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유

차례

역자의 말….4

성경의 비유들의 본성, 사용, 해석에 관해서…5

구약의 비유들….19

신약의 비유들….349

부록

선각자 신학 관련 도서들 목록
영계 관련 용어 도표로 스케치
선각자의 용어 풀이
선각자에게만 유일한 기본 생각들
도서 구입 안내

역자의 말

역자가 이 비유를 설교에 사용하고자 번역을 마친 때가 1996년 경 일 것 같다. 그 뒤 인터넷 세상이 열리면서 교회 웹사이트에 다른 번역서와 더불어 게재하여 많은 분들이 다운 내지 복사해간 것으로 사료된다. 어느 교회는 요청하는 자가 꽤 있어 아예 수십 권을 비치한 것도 보았다. 역자로서는 반가운 일이다. 부디 많은 이들이 성경의 비유의 올바른 이해와 삶에의 응용이 있기를 기도할 뿐이다.

최근 역자가 도서 출판 벽옥 출판사를 열었다. 그 이유는 번역 서적이 많이 쌓여 많은 양은 아니더라도 꾸준히 종이책을 원하는 분들이 많아졌기 때문이다. 사실 인쇄소에 맡기면 대단히 편하게 출판이 되겠지만 한꺼번에 수천 권을 쌓아둔다는 것은 너무 한 것 같아 필요에 따라 2-30권 분량으로 많으면 200여권 정도 직접 제본하고 있다. 아마 이 책의 부피와 가격을 대비해보면 간단히 알게 된다. 원래 이 비유 책은 신, 구약으로 원서에서는 구분되어 출판했기에 지금까지 그렇게 역자도 제본해왔다. 그러나 제작비를 절약하기 위해 궁리한 것이 한 권으로 만드는 것이다. 부피가 900여페이지에 달하지만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역자의 성경 상응 사전은 1082 페이지이기 때문이다. 역자의 출판 목적은 지식의 전달과 보존일 뿐, 영리 추구에는 하등 관심은 없기에 여느 출판사와는 목적 차원이 다르다.

이 책을 대하는 분들 모두가 책값 정도는 아끼지 않고 쓸 수 있는 분들이다면 좋겠지만 대중적인 수준은 대체로 절약하지 않으면 안 되는 분들이 더 많을 것으로 추측되기에 신, 구약 합본의 출판으로 무거워진 책에 불평은 없기 바란다.

종이책을 원하시는 분들은 아래 전화를, 더 많은 자료가 필요하신 분은 아래 웹사이트와 불로그를 검색하면 된다

전화 (한국) 010-4738-1711. (미국) 1-917-923-9825.
http://www.baysidechurch.org
biblestudynoteblog.wordpress.com

성경의 비유들의 본성, 사용, 해석에 관해서

정의

단어 “비유, parable”는 “곁에 놓음, throw beside,” “비교함, compare”라는 그리스어 파라볼레(parabole)에서 파생된 단어이다. 비유를 정확히 구별해 정의를 내린다는 것은 힘들다. 그 이유가 기존에 있어 온 정의는 비유의 필수적인 어떤 요소를 제외하고 있다거나, 단지 비유적 형체인 것만을 포함시키거나 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스터 사전(Worcester’s Dictionary)은 이렇게 비유를 정의하고 있다. “자연 또는 삶에 있는 실제적인 어떤 것에 기초된 짧은 이야기 또는 우화, 그 이야기를 즉각적인 관심사의 어떤 것과 비교함으로 도덕성을 끌어내는 이야기들.” 대주교 트렌피는 비유를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비유는 하나의 가공적이긴 하나 대체로 일상생활의 일로부터 취해져 보다 높고, 덜 알려진 진리를 예증하기 위해 사용된 대화체들.” 비유는 우화(fable)와는 다르다. 그 이유가 우화는 생명 없고 추론이 불가능한 것들을 인간 존재가 행동하듯 그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비유는 인간 존재에게 가능한 것들을 취급하고 있다. 단지 그 이야기가 특별한 경우를 위해 창안되었다는 점에서만 가공적일 뿐이다. 풍유(allegory)도 의미를 엄격하게 보면 비유와 다르다. 그 이유는 풍유에서는 사상이나 품질이 인격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풍유는 일반적으로 스스로 해석하고 있으나, 비유는 설명을 필요로 한다.
영어 성경의 공통된 번역, 특히 구약 성경의 경우, 단어 “비유”는 세 측면에서 사용되고 있다: 1. 수수께끼(enigma), 또는 희미하게 말함 2. 풍유적인 어떤 담화로서 3. 가공적이나 가능한 대화체로 어떤 진리를 탐사하고 예증하려고 고안됨. 그러나 비유를 취급할 때, 일반적인 비유 목록은 우화나 풍유, 예언들, 환상들과 엄격히 구분되는 것을 나열하고 있다.
비유는 진리를 감각적으로 그리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의 감각들이 진리를 붙잡을 수 있도록 진리를 가져다 놓는 것이다. 따라서 진리를 풍유적으로 서술한 것이 아닌, 상응에 의한 서술, 자연적인 것과 영적인 것이 짝을 이루는 법칙에 의한 서술인 것이다.

상응 (correspondence)

영적 원인인 내향의 것과 영적 원인의 자연적 결과인 외향의 것들 사이에는 명확한 유사성이 존재한다.
물리적인 세계 속의 것들은 영(spirit)이라는 내부 세계 속의 것들을 명백하게 해주거나 체현된 바깥쪽 형상일 뿐이다. 따라서 우리는 안쪽 삶을 언급하는데 있어 육체적 삶에서 사용하는 용어들을 사용한다. 그러나 그 언어를 사용하되 풍유적 방법, 또는 상징적 방법으로 사용할 뿐이다. 우리는 진리를 본다고 말하거나, 애정이 훈훈하다라던가, 명백한 생각, 달콤한 느낌 등등의 말을 늘 사용한다, 이런 용어들이 육체적 삶과 정신적 삶 사이에 존재하는 관계에 정확히 일치해서 사용될 때, 우리는 상응에 의거 말하는 것, 또는 자연과 영을 대응시켜 말하는 것이 된다. 이 법칙은 성경이 씌어진 수단이기도 하다. 성경의 글자 의미는 바깥쪽 사항들, 인간의 자연적 삶에 속한 것을 취급하면서, 그 반면 영과 육체의 관계와도 같이, 글자 내에는 변하지 않는 의미, 시종일관된 의미, 계속적인 영적 의미가 있어 언제나 인간 본성의 영적 측면을 취급하고 있다.
그래서 성경의 안쪽 의미, 즉 영적 의미는 상응의 법칙에 관한 지식과 사실들을 수단으로 발견되어진다.
그러므로 영적 의미는 영적 진리들을 표현하고 있고 영적 삶에 응용된다. 그래서 영적 진리가 감추어 놓인 글자 언어는 유사함을 수단으로 글자 속의 진리를 표현한다. 다시 말해서 유사함이란 상징물, 상응물, 그리고 표현물의 형상을 수단으로 한다는 말이다.

주님이 사용하신 비유

주님이 성서에서 비유를 사용하셨다는 것은 모든 이에게 알려져 있다.
따라서 그 다음 논제는 왜 주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셨는가 이다. 이 의문에 대하여서는 어떤 억측도 남기지 않는다. 그 이유는 주님께서 마태복음 13장 13절에서, “내가 그들에게 비유로 말하는 이유는 그들이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고, 깨닫지도 못하기 때문이다” 하고 답하셨기 때문이다.
진리란 일종의 칼과 같다. 잘 사용하면 우리를 잘 섬기는 물건이 되지만 잘못 사용하면 칼을 다룬 자를 다치게 한다. 이와 같이 우리에게 진리에 관한 지식이 더 많아질 때, 그 지식 속의 진리를 소홀히 하면, 우리는 더 많은 단죄를 받게 된다. 따라서 인간이 진리에 순종할 수 있는 조건이 갖추어지기 전에는 진리를 명확히 이해하는 것이 그 인간에게 있어 최상이 되지 못한다.
따라서 진리에 관한 논리적 서술은 서술 그 자체가 인간으로 이해하도록 명령하는 셈이지만, 비유는 진리를 받고 사용할 준비가 된 이들에게 진리를 운반해 주면서도, 명백한 진리를 들을 준비가 안된 이들을 위해서는 그냥 지나칠 수 있는 여유를 제공한다.

비유는 시선을 끈다

주님이 비유를 사용하신 데 대한 이유는 비유가 지닌 놀란만한 특성과 동시에 사람을 끄는 매력이 있기 때문에서였을 것이라 본다. 대화의 시작에서 비유 형체는 듣는 자의 시선을 잘 잡아당기고, 그 속의 교훈이 인정되어 상대방 속에 정착할 때까지 들은 자로 하여금 잘 붙들고 있게 해준다. 비유는 진리를 큰 힘으로 마음 앞에 가져다 놓는다. 이때 유사성은 기억 속에서 교훈이 자리잡는데 중요한 역할을 해준다. 영적 사항들은 이 세상의 인간 삶의 통상적인 것들과는 달라서 자칫하면 기억에서 미끄러져 빠져나가기 쉽다. 그러나 우리가 일상 생활에 있는 흔한 문제와 관련되어 생각할 때, 비유는 우리의 상상 속에 놀랄 만하게 인상지워 놓여있게 해준다. 이렇게 되면 진리들은 이중적으로 표현되어진다. 진리의 영은 사실이라는 육체로 준비되고, 육체는 원리의 영으로 준비를 갖춘다. 그래서 진리의 각각 측면은 마음속에 진리를 고정시킬 뿐 아니라 다른 측면이 마음에 고정되는 것까지 돕고 있다. 비유는 시선을 잡아끈다. 그 이유는 비유가 원리를 구체화 해 놓은 그림이기 때문이다. 비유 안에서 추상적인 원리들은 단단한 형태로 구체화되었다. 다시 말해 비유는 모든 마음들의 시선을 잡아당기는데, 그 이유가 비유는 모든 이들이 아는 친숙해진 것들로 형성된 그림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움직이며 살아간다. 육체가 일하고 의무를 이행하며 산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래서 우리의 생각들은 경험을 수단으로 우리의 감각들과 고리를 형성해 놓고 있다. 그래서 우리의 영적인 마음들이 열리는 시작 초반에는 늘 경험하는 일상생활 속에서 영적인 것들이 드러나야만 영적인 것에 관한 분명한 사상을 가질 수 있게 되어 있다. 비유가 시선을 끄는 이유는, 모든 타락된 본성 속에 숨겨 있는 악덕을 다루면서, 한편 거듭나는 사람이 배워 실제에 응용해야 할 미덕을 다루기 때문이다. 주님의 비유에서 가르쳐지는 진리는 마치 해묵은 달력과 같이 “시대에 뒤떨어지는” 일은 결코 없다. 오히려 그 속의 진리는 “매 아침을 새롭게, 매 저녁을 새로워지게” 하는 주님의 부드러운 자비와 같다.

비슷한 것에서의 지각은 모든 이에게 공통적인 것이다

다시 말해서 비슷한 것(유추)에서 오는 지각은 인간 본성의 모든 국면에 공통되는 것이라는 말이다. 성경의 글자가 주어진 동방인들은 쉽게 비슷한 속성에서 지각한다. 그러나 이런 능력과 같은 종류들은 모든 인간 속에 놓여져 있다. 따라서 이 능력을 비합리적인 독단적 교리가 내려 누르지 않는다거나, 감각적 삶이 질식시키지 않는 한, 언제나 인간 속에서 작동하고 있다. 비유에서 사용되는 진리의 형체는 모든 본성에, 모든 세대에 적용할 수 있게 되어 있다. 따라서 이 형체는 이 세상에 있는 자연적인 사람에게 영적 진리를 가르치는데 가장 보편적인 형태인 것이다. 생각이나 표현의 양식이나 어조는 시대에 따라 변하고 있다. 그러나 유추의 원리는 언제나 인간과 더불어 남아 있는데, 그 이유는 그것은 모든 본성 속에 있는 같은 성질의 토양이기 때문이다.
자연적인 감각은 모든 사람에게 열려져 있으나, 영적 마음은 거의 열려져 있지 않다. 따라서 모든 시대 풍토에서 인간에게 도달할 수 있는 가장 보편적인 방법은 각 인간의 감각에 먼저 접촉하는 것이다. 그 다음 유추를 수단으로 진리는 감각을 넘어서 영적 삶이 열린 사람에게로 들어간다.

비유는 의지에까지 도달한다

그 다음 비유 속의 진리는 마음을 통과해 의지를 두드려 설사 논리적 서술이 주어져 이해성이 받아들일 수 없는 진리에도 스스로 용납하도록 마음을 강요시킨다. 명확하게 지적인 빛으로 인간에게 다가오는 많은 진리들은 인간 속의 각종 편견으로 인해 명확한 진리에 마음 문이 닫혀져 있음을 발견한다. 그러나 비유가 지닌 놀라운 형체는 의지를 갈아엎어 지성의 문을 열도록 하여 마음이 변화할 준비를 갖추게 한다. 이런 한 예로 바쎄바에 관련하여 다윗을 견책한 나단의 비유를 생각해 보자.
이 비유는 다윗에게 진리를 보여주었다. 그래서 그는 비유 속의 악행자에 대하여 분노를 표현했다. 그러나 그는 죄 있는 자가 자신이라는 것을 자각하지 못했다. 그러나 의지 안으로 들어가는 통로를 발견한 진리는 그 진리가 적용된 사람에게 예언의 말을 수단으로 쉽게 자각되었던 것이다.

비유는 심판을 위해 일한다

만일 어떤 사람이 기꺼이 회개하지 않는다면, 비유의 형체는 그 사람으로 자신의 영적 위치가 어딘 지를 분명하게 해줌으로써 심판의 목적을 위해 봉사한다. 그 이유가 비유는 어느 나라에서든 그 나라 형편에 맞추어 진리를 표현하는데 가장 좋은 형체인 반면, 진리의 형체는 듣는 자가 기꺼이 회개하지 않으면 듣는 자의 마음에 진리가 옳다는데 대한 뉘우침이나, 그 사람이 악에서 돌아서게 할 수 없기 때문이다. 회개는 진리를 향한 인간 의지의 상태에 달려 있다.
이리하여 비유는 진리를 사용하겠다는 이들에게는 진리를 날라다 주고, 동시에 교훈을 받을 채비가 안되어 그 교훈을 모독할 것 같은 이들로부터는 진리를 감추는 두 가지 일을 수행해 낸다. 마치 땅콩의 껍질과도 같이, 비유의 글자는 진리를 남용하려는 것에서 비유의 알맹이인 가르침을 보호하면서 장차 사용을 위해 잘 보존되게 해준다. 또는 이스라엘 후손의 여행을 인도한 불기둥과 구름기둥과도 같아, 여행의 안내와 더불어 추격해 오는 에집트 군대가 그 후손을 볼 수 없게 했던 것과 같다.

비유는 형상(image)이 고정되게 한다

위에서 살핀바와 같이 비유는 진리를 받을 준비가 된 사람에게는 진리를 나타내 보이고, 준비가 안된 사람에게는 진리를 감추이게 하지만, 무관심하게 듣는 자에게도 비유의 형상만은 고정시켜 주어서 차후 비유 속에 있는 진리를 받을 준비가 될 때까지 비유를 붙잡을 수 있게 해준다. 다시 말해 비유의 글자는 땅에 떨어진 씨의 껍질과도 같아 속에 든 생명이 싹트기에 적절한 토양의 조건을 갖출 때까지 보호해 주는 것과 같다.

비유는 성령으로 차 있다

주님이 승천하시기 전, 제자들에게 확답하신 것은, 성령이 와서 그들에게 모든 것을 가르쳐 줄 것이라는 것, 그분이 그들에게 말하셨던 것은 무엇이든지 모두 다 그들 기억에 가져다 주시리라는 것이었다. 이것은 성취되었는데, 과거 그들 마음에 씨와도 같이 뿌려진 형상들, 즉 비유를 수단으로 있어졌던 것들이 그들의 눈앞에 펼쳐져 그 속의 영적 의미들이 부분적으로 밝혀졌던 것이다. 그들이 들었던 비유들은 과거 그들의 마음이 특별히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던 탓에 단지 형상뿐이었지만, 그들의 마음 자체가 진리의 빛으로 팽창되며 사랑으로 뜨거워지자, 그들 속에 있던 형상들이 벗겨져서 진리의 더 높은 양상에서 더 높은 생명으로 채워졌던 것이다.
그렇다면, 순수한 영적 가르침은 무엇일까? 그것은 정확한 정보를 전달해 준 다기보다는 듣는 자의 마음을 열게 하고 훈련하게 하여 그로 하여금 그가 들은 정보 속에 있는 모든 진리를 받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씨는 말씀이다. 씨의 성장은 심어져야만 한다는 조건뿐만 아니라 심겨진 토양의 조건에도 의존된다. 어떤 수준의 진리가 보여지고, 어떤 국면의 진리가 받아들여 질 것이냐는 것은 진리를 받는 마음의 상황에 크게 좌우된다. “씨뿌리는 자”의 비유에서 각기 다른 종류의 땅에 씨가 떨어지는 상황을 생각하면 쉽게 납득될 것이다.
똑같은 사실, 똑같은 교리라 해도 자연적 마음뿐인 사람에게는 자연적인 진리만을, 영적인 사람에게는 영적 진리를, 천적인 사람에게는 천적인 진리를 전달한다. 예를 들면 주님의 제자들, 그들이 감각적인 마음 상태에 있었을 때, 주님이 말하신 비유는 그들을 혼동하게 해주었던 때가 많았다. 그래서 해처럼 명백한 빛보다 구름이라는 희미함 속에 사는 이들을 위해 “주님은 구름과 함께 오신다.”

각 사람은 각자의 능력에 따라 받는다

진리의 빛은 각 사람에게 각자가 정신적으로 어떤 위치에 있어야 진리를 볼 수 있는지 밝혀 준다. 마치 자연계의 태양이 쏟는 밝은 빛에서 어떤 이는 그 빛으로 인해 자기 앞에 펼쳐진 아름다운 광경을 보겠지만, 어떤 이는 태양의 강한 광선만을 똑바로 쳐다보아 오히려 눈이 멀어 보지 못하는 것과 비슷하다. 따라서 태양과 자기와의 위치에 따른 결과는 극과 극이 될 수도 있다. 우리는 주님이 말하시는 것을 듣는다. 그러나 올바른 방법으로 듣는 위치에 있어야 함이 선결 조건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말하시기를,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지라. 가진 자에게 주어지겠지만, 가지지 못한 자는 가진 것처럼 보이는 것마저 빼앗기리라.” “하느님에 속한 자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다.” “어떤 사람이 그분의 뜻을 행하고자 한다면, 그는 그 교리를 알아야 할 것이다.”
우리 주님의 비유 속에 있는 두 겹의 속성은 주님 자신 속에 있는 속성과도 같다. 그분은 그분의 인성(humanity) 가운데서 그분을 영접하는 마음의 열림에 따라 하느님으로, 때로는 단지 인간이신 듯 나타나셨다.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신성한 속성의 교리는 인간이 만든 신조(creed)로부터는 “건축자가 버린 돌”이지만, 그 돌은 새 예루살렘에서는 “모퉁이의 돌”이 되어 있다. 이 돌은 비유뿐만 아니라 모든 진리와 함께 존재하고 있고 세상에서 가장 큰 진리, 즉 예수 그리스도의 속성을 제자들에게 알게 해주시되 각자의 수준에 따라 깨닫도록 배려하시기도 했다. 우리가 주님의 속성 측면에서 접근할 때, 우리는 그분의 속성을 더욱 명확하게 관조할 수 있다. 그분의 속성은 모든 진리와 더불어 존재한다. 따라서 우리가 그분의 속성을 사랑하여 인격을 형성하는데 사용한다면, 우리는 그분의 속성을 더 충분히 이해하게 된다.

비유는 주님이 일하실 때 필요하셨다

왜 주님이 비유로 말하셨는가를 좀 더 외적 측면에서 찾는다면, 그분이 지상에서 어떤 일을 하시는데 필요하셨다는 것, 지상에서 그분이 오신 이유를 노골적으로 말하셨다면 유대인의 폭동과 분노를 폭발시켜 그분의 공생애를 마무리하는데 간섭을 받으시기 때문이라는 등등의 이유도 있었을 것이다. 이렇게 해서 주님의 섭리 속에서 이런 저런 모든 것은 하느님의 사랑이 가진 목적과 협동을 이루고 있기도 하다.
예수님께서는 비유로 가르치셔서 듣는 귀를 가진 자에게는 그분의 가르침에 든 진리를 나타내 보이시되, 그가 받을 수 있는 정도만큼에서 진리의 어떤 면을 보여주셨다. 이리하여 선한 사람들의 거듭나는 일을 도와주시고, 준비된 사람들을 개혁과 회개에로 인도해 주셨으나, 진리의 영적 측면을 볼 준비가 아직 안된 이들에게는 그들의 장래를 위해 기억 속에 진리의 형상이 고정되게 해주시고, 진리를 명확히 보기는 하되 진리를 남용하게 될 사람들은 그들이 알게 된 진리를 모독하는 가장 비참한 죄에서 보호되게 배려하셨는가 하면 심판을 위해 준비된 사람들에게는 빛 가운데 심판을 보여 주시기도 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자주 말하신 것은,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어라” 이었다. 귀를 연 자는 들을 수 있었으되, 자기들의 영적인 귀를 틀어막은 자의 경우는 그들에게 상해를 입지 않게 지나쳐 갔다.

유추함의 원리

비유를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유추의 원리를 납득해야 한다. 이 원리는 우리에게 생각을 어느 정도 열어야 함을 요구하고 있다. 그 이유가 이 원리는 우리 삶의 양면인 자연적 측면과 영적 측면을 고려해야 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비유를 명확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합리적으로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합리적으로 생각한다는 것은 목적, 원인, 그리고 결과 사이에 있는 논리적 연결을 지각하는 것이다. 성경의 비유에서 취급되는 자연의 사실이나 원리를 이해하고 있다면, 이 원리는 비유들을 이해하는데 도울 수 있게 된다. 그 이유는 글자 의미와 영적 의미에 있는 상응은 단지 서술 형체뿐만 아니라 감각, 사상까지 포함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비유로 마음 안에 선명하게 그려진 그림을 가지기 위해 우리는 진리의 상징물로 고용된 것들에 관해 적절한 지식을 가져야만 하는 것이다.

교리에 관한 지식이 필요하다

비유가 진리의 영적 측면과 자연적 측면에 고리를 맺기 때문에 영적 진리가 포함되어 있는 교회 속의 교리에 관한 좋은 지식의 획득은 비유에서 우리에게 주입해 주고자 하는 영적 진리에 관한 명확한 지식을 가지게 해준다. 이런 사항은 다른 문제들, 다른 영적인 사항에도 마찬가지이다. 자신이 소유한 것이 많으면 더 많은 것이 주어질 기회를 가진 셈이라는 말이다. 그 이유는 이미 가진 것은 더 많은 것을 획득하는 수단이 되기 때문이다.

경험이 가르친다

주님의 가르침이 의미하는 것을 납득하는 좋은 방법은 주님이 직접 가르치셨던 그 사람들로부터 느끼셨던 대로 우리도 느껴 보려 하는 것이다. 그분은 파괴하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니라 구원해 주기 위해서, 상한 심정을 싸매 주기 위해 오셨다. 우리가 그분의 느낌과 생각 안으로 진입해 음미할 때, 우리는 그분의 가르침과 행동 역시 음미해 볼 수 있다. 그 이유는 이러한 것들이 똑같은 목적, 즉 인간 구원에 대한 모든 수단이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가 인간 본성을 관조하되 남을 단죄하기 위해, 또는 자신의 속셈을 챙기기 위해 관조한다면, 우리는 무한하신 사랑의 가르침을 움켜 쥘 수 없을 것이다.

비유들은 서로 관계가 있다

우리 주님의 비유는 비유 하나 하나가 독립된 위치를 갖고 있다. 그리고 그 각각은 단지 비유적인 가르침이 아니라, 상응으로 가르치는 신성한 비유인 것이다.
이 비유들이 각자 독립된 위치에 있으면서 그 모두는 서로 관계가 있다. 한 예로 마태복음 8장에서 “씨뿌리는 자”로 시작되는 몇 개의 비유를 생각해 보자. 이 비유들은 거듭남의 진보를 예증하면서 모두 연결을 이루고 있다. 주님의 비유는 마치 어떤 사람이 화랑을 걸어다니면서 전시된 작품을 면밀히 검사해 보는 것과 같다고 생각해 볼 수 있다. 즉 우리는 비유를 전체적 시리즈로, 또는 개별적 비유로 생각할 수 있다는 말이다. 각 비유는 각 나름대로 우리를 가르친다. 그럼에도 시리즈로 된 미술 작품과도 같이 각각은 나머지 비유들을 설명해 주고 있고, 모든 비유는 각 비유가 이해되도록 돕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우리가 주님의 비유를 관조할 때, 우리는 천국의 화랑을 거닐고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우리가 천국의 인도, 성령의 이끌림을 원한다면, 그림들이 설명될 때 우리를 참석하게 해줄 것이다. 그 때 중요한 것은, 설명되고 이해된 부분에 대해 우리는 반드시 영적이고 천국적인 음미를 해야 한다는 것, 즉 우리를 안내하는 그 가르침이 일상 생활에서 적은 부분일지라도 꼭 응용하는 노력이 곁들여져야 한다는 말이다.

각 복음서가 조금씩 다르듯 각 비유도 차이가 있다

각 복음서의 특성이 조금씩 다르듯 각 복음서 내의 비유에도 조금씩 차이가 있다. 네 복음서는 각기 다른 관점에서 온 진리의 서술이다. 이는 영의 세계에 있는 네 방위로부터, 거룩한 성에의 접근이 네 측면에서 있는 것을 말한다. 이와 같이 개별적으로는 각기 다르고, 다양한 특성을 소유했다 해도, 복음서, 그리고 그 속의 비유들은 모두 다 신성하게 무한한 사랑 속의 위대한 똑같은 진리를 가르치고 있다.

행동으로 보여준 비유들

인간에게 도달하려는 하느님의 사랑은 입으로 말해지는 비유뿐만 아니라, 행동으로 보여주는 비유까지 동원하고 있다. 예를 들어보자. 오지그릇을 사 가지고 벤힌놈 골짜기로 가서 장로와 사제 몇 사람에게 그 그릇을 깨는 모습으로 가르치도록 예레미야가 명령받는다 (예레미야 19:1-11): 예레미야가 나무 멍에와 끈을 만들어 그것을 주님의 말씀과 함께 여러 왕에게 보내는 비유 (예레미야 27:2): 하나니야가 예레미야의 목에 있는 멍에를 부순 뒤 있게 되는 예언의 비유 (예레미야 28:18): 예레미야가 밭을 사는 비유 (예레미야 32:6-15) 등등이다.
또한 에제키엘과 즈가리야의 행동을 통한 비유도 있다. 묵시록의 경우에도 이와 같은 비유가 있다. 그 이유는 예언자가 본 것, 환상들은 행동된 비유들이기 때문이다. 아주 큰 규모로 행동된 비유는 인간 거듭남을 예증하는데 보여준 이스라엘의 출애굽과 더불은 광야 여행이다.
보편적 의미에서 볼 때, 주님은 지상에 있는 일상 경험을 비유로 삼아 우리를 가르치시고 있다. 지상의 삶에 속한 것은 사실상 영적 삶에 대한 비유에 속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듣고 보는 모든 것은 만일 우리가 들으려 하고 경청하려 한다면 영적 교훈들을 우리에게 말해 주고 있기도 하다.

고대의 언어는 비유적이다

인류 역사를 한참 거슬러 올라간다면, 진리를 표현하는 방법으로 비유가 얼마나 널리 보급되었었는지 금방 알아챌 수 있다. 더 충만한 영적 시야가 인간을 더 광대한 감각적 삶 위로 들어올릴 때, 바깥 자연 속의 모든 것은 마음속 내적 세계에 관해 비유로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사람은 자연을 통해 하느님의 본성까지 쳐다본다. 자연은 일종의 거울이다. 그 속에서 영적인 사람은 자신의 모습을 보는 것이다. 우리가 비유로 충만해 있는 주님의 일을 발견한다면, 비유의 언어로 씌어진 그분의 말씀 역시 발견하는 바, 이 얼마나 놀라운 일일까?
글자 형태로 교회에 내려 온 모든 것은 기독인인 우리에게 와지는 영적 실재에 관한 형상으로 존재해 왔다. “율법이 모세에 의해 주어졌으나, 은총과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오게 되었다.”

예증과 견책

주님의 비유들 중에 어떤 비유는 위대한 진리를 예증해 주기 위해 주어진 듯 보이나, 다른 비유는 그 당시 널리 퍼진 죄들을 견책하시기 위해 주어진듯 여겨질 때도 없지 않다. 그러나 이 비유이든, 저 비유이든 면밀히 검토해 본다면, 각 비유 속에는 위의 두 가지 모두가 존재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교리를 강력히 주장하거나, 삶을 위한 교훈 등등 모두는 태양 광선이 열과 빛을 다 같이 보내듯 따로 따로이되 동시에 한 비유 속에 존재한다. 그 이유가 기독교는 신조에 있는게 아니라 삶에 있기 때문이다. 신조(creed)는 삶을 위해 존재할 뿐이다. “모든 종교는 생활에 관계되 고, 종교 생활은 선을 행하는 것이다.”
교리는 삶에 관한 이론이고, 행동은 삶 속에서 이론이 구체화된 것이다.

비유의 해석

따라서 주님의 비유에 관한 해석의 법칙은 무엇일까? 많은 각 개인은 그들 나름대로 비유를 읽는 방법을 가지고 있다. 밝혀질 수 있어 사용할 수 있는 해석의 법칙은 없을까? 자연이나 인간에 속한 모든 것에 법칙이 있음을 우리는 발견한다. 하느님의 사랑은 계획이나 방법을 가지고 일하고 있다. 그 중에서 방법이 법칙인 것이다. 그래서 인간이 사는 두 세계, 영계와 자연계 속의 모든 것이 질서, 또는 법칙에 의해 통치되고 있다면, 인간에 영향을 미치는 모든 것은 법칙에 속한 어떤 질서에 따라 작동되어야만 한다. 따라서 기록되고 말해지는 비유들이 어떤 법칙에 일치되며 골격이 짜여 있다면, 비유들은 법칙에 의거 읽혀질 수 있다.
법칙이 존재한다면 이는 밝혀질 수 있고, 따라서 인간은 그것을 고용하게 된다. 만일 우리가 법칙의 원리를 알고 있고, 어떤 사건의 사실들을 알고 있다면, 우리는 그 사건에 법칙을 응용할 수 있을 것이다. 만일 우리가 주님의 비유를 읽으면서 자신의 관념에 머무른다면, 비유로부터 끌어 올려져 알게 된 진리에 기초가 없다. 그러나 우리가 이미 알려진 법칙을 가지고 있다면, 비유의 가르침을 건설하는 반석을 가진 셈이 된다. 모든 과학은 그 나름대로 법칙과 용어를 가지고 있다. 미술도 그 나름대로의 방식(mode)이 있다. 음악을 기술하는 경우, 그 나름대로 소리를 위한 표시가 있다. 그래서 우리가 이러한 것을 배울 때, 각자의 지식이나 기술에 따라 각 사람에게 모든 것을 똑같이 말해 준다. 이러기 위해서는 각자의 관념이나 변덕스러움을 남겨 두어서는 안된다.

상응의 법칙

이미 살핀 바와 같이, 성경의 비유는 상응의 법칙, 즉 영적인 것과 자연적인 것의 상대물에 의거 씌어져 있다. 상응의 법칙은 육체와 영 사이의 관계를 포함해서 두 세계를 연결시켜주는 위대한 법칙이다. 비유의 글자는 인간의 자연적 삶 속의 것들로 되어 있지만 비유가 예를 들어 증거하는 영적 원리는 인간의 영적 삶에 관한 법칙이다. 이런 관계가 인간의 육체와 영 사이에 존재하기 때문에 진리는 자연적 삶에 흔한 사항들에 기초를 두고, 비유라는 형체로 놓여져 사람들이 비유의 의미를 알고자 하여 유추(analogy)를 수단으로 해서 자기들의 영적 마음이 비유의 의미에 열리게 할 수 있다.
자연과 영의 대응물, 상응의 법칙에서 우리는 비유 해석에 관한 원리를 가진다. 이 원리의 응용은 열려진 모든 마음, 모든 시대, 모든 나라, 정신적 진보가 어느 수준에 와있든 비유의 의미를 알 수 있게 해준다. 그래서 상응의 법칙은 변동이 없는 원리, 또는 해석의 법칙이요, 이 응용은 비유뿐만 아니라 거룩한 말씀의 모든 다른 부분에도 응용된다. 사실, 우리 인간 삶의 모든 경험이나 현상에 적용되기도 한다. 세상에는 한 분 하느님, 하나의 진리가 존재하고, 해석의 법칙도 하나뿐이다. “들을 귀 가진 자는 들을 것이다.”

비유의 세부 사항에도 진정한 뜻이 있는가?

주님의 비유를 해석하는데 확실한 법칙이 있다는 사실은 우리로 다음의 질문에 대답하게 해준다. 얼마나 많은 비유가 우리에게 진리를 가르치고 있는가? 비유의 세부 사항들을 해석할 수 있게 하는 일반 원리를 우리는 수집했는가? 많은 신학적 논쟁들은 이런 요점 사항들에 대해서는 계속 확정짓지 못한 채 연기되어 왔었다. 그러나 신성한 법칙이 존재하고, 비유는 이 법칙에 따라 골격을 갖추고 있다고 한다면 비유는 그 법칙에 의거 완전히 이해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비유 속의 세부 사항 모두는 그림 속의 세세한 부분과 같다. 전체로서의 그림을 구성하는 것이 세부 사항이다. 그래서 비유를 해석해 가는 가운데 세부 사항에서 주님 스스로 생각을 어떻게 맞추셨는지를 알게 해준다. “씨뿌리는 자”의 비유를 설명하신 주님의 방법, 생각을 상기해 보라. 예수께서도 세부 사항에 관한 해석을 주고 계신다. 이 구절에 덧붙여 기억해 볼 것은, 이 때 주님께서는 듣는 자에게 걸맞는 해석, 즉 외적인 해석만을 주셨을 따름이라는 것이다. 그분의 제자들에게까지도 외적 해석만이 주어졌는데, 그 이유는 그들이 비유에 관한 승강된 가르침, 영적 가르침을 받을 준비가 안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비유의 세부 사항에서도 가르침을 얻어 보아야 할 것인지에 관한 의문은 예수님 스스로 사용하신 방법을 생각하면 결말이 나리라 본다. 사실 상응의 원리로부터 살피면 위의 의문은 명백히 풀린다.
우리가 상응 속의 원리와 사실들을 따라가는 한, 우리는 비유의 세부 사항까지 해석이 가능해질 수 있다.

보증 없는 추론들

한가지 위험한 것은 상응에서 이탈하여 오로지 추론으로 의미를 끌어내려는 것이다. 이런 추론은 복음서의 가르침에 대중화한 방침으로든지, 비유의 상응을 가지고 추론하려 들든지, 모두 보증 안된 것들일 뿐이다. 예를 들면, 다섯은 슬기롭고 다섯은 미련했다고 서술하는 “열 처녀의 비유”를 가지고, 인류의 절반은 구원되고, 절반은 그렇게 되지 못할 것이라고 말한다면, 이는 주님의 비유에서의 가르침이든, 그 외 다른 구절에서든, 어리석은 추론을 생산했을 뿐이다. 이런 추론은 상응의 법칙이 응용된 것이라고 말할 수 없다. 상응이란 자연계와 영계 사이의 관계, 마음의 눈인 영적 시야와 육체의 눈인 자연적 시야 사이의 관계이다. 그러나 보증 없는 추론은 외적인 이것과 또 다른 외적인 저것과의 비교일 뿐, 인간 삶의 법칙이 놓여 있지 않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에 관한 모든 실제적인 상응들을 살피되, 정당성이 보증도 안되는 추론을 끌어낼 수도 있다는 점을 미리 유의하면서 조심스럽게 성경의 교훈을 끌어내야 하리라 본다.

상응은 신성한 원리이다

새교회 밖에서의 큰 곤란은, 상응의 원리를 신성한 원리로서 알지 못하고 있는 점이다. 이들은 비유가 인간을 본따서 만든 석상과 동등한 형상으로 생각한다. 사실 석상은 어떤 인간 형상의 모습인바 바깥 형체는 비슷할는지 몰라도 사람은 아니다. 초상화의 경우, 색깔까지 그 사람과 비슷하게 맞출 수 있겠지만 그 사람의 속 부분은 불가능하여 오로지 피상적인 수준을 넘지 못한다. 그러나 비유의 경우는 이와 아주 다르다. 비유는 그림이나 조각이 아닌 인간의 형상이다. 바깥으로 구체화된 열정은 그 열정을 표현하는 형상이다. 마치 웃는 얼굴이나 양팔을 벌린 모습은 그 사람의 애정이 표현된 모습이고, 반대로 주먹을 불끈 쥐고, 이를 악물었을 경우, 그것은 그 사람의 분노가 표출된 모습인 것과 같다.
그러므로 우리는 비유로부터 외적인 것들인 자연적 추론이 아닌, 자연적 결과 안에 들어 있는 영적 원인을 끌어내야 할 것이다.

비유는 중심 되는 진리로부터 붙잡아야 한다

비유를 해석하여 영적 교훈에 가장 잘 도달될 수 있는 것은 먼저 비유 속에 있는 중심 되는 진리를 파악하는 것이다. 그러면 그 뒤에 부수되는 여러 가지 상황들은 그림의 전체 중의 한 부분으로 자리잡게 될 것이다. 중심된 진리에 관한 지식으로부터 비유를 생각하는 사람은 마치 공원의 중앙에 위치한 사람이 사방의 길을 볼 수 있는 경우 같이 된다.
구심점은 비유의 중심 원리에 해당되고, 사방으로 뻗는 길은 비유의 여러 상황을 말한다. 그래서 중심 원리가 좁고 넓은 길들을 통제하여 간다. 따라서 공원 한 중앙에 위치한 사람은 공원의 계획도 쉽게 알게 되고, 공원의 특정 지역들 사이의 연관성도 이해할 수 있듯이, 비유 해석의 중심에 선 사람은 비유의 가르침에 관한 일반 계획, 서로 다른 듯한 비유간의 연결이나 관계까지도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공원 주변만을 맴도는 사람은 공원의 특정 구역과 구역의 연결을 납득 못하듯, 비유의 중심 원리를 파악치 못하고 바깥으로만 맴도는 사람은 비유의 가르침을 납득하지 못한다.
비유 속의 중심 진리가 무엇인지를 파악하려는 경우, 우리는 그 비유의 전후 문맥을 살피거나, 소개되는 상황, 또는 응용 등에 대해 배울 수 있을는지 모른다. 주님이 토론하시는 것, 그분께서 우리로 하여금 응용하기를 바래시는 것이 무엇인지 알려고 할 때 우리는 그분이 의도하시는 가르침의 힘을 느낄 수 있다. 기하학에서의 경우 주변은 언제나 중심에 이끌려 있지, 중심이 주변에 매달려 있지 않음을 알아야 한다. 중심 되는 진리는 비유가 올바르게 해석되게 방향을 제시하고 더불어 응용 가능하게 해준다.

비유는 예증하는 구절들이다

비유는 논쟁적이지 않고 예를 들고 있을 뿐이다. 다시 말해서 비유는 새로운 교리를 가르치기 위해 주어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이미 주어진 교리를 확증하고 있다는 말이다. 그래서 우리가 비유 속의 중심 진리를 볼 수 있을 때만이 그 비유의 응용 또한 가능한 것이다. 전후 문맥 속의 모든 상황은 비유가 예증하는 중심 진리를 내세울 때만이 하나로 뭉쳐진다.
비유 속의 진리는 진리의 빛 가운데 있는 이들에게는 언제나 명백하게 모습을 드러낸다. 중심 원리, 또는 진리가 언제나 쉽게 발견되는 것은 아니지만, 일단 발견된 이후는 누구도 쉽게 볼 수 있다. 마치 과학자가 어떤 법칙을 발견하거나 발명하는데 노력이 많이 들었지만, 그 뒤의 모든 사람들은 그 결과를 쉽게 사용할 수 있는 것과 비슷하다.
성경 속의 비유는 주님의 작품이므로 그 비유들은 반드시 그분의 목적을 위해, 그분이 밝혀 두신 법칙에 의해서만 해석되어야 한다.
비유는 영적 진리를 예증하기 위해서 주어져 있을 뿐, 어떤 국가나 교회사, 예언하는데 기발난 생각들을 제공하려고 주어져 있지 않다. 교회들의 역사에서 모든 종파나 그 종파의 신학자들이 자기들의 신조를 입증하려는데 사용되도록 비유는 강요당해 왔었다. 그래서 상징적이거나 교리에 얽매이지 않은 듯한 비유의 경우, 쉽게 남용되는 쪽으로 기울고 만다. 새교회 밖에서의 경우, 비유의 영적 가르침은 몇 계단 올라간 수준 정도로 생각하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의미는 자연적인 의미일 뿐, 확실히 구분되는 영적 의미는 아닌 것이다.

영적 의미는 외관상으로 글자와 연결되어 있지 않다

비유의 영적인 해석은 비유의 글자와 연결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놓고 새교회에서도 이의를 제기해 왔다. 그러나 위의 사항이야말로 새교회가 비유를 해석하는데 올바른 방법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왜냐하면 비유의 글자와 영의 관계는 인간의 육체와 영의 관계와 같기 때문이다. 이 두 관계는 서로 아무런 관계가 없는 듯 여겨진다. 그럼에도 그 둘은 아주 가깝게 연결이 가능한 가운데 존재한다. 우리가 제 아무리 인간의 육체를 연구하여 이해했다 해도 그것 가지고 인간의 영을 이해하는 수준까지 오를 수 없다. 사실 노골적으로 불신앙을 말하는 사람들의 일부는 자연과학을 우수한 성적으로 공부한 사람들 사이에 존재한다. 그들이 더욱 물리적 삶을 연구할수록, 그들은 더욱 영적 삶의 존재를 덜 믿는다.
왜? 이유를 정밀하게 말한다면, 바깥쪽 생각에서 볼 때 영과 육체는 전혀 연결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위 둘의 연결은 연속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 상응성에 있다. 영적 삶을 명백하게 이해하고저 하는 사람은 그 삶의 증거를 물리적 삶을 외적으로, 감각적으로 연구함으로 발견하려 들지 말고 자신의 영적 마음을 열므로 해서 발견해야 한다. 영적 마음이 열려질 때, 과거 영적 사항을 지각하는데 장애물이었던 자연 속의 참 사실들은 이제 자신의 열린 눈을 통해 그에게 영적 삶을 확증해 주고, 예증물도 되어 주며 응용도 할 수 있게 한다. 비유를 해석하는 새교회의 방법 속에서 발견되는 영적 의미들은 글자 의미와 끊어져 있다고 말해서는 안된다. 영과 몸이 끊어져 있다고 말하는 정도 이상으로 글자와 영은 끊어져 있는 것이 아니다. 연결된 존재를 볼 수 있는 사람에게는 끊어져 있지 않다.
성경의 영적 의미, 이는 인간의 영과 같이, 볼 눈을 가진 사람에게 그 존재의 비밀을 끝내 밝혀 준다. 이미 알려진 영적 원리들은 진리의 빛으로 보는 이에게 비유의 비밀을 밝히고 응용할 수 있게 해준다. 그 이유가 진리는 중심으로부터 바깥으로 이어져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명백한 영적 진리가 없으면 인간은 해석을 위한 확정된 법칙을 가지지 못한다. 확정된 법칙을 가지지 않은 채 비유에서 의미를 찾을 경우, 그는 성경에서 의미를 퍼내는 것이 아니라 아예 성경을 밀쳐내어 놓고 만다. 이러면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도록 성경은 인간에 의해 남용되고 마는 것이다.
그러나 어린아이 같은 영으로 성경의 글자에 다가가는 사람, 주님이 자기에게 가르치시고자 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받을 준비가 된 그 사람에게, 성경의 모든 부분은 그 사람 속에서 영원한 생명수가 솟아오르도록 하는 샘이 되어 줄 것이다.

구약의 비유 차례

* 서문———————————–23
1. 왕을 세우는 나무들—-판관기 9: 8-15———— 24
2. 삼손의 수수께끼—– 판관기 14: 5, 6, 8, 12, 14—— 33
3. 암컷 새끼 양——-사무엘하 12: 1-4———– 40
4. 원수 갚는 자——-사무엘하 14: 5-7, 11——— 49
5. 도망친 포로—–열왕기상 20: 39-40————- 57
6. 야망의 가시나무—-열왕기하 14: 9————– 66
7. 황폐된 포도원——이사야 5; 1-7————- 73
8. 감복숭아 가지와 끓는 가마솥—예레미야 1: 11-14—– 82
9. 쓸모 없게 된 허리띠—–예레미야 13: 1-7——— 88
10. 훼손된 옹기장이의 그릇—–예레미야 18: 2-6——- 94
11. 깨진 옹기장이의 그릇—예레미야 19: 1, 2, 10 ——– 98
12. 무화과 두 바구니——-예레미야 24: 1-2——— 100
13. 예레미야의 멍에와 끈–예레미야 27: 2,3,6. 28:1,2,10,12,13– 105
14. 포장된 광장에 돌을묻다—예레미야 43: 8-10———- 111
15 번쩍이는 불과 생물, 그리고 바퀴—에제키엘 1: 4-16—— 117
16. 이 두루마리 책을 먹어라—에제키엘 2: 8-10. 3: 1-4, 14— 123
17. 포위 공격되는 예루살렘—-에제키엘 4: 1-13———- 130
18. 예언자가 머리털과 수염을 밀다—-에제키엘 5: 1-5—— 137
19. 예루살렘의 우상 숭배——-에제키엘 8: 1-16——– 143
20. 예루살렘의 대학살—–에제키엘 9: 1-6. 10: 1, 2, 7—– 150
21. 보따리를 꾸려 떠남———에제키엘 12: 1-7—— 156
22. 무서워 떨며 먹는 빵, 겁에 질려 마시는 물–에제키엘 12: 18-20- 162
23. 거짓 여 예언자들——-에제키엘 13: 17-23——– 165
24. 예루살렘의 포도나무——에제키엘 15: 2-8——– – 173
25. 독수리와 포도나무——-에제키엘 17: 2-10——— 180
26. 설익은 포도를 먹으면——에제키엘 18: 1-2——— 188
27. 암사자와 그 새끼 사자——에제키엘 19: 1-9——– 196
28. 포도나무 같은 이스라엘의 어머니—–에제키엘 19: 10-14— 203
29. 끓고 있는 고기 가마——에제키엘 24: 3-12——— 210
30. 레바논의 아시리아 송백——–에제키엘 31: 3-12—– 218
31. 악한 목자———에제키엘 34: 1-6, 9-11——– 226
32. 마른 뼈가 되살아나다———-에제키엘 37: 1-14—- 233
33. 두 막대기가 하나로——-에제키엘 37: 16-23——- 241
34. 큰 제물에의 초대———-에제키엘 39: 17-21—— 249
35. 성전에서 흘러나오는 물——–에제키엘 47: 1-9—– 256
36. 큰 형상에 관한 느부갓네살의 꿈——다니엘 2: 31-45— 263
37. 큰 나무에 관한 느부갓네살의 꿈—–다니엘 4: 10-28— 271
38. 향연과 벽에 써진 글——–다니엘 5: 1-28——– 279
39. 네 짐승에 관한 다니엘의 환상—다니엘 7: 2-18, 23-27— 287
40. 수양과 수염소—-다니엘 8: 2-26—————- 295
41. 소귀나무 사이에 있는 사람과 말—-즈가리야 1: 8-11—- 302
42. 네 뿔과 네 대장장이–즈가리야 2: 1-4 (구번역 1: 18-21)- 307
43. 측량줄을 잡고 있는 사람–즈가리야 2: 5-9 (구번역 2: 1-5)- 313
44. 대사제 여호수아에 관한 환상—–즈가리야 3장——– 318
45. 황금 촛대와 올리브나무—–즈가리야 4: 1-4, 11-14—- 325
46. 날고 있는 두루마리——-즈가리야 5; 1-4——— 330
47. 여인과 에바————-즈가리야 5: 5-11——- 335
48. 네 병거와 말——-즈가리야 6: 1-8————– 342

구약 비유 서문

거룩한 성경은 하느님의 방법으로, 그분의 목적을 위해 씌어진 하느님의 말씀이다.
신성한 말씀은 영적으로 존재하시는 하느님께서 영적 존재인 인간에 대한 메시지를 포함하고 있다. 그러나 자연적 마음뿐인 인간에게 진리가 납득되도록 내려와지기 위해서 영적 진리들은 자연적 형상안에, 자연적 사항에 상응하여 표현되고 있다.
“나, 여호와, 너의 하느님이었다…나는 예언자들에게 내 말을 들려 주었다. 환상도 많이 보여 주었다. 나의 계획을 예언자들을 시켜 알려 주었다” (호세아 12:9,10).
성경은 영과 몸을 가지고 있다. 이 둘 사이에는 안쪽과 바깥쪽 상응물로서 상응의 관계가 존재한다.
단어 비유는 세 가지 의미에서 사용되어 진다. 1. 수수께끼, 또는 아주 모호한 말. 2.비유적인 대화. 3. 꾸민 이야기 이지만 진리를 알아낼 수 있거나 진리를 예증하도록 고안되었으나 실제로도 가능성이 있는 대화체이다. 신약성서의 비유들은 모두 세 번째 정의에 해당된다. 구약성서는 꼼꼼하게 위의 기초를 적용할 경우 몇 개의 비유만이 존재한다. 따라서 구약성서 비유를 취급할 때 우화나 환상을 포함하는 두 번째 정의 까지 채택하였다.
모든 비유는 최소한 세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다. 1.대화체적 의미 2. 자연물이나 사물에 적용시킴으로서 오는 비유적 의미 3. 마음에서 실행되는 원리를 예증해 주는 영적 의미이다.
이 책에 고용된 해석 체계는 이마누엘 스베덴볽를 통해 교회에 알려진 “상응학”에 기초를 두고 있다.
각 비유를 각 비유 단원 자체에서 완성하는 것이 가장 나을 것 같아서 약간의 반복 설명이 있음을 첨부해둔다.

1
왕을 세우는 나무들

성서: 판관기 제 9장 8-15절

8. 하루는 나무들이 모여 와서
자기들을 다스릴 왕을 세우기로 하고
올리브나무에게 청을 드려 보았소.
‘우리 왕이 되어 주게나!’
9. 그러나 올리브나무는 사양을 했소.
‘내 기름은 모든 신과 사람을 영화롭게 하는 것,
그런데 나 어찌 기름을 내지 않고 자리를 떠나
다른 나무들을 내려다 보며 으스대겠는가?’
10. 그래서 나무들은 무화과나무에게 청을 드려 보았소.
‘자네가 와서 우리 왕이 되어 주게나.’
그러나 무화과나무도 사양을 했소.
‘나 어찌 이 훌륭한 과일을 내지 않고 자리를 떠나
다른 나무들을 내려다 보며 으스대겠는가?’
12 그래서 나무들은 포도나무에게 청을 드려 보았소.
‘자네가 와서 우리 왕이 되어 주게나.’
13 그러나 포도나무도 사양을 했소.
‘내 술은 모든 신과 사람을 흥겹게 해 주는 것,
그런데 나 어찌 이 술을 내지 않고 자리를 떠나
다른 나무들을 내려다 보며 으스대겠는가?’
14 그래서 모든 나무는 가시나무에게 청을 드려 보았소.
‘자네가 와서 왕이 되어 주게나.’
15. 그러자 가시나무는 그 나무들에게
이렇게 대답하는 것이었소!
‘너희가 정말로 나를 왕으로 모시려는가?
정녕 그렇거든 와서 내 그늘 아래 숨어라
그러지 않았다가는 이 가시덤불이 불을 뿜어
레바논의 송백까지 삼켜 버릴 것이다.’

지배욕

지배욕은 남을 다스리려 하며 파멸로 치닫는다. 인간 속의 보다 높은 원리들은 제각각의 위치에서 자신들이 소유한 특질을 선용하는데 만족해 하나, 보다 낮고 비천한 인간의 성향은 타인을 다스리기를 바랜다.

본문의 역사 배경

기드온은 이스라엘의 성공적인 군사 지도자이었다. 그래서 백성들은 그에게 청하기를, ”당신이 우리를 미디안 사람들의 손에서 구원해 내셨으니 당신과 당신의 자자손손이 우리를 다스려 주십시요”라고 했다. 그러나 기드온은 “내가 그대들을 다스릴 것도 아니요, 내 자손이 그대들을 다스릴 것도 아닙니다” 하며 그들의 청을 거절하였다. 그리고 이어서 “그대들을 다스릴 분은 야훼시오” 라고 말해 주었다. 그 뒤 기드온이 살아 있는 동안, 그리고 판관으로서의 그의 조언이 계속 있는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은 평화와 번영을 누렸다. 그러나 그가 죽자 그들은 곧 우상들을 섬기기 시작했다. 기드온이 소실에서 얻은 아들 아비멜렉은 왕이 되기 위해 교활한 음모를 짜서 기드온의 친아들 칠십 명중 숨어 버린 요담을 제외한 모두를 한 바위 앞에서 죽였다. 그래서 주님은 아비멜렉과 이스라엘 백성들을 깨우쳐 주기 위해 요담을 사용하셨는데 그것이 바로 오늘 본문의 비유이고 아마 가장 오래된 성서의 비유일 것이다.
요담은 세겜 사람들에게 그들이 내세운 왕이 가문 중에서 하위 급에 속한 자요, 왕위를 얻기 위해 기드온의 친아들의 피를 본 잔인성이 있는 자임을 보여주었다. 또한 아비멜렉은 가시나무처럼 남을 다스리거나 파괴할 준비가 된 자로서 악령이 덮쳐 있어 그의 통치는 이스라엘에 재난을 불러오게 된다고 세겜 사람들에게 보여주었던 것이다.

역사에 표현된 의미

나무들은 이스라엘 백성을 표현하고 있다. 올리브는 기드온, 무화과나무는 기드온의 친아들들, 그리고 포도나무는 기드온의 자자손손들을 표현한다. 그 이유는 기드온이 왕위에 앉기를 사양했고 그 자손들도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가시나무는 아비멜렉, 그리고 레바논의 송백은 세겜의 사람들이다.

역사에 표현된 영적 의미

비유는 위의 역사 표현에 영적인 응용을 가지고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기들의 악함과 우상 숭배에 빠져들 때 그들은 언제나 어떤 강한 적에 의해 패배를 맛보았었다. 우리의 경우, 각자가 주님의 명령에서 이탈할 때 악에 침몰하여 자아나 세상을 숭배하게 된다. 그래서 언제나 그 사람에게는 정신적인 지주에 반기를 드는 어떤 영적인 적의 수중에 잡혀 심각한 패배를 맛보고 만다.
악에 빠진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이 빠져 든 악과 거짓을 표현해 주는 어떤 국가나 민족에 의해 공격당하였다.
때로 이 백성들은 포로로서 끌려가기도 했다. 끌고 간 나라는 이스라엘 백성을 내적으로 끌고 가는 악한 원리들을 표현해 주고 있는데 이는 육의 욕망에 영적으로 포로됨을 말한다. 이럼으로서 그들은 거듭나는 삶의 고향에서 멀어지게 되고 그 기쁨마저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인간이 자기 죄상을 보고 인정할 때, 그리고 구원을 위해 주님에게 돌아서고 회개하여 악을 죄로 알고 금함으로서 구원되어질 수 있다. 그러나 고난이 지나가고 나면 인간들은 하느님이 도우셨음을 쉽게 잊어 버리고 이기적인 우상숭배에 빠져든다. 그들은 자기들의 정신적인 왕인 장엄하고 신성한 진리를 간직하려는 대신, 진리를 거꾸로 뒤집어 보려고 하는바, 노예 같은 원리가 사생아로 태어나게 된다. 그리고 그 사생아를 자기의 정신적인 왕으로 내세운다.

아비멜렉

아비멜렉은 이기적으로 남들을 지배하려는 잔인한 사랑을 표현하고 있다. 이 사랑은 자아 사랑에서 태어나진다. 한마디로 지배하고 파괴시키는것에 준비가 완료된 가시나무인 바, 자기 지배 아래 들어오지 않으려는 더 나은 원리들은 불살라 버린다.

세 나무들

올리브, 무화과, 포도나무는 성경에서 자주 함께 언급되는 나무들이다. 이 나무들은 인간 생명의 불연속 등차인 천적, 영적, 그리고 자연적 등차를 표현하고 있다. 천적 등차는 주님을 사랑하는 것, 영적 등차는 이웃을 사랑하는 것, 자연적 등차는 법에 순종함을 사랑하는 것을 말한다. 나무란 인간의 지성과 삶의 내향적 원리를 표현한다. 선한 사람 안에 있는 선한 원리들을 “주님의 나무들”이라 불리고, 악한 사람 속의 원리는 열매를 맺지 못하는 나무들, 토양의 두통거리들이라 불린다. 시편을 찾아보면 나무에 대한 이해를 보태 줄 것이다. 즉 “나는 하느님의 집에서 싱싱하게 자라는 올리브나무 같이 한결같은 하느님의 사랑을 영원히 믿고 살리라” (52:8). “의로운 사람아. 종려나무처럼 우거지고 레바논의 송백처럼 치솟아라” (92:12).

올리브 나무

올리브 나무는 주님을 사랑함을 표현하는바, 이 사랑은 천적인 원리에 해당된다. 이 사랑의 원리는 기름(oil)같이 따뜻하고 미끈미끈하다. “당신은 정의를 사랑하고, 악을 미워하시기에 하느님, 당신의 하느님께서 즐거움의 기름을 다른 사람 제쳐놓고 당신에게 부으셨읍니다” (시편 45:7). 이 사랑의 기름이 본문에서 언급되는 올리브의 “기름(fatness)”이다. 이와 같은 사랑이 마음을 규율하여 모든 애정, 생각, 행동 지침들을 통치할 때 그 인간은 천적으로 거듭난 상태 안에 있게 된다.
올리브 나무가 나무들을 다스리기를 사양했다 함은 천적인 사랑이 거듭나는 마음을 규율할 수 없다던가, 규율 못한다는 것을 의미하는게 아니고, 이와 같은 천적인 사랑은 세겜 사람들 속에 존재하는 식의 마음 바탕을 규율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세겜 사람들은 천적인 방법으로 자기들이 다스려지길 바래지 않고 있다. 그들의 목적은 이기적인 데에 쏠려 있음을 음흉하고 살인적인 아비멜렉을 왕으로 추대하는 데서 스스로 보여주고 있다. 주님을 사랑함, 천적인 사랑은 이기적이고 세상적인 마음들을 다스릴 수 없다. 만일 천적인 사랑이 이기적인 원리들과 하나를 이룬다면 이는 필시 천적 사랑의 특질을 잃게 되고 악에 의해 간음질화가 있고야 만다. 그래서 다스리기를 사양한 올리브 나무의 대답은, “내 기름은 모든 신과 사람을 영화롭게 하는 것, 그런데 나 어찌 기름을 내지 않고 자리를 떠나 다른 나무들을 내려다보며 으스대겠는가?” 이였던 것이다. 이 거절의 기본 원칙은 천적 사랑은 그 사랑의 선함을 잃지 않고서는 세상적이고 이기적인 원리들과 섞일 수 없다는 것이다.
본문 글자대로 볼 때, 올리브 나무는 하느님과 사람을 존경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올리브 기름은 성전에서 하느님의 예배에 사용되고, 또한 사제들이나 왕들은 이 기름을 부워 세워졌기 때문이다. 영적으로 볼 때, 올리브 나무가 하느님과 사람을 존경하는 이유는 주님에 대한 사랑을 원리로 하는 자는 언제나 주님만을 찾으며, 그분을 인식하고 모든 영예를 그분께 돌려 드릴뿐 아니라, 인간으로 하여금 주님과 연합하는 상태로 가져다주려 하는 바 이런 상태의 사람이 진정으로 존경되어지는 것이 아닐까?

무화과나무

무화과나무 역시 왕이 되기를 사양했다. 무화과는 자연적인 선함, 자신에게 밝히 알려진 법에의 순종을 사랑함을 표현한다. 이 사랑이 하느님의 계명에 순종하려고 자연적인 사랑을 배가시켜 가려 하는 것은 지당한 일이다. 그러나 이 사랑의 미덕을 가지고 타인을 다스리려는 포부의 영을 먹여 살리려 하면 필시 이 사랑 속의 선한 특질은 파괴되고 만다. 그래서 결국 미덕이 악덕으로 부패해지고 말 것이다. 다시 말해 무화과나무는 자기의 달콤한 맛과 훌륭한 과일을 돌보지 않게 되고야 말 것이다. 인간이 지적으로 진리를 잘 알고, 기꺼이 그 진리에 순종하게 될 때, 요엘서 2장 22절과 같이, “무화과나무와 포도 덩굴에 열매가 주렁주렁 달린” 영적인 상태가 된다. 무화과나무의 “달콤함”이란 내향적인 선한 원리들을 말하고, 훌륭한 과일이란 그 원리들이 적용되어 이루어지는 선한 일들을 뜻한다.

포도나무

포도나무 역시 왕이 되기를 거절했는데, 말하기를 “내 술은 모든 신과 사람을 흥겹게 해 주는 것, 그런데 나 어찌 이 술을 내지 않고 자리를 떠나 다른 나무들을 내려다보며 으스대겠는가?” 이었다. 포도나무는 영적인 진리를 표현한다. 포도나무의 열매는 진리를 사랑하기에 튀쳐 나오는 선을 말한다. 이 사랑은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주님에 대한 사랑과는 구별된다. 본문 글자대로 볼 때, 포도주는 하느님과 인간을 기쁘게 하거나 흥겨웁게 한다고 했는데, 그 이유가 포도주는 주님에 대한 헌물이였기 때문이다. 또한 순수한 포도주를 올바르게 이용하면 슬픈 자나 피로에 지친 이에게 힘을 북돋아 주거나 기쁘게 해주기 때문이기도 하다.
영적으로 볼 때, 포도주는 신성한 진리, 영적으로 “주님의 피,” 주님이 인간에게 주시고자 하는 것들, 선한 사람이 그분에게서 받고자 하는 진리를 표현해 준다. 이와 같은 영적인 “포도의 피,” 신성한 진리는 인간의 영적인 눈을 열어 주며 그 심정을 따뜻하게 해주어 그 사람의 삶을 부유하게 만든다. 신성한 진리로서의 주님 자신을 요한복음 15장 5절에서,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고 부르셨다. “마지막 만찬”에서 주님은 그분의 제자들에게 포도주를 언급하시면서, “잘 들어 두어라. 하느님 나라에서 새 포도주를 마실 그 날까지 결코 포도로 빚은 것을 마시지 않겠다” (마가복음 14:25) 라고 하셨다. 이 새 포도주란 성경의 영적인 뜻이 우리의 내면에 와질 때 있게 되는 진리들, 즉 새로운 영적 진리를 말한다. 이 진리가 우리를 그분과 하나 되게 해주며, 우리로 하여금 사랑과 믿음 그리고 순종 안에 있게 해주는바, 이것이 영적으로 새 포도주를 마시게 되는 것이다. 이 영적 포도주는 “하느님과 인간을 흥겹게 해주는데,” 그 이유는 신성이 인간에게 더욱 더 복을 가져다주기 때문이며, 신성한 사랑의 역사가 더욱 더 팽창되기 때문이다.

다른 나무들

다른 나무들은 좋은 나무가 자기들을 다스리기를 바라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 있다. 그런데 그렇게 해 주려면 좋은 나무들은 자기들의 높고 거룩한 인격을 떠나 다른 나무들의 처지에로 내려가야만 했다. 바꿔 말해 다른 나무들은 세 나무들이 자기들 위에서 통치해 달라는 조건이 아니었다는 말이다. 대신 그들은 “우리 왕이 되어 주게나! Come thou, and rule over us” 라고 제의하였다. 그들은 자기의 인격이나 처지를 더 나은 곳으로 들어올리지 않고 그대로 자기들의 이기적인 조건을 주창 하였다. 오히려 그들은 더 높은 것들이 내려와서 자신들의 더 낮은 조건에 동의해 주기를 바랬다. 그래서 정신적으로 좋은 나무들은 자기들의 분명한 특질이나 인격을 버리지 않고서는 그들의 제안을 수락할 수 없었다. 따라서 왕이 되기를 사양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세 나무의 차이점

올리브와 무화과나무는 내, 외향적 선에 관한 의지 또는 심정의 상태, 혹은 사랑을 표현한다. 포도나무는 진리를 이해하는 상태와 진리로 살아가는 상태를 표현한다. 그래서 이들은 남을 지배하고 싶은 어떤 이기적인 형체와 자신들이 결합되기 위해 자신들의 선함과 진리를 내버릴 수는 없었다.

가시나무

좋은 나무들이 왕이 되기를 사양하자 다른 나무들은 가시나무에게 제의해 보았다. 각 개인의 차원에서 볼 때 이 가시나무는 대중을 지배하고 파괴시키려 드는 위험한 인물들을 표현한다.
추상적으로 볼 때, 이 가시나무는 남을 다스리기를 즐기려드는 이기적인 형체를 표현하는바, 이 형체는 매우 세상적이고 도도하고 위험스러운 것이다. 모든 자연적인 것들이 악한 용도에로 충당될 때는 가시나무같이 되어져 위험스럽고 불붙기 쉬워 이기적 욕망이라는 지옥의 불로 쉽게 타 버리고 만다. 성경의 글자도 그 글자들이 내향적인 영에서 분리되면 악한 용도에 금방 충당되므로 지성 속에서 가시나무가 되고 만다. 이렇게 성경의 글자가 남용되면 위장된 선함, 가짜 선함이 생산되는 것이다. 시온이 죄악스런 상황에 처할 때에 대해 말하기를, “궁궐마다 딸기 덩굴만 무성하고, 요새마다 쐐기풀과 가시덤불만 얽혀 자라나고 승냥이가 득실거리며, 타조가 노니는 곳이 되리라” (이사야 34:13) 라고 하였다.
가시나무는 다른 나무들을 지배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이기적인 사랑은 한 인간 속의 지배욕이 기꺼이 모든 것을 다 지배할 때까지 계속 그 지배욕을 키운다. 그래서 악인이 많이 알면 알수록 더 악을 행하게 되는 것이다. 비록 이 사람이 교리로서 진리를 알고 있다 해도 자신 속의 감각적인 욕망의 불은 자기 지성 속의 모든 진리에 불을 뿜어 태워버리고 만다. 레바논의 송백이란 합리적인 진리들, 주님의 말씀 속에 든 진리들인데 이것까지도 다 삼켜 버리게 된다.
지배욕은 자기 지식을 이기적인 목적에 충당할 준비가 완료되어 있는 욕망이다. 이 욕망은 교회를 향해서도, 모든 선한 영향력에 대해서도 선심을 쓰는 척 할 것이다. 만일 교회 속의 모든 것, 모든 선한 것이 선함을 떠나 이 욕망 아래로 내려와 이 욕망의 섬김을 바라는게 아니라 오히려 반대를 시도하면, 이 욕망은 지옥의 불을 보내 지성 속에서 다 태워 버린다. 인간 사회 속의 역사는 이와 같은 가시나무로 꽉 차 있고, 교회의 성직에 필요한 체계 속에서도, 정치인들의 정치 술수 속에서도, 사회 생활의 남용 속에서 남을 지배하고 파괴하려는데 전심전력 투구하는 모습에서 엿보아진다. 타락한 인간은 자아 사랑을 자기의 진짜 하느님으로 간주한다. 그러나 그가 자아 사랑만이 자기 생명이라고 여겨 기대고 있는 동안 이 사랑은 그를 지옥 불 속에서 파괴시켜 버리는 줄을 그는 까마득하게 모른다.
아비멜렉, 가시나무 같은 그는 무가치한 것 중에서 가장 무가치한 고로 통치할 자격이 주어졌다. 그 이유는 백성들은 그런 왕을 내심으로 원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도 자신에게 올 이익 때문에 그들을 다스려 줄 준비가 되었었다.
이 나무들은 가시나무에게 기울어졌고 가시나무 역시 자기 방식대로 지배하고 파괴하기 위해 왕이 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오만함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을 통치하겠다는 아비멜렉의 뻔뻔함, 자연적 수준의 인간성이 영적 수준의 인간성을 지배하겠다고 하는 건방짐이 모든 나무들, 게다가 곧바르게 하늘을 향해 높이 솟아 자라는 레바논의 장대한 송백 나무까지도 보잘것없는 가시나무 그늘 아래 들어와야 한다고 을러대는 낮고 비천한 가시나무의 말에서 보여지고 있다.
영적으로 보건대, 위의 괴물 같은 뻔뻔함, 이것이 지성 속의 드높은 원리들을 끌어내리려 시도하는 것, 이 원리로 하여금 악한 목적에 충당하려 하는 것, 전적으로 자기 그늘 아래 앉게 하려 하는 것, 또는 악한 욕망의 거룩하지 않은 불로 그 원리들을 파괴시키려 하는 것, 이런 것들은 우리의 자연적 수준의 지성 안에 든 지배욕이 보여주는 착각들이다.

송백 나무

레바논의 송백은 거듭나는 삶 속에 있어지는 장엄한 합리적인 진리들을 표현해 주고 있다. 이 나무는 고상한 모양새로 땅 위 아주 멀리까지 자라 오르고 그들 잎사귀들은 언제나 푸른 바, 이 진리들은 영적이며 죽지 않는 인성을 사람에게 가르친다. 시편을 보면 이를 이해할 수 있다. 즉 “땅에서도 야훼를 찬양하여라. 큰 물고기도 깊은 바다도, 번개와 우박, 눈과 안개도 당신 말씀대로 몰아치는 된바람도, 이 산 저 산 모든 언덕도 과일 나무와 모든 송백도…” (148:7-9.) 어떻게 드높고 영화로운 진리들이 구부리고 구부려도 땅바닥에 붙어 있듯 서 있는 낮고 천한 가시나무 그늘 아래에 자신들을 구겨 넣을 수 있단 말인가? 어떻게 우리가 영적이고 신성한 것들에 관한 지식을 남을 지배하려드는 이기적인 사랑의 욕망에 팔아 넘길 수가 있을까? 그러나 만일 우리가 어리석게도 이런 식을 시도한다면 우리 심정 속에 든 지옥의 불은 확실하게 봉기해서 우리 속에 든 레바논의 송백까지도 삼켜 버리고야 만다.

각 개인에 대한 응용

창조에는 질서가 있고 이 질서는 창조자에 의해 성별되어 있어 모든 창조물의 조직 안에 고정되어 있다. 이 질서에 따라 각 개인은 자기가 설 곳이 정해지고 자기가 어디에 쓸모 있는가를 가지게 된다. 그래서 각자의 용도에 맞는 항목을 선택하여 수행해감을 사랑하는 가운데 행복은 발견되어진다. 다시 말해 눈은 보는 일에, 귀는 듣는데 편성되면 가장 적합한 용도에 충당되는 것과 같다. 다시 말해 눈은 어떤 소리도 감지 못하고, 귀는 어떤 빛도 인지하지 못한다.
따라서 눈은 보는 일에서 떠나기를 원치 않아야 하고 귀는 듣는데서 떠나 다른 일을 하기를 원치 않아야 한다. 따라서 최상의 것이라면 각자의 씀씀이대로 편성된 속에서 자기 일을 수행하는게 가장 행복한 것이다. 이 상태에서는 다른 것을 다스릴 이기적인 포부란 있을 수 없다. 거듭나는 지성 안에 든 삶의 각 원리들은 제각각의 장소와 일들을 가지고 있다. 또한 제각각의 용도에 충당됨으로써 행복이 100% 성취된다. 만일 그 중 하나가 이기적인 욕망이 있어 제 길을 벗어나 다른 것을 지배하려든다면 그것의 좋은 특질을 포기해야만 할 것이다.

지배욕

그러나 우리 속의 가시나무, 지배하고 싶어하는 이기적인 우리의 포부는 자기 외의 모든 다른 것을 다스리려 하거나 악한 욕망의 지옥 불에 다른 것들을 종속시키려 들므로서 좋은 특질을 파괴하려 애쓴다. 천국은 겸손의 영으로 꽉 차 있고 지옥은 자기 주장으로 꽉 차 있는 곳이다.
만일 어떤 천국적인 원리들이 우리 지성 속에서 자라기 시작했다면, 이 원리들은 세상적이고 이기적인 목적의 조절 아래 놓여서는 안된다. 만일 우리가 선한 원리들을 남용한다면, 사랑의 기름을, 영성인 포도주를, 좋은 과일 속의 달콤한 맛을 잃어버리고 만다. 그래서 “좋은 열매 맺지 않는 나무는 다 찍혀 불 속에 던져질 것이다” (마태복음 3:10).
지배를 좋아하는 사랑은 여러 방면에서 그 자체를 드러낸다. 즉 자신의 길만이 올바르다고 우겨댐에서, 자기 견해만을 뻣뻣하게 과시함에서, 자신의 정신적인 능력을 과대 평가함에서 드러낸다. 게다가 이 평가는 적절한 비평이 있을 경우 참지 못하는 특성도 겸비하고 있다. 특별하게는 타인을 경멸하는 비열한 악덕 속에 상존 한다. 모든 이런 양상들은 정신적으로나 물질적으로나 타인을 다스리기를 좋아하는 사랑의 일부 형체들에 속한다.
겸손이 없으면 사랑의 기름은 그 특질인 천국적인 따뜻함을 잃는다. 진리의 포도주는 그 속의 영적 특질을 잃고 만다. 그리고 순종의 무화과는 그 자체의 주특기인 실용적인 달콤한 맛을 잃고야 만다.
우리 지성 속에 든 가시나무, 우리 자신이 남보다 잘났다고 추키려 들 때든지, 타인을 경멸하도록 자기 심정을 허용할 때든지, 더욱이 하느님이 자기에게 밝혀 준 진리(Divine Revelation) 속의 거룩한 진리들을 끌어내려 자신의 감각을 즐겁게 하기 위한 이기적 용도에 충당시키려 들 때는 언제든지, 어디에서든 그것은 우리 속의 가시나무가 다른 나무들을 다스리고 있는 모습이다.

영적 진리

성경의 글자적인 사실들을 놓고 이는 어떤 민족의 역사에 불과하다던가, 지구상의 어느 조그만 부분에 대한 과학이나 지리학에 관한 지식을 제공할 뿐이라고 하는 이들의 주장에 휘말리거나 맞서느라 시간을 허비하면 그 사이에 성경은 우리에게 조금밖에 사용되지 못하고 만다. 주님의 말씀 속에 있는 예언들이 자연적 측면 이상의 것과 관련되어 있지 않다고 예상할 때 영적이고 천적인 올리브 나무가 열매를 내지만 그 기름은 조금밖에, 무화과나무가 무화과를 맺어 봐야 그 열매 속의 달콤함은 조금밖에, 포도나무가 포도를 생산한다 해도 그 포도로 빚은 포도주는 조금밖에 안되고 만다. 밝혀진 진리의 빛 안에서 인간 영혼을 들여다보는 거울로서 신성한 말씀을 간주할 때만이, 그 말씀 속의 진리가 인간의 영적 양상 속에서 보여짐으로써만이 성경 속의 진리들은 천국적인 진리로 보여지고, 우리 지성으로 하여금 새로운 세계를 보게 해주며, 출생부터 영원까지 있어지는 인간 영혼의 역사를 적나라하게 나열해 준다.
주님이 영적으로 오시는 가운데, 그분은 인간에게 “더 풍부한” 생명을 주실 수 있고, 더 높은 품질에 속한 생명을 주시게 된다. 우리가 그것들을 뜻한다면, “하느님의 집에 있는 푸른 올리브 나무”가 될 수 있도록 그분은 예비해 두셨다. 그래서 “그날에 너희는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잔치를 베풀고 서로 오가며 살리라. 만군의 야훼께서 하신 말씀이시다” (즈가리야 3:10).

2
삼손의 수수께끼

성서 본문: 판관기 제 14장 5, 6, 8, 12, 14절

5. 삼손이 딤나로 내려 가서 딤나에 있는 한 포도원에 다다랐을 때의 일이다. 난데없이 어린 사자 한 마리가 으르렁거리며 달려드는 것이었다. 6. 그 때 야훼의 영이 갑자기 내리덮쳐 삼손은 양새끼 찢듯 맨손으로 그 사자를 갈기갈기 찢었다… 8. 얼마 후 삼손은 그 여자를 아내로 맞으러 가다가, 가던 길을 벗어나 죽은 사자가 있는 데로 가서 그 죽은 사자 몸에 벌이 꿀을 쳐 놓은 것을 보았다…. 12. 그 자리에서 삼손이 그들에게 말하였다. “내가 수수께끼 하나를 낼터이니, 잔치가 계속되는 이렛 동안 생각해서 맞혀 보게. 알아 내기만 하면 내가 모시옷 서른 벌과 예복 서른 벌을 내지.”… 14. 그래서 그는 수수께끼를 내놓았다.
“먹는 자에게서 먹는 것이 나오고
힘센 자에게서 단 것이 나오는데,
그것이 무엇인가?”

유혹에 저항

신성의 도움을 가지고 유혹에 저항하면 우리는 악의 권세를 이겨내서 거듭남의 단맛을 즐기면서 더 강해질 수 있다.

삼손

나지르인으로서의 삼손은 신성한 진리로 무장하고 지옥과 싸워 정복하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자연적 인간성을 표현한다. 삼손의 힘은 그의 머리털에 있었다. 머리털, 이는 피부로부터 자라고 육체 중에서도 가장 바깥쪽에 해당되는 바, 자연적인 마음에 속한 것들, 또한 자연적인 삶에 속하는 것들을 표현해 준다. 좀더 뾰족하게 생각하면 머리털은 신성의 가장 바깥, 즉 신성한 말씀의 글자를 표현해 준다.
진리가 무언가를 분명히 해줄 때 진리는 아주 힘있고 효과적인데 특히 바깥쪽 삶의 행동에 직접 응용될 때 더욱 그러하다. 열 개의 계명에 의해 행해진 삶이 바로 이런 경우이다. 예를 들면, 우리가 정직해야 함이라는 주제를 놓고 생각해 볼 때, 우리는 이 주제에 가능해지는 많은 논리들을 펼칠 수 있겠지만, 이에 대해 십계명을 참작하면, 진리는 자아 부정이라는 명백하고 실용적인 형체를 띄고 우리들과 대결하게 된다. 즉 “도적질하지 말라” 라든가 “거짓 증거하지 말라” 와 같은 형태로 대결된다는 말이다. 이와 같이 우리의 의도를 구체화해서 표현한 행동 지침에 대한 법의 실용적인 힘을 깨트릴 수 있는 기발할 논쟁이란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글자로부터 나오는 진리의 힘이 머리털로 표현되고 있다. 그런고로 예언자나 표현적인 인물, 즉 에사오, 엘리야, 세례자 요한, 삼손은 특별히 “털이 많은 사람”으로서 언급되는 것이다.
예수님의 자연적인 인간성은 유대 종족에 존재해 온 악에 속한 자연적인 경향성을 그의 어머니로부터 이어받은 성향인데, 이것이 삼손에 의해 표현되기도 한다. 그리고 예수님의 이 자연적인 인간성은 순수해지고 영화되어서 내재하는 신성과 하나를 이루어야 했다. 즉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가 되는 것이다. 위의 과정은 신성한 사랑이 신성한 진리인 예수의 마음 안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해준다. 이리하여 예수의 인간성은 모든 신성한 성질, 모든 신성한 권능으로 채워지는 바, 신성함이 신성한 인간성 안에 충만하게 내재할 수 있었다. 이상의 과정이 인간성이 영화하는 과정이요, 신성한 인간성인 하느님의 외적인 것을 만들게 되는 과정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이 외적인 것 안에 하느님이 충만하게 거하시는 바,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로, 신성한 인격 속의 삼위일체, 즉 아버지, 아들, 성령 또는 신성한 사랑, 신성한 지혜, 신성한 권능 모두가 한 분 하느님이고 한 인격인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한 인간 안에 상존한다.

사자

인성이 신성과 하나가 되는 작업, 영화 되시는 작업의 한 부분이 삼손이 사자를 찢어 죽임으로 표현되어져 있다.
표현물(representative)은 때로는 좋은 의미에서 사용되나, 뭔가가 비질서 속에 있을 때는 나쁜 의미로도 사용된다. 좋은 의미에서 사자를 살펴보면, “짐승의 왕” 또는 큰 힘을 가진 짐승으로서의 사자는 권능, 특별히 악과 거짓에 대항하여 싸우는 진리의 권능을 표현한다. 더 특별하게 보면 사자는 신성한 말씀의 글자가 가진 권능을 표현하는데, 그 이유는 사자가 털이 많은 짐승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의미에서 주님은 “유다지파에서 나온 사자”라 불리우신다. 그러나 이 동물이 나쁜 의미로 사용될 때, 사자는 거꾸로 된 진리의 권능, 거짓 권능으로 변한 권능, 퇴보되는 지성 속에 든 진리, 신성한 진리의 영에 맞선 전쟁에 가담한 비진리, 또는 실제의 삶 안에서 선함에 맞선 것들을 표현해 준다.
자연적 인간으로서의 예수님은 그분이 배운 신성한 진리를 거짓화시키고 싶어하는 자연적인 경향성으로 태어나셨다. 예수님의 본성 중에 내적인 것과 신성한 부분은 예수님의 전 인격을 선한 질서에로 가져다 놓으려 하지만, 진리를 거짓화하려는 자연적인 경향성은 자연적인 마음이 위와 같은 변화에 반대하므로 영화되는 과정에 당연히 저항한다. 이와 같이 진리를 거짓화 하려는 위의 자연적인 경향성이 본문에 있는 사자이다. 삼손에게 으르렁거리며 달려드는 사자란 상응으로 볼 때 정신적인 사자, 즉 예수님의 자연적인 마음을 표현한다.
이와 같은 사자가 성경에서 종종 언급되는 바, 시편 22편에서, “으르렁대며 찢어발기는 사자들처럼 입을 벌리고 달려듭니다.” 그리고 시편 57편 4절에서, “나는 사자들 가운데에, 사람을 잡아먹는 그들 가운데에 누워 있읍니다.” 그러나 예수님 안의 신성한 본성이 진리를 거짓되게 하려는 경향성들을 극복한 이유는 인간성 스스로 이와 같은 경향성에 저항하며 신성한 의지를 행하려고 했기 때문인데, 이런 행동이 사자를 찢는 삼손으로 표현되고 있다. 그분이 입으신 인간성, 우리가 입고 있는 인간성 모두에 대한 신성한 약속이 시편 91편 13절에서, “네가 사자와 독사 위를 짓밟고 다니며, 사자 새끼와 구리뱀을 짓이기라”로 표현되어 있다.

사자의 공격

악과 거짓의 큰 권능은 예수님이 입으신 인간성 안에 있는 유대 종족의 자연적인 경향성에만 있는게 아니다. 악과 거짓에 대한 이런 경향성은 자연적인 마음 안에 흔들리지 않는 바탕을 두고 있기 때문에 지옥은 이 바탕을 근거지로 삼고 전 인격을 소유하려는 바, 인간성을 영화하려는 예수님 안의 신성한 본성과도 전쟁을 치르게 된다. 영화하심은 선함만을 위한 것인지라 모든 악이 대항하게 되므로 지옥에 있는 모든 악령들은 이 영화하심이 실패되게 하려 발버둥친다. 그런고로 악령들은 모든 자기들의 권능을 모아서 죄에 빠지도록 예수님의 인간성을 꾀게 된다. 이러한 지옥의 권세가 공격하는 것이 사자의 공격으로 표현되어 있다. 그 반면, 사자에 대한 삼손의 큰 힘은 단지 그가 지닌 근육의 힘 때문이 아니라, “주님의 영이 내리 덮쳐” 있었던 힘과 더불어서 이다.
구세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 대부분은 인간을 붙잡고 있던 악과 거짓 그리고 죄의 근원인 지옥을 정복하시는 것이었다. 그러나 넓은 의미에서 인간을 위해 이 일을 수행하심에 있어서 예수님도 그분의 자연적인 마음 안에서 같은 종류의 일을 수행하셔야만 했다. 그분도 그분 속의 악에 대한 자연적인 경향성을 만나 그것들을 거꾸러트리셔야 지옥적인 권능에서 인간을 구출하실 수 있으셨다는 말이다. 삼손의 행동은 종종 예수 그리스도의 위의 일을 표현해 준다. 신성한 아버지가 예수 그리스도가 입으신 인간성 안에 내재하시어 예수의 자연적 인격을 지휘하고 강건하게 해주시면서 지옥과의 대결이 있어 왔다. 그래서 이제 예수 그리스도는 천상 천하의 한 분 하느님이 되셔서 우리 속에도 있으시게 된 것이다. 만일 우리가 뜻하기만 하면, 우리가 지옥과 대결하는데 있어 그분은 우리를 지휘하시고, 유지 보존시키며 가르치시기도 한다.
예수님께서 일흔 두 제자들을 파견하여 복음을 선포하게 하신 뒤 그들이 돌아와 보고하는 누가복음 10장 17-19절을 보면, “일흔 두 제자가 기쁨에 넘쳐 돌아와 ‘주님, 저희가 주님의 이름으로 마귀들까지도 복종시켰읍니다’ 하고 아뢰었다. 예수께서 ‘나는 사탄이 하늘에서 번갯불처럼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 내가 너희에게 뱀이나 전갈을 짓밟는 능력과 원수의 모든 힘을 꺾는 권세를 주었으니 이 세상에서 너희를 해칠 자는 하나도 없다” 라는 말씀은 위 내용을 보다 더 이해하게 해줄 것이다.

삼손의 수수께끼

“먹는 자에게서 먹는 것이 나오고, 힘센 자에게서 단 것이 나오는데 그것이 무엇인가?”
먹는 자, 게걸스럽게 먹어 치우는 자, 파괴자는 사자였다. 그래서 여기서의 사자는 거짓 원리의 힘을 표현한다. 이 원리는 인간의 자연적인 마음속에서 난동을 부려 인간 안에 있는 모든 선함, 모든 영성을 파괴하려 애쓴다. 개인적 측면에서 보면 이와 같은 사자는 악과 거짓의 영들이고, 이 영들은 영계에 살면서 언제나 인간의 악한 경향성과 긴밀한 관계를 가진다. 그리하여 언제나 이 경향성에 들러붙어 악과 거짓을 일으켜 세우고 증가시켜 인간을 영적으로 파괴시킨다. 그러나 삼손은 사자를 죽였다. 이는 인간성 안에 계신 주님이 악과 거짓의 영들에 대항하여 역사하고 그들의 영향력에 대처하셨음을 표현했는데, 이는 그분이 입으신 자연적인 인간성뿐 아니라 거듭나기를 정말 원하는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서, 악에 기울려는 상태에 저항하는 사람의 마음에서, 주님의 이름으로 선을 행하는 사람들 속에서, 한마디로 주님의 원리를 따르는 모든 사람 속에서 삼손이 사자를 죽이는 역사는 계속되고 있다.
악과 거짓에 대한 인간의 자연적인 경향성은 오래 전 인간이 악에 함몰되었기 때문에 악의 격렬한 권세로 꽉 차 있다. 그런데다 계속 악 속에 파묻혀 있어서 악에 대한 그들의 경향성은 더욱 증가되어 왔다. 그래서 지금 인간의 외적 본성은 지옥의 악한 영향에 일치되어 태어나진다. 그러나 구세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의 노력은 위와 같은 악한 권세의 힘을 부수었는 바, 이것이 본문에서 삼손이 사자를 죽이는 것으로 표현되고 있다. 죽은 사자는 자기의 격렬한 힘을 잃었다. 즉 거듭 나아가는 사람 속에서의 악과 거짓의 본성은 신성한 영향력과 인간과의 협동작전에 의해 패배된다는 말이다. 인간이 거듭나고 있지 않은 채 있을 때 모든 그의 자연적인 정신력은 악쪽으로 진행되므로 그들은 악을 위한 격렬한 권세를 가지게 된다.
그러나, 거듭나는 동안 위의 권세들은 그 품질이 바뀌어진다. 그리고 더 이상 악을 위해 일하지 않는바, 그들 안의 게걸스러웠던 사자는 죽게 된다. 거듭남은 인간의 심정을 지옥으로부터 분리시키고 영적으로 달콤한 인격 안에서 인간을 주님과 하나되게 한다. 따라서 “먹는 자에게서 먹는 것이 나오는” 것이다. 그 이유는 인간 속의 정신적 강함의 성질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고로 새 성질은 영적으로 파괴적이 아니다. 이를 돌려서 보면, 새 성질은 인간 영혼을 위한 양식인 영적인 먹을 것을 제공한다. 그래서 “힘센 자에게서 단 것이 나오게 된다.” 그 이유는 마음속의 힘이 거듭났기 때문이고, 그 힘의 강함도 심정으로부터, 그리고 삶 속에서의 선함인 영적인 단 것으로 변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정신적인 단 것이란 선한 자연적인 애정들을 말하고 이 애정은 바깥 행동을 선하게 이끄는데 단 것 중에서 매우 단 것, 꿀로 표현되고 있다.

개인적인 응용

삼손의 수수께끼는 우리 각자 앞에 세워둔 거울 같은 상징물이다. 이 수수께끼 속에서 우리는 우리의 처지나 가능성을 읽어 볼 수 있다. 우린 너나 나나 할 것 없이 악, 거짓 그리고 죄에 대한 경향성을 지니고 태어난다. 우리의 외적 본성에 든 이 경향성들은 마치 으르렁거리는 사자와도 같아 선하고 진실된 우리 속의 모든 것을 먹어 치우지 못해 안달하고 있다. 우리 속의 게걸스런 사자가 으르렁대고 덤비려는 과정에서 어떤 저항도 하지 않을 때, 우리는 자신의 심정 속에 악마를, 삶 속에 악행이라는 악한 인격을 형성시키고야 말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악의 영향력에 무방비된 상황속에 어느 누구도 방치되지 만은 않는다. 우리의 주님, 그분의 무한한 섭리는, 각 사람으로 진리를 듣게 되도록, 그리고 각 사람이 자기가 들은 진리가 납득되는 나이가 찰 때까지 그 진리가 각 사람에게 보존되게 설비해 두시고 있다. 더욱이 진리를 이해하기 전에서조차, 진리가 행동을 규율하도록 모든 사람의 관심에 가져다 두시어 각 사람으로 하여금 무엇을 해야 되며 무엇은 하지 않아야 되는지, 이런 경우에는 왜 그렇게 되는지 등등을 알 수 있게 조처하고 계신다. 이렇게 빛이 모든 이에게 주어지는 바, 모든 이는 스스로 어떻게 할 수 없는 조건에 방치되지 않는다. 그런 다음 권능이 주님으로부터 진리 안에서, 진리로 인해 모든 이에게 오게 된다. 그래서 모든 이가 진리를 사용하며 실용적인 면에서 진리의 권능을 획득하여 진리로 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자신의 힘을 자신의 것인 냥 발휘하면서도 그 근원이 주님의 권능에서요, 그 권능이 우리를 통해 또는 우리 안에서 역사 하는 것이라고 인정할 때 우리의 악한 경향성은 정복되는 바, 우리는 비질서적인 본성인 사자를 죽이게 된다. 그러면 악의 격렬한 권세 역시 파괴된다. 바꿔 말하면 악이 소멸해 간다는 말이다.

애정은 잃는 게 아니라 변해 간다

거듭남은 인간의 자연적인 마음을 죽이는 것도 아니고, 생명에 속하는 어떤 것을 그 사람으로부터 제거해 버리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거듭남은 애정의 성질을 악에서 선으로 바뀌게 해서 악을 제거시킨다. 사실 애정은 여전히 남아 있으되 그 애정의 성질, 특성들이 변하는 것이다. 주님이 사람들에게 거듭나야 한다고 말하셨을 때, 그분은 그들에게 자기들의 애정을 포기하라고 요구하신 게 아니라 애정을 선하고 참된 대상에 갖다 놓으라는 것이었다. 이사야서 1장 16-17절을 살펴보면, “몸을 씻어 정결케 하여라. 내 앞에서 악한 행실을 버려라. 깨끗이 악에서 손을 떼어라. 착한 길을 익히고 바른 삶을 찾아라” 와 같은 것이다.
시험받는 동안 앞일이 난감해 질 때, 만일 우리가 자연적인 바램들을 포기한다면, 살아야 할 가치가 있게 해주는 모든 것을 잃는 듯 우리는 종종 느끼게 된다. 그럼에도 우리가 악한 경향성들을 내려놓은 후에도 우리는 자신의 어떤 것도 잃지 않았다는 것, 우리의 애정은 여전히 그대로 있다는 것, 더욱이 이 애정들이 천국의 사랑을 받음으로 해서 더 순수해지고 거듭 나아지고 더 달콤해졌음을 발견한다. 이 발견이 있는 순간, “먹는 자에게서 먹는 것이 나오는 바,” 이것이 영적 삶을 위한 양식인 것이다. 그리고 자연적 애정들, 과거 우리 구원에 장애물처럼 보이기만 했던 이 애정들이 깨끗해지고 순수해졌을 때, 이 애정들은 우리에게 거듭나는 삶 속에서 단 것을 제공한다. 이리하여 자유가 어떻게 우리에게 주어져도 우리에게는 악을 위한 바램이 없다. 이것이 영적으로 볼 때 “힘센 자에게서 단 것이 나온다” 이다.

위대한 진리

이런 진리도 큰 진리이다. 즉 자연적 마음뿐인 사람을 가르친다는 것은 아주 어렵다는 것이다. 따라서 진짜 단것, 인간 생명을 기운 내게 하는 영적 양식은 실지로 우리 속의 악에 대한 자연적인 경향성이 정복될 때 즉 우리 안에서 삼손이 사자를 갈기갈기 찢을 때에야 시작이 있게 된다. 이 세상에 우리가 태어난 것은 진정한 삶이 무엇인지 배움으로 어떻게 살 것인지 습득하라는 것이다. 그리고 진정한 삶이 언제, 어떻게 우리에게 오는지, 진정한 삶의 힘은 어떻게 유지 존속시켜야 하는지, 존속되는 가운데 그 속의 단 것이 어떻게 나오는지 배우기 위해서이다. 거듭 나아가겠다는 진실되고 성의있는 우리의 노력에 주님이 채워 주신 위대한 강건함을 가진 우리가 우리 속의 사자를 짓부수는 것을 다 습득할 때까지 우리 인생은 투쟁으로 이어져 가야만 한다.
알고 있는 모든 진리들은 정신적인 방법이요 길인 바, 이 길에서 일상 생활을 영위하도록 우리는 요청받고 있다. 거듭남의 시작 초 좁은 길의 곳곳마다 으르렁대는 사자가 우리와 대결하려 버티고 있다. 그럴 경우마다 우리의 주님은 우리들 옆에 또는 우리 속에서 삼손처럼 계시어 우리 속의 사자를 갈기갈기 찢으실 준비를 완료하고 계신다. 우리가 발전을 거듭할 때마다 마음속의 영적인 벌들은 꿀을 만들게 된다. 그러면 우리의 일상 생활에 관해 다음과 같이 말하시는 주님의 말씀이 들리게 될 것이다. 즉 “사자가 얼씬도 못하고 맹수가 돌아다니지 못하는 길, 건짐받은 사람만이 거닐 수 있는 길, 야훼께서 되찾으신 사람이 이 길을 걸어 시온산으로 돌아오며 흥겨운 노래를 부르리라” (이사야 35:9-10).

3
암컷 새끼 양

성서 본문: 사무엘하 12장 1-4절

1. 야훼께서 예언자 나단을 다윗에게 보내셨다. 나단은 다윗을 찾아와 이런 이야기를 하였다. “어떤 성에 두 사람이 살고 있었는데, 한 사람은 부자였고 한 사람은 가난했읍니다. 2. 부자에게는 양도 소도 매우 많았지만, 3. 가난한 이에게는 품삯으로 얻어 기르는 암컷 새끼 양 한 마리밖에 없었읍니다. 그는 이 새끼 양을 제 자식들과 함께 키우며, 한 밥그릇에서 같이 먹이고 같은 잔으로 마시고 잘 때는 친딸이나 다를 바 없이 품에 안고 잤읍니다. 4. 그런데 하루는 부잣집에 손님이 하나 찾아 왔읍니다. 주인은 손님을 대접하는데 자기의 소나 양은 잡기가 아까와서, 그 가난한 집 새끼 양을 빼앗아 손님 대접을 했읍니다.”

인식되지 않은 악들

선을 행하려는 우리의 첫 노력들은 자기의 이기적 동인과 폭넓게 섞음질 된다. 우리는 많은 악들에 빠지고 죄를 범하는데, 이런 악이나 죄가 자신의 것인지 인식되지 않은 채 벌어지고 있다. 우리는 악들을 추상적으로 보고, 그 다음 합리적으로 보기도 하지만, 선과 진리에 관한 이해가 실용화되는 단계로 진전할 때까지 악이나 죄는 자신에게 자기 것으로서 나타나지지 않는다. 우리의 지성은 진정한 교리도 있지만 거짓 사상들도 들어 있어 섞여 있는 조건에 놓여 있다. 우리는 타인들 안에 있는 악들의 추함을 보고 어떤 비판적인 사상을 가지기도 하겠지만 그런다고 자신 속의 악들이 복종 당하지 않는다. 이론적으로 우리는 종교적인 교리의 어떤 체계를 도입한다. 그럼에도 그 교리의 체계를 자신의 일상생활에 응용하는 실제에 부닥치면 흔히 그 교리 속의 영을 거짓화되게 하는데, 그 방법은 우리의 악한 바램에서 튀어나오는 거짓된 의향(변덕스런 마음)을 그 교리에 혼합시킴으로 왜곡한다.

정신적인 성 (mental city)

“한 성에 두 사람이 살고 있다”. 이는 한 마음 안에 진리와 거짓이 똑같은 교리에 연결하여 존재한다는 말이다.
성 안은 집들로 차 있는데, 이는 인간 삶의 각종 사용을 위한 교리의 체계를 표현해 준다. 교리의 체계는 인간 지성 안에 건설되는데 특별히 우리의 지력에 그 기반을 두고서 우리의 생각과 애정들을 어디다 사용할 것인가를 계획하게 된다.
따라서 우리가 거듭나지 않는 조건 속에서, 또는 우리가 어떤 경우에는 진리를 받고, 어떤 경우에는 거짓 사상들을 받음으로 있어지는 혼잡한 마음의 조건 속에서 우리의 지적인 교리 측면은 마치 큰 성과 같은 모습이다. 그 성 안에는 각종의 인격들, 즉 선한 것, 악한 것이 거주하고, 때로는 진리의 지식에 부유하고, 때로 영적인 것들에 무지함인 가난함도 다 들어 있다.
그러나 한 가지 첨부해 둘 것은 부유한 것이 선한 것도 아니고 가난한 것이 꼭 악한 것을 수반하는게 아니다는 것, 오히려 위와 반대적일 때가 더 많을는지 모른다는 것이다.

영적인 부와 가난

“어떤(one) 성에 두 사람이 살고 있었는데, 한 사람은 부자였고 한 사람은 가난했다.” 성경의 위치나 조건을 글자대로 생각해 본다면 이 비유의 적용은 다윗과 우리야에 대한 것이 된다. 그러나 이 비유는 모든 이를 위해 성경 안에 존재한다는 내향적인 의미, 즉 영적 의미가 있다. 한 인간이 주님의 말씀이나 교회에 관해서 배우게 될 때, 그는 지적으로 부유해진다. 그래서 그는 자기의 전 인격을 바꿔지게 해줄 진리라는 큰 소유물을 가진다. 물론 그가 그 진리들에 순종하여 그렇게 행동하기로 작정할 경우에 변화는 있어진다. 넓은 의미에서 부자란 주님이 알려져 그분의 말씀이 읽혀지는 교회 속에 있는 사람들을 말한다.

이방인 (Gentile)

그리고 가난한 자란 이방인들, 또는 이방인의 상태 속에 있는 모든 이를 말하는데, 이들은 영적 진리의 가르침을 잘 받지 못했으나, 그들이 지닌 자연적 애정의 성품은 선한 상태에 있는 자들을 말한다.
우리야는 헷족이다. 이 헷족은 가나안 사람 중에서 가장 나은 종족에 해당된다. 헷족으로서의 바쎄바는 이방인 사이에서 시작되는 교회를 표현해 준다. 그 이유는 한 교회가 성품이 좋은 이방인들, 이스라엘 족의 영보다 더 나은 영을 소유한 자들에게서 일어날 것이기 때문이다. 다윗과의 부부 관계에서 처음의 바쎄바는 비정상이었는데, 이는 이방인들 사이에 일어나는 교회의 첫 상황 속에 든 삶의 성질을 표현하고 있다.
이 이방인들은 진리에 대해서 아주 호의적이긴 했으나 그 진리의 실제화, 즉 삶의 실제 움직임인 선과 악을 뚜렷하게 구별할 수 있는 사상을 가지지 못했다. 인간의 이런 상태와 더불어서 주님은 단번에 천국적인 진정한 교회를 형성하실 수 없으셨다. 단지 교회에 약간 접근되는 시도만이 가능한데, 그 이유는 이런 인간의 상태에는 많은 악들이 선한 원리와 섞여 있기 때문이다.

바쎄바의 아이들

그런고로 다윗과 바쎄바 사이에서 낳은 첫 아이는 죽었다. 이는 진리가 우리 속에서 작동되기 시작할 때, 우리 삶의 첫 상태는 순수하거나 선하지 못하고, 오히려 이 진리는 거듭나는 인격 속에서 우리 속의 자연적인 악들과 섞여 있어 영적으로, 영구적으로도 살지 못한다는 사실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다윗의 아내로서, 그리고 솔로몬의 어머니로서의 바쎄바는 위의 과정, 즉 시련과 시험을 거쳐 진보를 이룬 보다 높고 영적인 상황을 갖춘 이방인의 교회를 표현한다. 시험으로 정제된 순수함을 통해 이방인 속에 존재한 선이 기독교의 진리에 하나가 될 때 그들의 선은 기독교인의 선이 된다. 위대한 지혜로 유명한 솔로몬은 새로이 탄생된 아이, 영적 결혼으로 탄생된 아이 이다.

성경의 이야기는 표본(representative)이다

성경 이야기를 생각해 볼 때, 우리가 늘 염두에 둘 사항은 성경은 그 글자대로의 사실을 기록한 것이 아니라 인간 영혼의 거듭남과 발달을 모든 상황에서, 즉 무지하고 악한 상황에서 지혜롭고 선함으로 까지의 발달에 관한 표본적인 기록이다는 것이다.
상징적이거나 표본으로 착출된 인물은 그 문맥에서도 가장 중심 되는 요점 역할을 한다. 이 요점에 의해 성경의 모든 것은 해석되어지게 된다. 예수께서 말하시기를, “나의 말은 영이요 생명이다”고 하셨다. 신, 구약성서를 통틀어 있는 주님의 모든 말씀은 인간의 영적 삶에 우선적으로 응용하게 되어 있다.

영적 결혼

모든 인간 속에서 거듭남의 수준은 선과 진리 또는 사랑과 지혜의 영적인 결혼이 당사자 속에서 어떻게 결과를 낳느냐에 의존된다. 표본들을 사용해서 영적 결혼을 예증해 주기 위해 오늘 본문에서의 비유는 자연적인 결혼, 그런데 그 결혼의 꺼꾸로된 모습을 그리고 있는 것이다.

우리야와 다윗

헷족이요, 이방인인 우리야는 자연적 마음의 좋은 성품을 표현해 주고 있다. 부유한 이스라엘 족인 다윗은 내적이고 자연적인 마음 즉 진리로 가르침을 받아 선하고 진정한 원리들인 영적인 양이나 소를 많이 소유한 부자를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가난한 자인 이방인은 그의 소유물로서 오로지 암컷 새끼 양 한 마리뿐이었다. 이 암컷 새끼 양(exe-lamb)이란 자연적 마음 안에 있는 순진의 상태인데, 이 순진의 상태는 무지한 순진을 말하고, 흔히 어린아이들이 소유하고 있다. 이 순진이 가르침과 수련에 의해 발달되면 지혜로운 순진으로 된다.

도덕적인 선

이런 순진은, 예를 들면, 도덕적인 선함 안에, 또는 질서 있는 삶의 외형에 존재하며 흔히 착하고 선량한 성품에 동반되는 때가 많다.
이방인 상태의 마음은 이런 도덕적인 선을 하나의 위대한 선으로 간주한다. 그 이유는 영적인 선에 관해 가르쳐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런 상태의 인간은 도덕적인 존재가 되기 위해 애정의 비질서적인 상태들을 포기함으로 도덕적인 선을 사거나 얻는다. 그리고 얻어 들인 이 선들에 자양분을 공급해서 마음속에서 성장시킨다. 다시 말하면 자기의 정신적인 가족의 일원으로 만든다는 말이다. 그는 가족의 일원이 된 이 선을 자기 품에, 즉 심정에, 또는 애정에 품는다. 그와 더불어 이와 같은 도덕적 선은 먹고 마신다. 다시 말해 자기의 일반적인 생각이나 애정과 동질로서 함께 하는 것이다.

한 마음 안에 든 두 사람

이리하여 비유는 한 사람 속에 든 생명의 상태를 그리고 있다. 그 이유는 다윗과 우리야는 한 마음 안에 있는 각기 다른 원리들을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한 성에 살고 있다. 기억과 생각 속에 공통된 교리가 있다는 말이다.
그러나 거듭나기 시작한 후에도, 모든 사람의 마음 안에 있는 각기 다른 두 사람은 그대로 있다. 한 사람은 특별히 지적이어서 말씀과 교회에 속한 진리의 지식으로 꽉 차 있는 반면, 같은 마음 속에는 성품이 좋은 도덕적 생명의 이방인적 상태도 한쪽에 있다. 그런데 지적 측면이 우리 속에 있는 악에 잘 기우는 유전적 경향성과 접합되면, 이런 경향성들은 자기들 바램을 성취하기 위해 지적인 것들을 고용하게 된다. 그러면 지적 측면의 마음은 선과 진리에 대한 원리로 꽉 차 있겠지만 일상 생활에서 이런 지식들을 사용하지 못하고 만다.

손님 (traveller,여행자)

여행자는 좋은 의미에서 삶이 진보되는 것, 진리 안에서 정신적으로 여행함을 말한다. 이 진리는 우리 마음을 여행하되 바깥쪽 기억에서 생각을 통해 애정 안으로 여행한다. 그런 다음 일상생활에까지 당도한다. 그러나 나쁜 의미에서 여행자란 기억에서 끌어낸 거짓 원리를 말하고, 이 원리는 생각 속을 여행해서 애정 속으로 들어가려고 애쓰고 행동 지침에서 정체를 드러내게 된다.
본문 비유 속의 영은 본문 속의 여행자(손님)를 나쁜 의미인 거짓 원리, 즉 다윗의 마음 속을 배회하는 거짓 원리, 이 원리와 비슷한 것으로 자극 받아지는 모든 사람들의 마음임을 보여주고 있다.

그림의 마무리

지적인 사람은 지식의 풍부함으로 말미암아 부자인 것이다. 도덕적인 선함은 가르쳐지지는 않으나 암컷 새끼 양인 단순한 순진을 소유하고 있다. 이런 마음 속에 거짓 원리가 마음 속을 여행하면서 손님 대접을 받고자 한다. 이런 움직임은 어떤 악한 욕망에 의해 운전되어진다. 이런 경우 마음은 무엇을 하게 될까? 마음의 의지적 측면은 진정하고 선한 원리들을 기억 속에서 끌어내서 마음 속을 여행하는 거짓에 적용한다. 그런데 악한 욕망이 재촉하는 이상 끌어낸 진정한 원리들은 거짓 원리들을 가르치지도 못하고, 견책도 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 원리는 우리야의 암컷 새끼 양인 도덕적인 선의 단순한 원리들과 섞이게 해서 천사가 자기 생명력을 유지하기를 중단할 때까지 더욱 섞는다.

예증

결혼에 관한 도덕적인 선의 경우를 생각해 본다면, 인간이 감각적인 마음의 욕망에 재촉을 받게 되면 진정한 결혼에 존재해야 할 도덕적인 선을 사로잡아 파괴시킨다. 이리하여 일부 다처제라는 거짓 사상도 손님 대접을 받고자 주저앉는다.
결혼에 관한 인간의 내적 사상은 각 개인의 영적 성질에 대한 테스트이다.
다윗, 그도 바쎄바를 옆 눈으로 쳐다보는 것은 불법이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 여자의 남편을 죽일 계획을 세워 결국 그 여자를 획득했는데, 이는 자연적인 마음에 대한 표본되는 그림이다. 자연적인 마음이 악한 열정에 의해 충동질 받게되면 자연적인 상태 속의 순진을 이기적 용도에 충당하려고 애를 쓰는 결과, 그 순진의 수준에 맞춰 결혼되어 있는 진리를 이혼시키는 방법을 강구해 낸다.
그래서 인간이 선과 악에 관한 지식에 반대되는 쪽으로 하강할 때, 그 인간은 도덕적 선함을 탐내기 시작하고, 자기의 악과 죄를 정당화하려 들고, 결국 합법적인 남편인 도덕적 선에 동반하고 있는 글자적인 진리를 분리시키고야 만다. 그러한 인간도 도덕적 선인 바쎄바를 아름다운 여인이라고 인정한다. 그러나 그는 그 여자를 자신을 위해 바래는 것뿐이다. 따라서 그는 도덕적 선의 아름다움을 고백하되, 그것은 단지 이기적 목적을 위한 것일 뿐이다. 고로, 그는 자기 고백을 뒤집어서 악한 목적에 충당했으므로 순진한 선 속의 순결을 모독하게 된다. (종교상의) 자유 사상가(libertine)들이 글자를 가지고 순진한 선을 뒤집는 것 같이, 모든 악한 원리는 마음속에서 악한 목적을 위해 악한 원리를 고용해서 모든 선하고 순진한 경향성에 뒤섞은 다음 그 순진을 뒤집어 버리고야 만다.

살인

위의 죄는 살인을 수반한다. 즉 자연적인 사람의 목적에 이르는 길가에 놓인 모든 진정한 원리들을 죽인다.
예를 들면, 교회에 잘 참석해 온 사람이 있다고 가정해 보자. 그리고 그가 생각하기를, 주님을 예배하고 그분의 거룩한 말씀을 자기가 받는다는 것은 매우 유익하고 올바른 태도라고 느끼고 있을 경우, 이 사람의 외적 상태는 하느님과 인간 양쪽 모두에 좋은 성품을 갖추었다고 볼 수 있다. 이런 모습이 도덕적인 선함의 형체이고 바깥쪽 순진의 상태이기도 하다. 그런데 그가 진정한 예배는 자기 심정 속에 존재해야 하고 일상생활 속에 있어져야 함을 모를 수도 있다. 그런데 이 사람 속에 거룩하지 못한 포부가 그의 마음속을 여행하면서 그 포부의 욕구를 만족시켜 보려한다고 가정해 볼 경우, 그는 사실 이런 욕구를 견책과 훈육의 진리로 다스려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 대신 그가 예배에 대한 바깥쪽 애정이 욕망에 사로잡히는 것에 모른 척 내버려둔다면 그는 자기를 우쭐대게 해줄 거짓 원리로 예배에 관한 그의 순진한 도덕적 선을 섞이게 해 버리고 만다. 즉 비유 속에서 다윗이 바쎄바와 정을 통하고, 바쎄바의 남편 우리야를 죽이는 바가 되고 만다. 한마디로 그는 자기 속에 든 거짓 원리를 책망하려고 일어서는 모든 글자적인 진리를 거절하는 것이다.
영적으로 사람을 죽인다는 것은, 자기의 영적 생명인 주님에 대한 사랑과 믿음을 파괴할 때 있어진다. 우리 역시 진리를 죽일 때도 있다. 그 때란 우리가 자신 속의 마음에서든지, 타인의 마음속에서든지 진리를 왜곡시키고 뒤집어 악과 죄들을 정당화하려 들 때이다. 살인하는 영의 형체가 나쁜 감정, 분노, 원한인 것 같이 모든 거짓은 진리의 생명을 부수려는 경향이 있다. 간음과 살인이 사회의 심각한 범죄인 것 같이, 영적인 간음(섞음질)과 살인은 영적 생명을 가장 심하게 파괴한다.

주님 안에서의 결혼

결혼의 원리는 주님 자신 안에 있는바, 그것은 그분의 사랑과 지혜의 합일이다. 이 결혼의 원리는 모든 창조에 스며 있는데, 창조된 생명체의 가장 높은 형체로 있게 되는 가장 완전한 것이다. 천국에서 가장 높은 천사들은 가장 완전한 결혼 속에 있다. 그래서 지상에서의 신실한 결혼은 악한 영향에 대한 완벽한 방어벽인데 이 상태를 경험한 자들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확증되어진 간음은 지옥에 항복한 상태여서 마음속의 모든 선과 진리를 뒤엎게 하고 살인을 수반하고 만다.

다윗으로 주님을 표현한 방법

다윗이 주 예수 그리스도를 표현하는데 어떻게 그렇게 되어질 수 있을까? 또는 본문에서와 같은 범죄를 저질러도 주님을 표현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라는 의문이 있게 되리라 본다. 따라서 우리는 표현의 원리를 알아두어야 할 것이다. 표현하는 사람은 주님의 행동들을 표현하고 있지는 않다. 그러나 예수께서 입으신 인성 속의 유전적인 경향성, 즉 자연적인 어머니(마리아)로부터 상속된 경향성을 표현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그 경향성이 행동 지침 선상에까지 허락되는 것은 아니다. 그분은 그분이 입으신 인성 속의 이런 악에 대한 유전적인 경향성을 수단으로 해서 “죄를 짓지 않고도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측면에서 시험 당하신 것이다.” 그리고 그분은 언제나 이런 경향성들에 저항하셨고 극복해 내셨다. 다윗이 저지른 범죄나 살인은 그분이 입으신 인성 속에서 아주 심오한 정신적 시험을 표현해 주고 있다. 그러나 주님 자신은 어떤 죄(sin)도 범하신 일은 결코 없으셨다.

다윗의 범죄 (crime)

다윗의 범죄를 생각해 보기 앞서 반드시 기억해 볼 것은, 다윗의 시대에 있어서나 일부 다처론자에게 있어서나, 또는 다윗의 시대 때에 그의 죄악들이 계명에 의해 금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 당시의 사람들은 이와 같은 악들의 진정한 품질에 대한 영적 측면에는 관심이 전혀 없었다는 점이다. 그당시 사람들은 어떤 조그만 도전 같은 것을 가지고, 또는 어떤 변명할 기회도 주지 않은 채 사람을 죽이는 경우가 많다. 물론 다윗은 자기 죄가 악랄하다는 것을 이해하고 있었다. 시편 51편은 다윗이 본문의 범죄가 저질러진 후 쓰여진 시편이다. 이곳에서 그의 느낌이 어떠했는지 배우게 된다. 다윗은 왕이고 재판관이기도 했다. 고로 비유 속의 범죄에 대한 그의 결정은 곧 합법적인 재판이었다. 그의 분노는 악행자에 대해 거셌다.

도덕

오늘 비유 속의 도덕은 이론상의 미덕에 대한 경고로서 타인의 악에 대해 분노를 금치 못하는 모습으로 그 자태를 드러내고 있다. 인간이 자신을 너무 과대 평가한 결과, 또는 남을 비평하는데 지나치게 민감해져 자신 속의 악을 미처 보지 못할 때 경고를 받도록 우리는 타인이 자기를 보듯이 자신을 직접적으로 볼 때까지 가르쳐지게 된다. 우리가 차분한 마음의 상태나 재판관 같은 처지에서 남을 판단하려고 앉아 있을 때 옳고 그름을 이론적으로 보는 것은 아주 쉽다. 마치 다윗이 차분한 마음 상태에서 나단의 이야기를 듣고 판결하는 모습이다. 그래서 사도들에게 하신 말은, “너희의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다”고 말해 두셨던 것이다 (마태복음 7:2). 직접 당사자가 아닌 측면, 즉 이론상에서의 죄를 죄라고 보는 것과, 때로는 이론상의 그 죄가 자기 죄라고 보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 자신의 경우, 흔히 우리는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 봄도 없이 단지 충동적이었기 때문에, 또는 유전적인 경향성으로 인해서, 혹은 타인의 영향이나 그 사람의 행동 지침 때문이어서, 또는 자기 주위 환경이 좋지 않아서 등등에 기대어서 자기 죄의 변명을 찾는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타인의 악들이 자신을 다치게 하지 않는 이상 악행자를 비판하려는데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 것이 일반적인 현상이다.

이론적인 선함

먼저 우리가 주목할 것은 다윗은 비유 속의 죄인에 대해 상당히 분노했다는 점이다. 사실 비유 속의 죄인이 자기였다는 것이 다윗의 머리에는 떠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비유가 자기에게 적용되었을 때에야 그는 비유의 실체에 눈이 열렸던 것이다. 이 대목에서 우리가 알아야 할 중요한 사실은, 진리가 추상적인 실례 속에 있는 한, 우리에게 실용적인 중요성을 주지 못한다는 것이다. 진리가 “당신이 그 사람이다”라고 우리에게 분명하게 말해질 때만이 진리는 우리를 위해 쓸모가 있게 된다.

다윗의 회개

다윗은 비유의 응용이 자신에게 있음을 보자마자, 그는 “내가 야훼께 죄를 지었소”라고 고백하여 비유 속의 죄인이 자기임을 인정했다. 만일 그가 비유 속의 진리가 자신에게 적용되었을 때 그 진리에 반항해서 핑계라도 만들었다면 그는 이전의 악함보다 훨씬 더 악해지게 되었을 것이다. 우리가 진리를 이론적으로 토의하길 좋아하고 그 진리를 가지고 타인을 자주 비평하는 습관에 젖어 있으면서, 비평하는 가운데 인내심이 부족하여 성급하면, 우리가 기껏 토의해 온 진리에 자기의 관심도가 신실하지 못했음을 주지해야 한다. 신실하게 선한 사람은 악을 미워한다. 특별히 자신 속에 든 악을 더 미워한다. 따라서 그는 자기 속의 악한 경향성을 다윗처럼 타인이 지적해 주는 것을 매우 반겨 한다.

비평

자기 동료를 고귀하게 사랑하고 싶다면 타인의 악뿐만 아니라 자신의 악을 비평하고 나무라는 데에 즉각 응해야 한다. 흔히 우리는 이와 같은 직접적인 비평이나 나무라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며, 또는 어떤 악한 동기에서 그러한 비평이나 나무람을 일삼아 하지는 않는다.
어떤 교인이 자기를 두고 하는 말을 하는게 아닌가 하고 눈치채지 않도록 각별히 조심하여 설교하는 목사가 있다면, 그런 설교는 어떤 쓸모가 있게 될까? 목사는 자신 속의 악한 경향성을 똑바로 인식했을 때, 그리하여 그 경향성에 신성한 진리를 적용시켰을 때 가장 좋은 설교를 하게 된다. 그 이유는 모든 인간 각자 속의 자연적인 경향성은 거의 흡사하기 때문이다.
죄는 악이다. 죄는 어떤 우연한 기회 속에, 또는 어떤 좋지 못한 환경으로, 팔자가 이 꼴로 되어 있으니, 불운이 겹쳐서 라는 등등에 기인하여 발생되는 것이 아니다. 죄란 우리가 자신 속의 악한 경향성을 우리의 행동에 본색을 드러내도록 허용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나의 죄악에서 나 자신을 지키었다. I have kept myself from mine iniquity”라는 고백을 할 수 있게 자신을 다져야 하리라 (시편 18:23).

4
원수 갚는 자

성서 본문: 사무엘하 14장 5-7, 11절

5. “웬일이냐?” 하고 왕이 묻자 여인은 이렇게 하소연했다.
“임금님, 저는 남편을 여읜 과부입니다. 6. 그런데 저에게는 아들 둘이 있었습니다. 그것들이 어쩌다가 벌판에서 싸우게 되었는데 말릴 사람이 없어 한 아이가 그만 제 동기를 때려 죽이고 말았읍니다. 7. 그런데 이번에는 온 문중이 들고 일어나 동기를 죽인 놈을 내놓으라고 이 계집을 들볶지 않겠읍니까? 그 애를 쳐죽여 죽은 아이의 원수를 갚고 그 애의 씨를 말려 버리겠다는 것입니다. 그리되면 이 계집의 불씨마저 꺼지고 맙니다. 남편의 이름을 이어 내려 갈 후손이 땅 위에서 영영 끊기고 맙니다.”… 11. 여인은 계속 간청하는 것이었다, “저 원수갚겠다는 자들이 제 아들을 기어이 죽여 없앤다고 하면 어떻게 하겠읍니까? 그렇게 못한다고 임금님의 하느님 야훼를 두고 맹세해 주십시오.” 그가 다짐하였다, “살아 계시는 야훼 앞에서 맹세하거니와 네 아들의 머리카락 한 올도 땅에 떨어뜨리는 일이 없게 해 주리라.”

보복 (retaliation)

보복의 영은 거듭나지 않고 있는 마음에 있어서는 당연한 것이다. 이 영은 우리 본성 중 동물적 부분에 속한다. 이 영은 아주 어린 시절부터서 우리 속을 기어다닌다. 그래서 우리가 극복해 내기 힘든 악 중의 하나이다.
보복은 자아 사랑이 자기 적이라고 추측하는 것의 공격에 대한 당연한 응답이기도 하다. 그래서 인간이 자아 사랑으로 규율되는 한, 원수라는 형체를 띄우면서 보복의 영에 의해 좌우되고 만다. 사실, 자연적인 사람에게 노골적으로 말해 보라 하면, 보복의 영은 정당화되고 만다. 이 자연적인 사람은 자기에게 불친절한 모든 이들에게 좋게 대해 주어야 한다고 말한다면 그것에 아무런 의무를 느끼지 않는다. 우리에게 친절한 모든 이들에게 불친절하게 대하는 것은 악이다 든지, 혹은 은혜를 입은 자에게 무례함은 죄 중에서도 비열한 측에 해당된다고 하는 것이다 든지 통상 많은 이들이 인정하듯, 그도 그렇게 인정한다. 그럼에도 그는 자기에게 악을 행하는 이들을 미워할 권리가 있다고 주장한다. 한마디로 “피에는 피로”라는 것이 거듭나지 않고 있는 자연적인 마음의 외침인데, 이 외침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는다. 흔히 말하는 속어 중 “복수하니 시원하다” 라는 표현 같은데서 찾아볼 수 있다. 적대감은 오랫동안 또 다른 대상에 따라붙고,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그 대상에 보복을 가하고 만다.

미워함 (hatred)

이리하여 거듭나지 않은 사람이 하는 말, “나는 나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고, 미워하는 자를 미워하며, 내 욕구를 채워가는 길에서 걸림돌이 된 자, 내 계획을 간섭하는 자들을 미워할 수밖에 없다”는 말들을 하게 된다. 그래서 우리가 이 느낌의 표현을 좀 더 추적해 보면, 자기가 부러워하는 대상, 자신을 상하게 한 모든 사람을 미워한다는 것이 이 말 뒷면에 잠복해 있음을 알 수가 있다. 미워함을 개별적으로 따진다면 불합리하게 보일런지 모르나 위와 같은 말이 될 수 있는 이유는, 우리를 상하게 하는 이들을 미워함보다, 더 한 미워함은 그 미워하는 자를 친구 인체 하면서 비밀리에 그가 상하도록 보복하려는 마음이다.

복수심은 타락된 사람에게는 당연한 것

위에서 살핀 것들은 그 근원이 지옥임을 보여 준다. 우리가 그런 것들을 타인 속에서 볼 때 아주 추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우리가 솔직히 인정해야 할 것은, 복수하고 싶어하는 경향성들은 그것들이 주님에 의해 거듭 나아지든지 회개나 개혁을 통과하든지 할 때까지 모든 개인의 자연적인 마음 안에 존재한다는 것이다. 수준은 다르겠지만, 우리 모두는 이런 경향성을 가지고 있다. 이런 경향에 저항한다던가, 혹은 아예 집중해 버리는 양상은 모두에게 있어 각기 다르다. 이 자연적 마음을 따로 떼어 느끼게 한다면, 자기 친구를 사랑하고, 자기 적을 미워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것이라고 말할 것이다.

혈연의 원수를 갚는 자 (the revenger of blood)

옛날에는 원수 갚는 영이 아주 거세어서 그 시대에는 죽은 이의 친척이 살인자를 죽이는 것을 허락하는 관습이 있게 되었다. 게다가 만일 그 살인자를 잡지 못해 미처 죽이지 못할 경우에는 그 살인자의 가장 가까운 친척을 살해당한 사람의 친척이 죽이는 것까지도 허용했던 것이다.
자기 친척의 죽음을 복수하는 것은 “최 근친, next of him” 또는 가까운 남자 친척의 의무로서 간주했었다. 그래서 최 근친 인은 “혈연의 원수를 갚는 자,” 또는 “혈연의 복수자” 라고 불리었다. 이 관습은 세월이 경과하면서 더욱 나빠져, 그 살인자의 친척 관계가 아무리 먼 친척이었다던가, 또는 죽이기에는 너무 어리거나 순진하다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혈연의 원수를 갚겠다는 자에 의해 죽은 자의 대가를 요구했던 것이다. 심지어 아주 어리고 순진한 아기마저 어머니의 품에서 빼앗아 그 아기와는 관계가 멀어 잘 알지도 못하는 친척이 범한 살인 행위로 인해 원수 갚는 것을 당해야 했기도 하다. 오늘날 어떤 다른 사람을 향해 나쁜 의지, 원한, 복수 같은 것을 마음에 품는 정도에 따라 우리 역시 살인자의 친척에게 가해진 순진한 인격의 피에 굶주린 것에 고대 이스라엘 족이 빠졌었던 것처럼 비슷한 영에 파묻히고야 마는 경우가 빈번하다.

영적 살인 (spiritual murder)

그래서 적개심 있는 분노의 영이 어떤 형태로든 우리에게 접근해올 때, 이에 단호히 저항하지 않으면 우리 속에서나, 타인 속에서나 새롭고 거듭 나아가는 생명 속의 애정과 생각들, 즉 영적 자녀들에게 파괴적인 일격을 가하게 된다. 적개심, 이는 어떤 형태에서든, 그것이 비밀리에 있든, 공개적이든 모두 지옥으로부터 발생된다.
기독교의 영은 증오나 복수의 어떤 형태와도 완전히 반대되어 있다. 예수님께서는, “‘네 이웃을 사랑하고 원수를 미워하여라’고 하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이렇게 말한다.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박해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그래야만 너희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아들이 될 것이다. 아버지께서는 악한 사람에게나 선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비를 내려 주신다.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 세리들도 그만큼은 하지 않느냐?” 라고 가르치셨다 (마태복음 5:43-46).

비유의 글자적 의미

글자 상의 의미에서 본문의 비유는 압살롬의 친누이이며, 암몬에게는 배다른 누이인 다말에 대한 흉악하고 비인간적인 짓을 저지른 당사자 암논을 압살롬이 살해한데 대한 다윗의 용서를 획득하는데 기민하고도 매우 성공적인 듯 보여지고 있다.

비유의 표본적 의미 (the representative idea)

그러나 이스라엘 족에 대한 하늘이 내린 처방들은 표본을 만들기 위한 것이다. 이스라엘 사람의 생활이나 관습들 중 작은 것 어느 하나도 성경에 기록되어진 이상, 그것은 퇴보되는 상태들에 있는 인간 마음, 또는 그 반대인 악에서 선으로 가는 영적 여행에 있는 마음의 조건이나 활동을 표현하고 있다.
여러 가지 것들이 이스라엘 족에게 허락되어졌는데, 그 이유가 그들은 표본이 되는 수준이거나 상징적인 차원에서 필요한 수단을 제외하면 인도되어질 수 없었기 때문이다.

보복 (retaliation)

예를 들면, 잔인하고 피에 굶주린 사람에게 보복이라는 법칙은 지극히 정당한 것처럼 보였다. 따라서 더 높은 형체의 어떤 법도 삶의 어떤 더 나은 질서 속에서 그들을 붙잡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들은 이와 같은 마음이나 생명의 상태 속에 있었는고로 사랑의 원리로 뭔가를 해낼 수 없고 오직 두려움이나 공포 같은 형태만이 그들을 지배할 수 있었다. “피에는 피로”라는 보복의 법칙은 영적인 법칙 중에서도 가장 껍질에 속하는 외적 형체이다. 다시 말해서, 타인에게 품은 악이나 그에게 가하는 악은 똑같이 되돌려 온다는 법칙에 해당된다. 인간의 바깥쪽 몸에 가해지는 외적인 법은 사실 인간 생명 속에 존재하는 내적인 법의 표본인 것이다.

악은 되튀긴다

어떤 종류이든 악은 다른 것에 빠져들게 하면서 우리 자신을 상하게 한다. 이러한 이유는 우리가 그 악을 인격의 일부로 만들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우리가 누군가를 미워해서, 음모를 계획하고 있다면, 언젠가 틈만 보이면 그 계획을 실행에 옮긴다. 이런 동향이 자신의 영적 생명을 미워하고, 음모하고, 상하게 만드는 것이다. 특히 이것이 자신에게 선을 베푼 누군가에 대해서라면, 더 비열하므로 자신 속의 영적인 것을 더 상하게 할 것이다. 이러면 우리의 마음은 나누어지는 바, 우리 속의 악한 경향성은 영적 마음의 거듭나는 시작인 보다 높은 생명과 전쟁을 치르게 된다. 거듭남에 저항한 모든 자연적인 기질들은 영 속에 있어지는 주님의 일을 파멸시키려 했던 것에 대한 대가를 스스로 자초하고 만다.

정신적 투쟁 (mental struggle)

이 비유는 우리 속의 자연적인 마음과 영적인 마음 사이에 있는 투쟁에 대한 표본적인 그림이다.
어떤 사람도 투쟁없이 거듭나지지 않는다. 모든 사람은 자연적 경향성인 보복이라는 영을 가지고 태어난다. “그래서 이 종류는 소멸되어지지는 않으나 기도나 단식에 의해 가능해진다.” 그래서 우리는 이 악을 이기기 위해 주님의 말씀 속에 든 가르침, 말씀으로부터 있는 교회의 교리를 배워야 할 의무가 있는 것이다. 이렇게 배운 진리들을 고유의 속성인 자연적인 경향성에 대치시켜 경향성의 기세를 꺾어야 한다. 그리하여 진리의 소리가 악한 경향성 앞에서 체제를 갖출 때까지 투쟁은 이어진다. 다윗 앞에 당당히 선 예언자 나단은 진정한 이론을 설교해 주었을 뿐 아니라 다윗에게 “당신이 그 사람이오!”라고 확신시키는 논리를 펼쳤던 것이다. 그리고 그는 진리를 실제에 응용해서 다윗의 실제적인 느낌, 생각, 행위를 고치게 했던 것이다.

과부

남편이 죽고 없는 여인이 과부이다. 비유 속의 과부는 보호해 주고 인도해 주는 진리가 결핍된 자연적인 애정의 수준에 있는 마음을 표현한다. 자연적인 마음 속에는 진리 쪽을 향하려는 기질이 통상적으로 있지만, 남편이 죽은 본문의 과부는 진리로부터 아예 분리된 상태이다. 이 상태는 거듭나는 시작 단계에서 많은 사람에게 있게되는 마음이다. 그러나 또 다른 상태도 마음 속에 있다. 진리인 남편이 마음 속에 살아 있는 경우, 어떤 조건이 발달될 때도 있는데, 이 때는 보다 나은 자연적 애정이나 생각이 출생되기도 한다.

두 아들

성경에는 두 아들이 자주 등장한다. 먼저 출생한 아들은 자연적인 생각이다. 이 생각은 순수한 진리를 미처 알지 못하는 시기인 인생 초기의 상태이다. 그러나 더 나은 것들에 의해 마음이 열릴 때, 또 하나의 출생이 있게 된다. 이 출생은 영적 마음에서 있어진다.
이런 측면에서 본문의 두 아들은 자연적인 생각과 영적인 생각, 또는 자연적인 마음과 영적인 마음, 그리고 이 두 마음이 보게되는 각각의 진리, 혹은 마음의 두 부분을 표현하고 있다. 우리의 첫 생각은 자연적이고 설사 진리를 얼마라도 아는 수준에서도 이기적이다. 진리에 의거한 사람이나 또는 진리의 영을 가지지 않은 사람이라도 우리는 진리라는 형체를 소유할 수는 있다. 이런 상태에서 마음 속에 뭔가가 거론되면 우리는 진리를 가지고 있는 듯 했을 뿐 시야를 밝게 해주지 못함을 알게 된다. 다시 말해 우리 속의 진리가 과부인 듯 보인다. 이와 동시에, 자연적인 생각 속에는 조잡한 거짓 사상들이 있고, 진리는 영적 생각 속에 저장되어 있다. 그래서 이 두 부류가 실생활이라는 장소에서 접촉될 때, 싸움은 당연히 뒤따른다. 그 이유는 이 둘은 서로 상반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만일 우리가 거듭남을 추구하고 있다면, 영적 마음 속의 진리들은 자연적인 생각 속의 거짓 사상들을 짓부수고 살해한다. 다시 말해 그 사상들을 단죄하여 파괴한다는 말이다.

문중 (가문, family)

새 진리가 옛 거짓 사상들과 대치 상태에 있게 될 때, “온 가족,” 즉 자연적 마음 속에 든 모든 욕망과 거짓들은 들고 일어나 새 진리를 파괴하려 한다. 특히 이 진리에 보복하려 들 때도 있는데, 그 이유는 새 진리가 거짓 사상의 일부를 파괴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머니, 즉 자연적인 애정 속의 선한 모든 것은 왕, 즉 마음을 통치하는 원리에 아들을 구해 달라고 호소한다.
예를 들면, 거듭나지 않는 상태에서의 우리는 자아와 세상만에 관심이 있을 뿐, 영적인 삶은 소홀히 해 버린다. 그러나 거듭남의 시작, 즉 우리 속의 선과 진리가 결혼하게 될 때 우리의 자연적인 생각은 여전히 조잡한 사상, 또는 폭넓게 이기적이고 세상적인 것들을 담고 있긴 하나, 우리의 내향 쪽인 영적 마음은 순수한 진리를 한 움큼 쥔 상태에도 있게 된다. 이 두 상태를 지닌 채 일상 생활 속에서 어떤 행동이 요구될 때, 자연적인 생각 속의 자기 이익 추구나 세상적 책략은 영적 생각 속의 명백한 원리와 싸움이 붙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만일 자연적인 생각과 영적 생각이 올바른 질서 속에 있다면, 거기에는 어떤 싸움도 없고, 둘 중 어느 하나가 죽어야 할 이유도 없다. 각각은 각각의 일이 있어 각 삶의 평면을 지킬 뿐이다. 그러나 자연적인 생각 속에 거짓 사상이 있게 되면, 이는 영적 진리에 의해 뽑혀 버려져야만 한다. 그러나 우리 속에 든 이기적인 생각은 거짓들이므로 뽑아 내야겠다는 결정이 있자 마자, 우리 속의 악한 경향성의 온 문중은 피를 부르며 진리의 파멸을 선언하고 나선다. 이리하여 거짓 사상과 악한 경향성은 상호 방어와 공격을 위해 한 가문임을 선언하여 마음의 거듭남을 저지하게 된다.

예증

예증으로서, 보복에 대한 생각과 느낌을 택해 보자. 자연적인 생각은 복수는 꼭 해야 한다고 믿는다. 따라서 보복하길 바랜다. 그러나 영적인 생각은 복수란 그 성질로 보아 지옥적인 것이라고 본다. 그래서 어떤 사건이 있어 행동이 요구되면 마음속에서 투쟁이 있게 된다. 이런 행동이 “벌판(field)”이다. 이곳에서 두 아들은 서로 싸웠다. 우리가 누군가에게 선을 베풀었는데 오히려 그에게 피해를 당해 그가 악으로 갚은 격이 되었을 경우를 상상해 보라. 우린 어떻게 해야 할까? 그를 미워하고 그에게 보복을 해야 할까? 우리 속의 자연적 마음은 필시 보복을 가하라고 열을 올릴 것이다. 그러나 영적인 마음은 영적인 빛 속에서 복수라는 지옥적인 성질, 그뿐 아니라 그것에 연계되는 적개심, 이 적개심의 조그만 형체인 시기심까지 다 들추어낸다.
이 영적 진리의 빛 속에서, 우리는 모든 분노, 시기, 복수하려는 느낌이나 생각은 악이요, 지옥적인 성질임을 밝히 보게된다. 기독교 사랑의 큰 진리는 우리를 미워하는 자, 박해하는 자들까지 사랑하는 것이다. 이 사랑의 힘이 봉기하여 보복해야 한다는 거짓 논리를 쳐서 박살낸다. 그러한 이유로 지금 자기 자신은 선함을 획득했다고 생각할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모든 우리 속의 시기심이나 분노하는 느낌과 생각을 추방했다고도 상상할 것이다.

투쟁

그러나 아니다! 선함이 획득되었다고 하기 전 해야 할 한가지 일이 있다. 진리는 거짓을 쳐서 부쉈으므로 우리는 어느 것이 선하고 악한 것인지를 생각 속에서는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생각 속에서 죽었다고 알고 있는 거짓들은 실상 잠잠할 뿐인 것이다. 우리 속의 악이나 거짓들은 그 근원이 같고 성질도 비슷해서 들고일어나면 한 가문같이 행동된다. 그래서 우리가 그 가문 중 하나를 쳐서 부수면 사실 온 가문을 건드리는 셈이 된다. 따라서 이 가문은 거듭나지 않은 본성을 한 군대로 편성해 놓고 자기 가문의 일원을 감히 짓부순 영적 진리를 죽여야 한다고 외친다. 이 가문도 잘 아는 것은, 영적 진리가 생활 지침 속에 발판을 확보한 이상 그 세력은 증가되고 자기들 가족을 다 몰아 낼 때까지 계속 밀어붙일 것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악과 거짓도 자체 생존을 위해 투쟁을 선언한다.

거짓 논쟁

물론 우리 속의 거짓도 진리를 죽여야 할 권리의 근거를 가지고 있다. 근거란 진리가 거짓이라는 가문의 일원을 죽였기 때문이라고 우긴다.
예를 들면, 우리를 상하게 했거나, 또는 상하도록 할 것이라고 가상하기 때문에 직접적인 보복이라는 생각에서 스스로 추론했다 해도, 모든 우리의 속임수, 세상적인 전략, 자만심, 과민 반응, 자기 이익 추구, 시기함, 그 외 악에 대한 모든 경향성들은 자연적 마음속에 있는 생각들과 결합되어 영적 진리의 실지에 대한 영향력을 죽이려고 시도하거나 실지의 행동을 영적 진리가 좌지우지하려는 것을 억제하려 든다. 많은 그럴듯한 추론들이 자연적인 생각 속에서 튀어나와, 우리를 상하게 한 것은 벌받아야 마땅하다라고 말한다던가, 상하게 할 염려가 있는 것도 처벌 대상이라고 하거나, 공적인 선은 이런 처벌을 요구하니 처벌함은 우리의 의무라고 주장한다. 이런 논쟁을 수단으로 우리의 자연적인 악과 거짓들은 본문에서 원수갚겠다는 문중의 사람들 같이 우리가 이론적으로 채택한 영적 진리를 실지로 사용되지 못하도록 한다. 사실 악과 거짓에서 나온 속임수는 어느 정도까지는 그 논쟁이 진정임을 보여주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 속의 악은 이 논쟁을 나쁜 목적에 이용해 버린다.

상한 자에 대한 무관심

그리고 기억해 볼 필요가 있는 것은 우리의 말이나 행동이 타인을 상하게 했는지의 여부에 무관심해 하는 것은 그들을 상하게 하려고 하는 영만큼이나 나쁘다는 것이다. 그 이유가 무관심은 기독교 사랑이 전혀 없는 상태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사랑하는 이들이 가진 흥미들을 조심스럽게 보호해 주어야 한다. 기독교의 영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모든 사람의 영적 흥미를 사랑하라는 것, 그것을 조심스럽게 지켜 주라는 것이다.

기독교 사랑

기독교 사랑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우리에게 악을 행한 이들 속에 있는 영적 선을 위해 활동하라는 것, 가장 도달되기 쉬운 방법을 동원해 그 선을 키워 주라는 것이다. 자신의 피해를 보복하려는 것은 마치 악행자가 우리에게 가한 것과 같다는 것도 기억해 두도록 기독교 사랑은 요구한다.
보복하고 싶은 느낌이나 생각들을 내려놓고 기독교 사랑의 거룩한 체험으로 진입하면, 우리는 인간 속성을 감각적인 삶이라는 아주 낮은 평면 위에 맴도는 먼지나 연기, 구름을 훨씬 넘어 높은 산에까지 들어올릴 수 있다. 그래서 분노라는 지옥의 영이 결코 간섭할 수 없는 거룩한 영역 안으로, 영적 삶이라는 훨씬 높은 고도에까지 승강될 수 있다.

두 아들의 재 연합

계발된 합리적인 생각은 두 아들, 자연적 생각과 영적인 생각을 결국 하나가 되게 할 수 있고 두 생각이 우리 생각의 안과 밖의 측면에서 “사랑이 스스로 증거함”이 우리를 인도해 줄 때까지 서로 협력하게 할 수 있다. 이 협력의 상태는 높은 상태이다. 이 상태 속에서만이 우리를 상하게 한 이들이야말로 비참한 사람, 도움이 필요한 사람으로 간주할 수 있을 것이다.

악행자가 진정 고통받는 자

그렇게 간주할 수 있는 이유는, 진정으로 고통받는 자는 상해 받은 사람이 아니라 상해를 가한 자, 그것을 의도한 자이기 때문이다. 행위자는 그 상해를 두 배로 자신에게 되 퉁겨 오게 한다. 그는 자신의 영적 생명에 상처를 입힌다. 그는 자신의 상해 받은 이들로 분노하고 그 원수를 갚고 싶도록 충동질하게 하는데 성공했다면, 그 영은 상해자까지 지옥에 끌어들이는데 일보 전진한 셈이다. 그러나 우리가 보복이라는 영을 넘게 될 때, 미움에 사랑을, 악에 선을 되돌려야겠다는 생각의 원리를 앞세울 때, 우리는 실지의 어떤 상해도 초월하여 마음을 부상시킬 수 있다. 그러면 마음속에 예정된 상해는 우리의 보다 높은 발달의 수단, 우리의 영적인 선을 위해 허락된 시험이 된다. “옳은 일을 하다가 박해를 받는 사람은 행복하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마태복음 5:10).

5
도망친 포로

성서 본문: 열왕기상 20장 39-40절

39. 왕이 지나는데 그가 왕을 불러 말하였다. “임금님, 소인이 싸움이 한창 벌어진 곳을 지나오는데 어떤 사람이 포로를 하나 데리고 전쟁터를 벗어나 저에게 와서는 이렇게 말하였읍니다. ‘이 사람을 잘 감시하여라. 만일 놓치면 네가 대신 죽으리라. 죽기 싫으면 몸값으로 은 한 달란트를 내야 한다.’ 40. 그런데 소인이 이 일 저 일로 분주하여 정신이 없는 틈을 타서 포로가 도망치고 말았읍니다.” 여기까지 말을 듣고 이스라엘 왕은 “그렇다면 그대로 당해야지. 네 스스로 판결을 내렸으니까”하고 말했다.

거짓을 탐닉함 (indulging falsity)

어떤 거짓도 우리 지성 속에서 자유가 허용된 적은 없다. 그 이유는 거짓 원리가 순수한 선함을 생산할 수 없기 때문이다. 진리가 지성에서 인정을 받아 그 속에 자리잡으면 거짓이라고 보여지는 모든 사상의 축출은 당연히 뒤따른다. 모든 거짓은 합리적 능력에 포로가 된다는 말이다. 그래서 더 이상 어떤 피해를 내지 않도록 억류되어 있게 된다. 따라서 어떤 원리가 거짓임을 알고도 그 원리를 계속 사용하겠다고 고집 부린다면 우리는 자신의 영적 생명을 내걸어야 하는 지경에 다다른다.

표본적 의미(representative sense)

이스라엘은 주님의 교회를 표현했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적들은 교회의 적, 교인들의 적인 악과 거짓원리를 표현했다. 표본이 되어 있었던 그 당시의 이스라엘은 교인의 마음속에 든 악과 거짓을 복종시키거나 조절시키는 것이 표현되기 위해 그들 주위의 적들을 복종시키거나 조절하도록 섭리되고 있었던 것이다. 이스라엘에 대한 신성한 명령은 그들의 적을 파괴하라는 것이었는데 이것이야말로 아주 고된 일이었다. 이런 모든 것들 속에서 우리가 상기해 둘 것은 이스라엘 또는 성경 기록의 표본적인 성격에 관한 것이다.
진실로 이스라엘이 적을 파괴하는 일은 매우 힘든 일이다. 그러나 주님께서 이스라엘을 다루심은 우리가 다루기 힘든 사람을 다루는 것과 같았다. 그야말로 이들은 현재 있는 상황 보다 더 나빠지지만 않아도 잘된 것이라고 생각될 정도였다. 오늘날, 기독교가 잘 진보되어 있는 나라들 속에서도 우리가 인정할 수밖에 없는 것은, 갖가지 종류의 인간을 위해 갖가지 방법이 동원되고 각각에 적절한 대우를 해줘야 한다는 것이다. 선한 사람은 자유를 누리게, 범죄자는 감옥에 억류하고 심지어는 사형에까지 처하게 된다. 범죄자의 적절한 감옥살이는 공동체를 위해서 뿐 아니라 그 사람 자신을 위해서도 좋은 방법이 될 수 있다.
이스라엘에 주어진 법들은 이스라엘 백성에 걸맞도록 채택된 형체로 되어 있다. 주님이 아시는 이 법들을 다 찾아 볼 수는 없다. 그러나 “주님이 모든 이에게 선하게 대우해 주셨다는 것, 그분의 부드러운 자비가 그분의 일 속에 넘치고 있다는 것”에 대한 풍부한 증거를 우리는 읽어 볼 수 있다. 이 사람들이 저지른 짓이 무엇이었던 간에, 이들이 더 악해지는 것에서 구하시고자 주님은 노력하셨다.

채택 (adaptation)

주님의 자비가 인간에게 닿기 위해 그분은 반드시 인간의 인격 조건에 따라 움직이셔야 했다. 예를 들어보자.
건강한 눈에 대한 주님의 자비는 무엇일까? 그것은 빛의 공급일 것이다. 그러나 상처받거나 병든 눈에 대한 주님의 자비는 무엇일까? 그것은 그 눈의 상황에 맞는 부드러운 빛의 공급이 있어져야 할 것이다. 썩고 있어 못쓰게 된 팔에 대한 자비는 무엇일까? 만일 그 팔이 전혀 구제될 수 없다면, 그 사람에 대한 자비란 그것을 잘라버려 나머지 신체라도 죽지 않게하는 것일 게다. 이 때의 외과 의사는 고깃간의 주인 같은게 아니라, 사실은 자비를 베푸는 것이다. 나쁜 버릇을 가진 아이에 대한 자비는 무엇일까? 그것은 그 어린이가 탐닉하는 나쁜 습관을 억제시키고 좋은 습관을 형성하도록 훈련시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인간의 성품이나 상황에 따라 주님의 자비는 채택되어진다. 회복 불가능한 것을 자르는 것은 나머지의 생명을 보존시키기 위해서 이다. 이것이 주님의 방침이신 바, 말씀하기를, “손이나 발이 죄를 짓게 하거든 그것을 찍어 던져 버려라. 두 손이나 두 발을 가지고 영원한 불 속에 던져지는 것보다는 차라리 불구의 몸이 되더라도 영원한 생명에 들어가는 편이 더 낫다. 또 눈이 죄를 짓게 하거든 그것을 빼어 던져 버려라. 두 눈을 가지고 불붙는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는 한 눈을 잃더라도 영원한 생명에 들어가는 편이 더 낫다.”

해석 (interpretation)

본문의 비유는 시험 동안 악과 거짓 원리에 대항하는 투쟁을 취급하고 있다. 이를 최고 높은 내적 측면에서 본다면, 이 비유는 주님이 입으신 인성에서의 투쟁, 즉 인성이 신성과 하나가 되는 영화하시는 과정에서의 투쟁을 취급하고 있다. 본문의 싸움이란 시험(temptation)이다. 포로를 데리고 와서 “이 사람을 잘 감시하여라”고 말한 “어떤 사람”이란 주님이시다. 시험 기간 동안 주님은 우리의 합리적 능력을 열어 주시어, 그 능력이 진리를 진리로서 보게 해주신다. 그리하여 영적 삶에서 싸워야 했던 거짓 원리들의 진짜 성격을 우리에게 보여 주신다. 그 다음 우리의 합리적 능력에 그분이 하시는 말씀, 포로된 “이 사람을 잘 감시하여라” 이다. 다시 말해 이 거짓 원리가 틀림없이 우리에게 복종 당하고 있도록 잘 감시하고 있으라는 것, 그 원리의 영향력이 우리의 생각이나 느낌에 힘을 쓰지 못하도록 하라는 것, 이 원리들은 우리의 영적 생명을 파괴하는 것들임을 유념하라는 것 등이다. 만일에 거짓 원리가 우리 지성 속에서 일하게끔 자유를 준다면 정녕 이 원리는 영적 생명을 음험한 수단을 써서 침식해 갈 것임을 말씀하시고 계신 것이다. 거짓은 지옥에 속한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그것을 파괴시키든지, 아니면 그것에 의해 파괴당하든지 어느 하나에 속하게 된다. 따라서 이는 우리 생명에 관한 질문인 것이다. 그래서 그것을 잘 감시해야 하는 일을 소홀히 할 경우, 악과 거짓 원리는 합리적 능력의 감시에서 빠져나가게 된다. 그 뒤에도 이것들이 마음속에서 자유를 갖도록 계속 방치하면 지옥적인 작업의 수행이 영적 생명과 점점 대결하는데까지 치닫고 만다. 이래서 우리의 자연적 생각 속에 있는 거짓 원리들이, 비밀스럽게 영향을 주는 것이든, 공개적으로 영향을 주는 것이든 양쪽 모두를 알아차릴 수 있도록 주님은 우리에게 언제나 경고를 주고 계신다.

은 한 달란트 (the talent of silver)

“이 사람을 잘 감시하여라. 만일 놓치면(즉, 그가 자유를 얻으면) 네가 대신 죽으리라. 죽기 싫으면 은 한 달란트를 내야 한다.” 달란트란 이스라엘 왕국에서 사용되는 무게 표시 중 가장 큰 무게에 속한다. 은 한 달란트이면 아마 미화 이천여 불에 해당되는 많은 액수의 돈이다. 포로를 놓친 그 “소인”이 목숨을 건질 수 있으려면 은 한 달란트를 지불해야 했다. 좋은 의미에서 은이란 영적 진리를 표현한다. 그러나 나쁜 의미에서 은이란 거짓, 또는 왜곡된 진리를 표현한다. 모든 좋은 것이 악한 목적에로 남용되거나 고용되어질 때, 이 물건들의 표현성은 그 반대적 의미로 바뀌게 된다. 그래서 본문에서 이 소인은 죄인 취급을 당하게 되어 은의 소유를 포기하는 것, 즉 은을 지불해야 했는데 이럴 경우에 은은 거짓을 표현한다. 무게란 애정 속의 어떤 것을 측량함으로 식별하는 것을 표현한다. 따라서 무게란 마음속의 생각 또는 지성을 표현하는 것이다. 이 비유가 글자대로 라면 이 히브리인은 “은 한 달란트를 내야 했다.” 생명을 보존하기 위해 은 한 달란트를 달아 준다는 것, 또는 지불한다는 것은 그 사람의 영적 생명을 위협하는 거짓원리에 대한 그의 사랑을 포기해야만 한다는 말이다.

거짓을 봄 (seeing a falsity)

이리하여, 주님이 밝혀 주시는 진리를 가지고 거짓 원리 속에 든 지옥적인 속성들을 우리 눈이 열려 보게 된다면, 영적 생명이 거짓 원리를 얼마나 잘 복종시키느냐, 또는 그 원리들이 우리 실생활 속에 미치는 영향을 얼마나 감소시키느냐에 우리의 영적 생명의 보존이 달려 있음을 알게 된다. 따라서 우리의 영적 생명을 구원하기 위해서, 우리는 거짓 원리의 속성을 잘 알아야만 하고, 그것들을 계발된 합리성에 복종되도록 잘 감시해야 한다. 또는 거짓 원리를 사랑하려는 마음(애정)을 포기해야만 할 것이다. 그 이유는 이 원리들이 우리의 의지에 영향을 주도록 허용하지 않는다던가, 우리의 행동에 작용하지 않는다면, 외적인 거짓 생각은 영구적인 치명상을 우리 영에 가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근대의 많은 종교 교리의 체계 속에는 거짓 사상들, 특별히 하느님의 속성이나 인간의 영적 생명에 관해 거짓 사상이 많이 함유되어 있다. 그럼에도 주님은 이런 교리 체계를 수단으로 하시어 인간을 천국으로 인도하신다. 그 이유는 인간은 거짓 사상을 기억 속에만 저장해 두고 자기의 심정이나 삶 속에 갖다 놓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인간의 마음 속에 많은 거짓 사상이 있는데도 이 사상들이 해를 주지 않는다. 그 이유는 그 사상들이 악을 정당화시키는데 사용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성경의 글자 의미에는 영적이지 않거나, 진정하지 않은 사상들이 많이 있다. 그러나 성경을 읽는 사람이 성경 글자를 가지고 자신의 악들을 정당화하는데 이용하지 않는 한, 어떤 인간도 성경의 모든 상징적인 서술을 쓰여 있는 글자대로 믿는다 해도 그의 영적 생명은 잃지 않는다.

예증 (illustration)

예를 들면, 비록 성경이 하느님은 성내시고, 성마르시고, 편파적이신 듯 표현하고 있다해도 실상 그런 성격은 그분에 대한 진실이 아니다. 이런 서술들은 모두 자연적 마음 수준에 머문 사람, 또는 계발되지 않은 사람에 대한 것인 바, 한 마디로 진리의 외관(appearance of truth)일 뿐이다. 그러나 영적으로 계발된 사람은 하느님이 사랑이시라는 것, 그분 속에는 비 사랑적인 성질은 하나도 없으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사랑에 의해 이끌어질 수 없는 사람은 공포, 불안 같은 것에 의해 이끌리지 않으면 안된다. 이런 사람에게 필요한 하느님에 대한 인식은, 그분은 자기를 속박해 두시기를 좋아하는 분으로 믿어야 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만일 거짓 관념이 기억 속에 남아 있다해도 우리는 은 한 달란트를 물어내는 것, 즉 거짓 원리에 대한 어떤 사랑을 포기함으로 생명을 되찾을(redeem) 수 있다.
그 이유는 설사 우리가 사실(fact)에 관해서까지 거짓 사상을 가진다 해도 거짓 원리로 느끼고 행동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주님의 법도에서 하라는 대로 행하는 것이 가장 총명한 선택이라고 하여 그분의 법에 순종하는 사람, 주님의 행동 강령이 주님의 법이기 때문에 순종해야 한다고 하는 사람은 어찌됐든 주님의 뜻에 따라 살고있는 것이다. 비록 그가 자기 기억 속에, 자기 바깥쪽 생각 속에 많은 거짓 관념이 들어차 있다해도 결국 그는 주님을 사랑하고 그분께 순종하는 진정한 원리로부터 행동되고야 만다.

통치하는 사랑 (the ruling love)

위와 같이 순종하는 사람 속에 있는 통치하는 사랑은 분명 선할 것이다. 그래서 그 사람 속의 잘못된 관념은 결국 계발되고야 말 것이다. 왜냐하면 통치하는 사랑이란 마음속에 있는 절대 군주로서 마음이라는 제국의 모든 것은 그 군주 지휘하에서 보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이 주님의 뜻을 이해할 때 그는 더욱 그분의 뜻에 순종하고, 더욱 더 그분의 뜻을 명확하게 이해하게 된다. “만일 누군가가 그분의 뜻을 행한다면, 그는 교리도 깨닫게 될 것이다.” “주님의 법은 완전하므로 영혼을 바뀌게 한다.” 주님의 법은 그 법에 순종하는 영혼을 전환시켜 준다는 말이다.

주님의 포로 (Lord’s prisoner)

주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어떤 적이든 파괴시키도록 명령하셨다. 그래서 이스라엘 왕이 적의 포로를 사로잡았을 때, 주님의 명령에 의거 그 포로는 주님의 포로로서 취급하여야 했었을 것이다. 이와 같이 우리는 주님의 뜻을 거듭나는 삶 속에서 행하여야 한다. 어떤 거짓 원리를 자신 속에서든 타인 속에서든 보게 될 때, 우리는 그 거짓 원리를 주님의 포로로서 그분의 명령 하에 취급되게 하여야 한다. 이 원리에 어떤 가상적인 자비가 있어져서는 안된다. 이 원리가 포로로 붙잡힌 이상, 도망가거나, 자유를 얻게해서 다시 우리의 영적 생명에 대항하도록 빈틈을 주어서는 안된다는 말이다.
실제에 아주 중요한 요점이 있음을 고려해야 한다. 우리의 심정 상태가 열릴 때, 우리의 자연적인 생각 속에 존재하는 거짓 원리의 성질, 품성에 대해 어떤 판단이 주어진다. 마치 모세와도 같이, 우리는 산으로 인도되어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한 모형을 보고, 다시 실제 삶이라는 평지로 내려 와서, 산에서 본 모형대로 성전을 지어야 하는 것이다.
오만하고 무례하며 신성을 모독한 적이 도망가도록 허용한 아합의 우둔함으로 인해 이스라엘은 더 많은 피해를 보게 되었다.

영적 우둔함 (spiritual folly)

거짓 원리의 속성이 지옥적인 것들임을 보고 난 후에도 그것들을 자유롭도록 방치하여 다시금 우리를 공격할 기회를 허용하는 것은 얼마나 우둔한 짓인가? 예를 들면, 우리 속에 든 뽐냄(pride)은 우리를 얼마나 많은 곤경 속으로 몰아 넣는지 모른다. 아마 시험이 발생하면, 그 동안 거짓 원리들이 자연적인 자랑심의 기초가 되어 있음을 명백하게 보게되는 때가 허다하다. 그런데, 왜 우리는 우리에게 영향을 끼치도록 자꾸 우리의 뽐냄을 허용하는 것일까? 만일 주님이 그 뽐냄의 더러움을 우리에게 밝히 보여 주셨다면, 시험과 싸우는 도중에 주님께서는 이 뽐냄을 우리의 합리성의 감시 하에 놓이게 해주심으로 우리를 시험에서 건져 주셨을 것이다. 그리고 그분은 우리 수중에 있는 이 뽐냄을 넘겨 달라고 요구하셨을 것이다.

위험의 요점 (the point of danger)

진짜 위험은 일상생활이라는 삶의 생각에는 그렇게 많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우리의 관심이 거짓이라는 속성에 쏠리는 동안 우리는 그것을 빠르게 포로로 사로잡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상 생활의 세부 사항이랄 수 있는 “이 일 저 일로 분주한” 때에 진짜 위험은 오게 된다. 이런 때, 이미 알고있는 거짓까지 합리성의 지배를 벗어나도록 자칫 흘려 보내서, 삶의 전투에서 악한 영향력이 이 거짓을 사용하게끔 방치하는 것이다. 우리의 정신적인 벤하닷은, “이스라엘의 하느님은 산신”이므로 “평지에서 싸우면 반드시 이길 것으로” 예상하고 있었다 (열왕기상 20:23) 다시 말해 평지란 우리의 일상적인 삶을 말하고, 산이란 마음의 높은 수준을 의미한다.
그런고로, 우리는 “이 일 저 일로 분주한 동안에도” 이미 알고 있는 거짓들이 우리의 느낌이나 생각 그리고 행동에 실지로 영향을 끼치지 못하도록 포로를 잘 감시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이론적으로 거짓을 잘 공격하면서도 실제에서 그것들이 세력을 떨치는데 대해 수수방관해서는 안된다는 말이다. 잘 생각해 보면, 이론상과 실제상의 미덕(virtue)에는 큰 차이가 있는 것이다. 전쟁이 시작되면 허리에 무기를 찬 적들을 그냥 두어서는 안될 것이고, 적을 다 부숴버린 뒤에 무기가 필요 없다고 벗어 던지는 것을 자랑해서도 안된다. “싸워 보지도 아니하고 으스대며 갑옷을 벗지 말라” (열왕기상 20:12) 라는 구절을 상념해야 할 것이다.

거짓 원리들 (false principles)

이 세상 삶이 좋다고 하는 것들을 영적 축복보다 더 바라는 것이 거짓 원리이다. 돈이야말로 행복을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이라는 것도 거짓이다. 명성이 인격보다 더 중요하다고 외치는 것도 거짓 사상이다. 만일 어떤 관념이 거짓임을 명확하게 보았다면, 주님은 위에 열거한 세상의 좋다는 것들을 포로들로서 주님의 명령으로서 꼼짝 못하도록 하여 우리에게 넘겨주실 수 있다. 위의 좋다는 것들이 우리의 적들임을 오늘 보았다면, 내일 왜 우리는 그것들이 마음 속에서 활개치도록 자유를 허용할까?

인격의 강건함 (strength of character)

영적으로 인격이 강해짐은 악한 것에 저항하고 선한 것을 기꺼이 행동에 옮김으로 있어진다. 간혹 목적의 불분명함(weakness)이나 강건한 인격의 결핍은 자비나 관대함에서 실수를 연발하는 수가 허다하다. 강함(strength)은 자신이 겸비해야 하는 줄 알면서도 막상 겸비하려치면 골치 아픈 일처럼 보이기도 해서 손도 대보지 못하고 풀이 죽고마는 약한 심정이라던가, 자기 생명을 보전하기 위해 제 팔을 자를 수 없는 여린 심정, 죄를 견책해야 그 죄인을 구할 수 있는데 그러지 못하는 유약한 심정 같은 것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왜 사회나 사업이라는 삶 속에는 그렇게도 많은 협잡으로 가득 차 있을까? 그 이유는 간단하다. 시험에 저항하려는 결단 있는 목적을 가지지 않았거나, 본인도 그것이 거짓이요 악인 줄 뻔히 알면서도 사실은 그 원리를 즐기는 바, 기꺼이 내던지지 못해 사기꾼이나 사기 당하는 자나 공히 그들의 깊은 심정은 같은 원리를 탐닉하는데 전문가가 되고 있는 연약한 남녀들이 많기 때문이다.

진짜 새교회인 (genuine New-Church men)

새 예루살렘 교회(요한계시록 21:2)의 새 진리가 실용적인 열매를 보여주려면, 이 진리는 인간을 발달시킴으로 더 영적인 용기를 가져와야 할 것이다. 이 새교회인은 삶의 매 걸음마다에서 결실이 있어져야 할 것이다. 성실(integrity)이라는 높고 순수한 기운 속에서도 살아야 할 것이다. 이 사람은 자기에게 끈질기게 따라 붙어 매혹시키려 하는 모든 거짓과 그것의 영향에 대해 단호히 “no!”라고 즉각 말해야 할 것이다. 어떤 원리 속에서 거짓을 보았을 때 그 거짓을 포로로 잡아 놓고 빠져나갈 수 없게 감시하는데 있어 빈틈이 있어서는 안된다. 이 사람은 모든 사기 행위와 비열함에 찬웃음을 보낸다. 게다가 어떤 위기라도 정면 대결할 준비가 되어 있다. 그래서 약한 사람(weakling)들이 처하는 위험한 바다에서 표지(beacon-light)가 되어 준다. 이 사람은 나라의 기초나 인류의 기반을 좀먹어 들어가게 하는 비열함이나 감각적 행위 그리고 수 천 가지의 근대 협잡들을 약화시킬 것이다. 이런 고상한 사람을 어디서 발견할 수 있다고 기대해야 할까? 그곳은 영적 삶의 진리가 알려진 곳 새 예루살렘 교회에서 이다. 우리는 옛 사상이 해체되고 새 원리의 파종기인 위험 시기에 살고 있다. 위기는 경고도 주지만 기회도 부여한다. 위기는 강한 인격을 발달시키는 수단이다. 각 인간의 원리들을 시험해 보는 때가 바로 이런 때에 있어진다. 연약한 인간은 대중적인 관행이나 그 바람에 겁먹고 휩쓸리게 된다. 그러나 영적으로 강건한 자는 자기의 느낌이나 생각, 그리고 행동을 지배하려 드는 각종 영향력을 자기 강건함을 위해 시험해 보는 기회로 삼는다. 이 사람이 어떤 대중적인 인기를 끈 원리 속의 거짓된 속성을 명확히 보게 될 때, 그는 그것들을 자기 발 아래 누르고, 주님의 포로로 잡아 그분의 명령에 복종되게 처신한다.
이 사람이 아는 사항은, 모든 거짓원리들은 우리를 영적 죽음에로 이끌고 만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사람은 거짓원리를 짓밟는 유리한 고지를 점령한 뒤 결코 그 고지를 뺏기지 않는다. 한번 거짓원리를 보고 참 진리의 가치를 확인한 이상 이 사람은 심사숙고된 계획으로 돌진하고, 이 돌진은 그의 바깥쪽 생각에까지 밀어붙이며 결국 그의 실제의 행동에까지 옮기는 직진 코스를 밟는다.

진리에 문을 열라 (openness of truth)

진리는 풍부하다. 그러나 모든 사람은 진리를 수용하려는 상태에서, 심정에, 지성에, 그리고 행동에 진리를 간직해 보려고 진지하게 노력해야 한다. 그래서 진리가 자기에게 와질 때 즉각 받아들일 준비를 해야 한다.
많은 진리들이 진리를 받을 준비가 되지 않아 열려 있지 않은 마음에도 빛을 비추이고 있다. 우리 모두 인정하는 바는, 어떤 주일에는 여느 주일보다 영적 진리를 받을 수 있게 마음 문이 한층 더 열려 있었다는 사실을 본인 스스로도 확인되는 때가 있다는 것이다. 주일 날, 주님의 말씀인 성경이 영적 교훈을 위해 읽혀진다. 찬송은 우리 애정에 호소하고 있다. 설교는 우리의 합리적 생각에 메시지를 보내고 있다. 이런 가운데 어떤 이는 예배에 대해 여느 때 보다 더 흥미를 갖고 있는가 하면 어떤 이는 그 사람과 비교해서 덜 흥미를 갖게 되기도 한다. 지난 주일에 무관심한 사람이 이번 주일에는 관심이 많기도 한다. 오늘 마음 문이 열린 사람은 오늘 뭔가를 받아 가게 된다. 그래서 주님의 말씀, “옳은 일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만족할 것이다” (마태복음 5:6).
영적 진지함이 고갈되어 온 사람에게는 화가 있을 뿐이다. 그는 불이 다 태워 버리고 난 찌꺼기, 한 줌의 재와도 같다. 특별히 오늘 세대에서 우리는 목적에 대한 진지함이 필요하다. 그래서 사회적, 정치적, 일상 삶 속에서 번갈아 가며 맞이할 수밖에 없는 모든 거짓 원리를, 우리를 홀리는 거짓 사상을 내려 눌러야 한다.
“지금까지 걸어 온 내 길을 반성하고 당신 언약의 길로 되돌아 오리이다… 교만한 자, 거짓으로 나를 꾀어도 마음을 다 쏟아 당신 계명을 지키리이다” (시편 119:59, 69).

6
야망의 가시나무

성서 본문: 열왕기하 14장 9절

9.그러나 이스라엘 왕 여호아스는 유다 왕 아마지야에게 다음과 같은 회신을 보냈다. “레바논의 가시나무가 레바논의 송백에게 딸을 며느리로 달라고 청혼하였다가 지나가던 레바논의 들짐승에게 짓밟히는 신세가 되었다.”

