마태복음 10장 해석

10

제9장은 추수할 것은 많은데 일꾼이 적다고 선포하시면서 추수할 일꾼을 보내 달라고 기도하라고 제자들을 가르치시면서 마감되고 있다. 본 장은 양떼의 목자요 추수의 주인 되시는 분으로서의 예수께서 열 두 제자를 부르시고 그분의 교회에 영혼을 불러 모으는 위대한 전도 사명을 주어 파견하시고 있다.
1. “예수께서 열 두 제자를 부르셨다.” 열 둘이란 교회를 구성하게 되는 인간의 심정과 이해성에 있는 사랑과 신앙 또는 선과 진리에 관한 모든 원리를 표현하는 숫자이다. 이런 천국적 품위와 영적 측면의 원리들은 그분께서 밝히 알게 하신 말씀을 통해 주님으로부터 파생된다. 따라서 열 두 제자란 말씀 속의 선과 진리에 관한 모든 것을 표현한다. 그러므로 말씀 속의 선과 진리를 삶의 도구로서 사용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그 사람 안에서 주님의 구원하시는 권능이 발휘된다. 이러한 열 두 제자를 주님께서 부르셨을 때 그분께서는 그들에게 “악령을 제어하는 권능을 주시어 그것들을 쫒아내고 병자와 허약한 사람들을 모두 고쳐주게 하셨다.” 그분의 종들을 자비의 사역에 파견하실 때 주님께서 몸소 행하셨던 것들을 행할 권능을 주신 것이다. 이 권능은 그분께서 아버지로부터, 즉 그분 안에 계신 신성으로부터 파생된 인류의 행복을 위해 발휘되었던 힘이다. 사실 제자들에게 수여된 병 고치시는 능력은 주님 안에 존재하는 능력과는 아주 다르다. 제자들의 능력은 그분의 이름으로 발휘되었다. 이 이름은 구세주의 신성한 인성을 표현한다. 이 이름은 유한한 매체밖에 안 되는 곳에 존재한 권능이었다. 다시 말해 그들이 노력하는 결과는 각 개인이 이미 소유해오던 것과 비슷한 것이었다. 그 이유가 각 제자는 표현적 수준의 특성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각 제자가 표현하는 특성들은 말씀 안에 있는 선과 진리에 관한 모든 원리요 이 원리가 진정한 주님의 사도이다. 주님께서 제자를 부르심을 영적으로 볼 때 이는 말씀 속의 선과 진리를 매우 친밀하게 예수님과 연결되도록 끌어 당기시어 인간 영혼을 거듭나게 하는 데와 세상에 복음을 전하는데 새 능력을 부여하시는 것을 뜻한다. 그러나 본문과 위에서 말한 설명은 인간으로 계신 주님과 관계된다는 점을 잘 생각해 보지 않으면 합당하게 이해되지 않는다. 주님께서 육을 입으신 뒤 신성화 하셨을 때 영원한 말씀과 씌어진 말씀 사이에는 더욱 친밀한 관계가 건설되었다. 그래서 신성화 하시기 전에는 발휘된 적이 없던 말씀의 진리의 힘이 신성화 하신 이후에는 인간에게 나누어지고 있다. 이와같은 데에는 이유가 있다. 주님께서는 세상에 태어나시어 체류하시는 동안 인간 삶의 모든 상태를 통과해 가셨다. 특히 그분은 인간 차원에서 말씀 속의 진리에 관한 지식을 획득하셨다. 그러나 이 지식은 가상적인 진리 수준에 불과하다. 그러나 우리가 거듭남에서 진리의 수준을 승강시켜 가듯 주님도 영광을 입으시는 쪽으로 진리를 승강되게 하셨다. 예수께서는 과거 획득해 놓으셨던 진리를 불러 모으시어 승강시켜 가상적 수준의 진리 하나하나가 그 수준을 계속 벗게 하셔서 결국 순수하게 신성한 수준이 될 때까지 계속 해 가셨다. 씌어 있는 말씀 안에 있는 진리가 낮은 수준에서 가장 높은 수준까지 통과해 가게 하셨으므로 이제는 거꾸로 그대로 내려올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렇게 영광을 입으신 단계를 통해 우리에게 능력이 주어져 거룩한 말씀 속의 진리를 인정하는 각 사람의 마음 안에서 악령을 제어하고 쫒아내고 온갖 질병과 허약함까지 고쳐질 수 있게 되었다. 말씀 속의 진리를 부르시고 이 진리가 악과 거짓을 제어하도록 능력을 주심으로 주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거듭나도록 역사하신다. 다시 말해 진리들이 말씀으로부터 획득되어 기억 안에 맨 먼저 저장된다. 그 다음 주님께서는 이 진리들을 하나씩 부르시어 그분께 더 가까워지게 승강시킨다. 이 진리들이 승강된 만큼 이 진리들은 그 사람의 마음과 삶 모두에서 모든 것을 새롭게 하는 능력을 부여 받는다. 몸에 해당되는 교회 역시 여기서 예외는 아니고 이것이 제자들로 표현되고 있기도 하다. 무질서를 교정하고 세상에 질서를 소개하기 위한 교회의 능력 척도는 교회의 원리가 얼마나 순수한가라는 추상적 수준에 달려 있는 게 아니라 그 교회 안에 있는 멤버들의 심정과 지성 속에서 그 원리가 실지로 얼마나 높이 승강되고 있느냐에 달려있다.
2-4. “열 두 사도의 이름은 이러하다.” 사도들의 이름을 일일이 열거한 이유를 생각해 보기에 앞서 그 이름들의 일반적인 배열에 관해 몇 가지 짚어 보아야 할 게 있다. 이미 거론했던 바와 같이 사도들은 넷씩 세 그룹으로 편성되어 있다. 이 분류는 열 두 사도의 이름이 시리즈로 기록된 세 복음서 모두에서 공통되는 점이다. 이를 도표로 살펴보기 위해 아래에 모아 놓았다.

마태 10:2
마가 3:16
누가 6:14

1. 시몬과
1. 시몬과
1. 시몬과
2. 안드레아,
2. 야고보와
2. 안드레아,
3. 야고보와
3. 요한과
3. 야고보와
4. 요한,
4. 안드레아와
4. 요한,

5. 필립보와
5. 필립보와
5. 필립보와
6. 바르톨로매오,
6. 바르톨로매오와
6. 바르톨로매오,
7. 토마와
7. 마태오와
7. 마태오와
8. 마태오,
8. 토마와
8. 토마,

9.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9.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9.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10. 타대오,
10. 타대오와
10. 혁명당원 시몬과
11. 가나안 사람
시몬과
11. 가나안 사람
시몬과
11. 야고보의 형제
유다와
12. 가리옷사람 유다
12. 가리옷사람 유다
12. 가리옷사람 유다

세부적으로 보면 세 기록이 조금씩 다르게 나타나지만 세 그룹 측면에서는 일치하고 각 그룹의 첫 이름은 같은 사도들로 시작되고 있다. 말씀 안에서 우연한 게 전혀 없듯 세부적인 차이를 지니면서도 전체적으로 공통되는 데에도 의미와 의도된 목적이 있을 것은 분명하다. 사도들은 말씀과 인간의 마음 내지 교회 안에 있는 선과 진리에 관한 모든 원리를 표현하듯 세 그룹이라는 배열은 말씀 안에 있는 모든 선과 진리의 세 수준 즉 자연적, 영적, 천적 수준의 질서를 표현할 것으로 생각된다. 또 다른 구별과 유사함도 있다. 열 두 사도의 이름이 거론될 때 복음서 기자들에게 일치했던 것은 시몬을 첫째에, 가리옷 유다는 마지막에 배열했다는 것이다.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서 알 수 있듯 두 사도는 한 쌍으로 배열되고도 있다. 마가 6장 7절을 보면 이 순서로 주님께서는 사도들을 파견하시고 있다. 마태복음에서 사도들을 짝지어 보낸 서술과 연결해 생각해 보면 “둘씩 짝 지음”이란 선과 진리는 서로의 짝이어서 모든 선은 그 선에 걸맞은 진리를 가지고 있고 모든 진리는 그에 걸맞는 선을 가지고 있다는 것, 이 둘은 비록 유한한 그릇 안에서는 나뉘어질 수 있을는지 몰라도 주님으로부터서는 언제나 하나 된 상태에서만 진행된다는 것을 표현하는 말이다. 그러므로 짝지어 열 두 사도가 거론된 것은 각 쌍이 표현하는 원리의 품질을 영적으로 표현하기 위해서였다. 그 이유가 고대 시대 때 이름이 주어진 것은 이 사람과 저 사람을 구분하기 위함 보다는 당사자의 특성 내지 어떤 사물의 특이한 점을 표현하기 위해서 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경의 연결을 추적하기 위한 공부를 생각해 본다면 각 이름이 주어지는 부분과 그 이름이 지닌 영적 의미를 파악하면 효율적이고 값진 탐구도 기대해 볼 수 있다. 위에 열거된 사도들의 이름에 관해서는 Noble의 「Intellectual Repository, 1839출판」에서 어느 정도나마 탐구되어 있으므로 이를 참고하면 도움이 될 줄 믿는다.
5,6. “예수께서 이 열 두 사람을 파견하셨다.” 인간의 영적 발전 내지 거듭남에 관련시켜 열 두 사도를 부르시어 파견하시는 주변 여건은 한 인간의 마음이 선과 진리에 관한 충분한 지식을 갖춘 상태, 또는 말씀 속의 진리들이 충분히 저장되어 있고 이 진리들이 내적 인간의 애착과 적절하게 하나되어 주님과의 결합으로 능력을 부여받아 내적 측면과 외적 측면이 상응하도록 외적 측면에 내려 올 준비가 완료된 상태를 묘사하고 있다. 따라서 사도들에게 내리시는 분부사항은 사도들로 표현된 원리들이 작동하는데 근거가 되는 질서의 법칙이요 이 법칙에 따라 움직여 가면 가장 확실하게 좋은 결과를 얻게 된다. “이렇게 분부하셨다. ‘이방인들의 길로 가지 말고 사마리아 사람들의 도시에도 들어가지 말라. 다만 이스라엘 백성 중의 길 잃은 양들을 찾아 가라.’” 위 구절의 사항을 글자대로 고집해 생각한다면 이상한 구절이 되고 만다. 주님의 통치는 유대인의 세계에만 국한 된 게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분은 교회가 유대인에 한정된 상태에서 벗어나 이방인에게도 그분의 교회에 입장하는 특전을 나누어 주시기 위해서 오셨다. 사도들의 노력이 위와 같이 이스라엘에 한정된 것은 오로지 매우 일시적인 것에 불과할 뿐인 바 글자적인 생각은 편파적인 차원을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더욱이 주님의 마지막 명령은 세상에 나가 온 누리의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위 구절을 개인이 응용하는 측면 내지 영적 수준의 의미에서 살펴야 하리라 본다. 이런 측면일 경우 사도들, 이방인들, 사마리아인들, 이스라엘인들은 우리가 지닌 어떤 원리, 능력, 자질에 모두 관계되는 말들이다. 이미 살핀바 대로 사도들은 하느님의 말씀으로부터 우리 마음에 들어와 작동되는 선과 진리에 관한 모든 원리들, 이 원리들이 천국의 품위로 완전히 전환되어 있는 것, 그리하여 인간 전체에 이 원리가 영향을 주는 것을 뜻한다. 이방인들, 이들이 나쁜 측면 내지 이스라엘에 적이 되어 언급될 경우 그들은 자연적 수준의 마음에 소속된 악들을 의미하게 된다. 말씀 속에서 악이 취급될 경우 거짓도 통상 취급되고 있다. 사마리아인들, 이들은 과거 아시리아왕이 이스라엘 왕국 열 지파를 포로로 끌어가고 텅 빈 사마리아 지역에 강제로 이주시킨 사람들의 후손들인데 이들은 유대교의 썩은 형체를 섬겼는바 그들은 인간 이해성이 쉽게 물들고 마는 왜곡된 모든 감정(sentiment)을 의미한다. 이를 종합해 생각해 보면 사도들을 향한 분부, “이방인의 길로 가지 말라”란 원래 악에서 근원되는 것인 왜곡된 감정에 빠지지 말라는 뜻이다. 그리고 “사마리아 사람의 도시에도 들어가지 말라”란 거짓 원리에 근원을 두고 있는 어떤 교리도 지지하지 말라는 뜻이다. 위 사항이 천국의 원리라고 이해되어진다면 왜 이런 금지 사항이 있어야 할까? 이방인이나 사마리아 사람으로 표현된 의미가 좋은 측면일 경우 올바른 코스나 모습을 떠나 악하고 거짓된 어떤 것으로 그 자체 스스로는 바뀔 수가 없다. 그러나 이런 원리들은 무르디 물러 자칫 타락하기 쉬운 창조물 안에 있을 경우 그것들은 쉽게 뒤바뀌어 아예 거꾸로 되고 말 때가 많다. 마치 성경의 많은 진리들이 순수한 기독교의 원리에 불일치되는 죄 내지 실지 사건으로 탈바꿈되는 경우와 같다. 따라서 위 명령 속에서 우리는 중요한 방향 설정 즉 하늘의 선물이 더럽혀지거나 남용되는 것을 결코 허용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하늘의 선물, 천국의 원리들은 우리의 애착과 생각이 제아무리 변화무쌍하게 움직여도 그 속에서 언제나 거룩한 채로, 원래의 순수함 그대로 오점 하나 없이 존재해야 한다. 우리의 심정이 쉽사리 좋아하는 악한 어떤 욕망을 천국의 원리도 좋아하는 듯 여겨지게 하거나 우리의 지성이 선뜻 왜곡된 어떤 추론을 지지하는 듯 나타나게 해서는 결코 안 된다. 우리의 의무는 이방인들의 길로 가면 안 되고 사마리아의 도시에도 들어가면 안 되고 “단지 이스라엘의 길 잃은 양들을 찾아 가는” 것이다. 영적인 사도 즉 말씀에서 획득해 우리 속에 들어와 현존하는 선과 진리에 관한 원리들은 우리 영혼의 삐뚠 것을 바로 잡아 주는 바 이 원리들이 선함 쪽에 가담하고 있는 우리 속의 모든 것을 순수하게 하도록 흠모되어져야 한다. 넓은 측면에서 볼 때 이스라엘 사람은 진정한 교회의 모든 멤버를 뜻하는데 세부 측면에서 그들은 교회를 구성하는 품위들이 들어 갈 수 있는 마음의 모든 원리나 자질을 뜻한다. 양은 선함과 동일하다고 말할 수 있는 선행(charity)이라는 원리를 성경에서 언제나 상징해 주고 있다. 그 이유가 순수한 선행은 영적 수준의 사랑에 대한 애착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애착은 인간이 선이라고 부르는 것을 사랑한다. “이스라엘 가문의 모든 양”이란 인간 안에서 교회를 구성해 주는 원리와 근친 관계에 있는 모든 선이나 선행에 대한 애착을 말한다. 그러나 본문에서 말하는 양은 “이스라엘 가문의 길 잃은 양”이다. 이는 순수하지 않은 상태여서 순수한 진리와 하나 되지 못하고 있는 선행에 대한 애착들을 의미한다. 이런 상태는 순수한 진리로 인도받거나 순수해짐이 없는 바 이런 선행에 대한 애착은 눈이 먼 자연적 수준의 애착이어서 쉽게 엉뚱한데로 끌리어 가고 극한적으로는 비통할 만한 악 속에 파묻히고 만다. 사실 진리는 선을 지키는 자, 양떼를 지키는 목자와 똑 같은 바 진리의 인도가 없으면 울타리를 벗어나 흩어지게 되어 있다. 이런 상황에 빠진 길 잃은 양은 복음의 소식을 통해 교정되어야 한다. 자연적 수준에 있는 애착들은 주님으로부터 끊임없이 발산되는 순수한 선함과 진리를 말씀의 가르침을 매개체로 해서 그분의 생명을 흡입하고 교통을 갖게 됨으로 영적 수준의 애착이 되어 간다.
