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위기 해석 표지와 설명

레위기 해석
교정판

The Book of Leviticus Interpreted and Explained
according to its
Spiritual or internal Sense with copius reference
to the Writings of Emanuel Swedenborg
Explanatory Notes and a Commentary
by the Rev. Henry Maclagan

헨리 맥라간 지음
배제형 편역

도서 출판 벽옥
표지 설명

언약궤 (출애굽기 25장 10-22절)
“궤를 싯딤목(shittim wood)으로 만들어라… 순금으로 들씌워야 한다. 금으로 네(4) 고리들을 주조할 것이다…싯딤목으로 장대를 만들 것이다… 그것들을 금으로 들씌워라. 장대는 궤의 고리들 안에 있을 것이다…그것으로부터 옮겨지지 않을 것이다…증거판을 궤 안에 놓을 것이다…순금으로 자비석(mercy seat, propitiatory, 속죄판)을 만들어라…두 거룹들을 만들 것인데, 속이 비지 않은 금으로 너는 그것들을 만들고 (마치로 금을 두드려펴서 만듦), 자비의 자리 두 끝에서…한 거룹은 이쪽 끝에서 만들고, 한 거룹은 다른 쪽에서 만들 것이다. 자비의 자리로부터…두 끝 위에 거룹들을 만들 것이다. 거룹들은 그들의 날개들을 위쪽으로 펼칠 것이고, 그들의 날개들을 가지고 자비석을 덮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얼굴들(은) 그들의 형제에 대한 인간의 (것이다). 거룹의 얼굴들은 자비의 자리를 향하여 있을 것이다… 그리고 너는 궤에서, (그) 위로부터 자비석을 놓을 것이다. 그리고 궤에…증거판을 놓을 것이다…거기서 나는 너를 만날 것이다, 나는 자비석 위로부터, 증거판의 궤 넘어 있는 두 거룹들 사이로부터… 너와 더불어 말할 것이다.
(** 지면 관계상 위 구절은 전부는 게재되지 않았음)

레위기 해석
2019년 6월 20일 1판 1쇄 인쇄
2019년 6월 25일 1판 1쇄 발행
원저: 헨리 맥라간
한역자: 배제형
펴낸자: 민권식
펴낸곳 도서 출판 벽옥
등록 번호 2016-000002호
주소 전남 화순군 화순읍 안양산로 31-5
전화 화순 (010)-4738-1711, (010) 6609 -1711
뉴욕 (917) 922-9215
홈페이지 http://www.baysidechurch.org
bible study notes blog.wordpress.com
ISBN: 979-11-964971-
정가 15000원

사무엘상 15장 해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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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상 제15장

사울이 아말렉을 쳐부수러 보내지다

신약성서가 지니는 두 번째 가는 중요한 축복이라면 그것은 구약성서를 올바르게 해석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 그리고 기독교라는 처방에 살아있는 특전의 두 번째 가는 것이라면 기독교 출발 이전에 있던 교회의 진정한 본성을 알 수 있게 해준다는 것이다. 그런데 유대교 처방과 기독교 처방의 차이점, 그리고 각 처방에 속해 있게 된 성경을 엄밀하게 구별하지 않음으로 해서 기독교는 유대인이 행했던 실제의 일을 채택하기도 하고 그 영을 흡수하기도 했다. 이스라엘 족들이 하느님의 선택된 백성이요, 그분의 총애를 받은 백성이라고 가정해버리면, 그 민족들이 했던 것은 전부는 아니다 해도 어느 정도까지는 하나님의 뜻과 일치한다고 생각되어 신성한 권위 아래 있다고 간주해버리면서 그들의 행동들은 하느님의 허가로 하느님의 뜻을 모방한 듯 여기고 만다. 어떤 이들은 가상하기를, 유대인의 성경은 유대교의 처방이 끝남과 더불어 그것도 중단되어야 하는바, 기독교를 위해서는 유대인이 말하는 성경은 어떤 권위도 없고 가치도 없다고 까지 잘라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지금 우리를 기쁘게 해주는 빛으로 비쳐본다면, 구, 신약은 큰 차이가 있다는 것, 그런데도 두 성경은 완전한 하모니를 이루고 있다는 것을 알게 해준다. 유대인의 성경과 기독교의 성경은 바깥쪽 형태에서는 폭넓게 다르나, 안쪽인 영적 의미에서는 완전하게 하나를 이루고 있다. 두 처방은 같은 게 없지만 그들은 서로 유사성을 지니고 있다. 유대교는 기독교와 대칭 되는 형으로 되어있다. 그래서 유대인에게 자연적인 것들은 기독교에서는 영적인 것이 되고 있다. 유대인에게 에집트는 그들의 세계였고, 사막을 횡단한 뒤의 가나안은 그들의 천국이었다. 번성하는 것이 그들의 행복이요, 장수하는 것은 그들에게 불멸에 해당되었다. 그들의 적이란 자기들의 일시적일 뿐인 세상적 성취를 가로막고 서는 이들이요, 그들의 전쟁이나 무기는 육욕인 것, 세상적인 것뿐이었다. 이런 그들 역사를 영적으로 통역해놓는다면, 그들 역사는 기독인의 체험을 언어로 묘사해놓은 것이다. 이런 방법으로 우리는 그들의 역사를 읽어야 한다. 그러면 우리는 그 역사 속에서 신성하게 훈육되는 어떤 것, 영적인 가르침을 보게 되리라 확신한다. 가나안의 일곱 나라를 멸절시키는 전쟁은 깊은 도덕적 원인을 가지고 있었다. 그 이유는 한 나라가 통째로 부패될 때 지상에서 제거되어야 마땅한 그 민족이 보존되고 복지를 되찾으려면 그 도덕적 결함의 제거는 꼭 필요하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이 교전한 나라들이 우리의 새로운 본성을 구성하는 선함과 진리의 원리에 상반되는 악하고 거짓된 원리를 표현한다고 생각하게 되면 유대인이 치른 전쟁에 어떤 영적인 교훈이 우리를 위해 담겨있게 된다. 유대인의 적대 국가들은 감각, 특별한 어떤 악이나 거짓원리를 표현하고 있다. 암몬족이나 불레셋 족이 표현하는 것들은 이미 앞 장에서 살핀바 있다. 이제 또 다른 악의 성격, 아주 유한한 것 중의 하나를 이제 살피고자 한다.
아말렉은 가나안 땅 경계선 주변에 거주하는 흉폭한 민족들이다. 이스라엘은 홍해를 건넌 뒤 그들로부터 처음 공격받았다. 이 때 그들은 이스라엘을 정면에서 공격하지 않고 이스라엘이 매우 목말라 허덕거리고 지쳐있는 기회를 틈타 공격을 감행했다. 그럼에도 우리가 기억해보아야 할 것은, 이스라엘이 심히 범죄 하였을 때 그들은 자기들이 위반한 악에 상응하는 속성을 지닌 국가들에 의해 처벌되어졌다는 것이다. 갈증으로 고통 받을 때 그들은 자기들과 함께 하시는 신성을 부정해버리는 정도까지 불평했다. 불평해대는 이스라엘과 그에 앙갚음하듯 공격하는 아말렉 사이에는 표현적 유사함이 있다. 선견자는 이스라엘의 세 왕을 설명하는 가운데 특별히 아말렉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해주고 있다. “어떤 종류의 인격이 아말렉이 표현하는 내면의 악에 근거를 두는지 살펴보는 것이 보다 쉬울 것이라고 본다. 내면의 악(interior evil)은 인간 안에 내향으로 감추어 놓인 것, 그 사람의 의지 안에 축적되어 있는 악, 그로부터 생각 안에도 있게 되는 악, 언어나 행동, 용모 같은 바깥쪽에서 전혀 추적되지 않는 악이다. 이와 같은 악 가운데 있는 사람은 갖가지 방법을 동원하는데, 특히 정직이나 정의, 이웃 같은 사랑의 가상(껍질)속에 그 악을 감추어 숨겨놓는다. 그러면서 계속 그는 악행만을 생각하고 가능하면 타인을 수단으로 그 악을 행하여 자신으로부터 악을 행하지 않았던 냥 한다. 그들은 악 자체를 변장시켜놓아 악처럼 보이지 않게 하고 있다. 이들 삶의 큰 기쁨은 어떤 음모를 꾸미는데 있고 계략도 은밀하게 감행한다. 이것을 우리는 내면의 악이라 부른다. 이 악 가운데 있는 이들은 마귀(genii)라 불리고, 저 세상에서 이것들은 영(spirit)이라 불리는 외면의 악과는 분리되어있다. 이 악귀(evil genii)는 사람 뒤쪽 즉 등쪽에 그들의 지옥을 가지고 있고 그 곳에는 다양한 동굴이 있다. 그러나 악령(evil spirit)은 인간 앞쪽 또는 옆쪽에 그들의 지옥을 가지고 있다. 큰 사람(grand man)측면에서 이 마귀들은 소뇌(cerebellum)의 영역에 소속되고 있고 또한 무의식 부분에 신경과 섬유질을 내보내는 척추 부분에도 있다. 더 주목해 보아야 하는 것은, 이 악에서 비롯되는 거짓은 악령들에게서 비롯되는 거짓과 같지 않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그 자체가 악이기 때문이다. 이 악 가운데 있는 이들은 진리들을 공격하지 않고 신앙의 선들을 공격한다. 그이유가 그들은 타락한 애착들을 수단으로 행동하여 선한 생각까지 뒤집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악들은 거의 인지할 수 없는 방법 안에 숨어있다. 이런 특성을 지녔으므로 그들의 지옥은 악령과 완전히 분리되어 거의 어떤 고통도 있지 않는다. 이렇게 되어있는 이유는 영적 교회의 사람들로부터 격리될 수 있게 하기 위해서이다. 만일 이 악이 그들 지옥에서 흘러나온다면 영적 교회의 사람들은 지독하게 썩어지고 마는데 그 이유는 이 악들이 영적 교회인의 양심에 비밀리 작용하기 때문이고, 타락한 애착들을 흥분시킴으로 양심을 뒤엎기 때문이다. 이 지옥적인 악귀는 인간을 공개적으로는 결코 공격 않는다. 더구나 인간이 그것에 저항할 경우도 절대 공격 않는다. 그러나 인간이 굴복하던가 양보 할 것 같은 지점에 다다른 것 같을 때 모습을 드러내어 그 인간을 완전히 무너지게 한다. 아말렉이 공격하는 모습이 이런 악귀의 공격 수법을 표현하고 있다. 민수기 14장 45절을 보면, 이스라엘 자손이 주님께 등을 돌리고 가나안 국가들에게 겁을 먹었을 때, ‘그 산에서 살던 아말렉 사람들과 가나안 사람들이 달려 내려와 호르마까지 쫓아오며 그들을 무찔렀다.’ 위 구절로부터서도 아말렉이 표현하는 이들의 성격은 명백해지리라고 보고, 아말렉에 내린 주님의 심판에서 그들과 항구적으로 싸워야한다고 왜 그러셨는지, 그들은 천국 아래서부터, 일찌감치 기억 속에서까지 삭제되어야 한다고 하셨는지를 납득하리라 본다.” 이상의 모습은 이스라엘이 르비딤에 도착하였을 때 섭리하시는 하느님, 함께 하시는 하느님을 부정하는 시험에 빠졌을 때 이들을 공격한 아말렉의 모습이다. 이와 같은 시험은 이 세상과 인간 만사에 하느님의 통치가 있음을 부정할 때만 공개적으로 드러난다. 이 악은 불신앙에 뿌리를 두고 있다. 너나나나 할 것 없이 우리들 속에 이 뿌리를 가지고 있다. 우리가 천상천하의 통치자 되시는 분이 하느님이심을 부정한다는 것을 생각만 해도 몸서리쳐진다고 말할지라도, 우리는 신성한 통치인 하느님의 섭리에 진정 의존하지 않고 있음을 보여주기 위해 느끼고 행동하는 경우가 많다. 이 방식이 기독인 이라고 고백하는 이들 사이에 이 악이 거점을 확보하는 형체이다. 이 형체는 하느님을 드러내놓고 부정하는 것보다 더 내향적이고 더 사기성이 강한 형체이다. 이것이 바로 아말렉이 표현한 내면의 악에 바탕을 둔 거짓 원리인 것이다. 르비딤에서 이스라엘 자손이 빠진 시험의 본성 역시 이러한데 뿌리를 두고 있다. 이 때 아말렉의 공격은 여호수아에 의해 격퇴되었다. 그런 다음 신성한 판단은 이렇게 지시하고 있다. 그리고 내가, 아무도 아말렉을 기억하는 사람이 없도록 하늘 아래에서 전멸시키겠다…야훼께서 대대로 아말렉과 싸워 주시리라”(출애굽기 17:14-16). 사울은 지금 이 구절을 실행하도록 위촉되고 있다. 사무엘은 먼저 그에게 상기시키기를 야훼께서 기름 부은 자라는 것, 그러므로 주님의 소리에 순종해야 한다고 했다. 그 다음 이렇게 이어진다. “만군의 야훼께서 하시는 말씀이오. ‘아말렉 사람들이 이스라엘에게 한 짓 즉, 에집트에서 올라오는 이스라엘을 공격한 그 일 때문에 나는 그들에게 벌을 내리기로 하였다. 그러니 너는 당장에 가서 아말렉을 치고 그 재산을 사정보지 말고 모조리 없애라. 남자와 여자, 아이와 젖먹이, 소 떼와 양 떼, 낙타와 나귀 할 것 없이 모조리 죽여야 한다’.” 사실 사울에게는 아말렉을 위와 같이 해치워야할 특별한 건수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위의 사건은 하느님의 기억 속에서 사백여 년 간 남아있던 죄악상들이다. 하느님이 기억하셨다는 말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그분은 과거와 미래 모두가 현재 일 뿐이므로 뭔가를 마음에 되불러 올 이유가 하나도 없다. 따라서 이 표현은 인간의 상태와 관련시켜 신성을 이해해야 한다. 주님이 기억하신다고 말하실 때의 경우란, 그분의 진리를 우리 기억에서 새삼 떠오르게 하실 때 사용된다. 지상에 계셨을 때 주님은 성령을 약속하셨다. 이 성령은 그분께서 제자들에게 말한 것은 무엇이든지 그들 기억에 모두 가져다주게 된다. 그러나 이 약속은 과거의 말들을 재 수집하게 해주시는 것뿐 아니라 이전의 상태를 재생산 하는 것까지 의미한다. 영적으로 기억함이란, 사실을 기억하는 게 아니라 원리를 기억하는 것이다. 그 이유는 내적 삶에 받아들여졌던 것만이 내적 기억 속에 새겨져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영적 으로 기억함이란 내향에 있는 것을 바깥쪽 삶에도 산출하려는 노력과 더불어 이전에 획득된 원리의 재생산밖에 더 다르게 있을 수 없다. 이와 같이 행동과 노력이 주님께서 과거 사막에서 아말렉이 했던 짓을 기억하신다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아말렉은 거의 반복적으로 이스라엘을 공격해왔고 격퇴되었다. 그러나 이제 명령은 그들을 참혹하게 파괴하라는 것이다. 이 파괴가 지금 시도되어지는 이유는 공격할 수 있는 도구가 마련되었기 때문이다. 왕은 선함에서 파생된 진리를 표현하는바, 이는 악에서 파생된 거짓에 정반대 된다. 완벽하게 극을 이루는 원리, 즉 극과 극이 대치하지 아니하면 상대쪽을 완벽하게 제압하지 못한다. 악과 거짓이 선함과 진리에 정반대 된다는 것을 기억나게 함으로 전투의 원인이 되는데 이는 반대되는 악과 거짓이 시험에 의해 흥분 될 때 발생된다. 그리하여 전투는 상대 쪽을 처절하게 파괴하도록 거행된다. 사울이 이러한 하느님의 위탁된 업무를 충실히 집행 못한 것은 사실이다. 그 이유는 신성으로부터의 진리(truth Divine)은 대과업에 합당할만한 자격을 못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신성한 의지를 표현한 하느님의 명령은 부분적이 되었긴 해도 일부 성취되었다. 이 명령을 미숙하게 처리한 탓에 사울은 자기 왕위를 잇지 못하게 되었다 할지라도 그가 성취해야 했던 것은 다윗의 통치와 권력에 의해 더 쉽게 더 확실하게 아말렉의 완전한 정복을 이루게 된다. 이제 사울의 행동사항들에 시선을 모아 보자.
사울이 사무엘을 통해 주님의 메시지를 받고 그는 총동원령을 내려 델라임에서 점호해보니 보병이 이십만 이었고 유다 측에서도 일만이 가담했다. 진리와 선함에 속한 원리들을 다 모아 신성한 질서의 법칙에 의거 정렬해지는 것이 바로 이스라엘과 유다 사람들이요, 델라임에서 수를 세는 모습이다. 지역 이름 델라임은 성경에서 두 번 언급될 뿐인데, 오늘 본문과 이사야 40장 11절에서이다. 이 구절에 연결되어 그 단어가 지닌 의미는 이 본문의 영적 의미에 대해 좋은 착상을 주고 있다. 단어 자체는 아주 어린 양, 새끼 양(young lamb)이라는 뜻이다. 이 단어는 주님의 강림에 관한 아름다운 예언과 연결되어 언급되고 있다. “너, 시온아. 높은 산에 올라 기쁜 소식을 전하여라. 두려워 말고 소리를 질러라. 유대의 모든 도시에 알려라. 너희의 하느님께서 저기 오신다. 주 야훼께서 저기 권능을 떨치시며 오신다. 팔을 휘둘러 정복하시고 승리하는 보람으로 찾은 백성을 데리고 오신다. 목자처럼 당신의 양떼에게 풀을 뜯기시며, 새끼 양(lamb)들을 두 팔로 안아 가슴에 품으시고 젖먹이 딸린 어미 양을 곱게 몰고 오신다.”(40:9-11) 여호와께서 권능을 가지고 오시고 그분의 인성인 팔을 휘둘러 통치하신다. 그분은 원수들 가운데서도 왕권을 행사하실 정도로 강력한 사람으로 오시지만 (시편110:2) 한편 그분은 목자처럼 오시어 새끼 양을 두 팔로 안아 가슴에 품어주시기도 한다. 이와 같은 모습은 영적 싸움에 종사하고 사랑의 영에 감화 받기도 한다. 이 사람들은 델라임에 자기 힘을 모아 계량해야 한다. 델라임은 유다의 땅인바, 그 지역은 지혜의 순진을 상징하고 있다.
사울이 자기 군인들과 함께 아말렉 성이 있는 골짜기에 이르러 먼저 이들과 섞여 사는 켄족들에게 전갈을 보내어 그들에게서 떨어져 나와 이스라엘의 옛 적을 칠 때 불상사를 입지 않도록 했다. 이렇게 켄족이 다치지 않도록 의도한 이유는 과거 이스라엘이 에집트에서 나올 때 이스라엘에게 베푼 친절 때문이었다. 켄족은 미디안 족과 같은 것으로 이해될 수 있는데 모세의 장인 이드로가 미디안의 제사장 이기도 했다(판관기 1:16). 그리고 그는 광야에서 모세를 만나러 왔었다(출애굽기 18:1). 이스라엘이 사막에 진입한 후 아말렉은 그들을 공격한 첫 민족이 된 반면, 켄족은 이스라엘 편을 든 첫 민족이기도 하다. 그리고 우리는 여기에서 아말렉과의 전투에 즉각 뒤따라 켄족의 언급을 발견하게 된다. 그러나 사울의 친절한 연락으로 켄족은 아말렉의 파멸에서 유보되어졌다. 위와 비슷하게 두 민족이 붙어있는 모습이 판관 기드온 시대에서도 언급되고 있다. “미디안 사람과 아말렉 사람과 모든 동방의 백성들이 메뚜기 떼처럼 거기 평지를 덮고 있었다”(7:12). 이렇게 많은 군대들이 개처럼 물을 핥아먹은(튕겨 먹은, lapped) 삼 백명의 군대에 의해 무찔러졌다는 것은, 악은 병치(apposition)상황에서 뿐 아니라 그 반대(opposition)상황에서도 극복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모습이다. 아말렉이란 이름 자체는 개처럼 핥다(lick up)라는 뜻이다. 켄족을 미디안 족과 비슷하게 간주해본다면, 선한 자연적 기질을 지녔으나 그 자체로서는 진리에 관심이 없는 이들을 표현한다. 그러면 왜 이들이 날카롭고 뒤집혀진 이해성을 가진 아말렉 사이에서 발견되고 있을까? 그 이유가 단순히 선한 것은 교묘한 추론에 쉽게 빨려들고, 계획적인 설득에 쉽게 녹아들고 마는 약함이 있기 때문이다. 단순한(멍청한) 선함은 선보다는 악에 더 쉽사리 끌려갈 수 있는 성향이다. 그 이유는 악은 비둘기의 순진(해가 없음)은 없고 오로지 뱀의 신중함 만을 지녔기 때문이다. 그래서 악은 그 사용함에 있어 나쁜 짓을 하는 것이 예사로 되어 있어 “설마 인간이 그럴 리가,” 라고 말하는 단순한 선함의 기대를 쉽게 유혹해내지만, 선은 재촉하여 뭔가를 하도록 독촉하려 들기보다는 뭔가를 확신시키려는 쪽에서 더 강하게 작용할 뿐이다. 위 두 민족이 거듭나고 있는 마음 안에서 표현하는 원리까지 생각해보자. 마음 속에 위 두 원리들이 서로 모여있는 모든 가능한 경우에서도 주님께서는 이 두 원리가 뒤섞이지 않게 설비해 놓으시어 장차 싸움이 있을 경우 선이 악과 더불어 멸해지는 일이 없게 배려하신다. 그러므로 마음은 그 둘을 식별할 수 있게 훈육된다. 켄족이 떨어져 나오자 사울은 아말렉을 공략해서 “하윌라에서 시작하여 에집트 동쪽에 있는 수르까지 따라가며 쳐죽였다.” 수르 광야는 과거 하갈이 자기 여주인의 얼굴을 피해 달아날 때 고생한 장소이다. 지금 아말렉이 거주하는 이 구역은 창세기 25장 18절에서 언급되고 있다. 이 절을 읽어보면 이 구역은 하갈의 아들 이스마엘과 그의 자손이 소유했었던 곳 임을 알게 된다. “이스마엘 사람들은 하윌라에서 수르에 이르는 지방에 퍼져 살았다. 수르는 에집트 동쪽 아시리아로 가는 도중에 있다.” 이 지역은 과학과 추론 사이에 놓이는 표현적 특성을 말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과학, 지식, 추론은 등급별 시리즈를 형성한다. 과학은 기억 속에, 지식은 생활 속에, 추론은 이해성 속에 각기 존재한다. 과학과 추론 사이에 놓인 것이 지식이다. 달리 말하면, 기억과 이해성 사이에 놓인 것이 생각이다. 하윌라와 수르는 에집트와 아시리아와 비슷한 의미를 가지고 있으나 차이점은 에집트와 아시리아는 넓은 측면인 반면 하윌라와 수르는 좁은 측면 즉, 세부 측면에 한정된다. 아말렉을 하윌라에서 수르까지 쫒아가 쳐부순다는 것은 내면의 악에 바탕을 둔 거짓 위에 진정한 진리의 판결이 집행될 때, 과학이 기초를 둔 기억에서부터 추론이 자리를 두고 있는 이해성에까지 이르러 판결은 집행된다는 말이다.
넓은 측면에서 볼 때 아말렉이 쳐 부셔지긴 했지만 완전한 하느님의 목적은 덜 성취된 채 남아있다. “사울이 거느리는 이스라엘 군은 아각 뿐 아니라 양과 소 중에서도 좋은 놈, 기름진 짐승과 새끼 양들과 그밖에 모든 탐스러운 것들을 없애버리기가 아까워 그대로 살려두고 쓸모 없고 하찮은 것들만 없애버렸다.” 싹 쓸어 없애야 하는데 뭔가를 남겨둘 때, 사울이 불순종이라는 죄를 짓게 될 것은 생각해 볼 여지도 없다. 그럼에도 그 죄는 그를 심각하게 벌할 만큼 확대되어 부각되고 있지 않은 듯 보여지고 있다. 이럴 경우 죄는 행동의 본성에만 반드시 존재하는 게 아니라 명령의 위반에 있다고 우리가 인정한다면 그 죄는 행동이 무엇이든 간에 똑같게 된다. 그러나 이 원리는 건전한 것이라고 생각되지 않는다. 이 원리는 말씀의 글자에 국한된 것만을 받쳐 줄 수는 있다. 예를 들면 아담이 금지된 과일을 먹은 것을 생각해보면, 사실 그에게는 불순종이라는 것 외에 악은 없는 듯 나타난다. 그러나 이런 종류의 모든 예들은 글자가 표현하는 것 보다 더 깊은 의미가 있다. 신성한 정의는 너무나 순수해서 해를 주지도 않는 본성 속에 있지도 않은 것을 죄 있는 행동으로 만들지 못한다. 만일 사울의 죄가 영원한 결과를 수반하는 영적 행동을 표현하지 않고 있다면 그의 죄는 그렇게 심각하게 견책되고 처벌되지도 않았을 것이다. 아각을 살려둔 채 잡아 놓고, 기름진 가축 떼를 살려둔 것, 이런 것이 그 소유자의 도덕적 부패나 죄와 관계되지 않은 이상 탐욕에서 진행되지 않으면 그 자체 악에 속한 성격은 아무 것도 없다. 따라서 파괴하라는 명령 역시 아예 없었을는지 모른다. 그러나 사울에게 주님이 내리신 행동 강령은 미래의 모든 세대에 있게 될 교회 소속인들에 대한 영적 교훈을 가르치고 또 그들로 하여금 영적 진리를 탐사할 수 있게 하시려는 목적에서 있어진 명령이다. 몰살시키라고 내린 명령에 포함된 진리, 가르치시고자 의도된 교훈들을 살펴보기로 하자. 우선 우리는 사울의 불순종에서 따른 결과를 곰곰이 생각해 보아야 한다. “이 일이 있은 후 야훼의 말씀이 사울에게 내렸다. ‘나는 사울을 왕으로 삼은 것을 후회한다. 그가 나에게 등을 돌렸고 내가 시키는 대로 하지 않았다.’” 주님이 후회하신다는 것, 그분이 사울을 왕으로 세우신 것을 후회하신다는 말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될까? 인간이 후회한다면 그것은 견해가 바뀐다던가 목적이 변하는 것, 그것이 이해성에 속하든 의지에 속하든 어느 쪽이 변한다는 것을 함축하는 말이다. 이해나 의지가 바뀌는 것은 하느님께 대한 후회(회개)로 성경에 두루 있다. 이 변화들은 불완전한 존재, 죄 있는 존재에게만 있어지는 후회일 뿐 하느님에게는 하등 해당사항이 없는 항목이다. 그런데 사무엘은 이 사항을 명백해지도록 주님께서는 사울로부터 왕국을 찢어내시어 동족 가운데서 그대보다 훌륭한 사람을 주신다는 것을 선포하고 있다. “이스라엘을 비추시는 이는 빈말을 하시거나 변심하시는 분이 아니오.. 그는 사람처럼 변덕을 부리는 분이 아니시오..” 시작에서 끝을 이미 보시는 그분은 결코 실수를 만드시지 않는다. 그러므로 후회할 건수가 전혀 없으신 분이시다. 하느님께서는 후회할 수도 없는 분이라도 해도 성경에서 후회의 탓을 그분께 돌리는 듯 기록되어 있는 구절에도 우리를 가르치는 의미는 가득 차 있다. 그분을 위협해대는 악에 대해 주님이 후회하신다고 말해 질 경우, 이 후회는 자비를 의미한다. 그러나 그분이 행하신 것들, 예를 들면 인간을 만드신 것, 사울을 왕으로 세우신 일들을 후회하신다고 말해질 경우, 거기에는 자비 외에도 어떤 의미를 더 포함하고 있다. 가장 깊은 측면, 천적 의미에서 말씀 전체는 육을 입으신 하느님으로서의 주님을 취급하고 있다. 이 사항은 앞에서 일부 살핀바 있듯이, 사울의 역사는 그분이 입으신 인성이 신성한 진리(Divine truth)로 만드시기 전에 있던 신성으로부터의 진리(truth Divine)으로서의 주님을 표현하고 있다. 여호와께서는 그분이 인성을 입으셨으되 타락한 본성에 든 인간 공통적인 약한 부분까지 입으셨는데 대해 후회할 수 없으셨다. 그럼에도 인간 후회와 아주 비슷한 어떤 것이 일어나는 항목들이 그분의 어린 시절 상태나 경험 안에 있었다. 인간으로서의 주님은 여느 사람들처럼 죄의 상태로부터 의로운 상태로 건너가지 않았고 따라서 회개(후회)가 있으신 적도 결코 없었다. 그러나 회개와 거의 닮은 인간 상태나 그 상태의 변화를 통과하셨다. 참으로 주님은 그분이 영화하시는 과정에서 통상적 인간이 거듭나는 과정의 모든 단계들을 거치셨다. 인간은 자연적, 영적 양면에서 상태의 변화를 거친다. 그분도 유아, 어린 시절, 젊은이 시절, 성인시절 이라는 상태들을 통과하셨다. 더욱이 그분은 삶의 자연적 상태로부터 영적 상태로, 영적 상태로부터 천적 상태에 이르는 더 큰 과정들을 통과하셨다. 게다가 주님은 하느님과 인간 모두로부터 사랑을 받으면서 날로 지혜와 총명을 더 하셨다. 그분은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똑같이 자라셨다. 그래서 신성한 자연적 존재로부터 신성한 영적 존재와 천적 존재가 되셨다. 통상적으로 인간은 자연적, 영적 삶의 낮은 상태에서 더 높은 상태로 건너가면서 자기가 털고 일어선 그 자리(수준)에서 자기의 불완전했던 것을 보게 된다. 그래서 인간은 시험이나 시련 속에 있는 동안 그가 체험하는 것은 고작 그 시련이나 시험의 피상적 본성만을 알 수 있을 뿐이다. 거듭나는 삶의 초기 상태에서 있게 되는 시험은 악의 더 낮은 깊이까지 도달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더 낮은 깊음은 초기 상태에 있는 당사자에게는 느껴지거나 눈치 채이지 않고 더욱이 흥분시킨 악의 진정한 속성을 이해한다는 것은 더욱 불가능하다. 한마디로 그 사람에게 있어서의 악은 일반적인 것일 뿐 세부적인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따라서 그에게는 자신이 생각한 것에 반대되는 것이 일반적 사항에 해당될는지 모른다. 사울은 아말렉 사람들을 다 죽였지만 왕 아각은 살려져 있었고 좋게 보이는 것도 그대로 보존했었다. 이런 것들과 상응되는 상태를 주님은 통과하시면서 그것에 상응하는 경험을 가지셨다. 이런 사항들이 그분의 모형을 그려내는 이들의 행동에 나타나 있는 것이다. 특별히 사울은 이런 모형들 중 더 부각된 모형이라 할 수 있다. 사울과 그의 군인들의 죄들은 그분의 시험을 표현하고 있다. 여느 사람들과 달리 그분은 악의 권세나 악과의 싸움에서 결코 실패하지 않으셨다. 그러나 그분의 초기 삶에 있던 시험이 그분을 공격하는 악의 가장 깊음에까지 접근되셨던 것은 아니다. 주님의 영화하심과 인간의 거듭남은 서로 닮음 꼴을 형성한다는 내용을 취급한 선견자의 저서에서 위 사항을 잘 알게 해 준다. “모든 사람은 지식으로 자기가 획득한 선과 진리에 의해 우선적으로 영적 전투에서 버텨간다. 그리고 그 지식으로부터 그는 악과 거짓들을 판단해 간다. 모든 사람들, 그가 영적 전투에 처음 임하게 될 때 자기를 버티게 해준 선과 진리들이 자기 것, 즉 그것들이 제 잘난데서 비롯되었다고 상상한다. 따라서 그는 자기가 저항해낸 힘이 자기에게 근원 되었다고 생각한다. 인간이 거듭나기 전, 선과 진리는 자신으로부터 있는 게 아니라 모든 선함과 진리는 주님으로부터임을 알고 인정하고 믿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자신의 힘으로는 어떤 악이나 거짓에 저항할 수 없다는 것은 어느 누구도 모른다. 악령이 악과 거짓을 흥분시키고 주입한다는 것, 더구나 악령을 수단으로 자신이 지옥과 교통하고 있다는 것, 지옥은 전력을 다해 자신을 누른다는 것, 마치 파도에 부딪치는 모든 것에 파도가 밀어붙이는 힘과도 같은 악에 저항할 수 있는 힘이 자신에게는 지독하게도 없다는 것을 아무도 모르고 있다. 어찌됐든 거듭나기 이전일 경우 그 사람은 자신의 능력으로 싸우고 있다고 상상할 수밖에 없고 또 그렇게 상상하도록 허용되지만 그 후에 차츰 그는 계발되어진다. 선함과 진리가 자신으로부터 발생되었다고 생각하고, 저항하는 힘 역시 자신의 힘이라고 여기면서 선과 진리를 수단으로 악과 거짓에 맞서는 상태에 있을 경우, 비록 그에게서 선과 진리가 나타나 보인다고 해도 진정한 선과 진리는 아니다. 그 이유는 그의 이기심이 그들 안에 있고 그는 승리의 공적을 자신에게 돌리고, 주님만이 싸워 정복해 주실 수 있는 악과 거짓에 대한 싸움을 자기가 똑똑해서 그런 줄로 떠벌린다. 이런 경우에 있는 진리는 시험에 의해 거듭나는 이들에게만 알 수 있는 것들이다. 주님의 아주 어린 시절 그분이 가장 비통한 악과 거짓의 싸움에 소개되었을 때 그분도 위와 같은 상상을 마음에 품을 수밖에 더 다른 도리가 없으셨다. 뿐만 아니라 그분의 인간성은 계속적인 전투에 소개되고 그분의 신성은 계속 승리해 가서 서로 하나되는 것이 신성한 질서이기 때문에 선과 진리를 수단으로 그분 역시 외적 인간에 소속되어 있는 악이나 거짓과 싸워 가셨던 것이다. 이런 선과 진리들이 모두 신성은 아닌 까닭에 가상적인 선과 진리들이라고 불린다. 그분의 신성 측면이 정복 할 수 있도록 인성 측면에 소개되었던 것이다. 한마디로, 그분의 첫 전투에서 가지고 싸우셨던 선과 진리들은 어머니 쪽에서 받은 유전적인 것의 얼마로 얼룩져 있는 한 그것들은 신성은 아니다. 그러나 점차로 악과 거짓이 정복되어감과 동시에 그것들은 완전해져 신성을 만들었던 것이다. 가상의 선과 진리들을 신성 같이 착각되는 선과 진리들일 뿐 신성한 선과 진리는 아니다. 다시 말해 그것들은 신성으로부터 존재할 뿐 그 자체 스스로 신성은 아니라는 말이다. 이것들은 천사나 인간의 마음 안에 존재하는 것과 같은 형태로서 유한한 자질 안에 받아들여짐으로 유한한 그대로 이다. 이와 같은 것이 주님의 초기 싸움에서 어둠에 맞서졌을 때 가졌던 선과 진리들이고 이를 신성한 진리로 만드시는 준비물로 삼으셨는 바, 이를 수단으로 그분은 그분의 인성을 신성으로부터의 진리로 만드셨다. 이 유한한 것, 즉 눈에 보이게는 선과 진리 같은 것은 어머니 쪽에서 얼마 정도가 유전되어 얼룩져 있었는바, 이것이 사울로 표현되어 있고 우리는 그의 바둑판 같은 역사를 통해 믿기 어려울 정도인 현실 자체를 봄으로서 주님의 내적 삶과 경험 중 초기 부분의 역사를 짐작할 수 있게된다. 주님의 초기 시절 어둠의 권세와의 싸움은 그분의 인간적 어머니로부터 상속받은 불완전을 벗고 그분의 신성한 아버지로부터 상속받은 무한한 완전을 입으셨을 때와 비교한다면 보다 덜 완전하다고 할 수 있다. 이제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본문에서 왜 사울이 아말렉과의 싸움에서 백성은 죽였는데 왕은 살려주었는지, 왜 하찮은 것은 다 없애면서 좋은 것은 아껴두었는지에 대한 이유를 가늠하리라 본다. 악과 거짓의 넓은 측면의 원리들, 백성들은 파괴되었지만, 왕 같은 통치하는 원리는 아직 극복되지 못하고 있다. 시험과 승리가 결국 악의 뿌리 까지 뽑는 마지막 까지 달성하는 것은 이상형일 뿐 아직은 그 뿌리에 접근도 못하고 있다. 내적 인간에 있는 것, 본문의 하찮은 것들, 눈에 보이는 악과 거짓은 무엇이든지 다 없애버렸지만 선하고 진정한 듯 눈에 보이는 것은 보존되었던 것이다. 이제 더 살펴볼 것은, 사울을 왕으로 세우신 데 대해 후회하신 것, 한 걸음 더 나아가 이를 사울이 표현한 그분에 관련하여 생각해 보는 것이다. 후회는 어느 경우라 해도 신성한 마음을 바꾼다는 것을 의미치 않는다. 그러나 이는 모든 경우에서 주님의 신성과 인간본성 사이에 하모니가 있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본문에서도 주님의 신성과 인성 사이에 하모니가 있기를 원하심을 표현하는 것이다. 절대적인 것과 가상적인 것 사이에 있는 선과 진리는 비록 주님 안에 있다해도 그것은 하느님과 인간이었을 뿐 아직 하느님-인간(God-man)은 아니었다. 사울을 왕으로 세운데 후회하시는 신성한 존재란, 연약한 인간성을 입지 않았던 것이 더 나을 뻔 했지 않았을까 라던가, 약한 인간성 속의 불완전함이 악의 권세에 맞서 그분의 초기 싸움부터 명백히 드러나야만 하신데 대한 후회 같은 것이 아니라 인간 속의 불완전함은 신성한 완전함과 도저히 조화되지 않는다는 것, 따라서 그것은 반드시 제거되어야만 한다는 것, 달리 말해 본다면, 신성으로부터의 진리(truth Divine)는 영원할 수 없고 단지 주님의 인성 앞에서 일시적으로 통치하는 원리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그럼에도 어머니 쪽의 인성에 있는 이기심은 통상적 인간 존재 같이 어린 예수 안에서, 즉 그분 속의 유전적 악들이 적극적으로 일하기 시작할 때 그 자체는 명백해지기 시작했다. 이는 정신 발달의 과정 중에 흥분시켜주는 매체에 의해 깨어날 때까지 아담의 모든 아이들의 가슴 안에서 휴면 상태에 있다. 그런고로 해서 주님이 사울을 선택하시고 후회하시는 데에는 불일치 같은 게 우리에게 비쳐질 수밖에 없다. 사울이 왕이 되는 초기에는 그에게 없었는 듯 보인 악한 자질들이 드러나기 전 까지 에서는 그를 왕으로 세우신데 대해 주님이 후회하신 것은 아니었다. 이를 풀어 말하면, 유전적 악이 주님의 어머니 쪽 인성 안에서 그 자체로 전개될 때까지 신성과 인간 사이의 대비되는 사항들은 신성한 존재가 후회하심으로 표현되는 실제가 지각되는 것, 그 자체는 드러내어지지 않았었다.
“주님의 말씀이 사무엘에게 내렸다. ‘나는 사울을 왕으로 삼은 것을 후회한다. 그가 나에게 등을 돌렸고 내가 시키는 대로 하지 않았다.’ 사무엘은 애가 타서 밤새도록 야훼께 부르짖었다.” 주님의 초기 상태와 경험에 관해 선견자의 저서에서 살펴보면 우리가 그분을 상상해보는데 큰 도움이 된다. 그분은 선과 진리를 수단으로 악과 거짓에 대항하는 전투를 수행하셨고, 이 수행의 결과로 나오는 능력으로 그분의 도구인 선과 진리들은 그분 자신의 것이 되어 외적 인간 속에 있었다. 이제 본문은 내적 인간 쪽으로 향하면서 외적 인간의 조건을 감지하게 해주고 있다. 그 결과는 내적 비통함, 그런고로 신성 자체와 더욱 가까운 하나를 이루어야 한다는 더욱 강한 바람이 오고 있다. 복음서에서 우리가 읽는바, 주님께서는 산에 오르시어 하느님께 밤새 기도하셨다. 사람의 아들을 수단으로 경험되는 정신적 고난의 어두운 상태가 본문에서 사무엘이 애가 타서 밤새 울부짖는 것으로 비쳐지고 있다. 이와 상응되는 주님의 말씀 “마음은 간절하나 몸이 말을 듣지 않는구나.” 이 내적 담화는 더 간절한 기도로 더 강화되어 외적인 것에도 가져다 놓게 되었다. 그러므로 사무엘이 사울을 만나러 일찍 일어났다는 것은 새로운 상태라는 새벽에 내적 인간에 전달된 진리는 바깥쪽에도 역시 전달되고 있다. 그래서 “누가 그에게 이런 말을 전해주었다. ‘사울 왕은 오는 길에 가르멜에다 자기의 승전비를 세워놓고 그 곳을 떠나 길갈로 내려갔읍니다.’” 본문의 가르멜은 그 이름 자체에서 파생되는 열매 풍성함이나 아름다움을 말해주는 이름은 아니다, 산으로서의 가르멜 이라기 보다는 성읍으로서의 가르멜로 참작하여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따라서 그 뜻은 이해성에 있는 원리는 의지에 있는 원리와 같은 것을 가진다는 것이 되고 자연히 내적인 선과 진리에 관한 교리를 뜻한다. 사울이 승전비를 가르멜에다 세운 것은 아말렉과의 싸움에 관한 것이었다. 이와 비슷한 모습이 사무엘하 18장 18절에도 있다. “그런데 압살롬은 살아 있을 때 자기 이름을 이어 갈 아들이 없다고 해서 왕의 계곡에 돌기둥을 세운 일이 있었다. 그는 그 돌기둥을 자기 이름을 따서 불렀는데 그것을 오늘날까지도 압살롬의 비석이라 부른다.” 사울의 상태나 그가 표현하는 것은 승리로 자기를 추켜세우는 어떤 것에 관한 생각을 지지하는 모습이다. 사울은 가르멜을 떠나 길갈로 내려갔다. 사무엘은 아말렉의 수모를 “벗기기”위해 그의 뒤를 따라가고 있다.
위의 성경 줄거리를 가장 깊은 의미, 즉 인성 가운데 계신 주님에 관련하여 생각해보자. 그러면 우리 자신에 관련되는 내적 의미, 그분의 신성화 하심의 형상인 거듭남이라는 주제를 좀 더 실감 있게 알게 되고, 그분이 연약한 인간 본성, 타락된 인간 본성을 입으신 목적은 인간이 고통 받고 겪게 되는 것을 거쳐가심으로 그분이 이룩하시는 신성으로 만들어 가심에 우리도 참가되도록 하시기 위함이었음을 더 확실히 알게 된다. 말씀 안에 담긴 가장 깊은 의미를 관조 하게 되면 더 심오한 가르침과 영향을 받을 것은 두 말할 여지가 없다. 육을 입으신 상태에서 주님이 행하신 위대하고 자비로운 일들 하나하나는 우리 자신을 위한 원형이요. 근원임이 틀림없다. 그러나 우리가 그 경지에 다가가거나 그 안에 머물기에는 너무 멀고 원대하다. 인간 거듭남의 거울 안에 비쳐지는 모습 같이 라도 주님의 신성화 하심을 관조해간다면 그 정도 만에서도 우리에겐 유익하고 충분해지리라고 본다.
“사무엘이 사울을 찾아 만나자 사울은 이렇게 말했다. ‘야훼께 복을 받으십시요. 저는 야훼께서 시킨신대로 다 하였읍니다.’ 하며 인사를 하였다. 사무엘이 ‘양이 우는 소리가 들리는데 어찌된 일이오? 또 소 우는 소리도 들리는데 어찌된 일이오?’ 하고 물었다. 사울이 ‘군인들이 아말렉에서 빼앗아 온 것입니다. 양떼, 소떼 중에서도 좋은 놈을 살려두었다가 선생께서 모시는 야훼 하느님께 잡아 바치려고 끌어 온 것입니다. 그밖의 것은 모조리 없애 버렸읍니다.” 사울의 즉각적인 응답에서 보여지듯 자기가 주님께 전적으로 순종치 않았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있다. 그럼에도 그는 자기가 주님의 명령을 잘 이해했다는 것이 저절로 보증되도록 사무엘을 만나자 야훼께 복을 받으시라는 말과 자기 행동의 결과를 결합시키고 있다. 사무엘이 묻는 말, 양이나 소가 우는 소리는 어찌된 것이오 라는 질문에 자기에게는 책임이 없도록 교묘하게 대답하고 있는바, 빼앗아 온 것은 군인들의 짓이고 모조리 없애라는 명령의 말에는 자기를 포함시키고 있다. 자연적 수준의 인간이 댓가를 얻어내느라 열심이듯, 사울은 책임을 피하려고 분주하고 있다. 그가 선에 대한 공적이 자기에게 있다고 주장하는 만큼 악에 대해서는 책임지기를 거절하고 있다. 이런 모습에도 영적 진리가 있어 우리를 가르친다. 거듭나는 삶의 초기 수준에서 자연적 마음은 공적과 책임을 알면서도 알지 못하고 있다. 다시 말해 피상적으로 알 뿐 실제적으로는 모른다는 말이다. 종교적 가르침 중 가장 쉽고 가장 먼저 있게 되는 것 중 하나는 하느님은 만물의 창조자 이신 바 자신의 선함을 자기 공로로 돌릴 수 없다는 것, 우리가 자유로운 가운데 악을 행할 경우 그 죄에 대해 변명할 여지가 없다는 것, 그럼에도 자신의 미덕은 자랑하려 들고 악덕에 부끄러워 할 줄 모른다는 것 등등이다. 이 주제에는 가장 중요하고 가장 실용적인 교회의 교리가 있다. 만일 모든 선을 천국으로부터, 모든 악은 지옥으로부터 온다고 우리가 믿고 있다면, 우리는 선을 자기 것 삼지도 않아야 하고 악에 대해 죄의식도 없어야 한다. 선이 자기 것이라고 간주함으로 해서 우리는 자신 속의 선이 자기 것이라고 주장하게 되고, 악이 자기 것이라고 간주함으로 해서 우리는 악을 정당화시키려들게 된다. 그러므로 해서 그 속에서 발생되는 죄과는 거절된다. 이런 상태 속에 있는 자연적 마음을 사울이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영적 마음을 통해 주님의 빛이 들어 올 때 이런 상태는 드러나져 이런 상태가 어떠한 것들인지 자연적 마음 자체가 밝혀진다. 사울이 사무엘에게 변명을 늘어놓자, 사무엘은 지난 밤 야훼께서 내리신 말씀을 전한다. “그대는 본래 자신을 하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했었지만 야훼께서 그대를 기름 부어 이스라엘 위에 왕으로 세우시고 이스라엘 지파의 우두머리로 삼으셨소…” 거듭나는 삶의 초기 과정에 있는 마음은 의지가 이해성의 방향 아래 조절되게 하려드는 것이다. 이 의미가 위의 구절 “사울은 본래 하찮은 사람” 이라는 것에 담겨있다. 그런 다음 사무엘은 주님의 명령을 받은 사울임을 그에게 상기시켜주고 그가 얼마나 불완전하게 임무를 마쳤는지 꼬집고 있었다. 그런데도 사울은 여전히 주님의 명령에 잘 순종해서 주님이 시킨 대로 다 수행했다고 뻐기면서 아말렉왕 아각만 사로잡고 나머지는 다 파괴했다고 우긴다. 단지 군인들이 길갈에서 주님께 바치기 위해 양떼 소떼 중 좋은 놈만 남겼다고 핑계 대고 있었다. 이에 대해 사무엘은 우리에게 기억되는 다음의 말을 해주고 있다. “야훼께서, 당신의 말씀을 따르는 것보다 번제나 친교제 바치는 것을 더 기뻐하실 것 같소? 순종하는 것이 제사드리는 것보다 낫고, 그분의 말씀을 명심하는 것이 염소의 기름보다 낫소.” 예배는 우리가 하나님께 빚지고 있는 의무 중의 하나이다. 그러나 그 의무는 목적에 대한 수단일 뿐이다. 하느님께 드리는 모든 예배의 목적은 우리가 하느님의 뜻을 더욱 잘 수행하기 위해 힘을 더 얻으려는데 있다. 하느님은 자비를 요구하시지 제물이 아니다. 그리고 번제를 바치는 것보다 더 요구하시는 것은 그분에 대한 지식이다. 정규 축제에 관한 율법은 정신적인 율법을 위하여 주어져 있는 것이다. 더욱이 구약 시대의 것보다 신약 시대에 주어진 예배는 정신적 법에 관한 의미를 수행하는데 더 도움을 주고 있다. 예배 속에서 주님을 섬기는 것은 유일한 일임은 틀림없지만 순종이 제사보다, 그분께 경청하는 것이 염소의 기름보다 더 나음을 우리는 잊지 않아야 한다.
만일 순수하고 거룩한 상태의 예배가 순수하고 거룩한 삶을 보조해 주는 두 번째 것이라고 한다면, 하느님의 명령을 위반한 것에 기초한 예배에 대해서는 뭐라고 말해야 될까? 때로 하느님의 뜻을 따르지 않은 것을 예배드림으로 때움질 할 수 있을까? 뉘우침이 심정 속에 존재하면서 기도가 입술에 담겨져야 순서가 맞는다. 그 이유는 심정 속에 든 것이 입으로 말해지기 때문이다. 바쳐지는 제물 자체도 순수해야 한다. 율법 아래의 제물들은 흠 없는 것만을 요구하고 있다. 그 이유는 제단 위에 바쳐지는 동물들은 인간 마음 속의 선한 애착들을 표현했기 때문이다. 이런 제물들은 세상적인 것, 육적인 것으로 얼룩지지 않은 상태에서 하느님께 바쳐져야 할 것이다. 아말렉의 양과 소들은 순수하고 순진한 애착들을 표현할 수 없는 동물들이다. 그 동물 자체만을 두고 생각한다면 얼핏 보기에는 흠이 없는 듯 여겨질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것들의 소유주들은 이미 도덕적인 부패 속에 있어 왔다. 따라서 소유주와 그들의 동물 모두는 완전히 파괴했었어야만 했다. 어떻게 그것들이 주님께 제물로 바쳐질 수 있단 말인가? 탐욕으로 물든 옛 사람은 반드시 십자가형에 처해져야 한다. 새 애정의 새 사랑만이 주님께 바쳐지는 제물이 될 수 있다. 이것들은 영적 삶의 최말단에 있어야 할 조건이요, 영적 싸움에 있어야 할 두 개의 큰 목표물이다. 이것들은 주님 자신의 지상 삶에서의 목표물이기도 했다. 그분은 옛 사람, 마리아로부터 상속받은 연약한 인간성을 십자가에 처해지게 하시어 신성으로부터 오는 인성, 새 사람을 산 제물로 바치셨던 것이다. 이와같은 완전한 신성화 하심, 이와 상응되는 인간의 완전한 거듭남이 위와 같은 사울의 행동에서 표현될 수 없고 더욱이 그의 통치로도 표현될 수 없다는 것은 당연할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을 거절한 사울을 향해 주님께서도 그가 왕으로 있는 것을 거절하셨다고 사무엘은 발표하고 있다. 이 발표는 처음이 아니다. 예언자가 그의 왕국을 몰수하리라는 발표는 두 번 째에 해당된다. 처음의 경우, 사울이 불레셋과의 전투를 앞두고 주님께 제사를 드리기 위해 사무엘을 칠 일간 기다리다가 참지 못하여 성직자가 해야 할 제물 바치는 거룩한 임무를 가로챈 죄를 범했을 때였고, 지금의 경우, 그는 주님께서 받으실 수 없는 제물을 가지고 제사를 올리라고 건의함으로서 주님을 혐오하시게 하고 있다. 왕위에서 물러나게 하겠다는 사무엘의 발표가 있자, 그는 갑자기 자신을 낮추어 빌었다. “내가 죄를 지었습니다. 군인들이 무서워서 야훼의 명령과 선생의 말씀을 무시하고 그들이 하자는 대로 하였습니다.” 이 사울의 말은 왕의 뜻이 군인들에 의해 위압받은 두 번째에 해당된다. 왕의 성급한 명령 때문에 야기된 명령 불복종의 죄에서 요나단을 살리고자 하여 있어진 군인들의 탄원은 옳았다. 그러나 모든 것을 파괴해야 한다는 명령을받고도 쓸만한 것을 유보해둔 본문의 경우는 잘못되었다. 이는 더 낮은 원리가 더 높은 것을 통치할 경우 우리의 마음 상태를 표현하고 있다. 또는 열정이 지성을 통치할 경우와 바람이 의무 측면을 제압할 경우를 말해주고 있다. 본문의 경우에서 아각 왕과 가축떼를 살려두는 결과가 사울에게서 발견된다. 가장 높은 것과 가장 낮은 것, 또는 첫째가는 것과 최말단에 해당되는 것은 아주 중요하다. 이 두 개의 양 극에 있는 원리가 파괴해버려야 할 것을 남겨둘 때 검증하는 작업이 제아무리 정밀히 있어졌다 해도 거기에는 지독하게 불완전한 게 남아 있기 마련이다. 사울은 사무엘에게 죄를 지었다고 고백하면서 같이 예배드릴 수 있게 해달라고 사정했다. “같이 갈 수 없소 그대가 야훼의 말씀을 저버렸으니, 야훼께서도 그대를 이스라엘 왕위에서 밀어내실 것이오.” 이 말을 남기고 돌아서 가려고 하자, 사울이 도포를 붙잡는 바람에 도포자락이 찢어졌다. 사무엘이 그에게 일렀다. “야훼께서는 오늘 이스라엘 나라를 그대에게서 찢어내시어 동족 가운데에서 그대보다 훌륭한 사람에게 주셨소.” 사울이 사무엘의 도포자락을 찢듯이 자기의 심정을 찢었더라면 그의 죄는 용서되고 왕국 역시 그에게 계속 유보되었을는지 모른다. 그러나 이 뒤의 구절에서 알 수 있듯 그의 회개는 깊지 않았고 자기 죄를 느끼는 정도는 그가 지은 죄의 수준에 미치지 못하고 있다.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내가 죄를 지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그는 하느님께로부터 죄를 용서 받게 해 달라고 하지 않고 사람들 앞에서 체면을 세워 달라고 애원하고 있다. “이스라엘과 내 백성의 장로들 앞에서 내 체면을 한번만 보아 주십시오. 내가 선생께서 모시는 야훼 하느님께 예배드릴 수 있도록 선생께서 저와 함께 돌아가 주시지 않겠습니까? 그리하여 사무엘은 사울을 따라 갔다. 사울은 야훼께 예배를 드렸다.” 이상의 구절에서 우리는 사울이 표현하는 진리의 외적 특성, 그것이 영화하시는 주님의 과정에 관련해서 이든지, 거듭나는 인간의 과정에서 이든지 양 쪽 모두에 있게 되는 상태를 알 수 있게 된다. 주님의 측면에서 후회라 불리는 것에 관한 예를 사무엘을 통해 보게 된다. 그는 처음에 사울과 함께 가는 것을 거절했다. 그러나 그가 간절히 애원하는 바람에 응낙하고 있다. 이 모습은 자비에 관한 표시이다. 그러나 이것은 두 번째 간구에 대한 결과였는바, 이는 인간 마음에 있는 상태의 변화는 신성한 마음에 있는 의도가 바뀐 듯 인간의 눈에 비쳐지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진실된 진리는 이러하다. 주님은 자비 자체이시다. 그러나 그분의 자비는 그 자비를 받을 수 있는 준비가 될 때까지 그 인간 안에서 역사할 수 없다는 것이다. 마지막 문단에서 알 수 있듯 사무엘이 사울과 같이 간 중요한 이유가 있다. 즉각 처리되었어야 할 일이 미결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서 사무엘은 아말렉왕 아각을 데려 오라고 하였다. 아각은 마침내 죽을 고비를 넘겼나 보다고 생각하며 좋아서 사무엘 앞으로 나왔다. 그러자 사무엘이 ‘너의 칼에 얼마나 많은 여자가 자식을 잃었는지 아느냐? 네 어미도 그 여자들 처럼 자식을 잃어야 마땅하다.’ 하며 야훼 앞에서 아각을 난도질 하였다.” 아각은 아말렉으로 모형화 된 내면에 있는 것, 내면의 악에 바탕을 둔 거짓을 표현했다. 그러므로 사무엘이 아각을 난도질 했다는 것은 악 또는 거짓 원리는 그것에 정반대 되는 선 또는 진리에 의해서만 파괴될 수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다. 이스라엘의 진정한 왕이라면 그 왕은 아말렉의 왕과 정반대되는 것, 내면이 차있는 외면을 표현해야 마땅하다. 그러나 명확한 것은 사울은 그렇지 못했다는 것, 그래서 그는 아각을 살려두고 있었다.
이상의 줄거리는 오늘날 또 다른 양상으로 늘 나타나고 있다. 옛 것을 다 포기하라는 명령을 받은 기독교의 제자들, 그런데도 한쪽 부분은 아껴두고 싶어하는 기독인들, 그래서 하느님과 세상 것 둘을 함께 섬기려고 발버둥치는 우리들에게서 위의 성경 역사는 되풀이되고 있지 않을까? 불의한 방법으로 얻은 소득의 일부를 주님께 바침으로 신성의 비위를 맞춰보려고 하는 일을 얼마나 쉽게 해버리는지 우리는 알고 있을까? 자신이 하느님과 화해하려 않고 하느님이 자기와 화해하도록 예배하고 그분을 섬기려 드는 일, 얼룩진 죄에서 깨끗해지려 하기 보다 죄를 면제 받으려 그분께 묻는 일이 있지는 않을까? 이런 등등에 더 추가하고야 마는 것은 하느님을 찬양하면서 자기가 찬양되게 부추키는 행위들일 것이다. 이런 결과의 발생은 성경을 글자대로 마구잡아 사용하는데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흔하다. 그러나 글자 속에 내재하는 영적 의미를 살필 때, 우리는 성경 역사의 세부사항들에서 영적 전투에 있게 되는 마음의 작용이나 상태를 추적해 볼 수 있게 된다. 깡그리 파괴하라고 명령된 심정 속에 든 악들은 교활해서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 심정을 얼마나 썩게 하는지 모른다. 이런 악들이 본문에서 모조리 없애라는 것들, 즉 “남자와 여자, 아이와 젖먹이, 소떼와 양떼, 낙타와 나귀” 로 의미되고 있다. 남자와 여자, 아이와 젖먹이는 안쪽 인간 속에 있는 애착과 생각들이다. 양떼와 소떼, 낙타와 나귀는 바깥쪽 인간 영역에 있는 애착과 생각, 지식, 과학들이다. 이보다 더 격렬하고 몰인정한 듯 생각되는 명령을 주님께서는 기독인들에게 복음서에서 부과하시고 있다. “누구든지 나에게 올 때 자기 부모나 처자나 형제자매나 심지어 자기 자신마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누가복음 14:26). 율법과 복음서 양 쪽에 의해 부과된 영적 의무는 옛 사람에 속한 애착이나 욕망은 십자가에 매달아서 새 사람이 살 수 있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의무를 실제에 응용할 때 얼마나 힘든지 모른다. 자기를 즐기게 해줄 것 같은 생명, 자신이 생각할 때 참 생명인 듯 여겨지는 것을 내던지는 것 보다 더 하기 싫은 것은 없을는지 모른다. 이렇게 포기해야만 하는 생명, 부패된 이기심이라는 생명은 거듭남으로 받게 된 생명과 정반대되는 생명이다. 그러나 거듭남으로 얻게 되는 생명 만이 현재이든, 미래이든 진정한 행복을 붙잡게 해준다. 우리 속의 자연적인 의지나 이해성이 자신을 철저하게 검증 못하도록 유인하던가, 자신이 은근히 좋아하는 어떤 특질을 아껴두거나, 더욱이 자연적인 사랑이나 기쁨을 흠모하는 쪽으로 기울게 하는 어떤 영향이나 암시에 우리가 노출되는 것은 과히 이상하게 여길 필요는 없을 것이다. 좋은 게 좋은 거다는 식의 편리주의나 자기에게도 이익이 있다는 것을 암시하는 자연적인 애정이나 생각의 영향에 자연적 마음은 쉽게 누구러뜨려지고 흔들거려 같이 춤춘다. 이것이 소떼, 양떼를 다 죽이지 않은 군인들에 은근히 동조하는 사울의 모습이다. 그러나 영적인 마음, 내적 인간은 사무엘 처럼 더 높은 수준에서 사물을 직시하므로 낮은 수준의 자연적 애정이나 생각의 영향을 받지 않는바 흔들거리는 연약한 자연적 마음의 행동지침에 슬퍼한다. 바깥쪽 인간이 불완전에 허덕이고 연약함을 노출하지만 안쪽 인간은 완전무결 속에 남아 있는다. 그래서 안쪽 인간을 통해 주님은 바깥쪽 인간에게 말하시어 그 인간의 무력함이나 불쾌해지는 결과를 말해준다. 이런 마음의 진짜 본성과 그 작용은 경험을 통해 알 수 있기도 하다. 우리가 이렇게 알 수 있는 이유는 동물적 본성과 구별되게 하는 특성을 지녔기 때문이다. 동물은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 볼 수 없다. 그 이유는 동물적 마음은 설사 그 마음이 어떤 능력을 지녔다 해도 반사적 행동 (반성하는 행동)은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 본성이 지닌 신성의 창조 구성은 우리 자신을 곰곰히 반성해 볼 수 있게 장치되어 있어 자신의 수준 낮은 경향이나 상상등을 판단하여 조절이 가능하게 되어 있다.
사울의 애원을 받아 들인 사무엘은 그를 따라 가서 예배를 드렸다. 그러나 그 제물은 아말렉에게서 빼았은 더러운 것일 수는 없었으리라. 그 제물은 진정한 예배에서 바쳐지는 진정한 애착을 표현하는 이스라엘의 가축떼에서 조달되었을 것이 틀림없다. 이렇게 해서 사무엘과 사울, 내적 인간과 외적 인간이 하나로 움직였을 때, 한 가지 덜 완성된 것, 미결의 행동 하나가 있었다. 예배를 마친 후 사무엘은 아말렉왕 아각을 데려오라고 하였다. “아각은 마침내 죽을 고비를 넘겼나 보다고 생각하며 좋아서 사무엘 앞으로 나왔다. 그러자 사무엘이 ‘너의 칼에 얼마나 많은 여자가 자식을 잃었는지 아느냐? 네 어미도 그런 여자들 처럼 자식을 잃어야 마땅하다’ 하며 야훼 앞에서 아각을 난도질 하였다. 길갈에서 있었던 일이다.” 이 절에 대해 우리의 해설자는 이렇게 알려주고 있다. “아각에 대한 사무엘의 말 속에는 아말렉에 내려진 신성의 저주에 대한 그 원인이 깊게 감추여 놓여 있다. 즉 주님은 그들과 영원히 싸우실 거라는 것, 그들의 이름은 하늘에서 삭제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아각이 좋아하며 앞으로 나오는 모습은 아말렉이 표현하는 악의를 품은 영들이 타인들 앞에서 실지로 해대는 외적인 매력이나 유혹이다. ‘네 칼이 많은 여인들을 자식 없게 만들었다’ 는 사무엘의 말은 위의 악령은 지성에서 나오는 게 아니라 의지로부터 파생되는 악한 애착들이 주도권을 쥐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무엘이 주님 앞에서 아각을 난도질 하였다는 것은 지성으로부터 파생되어 악의 거짓 속에 있는 자들을 따로 분리했다는 말이다. 이리하여 마귀(genii)가 영들로부터 분리되어 졌다.” 위 인용문이 이 세상 사람들에게 어떻게 적용되는지 알아보는 것은 어렵지는 않다. 그러나 그것이 정작 자신에게 어떻게 응용되는지를 찾아 보는 것이 더욱 필요한 일이다. 내면의 악, 그것이 인간에게서 제아무리 감추여 놓여 있다 해도 그 악의 원리는 하느님의 보좌에 정반대 된다는 것, 주님은 그 악에 영원히 맞서고 계신다는 것을 우리가 아는 이상, 우리 역시 그것이 절멸될 때까지 싸움을 멈추어서는 안된다. 이스라엘 역사에서 우리가 배울 수 있듯이 그 악은 우리 속 아주 깊이 자리잡고 있어서 한번의 투쟁으로 뿌리뽑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그것이 뿌리뽑혔다 하여 한숨 돌릴 때, 그 즉시 그 악은 고개를 쳐든다. 따라서 그 악을 계속 발바닥 밑에 두고 밟고 있으려는 끈질긴 노력만이 그 악의 힘을 약화 시키게 될 것이고, 결국 거듭나는 마음의 천국에서 그 이름조차 모두 삭제되어 지리라 본다.
사무엘과 사울은 이제 서로 제 갈길로 갔고 다시는 육적으로 만나지 않았다. 각자는 자기 출생지로 되돌아 갔다. 두 사람 각각이 표현한 진리들은 각 진리가 소속된 영적 마음과 자연적 마음 속에서 은거하게 된다. 비록 그들 사이에 바깥쪽 왕래는 중단되었다 해도 동정적인 연결까지 완전히 절단되었던 것은 아니다. 사무엘은 사울 때문에 통곡하여 마지 않았다. 내향에 있는 애착과 생각은 외향에 있는 부족함과 연약함 때문에 통곡은 그치지 않는다. 통곡한다 해서 외향에 있는 상태가 개선되지는 못한다 할지라도 외향의 연약함으로 잃는 것 때문에 내향의 것들은 통곡 않을 수가 없다. 이렇게 사무엘이 주님 앞에 울부짖음에도 불구하고 그분께서는 사울을 왕으로 세우신 일에 대한 후회를 계속하시고 있다. 어머니쪽 인간성에 있는 신성으로부터의 진리, 사울이 표현한 이 진리는 신성한 사랑의 선과는 일치 않는 가운데 있어 신성한 사랑이 거할 영원한 거주지를 제공하지 못한다. 더구나 천국을 정돈하며, 지옥을 완전히 정복하여 지상에 천국을 건설해줄 매개체 역할은 더더욱 힘들다. 항구적인 거주지와 매개체가 또 다른 원리, 더 수준 높은 원리에서 발견되고 있다. 이 원리를 주님 스스로 설비해두시고 계신다. 이 원리의 취임식이 다음 장에서 거론되는 주제이다.