자연적 마음의 자신감 (the self-assurance of the natural mind)

자연적 감각에서 있어지는 생각들은 영적 진리를 납득할 수 없다. 그럼에도 인간 역사를 통해, 자연적 마음은 자연적 감각의 빛으로 비추어 인간의 영적 생명의 신비를 꿰뚫어 보려고 시도해 왔다. 그러나 이 노력은 성공적이지 못했고, 아마 결코 되어질 수 없는 일이기도 하다. 그 이유는 영적인 것은 영적인 빛으로만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글자상의 이야기 (the literal story)

유다와 이스라엘, 두 왕국으로 분단된 그 시대에, 유다의 왕 아마지야는 에돔족을 정복했는데, 그는 이 정복보다 더 큰 군사적 영예를 욕심 내던 차, 이스라엘 왕 여호아스에게 사신을 보내 싸움을 걸었다. 그러나 여호아스는 그의 도전을 거절하면서 집안에서 편안히 있을 일이지 타인을 건드려 다치게 하지 말라고 충고했다. 그래서 그는 유다 군대를 경멸하는 표현으로서 비유를 사용하였는 바, 그 내용은 천박하고 무가치한 가시나무가 짐승에 짓밟히는 신세를 유다 군대로 빗대면서 깊게 뿌리 내려 폭풍에도 끄덕없이 버티고 선 레바논의 드높은 송백 나무와를 대비시켜 말했다.
여호아스의 충고를 유념치 않은 아마지야는 전쟁을 일으키려 고집했다. 그리고 그 바로 뒤의 전투에서 그와 그의 군대는 사정없이 패하고 말았다.
본문의 글자적 의미가 주는 교훈은 명백하고 유용하다. 첫째, 불화를 일으키는 것은 결코 안전치 못하다는 것이다. 즉 원리면에서 볼 때, 불화를 일으키는 것은 옳지 못한 것이라는 말이다. 설사 말싸움하기를 좋아하고 야심있는 사람이라 해도, 종종 예상 못한 결과를 초래하는 경우가 많은 것이다. 그러므로 좋은 원리와 신중한 정책은 당사자를 평화롭게 해준다는 말이다. 둘째로, 적의 힘을 과소 평가해 가지고는 결코 안전치 못하다는 것이다. 그 이유가 우리의 실수는 적에게 더 유리한 측면을 제공하는데다가 정작 대처했어야 할 것들을 미처 준비 되지 않은 상태에서 맞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따라서 지도자로서, 또는 사람을 많이 다루는 직업인의 경우, 능력 발휘에서 가장 좋은 성과를 기대하려면 자신의 자원을 조심성 있고 면밀하게 평가하며 자기 앞에 놓인 장애물을 잘 헤아려 놓는 것이 있어야 한다. 성공하는 경영자는 언제나 자기 일 앞에 기습적인 사건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예상하고 있는 바, 사건의 발생에 준비가 되지않은체 느닷없이 당하는 일은 없다.
삶의 매 사건들에서 약하거나 부주의한 사람은 자기 일을 불시에 떠 안게 되어 자기가 그 일에 미리 대비되지 않았음을 늦게서야 발견한다. 그러고도 그는 그 일이 자기에게 닥칠 수밖에 없었다는듯 당연하게 받는다. 그러면서 그 일이 무사히 풀리겠지 라고 단순하게 예상해 버린다. 또 자기 방법으로도 뭔가 좋은게 있어질 수 있다라고 상상도 한다. 그러나 이들은 그 일이 무사히 잘 풀려야만 된다는 것을 조심스럽게 보지는 않는다.
셋째로, 본문의 또 다른 교훈은 자신의 능력을 과대 평가하는데 따른 위험에 대해서이다. 예를 들면, 어떤 젊은이가 마을에서 자기의 체육 실력을 칭찬 받았을 때, 이 실력 정도라면 전국을 제패할 수 있고 전국적으로 칭찬을 받을 거라는 야망에 가슴이 부풀어 있는 경우가 있다. 그리하여 그가 전국 체전에 참가했다면, 그는 패배로 인해 조용히 귀향하고 만다. “싸워 보지도 아니하고 으스대며 갑옷을 벗지 말라” (열왕기상 20:11). 이 구절이 이런 청년을 두고 하는 말이다. 뭔가 나도 잘할 수 있다 해서 분이 넘치는 목표에 도전함으로 자신을 망치는 경우는 요즈음도 흔한 일이다. 그래서 잠언 16장 18절은, “거만엔 재난이 따르고 불손에 멸망이 따른다”고 경고하고 있는 것이다. 번영을 누리고 있는 사람일수록 더욱 그 번영에 감사하고 더욱 조심성을 발휘해야 그 번영의 유지가 가능한 것이다. 만일 이 사람이 자신의 성공을 자랑으로 떠벌리면, 그 축복이 저주의 일로 바뀌어 되돌려 오고 만다.
우리가 노력을 경주하지 않으면 성공할 수 없음은 지당한 말이다. 그리고 모든 사람은 자신의 주제 파악에 관심을 가져야 하며 능력 이상의 것을 과도하게 욕심 낸다면, 일의 곤란성을 우습게 여겨 실패해버리고 말것이다. 조금 더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다면 성사될 일들이 자기 과신이 가져다주는 부주의한 가운데 그 일을 처리함으로 어이없이 실패를 당하는 것은 우리 주위에 흔한 사건이다. 우화 속의 토끼와 거북이의 경주 역시 이를 잘 나타내고 있기도 하다.

영적 의미 (spiritual meaning)

위의 모든 것들은 암시적이다. 왜냐하면 본문의 영적 의미는 이와 비슷한 원리들을 영적 삶에 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레바논의 가시나무가 레바논의 송백에게 딸을 며느리로 달라고 청혼하였다가 지나가던 레바논의 들짐승에게 짓밟히는 신세가 되었다.” 장대한 송백 나무의 울창한 숲을 가진 레바논 산이란 멀리 내다보는 영적 진리에 합리적 지식을 지닌 인간의 영적인 마음 또는 영적 인간을 표현하고 있다. 상록수인 송백이란 합리적 생각을 표현한다. 그래서 레바논의 송백이란 합리적으로 보고 이해된 영적 진리에 관한 지식을 표현한다. 상처를 주게 되는 위험성을 지닌 가시나무는 악에서 튀어나오는 거짓 원리를 표현한다. 들판에 자리를 잡게하면 근절시키기가 힘든 것이 가시나무들인 것같이, 악한 애정에서 나오는 거짓 원리들은 집요하게 우리 지성에 달라붙어 있게된다. 가시나무의 아들이란 거짓 원리에서 나오는 거짓 생각을 뜻하고, 레바논 송백의 딸들이란 영적 진리에 대한 애정을 말한다.

결혼 (marriage)

송백의 딸을 가시나무의 아들에게 주어 아내가 되게 한다는 것은 진리에 대한 우리의 애정이 자연적 마음속의 어떤 거짓된 생각과 결합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하나가 되려는 시도는 자연적 마음에 의해 우리 속에서 꾸준히 일어나고 있다. 애정(affection)은 진리의 빛이 필요하고, 진리를 갈망한다. 우리 주님은 영적 진리에 대한 애정이 우리 속에서 신장 되도록 노력하신다. 그리하여 그분은 우리의 이해성 안에서 진리에 대한 지식과 애정이 하나를 이루도록 추구하신다. 이 추구의 결과가 선과 진리의 천국적인 결혼이다. 그러나 악령들은 우리 속의 거듭나고 있지 않은 경향성들과 연계를 맺고 천국적 결혼을 저지하려 발버둥친다. 악령들은 우리의 성장해가는 애정들을 유인하여 감각에서 오는 거짓에 고정시켜 거짓이 진리인듯 착각을 일으키게 해서 사랑하게끔 하려고 한다. 그렇게 해서 자연적 감각에서 영적인 것의 슬기로움을 기대하게끔 만들려 한다.
결혼은 쌍방의 수준이 비슷해야 한다는 균등성이 비유 속에 비쳐져 있다. 이는 옛날 결혼 습관에서 가문과 가문을 비교한 것과도 비슷할는지 모른다. 이를 영적 의미에서 보면, 이 비유는 감각에서 오는 거짓 관념으로 채워져 있는 자연적 마음이 영적 진리에 대한 내향적 애정과 비교해서 영적 수준과 같다고 상상하는 그 오만성을 쉽게 알게 해준다. 낮고 비천한 가시나무가 드높은 송백에게 결혼을 요구하는 오만함 같이, 우리 속에서는 감각적 마음이 우리 속 영적 부분들을 끌어내려 하는 노력이 꾸준히 계속되고 있다.
우리의 감각들이 자주 사용하는 무기는, 우리는 이 세상에 발을 딛고 살아야 한다는 것, 우리가 자연스럽게 기울어지는 방향에서 느끼고 생각하고 행동해야 한다는 것, 이에 대해 어떤 제약을 받아서는 안된다는 것 등등이다. 이런 무정부적인 생각들이 무질서하게 뻗어가는 특성을 지닌 가시나무의 아들들이다. 그러나 주님은 감각의 가시나무 같은 거짓들과 레바논 송백의 딸이 결혼을 통해 연합하는데 대해서 영적 진리에 대한 우리의 애정을 지키시고 보호하신다. 이런 보호 과정에서 주님은 우리의 협력을 필요로 한다. 그 협력이란 우리가 그분의 계명을 지키고 그분의 진리를 배워야 하는 일이다.
교회의 역사를 보면, 진리에 대한 인간의 사랑이 감각에서 오는 오류들과 연합되어 야기된 잘못들로 고통을 주었던 예들이 상당히 많다. 이러한 역사 속에서 양심적인 이교도가 박해 당하는 것도 목격한다. 사랑 많은 이들이 거짓과 연합됨으로 사랑 없는 행위를 저지를지도 모른다. 그 이유는 그들이 하느님에 관한 속성과 그분의 섭리에 대한 거짓 관념에 사기 당한 채 자신의 미덕을 확인하기 때문이다. 이런 오류들은 개인의 정신적 측면에서도 흔한 일이다. 악한 경향성에서 튀어나온 감각적 거짓들은 영적 진리를 사랑하려는 마음을 낮은 수준에로 닥치는 대로 끌어내리려 한다. 즉 어떤 처녀가 고이 간직한 사랑은 그녀에게 주어질 고상한 남편, 영적 삶 속에 있는 장엄한 진리와 하나가 되어야 하는데 거꾸로 자연적 감각 속에서 나오는 어떤 거짓 관념과 결혼될 경우, 우리는 진리를 볼 수 있는 시력을 잃고 우리의 애정은 사기 당해 거짓과 결혼하고 마는 것이다.

실례들 (examples)

예를 들면 우리가 진리에 대한 어떤 사랑을 가지고 있으나, 그 사랑이 자아 총명에서 비롯된 지독한 거짓과 결합했다고 하자. 이럴 경우 우리는 주님이 주시는 어떤 계시(밝히 알게 해주심) 없이도 인간 삶에 관한 진리를 충분하게 이해할 수 있다고 상상하게 된다. 즉, 자연 과학만이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진리를 가지고 있다고 상상한다던가, 영적 삶, 또는 영계는 없다고 상상해 버리고 말 것이다. 아마 더 미묘한 술책은 거짓 원리가 우리로 하여금 하느님과 영계를 인정하게 하면서, 그리고 진리들을 사랑해야 한다고 주장을 펼치면서 하느님께 돌려야할 영광을 자신의 총명에 슬쩍 돌려지게 만드는 경우이다. 이렇게 해서 선함과 악, 진리와 거짓을 구별해 내는 능력이 자신에게 있는 듯 여기게 되어 영적 생명을 파멸시키려 든다.
자주 발생하는 것 중 하나는, 비록 우리가 진리에 대한 어떤 사랑을 가지고 있는 반면, 감각에서 오는 어떤 비천한 거짓이 이 진리에 대한 애정을 붙잡아 거룩하지 못한 결합을 이루게 되면 실제로 이 진리는 선함이라는 열매의 생산은 불가능해지고 만다. 아마 실제의 삶 속에서 우리는 어느 쪽에 기울려는 경향성에 따라붙는 악의 세력을 계속적으로 과소평가하고 있을 때가 흔하다. 아마 우리는 자신의 능력을 과대평가 하길 좋아하여 우리가 주님께 의지해야 한다는 점을 쉽게 망각한다. 주님이 가르치시는 것은 모든 선은 그분 안에 있고 그분으로부터만 온다는 것인데, 만일 우리가 이 진리를 마음에 언제나 간직한다면 우리는 선을 주님의 선물로서 받아 사용할 것이고 우리가 주님과 분리되어서도 선한 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은 상상도 하지 않을 것이다. 만일 우리가 모든 악은 지옥으로부터 옴을 보고 인정한다면, 우리는 악에 대한 우리의 경향성도 볼 수 있고 인정할 수도 있다. 그 다음 우리는 이것들을 지옥의 탓으로 여기고 생각이나 느낌, 그리고 행동 지침 상에서 이런 경향성들을 거절하게 될 것이다. 이런 방법 속에서 우리는 악을 자신의 것으로 음미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악을 자신의 것으로 사랑한다면, 우리는 그 악에 대한 책임이 자신에게 있게 된다. 그래서 만일 우리가 선을 자신의 것이라고 주장하면, 우리는 선의 근원인 하느님과 분리되는 바, 천국적인 속성들 역시 결핍되고 말 것이다.
나쁜 습관에 젖어 든 젊은이들을 주목해 보자. 만일 여러분이 이 젊은이의 나쁜 습관 중 하나를 꼬집어 준다면, 그는 대답하기를, “저는 그 습관 따위에 노예가 되어 있는 것은 아닙니다. 나는 그런 습관이 나쁜 것이라고 생각되어 그만두겠다고 생각하면 즉각 중지시킬 수 있습니다. 아마 당신은 내 속에 어떤 강함도 없다고 상상하겠지요?” 그런데 이 젊은이의 결과는 무엇일까? 사실 이 젊은이는 자신의 영적 강함을 과대 평가하고 있고 그 반면 악의 미묘한 힘을 과소 평가하는 것이다.
위의 결과 많은 젊은이들이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아마 영적으로까지 균열을 일으켜 미리부터 자기 무덤을 파는 일을 종종 목격해 볼 수 있다. 결국 그들은 자기들에 대한 나쁜 이름, 나쁜 본보기, 나쁜 영향만을 남기고 무덤에 들어가고 만다. 이런 사람들은 자기들의 나쁜 습관을 즉각 중단할 수 있다고 재잘거리나, 그 동안 탐닉에 의해 그들은 더 약해지고 악들은 더 강세해지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신속한 저항

악이라고 판정될 때 즉각 악을 내던지는 것만이 유일한 안전 수칙이다. 이미 알고있는 악을 즐기는 일, 그 일의 한건 한건은 우리의 정신 태도를 지옥에 노예화 되도록 하는 쇠고리에 큰 못을 박아 두는 것이나 다름없다. 자기에게 미리 경고된 것, 우리는 이것을 반드시 잘 관찰하고 심사숙고해야 한다. 우리가 선과 악 사이에 있는 차이점을 실감있게 알게 될 때에야 비로소 큰 요점이 파악된 것이다. 우리의 악한 경향성들은 마치 불길 같다. 이 불길이 거세지기 전이라면 진리인 물을 조금만 가지고도 진화시킬 수 있겠지만 이 불길이 거셀 경우, 이 불은 우리의 정신적인 집을 태우고 만다. 악한 영향력들은 주님이 우리 속에서 발달시키시는 더 높은 삶과 다투도록 언제나 부추기고 있다. 그러나 영계를 가리고 있는 휘장을 우리가 들어올릴 수 있다면, 그래서 우리가 우리 속 나쁜 충동들의 근원을 볼 수 있다면, 악령이 던지는 사악하고 야비한 암시들을 경청하려는 자신의 우둔함을 인정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악한 영향력 밑에 있는 사람을 그려보자. 그는 악령에 의해 움직이고 있다. 그는 지옥으로 열린 문 옆에 서 있다. 음험한 영향력은 자기들 명령대로 움직이게 하려고 그에게 재빠르게 돌진해 들어가 그를 부추기고 있다. 그 사람 바로 위에 천국으로 열린 문이 있다. 거기서 천사들은 천적인 축복 속에 들어오라고 손짓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천국에 등을 돌리고 그의 얼굴을 지옥에로 향한다. 왜 그가 자신이 불쌍한 처지에 있음을 인식할 수 없을까? 그 이유는 어떤 거짓 원리가 그 사람의 이해성을 점유하고 있고, 그의 경향성이 악을 행하려 하기 때문이다. 만일 그가 진리에 대한 어떤 사랑을 가지고 있다면, 즉 레바논 송백의 딸이 비천한 가시나무의 아들과 결혼했다면, 그 딸은 보기 흉할 정도로 잘못된 쪽으로 방향을 잡은 것이 된다.
우주에는 선이 가득하다. 그러나 이 선을 채택하며 음미하여 복을 받기 위해서는 반드시 선을 받을 조건을 갖추어야 한다. 자기 앞에 먹을 것이 가득하다 해도 그 음식들을 먹어 소화 흡수할 신체 조건을 먼저 갖추고 있어야 하는 경우나 다름없다.

신성한 섭리

주님은 인간이 남용하지 않고 사용할 준비가 된 모든 이들에게 선과 진리를 언제나 공급하고 계신다. “곧바르게 걷는 사람들에게서 그분은 어떤 선도 유보하시지 않는다.” 사람들은 제각기 다른 삶의 평면에서 살고 있다. 그래서 각 사람은 각기 다른 삶에 대해 열려져 있다. 그런고로 각자가 열고 있는 삶의 평면이 채워질 때 그는 만족을 하게 된다. 따라서 그가 열고 있지 않은 것들은 채워지지 않는다 해도 부족함을 느끼지 않는다. 한마디로 굼벵이가, “나도 비둘기처럼 날아 봤으면…” 하고 소리치는 일은 없다는 말이다. 두더지는 공중을 날기보다는 땅 밑을 파며 여행하는 것을 사랑한다. 이것이 그의 삶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삶을 다른 짐승에게 하라고 한다면 죽는 거나 다름없게 된다. 이렇게 해서 주님은 그분의 무한하신 사랑 속에서 삶의 각기 다른 형태에 따라 “그분의 손을 펴시어 모든 살아 있는 것의 바램을 만족시켜 주신다.”
이런 모습은 우리의 정신적 사람의 원리에도 적용되고 있다. 주님은 우리와 협력 관계를 가지고 우리 속에서 우리가 기꺼이 열어주는 모든 영적 능력을 발달시키신다. 그래서 보이든 안보이든 많은 방법으로 그분은 우리가 기꺼이 보호받아야겠다고 하는 한, 거짓 원리나 거짓 관념으로부터 방어도 해주신다. 그분은 우리의 애정들을 지켜 주시고 인도해 주시고 이 애정들이 우리의 자연적이고 감각적인 생각에 있는 거짓으로 말미암아 짐을 떠맡는 일이 없도록 배려하신다.
주님이 우리를 보호하시는 안전 수칙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가 그분의 계명에 순종함을 매일의 생활 속에 있게 하는 것이다.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려는 사람이면 이것이 하느님으로부터 나온 가르침인지 또는 내 생각에서 나온 가르침인지를 알 것이다” (요한복음 7:17). “그분은 천사들에게 임무를 주어 모든 너희들의 길을 지키게 하신다.”

가시나무가 짓밟힘

본문에서 가시나무가 송백에게 청혼하였는데, 그 다음 말하기를, “지나가던 레바논의 들짐승에게 짓밟히는 신세가 되었다”고 쓰여있다. 삶의 형체라는 면에서 짐승이란 애정(affection)을 표현한다. 그 이유는 살아 있어 의식하는 모든 것들은 애정을 표현하기 때문이다. 이런 애정들은 선하든, 악하든 필히 어느 한쪽에 해당된다. 본문에서 언급되는 들짐승들은 좋은 측면에 속한다. 예를들면 들사슴이 자연적인 선한 애정을 표현하는 것과 같다. 자연적 인간은 그 인간의 열정에 있어서 들짐승 같다. 인간은 자기의 영성, 즉 선과 진리를 보고 아는 그의 내향적 능력에 의해 구별된다.
선한 들짐승이 가시나무를 짓밟았다. 즉 선한 자연적 애정이 영적 진리에 대한 애정과 하나가 되겠다고 하는 거짓을 밟아 버렸다는 말이다. 영적 진리에 대한 사랑이 우리 속에서 발달되는 동안, 자연적 감각 안의 거짓은 우리를 매혹시키려 하며 사기 당하도록 한다. 마치 어떤 사기꾼이 순진한 처녀를 속여 결혼하는 모습이다. 그러나 주님은 자연적 마음속에 든 선에 대한 우리의 사랑을 통해 주님의 계명을 지키고 싶어하는 우리의 바램을 보호하신다.
이 짐승은 레바논에 있었다. 즉 선에 대한 자연적 사랑이 영적 진리에 대한 지식과 하나 되어 있었다는 말이다. 자연적 마음이 더 높은 삶을 위해 기꺼이 계명을 지키는 모습이기도 하다. 자연적 수준에 있는 선에 대한 이 사랑, 주님의 명령을 지키겠다고 결정한 이 사랑이 거짓의 미묘한 실력 발휘에서 우리를 보호한다. 이 사랑은 주님의 명령을 실제에 일치시킴에서 오는 모든 암시들이 테스트 되도록 우리를 인도한다. 자연적인 사람은 영적 진리를 감각적 측면에서 이해하려고 애쓴다. 이런 애씀은 낙타가 바늘귀를 통과하려는 것과 같은 것이다. 사람들은 자연과학을 가지고 영적 생명의 신비를 관통할 것으로 기대한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두고 경멸적으로 내뱉는 말, “그는 목수의 아들이 아니냐?”와 같이, 단지 자연적 마음뿐인 사람은 자연적 감각 너머에 있는 어떤 것의 존재를 언제나 의심한다. 그리고 자기 감각으로 납득되지 않는 어떤 것이 있다는 것을 거절해 버리고 만다.
삶의 위급한 상황을 위해 언제나 준비하고 있는 사람은 누구일까? 인간이 사는 두 세계를 이해하는 사람, 자기가 알고 있는 영적 원리에 삶의 기초를 둔 이들, 신성한 섭리와 협력 관계를 갖고 있는 사람, “만사가 주님께 달려 있다고 기도하고, 만사는 자기에게 달려 있다고 하면서 일하는 사람,” 이 세상 만사에 진리에 대한 사랑을 진리에 대한 합리적 이해와 지식에 결합시키는 사람, 주님의 계명을 지키는 유용한 생활로 감각에서 오는 미묘한 거짓들을 분쇄하면서, 더불어 “사람의 자, 곧 천사의 자”로 영적 삶을 충만하게 하는 사람이다. “당신의 법을 사랑하는 이에게는 만사가 순조롭고 무엇 하나 꺼릴 것이 없다” (시편 119:165).

7
황폐된 포도원

성서 본문: 이사야 제 5장 1-7절

1. 임의 포도밭을 노래한 사랑의 노래를 내가 임에게 불러 드리리라.
나의 임은 기름진 산등성이에 포도밭을 가지고 있었네.
2. 임은 밭을 일구어 돌을 골라 내고
좋은 포도나무를 심었지.
한가운데 망대를 쌓고
즙을 짜는 술틀까지도 마련해 놓았네.
포도가 송이송이 맺을까 했는데
들포도가 웬 말인가?

3. 예루살렘 시민들아! 유다 백성들아!
이제 나와 포도밭 사이를 판가름하여라.
4. 내가 포도밭을 위하여 무슨 일을 더 해야 한단 말인가?
포도가 송이송이 맺을까 했는데
어찌하여 들포도가 열렸는가?
5. 이제 내가 포도밭에 무슨 일을 할 것인가를
너희에게 알리리라.
울타리를 걷어 짐승들에게 뜯기게 하고
담을 허물어 마구 짓밟히게 하리라.
6. 망그러진 채 그대로 내버려 두리라.
순을 치지도 아니하고 김을 매지도 않아
가시덤불과 엉겅퀴가 덮이게 하리라.
구름에게 비를 내리지 말라고 명하리라.
7. 만군의 야훼의 포도밭은 이스라엘 가문이요,
주께서 사랑하시는 나무는 유다 백성이다.
공평을 기대하셨는데 유혈이 웬 말이며
정의를 기대하셨는데 아우성이 웬 말인가?

썩어진 교회

주님이 심으신 교회가 인간에 의해 부패되었다. 신성한 사랑은 영적 삶을 받아 즐길 수 있는 능력을 인간에게 주어 창조했다. 신성한 지혜는 인간으로 그들의 근원, 조직, 운명을 알고 이해할 수 있도록 필요한 모든 진리를 공급했다. 그리고 신성한 권능은 영적 삶의 길을 걷는데 필요한 모든 능력을 가지고 인간과 교통했었다. 신성한 사랑, 지혜, 그리고 그로부터의 권능 모두는 인간에게 일해 주었고 일해 왔으며 계속 일하시고 있다. 그럼에도 인간은 주님이 그들에게 주신 삶을 뒤집어엎고 부패시켰다. 이와 같은 전복과 부패가 인간 재난을 가져오고 있다.
본문의 비유는 주님이 그분의 교회를 다루시는데 대한 표본적인 그림이요, 교회의 부패에 관해서, 그런 교회 속의 사람들의 생활에 관한 표본이 되는 그림이기도 하다. 본문의 글자적 의미에서는 이스라엘에 내려진 처방의 전복과 관계가 있다. 그러나 내향적인 영적 의미에서는 인간 마음, 그 자체의 타락된 상태와 관계된다. 그리고 특별하게 첫 기독교회의 기울어지는 상태에 관해서도 언급하고 있다.

포도원 (the vineyard)

“사랑하는 자” 또는 “임, well-beloved” 이란 포도밭의 주인, 그분의 신성한 인성, 즉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주님에 관련지어 볼 때, 본문은 주님에 의한 천적 천국과 영적 천국의 결합을 표현하고 있다. 신성한 인간 안에서의 이 결합은 영적 수준인 믿음의 선이 천적 수준인 사랑의 선과 하나를 이루는 것이다. 이런 결합이 인간의 마음 안에서든, 인류 전체로서 볼 때이든 통과해가는 단계 속의 어떤 것이든 간에 주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부터 영화하시는 주님의 인간성 속에서 다 경험하셨던 것이다. 그분은 인간의 선에 관한 모든 형체와 모든 상황들을 다 겪으셨던 것이다. 그리고 입으신 인간성, 즉 자연성 안에 있는 악으로 기울려는 유전적인 경향성을 수단으로 그분은 인간 악의 모든 형체를 만나고 극복하셨던 것이다.
주님의 포도원은 영적 수준의 교회이다. 이 교회의 중심 원리는 이웃 사랑이다. 포도는 이타애의 선, 즉 이웃 사랑이 만들어 낸 실제의 선한 일을 표현한다. 그 이유는 우리의 일이란 삶의 실제적인 원리가 바깥쪽에서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나의 임은 기름진 산등성이에 포도밭을 가지고 있었네.” 이를 글자대로 직역하면, 기름진 산등성이(a very fruitful hill)는 뿔(horn), 또는 기름의 아들(the son of oil)에 포도밭을 가지고 있었다는 말도 된다. 뿔은 위쪽으로 불거저 올라온 땅 조각, 산등성이를 표현하는데 대한 동양적인 용어이다. 이와 같은 땅은 보다 더 많은 양의 태양 빛과 열을 잡게되는고로 보다 더 생산적인 땅이다. 기름은 몸을 따뜻하게 하고 기계를 위해서는 윤활 역할을 하므로 사랑의 원리를 표현한다. 사람의 아들이란 사람이 출생시킨 것, 즉 사랑에서 파생되어 나온 어떤 것이다. 이스라엘로 표현된 영적 교회 속에서 아들은, 아들과 딸이라는 측면에서 구별해 볼 때, 진리에 쏟는 마음, 즉 지성을 표현한다. 딸의 경우는 애정을 표현한다. “기름의 아들”이란 사랑으로부터 파생되는 진리, 즉 우리가 선하고 진정한 것을 사랑하기 때문에 우리에게 납득되어 채택되는 진리들을 말한다. 따라서 주님이 “기름의 아들, 뿔에, 기름진 산등성이에 포도밭을 가지셨다”는 것은 표본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주님께서 인간 지성에 영적 교회를 심으셨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 선하고 진정한 것을 사랑하는 모든 사람에 의해 납득될 수 있는 곳, 즉 이해성에 심으셨다는 말이며, 그 납득된 진리로 살려고 하는 사람에게 영적 교회를 심으신다는 말이기도 하다.
주님은 선하고 진정한 원리로 꽉 찬 거룩한 말씀을 수단으로 인간과 교통되는 교회를 건설하셨다.

주님이 하신 것 (what the Lord did)

신성한 섭리로 위와 같은 교회를 건설하심에서, 포도밭이 열매 풍성한 조건이 될 수 있는 교회로 되도록 그분이 하실 수 있는 모든 것을 해 두셨다. “그분은 포도밭에 울타리를 쳐 두셨다.” 이는 교회가 악의 영향에서 보호받을 수 있는 울타리, 또는 벽을 말하는 바, 일상생활을 위한 계명, 즉 십계명이라는 명백한 진리를 말한다. 신성한 말씀의 글자는 인간의 자연적 감각에 비교해서 보면 말씀의 내향적 의미인 영적 진리를 보호하는 울타리이다. 씨의 껍질이 속 알맹이를 보호해주듯, 인간의 폐와 심장을 보호해 주는게 갈비뼈이듯, 인간 두뇌를 보호하는 것이 두개골인 것 같이, 성경의 글자적 의미는 내적 의미인 영적 진리를 보호하는 벽이다.
이와 같은 식으로, 성경의 글자적 의미가 주는 가르침, 특별히 꼬집어 말한다면 십계명은 악의 습격에서 인간의 영을 보호하는 울타리로서 존재하는 것이다. 단순하다 보니 오히려 미련한듯 보이는 사람이든지, 책을 가지고 교육을 받지 못한 사람이라해도, 그가 주님의 계명을 이해하는 대로 지킨다면, 그는 감각에서 오는 오류로 받게 될 피해를 예방할 수 있고, 악령이나 이교도들의 미묘한 논리에 휘말리지 않는다.
주님은 그분의 교회를 건설하는데 있어서, 십계명을 가지고 교회에 울타리를 쳐 놓으셨다. (참조; 한글 성서의 경우, “임은 포도밭에 울타리를 치고…” 대신, “임은 밭을 일구어…” 라고 하여 울타리를 침(fenced) 대신 일굼(digged)을 사용했다. 이 경우, 땅을 일굼이란 자연적인 마음을 열어 그 마음의 조건을 탐사하고 검증함을 뜻한다.)

돌 (stone)

그 다음 그분은 포도나무의 성장을 방해하는 돌을 골라내셨다. 즉 감각에 있는 거짓 원리, 이것이 영적 성장의 길에 버티고 있다는 말이다. 좋은 의미에서 돌은 자연적 진리를 표현해 준다. 그러나 자연적 진리가 마음 안에 놓여 있을 때, 포도밭에 있는 돌과 같이, 영적 진리라는 포도나무의 성장을 간섭하게 되는바, 이 진리는 거꾸로 된 형체, 즉 거짓으로 변해 버린 진리가 되고만다.

포도나무 (the vine)

주님은 그분의 포도원에 “좋은 포도나무,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으셨다. 이 포도나무란 주된 동기로서 이웃 사랑의 원리, 순수한 영적 진리의 원리를 교회에 심으셨다는 말이다. 이와 같은 원리가 생각 속에서 자라는 모습이 포도원에서 자라는 포도나무로 표현되어지고 있다. 이 원리가 애정(하고 싶은 마음, affection)에 의해 수행될 때, 일상생활 안에서 실습될 때 원리의 실제 열매는 영적 이타애인 이웃에 대한 실용적인 사랑의 선한 일, 좋은 포도들이다.

망대 (tower)

포도원이라는 교회의 한 가운데에 주님은 망대를 세우셨다. 망대란 지상의 표면에서 높혀진 위치, 그래서 보다 더 넓은 시야를 보게 해주어 더 높은 관점을 볼 수 있게 하는 시설물인 바, 이는 내면의 진리, 즉 보다 높고 깊은 안쪽에 해당되는 관념으로부터 보는 것을 표현한다. 이 망대가 한가운데 세워져 있다는 것은 이 관념이 우리의 내향적 사고 안에 있다는 말이다. 즉, 주님께서는 인간에게 진리의 더 높고 더 내면적인 형체나 양상을 볼 안쪽 능력을 주셨다는 말이다. 이 능력은 영적인 빛으로 진리를 보고 납득하는 능력, 즉 합리성(rationality)을 말한다.

포도주 틀 (술틀, wine-press)

그리고 주님은 포도원에 “포도주 틀”도 만드셨다. (또는 포도주 통을 파셨다) 포도주 틀에 의해 포도는 짜 지고, 그 포도즙은 포도주를 만들기 위해 축출되어지는 바, 포도주 틀이란 합리적 능력을 표현해 준다. 우리가 시험받는 동안 이 능력 속에서, 이 능력을 도구로 삼아 우리는 실생활에서 생산하는 선한 일로부터 진리의 영적 포도주를 축출해 낸다. 포도나무 그 자체로 본다면, 인간 마음속에서 작동해서 선한 열매를 생산하는 진리를 표현한다. 그러나 이 포도나무의 좋은 열매, 즉 선한 일은 진리의 더 높은 형체를 산출해 낼 수 있다. 이것이 포도주로 표현되고 있다. 예를 들면, 주님은 여러분의 마음에 그분의 말씀을 통해 포도나무를 심으신다. 그 다음 그분은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는 원리로부터 타인을 대해야 한다고 가르치신다. 그 결과 여러분은 그 진리를 교리로서 붙잡게 된다. 만일 여러분이 그 진리를 살아있는 포도나무로서 붙잡고 있으면 그 원리는 자라나서 그 원리로부터 행동할 것이다. 그러면 여러분이 행한 선한 일은 영적 포도가 된다. 이 시점에서 여러분은 더 전진할 수 있다. 여러분은 더 확증된 형체 안에서 이 진정한 원리의 생명, 즉 참 영을 얻을 수 있다. 여러분에게 시험이 발생할 때, 그 원리로 서있는 여러분의 믿음을 가지고 그 시험과 부딪친다. 합리적 사고라는 압력기는 포도라는 자연적 쥬스(juice)로부터 진리의 영을 밝혀 낸다. 그리고 이 쥬스는 그것이 순수한 포도주가 되기 전 시련을 통과하여 걸러져야 한다. 이 쥬스 속에는 끝까지 견뎌 낼 수 없는 어떤 것도 있다. 이런 불순물은 쥬스가 발효되는 가운데 내던져져 멀리해져야 한다. 다시 말해 비록 여러분이 이웃 사랑의 원리로 행동되었다 해도, 여러분의 마음이나 행동에는 떼어 내어야 할 어떤 불순물, 즉 자아에 속한 어떤 것이 있다는 말이다. 그래서 시험들이 계속 오는 것이고, 그 원리에 얼마나 충실해야하는지가 시험대 위에 계속 서게되는 것이다. 만일 여러분이 시련을 견뎌내면서 지속적으로 서 있다면, 정신적 포도인 자연적 쥬스는 순수해진다. 그리고 찌꺼기 같은 불순물이 내던져지고, 여러분 속에 있는 진리는 정신적 발효를 통해 삶 속에서 확증된 진리, 영적 진리라는 순수한 포도주가 되어진다.
그분의 교회를 건설하심에 있어서 주님은 인간에게 진리를 진리로서 보는 능력, 즉 합리적 능력을 주셨다. 이 능력을 수단으로 인간은 자연적 진리에서 영적 진리로 진보해 갈 수 있다. 이와 같은 사람의 마음속에서 주님은 물을 포도주로 변하게 해주신다.
지금 주님은 인간을 위해 위와 같이 변하게 하는데 필요한 모든 것을 해 놓으셨고, 이를 수용할 정신적 능력에 필요한 모든 것도 인간에게 주셨고, 거기에 필요한 영적 양식과 도움까지 공급해 주셨다. 이제 그분은 인간에게 해 놓으신 것들에 적절한 열매가 생산되리라고 생각되시어 인간을 쳐다보고 계신다. 그분은 포도 즉 이타애의 선한 일들을 인간에게 기대하고 계신다.

들포도 (wild grapes)

그러나 인간이 생산해 낸 포도는 포도이긴 하되, 달콤한 천국적 영이 없는 시큼하고 맛없는 포도들, 즉 껍데기에 불과한 선한 일 뿐이었다. 다시 말해 형체 뿐인 이타애, 바깥쪽에서 볼 때 도덕적이고 친절한 체하여 결국 있어지는 것이라곤 교활(policy)과 자아사랑 뿐이다. 그런데 왜 이와 같은 비천한 들포도가 주님의 교회 속에서 생산되는 것일까? “예루살렘 시민들아! 유다 백성들아! 이제 나와 포도밭 사이를 판가름하여라. 내가 포도밭을 위하여 무슨 일을 더 해야 한단 말인가? 내가 해 주지 않은 것이 무엇이 있는가? 포도가 송이송이 맺을까 했는데 어찌하여 들포도가 열렸는가?” “예루살렘 시민들”이란 진리 안에 있는 선한 원리들이다. “유다 백성, men of judah”이란 모든 선 안에 있는 진리들이다. 이런 것들은 교회 속의 사람들의 마음에 필경 있어져야 할 것들이다. 그런데 교회 속의 사람들은 선하고 진정한 인간이 아니었고, 선하고 진정한 원리를 뒤집는 자, 부패시키는 자들이었다고 주님은 선포하고 계신다. 인간에게 영성으로 가는 길을 가르치고 인도하며, 선함으로 인도해주기 위해 신성한 사랑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주님은 다 해주셨다. 인간의 악은 인간을 위한 주님의 설비에 어떤 미흡함이 있어서 발생된게 아니다.

섭리 (providence)

시대를 따라 내려가면서 지상에는 각기 다른 교회들이 연속되어 왔는데, 그 때마다 주님은 인간을 위해 하실 수 있으신 모든 것을 해 주셨다. 그리고 신성한 인성으로 세상에 오심은 인간을 위한 그분의 은총 중 가장 큰 것이다. 주님이 해주지 않으신 어떤 것이 있어 주님이 더 하실 일이 있었을까? 아주 오랜 뒤인 지금, 우리는 인간의 자손들에게 더 충분한 빛과 생명이 쏟아져 나오는 영적 의미, 그분의 재림을 가지고 있다. 확실한 것은, 우리는 거듭 나아가는데 필요한 모든 수단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곧바르게 걷는 이들에게 주님은 어떤 선도 유보하시지 않는다.” 그러나 주님이 우리를 위해 해주시지 않는 것은 우리가 어리석은 가운데서 그분께 해 달라고 조르는 때이다. 설사 해주시지 않는다 해도 그분은 우리가 당장 가져야 할 가장 좋은 영적인 모든 것을 받는 길을 열어두시고 계신다. 그분은 우리가 바래야 할 모든 것을 주실 채비를 하고 계신다. 그러나 인간은 주님이 인간에게 주시고자 하는 영적 축복을 기쁘게 받지 못해 왔던 것이다.

결과 (results)

본문이 선포하는 바, 주님은 그분의 포도원이 파괴되도록 내버려두시고, 그것을 구원해 주시지 않을 것이라 말하고 있다. 이에 대한 글자적 의미는 실제적 삶에 대한 사실들을 서술하려는 의도는 없다. 그러나 이타애의 표현이라는 측면에서 이는 첫 기독교회가 그 교회 속의 거짓 가르침으로 해서 되어 갈 것들에 관해, 그래서 교회 멤버들의 악한 삶에 의해 되어질 것을 예언하고 있다.
의미를 생각해 보고자 하면, 이 구절들에서 언뜻 보여지는 것은, 주님이 교회 속에서 일어나는 위와 같은 황폐함으로 인해 사람들을 처벌하는듯 여겨진다. 그러나 생명 자체이신 주님은 언제나 인간에게 생명을 주시고자 애쓰신다. “악이 사악한 자를 죽인다.” 주님이 인간을 파괴하시지 않는다. 오히려 “그분은 감사하지 않는 자, 악한자에게까지 친절하시다.”
그러나 주님의 포도원 울타리는 거두어지고, 담은 허물어져 적들에 뜯기고 짓밟히는 바, 그 이유는 인간이 자기들의 일상생활을 보호해 주는 신성한 말씀 속의 진리들을 더 이상 간직하려 들지 않기 때문이다. 그 결과, 온갖 종류의 악과 거짓이 인간 마음에 돌진해 들어와 마음 속의 선과 진리를 파괴해 버린다. 인간이 자신의 느낌과 생각을 합리적으로 검증해서 악하고 거짓된 것을 던져버리지 않을 때, 주님의 포도원은 “순을 치지도 아니하고 김을 매지도 않게 된다.” 이러면 악과 거짓인 가시덤불과 엉겅퀴는 쑥쑥 자라나 자유로이 마음 속을 점령해 간다. 성경의 글자로부터 새로운 진리가 마음에 계속 공급되지 않을 때 구름이 비를 내리지 않는 것이다. 이러면 주님의 말씀을 통해 천국에서 오는 진리의 어느 한 조각도 인간 마음에 더 이상 받아지지 않게 된다. 이 결과의 종착역은 영적 진리에 열려져야 할 내면의 마음이 닫혀 있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공평을 기대하셨는데 유혈이 웬 말이며 정의를 기대하셨는데 아우성이 웬 말인가?” 즉, 주님은 인간을 위해 총명과 선함을 설비해 두셨다. 그러나 그들은 이것을 거절하고, 오히려 거짓의 어두움과 악의 냉혹함을 더 선호하여 주님에게 곡성만 들려주었을 뿐이다.

주님의 방법 (the Lord’s ways)

그럼에도 주님의 방법은 동등하고 정당하며 사랑과 자비로 꽉 차 있다. 인간은 태어나고 싶어 태어나는게 아니다고 사람들은 불평한다. 그리고 인간은 악에 기울려는 유전적인 경향성이라는 조건을 지니고 세상에 오게 되었다고 말하기도 한다. 이는 맞는 말이다. 그러나 인간은 자기가 지닌 유전적인 각종 경향성에 대해서는 책임이 없고 단지 그가 사는 것만에 책임이 있다. 만일 그가 그의 경향성들을 바꾸고 싶다면 이는 언제나 가능하다. 그의 선함이 얼마나 선을 행하고 싶어하고 악에 얼마나 저항하고 싶어하느냐에 달려 있을 뿐이다. 우리의 믿음까지도 우리의 지배하에 존재한다. 그 이유는 모든 사람은 그의 인격, 즉 그의 실제적인 원리들에 따라 믿는 것이지 단지 그의 교리적 관점에서 믿는게 아니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이 되어지는 것은 결국 그가 영적 인격의 집을 짓는데 어느 재료를 사용하기를 바래느냐에 달려 있다. “옳은 일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만족할 것이다.” 인간은 주님의 도우심을 가지고 자신의 인격을 바꿀 수 있다. 모든 천국은 우리에게 열려 있다. 그 이유는 인격 속의 모든 천국적인 상태가 우리에게 열려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선하게 되는 것을 기쁘게 여기는 만큼 우리는 선해진다. 우리를 천국에서 멀어지게 하는 것은 오로지 자신 속의 악들뿐이다. 따라서 선함의 척도는 우리가 악을 금하는 정도에 비례된다. 인간은 자기의 기회에 대한 표준, 즉 그에게 가능성이 주어진다면 되어지고자 원하여 이루어 놓는 것에 의해 심판되어진다. 주인의 뜻을 모르는 무지한 종과 주인의 뜻을 잘 아는 총명한 종이 주인의 명령에 불순종했을 때, 무지한 종이 경미한 처벌을 받는 반면, 총명한 종은 사정없는 매질이 가하여진다. 심판에서 모든 사람은 자신이 살아온 것을 도로 받는 것이다. “전능하신 주 하느님, 주께서 하시는 일은 크고도 놀랍습니다. 만민의 왕이시여, 주님의 길은 바르고 참되십니다” (요한계시록 15:3).

포도원을 돌보심 (care of the wine yard)

심겨진 이후, 포도나무에 필요한 것은 꾸준한 돌봄이다. 땅은 언제나 일구어진 상태여야 하고, 그 속의 돌들은 골라내어져 있어야 한다. 가지는 위로 치켜들어서 바람이 잘 통하고 햇볕을 잘 받아야 할 것이다. 좋은 가지는 정리해 주면서 죽은 가지는 잘라 내야 한다. 인간 마음도 위와 같은 꾸준한 돌봄 즉 영적인 수양이 있어야 한다. 다시 말해 인간 마음은 훈련되어야 할 필요가 있고, 정리 정돈되어야 하며 돌이나 잡초 같은 것의 거리적 거림이 없어야 한다는 말이다. 밭에서 지긋지긋하게 구는 잡초 씨 같은 우리 속의 유전적 경향성들은 틈만 있으면 포도나무 사이에서 고개를 디밀고 올라온다. “나에게 붙어 있으면서 열매를 맺지 못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모조리 쳐내시고 열매를 맺는 가지는 더 많은 열매를 맺도록 잘 가꾸신다” (요한복음 15:2).

가능성 (possibilities)

튀어나오는 모든 잡초가 성장하도록 내버려두어 씨를 맺도록 방치한다면 그 포도원은 무엇이 될까를 상상해 보자. 그 다음 여러분 속의 악에 기울려는 유전적인 경향성을 생각해 보자. 그리고 여러분의 나쁜 감정이나 생각들이 삶의 실제 행위에 튀쳐 나오게 방치한다면 여러분은 무엇이 되어질까 상상해 보자. 이제 여러분은 주님이 여러분을 위해 하신 것, 여러분에게 가르쳐 주신 것, 여러분을 인도해 주신 것, 여러분의 정신적인 포도원을 돌보아 주신 방법에 대한 것을 보게 될 것이라 생각한다. 그분이 더 해주셨어야 했던 것은 무엇이 더 있을까? 그리고 만일 여러분이 들포도를 생산했다면, 왜 그렇게 되었을까? 사랑의 하느님은 가장 높은 천사들에게 해준 것만큼 여러분을 위해서도 해주고 계신다. 여러분은 가장 높은 천사들이 모신 똑같은 사랑하는 구세주를, 똑 같은 신성한 말씀을, 게다가 천사들이 지닌 똑같은 인간 본성을 가지고 있다. 가장 높은 천사들의 인격 역시 여러분에게도 열려져 있다. 여러분은 전진해서 그 인격을 붙잡을 수 있고 자신의 것으로 간직할 수도 있다. 언제, 어느 때든지 주님은 그분의 천사들에게 임무를 주어 여러분에게 보내서 갖가지 방법으로 그 인격을 간직하도록 배려하신다. 단 하나 조건은 여러분이 천사의 인도를 기쁘게 받을 것이냐에 달려 있다.
우리는 새 예루살렘에 관해 밝혀 주신 귀중한 계시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를 위해 하실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해주셨다. 그런데 우리는 자신의 정신적 포도원을 잘 가꾸기 위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는가? 반문해 볼일이다. 그리고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지금도 하고 있는가? 다시 자문자답해 보아야 한다. “너희가 많은 열매를 맺고 참으로 나의 제자가 되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다.” 포도원의 임자가 시작하셨듯이 포도밭에 뒹구는 쓸모 없고 해만 주는 것들을 청소해 냄을 필두로 우리는 시작해야 한다. 감각적인 삶인 잡초나 돌밭에서 주님의 포도나무는 번성할 수 없다. 그러므로 주님의 포도원에 있지 않아야 할 것들이 우리 마음을 점유하지 않도록 해야 함을 우리는 똑바로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너희는 양식이 아닌 것을 위해 돈을 소비하며 만족치 못할 것을 위해 수고하느냐?” “몸을 씻어 정결케 하여라. 내 앞에서 악한 행실을 버려라. 깨끗이 악에서 손을 떼어라. 착한 길을 익히고 바른 삶을 찾아라… 너희가 기꺼이 순종하면 땅에서 나는 좋은 것을 먹게 되리라” (이사야 1:16-17,19).

8
감복숭아 가지와 끓는 가마솥

성서 본문: 예레미야 1장 11-14절

11. 야훼께서 나에게 말씀을 내리셨다. “예레미야야, 무엇이 보이느냐?” “감복숭아 가지가 보입니다” 하고 내가 대답하였더니, 12. 야훼께서 이르셨다. “바로 보았다, 나도 내 말이 이루어지는가 이루어지지 않는가를 깨어 지켜 보리라.”
13. 야훼께서 두 번째로 이렇게 말씀을 내리셨다. “이번에는 무엇이 보이느냐?” “부글부글 끓는 솥물이 북쪽에서 쏟아져 내리려 하고 있읍니다” 하고 내가 대답하였더니, 14. 야훼께서 이르셨다.
“이 나라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북녘에서 재앙이 쏟아져 내리리라.”

황폐함

본문의 비유는 두 개의 환상으로 구성되고 있다. 예레미야는 예언자요 예언자로서 영의 눈이 열린 사람이어서 영의 내향적 세계가 되어가는 것들을 볼 수 있었다. 이 환상들은 인간 마음의 상황들을 표현하기 위해 영계의 영적 본체로 구성되어 있다. 이와 같은 경우가 성경에는 많이 기록되어 있다.

환상들 (visions)

주제는 황폐된 것, 또는 적들에 의해 땅이 황폐해진 것이다. 그래서 영적인 주제는 악을 탐닉함으로 황폐해진 마음이다.

가지

가지(막대기, 지팡이)란 통치자의 주권 같은 능력, 권위, 권세를 표현한다. 통치자의 일이 모든 것을 그의 명령 밑에 두려는 것, 또는 이런 목적을 위해 비질서 하에 있는 이들을 교정하고 훈련시키는 등등, 통치자가 가할 수도 있는 처벌을 포함하는 훈련과 교정을 표현한다.

감복숭아 나무

위의 경우의 가지는 감복숭아 나무로부터 이다. 자라서 열매를 맺는 나무는 인간의 마음 안에서 자라나는 원리들과 그 원리들이 실제 삶에서 열매를 맺는 것을 표현한다. 각기 다른 나무들은 각기 다른 원리, 각기 다른 마음의 상태를 표현하여 이것이 인간 안에, 또는 각 개인 안에서, 또는 집합된 마음인 교회 안에 있게 된다. 이런 연유로 나무가 성경에서 많이 언급되고 있기도 하다.
감복숭아(살구, almond) 나무는 봄철에 가장 빨리 꽃이 핀다. 1월에 꽃이 피고 3월에 열매를 맺고 있다. 그래서 이 나무는 봄의 선구자이다. 히브리어 뜻을 보면 감복숭아는 바삐 서두는 것, 조급함(hasty)이라는 뜻이 있다. 그래서 이 나무는 “성급한 나무” 또는 “깨우는 자”라고도 불린다. 따라서 본문에서 예레미야에게 하시는 주님의 대답에서 이 나무의 이름의 뜻이 응용됨을 발견하게 될 것이라 본다. 즉 “바로 보았다. 나도 내 말이 이루어지는가 이루어지지 않는가를 깨어 지켜보리라.” 예레미야가 본 것은 다르게 말하면, “성급한 나뭇가지가 보입니다” 일는지 모른다. 그래서 감복숭아 나무는 조속히 오게 되는 것에 대한 표현물, 또는 약속이나 예언의 성취가 곧 닥친다는데 대한 표현인 것이다.
영적으로, 새 계절을 제일 먼저 잡는다는 면에서의 감복숭아 나무는 진리가 우리 내향의 삶에 적용될 때와 같이 내면의 진리를 지각함을 표현한다. 그리고 이 지각은 우리가 거듭날 때 자연적 마음 안에 존재하는 심정의 선함을 바탕으로 파생된다. 따라서 감복숭아 열매는 일상생활이나 일 가운데 있는 실제적인 선함을 표현하기도 한다. 이 나무의 가지가 지팡이(rod)로 전환될 경우, 이는 내면의 진리에 대한 우리의 지각은 우리의 자연적 감각들의 어리석은 생각이나 바램들을 훈련시켜 교정하는데 사용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이 목적을 위해 성경의 글자, 특별히 십계명은 이 지팡이의 가장 바깥의 형체를 담당하고 있다. 그 이유는 신성한 말씀의 글자는 진리가 우리 지각에 올 수 있도록 하는 수단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신성한 말씀의 글자는 우리의 생각이나 느낌, 그리고 행동들, 즉 실제 삶 속에서 우리를 교정하고 훈련시키는 지팡이이어야 한다. 학교에서 선생님들이 막대기를 가지고 시선을 모으거나, 경고하고 훈련시키는데 사용하듯, 신성하신 선생님은 언제나 말씀이라는 막대기를 잡고 계시면서 선하고 진정한 원리에, 그리고 선한 행동쪽으로 우리의 관심을 애정 깊게 불러서 당기신다. 그 이유는 우리가 삶의 법칙에서 탈선될 경우 부드러운 어조로 경고하시고 영원하신 선은 우리의 잘못된 행위에서 우리를 훈련시키기 때문이다.
자신 속의 악한 경향성에 저항하면서 선을 행하려는 사람의 경우, 주님께 고백하는 말, “막대기와 지팡이로 나를 인도하시니 걱정할 것 없다”이다. 주님이 그분의 사랑의 섭리 가운데서 필요하신 것은 “만국을 쇠지팡이로 다스리심”이다. 즉 우리 마음 속에 있는 모든 것을 훈련시키시되 자연적 진리라는 엄격한 법칙에 의거하신다는 것, 진리를 우리의 행동이라는 자연적 삶에 응용시켜 가신다는 말이다. 감복숭아 나무에 관한 첫 환상은 뭔가가 절박하다는 것, 또는 뭔가가 급속도로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암시한 것이다. 감복숭아 가지가 보였다 함은 교정과 훈련이 있을 것임을 미리 말해 두신 것이다. 그래서 두 번째 환상, “끓는 솥물”은 그 훈련의 형체가 어떤 것인지, 그 훈련이 언제 있을 것인지를 암시하고 있다.

끓는 솥 (seething pot)

둘째 환상에서 예레미야는 “끓는 솥물” 또는 끓는 냄비, 고기 가마가 끓어올라 가장자리로 넘치려 할 정도로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가마솥, 급기야는 흘러 넘치 게 될 것 같은 상황의 가마솥을 본 것이다.
글자적인 표현에서의 부글부글 끓는 고기 가마솥은 장차 북쪽에서 내려오는 느부갓네살왕의 군대 때문에 크게 흔들릴 예루살렘성을 표현한 것이다. 가마솥 속의 내용물들이 끓어 넘침은 강력한 적들로 인해 유대인들이 파괴되고, 재난과 혼란이 있게 될 것을 적절히 표현한 것이다.
영적으로, 움푹 들어간 용기인 가마솥은 마음에 있는 가마솥, 다시 말해 우리의 의지와 이해성을 담고 있는 진리의 서술, 즉 교리를 표현한다. 각양 각색의 사람들이 서로 비슷한 교리들을 교리로서 붙잡을는지 모르나 어찌됐든 각양 각색의 교리들은 그들의 정신적인 용기 안에 있게 된다. 그래서 어떤 경우든 그 용기가 사용 중에 있으면 담겨있는 내용물 여하에 따라 그릇의 성격이 결정된다. 그 내용물이 건강에 좋은 음식일 수도 있고, 때로 심하게 나쁠 경우는 사람을 죽게 만들 수도 있다. 나쁜 의미에서 고기 가마라면 감각적 쾌락을 표현한다. 그 이유는 그 내용물이 육의 욕망이기 때문이다. 출애굽기 16장을 보면, 에집트를 떠나 가나안으로 향하는 도중의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에집트의 고기 가마를 무척 그리워하였다. 그리고 만나에 관해서는 경멸하는 어조로 말했다. 이 만나는 주님이 그들을 위해 마련해 주신 것이다. 이 양식은 고기 같이 그들의 식욕을 즐기게 하고 뱃속을 무겁게 채워주지 않는 “가벼운 양식”이다.
사람들은 진정한 교리를 자기의 교리로서 붙잡을 수 있다. 그럼에도 그는 그것을 육의 욕구로 채우고, 그의 자연적인 마음을 감각적 생각으로 채울 수도 있는 것이다.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이 하느님을 믿고 있다고 하자. 그래서 그는 자기 삶의 이런 저런 것들에 대해 하느님께 감사한다. 그리고 저녁 식사에 앉으면 자기 앞에 차려진 다채로운 음식에 감사 기도를 올린다. 그런데, 그의 먹는 모습을 보면 며칠 굶은 사람 같이 먹는다. 옆에서 본다면, 그는 마치 살려고 먹는다기 보다 먹으려고 사는 듯 여겨진다. 이럴 경우, 비유적으로 보면, 그는 좋은 가마솥, 또는 교리를 사용하고는 있지만, 그는 육의 욕구라는 음식을 가지고 자기 솥을 채우고, 감각적 오류라는 물을 사용한다. 그 다음 육의 욕구와 감각적 오류를 넣은 자기 솥을 자아 사랑이라는 불로 끓이는 격이다. 자아 사랑의 불은 그 본성이 자기 불을 조절할 줄을 몰라서 그 솥은 끓어 넘치게 되어 모두 못쓰게 되고 만다. 넓은 측면에서의 교회 역사에는 위와 같은 모습들이 각 교회 말기에 존재한다. 즉 악한 열정이 인간을 통치해 가되 그 교회의 교리를 가진 이들 모두를 통치해 버릴 때까지 그 열정은 그칠줄 모르고 계속 있어지는 것이다. 자아 사랑이라는 악령은 만사가 끓어 넘쳐 한도를 넘어 끝장을 보는 것을 그 본성으로 가지고 있어 결국 영적 파멸이 있게 될 때까지 이어진다.

북쪽 (the North)

무질서하고 약해진 상태가 되면 북쪽에 있는 적들이 마음으로 내려와 그나마 잔류해 있는 조금의 생명까지 쓸어버린다.
본문은 말하기를, 가마솥이 북쪽에서 쏟아져 내리려 하고 있다고 했다. 이를 다른 표현으로 말하면, 가마솥의 열림(얼굴이)이 북쪽을 향해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고대 이스라엘은 인구와 영토에 비해 돌이 많은 편이어서, 연료를 채취하기가 힘들었다 .그래서 경제적인 방법, 즉 집안에 구덩이를 파고, 그 주위를 돌로 둘러치고 솥을 걸어 열의 손실을 막으면서 음식을 끓였다. 그래서 이 구덩이의 사면 중 한쪽은 연료를 더 보충할 수 있도록 열려 있었다.
이런 불구덩이와 솥을 예레미야가 환상으로 보았을는지 모른다. 그리고 연료를 넣기 위해 열린 구멍이 북쪽이었을 것임이 본문을 통해 추측된다.

나침반의 방위 (the points of the compass)

나침반의 방위는 각기 다른 정신적인 관점(standpoints)을 표현한다. 동쪽, 이곳은 태양이 떠오르는 곳으로 보다 높고 보다 내면에 속한 마음의 상태들을 표현한다. 주님을 처음 인식하게 되는 방위, 즉 사랑을 원리로 삼기 위해 주님을 찾는 경우가 이에 해당된다. 남쪽, 이곳은 태양이 정오에 위치하는 방위이다. 그래서 가장 밝은 빛이 있을 때인데 이는 총명해지기 위해 진리를 찾는 경우, 즉 진리의 총명을 표현한다. 서쪽, 이곳은 태양의 하루 일과 중 마지막에 도달되는 곳이고, 동쪽에 반대되는 바, 이는 사랑과 선함의 측면에서 마음이 보다 희미해져 있는 상태를 표현한다. 다시말해 보다 외적인 상태, 영적인 상태에 비해 보다 더 자연적인 상태에 있음을 말한다. 남쪽의 반대 위치인 북쪽은 진리 또는 총명의 측면에서 보다 더 희미해져 있는 상태, 영적 총명보다 자연적 상태에 치우쳐 있는 경우이다.
이상 살핀바와 같이, 북쪽은 자연적 마음 안에 있는 상태를 암시해 준다. 그래서 거듭나는 사람의 경우, 이 자연적 상태는 진리라기보다 거짓 사상의 상태일 뿐이다. 이렇게 희미한 상태에서는 마음에 알려져 있는 영적 진리는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아 사랑이라는 악에서 방어해 줄 진리가 없는 것이다. 이럴 경우 육의 욕구는 과감히 돌진해 들어온다. 그리하여 각 사람 속의 교리라는 가마솥은 거짓과 악한 느낌으로 채워지고 만다. 그런 다음 그 가마솥은 끓어오르고, 가마솥의 얼굴은 북을 향하고 있어 타락된 사람 속의 희미한 것들과 차디찬 심정으로부터 오는 것은 무엇이든지 받아 넣는 것이다.
가마솥의 얼굴이 어느 쪽을 향해 있느냐는 것에는 보다 더 심오한 의미가 들어있다. 인간 신체에서 얼굴은 마음의 지표(index)이다. 그 이유는 마음 속에서 행동되는 것은 무엇이든지 얼굴에 표현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람들이 반듯이 서 있게되면 얼굴을 포함하는 그의 머리 부분은 타 부분보다 언제나 위쪽에 위치한다. 그런고로 얼굴은 안쪽의 삶, 인간의 내면을 표현한다. 그래서 우리는 상대방이 실지 갖고있는 생각과 느낌을 알기위해 흔히 상대방의 얼굴을 훑어본다. 그리고 우리가 뭔가에 접촉하기를 원할 때, 우리는 얼굴을 그쪽으로 향하게 한다. 그러나 자신이 상대방의 의견에 반대임을 보여주고 싶을 때 고개를 돌려 얼굴을 뒤쪽으로 향하게 하거나 아예 등을 돌려 댄다. 이상 살핀 의미를 참작해서 보면, 북쪽을 향해 있는 가마솥의 얼굴은 영적인 북쪽을 향해 얼굴을 댄 것인바, 이는 북쪽에서 흘러오는 영향들을 받겠다는 뜻이다. 이런 표현적 의미는 다른 성경 부분에서도 그 일반적 원리에서는 같고 관점만 다를 뿐이다.

끓어 넘침 (boiling over)

본문이 제시한 표현상의 그림은 매우 강하다. 부글부글 끓는 솥, 그 속의 내용물이 끓어올라 넘치는 모습, 넘쳐흘러 못쓰게 되고, 더욱 끓어 결국 태우기까지 해서 솥 속에 든 것은 무엇이든 다 파괴하고 마는 모습은 인간의 마음상태 중, 희미하게 하고 죽게 만드는 자아 사랑의 감각적 욕구가 마음 전체에 열을 가하게 될 때의 상태를 표현한다. 그리고 이 상태는 느부갓네살 왕의 군대가 돌진해 들어오는 것같이 지옥의 모든 영향력이 마음에 돌진하는 찰나를 그려주고 있다. 악과 거짓이 필연적으로 저지르고야 마는 것은, 악과 거짓에 문이 열린 마음을 파괴하고 천국 쪽에 대한 마음 문을 확실히 닫히게 하는 것이다.

예레미야 (Jeremiah)

이 환상은 예언 초기에 있는 젊은 예언자 예레미야에게 처음 보여진 것들이다. 그래서 그로 하여금 자기의 일과 사명이 무엇인지 짐작하게 해준 환상이다. 감복숭아 나뭇가지에 관한 첫 환상이 그를 가르친 것은, 그의 사명은 이스라엘 백성 위에 이 나뭇가지를 사용하라는 것, 타락해 가는 그 백성들의 세대 속에서, 그들 교회의 지도자들까지 이기적이고 감각적 삶으로 다 포기된 상태 하에서, 그로 하여금 그 백성들을 교정하고, 타이르고, 훈육하라는 것이었다. 교회가 한참 기운 상태에서의 예언자란 그의 목소리가 높아질 수밖에 없고 행동을 바꾸라는 외침은 매우 고조될 수밖에 없을 것은 뻔한 이치이다.
그래서 그의 이야기는 교회의 파멸, 국가의 파멸에 관해 말할 뿐이어서 매우 슬픈 이야기들이다. 그래서 그는 “슬피우는 예언자”라 불렸고, “애가”의 저자이기도 한 것이다. 이 예언자 주위의 모든 것, 즉 백성의 상황은 퇴보되어 악의 열매가 무르익어 악의 추수인 파괴가 성급히 다가오고 있었다. 이런 형편 속에 주님은 예레미야에게 큰 사명을 놓으셨다. 즉, “보아라! 나는 오늘 세계 만방을 너의 손에 맡긴다. 뽑기도 하고 무너뜨리기도 하고 멸하기도 하고 헐어 버리기도 하고, 세우기도 하고 심기도 하여라”고 명령하셨던 것이다. 그 이유는 이와 같은 때, 이런 상황에서 어떤 이들은 예언자의 경고에 경청해서 도움을 예언자에게 청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예언자는 하느님의 말씀을 그들에게 운반해 주게 된다. 이러므로써 그들은 자기들의 심정에 새로운 애정을, 그들의 이해성에 새 생각을 심게 됨으로써 새 삶을 건설하여 새로운 실제 삶으로 단련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실지 응용 (practical application)

우리가 의아해 할 수밖에 없는 것은, 예레미야 시대에 이스라엘이 끔직한 상황들에 처했었는데, 더욱이 그런 상황에는 그 당시 학식이 있다는 자들까지 포함해서 이다. 게다가 하느님이 선택한 백성이라고 자처한 그들이기도 했는데 말이다.
그러나 오늘날에도 이런 비슷한 상황은 우리가 자신 속에서 악의 영향력이 행세하도록 허용한다면 언제나 가능한 일이다. 주님의 명백한 진리는 심각한 경고와 교정을 말해주느라 오늘도 우리 마음속을 거닐고 있으시다. 감복숭아 나무가지가 고대 이스라엘에게 필요했듯 우리에게도 필요한 가지이다. 우리가 신성한 말씀의 나무가지 밑에서 생각하고 느끼며 행동하지 않으면 단 하루도 영적으로 안전치 못하다. 우리는 정신적인 설비들을 갖추어 가는데 가장 보증되는 교리라는 가마솥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 가마솥 안에 무엇을 넣고 끓여야 할까? 이 솥에 열을 공급해 줄 불은 어디로부터 있어져야 하는 것일까? 내향의 삶이라는 일용할 양식을 끓여줄 영적인 물의 종류는 무엇일까? 지금이야말로 우리가 예레미야의 일을 자신을 위해 해야 할 때이다. 즉 우리 마음에 있는 것을, “뽑기도 하고 무너뜨리기도 하고 멸하기도 하고 헐어버리기도 하고, 세우기도 하고 심기도 해야 할 것이다.” 또한 우리는 허리를 동이고 일어나 주님이 하신 말씀을 자기 마음에 일러주어야 할 것이다.

9
쓸모 없게 된 허리띠

성서 본문: 예레미야 13장 1-7절

1. 야훼께서 나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는 가서 모시 잠방이를 하나 사다가 허리에 걸치고 물에 적시지 않도록 하여라.” 2. 야훼께서 분부하시는 대로 나는 잠방이를 사서 허리에 걸쳤다. 3. 그랬더니 야훼께서 또 나에게 이르셨다. 4. “네가 사서 허리에 걸친 잠방이를 벗어 들고 브랏으로 가서 바위 틈에 숨겨 두어라.” 5. 나는 야훼께서 내린 분부대로 브랏으로 가서 그 잠방이를 거기에 숨겨 두었다. 6. 오랜 시일이 지난 다음, 야훼께서 나에게 이르셨다. “이제 떠나 브랏으로 가서 내가 시킨 대로 숨겨 두었던 잠방이를 가져오너라.” 7. 나는 브랏으로 가서 숨겨 두었던 자리를 파고 잠방이를 꺼내 보았더니, 그 잠방이는 썩어서 아무 쓸모가 없게 되었다.

진리가 전복됨 (Truth perverted)

주님의 진리라 해도 우리의 감각적인 본성에 파묻힐 때는 그 진리가 가진 천국적인 품질을 잃는다. 그리하여 어떤 특별한 용도를 위해서도 아무 쓸모 없게 된다.

허리띠 (the girdle)

허리띠는 동양의 의복 차림에서 눈에 잘 띄는 품목 중의 하나이다. 많이 사용되는 허리띠는 대개 가죽이나 물감들인 옥양목으로 만든다. 더 섬세한 허리띠는 모시로 만들고, 거기에 명주나 금이나 은으로 된 실을 가지고 수를 놓는다. 때로 허리띠는 보석이나 진주를 박아서 장식하기도 했다. 이런 측면에서 허리띠는 그 띠를 두른 사람의 사회적 위치나 부를 암시하기도 했다. 매우 섬세하고 호화로운 허리띠는 그 소유자가 중요한 인물이라는 표시가 되기도 했다. 사실, 허리띠란 띠를 두른 자의 허리 부분에서 느슨해지는 겉옷을 붙잡아 두는데 사용된다. 특히 발까지 내려오는 긴 옷일 경우 더욱 요긴한 품목이다. 이와 같은 용도 측면에서 허리띠는 묶음(bond)을 상징한다. 영적 측면에서 교회 속에 있는 선함과 참된 원리를 한데 묶는 것, 인간 마음이 이 원리들을 함께 붙잡고 있는 것, 또는 하느님의 말씀에서 가르쳐진 진리에 마음을 매어 놓는 것을 말한다.
허리띠를 맨 효과는 다음 구절에서 암시해 준다. “허리에 잠방이(허리띠)를 단단히 걸치듯이 나는 이스라엘의 온 가문과 유다의 온 가문을 나에게 꼭 매어 두려고 하였다” (13:11). 그래서 주님이 유대인을 붙잡아 두시는데 사용된 수단은 신성한 말씀의 글자였고, 그들의 안내를 위해 이 글자가 주어진 것이고, 띠의 묶는 힘으로 해서 그들이 주님과 계속 연결되게 하셨던 것이다. 허리띠는 몸을 단단히 조여 주기도 한다.

모시 (linen)

본문에서, 허리띠는 모시(고운 베)였다. 모시는 정의에 대한 표현물, 즉 주님의 계명에 의거한 질서있고, 깨끗하고 순수한 삶에 관한 표현물인 것이다. 계시록의 요한의 환상을 보면, “고운 모시옷은 성도들의 올바른 행위, the fine linen is the righteousness of saints”라고 말하고 있다 (19:8.). 이는 모시가 정의를 표현한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모시로 만든 허리띠는 주님의 말씀에서 끌어 낸 진리가 교회의 교리 안에, 특히 일상생활에서 십계명을 실지 응용하고 있을 때를 말한다.
우리가 아침에 일어나서 하루 일과를 시작하기 전 허리띠를 맨다. 이럴 때의 행동은 우리가 뭔가를 행하려 할 때 우리 마음의 적절한 행동을 표현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우리를 규율하도록 신성한 말씀 속의 진리를 사용할 때라든가, 우리 심정 안에 있는 선이 제자리를 지키도록 한다던가, 이것들을 위해 우리가 행동하는 것 등등일 것이다. 그래서 허리띠로 묶어 서로 분리된 옷을 하나가 되게하는 역할은 주님의 진리가 결합해 주는 효과, 즉 우리가 하는 일 속에서 주님의 진리로 우리를 고정시킬 때, 그래서 우리가 사랑과 총명 속에서 주님과 묶이게 될 때를 표현한다.
예언자, 이들을 통해 하느님의 말씀이 주어졌을 때, 그들은 위와 같은 말씀을 표현했던 것이다. 말씀 속에서 우리에게 오시는 주님, 즉 우리가 그분께로 날아가서 그분이 우리와 결합하도록, 그리고 더 풍부한 삶을 우리에게 주시게 된다는 것을 표현한다.
요한이 본 하느님의 성전으로부터 나온 일곱 천사들은 “깨끗하고 눈부신 모시옷을 입고 가슴에는 금띠를 두르고 있었다.” 이는 천사들의 상태로 거듭나는 조건, 즉 인간이 자기 마음을 신성한 말씀 속의 진리에 의거 질서 있게 간직하는 것, 또는 천국적인 길을 사랑하는 마음을 말한다. 이사야 11장 5절에서 읽는 바, “그는 정의로 허리를 동이고 진리로 띠를 띠리라, Justice shall be the girdle of thy loins, and truth the girdle of thy thighs.”

(물건을) 사다 (buying)

이 예언자는 허리띠를 사게 되었다. 어떤 영어 번역 성경의 경우 산다(buy)는 표현보다 얻는다(get)라는 단어를 사용하기도 하지만 산다는 쪽의 번역이 더 본문의 의미에 충실할 것이라 본다. “산다”는 것은 단순히 “얻는다”라는 것보다 더 적극적인 노력이 그 안에 들어 있음을 함축하기 때문이다. 영적으로 우리는 노력에 의한다던가, 자기가 필요로 하는 것을 위해 자기 소유를 내놓음으로서 인격의 어떤 조건과 품질을 사게 된다. 우리가 신성한 말씀 속의 진리를 배울 때, 특히 진리를 획득하기 위해 강한 노력을 경주할 때, 또는 이 진리를 간직하기 위해 자신 속의 자연적인 생각이나 관념들을 내놓음으로 이 둘의 자리를 바꿀 때, 이를 표현적 측면에서 보면, 우리가 고운 모시띠를 사는 것이 된다.
다섯은 미련했고, 다섯은 슬기로웠던 열 처녀의 비유에서, 그들은 등잔을 사용하려면 기름을 사야만 했었다. 이는 우리가 진리의 빛 속에서 총명을 유지해 가기 위해서는 선함과 진리에 대한 사랑을 포획해야만 한다는 말이다.

허리띠를 숨겨 둠 (hiding the girdle)

이 예언자는 허리띠를 사서 그것을 한동안 사용하다가 바위틈에 숨겨 놓았다. 동양에 있는 관습 중 하나를 살펴보면, 어떤 이가 상대방에게서 괴롭힘을 당했을 때, 어떤 물건을 습기가 많은 강둑이나 습지에 묻어서 썩어지게 하는 행동을 취한다. 이렇게 해서 그는 자기 견해를 표현하고, 아마도 그의 소원을 그런 방법으로 나타냈던 것 같다. 그리하여 괴롭힌 자의 운명을 표현한 것이다. 약한 자들은 이런 행동의 표시로 상대방을 나쁜 운에 빠지게 할 것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예언자 예레미야의 특이한 행동은 그 시대의 사람들에 의하여 위와 같은 방법으로 쉽게 이해되어졌던 것이다.
그러나 바위 틈새에 자기 허리띠를 감추어두는 행동은 영적으로 자신 속에 있는 신성한 진리를 자기 마음의 높은 위치에 놓아두면서 삶 속에서나 마음 속에서나 마음 속의 각종 것을 질서 속에 간직되게 묶어두는 대신 자연적 감각 부류에서 나오는 희미한 관념 속에 감추어두는 것을 표현한다. 이렇게 신성한 진리가 감각의 오류 안에 감추어질 때, 그 진리들의 생명력은 잃고 말아 결국은 실생활 속에서 아무 쓸모없게 된다. 게다가 감각적 추론이 더욱 남용하여 거짓으로 변하게 하고 만다. 주님의 심판을 두려워한 이들이 바위틈에 숨어 있는 요한계시록 6장 16절도 상기해 보기 바란다. 이런 곳에 거하는 이들이란 거짓 사상에 거주하는 마음들, 그리고 영적 진리의 빛으로부터 숨고 싶다는 마음을 가진 이들을 표현한다.

유프라테스 (Euphrates)

예레미야는 유프라테스(브랏) 강둑에 허리띠를 숨겨 두었다. 유프라테스는 가나안과 아시리아 사이에 있다. 아시리아는 추론력, 또는 합리력을 표현한다. 이 능력은 좋은 의미에서 보면, 거듭나는 합리적인 능력, 각자 나름대로 빛 속에서 영적 진리를 보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퇴보하는 인간의 경우, 합리적인 능력은 단지 추론하는 능력일 뿐이고, 오히려 이 능력을 가지고 인간은 자연적 수준의 빛이나 자연적 마음에 있는 오류 속에서 추론할 뿐이다. 따라서 태양도 안 비치고 습한 곳인 바위 틈새에 허리띠를 숨겨 놓았다는 사실로 볼 때 유프라테스는 나쁜 측면에서의 의미를 갖고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즉 무질서한 형태, 또는 외적이고 퇴보적 상태이다. 계발되지 않은 자기 추론을 신용할 때, 그는 모든 것을 잘못된 길에서 볼 수밖에 없다. 다시 말해 그가 주님과 관련해서 사물을 보기보다 자아를 표준으로 모든 것을 보기 때문이다. 주님의 말씀, “너희 안에 있는 빛이 어둡다면, 그 어둠이야말로 어떠하겠느냐”는 구절을 상기해 보아야 할 것이다.
주님이 마음에 흘러 들어오셔서 계발해 주시지 않는 이상, 자연적 인간은 영적 진리나 합리적인 진리를 지각하지 못한다. 그래서 주님은 이 계발을 인간 속의 영적 마음을 통해 이루시는데, 인간이 자기 마음 문을 열어 영적 진리를 보려고 노력하는 만큼에서만 가능하다. 그러나 인간의 영적 마음이 닫혀질 때, 그는 자기의 감각적 마음 안에서 살게되어 진리 측면의 것은 희미해지고 만다.
그 당시 교통 사정으로 보아서 예레미야가 예루살렘에서 유프라테스까지 여행하는 것은 아주 먼 여행에 해당된다. 이 여행은 오랫동안 계속적으로 마음이 뒤로 후퇴하는 것, 즉 주님의 말씀이 주는 명확함에서 점진적으로 어두워지고 희미해져서 자연적 감각에 있는 오류나 거짓 속에 전적으로 감추어지고 말 때까지를 표현한다. 그래서 이 예언자가 하게된 긴 여행은 유대인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기게 되는 것이고, 그들에게 예언의 말씀을 수행해 내는데 얼마나 많은 노력이 요구되는가를 보여 주기도 한다. 이 여행은 본문에서 한번 더 있어졌다.

쓸모 없게 된 허리띠

한번 더 있어진 여행에서 발견된 허리띠는 썩어 아무데도 쓸 수 없게 되고 말았다. 다시 말해 그 띠는 이젠 쓸모가 없다는 말이다.
유대인들은 이렇게 집행된 비유 속에서 얼마간의 표현적인 의미를 얻을 수 있었다. 그 이유는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명확한 진리를 가진 교리를 주셨다는 것을 자기들은 알고 있기 때문이고, 자기들이 그 교회 속의 모든 것을 뒤엎었다는 것도 감지한 상태에 있었기 때문이다. 아마 그들이 알고 있는 또 하나는, 자기들이 주님의 길을 계속 따르고 있지 않고 자신들의 고집대로인 무질서한 길로 되돌아가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한 때 깨끗하고 아름다웠던 허리띠는 이제 못쓰게 된 허리띠, 곰팡이 피고 썩어 뭉그러지는 형태로 유대인 앞에 서 있는 것이다. 이는 유대인 자신들의 퇴보되고 있는 모습이고 그들 앞에 서서 기다리는 비참한 운명에 대한 예언의 표현인 것이다. 깨끗한 허리띠는 존경받는 부유한 사람을 표시해 주겠지만, 더럽고 썩어진 허리띠일 경우는 저질이고 퇴보적인 사람을 표시해 주게 된다. 이 상징적인 표현의 예언을 사려 깊은 유대인일 경우, 바위틈에 숨겨진 허리띠란 장차 유대인이 흩어지는 것, 그래서 자기 고향을 떠날 수밖에 없게 되고 외국 땅에 포로가 될 것과 자기들의 국가적 위신은 추하게 되고 그들의 힘은 잃어지며, 행복은 파괴된다는 것을 미리 그려주었음을 눈치챘을 것이다. 교회나 어떤 개인이 주님의 진리를 사랑하고 주님에 관한 어떤 지식들, 즉 거룩한 말씀에서 주어진 바대로 계명을 삶 속에 두는 상태에서 시작했다면, 이는 깨끗한 모시띠로 허리를 동이고 움직일 자유를 갖는 상태이다. 그러나 쓸모없게 된 허리띠란 어떤 개인 또는 교회가 신성한 진리에의 흥미를 잃었을 때, 또는 명백한 합리적 시야와 총명이 닫혀졌을 때를 표현한다. 이런 상태가 되는 이유는 주님의 진리가 세상과 자아만의 사랑을 즐기는 감각의 추론 속에 침수되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퇴보되는 사람 속에서 신성한 법은 쓸모 없게 되는 바, 인간의 심정과 삶이 더 이상 주님과 묶여 있지도 않고 더욱이 하나가 되지 못한다. 이런 사람을 두고 씌어진 말씀 구절은 “하느님은 그의 생각 안에 계시지 않는다”라는 것이다. 이런 사람에게 주님은 “나를 떠나서 너희는 어떤 열매도 맺지 못한다” 라고 경고하신다. 그리고 신명기 30장 17-18절에서, “그러나 너희 마음이 변하여 순종하지 아니하면, 하느님께 추방당하여 다른 신들 앞에 엎드려 그것들을 섬기게 될 것이다. 오늘 나는 너희에게 일러둔다. 그리되면 너희는 반드시 망하리라. 너희가 이제 요르단 강을 건너가 차지하려는 땅에서 오래 살지 못할 것이다” 라고 미리 일러 두셨다.

비유의 실지 적용

유대인에게 못쓰게 된 허리띠를 보여 주신 후 이 비유는 그 다음 구절에 강력하게 적용되고 있다. “나 야훼가 말한다. 나는 그와 같이 유다의 거만과 예루살렘의 엄청난 거만을 꺾어 버리겠다. 이 몹쓸 민족은 나의 말을 듣지 않았다. 저희의 악한 생각을 굽히지 않고 멋대로 살아왔다. 다른 신들을 따라다니며 섬기고 예배하였다. 그래서 이 백성은 잠방이처럼 되어 아무 쓸모도 없게 될 것이다.”
이 메시지나 이 비유는 오늘의 우리에게도 똑같은 힘으로 말하고 있다. 단지 우리에게는 영적인 적용만이 있다. 이는 표현적 의미보다 더 넓게, 더 멀리, 더 쉽게 그 적용이 있게 된다. 영적인 띠를 정신적인 허리에 동여매듯, 우리는 주님의 말씀 속에 있는 진리를 붙잡아서 간직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생활에 그 진리를 쓰기 위해 그 진리를 깨끗하게, 그리고 쓸모있게 간직해야 한다. 영적인 진보를 하고있는 사람이라면 어느 누구도 그의 자연적 마음 속에 있는 감각적 추론이라는 바위 틈새에 그의 영적인 허리띠를 숨겨 둘 이유가 없다. 오히려 그 진리가 자기 마음이나, 행동들과 꽉 묶여 있어서 자연적인 것과 영적인 것 사이의 분명한 구별을 할 수 있어야 하고 주님의 계명에 의거 행동이라는 자연적 삶을 질서있게 함으로서 주님의 말씀에 담긴 진리들이 언제, 어디서나, 무엇이든 따라다녀 간섭해 주어야 할 것이다. 이러면 우리는 더 높고 높은 조건, 즉 명백하게 해주는 영적인 시야를 갖게 되는바, “사람의 자”가 곧 “천사의 자”를 지니게 되며, “정의가 우리 허리의 띠가 되리라.”

10
훼손된 옹기장이의 그릇

성서 본문: 예레미야 18장 2-6절

2. “너는 곧 옹기장이 집으로 내려 가거라. 거기에서 너에게 일러 줄 말이 있다.” 3. 말씀대로 옹기장이 집에 내려 가 보았더니, 옹기장이는 마침 녹로를 돌리며 일을 하고 있었다. 4. 그런데 옹기장이는 진흙으로 그릇을 빚어내다가 제대로 안 되면 그 흙으로 다른 그릇을 다시 빚는 것이었다. 5. 마침 야훼의 말씀이 나에게 들려 왔다. 6. “진흙이 옹기장이의 손에 달렸듯이 너희 이스라엘 가문이 내 손에 달린 줄 모르느냐? 이스라엘 가문아, 내가 이 옹기장이 만큼 너희를 주무르지 못할 것 같으냐? 야훼가 하는 말이다.”

섭리

인간의 악과 거짓 그리고 죄는 인간을 향한 하느님의 일을 훼손한다. 그러나 인간에 대한 실패 뒤에라도 가능만 하면, 하느님은 인간과 더불어, 그리고 그들의 국가와 더불어 다시 시작하시어 또 다른 형태로 선한 결과를 산출해 내신다.

옹기장이

옹기장이가 진흙을 추켜들 때, 그의 마음속에는 어떤 이상적인 형태의 그릇을 먼저 가지고 있다. 그 이상적인 형태를 향해 그는 진흙을 가지고 일을 한다. 그러나 그 형태가 잘못 되면, 다시 시작한다. 그런데 다시 실패한다면, 진흙의 질이 허용되는 한도에서 그는 또 다른 형태를 창출해 본다. 이와 같이 주님은 신성한 옹기장이 이셔서 이상적인 형태를 가지고 계시고, 이를 향해 그분은 모든 국가, 모든 개인들을 그 각각의 정신적인 진흙이 창출 가능한 한도에서 어떤 모양을 추구하신다.
인간의 몰락은 인간 그릇이라는 것이 훼손된 일반적 형태이다. 그러나 주님은 몰락된 인간을 끌어올리시기 위해 신성한 섭리를 지속적으로 행사해 오셨었다. 그래서 한가지 처방이 인간에 의해 부패되어졌을 때, 또 다른 처방이 그 인간 조건에 맞추어 설비되어져 왔다. 게다가 인간이 악 속에서 스스로 파멸되기로 작정한 듯 보이는 때 조차에서도 사랑이신 하느님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구세주로서 그들에게 내려 오셨다. 즉 “인간을 사랑하시고 측은히 여기시어 주님은 그들을 구속해 주셨다.”

하느님의 생각

아주 넓은 측면에서, 모든 선한 인간의 생명이란 하느님에 관한 생각, 신성한 마음 안에서 형성된 계획, 선과 진리에 관한 그분의 영광스러운 특질을 보여주심으로 오는 이상적인 형태인바, 이 형태가 그분의 인간 창조의 활동 속에서 반영되는 것이다.
구원되는 집단, 즉 거듭나는 집단 속의 모든 남녀는 자기들을 만드신 자의 선함을 표출하고 있는 것이다. “하늘은 하느님의 영광을 선포하고…”라는 말씀의 구절을 읽게 될 때, 이를 가장 높은 의미로 본다면, 내향적이고 영적인 천국은 거듭난 사람에게 있는 재형성이 이루어진 마음 안에 존재한다는 것이고, 그 마음 안에서 하느님의 영광이 선포되는 것, 그리고 그 마음들이 선한 일을 재 생산할 때인 것을 의미한다.
모든 인간은 하느님의 그릇이요, 주님의 목적을 위해 빚어져 있는 것이고, 삶의 다양한 용도 속에서 창조물의 행복을 위한 주님의 계획을 수행해 가기 위한 그릇인 것이다. 그래서 주님이 모든 인간 삶을 위한 이상적인 형태를 가지고, 이에 걸맞게 인간을 만드시는 바, 우리가 영적으로 명확히 볼 수 있는 것은 인간의 어떤 부분이라 해도 그 부분에서 가장 큰 지혜는 오로지 주님과 협동하는 것, 신성한 이상향에 자기 인격을 맞추는 것이다. 따라서 가장 비극적인 어리석음은 하느님이 인간에게 베풀고 계신 것에 반대되게 일을 해 나가는데 있게 된다. 이러므로 하느님이 의도하시는 이상적인 형태, 즉 인간이 자기 안에 창조된 하느님의 형상을 망치게 하는 것이 가장 어리석은 짓인 것이다.

영적인 경제

옹기장이가 비록 자기가 만들고자 계획한 그릇이 망쳐졌어도 그 진흙을 버리지 않고 또 다른 그릇으로 다시 모양을 잡듯이, 비록 인간이 하느님의 일을 망쳐 놓거나 인간 자신의 나쁜 행동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모든 인간과 더불어 그분의 일을 사랑으로 다시 하신다. 주님은 어떤 인간에게 대한 일이 실패된 후, 그 사람의 현 상태에서 가능해지는 영적인 그릇이 재형성되도록 추구하신다. 따라서 우리가 실패하고 잘못되어졌다 해도 우리가 가져야 할 노력의 방향은 사람다운 삶 쪽으로 최선을 다하는 영을 가져야 한다는 것일게다. 따라서 인간 마음과 삶에 대한 하느님의 이상향이 무엇일까 라는데 우리의 관심을 모으고 산다면, 우리는 이 이상향 쪽으로 우리의 모양을 잡으려는데 자신의 실력을 늘 사용할 것이라 본다. 살림 잘하는 주부는 어떤 물품이 비록 망가졌어도 이를 고쳐 뭔가 좋은 용도에 충당될 수도 있지 않을까 라고 생각하여 그 물품을 버리지 않듯이, 우리는 주님의 인도하심을 위해 자신의 처지를 가지고도 어떤 선용을 발견할 수 있고, 자기 체험에서 온 모든 여건을 어떤 선을 창출하는 쪽으로 밀어붙일 수도 있는 것이다. 어떤 시점에 우리가 이미 당도해 있다 해도 다시 자신의 인격을 형성해 보겠다는 의지가 있는 한, 또는 악과 죄로 고정되고 굳어져 있지 않는 한, 망쳐진 우리 삶이라 해도 모델을 다시 만들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러나 올바른 결과를 위해서, 우리는 주님이 자신을 위해 설비해 두신 모형 외의 어떤 다른 모형을 만들려고 일해서는 안된다. 주님의 모형에 협동하지 않는 한 그 노력은 쓸모없게 된다.

이상적인 형태

어떤 이가 이렇게 물어 올는지 모른다. “인간을 위한 신성한 이상향이 무엇이 있었으며, 무엇이 있는지 우리가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그러나 이상적인 형태는 말씀 속에서 다각적인 방법으로 주어지고 있고, 인간 역사를 통해서도 밝혀져 있다. 이 형태는 각기 다른 처방으로 이어진 교회 속에서, 그리고 사람의 총명의 수준에 따라서 인간에게 와졌다. 아주 수준이 낮은 인간 조건에서까지도 이 형태는 십계명 안에 와 있었고, 모든 사람은 아주 적은 형태로나마 실제적으로 이 형태를 따를 수 있었다. 그리고 세대가 한참 지난 후, 이 형태는 지상에서 그리스도의 삶 속에 특별히 와져서, 복음서의 모든 가르침 안에 수록되어 있다.
지상 어느 곳에서나 하느님은 그분 자신과 그분 인격, 그리고 그분의 일을 밝히 알게 해주셨다. 그리고 그분은 인간에게 그들이 해야 할 부분을 하도록 명령하셨는데, 이는 신성한 표준에 의해 인격을 형성하라는 말이다. 표준 중에서 가장 큰 표준이라면, 그것은 지혜와 힘을 가지고 있는 사랑이다. 하느님의 사랑은 신성하고 무한하나, 인간의 사랑은 유한하며 하느님의 형상을 따라 만들어져 있다. 이것이 인간에게 있어지는 근본되는 이상적인 형태이다. 그 이유는 하느님은 신성한 인간이시기 때문이다. 이는 에덴에서 밝혀진 이상적인 인간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것은 모든 세대를 통해 반복되어 왔다. 게다가 기독교 안에서 하느님은 인간에게 더 높은 이상향을 주님 안에서 사랑하는 믿음이라는 단순함으로 회복시켜 주셨다. 더욱이 그분의 재림 속에서, 하느님은 그분의 영적인 양상(aspect)을 그분 스스로 밝히셔서, 인간으로 하여금 인간의 영적 양상 안에서 인간다운 것을 이해 가능하게 해주셨던 것이다.

악에 저항함

인간의 몰락이 더 낮은 조건 속에로 내려갈 때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재형성시켜 주시기 위해 조건을 개조해 오셨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께서 보다 나은 조건에로 인간이 되돌려지도록 인도하시는 실제 방법을 언제나 준수해 가고 있다. 이런 준수 속에서 인간이 개혁되어지는 정도 보다 더욱 명료한 진리의 이해를 주님은 인간에게 결코 요구하지 않으셨고, 단지 각 단계마다 요구되는 것은 주님에게 되돌아가는 것, 인간 속의 악한 바램에 저항하라는 것, 하느님의 말씀에 의해 인간에게 보여진 악들을 멀리 하라는 것 등이다. 각 단계의 시작에서 인간은 악을 행함을 중단하고 계명을 지키라는 것인 바, 이 정도의 요구 사항은 각자의 지식과 총명이 있는 한도라면 인간이 수행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각자의 수준에 맞추어 있어지는 하느님의 이상적인 형태에로 인간은 일을 해 왔고, 하고 있는바, 이상적인 형태에의 도달은 인간에게 가능한 것이다. 그래서 각자 수준에서 주님을 따르는 것은 영적인 자기의 인간 됨을 다시 형성시키는데 진일보하는 방법이 되어 왔다. 우리들 수준이 어떠하든, 내 환경 조건이 어떻게 되어 있든지간에, 우리가 악을 보고 아는 대로 그 악을 중단하며 계명에 순종해 간다면, 신성한 옹기장이는 우리들을 뭔가 쓸모 있는 그릇으로 형태를 잡아 주시어 그 그릇 안에 각자 수준에 걸맞게 천국에 있는 것을 담을 수 있게 해주실 것이다.

인격

뭔가 쓸모있는 그릇이 되어 간다는데 대한 실제의 결실은 인간의 삶과 운명이라는 것인데, 이것들은 각자의 환경이 어떠하느냐가 아닌 인격이 어떠해지느냐에 관한 문제임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우리의 주님은 정말 받들기 힘든 공사장의 감독 같은 분이 아니시다. 게다가 인간의 부족함과 실패라는 것을 가지고 벌하시려고 기회를 노리시는 분은 더욱 아니다. 그분은 사랑하시는 아버지이시요, 우리의 실패를 통해 돕고 계시고, 주님의 인도 하에 다시 도전해 보라고 격려하시면서 우리 곁에서 맴도시는 분이시다. 하느님의 모든 노력은 인간을 저주하는데 있지 않고 구원하시는데 있다. 인간에게 생명을 주시려 하고, 영적 죽음에로 인간이 빠지려는 것을 방치해 두시는 분이 아니다.

11
깨진 옹기장이의 그릇

성서 본문: 예레미야 19장 1,2,10,11절

1. 야훼께서 예레미야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오지그릇을 하나 사가지고 백성을 대표하는 장로 몇 사람과 사제 몇 사람을 데리고 2. ‘옹기 대문’ 바로 밖에 있는 벤힌놈 골짜기로 나가거라. 거기에서 내가 일러 줄 말이 있으니, 너는 그 말을 외쳐라.”
10. “이렇게 말하고는 같이 간 사람들이 보는 데서 그 그릇을 부수고 11. 일러 주어라. ‘만군의 야훼가 말한다. 이 옹기그릇이 부서져 다시는 주워 맞추지 못하게 된 것처럼 나는 이 백성과 이 도읍을 그렇게 부수리라. 마침내 사람 묻을 자리가 없어 이 도벳에마저 무덤을 쓰게 되리라.’”

그릇이 깨어짐

만일 인간이 악과 거짓을 사랑하기로 작정하여, 죄 가운데 살고, 하느님의 경고를 소홀히 하면서 하느님의 인도와 가르침에 저항하고 선함보다 악을 더 선호한다면, 이런 사람은 악한 인격 속에 심정을 확증시켜 뿌리박는 것이 된다. 그러면 신성한 옹기장이의 손에 의해서도 더 이상 빚어질 수 없는 상황까지 치닫고 만다. 다시 말해 그들은 자아 사랑이라는 불로 자신을 이미 구워서 더 이상 어떤 틈을 허용치 않게 된 것, 그들에게 있어야 할 탄력성은 사라지고 만 것이다. 이 그릇, 이 사람이 깨어질 때, 그 그릇, 그 사람은 전체적으로는 다시 만들어질 수 없다.
이와 같이 굳어진 인간으로부터는 신성한 옹기장이도 어떤 쓸모 있는 그릇을 더 이상 생산하지 못한다. 그 이유는 그들은 하느님의 어떤 인도하심에도 저항했고 영구적으로 거절해 버렸기 때문이다. 이후 이와 같은 사람은 영적으로 말한다면, 좋은 데에 쓸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는 셈이다. 그 이유는 신성한 기술자조차도 어떤 좋은 것으로 그 인간이 재 모델이 되도록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심정과 삶 속에 지옥이라는 것을 형성시켰고 그 안에 거하기를 더 좋아하고 있는 것이다.

이스라엘

비유의 문맥이 연결되는 점을 보면, 본문은 확증된 악 속에 살고 있는 이스라엘에 관계되어 언급되고 있다. 이 나라에 부패되지 않은 나머지라도 있어 선함을 담을 여지가 있는 한, 그들은 옹기장이의 손에 있는 진흙과도 같이 주님과 관련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더 나은 인격 조건에로 다시 형태를 잡아 개혁될 소지가 있었을 것이다. 이런 나머지라도 있는 조건에서는 주님은 그들을 큰 시련, 가뭄, 전쟁, 염병, 급기야는 포로로 잡혀가는 시련까지 다 동원시켜 목이 굳어진 이 백성들을 개혁하려고 추구해 오셨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 있는 내향적인 영적 의미는 이스라엘 백성같은 조건 속에 있는 전 시대 모든 이의 인격에 적용되고 있다. 그 이유는 이스라엘은 단지 교회라는 조직뿐만이 아니고 인간 속의 교회를 표현하기 때문이다. 더 뾰족이 말하면, 인간 마음속의 내향적인 교회, 즉 인격과 삶을 형성시키는 마음 속의 원리들을 표현한다.

저주

본문에서 반역한 이스라엘 백성에게 어떤 처벌이 공포되고 있는데, 이는 수세기 전 모세에 의해 공포된 저주와도 매우 유사하다는 점을 우리는 주시해 두어야 한다. 이런 저주들은 표현적 의미를 다분히 가지고 있다. 이 저주들은 인간의 거듭나지 않은 마음 부분 안에 거주하는 악하고 거짓된 원리에 적용되고, 이런 원리를 흠모하는 인간에게 떨어지는 것들이기도 하다. 하느님은 어느 인간도 저주하시지 않는다. 설사 그 인간이 악하다 해도 저주하지 않으신다. 오히려 그분은 개혁과 거듭남에 의해 어느 인간이라도 구원하시려 애쓰신다. “악이 사악한 자를 죽인다.” 그 이유는 영적 생명을 파괴하려드는게 악의 본성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악은 악을 사랑하는 이들 속에서 만들어지고 그것들이 지옥을 형성하는바, 이 지옥으로부터 구원되려면, 모든 인간에게 절대 필요한 것은 개혁되고 거듭 나는 것이라는사실을 우리 마음에 확실히 못박아 두어야 하는 것이다.

주님의 그릇

“너를 깨끗이 하라. 깨끗한 네가 여호와의 그릇이다.” “여호와의 그릇”이란 인간의 심정과 지성이다. 이것이 쓸모 있는 그릇으로 형성되는 것이고, 이것이 천국적인 사랑과 천사 같은 인간에 속하는 영적 총명을 담고 있다. 이것을 담고 있기 위해 우리는 자신에게 허락된 능력을 다 사용해 가야 한다. 사실 영적으로 보면 우리의 심정이나 지성은 우리 자신의 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심정과 지성을 악하고 거짓된 것들로 채울 어떤 영적 권리도 가진게 아니다. 한마디로, 악과 거짓으로 주님의 그릇인 심정과 지성을 망쳐 놓을 권한이 없다는 말이다. 악과 거짓들은 인간다움 안에 있는 그분의 형상을 파괴하고 있다. “선한 자의 거듭나는 단계는 여호와에 의해 순서가 잡혀간다. 그리고 그 사람은 이 질서 속에 있음으로 기뻐한다. 비록 그에게 잘못이 있게 되었다 해도 그는 지옥에 던져질 정도까지 빠지지 않는다. 그 이유는 여호와가 그의 손을 붙잡고 계시기 때문이다.”

12
무화과 두 바구니

성서 본문: 예레미야 24장 1-2절

1. 바빌론 왕 느부갓네살이 유다 왕 여호야긴을 비롯하여 유다의 고관들과 은장이, 대장장이들을 예루살렘에서 사로잡아 바빌론으로 데려 간 뒤였다. 하루는 야훼의 성전 앞에 무화과 바구니 두 개가 놓여 있는 것을 야훼가 나에게 보여 주셨다. 2. 한 바구니에는 맏물처럼 썩 좋은 무화과가 담겨져 있었고, 다른 바구니에는 먹을 수 없이 썩은 무화과가 담겨져 있었다.

운명

내향적으로 선한 사람들은 자연적 삶의 시련이나 영혼이 시험을 만나게 될 때 참고 견디어 자신을 개혁하고 거듭나게 하여 천국적인 인격을 발달시켜 간다. 반면, 주님이 허락하시는 훈련을 피하려 들고 그 훈련에 반발하는 이들은 자기들이 피할 수도 있을 거라고 자신 만만해함 속에 오히려 자신을 묻히게 해서 결국 자기들의 악으로 자멸하고 만다.

글자상의 이야기

서기 약 600년 전 경, 바빌론왕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을 포위 공격했었다.
그 당시 유다의 왕 시드키야는 예언자 예레미야에게 특사를 보내 여호와께서 거룩한 성을 적에게서 구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예레미야는 이렇게 예언했다. “당신들은 이 백성에게 야훼의 말씀이라 하며 이 말을 전하시오. ‘내가 살길과 죽을 길을 너희 앞에 내어놓을 터이니 너희는 그중 하나를 택하여라. 이 성안에 버티고 있다가는 칼에 맞아 죽거나 굶어 죽거나 병들어 죽을 것이다. 그러나 나가서 너희를 포위하고 있는 바빌론 군에게 항복하면 살 것이다.’”
이리하여 예루살렘 백성들의 견해는 두 가지로 갈라졌다. 즉 주님의 말씀을 받아 바빌론 군에 항복하는 이들과 예언을 거절하여 예루살렘에서 여전히 버티는 이들로 갈라졌다. 그리고 예언자 예레미야는 백성들 중 더 나은 부류는 포로로 끌려가는 백성이고, 더 나쁜 부류는 더 나쁜 운명을 위해 고국에 남게되는 자들이라고 보았다. 포로가 안된 백성들이 자기들은 포로로 끌려간 백성보다 운이 더 좋다고 상상할 것은 어쩌면 당연할는지 모른다. 그러면 예레미야는 예언이라는 신성한 말씀으로 그들 상상과는 반대되는 국면, 즉 포로들은 결국 예루살렘에로 귀환해서 번영할 것임을, 그 반면 남아서 포로가 안되려고 저항하는 이들은 해외로 흩어지게 되고, 전쟁, 기근, 염병 같은 시련을 더 당하게 될 것을 보여주었다.

비유

이러한 것들이 본문의 비유와 그 앞 뒤 문맥에서 표현되고 있다. 즉 “하루는 야훼의 성전 앞에 무화과 바구니 두개가 놓여 있는 것을 야훼께서 나에게 보여주셨다. 한 바구니에는 맏물처럼 썩 좋은 무화과가 담겨 있었고, 다른 바구니에는 먹을 수 없이 썩은 무화과가 담겨져 있었다… 나 야훼가 이스라엘의 하느님으로서 말한다. 나는 유다 사람들을 이곳에서 바빌론 땅으로 포로가 되어 끌려가게 하겠다. 그러나 나는 그들을 이 좋은 무화과처럼 잘 돌보아 주리라. 잘 보살펴 이 지방으로 돌아오게 하리라. 헐지 않고 세우며, 뽑지 않고 심으리라. 나를 알아보는 마음을 주어, 이런 일을 하는 것이 나 야훼인줄 알게 하겠다. 그리하면 이 백성이 진심으로 나에게 돌아와 내 백성이 되고 나도 그들의 하느님이 되리라. 그러나 유다와 시드키야와 그의 고관들, 그리고 예루살렘에서 살아남은 자들 가운데 국내에 남아 있는 자나 에집트로 망명한 자는 썩어서 먹지 못할 무화과 같이 만들겠다. 나 야훼가 선언한다. 이 백성에게 재앙을 내려 세상 만국이 보고 놀라 넘어지게 하겠다. 세계 방방곡곡으로 쫓겨다니며 사람들에게 욕을 먹고 희롱거리 조롱거리가 되게 하겠다. 전쟁과 기근과 염병으로 쳐서 모두 없애 버리고, 선조 때부터 살도록 내어 준 이 땅에 하나도 남아 있지 못하게 하리라.”

무화과

글자로만 생각한다면, 비유의 무화과와 유대인의 두 부류 사이에 어떤 연결 관계가 있는듯 여겨지지 않는다. 그러나 이 연결은 영적 의미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무화과란 자연적인 선함, 즉 행동에 있는 선함인바, 이는 하느님의 법에 순종하는 가운데 있는 선함을 표현해 준다. 선한 자는 마음 속으로 선한 원리를 사랑하여 그의 실제 삶 역시 선하게 꾸리는 이들이다.
무화과는 성경에서 자주 언급되고 있는데 언제나 행동의 품질을 표현하여 선한 것은 선한 사람과 더불어, 나쁜 것은 나쁜 사람과 더불어 언급되고 있다. 그리고 진리에 관한 영적 총명은 포도로, 주님에 대한 천적 사랑은 올리브로 표현되고 있다. 무화과는 행동 또는 삶 속의 자연적 선함에 관계가 있는바, 이는 인간의 의지 또는 심정에 관한 상태를 언급해 주게 된다. 선한 자는 그 심정 속의 선한 창고로부터 선한 것을 산출하고, 악한 자는 악한 창고로부터 악한 것을 산출한다. 열매를 보아 그 나무가 어떤 종류의 나무인지 알 수 있듯이 사람도 마찬가지인 것이다.
비유에서의 무화과 두 바구니는 인간의 두 반대되는 부류, 즉 인격이 발달할 때 있어지는 선과 악을 표현했다. 썩 좋은 무화과는 맏물(first ripe)처럼 매우 좋았다고 말해지고 있다. 첫 수확물인 초기의 무화과는 아주 맛이 좋은데, 그 이유는 그 과일의 풍미 때문이다.

성전

무화과의 풍미뿐만 아니라 첫 수확인 이유로, 맨 처음 익은 무화과는 성전 제단에 바쳐지는 예물로 사용되었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왜 이 무화과가 성전 문 앞에 놓여 있었는지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오래 전 이스라엘 백성에게 내린 주님의 지시에 의해 과일과 포도주, 기름과 곡식의 첫 수확물은 성전 예배에서 주님께 바쳐졌었다. 이렇게 첫 수확물은 거룩한 것으로 간주되어 왔었다. 그래서 첫 산물을 거두게 될 때, 이러한 것들이 주님으로부터 온 축복임을 인정하고 즐기기 위해 큰 축제가 있어 왔다. 이로부터 주님께 특별히 바쳐지는 첫 무화과는 일상생활 안에 있는 선한 상태를 표현했다. 이런 삶 속에서 사람들은 주님을 사랑함으로 행동하고 주님의 원리에 따라 자기들 삶을 꾸렸던 것이다. 따라서 본문의 비유에 있는 좋은 무화과는 맨 처음 딴 잘 익은 무화과 같았던 것이다. 표현적으로 볼 때 우리 모두는 주님의 성전에 각자의 일상 생활에 있었던 행동들을 갖다 놓게 된다. 그 이유는 진짜 인격, 또는 삶의 품질은 우리 행동들 안에 존재하기 때문이고, 이런 행동들을 수단으로 우리는 자신의 사랑의 품질과 예배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한가지 측면에서 주님의 성전은 그분의 신성한 인간성이신 바, 그 인간성 안에서 그분은 우리와 함께 거하시고, 그 인간성 속에서 우리는 그분을 이해하며 예배하는 것이다.
좋은 무화과는 주님을 사랑하며 그분의 인간성인 성전에 접근하려는 사람들을 표현한다. 이와 같은 상황 속에서만 천국이 형성되어진다. 포로된 유대인들이 고된 훈련을 계속 통과해야만 되었지만 결국 그들은 거듭남에 진입해서 천국으로 인도된다. 그들의 심정과 생활은 맏물 무화과의 영적 향기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썩은 무화과는 악 속에 있는 이들, 악을 사랑하여 실지로 사용한 바, 자신들의 것으로 만든 이들, 그래서 주님의 가르침과 인도를 따르지 않는 이들이다. 영적으로나 표현적으로나 그들은 먹을 수 없이 썩어진 무화과인바, 그것들 속에는 어떤 선함도 없이 부패되어 있어서 거듭나는 마음에 의해 음미될 수 있거나 거듭나는 마음과 융화될게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심판

유대인이 두 부류로 갈라짐은 심판에서 악한 자와 선한 자의 갈라짐을 표현한다. 이와 같은 분리는 집합체로서의 인간 사이에서 발생하고, 개인적으로는 각자의 마음 안에서 발생하는데, 이럴 경우, 마음속의 선함은 그 속의 악한 경향성에서 분리되어 보호되고 발달할 때 있어진다.
이러한 정신적인 분리 속에서 선한 원리들은 자연적인 생각들을 성가시게 하는듯 여겨지지만 결국 거듭나는 사람의 고향이요 영적인 출생지인 천국 조건의 탁월함을 열매맺어 준다. 그러나 악에 기울려는 경향성, 주님의 가르침에 따르지 않으려는 마음, 주님의 예언을 듣고서도 계속 악쪽으로 고집하는 마음은 결국 거듭나는 마음으로부터 분리되어 항구적으로, 완전히 흐트러지고 만다. 그래서 마음이 거듭나는 인격으로 강하게 성장할 때, 이런 악에 기울려는 경향성들은 결국 “욕을 먹고 희롱거리 조롱거리”라는 것밖에 없는 마음이 되어 버린다. 영적으로 그런 경향성들은 칼과 기근, 염병을 만나 그 땅에서 모두 사라지고 만다. 즉 그들 자신의 악과 거짓 교리로 인해 자멸되고 만다는 말이고, 따라서 그 속에 생명이 없고, 그들의 삶은 악한 영향이 뿜는 독에 중독되고 만다는 말이다. 그래서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은 천국적 삶으로 만족하게 될 것이고, 사악한 자는 악에 의해 살해당해 영적 죽음에 던져진다.

실제 응용

여호와께서 유대인들을 그들의 선을 위해 바빌론 땅에 보내셨던 것과 같이, 주님은 그분의 슬기로우시고 사랑하시는 섭리 속에서 우리가 참아 내기 매우 힘든 것처럼 보이는 많은 경험들에 빠지는 것을 허용하신다. 이런 허용은 모두 다 우리의 선을 위한 조치일 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에게 닥치는 시련을 신성한 섭리의 인도와 허용의 법칙으로 받아서 그런 시련들을 통해 우리에게 제공하려 하는 선을 포획해야 할 것이다.
주님을 신뢰하여 순종하는 경험을 많이 가진 이들이 가장 분명하게 인식하는 것은, 걷고 있는 당사자가 그의 발걸음을 지휘하는게 아니다는 것, 오히려 선한 이의 발걸음은 여호와에 의해 좌지우지된다는 것, 그래서 비록 자신이 밑으로 떨어졌다 해도 자신이 내동댕이쳐지지 않는다는 것, 그 이유는 여호와가 그 사람의 손을 붙들고 계시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를 아는 선한 사람은 자기 체험을 되돌아보면서 이렇게 외친다. “저는 고민해 보지도 않고 당신을 저버렸지만, 이제는 당신의 말씀을 지키나이다… 제가 괴로움을 받음으로 당신의 규례를 배우게 된 것, 저에게는 더 없이 좋은 일입니다.”
우리 속에는 한편은 좋고 한 편은 나쁜 두 명의 남자, 또는 여자가 있는데, 이것이 본문에서 무화과 두 바구니로 표현되고 있다. 우리 속의 이 두 사람 사이에는 억눌러 질 수 없는 분투가 존재하고, 그중 어느 것이 통치권을 장악하도록 우리가 결정할 때까지 싸움은 상존한다. 그리고 이 둘은 항구적으로 함께 남아 있지도 못하고, 서로 협동할 수도 없다. 따라서 어느 하나가 반드시 주인 노릇을 하게 되어 있다. 우리 각자는 어떤 것을 주인이 되게 하느냐에 대한 질문에 자신 스스로 답해서 결정지어야 한다. 이리하여 우리가 어느 것을 선택하게 될 때 우리는 자신의 인격과 운명을 결정짓는다. 고로 우리의 거듭남은 각자의 정신적인 이스라엘이 크게 동요하게 만들기도 하고, 각자의 삶에 큰 위기를 갖게도 하는 것이다. 그래서 거듭남은 감각적 삶에 포로 되어 있었던 영에 속한 것에 자유를 갖게 하는 동시에 악한 경향성을 흐트리고 몰아낸다. 거듭날 것이냐, 말 것이냐는 우리 삶에서 가장 큰 질문일 것이다.
위의 말들에 부수적으로 따라오는 자신 스스로의 물음은 이러할 것이다. “나더러 무엇을 먹고, 마시며, 입으라는 말인가?”, “세상적 삶을 갖기 위해 나더러 무엇을 하라는 얘기인가?”, “어디서 살아야 되는 건가?”, “내가 가질 수 있는 게 무엇인가?” 이런 물음보다 한 수 높은 질문도 떠오를 것이다. “나는 무엇인가?”, “왜 내가 이곳에 있는 건가?”, “나의 인간다움의 가능성은 무엇인가?” 이런 스스로의 물음에서 있어야 할 것은 비유에 있는 환상, 무화과 두 바구니를 여러분의 정신적인 눈앞에 붙잡아 볼일이다. 그리고 자신에게 되물어서, 두 바구니 중 어느 바구니가 당신의 진짜 삶, 당신의 인간다움의 품질이 담긴 바구니인지, 당신의 운명의 추세는 어느 바구니에 해당되는지 점검해 보라. “한 바구니는 썩 좋은 무화과를 담고 있다… 다른 한 바구니에는 먹을 수 없이 썩어 버린 무화과 였다.”

13
예레미야의 멍에와 끈

성서: 예레미야 27장 2,3,6절, 28장 1,2,10,12,13절

27장. 2. 야훼께서 나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무로 멍에를 만들어 가죽끈으로 목에 메어라. 3. 에돔 왕과 모압 왕과 띠로 왕과 시돈 왕이 유다 왕 시드키야에게 보낸 사절들이 예루살렘에 와 있지 않느냐? 너는 그들에게 내 말을 일러 주어, 본국의 왕들에게 전하도록 하여라.”
6. “이제 나는 이 천하를 나의 종인 바빌론 왕 느부갓네살에게 맡기기로 하였다. 들짐승까지도 그에게 맡겨 부리게 하였다.”
28장. 1. 같은 해에 일어난 일이다. 때는 시드키야가 유다 왕이 된 지 얼마 안 된 제사 년 오월이었다. 기브온 사람 아쭈르의 아들 하나니야라는 예언자가 있었는데, 그는 야훼의 성전에서 사제들과 온 백성이 보는 앞에서 나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2. “만군의 야훼께서 이스라엘의 하느님으로서 하시는 말씀이오. ‘나 야훼는 바빌론 왕의 멍에를 부수기로 하였다.’”
10. 그러자 예언자 하나니야는 예언자 예레미야가 메었던 나무멍에를 목에서 벗겨 부수었다.
12. 예언자 하나니야가 예언자 예레미야의 목에서 나무멍에를 벗겨 부순 후에 야훼의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내렸다. 13. “너는 하나니야에게 가서, 야훼의 말이라 하고 이렇게 일러라. ‘너는 나무멍에를 부수었지만, 나는 그 대신 쇠멍에를 만들겠다.’”

보호하는 섭리

진리를 지각하여 인정하면서 빛에 반대되는 죄나 악 속에 푹 빠지는 것보다는 아예 진리를 모르는 무지 속에 파묻혀 있는 것이 퇴보하는 인격을 위해서는 더 낫다.

글자적 이야기

오늘 본문과 그 전후의 문맥은 이스라엘 백성의 역사에서 매우 곤란했던 시대에 관해 언급하고 있다. 이 시대의 사제와 통치자까지 포함하여 그들 대부분은 신성한 것을 고백하지만 피상적으로 간주했고, 아주 감각적인 상태로 침몰되는 타락의 시대 속에 휘말려 있었다. 이기적인 세상욕의 영이 거의 모든 이, 모든 계층에 이미 스며들어 있었다. 백성들 일부는 이미 포로로서 바빌론에 끌려갔고, 이제 다시 갈대아의 대 군사가 거룩한 성 예루살렘을 포위하여 공략하고 있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두려움, 의혹, 불 신뢰, 자포자기에 이르기까지 모든 좋지 않은 것이 그들 주위에 잔뜩 깔려 있었다. 양식은 거의 없어졌다. 군사력도 거의 믿을 수 없다. 그 이유는 과거 갈대아군이 자기들을 패배시켰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 안은 흥분으로 가득 차 있다. 더욱 나쁜 상황은 백성들이 두 패로 갈라진 것이다. 한 패는 갈대아인들에게 항복하자는 것이고, 다른 쪽은 계속 저항하면서 에집트와 연합해서 갈대아인과 싸우자는 것이었다. 이런 혼란 속에서 여호와의 예언자인 예레미야는 여호와의 이름으로 목소리를 돋구어 갈대아인에게 항복해서 평화적으로 바빌론에 끌려가 이미 거기 가 있는 동료 백성들과 합류하는 것이 지금 같은 참혹한 전쟁을 치르려는 것보다 훨씬 나을 것이고 어차피 이스라엘은 패배하여 전보다 더 처참한 성의 파괴와 여호와의 성전 파괴를 당하기 보다 더 낫지 않으냐고 백성을 설득했다.

하나니야

예언자 수련생의 하나인 하나니야가 나서서 항복을 반대하고 전쟁을 선호하는 쪽에서 적극 활동했다. 그러나 여호와의 명령으로 예레미야는 예언을 반복하면서 본문의 비유를 가지고 하느님의 방침을 강조해 주었다. 그래서 그는 멍에와 끈을 만들어 자기 목에 매고 이방인들의 왕에게 그것을 보내어 바빌론 왕 느부갓네살에게 복종하라고 권유했다.
이런 식으로 해서 예레미야는 많은 유대인들, 특히 연약하고 우유부단한 시드키야 왕에게 그들이 생각해 볼만한 영향을 끼쳤다.
그러나 하나니야는 예레미야의 조언을 뒤엎었는데, 특히 시드키야 왕에 대한 영향력을 뒤엎었다. 하나니야는 자기가 주님의 성전에서 예언하도록 불렸다고 노골적으로 주장하고, 유대인들은 갈대아인들에 저항하고 물리쳐야 한다고, 더욱이 포로가 되어 가 있는 유대인도 머지 않아 예루살렘에 귀환한다고, 그들과 더불어 과거 갈대아인들이 강취해간 여호와 성전의 거룩한 집기들도 되돌아 올 것이라고 떠들어댔다. 이 거짓 예언을 뒷받침하기 위해, 하나니야는 예레미야의 목에 있는 멍에를 벗겨 부수었다. 이 멍에는 여호와의 명령으로 예레미야가 예언할 때 걸친 것들이다.
하나니야의 이런 행동은 신성을 모독하는 짓이었다. 그 이유는 그 행동이 여호와께서 인정한 예언자를 무시한 것이요, 따라서 여호와의 말씀에 정면으로 도전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자 여호와의 말씀이 진정한 예언자 예레미야에게 내려와, 하나니야가 예언이라고 주장한 것이 거부되도록, 거짓을 진짜 예언인 냥 현혹한 대가로 그는 곧 죽게 될 것이 예언되었다.
이상의 글자적 이야기는 두 예언과 그 속의 의미에 날카로운 대비를 불러 일으키고 있다.

영적 의미

오늘날 우리는 위의 이야기 속에 있는 영적 의미, 특히 각자의 개인 생활에 응용될 것들에 관심을 갖게 된다. 주님 말씀 속의 영적 의미는 언제나 우리의 내향적 삶 속의 것에 응용된다는 것을 염두에 두면서 위의 이야기가 우리 마음의 내향적 세계에 있는 광경들임을 살펴 그 이야기가 우리에게, 우리 속에서 의미하는 것을 살핀다.

속박 (captivity)

본문에 흐르는 중심 요점은 포로됨, 즉 속박된다는 것에 있다. 멍에와 끈은 속박되는 것에 대한 표현으로 우리에게 친숙한 자연물일 것이다. 선한 사람에게 정상적인 조건이라면 그것은 자유이고, 그 상태에서 그는 자신의 목적과 계획을 수행할 수 있다. 따라서 속박(포로됨)은 자유가 제한되어, 행동에 한계를 주고 생각과 애정을 감금당하게 한다.
자연적인 속박에는 이런 두 종류도 있을 것이다. 즉 자발적인 속박과 비자발적인 속박이다. 어떤 이가 자신의 어떤 목적을 성취해 가는데 있어 사회적으로 정치적인 속박에 자신을 스스로 한정시키게 된다면 이는 자발적인 속박일 것이다. 그러나 비자발적일 경우의 속박이라면 , 그것은 그가 사회법을 깨트렸을 때 그를 강제로 제한하는 때이다. 영적 속박도 이와 유사한 구별을 가진다. 거듭나는 사람이 상호적인 사랑이라는 묶음(속박)으로 자신을 주님과 이웃사랑이라는 데에 한정시킨다면, 이것은 자발적이요 그 자신이 기뻐하는 일이 되어 이 속박은 사실상 애정과 생각, 그리고 행동에서 가장 큰 충만함과 자유를 제공받게 된다.
그러나 퇴보되는 사람은 자신들에게 밉살스럽게 보이고 역겨운 법에 의해 속박된다. 이 속박은 그들의 바램과 계획, 그리고 행동을 엄격히 제한시키고, 그들이 이 속박을 깨트릴 경우, 그 댓가로 더욱 격리되어 더 손해를 본다는 두려움으로 통치 받게 된다. 퇴보되는 사람에게 있게 되는 속박은 억제하는 수단이요, 영적인 속박이다.
인간이 선함을 사랑하는 것을 기꺼이 하지 않을 때, 그는 벌이라는 두려움에 속박될 수밖에 없다. 신성한 진리를 거절하는 모든 마음은 결국 거짓 원리들에 포로가 되는 지경에 빠지게 되고, 이 상황은 마음의 문을 닫아걸어 영적 어두움에 처하고 만다.
영적 진리를 명백하게 지각했음에도 심정으로는 그것을 싫어하여 일상생활에서 그 진리를 모독하는 것보다, 차라리 영적 진리를 아예 모르는 채 있는 것이 당사자의 구원을 위해 더 나은 때가 있다. 교도소라는 사회 체제는 일반 사회 공동체를 위해서, 그리고 범죄자 자신을 위해 더 나은데, 그 이유는 수감자로 어떤 제한을 가해서 불순종에 대한 처벌이라는 더 엄격한 제한을 부여하기 때문이다. 이럴 경우 범죄자는 자신의 악한 경향성에서 어느 정도까지라도 방어되게 해준다. 만일 그에게 자유를 계속 허용한다면, 그는 더욱 더 많은 범죄에 빠져 끝장을 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런 경우는 영적 사항에도 비등하게 존재한다. 범죄자 속의 선이 보호되기 위해서는 두려움이라는 속박이 필요하다. 이 속박이 본문 비유에서 표현되는 중심 요점이다.
자유로운 사람 또는 국가가 포로 상태에 들어간다는 것은 마음 속의 애정이나 생각의 수준이 더욱 낮아져 삶의 표준 역시 하위에 머무는 상태를 표현한다. 그런데 본문 시대 때의 유대인들은 최악의 정신 상태에 이미 들어가 있었다. 이 상태의 그들에게는 포로가 되는 것이 그들을 위해 최상의 방법이다. 그들이 포로가 되면 어떤 제한 아래에서 살아야 될 것이고, 그 삶은 그들 속의 끈질긴 자만심을 깨트려지게 해서 더 많은 악과 죄에 빠지지 않도록 해줄 것이다. 그들의 생각에는 선택된 하느님의 백성이라는 우월감의 이기적인 자연적 자만심으로 가득 차 있었다.

바빌론

바빌론은 권력과 자만심, 그리고 학식의 큰 중심이었다. 그러나 바빌론의 삶이나 학식은 자연적 감각에 속한 것이요, 자연적 마음의 수준에 머물 뿐이었다. 거기에는 영적인 것에 관한 지식은 없다. 그들의 권세, 영예, 화려함은 육에 속한 것, 세상에 속한 것이다. 따라서 바빌론은 인간 본성 중에서 외적이고 감각적 측면을 표현한다. 특히 의지나 심정에서의 감각적 측면인바, 그들의 예배는 외적이고 형식뿐이지, 거기에는 영에 속한게 없다.
따라서 바빌론 군대 앞에 나가 항복한 유대인은 영적 진리에 관한 지식을 가진 교인이 타락하는 과정에 진입된 상태를 표현한다. 그리고 이런 사람은 무지 속으로 빠져 들어 결국 자연적 마음 수준에서 느끼고 생각하는데까지 자신이 몰입되게 허용된다. 이래야만이 그 사람으로 더 이상 영적 빛에 반대되어 죄를 범하는 일이 진행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루살렘에 남아서 버티는 유대인들은 영적인 것을 인정하고 그 지식 속에 머무르면서 더욱 악한 삶에 침몰되는 상태를 표현한다.

기회

물론, 어떤 사람이 스스로 정신을 일으켜 세워 자신의 악한 습관을 깨트리고 자신 속의 악한 경향성을 제한시켜 간다면, 그는 영적 예배의 따스함과 영적 진리의 빛 속에서 영적 자유를 누리게 되어 더할 나위 없이 좋게 된다. 그러나 그가 그렇지 못하다면, 주님은 그로 하여금 영적 무지 가운데 빠지도록 허용하시어 그를 보호하신다. 사랑하시어 보호해 주시려는 주님의 섭리는 각 인간이 현재 달성 가능한 최상의 조건에 관계하고 있다. 이렇게 해서 각 인간이 지옥의 어떤 형체에로 몰락되는 것보다는 비록 가장 낮은 천국이라 하더라도 그를 그곳에로 인도하시는 것이 그를 위해 더 낫기 때문에 그 사람 속에 든 영적 생명은 제 아무리 적다 해도 주님은 그것이 보존되게 하시려 애쓰신다. 그런데 이보다 더 악화된 경우, 그 사람이 천국의 어떤 형체에로도 구원되어질 수 없는 현재 상황이라면, 게다가 더욱 자기 심정에 지옥을 더 만들어 가는 형편이라면, 그 사람이 수긍해서 인도되어질 수 있는 가장 부드러운 지옥에로 가는 것을 허용하신다. 근대 개혁 주의자라고 자처하는 이들의 경우, 위와 같은 신성한 방법들로부터 자신들이 실제화한 방법보다 훨씬 더 위대한 지혜를 배울 수 있었을는지 모른다. 아주 흔한 경우는, 그들이 자신들의 관점에 따라 인간이 도달 가능한 최고의 상황을 그들 마음에 확정해 놓고 개혁이 필요한 모든 이로 그 지점까지 도달하라고 요구하는 것이다. 따라서 미처 따라오지 못할 경우, 그를 최악의 악한 상태에 침몰되는 것을 내버려두는 경우를 초래하고 만다. 이런 방향을 강행하다 보면, 개혁하려는 당사자가 사다리에 발을 들여놓는 최소한의 수준에라도 닿을 수 있게 섭리하시는 주님의 방법을 지연시키는 경우도 발생된다. 광대한 주님의 섭리는 모든 인간이 똑같은 높은 수준이나 표준에 도달하라고 강요하시지는 않는다. 그러나 각자가 갈 수 있고 기꺼이 가겠다고 하는 만큼까지 인도해 주신다. 주님의 무한하신 사랑은 근대 개혁자들이 불가능이라고 포기한 많은 이들을 결국 구원해 주신다.

훈련

그러나 주님은 각 사람에게 꽤 유용해질 수 있는 영적 훈련을 주고 계신다. 주님이 허용하시는 모든 훈련, 그것은 영적이든 자연적이든 우리의 인생 결산에서 남아 있게 될 우리의 선을 위해 허용하시는 것이다. “여호와의 모든 길은 그분의 언약과 법도를 지키는 이에게는 자비와 진리이시다.” 그래서 우리가 주님이 허용하신 훈련을 더 충분히, 자유롭게 받아, 그 훈련에서 더 연단된 선을 받는다면, 주님은 더 많은 선을 우리의 인격과 행복을 위해 해주실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우리가 자신에게 닥치는 훈련을 거절하고 게다가 반항까지 한다면, 주님은 우리에게 도달 가능하도록 더 고된 훈련을 허용하실 수밖에 없게 된다.
본문과 그 전 후 문맥에서 기록된 바대로 예루살렘에 남아 있는 유대인들은 위의 말에 대한 실 예이다. 여호와께서는 예언자 예레미야를 통해 나무 멍에 메기를 거절한 그들에게 나무보다 더 차고, 더 무겁고, 더 고될 뿐인 쇠 멍에를 그들 스스로 자초했음을 알려주었던 것이다.

나무와 철

나무는 자연적 선을 표현하는데, 이를 반대의 의미에서 보면 자연적 악을 표현해 준다. 철은 자연적 진리와 글자적 진리를 명시하는바, 그 진리가 왜곡되면 자연적인 거짓을 표현하게 된다. 나무 멍에를 멘다는 것은 정신적으로 타락하는 우리 속의 애정들이 자연적인 악의 지배하에서 사랑을 수행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쇠 멍에를 멘다는 것은 우리의 악들과 반대되는 글자적인 진리들과 대결하는 상태에 있게 될 것을 말한다. 예를 들면, 십계명이 악에 대한 강력한 제제수단이 되는 경우일 것이다. 그래서 철에 속박된다는 것은 참아 내는 정도가 나무로 속박되는 것보다 더 힘들다. 그 이유는 우리 심정이 글자적 진리에 동조하지 않는 데도 우리의 이해성은 그 진리를 빤히 보고 있기 때문이다. 이럴 경우 우리의 마음은 혼란 상태로 빠지는 바 더 힘든 고뇌를 겪게 된다.

두 예언자

진정한 예언자 예레미야와 거짓 예언자 하나니야, 두 사람이 유대인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하려고 힘을 겨룸이란 우리 마음속에서 주님의 진리와 자아에서 나온 관념들이 서로 진짜 진리라고 하면서 마음에 터전을 닦으려 다투는 모습을 표현하는 것이다. 흥미있는 것은, 구약 히브리어인 하나니야라는 이름은 그리스어인 신약에 등장하는 이름, 아나니야(사도행전 5:1-10)와 같은 바, 그들 사이에 공통점이 있다는 것이다. 하나니야는 거룩한 성전에서 여호와의 이름으로 거짓말을 한 거짓 예언자였다. 그는 예레미야의 예언으로 재빠른 죽음을 자초했다. 그는 그 당시 시대의 특별한 거짓말쟁이로 주님에 반대되는 거짓말을 성전에서 했던 것이다. 그리고 사도 베드로의 말로 죽어 버린 아나니야도 비슷한 상황이다. 죽은 두 사람 모두 하느님의 영을 시험해 보는 가운데 신성모독이란 죄에 빠진 것이다. 그래서 두 사람 모두 거짓말을 해대는 자아 사랑의 영을 표현하는데, 이 영은 거듭남의 큰 방해물인 것이다. 따라서 우리에게 유일한 안전도로는 신성한 인도를 따르는 것, 그분이 무엇을 지시하든, 그분은 현재의 우리에게 최선의 결과를 갖도록 인도해 주심을 알고, 그분께서 최상의 것을 향해 설비하시어 허용하시는 수단을 통해 그분의 인도를 따르는 것뿐이다.

14
포장된 광장에 돌을 묻다

성서 본문: 예레미야 43장 8-10절

8. 다흐반헤스에서 야훼의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내렸다. 9. “큰 돌을 몇개 가져다가, 다흐반헤스의 파라오궁 대문 앞 포장된 광장을 파고 유다 사람들만 보는 앞에서 묻어라. 10. 그리고 나서 만군의 야훼가 이스라엘의 하느님으로서 하는 말이라고 하며 유다 사람들에게 이렇게 일러라.

개요

자연적 감각 속의 거짓인 오류들은 타락한 마음을 이기적인 심정 속의 악에서 보호해 줄 수 없다.

글자 이야기

바빌론 왕이 예루살렘을 정복하여 그곳 백성의 대부분을 끌고 갔을 때, 그 왕은 유다 왕국 내의 토지를 경작시키고 그 소출을 거두도록 일부 가난한 자들을 남겨 놓았었다. 그리고 바빌론 왕의 명령을 받도록 게달리야에게 잔류민을 통치하게 했다. 그러나 한참 후, 유대인의 한 사람인 이스마엘과 그의 부하들이 게달리야를 살해했다. 그 뒤 그들은 바빌론 왕의 보복이 두려워 많은 유대인을 사로잡아 암몬땅으로 건너가고자 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요하난과 그의 부하들은 군대를 이끌고 이스마엘을 추격하여 사로잡아 가던 사람들을 되찾고 이스마엘은 암몬땅으로 도망쳤다. 그러나 요하난과 그의 부하들 역시 예루살렘으로 되돌아가는 것이 걱정이 되었다. 그래서 그들은 신변의 안전을 위해 에집트로 가기로 계획하면서 여호와의 예언자 예레미야에게 자기들이 어떻게 해야 좋을지를 상담하였다. 예레미야는 그들에게 에집트로 가지 말고 예루살렘으로 귀환해야 한다고 경고했다. 게다가 그들이 고집 부려 에집트로 갈 경우, 그들이 예루살렘에서 만나는 적과 똑같은 적을 그곳에서도 필히 만나 죽게 될 것이라고까지 말해 주었다. 그러나 이미 에집트에 가기로 작정한 이 사람들은 오히려 예레미야를 거짓 예언자로 몰아 붙였다. 그리고 에집트로 향하면서 예레미야까지 강제로 데리고 갔다.
이쯤에서 오늘 본문이 이어지고 있고, 그 장소는 다흐반헤스이다. 다흐반헤스는 팔레스틴의 남쪽 경계요, 고센지방의 남쪽 한계쯤에 있는 에집트의 큰 도시로서 각기 다른 시대 때, 벳세베스, 또는 온, 또는 헬리오폴리스라 불리기도 한 도시이다. 이곳은 에집트인의 학식과 예배의 중심지이기도 했다. 그래서 그곳은 태양의 집 또는 큰 신전이 있기도 한 곳이다.
그런데 바빌론 왕 느부갓네살을 불러 파묻어 놓은 돌 위에 옥좌를 차리게 하고 이 큰 도시 다흐반데스에 있는 파라오의 궁전과 그곳의 신전을 부수고 에집트를 말끔히 털게 하리라고 말해지고 있다.

암시해 주는 것들

본문과 같은 예레미야의 행동은 유대인들에게 과거와 미래에 관해 많은 생각을 해보도록 했을는지 모른다. 본문의 광경은 아주 오래 전 히브리민족이 에집트에 속박되었었던 모습이었다. 벽돌은 그들 선조에게 에집트 파라오가 짚도 주지 않으면서 단단한 벽돌을 대량으로 구워내도록 명령한 강제 노동을 암시해 주었을 것이다. 과거 에집트의 속박에서 해방된 큰 사실은 장차 여호와에 의해 있게 될 또 다른 구원의 희망을 말하고 있기도 한 것을 눈치채게 했을지도 모른다.
과거의 역사를 참작할 때 그 역사는 그들로 하여금 에집트에 상주하려는 것을 주저하게 했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야곱과 요셉의 시대 때에 그들은 에집트에 자발적으로 갔지만, 여호와에 의해 모세를 따라 출애굽 하기 전 그들은 잔인한 속박 속에 묶여 있어야 했기 때문이다. 지금 예레미야의 예언은 그들의 끔직한 적, 바빌론 왕이 에집트와 팔레스틴 사이의 경계인 다흐반데스에까지 와서 그의 보좌를 차리게 된다는 것이다.

영적 의미

이스라엘족을 위해 교회가 세워진 곳 가나안 땅, 팔레스틴은 영적 인간, 또는 인간 안의 영적 마음을 표현한다. 그리고 에집트는 자연적 인간 또는 인간 안의 자연적 마음을 표현한다. 타락하는 자연적 마음은 자연적 감각이라는 어둠 속에서 영적 진리의 빛도 없이 존재하게 된다. 그래서 에집트로 내려간다는 것을 영적으로 볼 때, 이는 영적 진리와 분리되어 자연적 감각이라는 평면에서만 생각하는 것을 말한다. 이런 상황은 거듭나는 사람을 위한 고향이 못된다. 이런 상황은 삶의 여정 중 초기 단계에 거치는 임시로 체류하는 장소일 뿐이다. 그런데 인간이 주님의 법을 생각하기를 그 법은 너무 엄격해서 따르기에 힘들다고 말할 때, 그는 자기의 자연적 감각 앞에 나타나는 외관에 따라 생각하기 시작하고, 신성한 가르침을 무시해 가는 쪽으로 기울게 된다. 이는 인간이 타락해 가는 상황이요, 인간의 자연적 감각을 표징한 뱀의 소리에 경청하는 이브이다. 뱀같이 낮게 기어다니는 생명, 자연적 감각은 하느님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에집트에서 뱀을 높이 평가해서 숭배하기까지 한 것은 에집트의 상응성을 고려해 볼 때 합당한 결과일는지 모른다.
하느님의 말씀에서 밝혀지는 진리에 자신의 자연적 감각을 증거로서 갖다 대며, 감각성에 비중을 더 두게 될 때, 우리는 고대 유대인 같은 위치에 서고 마는 것이다.
예레미야의 예언을 받지 않은 이들을 두고 “거만한 자들”이라 부르고 있다. 거만한 자란 신뢰를 주님에게 두지 않고 자신에 두는 이들을 말한다. 오늘날의 거만함, 자아 총명 역시 위와 유사한 영적 결과이다. 하느님의 법칙은 지키기에 너무 무리한 요구인듯 싶어 자기 감성이 주는 확신에 기대려 물러 선다면, 막상 걱정했던 악을 피하지 못한다는 것, 오히려 그 악들이 우리에게 다가와 우리의 진로를 막고 점거해 버린다. 그 이유는 우리가 악에 잘 기우는 경향성을 지녔기 때문이다. 사실 이런 악들은 우리에게서 절대로 멀리 있지 않음을 언제나 되새겨야 한다.

바빌론

위의 악은 에집트까지 뒤쫓아와 유대인을 사로잡는 바빌론 왕으로 의미되고 있다. 바빌론이란 의지, 심정 측면에서의 자연적 마음을 표현한다. 오늘 본문의 경우, 바빌론은 교회를 파괴하는 악한 자연적 심정을 표현하고 있다. 바빌론 왕이란 타락하는 자연적 의지를 좌지우지 해 버리는 거짓 원리를 말한다. 그리고 에집트는 이해성 또는 지성 측면에서의 자연적 마음, 자연적 감각 속의 오류를 가지고 생각하는 지성을 표현한다. 따라서 바빌론이 에집트를 정복했다는 것은 감각 속의 거짓이나 오류를 수단으로 자연적인 악한 사랑이 마음을 정복하는 것을 말한다. 그렇게 정복되는 이유는 거짓은 악한 바램에 동의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거짓이나 악한 바램은 둘이 협력하여 주님의 선하고 진정한 원리에 맞서기 때문이다. 이런 모습이 이스라엘이 에집트에 합류한 다음, 바빌론이 에집트를 정복하는 가운데 합류해 버린 에집트에 있는 이스라엘족까지 정복해 버리는 것으로 표현되고 있다.
타락하는 자연적 의지가 마음 전체를 좌지우지하는 한, 영적 마음은 어떤 성장도, 자유도 있을리 만무하다.
비록 에집트나 바빌론이 표현하는 정신적 조건들이 한 인격 속에서 내향적으로 서로 협동하는듯 해도 그 둘 사이에 전쟁이 있는듯 보이는 때도 있다.

이론과 실제

다시 말해서, 똑 같은 마지막 결과를 향해 실제로 일하는 것들 사이에 눈에 나타나 보이는 교전 상태가 종종 있다는 말이다. 그런데 이와 같은 대적 상태는 최소한도 어느 한쪽의 경우만이라도 피상적이거나 무지하다. 예를 들면, 사람들은 영적 진리에 무지한 가운데 자신의 자연적 감각 속에 있는 관점으로부터 삶 속의 것들을 보는 경우가 많다. 이 때 그는 자신의 심정에서 올라오는 악한 느낌에 반대한다. 그러나 그 반대는 이론적일 뿐이다. 그가 반대하는 이유는 세상의 많은 이들이 나쁜 것으로 여기기 때문에 자신도 그 의견에 동조 안할 수 없기 때문이다. 더욱이 어떤 나쁜 감정이 타인에게서 노출되는 것을 볼 때 우리는 아주 신속하게 그 잘못을 끄집어 올려 단죄하려 든다. 특히 그 감정이 자신과 이해 관계가 있을 경우는 더욱 기민하게 반응한다. 더 나아가, 상대방이 자기에게 어떤 자극을 가했을 경우, 그는 그 행동에 대해 타인들이 평가한 것 같이, 또는 많은 이들이 이론적으로 채택한 것과 동일하게 느끼고 행동하는 쪽으로 즉각 기울고 만다. 그래서 만일 우리가 자신의 가슴속에 삶의 영적 원리를 고정시키지 못했다면, 다시 말해 악에 반대하되 그 반대가 심정에서 이루어지지 못하는 상태에 머무르고 있다면, 우리의 피상적인 이론은 자신 속의 악한 바램에 의해 쉽게 흐트려지고 만다.
또 하나 예를들어 생각해 보자. 교회에 참석하는 것은 인간의 의무라고 교육받으며 성장해 온 사람, 더불어 경건하게 보이는 것이 순수한 경건심인듯 여겨지게 양육된 사람이 있을 경우, 그는 겉보기에 아주 경건하며 교회의 일에도 아주 열성적일는지 모른다. 그럼에도 그가 은밀히 기대고 있는 원리는 “믿음만으로 구원된다”는 교리, 구원은 실제 삶 속의 선함과 필수적 관계는 아니다는 교리 쪽으로 흘러간다. 이럴 경우 그는 주일날 배운 성서 속의 진리가 주 중의 일 속에로 이행되지 못한다. 게다가 나쁜 감정이 마음속에서 솟구칠 때, 처음에는 그것이 좋지 못하다고 여겨질지 모르지만 결국 피상적 상태에 머무르고 만다. 게다가 주님이 악이라 부르는 모든 것들을 포기해야 한다는데 대한 확고한 목적을 갖지 않았을 경우, 그 사람 속의 자연적이고 이기적인 바램들은 끝내 그 사람의 피상적인 사상을 뒤엎고 그의 행동까지 정복해 버리는 것이다. 설사 그가 에집트로 피신하는 것, 즉 자신 속의 자연적 감각의 빛으로 문제를 곰곰이 생각한다 해도 그 사람 속의 악한 경향성은 거기까지 뒤쫓아가, 결국 온 마음을 정복한다.
때로 우리는 교회 안에서 상당히 활동적이고 경건하며, 꽤 선한 사람인 것 같은데, 그가 큰 시험이나 갑작스레 덮친 시험에 버티지 못하는 것을 볼 경우도 있다. 왜 그렇게 될까? 그 이유는 그가 주님을 사랑함에 있어서, 신성한 원리에 있어서, 인간 안에 고귀함이나 성실도에 대한 사랑이 확실히 정착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좋은 정책(상식)이 나쁜 것을 행하는데서 단념하게끔 해 줄 것이라고 생각하는 한, 그 사람은 자기의 진짜 인격을 감추고 있는 것이다. 정신적 긴장이 한계점에 이를 때, 자기를 방어해 줄 수 있는 것이 자기 속에는 없다. 마치 에집트의 보호를 받고자 내려간 유대인 같이 결국 바빌론 왕의 손아귀에 도로 잡히고 만다.
우리가 주님의 선함과 진리를 일상생활에 건설하는 것 외의 어떤 것에 신뢰를 두는 한 우리 역시 위의 유대인 같은 신세가 되어 위험에 직면하고 만다. 자연적 감각의 오류들, 자연적 생각의 거짓들, 자기의 똑똑함에서 나오는 각종 아이디어 등은 자신 속의 자아 의지가 발동을 걸 때, 정작 어느 한계점에 가서는 한 걸음에 무너져 내린다.

돌과 벽돌

“큰 돌을 몇개 가져다가, 다흐반헤스의 파라오궁 대문 앞 포장된 광장에 묻어라.”
자연계는 크게 세 왕국으로 구성된다. 즉 동물, 식물, 광물 왕국이다. 이 세 가지는 생명의 각기 다른 등차, 종류, 품질로서 인간 안의 생명에 있어지는 세 개의 불연속 등차이다. 이 불연속 등차 중 가장 깊고 높은 등차는 천적 등차로서 주님을 사랑하는 것, 선함을 사랑하는 등차이다. 그 다음 등차는 영적 등차로서 이웃을 사랑하는 것, 진리를 사랑하는 등차이다. 세째는 자연적 등차로서 법을 알고 사랑하여 그 법에 순종하는 것이다.
광물계에 소속되는 보통의 돌들은 자연적 진리들을 표현하는데, 이 진리는 자연적 등차에만 열린 마음에 의해 보여지는 모든 것, 모든 진리를 말한다. 그래서 고대 사람들은 어떤 중요한 사건을 기념하거나 쌍방간의 합의에 대한 징표로 석상, 돌무더기, 돌기둥들을 세웠던 것이다. 그러나 이 돌들이 나쁜 목적, 잘못된 것을 언급하게 될 때, 그 돌의 표현성은 바뀌어 거짓, 잘못 응용된 왜곡된 진리를 표현해 준다. 따라서 성서 내의 서술에서는 돌이라는 단어가 그대로 말해지지만 그 서술의 실제 결과는 바뀌어 진리가 왜곡된 것, 어떤 이의 삶에서 진리가 남용된 거짓을 표현하게 된다. 인간의 자연적 감각에 묻힌 큰 진리는 그 진리의 품질을 잃고 만다.
예레미야가 취한 큰 돌은 그것이 자연계 안에 놓인 상태에서는 자연적 진리를 표현해 주지만, 그 돌을 이교도의 왕을 위해 포장된 광장 아래 묻었을 경우, 그 돌은 자연적 마음이 내뿜는 뜨거운 욕망 아래에 묻혀 감추여버린 성서 내의 자연적 진리들을 표현해 준다. 따라서 성서의 글자적 진리가 자아 총명이나 자아 사랑을 드러내는데 남용되었다는 것을 말해 준다. 자연계의 형체대로가 아닌 인간의 산물인 도로 포장에 쓰이는 모르타르(mortar)는 물과 석회로 끈끈하도록 반죽된 뜨거운 것이다. 그래서 모르타르는 거짓이라는 물과 자아 사랑이라는 불이 서로 연합된 상태를 표현해 준다.
사람이 만든 돌, 벽돌이란 인간이 주님의 진리와 대체해 보겠다고 하여 마음속에서 지어낸 거짓 사상들이다. 따라서 큰 돌이 묻힌 포장된 벽돌 위에 옥좌를 차리는 바빌론 왕이란, 인간이 자기의 감각적 사고로 성서 글자를 해석해서 만들어 낸 모든 거짓 관념을 수단으로 마음을 통치하도록 악한 사랑과 결합한 거짓 원리를 말한다. 그래서 세상에 돌아다니는 것들을 인간이 성서로부터 입증할 수도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 말을 되씹어 보면, 인간의 어떤 거짓 관념이 지지되도록 성서의 글자적 의미를 뒤집을 수 있다는 말이 된다.

에집트

느부갓네살이 와서 에집트를 쳐서 있게되는 모든 것들이란 자연적 마음에 가져다 놓은 나쁜 정신적 조건들, 이것들은 에집트가 어두울 때 감각적인 악한 사랑이 그 마음을 소유하여 자연적 마음에 남아 있는 얼마 안되는 선과 진리까지, 즉 거듭나는 삶의 밑천까지 몽땅 소모시키고 만다는 것을 구체적으로 그려주고 있다. 이스라엘이 에집트에 신뢰를 둘 경우 망하고 만다는 이사야의 예언으로 마감지어 보자. “아, 너희가 비참하게 되리라! 원군을 청하러 에집트로 내려가는 자들아! 너희가 군마에 희망을 걸고 많은 병거와 수많은 기병대를 믿는구나!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는 쳐다보지도 아니하고 야훼를 찾지도 않는구나. 하느님께서 어찌 어수룩하게도 재앙을 내리신다 하시고 그 말씀을 거두시랴? 괘씸한 자들의 집을 치러 일어나시고 엉뚱한 짓을 하는 자의 편에 서는 자도 치시리라. 에집트인들은 사람이요, 신이 아니다. 그들이 타는 말은 고깃덩이요, 정신이 아니다. 야훼께서 팔을 휘두르시면, 돕던 자도 비틀거리고 도움을 받던 자도 쓰러지리라. 모두 함께 멸망하리라” (이사야 31:1-3).

15
번쩍이는 불과 생물,
그리고 바퀴

성서 본문: 에제키엘 1장 4-16절

4. 그 순간 북쪽에서 폭풍이 불어 오는 광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구름이 막 밀려 오는데 번갯불이 번쩍이어 사방이 환해졌다. 그 한가운데에 불이 있고 그 속에서 놋쇠 같은 것이 빛났다. 5. 또 그 한가운데는 짐승 모양이면서 사람의 모습을 갖춘 것이 넷 있었는데 6. 각각 얼굴이 넷이요 날개도 넷이었다. 7. 다리는 곧고 발굽은 소 발굽 같았으며 닦아 놓은 놋쇠처럼 윤이 났다. 8. 네 짐승 옆구리에 달린 네 날개 밑으로 사람의 손이 보였다. 9. 넷이 다 얼굴과 날개가 따로따로 있었다. 9. 날개를 서로서로 맞대고 가는데 돌지 않고 곧장 앞으로 움직이게 되어 있었다.
10. 그 얼굴 생김새로 말하면, 넷 다 사람 얼굴인데 오른쪽에는 사자 얼굴이 있었고 왼쪽에는 소 얼굴이 있었다. 또 넷 다 독수리 얼굴도 하고 있었다. 11. 날개를 공중으로 펴서 두 날개를 서로 맞대고, 두 날개로는 몸을 가리우고 12. 돌지 않고 앞으로 날아 가는데, 바람 부는 쪽을 향해 곧장 앞으로 움직이게 되어 있었다. 그 동물들 한 가운데 활활 타는 숯불 같은 모양이 보였는데 그것이 마치 횃불처럼 그 동물들 사이를 왔다 갔다 하고 있었다. 그 불은 번쩍번쩍 빛났고, 그 불에서 번개가 튀어 나왔다. 14. 그 불은 번개처럼 이리 번쩍 저리 번쩍 하였다.
15. 그 짐승들을 바라보자니까, 그 네 짐승 옆 땅바닥에 바퀴가 하나씩 있는 게 보였다. 16. 그 바퀴들은 넷 다 같은 모양으로 감람석처럼 빛났고 바퀴 속에 또 바퀴가 있어서 돌아 가는 듯이 되어 있었는데….

주님의 현존

넓은 의미에서의 주제는 주님의 현존, 즉 모든 사람과 더불어, 그리고 각 개인과 더불어 항상 계시어 각자의 필요성에 편의를 제공하시는 주님에 관한 내용이다.
주님은 그분의 신성한 말씀으로 현존하시어, 그 말씀에서 다각도로 그분 자신을 밝히신다. 이렇게 해서 각 사람, 특히 각자의 영적 진보 단계에서 그가 실지 삶에 사용할 수 있는 정도만큼에서 정신적인 빛을 가져다주신다.

폭풍

폭풍이란 대기의 정상적인 조건을 휘저어 놓는 것이다. 따라서 영적 폭풍은 정신적인 조건이 휘저어지는 것을 말한다. 이런 폭풍은 예를 들면, 주님이 그분의 신성한 진리로 그분을 사랑하지 않는 이들, 또는 악과 거짓 속에 사는 이들 사이에서 명백한 그분의 현존을 드러내실 때 발생한다. 그 이유는 위와 같은 사람에게, 주님은 자기들의 현 조건을 간섭하시기 위해 휘젓고 파괴적인 힘으로 다가오시는 듯 여겨지기 때문이다.

북쪽

폭풍(회오리바람)이 북쪽에서 불어 왔다고 말해지고 있다. 방위는 인간 마음의 각기 다른 조건을 표현한다. 북쪽은 가장 어두운 방위로, 가장 밝은 빛을 주는 남쪽에 반대되는 방위이다. 그래서 남쪽의 빛은 총명의 영적인 빛을 표현한다. 북쪽은 그 반대가 되어 미미한 수준의 영적 총명, 즉 자연적 마음뿐인 상태, 또는 영적 진리에 무지한 상태를 표현한다.
신성한 진리로 접근하시는 주님은 인간의 자연적 마음에 회오리바람을 일으키시게 되어, 그 마음의 통상적인 조건을 깨트리신다.

구름

폭풍과 더불어 큰 구름이 밀려온다. 신성한 말씀의 영적 의미는 영적 마음의 경우, 그 앞에 밝은 빛, 따뜻한 광채로 존재한다. 그러나 자연적 마음뿐인 사람에게 영적 의미들이 숙박하려 할 때, 신성한 말씀은 글자적 의미라는 구름 속에 존재해서 말씀의 신성한 의미를 볼 준비가 안된 이들에 대해서는 영적 진리를 희미하게 보게 해준다.

포개지는 불 (enfolding fire)

그럼에도 볼 준비가 된 사람들의 경우, 그들은 구름 속에서 모든 것에 생명을 주는 신성한 사랑의 번쩍이는 불이 있음을 보게 된다. 본문에서 이 불은 “포갬 자체(infolding itself)” 또는 받는 자체(receiving itself)라고 말해지고 있다. 이렇게 말해진 이유가 불꽃이면서 앞으로 흘러나왔다가 중심에 있는 불로 되돌아가 포개지는 불의 흐름 때문일 것으로 본다. 이런 결과로 마치 별이 반짝이듯, 불의 섬광이 번쩍거림이 반복되었을 것이다. 이리하여 이 불은 근원적 측면으로의 불로서 계속 불을 공급하여 가는 모습이 된다. 이런 모습으로 본문은 주님의 사랑을 표현해 주고 있다. 즉 만물의 근원이 되는 사랑, 여기에서 인간을 위한 사랑과 지혜가 항구적으로 공급되고 있다는 것, 이 사랑은 사랑이 인식되면서 다시 주님에게로 되돌아간다는 것을 표현하는 것이다.
이러한 불 주위에는 후광 같은 빛남이 있었는데, 이는 주님을 명백하게 하는 신성한 진리, 이 진리가 그분의 사랑으로부터 흘러나옴을 표현한다. 이 빛남 한 가운데는 호박색갈(color of amber, 놋쇠)이었다. 호박색(황갈색)은 금색과 은색이 합하여진 색깔인 바. 금의 따스함과 은의 밝음을 가지게 된다. 호박색 같은 신성한 진리의 현존과 그 영향, 또는 신성한 말씀의 글자에서 속으로부터 따뜻하게 빛나는 것인 영적 의미를 표현한다.
불과 광채, 그리고 호박색이라는 세 가지 모습은 주님께서 그분의 말씀 속에서 세 가지 불연속 등차인 천적, 영적, 자연적 등차로 인간에게 나타나시는 세 가지 면모를 표현한다. 다시 말해 이 세 양상은 각기 다른 정신적 관점에서 보여지는 것, 즉 선함을 사랑함, 영적 진리로 총명함, 생활 규율에 순종하는 삶의 관점에서 보여지는 양상을 말한다.

생물

불 속에서 네 생물이 나타났다. 각기 다른 생물들은 주님이 신성한 말씀에서 각기 다른 총명의 수준으로 인간에게 감명을, 각자의 삶의 수준이나 평면에 따라 감명을 준다는 것을 표현하고 있다. 즉 이 사람일 경우, 신성한 말씀은 인간 삶의 모든 용도를 위해 하느님의 사랑의 선으로 가득 차 있기도 하고, 저 사람의 경우, 그 말씀은 명백한 진리의 보물 창고로 여겨지고, 또 다른 이의 경우, 말씀은 인간이 삶을 연구하고 응용해야 하리라 생각되지만 잘 알 수 없는 진리로 가득 찬 듯 여겨지기도 하고, 어떤 이의 경우 말씀은 행동 규율을 위한 지침서 역할로 나타난다.
이 생물, 또는 거룹이 외관상으로 표현하는 것은 글자상의 말씀이다. 이 글자는 내향적인 것, 즉 영적인 하느님의 말씀을 둘러싸서 자연적인 인간의 마음 안에서 진리가 모독되는 것에서 보호해 준다. 이렇게 해서 하느님의 섭리는 각자 사용할 수 있는 모든 것을 공급하게 해주면서 어떻게 사용할 수 있는 가를 모르는 이들의 남용을 방지시켜 준다. 가장 심오한 의미에서 이 생물들은 생명의 그릇인 인간에게 흘러드는 생명 자체이신 주님을 표현한다.
주님이 성경에서 생물들로 자주 언급되고 있는데, 각 경우에 인간에게 알려지고 보여지는 어떤 양상에 따라서 신성한 속성 중 어떤 면을 표현하고 있다. 예를 들면, 그분의 권능을 표현하기 위해 유다 지파에서 난 사자라 불리시고, 그분의 인자하심이 표현되도록 어린 양이라고 불리신다. 성경에서 사람들도 종종 각 개인이 표현하는 속성에 따라 선과 악이 표현되도록 동물들로 불리는 것도 위와 비슷한 의미를 지닌다. 본문에서 언급되는 것 같은 여러 동물이 혼합되어 생긴 동물은 자연계에는 존재하지 않는바, 매우 괴상하게 보여질는지 모른다. 그러나 이런 상징적 표현물은 동양의 문학에서는 풍부하게 나타난다.

본문의 생물은 넷이었다. 둘은 연합, 결합을 표현하는바, 심장과 폐, 또는 영과 육, 의지와 이해성이 하나로 움직이는 것과 같다. 그리고 넷은 둘과 둘의 합, 또는 겹쳐진 것, 포개진 것을 말한다. 즉 자연적인 의지와 이해성이 영적 의지와 이해성과 결합을 이루는 것이다. 주님으로부터 있게 되는 모든 것 안에는 이와 같이 포개진 연합이 있게 되어 완전을 이룬다. 이 결합은 상호성을 가지고 있다. 즉 거듭나는 사람의 경우, 자기가 사랑하는 것을 이해함과 동시에 자기가 이해하는 것을 사랑한다.

얼굴들

공통적으로 이 생물들은 사람의 형상을 가졌다. 그 이유는 그 생물들이 신성한 인간으로서의 주님, 유한한 인간에게 그분 자신을 명백하게 하시는 주님을 표현하기 때문이다. 흔히 얼굴은 마음에서 적극성을 띠는 느낌과 생각을 나타내는 신체 부분이다. 그래서 우리는 상대방의 진의를 파악하고자 할 때 그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는 습관이 있다. 이 생물들 각각은 각기 다른 종류의 네 얼굴을 가졌다. 이 각기 다른 얼굴들은 주님 말씀에 있는 영적 진리의 각기 다른 양상을 표현한다. 이 양상은 인간의 마음에 영향을 주는데, 내적 의지에, 외적 의지에, 내적 이해성에, 외적 이해성에 영향을 주는 것을 표현한다. 네 얼굴을 가졌다는 말은 주님의 말씀은 사방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말이다. 즉 거룩한 성의 네 측면에서 보게 되면 모든 곳을 볼 수 있듯이 인간의 모든 계층, 영적 계층이든 자연적 계층이든 모든 이에게 영향을 주는게 주님의 말씀이라는 말이다.

날개들

각 생물은 네 날개를 가지고 있었다. 팔과 비슷하다는 측면에서 볼 때 날개란 힘을 발휘하는 수단인 바, 이는 능력을 표현한다. 날개를 좀 더 특징적으로 보면, 몸체를 높이 오르게 한다거나, 빠르게 이동시켜 준다. 이와 같은 특징을 가진 것을 우리 측면에서 살펴보면 이해성이나 지적 능력이다. 이런 능력이 우리로 생각을 높이 나르게 하고 여러 가지 다른 느낌들을 빠르게 이동시켜 진보하게 해준다. 날개들이 쌍으로 움직인다는 것은 심정과 지성이 협력해서 일하는 것을 표현한다. 둘씩 짝을 이룬 네 날개란 자연적인 것과 영적인 것, 둘이 작동할 때 있어지는 생각의 힘을 표현하고 있다. 인간 안에서 자연적인 생각과 영적 생각이 함께 움직일 때 그로 하여금 주님의 말씀을 남용하는데서 그를 보호해 준다. 생물이 신성한 인간으로서의 주님을 표현했듯, 네 날개도 신성한 말씀 속의 진리 안에서 말씀의 글자와 영의 양면에서 동시에 있게 되는 신성한 권능의 협력을 말하고 있다. 그 이유는 진리가 비록 글자와 영이라는 측면에서 각기 다른 양상을 띄우고는 있지만 결국 하나로 결합되어 있기 때문이다.

신체의 가장 낮은 부분인 발은 마음의 가장 낮은 부분인 자연적 마음을 표현한다. 발바닥은 감각적인 삶, 생명의 육적 평면으로, 자연적 마음 중에서도 가장 낮은 부분을 표현해 준다. 이 생물들의 발바닥은 송아지 발바닥 같았다.
가축이라는 측면에서 소는 우리의 자연적인 애정들을 표현한다. 어려서 힘이 약한 송아지는 정신적 삶을 지탱시켜 줄 진리를 알고 싶어하는 마음인 자연적 마음속에 든 순진한 상태를 표현한다. 말라기 4장 2절을 보면 “…외양간에 매여 있던 소(송아지)가 풀려 뛰어 나오듯…”라는 구절이 있는데, 이는 거듭나는 자연적인 마음이 주님의 말씀에 관한 지식을 수단으로 선함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발달될 것을 의미하고 있다. 생물 각각의 다리는 곧고 송아지 발굽 같았다고 했는데, 이는 주님의 말씀이 자연적 인간에서 일어나서 인간으로 삶에 관한 신성한 법칙에 단순히 순종시킴으로서 선한 삶을 사랑하는 마음을 발달시키게 됨을 암시해 준다.
이 발은 닦아 놓은 놋쇠처럼 윤이 났다. 금속의 중요한 기초를 구성하는 놋쇠는 자연적 인간 또는 인간의 자연적인 애정을 표현하는데, 이는 영의 가장 깊은 애정을 가진 천적 사랑을 표현하는 금과 구별된다. 자연적인 애정이 선하고 질서적일 경우, 이것들은 잘 광을 낸 놋쇠와 같은 것, 즉 마음의 보다 높은 형상을 반사시켜 주는 바, 선한 자연적 애정은 선한 내면의 것, 또는 천국적 애정을 표현하게 된다.
윤이 나는 발이란 주님의 말씀이 그 말씀의 가장 바깥 선상의 글자에서까지 선하고 순수한 자연적 삶을 가르치시는 말씀의 특성을 말한다.
이 생물 날개 아래 있는 사람의 손이란 영적 진리의 높은 능력을 표현해 주는데, 이 힘은 신성한 말씀 글자의 능력 속에 종종 감추어 놓여 있다.

각 얼굴들

이 생물의 네 얼굴은 사람, 사자, 소, 독수리 얼굴이었다. 사람의 얼굴은 내면의 지혜에 있는 신성한 진리로서 이 진리는 천적인 사람에게 보여지는 진리로서 이들에게 슬기로워지는 힘을 준다. 사자는 강함을 표현한다. 사자의 얼굴을 가진 생물은 신성한 말씀의 글자가 지닌 힘을 표현하는 바, 주님 사랑의 힘으로 인간 구원을 위해 말씀의 글자를 형성하는 그 속에 나열되고 있다.
소는 자연적인 애정을 표현하는데, 이 애정에 있는 진리는 상대적으로 희미한 상태이다. 독수리는 인간 마음의 지적 측면을 표현한다. 그래서 짐승이 애정을 표현함과 구별된다. 독수리는 아주 힘차게 비행하는 능력과 더불어 넓은 시야를 똑바르게 관찰하는 새이다. 이런 특성을 지닌 새, 독수리는 합리적 마음속에 있는 보다 넓은 생각들, 통찰력을 표현해 준다.
이렇게 해서 사람, 사자, 소, 독수리의 얼굴을 가진 생물들은 신성한 말씀의 각기 다른 면모를 표현하는 바, 이는 제각기 다른 인간 자아를 지닌 모든 이에 대한 주님의 방법을 말하고 있다.

바퀴

생물 각각은 바퀴를 가졌고 이 바퀴는 생물들과 함께 움직였다. 바퀴란 전진하는 수단이다. 따라서 바퀴는 교리에 관한 총명한 지식을 표현하고, 이를 수단으로 인간의 마음은 여행하며 진보해 간다. 자연적인 것들에 관한 총명한 지식(예를 들면, 신성한 말씀 글자에 관한 좋은 지식 등등)은 마음을 더욱 진보할 수 있게 해주는 아주 훌륭한 수단이기도 하다.
그런데 본문은 각 바퀴 한 가운데에 바퀴가 또 있다고 말하고 있다. 이는 자연적 총명 안에 영적 총명이 들어 있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 하느님의 말씀에 관한 지식에는 그 말씀의 바깥 글자 지식 속에 영적 원리인 안쪽 지식이 들어 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총명은 인간을 두 겹으로 학자가 되게 한다. 즉 자신의 자연적 삶을 위해 신성한 말씀의 사실과 규칙을 배우고, 영적 삶과 관련되는 진리 속의 영적 총명까지 보유하게 된다.
이 생물들은 요한에 의해 보여진 계시록의 생물과 매우 흡사하다.
그래서 두 환상에 보여진 내용들은 주님께서 무한한 사랑으로 각 층의 총명을 지닌 인간 후손들에게 접근하시는 모든 형체들을 표현적으로, 그리고 상응적으로 그리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와 같은 표현물은 우리의 빛과 생명을 위해 주님을 찾아 나서서 자신 속에서 찾은 것을 키워 가고 타인이 주님을 찾고 키우는데 협력해 주어, 주님께서 우리 앞에 나열해 놓으신 모든 능력, 지혜, 사랑을, 특히 그분 말씀 안에서 드러나는 모든 것을 보고 이해하여 더 한층 자신 속과 이웃 속에서 커 가게 해야 할 것이라는 말이다.
사랑으로 그분께 가까이 다가 갈 때만이 우리는 가장 높은 인간 총명을 발달시킬 수 있어 열려진 영으로 가능한 직관적 통찰, 즉 “사랑해야 하는 이유에 자신 스스로 답을 할 수 있는” 마음을 얻게 된다.
이런 마음을 지닌 자의 고백은 이러할 것이다. “생명의 샘은 정녕 당신께만 있고, 당신의 빛으로만 볼 수 있나이다” (시편 36:9).

16
이 두루마리 책을 먹어라

성서 본문: 에제키엘 2장 8-10, 3장 1-4,14절

2장 8. “너 사람아, 내가 하는 말을 들어라. 너만은 저 반항하는 일밖에 모르는 족속처럼 나에게 반항하는 자가 되지 말고 입을 벌려 내가 주는 것을 받아 먹어라.”
내가 바라보니, 한 손이 나에게 뻗쳐 있는데 그 손에는 두루마리 책이 들려 있었다. 10. 그분이 그 두루마리를 펴 보이시는데 앞뒤에 글이 적혀 있었다. 거기에는 구슬프게 울부짖으며 엮어 대는 상여 소리가 기록되어 있었다.
3장 1. 그것을 보이시고 그분은 “받아 먹어라. 너 사람아, 이 두루마리를 먹어라” 하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가서 이것을 이스라엘 족속에게 일러 주어라.” 2. 내가 입을 벌리자 그 두루마리를 입에 넣어 주시면서 그분은 3. 말씀하셨다. “너 사람아, 내가 주는 이 두루마리를 배부르게 먹어라.” 그리하여 그것을 받아 먹으니 마치 꿀처럼 입에 달았다. 4. 그분이 말씀하셨다.
14. 그분의 기운이 나를 쳐들어 옮겨 갔다. 야훼의 손에 꽉 붙잡혀 가는데 나는 그냥 불안하고 초조한 심정이었다.

글자적 사실들

오늘 본문은 예언자가 본 경이로운 환상, 즉 폭풍, 포개지는 불, 바퀴 속의 바퀴 등등의 환상에 이어지는 경험을 이야기하고 있다.
주님께서는 에제키엘을 반역적이고 완악하며 뻣뻣한 목을 가진 이스라엘 백성에게 경고하고 가르치도록 보내고 있다.
에제키엘에 대한 특별한 메시지는 그에게 보내진 메시지를 먹으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한 손이 그에게 나타났는데, 그 손에는 두루마리 책이 들려 있었고, 그 두루마리는 앞뒤로 씌어 있는데, 그 내용은 애가와 탄식, 곡하는 소리들이었다. 그 책을 먹고,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서 여호와의 말씀을 말해 주도록 명령하고 있다.

영계에서

이 광경은 영계에서 있어진 것이다. 예언자는 자기의 영적 감각들로부터의 경험에 종사하게 된다. 즉 그의 영체가 느끼는 감각으로 예언자의 일을 한다는 말이다. 이에 대한 사실은 본문뿐만 아니라 전후 문맥의 언어를 보아서도 명백할 것이다. 이 책의 시작에서 말해지기를 강가에 있을 때 “야훼의 손에 잡혔다”고 언급하는데, 그가 표현하기를, “하늘이 열리며 나타나는 신비스런 광경의 발현을 보았다” 라고 했고, 다시 말하기를 “그분의 기운이 나를 쳐들어 옮겨갔다. 야훼의 손에 꽉 붙잡혀 가는데 나는 그냥 불안하고 초조한 심정이었다.” 이런 모든 기록들은 그가 주님에 의해 움직여졌고 인도되었다는 것을 입증해 준다.

영적 의미

환상의 영적 의미는 넓은 의미에서 국가에 관해 언급하지만 좁은 의미에서는 각 개인의 마음에 관계하고 있다.
영적으로 반역만 일삼는 이스라엘 가문이란 이기적이고 감각적인 생각과 느낌을 가진 인간 속의 퇴보된 자연적 마음을 말한다. 이에 더하여 인간의 나쁜 습관들에 관한 것도 말하고 있다. 이런 조건들이 오늘 본문 시대의 이스라엘 백성에 있는 일반적인 상황이다.
모든 사람은 물질적 몸 속에 영체를 가지고 태어난다. 그러나 각자 속에 있는 영적 감각들은 언젠가 주님에 의해 열리어져 그 삶으로 영계에 속한 것을 볼 수 있고 행동하게 해주신다. 이런 것이 모든 선견자들, 또는 한 때이지만 영계에 들어가게 허락된 성서에서 언급된 사람들의 경우이다.

우리의 힘을 나타내는 신체 도구가 특별히 손이다. 따라서 손은 힘을 표현한다. 우리의 일상 대화에서 손에 대한 상징적 표현은 자주 사용하는 편이다. 예를 들면, 우리가 자신의 능력 범주에 있음을 의미하기 위해, “그 문제는 내 수중에 달려 있어…”라든가, “그 문제야말로 우리 손 안에 들어와 있는 상태야…” 라고 말한다.
본문의 경우, 손이 영계에 있었는 바, 이는 영의 힘, 특수적으로는 신성한 영의 힘, 그분의 신성한 말씀으로부터, 또는 그 말씀으로 역사 되는 힘을 표현해 준다.

두루마리

손에 들려 있는 “두루마리 책”은 신성한 책, 주님의 말씀을 표현한다. 이 책이 두루마리라고 불린 이유는 고대 시대 때의 책들이 손으로 쓴 책이고 두개의 롤러(roller)가 달린 긴 종이, 파피루스, 양피지의 긴 조각으로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책이 읽힐 때 낭독자는 한 손은 롤러를 돌려 풀면서 다른 한 손은 롤러를 감아 가면서 읽어 갔다. 손으로 잡고 있는 두루마리란 주님의 말씀으로 예언자가 이스라엘에 전달해야 할 말씀을 표현한다. 그 이유는 이스라엘의 구원이 타 국가와는 달리 신성한 말씀을 수단으로 있어져야 했기 때문이고, 그분의 법칙이 인간 삶을 위한 것으로 인간은 자신들의 악들이 그들의 심정과 삶 속에서 자연스럽게 형체를 가져 결과될 내향적 지옥으로부터 구원될 수 있으려면 반드시 따라야 하는 법이 주님의 법임과 그분은 그분의 사랑과 지혜를 백성들에게 밝히시는 수단이 말씀이기도 하였기 때문이다.
그 손이 예언자 앞에 그 책을 “펴 보이셨다”는 것은 주님께서 그분의 진리를 이 예언자에게 밝히 보여주신다는 말이다.
이 책의 앞 뒤(안과 밖)에 글이 적혀 있었다는 것은 말씀이 내향적인 영적 의미와 외향적인 글자적 의미를 가졌다는 말이다. 그 책에 구슬프게 울부짖으며 엮어 대는 상여 소리가 기록되어 있다는 것은 영적 진리가 악한 자의 내향적 동인과 생각들에 있는 악과 거짓, 그리고 죄뿐만 아니라 그들의 행동 상의 각종 죄악상을 밝히 보여준다는 뜻이다. 사람들은 자기들이 잃게 된 선 때문에 애가를 부른다. 그래서 애가란 모든 악에서 떼어질 수 없는게 슬픔이라는 것과 그 악으로 선을 잃었다는 것을 표현하는 것이다. 악은 인간 심정 속에 있는 모든 선들을 황폐해지게 하고, 피폐된 채 놓아둔다. 이런 일은 특히 자신 속의 악을 사랑하고자 신성한 말씀의 글자를 남용할 때 여지없이 발생된다. 그 결과 “악은 사악한 자를 살해한다.”
이렇게 애가(구슬픔)란 심정 속의 선함을 상실한 것을 말한다. 그러나 울부짖는다(애곡)는 것은 진리를 상실한 것, 즉 거짓이 생각을 지배하게 될 때 지성 속에 있는 진리의 손실을 말한다. 재앙(엮어 대는 상여 소리)이란 악인의 행동과 실지 삶에서는 기쁨이 상실된다는 것을 뜻한다.