7. 사도들을 파견하시되 그들에게 말하신 첫 사항은 “가서 하늘 나라가 가까이 있다고 선포하여라”는 것이다. 복음의 이런 첫 전도 내용은 얼마나 복되고 중요한 사항인가! 인간 거듭남의 시작은 이 소식 밑에서 시작되어야 한다는 것을 얼마나 강조하고 계신지! 더구나 천국적 삶에서 영혼의 모든 발전 과정 역시 이 소식 밑에서 계속 되어야 한다는 것까지 알게 하시고 있다. 사도들의 전도란 주님의 말씀 속 진리가 인간 마음에 그려놓는 감명을 뜻한다. 이 감명이란 우리로 뭔가를 하고야 말도록 재촉하는 영향력을 동반한 직관과 지시받음이다. 이 감명은 영원한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에 눈이 떠진 사람, 진짜 행복은 영원히 있을 자신의 모습이라는데 마음의 눈이 보게 되어 무엇보다 먼저 그것을 붙잡아야 한다고 부름받고 자극받은 사람에 의해 느껴진 것을 뜻하는 단어이다. 이 감명의 내용은 그 사람의 애착과 바람이 동반되어 말씀으로부터 읽고 듣고 배운 진리들로 채워져 있다. 그래서 감명 받은 영혼은 자신의 영원한 구원이 설비되는 것임을 꾸준히 상기하면서 그의 삶이 계속 되어간다. 그러므로 순수한 전도의 꾸준한 주제는 “하늘 나라가 가까이 있다”는 것이다. 하늘 나라란 하느님의 진리가 통치하는 정부, 즉 그분의 지혜가 그분의 사랑과 하나 되어 통치하는 정부, 마치 천국으로부터 인간 마음 안으로 사랑과 지혜가 흘러드는 질서로 이루어진 정부이다. 이 왕국은 주님의 사랑과 지혜가 통치해 오던 천국 자체이고 천사에 의해 이 나라가 받아들여질 때 이 나라는 실지의 천국이 된다.
8. 이 좋은 소식은 선포한 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다. 말씀을 수단으로 교통되는 천국의 품위 또는 영적인 사도는 우리에게 이롭게 작용하도록 위촉되어 있다. 즉 가르치는 것 뿐만 아니라 행동하는 것, 그 유익한 행동이 “앓는 사람은 고쳐 주고 나병환자는 깨끗하게 해주고 죽은 사람은 살려주고 마귀는 쫒아 내어라.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라는 명령 안에 담겨 있다. 위의 나쁜 것들은 만일 우리가 해결하고자 사도의 도움을 원한다면 사도의 선교로 구원받게 되는 것들이다. 우리가 위 사항에 대한 것들을 눈치 채든 그렇지 못하든 만민이 도움을 받아야 할 불가결한 요소이다. 이는 우리가 한탄할 수밖에 더 재간이 없는 재난에 속한 것들이기 때문이다. 영적으로 볼 때 우리는 출생과 유전적 상속으로 병들어 있고, 나병환자이고 죽어있다. 죽어가고 있을 경우 이는 죽음보다 더 나쁜 생명을 호흡하는 상태이다. 그 이유가 우리는 악마에 의해 소유당한 상태로 악마의 활동 무대를 제공하는 상태에 있기 때문이다. 이런 재난들은 인간의 이기적 본성 또는 출생할 때 존재한 그대로인 자연적 수준의 마음과 꼭 같은 상태를 총괄해서 묘사하고 있다. 위 본문의 “앓는 사람”을 직역해 보면 약함, 우유부단함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자연적 수준의 인간은 그 수준의 마음 안에서 지배하는 썩은 것 때문에 선한 모든 것에 관해서는 약하고 무르디 무른 상태여서 악에 저항하는 힘은 하나도 없다. 따라서 인간 본성이 지닌 자연적 수준의 경향성 내지 인간적 신중함만이 자신을 끌고 가도록 스스로 허용한다면 악마가 단 한번 공격해도 백기를 들게 된다. 결국 자신이 좋아해서 악마에 노예가 되고 만다. 그래서 인간 고유의 것들은 나병이라 불리는 자연적 수준의 상태 안에 존재한다. 그 이유는 타락된 썩은 것들 때문에 그는 진리를 뒤집고 모독하려는 속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8장 2절에서 이미 살핀 바와 같이 나병이라는 참혹한 질병은 신성 모독을 표현하는 질병이다. 자연적 수준의 인간을 두고 성경은 죽은 사람이라고 부른다. 이 사람은 모든 영적 수준의 생명이 결핍되어 있어 감각이나 그 본성 자체로만 살아 있다고 할 수 있을 뿐 하느님과 천국에 관한 자연적 수준의 상태 자체 만을 들여다 보면 그것의 진짜 품질은 단지 악이고 거짓된 감정들 뿐이기 때문이다. 궁극적으로 볼 때 인간이 사랑하는 것이 그 인간의 생명 되는 것이다. 인간의 생명을 구성하는 것, 그 사람을 통치하게 되는 사랑(ruling love)은 천국이든 지옥이든 그곳으로부터 오고 있다. 만일 그의 사랑 또는 생명이 단지 자연적 수준에만 머물고 있다면, 그래서 악해 있다면 그의 생명은 어둠의 나라와 연결을 이루고 있는 바 그는 지옥의 영향력을 전달하는 악마의 군사일 뿐이다. 사실 악마라는 단어는 악한 욕망으로부터 튀어 나오는 왜곡된 추론을 생명으로 삼는 악한 영들을 뜻하는 말이다. 이상 설명한 것들은 심정을 아시는 분에 의해 보여진 인간 본성을 어느 정도나마 살핀 것이다. 그분이 보신 인간 속에 든 것, 지옥에 쉽게 사기당하는 연약함, 그 결과 지독하게도 사악해 있는 인간 본성을 우리는 얼마라도 느껴 보아야 하리라. 구원 받아야 할 우리의 악 조건에 대한 모습은 주님만이 초상화 하실 수 있는 바 그분 만이 올바르게 고쳐 주실 수 있다. 우리가 자아 속에 있는 고질 병을 고치겠다고 애쓰고 있으면 주님께서는 특사를 파견해 주시어 건전한 상태, 진정 즐거운 상태로 회복시켜 주신다. 그분께서는 이미 그분의 말씀을 주셨고 그 안에는 각종 병에서 구원되는 길이 열린 채 놓여 있다. 게다가 그분께서는 말씀 속에 있는 하느님의 진리들을 받는 자질도 우리에게 부여해 주셨다. 말씀이 인도해 가는 대로 우리가 따라갈 때 그분 자신으로부터 오는 생명력이 그 말씀에 동반된다. 이것이 그분께서 부패된 속성들을 깨끗하게 하시기 위해 파견하는 살아 있는 적극적인 사도들이다. 그 결과 우리는 주님의 모습과 형상으로 회복되어 간다. 그분께서는 위와 같은 사도들에 “앓는 이는 낫게 하고 나병은 깨끗하게, 죽은 사람은 살아나게, 악마를 내쫓는” 힘을 부여 하신다. 이런 사도, 즉 말씀 속의 진리를 수단으로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악에 저항하는 힘과 진리를 모독하지 않으면서 진리를 받는 힘을 얹어 주신다. 그리하여 우리 자아가 자연적 수준에 있는 썩은 상태라는 죽은 것들로부터 일어나게 된다. 이렇게 일어난 우리는 이제 죽은 것을 산 것으로 착각하게 한 지옥 세계의 영향을 더 이상 받지 않게 된다.
9. 주님께서 사도들에게 더 분부하시기를, “전대에 금이나 은이나 동(전)을 넣어 가지고 다니지 말라.” 이 구절의 의미는 한마디로 자신의 것과 주님으로부터 온 것들을 섞지 말라는 말이다. 금, 은, 동은 인간이 주님으로부터 받게 되는 사랑과 선함의 세 종류 내지 세 수준을 말한다. 금은 가장 높은 수준인 순수한 사랑 또는 선함을 표현하는 바 주님을 사랑함이다. 은은 순수한 영적 진리를 표현하는 바 그 자체는 이웃을 사랑함이다. 동(구리)은 자연적 선을 표현하는 바 이는 순종으로 생산되는 선이다. 위 세 수준을 달리 간단하게 말한다면, 선행, 믿음, 선한 일이다. 이 세 가지를 지갑(전대)에 넣는다는 것은 위 세 가지의 근원이 되시고 또 그것을 주시는 분이 주님이 아니라 자기로부터 근원되었고 자기 고유의 것이라고 착각하는 것을 말한다. 또 다른 의미도 우리에게 알려준다. 지갑(purse)은 우리의 자질 중 하나인 기억을 상징하는 물건이기도 하다. 따라서 “금, 은, 동을 지갑에 넣고 있다”란 주님으로부터 받게 된 선행, 믿음, 선한 일에 관한 원리를 자신을 소생시켜 생명 있게 하는 원리로서 인정하지 않아 기억속에 만 담고 있는 상태도 뜻한다.
10. 더 분부하신다. “여행을 위해 자루나 여벌 옷이나 신이나 지팡이도 지니지 말아라.” 이 자루(scrip)는 식량을 담는 자루이다. 사도들에게 돈 뿐만 아니라 양식, 여벌 옷을 지니지 말라고 분부하신 것이다. 양식은 영혼을 지탱시켜 주는 선을, 옷은 영혼을 보호하는 진리를, 지팡이는 영혼이 기대어 편하게 해주는 최말단의 힘을 상징하는 표현물들이다. 이 구절에서 지니지 않아야 할 세 가지 것이 다시 거론되고 있다. 양식, 옷, 지팡이(신발)는 의지, 이해성, 바깥쪽 삶을 표현하는 것들이다. 그래서 이 금지 사항은 우리의 안쪽 삶이든 바깥쪽 삶이든 그 삶들을 보살피는 것들은 어느 것도 자아로부터 파생되는 게 아니라 오로지 주님으로부터서만 공급된다는 것, 따라서 그분이 내리시는 선물과 품위들을 자아의 것과 섞어서는 안된다는 말이다. 글자대로의 해석을 시도한다면 복음의 전도자인 그 당시의 사도들에게 크게 부각될만한 명령이 못될는지 모른다. 그러나 이미 살핀바와 같은 영적 측면의 의미에서는 위 간단한 명령이 모든 기독교인에게 정녕 필요한 것, 더 이상의 어떤 금지 사항도 이 명령에 버금가지 못할 정도의 교훈으로 충만되어 있다. 이에 더하여 가르치신다. “일하는 사람은 자기 먹을 것을 얻을 자격이 있다.” 영적이고 천국에 속한 것에서의 노동은 그 자체가 보상이라는 뜻이다. 우리는 선을 행함으로 선을 획득한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생명의 빵을 공급하시는 유일한 통로는 유용함(use)이다. 그래서 주님 스스로 이렇게 증거하셨다. “내 양식은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행하는 것이다.”
