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11장 해석

11

1. “예수께서 열 두 제자에게 분부하시고 나서 그 근방 여러 마을에서 가르치시며 전도하시려고 그곳을 떠나셨다.” 주님의 일은 두 방법, 간접적인 방법과 직접적인 방법으로 이루어진다. 그분의 말씀을 통해서, 그리고 천국이나 세상에서 그분의 교회를 통하여 이루어지는 일은 간접적인 방법에 속한다. 그분 자신으로부터 이루어지는 일은 직접적인 방법이다. 직접적인 작용으로 이루어질 경우 가장 깊은 영혼 안으로 들어가시고 그 다음 마음의 다른 방면으로 그 일을 확장해 가신다. 간접적이든 직접적인 방법에 의해서이든 우리의 거듭남이라는 그분의 의도가 결과로 나타나기 위해서 바깥쪽 수단들이 두 번째 수단으로 채용된다. 우리의 지식 내지 기타 다른 수단들이 내부로부터 발출되는 생명과 빛이 순조롭게 하강되도록, 즉 주님의 길을 준비하기 위해 공급되어야 한다. 이런 두 겹의 작동이 본 장에서 취급되고 있다. 주님께서 내적 인간 안에서 선함과 진리라는 원리를 천국 질서로 배치하실 때가 본문의 “예수께서 열 두 제자에게 분부하심(안수하심)”에 해당되고 배치된 원리들이 바깥쪽 인간에로 퍼져나가 우리의 행동마저 천국 질서에 부합되게 하는 것은 “열 두 제자를 파견하시어 길 잃은 양을 모으시는 것” (10:6)에 해당된다. 주님은 인간 구원이라는 유용한 목적이 성취되도록 우리 속 깊은 곳으로부터 서도 그분 스스로 일하신다. 이것이 본문에서 “…가르치시며 전도하시려고 그곳을 떠나셨다”는데 대한 의미이다. 그분이 전도하시려고 가신 마을(city)이란 교리이다. 교리는 신성의 유입을 받는 그릇에 해당되고 그분이 역사하시는 장소이다.
2. “그런데 요한은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을 감옥에서 전해 듣고 제자들을 예수께 보냈다.” 역사적으로 생각해 본다면 위 요한의 행동은 의아스럽다. 그 이유가 “이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 양이 저기 오신다” (요한 1:29) 는 그의 말을 참작하면 그가 예수에게 메시아인지 또는 자기 같이 메시아의 길을 준비하러 온 사람인지 묻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학자들의 많은 의견이 있지만 그것을 반복해 본다는 것은 도움이 될 것 같지 않아 생략하기로 한다. 단지 모순 같이 보이는 역사적 측면에서 지혜와 관련된 어떤 교훈을 찾는 게 더 바람직하리라 생각된다. 요한은 헤로데가 동생의 아내를 데리고 사는 것을 책망함으로 진리를 당당하게 증거한 탓에 감옥에 감금되었다. 헤로데의 범죄는 유대 교회의 상태를 잘 표현해주고 있다. 요한의 감금은 요한으로 표현되는 말씀 속의 교회가 그 당시 어떻게 대우받는지를 확실히 표현하고 있다. 어쨌든 이런 역사물을 진정한 교회의 거듭나는 교인과 관련시켜 볼 때 위 사건은 또 다른 의미를 갖게 된다. 요한은 씌어 있는 말씀 또는 말씀이 가르치는 진리를 표현하는 바, 요한이 옥에 갇힘이란 진리의 출구가 자연적 수준의 인간이 내뿜는 적대행위로 막히면서 자유로운 진리의 행동이 박탈될 때 야기되는 시험의 상태이다. 이런 상태에서 주님의 인성을 의심하는 상태가 우리 마음에서 올라오고 결국 말씀이 육이 됨으로 구원이 설비되어 있다는 것에 의심을 품게 된다. 이런 영적 시련의 상태에 휘말리면 그분은 은총을 내리시는 것을 잊으신 듯 여겨지고 심하면 주님은 안 계신 듯 여기기까지 한다. 이런 의심들은 요한으로 표현되는 말씀 자체에서 근원되는 게 아니라 의심을 부추키는 쪽으로 말씀 속의 진리를 해석하는데서 기인된다. 그러나 비록 시련이라는 매우 캄캄한 상태에서도 빛을 보는 때도 있다. 그 때란 마음이 진리의 빛을 추구하거나 그 빛을 받고자 준비하는 경우이다. 다시 말해 본문에서 요한의 두 제자가 주님 자신에게 파견되어오듯 우리의 생각과 애착들이 마음 속에 있는 의심을 제거하고 싶어 주님을 직접 뵙고자 할 때이다. 이러면 그분의 입술로부터, 또는 직접 우리 영혼에 들어오시어 진리의 확증을 주신다.
3. 그런데 의심의 대상은 주님 자신이다. “오시기로 되어있는 분이 바로 선생님이십니까?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하겠습니까?” 이 구절로부터 교훈을 얻으려면 우리가 곰곰이 생각해보아야 할 게 있다. 위 질문의 시대적 여건은 거듭나는 삶에 있어지는 과도기(transition)를 표현한다는 점이다. 요한의 생애와 선교사업은 개혁(reformation)의 시기를 표현한다. 따라서 요한의 공생애가 끝을 맞이함으로서 주님의 공생애가 시작된다. 본문은 두 시기 사이에 상존하는 변화의 상태를 표현한다. 요한 자신이 말한 것, “그분은 더욱 커지셔야 하고 나는 반드시 쇠하여야 한다”는 예언이 이제 성취되고 있는 셈이다. 이 상태는 저 상태의 거꾸로 이다. 후자가 왕성해지면 전자는 쇠한다. 새 가지가 자라 오르면 옛 가지는 시들어간다. 요한의 공생애가 표현한 것은 선 쪽으로 인도하는 진리이고 주님의 공생애는 선으로부터 파생된 진리인 바, 전자의 임무 수행이 줄어들면서 후자는 점점 증가해간다. 전자의 직무 수행을 후자가 이어 받는 것이다. 글자대로의 진리가 우리의 개혁을 인도했지만 개혁이 마무리되면 글자 속의 영이 거듭남을 인도해서 구원을 마무리 짓는다. 회개함에 뒤이어 거룩함이 우리를 감싼다. 씨뿌리는 땀흘림에 이어 수확이 있어진다. 상태 변화의 시련기에 요한 같은 의심을 우리도 느끼게 된다. 그럴 때 우리 마음에 이런 질문이 있을는지 모른다. 영혼의 슬픔과 죄를 없애주는 어린 양이 정말 하느님 자신, 진리 자체란 말인가? 회개나 환난을 통해 영혼이 찾는 참 원리가 이것이란 말일까? 평화의 왕으로 오시게 되어 있는 분의 길을 예비하는 게 고통과 고생이라는 준비 과정밖에 더 다른 게 없단 말인가?