창세기 38 장 해석

창세기 제 38 장

1-5절. 그리고 이 때에서 있었다. 그리고 유다는 그의 형제들로부터 아래쪽으로 갔다, 그리고 남자, 아둘람족에게로 까지 길을 잘못 들어섰다, 그리고 그의 이름은 히라였다. 2 그리고 유다는 거기서 가나안족 남자의 딸을 보았다, 그리고 그녀의 이름은 수아였다. 그리고 그는 그녀를 데려왔다, 그리고 그녀에게 왔다. 3 그리고 그녀는 임신했고 아들을 낳았다, 그리고 그는 그의 이름을 엘이라 불렀다. 4 그리고 그녀는 다시 임신했고 아들을 낳았다, 그리고 그녀는 그의 이름을 오난이라 불렀다. 5 그리고 그녀는 다시 더 임신해서 아들을 낳았다, 그리고 그녀는 그의 이름을 셀라라고 불렀다. 그리고 그는 그녀가 그를 낳을 때 그집에 있었다.

그리고 이 때에서 있었다. 이는 뒤따라오는 것들의 상태를 의미한다. 이는 “때(time)”의 의미가 상태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뒤이어지는 것들의 상태이다가 “이 때에서 있었다(it came to pass in this time)”라고 말해짐에 의해 의미되고 있다; 그 이유가 …있었다는 것은 뒤이어지는 것과 관련이 있다는 말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시리즈에서 뒤이어지는 것들은 앞의 시리즈로부터 흐르고 있다. 즉 앞 장에서의 것은 대체로 야곱의 아들들이 요셉을 판 것, 그를 팔아버리자고 설득한 자가 유다였다는 것; 이 말을 했다, “유다가 그의 형제들에게 말했다, 우리가 우리의 형제를 죽이고, 그의 피를 감춘다고 무슨 이득이 있는가? 가서 그를 이스마엘 사람에게 팔자” (26, 27절), 이 구절에 의해 신성한 진리가 그들에 의해, 특히 유다에 의해 멀어진 것이 의미되었고, 대략적 의미에서 유다에 의해서는 유다 지파가 의미되고, 일반적으로는 선이라면 무엇이든 모든 선에 반대하도록 자신을 타락되게 해버린 교회인을 의미한다. 이것들이 “이 때에서”라고 말해짐을 수단으로 관련되고 있다; 그 이유가 지금 취급되려는 주제가 유다이고, 가나안족 여인에 의해 그의 아들들의 출생에 관련된 것, 그리고 그 후에 자기 며느리 다말에 의한 아들의 출생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사항들을 수단으로 이 지파와 더불어 설립되는 교회의 것들에 관련되는 유다 지파가 내적 의미에서 서술된다.
“때”에 의해 상태가 의미된다는 것, 이로부터 “이 때에서 있었다”에 의해서는 뒤이어지는 것들의 상태가 의미된다고 말한 것을 두고 아마 의아히 여겼을지 모른다; 그 이유는 “때(time)”라고 생각한 것이 어떻게 상태(state)로 바꾸어질 수 있는지를 납득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는 말씀에서 흔히 등장하는 “때”가 상태에 관련되는 어떤 것으로 어떻게 이해되어지는 가를 모르고 있어서 이다. 우선 알아야 하는 것은, 천사들의 생각들은 시간 또는 공간으로부터 어떤 것을 끌어내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그들이 천국에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우리들(인간)이 세상을 떠날 때, 더불어 우리들은 시간과 공간의 관념도 떠나고 (시간과 공간을 근거로 하여 생각할 수 없고), 그 대신 우리들은 상태의 관념을 (옷)입는다. (거기는 시간과 공간이 없고 상태밖에 없기 때문이다.); 입게 되는 상태는 (천국에서의 경우) 선과 진리의 상태에 관한 관념이다. 그러므로 인간이 말씀을 읽을 때, 그때 시간에 관해, 또는 시간에 속한 것들에 관해 생각하는 동안, 당사자와 더불은 천사들은 시간의 어떤 것을 지각하지 못하고, 그 대신 그것에 상응하는 상태 속의 어떤 것을 지각한다. 인간의 경우도 그의 내면의 생각들로부터는 시간을 지각하지 않고, 그의 외면의 생각들로부터만 시간의 관념 속에 있다. 예를 들면, 인간의 외면의 생각이 상대적으로 많이 누구러뜨려져 있는 때가 잠자는 때임을 여러분 스스로 집념해보면 납득될 것이다. 이외 더 많은 경험도 (나에게는) 있다.
이쯤해서 알아야 하는 한 가지 것은 상태에는 두 가지, 즉 선의 상태와 진리의 상태가 있다는 것이다. 선의 상태는 있음(being, 존재 자체)의 상태라 불리우고, 진리의 상태는 존재 안으로 옴(공표, 公表, 보이도록 세상에, 자연계에 나타남, 영계에서 나타남이 아님)의 상태라고 불리운다. 그 이유가 있음은 선 속에 있고, 이로부터 존재 안으로 옴이 진리 속에 있기 때문이다. 공간은 있음의 상태와 상응하고, 때(시간)는 존재 안으로 옴의 상태와 상응한다. 그러므로 인간이 “이 때에 있었다”라고 읽을 때, 천사들은 인간이 생각하는 것을 결코 생각하지 않는다. 이는 다른 구절들에서도 마찬가지 이다. 말씀에서 쓰여진 것은 무엇이든 천사와 더불어서는 상응하는 의미로 바뀌는 속성을 당연히 지니고 있어, 천사의 성경(내적 의미로 읽히는 성경)은 인간이 읽는 성경(글자 의미에서의 성경)에서는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그 이유는 글자 의미로부터의 세상적인 것이 내적 의미의 영적인 것으로 변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유다는 그의 형제들로부터 아래쪽으로 갔다. 이는 야곱의 후손, 특히 유다 지파가 그 나머지 지파로부터 분리되었음을 의미한다. 이는 유다의 표현함이 보편적 의미에서 야곱의 후손이다로부터, 그리고 특별한 의미에서는 유다 지파라고 불리게 되는 지파이다로부터; 그리고 “형제들로부터 아래쪽으로 감”의 의미가 나머지 지파들로부터 분리되어진다는 것, 여기서는 자기 형제들의 악보다 더 센 악 안으로 가는 것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 이유가 “아래쪽으로 감, going down”은 악쪽인 아래로 던져지는 것을 포함하기 때문, 마치 그 반대인 “위쪽으로 감, going up”이 선쪽으로 승강함인 것과 같은 논리이다(3084, 4539항). 이에 대한 이유는 이미 말했듯이, 가나안의 토지가 주님의 왕국, 그리고 이 토지의 가장 안쪽인 예루살렘과 시온을 표현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토지의 경계선 바깥 지역들은 주님의 왕국의 바깥쪽인 것들, 즉 거짓과 악을 표현했다. 그러므로 시온과 예루살렘으로부터 경계선쪽을 향하여 감은 “아래쪽으로 감, 내려 감”이라 불리웠고; 경계선으로부터 예루살렘과 시온으로 감은 “위쪽으로 감, 올라 감”이라 불리웠다. 그러므로 “위쪽으로 감”은 참되고 선인 것쪽으로 승강함을, “아래쪽으로 감”은 거짓되고 악한쪽으로 아래로 내던져지는 것을 포함한다. 여기서 유다 지파가 자체를 거짓과 악쪽인 아래쪽으로 던졌다가 취급되기에, 말해지는 바, 유다는 “아래쪽으로 갔다”라고, 그때 그는 “인간, 아둘람족쪽으로 길을 잘못 들어섰다”라고 말해진다; “길을 잘못 들어섬”에 의해 거짓쪽으로 돌아섬, 그리고 그 후에 악쪽으로 돌아섬이 의미된다.
유다 지파가 나머지 지파들로부터 분리되었는데, 그 이유는 이 지파가 주님의 천적 왕국을, 나머지는 그분의 영적 왕국을 표현하도록 하시려는 때문이었다. 이런 이유로 유다는 표현적 의미에서 천적 인간, 보편적 의미에서 주님의 천적 왕국; 그리고 나머지 지파들은 한 개의 이름으로, 즉 “이스라엘족, 이스라엘 지파”에 의해 불리우고. 이스라엘은 표현적 의미에서 영적 인간, 보편적 의미에서 주님의 영적 왕국이다.
유다 지파가 나머지 지파들보다 더 센 악쪽으로 아래로 간 것이 이 말들에 의해 특별히 의미되었다: “유다는 그의 형제들로부터 아래쪽으로 갔다, 그리고 길을 잘못 들어섰다.” 유다 지파가 나머지들 보다 더 악하게 된 것은 다른 구절로부터도 알게 된다. 즉:
그녀의 불충한 자매 유다는 이스라엘이 다시 잘못하는 갖은 방법을 동원해 간음을 범할 때, 내가 그녀를 떠나보내고, 그녀에게 이혼 증서를 준 것을 보았다; 그럼에도 불충한 유다 그녀의 자매는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 역시 가서 매춘을 범했다, 하여 매춘의 음성을 수단으로 토지가 모독되었다, 그녀는 돌과 나무로 간음을 범했다; 그럼에도 모든 이런 것을 위하여 불충한 유다는 나에게 되돌아오지 않았다; 불충한 이스라엘이 불충한 유다보다 그녀의 혼을 더 정당하게 하였다 (예.3:7-11).
그리고 에스겔서에서:
그녀의 자매는 정말로 보았다, 그럼에도 그녀는 그녀보다 그녀의 사랑을 더 썪게 했다, 그리고 그녀의 매춘은 그녀의 자매의 매춘 위 이었다 (겔. 23:11-끝절);
예루살렘과 사마리아에 관해서, 또는 유다와 이스라엘에 관해서 말하고 있다.
내적 의미에서 어떻게 지파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거짓으로, 이로부터 악 안으로, 마지막으로 우상 안으로 빠져드는 지를 묘사하고 있다. 이것은 이 지파가 나머지 지파로부터 분리되기 이전, 그렇게 되었기 이전을 내적 의미에서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내적 의미에서 있는 것은 신성이고, 신성한 미래의 것들 쪽이 표출되고 있다 (이 민족에 관해 미리 말해진 것에 관하여는 신. 31:16-22; 32:15-44를 보라.)

그리고 아둘람족, 남자에게로 길을 잘못 들었다. 이는 거짓을 의미한다. 이는 “길을 잘못 들어 섬”의 의미가 잘못된 것쪽으로 가버림이다로부터 알게 되는데, 그 이유는 “길을 잘못 들어서다”가 “아래로 가다” 같이 선으로부터 악으로 멀리 옮겨짐, 그리고 진리로부터 거짓으로 멀리 옮겨짐을 서술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남자(vir)”의 의미가 총명한 자, 추상적 의미에서는 진리이다로부터, 그 이유는 진짜 지적인 것은 진리들로부터 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반대적 의미에서 총명하지 않은 자, 결과적으로 거짓이 의미된다. 이 거짓이 아둘람족에 의해 의미된다, 그 이유가 아둘람은 유다의 상속분의 경계에 있었기 때문 (여. 15:35), 그러므로 해서 선으로부터 있는 진리가 의미된다; 미가서에서:
그럼에도 나는 네게 상속인을 데려올 것이다, 오 마렛사 거주민아, 아둘람에게조차 이스라엘의 영광이 올 것이다 (미. 1:15);
그러나 말씀에 있는 대부분의 것들이 반대적 의미 또한 가지는 바, 아둘람 역시 그러한 바, 이 때는 악으로부터의 거짓을 의미한다. 대부분의 것들이 반대적 의미 또한 가지는 이유는 토지를 누가 차지하고 거주하느냐에 의존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의 이름은 히라였다. 이는 그것의 품질을 의미한다. “이름”과 “이름을 부름”의 의미가 품질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방금 위에서 말해진 거짓의 품질이 의미된다; 그 이유가 말씀에서 장소와 인물 모두의 이름은 상태와 어떤 것들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유다는 거기서 가나안족 남자의 딸을 보았다. 악의 거짓으로부터 악에 애착함을 의미한다. 이는 “딸”의 의미가 선에 애착함이다로부터, 그리고 반대적 의미로는 악에 애착함이다로부터; 그리고 “남자”의 의미가 총명한 자, 추상적 의미에서, 그러나 반대적 의미에서는 총명하지 않은 자, 거짓이다로부터; 그리고 “가나안족”의 의미가 악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로부터 분명해지는 바, “가나안족 남자의 딸”에 의해 악의 거짓으로부터 있는 악이 의미된다는 것이다. 악의 거짓으로부터의 악이 무엇인지는 아래에서 살핀다.
여기서 먼저 말해두어야 하는 것은 유다 지파의 근원에 관하여이다; 그 이유는 그들이 이 장에서 묘사되기 때문이다. 이 지파, 또는 유태 민족의 근원은 셋이다: 즉 셀라로부터, 그리고 유다의 며느리 다말에 의한 유다의 아들들, 베레스가 둘째 근원이고, 셋째 근원은 세라이다. 유태 민족 전체가 유다의 이 세 아들들로부터 이었다는 것은 야곱과 더불어 이집트로 간 야곱의 아들들과 손자들이 열거된 구절로부터(창. 46:12); 또한 가문들에 따른 그들의 분류로부터 분명한데, 모세의 책에서:
그들의 가문들에 따른 유다의 아들들은 이렇다: 셀라로부터, 셀라족의 가문; 베레스로부터, 베레스 족의 가문; 세라로부터, 세라족의 가문 (민. 26:20; 역상 4:21);
이것은 이 민족의 근원이 무엇이었는지를, 즉 삼분의 일은 가나안족의 어머니로부터; 삼분의 이는 며느리로부터 였다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모두는 불법적 연결로부터 였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가나안족의 딸들과의 결혼은 엄격히 금지되었기 때문이다 (창. 24:3; 출. 34:16; 신. 7:3; 왕상. 11:2; 스. 9: 10), 그리고 며느리와 눕는 것은 사형에 처할만한 위반이었음이 모세의 책으로부터:
만일 누가 그의 며느리와 눕는다면, 그들 둘 다 정녕 죽음에 놓일 것이다; 그들은 혼동을 작업했다; 그들의 피는 그들 위에 있을 것이다 (레. 20:12).
유다가 자기 며느리와 있었던 행위를 형제에 관련해 만들어 놓은 역연혼 법에 관련시키고, 아버지에 관련해서는 이에 관련시켜서가 결코 아닐 경우, 다말에 의한 자기 아들들은 그의 장자 엘, 즉 가나안의 어머니로부터 태어났고, 여호와의 눈에 보이기에 악이었고, 그러므로 죽게 되었던 아들의 아들들로서(7절) 인정되어야 할 것임을 함축하고 있다; 그 이유가 남편의 형제에게 처음 출생한 이들은 임신되게 한 자의 것이 아니고, 형제의 씨를 일으킨 것 뿐이다가 신. 25:5, 6와 본문 8, 9절에서 분명해진다. 더욱이 다말로부터 출생한 이들은 간통(간음)으로부터 였다; 그 이유가 유다가 그녀에게 접근했을 때, 그는 그녀를 매춘부(harlot)로 생각했었기 때문이다(15, 16, 21절). 위의 사항들은 유다 민족의 근원이 어디서, 그리고 무슨 품질 속에 있었는지를, 그리고 그들이 “우리는 간음(fornication)으로부터 태어나지 않았다”하고 말했을 때 (요. 8:41)의 경우까지도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이 근원이 포함하고 표현하는 것은 그들의 내면들이 이런 품질 속에 있었다는 것, 또는 이런 근원을 가졌다는 것을 이어지는 구절들이 보여준다. 유다가 가나안족과 결혼함은 악의 거짓으로부터인 악의 근원을 포함한다, 그 이유는 이것이 “가나안족 남자의 딸”에 의해 내적 의미에서 의미되기 때문이다; 그가 며느리와 눕는 것은 악으로부터 왜곡된 진리로부터 저주됨을 포함하고 표현한다, 그 이유가 말씀 어디에서나 매춘(whoredom)은 진리를 거짓화함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악의 거짓으로부터의 악은 자기 사랑의 악에 의해 부화되어 왔던 거짓 교리로부터 있는 생활 속의 악이다; 그리고 이 생활 속의 악을 말씀의 글자 의미를 수단으로 확증한 악이다. 이와 같은 악이 유태 민족과 더불은 악의 근원이다, 그리고 이와 같은 악이 기독 세계의 어떤 이들과 더불은 그것의 악, 특히 바빌론에 의해 뜻해진 말씀 안에 있는 이들과 더불어서의 악이다. 이 악은 내적 인간을 닫아지게 하는 속성을 지녔으므로, 닫아진 만큼 양심의 어떤 것도 거기에서 형성되어질 수 없다; 그 이유가 한 인물이 거짓 교리로부터 행동된 악은 당사자가 그것을 선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허용되기만 하면, 그는 자유로이 기쁨으로 그것을 실행한다. 고로 천국은 그에게서 닫혀져 있어 그것이 열릴 수가 없다.
이 악의 품질은 예를 들어야 알게 될는지 모른다. 자기 사랑의 악으로부터 있는 이들과 더불어 믿어지는 것은, 여호와께서는 단 하나의 민족을 선택하셨다는 것, 그리고 나머지 민족들은 상대적으로 노예들이다는 것, 또한 심히 무가치한 바, 죽여도 되고, 잔인하게 취급해도 된다; 이렇게 유태 민족은 믿어 왔던 바, 오늘날 바빌론식의 민족도 그러한 바, 그들은 이 신조를 말씀의 글자로부터 확증한다. 하여 만들어진 거짓 교리를 기초로 해서 그들은 무슨 악행이든 실행한다. 이것이 악의 거짓으로부터의 악이다, 그리고 내적 인간을 파괴한다, 그리고 어떤 양심도 거기에서 만들어지는 것을 방해한다. 이들이 말씀에서 “피들에서”라고 말해지는 이들이다. 그 이유가 그들은 자기들의 신앙의 조항들을 찬양하지 않는 인류에 대하여 잔인한 격노 안에 있기 때문이다.
다른 예를 더 살펴보자: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의 악으로부터 있는 이들과 더불어 믿어지는 것은, 땅 위에서 주님의 대행자가 있음에 틀임 없다는 것, 그가 천국을 열고 닫는 권능을 지닌다는 것, 고로 모든 이의 마음과 양심을 통치한다는 것, 이 거짓을 말씀의 글자로부터 확증하고, 이로부터 실행되는 악은 무엇이든 그것은 악의 거짓으로부터의 악이다. 이 악도 이 악과 더불어 있는 이들의 내적 인간을 파괴한다. 게다가 이 악은 대단한 파괴력이 있어 그들은 더 이상 내적 인간이 무엇인지도 모른다, 결과적으로 누구도 양심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들은 사후 어떤 삶이 있다는 것, 천국과 지옥을 어떻게 말하든 더 이상 믿지 않는다.
이 악을 품질만에 주목하면, 세상의 인간들은 이 악을 다른 악들로부터 구별해낼 수 없다, 그러나 다른 삶에서는 청명한 날 보듯 천사들에 의해 알려진다; 그 이유가 악들과 거짓들은 다른 삶에서는 근원과 품질로부터 구분되어 명백해지기 때문이다, 이것의 무수한 종과 속으로의 구분이 지옥의 것들이기 때문이다. 이 무수한 차이를 인간은 거의 알지 못하고 단지 악이 존재한다고만 알 뿐, 그것의 품질을 알지는 못한다. 이런 이유는 단 하나, 그가 선이 무엇인지를 모르기 때문, 선행이 무엇인지를 모르기 때문이다; 만일 그가 선행의 선을 알았다면 그는 그와 반대되는 것, 또는 악들을 구분지어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녀의 이름은 수아였다. 이는 그것의 품질을 의미한다. 이는 “이름”이 품질이다로부터, 여기서는 악의 거짓으로부터의 악의 품질이다.

그리고 그는 그녀를 데리고 갔다, 그리고 그녀에게 왔다. 이는 유다 지파는 그 자체를 이러한 것들에, 즉 악의 거짓들로부터의 악들에 결합되게 했다를 의미한다. 이는 “그녀를 데리고 감”, 즉 여인으로 데리고 감, 그리고 “그녀에게 옴”, 또는 “그녀에게 들어감”의 의미가 결합되어지는 것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는 여러 차례 설명했다. 내적 의미에서 결혼들은 선과 진리의 결합을 표현하는데, 이것이 그것들의 (영계에서의 결혼들의) 근원이다, 그러나 반대적 의미에서는 악과 거짓의 결합, 여기서는 유다 지파가 악과 거짓과 결합함이다; 그 이유가 이것이 유다를 놓고 말해지기 때문, 그리고 유다를 따라 명명된 지파가 유다 지파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유의할 것은, 그가 그녀를 아내로서 데려갔다가 아니라 막연히 그가 그녀를 데려갔다, 그리고 그녀에게 왔다 라고 말해진 것이다. 그 이유는 이 결합은 불법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은 결혼이 아니었다, 그러나 매춘이었다, 고로 그녀로부터 출생한 아들들은 매춘으로부터 출생되었다는 것을 암묵적으로 암시하고 있다. 악이 거짓과 결합함은 이런 것밖에 더 아니다. 이 후에 그녀는 그의 아내라고, 즉 12절에서 “그리고 날들이 많이 불어났다, 그리고 수아의 딸, 유다의 아내는 죽었다”라고 서술되고 있다. 이는 그 구절에서 살핀다.

그리고 그녀는 임신했고 아들을 낳았다. 이는 교회의 거짓이 거기서부터 파생되었음을 의미한다. 이는 “임신하고 낳는다”의 의미가 신앙과 행동으로 인정하는 것이다로부터; 그리고 “아들”의 의미가 교회의 진리이다로부터, 여기서는 반대 의미인 바, 거짓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러므로 그녀에 의해 “아들을 임신하고 낳는다”는 유다 지파와 더불은 교회가 신앙과 행동으로 거짓을 인정함이 의미된다. 이 아들에 의해 교회의 신앙이 의미되는 이유는 그가 첫 출생이었기 때문, 그리고 고대 교회에서 “첫 출생”에 의해 신앙의 진리가 의미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반대적 의미에서 거짓이 의미되는데, 이것은 이집트에서 인간과 짐승의 첫 출생에 의해서도 마찬가지로 의미된다. 진리 아닌, 거짓이 의미되는 이유는 이어지는 7절에 말해진 것 때문인데, 즉 “엘, 유다의 첫 출생, 여호와 눈에서 악이었다, 그리고 여호와께서는 그를 죽게 하셨다” 때문이다. 이 아들의 이름, 엘은 이런 품질을 포함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둘째 아들 오난 또한 그의 품질은 잘못된 것, 또는 악인 것을 포함한다.

그리고 그는 그의 이름을 엘이라 불렀다. 이는 그것의 품질을 의미한다. 이는 “이름을 부름”의 의미가 품질이다로부터, 즉 교회의 거짓의 품질이다. 거짓의 품질이다고 말해진 이유는 거짓들이 서로로부터 다르기 때문이다, 진리들의 경우도 마찬가지 이다. 각기 다른 수준의 것들이 각기 다른 종류로 열거된다. 각기 다른 종류는 서로로부터 구별된다. 모두 각각의 교회에서 교회들을 타락시키는 일반적인 거짓들이 있다, 그리고 거짓은 모든 이 각각의 생명에 따라 교회 안에서 다양해진다. 여기서는 유태 교회 안에서 있었던 거짓이 취급되고, 이는 자기 사랑과 이 사랑에서 파생되는 세상 사랑의 악으로부터의 거짓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다시 임신했고 아들을 낳았다. 이는 악을 의미한다. 이는 아들의 의미가 진리, 그리고 또한 선이다로부터; 고로 반대 의미에서는 거짓, 또한 악이다, 이 악은 거짓으로부터 있는 악이다. 이 악은 그것의 본질 측면에서는 거짓이다; 그 이유가 거짓 교리로부터 악인 것을 행하는 자는 거짓인 것 또한 행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행동에서 행해지기 때문에 이것은 악이라 불리운다. 첫 출생에 의한 아들에 의해 거짓이 의미되고, 이 거짓을 수단으로 악이 의미된 것이 행동에서 악을 행한 둘째 아들, 즉 “그는 그의 형제에게 씨를 주지 않으려고, 땅쪽으로 씨를 파괴했다”와 연관되고 있다. “그리고 그가 행한 것은 여호와의 눈에서 악이었다; 그래서 그분은 그 또한 죽게 하셨다” (9, 10절). 여기서도 역시 이 악은 거짓으로부터 이었음이 분명해진다. 더욱이 고대 교회에서 둘째 아들에 의해서는 행동에 있는 신앙의 진리가 의미되어졌다; 그러므로 둘째 아들에 의해서는 행동에 있는 거짓이, 즉 악이 의미되었다. 악이 엘에 의해 의미된 것은 첫 출생 엘이 그의 아버지, 유다에 의해 이름지어졌다는 사실로부터; 한편, 오난은 그의 어머니, 수아의 딸에 의해 이름지어졌다는 사실로부터도 알게 된다. 이는 원어에서 알는지 모른다. 말씀에서 “남자(man)”에 의해 거짓이, “여인”에 의해 거짓으로부터의 악이 의미된다. 수아의 딸에 의해 악이 의미되는 것은 앞에서 말했다. 그러므로 엘, 아버지에 의해 이름지어졌기 때문에 거짓을 의미하고, 오난, 어머니가 이름지었기 때문에 악을 의미한다; 전자는 마치 아버지의 아들인 듯하게, 후자는 어머니의 아들인 듯하게 있다.
말씀에서 “남자와 아내”, 또한 “남편과 아내”는 종종 언급된다; 그리고 “남자와 아내”가 언급될 때, “남자”에 의해 진리가, “아내”에 의해 선이; 반대적 의미에서는 남자는 거짓을, 아내는 악을; “남편과 아내”의 경우에서는 “남편”에 의해 선이, “아내”에 의해 진리가, 반대 의미에서는 남편은 악을, 아내는 거짓이 의미된다. 이 신비함에 대한 이유는 이렇다: 천적 교회에서 남편은 선 안에 있고, 아내는 선으로부터의 진리 안에 있다; 영적 교회에서 남자는 진리 안에 있고, 아내는 이 진리로부터의 선 안에 있다. 이렇게 그때 있었던 것이 지금도 그렇게 있는 것이다, 그 이유는 인간의 내면들이 이 바뀜을 수행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말씀에서 천적인 선과 그것으로부터의 천적 진리가 취급되는 곳에서는 “남편과 아내”라고 말해진다; 그러나 영적 선과 그것으로부터의 영적 진리가 취급될 경우, “남자와 아내”, 오히려 “남자와 여인”이라고 말해진다. 표현들 자체로부터도 알려지는 것은 어떤 선과 어떤 진리가 말씀의 내적 의미에서 취급되는지 이다.
이것 역시 결혼들은 선과 진리, 그리고 진리와 선의 결합을 표현한다고 때때로 서술해왔던 이유이기도 하다. 더욱이 부부의 사랑은 그것의 근원을 선이 진리와 결합함으로부터 있다는 것, 영적 평면과 더불은 부부의 사랑은 진리가 선과 결합함으로부터 있다는 것이다. 결혼들 역시 이 결합들에 실제로 상응한다. 이상 모두로부터 분명해지는 바, 아버지가 첫아들의 이름을 짓는 것, 어머니가 둘째의 이름을 짓는 것, 셋째 또한 이름을 짓는 것에서 포함된 것은 원어에서 나타나듯, 즉 아버지가 첫째를 이름진 것은 그에 의해 거짓이, 둘째는 악이 의미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녀는 그의 이름을 오난이라 불렀다. 이는 그것의 품질을 의미한다. 즉 이는 위에서 말한 대로 악의 품질을 의미한다. 이는 “이름을 부름”이 품질이고, “오난”은 악의 품질을 의미하고 포함한다.

그리고 그녀는 추가로 임신해서 아들을 낳았다. 이는 우상적인 것을 의미한다. 이는 여기서의 “아들”의 의미가 우상적인 것이다로부터 인데, 그 이유는 앞서 태어났던 아들들이 거짓과 악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셋째 아들은 우상적인 것을 뜻하는데, 그 이유는 거짓과 악이 다함께 생산하는 것이 우상적인 것들을 생산하고 그것 안에 있기 때문이다. 가나안족의 여인으로부터 유다에게 출생한 셋째 만이 생존한 유일한 아들이고, 이로부터 유다 민족의 삼분의 일이 왔다; 그리고 이 민족이 우상적인 것으로부터 그것의 일어남을 가졌다는 것이 내적 의미에서 여기서 뜻해진다. 이 민족이 우상숭배쪽으로 아주 쉽게 돌아섰다는 것은 말씀의 글자 의미에 따른 역사적, 예언적 부분에서 분명해진다; 그리고 이것이 계속적으로 우상 숭배를 하였다는 것이 내적 의미로부터 분명해진다. 그 이유가 우상숭배는 우상들, 새긴 형상들, 여타 신들 뿐만 아니라, 내적인 것 없는 외적인 것만을 예배함에 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이 민족은 계속적으로 우상숭배를 하였고, 외적인 것만을 숭배하고, 내적인 것들은 통째로 제거하고 아예 알고 싶어하지도 않았다. 참으로 그들은 그들과 더불어 거룩한 것들을 가졌다, 즉 만남의 천막, 궤와 더불어, 그 위에 자비석, 빵덩어리가 진열된 식탁, 등잔대, 향, 천막 바깥의 제단, 그 위에서 태워바침과 제물 바침이 있었다, 이런 모든 것은 거룩하다 불리웠다; 그리고 천막의 가장 안쪽은 거룩들 중의 거룩이라 불리웠다, 또한 성소라고 불리웠다. 그들은 아론과 그의 대성직자들에 속한 의복들을 가졌다; 거기에 우림과 둠밈이 있었던 가슴받이와 더불은 에봇이 있었다, 이 외에도 많은 다른 것들이 있었다. 그럼에도 이런 것들은 그 자체로 거룩하지 않았다, 그러나 거룩한 것들을 표현함으로부터, 즉 주님의 왕국의 천적, 영적인 것들을, 또한 주님 자신을 표현함으로서 거룩하였다. 그들은 자신들과 더불어서는 더욱 덜 거룩하였는데, 그 이유는 백성들이 표현된 것의 내적인 것들로부터서는 전혀 감동되지 않고 오직 외적인 것만에 감동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외적인 것들만에 의해 감동되는 것이 우상 숭배이다; 그 이유가 나무나 돌, 이것들을 덮은 은이나 금을 예배하는 것이 그들이 그것 자체로 거룩하다는 몽상으로부터 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것이 그 민족인데, 오늘날도 그렇다.
그러나 아직도 그들과 더불어 있을는지 모르는 것은 교회의 표현물이다, 그 이유는 표현물은 인물을 중요시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것을 중요시하기 때문이다. 그들의 예배는 그들을 복되고 행복하게 만들지 못했다, 그러나 그들이 표현함 안에 있는 한, 세상에서의 번영만이었다, 그리고 이방인들의 우상들쪽으로 길을 바꾸지도 않았다, 고로 우상숭배자가 되었다; 그 이유가 그때 교회의 어떤 것도 이 민족과 더불어 더 이상 표현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것들이 가나안족 여인에 의한 유다의 셋째 아들에 의해 의미된 우상숭배적인 것에 의해 뜻해진 것들이다. 이 민족과 더불은 이 우상 숭배는 그것들의 근원이 내적 우상 숭배로부터 이다, 그 이유가 그들은 여타 민족들보다 더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 안에 있었기 때문; 그리고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 있는 이들이 내적 우상 숭배 안에 있기 때문, 그 이유가 그들은 자신들과 세상을 예배하고, 거룩한 의식 준행을 자기 숭배와 이득을 위하여 수행하기 때문, 즉 목적으로서 자아를 놓기 때문, 주님의 교회와 왕국이 목적이 아니다, 고로 주님을 위하여가 아니다.