11. 이렇게 복음을 전하러 나가는 사도들에게 이런 규칙이 첨가되고 있다. “어떤 도시나 마을에 들어가든지 먼저 그 고장에서 마땅한 사람을 찾아내어 거기에서 떠날 때까지 그 집에 머물러 있어라.” 말씀에서 언급되는 도시란 교리를 뜻한다. 그 이유가 교리는 가장 확실한 진리들, 또는 마감을 지어 결말로 간주된 일반적인 원리들을 말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 원리 안에 있는 구분되는 각각의 모든 기능들은 마치 우리가 집에 들어가 있는 것과 같다. 마치 튼튼한 성벽으로 된 도시 안에 있는 각 집들이 안전하게 보이는 것과 같다. 도시와 마을이 동시에 언급될 경우 도시는 원리 중에서 내면에 속한 것 또는 서열상 제일에 속하는 원리를 말하고 마을은 상대적으로 외면에 속하고 서열상 제일가는 원리를 뒤따르는 원리들을 뜻한다. 이런 측면에서 도시는 지성 자체 또는 지적인 기능을 상징하는데 이 안에는 살아 움직이는 주민이라 할 수 있는 모든 애착과 생각들이 담겨 있다. 사도들이 가야 하는 곳이 이런 도시요 마땅한 것, 가치 있는 것을 찾아야 하는 곳이기도 하다. 지성 자체에 국한해서 이해해 본다면 우리의 원리들은 교리와 생활이라는 측면에서 그 원리에 걸맞고 가치 있는 형체를 체현해야 함을 가르치고 있기도 하다. 이를 더 세밀히 분석해 생각해 본다면 우리가 거룩한 진리와 선함들을 우리의 안쪽 인간으로부터 바깥쪽 인간으로 가져다 놓으려 할 때 이 거룩한 진리와 선이 과연 거룩함에 합당할만한 가치 있는 애착과 생각 안으로 들어가고 있는지, 거룩한 것들에 천국적 품성이라는 거처를 제공하고 있는지, 거룩한 품성이 핵심이 되어 바깥쪽 삶으로 그 영향력을 뻗어 갈 수 있도록 준비되었는지 알기 위해 자신을 검사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러면 셀 수 없이 복잡하게 얽혀 담긴 우리 마음 안에 있는 것 중 누가 “마땅한 사람,” 어느 원리가 “가치 있는 것”이라고 평가할 수 있을까? 모든 인간 마음 속에는 하느님께서 그분 자신을 위한 증거들을 담아 놓으시고 있다. 땅에도 좋은 땅, 나쁜 땅이 있듯 심정 안에도 좋은 바탕이 최소한도의 얼마간은 존재한다. 그렇다고 이런 선한 바탕은 인간 스스로 출생 때부터 소지 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모든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천국의 선과 진리를 이해하고 사랑할 수 있는 자질을 지니게 되어 있는 게 섭리이다. 이런 자질은 유아기와 어린 시기가 순진 속에 있는 동안 그 영혼 위에 신성의 역사로 형성되어지고 형성됨과 동시에 하느님의 영에 의해 보존되도록 섭리된다. 이렇게 해서 내면이든 외면이든 인간 마음 속의 원리나 자질 안에는 주님에 속하는 어떤 것이 존재해 있다. 인간 마음의 모든 부분은 본래의 창조라는 측면에서 보면 선하지만 그 마음들이 변질되고 잘못 사용되어 왔다. 사실 마음의 각 부분은 모두 제각기에 합당한 용도를 가지고 있다. 이런 타당한 용도 안에 주님은 현존하실 수 있고 그분의 사도들이 영접 되어진다. 인간 마음 안의 “마땅한” 자질, 가치 있는 자질은 본시 창조 때 수여된 기능에 맞게 사용되어야 할 뿐 남용되어서는 안 된다. 육체이든 영체이든 각 부분은 그것에 합당한 용도를 가지지 않은 게 하나도 없다. 엄밀히 보면 어떤 악이라도 인간 자체가 범했다기 보다는 그 사람에게 위탁된 권능의 발휘가 보다 고상한 목적에 충당되지 못한 결과인 것이다. 본래 선하도록 되어있고 거기에 알맞는 용도가 부가된 어떤 것이 뒤집혀 있다 해도 본래의 용도가 인간에 의해 합당하게 여겨지면 곧바로 마음 속 자질들은 본래의 질서를 회복하게 된다. 이렇게 질서 잡힌 우리의 자질들이 사도라는 천국에 속한 원리의 거처이다. 그러면 원리와 자질은 서로 힘을 모아 그 인간의 영원한 복지를 위해 정진하게 된다. 그래서 사도들은 그들의 임무를 마치고 떠날 때까지 우리의 자질 속에 머무른다. 사도들이 머물게 되는 이런 거처는 선한 상태, 그리고 이 거처 안에서 선을 확증하는 상태와 언제나 관계를 맺고 있다. 따라서 떠날 때까지 거기에 머무른다의 의미란 천국적인 원리들은 그 원리가 머물게 된 그 사람의 자질들이 선한 상태로 완전히 고정되어서 그 상태가 선한 행위로 이어질 때까지 계속 머물러야 한다는 것이다. 그 이유가 선은 마음의 어떤 자질 안에 틀어 박혀 있어서는 안 되고 반드시 인간 삶이라는 바깥쪽에까지 확장되어야 한다는 것이 주님의 목적이기 때문이다. 사도들은 이스라엘의 성읍들을 통과해가게 되어 있고 통과하는 어느 곳에서나 신성한 스승의 뜻을 행해야 한다.
12. 그분의 명령이 이렇게 이어진다. “그 집에 들어갈 때에는 인사하여라.” 도시가 마음의 지적 부분과 상응 관계를 지니듯 집은 마음의 의지 부분과 상응 관계에 있다. 인사(salute)란 선함과 진리에 관한 거룩한 원리들이 의지 속 애착 안에서 만들어지고 있는가를 탐험하는 것을 뜻한다. 이와 같은 사건을 다룬 누가복음의 경우 “평화가 이 집에 있기를 빕니다!”라고 인사말을 하도록 분부되고 있다. 복음서의 이런 인사는 이 얼마나 천국적이고 복된 인사인가! 정녕 그렇다. 평화는 복음의 목표요 소원에 해당된다. 평화는 복음이 널리 퍼져야 하는 이유이요 복음의 영에 해당된다. 마치 천국의 원리가 인간 마음 안으로 흘러들 듯 천국의 원리는 그 자체와 더불어 평화라는 천국의 기운까지 가져다 준다. 주님의 교리들은 빗방울 같이 떨어지고 그분의 언어는 아침 이슬같이, 작은 빗방울이 연약한 목초 위에 떨어질 때 같이 스며든다. 위로부터 오는 지혜는 평화롭고 온화하고 온유하다. 이 지혜는 평화라는 메시지만을 가져다 주고 마는 게 아니라 평화라는 답을 받기를 바라기까지 하고 있다. “그 집이 가치가 있으면 너희가 비는 평화가 그 집에 내릴 것이다.” 누가복음(10:6)의 경우, “그 집에 평화의 아들(후손)이 살고 있다면…”라고 표현하고 있다. 이 두 구절을 종합해 생각해 보면 받아질 천국적 평화는 받게 될 마음이라는 그릇 속에 이미 평화라는 씨가 담겨 있어야 하는 게 조건으로 제시되고 있다. 그런데 이렇게 미리 존재해야 할 요소는 어디에 있을까? 우리가 자주 지적해 온 사항이 있다. 주님께서 거듭남의 근원되시는 분으로 인간에게 오셨을 때 그분은 이미 시작되어 왔던 일을 완성하시러 왔다고 말씀하셨다. 다시 말해 그분께서 오신 것은 창조 때의 것들, 즉 천국 생명의 싹을 생산하시어 심정과 이해성 안에 존재하게 하신 것들, 즉 잠복되어 있는 애착과 직감들을 불러 내시기 위해서였다. 잠복된 애착과 직감 없이는 천국의 평화를 받을 수 없고, 동정하는 느낌도 있을 수 없고 상호적인 생각도 없고 천국 인사에 답하는 소리도 있을 수 없다. 천국의 특사가 머물기 위해 들어가기 전 그 집에는 이미 평화의 아들이 살고 있어 그 집이 평화를 누릴만 해야 한다. 평화의 아들이란 어린 시절에 저장된 순진, 그리고 평화의 후예인 직감(perception) 외 더 무엇이 있을까? 천국이라는 나라로 들어가는 사람은 반드시 어린 아이가 되어야 한다. 거듭남이란 무지한 순진과 평화가 지혜로운 순진과 평화로 바뀌는 것을 말한다. 첫 단계에 있던 거듭남은 둘째 단계의 거듭남이 호소할 때 화답한다. 각자가 홀로서기란 불가능 하기 때문이다.
13. “그 집이 값어치가 있으면 너희가 비는 평화가 그 집에 있게 될 것이고…” 평화의 씨가 있어 값어치 있는 집에 와지는 사도의 평화란 의지에 있는 영적 수준의 평화가 상호교류해서 자연적 수준의 평화까지 있게 됨을 묘사하여 뜻하는 말이다. 그 이유가 실지의 거듭나는 행동이 있기 전 마음 속에 있는 선한 품질은 그 자체 비록 영적이긴 하지만 자연적으로도 납득되고 사랑될 수 있기 때문이다. 엄밀히 말해 마음 속 선한 품질 자체가 하늘 나라를 구성하는 것은 아니고 단지 하늘 나라를 획득하게 하는 자질이 되어 천국 원리가 접목될 수 있는 가지를 제공할 뿐이다. “… 그렇지 못하면 그 평화는 너희에게 되돌아 올 것이다.” 극도로 중대한 원리, 가장 위대한 순간에 있어지는 한 가지 교훈이 매우 짧은 위 명령 안에 포함되어 있다. 만일 영적 원리와 자연적 원리가 조화를 이루지 못해 자연적 원리가 영적 원리의 입장을 허락치 않는다면 두 원리들은 약화되어 가다가 마침내 사라지고 만다. 그 이유는 이것이 유입(influx)의 법칙이기 때문, 즉 생명이 형체 안에 흘러 들되 이 형체 때문에 생명의 흐름도 제한받고 때로는 변해 버리기 때문이다. 선함과 진리는 내면으로부터 흐르되 외면인 정직이나 예의 바름 같은 삶의 형식에서만 거처를 발견할 수 있을 뿐이다. 만일 천국적 원리가 자연적 수준에서 들어 앉을 합당한 자리를 발견할 수 없으면 발견될 때까지 되돌아 가 있을 수밖에 없다. 그 이유가 이 구절에서 주님이 하신 말씀의 의도는 평화가 각 사람의 깊은 곳으로 영원히 되돌아 가고 만다는 게 아니라 되돌아 가되 가치 있는 집이 발견될 때까지라는 조건이 붙어 있기 때문이다.
14. 더 일반적이면서도 더 심각한 경우, 즉 더 심한 거절과 이 거절에 대한 단호한 항변에 관해 언급되고 있다. “어디서든지 너희를 받아 들이지도 않고 말도 듣지 않거든 그 집이나 그 도시를 떠날 때에 발에 묻은 먼지를 털어 버려라.” 이미 언급된 무가치한 사람의 경우에서는 사도가 그들 집에 들어가되 거절될 경우는 말하고 있지 않고 오직 거룩한 사람이 그들 집에 부적합한 경우만 말했을 뿐이다. 이제 주님께서는 사도들을 영접하지 않는 사람들, 더구나 사도들의 말을 듣지도 않는 사람들에 관해 말씀하시고 있다. 어떤 도시나 어떤 집이 사도가 묵어도 될 마땅한 장소인가를 조사하라는 앞의 명령이란 세상으로부터 오는 마음의 외적 부분에 들어가 있는 교리적 감정과 도덕적 원리들을 자세히 검사할 필요가 있다는 것, 영적 차원이 자연적 차원으로 들어가기 전, 더 높은 총명의 지시나 영향력을 잘 받을 수 있는지 검증해야 한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치시기 위해 의도된 명령이다. 본 구절의 경우는 집주인 내지 시민들이 거절하는 경우인 바 이는 서로 어울리지 않는 정도 뿐만 아니라 외적 인간 측면에 있는 도덕적 수준이 반대한다는 것까지 포함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그렇다고 외적 인간 또는 자연적 수준의 우리 마음 전체가 이런 적개심으로 차 있다는 것은 아니고 도시나 집의 일부가 적개심을 품는 것이다. 물론 자연적 수준의 마음이 일반적으로 볼 때 가치가 매우 저하되어 있을 수 있긴 하지만 그럼에도 “마땅한” 거처인지 사도가 조회하는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 이유가 천국에서는 비록 악인이 심각한 범죄를 도모하려는 순간에서도 그 악인의 양심을 통해 말할 때도 적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렇게 극한 상황은 본문과는 거리가 멀다. 본문의 사도는 구원해 주는 자비를 실천하는 것, 또는 영적 진보라는 여행을 하는 경우에 해당된다. 이런 여행 도중 사도들이 복을 빌어 주려던 사람들 사이에도 가치 없는 사람, 또는 적개심을 품은 사람이 섞여 있다. 다시 말해 우리 속의 모든 것이 세상으로부터서만 흡수된 게 아니라 종교의 선과 진리에 직접 반대되는 지적 교리나 도덕적 원리들을 많든 적든 자신의 것이 되도록 채용했다는 말이다. 가치 없는 사람에 대한 사도들의 의무가 본 절에서 더 추가되고 있다. 평화를 빌었으나 받을 자격이 없어 그 평화가 사도에게 되돌아 온다는 단순한 이치 외에 더 추가되는 것은 “발에 묻은 먼지를 털어 버리라”는 것이다. 같은 사건을 다룬 마가복음에서는 “… 그들을 경고하는 표시로 너희의 발에서 먼지를 털어 버려라”라고 명령되고 있다. 글자대로 생각해 보면 이는 심판과 보복에 관해 말하고 있다. 그러나 영적 의미에서는 선하고 참된 것을 방어해 주고 보존하라는 명령에 해당된다. 따라서 발에서 먼지를 턴다는 것은 먼지가 발에 들러 붙는 것을 예방하여 먼지로 인해 발이 더럽혀지지 않게 하라는 말이다. 먼지(dust)란 땅에 속한 것에서도 가장 하급에 해당되는 것을 의미한다. 타락 이래 먼지는 뱀의 양식이 되어 왔다. 즉 감각적 측면의 인간 또는 인간 안에 있는 감각적인 원리들은 지상적 목표나 만족 그 이상을 가지고 있지를 않다. 주님께서 “발에서 먼지를 털라”는 명령을 통해 우리에게 가르치시고자 의도하신 교훈이란 이러하다. 우리의 의지나 이해성 속에서 영적 원리에 직접 대치되는 감각적으로만 쏠리게 하려는 경향성 내지 감정들이 발견될 경우 이것들이 영적 원리에 고착되도록 방치해서는 안된다는 것, 반드시 즉각 털어 내서 모든 영적 원리와의 연결을 끊을 것, 그것들이 우리의 삶이라는 실제에 영향을 미치지 못하게 해야 함을 뜻한다. 사실 이런 사항은 세상과 육으로부터 해방되어 보존되어야 하는 새 사람의 한 부분이기도 하다.