4. 요한의 제자에게 주님이 주신 답변은 얼마나 의미심장한지! “너희가 듣고 본대로 요한에게 가서 알려라.” 이는 결과적 차원에서 하신 답변이다. 위 구절을 다시 말하면 “너희가 장차 오시기로 되어 있는 분이 누구인지 찾되 말로 하지 말고 권능의 유무로 찾는다면 내가 그리스도인지 아닌지 판단되리라.” 만일 우리가 자신의 애착이 들은 것과 자신의 생각이 본 것에 대해 직바르게 해석을 내리고 그 해석대로 자신이 체험하도록 허용한다면 우리가 찾고 있는 “오시기로 되어 있는 그분”이 누구인지에 대해 어떤 의심도 아예 발생하지도 않는다. 우리 안에서 역사해 주시는 그분의 유용한 일보다 우리를 더 확신시켜 줄 증거가 더 있을 수 있을까? 어쨌든 감옥 속의 요한으로 표현된 시험의 상태를 통과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위 구절은 더 많은 위로와 격려의 교훈을 담고 있다. 이런 사람들에게 위 구절은 말한다. 제아무리 우리의 외적 인간이 철장에 갇히고 고통당하고 있는 때에도, 주님이 나의 구세주인지 아닌지 몽롱한 상태라는 시험의 늪에서 허우적대고 있는 때에도 그분은 영혼의 모든 질병을 치료해서 회복시켜주시는 선함의 기적으로 구원의 역사를 위해 일하시어 그들과 함께 해주신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다. 이 유익한 일들이 무엇인지 아래에서 간단히 살펴보자.
5. “소경이 보고…” 무지나 오류로 눈이 먼 이해성이 진리를 직감하도록 능력을 회복시키심이다. “…절름발이가 걷는다…” 무지와 오류 속의 악으로 삐뚤어진 삶을 곧바르게 해주심이다. “…나병환자가 깨끗해지고…” 알고 있는 진리들, 그러나 비꼬인 해석으로 왜곡되고 모독된 진리가 된 퇴색한 진리를 순수해지게 해주심이다. “…귀머거리가 들으며…” 진리와 사랑의 소리를 듣지 못하는 의지가 경청해서 순종하게 해주심이다. “…죽은 사람이 살아나고…” 죽은 상태인 자연적 수준의 사랑 대신 생명 자체인 영적 수준의 사랑이 그 자리를 차지하게 해주심이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복음이 전하여진다.” 영혼(spirit)이 가난함, 영혼이 비어 있는 상태는 새롭고 더 높은 수준에서 진리의 사랑을 받는 바탕인 바 복음은 구원의 기쁜 소식이 되어 혼(soul)을 가득 채운다. 요한의 제자들이 보았던 위에 간략히 열거한 주님의 일은 그분이 수행하셨던 모든 종류의 기적을 거의 다 망라하고 있다. 마치 메시아가 수행하게 될 것을 예언자들이 미리 선포했던 것과 다름이 없을 것이다. 요한이 의심을 지녔었다면 위와 같은 경이로운 그분의 역사는 요한으로 하여금 그분이 그리스도이다는데 대한 충분하고도 남는 증거가 되었을 것이다. 요한처럼 감옥에 갇힌 영혼, 구원해주시는 자비의 대상과 자신과 관련해볼 때 의심을 떨치지 못해 시험 속에서 헤매는 이들은 자신들에게 주어지는 증거, 시험의 근원인 진짜 악들을 자신에게서 제거하시는 그분의 역사에 관한 확실한 증거를 “보고” 의구심을 떨쳐야 하리라.
6. 요한에게 이런 일들을 보여 주신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를 두고 화를 품지 않는 사람은 복이 있다.” 많은 예언들이 주님의 일은 자비와 권능의 일이라고 미리 말해 두었지만 한편으로 그분은 걸림돌이요 화를 일으키는 돌도 되실거라고 선포했다. 주님이 오셨던 그 때는 시련과 결정이 동시에 필요했던 시대였다. 그분은 인간 위에 떨어지는 진리라는 돌이 되어 주셨는 바 그들은 연단되어야 했다. 이 때에 악한 자 내지 죄로 범벅된 이들에게 그분은 화를 치밀게 하는 돌이 되셨고 회개하는 사람에게는 안전하게 피할 곳을 제공하는 돌이 되어 주셨다. 누군가가 자기 결점을 지적할 때 화를 품지 않는 이가 얼마나 있을까? 주님의 진리가 자신의 악과 결점을 지적할 때 화를 품지 않는다면 이 얼마나 큰 하늘의 축복인가! 어느 때에 이 축복이 우리의 것이 될까? 신성한 질서의 법칙에 화를 품게 하는 모든 것을 홀연히 내던지고 오로지 순응하겠다는 거룩한 상태로 마음이 다시 다짐될 때, 그리하여 주님의 사랑과 진리가 우리의 심정과 이해성을 통치하도록 허용할 때, 이로부터 생활에서이든 대화 속에서이든 모든 것이 그분의 질서에 순응될 때 가능해진다.
7. 요한에게 인간 본성 안에 영원한 말씀으로서의 그분 자신에 관한 증거를 주신 뒤, 글자 의미로서의 씌어진 말씀을 표현한 요한에 관한 증거를 군중에 주시고자 그들을 향해 방향을 바꾸신다. 하느님으로부터 천국을 통해 지상의 인간에게 내려오는 신성한 진리가 그 자체 옷입고 있는 바깥쪽 덮개와 말씀 자체이신 예수께서 세상에 오시고자 옷입으신 인간은 잘 어울리고 있다. “너희는 무엇을 보러 광야에 나갔더냐?” 유대인을 향한 이 질문은 그들에 못지 않게 우리에게도 참으로 귀중한 질문이다. 그 이유가 요한은 계시된 말씀에 대한 모형이었기 때문이고 계시된 말씀은 아직도 수많은 견해들의 주제가 되기 때문이다. 요한을 보러 광야에 나간 이들은 제각기의 관념과 기대감으로 제각기 다르게 주님을 묘사해서 납득한다. 다시 말해 수많은 사람들은 진리의 말씀과 관련해서 자기 마음의 상태로 제각기의 계시를 발견한다는 말이다. 광야는 유대 교회의 계시된 말씀이 있었던 삭막한 상태를 묘사하고 있다. 이는 각 개인의 경우 영적 황량함 또는 시험에 부응되는 인간 마음의 상태도 뜻한다. 모든 이는 제각기의 기대감을 가지고 하느님의 말씀이 무엇인지, 무엇을 가르치는지를 검사한다. 가장 흔한 것은 선입견을 먼저 가지고 검사하는 경우이다. 그래서 말씀이라는 거룩한 매개체를 통해 그분 자신 내지 그분의 나라와 교통하게 될 때 단순한 마음이 보고 듣는 것에 만족치 못할 때가 너무 많다. 본문의 주님은 인간 심정을 가지고 그 속에 교회에 관한 완전한 지식을 가지셨는 바 그분의 육성을 통해 제각기 다른 견해를 지닌 교인을 위 짧은 구절로 정확히 표현해 놓으셨다. 그러므로 지혜인 그분의 다음 말씀에 귀를 기울여 우리와 그분의 관계 사항에서 뭔가 배워야 하리라.