책을 먹음

신성한 명령으로 이 예언자는 그 책을 먹었다. 우리의 신체가 무엇을 먹을 경우, 몇 가지 과정을 거친다. 입이 음식을 받아 그것을 씹어야 한다. 그 다음 위를 통과하여 분배된다. 음식을 입에 넣는 것은 영적으로는 어떤 선과 진리, 또는 어떤 새로운 느낌이나 생각을 받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들어온 음식은 반드시 위에서 소화라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이 과정은 합리적 생각을 수단으로 들어온 선과 진리, 느낌이나 생각을 검증하는 것을 말한다. 이리하여 우리는 자신의 느낌과 생각에 새로운 조건을 주게 된다. 더 나아가 소화된 음식이 위장 다음의 다른 장기를 통과하는 것은 그것들을 우리 내면의 의지로 테스트하는 것, 우리가 새로운 경험을 가질 때 더 내면적이고 영적인 생각을 그 경험에 부합시키는 것을 표현해 준다. 위장을 다른 내장과 비교해 보면, 위는 이해성에 속한 일을 표현하는 반면, 그 외 내장이 하는 일은 의지 또는 심정의 행동을 표현한다. 이 행동의 새로운 조건을 우리 마음이 받아 인정하고 음미해서 자기 것으로 융합시켜 준다.

달고 쓴 것

이 예언자가 책을 먹었을 때, 그 맛은 그의 입에서 매우 달았다. 그러나 그는 영 가운데서 그 맛이 쓰다는 것(불안하고 초조한 심정, in bitterness, in the heat of my spirit)을 느꼈다. 달고 쓰다(sweet and bitter)는 상황은 오늘 비유를 이해하는 열쇠가 된다. 이와 비슷한 사건이 계시록에서 요한에 의해 말해지고 있다. “하늘로부터 들려 오던 그 음성은 나에게 다시 이렇게 말했읍니다. ‘너는 바다와 땅을 디디고 서 있는 그 천사에게 가서 그 손에 펴든 두루마리를 받아라.’ 그래서 나는 그 천사에게 가서 그 작은 두루마리를 달라고 했읍니다. 그 때 그 천사는 나에게 ‘이것을 받아 삼켜버려라. 이것이 네 입에 꿀같이 달겠지만, 네 배에 들어가면 배를 아프게 할 것이다.’ 하고 말했읍니다. 그래서 나는 그 천사의 손에서 작은 두루마리를 받아 삼켰읍니다. 과연 그것이 내 입에는 꿀같이 달았지만 먹고 나니 배가 아팠읍니다. 그 때 ‘너는 여러 백성들과 민족들과 언어들과 왕들에 관해서 다시 예언을 해야 한다’ 하는 음성이 나에게 들려 왔읍니다” (계시록 10:8-11).
이러한 일이 일어난 것은 자기가 영 속에 있을 때였다고 그는 선포한다. 즉 그가 영계에서 또는 영적 감각 속에서 일어난 일이라는 말이다.
이제 에제키엘의 환상과 요한의 환상에 있는 몇 가지 유사한 점에 주목해 보자. 두 예언자 모두 영계에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열린 책이 천사의 손에 들려 있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그 책을 먹었는데 입에서는 꿀같이 달았지만, 소화 되면서는 매우 쓰게 되었다. 이런 일이 있고 난 직후 그들은 백성에게 예언하도록 부름 받는다. 두 환상 모두 예언자에게 일을 시키기 위한 사전 준비 작업이었다.
달다는 것은 우리의 바램과 생각에 일치하는 것을 마음에 받음으로 느끼는 기쁨이다. 꿀이란 마음속의 이러한 기쁨을 말하는데, 좀 더 뾰족이 말한다면 사물의 외적 측면을 다루는 자연적인 것들 속에서 오는 기쁨인 것이다.

안과 밖 (external and internal, 외부와 내부)

마음과 삶이 질서 있는 상태일 경우, 우리의 자연적 마음을 기쁘게 하는 것들은 우리의 계발된 영적 마음을 기쁘게 하는 것들과 일치한다. 그러나 퇴보되고 비 질서적 상태의 마음일 경우, 많은 것들이 자연적인 느낌과 생각을 기쁘게 하겠지만, 내적 양상에서는 같은 마음일지라도 맛을 주지 못한다. 예를 들면, 신성한 말씀, 즉 성경의 글자적 의미는 인간의 자연적 마음을 기쁘게 할는지 모른다. 그 이유는 그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이 느끼고 생각하는 방향에 따라 글자적 의미를 해석할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이다. 이런 방식일 경우, 그는 성경의 글자적 의미를 가지고 자신의 악한 애정이나 거짓된 관념, 죄가 되는 행동까지도 정당한듯 나타나게 만들 수 있을는지 모른다.
이에 대한 예를 들면, 고대 유대인들은 구약 성서의 글자를 가지고 자기들이 타 국가나 민족들보다 더 거룩하다는 것, 특히 주님의 백성으로 자기들은 선택되었다는 것이 입증되도록 해석해 왔다. 이런 견해는 고대 유대인들로 개인적으로나 국가적으로 자랑삼게 해주어 그들을 기쁘게 해주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신성한 말씀의 내향적이고 영적인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는 바, 자기들이 선택된 것은 영적 교회여서가 아니라 그들의 행동이 상징성을 갖도록 하기 위해 외적 방법으로, 오로지 영적 교회를 표현하도록만 선택되었음을 그들이 알았을리 만무하다. 한 마디로 연극 작가의 마음을 작가 대신 표현하는 배우일 뿐이었다.
다시 말해 고대 유대인들은 메시아가 당도하리라는 성경의 글자 의미에 기쁨을 누려 왔다. 그러나 그들의 기쁨은 장차 올 메시아가 그들을 일으켜 세워 빼어난 국가로, 그들에게 부와 명예와 권력을 이 세상에서 누리게 해줄 것이라는 가상적인 기쁨, 기쁨의 껍데기일 뿐이었다. 예수님께서 약속된 메시아로 그들 앞에 당도해서, 그들을 가르치고, 그들에게 삶에 관한 그분의 방법을 실지 보여주셨을 때, 입맛이 씁쓸했던 자들이 바로 그들이었다. 씁쓸해 한 이유는 그분께서 오시어 선포하신 내용이 그분의 왕국은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는 것, 거듭남으로 인간을 영적 왕국에 인도해 주시기 위해 오셨다는 것 때문이다. 이를 표현적으로 볼 때, 하느님의 말씀은 이 유대인들의 입에서 달았겠지만 그들의 내장에서는 쓴 것이다.

예증

오늘날 위와 유사한 상황이 사람들 사이에도 상존하고 있다. 예를 들면 “믿음만으로 구원됨, salvation by faith alone”이라는 세상에 널리 퍼진 이론이 이에 해당된다. 이 이론은 잘못 이해된 성경 글자를 가지고 많은 교회에서 가르쳐지고 있다. 이 교리를 바탕으로 해서 사람들이 자기가 “대속, vicarious Atonement”이라는 수단으로 구원되기를 기대하도록 가르쳐지고 있다. 그리하여 이 사람들은 자기 심정과 삶의 품질이나 인간 속의 실지 인격은 구원과 무관한듯 여기는 쪽으로 기울고 만다. 많은 이들이 교회에 가고 그리고 자신이 매우 경건한듯 여긴다. 그렇게 되는 이유는 그들이 교회에 등록하고 경건한듯 여김으로 악으로부터 선으로의 인격 변화를 주님의 인도하심 속에 달성해 가는 거듭 나아감의 과정에 있게 되는 길고 힘든 노력 없이 천국을 획득하기를 기대하기 때문이다. 극단적인 예로, 어떤 이는 자신의 악한 삶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은 그리스도의 의를 자기들에게 귀여케 할 것이라는 믿음으로 기뻐한다.
그러나 이런 사람에게 성경의 내적 의미에 있는 영적 진리가 가르쳐질 때, 그리고 영적 진리가 그 사람에게 적절한 이해를 동반하여 글자의 의미에서 확증될 때, 또는 구원은 믿음만으로 되는게 아니라 심정 속의 사랑과 지성 속의 믿음, 그리고 삶 속에 있는 정의로만 가능하다는 것을 발견 할 때, 이와 같은 진리들은 그들에게 매우 쓰다는 것을 발견한다. 그 이유는 이러한 영적 원리가 구원은 쉽게 된다라는 이론을 거둬가기 때문이고, 그럼과 동시에 그들에게 신성한 계명에의 순종으로 악으로부터 헤어 나와 선 쪽으로 가게 하는 계속적이고 심도있는 노력의 삶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하느님은 그들에게 그리스도의 의가 귀여 되도록 하시지 않는다는 것, 그러나 우리의 주님, 예수 그리스도, 스스로 계신 분, 천상 천하의 한 분 하느님은 그들에게 그분의 의를 나누어주시되 각자가 자기들의 실지 삶에서 정의롭지 못한 것을 중단한 만큼에서, 그리고 신성한 법도에 따라 살아간 만큼에서 나누어주신다는 명백한 진리를 위의 사람들은 맛있게 먹지 않을 것이다.
어떠한 실제의 거듭나는 삶 없이 천국에 입장하기를 원하는 사람에게 위의 명백한 진리는 더할 나위 없이 쓰고 쓸 뿐이다. 오로지 성경의 글자적 의미만이 그들에게 꿀같이 달 것인 바, 그 이유는 그 의미가 자기로 천국 가는 쉬운 방법을 약속한다고 이해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 대해 주님은 씨뿌리는 자의 비유에 대한 설명에서 초상화해 두셨다. “…또 돌밭에 떨어졌다는 것은 그 말씀을 듣고 곧 기꺼이 받아들이기는 하지만 그 마음 속에 뿌리가 내리지 않아 오래 가지 못하는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이다. 그런 사람은 그 말씀 때문에 환난이나 박해가 닥쳐오면 곧 넘어지고 만다.”
위의 비유 속의 사람에게도 말씀은 외적으로는 달겠지만 내적으로는 쓸 뿐이다.

세상의 상태

정치나, 사업 분야, 또는 교회 분야, 개혁이나 자선사업 같은 세상사를 둘러보면, 이기심과 세상욕이라는 영들이 성경의 글자 뒤에 진을 치려고 얼마나 발버둥치는지, 그렇게 해서 신성한 말씀 속의 영에 반대되는 실제 일상생활로 살아가게 만드는지 여러분도 쉽게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이기적인 세상욕의 영은 국가간에 이루어지는 싸움 가지고도 쉽게 예증되는 바, 영의 빛에서 시편 기자가 외친, “뭇 족속들의 신들은 우상들임”을 우리도 함께 소리쳐야 할 것이다.
나라들도, 각 개인들의 경우에서도 그들은 인간 이기심에 동조해서 같이 얼버무려 질 수 없는 성경의 영적 의미가 내놓는 명백한 가르침을 피하려는 노력으로 성서 글자를 가지고 모험을 하거나 간교를 부린다. 기독 사상은 근 이 천년 동안 세계를 가르쳐 왔다. 오늘날도 기독교는 세계를 이끄는 국가들에서 우세한 세력을 유지하는 종교이기도 하다. 그렇다 해도 이 세상 어디에도 교인이라는 증명서가 각 개인의 실제적인 선한 인격을 보증한다거나, 거듭나는 삶의 동료라는 확신을 주는 허가증과 대체될 수 있는 곳은 하나도 없는 것이다. 그런 곳이 있다면, 그것은 교회가 그리스도의 삶과 영에 실제적 관련을 맺지 않는 구원의 이론에 만족해하고 기뻐하는 장소나 모임일 뿐이다. 오늘날 세계에서 이와 대조되는 소수의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한 분 유일의 하느님으로, 생명을 주시는 분으로, 인간의 인도자요 구원자로, 그분의 가르침을 자신의 합리적이고 영적 마음에서 이해하고 믿는다. 이들은 지금 천국 가는 길에 서 있고 장차 천국에 거하게 된다.

천국

자신의 심정 속에서는 천국의 원리를 자기의 동기와 목적으로 갖고, 나날의 생활에서는 신성한 계명이 그 생활의 규범이 되어 있는 이들은 천국 안에 있는 이들이다. 이들의 입에 들어온 말씀의 글자는 영적으로 달고, 내향적 부분에서도 말씀의 영은 글자와 똑같이 달다. 이에 관해 주님께서 말하시기를, “나는 내 법을 너희들 안쪽 부분에 놓을 것인바, 너희들 심정에 그 법이 씌어지게 하리라.” 이것이 사랑의 위대한 법칙이요 우주를 움직이게 한다.
말씀의 글자가 자연적 마음뿐인 사람에게 매우 달게 느껴져야 하는 것은 꼭 필요한 것이다. 그 이유는 그 사람이 진리에 대한 절대적인 흥미를 갖기 전 우선 그 사람의 시선을 끌어 당겨야 하기 때문이다. 그 뒤 조금씩, 천천히 여유 있게 그 사람으로 하여금 영적 의미 쪽으로 말씀의 글자를 당기게 인도해서 결국 말씀의 글자 속에서 영적 의미를 보게 된다. 그러나 그 사람이 자신의 행동 지침이나 동기들을 말씀의 글자를 가지고 개혁하는 일을 스스로 허용할 때까지 글자 속의 영적 의미는 그 사람에게 매우 쓴맛만을 주게 된다.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시험받으시는 도중 시험자에게, “성서에 사람이 빵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리라”고 선포하셨다 (마태복음 4: 4).
자신의 매일 생활에서 “말씀 내리시는 대로 저는 받아 삼켰읍니다. 만군의 야훼 하느님, 이 몸은 주님의 것이라 불러 주셨기에 주님의 말씀이 그렇게도 기쁘고 마음에 흐뭇하기만 하였읍니다” (예레미야 15:16) 라고 고백하는 사람이라면 신성한 말씀은 안쪽으로나 바깥쪽으로나, 말씀의 글자에서나 영에서나 어느 측면일지라도 그를 들어올릴 것이다.

17
포위 공격되는 예루살렘

성서 본문: 에제키엘 4장 1-13절

1. 너 사람아, 흙벽돌을 집어다 앞에 놓고 그 위에 예루살렘 지도를 파 새겨라. 2. 그리고 그 바깥에 포위망을 새겨라. 또 감시탑을 세우고 옆에 돌더미로 축대를 쌓고 진을 둘러 치고 성벽을 허무는 쇳덩이를 사방에 늘어놓아라. 3. 또 석쇠를 가져다가 너와 그 도시 사이에 둘러 쳐서 쇠로 된 성벽으로 삼고 거기에서 눈을 떼지 말아라. 그렇게 예루살렘을 포위하고 포위망을 좁혀라. 그것으로 예루살렘이 어찌 될지를 이스라엘 족속에게 보여 주어라.
4. 너는 왼쪽 옆구리를 땅에 대고 누어라. 내가 네 몸에 이스라엘 족속의 죄를 메우는 것이니, 네가 그렇게 누워 있는 날수만큼 그들은 죄를 받는 것이다. 5. 나는 너에게 이스라엘 족속의 죄를 백 구십 일 동안 지운다. 그 하루는 그들이 벌받을 한 해와 맞먹는 것이다. 6. 그 날수를 채운 다음 이번에는 오른쪽 옆구리를 땅에 대고 누워 유다 족속의 죄를 받아라. 하루를 한 해씩으로 쳐서 사십 일 동안 받아라. 7. 너는 포위된 예루살렘에서 눈을 떼지 말고 팔을 걷어 붙이고, 예루살렘은 망한다고 예언하여라. 8. 나는 너를 사슬로 묶어 놓으리라. 그래서 네가 갇혀 있을 기한이 다 차기 전에는 옆구리를 이쪽 저쪽으로 뒤쳐 눕지 못하게 하리라. 9. 네가 한쪽 옆구리를 땅에 대고 백 구십 일 동안 누워 있으면서 먹을 빵은 밀, 보리, 잠두, 제비콩, 조, 쌀보리를 섞어서 만들어야 한다. 10. 너는 그 음식을 저울로 달아 하루에 이십 세겔씩 시간을 정해 놓고 먹어라. 11. 물도 되어서 마시는데 하루에 마실 분량은 육분의 일 힌이다. 그것도 시간을 정해 놓고 마셔라. 12. 보리과자를 굽듯이 빵을 굽는데 사람들이 보는 데서 인분으로 불을 피우고 거기에다 구워 먹어라. 13. 그리고 내 말을 전하여라. ‘야훼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다른 민족 가운데로 쫓아 보내실 것이며 너희는 거기에서 이렇게 부정한 빵을 먹게 되리라.’

글자 이야기

성을 포위하여 공격하는 적들로 해서 일어나게 되는 것을 흉내내는 연극을 보여줌으로서 예언자는 비유를 말하였다. 이렇게 흉내낸 포위 공격하는 연극은 이스라엘 족속에게 일어날 징조를 선포하고저 해서였다. 그리고 그 외 예언자의 다른 행동들, 즉 옆으로 누워 있는 것, 먹고 마시는 것 등은 포위 공격 될 때 성내 주민들이 당하는 재난을 글자대로 표현하고 있다. 음식은 호화스런 잔칫상이 아닌 극히 평범한 밥상이 될 것이고, 물도 귀해져서 아껴 마셔야 할 지경을 당하게 된다는 말이다. 포위 공격되는 긴 기간이 예언자가 이쪽 저쪽으로 드러누운 모습으로 표현되고 있다.
그런데 우리가 주시해 보아야 할 것은, 예언자가 왼쪽으로 드러누운 날 수가 390일이고 오른쪽으로 누운 날수는 40일이었다는 점이다. 이 두 숫자를 더하면 430이 되는데 이 숫자는 과거 출애굽 이전 이스라엘 후손들이 에집트에 속박되어 있던 햇수와 같은 숫자가 된다. 그리고 유다 족속을 위해 오른쪽으로 드러누운 날인 40일은 이스라엘 후손이 출애굽 해서 광야 생활을 한 햇수의 숫자에 해당된다. 따라서 이 두 숫자는 이스라엘 족속에게 아주 잘 알려져 있는 숫자를 나타내고 있다.
예루살렘이 포위 공격받아 항복한 뒤의 이스라엘 족속들의 퇴보된 모습이 예언자가 마른 인분으로 빵을 굽는 것으로 표현되고 있다. 인분으로 빵을 굽는 것은 그 당시 가난한 자들이 연료가 비싸서 구입하지 못하여 흔히 사용된 평범한 행동이다. 그러나 이렇게 구워진 빵은 종교적 예식이나 기타 축제에서는 “불결”한 것으로 간주되었었는바, 인분을 연료로 사용한다는 것은 그 백성들에게 아주 가난함이나 재난을 암시해 주는 상징이었다. 그리고 예언자는 어떤 징조를 표현해 주는 사람으로 백성들에게 언제나 인식되어 있었고, 또한 예언자를 통하여 주님께서는 백성들과 교통하시기도 했다. 그래서 예언자는 백성들에 의해 언제나 주목받아 왔던 것이다. 그가 하는 모든 일거 일동은 표현의 강약은 있을지라도 뭔가를 표현해 주었던 것이다. 따라서 예언자의 개인 생활은 표현되는 성격과 결합되어 있는 셈이었다.

영적 의미

본문에 대한 역사적 측면의 영적 의미는 유대 국가와 그 교회의 타락을 나열하고 그 타락은 자아 사랑에서 근원된 악과 섞이지 않은 어떤 선도 남아 있는게 없다는 것, 또는 자아 총명에서 비롯되는 감각적 관념으로 왜곡되지 않은 어떤 진리도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을 폭로하고 있다.
본문을 개인의 영적 측면에서 본다면, 일반적인 주제는 인간 마음의 타락이고, 타락하는 마음에서 생활 속의 선은 이기적인 악들과 섞음질 당하고 주님 말씀 속의 진리는 왜곡되어 지옥이 그 마음을 지배하는데 이르러 영영 악한 상황에서 빼내어 질 수 없는 모든 고통에 종속 당한다는 것을 우리에게 폭로하고 있다.
본문이 나열하는 바 같이, 예언자가 행한 모든 것, 즉 공격하는 적의 행동을 흉내낸 것들은 인간 마음에 있게 되는 악한 영향력의 맹습이 각 사람의 자연적 마음 안에서, 그리고 바깥쪽으로는 악령에 의해 있게 되는 특수적인 사항들을 표현해 준다.

흙벽돌 (tile)

예언자가 예루살렘 성을 파 새긴 흙벽돌은 태양으로 말리워져 단단해지기 전의 큰 벽돌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 벽돌에 그는 성을 새겨 놓았을 것 같고, 만일 단단한 벽돌이라면 아마 그는 벽돌에 성을 그렸을 것 같다. 어느 경우이던, 초상화는 예루살렘 백성들의 정신적 상황을 표현한 것이다. 그리고 포위망을 좁히는 식의 포위 공격은 성내 백성들이 그들이 선택한 삶의 과정으로 그들 스스로 자초하는 것들을 표현해 준다.

한쪽으로 드러누움

어느 한쪽으로 오랫동안 드러눕는 억류된 모습은 인간의 정신적 활동이 한 가지 형태의 영향하에 있게 될 경우, 그 영향으로 그 마음은 한 가지 형태만 강요되어 좁아지면서 실생활 역시 제한되어 결국 그 사람 속에 남게 될 정신적인 모습을 표현하는 것이다. 거듭남의 선과 진리를 빼놓고는 어디에도 충만된 영적 자유는 존재하지 않는다. 타락하는 삶에 불가결한 요소는 엄격한 제한과 한계이다.
타락하는 삶에 관해 표현된 적절한 구절이라면, “침대는 짧아서 길게 눕지 못하고, 이불은 좁아서 몸을 덮지 못한다” (이사야 28:20) 일 것이다.
신체의 양 측면은 마음의 양 측면을 표현한다. 오른 쪽은 사랑과 느낌을 가지고 있는 의지적 원리, 심정, 애정적 본성을 표현한다. 그리고 왼쪽은 지식이나 지혜, 진리 그리고 생각을 가지고 활동하는 지성적 본성이나 이해성을 표현한다. 에제키엘은 이스라엘을 표현하기 위해 왼쪽으로 드러누웠고, 유다를 표현하기 위해서 오른쪽으로 누웠는데, 그 이유가 이스라엘은 지성적 측면을, 유다는 애정적 측면을 표현해 주기 때문이다.
예언자가 주님에게서 받아 인간에게 가르친 진리를 표현하듯이, 한쪽으로 오랫동안 눕는 예언자의 강제된 행동은 인간 마음에 가르쳐져 온 신성한 진리가 오로지 외적 측면에서만, 단지 정규적 예배 형식에만 필요한 진리로 그 진리의 사용을 억지로 제한시킨 마음을 표현한다.

날 수

시간은 마음의 상태, 즉 애정과 생각의 상태, 이 상태에 의해 인간 마음의 진보는 계산되어진다. 날에 해당되는 용어들을 따로 떼어 생각해 본다면, 날(days)은 보다 작은 상황들, 즉 일상생활에 있는 정신적 상태의 변화를 표현하고, 해(year)는 보다 큰 상황들, 즉 보다 적은 상황들인 일상 생활 속의 상태들이 더 확장된 정신 상태를 표현한다. 오늘 본문에서 제시된 것은 해가 아닌 날들이다. 이렇게 날들로 제시된 이유는 그 적용의 편리함 때문인듯 하다. 그럼으로 해서 표현될 교훈이 보다 더 뾰족해지고, 더 직접적인 효과를 주게 된다. 정신적 성장의 보다 큰 기간의 품질은 작은 기간의 품질을 보여주고 표현해 주게 된다.
숫자 3은 충만함, 완성됨을 표현하는데 특별히 마음과 삶 속에 있는 진리의 충만함이나 완성을 표현한다. 즉 삶 속에서 인간이 주님의 진리를 사랑하고, 이해하며 실제화 하여 있게 된 진리의 충만함을 말한다. 모든 사람은 진리가 충만됨 속에서 진리를 받는데, 그 이유는 진리가 각 사람의 심정과 이해성, 행동 지침 그리고 삶 안에 존재하는 까닭이다. 100, 1000 등등의 숫자는 의미를 더 강조하는 숫자인 바, 의미가 보다 더 일반적이고 더 확정된 것을 말한다. 따라서 300이란 진리에 관한 보다 더 넓은 기간을 표현한다. 90은 3이 곱해져 이루어진 숫자인 바, 충만함을 표현하되, 특별히 “아껴 둔 것, remains,” 즉 우리 마음에 남아 있는 어린 시절의 상태들에 관련된 충만함이다. 마음 상태와 관련해 볼 때 390일 동안 예언자가 왼쪽으로 누워 있었다는 것은 진리가 마음속에서 완전히 “황폐해졌음, vastation”을, 또는 자아 사랑으로부터 나온 거짓 사상들로 인해 진리가 파괴된 채 오랫동안 방치되어졌음을 표현하고 있다.

40

숫자 40은 시험을 표현하되, 특히 의지나 심정에 관한 시험을 표현한다. 홍수가 40일간 계속 되었다든가, 이스라엘 자손들이 40년간 광야를 배회했다던가, 이스라엘의 열 두 스파이가 40일 동안 가나안 땅을 정탐했다던가, 예수님께서 40일 동안 광야에서 단식하신 것 등등이 성경에서의 대표적인 예가 될 것이다. 이 모든 경우나 그 외 다른 경우에서도 40은 시험을 표현한다. 본문에서 유다를 위한 40일이란 타락된 마음속의 심정에 대한 충분한 시험, 그리고 악을 산출해 냄으로 완전히 타락되었음을 표현하고 있다. 예언자가 이스라엘과 유다의 불법을 짊어지라고 말해진 것은 예언자로 그들의 죄를 대신하라는 표현은 아니고, 단지 예언적인 가르침을 목적으로 짊어지는 표징적 표현일 뿐이다. 390일과 40일, 모두 이스라엘과 유다 백성들에게 있어지는 선함과 진리의 완전한 황폐, 그들이 심정으로부터 선함을 완전히 거절하고, 이해성에서 진리를 완전하게 거절하여, 그들의 마음이 지옥에 포로가 되고야 마는 것을 표현하고 있다.
보다 더 심오한 의미를 찾는다면, 위의 두 숫자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입으신 인성에 대한 시험, 입으신 인성이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한 내향적 삶에서 분리되는 것이라고 생각해 볼 수 있다.
본문을 글자대로 생각하면, 이 예언자는 한번도 일어나지 않고 계속 430일간 누워 있었다고 보아야 하는데 우리로 그렇게 이해하도록 요구하는 것 같지는 않다. 즉 예언자가 드러누울 때 오랫동안 어느 한쪽으로만 눕도록 명령된 것으로 여겨진다. 또한 그는 자기가 먹을 빵과 물을 오랫동안 자신 스스로 해결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14개월 이상 되는 기간을 위해 드러눕기 전 양식과 물 모두를 한꺼번에 준비해 둔다는 것은 빵이든 물이든 모두 적절치 못할 것이라 여겨진다. 또한 만일 그가 오랫동안 부동적인 자세를 취했다면, 아마 누군가가 그를 시중들도록 되었을는지 모른다. 어찌 됐든 위의 사항에 대한 언급은 본문에서 찾을 수 없다.
양식과 물의 양도 예언자에게 아주 한정되었는데, 빵은 10온스, 물은 1 1/2 파인트(pints)로 생명 유지에 겨우 필요한 하루분 정도뿐이었다. 이런 사항들은 타락된 마음의 경직된 상황을 표현하는 바, 이런 마음은 영적 자양물이 언제나 부족하다는 것을 표현해 주고 있다.

부정한 빵

글자대로 보면 인분으로 빵을 굽는 것은 불결한 방법인데, 이는 포위 공격되는 기간동안 성내 백성들은 심각한 연료 부족 상태에 빠져 가장 확실한 연료 공급 방법인 인분 사용을 강요당할 것과 포위 공격 후에는 이방인들이 주는 오염된 빵을 먹도록 강요당할 것을 표현한 것이다. 영적으로 볼 때, 말린 똥으로 빵을 굽는다는 것은 악과 거짓, 죄악에 빠진 타락한 마음에는 자아 사랑의 불결한 탐욕으로 인하여 뜨겁게 될 어떤 선도, 진리도 남아 있지 않는다는 것, 이런 불결한 탐욕은 거듭나는 마음으로부터는 거절된다는 것, 형식적 예배의 모든 것까지 자아 사랑의 불순함으로 오염되어 있을 것을 표현한다.

불순함

영적인 것에 관한 총명한 지식보다는 좀더 까다로운 맛을 선호하는 자연적 마음뿐인 사람의 경우, 그들이 때로 불평하는 것 중 하나는, 성경은 자기의 세련된 맛을 오히려 더 떨어지게 하는 구절들이 많다고 한다. 이들의 불평이 성경 글자에 국한된 말이라는 것은 생각해 볼 여지도 없는 당연한 귀결이다. 그러나 성경이 이와 달리 더 어떻게 잘 씌어질 수 있을까? 성경이 만들어져 있는 이유는 아주 낮은 인격의 소유자, 즉 타락된 인간에게 까지 도달되기 위해 만들어진 책이다. 말씀은 타락된 사람들이 사는 삶의 평면에까지 내려와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말씀이 그들에게 도달되어 영향을 미칠 수 없다. 따라서 말씀은 낮고 낮은 수준의 마음만을 지닌 사람이 납득할 수 있는 삶의 국면을 다루어야 하고 그들이 흥미를 갖는 것들을 가지고 말해져야 하는 것이다.
만일 성경이 천사들만을 위해 만들어졌다면, 성경은 현재의 성경과 아주 다른 글자적 의미로 이루어져야 했었을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천사와 죄인 양쪽을 위해 만들어져 있다. 따라서 만일 죄인이 자신의 거듭남의 실제를 위해 성경을 사용코자 한다면, 그는 언어적인 반감이 없이 오히려 성경의 언어가 자기에게 필요하다는 것을 느끼게 되고, 성경의 언어가 담고 있는 글자적 의미는 영적 의미에서 의미되는 상응이나 표현, 또는 상응물이기 때문에 죄인일지라도 성경 글자를 사용함과 더불어 결국 영적 의미도 다소나마 발견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그리고 진지한 사람의 경우, 그는 성경 언어가 외적으로 우아해야 한다고 우기는 사람들의 주장에 동조하지 않고 오히려 자신 속의 악에 대한 자연적인 경향성에 대해 경고를 보내 주는 평범한 진리에, 또는 우아한 감각적인 풍미 뒤에 감추어 놓인 평범한 진리가 발견되는 것에 기뻐할 것이다. 성경을 접하는 우리가 명심해야할 것은, 주님의 무한한 사랑과 지혜, 그리고 순수함이 구원받기를 원하는 모든 이를 구할 수 있도록 인간의 불순함이 필요로 하는 것, 그 상황에까지 내려와 닿고 있다는 점이요, 특히 원어로 읽을 경우는 더욱 그것을 느끼게 해주고 번역의 경우도 그와 비등할 것이리라 믿는다.

신성한 의사

진정한 의사일 경우, 그는 자기 환자의 천연두가 터져 고름을 질질 흘리고 있다 해도 마다하지 않고 그 환자의 생명을 위해 그 고름을 만지는 수술까지 감행하여 건강을 찾도록 노력해 주듯이, 무한하신 신성한 사랑은 타락된 사람이 푹 빠져 있는 악의 깊은 수렁까지라도 가능만 하다면 따라가서 그 인간을 구하는데 결코 주저하지 않으신다. 그를 건져내어 천국에로 올리는 것이 가능치 않다면, 그가 더 낮은 지옥에로 침몰되지 않도록 해주신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이렇게 고백하고 있다. “하늘에 올라가도 거기에 계시고 지하 지옥에 가서 자리 깔고 누워도 거기에도 계시며, 바다 끝 서쪽으로 가서 자리를 잡아 보아도 거기에도 당신 손은 나를 인도하시고 그 오른 손이 나를 꼭 붙드십니다” (시편 139:9,10).
성경은 잘 교육받았다는 사람들의 세련된 자연적인 입맛에 맞춰지는 우아한 글자의 생산물만이 되도록 의도되어 있지 않다. 하느님의 말씀은 그분의 사랑으로 가득 찬 천국으로부터 성경의 언어를 사용해서 악취뿐인 지옥에까지 내려갈 수 있게 장치되어 잃어버린 사람을 구해 내도록 섭리되어 있다. 성경은 그분의 인간 환자들을 위해, 인간의 질병들, 정말로 불결한 인간 영혼의 질병들까지 서술하여 상세히 설명해 주는 위대한 의사의 안내서인 것이다. 만일 여러분의 영혼의 질병이 그렇게 심각하다고 생각지 않는다면, 성경 내에서 자신의 견해와 불일치 되는 부분에 오래 거주할 필요는 없을 것이라 보지만, 성경 언어에 보다 더 가까이 접근해서 공부하는 것은 여러분이 자신 속의 영적 질병을 진단해서 적절한 치료를 강구하는데 많은 도움이 된다. 더욱이 주님의 무한하게 부드러운 사랑이 우리에게 보여졌든, 안보여졌든, 그분의 항존하는 섭리가 우리를 주시해 주지 않고 방치한다면 얼마나 깊은 수렁에로 빠질 것인지 어느 누구도 인식하지 못한다.
그래서 우리가 보다 높은 상황에 있도록 자신이 진지하게 노력하면서, 악에 기울려는 자신 속의 경향들에 저항을 끊임없이 해 가노라면, 우리를 무한한 사랑과 지혜의 위대한 일들이 펼치는 신성한 방법들을 가지고 비평해 대는 것을 중지할 것이다. 자신의 내향적 경험으로 신성한 말씀 속의 영을 더 배우게 될 때, 말씀의 외적 형태를 비평하려드는 잘남이 수그러들 것이라 본다. 심정으로 이렇게 고백할 때, 즉 “당신의 말씀은 내 발에 등불이요 나의 길에 빛이옵니다.” 그래서 인간의 길들은 감각적 삶으로 진흙투성이요 추잡투성이 뿐임을 보고, 이 불결한 것들을 신성한 말씀이 내려 비추어 그 본성을 밝혀 주고 그 본성 속에 든 위험한 것들이 우리에게 경고되기 위해 하느님의 말씀은 절대 필요함을 인식하게 될 때, 하느님의 말씀은 “죽음의 그늘 밑 어둠 속에 사는 우리에게 빛을 비추어 주시고 우리의 발걸음을 평화의 길로 이끌어 주시리라” (누가복음 1:79).

18
예언자가 머리털과 수염을 밀다

성서 본문: 에제키엘 5장 1-5절

1. 너 사람아, 너는 이발사의 면도칼처럼 날선 칼로 네 머리와 수염을 밀어라. 그리고 그것을 저울에 달아 나누어 가지고 2. 포위가 끝나는 날 삼분의 일은 성 안에서 불에 사르고 삼분의 일은 성 밖을 돌면서 칼로 짓이기고 나머지 삼분의 일은 바람에 날려라. 내가 칼을 빼들고 그것을 뒤쫓으리라. 3. 그리고 조금 남겼다가 그것을 두루마기 단에 메두어라. 4. 그 중 더러는 불속에 넣어 살라라. 거기에서 불이 번질 것이다. 너는 이스라엘 온 가문에 일러라. 5. ‘주 야훼가 말한다. 내가 예루살렘을 뭇 나라에 둘러 싸여 뭇 민족들 한가운데 자리잡게 했건만, 예루살렘은…

요약

탐욕과 욕망이 인간 마음을 지배하는 세력을 획득했을 때, 이 세력은 그 마음속에 있는 모든 선함과 진리를 파괴하여, 결국 마음 속에 어떤 자연적 진리까지도 남아 있지 않게 하는 바, 자연적 마음의 안과 밖에 있는 모든 것을 송두리째 파괴시킨다.

예언자

본문에서 예언자는 “사람의 아들”이라 불리고 있다. 구약성서의 예언자, 그들을 통해 신성한 말씀의 글자가 인간에게 주어졌는데, 이 예언자들은 말씀의 측면에서 그분을 표현하고, 또 한편 말씀에서 축출되어 나오는 교회의 교리도 표현한다. 예언자는 주님의 견지에서 볼 때 오로지 인간적인 수단들, 즉 “사람의 아들”일 뿐이다. 그러나 주님을 위해 행동하도록 부름 받고 있을 경우, 그 예언자는 주님의 말씀을 표현하였다. 가장 높은 의미에서 볼 때, 사람의 아들이란 신성한 진리로서의 주님 자신이요, 인간을 통해 입으신 외적 인간다움을 가지고 본을 보이시고 신성한 진리를 완성하심을 표현한다. 예언자가 주님이 인간에게 진리를 밝혀 주시려는데 있어 수단으로 사용되었듯이, 예언자가 당한 것들은 신성한 말씀 글자에 저지른 유대인들의 폭력, 또는 신성한 진리에 대한 폭력을, 그리고 인간 구원을 위해 말씀이 육이 되신 그분의 인성에 대한 폭력까지 표현해 주고 있다. 그리고 예언자가 주님의 명령으로 행동한 모든 일들 역시 표현적 방법에서 위와 같은 것을 표현한 것이다.

칼과 깎음

이런 표현적인 행동의 하나로 예언자는 예리한 칼, 즉 면도칼처럼 사용될 수 있는 칼을 취하여 자신의 머리털과 턱수염을 밀도록 명령되었다. 깎거나 자르는데 사용되는 칼이나 검 등등은 좋은 의미일 경우, 그것들은 모든 거짓이나 악, 죄악된 행위에 반대하여 그것들을 자르려 하는 무기라는 측면에서의 진리를 표현하고, 마음 속에 들어오는 각종 생각들을 검사하고, 분리하고, 잘라 내는 진리도 표현한다. 그러나 나쁜 의미로 사용될 경우, 자르는 도구나 무기들은 나쁜 목적에 충당하려고 거짓이 전복해 버린 왜곡된 진리, 그리고 선하고 진정되며 유용한 좋은 것들을 파괴하려 드는 왜곡된 진리를 표현해 준다. 날이 선 칼은 대상물을 예리하고 정확하게 자른다. 날카로움이 정확함을 표현하듯 예리한 진리는 거짓 관념들을 자르고 관통하여 악한 느낌이나 죄짓게 하는 행동의 본성을 노출시켜 준다. 그리고 거짓된 간섭으로부터 사실들을 분리시켜 주고 거짓 사상의 영향력을 마비시켜 주기도 한다.

머리털

신체의 표면에서 자라는 머리털, 이는 삶의 자연적 평면에 해당되는 것들, 말단에 해당되는 자그마한 사건들을 표현한다. 이 머리털을 하느님의 말씀이라는 측면에서 살피면, 말씀의 글자를 표현하는데, 이 글자는 신성한 말씀 속에 든 생명 있는 부분에 해당되는 내적인 영적 의미와 구별된다.
따라서 머리털을 모두 깎는다는 것은 선과 진리에 있어야 할 말단적인 것, 즉 외부 사항들을 거두어버리는 것을 표현한다. 다시 말해서 선을 행하는 수단들인 진리의 지식이 결여됨으로 일상생활 속에 있어야 할 원리들이 마음 속에서 결핍된 것을 표현하는 것이다.

대머리

그러므로 대머리는 선을 행하는 수단인 진리가 결핍된 사람을 표현한다. 이를 바꿔 말하면, 사람들이 하느님의 말씀에 관한 글자적인 지식이 결핍될 경우, 그는 선과 악, 진리와 거짓 사이를 판가름하지 못하는 것과 같다. 그 이유는 지상의 인간일 경우, 그에게 신성한 말씀의 글자가 결핍해질 때, 그는 자연적 진리와 영적 진리 모두에서 배우고 이해하는 수단이 없게 되는 결과가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인간이 성경의 글자에 관한 지식을 왜곡시키고 부패시켜 자신의 악한 목적에 충당해 갈 때 주님의 말씀의 글자를 올바르게 사용치 못하는 바, 유용한 말씀의 글자의 사용이 결핍되고야 만다.
이렇게 잘리워진 머리털은 땅에 떨어져 결국 소멸되고야 만다. 즉 진리의 외적인 것들, 규율들, 또는 예배의 형식들이 하느님을 사랑하는 내향의 영과 생명에서 분리될 때, 그런 것들을 단지 형식적 방법으로서만 준수해 가는 사람들 속에는 어떠한 내적인 영적 생명도 있지 않는 텅빈 형체로 존재한다는 말이다.

표현

자신의 머리를 대머리로 만들므로서 이 예언자는 타락한 삶의 조건에 빠진 예루살렘 백성들의 정신 상태를 표현했다. 그리고 주님을 예배한다고 계속 고백하면서도 타락되는 상태속에 있는 오늘날의 모든 사람의 정신 상태까지 표현해 주고 있는 것이다.
또 다른 측면에서 글자로서의 신성한 말씀은 퇴보되는 사람 속에 들어가면 그들의 마음을 꿰뚫고 검사하여 그들 속의 악과 거짓을 노출시켜 주는 날카로운 칼이기도 하다. 그런데 칼이 예언자의 머리털을 밀었다는 것은 그들이 신성한 말씀의 모든 힘을 파괴할 수 있게 자기들의 마음에 거짓 관념을 허용하고, 말씀 속의 모든 개념과 명령들은 단지 정규적인 축제를 위한 것일 정도로 등급을 하락시키는 영적 행위가 되었음을 표현해 준다.
모든 천적이고 영적인 진리들은 마치 육체 속의 영이 육체에 의존하여 그것을 통해서만 가능하듯 말씀의 글자에 의존되어 있다.
말씀의 글자는 그 글자가 말하는 자연적인 것과는 글자대로 일치하지 않는다. 그러나 자연적인 것과 영적인 것 사이를 연결해 주는 상응을 수단으로 하는 표현적인 측면이나 비유적 측면에서는 언제나 일치한다. 그러므로 말씀의 표현적인 글자나 상응적인 글자는 말씀의 내적 의미에 있는 영적 진리를 담는 그릇, 또는 거처하는 장소가 되어주므로 중요하다. 즉 우리 얼굴의 표현, 말하는 목소리의 억양은 우리가 이해한다는데 대한 생각, 심정 속에서 있어지는 내향적인 느낌을 붙잡아 표현하는 바, 그릇 역할과 같음을 비교 생각하면 될 것이다.

동양에서의 대머리

대머리가 지닌 표현적 의미 때문에 대머리는 동양에서는 좋지 않은 것으로 간주했고, 범죄에 대한 처벌로 그 사람의 머리를 대머리로 만들 경우, 특별히 무례함을 상징하기도 했다. 때로 어떤 이는 자신 스스로 대머리가 되어 친척의 죽음을 매우 슬퍼한다는 것을 표현하기도 했다.
오늘 본문의 경우도 이와 비슷하여 예언자가 자기 백성들의 영적 대머리를 슬퍼하여 자신의 머리를 밀도록 명령되고 있다. 대머리는 동양의 경우 수치스러움, 대머리란 말을 타인을 향해 말할 경우, 상스러운 별명을 부르는 것이 된다. “대머리야, 꺼져라”라는 이 구절은 자기 스승 엘리야가 불 말과 불 수레를 타고 올라가고 그 뒤를 승계 받았다고 하는 엘리야의 사건 뒤를 잇는 구절에 등장하여 그 앞의 사건에 대해 경멸적인 말투가 되었는데, 이를 내뱉은 베델의 아이들에 관한 기사가 열왕기하 2장 23-25절에 있다. 그래서 42명의 이 아이들은 암콤에 의해 죽었는데, 곰은 표면에 털이 많아 대머리와 특별히 대조를 이룬다. 아이들이 예언자를 놀려대는 것은 말씀의 글자가 신성하다는 것을 경멸적으로 부정하는 것을 표현한다. 그 다음 곰에 의해 아이들이 죽는 것이란 경멸적으로 말씀의 글자를 부정하는 이들이 성경의 글자를 거절하고 미워했지만, 성경의 글자를 부정하는 자는 그 글자의 힘에 의해 스스로 파괴되고 만다는 것을 표현하고 있다.
그리고 삼손의 위대한 힘은 그의 긴 머리털에 있었다고 말하고 있다. 그의 머리털이 잘리우자, 그의 비상했던 힘은 사라졌다. 이는 성경의 글자를 부정하고 거절함으로 말씀을 대머리로 만드는 사람의 마음 속에서 신성한 말씀의 권능은 효력을 상실한다는 것을 말한다. 그이유가 말씀의 글자 의미 안은 신성한 말씀(신성)으로 가득 차있어 그분의 권능이 상존하는바 글자 의미가 삶의 지침으로 직접 응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응용에 대한 대표적인 것으로는 십계명이나 황금률, 기타 다른 교훈들일 것이다. 게다가 성경 글자의 어떤 부분이 오로지 표현적 성격만을 띄고 있다 해도 그 글자 속에 든 내적 의미인 모든 영적 원리까지도 발견해서 실용화 할 수 있다.

무게를 담

무게를 단다는 것은 물품의 양을 결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영적으로 무게를 단다는 것은 느낌이나 생각 속의 영적인 성격, 즉 그 품질을 결정하는 것을 말한다. 뭔가를 달아본다는 것은 대상물 속의 선을 측정하는 것이고, 뭔가를 재어 본다는 것은 대상물 속의 진리를 결정짓는 것을 말한다. 뭔가를 영적으로 달아 볼 경우, 그것이 악이든 선이든 그 성격이 판명되어 장차 있어질 것이 예견되어진다. 정신적인 것의 무게를 달아보는 영적인 저울은 두 가지인데, 하나는 영적 진리에 의해 계발된 마음속의 생각하는 능력, 그리고 자연적 진리로 이해된 마음 속의 생각하는 능력인데, 한마디로 합리적인 능력이다. 계발된 합리력이 애정들과 생각들의 영적 특질을 명확히 보게 될 때, 그 능력은 마음의 삶, 어딘가에 거처를 배당 받는다. 이것이 예언자가 잘리운 머리털을 나누는 것으로 표현되어 있고 나뉜 각 부분은 그 부분대로 운명을 받고 있다.

세 부분

숫자 3은 진리적 측면에서의 충만함, 완성을 표현한다. 즉 진리를 알게 되고, 그 진리를 사랑하여, 그 진리를 자기 삶에 실제 사용하는 것으로 완성된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진리의 힘은 인간 삶의 모든 부분, 즉 사랑하려는 의지, 생각하는 지성, 또는 이해성, 실제화 하는 행동 지침의 모든 부분을 완성해 주기 때문이다.
머리털을 세 부분으로 나누는 것은 영적으로 보면, 진리가 모든 것에 닿을 수 있을 충분한 수준에서 응용된다는 것을 말한다.
그중 삼분의 일을 불에 태운다는 것은 타락되는 마음이 되는 한가지 원인은 자아 사랑이라는 뜨거운 불, 악한 욕망에 있다는 것이다. 성 안에서 불에 사르라는 것은 타락의 한가지 원인인 악한 욕망은 교회의 중심되는 교리, 즉 주님에 관한 교리를 썩게 한다는 것을 말한다.
나머지 중 삼분의 일은 칼로 토막을 내라고 했는바, 이는 말씀 글자 속에 있는 힘은 타락된 마음 속에서는 감각적인 오류로부터, 자아 사랑에 근거한 거짓 추론으로 깡그리 파괴된다는 것을 표현하는 것이다. 나머지 삼분의 일을 바람에 날려라는 것은 타락된 마음 속에서는 바람이 등겨를 날리듯 자연적 마음 속에 있는 말씀 글자까지도 싹쓸어 흩어지게 되는 것을 표현하고 있다.
그래서 본문이 선포하는 바, 바람에 날리는 머리털은 정해진 장소도, 놓여질 곳도 없게 된다는 것, 게다가 계속 주님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칼을 빼들고 그것을 뒤쫓으리라.” 또는 그것에 대항하도록 칼을 보내리라는 것이었다. 이는 글자적 진리가 교리라는 어떤 바람에 의해 현재의 생각에서 어딘 가로 날려 가는 것만이 아니라, 마음 속에 더 심각한 거짓들이 따라 붙어 글자적 진리를 파괴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두루마기 단으로 묶음

마지막 삼분의 일 가운데 머리털을 조금 남겨 그것을 두루마기 단에 묶어 두도록 예언자에게 명령되었다. 두루마기 단이란 도포의 가장 낮은 부분에 해당된다. 의복이란 형체를 주는 것, 애정을 옷입힌 진리, 사랑이 표현됨, 실지 응용을 위한 계획 등을 표현한다. 옷자락이란 진리가 행동 지침의 가장 바깥쪽에 응용될 때의 진리를 표현한다. 예언자가 머리털 일부를 두루마기 단으로 묶었다는 것은 실제 행동에 말씀의 교훈 중 아주 적은 분량을 응용해보려 하는 마음을 표현한 것이 된다. 그러나 타락하는 마음일 경우, 행동을 위한 실제 교훈까지도 결국 자아 사랑이라는 불 속에 던져지고 만다. 이런 사항들이 발생할 때, 인간 속에 든 진리의 마지막 보루마저 허물어져 악의 불은 인간 마음과 삶 속에 있게되는 교회 속의 모든 것을 사르고 만다. 이런 사항들이 예언자에게 지시된 행동, 즉 두루마기 단에 묶어 둔 조금밖에 안되는 머리털까지 불 속에 던짐으로 표현되고 있고, 이런 사항들로부터 이스라엘 온 가문에 불이 일어날 것임을, 또한 이것이 예루살렘임을, 이런 상황이 예루살렘 백성의 영적 모습임을 본문은 표현적으로 묘사하여 선포하고 있다.
위와 같은 사항들은 오늘날 우리 상황에도 상존하는 것들이다. 위와 같이 타락된 상태에서 살고 있는 정도만큼, 각자의 실생활에 응용하도록 되어 있는 신성한 말씀을 옷벗기는 방법으로 말씀 속의 권능과 생명을 거절하는 정도만큼에서 우리 역시 예루살렘 백성이나 다를 바 없게 된다.

예루살렘

본문의 뒤를 이어 주님께서 예루살렘을 위해 하셔야 할 것에 대한 서술이 등장하고 있다. 예루살렘 백성들이 하느님의 극진한 사랑에 무례한 짓으로 보답한 것, 예루살렘의 악행에 대한 마지막 결과에 반드시 있어져야 할 것들에 관한 내용이 뒤따르고 있는 것이다. 예루살렘은 하느님의 총애로 타 국가 사이에 놓여 괄목할만 했지만, 오히려 타 국가들 보다 더욱 주님께 반역하여 더 사악한 짓을 했다. 그들은 신성한 법도와 원리들을 폐기시키고, 자기들이 하느님의 선택된 백성이라고 우쭐대면서도 하느님의 규정을 무시해 버렸던 것이다. 아예 주님의 거룩한 예배 장소까지 각종 우상을 세워 더럽혀 주님을 모독했다. 그들은 성전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었다. 삭발된 머리를 가진 예루살렘, 타락하고 퇴보되어 자아가 파멸되는 것이 예루살렘의 실체인 것이다.
이렇게 사실대로 묘사하여 표현된 그림은 특별히 새 예루살렘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우는 우리들의 교회에게 보다 더 적절한 경고를 주고 있다고 생각되지 않는가? 우리의 주님, 예수 그리스도는 옛날의 예루살렘보다 더 많은 것을 새 예루살렘을 위해 주셨다고 생각되지 않는가? 영적으로 거룩한 성인 우리의 새 예루살렘 교회는 우리 보다 덜 영적 빛을 가져서 신성한 인격의 본성이나 그 질을 덜 이해할 수밖에 없는 여타 종교들 사이에 놓여 있다. 우리는 신성한 말씀에 대해 내향적이고 영적인 의미라는 훨씬 더 큰 영적 빛을 가지고 있고, 성경의 바깥 형체인 글자와 그 글자 속의 영적 의미 사이를 야곱의 사다리가 천국과 지상을 연결하듯 말씀을 보는 능력도 충분히 가지고 있다. 게다가 일상 생활이 영적 원리와 어떤 관계를 가지고 있는지도 안다. 그야말로 우리는 주님께 감사하기에는 너무나 벅찬 그분의 총애를 받고 있다.

우리의 가능성들

이런 빛과 기회를 동시에 가진 우리는 평범한 이들, 덜 영적 빛을 가지고 있는 이들보다 실제에 있어 선한 인격이 더 높아지게 부상되어야 하리라 본다. 우리에게 많은 것이 주어진 만큼 많은 것도 요구되고 있다. 우리의 모든 기회는 가능성을 포함하겠지만 의무도 내포하고 있다는 것에 대해 슬쩍 넘어가서는 안될 것이리라 본다. 사랑의 주님이 심정 속에 나날이 건설하시려 애쓰신 것, 새 예루살렘은 우리가 그 성을 내 속에 짓겠다고 부단히 노력하는 한, 즉 자신 속에 든 악들, 거짓, 우리를 썩게 만드는 각종 죄가 되는 행위들, 우리 속 하늘 나라의 문을 닫아걸려는 타락된 심정 속의 찌꺼기들, 거룩한 말씀의 글자와 영이라는 양쪽 측면 모두를 부패시키려 하는 각종 행위들에 우리의 의지가 저항하는 한, 그 성은 우리의 영화로운 영적 고향이 될 것이다. 그리하여 이사야는 이렇게 노래한다. “예루살렘의 무너진 집터들아, 기쁜 소리로 함께 외쳐라. 야훼께서 당신의 백성을 위로하시고 예루살렘을 도로 찾으신다” (53:9).

19
예루살렘의 우상숭배

성서 본문: 에제키엘 8장 1-16절

1. 제육 년 유월 오일, 나는 집에 앉아 있었다. 유다 장로들이 내 앞에 앉아 있는데 주 야훼께서 손을 내밀어 나를 사로잡으셨다. 2. 내 눈에 비친 그 모습은 사람같이 보였으나, 허리 아래 모양은 불 같았고, 허리 위는 놋쇠처럼 환히 빛나는 것이었다. 3. 그분이 손같이 생긴 것을 내미시어 내 머리를 잡으시자, 그의 기운이 나를 공중에 번쩍 들어 올렸다. 나는 신비스런 발현 속에서 예루살렘으로 들려 갔다. 그 곳은 질투를 불러 일으키는 우상이 자리잡고 있는 북향 안문 문간이었다. 4. 거기에서 나는 전에 들판에서 본 것 같은 이스라엘의 하느님의 영광을 보았다. 5. 거기에서 “너 사람아, 어서 북쪽을 바라보아라” 하시는 그분의 말씀을 듣고 북쪽으로 눈을 돌리니, 제단 문 북쪽 초입에 질투를 불러 일으키는 우상이 있었다. 6. 그분은 “너 사람아, 사람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보이느냐?” 하시면서 나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스라엘 집안이 여기에서 하고 있는 짓은 너무나도 역겨운 짓들이다. 이런 행위로 그들은 나를 내 성소에서 멀리 떠나게 하였다. 너는 여기에서 이 외에도 그들이 하는 역겨운 일을 더 보게 되리라.”
7. 그분은 나를 뜰로 들어 가는 문간으로 데리고 가셨다. 거기에 가 보니, 담에 구멍이 하나 있었다. 8. 그분이 나에게 “너 사람아, 담을 뚫어라” 하시기에 그 담을 뚫으니, 문이 하나 보였다. 9. 그분이 말씀하셨다. “들어 가 보아라. 사람들이 거기에서 흉악하고 발칙한 짓들을 하고 있을 것이다.” 그의 말씀을 따라 10. 들어 가 보니 온갖 길짐승과 추한 짐승의 그림과 이스라엘 가문이 섬기는 온갖 우상이 그 담 사면에 돌아 가며 새겨져 있는 것이었다. 11. 그리고 이스라엘 가문의 장로 칠십 명이 사반의 아들 야자니야를 가운데 세우고 그 우상들 앞에 서서 저마다 손에 향로를 들고 있는데 향연이 향기를 풍기며 올라가고 있었다. 12. 그분이 나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이스라엘 가문의 장로들이 따로따로 신상을 그려 놓은 컴컴한 방에서 하고 있는 짓들을 보았느냐? 저들은 내가 이미 저희를 돌보지 않고 이미 이 땅을 버렸다고들 생각하고 있다.” 13. 그리고는 “이들이 하는 역겨운 짓을 또 보아라” 하시며 14. 나를 야훼의 성전 북향 정문 문간으로 데리고 가셨다. 거기에서는 여인들이 앉아서 담무즈신의 죽음을 곡하고 있었다. 15. “너 사람아, 보았느냐?” 하시면서 그분은 나에게 말씀하셨다. “이보다 더 역겨운 짓을 또 보아라.” 16. 그리고는 나를 야훼의 성전 안마당으로 데리고 가셨다, 거기 야훼의 성전 정문간, 현관과 제단 사이에 사람 이십 오 명 가량이 야훼의 성전을 등지고 동쪽을 향하여 해를 보며 절하고 있었다.

개요

악인은 신성한 말씀의 거룩함을 모독한다. 그들의 악은 예배까지도 침범하여 주님 말씀의 글자적 의미까지 뒤집어 놓는다. 내면적으로, 그들은 모든 선한 원리들을 섞음질 하여 주님 대신 자아 사랑만을 예배하게 한다. 그러는 가운데 신성한 사랑과 자비가 인간에게 닿게 하는 모든 길을 차단하기에 이르른다.

글자적 이야기

본문의 시대 때쯤, 예언자 에제키엘은 바빌론에 포로로 끌려간 유대인들 틈에 있었다. 그가 타락된 유대인들을 올바르게 세워 보려 노력했었지만, 유대인들은 악한 길속에로 이미 깊숙이 빠져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주님과의 언약에 무관심한 상태 속에 침몰되어 있었다. 따라서 그들은 예언자가 공적으로 말해 줄 때 경청하지 않았던 바, 에제키엘은 집안에 머무르면서 자기를 찾아오는 사람만을 만났던 것이다. 이들에게 그는 여호와의 말씀을 말했는데, 그런 상황이 오늘 본문의 경우이다.
이 때, 그의 영적 감각이 영계에 열리면서 표징적인 예언을 말했던 것이다.
그의 눈에 비친 사람이었던 불은 신성한 사람이신 주님을 표현하고 있었고, 그분이 이 예언자를 들어 올려 타락되어 가는 유대인의 모습들을 상징적인 환상으로 밝혀 주신 것이다.

영적 의미

예언자를 들어올릴 때, 수단이 된 것은 그의 머리털이다. 이 머리털은 신체의 표면에서 자라나는 바, 이는 바깥쪽 사항들, 즉 외부에 속하는 것을 표현해 준다. 신성한 말씀이 예언자를 통해 주어질 때, 예언자가 그 말씀을 표현하듯, 성경 글자, 이를 수단으로 우리 지성은 영적으로 승강되어 영적 마음이 열리면서 말씀 속의 영적 의미가 우리에게 밝혀지게 된다.
예언자를 붙잡은 손은 말씀의 글자를 수단으로 발휘되는 주님의 권능을 표현하고 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과거 스베덴볽은 그가 말씀의 글자를 읽고 있는 동안 그의 지성이 계발되고 승강되어져 신성한 말씀 속의 영적 진리들이 가르쳐졌다는 사실이다.

질투를 불러일으키는 우상

이 예언자는 “질투를 불러일으키는 우상”이 있는 장소로 옮기어졌다. 유다 왕국의 열 세 번째 왕인 므나쎄, 그는 서기 칠백 여년 전 왕국을 통치했었는데, 그는 악하고 우상을 섬기는 왕이어서 이교도들의 역겨운 짓들을 도입했다. 특히 그는 가나안족이나 페니키아인들이 제일 가는 신으로 여겨 만든 바알 제단을 육성시켰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위의 국가들의 주요한 여신인 아세라 목상도 세워 놓았는데, 이 우상은 아마 그리스나 로마의 아스타르테(Astarte)일 것으로 본다. 이 아세라 목상이 본문에서 언급되고 있는 “질투를 불러일으키는 우상”이다. 이 우상은 예루살렘의 여호와의 성전 바깥뜰에 세워졌는데, 이 장소는 큰 제단 옆이어서 “성소”와 마주보게 세워진 이유란, 여호와를 질투하는 신이 되게 하면서 동시에 여호와와 맞먹는다고 생각된 우상을 맞세워 여호와가 시기하여 자기들을 괴롭히는 데서 떠나 오히려 보호하기를 바래서였다. 이 우상이 “질투를 불러일으킨다”는 표현을 가지고 있어 위 같은 일이 벌어졌던 것이다.
그러나 여호와의 측면에서 “질투, jealous”란 “열정, zealous”을 의미한다. 사실상, 이 두 단어의 히브리 어원은 똑같다. 신성한 질투 또는 열정은 인간의 영적 복지를 위한 불타는 사랑이다. 위의 우상들을 세운 므나쎄라는 왕의 히브리 이름은 “잊어버림, forgetting”이라는 뜻을 갖고 있다는 것까지 연결하여 생각하면 본문의 이해에 더 보탬이 될 것이다.
왕이라는 므나쎄의 지위는 더 확실하고 특별하게 인간이 기억해야 할 것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을 잊게 했다. 즉 그는 살아 계신 하느님을 포기하고 죽은 우상들을 섬겼다는 말이다.
위와 같은 우상들이 나라를 휩쓰는 와중에서도 예언자의 눈은 눈부신 광채, 이스라엘 하느님의 영광을 보았는바, 이는 영적 영광인 사랑과 지혜를 표현한다.
예언자가 쳐다 본 방위는 북쪽이었는데, 이는 영적 태양이신 주님에게서 가장 멀리 떨어지는 상황, 그분의 따뜻함을 가장 적게 받는 것, 즉 인간의 마음이 자연적 마음뿐일 때를 표현해 준다.

역겨운 짓들

“역겨운 짓들”이란 선함을 모독하는 것을 표현한다. 그리고 불결한 것들은 교회에서, 예배 속에서 신성한 말씀을 부패케 함으로 신성한 진리를 모독하는 것을 표현했다. 이러므로 해서 타락하는 인간 속의 악한 욕망은 외모상 정규적인 축제 예배를 개최하는듯 여겨지는 상황에서도 지옥과 연결을 맺고 있는 것이 되었다.
본문에서 말해지는 바, 이런 역겨운 짓들로 “그들은 나를 내 성소에서 멀리 떠나게 하였다”라고 언급해 주고 있다. 그 이유는 유대인들이 여호와의 성전 뜰에서까지조차 이교도 여신 아세라를 숭배했기 때문이다. 이런 사항들을 영적으로 본다면, 인간이 자아 사랑과 세상 사랑만의 삶에로 하향할 때, 그는 악을 사랑하는 각종 신들을 만들게 된다. 그 다음 그는 더 이상 여호와를 찾지 않게 되는 바, 비록 그가 여호와의 성전에서 예배드리는 척 할 때도 마찬가지이다. 이런 상태로 인간이 타락했을지라도 여호와께서는 그분의 성소를 떠나시지도, 그 인간을 버리시지도 않는다. 그러나 악인이 자기 마음의 내향에 있는 성전에서 여호와를 몰아내는 것이다.

벽, 기타 등등

예언자는 구멍이 있는 담에 오게 되었다. 담이란 담 안에 있는 것을 보호해 준다. 그런데 그 담에 큰 구멍이 생겼을 경우 그 보호는 사라지고 만다. 여기서의 담이란 말씀 속의 영을 보호하는 글자를 표현해 주고 있다. 그런데 이 글자에 관한 인간의 지식, 이 글자에 대한 공경심, 이 글자에 대한 순종이 없게 될 때, 그는 진리를 항상 썩게 만드는 인간의 악한 경향성에 대항하여 보호해 줄 담이 없어지게 된다.
담에 구멍이 났을 경우, 담 안에 있는 것이 보여지게 될 뿐 아니라 공격에 노출되고 만다. 이와 같은 경우가 우리 마음에도 발생한다. 즉 우리의 자연적 마음과 동인들을 꿰뚫는 빛은 마음에 있는 아주 은밀한 구석에서 되어지는 것들까지 노출시켜 밝혀 줄 것이라는 말이다.
이 담을 뚫는다는 것은 자연적 마음의 외적 상황을 탐사하여 내향적 상황까지 발견해 가는 것을 말한다. 타락한 인간이 외적인 경건 같은 담으로 자신을 제아무리 숨기려 해도, 샅샅이 뒤지는 주님의 진리의 빛은 그 담을 관통해서 담 안에서 벌어지는 불결한 우상을 예배하는 것, 즉 자아 사랑이나 세상적 정책들을 밝히 노출시켜 준다.

은밀한 방

이 예언자는 감추어 놓인 방, “온갖 길짐승과 추한 짐승의 그림과 이스라엘 가문이 섬기는 온갖 우상이 그 담 사면에 돌아가며 새겨져 있는” 방을 발견하였다. 환상에서 보여진 이 장소는 아마 지하 동굴이라던가, 태양 숭배자들이 집합했던 갈대아나 에집트, 페리샤의 산 속에 있는 장소 같을는지 모른다. 내면의 벽이 그림 문자나 상형 문자를 사용해 온갖 짐승을 표현해 놓았는바, 이런 짐승 종류에는 불쾌하고 독까지 내뱉는 기어다니는 짐승들까지 포함하고 있다. 이런 모습은 이시스(Isis)나 오시리스(osiris)의 신전 같은데서 찾아볼 수 있는 것들이다. 이 우상들은 합성된 물체, 즉 일부는 사람, 일부는 짐승으로 표현되어 있었을 것인데 아마 에집트, 아시리아 등에서 숭배한 우상들이라 본다.

짐승들

짐승은 애정에 관한 측면에서 인간을 표현한다. 그 이유는 모든 각각의 짐승은 인간 마음에 있는 어떤 원리가 삶에서 표현된 형태들이기 때문이다. 자연 속에 있는 인간 아래의 모든 것은 표징적인 것으로 창조의 가장 높은 존재인 인간을 정점으로 하여 각 동물은 개별적으로 인간 속에 든 각 품질을 표현해 준다. 이와 같이 성경에서도 짐승들은 인간 품질에 상응되고 있는 바 그 품질을 상징하거나 표현해 주는데 사용되고 있다. 예를 들면 예수님께서는 헤로데를 여우라 부르셨는데, 그 이유는 헤로데가 여우의 음흉한 특질을 드러내기 때문이었다.
인간은 자연적 애정과 영적 애정의 둘로 형성되나 짐승들은 자연적 애정만으로 형성되는바 인간과 공통적인 것은 자연적 애정뿐이다. 때로 우리가 사람을 어떤 짐승으로 부를 경우, 이는 그가 이기적이고 자연적인 느낌만 있을 뿐, 정작 인간 삶에 존재해야 할 더 높은 느낌이 결핍되었을 때라는 사실을 주지해야 한다. 좋은 동물들은 종교적 제물로 사용되었는데, 그 때 그 동물은 인간이 하느님께로부터 온 가장 좋은 특질을 바치는 것을 표현하기 위함이었다. 선하고 유용한 짐승은 선한 애정을 표현하나, 사납고 잔인한 짐승은 악한 특질을 표현한다. 기어다니는 것들은 가장 낮은 품질, 즉 자연적 감각에 관계되는 것을 표현한다.
본문에 언급되는 은밀한 방의 벽에 그려진 짐승들이란 예루살렘 백성들의 마음을 지배하는 것들, 즉 감각적인 욕망과 거짓들을 표현하고 있다. 이 백성들은 겉으로 보기에는 하느님을 예배하는 듯 보이지만 그들의 은밀한 방, 즉 심정 속은 온갖 이기심과 불결을 사랑함에 도취되어 있었던 것이다.

들어감

이런 감추어 놓인 방에 예언자가 들어간다는 것은 진리가 악한 목적을 감추려 애쓰는 바깥쪽 형체를 꿰뚫는 것을 표현한다. 집이란 인간 마음을 표현한다. 그래서 인간이 자기 속의 은밀한 방에서 악을 사랑하고 거짓을 생각할 때, 자기의 속셈은 주님에 의해 보여지지도, 알려지지도 않을 테니까 외적 예배를 잘 지키면 하느님께로부터도 신뢰를 얻을 것이니 일거 양득이라 착각하게 된다. 그리하여 이런 악하고 거짓된 불결한 것들이 타락되는 인간의 자연적 마음 안쪽에 상주하고 만다. 이런 것들은 비록 인간이 제 아무리 경건하게 열심히 주님을 믿노라고 신앙을 고백할지라도 그 인간에게 악한 인격을 주고야 만다. 그래서 신성한 말씀 속의 순수한 진리가 이 타락한 인간에게 와 닿을 때 그 속에 들었던 모든 짐승 같은 것들, 기어다니는 냉혈적인 것들, 그 외 자연적 마음 안에 상주하는 것들은 드러나 밝혀지고 만다.
벽에 그려 있는 끔찍한 그림들은 고대 유대인들의 하급 열정을 표현할 뿐만 아니라, 오늘날의 우리들 속에 상주하는 유사한 것들인 분노, 시기, 앙심, 미움 등도 표현해 주고 있음을 잊어서는 안된다. 이런 불결한 것들은 타락하는 인간 마음의 은밀한 방 속에서 떼지어 기어다닌다. 그리하여 주님의 사랑과 지혜가 우리 속 어두운 곳을 명백해지게 해서 천국의 빛으로 나아가 거듭나는 실제의 일이 시작될 수 없도록 계속 우리의 심정과 지성을 더럽히려고 한다.

장로들

유다와 이스라엘의 장로들은 그 나라의 현자들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인간 마음 안에 있는 지혜를 표현한다. 그러나 이런 현자들까지 우상 숭배로 전락되었을 때, 그들 모습은 지혜가 부패된 것을 표현하게 된다 즉 합리적 마음이 영적인 것들로부터 빛을 받아야 할 터인데, 스스로 영적 빛에 문을 닫고 자연적 감각 속의 저급 품질로부터 사건을 분석할 자료를 받게 되었다는 말이다. 이런 상황 속에서 인간 마음은 예수님의 다음의 말씀과 같이 침몰된다.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아, 너희 같은 위선자들은 화를 입을 것이다. 너희는 겉은 그럴싸해 보이지만 그 속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썩은 것들이 가득 차 있는 회칠한 무덤 같다. 이와 같이 너희도 겉으로는 옳은 사람처럼 보이지만 속은 위선과 불법으로 가득 차 있다” (마태복음 23:27-28).
칠십 장로들이 우상들 앞에 있었다는 것은 거룩한 것의 모독을 표현한다. 그 이유는 7과 70은 거룩한 것을 표현하는 바, 거룩한 것의 남용은 모독을 초래하기 때문이다.

담무즈

폭로된 역겨운 짓의 하나는 “여인들이 앉아서 담무즈 신의 죽음을 곡하는” 것이었다. 담무즈란 시리아인들의 태양신이었고, 아마도 그리스의 아도니스(Adonis)일 것으로 본다. 고대 신화에 의거하면, 담무즈는 봄의 생기나 영화로운 것에 관한 자연의 외적 양상을 표현했는데, 이것이 가을과 겨울의 폭풍으로 파괴되었다. 이 담무즈가 산에 사는 야생 돼지에 의해 가을에 죽임을 당한 아름다운 젊은이로 그려졌던 것이다. 그래서 매 가을마다, 여인들이 모여 그의 죽음을 슬퍼했다. 이와 같은 것들이 가을과 겨울철이 태양에서 더 멀리 떨어진듯 나타나는 것으로도 표현되어지고 있다. 이런 연유로 두 계절은 담무즈를 위해 곡하는 계절로 선택되어졌다. 이는 지상적인 것들이 덧없음을 표현해 주기도 한다.
영적으로 보건대, 본문의 여인들은 영적이고 거듭나는 삶의 기쁨을 누리는데 실패하고, 게다가 감각적 쾌락마저 잃어 통곡하는 타락된 각 개인 속의 자연적 애정을 표현하고 있다. 이 여인들이 주님 성전의 면전에서 곡한다는 것은 인간의 마음이 신성한 사항들을 소홀히 여기면서 세상 사랑과 자아 사랑을 충족시켜 보려는 욕망으로 자신들의 심정을 좁히려 드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이어지는 다음 단계는 악에로 한 걸음 더 빠져드는 것, 즉 신성한 것을 거절하고 부정하면서 주님이 계실 장소에 자아 사랑이라는 우상을 세우는 것이다. 이것이 “이십 오명 가량이 야훼의 성전을 등지고 동쪽을 향하여 해를 보며 절하는” 것으로 표현되어 있다. 아마 25명의 구성원 중 1명은 예배를 관장하는 대사제, 24명은 사제 임무를 돌아가며 맡는 사람 또는 그 과정을 표현했을 것으로 본다.
이 사람들이 주님의 거룩한 성소에서, 성전에 등을 돌린 채, 해를 쳐다보면서 자연계의 태양을 숭배했다는 것은 여호와의 신성한 사항들을 완전히 배격하면서 동시에 우상으로 태양과 연합하는 것을 암시하는 행동들이다. 그리하여 주님과 가장 가까이 있었어야 할 이들, 여호와의 예배를 인도해야 할 이들이 그분께 맞서겠다는 쪽으로 전락된 것이다. 악인이 숭배하겠다는 태양은 단지 죽은 본성만 가졌을 뿐인 바, 타락한 마음속에서는 자아 사랑이라는 죽은 것이 살아 계신 하느님이 계실 장소에 들어앉았다는 것이 된다. 그래서 주님 사랑의 불이 이렇게 된 심정 속에 들어가시고자 할 때, 주님의 사랑이 자아 사랑이 흠모하는 삶을 파괴하려 든다고 간주할 뿐이다.
이런 타락된 인간을 향해 주님의 소리는 경고성 있는 사랑의 소리로 다가가서 말하시기를, “거역하며 저지르던 죄악을 다 벗어버리고 새 마음을 먹고 새 뜻을 품어라. 이스라엘 족속들아, 너희가 죽다니 될 말이냐?” (에제키엘 18:31).

20
예루살렘의 대학살

성서 본문: 에제키엘 9장 1-6절, 10장 1,2,7절

9장 1. 그리고 큰 소리로 외치시는 그분의 음성을 나는 들었다. “이 도시를 벌할 자들아, 모두들 두드려 부술 연장을 손에 들고 나오너라.” 2. 그러자 북쪽에 있는 높은 문에서 사람 여섯이 나왔다. 그들은 모두 손에 망치를 들고 있었는데 그 중 한 사람은 모시옷을 입고, 허리에는 서기관의 필묵통을 차고 있었다. 그들이 들어 와서 놋제단 곁에 서자, 3. 이스라엘의 하느님의 영광이 자리잡고 계시던 거룹에서 떠올라 성전 문턱으로 나오시어 모시옷을 입고 필묵통을 허리에 찬 그 사람을 부르시며 4. 말씀하셨다. “너는 예루살렘 시내를 돌아 다니며, 그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발칙한 짓을 역겨워하여 탄식하며 우는 사람들의 이마에 표를 해 주어라.” 5. 그리고 나머지 사람들에게는 내가 듣는 데서 이렇게 이르셨다. “너희는 저 사람 뒤를 따라 도시 안을 돌아 다니며 마구 쳐라, 가엾게 여기지도 말고 불쌍히 보지도 말아라. 6. 노인도, 장정도, 처녀도, 어린이도, 부인도 죽여 없애라. 그러나 이마에 표가 있는 사람은 건드리지 말아라. 우선 나의 성소에서부터 시작하여라.” 그러자 그들은 성전 앞에 있는 장로들부터 치기 시작하였다.
10장. 1. 내가 바라보니, 거룹들 머리 위에 있는 덮개 위에는 청옥 같은 것으로 된 옥좌 같은 것이 있었다. 2. 거기에는 모시옷 입은 그 사람에게 하시는 그분의 말씀이 들려 왔다. “바퀴들 사이로 해서 거룹 밑에 들어가, 그 거룹들 사이에서 숯불을 두 손 가득히 움켜 내어 이 도성 위에 뿌려라.” 그러자 그는 내가 보는 앞에서 그리로 들어 갔다.
7. 한 거룹이 그 거룹들 사이에 있는 불을 손으로 집어다가 모시옷 입은 사람 손에 쥐어 주었다. 그러자 그는 그것을 받아 가지고 나왔다.

개요

신성한 말씀 속의 진리는 성서를 거룩한 말씀으로 소유한 교인들에게 있는 영적 인격을 검사한다. 이 검사에서 인간이 신성한 말씀을 어떻게 받는지를 밝혀 준다. 이것이 영적 심판이요, 이 심판 속에서 악한 인간은 자신에게 이미 고정시켜 놓은 인격에 의해 자신을 파괴시킨다. 그 이유는 자신의 악들에 의해 모독되었거나 파괴되지 않은 진리와 선함이 자기 속에 남아 있는 것이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정한 교인은 신성한 진리를 신실하게 자기 심정에 받되 거룩한 말씀의 글자와 영을 수단으로 거듭 나아간다.

심판

우리가 기억해 둘 것은, 본문은 글자상의 역사를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 심판에 대한 상징적이고 표현적인 환상으로 이 심판은 인간 마음 안에서 계속 이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도성

도성에 대해 어떤 임무를 가진 이들에게 어떤 명령이 주어졌다. 도성, 이곳은 인간을 위해 집과 같은 것들이 체계적으로 집합되어 서있는 곳인바, 이는 인간 마음이 사용하려고 정리해 놓은 체계적인 교리를 표현한다.
예루살렘이 교회를 표현하듯, 도성은 교회 속의 교리를 표현한다. 오늘 본문의 경우, 도성은 더욱 악쪽으로 침몰되는 가운데 있는 타락하는 마음속에 든 교회의 교리를 표현했다.

사람들

도시에 어떤 임무를 띤 사람들이란 말씀 속의 신성한 진리들이다. 이 진리들은 교회의 교리 안에 거주하고 있고, 이 진리를 수단으로 진리 측면에서의 인간 마음 상태는 이 진리가 예리하게 심정의 삶 안에, 즉 바깥 행동에 응용됨으로 해서 검사되어 심판되는 것이다.
여섯 사람이 있었다. 여섯이란 전투하는 상태를 표현하고, 이 상태 속에서 진리는 악과 거짓을 치게 된다. 가장 대표적인 여섯은 창조의 육일이다. 이는 마음 속에서 계속되는 전투를 표현해 준다. 이 전투 속에서 인간이 도달 가능한 거룩한 칠일 째를 맞기 전, 인간은 선과 악, 거짓과 진리의 양 측면이 계속 대립을 이루어 가면서 거듭 나아가는 것이다. 그래서 히브리인의 종들은 육 년을 봉사하고 난 뒤 칠 년째에 자유를 얻도록 되어 있다. 또한, 이스라엘 족들은 자기들의 토지를 육 년 동안 계속 경작하다가, 칠 년 되는 해에 경작하지 않았던 것이다.
여섯 사람이 도시의 북쪽 문에서 나왔다는 것은 신성한 진리가 전투를 하게되는 국면은 거룩한 말씀의 글자에서임을 표현한 것이다. 그 이유는 가장 추운 방위인 북쪽은 외적인 것, 자연적인 것을 표현하기 때문이다.

지도자

여섯 사람 중의 한 사람은 대 학살을 주도하는 지도자였다. 특별히 그는 모시옷을 입고 서기관의 필묵통을 옆에 차고 있었다. 희고 깨끗한 모시는 순수하고 깨끗한 삶, 의로운 상태를 표현한다. 이 상태는 주님의 명령에 따라 삶을 올바르게 정립했을 때 가능하다. 그래서 묵시록에서의 경우, 모시옷은 교회에 관련되어 말해지고 있다. “…하느님의 허락으로 빛나고 깨끗한 모시옷을 입게 되었다. 이 고운 모시옷은 성도들의 올바른 행위이다”(19:8). 본문에서 모시옷을 입은 사람이 심판을 주도하는 자였다. 그런 이유는 교인을 심판하는 가장 중요한 테스트가 실제 삶이 얼마나 올바른 행위이냐에 있기 때문이다.

기록자

모시옷을 입은 사람이 필기자(기록자)처럼 필묵통을 찼다는 것은, 실제 있어진 정의가 인간 삶에 관한 실제의 기록을 있게 한다는 것, 각자의 일상 생활의 행동이 자기 인격의 품질을 기록하게 된다는 것을 표현하는 것이다. “열매로 너희는 그들을 알 것이다.” “자, 내가 곧 가겠다. 나는 너희 각 사람에게 자기 행적대로 갚아 주기 위해서 상을 가지고 가겠다.” “네가 영생에 들어가려 한다면 계명을 지켜라.”
“하느님의 영광,” 이는 신성한 현존을 표현하는 후광인데, 이 영광이 거룹에서 떠올라 성전 문턱으로 갔는바, 이는 주님께서 빛나는 진리로서 교회의 바깥 사항들에 특별하게 나타나시는 것을 표현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교인들의 실제 행동 속에 있어진 선과 악을 수단으로 각 사람의 인격의 품질이 증명된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심판 속에서 선한 자와 악한 자의 구별은 뚜렷하게 이루어진다. 영적 심판은 악한 자에게는 그 악에 대한 징벌로서 앙심 있는 처벌을, 선한 자에게는 그 선에 대한 보상이 아니라, 각 사람의 인격이 충분히 발달되므로 해서 악으로부터 선을 분리하는 것이요, 그 분리 속에서 각 사람은 자기가 이룩해 놓은 인격 품질의 결과를 갖게 되는 것이다.
예루살렘에서 일어나는 모든 발칙한 짓을 역겨워하여 탄식하며 우는 사람들에게 표를 해주라고 말해지고 있다. 이들은 발칙한 짓들에 동참하지 않고, 오히려 그 짓들이 영적 삶에 반대되므로 크게 슬퍼한 이들이다. 흔히 우리는 자신의 생각에 반대되는 것들에 한숨짓고, 자신의 애정을 해치는 것들에 대해서는 탄식한다.
이마는 내면에 있는 사랑을 의미한다. 이마가 얼굴의 제일 높은 곳에 위치하듯, 이 사랑은 인격의 가장 높은 부분에 해당된다. 어떤 것에 표를 해 둔다는 것은 다른 것들로부터 구별이 되게 하는 것이다. 선한 자들의 이마에 표를 한다는 것은 신성한 진리가 인간을 심판하는 가운데, 즉 선과 악을 분리함에서 인간의 진짜 품질에 해당되는 내향의 인격을 가지고 분리한다는 것을 표현한 것이다. 내향의 인격이란 그의 행동만이 아닌 그의 동기까지 포함될 때이다. 본문에서 표(mark)라는 의미로서 사용된 히브리 단어(tàw)는 특별히 십자가 표를 의미한다. 십자가가 시험의 고난을 표현하듯, 십자가 표를 한 사람들은 시험의 투쟁을 통과하면서 거듭 나아간 사람들이다.
이에 더해서 기억되는 한 가지는, 과거 이스라엘 후손의 출애굽 직전에 여호와께서 에집트의 맏이들을 죽이게 되었을 때, 그분께서는 이스라엘 후손들에게 그들의 문에 피가 묻어 있으면 에집트 사람과 구별되는 표로 삼아 이 마지막 재앙이 아무도 죽이지 않고 그대로 지나가게 될 것이라고 말씀해 두셨던 줄거리이다.
이 사건은 후에 과월절 축제를 기념하게 된 큰 사건이 되었다.

마구 쳐부숨

남자와 여자 그리고 어린이 할 것 없이 마구 쳐부순다는 것은, 심판 중에 악한 자들은 마음과 인격 속의 모든 부분들을 스스로 파괴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모든 부분이란 그들의 총명, 애정, 그리고 순진에 이르기까지를 포함한다. 그렇게 부서지는 이유는 그들을 이끈 사랑이 악인 고로 그 악이 마음과 생명에 속한 모든 특질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기 때문이다. 악한 자, 그들은 악한 심정이라는 창고로부터 악한 것을 만들어 낸다.
인정 사정 보지 말고 마구 짓부수라는 것은 악한 인격 속에는 구원되어지고 거듭나질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 악한 인격이 황폐해져야 함이 악인에게 필연적으로 있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이 파괴는 주님의 성소, 즉 거룩한 장소부터 시작되게 하라고 말해지고 있다. 다시 말해서, 여호와의 거룩한 장소에서 우상들을 숭배하느라 분주했던 장로들부터 쳐 부셔져야 한다는 말이기도 하다. 사람들의 지도자인 장로란 악행을 일으키게 한 마음속의 주된 사랑(ruling love)을 표현한 것이고, 이것들이 그 벌을 맨 먼저 느껴야 한다는 말이다. 악 가운데 있는 지도자, 악한 원리로 사람을 이끄는 자는 그 원리로 타인을 현혹시켰겠지만 결국 자기까지도 현혹시키고 만다. 따라서 그들의 악들은 자신의 인격을 파괴시킴으로 자신에게 되돌려 받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이런 것들이 “명령하신 대로 다 하였읍니다”라고 주님께 보고되는 심판 속에 있는 지도자에 의해 표현되어지고 있다.

청옥의 옥좌

이런 일이 진행된 뒤, 청옥 같은 것으로 된 옥좌가 거룹 위에 나타났다. 푸른색인 청옥(sapphire)은 진리를 표현한다. 본문의 경우, 청옥은 그분의 진리, 그분의 거룩한 말씀 안에서 주님의 현존을 있게 하는 신성한 진리를 표현하고 있다. 이 진리는 그분이 신성한 사랑 안에 계신 분임을 밝히 나타나게 해준다. 태양의 빛에서 아름다운 청옥이 맑고 투명하게 빛나듯,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에 오게 되는 영적인 빛에서 말씀의 글자는 온유하신 자비로 지상에 있는 인간의 모든 내향적 삶과 외향적 삶 속에서 하느님의 사랑을 드러나게 해준다. 주님의 옥좌란 주님이 계신 곳, 천국을 표현한다. 내적 의미에서 볼 때, 천국은 주님이 거하시는 선한 자의 거듭나는 마음이다.

모시옷 입은 사람에게 명령되기를, “바퀴들 사이로 해서 거룹 밑에 들어가, 그 거룹들 사이에서 숯불을 두 손 가득히 움켜 내어 이 도성 위에 뿌려라” 라고 하였다.
불은 사랑을 의미한다. 다만, 여건에 따라 선한 사랑이나 악한 사랑을 의미할 뿐이다. 거룹이란 주님의 섭리를 표현한다. 즉 자연적 마음뿐인 사람에 의해 영적인 것이 모독되는 데서 지켜 보호하시는 섭리이다. 예를 들면, 신성한 말씀 중 글자 부분은 악의 거짓이나 감각적 오류로 더럽혀질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영적 의미를 보호해 준다.
근원적 측면에서 보면, 모든 사랑은 천국으로부터 인간에게 온다. 따라서 사랑은 품질면에서 선하다. 그러나 악한 자가 이 사랑을 받게 되면, 그는 자신의 악한 애정과 거짓된 생각 속에 사랑을 침수시켜 사랑의 품질을 뒤집는 바, 신성한 사랑을 인간의 악으로 바뀌게 하고 만다.
주님의 섭리 속에서, 인간이 악할 경우, 그들에게는 믿음의 신비에 관한 영적 이해, 즉 거듭나는 삶에 관한 내적인 것을 명확히 이해하지 않는게 그들을 위해 더 바람직하게 된다. 그 이유는 그들이 진리에 반대되는 생활과 영적 진리들을 미워하고 모독하는 가운데 있으므로 더 밝은 영적 이해가 있을 경우, 그들은 악속으로 이 진리를 침몰시켜 더더욱 악해 지기 때문이다. 악인이 더욱 악해져 끝장을 보게 된다거나, 죄인들에게 복수하는 식으로 정죄하려는 것이 주님의 바램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가 주님의 바램이어서, 주님께서는 그분의 신성한 사랑을 본인이 기쁘게 받을 수 있는 정도만큼만, 선해지기 위해 그가 사용 가능한 만큼의 진리만을 주시려 하신다. 그래서 악이 자기가 선택한 악들로 인해 구원될 수 없을 때, 주님께서는 그가 더욱 깊은 악들로 빠져드는 것에서 조금이라도 덜한 악에로 구원해 주신다. 이 목적을 위해, 악한 자로 하여금 마음의 외적 조건에 머무르도록, 즉 영적인 것에 대한 지식이 거의 없는 가운데 머무르게 허용하신다. 그렇게 허용하시는 이유는 악한 자가 지옥적 삶 중에서도 조금 덜한 조건에서 머무를 수 있기 때문이다.

숯불 (coals)

거룹들 사이에 있는 숯불은 영적 마음 안에 존재하는 사랑을 표현한다. 그러나 이 숯불이 그 장소에서 꺼내져서 악한 자의 도성에 뿌려지게 될 때, 이와 같은 행동은 마음의 낮은 형태, 즉 자연적 마음에 사랑이 하강되고 마는 것을 표현한다.
도성은 교리의 체계를 표현하나, 본문의 경우, 이 도성은 악한 자들이 붙잡고 있는 교리, 즉 뒤집혀진 교리, 거짓 교리를 표현한다. 따라서 이 도성에 숯을 뿌렸다는 것은 주님의 허용하심에 관한 것, 다시 말해서 악한 자들이 영적 사랑이라는 높은 것들을 보고 모독해 버리느니 보다는 차라리 감각에서 오는 야생적 욕망에서 살게 하고, 자연적 애정만을 뒤집고 오염시키는 것을 허용하는 것이 그들을 위해 더 낫다는 주님의 판단을 의미한다. 그 이유는 진리를 전복하는 사랑과 거짓 교리를 믿는 가운데 있는 그들이 만일 더 높은 생명을 뒤집는다면 그들은 더욱 한탄스러운 조건에 빠져들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인간이 진리에 의해 심판되어지고, 각자가 있을 곳을 결정한 인격 그대로 있도록 허용되어, 악한 자가 악한 욕망에서 살도록 하는데서 심판은 마무리된다.
그 다음 주님의 영광은 거룹 사이로 되돌아온다. 즉 주님의 선함과 진리는 주님에 속한 것을 이해하고자 하는 인격을 갖춘 이들에 의해 높은 영적 빛 속에서 보여지도록 하신다는 말이다. 그 이유는 하느님의 사랑과 지혜는 “볼 수 있는 눈을 가진 자”에게만 명백하게 드러나야 하기 때문이다. “마음을 주님 가운데 머물게 하는 자, 완전한 평화 안에 있도록 그분은 지켜 주신다.”

21
보따리를 꾸려 떠남

성서 본문: 에제키엘 12장 1-7절

1. 야훼의 말씀이 나에게 내렸다. 2. “너 사람아, 너는 반역하는 일밖에 모르는 족속 가운데서 살고있다. 그들은 두 눈이 성하면서도 보려고 하지 않고, 두 귀가 성하면서도 들으려고 하지 않는다. 반역할 생각밖에 없으니 어찌 그렇지 않겠느냐? 3. 너 사람아, 포로로 잡혀 가는 사람이 메는 보따리를 꾸려 들고 사람들이 보는 데서 길을 떠나거라. 사람들이 보는 데서 네 살던 곳을 떠나 다른 곳으로 가거라. 행여 이 겨레가, 자기들은 반역하는 일밖에 모르는 족속인 줄을 깨달을지 아느냐? 4. 사람들이 보는 데서 포로로 잡혀 가는 사람이 메는 보따리를 대낮에 꾸려 놓았다가 저녁에 사람들이 보는 데서 사로잡혀 가듯이 떠나거라. 5. 사람들이 보는 데서 벽에 구멍을 뚫고 나가거라. 6. 어두울 때 사람들이 보는 데서 그 보따리를 어깨에 메고 얼굴을 가리우고 땅을 보지 말고 나가거라. 내가 너를 이스라엘 겨레가 겪을 운명의 상징으로 삼았다.”

개요

타락하는 마음은 주님에 정반대 되어 그분의 신성한 말씀이 담긴 성서의 글자까지 왜곡시킨다. 따라서 주님의 교회는 타락된 인간과는 결별하게 되는데, 그 이유는 그 인간을 더 이상 개별적인 교회라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그런 교회 안에서는 주님을 아버지로, 또는 교회의 통치자로서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글자에서의 의미

예언자는 예루살렘의 백성들에게 그들이 포로로 끌려 갈 시기가 임박해졌다고 거듭 경고했었다. 그런데도 그들은 이 예언자의 경고에 더욱 신경을 쓰지 않으면서 하는 말이란, 고작 그 예언들은 아주 먼 훗날을 말하고 있는 것이지, 지금의 우리와는 관계가 없다고 했다. 그래서 그들은 자기들의 악한 행실을 더욱 부채질하여 그들의 악이 필연코 가져오는 결과를 까마득하게 잊고 있었던 것이다.
에제키엘이 끼어 생활했던 포로들, 이들은 멀지 않은 장래에 자기들이 사랑했던 예루살렘으로 귀향될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에제키엘은 그들에게 귀향하고 싶은 희망은 소원 사항으로 끝날 뿐이라고 예언했는데, 그 이유가 예루살렘에 남은 백성 자체가 머지않아 이곳에 끌려 올 것이기 때문이라고 말해 주었다. 그래서 에제키엘은 본문에서 자신의 행동으로 보여준 비유, 즉 포로나 망명자들이 떠날 때 하는 모습인 보따리를 꾸려 떠나는 모습을 보여 주므로서 위의 예언을 예증해 보였다.
사막을 여행했던 고대 유대인들은 그들이 먼 여행을 준비할 때, 그들은 낮 동안에 각종 필요한 물품을 조달해서 집결지에 모아 떠날 채비를 다해 놓고 있다가 서늘해지는 밤을 이용해서 이동하였었다. 이 여행 대열에 합류할 사람이 있을 경우, 그들은 낮 동안 짐을 꾸려서 집에 머무르다가 저녁 무렵 짐들을 어깨에 메고 나와 그들과 합세하곤 했다.
집을 떠나는 예언자의 태도에서 보여지는 것은 글자대로 포로로 잡혀가기 싫은 사람이 도망치듯 하는 수법으로 표현되어 있다. 즉 낮에는 보따리를 꾸려 감추어 두었다가 어둠을 틈타 탈출하는 수법이다. 이와 같이 예루살렘의 백성과 수령들이 탈출한다고 에제키엘은 예언해 주었던 것이다. 예레미야도 이와 같이 왕 시드키야가 갈대아인을 피해 도망갔다고 기록했다. 즉 “유다 왕 시드키야와 그의 군인들은 그 장군들을 보고 두 성벽이 만나는 성문으로 빠져나가, 왕실 정원을 거쳐 밤을 도와 아라바 쪽으로 도망쳤다. 그러나 바빌론 군대는 그 뒤를 쫓아 예리고 벌판에서 시드키야를 붙잡아…” (예레미야 39:4-5).
벽을 조용히 뚫는다는 것은 적의 감시를 피하려는 모습이다. 얼굴을 가리운다는 것은 비통, 슬픔, 굴욕의 표시이다.

볼 눈 등등

이스라엘 백성들은 반역밖에 모르는 족속이라 불리고 있다. 그 이유가 그들은 주님의 계명에 순종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볼 눈을 가졌으면서도 보지 못하고, 들을 귀가 있는데도 듣지 못하는 족속이라고 말해지고 있다. 그 이유는 악한 인간도 진리를 볼 능력을 가졌고, 자기가 본 진리가 진리라는 것을 알 수 있는 정신 능력을 가졌기 때문이다. 게다가 자신이 원하기만 하면 진리를 실천할 수 있는 능력까지 보유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진리를 보고 기뻐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진리를 미워하고 악과 거짓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은 진리를 볼 수 있고 알 수 있는 영적인 모든 빛에서 얼굴을 돌린다.
악인에게 있는 문제점이란 그의 단순한 무지가 아니라 고집스런 무지, 즉 의도적으로 내세우는 무지에 있다. 그래서 이런 악인이 진정한 원리를 보게 되면, 그들은 그것이 자기들의 적이라고 간주해 버린다. 한마디로 그들은 진리를 바라지도 않고 사용하고 싶은 마음은 더욱 없다. 그래서 그들이 진리를 접할 때 추구하는 첫 단계는 진리가 뭐 그리 대단한 것이냐는 말이다. 그렇게 시작해서 마무리짓는 단계는 그것이 진리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이를 대변하듯 옛 말에, “본의 아니게 승낙했다 해도 그것은 그의 견해의 범주에 들어 있다.” 이에 더해서 있는 속담의 말, “보지 못할꺼라는 사람만큼 눈먼 자는 없다.” 이런 백성을 두고 이사야는 이렇게 기록했다. “이 백성들은 참으로 배반하는 백성, 믿을 수 없는 자식들, 야훼의 가르침을 따르기 싫어하는 자식들이구나. 계시를 보는 이들에게, ‘계시를 보지 말라’하고 예언자들에게 ‘진실을 우리에게 예언하지 말라’하며 ‘솔깃한 말이나 터무니없는 이야기나 하여라. 한 길에서 물러서거라. 한 길에서 비켜나거라. 이스라엘의 거룩한 분 이야길랑 우리 앞에서 꺼내지도 말라’ 하는 자들아!” (30:9-11). 이런 사람들은 믿음이 그들의 일상 생활과 분리되어 있다. 그들은 자기들 집을 세상의 방법이라는 모래 위에 세울 뿐, 진리라는 굳건한 반석 위에 세우려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듣는 것

예수님께서 비유를 말씀하실 때, 종종,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어라” 라고 말해 두셨다. 그렇게 말씀하신 이유는, 인간이 자기 스스로 영적인 귀를 열지 않는 이상, 어느 누구도 영적으로 기꺼이 듣겠다고 준비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순수한 영적 총명은 진리를 보고 인정하여 기쁘게 사랑함에서 비롯된다. 이 단계는 영적인 들음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보고 이해한 진리를 심정 안에 받아 사랑할 때, 우리는 영적으로 진리를 듣는 것이 된다. 그 다음 이 진리가 선과 결합할 때 들었던 진리는 지혜가 된다. 그러므로 진리를 본다는 것은 우리의 지성 안에 믿음을 가진다는 것이 되고, 진리를 듣는다는 것은 우리 심정(의지) 안에 믿음을 가진다는 것이 된다.
“심정이 순수한 사람은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느님을 뵐 것이다.” 이 때의 본다는 것은 육체의 눈이 본다는 말이 아니라, 내향적 삶에 있는 모든 것을 본다는 것인데, 즉 선하고 진정한 원리들이 모든 것에 스며들어 살아 있게 해줌을 본다는 말이다.
그러나 악한 사람은 자기들의 영적인 눈과 귀를 열지 않는다. 즉 그들은 선하고 진정한 원리들을 보고 이해하는 유전 받은 능력을 사용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인간이 정신적으로 소경일 경우, 그들은 소경이라는 것, 또는 그들은 회개하고 개혁할 기회를 가질 수 없다는 것이 가르쳐져야만 한다. 영적 소경은 정신적인 무감각 상태인 바, 그 마음이 올바른 조건, 제 정신으로 회복될 수 있기 전, 반드시 그 무감각의 극복 즉 소경의 눈이 뜨여야 하는 단계를 거쳐야만 된다.

소지품

소지품, 또는 집안의 물건이란 집을 관리하는데 필수되는 것들을 말한다. 집이 마음을 표현하듯, 집안의 물건들은 인간의 마음에 공급되어야 하는 필수 사항들, 인간을 영적으로 살게 해줄 것들, 즉 선하고 진정한 원리들을 표현한다. 주거지를 옮긴다는 것은 마음을 다른 조건에로 건너가게 하는 것을 표현한다. 이런 옮김에서, 마음은 삶 속의 일을 위해 그 일에 공급되어야 할 필수적인 것들까지 운반해야 한다.
그러나 본문의 경우, 예언자는 반역적인 악 속에 있는 유대인의 모습을 표징적으로 초상화해놓고 있다. 예언자가 공적으로 신성한 말씀을 표현했듯이, 그의 집안에 있는 것도 신성한 말씀에 있는 선하고 진정한 원리들을 표현했다. 그래서 집안에 있어야 할 소지품을 집밖으로 끄집어낸다는 것은 유대인들이 자기들 마음에 간직해야 할 말씀에서 오는 선함과 진리 모두를 마음 밖으로 내던지고 성경 글자에 있는 각종 축제를 형식적으로 지키는 그들 마음 상태를 표현한 것이다. 말씀 글자 내에 있는 의미가 썩어질 때 그 글자 역시 왜곡될 수밖에 없는바, 그렇게 되면 주님의 선함과 진리는 그들의 악한 마음과 결별할 수밖에 없다. 위와 같은 일이 “사람들이 보는데서” 있었다는 것은 만일 그들이 자기 속을 들여다보고자 했다면 말씀의 글자가 밝히는 삶의 법칙으로부터라도 자신들의 악한 길을 볼 수도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와 같은 이동이 저녁에 있었다는 것은 그들의 마음이 거짓 상태에 빠져 있다는 것, 진리를 받기 위해 꼭 필요한 영적인 빛이 없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말씀의 글자가 주는 경고가 그들의 정신적 조건에 고취되도록 경고하고 있지만, 그들은 그 경고를 무시하여 어떤 실제의 선한 원리에 관심을 두지 않았음을 말해 주고 있다.

포로, 등등

포로로 잡혀가거나 추방당해 쫓겨가듯 하는 모습으로 예언자가 자기 짐을 꾸리는 모습은, 보따리를 싸는 것이 소풍이나 여행 정도의 일시적인 행사가 아니라 오랫동안, 그리고 힘든 환경 속에서 지내야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인간이 영적으로 자유를 누릴 때란, 그가 선함을 사랑하고, 진리를 이해하여, 자기 삶을 위해 신성한 법칙에 기쁘게 순종할 때만 가능하다. 그러나 악을 사랑하고 거짓에 신뢰를 두어 죄 가운데 있게 되면, 그는 영적으로 포로가 된 상태요, 악의 사슬에 묶이게 된다. 그래서 그는 영적인 포로에 꼭 동반되는 영적 고통 속에 있게 된다. 그 이유는 언제나 “죄인은 자기 죄에 노예”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주님이 가르치시는 선하고 진정한 원리에서 떨어져 나간 모든 사람들은 자기 고향과 자유를 떠나, 영적인 포로로 전락되면서 외국 땅에서 비천한 망명 생활로 전전긍긍할 수밖에 없다. 악이나 거짓, 죄, 슬픔, 노예 신세 등등은 인간 영혼의 영적 보금자리를 결코 산출해 내지 못한다.

구멍을 뚫음

집 벽을 뚫는다는 것은 어떤 것 안에 있는 것을 보고자 하는 행위, 즉 검증, 또는 탐사를 표현한다. 그래서 선함과 진리에 속하는 신성한 원리들이 거꾸로된 교회의 교리 속에 더 이상 거주할 수 없을 때, 이 원리들은 그 원리와 전혀 맞지 않는 성질로부터 떠나 자기들의 길을 모색하기 위해 구멍을 뚫는다. 다시 말해 마음 상태를 잘 관찰하는 총명한 마음은 불순물로 꽉 차 있는 악 속에는 주님의 원리가 거주할 수 없다는 것을 명확히 안다. 인간의 왜곡된 사상이나 부패된 것들은 신성한 법칙과는 아주 딴판이라는 것은 말씀의 글자만을 가지고도 쉽게 판결된다.
예언자가 얼굴을 가리우고 집 밖을 나서되 땅을 보지 말고 나가라는 것은 유대 교회 안에는 신성한 말씀의 글자가 주는 삶의 법칙, 선함에 관한 어떤 지각도 남은게 없었다는 것을 표현한다.
어두울 때 보따리를 메고 나가는 예언자란 정신적 어두움과 거짓으로 꽉 차 있는 백성의 모습을 표현한 것이다.

상징 (sign, 징표)

“나는 상징(징표)이다” 라고 백성들에게 선포하도록 예언자는 명령받고 있다. 그 이유는 예언자가 그들의 정신적 행동을 표현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언자가 자기 집의 모든 물품을 옮기는 것은 유대 교회의 모습, 즉 그들에게 어떤 진리나 선함도 남아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선포하고 있다. 그런 선포가 있어지는 이유는 그들 속의 모든 것이 악과 거짓으로 깡그리 파괴되었기 때문이다.
본문 같은 인간 마음의 조건은 오늘날 기독교인이라고 예외가 있는 것은 아니다. 주님의 공생애나 그분의 속성을 잘못 해석하거나 남용함으로 본문과 유사한 상태로 위험스럽게 접근되고야 마는 때가 있다는 말이다. 다시말해 인간이 구원받으려면, 반드시 자신의 인격과 생활에서의 근본적인 변화, 즉 악에서 선으로 변화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믿음만으로 의로워짐, justification by faith alone,” 그리스도의 육체적인 피에 기대는 손쉬운 구원 방법을 강조함으로 교인들의 이해성을 엉뚱한 곳으로 흘러가게 한다는 말이다. 그러나 주님 자신의 명확하고 실제적인 서술은, “내가 살기 때문에 너희도 살게 될 것이다.” “너희가 생명의 나라에 들어가고자 하면, 계명을 지켜라” 임을 흘려 보내서는 안될 것이다.

거듭남

구원이 인간에게 오는 것은, 그리스도의 의가 악인에게 귀속됨(impute)에 의해서가 아니라, 주님께서 그분의 의를 나누어주심(impart)으로, 그리하여 인간이 거듭나 새 인격으로 다시 태어남으로, 그리고 새로운 인격을 천상 천하의 유일한 분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탱시켜 주심으로 가능해진다.
예언자에게 “백성들의 불법을 짊어지도록” 말해진 것은, 예언자가 백성의 불법을 거두어 갔다라던가, 그가 불법이 끼칠 피해를 없어지게 했다는 것이 아니라, 예언자로 하여금 그들의 불법을 표현해 주어 그들로 자기들의 속을 들여다보게 하셨을 뿐이다.
예언자와 백성의 관계에서 예언자가 어떤 산 제물 같이 여겨지는 것은 예언자의 표징적 직무(representative office)에 대한 본성이나 역할을 잘못 이해하는데서 비롯된 것이다.
예수에 관해 말해질 때도 위와 비슷하다. 즉 하느님께서 인간의 불법을 예수로 짊어지게 하셨다 함이란, 그리스도의 육체적 고통이 악인의 불법을 거두어 가셨다던가 또는 그 불법의 필연적 결과로 당하는 피해를 성난 하느님의 분노를 유화함으로 피하게 하셨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은 인간 속에 있는 악들을 단지 표징적으로 짊어지신 것이다.
그분이 입으신 인간성 속에서 예수님은 지옥에 있는 모든 공격을 당하셨다. 이렇게 해서 그분은 지옥을 만나셨고, 정복하시어 인간을 지옥의 권세로부터 구속하셨다. 이 구속은 만인을 위해 있어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 구속이 각 개인이 자신 속의 악으로 인해 해를 입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자기 인격 속에 있는 악한 조건으로부터 구해질 수 있기 위해서는 주님의 가르침을 수단으로 하여 회개와 개혁 그리고 거듭나아가는 것을 필수적으로 거쳐야 한다는 말이다.
하느님은 본질 측면에서든, 인격 측면에서든 한 분 뿐이시다는 것, 그 한 분 뿐인 하느님이 바로 주 예수 그리스도이시라는 것을 볼 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본성, 그리고 그분의 공생애(mission)는 실지의 거듭남, 새로운 인격으로 태어남을 수단으로 구원하시기 위해 하느님이 인간에게 나타나신(manifest) 것임을 납득하게 된다.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 있다”는 말씀(누가복음 17:21)이 우리 삶에서 실현될 때, 우리는 천국에로 들려지는 바, 예수님께서, “나를 본 자는 아버지도 보았거늘…” (요한복음 14:9)라고 선포해 두셨다.

22
무서워 떨며 먹는 빵, 겁에 질려 마시는 물

성서 본문: 에제키엘 12장 18-20절

18. 야훼께서 나에게 말씀을 내리셨다. 19. “너 사람아, 빵을 먹으며 무서워 떠는 몸짓을 하여라. 물을 마시면서 불안해서 겁에 질린 몸짓을 하여라. 그리고는 지방민들에게 일러 주어라. ‘예루살렘 주민들이 어떻게 될지, 이스라엘 농토가 어떻게 될지 나 야훼가 말한다. 땅에서 남아 돌아가던 것이 모두 없어져 다들 마음을 못 놓고 빵을 먹을 것이며, 허둥대고 물을 마실 것이다. 그것은 온 주민이 잔악하게 되겠기 때문이다. 20. 사람이 우글거리던 도시들은 사막이 되고 시골은 황무지가 될 것이다. 그제야 너희는 내가 야훼임을 알리라.’”

개요

거짓과 악을 탐닉함으로 타락하는 인간은 선과 악, 진리와 거짓을 분별하는 능력을 상실하게 된다. 그러므로서 그들은 행복해질 수 있는 능력을 자신들 스스로 파괴한다.

빵과 물

백성에게 징조를 보여주기 위해 예언자로 하여금 빵을 먹으며 무서워 떨고, 물을 마시되 불안해서 겁에 질린 몸짓을 하도록 명령되었다. 넓은 측면에서 빵은 양식을 대표하는 바, 이는 주님으로부터 우리의 의지 또는 심정에 받게 되는 선함을 표현한다. 그리고 물은 우리의 이해성 또는 지성에 받게 되는 진리를 표현한다. 포도주와 물을 구별해 본다면, 물은 자연적 진리, 즉 일상 생활에 응용되는 진리를 표현한다. 이 진리는 자연적 수준의 마음이 가진 관점에서 보여지는 진리이다. 빵을 먹고 물을 마신다는 것을 영적으로 생각하면 우리 마음에 선함과 진리를 받는다는 말이다.

무서워 떨고, 겁에 질림

무서워 떠는 것은 위험이라는 공포, 또는 정신적 동요를 야기시키는 어떤 불확실성에서 비롯되는 몸짓이다. 인간이 선이라고 간주되는 것을 획득하면서도 정작 그가 행복하지도 않고 평화롭지도 않은 상태, 뭔가 불확실해서 위험이라는 큰 공포가 덮칠 것 같은 마음 상태를 가질 때, 본문에서 언급하는 무서워 떨며 빵을 먹는 모습이다. 이렇게 되는 이유는, 자신 속의 악과 획득한 선이 섞여지기 때문이다.
불안해서 겁에 질려 물을 마신다는 것은, 의심과 공포, 또는 흥분과 곤란한 상태 속에 있으면서 진리를 진리로 간주하여 받는 모습을 말한다. 그렇게 되는 이유는, 인간이 진리를 받되, 자기 속의 거짓 관념 때문에 혼동을 일으켜 진리를 왜곡하기 때문이다.

근심, 걱정(불안, care)

성경에서 근심(care)은 고민을 포함하는 불안 (anxiety)을 의미한다. 예를 들면, 씨 뿌리는 자의 비유에서, “또 가시덤불에 떨어 졌다는 것은 말씀을 듣기는 하였지만 세상 걱정과 재물의 유혹이 말씀을 억눌러 열매를 맺지 못하는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이다”라는 구절이 있다. 이 구절에서의 “세상 걱정”이란 세상 업무 수행에 필요한 측면에서의 걱정이 아니라 세상욕을 채우기 위해 긴장하는 것, 이기심의 발작으로 비롯되는 근심 걱정이요, 신성한 섭리를 신뢰하지 않고 자신의 신중함에 전적으로 의지함에서 생산되는 근심 걱정이다.
이런 표현이 본문에서, “그들은 불안해하며 빵을 먹게 될 것이다”로 서술되고, 이는 공포와 불확실로 인해 올라오는 걱정 근심으로 가득 찰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그들이 “겁에 질려 물을 마신다”는 것은 타락하는 인간은 신성한 섭리를 결코 이해하지 못하고, 오히려 그 마음들이 혼동을 일으켜, 하느님이 분노하실 것까지 상상 속에 보태면서 닥쳐올 결과에 심각한 우려를 갖는 상태이다.
본문의 예언은 두 왕국, 예루살렘과 이스라엘을 향해 선포되고 있다. 이는 악인의 온 마음에 근심 불안이 고루 퍼지게 될 것을 뜻한다. 그 이유는 유다, 또는 예루살렘은 애정이 들어 있는 의지 또는 심정을, 이스라엘은 생각이 들어 있는 이해성 또는 지성을 표현하기 때문이다.

황폐함(desolation)

그 땅에 속한 모든 것이 황폐해진다는 것은 교회 내에, 또는 인간 심정 안에 있는 모든 선함이 죽게 된다는 뜻이다. 그 이유는 “온 주민이 완악하게 되겠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모든 선함을 전적으로 거절하고, 모든 신성한 원리에 광폭하게 반대하기 때문이라는 말이다.
“사람들이 우글거리던 도시들은 사막이 되고, 시골은 황무지가 될 것이다.” 이는 교회 속에 있는 모든 교리들, 그 교리를 집으로 삼아 거주하던 진리들이 타락된 마음속에서 지독하게 파괴되리라는 것을 뜻하는데 그렇게 되는 이유는 타락하는 마음은 오로지 악한 동기와 거짓 관념으로 말씀을 해석해 가기 때문이다.
“그제야 너희는 내가 야훼임을 알리라.” 악이 심판 속에서 선과 분리될 때, 분리라는 이 작업이 주님으로부터임을 알게 된다. 이런 사실은 영적 빛으로 영적 진리를 이해하는 영적 인간에 의해서만 보여질 수 있다. 또한 이 사실은 자연적 마음뿐인 사람에게도 자연스럽게 알려지는데, 그 이유는 이런 사실이 성경 글자에서도 가르쳐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악인은 자기에게 자연스럽게 주님께서 보내 주시는 생명을 썩게 함으로 자신이 자신을 판결하여 스스로 자신을 영적으로 죽인다. 영적으로 그가 에덴에서 쫓겨 나는 것, 즉 좋은 것으로 가득 찬 모든 것을 차 버리고, 어렵고 고된 정신 세계, 힘들게 땀흘려 보아야 고작 얻는 영적 생명은 조금 뿐인 정신 세계를 스스로 선택한다는 말이다.
이와 비슷한 상황이 애가서 5장 4-5절에서 다음과 같이 표현되어 있다. “자기의 물을 돈 내고 얻어 마시며 자기의 나무도 값을 내고 들이게 되었습니다. 목에 멍에를 걸고 허덕이며 숨돌릴 겨를도 없이 지쳤습니다.”

거듭남은 필수 과정

이상의 모든 증거는 인간 삶이 거듭나는 상태에 있어야만이 만족을 누릴 수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다. 거듭나지 않는 모든 상태들은 무거운 벌금을 지불해야 한다. 그 이유가 그들 속에 든 조건들이 필시 불행해지도록 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는 단지 외형에서만이 아니다. 그 이유는 이런 인간은 인간을 행복하게 만드는 인격의 품성을 받지 않기 때문이다.
인간의 행복은 거듭남 속에서, 즉 새롭게 영적으로 태어나는 것, 선하고 진정된 모든 원리를 사랑하면서 일상 생활을 그 원리로 꾸려 가는 데에 존재한다.
그러므로 우리 하느님, 사랑의 하느님은 모든 인간에게 생명과 행복에로 오도록 가장 은혜로운 초대를 다음과 같이 베풀고 계신다. “너희 목마른 자들아, 오너라. 여기에 물이 있다. 너희 먹을 것 없는 자들아, 오너라. 돈 없이 양식을 사서 먹어라. 값없이 포도주와 젖을 사서 마셔라. 그런데 어찌하여 돈을 써 가며 양식도 못되는 것을 얻으려 하느냐? 애써 번 돈을 배부르게도 못하는데 써 버리느냐? 들어라. 나의 말을 들어보아라. 맛좋은 음식을 먹으며 기름진 것을 푸짐하게 먹으리라. 귀를 기울이고 나에게로 오너라. 나의 말을 들어라. 네 영혼이 살리라” (이사야 55:1-3).

23
거짓 여 예언자들

성서 본문: 에제키엘 13장 17-23절

17. “너 사람아, 너는 이제 눈을 돌려 네 겨레 가운데서 자기가 하고 싶은 소리를하면서도 그것을 내 말이라고 하는 여인들에게 나의 말을 전하여라. 18. ‘주 야훼가 말한다. 저주받아라, 너희 사람 팔목에 토시를 만들어 끼우고 키 큰 사람 키 작은 사람에게 너울을 씌워 사람들의 목숨을 노리는 것들아! 너희가 내 백성의 목숨을 노리면서 너희의 목숨은 부지할 듯싶으냐? 19. 너희는 내 백성이 보는 데서 보리 몇 줌과 빵 몇 조각을 받고 나를 욕되게 하였다. 거짓말에나 귀가 솔깃해 하는 나의 백성을 속여, 죽지 않아도 될 사람을 죽이고 죽여야 할 자를 살려 두었다.
20. 주 야훼가 말한다. 너희가 새잡듯이 사람을 잡는 그 토시를 어떻게 내가 그냥 두겠느냐? 내가 그것을 너희의 팔에서 찢어 버리고 너희가 사로잡은 그 사람들을 새처럼 놓아 주리라. 21. 너희가 씌워 준 너울을 찢어 버리고 더 이상 잡고 있지 못하게 내 백성을 너희 손에서 구해 내리라. 그제야 너희는 내가 야훼임을 알리라.
22. 죄없는 사람의 마음을 내가 왜 괴롭히겠느냐? 그런데 너희는 터무니 없는 소리로 그 마음을 꺾어 주었다. 그런가 하면, 죄있는 자는 나쁜 길을 버리고 살 길로 돌아 오지 못하게 옆에서 부채질을 하였다. 23. 내가 이제 너희로 하여금 다시는 허황된 환상을 보지 못하게 하고 속임수로 점을 치지도 못하게 할 것이다. 그리하여 내 백성을 너희의 손에서 구해 내리라. 그제야 너희는 내가 야훼임을 알리라.”

개요

신성한 진리를 왜곡시키는 사랑은 거짓된 설득으로 우리 마음들을 유인하려 든다. 이 설득력은 마음이 악으로 파멸 당할 때까지 그 마음을 딴 길로 인도한다. 거짓된 설득을 주창하는 이들은 정신적인 파멸에 타인까지 그릇되게 끌고 간다. 그러나 이러한 그릇된 인도에 저항하는 모든 마음은 신성한 섭리에 의해 보호되어 진다.

글자적 사실들

“네 겨레 가운데서 자기가 하고 싶은 소리를 하면서도 그것을 내 말이라고 하는 여인들”이란 고대 이스라엘에 있었던 거짓 여 예언자들이다. 본문 당시 이 여자들은 부패된 계층 속에 있었고, 그들은 주님에게서 받아 예언하는 체하면서 실지로는 자기들 심정에서 나오는 소리를 말했다. 다시 말해 자기들 목적에 맞도록 위선적으로 사기치는 무리들이었고, 따라서 주님께 물으러 나오는 사람들을 현혹시켜 희생되게 했다. 그들은 느슨한 인격을 지닌 여자들이지만 자기들 방식을 사용할 때는 예리해져 잘 속여서 교회라는 외투 속에 자신들의 썩은 직업을 잘 숨겨 둔 자들이었다. 그 시대 상황에서는 이런 것도 잘 번창할 수 있는데, 그 이유는 통치자나 그 외 대다수가 썩은 상태면서도 교회의 규율은 엄격히 지키겠다고 고백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상태를 시편 12편에서 예를 들어주고 있다. “주위에는 악인들이 우글거립니다. 더러운 자들이 판을 칩니다.”

베개를 바느질함 (토시를 만듦)

본문의 역사가 있었던 그곳의 사람들은 아주 감각적이어서 신체의 편안, 감각을 즐기게 하는데 매우 신경을 썼다. 특히 부유한 자는 더욱 편하게, 사치스럽게 살려고 육체의 안락을 연구하다시피 했다. 게다가 부자들은 가능만 하면 적은 노동을 하고 대부분의 노동을 종들에게 시켰다. 여자들은 지적 교육을 받지 못했다. 그들의 주요 의무는 남편이나 아버지들을 기쁘게 해주는 것들 뿐이었다. 그 대신 부유한 여자들은 마차에서 베개에 기대고 있으면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자신의 운세, 행운을 주님께 묻고자 하는 이들이 위의 여자들에게 왔을 때, 그 여자들은 문의자들에게 우선 부드러운 베개나 푹신한 것들에 기대게 해서 상대방의 기세를 꺾으려 했다. 그래서 이런 여자들은 손목까지 내려 온 속옷의 진동에서도 사치스러운 편안함이 과시되도록 자기 팔 아래 조그만 베개를 바느질해 두었었다. 이런 것은 위의 것 외에도 또 다른 목적이 있었다. 이 여자가 장래 운세를 물어 온 사람에게 이런 저런 사기극을 벌인 후, 자기가 대고 있는 베개의 안락감과 사치스러움을 그 사람이 기다리는 행운의 상징물로 지적해 보이곤 했던 것이다.

너울

그리고 이 여자는 머리에 너울을 둘러쓰고는, 이 너울을 좋은 장식품으로 간주하면서 이 너울이 자유나 풍요함을 상징하는 듯 여겨지게 했다.
바빌론에 포로로 끌려간 유대인의 경우 자유를 상징한듯 한 이런 모자(너울)로 포로에서 해방되는 것을 상징화하고 싶었을는지 모른다.
본문을 그대로 읽을 경우, 너울이 무엇을 말하는지 매우 모호하게 되어 있다. 그러나 한국어 번역은 “person (개인)”을 추가해서 번역함으로 이해를 돕고 있는데, 어찌됐든 악한 여자의 영향력에 모든 연령층의 남자들이 빠져들었음은 틀림없다.

목숨을 노림 (영혼을 사냥함)

글자 의미를 풍자적으로 볼 때, 목숨을 노린다는 것은 뭔가를 얻어내려고 상대방을 현혹시키고 썩게 하기 위해 온 힘을 쏟는다는 것을 말한다. 자칭 예언자라는 여인들이 주둥아리를 미묘하게 놀린다던가, 뭔가 상대방이 은근히 바래는 것들을 감지해서 예언해 줌으로 그들은 그 사회 내에서 큰 영향력을 가졌던 것이다. 이런 사기가 성공되는 이유는 그 당시 사회에는 진리에 대한 어떤 영적 지각도, 합리적 판단도 전무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늙은 사람이건 젊은 사람이건 모두 자신의 안전을 위해 쉬운 방법, 자연적 소원만을 탐닉하려는데 빨려 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거짓 여 예언자들이 사람들의 위와 같은 바램을 예언하는 척하여 대가를 받아 손쉽게 자기 이익을 챙겼던 것이다.
이런 사회 풍조 속에서 주님의 진정한 예언자가 전하는 말에는 전혀 귀를 기울이지 아니했을 것은 별로 이상한 사건이 못된다. 게다가 주님의 예언자는 그들이 원하지 않는 재난들을 예언해 왔다. 따라서 주님의 말씀이 백성들 마음에서 더럽혀지고 말았는데, 그 이유는 주님의 말씀이 인간의 감각적 오류 속에 휩쓸렸기 때문이다. 그런 상황에 주님의 여 예언자라고 자처한 여자들도 합세해서 거짓말로 백성을 덮어 그들을 악 속에 빠지게 했던 것이다. 행운을 물어 온 자들로부터 거짓 예언자들은 소량의 보수를 당연히 받았음을 본문에서, “보리 몇 줌과 빵 몇 조각을 받고…”라는 데서 알 수 있다.
“죽지 않아도 될 사람을 죽이고”란 잘 해보려고 노력하는 이들을 썩게 만들었다는 말이다. “죽여야 할 자를 살려둠”이란 악한 자들에게 계속적인 번영을 약속해 줌으로 불법 속의 악을 더 부추겼다는 말이다. 이렇게 해서 악한 자를 더 부채질 해주어 그들이 회개하여 삶이 수정되지 못하게 모략한 것이다.
에덴의 동산에 있던 뱀이 이브에게 금지된 과일을 먹게 되면 해를 입는게 아니라 오히려 더 나아진다고 설득시켰듯이, 악한 여 예언자들은 거짓된 설득으로 남자들을 파괴 쪽으로 유인했다. 결국 기쁨을 주님께로부터 받아야 할 많은 사람들까지 심정을 슬퍼지게 하여 삶이 파괴되어졌다. 그 이유가 여 예언자들이 더 큰 생명을 확실히 약속하는 듯하여 확실한 죽음에의 희생물이 되었기 때문이다.

신성은 악에 정반대

그러나 본문이 말하는 바, 주님은 위와 같은 행동들에 정반대 되므로 그분은 그들의 영향력을 파괴하여 극복하실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다시 말해 위와 같은 사회 속의 악한 교회에 심판을 단행하시면서 그분의 법칙을 생명으로 삼고 따르는 백성들을 위와 같은 악에서 건져내실 것을 약속하고 있으신다. 이런 주님의 역사가 있기 전 주님의 예언자는 그 사회 속의 모든 악을 까 벌려 주면서 주님의 진리를 선포하도록 명령받고 있다.

영적 의미들

위에서 살핀 모든 것들은 본문의 글자에 속하는 사항들이다. 이제 글자 속에 있는 영적 의미에 초점을 맞추어 보자. 본문의 줄거리는 고대 이스라엘에게만 국한된 사항들이 아니라 이 시대 오늘의 우리 속 심정과 삶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그리고 그 옛날 주님의 예언자가 말한 경고 역시 우리에게도 필요한 경고이다. 그 이유를 영적으로 보면, 주님의 예언자란 신성한 진리 그 자체요, 이 진리가 우리 마음 속의 거리들을 거닐면서 우리로 회개하고 개혁하며 거듭나도록 촉구하기 때문이다. 주님의 소리란 그분의 신성한 진리인바, 이 진리가 거룩한 말씀 가운데서 우리와 만난다. 그리고 죄악된 행위를 멈추도록 우리 속의 자연적 마음에 경고를 보낸다. 이와 동시에 열려진 영적 마음에는 천국의 거룩한 원리들을 말해 주시어 우리로 “사람의 자, 즉 천사의 자”를 갖도록 배려하신다.

여인

본문에서 언급하는 주님의 예언자인 신성한 진리는 우리를 죽게 만드는 계략이 든 타락된 자연적 애정을 향해 경고하고 있다. 사실 이스라엘은 신성한 진리가 통치의 요소로 부각되어 있는 영적 교회를, 여인은 진리에 대한 애정을, 남자는 진리를 합리적으로 이해하는 것을 표현한다. 따라서 남자와 여자의 하나됨은 거듭남에서 있어지는 영적 결혼을 표현해 준다. 그러나 본문의 경우 여자들은 악했다. 그들은 자아 사랑으로 썩어 버렸다. 이러한 부패된 거짓 여 예언자란 전적으로 악하고 이기적이어서 주님 대신 자아로 꽉 찬 자연적 애정을 표현한다. 그래서 이 애정은 주님이 밝혀 주시는 뜻에 반대만 하고 자신의 욕구로부터만 언제나 중얼거릴 뿐이다.
인간의 자연적 애정들이 선한 체 할 때, 그들이 의도적으로 하려 할 때, 이 애정들은 인간의 합리적 판단을 딴 길로 들어서게 유혹하느라 끝까지 모략질 한다. 결국 온 마음은 자연적 애정 밑에 깔려 죽고 만다. 이렇게 속임수를 쓰는 실제들이 본문의 영적 의미에서 노출되고 있다.

영혼을 사냥함

영혼을 사냥한다는 것은 영적 인격이 파괴되도록 영향을 주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사냥질은 타인을 향해, 또는 자신의 심정과 삶을 향해 우리 자신에 의해 행해지기도 한다. 성경에서 용어 “영혼, soul”은 여러 가지의 의미들을 가지고 있는데 이는 히브리와 그리스 단어들 자체는 다른데도 불구하고 같은 의미를 지니는 것과 비슷한 경우이다. 영혼(soul)은 어떤 생물, 인간 존재, 또는 자연체의 생명, 인간의 영(spirit)속에 있는 생명, 또는 인간을 특징지어 구분해 주는 이해성 속의 생명, 또는 신성한 진리 등을 의미할는지 모른다.
오늘 본문에서의 영혼(soul)을 영적으로 볼 때, 이는 인간의 영적 생명을 의미한다. 그리고 영적 생명은 영혼(soul), 영(spirit) 속에 있다. 악한 자연적 애정이 진리의 지식들을 뒤집는 술책을 수단으로, 자연적 욕구가 좋아하는 것을 나열함으로, 진리를 거짓이라고 설득함으로, 죄는 악이 아니고 허용이 가능할 수도 있는 것 아니냐고 꾐으로, 이런 등등으로 합리적 판단을 그릇 인도 할 때 자연적 마음 속에 있는 거짓 여 예언자들은 영혼을 사냥해 버린다. 이런 방법으로 인간이 추켜세우면서 그는 자신 속의 악한 경향성이 추켜주는 것에 입맛을 다시면서 자신은 지금 참 생명을 열심히 추구하고 있다는 착각 속에 군림한다.
사실, 많은 사람들이 영적 선함과 진리가 무엇인지 모르면서 자연적 감각 수준의 삶 속에 푹 젖은 상태, 자연적 마음만을 가진 상태 속에서 삶을 영위해 간다. 따라서 이들이 영적 지각을 가지지 않는 한, 그들은 자기들 앞에 놓여지는 논쟁이나 교리들의 특성을 명확히 구별해 내지 못한다. 그런 고로 그들은 거듭나는 사랑이나 이타애를 포함하지 않은 지극히 외적인 믿음, 그러나 설득력 있어 그럴듯하게 여겨지는 믿음이 펼친 논쟁에 의해 쉽사리 엉뚱한 길로 들어서고 만다. 그래서 이사야 5장 20절은 이렇게 경고한다. “아, 너희가 비참하게 되리라. 나쁜 것을 좋다, 좋은 것을 나쁘다, 어둠을 빛이라, 빛을 어둠이라, 쓴 것을 달다, 단 것을 쓰다 하는 자들아!”
영적으로 사람을 죽인다는 것은 그 사람의 영적 생명을 파괴시킨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 생명에 있어야 할 영성을 파괴시킨다는 말이다. 이런 파괴로 인간 안에 있는 교회는 사라진다. 이웃에 거짓 증언을 하는 것도 영적으로 보면, 의도적으로 상대방을 현혹시켜 그 사람으로 하여금 선과 악, 진리와 거짓, 정의와 죄들의 관계를 혼동하게 하여 그의 거듭남을 방해하는 것이다. 이런 과정에서 “포악한 자는 재앙에 몰려 망한다” (시편 140:11). 다시 말해 타인에게 가한 영적 포악함은 필시 자신에게 되돌아온다는 말이다.
위와 같은 일은 우리 마음 속에서도 발생되는데, 우리의 자연적 애정이 우리의 판단을 현혹시킬 때 일어난다. 타락되는 때의 자연적 애정들이 거짓 여 예언자들이요, 이것들이 우리로 안일해지도록 기댈 베개(토시, pillow), 즉 자연적 수준의 바램을 탐닉하게 하면서, 이기적이고 감각적 삶만이 유일한 우리의 안전이라고 어루만져 준다. 이것들은 우리의 머리들, 합리적 생각들을 너울, 즉 자기만을 위한 탐닉이 번영을 기약해 줄 것이라는 그럴듯한 논쟁으로 덮어씌운다.
이것들이 키가 작든 크든 모든 사람의 머리를 덮어씌운다는 것은 정신적 성장의 모든 단계를 망라해서, 즉 어떤 조건이나 영적 필요에서이든 현혹하려 든다는 뜻이다. 각 개인의 마음속에서 우리의 타락되는 자연적 애정들은 우리의 머리들을 덮어씌우려고 현혹한다. 다시 말해 우리에게서 발달되는 영적 성장의 모든 단계에 있는 가장 높은 원리들을 자아 사랑의 미묘한 호소로 덮어 씌워 잘 안보이게 하려고 발버둥친다.

주님을 더럽힘

모든 우리 생각들의 머리가 되는 신성한 원리가 우리의 감각적 관념으로 덮혀질 때 우리 마음 속의 주님도 더렵혀진다.
죽지 않아도 될 영혼을 죽인다는 것은 어떤 인간 마음 안에서도 결코 죽지 않아야 할 진리의 생명이 마음 속에서 박탈되는 것이다. 죽어야 할 영혼을 살려 두는 것이란 어떤 인간 마음에서도 살아 있게 허용해서는 결코 안될 거짓 원리들의 권세를 지속시켜 놓는 것이다.
이런 잘못된 것들은 신성한 원리를 거절하여 선과 진리 대신 악과 거짓에 의해 이루어진다. 이런 상태의 지속은 악에게 용기를 주어 그의 권세는 더욱 강해지는 대신 선함과 진리는 위축되어 아무런 힘도 없게 된다. 부패된 자연적 애정들이 탐닉 속에서 생명과 번영을 약속해대지만, 결국 그것들은 영에 어떤 생명도 줄 수 없게 되어 있다. 그 이유는 그것들은 영적으로 죽은 것들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런 악들은 타락된 자연적 애정에 의해 생산되는데, 그 이유가 부스러기에 불과한 보상, 즉 “보리 몇 줌과 빵 몇 조각,” 다시 말해서 감각적 삶을 먹여 주는 탐닉의 작은 분량에 현혹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이런 악들에 대항하시는 바, 신성한 원리를 꾸준히 신뢰하려고 애쓰는 모든 마음에 대해서는 위의 악들의 권세가 꺾이게 섭리해 주신다.

정면 대결

심각한 시험을 겪지 않고도 거듭날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다. 그러나 시험을 겪는 동안, 우리가 주님의 계명을 굳건히 지켜 간다면, 우리 속의 자연적인 애정들 안에 있는 거짓 여 예언자들의 농간이나, 우리를 엉뚱한 길로 인도하려는 타인들의 술책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우리가 겪는 시험을 우리의 선을 위해, 우리 속의 악을 타파하는 데에 사용하실 것이다.
우리 마음 속에 있는 예언자, 즉 주님의 진리는 악한 여 예언자를 향해 정면에서 대면할 것이다. 즉 신성한 진리는 진리의 내향적인 영체를 우리에게 밝혀 주시어 비질서적인 자연적 애정이 감각적으로 유혹하려는 데서 우리를 보호해 줄 것이라는 말이다. 이렇게 하여 우리 내면의 마음인 영적인 마음은 비질서적인 자연적 삶에 완전히 반대되는 영적 삶으로 열려지게 된다. 그리하여 주님의 예언자, 즉 명백한 영적 진리는 우리 마음의 거리에서 영적 삶에 속한 것들을 선포한다.

우리의 영향력

우리가 악에 빠지고 있을 때, 남에게 미치는 영향력이나 행실로 남들까지 악에 빠져 허우적거리게 만들려는 경향이 짙다. 더욱이 많은 고통이나 곤경이 존재하는 이 세상에서, 어떤 이가 곤경에 허덕일 때, 일부러 그에게 더 많은 짐을 지워 놓고도 놀랄 정도로 태연해 하는 이들도 있다. 우리가 삶의 길을 따라 걷고 있을 때, 우리가 조금만 성의를 가진다면, 우리와 더불어 길을 걷는 동료 여행자에게 도움의 손길을 뻗는 여유도 가질 수 있다. 아마 우리는 동료들에게 슬픔이나 고통 대신 사랑과 친절을 나누어 줄 수도 있을 것이다. 사실 생명의 길은 모든 이가 이용해야만 하는 공용 도로이다. 이 길은 자기만에 전용된 개인 도로도 아니요, 자신에게 특전으로 부여된 길도 아니다. 생명의 도로에 서성거리는 타인이 있다 해서 그를 떠밀 권리도 없다. 생명의 나라에는 모든 이를 위해 충분하고도 남는 빈 방이 준비되어 있다. 단지 모든 이가 합리적이고 정당하게 처신할 때만이 가능하다.
거듭나는 사랑, 그 외 모든 선하고 진정한 것들은 우리가 타인과 그 사랑들을 나눌 때, 나눈 정도만큼 우리에게 배가된다. 이것이 거듭나는 사랑의 본성이다. 그러나 모든 이기심은 그 인간을 좁아지게 하고 작아지게 만든다. 그리하여 그 악은 그 사람의 심정을 하늘나라에 닫히게 한다. 그래서 모세는 우리에게 두 길 중 한 길을 선택하라고 이렇게 말하고 있다. “보아라, 나는 오늘 생명과 죽음, 행복과 불행을 너희 앞에 내놓는다… 그분의 계명과 규정과 법령을 지키면 너희는 복되게 살며 번성할 것이다… 그러나 너희 마음이 변하여 순종하지 아니하면, 너희는 반드시 망하리라… 너희나 너희 후손이 잘 살려거든 생명을 택하여라”
(신명기 30:15-20).

24
예루살렘의 포도나무

성서 본문: 에제키엘 15장 2-8절

2. “너 사람아, 포도덩굴이 무엇이냐?
숲 속에 얽힌 덩굴과 다를게 무엇이냐?
3. 거기에서 가구를 만들 재목이 나겠느냐?
무엇을 걸어 둘 못을 만들겠느냐?
4. 보아라, 땔감으로 불에 들어 간다.
양쪽 끝은 타고
가운데는 그을었는데,
그것을 무엇에 쓰겠느냐?
5. 옹근 대로 있어도 쓸모가 없을 터인데,
하물며 불에 타 그을은 것을 어디에다 쓰겠느냐!
6. 주 야훼가 말한다.
숲 속에서 자란 포도덩굴을
땔감으로 불에 집어 넣듯
예루살렘에 사는 자들을 나는 불에 집어 넣으리라.
7. 불에서 빠져 나오다가도
내가 화가 나서 노려 보면
불에 타 죽고 말리라.
내가 화가 나서 노려 보리니,
그제야 너희는 내가 야훼임을 알리라.
8. 나를 배신하였으니
내가 그 땅을 쑥밭으로 만들리라.
주 야훼가 하는 말이다.”

개요

악 속에 확실히 빠진 마음 안에는 어떤 선도, 어떤 영적 교회도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악한 사랑에 의해 다 파괴되었기 때문이다.

글자 의미

나무 중에서 포도나무는 재목으로 쓰기에는 합당치 못하다. 그 이유는 너무 가늘고, 구부러졌기 때문이다. 따라서 일반 목재의 다양한 용도로 볼 때 목재로는 적합치 못한 것이다. 게다가 너무 쉽게 구부러지기 때문에 여러 가지 그릇을 걸 수 있는 걸이 못으로의 사용까지도 적합치 못한 형편이다. 또한 포도나무는 바싹 마르게 되면 잘 바스러지는 성질까지 있다. 고대 시대 동방의 생활 양식은 아주 단조로워서 돌집과 같은 단단한 집을 지을 때, 돌 사이에 나무못이나 핀 등을 끼워 넣어 방 안쪽으로 삐져나오게 해 두었다. 그런 다음 그들은 이 나무못을 이용해서 부엌의 기구나 방 안의 갖가지 물건들을 걸어 두었다. 이런 못들은 벽 안에 집어 놓은 것들이라 매우 단단한 장치여서 거기에 웬만한 무게의 기구는 모두 걸어 둘 수 있었다. 따라서 이 못은 상당히 단단한 재질의 나무이어야지 포도나무와 같은 품질로는 가능치 못했던 것이다.
게다가 포도나무는 연료용 나무로서도 별 도움이 못된다. 그 이유는 쉽게 불이 붙긴 하지만 금방 사그라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굳이 사용한다면 점화용 정도이다. 그래서 포도나무가 죽는다던가 할 때, 그 나무는 나무를 처분하기 위한 방편으로 불살라지고 말았다. 불이 포도나무 끝에 당기면, 그 끝이 이내 비틀어지면서 나무 전체에 불이 번져 금방 타버리고 마는 것이다. 그래서 이 나무가 목재로 쓸 수도 없고, 게다가 나무가 생생할 경우, 불이 당겨 재로 바뀌게 하는 데도 쉽지 않다.

비유

위와 같은 상황들이 예루살렘 백성들을 위해 비유로서 본문에 실려 있다. 유대 국가가 타 국가보다 나은게 있을까? 그들이 타 국가 보다 특별히 낫다거나 더 위대한 것은 없다. 오히려 타 국가들은 나라 자체도 크고, 더 강한 것이 군사면으로나, 인구로나 훨씬 더 할지도 모른다. 에집트, 아시리아, 기타 다른 국가들이 유대 국가보다 예술이나 과학면에서만 보아도 더 진보되어 있다.
유대인들, 그들이 잘 하고 있다 해도 타 국가 보다 더 나은게 없는 형편인데, 타락해 가는 상황에서는 주변 국가보다 훨씬 하급으로 처지고 만다.

선택된 백성

타 국가 보다 더 사랑 받는 백성, 거룩한 백성, 여호와께서 선택한 백성이 자기들이라고 그들은 무척 떠벌린다. 그러면서도 그들의 생각과 심정, 그리고 행동들은 주님을 등지고 있었다. 이것은 주님이 그들에게서 얼굴을 돌리셨다고 성경에서 말해지는 구절의 의미이기도 하다. 그 이유는 주님이 그들에게 주신 선하고 참된 모든 것을 거절하고, 대신 악과 거짓, 죄악들을 좋아했을 때, 자기들이 악을 선택했다는 것은 잊은 채, 하느님께서 자기들을 번성하게 해주지 않으셨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실인 것은 주님께서 선택하신 것은 그들의 품질이 좋아서가 아니라, 그들이 상징적으로, 또는 비유적으로 교회를 표현하게 하려고 선택하셨을 뿐이다. 이런 표징성을 수행하게 하기 위해 주님께서는 그들로 많은 경험을 통과하게 하시면서 그들 위에 내려진 그분의 섭리적인 돌보심에 대한 많은 증거들을 가지게 해주셨다. 그래서 주님은 모든 것을 동원하시어 그들로 하여금 선하고 참되며 고상한 백성이 되도록 유대인을 도우셨던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좋은 땅에 심기워 좋은 관리를 받는 주님의 포도나무 같았다. 그러나 그 포도나무는 스스로 나쁜 포도나무가 되고 말았다. 한 마디로 무익한 포도나무가 되었던 것이다.
예수께서 말하시기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누구든지 나에게서 떠나지 않고 내가 그와 함께 있으면 그는 많은 열매를 맺는다.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이스라엘과 유다는 주님을 떠나 악 속에 푹 잠겼다. 그래서 그들의 땅은 황량해지고 말았다. 그 이유는 그들이 올바른 질서 속에 그 땅을 유지시키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님께서 그분의 백성인 자기들에게서 얼굴을 돌리셨다고 그들은 생각했는데, 그 이유는 그분이 그들의 일과 죄로부터 얼굴을 돌리셨기 때문이다.

영적 의미

이제 위의 상황과 처지에 관해 영적 의미를 살피기로 하자. “얼굴은 마음의 거울이다.” 얼굴에 나타난 것이 마음의 느낌과 생각을 표현하는 바, 마음은 얼굴에서 그 자체가 표현된다. 주님의 얼굴은 그분의 신성한 인격, 즉 사랑과 지혜의 표현이다. 이 두 가지는 본성과 품질의 양 측면에서 악과 거짓, 그리고 죄악에 반대하여 언제나 얼굴에 놓여지게 된다. 그 이유는 이러한 모든 것은 주님에 반대하여 그들 얼굴에 놓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주님의 속성에 반대된다는 말이다.

예루살렘

예루살렘은 교회를 표현했다. 그 이유는 예루살렘 성은 교회의 사령부로서 성전이나 제단 등등이 있어 거기서 모든 백성에 의한 예배가 거행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곳에서는 거동이 가능한 모든 성인 남자들이 참석해야 하는 정기 종교 행사도 있어 왔다. 예루살렘에 있는 유대인의 상황은 인간 마음에 있는 교회의 상황을 표현한다. 그런데 예루살렘 백성들은 완전히 썩어질 대로 썩어진 타락한 상태에 있었다.
히브리인들, 그들이 목자나 농부로서의 조용한 삶을 영위하는 가운데, 그들은 타 국가에 본이 되는 생활을 꾸렸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타인을 위해 그들이 할 수 있는 선함을 위해 이 세상에서 살았던게 아니라, 오히려 타인으로부터 뭔가를 얻어내려는 가운데 삶을 영위해 왔던 것이다. 결국 끝내 포기 못하는 악한 욕망의 불에 던져지고 마는 죽은 포도나무 같이 그들에게서 신성한 섭리는 떠나게 나타나셨다.

신성한 유입 (divine influx)

거듭나는 사람의 마음에 주님의 선함과 진리가 유입되는 곳은 그 사람의 영적인 내면이요, 이 부분이 천국적 사랑과 총명, 그리고 평화로 채워지는 것이다. 그러나 이와 똑 같은 신성한 사랑이 악한 자의 마음으로 흐를 경우, 그들의 영적 내면은 닫혀져 있기 때문에 자연적 마음의 내면에 도달되고 만다. 그런데 이 내면이 악과 거짓으로 차 있어 선함과 진리에 반대하고 있을 때, 선한 원리들의 흐름은 악한 인간 자신의 삶의 모든 형체와 품질에 직접적으로 대치되는 삶을 수행하게 하고 말 것이다. 따라서 그 인간 자신의 품질과 직접 접촉될 경우 이 흐름은 심한 고통을 생산하고 만다.
신성한 생명의 유입은 선한 사람의 경우, 생명과 기쁨으로 차 있다고 성서에서 묘사되지만, 악한 자의 경우, 태워 없애는 불로 묘사된다. 이는 마치 올빼미나 박쥐로 하여금 이글거리는 태양에 노출되어 있도록 강제하는 것일 것이다. 올빼미가 태양을 피해 그늘 속에 살게 되어 있듯, 악한 자가 신성한 가르침을 경청하지 않을 때 자기들이 선택하는 악 속에 살고, 신성한 원리를 거절할 수 있게 허용되기도 하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에서 주님의 영향이 태워 없애는 불로서 언급될 때, 이 표현은 악한 자의 마음 앞에 있게되는 현상에 일치해서 주어지는 것이고, 특별히 성경의 글자와 마주하는 자연적 마음에 주어지는 표현이다.

열매 맺음

모든 인간 마음은 포도나무와 같이 좋은 열매를 생산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주님은 좋은 열매를 생산할 기회를 모든 인간에게 부여하고 계신다. 그러나 열매를 맺는다는 것은 신성한 태양으로서 주님께 얼굴을 돌리고 있다는 것이 포함된다. 그래야 그 영적인 따뜻함과 빛이 인간 포도나무로 번성하게 해준다. 그러나 악한 자는 영적 생명을 얻기 위해 주님께 얼굴을 돌리지 않는다. “이스라엘은 무성할 뿐인 포도나무, 열매를 많이 맺긴 했으나…” (호세아 10:1). 주님 없이 어떤 인간도 어떤 선도 행할 수 없듯이, 타락된 자연적 인간은 선함이라는 측면에서는 무성할 수 있어도 열매는 없다.
좋은 열매를 맺는 이들은 영적으로 번영한다. 그러나 그런 이유는 주님께서 그들이 신실하다 해서 기분 내키는 식의 보상 때문이 아니라, 좋은 원리를 사용한 결과로 신실함이 보상되기 때문이다. 포도나무를 잘 관리하는 목적은 좋은 포도를 생산하려는데 있다. 그러나 포도나무가 좋은 열매를 생산하지 못하면 아무 쓸모가 없는 바, 오히려 어떤 유용한 작물을 심을 수 있는 공간만을 헛되게 차지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좋은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모든 나무는 잘리워 불에 던져지게 된다.” 이 때의 불이란 악한 자의 마음 속에 있는 악한 욕망이라는 불이다.
위는 각자가 마음으로하여금 열매 없도록 허용하게 될 때 주님이 우리 속에 이식해 두신 모든 진리가 자신의 악의 불로 살라지고 마는 운명에 대한 것이다. 이것이 우리의 정신적 조건들이었을 때, 성경에서 포도나무는 뽑히우고 땅은 황폐해지리라는 표징적 언어로 우리에게 말하고 있다. 다시 말해 우리 속에서 진리는 거짓으로, 선은 악으로 변하고 만다는 말이다.

못과 그릇

타락한 마음의 상태 하에 처해 있다면, 기댈만한 것이 우리 마음에는 하나도 없다. 우리가 교리에 관한 지식을 가지고 있다 해도, 그 교리가 앉혀질 든든한 마음, 그 교리를 잘 사용할 준비된 마음의 장소가 없을 뿐이다.
속이 빈 형태여서 뭔가를 붙잡아 두게 하는 그릇이란 서술의 형체, 즉 교리를 표현한다. 이 교리는 우리가 일상 생활에서 정신적 양식의 준비를 필요로 할 때 애정과 생각을 수단으로 기억에 모아진 진리가 실제 사용될 수 있게 한다.
집을 지을 때 벽 안에 미리 넣어 만든 걸이못(the stout hard-wood nail)은 그릇을 잘 붙잡고 있는데에 사용하려는 것인 바, 이 못은 사용될 준비가 완료된 상태이다. 따라서 걸이못은 일상 생활 속의 실제적 선함을 표현해 준다. 이 선함이야말로 우리가 의지하거나 신뢰할 수 있는 튼튼한 못으로서 언제나 우리를 위해 일해 준다. 우리는 이 실제의 선함 위에 우리의 정신적인 그릇, 즉 매일 사용될 필요가 있는 진리에 관한 모든 교리를 걸어 둘 수 있는 것이다.
나무 걸이못을 수단으로 집 안의 모든 그릇들이 집에 접촉되고 있듯, 못은 결합 또는 정신적으로 하나됨, 다시 말해 진리의 교리와 마음 속에 있는 심오한 원리 사이에 결합이 있게 해준다. 이 결합은 행동 속에 있는 실제적 선함 안에서 발견되는 것이다. 이 선함만이 우리의 내향적 인격과 진리의 교리 사이에서 접착제 역할을 해주어 서로가 확실히 붙잡고 있게 한다. 그래야 적극적인 사용을 위해 언제나 준비된 상태에 있을 수 있는 것이다. 이 선함 외에는 신뢰될 수 있는 것이 없다.
나무못에 담긴 표징적 의미는 유대인들도 알고 있다. 유대인들 중 누가 확실한 지위를 확보한 듯 여겨지면 그의 친구들이 그를 두고 “그는 못처럼 단단히 박았어…”라고 말하는데서 미루어 짐작된다. 이와 유사한 표현은 성경 글자에서도 발견된다. 즉 이사야 22장 23, 24절에서, 주님이 힐기야의 아들, 엘리아킴에 관해 말하신 대목이다. “나는 그를 단단한 곳에 못을 박듯 굳건하게 해주리라… 그의 가문의 모든 영광이 그에게 걸려 있다. 접시 그릇에서 병 그릇에 이르기까지 모든 작은 그릇과 같은 그의 자손과 후예가 모두 그에게 매달려 살리라.”

선함과 진리

왜 포도나무 가지로는 좋은 나무못을 만들지 못하는가에 대한 이유를 표징적으로나, 상징적으로 설명하는 데에는 매우 흥미 있고도 중요한 점이 있기도 하다. 이 설명에는 두 개의 원리, 즉 선함과 진리 사이의 차이점을 포함하고 있다. 인간은 교회의 교리를 받는다. 그 때에 그 교리들이 진정한 것이라고 그가 인정하게 되면, 그는 교리에서 가르쳐지는 진리들을 가지고 자기 인격을 형성해 보려 뜻한다. 그러나 그의 인격은 이런 진리에 의해 형성해 보려 한 적이 예전에는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나쁜 인격인 악에 잘 기우는 그의 자연적 경향성을 진리의 빛으로 보고, 내려놓기 전, 그는 많은 투쟁을 통과해야 할 필요가 있게 된다. 이렇게 자신의 악한 경향성에 대치되는 진리를 보고, 그 진리가 자기에게 가르치는 것을 해내야 하기 때문에, 그는 진리를 위해 악과 싸우게 된다. 그래서 그는 진리가 자기를 인도하는 원리로서 진리를 사랑하는 가운데 일한다. 진리가 자기에게 요구하는 것을 채우기 위해 그는 꾸준한 다툼이나 번뇌를 가질 수밖에 없다. 그 이유는 그가 아직 높은 위치에 도달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높은 위치란 선이 선이기 때문에 선을 행하는 위치, 선을 사랑하는 지점을 말한다. 결국 그가 이 높은 위치에 도달 될 때, 그는 거듭 나아지는 것이다.

예증

예를 들면, 우리가 어떤 일을 처리해야 하는 시점에 있다고 하자. 아마 우리는 그 일에 대해 진리가 요구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용감하고도 과감성 있게 올바르게 처리했을 경우, 우리는 선하지 않은 것을 행하려 드는 이기적인 바램을 정복한 셈이다. 그래서 자기는 진리를 따랐다고도 스스로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 속에 있는 것은, 자신이 행한 선이 칭찬되기를, 최소한 남들이 인정해 주기를 은근히 바라고 있다. 사실 우리는 칭찬만을 바래서 선을 행하는 것은 아닐 것이고, 설사 자기의 행함이 잘못 이해되고 흑평받을 때조차도 그 일을 게을리 하지는 않을 것이라 본다. 그러나 우리는 선을 행한 후, 그 일이 칭찬 받아질 때까지 실제로 만족 못한다. 이럴 경우, 우리는 선을 사랑함에 의해서 그 일을 처리한게 아니고 진리를 사랑함이 실제화 되었을 뿐이다. 이런 단계 역시 거듭나는 과정 중의 하나이지만 그 단계는 초기 단계인 것이다.
진리를 사랑해서 나타나는 결과로서의 선의 종류는 우리에게 영향을 준 진리의 품질에 따라 다양해진다는 것 정도는 이제 가늠할 것이다. 각양 각색의 사람들은 진리가 각자에게 행하도록 가르치는 것들을 생각하는 면에서 각양 각색이 된다. 진리가 마음 속에서 명백해 있지 않으면 그의 마음 역시 선한 것이 무엇이냐에 대해서 역시 모호한 상태에 있을 수밖에 없다.
진리를 사랑해서 얻어지는 선함, 진리의 선이 이스라엘로 표현되고 있다. 또한 포도나무로 표현된다.

좋은 못

위와 같은 종류의 선, 포도나무라는 재목을 가지고 교리라는 그릇을 걸어 둘 수 있는 좋은 못을 만들지 못하는 가에 대한 이유를 이해했으리라 본다. 이런 선함은 포도나무의 성질 같이 생각이 여러 가지로 변화할 때마다 그 변화에 쉽게 구부러지는 특성이 있다. 따라서 마음이 붙잡은 교리라는 모든 그릇을 걸어 두는데 있어서 그 나무(선)는 견고함이나 안전함이 충분치 못한 상태에 있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 마음속에 있어야 할 못은 단단한 나무, 즉 선이 선인 고로 선을 사랑함이라는 것으로 만들어져야 한다. 이 못이 집안 벽에 들어가 부착되어야 우리 속의 교리가 언제 어느 때라도 즉각 사용 가능할 수 있는 준비를 갖춘 것이 된다.
새 예루살렘의 명백한 교리들, 이 그릇은 영적 사용을 위해 가장 우수한 그릇이요, 우리는 이 그릇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이 그릇을 일상 생활에서 직접 사용하기 위해서는 걸어 둘 믿음직한 못을 만들어 두어야 한다. 이 못은 우리가 십계명을 일상 생활에서 준수해감으로 만들어진다.
이런 사람을 두고 주님께서 약속하신다. “축제 기분에 들뜬 우리 마을, 시온을 보아라! 네 눈은 아늑한 보금자리, 옮겨지지 않을 장막, 예루살렘을 보리라. 그 말뚝이 다시는 뽑히지 아니하고 그 줄 하나도 끊어지지 아니하리라. 거기에는 넓은 강이 여러 줄기로 흐르지 아니하고 야훼께로부터 한 시내가 흘러 우리의 기쁨이 되리라” (이사야 33:20,21).

25
독수리와 포도나무

성서 본문: 에제키엘 17장 2-10절

2. “너 사람아, 이스라엘 족속에게 수수께끼를 내놓아라. 비유를 들어 말해 주어라.
3. ‘주 야훼가 말한다.
큰 독수리 한 마리
알록달록한 깃털을 가득 쓰고
긴 것, 큰 날개를 치며
레바논에 가서
송백 끝에 돋은 순을 땄다.
4. 그 연한 가지 끝에 돋은 햇순을 따서
무역국가로 가져다가
상업도시에 내놓고는
5. 그 지방에서 난 종자를 찾아
버드나무 심듯
물이 콸콸 흐르는 강가,
갈아 놓은 밭에 심었다.
6. 움이 돋고 보니, 그것은 포도나무였다.
뿌리를 땅에 박고 낮게 옆으로 퍼지며
덩굴은 그 독수리에게로 뻗었다.
포도덩굴이 되어 가지가 뻗으며 움이 돋았다.
7. 깃털이 많은 큰 날개를 치는
다른 큰 독수리 한 마리가 나타나자
이번에는 그 포도덩굴이
가는 넌출을 그리로 뻗고
뿌리도 그리로 뻗어 물을 빨아 들이려고 하였다.
8. 물기 넉넉한 좋은 밭에 심어,
햇가지가 나서 열매를 맺는
훌륭한 포도나무가 되리라 여겼더니, 그 모양이었다.’
9. 주 야훼의 말이라 하고 일러라.
‘그러고도 잘 될 것 같으냐!
그러고도 뿌리가 뽑히지 않을 듯싶으냐?
열매를 훑어 가지 않을 듯싶으냐?
새 잎은 돋아나자마자 마를 것이다.
그 뿌리를 뽑는데는 힘들 것도 없다.
대군을 출동시킬 것까지도 없다.
10. 옮겨 심었다고는 하지만 잘 되기는 이미 틀렸다.
동쪽에서 열풍이 불어 오면 바싹 마르리라.
자라던 터전에서 그대로 시들리라.’”

영적 교회

본문은 영적 교회의 건립과 성장, 그와 동시에 그 교회의 뒤집힘과 하강을 표징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영적 교회는 거룩한 말씀 속의 진리를 수단으로 주님에 의해 건립되어진다. 이 진리들을 통하여 인간은 외적으로나 내적으로나 거듭 나아진다. 다시 말해 자연적 마음이나 영적 마음이 거듭 나아진다. “지금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말해준 말을 통해 깨끗해진다.” 교회는 진리를 합리적으로 보고, 본 진리를 실지 사용함으로서 영적으로 되어 간다. 그러나 진리를 소홀히 하고 남용함으로 인간은 진리를 왜곡해 버리고 삶 속의 악에 잠겨 버린다. 이렇게 해서 교회는 질적인 측면에서 부패되어 결국 멸하고 만다.

글자적 의미

본문의 비유를 일반적으로 보면, 시드키야가 느부갓네살과 협약을 하되 여호와의 이름을 걸고 맹세한 것을 그가 깨트림으로 결과된 시드키야에 대한 주님의 심판을 예언하기 위해 말해졌을 것으로 추측해 오고 있다.
첫 독수리는 바빌론 왕 느부갓네살이고, 둘째 독수리는 에집트 왕 파라오로 추정되고 있다.
그러나 주님이 언제나 추구하시는 것은 인간에게 영적 삶을 주시려는 것이다. 심판으로 인간이 당하는 고통은 신성의 어떤 분노 때문이 아니라, 인간 자신의 악들로 인한 것이다. 맹세 또는 협약, 이것은 인간의 어떤 행동 지침을 묶어 주게 되는데, 이 맹세에서 쌍방은 각기 맹세에 대한 성실과 신뢰를 위해 하느님을 증인으로 불러 세운다. 이런 맹세는 선량한 사람으로 자기 의무에 묶이게 하는 내향적인 원리를 표현하는 것이고, 이것이 실제의 의무를 형성해 준다. 그 이유는 영적 인간의 경우, 맹세는 그 사람의 행동 지침의 바깥쪽만을 규율하는 것이 아니라, 원리가 원리인 고로 그 원리에 순종하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본문은 인간이 영적 원리를 소홀히 할 경우 과연 어떻게 되어갈지에 대한 것을 미리 말해 주고 있다.

표현적 의미

삶 속에 창조된 모든 형체는 인간의 정신적 삶 속에 있는 것들을 표현한다. 짐승은 인간의 애정을, 새는 우리의 생각을 표현한다. 새의 날개나 팔은 힘을 표현하는 것인데, 그 이유는 팔이나 날개를 수단으로 힘이 발휘되기 때문이다. 날아갈 때의 날개란 사고력 또는 생각하는 힘의 사용을 표현한다. 이러므로 날아간다 함은 지각이나 가르침을 받기 위해 우리가 생각하는 능력을 사용하는 것을 표현하게 된다. 새를 덮고 있는 깃털이란 글자적인 진리 즉 각자의 처지에 알맞은 상태에서 우리 마음을 덮고 있는 진리를 표현한다.

독수리

새라는 짐승으로서의 독수리는 생각을 표현한다. 독수리는 “새의 왕”이라 불리는데, 그렇게 불리는 이유는 독수리가 지닌 힘, 예리한 시각, 오랜 시간을 나는 것, 신속한 비행 능력 등등 때문이다. 이런 견지에서 독수리는 생각에 있어서 총명함, 멀리 내다보는 것, 예리한 시각과 높은 관점을 가질 수 있는 합리적인 생각을 표현한다. 때로 독수리는 자연적인 것들을 넘어 날아가는 영적인 생각, 자연적인 것만을 볼 수밖에 없는 생각이 그 수준을 넘어 보게 되는 것을 표현하기 위해 사용되기도 한다. 독수리 같은 영적인 생각은 그 보금자리를 높은 장소에 둔다. 그래서 이사야 40장 31절에서, “야훼를 믿고 바라는 사람은 새 힘이 솟아나리라. 날개쳐 솟아오르는 독수리처럼 아무리 뛰어도 고단하지 아니하고 아무리 걸어도 지치지 아니하리라”라고 읊고 있다.
본문의 첫 독수리는 영적 교회의 바깥 측면에 있는 총명 또는 생각을 표현한다. 다시 말해 인간의 자연적 마음에 있는 영적 교회를 표현하고, 둘째 독수리는 내적인 영적 교회에 있는 총명이나 생각, 즉 인간의 영적인 마음에 있는 영적 교회를 표현한다.
두 독수리의 날개는 주님의 말씀의 글자로부터의 외적인 생각들이다. 많은 깃털을 가진 큰 날개란 진리나 과학적 지식, 또는 자료나 교리로서 알려진 것들의 풍부함을 표현한다. 이런 것들로부터 자연적인 마음은 그 마음에 총명을 이끌어 낸다. 많은 깃털로 된 큰 날개를 치며 재빠르게 비행하는 큰 독수리란 주님의 말씀 속의 진리로 잘 훈육될 때 있어지는 자연적 마음의 생각들, 다시 말해 자연적인 것들을 합리적으로 생각하는 것을 표현해 준다.
위와 같은 장엄한 독수리와 여타 새들 사이의 대조는 매우 놀랍다. 이 대비를 마음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영적 원리로 멀리까지 도달하는 합리적인 생각과 일상 생활의 잡다한 생각의 차이와 비등한 것이다.

레바논

이 독수리는 레바논으로 가서 키가 큰 송백의 가장 높은(끝) 가지를 취했다. 지상에서 자라고 있는 나무란 마음에서 자라는 진리를 지각함을 표현하는데, 이 지각이 생각 속에 심어질 때, 처음에는 감상적 수준( sentimental)에 심어져 순을 내고 자라 잎과 열매를 맺는 나무가 된다. 높은 장소라는 측면에서 볼 때, 레바논 산은 마음의 높은 상태 또는 칭찬되는 상태를 표현한다. 레바논이란 영적 인간 또는 인간 안에 있는 영적인 선을 표현한다. 다시 말해, 이웃 사랑은 영적 인간을 통치하는 원리이고, 영적 인간으로 구분되게 해주는 특질이다. 그래서 시편 92편 12절은, “의로운 사람은 종려나무처럼 우거지고, 레바논의 송백처럼 치솟는다”고 노래하고 있다.
송백이란 진리를 영적으로 지각하는 것을 표현한다. 따라서 레바논의 송백이란 선을 사랑함에 기초를 두고 진리를 영적으로 이해하는 것을 표현해 주게 된다. 즉, 우리가 이웃을 사랑할 때나 이웃과의 관계에 적용하고자 하는 원리를 알기를 바랄 때와 같은 경우, 즉 이웃을 사랑함은 우리의 의무이다고 지각하는 것을 말한다. “송백의 가장 높은 가지(끝)”이란 합리적인 생각 중에서 가장 상승된 원리를 지각하는 것을 말한다. 예를 들면, 이웃이, 또는 내 친구가 우리 주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그를 사랑해야 한다고 지각하는 경우 등등이다. 우리는 표현적으로 뭔가를 높다라고 부를 경우는 그것이 상당히 가치 있을 때나, 칭찬해야 하는 특성을 가지고 있을 때이다. 특별히 주님은 “지존한 곳에 영원히 거하시는 분”이라고 불리신다. 독수리가 레바논 송백의 가장 높은 가지를 취했다는 것은 우리가 주님의 말씀으로 진리에 관한 지식을 합리적으로 취해서 우리의 이웃이 주님의 자녀라는 차원에서 이웃과의 관계를 생각해 보는 데에 응용하게 될 때를 표현해 주는 것이다.
독수리는 가는 가지(순)를 무역 국가(장사하는 땅)로 가져다가 상업 도시에 내놓았다. 이는 우리 마음이 영적 진리를 생각하는 가운데 그 진리를 자연적인 과학이라는 평면에까지 운반하여 바깥쪽에 있는 것들에서 그 진리를 확증한다는 말이다. “장사하는 땅”이란 자연적인 마음이다. 이 마음 평면에서 우리는 기억 속에 있는 지식을 교환하고, 팔고 사는 무역을 하는 것이다. 자연적인 마음은 자연적인 기억으로부터 뭔가를 취하고, 그것 가지고 추론하는 바, 상업 도시가 있는 무역 국가(장사하는 땅)인 것이다. 즉, 갖가지 지식으로 가득 찬 교리를 말한다. 사람들이 사용하기 위해 건축해 놓은 도시란 살아 있는 진리를 담기 위해 축조된 교리의 체계를 표현하고, 진리는 이 체계를 수단으로 실용화된다. 그 이유는 한 마디로 교리 없이 우리는 진리를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나무를 심는다는 것은 진리의 지식으로 마음을 가르치는 것을 의미한다.
독수리는 “그 지방에서 난 종자를 취하여 갈아 놓은 밭(옥토)에 심었다.” 이는 우리의 생각이 교회의 교리를 취하여 그것이 잘 자랄 수 있는 옥토인 애정(사랑하는 마음, affection)에 심었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 진리가 뿌리를 내리고 자랄 수 있는 곳이란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이라는 말이다.

큰 물 (콸콸 흐르는 물)

독수리는 송백의 순을 “물이 콸콸 흐르는 강가”에 심었다. 즉, 주님의 말씀에 관한 글자적 진리가 풍부함 속에 심었다는 말이다. 깨끗하게 씻어 준다는 측면에서의 물이란 글자적인 진리들, 또는 자연적인 진리를 표현하는데, 이 진리가 우리의 행동을 깨끗하게 해준다. 말씀의 글자는 큰 저수지 또는 큰 물로서 여기에서 모든 진리가 흘러나온다. 그리고 독수리는 송백의 순을 버드나무 심듯 심었다. 버드나무는 강둑에서 잘 자라는데, 이는 하느님 말씀의 글자로부터 진리를 자연적 수준에서 지각함을 표현한다. 이렇게 심어진 송백은 자라나서 “낮게 옆으로 퍼지는 포도나무”가 되었다고 본문은 읊고 있다. 이 대목의 경우는 글자적인 역사일 수가 없을 것이다. 즉 송백 나무가 포도나무로 변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송백이 표현하는 것이 포도나무 또는 포도덩굴이 표현하는 것으로는 변할 수 있다. 즉, 삶 속에서 진리를 영적으로 지각한 것은 실제적인 영적 원리 또는 포도나무가 될 수 있다는 말이다. 먼저 이런 것은 단지 영적 원리의 시작일 뿐이다. 즉 포도나무는 낮게 옆으로만 퍼지고 높은 데까지 도달치 못한다는 본문의 말과 같다. 비록 낮기는 해도 옆으로 넓게 퍼지기는 했다. 즉 흔한 일상 생활 속의 만사(자연적 삶)에 영적 원리가 응용되었다는 뜻이다. 그 뒤 점차적으로 우리의 마음이 영적 삶의 원리를 볼 수 있게 될 때, 이 원리들은 우리 마음 안에서 적절한 장소를 차지하게 된다. 그러면서 이 원리들은 천국적 삶의 질서 안에 배치된다. 그런 뒤 일상 생활에의 응용을 다시 가지게 된다.