15. 사도들을 거절하는 도시에 관해 더 말씀하시고 있다. “나는 분명히 말한다. 심판 날이 오면 소돔과 고모라 땅이 오히려 그 도시보다 가벼운 벌을 받을 것이다.” 과거부터 물려 받은 전통이나 습관이라는 침침한 빛 속에서 죄를 진 사람들과 달리 보다 명백하게 알도록 해주었는데도 불구하고 뻔뻔하게 죄를 질 경우 후자는 전자보다 더 큰 정죄를 자초하게 되리라는 뜻이다. 위 구절에는 위 간단한 의미보다 더 내면에 속하는 의미까지 담겨 있다. 도시 주민 일부가 사도의 출입을 거절했다는 이유만으로, 사도들이 전하는 새 교리를 즉각 인정 않했다는 이유만으로 도시 전체가 정죄될 리 만무하리라는 것은 누구나 익히 알고 있을 것이다. 소돔과 고모라란 주님과 그분의 말씀에 관한 지식이 전혀 없는 채 악한 생활을 영위한 사람들을 뜻한다. 한편 사도를 영접 않는 도시나 집들이란 교회 안에 있으면서도 진리에 의거 삶을 꾸리지 않는 사람을 뜻한다. 위 구절을 세부 측면에 적용해 보면 이런 의미도 살필 수 있다. 위 주님의 말씀은 그분의 교회에 있는 사람들 각자의 마음 속에서 거행되는 심판과 관계되고 있다. 이런 심판 날이란 각자의 마음 안에서 선과 악이 분리되는 때를 말한다. 이때 악은 정죄되고 거절되면서 선은 환영받고 확증되는 따로 따로의 두 과정이 동시에 일어난다. 이런 심판 속에서 더 지독한 악들은 더 심각한 정죄의 대상 임에 틀림없다. 거듭나는 삶의 과정 중에서 무지로부터 불거져 나온 죄로 생각되는 지상의 삶에 속하는 것들은 이미 거듭남의 과정이 많이 진보되어 우리의 마음이 상당히 계발된 상태에서 범해지는 죄보다는 덜 비극적 수준이라 가늠해 볼 수 있다. 열심히 신앙 생활을 해가고 있다고 자부하는 교인들, 이들이 육체의 껍질을 벗고 맞게 되는 심판에서의 마지막 정죄됨을 피하려면 숨이 붙어 있는 현재에서 자신이 계속 심판 받아가게 해야 한다. 다시 말해 우리의 악들이 들추어 내지는 즉시 신성한 진리의 심판을 받게 해서 정죄되도록 해나가야 하리라.
16. “이제 내가 너희를 보내는 것은 마치 양을 이리떼 가운데 보내는 것과 같다.” 양은 영적 수준의 마음 안에 있는 선행(charity)이라는 원리를 의미하고 이리떼란 자연적 수준의 마음 안에 있는 악한 욕망들을 말한다. 사도들이 평화의 특사로 보내져서 경험하게 되는 세상의 핍박에 관한 모든 역사는 영적 마음을 기만하려드는 자연적 마음 안에 존재하는 반목질시하는 타입을 놀랄 정도로 확실하게 표현해 주고 있다. 이런 자연적 마음으로 하여금 영적 마음에 순종하게 하는 것이 거듭남의 노동에 해당된다. 이 노동의 필요성, 이 노동을 효과 있게 하는 방법, 그리고 노동에 수반되고 있는 환난과 시련들, 이런 것들이 사도들의 체험에서도 상응을 이루고 있다는 것은 거듭남으로 주님을 따르고 있는 사람들에게 흥미 있고 또한 교훈적이기도 하다. 주님께서 내적 인간 안에 이식해 두신 영적 원리들이 그 자체의 형상을 외적 인간 안에 만들기 위해 내려갈 경우 이는 마치 “이리떼 가운데 보내지는 양”과 같다. 선과 정 반대요 적에 해당되는 악에 속한 것들도 선과의 실제 접촉이 있기 전 까지는 그 악의 속성이 완전히 들춰져 나열되지 않는다. 따라서 악이 모두 정복되지 않은 상태에서 이 악에 대한 어떤 준비도 없이 선이 만나는 경우가 허다한 바 우리에게 너무나 귀감을 주는 말씀으로 이렇게 권고 하신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같이 슬기롭고 비둘기 같이 양순해야 하리라.” 지혜 자체요 선함 자체 되시고 그분 안에서 선과 지혜가 완전히 하나를 이루시는 그분께서 주시는 위와 같은 충고는 이 얼마나 값어치 있는지! 자신 속의 악과 싸우든 세상의 악과 싸우는 기독교 인이든 모든 기독인은 만사에서 위 두 가지 품성이 완전하게 하나를 이루도록 하는데 목표를 두어야 할 것이다. 슬기와 단순함(simplicity)이 하나 되는 것은 우리가 위쪽을 향한 삶의 과정에서 우리를 맹습하는 악을 방어하면서 동시에 대승을 거두게 하는 가장 확실한 수단이다. “뱀의 지혜”를 특별하게 생각해 본다면 이 지혜는 세속의 자녀들이 폭 넓게 소유하고 있는 바 빛의 자녀들 보다 이세상의 삶을 더 잘 꾸리게 해준다. 말씀에서 뱀은 인간 본성으로부터 오는 원리 또는 감각 측면을 상징하는 동물이다. 다시 말해 뱀은 가장 외적인 것 즉 이세상과 교통하게 하는 수단에 해당되는 것들을 통털어 뜻하는 동물이다. 따라서 뱀은 인간 속성 중 용의주도함(circumspection)을 상징하고 인간 본성 중 감각적 원리가 이를 철저히 수행하고 있다. 감각적 원리가 마음 측면에 해당되듯 몸에서는 감각기관이 이와 대응된다. 감각 기관들이 육체에 해로운 것을 탐지해서 접근을 미리 예방하듯 마음에 있는 감각적 원리들은 “생명의 나무에 이르게 하는 길목”에서 우리 영혼에게 악의 접근을 경고하고 동시에 선함 쪽으로 인도해 간다. 인간을 타락 쪽으로 팔아 넘긴 게 뱀으로 뜻해진 감각적 원리이다. 더불어 인간을 원래대로 회복시켜 줄 수 있는 유일한 수단으로 장치되어 있는 것도 감각적 원리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렇게 예수께서 말해 두셨다. “구리 뱀이 광야에서 모세의 손에서 높이 들렸던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높이 들려야 한다. 그것은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3:14,15). 이는 인간 본성 속의 감각적 원리를 입으시고 그것을 거룩되게 만드시는 방법으로 주님께서는 최하급인 감각적인 원리까지 거듭나게 해주실 수 있다는 뜻이다. 이런 방법으로 해서 거룩해진 주님의 감각적 원리의 특성인 용의 주도함이라는 것까지 인류 위에 펼쳐지게 해주시어 교묘함이나 원한 같은 마음 속의 악들로부터 보호되게 하신다.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뱀같이 슬기롭고 비둘기같이 양순해야 한다고 말씀하신 이유는 무엇보다 먼저 그분의 인간 속성을 거룩하게 하신 것을 모방하고 그 형상을 닮아야 함을 권고하시기 위함 때문이다.
17. 더 나아가 이런 지혜가 실시 되어야 하는 필요성을 보여 주신다. “너희를 법정에 넘겨주고 회당에서 매질할 사람들이 있을 터인데 그들을 조심하여라.” 동물과 확실히 구별되게 하는 인간의 자질은 이성(reason)이다. 자연적 수준의 인간일 경우 이는 자연적 수준의 이성(추론력)을 지니고 있다. 제자들에게 “사람들을 조심하라”고 권고 하신 이유는 기독교의 제자들이 마주쳐야만 하는 가장 큰 위험 때문이다. 주님께서는 각 사람 속의 자연적 이성이 종교와 말씀 속의 진리에 맞서도록 부추키고 있음을 위 구절에서 가르치시고 있다. 바리사이파 사람과 율법학자들이 그러했듯이 자연적 마음의 미묘한 추론은 말씀과 진리 자체되신 그분까지도 그분이 말하시는 대목 자체로부터 덫에 스스로 걸려 들게 하려고 순진한 방책으로 슬며시 접근한다. 이러한 감각적이고 교묘한 추론을 두고 주님께서는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찍어 말하셨다. 제자들이 경계해야 하는 “사람”의 추론하는 특성이 이어지는 주님의 말씀, “너희를 법정에 넘겨 준다”에 담겨 있다. 이는 자연적 인간의 합리적 추론은 영적 인간이 지닌 진리를 효과 없게 만든다는 것, 미리 짜 놓은 정죄 쪽으로 공정과 심판을 보여준다는 말이다. 마치 감정에 치우치지 않고 공평한 듯 보이면서도 부정한 재판에 따른 보상은 “그들의 회당에서 매질 당하는 것이다.” 이는 선하고 참된 것이 어떤 종교라는 이름 아래, 또는 미신의 영향 아래 폭력의 대상이 되기 쉽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그 이유가 자연적 인간 내지 자연적 마음도 나름대로 영적인 것이나 종교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역사나 체험으로부터 이미 아는 바와 같이 전통적인 종교가 보편적이고 필수에 속하는 종교와 다툼이 있게 되는 것은 과히 드물지 않다. “사람”들은 먼 거리도 아닌 매우 가까운 자기들 회당 안에서 제자들을 채찍질 한다. 사탄의 회당을 의미하는 종교나 교회의 왜곡된 모든 교리는 말씀 속의 신성한 진리에 맞서는데 이것이 “제자를 매질 함”으로 표현되어 있다. 제자들이 매를 맞는 모습은 우리 자신 안에 있는 회당에서도 발생한다. 모든 사람은 각자 나름대로 종교 원리를 가지고 있다. 이 원리의 뿌리는 자아 사랑이요 이런 사랑이 확증을 못 가질 때 조차에서도 자아 총명은 이 원리를 떠 받혀 준다. 이런 각 개인의 회당이란 각자의 종교가 발견하는 왜곡된 양심, 가짜 양심이다. 이 양심 속에서 각자의 종교는 그 나름대로의 성소와 예배를 발견한다. 이런 속에 진리가 출현하면 매질 당하고 만다.