너희는 무엇을 보러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하느님의 말씀에 관한 인간의 사상 중 가장 많은 부류를 형성하는 사상을 주님께서는 위 질문으로 매우 정확하고도 강력하게 묘사해놓으시고 있다. 하느님의 말씀에는 글자에서 나타나는 의미만을 갖고 있다고 간주하고 있어 말씀의 가르침에 관한 자기 견해를 타인의 견해에 의존하는 이들에게 하느님의 말씀은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일 뿐이다. 말씀의 바깥쪽인 글자 의미가 말씀의 전부라고 생각할 경우 이는 속이 빈 갈대이다. 말씀의 글자 의미는 가상의 진리(apparent truth)로 대부분 구성되어 있으므로 거기에 인간 해설자는 자기가 원하는 대로 해석을 붙일 수 있다. 그럴 경우 각기 다른 의미를 가르치는 바 그런 의미가 정도를 넘어서면 전혀 다른 교리로 뒤틀리는 경우까지 이르른다. 이런 계층의 사람들에게 말씀은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 되어 있다. 계시들, 비록 신성에 그 근원이 있지만 인간 견해와 호흡을 맞출 수 있게 작성되어있다. 비록 글자라는 측면에서 말씀이 지니는 특성이 이러하지만 그런 덕분에 모든 이의 상태에 잘 어울릴 수 있어, 각양각색의 해석이 튀어나오지만 이는 내적 의미를 보호하는 수단도 겸하고 있다. 마치 생명의 나무에 이르게 하는 길을 지키기 위해 장치된 돌아가는 불칼 같다. 설사 말씀의 글자가 잘못 해석된다해도 해석자가 진실한 태도로 임했었다면 “상한 갈대도 꺾지 않으시듯” 그들의 신앙이 파괴되거나 심각할 정도의 피해는 입지 않는다. 그러나 말씀에 사악한 해석이 내려졌다면 “그것을 지팡이처럼 믿지만 그것은 부러진 갈대에 불과하다 그것을 잡았다가는 도리어 손만 베고 만다” (이사야 36:6). 더구나 말씀을 의도적으로 왜곡해서 그 본질에 반대되게 했다면 이들은 마치 유대인이 범한 모독죄, “…사람의 아들의 오른 손에 갈대를 들리고… 그에게 침을 뱉고 갈대를 빼앗아 머리를 때리는” 죄를 범하게 된다. 그러나 정직하게 해석해보려 했다면 이는 “신포도주로 적신 해면을 십자가 위의 주님께 들어올리는” (요한 19:29) 것과 같아서 그 해석은 내면의 진리가 그 진리의 적들로부터 고통당할 때 그 진리를 받드는 수단이 되어 준다.
8. 또 다른 부류의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부드러운 옷을 입은 사람”을 보기 위해 광야에 나가고 있다. 이런 계층의 사람들은 하느님은 매우 훌륭한 분이신 바 인간의 매력을 끌어 당겨야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말씀은 완전한 인간의 품위(grace)보다 더 나은 것으로 옷입고 있어야 한다고 그들은 생각한다. 따라서 말씀이 털옷(hairy garment)(마태 3:4)으로 옷입혀진 것에 화를 내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주님께서 위 부류의 사람들에게 “부드러운 옷을 입는 사람들은 왕궁에 있다”고 일러주신다. 왕궁이란 천국의 저택이고 그곳에는 왕 중의 왕 되시는 분의 집도 있다. 이런 부드러운 옷은 말씀의 영적 의미에 있을 뿐 글자 의미에서는 발견하기 힘들다. 그럼에도 슬기롭지 못한 사람은 낮은 수준의 세계에 이런 부드러운 옷이 있으려니 착각하는 바 결국 화가 치밀 수밖에 도리가 없다. 참으로 매끈하게 차려입은 의상에 속하는 어떤 것을 말씀 안에서 발견하는 것이 이 세상이라 해도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마음이 천국 수준의 상태에 있는 사람들에게 신성한 진리는 천국의 은혜로운 어떤 것을 열어 보여 주신다. 왕궁에 있는 사람이란 영적 수준의 진리로부터 파생되는 선 안에 거주하는 사람을 뜻한다. 그 이유가 집은 의지 속의 애착을, 왕은 이해성 속의 영적 진리들인 바, 이 애착 안에 체류하는 진리들은 아름다웁기 때문이다. 이들은 과거 예언자가 회개의 설교자로 나타나 하느님의 분노와 심판을 자초하는 죄를 보여주고 나열하면서 그런 삶을 멈추라고 호통칠 때 그들의 삶이 입었던 옷, 곧 예언자의 거칠거칠한 옷을 벗어 던졌고 질서 자체로 건립된 왕궁의 사람들이 입는 매끄러운 옷으로 갈아입은 사람들이다. 그래서 그들은 하느님이 사랑이시오 그분의 왕국은 정의와 평화로 규율된다고 보고 느낀다.