그리고 그의 이름을 셀라라고 불렀다. 이는 그것의 품질을 의미한다. 이는 “이름을 부름”의 의미가 품질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우상 숭배의 품질이 셀라에 의해 의미된다, 그 이유는 거기에 많은 우상 숭배들이 있기 때문, 이에는 외적 우상 숭배와 내적 우상 숭배가 있다, 일반적으로는 모두 거짓과 악으로부터 예배함이다.

그리고 그는 그녀가 그를 낳을 때 그집에 있었다. 이는 상태를 의미한다. 이는 “그집(Chezib)”의 의미가 상태이다로부터 , 즉 셀라에 의해 의미된 우상 숭배의 상태이다, 이 안에 유태 민족이 있었다; 그리고 “낳다”의 의미가 행동에서 결합되는 것이다로부터; 그리고 결합이 우상 숭배 안에 있는 악과 더불어 있었기 때문에 말해지는 바 “그녀”가 그의 이름을 셀라라고 불렀다, 이는 원어에서 나타나는 바이다; 그 이유가 “그녀”, 즉 수아의 딸에 의해 악의 거짓으로부터의 악이 의미되기 때문이다.

6-10절. 그리고 유다는 그의 장자 엘을 위하여 여인을 데려왔다, 그리고 그녀의 이름은 다말이었다. 7 그리고 유다의 장자, 엘은 여호와의 눈에서 악이었다; 그리고 여호와께서는 그를 죽게 하셨다. 8 그리고 유다는 오난에게 말했다, 네 형의 아내에게 오라, 그리고 그녀에게 남편의 동생된 의무를 수행하라, 그리고 네 형의 씨를 일으키거라. 9 그리고 오난은 그 씨가 자기 것일 수 없음을 알았다; 그리고 그가 그의 형의 아내에게 왔을 때이다, 그는 그것을 땅쪽으로 파괴하여서, 그의 형에게 씨를 주지 않도록 했다. 10 그리고 그의 이 짓은 여호와의 눈에서 악이었다. 그리고 그분께서는 그 또한 죽게 하셨다.

그리고 유다는 여인을 데려왔다. 이는 그의 후손을 위하여 있었던 교회를 의미한다. 이는 다말, 여기서는 “여인”의 표현함이 교회이다로부터, 이는 아래에서 살핀다. 이것이 유다의 후손을 위하여 있었다는 것은 유다가 그의 첫 출생 엘을 위하여 그녀를 데려옴, 그리하여 그가 거기로부터 자손을 가지도록 함에 의해 의미되어져 있다.

그의 첫 출생 엘을 위해서. 이는 신앙 속의 거짓을 의미한다. 이는 엘의 표현함이 거짓이다로부터; 그리고 “첫 출생”의 의미가 신앙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리고 그녀의 이름은 다말이었다. 이는 그 교회의 품질, 영적이고 천적인 것들을 표현하는 교회를 의미한다. 이는 “이름”의 의미가 품질이다로부터, 여기서는 교회의 품질이다, 그 이유는 이 장에서 다말에 의해 교회가 표현되기 때문, 그리고 유다의 후손 사이에 설립되어지기로 되어 있었던 영적이고 천적인 것들을 표현하는 교회가 표현되기 때문이다. 이 교회가 다말에 의해 표현되는 것은 뒤이어지는 구절로부터 분명해진다. 이 38장 전체는 내적 의미에서 유태 교회가 취급되고, 이 교회는 고대 교회가 지녔던 것 같이 주님의 왕국의 천적, 영적인 것들을 표현하게 되어야 한다는 것을 취급한다; 그리고 이것은 외적 형체에서 뿐만 아니라 내적 형체에서도 그러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 이유가 교회는 외적인 것들부터, 즉 의식들로부터 교회가 아니고, 외적인 것들이 형식을 취하는 한편, 본질인 내적인 것들로부터 교회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야곱의 후손은 내적인 것들을 받기를 기꺼워하지 않는 상태 속에 있었다; 그러므로 그들과 더불어 고대 교회는 갱신되어질 수 없었고, 오직 그 교회의 껍데기(표현물)만을 이어갈 수 있었다. 여기서 교회의 내적인 것이 다말이다, 그리고 교회의 외적인 것은 유다와 가나안 여인에 의한 세 아들이다.

그리고 엘, 유다의 장자는 여호와의 눈에서 악이었다. 이는 그것은 악의 거짓 안에 있었음을 의미한다. 이는 엘의 표현함과 첫 출생의 의미가 신앙의 거짓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 거짓이 악의 거짓이었다는 것은 앞에서 말했다; 그러나 이 아들에 있는 악의 거짓의 본성은 교회의 껍데기조차도 그로부터의 후손 사이에 설립되어질 수 없었다; 그러므로 그는 “여호와의 눈에서 악이었다. 그리고 여호와께서는 그를 죽게 하셨다”라고 말해진다. 이 민족 전체는 그것의 근원, 특히 유다로부터 악의 거짓인즉, 생활의 악으로부터의 거짓 교리가 있었는데, 유다의 이 아들과 저 아들에게서는 조금씩 달랐다. 쓸모 있을는지 모르는 것이 예견되어졌다, 그런데 첫 출생 엘의 것은 아니었고, 둘째 오난의 것도 아니었고, 셋째인 셀라에 있는 것만이 쓸모 있다 말할 수는 없으나 보존은 가능했다. 그러므로 첫 둘은 파괴되었고, 마지막 것이 보존되어졌다. 악의 거짓이 이 전체 민족과 더불어 있었다는 것은 아래 모세의 책에 명백하게 묘사되어 있다:
그들은 자신들을 타락시켰다, 그들은 그분의 아들들이 아니다, 이것은 그들의 흠이다; 그들은 성미가 비꼬이고 꼬부라진 세대이다. 그리고 여호와께서 보시고 그들의 분노함 때문에 그분의 아들들과 그분의 딸들을 책망하셨다. 그리고 그분은 말하셨다, 나는 내 얼굴을 그들로부터 감출 것이다, 나는 그들의 후손이 무엇일 것인지를 볼 것이다; 그 이유가 그들은 심술궂음의 세대, 신의가 없는 아들들이다; 나는 그들 위에 악들을 더할 것이다, 나는 나의 화살을 그들 위에 소비할 것이다. 그들은 배고픔으로 지쳐 빠질 것이다, 그리고 타는 숯으로 살라질 것이다, 쓰라린 뒤집힘이 있을 것이다. 그들은 상담함들이 결여된 민족이다, 그리고 그들 안에 총명이 없다. 그들의 포도나무 는 소돔의 포도나무이고, 고모라의 들판의 것이다. 그들의 포도는 쓸개의 포도들이다, 그들의 포도송이는 쓴맛으로 있다; 그들의 포도주는 용들의 독이다, 그리고 독사의 잔인한 독이다. 이것이 나와 더불어 창고 안에 쌓여 있고, 내 보물들 안에 봉인되어 있지 않던가? 그들이 파괴되는 날이 임박해 있다, 그리고 그들 위에 와야 하는 것들이 성급함을 만든다 (신. 32:5, 1-24, 28, 32-35);
위 말들의 내적 의미에 의해 이 민족이 있었던 악의 거짓이 묘사되고 있다, 그리고 이것이 그들 안에 뿌리박혀 있다.

그리고 여호와께서는 그를 죽게 하셨다. 이는 거기에는 교회를 표현하는 것이 없음을 의미한다. 이는 “죽다”의 의미가 어떤 것이 있기를 중단하다 이다로부터, 또한 표현함의 끝이다로부터, 그러므로 여기서는 엘로부터의 어떤 후손 사이에서는 교회를 표현함이 있을 수 없었음이 의미된다.

그리고 유다가 오난에게 말했다. 이는 교회의 표현을 보존하기 위하여를 의미한다.
이는 뒤이어지는 구절로부터 분명해진다. 그 이유가 유다가 오난에게 형제의 의무를 수행하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이를 수단으로 교회의 계속과 보존이 표현되었다.

네 형의 아내에게 오라, 그리고 그녀에게 남편의 동생된 의무를 수행하라. 이는 그가 그것, 즉 교회의 표현을 계속해야 할 것임을 의미한다. 이는 형제의 아내에게 “오다” 또는 “들어가다”, 그리고 그녀에게 남편의 형제의 의무를 수행하는 것의 의미가 교회 속에 있는 것을 보존하고 계속하는 것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모세의 법에서의 명령은 만일 어떤 남자가 아이 없이 죽었다면, 그의 형제가 과부를 아내로 데려가서 그의 형제에게 씨를 일으키라고, 그리고 첫 출생은 죽은 형제의 이름에 의해 불리우고, 나머지 아들들은 그의 자신이 된다는 것이 “남편의 형제의 의무”라고 불리웠다. 이 규례는 유태 교회에서 발원한 새로운 규례는 아니었고, 이전에 사용되어 왔던 규례임은 이 역사로부터 분명해진다, 그리고 모세에 의해 이스라엘족들에게 명령된 많은 다른 규례들도 더 있다: 즉 그들은 가나안족의 딸들로부터 아내를 데려오지 말 것, 그들은 그들의 가문들 안에서 결혼해야 한다는 것 (창. 24:3, 4; 28:1, 2). 이런 것들로부터 분명해지는 사항은, 거기에 이전에 교회가 있어 왔다는 것, 이 교회 안에서 설립되어 왔던 규례들이 이 후에 야곱의 아들들 위에도 명령되고 선포되기도 했다는 것이다. 제단과 제물이 고대 시대로부터 사용되고 있었다는 것은 창. 8:20, 21; 22:3, 7, 8, 13으로부터도 분명해진다. 이로부터도 또 하나 명백한 것은 유태 교회가 새로운 교회는 아니었다는 것, 이것은 사멸된 고대 교회가 소생되었다는 것이다.
남편의 형제에 관련된 법이 있어 왔다는 것은 모세의 책에서 분명해진다:
만일 형제들이 함께 거주한다면, 그리고 그들 중의 하나가 죽는다면, 그리고 아들이 없다면, 죽은 자의 아내는 밖의 낯선 자에게 시집가지 말라; 그녀의 남편의 형제가 그녀에게로 들어갈 것이다, 그리고 그녀를 그에게 아내로 데려갈 것이다. 그 다음 그녀가 낳은 첫 출생은 그의 죽은 형제의 이름 위에 설 것이다, 하여 그의 이름은 이스라엘로부터 지워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만일 남자가 자기 형제의 아내에게 장가들지 않는다면, 그의 형제의 아내는 성문으로 원로들에게 갈 것이다, 그리고 말하라, 내 남편의 형제가 그의 형제에게 이스라엘에서 이름을 일으키기를 거절한다; 그는 나에게 남편의 형제의 의무를 수행하지 않는다. 그때 그의 도성의 원로들은 그를 부를 것이다, 그리고 그에게 말할 것이다; 그리고 만일 그가 서서 말하기를, 나는 그녀를 데려가기를 바라지 않는다; 그때 그의 형제의 아내가 원로들이 보는 앞에서 그에게 가까이 갈 것이다, 그리고 그의 신을 그의 발로부터 벗길 것이다, 그리고 그의 얼굴에 침을 뱉을 것이다; 그리고 그녀가 답하여 말하기를, 자기 형제의 가문을 건설하지 않는 남자에게 이렇게 대접하라; 이때로부터 그의 이름은 이스라엘에서, 자기 신발을 벗기운 자의 가문, 이렇게 불리울 것이다 (신. 25:5-10).
남편의 형제의 의미가 표현하는 것을 모르는 이들은 이 법이 이름을 보존하고, 상속을 위하여서만 있었던 법이라는 것 외의 다른 생각은 갖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형제가 형제의 아내와 결혼으로 들어가는 것은 이름을 보존하고 상속분을 보존하는 것 보다 더 중요한 것은 교회의 보존과 계속이다. 그 이유가 여기서의 결혼은 내적 의미에서 선과 진리의 결혼을, 즉 천국의 결혼을, 결과적으로 교회 또한 표현했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교회는 선과 진리의 결혼으로부터 교회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교회가 이 결혼 안에 있을 때, 교회는 천국과 하나를 만든다, 이것은 천국의 결혼 자체이다. 결혼이 이 표현을 가지는 바, 그러므로 아들들과 딸들은 진리들과 선들을 표현하고 의미했다; 그러므로 아이가 없는 것은 선과 진리의 결핍을, 고로 그 가문에서는 더 이상 교회의 표현이 없는 것, 결과적으로 그들 사회(종교 단체)로부터 나가는(왕따당하는) 것이 된다. 더욱이 형제는 혈연의 선을 표현했는 바, 이 선 가지고 과부된 아내에 의해 표현된 진리와 결합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 이유가 진리가 진리이어야 하는 것, 즉 생명을 가지고 열매를 맺고, 교회 속에 있기를 계속하려면, 진리는 그것 자신의 선(남편)이나 (차선책으로) 혈연의 선 외에 다른 선과는 결합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이상의 내용은 남편의 형제에게 처방된 의무를 수단으로 천국에서 지각되는 의미이다.
만일 남자가 남편의 형제의 의무를 수행하지 않는다면, 형제의 아내는 그의 신을 발에서 벗길 것이고, 얼굴에 침을 뱉을 것이다에 의해서는, 선과 진리의 외적, 내적인 것이 결여된 자인 바, 그는 교회 속의 것을 파괴하리라는 것이 의미되었다. 그 이유가 “신”은 외적인 것을; “얼굴”은 내적인 것을 말하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남편의 형제된 의무에 의해 교회의 보존과 계속이 의미됨이 분명해진다. 그러나 내적인 것들의 표현들이 주님의 오심에 의해 멈추었을 때, 위의 법은 폐지되었다. 이런 상황은 마치 혼 또는 인간의 영과 그의 육체가 되어가는 상황과 흡사하다. 혼, 또는 인간의 영은 당사자의 내적인 것이고, 그의 몸은 외적인 것이다; 또는 같은 말로, 혼, 또는 영은 인간의 형체 자체이나 육체는 (자연계에서) 그를 표현하는 형상이다; 그래서 인간이 다시 일어날 때, 그를 표현한 몸은 벗어진다; 그 이유가 다시 일어날 때, 그는 자기의 내적인 것으로만, 즉 그의 형체 자체로만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다른 상황을 가지고도 말해볼 수 있다. 어둠에 있는 자가 어둠을 수단으로 빛 속에 있는 것을 보는 경우이다. 또는 세상의 빛 안에 있는 자가 천국의 빛 안에 있는 것을 세상의 빛을 수단으로 보는 것이다. 그 이유가 세상의 빛은 천국의 빛과 비교하면 상대적으로 어둠 같기 때문이다. 어둠 안에서, 또는 세상의 빛 안에서 천국의 빛 속에 있는 것들은 그 안에 있는 그대로는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나 표현하는 형상으로서만 가능한데, 마치 인간의 마음이 얼굴에 나타나는 정도에서 이다; 그러므로 천국의 빛이 그 빛의 명료함에서 나타날 때, 어둠, 또는 표현하는 형상은 사라진다. 이것이 주님의 오심에 의해 결과되었다.

그리고 네 형에게 씨를 일으켜 주어라. 이는 교회가 멸해지지 않도록을 의미한다. 이는 “씨”의 의미가 선으로부터의 진리, 또는 선행으로부터의 신앙이다로부터 분명해진다. 같은 의미가 죽은 형의 이름 위에 선다는 것에 의해서도 의미되었다. “형제에게 씨를 일으키는 것”은 교회가 멸해지지 않도록 방금 위에서 말해진 것에 따라 교회 속에 있는 것이 계속되어야 함이다.

그리고 오난은 그 씨가 그의 것이 아님을 알았다. 이는 혐오함과 증오함을 의미한다. 이는 오난의 표현함이 악이다로부터 분명해진다; 그리고 형제에게 씨를 주지 않는 것, 또는 남편의 형제된 의무를 수행하지 않는 것은 교회의 선과 진리를 뜻하지 않는 것, 이것의 계속됨을 뜻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본문에 의해 혐오함과 증오함이 의미된다; 그 이유가 악은 교회의 선과 진리를 향하여 혐오함과 증오함을 갖는 것밖에 더 이상은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가 그의 형의 아내에게 왔을 때였다, 그리고 그는 그것을 땅쪽으로 파괴했다. 이는 부부의 사랑에 반대되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지금 이어지는 사항으로부터 분명해진다. 유다의 첫 출생 엘에 의해 유태 민족이 처음에 있었던 악의 거짓이 묘사되었다; 오난에 의해서는 악의 거짓으로부터의 악이 묘사되었는데, 이 악은 이후 유태 민족이 있었던 악이었다; 그리고 셋째 아들인 셀라에 의해서는 그 악으로부터 파생된 우상숭배가 묘사되었다, 이 안에서 유태 민족은 계속적으로 있었다. 악의 거짓으로부터 있는 악은 오난이 행동한 것에 의해 묘사되어졌다; 즉 그는 그의 형제에게 씨를 주고 싶지 않았던 바, 그는 그것을 땅쪽으로 파괴했다. 이것에 의해 부부의 사랑에 반대되는 것이 의미된 이유는 내적 의미에서 부부에 의해 교회 속에 있는 것이 뜻해지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교회는 선과 진리의 결혼이기 때문, 그리고 이 결혼에 악의 거짓으로부터의 악은 완전 반대로 있기 때문, 즉 이런 악 안에 있는 이들은 이 결혼에 반대한다는 말이다.
이 민족이 부부적인 어떤 것도 가지지 않았다는 것은 영적 의미에서 이해해보든지, 자연적 의미에서 생각해보든지, 그들에게는 하나 이상의 아내를 허용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족히 분명해진다. 그 이유가 영적 의미에서 이해되는 바 그대로의 부부적인 것이 있는 곳, 결과적으로 교회가 있는 곳에서는 하나 이상의 아내를 둠은 결코 허용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진짜 부부적인 것은 교회, 또는 주님의 왕국에 있는 이들 외에서는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둘 그 이상에서는 결코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진짜 부부의 사랑 안에 있는 두 인물 사이에 있는 결혼은 천국의 결혼, 즉 선과 진리의 결혼에 상응한다; 즉 남편은 선에, 아내는 이 선으로부터의 진리에 상응한다; 더욱이 그들이 진짜 부부의 사랑 안에 있을 때, 그들은 이 천국의 결혼 안에 있다. 그러므로 교회가 어디에 있든, 하나 이상의 아내를 가지는 일은 결코 허용되지 않는다. 그러나 야곱의 후손들 사이에는 교회가 없었고, 교회의 껍데기(표현물)만이, 교회의 내적인 것 없는 외적인 것만이 존재했기에, 그들에게는 일부다처가 허용된 것이다. 더 나아가 한 남편이 여러 아내들과 결혼함이 천국에서 표출되면 마치 하나의 선에 이 선에 일치하지 않는 여러 가지의 진리들이 결합된 듯 한 것, (고로 이게 뭐야? 하는 식의 물음이 있게 하는 것,) 선이 없다 라는 생각, 형상 뿐이다; 그 이유가 서로 일치하지 않는 진리들로부터의 선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고 말기 때문,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는 선의 품질은 이 선과 일치하는 진리로부터 있기 때문이다.
교회의 경우, 마치 교회가 하나가 아닌 듯 하게 표출되기도 한다, 그리고 이 교회들의 구분은 신앙의 진리들에 따라, 또는 교리물들에 따라서 이다; 그럼에도 하나의 선이 그것 안에 있는 본질일 때, 이 선은 진리들에 의해 변형되고 품질도 갖는다. 교회는 천국의 형상이다; 그 이유가 교회는 땅에 있는 주님의 왕국이기 때문이다. 천국은 많은 일반적 사회들로, 그리고 이 사회에 종속되는 더욱 많은 작은 사회들로 구별되어진다; 그러나 여전히 그것들은 선을 통하여 하나이다; 그 이유가 거기서 신앙의 진리들은 선에 따라 일치함 안에 있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신앙의 진리들은 선에 관련되고 선으로부터 있기 때문이다. 만일 천국이 신앙의 진리들에 따라 구별되어지고, 선에 따라서가 아니다면, 천국은 존재할리 만무한데, 그 이유는 생명이 없기 때문이다. 또한 천사들은 주님으로부터 생명의 하나됨, 또는 하나의 혼을 가질 수 없다. 이것은 선 안에서만, 즉 주님을 사랑함과 이웃을 향한 사랑 안에서만 가능하다. 그 이유가 사랑은 모든 것을 결합하기 때문이다. 선과 진리의 결합은 소위 이웃을 향한 사랑이다; 그 이유가 이웃은 선 안에 있고, 이 선으로부터 진리 안에 있는 자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추상적 의미에서 선 자체와 그것의 진리이다. 이상 살핀 바로부터, 왜 교회 안에서 결혼이 한 남편과 한 아내 사이에 반드시 있어야만 하는지를, 그리고 야곱의 후손에게 여러 아내를 허용했는지를 알았으리라 본다; 이런 이유로 야곱의 후손 사이에는 교회가 없었는 바, 결과적으로 교회의 표현이 결혼을 수단으로 그들 사이에 설립되어질 수 없었던 이유는 그들이 부부의 사랑에 반대되는 상태 안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형에게 씨가 주어지지 않도록. 이는 그러므로 거기에는 계속됨이 없음을 의미한다. 이는 “형제에게 씨를 주는 것”, 또는 남편의 형제된 의무를 수행하는 것의 의미가 교회 속에 있는 것의 계속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러므로 “씨를 자기 형제에게 주지 않음”이란 계속됨이 없음이다.

그리고 그의 이 짓은 여호와의 눈에서 악이었다. 이는 그것은 신성한 질서에 반대되는 것이었음을 의미한다. 이는 “여호와의 눈에서 악”, 또는 그분에 반대하는 악의 의미가 그분으로부터 있는 신성한 질서에 반대하는 것이다로부터 알려진다. 이는 행위로부터, 그리고 마찬가지로 남편의 형제에 관한 규례로부터, 즉 그의 형제의 아내는 그의 신을 그의 발로부터 벗기고, 얼굴에 침을 뱉고, 그의 이름은 이스라엘에서 자기 신을 벗기운자의 가문이라 불리운다는 것으로부터(신. 25:8-10) 알려진다. 이 규례가 의미한 것은, 그가 외적, 또는 내적 선 없이 있었다 이다; 그리고 선이 없고, 그 대신 악 안에 있는 그들은 신성한 질서에 반대하여 있다. 내면의 악으로부터 튀어나오거나 흐르는 모든 악, 즉 악한 의도나 악한 목적으로부터, 마치 본문의 오난의 경우 같은 악은 신성한 질서에 반대되어 있다; 그러나 내면의 악으로부터, 즉 악한 의도나 목적으로부터 튀어나오거나 흐르지 않는 악은 비록 그것이 내면의 악이나 별반 차이가 없는 악으로 나타난다 할지라도 목적 측면이 악이 아닌 바, 내면의 악과는 다르다. 그 이유가 목적이 모든 행위에 품질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생명은 그의 목적 안에 있다, 그 이유가 그가 사랑하여 생각하는 것을 그는 자기의 목적으로 가지기 때문이다; 인간의 혼은 이 이상 더 없다.
모든 이가 아는 바, 악은 신성한 질서에 반대된다는 것, 이 질서에 따른 선에도 반대 된다는 것이다; 그 이유가 신성한 질서는 천국에서 주님 자신이기 때문인데, 그분으로부터 있는 신성한 선과 질서가 질서를 구성하고, 이 질서에 있는 만큼에서 그는 신성한 선이 본체이고, 신성한 진리는 형체이다. 신성한 진리가 형체로 표현될 때, 이것은 사람으로 나타난다; 그 이유가 주님이 그분으로부터 계실 경우, 그분만이 유일한 사람이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천사들, 영들, 인간들이 그분으로부터 받는 만큼에서, 즉 그들이 선 안에, 이 선으로부터 진리 안에 있는 만큼에서, 고로 그분의 신성한 질서 안에 있는 만큼에서 그들은 사람이다. 이로부터 보편적 천국은 하나의 사람으로 표현되고, 웅대한 사람이라 불리운다, 그리고 인간의 전체와 각 부분은 이 웅대한 사람에 상응한다. 이는 각 장의 끝에서 살피고 있다. 이로부터 역시, 천국의 천사들 모두도 인간의 형체에서 나타난다; 그리고 그 반면, 지옥의 악령들은 몽상으로부터 서로에게 사람 같이 나타난다, 그러나 천국의 빛에서는 그들의 악에 따라 어떤 괴물 같이 나타난다; 이런 이유는 악 자체는 질서에 반대되기 때문이다, 고로 인간의 형체에 반대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분은 그 또한 죽게 하셨다. 이는 거기에도 역시 교회의 표현은 없었음을 의미한다. 이는 앞에서 살핀 바 있어 설명은 생략한다.

11절. 그리고 유다가 그의 며느리 다말에게 말했다, 내 아들 셀라가 젊은 성인이 될 때까지 네 아버지 집에서 과부로 남아 있거라. 그 이유는 그가 그의 형제들 같이 죽지 않도록 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말은 가서 그녀의 아버지의 집에서 머물렀다.

그리고 유다가 말했다. 이는 일반적 측면에서 야곱의 후손, 특별하게는 유다로부터 있는 야곱의 후손을 의미한다. 말씀에서 유다와 이스라엘을 구분해 일컫는 경우가 많다. 역사적 의미에서 “유다”에 의해서는 유다 지파가, “이스라엘”에 의해서는 분리된 열 지파가 뜻해진다. 그러나 내적, 영적 의미에서, “유다”에 의해 천적 평면, 또는 교회의 선이, 그리고 “이스라엘”에 의해서는 영적 평면, 또는 교회의 진리가 표현된다. 한편 반대적 의미에서 유다에 의해 교회의 악, 이스라엘에 의해서 교회의 거짓이 표현된다. 말씀의 영적, 내적 의미는 보편적인 바, 지파들로 구분하는 것이 아니라 외적 또는 역사적 의미로서 구분된다. 이로부터 “유다”에 의한 대략적인 의미는 야곱으로부터 있는 민족, 특별하게는 유다에 의한 야곱으로부터 있는 민족이 의미된다.

그의 며느리 다말에게. 이는 영적인 것들과 천적인 것들을 표현하는 교회를 의미하고, 이는 진리로부터 “며느리”라 불린다. 이는 다말의 표현함이 영적이고 천적인 것을 표현하는 교회이다로부터; 그리고 “며느리”의 의미가 영적 평면, 또는 교회의 진리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며느리”가 내적 의미에서 이 의미를 가지는 것은 결혼에 속하는 모든 것들, 결혼으로부터 출생하는 모든 것은 천국의 결혼 속에 있는 것을, 그리고 결과적으로 선과 진리 속에 있는 것을 표현하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이것들이 천국의 결혼 속에 있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말씀 안에서, 남편은 선을, 아내는 진리를 의미한다; 또한 아들과 딸은 그들로부터 있는 진리와 선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남편이 된 아들의 아내인 며느리는 선과 결합한 교회의 진리가 의미된다. 그러나 천적 교회 속에 있는 이들과 영적 교회 속에 있는 이들은 다르다; 즉 영적 교회에서는 남편은 남자라고 불리워서 진리를, 아내는 여인이라고 불리워서 선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말씀의 내적 의미에서 “며느리”에 의해 교회의 선에 결합된 진리가, 반대적 의미에서는 교회의 악과 결합된 거짓이 의미된다; 이는 “며느리”가 등장하는 말씀에서 분명해진다:
그들은 산의 머리에서 제물을 바친다, 그리고 언덕 위, 상수리나무, 포플러나무, 테레빈나무 아래에 서 향을 태운다, 그 이유는 거기로부터의 그늘이 좋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너희의 딸들이 매춘을 범하고, 너희의 며느리가 간통을 한다. 딸들이 매춘을 범하기 때문에 그들을, 며느리들이 간통을 범하기 때문에 그들을 내가 방문하지 않겠느냐? (호. 4:13, 14);
취급된 주제는 악과 거짓을 예배함이다, 악을 예배함이 “산의 머리에서 제물을 바친다”로, 거짓을 예배함이 “언덕에서 향을 태운다”로 의미되고 있다. 악한 생활이 “딸들이 매춘을 범한다”로, 악한 생활로부터의 거짓된 교리가 “며느리들이 간통을 한다”에 의해 의미된다. 말씀에서 간통과 매춘은 선의 섞음질과 진리의 거짓화를 의미한다; 그리고 그러므로 여기서 “며느리”는 거짓에 애착함을 표시한다.
미가서에서:
큰 자는 제 혼의 외고집을 말한다; 그리고 그는 그것을 비튼다. 그들의 좋은 것은 가시로서 있다; 직바른 것은 가시나무로서 있다. 아들은 아버지를 가볍게 평가하고, 딸은 자기 어머니에 맞서 일어난다, 며느리는 그녀의 시어머니와 맞서 일어난다; 인간의 적들은 그의 집안 식구 속에 있다 (미. 7:3, 4, 6);
위에서 취급한 주제는 악으로부터 있는 거짓인데, 황폐되는 때인 마지막 때의 교회가 이 안에 있다, 그리고 대략적 의미에서 유태 교회 역시 이 안에 있었다. “자기 어머니에 맞서 일어난 딸”은 악에 애착함이 진리에 반대된 것을; 그리고 “자기 시어머니에 맞서 일어난 며느리”는 거짓에 애착함이 선에 반대된 것을 의미한다.
위의 경우는 시험들에 있는 인간의 경우와도 비슷한 대목이 있다; 그 이유가 시험 안에서 악이 진리와, 거짓이 선과 전투함이 있고, 영적 시험은 인간 안의 거짓과 악을 황폐시킴밖에 더 다른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시험, 또는 영적 전투가 위 미가서와 아주 흡사하게 주님에 의해 묘사되어 있다:
예수께서 말하셨다, 내가 땅 위에 평화를 보내려고 온 것으로 생각하지 말라; 나는 평화를 보내려 온 것이 아니라 검을 보내려 왔다. 그 이유는 내가 온 것은 인간이 불일치하여 아버지와 맞서고, 딸은 자기 어머니와 맞서고, 며느리는 그의 시어머니와 맞서 있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인간의 적들은 그의 집안 식구 속의 그들이다 (마. 10:34-36);
예언서로부터 방금 위에서 인용한 같은 말들은 교회의 황폐해짐을 의미하는데, 여기서의 그것들은 교회에 있는 이들의 시험들을 의미한다, 그 이유는 이미 말했듯, 시험은 악과 거짓을 황폐시킴, 제거함밖에 더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이유 때문에 시험과 황폐함 모두가 물의 범람과 홍수에 의해 의미되고 묘사되었다. 여기서 역시 “불일치하여 자기 어머니와 맞선 딸”은 악에 애착함이 진리에 반대하는 것을; “며느리가 시어머니에 맞서는 것”은 거짓이 선에 반대하는 것을 표시한다. 그리고 시험에 있는 인간 안에서, 악들과 거짓들이 내부에 있고 그의 것인 바, 그것에 대해서, 그의 집안 식구라고 말해지고, “집안의 그들이 자기 적이다”라고 말해진 것이다. 시험이 묘사되었다는 것은 주님의 말하심, 즉 그분은 땅에 평화를 보내려가 아니고 검을 보내려고 오셨다 라고 말하신 대목에서 이다; 그 이유가 “검”에 의해 전투하는 진리가, 반대적 의미에서는 전투하는 거짓이 의미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그분은 평화를 주시려고 오셨다 (요. 14:27; 16:33). 위 마태복음서에서의 인용 구절에서 시험이 그렇게 묘사되었다는 것은 그 장에서 이어지는 대목에서(마. 10:38) 더 분명해진다; 즉 “자기 십자가를 짊어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는 나에게 가치가 없다.”
누가복음서 역시:
너희는 내가 땅에 평화를 주려고 온 것으로 상상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아니다; 그러나 분열이다; 그 이유가 이 후로부터 한 집에 다섯이 갈라져 있을 것이다, 셋이 둘에 맞서고, 둘이 셋에 맞서 있을 것이다. 아버지가 아들에 맞서, 그리고 아들이 아버지에 맞서 분열될 것이다; 어머니는 딸에 맞서, 그리고 딸은 어머니에 맞서; 시어머니는 며느리에 맞서, 그리고 며느리는 시어머니에 맞서 갈라져 있을 것이다 (눅. 12:51-53);
위 말들로부터 분명해지는 바, “아버지,” “어머니,” “아들,” “딸,” “며느리,” “시어머니”가 천국의 결혼으로부터 있는 이런저런 것들을 의미한다는 것, 즉 그것들의 질서에서 선들과 진리들, 또한 반대적 의미를 의미한다는 것이다; 마가복음서에서:
예수께서 말하셨다, 나와 복음을 위하여 집 또는 형제들 또는 자매들 또는 아버지 또는 어머니 또는 아내 또는 자녀들 또는 들판들을 떠난 사람은 이 때에서 집들과 형제들과 자매들과 어머니들과 자녀들과 들판들을 핍박들과 더불어 백배로 받을 것이다; 그리고 오는 시대에서 영원한 생명을 받을 것이다 (막. 10:29, 30);
말씀의 내적 의미에 친숙하지 않은 자는 집, 형제들, 자매들, 아버지, 어머니, 아내, 자녀들, 그리고 들판들이라는 것밖에 여기서 더 이상 의미되는 것이 없다고 상상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인간에게, 자기 자신에게 속한 것, 그가 포기해야 하는 것이 있고, 그는 그것을 포기한 대신 그가 주님에게서 반드시 받아서 그것의 빈 자리를 채워야 하는 것 영적, 천적인 것들이 있다는 것, 이러려면 반드시 시험을 수단으로 해야 한다는 것이 “핍박들”에 의해 뜻해지고 있다. 또한 누구나 위 구절을 두고 글자 의미대로 믿겠다고 각오해도, 어머니 한명을 포기했는데 어머니가 하나가 아닌 여러 어머니들을, 게다가 백배로 받는다는 말이 말도 안되는 소리인 것을 눈치 못채는 자는 없을 것이다.

네 아버지 집에서 과부로 남아 있어라. 이는 그 자체로부터 멀어짐을 의미한다.
이는 그가 그녀를 떠나보내고, 그에게 더 이상 되돌아 오기를 원하지 않았다는 사실로부터 분명해진다. 그는 실제로는 셀라, 자기 아들이 성장할 때까지 그녀의 아버지 집에서 남아있으라고 말했다; 그러나 여전히 그는 그녀가 셀라에게 주어지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 이유가 그는 자신에게 “그의 형들 같이 그가 죽지 않도록”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유다의 이 생각함은 14절에서, “다말은 셀라가 성장한 것, 그리고 자기가 그에게 아내로 주어지지 않는 것을 보았다”에서 유다의 생각이 행동으로 나타난 것에서도 입증되었다. 이상으로부터 그는 그녀를 자신으로부터 멀어지게 했다는 것이 의미되었음이 분명해진다; 이를 내적 의미에서 살피면, 다말에 의해 표현된 것, 즉 영적, 천적인 것들을 표현하는 교회가 유다에 의해 표현된 유태 교회로부터 멀어졌다는 것이다. 그 이유가 그들은 서로 일치하지 않았기 때문, 즉 유태주의는 교회의 껍데기(표현물)일 뿐이었고, 표현(적인) 교회는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그들은 외적인 것은 인정했으나 내적인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과부(widow)” 역시 선이 없는 교회의 진리를, 그리고 “남편”은 선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남편 없는 아내는 선이 없는 교회의 진리이다. 그리고 그녀에게 그녀는 “자기 아버지의 집에서 머물러라”고 말해질 때, 이것은 교회의 진리는 멀어져 있을 것, 그리고 자기 집에서 받아지지 않아야 할 것을 의미한다; 유태 민족은 이것을 받을 수 없었는데, 그 이유는 그들이 선 안에 있지 않고 악 안에 있었기 때문이다.
“과부”는 말씀에서 자주 등장하는 단어이기도 하다. 그러나 내적 의미에 친숙하지 않은 이들은 과부에 의해 과부가 의미된다고 믿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내적 의미에서 “과부”는 선이 없는 교회의 진리를 의미한다, 즉 선이 없는 교회의 진리 안에 있는 이들, 그러나 선 안에 있기를 바라는 이들, 결과적으로 선에 의해 인도받기를 사랑하는 이들; 그리고 “남편”은 인도하는 선이다. 이런 인물들이 고대 교회에서 과부에 의해, 그들이 남자이든, 여인이든 모두 과부의 좋은 의미에 해당된다고 이해되었다. 고대 교회에서 선행을 실시해야할 이들을 몇 계층으로 분류했는데, 그들을 가난한 자, 불쌍하고 역경에 처한 자, 묶인 자와 감옥에 있는 자, 소경과 절름발이, 낯선 자, 고아, 과부 등등이다. 그들은 선행의 일을 그들의 품질에 따라 그들에게 배분했다. 그들의 교리물들이 그들에게 이런 것들을 가르쳤다; 이 교회는 다른 교리물들이 없었다. 그러므로 이때 당시에 살았던 이들은 그들의 교리물에 따라 가르치고 적었다; 그들이 과부에 관해 가르쳤을 때, 과부에 대한 그들의 생각은 선이 없이 진리 안에 있으나 여전히 선에 의해 인도되기를 바라는 이들 외에 더 다른 과부에 대한 생각은 없었다.
위 살핀 바로부터 또한 분명해지는 것은, 고대 교회의 교리물이 선행과 이웃에 관련된 것을 가르쳤다는 것, 그리고 그들의 지식들은 외적인 것들이 의미하는 것을 앎에 있었다는 것이다. 그 이유가 교회는 영적, 천적인 것들의 표현이었으므로 그들이 교리물과 지식들을 수단으로 배운 것은 의미되고 표현된 영적, 천적인 것들이었다. 그러나 이런 교리물이나 지식들은 오늘날 완전히 말살되었다, 그야말로 그것들이 존재하지도 않았다는 정도로까지 말살되었다; 그 이유가 신앙의 교리물들이 선행의 교리물의 자리를 대신 꿰찾기 때문이다. 만일 신앙의 교리물이 과부가 되는 것, 즉 선행의 교리물로부터 분리된다면, 거의 아무것도 가르치는 것이 없다. 그 이유가 선행의 교리물이 무엇이 선인지를 가르치고, 신앙의 교리물은 진리가 무엇인지를 가르치기 때문이다. 선이 없는 진리를 가르치는 것은 소경이 길을 걷는 것과 같다. 그 이유는 가르치고 인도하는 것이 선이고, 가르쳐진 것, 인도된 것이 진리이기 때문이다. 이 두 교리물은 빛과 어둠 같이 큰 차이가 있다; 그리고 어둠이 빛에 의해 계몽되지 않는다면, 즉 진리가 선에 의해, 또는 선행에 의한 신앙에 의해 계발되지 않는다면, 어둠밖에 더 있는 것은 없다. 그러므로 누구도 어떤 것이 진리인지 아닌지를 진리를 슬쩍 보는 것으로, 지각으로부터도 알지 못하고, 오직 어린 시절에 흡수되고, 성인 시절에 확증된 교리로부터서만 아는 것이 가능하다. 이로 미루어 알게 되는 것은, 교회는 아주 폭넓게 교리를 지닌다는 것, 하여 이 교회는 진리라고, 저 교회는 거짓이라 불리우고, 이것들은 결코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좋은 의미에서 “과부들”에 의해서는 선이 없는 진리들에 있으나 여전히 선에 의해 인도되기를 갈망하는 이들이 의미된다는 것이 아래 구절에서 분명해진다:
여호와, 이 분은 억눌린 자를 위하여 심판을 집행하신다, 이 분은 배고픈 자에게 식품을 주신다, 이 분은 묶인 자를 푸신다, 이 분은 소경[의 눈을] 여신다, 이 분은 구부려 절하는 자를 일으키신다, 이 분은 공정한 자를 사랑하신다, 이 분은 체류자를 보전하신다, 이 분은 고아와 과부를 지지하신다 (시. 146:7-9);
위 구절의 내적 의미에서 주님에 의해 진리들 안에서 가르침을 받고 선으로 인도되는 자들이 뜻해진다; 이런 이들 중 얼마는 “억눌린 자,” “과부,” “배고픈 자,” “묶인 자,” “소경,” “아래로 엎드려 절하는 자,” “체류자,” “고아,” “과부,” 등등이다. 이것은 품질에 따라서 이다; 그러나 이것이 무엇인지는 내적 의미로부터가 아니면 아무도 알 수 없다. 고대 교회의 교리물들이 이를 가르쳤다. 위 구절, 내지 다른 몇 구절에서 체류자, 고아, 과부는 연합하여 명명된다, 그 이유는 “체류자”에 의해 신앙의 진리들 안에서 가르침을 받기를 원하는 이들을, 고아에 의해서는 진리 없이 선 안에 있어 진리를 수단으로 선쪽으로 인도되기를 바라는 이들을, 과부는 선 없이 진리 안에 있어 선을 수단으로 진리쪽으로 인도되기를 바라는 이들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 세 부류가 여기서, 그리고 다른 구절에서도 한 세트(set)인 듯 명명되어지는 이유는, 이들이 내적 의미에서 하나의 부류를 구성하기 때문이다, 이 셋을 한꺼번에 말하면, 선과 진리에 대하여 가르침을 받기를 원하고 선과 진리쪽으로 인도되기를 바라는 이들이 의미된다.
다시:
고아들의 아버지, 과부들의 재판관은 그분의 거룩함의 주택 안에 계신 하느님이시다 (시. 68:5);
“고아”는 작은 아이들 같이 순진의 선 안에 있는 이들, 그러나 진리 안에 있지 않은 이들을 표시하고, 이들의 아버지가 주님이시다고 말해진다, 그 이유는 그분이 아버지로서 그들을 인도하시어 진리를 통하여 선 안으로, 즉 생활의 선 안으로, 또는 지혜의 선 안으로 인도하시 기 때문이다. “과부”는 성인들이 진리 안에 있듯, 그러나 선 안에 있지 않은 이들을 표시하고, 이들의 재판관이 주님이시다고 말해진다, 그 이유는 그분이 그들을 인도하시기 때문, 즉 선을 통하여 진리 안으로, 즉 총명의 진리 안으로 인도하시기 때문이다. “고아”인 진리 없는 선은 진리의 교리를 통하여 지혜의 선이 되어 간다; 그리고 “과부”인 선이 없는 진리는 선의 생활을 통하여 총명의 진리가 되어 간다.
이사야서에서:
재판에서 가난한 자를 외면하는 불의한 법령을 포고하는 자, 그리고 뺏기 위하여 내 백성의 비천한 자를 재판 안으로 끌어들이는 자, 즉 과부들이 그들의 약탈품이 되고, 고아들을 털어가는 자에게 화있을 것이다 (이. 10:1, 2);
위에서 “비천한 자,” “가난한 자,” “과부”, 그리고 “고아”는 자연계의 그들이 아니라 영계에서 의미되는 그들이다. 유태 교회도 고대 교회에서와 같이 모든 것들은 표현적이었다, 고아와 과부에게 선을 행하는 것 역시 표현적이다. 그 이유가 영적 의미에서 이와 같이 있는 이들을 향한 선행이 천국에서 표현되기 때문이다.
예레미야서에서:
너희는 공평과 공정을 행하라, 그리고 약탈된 자를 압제자의 손에서 구출하라; 그리고 체류자, 고아, 과부로부터 사취하지 말며, 폭력을 행사하지 말며, 이 장소에서 순진한 자의 피를 흘리지 말라 (예. 22:3);
위에서 “체류자, 고아, 과부”에 의해 영적으로 그와 같은 이들이 의미된다; 그 이유가 영계에서 또는 천국에서는 지상에서 있는 것과 같은 그들이 거기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말들이 인간에 의해 읽힐 때, 천사들에 의해서 그들은 그들의 내적, 영적 의미에서 지각된다.
에스겔서에서:
보라 이스라엘의 제 일인 자들아, 너희 각각은 자기의 무력에 따라 피를 흘리기 위하여 너희 안에 있어 왔다. 너희 안에서 그들은 아버지와 어머니를 우습게 여겼다; 너희 한가운데에서 그들은 체류자를 압제를 수단으로 취급했다; 너희 안에서 그들은 고아와 과부에게서 사취했다
(겔. 22:6, 7).
말라기서에서:
나는 심판하러 너에게 가까이 올 것이다; 그리고 나는 신속한 증인을 마술사에 맞서서, 거짓 맹세자에 맞서서, 품삯을 놓고 삯꾼을, 그리고 고아와 과부를 압제하는 이들에 맞서, 그리고 체류자를 외면하는 이들에 맞서, 나를 두려워하지 않는 이들에 맞서 있을 것이다 (말. 3:5).
모세의 책에서:
너는 체류자에게 해를 끼치지 말라, 그를 압제하지 말라. 너희는 어떤 과부나 고아도 괴롭히지 말라. 만일 너희가 여하튼 그들을 괴롭혀서 그들이 나에게 외치면, 나는 그들의 음성을 반드시 들을 것이다; 그리고 나의 노염이 끓어오를 것이다, 그리고 나는 너희를 검으로 죽일 것이다, 그리고 너희 아내는 과부가 되고 너희 자녀는 고아가 될 것이다 (출. 22:21-24).
위 구절, 여타 다른 가르침과 같이, 유태 교회에서의 공정과 규례는 표현적이었다; 그리고 그 교회에서 그들이 외적으로 그렇게 행하도록 보존되었다, 그리고 이와 같은 것들을 수단으로 선행의 내적인 것들을 표현하기 위해, 비록 그들이 선행의 아무것도 가지지 않았을 지라도, 또한 내적 애착으로부터 그것들을 준행하지 않았을지라도 표현은 되어 있었다. 내적인 것은 애착으로부터 무지 안에 있는 이들을 진리들 안에서 가르치고, 선쪽으로 진리를 수단으로 인도하기 위해 있었다; 그럼으로 해서 그들은 체류자와 고아, 과부에게 영적 의미에서 선을 행할 것이다. 그럼에도 외적인 것은 표현을 위하여 남아있어야 하기에, 체류자나 고아, 과부를 억울하게 하는 이들에게 저주가 있으리라고 에발 산에서 발표되었다 (신. 27:19). “그들의 공정함을 외면하는 것(억울하게 하는 것)”란 반대되는 짓을 행하는 것, 즉 거짓과 악한 것쪽으로 생활과 가르침을 수단으로 인도하는 것이다. 그리고 타인들로부터 선들과 진리들을 빼앗고, 자기 명예나 이득을 위하여 자기 것 삼는 자에게 저주가 있기 때문에 주님께서 말하셨다:
너희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에게 화있을 것이다! 그 이유가 너희는 과부의 집을 삼키기 때문, 체면을 위해 기도를 길게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더 철저한 심판을 받을 것이다
(마. 23:14; 눅. 20:47);
“과부의 집을 삼키는 것”은 진리들을 바라는 이들로부터 진리들을 가져가고 거짓들을 가르치는 것을 뜻한다.
들판에, 올리브원에, 포도원에 남겨진 것은 체류자, 고아, 과부를 위해서 였다는 것도 표현적 이었다 (신. 24:19-22); 그리고 그들이 삼 년째 해의 소출의 십일조 바치기를 끝냈을 때, 그들은 그것을 체류자에게, 고아, 과부에게 주어야 한다고, 하여 그들의 성문에서 그들의 배를 채우도록 했다 (신. 26:12). 가르치고 선으로 인도하는 분은 주님뿐이기 때문에 예레미야서에서 말해진다:
네 고아들을 남겨두어라, 내가 그들을 살아 있게 만들 것이다; 그리고 과부들은 나를 신뢰할 것이다 (예. 49:11);
모세의 책에서:
여호와께서 고아와 과부의 재판을 집행하신다, 그리고 체류자를 사랑하시어, 그에게 빵과 의복을 주신다 (신. 10:18);
“빵”은 사랑의 선을; “의복”은 신앙의 진리를 표시한다.
엘리야에 관련된 사건: 토지에 비가 내리지 않아 가믐이 있었을 때, 그는 사렙다로 과부에게로 보내졌다, 그리고 그는 그녀에게 케잌 조금을 요구하고, 그녀가 만들어서 자기에게 먼저 가져오고 그 다음 그녀와 아들이 먹도록 했다, 그때 곡식가루 통은 다 소비되지 않았고, 기름병의 기름 역시 떨어지지 않았다 (왕상. 17:1-16)는 것 역시 표현적이다. 이는 엘리야에 관련된 다른 사건도 마찬가지로 표현적이다. 비가 내리지 않아서 가믐이 있는 토지는 교회에 진리가 황폐함을 표현했다; 사렙다의 과부는 진리를 바라는 교회 바깥에 있는 이들을 표현했다; 그녀가 그를 위해 먼저 만든 케잌(cake)은 주님을 사랑함의 선을 표현했다, 그분을 그녀는 자기가 가졌던 조금으로부터 자신과 아들 위에서 사랑하였다; 곡식가루통은 선으로부터의 진리를 의미한다, 그리고 기름병은 선행과 사랑을 의미한다; 엘리야는 위와 같은 일이 행해진 수단인 말씀을 표현한다.
이것이 주님의 말씀에 의해 내적 의미에서 뜻해진다:
자기 자신의 고향에서 예언자는 받아지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하나의 진리에 관해 말한다, 이스라엘에서 엘리야의 시대에, 하늘이 삼 년 육 개월 동안 닫히어, 모든 토지 위에 가믐이 있었던 때에 많은 과부들이 있었다. 그러나 과부였던 여인인 그들 중에서 오직 시돈의 사렙다로 엘리야는 보내졌다 (눅. 4:24-26);
엘리야는 진리를 바라는 교회 밖의 이들에게 보내진 것이다. 그러나 황폐된 교회 안의 과부들에게 엘리야는 보내지지 않았다. 이 교회인은 선 안에 있지 않기 때문에 진리 안에 있지 않은 이들이; 그 이유가 제아무리 많은 진리가 바깥쪽 형체에서 그들과 더불어 진리 같이 나타난다 할지라도, 선이 없는 곳에서는 어디든지 진리도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즉 알맹이가 없는 쭉정이 같이 있을 뿐이다는 말이다.
이런 진리 안에 있는 이들, 그리고 또한 거짓 안에 있는 이들은 “과부”의 반대적 의미에서 의미된다: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로부터 하루만에 가지와 골풀, 머리와 꼬리를 절단하실 것이다. 원로와 얼굴에서 존경된 자는 머리이고, 거짓말의 선생인 예언자는 꼬리이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그들의 젊은 이들 위에서 기뻐하시지 않을 것이다, 그는 그들의 고아와 과부에게 동정심을 가지시지 않을 것이다 (이. 9: 14, 15, 17).
예레미야서에서:
나는 토지의 큰문(성문)에서 꺄부르는 키를 가지고 그들을 꺄부를 것이다; 나는 그들로부터 자녀를 빼앗을 것이다, 나는 내 백성을 파괴할 것이다; 그들은 자기들의 길로부터 돌아서지 않았다. 그들의 과부들은 바다의 모래 이상으로 나에게 불어나졌다; 나는 그들에게, 젊은 이의 어머니 위에 정오에 황폐하게 하는 자를 데려올 것이다. 일곱을 낳은 여인은 녹초가 되고; 그녀는 졸도하고, 그녀의 태양은 낮인데도 저물 것이다 (예. 15:7-9).
다시:
우리의 상속분이 낯선 자에게로 돌아가졌다, 우리의 집들은 외국인에게 돌아갔다. 우리는 아버지 없는 고아들이다, 우리의 어머니들은 과부들 같이 있다 (애. 5:2, 3).
“과부들”에 의해 선 안에 있지 않기 때문에 진리 안에 있지 않은 이들이 의미되기에, 이들은 악으로부터의 거짓들 안에 있는 이들이나 매한가지 라고, 과부로 불리워져야 한다 라고 교회들을 질책한 것이 계시록서에서:
그녀는 자기 심정에 말했다, 나는 여왕으로 앉을 것이다, 그리고 과부가 아니다, 그리고 나는 슬픔을 보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하루에 그녀에게 재앙, 죽음과 슬퍼함이, 가믐이 올 것이다; 그리고 그녀는 불로 태워질 것이다 (계. 18:7, 8);
위 모두로부터 말씀에서 “과부”에 의해 뜻해진 것이 분명해졌을 것이다; 그리고 과부가 선 없는 교회의 진리를 표현하고 의미하고- 아내는 진리를, 남편은 선을 의미하기 때문에- 그러므로 고대 교회에서 일반적, 특수적 모든 것들은 표현적이었기에, 성직자는 성직자의 과부가 아닌 과부와 결혼하는 것을 금했다:
대성직자는 처녀에서 아내를 데려올 것이다. 과부, 또는 이혼녀, 또는 오염된 여인, 또는 간음녀, 이들을 데려오지 말 것이다; 그러나 자기 자신의 백성의 처녀를 그는 자기 아내로 데려올 것이다 (레. 21:13, 14);
그리고 새로운 성전과 새로운 성직 직분에 관하여:
성직자인 레위인은 자기 아내로 과부, 이혼녀를 데려오지 말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스라엘 가문의 씨의 처녀를 데려올 것이다; 그럼에도 성직자의 과부인 과부는 데려와도 좋다 (겔. 44:22).
위와 같이 명령된 이유는 그들이 결혼하는 처녀가 진리에 애착함을, 성직자의 과부는 선으로부터의 진리에 애착함을 표현하고 의미했기 때문이다; 또한 “성직자”는 표현적 의미에서 교회의 선이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아이 없고, 과부가 된 성직자의 딸은 거룩한 것, 또는 제물을 먹도록 허용되었다 (레. 22:12, 13).
이것이 “과부”의 의미인 것은 고대 교회 속에 있던 이들에게 그들의 교리물로부터 알려졌다; 그 이유가 그들의 교리물들은 사랑과 선행의 교리물들이었는데, 이 교리물은 오늘날에는 말살된 무수한 것들을 담고 있었다. 이런 교리물로부터 그들은 무슨 선행이 실시되어야 하는 지를, 자기들은 무슨 의무를 이웃에게 빚지고 있는 지를 알았고, 고로 자기들은 고아들, 과부들, 체류자들이라 불리워진다는 것을 알았다. 진리에 관한 그들의 지식과 기억 속의 지식들은 자기들의 교회의 의식들이 무엇을 표현하고 의미하는 지를 알았다; 그들 사이에 학식이 있는 자들은 땅 위와 세상에 있는 것들이 표현한 것을 알았다; 그 이유가 그들은 보편적인 자연계는 천국 왕국을 표현하는 극장무대이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지식들이 그들의 마음을 천국의 것들 쪽으로 승강되게 했고, 그 교리물은 그들의 생활을 인도해 주었다. 그러나 교회가 선행으로부터 신앙쪽으로 길을 잘못 들어선 이후, 더욱이 신앙이 선으로부터 분리된 이후, 그리고 선행과 선행의 일 없이도 신앙이 구원한다고 만들어버린 이후, 인간의 마음은 지식들을 수단으로 천국의 것들 쪽으로 더 이상 승강하지 못했고, 교리물에 의해서도 삶을 인도받지 못했다; 그리하여 사후 삶이 있다는 것을 믿는 자가 거의 없어지고, 거의 누구도 천국이 무엇인지를 아는 자가 없게 되었다. 동시에 말씀 안에는 글자 의미에서 나타나지 않는 영적 의미가 있다는 것은 믿어질 수 없게 되었다. 이런 길에서 인간의 마음은 닫혀져 있어 왔다.