18. 앞 구절의 경우는 종교적 측면이지만 이 구절에서는 세상적 측면에서 말하신다. “또 너희는 나 때문에 총독들과 왕들에게 끌려 가 재판을 받으며 그들과 이방인들 앞에서 나를 증언하게 될 것이다.” 정상적인 상태일 경우 “총독과 왕”은 선함과 진리를 규율하는 원리를 뜻해 주지만 위 구절에서는 반대적인 상황이므로 선함과 진리에 반대하는 악과 거짓을 뜻하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반대함이란 세상 사랑에 근원을 두는 악과 거짓들이 주님의 인간 측면에 근원을 두는 기독교의 원리에 뭔가를 제공하려는 것, 또는 심정과 지성 안에 있는 주님의 나라에 근거한 기독 원리에 뭔가를 제공하려는 것을 말한다. 유대인과 이방인이란 교회 내에 있는 것과 교회 밖에 있는 것들을 말하는 바 우리 속에 있는 원리 중 교회로부터 획득된 것과 자연계에서 획득한 것을 의미한다. 제자들이 그들과 이방인에게 예수에 관해 증언한다는 것은 신성한 진리와 교통을 이루고 이 진리가 자연적 인간 안에 있는 지적이고 도덕적인 원리에 영향을 끼친다는 것을 뜻한다. 그리하여 내적 측면의 것들이 외적 측면의 것에 영향력을 행사해 선용으로 이끌어 간다는 말이다. 주님 자신도 이런 과정을 통과 하시기 위해 세상에 오셨고 그럼으로 해서 그분 스스로 진리의 증언자가 되셨다. 그분의 증거란 진리 측면에서의 증거와 같은 맥락이다. 그러면 증언된 진리란 무엇일까? 악을 폭로시켜 정죄하면서 그 악이 차지했던 마음 영역에 그것 대신 선을 이식하도록 가르치고 인도하는 진리를 말한다. 예수를 증거함이란 구원받는 그 자체를 납득하게 해 주는 위대한 진리, 즉 말씀이 주님을 인간 안에 탄생하게 했다는데 대한 증거이다.
19,20. “그러나 잡혀 갔을 때에 ‘무슨 말을 어떻게 할까’ 하고 미리 걱정하지 말아라. 해야 할 말을 그때에 일러 주리라.” 일반인에게 주어지지 않는 신성한 영향력이 사도들에게 있어질 것임을 가르치시고 있다는 것은 의심할 바 없다. 그러나 본문의 약속은 보다 더 특이한 경우와 관계를 맺고 있다. 즉 계발됨이라기 보다는 영감 받음에 관계되고 있다. 이어지는 주님의 말씀에서 표현된 의미 그 이상의 영감은 생각해 볼 필요가 없을 것이다.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영(the Spirit)이시다.” 사도들이 총독과 왕 앞에서 주님을 증거할 때 절대적인 영감을 받게 되리라고 믿어야 한다는 것은 어느 정도 놀랄 일이라고 생각된다. 더욱이 이 세상의 미래 세대가 사용하기 위한 복음서의 거룩한 진리를 기록할 때에도 그러했는 바 이 역시 마찬가지로 놀랄만한 사항이다. 거룩한 저술들은 인도함만을 받은 정도가 아니라 주님의 영으로부터 직접 씌였다는 사실도 무조건 인정하는 방법 외에 더 다른 생각은 해볼 수 없다. 위 구절의 영적 의미를 간략히 생각해 보자. 신성한 원리가 인간적인 견해 또는 각 사람의 마음 안에 놓여지는 것은 마치 “사도들이 총독이나 왕 앞에 나가는” 모습과 같다. 이는 주님께서 우리의 내적 인간 안에 놓았던 원리들, 즉 신성한 원리들은 순수하게 영적이요 천국에 속한 것들임을 우리의 마음이 이해하도록 진열되되 특히 “총독과 왕”에 해당되는 자연적 마음 속의 애착과 생각들이 신성한 권위를 느끼게 함으로 자연적 마음 전체가 영적 마음의 통치를 받게 함을 뜻한다. “어떤 말을 할까?”하고 생각하지 말고 그로인해 걱정도 하지 말라는 주님의 훈계에는 인간 고유 의지, 자기 지혜로움이 없는 상태를 함축하고 있다. 진리를 증거하게 될 때 자기 뜻이나 지혜가 들어가 있는 한 정작 예상한 결과나 진리의 설득력은 힘을 잃고 만다. “아버지의 영”이란 사랑으로부터 있어지는 진리이다. 이 영은 그것을 받고저 하는 모든 사람의 심정과 지성 안으로 꾸준히 흐르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그 영의 흐름을 차단하지 않도록 노력해야 우리의 연약함까지도 손상 받지 않으면서 순수해져 거룩해지게 된다. 최소한 이런 사항들이 우리의 내향적 바람이 되어 있어야 하리라. 내적 인간 속에 있는 새 생명의 순수함이나 그 영성이 모든 것을 질서대로 놓기 위해 자연적 마음으로 내려오게 되면 필시 외적 인간의 반대에 부딛치는데 이는 필연적인 결과이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더 말하신다.
21. “형제끼리 서로 잡아 넘겨 죽게 할 것이며, 아비도 또한 자기 자식을 그렇게 하고 자식도 부모를 고발하여 죽게 할 것이다.” 이 구절에는 세 종류의 대립이 있다. 형제가 형제에 대립함은 거짓이 진리에 맞서는 것이고, 아버지가 아들과 대립함은 악이 진리에 맞서는 것이고, 아들이 아버지와 맞섬은 거짓이 선에 맞서는 것을 뜻한다. 이런 대립에 따른 불화가 끝까지 가면 선하고 참된 것을 소멸해 버리고 만다는 것을 위 구절은 묘사해 놓고 있다. 어쨋든 거듭 나아가고 있는 이들에게 있어서도 선하고 참된 것이 완전히 소멸된다고 생각해 볼 수는 없다. 그러나 극도의 싸움 속에서 죽음은 새 생명으로 건너가는 수단, 진정한 부활을 포함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 자연적 수준이 영적 수준을 향해 품는 분개함은 지독한 것이어서 사도들 스스로도 인간이 당할 수 있는 최고의 고통이라고 말하고 있다.
22. “그리고 너희는 나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끝까지 참는 사람은 구원을 받을 것이다.” 이 구절은 천국적인 선하고 참된 것에 관한 원리에 자연적 수준의 마음은 온통 모순되고 있다는 것, 마음 속에서 이기심 때문에 주님의 것에 반대하는 싸움이 언제나 계속되고 있다는 것을 표현하고 있다. 어쨋든 끝까지 참는 사람에게 구원이 있을 것이라고 약속되고 있다. 종합해서 뜻하는 바 이는 시험 가운데서 악에 굴복하지 않는 영적 원리들은 결국에 가서는 내향적으로나 외향적으로나 확증되어질 것임을 뜻하고 있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구원된다. 그 이유가 우리 속의 부패된 이기심이 주님께서 이미 이식해 두신 사랑과 믿음에 관한 구원하시는 원리들이 다해야 할 의무라는 길에서 이탈하도록 유혹하여 시험하는 가운데서도 우리의 협동으로 꾸준히 보존되고 성장하는 방법 외에 더 다른 구원의 방법은 없기 때문이다. 구원이라는 목적이 달성될 때까지 주님의 것이 우리 속에서 보존되기 위해서 우리는 양순함을 지니면서도 지혜로워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해 비둘기로 우리의 심정이 자극받는 반면 뱀에 의해 가야 할 방향을 결정지어야 하리라.
23. “이 동네에서 너희를 박해 하거든 저 동네로 피하여라.” 크라우스(Clowes) 목사는 위 구절에 대해 이렇게 해설해 주고 있다. “신앙 측면의 교리에서 맞서게 될 경우 선행(charity) 측면의 교리에로 피하고 선행(charity) 측면의 교리에서 대립된다면 신앙 측면의 교리에로 피해야 한다는 것, 바꿔 말해서 진리 측면에서 대적되면 선함 측면으로, 선함 측면의 대립이 있게 되면 진리 측면에서 피할 곳을 찾아야 한다는 뜻이다. 이런 교차는 신성한 섭리에 속한 사항이다. 아마 거듭나는 과정에서 각각의 원리가 완전해지도록 의도되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그 이유가 이렇게 됨이 없이는 다른 측면의 원리로부터 분리된 한쪽 원리 안에 안주하도록 유도당할 수 있다는 것, 또는 이쪽을 흠모하기 위해 저쪽이 희생될 수 있기 때문이다. 위와 같이 되어야 거듭남 속에서 선과 진리, 신앙과 선행은 명료하게 완전해지고 분명하게 결합된다.” 주님께서 위 구절에 더 이으신다. “나는 분명히 말한다. 너희가 이스라엘의 동네들을 다 돌기 전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다.” 글자대로라면 이는 사도들이 모든 동네에서 박해 당하기 전에 주님께서 사도들의 보복자로서 예루살렘을 멸하러 오신다는 뜻으로 이해될는지 모른다. 역사적인 내적 의미 측면에서 볼 때 위 구절은 유대 교회 시대 또는 박해의 시대가 속히 끝나되 이는 복수 차원이 아닌 사랑의 차원에서 짧아 지도록 섭리해 주실 것임을 뜻한다. 그 이유는 이런 시대가 짧아지지 않으면 어떤 인간도 구원되지 않기 때문이다. 어떤 교회이든 어떤 종교 시대이든 그것들의 끝장은 자동적으로 오도록 허용되고 있지는 않다. 그 이유는 만일 저절로 끝이 도래 된다면 구원의 어떤 가능성도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새로운 것을 형성해 줄 어떤 수단도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새로운 것이라 해도 반드시 옛 것을 그루터기로 삼아서 일어난다. 새 교회가 시작되기 위해 그분께서 나머지(remnant)를 아껴두시려면 만료되는 교회들의 종말로 선과 진리에 관한 모든 원리가 소멸되지 않아야 새 교회가 시작될 수 있는 바 소멸 이전에 미리 아껴놓기 위해 심판 기일이 당겨져야 한다. 이런 내용이 “사도들이 이스라엘 동네를 다 돌기 전에 사람의 아들이 온다”는 구절에 담겨 있다. 각 개인의 거듭남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이스라엘 동네”란 교회 속에 있는 교리들이 종말을 고하는 것과 완전해짐을 의미하게 되고 완전해지는 수준은 사람의 아들이 오심, 또는 신성한 진리가 우리에게서 명백해지는 정도에 비례된다는 것을 뜻하고 있다.
24,25. “제자가 스승보다 더 높을 수 없다. 제자가 스승만 해지고 종이 주인만 해지면 그것으로 넉넉하다…” 이는 사도들이 기쁨과 평화의 소식을 전하면서도 정작 그 사람들로부터 받게 되는 대접은 과거 그들의 스승이요 주인되신 분이 받는 대접보다 더 낫지 못할 것임을 알려주고 있다. 그러나 위 구절을 통해 알려주는 진리는 그분의 직계되는 제자들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 모든 시대의 제자들에게 응용된다. 위 구절을 넓은 의미에서 찾아 본다면 자신을 주님과 동등하게 만들려 해서는 안된다는 것, 자기가 소유하게 된 모든 것은 그분으로부터 소유된 것이고 그것으로 충분하다는 것, 그런고로 제자가 지닌 것은 그분이 지니셨던 것인 바 제자가 스승만 하고 종이 주인만 하면 그것으로 넉넉하다는 말이다. 그 이유가 주님이 제자 안에 계신 결과 제자들이 참된 것을 생각하고 선한 것을 뜻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는 주님의 인도를 받는 각 개인 속에서도 비슷하게 적용된다. 인간 속에 있는 두 인간, 즉 외적 또는 자연적 인간은 제자 내지 종과 같고, 내적 또는 영적 인간은 스승 내지 주인과 같다. 외적 인간이 내적 인간에게 순종하는 결과가 있게 되면 이는 주인의 지시대로 종이 일을 해낸 것인바, 실질 면에서 주인과 종은 서로 대등한 관계라고 볼 수 있다. 그 이유가 일의 결과 측면에서 볼 때 주인이 한 것이나 종이 해준 것이나 동일하기 때문이다. 즉 주인과 종은 하나로서 행동한 것이라는 말이다. 특별한 측면은 보편적인 측면과도 일치한다. 즉 영적 측면과 자연적 측면이 하나 되어 행동하면 주님 스스로 행동하시는 것이다. 그 이유가 영적 인간은 그 스스로 행동할 수 없고 오로지 주님으로부터서만 행동되기 때문이다. 영적 인간 또는 영적 마음이 천국으로 열려 있는 만큼에서 그 사람은 자신으로부터 행동하지 않고 주님으로부터 행동한다. 제자와 스승, 종과 주인을 선과 진리 또는 의지와 이해성에 관계시켜 보면 의지와 이해성 속에 있는 내면의 것들은 자연적 마음에 있는 자아와 세상 만을 사랑함 때문에 고통을 받게 되는데 그에 비례해서 외면의 것들도 고통 당해야 한다는 것까지 우리로 알게 해 준다. “집 주인을 가리켜 베엘제불이라고 부른 사람들이 그 집 식구들에게야 무슨 욕인들 못하겠느냐?” “집 주인”이란 마음을 통치하는 원리를 말한다. “집 주인을 베엘제불이라고 부른다”란 근본되는 원리들을 뒤집으려 발버둥치는 것을 뜻한다. 주님을 베엘제불이라고 부른다란 최고로 높은 수준에서 선을 악이라고, 빛이 어둠이라고 억지 부리는 것을 말한다. 선과 진리라는 제일가는 원리를 왜곡시키는 사람들은 그 다음 서열에 속하는 원리라면 더욱 쉽게 왜곡할 것임은 설명할 필요도 없으리라.