9. 무질서한 정신으로 말씀을 판단하여 본질을 흐려놓고 있는 위 두 부류 외에 또 다른 세 번째의 부류가 있다. 이들은 말씀의 본성에 일치하는 평가를 내리는 것으로 간주되는 부류로서 이들에 관해 주님께서 말하신다. “그러나 너희는 무엇을 보러 나갔더냐? 예언자냐? 그렇다. 그런데 사실은 여느 예언자보다 더 훌륭한 사람을 보았다.” 세례자 요한이 여타 예언자 중 한 사람일 뿐만 아니라 그들보다 더 나은 예언자 된다고 주님이 말하셨다고 이해하는 것은 타당치 못할 것 같다. 그러나 예언자라는 단어 자체에 어떤 의미가 있을 거라고 생각해 본다면, 그리고 요한은 신성의 명령을 위촉받은 사람일 뿐만 아니라 그 인물 자체가 표현적 특성을 지니게 섭리되었다고 더 생각을 보태본다면 이해의 실마리는 풀리게 된다. 말씀 속의 교리를 가르치는 게 그들의 직분인 예언자는 말씀으로부터 파생되는 교리도 의미한다. 우리가 모든 참된 교리의 근원이 하느님의 말씀이요, 그러므로 말씀으로부터 교리를 얻고자 진지하게 살핀다면 말씀의 진정한 속성에서 빗나가지 않고 말씀을 읽어갈 수 있다. 어쨌든 주님께서 요한에 관해 그는 예언자였을 뿐 아니라 “여느 예언자보다 더 훌륭하다”고 말씀하셨다. 비록 말씀이 모든 교리를 함유하고 있다 해서 말씀과 교리가 동등한 수준인 것은 아니다. 말씀 자체는 모든 교리보다 더 높은 위치에 있다. 말씀의 글자 수준도 인간의 사용을 위해 신성한 지혜 자체가 놓여져 있어 모든 세대를 망라해서 거듭나는 삶의 모든 상태를 계몽시키고 훈육하여 인도해간다.
10. 말씀은 모든 교리보다 더 훌륭하고 여느 예언자보다 더 나은 바 말씀은 교회와 모든 교인에게 특사이요 주님에 앞선 선구자 된다. “성서에, ‘나보다 앞서 내 사자를 보내니 그가 내 갈 길을 미리 닦아 놓으리라’하신 말씀은 바로 이 사람을 가리킨 것이다.” 제3장 3절에서 이미 살핀 바와 같이 요한이 표현한 말씀은 광야에서 외치는 그의 소리, “너희는 주의 길을 닦고 그의 길을 고르게 하여라”이다. 외치는 자가 누구이든 하느님의 말씀 속의 진리들은 인간 심정에 이르게 하는 주님의 길을 닦게 해준다. 주님께서는 이 문단에서 마치 주님 외 누군가가 그분의 길을 준비하도록 보내신 듯, 마치 여호와께서 예수의 길을 준비하도록 요한을 보낸 듯 말하시고 있다. 그러나 여호와와 예수는 동일한 존재이시다. 그럼에도 따로 따로의 인물인 듯 기록하신 이유는 한 분 주님과 구세주라는 그분의 품성, 신성과 인간 측면을 지칭하셨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하느님의 사랑과 지혜를 말하신 것이다. 또는 여호와께서 예수가 등장하기 전에 그분의 특사를 보낸다고 말해볼 수 있다. 그 이유는 여호와는 말씀의 근원 측면, 보내는 주체 측면 되는 신성이시고 그 반면 말씀 전체는 하느님이 육 안에서 모습을 드러내심, 구속자, 인간 구세주로서의 예수와 계속 관련을 맺고 있기 때문이다. 예수에 앞서(before the face of Jesus) 요한이 왔다고 말해지고 있다. 주님의 얼굴(face of Jesus)이란 말씀의 내적 측면, 이는 과거에 계셨던 예수이다. 따라서 말씀의 글자(외적측면)와 글자의 해설자로서의 진정한 교리는 글자의 영적 의미되는 내적 측면의 진리들에 앞서 있어 마음을 준비시켜 내적 진리를 받게 해준다.
11. 여느 예언자보다 큰 사람이 세례자 요한이다. 뿐만 아니라 “나는 분명히 말한다. 일찍이 여자의 몸에서 태어난 사람 중에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없었다.” 여인에게 태어난 사람과 하느님에게서 태어난 사람은 정반대의 위치에 있다. 말씀의 글자는 자연계로부터 얻은 형상으로 형성되어있다. 그래서 이 글자는 자연적 수준의 납득력에 잘 적응된다. 우리에게 밝혀지는 말씀 속의 진리, 설사 그 진리가 글자 의미의 수준에 머문다 해도 이 진리는 여느 인간의 저술에서 발견할 수 있는 어떤 진리보다 더 위대하다.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일찍이 없었다란 말씀은 설사 글자만 가지고 비교해도 이보다 더 큰 것은 없다는 말이다. 글자만 가지고도 인간이 작성할 수 있는 어느 문장도 비교가 불가능한 게 말씀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이런 글자 의미를 영적 의미와 비교한다면 덜 영광스럽다. 인간이 최고도로 하느님의 진리를 납득한다 해도 이 납득력은 가장 수준 낮은 천사의 납득력과도 비교가 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하늘나라에서 가장 작은 이라도 그 사람보다는 크다.”
12. “세례자 요한 때부터 지금까지 하늘나라는 폭행을 당하고 있다. 그리고 폭행자들이 강제로 하늘 나라를 차지하려고 한다.” 위 구절의 원어 번역에 대한 의문은 접어둔다 해도, 이 말이 무슨 뜻일까? 라는 의문이 생기지 않을 수 없다. 일반적인 주석에 의하면, 거룩한 사람들이 사용 가능한 수준의 폭행 내지 무력이라는 것이다. 이 주석이 전체적으로는 올바를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 말해지는 폭행이나 무력이 비록 천국 삶이나 하늘나라의 속성에서 빗나가지 않는다 해도 이는 교인 내지 교회에 속한 품성 속에도 존재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할 것 같다. 이는 진보해 가는 단계 중 개시 단계이고 이것이 세례자 요한의 시대로 의미되고 있다. 기독교라는 하늘 처방의 시작 단계, 물론 하늘의 여타 처방 때도 거의 비슷하지만 이 단계의 사람들이 진리를 영접하는 측면은 품행(morally) 측면보다는 지적 측면(intellectually)에서 이루어졌다. 다시 말해 사람들이 믿음의 신비로 들어가는데 지력에 의존했다는 말이다. 어떤 사람들은 맹렬한 욕망으로 이 진리를 붙잡았다. 그러나 그 진리를 유용하게 만드는 선과 함께 붙잡지 못할 경우가 많았다. 물론 진리를 붙잡은 초기 단계에서는 대체로 복음이 요구한 것에 관한 지식으로 발전한 선을 수용했을는지 모른다. 누가에 따르면 복음이 요구한 것에 관한 지식으로 발전한 선을 수용했을는지 모른다. 누가에 따르면 복음의 첫 번째 수용은 모든 이에게 동일하다는 것을 알아 볼 수 있다. “율법과 예언은 요한 때까지였다… 그 이후 사람들이 그 나라에 들어가려고 애쓰고 있다” (누가 16:16). 이를 달리 말하면 그 이후 사람들이 무력으로 하늘 나라에 들어가려고 한다는 말이다. 이 구절은 모든 사람들이 하늘 나라에 들어갔다는 것까지 뜻하고 있지는 않고 단지 억지로라도 노력했던 사람들이 들어갔다는 말이다. 영적 의미에서 볼 때 이 구절의 언어가 함축하는 바, 들어감(entrance)은 심각한 시련 없이는 결과를 보지 못한다는 것, 요한의 시대에서 광폭한 종류의 외적 시험을 수단으로 하늘 왕국에 들어가고 있다는 것을 뜻해주고 있다.