내 아들 셀라가 성장될 때 까지. 이는 (시간이 찰) 때까지를 의미한다. 이는 “성장됨”의 의미가 어떤 나이에 있는 것이다, 즉 시간이 채워지다로부터; 그리고 셀라, 아들의 표현함이 우상적인 것이다로부터, 고로 유태 종교인데, 이들과 더불은 이 종교는 우상숭배였다. 이로부터 “셀라 나의 아들이 성장될 때까지”는 유태 종교가 내적인 것, 또는 다말인 표현 교회의 영적, 천적인 것들을 받을 수 있는 (시간이 찰) 때까지가 의미된다.

그가…말했기 때문이다. 이는 생각함을 의미한다. 이는 말씀의 역사적 부분에서 “말하다”의 의미가 지각하다와 생각하다 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러므로 여기서 “그가 말했다”에 의해 그가 자신 안에서 다말은 아내로 그의 아들 셀라에게 주어지지 않는다 라고 말했다, 또는 생각했다가 의미된다. 이는 내적 의미에서 표현 교회 속의 내적인 것들은 멀어지리라는 것이다.

그 또한 그의 형들 같이 죽지 않도록. 이는 그것이 멸해질까 걱정함을 의미한다. 즉 야곱으로부터 내려와 후손들과 더불어 있었던 교회의 표현, 특별하게는 야곱으로부터 유다를 통하여 내려가는 교회의 표현이 멸해질까 걱정함을 의미한다. 이는 “그가 죽지 않도록”의 의미가 멸해질까 걱정함이다로부터 분명해진다. 여기서 이런 점에 대해 주목해보자. 즉 만일 진짜 표현 교회의 내적인 것들이 야곱의 후손들에 인접되었다면, 야곱의 후손과 더불어 있었던 교회의 표현은 멸해졌을 것이다는 점에 대하여 이다. 이 경우는 다음과 같다. 표현 교회, 즉 고대인들 사이에 존재했었던 것과 같은 교회가 야곱의 후손과 더불어 설립되어 가기로 되어 왔었다. 그러나 이 민족의 특성은 외적인 것들만을 예배하고 숭배하기를 원했고, 내적인 것들이라면 여하튼 어떤 것도 원하지 않았다; 그 이유가 그들은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 안에, 이 사랑으로부터 거짓 안에 침수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 민족은 이방인들보다 한술 더 떠서 많은 하느님들이 있다고, 그러나 여호와라는 하느님은 여타 하느님들보다 더 위대하시다는 것, 그 이유는 그분은 더 큰 기적들을 일으키시기 때문이다고 믿었다; 그러므로 기적 사실들이 뜸해진다든가, 여호와를 자주 부르다보니 그분에게 친구 같은 느낌이 들 때 (요즘 말로 잘 대해주니까 올라타려 든다는 식, 역자주), 하여 그분을 조금 낮게 평가할 경우, 그들은 금새 다른 신들에게로 방향을 틀었는데, 이는 말씀의 역사서나 예언서에서 흔히 목격된다.
이런 이 민족의 특질 때문에, 고대인들 사이에 존재했던 것 같은 표현 교회(a representative church)는 설립되어질 수 없었고, 대신 교회의 표현물(교회의 껍데기, the representative of church)만이 존재하였다; 이렇게 라도 주님께서 설비해두신 것은 그것에 의해서 천국과의 어떤 교통이 결과될런지도 모르기 때문에서 였다; 그 이유가 표현인 것은 악한 자와 더불어서도 가능하다, 그 이유는 이것은 인물(person)이 아니라 어떤 것(thing)이기 때문이다. 비록 그들의 의식들(예배들) 안쪽에 거룩한 신성의 것들이 포함되고 있다 할지라도 이 민족들에게는 우상숭배를 하고 있었음이 분명해진다(4825항). 이런 우상숭배적인 예배와 더불어 내적인 것은 결합되어질 수 없었다, 그 이유가 만일 결합이 있다면, 즉 그들이 내적인 것을 인정했다면, 그들은 그것들을 모독하고야 말았을 것이기 때문; 그 이유가 거룩한 것이 우상적인 외적인 것과 결합된다면, 필시 모독되어지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이 민족에게는 내적인 것이 열려지지 않았고, 만일 열려졌다면, 이 민족은 멸해지고 말았을 것이다.
이 민족이 내적인 것들을 받을 수 없었고, 인정할 수도 없었다는 것은 그들에게 얼마나 내적인 것들이 밝혀졌을런지는 모르나, 어쨌든 오늘날의 그들을 보아도 분명해진다; 그 이유가 그들이 기독인들 사이에서도 살지만, 여전히 그들은 그것들을 거절하고 조소하기 때문이다. 전환하였다는 이들조차도 심정으로는 그들의 뿌리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고로 영적, 천적인 것들을 표현하는 교회가 이 민족과 더불어 있지 않다는 것, 그러나 내적인 것 없는 외적인 것, 그 자체 우상숭배인 것인 교회의 표현물만이 존재했음이 분명하다. 게다가 어떤 기독인들의 경우, 이 민족이 선택된 민족인지라 마지막 날에는 전향되고 아마 기독인들에 앞서 천국으로 불려질 것이라 착각하고 있다, 또한 더 착각하는 것은, 마지막 날 메시아, 또는 주님이 그들에게 더 큰 기적을 베푸시며 나타나서 그들을 가나안의 토지로 데려가실 것이라고 상상한다. 이런 망상적 오류가 일어나는 주요한 원인은 말씀의 예언서 부분들에 있는 “유다,” “이스라엘,” “가나안의 토지,” 등등을 단순히 유다, 이스라엘, 가나안의 토지로 이해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말씀의 내적 의미에 아무런 관심을 두지 않고 막연히 글자 의미만을 믿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말은 가서] 그녀의 아버지의 집에서 머물렀다. 이는 그 자체로부터 멀어짐을 의미한다. 이는 앞에서 살핀 바 있어 설명을 생략한다.

12-14절. 그리고 날들이 늘어나졌다, 그리고 유다의 아내 수아의 딸이 죽었다. 그리고 유다는 위로 받아졌다, 그리고 그의 양떼의 털을 깎는 자 쪽으로 그와 그의 동료 아둘람족 히라는 딤나로 올라 갔다. 13 그리고 [누가] 다말에게 말하기를, 너의 시아버지가 그의 양털을 깎으러 딤나로 가더라. 14 그리고 그녀는 그녀의 과부의 옷을 벗고, 자신을 너울로 덮고, 그리고 자신을 둘둘말았다, 그리고 딤나로 가는 길에 있는 샘들의 문에 앉았다. 그 이유가 그녀는 셀라가 성장한 것을 보았고, 그리고 자기가 여인으로 그에게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날들이 늘어나졌다. 이는 상태의 변화를 의미한다. 이는 내적 의미에서, “날” 또는 “때”가 상태이다로부터; 그리고 “늘어남”이 날, 때를 서술할 경우, 변화됨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것이 상태의 변화됨을 의미하는 것은 아래로부터 분명해진다. 이것이 “늘어나졌다, were multiplied”라고 말해진 이유는 상태의 변화가 진리들 측면을 포함했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늘어남, 불어남”이 진리들을 서술하기 때문이다. 상태와 상태의 변화는 자주 언급되기에, 그리고 이것이 뜻하는 것을 아는 자가 적기에, 설명이 보충되어야 할 것 같다. 시간과 시간의 계속, 또는 공간과 공간이 넓혀짐이 인간의 내면들, 즉 생각들과 애착들을 서술할 수가 없다, 그 이유는 이런 내면의 것들은 시공 안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비록 인간에게 시공 안에 있는 듯 나타나고 있다 할지라도 엄밀히 말해 이것은 착각일 뿐이다. 그러나 내면의 것들은 시공에 있는 것들과 상응한다. 상응하는 내면의 것들을 우리는 상태(state)라고 부른다. 그 이유가 상응하는 것들을 상태라는 단어 외에는 표현할 수 있는 단어가 없기 때문이다. 마음 또는 심정이 애착들과 생각들 측면에서 바뀔 때, 즉 슬픔이 기쁨, 또는 기쁨이 슬픔으로, 또는 불경함에서 경건함으로 등등 같이 바뀔 때 상태가 변한다 라고 말해진다. 그리고 이 변화들이 상태의 변화들이라 불리우고, 애착을 서술한다, 또한 이 애착에 의해 통치되는 만큼에서 생각들을 서술한다. 생각 속의 상태의 변화는 애착 속에 있는 것과 같은데, 마치 특별 사항들이 일반적인 것들 안에 있는 경우와 같다, 고로 서로 비교하여 다양해진다.

그리고 수아의 딸이 죽었다. 이는 거짓으로부터의 악에 관련하여를 의미한다. 이는 “죽다”의 의미가 이런 품질 속에 있기를 중단함이다로부터; 그리고 “수아의 딸”의 의미가 거짓으로부터의 악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러므로 날들이 늘어진 이후 수아의 딸이 죽다에 의해 거짓으로부터의 악 측면의 상태의 변함이 의미되고, 이는 이전 같은 상태가 아니었다가 의미된다.

유다의 아내. 이는 야곱으로부터, 특히 유다로부터 내려오는 민족들과 더불은 광신적 신앙을 의미한다. 이는 “아내”의 의미가 교회이다로부터, 여기서는 광신적 신앙, 그 이유는 내적인 것으로부터 분리된 교회의 외적인 것이다로부터, 이것이 광신적 신앙이라 불리울 수밖에 없는 이유는 그들은 거룩한 외적인 것 안에 있을 수 있는데도, 거룩한 내적인 것은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유다의 표현함이 야곱으로부터, 특별하게는 유다로부터 내려온 민족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리고 유다는 위로되어졌다란 휴식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의 양떼의 털을 깎는 자 쪽으로 올라 갔다. 이는 교회를 위해 상담하려는 어떤 승강을 의미한다. 이는 “올라감”의 의미가 승강함, 즉 외면의 것으로부터 내면의 것쪽으로 승강함이다로부터; 그리고 “털을 깍는 자”의 의미가 사용중에 있음, 고로 사용할 것임, 또는 그것을 위해 상담을 함이다로부터; “양떼”의 의미가 교회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와 그의 동료 아둘람족 히라. 이는 그것이 아직도 거짓 안에 있었음을 의미한다. 이는 아둘람족 히라의 표현함이 거짓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가 여기서 “동료”라고 말해졌는 바, 이는 거짓이 그것에 인접하였다, 또는 그것이 아직도 거짓 안에 있다가 의미된다.

딤나로. 이는 그 상태를 의미한다. 즉 교회를 위해 상담을 하는 상태를 의미한다. “딤나”가 이 상태를 의미하는 것은 사사기서에서 삼손이 딤나로 내려가서 불레셋의 딸들로부터 아내를 데려오는 대목(사. 14:1-4, 7)에서, “딤나”에 의해 본문과 같이 교회를 위해 상담을 하는 상태가 의미되는 것에서 알게 된다. 삼손이 불레셋의 딸들로부터 데려온 아내는 표현적 의미에서 선이 아닌 것으로부터의 진리, 고로 불명확한 진리인데, 이것이 여기서 딤나에 의해 표현되어지고 있다; 그 이유가 “불레셋”은 신앙의 교리 안에는 있으나 그것에 따른 생활이 없는 이들이다. 더구나 딤나는 단 지파의 상속분의 장소들 사이에서 언급되고 있다 (여. 19:43). 말씀에 있는 장소들의 모든 이름들은 어떤 것과 어떤 상태를 의미한다.

그리고 [누가] 다말에게 말하기를. 이는 영적인 것들과 천적인 것들을 표현하는 교회와의 어떤 교통을 의미한다. 이는 “말해짐”의 의미가 지각함이다로부터, 고로 교통함, 여기서는 교통함의 어떤 것; 그리고 다말의 표현함이 영적, 천적인 것들을 표현하는 교회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상태가 바뀔 때 교회와 더불은 교통함, 즉 교회를 위하여 상담하는 어떤 승강함이 있다.

네 시아버지가 그의 양떼의 털을 깎으러 딤나로 가더라. 이는 유태 교회가 자체를 위해 상담받기를 원했음을 의미한다. 이는 유다의 표현함이 야곱, 특히 여기서 “시아버지”라고 불리우는 유다로부터 내려가는 민족과 더불은 교회이다로부터, 그 이유는 “며느리”인 영적, 천적인 것을 표현하는 교회와 교통하는 어떤 것이 있었다 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올라감”의 의미가 어떤 승강함이다로부터; 그리고 “양털을 깍는다”의 의미가 교회를 위해 상담함이다로부터, “딤나” 역시 그것을 위해 상담하는 상태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런 내적 의미들이 이런 말들 안에 포함되었다는 것에 대해 여러분은 의아해 여길지 모른다; 그 이유가 이런 의미를 글자로부터서는 어떤 느낌 징후조차 감지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그 이유가 우리가 이 구절들을 읽을 때, 우리의 마음이 유다, 딤나, 양털을 깍음의 영적인 것이 아닌 것만을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천사들의 경우는 다르다, 즉 그들은 영적인 것들 안에 있기 때문에, 우리와 달리 세상적인 것들을 전혀 지각하지 못한다. 즉 우리가 글자를 읽을 때, 그들은 영적인 것으로 건너간다. 세상의 장소, 인물 등등은 멸해지고, 대신 교회에 관련되는 것, 교회의 상태, 교회 안에서 사용되는 것을 지각한다.
어쨌든 인간에게 위와 같은 얘기는 거짓말 같은 소리로밖에 나타나지 않을지 모른다. 그 이유가 인간은 세상에 사는 한, 자기가 속한 자연계에 있는 것으로부터 생각할 수밖에 없다는 것은 그가 육체적 세상적인 것들 안에 침수되어 있음에서 비롯된 엄연한 사실인 바, 그가 영적이고 천적인 것을 모르는 것이 당연할지 모른다, 더욱이 영적, 천적인 것들이 세상적, 육체적인 것들과 구분된다는 것, 즉 영과 몸이 같이 있지만 이를 따로따로 말해도 누구나 이해하지 않던가? 인간의 영이 육체 안에서 살 듯, 영적 의미가 글자 의미 안에서 살고 있다는 것, 또한 글자 의미가 멸해질 때, 영적 의미는 생존한다는 것; 고로 내적 의미는 말씀의 혼이라고 말하면 기독인들 조차 고개를 까우뚱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그리고 그녀는 자기의 과부 차림의 옷을 벗었다. 이는 선으로부터 있는 진리인체 속임을 의미한다. 이는 “과부”의 의미가 선 없이 진리 안에 이들, 그러나 선에 의해 인도되기를 바라는 이들이다로부터. 옷이 진리들을 의미하기 때문에, 과부가 입는 옷은 위의 진리를 표현했다. 그러므로 “이 옷을 벗는 것”은 과부의 표현을 중단하는 것, 즉, 선이 없는 진리이기를 중단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녀가 자신을 너울(veil)로 덮었기 때문에 선으로부터 있는 진리인체 속이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을 너울로 덮었다. 이는 진리가 불명료했음을 의미한다. 이는 “자신을 덮음” 또는 “너울로” 그녀의 얼굴을 가림의 의미가 감추는 것, 선으로부터 있는 체 하는 진리가 불명확해지게 하는 것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리고 이것은 유다와 결합하기 위해서 이었다. 옛부터의 관습에서, 신랑이 신부에게 처음 접근할 때, 그녀는 너울로 자신을 가렸다(덮었다). 이는 리브가에게 이삭이 다가왔을 때의 대목에서 살핀 적이 있다 (창. 24:65); 그리고 이를 수단으로 진리의 나타남이 의미되었다. 그 이유가 아내는 진리를 의미하고, 남편은 선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진리는 그 진리의 선과 결합할 때까지 진리의 품질이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를 표현하기 위하여 신부는 자신의 남편을 처음 볼 때, 너울로 자신을 덮었던 것이다. 이런 경우는 다말의 경우도 비슷하다. 여기서는 다말이 자기의 남편으로 유다의 아들 셈을 기다려왔는데, 정작 그녀가 셈에게 주어지지 않자, 그 대신 남편의 형제된 의무를 수행할 자로 그의 아버지를 남편으로 간주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녀는 신부가 사용하는 너울로 자신을 덮었는 바, 이는 매춘부가 아니다는 표시이기도 하다. 물론 유다의 입장에서는 그녀를 매춘부로 간주했을지라도 다말의 입장에서는 매춘부가 아닌 것이다. 유다가 그녀를 매춘부로 간주한 이유는, 유태 민족, 여기서 “유다”로 의미되는데, 그들은 표현 교회의 내적 진리들을 매춘부로밖에 달리 간주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유다는 매춘부로서의 그녀와 결합되었으나, 다말이 유다와의 결합은 그렇지 않았다. 내적 진리들은 이 민족들과 더불어서는 이렇게밖에 나타날 수 없었다. 그러므로 불명확한 진리가 다말이 자신을 덮은 너울에 의해 의미되는 것이다. 교회의 진리가 그들에게 불명확해져 있다는 것은 오늘날 그들의 회당에서 너울로 자신을 덮는 것에 의해서도 표현되고 있다.
너울이 모세에 관련된 대목도 있다. 그가 시내산에서 내려왔을 때 그의 얼굴이 빛났으므로 그는 백성들과 말을 할 때는 너울로 가려야 했다 (출. 34:28-끝절). 모세는 율법이라 불리우는 말씀을 표현했다 (창. 18장 서문 참조); 그 이유가 이런 이유에서 “율법과 예언서”라고 말해졌기 때문이다 (마. 5:17; 11:13; 22:36, 40); 때로는 “모세와 예언자”라고 말해지기도 했다 (눅. 16:29, 31; 24:27, 44). 그의 얼굴의 피부가 빛남에 의해 말씀의 내적 측면이 표현되었는데, 그 이유는 “얼굴”이 내적 측면이기 때문이다; 영적인 내적인 것은 천국의 빛 안에 있다. 모세가 백성과 말할 때는 언제나 너울로 얼굴을 가렸는데 이는 내적 진리가 그들에게는 덮인 채로 있었다는 것, 하여 불명확한채로 있어 그들은 그것으로부터의 어떤 빛을 감내하지 않아도 되게 되어 있었다.

자신을 둘둘말았다. 이는 그러므로 해서 인정되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이는 “둘둘 말다”의 의미가 감추는 것이다로부터, 고로 인정되어지지 않았다 이다.

그리고 딤나로 가는 길에 있는 샘들의 큰문(gate)에 앉았다. 이는 교회의 진리들과 거짓들의 중간에 있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샘들”의 의미가 말씀으로부터 있는 교회의 진리들이다로부터; 그 이유가 “샘”은 보편적 의미에서 말씀이기 때문이다. “샘들의 큰문”은 이런 진리들 쪽으로의 입구이다; 그리고 말씀의 글자 의미의 외적 진리들이 입구를 제공해주기 때문에, 그것들은 “큰문(성문, gate)”이다. 그러나 이 진리들이 내적 진리들에 의해 계발되지 않으면, 그것들은 악 안에 있는 이들과 더불어 거짓들을 표현한다. 그러므로 교회의 진리들과 거짓들의 중간에 있는 것이 여기서 “샘들의 큰문”에 의해 의미되는 것이다. “딤나로 가는 길 위에”란 교회가 사용함쪽으로 이다, 그 이유는 “딤나”가 교회를 위해 상담하는 상태이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그녀는 셀라가 장성한 것을 보았고, 자기가 여인으로 그에게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는 [표현 교회의 진리는] 야곱의 후손, 특히 유다로부터의 후손에 있었던 광신적 신앙과 합쳐지는 도리밖에 더 다른 방도가 있을 수 없다고 식별함을 의미한다. 이는 “보다”의 의미가 식별하다(discernment)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여기서의 식별하는 것은 표현 교회의 진리가 야곱, 특별히 유다로부터 내려오는 광신적 신앙과 결합되는 도리밖에 더 다른 방도가 없다고 판단함인 이유는 “유다”에 의해 이 후손이 의미되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그들의 광신적 신앙이고, 이것에 결합되어졌다. 그 이유는 셀라와 결합되어질 수 없었기 때문이다. 셀라에 의해서는 우상적인 것이 표현되었는데, 다말인 표현 교회의 진리는 결합될 수 없었다.

15-18절. 그리고 유다가 그녀를 보았다, 그리고 그녀가 창녀라고 생각했다, 그 이유는 그녀가 자기 얼굴들을 덮어 놓고 있었기 때문이다. 16 그리고 그는 길가에 있는 그녀에게로 길을 잘못들었다, 그리고 말했다, 청컨대 내가 너에게 들어가도록 허락하라. 그 이유는 그는 그녀가 자기의 며느리인 것을 몰랐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녀가 말했다, “당신이 나에게 들어 온다면 나에게 무엇을 주시렵니까?” 17 그리고 그는 말했다, “나는 너에게 양떼로부터 염소들 중에서 새끼를 보낼 것이다.” 그리고 그녀는 말했다, “당신이 그것을 보낼 때까지 어떤 담보물을 주시렵니까?” 18 그리고 그는 말했다, “무슨 담보물을 내가 너에게 주랴?” “당신의 손에 있는 도장과 머리 수건(kerchief)과 지팡이 입니다.” 그리고 그는 그녀에게 그것들을 주었다, 그리고 그녀에게 왔다, 그리고 그녀는 그로부터 임신하였다.

그리고 유다는 그녀를 보았다. 이는 어떻게 그때 당시 유태 민족의 광신적 신앙이 표현 교회의 내적인 것들을 주목해서 보았는지를 의미한다. 이는 “보다”의 의미가 주목하여 이해하는 것이다로부터, 고로 곰곰이 생각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녀”인 다말의 표현함이 영적, 천적인 것들을 표현하는 교회이다로부터, 여기서는 교회의 내적인 것들, 그 이유는 취급된 주제가 내적인 것이 유태 민족에 광신적 신앙에 의해 주목되고 받아들인 방법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유다의 표현함이 특별하게는 유태 민족이다로부터, 결과적으로 이 민족의 광신적 신앙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 이유가 이 민족이 말씀에서 언급되는 곳에서 그것의 교회와 관련된 어떤 것이 내적 의미에서 뜻해지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내적 의미는 자연계의 어떤 민족의 사건들이나 역사에 관심이 없고, 오직 교회의 품질에 속한 것에만 관심이 있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분명한 바, 유다가 그녀를 봄에 의해 어떻게 유태 민족의 광신적 신앙이 그때 당시 표현 교회의 내적인 것들을 주목해서 보았는지를 의미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녀가 창녀라고 생각했다. 이는 거짓 외에는 더 달리 주목한 것이 없었음을 의미한다. 이는 “창녀”의 의미가 거짓이다로부터; 고로 이로부터 뜻하는 바, 유태 민족의 광신적 신앙으로부터 그들은 교회의 내적 측면을 거짓으로밖에 더 달리 주목하지 않았다 이다. “창녀”가 거짓을 표시하는 이유는 결혼이 천국의 결혼을 표시하기 때문, 즉 천국의 결혼은 선과 진리의 결혼, 남편은 선을, 아내는 진리를 표현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아들은 진리들을, 딸은 선을; 그리고 사위와 며느리, 그리고 시아버지와 시어머니, 그리고 이런저런 친척임은 각각의 등차들에 따라 천국의 결혼 속에 있는 이런저런 것들을 표현한다. 그러므로 간통과 매춘은 반대적인 바, 악과 거짓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것들은 실제 자연계에서조차 반대적이다; 즉 자기들의 삶을 간통과 매춘에 소비하는 이들은 선과 진리를 위해서는 아무것도 돌보지 않는다; 간통과 매춘은 악과 거짓의 결합으로부터 발생한다, 이는 지옥으로부터 이다.
유태 민족이 과거에도 지금에도 내적인 것을 거짓으로 간주한다는 것은 유다가 자기 며느리 다말을 창녀로서밖에 더 달리 간주하지 않아서 자신을 창녀로서의 그녀와 결합시킨 것에 의미되어 있다. 이 민족의 이런 근원에 의해 그들의 광신적 신앙의 근원과 품질이 표현되어졌다. 이 민족이 교회의 내적인 것을 창녀로서 간주한다는 것은 아주 분명하다. 예를 들면, 어떤 이가 그들에게 이렇게 말한다면, 즉 메시아의 오심이 말씀의 예언서 부분에서 예견되었는데, 이 분이 바로 주님이시다는 교회의 내적인 것을 말하면, 그들은 그것을 거짓으로 완강하게 거절한다. 또는 메시아의 왕국은 세상적, 일시적이 아니고, 천국적이고 영원적이다고 교회의 내적인 것을 말하면, 그들은 이것 역시 거짓이라고 발표한다. 만일 누가 그들에게 교회의 의식들은 메시아와 그분의 왕국을 표현했다고 말하면, 그들은 이것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모른다.
만일 누가 그들에게 교회의 내적인 것은 선행의 선, 그리고 교리와 생활에서 동시에 있는 신앙의 진리이다고 말하면, 그들은 거짓으로 간주한다. 이외 더 많은 예가 있다. 한마디로 그들은 내적인 것을 가진 교회를 상상만 해도, 픽 웃어넘긴다. 이런 이유는 그들이 외적인 것들만에, 참으로 가장 낮은 외적인 것들 안에, 즉 지상의 것을 사랑함 안에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누구보다 뛰어난 탐욕, 철저히 지상적인 탐욕 안에 있다. 이런 인간은 교회의 내적인 것을 여하한 다른 방법에서 주목하는 것이 가능하지 않다; 그 이유가 그들은 여타 인류들보다 천국의 빛으로부터 더 멀리 있고, 여느 누구보다 더 짙은 어둠에 있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그녀가 자기 얼굴들을 덮었기 때문이다. 이는 내면의 것들이 그들에게 감추여 있었기 때문임을 의미한다. 이는 다말의 표현함이 표현 교회이다로부터 분명해진다; 그리고 “덮다”의 의미가 감추이는 것이다로부터; 그리고 “얼굴들”의 의미가 내적인 것들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로부터 그녀가 자기 얼굴을 덮음의 의미가 교회의 내면의 것들이 그들에게 감추여져 있었다 이다.

그리고 그는 길가에 있는 그녀에게로 길을 잘못들었다. 이는 [유태 민족의 광신적 신앙이] 표현 교회의 내적인 것이 거짓 같이 보여 자기와 같기 때문에 그 자체를 표현 교회의 내적인 것에 인접되게 했음을 의미한다. 이는 “길”의 의미가 진리이다로부터, 고로 반대적 의미로부터는 거짓인데, 여기서는 그가 그녀를 창녀로 간주했기에 있는 거짓이다. 이렇기에 그는 길가에로 길을 잘못 들었다고 말해진다; 그 이유가 “길을 잘못 들다, turn aside”가 거짓을 서술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말했다, 청컨대 내가 너에게 들어가도록 허락하라. 이는 결합을 위한 욕망을 의미한다. 이는 “누군가에게로 옴, 또는 들어감”의 의미가 결합되는 것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욕망이 창녀와 더불은 결합을 위해, 내적 의미에서는 거짓과 더불은 결합을 위해 있는 것을 뜻하는 것은 분명하다. 여기서 “유다”에 의해 뜻해진 유태 민족은 표현 교회의 내적 진리를 거짓으로밖에 더 달리 간주하지 않았다는 것은 앞에서 살폈다. 지금 여기서 취급되는 것은 위와 같음에도 불구하고, 이 민족은 자체를 이 진리와 결합되게 했다는 것, 물론 아내로서가 아니고, 창녀로서, 즉 진리와 더불어가 아니고 거짓과 더불어 결합되게 했다는 것이다. 욕망(lust)은 거짓과 결합함을, 즉 창녀와의 결합함을 서술하고 있다.
말씀의 외적 의미, 즉 말씀의 글자 의미만을 믿는 모든 이들은 내적 진리를 창녀 수준에서 자신들과 결합시킨다. 이들은 말씀의 내적인 것, 영적 의미를 통째로 거절한다; 이런 자들보다 더 특별한 이들은 말씀의 외적, 또는 글자 의미를 자신의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이 강력히 바라는 것들을, 또는 이득과 지배함을 옹호하도록 응용해간다. 이런 짓을 위해서는 내적 진리를 창녀 수준으로 취급하는 도리밖에 더 없다. 이것은 유태 민족으로부터 있는 이들에 의해 특별하게 실행되어졌다, 또한 말씀 안에서 바빌론이라 불리운 이들에 의해서도 실행되었다; 그러나 말씀의 글자 의미를 정말로 단순히 믿는 이들, 그럼에도 내적 의미로부터 있는 것들, 즉 사랑과 선행 안에 있는 것들, 이로부터의 신앙 안에 있는 것들에 따라 사는 이들에 의해서는 아니다. 그 이유가 이들은 사실상 말씀의 내적 의미 속에 있기 때문, 그리고 이런 사항은 (글자를 정성들여 읽는다면) 글자 의미로부터도 배울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실예의 하나인 즉, 내적 의미와 외적 의미가 다함께 와닿는 가르침으로는 무엇보다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자신 같이 사랑하라는 명령이 이에 해당된다. (요나서 끝장 끝절도 곁들여 생각해보라 역자주)
유태 민족이 내적 진리를 창녀로 간주했다는 것, 그리고 만일 그들이 내적 진리와 결합했다면, 그것은 창녀와의 결합에 관한 욕망으로부터 그렇게 했을 뿐이다는 것은 이런 예를 가지고 예증될지 모른다. 만일 그들에게 말씀은 거룩하다, 그야말로 점 하나에 이르러서도 거룩하다 라고 말해진다면, 그들 역시 인정하고, 자신을 그것에 결합한다; 그러나 이것은 욕망으로부터 이다; 그 이유가 그들이 그것을 믿는 것은 글자에서 거룩하다는 것이지, 선과 진리 안에 있는 이들이 말씀을 읽을 때 그들에게 흘러드는 거룩함으로부터 거룩하다고 여기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만일 그들에게 말씀에 있는 많은 이들, 즉 아브라함, 이삭, 야곱, 모세, 아론, 다윗 등등의 인물도 거룩한 것으로 존경해야 한다고 말한다면, 그들은 그것을 인정하고, 자신을 그 말에 결합시킨다; 그러나 어떤 욕망 때문에서 이다. 그 이유가 그들은 이런 인물들은 여타 다른 이들에 앞서 선택되었다고 믿어서 그들이 거룩하다 라고 믿는 것이기 때문, 게다가 이들은 신의 위치에서 예배되어야 한다고까지 치닫는다. 그렇지만 이런 인물들이 존경되는 것은 그들이 주님을 표현하기 때문에서 일 뿐이고, 거룩한 표현물 자체가 우리에게 감동을 주는 것은 결코 아니다. (즉 그들도 성경에서의 표현을 빼면 우리 같은 인간이었을 뿐이다 역자주) 더욱이 구분이 없는 모든 이의 삶 역시 사후 당사자와 더불어 남아 있는다.
만일 그들에게 그들과 더불어 있었던 많은 것들, 즉 궤, 성전, 태워바침의 제단, 분향 제단, 식탁 위의 빵, 등불을 지닌 등잔대, 영구히 타는 불, 제물, 향, 기름, 또한 아론의 의복, 특별하게 우림과 둠밈이 있던 가슴받이 등등이 거룩하였다고 말해주면, 그들도 인정하고 그 말에 결합하나, 이는 욕망으로부터 이다; 그 이유가 그들은 이것들 자체 안에 거룩함이 있다고 믿기 때문, 고로 돌, 나무, 금, 은, 빵, 불이 거룩하다는 것은 여호와께서 그것들 안에 내면적으로 계셨기 때문인데, 그들은 거룩함이 그것들에 실제로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이것은 그들이 말하는 내적 진리이나, 이것은 상대적으로 거짓이다; 그 이유가 거룩함은 선과 진리 안에만 있기 때문이다. 선과 진리는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향한 사랑 안에서, 이 사랑으로부터의 신앙 안에서 그분으로부터 있다; 고로 살아 있는 주체들 안에서만, 즉 주님으로부터 이런 것들을 받는 인간들 안에서만 거룩함이 있다.
다시 만일 그들에게 기독 교회는 그들과 더불어 설립된 교회와 더불어 하나이다, 단지, 기독 교회는 안쪽에, 당신들의 교회는 바깥쪽일 뿐이다, 하여 바깥이라는 껍질을 벗기면 기독 교회가 시야에 잡힌다 하고 말하면 그들은 그것을 인정하지 않고 창녀, 즉 거짓으로밖에 인정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유태주의로부터 기독교로 전향한 일부는 자신을 위 진리와 결합시킨다, 그러나 같은 욕망으로부터 이다. 말씀에서 이런 것들이 “매춘부들, whoredoms”이라고 자주 언급된다. 말씀에서 “바빌론”으로 의미되는 이들이 교회의 내적 진리들을 위와 같은 유태 민족의 방식에서 있다; 그러나 그들은 내적인 것들에 친숙해져 있었고, 그것들을 어린 시절에는 인정했으나, 성년기에 그것들을 부정했기 때문에 말씀에서 그들은 더러운 간통들과 역겨웁게 성교함(교접함)에 의해 묘사되고 있다; 그 이유가 그것들은 모독들이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그는 그 여자가 자기의 며느리인 줄을 몰랐기 때문이다. 이는 그것이 표현 교회의 진리이다 라고 지각하지 못했음을 의미한다. 이는 “며느리”의 의미가 교회의 선에 인접한 교회의 진리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것이 표현 교회의 진리가 의미되었다는 것은 여기서 며느리인 다말에 의해서 영적, 천적인 것을 표현하는 교회가 표현되었기 때문이다. 이는 앞에서 말했다.

그리고 그 여자는 말했다, “당신을 나에게 오게 한다면, 무엇을 나에게 주시렵니까?” 이는 조건 있는 상호간의 결합을 의미한다. 이는 “나에게 옴”의 의미가 결합함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리고 그는 말했다, “나는 너에게 양떼로부터 염소들 중에서 새끼를 보낼 것이다.” 이는 결합에 관한 담보를 의미한다. 이는 “염소들 중의 새끼”의 의미가 외적, 또는 자연적 인간의 순진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리고 이것이 순진이기 때문에, 이것은 부부의 사랑의 담보, 또는 결합의 담보이다. 그 이유는 진짜 부부의 사랑은 순진이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고대인들이 받아들였던 관습의 하나가 그들이 자기들의 아내에게 새로이 갈 때, 미리 염소들 중의 새끼를 보냈다. 이는 삼손에 관한 기록에서도 발견된다:
날들이 지나, 밀 수확철의 날들에서, 삼손은 염소들 중의 새끼를 가지고 그의 아내를 방문했다; 그 이유가 그는 말하기를, 나는 침실로 내 아내와 들어갈 것이다 (사. 15:1).
위 구절과 본문의 경우는 비슷하다; 그러나 본문의 경우, 말해진 염소 새끼가 미리 받아진 것이 아니기에 다말은 담보물을 요구했다. 이 담보물은 결합을 위한 담보물이지, 결혼을 위한 담보물이 아니다. 그 이유는 유다쪽에서는 창녀와의 결합을 위한 담보물이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여자는 말했다, “당신이 그것을 보낼 때까지 당신은 담보물을 주시렵니까?” 서로에게 확실함이 있는지 여부를 의미한다. 이는 앞 구절에서 다말이 나에게 오면 무엇을 줄 것이냐고 묻는 것의 의미가 조건이 있는 결합을 의미함에서 알게 된다. 여기서는 서로에게 확실함이 있는 것, 그 이유는 담보물이 약속된 것이 주어진다는 확실함을 위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말했다, “무슨 증거물을 내가 너에게 주랴?” 이는 그것은 확실했음을 의미한다. 이는 “담보물”의 의미가 확실함이다로부터; 이것이 확실하였다는 것은 담보물이 주어지는 이어지는 구절로부터 분명하다.

그리고 그 여자는 말했다, “당신의 도장.” 이는 동의함의 표시(token)를 의미한다. 이는 “도장”의 의미가 동의함의 표시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도장(signet)”이 동의함의 표시이다는 것은 고대 시대에서 칙령들이 도장을 찍음으로 확증되었기 때문인데, 하여 도장은 이것이 그렇다는 것에 대한 확증 자체, 증명함이었다. 다말이 그의 도장, 머리수건, 지팡이를 염소들의 새끼를 보내기로 한 것에 대한 담보로 요구한 것을 그녀는 이후에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것은 내적 의미 없이는 알려지는 것이 가능하지 않다는 신비함들을 포함하고 있기도 하다. 이 신비함들은 이렇다; 염소들의 새끼는 진짜 부부의 것을, 결과적으로 내적인 것을 의미했다- 그 이유가 진짜인 모든 것은 동시에 내적인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그리고 이 염소 새끼가 유다의 쪽에서는 진짜 결합, 즉 결혼은 아니었기에, 다말은 염소 새끼를 수납하지 않았다. 그러나 염소 새끼 대신 “다말”에 의해 표현된 교회의 내적인 것이 결합될지 모를 외적인 것을 가져갔다. 교회의 외적인 것들이 도장, 머리수건, 지팡이에 의해 의미되었는데, 즉 “도장”에 의해서는 동의함 자체가, “머리수건”에 의해서는 외적 진리가, “지팡이”에 의해서는 이 진리의 힘이 의미되었다; 더욱이 이런 것들은 외적 또는 자연적 인간의 결합의 담보물이다.
내적 진리가 외적인 것과 더불어, 또는 유태 민족의 광신적 신앙과 결합함이 남편의 형제된 의무 수행이라는 구실로 며느리와 시아버지의 결합, 다말과 유다의 결합에 의해 표현되었다. 그리고 유태 민족의 광신적 신앙이 교회의 내적인 것과 결합함이 유다가 창녀로서의 다말과 결합함에 의해 의미되었다. 더욱이 이 두 결합의 본성은 각기 아주 정밀하게 일치하지만, 그것들의 품질에 대해서는 우리의 납득력에 얼른 다가오게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천사들이나 선한 영들에게 이 품질은 적나나 하다. 그 이유는 이 품질이 천국의 빛 안에서 표출되기 때문, 이 빛에서 말씀 속의 신비함들은 대낮 같이 열려 있기 때문이다. 이와 대비되는 경우가 인간이 존재하는 자연계의 빛으로 말씀을 읽는 경우일지 모른다. 간략히 말하면: 야곱의 후손들과 더불어 설립된 표현들은 고대 교회의 것들 같이 정밀하지는 않다; 그러나 이 표현들은 히브리 교회 라고 불리우는 에벨(Eber)에 의해 설립된 이들에게 대부분이 있었다. 이 교회에서 예배에 관하여 새로운 종류들이 생겨났다, 즉 태워바침, 제물, 등등인데, 이는 고대 교회는 알려지지 않았었다. 따라서 교회의 내적인 것은 고대 교회의 경우에서 결합되는 방식으로 이 교회와 더불은 표현에서는 있지를 않았다. 대신 거꾸로의 방식으로 인데, 이것이 다말쪽에서는 남편의 형제된 의무 수행이라는 핑계로 며느리와 시아버지의 결합을 수단으로 ; 또한 유다의 쪽에서는 창녀와의 결합이라는 수단으로 이고, 이것들의 내적 의미에서 묘사되어 있다.