26. “그러므로 그런 사람들을 두려워 하지 말아라. 감추인 것은 드러나게 마련이고 비밀은 알려지게 마련이다.” 제자들이 박해하는 사람들을 두려워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요 자신 스스로에 확신을 두고 두려워 말라는 것도 아니라 주님께 신뢰를 둠으로 두려워 말라고 권고하시는 구절이다. 기독인들은 과거 이스라엘 족들 같이 그들의 적이 얼마나 강하든 숫자가 얼마나 많든 두려워 함이 있어서는 안된다. 그 이유가 정작 싸워 승리해서 구원해 주시는 분은 주님이시기 때문이다. 두려워 한다란 제자들에게 신앙이 거의 없다는 것을 암시하는 말이다. 두려워 함 따위는 생각 속에도 없어야 한다 라고 말하신 이유는 “감추인 것은 드러날 수밖에 없고 비밀은 밝혀지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이 말씀을 인간에 관련해 볼 때 보편적 진리에 해당된다. 즉 모든 심정들 속에 담긴 비밀들은 영원한 세계에서는 밝히 들어나고 모든 겉치레 역시 훌랑 벗겨지며 가장 캄캄하고 가장 깊숙히 틀어 박힌 생각이나 의도까지도 대낮에 놓여지기 때문이다. 상응적으로 볼 때 감추어지고 덮여 놓인 모든 것은 우리 마음 안에서도 빛으로 가져와 진다. 거듭나는 사람의 마음 속에서는 감각이나 거짓들로 인한 오류로 감추어 둘 수 없다. 그 대신 모든 것은 진리의 빛의 영향 아래 놓여져 그것의 진정한 값이 매겨지게 된다. 내면의 마음 깊은 곳에 아껴두신 선함과 진리들은 바깥쪽 마음에서 활동하는 천국 원리들을 응원하기 위해 드러나 명백해진다.
27. 악과 거짓이 드러나지만 선하고 참된 것도 드러나는 바 그 결과가 이렇게 말해진다. “내가 어두운 데서 말하는 것을 너희는 밝은데서 말하고, 귀에 대고 속삭이는 말을 지붕 위에서 외쳐라.”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어두운데서 말하신 것들이란 그분께서 우리의 이해성에 내면적으로 밝히 알게 하신 진리이고 그분께서 귀에 대고 속삭인 말씀이란 우리의 의지 안에서 내면적으로 받게 되는 선을 뜻한다. 내면적으로 주어진 것들은 희미하게 보이는 수준이요 불분명하게 느껴진다. 그러나 합리적 자질 속에 있는 의지와 이해성 안으로 오게 되면 뚜렷해지고 분명해지게 된다. 이런 의미는 위 구절과 매우 비슷하면서도 다른 경우와 다른 의도에서 말하신 누가복음 12장 3절을 참조하면 확실해진다. 골방(closets)은 마음의 내면 측면을 뜻하고 지붕은 내면의 것들이 명백해지는 곳인 외면을 뜻한다. 빛의 경우를 가지고 생각해 보자. “빛은 지혜 자체 안에 존재하지 않고 이해성의 생각, 이로부터 언어 속에 존재한다.” 이는 마치 열이 사랑 자체 안에 존재하지 않고 사랑으로부터 의지 안에, 이로부터 육체 안에 존재하는 것과 같다. 사랑과 지혜는 열과 빛의 본체이다. 따라서 열과 빛은 그 본체로부터 진행되어 나온다. 주님은 깊은 어둠 안에 거하신다 라고 말해지는데 이는 그분 자신의 본성이 납득 불가능함을 두고 하시는 말씀이 아니라 인간 마음의 가장 높은 거처가 그러하기 때문이다. 내적 인간을 통해 오는 주님의 가르침이 처음에는 귀에 속삭이는 수준에서, 어둠 속에서 중얼거리는 정도에서 다가 온다. 이 가르침이 의지와 생각에까지 내려와야 속삭여지고 중얼거린 듯 우리에게 여겨졌던 그 가르침들은 낭랑하게 울려퍼지면서 총명하게 지각되어 인간과 교통을 이루게 된다. 대기의 높은 영역에서 소리는 잠잠하고 빛은 직감되지 않는다. 그러나 낮은 영역으로 내려올 때 소리는 청취할 수 있게 되고 빛도 볼 수 있게 된다. 진실된 설교자, 마치 진정한 제자와도 같이 자기 스승으로부터 감명과 생각들을 받는다. 그는 외형 측면에서는 스승을 닮지 않은 듯 보일 수 있어도 그의 뜻과 사상 측면에서는 스승의 의지가 임신되어 있다. 다시 말해 영혼이 육체로 아직 옷 입혀지지 않았고 사상들이 보일 수 있는 형상을 아직 형성하지 못한 상태이지만 이것이 의식할 수 있는 느낌과 또렷한 생각의 영역으로 내려오게 되면 지적 형체와 도덕적 표현이 주어져 총명한 언어로 옷 입혀져 타인도 감지할 수 있게 한다. 이는 어두운 데서 들은 것을 밝은데서 말하게 되고 귀에 속삭이듯 들은 것을 지붕 위에서 외치게 되는 것과 같다. 더구나 제자는 자신에게 뿐만 아니라 타인에게도 선생이 되어야 한다. 제자는 주님으로부터 배운 것을 말로 선포해야 할 뿐 아니라 행위로도 선포해야 한다. 그가 신성한 진리를 내향적으로 베껴 쓴 것을 이해성의 생각으로 가져다 놓고 신성한 사상을 의지의 애착으로 가져다 놓아야 한다. 동시에 자신의 삶과 대화에서 그분의 진리와 사랑이 형체를 갖게 해야 한다. 말하자면 자신의 선한 일로 나타나 볼 수 있게 해야 안과 밖 모두의 저자 되시는 분을 영광되게 하리라.
28. 이런 의무들을 말하시면서 이 의무 수행에 따라 붙는 두 가지 영향력, 즉 세상으로부터와 자신으로부터 받는 영향에 관해 말하신다. “그리고 육신은 죽여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사람들을 두려워 하지 말고 영혼과 육신을 아울러 지옥에 던져 멸망시킬 수 있는 사람을 두려워 하여라.” 우리는 인간을 두려워 말고 하느님을 두려워 하면서 행동해야 한다는 것, 인간의 힘은 육체에만 국한되지만 하느님의 힘은 영혼과 육체에 공히 미친다는 말이다. 이러한 글자적 의미는 가상적인 진리일 뿐 실제적인 진리는 아니다. 그 이유가 하느님은 지옥에 보내고자 영혼을 죽이시지 않는다는 것, 더구나 물질인 육체는 무덤 너머까지 잔존하지 않기 때문이다. 위 구절 역시 그 속의 영적 의미만이 진정한 의미를 알게 해 주고 이 구절에서 선포된 말씀의 진정한 힘 역시 영적 의미에만 존재한다. “영혼과 육신”은 영(the spirit)에 관련해 서술되는 바 이는 내적 인간과 외적 인간을 의미한다. 이 두 인간의 관계는 우리의 영혼과 육체와도 같다. 영적 의미로 볼 때 우리가 두려워 해야 하는 사람이란 인간을 멸하길 결코 원치 않으시는 신성한 존재를 뜻하는 게 아니라 우리를 파멸로 이끄는 원인되는 각자 속의 어떤 원리를 뜻한다. 그러면 외적 인간은 죽일 수 있으되 내적 인간은 죽일 수 없는 게 무엇일까? 부분적으로 우리를 파괴하는 것이 거짓이고 우리를 전체적으로 파괴하는 것은 악이다. 거짓 추론은 이해성을 뒤집음으로 외적 인간에 큰 상처를 입힐 수 있을 뿐 악만이 인간 전체를 파괴할 수 있다. 그 이유가 의지 또는 뜻함이 있는 곳이 인간의 생명에 해당되기 때문이다. 이런 악의 파괴는 폭 넓으면서도 매우 깊다. 그 이유가 주님께서 두 부류의 사람을 놓고 말하시기 때문이다. 본문의 지옥이란 침몰의 상태가 더 깊은 것, 죽음 보다는 생명이라 표현되는 것에 반대된 상태가 더 깊다는 측면을 암시하고 있다. 이런 의미 파악은 누가복음 12장 4절에 있는 주님의 말씀에서 가능하다. 거기서 제자들이 두려워 해야 할 대상은 육체가 죽은 뒤 지옥에 던질 수 있는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 구절은 죽음과 지옥을 따로 따로 언급하고 있다. 둘 모두 마지막 상태들을 뜻하지만 죽음은 사탄의 거처이고 지옥은 악마의 거처임을 우리로 확실히 알게 해 준다.
29. “참새 두 마리가 단돈 한 닢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그런 참새 한 마리도 너희의 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면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 새란 생각을 상징하는 동물이다. 참새 종류는 새 중에서 매우 흔하고 그 가치도 매우 적은 편에 속한다. 두 마리가 언급되고 있는데 이는 진리 측면에서의 생각과 선함 측면에서의 생각, 또는 선하고 참된 생각을 뜻하는 숫자이다. “참새 두 마리가 한 닢에 팔린다”라든가 참새 두 마리가 한 닢의 가치밖에 안된다라고 말해지고 있다. 즉 선함과 진리에 관한 우리의 매우 낮은 수준의 생각들이 선함과 진리에 관한 매우 수준 낮은 지식과 하나 될 경우를 말한다. 기억 속의 선함과 진리에 관한 지식을 돈(닢)이 상징하고 있다. 이렇게 가치가 거의 없는 우리 생각 중 어느 하나도 아버지의 허락 없이는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고 선포되고 있다. 우리가 곰곰히 생각해 볼 사항은 위 구절이 제자들이 받게 되는 시련과 박해와 관련되어 언급되고 있다는 점이다. 어느 때에 참새가 땅에 떨어질까? 시련 받는 때이다. 이때 우리의 생각들이 내적 인간의 하늘로 높이 오르는 대신 바깥쪽 인간으로 향할 때, 땅에 떨어질 뿐만 아니라 아예 죽기까지 하는 것이다. 이런 연유는 명확히 알 수 있다. 애착은 생각의 생명이다. 그래서 애착이나 느낌이 풀이 죽어 버릴 때 생각은 쇠약해져 죽기까지에 이른다. 흔히 모든 사람은 자연적 수준의 시련에 대한 결과는 확실히 예상할 수 있다. 예를 들면 매우 사랑한 사람이 죽을 경우 죽은 사람에 대한 자신의 애착이 죽은 사람과 묶여 있어 이 세상에는 텅 빈 공백만이 남아 있는 듯 여겨지고 생각은 땅에 묻혀 다시는 일어날 수 없는 듯 여겨지는 때가 그럴는지 모른다. 자연적 수준의 시련도 이러할진대 영적 수준의 시련은 더욱 심각하다. 이런 저런 상태에 놓인다 해도 우리는 하늘 아버지의 돌보심 아래 있다. 우리가 그분의 제자라면 그분은 우리 생각의 지극히 작은 것까지도 지배하시면서 조절해 주신다. 따라서 위 구절은 시련과 박해로 우리의 생각이 바닥에서 기고 있다 해도 아버지의 허락 없이는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고 약속해 주시고 있다. 하느님을 진실로 신뢰하는 마음 안에서 신성한 사랑은 지극히 작은 우리의 생각 안으로까지 들어오고 그 생각을 죽지 않게 보존해 주신다. 본문에서 언급된 “땅”이란 우리의 좌절감을 상징한다. 이런 좌절 속에 빠져 있다 해도 우리가 그분의 참된 제자가 되어 있다면 견뎌낼 힘을 공급해 주시겠다는 약속이 선포되고 있다.
30. “아버지께서는 너희의 머리카락까지도 낱낱이 다 세어 두셨다.” 참새가 자연적 수준의 매우 수준 낮은 생각을 상징하는데 비해 머리카락은 지혜 또는 합리적 원리 중에서 최말단에 해당되는 것들을 뜻한다. 앞 구절에서는 참새를 가지고 그분의 섭리가 미치지 않는 곳이 없음을 말하셨다. 이 구절의 경우는 머리카락을 들어 우리를 지키시는 섭리가 세세한 부분까지 미친다는 것을 선포하신다. 특히 시험의 때에 그러하다는 것을 앞 문단과 연결해 상념 해야 할 것이다. 본문이 가르치는 바, 가장 작고 가장 낮은 수준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것을 하느님은 알고 계실 뿐 아니라 그분에 의해 점검되어 있다는 것, 우리의 모든 것은 섭리를 주제하시는 아버지의 감독을 받고 있다는 것이다. 이제 다음 절에 있는 주님의 말씀에서 용기를 가져 보자.
31. “그러니 두려워 하지 말아라. 너희는 수많은 참새보다 훨씬 더 귀하다.” 주님께서 미세한 부분, 하찮은 듯 여겨지는 항목까지 다 돌보고 계신다면 가장 높은 것, 대단히 중요하다는 것은 당연히 돌보고 계시다는 것에 의심의 여지가 하나도 있을 수 없으리라. 주님과 천국에 가장 가까운 원리들, 무엇보다 먼저 그분을 사랑하여 그분의 목적을 수행하고 그분의 계명을 완수하는 것은 이보다 덜 중요한 문제들, 세상과 육신에 속하는 것에 관심을 두는 것보다 훨씬 더 귀중하다. 참으로 우리 시련의 얼마쯤은 이런 가치 기준에 관계된다. 우리가 겪게 되는 시험의 얼마는 무게를 두어야 할 높은 원리를 덜 중요하게 사용함으로 오게 된다. 우리의 애착과 생각이 감사와 신뢰를 수단으로 주님께로 승강시켜야 하는 때에 내일을 위해 걱정하느라 생각 자체를 땅에 떨어트려 땅속에 묻게 하려는 것 때문에 시험은 오는 것이다. 이렇게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나는 분명히 말한다. 너희는 무엇을 먹고 마시며 살아갈까, 또 몸에는 무엇을 걸칠까 하고 걱정하지 말아라… 공중의 새들을 보아라. 그것들은 씨를 뿌리거나 곳간에 모아 들이지 않아도 하늘에 계신 너희의 아버지께서 먹여 주신다… 너희는 어찌하여 그렇게도 믿음이 약하냐? 오늘 피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질 들풀도 하느님께서 이처럼 입히시거늘 하물며 너희야 얼마나 더 잘 입히시겠느냐?”