13. “그 이유가 모든 예언과 율법은 요한의 때까지 예언해왔다.” 우리가 주님에 관해서 배우기만 하고 있는 때가 우리에게 있어지는 “예언하는 때”이다. 주님께서 우리의 내적 인간 안에서 태어나실 때, 그러나 우리의 외적 인간에서 그 모습을 명백히 드러내시지는 않고 있을 때 우리에게 있어지는 “요한의 때”이다. 어쨌든 위 두 기간은 순종과 회개라는 수단으로 우리 안으로 들어오시는 주님의 길을 준비하는 과정에 해당되고 장차 생활 안으로 주님이 임하시는 준비단계이기도 하다.
14. “너희가 그 예언을 받아들인다면 다시 오기로 된 엘리야가 바로 그 요한임을 알 것이다.” 왜 엘리야가 주의 길을 준비하러 오게 된다고(말라기 4:5) 약속되었을까? 위 구절로 미루어 생각해보면 엘리야가 요한의 한 예징(type)이었다는 것을 누구나 인정할 것이다. 많은 예언자 중에서 엘리야가 선발된 이유는 세례자 요한처럼 그도 씌어진 말씀을 표현하는 예언자였기 때문이다. 교회에서이든 인간 마음에서이든 주님의 길은 말씀 그 자체에 의해 예비된다. 더구나 신성과 거룩함에 관한 것을 표현하는 것은 예언자라는 개인이 아니라 그 예언자의 직능인 바 엘리야라는 개인적 차원은 중요하지 않다.
15. 말을 마치신 주님께서는 이 말을 더하시고 있다. “들을 귀가 있는 사람은 알아들어라.” 이는 그분께서 말해온 사항을 주의 깊게 살피고 적극적인 태도를 지니라는 것이다. 귀는 소리를 듣는 것 뿐만 아니라 자음이 전달하는 의미를 탐사하는 신체기관이다. 특히 눈이 이해성과 상통하듯 귀는 의지와 교류하는 기관에 해당된다. “들을 귀를 가진 사람”이란 신성한 지혜가 주는 교훈을 명심해서 순종할 뜻을 지닌 사람을 뜻한다. 주님의 가르침에 의지를 복종케 함은 우리가 드릴 수 있는 어떤 제물보다 더 낫다. “순종하는 것이 제사 드리는 것보다 낫고, 그분 말씀을 명심하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낫다” (사무엘상 15:22).
16, 17. 주님의 가르침이든 요한의 가르침이든 자기 귀를 들이대어 명심하는 사람은 거의 없는 듯 하다. 이를 주님께서 비유로 지적해주시고 있다. “이 세대를 무엇에 비길 수 있으랴? 마치 장터에서 아이들이 편갈라 앉아 서로 소리 지르며 ‘우리가 피리를 불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았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가슴을 치지 않았다’ 하며 노는 것과 같구나.” 유대인들은 요한과 더불어 곡을 하고 예수와 더불어 기뻐하기를 거절했다. 요한은 고행자, 수도자같이 나타나 외딴 곳에 살면서 거친 털옷을 입고, 메뚜기와 들꿀을 먹고 지내면서 자아 부정(self-denial)이라는 교훈을 가르쳤다. 그는 사람들과 더불어 곡을 했지만 사람들은 거절했다. 주님께서는 준엄한 어떤 표시도 하지 않고 오시어 통상적인 사람들과 섞여 보통의 삶을 사셨다. 그분은 유대인에게 피리를 부셨지만 그들은 춤추기를 거절했다. 유대인과의 관계에서 본 위와 같은 의미 외에도 이 비유는 우리를 위한 더 나은 의미를 전달하고 있다. “장터에 앉아 있는 아이들”이란 거룩한 말씀 안에 있는 사랑의 진리와 순진을 뜻한다. “동무를 부름”이란 사랑의 진리와 순진을 인간이 받을 수 있게 적용함을 뜻한다. “우리가 피리를 불었다”란 영혼이 재충전되기 위해, 또는 영감을 받기에 적합하도록 해주는 천적 수준의 애착을 뜻한다. 그 이유가 “피리, pope, 피리 붐”는 위와 같은 애착을 뜻하기 때문이다. “너희가 춤추지 않았다”란 자연적 수준의 마음 안에서도 천적 애착에 부응되는 기쁨이 생산되도록 높은 애착이 그 영역에 입장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그 이유가 춤은 기쁨이나 즐거움을 뜻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곡을 하였다”란 애착 없는 진리이다. “너희가 가슴을 치지 않았다”란 마땅히 있었어야할 진리에의 순종이 없었음을 뜻한다. 이 비유를 각 개인의 상태에 응용하면 더욱 교훈적이다. 아이와 자기 동료 사이에 있어지는 공감(sympathy)의 결핍은 우리 마음 속에서 내적 애착과 외적 애착 사이에 있어지는 공감의 결핍을 표현한다. 피리를 불고 곡을 한 아이란 영적 수준의 마음에 속한 애착이고, 이 애착이 동료를 부름이란 자연적 수준의 마음에 있는 애착들과 기쁨이든 슬픔이든 서로 주고받으려 함을 뜻한다. 그 이유가 영적 수준의 마음에 있어지는 기쁨은 자연적 수준의 마음에 있는 순수한 선과 진리와 서로 주고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슬픔 역시 통회와 겸허를 수단으로 상호간에 교류해서 공감을 이루어야 한다. 우리 마음들에서 영적 애착과 자연적 애착 사이에 조화를 이루어 자연적 마음이 영적 마음에 응답해서 협동하게 만드는 것은 신성의 역사하심에 있는 그분의 목적중 하나이다. 이런 영적 애착의 부름에 진지하게 순종하는데 우리의 자연적 애착이 얼마나 느린지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미 체험했었으리라. 우리의 자연적 수준은 영적 수준과 공감을 나누는 게 얼마나 힘든지, 따라서 진리의 선으로 형성된 양심의 탄원과 부름이 있을 때 자연적 수준의 애착이 경청하도록 자신을 인도해가야 한다는 것을 이 비유를 통해 명심해야 하리라.