“그리고 당신의 머리 수건(머리띠)”. 이는 동의함의 표시인 진리를 수단으로를 의미한다. 이는 “머리수건(kerchief)”의 의미가 진리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머리수건”이 진리를 표시하는 이유는 이것이 옷에 관련되고 있기 때문이고, 옷은 일반적으로 진리들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의복이 육체를 옷입히듯, 진리는 선을 옷입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고대인들 사이에서 자기들을 옷입힌 모든 것은 어떤 특별하고 세세한 진리를 의미했다; 그러므로 튜닠(웃옷, tunic, 속옷)은 이 진리를, 바깥쪽 의복(chlamys)은 저 진리를, 가장 바깥쪽 의복(toga)은 또다른 진리를; 머리의 덮개들 또한 그러해서, 대성직자의 관(miter)과 터번 (turban), 또한 넓적다리와 발의 덮개인 짧은 바지(승마용 바지, breeches), 스타킹(긴양말, stocking) 등등을 분류해서 특별한 진리를 의미하였다. “머리수건”은 가장 바깥, 또는 가장 낮은 진리를 의미했는데, 이 수건은 실들을 다함께 꼬아서 만들었다, 하여 이를 수단으로 이 진리의 단호한 결정이 의미되었다. (아마 T.V등에서 요구 사항 관철을 위해 노조 파업 결의를 발표하고 구호를 외칠 때 머리에 띠(머리 수건)를 두른 것을 목격하는데, 이때 머리띠가 자기들의 결정이 단호함을 표시하는데 한몫을 한다 역자주) “머리수건”이 이런 진리를 의미하는 것은 다른 책에서 보면:
덮개로 사용하는 헝겊이 그 위에 있지 않은 열려진 모든 그릇은 불결하다 (민. 19:15);
이 구절을 수단으로 결정되지 않고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어야 한다는 것이 의미된다; 그 이유가 결정되지 않은 것은 무엇이든 열려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가장 바깥쪽 진리들쪽으로 내적 진리들의 결정됨이 있어야 한다는 것, 다시 말해 내적 진리들은 가장 바깥쪽 진리들에 종결되어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당신의 손에 있는 지팡이.” 이는 이 진리로부터의 힘을 수단으로를 의미한다.
이는 “지팡이(staff)”의 의미가 힘이다로부터, 이는 아래에서 살핀다; 그리고 “손”의 의미가 힘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여기서 “…당신의 손에 있는”이라고 말해진 이유는 가장 낮은 진리의 힘이 여기서 “유다”인 유태 민족의 광신적 신앙에 속한 것과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힘이 진리를 서술하는 것은 이미 살폈다. “지팡이”가 말씀에서는 자주 언급되는 단어에 속하는데도 불구하고 그것에 의해 영계에 있는 어떤 것이 표현된다는 것을 아는 이가 거의 없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마치 모세가 그의 지팡이를 들어 올려 기적을 수행했던 대목을 읽지만 지팡이의 영적 의미에는 무관심하다는 말이다. 또한 어린이들의 동화책 같은 곳에서도 지팡이로 마술을 발휘하는 대목에서도 지팡이는 등장하고 있다. “지팡이”가 힘을 의미하는 이유는 그것이 받침, 지지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손과 팔을 받친다, 그리고 그것들을 통하여 온 신체를 받치기도 한다; 그러므로 지팡이는 그것이 받치는 부분의 의미를 가져온다. 즉 손이나 팔의 의미를 지닌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진리의 힘이 의미된다. 각 장의 끝에서 열거하는 웅대한 사람 안에서 손과 팔은 이 힘에 상응하고 있다.
지팡이에 의해 힘(능력)이 발휘된 것은 위 모세에 관련한 대목들로부터 쉽게 알아진다. 즉, 그는 기적을 행하기 위해 지팡이(막대)를 가져오도록 명령받았다; 그리고 그는 자기 손에 하느님의 막대를 가졌다 (출. 4:17, 20); 막대로 쳤을 때, 이집트의 물들이 피가 되었다 (출. 7:15, 19, 20); 막대를 시내에 뻗쳤을 때, 개구리들이 튀어 올라 왔다 (출. 8:1-11); 막대로 먼지(흙)를 쳤을 때, 이가 되었다 (출. 8:16-20); 막대를 하늘을 향하여 뻗치자, 우박이 있었다 (출. 9:23); 막대를 토지 위에 뻗치자, 메뚜기떼가 나왔다 (출. 10:3-21). 손이 제 1 이기에 이를 수단으로 권능이 의미되고, 그리고 막대는 도구적이어서, 그의 손이 뻗쳤을 때, 기적들이 수행되었다 (출. 10:12, 13); 그의 손이 하늘을 향하여 뻗쳐졌을 때, 이집트의 온 토지에 짙은 어둠이 깔렸다 (출. 10:21, 22); 그리고 그의 손이 수프(Suph) 바다를 향하여 뻗쳤을 때, 동풍에 의해 바다는 마른 토지로 만들어졌다; 다시 그의 손을 뻗치자 바다는 원래대로 되돌아 왔다 (출. 14:21, 26, 27).
더욱이 호렙 바위를 막대로 쳤을 때, 물들이 흘러나왔다 (출. 17:5, 6; 민. 20:7-10). 여호수아가 아말렉과 전투할 때, “모세가 여호수아에게 말했다, 내일 남자들을 뽑아 아말렉과 싸우러 나가라. 나는 언덕 위에서 내 손에 하느님의 막대를 들고 서 있을 것이다. 하여 모세가 손을 들고 있는 동안에는 이스라엘이 승리했으나 손이 내려오면 아말렉이 승리했다” (출. 17:9, 11). 이런 위의 구절들로부터 분명해지는 것은 막대, 지팡이, 손이 힘을 표현했다는 것, 최고 의미에서 주님의 신성한 전능을 표현했다. 이때 당시에는 표현들이 교회의 외적인 것을 구성했고, 천국에 있는 것과 같은 영적, 천적인 것인 교회의 내적인 것이 이 외적인 것과 상응했다는 것이다. 이 상응함으로부터 그들에게 위와 같은 권능의 효력이 있었다. 따라서 모세의 지팡이 자체에 어떤 능력이 있다고 믿으면 얼마나 불합리한 지가 분명해진다.
영적 의미에서 “지팡이”가 힘이다는 것은 예언서들의 많은 구절에서 나타난다:
보라 주 여호와 체바욷께서 예루살렘으로부터 지팡이와 지주(버팀, stay)를, 즉 빵의 온 지팡이를, 그리고 물의 온 지팡이를 거두어가신다 (이. 3:1);
“빵의 지팡이”는 사랑의 선으로부터의 지지와 힘을 표시한다, 그리고 “물의 지팡이”는 신앙의 진리로부터의 지지와 힘을 표시한다. “빵”이 사랑의 선이다는 것은 이미 살핀 바 있다; 그리고 “물”이 신앙의 진리이다도 이미 살핀 바 있다. 에스겔서에도 “빵의 지팡이”가 언급된다 (겔. 4:16; 5:16; 14:13; 시. 105:16).
이사야서에서:
고로 주 여호비 체바욷께서 말하셨다, 시온에 거주하는 나의 백성들아, 이집트로의 길에서 너를 막대로 치고, 너희 위에 지팡이를 들어올리는 앗수르를 두려워 말라. 여호와께서는 그를 채찍으로 휘저으실 것이다, 마치 오렙(Oreb)의 바위에서 미디안에게 재앙이 덮친 것과 같다; 그리고 그분의 지팡이가 바다 너머 있을 것이다, 그분은 이집트로의 길에서 그것을 들어올리실 것이다
(이. 10:24, 26);
위에서 “지팡이”는 추론함과 기억 속의 지식으로부터의 힘을 표시한다. 이는 신앙의 진리들에 맞서 기억 속의 지식으로부터 추론하는 이들의 힘과 같다, 그리고 이 진리들을 악용하든지, 쓸모없게 만든다. 이것이 앗수르가 지니고 친 “막대”에 의해, 그리고 이집트로의 길에서 들어올린 “지팡이”에 의해 의미된다. “앗수르”에 의해 추론함이 뜻해짐에 대하여는 1186항을; “이집트”에 의해 기억 속의 지식이 뜻해짐에 대하여는 1164, 1165, 1186, 1462항을 보라.
스가랴서에서:
아시리아의 교만이 아래로 끌어 내려지고, 이집트의 지팡이가 멀리 떠날 것이다 (슥. 10:11).
이사야서에서:
너희는 부러진 갈대의 지팡이에, 이집트의 지팡이에 의지했다; 만일 인간이 그것에 의지하면, 그의 손 안으로 들어가서 손을 찌를 것이다 (이. 36:6);
“이집트”는 기억 속의 지식을 표시하고; 그것들로부터의 힘이 영적인 것들에서 “부러진 갈대로부터의 지팡이”이다; 그것이 들어가 찌르는 “손”은 말씀으로부터의 힘이다.
다시:
여호와께서는 사악한 자의 지팡이를 부러트리실 것이다, 치수를 재는 막대 (이. 14:5);
위에서 “지팡이”와 “막대는 힘을 분명하게 표시한다.
예레미야서에서:
탄식하라, 모압 주위의 모든 자들이여, 그리고 말하라, 어떻게 힘센 지팡이가 부러지고, 아름다움의 지팡이가 부러졌는가! (예. 48:17);
“힘센 지팡이”는 선으로부터의 힘을 표시하고, “아름다움의 지팡이”는 진리로부터의 힘을 표시한다.
호세아서에서:
나의 백성은 자기들의 나무에게 질문하고, 그들의 지팡이가 그들에게 대답할 것이다; 그 이유가 매춘의 영이 그들을 엉뚱한 쪽으로 인도했기 때문이다 (호. 4:12);
“나무에게 질문함”은 악들을 상담함을 뜻한다; “지팡이가 대답함”은 거짓이 거기로부터 있음을 뜻한다. 이 거짓은 그들이 확증하는 악으로부터 힘을 가진다; “매춘의 영”은 악으로부터 있는 거짓의 생명을 표시한다. 다윗서에서:
그렇다, 내가 죽음의 골짜기를 걸을 때, 나는 나에게 있을 어떤 악도 겁내지 않을 것이다; 그 이유가 당신이 나와 더불어 계시기 때문이다; 당신의 막대와 지팡이가 나를 위로한다
(시. 23:4);
“막대와 지팡이”는 신성한 진리와 선을 표시하고, 이것이 힘을 가진다. 다시:
사악한 자의 지팡이는 의로운 자의 구역에서 안주하지 못할 것이다 (시. 125:8).
[9] 다시:
당신은 쇠 막대로 그들을 짓부수실 것이다; 당신은 옹기장이의 그릇들 같이 그들을 흩으실 것이다 (시. 2:9);
“쇠 막대”는 자연 평면에 있는 영적 진리의 힘을 표시한다, 그 이유는 영적 진리가 들어 있는 모든 자연적 진리는 힘을 가지기 때문이다; “쇠”는 자연적 진리를; 계시록서에서도:
극복하는 자, 그리고 끝까지 내 일들을 준행하는 자, 그에게 나는 민족들을 다스리는 힘을 줄 것이다; 그는 쇠 막대로 그들을 풀을 뜯게 할는지 모른다; 옹기장이의 그릇 같이 그들은 조각들로 부셔질 것이다 (계. 2:26, 27; 또한 12:5; 19:15).
지팡이가 진리의 힘을, 즉 진리를 통한 선의 힘을 표현했기에, 왕은 짧은 지팡이 같은 홀을 지녔다; 그 이유가 왕에 의해 진리 측면에서의 주님이 표현되었기 때문이다; 신성한 진리는 왕권 자체이시다. 홀이 그것들에 속하는 힘을 의미하는데, 이는 위엄에 의해서가 아니라 진리에 의해, 즉 통치하는 진리에 의해, 이 진리는 선으로부터 있는 것 외의 다른 진리는 아니다; 고로 원칙적으로 신성한 진리, 그리고 기독인들과 더불어서는 주님, 이분으로부터 모든 신성한 진리가 있다.

그리고 그는 그것들을 그녀에게 주었다. 이는 이러므로 해서 그것은 확실해졌음을 의미한다. 이는 그녀가 요구하고 주어진 담보물의 의미가 확실함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리고 그녀에게 왔다. 이는 결합을 의미한다. 이는 누군가에게 “오다”, 또는 “들어가다”의 의미가 결합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리고 그 여자는 그로부터 임신하였다. 이는 이렇게 해서 받아졌음을 의미한다.
이는 “임신함”의 의미가 받아졌음 이다로부터; 그러나 받음의 품질은 앞 항을 보라.

19-23절. 그리고 그 여자는 일어났다, 그리고 너울을 벗었다, 그리고 그녀의 과부 옷을 입었다. 20 그리고 유다는 그의 동료 아둘람족의 손에 염소 새끼를 들려서 여인의 손에서 담보물을 받아오도록 보냈다. 그리고 그는 그녀를 발견하지 못했다. 21 그리고 그는 그곳의 사람들에게 물었다, 말하기를, 길가 샘들에 있었던 창녀는 어디에 있소? 그리고 그들이 말했다, 거기에 창녀는 없었다. 22 그리고 그는 유다에게 되돌아 와서 말했다, 나는 그녀를 발견하지 못했다. 그리고 또한 그곳의 사람들이 말했다, 거기에 창녀는 없었다.
23 그리고 유다는 말했다, 그녀로 그것을 자기에게 가져가게 하라, 그렇지 않으면 필시 우리가 책임을 뒤집어 쓸지 모른다. 보라 나는 이 새끼를 보냈다, 그리고 너는 그녀를 찾지 못했다.

그리고 그 여자는 일어났다. 이는 승강을 의미한다. 이는 “일어남”의 의미가 어떤 승강함이다로부터 분명해진다. 일어남에 의해 의미된 승강함은 영적 의미에서는 희미한 상태로부터 명료한 상태로 승강함이다; 이는 마치 무지의 상태로부터 총명의 상태로의 승강함과 비슷하다; 그 이유가 이런 길에서 인간은 세상의 빛의 상태로부터 천국의 빛의 상태로 승강되어진다.

그리고 갔다. 이는 생활을 의미한다. 이는 “가다”의 의미가 사는 것이다로부터 분명해진다. “가는” 것이 내적 의미에서는 사는 것이다는 말이 실로 인간이 존재하는 생각들의 관념들로부터서는 추상적인 듯, 또는 멀리 떨어진 듯 나타날런지 모른다. 그런 이유는 인간은 시간과 공간 안에 있기 때문, 이 시공으로부터 생각 속의 관념도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가다, 발전하다, 여행하다, 이동하다 같은 것에 대한 생각을 말한다. 이런 행동들이 공간 안에서, 또한 시간 안에서 존재하기에, 그리고 공간과 시간이 그것들에 관한 그의 생각과 짜깁어저 있기에, 삶의 상태들이 그것들에 의해 의미된다는 것을 얼른 납득하는 것이 쉽지 않다. 그러나 그것들에 관한 시공으로부터의 생각을 벗을 때, 또는 분리될 때, 의미된 영적인 것이 결과된다. 그 이유가 영계, 또는 천국에서는 시공에 관한 생각은 전혀 없고, 대신 생명의 상태에 속하는 것들만이 생각 속에 있기 때문이다. 천사나 영들의 경우도 인간의 경우 같이 자기들이 이 장소로부터 저 장소로 전진하고 이동하는 것이 나타난다; 그러나 이런 나타남을 생산하는 것은 삶(생명)의 상태들의 변화이다. 그들도 인간의 경우와 같이 자신들로부터 살아간다, 그럼에도 여전히 그들은 자신들로부터 살지 않고 생명의 전부이신 주님의 신성으로부터 살아간다. 천사들과 더불은 이런 나타남들이 진짜, 진실, 현실로 존재함(real)이라 불리운다, 그 이유는 마치 그것들이 (우리가 자연계의 생활을 보듯) 실제로 있는 것처럼 나타나기 때문이다.
때로 나는 이 나타남들에 관하여 영들과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다; 그리고 선 안에 있지 않은 이들, 결과적으로 진리 안에 있지 않은 이들은 자기들이 자신들로부터 산다는 것이 나타남이라고 하는 것을 듣고 싶어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그들은 자신들로부터 살고 싶어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신들로부터 살지 않는다는 것, 장소로부터 장소로의 발전은 변화이고, 생명의 상태의 발전이다는 것을 생생한 경험에 의해 그들에게 보여진 것 외에 말해진 것은, 그들은 자신들로부터 생명을 가진다는 것밖에 더 아는 것이 없음에 만족했을지 모른다는 것, 마치 그들은 자기들 안의 생명이 실제로 자신들로부터 있었는지조차 더 이상 가질 수 없듯 한 것과 같다; 그래도 여전히 더 나은 것은 어떻게 이런 경우가 실제로 있는지를 아는 것이다, 그 이유는 그때 그들이 진리 안에 있기 때문에서 이다, 만일 진리 안에 있다면, 그들은 천국의 빛 안에도 있는다; 그 이유가 천국의 빛은 주님의 신성으로부터 있는 진리 자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고로 그들은 자신들을 위해 선을 주장하지 못하고, 악이 그들에게 달라붙지도 못한다. 천사들은 지식을 수단으로, 뿐만 아니라 지각을 수단으로 이런 진리 안에 있다.
영계에 있는 시간들과 공간들은 생명의 상태들, 그리고 생명의 모든 것은 주님으로부터 이다는 것이 아래 경험으로부터 보여질는지 모른다. 모든 영과 천사는 오른쪽에서 선을, 왼쪽에서 악을 본다. 그리고 이 보는 것은 그가 어느쪽으로 방향을 틀든지 마찬가지이다. 다시 말해 선과 악이 그에게 나타나는 것은 그가 동쪽을, 서쪽을, 남쪽을, 북쪽을 향하여 쳐다보든지 그렇게 나타난다는 말이다. 이것은 영과 천사 모두 각각에게 진실이다; 하여 만일 둘이 쳐다보고 있는데, 하나는 동쪽을, 하나는 서쪽을 쳐다본다 해도, 둘에게 여전히 선은 오른쪽에서, 악은 왼쪽에서 나타난다. 이런 나타남은 보여지는 영들로부터 아주 멀리 떨어져 있어도, 설사 자기 뒤에 있어도 그러하다. 이상의 살핌으로부터 넌지시 암시되는 것은, 생명의 모든 것이 주님으로부터 이다는 것, 또는 주님은 모든 이의 생명 안에 계신다는 것이다; 그 이유가 주님은 거기서 태양으로서 나타나시고, 그분의 오른쪽에 선, 또는 양이 있고, 그분의 왼쪽에 악, 또는 염소가 있다. 그러므로 모든 이와 더불어 비슷해 있는 것은 이미 말한 대로 주님이 생명의 모든 것 이시기 때문이다. 아마 이런 사항은 인간에게는 역설적인 듯 보여질 수밖에 없다, 그 이유는 인간이 세상에 있는 한, 그는 세상적인 것들로부터 생각들을 가져야 하기 때문, 결과적으로 시공으로부터 생각을 가져야 하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영계에서, 위에서 말한 대로, 생각들은 시공으로부터가 아니고, 애착들과 이 애착으로부터의 생각들의 상태들로부터 이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말씀에 있는 시공 역시 상태들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녀 위로부터 너울을 벗었다. 이는 불명료했던 것이 흩으려졌음을 의미한다. 이는 “자신을 너울로 덮음”의 의미가 불명확한 진리쪽에 있음이다로부터; 여기서는 “너울을 벗음”이므로 이 불명확함이 흩으려짐이 된다.

그리고 그녀의 과부 차림새의 옷을 입었다. 이는 총명을 의미한다. 이는 “과부”의 의미가 선이 없이 진리 안에 있으나, 여전히 선에 의해 인도되기를 바라는 이들이다로부터 (4844항); 그리고 “옷”의 의미가 진리들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를 모두 취합하면 총명이 의미되는 이유는 진리들은 총명을 구성하는 것밖에 더 없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지적 마음은 선으로부터 진리들을 통하여 천국의 빛 안에 있고, 천국의 빛은 총명인데, 총명은 신성한 선으로부터 신성한 진리이기 때문이다. 과부차림새의 옷을 벗는 것이 총명을 의미하는 더 많은 이유는, 일반적 의미에서 진리 안에 있는 자가 선을 수단으로 총명의 진리, 고로 총명 안으로 인도되기를 바라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래에 간략히나마 설명을 더 한다면 어떻게 이 본문에서 이런 의미가 있는지를 알는지 모른다. 인간에 있는 진리는 그 진리가 선에 의해 인도될 때까지 총명의 진리는 아니다; 그리고 이 진리가 선에 의해 인도될 때, 그것은 처음 동안은 (진짜라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총명의 진리가 되어 있는다. 그 이유가 진리는 자체로부터 생명을 가지지 않고 선으로부터 가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후 인간이 진리에 따라 살 때, 그 진리는 선으로부터 생명을 (진짜로) 가진다. 그 이유가 이 때야말로 진리의 생명이 인간의 의지 안으로 주입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의 의지로부터 그의 행동 안으로, 고로 인간 전체에 주입된다. 인간이 알기만 하거나 또는 납득만 하는 진리는 그의 의지의 바깥쪽에 머무르고 있다, 따라서 그의 생명의 바깥쪽에 있는 셈이다; 그 이유가 인간의 의지가 그의 생명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이 진리를 뜻할 때, 이 진리는 그의 생명의 문턱 위에 있는다; 그리고 뜻함으로부터 그가 행할 때, 그때 진리는 그의 전체 인간이 되어 있다; 그리고 그가 이를 반복적으로 행할 때, 이것은 그가 습관으로부터 되돌아 가는 것 뿐만 아니라 애착으로부터 되돌아 가는 것이고, 자유함에서 되돌아 가는 것이다. (아마 자신 스스로 어떤 것을 행하고 기뻐 흡족해 하는 경우 그것 자체가 자신의 일부인 듯 여겨지는 자신의 경험을 예로 생각해보라 역자주) 이와 반대로 생각만 하고 행하지 않는 것, 더 나아가 생각은 했으나 행하고 싶지 않은 것은 자신 바깥쪽에 있고, 이는 자그마한 바람만 불어도 기다렸다는 듯이 날려가는 겨일 뿐이다. 이는 다른 삶에서 사실상 있는 일이다; 이로부터도 일함들이 없는 신앙이 이런 겨에 불과하다고 생각되지 않는가? 이로부터 총명의 진리가 무엇인지도 분명해진다. 즉 이것은 선으로부터 있는 진리이다. 진리는 이해력이라 단언되고, 선은 의지력이라 단언된다. 같으나 다른 말로, 진리는 교리 속에, 선은 생활 속에 있다.

그리고 유다는 염소들 중의 새끼를 보냈다. 이는 결혼의 담보물을 의미한다. 이는 “염소들 중의 새끼”가 부부의 사랑의 담보물, 또는 결합의 담보물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의 동료 아둘람족의 손을 수단으로. 이는 거짓을 수단으로를 의미한다. 이는 “유다의 동료”인 아둘람족 히라의 표현함이 거짓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여인의 손으로부터 담보물을 받아 가기 위하여. 이는 외적인 담보물 대신에를 의미한다. 이는 담보물인 “도장, 머리수건, 지팡이”의 의미가 외적 또는 자연적 인간의 결합의 담보물 이었다로부터, 고로 외적인 담보물 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러나 그는 그녀를 찾지 못했다. 이는 자기 쪽에서, 즉 유다쪽에서 결혼(부부)에 관한 어떤 것도 있지 않았기 때문에를 의미한다. 그 이유는 그가 그녀에게 온 것은 아내로서가 아니라 창녀로서 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줄을 아는 다말이기에 그녀는 염소 새끼를 바라지 않았는 바, 이를 수단으로 결혼 담보물이 의미되었다. 실로 다말쪽에서도 진짜(순수한) 결혼의 어떤 것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 이유가 그녀의 결합은 남편의 형제됨의 의무 수행을 빌미로 해서 시아버지와 며느리 사이의 결합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사항들이 유다가 그녀를 발견하지 못함에 담겨 있다.

그리고 그는 그 장소의 사람들에게 물었다, 말하기를. 이는 이 진리들이 상담되어졌음을 의미한다. 이는 “묻다”의 의미가 상담하다 이다로부터; 그리고 “사람들”의 의미가 진리들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장소의 사람들”은 이것의 상태에 관한 진리들인데, 그 이유는 “장소”가 상태이기 때문이다.

창녀는 어디에 있소? 이는 그것이 거짓이었는지 여부를 의미한다. 이는 “창녀”의 의미가 거짓이다로부터 알려진다.

길가 샘들에 있었던. 이는 그것이 진리 같이 나타났음을 의미한다. 이는 “샘들”의 의미가 교회의 진리들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길가”라고 말해지는데, “길”은 진리를 서술하고, 반대적 의미에서는 거짓을 서술한다; 그리고 묻는 말, “길가 샘들에 있었던 창녀는 어디 있는가?”에 의해서는 진리 같이 나타났던 거짓이었는 지가 의미된다.

그리고 그들은 말했다. 이는 진리들로부터의 지각을 의미한다. 이는 말씀의 역사 부분에서 “말하다”의 의미가 지각하다 임으로부터 알게 된다. 진리들로부터 지각함이 의미된 이유는 “장소의 사람들이 말했기” 때문, 그리고 “장소의 사람들”은 진리들이기 때문이다.

거기에 창녀는 없었다. 이는 그것은 거짓이 아니었다를 의미한다. 이는 “창녀”의 의미가 거짓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단어들의 의미에 관하여 펼쳐보인 이런저런 사항들이 시리즈들 안에 포함되었다는 것은 앞에서 말해온 것으로부터 어느 정도는 나타날는지 모른다; 그리고 더욱이 그것들은 유태 교회의 내적, 외적 진리, 즉 다말에 의해 표현된 내적 진리와 유다에 의해 표현된 외적 진리 사이의 결합의 본성이 알려지지 않으면 납득되어질 수 없는 사항들이다. 이런 사항들이 미리 알려져야 이 장 안의 단어들의 의미 파악도 그늘 안으로 빠져들지 않게 된다. 그 이유가 내적 인간의 시각인 이해력이 빛이든, 그늘이든 가지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런 사항들은 앞서 가졌던 개념에 일치하지 못하면 그늘 아래 있어질 수밖에 없게 된다. 어쨌든 시리즈에 등장하는 이런저런 세부 사항들, 너무나 무수해서 인간에 의해서는 혼돈과 더불어 납득조차 힘들어도 천사들의 이해력의 빛 안으로 명료하게 들어 간다. 이것만 보아도 인간의 총명은 천사의 총명과는 비교조차 안될지 모른다.

그리고 그는 유다에게 되돌아 왔다. 이는 반성함(곱씹어봄, reflection)을 의미한다. 이는 “유다의 동료 아둘람족”에 의해 거짓이 의미된다는 사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리고 발생한 것에 관련되어 되돌아 온 것은 거짓이라고 말해질 때, 이는 유다의 동료로부터 말해진 바, 이는 마음에 상기하는 것, 그리고 어떻게 이 경우가 있는지를 곰곰이 셍각하는 것밖에 더 아니다.

그리고 말했다, 나는 그녀를 찾지 못했다. 이는 이것은 거짓을 수단으로 밝혀질 수 없음을 의미한다. 이는 “발견하지 못함”의 의미가 밝혀질 수 없음이다로부터 분명해진다; 그리고 아둘람족이 이를 말하기 때문인데, 그에 의해 거짓이 의미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어진 말은 “나는 그녀를 찾지 못했다”에 의해 거짓은 그것을 밝힐 수 없었다, 또는 그것은 거짓을 수단으로 밝혀질 수 없다가 의미된다.

그리고 또한 그 장소의 사람들이 말했다, 거기에 창녀는 없었다. 이는 그것이 거짓이 아니었음을 진리로부터 지각했음을 의미한다. 이는 앞의 설명을 참조하라.

그리고 유다가 말했다, 그녀로 그것을 그녀에게 가져 가게 하라. 이는 이것은 그에게 무관심이었다를 의미한다. 이는 이 말들에 있는 애착으로부터 알게 되는데, 분개함과 이로부터의 무관심이다.

필시 우리는 책임을 면치 못할런지 모른다. 이는 비록 그것이 망신거리였다 해도를 의미한다. “책임을 짐, 수치스러움을 면치 못함”의 의미가 불명예, 망신거리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보라 나는 새끼를 보냈다. 이는 담보물이 있으니 충분하다를 의미한다. 이는 “염소들 중의 새끼”의 의미가 부부 사랑의 담보물, 또는 결합의 담보물이다로부터, 그러나 여기서는 오직 담보물만을 의미하는데, 그 이유는 이것을 다말이 수령하지 않았기 때문, 즉 부부의 사랑 따위는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이 이유이기에, “그는 그녀를 찾지 못했다”에 의해 만일 부부적인 어떤 것이 있지 않다면이 의미되어 있다; 이것 또한 무관심으로부터 흐르고 있다. 사실 이런 사항들은 반복 설명할 이유조차 없기는 하다, 그 이유가 이것들이 이해력의 그늘에 가리워질 수밖에 없는 탓이다. 또한 이해력의 그늘에 빠져든 것은 불신앙의 늪에 빠져든다. 예를 들면, 교회는 부부적인 것, 즉 선과 진리의 부부적 임이 있어야만 한다는 것; 또한 외적인 것 안에 내적인 것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는 것; 그리고 이 둘 없이 교회는 아무것도 아니다 등등이다. 현재의 단어들 안에서 유태 교회에 있는 내적인 것과 외적인 것들이 내적 의미에서 묘사되고 있다. 그런데도 보여지는 결과란, 이 민족에 관한 한, 외적인 것 안에 어떤 내적인 것도 전혀 없었다는 것, 이 민족들로부터 추상화된 율법과 규례만 거기에 있었다는 점이다.
유태 민족과 더불어 교회가 있었다는 것, 그들은 여느 다른 민족에 앞서 뽑히고 사랑된 민족이다고 믿으며 당차게 (설교 강단에서조차) 말해지는 것을 (요즈음의 교회에서도) 심심찮게 목격하기도 한다; 이들의 항변인즉, 그들이 이렇게 선택된 백성이기에 그렇게도 많은 기적들이 그들 앞에서 있었고, 많은 예언자들이 그들에게 보내진 것이고, 더구나 그들로 말씀을 소유하게 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이 민족 자체는 교회로부터의 어떤 것도 지니지 않았다; 그 이유가 그들의 교회가 선행 안에 있지 않았기 때문, 그들은 무엇이 진짜 선행인지를 모른다, 고로 주님에 대한 신앙도 없었다; 실로 그들은 그분이 오시리라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그분이 오시면, 자신들을 다른 민족 위에 우뚝 서게 해줄 것이라고만 상상했는데, 오셨다는 그분이 그렇지 않자, 그분을 철저히 거절했다; 게다가 그분의 천국 왕국에 관하여는 귀를 여는 것조차 지겨워했다. 교회의 내적인 사항들이라면 교리 측면 뿐만 아니라 생활 측면에서도 배제했다. 이 정도만 가지고도 이 민족에 있는 교회 속에는 아무것도 있지 않았다고 결말지을 수 있을 것이다.
교회가 사람들과 더불어 있는 방식이 있고, 교회가 사람들 안에 있는 방식이 있다. 예를 들면, 기독 교회는 말씀을 가지는 이들과 더불어 있다, 그리고 교리로부터 주님을 설교한다; 그러나 그들이 선과 진리의 결혼 안에 있지 않으면, 즉 그들이 이웃을 향한 선행과 이로부터의 신앙 안에 있지 않으면, 고로 교회라는 외적인 것들 안에 내적인 것들을 담고 있지 않으면, 그들 안에는 교회에 관한 어떤 것도 있지 않은 것이다. 교회는 내적인 것들로부터 분리된 외적인 것들 안에 있는 이들 안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또한 선행으로부터 분리된 신앙 안에 있는 이들 안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또한 교리로부터 주님을 인정하는데 생활로부터 인정함이 나타나지 않는 이들 안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교회가 민족과 더불어 있는 경우가 있고, 민족 안에 있는 경우가 있다는 말이다. 이 둘은 경우가 아주 다르다.
이 장은 내적 의미에서 유태 민족과 더불어 있는 교회와 유태 민족 안에 있는 교회를 묘사하고 있다. 이 민족과 더불은 교회의 품질은 남편의 형제된 의무를 수행한다는 빌미 아래 다말이 유다와 결합함에 의해서 묘사되어졌고; 이 민족 안에 있는 품질은 유다가 창녀로서의 다말과 결합함에 의해 묘사되었다. 이 이상의 세부적 설명은 생략한다, 그 이유는 그 이상의 것에 대한 이해는 인간의 경우 이해력의 그늘 아래로 빠져들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천사의 몫일지 모른다 역자주); 이해력의 그늘이라 말한 이유는 오늘날에도 교회의 내적인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자가 너무나 적기 때문이다. 이웃을 향한 선행이 뜻함 안에 존재한다는 것, 그리고 뜻함으로부터 행동함 안에 존재한다는 것, 그리고 이로부터 신앙이 지각함 안에 존재한다는 것을 누가 아는가? 이것을 모를 때, 특히 부정될 때, 마치 선행의 일함 없이 신앙만으로 구원받음이 있다고 함으로 선행을 부정해버릴 때, 이 장에서 묘사되는 것, 즉 유태 민족과 더불은, 유태 민족 안에 있는 교회의 외적인 것과 내적인 것의 결합에 관한 내적 의미로부터의 이해함은 그늘 아래 추락되고 만다. 선행이 내적인 것이고 교회의 본질이다는 것을 모르는 이들은 본문의 문맥을 이해함을 위한 첫 단계부터 너무나 멀어지고 만다. 따라서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향한 사랑에 관련되는 것들이 생명의 모든 것이 되어 있는 곳, 결과적으로 지혜의 모든 것, 총명의 모든 것이 있는 곳, 천국에 있는 무수한 사항들로부터는 아주 멀리 떨어져 있다.

24-26절. 그리고 석 달이 지나갔다, 그리고 누군가 유다에게 말했다, 말하기를, 당신의 며느리 다말이 음란하게 놀아났다. 그리고 더구나 그녀는 매춘으로 아이와 함께 있다. 그리고 유다가 말했다, 그녀를 끌어내라, 그리고 그녀를 태워라. 25 그 여자는 끌려나갔다, 그리고 그 여자는 그녀의 시아버지에게 보내졌다, 말하기를, 이것들이 있는 사람에 의해서 나는 아이와 함께 있다. 그리고 그 여자는 말했다, 청컨대 이것들, 도장과 머리 수건과 지팡이가 누구의 것인지 인정하라. 26 그리고 유다는 그것들을 인정했다, 그리고 말했다, 그 여자가 나보다 더 정당하다. 내가 그녀에게 내 아들 셀라를 주지 않은 까닭이다.

그후 석 달이 지났다. 이는 새로운 상태를 의미한다. 이는 “3”의 의미가 완전인 것, 이로부터 마지막과 처음 다함께, 또는 끝과 시작 모두이다로부터; 그리고 “달”의 의미가 상태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내적 의미에서 시간의 모든 기간들, 시간, 날, 주, 달, 년, 시기, 시대 같은 것들은 상태들을 의미한다; 또한 이것들이 더 세분해져 있는 경우도 마찬가지 이다; 즉 하루의 때들인 정오, 저녁, 밤, 아침; 그리고 한 해의 계절인, 여름, 가을, 겨울, 봄; 그리고 인생의 구분되는 시기인 유아, 어린 시절, 젊은 이, 성년, 노년; 등등인데, 이런 것들 모두가 각각의 상태를 의미한다. 어떤 상태들인지는 이미 살폈다.
때들이 상태들을 의미하는 이유는 때들이 다른 삶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영들과 천사들의 삶의 발전은 실로 때들에서 같이 나타난다; 그러나 그들은 인간이 때들을 생각하듯하는 때들에 관한 생각은 없다; 그들의 생각은 생명의 상태들로부터 이고, 이것은 때들에 관한 관념 없이 있다. 이런 이유로 그들 삶의 발전은 다른 시기들로 구별되지 않는다, 그 이유가 거기서 그들은 늙는 쪽으로 성장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날들이나 햇수들 같은 것이 없다, 그 이유는 그들의 태양인 주님은 언제나 떠 있고, 지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때에 관한 관념이 그들의 생각들 안으로 들어가지 않는다, 그러나 오직 상태와 상태의 발전에 대한 관념만이 그들의 생각 안으로 들어간다. 그들의 관념들은 감각 이전에 존재한 것들로부터 가져가진 것들이다.
이런 사항들은 제아무리 설명해도 역설적이다고 느낄 수밖에 없는데, 그런 이유는 인간의 생각 속의 모든 관념이 여하튼 시공에 관한 것이 섞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인간은 시공으로부터 그의 기억과 재수집이 있고, 그의 더 낮은 생각, 즉 물질이라 부르는 것도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이런 관념들을 오게 하는 기억은 다른 삶에서는 정지된 채로 있다. 다른 삶에 있는 그들은 내면의 기억 안에 있다, 그리고 그것의 생각 속의 관념들 안에 있다; 그리고 이 후자의 기억으로부터의 생각은 시간을 가지고 있지 않고 그것에 인접한 공간도 없다. 그 대신 상태들과 상태들의 발전들이 있다. 이로부터 역시 그것들은 상응하고, 이와 같은 상응의 결과 말씀에 있는 시간은 상태들을 의미한다.
“약 석 달 후”에 의해서 새로운 상태가 의미되는 이유는 “달”에 의해 상태가 의미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미 말한 바대로, “3”에 의해 마지막 그리고 처음 다 함께가, 또는 마지막 그리고 시작 모두가 의미된다. 이런 이유는 영계에서 이 상태로부터 저 상태로의 계속적인 발전이 있기 때문, 결과적으로 모두 각각의 상태의 마지막 또는 끝에서 처음 또는 시작이 있다. 그러므로 계속적이다, 고로 “석 달 후”에 의해 새로운 상태가 의미된다. 땅 위 주님의 왕국 또는 영계인 교회에도 역시 비슷해서, 한 민족과 더불은 교회의 끝에서는 저 민족과 더불은 새로운 교회의 시작이 언제나 있다. 고로 마지막은 처음으로 이어지기에, 주님에 관련해서 몇 번씩 말해지는 것은, 그분은 마지막과 처음이시다는 것이다 (이. 41:4; 44:4; 계. 21:6; 22:13); 관계적 의미에서 항구적인 것, 최고 의미에서 영원한 것이 의미된다.

그리고 이런 말이 유다에게 말해졌다. 이는 전달됨을 의미한다. 이는 “말해짐”의 의미가 어떤 소식이 전달됨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말하기를, 당신의 며느리 다말이 음란하게 놀아났다. 이는 부부적인 어떤 것이 그들 사이에 존재한다는 것은 거짓임을 지각함을 의미한다. 이는 “말하다”가 역사 부분의 말씀에서는 지각하다 이다로부터; “음란하게 놀다”의 의미가 거짓이다로부터; 다말의 표현함이 표현 교회의 내적인 것이다로부터; 그리고 “며느리”의 의미가 교회의 진리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러므로 “말하기를, 다말, 당신의 며느리가 음란하게 놀았다”는 말에 의해 부부적인 어떤 것이 그들 사이에 존재한다는 것은 거짓임을 지각함이 의미된다. 어떻게 시리즈에서 이런 것들이 있는지에 대하여는 앞에서 살핀 바도 있다, 즉 자기들의 광신적 신앙으로부터의 유태 민족은 교회의 내적인 것을 창녀로서 지각했다, 그리고 내적인 것으로부터 설교함이나 생활함은 매춘으로서 지각했다. 그 이유는 내적인 것 없이 외적인 것에만 있는 이들은 교회의 내적인 것을 창녀나 매춘으로밖에 달리 간주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즉 그들은 참된 것을 거짓이라고, 거짓을 참되다고 부른다.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는 외적인 것만으로는 무엇이 진짜인지, 가짜인지를 누구도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외적 시각으로부터 있는 것들을 판단할 내적 시각이 반드시 있어야만 한다, 이렇기 위해서 내적 시각은 반드시 천국의 빛에 있어야 한다. 주님에 대한 신앙 안에 있고, 이 신앙으로부터 말씀을 읽지 않으면, 우리의 내적 시각은 천국의 빛 안에 있지 않는다.
유태 민족이 내적인 것 없이 외적인 것 안에 있었다는 것, 그러므로 진리가 거짓이다고, 거짓이 진리이다고 믿었다는 것은 그들의 가르침만 엿보아도 판별된다. 즉 그들은 원수를 미워함을 허용할 수 있다는 것, 자기들의 광신적 신앙으로부터 있지 않은 이들을 미워하는 삶을 꾸렸다는 것 등등이다. 그들은 이렇게까지 조차 믿었는데, 즉 자기들이 이방인들을 야만적이고 잔인하게 처우하는 것을 여호와께서 흡족해 하신다는 것, 하여 그들을 죽인 후 시체를 새나 짐승이 먹게 노출시켜 놓거나, 그들을 데려다 톱질과 써레질과 벽돌구이를 시켰다. (삼하. 12:31). 더욱이 어떤 원인으로 적이라고 선포되면 동료였던 자도 위와 같은 식으로 처리했다. 고로 그들의 광신적 신앙 안에 내적인 것은 하나도 없었다는 것이 분명하다. 만일 누가 그들에게 위와 같은 짓이 교회의 내적인 것에 반대된다고 말해지면, 그들은 그것은 거짓이다고 응수했다. 그들이 외적인 것들 안에만 있고, 내적인 것에는 완전히 무지했다는 것, 그리고 내적인 것에 반대되는 생활을 했다는 것은 주님의 가르침에서도 분명해진다 (마. 5:21-48).

그리고 더구나 그 여자는 매춘으로 아이와 함께 있다. 이는 거기에서 어떤 것이 생산되어질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자궁 안에서 운반함” 또는 “아이와 더불어 있음”의 의미가 어떤 것을 생산하는 것이다로부터, 그 이유가 “씨”에 의해 신앙의 진리가 의미되기 때문, 그리고 “임신”에 의해 신앙의 진리를 받아들임이 의미되기 때문, 이로부터 “자궁 안에서 운반함” 또는 “아이와 더불어 있음”에 의해 생산함이 의미된다; 그리고“매춘”의 의미가 거짓이다로부터, 즉 그들의 광신적 신앙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위 각각의 의미로부터, 이 말, 즉 “말하기를, 다말, 당신의 며느리가 음란하게 놀아났다”; 그리고 더욱이 보라, 그녀는 매춘으로 아이와 함께 있다“에 의해 부부적인 어떤 것이 그들 사이에 존재하는 것은 거짓이다는 것, 그리고 거기로부터 어떤 것이 생산되어질 수 있다는 것을 지각함에 의미되어진다. 생산되는 것, 이를 교회에 응용하면, 진리를 수단으로 생산되는 선을 표시한다; 그리고 이것은 진리가 이해력을 통과해서 의지력 안으로 건너갈 때, 그 다음 의지력으로부터 행동 안으로 건너갈 때 생산되어진다. 그 이유가 앞에 말한 바, ”씨“는 신앙의 진리이고, ”임신“은 받음이다, 그리고 받음이 결과되는 것은 이해력 속에 있는 진리가 의지력 속에 있는 선 안으로 건너갈 때, 또는 신앙 속에 있는 진리가 선행 속에 있는 선으로 건너갈 때이다; 그리고 이것이 의지 안에 있을 때가 자궁 안에 있을 때이고, 이때 처음 생산되어진다; 그리고 인간이 행동에서 선 안에 있을 때, 즉 그가 의지로부터 선을 생산할 때, 고로 자유함과 기뻐함으로부터 선을 생산할 때, 자궁 밖으로 나가는 것, 또는 출생됨이다. 이것 역시 재출생, 또는 거듭남에 의해 뜻해진다. 이로부터도 “아이와 함께 있다”에 의해 영적 의미에서 의미되는 것이 분명해진다. 어쨌든 여기서는 반대적인 것, 즉 어떤 선도 생산되어질 수 없다가 의미되어진다; 그 이유가 여기서 묘사되는 이 민족은 어떤 진리 안에도 있지 않았기 때문, 그런 이유는 그들은 교회의 어떤 내적인 것도 없었고, 오직 거짓 안에 있었기 때문이다.
내적 인간을 만드는 재탄생 또는 거듭나지는 것이 이 민족에게는 통째로 알려지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이런 주제는 그들에게는 창녀처럼 여겨졌다. 이는 유태인의 지도자 중의 한사람인 니고데모로부터도 알게 된다 (요. 3:1-13). 즉 그가 말했다, “어떻게 인간이 늙었는데, 다시 태어날 수 있습니까? 그가 두 번째로 자기 어머니의 자궁 안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까?” 이 대목에서 주님께서 그분의 왕국과 교회 속의 내적인 것을 여셨다는 것은 아마 대체로 기독교계에 알려져 있다, 그러나 사실 이런 내적인 것들은 고대인들에게 이미 알려져 있었다; 즉 이런 것이다- 인간이 생명 안으로 들어가기 위하여 재탄생되어야 한다는 것; 그때 그는 옛 인간을, 즉 자기의 악한 바램들과 더불어 자기와 세상을 사랑함을 벗고, 새 인간을, 즉 이웃을 향한 사랑과 하느님을 사랑함을 입어야 한다는 것; 천국은 거듭난 인간 안에 있다는 것 등등이다. 이런 사항들은 고대 교회에 속해 있던 이들에게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이런 사항들을 표현하는 외적인 것들에 의해 인도되었다. 그러나 이런 사항들은 유태 민족과 더불어서는 완전히 잊혀지고 말았다; 하여 주님께서는 그것들을 가르치셨고, 표현물 자체를 폐지하셨다, 그 이유는 그들이 표현물에 그분 자신을 연계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형상(image, 허상, 거울 속의 것)은 형체(form, 실상, 거울 밖의 것)가 나타날 때 사라져야만 하기에 표현물을 폐지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그분은 새로운 교회를 설립하셨다, 이 교회는 과거 표현들을 수단으로 내적인 것쪽으로 인도되던 교회와는 같지가 않다; 이 새로운 교회는 표현(물)들 없이 그것들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그분은 외적 의식으로 두 가지만을 명령하셨다-세례와 성찬이다- 세례식은 거듭남을 상기하기 위해서 이고, 성찬식은 그분을 상기하는 것, 즉 온 인류에 대한 그분의 사랑과 그분의 이런 사랑에 감사하여 그분께 되돌리는 인간의 상호적인 사랑을 상기하기 위하여서 이다. 사실 이런 두 가지 사항 역시 고대인들에게 알려져 왔었지만, 유태 민족과 더불어서 완전히 상실되어 이런 사항들이 이 후손들에게 말해지면 그것은 거짓이라고 판단해버린다.

그리고 유다가 말했다. 이는 유태 민족이 있었던 광신적 신앙으로부터의 판결(sentence)을 의미한다. 이는 유다의 표현함이 유태 민족의 광신적 신앙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로부터의 판결이 의미되는 것은 아래 구절로부터 분명해진다.

그녀를 끌어오라, 그리고 그녀를 태워라. 이는 다말에 의해 표현된 교회의 내적인 것은 근절되어져야 한다를 의미한다. “그녀를 끌어오라, 그녀를 태워라”는 근절해버리기 위함이다. “끌어오라”는 진리 측면에서, “태워라”는 선의 측면에서 근절해버림 이다. “태워라”가 선을 근절함이라 단언되는 것은 말씀의 많은 곳에서 분명해진다; 그리고 그 이유인즉, “불”, “불꽃”이 영적 의미에서 선을 표시하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열(heat)”은 선에 애착함을 표시하고, 반대적 의미로는 악에 애착함이다. 더욱이 선은 실제로 영적인 불이고, 이 불로부터 생기를 주는 영적인 열이 온다; 그리고 악도 불이다, 이로부터 살라 없애는 열이 온다. 사랑의 선이 영적인 열인 것은 이를 곰곰이 추스려 생각하는 이라면 누구나 아는 (설명이 요구되지 않는) 너무나 자명한 사실이다. 그 이유가 만일 우리가 (절대로 필요한) 생명의 불과 열을 어디서 가지는 지를 잠깐만 곰곰이 추스르면 그것은 사랑으로부터 이다는 것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사랑이 중단되자 마자, 인간은 차갑게 되기 때문에, 반대로 그가 사랑 안에 더 있으면, 그 만큼 그의 따뜻함은 성장한다. 인간의 생명력이 이 근원으로부터 있지 않으면, 그는 생명을 지닐 수 없다. 그러나 생명을 생산하는 영적인 불 또는 열이 악한 자와 더불어서는 태워 없애버리는 불로 바뀐다. 이성이 결핍된 동물들에서도 영적인 불이 흘러서 생명을 생산해주기는 인간의 경우와 비슷하나, 이 생명은 그들의 유기체의 형체 안에 받아들임에 따라서일 뿐이다; 이런 이유로 그들의 지식들과 애착들은 선천적(본능적)이다.

그녀는 끌려 나갔다. 이는 그것이 결과를, 즉 근절됨을 이제 막 보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이는 “끌려나가 태워짐”의 의미가 근절해버림 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고로 여기서는 이 상황이 이제 막 벌어지는 찰나임을 암시한다.

그리고 그 여자는 그녀의 시아버지에게 보내졌다. 이는 은근히 뭔가를 심어줌을 의미한다. 이는 시리즈로부터 암시되는 것이 그녀의 시아버지에게 당신이 아이의 아버지임을 은근히 심어주는 결과가 있으리라 예상하게 한다.

말하기를, 이것들이 있는 사람으로 말미암아 나는 아이와 함께 있다. 이는 이와 같은 품질이 그들의 광신적 신앙 안에 있음을 의미한다. 이는 여기서 “사람”에 해당하는 자가 유다이고, 유다는 유태 민족의 광신적 신앙을 표현한다로부터; 그리고 “자궁에서 운반함” 또는 “아이와 함께 있다”가 생산되어지는 것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러나 여기서는 생산된 것은 아니고 안에 있는 것, 따라서 생산될 것이 예상되는 상태이다. 이 생산물은 첫 결과, 이 결과는 유효하기 때문에 원인이라 불리우고, 이로부터 는 더욱 결과인 셈이다.

그리고 그 여자는 말했다, 청컨대 이것들, 도장과 머리 수건과 지팡이가 누구의 것인지 인정하라. 이는 이것은 담보물로부터 알게 되어야함을 의미한다. 이는 “도장, 머리수건, 지팡이”가 외적 또는 자연적 인간의 결합에 관한 담보물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리고 유다는 그것들을 인정했다. 이는 그들의 것임을 그들이 확증했음을 의미한다. 이는 “인정함”의 의미가 확언함이다로부터, 그리고 이 확언은 그가 담보물이 그의 것임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이다. 이 구절에는 이 민족의 특질(genius)이 담겨 있다; 즉 그들은 교회의 내적인 것을 거짓으로 여겨 거절했음에도, 이것이 그들의 것들임이 그들 안으로 은근히 심어져 있을 때, 그들은 그것을 받아들이고 확언한다는 것이다. 이 민족의 경우 같이, 더러운 사랑들 안에 있고, 탐욕(avarce) 안에, 그리하여 자아 사랑 안에 있는 이들은 마음의 시선을 위쪽으로 향하게 해서 자아 외의 어떤 다른 근원으로부터 진리를 볼 수 없다; 그러므로 이것이 자신들에게서 비롯되었다고 할 때, 그들은 그것을 확언한다(확언할 수밖에 없다). 예를 들면, 그들에게 말씀은 그 자체가 신성하다, 그리고 천국의 비밀들을 포함하고 있다, 그리고 이런 비밀들은 천사들에 의해서만 납득되어질 수 있다 라고 말하면, 그들은 그것이 진리이다고 확언한다; 그 이유는 그들은 말씀을 자신들의 것으로 간주한다, 그 이유는 이것이 그들 위에, 그들 사이에 있었고, 글자에서 자신들을 취급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적 진리들, 또는 비밀들이 그들에게 알려지면 그들은 이것을 거절한다.
만일 그들에게 그들의 교회의 의식들이 자체 안에서 거룩하다고 말하면, 그들은 이것이 그렇다고 확언하는데, 그 이유는 그들이 의식들을 자신의 것으로 간주하기 때문; 그러나 거룩한 것은 그들로부터 떨어져 있는 의식들 안에서 이다고 말하면, 그들은 이것을 부정한다. 다시, 만일 그들에게 유태 교회는 천적이고 이스라엘 교회는 영적이다고 말하면, 그들은 이것 역시 그렇다고 확언한다; 그러나 그들이 영적이고 천적이다 불리우는 이유는 그 교회의 세부적인 것들이 영적이고 천적인 것을 표현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표현물은 어떤 것일 뿐 인물이 아니다고 말하면, 그들은 이것을 부정한다. 다시, 만일 그들에게 모세의 지팡이에는 여호와의 힘이 있었다, 그러나 신성한 명령에서만 힘이 있었다고 말하면, 그들은 그것을 부정하고 거짓이라 부른다.
만일 그들에게 모세에 의해 세워진 놋뱀이 뱀에 물린 자들을 치료했다, 그리고 그것은 기적이었다고 말하면 그들은 그것을 확언한다; 그러나 놋뱀 자체가 치료한 것이 아니라는 것, 그 자체 기적은 아니다, 이것은 그렇게 표현된 주님으로부터 치료된 것이다 라고 말하면, 그들은 부정하고 거짓이다고 말한다. (뱀에 관련된 것은 민. 21:7-9; 왕하. 18:4; 요. 3:14, 15를 참조하라.) 이와 같은 것들이 유다의 인정함에 의해 의미되어 있다, 그리고 유다에 의해 의미된 민족의 부분에서 다말에 의해 표현된 교회의 내적인 것과 결합되어 있다; 그리고 그들이 이와 같기 때문에, 유다는 남편의 형제된 의무 수행을 위해서 다말에게 온 것이 아니라 매춘자로서 창녀에게 간 것이다.