32.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안다고 증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안다고 증언하겠다.” 이는 우리가 사람들 앞에서 하늘 아버지의 아들을 안다고 증언하면 그 아들은 그분의 아버지 앞에서 우리를 안다고 증언한다는 말이다. 아들(the Son)이란 신성한 진리를, 아버지란 신성한 선을 뜻한다. 만일 우리가 진리를 실천한다면 그 진리는 우리를 선 쪽으로 인도해 갈 것임을 약속하시고 있다. 우리가 아들을 믿노라고 공개적으로 말할 뿐만 아니라 그분의 계명을 성실히 실천함으로 확증해야 한다. 이것이 실제적으로 그분을 안다고 증언하는 것이다. 이것이 선으로 인도해 주는 진리를 안다고 증언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 이유는 진리 자체가 증인같이 우리 속에 존재하면 그 진리는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임을 인정하고 동시에 꾸준히 있어지는 진리의 증언 결과 내지 그 보상으로 진리의 선을 선물하게 된다. 본문을 읽게 되면 아버지는 하늘에 계신다고 말해지고 있고 아들은 땅 위에 계신 것으로 이해되게 하고 있다. 그러므로 위 구절에는 더 약속되는 바가 있다. 즉 우리가 진리를 외적 인간 측면에서 꾸준히 인정하는 것은 그 진리 자체를 내적 인간 안으로 들어 올리게 하는 수단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지혜가 통치하는 형태에서 사랑이 통치하는 형태로 승강되게 해준다.
33. “그러나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모른다고 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모른다고 하겠다.” 사람 앞에서 아들을 부인함 속에는 아들로 아버지 앞에서 그 부인자를 부인하게 하는 것까지 포함되어 있다는 말이다. 만일 진리가 생활에서 부인된다면 그 진리가 향해 가는 선, 우리를 지휘해 가는 목적인 선 쪽으로 인도할 수 없다는 말이다. 위 구절을 더 생각해 보면 아들이 아버지 앞에서 모른다고 하는 것 보다 사람 앞에서 아들을 모른다고 하는 것이 더 심각한 결과임을 알게 해준다. 아들이 우리를 모른다고 하신 말씀의 의미는 무엇일까? 우리가 진리를 알게 되었는데도 여전히 그 진리를 무시하고 있을 때 그 진리 자체는 우리를 정죄하고 그 진리가 가르치는 모든 선을 우리로부터 박탈함으로 해서 진리를 알지 못했던 이전과는 아주 달리 진리와 선함 모두에 대해 반대하는 결과를 낳게 된다.
34.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아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 이 구절을 글자대로 생각하려고 고집하는 사람은 없으리라 생각된다. 주님께서 사람들 사이에서 불협화음이 일어나게 하시려고 오신 게 아니라 그분께서 가르치신 그 결과는 다른 견해를 낳게 해 그 결과가 분리를 창조할 것이라는 말이다. 이세상은 사람 사이에 분규나 폭동같은 게 없으면 혼수 상태 또는 죄있음에서 깨어나질 수 없게 되어 있다. 영적 의미로 볼 때 이 구절은 매우 놀라운 방법으로 신앙자의 마음 안에 구세주로 주님이 오신 결과가 이 구절과 같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다. 이 결과란 우리의 자연적 수준의 마음에 있는 생각과 애정들은 모두 영적 수준의 것들에 적대감을 갖도록 흥분된다는 것이다. 이런 주제는 이미 말했던 사항인데 이 곳에서도 취급되고 있다. 이 구절은 위 내용을 찾는 이들에게 더 직설적으로, 마음에 꽉 박히도록 의도하시고 있다. 자연적 수준의 마음이 비질서적이고 썪어 있는 상태일 경우 주님께서는 평화를 주시러 오지 않는다. 아마 단 한번도 그런 일은 없었으리라. 하느님의 진리의 칼은 하느님과 인간 자신에게 공히 적이 되는 마음 속의 악과 거짓을 향해 휘둘러진다. 거듭나기 전이라 해도 거기에 평화가 있을 수 있지만 그것은 진정한 평화가 아닌 거짓 평화일 뿐이다. 이런 평화란 자연적 수준의 인간에 상속적으로 선택된 죄, 불신앙, 비질서 같은 마음에 합일될 때 있는 평화일 뿐이다. 영혼에 주님이 오심, 그분을 구세주로 응낙하면 그분께서는 칼을 내어 주시고 악이 정복될 때까지 계속 이어지는 전쟁이 시작된다. 이후 승리가 있을 때마다 진정한 평화가 정의와 공정이라는 원리 위에 건설되어진다. 주님을 영접함으로 창조되는 전쟁이란 우리의 내적 인간과 외적 인간 사이의 전쟁을 말한다. 외적 인간 속에 있는 악들이 마음을 통치하는 원리와 생명으로 더 이상 인정되지 않는 대신 하느님의 법이 내적 인간에서 인정되면 자연적 마음 속의 욕망은 새로운 내향의 법에 반기를 들게 되지만 성공적인 전쟁으로 마무리 되기 위해 미움같은 혹독한 분노 속에 휩싸인다. 이 전쟁의 모습에 대한 일부가 다음 절에서 묘사되고 있다.
35. “나는 아들은 아버지와 맞서고 딸은 어머니와, 며느리는 시어머니와 서로 맞서게 하려고 왔다.” 아들, 딸, 며느리란 내적 인간 안에 있는 새 원리와 선과 진리를 향한 애착들이다. 아버지, 어머니, 시어머니란 외적 인간 안에 있는 옛 원리들과 악과 거짓을 향한 애착이다. 아들은 진리를, 딸과 며느리는 선과 진리를 향한 애착인데 이것들은 내적 인간의 원리를 구성하는 요소들이다. 아버지는 악을, 어머니와 시어머니는 악과 거짓을 향한 애착을 말한다. 따라서 이것들은 외적 인간의 원리를 구성하는 요소이다. 우리 영혼에 주님이 오시면 위 새 원리들은 다양한 조건 위에 자리를 잡게 된다. 그 이유가 악과 거짓에 노예되어 있어 왔던 마음은 진리를 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악한 열정의 폭력에 저항하는 일도 없이, 또는 죄의 굴레를 벗으려는 투쟁도 없이 진리가 정착할 수 있는 마음 영역 즉 자유로운 마음이 형성되는 때는 단 한 번도 없다. 이런 투쟁 속에서 기독인은 다음 절에 있는 주님의 말씀이 얼마나 위대한 진리인지 깨닫는다.
36. “집안 식구가 바로 자기 원수다.” 집이란 인간 고유의 마음을 말한다. 진짜 적은 인간 고유의 집에 있다. 인간의 유전적인 근성에는 악밖에 더 있는 게 없다. 주님과 이웃보다 자신과 세상을 사랑하는 게 인간이 태어날 때 지닌 본성이다. 자아와 세상 만을 사랑하는 게 인간이 태어날 때 지닌 본성이다. 자아와 세상만을 사랑하는 것은 언제나 참 인간의 원수이다. 그 이유가 이 사랑은 참된 부와 행복을 박탈해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 고유의 마음은 자아와 세상만을 사랑함이라는 악이 자기 원수인줄 모른다. 그 이유가 진리와 생명의 원리가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느님이 인간의 참 친구되심을 알게 되고 그분의 형상을 닮아야겠다고 결심하게 될 때 과거 거듭나지 않고 있던 심정 속에 있던 것들이 얼마나 몹쓸 것인지 이내 발견한다. 그래서 원수가 집안에 들어 앉은 것들임을 똑바로 직시하게 된다.
37.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내 사람이 될 자격이 없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도 내 사람이 될 자격이 없다.” 집안 식구가 바로 자기 원수라는 것을 발견할 때 그 즉시 그 사람에게 위험이 뒤따른다. 마치 모든 시련이나 투쟁에는 언제나 위험이 곁들여 있는 것과 같다. 이런 이유가 기독인의 생활에는 투쟁 내지 전쟁 상태는 언제나 하느님을 사랑하느냐와 자아를 사랑하느냐, 이웃을 사랑하느냐와 세상을 사랑하느냐라는 두 원리 사이에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서로 정 반대되는 사랑들 사이에 싸움이 늘 있다는 참 사실은 어느 쪽이 승리를 하든 승리하게 만들어 주는 것은 힘의 균형이 어떠 하느냐에 있음을 암시해 준다. 만일 자아와 세상 사랑이 우리 애착에 깊이 뿌리 박지 않고 있다고 가정한다면 거기에는 심각하게 싸울 바탕이 있을 리 없고, 자연적 수준이 영적 수준을 미워하고 적대시 해서 정복하려 들 어떤 위험한 상태도 있을 수 없다. 자연적 수준이 영적 수준을 정복해 버리는 결과도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이렇게 되는 불행으로부터 주님께서는 우리를 지켜 주시는 바,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내 사람이 될 자격이 없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도 내 사람이 될 자격이 없다”고 말씀하신다. 이 구절의 “아버지와 어머니”란 자아 사랑과 세상 사랑을 뜻하고 이 두 사랑은 악한 모든 사랑의 부모격이다. 그리고 “아들과 딸”이란 모든 거짓과 악을 향한 애착들을 뜻한다. 이 사랑은 위 부모격인 두 사랑의 자손에 해당된다. 그러므로 이 두 사랑은 악한 모든 것, 즉 유전적인 악과 실제의 악을 일괄해서 뜻하고 있다. 따라서 자아보다 주님을 더 사랑하느냐, 또는 주님보다 자아를 더 사랑하느냐를 결정짓는 것이 싸움의 목적이다. 싸움터가 이러하기에 위 말씀에 담긴 진리를 상기할 필요가 있고 자아를 우선시 하는 사람은 생명 자체가 사랑이신 그분에게 아무 쓸모없게 된다. 악은 악마 특히 자아 사랑이라는 악이다. 따라서 만일 우리의 아버지가 악마에 소속되어 있다면 지독하게도 무가치한 인간일 수밖에 없다. 그 이유는 악마의 자식을 하느님의 아들이라 할 수 없는 지당한 귀결 때문이다.
38.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 오지 않는 사람도 내 사람이 될 자격이 없다.” 가장 필수되는 의무, 기독인의 전투를 성공리에 마무리 하는데 필수되는 꼭 한 가지는 십자가가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의미인 자기를 부정하는 일이다. 세상과 육에 속하는 것들을 십자가 형에 처해 버리는 것이 기독인이 날마다 땀 흘려야 하는 노동이고, 주님만을 따르는 것은 기독인의 일상적인 의무이다. 기독인은 자기 내부에 있는 악한 욕망과 싸워 가야 할 뿐만 아니라 자기 밖에 있는 악한 습관과도 싸워가야 한다. 그리하여 악행을 중단하면서 선행을 배워 익숙해져야 한다. 기독인은 악에 저항함으로 자기 십자가를 짊어져야만 하고 주님의 거룩한 본보기를 모방하려 노력함으로 주님을 따라가야 한다. 기독인이 이렇게 하지 않는다면 십자가를 즉각 짊어지고 사랑과 은혜의 생애를 엮으신 그분에게 아무 가치도 없는 우리가 될 것이다. 십자가를 짊어지는 중대한 의무를 수행하기 위해서는 이 의무가 무엇인지를 알아야 하고 십자가가 무엇을 뜻하는지를 이해해야 하는 것이 꼭 필요하다.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육체가 고통 받을 때 있어지는 게 아니라 마음을 순수해지게 할 때 존재한다. 또한 마음이든 육체이든 만족 시키려는 것을 부정하는데 있는 게 아니라 마음이나 육체에 있게 되는 이기적인 것들과 그 속에 있는 불순한 것에 반기를 들 때 십자가는 존재한다. 우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그 모든 행동은 하느님이 영광스럽게 되는 데에 초점을 맞추고 있어야 한다. 더 특별히 말해보자. 십자가를 짊어짐은 시험을 견뎌내는 것이고 이 시험은 영적인 악과 내향적으로 투쟁하는 것, 즉 주님께서 우리 심정 속에 이식해 두셨던 선을 제압하려 봉기하는 영적 측면의 악과의 투쟁을 뜻한다.