독수리들

첫 독수리에 관해 지금까지 살핀 바를 종합하면, 본문은 자연적인 마음이 거듭나서 영적 인간이 되는 것에 관련되고 있다. 만일 마음이 합리적이면서 주님의 말씀에서 온 진리의 지식을 가지고 있다면, 그리고 그 마음이 합리적으로 본 대로 말씀의 가르침 속에서 기뻐한다면, 이해도는 증가될 것이다. 한 마디로 송백 나무가 포도나무가 되어진다는 말이다. 즉 어떤 원리를 지각한 것이 실지 살아 있는 원리가 되어 일상 삶 속에서 열매를 맺게 된다는 것이다. 합리성으로부터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 그는 영적 인간이 되어지는 것이다. 이 영적 인간의 삶을 시편 1편은, “복되어라. 악을 꾸미는 자리에 가지 아니하고, 죄인들의 길을 거닐지 아니하며, 조소하는 자들과 어울리지 아니하고, 야훼께서 주신 법을 낙으로 삼아 밤낮으로 그 법을 되새기는 사람, 그에게 안될 일이 무엇이랴! 냇가에 심어진 나무 같아서 그 잎사귀가 시들지 아니하고 제 철따라 열매 맺으리…”라고 읊고 있다.
둘째 독수리는 영적 마음의 생각, 즉 영적 인간의 내향적 마음을 표현한다. 두 독수리들은 영적 인간의 생각, 즉 영적 교회의 인간, 또는 거듭나는 동안에 있는 삶의 영적인 수준을 표현해 준다. 첫째 독수리는 영적 인간의 자연적인 부분 또는 외적 마음의 거듭남인데, 이것이 먼저 가르쳐지고 훈련받게 된다. 그리고 둘째 독수리는 마음의 영적인 부분, 즉 내향적인 부분의 거듭남을 표현하는데, 이 부분은 자연적 부분의 거듭남이 있어진 후 열리고 훈육되어진다. 두 독수리 모두 큰 날개와 많은 깃털을 가졌다. 즉 영적 인간 마음의 두 부분인 안쪽과 바깥쪽 모두에서 풍부한 지식을 가진다는 말이다. 이 지식이란 알려진 사실(fact), 알려진 원리들이고, 이런 것에 의해 영적 인간의 생각은 힘과 신속함을 가지고 연습되어진다.
“이번에는 그 포도 덩굴이 가는 넌출을 그리로 뻗고 뿌리도 그리로 뻗어 물을 빨아들이려고 하였다”라고 본문은 말한다. 즉 영적인 마음, 내향적인 마음이 열리어 생각이 새로운 수준에서 발달될 때, 모든 뿌리와 가지들인 우리의 지식과 지각의 시작과 성장은 생각의 새로운 수준을 향해 스스로 방향을 바꾸어 새로운 수준과 연결해 보려 한다는 말이다. 이를 다른 말로 말해 보면, 생각의 새롭고 영적인 수준이 우리 속에서 열려질 때, 과거에 알고 있었고 이해했었던 만사가 생각의 새로운 길을 향해 스스로 방향을 바꾸어 새로운 삶, 보다 더 높은 종류의 삶을 향한다는 말이다. 그래서 과거 자연적 차원에서, 자연적인 것에만 기여해 오던 사실들이나 원리에 관한 지식이 비록 같긴 하지만 이제는 영적 차원에서 영적인 생각을 위해 수단이 되고 도움을 주게 된다. 이리하여 우리의 영적 생각은 과거의 사실이나 원리에 관한 모든 지식을 인계 받아 삶의 새로운 관점에 이 모든 것을 응용하게 된다.
이렇게 해서 지금까지 우리가 습득한 바깥쪽 지식들, 이 지식들이 과거에는 자연적인 것 속에 있는 지혜만을 찾을 수 있게 했지만, 같은 지식들이라도 이제는 영적인 것들 안에 있는 지혜를 열려진 영적 마음으로 습득하게 해준다. 이러면 마음에 있는 중심 원리는 생각 속의 잡다한 것들에까지도 영적 생각의 품위와 성질을 주게 된다. 둘째 독수리의 보호 아래에 있는 포도나무는 자라서 열매를 맺을 수 있었다. 즉 진리의 지각은 팽창되어 삶의 실지에 응용될 수도 있었다는 말이다. 한마디로 주님과 이웃에 대한 책임을 잘 준수함으로 “훌륭한 포도나무(good vine)”가 되어질 수도 있었을 것이다.

번영

그러나 본문은 묻는다. “그러고도 잘 될 것 같으냐?” 이것은 영적 교회, 또는 고대 교회의 몰락과 파멸, 각 개인의 차원에서 보면 주님과 이웃에 대한 책임을 각자가 지키지 못한 까닭에 있게 되는 삶의 영적 수준이 뒤집혀 맞이하는 파멸에 대한 예언이다. 역사적 측면에서 보면 유다왕 시드키야와 같은 처지, 주님 앞에서 만든 맹세를 깨트리는 그의 마음 같은 것이다. 어떤 이의 경우, 그가 영적 사고의 어떤 조그만 수준을 달성했을 때, 그는 자신 속의 악한 경향성을 대항하는데 진리를 응용하지 않을 때가 있다. 오히려 그는 자신이 총명하다는 자만에 빠져 버린다. 그래서 그 진리를 가지고 자기 자만을 확증해 버리고 만다. 이렇게 되면 그는 실제에서 주님을 잊고 자신을 예배하는 잘못을 저지르는 것이다. 이 잘못은 기껏 알게 된 진리를 뒤집는 결과인고로 더 이상의 진리의 발전이나 상승, 즉 번영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영적으로 보건대 그는 시들어 죽는 것이다. 결국 그가 생산하는 열매는 훌륭한 포도가 아닌 들포도일 뿐이다.
동쪽은 주님을 표현하는데, 그 이유는 태양이 동쪽에서 떠올라 생명과 빛을 가져오기 때문이다. 좋은 측면에서 볼 때, 동풍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의 유입이다. 그러나 주님의 생명이 그분의 생명과 반대되고 있는 이들 안으로 흘러들 때, 주님의 생명은 그들을 파괴하는 듯 보인다. 마치 우리가 강한 태양 빛을 계속 응시하면 오히려 그 빛이 눈을 병들게 하는 것과 같을 것이다. 주님의 진리가 인간에게 와서 심판을 집행하는 셈이다. 진리를 사랑하는 이들은 이를 환영한다. 그러나 진리에 따라 살지도 않고, 진리를 사랑하지도 않는 이들은 진리의 현존에서 피해 보려고, 숨으려고 발버둥 칠 뿐이다. 태양이 생명 없는 식물을 말려 버리듯 그들은 시들어질 뿐이다.

좋은 독수리와 나쁜 독수리

독수리에 관한 의미를 생각하는 가운데, 우리가 유념해야 할 것은 표징물의 특성이다. 이것은 각기 다른 관점이나 다른 양상에서 관조되기도 한다. 예를 들면 좋은 성질과 능력의 측면에서의 독수리는 독수리의 좋은 것들을 표현한다. 즉 예리한 시각, 기민한 동작, 오래 비행할 수 있다는 것, 용기나 힘이 강하다는 측면에서의 독수리는 합리적이고 영적인 생각, 멀리 내다보고, 사물을 명확히 보며 진리의 높은 영역까지 오르게 해주고, 힘과 용기를 가지고 그 영역에서 오래 머물 수 있게 해준다.
그러나 독수리는 거만하고, 외톨이로 생활하며, 싸움을 좋아하는 새요, 먹이는 주로 사냥하는 자같이 포획한다. 이러한 탐탁치 못한 특성에서 본다면, 독수리는 인간 속의 자기 총명(자만)을 표현해 주는데, 이 총명은 거만하여 자기 야망의 길에서 거리적 거리는 모든 것을 해치우려 단단히 준비를 갖추고 있다. 이와 같은 총명은 비록 입술로는 살아 있는 진리를 내뱉으면서 삶의 실지 동기에서는 악과 거짓에 속하는 죽은 것들에 고착되어 있다. 그래서 주님께서 말하시기를, “시체가 있는 곳에는 독수리들이 모여든다”라고 하신 것이다 (마태복음 24:28). 이런 총명은 자기를 사랑함에 속한 것에는 매우 분주하나 천국적인 것들에는 무관심하여 죽어 있다.
인간은 보다 높은 지적인 것을 소유해서 생각이라는 영역을 드높일 수 있고, 교리라는 측면의 총명이 보다 오래 비행할 수 있을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 인간은 지적인 것뿐일는지 모른다. 오히려 그의 심정은 악하고, 거만하고, 이기적이며, 건방지고 야비해서, 자기 총명을 낭비해 버리고, 인간 존재와 더불어 있어야 할 실용적인 영적 공감에서는 붕 떠 있는 상태로 자신을 간직해 간다. 이런 사람은 영적으로 번영할 수 없는 것이다. 그는 자신이 판 밭고랑인 자기 총명 속에서, 자신의 총명을 과시하는 가운데, 이기적인 목적을 위해 총명의 본질을 뒤집는 가운데 시들고 만다.

약속된 좋은 나무

그러나 주님은 영원히 자라고 번성할 송백나무를 심으시겠다고 약속하신다. 즉, “나도 그 송백 끝에 돋은 순을 따리라. 그 연한 가지에 돋은 햇순을 따서 높고 우뚝한 산 위에 몸소 심으리라. 이스라엘의 높은 산에 그것을 심으면 햇가지가 나서 열매를 맺는 훌륭한 송백이 되고 온갖 새들이 거기에 깃들이며 온갖 날짐승이 그 가지 그늘에 깃들일 것이다.”
주님은 그분의 재림으로 이미 만드신 새 예루살렘의 영적 진리를 통해 영적 교회를 건설하실 것이다. 그분의 재림은 거룩한 말씀 속의 영적 의미를 열으심으로 생명과 빛을 새롭게 쏟아 부워주시는 영적인 오심이다. 그리고 이 영적 진리는 일상 생활의 세세한 사항 안에서 본체를 드러내며 천국의 태양 광선으로 지상의 생명체도 빛을 발하게 해준다. 그래서 일상 생활이나 사회 생활에서 의의 열매가 속속들이 맺힐 수 있게 할 것이다.
이 영적 진리 안으로 들어오도록 준비되는 이들 사이에서 주님은 이 영적 교회를 지금 건설하고 계신다. 교리에 관한 지식, 진리를 이해하는 총명은 순수한 새교회인에게 필수적인 것이다. 그러나 이보다 더 절실히 요구되는 필수 사항은 온유하고 겸비한 영(a meek and lowly spirit), 그래서 만사에 있어 주님을 찾는 영, 자만은 지옥의 것이어서 기어이 금하고야 마는 영이다.
겸허한 새교회인은 하느님의 섭리가 보호해 주시는 보살핌 밑에서 영원히 배우고, 자라며, 기뻐할 것이다. “독수리가 보금자리를 흔들어 놓고 파닥거리며 떨어지는 새끼를 향해 날아 내려와 날개를 펼쳐 받아 올리고 그 죽지로 업어 나르듯 야훼 홀로 그를 인도해 주실 때, 어느 다른 신이 그와 함께 하였더냐? 산등성이를 타게 하여 주시며 밭에서 나는 오곡을 먹게 하여 주시고 바위에서 흘러내리는 꿀을 먹이시며 돌 틈에서 흘러내리는 기름을 마시게 해 주셨다” (신명기 32:11-13).

26
설익은 포도를 먹으면

성서 본문: 에제키엘 18장 1-2절

1. 야훼께서 나에게 말씀을 내리셨다.
2. “‘아비가 설익은 포도를 먹으면
아이들의 이가 시큼해진다.’”
이런 속담이 너희 이스라엘 사람이 사는 땅에 퍼져있으니 어찌된 일이냐?

머리말

구원은 유전적으로 받은 조건에 달려 있는게 아니라, 실제 삶으로 고정되는 현재의 인격에 의존된다.

본문의 글자적 의미

고대 히브리인들은 자기들이 지닌 악한 특질이나 그에 따른 불행 등에 대해 자기들에게 책임이 없을 만한 구실로 변명을 해 왔었다. 그 구실이란, 자기들은 선조들의 퇴보된 기질로부터 자연적인 특성을 상속받았다는 것, 이런 특성은 어쩔 수 없는 불운으로 축적되어 아예 고쳐질 수 없도록 정착되어버린 성질의 것이 되어 유대 종족의 마음에 가라앉았다고 말한다.
이런 사상이 본문의 비유, 또는 속담인, “아비가 설익은(신) 포도를 먹으면(먹었으므로) 아이들의 이가 시큼해진다”고 하는 것에 표현되어 있다.
이런 생각은 당연히 감각적인 생각에로 몰입하게 한다. 오늘날에서 까지도 자연적 수준의 마음을 소유한 사람들로 하여금, “나는 내 성질을 바꿀 수 없어, 본시 그렇게 태어나진 것을… 이것이 내 본성인데… 나는 도저히 내 성격을 바꿀 수 없어…”라는 식으로 말함으로서 잘못된 느낌을 변명으로 들이대는 것을 우리는 가끔 목격하게 된다.

출애굽기 20장 5절

유대인들 사이에 퍼진 본문 같은 이런 관습은 출애굽기 20장 5절의 말씀인, “나 야훼 너희의 하느님은 질투하는 신이다. 나를 싫어하는 자에게는 아비의 죄를 그 후손 삼대에까지 갚는다”라는 계명을 잘못 이해함에서 비롯되어진 것이다.
고대 유대인들은 자연적 마음 상태에 감각적인 것이 보태져, 자연적인 것과 영적인 것 사이의 분명한 차이를 알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악행자에게 예상되는 하느님의 분노라는 점에서, 악행자는 이 자연계에서 그 악의 벌이 있을 것이라고 간주했었다. 자연적 수준의 생각에서, 악행자의 자녀는 부모의 죄 때문에 고통을 받는 것처럼 보여질 수는 있다. 다시 말해, 만일 부모가 슬기롭고, 신중하며 근면하다면, 그 부모들은 순조로운 생계를 유지하면서, 자녀에게 좋은 교육을 받게 하고, 어떤 쓸모 있는 직업을 위해 적절한 훈련도 거치게 해줄 것이다. 그러나 만일 부모가 부도덕하고, 나태하며, 부주의 하다면, 그 자녀들은 위의 자녀들 같은 혜택 없이 성장할 경우가 많을 것이다. 그리고 자신들의 악한 경향성을 제지하지 않고 살아간 부모들의 경우, 그들은 자기들과 방향이 비슷한데로 후손이 유도되게 되면서 더 증가된 악한 경향성을 전해 줄 수도 있을 것이다. 더욱이 자기들의 신체를 남용한 부모들은 손상된 신체 조건의 얼마가 자녀에게 이전될 수도 있다. 이는 몇 세대까지도 영향을 미치게 할는지도 모른다. 인간 삶의 모든 국면에서 있는 기질이나 경향성, 그리고 쉽게 어느 쪽에 기울어지는 것 등은 유전적이기도 하다.

유전적인 것들

위의 좋지 않은 유전적인 영향들이 선조의 죄로 인해 주님이 부과한 벌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이어서, 이런 유전적인 조건들은 선조가 후손에게 부과하여 삶의 형체 속에 포함되어 있다. 사물의 본성 측면에서, 모든 것은 “각 종류에 따라 생겨나야”만 한다. 그 이유는 부모는 부모가 가진 조건 속에서만 후손이라는 유기체를 생산해 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주님의 생명은 부모에게로 흐르지만, 주님은 모든 자녀들에게 최선의 것을 주시려 애쓰신다. 그러나 주님 역시 그들의 부모를 통하여서만 주실 수 있으시다. 이러므로 하느님의 선물은 양친이 가진 유기체라는 현재 조건에 의해 제한되어 진다.
이런 사실은 자연적인 마음들이나 신체 조건 같은 측면의 경우가 모든 국가, 가문, 개개인에게서 명백하게 보여지고 있다. 육체라는 생명의 경우, 어느 인간도 이 세상에 등장하게 되는 자기의 마음과 몸에 대해 선택하지 못한다. 어느 경우라도, 인간은 자기에게 이전되어진 조건만을 받아야 한다. 그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자기에게 주어진 조건을 가지고 더 나은 조건이 되게 최선을 다해 일할 수 있는 것뿐이다. 이래서 유전적인 것의 능력은 결과에 편견을 갖게 하는데, 그 이유는 본시 자기에게 주어진 조건을 더 나은 조건에서 스스로 일할 수 있는 자유와 능력은 분별 있는 사람에게만 주어지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법

자연적인 마음뿐인 인간들에게 유전적인 영향에 관한 생각에 착오가 없도록 하시기 위해, 주님은 이 세상까지를 포함하는 인간 삶의 법칙에 대해 명백하고도 확실하게 서술해 두셨다. 우선 신명기 24장 16절에 이렇게 말씀하시고 있다. “자식의 잘못 때문에 아비를 죽일 수 없고, 아비의 잘못 때문에 자식을 죽일 수 없다. 죽을 사람은 바로 그 사람이다.” 그리고 열왕기하 14장 6절에서, 유다의 왕 아마지에 관해 말해지기를, “그는 왕권이 튼튼하게 되자 부왕을 죽인 신하들을 처형하였다. 그러나 그 살인자들의 자손들은 죽이지 않았다. 그는 모세의 법전에 기록되어 있는 야훼의 명령을 따랐던 것이다. ‘자식의 잘못 때문에 아비를 죽이지 못하고 아비의 잘못 때문에 자식을 죽이지 못한다. 죽을 사람은 죄지은 바로 그 사람이다.’” 그리고 예레미야 31장 29-30절에서 이스라엘 회복에 관해 말해지면서, “그 날이 오면, ‘아비가 신포도를 먹으면 아들의 이가 시큼해진다’라는 말을 하지 않게 되리라. 죽을 사람은 죄지은 그 사람이다. 이가 시큼해질 사람은 신 포도를 먹은 그 사람이다.”
위의 구절만으로도, 유전적인 영향에 관한 문제에서 주님이 무엇을 가르치고 계신지에 관해서는 의심을 가질 것이 없으리라 본다. 그리고 본문 뒤에 이어지는 구절 속에서 주님은 아직 더 확실하게 해주시고 있으시다. “사람의 목숨은 다 나에게 딸렸다. 아들의 목숨도 아비의 목숨처럼 나에게 딸렸다. 그러므로 죄지은 장본인 외에는 아무도 죽을 까닭이 없다… 죽을 사람은 죄를 지은 장본인이다. 아들이 아비의 죄를 받거나 아비가 아들의 죄를 받거나 하지 않는다. 바로 살면 바로 산 보수를 받고 못된 행실을 하면 못된 행실의 보수를 받는다. 그러나 만일 못된 행실을 하던 자라도 제 잘못을 다 버리고 돌아 와서 내가 정해 준 규정을 지키고 바로 살기만 하면 그는 죽지 않고 살 것이다… 그가 못된 행실을 한 자라고 해서 사람이 죽는 것을 내가 기뻐하겠느냐? 주 야훼가 하는 말이다. 그런 사람이라도 그 가던 길에서 발길을 돌려 살게 되는 것이 어찌 내 기쁨이 되지 않겠느냐?” (에제키엘 18:4,20,21,23).
모든 영혼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을 받기 위해 형성된 하나의 그릇이요, 유기체인 것이다. 그런 고로 모든 영혼의 숙명을 훼방 놓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오로지 훼방이 가능한 한가지는 주님에게서 그에게로 흐르는 생명을 받지 않겠다고 하는 당사자의 거절뿐인 것이다.

영적 죽음

악한 인간은 자기의 영적 생명을 잃는다. 잃는 이유는 그가 영적 생명이 흘러들지 않도록 문을 닫아거는 것들만을 사랑하여 행동하는 것에 집착해서 영적 죽음이라는 상황으로 자신을 꾀기 때문이다. 지옥은 조건이라는 것에 존재한다. 지옥은 주님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고, 주님에게 반기를 드는 인간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다. 이들이 먼저 자신들의 심정 속에 지옥을 만들고, 그 다음 자기 주변까지 형성해 놓는다. 악인의 파멸은 주님으로부터가 아니고 그들이 주님의 생명이 흐르는 영혼의 통로에 있는 문을 닫아걸음으로 야기되는 것이다.
그런고로 악인의 영적 죽음은 복수를 위한 처벌에 의한 것이 아니요, 더욱이 하느님의 기분 내키는 식의 규율에 의해서도 아니다. 이 죽음은 원인과 결과라는 불가피한 원리에 의한 것이다. 어떤 인간이 처벌당해졌다면, 그것은 자기 죄로 인해 당해진 것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 자기를 파괴하거나 그의 악에 의해 처벌당하는 것이다.

경향성 (tendencies)

본문의 전체적인 측면에서 근본 되는 요점은, 우리는 어떤 움직일 수 없는 고정된 성품을 상속받는게 아니라, 단지 어떤 것만을 고집 하려는 경향(tendency)과 어떤 쪽으로만 잘 기우려 하는 성향(inclination)을 상속받는다는 것이다. 이런 경향이나 성향은 우리가 발견할 수 있고 그것을 싫다 하여 거절할 수 있는 것들이다. 이렇게 거절하면, 우리는 이런 것들이 고정되고 마는 인격 속의 원리로 정착되지 않는다. 그래서 인간은 자기가 나쁜 짓을 했을 경우에서도 그 행위가 나쁜 것임을 알 수 있는 것이다. 더 나아가 자기 악을 인정하고 회개해서 개혁도 가능하다. 그러면 그는 주님에 의해 거듭 나아질 수 있게 된다. 즉 주님은 그에게 새로운 인격을 주시고 그는 이를 위해 일한다. 이런 고로 영적 삶은 유전적인 것 또는 과거 삶에 구애받지 않는다. 오로지 그것은 현재의 우리 인격에 관한 문제인 것이다.

영적인 의미

위에서 살핀 주제는 본문을 영적 의미에서 살피게 되면 예증도 할 수 있다. “설익은 (신, sour) 포도”란 들포도인데, 이 포도는 매우 신맛을 함유하고 있고, 이 맛은 신경을 자극하여 느낌을 혼란스럽게 까지 한다.
좋은 측면에서 포도란 “이웃을 사랑하라,” 또는 “이타애, charity”라는 원리로 작동되어 질 때 생산되는 삶의 실제에 있는 선을 표현한다. 거듭나는 삶 속에 있는 이런 것들은 사랑을 가지고 있어 매우 달고, 진리를 가지고 있어 아주 향기롭다. 그러나 신 포도는 나쁜 열매, 거듭나지 않고 있는 것 속의 악한 행동, 이기심이라는 예리한 산성(acid)으로 꽉 차 있어, 이 포도는 만족을 주지 못한다.

영적으로 먹음

영적으로 먹는다 함은 사용하기 위해 충당하거나 자신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 마음 안에 받아들이는 것을 말한다. 이(teeth)란 우리 몸이 음식물을 사용할 수 있게 입 속에서 붙잡아, 그것이 몸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준비시켜 주는 바, 이는 우리의 자연적인 감각들을 표현한다. 이 감각을 수단으로 우리는 정신적으로 뭔가를 붙잡고, 붙잡은 것을 조사하여 마음이 받을 수 있게 준비시킨다.
그러나 우리가 어떤 원리나 애정, 그리고 생각 등을 붙잡을 때, 그리고 이런 것들이 우리에게 심히 불일치할 때, 그것들은 마음을 반대쪽으로 끌어 당겨 우리를 흥분시킨다. 마치 설익은 포도 속의 신맛이 신경을 심하게 자극하여 이까지 시큼해지게 하는 것과 같다. 이런 현상은 거듭나는 사람이 모든 악들을 동반하는 예리하고 삐꺽거리는 거짓들과 접촉할 때 있어진다.
육체적으로 만일 누군가가 자기 이가 시큼해 있는 상태에 오래 오래 방치해 둔다면, 그는 신경과민이라는 습관을 획득하게 될 것이고, 이것이 신경과민에 잘 쏠리는 경향이 생기고, 그의 자녀에게 유전될는지도 모른다.

영적인 아버지와 아들

본문의 영적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마음에 있게 되는 전체적인 풍경을 그려보아야 할 것 같다. 영적으로 아버지란 마음 안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하는 원리들을 말한다. 이 원리는 마음에 또 다른 상태들을 생산한다. 물론, 만일 우리가 생각과 느낌에 대해 사려 깊은 감독 없이 자신의 자연적 경향에 따른다면, 자기가 느끼고 생각하는 습관 속에 자연적 경향을 고정시키고 말 것이다. 그러나 하느님의 법도에 관심을 두고, 주님이 제시한 잣대로 자신의 삶을 측정해 간다면, 생각하고 느끼는 방법을 조절하고, 변화시켜 간다. 마음속에서의 아버지란 옛 느낌이고, 이로부터 새 느낌이 파생되어 진다. 새 느낌은 아들로서 또 다른 정신적인 세대이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자신의 원리를 개선한다면, 각각의 새로운 정신적 세대는 앞선 세대보다 더 나을 것이다. 그리고 자신 속의 옛 느낌 안에 이기심이 있다면, 새 느낌 안에서는 그 이기심으로부터 자유로와져서 정신적 아들인 새 애정(affection)은 그의 아버지의 악 때문에 영적으로 죽지 않을 것이다. 그 이유는 그가 다른 성품 속에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우리는 과거에 지녔던 조건들로부터 경고를 받았기 때문이다. 그 결과 우리는 나쁜 유전적인 경향들에 저항하면서 확실히 더 나은 성품을 건설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위와 같은 변화와 건설은 때로 이기적인 우리의 느낌에서 시작되기도 하나, 점차적으로 그 느낌은 더 나은 느낌으로 변화되어, 결국 올바른 느낌에까지 이르른다. 그러면 그 느낌의 아버지, 또는 할아버지 되었었던 느낌은 비록 이기적이고 잘못된 것이었다 해도, 옛 느낌 때문에 현재의 선한 느낌은 단죄되지 않는다. 즉 “아들이 아비의 죄 때문에 죽지 않는다.”

영적인 세대

푸르퉁하고 아직 익지 않은 포도는 매우 시고 자극적이다. 그러나 사실, 시큼한 푸른 포도는 질 좋은 포도의 시작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제 아무리 잘 익고 감미로운 포도라 해도 이 시큼한 과정을 거쳐 된 것이기 때문이다. 단지 태양과 공기 그리고 비와 토양 덕분에 점차 처음의 시큼한 성질을 벗어나 잘 익고 달콤해질 때까지 성장하여 결국 포도즙이 많은 우량한 포도로 바뀐 것뿐이다. 따라서 포도가 잘 익는 단계에서 이전 단계가 지닌 특질은 이후 단계의 아버지인 셈이다.
이와 같이 되는 것이 우리 마음이기도 하다. 영적인 진보는 이 상태에서 저 상태로 계속 이어져 간다. 애정과 생각의 각 새로운 상태는 새로운 정신적인 세대로서 이 세대는 앞선 세대에 의해 탄생되어 진다. 그러면서 주님의 자비를 입어 더 개선된 조건으로 인도되어 가는 것이다.
우리가 현재 가진 자신의 느낌과 생각의 정신적인 선조를 추적해 보면 흔히 발견되는 것도 그 시작 당시의 느낌과 생각이 꽤 이기적인 어떤 것에 발단을 두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하느님의 섭리가 부드럽게 인도해 주신 덕택에 각 세대 안에 이기적인 느낌이 있는 동시에 풍미 있는 영도 소개되어져서 자신 속의 이기심을 인정하고 그 이기심을 딛고 부상해야겠다는 각오만큼 그 영은 우리의 것으로 정착된다.

예증

한 가지 예를 들어보자. 그것은 마음 안에서 있게 되는 결혼의 발전에 관해서다. 우리가 20세 안팎의 젊은 미혼 여성을 생각하면서 말할 때, 대개 그녀들에게 있는 순결함을 연상해서 그들은 매우 사랑스럽고 달콤한 매력이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영적인 매력, 달콤함의 경우, 20세 가량의 여자들은 40세 가량의 여자들 보다 그 달콤함이 훨씬 못하다. 그 이유는 40세의 여자들은 아내로서, 어머니로서, 그리고 이웃과 친구로서 그들이 타인을 위해 할 수 있었던 선을 행하면서 살아왔기 때문이다. 이런 견지에서 그 여인들은 헌신적인 사랑이라는 축복을 하늘로부터 지상에 가져다 놓은 것이기도 하다.
기뻐 어쩔 줄 모르는 신혼 첫날의 애정은 단지 시작일 뿐이다. 즉 결혼 생활을 통해 영적으로 성장해 가는 더 높아지는 영적 단계를 향한 어떤 사랑이 되어 가는 두 사람의 거듭남의 시작일 뿐인 것이다. 그리고 첫 젊은 사랑은 단지 보석을 담는 상자일 뿐이고, 그 이후에 많은 세월의 부부 생활을 거쳐 여물어지는 영적 결혼이라는 보석을 담게 된다. 이 보석만이 천국에서 영원히 빛나게 될 것이다.
아마 옛 속담 “소원은 생각의 아버지이다”에서도 영적으로 부모와 자식 관계의 원리를 찾어 볼 수 있다. 즉 바램이 마음에서 강해지면 생각이 번성하게 된다는 말이다.

“삼, 사 세대”

십계명의 말씀을 앞에서 살핀 바, 주님을 미워하는 아비의 죄는 그 후손 삼, 사대에까지 갚는다고 읽게 되고, 또 한편 고대 유대인과 근대의 성경 직역주의자들은 아담의 죄나 자기에게 가까운 선조들의 죄 때문에 있을 하느님의 분노에 떨면서 산다. 그러나 우리는 하느님의 속성, 주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천상 천하의 한 분 하느님이시요, 사랑의 하느님이신 것에 대한 지식을 사용해서 위와 같은 공포에서 보호될 수 있다.
그리고 십계명을 영적 의미로 보면, 그 계명 속에서 명령되는 아버지와 아이들은 우리 자신의 마음속에 있는 것들임을 인식한다. 그것들이란 우리 자신의 보다 이른 때와 늦은 때에 있는 정신적 조건들을 표현한다. 십계명은 외적인 부모 자식간의 유전성을 문제시하여 다루거나 우리가 어쩔 수 없이 타고난 것을 문제삼는 것이 아니다는 것, 오히려 각 개인의 정신적인 가족 관계 속에 든 현재의 조건과 성장, 즉 각자의 심정과 생각을 통치하는 원리를 문제삼고 있는 것이다. 이런 문제들은 주님의 도움을 가지고 각자가 조절 가능한 것들이다.
진정으로 사실인 바, 주님을 미워하는 이들, 즉 선함을 미워하고 악을 사랑하는 우리 속의 애정들, 그리하여 악 가운데 사는 이들이 맺는 죄악은 정신적인 세대 속에서 삼, 사대까지 이어져 내려간다. 그 이유는 그 악한 성질이 유사하게 남아 있기 때문이다. 어떤 애정이 질적인 측면에서 악한 선조와 같은 한, 당사자 자신의 성품은 똑 같은 단죄 밑에 놓여질 것이다.
표징적으로 볼 때, 3이란 진리와 관련되는 숫자인바, 그 반대 의미에서 보면, 거짓 또는 왜곡된 진리에 기초를 두는 경우에 관계된다. 4란 숫자는 선함을 표현하고, 그 반대 측면에서 악, 또는 부패된 선을 표현한다. 이러므로 죄악이 삼, 사 대까지 내려간다는 것을 영적으로 보면, 악들은 거짓 원리로부터 태어나진 모든 악한 것 안에, 그리고 악으로부터 파생된 모든 거짓된 것 안에 남아 있게 된다는 말이다. 퇴보되는 것들 속에 있는 이 두 가지 것들은 악하고 거짓된 것의 선조와 함께 죽어져야만 한다. 그 이유는 그들 아버지처럼 자식들도 영적 생명이 없기 때문이다. 하느님은 그것들까지도 파괴하시지 않으나, 그들이 그들 속에 있는 영적으로 생명 있는 것을 파괴해서 자멸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에제키엘 18장 31절에서 말씀하시기를, “거역하며 저지르던 죄악을 다 벗어버리고 새 마음을 먹고 새 뜻을 품어라. 이스라엘 족속들아. 너희가 죽다니 될 말이냐?”

27
암사자와 그 새끼 사자

성서 본문: 에제키엘 19장 1-9절

1. 너는 이스라엘 두 수령의 죽음을 애도하여 이렇게 읊어라.
2. ‘그대의 어머니는 어떤 어머니였는가?
수사자들에게 둘러 싸인 암사자 아니었는가?
젊은 사자들 틈에 누워
새끼들을 기르지 않았는가?
3. 그 길러 낸 새끼 하나가
젊은 사자 되어
사냥해 찢어 먹는 법을 익혀
사람을 잡아 먹더니,
4. 여러 민족이 함정을 파 놓고 몰아치는 바람에
거기에 빠져 코를 꿰어 에집트로 끌려 갔네.
5. 어미 사자는 어이가 없어,
바라던 일이 물거품 된 것을 보고,
새끼 가운데서 또 하나 골라
젊은 사자로 추켜 세웠지.
6. 이놈도 사자들 사이를 드나들며
제법 젊은 사자 행세를 하면서,
사냥해 찢어 먹는 법을 익혀
사람을 잡아 먹더니,
7. 궁전을 짓밟고 도시들을 폐허로 만들며
으르렁대는 소리에
온 나라가 다 벌벌 떨게 하더니,
8. 여러 민족이 사방에서 모여 와 몰아치며
그물을 그 앞에 치니,
함정에 빠져 잡히고 말았네.
9. 코를 꿰이고 철창에 갇혀
바빌론 임금에게 끌려 가
우리에 갇혔네.
다시는 그 소리 이스라엘산에
울려 퍼지지 않게 되었네.

개요

본문은 악한 애정에서 파생된 거짓 원리들의 유혹으로 말미암아 있어지는 계속적인 진리의 모독을 기술하고 있다.

글자적 의미

글자대로 보면, 이스라엘의 수령(princes)이란 이스라엘 민족의 국가에 속한 왕자와 왕들이었다. 이스라엘족 교회의 어머니는 고대 교회(Ancient Church)로서 이 교회가 더 나은 상태 때는 아주 강력했었다. 동양적 상상을 동원하면 활기에 찼던 교회가 암사자로서 표현되어 있는 것이다.
짐승들은 인간의 인격 속의 품질을 흔히 나열해 주는 바, 본문도 사람들을 표현하고 있다. 그 짐승이 표현하는 사람이 어떤 종류에 속한지 쉽게 알 수 있게 된다.
유대인들은 로마인을 두고 흔히 “짐승들”이라고 불렀고, 바울이 네로의 테러자들로부터 탈출하게 되었을 때, 그는 사자의 입에서 구원받았다고 표현한 적도 있었다. 성경에서 짐승들이 얼마나 자주 등장하는지는 우리 모두 아는 사실이다. 특히 에제키엘이나 다니엘, 그리고 계시록의 경우는 더욱 현저한데, 모두 인간의 품질을 표현해 주고 있다.

사자

어떤 강력한 개인을 사자나, 암사자로 표현하는 성경의 언급은 상당히 많다. 이는 영적으로 강력한 원리들을 명시해 준다. 한 두 군데를 들추어보자. 즉 “보아라, 사자처럼 일어나는 백성을! 사자처럼 한 번 몸을 일으키면 잡아먹지 않고는 눕지 않는구나. 잡은 짐승의 피를 다 핥지 않고는 눕지 않는구나” (민수기 23:24). “사자처럼 웅크리고 있는데, 그 사자 같은 자들을 누가 감히 건드리랴!” (민수기 24:9).
본문에 언급되는 두 새끼 사자는 역사적으로 또는 비유적으로 유다의 두 왕 여호아하즈와 여호야킴을 언급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이 두 왕은 매우 악했고, 그 야망이 탐욕적이고 앙심 깊은 우상 숭배자였던 것이다. 여호아하즈가 파라오에게 잡혀 에집트로 끌려 가 그의 통치는 막을 내렸다. 그 뒤 요시아의 또 다른 아들 여호야킴이 왕이 되었으나, 그는 느부갓네살에게 붙잡혀 바빌론으로 끌려갔다.
이런 사실들이 본문의 글자 의미에서 부각되어 두 왕자(수령)들을 위한 애가로서 불리고 있는데, 이는 넓은 측면에서 나라를 위한 애가이기도 한 것인바, 그 이유는 그 나라는 매우 부패되어 쇠약해져 큰 슬픔과 굴욕을 당해야 했기 때문이다.

표징적 그림

유다 왕국이 위의 역사 시대 보다 훨씬 나았던 시대 때가 짐승의 왕인 사자로 표현되기도 했었다. 그러나 유다의 영화는 영원히 두 조각 나고 말았다. 그 나라의 왕들은 망명 속의 포로일 뿐이었다. 여호와에 의해 심어진 고대 국가, 그분의 사랑의 섭리로 젖먹여져 길러진 그 나라가 위와 같은 꼴, 즉 백성들의 끔찍한 부패로 완벽하게 파괴된 나라로서 오늘날의 우리 눈앞에서 영화의 한 장면같이 보여지고 있다. 이러한 글자상의 역사는 악과 거짓 그리고 죄에 따른 생생한 경고의 긴 시리즈로 오늘날의 사회나 각 개인 앞에 놓여 경고를 주고 있다. 이와 같은 역사를 성경에서 언급할 때, 종종 비유적 언어를 사용함으로서 그 역사가 주는 교훈을 더욱 힘있게 전달한다.
그러나 이런 비유적인 언급, 즉 더 심오하고 영적인 인간 삶의 역사, 하느님의 사랑과 지혜가 인간의 심정과 삶을 어떻게 다루시는 가에 관한 언급, 이 언급이 머나먼 과거 시대뿐 아니라 오늘 우리 삶에서의 실용적 쓰임을 위해 비유의 언어로 놓여 있는 것은 오로지 “들을 귀가 있는” 사람에게만 전달되기 위해서다.

영적 의미

우리의 내향적 마음속에 있는 교회는 원리에 관한 우리의 체계로서, 우리는 이 원리들을 사랑하고 믿는 바, 이를 실생활에로 옮기게 된다. 이 원리들 중 어머니 역할을 하는 원칙적인 원리가 있는데, 이것이 다른 원리들을 이끌어 가면서 기타 원리들은 어머니 되는 원리에서 파생되어 나온다. 순진했던 시절에 우리 속의 어머니 되는 원리는 주님으로부터 존재한다. 그러나 우리가 인격면에서 타락되고 있다면, 어머니 되는 원리의 자식들 역시 뒤집혀 가서 결국 선조의 품질을 잃고 만다.
이스라엘에 있는 지도자들의 삶은 더욱 부패해져서 결국 주님의 교회에 있는 원리들과 정 반대 되어 그 교회는 인간의 마음속에서, 그리고 조직으로서의 나라 역시 파괴되고 말았다. 명목뿐인 교회의 지도자들 역시 감각적인 추론을 사용함으로서 그들 인격 속의 것이 뒤집어져 자연적 마음뿐인 인간이 되어 버렸다.
이런 모습이나 처지는 영 속에 있어지는 순수한 삶보다 감각적 삶을 더 선호함으로 영적 삶을 파괴하고 교회의 원리들을 전복시키는 것은 오늘날에도 모든 이들의 마음속에서 재발되고 있다.
주님 말씀 속의 강력한 진리가 인간 마음속에서 자유로이 거니는 암사자로 표현되었지만, 이 진리가 타락하는 마음속에 있을 경우 철창에 갇히고, 사슬에 묶인 사자처럼 힘이 빠진 상태가 되어지고 만다.

사자

일반적으로 사자는 힘을 표현한다. 세부적 측면에서 볼 때 이 힘은 최말단(ultimate), 즉 가장 바깥 형체에 있는 진리의 힘, 예를 들면 신성한 말씀의 글자에 있는 힘을 표현한다. 이것은 이스라엘족들에 강하게 부각되어 이끌리도록 해주었기도 하다. 가장 높은 측면에서 사자는 신성한 진리 또는 진리의 힘이라는 측면에서의 주님을 표현한다. 이런 견지에서 주님은 “유다 지파에서 난 사자”라고 불리고 있다.
암사자, 어미 사자란 선함과 하나가 되었을 때의 진리의 힘을 특별히 표현한다. 그러나 본문은 타락되는 교회를 표현하는 고로, 암사자는 위와 반대 의미인 악에서 튀어나오는 거짓의 힘을 표현하고 있다. 그 이유는 타락되는 마음은 자기 속의 선을 악으로, 진리를 거짓으로 바꾸기 때문이다. 따라서 본문의 암사자는 악과 연계된 거짓의 힘을 말한다. 타락해 가는 사람의 마음 안에서 이 힘은 주님의 교회의 원리에 지속적인 영향력을 발휘해서 그 사람 마음속에서 주님의 교회의 원리들을 파괴시키고 타인의 마음에서도 자기 영향력을 행사하려 발버둥친다.

함정과 덫

본문은 젊은 사자에 관해 언급하기를, “…여러 민족이 함정을 파 놓고 몰아치는 바람에 거기에 빠져 코를 꿰어 에집트로 끌려갔다”라고 읊고 있다. 표징적 측면에서 사자와 여러 민족간 사이의 적대 관계는 인격 속의 적대 관계, 또는 여러 민족 안의 어떤 선함 같은 것을 암시하지는 않는다. 그 이유는 여러 민족들이란 이교도 국가들로서 그들도 타락하는 삶을 표현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본문에서 두 마리의 젊은 사자와 여러 민족들의 취급은 악과 거짓의 어떤 계층이 부패된 원리의 또 다른 계층에 행동을 취하는 것을 표현하고 있다.
함정, 덫, 그물, 올가미 등등은 동물을 유인하는 방법으로 포획하는 장치들인바, 이는 외적이고 자연적인, 또는 육적인 마음속의 탐욕이 모든 느낌과 생각들을 끌어내려 타락시켜 감각적 욕구에 고정시키려는 현혹이나 꾐을 말한다. 감각적 삶 속에서 인간의 악에 대한 경향성은 그들 자신을 인간의 욕구 쪽으로 따라가도록 끌어당긴다. 마치 강물의 흐름은 그 강물 위에 떠 있는 물체를 결국 바다로 향하게 하여 파괴시키고 마는 것과 같다. 따라서 함정을 판다던가, 덫을 놓는다는 것은 세상 사랑이나 자아 사랑이 주는 기쁨을 부추겨서, 특히 자아 사랑에서 나오는 기쁨을 애호하는 자연적 감각 속의 오류를 근거로 추론하도록 꾀어서 파괴 쪽으로 몰고 가려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 속에 자연적이고 이기적인 사랑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악령들은 이런 악한 사랑들이 들썩거리도록 선동하고, 거짓 암시 같은 것으로 이기적인 사랑이 기뻐하도록 발버둥치는데, 우리 마음이 함정에 빠질 때까지 계속 진리 대신 거짓으로 선 대신 악으로부터 추론하려 든다. 그러나 함정이나 덫은 무엇보다 자신과 세상 것만을 사랑하려는 이들을 붙잡을 수 있긴 하지만, 이것들은 거듭남을 추구하는 신실한 마음까지 덫이나 함정에 걸려들게는 못한다. 그래서 아모스는 이렇게 읊는다. “사자가 잡아먹을 것이 없는데도 숲 속에서 으르렁거리겠느냐? 굴속에서 소리를 지르겠느냐? 미끼가 없는데도 새가 창애에 내려 와 걸리겠느냐? 아무 것도 걸리지 않았는데 창애가 퉁겨 오르겠느냐?” (3:4-5).
누군가를 덫에 걸리게 할 수 있었던 술책 같은 것이 진리의 지식이나 선한 삶 때문에 보호되는 사람들을 함정에 빠트릴 수 없는 것은 하늘의 비밀에 속한 것이다.

사슬 (갈고리)

젊은 사자는 사슬 또는 갈고리로 꿰여져 에집트로 끌려갔다. 들짐승을 사로잡을 때 흔히 사용되는 방법은 갈고리를 입이나 코에 꿰어서 사슬로 끌고 가는데 오늘날에도 숫소 같은 짐승을 이런 식으로 다루고 있다. 고대 시대 때는 잔인함이 흔한 일로 여겨져서 전쟁 중의 죄수들을 위와 같이 코를 꿰거나 사슬로 엮어 끌고갔던 것이다.
원래 입이나 코는 고통에 아주 민감한 반응을 보이는 부분인고로 동물이든 사람이든 코를 꿰어 끌면 쉽사리 끌려가게 된다. 이런 상태로 묶인 사람은 감각적인 기쁨의 끌어당김에 쉽게 유혹되는 마음을 표현한다. 이런 경우, 비록 코를 꿰인 사람의 마음도 위와 같은 감각적 기쁨을 탐닉함을 금해야 함을 알고 있다 해도, 자기의 자연적 경향성을 내려 누를 경우에 오는 고통을 참을 수가 없다고 느끼는 것이다.
젊은 사자가 코를 꿰어 끌려간 에집트란, 자연적 감각에 관한 지식도 진리들을 건설해 준다고 간주하는 신앙이나 생각, 그리고 기억 속에 쌓고자 자연적인 감각으로 배우려는 것을 표현한다. 이 자연적 감각들은 거짓 사상을 먹여 키우는 장소인 것이다. 그러나 자연적 감각의 오류가 파 놓은 함정에 빠진 마음은 마치 숲 속의 젊은 사자가 코를 꿰인 것과 같고, 포로된 유다의 왕이 고통받으며 토굴에 갇히는 것과 같은 것이다.

둘째 새끼 사자

암사자는 자기의 첫 새끼 사자가 되돌아오지 않자 실망해 버렸다. 이는 타락하는 마음속의 정신적인 사자들, 즉 자연적인 마음을 통해 펼치려던 힘센 거짓들은 기대된 행복을 가져오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 이유는 첫 새끼 사자가 생각의 육적 평면에 있는 감각의 오류가 파 놓은 함정에 빠졌기 때문이다. 자연 과학 같은 학문도 그것이 부패될 때는 거짓 원리 속에서 자유를 갖게 된다.
그럼에도 암사자는 또 다른 젊은 사자를 배출한다. 즉 악으로부터 오는 통치 권한이 있는 거짓이 생각의 보다 높은 평면에로 자신을 들어 올려 교회의 삶에 관해서 까지 자신의 영향력을 과시해 보겠다는 것을 말한다. 이 삶은 자연적 마음의 내면에 있는 원리들이다. 이 높은 평면에서도 역시 거짓은 포획하려는 노력과 더불어 사람까지 잡아먹는다. 즉 생각과 느낌의 보다 높은 평면에 있는 진리들과 선한 원리들을 파괴한다는 말이다. 게다가 이 젊은 사자가 안 것은 인간의 궁전을 황폐케 하는 것이다. 거짓들을 이끄는 대장격인 거짓 원리는 자연적 마음을 황폐하게 하려면 인간에게서 영적 원리들을 빼내어 못쓰게 하면 된다는 것임을 알았다는 말이다. 더욱이 성읍까지 폐허로 만드는 것까지 알았다. 즉 마음속에 있는 교회 속의 교리 즉 인간 마음속에서 선하고 진정한 원리의 주거지인 마음속에 든 교회의 교리마저 폐허로 만든다는 말이다.
이렇게 해서 본문은, “으르렁대는 소리에 온 나라가 다 벌벌 떨게 하더니…”로 이어지고 있다. 좋은 측면에서 볼 때, 온 나라, 즉 마음에 가득 차야 할 것은 신성한 말씀에 의해 진리가 풍부해진 결과 가득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자아 사랑에서 오는 악한 기쁨은 타락해 가는 마음일 경우 그 속에 든 주님의 모든 진리를 공격해서 파괴하여 주님에 대한 사랑, 이웃을 향한 사랑, 선용을 사랑하는 마음을 우선 거절하고, 그 다음 파괴시켜 버리는 것이다.

으르렁댐

사자가 으르렁대는 소리는 숲속의 소리 중에서 가장 위협적일 것이라 생각한다. 길게 내뱉는 굉장한 음량은 산들 사이에서 굴절되어 땅을 흔드는 듯 여겨질 정도이다. 이 소리는 듣는 이의 신경을 순간적으로 마비시키는 듯 해서 거의 무기력하게 하여 죽음의 공포가 흐르게 한다. 한 마디로 사람이나 짐승들에게 공포를 전달해서 당황하게 만든다.
이런 사자가 마을 주위를 맴돌고 있으면서 출입하는 사람들을 위협하고 있다고 할 때, 그 마을이 얼마나 공포 속에 있을 것인지는 쉽게 상상되리라 본다. 사자가 사람이나 짐승을 포획할 때 내는 으르렁댐은 그곳 주민들로 쉽사리 공포 속에 떨게 할 것이다. 타락한 이스라엘에 예언된 슬픔 중의 하나는 이러하다. “그래서, 사자가 숲에서 뛰어 나와 사람들을 물어 죽입니다. 벌판을 쏘다니던 늑대가 덤벼들고 표범이 성읍 밖에서 노리다가 나오는 사람을 모두 잡아갑니다. 그렇게 거역하기만 하고 그렇게 배신만 하더니 이 꼴이 되었습니다” (예레미야 5:6).
강력한 사자, 죽게 만드는 거짓이 마음속에서 우렁찬 소음을 일으켜서 영적 생명에 있는 선하고 참된 것을 송두리째 위협할 때, 주님 말씀 속의 모든 진리를 몽땅 삼키겠다 할 때, 진리를 왜곡시켜 악한 목적에 진리를 충당함으로 악한 원리를 주님 말씀으로 확증하려 들 때, 인간 마음속에서는 재난과 맞먹는 상황이 언제나 존재한다. 이런 조건 속에서 마음 전체는 전율과 불확실성이라는 공포 속에 놓이고 만다. 예를 들면, 하느님이 밝혀 주시는 도움도 없이 자신의 자연적인 추론만 가지고 모든 진리를 이해하는데 충분하다고 단정 지을 경우가 있다. 먹이를 찾아 배회하는 사자들이 기어이 먹이를 찾아내듯 이런 거짓은 영적인 파괴를 우리 마음에서 기어이 저지르고 만다. 영적으로 사자가 으르렁댐이란 모든 선함과 진리를 말살시키고자 하는 탐욕과 격렬한 열정이 쉴새없이 내뱉는 거짓들을 말한다.

둘째 새끼 사자가 잡힘

위와 같이 공포를 자아낸 사자, 타락되는 마음속에 있는 두 번째 사자 역시 그물에 걸려 함정에 빠져 바빌론으로 끌려갔다. 큰 문화를 이룬 사회라는 측면에서 바빌론은 교회를 인정하는 이들, 비록 글자적 의미 수준일지라도 주님의 말씀을 가진 이들, 그러나 인간을 통치하는 수단으로 신성한 말씀과 교회를 이용하는 이들, 그리고 주님이 자기에게 인간을 지배하도록 권세를 주었다고 선포하는 이들을 표현한다. 이들이 이런 것을 실제에 옮길 때, 그들은 교회 속에 있는 선을 뒤집고, 진리를 왜곡하는 것이다.
비인격 측면에서의 바빌론은 자아 사랑에 근거한 지배욕이라는 악한 원리를 표현한다. 그래서 철창에 갇히고 코를 꿰어 바빌론에 끌려갔다는 것은 이기적 목적을 성취해 보려고 자기 마음속에 있는 신성한 진리를 모독하도록 지배욕이라는 지옥의 영을 자기 마음에 허용함으로 자신의 삶을 부패시켜, 결국 자신 속의 이기적인 욕망의 본부인 자아 사랑의 사슬에 꼼짝 못하게 얽혀지고 마는 것을 말한다.
사자 앞에 그물을 쳤다는 것은 자아 사랑이 세상적 야망이 주는 기쁨과 그것을 탐하는 욕구라는 것을 발판으로 추론하게 유도함으로써 결국 어떤 희망도 없게 되도록, 그물 같은 체계 속에 갇히도록, 우리가 자신 속의 자아 사랑을 허용하는 것을 말한다. 그러면 우리의 “소리”는 “더 이상 이스라엘 산에 울려 퍼지지 않게” 될 것이다. 즉 우리는 세상과 자아에 속한 낮은 것에로 끌려 내려가 인간 삶의 더 높은 평면을 더 이상 생각지도 못하게 될 것이라는 말이다. 그 이유는 우리가 알고 있던 선에 관한 모든 것이 부패되었고, 진리 역시 모두 왜곡되었기 때문이다. 이에 당연히 수반되는 것은, 타락하는 마음에서는 교회 역시 파멸되고야 만다는 것이다. 우리 마음속의 이교적인 것들을 전멸시켜야 하는 이는 바로 우리들이다. 그 이유는 그것들이 우리를 함정에 빠트리기 때문이다. 시편의 두 구절로 마무리 지어 보자. “당신의 언약은 영원히 나의 유산이며 내 마음의 기쁨입니다. 당신 뜻을 따르기로 내 마음 정하였사오니 그것이 영원한 보상입니다” (119:111-112).

28
포도나무 같은 이스라엘의 어머니

성서 본문: 에제키엘 19장 10-14절

10. ‘“그대의 어머니는 물가에 심은
포도덩굴 같았지.
물이 많아 햇가지가 무성하여
송이가 소담스러웠고,
11. 세찬 가지를 뻗어
왕의 지팡이가 되었고
어찌나 키가 큰지,
탐스런 가지들 사이에서도 뛰어나고
게다가 잎 또한 무성해서 돋보이더니,
12. 뙤약볕에 뽑혀
땅에 내동댕이쳐졌네.
열풍이 불어 오니 줄기는 말라 꺾였고,
그 세차던 가지도 말라
불에 타 버리고 말았네.
13. 이제 바작바작 타들어 가는 메마른 땅,
사막에 옮겨 심었더니,
14. 그 줄기에서 불이 나
가지도 열매도 삼키고 말았네.
그 세차던 가지도 없어져
왕의 지팡이가 나지 못하게 되었네.’”

개요

영적 인간은 신성한 진리의 삶 속에 존재한다. 그러나 감각적 인간 안에서는 모든 신성한 진리가 전복되고 거절되어진다.

어머니

글자대로, 또는 역사적으로, 이스라엘 교회와 유대 교회의 어머니는 고대 교회(Ancient Church)였다. 이 교회는 영적 교회로서 합리적이고 영적인 진리들의 빛에 있게 되는 선한 삶을 원리로 삼았던 교회이다.
이 고대 교회가 좋고 풍성한 포도를 맺는 포도나무로 표현되어지고 있다. 그 이유가 포도나무는 진리가 근본 바탕이 된 영적 수준에 있는 인간의 삶을 표현하기 때문이다. 성경에서는 포도나무, 또는 포도원, 간혹 다른 나무들, 혹은 동산으로 교회가 표현되어 있다. 이사야 5장 7절의 경우, 이렇게 말해진다. “만군의 야훼의 포도밭은 이스라엘 가문이요, 주께서 사랑하시는 나무는 유다 백성이다.”
“그대의 어머니는 물가에 심은 포도덩굴 같았지. Thy mother is (or was) like a vine in thy blood”라는 구절은 글자대로 보면 출생의 때와 관계가 있다. 즉 에제키엘 16장 4-6절의 “네가 나던(태어나던) 일을 말하자면… 내가 지나가다가… 너를 보고 핏덩어리야 살아라”를 읽으면 이해된다. 그러나 피(blood)가 육체에서 순환하는 생명이듯, 영혼을 순환하는 피는 신성한 진리이다. 신성한 진리의 사랑이 영적 교회 안에 있었다. 이 사랑이 이스라엘에 의해 상속되어 그들의 경향성 속에서 발달되어 이스라엘 교회를 이룩했다.

물가 (the waters)

어머니인 영적 교회(the Spiritual Church)는 물가에 심겨졌다. 즉 풍부한 진리 가운데 설립되었다는 말이다. 물은 우리를 가르치게 되는 진리들을 표현하고, 이 진리가 우리의 자연적 마음에 의해 받아들여진다. 풍부한 진리를 가진 영적 교회는 그들이 소유한 진리에 따라 살아감으로써 선하고 의로운 삶을 꾸렸었다. 따라서 그 교회는 실제의 선함인 “송이가 소담스러웠고,” 물가에 심긴 덕분에 생각이 넓혀지고 더 성장한 바, “햇가지도 무성했다.” 그 이유가 진리에 관한 풍부한 지식은 그들로 하여금 영적 성장이 뛰어나도록 해주었기 때문이다. 즉 진리는 수단에 속하는 고로 선이 무엇을 해야 하며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알게 해주는 바, 어떻게 성장하며 결실을 거두어야 하는지 알게 해주기 때문이다는 말이다.

가지들 (rods)

“세찬 가지를 뻗어 왕의 지팡이(홀, sceptre)가 되었고…” 이를 글자대로 생각해 보면, 포도나무가 강하고 크게 자라서 지팡이나 홀을 만들 수 있는 가지가 많이 있었다는 말이다. 원래 왕의 홀(직함을 적은 패)은 단순히 왕의 지팡이 일뿐이었다.
고대 그리스에서의 판관은 이와 같은 지팡이를 자기 직책의 표시로 지니고 다녔다. 그 뒤 점차로 통치자들은 홀의 형체를 단순히 직능을 상징하는 용도로 사용해 갔다. 그래서 그들은 자기 직능의 위엄을 나타내도록 보석이나 귀금속으로 홀을 장식했다. 이런 장식을 사용하는 것은 미개한 나라에서 많았으나 문명화된 나라의 경우에도 자기가 사용하는 지팡이 등에 어떤 상징적이고 표징적인 형태를 새기는 것은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위와 같은 사실들은 지팡이, 특히 통치자의 홀 같은 것에 큰 관심이 있었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 준다. 여행 동안 사람들이 의지하게 되는 지팡이는 힘을 표현한다. 인간이 이 지팡이에 의지해서 힘을 아껴 더 버티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팡이는 나무의 일부이기 때문에 마음속에서 자라는 진리를 표현하게 된다. 따라서 나무로 된 지팡이, 또는 홀은 진리의 힘을 표현하는데, 마음은 이 힘에 의지해서 버틴다. 그리고 통치자의 홀일 경우, 그 홀은 통치자의 권력과 권위에 대한 상징물이다. 그래서 신정 시대(the theocracy) 때의 경우, 통치자는 주님에 의해 뽑혀졌으므로 그의 홀은 신성한 권능을 표현했고 신성한 이름과 권능 하에 인간 통치자는 자기 지위를 지탱했다.
포도나무가 위와 같은 가지들을 많이 가졌다는 사실은 영적 교회가 그 교회의 내향적 원리나 행동을 위한 바깥쪽 통치라는 양 측면에 응용할 수 있는 신성한 진리에 관한 지식에서 오는 풍부한 힘을 부여받았다는 것을 표현하고 있다. 이런 견지에서 성경의 글자는 인간 삶의 실용적 측면인 일상 생활을 위해 위대한 지팡이인 것이다.

탐스런 가지(굵은 가지, the thick branches)

그러나 이 포도나무는 “탐스런 가지들 사이에서도 뛰어났다.” 즉 영적 교회는 지적으로 잘 성장해 갔으나, 지적인 자신을 두고 우쭐대었다는 말이다. 영적 교회인들은 자신이 총명해지는 것을 무척 사랑해 갔는데, 급기야 그들은 주님의 진리가 모든 인간 총명의 근원인 것을 잊어버리는 데까지 이르고야 말았다. 즉 그들은 자신 속의 총명의 근원이 자신들인 냥 착각하고야 말았다. 그래서 그들은 자아 총명을 자랑함으로 자신을 우뚝 세웠던 것이다.
본문에서 언급되는 “탐스런 가지들, the thick branches, 많은 가지들”이란 서로 뒤엉킨 상태의 가지들을 말한다. 이런 상황에서 이 포도나무는 빼어나게 크게 보였다.
일종의 그물망과도 같이 서로 얽혀서 두툼해진 가지들이란 자연적 마음 안에서 많은 생각들이 더 팽창되어 생각 속에 또 생각이 포개지고 포개지듯하여 비비꼬인 다발이 되어 버린 것을 표현한다. 따라서 이 마음은 생각들이 뒤엉켜져서 결국 서로 혼잡을 이루다 못해 명백히 해주어야 할 총명마저 상실하고 만다. 예를 들면, 자기를 추켜세우는 무신론자의 경우, 그는 자기 총명을 최고의 것으로 간주해서 어떤 영적 의문도 신성한 말씀의 도움도 없이 다 답변할 능력이 자기에게 있다고 생각하는 바, 결국 그의 생각은 뒤엉켜져서 그의 속에 있는 많은 거짓 관념과 뒤섞이고 만다.
영적 인간은 양심을 그의 마음 안에 형성하여 가지고 있고, 이 양심은 어릴적부터 조금씩 발달하는데, 선생이나 부모, 기타 다른 이들에 의해, 후에는 교회의 교리에 의해 발달되어진다. 그러나 진리의 원리들에 대한 명백한 개념이 없는 이상, 그는 자기가 아는 교리들을 자기의 감각들을 통해 획득한 사물에 대한 지식으로 확증해야 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그가 올바르지 못한 자연적 사상을 받는 상태라면 그의 사상은 감각에서 오는 오류와 거짓된 것들의 혼합으로 그의 마음은 서로 뒤엉켜지게 되어 그 속에 들어 있는 진리마저 파괴되고 만다. 더욱이 자기는 아는 것이 많아 총명하다고 하여 자기 마음을 추켜세우려 할 때, 그는 자기 총명까지 파괴할 것들과 뒤엉켜지고 마는 실수를 범한다.
이런 모습은 타락되는 영적 교회 또는 오늘날 이와 비슷한 정신적 조건에 있는 사람들의 경우에 해당된다. 좋은 영적 조건을 지닌 사람들은 신성한 진리를 받아 매일의 생활에 응용해 간다. 그러나 자아를 찬양하려 드는 사람은 신성한 진리를 뒤집고 거절하는데, 그 이유는 자신 속에서 파생된 관념들이 주님의 가르침에 동의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에 더하여 있게 될 상황들이 본문의 포도나무에서 일어나는 것들로 표현되고 있다.

뽑힘

“뙤약볕에 뽑혀 땅에 내동댕이쳐졌네. 열풍(동풍)이 불어오니 줄기는 말라 꺾였고…” 타락하는 마음속에는 분노로 인해 그 마음에 심겨진 진리가 뽑혀 내던져 진다. 즉 그 진리들은 인간의 자아 사랑에 반대되므로 분노가 치밀어 진리가 뽑혀진다는 말이다.
“열풍(동풍)이 불어오니 줄기는 말라 꺾였고, the East Wind dried up her fruit. 그 열매는 동풍에 마르고.” 바람이 분다는 것은 좋은 의미에서 보면, 진리의 적극적인 영향이나 작용을 표현하나, 나쁜 의미의 경우, 마음에서 일어나는 거짓 원리들의 활동을 말한다. 태양이 뜨는 동쪽 역시 좋은 의미로는 주님을 표현하지만, 반대 의미로는 자아 사랑이고 타락하는 마음속에서는 이 사랑이 주님 대신 들어앉는다.
따라서 나쁜 의미에서의 동풍이란 악에서 온 거짓들이고, 이 거짓이 마음속에 있는 선하고 참된 것을 흐트리고 파괴한다. 그리고 악의 모든 탐욕을 부추긴다. 이런 정신적 조건에 처하면 정신적 포도나무가 제 아무리 세찬 가지였다 해도 부러지고 시들어진다. 그 이유는 그 마음에 생명이 없기 때문이다. 즉 교회 속의 진리가 파괴되어져 그 마음은 지옥에 저항할 힘이 결여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면 지옥적인 “불”은 자아 사랑의 악 속에서 그 모든 것을 태워 버린다. 이리하여 이스라엘 교회는 파괴됐는데, 그 파괴는 신성한 진리의 거절과 전복에 의한 것이다.

역사적 의미

유다 왕국의 파괴는 글자대로 느부갓네살의 정복을 통해 이루어져 백성들은 바빌론으로 끌려가고 말았다. 역사적으로 고대 교회는 무성하게 자라고 풍성한 포도를 맺는 훌륭한 포도나무 같았다. 게다가 많은 지식으로 그 교회는 채워졌었다. 지팡이나 홀이 됨직한 많은 가지들이란 신성한 법을 배운 많은 현자들이다. 이들은 교회나 어떤 지역들을 슬기롭게 통치할 수 있었다. 그러나 타락해 가는 이스라엘과 유다 왕국 시대 때에 느부갓네살은 회오리바람과도 같이 들이닥쳐 그들을 끌고 가 버린 것이다. 그리하여 영광이 있던 그들의 역사는 닫히게 되어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더 이상 과거 같은 국가도 없이 지상의 여러 민족 속에 흩어졌고 그들의 영광스러운 예루살렘은 그 황폐해진 것만이 알려지게 됐던 것이다.

광야

“이제 바삭 바삭 타 들어가는 메마른 땅 사막(광야)에 옮겨 심었더니…” 광야란 생명이 없는 곳이다. 그래서 광야는 생명 있는 원리인 주님으로부터 온 선함과 진리가 없는 마음을 표현한다. 악과 거짓 속으로 타락해 가는 교회 또는 마음은 생명을 줄 만한 것이 하나도 없는 영적인 광야 그 자체에 심겨진 바 된다.
그래서 악한 자아 사랑의 불은 거짓과 뒤엉킨 포도나무 가지까지 번져 가서 새 삶의 시작이 되고 천국적 삶을 발달시켜 줄 지식들인 마음 안에 있는 거듭나는 사랑, 지혜, 선용이라는 열매까지 삼키고 만다.
타락하는 과정에 있는 이 정신적인 포도나무는 왕의 지팡이가 될 튼튼한 가지를 더 이상 가질 수 없게 된다. 그 마음은 더 이상 신성한 진리의 실용적인 힘에 관한 지식이 없게 된다는 말이다. 사실 인간은 이 지식에 기대어야만이 영적으로나 자연적으로나 자기 삶의 원리와 행동 지침을 찾아 낼 수 있고 자신을 지배할 힘도 거기에서 나오고 삶의 낮은 수준을 지배하는 거듭남의 실제를 위한 계발된 영이 가지는 총명까지 가능하지만 이런 모든 것이 깡그리 사라진다는 말이다.
마음 안에 있는, “자아를 확신하게 하는 사랑의 추론,” 이것이 인간으로 주님의 것을 지각하도록 마음 문을 열게 하고 주님의 것을 사랑해서 채택하도록 하지만, 타락되는 마음일 경우 그 속에서의 이 추론은 힘을 상실해서 사랑과 지혜의 품질에 대한 인식이 없게 된다. 신성한 진리, 그 진리의 영의 측면이든 글자적 형태로 이든 선한 자에게는 그가 의지할 지팡이이지만, 악한 자에게는 아무 쓸모 없는 것으로 보인다.

황폐함

본문은 신성한 진리를 흠모하기를 중단해 버린 마음을 표징적으로 그리고 있다. 이런 마음은 주님에게서 흘러나오는 모든 영적 선과 진리를 마음이라는 영토에서 몰아낸다. 그러므로 이런 마음은 영적 생명에 속한 것을 받는 데에서나, 또는 영적 죽음에 저항해 보려는 쪽이든지, 어느 쪽에서든지 아무런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그런 마음의 영역에는 오로지 지독한 허무주의, 불합리한 폭력적 혁명의 발생, 사악함뿐인 파괴주의 같은 것만 팽배해질 뿐, 무한하게 선하신 사랑의 하느님이 인간의 삶과 심정에 쏟아 부어 주시려 하는 모든 것을 자기 근처에도 접근 못하게 훼방할 뿐인 것이다.
그래서 “어리석은 자가 자기 심중에 대고 하는 말, 하느님은 안 계신다.” 이렇게 말한 그는 하느님이 안 계시는 우주에서 살아 보려고 그의 하찮은 노력을 경주해서 자기속 우주로부터서도 하느님을 몰아내려고 한다. 이렇게 발버둥친 그의 인간 삶이란 황량한 슬픔만 생산하여 그의 바깥쪽은 사막이고 그의 안쪽은 지옥이라는 죽음의 광야에 자신 스스로 목 매이게 한다.

애가

위와 같은 광야가 “애가”라고, 인간이 소유 가능한 천국을 잃어버린데 대한 “애가”라고 불리는 것은 하등 이상할 일이 아니다. 악인은 천국을 신중하고도 결정적으로 거절하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의 왕들”은 연기 속에 빨려들듯 희미함 속으로 사라졌다. 여호와에 의해, 그분의 경이로운 역사로 건설된 다윗의 계보는 망해야 할 시기도 되지 못해 부패와 우상 숭배로 인해, 꺼질 줄 모르는 죄악들을 통해 오래 전에 일찌감치 막을 내렸다. 유다 왕국의 몰락은 결코 회복될 수 없는 왕조의 몰락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그런 사항은 역사적 사항이고, 마지막으로 회복된 것은 표징적 측면, 또는 영적 측면에서의 회복인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에서 가능했고 이분이야말로 다윗의 계보 이스라엘의 진정한 왕이시다.
이런 측면에서 우리로 알게 해주는 것은 주님의 무한하신 사랑은 거듭 인간에게 다가와서 각 개인이나 인류에게 영적이고 천국적인 생명의 축복을 주시려 애쓰신다는 것일게다.
지나 가버린 시대의 역사를 반영해 볼 때, 우리로 조심스럽게 기억하도록 하는 것은, 위와 같은 역사적 사항들이 거룩한 성경 안에 서술되어 있다는 것과, 그것들을 우리가 거울로서 삼아 각자 자신 속을 들여다보는 기회로 삼아야 할 것이다는 것이다. 고대 이스라엘 속에 있던 감각적이고 자만으로 꽉 찬 지옥의 영은 이 세상을 활보하면서, 동시에 우리의 자연적 마음에 있는 유전적 경향성 속에 매복되어 있다는 사실, 그리고 틈만 엿보이면 우리를 꾀어내려 한다는 것을 거듭 상기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우리의 고난, 슬픔, 투쟁, 고통 등등, 이 지상의 삶인 자연적 삶의 모든 국면에 걸쳐 있는 우리가 피했으면 하는 것들 모두는 오로지 각자 속의 자연적 경향성이 발동되어 오는 오히려 피할 수 없는 결과임을 인식해야 한다. 오늘도 주님은 더 강한 팔로, 더 많은 사랑으로 오래 전 이스라엘에게 말하셨듯 말하신다. “야훼의 손이 짧아서 구해 내지 못하시겠느냐? 귀가 어두워서 듣지 못하시겠느냐? 너희가 악해서 너희와 하나님 사이가 갈라진 것이다. 너희가 잘못해서 하느님의 얼굴을 가리워 너희 청을 들으실 수 없게 된 것이다” (이사야 59:1-2).
그러나 우리의 마음이 그분에게 머물고 있을 경우, 그분은 우리로 완전한 평화에 머물도록 해주실 것이리라.

29
끓고 있는 고기 가마

성서 본문: 에제키엘 24장 3-12절

3. 이 반역하는 족속이 어찌 될 것인지 비유를 베풀어 일러 주어라. ‘주 야훼가 말한다.
솥을 걸어 놓고 물을 부은 다음
고기를 썰어 넣어라.
4. 좋은 고기를 다 썰어 넣어라.
넓적다리, 등심을 썰어 넣어라.
5. 양도 살진 것을 골라 잡아 넣고
밑에 장작불을 지펴
뼈까지 흐물흐물하게 되도록 푹 삶아라.
6. 주 야훼가 말한다.
무죄한 피를 흘린 이 망할 도성,
뻘겋게 녹이 슨 솥,
닦아 낼 수 없이 녹이 슬었으니,
그 안에 들어 있는 고기를
한 점 남기지 말고 꺼내어라.
주사위를 던져 골라 낼 것도 없다.
7. 이 도성 안에서 참으로 무죄한 피가 흘렀다.
맨바위 위에 뿌려졌다.
흙으로 덮어 버릴 수 있도록 땅에 흘리지도 않았다.
8. 진노하여 그 원수를 갚을 셈으로 내가
덮어 버릴 수 없도록 바위 위에 뿌리게 하였다.
9. 주 야훼가 말한다.
죄 없는 피를 흘린 이 망할 도성,
장작 더미를 가려 놓을 터이니,
10. 나무를 많이 넣고 불을 지펴라.
고기를 푹 삶아서 국물을 쏟아 버리고 뼈는 태운 다음
11. 솥을 숯불에 올려 놓아 달구어라.
놋쇠가 달아 속에 있는 더러운 것이 타고
녹이 다 가시게 하여라.
12. 아무리 해 보아도, 아무리 불에 올려 놓고 달구어도 녹은 가시지 않았다.

개요

주님은 만민을 거듭나게 하시려고 온갖 노력을 경주하신다. 그러나 자신을 악과 거짓으로 확증해 놓은 이들은 거듭날 수 없다. 그 이유는 그들이 자기들의 악을 기꺼이 내던지지 않기 때문이다.

본문의 글자적 의미

본문은 예루살렘 성과 그 백성들이 끊고 있는 고기 솥이라고 비유로 말하고 있다. 이 비유의 근원은 유대인들 자신이 뱉어 놓은 말에 있었음을 에제키엘 11장 3절에서 살펴볼 수 있다. 이 구절에서, 예언자가 곤경이 닥칠 것임을 지도자들에게 말해 주자, 그들이 수군거리는 말은, “집을 지어 놓았었다. 우리는 냄비 속에 고이 담겨 있는 살점 아니냐?” 는 그들의 말을 주님께서 비유로 쓰신 것이다.
이 당시 바빌론 왕은 예루살렘을 포위 공격하고 있었다. 솥 안에 든 살점들은 솥 밑에서 타고 있는 불로부터 당장은 안전한 듯 여겨질 것이나, 그것들은 솥 안에 담긴 상태인지라 꼼짝할 수 없는 것이 흠이다. 이와 같은 포위 공격받는 예루살렘 성내의 백성들은 성곽 덕분에 안전하다고 우선 안심할는지 모른다. 그러나 자기들을 안전하게 해준 성벽은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도 장애물이어서 어디로든 피할 수 없게 되어 있어, 한편으로 성을 공격하는 적에게 꼼짝못하게 되어 있다.
솥 안의 내용물이 끊고 있을 경우, 그 속의 찌꺼기 같은 물질은 끓는 표면 위로 부상하게 된다. 이 때 우리는 그 찌꺼기를 걷어 내어 줌으로 내용물이 넘치지 않게 한다. 그러나 이런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내버려두면 내용물이 다량으로 넘치게 되어 쉽게 태워지고, 물이 없는 가마솥 역시 불에 달구어져 구멍이 나기 마련이다.

풍자적 의미

본문은 예루살렘이 완전히 파괴되는 모습을 풍자적으로 그리고 있다. 그 성과 백성은 독 안에 든 쥐의 꼴이라는 그림이다. 본문의 예언자는 고기와 뼈까지 솥에 넣어 끓이라고 지시 받고 있다. 게다가 펄펄 끓어 넘치도록 하여 아무 것도 없게 하라고 지시되고 있다. 그 다음 놋쇠솥 자체가 달구어져 파괴되게 하라고 말해지고 있다. 이런 상황은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을 공격하는 역사적 사실로 판명되었는 바, 다음 구절을 읽어보자. “바빌론 왕 느부갓네살 제 십 구 년 오월 칠일, 바빌론 왕의 친위 대장 느부사라단이 예루살렘에 들어와 야훼의 전과 왕궁과 예루살렘 성 안 건물을 모두 불태웠다. 큰집은 모두 불탔다. 친위 대장을 따르는 바빌론 군인들은 예루살렘을 둘러싸고 있는 성벽을 죄다 허물어 버렸다” (열왕기하 25:8-10).

계시

우리가 주목해 볼 것은, 바빌론 왕이 예루살렘을 처리하는 모습을 주님께서 에제키엘에게 밝히 보여주셨다는 점이다. 25장 첫 두절에서 이렇게 언급하고 있다. “야훼의 말씀이 나에게 내렸다. 때는 제 구 년 시월 십일이었다. 너 사람아, 오늘 날짜, 바로 오늘 날짜를 기록해 두어라. 이 날은 바빌론 왕이 예루살렘 공격을 개시하는 날이다.”
이 당시 에제키엘은 아라비아 사막을 가로질러 500마일 이상 예루살렘에서 떨어진 곳에 포로로 가 있던 때였다. 그 당시에는 소식을 즉각 알려줄 전화 같은 통신 수단이 전혀 없을 때이다. 그러나 위와 같이 주님께서 에제키엘에게 알려준 날짜는 열왕기하 25장 1절의 기록으로 충분한 확증을 우리로 가질 수 있게 해주고 있다. 즉 “바빌론 왕 느부갓네살은 시드키야왕 구 년 시월 십일, 전군을 이끌고 예루살렘을 침공하여 성을 포위하고 사면에 토성을 쌓았다.”

예언

여호와께서는 에제키엘을 통해 반역만 일삼는 이스라엘 가문이 머지 않아 황폐되고 말리라고 예언하셨다. 이 예언이 표현적 형상, 즉 끓고 있는 고기 가마로 주어지게 되었는데, 이에는 두 가지 목적이 있다. 첫째는 유대인들의 마음에 그분의 경고가 인상깊어지게 하시려는 것, 둘째는 이 예언에 담긴 영적 의미를 읽을 수 있는 이들에게 영적 진리를 밝혀 주시면서, 동시에 경고를 해주기 위해서이다.
이와 비슷한 예언이 예레미야의 선교 초기에도 있었다. 예레미야 1장 13, 14절을 보면, “야훼께서는 두 번째로 이렇게 말씀을 내리셨다. ‘이번에는 무엇이 보이느냐?’ ‘부글부글 끓는 솥물이 북쪽에서 쏟아져 내리려 하고 있습니다’ 하고 내가 대답하였더니 야훼께서 이르셨다. ‘이 나라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북녘에서 재앙이 쏟아져 내리리라.”
유대인들은 자기들이 여호와께서 선택하신 백성이라고… 그분의 거룩한 성전이 자기들에게 있다고.. 그분의 거룩한 말씀, 율례, 규정 등등을 자기들이 소유하고 있다고 자랑하여 떠벌렸다. 그러나 타락하는 백성이 지닌 인격은 그들이 자랑했던 모든 것을 보존할 수 없었다. 그 이유는 그들이 하느님의 법칙을 준수함에 있어 원리면에서나 형식면에서나 공히 거절했기 때문이다. 주님의 진리를 소유한 그 자체만 가지고는 어떤 악한 인간도 구원될 수 없다. 마치 태양의 빛이 소경에게는 아무 소용도 없는 것과 같다.

찌꺼기 (scum, 녹)

도시 안에 있는 저질의 사람들을 흔히 “찌꺼기”들이라 부르는데, 그 이유가 그들은 범죄를 일으킬 경향이 짙기 때문이다. 이들은 도시가 조금만 소란해져도 그 틈을 즉각 이용해서 남에게 피해를 주게 된다. 더욱이 주민 대다수가 위와 같은 저질일 경우 그 도시는 송두리째 도덕적으로, 영적으로, 아예 형태 자체까지 파괴에 이르고야 만다.
한 때 막강한 군사력으로 큰 도시를 이루어 그 일대의 중심으로 부상했던 고대 나라들의 경우, 그들 백성들이 타락하여 악덕 속에 푹 잠길 때 타 국가에 의해 쉽게 정복당하고 말았다. 고고학자들의 노력으로 발굴되는 고대 도시들의 경우 이런 예가 많은데, 아직도 역사적으로 전혀 알려지지 않은 위와 같은 대도시들이 더 있을는지 모른다.
모든 시대를 망라하는 지상의 역사에서 위와 같은 역사는 되풀이 되고 있다. 인간의 발전과 행복을 위한 가장 항구적인 요소는 인격의 거듭남밖에 없다. 시간은 오고 간다. 나라들은 일어섰다가 몰락한다. 인류는 진보하기도 하고 퇴보도 한다. 이런 상태의 변화 속에 인격의 수준은 상승되기도 하고 밑으로 처지기도 한다.

영적 의미들

고대 유대인들은 자기들에게 보내진 표현적 예언들로부터 인격의 진보 역시 가능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오늘날의 우리에게도 본문의 경고, 가르침의 필요성은 고대의 유대인들이나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만일 “성령이 교회에 하는 말을 들을 귀 있어 듣는다”면, 성경의 글자 속에서 더 심오한 영적 진리를 보게 되어, 성경이 단지 어떤 역사 사실만을 언급하는게 아니라 신성한 원리, 즉 모든 인간에게 영적으로 응용 가능한 원리들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게 된다.
우리 각자는 자기 속에 거룩한 성 예루살렘을 가지고 있다. 다시 말해 각자의 마음속에는 진리의 체계가 건설되어 있고 그 안에 애정과 생각들이 거주한다. 이 영적 예루살렘에 사랑의 주님은 신성한 모든 진리를 건설하시고, 각자의 심정과 행동 지침에 모든 선한 원리들을 건설해 주시려 노력하신다. 그래서 만일 우리가 주님께서 우리 속에 건설해 주신 정신적인 예루살렘 안에서 살게 된다면, “네 눈은 아늑한 보금자리, 옮겨지지 않을 성막, 예루살렘을 보리라. 그 말뚝이 다시는 뽑히지 아니하고 그 줄 하나도 끊어지지 아니하리라. 야훼께로부터 한 시내가 흘러 우리의 기쁨이 되리라. 노젓는 큰 배는 들어오지 못하고 장엄한 배는 얼씬도 못하리라” (이사야 33:20,21). 그리고, “예루살렘을 위하여 평화의 소리 외쳐라. ‘네 집안에 평화!’ ‘네 성안에 평화!’ ‘궁궐 안에 평화!’”(시편 122:6,7)를 누리게 될 것이리라.
그러나 우리가 타락하고 있다면, 우리 속의 정신적인 예루살렘은 반역적인 집, 심정이나 행동에서 신성한 원리에 반대되게 사는 자가 될 것이다. 이런 우리의 모습이 본문이나 본문 뒤에 따르는 바와 같이 나타난다.

고기 가마

음식 또는 액체를 담기 위해 움푹 들어간 그릇은 교리를 표현한다. 이 교리들이 음식물과 그릇의 관계와도 같이 인간 마음에도 작용한다. 진정한 모든 교리는 선함과 진리를 담는 정신적인 그릇이다. 물은 그 자체로 볼 때 어떤 형체가 없다. 그러나 물을 담는 그릇은 물에 형체를 주게 된다. 따라서 물을 사용하려면 물은 그릇에 담겨져야 한다. 이와 같이 진리는 교리 속에서 형체를 취해야 하는 바, 그 이유는 교리가 진리를 서술해 주어 진리가 어떤 생김새인지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이러므로 음식을 요리하는 냄비, 솥, 가마 등등도 교리를 표현한다. 물은 자연적인 진리를 표현한다. 이 진리는 자연적인 마음에 의해 보여져 응용된 진리를 말한다. 단단한 음식은 실제에 있는 선함을 표현하는데, 진리라는 물이 사랑이라는 불에 의해 끓여져 요동할 때 정신적인 사용을 위해 준비되어져야만 한다.
본문에서 언급되는 고기 가마(솥)는 구리로 만든 가마(솥)이다. 구리(brass)는 자연적인 선, 자연적인 마음으로 볼 수 있는 선, 바깥 형체에 있는 선을 표현한다. 그러나 타락하는 마음속에서 선함에 관한 자연적인 사상은 금으로 표현되는 천국적인 선함의 형체와는 아주 다르다. 구리도 광을 냈을 경우 잠깐 동안 금과 비슷하게 보일는지도 모르나, 금과 구리의 품질은 아주 다르다. 이와 같이 자연적 수준의 선함과 천국적 수준의 선함은 그 품질이 매우 다르다.
솥을 걸어 놓는다는 것은 솥 안의 내용물을 끓이기 위해 불 위에 솥을 놓는 것이다. 이는 우리가 어떤 문제를 해결하려고 자기의 애정을 적용할 때를 말하는데, 이 때 우리는 일상 생활에서 실제의 형체로 자신의 선함과 진리를 가져다 놓게 된다. 솥 안에 들어가는 “좋은 조각”들이란 정신적인 사용을 위한 제각기 다른 선을 표현하고 있다. 그래서 “넓적 다리, 어깨, 뼈들”이란 정신적 삶의 제각기 다른 분과, 즉 천적, 영적, 그리고 자연적 분과에 응용할 수 있는 제각기 다른 선함들을 표현해 준다. 넓적 다리(thigh)는 천적 사랑의 선, 특별히 순수한 결혼적 사랑을 표현한다.
어깨(shoulder), 이를 가지고 인간이 밀어붙이는 바 힘을 표현한다. 정신적 힘이 삶에서 발휘될 수 있는 것은 자신이 아는 진리를 수단으로 이루어지는 바, 어깨는 영적 수준을 표현한다. 이 수준의 근본 되는 요소는 진리요, 이 수준에서 나오는 선은 진리로부터의 선이다. 다시 말해 진리를 사랑하고 진리를 실제에 사용함으로 생산되는 선인 것이다. 그러나 뼈들, 이는 육체의 부분 중 부드러운 살과는 달리 덜 생명이 있는 바, 이는 자연적 수준을 표현한다. 이 수준은 행동 지침의 외적 선에 해당되므로, 각 인격의 골격을 이루고, 이를 수단으로 인간은 설 수 있고 움직일 수도 있다. 위 세 가지 선, 즉 사랑의 선, 진리의 선, 행동의 선 모두는 매일 우리들의 양식을 위해 정신적 가마솥 안에 놓여지는 것이다.

뒤집혀지고 부패됨

그런데 본문에서 언급되는 고기 가마솥은 사악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사용했던 가마이다. 그들이 선하고 진정한 모든 원리들을 남용함으로 해서 그들은 진리와 선 그리고 정의를, 악과 거짓 그리고 죄악들로 뒤집어 놓아 썩게 만들었다. 이리하여 본문에서 이들을 두고 “피를 흘린 도성”이라고 말해지고 있다. 이는 글자대로만 보아도 악하고, 잔인하고, 살인적인 사람들을 뜻함은 금방 알 수 있다.
좋은 의미에서 피는 신성한 진리를 표현한다. 육체 속에서 피가 각처를 순환하면서 생명을 공급하여 건강한 육체를 유지시키듯, 거듭나는 마음속을 영적 생명은 순환한다. 그러나 인간이 신성한 진리를 뒤집고, 진리의 영을 거절할 때, 내향의 생명은 신성한 진리에 의해 지탱되는 것이 아니라, 이기적인 악한 거짓에 의해 순환될 뿐이다. 따라서 정신적인 인간의 가마솥은 찌꺼기들로 덮어지고 만다. 정신적인 찌꺼기는 이기심 속의 추잡한 사랑에 의해 생겨난다. 가마솥 안의 찌꺼기, 그것이 넘쳐 나거나, 벗겨지지 않으면, 가마솥의 내용물을 더 더럽게 한다. 이와 같이 불결한 이기적 사랑이라는 찌꺼기, 그것의 본성이 어떠한지 알아차려 제거치 않으면 인간 마음속에 있는 모든 선함과 진리는 더럽혀 지고 만다.
그래서 끓고 있는 동안, 즉 우리의 심정이 일상 생활에서 실제의 사용을 위해 자신의 애정과 생각을 준비하는 동안, 정신 속의 찌꺼기가 마음의 표면 위로 떠올라 우리로 인식할 수 있게 섭리되어 있다. 다시 말해, 자기 속의 찌꺼기가 무엇인지, 그것은 쓸모 없는 것인 고로 걷어 내야 한다는 것을 제 눈으로 보고 알아채도록 의도되어 있다는 말이다.
각자의 생활 체험은 자기 속에 있는 자연적인 유전적 경향성을 관찰할 기회를 제공하여 각자의 불순한 경향성들을 자기 마음에서 치워 내야 한다는 것, 그렇지 않으면 그것들이 자기 인격 속에 고착되고 말리라는 것을 알게끔 설계되어 있다. 그것이 자기 마음에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을 때, 전 인격은 서서히, 혹은 빠르게 불순해져 악한 인격으로 만들어진다. 정신적으로나, 물질적으로나, 자기 속의 불순한 찌꺼기들을 거절하고 제거시키는 작업은 자기의 가마솥의 내용물이 끓고 있는 동안 각자가 해야 할 아주 중요한 책무이다.
지상의 삶 속에 있는 시련이나 고난은 정신적 삶에서 뒤엉켜 있는 선과 악이 분리되는 것을 도와준다. 따라서 시련이나 고난의 시기가 올바르게 이용된다면, 우리 속의 정신적 표면 위에 둥둥 뜨는 찌꺼기들을 걷어 내는데 바람직하게 이용된다. 그러나 악한 마음일 경우, 찌꺼기는 언제나 남아 있게 되는데, 그 이유는 그 마음 자체가 자신 속의 불순물을 자기 생명의 필수 요소로 느껴 사랑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자기 속의 찌꺼기는 인격의 본체와 뒤섞여 늘어붙는 바, 그의 인격은 더러운 채로 남아있게 된다.
본문 뒷부분은 더러운 것(filthiness)과 찌꺼기(scum)를 구별해서 언급하는데, 더러운 것은 악을, 찌꺼기는 거짓을 표현한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어서, 피에 관련된 율법은 아주 엄격했다. 그 이유가, 신체적으로 피가 육체의 생명이듯, 마음의 생명을 표현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스라엘 족의 남자들은 피를 취급함에 어떤 부주의도 허용되지 않았었다. 그들이 피를 쏟으려면 땅에 쏟고 흙으로 덮어서 피가 땅에 스며들게 하도록 명령되어 결코 공기 중에 노출시켜 부패시키지 않도록 되어 있었다.
본문에서 이스라엘 백성에 관해 말하는 바, 그들은 피를 조심스럽게 흙으로 덮기는커녕, 이중적으로 과시하고자 바위 위에 뿌려 태양과 공기에 노출시켜 부패시켰다. 이런 짓들은 주님 보시기에 아주 역겨운 형태였다. 그 이유가 이 형태는 바위로 표현되는 신성한 말씀 안의 진리에 의거 악과 거짓을 추구함으로, 자신 속의 악과 거짓을 더욱 자랑함으로 하늘 면전에다 악과 거짓을 드러내는 악인의 노골적이고 대담한 행동을 표현해 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악은 거룩한 장소에서 자신을 드러내고, 더욱이 신성한 법에 의거 그 자체가 의롭다고 떠벌릴 정도로 뻔뻔하다.

가마솥을 태움

위와 같은 신성모독(desecration)의 형태는 악한 목적에 충당코자 교리를 뒤집는 마음속에서 모든 진정한 교리를 파괴한다는 것을 살폈다. 이런 모습들이 비유에서 고기 가마 속의 내용물과 찌꺼기(녹)까지 태워 버릴 뿐더러 가마솥에 불을 더 놓아서 놋가마 자체가 솥에 늘어붙는 찌꺼기와 함께 모두 파괴되게 하라고 말하는 사실로 표현되고 있다. 악과 거짓은 모든 영적인 것을 파괴하되, 어떤 영적 생명도 남지 못하도록 철저한 파괴를 가져다준다. 그래서 본문의 마지막 절은, “아무리 해 보아도, 아무리 불에 올려놓고 달구어도 녹(찌꺼기)은 가시지 않았다”라고 말하고 있다. 이는 자신 속의 악과 거짓을 결코 포기치 못하는 인간들에 대한 슬픈 운명이요, 이는 영적 죽음으로 치닫아 자아 사랑이라는 지옥의 불이 그 속의 거짓이라는 더러운 찌꺼기와 더불어 언제나 혼합되어 있게 된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지금도 이렇게 말씀하신다. “나는 너희 하나 하나를 너희의 행실대로 다스리리라… 너희의 행실을 고쳐라… 그래야 올가미에 걸려 망하지 아니할 것이다… 너희가 죽다니 될 말이냐? 죽을 죄를 지은 사람이라도 사람이 죽는 것은 나의 마음에 언짢다… 살려느냐? 마음을 고쳐라” (에제키엘 18:30-32).

30
레바논의 아시리아 송백

성서 본문: 에제키엘 31장 3-12절 (* 표준 새번역 참조 *)

3. 아시리아는 한 때 레바논의 송백이었다. 가지가 멋지게 우거져 그늘이 좋고 키가 우뚝 솟아 꼭대기 가지는 구름을 뚫고 뻗었다.
4. 너는 물을 먹고 크게 자랐고 지하수를 빨아 치솟았다.
네가 선 주위로는 강물이 돌고
도랑물이 흘러 들나무를 모두 적셨다.
5. 그래서 너는 들의 어떤 나무보다 키가 컸다.
그 많은 굵은 가지에
가지들이 무성하게 뻗은 것은
물이 많아서 잘 자란 탓이었다.
6. 그 가지들에 하늘의 새들이 깃들였고
우거진 가지들 밑에서 온갖 들짐승들이 새끼를 쳤으며
그 그늘 밑에 큰 민족들이 모두 자리잡았다.
7. 뿌리가 물을 마음껏 빨아 들여
키는 크고 가지는 멋있게 뻗었다.
8. 하느님 동산에서 자란 어느 송백이 이만하랴!
전나무 가지도 그만큼은 되지 않았고
플라타나스도 그만큼은 무성하지 못하였다.
하느님 동산 어느 나무가 이만큼 멋지랴!
9. 나는 이 나무를 가지도 무성하게 멋지게 키웠다.
하느님의 동산 에덴에 있는 나무들조차
모두들 부러워하도록.
10. 그래서 주 야훼가 말한다. 이 나무가 스스로 키 크고, 그 꼭대기 가지가 구름을 뚫을 만큼 높다고 으쓱해져서 우쭐대므로 11. 내가 이 나무를 뭇 민족을 거느린 우두머리에게 넘겨주었다. 못할 짓을 한 만큼 그대로 갚아, 내쫓은 것이다. 12. 뭇 민족 가운데서도 포악한 침략자들이 이 나무를 베어 산에 내던졌다. 그래서 잎사귀들은 모든 골짜기에 너저분하고 무성한 가지는 부러져 이 계곡 저 계곡에 흩어졌으며 세상 모든 민족이 이 나무를 내버려 두고 그 그늘에서 도망쳐 버렸다.

지능을 자랑함

영성이 없는 총명은 지능을 자랑하게 되어 결국 악에 빠지고 만다. 많이 아는 것, 쉽게 배우는 사람이 자기 학식을 수단으로 인격이 더 나아진다고 꼭 말할 수는 없다. 선함은 자기가 안 진리를 일상 생활에서 겸허하게 사용함으로 생산된다. 자기에게 알려진 진리, 그러나 그 진리를 사랑하지도 않고 그대로도 살지 않을 경우, 그 진리는 진리일 뿐 영적 생명, 즉 선이 결여된 채 있게 된다.

글자적 의미

글자대로 생각하면, 본문은 에집트의 몰락에 대한 예언이 집행된다는 것을 경고하는데 아시리아의 몰락을 인용하고 있다.
아시리아 사람들은 광폭하여 전쟁을 즐기고, 총명했으나 믿을 수 없는 자, 거만하고 멋대로 굴며 타 국가들이 자기 나라 보다 하급이라고 공언했었다.

표현 속에 든 의미

앗수르 또는 아시리아가 표현하는 의미는 인간이 총명해지는 수단인 합리력, 추론력, 생각하는 원리들이다. 그리고 성서의 표현 속에 든 의미들은 교회와 개인들에 유효하도록 되어 있다. 그 이유는 영적 사항에 관한 한, 우리들로서는 개인적인 것보다는 원리를 찾아야 하기 때문이다. 원리는 그 사용자가 개인들이든, 집단이든, 똑 같이 적용된다. 게다가 교회 속의 모든 개개인은 작은 형태로 있는 좁은 측면에서의 교회이고, 넓은 측면에서의 교회란 작은 형태의 교회가 집합한 것이다.
본문은 과거 속에 존재했던 교회에 관한 예언물이요 역사물만을 언급하는게 아니라, 본문에서 묘사된 마음과 삶의 상태에 있는 모든 시대, 모든 이에게 응용되어 진다. 본문과 똑 같은 심정과 삶 속에 든 악은 고대 아시리아인들에게 영적 몰락을 가져오게 했지만 오늘날에도 개인적으로나 국가적으로나 파멸의 원인이 되는 것이다. 본문 같은 종류의 총명은 우리에게도 열려 있다. 그래서 총명을 자랑하고 싶어 못 견디는 위험은 언제나 우리와 대결 상태에 놓여 있다. 더욱이 진정한 교리가 풍부하여 많은 지식을 얻을 기회가 많은 새교회인의 경우, 더욱 그런 상태에 직면할 수 있다. 따라서 많은 지식을 가짐과 더불어서 모든 진리의 근원이 오직 하나뿐임을 잊지 않아야 한다는데 대한 책임감 역시 배가되어야 할 것이다.

영적 의미 – 나무들

“아시리아는 레바논의 송백이었다.” 고상한 송백 나무숲을 가진 레바논 산이란 영적 진리에 관한 장대한 지식을 지닌 영적 인간, 즉 인간 속의 영적 마음을 표현한다. 나무들이란 진리에 관한 지각을 표현하는데, 이 지각은 마음속에서 자라 올라 삶에서 결실을 맺는다. 나무들 중에서도 송백 나무는 합리적인 지각을 표현해 준다. 따라서 레바논의 송백이란 영적 진리에 관한 지각을 표현하는데, 지각된 진리에 관한 지식들은 마음속에서 가지를 뻗으며 자라 오른다.
본문은 선포하기를, 아시리아인은 레바논의 송백같이, 물가에서 자란 덕분에 크게 성장하였다. 이는 자연적 진리, 주님 말씀의 글자로부터 온 진리들이 잘 공급된 바, 이로 말미암아 총명해지게 되었다는 말이다. 말씀 글자로부터 온 지식은 우리의 영적 총명을 발달시켜 준다. 이 발달 덕분에 영적 총명은 “들의 어떤 나무보다 키가 컸던 것이다.” 즉 자연적 지식 너머에까지 지식이 확장되었다는 뜻이다. 그래서 “그 가지들에 하늘의 새들이 깃들였다.” 이는 갖가지의 생각들이 총명한 마음 안에서 자라나, 거기서 생각들이 번성하여 새로운 생각들을 생산한다는 말이다. 그렇게 되는 이유는, 마음속의 합리적 능력은 마음의 영적 부분과 자연적 부분의 중간에 있어 매개체 역할을 해주기 때문이다. 합리적 능력, 또는 생각하는 능력을 수단으로 자연적인 생각들은 마음대로 풍부하게 생각을 더 산출해 내어 영적 생각들에 자료를 제공해 준다. 그 이유가 영적 사고는 단지 영적 사항에 관해서만 생각하는게 아니라 영적 관점으로부터 영적인 방법에 관련된 모든 것을 영적 빛으로 비추어 생각하기 때문이다. 자연적인 사람도 영적인 사항을 생각하나 자연적 관점으로부터 생각하므로 영적인 것을 자연적인 것으로 간주해 버린다. 그 결과 그는 영적으로 생각하는게 아닌 자연적으로만 생각할 뿐이다.
송백나무 아래에는 짐승 역시 새끼를 쳤다. 이는 영적 진리에 관한 지각은 애정까지 증가시키고 배가하게 된다는 뜻이다. 송백은 키가 크고 가지도 멋있게 뻗었다. 즉 영적인 것을 지각하는 마음은 합리적 총명으로 인해 아름다워진다는 말이다. 그리하여 어느 나무도 아시리아라는 송백을 덮을 수 없었다. 즉 영적 총명은 자연적 총명을 넘어 멀리까지 다다른다는 뜻이다. 다른 나무들은 이 송백 나무를 부러워하여 멀리까지 뻗어 오르는 것을 흉내 내고 싶어하였다. 이와 같이 우리 마음이 영적으로 총명하다면, 그 총명은 다른 모든 총명보다 더 승강되어 위엄을 드러낸다. 모든 총명은 선과 악을 알기 위해 영적 총명 같이 되고자 열망하게 된다.

영적 총명

본문은 영적 인간 속의 총명에 관한 아름다움 또는 그 영성을 위와 같이 나열해 놓고 있다. 영적 마음을 지닌 사람은 생각의 영적 등차에 마음이 열리어 있다. 그의 마음은 레바논의 송백 같이 고상하고 드높으며 언제나 푸르면서 하늘의 햇빛을 받아 멀리까지 이르른다. 주님 말씀 속의 진리들, 글자적 의미만 가졌다해도 영적 마음이 열린 자에게는 물이 송백 나무의 뿌리를 적시우듯 그에게 영적 자양분을 공급해 줄 수 있다. 그 이유는 그가 말씀 글자에서 글자 속에 내재하는 영적 진리를 보고 영적 사항들에 가르침을 응용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편 1편에서, 이런 사람을 두고, “냇가에 심어진 나무 같아서 그 잎사귀가 시들지 아니하고 제철 따라 열매 맺는다”라고 노래하고 있다.
그러나 아시리아 사람은 자기 인격을 바꾸었다. 그리하여 높은 지위에서 아래로 떨어졌다. 영적으로 볼 때, 조건(condition)은 인격에 의존된다. 인격이 선함으로 인해 진보되어 가면 영적 성장을 있게 해주지만, 인격이 퇴보될 경우, 영혼을 썩게 만든다. 인격 성장을 목적으로 삼도록 주어진 그의 총명이 어떤 총명이던지 간에, 영적 성장을 위해 그 총명을 사용할 때만 그 총명은 그 사람과 더불어 남아 있을 수 있다. “의로운 자는 종려나무같이 번성하며 레바논에 있는 송백같이 자랄 것이다. 여호와의 집안에 심기운 이들은 하느님의 뜰에서 번성할 것이요, 그들은 고령에도 계속 열매를 맺으리라.”
이런 조건이 위와 같이 오랫동안 남아 있을 수 있는 것은 오로지 그 인간이 자기에게 있는 총명이 주님께서 계속 주시는 선물임을 인정할 때에만 가능할 뿐이다. 따라서 자기 속의 총명이 자기가 잘나서 있게 된 총명으로 착각하게 되면, 그는 곧 바로 총명의 근원에서 떨어져 나가 총명 속의 영적 품질은 파괴되고 만다. 그 이유가 총명은 생명처럼 주님으로부터 인간에게로 순간 순간마다, 계속해서 흘러들어야 하기 때문인 바, 마치 열과 빛이 태양으로부터 식물에게 계속 흘러 들어가야 하는 것과 같다. 태양이 주고 식물이 받음 같이, 주님은 주시고 인간은 받는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인간이 무조건 총명을 받아 사용하며 보유할 수 있도록 인간을 창조해 가고 있으시지 않는다. 인간은 주님으로부터 자기에게 흘러드는 총명을 받는 능력만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총명은 조건(condition, 상황, 요건, 처지, 상태)적 이다. 그리고 이 조건이 유지되는 것은 인간이 아닌 주님에 의해서만 가능할 뿐이다. 다시 말해서 인간이 주님에게 얼마나 기쁘게 마음 문을 열어 놓느냐에 따라 유지시켜 주신다. 그러므로 인격이 타락할 때, 인간의 영적 총명도 타락하게 된다. 그 이유는 그가 주님에게서 받는 능력을 감소시키기 때문이다. 이 인간은 스스로 주님에게 자신의 문을 닫아건다. 총명을 유지 보존시킬 수 있는 것은 인간 속에는 하나도 없다. 비록 어떤 인간이 어떤 진리를 사실(fact)로서 이해하거나, 교리로서 납득했다 해도 그 진리는 그의 실제 삶에 즉각 연결되지 않는다. 다시 말해 그 진리는 그 사람에게 더 나은 인간다움을 창조해 주지 못한다는 말이다. 그러나 그가 알게 된 진리를 주님께서 자기에게 밝혀 주신 진리로서 간주한다면, 그는 그 진리가 주님과 연결되어 있음을 보고, 주님의 진리로서 그 진리에 순종할 때, 그는 그 진리로 인해 더 나은 인간을 형성한다. 이렇게 되면 그는 자기 마음에 흘러드는 신성한 생명의 흐름에 자신을 열어 두게 되는 것이다.

지적 오만

그러나 어떤 인간이 진리를 지적으로 받았는데, 그 진리가 자신의 총명에 의해 발견되어진 것이니 그 진리가 자기 것이라고 간주해 버리면 그는 자기 총명을 자랑하는 데로 빠져들고 만다. 그러면 그는 자기 속의 총명이 자기 것이라고 주장하는 바, 진리도 총명도 모두 인간을 위해 순간 순간마다 주님이 주시는 선물임을 잊게 된다. 자신의 지성을 자랑하는 것은 그 인간으로 자신을 우쭐대게 만들고, 그 결과 자기보다 덜 똑똑한 듯 싶은 이들을 경멸하는 결과를 낳게 한다. 이런 행동의 되풀이는 그가 주님에게 반대하여 내적 마음을 닫게 만들면서 총명 속에 있어야 할 영성(영혼)을 파괴시키고 만다. 따라서 그는 지식의 바깥 형체만을 고수하고 있을 뿐 그 지식 속의 영혼은 상실되어진 상태가 된다. 이 상태에서 그의 총명이나 지식은 그를 더 나은 인간으로 만드는 대신, 더욱 나쁜 쪽으로 끌고 간다. 그 이유는 그가 자신 속의 총명과 지식을 자아와 결부시키는 바, 지적 오만(거만)이라는 지옥의 것을 배양하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 있는 수많은 지성인들이 이런 지옥의 형체에로 몰락되는 때가 허다하다. 성경 전체를 망라해서, 주님께서는 이런 지적 오만에 관해 인간에게 경고하고 계신다.
하느님의 선함을 낭독하는 자리에서 모세는 이스라엘 후손들에게 자기들의 번영이 자기들이 똑똑한 결과라고 결론 짓는 일이 없도록 이렇게 경고하고 있다. “‘이 재산은 내 손으로 뼛골이 빠지게 일해서 모은 것이다.’ 이런 엉뚱한 생각이 들거든 너희 하느님 야훼를 생각하여라… 오늘 이처럼 재산을 모으도록 너희에게 힘을 주셨다는 것을 생각하여라” (신명기 8:17-18). 신약 성서에서도 예수님께서는 자아를 추켜 대는 것과 제가 똑똑하다고 하는 자만심에 대한 경고를 기록해 두시었다. 오늘 본문에 이어지는 구절에서 아시리아의 자아 찬양과 지적 오만이 기술되면서, 그것으로부터 오게 되는 결과를 증거로 보여주신다.
우리 속 자연적 마음의 끈질긴 경향성은 자신은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비치려 하고 그 중요한 자아를 더욱 과장하려 든다. 따라서 인간이 자신의 총명을 조금만 자랑하려 들어도 그 순간 그는 신성한 총명에 대한 자신의 관심을 퇴조시키고 만다. 자신이 위대하다고 착각할 때, 그는 자신 너머에 있는 어떤 총명의 필요성을 더욱 덜 느끼게 된다. 덜 느끼는 가운데, 그는 자신이 소유했다고 생각되는 총명에 대해 더욱 거룩해진 듯 여긴다. 이와 같은 자아 영광은 자아 사랑이라는 지옥의 영을 발달시켜 준다. 그리고 이 영은 악령들, 지옥의 악마들과 더욱 밀접한 유대 관계를 맺게 한다. 그 이유는 지옥의 영들 모두는 제 잘난 멋에 혼자 춤추면서 자신만이 가장 중요하다고 여기는 영혼들이기 때문이다. 자아 총명에 가장 큰 신뢰를 두는 지옥의 영들에게는 천국의 빛에 있는 영적인 것들마저도 지독하게 사악한 듯 보여질 뿐이다.

영적 몰락

이렇게 인간이 자신의 총명에 우쭐하는 늪에 빠질 때, 그는 천사들의 영적 집단에서 탈퇴되고, 인격면에서, 동기면에서, 계획하는 면에서나, 사사건건 그는 악령들과 상의한다. 그는 생명이신 주님에게 등을 돌려 대고 타인 보다 자아를 사랑한다. 결과적으로 그는 악한 느낌과 거짓된 생각에 자기를 내주고 말아 악한 삶으로 이내 자신을 확증하고야 만다. 과거 그의 총명은 고상한 레바논의 송백 같았었지만, 지금 그의 총명은 송백을 닮긴 했지만 부러져 내려앉은 송백 나무여서 더 이상 밤의 새들에게 안식처를 주지 못하고, 타락한 본성 속에 있는 거짓과 악들의 짐승에 짓밟히는 송백 나무일뿐이다. 이를 두고 이렇게 말한다. “웬일이냐, 너 새벽 여신의 아들 샛별아, 네가 하늘에서 떨어지다니!… 네가 속으로 이런 생각을 하지 아니하였더냐? ‘내가 하늘에 오르리라. 나의 보좌를 저 높은 하느님의 별들 위에 두고… 나는 저 구름 꼭대기에 올라가 가장 높으신 분처럼 되리라.’ 그런데 네가 저승으로 떨어지고 저 깊은 구렁의 바닥으로 떨어졌구나” (이사야 14:12-15).
위와 같은 모습이 자기 지성을 자랑하며 자기 총명은 굉장히 높은 수준이라고 우쭐대는 이들의 마지막이다. 지적으로는 그가 별들 위에 오를는지 모르지만, 그의 심정은 악 가운데 있어 그의 삶은 죄 속에 빠져 있을 것이다. 그가 안다는 진리들은 그의 마음속에서 오만이라는 욕망으로 더럽혀져 있다. 그가 과거에는 영적 인간이었을는지 몰라도 이제 자기 마음을 자아 총명의 오만이 통치하도록 방치한 이상 그의 실지 삶은 아주 낮은 감각적 상태에로 환원되고 만다.
본문에 이어지는 구절 속에서, “이는 파라오와 그의 무리를 두고 하는 말이다”라고 했다. 위와 같은 것이 자기의 학식, 과학, 짐짓 지녔다고 생각되는 총명들, 이 모두를 이기심의 감각적 삶에 던져 버린 자연적 인간이다. 이것이 주님을 신뢰하는 대신 말과 병거를 신뢰한 에집트이다. 이것이 주님을 인도자로, 진정한 교리를 찾고자 주님의 말씀을 찾는 대신 자기 지식이나 이해성에서 끌어낸 교리에 신뢰를 두는 자연적 인간이다. 진실로, “아시리아의 콧대는 꺾이고 에집트는 국권을 잃으리라.” (즈가리야 10:11).
자아에서 끌어낸 총명 속에 있는 자들은 자기가 알게 된 진리들을 총명을 뽐내려 드는 자만심과 포부욕이라는 욕망과 뒤섞는다. 이렇게 해서 그들 속의 모든 진리는 모독당하고 만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늘 경고하신 말씀은,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어라”이셨다. 인간이 어떻게 진리를 이해해서 진리로 간주하였는가와, 어떤 원리로부터 진리를 진리라고 인정하느냐에는 대단히 큰 차이가 있다. 겸손한 사람, 그는 자기가 제 아무리 총명하다 해도 자기 속의 총명을 주님의 선물로서 간주하여 그것을 유용한 일, 즉 주님과 이웃을 섬기는 수단으로서만 간주한다. 따라서 그는 긍정적인 원리 안에 있는다. 그리고 그는 진리를 사랑하고, 그 진리를 주님의 진리로 믿는 것을 사랑한다. 그래서 그 진리는 그로 하여금 슬기롭게 해주며 유용하게 사용하도록 해주어 행복을 가져다준다.
그러나 자신의 총명으로 콧대가 세어진 사람은 그 총명이 자기 작품인 냥 여겨 우쭐대는 바, 자아 사랑을 먹여 키우는 결과를 낳고 만다. 그래서 그는 믿음을 이타애로부터 분리시키는 바, 자기 지식을 타인에게 선을 행하는 수단으로 사용하지 않는다. 내향적으로 그는 자연적 마음으로부터 추론하고, 일상 생활속의 실제적 거짓 원리안에서 자신을 확증한다. 자신이 타인과 주고받는 대화 속에 들어 있는 진리까지 그는 왜곡시켜 진리의 영을 뒤집고 자기 마음속에 있는 진리의 생명까지 파괴시킨다. 한마디로 자기 심정 속에서 카인이 아벨을 죽이는 상황과 같은 바, 즉 자기 속의 거짓 믿음이 자기 속의 이타애를 살해한다.

지적 위험 – 섭리

지력이 강하다고 여겨지는 사람은 지적 오만이라는 악에 특별히 더 빠지기 쉽다는 말이 자칫 하면 우리로 그 말이 당연한 듯 여기게 할는지 모른다. 그 반면, 특별히 총명한 사람, 지력이 강하다는 사람은 이런 사실을 이미 눈치채고 있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래서 그들의 자연적인 유전적 악에 대한 경향성은 그들이 타인보다 더 우위에 있다는 쪽으로 기울게 부추겨 줄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자기가 지적으로 타인 위에 있다는 것을 보게 되는 데서 피해 갈 수도 없다. 그러나 그에게 있는 눈에 나타난 우위성을 스스로 보게 하는 지성은 그와 동시에 모든 인간은 자신 스스로 악과 거짓뿐이란 것도 볼 수 있게 해준다. 그래서 모든 선과 진리, 그리고 생명은 주님에게만 있고 그분으로부터만 가능하다는 것, 모든 인간은 주님으로부터만 총명해질 수 있다는 것도 알아차릴 수 있게 되어 있다.
그러므로 인간이 더 총명하면 할수록 인간은 자신 스스로부터서는 떠벌릴 만한 어떤 것도 갖고 있지 않음을 더 알게 된다. 즉 더 총명할수록 더 겸손한 마음이 되어야 함을 안다는 말이다. 만일 지적으로 높은 사람은 평범한 사람보다 더 위험할거라고 우리가 상상하고 있다면, 우리는 신성한 섭리의 역사를 잊고 있는 셈이다. 자비로 이뤄지는 그분의 섭리는 각인의 필요에 맞춰 그의 영적, 자연적 상황을 조정해 주시어 언제나 당사자로 영적 자유 속에 있도록 배려하신다. 악해지려는 우리의 경향성은 죄라는 한 가지 방향으로만 치우치도록 추근대고, 악령은 이 경향성이 활성화되게 부추긴다. 그 반면, 천사들은 동등한 힘을 가지고 인간에게 그런 경향성과 악령들에서 보호되도록 경고해 주어 악에 강요당하지 않게 하고 있다. 인간 속의 자연적인 유전적 경향성이 어떤 악에 더 솔깃해지면 해질수록, 그만큼 천국의 보호하려는 힘이 그로 하여금 그 악에 대항하도록 더 강해진다. “그분은 너희가 가는 모든 길을 지킬 수 있게 천사들에게 임무를 주시리라.”
흔히 듣고서 끄덕이는 말은, 강한 인격의 소유자는 연약한 인격의 소유자보다 더 유리한 조건 속에서 삶을 영위한다는 것이다. 이는 강한 인격의 경우 연약한 인격이 쉽게 넘어지는 상황에 능히 버틸 수 있다는 계산에서 나온 말일 것이다. 연약한 인격은 바람개비와도 같이 작은 바람에도 금방 감지되어 휩쓸릴 거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평가한 이유는 우리가 신성한 섭리의 역사를 되새겨 보는 것을 잊었기 때문이다. 선천적으로 덜 강한 자는 사람을 공격하는 악한 영향력 역시 덜 강하다. 연약한 인격은 연약한 해결책과 의지를 가진 셈이지만, 그 반면 그에게 오는 시험 역시 연약하다. 주님의 방법은 만민에게 모두 평등하다. 모든 인간에게 오는 선과 악의 영향력이 균등해지도록 해서 그가 자유롭고 그의 능력에도 합당해서 선과 악을 자신 스스로 선택할 수 있게 주님은 배려하시고 있다.
그렇지 않다면, 약한 자가 시험에 걸려 쉽사리 넘어지는 것을 나무랄 수 없을 것이고 강한 자가 악에 버텨내는게 별 대수로운게 못될 것이다. 한 마디로 양쪽 다 핑계가 있는 셈이 될 것이다. 그러나 인간이 강해지면 더 강한 시험이 오고, 동시에 더 강한 보호가 그를 감싸고 있다. 아마 주님께서 천국의 보호를 철회하신다면, 어떤 것도, 어떤 사람도 악의 작은 영향력에도 넘어지고 만다. 이와 반대로 만일 인간이 악에서 구원되기를 기꺼이 원한다면 그가 구원되는데 충분한 보호가 언제나 그 사람 앞에 존재한다. 정말 강한 자가 있다면, 그는 연약한 사람을 짓부숴버리는 시험 정도는 능히 견뎌야 할 것이다. 그렇다고 약한 자가 자기 힘에 부치는 시험에는 결코 노출되지 않는다. 주님의 도움을 가지고 각자가 해낼 수 있는 만큼이라도 자기 의무를 기꺼이 수행하는 사람에게는 그에게 좋은 것 그 이하의 어떤 것을 요구 당하는 일이 결코 없다.
“모든 사람의 등은 각자 자기 짐을 지는데 적합한 것이다.” 그 이유가 각자에게 주어지는 짐은 그 사람의 등에 꼭 맞게 섭리되고 있기 때문이다. 위기가 올 때, 주님은 각 사람에게 그 위기에서 지탱할 힘을 공급해 주신다. 이를 두고 신명기 33장 25절에서, “네 사는 날을 따라서 능력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시편 27편에서 이렇게 노래한다. “야훼께서는 나의 빛,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야훼께서 내 생명의 피난처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요… 그 군대 진을 치고 에워쌀지라도 나는 조금도 두렵지 아니하리라. 군대를 몰아 달려들지라도 나는 그 속에서 마음 든든하리니… 야훼를 기다려라. 마음 굳게 먹고 용기를 내어라” (27:1,3,14).

31
악한 목자

성서 본문: 에제키엘 34장 1-6, 9-11절

1. 야훼께서 나에게 말씀을 내리셨다. 2. “너 사람아, 너는 이스라엘 목자들에게 내 말을 전하여라. 목자들에게 그들을 쳐서 이르는 내 말을 전하여라. ‘주 야훼가 말한다. 망하리라. 양을 돌보아야할 몸으로 제 몸만 돌보는 이스라엘의 목자들아! 3. 너희가 젖이나 짜 먹고 양털을 깎아 옷을 해 입으며 살진 놈을 잡아 먹으면서 양을 돌볼 생각은 않는구나. 4. 약한 것은 잘 먹여 힘을 돋구워 주어야 하고 아픈 것은 고쳐 주어야 하며 상처입은 것은 싸매 주어야 하고 길 잃고 헤매는 것은 찾아 데려 와야 할 터인데, 그러지 아니하고 그들을 다만 못살게 굴었을 뿐이다. 양들은 목자가 없어서 흩어져 온갖 야수에게 잡아 먹히며 뿔뿔이 흩어졌구나. 내 양떼는 산과 높은 언덕들을 이리저리 헤매고 있다. 내 양떼가 온 세상에 흩어졌는데 찾아 다니는 목자 하나 없다.
9.그러니 목자들아, 이 야훼의 말을 들어라. 10. 주 야훼가 말한다. 목자라는 것들은 나의 눈밖에 났다. 나는 목자라는 것들을 해고시키고 내 양떼를 그 손에서 찾아 내리라. 그들이 다시는 목자로서 내 양떼를 기르지 못할 것이다. 나는 내 양떼를 그들의 입에서 빼내어 잡아 먹히지 않게 하리라.
11. 주 야훼가 말한다. 보아라. 나의 양떼는 내가 찾아 보고 내가 돌보리라.

개요

자아 사랑, 이 사랑은 자기 이익만을 위해 일할 뿐 의무를 게을리 하고 이웃이 피해 당하는 것을 아랑곳하지 않는다. 결국 그 사랑의 리더십이 박탈되어야 그나마 다른 이들이 구원 될 수 있는게 이 사랑의 끝말이다.

배경

주님께서는 예언자 에제키엘을 통하여 이스라엘 속에 있는 악들을 노출시켜 견책하시면서 이와 같은 악들의 피할 수 없는 결과를 경고하셨다. 오늘 본문에서 하느님의 폭로와 경고는 이스라엘의 통치자들을 향한 것이다. 이들은 사적으로나 공적으로 푹 썩어 있어 이기적인 소득을 위해 백성을 이용하는 자였을 뿐이다.

목자들

위와 같은 배경 속에 있는 목자들이란 모든 지도자들, 즉 왕, 왕자, 각 급 관리들, 심지어 교회의 사제까지 포함하고 있다. 이 사람들은 백성을 억누르고 수탈하는데 자신들의 권력이나 영향력을 한껏 발휘해 오고 있었던 것이다. 이 시대 훨씬 앞서서, 주님께서는 명백히 그들 선조에게, “백성을 통치하는 자는 반드시 정의로워야 하며 하느님을 경외하면서 다스려야 한다”라고 가르치셨었다. 즉 백성들의 선을 위해 신성한 법칙을 수행해 가는데 실패할 경우의 두려움을 가지고 통치하라는 말이다. 악한 목자에 관한 비유의 형체로 그들의 악한 방법들이 오늘 본문에서 노출되고 있다. 이 목자들은 자기들에게 위탁된 양떼들을 보호하기는커녕 오히려 해를 줘서 결국 자신들 스스로까지 파멸되고 만다.
목자라는 직책, 이는 양을 잘 관리해야 하는 것, 양떼 주위를 잘 지켜보는 것, 좋은 풀밭에 그들을 인도해야 하는 것, 좋은 물가로 그들을 인도해 줘야 하며, 각종 짐승에게 유린당하지 않도록, 그리고 사고나 병드는데서 보호해야 하는 것이 그 직책의 수행일 것이다. 이런 일들을 수행치 않는 목자는 선한 목자가 아니다. 따라서 그는 자기 직책에서 반드시 해고당해야 할 것이다.
양떼와 목자라는 관계는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지도자와 그 지도자의 영향력 밑에 있는 사람들 사이에 언제나 존재하기 마련이다. 왕, 왕자, 상급 관리자, 재판자, 사제, 선생, 백성의 선을 위해 직무를 맡고 있는 모든 이들은 백성들의 선을 위해 정직하고 신실하게, 총명하고 관대하게 모든 선의 근원이신 주님의 이름으로 맡은 직분을 수행해야 한다. 직책을 부여받은 목자, 그들이 양떼의 복지에 무관심하고 자기 편리함에 치중할 경우, 머지않아 양떼는 이런저런 형태로 고통을 당하면서 결국 흩어지고야 말 것이다.

유대인

위의 말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적용되는데 있어, 그들의 악한 결과가 눈에 잘 띄도록 조치되어 있다. 악하고 이기적인 통치자들이 백성들을 무관심 속에 방치하는 동안 백성들은 나쁜 길로 빠지고 말았다. 강력하고 위대했던 이스라엘 국가는 잠간의 세월 속에서 깨어지고 흩어지고 말았다. 한 예로 열 두 지파 중 열 지파가 아시리아로 끌려가 돌아오지 못하는 신세가 되었다. 유다 지파는 대부분 포로가 되었는데, 일부는 바빌론에, 일부는 에집트에 끌려갔고, 그나마 예루살렘에 남은 이스라엘인들 역시 정복자들의 발 밑에 눌려 사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이런 처참한 신세는 백성들 속에 있는 악이 꾀어낸 결과요, 그 악은 자신들만을 생각하는 욕망이 베푼 자비요, 교회나 국가라는 양 측면에 있는 모든 지도자들 속에 있는 무관심과 이기심이라는 악이 베푼 자비의 모습이다.

신성한 목자

유대인의 무가치함 때문에, 그들에게 내려진 처방은 종말을 고하고, 그 대신 기독교회가 건설되어졌다. 영적 상황에서 있어진 이 위대한 변화가 본문에서 비유의 언어로 예견되고 있다. 본문 끝에서 주님께서, “나는 내 양떼를 그들의 입에서 빼내어 잡아먹히지 않게 하리라.” “나의 양을 찾아 구하시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로 유대인들 사이에 오셨다. 그리고 타락된 인간과 예수님과의 관계에 대해, “나는 선한 목자”라고 선포해 두셨다. 그래서 지상에서의 예수님의 전 생애는 선한 목자의 일에 관한 살아 있는 예증과 본보기 그 자체이셨다. 그분의 생애는 자기 양을 사랑하여 갖가지 방법으로 그들에게 선을 베푸시는 한편, 그들을 온갖 악에서 보호해 주셨던 것이다. 그래서 신성한 목자를 신뢰하여 그 인도를 따르는 모든 이는 보호받으며 인도되는 것이다.

목자로서의 목사

본문의 풍유적인 글자 의미 안에서 특별히 목자가 교회의 목사와 관련을 갖게 하고 있다. 그 이유는 목사들은 지도자와 선생으로서 교인들과 관계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직책상, 목사의 불성실은 사람들에게서 재연되고야 만다. 그 이유가 목사들은 사람들에게 진정한 진리를 명백하고 사랑스럽게, 그러나 용기 있게 사람들의 선함을 위해 가르칠 거라는 데에 신뢰를 두고 있고, 게다가 그 가르침은 이 세상과 저 세상 모두를 위해 가르치고 있다고 신뢰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목사는 거짓 원리나 악한 길에 대해 사람들에게 경고하는 사람이라고 알고있다. 그런데 목사가 사람들의 선에 무관심하여 그 선함에 대한 가르침을 소홀히 한다면, 목사라는 직책이 마땅히 수행해야 할 고유의 선한 일은 미결로 남겨지고 만다.
이런 목사가 잘못된 생각과 느낌을 가지고 방황하는 사람을 발견했다고 해도, 그는 그 사람에게 명백하고 실용적인 진리의 빛을 비추어 주지 못하고 그가 뭘하든 아무렇게나 방치할 것이다. 주님의 보편 타당하고 꾸준한 섭리를 의심하려 드는 주위 환경이 있다 해도, 부주의한 목자는 양떼들을 영적 측면에서나 생활 측면의 양쪽 모두에서 병들어 쇠약해지게 방치하고 말 것이다. 어떤 이가 심한 영적 훈련 속에서 부상당했다면, 위와 같은 목사는 그 부상을 싸매 주는 자기 직무에 실패하고 말 것이다. 또는 어떤 이가 감각적 오류 속에 헤매고 있다 해도 그 사람이 교회라는 우리 속에 다시 들어오도록 자기 책무를 다하는데 실패하고 만다. 위와 같은 조그만 예증들로만 생각해 보아도, 이기적인 목자는 제거됨이 바람직해지는 것이다.

준비

목자는 그 의무 수행을 위해 준비해야 할 것이 있다. 좋은 목자는 양의 본성, 양떼가 필요로 하는 것, 그 필요함을 어떻게 어디서 공급해 주어야 하는지에 대해 반드시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 게다가 양떼를 덮치는 위험들이 무엇들인지, 이런 위험을 어떻게 피할 것인지, 만날 경우, 어떻게 대적해야 할 것인지도 파악하고 있어야 한다. 그런고로 목사는 자기 직무 수행을 위해 어떤 준비가 필요하다. 그는 진리의 창고인 하느님의 말씀인 성경, 신성한 진리에 관한 지식을 수단으로 자기 이해성을 준비해 두어야 한다. 더불어 그는 사람들을 원기 있게 사랑할 심정을 준비해야 한다. 이런 심정 속의 사랑은 유용함을 사랑하도록 준비되어 사람들의 영적 필요성, 실제적 위험을 헤아려 두어 그 위험을 만나는 방법, 그 위험의 피해를 피하는 것까지 알고 있어야 헐 것이다.
목자는 위와 같은 위험의 가능성이 자기에게 있을 경우로 바꿔 이해해 볼 때만이 사람들을 위한 것도 이해할 수 있다. 그 이유는 사람들의 영적 체계나 필요성 등등은 거의 비슷하기 때문이다. 주님께서는 “인간의 심정을 비슷비슷하게 다듬어 놓으셨다.” 따라서 유일하게 진정한 목자는 주님뿐이다. 인간의 영적 선을 위해 일하는 이들은 신성한 목자로서의 주님과 인간과의 관계를 확실히 이해해 두어야 한다. 영적인 양은 주님의 소리를 알고 그분을 신뢰하여 따른다.

나쁜 목자

교회에 있는 나쁜 목자란 교인들보다 자신에 흥미를 더 느끼는 이들이다. 그가 목사로서의 지위를 갖고 있지만, 갖고 있는 이유가 단지 세상적인 후원 또는 공적 지위를 갖는 기회 정도일 뿐이다. 설사 목사가 교회의 재정을 번창하도록 하여 외적 교회를 만드는데 필요한 모든 것을 잘 하고 있다 해도, 위와 같은 마음의 태도는 결국 목사로 영적 부주의함을 빚게 하고야 말 것이다. 목자가 자신을 먼저 챙기는 한, 양떼를 향한 영적 무관심은 존재하고야 만다.
이런 점에서의 무관심은 악이다. 인간은 어떤 동기로부터 행동이 나온다. 만일 동기가 분명히 선하지 않다면, 행동은 반드시 악하다. 그 이유는 인간의 동기 속에는 중간이라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모든 동기의 기초, 또는 그 동기를 움직이게 하는 힘은 사랑의 어떤 형체로 존재한다. 그 형체는 주님과 이웃을 사랑한다거나, 어떤 유용함을 사랑하는 데에도 있겠지만, 나쁜 사랑, 즉 자아와 세상을 사랑하는 데에도 있다.
그러므로 인간이 타인의 영적 선에 무관심 하다면, 그는 영적 선을 사랑하지 않는다. 자신을 먼저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 이웃을 전혀 사랑하지 않는다. 물론 주님도 사랑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각자의 심정 속에 먼저 오게 되는 사랑, 상석에 앉게 되는 사랑이 그 사람 속의 여타 사랑을 지배하여 인격의 품성을 형성하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가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이타적인 차원에서 이웃을 사랑하는게 아니다. 고로 자신을 먼저 사랑하는 목자는 자기 양떼가 자기를 위해 존재하는 것으로 착각한다.

영적 의미들

이상과 같은 생각들은 우리로 본문에 있어질 영적 사항들을 생각해 보도록 이끌고 있다. 그 이유가 영적 의미는 원리들에 관계되지, 인간 어떤 개인에 관계되는게 아니기 때문이다. 가장 높은 차원에서 주님은 교회 또는 각 교인에 대해 목자이시다. 신성한 목자는 주 예수 그리스도, 천상 천하의 유일한 하느님 안에 있는 신성한 사랑이다. 신성한 선생은 주님 안에 있는 신성한 진리이다. 이 두 속성, 사랑과 진리가 신성한 목자의 속성들이다. 그분의 양떼는 우리 인간 마음들, 심정과 이해성으로 구성되어 있고, 이 안으로 신성한 사랑과 진리는 들어가실 수 있고, 그 안에서 사랑과 진리는 삶의 새롭고 거듭나는 품성을 생산하고 받쳐 주기 위해 역사 된다.
이런 사항이 우리와 주님과의 사이에 존재하는 사실임을 인식할 때,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다”라고 외칠 수 있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목자이심을 알면, “나는 선한 목자이다. 나는 내 양들을 알고 내 양들도 나를 안다”라고 말하신 것도 인식하게 된다. 주님의 무한한 사랑은 우리가 그 사랑을 위해 빈방을 준비할 때 우리 심정 속으로 흘러든다. 이 말이 실제로 의미하는 것은, 자아 사랑이나 악한 애정이 심정에 눌러 앉으려 하는 것을 기꺼이 거절할 때이다. 거듭나게 하는 사랑, 주님의 사랑이 우리 심정에 들어 올 때, 그 사랑은 우리의 신성한 목자가 되는 것이다. 위의 목자는 우리를 올바른 길로 인도하고, 우리 심정이 진리를 배우고 사랑하고 경청해 가는 쪽으로 기울게 해준다. 이 신성한 목자는 우리의 이해성을 안쪽으로 열리게 해주어 가르쳐 진리를 명확히 보게 하는 주님 영의 내향적 빛을 받게 해준다.
하느님의 사랑을 자기의 목자로서 받고 실제 삶으로 그분을 따라가는 정도만큼에서 모든 각 개인은 자기 개개인이 발휘하는 영향력 수준에서 목자가 된다. 그는 주님의 이름으로 행동하며, 동료들에게 주님의 사랑과 지혜를 운반해 준다. 이와 같은 사랑은 모든 주님의 자녀들, 그들에게 유용한 것을 사랑하여 영적, 자연적으로 그들의 복지에 관심을 두게 해준다. 이와 같은 사랑은 만민과 더불은 모든 관계에서 공정하고 직바르며 관대해지도록 인도해 줄 것이다.
이와 같은 사랑이야말로 우리 마음 안에서, 그리고 실제 삶 속에서 진정으로 효능 있는 목자인 것이다. 이 사랑은 모든 우리 속마음을 돌아다니며 정신적인 양과 어린 양을 먹여 줄 것이다. 그리하여 약함으로 붕괴되고 말는지 모르는 우리 속의 생각이나 애정을 강건케 해주어 영적 질병이 낫게 된다. 또는 삶의 투쟁에서 찌그러지고 찢기고 만 우리 속의 어떤 것도 싸매 줄 수 있어 마구 짓밟혀 있던 조그만 선한 품성까지 회복되게 해줄 것이다. 결국 우리 의식 세계에서 일시적으로 잃었던 좋은 품성을 재발견하게 해줄 것이다. 적극적 사랑이라는 끄나풀로 모든 우리 속의 양떼들은 잘 간수되어 영적 시온산, 햇빛 잘 받는 그 산에서 매일 먹여져 안과 밖에서 엄습하는 모든 위험에서 보호되며 모든 불화도 종식되리라. 이것이 선한 목자의 양이 된 사람의 거듭 나아가는 상태이다.

악한 목자

그러나 우리가 자아 사랑의 영을 심정과 삶의 목자로서 허용해 버린다면, 악한 목자가 되고 만다. 나쁜 목자란 진리 대신 거짓을 가르치고, 선함 대신 악한 삶으로 유도하는 목자이다. 이럴 경우 본문에서 말하는 모든 악한 결과가 우리 마음에 따라붙는다. 목자가 된 자아 사랑의 영은 이기적 목적을 위해 모든 것을 좌지우지한다. 그러면 주님께서 우리 심정과 삶 속에 건설하시고자 추구해 오신 양우리 속의 모든 양떼들은 영적 불결함으로 인해 병들어 위험 속에 방치되면서 흩어져 몽땅 잃게 되어 그 울타리 속에 남는 것이라곤 거짓 관념, 곤경으로 굽어진 사상들, 무거운 짐을 지고 가는 잔인한 인생의 원칙만이 쭈그리고 앉아 우리를 기다릴 뿐이다.

약속

위와 같은 끔찍한 상황이 우리 삶 속에서 이미 전개된 어떤 것들이기도 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해도, 본문의 끝 절은 우리에게 큰 용기를 북돋게 해주고 있다. 끝 절에서 우리가 그분의 가르침을 경청하여 삶에 관한 그분의 법칙을 따른다면 주님께서는 악한 목자를 해고시켜 주시고 그분 스스로 우리의 목자가 되어 주시겠다고 약속하고 계신다. 우리 마음속의 여하한 자연적인 경향성도 주님의 권능 보다 강한 것은 없다. 그래서 우리가 그분에게 그분이 일하실 기회를 주기만 하면 그분은 우리 심정과 삶에 기적을 베풀어주신다. 다시 말해 우리가 악행을 금하고 그분의 법칙에 의거 선을 계속 수행하려 할 때 마음속에서 기적을 주님이 수행해 주신다는 말이다. 우리가 그분과 협력하여 일하는 이상, 우리 속의 어떤 악도 그분의 권능을 덮을 수 없다.
악에 잘 쏠리는 우리 속 유전적 경향성은 아주 강하고 요란하게 우리를 뒤흔들려 하겠지만, 우리가 주님의 이름으로 경향성이 부추기는 욕구들을 밀쳐 낼 때 그런 것들 모두는 우리의 지배 아래 눌러지고 말 것이다.
소년 목자 다윗과 골리앗의 대결을 생각해 보라. 무장도 갖추지 않고 오로지 돌팔매와 개울가에서 주운 돌 다섯 개를 들고있는 다윗, 그리고 거대한 무기와 튼튼한 방패와 갑옷으로 완전 무장한 거인 골리앗, 두 사람의 비교는 겉으로 보기에는 전혀 상대가 될 수 없는 듯 보였다. 그러나 이 목자 소년은 이스라엘의 하느님과 그분의 군대를 모독하는 언사를 퍼부으면서 도전해 온 이교도의 거인을 여호와께서 때려 눕혀 주실 것임을 확신하면서 돌팔매질을 했을 때, 그 팔매돌은 골리앗의 이마에 적중하여 그를 땅에 거꾸러지게 만들었다.
개울에서 얻은 돌이란 주님의 말씀 글자로부터 얻은 진리들, 예를 들면 십계명 같은 진리들이다. 이 진리로 무장하고 주님의 섭리를 확신하고 있는 우리는 각자 속의 자연적인 마음 안에 있는 자아 찬양이라는 거인 골리앗이라는 악도 단번에 쳐 눕힐 수 있다. 우리의 신성한 목자는 우리가 그분의 양떼로서 따라가는 정도와 수준만큼 우리를 도와주실 수 있으시다.

우리에게 할당된 부분

우리가 해야 할 실제의 일이란 우리의 정신적인 양우리를 올바른 질서로 관리하는 것, 선하고 진정한 모든 애정과 생각들을 존속시켜 가는 것, 모든 악한 느낌과 거짓 사고들이라는 들짐승은 때려잡고 우리 밖으로 던져 파괴시켜야 할 것, 약해져 있는 모든 사랑을 강건케 할 것, 겁에 질린 생각들에 용기를 주어야 할 것, 방황하고 길 잃은 애정이나 생각들을 원위치에 되돌릴 것, 살아 있는 모든 원리들을 선한 목자의 인도 하에 우리에 몰아 넣어야 할 것이다. 이런 우리의 노력에 주님은 다음과 같이 은혜로운 약속을 해주고 계신다. “나는 그들을 푸른 풀밭에서 먹게 해주고, 이스라엘의 높은 산에 그들을 위한 우리를 지어… 누구도 그들을 두렵게 만들지 않게 하여 마음 편히 살게 하리라.”

32
마른 뼈가 되살아나다

성서 본문: 에제키엘 37장 1-14절

1. 야훼께서 손으로 나를 잡으시자 야훼의 기운이 나를 밖으로 이끌어 내셨다. 그래서 들 한가운데 이끌려 나가 보니 거기에 뼈들이 가득히 널려 있는 것이었다. 2. 그분이 나를 그리로 두루 돌아 다니게 하셨다. 그 들바닥에는 뼈들이 굉장히 많았는데 그것들은 모두 말라 있었다. 3. 그분이 나에게 말씀하셨다. “너 사람아, 이 뼈들이 살아 날 것 같으냐?” 내가 “주 야훼여, 당신께서 아시옵니다”하고 아뢰니, 4. 그분이 또 나에게 말씀하셨다. “이 뼈들에게 내 말을 전하여라. ‘마른 뼈들아, 이 야훼의 말을 들어라. 5. 뼈들에게 주 야훼가 말한다. 내가 너희 속에 숨을 불어 넣어 너희를 살리리라. 6. 너희에게 힘줄을 이어 놓고 살을 불이고 가죽을 씌우고 숨을 불어 넣어 너희를 살리면, 그제야 너희는 내가 야훼임을 알게 되리라.’”
7. 나는 분부하신 대로 말씀을 전하였다. 내가 말씀을 전하는 동안 뼈들이 움직이며 서로 붙는 소리가 났다. 8. 내가 바라보고 있는 가운데 뼈들에게 힘줄이 이어졌고 살이 붙었으며 가죽이 씌워졌다. 그러나 아직 숨쉬는 기척은 없었다. 9. 야훼께서 나에게 또 말씀하셨다. “숨을 향해 내 말을 전하여라. 너 사람아, 숨을 향해 내 말을 전하여라. ‘주 야훼가 말한다. 숨아, 사방에서 불어 와서 이 죽은 자들을 스쳐 살아나게 하여라.’” 10. 나는 분부하신 대로 말씀을 전하였다. 숨이 불어 왔다. 그러자 모두들 살아나 제 발로 일어서서 굉장히 큰 무리를 이루었다.
11. 그러자 그분은 나에게 말씀하셨다. “너 사람아, 뼈들은 이스라엘의 온 족속이다. 뼈는 마르고, 희망은 사라져 끝장이 났다고 넋두리하던 것들이다. 12. 이제 너는 이들에게 나의 말을 전하여라. ‘주 야훼가 말한다. 나 이제 무덤을 열고 내 백성이었던 너희를 그 무덤에서 끌어 올려 이스라엘 고국 땅으로 데리고 가리라. 13. 내가 이렇게 무덤을 열고 내 백성이었던 너희를 무덤에서 끌어 올리면, 그제야 너희는 내가 야훼임을 알게 되리라. 14. 내가 너희에게 나의 기운을 불어 넣어 살려 내어 너희로 하여금 고국에 가서 살게 하리라. 그제야 너희는 나 야훼가 한 번 선언한 것을 그대로 이루고야 만다는 사실을 알 것이다. 야훼가 하는 말이다.’”

개요

교회가 타락되는 상황에서, 그 교회 속의 사람들은 악과 거짓, 그리고 죄 가운데 죽어 있다. 그 이유는 더 이상 주님으로부터 생명을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님은 자비로우신 사랑으로 새로운 교회를 준비하신다. 이 교회는 생명이 있는 바, 그 이유는 그 교인들이 영적 진리로 훈육되어 마음을 다시 열어 주님으로부터 영적 생명을 받게 되기 때문이다.

본문의 글자적 의미

이 본문은 넓은 측면에서의 부활, 즉 언젠가 인간이 죽음에서 깨어날 때 과거의 자기 육체로 다시 들어간다는 부활을 언급해 준다고 오랫동안 많은 이들이 상상했었다. 그러나 이 본문은 위와 같은 물질적 부활과 관계없음을, 그러나 이는 지상에서 재난을 맞고 있는 유대인에게 용기를 불어넣기 위해 글자적으로 의도된 환상임을 본문의 글자에서 스스로 증거해 주고 있다.
예언자 에제키엘, 그는 외국 땅에서 망명 생활을 하는 포로된 유대인들, 언젠가 고국에 돌아가리라는 희망이 아주 빠르게 사라져 가는 시점에 달한 유대인들 틈에 끼어 있었다. 그래서 본문은 노골적으로 주님께서 그들로 고국에 되돌아가게 해주겠다고 선포하고 있다. 속박된 유대인들, 게다가 외국 땅에서 이미 매장되어 버린 그들 모두는 이제 유대 땅을 다시 밟는다는 것 자체를 아예 포기해 버린 상태까지 이르렀다. 사실, 유대인들은 이 세상에서의 자신들만을 생각할 줄 알았지 장래의 부활 따위는 생각조차 안하는 사람들이다. 특히 사두가이파의 유대인들은 육체가 죽은 뒤에 있게 되는 어떤 삶도 믿지 않는 이들이다. 그들 중 어느 누구도 자연계의 삶과 분리된 영계 속의 삶에 관한 개념은 별로 갖고 있지 않았다. 설사 부활이 있을 거라고 여긴 소수의 사람도 부활은 자연계의 삶으로 되돌아오는 것일 거라고 추측해 볼 정도였다.

부활

위의 소수의 사람이 생각한 것 같이 또 다른 장소에 거행될 물질적 육체로의 귀환 또는 넓은 측면의 부활은 발생하지 않는다. 물질적 몸은 물질 세계의 물체로 형성되어져 있다. 따라서 육체는 물질적 삶에 알맞게 되어 있다. “육과 피는 하늘 나라를 상속받을 수 없다.” 즉 영의 나라를 상속받을 수 없다는 말이다. 육체가 죽는다는 것은 물질로서의 인간 존재가 끝난다는 말이다. 이렇게 끝나면 인간의 육신은 부패되어 과거에 있던 조직화된 형체를 잃어버린다.
부활은 죽은 육체가 다시 일어나는게 아니라, 살아 있는 인간이 일어남, 즉 죽은 육체로부터 영이 일어 나는 것이고 이 영이야말로 삶의 더 진보된 세계에 적합해 있다. 부활 뒤의 몸이란 영의 몸(영체), 내향적인 몸을 말하고, 이 몸에서 인간이 태어나지는 것이다. 이 몸은 그가 지상에 사는 동안 육의 몸(육체) 속에 상존해 있어 오던 몸이다. 따라서 자연계에서의 죽음은 바깥쪽 몸, 즉 물리적인 몸이 거두어져서 영적 실체를 형성하는 영체, 영계에 살 수 있는 영체를 가지도록 허용되는 것이 인간의 부활이다.
그러나 자연적 마음뿐인 사람, 그는 영적으로 생각지 않는 바, 오로지 자연적 감각의 빛으로만 보아서 그 빛에 나타나는 외관에 의거 자연적 관점을 만들어 만사를 규명하려고 고집한다. 그럼에도 육체가 부활한다고 믿는 이들 중에도 어떤 이들은 오늘 본문에 관해 언급하기를, 이는 악과 죄라는 영적 죽음으로부터 내향적인 정신적 부활, 거듭나는 정의의 삶을 말하고 있다고 넓은 측면에서 이해를 도모하기도 한다.

영적 의미들

영적 의미로 볼 때, 본문의 주제는 거듭남에 관한 것이다. 자연적인 죽음은 육체의 불순물을 포함해서 인간의 더 낮은 본성에 대한 거절이다. 그래서 거듭남의 부활에서 자연적 마음속의 더 낮은 것들과 불순결한 것은 거절되어 죽는다.

계곡

예언자에게 보여진 것은 마른 뼈들이 가득히 널려 있는 계곡이었다. 땅이란 땅의 형상이나 조건이라는 측면에서 인간 마음에 대한 상징물이다. 지상 표면 위에 있는 산이란 높은 장소인 바, 이는 마음의 더 높은 상태, 즉 더 높은 수준의 애정과 생각을 표현한다. 그 반면 계곡은 더 낮은 장소인 바, 이는 마음의 더 낮은 상태, 즉 정신적 삶의 낮은 수준을 표현한다. 상대적으로 생각해 볼 때 자연적 마음은 낮은 장소인 계곡과 같고, 영적인 마음은 우뚝 서 있는 산과 같다. 인간 삶은 누구나 그의 가장 낮은 수준인 계곡이라는 장소에서 시작한다. 그리고 각 인간은 위쪽으로, 그리고 안쪽으로 더 열려서 더 진보된 인간다움인 더 높은 것들에 접근할 필요가 있다.
정신 세계 속의 계곡인 우리의 자연적 생각은 자연적 감각들 앞에 보여지는 그대로 사물을 볼뿐이고, 더 높은 수준의 사물은 영적 진리의 빛 안에서만 보여 진다. 그래서 우리가 거듭 나아가는 매 단계에서 주님은 우리를 이렇게 부르시고 있다. “어서, 야훼의 산으로 올라가자. 야곱을 뽑으신 하느님의 성전으로. 거기서 어떤 길을 가리켜 주시든 우리 모두 그 길을 따르자. 그렇다. 야훼의 가르침은 시온에서 나온다. 야훼의 말씀은 예루살렘에서 들려 온다” (미가 4:2).
계곡에서 산꼭대기까지 이르는데는 꾸준하고도 성의 있는 작업이 수반되어야 한다. 꾸준히 등반함이란 거듭 나아가는 사람이 더 높은 정신적 수준에 도달하기 위해 애쓰는 노력을 표현한다. 이 등반은 감각들에 의한 낮은 수준의 방법들을 거절하여 우리 뒤에 남겨 두고, 느낌과 생각, 그리고 행동에서 더 깨끗하고 질서 있는 삶을 채택함으로 성취되어진다. 이 사람을 두고 시편 기자는 이렇게 노래해 주고 있다. “어떤 사람이 산에 오르랴? 어떤 사람이 그 성소에 들어서랴? 행실과 마음이 깨끗한 사람, 허망한데 뜻을 두지 않고 거짓 맹세 아니하는 사람…” (시편 24:3-4).

뼈들

물질적 몸 속에 든 뼈를 몸의 여타 다른 구성물, 즉 심장, 폐, 뇌 등과 비교해 볼 때, 뼈는 그것들 보다 덜 생명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뼈는 생명을 가장 적게 받는 마음속의 것들, 중심이 될 삶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것들을 표현한다. 내적인 영적 마음에 비교해 볼 때 뼈는 외적인 자연적인 마음을 표현한다. 이를 보다 더 뾰족하게 의지와 지성이라는 생명의 측면에서 비교 생각하면, 뼈는 지성 쪽의 생명에 해당된다. 지성이라는 생명도 필수적이고 유용한 것임은 틀림이 없다. 그러나 이 생명은 의지 속의 사랑이 거기에 흘러들어서 심정의 목적이나 일을 위해 사용될 때까지는 살아 움직이는 충만해진 생명은 못된다.
뼈는 행동에서 어떤 것도 하지 못한다. 오로지 근육과 신경을 수단으로 행동되어 진다. 그럼에도 골격은 근육에 수단을 제공해 이를 가지고 근육 역시 일을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우리의 지적 생명 그 자체는 그것이 심정의 사랑에 의해 훈훈해질 때까지 차가운 상태요 죽은 상태 같다. 따라서 심정을 위해 일 가운데 놓여져야만 하는 것이다.
먼저, 우리는 교회 속의 진리를 지적으로 붙잡아 교리로 간추려 놓는다. 이 교리들은 우리 심정이 일상 생활에서 교리를 필요로 할 때 사용될 준비가 되어 있는 것이다. 이렇게 준비가 갖추어져 있다 해도 정작 사용되고 있지 않은 상태는 뼈가 가진 생명의 수준, 즉 생명의 중심에서 아주 먼 상태에 불과하다. 그러나 우리 심정이 어떻게 선함과 진리를 사랑해야 하며 행동에 옮기울 것인가를 위해 이 교리들을 사용하게 될 때 이 뼈들은 살아나기 시작하고, 살과 신경들, 피부들로 옷입혀져 삶에 사용하기 적당한 정신적 몸으로 완성되어 진다. 뼈만 앙상한 골격에서 몸으로 건설된다는 것은 거듭나는 과정 속에서 처음에 교리에 관한 지식을 습득하면서 충만된 인간을 만드는 생명 있는 것들을 가지고 정신적 골격을 점차 덮어 가는 마음의 건설을 표현하는 것이다.

마른 뼈들

예언자의 환상에서 뼈들은 아주 말라 보였다. 즉 아주 죽은 듯, 생명과는 거리가 먼 듯 보였다는 말이다. 이와 같이 타락되는 마음속에 있는 진리에 관한 지식은 아주 죽은 듯 한데, 그 이유는 살아 있는 어떤 원리와도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지 않은 때문이다.
환상 속에서의 뼈들은 이리 저리 널려 있었다. 어떤 연결된 골격조차 형성 못한 상태라는 말이다. 이는 타락되는 마음속에 있는 진리들의 모습을 표현한다. 그 속의 진리들은 완성된 체계로 서로 연결도, 배열도 되어 있지 않은 채 서로 떨어진 관념들로 엉성해서 실제 사용하는 데로 가져다 놓을 수 없는 상태에 있다. 이럴 경우, 당연히 나오는 질문은, “이 뼈들이 살아날 것 같으냐?” 자연적인 기억 속에 죽은 듯 누워 있는 흐트러진 관념들에 순수한 영적 생명 어느 하나라도 있을 수 있을까? 기억 속에 흐트러져 있는 교리에 관한 지식들, 심정 속의 생명으로 사용되지 않고 있는 그 지식들 안에 영적 생명 어느 하나라도 있을 수 있을까?
우리가 늘 보는 것 중 하나는, 많은 젊은이들이 교회 학교에 와서 교회의 교리로 가르침을 받고, 성경 말씀을 외우면서도 이들 중 많은 이들이 감각적 삶이라는 먼지 속에 그 지식을 매장하거나 마치 낮고 이기적인 생명인 계곡 속에 흐트러져 널린 마른 뼈들처럼 어떤 영적 생각도, 어떤 고상한 감정 하나도 없을 경우 그 지식들은 단지 머리 속에 흐트러져 있는 모습일 것이다. 따라서 또 상기되는 질문은 “이 뼈들이 살아날 것 같으냐?” 아니다. 현재의 조건이라면 절대 아닐 것이다.

생명 있음

그러나 생명 자체이신 주님은 만일 위의 젊은이들이 그분께 되돌아서서 생명을 구한다면, 참 생명을 그들에게 채워 주실 수 있다. 죽은 교리라는 뼈들에게 생명을 주시는 방법을 오늘 본문이 표현해 주고 있다. 그분은 그 뼈들을 완전한 몸이 되게 해주신다. 이 응용은 넓은 의미에서나 좁은 의미에서나 다 같이 해당된다. 이어져 내려오는 교회의 매 단계의 종말에는 언제나 그 교회 안의 사람들은 지극히 외적인 상태로 침몰하고 있다. 그들이 지닌 진리의 지식 역시 심하게 분산되어 조각난 상태로 있어 흡사 죽은 상태나 별 다름없다. 그러나 매 단계에서 끝장을 본 교회에 이어 주님께서는 언제나 새로운 교회, 이전 교회의 상황과 전혀 다른 교회를 거듭 나아질 수 있는 가능한 사람들에게서 건설되게 해주시고 있다. 신성한 진리는 위의 사람에게 아주 다른 형태로 가져다주시어 그들의 시선을 집중케 해주신다. 그러면 그들에게 있는 옛 교리들은 뼈와 같이 골격의 역할을 담당하게 되고, 그 위에 주님은 영적인 살과 힘줄을 입혀 주시어 완전한 사람으로 건설해 주신다. 그런 뒤 그분은 이 사람에게 영적 생명을 주실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죽은 뼈에 관해 예언하는 예언자란 죽은 마음에 오시는 주님의 말씀을 표현한다. 다시 말해 타락된 마음에 새 빛과 생명을 가져다주는 주님의 말씀을 표현한다. 우리가 거듭나는 삶의 질을 의식하게 될 때 주님은 우리의 죽은 마음에 들어오시기 위해 숨을 쉬게 하시고, 그 상황에서 우리는 신성한 진리의 기운으로 영적인 숨을 쉬게 될 수 있다.
히브리어에서 바람, 숨을 쉼, 영에 대한 단어들은 같은 어원에서 파생된 말들이다. 숨을 쉰다는 것은 살아 있다는 표시이다. 인간이 죽게 될 때, 우리는 그가 숨이 끊어졌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숨을 다시 쉰다는 것은 죽은 마음 안에 영적 생명이 온다는 것을 표현하게 된다.
그 다음 힘줄(또는 신경)이 해골들에게 주어지고 있다. 히브리어(gid)에서는 힘줄과 신경을 구분치 않고 말한다. 온 몸에 뇌의 전달을 뻗치게 하는 신경계란, 진리가 온 마음에 뻗쳐 가는 것, 즉 영적 마음속의 내용물이 각 단계를 통과하여 바깥쪽인 자연적 마음에까지 전달되는 수단을 표현한다. 육체 속의 신경계에 어떤 힘도 없다면, 그 육체는 완전 마비되어 죽은 상태이다. 이와 같이 마음속에서 살아 있는 진리가 생산한 힘이 온 마음을 순환하지 않으면 영적 생명은 있으나 마나이다.

살, 등등

그 뒤 뼈들에게 살이 주어지고 있다. 오늘 본문에서의 살은 선을 표현하고 있는데, 이 선은 의지 또는 심정에로 들어간다. 힘줄이나 신경이 지적 부분을 표현하는데 비해 살은 마음의 애정 부분을 표현한다. 이 둘은 어떤 영적 삶에도 필수적이다. 뼈에 살을 붙인다는 것은 영적으로 죽어 있는 인간을 그의 심정이 되살아나게 하므로 거듭나는 삶을 영위할 수 있게 재건설하는 것을 표현해 준다.
거룩한 성찬에서 사용되는 주님의 살을 표현한 빵의 의미도 이와 같다. 주님의 살은 신성한 사랑 또는 신성한 선을 의미하는데, 성찬에서 이를 우리가 받는 것이다.
힘줄과 살이 육체를 위해 제공되어졌다 해도 꼭 더 필요한 것은 가죽(피부)으로 덮어 씌워지는 일이다. 가죽은 중요한 용도를 지녔는데, 가장 주목되는 것은 육체를 보호하는 기능일 것이다. 피부는 모든 종류의 영향, 즉 뜨겁고 찬 것, 또는 위험이나 기쁨 등등에 극도로 민감하게 반응한다. 동시에 접촉해 오는 각종 불순물을 떠밀어 내 육체를 깨끗하게 보존하는 것도 피부의 중요한 역할에 해당된다.
이와 같이 몸 전체를 뒤집어씌운 상태에서의 피부(가죽)는 행동이라는 바깥쪽 삶, 일상 생활에서 있게 되는 각종 실제적 행동, 즉 우리의 안쪽 원리들이 행동으로 옮기어지는 것을 표현한다. 게다가 피부를 수단으로 즉 행동 거지를 보아 우리는 너나 나나 할 것 없이 모든 이의 정신적 불순물을 인식해 내서 피해를 당하기 전 던져 버린다던가, 자신의 실제 행동에 그 불순물이 반영되지 않도록 미리 조처를 취할 수 있다. 건강한 피부가 육체와 상충하여 완전히 유용해지듯, 선하고 유용한 실제 삶은 인간에게 인간다움을 완성시켜 준다. 이 인간다운 인간은 선한 심정에 명백한 이해성을 수반할 때 존재한다.
질병에서 몸을 보호하려면 늘 피부를 깨끗이 간수해야 할 필요가 있듯, 바깥쪽 삶이 건전하고 깨끗한 것은 영적 삶을 보호하는데 절대적인 요소이다.
본문은 선포하기를, 뼈들이 되살아 날 때, 되살아난 인간들은 주님을 알아 볼 것이라고 했다. 이 사항이 표현해 주는 것은, 주님에 의해 영적으로 생기 있게 되는 인간은 우선적으로 주님을 진정하게 알아본다는 말이다.

회복

본문은 기술하기를, 각기 다른 뼈들이 움직이어(shake) 소리내면서 서로 붙었다고 말한다. 시끄러운 소리(noise)란 마음의 옛 조건에 혼동이 있음으로 해서 야기되는 정신적인 소리이다. 그렇게 되는 이유는 새 생명이 작동하게 되면서 미치는 영향력에 죽은 옛 상태들이 떠들썩해지기 때문이다. 흔들림(shake) 또는 전율(trembling)이란 마음의 동요인 바, 이런 상태는 옛 것들에 붙잡힌 상태에서 풀려날 때, 그리고 새 생명을 받게 될 때 있게 된다.
이 뼈들이 서로 모여 뼈와 뼈가 붙었다. 이는 기억 속에서 흐트러진 채 방치된 교리들이 진리의 일반 체계에로 서로 집합해 마음과 삶을 지휘하여 행동에 응용되는 모습이다. 이 조건에 있는 마음은 모든 것이 서로 관련이 있고 서로 연계되어야 함을 지각한 상태이다. 이 상태는 힘줄과 살이 해골에 더해지기 전 갖추어야 할 예비 조건이다. 즉 우리에게 영적 지혜와 사랑이 주어질 수 있기 전 진리적 체계가 사전에 준비되어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이와 같이 육체가 다 갖추어졌는 데도 주님께서 숨을 주시기 전에는 그 몸은 숨을 쉬지 못했다. 다시 말해 우리가 선하고 진정한 원리를 가지고 있다 해도 그런 모든 것이 주님으로부터 온 것들이요, 우리 속에 현존하신 주님이 그것의 소유자이심을 인식하지 않는 한, 우리는 어떤 영적 삶도, 생명도 가지지 못한다는 말이다. 선하고 진정한 원리는 우리 자신의 어떤 재주로도, 어떤 힘으로도 포획될 수 없으며 더욱이 우리 속에는 그 원리에 비슷한 어떤 것도 일체 존재하지 않는다.

사방에서 온 바람

숨 또는 영이 죽은 뼈들에게 생명을 주기 위해 “사방 (four winds)에서 불어 왔다”라고 말해지고 있다. 사방이란 글자 그대로 동서남북이라는 네 방위를 말한다. 이 네 방위는 영적으로 보면 인간 삶의 네 가지 영적 상태, 즉 자연적 이해성과 의지, 영적 이해성과 의지를 표현해 준다. 이러한 삶의 각기 다른 네 국면은 삶의 질과 수준에 있어 각기 다른 네 가지 정신적 관점에서 오는 삶의 양상들이다. 이렇게 다른 관점에서, 또는 정신 조건에서 인간의 필요를 만날 수 있도록 신약 성서는 네 복음서로 되어 있고, 각 복음서는 네 가지 정신적 조건들 각각에 있는 인간에 적합토록 배려되어 있기도 하다. 이와 유사한 것으로는 정방형으로 지어진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의 모습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또한 “사방에서 숨이 불어 왔다”는 것은 그 숨의 근원이 영계의 모든 방위, 즉 외적 진리와 선, 내적 진리와 선으로부터라는 것, 그 근원으로부터 모든 양상들에 영적 생명을 가져와서 모든 인간 마음 형체에 도달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를 다시 말하면 교회에서의 사용을 위해 모든 선하고 진정한 천국 원리를 가져다주신다는 말이다.
이 몸들이 숨을 받자, “모두들 살아나 제 발로 일어서서 굉장히 큰 무리를 이루었다.” 거듭나는 마음은 새 원리를 실생활에 즉각 도입한다는 것, 그렇게 함으로써 그 마음은 이 원리들이 인간 행동들 모두에 응용할 수 있음을 발견한다는 말이다. 그러면 거듭나는 마음, 그 마음이야말로 “이스라엘의 온 가문”임을, 주님만을 찾는 영적 교회임을 알게 된다. 이렇게 해서 주님은 이스라엘을 그들 고국에 회복시켜 주신다. 즉 인간을 거듭나는 상태로 회복시켜 주신다는 말이다.

응용

여러분 앞에 마른 뼈로 된 인간 해골을 놓고, 한쪽에 건강하게 작동되는 살아 있는 육체를 놓아보라. 아마 이 두 인간의 대비는 그 차이가 엄청날 것이다. 만일 여러분이 거듭나고 있는 중이든지, 또는 타락되고 있는 중이든지 한다면, 그 두 개의 평행 속에 있는 차이는 아주 큰 차이가 있음을 인식해 볼 수 있다. 해골뿐인 인간의 경우와 살아 숨쉬는 인간의 경우를 영적으로 보면, 한쪽은 생기 있는 영적 건강, 즉 사랑과 총명, 그리고 질서 있게 활동하는 인간이고, 해골 쪽은 이와 정 반대가 된다. 이 시점에서 우리가 이해되는 것은 “나를 믿는 자는 죽더라도 살리라”는 구절일 것이다. 이렇게 해주시는 이유는 그분께서는 우리의 죽은 심정이라는 옛 무덤을 여시어 우리 영혼이 영적 삶에서 일어나게 해주시기 때문이다. 본문에 있는 주님의 약속, “주 야훼가 말한다. 나 이제 무덤을 열고 내 백성이었던 너희를 그 무덤에서 끌어 올려 이스라엘 고국 땅으로 데리고 가리라.” 이 사항은 현재의 우리들에게도 영적으로 성취되게 해주시고 있다.

33
두 막대기가 하나로

성서 본문: 에제키엘 37장 16-23절

16. “너 사람아, 나무 막대기 하나를 취하여 그 위에 ‘유다와 그와 한편이 된 이스라엘 백성’이라고 써라. 또 다른 나무 막대기 하나를 취하여 그 위에 ‘요셉, 에브라임의 막대기와 그와 한편이 된 이스라엘의 온 족속’이라고 써라. 17. 그리고 이 둘을 붙여서 한 막대기로 만들어라. 둘이 하나가 되게 잡고 있어라. 18. 네 겨레가 너에게 막대기가 저희와 무슨 관계가 있는지 알려 달라고 묻거든 19. 이렇게 일러 주어라. ‘주 야훼가 말한다. 나 이제 에브라임 수중에 있는 요셉과 그와 한편이 된 이스라엘 지파의 이름을 쓴 나무 막대기를 유다의 이름을 쓴 나무 막대기에 붙여 한 막대기로 만들리라. 둘이 하나가 되게 내가 잡고 있으리라.’ 20. 네 손으로 이름을 쓴 그 나무 막대기들을 사람들 보는 앞에서 들고, 21. 사람들에게 일러 주어라. ‘주 야훼가 말한다.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이스라엘 백성을 나 이제 뭇 민족들 가운데서 이끌어 내리라. 사방에서 모아 고국으로 데려 오리라. 22. 그들을 나의 땅 이스라엘 산악지대에서 한 민족으로 묶고 한 임금을 세워 다스리게 하리니, 다시는 두 민족으로 갈리지 않을 것이다. 다시는 반으로 갈라져 두 나라가 되지 않을 것이다. 23. 그리고 나를 거역하여 온갖 죄를 지으며 보기에도 역겨운 우상들을 섬겨 몸을 더럽히는 일이 다시는 없을 것이다. 배신하여 온갖 탈선 행위에 빠졌던 그들을 건져 정하게 해 주리니, 그들은 다시 나의 백성이 되고 나는 그들의 하느님이 되리라.

개요

거듭나고 있는 마음속의 천적 원리와 영적 원리는 그의 내면의 삶과 외면의 행동에 굳게 결합되어 있다. 이 사람은 신성한 섭리의 보호 속에서 주님의 교회를 형성한다.

글자적 의미

예언자 에제키엘은 주님의 명령을 받아 어떤 축제를 표현하는 행위를 보여주어 주님께서 장차 이스라엘 족들에게 해주실 일을 예언하도록 했다. 하느님의 약속은 장차 흐트러진 이스라엘 지파들을 한데 모이게 하고, 한 왕 아래 그들을 고향으로 되돌리고 신성한 보호 아래 있도록 하실 것처럼 보여지고 있다는 말이다.
그런데 위의 약속을 역사적 사실 측면에서 볼 때, 글자와 똑같게 이루어진 때는 없었다. 아마 그런 징조조차도 없었던 것 같이 추정된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고대 유대인들이 자기들 스스로 본문 같은 식의 회복을 무척 기대 했었던 것은 사실이다. 사실 이와 같은 미래에 대한 희망은 많은 근대 유대인들에게 위안을 주고 있기는 하다. 그러나 기독교회는 이스라엘 족의 역사, 즉 성경의 글자적 의미로 엮어진 그들 역사는 표현적이요, 상징적으로 우리의 거듭남을 특징화 해 놓은 것이라고 알고 있다. 성경의 예언들은 우선적으로 인간 마음 안에서 성취되고 있다. 성경은 인간이 영적으로 발전하는 것을 돕기 위해 주어져 있다. 성경 속의 많은 예언들이 글자대로도 성취된 것은 사실인데, 그 이유는 글자상의 조건들은 그 글자에 상응되는 영적 조건이 밖으로 돌출된 결과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어찌됐든 글자상에서 이루어진 부분은 성경의 중요성 중 두 번째에 해당될 뿐이다.
한편, 성경 예언들의 아주 많은 부분들은 글자 그대로 성취될 조건도 갖추지 못했다. 이런 부분을 통해 성경은 풍유적으로, 비유적으로, 표현적으로, 상징적으로, 씌었는 바 상응을 통해서만 이해되도록 의도되어 있다. 고대 이스라엘족, 그리고 여타 다른 민족이나 국가들에 대한 성경의 예언 모두를 그 글자 자체대로 적용해 보려는 것은 사실상 역사책 수준으로 성경의 권위를 끌어내리는 것밖에는 안된다. 오히려 성경은 모든 시대의 모든 이들을 위해 존재하고 있고, 더욱이 중요한 것은 지금의 우리를 위해 존재한다는 것을 잠시도 잊어서는 안된다.

막대기

예언자 에제키엘은 막대기 하나에는 유다, 다른 막대기에는 요셉과 에브라임의 이름을 써서 뭔가를 표현해 보이도록 명령받았다.
어떤 개인을 표현하기 위해 막대기, 또는 지팡이에 이름을 적는 관습은 아주 오래된 행위이다. 이와 같은 행위는 오늘 본문의 시대보다 구 백년 앞선 시대인 민수기 17장 16-20절(개역 17:1-4)에서 볼 수 있는데 다음과 같다. “야훼께서 모세에게 이르셨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명령하여 각 가문에서 나뭇가지를 하나씩 가져오게 하되, 각 가문별로 어른들이 하나씩 가져오게 하여라. 이렇게 가져온 열 두 가지에 각기 자기 가문의 이름을 새기게 하되 레위 가문의 가지에는 아론의 이름을 새겨라. 각 가문마다 그 가문의 어른에게 나뭇가지가 하나씩 있어야 한다. 그것들을 내가 너를 만나는 만남의 장막 안 증거궤 앞에 놓아 두어라…’”
예언자가 두 막대기를 어떻게 하나로 붙잡았는지에 대해서는 우리가 꼼꼼하게 상상해 볼 필요는 없을 것 같다. 그 이유는 본문의 언어적 측면에서 볼 때 어떤 기적에 의해 하나가 되어 있도록 했다는 식의 상상을 요구하지 않기 때문이다. 오로지 하나로 붙잡아서 막대기에 적힌 지파들이 한 왕 아래 한 백성으로 서로 모이도록 하는데 대한 예언만을 표현했기 때문이다. 아마 이렇게 하나로 모인다는 것은 오늘날의 미합중국같이 각 주가 독립된 체제를 유지하면서 전체적으로 미국이라 불리는 나라 안에 포함되어 있는 모습일는지 모른다. 우리에게 흥미를 주는 것은 막대기에 적힌 것이 우리들 삶에서 표현되는 것일게다.

영적 의미들

두 막대기는 야곱의 두 아들, 이스라엘 지파의 두 지파인 유다와 요셉으로 명명되어졌다. 야곱의 열 두 아들, 또는 이스라엘 열 두 지파는 집합체로 볼 때의 교회 속에 있는 선하고 진정한 모든 원리를 표현한다. 그 중 유다는 천적인 원리, 즉 사랑을 원리로 삼는 것, 주님을 사랑함, 또는 선을 사랑함을 표현한다. 이 원리는 선이 선이기 때문에 선을 사랑하여 선을 행한다. 요셉은 영적인 원리, 즉 진리를 사랑함, 진리를 사랑하는 결과 보여지는 것, 진리가 선을 행하라고 가르치기 때문에 선을 행하는 원리이다. 요셉의 아들, 에브라임은 영적 진리를 이해함을 표현한다. 위의 말은 다른 각도에서 말한다면, 유다는 천적인 선(celestial good)을 표현한다. 이 유다와 한편이 될 수 있는 것은 천적인 진리뿐인데, 그 이유가 진리는 언제나 자기와 비등한 선을 동반하기 때문이다. 요셉은 영적인 선을 표현한다. 영적 선과 한편이 되는 것은 영적 진리들이다.
유다, 요셉, 에브라임이라는 이름을 적은 곳은 나무로 된 막대기였다. 나무(wood)는 실제의 삶에 있게 되는 선함, 즉 자연적 선함(natural goodness)을 표현한다. 막대기에 이름을 적는다는 것은 적힌 이름에 속한 사람(person)의 품질을 알게 만드는 것을 표현한다. 근원적으로 이름은 그 이름을 가진 사람의 특질을 암시하기 때문이다. 이름은 어떤 개인, 또는 사물의 품질, 특성을 표현해 준다.
성경에서 개인이나 사물의 이름이 불릴 때 위와 같은 표현에 기초를 두고 있다. 예를 들면,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전, 예수라는 이름이 요셉에게 계시되었다. “마리아가 아들을 낳을 터이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 예수는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할 것이다” (마태복음 1:21). 단어 예수는 구원자(savior)란 뜻이다. 우리가 기도를 끝마칠 때 “…주님의 이름으로…”라고 하여 그분의 이름에 축복이든, 소원 사항이든 묻게 된다. 이는 하느님의 이름이 지니는 품질을 사랑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두 막대기가 하나로

두 막대기, 유다와 요셉, 그의 아들의 이름이 적힌 막대기는 글자대로 볼 경우, 이스라엘의 두 지파를 표현하는데, 이를 더 넓게 생각한다면 유다와 이스라엘을 표현한다. 영적으로 볼 경우, 그들은 천적 원리와 영적 원리, 또는 사랑을 근본으로 삼는 것과 진리를 근본으로 삼는 것, 사랑과 지혜, 또는 선과 진리를 표현한다. 사랑은 인간의 위치(심정)로 흘러들어 그로 하여금 선을 지각(perception of goodness)하도록 해준다. 그러나 진리는 인간의 이해성으로 흘러들어 그로 하여금 진리를 인식(recognition of truth)하게 해준다.
위의 원리가 원칙임에도 불구하고 때로 인간은 많은 진리를 알면서도 그 진리를 자기 삶의 행동 지침으로 삼아 응용하지 않아서 선을 사랑하지 않는 경우도 많다. 어찌 됐든 인간이 진리를 알고 선함을 사랑하여 그 원리에 따라 살게 될 때, 비로소 주님은 각인의 삶과 마음속에서 그가 지니고 실천한 선함과 진리에 하나를 이루신다. 이렇게 선함과 진리가 하나를 이룸이 주님의 명령으로 예언자의 수중에서 두 막대기가 하나를 이룬 것으로 표현되어지고 있다. 이를 표현하도록 두 막대기가 한 막대기로 된 것이다.
심정 속의 선함과 이해성 속의 진리가 연합함, 또는 서로 일치를 이루는 것이 거듭나고 있는 마음 안에서 이루어지는 천국적인 결혼이요, 이 결혼은 선함과 진리가 하나 되어 생명력이라는 결과를 갖게 하는 바, 사랑이 지혜 안으로 흘러들어 지혜가 움직이는 동기를 제공하는 한편, 지혜는 사랑에게 빛을 밝혀 준다. 이 영적인 결혼은 심정의 선함과 지성의 지혜가 행동이라는 실제의 선함 속에서 성립된다. 매일의 생활 속에 있는 선한 생활, 그곳은 선함과 진정한 원리가 만나는 장소요, 그 장소에서 그 둘은 결합하여 그 사람 속의 선은 거듭나게 된다. 이런 사항들이 이름이 적힌 표현물, 나무 막대기에 담겨 있다. 그 이유가 나무(wood)는 실제의 선함(practical goodness)을 표현하기 때문이다.