그리고 말했다, 그 여자는 나보다 더 정당하다. 이는 거기에 외적인 것이 내적인 것과 결합함은 없고, 단지 내적인 것이 외적인 것과 결합함 만이 있었음을 의미한다. 이는 앞에서 유태 민족의 교회에 관하여 살피기도 했다; 즉 이 백성과 더불은 교회, 이는 내적인 것이 외적인 것과 결합되어져 있다; 그러나 그들 안에는 교회가 없었다, 즉 외적인 것이 내적인 것과 결합하지 않았다. 교회는 상호적이어야만 존재한다.

내가 내 아들 셀라를 그녀에게 주지 않은 까닭에서 이다. 이는 외적인 것이 이와 같은 품질 속에 있었기 때문에를 의미한다. 이는 앞의 설명들로부터 분명해진다; 즉 다말이 유다의 아들, 셀라에게 주어질 수 없었던 이유는 주어질 경우, 즉 남편의 형제된 의무 수행의 법에 일치하여 다말이 아내로서 주어지는 것인데, 이에 반해 유태 민족의 광신적 신앙이 표현되려면, 합법적이 아닌 것에 의한 결합이어야 했기에, 즉 시아버지와 창녀로서의 며느리 사이의 결합이어야 그 광신적 신앙이 적절히 표현되기 때문에서 이다.

그리고 그는 그녀를 알려는 것을 더 추가하지 않았다. 이는 더 이상 결합은 없었음을 의미한다. 이는 “안다”는 것이 결합되는 것이다로부터; 그리고 “더 이상 추가하지 않다”의 의미가 교회의 내적인 것과의 결합은 더 이상 없었다 이다로부터; 그 이유가 교회의 내적인 것이 다말에 의해 표현되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유다는 더 이상 아들들을 갖지 못했다.

27-30절. 그리고 산고를 겪는 때가 오고 있었다, 그리고 보라, 쌍둥이가 그녀의 자궁에 있었다. 28 그리고 그 여자는 해산하고 있을 때, 한 아이가 손을 내밀었다. 그리고 산파가 잡고 그의 손에 두 번 물들인 것을 매었다, 말하기를, 이것이 먼저 나왔다. 29 그리고 그는 자기 손을 뒤로 당겼다, 보라 그의 형제가 나왔다, 그리고 그 여자는 말했다, 어찌하여 너는 깨뜨려서 네 위에 깨뜨림(위반)이 있느냐? 그리고 그는 그의 이름을 베레스라고 불렀다. 30 그리고 그 뒤에 두 번 물들인 (것을) 맨 그의 형제가 나왔다. 그리고 그는 그의 이름을 제라라고 불렀다.

때가 오고 있었다. 이는 뒤따르는 상태를 의미한다. 이는 “때”의 의미가 상태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때가 옴”이 뒤이어지는 상태인 것은 분명하다, 그 이유는 뒤따르기 때문이다.

그녀의 해산. 이는 내적 진리쪽에서 인정함을 의미한다. 이는 “해산함”이 신앙과 행동에서 인정함이다로부터; 그리고 그녀, 즉 다말의 표현함이 표현 교회의 내적인 것, 결과적으로 내적 교회이다로부터 알려진다.

그리고 보라, 쌍둥이가 그녀의 자궁에 있었다. 이는 교회의 두 가지 모두의 것들을 의미한다. 이는 “쌍둥이”의 의미가 선과 진리 모두이다로부터; 그리고 “자궁”의 의미가 임신된 선과 진리가 놓이는 곳, 결과적으로 교회 속에 있는 것이 있는 곳이다. “자궁”은 진짜 의미에서 순진이 있는 가장 깊은 부부의 사랑을 의미한다, 그 이유는 웅대한 사람 안에서 자궁은 이 사랑과 상응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천국의 결혼에 속하는 선과 진리를 사랑함에 그것의 근원을 가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결혼이 천국 자체 또는 주님의 왕국이기에, 그리고 땅 위 주님의 왕국이 교회이기에, 그러므로 교회 역시 “자궁”에 의해 의미된다; 그 이유가 선과 진리의 결혼이 있는 곳이 교회이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자궁을 염”은 교회의 파생되는 교리들을 표시하고, 그리고 교회의 진리들과 선들을 받는 수용력을 표시한다; 그리고 “자궁으로부터 세상밖으로 나옴”은 재탄생 또는 거듭남, 즉 교회가 만들어짐을 표시한다, 그 이유는 재탄생, 거듭나는 자는 누구든지 교회를 만들기 때문이다.
재탄생, 그러므로 교회가 “자궁으로부터 나감”에 의해 의미되기에, 그러므로 주님은 말씀에서, “자궁으로부터 형체를 만들어 내신 분”, “자궁으로부터 낳게 되신 분”이라 불리운다; 그리고 거듭나는 이들과 교회를 만드는 이들은 “자궁으로부터 운반됨”이다고 말해진다;
고로 여호와 너를 만드신 분, 자궁으로부터 형체를 만들어 내시는 분, 그분이 너를 돕는다
(이. 44:2).
다시:
고로 여호와 너를 되찾으신 분, 그리고 자궁으로부터 너를 만들어 내신 분 (이. 44:24).
다시:
자궁으로부터 나를 만들어 내신 여호와깨서 그분의 종이 되기 위하여, 야곱을 그분에게 다시 데려오기 위하여, 그리고 이스라엘이 그분에게 모아들이기 위하여 말하셨다 (이. 49:5).
다윗서에서:
나를 자궁으로부터 데려오신 여호와 (시. 22:9).
다시 이사야서에서:
나에게 경청하라, 야곱의 가문아, 그리고 이스라엘의 가문의 남은 모든 자들아, 자궁으로부터 운반했고 모체(자궁, matrix)로부터 태어난 (너희들아) (이. 46:23).
다윗서에서:
사악한 자들은 자궁으로부터 이간질을 한다; 그들은 뱃속으로부터 엉뚱한 곳으로 간다, 온갖 거짓말과 더불어 (시. 58:3);
위에서 “자궁으로부터 이간질 함”은 교회 속에 있는 선으로부터를 (이간질을 함을) 뜻하고, 그리고 “뱃속으로부터 엉뚱한 곳으로 감”은 진리로부터 엉뚱한 곳으로 감을 뜻한다. 호세아서에서:
해산하는 여인의 격심한 아픔이 그에게 닥칠 것이다; 그는 슬기롭지 못한 아들이다, 그 이유가 그가 아들들의 자궁에서 서있지 않아야 하는 때이기 때문이다 (산고가 시작되고 자궁이 열리면 최대한 빨리 자궁을 빠져나오는 것이 상책인데, 자궁문에서 나오지 않고 서있어 어리석다는 말인 것 같다 역자주).
위에서 “아들들의 자궁에서 서있지 않아야 한다”는 교회 속에 있는 진리의 선에 있지 않음을 뜻한다.
다시:
그들의 영광은 새 같이 출생으로부터, 뱃속으로부터, 그리고 임신함으로부터 날아가버릴 것이다 (호. 9:11);
교회의 진리가 통째로 멸해질 것을 뜻한다; “출생으로부터”는 태어난 것을 뜻하고; “뱃속으로부터”는 섭취한 것을 뜻하고; “임신으로부터”는 시작된 것을 뜻한다. 이사야서에서:
나는 네가 아주 불충하게 행동하였다는 것, 그래서 자궁으로부터 위법자라고 불리워졌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 48:8);
위와 같은 것이 교회의 시작으로부터 그들(유태 교회)의 품질이었다는 것을 뜻한다. 계시록 서에서:
큰 표시가 하늘에서 보여졌다, 여인이 태양을 휘감고, 그녀의 발 아래 달이, 그리고 그녀의 머리 위에는 열두 별들의 왕관이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뱃속에서 낳으려, 소리쳤고, 출생에서 산고를 겪고 있다, 그리고 분만하기 위하여 고통 안에 있다 (계. 12:1, 2);
“여인”은 교회이다 (252, 253, 255항); “그녀가 휘감은 태양”은 사랑의 선이다; “그녀의 발 아래 있는 달”은 신앙의 진리이다; “별들”은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이다; “열두 별들”에서 “열둘”은 모든 것을 뜻한다, 고로 신앙의 모든 것들을 뜻한다; “뱃속에서 낳음”은 교회의 진리가 임신됨을 뜻한다; “출생에서 산고를 겪음과 분만하려 고통 안에 있다”란 그것은 어려움과 더불어 받아졌다를 뜻한다.

그 여자에게 산고를 겪는 때가 왔다. 이는 생산을 의미한다. “산고를 겪음”이 신앙과 행동에서 인정하는 것이다; 그리고 신앙에서 인정하고 행동하는 것은 무엇이든 생산하는 바, 그러므로 “산고를 겪음” 역시 생산함이 의미된다, 즉 선과 진리를 생산함이 의미되는데, 이는 교회 속에 있다.

그리고 손이 나왔다. 이는 힘(능력, power)을 의미한다. 이는 “손”의 의미가 힘이다로부터알게 된다.

그리고 산파가 잡았다. 이는 자연 (평면)을 의미한다. 이는 “산파”의 의미가 자연 (평면)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어떻게 이 경우가 있는 지는 이어지는 것들로부터 알게 된다. 영계에서의 산파는 자연계에서의 산파와는 다른 의미를 가진다; 그 이유가 그곳에서는 자연계에서 같은 출생에 관련되는 것는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산파의 직능(직업 분야)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인간들이 이런 단어를 말씀으로부터 읽을 때, 당사자와 더불은 천사들은 산파 대신에 어떤 것, 참으로 영적으로부터의 어떤 것을 지각한다. 결과적으로, 천사는 자기들의 생각들을 영적인 출생에 관련되는 이런저런 것들에 놓아두고 있다; 고로 산파를 수단으로 그들은 이 출생을 조력하고 받아주는 것을 지각한다; 이것이 자연 (평면)인데, 이미 언급한 적도 있다.

그리고 그의 손에 두 번 물들인 것을 매었다. 이는 그 여자가 그것(선)에, 즉 힘에 표를 해놓았다는 것, 그리고 “두 번 물들임(double-dyed)”은 선을 표시한다. 이는 “손에 맴”의 의미가 힘(power)에 표(mark)를 놓는 것이다로부터, 그 이유가 “손”이 힘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두 번 물들인”의 의미가 선이다로부터, 참으로 영적 선이다에서 알려진다. “두 번 물들임”이 영적 선을 표시하는 것은 이것이 주홍색(진홍색, scarlet color)에 속하기 때문이다. 주홍의 색깔이 다른 삶에서 보여질 때, 영적 (평면의) 선을, 즉 이웃을 향한 선행의 선을 의미한다. 다른 삶에서 보일 수 있는 모든 색깔들은 선과 진리로부터의 어떤 것을 의미하는데, 그 이유는 그것들이 천국의 빛으로부터 존재 안으로 오기 때문이다. 천국의 빛 자체는 주님의 신성으로부터의 지혜와 총명이다. 이 빛의 다양해짐과 변형되어짐은 결과적으로 지혜와 총명의 다양함과 변형됨, 결과적으로 선과 진리의 다양함과 변형됨이다. 천국에 있는 빛은 거기서 태양으로 계신 주님으로부터의 신성한 지혜와 총명으로부터 이다는 것에 대하여는 (우리가 기억하고 있어야 하기에) 많은 장소에서 말해왔다. 색깔들이 이 근원으로부터 이다는 것, 그리고 그들이 이 빛의 다양함들과 변형됨들 이다는 것, 결과적으로 총명과 지혜의 다양해짐과 변형됨이다는 것에 대하여도 여러 번 언급하였다.
“두 번 물들임”이 영적 선을 표시하는 것을 말씀의 다른 구절로부터 확인해보자:
네가 황폐해져 있다면 너는 무엇을 할 것이냐? 만일 네게 두 번 물들인 것으로 옷입고, 금 장신구로 치장한다면, 너는 헛되이 네 자신을 아름답게 꾸미는 것일 것이다; 애인이 너를 몹시 싫어할 것이다 (예. 430);
위에서 유다가 취급된다; “너 자신을 두 번 물들인 것으로 옷입고”가 영적 선을 표시한다, 그리고 “금장신구로 너 자신을 치장한다”는 천적 선을 표시한다. 사무엘하서에서:
다윗은 사울과 요나단을 두고 통곡했다, 그리고 유다의 아들들을 가르치기 위해 활(의 노래)을 썼다(작곡했다). 너희 이스라엘의 딸들아, 사울을 위해 슬퍼하라, 그는 기쁨으로 두 번 물들인 것으로 너희를 옷입혔고, 너희 의상에 금 장신구를 놓아주신 분이시다 (삼하. 1:17, 18, 24);
위에서 “활”을 가르침은 사랑과 선행의 교리를 가르침이다; 그 이유는 “홀”이 이 교리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두 번 물들인 것을 입는 것”은 영적 선을 표시한다; 그리고 “의상에 금장신구를 놓는다”는 천적 선을 표시한다.
이것이 두 번 물들인 것의 의미이기 때문에 두 번 물들인 진홍색이 성막의 커튼들에, 베일들에, 천막의 문을 위한 덮개에, 바깥뜰의 큰 문을 위한 덮개에, 그들이 여행할 때 얼굴들의 식탁에, 그리고 거룩함의 아론의 의복에, 판단의 가슴받이 에봇에, 그리고 에봇의 도포의 가장자리(술)에서 사용하게 명령되었다. 아래에서 살핀다:
너는 성막을 위하여 열 커텐들을 만들어라; 곱게 꼬아 만든 아마로, 그리고 청색 (실), 그리고 심홍색 (실), 그리고 두 번 물들인 진홍색 (실) (출.26:1).
너는 베일을 청색, 심홍색, 두 번 물들인 진홍색 (실)로 만들어라 (출. 26:36).
바깥뜰의 큰 문을 위하여 너는 청색, 심홍색, 두 번 물들인 진홍색 (실)로 덮개를 수공예 자의 일로 만들어라 (출. 27:16).
진영이 출발할 때, 얼굴들의 식탁 위에 두 번 물들인 진홍색 천을 펴놓아라, 그리고 오소리 가죽 덮개와 함께 덮어라 (민. 4:5, 7, 8).
너는 금, 청색(실), 심홍색 (실), 두 번 물들인 진홍색 (실)과 고운 아마포로 기술공의 일로 에봇을, 마찬가지로 벨트도 만들어라 (출. 28:6, 8).
너는 기술공의 일로 판단의 가슴받이를 만들어라; 마찬가지로 에봇을 금, 청색, 심홍색, 두 번 물들인 진홍색, 고운 아마포로 만들어라 (출. 27:15).
에봇의 도포의 가장자리(술)에 [너는] 청색, 심홍색, 두 번 물들인 진홍색의 석류[를 만들어라] (출. 27:33).
궤와 더불은 회중의 천막이 천국을 표현했기에, 그러므로 위에 언급된 색깔들을 사용하도록 명령되었다; 그리고 그것들은 천국의 질서 안에서 천국의 천적, 영적인 것들을 의미한다, 즉 “청색, 심홍색”은 천적 선들과 진리들을, 그리고 “두 번 물들인 진홍색과 고운 꼬아만든 아마”는 영적 선과 진리들을 의미한다. 말씀이 거룩하다고 믿는 모든 이라면, 위의 구절 안에 있는 모든 것이 어떤 의미를 가진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리고 말씀은 주님으로부터 천국을 통하여 보내져 내려왔기 때문에 거룩하다고 믿는 자는 누구든지 그분의 왕국의 천적, 영적인 것들이 의미되었다는 것을 안다. 마찬가지로 삼나무, 진홍색, 히솝이 나병을 깨끗하게 함을 위해 사용하도록 명령되었다 (레. 14:4, 6, 52); 그리고 삼나무, 히솝, 두 번 물들인 심홍색을 붉은 어린 암소를 태울 때 거기에 던지도록 명령했다, 이로부터 분리함의 물을 준비하기 위하여서 이었다 (민. 19:6, 9).
선과 진리를 모독함이 유사한 표현에 의해 묘사되었다. 계시록서에서:
나는 진홍색 짐승 위에 앉아 있는 여인을 보았는데, 모독의 이름들로 가득하여 있고, 일곱 머리들과 열 뿔들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여인은 심홍색과 진홍색으로 옷입혀져 있고, 금빛으로 칠해져 있고, 보석과 진주들로, 그녀의 손에는 그녀의 매춘들로부터의 역겨움과 더러움을 가득채운 금빛의 잔을 들고 있었다 (계. 17:3, 4).
그리고 그 후에:
화, 화가 있다, 큰 도성이여, 고운 아마, 심홍색과 진홍색, 금빛으로 칠해졌고, 보석과 진주들로 치장한 그녀여 (계. 18:16);
위는 바빌론에 관해서이다, 이를 수단으로 선의 모독이 의미되어 있다, 여기서는 선과 진리의 모독이다, 이것이 바빌로니아인이다. 구약 성경의 예언서들에서 “바빌론”은 선을 모독함, 그리고 “갈대아”는 진리를 모독함이다.
“진홍색”은 반대 의미에서 영적 선에 반대되는 악을 의미한다;
너의 죄들이 진홍 같이 있을지라도, 그것들은 눈 만큼 희게 있을 것이다; 그것들이 심홍 같이 있을지라도, 그것들은 양털 같이 있을 것이다 (이. 1:18).
“진홍색”이 이 악을 의미하는 것은 빨간색으로부터의 “피” 때문이다. 이 빨간색(redness)은 좋은 의미에서는 영적 선, 또는 이웃을 향한 선행을 의미하지만, 반대 의미에서는 선행에 가한 폭력이 의미된다.

말하기를, 이것이 먼저 나왔다. 이는 이것이 (시간, 순서에서) 먼저임(앞임, priority)을 가졌다를 의미한다. 이는 “먼저 나왔다, coming out first”, 또는 첫 출생이다의 의미가 앞임(priority), 우위임(superiority)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여기서와 이 장의 끝까지에서 취급되는 주제는 장자임(primogeniture)이다. 말씀의 내적 의미에 관한 지식을 가지지 못한 이들은 취급되는 것이 장자임 뿐이다고, 첫 출생의 법에 따라 가지게 될 특권만을 상상하게 된다; 그러나 내적 의미의 어떤 것을 아는 자는 이런 말들 안에 더 특별한 어떤 것이 감추여 놓여 있다는 것을 짐작 못할 자는 없을 것이다. 여기서의 경우, 아이 중 하나가 자기 손을 내밀었다가 다시 뒤로 끌어당겼고, 그때에 다른 하나가 나왔다는 것, 이로부터 그들의 이름이 명명되었다는 것, 그리고 산파는 첫째의 손에 두 번 물들인 것을 매었다는 것; 성경 앞쪽으로 가보면, 이와 비슷한 사건으로 연상되는 것은 에서와 야곱이다; 이들은 자궁 안에서 다투었고, 에서가 먼저 나왔을 때, 야곱은 그의 뒤꿈치를 잡고 나왔다 (창. 25:22, 26); 이 사건 뒤쪽에서도 유사한 것이 더 있다; 즉 요셉의 두 아들에게 야곱이 축복하는 경우인데, 그는 오른손이 더 젊은 아들에게, 그의 왼손은 다른 아들에게 올려놓고 축복한 것이다 (창. 48:14, 17-19).
유태인들과 일부 어떤 기독인들이 참으로 믿는 것은, 이 본문 안에, 그리고 위의 다른 두 사건 안에 어떤 의미가 저장되어 있다는 것, 이것을 그들은 신비적이라 부르고, 이런 이유로 말씀에 관련하여 거룩함에 대한 생각이 아주 어린 시절로부터 그들 위에 각인되어 있다; 그러나 이 신비적인 것이 무엇인지를 그들에게 물으면, 그들은 모르고 있다. 그래서 그들에게 이런 사항을 미리 알지 않으면 이 대목의 의미 또한 납득되지 않는다는 것: 즉 말씀은 신성하므로, 이 의미는 천국에 있는 천사들이 이해하는 것과 반드시 같아야만 할 것이다; 말씀 안의 의미가 이러한 바, 여타 다른 신비적이다 여겨지는 대목 또한 이런 수준이고, 만일 그렇지 않다면, 말씀 속의 이런 사건들은 전설적, 마술적, 또는 우상적 수준에 머물고 말지 모른다는 것; 더욱이 천사들 사이에서 천국에 있는 이런 신비적 의미는 영적, 천적이라 불리운다는 것; 그리고 영적, 천적 의미들은 우선적으로 주님만을, 그 다음 그분의 왕국에 관한 것을, 그 다음 교회에 관한 것을, 결과적으로 선과 진리에 관해서 이다는 것; 그리고 만일 그들이 선과 진리, 또는 신앙과 사랑이 무엇인지를 알았다면, 그들은 자기들이 상상하는 신비적 의미 또한 알 수 있다는 것 등등이다. 이런 사항만 말해주어도 그들로부터 되돌아오는 응답은 이를 믿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렇다, 오늘날 이런 무지 안에 있는 이들은 영적, 천적 의미를 거의 납득하지 못한다. 아예 이런 단어에 생소해 있다. 어쨌든 세상적 상황이 이럴지라도 주님의 신성한 자비로부터 나에게는 영으로서는 천국 안에, 땅에서는 인간으로서 동시에 있게 해주셨다. 그러므로 천사들과 수 년을 계속적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이렇지 않으면 말씀의 이런 신비적 대목을 나 스스로 라면 열어보이는 것이 가능할 수 없다. 그 이유가 이 대목의 내면들, 이것들은 주님의 왕국 속의 영적, 천적 사항들이기 때문이다. 다말의 두 아들에 관련된 내적 의미가 무엇인지 아래에서 살핀다.

그리고 그는 그의 손을 끌어 당겼다. 이는 그것은 그것의 힘(능력)을 감추었음을 의미한다. 이는 “손”의 의미가 힘이다로부터 분명해진다. “끌어 당김”에 의해 감추여짐이 의미된다.

보라, 그의 형제가 나왔다. 이는 선으로부터의 진리를 의미한다. 이는 “형제”의 의미가 선으로부터 친족인 것이다로부터, 고로 선으로부터의 진리이다; 선으로부터의 진리(선의 진리)는 선으로부터 있는 진리, 또는 선행으로부터 있는 신앙이다. 여기로부터 내적 의미에서 취급되는 주제는 주님에 의해 거듭나는 이들, 또는 재탄생되는 이들의 경우에서 있는 장자임(premogeniture), 결과적으로 교회 안에서 장자임에 관해서이다. 태고 시대로부터 논쟁되어온 것이 첫 출생에 관련된 것; 즉 어느 것이 먼저인지, 첫째인지, 또는 형이고 동생인지, 구체적으로 선행으로부터 있는 선과 신앙으로부터 있는 진리에서 어느 것이 우위인지에 관하여 논쟁되어 왔다는 말이다. 선은 인간이 재탄생 또는 교회를 만드는 동안 나타나지 않고, 그 자체를 내면의 인간 안에 감추이고 있다, 그래서 선은 당사자가 재탄생되어질 때까지 외적 또는 자연적 인간의 감각(sensation) 안으로는 명료하게 와닿지 않는 어떤 애착 안에서만 명백해 있다. 이에 반해, 진리는 그 자체가 명명백백 (당당)하다; 이런 이유가 진리는 감각들(오각, senses)을 통하여 들어가서 외적 또는 자연적 인간의 기억 안에 자체를 저장해놓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많은 인물들이 진리가 첫 출생이다는 오류에 빠져들고 만다, 이 빠져듦이 좀 더 깊어지면, 진리가 교회의 본체(essential)이다고 착각해버리고 마는 수준에 이른다; 이러면 본체라고 말하는 진리를 그들은 신앙이라 부르고, 신앙은 선행 속에 있는 선 없이도 구원하는 힘을 가진다는 결론에 이르른다.
위 한가지 결론으로부터 많은 것들이 파생되는데, 이 결론은 자기들이 작성한 교리 뿐만 아니라 생활까지 감염되어 있다; 간단한 예로 대단히 사악하게만 살아왔던 자라 해도 만일 마지막 한 시간 전에 신앙 속에 있는 이런 사항들에 관한 고백을 만든다면 천국 안으로 받아진다고 말한 대목이다. 그리고 모든 이는 은총(grace)으로부터만 천국 안으로 받아질 수 있다는 것, 그의 삶에 관계없다는 것이다. 이 교리를 만들어 굳히다보니, 그들은 선행(charity)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하고, 자기들 입장에서는 알려고 애쓸 이유가 하나도 없다. 여기서 더 진전된 인물은 선행이라는 단어조차 기억에서까지 지워버린 듯해 있다; 결과적으로 천국과 지옥이 있다는 것에, 내가 가야 하는 그곳이 어떤 곳인지 알 이유도 없다. 선행 없는 신앙, 또는 선이 없는 진리는 가르치는 것이 사실상 아무것도 없기에 위와 같은 일이 벌어진다. 게다가 선으로부터 퇴조하는 정도에 비례하여 그의 어리석음은 증가한다. 그 이유가 선 안에서, 선 안으로, 선을 통하여 주님께서는 총명과 지혜를 주시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더 높은 곳에서 정신적으로 조망하게 해주신다, 더불어 이것이 그런지, 그렇지 않은지에 관한 지각도 주신다.
위의 말들은 본문의 주제인 장자임을 두고 묘사된 것이 어떤 경우인지를 보여준다: 즉 장자권은 실제적으로는 선에 속한다는 것, 그리고 가상적으로 진리에 속해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다말의 두 아들들의 출생에 의해 내적 의미에서 묘사되어져 있다; 그 이유가 산파가 손에 묶은 “두 번 물들인 것(끈, 또는 실)”이 선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먼저 나왔다”에 의해서는 우위임, 먼저임, 앞섬(priority)이 의미되기 때문; 그리고 “자기 손을 끌어당김(뒤로 당김, draw back)”에 의해 선이 그것의 힘을 감추었다가 의미되기 때문; 그의 “형제가 나옴”에 의해 진리가 의미된다; “너는 깨뜨려서 네 위에 깨뜨림을 있게 했다”에 의해 선으로부터 진리의 가상적인 분리가 의미된다; 그의 “형제가 그 뒤에 나왔다”에 의해 선이 실제로는 먼저임(priority)이 의미된다; 그리고 “두 번 물들인 것을 손에 가진 것”에 의해 이것이 선이다를 인정함이 의미된다; 그 이유는 선은 인간이 재탄생할 때까지 먼저임 이다는 것이 인정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재탄생 이후, 선이 먼저가 되어 있다, 즉 그는 선으로부터 행동하고, 선으로부터 진리를 주목해서 보고 진리의 품질을 가늠하기 때문이다.
이상의 내용들은 내적 의미에서 포함되어진 것들이고, 이것은 새로이 태어나는 이들 안에서 선과 진리가 어떻게 관련을 맺는지를 가르치고 있다; 즉 선은 실제적으로는 먼저이고, 진리는 가상적으로 먼저이다는 것이다. 따라서 선은 거듭나는 동안 첫째 자리에 있지 않다, 그러나 거듭나졌을 때 이후 선은 첫째 자리에서 명명백백해져 있다. (만일 거듭나는 동안에서 선이 앞에 있다고 가정해본다면, 아마 대부분의 인간들이 이 선을 짓밟아 모독해버릴 위험이 100%이고, 이럴 경우 그 인간의 구원은 너무나 힘들지 모르는 바, 선의 모독을 예방해주시는 섭리 차원이 중요함을 선이 자기 손을 끌어당기고, 진리가 먼저 나오는 모습에서 우리를 가르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본다 역자주.) 사실 위의 내용들에 대해서는 이미 많은 설명이 있어 왔기에 더 설명은 필요하지 않다. 선과 진리, 또는 선행과 신앙, 어느쪽이 형이고 아우인지, 또는 앞이고 뒤인지, 첫째이고 둘째인지에 대하여는 고대 시대로부터 있어온 논쟁거리 이다.
최고 의미에서 주님이 “첫 출생”이시다, 결과적으로 주님을 사랑함과 이웃을 향한 선행이 첫 출생이다는 것, 하여 첫 출생이 여호와의 것임을 표현 교회에서 법으로 정해 놓았다:
모든 첫 출생, 즉 이스라엘의 아들들 사이에서 자궁을 연 것은 그것이 인간이든 짐승이든, 그것들이 나의 것이 되도록 나에게 바쳐라 (출. 13:2).
너는 자궁을 연 모든 것, 그리고 짐승의 새끼를 연 모든 것을 여호와에게로 건너가게 하라 (양도하 라), 너희에게 있는 숫컷들은 여호와의 것이다 (출. 13:12).
자궁을 연 모든 것은 나의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가축에 관련하여 너희가 숫컷을 줄 것인데, 수소와 작은 가축을 여는 것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출. 34:19).
모든 육의 자궁을 여는 모든 것, 이것을 그들은 여호와께 가져올 것이다, 즉 인간들과 짐승들로부터 너의 것들인 것으로부터 이다; 그럼에도 인간의 모든 첫 출생을 그들은 확실히 되찾을 것이다 (민. 18:15).
보라 나는 이스라엘의 아들들 사이에서 레위 지파를 데려왔는데, 이는 이스라엘의 아들들의 자궁을 연 첫 출생을 대신해서 이다; 고로 레위 지파는 나의 것이다 (민. 3:12).
자궁을 연 것이 첫 출생이기에, 그러므로 단어 “첫 출생”이 언급되는 곳에서는 “자궁을 여는 것”이 말해진다; 이는 선이 의미되기 위하여서 이다. 이것이 선을 의미하는 것은 세부 사항이 내적 의미에서 의미하는 것을 살피면 알게 된다; 즉 제라가 자기 손을 가지고 자궁을 열었다, 그를 수단으로 선이 표현되었는데, 그가 자기 손에 두 번 물들인 것을 매었다는 것으로부터 분명해진다. 더욱이 열려진다고 말해지는 “자궁”은 선과 진리가 있는 곳, 결과적으로 교회가 있는 곳이다; 그리고 “자궁을 여는” 것은 진리가 태어나지도록 힘을 주는 것이다.
주님만이 첫 출생이신 바, 그 이유는 그분이 선 자체이시고, 그분의 선으로부터 모든 진리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야곱은 첫 출생은 아니었지만, 그분의 첫 출생을 표현하도록 그는 자기 형제 에서로부터 장자임을 사는 것이 허용되어졌다; 그리고 이것 가지고는 충분하지 않았기에, 후에 그는 이스라엘이라 불리웠는데, 이 이름에 의해 그는 진리로부터의 선을 표현하였다. 그 이유가 표현적 의미에서 이스라엘은 진리를 수단으로 오는 선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여자는 말했다, 어찌하여 너는 깨뜨려서 네 위에 어김(깨뜨림)을 있게 했느냐? 이는 그것이 선으로부터 가상적으로 분리됨을 의미한다. 이는 어김(breach)의 의미가 선으로부터 분리됨에 의해 진리가 악용됨(perversion)과 진리를 위반함(infraction)이다로부터 알게되는데 아래에서 더 살핀다. 이는 “깨뜨려서 어김이 있는” 것이 여기서는 끌어당겨서 손으로부터 두 번 맨 것을 벗기는(pull off) 것, 고로 선을 분리하는 것임이 분명하다, 그 이유가 “두 번 맨” 것이 선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가상적으로 그러했다는 것은 그렇게 산파에게 나타난 사실로부터 이어진 말이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깨뜨려 어김이 있는 자는 두 번 물들인 것을 맨 자가 아니었기 때문, 그러나 그의 형제, 즉 진리를 표현한 형제였기 때문이다. 즉 선이 실제의 첫 출생이고, 진리는 가상적으로 첫 출생이다. 이는 예를 들어 생각하면 더 나을지 모른다. 즉 신체의 사지(손, 발 등등)들이 마치 앞임 것처럼 나타난다; 그 이유가 전자가 눈에는 먼저 표출되기 때문이다, 그것을 사용할 필요성 앞에 알려진다. 그럼에도 사용할 필요성은 사지의 움직임에 앞서 있다. 그러므로 사용의 필요성에 따라 사지의 움직임은 만들어진다. 그렇다, 사용함 자체가 사지의 움직임을 만들어 사지로 사용함 자체에 적응되게 한다. 이렇게 되지 않는다면, 인간 안의 모든 것은 하나로 만장일치하여 공모할 수 없다. 이것은 선과 진리와 더불어서도 비슷하다; 마치 진리가 앞임 인 것처럼 나타나나, 앞임 인 것은 선이다, 그 이유가 선이 진리를 만들어내기 때문, 선 자체에 어울리게 진리를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진리들 자체만에 주목하면, 진리는 선들이 만들어 낸 것, 선의 형체들밖에 더 아니다. 선에 관련하여 있는 진리들은 마치 신체에서 사용의 필요성에 사지나 기관의 관계와 같다. 그 자체에 주목하면, 선은 사용함(use)밖에 더 아니다.
“어김(깨뜨림)”이 선으로부터 분리함에 의해 진리를 위반함과 진리를 악용함을 의미한다는 것을 말씀의 다른 구절로부터 찾아보자:
우리의 곳간들은 가득해서 식품으로부터 식품까지 여유가 있다; 우리의 양떼들은 천천 만만으로 우리의 거리들에 있다; 우리의 수소들에 짐이 가득하다; 거기에는 어김이 없다
(시. 144:13, 14);
위는 고대 교회의 젊은 이 시절 같은 것을 취급하고 있다; “식품으로 곳간이 가득하다”는 영적 식품, 즉 진리와 선을 표시한다; “양떼들”과 “숫소들”은 내적 선들과 외적 선들이다; “거기에 어김이 없다”는 진리가 선과 분리함으로 위반함과 깨뜨림 않고 있다를 표시한다.
아모스서에서:
나는 무너진 다윗의 천막을 일으켜 세울 것이다, 그리고 거기로부터의 위반함에 울타리를 칠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것의 파멸들을 회복할 것이다, 그리고 나는 영원의 날들에 따라 그것을 건축할 것이다 (암. 9:11).
위는 선 안에 있는 교회를 묘사한다, “무너진 다윗의 천막”은 주님으로부터의 사랑의 선과 선행의 선이다. “위반함에 울타리를 치는” 것은 진리가 선으로부터 분리함으로 해서 들어와진 거짓을 수리하는 것을 뜻한다; “영원의 날들에 따라 그것을 건축한다”란 고대 시대에서 교회의 상태에 따라를 표시한다; 이 상태와 이 때들이 말씀에서 “영원의 날들”, “시대의 날들”, 또는 “대대로”이라 불리운다:
시대의 황폐된 것, 대대로부터의 기초들이 너로부터 건설될 것이다; 그래서 너는 위반함을 수리하는 자, 작은 길을 거주할 곳으로 회복하는 자라 불리울 것이다 (이. 58:12);
교회 안에서 선행과 생활이 본질임을 묘사하고 있다. “위반함을 수리함”은 진리로부터 선이 분리됨에 의해 기어다니게 된 거짓들을 수리함을 표시한다, 모든 거짓은 이 근원으로부터 있다; 그리고 “거주하게 작은 길을 회복하는 것”은 선으로부터 있는 진리들을 표시한다, 그리고 “거주함”은 선을 서술한다.
다시:
너희는 다윗성의 위반들, 그것들이 많다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너희는 더 낮은 못의 물들을 모두 그러모았다 (이. 22:9);
“다윗성의 위반들”은 교리 속의 거짓들을 표시한다, 그리고 “더 낮은 못의 물들”은 전통들을 수단으로 그들은 말씀에 있는 진리의 위반을 만들어 냈다를 표시한다 (마. 15:1-6; 막. 7:1-14). 에스겔서에서:
너희는 위반 안으로 가는 것을 포기하지 않았다, 너희는 이스라엘의 가문을 위해 울타리를 건설하지 도 않았다, 하여 너희는 여호와의 날에 전쟁에 서 있을는지 모른다 (겔. 13:5).
다시:
나는 내가 토지를 파괴하지 않도록 토지를 위하여 내 앞에 있는 위반에 서서 울타리를 건설할 사람을 찾았었다; 그러나 나는 아무도 발견하지 못했다 (겔. 22:30);
“위반에 서있다”란 거짓들의 깨뜨림이 있지 않도록 경청하고 방어함을 표시한다. 다윗서에서:
그분의 선택하신 모세가 위반에서 그분 앞에 서있지 않으면, 그분은 백성들을 파괴하시리라고 여호와께서 말하셨다 (시. 106:23);
위에서 “위반에 서있다”는 것은 거짓들이 깨뜨리지 않도록 경청하는 것을 표시한다. “모세”는 말씀이다.
아모스서에서:
그들은 낚시로 너의 후손을 끌어낼 것이다. 너희는 위반들을 관통하여 나갈 것이다, 모든 이가 그녀 앞에서 곧바로 이다; 그리고 너희는 궁전 아래로 던져질 것이다 (암. 4:2, 3);
“위반들을 관통하여 나감”은 추론들로부터 거짓들을 관통함을 표시한다; “궁전”은 말씀이다, 결과적으로 선으로부터 있는 교리의 진리이다. 그리고 “위반들”에 의해 진리로부터 선의 분리됨에 의해 존재 안으로 오는 거짓이 의미된다; 같은 것이 표현적 의미에서, “여호와의 집의 위반들(부셔진 곳)을 튼튼하게 하고 수리하는 것”에 의해서도 있다 (왕하. 12:6-8, 12; 22:5). 사무엘하서에서:
여호와께서 웃사 위에 깨뜨림이 있어 위반함을 있게 하셨기 때문에 슬퍼했다; 그러므로 그는 그 장소를 베레스-웃사 라고 불렀다 (삼하. 6:8);
위 구절은 궤를 만졌기 때문에 죽은 웃사에 관한 기록이다; 궤에 의해 천국이 표현되어졌다, 최고 의미에서 주님이 표현되어졌다, 결과적으로 신성한 선이 표현되어졌다; 웃사에 의해서는 섬기는 것, 고로 진리가 표현되었는데, 그 이유는 진리가 선을 섬기기 때문이다. 위에 묘사된 분리함은 “웃사 위에 위반함이 있다”에 의해 의미되어 있다.

그리고 그는 그의 이름을 베레스라 불렀다. 이는 그것의 품질을 의미한다. 이는 선으로부터 진리가 가상적으로 분리함의 품질이다; 이는 “이름을 부름”의 의미가 품질이다로부터. 품질 자체는 “베레스”이다; 원어에서 “베레스”는 “위반”을 뜻한다.

그 후에 그의 형제가 나왔다. 이는 실지로는 선이 우위임을 의미한다. 이는 여기서 “형제”인 제라의 표현함이 선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 이유가 자궁을 연 자가 제라이고, 따라서 그가 첫 출생이었다, 하여 그의 손에 두 번 물들인 것이 매어졌는데, 이것은 선이다. 그의 형제가 그 뒤에 나왔다에 의해 의미되는 바, 선이 실제적으로는 앞임 이다는 것; 단지 거듭나는 동안 선이 나타나지 않기 때문에서일 뿐이다; 또한 선은 자체를 내면의 인간 안에 숨기고 있다; 그리고 이 선과 더불어 진리가 결합하는 정도에 따라 애착을 통하여 진리 안으로 흘러들 뿐이다. 그러나 진리가 선과 결합되어졌을 때, 즉 인간이 거듭나졌을 때, 선은 자체를 드러낸다; 그 이유가 이때 인간은 선으로부터 행동하고, 진리를 선으로부터로서 가늠하기 때문이다, 이때 그는 진리를 교리로부터 더 알고 싶어 하기보다 생활에 더 사용하기를 바라고 있다.

그의 손에 두 번 물들인 것을 가졌던 것. 이는 그것이 선임을 인정함을 의미한다. 이는 그가 지금 두 번 물들인 것을 손에 매고 있었다로부터 인정되었다는 사실로부터 분명해진다. 고로 자궁을 연 것이 선이었다는 것, 또는 선이 첫 출생이다가 인정되어진 것이다. 산파가 그의 손에 두 번 물들인 것을 맴에 의해 그녀는 누가 첫 출생인지를 표를 했고, 이로부터 여기서 인정함이 의미되었다.

그리고 그는 그의 이름을 제라 라고 불렀다. 이는 그 품질을 의미한다. 이는 “이름을 부름”의 의미가 품질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제라”에 의해 의미된 품질은 지금까지 내적 의미에서 취급해왔던 것, 즉 선이 실제로 첫 출생이고 진리는 가상적으로 첫 출생이다는 것이다. 품질 자체는 아주 무수한 것들을 그것 안에 포함하지만 세상의 빛에서는 보여질 수 없고, 오직 천국의 빛에서만, 고로 천사들 앞에서만 보여질 수 있다. 만일 인간이 천사들 앞에 나타난 딱 하나만 본다 해도, 그는 너무나 놀라 의아해 하여 그것을 도리어 믿지 못하겠다고 고백할지 모른다. 단언컨대, 그는 거의 어떤 것도 알지 못한다. “제라”는 원어에서 “일어남(rising, 떠오름)”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 말은 태양을 염두해야 적절한 말이고, 태양의 빛의 처음 나타남들에 어울린다. 그가 이로부터 제라 라고 이름된 이유는 거듭나지는 인간 안에서의 선이 이와 비슷하게 (서서히 태양의) 떠오름 같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이것은 처음에 떠오르고 빛을 주고, 이 빛으로부터 자연적 인간에 있는 것들이 계발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것들(영적인 것들과 천적인 것들)이 보여질는지 모르고 , 인정될는지 모르고, 믿어질는지 모른다. 다시 말해, 인간 안에 내향적으로 선으로부터 빛이 있지 않으면, 그는 그것들을 인정하고 믿어지기 위한 진리들을 볼 수 없다; 그 대신 아마 항간의 사람들에 통용되는 정도의 진리 라고, 또는 거짓으로밖에 부를 수 없을 것이다.

새 교회

새 교회
(New Church)

배제형 편역

도서 출판 벽옥

이 책을 엮으면서

여러분도 새 교회인 일 수 있다. 다시 말해 누가 어떻게 누구로부터 새 생명을 받아 진짜 새 교회인이 되어가는지를 생각해볼 자료를 이 책은 제공하고 있다.
흔히 새교회와 연계되어 떠올리는 구절은 아마 계시록 21장 1-3절이 아닐까 싶다. 하여 연상되는 그림은 구름을 밑배경으로 빛을 받으며 내려오는 듯 하게 그려진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에 관한 것일지 모른다. 허지만 이 그림을 상상하는 분들에게 그런 새교회를 꿈속에서라도 본 적이 있는지 되묻고 싶다. 마치 용을 본 사람이 없어도 용이 존재하는 듯 휘황찬란하게 그리는 화가가 생각나서 이다.
그런 그림 대신 저자는 무화과나무, “가지가 연해져 잎을 내미는” 무화과나무를 “새 교회”라는 책의 표지로 삼았다. 이에 대한 이유는 이 책에서 발견할 것이다.
자칭 “…새 교회”는 우리 주변에서 흔히 발견되고, “내(우리) 교회는 새 교회…”라고 힘주어 역설하는 이들도 심심찮게 만나기도 한다. 그렇다면 그들의 새 교회를 두고 막연히 붙였다고 말할 자신은 없다. 그 이유가 새 교회라는 호칭을 사용한 그분들에게 실례를 범하는 것이 되어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어떤 이유에서 새 교회라는 호칭이 사용되었든 성경이 말하는 새 교회, 게다가 계시록 끝부분에 근거하여 말하는 새 교회, 고로 어쩌면 성경에서의 마지막 새 교회일 수 있는 새 교회, 성경의 마지막 책, 게다가 마지막 두 장을 장식하는 듯한 “새 교회, the New Church”에서 성경은 마감된다고 말할 수도 있다.
사실상, 성경에서의 새(로운) 교회 (a New Church)는 계시록에서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계속 있어왔다. 이에 대해 의문스럽고 궁금하시겠지만 이 책의 자료를 읽다보면 자연스럽게 알아지리라 확신한다.
이 책의 이름인 “새 교회”는 체계적인 글이 아니고 저자가 구상하는 20여권(각 500쪽)의 “상응 사전” 속의 단어 하나일 뿐인데, 분량이 적지 않아 책으로도 편집한 것이다. 따라서 사전 편집을 위한 자료인 바, 무질서하나 내용 측면에서는 여러분이 접해보지 못했던 글일 수 있다. 따라서 여러분의 앎이라는 영역에 힘으로 보태어지기를 염원한다. “아는 것이 힘이다”는 말은 삼척동자도 아는 격언인데, 신앙 생활을 위해서도 이것 같이 귀중한 것은 없다고 보는 것이 역자의 제일가는 요점이다.
이 책의 내용 중 한 두 군데라도 귀감이 되어 당신의 영적 생명에 더 많은 활기가 있기를 기도한다
May. 4th. 2018. at bayside NY. Je Hyung Bae.