39.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꾸준하게 자아를 부정하는 것이다. 더불어 거기에는 십자가를 지는 목적 내지 마지막 결과로서 이기심을 십자가 형에 처해 죽이는 것까지 포함된다. 이런 결과가 없다면 우리가 십자가를 지는 것은 헛된 공상일 뿐이다. 즉 “자기 목숨을 얻으려는 사람은 잃을 것이며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얻을 것이다.” 사랑이 생명(목숨)이다. 자아를 향한 사랑과 세상을 사랑함은 인간 고유의 사랑, 거듭나지 못한 생명이다. 주님을 향한 사랑은 새로운 생명, 거듭난 생명이다. 자기 심정을 통치하도록 자아 사랑을 허용함으로 거기서 자기 생명을 발견하는 사람은 진정한 생명인 하느님을 사랑하는 그의 생명을 잃는다. 그러나 주님을 위해 인간 고유의 생명을 내려 놓는 사람은 그분을 사랑하는 가운데 진정한 생명을 발견한다. 주님을 위해 자기 목숨을 잃는다는 것은 자아를 죽이는 것이요 하느님으로부터 생명을 받는 것인바, 이는 악과 선, 거짓과 진리를 맞바꾸는 것이다. 이런 교체 속에서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고 그분의 영광은 더 한층 드높여 진다. 생명(목숨)이라는 단어의 사용과 관련지어 생각해 볼 것이 있다. 신약 성경에서는 생명이란 단어가 위 두 가지 의미 중 어느 하나가 선택되어 사용되고 있다. 예를 찾아 생각해 보면 두 가지 구별되는 점이 발견된다. 요한복음 1장 4절의 경우, “그에게서 생명을 얻었으며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 그리고 주님 스스로 말씀하셨다. “…나는 내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바친다… 나에게는 목숨을 바칠 권한이 있고 다시 그 목숨을 얻을 권한도 있다…” (요한복음 10:15,18). 아버지로부터 얻은 그분의 생명은 그분께서 내려 놓으신다고 말했을 때의 생명이 아니고 단지 동일한 단어인 목숨이라는 말로 표현된 것 뿐이다. 그분께서 내려 놓으신 생명은 “내 영혼이 죽을 정도로 심히 괴롭다”고 말하셨을 때의 “영혼”이라는 단어와 의미가 똑같다. 이렇게 구별해 살피는 이유는 그분이 태어나실 때 아버지로부터 받아 가지고 있는 생명은 신성한 사랑이라는 것, 그분께서 내려 놓아야만 하겠다고 심히 통곡하신 생명은 신성한 진리였다는 것을 곰곰히 생각해 볼 때 발생된다. 그 이유가 주님께서는 신성한 진리 측면에서 시험받으시고 죽기까지 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성한 사랑 내지 선함 측면에서 그분은 모든 시험을 초월해 존재하시는 바 죽을 수가 없다. 이쯤해서 주목해 둘 사항이 있다. 우리가 신성한 진리 측면에서 그분은 고통 받으시고 죽으셨다고 말할 경우라 해도 이때의 신성한 진리란 그 진리 자체를 뜻하는 게 아니라 유한하고 미약할 뿐인 인간성을 수단으로 세상에 내려 오실 때 필요했던 진리, 즉 진리의 외관을 입으실 때의 신성한 진리만을 두고 하는 말이다. 이 내용을 교리 차원에서 달리 말해 볼 수 있다. 주님께서 아버지로부터 받은 생명은 그분의 내적 인간 측면의 생명이고 그분께서 내려 놓겠다고 하신 어머니 쪽에서 받은 생명은 그분의 외적 인간 측면의 생명에 해당된다. 그러므로 본문에서 말하는 목숨, 즉 얻고자 하면 잃고 잃고자 하면 얻게 되는 생명은 우리의 외적 인간 측면의 생명, 좀 더 꼬집어 말한다면 지적 측면의 마음에 해당되는 생명이다. 이 생명을 내려 놓는다는 것은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진리를 에워싸고 있는 각종 거짓이나 오류를 벗어 던진다는 말과 같다. 이럴 때 자연적 수준의 인간 즉 인간 고유인 각종 거짓들로 범벅된 의심과 불신앙을 우리의 참 신앙으로부터 제거할 수 있다. 이를 응용해 생각해 보자. 지적 자만은 본문을 통해 주님께서 잃어야 한다고 하신 목숨 내지 영혼이고 이 목숨을 내려 놓을 때 우리는 새 생명, 하느님께서 불어 넣으신 살아 있는 영혼을 발견하고 이때 새 피조물이 된다. 이상의 내용을 집약해 생각해 보면 위 본문의 두 가지 약속은 신성한 섭리에 관한 교리를 요약해서 표현함을 알 수 있다. 이 구절에는 우리가 그분의 제자일 경우 그분께서 설비해 두신 것 뿐만 아니라 그분께서 허용하시는 사항이 포함되어 있다. 주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어떤 악에도 빠지는 것을 허락치 않으신다. 그러나 더 큰 악에 빠질 위험이 있을 경우와 궁극적으로 우리의 선을 위해서라면 악에 빠지는 것을 허용하실 때도 있다는 것이다. 참새 한 마리도 그분의 허락 없이는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 우리의 머리카락까지 다 세어 두셨다. 머리카락을 세어 놓는다는 것은 우리를 보전하신다는 섭리 뿐 아니라 그분의 신성한 질서 법칙에 일치 하도록 우리의 자연적 수준의 마음과 삶에 있는 미미한 활동까지도 섭리하심을 뜻한다. 주님께서는 질서를 수단으로 섭리를 펴시고 하느님의 질서 자체가 그분의 권능이다.
40. 이제 인간 고유에 속한 자연적 인간이 거듭 나질 때 더 밝은 측면이 제시되고 있다. “너희를 맞아 들이는 사람은 나를 맞아 들이는 사람이며 나를 맞아 들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맞아 들이는 사람이다.” 제자들은 예수께서 보내셨고 예수는 하느님께서 보내셨다. 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제자들이 스승과는 독립된 인물이었듯이 예수 그리스도를 아버지로부터 독립된 인물(person)로 이해해서는 안된다. 신성한 실체는 하나일 뿐 나뉠 수 없다. 하느님으로부터 탄생된 예수 그리스도는 하느님이시고 무한하시다. 그 반면 인간은 창조 되어진 상태로 유한하다. 무한과 유한 사이에는 어떤 비교도 할 수 없다. 무한은 생명 자체이고 유한은 그 생명을 받는 그릇에 불과한 바 그 근원되는 생명으로부터 한순간이라도 분리되어 존재할 수 없다. 그러나 비록 신성한 실체가 하나요 분리될 수 없다 해도 실체의 속성은 복수로 존재한다. 하느님 안에서 사랑과 지혜 또는 선함과 진리는 따로 따로 구분되는 실체이다. 마치 한 인간 안에 이해성과 의지가 놓여 있듯 위 둘은 분리될 수 없지만 따로 따로 구분해 볼 수 있다. 하느님 안에서의 이런 구별이 신약 성경에서 아버지와 아들로 표현되고 있다. 아버지는 신성한 사랑 또는 선함이고 아들은 신성한 지혜 또는 진리를 표현한다. 지혜는 사랑으로부터, 진리는 선함으로부터 발출된다. 자연계에서 아들이 아버지로부터 출생되는 것과 같다. 이런 자연계와의 유사한 점을 수단으로 신약 성경에서 그분의 사랑과 지혜가 표현된다. 신성한 지혜는 신성한 사랑에 의해 보내졌다. 이런 견지에서 예수는 하느님께서 보내졌다고 말해지는 것이다. 이와 상응되는 견지에서 예수께서 제자를 보내셨다고 말해지고 있다. 그 이유가 주님께서 그분의 이름으로 보낸 제자란 진리 자체라는 측면에서의 주님으로부터 진행되는 진리들, 인간이 납득할 수 있는 더욱 낮은 수준의 마음에 체류할 수 있는 진리들을 표현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느님으로부터 인간에 이르기까지 생명은 점진적 수준으로 존재한다고 말해볼 수도 있다. 즉 신성한 진리(Divine Truth)는 신성한 선에 의해 보내졌고 가상의 진리, 신성으로부터의 진리(truth divine)는 신성한 진리에 의해 보내졌다. 또한 영적 수준의 원리는 천적 수준의 원리로부터, 자연적 수준의 원리는 영적 수준의 원리로부터 진행된다. 보다 낮은 것들은 보다 높은 것에 이끌리고 보다 높은 것은 가장 높은 것에 이끌린다. 그 반대로 가장 낮은 것은 그 안에 보다 높은 것을 포함하고도 있다. 그러므로 신실한 상태에서 가장 낮은 것을 맞아 들이는 사람은 그외 다른 것도 맞아 들일 수 있다. 이제 말씀을 가지고 생각해 보자. 말씀의 내적 의미는 최말단 의미, 즉 글자 의미 안에 포함되어 있다. 글자 의미를 통해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가르치신다. 말씀의 지극히 단순한 의미가 담긴 진리를 맞아 들이는 사람은 말씀의 더 높은 지혜를 받을 수 있다. 지극히 간단한 순종부터 실행하는 사람은 그 순종 안에 지극히 높은 사랑,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까지도 지닐 수 있다. 종교 생활의 발전이 계속되는 사람이라면 그의 순종 안에 잠재되어 있는 위 큰 두 사랑은 그의 마음 안에서 적극적인 원리로 되기에 이르러 그에 상당하는 완전한 삶을 이룩하리라. “나를 사랑하는 사람을 내 말을 지킬 것이다. 그러면 나의 아버지께서도 그를 사랑하시겠고 아버지와 나는 그를 찾아가 그와 함께 살 것이다”(요한복음 14:23). 이 축복의 말씀, 우리가 주님의 말씀에 귀 기울여 듣고 순종한다면 우리 마음은 그분의 사랑과 지혜가 거주하는 장소가 되리라는 것이다. 이리하여 하느님의 성막이 우리와 함께 있어 우리는 그분의 백성이 되고 주님은 우리와 계신 바 우리의 하느님이 되실 수 있다.
41. “예언자를 예언자로 맞아 들이는 사람은 예언자가 받을 상을 받을 것이며, 옳은 사람을 옳은 사람으로 맞아 들이는 사람은 옳은 사람이 받을 상을 받을 것이다.” 진리를 가르치는 자가 예언자요, 진리를 실행하는 자가 옳은 사람이다. 따라서 각각은 진리와 정의를 의미한다. 예언자를 예언자로 맞아 들인다는 것은 그 예언을 위해 진리를 받는 것이다. 옳은 사람을 옳은 사람으로 맞아 들인다는 것은 옳은 것을 위해 선을 받는 것이다. 참됨과 선함을 위해 참되고 선한 것을 받는데 따른 보상은 진리와 선함을 향한 애착이다. 사랑 안에 행복이 있다. 영적 수준의 사랑은 우리 안에 있는 주님을 향한 사랑이다. 이 사랑 안에 참 행복이 존재하고 이 사랑은 행복과 천국 모두를 우리에게 갖게 해준다.
42. “나는 분명히 말한다. 이 소자(little ones) 중 하나에게 그가 내 제자라고 하여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사람은 반드시 그 상을 받을 것이다.” 작은 어린이는 순진을 상징한다. 소자에게 물을 준다는 것은 순진하되 무지한 사람을 가르치는 것을 뜻한다. 그리하여 어느덧 순진 자체에 진리가 심어지는 것까지 뜻한다. 그런데 이런 의무 실행에 약속된 보상은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사람까지 포함되고 있다. 따뜻함이 사랑 또는 애착인 반면 차가움은 사랑이 없음 또는 사랑이 부족함을 말한다. 찬물이란 사랑의 진리가 아닌 순종의 진리를 말한다. 그러므로 작은 사람에게 찬물 한 그릇이라도 주는 사람은 받을 보상을 결코 잃지 않으리라고 말한 위 본문의 약속이란 이런 의미가 담겨 있다. 비록 자신의 뜻이라면 행하고 싶지 않다 해도 주님의 뜻을 실천하기 위해 있게 되는 선한 일, 의무감에 따른 선한 일, 지극히 단순한 선함까지도 그에 따른 보상을 받을 뿐 아니라 지극히 높은 보상까지도 받으리라는 것, 가장 높은 사랑의 행동과 비교해도 그 수준이 덜해지지 않으리라는 약속이다. 어쨋든 이렇게 지극히 단순한 의무가 상을 취득하기 위해서 반드시 제자의 이름을 걸고 행동되어야지 자신의 이름을 걸고 행동해서는 결코 안된다. 이를 다른 측면에서 말해보자. 지극히 단순하나마 주님의 뜻을 행할지라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말씀의 가르침에 관계되어야 하고 자연적 수준의 자비심의 결과가 되어서는 안된다. 의무감에서 비롯된 지극히 단순한 선한 일에 영적 수준의 품질과 천국적인 결과가 있기 위해서 의무수행은 반드시 영적 수준의 원리로부터 진행되어야 한다. 종종 기독인들은 자신이 하느님을 덜 사랑하고 있음을 스스로 발견할 때 애석해 한다. 그러나 만일 자기가 하느님을 생각했던 만큼 사랑하고 있지 않다고 판단했다면 그분께 순종하는데 부족함이 없도록 적극적으로 움직여야 할 필요가 있다. 하느님을 사랑하라고 자기 자신을 강요할 수 있는 능력의 소유자는 아무도 없다. 그러나 자신이 하느님께 순종하도록 자기를 강요할 수 있다. 그분께 순종해 가려고 억지를 부려서라도 성실히 순종함을 시작한다면 비록 그 순종이 “냉수” 같이 차가운 순종이었겠지만 차츰 그런 의무감에서 해제됨을 수단으로 과거 자신에게 너무 결핍되었었다고 통탄했던 그 사랑을 느끼면서 소유하게 된다. 비록 사랑이 존재되도록 자기 의지가 움직여질 수 없었다 해도 그 사랑이 존재하도록 역사된다. 우리가 하느님께 순종을 바치면 그 보상으로 그분은 우리에게 사랑을 갖게 해 주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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