예언자의 손

두 막대기는 예언자의 손에서 하나로 붙여졌다. 예언자란 주님의 말씀을 표현한다. 특히 주님이 예언자 또는 기타 다른 사람을 통하여 인간에게 밝히 알려 주신(계시) 신성한 진리를 표현한다. 손(hand), 우리는 이 도구를 가지고 무엇을 붙잡아 그 무엇이 어딘가에 사용되도록 한다. 따라서 손은 일반적으로 힘(power)을 표현하지만, 좀 더 뾰족하게 살피면, 우리 마음이 어떤 선하고 참된 원리를 실제로 붙잡아 일상 생활 속에서 응용되게 하는 힘을 표현한다. 두 막대기가 예언자의 수중에서 하나로 되듯, 주님의 말씀에서 끌어져 나온 신성한 능력 속에서 우리 심정 속의 선한 사랑과 지성 속에 있는 진리들이 일상 생활에 응용되는 만큼에서, 즉 애정을 형성하는데, 생각을 정리 정돈하는데, 우리 행동을 규율하는 만큼에서 하나를 이루게 된다.
이러한 영적인 조화(일치)나 하나됨이 주님의 말씀에서 이렇게 언급되고 있다. “그러므로 제단에 예물을 드리려 할 때에 너에게 원한을 품고 있는 형제가 생각나거든 그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그를 찾아가 화해하고 나서 돌아와 예물을 드려라” (마태복음 5:23,24). 제단이란 우리가 주님께 예배함을 표현한다. 주님께 대한 순수한 예배는 우리의 사랑과 지혜가 조화를 이룬 만큼에서만 존재한다. 만일 진리에 대한 우리의 지식들이 우리가 이해한 진리를 우리의 심정이 사랑하지 않는다고 하여 꾸짖는다면, 이는 영적으로 이해성 속의 형제가 심정 속의 형제에 반대된 어떤 것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 된다. 선을 사랑함과 진리에 대한 지식이 화해(조화) 하기로 결정을 볼 때까지 주님께 예물을 바치는 것은 헛된 일일 수밖에 없다. 그 이유는 예배의 실제적 품질은 우리 마음의 두 부분이 실지로 일치하는데 달려 있기 때문이다. 하느님께 대한 피상적인 예배는 형식적일 뿐 순수하고, 진지한 예배가 못된다.

주님의 일

이제 우리는 주님께서 예언자의 수중에서 두 막대기가 하나로 되게 하시겠다는 사항을 관찰해야 할 것이다. 이 서술에서 강조되는 것은, 거듭나는 삶 속에서 선과 진리가 하나 되게 하는 것이 주님의 일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말씀으로부터 진리를 배운다. 그리고 우리는 자기의 심정이 주님께 문을 열도록 노력하고, 그분이 선이라고 말하시는 것을 사랑해 보려 애쓴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의 계명을 자기 삶의 법칙으로, 행동을 규율하는 표준이 되게 자신을 채찍질 할 수 있다. 그러나 지성과 심정을 하나 되게 하는 영적인 일인 내면의 작업은 주님으로부터만, 즉 모든 선과 진리 그리고 생명의 근원으로부터만 가능하다. 우리가 거듭 나아가기 위해서는 스스로 노력을 경주하면서 한편으로는 우리 속에서 일을 진행하시는 주님을 찾아야만 한다.
영적 역사에서 두 교회가 있었다. 하나는 천적인 교회로서 주님을 사랑함을 그 교회의 중심 원리로 삼은 교회이다. 다른 하나는 천적인 교회 뒤를 이은 교회로서 영적인 교회인데, 이 교회의 중심 원리는 이웃을 사랑함이었다. 천적인 교회로부터 천적인 천국이 형성되었고, 영적인 교회로부터 영적인 천국이 형성되었다. 어떤 측면에서 볼 때, 위 두 교회는 따로 따로 분리되어 있다. 마치 심장과 폐가 분리되어 있는 것과 비슷하다. 그럼에도 지상에 오신 주 예수 그리스도는 위 두 천국을 그분의 인성을 통해서 그분에 의해 역사 되는 인간의 거듭남과 구속을 수단으로 더욱 가까운 하나됨을 이룩해 놓으셨다. 더 큰 일반적 측면에서 보면, 위 두 교회는 하나이고, 두 천국도 우리의 의지와 이해성이 한 마음을 이루듯, 심장과 폐가 한 육체를 이루듯이 하나를 이룬다. 이러한 일반적인 조건들은 천국이나 지상의 거듭나는 각 인간의 마음과 삶에서 거행되는 세부적인 변화를 표현해 준다.

이스라엘을 모으심

본문과 본문 뒷부분에서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 족들을 한 국가로, 한 왕을 가진 한 왕국으로, 한 목자 아래 모으시겠다고, 그리고 그들의 악들을 깨끗케 하시겠다고, 그리고 우상 숭배로부터 더럽혀지는 일이 없게 하시겠다고, 신성한 법칙에 반대된 탈선 행위를 정리하게 해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 이런 약속들은 모두가 영적 측면에서의 약속이다. 따라서 이 약속들은 거듭나는 각 개인에게 해주신 약속이다. 이교도들에 포로가 된 이스라엘 지파들, 그리하여 역겨운 짓들에 빠져 온갖 탈선 행위에 푹 빠졌던 그들이란 거짓 관념에 빠지고, 우리 속의 악한 경향성을 허용하여 죄악에 빠진 행위들로 범벅된 우리의 자연적 마음을 표현한다. 이런 마음은 의롭고 거듭나는 가운데 있어야 할 인간 마음의 진정한 고향을 멀리 등진 상태이다. 이런 비질서적인 상황 속에서 우리의 자연적 마음은 온갖 다툼질뿐인 관념들과 섞여 연합을 이루기 때문에 사실상 수많은 갈래로 나뉘어져 있다. 거기에는 우리의 마음 전체를 다스려 줄 왕으로서의 아주 큰 신성한 진리가 없다. 거기에는 하나로된 마음을 이끌어 줄 목자로서의 아주 큰 신성한 사랑도 없다.
그럼에도 거듭남이라는 작업 속에서 우리의 주님은 위와 같은 조건들에 변화가 오게 하신다. 신성한 진리를 한 분 왕으로 채택하는 수준만큼에서, 목자로 신성한 사랑을 받는 정도만큼에서 그분께서는 우리 삶에 흐트러진 각종 요소들을 한데 모으시고, 그것들은 하나의 정신적인 왕국, 한 울타리 안에 가져다 놓아주신다. 우리가 주님을 나의 왕으로, 목자로 인식하는 정도만큼에서, 그분이 우리 지성 속의 모든 것을 다스리는 왕이심을, 우리 심정 속의 모든 것을 인도하는 목자로서 보게 된다. 이 수준이 점차 높이를 더하고 깊이를 더함에 따라 그분께서는 우리 속에 그분의 교회를 건설하시면서 우리 삶의 구석구석에까지 그분의 영향력을 확장해 가신다. 비록 마음과 삶 속의 각종 요소들이 제각기 떨어져 있다 해도, 그분은 그것들 모두를 인간다움의 하모니를 이루도록 진리의 한 왕국, 선함의 한 나라로 이끌어 내주실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의 자연적 삶을 영적 삶과 밀접한 연결을 이루는데 까지 승강시켜 주실 것이다.
그러면 다윗이 영원히 왕이 될 것인 바, 역사적으로, 글자적으로, 표현적으로, 뿐만 아니라 영적으로 다윗이 표현한 신성한 진리가 우리의 온 마음, 분단 안된 마음과 삶을 통치할 것이다. 영적 마음뿐인 조건 속에서의 우리는 신성한 진리를 찾되 단지 행동을 규율하는 외적 권위로서뿐 아니라, 명확히 보고 이해된 신성한 원리로, 모든 우리의 존재에 관한 영적인 법으로 알게 되리라.

우리의 하느님

기독교의 하느님, 주 예수 그리스도는 사랑과 지혜라는 원리의 하느님이시다. 그 원리 속에서 우리는 살아 움직이는 것을 보고 느낄 수 있어 우리의 존재를 가지게 된다. 그분은 두려움을 우리에게 주어 순종하게 하시는 하느님, 마음 내키는 대로 권능을 발휘하시는 하느님이 아니시고, 오로지 그분의 선함을 사랑으로 우리 심정에 채우시고 진리의 원리들을 우리로 이해하도록 계발시켜 주시는 분이시다. 그러시면서 그분의 권능으로 “거룩의 아름다움 속에” 우리의 활동들을 유지되게 해주시며 그분과 연합함으로 기쁨을 만들어 주신다. 이리하여 우리의 삶은 하느님의 법칙에 반대되느라 있어지는 계속적인 다툼이 있지 않고, 하느님의 법에 대한 우리의 의무가 꾸준히 그분과 협동하여 악과 거짓에 쉽게 넘어가던 자연적 경향성과 분리되어진다. 우리 속에 있는 자연적 경향성이 어떤 것인지 알고 있게 되면 우리는 자기 앞에 놓이게 될 위험을 이해하게 된다. 이런 신성한 가르침과 인도를 받음으로 우리는 “온갖 죄를 짖는 것,” “몸을 더럽히는 것”에서 보호될 것이다. 더욱이 “온갖 탈선 행위”로부터도 보호되어지리라. 이리하여 주님을 온전히 사랑함 속에서, “거룩함의 아름다움” 속에서 살게 되면, 우리는 그분께서 주시는 다음과 같은 은혜의 약속을 듣고 이해하리라.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되고, 나는 그들의 하느님이 되리라.”

34
큰 제물에의 초대

성서 본문: 에제키엘 39장 17-21절

17. 너 사람아, 주 야훼가 말한다. 날개치는 모든 새와 모든 들짐승에게 일러 주어라. ‘모여 오너라. 내가 이스라엘의 산에 제물을 잡아 큰 잔치를 벌여 놓았으니, 너희는 사방에서 몰려 와 제물인 고기를 먹고 피를 마셔라. 18. 용사들의 살을 먹고 세상 수령들의 피를 마셔라. 이들의 살은 수양이나 새끼양이나 수염소나 바산의 살진 송아지의 살코기 못지 않다. 19. 내가 잡아서 차려 놓은 이 제물의 기름을 베부르게 먹고, 피를 취하도록 마셔라. 20. 너희는 내가 차려 놓은 잔치상에서 말과 기병의 용사(병거)와 그 밖의 모든 군인들의 살코기를 배불리 먹어라. 주 야훼가 하는 말이다.’
21. 내가 나의 영광을 뭇 민족들 가운데 드러내리라. 모든 민족들은 내가 심판을 내리고 팔을 휘둘러 그들을 치는 것을 보리라.

총괄

영적 사항을 들을 귀 있어 듣는 모든 이는 영적 잔치, 즉 신성한 말씀의 내향적 의미에 초대되어 진다. 이들은 영적 의미를 수단으로 각인의 수준에 따라 진리로 훈육되어 갖가지 것속에 영적 선이 스며들게 되어 내면의 예배와 더불어 외면의 예배로도 새교회를 형성할 것이다.

본문의 상황

성경을 별로 대해 보지 못했던 사람이라 해도 이 본문을 읽을 경우 금방 알 수 있는 사항은 본문은 글자대로 이해하도록 되어 있지 않는다는 것, 따라서 비유적인 예언이라는 것이다. 역사적 측면에서 볼 때, 본문의 부름(초대, calling)은 육으로 주님이 오실 때 이방인을 향해 있어진 내용이다. 이를 개인적 측면에서 본다면, 이 부름(calling)은 초대에 귀를 기울일 수 있는 정신적 조건에 있는 모든 사람을 두고 하시는 말씀이다.
본문과 비슷한 구절이 계시록 19장 17-18절에 다음과 같이 언급되고 있다. “나는 또 태양 안에 한 천사가 서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는 하늘 높이 날고 있는 모든 새에게 큰 소리로 ‘자, 다같이 하느님의 큰 잔치에 오너라. 왕들과 장성들과 장사들과 말들과 그 위에 탄 사람들과 모든 자유인과 노예와 낮은 자와 높은 자의 살코기를 먹어라’하고 외쳤습니다.” 본문과 위 구절에서와 같은 카니발에 하느님께서 어떤 이들을 초대해서 수령이나 왕자들, 용사들을 먹으라고 하셨다고는 생각하지 않으리라 본다. 더 확실한 것은 나무나 쇠로 된 전쟁 무기인 병거는 먹을 수 없는데도 먹으라는 것은 더 더욱 타당치 않으리라 생각되리라 본다. 더욱이 양식으로 삼는 짐승의 피나 기름도 먹지 못하도록 하신 하느님께서 잔치에 그들을 불러 기름과 피를 먹도록 했을 리 만무이다. 확실한 것은, 본문이 의도하는 뜻은 표징적 의미에서만 발견될 수 있다는 점이다.

영적 의미들

예언자는 하느님의 말씀을 표현하는데, 좁혀 생각하면 예언자를 통해 주어진 말씀을 표현한다. 가금류(fowls)란 온갖 종류의 새를 통칭하는 말이다. 인간은 창조된 모든 생명의 머리된다. 인간 아래 있는 모든 창조물의 힘이나 능력 등은 인간 마음에 있는 각기 다른 능력을 표현한다. 넓은 의미에서 짐승은 심정의 삶에 있는 인간의 애정들을 표현하고, 반면 새는 지적 삶에 있는 인간의 생각들을 표현한다. 이러한 표현적 의미 때문에 짐승과 새들이 이스라엘 족들에게서 제물로 사용되어 왔었다.
이러한 모든 새와 짐승들을 주님의 제물에 모여 오도록 부른다는 것은 어떤 공통된 목적을 위해 스스로 연합해서 참여하도록 인간의 생각과 애정을 영적으로 부른다는 것이다. 그리고 삶의 각기 다른 등차나 국면을 함께 모아서 주님이 신성한 말씀 속의 내향적 생명으로 먹이시는 모든 선하고 진정한 것들이 잔치를 벌이도록 하신다는 말이다.
제물로 바친다는 것은 영적인 목적에 충당되도록 거룩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러므로 제물은 주님께 대한 예배, 자신이 가진 모든 선함과 진리가 오로지 그분으로부터만 근거했음을 인정하는 것을 표현한다. 이 제물은 큰 제물(great sacrifice, 큰 잔치)이라 명명되고 있다. 그렇게 명명되는 이유는, 큰 제물은 순수한 믿음과 사랑으로 주님께 드리는 예배의 일반적 상태를 표현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상태가 요구하는 것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한 속성을 지각해서 그분만이 모든 생명, 선함과 진리의 근원이 되시는 천상 천하의 한 분 하느님이심을 지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잔치가 벌어지는 이스라엘의 산이란 영적 잔치에 모여든 사람 속에 있는 의지와 이해성이 드높여 있는 상태를 표현한다.

먹고 마심

영적으로 먹는다는 말은 어떤 원리를 애정 속으로 받아들여 음미한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 어떤 원리를 인격에 채용해서 자기 것이 되도록 한다는 말이다. 살과 피 중에서 단단한 부분인 살(flesh)은 선함을 표현하고, 액체 부분인 피는 진리를 표현한다. 피는 생명 있는 액체로 생명을 순환시켜 주는 바, 피는 인간 마음을 순환하는 신성한 진리를 표현한다. 이 신성한 진리는 주님의 말씀으로부터 존재한다. 다시 말해 주님으로부터 말씀을 통해 존재한다. 거듭나는 사람이 어떤 선한 원리를 자기의 의지나 심정에 받게 될 때, 원리가 생산하는 선함은 그 사람의 의지에 새로운 조건을 만들어 삶을 새로운 품질로 바뀌게 한다.
그 다음, 인간이 자기 이해성에 어떤 원리를 받게 될 때, 즉 새 진리를 영적으로 마실 때, 그 진리는 그 사람의 이해성, 지성으로 하여금 새로운 상태에서 일하게 하여 실제의 삶 역시 새로운 상황에로 진입된다. 그러므로 살을 먹고 피를 마신다는 것을 영적으로 볼 때, 이는 선함과 진리를 받는 것을 뜻한다. 거듭나는 마음속에서 벌어지는 잔치에서 주님으로부터 생명 있는 양식을 받는다는 것은 영혼이 생명 있는 양식을 음미하여 사용한다는 말이다. 이것이 주님과 더불어 있는 잔치인데, 그런 이유는 그 잔치 속에서 인간은 주님의 현존을 영적으로 의식하여 그분과 교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영적 교제

위의 설명은 성찬에서 먹고 마시는 의식에 담긴 영적 의미이기도 하다. 성찬식에서 사용되는 빵과 포도주는 살과 피가 갖는 영적 의미와 비슷하다. 그 이유는 동물계의 살과 피는 선함과 진리에 대한 표현물인데, 식물계의 빵과 포도주도 같은 의미를 가진 표현물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주님과 제자들이 마지막 만찬을 기억하기 위해 성만찬에서 빵과 포도주를 먹고 마신다. 성찬 참석자가 빵과 포도주가 표현하는 의미를 이해할 때, 그는 주님과 영적 연계를 이루고, 자신의 심정과 이해성에 주님의 선하고 참된 원리를 받게 되면 즉각 그는 주님의 잔치에 정신적으로 참석하는 것이 된다.
이 경우, 영적 잔치 자체가 큰 제물이 된다. 그 이유는 그 제물로 해서 인간 양식이라는 통상적인 것까지도 드높여져, 주님과의 교제를 위한 거룩한 목적에 사용됨으로 모두 거룩하게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이러한 제물에 대한 예를 외적 상태의 마음만을 소유한 이들에게서도 관찰해 볼 수 있다. 그들은 성찬에서 사용되는 포도주가 비질서적인 정신 상태에서 맛보는 경우를 두려워한다. 이렇게 그들이 가진 포도주에 대한 경외심은 그들에게 좋지 않는 성질인 절제하지 못하는 습관을 극복하게 하는 체험 쪽으로 유도해 주는 경우가 있다.

영적 양식

본문에서, 새와 짐승들이 잔치에 불려 “용사들의 살을 먹고 세상 수령들, 바산의 살진(기름진) 모든 것, 송아지, 수양, 새끼양, 수염소의 피를 마시도록” 말해지고 있다. 영적으로 용사, 또는 힘이 세다는 것은 신성한 말씀으로부터 온 진리에 대한 지식을 마음속에 지닌 이들, 이 지식을 수단으로 악과 거짓을 금하고 심정과 행동에서 선을 행하는 방법을 알고 있는 사람들을 말한다. 다른 측면에서 이를 말한다면, 인간에게 능력을 주는 주님의 말씀 속에 있는 진리들이다. 실생활에서 이를 예증해 본다면, “지식은 힘이다”라고 하는 말이 될는지 모른다. 이렇게 말해지는 이유는, 지식은 각 개인의 의도나 목적을 이루게 하는 수단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영적으로 용사의 살을 먹는다는 것은 진리에 관한 지식이 신실한 마음에 실제적인 선을 받게 해주기 때문이다.
한 나라를 통치하며 백성을 이끄는 왕 또는 왕자(수령)란 모든 등차나 종류를 막론하고 마음에서 통치하는 근본 되는 원리, 제일 가는 진리를 표현한다. 세상(the earth)이란 지상의 교회를 표현한다. 그 이유는 지상의 인간과 더불어 교회는 가장 수준 낮은 기초인 자연적인 마음 위에 세워지기 때문이다. 세상(지상) 수령(왕)의 피를 마신다는 것은 지상에서의 삶에 직접 응용 될 수 있는 기초되는 형체로 신성한 진리를 받는다는 것을 표현적으로, 영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여러 종류의 동물들

수양(ram)은 영적 선인 이타애의 선 또는 이웃을 사랑함을 표현한다. 새끼양(lamb)은 심정과 삶, 또는 원리와 실제 안에 있는 순진을 표현한다. 외적이고 자연적인 순진은 소극적인 상태 하의 순진인데, 이 상태 하의 각 개인은 죄가 되는 어떤 행동을 하지 않는 수준에 머무른다. 그러나 영적이고 내적인 순진은 적극적 상태 하의 순진이어서 이를 지닌 사람은 잘못된 느낌이나 생각에 빠지는 것조차 하지 않는다. 염소는 믿음을 표현한다. 이 믿음은 사랑이 안쪽인데 비해 외곽 쪽을 형성해 주어, 진리의 빛에 마음을 머물게 한다. 송아지(bullock)나 소떼는 우리의 자연적 애정들을 표현한다.

바산

“바산의 살진 가축들, fatlings of Bashan”이란 영적인데 근원을 둔 자연적인 마음과 삶에 있는 선을 표현한다. 지방(fat) 또는 기름(oil)의 특성은 신체를 따뜻하게 하는 것, 미끈미끈 해서 마찰을 소모시키는 기능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기름(oil)은 주님으로부터 온 선함, 즉 따뜻하고 온화한 애정, 선함으부터 발생하는 기쁨을 표현한다. 최고 높은 의미에서 기름(fat, 지방)은 천적인 선을 표현하는데, 이 선 속에서 하느님의 사랑은 심오하게 나타난다. 넓은 의미에서 기름(fat)은 인간 마음의 낮은 등차, 즉 자연적 삶(실생활)에서 수행된 선을 표현한다. 살진 가축이란 잘 양육된 가축들, 아주 양호한 상태에 있는 가축이다. 이런 가축은 인간의 마음이 영적으로 양호한 조건이 되도록 만드는 것을 말한다. 요르단 동쪽으로 길르앗 다음 지역에 해당되는 바산 지역은 므나쎄 반쪽 지파에 의해 점령된 지역인데 소떼가 잘 크는 지역이기도 하다. 요르단 동쪽, 팔레스타인의 중심 구역이 아닌 바산이란 거듭나는 사람에게 있는 자연적 마음을 표현한다. 그러므로 “바산의 살진 가축”이란 자연적 마음과 삶에 있는 천국적인 선함을 표현한다.
위의 말을 종합해서 생각해 볼 때, “수양이나 새끼양이나 수염소나 바산의 살진 송아지”가 잔치에 올려진다는 것은 주님의 잔치에 오라고 하는 영적인 부름(call)이다. 이 부름이 그분의 신성한 말씀에서 있게 되고, 이 말씀 가운데서 주님은 이타애와 순진, 믿음, 그리고 거듭나는 자연적 애정들로 우리를 가득 채우신다. 이런 사항들이 실생활에서 선한 행동을 생산하게 한다.

가득 채우심

“내가 잡아서 차려 놓은 이 제물의 기름을 배부르게 먹고, 피를 취하도록 마셔라.” 이는 한마디로 모든 선과 진리가 풍부하게 있고 그것 모두를 우리가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들, 아마 현대의 관습이나 사상을 가진 우리에게 본문 글자대로의 의미는 매우 자극적이어서 반발을 불러일으킬는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가 꼭 기억해야 될 것은 본문은 오로지 표현적일 뿐이라는 것이다. 본문은 사람들로 술취하라는 것이 아니라, 만일 많이 마신다면 술에 취할 수 있는 충분한 양의 피가 있다는 것뿐이다. 더욱이 피가 술취하게 할 것이라는 것도 의미하지 않는다. 어찌됐든 의미는 모두 비유적이다. 그 이유를 하나의 사실을 들어 말해 본다면, 어떤 이가 진리를 지적으로 받아 들이되 자기 심정이 사용하는 양보다 훨씬 더 많았을 경우 그 사람은 정신적으로 진리에 취할(intoxicate, 중독) 수 있기 때문이다.

취함 (intoxicate, 중독, 도취)

신체가 술에 취하는(drunkenness) 것은 포도로 만든 식초나 시큼한 포도주 같은 것 때문이 아니라 아주 잘 숙성된 우량한 포도주를 남용하는데서 비롯된다. 이를 영적으로 보면, 정신적인 술 중독은 거짓 사상으로부터만 오는게 아니라, 불성실한 마음이 이기적인 욕망에 사로잡혀 자신이 알고 있는 영적 진리들의 의미를 왜곡하여 남용하는데서 비롯된다.
좋은 것으로 채운다는 것(배부르게 먹고 마신다는 것)을 영적으로 보면 모든 선한 사랑과 믿음 속에 든 모든 진리를 자신의 심정과 이해에 가득하도록 채운다는 말이다. 주님의 잔치에서 배불러진다는 것은 주님을 예배하는 가운데 위의 영적인 것들을 받는다는 말이다. 그리고 이 받음은 그분의 거룩한 말씀을 수단으로 있게 되고, 이 수단에 의해 우리는 사랑과 믿음에 속한 것을 알게 되거나 그것들을 받을 수 있게 된다. 주님의 말씀은 언제나 거듭나는 마음에 천국적인 행복한 삶에 필요한 모든 것으로 잔치를 준비해 놓고 계신다.

말, 기병(병거) 등등

“말과 기병과 용사와 그 밖의 모든 군인들의 살코기를 배불리 먹어라” 라고 본문은 우리를 잔치에 부르고 있다. 말(horse), 이 짐승은 인간에게 매우 친근하고 총명한 하인 같은 짐승이다. 그래서 말은 인간의 이해성에서 이루어지는 지적인 삶, 특별히 하느님의 말씀을 이해하는 것을 표현한다. 이런 이유로 말이 성경에서 표현적 언어로 자주 언급되고 있기도 하다. 사람을 운반하는 수송 수단인 병거(chariot)는 교리, 또는 진리를 운반하는 진리의 서술을 표현한다. 말과 병거를 먹는다는 것은 주님의 진리와 교회 속의 교리를 총명하게 이해함으로 자신의 것으로 만든다는 말이다.
“군인들, men of war”도 먹으라고 본문은 말한다. 군인들이란 우리의 자연적 경향성에 있는 악하고 거짓되며 죄짓게 하는 것들과 싸우는 진리들이다. 따라서 군인들을 먹는다는 것은 악에 저항하고 선을 행하는 가운데 권능 있는 신성한 말씀 속의 진리를 받아 사용하는 것을 말한다.

주님의 영광

큰 잔치에 초대한 후, 주님께서 이렇게 말하신다. “내가 나의 영광을 뭇 민족들 가운데 드러내리라.” 주님의 영광은 신성한 진리가 발하는 눈부신 빛이다. 이는 거듭나는 마음 안에 있는 신성한 사랑과 지혜를 둘러 싼 후광 같은 것이다. 주의 영광을 뭇 민족 가운데 드러낸다는 것은 신성한 진리를 받을 준비가 된 이들에게는 신성한 진리가 발하는 빛을 주시겠다는 것이다. 신성한 진리를 받을 준비가 된 이들이란 내면의 선 가운데 있는 자, 또는 내면의 예배 가운데 있으면서 외적 예배를 지키는 자들이다. 이런 상태에 있는 이들의 마음은 주님을 이해한다. 그 이유가 그들은 사랑의 선, 다시 말해 주님을 사랑하는 가운데 생활의 선인 이웃을 사랑하는 가운데에도 있어 새로운 영적인 선을 받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은 영적 사항에 총명해 있다. 이런 마음의 소유자는 주님을 더욱 더 알 수 있게, 주님의 속성과 생명에 관한 더 높은 면모를 알 수 있는 영적 진리로의 가르침을 받을 준비가 되어 있다. 이들이 새로운 영적 교회를 건립한다.
오늘 본문은 위와 같은 사람들을 이스라엘의 영적인 산으로, 즉 거듭나는 인격의 더 높은 상태에 모이도록 부르고 있다. 그 상태에는 사랑과의 더 밀접한 유대 관계가 있고 더 위대한 영적 총명이 있다. 그래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는 우리들을 부르시어, 우리의 영적인 속성과 자연적 속성을 더욱 높은 상태로 끌어올리라고, 순종하는 사랑의 자녀에게 주실 수 있는 그분의 사랑과 지혜에 관한 장엄한 원리들을 매일 사용하여 즐기라고 말하신다. 이 본문에서 주님은 우리를 부르시어 이렇게 당부하신다. 갖가지 측면의 인간 삶에 영양을 공급하는 순수한 종교로 우리가 진입해야 한다는 것, 우리의 발걸음이 평화의 길에 매일 머무르도록 인도해 주는 종교를 가져야 한다는 것, 그리하여 “그분 앞에서 정의롭고 거룩한” 가운데 생애를 마무리해야 한다는 것이다.

35
성전에서 흘러나오는 물

성서 본문: 에제키엘 47장 1-9절

1. 나는 다시 그분에게 이끌리어 성전 정문으로 가 보았다. 그 성전 정면은 동쪽을 향해 나 있었는데, 그 성전 동쪽 문턱에서 물이 나오는 것이 보였다. 그 물은 제단 남쪽으로 해서 성전 오른쪽 벽에서 뻗은 선을 타고 흘러 내려 갔다. 2. 나는 그분에게 이끌리어 북문을 나가 바깥 길로 해서 바깥 동문께로 돌아 가 보았다. 물이 그 대문 오른쪽에서 솟아 나는 것이 보였다. 3. 그분이 측량줄을 가지고 동쪽으로 재면서 가다가 천 척 되는 곳에 이르러 나더러 물을 건너라고 하기에 건너 보니 물이 무릎에 찼다. 그분이 또 재면서 가다가 천 척 되는 곳에 이르러 나더러 건너라고 하기에 건너 보니 물이 허리에 찼다. 5. 그분이 또 재면서 가다가 천 척 되는 곳에 이르러 보니, 건널 수 없는 강이 되어 있었다. 물이 불어서 헤엄이나 치면 건널까, 걸어서는 건너지 못할 강이 되어 있었다. 6. “너 사람아, 보지 않았느냐?” 하고 말하며 그분은 나를 강가로 도로 데리고 갔다. 7. 되돌아 와 보니 강을 끼고 양쪽에 나무가 무성한 것이 보였다. 8. 그분이 말씀하셨다. “이 물은 동쪽으로 가다가 메마른 벌판으로 흘러 내려 사해로 들어 간다, 이 물이 짠 사해로 들어 가면 사해의 물마저 단물이 된다. 9. 이 강이 흘러 들어 가는 곳이면 어디에서나 온갖 생물들이 번창하며 살 수 있다. 어디로 흘러 들어 가든지 모든 물은 단물이 되기 때문에 고기가 득실거린다. 이 강이 흘러 들어 가는 곳은 어디에서나 생명이 넘친다.

개요

신성한 진리는 신성한 사랑을 가지고 주님에게서 흘러 나와 각 천국의 천사들 속으로, 지상의 사람들 속으로 각각의 마음과 삶의 등차에로 품질에 따라 흘러든다.

신성한 진리

이 예언적 환상은 인간의 마음과 삶의 거듭나는 단계를 몇 가지 측면에서 그려 주고 있다. 이 신성한 진리는 양적 측면에서 증가하여 더 높은 수위에 달해서 인간으로 진리를 더욱 더 이해하고 더욱 더 지각하는 데에 이르게 해준다.
측량 줄을 가진 사람은 몇 가지 양상으로 보여지고 있다. 우선 그는 특별한 사명을 띄고 보내진 천사이도록 보여지고 있다. 그러나 가장 높은 측면에서 볼 때, 그분은 거듭나는 사람을 계발시켜 인도하는 신성한 섭리 가운데 계신 주님이시다. 그리고 비인격 측면에서 볼 때 그 사람은 거듭나는 인간 안에서 현존하시어 당사자를 발달시켜 줌으로 있어지는 진리에 대한 지각을 표현하고 있다.
성전 또는 주님의 집은 한 측면에서 본다면 교회를 표현하고 있고, 이 교회는 인간과 더블은 주님이 거하시는 장소이다. 보다 넓은 측면에서 볼 때, 집 또는 성전은 주님이 인간과 함께 거하시는 천국도 표현해 준다. 위의 두 의미는 인간 삶에 진리를 적용하는 면에서 하나를 이룬다. 그 이유는 보다 높은 의미로 볼 때, 교회와 천국은 인간 마음 안에서 영적으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 마음을 보다 구체적으로 설명하자면, 이 세상과 저 세상에서 거듭나는 사람의 지성과 심정을 말한다. 어떤 영적 의미에서도 천국의 존재는 어떤 장소에 있는게 아니라, 거듭나는 사람 속에, 그곳에 천사들이 거하게 되고 주님 역시 그 사람과 더불어 영적으로 거하신다.
가장 높은 의미에서 집 또는 성전은 주님의 신성한 인성이고, 그 인성에서 신성한 생명이 인간에게 오며, 인간과 더불어 거하시고, 인간은 사람의 손이 만들지 않은 집, 영원한 천국에서 그분과 함께 거할 수 있는 것이다.

문, 입구

주님의 문, 또는 출입구란 입문하게 해주는 진리를 표현한다. 이 진리는 인간의 마음에 주님과 그분의 교회에 관해 정보를 제공하는 바, 그 사람이 교회 안으로 올 수 있게 소개하는 것이다. 이 소개란 단지 외적 조직인 교회만을 말하는게 아니고, 오히려 교회의 원리에 관한 것을 소개해 준다고 해야 지당할 것이다. 그래서 이 진리는 일상 생활 속의 선함에 마음을 소개시켜 줌으로 내면의 교회를 형성시켜 준다.
이러한 입문적인 진리들의 실제 응용은 새 예루살렘의 거룩한 성에 관해 언급하는 계시록에서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즉 “생명의 나무를 차지할 권세를 얻고 성문으로 그 도성에 들어가려고 자기 두루마기(계명)를 깨끗이 빠는 사람은 행복하다” (22:14).
“그 성전 동쪽 문턱에서 물이 나오는 것이 보였다.” 이 물이란 인간 삶에 사용되도록 하기 위해 주님에게서 오는 실질적인 진리를 표현한다.

영적인 방위들

이 물은 동쪽에서 흘러 나왔다. 영계에서 방위는 어떤 지점이나 지역을 두고 언급하는게 아니라 정신적인 상태를 말한다. 주님은 “정의의 태양”이시다. 따라서 어떤 천사가 어느 곳에 살고 있다고 말할 때, 그가 사는 곳의 위치는 영적 태양이신 주님을 향한 그의 정신적인 태도에 의존되어 그의 거처가 결정되는 것이다. 태양이 떠오르는 동쪽은 주님의 사랑을 표현한다. 이를 우리 속에서 본다면, 주님에 대한 우리의 사랑이다. 동쪽에 반대되는 서쪽은 주님에 대한 사랑이 덜해 가는 수준을 표현하고, 가장 빛이 많은 남쪽은 신성한 진리에 대해 총명이 가장 큰 빛을 발하는 상태를 표현한다. 남쪽에 반대되는 북쪽은 영적 총명이 덜해 가는 수준을 표현한다. 이 덜해 가는 수준의 가장 작은 수준은 인간의 자연적 마음, 즉 외적 마음속에 있는 바, 이 마음들은 오로지 자연적 감각의 빛으로만 사물을 볼 수 있을 뿐이다. 고대 시대 때, 예배를 위한 성전은 동향으로 지었는 바, 그 집의 최전방을 동쪽으로 향하게 해서 예배자들의 얼굴이 동쪽을 향하게 했는데, 이는 그들의 마음이 주님을 향해 있음을 표현하는 것이다.
“그 물은 제단 남쪽으로 해서 성전 오른쪽 밑으로 흘러 내려갔다.” 오른쪽이란 애정이나 의지 또는 심정 측면을 표현한다. 그리고 왼쪽은 지성이나 이해 측면을 표현한다. 오른쪽으로부터 나오는 물이란 진리가 주님의 사랑으로부터 나온다는 것, 진리는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에 호소한다는 것을 표현하는 것이다. 그 이유가 인간이 진리를 받느냐, 받지 않느냐의 여부는 그의 심정이 얼마만큼 주님의 진리에 흥미를 가지느냐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제자 몇 명이 밤새도록 고기를 잡으려 했지만 아무것도 잡지 못했을 때,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그물을 배의 오른쪽에 던지라고 가르쳐 주셨고, 그렇게 한 결과 그들은 많은 고기를 잡을 수 있었다 (요한복음 21:3-6). 배는 교리를, 그물은 논쟁을 표현한다. 따라서 배라는 교리의 오른쪽에 그물인 논쟁을 던진다는 것은 사람들이 선을 행하기를 바라면서, 즉 사랑으로 인간을 가르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마음의 상태는 진리라는 바다에 살아 움직이는 고기라는 것, 즉 지식 속에 살아 움직이는 사실들을 끄집어올리는데 언제나 성공한다. 이 물이 제단 남쪽에서 나왔다는 것은 진리들은 신성한 총명에서 비롯되어 주님을 예배하는 인간의 가장 높은 총명에 도달된다는 것을 표현하고 있다.

북쪽과 동쪽

이 예언자는 북문을 나가 바깥 길로 해서 바깥 동문께로 인도되었다. 인간은 자기의 거듭남을 가장 차겁고 어두운 방위, 영적인 북쪽에서 시작한다는 말이다. 그 이유는 이 방위는 영적 사항들에 무지한 자연적인 마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어떤 인간도 그가 존재하는 바로 그곳에서 자연스럽게 시작해야만 한다. 그러나 본문은 선포하기를, 비록 이 예언자가 북문을 나가 바깥 길로 해서, 즉 마음의 가장 외적 상태를 통과해 가면서도, 그는 동쪽 즉 주님을 향해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거기서 그는 물이 오른쪽에서 솟아나는 것을 보고 있었던 것이다. 주님을 찾는 모든 이들은 그분의 말씀 또는 교회 속에 있는 진리 가운데서 주님으로부터 오는 영적인 물을 볼 수 있을 것이라는 의미이다.
우리의 사랑은 열(따스함)이요, 이 열로부터 우리의 빛이 나온다. 우리가 주님을 사랑한다면, 주님을 찾게 되고 영적인 빛을 보게 된다. 그러나 우리가 세상적 방법에서 자아를 위해서만 지적 발달이 있다면, 영적으로 형성되는 마음은 존재하지 않게 되는 바, 영적인 것들은 비현실적이고 무가치하게 느껴진다. 그러나 우리의 사랑이 거듭나는 사랑이라면, 우리가 이 세상에 속한 것들에 덜 지적이다 해도, 우리는 영적 빛 가운데서 각자의 삶의 수준과 등급에 따라 존재가 가능해 진다. 그리하여 각자가 바라는 영적 삶에 관계된 것을 확신하게 할 충분한 빛도 소유하게 된다. 거듭나는 사람이지만 순박할 뿐인 경우, 즉 불완전한 교육의 소지자, 또는 자기 일상생활에 자기가 지닌 진리를 잘 응용하지 못하는 사람이라 해도 진리가 가르쳐질 때 그 진리를 인식할 수는 있다. 그 이유는 그의 사랑이 그로 하여금 긍정적인 자세를 가지게 하기 때문이다. 그 자세에서 그는 자기 나름대로의 빛으로 진리를 알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지적이긴 하지만 자연적인 사람의 경우, 즉 주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사랑의 빛에 거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는 영적 진리를 보지 못한다. 그 이유는 그의 마음은 진리를 향해 부정적인 상태에 있고, 그는 자연적인 감각이라는 가상의 빛에 거하기 때문이다.

측량

동쪽으로 가면서 이 안내자는 흐르는 물의 깊이를 재되, 이 지점에서 저 지점까지, 그리고 그 결과를 표지하면서 재어 갔다. 어떤 것을 영적으로 측량한다는 것은 그 어떤 것의 품질 또는 성격을 파악하는 것을 말한다. 우리도 어떤 것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그것의 길이나 넓이, 높이 등을 측량한다. 그러나 우리가 영적으로 측량할 경우, 우리는 그 속의 선함과 진리, 그리고 이것들이 마음속에서 얼마나 들리워 있는지, 영적 원리로 얼마나 승강되었는지를 발견하려는 것이다. 큐빗은 오래된 측량 단위인데, 이는 우리의 정신적인 측량, 즉 합리적인 판단을 표현하고, 이 단위에 의해 우리는 사물의 속성을 결정 짓는다. 어떤 양을 완성하게 하는 숫자, 즉 한 바퀴 돈 숫자인 100이나 1000등등과 같은 숫자는 마음이나 삶이 충만해진 상태, 혹은 완성된 상태를 표현한다. 흔한 일상 용어에서 우리가 어떤 대상물에 관해 상대방으로부터 그 대상물의 확실한 여부를 반복해서 질문 받게 될 때, 흔히 “아마 난 그것을 수 백 번 보았을 꺼야” 라는 식으로 대답해서 아예 그 대상물을 훤히 안다는 말을 강조한다.
이 예언자가 그 물의 흐름을 따라 동쪽으로 갔다는 것은 주님을 찾는 마음이 안쪽을 향해 흐르는 진리의 흐름을 따라 갈 때, 그의 진리는 더 증가되고 더 깊어진다는 것을 표현하는 것이다. 이 여행이 몇 번씩 측량되었고, 물의 깊이가 각 측량 결과 테스트되었다는 사실은 진리의 흐름을 따라가는 정신적 여행은 성공적인 단계, 또는 진보의 단계로 이루어 나가고, 각 단계는 거듭나는 사람의 정신적 경험을 완전한 상태로 만들어 준다는 사실을 표현하는 것이다. 각 단계 때마다 더 깊어져 간 물이란 마음 안에 들어온 진리는 더욱 더 심오해진다는 것을 표현하는 것이다.

발목

이런 진보의 첫 단계인 천 큐빗되는 곳, 완전을 이루는 마음의 첫 상태에서, 그 물은 발목까지 찼다. 발이란 자연적 인간, 인간 속의 자연적 마음, 정신 기관의 가장 수준 낮은 부분을 표현한다. 발목까지 찬 물이란 첫 단계 진보가 마무리되는 때에 보여지는 주님의 진리, 즉 주님의 진리를 인간의 자연적 삶에 응용한 결과 보여지는 진리, 다시 말해 진리의 껍데기 측면을 보는 것을 표현한다. 좀 더 설명하면, 성경이 주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배울 때 우리는 그 말씀의 규율에 따라 자신의 행동을 맞추어 가야 한다고 느끼는 마음의 상태이다. 이런 각오가 선 사람은 진리를 얼마만큼 알게 되고 진리 속에서 비록 자연적 수준이지만 총명도 획득하게 된다. 그 이유는 그가 자연적 인간으로서의 행동에 진리를 응용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행동하는 한 그 행동은 선함인 것이다. 그러나 그 행동은 거듭남의 첫 단계의 완성에 불과한 것이다. 이 완성 다음에 주님은 인간으로 또 다른 천 큐빗을 신성한 진리의 흐름에 따라 측량하게 인도해 주신다. 즉 영적 진보를 완성하는 단계를 갖게 해주신다는 말이다.

무릎

그러면 물은 무릎까지 차게 된다. 무릎은 사지의 낮은 부분 중에서 높은 위치이면서 넓적 다리 아래 부분이다. 그래서 무릎은 영적-자연적이라 불리는 마음 조건을 표현한다. 그 마음 조건이란 그 마음이 자연적 마음이라 불리기는 하지만 영적 빛의 영향을 받아 영적 조건을 형성하는 자연적 마음이다. 따라서 이 마음은 완벽한 영적 조건이 그 사람의 의식 세계까지 다다르지 못한 상태이기도 한 것이다. 이 상태에 있는 사람은 발목보다는 더 깊은 진리의 물 속에 서 있는 셈이다. 그 이유는 신체의 낮은 부분인 사지가 물로 덮였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의 행동 원리는 주님의 법칙에 따른 행동이 단순한 순종, 맹목적인 순종, 하기 싫지만 주님의 법이니 실천해야 한다는 억지 순종 같은 차원을 넘어선 정신적 조건에 있다. 그래서 그가 주님에 관해 느끼는 것이 비록 희미한 상태 속에는 있을지언정, 주님의 법칙이 규율이라는 차원을 넘어 원리라는 차원에서 주님의 법을 사랑하는 마음을 소유한다. 그의 자연적 마음은 내향적으로 빈 상태가 아닌 큰 힘으로 채워져 있고, 이를 그가 이해하며 느낀다. 한 마디로 그의 마음에서는 영적 합리성이 자라난다는 말이다.

허리

그 뒤 인도자가 또 다른 천 큐빗을 재니 그 물은 허리까지 찼다. 이제 이 사람은 진보의 또 다른 단계를 완성했다. 그는 영적 마음을 확실히 소유한 것이다. 허리는 이웃을 사랑하고 싶은 마음을 표현한다. “네 허리를 띠로 졸라매고 네 빛이 타오르게 하라.” 이는 너의 사랑하고 싶은 마음(애정)을 진리의 띠로 졸라 맨 뒤, 너의 영적 총명이 적극성을 가져야 한다는 말이다.

또 다른 천 큐빗을 재어 보니 그 물은 큰 강이 되어서 헤엄이나 쳐야 건널 수 있는 강이 되었다. 이는 거듭남으로의 진보에 있는 마지막 단계를 표현한다. 이 단계에서 인간은 천적 인간으로 구별되어 진다. 이 정신적 상태는 그가 이웃 사랑이라는 차원을 넘어 진보한 상태이다. 그래서 그는 가장 높은 상태, 완성된 사랑인 주님을 사랑하는 상태, 신성한 사랑 속에 있는 사랑을 모두 흡수할 수 있는 상태에 도달된다. 이 상태에서 진리는 그 사람 전체를 덮는 큰 강이 되고, 무한한 진리에 푹 잠겼음을 자신이 느낀다. 이 경우는 인간 경험에서 가능해질 수 있는 모든 경우를 다 덮은 상태이다.
이럴 경우 거듭남의 진보에서 진리의 증가는 극도에 이른다. 그 사람의 마음은 주님의 진리 속에 있는 영과 생명을 최대한 붙잡게 된다는 말이다. 우리가 진리의 과정을 더 완전하게 따라가면 갈수록 더욱더 큰 진리가 우리에게 와지게 된다. 그렇게 되는 이유는 우리가 주님과 그분의 진리를 더욱 이해하고 지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면 그 마음은 억지가 아닌 사랑의 자유 속에서 “생명수를 값없이 마실 수 있게 된다.”
이 강은 묵시록의 환상 속에서 요한에 의해 보여진 강과 같은데, 그 환상에서 요한은 이렇게 말한다. “그 천사는 또 수정 같이 빛나는 생명수의 강을 나에게 보여 주었습니다” (계시록 22:1). 이 강은 시편 기자가 말하는 강과도 같다. “강물의 줄기들이 하느님의 도성을, 지존의 거룩한 처소를 즐겁게 한다” (시편 46:4). 이 강둑에는 많은 나무들이 있었다. 이는 살아 있어 성장하는 원리들, 또는 거듭나는 마음이 알고 있는 것들을 표현한다. 뒤 구절에서 배우는 바대로 이 나무들은 많은 열매를 생산하는데, 이는 실제적인 선한 일, 우리가 수용한 원리들이 해낸 바깥쪽 일들을 표현한다.

치료하는 물

“이 물은 동쪽으로 가다가 메마른 벌판으로 흘러 내려 사해로 들어간다. 이 물이 짠 사해로 들어가면 사해의 물마저 단물이 된다.” 메마른 벌판이란 영적인 것에 대해 죽어있는 자연적인 마음이다. 바다란 자연적인 기억, 즉 보고 들은 모든 것이 저장된 곳을 말한다. 그래서 자연적인 인간은 그가 모든 사실들을 기억하고는 있지만 신성한 진리의 물이 그의 마음과 기억 속에 들어와 신성한 것으로 자리 잡을 때까지 영적으로 죽어 있는 상태이다. 자연적인 기억은 교리와 같은 것을 포함해 많은 지식으로 가득 차 있을는지 모르나, 이런 지식은 그것이 주님의 것임을 인정할 때까지 인간 속에서 어떤 영적 생명도 존재하지 않는다.
위와 반대로, 모든 신성한 것들은 그것들이 자연적인 마음과 기억 속에로 유입되어 질서대로 정착될 때까지는 마음속에 어떤 굳건한 기반을 취할 수 없다. 그래서 위의 두 가지 과정 모두가 사막이나 바다로 흘러 갈 때 물들을 치료한다. 그러면 “여호와에 관한 지식은 물이 바다를 덮듯이 지상을 덮게 될 것이다.”
지형학적으로 생각해 볼 때, 우리가 가상해 보는 바는, 본문의 물은 예루살렘의 성전 동쪽으로부터 흘러내려 사해로 흘러간다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해도 주님으로부터 온 진리의 물로 인간의 자연적 마음인 죽어 있는 것에 생명을 주는데 대한 상징적 그림은 마찬가지 의미를 우리에게 제시한다.
이 살아 있는 물이 흘러가는 곳은 어디든지 모든 것을 생명 있게 해준다. 그 이유는 주님의 생명은 그분의 신성한 말씀으로부터 인간에게 가르쳐진 신성한 진리를 수단으로 인간의 영혼에 운반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진리들이 입장하도록 허락된 심정이나 이해성, 그 진리로 행동하는 마음속에 이 진리들은 천국의 빛을 운반하여 그 인간을 거듭나게 해준다.

고기

치료된 물, 단물 속에는 온갖 고기들이 득실거렸다. 물 속에서 살아 움직이지만 냉혈 동물이요 생명의 저 수준급인 고기는 우리에게 알려진 실지의 사실들, 그래서 자신의 일상 경험이 되게 응용할 수 있는 것들을 표현한다. 이런 사실들은 교리에 관한 지식, 과학 지식들이요, 이런 것들은 그것들의 근원이 주님임을 우리가 인정할 때 살아 있게 되어 우리의 정신적 양식이 되어 준다.

응용

교회 역사를 되돌아보면, 금방 알 수 있는 게 떠오를 것이다. 즉 유대 교회에서의 진리의 물은 발목까지만 찼었다. 그 이유는 진리가 그들에게 있어서는 자연적인 국면에서만 보여졌기 때문이다. 첫 기독교회에서 이 물은 무릎까지 찼다. 이들은 자연적인 국면에다 얼마간의 영적인 것들도 주어졌었지만, 성경을 글자대로 해석하는 교리를 더불어 지녔었다. 그러나 새교회에서 거룩한 곳에서부터 흐르는 물은 허리까지 깊어졌는 바, 이는 진리를 보되 영적 진리로서 보게 된다. 우리가 주님 예수 그리스도를 보되, 단지 자연적 인간으로가 아닌, 신성한 인간(Divine Man), 그분 속에 모든 신성한 생명이 존재함을 보는 것이다. 우리는 그분을 진리이시고, 사랑이시며 그리고 생명이 되시는 분으로 본다. 그래서 생명 있는 원리들로부터 흐르는 진리들은 영적이고 자연적인 우리 생명 속의 모든 것을 다 망라하게 된다. 이리하여 우리 마음속의 모든 것은 그 강물로 인해 결코 시드는 일이 없게 된다.

36
큰 형상에 관한 느부갓네살의 꿈

성서 본문: 다니엘 2장 31-45절

31. “임금님께서 보신 환상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매우 크고 눈부시게 번쩍이는 것이 사람의 모양을 하고 임금님 앞에 우뚝 서 있었습니다. 32. 머리는 순금이요, 가슴과 두 팔은 은이요, 배와 두 넓적다리는 놋쇠요, 33. 정강이는 쇠요, 발은 쇠와 흙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34. 임금님께서 그것을 보고 계시는데 아무도 손을 대지 않은 돌 하나가 난데없이 날아들어 와 쇠와, 은, 금이 한꺼번에 부서져 타작마당의 벼처럼 가루가 되어 바람에 날려 가고 자취도 남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친 돌은 산같이 큰 바위가 되어 온 세상을 채웠습니다.
36. 꿈은 이러합니다마는, 이제 그것을 해몽해 드리겠습니다. 37. 임금님께서는 왕이실뿐 아니라 왕들을 거느리신 황제이십니다. 하늘에 계시는 하느님께서는 임금님께 나라와 힘과 권세와 영화를 주셨습니다. 38 하느님께서는 사람과 들짐승과 공중의 새가 다 어디에 있든지 그것들을 임금님의 손에 맡겨 다스리게 하셨습니다. 금으로 된 머리는 바로 임금님이십니다. 39. 임금님 다음에는 임금님보다 못한 다른 나라가 서겠습니다. 세 번째는 놋쇠로 된 나라가 온 천하를 다스리게 됩니다. 40. 네 번째로 설 나라는 쇠처럼 단단하겠습니다. 쇠는 무엇이나 부숩니다. 그 나라는 쇠처럼 모든 나라를 부술 것입니다. 42. 임금님께서 보신 대로 두 발과 발가락들이 옹기 흙과 쇠로 되어 있는 것은 나라가 둘로 갈라진다는 뜻입니다. 그 나라는 쇠처럼 단단하기는 하겠지마는 임금님께서 보신 대로 쇠는 옹기 흙과 섞여 있습니다. 42. 발과 발가락들이 쇠와 옹기 흙으로 되어 있는 것은 단단한 편도 있고 무른 편도 있다는 뜻입니다. 43. 임금님께서 보신 대로 쇠가 옹기 흙과 섞인 것은 사람들이 인척 관계를 맺는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쇠와 옹기 흙이 엉기지 않듯 서로 결합되지 않을 것입니다. 44. 이 왕들 시대에 하늘에 계시는 하느님께서 한 나라를 세우실 터인데 그 나라는 영원히 망하지 아니하고, 다른 민족의 손에 넘어 가지도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앞에 말한 모든 나라들을 부수어 없애 버릴 것입니다. 그 나라는 길이 서 있게 될 것입니다. 45. 아무도 손을 대지 않았는데, 돌 하나가 바위 산에서 떨어져 나와 쇠와 놋쇠와 옹기 흙과 은과 금으로 된 것을 부수는 것을 임금님께서는 보셨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위대하신 하느님께서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지를 임금님께 알려 주신 것입니다. 꿈은 분명 이런 것이었고 그 풀이 또한 틀림이 없습니다.”

총괄

타인 위에 군림하겠다는 통치하는 사랑(the love of ruling)은 처음에는 교회 내의 어떤 지도자를 꾀어서 신성한 말씀으로부터 교회의 선하고 진정한 원리들을 배우고 가르치게 해서 교회가 건설되게 한다. 그러나 이와 같은 지도자들은 점차 자신의 총명과 지식에 흠취되어 영적 진리 대신 글자적 규율만을 가르치는 데로 하향하고 만다. 결국 그는 교회 속에 있는 선하고 진정한 모든 것을 악하고 거짓된 것과 섞음질 하여 교회가 끝장을 보게 한다. 그러면 주님께서는 새로운 교회를 설립하시기 위해 오시게 된다. 이런 것들은 넓은 측면에서의 지상의 교회에 관계되고 세부 측면에서는 각 인간의 마음에도 관계되고 있다.

바빌론

바벨 또는 바빌론이란 자아 사랑을 위해 타인 위에 군림하려는 사랑을 표현한다. 자기만을 사랑함(self-love)은 교회 속의 거룩한 것까지 사용해서 인간 영혼을 통치하려 들고 온 세상 위에 군림하려고 발버둥친다. 바빌론의 왕은 군림하려 드는 욕망을 표현한다. 바빌론 왕 느부갓네살은 많은 국가를 정복했었다. 그는 온 세상을 지배해 보겠다는 야망을 품었다. 이런 야망 속에서 그는 본문같은 의미심장한 꿈을 꾸게 된 것이다. 이 꿈은 미래 교회들의 조건에 관해 주님으로부터 온 계시였다.
그러나 위의 주제를 본문의 왕이나 여느 자연적 마음뿐인 사람이 이해할 수 있는 생각 수준에 놓여지기 위해 예언자 다니엘로 하여금 그 꿈이 마치 지상의 왕국들의 시리즈인 것처럼 해석하도록 인도된 것이다. 그러나 주님의 말씀 안에 있는 중요한 의미는 인간의 영적 삶에 관련되고 지상적 사항들은 단지 영적 원리들을 예증하고 있을 뿐이다. 이 꿈에 관한 영적 의미를 파악하려면 꿈에 대한 다니엘의 해석 역시 꿈 자체 못지 않게 많은 설명을 필요로 한다. 그러므로 이 꿈은 몇 가지 측면에서 해석해 보아야 할 것으로 본다.

교회들

지상에는 아주 넓은 측면에서 네 개의 교회들이 존재했었다. 다시 말해서 인간 사이에 있었던 주님의 교회들의 조건이 크게 네 가지였다는 말이다. 그것은 아담으로 지칭되는 천적 교회, 노아로 불린 영적 교회, 이스라엘로 표현된 자연적 교회, 그리고 영적-자연적 교회라 할 수 있는 첫 기독교회이다. 고대인들은 자연적인 것과 영적인 것 사이에는 상응(correspondence)이 존재한다는 것을 이해했었다. 그래서 현자들은 각기 다른 시대 또는 교회들을 가치가 각기 다른 금속들로 표현했는데, 즉 “금시대,” “은시대,” “동시대,” “철시대”로 표현했다. 그 이유는 이 금속들은 지상의 인간에게 중점적으로 우세했던 원리들을 적절히 표현해 주기 때문이다.

금속들

금, 이는 금속들 중 가장 가치가 높고 부식이 안되는 금속이다. 금은 인간 삶에 있어 가장 뛰어난 원리, 가장 가치가 높은 원리를 표현하는데 그 원리의 중심은 사랑이다. 특별히 주님의 이타적인 사랑이 자신을 지휘해 가는 경우이다. 이 원리를 우리는 천적 원리라 부른다. 이 원리는 삼층 천국인 천적 천국에 거주하는 이들을 움직여 주는 원리이다. 이 천국은 천국 중에서 가장 높은 천국에 해당된다. 이는 “불로 연단 된 금”이다. 이 금은 인간을 인격 측면에서 영적으로 부자가 되게 해준다. 은은 금보다는 수준이 낮은 원리를 표현하지만, 이 원리도 천국 삶의 기본 요소에 해당된다. 이 원리는 이웃을 사랑함을 원칙으로 삼은 원리요 우리는 이를 영적 원리 즉 이타애라 부른다. 이 원리는 주님을 사랑함을 원칙으로 하는 것보다는 그 수준이 낮은데 그 이유는 주님을 사랑함은 선함 자체를 사랑하는 것인 반면, 이웃을 사랑함은 근본적으로 진리를 사랑함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선을 사랑함이 진리를 실천함을 수단으로 달성된다. 영적 원리, 이타애는 영적 천국이라 불리는 중간 천국인 이층 천국에 거주하는 천사들을 구별짓게 하는 원리이다. 동(brass, copper)은 자연적 선을 표현한다. 이 선은 인간이 자연적 삶에서 주님의 법에 순종할 때 획득되는데 이 순종은 인간으로 선을 행하게 해준다. 철은 자연적 진리를 표현한다. 이 진리는 규율 속의 진리요 이 진리는 인간의 행동을 조절해 준다. 마지막 두 개는 자연적 천국 안에 있는 이들과 함께 존재하는 선과 진리의 품질들로 천국적 삶 중 가장 낮은 수준에 속한다.
이와 같이 각기 다른 가치와 품질을 지닌 금속은 각기 다른 교회들 또는 지상의 인간 사이에 있는 넓은 측면에서의 각기 다른 면모의 교회들과 상응된다.

인간의 몸

위에서 살핀 각 금속들의 상응 외에도 인체의 각기 다른 부분과 인간 삶의 각기 다른 수준은 상응 관계를 이루고 있다. 인간이 직립할 경우 머리는 신체 중에서 가장 높은 부분이 된다. 게다가 머리는 가장 중요한 가치와 중요성을 지닌다. 그래서 머리는 인간 만사 중에서 머리가 되는 것, 인간 삶의 가장 높은 요소인 주님을 사랑하라는 황금 원리와 상응된다. 머리 아래에 위치하는 것은 가슴과 팔이다. 이것 역시 큰 가치를 지니고, 이것들은 이웃을 사랑하라는 은 원리와 상응된다. 이 원리는 거듭나는 삶의 영적 원리이다. 이 아래 부분으로 복부와 정강이가 있는데 이는 자연적 선을 표현하고, 이는 동(구리)과 상응된다. 이 아래 부분으로 다리와 발이 있는 바, 이는 자연적 진리로 이루어지는 삶을 표현하고 이는 마음속의 철과 상응된다. 위에서 열거된 각기 다른 요소들은 선을 생산하는바, 사람이 사람답게 되는데 절대적인 요소들이다.
이렇게 해서 삶의 각기 다른 요소들은 천국에서도 더 높거나 낮은 상태로 서로 유사한 관계가 있게 된다. 따라서 두 세계의 비교 또는 상응은 각기 다른 양상들로 있는 인간 삶에 관계가 있는데, 그것이 지상에 존재해 온 각기 다른 교회이든, 천국에 있는 각기 다른 조건들이든, 인간 각 개인의 마음 안에 있는 원리들에 관계되든, 모두 유사한 품질을 지니게 된다.

형상 (the image)

위에 살핀 내용들이 느부갓네살에 의해 보여진 큰 형상으로 본문에서 표현되고 있다. 따라서 우리가 쉽게 알 수 있는 것은 왕 자신의 마음 안에 똑바로 우뚝 선 것들, 즉 그의 야망에 찬 생각들, 자신의 위대함, 왕국의 장려함, 그의 권세가 팽창함, 그리하여 온 세계를 통치하겠다는 욕망을 그대로 반영한 그의 마음과 똑같은 형상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 꿈은 지배욕이 인간 마음 안에서 작동될 경우, 그리고 인간 역사 속에서 작동될 경우 맞이해야 할 피할 수 없는 결과를 인간에게 밝히 알게 해주고 있다. 그 이유가 지배욕에 있는 통치하는 사랑은 자아 사랑에 근거하기 때문이다. 이 사랑은 결국 자신만에 관심을 가질 뿐 주님과의 결별을 초래한다. 따라서 악을 사랑하고 죄짓는 생활 속에서 자아 파멸로 이어져 결국 멸해지고 만다.
형상의 머리는 금으로 되어 있었다. 이는 주님을 사랑함이라는 천적 사랑을 표현한다. 상체는 은으로 되었는데, 이는 영적 사랑인 이웃을 사랑함을 표현하고 있다. 하체는 구리로 되었는 바, 이는 자연적 선함을 표현하고 있다. 다리는 철로 되어 자연적 진리를 표현해 주고 있다. 이상의 모든 것들은 실상 올바른 인간 마음과 선한 것에 필수적 요소들이다. 만일 다리가 좋은 철로만 구성되어 있다고 가정한다면, 이 형상은 고상한 인간다움을 표현해 주었을 것이고, 각기 다른 원리들이 서로 유사한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을 표현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 형상의 약점은 발에 있었다. 그 이유는 발은 “진흙과 쇠”로 구성되었기 때문이다. 철과 진흙은 서로 결합할 수 없게 되어 있다. 따라서 이 형상은 굳건하게 서 있을 수 없다. 철과 결합할 수 없는 진흙(clay)은 자연적인 악을 표현하는데 이 악은 자연적 진리와 결합될 수 없는바 선한 자연적 삶의 굳건한 기초를 제공해 주지 못한다.

인간 역사

이상에서 살펴본 것만 가지고도 우리는 타인을 지배하려는 원리의 총 역사, 그리고 그 원리의 종말은 자아 파멸이라는 것을 알았으리라 본다. 이 큰 형상은 금으로 된 머리를 가지고 있었다. 이는 어떤 역사의 시작 초, 또는 마음의 가장 높은 상태인 주님에 대한 어떤 사랑을 가지고 통치자는 상상하기를, 자기는 자기 밑에서 통치 받는 이들에게 천적 선을 행하기 위해 그들을 통치할 뿐이라고 한다. 그 이유가 이 백성들은 주님의 자녀인 바, 왕의 보호 아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통치에 재미를 붙여 더 강세를 얻은 사랑은 천적 사랑 아래로 점차 타락되면서 새로운 정신적 조건을 가져온다. 즉 주님의 요구가 잊혀져 가서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는 원리를 중심으로 삼게 되는 바, 그 이유가 그는 자기가 지배하는 이들이 잘 사는 것을 원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이 사랑은 은으로 된 가슴과 팔로 내려앉아 금으로 된 머리와는 결별하고야 만다.
그러나 통치하려 드는 사랑 속에 잠복한 이 사랑의 근본을 이루는 자아 사랑은 사랑의 영적 요소를 망각해 버렸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세력은 더욱 증가한다. 그래서 이 통치자는 백성의 외적인 것과 자연적 선을 위해 그들을 통치해야 한다고 자신을 스스로 설득시킨다. 이 수준은 그로 하여금 구리로 된 가슴과 팔의 위치로 하강하게 해준다. 그리하여 이 점진적인 하강은 마음의 또 다른 상태를 가져오는데, 그것은 자연적 평면 조차에서도 선함을 잊는 것, 그리하여 철로 된 다리로의 하강, 그래서 자연적 진리라는 고된 법에로 하강 국면을 맞이한다. 이를 수단으로 통치자는 자연적 진리야말로 타인을 통치하는데 가장 적절하고 올바르다고 자신 스스로 설득시킨다.
위의 하강 추세는 철의 단계에서조차도 멈추어지지 않는다. 이제 통치자의 마음은 영적으로나 자연적으로나 선함과 진리에 관한 어떤 사상도 한쪽으로 밀쳐 내고 한편으론 진흙으로 한편으론 철로 자신의 서 있음을 버텨 내려고 골몰한다. 결국 법에 수반되어 있어질 뿐일 법의 허상을 입게 된다. 그러나 자연적 진리 또는 법이라는 철은 악이라는 더러운 진흙과 부합되지 않는 바, 형상 전체는 자신의 안전한 위치를 잃고야 마는 것이다.

파멸

위와 같이 이 큰 형상이 낮은 평면에서 서 있었을 때 형상 부근의 산에 있던 돌이 굴러 내려와 이 형상을 산산 조각 냈다. 이 돌은 형상의 연약한 부분인 다리를 쳐서 그 형상을 날려 버려 “타작 마당의 겨처럼” 먼지가 되게 했다. 한 마디로 진흙, 철, 동, 은, 금, 모두 파괴되었다는 말이다.
형상을 짓부순 “돌”은 주님의 진리요, 이 진리는 인간에게 밝히 알게 해주는 바, 주님 사랑이라는 큰 산으로부터 출현된다. 주님은 스스로 그분의 진리에 계신다. 그래서 진리가 인간 마음을 따라 자라면서 그 진리는 성장해서 “큰 산이 되어 온 세상을 채우는” 것이다. 다시 말해 그 진리는 교회와 인간 마음을 주님의 사랑으로 채운다는 말이다. 이 돌은 인간의 손을 거쳐 산에서 취해진 돌이 아니고 저절로 출현된 돌이다. 이는 악과 거짓을 흐트러 버리는 진리는 여느 인간이 조작한 신조로 있어지는게 아니라 신성한 진리 자체의 영임을 표현하는 것이다.
이런 사항들이 꿈과 꿈에 대한 다니엘의 해몽에서 설명되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본문을 읽는 가운데 혼동치 말아야 할 것은 “금으로 된 머리는 임금님이십니다”라는 대목이다. 이는 바빌론 또는 바빌론 왕이 마음의 천적 상태를 뜻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바빌론은 한 때 천적 교회였던 것들이 타락되고 타락되면서 남은 찌꺼기일 뿐이다. 한 때이지만 천적 교회 속에 있던 통치자들은 주님을 사랑함으로, 백성들 속의 선을 위하여 통치했었다. 갖가지 모든 교회 속에서 우리는 각 교회를 특징지어 주는 것들의 점진적 하강을 추적해 볼 수 있다. 진보하고 타락하는 모든 단계 속에서 교회 속의 어떤 것이 유지될 수 있다면 단체라는 교회의 조직이 계속 되도록 허용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교회 속의 인간들이 한결같이 감각적 측면으로 쏠려 교회의 생명인 영적 특성을 무시하여 잃게 되었다 해도 외적 교회를 수단으로 외적 질서 속에 그 교회는 계속 유지 보존은 가능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교회가 선에 속한 어떤 것을 더 이상 섬기지 못할 때, 그 교회는 막을 내린다.

교회들

태고 교회는 아주 큰 영적 총명을 소유했었다. 그러나 그 교회인들은 지식의 나무를 잘못 먹음으로, 다시 말해 주님께서 알게 해주신 진리들이 짐짓 제가 잘나서 인줄 착각하여 진리가 제것이라고 고집함으로서 타락을 시작했다. 이리하여 그들은 자기가 총명하다는 것으로 인해 파멸되었는데, 이것이 홍수라는 비유로 묘사되고 있다. 고대 교회의 파멸은 이스라엘족에 의해 가나안 땅의 백성이 쫓겨나는 것으로 표현되고 있다. 유대 교회의 끝은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와 유대인이 포로로 끌려가는 것으로, 그리고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표현되고 있다. 첫 기독교회의 끝은 세세한 도표 형식으로 성경에서 그려지고 있는데 이를 계시록에서 특별히 취급하고 있다. 그리고 첫 기독교회의 끝에서 주님께서는 다시 오셨는데, 그 오심은 처음의 오심과는 달리 영적으로 오셨고, 이 오심에서 있어지는 그분의 생명과 빛은 더욱 더 충만 되게 흘러나오고 있다. 그리고 이 빛과 생명은 “성령께서 하시는 말씀을 들을 귀 있어 듣는 자”에게 흘러들고 있다.
끝장을 본 모든 교회들은 한결같이 인간 안에서 하느님의 형상(image)을 정반대 되게 함으로 해서 타락되고 말았다. 각 교회인들의 시도는 쇠와 흙으로 된 발 위에 천국적 금과 은을 세우려 했던 것이다. 다시 말해 그들의 시도는 이기적인 악한 삶 위에 천국의 원리를 세우려 했다는 말이다.

실용적 교훈들

먼 옛날 이 왕에 의해 보여진 형상은 오늘 우리 앞에서도 타락하는 마음의 끝장을 그린 놀라운 그림으로 버티고 서 있다. 우리는 세상의 미덕으로 자기 속의 이기심을 덮어두려 골몰할는지 모른다. 자기 속의 진짜 동기에 든 악을 보호하고자 온갖 합리성으로 자신을 옹호하려 들는지 모른다. 그러나 이런 저런 노력이 있다 해도 우리 인간은 계속 아래로 향해 가는 것을 멈추게 할 수 없고 마지막 자아 파멸을 피할 도리는 없다. 거듭 나는 삶만이 타락하는 자신의 코스를 바뀌게 할 수 있을 뿐이다.
위의 말이 뒷바침 되도록 오늘 본문의 끝 부분에서, “…이 왕들 시대에 하늘에 계시는 하느님께서 한 나라를 세우실 터인데 그 나라는 영원히 망하지 아니할 것이다”라고 말해 주고 있다. 이 왕국은 주님 자신의 영적 왕국, 그분의 재림에, 그분의 영 가운데 있는 왕국이다. 주님께서는 이 왕국을 그분을 사랑하는 이들의 심정 안에 건설해 주신다. 이 왕국은 신성한 말씀의 내향적 의미인 영적 의미를 수단으로 건설된다. 그래서 이 왕국은 “영원히 망하지 아니하는 바,” “풀은 시들고 꽃은 지지만 우리 하느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 있으리라” (이사야 40:8).
인간을 위한 하나의 처방으로 도래된 첫 기독교회 역시 앞서 살핀 모든 상태를, 초기 금의 상태로 시작해서 은으로, 그리고 동과 철, 마지막의 진흙 상태까지 이어진 뒤 주님의 재림에서 끝을 내었다. 이제 교회의 진보가 부상되면서 이 경우는 정반대 되어 있다. 그 이유는 모든 각 개인, 교회는 아래로부터 위로 향하는 작업을 다시 해야 하기 때문이다. 새 예루살렘이 온다는 약속에서 우리 주님은 우리를 잃어버린 땅으로 되돌아가도록 인도하시지 않음으로 우리로 영적 유산을 다시 받게 해주실 것이다. 이를 두고 이사야는 노래한다. “내가 놋쇠 대신 금을 들여오리라” (이사야 60:17).
새 예루살렘에 속하는 사람들에게 모든 선한 원리들은 사랑받고, 이해되여 일상 생활 속에서 건설되면서 그 자체 스스로 더 높은 국면에서 우리 영혼이 열리고 마음은 더 높은 차원에로 승강되어 주님께 더욱 더 가까이 가게 해주리라.

현 조건들

가끔 우리가 궁금해하는 것 중 하나는 왜 새 예루살렘이 하늘에서 좀더 빠르게 하강하지 않을까라는 점이다. 천상 천하의 한 분 하느님,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이라는 큰 진리는 이 큰 형상의 연약한 발을 강타했다. 그러나 우리는 이 형상이 산산이 부숴져 가고 있는 시기에 살고 있다. 기독교국이라는 분파 속에 있는 선은 영적 선이라기보다 자연적 선이라고 보는게 옳고 이 선이 최선의 방책인 듯 아직도 드넓게 자리잡고 있다. 선이라 불리는 수많은 것들은 인간의 자연적 악들인 진흙과 뒤엉켜 있다.
인간 삶의 갖가지들이 뒤범벅된 우리 주위를 둘러보라. 그리고 어떤 기반이 새 예루살렘을 위해 마련되어야 할 것인가 되물어 보라. 일반화되어 버린 무질서, 이기적 목적을 위한 큰 규모의 조직들, 법의 제한을 뚫으려 드는 성급함들이 도처에 산재해 있다. 또는 노골적으로 자기 것만 옳다고 주장하던가, 거만할 정도의 자기 이익만의 추구들은 보편화되어 있다. 범죄 역시 풍부하다. 많은 이들이 신뢰할 것을 믿지 못해 의무까지 회피하고 있다. 부도덕이 구릿빛 얼굴을 버젓이 내밀고 온 땅을 활보하고 있다. 온갖 비합리적인 학설들이 순수한 기독교의 자리에 들어앉으려 한다. 야비하고 무례하고 저속한 악들이 세련된 모습으로 웃음을 던지고 있다. 이같은 것들은 거룩한 성이 내려올 준비된 기반이 될 수는 없다. 이런 시대 상황의 틈바구니에서도 보다 높은 영적 조건에로 기어오르려 애쓰는 각 개인에게는 자신들이 걸어가야 할 길을 주님께서 밝히 보여주실 것이다. 그러므로 “악을 버리고 선을 행하여라… 만군의 하느님 야훼께서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 (아모스 5:14).

37
큰 나무에 관한 느부갓네살의 꿈

성서 본문: 다니엘 4장 10-28절

10. “‘잠자리에 누워서 이런 것들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 가는 것을 보고 있는데 이번에는 하늘에서 거룩한 감독원 하나가 내려 오더니 11. 이렇게 외치는 것이었다.
이 나무를 찍어라. 가지는 잘라 내고
잎은 흩뜨리고 과일은 따 버려라.
짐승들로 하여금 그 밑을 떠나게 하고
새들로 하여금 가지를 떠나게 하여라.
12. 그러나 등걸과 뿌리만은 뽑지 말아라.
쇠사슬, 놋쇠사슬로 묶어 풀밭에 버려 두어라.
하늘에서 내리는 이슬에 몸을 적시고
짐승들과 어울려 풀이나 뜯게 버려두어라.
13. 사람의 정신을 잃고
짐승처럼 생각하면서 일곱 해를 지내야 하리라.
14. 이것은 감독원들의 결정으로 이루어진 포고이다.
거룩한 이들의 명령으로 내려진 판결이다.
인간 왕국을 다스리는 분은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이라는 것을
살아 있는 자들에게 알리려는 것이다.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께서는 겸손한 사람을 좋게 보시고
그런 사람을 높은 자리에 앉히시어
나라를 다스리게 하신다.
15. 이상이 나 느부갓네살왕이 꿈에서 본 것이다. 벨트사살, 이것을 해몽하여라. 이 나라에는 내 꿈을 해몽할 재사가 하나도 없었다. 그러나 너는 거룩한 하느님의 영을 받은 사람이니 해몽해 주리라 믿는다.’”
16. 벨트사살이라고도 불리는 다니엘이 크게 놀라며 잠시 난처한 기색을 보이자 왕은 이렇게 말했다. “벨트사살, 내 꿈이 길몽이 아니더라도 사실대로 풀이하여라. 꺼릴 것 없다.” 그러자 벨트사살이 대답했다. “임금님 그런 꿈은 임금님의 원수들이 꾸었더라면 좋았을 뻔했습니다. 해몽도 임금님의 적에게나 해 주고 싶습니다. 17. 임금님께서 보신 그 나무는 크고 우람져서 하늘까지 닿았고 세상 어디에서나 볼 수 있었다고 하셨지요? 18. 잎사귀들은 싱싱하고 열매는 세상 사람들이 다 먹고 살 만큼 많이 열렸으며 들짐승들이 그 밑으로 찾아 들었고 가지에는 공중의 새가 깃들었다고 하셨지요? 19. 그 나무는 바로 임금님이십니다. 임금님께서는 그처럼 위대하시고 세력이 크십니다. 임금님의 세력은 하늘까지 뻗고 세상 끝까지 다스릴 만합니다. 그런데 임금님께서 보신 대로 하늘이 보낸 그 거룩한 감독원이 땅에 내려와 이렇게 외쳤다고 하셨지요? ‘그 나무를 찍어 버려라. 그러나 등걸과 뿌리만은 뽑지 말아라. 쇠사슬과 놋쇠사슬로 묶어 풀밭에 버려 두어라. 하늘에서 내리는 이슬에 몸을 적시고 들짐승들의 먹이나 얻어 먹으며 일곱 해를 지내리라.’ 21. 임금님, 해몽은 이렇습니다. 그것은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께서 임금님을 두고 내리신 판결입니다. 22. 임금님께서는 세상에서 쫓겨 나 들짐승들과 같이 살게 되셨습니다. 소처럼 풀을 뜯고, 하늘에서 내리는 이슬에 몸을 적시며 일곱 해를 지내게 되셨습니다. 그리고 나서야 인간 왕국을 다스리는 분이 바로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이심을 깨닫게 되실 것입니다. 그리고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께서는 겸손한 사람을 좋게 보시고 그런 사람을 높은 자리에 올려 앉혀 나라를 다스리게 하신다는 것을 깨닫게 되실 것입니다. 23. 나무등걸과 뿌리만은 그대로 두라고 한 것은, 임금님께서 하늘이 세상을 다스린다는 것을 깨닫게 되시면 이 나라를 임금님께 다시 돌려 주신다는 뜻입니다. 24. 임금님께서는 이제 소인이 드리는 의견을 기꺼이 받아 들어 주십시오. 선을 베풀어 죄를 면하시고 빈민을 구제하셔서 허물을 벗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길이 태평성대를 누리실 것입니다.”

머리말

천적 교회(Celestial Church)는 생명있어 번성하는 조건 속에서 시작되었다. 그러나 그 교회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지혜를 자신의 것이나 된 듯 사랑하는데 몰입되었다. 그래서 그들은 모든 진리와 생명의 근원이 주님이심을 잊어 갔다. 결국 그들은 교회의 몰락을 자초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선함의 일부는 새교회가 건설될 때까지 주님에 의해 인간의 심정인 내면에 보존되어 자양분을 그분에게서 공급받았던 것이다. 이러한 상태들이 역사적으로는 집단적인 교회에, 개인적으로는 인간 속마음에 응용되었다.

통치하는 사랑 (the love of ruling)

본문은 사람들의 마음을 통치해 가는 사랑을 다루고 있다. 그리고 본문은 개인적으로나 집합적으로나 인간의 마음에 이러한 사랑으로 있게 될 피할 수 없는 결과도 예증해 주고 있다. 통치하는 사랑에는 두 가지, 즉 선한 사랑과 악한 사랑의 두 종류가 있다. 통치하는 선한 사랑은 인간 사이에 있어지는 주님의 섭리에 속한 것들을 집행해 가는 사랑이다. 이 사랑은 거듭나는 마음에 존재한다. 그 이유는 그 사랑의 목적은 타인의 행복을 위해 주님으로부터 타인에게 선을 행하는데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통치해 보려는 바램은 주님의 이름으로, 또는 인간 삶을 위해 그분이 밝혀 주신 법칙에 따라 인간 사이에서 주님의 통치를 수행하고자 하는 바램일 뿐이다. 그러나 타인 위에 군림하려는 악한 사랑은 자아애의 형체로서, 이는 자기만을 위해, 자아 사랑을 위한 이득을 챙기고자 타인을 복종케 하려 든다. 이 악한 사랑은 지옥에 근원을 두고 있으면서 거듭나지 않는 사람 속에 들어간다.
글자대로 본문을 살피면, 본문은 바빌론 제국과 그 나라의 위대한 왕을 다루고 있다. 바빌론은 타인 위에 군림하겠다는 악한 사랑을 표현한다. 그리고 그 왕은 이 악한 사랑에 방향을 제시하여 이끄는 거짓 원리를 말한다. 본문 시대 때의 바빌론은 한 때 천적 교회였던 데에서 퇴보된 잔류(remnant)였다. 바빌론이라는 도시는 거대한 도시였다. 그 곳 신전에서의 예배는 아주 거창하고 정교해서, 겉으로 보기에는 매우 화려하고 번성하는 듯 보였다. 이런 견지에서 바빌론의 외적 조건들이 본문에서는 우람차게 큰 나무로 표현되어지고 있다.

큰 나무

그래서 이 나무의 역사는 바빌론으로 표현된 정신적 조건에 있는 영적 역사를 표현하게 된다. 한 개의 씨로 출발해서 지상에서 자라는 나무란 마음속에 이식되어, 여러 단계의 진보를 통과하면서 마음속에서 자라는 원리를 표현한다. 이런 의미로 볼 때, 「겨자씨의 비유」에서, 주님은 인간의 마음에서 있어지는 그분의 진리의 성장을 이 작은 겨자씨의 성장에 비교하셨던 것이다. 본문에 있는 크고 우람한 나무란 멀리까지 미치는 마음의 총명, 그 안에서 주님의 진리가 크게 자라 큰 힘을 소유한 마음의 상태를 표현한다. 이 나무가 하늘까지 닿았다는 것은 마음이 천국적인 것들을 이해하는데 까지 도달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땅 끝 어디서나 바라보였다는 것은 글자대로도, 그 나무의 키가 높아서 먼 거리에서도 보여질 수 있었다는 뜻이다.
이를 영적으로 살피면, 그것은 마음의 총명이 교회의 미미한 사항에까지 진리가 닿도록 해준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자연적인 것뿐 아니라 영에 속한 사항 모두에 진리가 스며든다는 말이다. 이 나무의 잎은 싱싱했다. 즉, 합리적인 생각들이 진실되고 풍부하게 있다는 말이다. 그 열매는 아주 많았다. 즉, 선한 일 역시 선한 원리의 결과로 풍부했다는 뜻이다. 더욱이 이 열매는 세상 사람이 다 먹고 살 만큼 풍부했다. 자라나는 진리는 인간 마음의 모든 부분에 생명과 만족을 주고도 남는다는 것이다. 들짐승들이 그 그늘 밑으로 찾아 들었다. 마음속의 애정들은 알려진 진리 안에서 쉴 곳을 발견했다는 말이다. 새들이 그 나뭇가지에 깃들었다. 생각들이 알려진 진리 사이에 거주했다는 말이다.
이상 살핀 바의 나무는 삶의 모든 평면에서 자라서 무성해지는 상태, 좋은 조건에 있는 마음을 표현한다. 즉 거듭나는 상태 속에서 마음이 어떻게 되어갈지에 대한 것을 표현해 주고 있다.

파멸

그러나 본문에서의 나무는 퇴보되는 마음, 높게 번성해 가는 조건에서 추락하는 마음, 그래서 거의 다 파멸되고 마는 마음을 표현하고 있다. 이렇게 엄청난 파멸의 원인은 인간이 자기만의 사랑에 몰입되어 집착하면서 그 사랑을 목적으로 해서 타인 위에 군림하려는 사랑을 고수하려는데 있다. 이 사랑에서 발동되는 악한 원리는 마음 안에서 크게 번성한 진리에 관한 나무의 파멸을 야기시킨다.
이 나무는 하늘에서 내려온 거룩한 감독원의 명령으로 찍혀지고 말았다. 이는 하느님의 섭리를 표현하는 것인데, 신성한 권능이 인간의 마음 안에서 발휘되어 인간의 영적 생명이 지극히 위험할 정도까지 치닫게 한다는 말이다. 그리고 다각적인 경험을 통하도록 인간을 인도해 가고, 그러는 가운데 항구적인 기초인 좋은 마음 바탕이 회복되어지게 한다. 다시 말해 인간의 마음이 어떤 상황에서 그 상황의 막바지까지 치닫아 그 퇴보하는 단계를 완성시켰을 때 주님께서는 존재하는 상황에 있어야 할 심판을 허용하시어 그 상황이 끝장을 맞이함으로서 새로운 시작이 정신적 생명의 다른 수준에서 만들어지게 해주신다.
그러나 이전에 그 사람의 마음속에서 자라던 주님의 진리에 의한 모든 지식과 총명은 땅에 떨어져 아무 것도 아니게 된다. 그 이유는 그 사람이 자아 사랑과 타인을 지배하려는 사랑에 충당하려고 주님의 진리에서 나온 총명과 지식을 뒤집어서 남용했기 때문이다. 선하고 참된 원리가 그 생명과 성장, 그리고 열매의 생산을 계속해 갈 수 있는 것은 오로지 그 원리가 주님의 선이나 진리로서 받아 사용했을 때만이, 그리고 주님이 인간의 삶에 대해 밝혀 주신 목적을 위해 사용될 때에 한해서만 가능한 것이다. 선함과 진리가 악한 목적에로 뒤집어지면 그것을 썩게 하는 마음속의 악과 거짓이 되어 버린다. 이런 마음속에 있는 모든 선한 짐승과 새들은 그 나무에서 떠나도록 경고되어지고 있다. 그 이유는 그 나무가 이내 쓰러질 것이기 때문이다. 통치하는 이기적인 사랑이 삶을 좌지우지하면 마음속에 있는 선한 애정과 진정한 생각들은 그 마음에서 분리되어져야 한다.

등걸 (그루터기)

그러나 주님의 무한한 자비는 그 인간의 미래의 회복과 성장을 위해 등걸과 뿌리만은 남도록 설비해 주신다. 그 이유는, 만일 뿌리에 충분한 생명력이 있다면, 그 뿌리는 적당한 조건하에 새 나무를 자라게 할 수 있을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마음속의 뿌리란 의지 속에 있는 애정들이다. 근본이 되는 원리들로부터 새 생명은 새 조건하에 자라나 열매를 맺을 수도 있는 것이다.
한 인간이 자기가 익히 아는 원리들을 썩게 만들어 스스로 파괴를 자초하도록 자신의 마음을 허용할 때, 그는 영적으로 거의 죽은듯한 상태에로 떨어지게 된다. 그럼에도, 만일 그 사람의 심정 속에 선함에 관한 것이 약간만 남아 있어도 주님은 이 작은 선함을 보존하시고, 주님의 섭리의 인도하심과 교훈을 수단으로 그 조금 남은 선함으로부터 그 사람에게 잠재한 영적 생명을 끌어내시어 새로운 성장을 인도하시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주님은 그 인간이 빠지고야 말 영원한 죽음, 즉 영적 죽음에서 유보되게 배려하신다. 그러면서 주님은 자연적인 선함과 진리에 관한 지식 가운데에 그를 붙잡아 두시는 방법으로 새로운 성장을 행할 수 있으신다. 다시 말해 주님은 그분의 말씀의 글자에서 나오는 빛 가운데 인간의 마음을 붙잡아서 그가 주님의 계명에 따라 자기 행동을 형성할 수 있도록 하신다. 이와 같이 말씀 글자에 있는 명령들은 한 인간이 삶의 실제적인 악들에 빠지는 것을 방어하게 해 주고, 더불어 실제의 악들에 자신을 고정시킴에 따라 야기되는 영적인 죽음에서도 방어해 주시게 된다.
이런 방어가 철과 놋쇠 사슬로 표현되고 있고 이 사슬들이 본문에 서술된 바대로 이 나무의 그루터기를 묶고 있는 것이다. 글자대로 인간이 나무의 등걸을 보존시킬 수 있는 길은 그 등걸을 강한 고리(사슬)로 동여맴으로서 비나 바람 그리고 서리가 그 등걸을 쪼개지게 하거나 썩게 만드는데서 방어되게 하는 것이다. 이 사슬이 시련의 때에 인간 마음에 주어지는 보호 수단이다. 쇠사슬이란 자연적인 진리, 또는 글자적인 진리를 표현한다. 놋쇠 사슬이란 자연적인 선을 표현한다. 그래서 어떤 한 인간이 악에 빠질 때, 그는 하느님 말씀의 글자가 묶어 주는 영향 밑에 보존되어 질 수 있다. 즉 그가 일상 생활에서 주님의 계명을 지키게 되면 그 사람 심정 속에 있는 잠재적인 선은 무엇이든지 보존될 수 있고, 이 선이야말로 새로운 영적 성장의 기초를 마련해 준다.
이렇게 묶은 등걸과 뿌리가 “풀밭에 버려두었다.” 이는 인간의 인격이 형성되는 곳인 일상 생활 안에 있는 자연적인 것에 관한 실제적인 지식 사이에 놓여진다는 말이다. 이것은 “소(ox)처럼 풀을 뜯고…”라는 22절에서도 언급되고 있다. 그리고 등걸은 하늘에서 내리는 이슬에 몸을 적셔야 할 것이라 했는데, 이는 하느님 말씀 속의 진리들이 일상 생활의 세부 사항에 응용될 때 그 진리가 마음에 닿게 될 것임을 뜻하고 있다.

짐승들과 어울려…

그러나 퇴보되는 인간은 “사람의 정신을 잃고,” 자연적 충동에 의존하는 짐승들 같이 되어진다. 이런 사람의 애정의 질은 더 이상 영적이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감각적이다. 이럴 경우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라도 이 사람은 자기가 알고 있는 진리의 일부가 모독한 상태에 있게 된다. 그의 지성은 영적인 빛 속에서 영적 진리를 보는 능력인 영적 합리성에 속하는 인간 특성을 더 이상 즐기지도 못한다. 이렇게 해서 이 사람은 자기에게 인식되는 주님의 도움 없이 스스로 자기 본래의 위치로 전락된다. 이렇게 전락된 상황은 그로 하여금 본문에서 짐승으로 표현되는 악령과 정신적인 연합을 초래하고야 만다.

일곱 번

본문에서 “…일곱 해를 지내야 하리라, let seven times pass over him”라고 언급되는데, 이를 보다 더 글자대로 말한다면 “…일곱 번 바뀔 것이라, seven times shall change upon him”가 되기도 한다. 글자에서의 해(또는 때, times)는 영적일 경우 해나 때에 관해 언급하는게 아닌 정신적 상태에 관해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일곱이란 숫자는 상징적인 측면에서 두 가지 의미를 가지는 바, 이는 완성함과 거룩함이다. 두 의미는 실상 하나로 조화를 이루는데, 그 이유는 거룩함이란 하느님의 법을 준수하기를 완성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곱 해” 또는 “일곱 때”란 타락한 인간 속에 남아 있는 선이 그를 진정한 인간 삶으로 회복시켜 주기 전 반드시 거쳐야 할 정신적 상태의 연속되는 변화의 완성을 표현하는 것이다. 이미 썩어진 마음속의 낡은 것들은 거룩함의 내향적 삶이 싹트기 전 완전히 닦아 내 지도록 스스로 허용해야 한다. 그런 다음에야, “인간 왕국을 다스리는 분이 바로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이십니다”라는 것이 그 사람에게 가르쳐 진다. 이는 하느님의 원리가 그 사람의 마음과 생활을 통치한다는 말이다.
본문에서 말해지는 바,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께서는 겸손한 사람을 좋게 보시고 그런 사람을 높은 자리에 앉히시어 나라를 다스리게 하신다”고 적고 있다. 겸손한 사람(천한 자, basest of men)으로 번역된 히브리 단어는 성품에 관계되는게 아니라 사회적 지위에 관계된 말이다. 이는 천한(humble), 비천한 지위(humble position), 사회적으로 낮은 계급(low station)에 관계되고 있다. 그래서 이 구절을 글자대로 생각하면, 주님께서는 간혹 사회적으로 두드러지지 않는 사람을 일으키시어 왕이 되게 하신다는 것이다. 시편 기자는 이를 다음과 같이 읊는다. “약한 자를 티끌에서 끌어올리시고 가난한 자를 거름더미에서 끌어내시어 귀인들과 한 자리에, 백성의 귀인들과 한 자리에 앉혀 주신다” (시편 113:7-8). 그리고 누가복음 1장 52절에서, “권세 있는 자들을 그 자리에서 내치시고 보잘 것없는 이들을 높이셨으며…”라고 노래하고 있다.
주님께서 우리를 훈련시키실 때, 위의 사항들을 마음속에서, 인격 속에서 행하시되, 우리가 자기 찬양을 내려놓고 과거에 경멸해 왔던 거듭나는 사랑에 있는 더 높고 더 내면적인 특질을 찬양할 때까지 계속 행하신다.

나무로서의 느부갓네살

성경에서 명명되는 인물 중의 일부는 오로지 표징적일 뿐, 실제의 개인을 암시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느부갓네살은 실제의 인물로서 서기 육 백년 전에 살았던 바빌론의 아주 유명한 왕이었다. 그리고 그는 공학과 건축에 관한 거창한 업적을 창출했던 인물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의 지나친 개인적 야망은 마침내 그를 사악한 인물로 치닫게 해서, 아마 낭광(lycanthropy, 자신을 이리 따위의 야수라고 여기는 정신병)으로 알려진 특이한 형체의 사악함에 몰입된 듯하다. 이런 병적 증세는 쉽게 인간의 마음을 불안정하게 해서 사악한 인간과 쉽사리 유대 관계를 맺는 악령에 휘말린다.
그러나 영적으로 보면, 이런 것들은 인간이 자신을 추켜세우면서 주님을 잊게 될 때, 쉽게 빠지고 마는 거짓들이나 천한 오류들을 표징한다. 이러면 마음 안에 있는 인간으로서 있어야 할 요소들은 축출되고, 인간의 동물적인 요소들이 그 인간을 좌지우지하게 된다. 이렇게 되면 그 인간은 짐승처럼 생각하고 짐승들에 어울리는 삶을 영위하게 된다. 한 마디로 그는 합리적인 인간 삶이라기 보다 동물의 삶을 영위하는 것이다.

확실한 왕국

그러나 만일 주님의 무한하신 사랑과 자비가 인간 안의 어떤 새로운 선을 발달시킬 수 있다면, 그는 합리적인 인간다움을 회복하여 그의 영적 왕국은 그를 위해 확실히 존재하게 될 것이다. 진정한 인간성을 회복시키기 위해 마음을 준비하는 수단이 바로 다니엘이 왕에게 꿈을 해석해 주면서 충고한데에 나타나고 있다. 즉 “선을 베풀어 죄를 면하시고 빈민을 구제하셔서 허물을 벗으시기 바랍니다. 그리하면 길이 태평성대를 누리실 것이다.” 이 충언은 자아사랑과 자아에서 파생된 총명을 드높여 찬양하는 한편 가난과 재난에 방치해두었던 우리의 영적 본성에 생명을 줌으로써 악과 거짓을 중단하고 주님께 순종하기 위한 항구적인 개선의 수단이다.

응용
본문은 선포하기를, “이런 것들이 다 그대로 느부갓네살왕에게 들어맞았다.” 그러나 이런 경우에서 예언의 글자적인 성취가 이루어지는 동안, 이 역사의 외적인 줄거리들은 영적 측면을 상징화 해주고 있는 것이다. 느부갓네살의 경우가 잠언 16장 18절의 좋은 예이다. “거만엔 재난이 따르고, 불손에 멸망이 따른다.” 느부갓네살은 타인 위에 군림하겠다는 이기적인 사랑의 영향 아래 죽어 가는 인간 본성을 표현한다. 이런 지옥적인 영은 개인 안에서, 교회 안에서, 이 세상에서, 저 세계에서도 공히 존재한다.
지상의 인류사 역시 지나친 야망에 관한 많은 실예를 제공한다. 그 야망들은 정신적 측면에서, 물질적 측면에서, 어느 측면이라도 좌지우지하려 드는 것이다. 크시륵세스(xerxes), 시이저, 나폴레온, 기타 많은 자들이 인간 역사의 지평선을 타고 찬란히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비참한 종말 속에 침몰되었던 것이다.
우리 각 개인의 자그마한 인생 속에서도 위의 인물들이 지녔던 비슷한 자기 찬양의 영은 우리 인생 과정 속에서 줄을 잇고 있으면서 우리를 지배하려 든다. 그러나 가장 행복해지는 것은, 우리가 인생 경력을 쌓는 가운데 가능만 하면 빨리 우리 속에 든 지독하게도 악질적인 지옥적 본성을 발견하는데 있다. 그래서 우리가 그 악을 거절하고 저항하면서 빛과 안내를 주님에게서 찾아야 한다.
때로 이런 악들은 이렇게 자신에게 묻는 경우에도 발생된다. “왜 우리 주님은 내가 원하는 방법과 같은 측면에서 나를 잘되게 해주시지 않는가? 내 생각도 꽤 주님의 생각과 맞는 것 같은데…” 그러나 우리의 정신 상태가 영적으로 번영하지 않고 있다면, 필시 엇갈리는 바, 그 이유는 우리가 수용할 수 있는 최선의 삶을 건설하는데 요구되는 충분한 반석이 마음과 생활 속에 아직 확보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 주님은 우리의 나무가 찍어지도록 허용하신다. 그리고 그분의 법칙이 우리 인생 경험을 통치해야 함을 보고 스스로 찾을 때까지, 우리가 그분의 선물을 받도록 준비가 될 때, 우리를 위한 사랑과 선함으로 가득 찬 그분의 의지에 우리의 자아 의지는 반대되고 있음을 지각할 때까지 그분은 우리 속의 나무인 원리가 일곱 번이나 찍어지도록 허용하신다. 다시 말해 자아가 주님 앞에 송두리째 허물어 질 때까지 우리의 자아가 찍힘을 허용하신다. 이러고 나면, “주님의 기운이 내리덮쳐,…아주 딴 사람이 될 것이다” (사무엘상 10:6).

38
향연과 벽에 써진 글

성서 본문: 다니엘 5장 1-28절

1. 벨사살왕이 잔치를 베풀고 만조백관들을 불러 함께 술을 마신 일이 있었다. 2. 벨사살은 거나하게 되자 선왕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 성전에서 약탈하여 온 금잔, 은잔을 내 오라고 하였다. 왕은 고관들과 왕비들과 후궁들과 함께 그 잔으로 술을 마시고 싶었던 것이다. 3. 예루살렘에 있는 하느님의 집에서 약탈하여 온 금잔이 나오자 왕은 그 잔으로 고관들과 왕비들과 후궁들과 함께 술을 마셨다. 4. 이렇게 술을 마시며 금은동철이나 목석으로 만든 신상들을 찬양하는데 5. 갑자기 사람의 손가락 하나가 나타나서 등잔대 맞은 쪽 왕궁 벽에 붙어 있는 판에 글자를 썼다. 왕은 글 쓰는 손을 보고 6. 새파랗게 놀랐다. 그는 머리가 아뜩해지며 허벅지가 녹는 듯하고, 무릎이 떨려 7. 마술사들과 점성가들과 점장이들을 불러 들이라고 고함쳤다. 재사들이 대령하자 왕이 말했다. “저 글을 읽고 뜻을 풀어 주는 사람은 자주색 도포를 입혀 주고 금목걸이를 걸어 주며 이 나라에서 세째가는 높은 자리에 앉혀 주리라.” 8. 그러나 불려 나온 왕실 재사들 중 아무도 그 글을 읽고 뜻을 풀어 내는 사람이 없었다. 9. 벨사살왕의 얼굴빛이 달라지며 당황하는 모습을 보고 고관들은 안절부절못했다.
10. 그 때 왕비가 고관들이 웅성거리는 소리를 듣고 연회장으로 올라 가 아뢰었다. “임금님, 만수무강을 빕니다. 그렇게 안색이 달라지시도록 당황하실 것은 없습니다. 11. 임금님의 나라에는 거룩하신 하느님의 영을 받은 사람이 하나 있습니다. 그는 머리가 명석하여 지혜롭기가 하느님 같다고 소문난 사람입니다. 선왕 느부갓네살께서 그를 마술사들과 술객들과 점성가들과 점장이들의 수령으로 임명하신 일까지 있습니다. 12. 임금님께서 벨트사살이라고 이름을 주신 다니엘이 그 사람입니다. 그는 신통력이 놀라와 모르는 것이 없습니다. 꿈이나 수수께끼나 어떤 어려운 문제든지 잘 풀어 내는 재주가 있습니다. 다니엘을 부르시면 이 글을 풀어 드릴 것입니다.”
13. 그래서 다니엘이 불려 나오자 왕이 그에게 물었다. “그대가 바로 유다에서 포로로 끌려 온 다니엘이란 사람인가? 14. 그대는 하느님의 영을 받은 사람으로서 머리가 명석하여 지혜가 대단하다는 말을 들었다. 15. 나는 재사들과 마술사들을 데려다가 저기 저 글을 읽고 뜻을 풀이하라고 했지만 아무도 그 말 뜻을 풀지 못했다. 16. 내가 들으니, 그대는 무엇이나 다 잘 알아 내고 어떤 수수께끼든지 풀 수 있다던데 이제 그대는 저 글을 읽고 뜻을 풀이하여 보아라. 그리하면 그대에게 자주색 도포를 입히고 금목걸이를 걸어 주며 그대를 이 나라에서 세째가는 높은 자리에 앉혀 주리라.”
17. 다니엘이 왕에게 대답했다. “임금님께서 주시겠다는 선물은 거두시고, 그 사례는 다른 사람에게나 내리십시오. 그래도 저는 임금님께 저 글을 읽어 드리고 뜻을 풀이하여 드리겠습니다. 18. 임금님,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께서는 선왕 느부갓네살의 나라를 강대하게 하셔서 영화와 영광을 떨치게하여 주셨습니다. 19. 하느님께서 그렇게 선왕을 위대하게 해주셨으므로 인종과 말이 다른 천하 만민이 모두 선왕 앞에서 두려워 떨었습니다. 그래서 선왕께서는 마음대로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하고 올려 앉히기도 하고 내려 앉히기도 하셨습니다. 20. 그렇게 마음이 높아져서 거만을 떨며 자기 생각만 내세우시다가 그만 옥좌에서 쫓겨 나 영화를 빼앗기고 21. 세상에서 쫓겨 나 그 생각이 짐승과 같아져서 들나귀하고 어울려 지내며 소처럼 풀을 뜯어 먹고 하늘에서 내리는 이슬에 몸을 적시셨습니다. 그러다가 마침내 인간의 왕국을 다스리는 분은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이시라는 것을 깨닫게 되셨습니다.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께서는 당신 마음에 드는 사람이라야 왕으로 세우신다는 것을 깨닫게 되신 것입니다. 22. 그분의 아들이신 임금님께서는 그것을 다 아시고도 겸손해지기는커녕 23. 오히려 하늘의 대주재를 거역하시고 그분의 집에서 쓰던 잔들을 이 자리에 내어다가 대신들과 왕비들과 후궁들과 함께 그 잔으로 술을 마셨습니다. 그리고는 금은동철이나 보석으로 만든 신상들, 보지도 듣지도 못하고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신들을 찬양하셨습니다. 그러시면서 임금님의 목숨을 손안에 쥐고 계시는 하느님, 임금님의 일거 일동을 지켜 보시는 하느님을 공경하지 않으셨습니다. 24.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께서 손가락을 내 보내시어 저 글자들을 쓰게 하신 것은 그 때문입니다. 25. 저기 쓴 글자들은 ‘므네 므네 드켈’ 그 다음은 ‘브라신’입니다. 26. 그 뜻은 이렇습니다. ‘므네’는 ‘하느님께서 왕의 나라 햇수를 세어 보시고 마감하셨다’는 뜻입니다. 27. ‘드켈’은 ‘왕을 저울에 달아 보시니 무게가 모자랐다’는 뜻입니다. ‘브라신’은 ‘왕의 나라를 메대와 페르샤에게 갈라 주신다’는 뜻입니다.”

개요

순수한 사랑과 믿음이 중단되고 자아 사랑이 교회 안에서 우세해질 때, 바빌론이라는 영이 자라 오른다. 이 영이란 타인을 지배하는 것을 사랑하는 것, 특히 인간의 영을 통치하기를 사랑하는 것, 종교의 목적을 은밀하게 타인을 지배하려는 데에 두는 영이다. 이 영은 결국에 가서는 신성한 말씀 속의 거룩한 것들을 모독하면서 말씀이나 주님 위에 자신을 세워 찬양하게 된다. 이런 영이 교회 속에 팽배될 때 교회는 파괴되는 것이다.

글자적인 이야기

벨사살은 느부갓네살의 손자이지만 본문에서 직계 비속이 된다는 점에서 그의 아들이라 불리고 있다. 갈대아 이름인 벨사살은 하느님의 왕자라는 뜻이다. 이 이름은 과거 다니엘과 그의 동료들이 바빌론에 잡혀갔을 때 갈대아 말로 다니엘에게 주어진 이름과 거의 비슷하다. 그러나 우리는 갈대아 왕 벨사살과 히브리 예언자 다니엘인 벨트사살을 혼동해서는 안될 것이다. 왕인 벨사살은 감각적인 취미와 습관에 젖은 사람으로 이교도의 우상 숭배자이다. 게다가 그는 기독교적인 미덕의 표준이 전혀 없는 고대 동양에 전수된 다첩제나 음란한 생활이 몸에 베어 있었던 사람이다.
그가 큰 잔치를 벌이고 거나하게 포도주에 취하자, 그 향연을 더 떠들썩하게 해줄 것 같은 착상이 떠올랐는데, 그것은 과거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 성전의 여호와 제단에서 약탈해 온 아름답고 가치 있는 금, 은잔을 가지고 마시는 것이었다. 이 거룩한 금, 은 집기들은 오로지 여호와를 예배하는데에만 사용되었었는데, 그 왕은 낮은 마음의 평면, 천한 마음 안에 있는 음란한 동물적 쾌락을 돋구기 위해 거만하게 사용했던 것이다. 그래서 이런 행동은 신성을 모독한 행동인 바, 그들이 하느님의 거룩한 집기들로 마셔 취하면서 그들은 생명도 힘도 없는 이교의 우상들을 찬양했다는데서 여실히 나타나고 있다.

환상

그들이 이렇게 흥청대는 사이에 심판을 함축하는 환상이 그들에게 밝혀졌다. 그들의 영적 눈이 열리어져서, 왕을 포함한 그들 일부가 벽에 희미한 글자를 쓰고 있는 손을 보았던 것이다. 물론, 이 광경은 영적 세계에서 있어진 것이고, 영적인 눈이 그것을 보았고, 그들에게 계시된 것이다. 진짜가 아닌 물체가 영계에서는 주님이 바래신 어떤 것을 표현하기 위해서, 때로는 천사들이 생각하고 느낀 것, 그들이 바랜 것을 표현하기 위해서 꾸준히 형상이 만들어지고 있다.
이렇게 만들어지는 형상이 감각적인 것뿐인 왕을 새파랗게 놀라게 했다. 따라서 그는 박사들을 불러 신비한 글자를 읽고 해석하도록 했다. 그들은 그 글을 읽고 뜻을 풀어 낼 수 없었다. 그러나 이 흥청대는 향연에 참석하지 않았던 왕비, 그런데 연회장이 이상한 표적 때문에 흥분된 것에 이끌려 오게 된 이 왕비는 왕으로 하여금 다니엘을 불러 그 글을 해석하도록 권고해 주었다. 아마 이 왕비는 왕비의 어머니일는지 모르고, 어쩌면 통치자의 왕비 중의 하나가 아니었을까 추측된다. 그녀는 향연에 초대되지도 않았지만 다니엘을 기억에 담고 있는 것으로 보아 아마도 보다 나은 인격 소유자일 것 같다.
불려 나온 다니엘은 벽에 써진 글을 읽어 해석했다. 그리고 그는 왕과 왕국에 대한 심각한 심판을 선포했다. 그날 밤, 도성을 포위한 메대왕 다리우스에 의해 벨사살은 살해되어 그 왕국이 다리우스에게 넘어 감으로서 그 심판은 글자대로 성취되었다. 이는 그 줄거리 속에 더 중요하게 담긴 영적 이야기의 겉에 불과할 뿐이다.

바빌론과 향연

바빌론은 타인을 통치하려 드는 이기적인 사랑을 표현한다. 바빌론 왕이란 타인 위에 군림하려 드는 악한 사랑을 이끌고 가는 거짓 원리를 표현한다. 우리 마음에 있는 향연 중에서, 좋은 의미의 향연은 주님으로부터 사랑과 지혜, 선함과 진리를 받는 것이지만, 악인의 경우는 주님으로부터 선함과 진리 모두를 받지 않고 오히려 주님의 원리에 반대되는 자신의 악과 거짓으로 향연을 갖는 것이다.
타인 위에 군림하려 드는 악인의 이기적인 사랑이 적극성을 띌때, 왕이라는 거짓 원리가 정신적인 향연을 베푸는 모습이고, 그 향연에 참석한 만조 백관이란 우리의 자연적 마음에 있는 좀 똑똑하다고 자찬하는 원리들이다. 왕자들이란 우리를 이끌려는 모든 진리들, 왕비란 자연적인 애정들, 첩들이란 비질서적인 감각적 애정들을 말한다. 모든 이런 악하고 거짓된 것들이 정신적 향연에 참가할 때, 참석된 모든 것들은 선함이나 고상함에 있는 법칙이 무시된 채 음란해져 흥청대고 마는 것이다.
악인이 위와 같은 조건 속에 있으면서도 교회나 말씀에서 축출되는 진정한 교리들을 많이 알고 있을 수도 있다. 그가 포도주에 만취되어 있는 동안, 즉 자기가 아는 진리에 흠뻑 젖어 있는동안 그는 교회의 진정한 교리를 자신의 거짓 관념에 일치시키려고 애쓸는지 모른다. 주님의 제단에서 강취해 온 금과 은 집기들은 교회의 진정한 교리를 뜻한다. 주님 성전의 집기에 딸아 놓은 포도주는 악한 인간 자신의 관념들이다. 따라서 왕과 만조 백관들이 성전 제단에서 강취해 온 거룩한 집기로 포도주를 마시는 본문의 모습은 악과 죄라는 잔치에 모든 정신적 능력을 불러모으는 한편, 주님의 가르침을 자신들의 악한 삶에 맞춰지게 강요하겠다는 정신적 측면에서의 대칭물인 것이다.

모독

이교도들이 자기들의 감각적 향연에서 주님 성전의 집기들을 사용했을 때, 그들은 거룩한 것을 남용함으로 인해 신성을 모독했던 것이다. 이와 같이 우리가 신성한 진리들을 자신의 이기적인 악들을 정당화하는 근거로 사용할 때, 우리 역시 알고 있는 진리들을 의도적으로 남용함으로서 신성을 모독하는 죄를 짓게 된다. 이런 한 예를 복음서에서 찾아보면, “이것이 바로 전해 오는 전통을 핑계삼아 하느님의 말씀을 무시하는 일이 아니고 무엇이냐?”라는 구절이다 (마가복음 7:13).
모독 죄는 심각한 악인데, 그 이유는 그 죄가 무식해서 있게 되는 단순한 죄가 아니라 고집스런 악이 갖는 이중성 때문에 야기되는 죄이기 때문이다. 이런 악에 대한 깊은 속성이 여호와의 집기로 포도주를 마시면서, 금속이나 나무, 돌에 불과한 우상들을 찬양하는 구절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 구절의 모습은 신성한 말씀 속의 진리와 교회의 교리를 잘 알고 있으면서 이를 수단으로 주님이 최상의 분이심을 부정하고 주님 위에 자신을 놓고 찬양하는 사람을 그려 주는 것이다.

우상들

금 우상은 자아 사랑이라는 악이요, 주님의 선함을 모독하는 악이다. 은 우상은 거짓인 바, 이것이 자아 사랑의 악을 숭배하는 마음속에서 신성한 진리와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는 원리, 둘 다 파괴한다. 놋 우상은 자연적인 악, 또는 자연적 평면에 있는 악으로 이 악은 주님의 계명을 지켜보려는 사람에게 달라붙어 그의 자연적인 선함을 부패시킨다. 쇠 우상은 행동에서 딱딱해진 글자적인 규칙으로 이는 인간 삶을 위한 신성한 규율에 반대되어 있다. 돌 우상은 진리로서 받아들여진 글자적 서술들, 그럼에도 그 서술을 이상하게 사용하는 바, 결과에서는 거짓을 만들어 낸다. 나무 우상이란 자기의 감각적인 삶이 선해지기를 바라면서도 신성한 표준에 의거 그 삶을 선하게 하지 못하는 이들이다.
위의 모든 우상들을 찬양해 대는 이런 저런 사람들은 그들이 주님의 집기로 마시고 있으면서 한편으로 신성한 말씀 글자를 사용해서 애정 속의 이기적인 악들이나 생각 속의 거짓, 그리고 행동 속의 죄들을 정당화하려 발버둥친다. 이들의 삶은 정작 주님께서 우리 속에 천국을 만들도록 하기 위해 주신 각종 것들을 자기 마음에서 몰아내고 대신 지옥을 만들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남용, 더럽힘, 모독인 것이다. 그것은 하느님이 거하실 곳, 즉 자기의 심정과 생각에 자아를 놓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 자신의 심정을 지옥이 되게 하는 것이다. 이들의 차가움은 너무 차가워 주님의 사랑도 그것을 따뜻하게 할 수 없고, 이들의 어둠은 너무 짙어 그분의 지혜가 그것을 밝게 해줄 수 없다. 그런 이유는 생명의 근원이 그 사람의 마음으로부터 끊어졌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그 사람은 악한 것으로 자신 속을 다 채우게 된다. 그리하여 자신이 자신을 심판대로 가져다 놓는다.

심판

궁전 벽에 써진 육필은 왕과 왕국에 대한 심판을 선언한 것이었다. 사람의 손가락 하나가 벽에 글을 쓰는 것을 왕이 보고서 그는 새파랗게 놀랐다. 감각적 삶의 욕망에 푹 빠진 악인이라 해도 때로 그의 제잘난데 따라 곧 닥칠 운명에 대한 사전 경고와 그 징후는 있게 마련이다. 그 이유가 주님은 사랑하시는 섭리로 이런 운명을 예방해 주시려 애쓰시지만, 그런 인간은 자신의 인격과 삶에 있어서 결정적 순간에는 자아로 되돌아가고 만다.
당사자를 뒤흔드는 사전 경고인 곤란함은 악인에게도 자연스럽게 있는 바, 그도 자기 이익 추구나 그에 따른 생각들을 타인에게 문의해서라도 자기에게 발생할 것을 예상해 보려 할 것은 뻔한 이치이다. 그 이유는 그에게 있는 곤란함은 자기에게 손실을 초래할 것이고 자신의 악하고 이기적인 품질까지 뒤흔들리게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악인에게서의 손실에는 영적 삶의 손실이라는 것까지는 포함되지 않는다. 그에게는 그런 손실은 아예 발생조차 않는다. 벨사살 왕에 의해 표현되어진 자아에 의존함은 이교도의 점성가들을 불러 벽에 쓰인 글을 해석하게 한다. 그런데 이교도의 어떤 현자도 이 글을 읽지도 해석하지도 못했다는 사실이란, 우리 자신의 이기적 관념이나 세상적 사상은 우리를 이기적 삶의 위험이나 절박해진 심판에서 건져 줄 수 없다는데 대한 영적 사실인 것이다.
그러나 어머니 왕비, 흥청대는 향연장에 있지 않았던 여자는 여호와의 예언자 다니엘을 상기해서 그로 벽에 써진 글을 읽고 해석하게 했다. 이 왕비는 마음 안에 있는 보다 나은 것들, 주님이 우리의 어린 시절에 특별히 저장하여 아껴 두신 것을 표현한다. 이로 말미암아 곤란 속의 인간은 주님에게로, 그분의 말씀에로 나아가 빛을 얻게 된다. 예언자 다니엘은 신성한 말씀을 표현한다. 그런고로 다니엘은 벽의 글을 해석해서 왕이 처한 조건과 그에 따른 결과를 명백하게 알려 주었다.

글자 해명

“므네, 므네, 드켈, 브라신.” “므네는 하느님께서 왕의 나라 햇수를 세어 보시고 마감하셨다.” 이는 끝장을 보게 되었다는 말이다. 흔한 말 가운데, 어떤 것이 마무리되거나 끝에 오게 될 때, “그 수가 다하였다”라고 말한다. “드켈은 왕을 저울에 달아보시니 무게가 모자랐다.” 즉 인격에 결함이 있다는 말이다. “브라신이란 왕의 나라를 메대와 페르샤에게 갈라 주신다”는 것이다.
글자상의 의미로 볼 때, 의아스럽게 여겨지는 점은 다니엘이 벽의 글을 읽을 때는 “므네 므네 드켈 브라신”이라고 읽었는데, 해석에서는 “브라신, Upharsin, 우바르신”을 “베레스, peres”로 말했다는 점일 것이다 (개역 성경 참조). 이 문제에 대해서도 이해가 곤란한 것은 없다. 그 이유는 언어의 관용구였을 뿐이기 때문이다. 다니엘서는 고대 갈대아어 또는 시리아어로 씌어졌다. 단어 “우바르신”은 두 단어, 즉 “and”와 나뉨인 “pharsin”이 합해진 것이다. 갈대아어의 “그리고”란 단어가 “그리고” 에 뒤따르는 명사에 붙여 한 단어로 쓰였던 것이다. 문법상에서 “므네, Mene”와 “드켈, Tekel”은 과거 분사로서 이미 행하여져 온 것을 표현하는 바, 즉 세었고 저울에 달았다는 말이다. 그러나 단어 “pharsin”은 능동적인 현재분사로 “나뉘고 있음,” 즉 그들이 지금 왕국을 나누고 있다는 것이 된다. 그러나 다니엘이 이 의미를 설명할 때, 그는 능동적 현재 분사인 “pharsin”을 사용하는 대신, 마치 메대와 페르샤로 이미 왕국이 나뉜 것처럼 과거분사 “peres,” 즉 “나뉘었음”을 사용했다.

위에 대한 영적 의미

영적으로 수를 센다는 것은 사물의 성질에 있는 진짜를 추산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어떤 것의 무게를 달아본다는 것은 그것 속의 선함을 테스트하는 것이다. 그래서 “므네”는 “하느님께서 왕의 나라 햇수를 세어 보시고 마감하셨다”는 뜻으로 다니엘이 해석한 것이다. 왕의 나라란 각 개인적 측면에서의 정신적인 왕국인 각자의 마음을 말한다. 이 마음이 세어졌다는 것은 각자의 마음 안에 있는 진리를 계산했다는 뜻이 된다. 그래서 각 마음이 이력서를 쓰고 싶을 만큼 써서 다 채웠을 때, 그리고 마음속에 든 지식에서 오는 진리가 다 왜곡되어 질 때, 각자의 마음은 영적으로 셈을 한 것이요, 이력서의 끝줄을 끝내어 심판인 결산을 보게 된다.
“드켈, 왕을 저울에 달아보니 무게가 모자랐다.” 즉 선함에 관한 인격을 달아보니 선함이 부족한 것이 발견되어 신실함이 없었다는 뜻이다. “잘난 체 지껄이는 자들아, 너무 우쭐대지 말아라. 거만한 소리를 입에 담지 말이라. 야훼는 사람이 하는 일을 다 아시는 하느님, 저울질하시는 하느님이시다” (사무엘상 2:3).
그리고 욥이 고백한다. “바른 저울에 달아보시면 아시리라. 하느님께서 나의 흠 없음을 어찌 모르시랴?” (욥기 31:6).
“베레스, 왕의 나라를 메대와 페르샤에게 갈라 주신다.” 영적으로 마음을 나뉘게 함은 마음을 파괴시키는 것이다. 그 이유는 인간의 마음은 주님이 그분의 왕국으로 삼으시어 그 안에 거할 때만이 진실로 영적으로 살아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왕국은 선함과 진리 안에 존재하면서 생활로 하나를 이루고 있어야만 하는 왕국이다. 따라서 인간이 자기가 아는 진리를 심정과 삶에서 떼어 낸다면, 그는 자기의 영적 왕국을 파괴하게 된다. 그 이유는 분리된 마음속에서는 주님이 왕으로 거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럴 경우의 인간 마음의 왕국은 영적 적들, 즉 자신의 악한 사랑과 거짓 생각들에 사로잡히고 만다. 이교도인 메대와 페르샤는 인간 마음의 악한 상태를 표징하는데, 이 상태 속의 이타애와 믿음, 선함과 진리는 분리되고 그의 정신적 왕국은 악과 거짓의 권세 하에 떨어지고 만다. 그래서 그날 밤 왕은 영적 생명의 손실로 말미암아 살해된 것이다.
이상에서 본 표징적인 그림들은 각자의 영적인 인간다움이나 그의 미래의 행복은 자아 사랑이 부추기려는 각종 암시, 이 암시를 정당화하는 거짓들에 강력히 저항하는 매일의 삶에 절대 의존되고 있음을 각 사람 속의 합리성이 가르쳐 주고 있다. 영적 세계는 우리 주위의 모든 것뿐만 아니라 우리 속에도 있다. 우리 삶의 매일 매일, 그 매일 속에 있는 갖가지 사건이나 잡다한 일들은 우리 앞에 있는 벽에 손가락으로 글을 쓰고 있다. 자연적인 삶에 흥미가 있는 만큼 영적인 삶에도 흥미를 두어 보다 폭 넓게 깨어 있다면, 우리는 우리 앞의 벽에 써진 글을 읽어 내어, 해석도 해낼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우리 삶의 벽에 써진 글, 선하지도 진정하지도 않은 인격 속에 든 모든 것에 떨어지는 심판을 매일 발견해야 한다. 우리 마음과 삶에 있는 악과 거짓에 이렇게 선포하고 있다. “너를 저울에 달아보니 무게가 모자른다.” “조금 맞았다고 하여 웬 엄살을 이렇게 부리느냐? 그 아픔은 쉽게 가시지 않으리라” (예레미야 30:15

39
네 짐승에 관한 다니엘의 환상

성서 본문: 다니엘 7장 2-18절, 23-27절

2. “다니엘이 말한다. 나는 밤에 이상한 광경을 보았다. 하늘 끝 사방에서 갑자기 바람이 일면서 큰 바다가 출렁이는데, 3. 바다에서 모양이 다른 큰 짐승 네 마리가 올라 왔다. 4. 그 첫째 것은 몸이 사자같이 생겼고 독수리 날개를 달고 있었다. 내가 바라보고 있는 사이에 그 짐승의 날개가 뽑혔다. 그러더니 땅에서 몸을 일으켜 사람처럼 발을 딛고 서는 것이었다. 그 짐승은 사람의 마음까지 지니게 되었다. 5. 둘째 짐승은 곰같이 생겼는데 몸을 한쪽으로 비스듬히 일으키고 있었다. 그 짐승은 이빨 사이에 갈비 세 개를 물고 있었는데 어디서 ‘일어나 고기를 실컷 먹어라’ 하는 말이 들려 왔다. 6. 내가 또 바라보니 이번에는 표범같이 생긴 짐승이 올라 오는데 옆구리에 새 깃이 네 개 달려 있었고 머리도 넷이었다. 그 짐승은 권력을 받았다. 7. 그 날 밤 꿈에 본 네째 짐승은 무시무시하고 끔찍하게 생겼으며 힘도 무척 세었다. 쇠로 된 이빨로 무엇이나 부러뜨려 먹으며 남은 것은 발로 짓밟았다. 먼저 나온 짐승들과는 달리 뿔이 열 개나 돋아 있었다.
8. 그 뿔들을 유심히 바라보고 있자니 그 몸에서 작은 뿔 하나가 새로 돋아났다. 그러자 먼저 나온 뿔 셋이 그 뿔에 밀려서 뽑혀 나갔다. 그런데 그 작은 뿔은 사람처럼 눈이 있고 입도 있어 큰 소리를 치고 있었다.
9. 내가 바라보니
옥좌가 놓이고 태고적부터 계신 이가 그 위에 앉으셨는데,
옷은 눈 같이 희고
머리털은 양털같이 윤이 났다.
옥좌에서는 불꽃이 일었고 그 바퀴에서는 불길이 치솟았으며,
10. 그 앞으로는 불길이 강물처럼 흘러 나왔다.
천만 신하들이 떠받들어 모시고
또, 억조창생들이 모시고 섰는데,
그는 법정을 열고 조서를 펼치셨다.
11. 그 뿔이 계속하여 외쳐대는 건방진 소리를 한 귀로 들으면서 보고 있자니, 그 짐승은 나의 눈앞에서 처형을 받아 시체가 박살이 나고 타오르는 불 속에 던져지는 것이었다. 12. 다른 짐승들은 권세가 빼앗겼으나 목숨만은 얼마 동안 부지하도록 버려졌다.
13. 나는 밤에 또 이상한 광경을 보았는데 사람 모습을 한 이가 하늘에서 구름을 타고 와서 태고적부터 계신 이 앞으로 인도되어 나아갔다. 14. 주권과 영화와 나라가 그에게 스러지지 아니하고 영원히 갈 것이며 그의 나라는 멸망하지 아니하리라.
15. 나 다니엘은 마음이 어수선했다. 그 이상한 광경이 머리를 어지럽히게 하였다. 16. 그래서 거기 서 있는 한 분에게 가서 이 모든 것이 무엇을 뜻하는 것이냐고 물었더니 그가 설명해 주었다. 17. ‘이 큰 짐승 네 마리는 세상 나라의 네 임금을 가리키는데 18. 마침내는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을 섬기는 거룩한 백성이 그 나라를 물려 받아 길이 그 나라를 차지하고 영원토록 이어 나가리라는 뜻이다.’

23. 그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네째 짐승은 네 번째로 일어날 세상나라인데
그 어느 나라와도 달라,
온 천하를 집어 삼키고 짓밟으며 부술 것이다.
24. 뿔 열 개는 그 나라에 일어날 열 임금을 말한다.
이들 임금 다음에 다른 임금 하나가 일어날 터인데
그 임금은 먼저 일어난 임금들과는 달라
그 중 세 임금을 눌러 버릴 것이다.
25. 그는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에게 욕을 퍼부으며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을 섬기는 거룩한 백성을 못살게 굴 것이다.
축제일과 법마저 바꿀 셈으로
한 해하고 두 해에다 반 년 동안이나
그들을 한 손에 넣고 휘두를 것이다.
26. 그러나 마침내 재판을 받아, 주권을 빼앗기고
송두리째 멸망하여 버릴 것이며,
27. 천하만국을 다스리는 권세와 영광이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을 섬기는 거룩한 백성에게
모두 돌아 올 것이다.
그 나라는 영원히 끝나지 않아
모든 나라가 그 나라를 섬기고,
그 명을 따를 것이다.’”

개요

제 7장은 지상에 사는 사람들 사이에서 변화를 계속 하면서 있게 되는 교회들의 영적 조건에 관한 계시를 담고 있다. 바빌론에 의해 마지막으로 표현된 교회는 그 교회의 첫 상태에서는 어느 정도 진리에 관한 이해성을 가졌었지만, 두 번째 상태에서 그 교회는 성경의 글자만을 연구했고, 세 번째 상태에서는 연구한 것이 신성한 말씀 속의 진리를 왜곡시킨 바, 그 거짓이 진리인 냥 드러내 놓고 있다. 그리하여 “믿음만으로 구원됨, salvation by faith alone”을 형성하여 가르치면서, 그 교리를 성경의 글자로 확증했는데 이는 외관적 수준에서일 따름이다. 그리하여 이 교리의 이론(heresy)은 교회의 영적 생명을 거의 죽은 지경으로 파괴한 바, 첫 기독교회는 처방 측면에서 끝을 맺게 되어 새로운 기독교회가 일어나 기독교인을 이해하고 사랑하여 실제에 응용하게 된다.

짐승들

환상에서, 다니엘은 네 짐승을 보았는데, 이들은 바다에서 올라 왔고, 이들은 각기 특이하게 모양이 달랐다. 이 네 짐승들은 네 개의 일반적 교회들의 상황과 그 활동, 또는 지상의 인간에 있는 교회의 일반적 상태들을 표현적으로 그리고 있다. 직역주의자(literalist)들은 본문같은 표현적인 계시들을 물질적인 것이나 이 지상의 나라나 역사적으로 유명했던 사람들에게 적용해 보려고 애쓴다. 그러나 주님의 말씀 중 가장 심오하고 가장 중요한 것은 언제나 영적 본성에 있는 원리나 그 활동 측면에서 인간과 관계되고 있다. 따라서 그 적용은 인간의 영적 활동들이 발생하는 영계의 작용에 관계된다.
다니엘이 자기가 본 것의 의미를 물었을 때, 그가 물었던 천사는 그것들이 네 왕을 언급한다고 해석했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이 대화는 다니엘이 본 영계, 그가 행동했던 영계에서 있어졌다는 사실이다. 그 다음 그는 선각자로서 영의 눈이 열렸던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따라서 천사는 우리가 읽는 글자대로의 방식에서 말한 것이 아니라 표징적인 것인 바 그의 언어는 그가 말하는 환상 속의 것들만큼이나 표징적이고 상징적이었다. 천사에게 있어, 지상은 물질적 지상을 의미하는게 아니고, 지상이라 불리는 영적인 것, 즉 인간 마음의 지상적 측면의 것인 자연적 마음으로 이는 천국적 측면인 영적 마음과 구별되는 지상을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왕은 물질적인 지상의 통치자만을 언급하는게 아니고, 마음속의 지상인 자연적 마음을 통치하는 원리도 말하는 것이다. 모든 예언, 또는 모든 계시에서 중요한 의미는 언제나 그 전체적 광경이 인간 마음 안에 놓여져 있음을 미리 감지하고 있어야 할 것이다.
네 짐승은 네 개의 다른 왕들, 즉 각기 다른 통치 원리가 마음을 좌지우지하여 있어지는 인간 마음의 네 개의 연속적인 조건들을 표현해 주고 있다. 따라서 이 짐승들의 표징적 전말에서 우리는 퇴보하는 인간 마음이 점차 거짓과 악 그리고 죄로 고정되는 조건에로 몰락되는 영적 역사를 알 수 있게 해준다. 그리하여 그런 인간의 마음과 삶에서 주님의 교회는 결국 파괴되고 마는 것도 보게 해준다.

네 바람

다니엘이 밤에 이상한 광경을 보았다는 말은 교회의 캄캄한 상태, 그리고 진리를 외적이고 표징적 측면에서 상징적으로 다루어 내면의 영적 진리가 명확히 선포되지 않을 것임을 표현하는 말이다. 하늘의 “네 바람이 일면서 큰 바다를 출렁거리게 했다.” 바람이 분다는 것은 신성한 영향이 인간 마음에 역사 되는 것을 표현한다. 바람을 더 이해하기 위해 요한복음 3장 8절을 더 읽어보면, “바람은 제가 불고 싶은 대로 분다. 너는 그 소리를 듣고도 어디서 불어 와서 어디로 가는 지를 모른다. 성령으로 난 사람은 누구든지 이와 마찬가지이다.”
신성한 영향(Divine influences)이 인간 위에 놓일 때, 모든 각 사람은 각자가 지닌 인격의 품질에 따라 그 영향을 만나, 그것을 선용하거나 남용하게 된다. 선한 사람의 경우, 그는 신성의 유입을 받아들여 자기의 심정을 신성한 사랑에 열고, 자기의 지성을 신성한 지혜에 열지만, 악인의 경우, 그는 주님의 선함과 진리의 품질을 뒤집어 악과 거짓으로 변하게 한다. 큰 바다는 영적으로 보면 인간의 자연적 마음이요, 이 마음이란 모든 것들이 수집되어 저장된 기억이라는 물의 집합인 것이다. 따라서 큰 바다에 작용한 하늘의 네 바람이란 인간의 자연적 마음에 미치는 신성한 영향에 대한 그림인 것이다.
네 바람이란 네 방위, 사방에서 바람이 불어오는 것을 암시하는 말이다. 북쪽은 가장 어두운 영적 방위를 표현하는데, 이는 신성한 영향력이 가장 외적인 형체, 또는 가장 미미하게 느껴지는 형체인 신성한 원리, 즉 자연적 진리로 올 때를 말하고, 한마디로 실제의 규율이 이에 해당된다. 남쪽은 가장 밝은 방위인 바, 이는 인간 마음을 가장 밝게 계발하는 진리, 즉 영적 진리로 오는 신성한 영향력이다. 동쪽, 이는 태양이 떠오르는 방위인 바, 신성한 사랑의 측면에서의 주님을 표현해 주고, 이 사랑은 차고 어두운 세계에 떠오른다. 따라서 동쪽은 영적 선에 해당되는 방위이다. 그리고 서쪽은 자연적 선이다. 바람이 바다에 분 결과로 네 짐승이 연속해서 바다에서 올라 왔다.

첫 번째 짐승

첫 번째 짐승은 사자 같았고 독수리의 날개를 가졌다. 짐승의 왕으로 알려진 사자, 매우 강한 짐승인 사자는 힘을 표징하는 바, 권능적 측면에서의 진리를 말한다. 좋은 의미에서 주님도 “유다 지파에서 난 사자”라 불리셨는데, 이는 영적인 왕, 신성한 진리가 체현하는 신성한 권능을 말한다. 그래서 사자, 즉 권능적 측면에서의 진리는 독수리의 날개를 가진 것이다. 날아오르는 측면에서 매우 강력한 독수리는 매우 높이 날아 드넓게 멀리 있는 지점까지 관찰하는 바, 독수리는 생각하여 자기 마음을 높은 데로 승강시켜 높은 관점에 있는 진리를 지각하게 하는 인간의 합리적 생각을 표현한다. 따라서 독수리 날개를 가진 사자란 좋은 의미로 볼 때, 합리적 사고를 동반하여 영적 진리를 지각하게 해 주는 교인들 마음에 있는 신성한 진리를 표현한다.
이런 마음은 교회 초기에 있던 마음의 상태였다. 그러나 이 날개들이 뽑혔는데, 이는 지각한 영적 진리의 빛에 따라 사는데 실패하므로서 마음속의 합리성이 쇠약해지고 말았다는 사실을 표현하는 것이다. 그런데도 사자는 몸을 일으켜 사람처럼 발을 딛고 섰는데, 이는 인간이 삶의 법칙을 이해했던 바대로 올바른 삶을 자기 표준으로 삼아 자기들 마음을 승강시키려고 노력했다는 것을 표현하고 있다. 이런 분투 노력으로 그들은 어느 수준까지는 진짜 사람이 되었는데, 이것이 사자에게 사람의 마음이 주어졌다고 표현된 것이다.

둘 째 짐승

그러나 새로운 상태가 인간에게 왔는데, 이것이 털 많은 짐승, 곰으로 표현되고 있다. 털이란 신체의 가장 바깥 부분이다. 따라서 털이 길어 돌출한 모양새를 가진 짐승, 곰은 글자적 진리, 외적인 진리, 즉 성경의 글자에 있는 진리를 표현한다. 인격 측면에서 볼 때, 곰은 성경의 글자적 의미에 관한 지식을 가지고 성경을 외적으로 이해하는 인간 마음을 표현한다. 즉 성경의 글자적 측면에 있는 진리는 보지만 그 글자 속의 영적인 측면을 이해 못하는 사람을 말한다. 곰이 물고 있는 세 갈비란 위의 인간 마음이 붙들고 있는 말씀 글자에 관한 지식은 충만한 상태이다는 말이다. 그러나 그 이빨은 물고만 있었지 씹어 삼켜 소화한 것은 아니다. 즉 성경 의미에 관한 생각이 그 의미의 바깥쪽 측면일 뿐 성경의 안쪽에 관한 생각을 얻어내지 못했다는 말이다.
이런 모습은 성경의 글자적 의미에 관한 외적 지식은 대단할 정도로 많은 양을 소유했음에도 성경의 안쪽인 영적 의미에는 마음이 열리지 못한 시대, 즉 성경을 글자적으로만 해석하는 교회 시대를 말하는 것이다. 이런 정신적 상황의 자연스런 결과는 교회 속의 영적 생명을 먹어 치우는 것, 또는 표징적으로 볼 때, “고기를 실컷 먹는” 것에 해당된다. 그 이유가 감각적인 마음 안에 있는 성경의 글자적 의미에 관한 지식은 그 의미의 오류 속으로 점차 침몰되기 때문이다.

세 째 짐승

이런 식으로 교회의 상태는 다시 변화하여 더욱 나쁜 상태로 빠져드는데, 이것이 표범 같은 짐승, 즉 약삭빠르고, 믿을 수 없고, 맹렬하고, 피에 굶주린 짐승으로 표현되고 있다. 이런 특성들은 거짓을 사랑하여, 선하고 진정한 원리들을 왜곡시키고 전복하는 것을 상징한다. 이런 상징물이 행동을 개시하는데서 그것들은 네 날개를 이용했다. 둘이 포개진 숫자 넷이란 생각하는 힘이 의지와 이해성이라는 양 측면에서 있음을 의미한다. 이런 가운데 거짓 사상들은 지성에서 보여지고, 심정에서 확증되어 행동에서 체현되고 만다. 이 표범이 네 머리를 가졌다는 것은 교회의 상태에서 인간 마음의 내면에 있는 원리들이 자연적 마음에 있는 글자적 오류와 거짓과 결합되었다는 뜻이 된다. 이렇게 되면 인간 마음속에서 그 표범은 권력을 쥐게 되는 것이다.

네 째 짐승

이런 교회의 상황은 영적 하강의 길로 더 빨려 든다. 이런 상황에서의 인간의 정신 상태가 무시무시하고 끔찍하게 생겼으며 힘도 세어 파괴적인 짐승으로 표현되고 있다. 이것은 성경의 글자적 의미를 감각적 측면에서 잘못 이해함으로 유도된 상황인 바, 그들은 신성한 계명에 따른 삶, 선한 삶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이들을 설득이라는 추론으로 물리쳐 내고, 동시에 인간 구원은 “믿음만으로,” 그리스도께서 육체적으로 피 흘려 죽으심으로 가능해졌다고 착각해 버린다. 따라서 영적 인격이 어떠한지는 별 관심이 없다. 이로 인한 성경 글자의 잘못된 견해는 교인들의 영성을 파괴하고 만다. 이 짐승의 쇠로 된 이빨이란 완악하게 감각적인 글자적 생각을 표현하는데, 이런 생각들이 성경 글자를 분쇄해서 인간 마음에 사용할 수 있게 했다는 말이다. 네 째 짐승은 무엇이든 부수고 짓밟는 것을 기뻐했다. 이는 타인을 통치하기를 기뻐하는 영을 표현한 것이다. 바빌론으로 표현되는 악한 영이 교회를 장악했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 영들은 교회 속의 거룩한 것들, 신성한 말씀까지도 수단으로 이용해 교회에서 강한 권력자로 자신을 부상시킨다. 이것들은 기울어 가는 교회, 죽어 가는 교회의 마지막 상태이고, 인간 마음 측면에서 보면, 인간 의지가 하느님의 의지가 있어야 할 장소를 찬탈하는 상태인 것이다. 이 끔찍한 짐승은 뿔 열 개를 가졌는데, 그들의 거짓과 오류들은 사람들을 주목하게 하고 설득시키는 힘이 굉장하다는 것을 말한다.

작은 뿔

그런데 그 몸에서 또 다른 뿔, 작은 뿔이 돋아났다. 이 뿔은 사람처럼 눈이 있고 입도 있어 큰 소리를 치고 있었다. 이 작은 뿔이 다른 뿔 셋을 뽑히게 했다는 것은 성경의 글자에서 까지도 반대되고 더나아가 글자적 지식을 남용하는 힘을 표현하는 것이다. 이 행동이 사람 눈처럼 생긴 눈의 도움을 받아 저질러졌다는 것은 성경 글자의 지식을 남용하되 자신의 악을 변호하기 위해 영적 총명의 가상적인 것들을 가지고 그 일을 치른다는 것을 표현한다. 작은 뿔의 입이란 거꾸로 된 교회에 의해 말해지고 가르쳐지는 교리가 겉보기에는 성경의 글자에 기초를 두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을 말한다.

고대 시대

위의 모든 것들, 교회를 썩게 하는 모든 것들은 첫 기독교회 위에 있어진 심판을 초래하였는 바, 이 마지막 심판은 1770년경 영계에서, 그리고 인간의 영적 조건들에 있어졌다. “태고적(the ancient of days)부터 계신 이”란 사람의 아들과 구별해 볼 때, 신성한 아버지, 신성한 사랑 또는 신성한 선함이고 사람의 아들이란 신성한 진리, 신성한 인성인 바, 이에 의해 신성한 사랑은 신성한 말씀을 글자와 영이라는 양 측면에서 이해하는 영적 교회인 새 기독교회를 건설하셨다. 태고적부터 계신 이에 관한 내용인 불과 광채, 그리고 그분의 옷과 머리털이 희다는 것은 신성한 아버지의 특성이 사랑과 지혜, 그리고 순수함인 것을 표현해 주고 있다. 떠받들어 모시는 천만 신하들이란 천국과 영적 교회에서의 그분에 대한 보편적인 인식을 표현한다.
주님의 오심에서 심판이 집행되어 끔찍한 짐승의 모든 권세와 유보되었던 다른 짐승의 권세도 파괴되어 버렸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악의 권세에서 구속되어졌다. 심판을 위해 열린 책들이란 인간의 정신적인 책, 즉 세상을 사는 동안 자신들 스스로 써 놓은 마음의 상태들이다.
사람의 아들은 하늘의 구름 즉 성경 글자를 타고 오셨다. 글자로 오심은 자신들의 악한 삶을 변명하고자 성경 글자를 남용하고 뒤집은 이들을 심판하는 수단이다. 그래서 인간들이 주님을 받아들이는 정도와 수준에서 그분의 재림은 인간의 내향적 마음에 영적으로 오신다. 이런 마음의 상태는 교회를 다시 회복시키어 주권과 영화와 나라를 주님께 모두 돌리게 되어 마음속의 뭇 백성과 나라인 선한 애정과 진정한 생각들 모두에 주님의 영원한 왕국이 세워진다는 말이다.

짐승들과 왕들

짐승이 글자적 역사상의 어떤 왕들을 표현함으로서 본문에 대한 외관적 해석도 가능토록 되어 있는데, 그 이유는 인격들이 성경 글자의 내면인 영적 측면에 있는 진리를 지각 할 수 있기 전의 교회 시대 동안 성경을 외관적으로 이해해서 사용할 수 있도록 한 배려 때문인데, 한 마디로 인간의 자연적 마음이 사용할 수 있게 주어졌다는 말이다. 그 이유는 신성한 섭리는 대상물이 당장 받을 수 없는 내용의 경우 간접적 수단으로 인도해 주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인도하심이 첫 기독교회에서 있어졌다. 이 교회는 자연적 마음으로 이해하는 것이 일반적인 믿음의 형태였는 바, 그들의 경우, 첫 짐승은 갈대아 왕을, 둘째 짐승 곰은 메디아왕을, 셋째 짐승 표범은 페르샤왕을, 가장 무시무시하고 끔찍하게 생긴 네째 짐승은 마게도니아, 또는 그리이스왕을 각기 표현한다고 알고 있다. 또 작은 뿔은 시리아의 위대한 왕(Antiochus Epiphanes)을 표징한다고 믿고 있다. 이상의 내용은 사실들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왕들이나 나라는 표징적일 뿐이고, 표징된 것들은 내향적인 영적 교회의 조건이 변하는 가운데서 인간 마음을 통치하는 원리들임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이렇게 표징적인 짐승들은 계시록에서 명명되는 다른 짐승과 매우 유사하다. 계시록의 짐승 역시 인격의 조건들을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음은 본문과 마찬가지이다.

경고

넓은 측면에서의 교회가 기울어가는 상태는 우리 각자에게 경고를 꾸준히 보내고 있다. 하늘의 바람들이 일어, 우리의 자연적 마음인 바다를 출렁거리게 할 때, 즉 우리가 하느님의 영향력을 느끼고, 신성한 진리를 지각할 때, 만일 그 진리를 꽉 붙잡아, 그 진리를 더 명백하게, 더 승강되도록 해 나간다면, 감각이 늘 주고 있는 오류로 인해 그 진리의 이해가 희미해진다거나 뒤집어 질리 만무인 것이다. 이렇게 한다면, 우리는 영적 사랑과 지혜 속에서뿐만 아니라 자연적인 의로움 속에서도 살게 될 것이다. 이러면 우리 속에서 주님은 지속될 나라를 건설하시고, 우리 속 모든 나라(생각과 애정)가 그 나라를 섬기고 그 명을 따를 것이다.

40
수양과 수염소

성서 본문: 다니엘 8장 2-26절

2. 내 눈앞에 이상한 광경이 나타났는데, 그것을 본 것은 내가 엘람 지방의 요충지인 수사의 울래강 가에 있을 때였다. 3. 내가 눈여겨 보니 강가에 수양 한 마리가 서 있었다. 그 수양은 긴 뿔이 두 개 돋아 있었는데, 그 중에서 나중 나온 뿔이 더 길었다. 4. 그 수양이 뿔을 휘두르며 서쪽, 북쪽, 남쪽으로 치닫는데 어느 짐승도 그 수양을 당해 낼 수가 없었고 거기에서 빠져 나올 수가 없었다. 그 수양은 제멋대로 날뛰며 스스로 강하여졌다.
5. 저것이 대체 무엇일까 하고 생각하고 있는데, 서쪽에서 수염소 한 마리가 나타나더니 발이 땅에 닿지 않을 만큼 날쌘 몸짓으로 온 세상을 휩쓸었다. 그 수염소의 두 눈 사이에는 외뿔이 완연히 돋아 있었다. 6. 수염소는 강가에 서 있는 조금 전의 그 수양에게 쏜살같이 달려 들었다. 7. 수염소가 성을 내어 수양을 받아 그 두 뿔을 꺾어 버리는 것을 나는 보았다. 수양이 대항할 힘을 잃자 수염소는 수양을 땅에 거꾸러뜨리고 짓밟아 버렸다. 그래도 그 수양을 구해 주는 이가 없었다.
8. 이리하여 수염소의 기세는 매우 커졌다. 그러나 한창 힘을 쓸 때쯤 해서 큰 외뿔이 부러지고 그 자리에 뿔 네 개가 돋아나 사방 하늘로 멋지게 뻗어 나갔다. 9. 그 중 뿔 하나에서 작은 뿔 하나가 돋아나서 남쪽과 동쪽과 영광스러운 나라 쪽으로 줄기차게 뻗어 나갔다. 10. 그 세력은 하늘 군대에게까지 뻗쳐 하늘의 군대와 별들을 땅에 떨어뜨려 짓밟았다. 11. 그는 하늘 군대 사령관까지 업신여기며 날마다 드리는 제사를 폐지하고, 성소의 터까지 파헤쳤다. 12. 나아가 하늘 군대까지 몰아 내고 날마다 제멋대로 굴었으나 그 하는 일마다 거침없이 이루어졌다.
13. 그런데 하늘이 보낸 이 둘이 서로 말을 주고 받는 소리가 내 귀에 들려 왔다. “지금 나타나 보이는 대로 날마다 드리는 제사가 폐지되고 돌무더기가 된 이 자리에는 부정한 것이 버젓이 놓여 있으며, 성소와 하늘 군대가 짓밟히고 있는 저 일이 언제까지 갈까?” 14. “아침과 저녁이 이천 삼백 번 바뀌어야 성소가 복구되리라.”
15. 나 다니엘이 이 환상을 보면서 그 뜻을 몰라 애쓰고 있는데 내 앞에 문득 장사같이 보이는 이가 섰고 16. 울래강 너머에서 웬 사람이 말하는 소리가 들려 왔다. “가브리엘, 너는 저 사람에게 환상을 풀이하여 주어라.” 17. 그러자 가브리엘은 내가 서 있는 곳으로 왔다. 그가 다가 오는 것을 보고 내가 겁이 나서 엎드리자 그는 나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이 사람아, 보고 깨달아라. 이 환상은 세상이 어떻게 끝판날 것인지를 보여 주신 것이다.” 18. 그는 이 말을 듣고 땅에 엎드린 채 까무러친 나를 부축하여 일으켜 세우고는 19. 이렇게 말하였다.
“나는 하느님께서 노여움을 모두 터뜨리실 세상 끝판에 일어날 일을 너에게 알리러 왔다. 하느님께서 정하신 끝날은 오고야 만다. 20. 네가 본 수양의 두 뿔은 메대와 페르샤의 임금들이다. 21. 수염소는 그리이스요, 두 눈 사이에 돋은 큰 뿔은 그 첫 임금이다. 22. 그 뿔이 부러지고, 그 자리에 네 뿔이 돋은 것은 그 백성이 네 나라로 갈린다는 뜻이다. 그런데 그 힘은 첫 임금만 못할 것이다.
23. 죄악이 가득 차
나라가 끝장나게 되었을 때
사나운 임금이 나타나
권모술수를 써 가며
24. 세력을 뻗칠 것이다.
비상한 계략을 짜 내어
무슨 일이든지 해 내고야 말 것이다.
강대국들을 부수고
거룩한 백성까지 부술 것이다.
25. 못된 꾀로 흉계를 꾸며
그 모든 일을 제 손으로 해치우리라.
마음이 방자해져서
많은 사람들을 불시에 덮쳐 멸하고
가장 높으신 사령관에게까지 맞서다가
사람의 손이 닿지 않아도 부서지고 말리라.
26. 이것은 장차 정해진 날에 틀림없이 이루어지겠지만
오래 있다가 될 일이니 비밀에 붙여 두어라.”

머리말

이타애(charity), 이는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서 인간 사이에 있는 교회에 생명과 번영을 가져다준다. 믿음(faith), 그러나 이 믿음이 이타애에서 분리 될 경우, 뒤집어져 거짓이 되어 간다. 게다가 거짓 추론들로 해서 믿음은 인간 마음에 있어야 할 진리를 흐릿하게 하면서 부패시킨다. 그래서 영적 교회가 더 이상 마음속에 존재하지 않을 때까지 교회 속에 있는 예배의 영을 파괴한다.

수양

본문에서 가장 두드러진 양상은 수양과 수염소, 그리고 이들 사이의 싸움이다. 양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수양은 이타애, 또는 이웃을 사랑함을 표현하는데, 이웃을 사랑함은 교회의 영적 원리로서 인간 삶을 영적 수준으로 구별되게 해준다.
성경에서 이타애를 삶의 원리로 삼은 이들을 흔히 양, 또는 주님의 양떼라고 불리고 있고, 주님은 그 양떼의 목자라 불린다. 본문의 수양은 두 뿔을 가졌다. 무기라는 측면에서 뿔은 힘을 표현해 주는데, 이 뿔을 수단으로 동물은 실력을 과시한다. 본문에서 수양 또는 양의 뿔이라는 것은 이타애와 믿음 속에 있는 힘을 표현한다. 그 이유는 거듭나는 인간 속에서 이타애와 믿음은 하나가 되어 있고 그들은 의지와 이해성이 함께 움직이듯 서로 협동한다. 또 다른 측면인 교회 속에서의 경우, 이해성이 터득하고 의지로 사랑되는 상태, 즉 내적 인간과 외적 인간, 양쪽에 의해 이해되고 사랑될 때 나타나는 진리의 힘을 표현하기도 한다. 이 뿔이 매우 길었다(high)는 것은 마음의 높은 장소에로의 승강(elevation)을 표현해 준다. 그 중 하나는 다른 것보다 더 길었는데, 그 이유는 이타애가 믿음 보다 더 칭찬되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더 긴 뿔은 나중에 나온 뿔이었다. 그 이유는 내면에 있는 이타애는 우리가 알게 된 진리들 가운데서 더 명료해진 믿음만을 수단으로 뒤늦게 형성되기 때문이다.
본문이 인간 마음의 상황들을 영적으로 취급하고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둔다면, 여러 방면으로 치닫는 수양이란 자연적 마음의 사방에서 올라와 악하고 거짓된 영향력들에 대적하려는 참되고 사랑 받는 이타애의 원리를 표현함을 쉽게 알 수 있다.

수염소

그런데 수염소가 서쪽에서 나타나 수양에게 달려들었다. 수염소는 믿음과 상응된다. 좋은 의미로 볼 때 수염소는 이타애와 하나를 이루는 믿음이지만, 반대 의미인 양과 대적하는 상태에서는 이타애와 분리된 믿음과 상응된다. 이타애와 분리된 믿음인 “믿음만, faith alone”은 단지 외면상의 믿음, 또는 지적인 믿음이다. 이 믿음은 거듭나는 사랑과 하나를 이루지도 않고, 의로운 생활과 인연을 갖고 있지 않은 믿음이다. 양과 염소는 이타애 가운데 있는 이들과 이타애와 분리된 믿음만에 있는 이들을 가리켜 사용되고 있는데, 더 확실히 이해하려면 마태복음 25장, 에제키엘 34장 17, 18, 22절을 참고하면 된다.
본문의 수염소는 서쪽에서 왔다. 태양이 떠오르는 동쪽의 반대 방향인 서쪽이란 아주 먼 거리에서 선함과 진리를 보는 인간 마음의 상태, 즉 가장 외적 평면, 자연적 평면만의 마음 상태를 표현한다. 나쁜 의미에서 볼 때, 마음의 외적 상태는 자연적 악 가운데 존재한다. 그리고 거짓된 영, 이타애 없는 믿음뿐인 영은 인간 심정에 든 악으로부터 온다. 이 수염소가 온 세상을 휩쓸었다는 것은 거짓된 믿음이 온 교회를 휩쓸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수염소가 발이 땅에 닿지 않고 달려왔다는 것은 이 믿음은 이론적일 뿐 선하고 실용적인 일상 생활과는 연관이 없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다.

수염소의 뿔

수염소의 뿔이란 선함과 진리를 채워가는 마음속에서 그 선함과 진리를 파괴하는 거짓 믿음의 권세를 표현한다. 이 뿔이 수염소의 두 눈 사이에 돋아 있었다는 것은, 거짓 믿음의 권세는 총명인체 하는 것에서 기인된다는 것을 말하는데, 이런 것이 논쟁 가운데서 사람에게 시선을 끌게 매력을 던지는 것이다. 그러나 이 겉보기뿐인 총명은 자아에서 파생된 것인지라 진리를 보지 못하고, 자아 사랑을 부추겨 주는 논쟁만을 볼 수 있을 뿐이다. 그 이유는 자기만을 사랑하는데에 표준점을 두고 온 세상을 바라보기 때문이다. 따라서 수염소의 뿔이란 자아에서 파생된 총명도 의미하고, 이것이 맹렬한 기세로 수양에게 달려들었다. 즉 자아에서 나오는 총명은 거짓 추론으로 현혹시키는 권세인 바 교인들의 마음속에 있는 이타애를 쫓아낸다는 말이다.
수염소는 수양의 두 뿔을 꺾었다. 이는 “믿음만으로”라는 영이 마음속에서 생산한 거짓 원리는 이타애와 진정한 믿음에 있는 능력을 꺾어 버리고, 그 속성도 파괴하면서 마음을 감각적 수준에로 떨어트려 성질 자체를 거꾸로 뒤집는다는 것을 표현해 주고 있다. 이런 상태에서는 더 이상 보다 높은 국면의 진리를 볼 수 없는 것이다. “믿음만으로”라는 영이 교회에서 우세해지면, 교회의 생명은 부패되고 마는 것이다.

수염소의 뿔이 부러지다

수염소의 외뿔이 부러졌을 때조차도 그 자리에서 네 뿔이 돋아났다. 이는 “믿음만으로”가 내놓는 주요 논쟁들에 반박이 가해졌음에도, 똑같은 근원인 자아 총명은 다시 득세하여 갖가지 방법을 동원해서 성경 글자를 왜곡시켜 심정과 행동 속에서 악과 거짓을 결합시키려 든다는 것을 의미한다.

작은 뿔

네 뿔 중 하나로부터 작은 뿔이 돋아났다. 이는 “믿음만”이라는 교리가 은근히 빗대서 심어 놓은 오류를 표현해 주고 있다. 예를 들면, 그 교리가 논쟁하기를, 인간은 스스로 선할 수 없다. 따라서 우리는 자기의 악한 경향성을 억누르기 위해 자신의 의지를 발휘해선 안된다. 그 이유는 자신의 의지를 발휘한다는 것은 자신의 힘에 의존하겠다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오로지 우리는 주님이 우리의 악들을 거둬가시도록 내버려두어야 한다. 이렇게 말꼬리를 잇는 가운데 미묘한 오류가 심어져 인간은 지옥의 자비에 방치되고, 주님의 계명에 따라 자신의 생각과 느낌 그리고 규율할 능력을 행사하는 것마저 실패하고 만다. 사실 자신 속의 악한 경향성을 억누르는데 자기 나름대로 전력해 가면서 자신의 힘이나 총명을 떠받치기 위해 주님을 신뢰해 가야 지당할 것이다. 이래야 자아를 신뢰하지 않고 주님을 신뢰하는 것이 될 것이다.
마지막 돋아난 뿔은 작다고 말하고 있다. 그 이유는 미묘한 논쟁, 은근히 심어지는 오류들은 실력 행사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뿔은 “남쪽과 동쪽, 그리고 영광스러운 나라”에 까지 줄기차게 뻗어 나갔던 것이다. 즉 이 뿔은 선함에 대항하여 큰 힘을 발휘했다는 말이고, 영적 총명에 대해서도 그러하고 교회의 생명에 대해서도, 주님이 밝혀 주신 진리의 빛에까지 그 힘을 행사했다는 말이다.
그리하여 이 작은 뿔은 하늘 군대와 별들까지도 짓밟아 뭉갰다. 즉 “믿음만”이라는 영은 교리 속의 선하고 진정한 원리에 맞붙어 싸우되 교회에 있는 진리의 지식을 왜곡함으로 해서 진정한 교회 원리의 영향력을 파괴했다는 뜻이다.
이 뿔은 하늘 군대 사령관까지 업신여겼는데, 이는 신성한 진리라는 측면에서의 주님까지 무시해 버렸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날마다 드리는 제사를 폐지시키고, 주님의 성소까지 파헤쳤다. 즉 “믿음만”이라는 영은 신성한 인간에 관한 진리를 통째로 왜곡시켜 인간 마음속에 있어야 할 예배의 영과 삶을 파괴시켰다는 뜻이다. 그렇게 된 이유는, 인간이 “믿음만”을 구원의 방향으로 고집하면서 신성한 인간(Divine Humanity)을 찾겠다는 쪽으로 끌려갔기 때문이다. 사실 인간은 주님의 신성한 인간 속에서 주님을 찾되, 우리 속의 악한 경향성에 저항할 힘을 주시고, 우리 나름대로 선을 행할 힘을 주시기 위해 타락한 인간에게 내려와 닿으시려 하는 사랑의 하느님으로서 주님을 찾아야 할 것이다. 동시에 우리는 삶의 방향과 힘을 주님에게 의존해야 한다.

수염소 권세의 기간

거룩한 이들, 즉 천사들이 수염소의 권세가 언제까지 될 것인지를 놓고 말을 주고받았다. 그들이 선포하기를, 수염소의 권세가 이천 삼 백 일이 지나야 성소가 깨끗해질 것이라고 했다. 숫자 2는 선함과 관계가 있고, 3은 진리와 관계된다. 백이나 천이라는 단위가 곱해지거나 더하여지는 것은 앞의 숫자인 2나 3의 숫자가 팽창되거나 보강된 것일 따름이다. 따라서 수염소의 권세가 이천 삼 백 일간 계속된다는 것은 “믿음만”이라는 영이 모든 선함과 진리를 다 파괴하기 위해 많은 이들의 마음속에서 계속 극성을 떨 것이라는 말이다. 이는 교회에 관한 훼방이 끝나 주님의 성소가 깨끗해지는 때까지, 즉 새로운 교회가 사랑과 지혜, 그리고 정의로 주님을 예배하기 위해 일어나는 때까지라는 말도 포함한다.

가브리엘, 그리고 그의 교훈들

이 환상을 다니엘에게 설명하도록 가브리엘이 보내졌다. 이와 똑같은 천국의 특사가 복음서의 마리아와 즈가리야에게도 가르치도록 보내어졌었다. 단어 가브리엘이란 “하느님은 전능하시다”라는 뜻이다. 성경에 등장하는 이름은 글자대로만 읽는다면, 그 이름은 오로지 한 천사의 이름인 듯 여겨질지 모른다. 그러나 그 이름은 천국 사회에 대한 이름으로서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신성한 속성에 대해 인간의 마음을 계발시켜 주시려는 특별한 용도를 지니고 성경에 등장되고 있는 것이다. 가브리엘이 다니엘을 가르치는 모습은 구약성서의 글자에서 아주 희미하게 모습을 나타내는 영적 진리가 밝히 알게 되는 것, 마치 잠들어 있는 사람을 건드려 깨우듯 하는 모습을 표현하고 있다.
본문에서 환상에 대한 가브리엘의 해석은 표징적이고 상징적인 언어인데, 이것은 영적 원리와 상응되는 바, 미래에 그 의미가 사용될 수 있는 것들이다. 그러나 가브리엘의 말에서 영적 의미를 끄집어내기 위해서는 그 말에 대한 설명이 요구된다. 이렇게 본문은 말한다. 수양의 두 뿔은 메대와 페르샤의 임금들을 표현하고, 수염소는 그리이스의 왕들, 그 뿔은 각기 다른 왕들을 표현한다고 했다. 통치자로서의 왕이란 인간 마음을 좌지우지하는 원리를 표현한다. 본문의 메대와 페르샤의 왕이란 이타애 또는 이웃 사랑을 원리로 마음에 갖고 있는 것을 표현한다. 그리고 그리이스의 왕은 이타애가 없는 “믿음만”을 표현하고 있다.
“죄악이 가득 찼을 때,” 즉 악의 권세가 완전히 장악해서 교회의 처방이 끝장을 보게 되었을 때, “사나운 임금이 나타나 권모술수를 쓴다고”했다. 즉 악으로부터 튀어나오는 거짓 원리, 그리고 그 원리는 무식해서 튀어나온 원리가 아니다는 말이다. 이 악한 거짓은 맹렬한데, 그 이유는 이웃에 대한 온화한 사랑이 전혀 없는 탓이다. 악을 사랑하는 이들, 또는 자신들 속에 있는 악에 쉽게 기울려는 성질을 저지하고 싶지 않은 이들은 “믿음만”이라는 단어를 가지고 자신들이 옳다고 확증해 대면서, 구원에는 “믿음만”이면 충분하고 선한 삶은 구원의 필수 요건이 아니라고 떠든다. 그래서 그들은 정의는 불필요한 물건으로 취급하기까지 이른다. 그러면서 이들은 자신들을 추켜세우면서 하느님의 뜻과 선함 위에 자아 의지를 세우고야 마는데로 치닫는다. 결국 그들은 자신들을 평가하건대 주님보다 더 낫다는데 까지 자신을 추켜세운다. 이런 것들이 영적인 사악함, 부정한 것이다. 아마 현재의 세상 주위를 둘러 보아도 지능적으로 사악한 이들은 자신이 주님이라고까지 선포하는 우스꽝을 식은 죽 먹듯 해치우는 것을 여러분들도 쉽게 목격할 수 있다.

반복되는 이야기

위에서 살펴 알 수 있는 것은, 본문의 환상은 하나로 있어야 할 믿음과 이타애가 분리될 때 있게 되는 싸움을 상징적으로 기술해 주고 있다는 것이다. 본문의 내용과 유사한 이야기는 본문 이전의 성경에서도 이미 있었던 것인데, 이 내용은 창세기로부터 계시록에 이르기까지 계속 반복되는 내용들이다. 우리에게 맨 처음 등장된 성경 이야기로는 인간 가족에 관한 첫 가상적인 이야기인 카인과 아벨에서, 카인이 아우 아벨을 죽였을 때이다. 그리고 이것은 인간 역사의 매 시대에서 그 자체가 반복되고, 넓은 측면에서 볼 때 교회의 각 처방 속에서도 반복되고 있고, 더욱이 또 다른 교회에 의해서 계승되고 있기도 한 것이다.
새교회를 가져다 놓게 한 큰 사건, 주님의 오심은 옛 교회에게 끝을 맺게 했는 바, 이는 영계에서 있어진 넓은 측면의 영적 심판인 것이다. 이 심판에서 수염소의 권세는 바람에 흩날리는 겨같이 부서졌고, 새로운 처방이 그 뒤를 이어 영적 진리의 새 빛과 영적 사랑의 따스함 속에서 시작되었기도 하다.
구원은 “믿음만”가지고 되지 않는다. 또한 선한 일만 가지고도 안된다. 좌우지간 그 어떤 한쪽 측면만 가지고는 구원은 없다. 구원은 사랑과 믿음의 연합으로 있어지는 정의 속에 존재한다. 하느님은 인간을 인간 자신들로부터 구원하신다. 그러나 각자가 자기 속에 처박힌 악들을 기꺼이 포기하고 주님의 계명을 지켜 가는 한도 내에서만 구원해 주신다. 영계에 있게 될 우리의 거처는 각자가 실제로 이룬 인격의 직접적인 결과이고 그 인격이란 각자의 사랑과 생각의 품질에 따라 있는 바, 이 품질이 어떠하느냐는 각자가 주님의 계명을 자기 행동에서 얼마나 체현(embody)했느냐에 의존된다. 어떤 젊은이가 주님께 “제가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얻겠습니까?”라고 직선적으로 물었을 때, 주님은 “네가 생명의 나라로 들어가려거든 계명을 지켜라”고 대답하셨다.

41
소귀나무 사이에 있는 사람과 말

성서 본문: 즈가리야 1장 8-11절

8. 내가 밤에 환상을 보니, 낮은 곳에 소귀나무들이 있는데, 그 사이에 한 기사가 붉은 말을 타고 서 있었다. 그리고 그 기사 뒤에는 붉은 말, 잿빛 말, 흰 말을 탄 기마대가 늘어서 있었다. 9, 내가 “나리, 이것이 웬 기마대입니까?” 하고 묻자, 그 천사가 “이것이 웬 기마대인지 알려 주리라” 하며, 10. 소귀나무들 사이에 서서 이렇게 대답하는 것이었다. “이들은 야훼께서 세상을 순찰하라고 보내신 자들이다.” 11. 그러자, 말 탄 사람들이 소귀나무 사이에 서 있는 야훼의 천사에게 “세상을 돌아 보니, 사람들이 평안히 살고 있었읍니다” 하고 보고하였다.

내적 측면에서의 이해

내적 측면에서 볼 때 본문은 교회의 하강을 나열하고 있다. 다시 말해 쇠퇴해 가는 교회의 각기 다른 단계에서 있어지는 신성한 말씀에 대한 이해의 품질을 암시해 주고 있다. 그래서 본문의 적용은 우리로 자아를 검증하도록 뾰족하게 유도해 주고 있다.

글자적 의미

글자상에서 본문의 시대는 서기 전 약 520년 정도 된다. 이 시대에 몇 달 앞서서 예언자 하깨가 유대인에게 여호와는 머지 않아 “나라들을 뒤흔들고,” 이스라엘을 구할 것이라고 선포했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이런 사건을 기다리는데 매우 성급해지기도 하고 일부는 그 미래에 관해 의심하기도 했다. 그런데 예언자 즈가리야에게 유대인과 이방인의 현재와 미래에 관련되는 8개의 환상 시리즈가 있게 되었다.
한 마디로 즈가리야는 유대인들에게 그들을 향한 주님의 호의적인 의도를 재 보증했다. 즉 그는 예루살렘의 회복이 임박했고, 이스라엘의 마지막 쾌거가 있는다고 예언해 주었다.

영적 의미

환상 속의 계시가 밤에 있었다는 것은 그 계시가 희미하다는 것, 즉 진리로 명확한 시야를 만들지 않는 것, 자신들의 명백한 빛으로 진리를 볼 준비가 안된 마음들에 있어지는 계시를 암시해 준다.
밤중에 있는 이들이란 정신적으로 어둠의 상태인 자연적인 마음의 상태 가운데 있는 것, 또는 선함과 진리의 원리에 무지한 가운데 있다는 말이다. 그래서 만일 어떤 사람이 인격 측면에서 악하다면, 그는 거짓이라는 두꺼운 암흑 속에 있는 셈이다. 오늘 본문의 시대 때 유대 교회는 깊고 두꺼운 층으로 된 암흑이라는 상황 가운데 있었는데, 그렇게 된 이유는 그 교회의 사람들의 인격이 상당히 퇴보(degenerate)되었기 때문이다.
예언자로서의 즈가리야는 교리 속의 진리를 표현한다. 즉 교리의 진리와 지식 가운데 있는 이들을 표현하는데, 이에 적절한 성경 구절은 “들을 귀가 있는 자는 알아들어라.” 또는 “귀 있는 자는 성령께서 여러 교회에 하시는 말씀을 들어야 한다” (마태복음 13:9, 계시록 2:11) 일 것이라 본다.