새 교회
(New Church)

A. 28. 새 교회
324. 그 후에 들어올려진 새 교회가 ‘에노스’라 불리웠다.
333. 새 교회가 그때 일어났다, 이것이 ‘아다와 실라’에 의해 뜻해진다 (창. 4:19).
408. 교회가 아주 황폐해져 더 이상 어떤 신앙도 없을 때, 교회는 새로이(anew) 먼저 시작한다; 또는 새로운 빛이 비추인다, 이것이 ‘아침’이라 불리운다.
409끝, (새 교회가 이방인들에게 이동되었다.)
411. 황폐해짐의 마지막 때는 새 교회가 일어날 수 있기 앞서 반드시 있어야만 한다.
436끝. ‘사람과 그의 아내’(창. 4:25)=‘아다와 실라’로 불리우기 이전에서의 새 교회.
441. 새 교회의 예배.
467. ‘노아’(창. 5:29)=새 교회.
526. ‘아들’(창. 5:28)=새 교회의 일어남.
728-4. 새 교회의 시작이 해방됨과 성전의 재건축에 의해 표현되어졌다.
784. 그러나 이 새 교회는…신앙 안에 있었다.
931-2. 새 교회는 주님에 의해 언제나 소생되어진다.
1148. 새 교회가 출시된 이 때부터.
1219. 새 교회가 고대 교회로부터 출시되었다는 것.
1228-2. (그들을 다시 그러모우고 포로로부터 되돌려 놓는 것)에 의해 새 교회의 창조가 뜻해진다.
1259-3. 새 교회, 또는 이방인들로부터의 새 교회.
1366. 지독히 황폐해져 교회의 내적 예배 안에 악과 거짓의 어떤 것도 남아 있지 못할 때까지 어떤 나라와 더불어서도 교회는 새로이 출시될 수 없다.
1366-2. 새 교회가 원 상태로 되돌려 있게 될 때, 이들에게는 선과 진리가 심어진다; (그 반면) 선과 진리에 관한 모든 지식이 말살될 때, 이방인들의 경우 같이 그들은 우상숭배자가 된다.
1778. 이것이 보여졌는데…새 교회가 되살아나리라는 것이다…
1850-2. 새 하늘과 새 땅, 즉 새 교회가 창조되었다, 이것이 고대 교회로 불리웠다.
1850-3. 그러므로 새 교회는 야곱의 후손들과 더불어 일으켜졌다…
1850-4. 이 후…새 교회, 이것은 원시 (기독) 교회라고 불리워진다.
1850. 지구의 어느 구역에서 새 교회는 일으켜 세워질 것이고, 현재의 새 교회는 그것의 외적 예배 안에서 남아 있는다, 마치 유태인들이 그들의 교회 안에 남아있는 것과 같다…
2243-7. 동시에 주님은 기독 교회라고 불리우는 새 교회를 회복하셨다…
2323. 선행이 빛을 낼 경우에서, 또한 ‘저녁’(창. 19:1)이 있다, 결과적으로 신앙이 빛을 낼 때, 새 교회가 일으켜진다. 이 ‘저녁’은 아침에 앞서 있는 황혼의 빛이다. ..교회가 중단되기로 할 때, 새 교회가 일으켜지는데, 주님에 의해 설비되어진다; 그 이유가 교회 없이 지구 어디에도 인류는 존속해갈 수 없기 때문이다…
2323-2 (창. 19장에서) 교회의 양쪽 상태가 취급된다, 새 교회의 일어남이 ‘롯’에 의해, 옛 교회의 파멸이 소돔과 고모라로 표현되어진다.
2405-8. 아침을 참조.
2830-5. 새 성전과 새 예루살렘, 보편적 의미에서=주님의 왕국, c특수적 의미에서는 새 교회.
2853-3. 어떤 교회가 극점에 도달하는 언제든지…주님의 섭리로부터, 새 교회가 언제나 일으켜진다.
2895. 복음서 기자들에 의해 쓰여진 말씀이 새 교회 안에 있었다.
2901. 새 영적 (평명의) 교회.
2901끝. ‘가나안의 토지에 있는 헤브론’ (창. 23:2)=새 교회.
2902. 주님께서 새 교회를 복구하셨다는 것, 이것이 상냥하게 받아졌다…
2902끝. 고로 이방인들로부터 새 교회.
2906-2. ‘여호화께서 흡족해 하시는 해 (이. 61:2)=새 교회의 때.
2906. ‘내 되찾음(구속)의 해’ (이. 63:4)=새 교회의 때.
2909-3. 다시 새 교회가 있었다는 것이 갈렙에게 마을과 들판을 할양함에 의해 표현되었다.
2910-3. 후에 새 교회가 주님에 의해 일으켜세워졌는데, 이것이 이방인들의 교회라고 불리웠다, 그리고 내적 이었다…
2910끝. 교회가 극점에 이르고 멸망할 때, 언제나 주님께서는 어딘가에 새 교회를 일으키시고 계신다; 그러나 이전의 교회로부터서는 드물다; 그러나 무지해 있어왔던 이방인들로부터서 이다.
2912. 새 교회가 이전 것 대신에 일으켜지기로 되어있기 때문에.
2913. ‘헷의 아들들’ (창. 23:3)=새 영적 교회가 (있기로 되어 있는) 이들.
2913-3. (창. 23:3에서) 이전 것이 만가가 될 때 주님게서 일으키는 새 교회가 취급된다.
2915. 창. 23:4에서는 새 교회에 관하여가 취급되는데, 그것의 첫 상태, 즉 주님이 그들에게 알려져 있지 않은 상태; 그러나 여전히 그들은 선행의 선 안에서, 시민적 생활 역시 공평과 공정함에서, 도덕적 생활 역시 명예로운 바, 주님이 그들과 더불어 계실 수 있는 조건을 갖추고 있다; 그 이유가 주님의 현존하심은 선 안이기 때문이다…
2916-4. 주님께서는 죽은 자로부터 나사로를 복구하셨다, 또한 새 교회를 소생케 하심을 포함한다.
2919. 새 교회로부터 있는 상호적인 상태.
2950. 세 영적 (평면의) 교회 속에 있는 이들의 선한 의지 때문에 주님이 기뻐하심.
2955. ‘나는 죽은 자를 매장할 것이다’ (창. 23:13)= 영적인 밤으로부터 있는 위급함, 그리고 생동하게 함, 또한 이전의 교회가 죽을 때, 그것 대신 새 교회가 주님에 의해 일으켜지는 이유를 위해서이다.
2955끝. 땅 위에는 언제나 어떤 교회가 있기 때문, 그리고 옛것이 죽을 때, 새 교회가 다시 그밖의 장소에서 일어난다, 거기서 아침이 온다.
2978. 그들이 거듭나지는 것, 고로 새 교회가 일으켜진다는 것.
2981. ‘이것이 헤브론이다’ (창. 23:19)=이것이 새 교회이다.
2986. ‘헷의 아들로부터’ (창. 23:20)=이것은 이방인들로부터 이었다는 것.
2986-2. 알려진 바, 어떤 교회가 무익(무효)해질 때, 즉 선행이 멸해질 때, 새교회가 주님에 의해 일으켜진다, 드물지만 옛 교회에 있어왔던 이들로부터이다; 그러나 이전에 교회가 있지 않았던 이들과 더불어 (일으켜진다)…태고 교회가 멸해졌을 때, 새 교회가 일으켜졌는데, 이것이 ‘노아’로 불리웠다…이것도 이방인들과 더불어 일으켜진 것…마찬가지로 이 교회가 멸해졌을 때도 역시 교회와 유사한 것이 아브라함의 후손들t과 더불어 설립되었다…아브라함이 불리울 당시 그는 이방인이었다…그리고 이집트에 있는 야곱의 후손은 더욱 더 이방인이 되어 있었다…이 교회가 극점(종말)에 이르자, 유태인 거절되고 이방인들로부터 원시 기독 교회가 일으켜지었다. 이 교회와 더불어 있는 이들이 기독교인이다.
[2986]-3. 새 교회가 주님에 의해 이방인들과 더불어 일으켜지는 이유는 그들이 신앙의 진리들에 반대되는 거짓 원리들을 가지지 않았기 때문이다…거짓의 원리들은 유아기로부터 흡입되어진다, 이후 확증되는 바, 인간이 거듭나질 수 있기 이전, 즉 교회가 되기 이전 털어내야 한다…
3325-10. 새 영적 (평면의) 교회.
3355끝. 내적, 외적 새 교회.
3579-2. 새 교회.
3580-6. ‘이스르엘’ (호. 2:22)=새 교회.
3654-3.일반적 측면에서의 새 교회, 그리고 특별한 측면에서는 거듭나지는 각 인간, 또는 교회를 만드는 각 사람.
3708-11. 새 교회가 (직바른 이방인들)과 더불어 일으켜질 때, 하느님의 영이 거기서 ‘쉰다(rest, 고요해진다, quiet)’ (슥. 6:8)고 말해진다.
3881-5. 이방인들과 더불은 새 영적 (평면의) 교회
3898-3. 말씀의 내면들이 지금 열리는 이유인 즉, 오늘날 교회는 심히 황폐되었기 때문, 즉 신앙과 사랑이 결핍되었기 때문, 비록 인간들이 알고 이해할지라도, 여전히 그들은 인정하지 않는다, 더욱이 믿지 않는다; 극소수, 즉 선한 생활 안에, 고로 ‘뽑힌 자’ (마. 24:24)라 불리우는 자들만이 인정하고 믿는다. 이들과 더불어 새 교회는 설립된다. 그리고 이런 자가 어디 있는지는 주님만이 아신다; 교회 안에는 극히 적을 것이다; 이전의 새 교회의 설립도 이방인들과 더불어서 였다.
4058끝. (마. 24장) 새 교회의 시작이 취급된다.
4060-9. ‘그들이 네 바람들로부터 뽑힌 자를 그러모을 것이다…’ (마. 24:31)=새 교회가 일으켜짐.
4197-4. ‘하느님으로부터 생명의 영이 그들 안으로 들어갔다, 하여 그들은 자기들의 발로 섰다’ (계. 11:11)=새 교회.
4230. 마지막 심판을 보라.
4231. ‘무화과나무로부터의 비유를 배워라: 그것의 가지가 연해지고, 그것이 잎을 내밀면, 여름이 가까웠음을 너희는 안다’ (마. 24:32)=새 교회의 처음…
4231. (고로) 이 비유는 새 교회가 주님에 의해 창조될 때, 무엇보다 먼저 자연 평면에서 선, 즉 선에 대한 애착들과 진리들과 더불어 외적 형체에 있는 선이 나타난다는 것을 포함한다.
4231-2. 그 다음 옛 교회가 거절되어지고, 그리고 새 교회는 일으켜진다.
4231끝. (고로) 여기서 새 교회의 시작들에 관한 것이 예견되어 있다.
4255끝. ‘새 땅’, 또는 ‘거룩한 토지’ (겔. 47:18)=주님의 왕국, 그리고 또한 새 교회, 이것이 땅 위의 주님의 왕국이다.
4333. 이 말들은 옛 교회가 거절되어질 때, 새 교회가 일으켜지는 때의 상태의 품질을 묘사하고 있다.
4334-5.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는 날까지’ (마. 24:38)=이전 교회의 끝과 새 교회의 시작.
4334끝. 이 말들(마. 24:36-42)에 의해 (옛) 교회가 거절되고, 새 교회가 채택될 때 (옛) 교회 내에 있는 선과 진리에 관련한 상태들이 무엇일지가 묘사되어 있다.
4423. 옛 교회의 거절과 새 교회를 채택함의 경우가 어떻게 있는지에 관하여 누구에게도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옛 교회의 사람들이 멸망하는 것이 아니다…그러나 교회는 교회의 내면들 측면에 관하여 원칙적으로 멸망하는 것이다…이때 천국은 그 자체를 제거하고…그리고 그들 대신에 채택된 다른 사람들에게로 이동한다.
4449. 이 새 교회와 결합함을 갈망함.
4516끝. 그 이유가 이전 교회가 황폐해질 때까지 새 교회는 일으켜지지 않기 때문.
4535-2. ‘새 하늘과 새 땅’(이. 65:17)=이전 교회가 사라질 때, 이어지는 새 교회의 내적, 외적 측면.
4535-3. 이전 교회의 마지막 때와 새 교회의 처음이 ‘시대의 종말(극점)’ (마. 24장)이라 불리운다…그리고 그분의 강림; 그 이유가 그때 주님께서는 이전 교회에서 물러나시어 새 교회에 오시기 때문.
4588끝. 히브리 여인이 낳은 딸들과 아들들=새 교회의 선들과 진리들.
4672. 새 교회가 서술될 경우, ‘소년’(요셉) (창. 37:2)= 새 교회의 처음 상태…그 이유가 교회는 인간의 년령에 따른 시기와도 비슷하기 때문이다…
4747-3. 그러므로 어떤 새 교회가 주님에 의해 일으켜질 때, 이는 교회 내에 있는 이들과 더불어서가 아니고, 교회 밖에 있는 이들, 즉 이방인들과 더불어서 이다. (이것이) 요셉이 형제들에 의해 구덩이에 내던져짐, 그리고 미디안족에 의해 끌어내짐, 그리고 이스마엘족에게 팔려짐 (창. 37:28)에 의해 표현되고 있다; 그 이유가 요셉의 형제들에 의해서 신성한 진리들에 맞서 자신들을 확증한 교회 내의 사람들이 표현되는데, 특별히 두가지 사항들에 반대되고 있다: 즉 주님의 인간이 신성하다는 것, 그리고 선행은 구원함에 효력이 있다는 것, 그리고 이것은 교리 안에 뿐만 아니라 생활에도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스마엘족’은 단순한 선 안에 있는 이들을; ‘미디안족’은 이 선으로부터의 진리 안에 있는 이들을 표현하고 있다.
4835. (고로) 유태 교회는 어떤 새 교회는 아니었다, 그러나 고대 교회가 소생된 것, 이것은 멸해졌다.
4904-3. 그러므로 주님은 새 교회를 일으키신 것…
5247-2. 거기서 새 성전이, 새 성직 직분, 즉 새 교회가 취급된다…
5360끝. 새 교회의 상태에 앞서 있는 교회의 마지막 상태가 ‘황폐함’, 그리고 ‘황무함’에 의해 말씀에서 뜻해지고 있다…
6000-4. ‘밤’ (마. 25:6; 눅. 17:34; 마. 26:31, 34)=옛 교회의 마지막 때와 새 교회의 처음.
6588. ‘하느님께서 너희를 꼭 방문하실 것이다’ (창. 50:24)=…옛 교회의 마지막 때, 그리고 새 교회의 처음. 이 마지막 때가 ‘방문함’이라 불리우고, 그리고 태어나지는 새 교회, 그리고 옛 교회는 기한이 만료됨을 서술한다…
6588-2. ‘방문함이 있어지는 것’ (눅. 1:68, 78)=새 교회가 일으켜 세워짐, 그리고 그때 신앙으로부터의 진리와 선에 대해 무지함에 있던 이들이 계발됨; 고로 그들이 해방됨에 관하여; 그러므로 말해진다, ‘그분이 방문하셨다, 그리고 그분의 백성을 구해내셨다’; ‘그분은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은 이들에게 나타나시기 위하여 방문하셨다.’
6895-2. 주님의 강림은 옛 교회가 거절되고, 새 교회가 주님에 의해 일으켜 세워질 때 거행된다: 그리고 새 교회가 야곱의 후선들과 더불어 일으켜졌던 바, ‘그분은 우리를 꼭 방문하신다’ (창. 50:24)라고 말해진 것이다…
6895끝. 고로 주님의 강림은 새 교회 속에 있을 이들과 더불어 사랑과 신앙 안에서 있는다.
7844-4. ‘아침’=주님으로부터 있는 새 교회의 빛과 일어남.
7844-3. 저녁을 참조하라.
8427-4. ‘당신의 오심의 표시인 것을 우리에게 말해주십시오’(마. 24:3)…주님의 오심=신성으로부터의 진리(truth Divine)가 새 교회 속에 있는 이들에 의해서는 인정되고, (한편) 옛 교회 속에 있는 이들에 의해서는 부정되는 것.
8891-3. ‘아담과 이브’(창. 3장)=새 교회.
8902-8. 여기서(이. 26:21)는 교회의 마지막 때에 관한 것, 즉 새 교회가 소생되고, 옛 교회가 멸해질 때를 취급한다; ‘야곱’=교회의 외적 측면 안에 있는 이들; 그리고 ‘이스라엘’=교회의 내적 측면에서 있는 이들.
9042-2. (예. 31:8) 주님으로부터 있는 새 교회를 취급한다.
9050-10. (겔. 47:9) 새 성전, 즉 주님으로부터 있는 새 영적 (평면의) 교회에 관하여.
9182-6. (호. 2:18, 19) 새 교회를 회복하심(세우심)에 관하여
9212-7. (눅. 5:36) ‘헌 옷에 새 옷의 조각을 보태는 자는 아무도 없다…’ 주님께서는 새 교회의 진리와 옛 교회의 진리와의 관계가 헌 옷과 새 옷과의 관계와 유사하더고 말하신 것이다…이것에 다른 것을 ‘깁는(sew)’ 것…은 둘 다를 파괴한다; 그 이유가 새 교회의 진리는 내면의 진리, 즉 내적 인간을 위한 진리; 그 반면 옛 교회의 진리는 외면의 진리, 고로 외적 인간을 위한 진리이기 때문. 이 후자의 진리 안에 유태 교회가 있었다…이에 비해 오늘날의 교회는 (상대적으로) 내적 진리들 안에 있다…
9256-5 이런 사항들로부터 새 교회는 교회 밖에 있는 나라들과 더불어 언제나 설립되어짐이 분명해진다; 이것은 옛 교회가 그 자체를 향하여 천국을 닫아버릴 때 거행된다. 그러므로 교회는 유태 백성으로부터 이방인들에게 이동되어졌다; 또한 현재의 교회가 지금은 이방인들에게 이동되어지고 있다.
9256-7. 이방인들은 인간 형체로서의 한 분 유일한 하느님을 숭배한다; 그러므로 그들이 주님에 관하여 듣게 될 때, 그들은 그분을 받고 인정한다; 새 교회는 이런 자들과 더불어 설립되어질 수 있다.
9325-8. 이방인들의 새 교회가 ‘많은 아들들을 가지는 애를 못 낳는 여인…’에 의해 뜻해져 있다 (삼상. 2:5).
9407-4(?).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거룩한 예루살렘’에 의해 이방인들과 더불은 새 교회가 뜻해진다, 그 후 우리의 유럽 세계 안에 있는 현재의 것이 황폐되어왔다.
9408-5. 창. 1:1과 2:1의 ‘창조’에 의해 새 교회가 뜻해진다; 그 이유가 이 두 장에서의 ‘창조’는 새로운 거듭남이기 때문…
9485-2. (예. 3:14, 16, 17에서) 새 교회에 관한 것을 취급한다. 이전 교회의 표현물, 이 표현은 철폐되어진다는 것이 ‘더 이상 말해지지 않는 궤’에 의해…‘예루살렘’, ‘여기에 나라들이 모일 것이다’에 의해 새 교회가 표시되고 있다.
9642-2. 이. 43:6에서는 새 교회에 관한 것을 취급한다. ‘북에게 말하는 것’=신앙의 진리들에 관하여 무지함 또는 어둠 안에 있는 이들, 즉 교회 밖에 있는 나라에 있는 이들에게 말함이다.
9659-5. 겔. 40장에서는 새 집에 관하여를 취급한다, 이 집을 수단으로 주님의 새 교회가 의미된다.
9818-4. (슥. 12:1) ‘하늘을 펴시고 땅의 기초를 놓으심’=새 교회.
10134-7. 교회가 그것의 밤 안에 있을 때, 이는 하느님을 사랑함과 신앙 안에 더 이상 있지 않을 때이다, 그 다음 해뜨기 직전 박명으로부터, 아침은 또 다른 나라와 더불어 시작한다, 거기서 새 교회는 건립되어진다.
10134-11. (이. 21:11, 12) ‘아침이 오고, 또한 밤이 온다’=비록 새 교회로부터 있는 이들에게 계발됨이 있을 지라도, 옛 것 안에 있는 이들에게는 여전히 밤이 있다.
N. 1-2 (계. 21:1) ‘새 하늘과 새 땅’=천국들 안에서와 땅 위에 있는 새 교회.
5. ‘새 땅’에 의해 땅 위에 있는 새 교회가 뜻해진다; 그 이유가 이전의 교회가 존재하기를 중단할 때, 새 것이 주님에 의해 설립되어지기 때문이다…
J. 1-2. 천국들에 있는 새 교회가 말해진다, 그 이유는 땅 위에서와 같이 거기에도 교회가 있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거기에도 땅에서와 같이 말씀이 있기 때문, 또한 신성한 예배도 있기 때문; 차이점이라면 단지 그쪽은 더 완전한 상태에 있다는 것이다…
34끝. 교회의 끝에서 악은 선을 압도할 정도로 증가한다, 그래서 모든 이는 주님에 의해 심판되어진다, 그리고 악은 선으로부터 분리된다, 그리고 모든 것들은 질서로 환원된다, 그리고 새 하늘이 설립된다, 그리고 또한 땅 위에 새 교회가 설립된다, 그리하여 (영적) 평형이 회복된다.
45-2. 보는 것이 나에게 주어졌는데…새 하늘이 어떻게 만들어져 왔는지, 그리고 ‘새 예루살렘’에 의해 뜻해진 것인 새 교회가 천국들 안에서 어떻게 건립되어왔는지…
46-2. (창. 1장의) ‘하늘과 땅의 창조’에 의해 새 교회의 건립이 뜻해진다.
C. J 12. 최후 심판이 완성된 후, 그리고 그 이전이 아니고, 계시들이 새 교회를 위해 만들어졌다
L 서문끝. 말해진다, 새 예루살렘의 교리, 그리고 오늘날 주님에 의해 설립되는 새 교회를 위한 교리가 뜻해진다; 그 이유가 옛 교회가 그것의 끝에 도착했기 때문이다…
3. 주님께서는 새 교회를 일으켜세우기 위하여 세상에 오셨다…
61. 주님에 관한 이런 사항들이 먼저 알려지게 만들어지게 되는 이유는 이것이 계시록 21, 22장에서 예언되어져 있는 것 때문, 즉 새 교회는 이전 것의 끝에서 주님에 의해 설립된다는 것, 이 교회 안에서 이것이 제일의 것이 된다는 것이다. ‘새 예루살렘’에 의해 뜻해지는 이 교회 안으로 들어 올 자는 오직 주님만을 천국과 땅의 하느님으로서 인정해야한다; 그러므로 이 교회는 ‘어린 양의 아내’라고 불리운다.
62. 새 교회가 계시록에서 ‘새 예루살렘’에 의해 뜻해진다는 것.
62. ‘새 하늘과 새 땅’은…영계에 있는 교회의 새로이 있는 것, 그리고 자연계에 있는 교회의 새로이 있는 것을 뜻한다.
63. ‘거룩한 성 예루살렘’에 의해 교리 측면에서의 새 교회가 뜻해진다.
65. 주님에 의해 지금 설립되어지는 (새) 교회 안에 새 교리가 있을 것이다.
S. 14-2. (마. 24:29-31) ‘뽑은 자를 그러모음…’에 의해 사랑과 신앙 측면에 관하여 교회에 새로이 있는 것이 뜻해진다.
F. 67끝. (단. 8:14) ‘저녁 아침, 거룩한 것이 의롭다 여겨질 때까지’에 의해 교회의 끝, 그리고 새 것의 시작이 의미되어 있다.
P. 264-4. 영적 의미가 있는 진짜 진리들은 (영계에서의) 최후 심판 (the Last Judgment) 이후, 그리고 ‘거룩한 예루살렘’에 의해 뜻해진 새 교회가 주님에 의해 설립될 때까지 밝히 알려지지 않았다.
264-5. (고로) 영적 의미가 새 교회를 위하여 밝히 알려지게 되었다, 즉 주님만을 인정하고 예배하는 것, 그리고 그분의 말씀을 거룩하게 간직하는 것, 그리고 신성한 진리들을 사랑할 것, 그리고 선행으로부터 분리된 신앙은 거절하는 것이다.
328-10. 새 교회는 황폐된 이전의 것 대신하여 계속 될 것이다가 설비되고 있다.
R. 서문-2. 이로부터 새 하늘이 내려오고, 땅에 새 교회가 내려오는데, 이 교회가 새 예루살렘이다. 이 교회는 주님 만을 인정할 것이다.
I. 이 계시는 새 예루살렘인 새 교회 안에 있을 이들에 의해 받아진다는 것.
II-2. 계시록은 시작부터 끝까지에서 천국들과 땅에 있는 교회의 마지막 상태에 관하여, 그다음 (영계의) 최후 심판 (the Last Judgment), 이후 새 예루살렘인 새 교회에 관하여를 취급한다. 이 새 교회가 이 일의 끝임은 분명하다, 그러므로 (계시록 앞부분에서는 새 교회 이전 대략적으로 교회의 상태에 관한 것을 취급한다.
4-2. ‘시대의 종말’에 의해 옛 교회의 마지막 상태가 뜻해진다; 그리고 ‘주님의 강림’에 의해 새 교회의 첫 상태가 뜻해진다.
9. (마. 21:22)그러므로 이런 두 필수 본질을 인정하고 그것들에 따라 사는 새 교회가 일어나지 않으면, 아무도 구원되어질 수 없다. 이 위험 때문에 시간이 주님에 의해 짧아진다…
17-5 그러므로 생활의 선이 새 예루살렘인 그분의 새 교회에 있을 이들을 위해 주님에 의해 지금 가르쳐지고 있다.
43. (계. 1:12) ‘나는 금빛의 등잔대들을 보았다’=새 교회, 이 교회는 말씀으로부터 주님으로부터 예증함 안에 있을 것이다.
43-2.주님의 새 교회 속에 있을 이들이 유일한 등잔대들이고, 이들은 주님으로부터 빛을 받는다.
43-3. ‘등잔대’에 의해 새 교회가 의미되고, 슥. 4장에서도 그러하다.
43-4. 진리를 통하여 사랑의 선으로부터 주님에 의해 새 교회는 예증됨.
44. 말씀 측면에서의 주님, 이 분으로부터 새 교회가 있다.
53-2. ‘그 날’ (이. 30:26)=옛 교회가 파괴되어졌을 때, 주님이 강림하심, 그리고 새 것이 일으켜 세워지는 것.
64. (계. 1:20) 새 천국과 새 교회에 관한 환상에 있는 신비함들…‘일곱 별들’=천국들에 있는 교회; 그리고 그리고 ‘일곱 등잔대들’= 땅에 있는 교회.
65. (계. 1:20) ‘일곱 별들은 일곱 교회들의 천사들이다’=천국들에 있는 새 교회, 이것은 새 천국이다.
66. (계. 1:20) ‘네가 본 일곱 등잔대들은 일곱 교회들이다’=땅에 있는 새 교회, 이는 새 천국으로부터 주님으로부터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이다.
66끝. 그러므로 다양한 것을 지닌 보편적 새 교회가 일곱 교회들에 의해 지금 뒤이어지는 사항들 안에 묘사되어 있다.
67. 새 천국과 새 교회의 신앙이 보편적 관념(생각, idea)에서 서술되었다.
68. (기독교계로부터) 모든 이것들이 새 예루살렘인 새 교회라 불리운다.
69. (일곱 교회들)에 의해 기독 세계 안에 있는 모든 이들, 종교를 가진 이들, 그리고 이들로부터 새 예루살렘인 새 교회가 만들어질 수 있는 이들이 묘사되고 있다; 그리고 이 교회가 만들어지려면 주님만에 접근하려 해야 하고, 악한 일들로부터 회개함을 동시에 수행해야한다. 그 외의 사람들, 즉 주님 만에 접근하지 않는 이들, 그리고 그분의 인간이 신성함을 확증적으로 부정하는 이들, 그리고 악한 일들로부터의 회개를 수행 않는 이들, 이들이 실로 교회에 소속되고 있다 해도 그들은 자신들 안에 교회의 어떤 것도 가지지 않은 자들이다.
70. 주님 만이 천국과 땅의 하느님으로 인정하는 이들은 천국들에서 그분의 새 교회 속에 있을 이들과 땅 위에서 새 교회 속에 있을 이들이기에 계시록의 첫 장은 주님 만을 취급하고 있다; 그리고 다음 두 장에서 그분 만이 교회들에게 이야기하신다…
71끝. 이런 구절들로부터 (계. 2:7; 2:10, 11; 2:17; 2:26, 28; 3:12; 3:21) 주님 만이 새 교회 안에서 인정되어짐이 분명해진다. 그러므로 이 교회는 ‘어린 양의 아내’ (계. 19:7, 9; 21:9, 19)라고 불리운다.
72. 새 교회, 이는 새 예루살렘인데, 악한 일들을 회개한 이들로부터 만들어진다.
87. 이런 사항들을 이해하는 자는 말씀의 신성한 진리가 가르치는 것에 순종하는 바, 이들은 새 예루살렘인 새 교회 속이 있을 것이다.
145. 그들은 자기들이 말씀으로부터 아는 몇 가지 것들을 자기들이 새 천국과 새 교회를 만들 때까지 보유하고 그것들에 따라 산다. 이것이 주님의 강림이다.
154. (서문) (모든 이들이) 주님의 새 교회로 불리운다.
166-4. (눅. 5:36)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외적이고 영적인 것들의 표현인 이전 교회의 것들을 ‘헌 옷 조각’에 비교하신다; 그리고 내적이고 영적인 새 교회의 진리들은 ‘새 옷 조각’에 비교하신다.
183. 교리 측면에서 거짓들 안에 있는 이들, 그들이 악으로부터의 거짓들 안에 있지 않으면, 새 교회의 진리들을 받고, 그것들을 인정할 것이다.
187. 주님의 강림, 그리고 그때 그들로부터의 새 교회.
194. 새 교회의 교리가 그들의 심정들에 새겨질 것이다.
237. ‘왕좌 앞 불켜진 일곱 등불들이 있었는데, 이는 하느님의 일곱 영들이다’ (계. 4:5)=주님으로부터 진행하는 신성한 진리를 통하여 주님으로부터 천국과 땅에 있는 새 교회.
237. ‘일곱 등잔대들’에 의해 당 위 새 교회가 뜻해진다…그리고 ‘일곱 별들’에 의해 천국들에 있는 새 교회가 뜻해진다.
348-3. 여기서 취급된 이들(144,000)로부터 주님에 의해 새 천국이 만들어져 왔고, 새 교회가 만들어져 오고 있다.
350. (계. 12:5, 유다 지파로부터의 12000명은) 새 천국과 주님의 새 교회 안에 있을 이들과 더불어 있는 천적 (수준의) 사랑, 이는 주님을 사랑함이다.
351. (계. 12:5, 르우벤 지파로부터의 12000명은) 새 천국 안에, 그리고 주님의 새 교회 안에 있을 이들과 더불은 천적인 사랑으로부터 있는 지혜.
352. (계. 12:5, 갓 지파로부터의 12000명은)새 천국, 주님의 새 교회 안에 있는 이들과 더불어 있는 생활의 쓸모 있음들(uses, 유용, 선용)을 의미하고, 이 사랑으로부터 지혜 속에 있다.
353. (계. 12:6, 아셀 지파로부터의 12000명은) 새 천국에, 그리고 주님의 새 교회 속에 있을 이들과 더불어 있는 서로의 사랑, 공동체나 사회에 쓸모가 있기를 사랑함을 의미한다..
354. (계. 12:6 납달리 지파로부터의 12000명은) 사용함과 어떤 사용함을 지각하는 것은 새 천국과 주님의 새 교회에 있을 이들과 더불어서 있는 쓸모있음을 지각하고 무엇이 쓸모 있는지를 지각함을 의미한다.
355. (계. 12:6 므낫세 지파로부터의 12000명은) 새 천국과 주님의 새 교회 속에 있을 이들과 더불어 있는 행동을 뜻함과 섬김을 뜻함을 의미한다.
356. (계. 12:7, 시므온 지파로부터의 12000명은) 새 천국, 주님의 새 교회 안에 있을 이들과 더불어 있는 영적 (수준의) 사랑, 이는 이웃을 향한 사랑, 또는 선행을 의미한다.
357. (계. 12:7, 레위 지파로부터의 12000명은)새 천국과 주님의 새 교회에 있을 이들과 더불어 있는 선으로부터 진리에 애착함을 의미하고, 이로부터 총명이 있다.
358. (계. 12:7, 잇사갈 지파로부터의 12000명은) 새 천국과 주님의 새 교회에 있을 이들과 더불어 있는 생활의 선을 의미한다.
359. (계. 12:8, 스불론 지파로부터의 12000명은) 새 천국과 주님의 새 교회에 있을 이들과 더불어 있는 선과 진리로부터의 부부의 사랑을 의미한다.
360. (계. 12:8, 요셉 지파로부터의 12000명은) 새 천국과 주님의 새 교회에 있을 이들과 더불어 있는 선과 진리에 관한 교리를 의미한다.
361. (계. 12:8, 베냐민 지파로부터의 12000명은) 새 천국과 주님의 새 교회에 있을 이들과 더불어 있는 선으로부터의 진리로 생활함을 의미한다.
362. 단지파는 새 천국과 주님의 새 교회에 있는 어떤 것을 의미할 수 없었다, 그 이유가 새 천국과 주님의 새 교회에는 천적 수준과 영적 수준에 속하는 이들만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단’ 대신 ‘므낫세’가, ‘에브라임’ 대신 ‘요셉’으로 의미되고 있다.
363. 위에 열거되지 않은 나머지 모든 이들, 그럼에도 새 천국과 주님의 새 교회에 있는 이들은 최말단 천국과 외적 교회를 만든다, 이들의 품질에 대해서는 주님 외에는 아무도 아는 자가 없다.
434-2. 용이 핍박한 ‘태양을 휘감은 여인’에 의해 새 예루살렘인 새 교회가 의미되었다
469-2. 이 (주님에 관한 교리)는 새 교회의 필수 교리 자체이다.
473. 일곱 천둥들이 이야기했던 소리는 새 교회의 필수 요소인 바, 세 번씩 말해진 것이다가 의미된다.
473-2. 이런 사항들이 행해졌고, 새 교회, 어린 양의 아내, 천국으로부터 내려왔다.
476. (고로) 주님 만을 천국과 땅의 하느님으로 인정하고, 이분에게로 즉각 접근하는 새 교회가 출시되지 않으면, 교회는 기한이 만료될 것이다.
485 서문. 새 교회의 두 필수 요소에 반대되는 신앙만에 내면적으로 있는 이들의 품질; 이것이 취급된다.
485끝. 새 교회의 상태가 새 천국으로부터 명명백백해졌다.
491. 새 교회의 두 필수 요소가 이 장(계. 10)의 시작과 끝에서조차 가르치고 있다.
491. ‘1260 일’에 의해 이전 교회의 끝, 고로 새 교회의 시작이 의미되고 있다.
494. 새 교회의 이런 두 필수 요소들을 파괴하기를 원하는 자는 지옥의 사랑으로부터 멸해진다가 의미된다.
496. 새 교회의 두 필수 요소로부터 자신을 비켜서게 하는 자는 천국으로부터 어떤 진리도 받을 수 없다는 것이 의미된다.
497끝. 새 교회의 두 필수 요소들로부터 자신을 비켜서게 한 자는 자신들이 있는 거짓들 외애 볼 수 있는 것은 없고, 그들이 말씀으로부터 확증한다면, 그들은 그 말슴 속의 진리를 왜곡하는 것이다.
498. 새 교회의 두 필수 요소를 파괴하기를 원하는 자는 자신들을 갖가지 종류의 악들과 거짓들 안으로 내던지는 것이 의미되고 있다.
500. 신앙 만으로 구원됨이라는 교리를 내면적으로 지닌 이들은 새 교회의 두 필수 요소에 반대하고 공격할 것이다, 하여 그 요소들을 자신들이 거절하고 타인도 거절하도록 부추킬 것이다.
501. 새 교회의 두 필수 요소는 신앙 만으로 의롭다 여김을 받는다는 교리의 거짓들 안에 내면적으로 있는 이들에 의해 거절될 것이다.
505. 신앙 만으로부터의 교리 속의 거짓들 안에, 그리하여 생활의 악 안에 있어왔던 모든 이는 교회의 끝과 새 교회의 시작에 있는 바. 새 교회의 두 필수 요소들을 들어왔을 것이고 듣게 될 것이나 그들은 이 교리들을 비난하고 정죄할 것이다.
509. (개혁 교회에서 받은 두 필수 요소에) 새 교회의 두 필수 요소가 불일치함 때문에 새 예루살렘인 새 교회의 두 필수 요소는 그들에게서는 경멸받고, 싫어하고, 뒤돌아선다.
510. 이전 교회의 끝에서 있는 새 교회의 두 필수 요소들은 시작하고 발전하는데, 이 요소들을 받는 이들과 더불어 주님에 의해 살아있을 것이다.
510. ‘삼일 반’ (계. 11:11)에 의해 아직 있는 교회의 끝으로부터 새 교회의 시작까지가 의미되고 있다; 여기서는 새 교회가 시작하고 발전하는 이들과 더불은 경우이다.
512. 새 교회의 이 두 필수 요소들은 주님에 의해 천국으로 가져가졌다…
523. 새 천국과 새 교회에서 그들은 그분을 유일한 하느님이시다고 인정할 것이다.
532 서문. 계12장은 새 교회와 그 교회의 교리를 취급한다. 즉 ‘여인’에 의해 새 교회가 뜻해진다…교리 때문에 새 교회가 핍박당함…주님께서 숫자가 많아질 때까지 이 교회를 보호하심 등등이다.
532. 천국들과 땅 위 그분의 새 교회에 관하여 주님으로부터의 계시, 그리고 새 교회의 교리를 받음에 곤경이 있음과 이 교리에 맹렬한 공격이 있다.
533. ‘여인이 태양을 옷입고, 그녀의 발 아래에 달이…’ (계. 12:1)= 천국들에 있는 주님의 새 교회, 이는 새 천국이다, 그리고 주님의 새 교회, 이는 땅 위에 있을 것이다, 이것이 새 예루살렘이다.
534끝. 여인의 머리 위에 ‘열두 별들의 왕관이’ (계. 12:1) = 주님으로부터의 신성한 선과 신성한 지혜에 관한 지식들로부터 있는 새 교회의 지혜와 총명.
535. 새 교회의 교리가 초기 단계에서 ‘용’에 의해 뜻해진 이들에 의해 저항받아 받아들임에 어려움이 있다.
536. 새 교회와 이 교리에 맞서 있는 이들에 관하여 주님으로부터의 계시.
542. ‘용’(계. 12:3)에 의해 뜻해진 이들이 새 교회의 일어남에 그 교리를 소멸하느라 분주하다는 것.
545. 이 교리는 새 교회를 위해서 이기 때문에 주님에 의해 이 교리는 보호된다는 것…
546. 새 예루살렘인 교회는 처음에 소수로 있을 것이다.
547. 그 당시 이 교회의 상태, 한편 많은 이들과 더불어 준비되는 동안, 즉 이 교회가 지정된 상태로 증가할 때까지.
547-2. 이것이 주님의 신성한 섭리로부터 있는 이유, 처음에 교회는 소수에게 있을 것이다, 그리고 많은 이들로 계속 불어날 것이다, 이전 교회의 거짓들이 먼저 제거될 것이다; 이렇지 않으면 진리들은 받아질 수 없다. 그 이유가 거짓들이 제게되기 이잔에 받아지고 심어진 진리들은 항구적으로 남아있지 못하고, ‘용’의 추종자들에 의해 줄어들고 말기 때문이다. 같은 것이 기독 교회와 더불어 거행되는데, 소수로부터 다수로 증가하는 것이다. 또 다른 이유는, 새 천국이 먼저 만들어져 있어야만 한다는 것, 하여 이 천국이 땅 위 교회와 하나를 만드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말씀에서, ‘우리는 새 천국을 보았다’, 그리고 ‘천국으로부터 밖으로 하느님으로부터 내려오는 거룩한 예루살렘’이라고 읽는다. 이는 새 예루살렘인 새 교회가 출시될 것임이 확실하다. 이것이 계시록에서 예언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전 교회의 거짓들이 먼저 제거되어야만 한다는 것이 20장까지에서 언급되고 있다.
548. 이전 교회의 거짓들이 새 교회의 진리들과 싸운다.
558. (용 추종자들은) 천국으로부터 영들의 세계 안으로 내던져졌다, 그 때부터 땅의 인간과 결합하여 있고, 이들은 새 교회에 대한 증오함으로부터 자기들의 거짓들과 이에서 파생된 악들을 보전하려 흥분하고 있다.
559. (용은) 새 천국이 만들어져 왔었다는 것, 새 교회가 땅에 있는 것이 임박했다는 것, 그때 자기와 자기의 의지는 지옥 안으로 내던져진다는 것을 알고 있다.
560. 영들의 세계에 있는 용 추종자들은 새 교회의 교리 때문에 새 교회에 (자기들의 것을) 전염시키려 즉시 채비를 했다.
561. 새 교회가 소수로 있는 동안 새 교회를 위한 신성의 용의주도하심, 그리고 보호하심.
562. 유혹자들의 꾀임 때문에 새 교회가 주님이 원하시는 상태에 이를 때까지는 더 주의 깊음이 준비되고 있다.
563. 교회를 파괴하려는 거짓들로부터의 추론은 풍부하다는 것.
563-2. 이것을 나는 관련해 볼 수 있다: 자신들과 더불어 신앙만으로 구원돰을 확증한 이들은 심각한 회개가 아니고사는 그 교리에서 멀어질 수 없다는 것, 그 이유는 그들이 용 추종자들에게 자신을 결합하고 있기 때문이다, 용 추종자들은 지금 영들의 세계 안에 있다, 그리고 거기서 크게 동요하고 있다, 그리고 거기서 새 교회릏 증오함으로부터 자기들이 만나는 모든 이들에게 (자기들의 거짓들을) 전염시키고 있다…
564. 용 추종자들이 도출해낸 추론들은 영적 진리들로부터 합리적으로 이해되어지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이것이 미가엘로부터 있는 새 교회이다고 예증되고 있다.
565. 그들이 새 교회를 파괴하려드는 것은 헛 수고이었다는 것.
565-3. 여기서 여인의 ‘씨’ (계. 12:17)에 의해 새 교회 속에 있는 이들, 새 교회의 진리들 안에 있는 이들이 뜻해진다.
574-2. (단. 7장) 마지막에서 주님의 강림이 묘사되고, 그때 이 교회의 파멸, 그리고 새 교회의 출시.
583. 이 교회의 끝에서조차, 그리고 새 것이 시작할 때까지 이 교리의 거짓들과 악들을 가르치고 행할 기회(는 많다).
593. 주님의 새 교회인은 시험을 수단으로 그들로부터의 생활에 관하여와 신앙에 관하여를 조사받는다.
593. ‘성도들’ (계. 13:10)에 의해 주님의 새 교회 속에 있는 이들이 의미된다; 특별하게는 거기서 신성한 진리 안에 있는 이들이다.
612 서문. 주님의 강림에 관한 복음 전도, 그때 새 교회.
612-2. 이 천국이 새 천국이다, 이로부터 거룩한 예루살렘, 즉 땅 위 새 교회가 내려 올 것이다 (계. 21:1, 2).
626. 주님의 강림이 고시됨, 그리고 그분으로부터 천국으로부터 내려올 새 교회가 고시됨.
628. 이런 사항들이 땅 위 새 교회 속에 있을 이들에게 지금 말하여진다, 그 이유는 개혁됨의 첫 번째가 십계명의 가르침에 따리 사는 것이기 때문이다.
633끝. (계. 14:6, 7에서) 복음의 전파에 관해; 즉 주님의 강림으로부터 새 교회를 설립하심 쪽으로
639. 그분의 새 교회 속에 있는 이들의 사후 상태를 주님께서 예언하심; 즉 주님에 대한 신상과 그분의 가르침에 따른 생활 때문에 시험을 받기를 허용한 이들은 영원한 생명과 행복을 가진다는 것이다.
658끝. ‘시대의 종말에서 조차’ (마. 28:20)=교회의 끝에서 조차, 그때 새 교회와 더불어 주님이 있으실 때까지.
700. 이 추론들의 거짓들은 주님으로부터 있는 선들로부터의 진리들 안에 있는 이들에게서는 제거되어진다. 그리고 새 교회 안으로 입문되어진다.
700. ‘태양이 떠오름’ (계. 16:12)= 주님으로부터 새 교회의 시작.
700-2. 여기서 현 교회의 종말, 끝, 그리고 새 교회의 시작, 설립, 그리고 논쟁들에 관하여를 취급한다.
700. (현 교회가) 새 교회에 있을 이들과 논쟁함이 ‘땅의 왕들이 전투하려고 다 모였다’ (계. 16:14)에 의해 뜻해져 있다. 그러나 이 왕들이 전투하려하는 새 교회 속에 있을 이들은 ‘유브라데강의 물이 말라졌고, 태양의 떠오름으로부터 왕들의 길이 준비됨’에 의해 뜻해져 있다. 이 대목은 과거 이스라엘의 아들들이 가나안의 토지를 받아들여질 당시 요단강이 말리워짐과도 비슷한데, 그 차이는 여기서는 유브라데강이다는 것, 그 이유는 여기서는 내면의 추론들을 수단으로 논쟁하기 때문, 이 내면적 추론에 있는 거짓들이 제거되어야 새 천국, 새 교회로의 받아들임이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그들의 내면의 것들이 계시록에서 열어보이는 것이다.
704. 같은 거짓들 안에 있는 전체 교회의 모든 이가 새 교회를 공격하려고 흥분함.
704. 새 교회의 진리들을 공격하는 것이다인 이유, ‘전능하신 하느님의 위대한 날’이라 말해지기 때문, 그리고 ‘이 날’에 의해 주님의 강림이 의미되고, 그때 새 교회.
704끝. 옛 교회의 끝이기에, 주님의 강림과 새 교회의 시작이고, 그러므로 많은 구절들에서 ‘여호와의 날’에 의해 이전 교회의 끝이 의미된다.
706. 이런 사항들이 주님의 새 교회 속에 있을 이들에게 말해지는데, 그들이 진리들을 배워 그 진리 안에 남아있도록 하시기 위함이다.
707. 새 교회를 파괴하려 드는 마음은 명령하기를 사랑함, 그리고 탁월한 자로 칭해지기를 사랑함에서 근원된다.
707. 옛 교회와 새 것 사이의 전투기 뜻해지기 때문에…
707-3. ‘그 날’에 의해 주님의 강림이 의미된다, 그때, 옛 교회의 끝, 그리고 새 교회의 시작이 의미된다.
707. 슥. 12장에서…묘사된 바, 주님께서 새 교회를 막 만드시기로 하신다는 것 (1절); 그때 옛 교회에 있는 교리는 아무것도 없다는 것, 그리고 그러므로 그들은 그것으로부터 도망함이 있다는 것 (2, 3절). 말씀 안에, 새 교회 안에 있는 이들 외에는 더 이상 진리들을 이해하는 자가 없다는 것 (4절). 이들은 주님으로부터 교리의 선을 배울 것이다는 것 (5절). 그때 주님께서는 말씀 속의 진리들을 수단으로 모든 거짓들을 파괴하실 것이다는 것, 하여 새 교회의 교리가 진리외에 어던 것도 가르치지 않도록 함에서 이다 (6, 7절). 그때 교회는 주님에 관한 교리 안에 있을 것이다 (8절). 그대 그분은 이 교리에 반대하는 모든 인물들과 것들을 파괴하실 것이다 (9절); 그리고 그때 주님으로부터 새 교회가 있을 것이다 (10절). 그리고 그때 교회의 각각 그리고 모든 것들은 아침 안에 있을 것이다 (10-14절).
707- 4. 슥 13장의 내용들은 이러하다: 말씀이 새 교회를 위해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에게 열리어 있을 것이다 (1절)…황폐된 교회 속에 있는 이들은 멸해질 것이다; 그리고 새 교회 속에 있는 이들은 순수해지고 주님에 의해 가르쳐질 것이다 (8, 9절).
707-5. 슥. 14장의 내용은 이렇다: 새 교회 안에서 진리는 번성할 것이다; 거기서 악의 거짓은 있지 않을 것이다 (10, 11절)…그들은 주님을 예배함에 응할 것인데, 외적 자연 평면에 있는 이방인들조차 동의 할 것이다 (16-19절)…이상은 슥. 12, 13, 14장의 열려진 내용들이다. 그 이유가 이 장들에서 옛 교회의 마지막 상태와 새 교회의 시작에 관련된 상태를 취급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계. 16:16에서) 그들이 아마겟돈이라는 장소로 다 모인다고 말해지는바… 분명한 것은 두 예언서에서 같은 것이 취급된다는 것, 즉 현 교회의 마지막 상태, 그리고 새 교회의 첫 상태가 취급된다는 것이다.
750끝. ‘시대의 종말에서 조차’(마. 28:20)=교회의 끝에서 조차; 그때 그들이 주님에게 접근하지 않고, 그분의 가르침에 따라 살지 않으면, 그들은 주님에 의해 남겨질 것이다; 그때 그들은 종교가 없는 이교도같이 된다; 그리고 그때 주님은 그분의 새 교회 속에 있을 이들과만 계실 것이다. 이런 사항들이 ‘하느님의 말씀이 극점(종말)에 이를기 가지’, 그리고 ‘시대의 종말(극점)에서 조차’에 의해 의미되어 있다.
803 서문. 주님의 강림과 새 교회에 관하여 고시함.
811. 가장 낮은 천국의 천사들, 중간 천국의 천사들, 가장 높은 천국의 천사들은 주님만이 지금 오는 교회를 통치하심에 기뻐하고 있다.
813. ‘그리고 그분의 아내는 자신을 준비되게 만들었다’ (계. 19:7)=새 예루살렘인 이 교회 속에 있을 이들이 수집되고, (새 시대를)열고, 가르침을 받는다는 것.
814. 주님의 새 교회 속에 있을 이들이 주님으로부터 말씀을 통하여 진짜이고 순수한 진리들로 가르쳐질 것.
816. 천사가…요한에게 주님의 새 교회에 관하여 이야기하여 말하기를, 이 교회 속에 있는 사항들을 받는 이들은 영원한 생명을 가진다는 것을 땅에서 아는 것이 주어졌다.
816-2. 천국들에서 새 교회가 설립되어왔듯, 땅에서도 주님에 의해서립되어진다는 것이 발표되기 위하여 이것이 행해졌다; 그 이유가 교회는 주님에 의해 천국들에서 먼저 건립되고, 그 후에 천국을 통하여 땅에서도 건립되기 때문이다.
816-3. ‘어린 양의 결혼식’ (계. 19:9)에 의해 새 교회가 의미되는데, 이는 주님과 결합함이다. ‘(잔치에) 초대받은 이들’에 의해 (새 교회를) 받아들이는 이들이 뜻해진다…
816-4. ‘어린 양의 혼인 잔치’라고 불리우는 이유는, 이것이 ‘저녁’이라 불리우는 교회의 마지막 상태에서 거행되기 때문…그러나 새 교회의 첫 상태는 ‘아침’이라 불리운다. 저녁에 인간은 교회로 불리운다; 그리고 불린 자가 출석할 때, 그것은 아침이 된다.
831. 신성한 사랑으로부터의 주님, 그리고 거기로부터의 신성한 열정은 진리에 영적으로 애착하는 이들, 그리고 천국에 관하여 곰곰이 생각하고저 하는 이들을 부르시어 새 교회로 소집하신다.
831. ‘위대하신 하느님의 만찬에 오고 다함께 모이는’ 것 (계. 19:17)= 새 교회로 부르시고 소집하는 것, 그리고 주님과 결합하는 것.
833. 신앙만을 고백하는 이들, 내면적의 악한 모든 것, 주님의 새 교회 속에 있을 이들을 감염되게 할 것이다.
839. 나는 붉고 검은 말 위에 있는 군대를 보았다, (그들은) 원숭이들 같았는데, 그들의 얼굴과 가슴은 말의 허리와 꼬리를 향해 돌아서 있었다…그들이 외쳤다, 흰말을 탄 이들과 싸우러 가자; 그리고 그들이 양손으로 고삐를 당겼다, 고로 싸움으로부터 말을 물러서게 했다…천사들이 말했다, 그들은 ‘아마겟돈’이라는 장소로부터 인데, 이 장소로 수천이 모였고, ‘새 예루살렘’이라 불리우는 주님의 새 교회 속에 있는 이들에 맞서 싸우려고 모였다.
839-7 (천사들이) 그들에게 통보했다, 오늘날 새 교회는 주님에 의해 설립되는데, 이것이 ‘새 예루살렘’에 의해 계시록에서 뜻해진다; 이 교회에서는 천국에서 같이 주님 만이 예배될 것이다: 그리고 시작으로부터 끝까지 주님의 기도에 포함된 모든 것을 완성할 것이다.
859-2. 주님에 의해 설립되는 새 교회는 갖가지 종류의 진리들과 선들 안에서 통보될 것이고, 모든 종류의 선들을 빨아들일 것이다 (겔. 39:17-21 참조).
861. 용 추종자들에 의해 흥분됨, (‘곡과 마곡’에 의해 뜻해진 이들)이 새 교회의 모든 것들을, 특히 새 교회의 주님과 생활에 관한 교리 자체를 파괴하려 골몰할 것이다.
876, 서문. (계. 21장에서는) 마지막 심판 이후 천국과 교회의 상태에 관한 것을 취급한다: 즉 그 후 새 천국을 통하여, 새 교회가 땅위에 출시될 것이다, 이 교회는 주님 만을 예배한다 (1-8절). 이 교회가 주님과 결합한다 (9, 10절). 말씀으로부터 총명한 측면에 관하여 묘사함 (11절): 그로부터의 교리 측면 (12-21절): 그리고 모든 그것의 품질 측면 (22-26절).
879. 이전 교회의 끝에서 주님에 의해 설립되어지는 새 교회, 이 교회는 교리와 생활 측면에 관련하여 신성한 진리들 안에서 새 천국과 연합될 것이다.
879끝. ‘천국의 안으로부터 밖으로 하느님으로부터 내려옴’이라 말해지는 이유는 [새 교회]는 새 기독 천국을 통하여 주님으로부터 이기 때문이다.
881. 새 교회는 말씀을 통하여 주님과 결합할 것이다.
881. 요한은 (새 교회를) 처음에 도성으로 보았다, 그리고 그 후에 처녀 신부로 보았다; 표현적으로는 도성으로, 영적으로는 신부로 보았다; 고로 이중적 생각 안에, 즉 하나는 안쪽에, 또는 다른 하나의 위쪽에 있는 것으로 보았다.
886. 주님은 새 천국을 새 땅, 그리고 새 예루살렘이라 불리우는 새 교회와 더불어 창조하실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이런 사항들을 어느 정도까지로는 알는지 모른다, 그리고 그것들을 기억할는지 모른다, 긔 이유는 주님 자신 증거하셨고 그것을 말하셨기 때문이다.
895. 새 교회에 관하여 가장 깊은 천국으로부터 주님으로부터 유입됨과 명백해짐, 이 교회는 말씀을 통하여 주님과 결합될 것이다.
896. 요한은 셋째 천국 안으로 옮기웠다, 그리고 그의 시각이 거기서 열렸다, 이에 앞서 교리 측면에서의 주님의 새 교회가 도성의 형체 안에서 명명백백해졌다.
897. 이 교회에서 말씀이 이해될 것이다, 그 이유는 말씀의 영적 의미로부터 반투명(translucent)하기 때문이다.
898. 글자 의미에서의 말씀, 이로부터 새 교회의 교리는 있다.
898끝. 새 교회의 교리 때문에, ‘도성’에 의해 의미되는 것은 말씀의 글자 의미로부터서만 있다.
900-2. 그가 주님으로부터의 이런 (영적) 지식들 안에 있지 않으면 누구도 [새] 교회 안으로 들어오지 않도록 지킴이 있다.
902. 글자 의미에서의 말씀은 새 교회의 교리의 모든 것을 포함한다.
903. 주님에 관하여와 그분의 가르침에 따른 삶에 관하여 말씀으로부터의 교리의 모든 것들…(이 두 가지 것들에) 새 교회의 교리의 모든 것들이 관련되고 있다.
904. 사랑의 선 안에 있는 이들에게는 주님의 새 교회의 교리 측면에 관하여와 이 교회로 들어오게 하는 진리들, 그리고 이런 진리들이 말씀의 어디에서 있는지를 아는 능력이 주님에 의해 주어진다.
905. 그것 안에 공의.
906. 새 교회 안에서 선과 진리는 하나를 만든다, 마치 본질과 형체의 관계와 같다.
907. 새 교회의 모든 것들은 사랑의 선으로부터 있다.
909. 새 교회 안에 있는 말씀의 품질: 그것으로부터 모든 진리들과 선들이 있다.
910. 천국과 하나를 만드는 새 교회의 품질.
911. 새 교회의 사람들과 더불어 글자 의미 안에 있는 말씀의 신성한 모든 진리는 영적 의미에서 있는 신성한 진리로부터 반투명(translucent)하다.
912. 그렇기 때문에 새 교회의 모든 것은 주님으로부터 천국으로부터 빛과 더불어 유입되는 사랑의 선이다.
914. 새 교회의 모든 것들은 빛 안에서 나타난다.
917. 새 교회의 모든 진리와 그것의 교리 속의 진리는 주님으로부터 천국으로부터빛과 함께 유입되는 사랑의 선이 형체적으로 있다.
918. 새 교회에서는 내적인 것으로부터 분리된 어떤 내적인 것도 있지 않을 것이다.
919. 새 교회인들은 자기 사랑과 자아 총명 안에 있지 않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자연적 빛(발광체, lumen)만에도 있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주님 만으로부터 있는 말씀의 신성한 진리로부터 영적 빛 안에도 있을 것이다.
920. 생활의 선 안에, 그리고 주님을 믿는 모든 이는 신성한 진리들에 따라 거기서(새 교회 안에서) 살 것이다, 그리고 자신 안에서 새 교회 자체를 볼 것이다, 마치 눈이 물체를 보는 것과 같이 이다.
921. 영적 선으로부터 지혜의 진리들 안에 있는 모든 이는 거기서(새 교회 안에서) 주님을 고백할 것이다, 그리고 자기들에게 있는 모든 진리와 모든 선은 나의 것이 아니고 그분으로부터 받았던 바, 그분의 것으로 인정하고 그분에게 돌려드릴 것이다.
924. 선에 섞음질 하고, 말씀의 진리들을 악용하는 자, 그리고 확증하여 악들을 행하는 자, 거짓들도 그렇게 하는 자는 아무도 새 예루살렘인 새 교회 안으로 받아지지 않는다.
925. 주님을 믿으며, 말씀 안에 있는 그분의 가르침들에 따라 사는 자가 아니면 새 예루살렘인 새 교회 안으로 받아지지 않는다.
932, 서문. (계. 22장에서도) 새 교회가 주님으로부터 신성한 진리들로부터의 총명함에 관련하여 여전히 묘사되고 있다.
933. 새 교회 안에서 교리의 진리들과 이에서 파생되는 삶의 가장 깊은 안쪽에 주님께서는 그분의 신성한 사랑 안에 계신다.
933-2. 이것은 주님에게 직접적으로 접근하는 자, 그리고 악을 죄로 인정하여 금하는 자와 더불어 거행된다; 고로 (그는) 새 예루살렘인 주님의 새 교회 안에 있을 것이다.
937. 새 예루살렘인 교회 안에는 주님과 분리된 어떤 자도 있지 않을 것이다, 그 이유는 주님 자신께서 거기를 통치하시기 때문이다…
944. ‘오시는’ 것(계. 22:7)에 의해 주님이 오실 것이 의미되나 (초림때와 같이 육체를 지니신) 인물(person)로서가 아니라, 말씀 안에서 오심 (영적으로 오심), 즉 말씀 안에서 그분의 새 교회 속에 있을 이들에게 나타나신다.
951. 그분에 관한 (영적) 지식들을 통하여 그분의 새 교회 안에 있기를 목적으로 삼아 그분의 가르침에 따라 사는 이들은 영원한 행복을 누린다.
952-2. 그러므로 말해지는 바, 그들은 ‘밖에’ (계. 22:15) 있을 것이다; 즉 주님의 새 교회를 받지 못할 것이다.
954. 이 분(계. 22:16)은 세상에 태어나셨던 주님, 거룩한 예루살렘인 그분의 새 교회 앞에서 일어나는 새 빛과 더불어 오실 주님이시다.
M. 43. 내가 예보하건대, 새 예루살렘인 새 교회 안으로 주님에 의해 받아지는 자외에는 이 (부부의) 사랑을 자신들에게 어울리게 할 자는 없을 것이다.
82. 당신은 새 교회를 설립하여 세상을 꾀려드는 자이다.
534-2. 상큼함을 지닌 부부로부터의 진실된 사랑은 주님의 가르침에 따라 생활하는 이들에게 주어진다; 고로 계시록에서 ‘새 예루살렘’에 의해 뜻해진 주님의 새 교회 안으로 받아진 이들에게 주어진다.
B. 표제. 계시록에서 ‘새 예루살렘’에 의해 듯해진 새 교회의 교리의 간략한 해설
44. 이것은 단순한 형체 안에 있는 새 교회의 신앙이다…
63끝. 새 교회를 위한 지정된 때 이전, 충만됨과 회복됨이 있을 때.
68끝. 이 결혼이 교회 자체이고 새 교회이다, 이것이 주님에 의해 지금 설립되고 있다.
71-2. 주님의 강림에 의해 말씀에서 그분의 강림이 뜻해진다는 것, 그리고 그때 종말하는 이전 교회 대신 새 교회의 설립도 뜻한다는 것.
91. 새 교회가 주님에 의해 설립되지 않으면, 아무도 구원되어질 수 없다; 그리고 이것이 이 말씀(마. 24:22), 즉 ‘이 날들을 짧아지게 하지 않으면, 어떤 육체도 보존될 수 없다’에 의해 뜻해진다.
92. ‘이 날들이 짧아지는’ 것은 현 교회에 끝을 놓고, 새 것이 설립되는 것을 뜻한다.
94. 큰 신비함들, 즉, 새 교회가 주님에 의해 설립되지 않으면 어느 육체도 보존되어질 수 없는 이유는 이렇다: 용이 자기 패거리와 더불어 천국으로부터 영들의 세계 안으로 내던져졌는데, 그들이 거기에 있는 한, 신성한 선과 하나가 된 신성한 진리가 주님으로부터 땅의 인간들에게로 통과하여 갈 때 절멸되거나 타락되지 않고서는 통과하여 갈 수 없기 때문이다.
95. 계시와 새 교회의 신앙에 관한 독단적 견해를 받아들임이 ‘보라 내가 모든 것들을 새로이 만든다’(계. 21:5)에 뜻해져 있다
96. 새 교회의 독단적 주장 속의 진리들이 밝히 알려져 받아들이기 전, 현 교회의 신앙에 관한 독단적 주장으로부터의 거짓들이 먼저 제거되어야 하는 이유는 일치하는 교리가 없기 때문이다.
102. 새 교회의 신앙은 이전 교회의 신앙과 함께 있는 것이 가능하지 않다, 만일 같이 있다면, 거기에는 분규와 충돌이 있어, 인간과 더불은 교회의 모든 것이 멸해진다.
103. 새 교회의 신앙이 ‘태양을 휘감은 여인’(계12:1)에 의해 묘사되어져 있다…
103끝. 옛 교회의 신앙을 자신과 더불어 확증되게 한 이들은 새 교회의 신앙을 받으려면 자기의 영적 생명에 위험을 감내해야 한다. 따라서 그들은 먼저 하나씩 옛 것을 부정해가는 것, 이전의 신앙을 철폐하는 것이 먼저이다.
105. 그러므로 (로마 카토릭이) 자기들의 예배의 외적인 것들에서 부분적으로 물러나고, 하느님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에게 직접적으로 접근한다면, 또한 성체의 두 종류들을 분배한다면, 그들은 새 예루살렘 안으로, 즉 새 교회 안으로 개혁 교회 보다 더받아들여 질 수 있다.
T. 표제. 다니엘서 7장 13, 14절과 계시록 21장 1. 2절에서 주님에 의해 미리 말해진 새 교회의 보편적 신학을 포함하는 진정한 기독 종교.
115. 되찾으심(redemption) 자체는 이런 사항들을 통하여 새 영적 평면의 교회를 준비하심이었다.
115. 오늘날 이것이 주님의 두 번째 강림과 새 교회가 설립되는 것이다; 그리고 지옥들을 복종하게 하시고 천국들을 정돈하심이 먼저 있지 않으면 이 교회의 설립은 있어질 수 없다…
115-2. 지옥들을 복종시키심, 천국들을 정돈하심, 그리고 새 교회를 설립하심이 되찾으심인 이유는 이것 없이 아무도 구원되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 이것들 또한 순서적으로 있다; 즉 먼저 새 천사의 천국이 형성될 수 있기 이전 지옥들의 복종됨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새 교회가 땅 위에 설립될 수 있기 전 새 천사의 천국이 형성되어 있어야 한다.
154끝. 이 신비함들은 그분의 새 교회 속에 있을 이들을 위하여 주님 자신으로부터 있다.
182. 새 천국과 새 교회가 주님에 의해 세워지지 않으면 어는 육체도 구원되어지지 않을 것이다.
182. 되찾으심을 수행하시는 것이 새 천국과 새 교회를 세우는 것을 뜻한다.
303-2. 인간들이 주님에 의해 평화의 상태 안으로 오는 것이 이사야서 65, 66장 내지 그밖의 장소에서 취급된다; 오늘날 주님에 의해 설립되는 새 교회 안으로 받아들여지는 이들이 이 상태 안으로 와진다.
307끝. (‘새 예루살렘’에 의해 뜻해진) 이 새 교회, 이전의 교회가 아닌 교회가 천적 수준의 의미에서 ‘아내’, 그리고 ‘어머니’ (출. 20:12; 신. 5:16)이다.
330-2 새 교회의 예배를 위한 두 정경들.
344. 새 교회의 신앙의 있음이다…
344. 새 교회의 신앙의 세상 밖으로의 나타남은 이렇다…
344끝. 새 교회의 신앙의 형체 자체…
354-4. 주님의 새 교회 안으로 오는 이들, 외관상으로 단순할지라도 그들이 천국으로 들리우면 거기서는 천사들 만큼이상으로 슬기로워 있다.
465. (새 교회의 독단적 주장과 법령이 현 교회의 것과 대비되는 이유)
465끝. 새 교회의 법령은 다음과 같다.
508-2. 새 교회에 의해 의미된 성전이 보여짐.
508-5. 그러나 새 교회에서는 말씀의 모든 비밀한 것들 안으로 꿰뚫고 들어가고 그것들을 말씀을 수단으로 확증함이 허용되어져 잇다. 그 이유는 새 교회의 교리적인 것들은 말씀을 통하여 주님에 의해 밝혀진 진리들이 계속되기 때문이다.
508. 새 교회의 정경은…
536. 나는 이 새로운 것을 더할 것이다: 종교로부터 선한 것을 행하는 모든 이는 사후 세 신성한 인물들에 관한 현 교회의 교리, 그리고 순서적으로 이 세 분에서 응용된 신앙들을 거절하고, 자신들을 주 하느님 구세주에게로 전향한다, 그리고 새 교회 속에 있는 이런 사항들을 흔쾌히 빨아들인다.
536-2. 종교로부터 선행을 실행하지 않은 이들은 쉬이 굽어지지 않는 심정을 가지고 있다. 이들은 먼저 세 하느님들에 접근한다, 그 후에 하느님 아버지만에 접근하고, 마지막으로는 하느님이 없음에 이른다. 그들은 주 하느님 구세주를 마리아의 아들로 간주한다…그때 그들은 새 교회의 모든 선들과 진리들을 내버린다, 그리고 이내 용들의 영에게 결합한다…
537. 종교로부터 선행의 선들을 행하는 이들, 그렇기에 그들이 주님에 관하여 새 교회의 교리를 응낙하기 전 악들을 행하지 않고 있다. 천국에서 그들은 붉은 색의 옷을 입고 있다; 그리고 그들이 새 교회의 선들 안으로 입문된 이후 그들은 밝은 심홍색의 옷을 입고 있다; 그들이 새 교회의 진리 또한 받을 때, 아름다운 금빛의 광선으로 반짝거린다.
598-2. 만일 진짜 진리들이 가르쳐지는 새 교회가 주님에 의해 설립되어지 않으면 인간은 얼마나 더욱 망상적이 될는지 모른다 (하여 ‘어느 육체도 보전되지 못할 것이다’ 마. 24:21, 22 참조)
599-2. 되찾으심 이후, 주님은 새 교회를 설립하셨다.
667. 이 날에서 말씀의 영적 의미는 주님에 의해 설립되는 새 교회를 위하여 열리어졌다.
700-2. 지금 기독 신앙이 일어나고 있고, 계시록에서 ‘새 예루살렘’에 의해 뜻해진 새 교회가 주님에 의해 설립되고 있기에…이 교회가 두 성례식을 향유하고 제대로 사용하도록 해주시기 위해 말씀의 영적 의미를 밝히 알려주시는 것에 흡족해 하셨다.
708끝. ‘그들이 새 것으로 마시게 되는 포도나무의 열매’=새 교회의 진리와 천국의 진리.
753. 새 천국과 새 교회에 관하여.
761-2. 그때 주님은 그들로부터 새 교회로 떠나신다.
764. 현 교회가 ‘밤’이기에, ‘아침’이 가까이 있다가 이어진다; 즉 새 교회의 처음이이어진다.
771. 그러므로 새 교회인이 옛 교회인 같이 그늘에서 방황하지 않도록 하시는 것이 그분의 기쁨이신즉, 내 영의 시각을 여셨다.
773. 그분을 믿어온 이들로부터 새 천국을 형성하시는 것, 그리고 새 천국이 형성된 이후 그분을 믿는 이들로부터 새 교회를 설립하시는 것, 이 두 가지 것들이 그분의 강림의 목적이다.
779. 그분께서 그분의 영으로 채운 이들을 말씀을 통하여 새 교회의 교리들을 가르치신다.
779. 주님께서 오시어 ‘새 예루살렘’인 새 교회를 세우실 것이라고 미리 말해두셨기에, 그분은 이를 행하시는데 인간을 수단으로 하신다.
784. 새 천국이 땅에 새 교회가 있기 이전에 반드시 형성되어 있어야만 한다. 이 새 천국이 인간과 더불은 교회의 내적 측면을 만들기에, 이 천국으로부터 새 예루살렘, 새 교회가 내려옴에 비례하여 성장한다. 그러므로 새 교회의 성장은 한 순간에 거행될 수 없다, 그러나 이전 교회의 거짓들이 제거됨에 비례하여 거행된다…이는 성직자들, 또는 평신도와 더불어 거행될 것이다.
784끝. (마. 13:24-30, 39, 40) ‘밀’은 새 교회의 진리들과 선들을 뜻하고, ‘가라지’는 옛 교회의 거짓들과 악들을 뜻한다.
786. 이 새 교회는 모든 교회들의 왕관이다.
787. 이 새 교회가 모든 교회들의 왕관인 이유는 보일 수 없는 하느님이 안에 계신 보일 수 있는 한분 하느님을 예배하기 때문이다. 즉 혼이 육체 안에 있는 것과 같다.
788. 이 교회는 세상의 시작으로부터 출시되어왔었던 교회들을 계승한다는 것, 그리고 세세토록 지속될 것이다는 것; 그리고 이전에 있어왔던 모든 교회들의 왕관일 것이다는 것이 다니엘(2장 등등)에 의해 예언되었다.
789. 이외에, 많은 예언서들에서 이 교회의 품질이 무엇일지가 예언되어왔다.
790. 이 교회의 품질이 무엇일지에 관하여 계시록이 충분히 묘사해놓고 있다.
796-3. (루터)는 지각했다, 즉 오늘날 이전 교회의 끝이 있고, 새 교회의 시작이 이 있다는 것, 이에 관해 다니엘이 예언했었다는 것, 그리고 주님 자신 복음서들에서 미리 말해두셨다는 것이다. 또한 그는 이 교회가 계시록에 있는 ‘새 예루살렘’에 의해 뜻해져 있고, ‘영원히 지속되는 복음’이다는 것도 지각했다.
799. 선행의 생활을 인도했던 모든 이들, 그리고 더 나아가 진리가 진리이기 때문에 진리를 사랑했던 이들은 영계에서 자신들이 가르침을 받게 허용한다, 하여 그들은 새 교회의 교리적인 것들을 응낙한다.
D. 4770. 새 교회의 시작에 관하여. 많은 이들에 의해 말해졌다, 즉 발표된 것은 나라들(또는 이방인들)과 더불은 어딘 가에서 천국으로부터의 계시가 거행되기를 시작하고 있다는 것, 하여 영들과 천사들이 그들에게 이야기를 한다는 것, 즉 그들에게 천국의 교리를 가르친다는 것, 이 교리의 첫 번째는 주님에 관한 교리이다; 그리고 이것을 포옹함이 있었다, 고로 천국으로부터 새 교회가 일어나고 있다…그러므로 천국 안에 기쁨이 있었다. (4771항) 이것은 왼쪽으로, 앞쪽, 하여 아프리카 인근, 아시아의 어딘가에서 거행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4772항) 그때, 거기에 많은 이들이 나타났다, 즉 그들의 영들, 이들이 천사들과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리고 천국의 교리 속에 있는 것들과 같은 것에 관하여 주님으로부터 천국을 통하여 가르쳐지고 있다; 그리고 그들은 말했다, 즉 자기들은 이 백성들과 이런 사항들을 전달한다는 것…
4773. 새 교회에 관하여. 나는 어떤 이가 말했던 궁전, 즉 계시가 약속되었었던 궁전, 그들이 그것을 오랫동안 예상해왔던 궁전으로 인도되었다…그때 마치 희미함에서 인 듯 일종의 광휘가 나타났는데, 이로부터 그들은 계시가 임박했다는 것을 예언했다…그때 천사중의 한 명이…그들에게 이야기를 했고, 그들에게 주님에 관하여 가르쳤다…땅에 있는 이들과 더불어 교통함과 유입됨이 있는데, 아마도 아프리카, 일부는 아시아 지역, 오히려 인도 바다 근처, 그러나 그 바다에서는 아니다. (4775) 나는 이내 거기로부터 오른쪽을 향하여 데려가졌다, 나는 거기서 [사람들이] 이야기를 하는 것을 들었는데, 계시를 예상하고 있다; 그리고 이들과 더불어 천사들이 이야기를 하고 있고, 주님에 관하여 그들을 가르치고 있다, 그리고 그들은 천국으로부터 교회의 전체 교리를 이제 받으려하고 있다; 또한 그들은 성경을 받으려하고 있는데, 이 성경은 주님으로부터의 새 성경이다…(4776) 이것들은 아프리카쪽으로의 입구 안에 있다. (4777) 이후에 희미한 환상이 보여졌는데, 어떻게 천국의 교리가 아프리카에서 진행될지이다… 또한 그들은 기독교의 밀사들로부터 어떤 교리를 받지 않도록 타일러졌다; 실로 그것들을 듣기는 하지만 그것들을 믿지는 말라는 것이다; 그리고 또한 천국의 교리는 해안 근처에 있는 이들에게는 발표되지 않는다; 그 이유가 기독인들이 그쪽으로 오기 때문, 이들은 (천국의 교리를 받음에) 장애물들을 소개하기 때문이다…(4779)내가 그들로부터 떠날 때, 나는 그들의 큰 모임이 할렐루야를 노래하여 주님을 찬양하는 것을 들었다. 그 후에 나는 뒤쪽으로 데려가졌다, 그러나 더 높은 위쪽으로였다, 거기에는 아시아의 북쪽 지역으로부터의 영들이 있었다. 그리고 지각된 것은, 그들은 세상으로부터의 그들의 삶으로부터 이 천국의 교리를 받는 타고난 자질이 있었다는 것이다…그 후에 나는 뒤쪽으로 지식들 안에 있는 이들이 있는 지역으로 데려가졌다. 거기서 통각된 것은, 그들 모두가 한 분 하느님만이 계시다는 것을 납득하는 것이 가능하지 않다는 것, 고로 그들 모두는 천국의 교리를 받을 수 없었다… 그러나 거기서 오른쪽으로 더 가서, 더 아래쪽으로 갔더니 거기는 이 교리를 받을 능력이 있는 이들이 있었다…
4783. 새 교회가 설립되는 만큼에서 자주 주님 자신이 오시고, 가르치셨다…그렇게 지금 새 교회가 설립되는 이들과 더불어, 그에게 주님 자신 천사들을 통하여 가르치신다.
E. 49끝. 그러므로 새 교회는 이방인들과 더불어 주님에 의해 설립되어지고 있다, 거기서 이것(주님의 인간이 신성하다)이 알려질 뿐만 아니라, 인정되고 있기도 하다.
62. 새 천국과 새 교회, 이는 사랑의 선 안에 있다.
91. 이런 모든 것은 새 천국과 새 교회 안에 있다.
91. 계시록에 있는 모든 것들은 그것의 목적과 결말 측면을 바라보고 있다, 즉 ‘일곱 금빛의 등잔대’에 의해 의미되는 쪽을 응시하고 있다. 즉 새 천국과 새 교회이다. 그러므로 이에 관해서는 마지막 두 장들에서 취급되고 있다. 이 두 장 외의 나머지 장들은 이 두 장으로의 길에 서있는 중재하는 사항들이고, 길에서 장애물을 제거하기 위해 놓여져 있다, 이 제거로 새 천국과 새 교회는 일어나고 명백해진다.
223. 새 교회의 교리는 천국들 안에 있다.
403-15. 그때 새 교회는 시작할 것이다, 이 시작에서 새 교회는 외적일 것이다는 것이 ‘잘보라, 무화과나무와 모든 나무들이 (싹을) 내밀 때’ (눅. 21:29)에 의해 의미되어 있다…그때 ‘하느님의 왕국’이 ‘가까이’ 있다=주님의 새 교회; 그 이유가 마지막 심판의 때에서 옛 교회는 멸해지고 새 교회는 시작하기 때문이다.
405-17. 예. 16장은 포로에서 되돌아 옴에 의해 새 교회의 복구(설립)가 표현되어 있다.
418-3. (마른 뼈들의 부활에 관한) 환상에 의해 어떤 영적 생명도 이전에 있지 않았던 이들로부터 새 교회가 복구되고 재 형성됨이 묘사되고 있다.
418-5. ‘네 바람들로부터, 하늘들의 맨끝으로부터 그것들의 맨끝까지에서 뽑은 자를 다 모으심’에 의해 새 교회가 복구됨이 의미되고 있다.
422-15. 여기서 (물들에 관한 환상에 의해) 천국들에 있는 새 교회와 모든 신성한 의지가 그분으로부터 진행될 때, 주님에 의해 복구되어질 새 교회가 묘사되어 있다.
624-3. 마지막 심판 이후 새 교회가 충분히 복구되지 않는 채로 시간이 길어지는 이유는 천국으로부터의 비밀들인 바, 이것은 극소수 외에는 누구의 이해력에도 와닿지 못한다.
633. ‘마흔 두 달’(계. 11:2)=옛 교회의 끝, 그리고 새 것의 시작.
633-2. 새 교회의 시작…‘40 년의 끝’ (출. 29:13)에 의해 의미되어 있다.
633-7. 사십 년의 끝 이후 새 교회의 시작이 이스라엘족들이 가나안의 토지 안으로 받아들임에 의해 의미되고 있다…또한 이 말들에 의해, 즉 ‘마지막에서 네게 선을 행하기 위하여’ (신. 8:16)와 ‘나는 아모리족의 토지를 소유하라고 사십 년을 광야에서 너희를 인도했다’ (암. 2:10)에 의해서도 뜻해진다.
636. 그들이 가르칠 것, 그리고 가르쳐지게 될 것, 옛 교회의 끝에서 조차, 그리고 새 교회의 시작에서조차.
636. 새 교회의 시작이 ‘하느님으로부터의 생명의 영이 그들 안으로 들어갔다’에 의해 의미되어 있다 (계. 11:11).
641-2. 교회의 끝이 가까울 때, 말씀의 내면의 것들, 교회의 내면의 것들, 예배의 내면의 것들이 밝히 나타나고 가르쳐졌다. 그 이유는 선이 악으로부터 분리됨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새 교회에 관한 사항들이) 선한 자에 의해서는 받아지고, 악한 자에 의해서는 거절되기 때문이다…더욱이 말씀의 내면의 것들이 교회의 끝에서 밝히 알려져, 새 교회를 섬김 속에 있고, 그때, 생활과 교리를 위해 새 교회가 복구되기 때문이다. 이것이 그렇다 하는 것은 유태 교회의 끝이 가까웠을 때, 주님 자신께서 말씀을 여시고 가르치셨다는 사실로부터 확인된다. 이는 오늘날에도 마찬가지 이다; 그 이유가 천국의 많은 신비함들을 밝히 알리시기에 흡족해 하셨기 때문이다…교회의 끝에서 계시가 있는 이유인즉, 선한 자가 악한 자로부터 분리되어야 한다는 것, 또한 새 교회의 복구가 있어야 한다는 것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은 인간들이 있는 자연계에서 뿐 아니라, 영들과 천사들이 있는 영계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그 이유가 교회는 두 세계 모두에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계시는 양 세계에서 거행된다, 그럼으로 해서 분리됨, 새 교회가 회복됨 또한 있다.
658-2. ‘삼 일 반 이후에 하느님으로부터 생명의 영이 그들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그들은 자기들의 발로 섰다’(계. 11:11)에 의해 옛 교회의 끝 이후 새 교회의 시작이 의미된다; 그 이유가 사랑의 모든 선과 교리의 진리가 교회의 끝에서 소멸하나, 또한 소생되는데, 이것은 주님에 의해 새 교회가 회복됨과 더불어 거행된다, 이것 역시 ‘그들 안으로 들어간’ ‘생명의 영’에 의해 의미되어 있다.
665. 새 교회가 시작하기 위해 누군가에게 주님으로부터 신성한 진리에 대한 예증과 받아들임이 있다.
665-2. 교회의 끝이 가까워지면, 주님께서는 이 교회를 이어 계속될 교회를 준비하신다. 그 이유가 교회 없이 말씀이 존재되지 못하고 주님이 알려지지 못하기에 세상이 존속할 수 없기 때문이다.
665. 새 교회의 시작만이 뜻해지고, 아직 교회의 회복됨은 아닌 이유가 다음 절의 설명에서 말해질 것이다.
665-4. 새 생명의 호흡, 또는 거듭남에 의해 새 교회가 회복됨이 ‘신경’, ‘살’, 그리고 뼈를 입힌 에 의해 피부’에 의해 의미되는데, 특별히 ‘그들에게 들어간’ ‘영’에 의해그들이 ‘살았다’에 의해 의미되고 있다 (겔. 37장).
667-2. 옛 교회의 끝과 새 교회의 시작일 때, 사랑의 선들과 교리의 진리들에 맞서 있는 이들의 상태가 묘사되어 있다. 그때 이들은 새 교회를 형성하는 사랑과 주님에 대한 신앙을 받는 이들의 현존으로부터 걱정근심을 갖게 된다.
670-2. 교회의 끝에서…교리와 생활 측면에서 새 교회를 섬김 속에 있는 말씀 속의 내면의 것들이 명명백백해진다. 이것은 유태 교회의 끝이 임박했을 때 주님 자신에 의해서도 행해졌다…그러나 아직 이런 사항들이 직접적으로 받아지지 않고 있다…이는 교회 역사로부터도 알려진다. 그 이유는 영계에 있는 모든 것들이 질서 안으로 환원되기 전에는 그것들이 받아질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그때까지) 사랑의 선들과 교리의 진리들이 자연계에 있는 인간들에 의해 이해되어질 수 없고 지각되어질 수도 없었기 때문이다…이런 사항들이 말해진 특별한 이유는 두 증인이 하늘 안으로 올라오게 한 것, 즉 사랑의 선들과 교리의 진리들이 교회의 마지막 때에서 명명백백해짐으로 악한 자에게 상함을 입지 않도록 하시기 위함 때문이다.
670-3. 같은 것이 태고 교회가 그것의 끝에 도착했을 때도 그러했다. 천국의 것들에 대한 표현들이 ‘에녹’이라 불리운 이들에 의해 하나로 수집되었고, 장차 홍수 이후 새 교회의 사용을 위해 보존되었다…이들과 더불어서도 같은 방식이 있었는데, 즉 천국으로 들리움에 의해 악한 자로부터 분리되었다, 고로 보호되었다. 이 보호는 옛 교회가 마지막에 당도할 때가지, 그리고 새 교회가 회복될 때까지 였다.
670-4. 이런 방식의 실행은 오늘날이라고 예외는 없다, 기독인으로 불리운 이 교회는 오늘날 그것의 끝에 있다, 그러므로 천국과 교회의 신비함들이 주님에 의해 밝혀져왔다. 이것이 새 교회를 섬김 속에 있어야 했기 때문이다, 이것이 계시록에서 ‘새 예루살렘’으로 뜻해진다, 이는 새 교회인의 삶과 교리를 위해서이다; 이 교리 또한 천국 안으로 올려가졌다, 즉 새 교회가 회복되기도 전에 악한 자들에 의해 피해를 입지 않도록 배려하심에서이다. 이것이 ‘하느님에게로, 그분의 왕좌로 데려가졌다’에 의해 의미되고 있다 (계. 12:5).
691. ‘당신은 들어가시어…왕국 위에’=이전 천국과 교회가 파괴되었을 때 새 천국의 회복과 새 교회의 설립.
695-14. 주님으로부터의 새 교회가 취급된다 (요. 4:35, 36).
695-16. ‘너의 최후에 희망이 있다’ (예. 31:17)=이전 교회의 끝, 그리고 새 것의 시작. ‘아들들은 그들 자신의 경계 안으로 되돌아 갈 것이다’=영적 진리들이 이 새 교회 속에 있을 이들에게 출시될 것이다.
695-17. 이런 사항들이 이. 49장 4절에서 주님에 의해 설립되어지는 새 교회에 관련하여 말해진디.
699. ‘천국에 있는 하느님의 성전이 열렸다’(계. 11:19)=새 천국과 새 교회의 나타남, 거기서 주님을 예배함이 있을 것이다.
699. 그 이유가 이 장(계. 11장)에서는 마지막 심판에 앞서 있는 상태의 변화가 취급되었기 때문이다; 즉 악한 자가 선한 자로부터 분리됨, 그리고 그들이 있던 이전의 장소로부터 이전의 것들이 제거됨이다. 이것이 행해질 때, 그때 더 높은 천국들에 있는 이들이게 새 천국과 새 교회가 나타난다. 이런 것들이 악한 자와 결합되어 있는 한, 그것들은 나타날 수 없다, 그 이유는 그들이 악한 자에 의해 상함을 받지 않기 위해 그들의 내면들이 닫혀졌기 때문이다…그러나 그들이 분리되고 제거되었을 때, 내면들이 선한 자와 더불어 열려졌다…(그리고 그때) 천국과 교회는 명백히 나타난다; 그 이유가 천적 평면이거나 영적 평면이거나 하는 내면들에 비례하여 열려져, 같은 비례함에서 천국은 그들에게 있는 천국과 교회와 같게 명백해지기 때문이다.
706. 미래 교회에 관한 신성한 증거; 그리고 그것의 교리를 받음에 관하여; 그리고 이것을 수단으로 공격당할 것이다.
706-13. ‘당신의 강림의 표시인 것, 시대의 종말의 표시인 것’ (마. 24; 막. 13; 눅. 21장) =새 교회의 시작, 그리고 이전 교회의 끝…그러므로 주님께서 위 장들에서 제자들에게 이전 교회의 계속적인 황폐됨에 관하여, 그리고 그것의 끝에서 새 교회가 설립됨에 관하여 가르치신다.
706-14. ‘새 혀들’=새 교회를 위한 교리적인 것들.
706-16. 이 표시 (아하즈의 해 시계)에 의해 주님에 의해 설립되기로 있었던 새 교회가 표현되었다.
707. ‘태양을 휘감은 여인’(계12:1)=주님을 사랑함, 그리고 이 사랑으로부터 이웃을 향한 사랑 안에 있는 이들과 더불은 교회, 이 교회는 기독 교회의 끝 이후 주님에 의해 설립되어지는 새 교회이다.
708. ‘달이 그녀의 발 아래’(계. 12:1)에 의해 자연적이고 감각적인 이들, 이와 동시에 선행으로부터의 신앙 안에 있는 이들과 더불은 교회가 의미되고 있다.
709. ‘그녀의 머리에는 열두 별의 왕관이’ (계. 12:1)=말씀으로부터 진리와 선의 모든 것들에 관한 지식들과 교리적인 것들을 통하여 지혜와 총명 속에 있는 이들과 더불은 교회.
713. 새 교회를 위해 있는 교리를 공격함에 관한 신성한 계시. 그리고 그들을 수단으로…
724. ‘그녀는 남성 아들을 출산했다’ (계. 12:2)=‘새 예루살렘’이라 불리우는 새 교회를 위해 있는 진리로부터의 교리.
724-3. 이 교리가 새 예루살렘이라 불리우는 새 교회를 위해 있는 이유인즉, 이 ‘여인’(계. 12:1)이 ‘신부’, ‘어린 양의 아내’라 불리우는 여자이기 때문, 이 여인은 하느님으로부터 천국의 안에서 밖으로 내려오는 거룩한 성 예루살렘이었기 때문이다.
727-18. 이런 사항들 (이. 30:31, 32)은 마지막 심판의 때를 취급한다, 이 때 새 교회가 있다.
728. ‘그녀의 아이가 하느님에게로, 그리고 그분의 왕좌로 데려가졌다’(계. 12:5)=주님에 의해 교리가 보호됨, 그 이유는 이 교리는 새 교회를 위해서 이기 때문.
730. ‘여인은 광야로 도망했다’(계. 12:6)=이 (새) 교회는 아주 적은 사람들 사이에 있는다는 것, 그 이유는 선 안에 있지 않은 이들, 그로부터 진리 안에도 있지 않은 이들 때문이다.
730. 이 말들이 포함하는 바, ‘거룩한 예루살렘’이라 불리우는 새 교회, ‘여인’이라 불리운 새 교회는 소수에게서가 아니면 아직까지는 설립되어질 수 없다는 것, 그 이유는 이전 교회가 사막이 되어가야 하기 때문이다.
731. ‘여인이 하느님에 의해 준비된 장소를 가지는 것’=한편 더 많은 이들과 설비될는지 모른다는 상태.
732. ‘그들은 1260일 동안 자양분을 받는다’ (계. 12:6)=새 교회와 그 교리가 충만한 수준 안으로 성장할 때까지.
732-2. ‘거룩한 예루살렘’이라 불리우는 이 교회가 처음에는 소수와 더불어 시작하고, 그 후에 더 많은 이들과 더불어, 마지막으로 채워질 것이라고 말하는 이유 몇 가지: 첫째인즉, 그것의 교리 측면이다, 즉 주님을 사랑함과 이웃을 향한 선행의 교리는 내면적으로 진리들에 감명된 자 외의 다른 이들은 이 교리들을 볼 수없기에 이 교리들을 받아들이고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자기들의 지적 능력이 연마된 이들이 이 교회들을 볼 수 있다는 것,그리고 자가 사랑과 세상 사랑으로 자신을 파괴하지 않은 자이어야 이 교리들을 볼 수 있다. 두 번째 이유인즉, 이 교회의 교리들은 신앙(믿음)만으로 구원됨의 교리로 자신을 확증한 삶을 영위하는 자의 경우,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 없다. 만일 교리측면에서만 확증함이 있다면 그는 방해 받지 않는다; 그러나 교리와 동시에 삶의 원리도 신앙만으로에 뿌리를 둔다면 방해받는다…세 번째 이유인즉, 땅 위 새 교회는 영들의 세계에서 증가함에 따라 증가하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그 세계로부터의 영들이 인간들과 함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세계에 있는 자들은 각자 땅에서 살았던 동안 자기 자신의 교회의 신앙 안에 있어왔던 이들이다; 거기에서 진리에 영적 수준에서 애착함에 있어왔던 이들만이 이 교리를 받을 수 있다; 이들만이 이 교리가 있는 천국과 결합된다, 그리고 그들은 인간과 더불은 천국과 결합한다; 영들의 세계에 있는 이들의 숫자는 매일 증가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들이 증가함에 따라서, ‘새 예루살렘’이라 불리우는 이 교회도 땅 위에서 증가할 것이다.
745. ‘지금 구원, 그리고 능력, 그리고 우리의 하느님의 왕국, 그리고 그분의 그리스도의 힘이 왔다’=지금 주님은 그분의 신성한 진리를 통하여 그분의 교회 속에 있는 이들을 구원하는 힘을 가지신다, 구원 받는 이들은 심정과 혼 안에서 이것들을 받는다.
758. ‘용’에 의해 뜻해진 이들, 증오함과 적개심으로부터 새 예루살렘인 교회를 비방하고 거절한다, 그 이유는 이 교회가 삶의 교리를 가졌기 때문이다.
759.이 교회 속에 있는 이들에게 주님에 의해 주어진 영적 총명과 명민함.
759-2. ‘용과 그의 천사들’(계. 12:7)에 의해 뜻해진 모든 자는 외관으로부터 추론한다…이를 수단으로 단순한 자를 꼬드긴다; 그러므로 ‘거룩한 예루살렘’이라 불리우는 새 교회의 사람들에게는 외관에 따라서인 감각적으로가 아니고, 본질에 따라서인 영적으로 말씀에 있는 신성한 진리들을 보는 것이 주어졌다. 그러므로 이 교인들에게는 이들만을 위한 것, 즉 영적인 것, 즉 말씀의 내적 의미가 밝히 드러나 있다…신성한 진리는 말씀이다, 그리고 이 교회 속에 있는 이들에게는 주님으로부터 천국의 안에서 밖으로의 유입을 통하여 말씀의 영적 빛으로부터 예증되어진다; 이런 이유는 그들은 주님의 인간에 있는 신성을 인정하고, 이분으로부터 진리에 영적으로 애착함 안에 있기 때문이다. 진리에 애착함을 수단으로 말씀을 읽는 모든 이는 주님으로부터 천국을 통하여 꾸준히 흐르는 영적 빛이 받아간다.
759-4. 더욱이, 여인에게 주어진 ‘독수리의 날개’(계. 12:14)는 진리를 이해함을 의미한다; 그 이유가 이 (새) 교회 속에 있는 모든 이는 예증된 이해력을 가지기 때문이다. 이들은 이 이해력으로부터 진리의 빛으로부터 있는 진리를 볼 수 있다; 즉, 어떤 것이 진리인지, 아닌지를 볼 수 있다: 고로 진리를 보면, 그것을 인정하고, 의지 속에 있는 애착함 안에 그것을 받는다. 이로부터, 그들과 더불은 진리는 영적으로 되어 있다; 결과적으로 영적 마음이 그들과 더불어서는 열려 있다; 그리고 열려 있는 바, 이 마음은 천사의 시력을 받는다, 이 시력은 그것의 빛으로부터 진리 자체의 시각이다. 이 교회 속에 있지 않은 이들은 주님의 인간에 있는 신성을 인정하지 않는다, 이 신성하심이 진리인 것, 즉 영적인 것이기 때문에 진리를 사랑하지 않는다, 고로 예증된 이해력을 가질 수 없다; 하여 이것이 진리인지 여부를 가릴 수 없다; 따라서 그들은 진리의 외관만을 보고 그것이 진짜 진리라고 한다, 다시 말해 말씀의 글자 의미만으로부터 진짜 의미인 것을 확증하는 것이다.
764. 진리들 안에 있지 않은 이들이 ‘거룩한 예루살렘’이라 불리우는 새 교회에 원조를 제공한다.
767. 새 예루살렘인 교회에 맞선 ‘용’에 의해 뜻해진 이들의 증오함 (계. 12:17)은 더 많은 사람에게 총애된 지각으로부터 격앙된다.
768. 그리고 악한 생활로부터 이 교회의 교리 속의 진리들을 공격하는 격렬한 노력.
768-6. (이. 43:5, 6)에 의해 가나안의 토지 안으로 이스라엘의 아들들을 되돌려 데려감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새 교회 속에 있어 그분으로부터 신성한 진리를 받을 모든 이들이 주님에 의해 구원됨이 뜻해져 있다.
821-8. 교회의 끝에서조차, 그리고 새 교회가 있어질 때조차에서도 선행의 선은 주님에 속한 이들과 더불어 남을 것이다.
857끝. (계. 14:3에서) 이 노래가 ‘새 (노래)’라고 불리운다, 그 이유는 이것이 새 교회를 위해 있기 때문이다, 이 교회는 주님에 의해 이후 세워진다.
865. (계. 14:4에서) ‘하느님과 어린 양에게 첫 열매들’=주님에 의해 받아진 새 교회 안에 있는 이들.
865. 그 이유가 새 교회 안에 받아진 이들은 주님의 신성한 인간을 인정하고 그분의 가르침들에 따라 산다. 다른 사람들은 ‘새 예루살렘’이라 불리우는 새 교회 안으로 받아지지 않는다. 그 이유가 이것을 믿지 않는 이들은 그것에 따라 살지 않고, 천국의 삶과도 일치하지 않기 때문이다.
948-2. 교회가 완전히 황폐되고 동시에 새 교회가 되기에 앞서, 말씀이 내면적으로 밝히 알려진 것은, 그때 이 안으로 이전 교회 속에 있는 이들도 초대받아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새 교회를 위해 내면적 신성한 진리가 밝혀져 있다…지금 행해진 것은 과거 유태 교회의 마지막과도 방식이 같다, 즉 그때 주님이 세상에 오셨고, 내면의 말씀이 열렸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주님에 의해 설립될 새 교회를 섬길 내면의 진리들이 밝히 알려졌기 때문이다. 오늘날에서도 같은 이유를 위해 내면의 말씀이 열린다, 그리고 신성한 진리들은 과거 보다 더 내면적 측면의 것이 밝혀졌다. 이 진리들이 새 예루살렘이라 불리울 새 교회를 섬긴다.
948-3. 지금 새 교회가 시작된다.
950-2. 세 번째 이유인즉, 계시록에서 ‘거룩한 예루살렘’으로 뜻해진 새 교회는 영적 의미에서 있는 말씀의 신성한 진리들을 통하여 천국과 결합한다; 그 이유가 말씀은 천사들이 하는 방식에서 지각할 때 그 인간과 더불어 결합하기 때문이다.
951-4. 성전을 측량함에 의해 새 교회가 품질 측면에서 묘사된다.
985. 고로 그때, 설립되어지는 새 교회는 (악들과 거짓들로부터) 순수해 있다.
1029-5. 주님에 의해 설립되는 새 교회가 다니엘서 2장 44절에서 묘사되어 있다.
1029-8. 바빌론이 되어간 이 교회는 파괴될 것이고, 주님을 예배하는 새 교회가 설립된다는 것이 다니엘서 7장 13, 14, 27절에서 뜻해진다. 교황이나 서인들, 우상들을 숭배하지 않는 이들, 그러나 주님만을 숭배하는 이들만이 새 교회로 주님에 의해 수집될 것이다.
1029-13. 바빌론의 끝 이후 주님에 의해 설립되는 새 교회가 이사야서 44장 1절에서 의미되어 있다.
1109끝. 이것은 ‘거룩한 예루살렘’이라 불리우는 새 교회를 위하여 밝히 알리신 것이다.
성경 약자표