18, 19. 주님께서는 위 비유를 그분 자신과 세례자 요한에게 적용하시어 설명하신다. “요한이 나타나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으니까 ‘저 사람은 악마를 가졌다’고 하더니 사람의 아들이 와서 먹기도 하고 마시기도 하니까 ‘보아라, 저 사람은 식도락가요 모주꾼이고 세리와 죄인하고만 어울리는구나’ 하고 말한다.” 사건을 비틀고 왜곡하고 과장하는 마음씨, 결국 저주를 자초하는 그 마음씨 안에서는 미덕도 악덕으로 변질되고 마는 것을 위 구절에서 금방 살필 수 있다. 어쨌든 위 구절에서도 거기에 담긴 영적 의미의 파악이 본 주석서의 중요한 목적이다. 요한은 와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았다. 그 이유는 요한으로 표현된 개혁이라는 작업은 자아 부정을 수단으로 악을 제거하는 게 그 본질되기 때문이다. 사람의 아들은 와서 먹고 마셨다. 그 이유는 예수의 공생애로 표현된 거듭남이라는 작업은 선을 행함이 그 본질 되기 때문이다. 자아 부정 또는 악을 단념하는 것이 영적 단식이고 선을 행함은 영적으로 먹고 마시는 것이다. 유대인들은 요한을 두고 악마를 가졌다고 말하고 있다. 그 이유는 자연적 인간은 자아 부정을 악마로 간주하고 그것은 참된 모든 생명과 그 즐거움을 파괴하는 것으로 간주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예수가 식도락가요 모주꾼이라고 말했다. 그 이유가 자연적 수준의 인간은 종교의 선과 진리에 관한 것은 맛있게 먹으려 하지 않으므로 자연적 인간 자체의 생각만으로 정작 영혼을 채워 더 이상 어느 것도 채울 공간을 남기려들지 않기 때문이다. 주님을 헐뜯는 위의 발언은 군중이 아니라 바리사이파인들, 굉장히 성결되다는 인물로 자처하는 자들, 주님께서 악이나 위선 외의 세상에 관해서는 거절하시거나 정죄 않으셨기 때문에 오히려 주님을 세상의 어떤 인간으로 간주해버리는 사람으로부터 나온 것들이다. 그러므로 그분이 세리와 타인들을 친구로 삼는 것까지도 바리사이파인들에게는 규탄의 대상이 되었던 것이다. 세리나 죄인들과 가까이 하신 이유는 그분의 목적이 그들에게 선을 베푸시는데 있기 때문이다. 이런 그분의 품새를 보아도 주님은 완전한 인간의 모형이 되어 주셨음을 알 수 있다. 그분은 죄인들이 경멸당하고 있다 해서, 또는 그들과의 교제로 경멸당하지 않을까 하는 걱정 때문에서이든 여타 사람들 같이 죄인들을 피하시지 않았다. 그들의 영혼을 향한 그분의 사랑은 너무 위대해서 그들에게 가까이 접근하게 했고 그분의 사랑은 너무 순수해서 그들과의 접촉으로 오염되는 것도 예방해주었다. 이렇게 말하시어 결론 내리시고 있다. “지혜는 그 자녀로 정당해진다.” 글자 의미에서 볼 때 지혜의 자녀란 슬기로운 사람이다. 지혜는 오로지 슬기로운 사람만이 옳다고 인정한다. 지혜 자체가 정당화되는 것은 지혜 자체되시는 주님으로부터 슬기롭게 된 이들에 의해서일 뿐이다. 슬기로운 사람 외에 누가 지혜를 음미할 수 있을까? 영적 의미에서 볼 때 지혜의 자녀란 지혜 속의 선과 진리들이다. 성경이 언급하는 지혜라는 단어의 사용은 지적 측면보다는 품행 측면에 비중을 놓고 있다. 성경에서 우둔함이 악행(depravity)을 뜻하듯 지혜로움은 총명에 바탕을 둔 선함을 뜻한다. 지혜롭다 라는 결과를 생산하게 한 원리가 과연 특출한 원리라는 것을 사람들 앞에서 증거로 내보일 때만이 지혜는 정당해진다.
20-24. 경이로운 많은 일들이 있었음에도 회개함이 없어 책망을 들어야 하는 성읍을 향해 언급하시고 있다. “예수께서 기적을 가장 많이 행하신 동네에서 회개하지 않으므로 그 동네들을 꾸짖으셨다. ‘코라진아. 너는 화를 입으리라. 베싸이다야. 너도 화를 입으리라. 너희에게 베푼 기적들을 띠로와 시돈에서 보였더라면 그들은 벌써 베옷을 입고 재를 머리에 들쓰고 회개하였을 것이다. 그러니 잘 들어라. 심판 날에 띠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오히려 가벼운 벌을 받을 것이다. 너 가파르나움아! 네가 하늘에 오를성 싶으냐? 지옥에 떨어질 것이다. 너에게 베푼 기적들을 소돔에서 보였더라면 그 도시는 오늘까지 남아 있을 것이다. 그러니 잘 들어라. 심판 날에 소돔땅이 너보다 오히려 가벼운 벌을 받을 것이다.” 위 도시들은 방금 주님께서 비유로 전달하신 진리에 관한 장엄한 샘플이다. 기적과 경이로운 일들을 요구했던 이들에게 위 구절의 대답은 얼마나 심각한지! 구세주의 권능과 복된 일들은 정작 그 일이 있었던 성읍에서는 대체로 큰 반향을 일으키지 못했다, 그곳 사람들은 수행된 적이 없던 위대하고 가장 은혜스러운 기적들을 목격했지만 여전히 불신앙과 죄 가운데 파묻혀 있었다. 한마디로 외적 측면의 신념이나 설득이 내적 측면의 신념을 생산해주지 않았다는 말이다. 따라서 내면으로 신앙이 있으려면 내면적 확신이 먼저 있어져어야만 한다. 주님의 기적들이 구원해주는 믿음으로 우리에게 정착되게 할 수 있는 방법은 오로지 한 가지 방법뿐이다. 영적으로 우리 혼(soul)에서 작업되는 방법이다. 주님의 기적들은 혼을 건전 상태로 회복시키는 수단들을 표현했다. 건전한 상태로 회복된 혼만이 그분의 기적에 대한 증거를 제공한다. 그 이유가 주님의 기적은 구세주로서의 주님에 관해 실험적인 지식에 해당되기 때문이다. 주님의 일을 입증하지 않는 사람들이 불신앙과 회개치 않은 죄로 화를 입고 있는 코라진과 베싸이다, 가파르나움이다.