사람

즈가리야는 한 사람을 보았는데, 그 사람은 11절을 보면 주님의 천사였다. 천사는 영계의 개인적 인물(person), 즉 주님의 진리를 알고 사랑하여 그렇게 사는 사람을 말한다. 그래서 그들은 종종 주님에게 피택되어 지상의 사람들에게 그분의 진리를 선포하며 교통하기 위해 보내어졌었다. 그러나 이 천사를 비인격적 측면에서 보면 천사는 신성한 진리를 표현하는데, 이 진리 속에서 주님은 영적으로 인간에게 오신다.

말 (horse)

예언자에 의해 보여진 사람은 말을 타고 있었다. 상징적 측면에서 말은 인간의 지성이나 이해성을 표현한다. 특별한 경우 말은 신성한 말씀에 관한 이해성을 표현할 때도 있다. 붉은 말이 먼저 언급되고 있다. 붉은(red)색은 사랑 또는 선함을 나타내는 색깔로서 가장 활기 있고 근본 되는 색이다. 그래서 붉은 말은 주님의 말씀 속에서 가르쳐지는 선함이나 거듭 나아가는 사랑에 관련되는 신성한 말씀에 대한 인간의 이해성을 표현한다. 그래서 붉은 말을 탄 기사(사람)가 천사로서 이방인이나 이교(heathen)에 있는 사랑의 질이나 선함의 질, 즉 사랑의 체현(embodiment)이 어떻게 존재하고 있는지를 검증하기 위해 보내어지고 있다.

소귀나무 (화석류나무)

붉은 말을 탄 사람은 “낮은 곳에 있는 소귀나무 사이”에 서 있었다. 서 있다는 것은 뭔가가 발생되기를 기다리는 것, 뭔가 준비된 모습을 말한다. 따라서 이 모습은 더 많은 행동을 취하기 위해 결과를 기다리는 정신적인 상태를 표현해 주게 된다.
소귀나무는 방향성의 잎이 무성한 작은 상록수이다. 장대하게 높게 뻗는 송백나무는 멀리까지 미치는 합리적인 진리를 표현해 주지만, 소귀나무는 단순하고 하급의 질서 속에 존재하는 합리적인 진리를 표현한다. 따라서 소귀나무로 표현되는 진리 역시 영적 진리이기는 하지만 높은 영적 수준이지는 못한 것이다. 교회 속의 개개인의 거듭남을 의미하는 교회 회복에 관한 예언인 이사야 55장 중 13절은 악에서 선으로 변화된 결과가 이렇게 상징되고 있다. “가시나무 섰던 자리에 전나무가 돋아나고 쐐기풀이 있던 자리에 소귀나무가 올라오리라. 이런 일이 여호와의 이름을 드날리고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표가 되리라.”
그래서 소귀나무 사이에 있는 천사의 일은, 유대인들이 내적, 외적으로 자기들의 어려운 조건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선함을 위해 주님께서는 아직도 그들 사이에 천사들을 보내고 계신다는 것, 그리하여 그들로 주님을 찾도록 유인하시고, 그러므로서 주님이 그들과 함께 할 수 있는 마음의 상태와 삶에로 되돌아와, 결국 그들 악에서 그들을 구원하실 수 있으시다는 생각을 가지고 유대인을 위로하는 것이었다.

낮은 곳

천사인 본문의 사람은 “낮은 곳에” 있는 소귀나무 사이에 있었다. “낮은 곳”이란 계곡 같은 곳, 또는 과거에 강바닥이었다가 지금은 물이 말라 마른땅이 된 것 같은 낮은 장소일 것이다. 그리고 이 소귀나무가 많은 곳이라면, 그 사람이 서 있는 곳은 그늘진 장소일 것이다. 이런 주위 환경이 표현해 주는 바는, 인간 사이에 있는 교회의 상황을 살피려고 천사가 내려 왔다면 필시 그 천사는 낮은 곳에 있는 소귀나무 같은 인간들의 모습, 즉 자연적 마음속의 생각 역시 외적이고 수준이 낮은 상태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천사 뒤에는 붉은 말, 잿빛 말, 흰 말이 있는 것이다. 이 말들 뒤에 늘어선 말들은 세 말들 보다 더 하급의 위치에 있는 것인 바, 이 말들은 더 낮은 상태, 그리고 더 외적인 상황에 있는 상태를 표현하게 된다.

색깔들

여러 가지 색깔의 말들은 교회 경력에 있어서 각기 다른 시기, 또는 각기 다른 인간 안에 있게 되는 상황을 표현한다. 나쁜 의미로 보면, 사랑의 색인 붉은 색은 악한 사랑을 표현한다. 이런 붉은 색의 교회는 매우 퇴보된 상태 안에 있는 교회이다. 따라서 말들의 색은 교회의 색을 반영(reflect)해주고 있다. 이런 견지에서 붉은 말은 순수한 사랑 또는 선함이 신성한 말씀에서 가르쳐지는 바에 대해 납득하는 측면이 썩어 있는 인간의 이해성을 표현하고 있다.
좋은 측면에서 흰 말은 신성한 말씀에 대한 명확한 지식을 표현한다. 계시록 19장 11-14절을 보면, “나는 또 하늘이 열려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거기에는 흰 말이 있었고 ‘신의’와 ‘진실’이라는 이름을 가진 분이 그 위에 타고 계셨습니다… 그분의 이름은 ‘하느님의 말씀’이라 하였습니다. 그리고 하늘의 군대가 희고 깨끗한 모시옷을 입고 흰말을 타고 그분을 뒤따르고 있었습니다.” 이 구절의 경우, 흰 말 위의 승마자는 “하느님의 말씀”이라고 똑똑하게 명명되었다. 그래서 흰 말 위에 계신 분은 “말씀이 육이 되신” 주 예수 그리스도이신 바, 이 구절은 말이 짐을 나른다는 측면의 상징성, 즉 모든 거듭나는 이들의 생각 속에 주님이 계시어 거듭나는 인간의 마음과 그분이 영적으로 연계됨을 표현해 주고 있다. 그러나 악인에게 있어서는 시편에서 말한 바 같이, “하느님은 악인의 모든 생각 속에 계시지 않는다.”
나쁜 측면에서 볼 때, 흰 말은 활기가 결핍되어 창백한 상태의 흰색이다. 그래서 흰말은 죽어 가는 마음, 즉 영적으로 생명력을 잃어 가는 것을 표현하게 된다. 이것이 본문의 흰말에 담긴 의미이다.
또 하나의 말은 잿빛이었다. 즉 색이 혼합된 상태, 일부는 희고 일부는 검다고 말할 수 있겠다. 이런 모습은 혼합된 마음 상태, 즉 진리에 관해 얼마 정도라도 지식이 있는 반면, 또 얼마는 악과 거짓이 있어 혼합된 상태의 마음이다.

왔다 갔다함 (순찰)

이 말들은 “여호와께서 세상을 순찰하라고 보내신 자들이다”라고 말해지고 있다. 순찰이란 조회(inquiry)가 이루어진다는 것, 특별히 신성한 말씀을 얼마나 사랑하고 얼마나 이해하는지에 관해 지상에 존재하는 교회 속의 사람의 상태를 조회한다는 말이다. 그러자 순찰자들이 이 명령을 받들어 세상을 돌아본 결과를 보고하였다. 즉 존재하는 상황이 지금 밝혀지게 되었다는 뜻이다. 순찰자가 발견한 것은 “사람들이 평안히 살고 있었습니다, still and at rest” 이었다. 지상은 지상의 사람들 사이에 있는 교회를 표현한다. 그리고 관찰된 상황은 지상의 사람들에 관한 것이었다. 즉 인간 안에 있는 교회의 상태라는 뜻이다. 모든 것이 평안(at rest)하다고 발견되었다는 것은 어떤 활동이나 움직임이 전혀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그 이유는 거기에 생명이 없는 탓이다. 게으르거나 활발하지 못해서 있어지는 평안(고요함, still), 또는 죽어 있는 탓에 움직일 수 없어 정온함, 이는 평화(peace)로 있어지는 조용함이 아니다.
본문을 글자로만 볼 때, 이 보고는 하깨의 최근 예언인 “여호와께서 머지 않아 나라들을 흔들어” 그것들을 짓부술 거라는 예언이 고려되어 있다. 그래서 순찰자의 보고는 영적으로 냉혹하고 무관심하며 이기적인 것들이 흔들릴 어떤 징조나 이교도 세계의 죽은 상태가 흔들려 깨워질 어떤 징조가 당장은 없다는 보고였다. 외형상에서 이 나라들은 조용한 듯 보였고, 심지어 자기들의 이기적인 길들만이 자기들을 견고하게 해줄 듯 보였을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외관상의 조용함은 내적인 평화까지 보증해 주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교도 국가들은 심판이 있게 될 때, 즉 인격의 내적 상태에 따라 되어지는 심판에서 자아 파멸로, 그들의 불법이 목까지 차 있었을 뿐인 것이다.

응용

우리 마음속에 있는 이교(heathen)들이란 우리의 이기적인 열정이나 관념들이다. 이런 것들은 우리가 인격의 진정한 질이 무엇인지 모르고 있을 때, 또는 우리가 악 가운데 살고 있음으로 해서 피할 수 없는 내적 생명의 결과를 볼 수 없을 경우, 매우 평안한 듯 느낄는지 모른다. 이런 환경 속에서 만일 우리가 자신의 악 가운데서 더 견고해지고 자아만족 같은 것을 느낀다면 이런 여건의 우리는 더 희망적이라 생각될지도 모른다. 우리의 영적 마음이 영적 생명을 위해 격렬한 투쟁을 해야 하는 동안, 우리의 자연적 마음은 그 감각적 수준에서 머무르며 평안해 있을는지 모른다.
이교도 국가들이 쉬운 방법으로 잘 살고 있는데 비해, 유대인들은 고난 속에서 살았는 바, 아마 자기들은 매우 힘든 삶을 꾸리는 듯 여겼다. 영적 생명을 찾는 인간 존재의 삶의 투쟁 속에는 다소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언제나 위의 유대인 같은 처지가 존재한다. 교회가 물질 세계 속에 남아 있는 한, 교회는 그 세상의 상황인 감각적인 것들에 부딪쳐야만 한다. 감각적 상태와의 싸움이 올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우리의 자연적 마음이 자연적인 평화나 쉬운 방법을 추구하는데 비해, 우리 내면의 마음들은 선함과 진리, 그리고 의로움 속에서 거듭남에 오게 되는 영적 평화와 쉼을 추구한다.
우리가 정신적으로 분투하면서 그 싸움에서의 성공을 갈망한다면, 우리의 주님은 때때로 그분의 말씀을 수단으로 우리의 마음을 열어 주신다. 그리하면 우리는 자신의 감각적인 자연적 마음의 현 상황을 직시하게 된다. 그분은 우리에게 진리의 천사를, 우리 지성 속에 있는 표징적인 말들, 그리고 우리들 마음의 합리적인 생각들, 즉 소귀나무 아래 이 말들이 서 있는 것을 보여 주신다. 그리하면 우리는 자신 속의 각기 다른 이해성, 즉 어떤 측면의 이해는 붉은 색, 또는 잿빛, 또는 흰색의 이해성뿐이었음을 인식하게 된다. 다시 말해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이해하려는 노력에서, 때로 우리는 이기적이고 악한 사랑으로부터, 혹은 죽은 듯한 순백색으로부터, 영적 생명이 결핍된 창백함에서 이해하겠다고 노력해 온 자신을 인식하게 된다.
그래서 이런 상황들이 우리 속에 있음을 하느님의 말씀을 통해 밝히 알게 될 때, 이 앎은 우리가 순수한 사랑과 진정한 생각, 그리고 의로운 행동으로 들어가도록 자신으로 노력하게 해서 주님은 영적 원기를 우리에게 회복시켜 주시게 된다. 이렇게 하면, 우리 마음에서 이교(잡신)를 추방할 수 있게 된다. 그래서 우리 속의 주님은 영적으로 “시온을 불쌍히 여기시고, 예루살렘을 다시 자기 것으로 삼으실 것이다.”

42
네 뿔과 네 대장장이

성서 본문: 즈가리야 2장 1-4절 (구번역 1:18-21)

1. 내가 다시 고개를 들고 보니 뿔이 네 개 있었다. 2. 나와 말하던 그 천사에게 “이게 웬 뿔들입니까?” 하고 물었더니, 유다와 이스라엘과 예루살렘을 흩뜨린 뿔들이라는 대답이었다. 3. 그 때에 야훼께서 대장장이 네 사람을 보내 주셨다. 4. 내가 “이들은 무엇하러 온 사람들입니까?” 하고 물었더니, 그가 대답하였다. “바로 이 뿔들이 유다를 흩뜨려 감히 머리를 쳐들지 못하게 했지만, 이 대장장이들은 일찍이 유다 땅을 흩뜨리던 그 뿔이 돋은 나라들을 혼내 주러 온 것이다.”

개요

본문은 교회가 악한 사랑에 근원한 거짓 원리로 말미암아 못쓰게 된 채 방치되는 것, 즉 황폐함(vastation)과 그 후 주님께서 거짓 원리들을 몰아내고 영적 진리를 가진 새교회를 건설하심으로 교회를 회복하실 것을 묘사하고 있다.

뿔들

성경의 상징적 언어 속에서 뿔은 힘을 표현한다. 그 이유는 뿔이 무기로 사용되어 힘을 발휘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수중에 있는 무기로는 칼, 곤봉, 총 등등일 것이다. 동물의 경우에는 뿔이나 발톱이 무기에 해당된다. 이 무기들은 소유자가 힘을 발휘할 때 한층 더 강한 실력을 발휘하게 해준다.
정신적 삶이 질서 있는 상태라면, 우리 사랑의 힘은 우리가 알고 사랑해서 사용하게 되는 진리를 수단으로 발휘되어 진다. 이와 같은 좋은 의미에서 볼 때, 뿔은 악이나 거짓, 죄 등등에 대항하는 진리의 힘을 표현한다.
그러나 우리 삶이 비질서적이고 타락하는 내림 길에 있다면, 우리는 주님의 진리에 의존해서 힘을 발휘하지 않고, 정신적 어둠인 자아 총명에서 파생되는 관념들이나 거짓 원리에 의존하게 된다. 이럴 경우, 자신의 힘이라고 하는 것들은 선과 진리에 반대하는 거짓의 힘일 뿐이다. 따라서 나쁜 의미에서 볼 때, 뿔은 인간 삶의 법칙인 주님의 진리에 대항하려고 마음속에서 발휘되는 거짓의 힘인 것이다. 이와 같은 거짓의 힘은 거짓을 흠모하는 마음 안에서 교회에 관한 원리나 그 생명을 파괴하고, 이런 거짓이 사람들 가운데서 우세해지면 집합체로서의 교회 역시 파괴된다.
뿔은 성경에서 좋은 의미로나 나쁜 의미로나 자주 언급되고 있다. 우리 주님의 중심 되는 생명은 신성한 사랑이다. 그리고 그분의 신성한 권능은 신성한 진리를 수단으로 발휘되어진다. 따라서 성경에서 주님에 관련하여 뿔이 언급되면, 그 뿔은 그분의 신성한 진리를 표현해 준다. 그리고 뿔이 인간에 관련해서 언급될 경우, 이는 그 인간에게 밝혀 주신 신성한 진리에 의해 주님이 그 사람에게 주신 힘을 표현한다.
이스라엘 민족들 사이에서는 뿔을 가지고 힘을 암시하는 것이 그들에게 관습이 되어 유행했었다. 그래서 뿔을 가지고 장식구로 사용하거나 자기의 현재 상태를 표시하도록 사용했다. 남자의 경우, 머리띠를 할 때, 머리 정면 부분의 띠를 조금 더 길게 해서 위쪽으로 향하게 한 다음, 그리 크지 않은 금속으로된 뿔을 약간 비스듬하게 부착했는데, 때로는 머리 부분에서 아주 높게 장식해 달기도 했다. 여자들의 경우, 이 뿔을 더 길게 장식하는 것이 유행하기도 했다. 게다가 모자에는 수직으로 세워 장식했다. 그래서 뿔로 머리를 장식한 사람이 머리를 세우고 있으면 그의 뿔은 더 높은 위치에서 뽐내는 듯 보였다. 그러나 그 사람의 마음이 매우 우울해져 머리를 떨구고 있으면, 그의 뿔은 머리보다 더 아래로 쳐진다. 이렇게 해서 뿔의 높,낮이는 뿔로 장식한 사람의 상태를 표현했던 것이다. 표징적 측면에서 뿔은 이스라엘 민족에게 매우 친밀했던 상징물이었다.

예식에서의 뿔

뿔은 예식을 거행할 때도 사용되었다. 왕이나 사제에게 기름 부을 때, 사용된 올리브 기름은 뿔로 만든 화약통과 비슷한 소뿔로 된 용기에 간직했다. 그리고 분향단과 번제단의 네 귀퉁이도 뿔 모양으로 돋아나게 만들었다. 이래서 그 뿔은 예배에 있게 되는 진리의 힘을 상징하게 했다.
그러나 교회가 타락되어 그 교회의 예배가 위선이 되었을 때, 아모스 3장 14절을 통한 예언에서 다음과 같이 말해진다. “나를 거슬러 죄짓는 이스라엘을 찾아오는 날 내가 베델의 제단에 벌을 내리리라. 그 제단의 뿔들을 때려부수어 땅바닥에 흩어 버리리라.”

환상 속의 뿔

예언 속의 상징적인 환상에서 뿔 달린 짐승들이 보여졌고, 특별히 뿔이 언급되는 경우도 있다. 다니엘은 환상 속에서 특이한 뿔을 가진 수염소를 보았는가 하면, 다른 때에는 뿔이 많이 돋아 올라 끔찍하게 보이는 짐승들도 보았다. 그 중에는 뿔이 열 개 달린 짐승도 있었다. 그리고 요한은 열 개의 뿔을 가진 용을 보았다. 모든 이러한 나쁜 짐승들은 교회를 파괴하고자 주님의 진리에 맞서 싸우려는 거짓을 표현했다.

흩뜨림

위와 같이 자아에서 비롯되는 총명에 의존하는 마음속에 있는 진리들은 흐릿해지고 만다. 악에서 튀어나오는 거짓들은 교회 속의 진리들을 흩뜨리고 교회의 생명까지 죽인다. 그 이유가 교회는 오로지 주님으로부터, 주님에 관한 지식 속에서만, 주님이 밝혀 주신 원리들을 사랑해서 실제에 응용할 때만 살아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때로 위와 같은 마음의 상태가 교인들에게 팽배해질 때, 그 교인들은 이방인의 포로가 되어 산산이 흩어지고 만다.
위의 모습이 본문의 “유다와 이스라엘과 예루살렘을 흩뜨린 뿔” 이라는 상징적인 표현 속에 포함되어 있다. 유다는 선함 또는 사랑의 측면에서의 교회를, 이스라엘은 진리 또는 지혜라는 측면에서의 교회를, 예루살렘 성은 교회에서 가르쳐진 교리라는 측면에서의 교회를 각기 표현한다. 그래서 선함과 진리, 그리고 올바른 교리는 신성한 진리 대신 자아에서 비롯된 관념들에 의존하는 사람이나 거짓을 탐닉하는 사람의 마음으로부터는 모두 흩트려진다.

본문에서 보여진 뿔은 넷이다. 넓은 의미에서 각 숫자는 의지 또는 심정 속의 생명에 관계되어 사랑 또는 선함에 관한 각 인간의 상황을 표현한다. 그 반면, 첨가된 숫자들은 이해성 또는 지성에 관계되어 각 인간은 지식이나 총명, 진리에 관한 상황을 표현해 준다.
단일 숫자로서의 둘은 선함을 표현한다. 그 이유는 사랑과 지혜가 하나를 이루기 때문인데, 다시 말해 사랑과 지혜는 의로운 삶 속에서 둘이 연합하기 때문이다. 넷은 둘에 둘을 곱한 숫자이다. 그래서 넷은 이중 형태로 둘을 포함하고 있는 셈이다. 따라서 이는 마음의 안쪽과 바깥쪽인 행동의 양면에서 동시에 있게 되는 선함을 표현해 준다.
자연계에는 네 방위, 즉 북, 남, 동, 서가 있는데, 네 방위는 인간 마음의 모든 상황, 즉 자연적 총명과 영적 총명, 영적 사랑과 자연적 사랑에 관한 상황을 표현해 준다.
그러나 인간이 인격 면에서 타락 쪽으로 기울고 있을 때, 그 사람에 관계하는 숫자들의 표징은 위와 반대되는 성질로 바뀌어진다. 따라서 악인에게 있어서의 북, 남, 동, 서는 거짓과 악에 속한 상황을 나타내 준다. 이런 것들이 본문에서 유다와 이스라엘, 예루살렘을 흩뜨린 뿔이라는 거짓 권능으로 유인되어 나오는 상황이다.

대장장이 (또는 목수)

교회 속에 있는 거짓의 악한 결과를 좌절시킴으로 교회를 회복시켜 주는 것이 주님의 의도요, 계획이다.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것은, 악에서 파생된 거짓들이란 교회에서 가르쳐진 거짓 교리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심정 속에서 사랑되고 생각 속에서 흠모하여, 삶 속에서 실제화된 거짓 원리들, 정의로운 사랑 대신 이기적인 욕망들을 북돋는 것, 진정한 사상 대신 부정한 생각들을 부추기는 이런 저런 것들까지 다 포함하고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그래서 인간 마음 안에 있는 사악한 거짓의 힘을 깨트리기 위해, 주님은 그 힘에 맞서도록 신성한 말씀의 글자 의미 속의 진리를 삶의 최 말단에 가져다 놓으심으로 인간으로 각자의 일상 생활에 진리를 응용해서, 인간으로 자기 삶에서 행해야 할 것을 볼 수 있게 하셨던 것이다.
이럼으로 해서 우리는 명백한 글자적 진리에 의해 발휘되는 큰 힘을 확실히 알 수 있다. 이 글자적 진리는 행동의 법칙이기도 하다. 이 법칙은 인간이 가진 관념이나 이론이 무엇이든 간에 인간 행동의 과정들을 엄격하게 붙잡고 있다. 이렇게 인간에게 틀을 만들어 주고 있음으로써 각 사람은 자기 행동에 관해 그가 행하는 실제의 일들을 이런 틀에서 벗어나지 않게 함으로 해서 그의 마음을 죽이려고만 하는 거짓의 각종 영향력들로부터 그가 원하기만 하면 벗어나질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실제에 놓인 진리들이 즈가리야가 환상에서 본 대장장이 이다. 번역된 대장장이(smith)는 어떤 번역의 경우는 목수(carpenter)로도 했는데, 확실한 것은 이 단어가 기술 있는 사람, 또는 철 도구를 사용하는 기술자를 언급한다는 것이다. 철 도구(iron tool)란 실제에 응용하기 위해 글자라는 외관에 있는 진리를 표현한다.

혼내 줌

네 뿔, 즉 거짓들을 혼내 주기 위해 또는 교인의 마음으로부터 거짓을 쫓아내기 위해 대장장이들이 파견되었다. 만일 인간이 주님이 밝혀 주신 진리에 따라 선을 행하는 일을 계속해 간다면, 그렇지는 못하더라도 선한 일 속에 자신의 행동이 머물도록 애쓴다면, 그의 마음은 새로운 진리들에 더욱 더 열려지게 되어 그가 행하는 실제의 선들과 일치되어 진다. 그리고 점차 그는 이전의 거짓 관념들을 벗어나게 인도되어 질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의 마음속에서 매일 생활을 규율하는 진리, 즉 일하고 있는 새로운 실제 속의 진리들은 과거 거짓이 점령하고 있던 자신의 생각과 느낌의 영역 수준까지 도달되기 위해 자신을 개혁하게 해주어야 한다. 만일 어떤 이가 자기 마음에 선한 영향력이 행사되도록 허용한다면, “네 대장장이”가 네 뿔을 혼내 주듯이 자신 속의 옛 거짓에 속한 모든 형태나 양상들에 새로운 진리가 도달해서 정복해 줄 것이다. 이와 유사한 모습이 즈가리야의 첫 환상인, 네 승마자가 교회의 영적 상황을 순찰한 구절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네 뿔에 네 대장장이가 대치하는 모습은 힘의 균형(balance)을 우리에게 암시한다. 이는 주님의 신성한 섭리가 우리 마음이 균형(equilibrium)을 갖도록 역사 하신다는 것도 암시해 주고 있다. 그렇게 역사 하심으로 주님은 우리가 선함과 진리로 되돌아오고 악과 거짓에는 저항이 가능하게 영적 자유를 유지시켜 주신다. 그래서 우리의 시험이 어떤 것이든지 우리가 영적인 도움과 보호를 정말로 원한다면 각자에 부응되는 섭리는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게 되는 것이다. 이사야 54장 16, 17절을 찾아보면, “숯불을 불어 피우고 자기가 쓸 연장을 만드는 대장장이를 나 말고 누가 만들었겠느냐? 닥치는 대로 부수는 파괴자를 나 말고 누가 만들었겠느냐? 너를 치려고 버린 무기는 아무리 잘 만들었어도 소용이 없으리라. 너를 법정에 고소하는 혀가 도리어 패소의 쓴잔을 마시리라. 바로 이것이 야훼의 종들이 나에게서 받을 몫이다. 내가 이 권리를 그들에게 돌려준다. 야훼의 말씀이시다.”

머리를 쳐듦

“뿔들이 유다를 흩뜨리어 감히 머리를 쳐들지 못하게 했다”고 본문은 말하고 있다. 즉 정복자가 유다를 짓부수어 굴욕시켜서 그들의 용기를 강탈하고 독립해 설 수 없게 만들었다는 말이다. 신체 중에서 머리는 가장 높은 위치이다. 그래서 머리는 총명을 가지고 통치하는 사랑을 표현한다.
악에서 끌어낸 거짓 사상으로 마음을 압박한 결과는 그 사람으로 하여금 인간답게 되는 것, 고상하고 영적 인간으로 되게 해주는 모든 것이 깔아뭉개지는 것뿐이다. 그러나 새로운 진리, 신성한 말씀 글자에서 가르쳐진 진리, 이 진리가 실제로 사용하는 형태를 취할 때, “이방인의 뿔”은 흩뜨려져서 그로 하여금 머리를 다시 쳐들 수 있게 해줄 것이다. 즉 그의 내면에 있어야 할 사람다움(manhood)이 승강되어 영적 총명을 다시 획득하게 해준다는 말이다.
글자대로 볼 때 “이방인의 뿔들”이란 이스라엘이 주변의 이교도 국가로부터 배운 끔직한 것들이었다. 영적으로 볼 때, 이러한 이교도는 우리의 자연적 마음속에 늘 존재하고 있다.
본문이 보여주는 글자적인 의도는 유대인에게 용기를 주는 것, 그들이 처한 국가적 고통은 장차 끝장을 보게 된다는 것, 더 좋은 세월이 그들을 위해 비축되어 있다는 것을 보증해 주려는 것이었다. 유대인들은 더 좋은 외적 상황이 그들에게 도래할 것을 기대했다. 그러나 뭔가 좀더 총명한 기독교인이 기대하는 “더 좋은 세월”이라면, 그것은 자기 속의 변화라는 것, 자신의 인격이 신성한 인도와 가르침 밑에서 더 개선되는 날들일 것이다.
즈가리야는 “야훼께서 나와 말하던 그 천사를 좋은 말로 위로하셨다”고 말하고 있다. 우리의 주님은 우리가 그분께 영적 삶을 위해 묻는 진지한 물음에 언제나 “좋은 말로 위로해 주신다.”
본문은 머나먼 과거에 이스라엘을 주님이 해방하셨던 것과 장래 그들의 적들을 전복시키실 것을 표징적으로 예증하고 있다. 만일 우리가 계발된 총명 상태에 있다면, 성경에 기록된 이스라엘의 역사는 우리 개개인의 살아온 역사에 관한 표징적이고 상징적인 그림임을 알게 해준다. 그래서 이 그림은 우리를 심각해지게도 만들지만, 그 반면 무화과나무 아래 있는 나타나엘, “거짓이 조금도 없는 사람”이 되려고 애쓰는 정도만큼에서 우리 앞에 놓인 가능성들에 기뻐할 풍부한 이유도 제시해 준다 (요한복음 1:47).

43
측량줄을 잡고 있는 사람

성서 본문: 즈가리야 2장 5-9절 (구번역 2:1-5)

5. 내가 또 고개를 들고 보았더니, 누가 측량줄을 잡고 있었다. 6. 내가 그에게 어디로 가는 길이냐고 묻자, 그는 예루살렘을 측량하여 그 폭과 길이를 알아 보러 가는 길이라고 대답하였다. 7. 나와 말하던 천사가 거기 서 있다가 다른 천사가 마주 오는 것을 보고 8. 그에게 일렀다. “저 젊은이에게 달려 가서 일러 주어라. ‘예루살렘에 사람과 짐승이 불어나서 성을 둘러 치지 않고 살게 되리라. 9. 이는 야훼의 말이다. 내가 불이 되어 담처럼 예루살렘을 둘러 쌀 터이고 그 안에서 나의 영광을 빛내리라.’”

개요

본문은 새교회의 영적 품질을 표징적으로 밝히고 있다. 이 교회는 크게 불어나고, 이 교회의 내적, 외적 측면에서 주님이 현존하실 것임을 보여주고 있다.

측량함

어떤 사람이 나타났는데, 측량줄을 잡고 있었다. 영적 환상에서 보여진 이 사람은 영계에 있는 거듭난 사람, 즉 천사였다. 천사는 주님의 특사인 바, 그에게 명령한 일 역시 인간을 통하여 이루시는 주님의 일을 말한다. 천사의 행동이 표징적이듯, 그 일 역시 인간 사이에 있게 되는 주님의 영적 행동을 표현했다.
자연계 속에서 우리는 어떤 물건의 크기를 알아보려면, 그 물건의 길이와 넓이, 그리고 두께, 즉 높이를 측량한다. 그러나 영적인 것의 경우는 양보다는 품질과 관계가 된다. 그래서 영적 물건의 크기는 성질(character)에 관계가 있다. 자연적인 것을 측량하는데 사용되는 것은 길이, 넓이, 높이인데, 이런 크기들은 영적 측량으로 알아 볼 경우, 인간 마음 안에 있는 선함과 진리, 그리고 등차(수준)로 표현된다.
아마 위의 말에 대한 납득은 우리가 늘 사용하는 일상 언어를 살펴보면 쉽게 납득된다. 우리는 야비한 사람을 두고, “그는 좁은 사람이야…” 또는 “그는 작은 마음을 지녔어…”라고 하고, 관대하고 선한 사람을 두고, “그는 넓은 마음을 지녔어…” 또는 “그 사람은 큰 가슴을 가졌어…”라고 말한다. 이럴 때, 이런 마음이나 가슴을 잰 표준은 주님의 신성한 말씀에서 밝혀진 그분의 진리이다. 우리 속에서 이런 표준을 사용하거나 측량하는 능력은 자기에게 밝혀진 진리를 지각하여 그 표준을 원리 속의 진리로 인정하는 우리의 능력, 즉 합리적 능력이다. 그래서 주님께서 각자의 마음과 삶의 각기 다른 상태를 보여주시려고 천사를 보내 영적으로 측량할 때, 천사가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을 납득하기 위해 우리의 합리적 마음은 반드시 열려서 적극적 자세를 취하고 있어야 한다.

예루살렘을 측량함

본문에서 말하는 바, 천사는 예루살렘을 측량하는 것이었다. 글자대로 볼 때, 그 천사는 예루살렘 성의 크기를 재려는 것이었다. 아마 그 성을 수리하고 재건하려는 의도에서였는지 모른다. 이 행동은 인간 사이에 있는 교회의 상황을 영적으로 측량하는 상징적이고 표징적인 것이었다. 그 이유가 예루살렘, 이는 이스라엘 교회들의 사령탑인바, 교회를 말한 것이고, 예루살렘의 상황이 어떠하느냐란 교회의 영적 상황과 품질을 표현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측량이란 교회의 생명에 관한 영적 품성, 품질을 결정하는 것을 말한다. 교인들의 품성이 변화된 상황은 영적 측량을 다시 함으로서 밝혀지게 되는 것이다.
예루살렘을 서 있는 그대로 측량한다고 말할 경우, 이는 기존 교회의 영적 품성을 밝힌다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환상에서 보여진 예루살렘을 측량할 경우, 이는 미래에 있게 될 교회의 영적 상황, 특별히 주님이 오신 이후의 교회의 상황과 관계가 있게 된다.

두 천사

“나와 말하던 천사가 저기 서 있다가 다른 천사가 마주 오는 것을 보고 그에게 일렀다. ‘저 젊은이에게 달려가서 일러주어라.’” 이 두 천사란 거듭나는 사람의 마음에 보내진 주님의 진리를 표현한다. 우리는 신성한 진리를 각기 다른 측면에서 본다. 하나는, 의지 또는 심정이다. 이 측면에서 우리는 선함이 수행되어야만 하겠다고 생각한다. 또 하나는, 지적 측면이다. 이 측면에서 우리는 수행해야 할 것들에 수반되는 생각을 이해하게 된다.

벽이 없는 성읍

천사는 주님의 약속이 “예루살렘에 사람과 짐승이 불어나서 성을 둘러치지 않고 살게 되리라”라고 밝혔다. 고대 시대 때, 큰 성읍이나 중요한 장소들은 높은 벽으로 보호되어 있었다. 그러나 작은 성읍이나 마을들, 특히 농장의 경우는 평야나 언덕, 또는 계곡에 성벽 없이 건설되어 있었다. 강도나 적들이 휭행하는 때에 성벽도 없이 괴로움을 당하지 않고 생계를 잇는 성읍이나 마을은 평화, 고요함, 자유로운 상태들을 암시하는 것이다.
때로 성 안이 과밀 되었을 경우, 불어난 인구는 성 밖에서 살아야 했다. 게다가 이 성읍과 저 성읍이 연결을 이루면서 그곳 주민이 아닌 외부인이 서로 교역하면서 그들이 잠시 체류할 때 그들은 성 밖에서 지낼 수밖에 없었던 때도 있다.
이 본문의 경우를 글자대로 생각한다면, 예루살렘이 평화와 번영의 때를 맞이하여 즐기는 가운데, 인구가 크게 증가해서 성밖에도 성 안 만큼이나 커지게 될 것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다.

영적 측면에서의 비유

그러나 본문을 영적 측면에서 보면, 이 본문은 미래에 있을 주님의 교회 상황, 거듭나는 상태 속의 새교회, 주님과 그분의 진리를 내면으로 받는 상태를 초상화 해놓고 있다. 따라서 성 안에 있는 시민들은 천국의 더 높은 수준에 이르는 총명한 새교회 인을 표현하고, 성 밖 주위에 사는 사람들은 선량한 자연적 인간처럼 자연적 수준에서 새교회의 영향을 받아 새교회로 향해 오는 이방인들을 표현해 주게 된다. 그 이유는 여느 교회나 비슷하게 새교회도 내적인 것과 외적인 것을 가져야 하기 때문이다. 자연적 천국에도 말씀으로부터 온 진리에 관한 지식, 그에 따른 선한 삶이 있다. 그러나 그곳에는 진리 속의 원리를 들여다보게 해주는 내적 시야인 영적 지각이나 총명이 없다.
이와 같은 모습은 지상의 교인들에게도 마찬가지이다. 어떤 이는 상당한 영적 마음을 소유하는데 비해, 어떤 이는 자연적 수준의 생각만으로 진리를 본다. 그러나 이 두 가지 사람 모두 거듭 나아가는 삶을 영위하고 있음은 서로 공통된 점이다. 따라서 교인들 역시 각기 나름대로의 수준과 평면에 속해 있는 것이다.
이 외적 사람이 본문에서 짐승으로 의미되고 있고, “사람과 짐승이 불어나서…”라고 하여 사람과 짐승을 구별짓고 있다. 이렇게 구별한 이유는, 영적인 사람과 선한 자연적 사람의 내면상의 차이가 선한 자와 좋은 가축의 차이로 표현되기 때문이다. 둘 다 바깥쪽은 자연적 삶에 열려 있지만, 삶의 안쪽은 품질면에서 완전히 영적이어서 차이가 있게 된다.
이와 같은 생각은 천국에서 각 사람의 거주지를 배열하는 데서도 보여진다. 아주 슬기롭고 선한 천사들은 중심 부근에 살고, 그 외 사람들은 중심으로부터 시작해서 외곽으로 퍼져 산다. 어느 정도까지 바깥쪽에 거주하느냐는 총명이 어느 정도 약해지느냐에 의해 결정된다.

불로된 벽
주님께서 선포하시는 바는, 비록 예루살렘이 불어나서 성 바깥까지 거주하게 된다 해도 “내가 불이 되어 담처럼 예루살렘을 둘러 쌀 터인즉” 예루살렘은 안전할 것이라는 것이다.
성벽은 그 안에 있는 것들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다. 불로된 성벽이라면 더욱 보호해 주게 될 것이다. 그 이유는 그 벽이야말로 적에 의해 부서질 수도 없고, 감히 들어오려고 생각해 보지도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뚫지 못하는 불로 된 성벽은 그분 백성을 향한 주님의 사랑이다. 이 사랑은 언제나 그분의 백성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신성한 섭리, 즉 그 안의 백성들이 영적 사랑의 법칙에 의거 서로가 서로를 대접하는 이웃사랑과 주님을 사랑하는 수준만큼에서 바깥쪽 적들로부터 보호되는 것이다.
불로된 벽은 어떤 악령도 감히 침입할 수도, 아예 들어 올 생각조차 못할 벽이다. 이 불은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임을 시편 34편 7절은 이렇게 노래하고 있다. “야훼의 천사가 그를 경외하는 자들 둘레에 진을 치고 그들을 구해 주셨다.”
인간을 보호해 주는 벽이란 교회, 또는 교회에 있는 체계적인 교리를 말한다. 교리는 거듭 나아가는 마음이 바깥쪽에 해당되는 자신의 감각적인 것들 속에서 먹이를 찾아 배회하는 적들인 자연적 꾐이나 악한 영향력에 물드는 데에서 보호해 준다. 교리 중에서도 사랑의 교리는 가장 완전한 벽이다. 그 이유는 사랑으로 자신이 증거를 가졌을 때, 그와 같은 사랑의 행동이나 기운 속에 있는 마음은 그에 따른 모든 것에 대해 명백한 추론을 가능하게 해주기 때문이다.

영원한 불
불은 사랑을 표현한다. 가장 높은 의미에서 불은 하느님의 사랑을 표현한다. 결코 실패하지 않는 신성한 사랑이 이스라엘 후손들의 성막 안 제단 위에서 꺼지지 않고 타는 불로 표현되어 졌었고, 성전에서도 꺼지지 않도록 명령되었기도 하다. 이 영원한 불은 인간이 주님을 향해 가지고 있어야 할 꾸준한 사랑이 표현되도록 의도되어 있기도 한 것이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나타나실 때, 그분은 “떨기 가운데서 이는 불꽃으로 그에게 나타났다” (출애굽기 3:2). 이 때의 불은 신성한 사랑, 아버지를 표현했고 떨기로 표현된 것은 말씀의 글자인데, 이에 대한 또 다른 의미는 주님의 외적 인간성을 표현해 주기도 한다.

영광
오늘 본문은 예루살렘에 대한 하느님의 약속으로 마무리 짓고 있다. 즉 “…그 안에서 나의 영광을 빛내리라.” 예루살렘은 마음에 건설된 일반적 교리 체계라는 측면에서의 교회를 표현하고, 이 예루살렘 성이 지상에 건설되고, 이 예루살렘 안에 있는 “영광”이란 교회의 교리 속에서 빛나는 신성한 진리, 신성한 사랑으로부터 밝게 빛나는 신성한 진리를 말한다. 이 진리는 불로부터 빛이 발하여지듯, 교회 깊은 곳으로부터 발출된다.
또 다른 국면에서 볼 때, “안에 있는 영광, glory in the midst”은 신성한 말씀 속에 있는 영적 의미를 말하고, 이 의미는 거룩한 성경 글자를 통해 밝게 빛난다. 가장 심오한 의미에서 볼 때, “한 가운데 있는 영광, glory in the midst”은 천상 천하의 한 분 하느님,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한 인성에서 빛나는 가장 깊숙한 생명, 하느님의 생명을 말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을 통해 빛을 발하는 신성이 예수님의 머리 주위에 있는 후광으로 수많은 미술가에 의해 그려졌기도 했다.
우리가 예수님의 신성한 인격을 보고 이해하여 인간 안에 하느님이 현존하심을 납득할 때, 이 납득의 뒤를 잇는 것, 영적 진리에 대해 밝히 알게 되는 것(계시)은 우리로 더 높은 수준에로 마음을 승강시키도록 부름 받게 하여 더욱 더 높은 차원에서 진리를 볼 수 있게 해준다. 이 때 주님의 소리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이 있게 된다. “일어나 비추어라. 너의 빛이 왔다. 야훼의 영광이 너를 비춘다” (이사야 60:1). “그러면 하늘에는 사람의 아들의 표징이 나타날 것이고… 그들은 사람의 아들이 큰 영광과 권능을 가지고 하늘의 구름에 오심을 보게 될 것이다” (마태복음 24:30). 이는 주님의 신성한 진리가 말씀 글자를 통하여 밝게 빛을 낼 것이라는 말이다.
내면적인 교회는 이스라엘 후손들 사이에서는 건립되어질 수 없었다. 그 이유는 그들의 마음 상태는 지독하게 낮은 마음, 자연적 마음 안의 상태여서 내면에 속한 것들을 지각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새교회로서 첫 기독교회가 건설되어 단순한 수준, 즉 자연적이면서도 영적이기도 한 인간 수준에서라도 영적 상태들의 적은 부분이라도 마음속에 받을 수 있게 된다. 따라서 첫 기독교회 역시 내면에 있는 영적 사항들을 다 이해할 수는 없었다. 그런고로 해서 주님은 재림 속에서 새로운 교회인 새 예루살렘 교회를 건설하시었고, 그 교회로 그분의 신성한 인성 안에 계신 주님을 어떤 신비로움이나 샤머니즘 같은 이상한 증거가 필요 없는 명백한 영적 빛으로 받을 수 있게 설비해 주셨던 것이다. 이 새교회는 성경 글자 속에서 발하는 주님의 영광, 말씀의 내면에 해당되는 영적 의미로 하느님의 말씀을 받는 자, “성령이 여러 교회에 하시는 말씀을” “들을 귀 있어 듣는 사람들”로 구성된다.

44
대사제 여호수아에 관한 환상

성서 본문: 즈가리야 3장

1. 또 야훼께서 대사제 여호수아가 야훼의 천사 앞에 서 있고 사탄이 그 오른편에 서서 그를 고발하는 것을 나에게 보여 주셨다. 2. 야훼의 천사가 사탄을 나무랐다. “사탄아, 너 야훼께 책망받을 놈아! 예루살렘을 택하신 야훼께 책망받을 놈아! 이 사람은 불에서 꺼낸 나무토막이 아니냐.” 3. 그 때 여호수아는 때묻은 더러운 옷을 입고 천사 앞에 서 있었다. 4. 천사가 그의 앞에 서 있는 사람들에게 일렀다. “저 때묻은 더러운 옷 대신에 좋은 옷을 입히고, 5. 머리에는 깨끗한 관을 씌워 주어라.” 그들이 여호수아에게 좋은 옷을 입히고 머리에 깨끗한 관을 씌워 주자, 야훼의 천사가 일어서서 여호수아에게, 4. “보아라! 내가 너의 죄를 벗겨 준다”하고 선고하였다. 6. 그리고, 그 천사는 여호수아에게 주의 말씀을 일러 주었다. 7. “만군의 야훼께서 말씀하신다. ‘네가 만일 내가 일러 준 길을 따르고 내가 맡긴 직책을 다한다면 너는 내 울 안을 지키고 내 집을 다스리며 여기 섰는 자들과 어울려 지내게 되리라. 8. 대사제 여호수아야, 똑똑히 들어라. 여호수아를 모시고 앉아 있는 동료들도 잘 들어라. 나 이제 내 종이 될 새싹을 돋아나게 하리라. 너희가 그 자리에 오른 것이 그가 올 징조다. 9. 나 이제 여호수아 앞에 돌을 하나 놓는다. 돌은 하나인데 눈은 일곱 개가 달려 있다. 나는 친히 이 돌에–내가 이 땅의 죄를 하루 아침에 쓸어 버리겠다–고 새기리라. 만군의 야훼가 말한다. 10. 그 날이 오면, 너희는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잔치를 베풀고 서로 오가며 살리라.’ 만군의 야훼께서 하신 말씀이시다.”

개요

본문은 다음에 대한 예언이다. 이스라엘 교회 속에 있는 지옥적인 거짓 원리들은 주님께서 세우실 첫 기독교를 무지의 거짓에 빠지게 할 것이라는 것, 그러나 주님께서는 이와 같은 거짓들을 제거하시고 진리를 주실 것이라는 것, 교인들은 자기들 마음과 생활로부터 거절하는 만큼에서 주님으로부터 온 진리를 이해하게 된다는 것이다.
모든 신성한 예언들은 그 적용 대상이 일반적이어서 모든 인류 조건에 응용되듯, 본문 역시 계시록에서 나열된 새 예루살렘이 내려오는 것으로 상징화된 새교회의 설립과 형성, 주님의 재림에서 나타나는 첫 기독교회의 상황을 예언적으로 밝히고 있다.

글자대로의 그림

갈대아에 포로가 되어 끌려간 유대인들이 팔레스틴으로 되돌아 와 발견했던 것은 자기들의 고향과 백성들이 퇴보된 상황에 있는 모습이었다. 예루살렘에 있는 여호와의 성전 역시 붕괴된 채 방치되어 있고, 성전 예배 물론 거들떠보지도 않는 상태였다. 유대인 중 일부는 이렇게 악한 조건에 있는 모습을 인식하여 한탄했다. 그러면서도 그들이 두려워했던 것은 나라 속에 만연된 악들이 워낙 심해서 그들이 과연 여호와께서 용서해 주신다거나 그분께서 예전의 상황으로 백성이나 나라를 회복시켜 주실까에 대해 매우 의심스러워했던 것이다.
그러나 예언자들, 특별히 하깨나 즈가리야는 지도자들에게 이스라엘의 회복을 위해 노력을 기울이도록, 특히 성전의 재건을 마무리짓도록 용기를 불어넣었다. 그에게 힘을 내도록 본문에서 보여지는 환상이 즈가리야에게 보여졌다. 이 환상에서 대사제 여호수아는 심각한 죄를 고소 당하는 사람으로 심판자 앞에 서서 고소자와 맞서 있는 모습으로 표현되어 있다. 게다가 관습에 의거 때묻은 더러운 옷까지 입고 있었다. 그러나 주님께서 사면하시어 그를 석방하라고, 그리고 예전의 모습으로 회복시키도록 명령하시는 것으로 표현되고 있다. 이렇게 해서 주님은 이스라엘을 면책하시어 용서하시고 예전의 번영하던 모습으로 회복시키실 것임을 표현하고 있다. 물론 이스라엘 백성이 다시 주님의 계명에 따라 살고 자기들 생활을 개혁한다는 조건에서이다.

영적 의미

본문을 영적 의미에서 보면, 여호수아와 사탄이 심판에 올라 있는 극적인 그림은 유대 교회에 있는 사람들의 마음에서 우세해져 있던 것들, 신성한 말씀이 자아에 근거한 총명으로 인해 왜곡되어 있는 것을 표현한다.
여호와의 대사제 여호수아는 신성한 말씀 측면에서의 주님, 또 다른 의미로서 주님의 자연적 인성 측면에서의 주님을 표현하고 있다. 이렇게 표현되는 이유는 신성한 말씀을 글자에서까지 뒤집어 모독한 이들이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주님을 경멸했고 거절했기 때문이다.
인간의 이기적인 마음은 신성한 말씀과 교회를 거짓과 모순들을 가지고 고소할 준비가 언제나 되어 있다. 그러나 주님의 목적은 인간을 정죄하는데 있지 않고 악과 거짓에서 구해 주시는데 있다. 그래서 주님은 인간을 고소하는 자, 인간의 적, 사탄을 언제나 꾸짖으신다. 이 책망은 사탄을 정죄함뿐만 아니라 사탄의 일에 대치되는 진지한 하느님의 노력까지 포함하고 있다. 따라서 인간이 악한 불 속에서 잘 타고 있다고 사탄이 더 입증하면 할수록, 주님은 각 개인을 불에서 꺼낸 나무토막 같이 여기시고 구출하시려고 더욱 애쓰신다.

사탄

사탄이란 어떤 누구를 지칭한 이름이 아니라, “인간의 적”을 의미하는 공적인 칭호이다. 그런데 성경의 글자 대로를 고수한 첫 기독교회는 사탄이 타락한 천사일 것이라고 가상했던 것이다. 이런 생각처럼 주님의 적수로서의 어떤 큰 인물이라는 악마는 없다. 악마란 타락하는 인간의 심정 속에 있는 악의 원리로서 이는 지상에 있든 지옥에 있든 마찬가지이다. 악을 자기의 인격 속에 고정시킨 사람은 악마인 것이다. 주님께서 유다에 관해 말하시기를, “내가 뽑은 사람은 열 둘이 아니더냐? 그런데 그 중에 한 명이 악마이다”와 같이 언급하신 대목을 참조하면 위의 말이 납득될 것이다.
악마와 사탄 사이에는 어떤 구분이 있다. 악마는 집합적으로 본 악의 원리를, 사탄은 집합적으로 본 거짓을 의미한다. 대사제 여호수아를 공박하는 사탄이란 각 개인의 마음속에서, 또는 교회라는 집합된 마음속에서 작동하는 감각적인 거짓의 영이 신성한 말씀에 반대하되 특히 말씀의 생명과 영에 적이 된다. 이런 반대는 말씀의 글자 의미로 자기를 규율한다고 고백하는 순간에서까지 작동되는 경우도 있는 것이다.
지상의 인간 삶의 많은 측면, 즉 개인적으로, 공적으로, 상업적으로 우리가 의를 실천해 보겠다고 할 때, 사탄은 우리 오른편에 서서 우리를 고소하려 들어 우리가 해보겠다고 하는 결심에 비상등이 켜지게 하고 짓눌러 좌절하게 만든다.
손이란 힘을 표현한다. 그 이유는 우리가 손을 수단으로 뭔가를 해내기 때문이다. 특별히 오른손은 선함을 사랑하려는 심정, 의지 속의 힘을 표현한다. 그리고 왼손은 진리에 관한 지식 속에 있는 지성, 이해성을 표현한다. 오른쪽에 서 있는 사탄이란 주님으로부터 받아 우리 심정 속에 있는 선을 파괴하고자 몸부림치는 거짓 원리를 표현한다.
이렇게 사탄은 형제를 무고하는 적인데, 표징적으로 인격화되어 있는 것이다. 우리가 거듭남으로 해서 이 거짓 영은 마음 밖으로 쫓겨 나가는데, 이런 모습이 계시록 12장 9-10절에서 또 다른 그림으로 주어지고 있다. “큰 용은 악마라고도 하고 사탄이라고도 하며 온 세계를 속여서 어지럽히던 늙은 뱀인데… 우리 형제들을 무고하던 자들은 쫓겨났다… 이제 우리 하느님의 구원과 권능과 나라가 나타났고 하느님께서 세우신 그리스도의 권세가 나타났다.”

타다 남은 나무

어떤 이가 큰 위험을 극적으로 피했을 때, 흔히 우리는 “타 버릴 뻔한 나무,” “불에서 꺼낸 나무토막”이라고 부른다. 이는 다 타 버리고 말 뻔했던 데서 건져졌다는 말이다. 이와 같은 언어가 영적 위험에도 응용되어 지옥의 불에서 구원된 회개한 죄인을 말하기도 한다.

때묻은 옷

과거에는 중범을 저지른 죄수일 경우, 그의 외모에 관심을 두지 못하게 하여서 그로 그의 행동 인격에 어울리는 옷차림, 즉 때묻은 지저분한 옷을 걸치게 했다. 이런 형태는 로마 관습에도 있어 기소된 자를 “더러운 자, sordidati, filthy one”라고 불렀었다. 영어의 경우 이에 해당되는 말은 “sordid”일 것이다.
몸을 감싸는 옷(garment)은 우리의 애정을 감싸는 진리, 즉 애정이 자신을 스스로 표현하기 위한 수단을 말한다. 존경받는 사람이 특별히 공식 석상에 나타나기 위해서는 그에 걸맞게 품위 있는 옷을 입는다. 그러나 낮고 천하다는 사람, 특히 죄를 진 사람의 경우, 그는 더러운 옷이나 넝마를 걸친다. 마음은 각 마음에 걸맞은 자연적인 지각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성경에서도 복장은 영적 조건이 어떠한지가 표현되도록 종종 언급되고 있다. 이사야 61장 10절을 찾아 읽어보자. “야훼를 생각하면 나의 마음은 기쁘다. 나의 하느님 생각만 하면 가슴이 뛴다. 그는 구원의 빛나는 옷을 나에게 입혀 주셨고 정의가 펄럭이는 겉옷을 둘러 주셨다.”

겉옷이 바뀜

예수님께서 세 제자들 앞에서 변모하셨을 때, “그분의 얼굴은 해같이 빛나고 그분의 의복은 빛같이 희었다”라고 언급하고 있다. 이 경우, 겉옷의 나타남이 변화되었다는 말이다.
때묻은 옷이란 악에서 퉁겨 나오는 거짓 원리들을 표현한다. 때묻은 더러운 옷을 입은 대사제를 두었다는 것은 교회가 진리 대신 거짓들로 가르침을 받았다는 것을 표현한다. 그리하여 거짓들이 주님의 말씀에서 비롯되었다고 하여 결국 주님에게 자기들이 더러워진 탓을 돌려, 주님의 신성한 인성을 경멸해 댄다. 그러나 여호수아의 더러운 옷을 벗기고 좋은 옷을 입힌다는 것은 교회로 하여금 신성한 말씀을 이해할 수 있게 회복시켜 주시어, 자아 총명에서 비롯되는 거짓을 거절할 수 있게 해주시겠다는 말이다. 이런 방법으로 주님은 교회를 거듭나게 하시면서, 인간의 불법이 사라지게 하신다. 다시 말해 거짓이 퍼졌을 때, 인간이 그 거짓을 거절하여 지옥에로 그것들을 내쳐 보내도록 하는 방법을 취하신다.

깨끗한 옷이 여호수아에게 입혀진 뒤, “머리에는 깨끗한 관이 씌워졌다.” 주교, 또는 감독자가 쓰는 공적인 모자(mitre)란 거룩한 말씀에서 주님이 가르치시는 영적 진리에 관한 지식에 근거한 교회의 총명과 지혜를 표현한다.

주님의 길을 따름

관이 씌워진 뒤 천사가 여호수아에게 이렇게 말했다. “만군의 야훼께서 말씀하신다. ‘네가 만일 내가 일러준 길을 따르고 내가 맡긴 직책을 다한다면 너는 내 울 안을 지키고 내 집을 다스리라.’” 여호수아가 여호와의 길을 걷는다는 것은 교회가 말씀 속의 가르침에 따라 살게 된다는 것이다. 누군가가 어떤 진리를 신실하게 믿고 있다면, 그 믿는 증거는 그가 자신의 모든 생활 속에서, 즉 그의 애정과 생각, 그리고 행동 속에서 그 진리에 순종하는 것뿐이다.
대사제로서의 여호수아는 주님의 종으로 교회에 대한 직책을 가졌다. 이는 주님이 내리신 임무요, 어떤 방법으로든 주님이 파견하신 것이다. 이와 같이 교회는 그 교회가 집합 단체로서 이든, 각 마음속에 있는 교회로서 이든, 교회에 위탁된 선함과 진리에 속한 신성한 사랑들에 대해 임무가 주어져 있는 것이다.
주님의 집을 다스린다(judge)는 것은 이스라엘 가문을 이끌어 간다는 말이다. 이 말을 영적으로 생각한다면 이는 합리적인 마음이 영적 진리 속의 원리와 응용면을 볼 수 있게 열려질 때, 생활의 지침에 하느님의 말씀에 있는 선한 원리들을 응용해 간다는 뜻이다. 주님의 울안을 지킨다(keep)는 것은 선한 질서 속에서 교회의 바깥 사항을 보존시킨다는 말이다.

징조 (sign)

이스라엘 사제들이나 예언자들은 주님을 공적으로 표현했다. 그들은 백성들 앞에서 주님을 표현하는 징조물이었다. 그래서 그들의 행동 하나 하나를 백성들은 유심히 관찰하기도 했다. 예를 들면, 에제키엘은, 주님의 명령에 따라, 이스라엘 백성들의 면전에서 비유를 직접 그의 행동으로 표현해 주었는데, 예를 들면, 포로로 끌려 갈 것을 자기 물건들을 꾸려서 떠나는 모습으로 보여주기도 했다. 그런 다음 주님은 백성에게 에제키엘로 이렇게 말하도록 했다. “나는 징조(sign)이다. 너희는 나의 몸짓을 보고 이 겨레도 사로잡혀 가서 종살이를 하게 되리라는 것을 알리라” (에제키엘 12:11). 이와 같이 본문에서도 여호수아를 모시고 앞에 앉은 사람들에게도 알려 주고 있다.

순 (가지, branch)

아마 인간에 대한 징조 중 가장 큰 징조는 메시아, 주 예수 그리스도이리라. 즉 신성한 여호와로부터 자라 나온 가지, 인성(humanity)이다. 이를 두고 이사야 11장 1절에서, “이새의 그루터기에서 햇순이 나오고 그 뿌리에서 새 싹(branch)이 돋아난다.” 그리고 즈가리야 6장 12, 13절에서, “나 만군의 야훼가 말한다. 이 사람을 보라. 그 이름은 새 싹이니, 이 사람이 앉은 자리에서 싹이 돋으리라. 그는 야훼의 성전을 지을 사람이다. 이 사람이 바로 야훼의 성전을 짓고, 영광스런 옥좌에 앉아 나라를 다스릴 사람이다.”

“나 이제 여호수아 앞에 돌을 하나 놓는다.” 이는 교회 앞에 놓여질 신성한 말씀, 이 말씀의 글자적 의미 속의 진리까지도 주님에게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교인들이 인정하도록 하시겠다는 것을 표현하고 있다. 이 말씀은 교인들의 마음속에 지어질 새 성전의 모퉁이 돌이 되고 있다. 가장 높은 의미에서, 이 돌은 땅 위 교회의 반석으로서의 주님의 인성이요, 거듭나는 마음속에 있는 내향적 성전이다. 이를 두고 이사야 28장 16절에서, “보아라, 내가 시온에 주춧돌을 놓는다. 값진 돌을 모퉁이에 놓아 기초를 튼튼히 잡으리니 이 돌을 의지하는 자는 마음 든든하리라.”
이 돌은 일곱 눈을 가졌다고 말해지고 있다. 우리의 눈은 이해성 또는 지성을 표현하는데, 이를 수단으로 마음이 본다. 일곱이란 완전하고 거룩한 것을 표현한다. 따라서 눈이 일곱 개라는 말은 진리를 완전하게 충분히 이해한다는 말이다.
그러나 주님이 놓으시는 이 돌이란 신성한 지혜로 있어지는 완전한 신중함과 섭리를 표현하고 있다. 예언자 즈가리야에게 일곱 등잔이 달린 등잔대가 보여졌을 때, 이렇게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이 일곱 등잔은 천하를 살피는 야훼의 눈이다.” 다시 말해 완전한 하느님의 섭리라는 말이다 (즈가리야 4:10).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

이런 다음, “너희는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잔치를 베풀고 서로 오가며 살리라.” 거룩한 땅의 더운 지방에서 그들은 시원한 바람으로 더위를 식히기 위해 나무 그늘 아래에서 가족들이 만찬을 가졌는데, 그 지방은 특히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가 많은 관계로 그 나무 밑에서 자주 행사를 벌였었다. 그럴 때 지나가는 이웃이나 여행자가 식사에 초대되기도 했다. 이와 같이 편안한 기분으로 쉬면서 식사하는 모습은 거듭나는 사람이 영적 평화 속에 쉬는 마음의 모습, 영적이고 자연적인 선함을 사랑하여 이해하고 있는 마음의 상태들을 표현한 것이다. 이와 같은 상태에 대한 적절한 구절이 열왕기상 5장 5절(개역 성경 4:25)일 것이다. “이렇게 솔로몬이 다스리는 동안, 유다와 이스라엘은 단에서 브엘세바에 이르기까지 마음놓고 살면서 저마다 자기의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 아래서 두 발 뻗고 잘 수 있었다.”
위와 같은 표징적인 약속이 고대 이스라엘에게 이미 주어져 있었기도 하다. 더욱이 이 약속은 오늘 우리에게도, 그리고 이어지는 각 교회 단계에도 주어지고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그 이유는 하느님의 사랑과 지혜는 어느 시대, 누구에게나 복을 주시려고 애쓰기 때문이다. 본문 외에도 고상한 영적 모습에 관한 모든 영화로운 그림들은 오늘날 우리 삶의 초상화가 될 수도 있다. 이는 우리가 자신 속의 악한 경향성을 끄집어내서 그 악을 회개하여 삶을 개혁한다면 언제나 가능한 모습들이다. “의로운 길을 걷는 이들로부터는 좋은 것이 어떤 것이라 해도 그분은 철회하시지 않으신다.” “주님 안에 자기 마음을 머물게 하는 이들, 주님께서 온전한 평화를 언제나 간직되게 해주신다.” 이와 같이 주님은 우리에게 약속해 놓고 계신다.

45
황금 촛대와 올리브나무

성서 본문: 즈가리야 4장 1-4절, 11-14절

1. 나와 말을 하던 그 천사가 돌아 와서 나를 흔들어 깨웠다. 잠이 덜 깬 사람처럼 얼떨떨해 하는 나에게, 2. 그가 물었다. “무엇이 보이느냐?” 나는 금으로 만든 등잔대가 보인다고 대답하였다. 그 등잔대 꼭대기엔 그릇이 하나 있고, 그 가장자리로 돌아 가며 심지 주둥이가 하나씩 뚫린 등잔 일곱 개가 붙어 있었다. 3. 그리고, 올리브나무 두 그루가 등잔대 오른쪽과 왼쪽에 하나씩 서 있었다. 4. 나는 나와 말하던 그 천사에게 “나리, 이것들이 무엇입니까?” 하고 물었다.
11.나는 그 천사에게 “그러면 등잔대 오른쪽과 왼쪽에 있는 올리브나무 두 그루는 무엇입니까? 12. 또, 금대롱으로 기름을 대어 주는 올리브나무 가지가 둘 있는데, 그것은 무엇입니까?” 하고 물었다. 13. 그 천사가 그것이 무엇인지 모르겠느냐고 하기에 내가 모르겠다고 대답하자, 14. 그는 이렇게 일러 주었다. “올리브나무 두 그루는 온 세상의 주를 모시도록 기름 부어 성별한 두 사람을 뜻한다.”

개요
이 본문은 천국적 진리를 수단으로 사랑의 선, 즉 주님으로부터 새교회에 있게 될 영적인 빛을 취급하고 있다.

깨어남

자연적인 삶과 영적인 삶은 경험에 있어서 그 수준이 아주 다르다. 육체적 삶에 속한 것들, 눈으로 볼 수 있는 현상, 생각, 일에 종사할 때, 우리는 영적 삶의 현상이나 경험에 대하여는 마치 잠자는 듯한 상태로 있게 된다. 영계는 내면의 세계요, 원인과 생명에 관한 세계이다. 그 반면, 자연계는 영적 원리가 구체화되는 세계요, 그 결과라는 외면의 세계이다. 통상적인 생활, 일상 생활 속에서 우리는 자기 몸 속에서 활동하는 영혼이 있다는 것조차도 인식하지 않는다. 그래서 주님이 인간 영혼의 눈을 갑자기 열리게 하시어 영계를 보도록 허락하시면 그 당사자는 잠자는데서 갑자기 깨어나듯 하면서 자연적 삶의 현상 속에 자기 의식을 새롭게 하게 된다.
이와 비슷한 깨어남이 우리 마음에서도 발생한다. 그 때란, 생각의 감각적 형체로부터 영적 국면으로 건너갈 때, 즉 자연적 마음의 상태만 가지고는 납득하기 어려웠던 원리들을 합리적으로 지각하게 될 때에 발생된다. 이와 같은 일들이 천사가 예언자를 흔들어 깨워 영계에서 진열되는 상징적 표현물을 보도록 하는 것으로 의미되고 있다. 그래서 성경은 인간이 자연적 마음만 지닐 경우 잠자는 상태라고 언급하고, 마음이 영적 진리에로 승강시키도록 불리워질 때, “깨어나라”고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음을 읽어볼 수 있다. “티끌에 거하는 자들아, 깨어 노래하라” (이사야 26:19). “깨어라, 깨어라. 너 시온아, 힘을 내어라 찬란하게 몸을 단장하여라” (이사야 52:1).

황금 촛대

예언자는 황금 촛대와 두 올리브나무를 보았다. 촛대란 등잔대이다. 본문에서 사용되는 히브리어는 빛, 등불을 포함하는 덮개, 초, 횃불 등등에 다 사용되는 일반적 용어이다. 오늘날의 경우, 빛을 언급할 때, 가스, 전기 불, 촛불 등등이라고 말하는 것과 비슷할는지 모른다. 다양하게 사용된 한 예로 다음 구절을 보자. “야훼여 당신은 나의 등불, 내 앞에서 어둠을 몰아 내 주십니다” (사무엘하 22:29). 시편의 경우, “당신은 나의 촛불이십니다. 여호와 나의 하느님이시여, 내 어둠을 밝혀 주소서.”
자연적인 수준의 풍자적 의미에서 본문의 환상은 즈루빠벨의 일들, 성전을 수리하고 새로 설비하는 일에 관련되어 언급하고 있다. 그러나 영적 의미에서 본문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 그리고 인간 마음속에서 영적 교회를 수리하는 그분의 일, 천국의 진리와 생명을 가져다주시는 일을 언급하고 있다. 특별히 이 환상은 천상 천하에 있는 새 예루살렘 교회를 상징하고 있다. 이 교회는 주님으로부터 오는 영적 빛 가운데 존재한다. 특별한 의미로 볼 때, 이 교회는 주님의 성전이시다. 그 안에서 주님은 신성한 인성으로 알려져 예배되어 진다. 신성한 인성은 가장 높은 의미에서 여호와의 성전이시다. 계시록 1장 20절에서, “네가 본 일곱 황금 등경은 일곱 교회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이 등경은 금으로 되어 있다. 금은 주님을 사랑함과 상응된다. 주님을 사랑함이 위의 교회에 존재하고, 그 교민들은 그분의 말씀을 수단으로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의 진리, 진리의 가장 높은 빛을 지각하여 진리를 사용하는 사람들로 구성된다.

그릇, 대롱(주둥이, pipe) 등등

등잔대는 기름을 담은 그릇을 꼭대기에 가졌고 일곱 등잔대는 제각기 대롱을 가지고 그릇 꼭대기에서 기름을 공급받게 되어 있었다.
그릇과 대롱이란 말씀에서 오는 교회의 교리를 표현한다. 이 교리는 그릇과도 같이 진리와 사랑의 선함을 담고 있으면서 영적인 것이 실제 사용될 때 수단으로 이용되는 것이다. 이 그릇이 등잔대의 꼭대기에 있었다는 것은 기름, 즉 천국적 사랑의 근원을 표현하고, 생명의 가장 높은 것들은 주님으로부터만 온다는 것도 표현해 주고 있다.
그 등잔은 일곱이었다. 일곱은 거룩함을 표현한다. 그래서 일곱 등잔이란 말씀을 통해 주님으로부터 오는 교회 속의 거룩한 진리들이다. 그 이유가 가장 높은 의미에서 주님은 거룩함 자체이시기 때문이다. 성막의 등잔에 관한 내용을 읽어보자. “너는 순금으로 등잔대를 만들어라. 한 덩이를 두드려서 밑동아리와 원대를 만들고, 또 두드려서 꽃받침과 꽃잎 모양을 갖춘 잔들이 뻗어나게 하여라… 그리고 등잔 일곱 개를 만들어 앞을 환히 비추도록 등잔대에 올려놓아라” (출애굽기 25:31,37).

등불

넓은 의미로 볼 때, 등은 교리를 의미한다. 교리는 빛처럼 진리를 밝히 드러내게 해준다. 그래서 시편 119편 105절은, “당신의 말씀은 내 발에 등불이요 나의 길에 빛이옵니다” 라고 노래하고 있다. “천하를 살피는 야훼의 눈이다” 라고 불리는 등잔대 위의 일곱 등불은 인간 삶의 모든 것 위에 군림하시어 거룩하게 지키는 주님의 완전한 섭리를 표현한다. 지상의 교회는 각기 등차별로 신성한 진리를 가지되, 그 진리를 전복시키지 않았을 경우, 제각기 “세상의 빛”이다. 최고로 높은 등차에서 볼 때, 주님은 “세상의 빛”이시다. 이런 견지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라고 말하셨기도 하다.

올리브나무

환상 속의 올리브나무는 천적인 교회(the Celestial Church), 주님에 대한 사랑을 원리로 삼는 교회, 동료를 위해서도 천국적 사랑을 포함하는 교회를 뜻한다. 올리브나무의 열매는 몸을 따뜻하게 해주고, 미끈미끈한 기름으로 가득 차 있는 바, 이는 주님의 자녀로서 인간의 사랑 안에서까지 보여지는 주님에 대한 실제적인 사랑을 표현한다.
올리브나무가 두 그루 있었다. 그중 오른쪽은 천적인 사랑을, 왼쪽은 천적인 총명을 표현한다. 그 이유가 오른쪽은 사랑이나 애정을 가지고 있는 의지 또는 심정을, 왼쪽은 생각을 지니는 지성, 또는 이해성을 표현하기 때문이다. 이러므로 두 올리브나무는 사랑과 이타애, 또는 천적 인간의 주님에 대한 사랑과 동료에 대한 사랑을 표현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표현적 측면에서는 사랑의 위 두 가지 품성, 개인이라는 측면에서는 위 두 가지 사랑의 품성으로 다스려지는 사람(person)이다.

이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모르느냐?

환상에서 보여진 것들에 관해 예언자가 천사에게 묻자, 그의 첫 대답은 “이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모르느냐?” 라는 것이었다. 되받아 치는 식의 이 대답은 환상 속에서 두 번씩 있어지고 있다. 당연히 생각될 수 있는 것은, 예언자가 특별히 가르쳐 주지 않고는 모를 것임을 천사가 짐짓 알고 있다는 것일는지 모른다. 그러나 천사의 되받아 친 대답은 예언자의 마음 상태를 더 선명하게 만들므로서, 그의 생각을 끌어내어 그의 마음에 더 확실하게 문제를 고정시켜 주려 의도된 것이다. 이래서 이 예언자가 인간들 가운데 있는 교회들을 표현해 준 격이 된다. 따라서 “이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모르느냐?” 라는 천사의 물음이란, 예언자가 이런 사항들을 알고 있었어야 한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다시 말해 환상 속의 이런 저런 모습은 교회와 더불어 존재한 신성한 말씀 속에 이미 언급되어 있는 것이라서 만일 인간이 거듭나고 계발되는 상태에 있다면 이미 이해되고도 남을 사항들이라는 말이다.
이와 유사한 경우가 요한계시록 7장 13절에서도 언급되고 있다. 거기서 요한이 영계의 표현적 현상을 목격하고 있을 때 원로 중의 하나가 요한에게 물었다. “흰 두루마기를 입은 이 사람들은 도대체 누구이며 또 어디에서 왔습니까?” 이 때 요한은 자기가 본 것을 이해하고 있지는 않았으나 그 사항을 알아보고 싶어서 이렇게 응답했다. “어른께서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러자 천사가 요한에게 가르쳐 주었다. 위와 같은 천사의 물음은 우리의 정신적 의문들, 선함이나 빛에 관한 우리의 물음은 비록 그런 것들이 우리 자신의 행동에서 비롯된 듯 여겨진다 해도 그것은 주님에 의해 부추겨 진 것이라는 위대한 영적 사실을 잘 표현하고 있을는지 모른다. 우리는 모든 것을 자신 스스로로부터 행동한다. 그러나 주님의 사랑과 지혜는 각자의 마음 문이 열린 등차에 따라 흘러 들어와서 더욱 많은 물음이 당사자에게 있도록 하여 영적 삶에 관해 더 많이 이해하려는 노력이 있어지게 하신다. 그럼에도 주님은 우리가 자신 스스로에게서 그런 것들이 발생한 듯 느끼고 생각하는 것도 허용해 주신다. 그리하여 더 높은 인격 달성에 각자 스스로 노력하게 배려하신다.

기름 부음

천사가 예언자를 가르치기를, “올리브나무 두 그루는 온 세상의 주를 모시도록 기름 부어진 두 사람” 이라고 했다. “기름 부어짐”은 올리브 기름으로 부어졌다는 것과 같은 말이다. 그 이유는 올리브 기름은 주님을 사랑함에서 비롯되는 선함과 상응되기 때문이다. 올리브 기름은 이스라엘 교회에서 하느님의 명령에 의해 사용되었고, 그것의 상응은 예언자를 통해 그 교회에 밝히 알려져 있었다. 기름 붓는 것은 아주 다양한 형태에서 이루어져 왔었다. 예를 들면 성막이나 성전에서, 사제들, 예언자나, 왕들, 어떤 맹세의 증거로 삼는 돌들 위에도 부어졌었다. 개인의 경우, 자기의 기쁨과 사랑을 표현하기 위해 스스로 기름을 붓기도 했다. 이 모든 경우에서 부어지는 기름은 사랑을 표현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주님을 모시기 위해 기름 부어지는 이들은 “기름에서 태어남, born of oil”이라고 말해지기도 했다. 다시 말해 주님을 섬기는 사람들은 사랑의 영으로 채워져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주를 모심 (주 앞에 서 있음, standing by the Lord)

기름 부어진 자들이 “주를 모시라고” 말해지고 있다. 본문이 의도한 객관적인 그림은 양쪽에 명령을 즉각 받을 준비를 갖춘 두 신뢰하는 종을 거느린 왕에 관한 것이다. 그러나 영적으로 그려지는 본문의 그림은 거듭나는 사람의 마음에 즉위하신 신성한 왕으로서의 주님에 관한 것이다. 그분 옆에 서 있는 두 “기름 부어진 자”란 주님을 사랑함(오른쪽)과 이웃을 사랑함(왼쪽)을 기둥 원리로 삼고 있는 마음을 말한다. 이 두 원리는 인간 마음속에서 주님을 자신의 통치자로 인식하면서 매일의 생활에서 겪어 가는 자그마한 일 까지에서도 그분이 하라는 것을 행하는 착실한 종들과 같다. 주님의 뜻을 내 삶에서 수행할 각오가 되어 있는 마음은 행복하다.
본문에서 하느님은 “온 세상의 주”라고 불리고 있다. 여기서의 “온 세상”이란 인간 마음 안에 있는 교회를 표현한다. 주님은 모든 교회의 하느님이시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 (마태복음 28:18)라고 선포하시었다. 최고 높은 의미에서 하늘과 땅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성과 인성이시다. 낮은 의미에서 하늘과 땅은 인간 안에 있는 영적 마음과 자연적 마음이다. 이 두 마음 모두가 주님의 사랑과 지혜를 받을 때 인간은 거듭나게 되어 천국 품성을 지니게 된다. 이 때 주님은 각 마음속에서 왕위에 오르시게 된다. 그러면 그 왕좌 옆에 천국의 사랑과 지혜라는 두 올리브나무가 서 있게 된다. 이 마음에 의해 하느님의 뜻은 자연계의 삶 즉 지상에서 펼쳐지게 된다. 동시에 계발된 영적 삶이 하늘에도 알려지고 행해지게 된다. 매일 우리 삶에서 주님은 그분의 거룩한 진리들을 가르쳐 주시어 천국적 사랑의 선함으로 우리를 인도해 주시려 노력하신다. 매일 매일 그분의 역사 속에, 그분의 말씀 속에서 그분의 무한한 사랑과 지혜를 구체화하시면서 우리 앞에 앉아 계신다. 그분의 사랑과 지혜가 우리 삶의 사실(fact)들 앞을 지나치시면서 지금도 이렇게 되물으신다. “이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모르느냐?”

46
날고 있는 두루마리

성서 본문: 즈가리야 5장 1-4절

1. 또 내가 고개를 들고 쳐다보니, 두루마리 책 한 권이 날고 있었다. 2. 그가 나에게 무엇이 보이느냐고 묻기에 나는 “스무 자 길이에 나비가 열 자 되는 두루마리 책 한 권이 날고 있는 것이 보입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3. 그러자 그는 나에게 이렇게 일러 주었다. “이것은 온 나라를 휩 쓸 저주이다. 이 두루마리 한 쪽에는 ‘도둑질하는 자들은 다 사라지리라’ 라고 적혀 있다. 4. 이것은 내가 보낸 것이다. 만군의 야훼가 말한다. 남의 것을 훔쳐 먹은 자의 집에도, 내 이름을 팔아 거짓을 옳다고 맹세하며 사기치는 자의 집에도 들어 가 그 집 안에 머물면서 대들보와 돌담까지 다 허물어뜨릴 것이다.”

개요

본문은 교리나 생활면이 완전히 거꾸로 되어 버린 유대교회의 파멸이 임박했음에 대한 표징적 예언이다.

두루마리

예언자에게 보여진 두루마리는 현재와 같이 인쇄나 제본이 발명되기 전에 만들어진 책, 손으로 써서 만든 책이다. 에제키엘이 그의 환상 속에서 이와 같은 책을 보고 이렇게 말했다. “내가 바라보니, 한 손이 나에게 뻗쳐 있는데 그 손에는 두루마리 책이 들려 있었다” (2:9).
책이란 책 안에 씌어 있는 내용에서, 또는 저자의 특질로부터 책의 특성 역시 결정된다. 만일 책의 내용이 진정하다면, 그 책은 내용에 다소 수준의 차이는 있을지라도 진리를 표현할 것이다. 그러나 만일 그 내용이 거짓이라면, 그 책은 거짓을 표현할 것이다. 주님의 말씀이 “책, the book”이라 불리는데, 그 이유는 내용이 신성한 진리들로 채워져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본문에서 언급되는 책은 이스라엘 후손 내의 썩어진 교회의 사람들에 의해 씌어진 것, 자아 사랑에서 튀어나온 왜곡된 원리들을 내포하고 있다. 그래서 이 책, 즉 두루마리는 유대교회 안에 있는 모든 영적 생명을 파괴하는 악한 것뿐인 거짓을 표현하고 있다. 이 두루마리가 날고 있었다는 말은, 이런 거짓이 부패된 교회를 사방으로 다니며 설치어 그나마 마음 안에 남은 모든 선함과 진리를 파괴하고 있다는 말이다.

두루마리의 크기

이 두루마리가 책이라고 볼 때 굉장히 큰 크기였다. 어림잡아 30피트 길이에 폭이 15피트 정도였다. 이같이 책의 크기가 굉장함은 인간 마음 안에 있는 온갖 것을 통해 침투한 거짓 원리의 굉장한 세력을 표현하고 있다. 본문에서 말하는 큐빗(cubit)은 오늘날의 측량치로는 약 18인치 정도이다.
길이는 선함에 관한 측량 또는 품질을, 폭(나비)은 진리에 관한 측량 또는 품질을 표현한다. 본문의 경우 길이는 20큐빗이었다. 숫자로서의 20은 인간 마음 안에 저장된 내면의 원리, 즉 각자의 어린 시절에 주님께서 저장해 두신 것, 그리하여 성년 시절 시험이 올 때 그와 더불어 남아 있게 되는 원리들, 이를 통틀어 “아껴 두신 것들, remains”이라 불리는 것들을 표현하는 숫자이다. 그리고 나비는 10큐빗이었다. 숫자 10은 모든 것, 완성되는 시리즈를 표현하는데, 대표되는 예로서 모든 인간 삶을 위한 법칙인 십계명이 있다. 나비는 진리 측면을 말하는 바, 열 큐빗이란 원리 속의 진리에 관한 것, 즉 두루마리의 모든 특성이다. 그런데 이 두루마리는 선함이 악으로 뒤바뀌고, 진리가 거짓으로 온통 되어 버린 썩을 대로 썩어 거의 죽은 유대교회의 정신적 모습을 표현하고 있다. 또한 이 두루마리는 영적 삶의 수단으로 인간에게 밝혀 주셔 왔던 모든 신성한 원리들이 그 원리를 받았던 인간들에 의해 썩혀지고 영적 죽음으로 변하게 했다는 것, 주님이 축복하시기 위해 인간에게 주셨던 모든 것을 인간들이 저주로 바뀌게 했다는 것도 표현해 준다.

저주

천사가 두루마리의 의미를 예언자에게 설명할 때, “이것은 온 나라를 휩쓸 저주이다”라고 말했다. 이런 경우, 저주란 정죄 또는 처벌의 의미로 사용되는 바, 이는 인간이 거짓되게 맹세한 것, 자기 생각에 거짓이라고 알고 있으면서도 하느님에게는 진리를 증거 하겠다고 할 때 되돌려 받는 대가로 사용되고 있다. 이와 같은 처벌은 시민법에서 흔히 맹세에 붙어 다니는 조항인데, 이는 신성한 법에도 마찬가지이다. 그 이유는 맹세라는 단어의 가치는 언제나 신실함과 신뢰 속에만 절대적으로 존재해야 하는 까닭이다. 어떤 사회 속에 있어야 할 표준 외의 어느 다른 표준이 발생되면, 그것은 공동체 내의 모든 사람의 삶과 자유를 위태롭게 한다. 그래서 책임감 있는 사람들은 맹세의 본성이나 그 중요성을 이해하고 있기 때문에, 만일 의도적인 거짓 맹세를 할 경우, 그 새빨간 거짓말은 필시 시민적이고 영적인 처벌을 당사자에게 반드시 초래한다고 믿는다. “악이 사악한 자를 죽인다.” 그런데 악인에게는 하느님께서 악인에게 곤경을 만들어 주는 듯 여긴다. 예레미야 5장 25절에서, “너희가 이렇게 굴었기 때문에 계절이 순조롭지 못하게 되었다. 너희 죄가, 들어오는 복을 차 버린 것이다.” 이사야 59장 1,2절에서, “야훼의 손이 짧아서 구해 내지 못하시겠느냐? 귀가 어두워서 듣지 못하시겠느냐? 너희가 악해서 너희와 하느님 사이가 갈라진 것이다. 너희가 잘못해서 하느님의 얼굴을 가리워 너희 청을 들으실 수 없게 된 것이다” 라고 말해지고 있다.

지면 (나라, the face of the earth)

저주는 “온 지면(나라)을 휩쓸 저주”라고 말해지고 있다. 온 지면(whole earth)이란 처방이 내려졌었던 온 교회를 표현한다. 그리고 인간 마음속의 천국인 영적 마음과 구별되는 인간 속의 모든 자연적 마음도 표현한다.“ 얼굴(face)은 마음을 표시(index)한다.” 그래서 얼굴은 마음속의 내용물을 표현한다. 악인의 경우, 그가 알고 있는 내용물이란 자연적 마음속에 있는 내용물뿐이다. 그 이유는 그 사람에게는 영적 마음이 닫혀져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저주가 악을 행하는 이들을 “사라지게(cut off)” 할 것이라고 말해지고 있다. 이를 내향적으로 볼 때, 악한 인간이 확증한 거짓 원리들이 주님께로 열려야만 가능해지는 주님에게서 오는 영적 생명의 공급을 그들 속에서 자르게 된다는 말이다.

도둑질

본문에서 특별히 언급하는 악행자의 두 가지는 도둑질하는 자들과 거짓 맹세하는 자들이다. 도둑질이라는 것을 글자대로 생각한다면, 타인에게서 그의 물질적 재산이나 정신적 재산을 불법으로 탈취하는 것이다. 이를 영적으로 보면, 타인에게서 그 사람을 선하고 진정한 원리들, 또는 그의 합리성, 또는 영적 자유를 제거시키는 것이다. 이런 사항 중 어느 하나라도 상대방이 모르게 제거시킨다 해도, 그는 선과 악, 진리와 거짓, 의와 죄에 관한 그 사람의 올바른 감각을 강탈한 것이 된다. 한 마디로 영적 삶의 수단들을 강했다는 말이다. 이를 더 깊은 의미에서 살피면, 악인이 주님을 사랑함과 순종함을 거절할 때, 자기 생명이 주님의 선물임을 인정치 않을 때, 그는 주님으로부터 도둑질하는 것이 된다.
거짓이라는 망측한 저주가 인간의 마음을 쓸고 다닐 때, “도둑질하는 자들은 사라지고 만다.” 즉 이와 같은 거짓은 인간에게 생명을 실어 나를 수 없고, 오로지 죽음만을 가져온다는 말이다. 그 이유가 거짓은 인간의 마음을 주님 안에 있는 영적 생명의 근원에서 자르기 때문이다. 비록 그가 주님의 사랑스러운 초대를 받는다 해도 영적 죽음만을 선호하므로 주님께서 이렇게 말하신다. “너는 생명을 갖기 위해 나에게 오지 않는다.” 영적인 도둑질은 심정으로부터 모든 선을 거둬 가고, 그나마 주님께서 각 인간의 유아 시절에 저장해 두셨던 “아껴 두신 것, remains”까지 파괴한다.

맹세함

본문의 맹세란 거짓 맹세, 맹세 밑에 위증죄가 깔려 있는 허위 맹세임은, 본문 4절에서 “내 이름을 팔아 거짓을 옳다고 맹세하며 사기치는 자…”라는 사실에서 알 수 있다. 단지 맹세한다라든가, 진리를 말한다고 맹세하는 것, 등등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절대 금지되었던 것은 아니다. 그 반면, 맹세는 주님에 의해 성별되어 사제의 임무에서 규율되고 특별화 되었던 것이다. 주님의 이름으로 맹세하는 것은 가장 엄숙한 태도로 가장 높은 권위를 수단으로 확언하는 행위이다. 자신의 신실함이나 진실성을 증언하기 위해 하느님을 찾으면서 유유히 거짓말을 한다면, 우리는 가장 무거운 죄의 하나를 범하게 된다. 영적으로 볼 때, 맹세를 깨트림 속에서 우리는 선과 악, 진리와 거짓을 혼동하게 되어 결국 자신의 영적 합리성과 영적 자유를 파괴한다. 그 이유가 “죄인은 자기 죄에 노예이기” 때문이다. 거짓 맹세함은 주님께서 인간 마음 안에 저장해 두신 진리에 관해 “아껴 두신 것들”을 파괴한다. 그래서 레위기 19장 12절은, “너희는 남을 속일 생각으로 내 이름을 두고 맹세하지 말라. 그것은 나의 이름을 욕되게 하는 것이다”라고 규정하고 있다.
본문에서, 도둑과 거짓 맹세자들은 날고 있는 두루마리, 즉 저주로 사라지게 된다고 말하고 있다. 즉 타락하는 마음속에서 활기치는 거짓의 역사로 사라진다는 말이다. 두루마리에 적힌 서술은 한쪽에 그리고 다른 쪽에도 적혀 있는데, 이는 오른쪽과 왼쪽을 각각 암시하는 바, 심정 속의 선함, 이해성 속의 진리를 모두 제거시킨다는 말이 된다. 오른쪽은 우리의 애정 측면의 본성을, 왼쪽은 우리의 지성 측면의 본성을 표현해 준다.

집, 기타 등등

날고 있는 두루마리, 곧 저주는 “남의 것을 훔쳐먹은 자의 집에도, 내 이름을 팔아 거짓을 옳다고 맹세하며 사기치는 자의 집에도 들어가 그 집안에 머물면서 대들보와 돌담까지 다 허물어뜨릴 것이다”라고 말해지고 있다. 영적으로 보건대, 인간의 집이란 각자의 마음, 특별히 그의 의지, 또는 심정이고, 이곳은 인격의 근본 동기인 통치하는 사랑(ruling love)이 거주하는 곳이다. 날고 있는 두루마리로 표현된 이 거대한 파괴적인 거짓 원리들은 인간의 의지 안으로 들어가서 애정의 영적인 생명까지 살라 버린다. 거짓 맹세자의 정신적인 집 속에서 이 엄청난 거짓들은 그 속에 남은 진리의 모든 형체까지 왜곡시켜 버린다.
본문은 서술하기를, 저주는 대들보(timber)와 돌담(stones)까지 사라지게 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나무로 된 대들보란 모든 인간 삶이 건설되어야 할 자연적 선함을 표현한다. 돌(stone)이란 선한 인간의 정신적인 집의 기초나 벽을 형성해 주는 것, 즉 자연적인 진리를 표현한다. 이와 같은 선함과 진리들이 고정되어진 거짓이라는 저주로 파괴되어지고 만다.

일반적인 표징

오늘 본문에 흐르는 양상을 보면, 두 가지 죄 즉 도둑질과 주님의 이름으로 거짓 맹세하는 것을 열거하면서 이 두 죄를 널리 퍼져 있는 죄악들에 대한 대표되는 격으로 내세워 놓고 있다. 그 이유는 그 두 죄가 십계명의 두 돌판에 반대되는 것, 하나는 하느님과 인간 관계에 대해, 또 하나는 인간 상호 관계에 해당되기 때문이다. 즉 주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일컫는 것은 첫 돌판에 반대되는 죄이고, 도적질하는 것은 둘째 돌판에 있는 율법을 깨트리기 때문이다.
악이나 거짓, 그리고 죄는 어느 인간의 마음속에서도 홀로 거주하는 일이 없다. 악들은 떼지어 돌아다닌다. 그래서 우리가 인간 마음의 소유권을 탈취했다고 여겨지는 어떤 고정되어진 악을 발견한다면, 어디서든지 우리는 타락하는 심정을 발견하고, 그외 다른 악들도 발견하게 되는데, 발견 못한다면 최소한 잠재하고 있다든지, 시작하는 초기에 있다고 보아도 된다. 모든 인간은 인격의 일반적(평균) 수준을 가진다. 그 수준은 선을 향해서도, 악을 향해서도 동등한 수준이다. 또는 일반 수준 아래나 위로 자신의 미덕이든 악덕이든 가지지 못한다. 다시 말해서, 어느 인간도 자기 인격 중 어느 일부만 거듭 나아가고, 일부는 타락된 채 남아 있을 수 없다는 말이다. 그 이유는 거듭남은 부피로 진보되는게 아니라 품질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모든 인간 속에 있는 인격의 일반적인 품질은 그 사람의 마음과 삶의 각 분과에 품격을 주게 된다.
큰 두루마리가 날아다니면서 닥치는 곳마다 파괴하는 모습은 아주 생생하고 강력한 그림을 우리 마음에 남게 한다. 어찌됐든 악과 거짓, 죄악으로 고정되고만 인간 마음속을 날고 있는 참혹한 저주는 존재한다. 이는 인간의 심정과 지성 안에서 형성되어 고착된 죽을 수밖에 없는 저주이다. 우리가 그런 저주를 피할 수 없는 이유는, 우리가 죽게 하는 저주를 형성시켜 주고 먹여 살려 주는 썩은 것을 사랑함 때문이다. 이런 것에서 탈피하는 유일한 방법은 회개와 거듭남밖에 없다. 그러나 그것도 우리의 인격 속에서 악이 고정되기 전 일뿐이다. 그래서 사랑의 하느님이 내리시는 말씀을 경청해야 한다. 그래서 회개치 못하는 심정 속에 확증된 악이 고착되기 전, 즉 자신 스스로 지옥을 만드는 데서 구원하시고자 하는 하느님의 말씀을 경청해야 할 것이다. “일러주어라 ‘내가 맹세한다. 죄인이라고 해도 죽는 것을 나는 기뻐하지 않는다. 주 야훼가 하는 말이다. 죄인이라도 마음을 바로 잡아 버릇을 고치고 사는 것을 나는 기뻐한다. 그러니 너희는 돌아 오라. 나쁜 버릇을 고치고 돌아 오라. 이스라엘 족속아, 어찌하여 너희는 죽으려고 하느냐!’” (에제키엘 33:11). “살고 싶으냐? 악을 버리고 선을 행하여라. 너희의 말대로 만군의 하느님 야훼께서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 (아모스 5:14).

47
여인과 에바

성서 본문: 즈가리야 5장 5-11절

5. 나와 말하던 그 천사가 나서서 말하였다. “저기 나타나는 것이 무엇인지 눈을 똑바로 뜨고 보아라.” 6. 내가 “저것이 무엇입니까?” 하고 묻자 그가 대답하였다. “저기 나타나는 것은 말이다. 저 말 속에는 온 땅에 가득한 죄악이 담겨 있다.” 7. 그러자, 납으로 된 뚜껑이 열리면서, 그 큰 말 속에 한 여인의 앉아 있는 모습이 보였다. 8. 그는 “몹쓸 것”이라고 하면서 그 여인을 말 속에 틀어 넣고 납뚜겅을 도로 덮었다. 9. 다시 고개를 들어 보니, 두 여인이 나타나서 황새 날개 같은 날개로 바람을 일으키며 그 말을 공중으로 들어 올려 날아 가고 있었다. 10. 내가 나와 말하던 그 천사에게 “저 여인들은 그 말을 어디로 가지고 갑니까?” 하고 묻자 11. 그는 나에게 이렇게 일러 주었다. “그가 있을 신전을 시날 땅에 짓고 받침대를 마련하여 그 위에 모시려고 갔다.”

개요

악한 사랑으로 속을 채운 유대교회가 자기들의 선함을 뒤집고, 더 나아가 신성한 진리까지 모독하여 완전히 뒤집힌 교회가 되는 것을 본문은 밝히 알려 준다.

에바

에바란 이스라엘 후손들이 사용한 가장 큰 측량치로서 마른 것을 측량할 때 사용되었다. 오늘날의 1 부쉘(bushel), 또는 1 말 정도일 것이다. 고체(solid)는 선함에 관한 것을, 액체(liquid)는 진리에 관한 것을 표현하는 바, 고체(마른 것)의 측량치는 선함의 품질, 또는 선함의 품질을 테스트하는 것을 표현한다. 따라서 넓은 의미에서 에바는 선함을 표현하고 있다. 이 선함이 실제 사용되고 있을 때 “저기 나타나는 것…” 이라고 본문에서 말해지는 것이다.
천사가 말하는 에바에 관해서 개역 성경은 “This is their resemblance through all the earth, 온 땅에 가득한 죄악이 담겨있다.” 다른 번역의 경우, “그것은 온 땅에 가득한 죄악을 나타내는 것…” 등등으로 번역되나, 히브리어를 글자대로 말한다면, “This is their eye through all the earth, 이것은 온 땅에 가득한 그들의 눈이다”일 것이다. 눈이란 이해성, 또는 지성으로 이 눈이 마음의 눈이요, 이 눈으로 정신적인 것들이 총명하게 보여지게 된다. 에바라고 본문이 언급한데 대해서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기를, 이는 통상적인 측량치 정도로 간주하기 쉽다. 그러나 영적으로 보건대, 이는 교회 안에서의 자연적 선에 관한 통상적인 종류들, 예를 들면, 경건함이나 헌신 등과 같은 바깥쪽 행동으로 측량되는 선함을 표현한다.

이 에바는 납뚜껑을 가지고 있다. 기초 금속으로서의 납은 아주 낮은 수준의 선함, 즉 물질에 속한 선, 자연적 감각에 알려진 선, 즉 감각적인 선을 말한다. 이 납 뚜껑은 “한 달란트, a talent of lead”이라고 말해지고 있다. 히브리인에게 있어서의 달란트라는 무게 단위는 매우 무거운 측량치에 사용되었는데, 이는 어느 시대에서나 정확히 일치해 온 것은 아니다. 그러나 현대의 무게로 볼 때 100파운드(pound)쯤 될 것이라 본다. 금 한 달란트나 은 한 달란트는 큰 액수가 요구되는 큰 공사나 사업에 사용되는 액수이었다. 마태복음 25장 14-30절의 달란트의 비유에서, 우리는 달란트라는 용어의 사용에 관한 예를 찾아볼 수 있다. 화폐 가치로 사용된 달란트는 진리나 선함에 관한 지식을 표현한다. 왜냐 하면, 돈처럼 지식도 어떤 것을 획득하는 수단일 뿐이기 때문이다. 이 큰 덩치의 납뚜껑이 물질적(육적)이고 감각적인 선함을 표현했는데, 그 뚜껑이 납 한 달란트였다는 사실이 육적인 선함에 형태를 주는 지식임을 암시해 주고 있다. 에바(말) 속에 든 것이 폭로 되도록 이 납뚜껑이 들리웠다(열려졌다).

여인

뚜껑이 열려지자, 에바 속에 든 내용물은 여인이었다. 여인이란, 개개인의 인격에 따른 선과 악, 또는 애정 측면의 삶을 표현한다. 본문의 경우, 거꾸로 되어 버린 교회가 그려지고 있으므로, 여인은 악을 사랑함을 표현했다. 이 사실이 뒷받침되도록 천사가 그 여인에 대해 “몹쓸 것, 사악함, wickedness, 글자대로 보면 악”이라고 말했다. 이 악한 여인은 썩어진 교회에 대한 일반적 모습을 표현한 것이다. 에바는 자연적 선, 즉 외적 행동에 있는 선을 표현했고, 여인은 심정 안에 있는 악, 교회를 구성하는 이들의 경건함이나 헌신이라는 외적 선함 내에 거주하고 있는 악을 사랑함을 표현했다. 유대 교회, 비록 그들이 아직까지는 교회 예배의 형식을 엄격히 준수해 가고 있다 해도, 그들의 심정은 온갖 종류의 악 속에 몰입되어 있었다는 말이다.
위와 같은 모습에 대해 “위선자, 바리사이파인과 율법학자”라고 예수님께서 질타하시었음을 우리는 기억한다. 그리고 주님은 다음과 같은 구절로 그들 국가의 일반적 모습을 표현하셨다. “너희는 겉은 그럴싸해 보이지만 그 속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썩은 것이 가득 차 있는 회칠한 무덤 같다” (마태복음 23:27). 이 서술은 외형상으로는 경건하게 열심히 고백하는 중에 있다 해도 유대인들의 속은 악한 속성으로 가득 차 있음을 폭로하는 것이다. 이것이 에바 속에 든 악한 여인으로 상징화된 의미인 것이다.
여인이 에바 속에 “앉아 있다”는 것은 그 여자가 위와 같은 악 속에 자신을 고정시켰다는 말이다. 그 이유가 “앉음”이란 어느 정도 항구적인 자세를 표현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자세는 어떤 조건에서 안일함을 갖고 있어 마음이 변하는 이동하는 상태인 서 있는 것과 대비를 이룬다. 여인이 “에바 속에” 있었다는 것은 그 여자가 그와 같은 조건으로 확실하게, 통째로 고정되었음을 의미한다.

덮음

천사가 예언자에게 여인을 보여준 뒤, 그는 여인을 에바 속으로 틀어넣고 납뚜껑을 도로 덮었다. 이런 행동이 나타내 주는 것은, 여인으로 표현된 유대교회가 외적인 경건과 헌신이라는 선함을 유지했으면서도 그들 심정으로는 악을 확증하여 고정시켰다는 것, 이런 악들은 감각적이고 육적인 선으로 덮어져야 한다는 것, 그리하여 이런 심정의 소유자들은 자기들 종교를 육적인 선 속에 놓았다는 것이다. 행동에 있는 선을 심정에 있는 악과 결합시키는 것은 선함의 모독을 성립시킨다.
천사가 에바를 닫을 때, 말해진 것은 “…납뚜껑을 도로 덮었다. He cast the weight upon the mouth”이다. 이를 히브리어 글자대로 말한다면, “납 같은 돌, stone of lead”로 덮었다이다. 고대 시대 때의 무게, 중량(weight)은 종종 돌로 표현했다. 그래서 중량이 흔히 돌로 불리웠는데, 오늘날의 경우, 영국에서는 14파운드를 돌 하나(a stone)로 일컫는다. 돌이란 자연적 평면에서의 진리, 자연적 진리를 표현한다. 그러나 나쁜 의미로 사용될 경우, 돌은 거짓으로 왜곡된 자연적 진리를 표현해 준다. 이리하여 “납 같은 돌”이란 감각적인 거짓을 의미하고, 이 의미는 감각적인 악을 표현하는 납과 일치를 이루게 된다.

두 여인

에바가 닫힌 후, 두 여인이 나타나 에바를 들어 운반했다. 여인은 애정을 표현하는 바, 두 여인은 다른 교회들에 존재하는 애정, 그 교회의 다른 조건, 에바 속의 여인으로 표현된 유대교회의 악한 인격을 지각했다는 것을 표현한다. 그래서 그들은 그들 사이에서 에바 속의 여인이 사라지도록 주님의 지휘를 받아 다른 교회들을 오염시키지 않은 채 그 자체 스스로 존재 될 수 있는 곳에 던져지도록 섭리되고 있다. 그 이유가, 이방인 교회의 일부는 비록 그 교회가 진리에 무지해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그들은 단순한 심정으로 주님을 모셔 보려 하는 태도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그들이 오염되어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이 교회들이 지닌 자연적인 선한 애정들이 유대인 속에 든 위선을 인식하도록 허용하심으로 그것이 죄악임을 알고 거절하게 하여 그 악의 오염에서 보호되어 져야 했다는 말이다. 여인이 둘이라는 말은 그들의 선한 자연적 애정들이 하나 된 상태에 있음을 표현하기 위한 것이다. 개인 측면에서 볼 때, 우리의 선한 자연적 애정들이 우리가 알고 있는 진리와 하나를 이룰 때 위선적인 경건함 따위는 노출되어 알게 됨으로서 주님이 그런 죄악에서 우리를 보호하시게 된다.

날개

이 여인들은 “날개”를 가지고 있었다. 날개, 이는 새의 팔인 바, 힘을 표현하는데, 그 이유가 새들이 힘을 발휘하는 중요한 수단이 날개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새는 우리의 생각(사고)을 표현하고, 날개는 사고하는 힘을 표현한다. 그리고 날아간다는 것은 사고력을 사용하는 것이다. 위선적인 경건이라는 악령을 사라지게 하는 것은 우리의 날개를 잘 사용함으로 가능해진다. 즉 사고력의 사용은 악한 여인이 들어앉은 에바를 들어 올려 날아가는 것으로 표현되고 있다.
두 여인이 “황새 같은 날개”를 가졌다는 것을 글자대로 생각하면, 그들의 날개는 길고, 강해서 더 세차게 공기를 차면서 빠르게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을 뜻한다. 황새는 자연적 생각을 표현하는데, 이 생각은 계속적으로 힘있게 생각해 갈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바람

두 여인에 관해 말해질 때, 그들에게 황새 같은 날개가 있어 “바람을 일으켰다”고 말해지고 있다. 개역 성경을 참조하면 “…그 날개에 바람이 있더라. The wind was in their wings”라고 말하고 있다. 이는 날개가 바람을 이용하는데 대해 풍자적으로 말한 것이다. 그러나 이를 영적으로 보면 그 의미는 보다 더 심오해진다. 신체적 특징을 가지고 바람을 일으키는 것, 그럼으로 해서 필요한 목적을 성취시키는 것은 신성한 섭리의 역사, 특별히 신성한 진리를 인간 마음에 흘려 보내심으로 인간을 거듭나게 하는 역사를 표현한다. 사람을 창조하는 기록, 창세기 2장 7절에서, “여호와 하느님께서 진흙으로 사람을 빚어 만드시고 코에 입김을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되어 숨을 쉬었다”라고 말해지고 있다. 바람, 숨, 영으로 번역되는 히브리 단어는 모두 같은 어원에서 출발하고 있다.

시날 땅

두 여인은 에바에 든 여인을 시날 땅으로 운반해서, 거기에 그녀가 있을 집을 지어 그녀의 “처소 (받침대, base)”로 삼게 했다. 시날 땅은 갈대아 또는 바빌로니아에 관한 고대 이름인데, 이에 관해서는 창세기 10장 10절에서 “힘센 사냥꾼 니므롯”을 거론하면서, “그의 나라는 시날 지방인 바벨과 에렉과 아깟과 갈네에서 시작되었다.” 그리고 노아의 후손에 관해서 말해지는 바, “사람들은 동쪽에서 옮아오다가 시날 지방 한 들판에 이르러 거기 자리잡고는…”(창세기 11:2)라고 언급되고 있는 바, 거기서 그들은 바벨이라는 큰 탑을 짓기 시작했다.
시날 땅이란, 심정이 악과 결합되어 있어 모든 선함과 진리를 모독해 버리면서도 외형으로는 예배 속에 있는 상태를 표현한다. 예를 들면, 헌신적인 외적 경건함을 유지해 간다면 그리스도의 “대속, Vicarious Sacrifice”에 의해 하느님의 진노로부터 구원된다고 믿는 이들, 이런 구원을 위해서 악에서 선으로의 인격 변화인 회개와 개혁 그리고 거듭남을 간절히 바래고 노력하는 주님과의 협력 관계는 꼭 요구되는 것은 아니다고 믿는 식이 이에 해당될 것이다.
이 에바에 앉은 여인이 시날 땅으로 운반되었다는 것은 위선적 경건함, 심정이 악으로 차 있는 교회를 분리시켜 제거함으로서 교회의 다른 형체와 섞이거나 혼돈 되지 않도록 하고, 그것은 그 자체대로 있으면서 자신의 운명을 채워야 한다는데 대한 표현적 그림이다.
시날 땅에 그런 교회를 위해 집이 지어질 것이라고 했다. 이 집이란 인간의 고향, 즉 인간이 각자 거주하는 고향이다. 이 고향이란 각 개인이 독자적으로만 거주하는 곳, 자기 내면에 있는 의지이다. 이러므로 악한 여인이 사라지면서 멀리 떨어진 곳에 그 여인을 위한 집이 지어져 그곳에 안착한다는 것은 위선적인 선함이 분리되고, 그것 자체는 그것과 품질이 같은 생김새가 그 악 자체를 위한 기초(받침대)가 된다는 말이다.

예언

글자대로 생각해 본다면, 본문은 예루살렘의 파멸, 그리고 유대인 국가가 파괴될 것이라는데 대한 예언이라고 생각될 것이다. 사실 이런 예언은 로마가 유대 땅을 정복함으로 곧바로 실현되었기도 하다. 그러나 영적으로 생각한다면, 본문은 유대인에게 내려졌던 처방(dispensation) 위에 있을 심판, 더불어 모든 시대, 만민, 각 개인의 마음이 본문의 의미와 같을 경우, 그 마음 위에 내려질 심판을 묘사해 놓고 있다.
하나의 처방전으로 볼 때 유대교회는 오래 전 자신들의 악들로 인해 끝장을 보았다. 교회에 있어 온 각 개인은 아직 존재하고, 그 조직 역시 흐트러진 파편같이 되었지만 여전히 존재하고는 있다. 그러나 여러 세기를 걸치면서, 유대인은 기독교 국가들 사이에서 종교적으로 내쫓겼다. 유대인의 일부, 아마 많은 이들이 아직도 옛 이스라엘의 회복, 예루살렘으로의 귀환이라는 예언이 글자대로 성취되기를 기대하고 있을는지 모른다. 이런 성경의 예언 성취는 결코 있지 않는다. 성경의 예언들은 영적으로 성취되나 글자적으로는 꼭 일치하지 않는다. 글자적 성취가 있다면 그것은 영적 성취의 결과인 것뿐이다. 이 예언들이 의미하는 것들의 마지막 목적은 유대인들이 아니라, 새로워진 교회, 거듭나는 주님의 교회, 새 예루살렘을 위한 것이고, 이 목적을 향해 고대 예루살렘이나 그 백성들은 단지 글자로서, 비유적인 표현으로 존재할 뿐이다. 마치 육체적 삶이 정신적 삶의 상징물인 것과 같은 것이다.
교회의 매 단계, 태고교회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악은 주님과 그분의 신성한 선과 진리, 그리고 그분의 섭리를 사랑하는데 실패되도록 작용되어 왔다. 말하자면, 인간은 자기만의 사랑에 집착하고 자신의 능력만을 신뢰함으로서 영적인 사랑과 믿음과 정의를 자신들의 심정과 삶 속에서 파괴했다. 인간의 악과 거짓은 거듭나게 할 수 있는 영적 자유의 상태를 끌고 가, 진리는 왜곡하고 선함의 표준을 뒤집어 놓았다. 그래서 인간들은 자아에서 파생된 관념 속에 상주함으로써 그들이 형식적으로나마 예배한 하느님의 진정한 모든 속성까지 실지로 부정하고 만다. 이런 것들은 영적 시날, 자아 사랑과 위선적 예배라는 정신 상태로 운반되어 진다. 그곳, 노아의 후손이 해 놓은 고대의 모형 속에서 그들은 큰 탑을 쌓되 자신의 자연적 감각을 받침대로 해서 천국까지 도달하게 쌓아 올릴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자아 숭배를 위한 탑은 옛날과도 똑같이 사상에 혼동이 와서 끝장이 나는 바, 영적 사람다움을 이룩해 줄 모든 것들은 사라지고 만다. 다음의 두 예언자의 말에 귀를 기울여 보라. “야훼께서도 아시다시피, 사람이 산다는 것이 제 마음대로 됩니까? 사람이 한 발짝인들 제 힘으로 내디딜 수 있습니까?” (예레미야 10:23). “귀를 기울여 내 소리를 들어라. 정신 차려 내 말을 들어라. 농부가 날마다 밭만 갈겠느냐? 땅을 뒤집고 써레질만 하겠느냐? 땅을 고르고 나서 검정풀씨나 회향초씨를 뿌리지 않겠느냐? 밀과 보리를 심지 않겠느냐? 밭 가장자리에는 쌀보리를 심지 않겠느냐? 이런 농사법을 일러주신 이가 누구냐? 하느님께서 농부에게 가르쳐 주신 것이다. 검정풀씨를 타작기로 떨더냐? 탈곡기를 굴려 회향초를 떨더냐? 검정 풀씨는 막대기로 두드려 떤다. 회향초는 도리깨로 두드려 떤다. 어찌 밀알이 바숴지도록 두드리겠느냐? 아니다, 무작정 두드리지는 않는다. 바숴지기까지 탈곡기를 굴리지는 않는다. 이 생각도 만군의 야훼께서 가르쳐 주신 것이다. 놀라운 계획을 멋지게 이루시는 야훼께서 가르쳐 주신 것이다” (이사야 28:23-29).

48
네 병거와 말

성서 본문: 즈가리야 6장 1-8절

1. 또다시 고개를 들고 보니, 놋쇠로 된 두 산 사이에서 병거 네 대가 나오는데 2. 첫째 병거는 붉은 말들이, 둘째 병거는 검은 말들이, 3. 셋째 병거는 흰 말들이, 네째 병거는 짙은 점박이 말들이 끌고 있었다. 4. 내가 나와 말하던 그 천사에게, “나리, 이것이 무엇입니까?” 하고 묻자 그 천사는 이렇게 말하였다. 5. “이 네 병거는 하늘의 영들이다. 이 영들은 온 천하의 주님을 들어 가 뵈옵고 이제 막 나와 사방으로 떠나는 길이다. 6. 붉은 말들은 동녘 땅으로, 검은 말들은 북녘 땅으로, 흰 말들은 서녘 땅으로, 점박이 말들은 남녘 땅으로 나갈 말이다.” 7. 그 씩씩한 말들은 나가서 온 세상을 순찰하라는 명령을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8. 그 천사가 나를 부르며 일러 주었다. “자, 보아라. 북녘 땅으로 나갈 말들이 주의 영을 모시고 북녘 땅으로 떠난다.”

요약

새교회를 위한 교리들은 사랑과 이타애로부터 끌려 나와 진다는 것, 이 교회는 영적 진리에 무지하나 마음씨 고운 각 사람들로부터 형성되어진다는 데 대한 예언이다.

병거들

네 병거가 환상 가운데서 보여졌다. 모든 수송 수단(vehicle)은 인간이 이용하기 위해 만들어져 있는 것이고 인간을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 수송 수단은 실제로 사용될 수 있게 진리를 놓는 것, 즉 진리를 서술의 형체로 바꾼 것인 바, 교리들을 표현하게 된다. 시편 20편 7절을 보면 이렇게 말하고 있다. “누구는 병거를 믿고, 또 누구는 기마를 믿지만 우리만은 우리 하느님 야훼의 이름을 믿사옵니다.” 병거를 신뢰한다는 것은 교리에 신뢰를 둔다는 것이고, 말을 신뢰한다는 것은 인간 자신의 자연적인 이해성에 의존한다는 것이며, 주님의 이름을 기억한다는 것은 자신의 가르침과 지도를 위해 주님을 신뢰한다는 뜻이다.
네 병거가 있고, 각각은 네 방위 동, 서, 남 그리고 북쪽으로 여행하리라고 예상되어 있는데, 그 의미는 뒤에서 살피겠다.

놋쇠로 된 산들

이 병거들은 두 산 사이로부터 출현했다. 땅보다 높은 위치에 있는 산이란, 인간 마음속에 있는 원리 중에서 가장 높은 원리들을 표현한다. 이 가장 높은 원리란 사랑의 원리, 특별히 주님을 사랑함이 자신의 원리가 되어 있는 것을 표현한다. 사랑은 선한 모든 것의 근원이다.
본문에는 두 개의 산이 있는데, 이는 서로 구별되는 사랑의 두 형체, 즉 주님을 사랑함과 이웃을 향한 사랑을 표현하는 것이다.
이 산들은 놋쇠(brass)로 된 산이었다. 놋쇠는 다각도로 사용되는 기초 금속류이나 귀금속인 금이나 은에 비해 그 가치는 훨씬 낮다. 놋쇠는 자연적 선함, 실생활에 있는 선, 자연적 마음속의 선을 표현한다. 이 선은 금으로 표현되는 천적 선과 은으로 표현되는 영적 선과 등차가 다른 선이다. 따라서 놋쇠로 된 산들이란 주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과 관련을 갖는 자연적 삶 속에 있는 선함, 즉 자연적 선함을 표현한다. 그래서 병거들이 놋쇠로 된 두 산 사이에서 나왔다는 사실은 주님으로부터 파견된 교리들은 자연적 인간이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는데 사용할 수 있는 수준의 선함, 즉 자연적 선함의 정신적 평면에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산에서 흘러내려 계곡을 비옥하게 하는 물의 흐름같이 일상 생활 속에서 실제 사용되는 진리는 우리의 자연적 행동 지침을 선한 질서 속에 있게 하는데, 이 진리는 사랑의 가장 높은 산으로부터 흘러내리고 주님과 하나 되고자 하는 가장 심오한 바램, 그리고 동료들과도 가장 좋은 유대 관계가 있어지게 해준다. 만인의 사용을 위해 모세가 높은 산으로부터 십계명을 받아 들고 내려 왔다는 것이 위의 말을 예증해 줄 것이다. 시련과 시험 속에 있는 거듭 나아가는 사람들이 신성한 인도의 필요성을 인식하게 될 때, 다윗처럼 이렇게 노래하리라. “이 산 저 산 쳐다본다. 도움이 어디에서 오는가? 하늘과 땅을 만드신 분, 야훼에게서 나의 구원은 오는구나” (시편 121:1,2).

말들

병거는 말에 의해 끌려진다. 말은 인간의 지적인 원리, 이해성, 특별히 신성한 말씀에 관한 인간의 이해성을 표현한다. 에제키엘 39장 17, 20절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너 사람아, 주 야훼가 말한다. 내가 이스라엘의 산에 제물을 잡아 큰 잔치를 벌여 놓았으니, 너희는 사방에서 몰려 와 제물인 고기를 먹고 피를 마셔라… 너희는 내가 차려 놓은 잔칫상에서 말과 기병과 용사와 그 밖의 군인들의 살코기를 배불리 먹어라.” 이와 비슷한 잔치가 계시록 19장에서도 선포되고 있다. 이런 모든 사항들은 주님의 말씀 속에 있는 진리와 교리 등등에 관한 영적 잔치를 상징화하고 있다.
본문에서 말이 끄는 병거란, 신성한 말씀에 관한 지식을 수단으로, 그리고 이해성의 품질 수준에 따라 인간의 이해성에 의해 끌려지는 교회의 교리를 표현한다.

색깔들

각기 다른 조건과 품질의 인간 이해성이 여러 가지 색깔인 빨강, 검정, 흰 그리고 회색(gray, bay)으로 표현되어져 있다. 빨간 색은 사랑과 선함에 관한 색이다. 그 이유가 선함은 행동에 있는 사랑이기 때문이다. 붉은 말은 사랑 또는 선함이라는 측면에서의 이해성에 관한 속성 또는 품질을 표현한다. 맨 먼저, 병거가 붉은 말에 이끌려지는데, 이는 새교회가 형성되는 초기 단계에서의 마음의 조건을 표현한다. 그 이유는 교리가 선포되는 가운데서 진리의 품질이나 그 수준은 진리에 도움을 얻는 사람들의 상태와 언제나 부응되기 때문이다. 신성한 진리는 모든 등차 속에 존재하므로 그 진리는 인간 마음의 모든 국면에 도달된다. 그러나 세부적인 측면에서 인간에 도달되는 진리는 현재 그 인간의 정신적 열림의 수준이나 등차에 국한되어진다. 이런 이유로 해서 붉은 말로 이끌리는 병거는 자연적인 선함이나 사랑 가운데 있기는 하지만 아직 영적 진리에 관한 지식이 없는 사람들에게 도달되도록 주어지는 교리들을 표현한다. 그 이유를 넓은 측면에서 볼 때, 새 교회는 초기 기독교회의 남은 조각들로부터 형성되지 않고 이방인의 세계, 즉 초기 기독교회의 교리들로 특별하게 훈육되지 않고, 단지 단순하게 신실한 마음이 선한 이들로부터 형성되기 때문이다.
검은 색이란 정신적인 어두움, 진리에 무지함, 예를 들면 글자대로의 외적 방법으로 모든 것을 찾아내려는 사람들의 마음들을 표현한다.
흰색은 진리의 빛, 또는 깨끗한 순수성을 표현한다. 흰 말은 신성한 말씀에 관한 이해성을 표현하는데, 인간 마음이 진리에 관한 어떤 지식을 획득하여 이해성이 빛이 날 때를 말한다. 계시록 19장 11, 13, 14절을 보면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나는 또 하늘이 열려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거기에는 흰 말이 있었고 ‘신의’와 ‘진실’이라는 이름을 가진 분이 그 위에 타고 계셨습니다… 그분은 피에 젖은 옷을 입으셨고 그분의 이름은 ‘하느님의 말씀’이라 하였습니다. 그리고 하늘의 군대가 희고 깨끗한 모시옷을 입고 흰 말을 타고 그분을 뒤따르고 있었습니다.”
점박이 또는 회색은 흰색과 검은 색의 혼합이다. 따라서 점박이 말이란 무지한 듯 하면서도 약간의 진리를 알고 있는 것, 즉 지식 측면이 희미한 상태의 이해성을 표현한다.

씩씩함 (strong, bay)

본문에서는 씩씩한 말(bay horse, 적갈색 말) 역시 보여주고 있다. “bay”로 번역되는 히브리 단어는 “짙은 빨강, deep red” 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이 색은 창백함을 암시하기 보다 오히려 “강함”을 나타내는데 많이 사용되어지고 있다. 한국어 번역 성경의 경우, “씩씩함” “건장함”으로 번역되고 있다. 본문의 씩씩한 말(bay horse)의 색깔은 적갈색(reddish brown), 밤색(chestnut color)이다. 이 단어가 색깔 측면에서 오늘 본문과 같이 사용되는 곳이 성경 내에 더 이상 없기 때문에 우리는 비교 생각할 기회를 갖지 못하나. “건장함, strong”으로 사용되는 예를 한군데 읽어보면 다음과 같다. “나를 미워하는 억센(강한) 원수들, 내 힘으로는 당해 낼 수 없는 것들 손에서 나를 건져 주셨다” (시편 18:17).
적갈색(reddish brown)은 활력 있는 건강한 색깔로 여겼는 듯 추정된다. 이 색을 강건함(strength)으로 여긴 것은 이 단어의 표현적 의미와도 일치된다. 적갈색 말(건장한 말)이란 악과 거짓에 저항할 수 있을 만큼 충분한 지식이 있는 인간 이해성의 상태, 그래서 진리의 힘이 아주 강한 인간 마음의 상태를 표현한다.
색깔이 다른 말들에 관한 언급은 즈가리야서와 계시록 모두 유사하게 기록되고 있다.

네 영 (또는 네 바람)

“나리, 이것이 무엇입니까?”라고 예언자가 병거와 말들에 관해 묻자, “이 네 병거는 하늘의 영들이다. 이 영들은 온 천하의 주님을 들어가 뵈옵고 이제 막 나와 사방으로 떠나는 길이다”라고 대답해 주었다. “영”은 “바람”이라고도 번역하고 있는데, 그 이유가 히브리어나 그리스어에서 단어 하나가 바람, 숨, 영을 다 말하고 있기 때문에, 그런 이유로 정확한 의미는 알기 곤란하게 되어 있다. 어떻게 말해졌던지간에 이 말들은 인간이 지닌 각자의 정신적 수준에 의거한 필요성에 맞춰 인간에게 뻗쳐 나가는 신성의 영향력을 표현한다. 왜냐하면 이 말들은 온 천하의 주님 앞에 서 있는 데로부터 사방으로 뻗쳐 나가기 때문이다. 온 천하란 모든 각 교회 속의 하느님이다. 시편 104편 3절에서 주님에 관해 이렇게 노래한다. “…구름으로 병거를 삼으시고, 바람 날개를 타고 다니시며…”
글자대로 읽을 경우, 지상의 네 방위를 언급하는 듯 여겨진다. 그러나 그 영적 의미는 인간에게로 나가 각 인간의 생각과 삶의 각 등차에 도달되는 네겹(fourfold)으로 된 주님의 영향력을 언급하고 있다. 이런 이유로 요한의 환상에서 보여준 거룩한 성에도 네 면이 있었다. 이 성은 천국에서 내려와서 새교회를 받을 각자의 능력에 따라 인간 마음에 닿게 되는 새교회를 표현하고 있다.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에게 분명히 말하신 것은, 그들은 자신들의 악한 인격 때문에 하늘 나라를 차단시키고 있다는 것, 그러나 교회는 이방인들로부터 형성될 것이라고, 즉 “사방에서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어 하느님 나라의 잔치에 참석할 것이다” (누가복음 13:29). 그래서 어린 양이 큰 책의 봉인을 뗄 때, 각 색깔의 말들이 요한에게 보여졌다. 큰 책이란 하느님의 말씀이요, 어린 양이 봉인을 떼셨다는 것은 주님께서 성경의 내적인 영적 의미를 밝히 보여주셨다는 것, 그 속의 진리가 인간에게 뻗쳐 나가 이 진리를 받고 싶어하는 각종 인간 국면에 도달된다는 말이다.

영적 네 방위

넓은 의미에서 태양이 떠오르는 동쪽은 주님을 표현한다. 그 이유는 태양이 그분을 표현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를 인간에 관련해서 생각해 보면, 동쪽은 주님에 대한 사랑, 이 사랑의 결과가 인간의 심정 속에 있는 선함을 표현한다. 그래서 누군가가 주님을 영적으로 사랑하며 산다고 할 때, 그는 동쪽에 거주한다고 말해진다. 이 동쪽과 반대 위치에 있는 서쪽은 동쪽이 내적이고 영적인데 비해 외적인 자연적 사랑의 상태를 표현한다. 태양이 정오에 있을 때가 남쪽에 해당되는데, 이 때가 가장 많은 빛이 비치는 바, 남쪽은 영적 총명을 표현한다. 남쪽에 반대되는 북쪽은 자연적 마음 수준이 갖는 총명, 영적 진리보다는 자연적 진리를 붙잡고 있는 상태, 다시 말해 자연적 마음의 관점에서 보여지는 진리의 국면들을 표현한다. 비교적 측면에서 볼 때, 북쪽과 서쪽은 성경의 글자에서 보여지는 바대로 사랑을 표현하고 있고, 그 반면 남쪽과 동쪽은 신성한 말씀 속의 영적 의미에서 보여지는 진리와 사랑을 표현한다.
각기 다른 색깔의 말들이 각기 다른 방향으로 가도록 본문은 임무를 부여하고 있다. 먼저, 검은 말은 북쪽으로 갔는데, 그 뒤를 흰 말이 따르고 있다 (개역 성경 참조). 북쪽은 마음이 차고 어두운 상태를 표현한다. 이 상태는 자연적인 사랑 안에 있을 때이고, 진리에 관한 빛이 희미할 때이다. 이런 마음의 상태를 검정이 표현하는 바, 이는 영적인 북쪽과 부합되어 진다. 북녘을 향해 검은 말이 간다는 것은 마음이 선하지만 무지해 있는 이들, 마지막으로 새교회 안으로 들어와질 이방인들에게 신성한 말씀에 관한 글자를 소개한다는 뜻이다. 이렇게 소개받은 뒤, 그들이 말씀을 받을 준비가 될 때, 그들에게 더 큰 진리의 빛을 보내신다는 것이 본문에서 검은 말 뒤를 이어 흰 말이 나가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 이리하여 이방인들이 신성한 말씀에 관한 글자를 받고, 그 글자에 있는 법대로 자신의 행동을 굳혔을 경우, 그들은 자기들 정신적 상태와 행동에 적절한 진리의 더 높은 형체들에 그들 마음이 열릴 준비가 되어 있게 된다.
점박이(grizzled, 회색, gray) 말들은 남녘으로 갔다. 이 말들은 검정 말이 표현하는 진리의 빛보다 더 많은 빛을 가진 마음의 상태를 표현한다. 그래서 그들은 진리에 대한 이해와 지적인 지식을 가지고 이방인들과 교통할 수 있다.
적갈색 말(또는 씩씩한 말)들은 “나가서 온 세상을 순찰하라”고 명령되고 있다. 다시 말해 그들의 영향을 더욱 폭넓게 미치도록 하라는 말이다. 비교 측면에서 볼 때 하늘이 정신적인 천국, 영적 마음을 표현하는데 반해, 땅(earth)은 인간 속의 자연적 마음을 표현한다. 이런 측면에서 볼 때, 땅을 두루 다녀라(순찰하라)는 것은 신성한 진리가 자연적 마음에 도달하여 인간이 지닌 악에 대한 자연적 경향성에 저항하면서 주님의 이름으로 신성한 진리의 빛 속에서 자기 속의 악을 극복하게 하는 목적을 수행해 가는 것, 더불어 그분의 강함만이 인간을 감각적인 조건에서 영적 조건에로 바뀌게 할 수 있음을 확연히 인정할 수 있게 우리를 도우신다는 것을 말한다.

“내 영을 가라앉혔다 (quiet my spirit)”

본문은 다음과 같은 독특한 표현으로 끝맺고 있다. “보라 북녘 땅으로 나간 자들이 북녘 땅에서 내 영을 잠잠하게 했다. Behold. these that go toward North country have quieted My Spirit in the North country.” 이를 글자대로 말하면, “…내 영을 쉬게 했다. Have caused my Spirit to rest in the North country.” 주님의 영, 그 영은 바로 주님 자신이신데, 병거나 말들을 수단으로 주님의 영 안에서 어떤 다른 것을 만들게 하리라고 생각될 수도 있겠지만 전혀 타당치 않다. 그러나 본문에 언급되는 상황은 주님의 영을 향한 태도를 유발하게 하는 마음의 상태를 뜻한다. 표현적 측면에서 볼 때, 인간이 자기 속에서 자기를 거듭나게 해주시려고 역사 하시는 주님의 영에 반대하여 더 이상 투쟁하지 않게 될 때, 주님의 영은 쉬시고, 잠잠해지신다. 거듭나는 인간의 상호적인 사랑(mutual love)이 신성한 사랑을 위해 거처할 장소를 제공할 경우, 주님은 그 사람 속에서 안식하신다. 만물의 창조 후에 이어진 안식일(The Sabbath, rest)은 창조하시므로 몹시 피로해지신 창조주가 피로를 회복하시려고 정해 놓은 안식일이 아니다. 안식일은 인간 거듭남의 영적인 조건을 표현해 놓으신 것이고, 그 조건을 갖춘 심정 속, 즉 평화와 사랑 속에서 주님은 쉬실 수 있으셨던 것이다. 이런 인간 조건에 대한 주님의 말씀을 찾아보자. “너를 구해 내신 용사 네 하느님 야훼께서 네 안에 계신다. 너를 보고 기뻐 반색하시리니 사랑도 새삼스러워라. 명절이라도 된 듯 기쁘게 더덩실 춤을 추시리라” (스바니야 3:17). “야훼께서 너를 너그럽게 대하셨으니 내 영혼아, 너 이제 평안히 쉬어라” (시편 116:7).
이렇게 되는 조건은 “북녘 땅에서” 발생된다. 즉 이방인들, 주님의 말씀이 없는 자, 무지 가운데 있었던 이들 사이에서 일어나 신성한 말씀을 수단으로 새교회는 형성되어질 것이다. 먼저 신성한 말씀의 글자를 수단으로, 후에 그 글자를 바탕으로 한 영적 의미 속에서 형성된다. 조금씩 조금씩 우리의 주님은 천상 천하의 영원한 교회, 그분의 새 예루살렘을 건설하신다. 아마도 형체에서는 다양하겠지만 사랑과 진리에서는 하나인 교회를 건설하신다. 다음의 구절로 위의 말을 더 되새겨 보자. “축제 기분에 들뜬 우리 마을, 시온을 보아라! 네 눈은 아늑한 보금자리, 옮겨지지 않을 천막, 예루살렘을 보리라. 그 말뚝이 다시는 뽑히지 아니하고 그 줄 하나도 끊어지지 아니하리라. 거기에서 넓은 강이 여러 줄기로 흐르지 아니하고 야훼께로부터 한 시내가 흘러 우리의 기쁨이 되리라… 우리를 재판하는 이는 야훼, 우리의 법을 세우는 이도 야훼, 우리를 다스리는 왕도 야훼, 그분만이 우리를 구원하신다” (이사야 33:20-22).

신약 비유 차례

서문 ——————————-353
1. 반석 위에 지은 집——마태 7: 24-27——- 354
2. 옷과 포도주—-누가 5: 6-39————–362
3. 장터에 있는 아이—–마태 11: 16-19- ——-373
4. 씨뿌리는 사람—마태 13: 3-8, 18-23———383
5. 밀밭 속의 가라지—-마태 13: 24-30, 36-43– — 407
6. 겨자씨———-마태 13:31-32———- 419
7. 누룩———–마태 13:33————- 429
8. 숨겨진 보물——-마태 13: 44 ———– 439
9. 진주를 찾아다니는 장사꾼—–마태 13: 45-46— 450
10. 끌어 올려진 그물—–마태 13:47-50——– 458
11. 하늘 나라의 교육을 받은 율법학자–마태 13: 51-52- 467
12. 무자비한 종—–마태 18: 23-35———–473
13. 포도원의 일꾼들—마태 20: 1-16———– 485
14. 두 아들——–마태 21: 28-32———- 497
15. 사악한 소작인—–마태 21: 33-43———-508
16. 왕의 아들의 혼인 잔치—–마태 22: 2-14—– 522
17. 잎이 돋는 무화과나무——마태 24: 32-35—- 540
18. 열 처녀——마태 25: 1-13————-550
19. 달란트——–마태25: 14-30————560
20. 은밀하게 자라나는 씨—–마가 4: 26-29—– -572
21. 소경이 소경을 인도함——누가 6: 39———583
22. 빚진 두 사람——누가 7: 41-43———–592
23. 선한 사마리아 사람—-누가 10: 30-37———603
24. 귀찮게 졸라대는 한 밤중의 친구—–누가 11: 5-8—614
25. 어리석은 부자——누가 12: 16-21———–625
26. 허리에 띠를 띠고 불을 켜 놓고 기다려라–누가 12: 35-48— 635
27. 열매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누가 13: 6-9——- 645
28. 낮은 자리에 앉으라——–누가 14: 7-11——- 653
29. 핑계들——–누가 14: 16-24 ————- 661
30. 망대를 쌓고 전쟁을 치룸—-누가 14: 28-33– —– 673
31. 잃었던 양 한 마리——-누가 15: 3-7———- 682
32. 잃었던 은전——-누가 15: 8-10————- 691
33. 잃었던 아들—–누가 15; 11-32- ————- 700
34. 부정한 청지기—-누가 16: 1-12————— 724
35. 부자와 라자로—-누가 16: 19-31—————735
36. 보잘것없는 종—–누가 17: 7-10- ————- 746
37. 부정한 재판관—–누가 18: 1-8————— 754
38. 바리사이파인과 세리—-누가 18: 9-14———— 766
39. 선한 목자—–요한 10:1-16- —————- 775
40. 포도나무와 그 가지——요한 15: 1-10———– 785

신약의 비유 서문

이 책은 신약 성서의 비유를 새 예루살렘 교리의 관점에서 살펴 실제에서 응용이 잘되게 하는데 목적을 두고 있다. 이 책을 출판하게 된 이유는 비유를 새로운 관점에서 살필 필요성이 대두되었기 때문이다. 사실 제아무리 노력한다해도 비유에 관한 주제를 총망라해서 다루기는 쉽지 않다. 각 비유를 관조해서 해석하는데 몇 가지 국면이 있어지겠지만, 각 경우에서 저자는 실제 사용에 가장 적합한 듯 보이는 국면만을 선택했다. 각 비유의 설명은 그 비유 자체 내에서 완전히 해결하는 것이 최선일 것이라 생각되어 꼭 필요한 경우, 설명을 반복했다. 글자적 견지를 중시하는데 있어, 저자는 해석의 일반적 방법, 상응이나 표현성에 관한 사실과 원리에 대해서는 이마누엘 스웨덴볽의 신학 저술에 많은 은혜를 입고 있다. 그리고 몇몇 예를 드는데 있어서, 저자는 다른 주석들이 제공하는 암시들을 사용하기도 했다.

I
반석 위에 지은 집과 모래 위에 지은 집
-실제에 적용 안 된 진리의 불안정성 –

성서 본문: 마태복음 7장 24-27절

24. “그러므로 지금 내가 한 말을 듣고 그대로 실행하는 사람은 반석 위에 집을 짓는 슬기로운 사람과 같다. 25. 비가 내려 큰 물이 밀려 오고 또 바람이 불어 들이쳐도 그 집은 반석 위에 세워졌기 때문에 무너지지 않는다. 26. 그러나 지금 내가 한 말을 듣고도 실행하지 않는 사람은 모래 위에 집을 짓는 어리석은 사람과 같다. 27. 비가 내려 큰 물이 밀려 오고 또 바람이 불어 들이치면 그 집은 여지없이 무너지고 말 것이다.”

종교는 삶과 관계가 있다

이 비유는 주님의 비유 중에서도 의미 파악이 가장 명백한 비유에 속할 것이라 본다. 그 이유는 이 비유가 주는 교훈의 두드러진 요점을 쉽게 알 수 있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즉 실제화된 진리만이 시험에 잘 견딘다는 것이다.
“…내가 한 말…,” 이는 주님이 말하신 것은 그분 자신이다는 것, 그분의 진리를 밝혀 주심이다는 것, 우리의 애정, 생각, 그리고 행동이라는 영혼의 정부(government)를 위해 그분이 내려놓는 위대한 삶의 원리이다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이 그분의 소유인 것은 그분은 신성한 진리이시요, 인격화되신 분이 주님이시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다른 성경 부분에서 주님은 말하시기를, “너희가 듣는 이 말은 나의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것이다…”, 즉 신성한 진리는 독립된 존재가 아니라 신성한 선으로부터 이다는 말이다. 신성한 선은 아버지요, 진리는 아들이다. 그럼에도 아버지와 아들은 선이 진리와 하나를 만들듯 하나인 것이다. 진리는 선의 형체이고 진리를 수단으로 선은 그 자체를 명백히 한다. 마치 불의 열이 불의 빛과 불가분하게 하나를 만드는 것과 같다.

영적으로 듣는 것

속뜻에서 듣는 것은 속 사람, 즉 영이 듣는 것, 즉 영이 알고 이해하는 것이다. 주님이 말한 말씀을 듣는다는 것은 그분의 진리를 알고 이해하는 것이고, 그분의 말은 진리이다는 것을 안다는 것도 되고, 그분의 소유인 그 말을 우리가 받고 있다는 것도 포함하고 있다. 자연적인 인간은 진리의 근원이 주님이심을 생각해 봄도 없이 단지 과학적인 수준 정도에서 진리를 원리로서 채택한다. 예를 들면, 세상적으로 슬기로운 자는 말하기를, “정직이 최상의 정책이다”고 말하고, 그는 가장 정직한 정책을 채택한다. 채택하는 이유는 흔들릴 수밖에 없는 부정직한 정책보다 정직한 정책이 소득이 더 많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은 종교적인 원리에 의해 규율 받지 않고 세상적인 정책에 규율 받아진다. 한마디로 그는 자기 정책을 선택함에 있어 뱀의 신중성을 사용해 간다.
그러나 주님이 가르치시고 뜻하시고자 하는 것을 알려고 하는 사람, 주님의 명령이 있는 사항을 행동에 놓기로 결정한 사람들은 종교적인 원리에 의해 규율되어 진다.
오늘 비유는 경고장을 가지고 우리에게 접근하고 있다. 이 경고가 갖는 힘의 출처는 천국은 신성한 진리를 그저 알고 이해함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알고 이해한 뒤 행동함에 의거 이루어진다는 주장에 있다. 그 이유는, 반석 위에 집을 지은 사람과 모래 위에 집을 지은 사람의 차이가 “지금 내가 한 말을 듣고 그대로 실행한 사람”인지 아니었는지의 차이이기 때문이다. 양쪽 다 듣기는 했고, 양쪽 다 알고 이해는 했다. 그러나 전자는 주님의 말씀을 자기 삶에 응용해서 악에 대해 흔들리지 않는 경우이나, 후자는 그분의 말씀을 지적 측면에서는 간직했으나, 일상 생활에서의 응용이 없었던 결과, 시험이라는 폭풍이 불어닥치면 여지없이 무너져 영적 죽음에 빠지게 된다.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듣는 이유는 한마디로 그 말씀을 행동에 놓기 위함이요 듣는 목적인 바, 듣는 것은 목적을 관철하기 위한 수단이기 때문이다.

슬기로운 사람

주님의 말씀이나 가르침을 행하는 자는 슬기로운 사람과 같다. 세상은 많이 아는 자를 슬기롭다고 흔히 부른다. 그러나 주님이 슬기로운 자라고 하실 때 그 사람이란 자기 지식에 따라 살아감으로서 선용을 만드는 자를 두고 일컫고 계신다. 어리석은 자란 지식을 선한 삶에 응용 못했기 때문이다. 슬기로운 자는 자기 집을 반석 위에 세움으로 자기의 지혜를 증거 한다. 영적 의미에서의 이 비유는 영적인 사항들, 즉 영이 마음속에서 짓게 되는 영적인 집과 관계가 있다.

영적인 집

마음은 각자의 영적인 집이고, 그 집은 각 개인이 거주하는 곳이다.
마음은 의지와 생각으로 구성되고 의지는 애정(뭔가를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고 생각은 지성을 동반하고 있다. 인간의 영적 삶은 그의 마음, 즉 그의 의지와 이해성 속에 존재한다. 각자의 영적 삶의 질, 또는 삶의 종류는 그의 마음 상태에 달려 있다.
우리 모두는 어떤 원리 하에 각자의 마음을 짓고 있다. 뾰족이 말해서 우리는 영원히 살게 될 집을 우리 속에 짓고 있다. 하루하루, 순간 순간마다, 우리는 각자가 선택한 계획에 의거 집에 구조물을 하나씩 하나씩 붙여 세워가고 있다. 우리가 이 집을 천국의 재료들인 선한 애정, 진정한 생각들로 짓고 있다면, 우리의 주님은 그 집에 들어가시어 우리와 함께 거하시게 된다. 우리가 그분의 말씀을 지킬 때 우리는 주님이 거하실 집을 짓게 된다. 그 이유는 그분이 말하시는 바,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말을 잘 지킬 것이다. 그러면 나의 아버지께서도 그를 사랑하시겠고 아버지와 나는 그를 찾아가 그와 함께 살 것이다”고 하셨기 때문이다 (요한복음 14:23).
선한 사람이 자기 몫인 주님의 가르침을 행하는 동안, 주님은 그분의 몫을 집행하는 천사들을 통해 우리 속에서 집을 실지로 지으신다. 악한 사람의 경우, 악령이 그에게 역사해서 그를 악마의 도구로 사용하게 된다.
이와 같이 우리가 우리 속에 짓게 되는 집이라는 인격은 지어지는 집, 즉 상부 구조에만 의존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정성은 집이 앉게 되는 기초에 의존됨을 잊어서는 안된다. 견고한 기초 없이 안전한 집은 있어질 수 없는 것이다. 제 아무리 번쩍거리는 궁전일지라도 그 기초가 가라앉는다면 그 궁전의 가치는 하루 아침에 사라지고 만다.

반석

성경 글자에서 반석(rock)은 진리에 대한 상징물이다. 신성한 인간 측면에서의 주님은 진리이신 고로 그분은 바위(rock)라 불리우신다. “야훼는 나의 반석, 나의 요새, 나를 구원하시는 이, 나의 하느님, 내가 숨을 바위…” (시편 18:2).
반석, 그 위에 슬기로운 자는 자기의 정신적 집을 짓는데, 그 반석은 주님이시다. 좀더 뾰족한 의미로 보면 반석은 주님의 신성한 진리이다. 우리는 믿음으로 이 진리를 받는다. 집을 반석 위에 짓는 것은 주님의 진리 위에 마음을 세운 것이며 순수한 믿음을 붙잡게 된다. 위에서 살핀 인간 마음의 두 부분은 집의 두 부분과 같다. 의지는 집의 기초이고, 이해성은 기초 위에 세운 상부 구조이다. 의지가 믿음 속의 진리를 굳게 잡고 있을 때 집은 반석 위에 세워진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진리를 알아보고 이해한 뒤 우리 심정을 그 진리, 주님의 진리 위에 정착시킬 때, 한 마디로 그 진리에 따라 선한 삶이 영위될 때 반석 위에 집은 건설되는 것이다.

모래

“모래”란 의지로 사랑됨이 없이 기억이나 지성 속에 놓여 있는 진리를 상징한다. 바위나 모래는 똑 같은 재료인 돌로 구성되어 있다. 둘 다 자연계의 법칙에 따라 있지만, 모래는 과거 수많은 세월 동안 큰 바위가 서로 결집된 상태가 흐트러진 죽은 해골 같은 돌들이다. 바위를 구성하는 분자들은 우리 마음에서 결합되고 응고되어 서로 단결되어 있는 생생한 진리와도 같다. 이 진리는 살아 움직이는 사랑의 원리로 묶여 있는 것이다. 그러나 모래 속의 분자는 서로 풀리어 있어 서로가 접합하고 있을 뿐 결합되어 있지 않고 서로 서로 옆에 놓여 있는 상태이므로 기반을 주지 못하는 기억이나 지성 속의 진리들과 같은 것이다.
의지에 기초를 둔 진리, 즉 진리에 의거 살고 있는 믿음이라는 반석이 아니면 단단한 기초가 되지 못한다는 사실이 누가복음 6장 49절에서는 더 뾰족하게 서술되는데, “그러나 내 말을 듣고도 실행하지 않는 사람은 기초 없이 맨땅에 집을 지은 사람과 같다”고 말해지고 있다.

반석 위의 교회

“선생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 이십니다”라고 베드로가 말했을 때, 예수께서 그에게,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죽음의 힘도 감히 그것을 누르지 못할 것이다”라고 말하셨다. 우리의 주님이 그분의 교회를 건설하고자 하는 반석이란 진리를 살아 내는 믿음, 즉 의지 안에 기초를 둔 진리이다. 우리가 반석 위에 영적인 집을 건설할 때 그 집이 교회인데, 그 이유는 우리 주님이 그 안에 계시기 때문이고 그 안에서 우리가 그분을 예배하기 때문이다. 교회는 이렇게 해서 인간 안에서, 믿음의 진리 안에서, 사랑 안에 기초를 두어 뿌리를 내린다.
우리가 주님을 사랑함에 원리를 두지 않으면, 자아 사랑으로 흘러 가고 만다. 그래서 “인간이 자기에게 주어지는 것들이 천국으로부터가 아니면 그는 천국적인 것을 아무것도 받을 수 없는데,” 그 이유는 자아에 의존하면 어떤 힘도, 안정성도, 견고함도, 행복도 없기 때문이다.
인간이 진리를 지상적으로 받게 될 때 그 진리는 자기에게 자기 속의 악들을 보여주도록 허용되지 않는다. 따라서 그는 자기의 악들을 끊지 못하며 진리의 실제 응용 역시 있을리 만무하다. 그러나 오늘 비유는 우리에게 왜, 어떻게 모래가 우리 집을 짓는데 불안정한가를 보여주고 있다.

집의 위험은 비나 홍수 그리고 바람에서 온다. 우리가 주목할 점은 이런 위험은 모래 위에 지은 집이든, 반석 위에 지은 집이든 공히 닥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는 버티고 다른 하나는 허물어진다. 반석 위에 세운 집이 별난 재주가 있기라도 해서 비나 홍수 그리고 바람을 피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단지 파괴되는 것을 피할 뿐이다.
비나 홍수 그리고 바람이란 우리 삶의 경험 속에서 우리를 에워싸고 강타하는 시험을 표현해 준다. 너나 나나 할 것 없이 모두 이것들을 만나야만 한다. 그러나 선한 자는 그것들 아래서 견고하게 서 있고, 악한 자는 흔들리고 무너지는 것이다.
우리의 믿음은 시험 속에서 그 강도, 기량, 성질 등등 모든 것의 상태를 조사 받게 된다. 만일 그 믿음이 진정한 믿음이라면, 그 믿음은 주님 위에 기초를 두고 심정으로 사랑되고 있는 바, 그 믿음은 그 테스트에 견디게 되어 불 속에서 연단된 금같이 더 품질 좋은 순수함을 드러낸다. 그러나 그것이 가짜 믿음이라면, 혹은 지성 속의 믿음에 불과했다면,또는 사랑이 주도해 가는데 기초를 두지 않았다면, 그 믿음은 훼손되어 쓸려 가버리고 만다.

시험 (temptation)

악을 향한 우리의 자연적인 경향성들을 발판으로 해서 악령들은 우리에게 가까이 와 꾀어 들이어 유전적인 우리의 악한 성질(propensity)을 흥분시킬 수 있다. 그럼에도 천사들은 주님의 말씀에서 온 진리의 가르침을 수단으로 우리에게 가까이 접근해서 악한 영향력과 맞서면서 천국으로 우리를 인도해 간다. 우리의 믿음이 지성 속에만 있을 경우, 천사들은 생각 차원에서만 우리에게 영향을 미치게 할 수 있고, 만일 우리 심정이 악과의 대결에서 포기된 상태이면, 악령은 심정에 다가가서 애정을 수단으로 우리를 끌고 가버린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애정이란 언제나 전진 방향으로만 가능하다는 것, 그리고 비록 우리의 생각이 애정과 이견을 보인다 해도 애정은 지성을 점진적으로 장악해서 끌고 갈 수 있다는 것도 잊어서는 안된다. 따라서 천사들이 우리의 애정을 가지고 우리를 인도하게 하려면, 우리는 믿음에 속한 것을 사랑해야 하고 그 사랑한 만큼 가능해진다. 그러면 우리의 자연적 마음속에 든 악한 기질까지도 우리를 장악할 힘을 어떤 시험 속에서도 갖지 못한다.
시험은 모든 이에게 온다. 그러나 선한 사람에게 있어 시험은 자신을 더 순수해지게 만들고, 악한 자에게는 자기의 악을 더 확증하는 기회가 된다.
시험의 심한 시련이 비나 홍수, 바람이 집에 불어 들이치는 모습으로 본문에서 잘 그려지고 있다.
“비,” 이것도 물과 같이 자연적인 진리를 상징한다. 그러나 이 비가 광폭하고 파괴적일 때 이는 꺼꾸로된 진리, 거짓으로 변해 버린 진리를 명시하게 된다.
집을 때려부술 듯 퍼붓는 비는 마음을 공격하는 거짓, 우리에게 오는 거짓 암시, 속임을 당하게 만드는 거짓들, 악령에서 나와 마음에 오게 되는 각종 것들이다. 그리고 이것들로 인해 악에 대한 유전적인 자연적 경향성을 흥분시키는 것들까지도 비가 표현해 준다.

홍수

시험 속에서 이런 거짓 암시들이 마음속에 흘러 들어와 차츰 이 암시들의 부피가 증가해 간다. 자연계에서 오래 계속되고 무거워진 비가 홍수를 야기시키듯, 시험 동안 우리 마음속에서 이 거짓 암시라는 사악한 비는 처음에는 조금 들어오지만 차차 거짓을 축적해서 이를 부풀려 홍수를 만들고, 넘칠듯 넘실거리는 홍수와도 같이 돌진하여 그나마 우리 속에 남아 있던 영적 삶에 속한 것들을 집어삼키고야 만다.

바람

비에는 바람이 흔히 동반한다. 비와 동반하는 바람이 세어지면 폭풍이 되는데, 이는 거짓이 생각에 관계하여 있어지는 독특한 모습들을 표현해 준다. 폭풍은 비나 홍수보다 더 미묘함을 가지고 은근히 강타하게 된다. 바람은 모든 틈새나 구석까지도 침투해 들어와 약한 모든 구석을 자기들의 영향력을 높이는데 이용하고 만다. 바람은 처음에는 조용하게 오나 맹렬한 돌풍을 일으켜 앞에 있는 모든 것을 거꾸러트린다.

단어의 차이점

번역 성경에서 쉽게 나타나지 않는 차이점에 대한 암시를 주고자 한다. “부딪치매, beat”라는 단어는 두 집의 경우 똑같지는 않다. 반석 위에 지은 집에 있어지는 부딪침은 약한 부딪침, 엄습함, fall이 원문에 더 가까운 번역일 것 같고, 모래 위에 지은 집은 때려눕힘, beat upon, 또는 때려부숨, dash against가 더 나을 것 같다고 본다. 시험 기간 동안 거짓들은 악한 마음에는 거짓 믿음을 가지고 광폭하게 돌진하여 그 속에 잔류한 선과 진리들을 모두 때려 눕힐 수 있다. 그러나 선 자체에게는 아주 약한 광폭함을 가지고 다가와 쓰러트리려 할 뿐이다. 더우기 거짓은 거짓을 초대한 우리의 악한 성질을 광폭하게 끌고 가 버린다. 그래서 선한 자의 경우, 엄습한 폭풍인 시험이 끝나면 선한 자 속에든 악한 기질이 그만큼 더 사라진 결과 달콤한 평화가 마음의 더 많은 부분을 점유하게 된다.

영적 폭풍의 근원

주님은 그분의 교회를 인간 안에서 지으시되 “죽음도 감히 누르지 못할” 살아 있고, 사랑받는 믿음이라는 반석 위에 지으신다. 이는 우리에게 광폭한 시험의 근원을 암시해 주게 된다. 시험은 성난 폭풍이고, “지옥문”으로부터 돌진해 나와, 우리 속의 악들이나 악한 기질이 있는 곳으로 들어가고자 애쓴다. 그 이유는 지옥의 것과 우리 속의 악한 성질과는 서로 뜻이 통하기 때문이다. 각종 시험을 수단으로 악령은 우리의 영적인 집을 파괴하거나 유인해낸다. 그러나 시험이라는 위와 같은 폭풍은 선한 자에게는 서비스를 제공하는 수준이고, 더욱이 주님의 경우는 “분노한 자로 그분을 찬양하게 만든다.” 그래서 선한 자는 선함을 더욱 확고 부동하게 하는 계기가 되고 악한 자에게는 악함을 허용받는 계기가 된다. 시험 중에 선한 자는 더 굳건해지는데, 그 이유는 그들의 심정이 거듭나는 중이기 때문이고, 그들 안쪽의 사랑들이 시험을 야기시키는 주범인 자연적 수준의 마음속에 있는 악에 기울려는 유전성에 반대하기 때문이다.

정신적인 집은 영계에서 세워진다

인간의 영은 언제나 영계에서 사는 바, 우리 안쪽의 집 어디에 계속 건축되어 가고 있을까? 물론 영계이다. 오늘 비유가 말하는 바, 주님의 말씀대로 사는 자는 슬기로운 자이어서 굳건한 반석 위에 집을 짓는 사람 같다고 했다. 사실 영적으로 보건대 슬기로운 자는 “…사람 같다”가 아니라, 슬기로운 사람으로 존재한다. 그는 영적인 반석 위에 자기의 영적인 집을 영적으로 짓는다. 그리고 어리석은 자는 자기의 영적인 집을 영적인 모래 위에 짓는다.
본문은 영적인 사항에 관해 글자적으로도 진정한 것이다. 선한 자의 안쪽에 있는 집은 실제로 천국에 짓고 있다. 그 이유는 천국은 특정한 장소에 존재하는게 아닌 내향의 상태(inward state)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자연적인 죽음은 각자에게 자기 집에 대한 소유권을 100% 획득하게 하는 수단일 뿐이다.
그러나 악한 자는 시험 동안에 무너지는데, 그 이유는 그들의 안쪽 마음이 그들을 도와주게 될 천국 쪽에 닫혀 있기 때문이다. 악은 지옥과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어서 지옥이 그들을 이끄는 대로 뜻을 같이 한다. 따라서 악한 자는 자기들의 집을 지옥에다 실지로 짓고 있다.
반석 위에 기초한 집은 폭풍에 견디고 무너지지 않는다. 즉 자기 의지 속에 기초한 믿음을 가진 자는 주님에게 생명과 도움을 구하고, 받기 때문에 어떤 시험, 죽음까지도 그를 당해 내지 못하는 바, 그는 악령과의 대적에서 승리하고야 만다.

무너짐

모래 위에 지은 집은 폭풍에 노출되면 무너진다. 여지없이 무너진다. 즉, 진리를 알고 이해하되 마음 안쪽에서 악을 흠모하는 이들은 시험 동안에 무너진다. 자기에게 자발적으로 있어지는 지식이나 이해성의 남용으로 인해 스스로 “더 큰 단죄를” 자초한다. 그 무너짐이란 아주 크고, 완전한 무너짐이다. 이 무너짐은 처음에는 가벼운 거짓으로 시작된다. 사실 이 경미한 거짓의 수준에서 우리가 자유로워지는 것은 별로 힘들지는 않다. 그러나 이 경미한 거짓이 반복되어 가다 보면 악으로부터 온 거짓이라는 크고 강한 급류로 돌변해 간다. 이 급류의 원인인 억수 같은 비는 진실로 크게 무너지는 것, 영적인 것을 완전히 침식하여 영적 인간을 영원히 멸해 축축한 무덤을 만들고야 마는 것이다.

인격

실제로 사용된 진리만이 참 인격을 형성한다. 우리 인생의 가장 큰 업무는 우리의 주님이 거하실 집을 우리 심정과 삶 속에 지어 드리는 것이다. 우리가 주님을 위해 짓지 않는다면, 우리는 단지 야생 동물이나 불결하고 보기 싫은 새들이 거할 굴을 짓게 될 것이다. 우리의 모든 선한 애정들은 우리 안쪽의 집을 짓는데 쓰여지는 품질 좋은 재목들이다. 모든 진정한 생각은 튼튼하고 오래가는 돌이다. 그 반면 우리 속의 악한 애정은 벌레 먹은 재목이요, 모든 거짓 생각은 인간이 찍어 만든 벽돌에 불과하다.
우리 주님은 그분의 말씀 속에서 우리가 집을 잘 짓도록 계획을 세우고 비용을 계산할 수 있게 섭리해 두셨다. 이 건축의 실제야말로 우리가 가질 수 있는 최대의 기쁨이다. 어리석은 자는 자기 계획대로 집을 지으려고 애쓰지만 선하고 슬기로운 자는 주님의 계획대로 집을 짓는다. 슬기로운 자는 온 정성을 가지고 재료들을 선발하고 아주 세심하게 주의해서 집을 지어 간다. 그러나 부주의한 사람은 자기 손에 편리할 듯 싶은 재료이면 선뜻 선택한다. 결국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어떤 감상적인 수준의 것이 아닌 고정된 원리들이다. 원리를 가지고 뭔가를 실현하지 않고는 고정된 원리가 인간 속에 존재할 수 없다. 진리를 생각함, 선을 사랑함들이 한 개의 행동 속에서 자신의 지침으로 고정되는 것이다.

2
옷과 포도주
– 새 교리는 새 진리를 위해 필요했다 –

성서 본문: 누가복음 5장 36-39절

36. 그리고 예수께서는 비유를 들어 말씀하셨다. “새 옷에서 조각을 찢어 내어 헌 옷을 깁는 사람은 없다. 그렇게 하면 새 옷을 못쓰게 만들뿐만 아니라 새 옷 조각이 헌 옷에 어울리지도 않을 것이다. 37. 그리고 새 술을 헌 가죽부대에 담는 사람도 없다.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릴 것이니 포도주는 쏟아지고 부대는 못쓰게 된다. 38. 그러므로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한다. 39. 또 묵은 포도주를 마셔 본 사람은 ‘묵은 것이 더 좋다’고 하면서 새것을 마시려 하지 않는다.”

요약

진리는 교리로 표현된다. 따라서 모든 진리는 그 진리를 담을 적당한 교리를 요구한다. 새 진리는 낡은 교리에 의해 전시될 수 없고, 그 교리에 담길 수도 없다. 그러므로 새 진리를 위해 새 교리를 가져야 한다.
교리가 사람들에게 어떻게 살 것인가를 가르칠 때, 삶에 관한 모든 새 특질은 새 교리와 동반되어 진다. 그 이유는 삶의 새로운 종류는 새로운 생각, 감정, 습관들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생각함이나 느낌이 낡은 방법에 머물고 있는 사람은 살아가는 새 방법이 왜 있어져야 하는지 보지 못한다. 동시에 그는 새 습관의 필요성도 보지 못한다. 새 삶은 새로운 내적, 외적인 것을 포함한다.
위의 원리들이 이 비유의 주변에 깔려 있다. 바리사이파인이나 율법학자들이 예수께, “요한의 제자들은 물론이요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제자들까지도 자주 단식하며 기도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먹고 마시기만 합니까?”라고 물었다.

새 방법과 낡은 방법

그래서 이 비유는 예수님의 제자들이 바리사이파인의 제자들과는 달리 다른 습관을 가져야 하는 이유를 주고 있다. 바리사이파인들은 옛 유대인에게 하늘이 내린 처방 속에서 살아왔다. 그들의 느낌, 생각, 습관들은 하늘이 그들에게 내렸던 처방(dispensation)의 특질 속에 있던 것이다. 그래서 세례자 요한은 새 진리를 그들에게 주는 것보다 오히려 그들을 경고하러 왔던 것이다. 그런고로 그의 제자들은 예배의 새 형체를 입을 준비는 되어 있지 못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삶에 대한 새로운 처방을 소개하시기 위해, 새 진리를 가르치시기 위해, 옛 처방을 심판하시기 위해 오셨다. 더욱이 인간이 느끼고, 생각하고 행동하는 방법들에 근본적인 도전을 만들기 위해 오신 것이다. 따라서 그분의 제자들이 그들의 인격 변화의 한 부분으로서 행동하는 방법이 바뀌어 있다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하늘이 준 처방의 차이

삶에 대한 각 처방은 인간의 영적 필요와 조화되도록 인간 삶에 재 조정되어 왔다. 인간이 더 낮은 인격 상태에로 기울어질 때, 주님의 무한하신 사랑은 그들에게 내려와 그들의 조건을 재 조정하여, 그들의 악에 따라 있어질 나쁜 결과로부터 가능한 한 지켜 주시었다. 동시에 그들의 인격이 허용하는 한도에서 하늘의 축복이 열릴 수 있게 그들을 보존해 주시었다.
교회에 대한 각 처방은 그들속의 통치하는 사랑(ruling love)을 수단으로 주변의 모든 것을 재 조정하여 왔다. 따라서 각 처방은 삶의 고유한 단계가 있고, 그 나름대로의 고유한 특질이 있게 된다. 다른 처방 속의 인간은 다른 인간의 종류 속에 있어 왔고, 그 인격의 성질 역시 다르고, 바깥쪽 삶의 방법이나 습관 역시 다르게 있어왔는 바, 이것들이 인격을 구체화시켜 표현하였다.

후퇴함 (retrogressing)

각 처방에서 인간의 영적 삶이 높은데서 낮은 데로 후퇴될 때, 새 처방이 반드시 대두되어야 하는데, 그 이유는 인간이 이전 처방의 특색을 이루는 성질의 얼마를 잃었기 때문이다. 인간은 자기들의 중심 원리가 각기 다르기 때문에 삶의 방법 역시 다르게 되었다. 이렇게 다른 것을 성장시켜 가면서 영적 영향의 다른 국면들이 자기들의 영적 필요성에 채용되어졌던 것이다.
인간이 신성한 사랑을 보다 높은 형체에서 고맙게 여기던 데서 아래로 처질 때, 무한하게 부드러운 주님의 사랑은 더 낮고, 더 외적인 형체로 그들에게 다가와 그들이 그분의 사랑을 납득할 수 있게 해 주셨다.

주님의 오심

그래서 인간의 생명이 보존될 수 있는 상황의 가장 낮은 지점에까지 이르렀을 때, 바야흐로 파멸되는 정점에서 인간을 건지시기 위해 육을 입고 예수 그리스도로 오셔서 천국 삶의 진가를 인정하는 쪽으로 그들의 마음이 열리게 해 주셨던 것이다.

상승 (the ascent)

그리하여, 신성한 사랑의 인도 하에서 과거에는 잃고 있었던 보다 높은 고지를 향해 인류의 상승이 시작되었다. 상승하던 인간이 자기에게 존재했던 처방 속의 특질을 벗어나 새롭게 위쪽을 향할 준비가 되어 삶의 더 높은 국면을 필요로 하자, 새로운 처방이 소개되었다.

옛 것과 새 것의 분리

이와 같은 변화의 각 단계에서, 자신에게 존재한 낡은 영과 처방의 특질에 한껏 빨려 들어 있어 그 삶에 만족해하는 사람들은 새 처방의 필요성도, 그 특질을 납득하는데도 실패했다. 그래서 새 처방 속에 든 새로운 감정이나 생각들이 삶의 새로운 방법으로 그 자체를 드러냈을 때 옛 처방 속에 남아 있는 사람들은 옛 표준을 가지고 새 것을 저울질 해본다. 그리하여 그들은 새 것을 위험한 혁신으로 선한 옛 방법으로부터 죄를 짓게 하는 출발로 간주해 버린다.

주님의 재림

위와 같은 상황이 주 예수 그리스도의 첫 번째 오심에 관한 것이다. 이와 같은 상황은 영적 생명과 빛인 새 처방 속에서의 주님의 두 번째 오심에도 비슷하다. 주님의 재림은 바깥쪽 또는 육체적인 오심이 아니라, 인간의 심정과 이해성에 오시는 안쪽으로의 오심, 즉 영적인 오심이요, 이는 인간에게 안쪽(inward)과 바깥쪽(outward) 삶에 새 품위을 주시려는 것이다. 이 오심은 이미 시작되었다.

옛 것이 새 것을 잘못 생각함

옛 것은 새 것을 결코 이해하지 못한다. 그 이유는 옛 것이 새 것으로 될 준비가 안되어 있기 때문이다. 새 것은 옛 것을 넘어 있고, 삶의 새 국면에 있어서는 존재의 수준 자체가 달라 삶의 특질이 근본적으로 바뀌는 것이다. 그러니 새 것을 이해 못하는 옛 것이 새 것을 잘못 판단하게 됨은 불가피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옛 것이 상도에서 벗어나 성장하면서 새 것은 자신이 과거에 처해 있던 조건을 납득하면서 오히려 변화의 필요성을 더욱 실감한다. 예를 들면, 태어날 때부터 눈이 먼 사람은 자신의 눈이 보는 경험을 하기 전 까지는 본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납득하기 힘든 것과 마찬가지이다.

옷 (garment)

“새 옷에서 조각을 찢어 내어 헌 옷을 깁는 사람은 없다”
사람을 옷 입히며 보호도 해주는 겉옷이란 우리의 선한 애정들을 영적으로 옷 입혀 보호하는 진리를 표현한다. 진리의 명석한 지식이 산출해 내는 보호가 없으면 우리의 선한 자극(impulse)들은 자주 우리를 곤경에 빠지게 하거나 잘못된 방향으로 흐르게 하고 만다.
이와 같은 겉옷의 상징적인 의미 때문에, 주님의 말씀 속에서 겉옷에 관해 많이 거론되고 있다. 그중 하나인 이사야서 52장 1절을 보면, “거룩한 성 예루살렘이여 네 아름다운 옷을 입을 찌어다”라고 적혀 있다. 이는 영적 예루살렘인 교회는 주님의 말씀 속에 든 아름다운 진리로 자신을 잘 차려 입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리하여 교회가 이 진리들을 가르침으로 해서 인간의 삶을 아름답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우리가 주일 날 예배에 참석하러 갈 때 혹은 사회적인 모임에 갈 때 옷을 잘 차려 입고 가려 하는 습관은 우리가 주님께 접근될 때 또는 그분이 우리에게 주신 축복 때문에 발산되는 기쁨을 감추지 못할 때 주님의 진리로 우리 마음을 옷입히고 있는 정신적인 습관을 표현해 준다.
유대인들의 예배에서 사제들의 겉옷은 주님에 의해 규율되어진 것인데, 이는 각기 다른 경험 속에 있는 우리의 애정을 옷입히게 될 진리에 대한 주님의 규율을 표현하는 것이다.
계시록에 언급된 매우 흰 겉옷은 영계에서 구원받은 자들이 입고 있는 바, 이는 삶에 진리를 적용해서 입게 되는 진리, 순수한 진리를 표현하는 것이다.

옷의 표본 (representative)

옛 유대인에 대한 처방에서 그들은 영적인 것들의 표본이 되어 있었는 바, 옷 입는 것까지도 표본이 되는 그들의 특질에 맞추어져 있었다. 마찬가지로 기독교회에서, 새로운 처방의 영적 삶 어디서나 인간의 마음을 옷입히고 있는 진리들은 애정의 상황에 부응되는 지성의 옷인 것이다.
오늘날까지도 사회적으로 의복 차림, 각자의 옷차림은 그 사람의 조건, 직업, 공적 지위 등등을 암시해 주듯, 인간의 정신적인 의복, 즉 자기 마음을 옷 입히는 진리들은 그 사람의 영적 조건과 그의 삶의 성질을 암시해 준다.
시편 기자는 이렇게 노래한다.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주께서 옷을 입음 같이 빛을 입으시매.” 다시 말해 그분은 진리의 빛 안에 그분의 속성을 진열해 놓으신다는 말이다.
주님의 겉옷 자락을 건드리기만 해서 병이 나은 여인의 믿음은 자신의 행동을 규율하는 말씀 속의 진리에 접촉함으로 애정을 깨끗케 하는 것을 표현하고 있다.
천사들이 빛나는 옷을 입고 있는 모습이 자주 보여졌다. 이는 인간 삶의 천적인 모습을 보여주게 되는 빛나는 진리를 말한다. 그래서 예수님이 변모하실 때 그분의 옷은 희고 광채가 났던 것이다. 말씀의 글자는 우리의 외투(outer garment)와도 같아 글자 안쪽에 든 것, 즉 영적 의미를 보호한다.

새 옷과 헌 옷

위에서 살핀 바와 같이, 옷(garment)은 마음을 입히고 있는 진리를 표현해 준다. 수선해서 입어야 할 헌 옷이란 생각의 헌 상태, 인간 마음 안에 든 영적 질서가 올바르지 않은 것, 한마디로 진리의 낡은 국면을 표현하는 것이다. 새 옷은 생각의 새로운 방법, 진리의 새 국면(phase), 새 진리를 표현한다.
말씀의 글자적 의미, 이는 인간의 자연적 마음이 보는 바 대로의 의미이다. 이 의미는 잘못 성장할 우려가 많지만 말씀의 속뜻을 보는 사람에 의해서는 그렇지 않은데, 그 이유가 그는 진리의 영으로부터 글자에서 발하는 빛을 발견하여 총명하게 이해하기 때문이다.

영적인 옷

교리는 영적 성장에 맞게 조정되어야 할 필요를 이 비유는 예증해 주고 있다. “새 옷에서 조각을 찢어 내어 헌 옷을 깁는 사람은 없다.” 사실 어떤 사람도 이런 식으로 일하지 않는다. 진리의 낡은 국면을 과대 성장시킨 사람도 낡은 사상이 새 환경 조건을 섬기리라고 기대하지도 않을 것이다. 이것은 새 조각을 가지고 헌옷을 깁는 격이다. 새 상황은 그 변화된 마음 상태에 적절한 새 진리가 필요한 것이다.

헌 옷을 깁는 것

낡은 신앙에 얼마 큼의 새 빛을 놓음으로써 낡은 신앙을 보충하려 한다면 그 노력은 성공되지 않는다. 그 이유는 “새 옷의 조각이 헌 옷을 찢어지게 하기” 때문이다. 새 옷처럼 새 진리는 탄력성이 있다. 그러나 헌 진리는 헌 옷과 같아서 팽팽하게 당겨 질 수 없다. 당겨지면 째지고 만다. “새 옷조각이 헌 옷에 어울리지도 않을 것이다.” 즉 헌 관점과 새 관점 사이에는 하모니가 없다는 말이다.

포도주

이와 같은 일반 원리가 “새 술을 헌 가죽 부대(병)에 담는 사람이 없다”는 두 번째 본문에서 가르쳐지고 있다.
포도주는 영적 진리와 상응된다. 이런 이유 때문에 포도주는 주님의 성찬에서 사용되는 바, 이는 주님으로부터 영적 진리를 받는 것을 표현하는 것이다.
성경에서 포도주는 많이 등장하는데, 나쁜 의미로의 사용을 제외하면 대부분 영적 진리라는 내적 의미를 가진다. 나쁜 의미의 표현에서 포도주는 꺼꾸로된 진리, 왜곡된 진리, 그 성질이 부패된 상태의 진리를 표현한다.