창 창세기 이 이사야 마 마태복음
출 출애굽기 예 예레미야 막 마가복음
레 레위기 애 예레미야애가 눅 누가복음
민 민수기 겔 에스겔 요 요한복음
신 신명기 단 다니엘 계 요한계시록
여 여호수아 호 호세아 고전 고린도 전서
사 사사기 욜 요엘 고후 고린도 후서
삼상 사무엘상 암 아모스 행 사도행전
삼하 사무엘하 옵 오바댜
왕상 열왕기상 욘 요나
왕하 열왕기하 미 미가
대상 역대상 나 나흠
대하 역대하 합 하박국
욥 욥기 습 스바냐
시 시편 학 학개
잠 잠언 슥 스가랴
아 아가 말 말라기

스베덴보리 저서 약자표

A. 천국의 비밀들. M. 결혼의 사랑, 또는 부부의 사랑.
B. 간략한 설명. N. 새 예루살렘과 그곳의 교리.
C. 선행에 관한 교리. P. 하느님의 섭리.
D. 영계에서의 일기. Q. 아홉 질문들.
E. 계시록 설명. R. 계시록 밝힘.
F. 신앙에 관한 교리. S. 성경에 관한 교리.
H. 천국과 지옥. T. 진정한 기독 종교.
I. 유입, 또는 혼과 신체의 상호 작용. U. 우주에 있는 지구들.
J. 마지막 심판. W. 하느님의 사랑과 지혜.
L. 주님에 관한 교리.

세계 기록 유산 에마뉴엘 스웨덴볽 컬렉션 2005년 등재

이 collection은 이매누엘 스웨덴보리의 20000여쪽에 이르는 방대한 저술의 원고인데 이에대한 더 자세한 내용은 웹사이트 “유네스코 세계 기록 유산 에마누엘 스베덴보리”를 참조하기 바란다. 더불어 이매누엘 스웨덴보리께서 그 자신 출판한 여러 책들 중 처음 출판된 책인 “Arcana Coelestia” pdf는 http://www.baysidechurch.org에서 살펴볼 수 있다.0001

<Arcana Coelestia vol 1, page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