위 구절을 글자 의미로만 볼 경우 약간의 곤란한 점이 발견된다. 만일 주님의 기적들이 띠로와 시돈을 회개하게 했을 것이라면 왜 그 당시에 있어지지 않았을까? 대답은 간단하다. 주님이 띠로와 시돈은 구하실 수 있었다 해도 코라진과 베싸이다는 구하실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분께서 더 일찍 세상에 오셨다면 그분께서는 그 때 이후 살았던 사람들이 구원되도록 설비하시되 완전하게는 못했을 것이다. 극도의 악까지 치료되려면 극도의 악이 출현 되어 극성을 부릴 때이어야 가능하다. 그럼에도 그분이 오시기 전에 살았던 사람들이 불이익을 당하지 않도록 주님의 자비는 미리 설비하시고 있다. 심판 날에 구세주를 거절한 사람보다 띠로와 시돈이 더 가벼운 벌을 받게 되어있다. “많은 것이 주어진 사람에게는 많은 것이 요구되어진다.” “이것이 단죄이다. 빛이 세상에 왔는데도 사람들이 어둠을 사랑하는” 것이다. 이 본문을 영적 의미로 보게 되면 더 엄숙하고 중요한 교훈을 가르친다. 일반적으로 자연적 인간 속에 있는 지적 측면의 원리들이 띠로와 시돈으로 표현되고, 이 지적 원리 안에 있는 거짓 추론이 코라진과 베싸이다로 표현되어 있다. 마찬가지로 일반적으로 자연적 인간 속에 있는 의지 측면의 원리들이 소돔으로, 그 의지의 원리에 선천적으로 붙은 악들이 가파르나움으로 표현되어 있다. 이런 관점에서 살펴보면 띠로와 시돈으로 표현된 자연적 인간 속의 지적 원리 자체는 “권능의 일” 또는 구속하시는 주님의 자비로 구원될 수 있는 반면, 코라진과 베싸이다로 표현된 지적 원리 속의 거짓 추론은 주님의 신성한 진리에 정반대되는 바 거절되고 정죄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화가 있으리라고 발표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런 거짓 추론에 빠지는 것을 피해야 할 것이고 피할 수 있는 수단은 오로지 그것들과 결별하는 수밖에 없다. 소돔으로 표현되는 자연적 인간의 의지 측면의 원리까지 그분의 구속하시는 권능은 구원하실 수 있다. 그러나 가파르나움으로 표현된 그 속의 악들은 주님의 신성한 사랑에 정반대되는 바 그 악은 반드시 우리 속에서 소멸되어야만 한다. 이런 악도 화 있을 것이라고 발표되고 있다. 따라서 이런 악들, 특히 지옥으로 가라앉게 하는 자아 사랑의 악을 떠안지 않는 길만이 화를 피할 수 있다.
25, 26. “그 때에 예수께서 이렇게 기도하셨다. ‘하늘과 땅의 주인이신 아버지, 안다는 사람들과 똑똑하다는 사람들에게는 이 모든 것을 감추시고 오히려 철부지 어린아이들에게 나타내 보이시니 감사합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이것이 아버지께서 보시기에 선이었습니다.” 지금까지 생각해왔던 앞의 주제의 또 다른 측면 즉 신성하고 천국적인 측면이 본 절에서 언급되고 있다. 인간이 신성한 자비의 제안을 거절할 때 이 자비는 거절의 결과나 악의가 경감되는 쪽을 선택하신다. 그 방법은 그들로부터 그들의 범죄 발생을 더 악독해지게 하는 지식을 감추시는 것이다. 그분의 전능하심은 정작 인간을 행복하게 만들 선을 그들이 완고해서 받지 않는 것을 보실 때 그분의 자비하심은 그들을 더 죄 있게 만들기만 할 뿐인 진리를 보류하신다. 진리의 내면적 인정은 자기 생명이 되도록 보존할 수 있는 한도에서 인정하게 되어 있는데 이것도 하느님의 섭리적 차원의 역사 중 하나이다. 이런 섭리의 한 가지가 본문에 실려 있다. 즉 하느님의 선하심은 슬기롭고 똑똑하다는 사람들에게 구원에 속한 사항을 감추어두신다. 그러나 어린 아이들, 즉 구원의 진리를 받아들이는 상태인 심정이 순진하고 영이 단순한 이들에게는 나타내 보여주신다. 어떻게 하느님께서는 생명의 진리들을 감추거나 보여주시는 일을 하실 수 있을까? 한 가지 방법은 이러하다. 말씀의 글자는 똑똑하다는 사람들에게는 그 속의 영적 진리가 감추이게 하되 단순한 사람들에게는 밝혀준다. 말씀의 글자는 마치 에집트 군대와 이스라엘 백성 사이에 있었던 구름 기둥 같아서 이쪽은 밝음을, 저쪽에는 어둠이 있게 한다. 이런 조치에 대해 아버지께 감사를 드리고 있다. 감추이고 드러내심은 아버지가 보시기에 선이었다고 말해지고 있다. 아버지란 신성한 사랑 측면의 주님을 의미하는 바 이 구절 같은 조치는 순수한 사랑이 하나인 것을, 우리에게 전달해주고 있다. 그 이유가 “그분이 보시기에 선이었다(its being good in his sight)”에서 선한 모든 것은 사랑에 속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주님의 사랑은 “그분이 보시기에” 적절한 지혜로만 행동된다.
27. 주님께서 이제 아버지 쪽으로부터 군중을 향해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진정한 관계를 가르쳐주신다. “아버지께서는 저에게 모든 것을 맡기셨습니다. 아버지밖에는 아들을 아는 이가 없고 아들과 또 그가 아버지를 계시하려고 택한 사람들밖에는 아버지를 아는 이가 없습니다.” 이 감사기도가 주는 인상은 마치 아버지 보다 아들이 더 하위 서열에 있는 것을 인정하는 것 같은 인상을 풍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아버지와 아들이 동등함을 주장하고 있다. 본문의 “모든 것”은 “아버지가 가지신 모든 것,” 즉 신성의 특권과 모든 속성을 포함하고 있다. 아버지는 이런 모든 것을 아들에게 전달하셨다. 사실 한 분밖에 지닐 수 없는 신성한 모든 것을 또 다른 인물에게 나누어준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은 재론할 필요가 없는 이치이다. 아버지란 주님의 내재하고 있는 신성이고 아들은 내재하는 신성이 거하는 인성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면 신성에 속한 “모든 것”이 인성에 전달되는 것은 타당하고 당연하다. 마치 우리의 영혼이 가진 모든 것이 육체에 전달되는 것과 같다. 그리고 영혼 속의 것이 육체에 배달된다고 해서 영혼의 어떤 속성이든 그 권위성이든 어느 것도 육체에 빼앗기지 않는다. 주님께서는 신성에 속한 것을 그분의 인간 본성에 배달하심으로 인간 자체를 신성되게 만드셨다. 즉 신성한 영혼이 거주하기에 꼭 맞는 신성한 몸이 되게 하셨다. 그러므로 그분의 인성은 신성의 참 형체, 신성을 명백히 나타나게 했다. 예수 안에서 신성은 인성이고 인성은 신성이시다. 그러므로 둘 다 똑같이 무한하시다. “아버지밖에는 아들을 아는 이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이 아버지를 밝히 알게 해주려는 사람들밖에는 아는 이가 없다.” 만일 아버지밖에 아들을 아는 이가 없고 아들밖에 아버지를 아는 이가 없다면 아들과 아버지의 서로에 대한 지식은 무한할 수밖에 없다. 우리는 인성을 통하지 않고는 신성을 알 수 없다. 그러므로 이어지는 구절이 말하는 주님의 초대야말로 얼마나 적절한지!