병 (bottle, 가죽 부대, wineskin)

병이 포도주를 담는 용기일 경우, 이 병은 진리를 붙잡고 함유하는 교리들을 표현한다. 교리는 진리를 이해하기 위해, 또는 진리가 사용되기 위해 필수적이다. 본문에서 언급되는 병이란 염소나 새끼 염소의 가죽으로 만든 병(가죽부대)이다. 그래서 신약 성서의 새 번역에서는 병 대신 “가죽부대(wineskin)”를 사용하고 있다.
가죽부대가 새 것일 때는 매우 탄력성이 있다. 새 포도주가 그 속에 담아질 때 포도주의 발효는 이 부대를 부풀게 만든다. 그러나 이 부대가 오래된 것이면 경직되어 있어 그 유연성을 잃어버린 상태라서 새 포도주가 이 헌 부대에 담기게 되면 포도주의 발효는 이 부대를 터트리고야 만다. 그러면 포도주는 쏟아지고 부대도 터져 양쪽 다 못쓰게 된다. 이 비유에서 헌 병(부대)은 헌 교리, 낡은 사고 방식, 낡은 정신적 조건들을 표현한다. 그 반면, 새 병은 새 교리를, 마음의 새로운 조건에 부응될 교리들을, 교회의 새로운 상태에 대한 가르침들을 표현한다.
유대주의 속의 교리는 기독교로 처방된 새 포도주를 붙잡을 수 없는 헌 병이었다. 그리고 첫 기독교회의 교리가 명확치 못하며 불합리하게 되어 감으로써 이 교리는 주님의 재림에서 있게 된 장엄한 영적 진리, 새-교회(New-Church)라는 새 포도주를 붙잡을 수 없는 헌 병이 되었다.

새 진리

마음이 영적 진리의 측면을 진보하게 하려고 새로운 단계를 취할 때, 그 마음은 새 진리를 일상 생활에서 사용하기 위해 새 교리를 채택해야만 한다. 거듭나는 이해성은 일상 용도에서 반드시 있게 되는 필요성의 팽창을 수용할 수 있도록 마음을 가다듬어서 새 진리가 마음에 가져오게 되는 것들에 탄력성을 보유해야만 한다.
새 진리가 마음에 들어오면 그 진리는 마음으로 시험에 부딪치게 해서 영적 발효를 일으키게 하고, 이 발효는 마음속의 불순물들이 저절로 걸러지게 해서 깨끗함 속에서 진리를 붙잡도록 하여 주변의 불리한 상황에도 마음이 견뎌내게 해준다. 엄밀히 말한다면 우리가 그 진리 때문에 고통받고, 그 진리를 위해 싸우며 그 진리를 위해 살 때까지 그 진리는 우리 것이 아닌 채로 있는다.

헌병이 깨짐 (부대가 터짐)

우리가 진리를 내적 측면에서 보게 되면 그 진리의 겉에 나타나 보이는 글자적인 양상을 밀어 제치게 된다. 새 진리의 팽창된 힘은 헌 병, 헌 교리를 깨트리고 말아, 헌 병은 종말을 고하게 된다. 그런데 우리가 헌 병을 대체할 것이 아무 것도 없다면 영적 진리의 포도주는 쏟아지고 만다. 예를 들면, 언젠가 그에게 계발된 가르침이나 합리적 생각이 창세기는 물질적인 과학을 가르치려는 것이 아님을 보여 주었을 때, 이는 새 진리라는 새 포도주가 헌 교리라는 헌 병을 깨트리는 격이다. 그런데 그 사람에게 어떤 새로운 병, 새 교리가 사용을 위해 준비되어 있지 않다면, 그 합리적 생각은 못쓰게 되고 마는 바, 그는 그 진리마저 잃게 된다. 즉 창세기는 신성한 책이 아닌 것으로 귀결짓고 성서를 거절하게 된다는 말이다. 그러나 창세기는 하느님의 책으로 항존한다.
그러나 만일 그가 창세기는 인간 마음의 거듭남과 영적 창조를 취급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교리, 말씀의 영적 의미에 근거한 교리의 새 병에 합리적인 생각인 진리의 새 포도주를 놓을 경우, 그는 포도주도, 진리도, 교리도 동시에 보존하게 된다. 진정한 교리라는 병 없이 진리를 사용한다는 것은 생각조차 하기 힘들다.

옷과 포도주

이 비유는 똑같은 의미를 옷과 포도주를 가지고 번복해서 말하고 있는 게 아니다. 그 이유는 옷은 마음의 바깥쪽 사용을 위해 있는 진리, 마음을 옷입히고 있는 진리로서 표현되고, 포도주는 마음의 안쪽 사용을 위해 있는 진리, 영에 활기를 주며 훈훈하게 하는 진리를 표현하기 때문이다. 이런 사실과 일치되는 경우를 본문의 그리스어에서 발견하는데, 번역된 새(new)란 단어는 비유 내의 두 경우에서 똑같지 않게 사용되었다.
좁은 측면에서 보면 헌 병은 유대교회의 규범들이고, 새 포도주는 기독교회의 진리이다. 또한, 헌 병은 첫 기독교회의 전복된 교리들이고, 새 포도주는 새-교회(the New-Church)의 진리이다. 헌 것과 새 것은 일치하지 않는다. 우리가 교리의 구멍난 낡은 옷을 새 천조각으로 깁는 것은 쓸데없는 일이다, 주님께서, “보라 내가 모든 것을 새롭게 한다”라고 말하셨다. 모든 것이란 교리와 형체 또는 생각과 애정이요, 이런 모두를 새 것으로 만드신다는 말이다. 헌 교리는 헌 사상에 어울릴 뿐 새 진리에는 어울리지 않는다.

예증

예를 들면, 옛 교리는 거듭남(또는 구원받음)이 단 번에 이루어질 수 있다고 말한다. 사람들이 이 교리를 꽉 붙잡고 있는 한, 거듭남이란 점진적인 영적 성장 과정을 통해서만 이루어진다는 새교회의 교리를 알아차릴 수 없다. 새 것은 옛 가르침에 있는 신학적인 용어에서 까지도 다르다. 영적으로 옛 마음은 묵은 포도주 병과 같다. 그들은 자기들의 능력 한도까지 팽창이 가능하겠지만, 그 이상의 경우에서는 그 탄력성을 잃고야 만다. 그들은 자기들 방법에 집착되어 있어 그 이상의 유연함을 발휘하지 못한다. 그들은 묵은 포도주를 담을 수 있을 뿐 활기 왕성한 새 포도주는 안된다. 진리는 교리에 생명을 준다. 그리고 교리는 진리를 지탱시켜 준다.
교리는 진리와 더불으면 팽창되어 질 수밖에 없다. 인간이 소년기를 벗어나 자라는 바, 그가 입었던 소년 시절의 옷은 그에게 맞지도, 예쁘지도 못하다. 어른이 되면 그 나이에 알맞은 크기와 멋이 옷에도 곁들여져야 할 것이다. 이와 같이 마음이 옛 교리에서 벗어나 성장하노라면, 새 교리가 반드시 그 상황에 어울리게 준비되어야 한다. 교리의 각 체계는 정신 성장의 각 단계에서 채택되는 바, 우리의 상태가 현 상태를 벗어나 자라면 그 상태 하의 교리 역시 벗어나 바꿔져야 한다.

새 것과 옛 것

예를 들면, 새교회인이 되는 데는, 새교회 진리의 사상 얼마를 포획해서 옛 교리에 그 새 것 조금을 깁는 것, 또는 새 포도주를 헌 가죽부대에 부어 보려는 것 이상으로 필요한 것이 있다. 우리는 교리의 새 체계를 가져서 마음의 중심에서 밖의 경계선까지, 삶의 새 방법에 새 교리가 구체화되도록 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 말을 바꾸어 설명하면, 우리는 자신에게 새 것과 헌 것이 완전히 다른 특질임을 알게 하지도 않았으면서 타인의 마음에 새교회 사상을 슬며시 밀어 넣으려는 것은 아무 쓸모가 없다는 것이다. 이런 식의 시도 역시 새 옷조각을 가지고 헌 옷을 깁는 것이고, 새 포도주를 헌 가죽부대에 붓는 것일 뿐이다. 새 진리임을 똑바로 인정치 않는 이상 밀어 넣어진 새교회 진리는 새 교리 안에서 어떤 실용성을 만들지 못한다.

영적 위험

진리의 새 사상을 피상적으로 채택하려 드는 데는 위험이 존재한다. 그렇게 채택되면 이는 낡은 습관이나 방식을 가지고 삶을 계속 이끌어 나가려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새 삶은 낡은 습관이나 사고 방식 속에 붙잡혀 있지 못한다.
우리는 세상적 표준으로 확증해 볼 필요가 없고, 오로지 진리의 영으로 우리를 변형시킬 필요만 있다. 새교회를 위한 진리는 속 마음을 위한 내적 진리이나 옛 신학 속의 진리들은 외적 진리, 진리의 가상으로 자연적 마음을 위한 진리이다.

예증들

주님에 관한 교리를 예로 들어보자. 옛 교리를 수단으로 하면 사람들은 하느님을 어떻게 생각할까? 그분은 성내시는 분, 편파적인 분, 징벌하시는 분 등등으로도 보여진다. 이 견해를 새교회의 명백한 진리, 그분은 한 인격 속에 계신 주 예수 그리스도 한 분 하느님 속에 있는 무한한 선함과 사랑을 가르쳐 주시는 분이시다는 것과 비교해 보라.
그리고 옛 교리인 “대속죄 (vicarious atonement)나 믿음만으로 의로워짐, justification by faith alone”라는 것과, 새 교회 교리인 주님과 인간 사이의 동의(agreement)에 관한 교리, 즉 인간은 악을 금하고 주님을 사랑하며, 믿고 순종하는 가운데 선을 행해야 한다는 것, 그리고 자기의 모든 삶, 즉 느낌, 생각, 행동 면에서 악을 거절해야 구원된다는 교리를 비교해 보라. 그리고 옛 교리의 경우, 모든 성경은 그 서술이 신중해지도록 주님이 인도하셨기 때문에 모두 다 신성하다는 성경 글자상의 진리와 새교회의 경우, 성경에는 글자적인 것과 영적인 것 즉 말씀에는 몸과 영이 있고 이 둘은 상응으로 관계를 가진다는 것과도 비교해 보기 바란다.
또 한 가지, 삶의 교리를 들춰 보자. 옛 교리는 경건심에 의존하는 바 인간의 실제적인 악과 관련될 때 그 실용적 가치는 거의 없게 된다. 그러나 삶의 새 교리는, 인간은 선을 행하고 악을 금하는 것이 삶의 양면(내, 외면)에서 있어지는 만큼에서만 선해진다는 것, 그나마 이 일은 주님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다는 것과도 비교해 보라.

헌것을 깁는 것

지금까지에서 명확히 알게 된 것은 위와 같은 옛 교리를 붙잡으려 노력하는 것이나, 새교회로부터 잘라낸 새 조각을 헌 옷에 깁는 것, 또는 새 포도주를 헌 가죽부대에 담으려는 것 등등은 다 쓸모 없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새 옷 조각이 헌 옷에 어울리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하는 것이다. 실지로 우리 삶의 상태나 행동 지침들이 자연적 마음에 바탕을 둔 옛 사상에 의해 통치되는 한, 우리는 새 진리를 생동력 있는 원리로서 붙잡을 수 없다. 새교회인(a New-Churchmen)은 새교회의 빛 속에서 자기의 삶을 통째로 형성해야 한다. 다시말해 자기 삶에 새교회의 분명한 품질이 나타나야 한다.

묵은 포도주와 새 포도주

“묵은 포도주를 마셔 본 사람은 ‘묵은 것이 더 좋다’고 하면서 새 것을 마시려 하지 않는다.” 옛 삶에 만족해하는 이들은 새 삶이 가까이 오는 것을 느끼지 못한다. 그러니 옛 것에서 벗어나 새 것 안으로 들어가지 못할 것은 당연하다. 더욱이 옛 삶 속의 특질이 고착화된 모든 이는 변화 역시 반기지 않는다. 오히려 옛 영 속에 아직 있는 이상 그들은 새 것을 거절한다. 외적인 틀 속에서 사는 이들은 내적인 틀을 보고도 단 번에 고마워하지 않는다. 자연적 마음만을 지닌 사람은 영적 삶의 실재를 보지 않는다. 그러나 명석한 새교회인이라면 영적 삶이야 말로 진짜 삶인 고로 그 삶이 자신의 바깥 삶을 통치해야 하고 그 삶으로 자신 전체를 형성시켜야 함을 똑바로 볼 것이다.

새 천국(the New Heaven)

새교회가 지상에서 봉기될 수 있기 전 새 천국이 형성되어져야만 한다. 새 천국이 증가 될 때 그 천국의 영향력도 증가되는 바, 이에 따라 지상의 새교회도 증가된다. 왜냐하면 새 예루살렘이 천국에서 내려 올 수 있기 전, 새 예루살렘을 위한 올바른 여건이 반드시 있었어야 했기 때문이다. 새 예루살렘, 새교회는 단 번에, 또는 강제적으로 하늘로부터 내려와 질 수 없다. 오로지 인간이 그것을 받을 준비가 되었을 때만 가능하다. 이는 옛 신학 속의 거짓들이 제거될 때만 가능하다는 말도 된다. 그 이유는 거짓이 제거되지 않으면, 거짓이 심어졌었던 장소를 새 것이 차지하도록 하는 승인을 당사자로부터 얻어낼 수 없기 때문이다.
새 예루살렘이 내려오는 것에 대해 의문이 있다면, 그것은 진리의 새 교리를 수단으로 삶의 새 품질을 받기 위한 인간의 준비와 그 신속력에 대한 의문이기도 한 것이다. 과거 하늘이 유대인에게 내린 처방 속에 있는 영과 삶으로 확증되어 있는 유대인 모두를 여러분은 기독교인이 되게 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여러분은 선과 진리에 관한 옛 교회 속의 품질에 빠져 자기 삶의 영으로 만들어 버린 이들로부터 새교회인을 만들 수 없다. 옛 조건은 새 삶을 위한 그릇으로는 어울리지 않기 때문이다.

두 비유의 연결

앞의 비유와 오늘 비유, 두 개를 동시에 생각해 보면 연결이 있음을 보게 된다. “반석 위에 지은 집과 모래 위에 지은 집”의 비유에서는 진리를 알았으면 그 진리에 의거 살아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다. 옷과 포도주에 관한 비유는 옛 교리와 그 삶의 상태를 가지고는 새 진리, 새 삶을 붙잡을 수 없음을 가르치고 있다. 새 진리를 삶에서 실지로 받기 위하여 우리는 거듭남 속에서 새로운 것을 만들어야만 한다. 우리는 자신을 새 진리의 수준까지 들어올려야 한다. “너희가 이것을 알고 또 그렇게 행한다면, 너희는 행복하다.”

3
장터에 있는 아이들
-주님의 초대에 대한 인간의 응답-

성서 본문: 마태복음 11장 16-19절

16. “이 세대를 무엇에 비길 수 있으랴? 17. 마치 장터에서 아이들이 편갈라 앉아 서로 소리지르며 ‘우리가 피리를 불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았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가슴을 치지 않았다’ 하며 노는 것과 같구나. 18. 요한이 나타나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으니까 ‘저 사람은 미쳤다’ 고 하더니 19. 사람의 아들이 먹기도 하고 마시기도 하니까 ‘보아라, 저 사람은 즐겨 먹고 마시며 세리와 죄인하고만 어울리는구나’ 하고 말한다. 그러나 하느님의 지혜가 옳다는 것은 이미 나타난 결과로 알 수 있다.”

글자적 의미

글자 의미에서 “이 세대”란 유대인을 가리키고 있다. 주님은 개인적으로 볼 때, 유대인들에게 나타나셨고, 그들과 함께 생활하셨다. 그러나 “그분이 그들 앞에서 많은 기적을 베푸셨음에도 그들은 그분을 믿지 않았다.” 더욱이 그분은 유대인들에게 “경멸을 받으시고 거절되어지셨다.” 주님은 탄생하실 때 “머무를 방이 없었기 때문에 아기는 포대기에 싸서 말구유에 눕혀” 지시기도 했다. 그리고 그분의 성년 시절을 두고 하신 말씀, “여우도 굴이 있고 새도 보금자리가 있건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 둘 곳도 없다”고 하셨다.
말씀이 유대인들에게 주어졌고, 예수님이 그분의 신성한 권능을 보이셔서 그들로 그분의 권능을 인정하게끔 되어 있었지만, 그들은 그 권능이 악마인 베엘제불에게서 온 것이라고 소문을 퍼트리기도 했다. 이렇게 해서 그들은 주님을 거절했고 그분의 영향을 파괴해 보려고 애썼으며 결국 그분을 십자가에 매달았다. 주님이 그들에게 회개와 개혁을 요구하셨지만 그들은 여전히 악 속에 머물고 있었다. 주님께서는 천국의 보물을 보고 즐거워하도록 해주셨지만, 그들은 그분의 보물은 물론 그분 자신에 대해서까지도 코웃음을 쳤다.

내향적인 뜻

영적 의미에서, “이 세대”라는 단어는 유대인 같은 사람들, 그들 같은 품성을 가진 이들, 즉 하느님의 말씀에 대한 가르침을 알고, 그분의 권능을 보았으면서도 심정과 생활에서 그분에게 속한 것을 거절하는 이들을 가리키고 있다.
이런 마음들이 “세대”라 불려진다. 그 이유는 인간의 내용물은 악한 어떤 원리로부터 태어나 대를 잇고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유대인을 두고 말하셨을 때 같이, 인간의 “조상”은 악 속에 머물고 있었던 것이다. 모든 다른 사람들같이 유대인들도 자연적으로는 악 속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그들은 회개나 개혁을 수단으로 주님으로부터 다시 태어나는 재생을 하지 않았다. 그들에 대한 문제점은 교리에 무식해서가 아니라 말씀이 가르치는 삶을 기꺼이 영위하지 않으려는 심정에 있었던 것이다.

아이들

“아이들”이란 작은 영들, 말씀 속의 원리들, 즉 순진과 이타애 속에 든 선과 진리들, 또는 어린 시절로부터 주님에 의해 인간 내면에 담겨진 선과 진리의 상태를 말한다. 새 교회의 용어로는, 이 원리나 상태들을 “아껴 두신 것, remains”이라 부른다. 이것은 천국에 속한 것들인데 인간 마음에 계속 남아 있어 인간이 거듭날 수 있게 해준다. 이것은 삶을 오래 살았다고 해서 있어지는 것이 아니라, 사랑과 생각에 의해 성년기까지 성숙되어 간다. 이것은 아주 어린 아이들이어서 우리 속에서 뭔가 쓸모 있게 된다거나 성숙되려면 우리의 조심스런 돌봐줌을 필요로 한다. 이것은 우리가 확증해 버린 삶의 어떤 원리 안에 있지 않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가 확증해서 우리 속에 고정되는 삶의 구체화 속에 존재하려고 애쓴다.
이런 목적 측면 때문에, 그들(children, remains)은 장터에 앉아 있으면서 자기들의 동료를 찾는다. 이것을 통해 우리가 거듭나도록 주님은 부르신다. 그래서 그분은 우리가 “들을 귀”가 있는 한 계속해서 부르시고 계신다. 이 작은 것, 아이들을 수단으로 그분은 우리 속에 그분이 거하실 방을 마련하시려고 애쓰신다. 이 방에서 이 작은 것, 즉 아이들은 우리의 성장과 더불어 성장하고 우리의 강함과 더불어 강해져 성숙된 성년으로 자라, 우리들로 성령과 교통하게 한다. 그리고 이 성령은 우리의 유일한 하느님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한 인성에서 근원된다.

제 동무를 부름 (calling to their champions)

이 아이들, 즉 “아껴 두신 것, remains”이 “자기 동료”를 부른다. 그들은 이미 우리 속에 고착된 것들, 즉 이기심(self-hood)이나 자아(proprium)에 속한 것들에 동무하자고 호소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인간의 마음속에서 확증된 삶의 원리는 무엇이든 간에, 또는 마음속에서 성년이 된 것은 무엇이든지 계속 마음속에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비록 다른 원리에 의해 균형을 이룬다던가, 수식된다 해도, 한번 확증되어 자리잡은 삶의 원리는 제거되지 않는 게 특성이기 때문이다. 인간이 자신 스스로 살아온 것들, 그래서 그것이 자기의 일부가 된 것들, 이것들 모두는 제각기 각자의 집을 이룬 인생 건축 자재들이다. 그가 건축하는 대로 인격은 형성되는 것이다.
아이들, “아껴 두신 것,” 즉 마음속에 든 말씀의 원리들은 마음속의 다른 아이들을 “제 동무가 되라고 부른다.” 다른 아이들이란 지금 커 가고 있고, 고착되지 않았으며, 성숙되지 않은 삶의 종류나 자연적인 마음속의 원리들이다. 이 원리에 호소하는 이유는 그 원리들은 아직 어려서 질서 있는 방법으로 훈련이 가능하고 훈련된 그대로의 형성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우리 속의 주님이 아껴 두신 것들, 영적 아이들을 수단으로 주님은 우리 마음속의 자연적인 원리들에 섭리하신다. 이 원리들이란 지금 발달되고 있는 것들, 푸르고 연약한 가지 같아서 잘 구부려 지므로 보기 흉한 자연적 경향성들에서 탈피될 수 있는 특성이 있다. 내적인 것들은 영적 마음에 소속되어 있으나, “동무”들은 자연적 마음속의 원리들이다.

장터 (market)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있다”고 본문은 말하고 있다. 장터란 물건을 사고 팔고, 교환하려는 이들을 위한 번잡하고 교통량이 많은 지역이다. 자연적인 삶에 필요한 것들은 영적인 삶에 필요한 것들, 즉 인간 마음을 먹이고 옷입히는 영적 원리들과 상응된다.
자연적인 것들을 사고 팔고, 교환하는 장소는 인간이 영적 삶에 속한 것들을 자신에게 조달하는 상태를 표현한 것이다.

주님의 본보기

주님은 장사라는 측면에 관해 또 다른 본보기를 주고 계신다. 그분은 자아 신뢰를 포기하시고, 그 대신 주님 신뢰를 획득하셨다. 주님은 그분 스스로 자랑을 팔아 치우시고, 시련에 의해 겸허함을 매입하셨다. 주님은 그분의 온유하심을 위해 그분의 성마름을 팔아 치우셨다. 세상적 보물에 대한 연민은 느슨하게 하시면서 천국의 보물을 꽉 붙드셨다.

정신적인 장터

인간이 위와 같은 교환을 수행하며 추구하는 마음 상태가 거래와 교환이 있는 “장터”로 본문에서 나타나고 있다. 이 장터란 우리의 합리적 능력이다. 이 능력 속에서 모든 것이 검사된다. 그 속에서 우리는 자기가 원하는 것을 추구한다. 자기의 합리적 능력을 사용하는 가운데, 인간은 그가 주님의 말씀 속에서 본 선하고 진정한 원리들을 음미하고 받아들여 자기 것으로 만든다.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있다”는 것은 “아껴 두신 것,” 즉 주님에 의해 우리의 내면(interior)에 아껴 놓으신 거룩한 말씀 속의 원리들이 우리에게 오는 변화의 상태, 변화의 시기에 작동할 태세가 완비되었음을 말한다. 이 변화의 시기란 우리가 새 원리를 합리적으로 검사하려는 때이고, 이미 가진 것들을 팔아 치우고 새 원리를 사고 싶어하는 때, 합리적으로 생각하는 때, 그 생각을 생활 속에 반영하려는 때, 영적 필요성을 느끼는 때, 종합해 보면, 영적인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되어 그것을 얻어 보아야겠다고 작정하는 때, 따라서 마음이 열려 있어 검사하여 받을 준비가 된 때, 이런 때들이 장터에 아이들이 앉아 있는 모습이다.

예증

위의 의미를 두고 주님은 이렇게 말하셨다. “너는 나에게서 불로 단련된 금을 사서 부자가 되고 나에게서 흰옷을 사서 입고 네 벌거벗은 수치를 가리우고 또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눈을 떠라” (요한계시록 3:18). 그리고 부자 청년에게 말하시기를,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가서 너의 재산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어라. 그러면 하늘에서 보화를 얻게 될 것이다. 그러니 내가 시키는대로 하고 나서 나를 따라 오너라.”

정신적인 앉음 (mental sitting)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있었다.” 앉음은 서 있는 것이나 걷는 것보다 더 부동적인 자세다. 앉음은 의지 또는 사랑의 상태를 표현한다. 그 이유는 의지가 한번 자리를 확보하면 어떤 상태로 굳혀지기 때문이다. 서 있다 함은 지적인 상태, 또는 이해성, 생각함이라는 긴 연속의 한 토막, 움직이기 직전의 준비 등을 표현한다. 그러므로 영적 의미에서 앉아 있다는 것은 정신적인 상태가 더 영구적이다는 말이 된다.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있다”는 것은 “주님이 우리 속에 아껴 두신 것, remains,” 또는 주님이 우리 의지 속에 저장해 두신 말씀 속의 원리들을 수단으로 주님께서는 인간으로 거듭날 수 있게 할 기회를 영구적으로 갖고 계심을 말한다. 또한 이런 수단에 의해 주님은 인간과 언제나 함께 하실 수 있으시며 언제든지 인간의 의지에 작용하시어 인간 마음이 거듭나는 쪽으로 인도하실 수 있으시다.

영적인 부름(spiritual sitting)

자연적인 측면에서 사람들이 정신적인 장터에 가게 될 때, 그는 그곳에서 자기의 탐욕이나 거짓이 좋아할 것들을 획득하기를 바랜다. 그러나 “장터에 앉아 있는 아이들”은 “제 동무를 부를” 뿐이다. 즉 우리의 내면(interior) 속에 저장된 하느님의 거룩한 말씀 속의 선과 진리는 지금 발달되려 하는 자연적 마음속의 원리들을 부르고 있고, 악과 거짓된 것을 구매하려 하는 우리 속의 경향성들에게 그것을 사지 않도록 경고하면서 천국적인 인격에 관한 것들만을 구매하라고 촉구한다는 말이다. 우리가 주저하고 있을 때 우리 속의 아이들이 우리를 불러 이르는 말, “너희 목마른 자들아, 오너라. 여기에 물이 있다. 너희 먹을 것 없는 자들아, 오너라. 돈 없이 양식을 사서 먹어라. 값없이 포도주와 젖을 사서 마셔라. 그런데 어찌하여 돈을 써 가며 양식도 못되는 것을 얻으려 하느냐? 애써 번 돈을 배부르게도 못하는데 써 버리느냐? 들어라, 나의 말을 들어보아라. 맛 좋은 음식을 먹으며 기름진 것을 푸짐하게 먹으리라. 귀를 기울이고 나에게로 오너라. 나의 말을 들어라. 너희 영혼이 살리라”(이사야 55:1-3).
영적인 마음은 천국의 형상을 따라 이루어진다. 자연적인 마음은 영적 마음의 모양을 따라 형성될 것이다. 선과 진리에 관한 내적 원리들의 구체화는 자연적인 애정, 생각, 그리고 행동과 상응을 이룬다. 그래서 우리의 영적 마음을 통해 역사 하시는 주님은 좋은 영혼을 형성하게 해 줄 좋은 소식을 영적 마음을 통해 자연적인 마음에로 내려 보내신다. 그러나 우리가 자연적인 삶만을 위해 살고 있다면, 우리는 스스로 자연적인 마음 문을 닫아걸게 되어 더 높고 더 사랑스러운 삶에 관해 말하는 영적 마음의 속삭임을 전혀 들을 수 없게 된다.

부름과 말함 (calling and saying)

영의 아이들이 “부르고” “말한다”고 적혀 있다. 소리의 억양을 가지고 “부른다”는 것은 의지 또는 애정에 호소하는 것을 말하고, “말한다”는 것은 지성 또는 생각에 호소하는 것을 암시한다. 그러므로 “부르고” “말함”은 심정과 지성 양쪽에 결합되어 영향력을 발휘하는 것을 말한다.

피리 붐 (piping)

“우리가 피리를 불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았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가슴을 치지 않았다.”
악기에는 현악기와 관악기가 있다. 현악기의 소리는 각 줄이 제각기 한번씩 소리를 낸다. 그래서 악기의 종류는 따로 따로 구분되는 우리의 생각과 비슷하다. 따라서 현악기는 우리 삶의 영적 수준, 진리, 생각과 상응된다. 그러나 관악기의 소리는 계속적이어서 한 음이 길게 연장되면서 키에 의해 다양해진다. 그래서 이 소리들은 우리의 애정들 같아서 계속적으로 흘러 나가면서 음조도 다양해진다.
피리(pipe)는 갈대(reed)로 된 관악기이다. 그러므로 피리는 의지의 생명인 애정적인 것과 관계가 있다. 본문에서 있게 되는 피리를 부는 음악이란 주님이 우리 속에 이식해 놓으신 “주님이 아껴 두신 것들” 즉 본문의 “아이들”에 존재하게 되는 내적 하모니를 표현해 준다. 이와 같은 하모니는 천적 애정 또는 내적 사랑에서 있어지고, 우리 속의 선과 진리의 상태 속에 포함되어 마음의 내용물 안에 저장되어 있다. 거룩한 말씀 속의 것들이 “장터에 앉아,” 자기 동무들에게 “피리를 불고 있다.” 다시 말해 “아껴 두신 것들,” 말씀 속의 원리들은 인간의 품성이 형성되고 발달되는 동안 인간과 더불어 거주하면서 성장하는 인간의 자연적인 원리들에 호소한다는 말이다. 그리고 내적인 것들이 내적인 하모니와 행복을 추구하면서 자연적인 마음에 대해 그 행복과 하모니를 받아서 추구해 보지 않겠느냐고 부른다는 말이기도 하다. 내적인 것들, 주님이 아껴 두신 것들, 말씀 속의 원리들은 거듭난 삶의 영화로움에 관한 것을 자연적 마음에 자꾸 말해 준다는 말도 된다. 이것이 “피리를 분다” 또는 피리로 음악을 만든다는 뜻이다.

춤추다 (dancing)

그래서 그들은 이 음악에 맞춰 “춤추도록” 자기 동료, 동반자를 부르고 있다. 춤춘다는 것은 신체가 기뻐하는 활동, 특별히 손,발이 기뻐하는 것이다. 이는 마음이 기뻐하여 둥둥 뜨는 느낌에 대한 신체적 응답으로 음악에 의해 야기되거나 어떤 좋은 소식 등등에 의해 흔히 있어진다. 손과 발(lower limb)은 마음의 보다 낮은 부분들, 즉 자연적 마음과 상응된다. 그러므로 춤은 자연적인 마음이 느끼는 적극적인 즐거움이나 기쁨과 상응되는데, 이런 즐거움이나 기쁨은 영적 마음의 내적 하모니가 유입(influx)에 의해 자연적인 마음에 내려와질 때 있어진다. 다시 말해 영의 아이들, 마음속에 저장된 “아껴 두신 것들”이 그들의 동무들, 자연적인 마음속에서 발달하려는 원리들에게 피리를 불 때에 있어진다는 말이다.

합리적인 마음

위의 일이 있게 되는 곳, 장터란 마음의 합리적인 원리이다. 즉 선하고 올바른 것은 받아들이고, 그렇지 않은 것은 거절하는 마음의 능력, 생각하고 느끼는 것을 비교하고 참작하는 마음의 능력이다.
이 합리적인 원리는 영적이고 자연적인 마음 사이에 위치한다. 이곳은 장터와 같이 교환이 이루어지는 바, 영적인 마음의 아이들이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고, 자연적인 마음이 아래에서 위로 올라감으로서 만나는 장소이다. 그래서 자연적인 마음이 영의 아이들의 소리에 유의하게 되면, 양쪽에 기쁨이 있게 된다. 그 이유는 영의 아이들은 자기들의 기쁨을 나누어 가지기를 매우 즐거워하기 때문이고, 자연적인 마음의 아이들은 이런 영의 기쁨을 받기를 즐거워하기 때문이다. 그 결과, 피리 부는 소리에 맞춰 춤을 추게 되는 것이다.

비유의 역사적 적용

유대인들에게는 구약성서의 말씀이 주어졌었다. 그리고 주님은 그들 앞에서 기적을 베푸셨다. 그러나 그들은 말씀 속의 진리가 만드는 천국의 하모니를 감지 못했고, 내적인 것들의 유입에 따라 그들의 자연적인 마음을 기꺼이 질서 있는 상태로 바꾸지도 못했다. 그들은 오로지 말씀의 글자를 받들어 모신다고 고백하기만 했다. 오히려 그들은 말씀의 글자를 해석한다 하면서 자기들의 악에 동조되도록 해석했을 뿐, 말씀의 글자 속의 영은 하나도 받지 않았다.

비유의 개인적 적용

위의 유대인의 경우 같이, 영적 “세대”에 있는 모든 이, 그들과 같은 악과 거짓 속에 있는 오늘날의 모든 이에게도 같은 적용이 있게 된다. 각자가 자기를 자세히 살피면 우리 모두에게 아주 많이 널려 있기도 하다. 우리의 자연적인 마음은 세상적인 관심사로 꽉 차 있어 영의 호흡을 붙잡는데 매우 느리다. 장터에 앉은 귀중한 영의 어린이들은 자연적인 마음의 원리들에게 피리를 불어서 내적인 선과 진리의 천국적인 아름다움을 와서 보고 음미한 뒤 응답해 달라고 부르고 있다. 또한 천국적인 원리를 받아서 실생활에 응용해 보지 않겠느냐고 계속 묻고 있다. 그렇게 응용해 보면, 더 장엄하고, 더 자유롭고, 더 열정적이고, 더 높은 영의 삶이 출현되어 육체의 삶 역시 이와 같이 표현될 것이라고 권고한다. 또한 천국의 장엄한 하모니는 지상의 삶을 아름답게 해줄 것이라고 설명한다.
그러나 자연적으로 우리의 눈은 아래쪽만을 응시하고, 우리의 귀는 무디다, 그래서 비록 영적 원리들이 “경계를 더하며, 교훈에 교훈을 더하여” 가르친다 해도 우리의 자연적 마음이 영과 협력하는 데는 얼마나 느린지 경험이 입증한다. 천사의 소리가 영들에게 말했던 아름다운 것을 자연적인 평면에서 보다 강도있게 밀어붙이지 못하는 게 자연적인 마음의 상태들이다. 따라서 피리가 열심히 소리를 내는 데도 춤추지 않는다. 딱딱해서 좀처럼 벗겨지지 않는 차디찬 외용물이 우리를 덮고 있다. 서로 서로 동감하고 위로를 제공하는 것은 거의 없다. 한 마디로 땅 위를 걷되 서로가 서로에게 무관심한 것이 정상이 되어 있다. 세상적 성공밖에는 성공이라는 표준을 갖고 있지 않다.

천사들의 상태

그러면 천사의 영을 구체화한 삶은 과연 어떨까? 천국의 영적 하모니를 함유한다면 위와 같은 표준을 가질 수 있을까? 따뜻하고 자유로우며, 생기 있고 너그러운 인간애, 동정심으로 한 덩어리가 되는 삶, 기쁘고 반짝거리는 거룩함의 아름다움, 이런 영으로 자연적인 마음을 채워 기뻐 춤추는 데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한 순간만이라도 부드럽고 상냥하며 아름다운 천사의 외모를 볼 수 있다면 자연적인 마음을 씌운 딱딱하고 찬 뱀의 비늘 껍질을 벗어 던지지 못한 자신에 대한 부끄러움에 얼굴이 붉혀지고, 영의 아이들이 연주한 음악에 장단을 맞추지 않은 부끄러움을 가질는지 모른다.
무한한 인내를 가지고 예수님은 우리의 자연적인 마음의 문 앞에 서서 두드리고 계시며, 우리를 그분에게 결합되게 하시어 구원하며 복을 주시려고 애쓰고 계신다. 그리하여 천국의 아름다움으로 우리의 자연적인 인간까지도 채우시려 노력하신다. 아이들은 피리를 불고 있지만, 우리는 그 피리에 장단을 맞추는데 너무나 속도가 없다. 우리는 냉정하고 비수용적인 「나」(proprium)라는 것을 사랑한다. 그래서 그 「나」를 포기하되 마지못해 포기할 수밖에 없을 때에 당도해서야 겨우 포기한다. 천국적인 실체를 위해서도 「나」라는 것의 포기가 너무나 느리지 않느냐 말이다.

슬퍼함 (곡함, mourning)

아이들이 말한 또 한가지는, “우리가 곡을 하여도 가슴을 치지 않았다.” 아이들, 마음속에 저장된 “주님이 아껴 두신 것들”을 인간의 합리적인 지각과 이해성이 인간 속의 악하고 거짓된 자연적 상태의 슬픈 쪽을 돌아서서 보게 될 때 곡을 하게 된다. 그리고 속에 든 악을 회개하기 위해 가슴을 치라고 불러 댄다. 이 “아껴 두신 것들”을 통해 주님은 우리에게 우리 속의 자연적인 상태를 밝히 알게 해주시면서 아이들의 동무들, 발달되려는 자연적인 마음속의 원리들에게 악한 경향성에 저항하며 거기에 휩쓸리지 않도록 경고해 주신다.

가슴을 침 (한탄함, lamenting)

자연적인 마음이 슬퍼하는 소리를 들을 때, 그 마음이야말로 한탄의 소리가 있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죄를 깊이 뉘우치는 겸허 속에 있어져야 되고, 자신의 악들을 인정하고 주님의 거룩한 말씀을 통해 주님에게서 오는 도움과 안정을 찾으려 해야 할 것이다.
유대인들은 이와 같이 가슴을 치지 않았다. 세례자 요한은 회개하라고 외쳤다. 예수님께서는 구원을 제공하셨다. 그럼에도 이 두 가지 모두는 거절되고 죽음에 몰아넣었다.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피리를 불었지만, 그들은 춤추지 않았다. 요한이 말씀의 글자를 표현하고 있다는 측면에서 보면, 요한의 말들은 우리에게 회개를, 단식을, 투쟁을 해서 에집트를 빠져 나와 광야를 통과하라고 부르고 있다. 요한과 비교해서 볼 때 예수님은 말씀 글자의 영을 표현하시고 있다. 예수님의 말씀은 인간에게 천적인 삶의 상태, 약속된 땅, 사랑과 지혜로 가득 찬 보물, 영의 잔치가 마련되어 있음을 인간에게 소개하시고 계신다. 글자대로의 율법같이 세례자 요한은 우리에게 해서는 안되는 것, 일상 생활의 개념을 만드는 규정들에 우리의 시선이 모아지도록, 그리하여 영적 질서에 우리를 가져다 놓도록 하기 위해 온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가 그분이 지시하는 삶에 들어갈 준비를 하려고 한다면 우리가 해야 될 것을 보여주시기 위해 오셨다. 그분은 천국이 무엇인지 그 안에 들어가려면 무엇을 해야 되는지 보여 주셨다. 회개라는 요한의 세례를 수행할 때만이 우리는 새 삶 속으로 예수님을 따라갈 준비를 해놓은 것이다. 우리가 비질서인 낮은 본성을 키우려고 열심히 먹이던 것을 멈출 때, 우리는 천국에서 내려보낸 빵으로 우리 삶을 먹여 살려 더 높은 삶, 주님의 잔치에 참석하게 된다.

천국은 모든 이에게 열려 있다

이 비유의 아름다움 속에서 우리가 보게 되는 것은, 주님은 인간으로부터 천국을 보류해 놓고 계시지 않으시다는 것, 오히려 주님은 우리 심정과 이해성 그리고 삶 속에 모든 사랑과 지혜 그리고 실지의 기쁨을 부어 주고 계신다는 것, 우리는 주님이 주시는 모든 것을 기쁘게 받아 살아야 한다는 것, 그리고 우리가 자신에게 주어지는 기회에 게을러 있을 때조차도, 혹은 우리가 그분께서 제공하는 은혜를 거절하는 때조차도, 그분은 우리 앞에 놓으신 주님의 주제를 언제나 유념 하시어 온갖 방법을 다 동원하신다는 것, 그분의 무한한 경륜 속에서 모든 기회를 다 사용하시어 우리의 악을 경고해 주시고 천국을 소유하는 승리를 갖게 해 주시려 우리와 함께 하고 계신다는 것이다. 그분은 모든 이를 위해 그분의 은총을 주시고 계신다. 그러나 그것을 즐길 수 있는 자, 자신 스스로 천국 안에서 기꺼이 살려는 자, 자신 스스로 악과 죄를 끊으려는 사람 만이 그분의 은총을 받을 수 있다. 천국은 인간 자신의 바램에 일치되는 것들 속에서 만들어지는게 아니라, 천국적인 품질의 삶에 자기의 바램을 순응시킬 때 가능해진다.

지혜 (wisdom)

“그러나 하느님의 지혜가 옳다는 것은 나타난 결과로 알 수 있다. But wisdom is justified of her children. 지혜는 그 행한 일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는다.” 지혜의 결과(자녀들)란 지혜에서 태어난 삶의 원리들이다. 이 원리들은 정당화되고, 의를 만들며, 공의이다. 선하고 진정한 원리들은 그 열매로 그 원리의 옳음을 입증하며 거듭나는 삶의 질을 말해 준다. 우리가 창조된 것은 천국을 위해서이다. 따라서 우리가 뜻한다면 우리는 천국에 도달될 수 있다. 우리의 마음에는 미발달된 능력, 우리 영 속에는 탐험되지 않아 아직 높이를 모르는 산들이 수두룩하게 있고, 이 속에 주님은 계시면서 온갖 방법을 동원하시어 우리의 의식을 일깨워 인도하신다. 자기가 자기를 다 아는 듯 여기지만 실상 인간은 인간 본성의 초보 단계밖에 아는게 없다. 모든 천국은 우리에게 열려 있고 우리를 맞으러 내려오고 있다. 우리를 승리하게 하는 것은 “하느님만이 선하시다는 것을 알고 음미하는 것” 뿐이다.
어린 아이가 즐거울 때 껑충 뛰며 좋아하듯, 자연적인 마음은 높은 사랑의 삶이 우리 속 아주 우묵한 곳까지 꿰뚫어 보는 것에 진한 만족을 발견하고는 그 기쁨의 표현이 어린 아이처럼 당연히 있어져야 할 것이다. 합리적 생각이라는 장터에 앉아 회개와 개혁을 촉구하는 영의 아이들의 소리를 우리는 얼마나 소홀히 하고 게을리 하여 지나쳐 버렸는가? 성경에서 오는 모든 신성한 진리는 우리 속 천박한 성품에 대고 곡을 하는 한편, 천국 삶의 영화로움에 대해서는 피리를 불고 있다. 주님의 특사가 바로 말씀 속의 진리이다. 주님을 사랑하는 자, 그분과 함께 살 자들에게 주님은 이 특사를 보내시어 진리의 지식을 축적시켜 주시고 그 지식을 응용하도록 부르고 계신 것이다.
주님의 초대장, 주님의 경고장을 받지 못한 이는 세상에 아무도 없다. 어떤 인간이 거듭나는데 실패한다면, 그것은 그가 주님의 경고나 권유를 소홀히 취급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 삶에 허용되는 훈계는 자아 추구에서 돌아서는 거듭남을 위한 기회들이다. 그리하여 우리에게 회개를 촉구하며 천국을 소개하는 영 속의 아이들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우리가 주님의 분부, 말씀 속의 진리를 소홀히 한다면, “주여, 주여”하고 밤낮 불러 봐야 헛일이다. 그 이유는 천국의 어린이로서 천국에 우리가 알려져 있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우리는 거룩한 말씀 속의 진리에 의해 심판되어진다. 애석한 것은 이런 사항을 알고도 우리는 주님의 말씀에 여전히 게으르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에게 또 되풀이되는 말, “우리가 피리를 불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았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가슴을 치지 않았다.”

4
씨 뿌리는 사람
– 인간 수용성의 다양함 –

성서 본문: 마태복음 13장 3-8, 18-23절

3. 예수께서 그들에게 여러 가지를 비유로 말씀해 주셨다. “씨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리러 나갔다. 4. 씨를 뿌리는데 어떤 것은 길바닥에 떨어져 새들이 와서 쪼아 먹었다. 5. 어떤 것은 흙이 많지 않은 돌밭에 떨어졌다. 싹은 곧 나왔지만 흙이 깊지 않아서 6. 해가 뜨자 타 버려 뿌리도 붙이지 못한 채 말랐다. 7. 또 어떤 것은 가시덤불 속에 떨어졌다. 가시나무들이 자라자 숨이 막혔다. 8. 그러나 어떤 것은 좋은 땅에 떨어져서 맺은 열매가 백 배가 된 것도 있고 육십 배가 된 것도 있고 삼십 배가 된 것도 있었다.”
18. “이제 너희는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가 내포한 뜻을 들어 보아라. 19. 누구든지 하늘 나라에 관한 말씀을 듣고도 깨닫지 못할 때에는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려진 말씀을 빼앗아 간다. 길바닥에 떨어졌다는 것은 바로 이런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이다. 20. 또 돌밭에 떨어졌다는 것은 그 말씀을 듣고 곧 기꺼이 받아 들이기는 하지만 21. 그 마음 속에 뿌리가 내리지 않아 오래 가지 못하는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이다. 그런 사람은 그 말씀 때문에 환난이나 박해가 닥쳐 오면 곧 넘어지고 만다. 22. 또 가시덤불에 떨어졌다는 것은 말씀을 듣기는 하였지만 세상 걱정과 재물의 유혹이 말씀을 억눌러 열매를 맺지 못하는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이다. 23. 그러나 좋은 땅에 떨어졌다는 것은 그 말씀을 듣고 잘 깨닫는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이다. 그 사람은 백 배 혹은 육십 배 혹은 삼십 배의 열매를 맺는다.”

마음은 흙과 같다 (minds are like soils)

주님께서는 모든 인간에게 그분의 선물을 자유롭게 받도록 배려해 놓으셨지만 그 선물을 받게 되는 인간의 마음은 다양하다. 이것이 이 비유의 중심 되는 진리이다. 인간의 마음은 흙과 같다. 그러나 이 위에 뿌려지는 씨를 수용하는 것은 각기 다르다.

주님의 비유 설명

우리 주님은 이 비유에 관해 일반적인 설명을 그분 스스로 주시고 계신다. 그럼에도 새교회의 빛 속에서 우리는 옷을 더 벗은 진리, 더 발달된 영적 의미를 명확히 보게 된다.
우리 주님이 지상에 계셨을 당시의 인간들의 마음은 외적 상태(external state)에 있었다. 그래서 높은 국면에서의 진리를 산출할 수 없었다. 그러나 지금, 주님의 재림에서, 인간은 진리의 영적 국면 까지 볼 수 있도록 합리적인 시야가 주어지고 있다.

씨 뿌리는 사람과 씨 (the sower and the seed)

씨 뿌리는 사람은 주님 자신이시다. 씨는 그분의 말씀 속에 든 진리이다. 진리들이 인간의 마음에 뿌려지는 그 때란 인간이 주님의 말씀을 읽거나 들을 때, 또는 말씀의 가르침들이 어떤 방법으로든 인간과 교통하는 때에 이루어진다. 씨에 발아력이 있듯 진리에는 생명력이 있다. 이 씨가 옥토에 심어지면 그 성장 과정은 경이로운 기적을 창출해 낸다. 수용하는 마음 안에 뿌려진 진리는 그 진리가 수확을 거둘 때까지 연속적인 단계를 통해 성장한다. 씨 같이 모든 진리는 그 속에 새 진리를 번식시키는 능력을 함유하고 있어 그 진리를 불멸하게 한다. 그래서 씨는 주님의 속성 중에서 무한하심, 언제나 창조해 가고 계신 것, 결코 죽지 않으시는데 대한 형상인 것이다.
씨는 주님의 말씀이다. 최고 높은 측면에서 보면 주님 자신은 말씀(the Word)이요, 인간에게 내려오는 신성한 진리(Divine Truth)이다. 그러므로 진리라는 씨 속에서 주님은 우리에게 그분 자신을, 그분의 영과 생명을, 신성한 사랑의 생동력을 주시고 있다.
사람의 아들(the Son of Man), 육을 입으신 신성한 진리의 측면에서 주님은 “씨를 뿌리러 나가셨다.” 즉 영적 죽음을 재촉하는 인간을 구하시기 위해 세상에 오신 것이다. 인간 마음의 밭에 그분의 말씀인 살아 있는 씨를 뿌리시기 위해 오신 것이다.
넓은 측면에서 볼 때, 씨 뿌리는 사람으로서의 주님은 모든 시대에, 모든 그분의 처방 속에서의 모든 사람에게, 더욱이 인간의 영적 진보의 모든 단계마다에 씨를 뿌리고 계신다.

밭 (field)

씨 뿌리는 사람의 작업 전후에 있는 들판을 보라. 씨를 뿌리는 사람이 오기 전, 들판은 비록 사용될 준비가 완료되어 있다 해도 어떤 사용도 수행되고 있지 않다. 밭을 가는 사람이 토양을 잘 마무리해 놓았을는지 모른다. 그러면, 이제 영적으로 씨뿌리는 사람인 주님이 오시기 전과 후의 인간 마음을 보라. 주님이 강림하시기전 인간 마음의 상황은 얼마나 비생산적이었는가? 그러나 우리 주님이 씨 뿌리는 사람으로서 일하신 뒤, 인간 마음은 얼마나 변화를 일으켰는가?
그래서 씨를 뿌리기전 밭을 갈아 논 상태와 같은 것이 세례자 요한이 세상에 와서 주님의 강림을 위해 인간을 준비시키고자 그들에게 세례와 회개를 촉구하여 삶을 수정해 놓은 모습이다. 그야말로 요한은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요,” “주의 길을 닦고 그의 길을 고르게 하라”는 이사야의 예언에서도 정확히 표현되고 있다. 철로된 농기구란 글자 그대로의 명령 속에 있는 진리들이다. 이를 가지고 요한은 그의 시대에 있는 사람들의 마음인 딱딱한 밭의 흙들을 짓부수웠다. 그래서 요한에 의해 정신적인 바탕이 골라진 뒤, 예수님께서 영적 진리라는 씨를 뿌리신 것이다.
말씀의 글자가 요한이다. 그의 일은 말씀의 영적 의미를 가지고 오시는 예수님의 일을 준비하는 것이었다. 말씀의 글자란 영적 의미라는 알맹이를 보호하고 있는 씨의 껍질에 해당된다. 인간에게 영혼과 육체가 동시에 필요하듯 말씀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유입 (흘러듦, influx)

선한 원리들이 어떻게 인간 마음속에서 결실을 맺는지, 어떻게 진리들이 번성하게 되는지 이해해 보기 위해서, 우리가 먼저 알아야 될 것은 천국이 인간 마음에로 어떻게 흐르는(inflowing)가에 대해서이다. 모든 사람은 자기 마음에 두 분과, 또는 두 마음, 즉 내향적(inward, 영적, spiritual) 마음과 외향적(outward, 자연적, natural) 마음을 가지고 있다. 진리를 진리로서 알아보는 인간의 능력인 합리적 능력은 영적 마음과 자연적 마음 사이에 놓여 있다. 그래서 이 능력이 두 마음들로 서로 통하게 해준다. 그리고 인간이 영적인 것에 열릴 때, 계속적인 교류를 간직하게 해준다. 그러나 인간이 출생할 때, 그의 자연적 마음이 열리어지지만 그의 영적 마음은 그가 거듭남에 의해 열리어진다.
우리의 내향적 영 안에서 주님은 우리의 영적 선을 위해, 그리고 우리가 모르는 길을 통해 역사 하신다. 그러나 우리의 외향적 마음과 삶 안에서 우리가 그분의 명령을 간직하는 가운데 우리는 그분과 협동하여 역사 한다.
우리가 심정과 지성을 주님에게 열 때, 그분은 우리 속에 있는 그분의 비밀스런 거처에서 나오시어 우리를 만나러 내려오신다. 그리고 우리가 그분을 자유롭게 영접하여 그분과 협동할 때, 그분은 우리의 안과 밖, 양쪽에서 우리를 인도하신다. 그제야 우리 자신의 내향적 마음의 문은 열리어 있어 거듭나는 영인 내향적 삶 속에서 우리가 그분과 함께 거하게 된다.

합리적 능력 (the rational faculty)

합리적 능력은 주님이 우리 영의 비밀스런 문이 열리도록 만드는데 사용하시는 수단이다.
그러므로 합리성에 주님이 호소하심은 지성에만 호소하시는게 아니라 우리의 총명을 통해 심정에 호소하시는 것이다. 따라서 이는 이해성을 통하여 전체 인간(whole man)에 대한 호소이다.
악의 영향력은 우리의 자아 사랑에 악의 열정과 편입견을 가지고 호소하나, 주님은 우리의 내향적 삶의 입구를 지키는 합리적 총명에 호소하신다. 따라서 주님의 진리를 얼마나 수용하느냐에 따라 우리의 영적 상황은 달라지게 된다.
우리가 신성한 진리를 받게 될 때, 또는 영적 생명을 받게 될 때 그 진리를 얼마만큼 받느냐와 수용 태도의 품질 여부에 따라 받아진 그 진리는 각양 각색이 된다. 반대로 우리가 주님의 진리를 거절하면 그만큼 우리는 영적 생명에 대해 심정과 이해성을 닫는 것이고, 우리가 의식하는 삶을 주님이 조절하시는 것에서도 그만큼 잠궈지게 한다.
비유가 우리에게 가르치는 바, 인간이 진리라는 씨를 받는데 몇 가지 방법이 있다는 것, 씨 뿌리는 가장 크신 분으로서의 주님은 모든 이들에게 광범위하게 뿌리고 계신다는 것등이다.

길바닥

“어떤 것은 길바닥에 떨어져 새들이 와서 쪼아먹었다.”
아주 큰 밭에는 몇 방향으로 이 밭을 가로지르는 딱딱하게 다져진 도로가 있기 마련이다. 이 길이 본문에서 말하는 “길바닥”이다. 씨 뿌리는 사람이 광범위하게 뿌릴 때 얼마의 씨는 이 길바닥에 떨어지게 되고, 이 바닥은 딱딱해서 씨가 흙 속에 묻히지 못하고 만다. 이 씨가 짐승이나 사람이 밟아서 뭉개지지 않는 한 이내 새들에 의해 먹히우고 만다.
좋은 의미에서 “길”이란 진리, 정신적인 길, 이 길로해서 마음이 여행하는 것, 삶의 원리들을 말한다. 그래서 시편은, “나는 당신의 증거들의 길에서 기뻐합니다.” “제가 당신의 진리에서 걸을 수 있게 나를 가르치소서 주여…”라고 노래한다.
그러나 나쁜 의미에서, 길은 사악한 자의 길, 거짓된 길, 거짓, 또는 거짓 원리들을 말하기도 한다. 그래서 노래하기를 “당신의 교훈을 통해서만 저는 이해를 얻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모든 거짓된 길을 미워합니다.” 모든 악한 마음은 거짓된 길을 걷고, 마치 딱딱하게 다져진 통로 같아서 진리의 씨를 거절한다.
쿵쿵거리며 걷는 우리의 이기적인 열정은 언제나 우리 마음에 있는 단단한 길로 옷을 지어 입고 있으면서 비질서적인 삶에 의해 확증되어진다. 생각의 거짓된 방법 속에서 진리의 씨는 어떤 인상도 남겨 줄 수 없고 성질이 맞는 토양도 발견할 수 없다.
길바닥에 떨어지는 씨 같이 주님의 말씀을 영접하는 이들에게 진리를 사랑하는 마음(affection)이 있을 리 만무하다. 따라서 진리에 무관심하다. 길을 따라 걷는 여행자들은 자기들이 짓밟게 되는 씨에 무관심이듯, 진리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자기들 생각 속에 우연히 떨어진 진리에 진지한 흥미를 갖지 않는다. 한 마디로 진리는 그 사람 마음에 잡혀지지도 않으며 그 마음에 심어지지도 않는다. “누구든지 하늘 나라에 관한 말씀을 듣고도 깨닫지 못할 때,” 그는 그 말씀을 갖고 싶어하지도 않으며 심정으로 그것을 이해하지도 않을 것이다.

새 (fowl)

“새들이 와서 쪼아먹었다.” “새”란 마음속을 날아다니는 것들, 즉 생각을 표현한다. 오늘 비유에서 새는 나쁜 의미인 거짓 생각으로 사용되고 있다. 이 거짓 생각은 우리 마음속을 날아다니면서 기억 속에 있을지 모르는 어떤 진리, 그 진리의 영향력을 잡아서 파괴시킨다.
이런 거짓 생각은 자아 사랑(self-love)으로부터 출현된다. 자아 총명 속의 거짓은 “사악해서” 진리를 붙잡아 쫓아낸다. 이런 마음들은 생각의 거짓된 길에 본거지를 두고 진정한 삶의 원리를 기꺼이 받지 못하게 하고 있다. 말씀 속의 진리가 이런 마음, 딱딱하고, 저항이 강한 다져진 길에 떨어지면, 그 진리는 그 진리를 박해하거나 거절함으로 인해 거짓된 생각이 그 진리를 쪼아먹을 때까지 우리 기억 속에 누워 있게 된다.
새교회의 교리에서 보여지는 바, “진리를 바라는 모든 사람의 영혼(soul)은 빛 가운데서 말씀 속의 진리를 볼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이 진리에 정말 흥미가 없을 때, 그의 영혼(soul)은 진리를 바라지도 않는다.

돌밭 (the stony ground)

“돌밭” 같은 이들은 합리성이라는 빛 속에서 진리가 진리로서 보여지기 때문에 진리를 믿는게 아니라, 단지 권위 때문에, 혹은 역사적 차원에서 믿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다. “돌밭” 또는 돌투성이의 밭이란 조그만 돌들이 많이 있는 밭을 뜻하는게 아니다. 왜냐하면 돌이 많이 있는 밭이라 해도 만일 깊고 비옥한 토양이 돌과 섞여 있다면 아마 작물의 수확이 얼마간이라도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본문이 말하는 돌밭이란 자라기에는 흙이 많지 않은 밭, 또는 얇은 흙이 덮여 있을 뿐 바닥이 바위로 된 밭, 그래서 씨로 하여금 뿌리를 내릴 틈을 주지 않는 밭을 말한다. 누가복음의 경우, 이를 두고 “바위에 씨가 떨어졌다”고 언급하고 있기도 하다. 어찌됐든 표면에 놓인 씨일지라도 이내 싹은 트고 빠른 성장도 보여줄 수 있다. 그러나 이 씨들은 쨍쨍 내리비치는 태양이나 뜨거운 바람에 오래 견딜 수 없다. 그 이유는 식물을 버티게 해줄 영양 공급이 겉만 덮은 토양 가지고는 부족하기 때문이다. 이 사람들은 자기들의 진짜 본성을 비수용적인 인격으로 덮어놓은 피상적인 총명의 소유자들이다.

피상적인 수용 (superficial reception)

돌밭 같은 마음들은 빠르게 전환은 하지만 피상적이다. 새 진리를 듣고 알게 된데 대해 매우 기뻐하여 이 진리들을 큰소리로 외치기도 한다. 그들은 감정적이고, 용솟음치며 역설적으로 진리에 접근하거나, 진리를 가지고 논하는데 매우 흥미있어 할런지 모른다. 그들은 우리가 아름다운 미모나 사랑스런 꽃을 보듯 진리의 아름다움을 볼는지 모른다. 비록 그들 안쪽 심정이 영적으로 단단한 껍질을 씌우고 있다 해도 겉으로는 부드러운 심정을, 명백한 생각을 얼마라도 가질 수도 있을 것이다.
게다가 그들의 이 사상들은 재빠르게 성장할 수도 있겠지만, 이내 중단되고 만다. 그 이유는 영적 인격의 심오함, 깊이 있는 옥토를 가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목적 측면에서 내향적 진지함이 부족하다. 그래서 어떤 진리도 그들 본성 속에 깊이 뿌리내리지 않는다.
종종 이런 사람도 부드러운 심정이나 사랑한다는 본성의 옆을 스쳐 지나 가기도 한다. 그들의 감정은 비록 피상적이지만 매우 빠르다. 그들의 눈물은 언제나 눈 언저리에 대기하고 있어 감정을 살짝 건드려도 주르륵 흘러내린다. 그러나 진리에 대한 그들의 사랑은 하느님에 반대되는 악을 죄로 알고 금하도록 자신을 채찍질하기에는 너무 충분치 못하다.

신앙 부흥 (revival converts)

때때로 우리는 신앙 부흥 집회에서 용솟음쳐 오르는 경건심(piety)이나 시끄러운 열정(zeal) 속에 파묻힌 인격들을 보게 된다. 이들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피흘려 죽으심과 받으신 고통에 눈물을 터트리는 반면, 정작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보여주신 삶이 자기 삶의 실제적인 본보기가 되어야 한다는데 대한 것은 경시한다. 예수님의 원리는 모든 우리의 사랑들, 생각들, 그리고 행동에 대한 주요 동기(main-spring)이어야 한다는데 대한 깊이가 빈약하다는 말이다. 그들이 자신 속의 본성을 이해한다면, 그들의 감정적인 진리의 수용은 그런 대로 신실할 수 있겠으나, 그게 통째로는 되지 않는다. 감정적인 수용은 그들 삶의 진짜 원동력에 영향을 줄 수가 없다.

실족케 됨 (being offended)

“그 마음속에 뿌리가 내리지 않아 오래가지 못하는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이다. 그런 사람은 그 말씀 때문에 환난이나 박해가 닥쳐오면 곧 넘어지고 만다.” 사회의 상태, 교회인까지 포함해서 그들 속의 피상적인 경건함은 사회 생활의 거짓된 견해와 고리를 맺고 있으면서 인간 삶의 다방면에 걸쳐 있는 깨끗하고 건강한 모든 것, 선하고 참되며 유용한 모든 것을 향해 이간질을 한다. 주변의 이런 것들을 돌아보면, 우리는 지반이 바위이고 표면만 흙이 덮인 밭에 뿌려진 씨의 결과를 가히 납득할 수 있을 것이다.
피상적 인간은 진리를 위해 자기 애정의 성질을 바꾸지 않을 것이다. 만일 새로운 진리가 이 사람의 마음 안에 시련을 가져오게 한다던가, 이 사람의 이기적 바램이나 계획, 쾌락 등등을 잘라 버리라고 촉구한다면 그는 즉각 진리를 등진다. 만일 새 진리가 이 사람의 마음속의 집안에 들어가 앉아 그 집 주인의 카운슬러가 되어 집안을 청소하라고 권고한다면 그는 즉각 그 진리를 내어 던진다. 그는 진리에 대한 감상적인 접근이나 분위기를 살려주는 사상의 고취는 허락하나, 진리가 그에게 악을 죄로 알고 끊고 주님의 이름으로 선을 행하라고, 더 존경받을 수 있는 인격이 되라고, 용서할 줄 알아야 한다라고, 관용도 있어야 한다고, 순수한 마음을 가져 보라고 권고하면 더욱 성내며 실족한다.

해가 떠오름 (sun rising)

“해”는 사랑을 표현한다. 악한 사람을 통치하는 사랑(ruling love)은 자아 사랑이다. 이 해가 떠오르는 때란 우리의 자아 사랑이 진리에 반대하여 실력을 행사하기 시작하는 때다. 씨라는 새 진리는 피상적 인간의 외적인 감정 속에서 빠르게 싹이 틀는지 모른다. 다시 말해 그도 새 진리를 발견할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의 자아 사랑은 진리가 천국적 선교를 하려 한다는 것을 인식하자마자, 또한 모든 이기적이고 악한 열정, 거짓 생각, 이기적 행동에 이 선교가 반대 의견뿐임을 눈치채자마자, 그는 진리를 밀어내고자 보다 강도 있는 반대 입장을 부상시킨다. 그의 자아 사랑은 그 뜨거운 광선을 발출시켜 자라나는 진리를 말려 버리는데 어쨋든, 이는 자연적 마음 안에서 피상적으로만 가능할 뿐이다.

예증 (illustrations)

위와 같은 실례는 지상에서의 주님의 공생애 시대 때에도 있었다. 어떤 이들, 그분의 제자들조차도 그분의 말씀에 실족되어졌다. 그래서 그들은 “되돌아갔고 그분과 더이상 동행하지 않았기도 했다.” 그래서 예수님이 말하시기를, “나로 인해 실족치 않는 자는 누구든지 복이 있다”라고 말하셨던 것이다.
진리들은 유아 시절 때부터 주님에 의해 말씀으로부터 부모나 선생, 기타 다른 이들을 통해 기억 속에 뿌려진다. 그러나 인간이 독자적으로 생각하기 시작할 때, 그의 자아 사랑의 열정이 떠오르게 되고, 그들의 탐욕과 거짓이 발출된다. 그래서 이것들이 마음속에 있는 선하고 참된 모든 것을 거짓과 뒤섞어 버리거나 아예 뒤집어 놓기도 한다.
이런 것들은 깊이 뿌리를 내릴 수 있는 깊은 토양이 심정 속에 없기 때문에 멸해지고 만다. 더욱이 진리를 믿는 때조차도 사람들은 진리에 악을 좋아하는 어떤 거짓된 응용을 접합시켜 마음속에 있는 진리의 천국적 성질을 파괴하려 든다.
예를 들면, 용감한 사람을 구성하는 요소들 중 가끔 사나이답게 결투하는 것을 연상시킴으로서 엉뚱한데로 끌어낸다. 즉 용감한 자의 영은 자아 사랑의 가차없는 주장에 존재한다고 결론을 끌어낼 때이다. 사실 이 결론을 영적으로 이해하면 가장 비겁한 것일 뿐이다.
소년들이 생각하기를 사나이가 되는 것은 부모의 제한에 자유를 선포하는 것이라고 한다. 사실상, 이와 같은 독단적 주장은 천사의 삶과는 정 반대되는 것이다. 천사는 유한한 인간의 가장 고상한 보기들이다. 천사들이 더욱 나은 천사가 되는 방법은 그들이 독립적이기보다 천국 아버지에게 인도 받기를 더욱 사랑하는 데서 있어지기 때문이다. 주님을 향해 독립을 선포하는 이들은 지옥에 있는 자들뿐이다.

환난 (tribulation)

새 진리가 생각 안으로 들어와서 우리의 애정이나 생각, 그리고 행동 지침들의 속을 까벌릴 때, 환난이나 박해가 마음속에서 일기 시작한다. 그래서 우리는 시험(temptation) 속에 있게 되고, 이 속에서 우리 마음과 삶의 주인이 되기 위해 다툼이 있게 된다. 이 때에 만일 우리가 진리를 단지 피상적으로 잡고 있다던가, 우리의 본성이 단단하고 비 수용적인 바위여서 뿌리 자체인 선함의 깊이가 충분치 않다면, 시험은 진리를 내던지며 그 영향력 역시 파괴할 것이다.
게다가 새교회 교리를 배운 자, 이 교리를 가슴 깊게 사랑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그런데 그들이 이 교리를 알고만 있을 뿐 실제에 응용하지 않고 있을 경우에도 그들은 타인과의 논쟁에서 무기로서 새교회의 명쾌한 진리를 사용할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이 교리가 자기들의 총명을 드높여 준데 대해 매우 흡족하여 기뻐할는지 모른다. 그러나 이 교리가 그들 자신 속의 악들에 대해 사용될 때 그들은 이 진리에 성을 내고 만다.

시험을 치르는 인격 (testing character)

환난이나 박해는 인격으로 테스트를 치르게 해준다. 육적 측면에서는 이스라엘 족들이, 영적 측면에서는 기독교인들과 더불은 것들은 불을 통과해야 했었다. 불 속에서 순수한 금속은 찌꺼기와 분리된다.
단어 “tribulation”은 꽤 암시적이다. “tribulum”은 곡식을 두들기는데 사용되는 방망이(roller)이다. 그래서 이 단어는 훈련(discipline)을 표현한다. 곡식의 알맹이와 쭉정이가 두들김으로 서로 분리되듯 시련을 수단으로 주님은 인간 마음속에 든 선한 것과 악한 것을 분리하신다.
한 마디로 우리는 시련에 의해 깨끗케 된다. 우리가 진리를 사용해 보지 않고는 어떤 원리가 정녕 자신에게 값어치가 있는지를 결코 알지 못한다. 사용해 보려는 노력이 없는 상황에서, “미덕 중의 절반은 시험의 길을 벗어나 있는 우리의 존재로부터 흔히 발생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시련은 자신의 위치가 어디인지에 대한 윤곽을 명확히 해준다. 만일 우리가 선하고 참된 원리들을 진실로 깊이 있게 사랑한다면, 그것을 생명으로여겨 그것에로 기울 것이고, 그것에 반대되는 어떠한 것도 단호히 분리시키고야 말 것이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이기심을 선한 원리보다 더 사랑할 경우, 선한 원리가 자기 속의 악과 거짓에 반대함을 보여주면 줄수록, 더 신속하게, 더 결정적으로 우리는 선한 원리를 포기하고라도 자신의 이기심을 구하려 할 것이다. “인간이 가지게 되는 모든 것은 그 인간의 생명이 된다.” 그래서 내향적 삶은 사랑과 생각의 삶이다.
선한 사람은 시련을 견디어 낸다. 그리고 시련 가운데서 그들은 자연적 약함 들을 잃게 된다.
“과즙이 더 향기가 있고 더 달듯
선한 사람들은 아픔으로 더 선하게 된다”
그러나 악한 자들은 시련으로 인해 자기 내향적 인격의 부분이 달성 안되는 바, 그들의 소유인 것 같았던 선과 진리의 피상적인 사랑마저 잃게 된다.

인내 (endurance)

선한 사람은 자신 속에 뿌리를 가진다. 뿌리는 지면 밑에 있는 것이고 눈에 보이지 않는다. 이와 같이 선한 사람이 꽉 붙잡은 영적 원리는 얼핏 볼 경우 상대방에 의해서 쉽게 드러나 보이지 않는다. 기독인의 내적 삶 속에 있는 뿌리의 깊이는 비록 세상이 그것을 잘 보지 못할지라도 주님만이 아신다. 원리에 대한 진지함의 깊이는 일상 생활 속의 시련을 얼마나 끈질기게 버텨가느냐가 결정해 준다. “나에게 붙어 있으면서 열매를 맺지 못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모조리 쳐내시고 열매를 맺는 가지는 더 많은 열매를 맺도록 잘 가꾸신다” (요한복음 15:2.)
우리가 상대방을 파악할 때 그의 경험을 참조한다. 단지 그가 말하는 고백도 아니고, 열성을 내는 그의 감정, 말하자면 마음이 후하다는 것 같은 것도 아니다. 오로지 잘 인내하는 특성 같은 것, 세상이라는 망치가 달구어진 쇠를 대고 두드려 패는 동안 끄떡없이 버티고 있는 모루(anvil)같은 능력, 기꺼이 시련을 맞이함 같은 것, 시험 속에서도 그가 흠모해 온 원리를 꾸준히 신봉하는 태도 같은 것, 자기의 시련 깊은 심정인 선하고 영양이 풍부한 토양 속에 강한 뿌리를 놀랍게 깊이 박고 있는 그의 자세 같은데서, 또는 그의 속에 든 강건함을 끌어내서 그를 시들게 만들려는 모든 영향력을 헛수고하게 만드는 그의 힘 같은 결과를 보고 그를 판단한다.
가장 높은 삶은 가장 큰 슬픔 후에 온다. 용감한 투쟁만이 가장 고귀한 강건함을 발달시켜 준다. “네가 살아온 날들 같이, 너의 강건함이 있으리라.” “옳은 일을 하다가 박해를 받는 사람은 행복하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마태복음 5:10).

가시덤불 (the thorns)

“또 어떤 것은 가시덤불 속에 떨어졌다. 가시나무들이 자라자 숨이 막혔다… 또 가시덤불에 떨어졌다는 것은 말씀을 듣기는 하였지만 세상 걱정과 재물의 유혹이 말씀을 억눌러 열매를 맺지 못하는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이다.”
“가시”란 악의 욕망이요, 이는 이기심의 흥분이다. 이와 같은 욕망과 흥분이 마음을 점거하면, 이것들은 인간에게 가르쳐진 모든 신성한 진리를 숨막히게 해서 파괴시킨다. 이것들은 인간을 영적인 것 대신 세상적으로 만든다. 이 삶은 자아와 세상 사랑 안에 머무르게 하므로 그 사람은 선에 관한 열매를 맺지 못하고 만다. 세상적인 흥분은 감각적이고 외적인 삶, 허구적인 가치들에 소모되고 만다.
우리의 자연적이고 세상적인 욕망, 마치 가시나무같이 불이 쉽게 붙고 재빠르게 탄다. 가시나무 같은 사람들도 아마 진리를 알고 싶어하고 총명해지기를 바라나, 그들은 자신의 거듭남에 이 진리를 응용하려고 지식을 추구하지 않는다.

예증

이와 같은 사람도 종교적인데 기울기도 하나 그는 바깥쪽 분위기나 경건함 또는 고백하는 것에 치중하고 만다. 그런데도 그들은 신앙심이 깊은 자로 스스로 자처하고 있다.
이와 같은 사람들, 천국과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보다 인간과 세상을 더 사랑하는 자들은 자기들 속의 세상적 욕망을 빼어 내려 하는 어떤 진리도 자신들의 의지 안에 정착하도록 허락지 않는다. 이들은 설교가 뭔가 말로 사람을 움직이게 하는 힘이 있다고 가상되는 경우, 그 설교를 매우 기뻐한다. 이와 같은 사람은 진리인고로 진리 안에서가 아닌 감각적인 웅변술에 흥미를 두는 것이다. 그래서 이와 같은 마음속에 뿌려진 진리의 씨는 세상적 욕망이라는 가시덤불 속에 떨어지는 격이된다.
그 땅 어디에 가시덤불을 잘 자라게 하는 곳이 있을까? 그리고 밀을 잘 자라게 하는 곳은 어디에? 곤경은 밀이나 가시덤불 모두를 자라게 하려고 노력한다. 만일 가시덤불이 토양의 소유권을 쟁취한다면, 거기에는 밀을 성장시킬 땅의 여유가 없게 된다. 가시덤불이 밀의 성장을 저지하는데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하나는 토양의 자양물을 먼저 흡수해 버리는 것, 또 하나는 밀에 그늘만을 주는 것, 그리고 엉켜 질식시키는 것이다.
가시덤불은 토양 자체가 그 나무의 본산지인 셈이다. 다시 말해 농부가 심지 않았는데도 자라 오른다. 이와 같이 우리의 자연적 마음속에서 세상에 대한 욕망은 그의 주거지를 발견하고 번성한다. 그리고 영적으로 우리의 악과 세상욕은 우리의 애정으로부터 자기들의 자양물을 끌어낸다. 마치 심지도 않은 가시덤불이 싹이 터서 그 토양에서 양분을 빨아올리는 것과 같다. 그래서 가시덤불이 밀을 질식시키듯 세상욕의 재빠른 성장은 천국의 선한 영향력을 질식시켜 진리의 씨로 하여금 결실을 못 맺게 한다.
천국은 사랑의 따뜻함과 진리의 빛을 가지고 열린 마음 안으로 흘러든다. 그러나 만일 감각적이고 세상적인 욕망이 지독하게 성장해서 그의 마음을 채우고 있다면, 이런 것들은 마음에 와지는 천국의 영향을 뒤집고, 그 천국 품질을 파괴시킨다. 이리하면 기억 속에 놓여 있는 진리들은 그 진리를 생생하게 해줄 천국의 영향력을 받을 수 없어 생명의 근원에서 잘려지는 바, 씨는 결실을 맺지 못한다.

세상욕 (worldliness)

가시덤불에 질식되는 것은 “이 세상에 대한 관심과 재물에 사기 당한” 결과이다. 즉 직업이라든가 쾌락을 담당하는 세상적 영의 결과이다. 우리가 해야 하는 것, 우리가 가져야 하는 것에 적당한 관심을 두는 것은 슬기롭고 유용하다. 관심과 재물 모두 적당히 사용된다면 우리에게 쓸모가 있다. 이것의 나쁜 영향이란 그것의 남용에, 그것에 현혹될 때에 존재하는 것이다. 세상의 직업을 갖는 것은 지당한 것이다. 그리고 그 직업에 정력적으로, 능력도 발휘해 보고, 근면하게 종사해야 하는 것 물론 당연지사이다. 정직하고 쓸모 있게 부자가 되는 것, 부의 선용을 위해서라면 정법에 속한다. 그러나 탐욕, 허욕은 지옥적인 것이다.
종종 우리는 세상적인 주제에 관심이나 애정이 너무 많이 흡수될는지 모른다. 시중드느라 경황이 없었던 마르타, 삶의 외적인 것을 과도하게 추켜세운 마르타에게 “필요한 꼭 한가지 것”은 영적인 것, 이것을 게을리 하지 않도록 주님은 그녀를 타이르셨다 (누가복음 10:38-42). “아무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 그러므로 영적인 것이 마음속의 주인이어야 하고 세상적 관심사는 종이어야 할 것이다.
사람들이 세상적 관심사나 감각적 삶이라는 외적인 것들을 스스로 포기할 경우, 자신의 신중성에 의존하기 십상이어서 자칫 신성한 섭리를 잊기 쉽다. 인간을 에덴이라는 동산으로 상징화된 삶의 조건에서 몰아낸 것이 바로 자아 신뢰나 감각성이었다.
인간이 주님을 신뢰하고 그분을 따를 때만이 주님은 인간을 진정으로 축복하실 수 있다. 세상의 일들을 좋은 쪽으로 처리하게 되면 자기는 종교인으로 바뀌었다고 즉각 말하는 이들을 가끔 보기도 한다. 그러나 주님이 우리에게 채택하라는 삶의 순서는,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외적인 것)을 너희에게 더하리라”이다. 이는 영적인 필요에 따라 자연적인 것도 수반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거듭나지 않고는 어떤 사람도 선한 영적 질서로 세상의 일을 처리 해갈 수 없다.

무관심 (indifference)

가시덤불 밭으로 표현되는 마음의 상황은 길바닥의 경우에서 같이 진리를 바깥쪽 측면에서 반대하는 것이 아니다. 논쟁 같은 것에 의해 자신의 신앙이 공격당할 때, 진리에 대한 우리의 흥미는 공격자의 논쟁에 저항하도록 우리를 촉구한다. 그러나 우리 속 자아 신뢰(self-trust)라는 것은 모든 불신앙이 펼치는 논쟁보다 더 영적 생명을 위험하게 한다. 자아 신뢰 속에는 영적인 것에 무관심하게 하는 미묘하게 속으로만 흐르는 힘이 있다. 이 무관심은 우리가 세상에 관심이 너무 고조될 경우, 또는 재물에 현혹될 경우 자란다. 다시 말해 감각적인 삶이 우리의 애정과 시선에 눈길을 보내고 끌어당긴다는 말이다. 그러면 우리 속의 정신적 가시덤불은 재빠르게 성장해서 주님이 마음속에 뿌려 놓으신 영적인 밀을 닥치는 대로 질식시켜 버린다. 밀과 가시덤불 모두를 배양하게 하는 마음속의 미덕(virtue)이란 것은 얼마나 연약한 것인지!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아울러 섬길 수 없다.”

재물 (riches)

현혹하는 재물이란 단지 물질적 부함만을 가리키는게 아니라, 모든 정신적, 물질적 소유물, 우리가 자신을 위해 사랑하는 재물, 슬기로운 씀씀이를 위하기 보다 이기적인데 충당하려는 재물까지 포함하여 가리키는 말이다. 지식, 지적 능력, 개인의 외모, 사회적 지위, 공적 명성, 자신이 소유했다고 생각하는 그밖의 것, 다른 사람보다 자기가 더 잘낫다고 느끼게 만드는 것들이 위험한 재물들이다. 이것들이 영혼을 현혹하며 영적 생명을 파괴하려 위협하고 있다. 이것은 선하고 참된 원리라는 씨, 사랑의 주님이 정성들여 뿌려 놓으신 씨들을 질식시킨다.
이 재물을 이기적으로 사랑할 때, 그것들은 우리의 심정이나 지성 속에서 우리의 애정과 생각들을 흡수해 버리고, 주님의 선하고 참된 영적 생명의 원리들에 주어져야 할 거주지를 찬탈해 버린다.
이런 모습이 위에서 열거해 본 재물들이다. 이 재물들을 가지고 인간이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무척 어렵다. 그 이유는 자신의 거듭남이나 인격의 향상보다 이 재물을 더 사랑하며 더 신뢰를 두기 때문이다. 천국 또는 인격의 천국적 성질 속에서 모든 종류의 재물은 그 자체가 목적이 되어서는 안되고 선을 위한 수단으로 사랑되어야 한다.

예증

우리 주변을 살펴보자. 천하고 낮은 수준의 인격 소유자들, 매우 한정된 총명의 소유자들은 자신의 위치는 남들보다 더 위에 있다고 자부하며 떠벌린다. 그 떠벌리는 이유의 속을 들여다보면, 그것은 자기 아버지가 높은 사회 지위나 재산이 있어서, 자기 가문의 누구가 사회의 인사급이었고 자기는 그의 후손이어서라는 등등을 자기 속에서 은근히 내세워 자기를 추켜 보고자, 또는 남이 알아 줘야 하는데라는 식의 태도들이고, 이것이 사회 전반에 꽤 널려져 있는 보편화된 지옥들이다. 이런 자만은 매우 어리석은 것이기도 하다.
영적으로 밀밭 같은 인간 사회 속에서 보면 이런 자만으로 자기 동료보다 자신이 더 높은 듯 여기려 드는 두뇌는 사실 텅빈 깡통이다. 많은 이들이 지적으로는 높으면서도 영적으로는 텅비어 있는 경우가 많다. 예수님은 그분의 신성한 총명을 통해 그분 자신을 유화 시키고 낮추시었다. 그래서 더 높은 천사들이 더 높은 인격 속에 머무르려면 더 겸손해야 하고 자기 주장이 더 줄어들어야 한다.
인격보다 지위에 관심을 두는 세상을 둘러보자. 정치에서, 지옥적 능력의 소유자들, 방대한 자기 주장, 아우성 소리, 술책, 부패된 협상 등등을 자기들의 지위를 확보하기 위해 여차 없이 행사 한다. 이런 것들이 그들 스스로 자신의 인격을 저질로 떨어지게 하고 있다. 이들은 남들이 부러워하는 공직에 앉은 것을 가지고 자신 속의 조그만 것들을 극구 찬양 받게 해보려 한다. 그런데 이런 부류가 그들 목적을 달성했을 때, 그들이 확보한 재물은 가시덤불 같아서 조용하게 유용한 삶에 있는 만족, 선하고 참된 삶에 속한 것은 어떤 것이든 질식시켜 간다.
이 질식의 정도가 더 증가하고 위험수위인 것, 정신적, 물질적인 재물에 대한 욕망에 극도의 흥분이 연결을 이루면 화약고에 불이 접근되는 격이다. 이런 경우는 지면을 할애해서 열거하지 않아도 우리들 속에, 주위에서 쉽게 그 예를 각자 찾을 수 있다. 국가의 물질적인 발달이 빠르게 있어지면서, 인간속의 중대사에 관한 애정이나 관심도는 물질적인 것들에 빨려 들어 영적인 것들의 배양에 대한 심오한 흥미마저 축출되어지고 마는 경우도 그 한 예다.
패권을 다투는데 혈안이 된 인간 종족 속에서 사회는 도덕적 쇠퇴로 벌집 같은 구멍투성이가 된다. 차지해야겠다는 욕심, 명성을 얻어야 한다는 야망 같은 것은 온갖 종류의 부정을 닥치는 대로 저지른다. 그래서 음모나 사기들은 온갖 삶의 형태에 만연되고 만다. 무절제나 방탕도 더 난폭해진다. 이런 가시덤불이 영의 생명을 질식시킨다는 것에 의아해야 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질문의 답

이런 주위 환경 속에서, 매우 예민하고 열렬한 희망으로 불타는 젊은이들, 그럼에도 포부라는 영으로 차 있는 젊은이들은 무엇을 해야 할까? 우선 그들은 자기 자신의 합리적인 총명에 각종 주변 상황을 놓아서, 세상적 삶과 쾌락 위주는 인간 생명의 가장 크고 고상한 측면에 자기 영혼을 닫히게 하고 만다는 것을 명확히 알아야 한다.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는 말씀이 합리적 총명에 놓여져야 한다는 말이다. 그의 영적인 마음을 순진하고 쓸모 있게 하며 하느님의 인도 아래 놓아둘 때만이 세상의 쾌락이나 의무들에도 충실해짐을 알아야 할 것이다.
만일 그가 말씀 속의 진리를 빠르게 붙잡지 않는다면, 그의 물질적, 정신적인 재물, 세상적 관심은 그의 온 마음을 다 채울 때까지 놀랍게 성장하여 위험한 가시덤불이 되고 만다. 그렇게 되면 싹트는 마음, 젊은이의 마음에 천사나 부모 그리고 선생을 통해 주님이 뿌려 놓으신 천국적인 진리의 선한 씨들은 이 가시덤불에 눌려 질식사 한다.
“만일 네 눈이 죄를 짓게 하거든 뽑아 버려라…” 우리가 물질적이거나 이기적인 정신의 소유물을 진정한 재물로서 간주하고 있는 한, 예수님께 찾아가 “제가 무엇을 해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라고 물은 부자 청년같이 될는지 모른다. 이 청년은 영생을 위해 그가 가장 중요하다고 여긴 소유물을 포기해야 한다고 배웠을 때 슬픔에 잠기고 돌아갔는 바, 그는 겸손한 선용의 삶 속에서 주님을 기꺼이 따르지 못했고, 자신을 부정하는 댓가인 천국을 기꺼이 잡으려 하지 않았다.

가시덤불의 성장

반갑지 않은 데도 불구하고 자주 볼 수 밖에 없게 되는 것은, 젊은 마음 안에 있는 위의 가시덤불의 성장과 동시에 인격이 퇴보하는 모습이다. 세상에 속한 것을 맛보기 시작하여 그것들에 입맛을 더욱 다시기 시작하면서 영적 원리가 잊혀져 가기 시작할 때, 인격은 도덕적으로나, 영적으로 당연히 있어야 할 책임에 불성실 하는 쪽으로 퇴보한다. 더욱이 결혼 관계의 경우, 무정한 불성실이 불법이란 뒷박을 채우고, “사람의 자, 즉 천사의 자”에 속하는 평화롭고 천국적인 품위에 죽음의 종소리가 울릴 때까지 뒤로 미끄러지는 속도는 더욱 빨라지기도 한다.

개인적 응용

여러분, 특히 이 책의 독자들, 아마 자기 마음속의 영성(pirituality)이 더디게 자라 오르는데 대해 자주 실망한 적이 있지 않았을까? 만일 그런 적이 있다면, 그래서 그 원인을 열심히 찾으려 한 적이 있다면, 그 원인, 자신 속의 밀이 질식하도록 한 것은 자신 속의 악한 느낌, 거짓 생각 또는 죄로 변질되게 부추기는 어떤 습관들임을 발견했었으리라 본다. 성격의 결점, 느끼는데 있어서의 자신 속의 불친절, 남의 흠집만 잡으려는 생각, 대화만 하면 자제력을 잃는 혀, 등등의 것들이 영적 성장의 뒷켠에서 조종 역할을 담당했음을 발견한다. 그런데 만일 여러분이 더 나은 영적 성장을 가졌다면, 그 배후에는 발견된 약함투성이에 대한 절대적인 자아 부정이 있었음을 동시에 알게 된다.
성공은 우리들 앞에 모두 놓여 있다. 그러나 우리는 올바른 방법으로 일해 가야 한다. 즉 “엉겅퀴 속에 씨를 뿌리지 말고 땅을 새로 갈아 엎고 심어야 한다.” 그래야 “이스라엘 족속을 멸시하던 주위의 모든 민족이 다시는 가시로 찌르지 아니하고 갈대로 할퀴지 아니할 것이다” (에제키엘 28:24.).

훈련의 섭리 (discipline providential)

삶 속에 상존하는 시련과 훈련은 하느님의 섭리 아래 우리 속에서 가시덤불이 성장하는 것을 억제하는 수단으로 허용되어져 있다. 많은 경우에 있어서 손쉽게 번 돈 또는 부귀는 우리 속의 밀보다는 가시덤불을 더 잘 자라게 하는 환경, 가장 위험한 환경을 조성해 준다. 따라서 우리의 가장 큰 선을 위해, 또는 영적 진보를 위한 수단으로 신성하게 허락된 훈련 속의 투쟁은 얼마나 힘든 일인지 모른다.
영적 위험인 세상에 대한 관심과 재물은 각기 다른 듯 보일런지 모른다. 그러나 세상적 관심과 재물의 남용, 모두 이기심으로부터 튀어나온다. 하나는 탐닉이라는 수단을 포획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탐닉을 수단으로 감각적으로 자라난다.

가시덤불의 상응

그들의 구세주 하느님에게 온갖 희롱을 퍼부으면서 가시면류관을 씌어 십자가에 못박은 악한 국가가 자신들의 악을 가지고 그분의 영적 생명의 면류관과 대체 해버린 것은 생각만 해도 슬퍼지는 일이다. 이와 같은 모습은 각 개인에게도 마찬가지이다. 죄가 되는 악을 덜 끊을 수록 더 많은 악의 탐닉에 빠져, 더욱 악을 위해 선을 내려 놓고, 악은 선인 척 위장하고 영적 총명은 어두워져 죄라는 가시덤불이 밀을 질식시킨다. 가장 순수한 삶의 나날이 가장 명백한 총명의 나날이기도 하다.

과오가 있는 곳 (where the fault lies)

이상 살핀 세 경우, 길가와 돌밭 그리고 가시덤불에서 씨가 자라나지 못한 이유는 그 과오가 씨에 있는 게 아니라 토양에 있다. 씨 뿌리는 사람은 좋은 씨만을 뿌리신다. 그것도 광범위하게 뿌리신다. 다시 말해 우리의 마음 조건이 어떠한 상태에 있던지 주님의 진리는 마음에 뿌려지고 있다는 말이다.
아마 우리의 자아 사랑은 자신의 영적 실패를 병들어서, 가난해서, 사업상 바빠서, 운이 나빠서, 누군가의 잘못된 행위의 탓으로 돌려 대고 싶어한다. 그러나 이것들은 실패의 원인이 결코 못된다. 그 원인은 우리 심정과 삶 속에 있는 것이다.
좋은 씨가 마음에 뿌려졌다는 것, 그 씨에 알맞은 마음이라는 토양이 적절히 있어져야 한다는 것을 아는 정도 가지고는 충분치 않다. 비유에 언급된 세 가지 실패를 보면, 첫 번째 실패는 토양이 씨를 받을 조건을 갖추지 못했다. 두 번째 실패는 토양의 조건이 천박했다. 그리고 세 번째 실패는 비록 토양이 좋은 조건이었지만 그 토양이 다른 것들로 꽉 차 있는데 실패 원인이 있었다.
첫 실패의 경우, 씨는 싹 조차도 내지 못했다. 둘째 실패에서 작물이 시들어 말라죽었고, 셋째 실패에서는 어느 정도 성장했지만, 만숙되기 전에 가시덤불로 말미암아 질식했다. 세 조건 모두의 인간 마음은 과오라는 조건하에 있었다. 각 마음 조건은 주님의 진리를 거절하고, 뒤집어엎고, 고통받게 했다. 진리가 주님으로부터 우리에게 가르쳐질 때, 혹은 진리의 암시가 와질 때, 우리의 합리적 능력은 천국의 빛을 받기 위해 위쪽이든 아래쪽이든 돌아선다. 그리하여 진리가 지상의 삶에 속한 것들에 응용됨으로써 그 빛을 가져다준다. 우리의 합리적 능력이 주님을 스스로 따르게 하는 위쪽으로 돌아서면 우리는 거듭 나아진다. 그러면 우리 마음은 좋은 땅이라는 조건을 갖추게 되는 것이다.

좋은 땅 (the good ground)

“그러나 어떤 것은 좋은 땅에 떨어져서 맺은 열매가 백배가 된 것도 있고 육십 배가 된 것도 있고 삼십 배가 된 것도 있었다… 그러나 좋은 땅에 떨어졌다는 것은 그 말씀을 듣고 잘 깨닫는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이다. 그 사람은 백 배 혹은 육십 배 혹은 삼십 배의 열매를 맺는다.” 그리고 누가복음에서, “그러나 씨가 좋은 땅에 떨어졌다는 것은 바르고 선한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간직하여 꾸준히 열매를 맺는 삶들을 두고 하는 말이다.”
말씀을 듣는다는 것은 진리를 듣는 것이다. 이는 교리의 서술만을 듣는다는게 아니라, 말씀의 가르침을 삶의 원리로서 총명하게 듣는 것을 말한다. 말씀을 이해한다는 것은 말씀의 의미를 지적으로 파악했을 뿐아니라 삶의 원리로서 그 의미를 취하기 위해 이해성 속에 받는 것을 말한다. 다시 말해서 이는 심정으로 이해하는 것이요, 진리를 사랑하는 것이다.
우리의 주님은 이렇게 말하셨다. “들을 귀가 있는 사람은 알아들어라.” 의심을 가지고 진리를 듣는 이들, 자기의 자연적 추론을 가지고 진리에 반대하는 자들, 이들은 자신이 총명하다고 상상한다. 그러나 그 상상은 정밀하게 보면 꼭 반대이다. 순수한 영적 총명은 의지가 어떻게 진리를 수용하느냐에 달려 있고, 영적 진리의 빛을 향해 자신의 이해성을 어떻게 여느냐에 의존된다. 영적 진리를 잘 받으려면 우리는 “바르고 선한 심정”을 가져야 할 필요가 있다. 선처된 심정, 인격의 단순함은 진리를 사용할 것이고, 그래서 진리를 살아 있게 한다.

예증 (illustration)

사도인 토마는 자신의 감각으로 예증되는 증거가 잡힐 때까지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않았었다. 그러나 주님께서 말하셨다. “너는 나를 보고야 믿느냐? 나를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예수님께서 토마에게 분명하게 가르치신 것은, 진리가 내면으로 열리는 것이 진리의 외부적 증명보다 더 낫다는 것이었다. “하느님에 속한 사람은 그분의 말씀을 듣는다.”
진리가 특별히 필요하다고 느끼지 않는 사람, 진리를 절실하게 바라지 않는 사람은 대체로 진리를 의심하는 상태에 있다. 그러나 진리를 갈망하는 사람, 그래서 진리를 가지고 자신의 삶을 수정해 볼 목적이 있는 사람은 진리를 향해 마음을 깔끔히 정렬해 놓은 상태이다. 그들은 귀로 듣고, 심정으로 이해한다. 그래서 진리가 그들에게 와질 때 그들은 그것이 진리임을 인식하려는 내적 상태에 있게 된다. 그들은 자기들에게 다가 온 진리가 바로 자기가 원하는 것임을 보고, 영적 인격의 성장에 이 진리들을 즉각 사용한다. 한 마디로 그들은 좋은 땅이다. 그들은 진리를 합리적으로 사랑하는 이해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진리에 사려 깊은 관심을 쏟는다.
진리가 마음속에 있다고 해서 누구나 선을 생산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그가 그의 의지, 심정에 좋은 땅을 가져야 생산이 가능하다. 진리를 가지기 위해 자신을 강요해야 하며, 관념이라는 수준에서가 아닌 실지 사용을 위해, 악은 죄가 되기 때문에 금하고 선을 행하는 좋은 땅이어야 한다.
진리를 향해 호의를 보이는 사람이 가지고 있는 큰 이점이 무엇인지는 쉽게 알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그의 마음은 딱딱한 땅 같은 것이다. 이 상태의 사람은 진리를 향해 긍정적인 상태에 있지 않다. 모든 나쁜 정신적 새들, 자연적인 수준 속에 든 거짓 생각이나 감각적인 추론은 접근해서 진리를 쪼아먹되 마음속의 진리가 다 없어질 때까지 계속 쪼아먹는다. 이런 조건하에서 인간은 결코 진리를 붙잡지 못한다. 그의 마음은 부정적 상태에 남아 있게 된다. 그런고로 우리의 자연적인 생각은 우리의 합리적 생각의 지배를 받아야 하는 것이고, 우리의 감각들이 감각적이라는 차원을 넘어 있는 것들을 판단하게 내버려두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좋은 땅의 품질 (quality of good ground)

좋은 땅이란 토양이 부드럽고, 깊고, 비옥하며, 잡된 것이 없는 땅을 말한다. 마음속의 좋은 땅도 이와 같이 부드러워 진리의 씨를 받을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하고 악이나 거짓의 탐닉에 의해 굳어져 있어서는 안된다. 이 땅은 진리를 받아 붙잡기 위해 반드시 깊고, 심오해야 한다.
사상을 취하려는 지적인 즉응력만이 딱딱한 심정을 덮고 있거나, 암석이 깔린 땅의 표면만을 이 즉응력이 덮고 있을 경우도 있지만, 옥토 같은 마음은 가시덤불이나 잡초가 없는 깨끗한 땅을 간직해야 한다. 세상에 쏠린 관심, 감각의 쾌락은 영의 지배하에 반드시 종속되어 있어야 한다.
땅의 조건은 농부에 의해 어느 정도까지는 조절되어질 수도 있다. 즉 땅을 갈아엎는다거나, 잡초를 제거하여 좋은 조건을 간직할 수 있다는 말이다. 주님이 작물을 생산하실 수 있기 전, 인간은 이와 같이 인간 부분의 일을 해 놓아야만 한다. 교회에서 가르쳐지듯, 말씀의 교리로부터 인간은 진리를 배워야만 한다. 즉 우리는 주님이 누구이시며, 그분의 속성은 어떠하며, 이웃이 누구인지, 사랑이 무엇인지, 선하고 참된 것, 그리고 유용한 것은 무엇인지, 악과 거짓, 죄가 되는 것은 무엇인지 배워야 할 것이다. 그는 자신의 영적 삶, 그 삶의 가능성도 배워야 한다.
위의 사항들을 자신이 사용할 목적으로 알고자 할 때, 진리를 사랑하는 것이다. 그러면 마음은 파종을 위해 준비가 마무리 된 조건하의 땅을 갖춘 셈이다. 그래서 주님은 씨 뿌리는 사람 같이 그분의 진리를 마음에 드넓게 뿌리신다. 씨, 태양, 비는 땅이 어떤 조건에 있던 똑 같이 주어진다. 그러나 그 결과는 다르다. 그래서 “주님은 모든 이에게 선하시다. 그분의 부드러운 자비는 그분의 일 속에 스며 있다,” “그분은 그분의 해를 선한 자, 악한 자 모두에게 비추이게 해 주시며, 의로운 자든, 불의한 사람이든 똑같이 비를 보내 주신다.” 그러나 그 결과는 토양의 질과 양에 따라 달라진다.

땅 위와 아래 (on or in the ground)

옥토의 경우 씨는 땅 위 뿐만 아니라 땅 아래로도 들어간다. 마음이 진리에 문을 열어 내적으로 영접한다는 말이다. 씨가 비옥한 토양 아래로 뚫고 들듯, 진리는 이해성 뿐만 아니라 의지에도 꿰뚫고 들어간다. 이 조건에서만 마음은 말씀을 잘 간직하게 된다. “나에게 당신의 법을 지킬 수 있도록 이해를 열어주시옵소서, 나는 온 마음을 다하여 그 법을 지키리이다.”
어떤 사람들은 진리에 필요한 모든 것은 진리가 기억 속에서 마음을 통과하여 가면서 인상깊어지고, 관통하여 나가 다시 그 밖의 것에서 거할 방을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가 진리를 간직할 때까지, 진리가 그와 더불어 정신적인 가족의 일원이 될 때까지 어떤 진리도 인간에게 살아 있는 실재가 되지 못한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요한복음 15:7). 진리는 진리가 사용되는 가운데에 존재한다. 진리가 행위 속에서 구체화되는 것, 인간 삶의 원리로 있게 될 때만이 진리는 존재한다.

선의 다양함 (varieties of good)

이런 질문도 있다. 왜 정신적인 땅은 좋은 땅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하면서도 그 땅이 선이라 불릴까? 어린 시절 마음속의 선은 사실 자연적이지 영적인 것은 아니다. 이 선은 수확할 것으로 차 있는 땅 같지 않고 파종을 위해 준비해 놓은 땅 같다. 한 마디로 잘 정리된 마음이다.
마음은 언제나 신성한 섭리에 의해 준비되어 있다. 유아기 때부터 주님은 선한 애정과 진정한 생각에 관한 상태들을 우리 마음에 이식해 놓으신다. 새교회의 용어로 이는 “아껴 두신 것, 남겨 두신 것, 나머지, remains, remants”라 부르며, 이는 내적 삶에 속한 것들로서 우리의 내면에 축적되어 있으면서 씨를 위해 좋은 조건을 형성시킨다. 이와 같이 “아껴 두신 것”들은 신성한 진리의 씨가 잘 심겨 지도록 우리 마음을 준비시키는 수단들이다.
만일 우리가 삶 속에서 이러한 내향적인 것들을 사랑하여 그것들을 배양하고자 노력한다면, 이 아껴 두셨던 것들은 주님으로 하여금 우리 마음에 천국적인 영향력을 부울 수 있게 해준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주님이 아껴 두신 것들을 경멸하며 그것의 자극에 저항하면, 우리는 여타 우리 속의 선과 진리에 대해서도 마음이 굳어지게 하고 만다. 우리가 악을 향하려는 경향성을 보고, 그것에 저항하면 필시 우리는 악에 반대되도록 자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악들을 흠모하고 사랑하며 실제에 응용하면 우리는 마음속에 있는 더 나은 것, 내적 마음 안에 있는 주님이 “아껴 두신 것들”을 질식시키고 마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 마음은 더욱 활활 타는 이기적 열정에 의해 더 단단한 밭이 되고 만다. 그리하여 주님의 말씀인 씨들이 들어갈 틈을 주지 않게 된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자신의 마음이 굳어진데 대한 책임이 있게 되는데, 그 이유가 굳어짐은 악한 삶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이라 해도 우리는 풍부한 지식을 소유하고 있을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 지식을 인격이 거듭 나아가는데 사용치 않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올바른 심정”인 좋은 땅은 풍성한 열매를 산출한다. 살아 있는 진리의 씨가 어느 좋은 토양을 발견하면, 그 씨는 자기의 생명력을 성장이라는 것에서 보여준다. “올바른 심정, honest heart”은 진리가 삶을 통치하도록 순수하고 진지한 애정을 가지고 진리를 받는다.
토지(ground)는 사랑 또는 애정을 표현한다. 그래서 씨를 받는 이들의 차이점은 각자의 토지, 즉 각자가 소유한 애정의 품질과 양에 있어서의 차이점인 것이다.
겨울철의 빛이 식물을 생산하지 못하듯, 총명만으로는 거듭나는데 있어 열매를 생산하지 못한다. 그러나 여름철 태양의 빛과 열이 하나가 되어 소출을 내듯, 총명도 진리를 사랑하는 마음(애정)과 하나가 되면 소출이 가능해진다.

열매를 맺음 (bearing fruit)

좋은 땅인 심정은 계속해서 열매를 맺고, 진리가 가르치는 것을 행하고, 악을 행하기를 중단하고 선을 행한다. 주님을 사랑함, 이웃을 향한 이타애는 삶에 응용되어 구체화되며 아주 사소한 삶의 사건(ultimate)들에게까지 스며든다. 땅이 좋냐 나쁘냐라는 판정은 그 땅에서 무엇이 생산되느냐에 있다. 이것이 거듭남이다. 거듭남의 증거는 우리가 진리를 실용적인데 사용하는 양적 증가에 존재한다. “열매를 보면 그 나무를 안다.” “가시덤불에서 포도를 딸 수 있으며,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거둘 수 있겠느냐?” 우리가 증가시키는 선함은 삼십 배뿐일는지 모른다. 아마 삼십 배만이 우리의 실질적 증가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선함이 증가되고 있지 않으면 어떤 영성도 그 선함 속에 존재하지 않는다.

각자의 성장 (individual growth)

이 비유는 마음의 다른 계층에 관해서뿐아니라 각 사람의 마음에서 거듭나는 각기 다른 상태와 수준까지도 언급하고 있다. 비유에서 주목할 것은, 세 토지 조건이 더 향상되어 가는 것에 관해서이다. 향상되는 토지 조건은 씨가 토양 안으로 더 깊이 들어가고, 더 자라고, 더 오래 견딜 수 있게 한다. 이와 같은 거듭남 속에서 각기 거듭나는 마음은 이런 조건들을 통과하면서 진보되는 성장이 있어진다. 거듭나는 마음은 비유 속의 위험들을 만나고 정복하되 주님의 섭리 아래에서이다.
이 비유는 교회에 관해서도 언급한다. 무엇이 교회를 구성할까? 교리만은 아니다. 그러나 사랑과 선용의 삶, 이것이 인간으로 기독교인을 만든다. 진리로 살아보지 않는 이상 진리는 그 사람을 구원할 수 없다.

삼십 배 등등 (thirty-fold etc)

선한 사람에서조차, 진리를 받는 수준은 양과 질 양면에서 차이가 있다. “어떤 것은 백 배가 된 것도 있고 육십 배가 된 것도 있고 삼십 배가 된 것도 있었다.” 이와 같이 결실은 거듭나는 삶의 세 가지 불연속적 수준, 즉 천적, 영적, 자연적 수준에서 있는다.
위의 모든 숫자들은 십(10)을 곱해서 이루어진다. 숫자 10이란 “아껴 두신 것, remains,” 자라나는 영의 내면에 이식된 생명 상태를 명시하고 있다. 만일 이 아껴 두신 것이 자연적 수준인 인간이 의식하는 삶에서 발달된다면, 그 결과는 외적인 법, 계명을 단순하게 순종하는 것으로 성취된다. 이 상태는 3 x 10, 30의 결실을 거둔다. 3은 진리 측면에서 가득 찬(full) 상태를 말한다.
이 사람이 보다 높고, 보다 내면적인 영적 성장의 단계로 간다면, 그는 영적 수준인 진리를 총명하게 사랑하는 상태, 즉 진리를 삶의 원리로 소유하는 상태에 진입된다. 즉 그는 육십 배의 결실을 가져온다.
6이란 정신적인 전투 상태, 창조의 육일, 거듭남의 육일, 일하는 육일, 이렛날 이전의 날들, 완성하는 상태를 말한다.
100이란 한 바퀴 돈 숫자(a round number)로서 선의 측면에서 가득 찬 상태, 진보가 다된 상태를 표현한다. 백 배의 결실을 맺은 이들은 완성하는 거듭남이 충만된 상태, 즉 천적 상태인 선을 사랑함, 주님을 사랑하는 충만된 사랑, 최고의 사랑에 도달된다. 이 상태에서 “주님이 아껴 두신 것”은 인간이 의식하는 삶에서 100% 발달된다.
이렇게 해서 토양의 세 가지 생산성은 거듭남의 세 조건, 불연속 등차, 그리고 세 천국을 표현한다. 그 반대 측면에서 있는 열매 맺지 못하는 실패의 세 조건은 거꾸로된 삶, 지옥의 삶을 표현한다. 따라서 비유는 선과 악, 양 측면에서의 완전한 조건, 그 조건의 확증이 표현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천적 상태를 영적으로 음미하는 사람을 제외한다면 천적 상태는 가장 매력적인 상태같이 보이지 않을 것이다. 감상적인 사람에게는 달빛이 햇빛보다 더 아름답고, 꽃이 익은 열매보다 더 마음을 당기게 하고, 젊은 여자가 노령의 여자보다 더 아름다워 보일 것이다. 이러한 맛은 심오하고 내면적 사랑에 속하는 수확물이라기 보다 믿음의 초기 상태들에 속한다.
보다 진보된 상태 속에서 행동으로 구체화된 원리인 만숙된 것은 입증 안된 감상적인 것 보다 훨씬 더 아름답다. 그래서 천적 천사는 “사람의 자”로 재어 네모반듯하다.

새교회 저술을 읽는 독자

이 세상 상태에 관해 말하면서 스베덴볽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의 저서를 읽는 이들에게는 다섯 계층이 있다. 첫째는 진리가 전혀 없거나 다른 교리가 꽉 차 있어 완전히 거절하는 자, 둘째는 호기심의 수준에서 받는 자, 셋째는 지적 측면에서 받아 어느 정도까지는 책의 내용에 흡족해 했지만 책의 내용이 그들 삶속에 스며들고자 할 때 곧바로 이전 상태로 환원하는 자, 넷째는 이 책이 그들 자신을 잘 설득시켜, 어느 정도까지지만 악을 죄로 알고 끊는 데까지 인도되고 선을 행하는 자. 다섯 째는 책의 내용에 기쁨을 가지고 영접하며 책의 내용을 그들 삶에서 확증하는 자이다.” 이와 같은 것이 주님이 세상에 허락한 새교회라는 처방을 수용하는 인간 마음의 조건들이다.

수확 (harvest)

더 충만한 진리가 마음이란 땅을 점거하면 더 많은 영적 소출이 수확기에 있어진다. 주님은 언제나 가장 많은 수확을 위해 일하신다. 그러나 어느 경우든지 그분은 인간 상태가 허용하는 정도에서만 산출하실 수 있다. 그분은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거두실 수 없다 (마태복음 7:16). “너희가 많은 열매를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다” (요한복음 15:8). 주님의 위대하심과 선함을 나타내려고 최선을 다 하는 것이 선한 자의 동기가 되어야 할 것이다. 우리가 진실로 주님에게 더욱 더 영광을 돌리면 돌릴수록 더 많고 더 품질 좋은 영적 열매가 생산된다. 자신에게 영광을 더 돌릴수록 우리의 선한 열매는 더욱 줄어든다.
씨가 길가에, 돌밭에, 그리고 가시덤불, 어느 곳에 떨어지든 그 밭 자체에 피해를 주지는 않는다. 주님이 비유로 가르치신 영적 이유의 하나는 마음 밭이 준비된 자, 진리를 듣고 이해할 준비가 된 자를 위해, 만일 준비가 안되었다면, 진리가 그들을 상하게 하지 않고 피할 수 있도록, 한마디로 진리가 더렵혀짐으로 받을 그들의 상해를 피할 수 있게 하시려는 배려에서 였다.
거의 모든 이들의 경우, 자기들은 진리에 흥미가 있고, 그것을 찾고 있다고 상상한다. 그러나 그들은 진리에 대한 그들의 흥미가 어떤 속성인지, 피상적인 흥미인지, 심오한 흥미인지 점검하지 않는다. 우리 마음이 진리에 무딘 흥미만 가지고 있다고 발견하면, 우리는 길바닥을 갈아엎어야 한다. 우리 심정이 암석 같음을 발견했다면, 반드시 그 암석은 주님을 사랑함으로 부수어 트려 가루가 되어 토양의 심도가 깊어지게 해야 한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 말이 불같지 아니하냐? 반석을 쳐서 부스러트리는 망치 같지 아니하냐?” (예레미야 4:3) 추구할 오직 하나는 우리의 거듭남이다. 그러면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정녕 기쁨으로 그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 (시편 120:5,6).

들음 (hearing)

주님의 성전에서 인간은 진리를 추구한다. 진리가 가르쳐지는 데서 우리에게 인정되는 두 가지 중요한 사실이 있다. 즉 좋은 설교와 좋은 들음이다. 만족한 생산을 위해 우량한 씨도 있어야겠지만 적절한 밭도 필수적이다. 제 아무리 설교 강단이 일을 많이 한다 해도 교회 의자에 앉은 사람이 경청하려는 자세가 없는 이상 진리의 씨는 뿌려지지 않는다. 잘 들음은 모임에서 좋은 설교를 촉진시킨다. “네가 어떻게 듣고 있는지 유념하느냐?” 심정으로 듣는 것, 열린 심정을 가지고 진리를 추구하는 것은 거듭남을 위해 사용되어진다. 우리의 주님은 설교에 관해서는 아주 적은 방향을 제시하고 계시지만, 듣는 것에 관한 언급은 상당히 많다. 우리가 언제나 유념해야 할 것은 듣는 자세는 교인의 의무로서 교회에 가기 전 이미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즉 세상의 사업이나, 정치, 육적인 쾌락 같은 감각적 세계로 열리는 마음 문을 최소한도 일요일 하루만은 걸어 잠가야 한다. 그래서 듣는 자나 설교자 양쪽 모두, 주님만이 신성한 진리를 뿌리시는 분이시다는 것, 설교자는 그분의 미천한 조력자일뿐임을 유념한다면, 듣는 자와 설교자 모두 더 나으며, 더 유용하게 되리라. “들을 귀가 있는 사람은 알아 들어라.”

5
밀밭 속의 가라지
– 지옥은 신성의 영향력을 분쇄하려고 발버둥친다 –

성서 본문: 마태복음 13장 24-30, 36-43절

24. 예수께서 또 다른 비유를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하늘 나라는 어떤 사람이 밭에 좋은 씨를 뿌린 것에 비길 수가 있다. 25. 사람들이 잠을 자고 있는 동안에 원수가 와서 밀밭에 가라지를 뿌리고 갔다. 26. 밀이 자라서 이삭이 팼을 때 가라지도 드러났다. 27. 종은 주인께 와서 ‘주인님, 밭에 뿌리신 것은 좋은 씨가 아니었읍니까? 그런데 가라지는 어디서 생겼읍니까?’ 하고 묻자 28. 주인의 대답이 ‘원수가 그랬구나!’ 하였다. ‘그러면 저희가 가서 그것을 뽑아 버릴까요?’ 하고 종들이 다시 묻자 29. 주인은 ‘가만 두어라. 가라지를 뽑다가 밀까지 뽑으면 어떻게 하겠느냐? 30. 추수 때까지 둘 다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 두어라. 추수 때에 내가 추수꾼에게 일러서 가라지를 먼저 뽑아서 단으로 묶어 불에 태워 버리게 하고 밀은 내 곳간에 거두어 들이게 하겠다’ 고 대답하였다.”

36. 그 뒤에 예수께서 군중을 떠나 집으로 들어 가셨다. 그러자 제자들이 와서 “그 밀밭의 가라지 비유를 자세히 설명해 주십시오” 하고 청했다. 37. 예수께서는 이렇게 설명하셨다. 38. “좋은 씨를 뿌리는 이는 사람의 아들이요 밭은 세상이요 좋은 씨는 하늘 나라의 자녀요 가라지는 악한 자의 자녀를 말하는 것이다. 39. 가라지를 뿌린 원수는 악마요 추수 때란 시대가 끝나는 날이요 추수꾼은 천사들이다. 40. 그러므로 추수 때에 가라지를 뽑아서 묶어 불에 태우듯이 이 시대 끝날에도 그렇게 할 것이다. 41. 그 날이 오면 사람의 아들이 자기 천사들을 보낼 터인데 그들은 남을 죄짓게 하는 자들과 악행을 일삼는 자들을 모조리 자기 나라에서 추려내어 42. 불구덩이에 처넣을 것이다. 그러면 거기에서 그들은 가슴을 치며 통곡할 것이다. 43. 그 때에 의인들은 그들의 아버지의 나라에서 해와 같이 빛날 것이다. 들을 귀가 있는 사람은 알아 들어라.”

투쟁 (the struggle)

우리의 마음은 선과 악이 영향력을 행사하는 싸움터이다. 천국은 우리가 그곳의 축복을 받도록 추구하고, 지옥은 우리를 지옥의 비참함 안에 끌어들이려 한다. 이 둘에 대한 선택권은 우리에게 있다.

유사점 (resemblances)

오늘 비유는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와 비슷한 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주시해 두어야 한다. 사실 마태복음 13장의 모든 비유는 서로 연결되어 있다. 이 비유들은 연결된 형태로 진보해 가는 시리즈로서 선한 사람 속에서는 거듭나는 진보를, 나쁜 사람 속에서는 악을 확증해 가는 것을 보여준다.

두 비유의 구별점 (distinctions)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에서 우리에게 주는 가르침은 인간의 마음속에서 새롭고 영적인 삶이 일어나도록 진리를 뿌리신다는 것이다. 따라서 마음의 각기 다른 종류에 따라 진리를 영접하는 양상이 달라진다는 것이다.
”가라지“의 비유에서, 사랑 있는 심정인 옥토에 진리가 뿌려진 것까지 포함해서 진리라는 좋은 씨에 따라 붙는 위험성을 드러내 보이고 있다. 이 위험들은 신성한 파종자의 일을 역행하려는 악령의 발버둥침에서 비롯된다.
오늘 비유에서, 곤경은 땅의 성질에 기인되는게 아니라 악마의 일로 인해 기인한다고 말하고 있다. 따라서 씨 뿌리는 사람은 두 사람이 있다는 것, 천국 삶의 수확을 위해 주님은 좋은 씨를 뿌리시고, 지옥 삶을 전염시키기 위해 비밀리에 나쁜 씨를 뿌리는 악마가 있다고 말한다.

천국 (the kingdom of heaven)

천국은 하늘에서나 지상에서나 주님의 교회 속에 있다. 주님을 왕으로 인정하고, 그분을 사랑하며 순종하는 곳에 천국은 존재한다. 이 왕국은 물질계의 장소가 아니고 어떤 상태, 조건 속에 존재한다. 즉 주님의 사랑과 지혜가 인간을 통치하는 원리로 받아들일 때 바로 거기에 존재하는 것이다. 거룩한 말씀을 가지고 주님은 인간의 지성에 진리의 씨를 뿌리신다. 좋은 씨란 신성한 사랑으로부터 나온 신성한 진리이다. 이 진리의 씨가 싹틈으로서 모든 천국적인 선이 그 안에 있게 되고 그 선을 운반하기도 한다.

자녀 (the children)

좋은 씨는 하늘 나라에 있는 자녀들이라고 본문에서 말해진다. 각 개인으로 볼 때, 영의 아버지를 주님으로, 영의 어머니를 교회로 삼아 거듭나는 이들이 하늘나라의 자녀들이다. 씨가 진리이다는 말은 추상적이지만 이 진리가 사람 속에 존재하면, 우리는 진리를 씨로서 비유하여 부른다. 그 이유가 진리의 씨는 각 사람이 어떤 존재인지를 만들기 때문이다. 새로운 생명이 싹이 터서 자라 열매를 생산하면 그 사람을 특징짓게 하는 품질을 주게 된다. 우리의 정신적인 왕국에 있는 자녀들이란 애정과 생각들이다. 신성한 진리라는 좋은 씨는 거듭나는 사람의 인격을 좌지우지하여 그 진리의 살아 있는 형태를 그에게서 만든다. 한 마디로 원리가 인간에게서 구체화된다는 말이다.

밭 (the field)

씨가 뿌려진 “밭”이 “세상”이다. 이는 정신적인 세계에 있는 것, 자연적 마음이요, 세상의 일을 담당하는 마음 부분을 말한다. 선과 진리에 관한 원리들은 인간의 마음 중 내적 부분, 즉 영적 마음에 심어지나, 이는 반드시 자연적 마음에도 이식되어져야 한다. 즉 기독교적 전투를 지상에서 펼치어 각 사람은 자신 속의 자연적 마음을 통제해 기독교적 승리를 천국에서 갖기 위해 준비되어야 한다는 것과도 같다.
주님은 그분의 거룩한 진리의 씨를 인간의 영에 뿌리시되 인간의 자연적 마음에까지도 뿌리시어 그 진리가 바깥쪽 삶에서 자라나 통제해 가도록 하신다. 교회는 품질 면에서 세상적이지 않지만 세상 속에 존재하고 있다. 주님께서 말하신 바, “이 하늘나라의 복음이 온 세상에 전파되어, 모든 백성에게 밝히 알려질 것이다. 그리고 나서야 끝이 올 것이다” 라는 구절이 있다. 그분이 의미하신 것은 복음이 지상의 모든 곳에 도달되어야 한다는 것 뿐 아니라, 세상의 것을 다루는 마음의 부분, 자연적 마음의 모든 곳에 도달되어 복음의 영향을 받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인간은 거듭나는 조건들을 거쳐가는 바, 거듭나지 못한 마음 부분에는 끝이 온다는 말이다.

악을 만남 (meeting evil)

악한 영향력과 우리가 접촉되는 것 또한 세상에 존재한다. 천국의 천사들은 영의 내면에서 역사하여 우리를 천국적인 것들에로 인도한다. 그러나 자연적인 것에 관여하는 우리의 자연적 마음에 속한 정신 세계에서 악한 영향력은 우리의 관심을 불러일으키며 어떤 암시를 만들려고 애쓴다.
그래서 자연적 마음에서 선한 영향력과 악한 영향력은 승부를 가리게 된다. 주님은 좋은 씨를 뿌리시나 악마는 가라지를 뿌린다. 이것이 삶에 의거 인격을 형성하는 세상 안에 존재하고 있다.

잠을 자다 (sleeping)

우리가 영적으로 깨어 있는 것은 우리가 보다 높은 삶, 영적 삶 속에 있을 때이다. 그러나 우리가 감각에 속한 것들, 외적이고 자연적인 삶에로 내려갈 때, 우리는 상대적으로 잠들고, 내적 삶에 대해서 무뎌지거나 꾸벅꾸벅 조는 상태에 있게 된다. 이것이 본문에서 “잠든 사이”라는 말로 표현되고 있다.

가라지의 글자적 의미 (the literal meaning)

글자적 측면에서 본문은 타인을 해치고 싶어하는 사람, 비겁하고 심술궂은 사람의 야비한 행동에 관해 언급하고 있다. 게다가 한 밤중에 야비한 행동의 표적이 잘 뿌려진 밀밭이고 거기에 악한 잡초의 씨들을 뿌렸다고 말하고 있다.
본문에서 언급되는 “가라지”란 통상 부르는 가라지, 즉 밭에 나는 강아지풀 같은 식물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런 풀은 때로 가축을 위해 일부러 뿌리기도 하기 때문이다. 사실 이런 풀(가라지)은 성장의 매 단계마다에서 밀의 성장과 달라 금방 식별되는 식물이기도 하므로 본문의 가라지와는 다르다. “가라지, tares”로 번역된 단어 “zizania”는 이 비유를 제외하면 성경에 등장하지 않고 있다. 이 식물을 탐구한 학자들의 공통된 결정은 “zizania”는 팔레스틴의 아랍어 “zowan,” 특별하게는 “독보리, darnel”이라 불리는 잡초일 것이라고 했다. 이 잡초는 성장의 각 단계가 밀과 아주 비슷하다. 이 잡초는 “가짜 밀, bastard wheat”이라고도 불린다.
독보리를 뽑을 때 두 가지 위험이 뒤따른다. 하나는 독보리를 뽑다 보면 옆의 밀의 뿌리도 뽑힐 수 있다. 기술적 측면의 위험이 있고, 또 하나는 밀을 독보리로 잘못 판단하여 오리려 밀이 뽑히는 정신적 측면의 위험이다. 독보리는 독성이 있다.

정신적인 가라지 (mental tares)

이러한 독보리 또는 가라지는 악한데서 근원되는 거짓 원리, 악에로 인도하는 원리들을 표현한다. “가라지는 악한 자의 자녀”이다. 즉 그들은 악과 거짓 원리에서 튀어나온 것들이다. 개인적 측면에서 보면, 이것은 사악한 사람들, 거짓 원리를 구체화시킨 사람들, 거짓 원리라는 형체 속에 담긴 사람들이다.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에 있는 가시나무는 거듭나지 않고 있는 마음, 육의 욕망에서 임의적으로 성장된 것, 악을 행하려는 유전적인 경향성을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본문의 가라지는 마음 안에 뿌려져 있다. 그래서 가라지는 악령에 의해 마음속에 비밀리에 심어진 거짓 암시들을 표현한다. 주님이 진리를 뿌리시는 동안 악마는 거짓을 뿌린다. 이는 옥토에서까지도 그러하다.
인간이 잠드는 동안 악마는 씨를 뿌리고 있다. 즉 우리가 감각적인 것에 관심을 두면서, 그 반면 영적인 것들에 관심을 적게 둘 때 이런 일이 발생한다는 말이다. 거짓 암시들은 악과 거짓에 쏠리려는 우리의 자연적인 경향성을 수단으로 우리에게 접근한다. 아주 당연스럽게 우리는 악령들의 이런 저런 암시들이 자기 생각이라고 여긴다. 그래서 원수들은 자기 할 일을 계속하면서도 어떤 의심도 우리로부터 받지 않는다. 그 이유는 우리가 자신 속의 감각적인 생각들의 근원을 인식 못하기 때문이다.

악마 (the devil)

가라지를 “뿌린 원수”가 “악마”라고 본문은 말하고 있다. 악마란 지옥에 대해 인격적인 이름을 붙여 부르는 말이다. 꼼꼼하게 말해서 악마는 자아 사랑에서 나오는 악한 원리이고, 주님에 반대되는 것들이다, 악한 자, 또는 악한 인격을 고정시키거나, 그 인격이 올바르다고 하는 사람은 일종의 악마이다. 그 이유는 그가 자아 사랑의 형체요, 자아 사랑을 구체화시켰기 때문이다.
악마가 사람이라고 말한 옛 생각은 자아 사랑에서 오는 원리의 비인격이다. 성경의 언어에서 말하는 악마는 비유적이다. 한 때 천사였던 사람이 악마가 되었다고 옛 사상은 말했는데 그렇게 된 천사는 없다. 모든 악마는 한 때 지상에서 살았던 사람이다. 주님이 주시는 삶의 모형을 뒤집어서 영위한 사람들이 스스로 악마가 되는 것이다. 지옥은 인간이 만든 것이지 주님이 만드신게 아니다.
자아 사랑에서 나온 악마는 인간에게 원수요, 주님에게도 적이다. 심정 속의 모든 악한 원리, 지성 속의 모든 거짓 생각은 우리 영혼에, 우리 주님에게 원수이다. 우리가 악쪽으로 더 돌아서서, 악령이 자극하는데 대해 더 귀를 갖다 댄다면, 우리는 더욱 주님과 천국에서 멀어지게 된다. 진실을 우리에게 말해 주는 악마는 하나도 없다. 그 이유는 “악마는 태초부터 거짓말쟁이요, 악마 속에는 진리가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겪는 곤경은 우리 마음에 잘못된 관념을 뿌리는 영향력이 우리의 원수들이라는 사실을 인식하게 해준다. 우리가 영적 삶에 감각적으로 무관심한 상태, 즉 영적으로 잠들어 있으면, 거짓 암시들이 자신을 기쁘게 해주는 듯한 착각 속에 빠지게 된다.

예증 (illustration)

수세기를 거친 기독교 역사를 보면, 수많은 악마들이 주님의 밀밭에, 교회에 가라지를 얼마나 뿌렸는지 모른다. 어떤 교회가 대중적이 되고 세상적으로 성장했을 때면 언제든지 그 속의 영은 깊이 잠들어 가게 되고 악마는 이 조건을 한껏 이용해서 그들의 편견을 뿌리고, 인간의 죄를 정당화하여 속이는 작업을 주님의 이름으로, 교회의 이름으로 얼마나 자행했는지 우리는 쉽게 역사를 회상해 볼 수 있다. 그런 다음 악마는 제 갈 길로 가 버리고 인간은 자신의 인격의 진짜 품질에 무지한 채 내팽개쳐진다. 주님이 제자들에게까지 하신 말씀, “너희 속에 든 영이 어떠한지 너희는 알지 못하고 있다”와 같아, 주님은 각 시대때마다 교회 속의 사람들에게 타이르셔야만 하셨던 것이다.
우리가 자기 생각의 근원을 알지 못할 때, 악마는 씨를 받을 준비가 아주 잘된 우리 마음에 거짓된 설득이라는 지옥의 씨를 자주 뿌리고 있다. 이렇게 뿌려져도 우리가 모르는 이유는 그 씨가 열매를 맺어야 그 씨의 성질을 발견하고, 파악하는 게 인간이기 때문이다. 악에 기울려는 우리의 유전적인 경향성은 악령의 영향력이나 현존에 매혹되기 쉽다.

싹이 틈 (the blade springing up)

“밀이 자라서 이삭이 팻을 때 가라지도 드러났다.” 진리가 우리 마음속에서 뿌리를 내리고 열매를 생산하여 우리 마음이 바뀔 때, 우리는 자기 속에 가라지도 있음을 알게 된다. 그런 다음에야 우리는 악령이 과거 우리에게 암시했었던 것들의 속성 중 어떤 것들을 보기 시작한다. 진리가 우리 의지에 영향을 주기 시작할 때, 우리는 우리 속에 있는 반대적인 것, 즉 이기적이고 죄에 속하게 될 것들이 우리 속 자연적 마음에 이미 뿌려져 있었다는 것을 보게 된다는 말이다. 사실 우리는 이런 것들이 마음속에 있음을 알고 있었지만, 단지 그것들의 진짜 속성을 실감 못했을 뿐이다.

가라지의 발견 (discovering the tares)

“가라지도 드러났다.” 이는 가라지가 자기 본색을 드러냈다는 말일 것이다. 이런 시기가 오기 전, 우리는 그것들이 밀인줄로 착각하고 있었던 셈이다. 가라지가 밀 사이에서 자라는 동안 가라지도 밀같이 보여진다. 그러나 더 자라면서 두 씨의 차이점은 더욱 보여진다. 그들이 맺은 열매 속에서 그들의 차이는 확실히 구별되어 진다. “열매로 너희는 나무들을 알리라.”
우리 속의 악과 거짓의 속성을 파악해 내는 최선의 방법은 우리 속에서 선과 진리를 더욱 성장시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것들은 악과 거짓의 속성과 반대되므로 그 반대된 것을 드러나게 해주기 때문이다. 즉 우리 속의 선과 진리가 성장을 더 잘할 수록, 우리의 악들이 더 나쁘게 보여 진다는 말이다. 악인의 경우, 아마 외견상의 것이나 수단에 불과한 것을 제외하면 자기 속의 악한 습관들을 포기하지 않는다. 그래서 악인이라 불리는 것이다. 그러나 그 인간도 그 사람 속에 더 나은 것이 자라도록 하면, 그도 자신 속의 나쁜 습관에 대해 강한 반감을 지니기 시작한다.
밀이 숙성되어 그 속성을 보여줄 때, 가라지도 자기 속성을 보여준다. 진리를 사랑하려고 진리에 흥미를 충분히 갖고, 진리대로 살아 볼 때까지, 진리의 힘은 그리 강하지 않은 바, 진리가 우리 속 가라지의 진짜 속성을 밝혀 주기에는 미약한 편에 속해 있다. 완벽한 힘은 선을 사랑할 때만 존재한다. 이것만이 악을 송두리째 식별 가능하게 한다.

주인 (the householder)

주인의 종들이 가라지를 발견했을 때, 종들은 묻기를, “주인님, 밭에 뿌리신 것은 좋은 씨가 아니었습니까? 그런데 가라지는 어디서 생겼습니까?” 최고의 의미에서 주인은 주님이시고, 이 주님이 우리의 안쪽 집을 관리하신다. 그래서 그분은 사람의 아들, 또는 신성한 진리라 불리우신다. 바꿔 말하면, 집주인은 신성한 진리이고, 이 신성한 진리가 우리 안쪽 집을 지키시며 그 집이 진리의 영향력 아래에 있게 한다.

종 (the servants)

주인을 섬기는 종들이란 지식들, 또는 우리가 아는 가르침들이다. 이것들이 마음을 섬긴다. 진리에 대한 지식들이 마음에 이미 뿌리를 내린 거짓 암시들의 속성을 파악하게 해준다.
다시 말해서 주님이 말씀 속에서 가르쳐 주신 진리를 더욱 더 음미하면, 우리는 자기의 자연적 마음속에 악한 삶을 부추기고 있는 어떤 다른 것들이 있음을 더욱 더 발견하게 된다. 그래서 짐짓 놀라게 된다. 그 이유는 주님이 그분의 밭, 즉 우리 마음에 뿌리신 것은 좋은 씨뿐이었음을 우리가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당연히 “가라지는 어디서 생겼습니까?” 라는 질문이 따를 수밖에 없다. 다시 말해 왜 이런 악과 거짓된 것들이 우리 마음속에서 자라나서 나를 괴롭힐까? 라고 되묻게 된다는 말이다. 이렇게 묻는 때, 이 때는 우리가 이미 준비된 상태인지라 이런 거짓과 악들을 뽑아 내겠다고 당연히 생각하는 때이다.
이 때 우리는 주님께로, 그분의 말씀에로, 신성한 진리가 통치하는 안쪽 마음에로 나아가서 마음의 상태에 관해 묻는다. 이렇게 물을 때란, 자기 속의 악하고 거짓된 것을 멀리 던져 버리겠다는 결심에 어떤 의심도 갖지 앉는 때이다. 이 때에 주님은 그분의 진리로 가르치시는 바, 마음속에서 스스로 보여주게 된 거듭 안 난 것들은 영적인 원수들이 해 놓은 짓들이라는 것, 이는 자아 사랑이라는 악마가 해 놓은 것들, 이 자아 사랑이 완전히 정복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도, 악마는 우리로 악령인 자아 사랑과 제휴하도록 꾀고 있다는 것 등등을 알려 주신다.
주님은 가라지에 대해 우리로 하여금 의문이 제기되도록 하시어 우리로 인간 본성을 이해 할 수 있게, 그리하여 우리가 주님을 자신의 진정한 충고자요 스승이심을 더 충분히 인정하도록 배려하고 계신 것이다.

예증 (illustration)

주님에게서 분리되어 있는 어떤 것을 선으로 간주하여 시작할 때, 또는 자연적 자아 사랑에 근거해서 인간이 시작하는 순간, 악이 인간의 마음속에서 창조되어 진다. 왜냐하면 악은 선을 뒤집어 놓은 것, 신성한 선에서 분리되어진 선, 이리하여 선의 성질이 신성과 반대되어 변화된 것이기 때문이다. 신체를 돌면서 매개체 역할을 하는 혈액이 심장과의 연결에서 분리 될 때, 그 피는 위험한 것이요, 죽게 되는 것과 같다.
거짓 사상도 진리와 아주 흡사한바 이것이 주님의 인도를 받는 대신 자아 사랑을 선호하여 뒤돌아 섰을 때만 쉽게 구별된다. 이런 경우, 인간이 자기 삶을 개혁해서 주님과 천국에 연결되기 전에는 이런 사상들을 던져 버릴 수 없다. 개혁만이 거짓과 진정한 것 사이의 차이점을 실감하게 해준다.

가라지를 모음 (gathering the tares)

자기 마음속에 있는 거짓 신념의 속성을 얼마만큼이라도 알아차리고, 그 거짓 신념이 악한 열매를 생산하는 것을 두려워 할 때, 우리는 그것을 뿌리 뽑아야겠다는 강한 확신 속에 서게 된다. 초심자가 가지는 성급한 열정을 가지고 우리는 자신이 생각 한대로 되지 않는 자신 속의 모든 것을 쓸어버리길 원한다. 아마 하늘로부터 불이 내려와 자기 속의 쓸모 없는 것들을 태우라고 요청하고 싶어할는지 모른다.
그러나 주님이 가르치시는 바, 우리는 그런 일을 전적으로 해낼 조건을 갖추고 있지 않다는 것, 사실 그런 일은 천사가 해야 한다는 것을 알게 해주신다.
예를 들어 베드로의 열정을 보자. 그는 주님을 따르는데 필요하다면 무엇이든 하겠다고 장담했고, 결코 그분을 버리는 일은 없을 거라고 선언했다. 그래서 그는 자기가 세 번 주님을 부인할 것이라는 스승의 예언에 깜짝 놀라기도 했다. 그는 후에 주님을 세 번 부인했던 것이다.
“저희가 가서 가라지를 뽑을까요?” 하고 종들이 주인께 물었을 때, 주인은 대답하기를, “가만두어라. 가라지를 뽑다가 밀까지 뽑으면 어떻게 하겠느냐? 추수 때까지 둘 다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두어라.” 비유 설명에서 “추수 때란 시대가 끝나는 날이다.” 이 끝날 이란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세상욕의 끝이기도 한 것이다. 우리 마음의 정상적인 것은 거듭 나아가는 데 보조를 맞추는 것일 게다. 우리는 우리 속의 악과 거짓된 것이 과잉 성장을 해서 삐져 나오기 전에는 우리 속의 그것들을 던져 버릴 수가 없다.
본문에서 주목할 점의 하나는 종이 가라지가 있는 것을 보았으나, 그것들을 뽑을 때가 아니었다고 대답하는 점이다. 이와 같이 우리는 우리 속의 거짓 신념의 속성을 보게 될 때, 그것들을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 처리해야 하는 적기가 언제인지를 이해할 수도 있다는 말이다. 거짓을 뿌리 뽑아 내는 때가 언제인지에 대한 예를 들어보자. 여러분의 마음속에서 거짓 사상이 자라고 있음을 여러분이 보고 있다고 상상해 보자. 그러면 여러분은 그것을 뽑아 내야겠다고 작정한다. 그 이유는 그것이 삐뚤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러분이 자신의 능력으로 일을 잘 처리 해갈 경우, 자신 속에 신념이 서 있다고 판단하고, 여러분은 자기 속의 거짓 사상을 추방했다고 착각해 버린다. 이 착각은 자신 속에서 자라나는 주님을 신뢰함과 겸손도 뽑아 내게 된다. 거짓된 속성을 거짓된 생각으로 인정하게 되는 것이요, 그 인정했던 것은 진리에 반대되어 살고 있는 것인데도 주님의 이름으로 하는 듯하여 오히려 그 거짓 속성을 과잉 성장시키는 노력에 빠지고 만다.
우리는 진리가 아닌 모든 사상을 단번에 모두 추방할 수 없다. 오로지 우리의 안쪽 마음속에 있는 선하고 참된 원리의 점진적 발달에 의해 우리는 자연적 마음, 즉 바깥쪽 마음에 있는 거짓들이 성장할 수 없게 만 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우리가 성경의 내적인 영적 의미에 대한 총명한 지식을 증가시킬 때, 우리는 성경 글자가 주는 의미로 형성된 잘못된 사상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이다. 거듭남의 초기 단계에서 우리는 거짓된 것이 무엇인가에 관해 자주 실수를 연발한다. 예를 들어보자. 자연적 마음만 가진 사람은 자기 속의 거짓 관념을 던져 버리겠다고 성급하게 서두르는 가운데 인격적 측면에 관한 하느님이나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한 인격에 대한 모든 사상까지 뽑아 내는 경우가 발생한다.
우리가 주님의 진리를 배우고 사랑해서 그 진리로 살게 되어 선한 삶 속에서 우리의 마음을 형성할 때 우리는 추수하게 된다. 그러면 주님으로부터 와서 우리 속에 있게 된 선은 자연적 마음속에 든 거짓된 것들을 보게 된다. 그리고 우리 심정은 온갖 거짓들에 완전한 혐오를 느끼는 상태에 놓이게 된다. 이리하여 우리가 선하고 참된 원리를 가지고 스스로 살아 갈 때, 우리는 악하고 거짓된 원리 밖에서 살게 된다.

거짓을 분리함 (separating falses)

진실로 좋은 것이 부와 명예라고 상상하고 있는 자신을 어떤 이가 보게 되었다고 가정해 보자. 그가 가진 그런 생각이 잘못임을 보았다는 것만 가지고 그가 그 사상을 즉각 던져 버릴 수는 없다. 그러나 사람 속에서 이웃을 사랑함이 자라 갈 때, 그리고 쓸모 있는 삶을 더욱 사랑하게 될 때, 그는 자기 속에서 우물쭈물하며 좀처럼 사라지지 않는 세상욕이 암시했던 거짓 관념들의 성장을 제지하게 될 것이다.
진정한 것과 거짓된 것들은 선함이 확증되는 추수 때에 완전히 분리되어 진다. 실제로 우리는 거짓 사상을 점진적으로만 거절할 수 있고, 선함 역시 점진적으로 키워 간다. 이런 이유로 주님은 우리의 의지가 언제나 자유로운 상태에 있도록 보호하신다. 그 이유는 인간의 의지가 인격을 바꾸겠다는 데 대해 만족할 때까지 거듭나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너무 서둘러서 가라지를 뽑는다는 것은 인간의 의지가 강요당하는 결과를 초래 할 것이다.
인간은 거짓 사상이나 악한 습관이 발견되자마자 거짓 생각을 거절할 것이고 악한 습관을 멀리 할 수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 사실, 더 낫다는 판단의 순간을 제외하면 인간은 나쁜 습관이나 거짓 관념에 변명을 보태거나 오히려 방어까지 하려든다.
그러나 인간이 거듭 나아갈 때, 거듭 안 나고 있는 생각과 습관들은 점차적으로 정오의 태양이 눈을 녹이듯 되어 질 것이다. 우리는 거짓을 반기는 우리 속의 악한 경향성을 거절하기 전에 우리 속의 거짓을 마음으로부터 거절해 내지 못한다.
물론 인간은 언제나 악하고 거짓된 모든 것을 던져 버리려는 노력을 경주해야만 한다. 그러나 이에 대한 성공은 그가 얼마나 거듭났느냐에 달려 있다. 가라지를 뿌린 원수에 얼마나 잘 저항해 내느냐에 따라 우리는 우리 속의 가라지를 제거할 수 있다. 악이 하느님과 반대되기 때문에, 하느님과 반대되는 것은 죄가 되기 때문에 악을 금해야 한다. 악행을 중단하지 못하는 만큼 우리는 어떤 선도 행할 수 없다. 선을 사랑하고 악을 미워하는 것을 습득하지 않는 한 어떤 사람도 악을 금할 재간이 없다. 심정이 선을 사랑하여 따뜻해지게 될 때, 눈은 진리의 빛으로 더 밝아진다. 그리하여 우리는 사물을 다르게 본다.

예증 (illustration)

겨울철에 살아 있는 나무와 죽은 나무를 외관상으로는 식별할 수 없다. 그러나 여름철, 나무가 성장하는 기간에는 각 나무의 조건은 자연스럽게 드러나진다. 이와 같이 마음속에서도 진리의 빛은 사랑의 따뜻함 없이는 영적 성장을 눈곱만치도 만들지 못한다.
진리를 소유하고 있다는 교회에서까지도 많은 이교도들이 발생하고 얼마나 많은 악들이 자행되는지 잠깐만 둘러봐도 금방 눈치챌 수 있다. 모두 같은 성경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자아 사랑이라는 악마, 남들 위에 군림하고 싶어하는 지배욕이 교회 안에 흉측한 가라지를 뿌리고 있는 것이다.

왜 가라지가 있도록 허용되고 있을까?

다음과 같이 질문할는지 모른다. 왜 주님은 가라지가 뿌려지는 것을 허용하실까? 두 가지 이유가 있을 것이다. 첫째는, 인간 자신 속에 든 악에 기울려는 유전적인 경향성이 악령이 보내는 암시에 문을 열어 놓고, 그 암시를 듣고 싶어하고, 그런 암시를 좋아하기 때문이다. 두 번째는, 이런 가라지들은 신성한 섭리에서 선한 이들에게 시험으로서 사용되기 때문이다. 이 시험은 인간으로 자신 속의 경향성들을 보게 해주고, 그것들을 멀리 하게 하는 약효가 있다. 비록 인간이 자주 잠들어도 주님은 결코 그러하지 않으신다.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이는 졸지도 잠드시는 일도 없으시다.”
인간이 진리를 배워 그에 따라 살려 할 때, 악령은 악에 기울려는 인간 속의 자연적인 경향성들을 흥분시킨다. 이러므로 해서 인간은 자기 자신의 진짜 모습을 발견한다. 이 발견 없이, 어떤 거듭남도 존재할 리 만무하다. 진리 없이 인간은 자기의 악들이 악인지를 알지 못한다. 시험 없이 자기 스스로 악을 거절할 수 없는게 인간이다. 따라서 신성한 섭리 속에서 악마의 일들은 거듭나는 사람을 선한 쪽으로 더욱 향하게 해준다.

천사들

신성한 진리(Divine Truth)는 심판을 행하시어, 인간의 인격에서 각 사람을 통치하는 사랑에 반대되는 모든 것을 축출하신다. 신성한 진리(Divine Truths)들이란 천사들이고, 천사들이 바로 수확기의 추수꾼으로 활동한다. 그들은 밀, 좋은 것들을 주님의 창고인 천국으로 모으고, 악과 거짓된 것들은 단으로 묶어 불태운다. 즉 그들은 우리 마음속의 다양한 것들을 질서대로 정리하고 분류해서 거듭난 삶 속의 모든 원리들은 그것에 걸맞은 장소인 천국에 모으고 모든 지옥적인 원리들은 거절하여 지옥에 그 자리를 갖게 한다.

지옥의 불, 등등
지옥의 불은 모든 심정 속에 든 악한 욕망이다. “남을 죄짓게 하는 모든 것”은 거짓들이요 “불법을 행하는 모든 것”이 악인 것이다.
“통곡함”이란 거짓 원리서 비롯되는 슬픔이다. “이를 갊, 가슴을 치며 통곡함”이란 악한 욕망으로부터 있는 거짓 추론의 불일치를 말한다. “그러나 의인들은 그들의 아버지의 나라에서 해와 같이 빛날 것이다.” 그들은 사랑과 지혜, 영적 태양의 열과 빛을 더욱 이용하여 더 많은 즐거움을 만끽한다.
의로운 자가 천국에 들어가기 전, 자신의 비천함을 보이려고 행진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오히려 그들의 인격이 사랑과 지혜로 빛날 것과 주님의 선함과 지혜를 찬양할 것임을 의미하고 있다. “너희 빛을 사람들 앞에서 비취게 하여 너희들의 선한 일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우리가 주목할 것 중 하나는, 진리에 대한 지식을 표현하는 본문 속의 종들은 우리 마음속에서 선한 것을 악에서 분리시키는 일을 하지 않는다는 것, 이 일은 천사들에 의해 있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하늘에 속한 진리, 저것은 땅에 속한 진리라고 가르는 것은 삶으로 확증된 진리들에 의해서만 된다는 말이다.
우리는 천국과 지옥, 두 왕국 사이에 놓여 있다.
두 왕국에서 오는 영향력, 모두는 우리에게 각기 그 힘을 쏟는다. 두 왕국에서 온 씨들이 우리의 자연적 마음에 뿌려진다. 우리가 천국에서 온 씨를 음미할 때, 우리는 그 씨를 계속 키워 나갈 필요가 있을 뿐, 가라지를 보고 뽑아 내는 일까지 하라는게 아니다. 수확하는 그 때까지 우리의 선한 원리들을 계속 키우고 있노라면, 주님은 우리에게 빛을 주시고 가라지를 뽑아 낼 힘을 주시게 된다. 어찌됐든 우리는 추수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이 비유가 가르치는 바, 우리가 거듭나는 삶을 시작하자마자, 이 지상은 보다 쉬운 낙원일 것이라고 기대해선 안된다는 것도 말하고 있다. 불법을 행하게 하는 모든 것은 추수 때까지 우리 마음에서 끄집어 내질 수 없다. 즉 “너희는 세상에서 고난을 당할 것이다” (요한복음 16:33.) 우리는 이 세상을 이겨내야 한다. 그래서 우리 주님의 본보기와 같이, 세상은 우리가 모셔야 할 스승이 아니고 우리가 부려야 할 하인임을 발견해야 한다.

우리의 마지막 고향
모든 인간에게 하느님이 주신 운명은 천국에 고향이 있다는 것이다. 이 고향이 우리에게 열려 있고, 그 속에 우리가 거할 장소는 신성한 사랑에 의해 준비되어 있다. 그러나 그 장소를 차지하느냐, 못하느냐는 지상에서의 삶에 의해 스스로 결정해야 할 질문이다. 씨 뿌리는 사람은 우리 마음에 계속 씨를 뿌리고 계신다. 그분은 좋은 씨만을 뿌리신다. 그분은 밝고 따뜻한 대낮에 뿌리시고 계신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현혹하려 드는 악마는 주님이 우리에게 하고 계신 일을 주시한 다음, 정신적인 어두움이 덮이는 때, 우리가 영적으로 잠드는 때, 우리가 감각적인 것들에 정신이 쏠리는 틈에, 우리도 모르게 살짝 다가와서 주님의 진리에 별로 경청하지 않는 마음 밭에 악하고 거짓된 원리의 지옥적인 씨를 뿌려 놓는다. 그래서 우리는 인간 삶의 실제에서 스스로 깨어 있을 필요가 있는 것이요, 영적으로 잠들지 않아야 주님은 우리 속에서 그분의 천국 일을 계속하실 수 있고, 악마는 지옥적인 책략에 실패하고 말 것이다. “들을 귀가 있는 사람을 알아들어라.”

6
겨자씨
– 실제로 사용된 진리의 성장 –

성서 본문: 마태복음 13장 31-32절

31. 예수께서 또 다른 비유를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하늘 나라는 겨자씨에 비길 수 있다. 어떤 사람이 밭에 겨자씨를 뿌렸다. 32. 겨자씨는 모든 씨앗 중에서 가장 작은 것이지만 싹이 트고 자라나면 어느 푸성귀보다도 커져서 공중의 새들이 날아 와 그 가지에 깃들일 만큼 큰 나무가 된다.”

생명 (life)

진리는 씨처럼 생명력으로 가득 차 있다.
우주에는 한 개의 자존하는 생명, 창조자에 속한 것, 유일하게 진정한 생명, 내향적 생명력, 이 생명이 모든 창조된 것들을 채우고 활력을 준다. 주님에게서 나오는 각 진리는 그분의 생명을 가지고 내향적으로 채우신다. 모든 진리는 지적 생명의 완전한 체계의 근원을 자체속에 함유하고 있다. 그래서 그 체계는 씨가 나무로 성장하듯 질서 있는 성장 과정에 의거 발달되어진다.

하늘 나라 (the kingdom of heaven)

이 비유는 영적 삶을 처음 의식하는 시작에 관해서, 그리고 그 시작은 진보적으로 발달해 간다는 것에 관해 가르치고 있다. 하늘 나라는 신성한 지혜를 수단으로 신성한 사랑이 통치하는 국가이다. 이 국가는 영의 왕으로 주님을 알고 사랑한다면 어디에서든지 존재한다. 그래서 그 나라가 어디에 있느냐는 질문에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하느님 나라는 너희 속에 있다” 라고 답하셨던 것이다.
감각적이기만 했던 유대인들에게 하늘의 나라란 메시아가 오신 뒤 지상에 있는 것들이 안락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추는 것, 그들이 오랫동안 바래 온 것, 패권을 잡아 유대인을 높이 세우는 것이라고 상상했다. 그러나 하느님 나라는 인간의 삶과 마음 안에서 영적 원리들이 통치하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이 이 나라에 들어간다는 것은 어떤 장소에 있는 나라에 입국한다는 것이 아니라, 인격과 삶의 어떤 상태에로 들어간다는 말이다. 세상에서의 삶에서 천국의 삶이 있어진다는 것은 영적으로 말해서 세상적 수준의 인격에서 천국적 수준의 인격으로의 변화를 말하는 것이다.
이런 견지에서 하늘의 왕국은 천국에 있는 주님의 교회이다. 지상에서의 경우, 거듭나는 사람들로 구성되는 만큼 주님의 교회가 있게 된다. 하늘의 이런 영적인 나라 그리고 인간 마음 안에서 천국의 원리가 통치하는 것은 “겨자씨에 비길 수 있다.” 그 이유는 사랑과 믿음으로 된 이 나라의 성장, 또는 인간 마음 안에서 있게 되는 사랑과 믿음의 성장은 마치 씨의 성장과 같기 때문이다.

겨자씨 (mustard seed)

“씨”란 진리이다. 진리 안에 선함이라는 싹틈(germ)이 존재한다. 특별히 겨자씨가 본문에서 소개되고 있는데, 그 이유는 그 씨의 본성 내지, 그 씨가 지니는 세부 내용 때문이고, 더우기 글자로도 영적 의미의 상응이 눈에 띄도록 강하게 만들어져 있기 때문이다. 겨자씨는 열(heat)을 함유하고 있다. 이 씨의 열은 사랑의 따뜻함을 표현해 주고, 이 따뜻함은 진리 안에 또는 마음 안에 놓여 있어 진리에 열심을 낼 때 열을 낸다.
물론 이 열심은 초기에는 단지 자연적일 뿐이고 많은 이기적인 바램과 하나가 된다. 그러나 거듭나는 과정에서 우리는 이런 외적(자연적) 조건을 벗어나 성장하는 바, 영적인 열심(진지함)으로 진입된다. 어쨋든 처음에 가질 수 있는 것들은 자연적인 진지함뿐이다. 이것은 우리가 뭔가를 행동하려는데 대한 목적을 주장하게끔 해준다.

어떤 사람, 그리고 밭 (the man, and the field)

어떤 사람이 겨자씨를 가지고 밭에 뿌리러 나갔다. 이 사람이란 주님, 예수 그리스도, 신성한 사람이시다.
그분이 진리의 씨를 뿌리시는 “밭”이란 우리의 자연적 마음이다. 이러므로 겨자씨는 진리를 표현하고, 그 안에 선한 애정이 있고, 이 씨가 주님에 의해 우리의 자연적인 마음에 뿌리어져서 우리로 장차 영적 마음이 될 수 있도록 하신다.

씨가 작음 (the smallness of the seed)

이 겨자씨는 “모든 씨앗 중에서 가장 작은 것이지만” 이라고 말하고 있다. 동방 지역에서 겨자씨는 10-12피트(4-5미터) 크기의 나무로 성장한다. 그래서 글자적으로 보면, 본문은 동양적인 언어, 즉 뭔가를 강하게 표현하는 통상적인 방법으로 말하고 있다. 겨자씨는 작은 씨로 널리 알려진 씨이다. 동양의 말 가운데, “겨자 씨 만큼 작은데…” 라는 경우와 비슷하다. 예를 들면, 모하멭의 코란을 보면, “나의 아들아, 참으로 모든 문제, 그게 좋든 나쁘든, 비록 그것이 겨자 씨 만 할지라도, 그리고 바위로 감추어져 있어도…, 하늘이든, 지상이든, 하느님은 똑같이 빛을 가져다 주신다.”
우리 주님은 “겨자 씨”란 용어를 사용하시어, 인간의 영적 삶의 시작은 아주 미미하다는 것, 그럼에도 그 작은 것이 크게 성장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계신다.

영적인 겨자 – 씨

영적으로 보면, 겨자 씨는 진실로 모든 씨 중에서 작은 것이다. 그 이유가 그 씨는 영적 삶의 지극히 작은 시작을 표현해 주기 때문인 바, 인간이 진리를 사랑하기 시작하고 그 진리로 살아보겠다고 시작이 되었을지라도, 그는 자기가 이뤄 놓는 선이 자신이 선해서 있게 된 줄 알고, 또는 자기가 능력이 있어서 그렇게 된 줄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이러한 그의 선은 자연적이지 영적이지 않다.
이 선은 아주 작은 종류의 선, 즉 천적인 삶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선에 속한다. 그가 해 놓은 선의 양이 아무리 많다 해도, 여전히 그 선은 가장 외적인 특질 속에 존재하고, 선이라 불릴 수 있는 어떤 것 중에서도 가장 작은 영적인 것이다. 진리라는 생명 있는 씨는 인간의 마음에서 거처할 곳을 발견하는데, 그러면 선을 행할 그의 어떤 열정(zeal)이 불타오른다. 그러나 그의 열정은 외적인 것, 자연적이어서 많은 이기적인 것들과 하나를 이루고 만다.

씨가 뿌려짐 (the seed sown)

영적인 겨자씨는 인간의 마음에 뿌려진다. 그 때란 인간이 주님의 말씀 속에 있는 진리를 사용하려는 때, 악을 죄로 알고 금할 때, 자신의 사상 대신 신성한 진리가 그의 삶을 통치하도록 결심할 때에 있어진다. 자연적으로 보면, 우리 모두는 자아 사랑에서 흘러나오는 사상을 사랑한다. 이 사랑으로 어떤 선을 행할 때, 우리는 그 선을 자기 것이라고 주장하고, 자기는 자신을 추켜세우면서 타인도 자기의 선함을 본받기를 바랜다. 그러나 이런 선함은 모든 선함 중에서 지극히 작은 것일 뿐이다. 이런 선함이 가진 진리는 진리라는 모든 씨 중에서도 가장 작은 씨이고, 그 씨 안에 함유할 수 있는 천국적인 선함은 단지 미발달된 싹틈만 있을 뿐이다.

씨가 자람 (the seed growing)

그럼에도 우리가 선을 행하겠다고 작정하고 있노라면, 주님은 우리의 선함을 점진적으로 발달시켜 주신다. 그리고 우리가 악을 금해야겠다는 결심과 바램을 증가시킬 때, 우리의 선함의 특질 역시 개선되어 간다. 그러면 우리의 지혜는 천사들 같이 증가되어 지금 납득할 수 없었던 많은 것들을 알고 이해하게 된다. 주님이 제자들에게 말하시기를, “아직도 나는 할말이 많지만 지금은 너희가 그 말을 알아들을 수 없을 것이다” 라고 일러 두셨던 것이다 (요한복음 16:12.).
진리라는 우리의 씨는 나무로 자라 갈 것이고, 마음속의 새들은 거기서 쉴 곳을 발견하게 된다. 모든 선함은 주님의 것임을 알게 될 때, 그래서 주님의 이름으로 선을 행할 때, 우리는 자신만이 중요한 인격자라는 아집을 벗어나 성장하면서, 더욱 나은 영적인 사람이 되어 가게 된다. 그러면 마음속의 진리들은 가지를 더 치게 되고 여느 푸성귀보다 더 자라나게 된다. 그리고 진리를 위해 진리를 사랑할 때, 마음속의 진리가 주님의 선과 진리를 사랑하는 것과 하나를 이룰 때, 우리의 진리들은 장대하고 풍성해진 나무들이 된다.
이와 같이 마음속에 뿌려진 모든 진리는 그 속에 영적 생명이 미발달된 채 발달될 능력만을 담고 있다. 인간에 비교한다면, 아기가 태어나되 성인이 될 가능성이 단지 미발달된 채로 가지고 있는 것, 즉 싹을 가진 것과 같다. “사람의 자”는 곧 “천사의 자”가 될 싹이라는 말이다 (요한계시록 21:17).

나뭇가지 (the branches of the tree)

이 나무에 관해 말해진 바, “공중의 새들이 날아와 그 가지에 깃들일” 것이라고 언급되고 있다. 나무의 가지는 사람의 팔같이 말단 부분들이다. 그래서 가지들은 궁극적인 것(ultimate), 또는 외부적인 것, 표면에 가장 가까운 것들, 마음의 바깥 부분 등을 표현하게 된다. 진리를 가장 내면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지혜이다. 지혜란 진리가 사랑 받아 실제에 쓰여질 때에 있게 된다. 가장 바깥쪽 수준으로 본다면, 진리는 사실(fact)에 관한 지식, 즉 과학이다.
이를 새교회에서는 사실에 관한 지식, 기억 속에 있는 지식을 과학적인 것들(scientics), 즉 알려져 있는 것들이라 부른다. 이런 것들은 인간 마음의 말단 부분, 즉 기억 안에 존재한다.

새들 (the birds)

새란 지적인 것들, 즉 생각들을 표현하는데, 이것들이 마음을 날아다닌다. 거듭 나아가는 사람에게 있어서, 그 사람이 진리를 사랑해서 실제에 응용해갈 때, 진리는 나무처럼 그의 마음속에 가지를 뻗고 그의 합리적인 생각인 새들은 그의 기억 속에 저장된 알려진 사실 안에 거처를 둘 장소를 발견한다.
그 다음 이와 같은 모든 사실들이 삶을 채우게 된다. 그 이유는 영적 진리라는 생명 있는 것들은 기억 속에서 거처를 발견하고 더 가지를 쳐서 더 멀리 더 넓게 삶의 각 방면에 미치기 때문이다.

깃들일 곳 (lodging-place)

우리의 영적 생각속의 원리가 추려져 나와, 바깥 삶의 사실과 하나를 만들 때, 영의 내향 세계가 뻗어 나가는 외향 세계, 바깥쪽 삶의 각 세부 사항 속에서 모든 사실이나 주위 여건들이 영혼과 생명을 인식하게 될 때, 이 때야말로 축복된 조건을 갖춘다.
그런 다음, 우리 마음속에서 주님의 말씀 속에 있는 내향적인 영은 말씀 글자 안에서 거처할 곳을 발견하고, 말씀의 영과 글자는 인간의 영과 몸이 하나를 만들듯 하나를 만든다. 이는 신실한 심정이라는 옥토에서 하느님의 말씀 속의 진리가 성장해서 있게 되는 은혜스러운 약속으로서의 결과이다.
이런 삶 속에서 성경의 글자적 의미는 스스로 열려져 신성한 진리 속에 거처를 둔 영을 드러내 보여준다. “자연을 꿰뚫어서 자연 속의 하느님까지 보아야” 한다. 그래서 살아 있는 진리의 큰 나무의 작은 가지인 기억 속에 알려져 있는 사소한 사실에서까지도 위쪽으로, 그리고 안쪽으로 추적해 가서 나무가지에 깃들인 새들, 즉 영적 사고라는 살아 있는 새들 안에서 영적 상응물을 보게 된다.
이러한 정신적 삶의 칭찬할 만한 상태 속에서 물리적 창조의 모든 세부 사항은 거룩한 하느님을 찬양하여 행복한 합창을 하게 된다. 그런 다음 물질적인 자연은 영계의 거울로서 지상의 온갖 것으로 구체화된 더 높은 생명을 반영하게 된다.
이렇게 거듭남을 진보시켜 갈 때 우리가 아는 모든 것은 실용적인 삶에 있어서의 문제들이 되어 간다. 어린 시절에 가르쳐진 우리 속의 모든 교훈 그리고 기억 속에 저장된 것들은 우리에게 실제적인 사용이 있게 된 바, 그것들은 영적 생명으로 채워진다. 따라서 그것들은 그저 몸일 뿐이 아닌 살아 있는 몸, 그 안에 생명이 있는 영에 의해 움직여지는 몸이다.

기르는 곳 (breeding-places)

나무가지는 새들을 위해 쉴 곳도 되지만 새끼를 기르는 곳도 제공한다. 이와 같이 기억 속의 지식은 더 많은 생각을 할 기회를 주어 생각을 더욱 배가시켜 준다.
이리하여 투쟁하는 삶에 있어지는 실망되는 주위 여건 가운데서 이 비유는 천국적 햇빛의 광선과도 같이 우리를 향해 미소지으며, 한 때 마음에 뿌리박은 생명있는 진리를 가르친다. 그리고 선의 사랑으로 채워 주고 무성해져 마음 안에 가지를 뻗게 하는 바, 고상한 나무가 되어 활력과 다양함으로 가득 찬 삶이 될 때까지 성장하게 해준다.
이는 주님의 새교회에서 더욱 그렇게 된다. 그 이유는 이 교회의 교리는 합리적 체계로, 모든 사항들이 관련짓고 연결되어 모든 방면, 즉 내면에서 외면으로까지, 마음으로부터 물질로까지, 천국에서 지상에까지로 배열되어 있기 때문이다. 삶에 관한 과학적인 것들이나 사실들은 수도 없이 많겠지만, 그 모든 것은 합리적으로, 영적 생각이라는 정신적인 새들에게 거할 곳과 기를 곳을 제공해 준다.
진실로 새교회에서, “그렇다. 참새도 제 집을 발견하고 제비도 자기 둥지를 발견하여 자기 새끼를 놓는다. 너의 제단에서 나의 왕이요 나의 하느님이신 만군의 여호와여”일 것이다. 새교회에서는 삶의 모든 사실들이 선용의 수단이 되고 영적 삶의 수단이 되어 “나뭇잎까지도 만국 백성을 치료해 준다.”
거듭나는 사람에게 주님의 진리는 마음의 천국적인 동산 한가운데서 생명의 나무가 되어 있다. 이렇게 나무를 가진 자는 “악을 꾸미는 자리에 가지 아니하고, 죄인들의 길을 거닐지 아니하며, 조소하는 자들과 어울리지 아니한다.” 그리고 그의 기쁨은 “야훼께서 주신 법을 낙으로 삼아 밤낮으로 그 법을 되새김”에서 있어진다. 이 사람은 “냇가에 심어진 나무 같아서 그 잎사귀가 시들지 아니하고 제 철 따라 열매 맺는” 나무 같다. 이 사람에게 안될 일이 없다.

진리의 번식 (truths prolific)

진리가 씨에 비유될 때, 우리는 진리 속의 생명력에 대한 명확한 생각을 가졌으리라 본다. “씨는 말씀이다”라고 주님은 말하셨다. 씨는 비록 작지만 다산성이 강하다. 아주 작은 씨라해도 매우 큰 나무로 성장될 수 있다. 그리고 이 나무는 더 많은 씨를 생산하는 바, 비록 씨가 하나일지라도 큰 나무, 큰 숲을 이룰 때까지 계속 이어진다. 그리고 이 씨들은 그 밖의 장소로 운반되어 다른 과수원도 형성할 것이다.
이와 같은 모습이 주님의 말씀 속에 든 진리라는 씨 하나 하나에 존재한다. 각 진리는 천국의 생명력을 그 속에 담고 운반해 준다. 이는 한마디로 경이로운 다산성을 지니고 있다. 진리 하나만이라도 진실로 사랑되어 실제에 쓰여진다 해도 씨의 경우 같이 큰 나무가 되며, 계속 이어져 간다. 정신적인 나무의 씨가 성장하고 숫자적으로도 배가해 가듯 천사들의 지혜도 말씀 속의 진리로부터 증가해 영원까지 배가되어 간다. 천사들이 더욱 슬기로워지기만 한다는 말은 지혜에는 한계가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지만 그들은 지혜의 바깥쪽 영역에만 있다는 것, 그들은 모든 유한한 능력을 초월하는 신성한 지혜에는 결코 도달되지 못한다는 것도 우리는 알아야 할 것이다.
십계명 속의 진리는 가장 큰 생명력을 가진 정신적인 씨이다. 그 이유는 십계명은 글자로나, 영에 있어서나 생명의 법칙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계명은 인간 삶의 모든 국면과 수준에서 채택되어진다. 각양 각색의 인간이라 해도 계명에 의해서만 살아야 하는바, 천국적 삶 중에서 가장 큰 다산성은 계명에 있다.

교회 ( the church)

교회가 진리와 함께 존재해야 하듯, 진리는 교회와 함께 존재한다. 교회는 작은 씨같이 시작해서 가지를 뻗치어 곧 성장을 이룬다. 예수라는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팔레스틴 마을에서 이상한 교리를 가르치고, 그 뒤 굴욕적인 죽음을 만나고, 그의 몇 안되는 힘없는 추종자들에게까지 버림을 받았다는 식의 세상적인 태도로 응시하는 이에게는 그분의 일에 하등의 중요성이 있을 것 같게 보이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기독교는 지금 세계를 이끄는 종교가 되어 있다. 그분의 제자들 자체만을 본다 해도 그들은 기독교의 생명력에 대해 매우 적게 납득하고 있었다.
이와 같이 새 교회도 아주 작게 시작되었다. 어떤 학식 있고 우수한 사람이 자신 스스로 영적 선교에 부름 받았다고 선포했다. 그리고 그는 신학에 관련된 많은 책을 라틴어로 썼다. 그 후 이 백년 이상이 지나 갔지만 그의 저서를 믿는 자는 숫자적으로 보아 그렇게 많지는 않다. 이것이 새교회와 함께 하는 작은 시작의 날에 해당된다. 그러나 그 진리는 씨가 지니는 생명력을 가지고 있는 바, 그 가지가 멀리 그리고 드넓게 확장될 것이다.

세상 (the world)

세상은 새교회의 진리를 추켜들 준비가 아직 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지금 준비를 하는 마음들 속에서는 이 진리들은 고귀한 나무로 성장할 것이다. 그 이유는 마지막 심판 이후 성장할 여건이 더 나아져 가고 장애물은 더 줄어들기 때문이다.
아직도 세상은 자연적인 선함을 넘어있는 것을 보지 못하고 있다. 사실상, 세상은 종교를 포함해서 모든 것이 세상의 맛을 실어 나르게 만들려 하고 있다. 그러나 새교회는 이 생각과 꺼꾸로이다. 즉 새교회는 지상을 천국으로 가는 발판으로 삼고 있다. 세상의 목적(purpose)은 즐거움 (pleasure)이나, 새교회가 노력하는 목적(end)은 영적으로나 자연적으로나 선용(use)이다.

작은 시작들 (small beginnings)

이 비유는 작은 시작들을 경멸해서는 안된다고 가르치고 있다. 우리는 작은 것에서 결과되는 모든 것, 그것이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예견할 수 없다. 모든 선하고 진실하며 유용한 것들에 용기를 북돋아 발달하게 해주며, 모든 악하고 거짓되며 해가 되는 것들은 실망하도록 해주는 것이 지혜의 몫이다. “이와 같이 좋은 나무는 좋은 열매를 맺고 나쁜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게 마련이다”(마태복음 7:17). 천사들 속에 있는 것이 생명으로 가득 차 있듯이, 지상의 인간에게도 씨 같이 가득 차 진다. 그래서 열매가 있는 나무들이 천사들 속에 있는 것같이, 인간은 영적 삶의 시작에서 씨의 성장을 보아 용기를 얻게 된다. 영계의 천사들은 영적 생명으로 충만해 있다. 그러나 천사들이 인간으로 지상에 있었을 때, 그들은 그러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이 지상에 있을 때 악을 죄로 알고 금하며 회개와 개혁이라는 일을 계속 행하지 않았던들 그들은 영계에서 천사도 못되었을 것이고, 영적 생명으로 가득 차 있지도 못했을 것이다. 어떤 선한 작은 일이 시작되고, 그 시작이 신실하게 계속되면 위대한 결과를 낳게 되는 것이다.
이에 대한 반대 측면에서 우리에게 주는 교훈을 그냥 지나칠 수 없다. 때로 어떤 악의 경우, 그것이 대수롭지 않은 듯, 눈에 보이게는 중요하지 않게 여겨 그 악을 저지르도록 허용하라고 유혹되는 수가 있다. 이는 악령의 교활한 암시인 것이다. 선과 악이란 양이 중요한게 아니라 질이 중요함을 잊어서는 안된다. 합리적으로 보아 잘못이라고 판단되는 것은 어떤 것이든 중요해서 금욕(self-denial)이라는 주체를 만들기에 충분함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이것은 꼭 해야 되고 저것은 금해야겠다는 것을 결정함에, 우리는 대상의 질을 조심스럽게 판단해야 하는데, 그 판단 기준이 중요하다. 우리는 판단 기준을 주님의 말씀에서 가르쳐진 대로, 또는 그분의 교회가 가르치는 대로, 주님의 진리에 표준을 두어야지, 자아나 세상에 널려 있는 표준을 가지고 측량해선 안된다.