28. “고생하여 무거운 짐을 지고 허덕이는 사람은 다 나에게로 오너라. 내가 편히 쉬게 하리라.” 인간의 허약한 모든 것, 슬픔을 짊어지신 분, 영적 노동의 모든 상태를 통과하신 분, 그래서 가련하고 죄 많은 피조물, 고뇌 속의 피조물을 위로하실 수 있는 분, 인간 최대의 시련에서도 그 인간을 떠받혀 주실 분, 이런 신성한 인간이신 예수가 우리 앞에 계셔서 복된 초대와 확증을 가져다주고 있다. 악과 잘못들은 압박하는 두 개의 짐이어서 인간의 열매를 썩게 하고 신음소리만을 내게 한다.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이들만이 위 두 짐이 영적 생명을 갖는데 방해꾼임을 안다. 이들만이 온유하고 겸손하신 예수의 멍에를 위해 압박하는 자신의 악한 것들을 내려놓을 수 있는 마음의 결단을 갖는다. 주님께 나아오는 녹초 된 영혼에 약속하신 쉼을 구하기에 앞서, 주님의 훈계에 귀를 기울기에 앞서 우리는 반드시 악이 죄임을 알아야만 한다.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죄인이 필요로 하는 것, 죄인에게 쉼이 필요해서 그 쉼을 주실 수 있는 분은 오로지 구세주 한 분뿐이시다. “사악한 자에게는 쉼이 없다.” 쉼(rest)은 정의 속에서만 획득된다. 그리고 이 정의는 정의 자체이신 그분 안에서만 발견할 수 있다. 이분이 주는 쉼을 얻기 위해 우리는 죄의 길을 단념함으로, 회개라는 열매를 가지고 그분께 “나아가야” 한다. 더 나아가 우리는 그분을 사랑해서 계명을 실천하는 자세로 발전해야 한다. 그 이유가 쉼의 저자이신 그분께로 끌어당겨주는 것은 사랑뿐이기 때문이다.
29. 짐을 지느라 허덕여 쉼을 찾는 사람을 초대하시고 그들이 그분의 멍에를 메고 배우도록 아울러 초대하시고 있다. “나는 심정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우리가 사탄의 멍에를 벗어 던질 때, 우리는 그리스도의 멍에를 메어야만 한다. 죄의 멍에가 정의의 멍에로 대체되어야 한다. 주님의 멍에를 멘다는 것은 우리의 의지를 안내하는 원리로 그분의 사랑을 받는 것이고 그분에게서 배운다는 것은 우리의 이해성에 방향을 지어주는 원리로 그분의 진리를 받는 것을 뜻한다. 주님 스스로 말하신다. “나는 심정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정확히 말해 그분은 온유와 겸손 그 자체이시다. 그분은 가장 크시지만 가장 작기도 하시다. 그분은 가장 높으시지만 가장 낮으시기도 하다. “나는 섬기기 위해 너희 가운데 있다.” 이런 복된 그분의 본보기를 모방하는 사람은 자기 영혼으로 하여금 쉼을 발견하게 한다. 그 이유는 이렇다. 지옥의 모든 권세를 정복하신 분, 불일치로 얼룩진 인간 모든 원리를 던져버리신 분, 그래서 인성 안에 평화를 만드신 분, 이제 이런 평화를 추구하는 모든 사람에게 평화의 원천이 되신 분, 이런 주님에게만 진정한 안식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30.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주님의 멍에는 사랑의 멍에인 바 그 멍에는 편할 수밖에 없다. 그분의 짐은 진리의 짐인 바 가벼울 수밖에 없다. 진리는 우리를 자유롭게 만들고 사랑은 완전한 자유이다. 따라서 사랑과 진리가 있는 곳, 그분의 멍에와 짐을 진다면 압박이나 피곤에 지치는 경우가 없고 오로지 행복과 신선한 느낌만이 맴돌 뿐이다. 이 기쁨은 예수의 멍에를 메는 모든 사람에게 공통된 경험이다. 많은 이들이 천국을 위해 살아가는 것은 어려운 일, 고달픈 삶이라고 예상하지만 그렇지가 않다. 주님께서 세상에 오신 것은 천국에의 길을 더 쉽게, 천국에 더 확실히 입장할 수 있게 해주시기 위해서였다. 그분께서는 율법의 짐과 멍에를 그분 자신으로 만드시어 이를 행하셔서 우리도 그 짐과 멍에를 거뜬히 짊어질 수 있게 하셨다. 그분이 율법을 완성하신 것은 우리가 해야 할 율법의 완성이라는 의무를 면제시켜주기 위해 우리 대신에 이루신 게 아니라 우리가 꼭 해야만 하는 율법의 완성을 더 쉽고 더 편하게 할 수 있도록 모범적으로 해놓으신 것이다. 우리는 그분의 멍에를 짊어져야 한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그분의 멍에는 편하기 때문이다. 그분께서는 그분 스스로 우리에게 하라고 요구하시는 모든 것을 하셨다. 그래서 그분은 그것을 행할 능력을 우리에게 주실 수 있다. 그 이유가 그분은 우리에게 본보기로서, 후원자로서 함께 하시기 때문이다. 시편 기자의 이런 권고는 기독인과 그 구세주에 매우 적절한 표현이 될 것 같다. “네 짐을 주님께 의지해라. 그러면 그분은 너를 받쳐 주리라.” 주님이 우리 대신 우리의 짐을 짊어지실 것이라고 말하고 있지 않고 우리가 짐을 진 상태에서 그 짐을 떠받혀 주시리라고 시편은 말하고 있다. 주님은 우리에게 친구요 원조자이시다. 그분은 우리의 인생 여정 내내 우리와 함께 가신다. 그러시면서 우리를 원조하시고 우리의 갈 길을 붙잡아 주신다. 우리가 기쁨과 평화로 된 그분의 나라를 우리에게 소개해줄 때까지 함께 해주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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