성장의 법칙 (the law of growth)

씨가 나무로 자라나되, 그것은 우연에 의한 것이 아니고 주님이 그 씨의 본질에 이식해 놓은 법칙에 의한 것이다. 온전한 나무의 근원(germ)이 씨 안에 들어 있다. 주위 여건은 씨의 근원을 만드는게 아니고 오로지 씨가 성장할 기회를 줄뿐이다. 그래서 우리는 선함의 근원, 즉 진리를 사랑해야 하고, 자기 주위의 어떤 것도 우리를 천사가 되게 할 수 있는게 없다. 좀더 자세히 말하면, 우리가 실천해 보아야 할 진리를 아직 해보지도 않고 어떤 영적 선을 기대한다는 것은 당치도 않는 이론이라는 말이다. 그러나 영적 삶을 진지하게 시작하는 것, 또는 악을 죄로 알고 끊는 신실한 노력을 자꾸 만들어 간다면, 그리고 자신의 원리를 실용적으로 계속 유지하는 한, 좋은 결과를 기대해도 된다.
그렇다고 이 세상에서 거듭남을 다 마무리 지었다는 높이에는 도달되지 못한다. 그러나 완전한 거듭남을 향한 첫 일보로서 우리 속의 씨는 반드시 성장을 시작했어야 한다. 그러면 다음 세상에 가서, 자신 속의 작은 씨들이 엄청나게 큰 나무로 자라고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만일 우리가 악을 끊는다면, 우리는 선함을 성장시키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 속에 든 악의 성장을 제지한 만큼 우리 속의 선함 역시 존재하게 된다. 부자 청년이 예수께 와서 무슨 선한 일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얻겠느냐고 물었을 때, 주님은 대답하셨다. “계명을 지켜라.”

성장의 확실성 (the certainty of growth)

작은 씨가 커 가는 것을 유심히 보자. 씨 안에 생명력이 있음을 알 것이다. 하늘 나라의 모든 힘은 이 작은 씨 안에 존재한다. 사실, 주님의 모든 권능도 그 안에 있어 씨를 자라게 만든다. 씨의 운명이 결정되어 있다. 씨의 생명의 법칙이 작동되고 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오고야 말 것이다. 씨가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은 성장을 위한 기회이다.
이와 꼭 같이 마음에서 진리의 씨는 작동되고 있다. 그래서 그 진리에 기회와 여건을 부여해 주면 그 결과는 확실하다. 이 진리가 성장하는데 요구되는 조건이란, 악을 죄로 알고 금하는 것, 주님과 이웃을 사랑한다는 원리로 선을 행하는 것이다.
영적 삶에서 문제시해야 하는 것은 어디로부터 자신이 왔느냐 가 아니라 어디로 들어가게 되느냐이다. 우리 모두는 자연적 측면에서 악뿐이다. 그러나 회개와 개혁, 그리고 거듭남에 의해 그 악을 벗어나 성장할 수 있다.

양과 질 (quality and quality)

“의로운 자의 작은 것은 사악한 자의 많은 것보다 더 낫다.” 그 이유는 영적 삶이 비록 초기 상태, 지극히 작은 업적을 달성했다 해도 감각적으로만 치닫는 삶보다는 훨씬 더 가치가 있다. “사악한 자의 천막 안에서 거하기 보다, 내 하느님의 문지기가 더 낫다.” “주님은 야곱의 모든 거처보다 시온의 문을 사랑하신다.” “의로운 자가 소유한 작은 것” 가지고 구원해 준다. 그러므로 우리가 삶의 질이 향상되기를 도모하면, 주님은 우리가 노력하는 그 삶의 양도 알고 계신다. 그 이유가 선함은 지혜가 자라는 땅이기 때문이다.

7
누룩
– 미묘한 시험의 사용 –

성서 본문: 마태복음 제 13장 33절

33. 예수께서 또 다른 비유를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어떤 여자가 누룩을 밀가루 서 말 속에 집어 넣었더니 온통 부풀어 올랐다. 하늘 나라는 이런 누룩에 비길 수 있다.”

시련 (trials)

영적 삶의 발전은 시험을 수단으로 하여 있게 된다. 시련은 인격의 테스트이며, 이 테스트로 인해 거듭나는 사람은 선함과 진리의 측면에서 확증과 힘을 얻게 된다. 동시에 자기 속의 자연적인 마음에 있는 악과 거짓으로 쏠리려는 경향성에 저항하면서 그것을 버릴 수도 있게 된다.

하늘 나라 (the kingdom of heaven)

“하늘 나라”란 신성한 사랑과 지혜가 통치의 원리가 되어 군림하는 인간 삶과 그 삶의 마음에 있는 정신적인 왕국이다. 따라서 내향의 왕국, 영적인 왕국이다 (이에 대한 더 많은 이해는 제 6장을 활용할 것). 그러나 “이 왕국”의 진리들은 신실한 마음에서조차도 연속적으로 자라지는 않는다. 그 이유는 악한 경향성들의 공격이 매우 다양하기 때문이다.

악의 경향성에 대한 비유상의 차이

“씨 뿌리는 자”의 비유에서는 신성한 영향력을 받아들이는 각기 다른 마음 바탕을 나열하고 있다. 거기서 악의 경향성은 인간으로 하여금 신성한 영향력에 반대되게 하려 하거나, 진리에 무관심을 보이게 하려 들기도 하고, 그 영향력에 단지 피상적인 접근만 있게 만들려 하고 있다. “가라지”의 비유에서는 마음에 있는 진리에다 거짓 사상들을 뿌려 놓는 악한 경향성을 진열하고 있다. 그러나 “누룩”의 비유에서는 악한 영향력의 아주 교활한 수법을 폭로해 주는 바, 이 비유에서는 현혹하는 악마들이 선과 진리라고 간주되는 참된 것 안에 악의 거짓 암시들을 슬며시 주입시키고 있다. 이렇게 하여 우리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수용한 진리들의 좋은 특질들이 오염되고 만다. 이 오염을 발견해 내는 데는 상당한 노력이 요구된다. “너희 안에 있는 빛이 어둡다면 이 얼마나 암흑일까!” 사랑하려 하고 진리를 행하려 하는 우리 내향의 기질들이 생각과 느낌, 그리고 행동들을 형성하려고 자연적 마음에로 나가려고 할 때, 우리의 악한 경향성들은 들고 일어난다. 그리고 이것들이 진리를 오염되게 한다.

예증

성급한 성미로 기울려는 예를 가지고 생각해 보자. 아마 성질이 급한 사람도 거듭나 보려 노력하고 있을 것이다. 온화함은 기독교인의 의무라는 것을 우리는 안다. 그리고 성급한 기질의 행동은 무례하고 이기적이고 때로 죄악시되기도 한다는 것도 안다. 나쁜 성미를 탐닉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어떤 사건이 있을 경우 그 급한 성미가 즉각 발동하는 때가 빈번하다. 이 때 약한 자를 공격하려 들고, 보복하길 즐기는 우리의 옛 경향성들까지 잇따라 일어나 진리의 응용을 그릇되게 함으로 진리를 뒤집는다. 그러면 우리 속에서는 선으로부터의 내향적인 원리와 성미 속에 있는 자연적인 이기심 사이에 싸움이 붙게 된다.
이 싸움이 시험인 바, 그 수단은 영적 발효이다. 그 이유는 우리의 선이 악한 경향성에 의해 섞음질 당하려 하고, 진리는 거짓 암시에 의해 뒤집혀 지려 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자기 앞에 버티고 있는 잘못된 행위를 한 자에게 자기 처지를 보여주기 위해서는 보복해야 한다는 생각을 도입할 때이다. 그래서 진리를 위해 진리를 수행한다고 생각하는 동안 실지로 있어지는 것은 이기적인 사랑의 탐닉이다.
이런 때에도, 십계명의 빛 속에서 자신의 느낌과 생각의 질을 검사해 본다면, 우리는 이전 생각의 오염도를 가늠해 낼 것이다. 그런 다음 자신의 혀와 손을 자제해 간다면, 그리고 주님의 뜻을 시행해 가기로 결심을 다시 한다면, 주님 사랑으로부터의 불이 우리 마음에 흘러들어 거짓된 누룩은 밖으로 내던진다. 그러면 우리가 저항해 온 악과 거짓은 우리들에게서 분리되고, 선의 특질은 사랑되어 사용해야 한다는 것에 대해 더 많은 확증이 있게 된다. 따라서 더 명료한 진리가 우리 삶이나 생각 속에서 더 실용적인 원리가 되어 간다.
이렇게 되면 시험을 유발하는 발효는 우리에게 좋은 결과를 가져다준다. 선과 진리가 우리들 속에서 더욱 자라는 것을 깨트리고 악령의 자극이 있어 시험을 거치지만 우리에게는 더 많은 진보를 얻게 해준다. 그러나 악령은 자연적 경향성을 일으켜서 파괴 쪽으로 치닫게 유인한다.

시험은 허용되는 것이다 (temptations are permitted)

주님은 악령들이 우리를 휘젓는 것을 허용하신다. 그 이유는 자신 속에 악한 경향성이 있다는 것과 이것이 우리로 지옥을 향하게 한다는 것을 인식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허용으로 악마가 우리를 부추길 때, 주님은 수호 천사를 우리에게 보내셔서 우리로 악마의 오염도를 가늠할 수 있게 해준다. 그리고 그 천사로 우리의 선한 애정과 진정한 생각들이 간직되게 해주며, 이 애정과 원리들에 대한 증거를 우리로 볼 수 있도록 도와주신다. 주님은 악마가 우리 속에서 일어나는 것을 허용하셨다. 그 이유는 악마의 일이 우리에게 오히려 이득을 보도록 하실 수 있기 때문이다. 주님은 악마가 우리의 밀가루에 누룩을 놓는 것을 허용하셨다. 그 이유는 더 나은 빵을 생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미 진리를 소유하고 있는 고로, 이 진리의 빛으로 자신의 경향성 속에 든 악의 속성을 볼 수 있다.

누룩 (leaven)

마음속에 있게 되는 시험의 작용(operation )은 빵을 만들 때 누룩이 작용하는 것과 같다. 자연 상태 하의 빵반죽은 무겁고 불순물을 함유하고 있을 것이나, 누룩을 첨가함으로서 누룩은 반죽 덩어리를 쑤석거려 발효시키는 바, 빵을 굽는 불이 누룩을 다 쫓아낼 때까지 발효 작용을 한다. 게다가 반죽 속의 불순물까지 누룩이 몰아 내면서 더불어 없어진다.
인간은 악하고 거짓된 것과 선하고 참된 두 원리 사이에 있게 되는 싸움이 없으면 악쪽으로 기울려는 경향성을 똑바로 볼 수 없다. 각자가 지닌 선과 진리의 질은 향상되어야 하는 바, 싸움이 끝난 뒤 진리가 승리했다면, 거짓 사상은 빵에서 누룩이 쫓겨나듯 밖으로 내던져지게 된다.
누룩의 본성은 그 누룩의 힘이 붕괴되고 만다는 결과에서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누룩은 영적인 쇠퇴 또는 죽음을 표현한다. 누룩을 수단으로 해서 오는 선은 누룩 자체로부터가 아닌 누룩의 작용에서이고, 이 작용은 선을 위해 신성한 섭리의 전적인 통제하에 있고, 이 통제는 불을 수단으로 한다. 누룩은 악에 근원을 둔 거짓 원리를 표현한다.

거칠게 간 곡식 (meal)

밀(wheat)은 생명 유지에 필요한 마음속의 선한 원리들을 표현한다. 그러나 이 원리들은 실지 사용에로 가져다 놓을 필요가 있다. 밀을 빻는다는 것은(grinding)은 우리 속의 선한 원리를 검사하고 생각해 봄으로써 그 원리들을 실지 사용을 위해 준비하는 정신적인 과정을 표현해 준다. 이러므로 거친 가루(flour, meal)란 선으로부터 온 진리를 표현하는 바, 선이 응용되기 위해 어떤 모양새를 갖는 것을 말한다. 응용 속에 선이 놓일 때, 더 많은 선이 생산되고, 더 실제적인 면모를 갖추게 된다. 실제적인 사용을 위해 곡식 가루는 빵으로 만들어져야 한다. 인간의 일에 해당되는 빵은 선의 실제인 바, 일상 생활에서 선용을 수행하는 가운데 생산된다. 그러나 인간이 붙잡고 있는 진리로부터 순수한 선이 올 수 있으려면, 먼저 그 진리와 뒤섞여 있는 불순물들, 즉 인간 마음속에 있는 거짓 관념들이 걸러 내어져야 한다. 이래야 인간이 진리를 수행하기 시작할 때, 자기 속의 자연적이고 유전적인 경향성이 일어나서 진리를 오염시키고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게 된다.
밀가루 안에 든 불순물은 좋은 것과 결합하려고 한다. 그러면 좋은 것을 부패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순수한 것, 더 순수해지고자 하는 좋은 것은 이 불순물과 결합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그 결과 불순물이 제거될 때까지 싸움이 일어난다. 이와 같이 마음속에 있는 거짓된 것은 진리에 결합하여 진리를 거짓으로 물들이려고 한다. 그러나 거듭나는 마음 안에 있는 진리들은 거짓에 물들어 부패되고 싶어하지 않는다.

여인 (woman)

본문에서 누룩은 여인에 의해 사용되고 있다. 여인이란 애정을 표현해 준다. 오늘 비유의 경우, 이 여인은 퇴보되는 상태에 있는 자연적인 애정을 표현하고 있다. 이 여인이 가루 속에 누룩을 슬며시 넣어 놓았다(hide). 거짓들은 악령에 의해 우리 마음에 은근히 심어져 진리 속에 감추어 놓여 있다. 이 거짓들의 행동 발판은 자아와 세상을 사랑하려는 마음, 즉 자연적인 애정이다. 이와 같은 방법이 예시되는 곳이 에덴의 동산에서 뱀이 이브를 발판으로 해서 아담을 유혹하는 것인바, 이는 자연적 애정이 합리적인 사고에 도달하려 드는 것이다.

측정 (measures)

이 가루는 “서 말” 되는 양이었다. 측정이란 양을 알아내기 위한 도구(용기, vessel)이다. 움푹 들어간 그릇, 무언가를 담는 것들은 진리를 붙잡는 형체, 즉 교리를 표현한다.

3 (three)

숫자로서의 3은 진리의 측면에서 충분함(fullness), 완성함(completeness)을 표현한다. 삶에는 세 개의 불연속적이고 각기 다른 수준(degree)이 있다. 즉 천적, 영적, 자연적 수준의 삶이다. 인간의 신체에도 세 개의 각기 다른 부분, 즉 머리, 몸통(trunk), 사지(extremities)가 있다. 이와 같이 인간 속에도 세 개의 부분, 영(spirit), 활동 부분(activity), 몸(body)이 있다. 주님 안에도 세 개의 부분, 즉 아버지(Father), 아들(Son), 성령(Holy Spirit), 바꿔 말하면, 사랑, 지혜, 권능인데, 이 원리의 세 개가 한 분 신성한 인격, 즉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 이와 같이 숫자 3이 충분, 완성을 의미하듯, “가루 서 말”이란 진리에 관한 체계적인 교리, 즉 진리에 의거 살 수 있도록 완성된 체계를 의미한다. 본문이 주도하려는 요점은 용기로서의 서 말이라는 부피보다는 완성된 교리적인 체계로 마음 안에 있는 진리인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누룩을 사용함 (using the leaven)

마음이 영적인 진보를 위해 적절히 훈육되어질 때, 그리고 영적 삶의 새로운 단계를 향해 전진하려 할 때, 본문의 여인 즉, 악령은 우리의 자연적 애정을 수단으로 얼마간의 자연적인 거짓을 우리의 생각 속에 은밀히 심어 악에로 기울려는 우리의 경향성과 연계되게 해 놓는다. 그러면 온 마음은 주입된 거짓으로 인해 휘저어진다. 이를 두고 본문에서 “온통 부풀어올랐다”고 기술되고 있다.
진리가 정말 진실된 것인지? 라는 의문이 마음속에 발생한다. 이러면 진리를 사랑하는 마음이 그 마음에 주입된 거짓 원리라는 누룩의 공격을 받은 것이다.
여인이 누룩을 슬쩍 넣었다. 이 누룩이란 과거 부풀어 오른 옛 밀가루로부터인 바, 이는 거듭나지 않는 본성으로부터 온 어떤 것을 표현한다, 지금 묵은 밀가루 반죽이 새 밀가루 반죽에 첨가되는 것이다. 이리하여 싸움이 발생하는 바, 이것이 발효요 시험인 것이다. 만일 진리가 정복한다면, 주님 사랑의 불은 누룩을 몰아내게 된다. 가다라지방의 돼지 떼에 악마가 들어감으로서 악마가 내쫓기는 모습과 같다.

정확한 의미 (the exact meaning)

우리가 알 수 있는 바, 하늘 나라는 누룩 자체 같다라는 말이 아니고 인간 마음에서의 하늘 나라의 건설이 누룩 같다는 것이다. 이 건설은 시험을 수단으로 하여 반죽을 깨끗이하면서 좋은 빵을 만드는 것과 같다는 말이다. 건조한 누룩을 건조한 밀가루에 아무리 많이 넣어도 발효되지 않는다. 누룩은 습기를 필요로 한다.
물은 자연적 진리를 표현한다. 그래서 자연적 마음에 의해 보여지는 진리인 자연적 진리는 흔히 잘못 이해할 때가 많은 바, 마치 밀가루 속의 수분이 누룩의 작용을 돕는 것 같다. 자연적 마음은 순수한 진리들을 한번에 획득할 수 없다. 자연적 마음은 진리의 외관(껍질)이 비록 순수하지 않더라도 이를 먼저 받아야 한다. 껍질에 불과한 진리라도 이 진리를 수단으로 해서 인간 마음은 순수한 진리를 받을 수 있다. 이는 마치 열매의 첫 단계에서는 시고 떱떨하지만 둘째 단계에서는 달고 영양 있는 열매를 생산하는 것과 같다.

예증 (illustrations)

예를 들면, 주님을 찾아 온 부자 청년이 어떤 선한 일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얻는지 물었을 때, 사실 그는 자기에게 요구되는 행위가 무엇이든지 기꺼이 할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가 자기를 부정해야 한다는 것이 발견되자 마자, 그는 자기에게 제시된 첫 일을 행하는 것을 사양했다. 그 일이 자기에게 좋게 보이지 않았던 때문이였다.
베드로가 주님을 받드는데 얼마나 자만심이 있었는지 마태복음 26장을 보면, “‘저는 주님과 함께 죽는 한이 있더라도 결코 주님을 모른다고는 하지 않겠습니다’하고 장담하였다. 다른 제자들도 모두 그렇게 말하였다.” 그러나 몇 시간이 채 지나기도 전에 그는 주님을 세 번 부인하였고, 다른 제자나 마찬가지로 주님을 버리고 도망했다.
우리는 흔히 자기가 최소한 남보다는 선하다고 착각하는 일이 많다. 게다가 자기가 진리를 많이 알고 있다 해서 자기가 진리를 실천하고 있는 듯 여겨 버리는 경우도 흔하다. 그러나 우리는 “싸워 보지도 아니하고 으스대며 갑옷을 벗지 말라”는 구절을 명심해야 한다(열왕기상 20:11). 우리에게는 싸움이 언제나 있는 바, 싸움이 끝나기도 전에 싸움이 끝났다고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인간은 자기 속의 선과 진리의 품질이 어떠한지 인식 못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우리가 실지로 진리를 가지고 노력하고 테스트 받을 때, 그리고 우리 속의 선과 진리의 오염된 정도를 인정할 때, 진리를 위해 싸우고 살아 낸 만큼 그 진리는 삶으로서의 가치를 지니게 된다. 한 마디로 살아 낸 만큼의 진리 부분은 그의 생명이 된다는 말이다. 그래서 “인간이 가진 모든 것은 그 사람의 생명이 된다.” 실제적인 삶 속에만 진리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정신적 삶, 즉 애정과 생각도 형성한다는 말이다. 우리 속의 선한 원리를 지지하고 주님이 악한 경향성을 몰아 낼 수 있게 자신의 문을 열어 놓을 때, 우리는 자신의 생각 속에 있는 선한 원리들을 존경하게 된다. 그러면 우리는 선과 진리의 더 높고 더 섬세한 특질이 일어나는 계기를 갖게 된다. 그 이유는 우리가 악에 기울려는 데서 자신을 더욱 분리시키기 때문이다. 이 때야 말로 우리의 선한 원리는 이론에서 뿐아니라 실제에서도 있게 된다. 다시 말해 더 이상 자연적이지 않고 영적인 상태에 있게 된다는 말이다.

이론과 실제 (theory and practice)

기억이나 자기의 이해성에, 또는 자기의 자연적 애정 위에 새 진리가 놓여졌다 해서 그 진리가 삶에 놓여진 냥 상상해서는 안된다. 삶에 놓여지는 것은 또 다른 전진 단계를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좋은 밀가루를 가졌다 해서 언제나 좋은 빵이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다. 단지 생각 속에 새 진리를 집어넣고, 얻은 진리에 기뻐하면서도 자신의 삶에서 있어야 할 투쟁을 결코 취하지 않는다면, 밀가루는 잘 구워진 빵은 아니고 단지 밀가루일 뿐임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따라서 밀가루는 부푸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는 것, 그 과정 속에서 순수해져 영적 양식으로 준비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많은 이들이 그들의 선하고 진정한 정신적 소유물들을 느슨하게 붙잡고 있다. 그러나 시험이 올 때, 그래서 자기가 간직하고 있는 소유물들이 휘저어 질 때, 밀반죽이 발효되듯 할 때, 그들이 추측한 원리들은 이 휘저어짐에 날카롭게 돌출되어 자기가 가진 선하고 참된 것의 면모를 알게 만든다.
사람들이 새교회 안으로 오게 될 때, 그는 새로운 진리들에 매우 열성적인 기쁨을 가진다. 그리고 세상 사람들이 이 아름다운 교리들을 단번에 왜 받지 못할까라고 궁금해한다. 그러나 당사자가 일상 삶에서 새 교리들을 수행해 보려 노력할 때, 그리고 자신 속의 악하고 거짓된 경향성들이 기반을 형성치 못하도록 떼어 내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알게 될 때, 이 악과 거짓이 새 진리의 실질적인 특질을 오염시키려 얼마나 발버둥치는지 보게 될 때, 그는 왜 온 세상이 한꺼번에 새교회 안으로 돌진 못하는지에 대해 궁금해하던 것을 중단하게 된다.
자기 이해성 안에서 진리가 완전한 체계를 갖는 것이 “밀가루 서 말”이다. 그러나 이 밀가루는 삶의 양식은 아직 아니다. “하늘로부터 내려와 세상에 생명을 주는 하느님의 빵”으로 만들어지기 위해서 이 밀가루는 반드시 경이로운 발효 과정을 통과하여야만 한다.

누룩은 지옥을 표현하고 있다 (Leaven represents hell)

주목해 둘 것은, 비유에서 누룩은 천국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지옥을 표현한다는 점이다. 새교회 밖에 있는 많은 주석가들의 경우, 본문의 누룩이 천국을 표현하는 것으로 간주하고 있다. 본문 외의 다른 성서 부분에서도 누룩은 악하고 거짓된 것을 나타낸다는 것이 그들에게도 인정된 사실임에도 그러하다.
누룩이 지옥을 표현한다고 본 옛 주석가들의 경우도 막상 결론을 반대쪽으로 몰고 간다. 그래서 그들도 이 비유는 누룩 같은 이설적이고 악한 것들이 기독교계에 잠입해서 전 교회를 부패시킨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한다. 이런 저런 주석가들의 일반적인 사상은 누룩을 상징적으로서, 또는 일반적 방법 면에서 드러내놓는식 보다는 은밀한 영향력이 어떤 큰 결과를 가져오게 하는 것을 표현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누룩에 대한 어떤 분명한 성격이 제시되지 않고 있다.
이 비유에 대한 또 다른 일반적인 해석의 경우, 이는 그리스도 복음의 조용한 힘이 세계에 점진적으로 작용해서 그 성격과 품질에서 기독교로 전환되는 것을 표현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미 앞에서 살핀바 같이 이는 누룩의 의미에 관한 전적인 오해이다. 성경의 다른 부분에서이든, 본문의 경우에서이든, 누룩은 선하거나 진정한 어떤 것을 표현하고 있지 않다.
누룩 자체로만 보면 별 가치가 있지 않지만, 누룩의 작용은 매우 좋은 결과, 즉 이익을 보게 만든다. 이와 같이 악하고 거짓된 것은 추하고 아무 쓸모가 없음에도 그것의 작용인 시험은 거듭나는 사람의 속성들을 선한 쪽으로 더욱 돌리도록 신성한 섭리의 지배하에 허용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악한 것을 “부풀림”으로써 어떤 것이 선해진다고 말하려는 흔한 우리의 습관은 고쳐져야 한다. 부풀림은 순수해짐을 뜻하지 않는다. 부풀림은 시험받음을 의미하고, 부패되어감이다. 부풀리게 하는 것은 악이다. 더 뾰족이 말하면 악으로부터 온 거짓이다. 그러나 주님은 누룩을 쫓아내심으로, 누룩의 영향력을 누룩 자체가 의도하려는 것에 반대되게 돌리심으로 인간의 마음을 순수하게 해주신다.

불 (the fire)

누룩 자체에 어떤 좋은 것이 있는게 아니라 좋은 것은 사실 불로부터 있다. 불은 누룩으로 하여금 저절로 패배케 해서 추방시켜 준다. 만일 우리가 밀가루 반죽 속에 누룩을 섞은 채 내버려두면, 그 반죽은 이내 썩어진다. 좋게 되는 것은 불로부터 온다. 불이 누룩을 몰아내기 때문이다. 이 불이란 영적 사랑이다.
시험 동안 우리의 영적 사랑은 천국으로부터 오는 에너지라는 불로 채워져 마음속에서 그 힘이 발휘되어 악령이 우리 속에 슬쩍 심어 놓은 악한 것과 거짓된 것들을 몰아 내준다. 게다가 우리 속의 유전적으로 온 악하고 거짓된 경향성마저 누룩과 더불어 쫓아내지는 이중효과가 발생한다. 그 이유는 시험 동안 우리는 속에 있는 악과 거짓을 인식해서 저항하게 되어 더욱 지옥적인 것들을 거절하기 때문이다.
만일 누룩이 선하고 진정한 어떤 것을 표현한다면, “온통 부풀어오르도록” 하는 반죽의 부풀음이라는 작용만이 빵이 되는 필요한 조건의 전부일 것이다. 그러면 반죽 전체에 누룩이 퍼질 때 기껏 있게 되는 결과는 못 먹는 음식의 발생뿐이다. 밀가루 반죽이 맛있는 빵으로 되는 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불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그러므로 누룩 자체가 밀가루를 개선해 주는 것도 아니고 밀가루를 빵으로 만들어 주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반죽된 채 놔두면 밀가루 마저 못쓰게 만들뿐이다. 아마 더 오래 방치해 두면 누룩이 반죽 전체에 더욱 번져 밀가루 반죽은 완전히 못쓰게 될 뿐이다. 그러나 우리가 밀가루 반죽 속의 누룩을 몰아내기 위해 반죽을 굽게 되면 좋은 빵이 생산된다.
이런 사실들에서 우리가 알게 되는 것은, 누룩이 천국 또는 천국의 복음을 표현할 수 없다는 것이다. 누룩이 복음을 표현해 준다고 알려진 믿음은 구시대 신학의 피상적인 견해에서 비롯된 오류일 뿐이고 그 신학은 사물의 중심을 꿰뚫지 않는다는 것도 짐작하게 해준다.

누룩 없는 빵

과월절을 포함해서 이스라엘의 종교 행사 중 일부에서, 백성들에게 누룩 없는 빵을 사용하도록 명령되어져 있었다. 그리고 모든 누룩은 엄격하게 금지되기도 했다. 지금, 만일 누룩이 선한 어떤 것을 표현했다면, 아마 과월절 같은 중요 행사에 꼭 필요로 하는 품목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누룩이 악과 거짓을 의미한다고 이해하면 위의 행사에 대한 설명은 매우 쉽다. 유대인의 일년 기념 행사 일정 중에서 빠른 일정에 놓인 행사는 거듭나는 단계 중 이른 단계, 즉 초기 단계를 표현해 준다. 이 초기 단계란 인간이 사랑의 측면에서라기보다는 믿음의 측면에서 거듭날 때의 단계를 말한다. 이 단계는 아직 누룩이 들어가지 않은 상태, 유혹을 받지 않은 상태, 따라서 순수해지지도 않는 상태이다. 이 백성들에게 주님이 주시는 것을 받는 초기 단계의 의미를 표현하게 하기 위해 그들에게 누룩을 사용하지 말도록 명령되어진 것이다. 다시 말해서 시험을 통하여 순수해지는 결과를 낳는 실용적 삶 속에서 이 백성들은 주님이 주시는 것을 가지고 자신의 것으로 아직 만들지 못하였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들이 “햇곡식을 바치는 축절, first fruits”에서는 누룩을 넣은 빵을 사용하도록 명령되었다(레위기 23:17). 왜냐하면 정신적 측면의 햇곡식은 노동과 시험을 통하여 이루어지기 때문이고, 이 과정은 누룩을 넣어 빵을 굽는 과정에 해당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누룩을 넣은 빵, 순수해진 빵은 보다 더 마음의 상태가 진전을 이룬 상태를 표현했다. 이 진보된 상태에서 그 속의 선은 어느 정도 질적 측면에서 더 노력이 있어 온 것이고 따라서 더 순수해진 것이다.
“햇곡식을 바치는 축절”은 약속된 땅에로의 진입을 표현했다 (레위기 23:10). 그런데 이 진입은 시험이라는 어떤 부풀림을 통해, 그 과정 이후에 있어진 것이다.

악이 아닌 선으로서의 밀가루 (the flour as good, not evil)

그래서 다시 만일 누룩이 선을 표현한다면, 밀가루는 악을 표현해야만 할 것이다. 이러면 밀가루가 주님께 드리는 헌물로서 축제에서 사용되는 표현에 반대되고 만다. 물론 밀가루에는 불순물이 섞여 있긴 하지만, 고운 밀가루 자체는 선으로부터 파생되는 진리를 표현한다. 그래서 빵을 만드는 과정에서 누룩의 사용은 좋은 밀가루를 더 순수해지도록 하려는 것이다.

예증 (illustration)

구 신학에서 영적 진리는 희미해 있었거나 종종 잊어 버렸다. 그 이유는 “대속죄, vicarious Atonement,” 그리고 “믿음만으로 의로워 짐, justification by faith alone”이라는 두 거짓 교리라는 누룩 때문이었다. 이 두 교리는 신학들을 온통 부풀게 만들어서 신학 속의 특질을 오염시키고 말았다. 그리고 많은 경우에서 영적 사랑이라는 불은 아직 이 누룩을 몰아내지도 못하고 있고, 순수해지게도, 건강에 좋은 생명의 빵을 만들지 못하는 실정이다.
구원은 믿음만에 의해 되는 것이 아니라, 사랑과 믿음, 그리고 계명에의 순종에 의해 달성된다. 선함은 인간이 선해서 소유되는 게 아니라, 인간이 실제 삶 속에서 주님을 따를 때, 주님이 인간에게 나누어주심으로 우리가 가지게 되는 것이다.
오늘 비유는 젊은이들, 그리고 기타 다른 이들에게 그들이 악한 영향들을 만나 극복할 준비가 되기 전 시험 속에 뛰어들지 말라는 경고도 포함하고 있다. 우리는 “밀가루 서 말,” 즉 지성 속에 진리의 완전한 가르침을 소지하고, 심정 속에 순수한 사랑의 불을 지녀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자신의 생각과 애정의 질이 어떠한지 모를 것이고, 따라서 생각과 애정 속에 섞인 누룩은 추방되지 않아 순수한 생명의 빵을 생산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시험을 추구할 필요는 없다. 그것들은 곧 그리고 충분하게 올 것이다. 그러나 그것들이 내게 올 때 버티어 극복할 수 있다는 것도 잊어서는 안된다. 그러나 늘 우리가 기도해야 할 것은, 우리의 힘만 가지고는 시험을 이길 수 없다는 것, 그리하여 “…우리로 시험에 들지 마옵시고…”라고 기도하면서, 시험에 들었을 때, “…다만 악에서 구하여 주옵소서…”라고 주님께 도움을 요청해야 하리라.

8
숨겨진 보물
– 영적 진리의 발견 –

성서 본문: 마태복음 13장 44절

44. “하늘 나라는 밭에 묻혀 있는 보물에 비길 수 있다. 그 보물을 찾아 낸 사람은 그것을 다시 묻어 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있는 것을 다 팔아 그 밭을 산다.”

요약

영적 삶은 거듭나는 사람에게 있는 천국적인 기쁨이다. 영혼이 내향적으로 열리면, 감각에서 오는 쾌락은 단지 외적인 것들로서의 제 위치에 가라앉아 있다.
천국은 신성한 진리가 마음과 삶을 통치하는 영적인 왕국이다.

글자적인 의미

보물이란 가치가 있다고 알려져 있거나 그렇게 추산되는 어떤 것을 말한다. 비유에서의 보물은 고대 시대 또는 동양에서 공통되어 알려진 관습에 관련되어 언급되고 있다. 고대 시대 때에는 돈이나 값진 물건을 보관할 은행 같은 특별한 장소가 없었다. 극히 일부의 부유했던 국가들의 경우 무역 부분에서 어떤 투자적인 측면을 발견할 수는 있다. 그런데 강도들은 그 때나 지금이나 존재한다. 더욱이 통치자들은 독재정치를 하는 터에 경미한 트집만 생겨도 백성들의 재산을 강취하려 들었다. 전쟁은 그 땅의 통치자를 바뀌게 하고 사회의 조건을 변화시켰다. 이런 저런 이유로 자기 소유가 확실하다 해도 사람들이 소유한 보물은 안전치 못했던 것이다.
이리하여 보물을 안전하게 보관하고자 생겨난 방법이 보물을 땅에 묻어 두는 것이었다. 그런데 아주 흔한 것은, 갑작스런 죽음이나 정치적 변동 같은 것으로 인해 소유자가 사라져 버리는 통에 그 사람의 보물 역시 감춰져 있게 되고 말았다. 그래서 어떤 행동, 즉 그 땅을 변형한다던가 하는 어떤 작업 과정에서 감추어 놓인 보물이 드러나게 되곤 했다. 유대인의 법 아래서 보물이 발견되는 땅의 소유자는 곧 그 보물의 소유자이기도 했다.
이 사실들은 비유의 글자적인 의미를 설명한다. 즉 보물을 발견한 자가 왜 그 밭을 사야 했는지이다. 만일 그 밭을 사지 않고 그 보물을 슬쩍 캐내어 갔다면 필경 그가 갑자기 부유해진 원인이 주위 사람이나 통치자에 의해 캐묻게 되어 결국 자기 소유가 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발견자의 도덕성

이 비유는 인간 삶에 있는 표본적인 그림을 나타내고 있다. 주님은 보물을 발견한 자의 방법을 칭찬하시려 했다거나, 보물을 발견한 자가 그 밭의 소유주에게 그 사실을 은폐한 행위를 정당화하시려고 비유를 말하신 것도 아니다. 이 정당화는 또 다른 비유인 부정한 청지기의 약삭빠른 행동이 정당화된 정도뿐이었을 것이라 본다. 오늘 비유를 가지고 위와 같은 행동에 대한 도덕성을 토의 하는데에 초점을 모아서는 안된다. 오직 이 비유가 표현하는 가르침만을 얻는데 집중해야 할 것이다.

영적인 보물

이 본문의 보물은 영적 삶을 위해 가치 있고 바람직한 어떤 것을 표현하고 있다. 그것이란 실제에 보인 영적 진리, 그래서 천국적인 선을 생산한 영적 진리를 말한다. 따라서 이 보물이란 자신에게 밝혀져 음미된 신성한 말씀 속의 지혜이다.

보물이 숨겨져 있는 밭이란 어떤 조직이나 단체로서만의 교회가 아닌 교회, 즉 인간 안의 교회, 또는 교회에 있는 신성한 말씀에 관한 원리나 가르침들이다. 아마 밭을 교회 또는 말씀이라고 말할 수 있을는지 모른다. 그 이유는 말씀이 교회를 구성하기 때문이고 그런 교회 속에 주님의 현존이 있기 때문이다.
비유에서, 그 밭이 가치 있게 된 것은 감추어진 보물이 그 밭에서 발견되어서이다. 이는 세상의 교회에서의 경우도, 우리 마음속의 교회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그것이 귀중하게 여겨지는 때란 우리가 감각적인 것만 오랫동안 응시하여 상대적으로 쳐저 있었던 천국적인 삶에 관한 진리를 다시 보게 될 때이다.
교회의 원리 속에서 영적 삶에 관한 진리를 보지 못하는 이들은 자연히 교회의 교리를 어떤 특별한 가치가 없는 그저 그런 식의 밭으로 간주해 버린다. 교회의 보물은 주님의 신성한 진리이다. 보다 뾰족이 말한다면 성경의 영적인 내적 의미이다. 진정한 새교회인으로 사는 사람이라면 주님의 말씀 속에 든 영적 진리를 보고 음미할 것이다. 그래서 이 사람은 이런 진리 가운데 기뻐하여 그가 지닌 정신적인 소유물을 다 팔 것이고, 감각에 속한 자신의 관념도 다 팔아서 내면의 진리들에 속한 삶에로 들어가 그 진리들을 자기 소유로 만들 것이다.

보물은 감추어 있다

보물은 교회라는 밭에 감추어 놓여 있다. 그 이유는 영적이고 내면에 속한 진리는 성경의 글자, 즉 글자적인 역사, 예언, 시편, 또는 복음서라는 제목 아래에 감추어 놓여 있기 때문이다. 비유들이나 상징물들이 성경에서 주어지고 있는데 그 안에 진리의 영이 감추어 놓여 있는 것이다. 그렇게 놓인 이유는 진리의 영이 모독되는 데서 보호하기 위해서이다.
창세기로부터 계시록에 이르는 성경에는 한 개의 가장 큰 주제가 다양한 가르침 밑에 감추어 놓여 있다. 이 주제란 천국과 천국의 왕에 관한 것이다. 가장 높은 의미에서 볼 때 성경의 모든 것들은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그분의 신성한 인간성에 관해, 오직 한 분, 유일한 하느님에 관해, 한 분 신성한 인격에 관해 가르치고 있다. 그리고 그분의 영적 왕국에 관해 가르치고 있고, 이 모든 것은 거듭나는 사람의 삶과 심정 안에 설립되어진다.
천국은 참으로 “밭에 묻혀 있는 보물”이다. 이 보물은 영적 진리와 영적 삶이요, 그것은 교회라는 밭, 즉 성경 글자 안에 묻혀 있다. 성경 글자 속에서 빛나는 의미, 그 의미가 읽는 이의 눈에 환하게 비쳐질 때, 한 마디로 말씀 속의 영적 의미를 보게 될 때, 그 사람은 감추어 놓인 보물을 발견하는 것이다. 이 사람은 성경의 내향적인 영적 의미가 천국의 문을 열리게 해주어 천국 속의 모든 것을 보게 해준다는 것을 알게 된다.

보물을 다시 묻어 둠

보물을 찾아낸 사람은 그가 밭을 살 때까지 보물을 밭에 묻어 두었다. 영적 보물을 발견해 낸 사람도 밭이 자신의 소유가 될 때까지 보물을 그 밭에 묻어 둔다. 글자적으로 진리를 발견한 사람은 혹 다른 이가 그의 비밀을 알게됨으로 해서 손실의 위험에 직면하거나, 음모라는 위험에 노출될 수 있다. 이와 같이 영적 보물을 발견한 자도 계략이라는 위험에 놓이기는 마찬가지이다.
영적 보물의 발견은 신성한 영향력이 보통 수준 이상이었을 때, 즉 보다 더 명백한 높은 상태에서 있어진다. 그러나 이렇게 발견된 영적인 보물은 삶이라는 실용 단계, 즉 외적인 상태나 일 속에로 되돌아가야만 한다. 그런데 인간의 자연적이고 감각적인 마음은 이와 같이 새롭게 발견된 보물이 당사자의 완전한 소유가 되는 것을 방해한다.
방해하는 이유란, 새 진리의 발견은 당사자로 하여금 새 빛으로 자기 삶을 재조명해 보도록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의 자연적이고 감각적 수준의 마음은 비평 당하기를 싫어하고 질서 속에서 바로 잡히고 싶어하지 않는다. 그래서 모든 새 진리가 마음에 소개되면, 과거에 가졌던 생각이나 느낌, 그리고 행동들의 반대에 부딪치고 만다. 성경에서 밝혀지는 영적 의미, 영적 진리라는 보물을 발견한 사람은 이 보물이 감각적인 사고가 던지는 야유 같은 것이나 반대에 복종 당하게 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 발견한 자는 그것을 밭에 다시 묻어서 다른 통행자의 눈에 띄게 내버려두지 않는다는 말이다.
영적 보물을 발견한 자는 이 새 보물을 내면의 마음, 즉 자기 속 마음이라는 심오하게 깊은 마음에 감추어 두어서 거듭나지 않는 자연적 마음 속을 거니는 정신적인 개나 돼지로부터 안전하게 한다. 이 사람은 “하늘 나라는 너희 마음 안에 있다”는 것을 안다. 그리고 그는 내향의 영 속에 이 큰 보물을 저장해 두어야만 한다는 것도 안다. 그래서 자기가 완전히 그 보물을 소유할 때까지 꼭꼭 숨어 있게 해야만 함도 알고 있다. 그런 다음 주님께 깊은 감사를 드리는 가운데 이렇게 기도한다. “당신의 말씀을 제 가슴 속에 감추어 두어 당신께 죄를 범하지 않게 하소서…”
이 사람은 먼저 자기 내향의 마음, 즉 자기 심정 속에 영적 진리라는 보물이 잘 보관되고 있는지를 확실히 해 두고, 그 다음 그 진리들을 외적인 삶 즉 행동에로 가져온다. 그 이유가 자연적 마음 속에 있는 악에 기울려는 경향성을 극복함으로써만 영적 보물을 확실히 소유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그가 지닌 이기적인 삶을 팔거나 이별해 버리고 주님이 그에게 주시게 되는 것을 사거나 붙잡아야 하기 때문이다.

기뻐함 (rejoicing)

이 사람은 보물을 발견했을 때 매우 기뻐했다. 기쁨의 상태란 진리를 사랑함에서 오는 환희이다. 선과 진리에 대한 내향적 애정은 주님의 말씀 속에서 발견되는 것 때문에, 그리고 말씀으로부터 오는 교회의 가르침 때문에 일어난다. 이 사람은 가장 큰 보물을 획득하기 위해 과거에 지녔던 느낌이나 생각들, 즉 과거의 모든 소유물들을 포기해 버린다. 그는 자신을 부정하고 주님을 따른다. 그는 주님의 말씀, 즉 “내가 이 말을 한 것은 내 기쁨을 같이 나누어 너희 마음에 기쁨이 넘치게 하려는 것이다”는 말씀을 귀담아 듣는다. 그래서 그는 밭을 사기 위 한 길을 달려간다.

가다 (going)

그래서 영적 진리를 발견한 자는 밭, 즉 교회의 원리, 또는 말씀의 글자를 사기 위해 “가야”만 한다. 그가 가야만 하는 이유는, 간다라든지, 진보해 간다 던가, 걷는다 라 함은 진리에 의거 살고 행동함을 의미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이 사람은 주님의 계명에의 길을 “가야”만 한다. 그 이유는 그 길이 생명의 길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영적 진리에 위대한 가치가 있음을 보게 되어서 그 가치의 위대함을 평가해 보는 것만 가지고 보물을 우리 것으로 만들지 못한다. 우리는 밭의 소유자에게 가서 그의 소유권을 인정하고 그에게 값을 치뤄 밭을 사야 된다.

소유자

보물이 묻혀 있는 밭의 소유자는 주님이시다. 그 이유는 모든 진리는 그분의 것이기 때문이다. 말씀의 글자가 그분의 것이라는 말이다. 그래서 우리가 말씀 속의 영적 진리를 보게 될 때, 그 진리들이 주님의 것임을 우리는 인정해야 한다. 만일 우리가 자신의 총명을 통해 발견하였다고 해서 그것을 자신의 것으로 간주한다면 우리는 정당한 소유자로부터 훔치는 격이 된다. 그 대신 밭에 보물이 있음을 보게 될 때, 즉 말씀의 글자적인 진리 속에 놓여 있는 영적 진리를 보게 될 때, 우리는 그 진리의 소유자가 주님이심을 인정해야만 한다. 그렇게 인정한다면, 미처 발견 안된 말씀 속의 모든 사항도 주님의 것이라고 실제로 인정하는 셈이다.

밭을 삼 (buying the field)

만일 우리가 밭을 산다면 우리는 보물을 소유할 수 있다. 밭을 사되 비밀스런 계략에 의한 것이 아니라 공개적인 방법에 의해 밭을 사는 것이다. 그 이유는 밭을 사는 것, 또는 글자 속의 진리를 획득하는 것은 먼저 그 진리가 주님의 것임을 인정하고 그 진리에 따라 살아가는 실제에 의해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가 거듭나는 작업 중 우리에게 할당된 부분, 즉 주님의 진리에 따른 삶 혹은 그분의 계명에 순종해 가는 생활을 해 나갈 때 우리는 자기 몫을 다하는 것이다. 그러면 주님은 우리에게 영적 진리라는 천국적인 보물, 선한 삶이라는 보물을 우리에게 열어 주신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바, “목욕을 한 사람은 온 몸이 깨끗하니 발만 씻으면 그만이다.” 즉 계명에 따라 자기 일상 생활을 순수하고 깨끗하게 지켜 나가라는 뜻이다. 그런 다음 그의 내부 삶은 그의 일상 지침에 적합한 외부적 삶을 발견하게 된다.
이상 살펴본 바대로 이 비유의 영적 의미 속에서 보물을 발견한 자는 소유자에게 어떤 것도 감추지 않았다. 다시 말해 그는 자기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했다. 즉 “그는 있는 것을 다 팔아”라는 대목에서 그의 진지함이 증거 되고 있다.

모든 것을 다 팜(selling all)

그가 가진 모든 것을 다 판다는 것은 그가 천국적인 사랑, 영적 총명, 천국적인 정의를 소유하기 위해 자기가 남보다 조금 더 영리하다고 으시대는 자아 총명, 최소한 자기는 올바르다고 우기는 자아 정의, 누구보다 애정이 많은 자라고 뽐내는 자아 사랑, 이런 것들을 포기한다는 말이다. 그는 제 스스로부터 있는 모든 애정의 대상물을 주님과 바꿔쳤다. 그는 자아를 부정함으로, 자기 속의 악에 기울고 싶어하는 경향성에 저항함으로써 자기 악들을 멀리해 버렸다. 이렇게 실제 속에서 선을 자신의 소유로 만듦으로서 그는 선을 산 것이다.
이기적인 삶을 포기하는 값을 치르지 않고서 우리는 주님의 보물을 우리 것으로 만들 수가 없다. 우리가 주님의 뜻을 나의 뜻으로 수용할 때, 즉 그분이 우리에게 삶의 법칙으로 주신 명령을 수행해 갈 때, 그분은 우리에게 그분의 영적인 축복을 주신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주님의 말씀속에 이런 보물이 있는 줄 알면서도 그 말씀에 의거 살지 않는다면, 보물이 감추어 놓인 곳을 알고도 그 밭을 사지 않는 사람인 바, 우리는 그 보물을 소유할 수 없게 된다.

팔아야만 하는 것들

“모든 것을 다 팔아”라고 씌어 있다 해서 자기의 자연적인 재산, 그것이 물질적인 것이든 정신적인 것이든 다 포기하라는 말이 아니다. 단지 그것들이 자신의 것, 즉 이기적인 것으로 붙잡고 있는 것을 포기하고 그것들이 주님의 것인데 자신이 사용한다는 것을 배우라는 말이다. 자기가 가진 것을 다 파는만큼, 자기 십자가를 완전히 지는 만큼, 또는 자신을 부정하는 만큼에 비례해서 그는 영적인 보물을 완전히 소유하게 된다. 만일 그가 이기심의 어떤 것을 은밀하게 간직해 보겠다고 하면 영적 보물의 구입 과정에서 실패한다. 우리는 천국가는 여행을 경제적으로 하는게 아니다. 지옥의 악한 삶을 중단할 때만이 천국의 순수한 삶이 흘러 들어와 우리를 복되게 한다. 천국을 위해 우리가 지불하는 만큼에서 우리는 천국의 것을 붙잡을 것이다. 주님과의 흥정에서 약삭빠른 장사는 가능치 않다. 천국을 솔직하게 받아들이는 정도에서 천국은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이다.
자기 자유의지에 의해 주님을 인정하는 이들, 그래서 말씀에 있는 내면의 진리를 보는 이들, 이들은 거듭 나아가기 위해 자신 속의 거듭나지 않은 것들, 이기성들의 소유권을 포기해 가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거듭남이 진보할수록 그들은 말씀 속의 내면의 진리를 더 뚜렷하게 보는 바, 과거 자연적 마음으로 말씀을 대한 것과는 대조를 이루게 된다. 악을 멀리하면 악에 반대되는 선이 주는 기쁨이 우리에게 더 충만해진다. 악은 죄로 될 소지가 절대적으로 있기에 멀리 할 때, 우리 악이 만드는 죄악의 소지들을 명확히 볼 수 있게 된다.
거룩함이 발하는 아름다움을 한웅큼 쥐게 될 때, 거듭나는 삶의 영광을 맛보게 될 때, 우리는 자신 속에서 일어나는 분노, 시기 등등, 이기적 사랑의 모든 형체를 한쪽에 내려놓아야만 한다. 그러면 우리는 영적 진리의 보물들, 즉 사랑하는 것, 참는 것, 친선, 타인을 생각해 주는 것, 인격의 영성을 바래는 것, 그 외 미덕들 등등을 소유한다는 말이고, 이런 속에서 우리는 스스로 살게 된다.

주님의 영적인 피 (the spiritual blood of the Lord)

새교회인이다면, 갈보리에서 주님이 흘리신 육체의 피로 천국을 매입할 수 없다는 정도는 쉽게 이해하고 있을 것이다. “대속죄, vicarious atonement”의 교리는 성경 글자를 외적이고 감각적인 시야에서 보아 기초된 사상 중의 하나이다. 우리가 말씀의 구름을 제치고 볼 때, 즉 내향적이고 영적인 의미로부터 발하는 빛을 가지고 말씀을 대할 때, 글자라는 밭에 감추어 놓인 귀중한 보물을 발견한다.
그래서 “기뻐하며 돌아가서 있는 것을 다 판다.” 다시 말해 장대하고 영광스러운 진리들, 주님은 무한하신 사랑이시다는 것, 주님을 인간이 버렸다고 해서 그 인간에게 저주를 내리시는 분이 아니다는 것, 그리고 할 수만 있다면 모든 이를 구원해 주시려 하신다는 것 등등의 진리에 들어가게 된다. 즉 무엇보다 먼저 그분을 사랑하고 이웃을 제 몸같이 여기며, 그분의 계명에 따라 삶을 꾸리는 사람들이 영광스러운 진리 안에 거한다는 말이다.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는 나를 사랑하는 자이다” (요한복음 15:10).
주님의 피란 영적으로 주님의 신성한 진리를 의미한다. 우리가 이 진리를 사랑하여 배우려 하고 배운 대로 살아갈 때 그 진리는 우리를 악에서 구원해 준다.

거듭남은 점진적인 단계로 이루어진다

우리는 교회의 밭 즉 말씀을 단번에 다 살 수 없다. 우리는 그 밭을 조금씩 계속하여 사들인다. 우리가 생활 속에서 갖게 되는 악한 느낌들을 거절할 때, 그 거절된 악이 우리가 소유하려는 보물의 값을 지불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악들을 멀리하거나 팔아 치워 자기 속에서 꺼내질 때, 선에로 들어가기 때문이다.
우리가 보물을 위해 값을 다 치를 수 없는 고로 해서 교회 속의 영적 삶을 소유하는데 선한 자가 다 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말은 아니다. 교회라는 외적 형태의 조직은 영적인 것을 배우고자 하는 이들을 돕기 위해, 그리고 계명대로 살아가는 이들과 살 필요가 있는 이들을 돕기 위해 존재하는 것뿐이다. 또한 교회 조직에서 활동하는 일이 사람을 거듭나게 하는 일을 수행하는 것이라고 단정지어서도 안된다.
진리가 어디에 있는지 대부분의 사람은 알고 있다. 게다가 감추어 놓인 보물을 우연히 만나는 체험도 한 두 번 이상 가졌었줄로 본다. 그럼에도 그 보물은 우리의 것이 안되어 있다. 우리는 필시 밭을 사야만 한다. 우리는 말씀의 글자를 자기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 다시 말해 진리에 반대되는 우리 속의 모든 것을 포기함으로서, 계명에 순종함으로써 우리는 말씀의 글자, 밭을 사는 것이다. 기회가 생길 때마다 악을 금하면서 주님의 이름으로 선을 행함으로 우리는 매일 조금씩 그 밭의 값을 지불해 가야 한다. 그래서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될 것이다.”

악에 저항함

모든 악은 당파적이고 배타적이다. 그래서 이것들은 마음을 한쪽으로 쏠리게 한다. 우리 속의 어떤 악이 대수롭지 않게 여겨져 그 악을 느슨하게 처리해 버릴 때, 그것은 여타 악들에 대해서도 느슨해지게 처리하려는 성향을 부추기게 된다. 한 마디로 인간은 악을 흠모하려는 자기 속의 성향을 모르는 척 해 두기를 좋아한다는 말이다.
이렇게 내버려두게 되면, 그렇게 한만큼 모든 악의 영향에 노출되는 셈이다. 모든 악은 자아 사랑의 형체들이다. 그래서 우리가 어떤 악에 저항한다면, 우리는 모든 악의 뿌리인 자아 사랑에 저항하는 것이 된다. 그래서 어떤 형체의 악이 되든 진실로 금하려 한다면, 최소한 이미 자기가 아는 악한 형체의 경우 만큼은 기꺼이 저항해내야 할 것이다.

기독교인의 상태

현 상태의 기독인에게 주님의 말씀에 있는 내적인 영적 의미는 감추어 놓인 보물이다. 이런 보물의 존재를 아는 이는 거의 없다. 만일 새교회의 교리 속에서 보게 된다면, 영적 의미를 보물로서 보게 되리라 본다.
많은 현 세대 사람들, 교회 안의 일부에서까지도 구약성서를 묵은 달력 같은 책으로 간주한다거나 현시대에는 별 실용성이 없는 듯 여기는 경우를 목격한다.
주님의 말씀 속에 있는 내향의 보물을 사람들은 어떻게 발견해야 할까? 이 보물은 무심코 지나가던 사람들의 눈에 띄는 표면에는 놓여 있지 않음을 먼저 알고 있어야 한다.

경작하는 밭

비유에 있는 밭은 그리스어로 보면 경작하는 밭을 뜻한다. 그래서 감추어 놓인 보물을 발견하는 사람은 아마 소유자를 위해 그 밭에서 늘 일하는 사람일 것이다.
밭을 늘 경작한다는 것은 영적 측면에서 생각하면, 교회의 진리를 가지고 일하는 때, 또는 말씀의 글자를 가지고 어떤 선을 행하려 추구하는 때, 우리에게 열린 글자적 진리를 가지고 뭔가 선용하려 할 때, 그래서 말씀 속의 내향적 항목들을 나열해 보고, 그 속의 영적 보물을 찾으려 추구하는 때, 등등을 뜻하게 된다. “만일 네가 하느님에 관한 지식을 소리쳐 요구하며, 그 이해를 들어올린다면, 만일 네가 그 지식과 이해를 은을 원하듯이 추구하고, 감추어 놓인 보물로 여겨 열심히 찾는다면, 주님을 경외해야 함을 이해하고 하느님에 관한 지식도 발견할 것이다.”
비유 속에서 보물을 발견한 자는 보물이 밭의 어딘가에 감추어 놓였다는 것을 미리 눈치채고 있었던 것은 아니고, 단지 그는 적당한 급료를 받기 위해 열심히 일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따라서 발견된 보물은 그에게 있어서는 과분한 대가 그 이상이었을 것이다. 이와 같은 모습은 우리 삶에서도 존재한다. 우리에게 주어진 바깥 임무들을 끈기 있게 해 가고, 그런 일들이 유용해지도록 사랑하노라면, 자신이 기대했던 것보다 더 큰 보물을 발견한다는 말이다. 그리하여 발견된 보물로 인해 기쁨을 발견하고 삶의 풍요를 누리며, 그와 동시에 삶의 품성 역시 바뀔 것이다.

악을 멀리함

팔아 치워야 할 것, 또는 멀리해 버려야 할 것들이 우리의 자연적인 마음속에 얼마나 있는지 헤아리고 있는 사람은 상당히 적다. 그렇게 적은 이유가,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기 속 악의 비통한 형체를 건드리지 않으려 하기 때문이고, 자기 죄에 관한 한 적당히 얼버무리려 한다던가, 사회적 또는 도덕적인 수준에서 겨우 점검하려 하기 때문이다.
우선되는 요점은 악은 악이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그 다음 그런 악들이 남의 속에만 든게 아니라 내 속에도 있다는 것을 알 필요가 있다. 죄는 하느님과 반대되므로 그것들을 멀리하는 방향에서 해결을 가져야 한다. 이 원칙에 있게 되면, 악이 죄가 되는 기회가 온다 해도 그것들을 못본척하여 용납하는 어떤 순간도 허용하지 않게 된다. 이에 한 걸음 더 나아가, 우리가 쉽게 쏠려지는 악에 반대되는 선을 강행함으로 더욱 기반을 다져 두어야 한다.
이럴 때만 우리는 보물이 감춰져 있는 밭을 매입하게 된다. 다시 말해 우리가 글자적인 계명을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만큼, 또는 계명을 실제에 응용하는 정도에서 말씀 속의 영적 의미도 자신의 소유가 된다는 말이다. 자신이 부자라고 간주하는 가장 진정한 길은 자신에게 대해 “나는 무엇을 소유하고 있지?”라고 묻는게 아니라, “계명을 표준으로 해서 판단하건대 나의 실제 인격은 어떻게 되어 있지?” 라고 되묻는 것뿐이다.

지식은 힘이다

이 비유는 지식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지식은 힘이다.” 이 말은 물질적 세계에서 공인된 말이지만 영적 세계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영적인 보물과 천국적인 삶은 우리 주위에 함께 존재하고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 삶의 존재에 관한 지식이 얼마나 부족한지 모른다.
수세기 동안 캘리포니아나 오스트렐리아 등지에서 금이 매장된 밭들이 자기들 발 밑에서 짓밟히는 줄도 모른 채 지내 왔다. 정신적 측면에서 우리는 영적인 부유가 함유된 것들을 거침없이 쿵쿵 밟고 다니고, 우리 주위에 있는 영적 부의 가능성을 눈치도 못챈채 살아가는지 모른다. 자기에게 무진장한 행운을 보증해 줄 부를 함유한 땅위에서 얼마나 많은 이들이 가난으로 죽어 갔는지 모른다. 펜실바니아의 농부들은 땅 값을 다 지불 못해 경작하던 땅을 얼마나 많이 잃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 땅에 매장된 석유에 관해 그들이 알았더라면 백만 장자가 되고도 남았을 것이다.
이와 같이 우리는 영적인 가난으로 죽어 간다. 사실 주님이 영원한 삶의 보물을 엄청나게 저장해 두신 땅위에서 우리는 죽어 가고 있다. 때때로 펜실바니아의 농부들 같이 우리는 석유라는 것을 알았을는지 모르나, 석유의 가치는 모르고 있었던 것 같을는지 모른다. 성경이나 교회의 가르침은 우리의 귀에 익혀져 있는데도 그 속에 들어 있는 보물에는 소경이 되어 있다. 게다가 “볼 눈”까지 가졌는데도 말이다.

주님의 오심

주님은 그분 스스로 육신을 가지시고 인간 앞에 오셨다. 신성한 인격이라는 보물이 지상에 오신 그분 안에 존재했다. 그럼에도 인간들은 그분 안에 신성이 존재 않는다고 알았던 것이다. “말씀이 세상에 계셨고, 세상이 이 말씀을 통하여 생겨났는데도 세상은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그분이 자기 나라에 오셨지만 백성들은 그분을 맞아 주지 않았다” (요한복음 1:10-11).
오늘날, 신성한 말씀에 있는 내향적이고 영적인 의미를 밝히 아는 것(계시), 이 지식 속에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한 인격은 명백하게 설명된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재림이다. 그분의 재림은 물질 세계라는 구름 안에 육체로 오시는게 아니라, 말씀의 글자적 의미인 구름 안에 내향적이고 영적으로 오셨다. 말씀의 글자는 영적 마음을 가진 이들의 눈앞에서 구름이 벗겨지듯 갈라지고 말씀 안의 내향적인 영적 의미가 더 큰 영광으로 나타나 보여지고, 그 영광 속에서 주 예수 그리스도가 명백한 자태, 즉 한 분 하느님, 한 인격으로 드러내 주셔서 거듭나는 사람의 삶과 마음에 자리잡으신다.
신성한 인격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감추어 놓여 있다. 다시 말해 세상에 감추어 놓여 있고 단지 그분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 만이 감추어 놓인 신성한 인격을 발견한다. “진실로 구세주이신 이스라엘의 하느님은 그 백성 안에 숨어 계십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 있는 우리들은 그분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고 그분의 가르침을 읽는데도, 정작 그분의 거룩한 말씀 안에 숨겨 놓은 보물을 백만 분의 일도 보지 못한다. “성경을 뒤져라. 너희가 생각하는 성경 속에서 너희는 영원한 생명을 가진다. 성경은 나를 증거하고 있다.” 그리고, “어둠 속에 있는 보물, 은밀한 곳에 숨겨진 재물을 너희에게 주리라” (이사야 45:3).

9
진주를 찾아다니는 장사꾼
– 하느님의 인성을 인정함 –

성서 본문: 마태복음 13장 45-46절

45. “또 하늘 나라는 어떤 장사꾼이 좋은 진주를 찾아다니는 것에 비길 수 있다. 46. 그는 값진 진주를 하나 발견하면 돌아가서 있는 것을 다 팔아 그것을 산다.”

중심 되는 진리

모든 지식 중에서 가장 중요한 지식은 하느님에 관한 지식이다. 하느님의 모든 말씀에 흐르는 가장 큰 주제요, 기독교의 가장 귀중한 진주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한 인격에 관한 진리이다.
이 진리는 성경이 다양한 각도로 가르치는 가르침 속에, 그리고 내향적 의미로 상주하는 거룩한 성경에서 중심 되는 가장 넓은 논제인 것이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 있어서도 이 주제는 예외일리 없다. “숨겨진 보물”의 비유가 암시해 주는 것은, 교회는 세상이 관심을 두지 않아 숨겨진 채 있는 아주 큰 보물을 소유하고 있다는 것, 자연적인 생각으로부터 숨겨진 채 오로지 영적인 마음에만 밝히 알게 하는 내향적인 영적 의미가 있다는 것, 등등이다. 그래서 오늘의 비유는 주님의 말씀에서 가장 크고 중심 되는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이 신성하다는 것은 진리이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나타내 보이고 있다.

신성한 인성 (the Divine Humanity)

우리는 지금 보다 꼼꼼한 표현인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은 신성함, the Divinity of the Humanity of Jesus Christ”이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다. 이렇게 용어를 정밀하게 사용한 이유는, 많은 사람들이 예수의 인격 속에는 신성한 어떤 것만을, 특별히 그분의 내향적 삶 속에 있는 신성한 어떤 것만을 인정하려 들기 때문이다. 한편 극소수이긴 해도 일부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 전체가 신성하다는데 대한 완전한 사상을 확실히 갖고 있다 구 신학은 “삼위 일체의 신비”라는 비합리적인 명분에 예수 그리스도의 이해라는 짐을 떠맡겨 놓아서, 일반적인 사실을 제외하면 납득할 수 없는 신조로 뒤집어 씌운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한 인격을 가르치는 바, 사실 가르치는게 아무것도 없다고 말하는 표현이 나을는지 모른다.
그러나 “때가 되면 너희에게 아버지에 관해 명백한 것을 보여 주겠다”고 하신 주님의 약속에 대한 성취가 새교회에 있다. 그래서 새교회에서야말로 주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신성한 한 분으로서 아버지와 더블은 그분 자신의 신분을 명백하게 보여주고 계신다. 그분은 우리에게 그분 자신의 신성한 인격을 보여주시되, 단지 물질적인 육체만이 아닌 (그 이유는 물질적 육체만으로는 어떤 인간의 경우도 인간의 필수가 되는 부분은 못되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로서 입으신 자연적인 인간다움 (물질적 부분을 넘어 있는 모든 것들) 이 영화되시어 예수 안에 거주하신 아버지와 합쳐져서 한 분 하느님 예수 그리스도라는 한 인격으로 하나를 이루셨음을 보여주셨다. 그래서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다.”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라고 말씀하셨다.

가진 것을 다 팔다

이 위대한 진리가 영적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 위에 내리 비칠 때, 그 진리는 두 겹으로 된 인간 삶(자연적, 영적 삶)의 모든 것 위에 하늘의 빛을 홍수처럼 쏟아 부어 준다. 이 영광스러운 빛 가운데서 이 사람은 이전부터 알고 있었던 모든 것, 그리고 지금까지 진리라고 알고 있었던 것들이 테스트 받아진다. 그래서 자기의 생각, 느낌, 습관에 속한 것까지 무엇이든 간에, 그것들이 기독교의 장대하고 중심 되는 이 진리와 모순됨을 발견하고, 모순된 것이 무엇이든 그는 기쁘게 포기한다. 영적으로 보건대, 이 가장 위대한 진리를 소유하기 위해 그는 가진 모든 것을 기쁘게 팔아 치운다. 그는 옛것을 밟고 일어서서 이제는 성장해 간다. 과거 예수님께서 모든 진리를 성취하시기 위한 삶을 가지셨듯이 진리대로 살아 보려는 순수한 노력을 해 가서 자기의 옛것에 속한 것, 이기적인 삶의 궤도를 벗어나 성장한다.

장사꾼

장사꾼이란 직업적으로 물건을 사고 파는 사람이다. 그래서 뭔가 유용한 것을 팔고 사는 사람이란, 그가 총명과 지혜를 획득해 보기 위해, 또는 그가 타인에게 그 유용한 것을 서로 나누기 위해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을 획득하는 사람을 표현한다. 이 사람은 선을 위해 진리들을 배워 가르치는 사람이기도 하다. 장사란 정신적 재물들의 사용을 만드는 것을 표현한다.
“달란트의 비유”를 생각해 보면, 자기에게 주어진 달란트를 사용해서 장사한 이들은 자기들의 행운을 증가시켰고 칭찬되어졌지만, 주어진 달란트를 사용 안한 사람은 주어졌던 것 마저 잃고 혹독하게 질책되어졌다.
영적으로, 장사꾼이란 어떤 사용을 위해 주님의 말씀으로부터 진리를 수집하는 이들이다. 그래서 어떤 사용을 위해 지식을 서로 나누는 가운데 서로의 선과 진리를 위해 자기에게 부족한 지식이나 총명, 그리고 애정들을 벌충하게 됨으로 보상받아진다. “지혜를 발견하는 자, 그래서 이해를 끌어내는 자는 행복하다. 그 이유가 지혜와 이해라는 상품은 은이라는 상품보다 더 낫고, 얻은 것이 순금보다 더 가치 있기 때문이다.”

찾아다님

비유 속의 장사꾼은 “좋은 진주를 찾아 다녔다.” 찾는다는 것은 진리를 목적으로 진리를 사랑해서 오는 의지의 노력이다. 우리에게는 “너는 주님을 찾으라” 또는 천국을 추구하라고 명령되어져 있다. 이는 주님과 하나를 이룸으로 영적 삶에 도달되도록 의지가 노력하게 해야 한다는 말이다. “그분의 언약을 지키는 자, 성심으로 그분을 찾는 자는 복되다.”
거듭나겠다고 애쓰는 사람, 그래서 자기 마음에 천국을 형성하고 있는 사람은 지식과 진리를 찾아다니는 사람이요, 이 사람은 그 진리대로 차차 살아가게 된다. 이 사람은 영적으로 좋은 진주를 찾고 있는 것이고, 이 진주와 더불어 정신적인 장사를 하는 것이다.

진주

“진주”란 진리와 선에 관한 지식 또는 추상적인 의미로 본다면 진리 그 자체를 표현한다.
따라서 진주는 바깥 쪽에 있는 지식들, 예를 들면 말씀의 글자에 존재하는 지식들이다. 그러나 상응에 의해 이러한 진리들은 말씀의 안쪽에 있는 의미 즉 영적 의미와 하나를 이룬다. 그래서 거듭남이 진보해 가면 진주는 지식일 뿐아니라 진리이기도 하다. 그 이유는 우리가 진리를 알고 이해도 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알게 된 교리가 마음속에서 단지 지식이든, 진리이든, 또는 지혜이든, 무엇이 되는 것은 거듭남의 상태 여부에 달려 있다.
진주가 외적 진리들을 표현하기 때문에 거룩한 성의 문은 진주로 되어 있다고 말해진다. “또 열 두 대문은 열 두 진주로 되어 있었고 그 열 두 대문이 각각 다른 진주로 되어 있었다”(계시록 21:21). 문이란 외적 진리들이고, 이 진리들은 문 안쪽에 있는 것들을 소개하는 역할을 한다. 거룩한 성의 문은 우리들 마음에 영적 진리의 체계에 관한 지식을 소개하는 외적 진리들을 말한다. 각 문이 각각 다른 한 개의 진주로 되어 있다 함은 진리의 통일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 이유는 주님은 한 분이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모든 진리는 최상의 의미인 주님에 관한 더 많은 지식을 소개하는 것일 뿐이다. 그래서 우리의 지식과 주님을 인정하는 것은 모두 함께 끌어내지게 되고, 하느님의 말씀으로부터 파생되어 있는 선과 진리에 관한 모든 지식은 하나로 결합되어진다. 결국 모든 지식은 본질 면에서 보면 주님에 관한 지식이고, 신학이란 하느님에 관한 지식이다.

예증

인체의 모든 부분들은 아주 다양하고 각각 독립되어 있지만 하나의 몸으로서 모든 부분은 연결을 맺고 서로가 적극적인 협동 하에 통일을 이루고 있다. 이와 같이 마음 안에서 모든 진리들은 생각이라는 체계 속의 각 부분들이다. 그리고 모든 진리들은 어떤 사용에 있어서 서로 협동하는 가운데 관련을 가지고 연결을 이룬다. 육체가 그 안에 거하는 영에 의해 움직여지듯, 모든 진리들은 하나의 육체같이 진리들의 영혼(soul)이요 생명인 신성한 영혼(Divine Spirit) 아래 하나로서 행동한다.

모든 것 안에 주님은 계신다

어떤 지식 속에서 우리가 주님을 볼 때만이 그 지식은 우리에게 어떤 영적 쓸모가 있도록 되어진다. “나는 문이다,” “나를 거처서 들어가는 자는 구원을 얻을 것이다” 라고 주님은 말하셨다.
거의 같은 듯한 지식이나 교리라 해도, 만일 주님에게서 분리되어 있다면, 지식이든, 교리이든, 무엇이든 간에 그것은 인간으로 영적 삶에 들어가지게 해줄 수도 없고, 자신 속의 악들의 영향으로 영적으로 부식되어 가는데서 치료되게 해줄리도 만무하다. 그러므로 가장 중요한 것은 주님을 인정한다는 것이고, 가장 위험한 것은 하느님을 불신하는 것일 게다. 단지 도덕적이기만한 사람은 그가 선을 행하되 자신을 위해 시도하지만, 영적인 사람은 똑같은 선을 행하되 주님을 위해 노력한다.
인간이 지식을 추구하고 진리에 의거 살면서 지식을 사용한다면, 그는 선을 획득한다. 그래서 더 열심히 추구하면 그가 구하고자 한 것을 더욱 발견해 간다. 한 마디로 그는 아주 많은 진주를 발견해 가고 결국 지금까지 자기가 소유했던 모든 진주보다 더 값어치 있는 한 개의 큰 진주까지 발견하게 된다. 지식을 추구하면서 그는 진리를 획득하고, 진리를 탐구하면서 그는 선함을 달성한다. 그는 모든 진리가 만나는 지점이 선임을 발견하고, 거듭나는 그 사람의 선은 주님과 하나를 이룬다.
여러 가지 일로 분주한데 마리아가 돕지 않는다고 불평하자, 주님은 마르타에게 이렇게 타일러 주셨다. “마르타, 마르타, 너는 많은 일에 다 마음을 쓰며 걱정하지만 실상 필요한 것은 한 가지 뿐이다. 마리아는 참 좋은 몫을 택했다. 그것을 뺏어서는 안된다.”

유일한 하느님 (the unity of God)

한 분 하느님이 계심을 알 때만이 우리는 통일된 진리를 납득할 수 있다. 구 신학의 경우, 거기에는 여러 가지 신들이 있었고, 종종 이 여러 가지 신은 서로 상반되기도 했다. 자연적인 사람에 있는 마음은 유일하신 하느님을 보지 못하는 고로, 이와 같이 대부분의 진리들이 서로 분리되어 다른 것 같이 보인다. 더욱이 각각의 진리는 어떤 중심되는 큰 진리 밑에서 조화를 이루지도 못하는 것 같고, 서로 충동을 일으키는 듯 여겨진다. 어떤 통일된 목적에 서로 협동 안하는 듯 보일 수밖에 없다.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계신 한 분 하느님을 알 수 있을 때만이 우리는 유일하신 분의 영과 시야로 충만된 기독교를 납득하게 된다.
따라서 우리가 영화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 안에서 신성한 인격이 충만해져 있음을 납득하는 것을 배우려 할 때, 영적 생명에 있는 한 개의 장대한 중심 되는 진리가 왕같이 모습을 들어내 모든 진리를 끌어내 체계화 해주어, 우리가 아는 모든 진리는 다양한 인간 삶 속에서, 그 삶의 모든 수준에서, 모든 평면에서 통일되게 해준다. 예수께서 말하시기를, “나는 길이요, 생명이다” (요한복음 14:6.) 그리고 또 말하시기를 “너희는 성서 속에 영원한 생명이 있는 것을 알고 파고들거니와 그 성서는 바로 나를 증언하고 있다” (요한복음 5:39).

진리의 성장

한 개의 진주는 층을 이루는 겹겹으로 해서 점진적으로 형성된다. 진주는 간단한 한 개의 둥근 공이 아니라 작은 응어리(core)를 덮고 덮은 층층으로된 껍질의 시리즈라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주님에 관한 지식은 우리 마음속에서 어떤 작은 시작으로부터, “교훈에 교훈을” 더해 가는 점진적인 형태를 취하여, 마치 큰 진주가 되어 끝나듯 큰 진리가 완성될 때까지 계속된다. 좋은 진주를 찾아다니는 마음은 중요한 지식과 진리를 추구해 간다. 그래서 점진적인 성장에 의해 준비가 마무리 될 때, 그 마음은 한 분 하느님으로서의 주 예수 그리스도라는 진정한 인격에 관한 지식, 값을 매길 수 없을 정도의 값진 진주를 발견하고야 만다.
그런데 순수한 진리를 안다는 것은 그 진리를 하나의 교리로 정리해서, 또는 이론적으로 아는 것만을 말하는 게 아니라, 그 진리를 실제에 사용함을 안다는 말임을 확실히 해 두어야 한다. 그것을 안다는 것은 마음에 잘 간직하면서 그것으로부터 행동하는 것, 삶의 원리가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따라서 진리를 안다는 것이란 모든 진리 안에 주님이 계심을 안다는 것이기도 하다.
주님은 육을 입은 말씀이요, 씌어 있는 말씀이 신성한 진리임을 우리가 안다면, 모든 선과 진리는 주님 안에, 주님으로부터 있다는 것, 모든 진리는 주님의 말씀 안에 주님의 말씀으로부터 존재한다는 것도 알게 된다. 특별히 이러한 것들이 말씀의 내향적인 영적 의미로부터 보여져 알게 된다면, 그 안에 계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한 인성도 명확히 볼 것이다.

진리는 서로 연계되어 중요하다

위와 같은 위대한 진리를 우리가 붙잡고 있음에도, 우리가 가진 모든 진리들이 가장 값어치 있다는 것에는 주목하고 있지 않을는지도 모른다. 우리의 마음이 한 개의 큰 진주의 진정한 특질에 방향을 맞추고 있지 않을는지도 모른다는 말이다. 그 이유가 이런 진리들이 진주 즉 지식들과 더불어 존재하기 때문이고, 그 진리들의 가치는 양만에 의존되지 않고 그 질이 어떠하느냐에 의존되기 때문일 것이다. 큰 것이 언제나 가장 가치가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기독교에 관한 지식을 습득해 가고 경험도 하는 초기 단계에서 주님에 관한 교리는 중요하지 않은 듯 여겨질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 교리 역시 우리가 아는 많은 교리 중의 한 부분일 것 같고 다른 교리를 믿듯 이 교리도 믿고 있다고 예상할 것이다. 다시 말해 주님에 관한 교리가 가장 중요하다고 여기지 않는다는 말이다. 오히려 우리의 일상생활을 규율하는 실용성에 속하는 교리가 더 중요한 듯 여겨질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가 진리를 사랑하고 그 안에 계신 주님을 보면서, 가진 것을 다 팔아서 진리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려고 더욱 전진할 때, 주님은 모든 진리 안에 계신다는 것,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고 하신 것 같이 모든 지식은 주님을 향해 있음을 알게 된다. 그리고 주님의 말씀 안에 있는 모든 진리는 얼핏 읽기에는 우리의 바깥쪽 것들에 대해 언급하는 듯 보일런지 몰라도, 안쪽 의미에서는 계속해서 주님에 관한 어떤 것을 가르치면서 우리의 인간다움은 그분의 형상을 닮아 가는 것임을, “사람의 자”가 곧 “천사의 자”로 성취되는 것임을 보여준다.

예증

창조의 이야기에서 빛은 해가 창조되기 며칠 전에 창조된 것으로 말해지고 있다. 주님의 말씀으로서 창세기는 어떤 물질적인 세계를 만드심이나 지질학을 취급하는게 아니라, 상징의 언어로 이 책은 신학이나 인간 영에 관한 정신적인 세계를 만드시는 것을 취급하는 것이다.
태양이 나타나기 전에 빛이 있어진 이유는, 성장해 가는 인간의 마음은 신성한 태양, 즉 주님을 알아보기 전, 또는 개인적으로 모든 진리의 근원, 정신적인 빛의 근원이 주님이심을 인식하기 전 일반적인 진리들을 먼저 보게 된다는 사실을 표현하기 위해서였다.
예를 들면, 태어난 아기가 태양을 보기 전 빛을 보는 것, 빛과 태양 사이의 어떤 연결도 없이 무작정 먼저 빛을 보게 되는 경우를 생각해 보라. 아마 이 아기는 햇빛, 달빛, 불빛 등등 많은 빛을 볼 것이다. 아마 아기는 이런 빛들이 여러 가지 근원에서 있어진다고 간주할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차츰 그에게 태양을 보여주면 빛의 근원이 태양에서, 태양으로부터임을 가르치면, 그는 각 빛의 연결을 이해할 것이다. 그런 다음 점차적으로, 그는 더욱 더 총명해져 가서 빛이 직접 비치든, 간접적으로 비추이든 그 빛들은 태양에 근원을 둔다는 것을 이해할 것이다.
이와 같이 영적으로 총명한 마음이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한 인간성에 관한 진리로 가르쳐지게 되면, 그 마음은 생명과 빛의 유일한 근원이 주님이심을 이해한다. 이리하여 그 마음은 모든 진리는 주님의 것이요, 영적 마음은 그분의 생명으로 채워지는 것임을 알게 된다. 따라서 모든 진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에 귀속된다고 하는 것에 실패하는 일이 절대 없다. 한 마디로 그는 그분의 명령에 따른 길을 걷는다. 이 사람도 열심히 자연적인 것을 추구하되 그것 자체가 자신의 영적 진보를 방해하게 하는 것들로 만들지 않는다.

파는 일은 반복된다

“숨겨진 보물”의 비유에서 보물을 발견한 자는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팔아서 그 밭을 샀다. 그리고 연속되는 비유 시리즈로서 오늘 본문에서는 진주를 발견한 자도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팔아야만 했다. 이 비유들은 동일한 마음이 계속적으로 진보해감을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누군가가 묻기를, “숨겨진 보물”의 비유에서 그가 가진 모든 것을 다 팔았다면, 어떻게 그 다음 비유에서 그는 또 다시 가진 모든 것을 다 팔 수 있단 말인가? 라고 다그칠 수 있을는지 모른다. 두 비유를 좀더 세밀하게 구분해서 말한다면, “숨겨진 보물”의 비유는 우리가 세상을 사랑하는 것을 포기하는 측면을 언급하고 있다. 그 다음 비유는 자아를 사랑하는 것을 포기하는 측면을 다루고 있다. 인격에서 각각의 진보는 정신적인 빛 속에서 각기 다른 발전을 가져다준다. 그리하여 인간은 자기가 스스로 포기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진보할 적마다 더 알게 된다. 진보의 각 단계마다에서 그는 악과 거짓에 속하는 자신 속의 것을 팔아 치우고 포기해 가고 있는 것이다.

돼지 앞에 있는 진주

“너의 진주를 돼지에게 던지지 말라.” 이는 주님이 우리에게 경고하신 말씀이다. 이 구절에서의 돼지 떼란 악에 속한 우리 속의 감각적인 욕망들을 말한다. 우리의 애정들이 썩어 뭉글어진 본성인 오물 앞에 머리를 숙이려 든다면, 우리의 주님은 천국적 진리로 천국의 삶에 우리를 들어 올려 주실 수 없다. 사실 진리를 해박하게 안다는 것과 진리대로 살아간다는 것은 이론이나, 말로는 비슷할 것 같이 보일런지 모르나, 이 둘은 별개의 사항이다. 요한계시록 17장을 참조하면, 부패되고 세상적이며 신성을 모독한 바빌론도 “주홍과 진홍색의 옷을 입고 금과 보석과 진주로 단장한” 여자로 표현되어지고 있다. 다시 말해 그녀도 진리를 알고 있다는 말이고, 겉보기에는 거룩함을 고백하나, 속은 썩어 있어 모든 선과 진리를 더럽힌다.

진리를 앎으로서 오는 기쁨

“숨겨진 보물”의 비유나 이 본문의 비유, 모두가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은 영적 진리를 알게 되면 기쁨이 생산된다는 것이다. “주님의 비밀은 그분을 경외하는 이들과 함께 있다. 그분은 그들에게 그분의 언약을 보여주신다.” 이와 같이 진리가 더 높아지면 그에 따른 기쁨도 더 높아지고 증가한다.
신성한 말씀은 무진장하게 존재한다. 우리는 그 진리를 결코 다 소화해 낼 수 없다. 그러나 하느님의 말씀 안에 있는 것을 보고 이해하는 범위에서 우리가 더욱 총명하게 성장해 갈 수는 있다. 말씀은 하느님의 진리이요, 이 진리는 인간의 생각과 삶의 모든 평면과 수준에 적용된다. 그래서 우리가 새로운 진리를 가졌다고 말한다 해도 그것은 하느님의 말씀 안에 이미 있는 것에 관한 지식일 따름이다. 지식이라는 진주는 다만 주님의 정신적인 도성, 새 예루살렘이라는 거룩한 도성의 문일 뿐이다. 즉 “열 두 대문은 열 두 진주로 되어 있었고 그 열 두 대문은 각각 다른 진주로 되어 있다” (요한계시록 21:21).

10
끌어 올려진 그물
– 선과 악의 분리 –

성서 본문: 마태복음 13장 47-50절

“또 하늘 나라는 바다에 그물을 쳐서 온갖 것을 끌어 올리는 것에 비길 수 있다. 어부들은 그물이 가득차면 해변에 끌어 올려 놓고 앉아서 좋은 것은 추려 그릇에 담고 나쁜 것은 내버린다. 시대 끝날(the end of the age)에도 이와 같을 것이다. 천사들이 나타나 선한 사람들 사이에 끼어 있는 악한 자들을 가려내어 불구덩이에 처넣을 것이다. 그러면 거기서 그들은 가슴을 치며 통곡할 것이다.”

심판

교회의 가르침은 심판에 대비해 인간을 준비시킨다. 인간의 인격에 작용하는 면에서 하느님의 진리는 두개의 반대되는 특질의 발달로 해서 선으로부터 악을 분리시킨다.
그 이유는, 영적인 분리란 장소에 관련된 거리 상의 분리가 아닌 것, 즉 상태 또는 인격에 관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서로 대치되는 인격으로 발달된 사람들은 영적으로 분리된다. 또한 그들은 서로 떨어진 채 성장한다. 아마 그들이 물질적 세계에서는 서로가 가까이 살고 있다 해도, 정신적 세계에서는 서로 다른 세계에서 거주하는 것이다.
영계에서의 거리는 인격에 의해 결정된다. 그래서 그들이 가까이 있다는 것은 인격면에서 서로 비슷하다는 말이고, 서로 떨어져 있다 함은 인격면이 서로 일치 않는다는 것이 된다.
이런 모습은 이 세상에서까지도 그러하다. 누군가가 자기와 견해를 같이 하면, “그는 나와 가까운 사이지…”라고 말하나, 자기와 비슷하지 않으면, “그와 나는 거리가 있어서…”라고들 말한다.
하늘(Heaven)은 하느님의 총애를 받아 입장이 허락되어 들어가는 어떤 장소가 아니다. 하늘 나라에 들어오도록 허락된 사람은 자기 심정과 이해성, 그리고 행동에 선과 진리의 천국적 원리가 입장되도록 허용한 사람, 그래서 천국적 원리들을 삶에서 구체화하여 천국적 원리가 살아 있게 만든 이들이다.

“물”이란 자연적 진리에 대한 표현이거나, 이 진리와 상응된다. 즉 생각의 자연적 평면에 있는 외적 진리를 말한다. 예를 들면, 이 진리는 신성한 말씀의 글자적 의미, 특별히 십계명 등등이다.

바다

“바다”는 많은 물들이 집합되어 있는데, 이와 같이 자연적 진리의 저장소로서 주님의 말씀의 글자를 표현한다.
그리고 이와 같은 진리들이 인간 기억 속에 저장되어 있다는 측면에서 생각한다면, 바다는 진리라는 물들로 채워진 인간의 자연적인 기억을 표현한다.

고기잡이 (fishing)

“고기들”이란 기억, 또는 교리 안에 살아 있는 진리에 관한 원리들을 표현한다.
이를 개인적 측면에서 보면, 고기는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을 가진 사람들, 또는 자료나 학문의 측면인 자연적 평면에서 진리들을 받는 사람이기도 하다. 이에는 선한 자연적 인간 또는 악한 자연적 인간, 어느 부류도 다 해당되는 말이다. 이 세상에서는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의 가르침은 악하든 선하든 모든 인간에게 주어진다. 즉 “씨 뿌리는 자의 비유”에서 씨가 모든 종류의 밭에 뿌려지는 것과 같은 모습이다.
고기잡이란 마음이나 삶이 외적이고 자연적 상태에 있는 사람들을 전환시킨다거나 교훈하는 것을 표현한다. 그래서 어부란 말씀의 글자에서 진리를 끌어내는 자, 그리고 그 진리를 타인에게 가르치는 사람이다. 주님은 그분의 첫 제자들로서 어부를 선택하셨는데 이들의 직업은 주님이 그들을 부르신 새로운 직무를 표현했다. 그들을 부르시면서 하신 말씀, “나를 따르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위한 어부가 되게 해주리라.” 예언자들 같이 제자들도 그들이 가르친 원리들을 표현했다.
고기란 삶의 낮은 형태, 냉혈적인 삶, 총명하지 못함을 뜻한다. 그래서 자연적 평면의 마음 상태, 영적으로 고기라 불리는 사람은 영적으로 더 높고 총명한 조건 속에는 있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이런 사람들도 가르침을 받아 낮은 형태에서 끌어 올려져 생각의 더 높은 형태로, 고기가 바다에서 해안가에 끌어 올려지듯 더 강화된 교리라는 지식에로 끌어 올려질 수 있다.

그물

고기를 잡기 위해 질서 정연하게 끈을 연결한 그물이란 논리적이고 질서 있는 체계를 갖춘 교리를 표현하는 것이고, 이 교리가 인간의 마음을 붙잡으며 논쟁의 결말에서 인간의 마음을 단단히 붙잡는다.
그물도 그 외 다른 표현물들 같이 양면, 즉 좋고, 나쁜 측면의 의미를 가진다. 나쁜 측면에서 그물은 거짓 교리로 연결된 체계를 표현한다. 그러나 좋은 측면에서 그물은 신성한 말씀으로 확증된 진정한 교리 체계를 말한다.
“바다에 그물을 침”은 훈육하기 위해 자연적 마음들을 모으는 것, 그래서 그 마음들에 있는 신성한 말씀 속의 진리들을 합리적으로 열어서 설명하는 것을 표현한다. “온갖 것”이란 훈육되는 모든 인간, 갖가지 종류의 인간을 표현한다. 이렇게 온갖 것이라 서술된 이유는 인간 마음이 훈육되어 어떤 영적 마음이 될 것인지 그 인격의 결과를 보지 않는 이상 뭐라고든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물을 끌어올림

그물이 가득 찼을 때, 어부는 그물을 해안가로 끌어올린다. 가득 찬 그물이란 훈육된 인간의 이해성 안에 있는 풍부한 진리의 지식을 표현한다. 이 인간은 악과 선을, 죄된 것과 거룩한 것을, 진리와 거짓을 구별해 낼 수 있을 만큼 충분한 지식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렇게 충분한 지식을 가진 사람은 본인이 원하기만 하면 진리에 의해 살 수 있는 것이다.
“물”이 자연적인 진리에 상응되듯, 땅에 속하는 “해변”은 자연적인 선에 상응된다. 이 자연적인 선은 진리에 의거 살아간 결과이다. 따라서 자연적 선은 생활에 진리를 응용한 실제인 것이다.
진리가 인간에게 가르쳐져 알게 된 뒤, 그 다음 단계는 안 것들을 실제에 놓음으로서 그 진리로부터 선을 얻는 것이다. 모든 가르침은 그 가르침을 사용해서 더 나은 인격을 만들 작정으로 주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어떤 인간이 적절한 가르침을 받게 되었다면, 그는 자기가 안 진리를 실제에 사용해야 하는 의무가 발생된다.

판단(심판)의 실제

이렇게 해서 각자가 걷는 삶은 각자에게 실제적인 심판이 되어 간다. 모든 이는 자기가 받은 가르침을 사용함으로서 심판되어진다. 그 이유가 가르침의 목적은 인간으로 선한 삶을 꾸리게 하려는 것이기 때문이다.
모든 심판은 성취된 상태, 무르익은 상태, 준비되어진 조건, 즉 선하든 , 악하든, 각자가 결정한 것이 삶에 의해 고정되어지고 확증되는 때에 있어진다.
넓은 측면에서 땅 위 교회의 역사는 각 시대와 각 시대에 있어진 처방에 의해 그 시대에 속한 사람들에게 이루어져 왔었다.
“가라지”의 비유에서, 가라지와 밀은 수확기까지 함께 자라도록 허용되었다. 이 수확기가 “시대 끝날”이라고 말해지는데, 이는 한 시대의 끝, 한 처방의 끝, 또는 세상의 어떤 일반적 상황 조건이기도 하다.
각 사람의 마음속에서 있게 되는 심판이란 나쁜 것과 좋은 것을 항구적으로 분리하는 것이다. 우리가 인격 속에 고정시킨 만큼 우리는 자신의 심판에 접근되고 있는 것이다. 바꿔 말해서 우리의 인격이 고정되어 간다는 것은 자신이 사랑하는 원리 그대로 살아 그 원리를 확증하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생각에서 더 이상 붙잡고 싶지 않은 원리는 거절해 버린다. 그리하여 우리는 자신의 삶에 의해 스스로 자기를 심판하는 것이다. 자신 속에 남긴 것으로 각자의 모양이 어떻게 되도록 함으로 스스로 심판한다는 말이다. “불의한 자는 그대로 불의한채로, 의로운 자는 의로운 채로 남겨 지리라.” 자신의 삶에 의해 모든 이는 자기가 만들고자 한 것을 인격 속에 남기고, 확증하고, 견고하게 해 나간다. 각 개인은 자기 속에 남아 있기를 원한 것들을 좋은 것이라 부르면서 나중 사용을 위해 소중하게 간직한다. 그 반면 자기가 더 이상 흠모하고 사랑하고 싶지 않은 원리들은 나쁜 것, 쓸모 없는 것으로 여겨 던져 버린다. 이는 마치 어부들처럼 가득 찬 그물을 해변에 끌어 올려놓고 앉아서 잡은 고기들을 분류하는 것과 같다. 그래서 자신이 판단해 보아서 좋다는 것은 자신의 정신적인 그릇에 모아 담고 나쁘다고 판단된 것은 던져 버린다.

앉음

“ 앉아 있음”은 걷는 것이나 서 있는 것에 비해 보다 더 고정되고 항구적인 태도인데, 이는 의지나 심정이 더 고정된 상태, 또는 자기가 살아가야 하는 태도를 결정하는데 더 준비된 상태를 표현하는 것이다. 의지가 결정하는 가운데서, 우리는 자기에게 오게 되는 것을 삶 속에 예상되는 원리로서 심판하기 위해 영적으로 앉아 있는 것이 된다. 자기의 바램이 고정되면, 우리는 자신이 원하는 것과 원하지 않은 것, 쓸모 있는 것과 쓸모 없는 것, 좋은 것과 나쁜 것을 알고 있다는 말이 된다.

그릇

속이 비어서 뭔가를 담게 될 “그릇”은 교리를 표현한다. 이 교리가 진리를 담고 있게 된다. 그런데, “그물”은 논쟁적인 측면의 교리인 바, 이를 수단으로 우리는 삶의 원리들을 수집한다. 그러나 좋은 고기를 담는 그릇이라는 교리는 내향적인 생각의 영적인 원리, 즉 내면에 속한 것들을 담는다. 그릇에 담기는 것들은 각자가 자신의 삶에 꼭 필요하다고 하는 원리, 살아 있는 원리들이다. 우리는 자신의 그릇이라는 교리 안에 살아 있는 원리를 가지고 채운다. 다시 말해, 우리가 그릇에 담은 원리는 흔하디 흔한 원리라는 수준이 아닌 일상 삶에서 자신에게 절대 필요한 원리 수준으로 인정한다는 말이다.

분리

위와 같이 자기 마음속에서 심판이 집행되는 바, 좋은 것과 나쁜 것, 참된 것과 거짓된 것이 분리되어진다. 자기 애정 속에 있는 선한 것들은 자기 생각 속에 있는 진리들과 서로 상응하여 결합을 이루고, 악한 것은 던져 내진다.
넓은 측면에서의 심판에서도 같은 진리들이 응용된다. 악한 인격은 선한 것이 천국에 넘어 갈 때 선한 것에서 분리되고, 악한 인격을 위해 적절한 것은 악한 자가 지옥에 넘어갈 때 채워진다. 그래서 각 개인은 자기가 선택해서 확증한 인격을 지니고 살 수 있는 데로 가는 것이다.
자연적인 마음을 가진 인간은 선하든 악하든 어느 쪽에 해당될는지 모른다. 자기 인격의 테스트는 각자가 주님의 계명을 어떻게 지켰는지, 또는 자신의 자연적인 바램을 따라 살았는지, 이기적으로 살았는지, 또는 신성한 법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왔는지, 그래서 자신의 이기적인 경향성에 어떻게 저항했으며, 자아 부정을 선한 원리를 위해서 얼마나 실제화 했는지에 의해 받게 된다.

시대 끝 날

“시대 끝 날에는 이와 같을 것이다” 또는 넓은 측면의 교회로 볼 때, 교회 처방의 끝 날 에는 이와 같을 것이다.
각 개인으로 본다면, 인간이 진보하는 매 단계에서도 이와 같을 것이다. “천사들이 나타나 선한 사람들 사이에 끼어 있는 악한 자들을 가려낸다”고 본문은 말한다. 천사들은 모든 인간 가까이에서 나타나 도움을 준다. 그런데, 천사들의 기운(sphere)은 선한 사람에게는 호감을 느끼게 하지만 악인에게는 강박감을 느끼게 한다. 그 이유는 악인은 천사들의 현존에 견딜 수 없기 때문이다.

천사들

천사란 지상에 살면서 거듭나서 천국에 간 사람들이다. 추상적 의미에서 각 개인 안에 있는 선과 악의 심판을 집행하는 천사란 주님의 말씀 속에 있는 선하고 참된 원리들, 우리가 사랑해서 채용한 영적인 원리들을 말한다. 이런 원리들이 우리의 자연적인 마음속에 있는 모든 것의 품질과 그 성격을 심판해 준다.
이 천사들이 신성한 말씀에서, 주님으로부터 “나타나,” “선한 것들 사이에 끼어 있는 악한 것을 떼어 내준다.” 다시 말해, 이 천사들은 악한 세상적 삶과 거듭난 삶 사이에 선을 그어준다는 말이다. 즉 그들은 선한 것은 수용하고 악한 것은 거절하도록 우리를 인도해 준다.
바꿔 말해서, 만일 우리가 악 속에서 자신을 확증했었다면, 신성한 말씀 속의 내면의 진리들은 그 진리가 우리 마음을 수색하기 위해 빛을 비추일 때, 악한 것이 선한 것에서 떼어 내진다. 즉 이 빛은 우리의 인격과 입장을 분명히 하도록 해준다.
만일 어떤 이가 교회의 선하고 참되다고 하는 것에 자기는 상당히 가깝다고 위선적으로 공표한다면, 그는 내면의 진리에 있는 기운이나 그 진리의 현존이 훨씬 더 가까운 상태에서 더 심오한 이질감을 느끼게 되어 그가 믿는다고 하는 진리의 바깥쪽 나타남까지도 부서지고 만다. 마치 태양이 빛과 열을 가지고 떠오르면 낮의 새들에게는 활동하도록 깨워 주지만, 동시에 밤에 적응하는 새들에게는 뒷전으로 물러가게 하는 것과 같다. 악한 자는 자기가 사랑하는 악을 자기를 위해 간직할 것이고, 그가 사랑하지 않는 선과 진리는 거절할 것이다.

예증

한가지 예를 들어보자. 어떤 젊은이가 가게에 취직했다고 간주해 보라. 그가 “정직함이야말로 인간 본성 중 가장 필수적인 요소이다”라고 교육받으며 성장했었다고 가정해 보자. 이럴 경우, 바깥쪽 생각의 측면에서 그는 정직한 태도를 가진다. 게다가 자기는 정직한 품성을 지녔다고 생각하고, 앞으로의 자기 삶에 있어서도 정직함은 자기 속에 남아 있을 것이라고까지 생각할는지 모른다.
이런 젊은이일지라도, 그는 차츰 감각적인 쾌락에 대한 사랑을 발달시킨다. 게다가 그가 타 젊은이들과 어울리면서, 그는 친구들의 습관을 재빠르게 본뜬다. 그리고 그는 친구들과 어울림에서 자기가 꽤 잘난 인물로 사랑 받기를 원하고 관대하면서 자유 분방한 인격자로 평가받고자 한다. 따라서 그는 자기를 과시해 보고자 한다. 이를 위해 호주머니가 허락만 한다면 그는 돈도 서슴없이 소비한다.
이래서 친구들 사이에서 있는 명성이나 쾌락에 대한 사랑이 그의 마음속에서 점점 더 거세어진다. 이와 더불어 그는 자기에게 돈이 더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제 그의 이기적인 사랑, 또는 탐욕 등이 그의 초기 때의 태도인 정직함에 대치하기 위해 은밀히 자라 오른다. 그래서 그와 더블은 정직함은 일종의 감상적 수준일 뿐 삶의 원리로 아직 확증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자신의 쾌락, 명성을 위해 열심을 내는 것, 이것이 자신이 해결해야 할 급선무라고 자꾸 생각한다.
그는 자기의 자연적인 인간의 맛을 내는 쪽을 계속 바래고, 자기의 감각적 바램을 운반해 주는 습관들이 쓸만하여 간직해 두면서 인생을 출발하게 된다. 이를 위해 필요하고 허용 가능한 바깥쪽 생각이나 교리의 체계를 그는 채택한다.
이 교리가 고기잡는 그의 그물이다. 이 그물을 가지고, 그는 자기 속 기억의 바다로 거침없이 노를 저어 나간다. 그 바다 속에는 교회의 가르침, 부모의 가르침, 세상에서 배운 각종 것들이 우글거리고 있다. 이 속에 그물을 던져 가득 채운 뒤 그는 해변에 되돌아 와서 그 그물, 정신적인 온갖 고기들로 가득 찬 그물, 삶의 온갖 원리로 가득 찬 그물을 끌어올린다.
그리고 그는 해변에 앉아 잡은 고기들을 분류한다. 그의 의지가 기억에서 끌어 올려진 것들을 판단하기 위해 들고 일어선다. 그는 그물 속에 선함과 정직이라는 생명있는 많은 종류들을 발견하지만, 삶에 관한 많은 거짓 사상도 함께 발견한다. 아마 이런 거짓 사상은 과거 그에게 가르쳐져 온 것 중 잘못된 관념이라든가, 그의 부모가 그의 기억 속에서 자라도록 방치해서 있어진 잘못된 사상도 있을 것이다. 부모의 경우라 해도 삶이 무엇인지, 어떻게 인간은 삶을 꾸려야 하는지에 관해 잘못된 견해도 가졌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저런 것을 가지고 그는 가게에서 돈을 빼먹는 방법까지도 자신의 쾌락을 증진시키는 수단에 첨가시켜 생각하기도 한다.
그의 정신적인 고기잡이 여행의 결과, 그는 자기 앞에 좋은 것과 나쁜 것이라는 날카롭게 대비되는 두 층의 원리를 가져다 놓게 된다. 과연 무엇을 자신이 채용해야 하는 걸까?
만일 그가 거듭 나아지려고 노력하고 있다면, 그는 참되고 선한 원리는 좋은 것으로, 거짓되고 악한 것은 나쁜 것으로 여길 것은 분명하다. 그러면 그는 자기의 내향적 마음에 좋은 것을 조심스럽게 추려 담는다. 동시에 그는 나쁜 것을 즉각 던져 버릴 것이다. 그가 보건대 부정함은 아무리 작은 시작이었다 해도 어떤 선도, 어떤 행복도 결코 가져다주지 않을 것이라 결론 지을 것이다.
그러나, 만일 그가 자신의 감각적 쾌락을 즐기기로 결정했다면, 그의 쾌락에 대한 사랑은 그의 정직함에 대한 사랑을 짓밟고 만다. 그러면 교회의 가르침에서, 부모의 가르침에서 얻은 정직함이란 실용적인 선함이 못된다는 것에 귀착하고, 그것들을 자신의 흥미에 상반되는 것으로 여기고 만다. 그러면 그의 애정과 생각 속에서 그는 선을 위해 악을 놓고, 악을 위해 선을 놓는다. 어리석게도 그는 나쁜 원리들을 자신 속에 체류시키면서 흠모하기까지 하는 바, 오히려 선한 것을 던져 버리고 만다.
그에게 있어서 선이란 자기 속의 자아 사랑에 좋게 반응하는 것이 선인 듯, 자기 욕망에 일치되는 것이 선인듯 느낀다. 그래서 성서는, “악을 선이라, 선을 악이라 하는 이들, 어둠을 빛이라, 빛을 어둠이라 하는 이들, 쓴 것을 달다 하고 단 것을 쓰다고 하는 이들에게 화있을진저…”라고 적고 있기도 하다. 그는 자신이 행복을 향해 가고 있다고 상상하지만 실상은 더욱 악화되는 쪽에 몰입되고 있다.
그가 주인에게서 뭔가를 훔치려 하는데 유혹되는 것도 위와 같은 경로를 밟는다. 자기 속 감각적 쾌락의 바램을 만족시키겠다고 결정할 때, 그는 정직해야 한다고 조언하는 진리를 거절해 버린다. 처음에 그는 주인을 매우 조금만 속일 것이다. 그러나 매우 조금이라는 부정직함은 자기 속에서는 탐닉으로 자라 오른다. 그래서 매우 조금이 휫수를 더해 간다면, 성실함에 대한 그의 느낌은 더욱 더 무디어 가고 만다. 그래서 그는 선과 악, 진리와 거짓을 구별하는 능력마저 상실한다. 그리고 도둑이라는 인격을 자기 속에 고정시키게 되는 것이다. 빠르던 조금 늦던, 그의 행동은 폭로되어 전복되고 만다, 그리하여 그의 이기적 쾌락 역시 끝장을 보고야 만다.
설사, 그의 도둑질이 들키지 않은 때 조차에서도 그는 언젠가 드러나리라는 두려움으로 인해 매일 괴로움을 당했을 것이다. 그는 자기의 이기적인 욕망이 확증되는 형태를 수단으로 자신 스스로 심판을 집행해 온 것이다.

역사적 응용과 개인적 응용

역사적으로 보면, 본문은 일반적 측면에서의 모든 교회, 모든 처방의 끝에 있는 일반적인 심판과 관련되고 있다. 그런 다음 고기잡이는 자연적인 것, 즉 이 세상에서, 그리고 영적인 것, 즉 저 세상에서 계속되고 있다. 그리고 그 해변은 영원한 세계에 존재한다.
객관적으로 보면, 모든 영적인 심판은 영계에서 집행되어진다. 그 이유는 심판되어지는 것이 인간의 영이기 때문이다. 또한 모든 영들이 심판을 위해 완숙되는 곳도 저 세계임에 틀림없다.
개인 측면에서 보면, 각 개인의 심판은 비록 우리가 지상에 있을 때 조차에서도 우리 속 영적 부분 안에 존재한다. 우리들 영이 진보해 가는 매 단계에서 심판이 있어지고 그 심판 후 우리 영은 다음 단계로 진입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인격 속에 뭔가를 고정시키기 전 우리는 영적으로 심판을 준비하던가, 심판을 진행하던가 한다. 신성한 진리의 천사들은 언제나 우리 기억 속에 헤엄쳐 다니는 것들을 해변에 끌어 올려 준다. 그리고 천사들은 끌어낸 것들을 분류해 주고 옳은 것과 나쁜 것을 분리해 준다.
교회란 이런 일들을 우리가 해 가는데 알 필요가 있는 원리를 가르쳐 주고 천국적 삶의 길을 제시해 줌으로 우리를 돕고 있다. 우리는 언제나 기억의 바다에, 신성한 말씀의 글자에 교리라는 그물을 던진다. 그래서 성경 안에 있는 풍부한 지식을 해변에 끌어내기도 한다. 끌어낸 것들 중 어떤 것은 선하고 참되지만, 어떤 것은 성경의 의미에 대한 잘못된 개념으로 왜곡된 것도 있게 된다. 따라서 합리적으로 생각하는 가운데, 좋은 것은 장차 사용하기 위해 그릇에 담고, 나쁜 것은 던져야 할 것이다.

처벌

본문은 선포한다. “…악한 자들을 가려내어 불구덩이에 처넣을 것이다. 그러면 거기서 그들은 가슴을 치며 통곡할 것이다.” 불구덩이란 인간 바깥 부분에 있는 어떤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이는 악한 열정이 불타고 있는 인간 자신의 덩어리인 것이다. “통곡”함이란 악인이 자기의 바램을 다 채울 수 없어 느끼는 번민이나 고통이다. “가슴을 침, 이를 갊”이란 악인이 자기가 좋아하지 않는 것을 만날 때 있어지는 생각의 마찰이나 충돌이다.
주님이 고의적으로 악인을 벌하시려고 장치한 지옥이란 없다. 주님은 언제나 인간의 마음과 삶 속에 천국을 창조하시려고 애쓰실 뿐이다. 그러나 주님께 저항하는 이들, 그분의 원리를 뒤집으려 발버둥치는 자들, 선을 악으로, 진리를 거짓으로 돌리려는 이들 모두는 자신들의 마음과 삶 속에 스스로 지옥을 만드는 것이다. 인간의 심판이란 자기들 인격이 어떻게 충분히 발달 되느냐일 뿐이다. 악의 결과에서 자유로워지고 싶은 사람은 반드시 스스로 악을 사랑함과 그 응용을 포기해야 한다.
신성한 정의는 또한 신성한 사랑이시다. 그래서 그분은 결코 인간 면전에다 과거 악한 행적의 목록을 내동댕이치시지 않으신다. 게다가 인간은 자신의 바깥쪽 행위만에 의해 심판되는 게 아니라 자신이 형성시킨 인격에 의해 심판되는 것이다. 인간의 인격이 악에서 선으로 변화 될 때, 그는 더 이상 자기 과거에 대한 하느님의 분노 같은 것을 느낄 필요가 없다. “범죄한 그 영혼은 죽을지라… 의인의 의도 자기에게로 돌아가고 악인의 악도 자기에게로 돌아가리라. 그러나 악인이 그 행한 모든 죄에서 돌이켜 떠나 내 모든 율례를 지키고 법과 의를 행하면 정녕 살리라… 그러나 의인이 돌이켜 그 의에서 떠나서 범죄하고 악인이 행하는 모든 가증한 일대로 하면… 그 지은 죄로 인하여 죽으리라” (에제키엘 18:20-24). “만일 네가 영생에 들어가려거든, 계명을 지켜라.” 그 이유는 계명이 삶의 법이기 때문이다. 행복함은 여기서든 저 세계이든, 천국의 말씀이 주는 빛 가운데 신성한 진리의 천사와 더불어 앉아 있는 사람들의 것이다. 이 사람들은 삶이 진보하는 매 단계마다에서 자신의 애정과 생각, 행동 지침들이 움직여 가는 것들의 영적인 품질들을 조심스럽게 검사해 간다. 이런 삶 속에서 천사들은 진실로 “좋은 것은 추려 그릇에 담아 주고 나쁜 것은 내던져 줄 것이다.”

11
하늘 나라의 교육을 받은 율법 학자
– 영적인 진리와 자연적인 진리를 살아 있게 수용함 –

성서 본문: 마태복음 13장 51-52절

51. 예수께서 말씀을 마치시고 “지금 한 말을 다 알아 듣겠느냐?” 하고 물으셨다. 제자들은 “예” 하고 대답하였다.
52.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을 맺으셨다. “그러므로 하늘 나라의 교육을 받은 율법학자는 마치 자기 곳간에서 새 것도 꺼내고 낡은 것도 꺼내는 집주인과 같다.”

질문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13장에 기록된 비유 시리즈를 다 말씀하신 후, 제자들에게, “지금 한 말을 다 알아듣겠느냐?” 라고 물으셨다. 주님께서는 이 질문을 우리의 내향적인 마음에도 던지고 계신다. 우리가 신성한 비유를 읽게 될 때, 비유의 글자 의미 내에 감추어 놓인 영을 합리적으로 쥐고 있을까? 이렇게 의문을 가져 보는 이유는 그 영을 합리적으로 이해하는 만큼에서만 그 비유를 사용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야 그 비유 속의 의미가 실생활에 적용되고, 생활에의 적용에 의해서만 인간은 진리를 확정하는 상태에 진입된다. 만일 그가 진리가 무엇인지 모른다던가, 설사 진리를 안다 해도 막연히 이해하고 있다고 한다면, 그 진리를 선명하게 가진 것도 아니고 능동적인 진리를 가진 것도 아니어서 그 진리를 확언하거나 사랑하지도 못하게 된다. 이럴 경우, 자신의 자동차가 올바른 방향으로 달리고 있는지 불확실한 상태에서 운전하듯, 그의 마음은 의심 가운데 항상 놓여 있을 뿐이다.
영적으로 말한 비유를 이해한다는 것은 비유 안에 있는 진리를 본다는 것 이상을 의미한다. 이는 본인의 영과 행동의 양면을 통치하기 위해 실생활의 원리로서 진리를 확정하며 동의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진리를 듣게 될 때, 주님은 내면의 마음에 작용하시어, “지금 하는 말을 다 알아듣겠느냐?” 라고 물으시는 것이다.

대답

이러한 주님의 질문에 어떻게 우리는 대답해야 될까? 아마 우리는 본문의 제자들 같이 “예, 주님” 하고 대답할는지 모른다. 또 한가지 질문을 더해 보자. “어떤 방법으로 우리는 대답을 만들어야 할 까?” 바깥쪽 생각으로부터 대답한다면, 죽음까지도 감수하겠다는 베드로 같을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막상 시련이 오게 될 때 실수할는지 모른다. 우리는 자신 속에서 주력이 되는 자기를 통치하는 사랑(ruling love)을 쉽사리 인식하지 못한다. 우리는 자신의 애정을 가늠해 봄도 없이 바깥쪽 생각으로부터만 주님의 질문에 답할는지 모른다.
그렇다고 우리는 자신의 애정으로부터 답하려고 억지를 써서도 안될 것이다. 그 이유는 우리의 애정은 상황에 따라 다른 상태에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만일 애정에 의존한다면 자신의 바깥 측면의 애정에서 말하기 쉽다. 그러면, “어떻게 주님의 물음에 대답해야 할까?” 우리의 일상 생활이 대답이 되어야 할 것이다. “너희는 행위를 보고 그들을 알게 될 것이다. 가시나무에서 어떻게 포도를 딸 수 있으며 엉겅퀴에서 어떻게 무화과를 딸 수 있겠느냐?” (마태복음 7:16). 우리의 삶이 위의 주님의 질문에 대답을 해야 정답이 된다. 그 이유는 삶 속에서 자신의 생각과 애정이 하나를 이루기 때문이다.
우리가 주님의 비유를 읽고, 일상 생활의 긴요한 교훈으로 비유의 내향적인 진리를 채용한다면, 그리고 그 진리가 자신 속의 애정이나 생각 그리고 행동을 형성하도록 허용한다면, 우리는 이런 진리를 향해 능동적이고 확신적인 상태를 가지게 된다. 수학의 기본 원리가 틀림없다고 아는 것만큼이나 우리는 비유 속의 진리를 알게 될 것이다. 그 결과, 우리는 그 진리를 이해하고 사랑하며 행동하게 된다.
안과 밖의 삶이 위와 같은 조건에 있게 될 때, 우리의 삶 그 자체가 “예, 주님”이라고 말한다. 일상생활 속에서 주님께 답하지 않는 이상 그외 어느 방법으로 대답해 보려고 노력해야 쓸데없는 것이다. 그 이유는 삶은 인간 전체의 요약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주님에 대한 사랑, 그분의 진리에 대해 능동적인 확신을 가진 사람은 필시 그의 행동에서 그 사랑을 보여 줄 것이라는 말이다.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다…”

율법 학자 (서기관)

“그러므로 하늘 나라의 교육을 받은 율법 학자는 마치 자기 곳간에서 새 것도 꺼내고 낡은 것도 꺼내는 집주인과 같다.” 즉 신성한 진리를 향해 긍정적인 상태에 있으면서 그 진리로 교육받아지는 이들은 주님의 살아 있는 형상과 모습이 되어 가고, 거룩한 말씀의 글자와 글자 속의 영, 양면으로부터 자기의 삶을 건설한다는 말이다.
율법 학자들은 학식 있는 계층으로 신성한 법에 관한 임무를 띄고 교회의 법에 대한 선생 역할을 담당했다. 또한 그들은 성경을 베끼기도 했다. 그래서 그들은 율법의 교리들을 가르쳤다.
좋은 의미에서, 율법 학자는 진리에 있어서의 총명을 표현한다. 그 이유는 그들이 “율법을 잘 알기” 때문이어서이다. 그들은 구약 성서의 율법의 글자를 쓰고 베꼈기 때문에, 그 법에 매우 친숙해서 그들의 자연적인 기억 안에 보물로서 저장되어 있었다. 기독교인들은 율법에 따라 살아감으로 해서 자기 심정과 이해성에 율법의 영을 쓰고 있다. 한마디로 기독교인은 영적인 율법 학자인 셈이요, 하늘나라의 교육을 받은 율법 학자인 것이다.
원래, 율법 학자의 직분은 좋고 유용한 것이다. 그러나 유대인들이 악에 빠졌을 때, 그들은 신성한 법을 뒤집었다. 그런 다음 “바리사이파인과 율법 학자들”은 “위선자”가 되어 백성을 누르는 악한 권세를 행사했었다. 본문 속에서의 율법 학자는 좋은 측면만을 언급하고 있다.

교육받는 율법 학자

영적으로 보건대, 하늘 나라의 교육을 받은 율법 학자는 주님의 말씀 속에 있는 선한 원리와 영적 진리들로 교육된 사람이다. 그 이유는 천국은 하느님의 말씀 속에 있는 천국적인 진리에 따라 살아감으로 인간 안에 건설되기 때문이다. 인간이 이 진리들을 내면적으로 이해하면 할수록, 그는 더 내면적인 삶을 갖게 되어, 자연스럽게 천국은 그 사람 안에서 건설되어 질 수 있게 된다.
하늘 나라의 교육을 받은 것과 하늘 나라에 관해 교육을 받은 것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 전자는 합리적인 이해로 교육을 받아 진리를 수용한 상태이고, 후자는 교리의 지식으로 교육받아진 상태이다. 교리가 진리로 될 수 있는 때란, 당사자 스스로 교리가 진리라고 보게 될 때이다.

사람과 집주인

교육받은 율법 학자는 “마치 자기 곳간(보물 창고)에서 새것도 꺼내고 낡은 것도 꺼내는 사람, 집주인과 같다. like unto a man, a householder, who bringeth forth, out of his treasures, thing new and old.” “사람”은 이해성에 있는 진리들을, “집주인”은 의지 속에 있는 선들을 표현한다. 이 둘이 언급되는 것은 거듭나는 사람에게 있어 그 둘이 하나를 이룬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함이다. 의지는 인간의 가장 깊은 거주지요, 개인 소유의 집인 것이다.
가장 깊은 측면에서 볼 때 집주인은 주님 자신이시요, 그분의 집 또는 거주지는 거듭나는 인간의 심정이다. 낮은 측면에서 볼 때, 집은 주님의 교회 또는 천국이다. 그 이유는 이것들이 주님의 거주지이기 때문이다.
율법 학자는 집주인 같다고 말해지고 있다. 인간이 주님을 사랑하고 그 사랑으로 살게 될 때, 그는 주님을 닮아 간다. 그가 주님의 진리를 알게 되고, 그 진리에 따라 살 때, 그는 주님의 형상이 되어 간다.

보물 (곳간, treasure)

주님이 집주인되시는 바, 그분의 보물이란 그분 말씀의 영에 있는 선하고 참된 모든 천국적인 원리들이다. 이 천국적인 보물들은 말씀의 글자로부터, 선하고 진정한 원리들로부터 끌어내져, 인간의 자연적 행동에 응용된다.

새 것과 낡은 것

끌어내진 보물들이 “새 것과 낡은 것” 이라고 불리고 있다. “새 것”이란 말씀의 영적 의미에서 오는 것, 내면에 속한 것, 영적인 삶을 말하는데, 이것은 주님으로부터 새 생명으로 즉각 채워져 있다. “낡은 것”이란 말씀의 글자적 의미에서 오는 것, 외부 행동에 대한 교훈들, 바깥쪽 삶에 속한 것들이다. 이러한 글자적인 것들은 낡은 것이라 불리는데, 그 이유는 모든 선과 진리 그리고 생명의 신성한 근원으로부터 보다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이다.
바울이 새것과 낡은 것으로서 성경의 글자와 영을 말하기를, “우리는 글자에 속하는 옛것을 섬기지 말고 영에 속하는 새것을 섬겨야 한다”라고 말했다.
인간의 의지는 애정과 더불어 그의 사랑의 곳간이고, 그의 이해성은 생각과 더불어 지혜의 곳간이며, 삶은 실제의 선함, 거룩함의 곳간인 것이다. 이리하여 주님은 그분의 약속, “나는 내 법을 그들 안쪽에 놓아, 그것을 그들 심정에 쓰게 하리라”를 성취하신다.

율법의 성취

새 것과 낡은 것, 이 두 가지를 곳간에서 꺼낸다는 것에 주목해 보자. 구약 성서의 율법은 신약 성서에 의해 취소되는 것이 아니다. 칼빈 주의자들은 말하기를, “우리는 율법 밑에 있지 않고 은총 밑에 있다. 즉 우리는 율법에 의해 잡혀 있지 않다. 고로 우리는 율법으로 살아갈 필요는 없다. 그 이유는 주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 율법을 성취(완성)하셨기 때문이다” 라고 한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 대신 율법을 성취하실 수 없으셨다. 오히려 그분은 그것을 그분의 인성 속에서 성취하셨는데, 그로 인해 우리로 율법을 성취 가능하게 만들어 주셨던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스스로 율법을 성취해야만 한다. 즉 율법에 순종하여 율법을 완성해야 한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 율법을 생명과 사랑으로 가득 채워야 한다. 예수님은 인간에게 선과 악 사이에 선택할 자유를 회복시키심으로 율법을 성취할 기회를 우리에게 회복시켜 두시었다.
그래서 우리는 계명에 관한 법을 지켜야만 한다. 아마 과거 유대인이 그것을 지킨 것 이상으로 준수해야 할 것이다. 그 이유는, 유대인은 율법을 글자대로의 수준에서 준수했지만, 우리는 글자와 함께 글자 속의 영까지 지켜 가야 하기 때문이다. 즉 우리는 새 것과 낡은 것, 두 가지를 꺼내서 삶 속에 실현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에 의한” “은총과 진리”는 “모세를 통해 주어진 율법”을 폐기하지 않았다. 다시 말해 하느님 말씀 속의 영적 의미의 열림이 그 말씀의 글자를 폐기시키지 않았다는 말이다. 또는 인간의 영적 마음이 열렸을 때, 그는 자기의 자연적 마음에 있는 진리들이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고 간주해 버려서는 안되는 경우와 같은 것이다.
“만일 너희가 영원한 생명으로 들어가려거든, 계명을 지켜라”고 주님은 말씀하셨다. 그리고 만일 계명이 의미하는 것에 의심이 있다면, 그 문맥 하나 하나에 의문이 정착된다. 젊은 청년이 주님에게 계명을 물었을 때, 예수께서는 모세를 통해 주어진 십계명 속의 계명을 인용하셨다. 말씀의 글자에 관계되는 낡은 것은 자연적인 마음에 알맞다. 말씀의 영에서 오는 새 것들은 영적인 마음에 채용되어 진다. 따라서 이 두 가지가 있어야 인간 삶을 가득 차게 해준다. 그리고 인간의 영적 본성에 관한 지식이 각자의 바깥쪽 삶의 이해에 열쇠가 되듯 말씀 속의 영은 말씀의 글자를 적절히 설명해 준다. 모든 신성한 법이 우리에게 주어져 있으되 우리로 각자의 수준이나 평면에 걸맞아 순종되도록 주어지고 있고, 이렇게 적용됨으로 그것은 인간다움의 일부가 되어진다.

모든 진리는 실용적이다

이리하여 이 비유는 모든 진리가 실용적이며 우리의 사용을 위한 것임을 확인하고 있다. 우리가 주님에게서 진리를 받을 때, 우리는 영적 의미와 자연적 의미의 양면에서 받아야 한다. 우리는 이 두 의미를 분리해서는 안되는데, 그 이유는 그 둘은 인간의 영혼과 몸이 하나를 이루듯 상응에 의해 하나를 만들기 때문이다. 주님 스스로 그분의 거룩한 말씀의 글자와 영을 하나 되게 하셨듯이, 우리도 말씀을 애정과 생각, 그리고 행동에서 하나를 만들어야 한다. 그 이유는 “하느님께서 짝지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마태복음 18:6).
우리는 선과 진리를 모든 수준에서, 가장 안쪽에서 바깥에 이르기까지, 알아차리지 못하는 인간의 핵심에서 알아차리는 인간의 주변에 이르기까지를 총망라해서 사랑하고 이해하면서 행해야 한다. 그 이유는 자연적인 선과 진리가 없는 영적 선과 진리는 형체 없는 존재요, 가득 채워지지 못한 그릇이요, 힘이 없는 영일 뿐이고, 영적인 것 없는 자연적인 선과 진리는 내향적인 영과 생명이 없는 껍데기뿐이기 때문이다.
말씀 속에 있는 내면적인 진리가 말씀의 글자에서 잘 맞는 표현을 찾아 인간의 자연적인 궁핍함을 채울 수 있게 하듯, 내면적인 선과 진리는 우리의 일상적인 행동에서 그 말단을 발견하여 체현된다.
이렇게 해서, 삶의 모든 평면과 수준에서, 우리의 정신적인 진보의 매 단계에서 우리는 진리에 대한 자신의 생각에서, 만일 그 생각이 영과 글자 면에서 하나를 만든다든가, 안과 밖이 일치하는지를 보아서 그것이 과연 올바른 것인지 알게 된다. 그러나 만일 눈에 보이는 영적 진리가 자기의 바깥 행동을 위해 상응되는 규칙을 생산하지 못한다면 우리가 가졌던 생각은 잘못된 것임을 알게 된다.

개인적인 영향

이러므로 우리는 주위 사람과의 관계에서 그들에게 주는 우리의 영향을 영적으로나 자연적으로나 선하게 만들 필요가 있는 것이다. 이 세상은 영에 속하는 새로운 것을 사랑하지 않는다. 더욱이 영적인 것들을 명백히 해주며, 우리의 영적인 마음에 새 천국을 만들어 주면서, 자연적인 마음에 새 땅을 건설하게 하는 새 교회의 인정은 더욱 힘들다.
이 세상은 바깥쪽 삶에 있는 낡은 것들을 사랑한다. 이 세상은 인간이 바깥쪽 곳간 속, 즉 자연적인 인간에 있는 낡은 것들을 타인에게 줄 때, 그 사람을 두고 선하고 너그러운 사람이라 일컫는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의 곳간을 열 때, 영적 삶에 있는 새 것을 타인에게 준다면, 그는 더 나은 선, 더 높은 종류의 선을 행하는 것이 된다. 불멸의 영혼을 먹이는 빵은 일시적인 육체를 먹이는 빵보다 훨씬 더 가치가 있다. 그러나 이 세상 속에 있는 우리에게는 이 두 종류의 빵은 필수적이다. 따라서 두 가지 것을 자신과 타인에게 주어야 합당한 것이다.
우리는 율법 학자들이다. 그 이유가 우리는 자신이 사랑하는 원리들, 그래서 그것 가지고 움직이는 삶으로 자신의 심정에 날마다, 깊게 새겨 가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우리 삶 속에서, 그 삶에 의해 우리는 생명의 자기 책을 집필하고 있다는 말이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자기 책에 씌어진 것들에 의해 심판되어질 것이다. 다시 말해 우리가 언제인가 쓰리라 예상했던 것이 아닌, 선한 원리에 대한 감상적 접근이 아닌 일상 생활에 적용된 원리에 의해 심판된다. 저 세상에서 분명히 드러날 수 있는 것은 이 세상에서 우리 책에 쓰여진 것뿐이다. 바깥쪽에 속한 것만을 바라면서 일해 간다면, 우리는 지상 곳간에 보물을 쌓을 수 있을는지 몰라도 천국 곳간은 텅빈 채 남겨진다. 그러나 만일 영적인 사용을 위해 영적 보물을 자연적 용도에 충당해 간다면, 영의 하늘에 보물이 쌓이면서, 동시에 자연적인 마음인 지상도 채워질 것이다.
이와 같은 삶 속에서 있다면 우리는 날마다 “자기 곳간에서 새 것도 꺼내고, 낡은 것도 꺼내리라.”

12
무자비한 종
– 용서 않는 영 –

성서 본문: 마태복음 18장 23-35절

23. “하늘 나라는 이렇게 비유할 수 있다. 어떤 왕이 자기 종들과 셈을 밝히려 하였다. 24. 셈을 시작하자 일만 달란트나 되는 돈을 빚진 사람이 왕 앞에 끌려 왔다. 25. 그에게 빚을 갚을 길이 없었으므로 왕은 ‘네 몸과 네 처자와 너에게 있는 것을 다 팔아서 빚을 갚아라’고 하였다. 26. 이 말을 듣고 종이 엎드려 왕에게 절하며 ‘조금만 참아 주십시오. 곧 다 갚아 드리겠읍니다’ 하고 애걸하였다. 27. 왕은 그를 가엾게 여겨 빚을 탕감해 주고 놓아 보냈다. 28. 그런데 그 종은 나가서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밖에 안 되는 빚을 진 동료를 만나자 달려들어 멱살을 잡으며 ‘내 빚을 갚아라’하고 호통을 쳤다. 29. 그 동료는 엎드려 ‘꼭 갚을 터이니 조금만 참아 주게’ 하고 애원하였다. 30. 그러나 그는 들어 주기는커녕 오히려 그 동료를 끌고 가서 빚진 돈을 다 갚을 때까지 감옥에 가두어 두었다. 31. 다른 종들이 이 광경을 보고 매우 분개하여 왕에게 가서 이 일을 낱낱이 일러 바쳤다. 32. 그러자 왕은 그 종을 불러 들여 ‘이 몹쓸 종아, 네가 애걸하기에 나는 그 많은 빚을 탕감해 주지 않았느냐? 33. 그렇다면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너도 네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할 것이 아니냐?’ 하며 34. 몹시 노하여 그 빛을 다 갚을 때까지 그를 형리에게 넘겼다. 35. 너희가 진심으로 형제들을 서로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실 것이다.”

원리

영적 삶의 법칙은 선용(use)이다. 우리가 사랑하는 선, 생각하는 진리는 그것들로부터 오는 행동이 있는 만큼에서, 이렇게 해서 행동 지침에 그것들을 구체화하는 정도에서 우리의 것이 되어진다. 본문 비유의 요점은 영적 삶의 이런 법칙에 대한 예증이고 이것이 타인을 용서함, 자비라는 원리에 응용되고 있다. “용서하라, 그러면 너도 용서받아질 것이다.” “남을 저울질하는 대로 너희도 저울질을 당할 것이다.” 이 법칙은 세상의 법규정 같이 임의로된 법이 아닌 인간 삶의 영적 원리에 관한 것이다.
“자비를 베풀어 네 스스로 자비로움을 보여라” 고 주님은 말하셨다. 그 이유는 쉽게 이해할 수 있다. 하느님의 자비를 보고 고맙게 여기는 이들이라면, 자기의 원리로 그 자비를 채택하고, 그로부터 행동할 것이기 때문이다. 어느 정도만큼 각 개인이 주님의 사랑을 이해했느냐는 것은 서로의 사이에서 주님의 사랑과 얼마나 유사한 사랑을 행사했느냐에 의해 측량된다. 그 반면, 하느님의 사랑의 속성에 감사를 느끼지 않는 이들은 그들 삶 속에서 하느님의 사랑과 유사하게 살아 보려는 어떤 노력도 만들지 않는다.

베드로의 질문

베드로가 묻기를,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잘못을 저지르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이면 되겠습니까?” 예수께서는 대답해 주시기를, “일곱 번 뿐 아니라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여라.” 이렇게 물을 때의 베드로의 마음속에는 아마 “만일 누가 하루에 일곱 번씩 잘못을 저지르고, 그 때마다 되돌아와 말하기를, 회개하노라 한다면, 우리는 그를 용서해야 할 것이다”라고 추측했을는지 모른다.
유대 원로들의 전통에서, 피해를 가하는 어떤 사람을 세 번만 용서하면 충분했다. 따라서 베드로도 그의 자연적 마음속에는 이와 공통된 생각이 있었을는지 모른다. 즉 잘못된 행위는 반복될 때마다 그를 더 범죄자로 만들고, 결국 그가 용서받을 수 있는 한도를 넘어서게 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원리를 많은 나라의 법에서 채택하고 있는게 현 실정이다.

주님의 응답

주님의 응답은 베드로를 크게 놀라게 했다. “일곱 번씩 일흔 번,” 이는 490번이라는 말이고 이 숫자의 크기로 보아서, 주님의 말씀은 타인을 무한정으로 용서하라는 것, 용서할 때 몇 번 용서했는지 아예 세지 말라는 것도 암시하고 있다. 그 이유는 몇 번인지를 계산한다는 것 속의 생각에는 잘못한 자가 어느 한계점을 넘어서서 처벌을 가할 수 있을 때까지 자신의 분노를 꼭 붙잡고 있겠다는 자연적인 바램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님은 베드로(그리고 베드로를 통해 모든 사람)에게 가르치시기를, 우리가 타인을 용서하는 것은 타인이 잘못한 횟수에 의존하지 말고, 본인 자신의 마음 상태에 의존하라는 것, 남을 용서할 수 있는 마음, 비록 잘못을 저지른 사람 속에도 선은 남아 있고, 그 선 만큼은 사랑되어야 하기에 용서를 사랑하는 것을 자신 속에서 증진시키라는 것이다.
그 다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우리는 누군가를 얼마나 많이 용서해 주었는가를 계산하지 말고, 용서하지 못하는 것이 악임을 보고, 그 악은 반드시 거듭나는 가운데 떨어져 나가야 한다는 것을 확실히 해야 한다.

일곱

본문의 “일곱”은 거룩한 것을 명시해 주는 표현적 숫자이다. 그리고 “일곱 번씩 일흔 번”이란, 우리가 타인과 관계를 갖는 가운데 우리에게 영향을 미치게 하는 것은 모든 사람에 대한 사랑의 거룩한 영이라는 것을 강조하여 말하는 것이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가 완전하신 것 같이, 너희도 완전해라.” 이는 인간에 대한 주님의 완전한 이타적 사랑에 근접되도록 우리는 움직여야 한다는 뜻이다.

“하늘 나라”는 거듭 나아가서 천국적인 조건을 갖추고 있는 마음과 그에 따른 삶 속에 존재한다. 그 나라의 왕이란 신성한 진리로의 모든 천국과 모든 거듭나는 마음속에서 천국을 통치하시는 주님을 말한다.

종들과 셈을 밝히려 했을 때의 종들이란 인류이다. 주님의 사랑과 그분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그분께 기쁘게 순종했을 때의 인간들은 주님의 진정한 종들이었다. 인간들과 셈을 하심, 인간들과의 계산을 조정하시는 것은 인간의 마음과 삶의 질을 테스트하시어, 어떤 원리가 그들을 격려하는데 도움이 되는지를 보여주시는 것이다. 이런 작업을 주님께서는 내향적 측면에서, 즉 각 사람 마음에 뿌려진 진리를 수단으로 계속하신다. 왕이 자기 종들과 셈을 밝힌 때란 자기에게 가르쳐진 진리가 자신의 마음과 삶을 반성하게 하거나 곰곰이 생각하게 하는 때를 말한다.
현명한 사람이라면 위의 반성을 행한다. 그 반면 “분별없는” 사람은 계산이 어떻게 되어 자기에게 닥칠지 곰곰이 생각하지 않고 충동적으로 행하는 사람이다. 인간이 되새겨 보는 가운데서 셈을 하는 분은 주님이시다. 그 이유는 주님은 거듭나는 사람이 자신의 인격 속에 든 것이 도로 튀기도록 진행시켜 주시고 그에 따라 있어지는 영향을 감지시켜 주시기 때문이다.

달란트

달란트의 정확한 값어치는 확실치는 않는데, 그 이유는 달란트를 은이나 금으로 만들었기 때문이고, 게다가 시대에 따라 그 값어치가 달랐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느 경우에서든 일만 달란트라면 아마 수백만 달러에 견줄 수 있는 굉장한 액수인 것만은 사실이다.
그래서 일만 달란트는 우리가 주님의 자비하심에 대해 빚지고 있는 액수가 굉장하고 무한정 하다는 것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글자대로 볼 때, 그들 관계는 어느 성을 통치하는 왕이 어떤 이에게 내려 준 지위에 대한 대가로 공물을 상납하는 관계에서 빚을 진 종과 왕과의 관계일 것으로 추측된다.

주님에게 갚을 부채

거듭나는 사람 모두는 자기가 주님에게 빚지고 있다는 것을 곰곰이 생각한다. 그리고 그 사람은 자기의 부채액이 얼마나 엄청난지를 본다. 물론, 인간은 출생 때부터 주님에게 수많은 부채를 짊어지고 있다. 다만 인간이 이 사항을 거듭나는 삶이 있기 전에는 인식하지 못했을 따름이다. 이제 자기가 갚아야 할 빚의 액수를 안 이상, 그가 실감하는 사실은 자기의 모든 생애를 걸쳐 주님께 빚을 갚아 간다 해도 다 갚을 수 없다는 것이다. 게다가 지금까지 살아온 모든 것은 자신과 세상을 위한 것일 뿐 주님과 타인을 위한 것이 없다는 것까지 인식하게 된다.
그래서 그가 보는 또 하나는, 지금부터 빚을 줄이는데 전력을 쏟는다 해도, 주님께 전액을 갚을 수 없다는 것, 한마디로 “빚을 갚을 길이 없다”는 것이다. 주님께서 보신 바, 그는 그의 영적 채무를 스스로는 지불할 수 없다는 것, 그는 자신 스스로 자기를 구원할 수 없다는 것, 그래서 인간은 주님의 자비에 의존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팔려져야 함

그러나, “왕은 ‘네 처자와 너에게 있는 것을 다 팔아서 빚을 갚아라’라고 명령하였다.” 즉, 반성하는 사람(reflecting man)의 경우, 그가 주님께 빚진 상태를 벗는데 있어서 현 상태의 삶으로는 어림도 없음을 보게 되고, 오히려 자기는 이기적 삶으로 인해 지옥을 향해 아래쪽으로 치닫고 있음을 알게 된다. 그래서 그가 의식하는 것은, 그분을 인정하고 그분의 은택에 감사하고,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는 대가를 치르지 않으면, 자기는 자신의 악으로 인해 영영 죽게 된다는 것이다.
이럼으로써 팔아 치워야 할 것은 우리로 퇴보되게 하는 상태에 빠지게 하는 것들이다. 거짓 사상 속에 붙잡힌 이해성, 악한 애정 속에 파묻힌 의지, 죄 가운데서 헤매는 삶, 게다가 자아와 악에 속한 거룩하지 않은 삶을 위해 사용된 정신적, 육체적인 모든 소유물들이다. 이에 대한 예증으로 아합에게 내려진 구절을 찾아보자. “너는 목숨을 내던져 가며 야훼의 눈에 거슬리는 일을 하려고 한다” (열왕기상 21:21). 이런 상태 속에 있는 인간은 영적으로 붙잡을 수 있었던 값비싼 모든 것, 즉 선함과 진정함, 그에 따른 선용의 삶을 다 잃고 마는 것이다.

처자와 가진 모든 것

“남자”는 이해성을, 그의 “아내”는 의지를 표현하고, 그의 “자녀”는 그의 의지와 이해성이 하나를 이룸에서 태어난 애정과 생각들이다. “그가 가진 모든 것”이란 그의 자연적 마음과 삶에 속하는 외적인 모든 것들이다. 이러한 것들은 그것들이 주님에게서 멀리 떨어지고, 자아에 헌신될 때 악에 속박되고, 노예화되어 마치 악에 팔리는 상태에 진입된다.
자신을 잘 숙고하는 사람은 자신 속의 자연적 성향에 있는 아래쪽만으로 향하려는 경향성을 인식한다. 이렇게 자신의 상황을 보는 중에, 그에게 경보종이 울려지고, 자비를 간청하며, 자기가 빚졌다는 것을 인정하고, 그 채무를 언제나 갚을 의도가 있고, 갚기 위해 헌신적 노력을 해보겠노라고 애원할 수밖에 없게 된다. 다시 말해 주님의 계명을 지키겠다는 의도와 바램을 표현한다는 말이다. 이렇게 해서 자기 인격을 주님 쪽으로, 그분의 자비 쪽으로 바꾸겠노라는 결심을 표현한다.
열심을 다해 빚진 것을 갚겠노라는 그의 의도란 고된 것처럼만 보이는 진리라는 완고한 법칙에 의거 심판되어지기보다는 자비로운 하느님의 사랑에 의해 통치되고 싶은 그의 바램을 표현하는 것이다.

간청 (애걸, petition)

위의 사항들이 26절의 “조금만 참아 주십시요. 곧 다 갚아 드리겠습니다”로 의미되고 있다. 이 사람이 본 것은, 법대로 하면 자기는 단죄된다는 것, 신성한 사랑과 자비가 아니고서는 자기를 도울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사실, 그는 자기가 과거에 주님께 빚진 것 모두를 갚을 수 있으리라는 것은 기대하고 있지 않다. 그러나 그는 자기에게 기회만 있게 되면 모든 것을 다 제치고라도 빚을 갚겠다는 각오 뿐이다. 즉, 살아야 하는 법칙을 살아 내려고 노력하겠다는 말이다. 그는 주님의 자비를 기억하고 타인을 향해서도 그 자비를 느끼고 생각하면서 행동하겠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그는 사랑과 자비로부터 행동하지, 사랑이 분리된 완고한 진리만으로는 움직이지 않겠다는 말일 것이다. 더욱이 그는 처음에 주님이 그에게 요구했던 것과 같이 하기보다, 자기에게 빚진 타인을 다룰 때 덜 엄격하게 계산하겠다는 의지도 담겨 있는 것이다.

주님의 응답

그리고 주님은 인간의 처지를 인식하시고 그를 돕는다. 인간이 주님을 보되 그분은 자기 종들과 셈을 밝히시는 신성한 진리로서의 왕이심을 보게 될 때, 자기는 주님께 빚진 자임을 보고 인정하는 데로 인도되어지고, 그 다음, 자기 채무를 최선을 다해 갚겠다고 결심할 때, 그리고 자기의 부채가 얼마인지 인정하게 될 때, 주님의 계명을 지키겠노라는 결단이 내려질 때, 그에게는 주님의 속성 중 새로운 측면인 그분의 사랑과 자비를 밝히 알게 된다. 즉 “왕은 그를 가엾게 여겨 빚을 탕감해 주고 놓아 보냈다.”
인간이 자기 처지를 인식하고, 자기에게 필요한 것이 있음을 알아차리면 겸허가 생산되면서 성격에 변화를 가져온다. 이 변화야말로 인간의 마음으로 하여금 주님의 진정한 속성을 더 명료하게 지각하도록 열리게 해준다. 그 이유가 주님께서는 언제나 “인간을 가엾게 여기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본문의 글자는 표현적임에도 불구하고 명확한 교리에 있는 영적 진리들을 말해 주지는 않고, 다만 인간의 자연적 마음에 적응되는 바깥쪽에 속한 표현적 그림만을 제공해 주고 있다.

빚을 갚음

자기가 빚진 것을 갚기 위해 인간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이란, 자기 속의 이기적인 사랑이 자기를 지배 못하게 하는 것, 자신을 부정하는 것, 십자가를 지는 것, 그리고 계명을 지킴으로 주님을 따라가는 것, 그리고 그의 모든 노력을 떠받치기 위해 주님을 찾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인간은 자신의 심정 속에서 스스로 무한히 자비로우신 신성한 사랑과 결합을 이룬다. 그러면 그에게는 영적 자유가 주어진다. 즉 주님은 악에 노예가 되어 타락된 상태에서 그를 해방되게 해주신다는 말이다. 그리고 주님은 그에게 채무를 탕감해 준다. 그 이유는 그가 주님을 인정하여 그의 생명을 주님께 기꺼이 내준다고 결심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수술은 인간의 영인 내향적 마음에서도 계속 되어진다. 그러나 반성한 사람이라 해도, 그는 용서라는 원리로 자신의 기반을 확고히 만든 것은 아니다. 그 이유는 그가 그 원리를 자신의 행동에서 수행한 것도 아니고, 더욱이 그 행동 결과에서 그 원리를 확증한 상태가 아니기 때문이다. 만일 그가 자신의 심정 속에서 하느님의 사랑이 좌지우지하시도록 마음 문을 열었다고 한다면, 그는 타인과의 관계에서도 하느님의 사랑이 그를 움직이도록 허용하고 그의 행동도 규율되도록 해야 할 것이다. 주님이 그에게 참을성 있게, 그리고 자비로 대하셨듯이 그도 타인에게 그렇게 대해야 할 것이라는 말이다. 그가 이렇게 행동할 때, 천국은 그에게 흘러들고 그를 통해 타인에게도 흘러든다.
그러나 만일 그가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그는 자아 사랑으로부터 행동하는 것이고, 따라서 신성한 자비는 그에게 복을 내릴 수 없다. 그 이유는 그가 행동한 모든 것이 자신만을 위해 노력했기 때문이다. 신성한 자비를 이기적으로, 그리고 자신만을 위해 사용하려 한 순간, 그의 심정으로 유입되던 신성한 자비는 멈추고 만다. 그 이유는 그가 주님에게서 받은 것의 성질을 변화시켰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신성한 자비가 축복을 내릴 수 있는 때란 당사자를 통해 타인에게 흘러갈 때뿐이다. 그 이유는 신성한 자비의 특유한 성질은 선을 타인에게 주려는 사랑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가 타인과의 관계에서 신성한 자비를 사용하는 것을 이기적으로 거절할 때, 그는 그 자비의 특유한 성질을 스스로 파괴하는 것이다.

감옥

이리하여 인간이 신성한 자비의 특유한 영으로 자신을 채우기를 사양하고, 자신이 타인과의 관계에서 자비롭게 되기를 거절할 경우, 그는 자신 속에로 신성한 자비의 유입을 멈추게 한다. 그리고 이 자비의 축복이 없는 채 내동댕이쳐지어 감옥으로 떠밀려지고 만다. 다시 말해 자신을 이기심이 제작하는 지옥에로 되돌아가 자리잡게 한다는 말이다. 이러면, “그 종은 나가서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을 빚진 동료를 만난다.”
이 종이 왕의 면전에서 “나갔다”는 것을 영적으로 보면, 그가 그의 영 안에 있는 내면의 원리와 교통하는 관계에서 나갔다는 것, 그의 자연적 마음과 삶인 외적인 것들에로 나갔다는 것을 말한다. 그가 내면의 상태 안에 있었을 경우, 그는 신성한 자비를 볼 수 있었고, 용서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지금 그는 “밖으로” 나갔다. 즉 그는 지금 외적인 마음과 그에 의거한 삶 속에서 생각하고 행동하기 시작했다는 말이다. 인간이 영적 원리들을 볼 때만이 선한 해결책을 만들 수 있다. 그러나 바깥 삶, 즉 일상 업무인 밖으로 나가서도 선한 해결책을 계속 유지할 수 있는 자는 오로지 거듭난 인간뿐이다.

동료 – 종

영의 “동료”란 자연적인 인간 또는 자연적인 마음이다. 영은 주님을 섬기고, 또한 주님의 이름으로 자연적 인간은 영을 섬긴다. 이러므로 영적 마음과 자연적 마음은 동료라는 종들로 주님을 섬긴다. 자연적인 마음은 영과 주님에 빚을 지고 있다. 그 부채액이 백 데나리온이고 그 액수가 그 마음이 할 수 있는 모두이다. 이 부채는 일만 달란트나 빚진 영의 부채에 비해 아주 적은 액수이다. 즉 자연적인 마음은 영이 할 수 있는 것에 비해 아주 조금밖에 할 수 없고, 일하는 수준 역시 매우 낮은 평면일 뿐이다. 자연적 삶 속에 있는 자비들이란 비록 그것 역시 빚을 진 관계에 있다 해도 그 액수는 양과 질의 양 측면에서 영적 삶 속의 자비에 비하면 극히 적은 것이라는 말이다.
그래서 이 두 종의 부채 액수는 우리 삶의 두 부분의 가치는 굉장한 차이가 있음을 보여 주도록 의도되어 있는 것이다. 게다가 우리가 타인을 용서할 수 있는 것과 주님이 우리를 용서하심은 엄청난 차이가 있다는 것까지 보여주고 있다.

종의 요구

그러나 불성실한 자연적 인간은 위의 사실을 고맙게 여기지 않는다. 그는 내면의 진리인 왕의 면전에서 밖으로 나가, 자기에게 빚진 동료 종을 만나자 달려들어 멱살을 잡으며 “내 빚을 갚아라”라고 호통을 쳤다. 바깥쪽 마음에서 생각하는 사람은 자기의 자연적 마음과 삶은 자기가 바래는 쾌락만을 위해 일해야 한다고 주장한다는 말이다. 이 자연적 삶 역시 주님께 드려야 한다는 것을 그는 망각하고 있는 것이다.
목은 내면의 것 또는 영을 표현하는 머리와 외면의 것 또는 자연적 마음을 표현하는 몸을 연결하고 있다. 뇌로부터 오는 생명이 목을 통하여 몸 속으로 흐른다. 이렇게 흐르는 생명을 멈추게 하거나 질식하게 만드는 것은 몸을 죽게 만든다.
이와 같은 작용을 마음속에서 보면, 영적인 마음이 자연적인 마음 안으로 흐르는 것을 멈추게 하거나 질식하게 하는 모습이 된다. 그래서 자기의 자연적 마음을 영적으로 질식하게 하는 사람은 영으로 흐르는 주님의 생명을 멈추게 한다. “내 빚을 갚아라”라는 요구는 자아 사랑의 기쁨 속에 몰입하겠다는 요구이며, 동시에 인간 속의 악한 식욕을 돋구기 위해 자연적 마음으로 음식물을 운반하겠다는 요구인 것이다.

동료 종의 응답

“그 동료는 땅에 엎드려 ‘꼭 갚을 터이니 조금만 참아 주게’ 하고 애원하였다.” 자연적인 마음은 영에 대한 자기의 의무를 인정한다. 그 의무는 영의 명령에 의해 계명으로 사는 것임을 알고 있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우리의 자연적 마음이 감각적 삶을 받들게 만들고, 따라서 주님에게서 분리되고, 그분의 명령에 반대되게 놓는다면, 우리는 자연적 마음을 지옥인 악의 속박, 즉 감옥에 던져 넣고야 만다. 본문에서, 종이 자기 동료 종에게 자비를 베풀기를 거절했을 때 결과된 모습이다.

다른 동료 종들

“다른 종들이 이 광경을 보고 매우 분개하여 왕에게 가서 이 일을 낱낱이 일러 바쳤다.” 곧바른 동료 종이란 자연적인 기억, 또는 양심 안에 있는 진리들이다. 이 진리들은 말씀으로부터 받았던 진리들이다. 이 진리들은 매우 서운해하고, 양심의 가책이 있게 하며, 인간의 삶과 주님의 계명 사이의 차이점을 보여준다. 이 진리들이 우리에 대해 주님께 일러바친다. 그러면 왕은 그 종을 무자비한 종이라 부르면서 견책하는 것이다. 즉 주님은 양심을 수단으로 해서 인간에게 그의 현 상태가 악의 하나요, 은택을 느낄 줄 모르는 짓임을 보여주시는 것이다.

형리 (tormentor)

“왕은 몹시 노하여 그 빛을 다 갚을 때까지 그를 형리에게 넘겼다.” 주님에게서 얼굴을 비끼어 삶 속에 있는 주님의 자비를 보는 것을 중단한 사람은 자기가 받는 고난이 주님께서 자기를 벌하시려고 창출해 냈다고 상상한다. 따라서 이 사람이 다시 주님의 진정한 인격을 볼 수 있기 전, 그는 악에 기운 자신에 대항하는 시험의 전투가 수행되어야만 할 것이다.
이럼으로 우리가 내향적으로는 주님의 자비를 알고 있는 반면, 외향적인 경우, 즉 자기 동료에게는 조그마한 것을 가지고도 무자비한데 아직 기울어 있다면, 그는 자기 채무를 다 갚을 때까지 시험에 복종 당해 있게 된다. 즉 그가 영적 삶의 법칙에 순종하는 결실이 있을 때까지, 그가 자아 사랑을 포기할 때까지, 신성한 뜻을 수락할 때까지, 한마디로 거듭나는 영적 마음을 통해 보여주는 것들이 생산될 때까지 시험이라는 고통에 시달려야만 한다는 말이다.
더욱이 그는 스스로 자연적 마음과 삶을 질서대로 지키지 않으면 안된다. 이렇게 될 때, 주님은 그의 영적 마음을 질서 안에 간직해 주실 것이다. 그 이유는 자연적 삶이 기초이고, 그 기초 위에 주님은 영적 삶을 건설해 주시기 때문이다. 주님은 우리가 바깥 삶에서 실제로 쓰일 모든 영적 원리를 가지고 우리 속을 채워 주신다. “우리가 우리에게 빚진 자를 용서하듯이, 우리의 빚을 용서하소서. Forgive us our debts, as we forgive our debtors” (마태복음 6:12).
용서할 줄 아는 영이 발휘될 때면 언제든지, 우리는 타인을 단죄하기 보다 자신을 더 단죄하게 된다. 다시 말해, 우리가 타인 속의 악에 관해 불평하는 동안, 우리는 그보다 더한 악 속에 자신을 있게 한다. 우리는 자신의 악들을 볼 기회를 가지고 타인 속의 악을 볼 경우, 자신 속의 것을 볼 기회를 잃어 결국 자신의 악을 보지 못할 때가 많다.

자비

우리는 자비라는 단어가 지닌 의미에 실수가 있어서는 안된다. 자비란 타인의 악을 못본척 놔두는 것도 아니고, 그 악이 그들의 영적 생명을 다 불사를 때까지 점검해 주지도 않은 채 외적으로는 친절한 가운데 그 악을 내버려두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더욱 아니다. 순수한 자비는 영적이다. 이 자비는 인간을 그의 자연적인 지옥에서 훈련시킴으로 해서 천국을 위한 인간이 되게 한다.
자비는 우리의 행동 뿐 아니라, 타인을 향한 우리의 생각과 느낌에까지 관계된다. 자신이 비판되어지기를 바래는 정도 이상을 가지고 타인을 비판하려 든다면 우리는 무자비한 사람이 되고 만다. 그리고 우리가 타인을 향해 어떤 종류의 불친절한 느낌과 생각을 흠모하게 될 때 우리는 무자비해진다.
우리는 우리의 자연적 악들이라는 감옥을 나올 수 있기 전, 순수하고 이타적인 사랑으로부터 타인을 느껴보고 생각하고 행동해야 한다. 상대방의 인격이 어떠하든 자신의 사랑을 견지해 갈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타인 속에 있는 선 때문에 그들이 악에서 나오도록 인도하기를 사랑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 자신이 악 속에서 걷는 이상 우리는 누군가를 악에서 건져내 줄 수는 없다.
주님은 언제나 모든 사람을 용서하신다. 용서 안하는 느낌 자체가 아예 없으시다. 그러나 우리가 타인을 향해 주님과 비슷한 용서를 가지고 행동하지 않으면 우리는 그분이 베푸시는 용서라는 혜택을 누리지 못한다. “자비를 베푸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자비를 입을 것이다.”

악을 이동시킴

우리의 죄가 주님에 의해 용서되어 질 때, 그 죄는 씻어지는 게 아니라 그것이 우리 삶의 경계선 밖으로 옮기어 지는 것일 뿐이다. 즉 우리가 주님과 협동하는 동안 그 죄들은 보류되고, 주님의 권능에 의해 그것들이 억눌려 있는 상태일 뿐이라는 말이다. 따라서 만일 우리가 선을 행하기를 중단하거나 악에로 다시 몰입된다면, 우리는 자신의 악이 자신을 위해 만드는 감옥인 악의 권능 밑에 푹 빠지게 되고 만다.
천사들까지도 악에서 헤어나 있으려면 주님의 권능과 자비에 의존한다. 천사들은 이 사항을 알고 있어 그들은 주님이 자기들을 인도해 주기만을 바래고, 자기들을 악에서 떼어져 있도록 하려고 주님을 붙잡는다. 그러나 악마가 악마인 이유는, 그들은 자기들을 악에서 주님이 인도해 내시기를 허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천사들은 주님의 도움이 없는 경우 자기들이 비참해진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악마는 자기가 행복해지려면 자기들이 즐기는 것을 주님이 허용할 때 뿐이라 생각한다. 이러므로 천사들이 보는 것은 신성한 자비이지만, 악마는 그 자비가 잔인하다고 생각한다. “자비를 베풀어 네 스스로 자비를 보여라.”

용서 안하는 영

용서 안하는 영은 유대인에게 있어진 처방에 끝장을 내게 한 저명한 악 중의 하나였다. 따라서 타인을 용서하는 원리는 아주 중요하다. 이렇게 중요함으로 주님의 기도문에 등장하고 있고, 주기도문 바로 뒤 구절에서 주님에 의해 다시 반복되고 있기도 하다. 이리하여 용서하는 원리는 기독인의 기도하는 영에 실지로 축적되어 있도록 섭리되어져 있다.
그런데 왜 우리는 우리가 타인에게 잘 사용하지도 않은 자비를 위해 기도해야 할까? 우리가 자신을 위해 주님께 간구한 대로 타인에게 행하지 않는다면, 그는 타인을 단죄하는데 사용한 똑같은 진리로 자신을 단죄 받게 한다. 인간이 주님을 위해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그가 자기 주위 사람에게 선을 행하는 방법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너희가 네 형제 중 작은 이에게 행한 것이 곧 나에게 행한 것이다.”

하느님의 용서

이 비유는 하느님의 용서의 법칙을 예증해 주고 있다. 그리고 구 교리인, “대속”이나 “믿음만으로 의로워짐”이 거짓된 것임을 보여주고 있기도 하다. 이런 옛 사상에 의하면, 빚은 누군가에 의해 지불되어 졌음에 틀림없다. 그 이유는 정의가 그렇게 요구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비유에서, 이 빚은 지불된 것은 아니고 용서되어졌을 따름이다. 임의적인 정의는 만족되어지지 않았다. 또 다른 측면에서 보면, 그 죄는 임의적인 자비에 의해 닦아지지도 않았다. 오로지 하느님의 자비는 인간에게 역사하시되 각 사람의 상태에 따라 작동되는 바, 그 원칙은 “죄 있는 영혼은 정녕 죽게 되리니, 그 이유는 죄는 죽음이기 때문이다”에 있다.
비유에서, 비록 채무가 용서되긴 했지만, 그 뒤에 감옥에 들어가고 말았는데, 그 이유는 그가 자기 동료를 용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실, 이 종을 주님이 감옥에 넣은 것이 아니고, 그가 자신의 악들로 되돌아감으로서 해서 그의 죄가 그를 감옥에 넣은 것이다. 주님이 벌하시는 것 같이 보는 것은 우리 속의 자연적인 인간 평면 때문이다. 그 이유는 이 평면에서는 자기에게 떨어지는 벌이 자신의 악의 필수적인 결과임을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주님께서는 우리로 죄에 대해 보상(atonement)해야 한다고 요구하시지 않는다. 그분이 우리에게 묻는 것은, 죄에 빠지게 하는 기질을 포기하여, 죄로 실제화 하려는 것을 포기하라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내심으로 악을 미워하며 그 미워함이 마음 밖에서 성장하면서 동시에 선을 사랑하여 행할 때, 주님의 사랑은 우리 삶 안에 들어 올 수 있다. 교도소의 문을 열어 둔다면, 그것이 범죄자들로 더 나은 사람을 만들지 못할 것이다. 그것이 진실로 더 나은 삶을 전과자들에게 허용하지도 않을 것이다. 아마 그들을 더 심한 악에 빠지도록 허용하여 더 비참한 악의 결과만을 창출되게 할 것이다.
하느님의 용서는 신성한 사랑 같이 꾸준하고 영원하다. 그러나 용서가 악을 행하려는 인간의 기질을 거둬가지는 않는다. 그러나 인간이 자기 속의 악한 자연적 조건을 보고 인정하면서 그것과의 싸움을 위해 주님께 도움을 구할 때, 주님의 권능은 인간 안으로 들어 올 수 있어 우리를 떠 받쳐 주게 된다. 그 이유는 우리가 의지와 이해성, 삶을 신성한 영향력 밑에 있도록 열었기 때문이다. 이럴 때만이 주님은 우리를 악으로부터 보류시켜 주실 수 있어서, “나의 죄악에서 자신을 지켰다”고 고백하는 것을 도울 수 있으시다.
인간은 주님의 권능이 자기를 도울 수 있게 할 수 있으나, 오로지 그가 그 권능에 기꺼이 협동할 때뿐이다.
신성한 자비가 죄인을 향해 베풀어 질 때, 주님의 처방에 어떤 변화가 있어 베풀어지는게 아니라 죄인 자신의 기질에 변화가 있어 자비를 입는 것이다. 죄인이 사랑이신 주님을 찾을 때, 신성한 자비는 죄인을 위해 일을 하실 수 있지만, 이는 주님이 일하시도록 허용하기 전이 아닌 주님이 하실 수 있도록 계속 노력해 왔을 때에야 가능하다.
하느님의 용서는 과거에 속한 것에 존재하지도 않고, 단지 미래에만 국한되는 것도 아닌, 현재에 존재한다. 우리가 악과 죄로부터 보류되고 있다면, 그것은 우리가 지금 자신의 약함을 인정하고 주님의 도움을 받으면서 그분의 계명을 지키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주님에게서 순간 순간마다 와지는 생명에 의해 매 순간 매 순간 지탱되어지는 것이다. 영적 삶의 법칙은 선용(use)에 존재한다. 우리가 사용한 것들은 우리 것이 된다. 주님의 계명을 게으르게 사용하면 우리는 주님의 축복을 잃는다.

13
포도원의 일꾼들
– 거듭남의 질서 –

성서 본문 : 마태복음 20장 1-16절

1. “하늘 나라는 이렇게 비유할 수 있다. 어떤 포도원 주인이 포도원에서 일할 일꾼을 얻으려고 이른 아침에 나갔다. 2. 그는 일꾼들과 하루 품삯을 돈 한 데나리온으로 정하고 그들을 포도원으로 보냈다. 4. 아홉 시쯤에 다시 나가서 장터에 할일 없이 서 있는 사람들을 보고 4. ‘당신들도 내 포도원에 가서 일을 하시오. 그러면 일한 만큼 품삯을 주겠소.’ 5. 하고 말하니 그들도 일하러 갔다. 주인은 열 두 시와 오후 세 시쯤에도 나가서 그와 같이 하였다. 오후 다섯 시쯤에 다시 나가 보니 할일없이 서 있는 사람들이 또 있어서 ‘왜 당신들은 하루 종일 이렇게 빈둥거리며 서 있기만 하오?’ 7. 그들은 ‘아무도 우리에게 일을 시키지 않아서 이러고 있읍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래서 주인은 ‘당신들도 내 포도원으로 가서 일하시오’ 하고 말하였다. 8. 날이 저물자 포도원 주인은 자기 관리인에게 ‘일꾼들을 불러 맨 나중에 온 사람들부터 시작하여 맨 먼저 온 사람에게까지 차례로 품삯을 치르시오’ 하고 일렀다. 9. 오후 다섯 시쯤부터 일한 일꾼들이 와서 한 데나리온씩을 받았다. 10. 그런데 맨 처음부터 일한 사람들은 품삯을 더 많이 받으려니 했지만 그들도 한 데나리온씩밖에 받지 못하였다. 11. 그들은 돈을 받아 들고 주인에게 투덜거리며 12. ‘막판에 와서 한 시간밖에 일하지 않은 저 사람들을 온종일 뙤약볕 밑에서 수고한 우리들과 똑같이 대우하십니까?’ 하고 따졌다. 13. 그러자 주인은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을 보고 ‘내가 당신에게 잘못한 것이 무엇이오? 당신은 나와 품삯을 한 데나리온으로 정하지 않았소? 14. 당신의 품삯이나 가지고 가시오. 나는 이 마지막 사람에게도 당신에게 준 만큼의 삯을 주기로 한 것이오. 15. 내 것을 내 마음대로 처리하는 것이 잘못이란 말이오? 내 후한 처사가 비위에 거슬린단 말이오?’ 하고 말하였다. 16. 이와 같이 꼴찌가 첫째가 되고 첫째가 꼴찌가 될 것이다.”

거듭남은 점진적이다

거듭남은 점진적인 성장이다. 따라서 최근의 거듭나는 삶이 최상의 것에 속한다. 시작 때 있게 되는 개혁(reformation)은 비교적으로 볼 때 좀더 조잡하고 피상적이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를 인도하시되, 좀 더 안쪽으로, 위쪽으로, 앞쪽으로 인도하시고, 그리고 한 단계씩, 조금씩 더 가까이 천국 안으로 들어오게 해주신다. 하늘 나라란 마음과 삶에 있는 조건적인 나라이다. “하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다.”

옛 사상

오늘 본문을 살피는 가운데 과거 이 비유의 목을 오랫동안 조이고 있었던 잘못의 구름이 깨끗이 걷혀지리라 생각한다. 오늘 비유는 임종시 있게 되는 회개에 대한 논쟁을 위해 오랫동안 사용되어 왔었다. 그러나 이 비유는 임종할 때의 회개라는 주제와는 아무 관련이 없다. 구신학이 오랫동안 가르쳐 온 바는, “믿음만”에 의해 된다는 것, 이와 같이 믿음만 있으면 삶의 마지막 순간인 임종시에도 의롭다 함은 달성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위의 신학을 오늘 비유가 뒷받침하게 해주려면, 비유를 비비꼬지 않으면 성사되지 않는다.
우선 생각해 볼 것은 복음이 부르는 소리에 아랑곳하지 않고 악 가운데 살아 온 사람에게 임종의 회개가 있었을 경우이다. 이 사람에 해당되는 비유 속의 일꾼이라면 일이 시작되어 열 한 시간(개역 성경 – 십일시, 공동 번역 성경 – 오후 다섯 시)이 지난 뒤 일하게 된 일꾼이지만, 사실 이 일꾼은 주님께 반역적이었다거나, 아주 보기 흉한 게으름뱅이로서 비유에 등장되고 있지 않다. 그들도 역시 어떤 이가 자기들에게 일을 하게 해줄까 하고 알려진 장소인 장터에서 일을 기다리고 있는 중이었다. 즉 “왜 당신들은 하루종일 이렇게 빈둥거리며 서 있기만 하오?” 그들 대답은, “아무도 우리에게 일을 시키지 않아서 이러고 있읍니다” 이었다. 고용되지 않았던 것이 그들의 과오가 될 수 있을까? 사실 그들도 호의를 가지고 일을 찾던 사람이었으므로 임종시 회개하는 것과 상관이 없다.
비유적으로 이 일꾼들은 주님을 기다리고 있었으나 그분을 찾지 못했던 이들을 표현했다. 그들은 유대인들에게 오랫동안 이방인이라고 불린 자들인데, 이들은 호의적이긴 했으나, 그들은 주님에 관해 너무 무지했던 이들이었다.

열 한 시간

임종시의 회개에 관한 옛 사상은 열 두 시간을 놓고 생각하면 열 한 시간과 매우 혼동을 일으키게 한다. 사실 열 한 시간 지난 뒤에 온 마지막 일꾼이라고 해서 일을 하지 않고 빈둥거렸던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들도 열심히 일했다. 단지 한 시간만 일할 수밖에 없었을 따름이다. 죽어 가는 사람은 일할 수 있는 능력이 막판에 와 있는 상태이므로 그는 열 두 시간이 거의 다 차서 일에 착수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아마 죽어 가는 이는 자기가 할 수 있는게 아무 것도 없다는데 놀라면서 종교를 추구했을는지 모른다. 아마 자기는 세상적 쾌락을 포기해야만 한다고 하여 포기가 강행되었을는지 모른다.
그러나 본문의 마지막 일꾼들은 자기들이 일을 선택할 수 있는 때에 일을 하러 갔다. 사실 그들은 자기들이 뭔가 할 기회를 가졌던 모든 일을 했다. 거듭남에서도 이와 같이, 우리는 개혁과 회개의 일을 해야만 한다. 회개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회개와 더불어 삶의 수정이 꼭 필요한 것이다.
만일 비유 속에서 열 한 시간 지난 뒤에 온 일꾼들이 마지막 순간에 회개한 사람들을 표현한다면, 하루 종일 포도원에서 일하고 있는 이들은 인생 기간 중 오랫동안 기독인이었던 사람들을 표현해 주어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이들은 주님이 일찍 기독교인이 된 자들을 늦게 기독교인이 된 자들과 똑같은 대우를 한다고 불평한 이들, 주님에 반항하는 가장 비기독교적인 불평자로 해석되고 만다. 이렇게 생각된다면, 이 해석의 결과는 종교에 오래 헌신해서 가지게 되는 좋은 결과를 가지고 논쟁해서는 안된다는 교훈만을 얻어야 할 것이다. 또한 주님의 선하심에 불평을 해대는 것이 우리 속의 이기적인 경향성이요, 이 경향성은 삶이 만숙되기 훨씬 이전에 미리 미리 훈련을 받아야 하는 것들임을 눈치채야 한다는 뜻도 담겨 있는 것이 된다.
그러나 이 비유의 진정한 의미를 찾는다면, 본문은 임종의 회개하고는 아무 관련이 없다. 더욱이 성경에서는 임종의 회개에 관한 어떤 교리도 가르치고 있지 않다. “죄 있는 영혼은 정녕 죽으리라.” 그 이유가 죄는 죽음이기 때문이다. 영적인 죽음은 죄에 대한 처벌이 아니라 죄의 직접적인 결과일 뿐이다. 그리고 죽음은 죄 속에 이미 존재한다.

비유의 역사적 적용

역사적으로, 비유는 유대인과 이방인에 관해 언급하고 있다. 유대인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가졌으나, 피상적인 지식이었을 뿐이었다. 이방인들은 말씀에 관해 무식했었지만, 호의적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주님과 그분의 말씀을 받아들였는데 비해, 유대인들은 주님을 거절했고 말씀의 경우도 말씀 속의 영은 거절하면서, 말씀의 글자만에 치중해 있었다.
그러나 모든 성경은 개개인에게 대한 교훈과 그에 따라 사용하도록 주어져 있는 것이다. 이를 최고의 측면에서 말하면, 성경은 개인이나 국가에 대한 언급이라기보다 원리들을 말해 주고 있다. 성경은 모든 인간의 마음이 알아야 될 원리, 그리하여 사랑되어지고 실제 사용되어야 할 원리를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사실, 성경책이 각 장으로 나뉠 때 있어진 임의적인 분할로 문맥상 이 비유가 연결을 이루는데 독자들로 혼동을 주고 있다. 자기의 재물을 포기 못하는 부자 청년과 베드로의 질문인, “보시다시피 저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랐읍니다. 그러니 저희는 무엇을 받게 되겠읍니까?” 라고 기록된 19장 후반과 더불어 오늘 비유는 읽어야 할 줄로 본다. 그 이유는 오늘 비유에서 주님은 베드로가 자기의 공적을 내세운 것에 대해서도 견책하고 있으시기 때문이다.

집주인 (housekeeper)

“집주인” 또는 “포도원 주인” 이란 주님 또는 우리 마음의 집 안쪽을 관리하시는 신성한 인간이시다. 인간의 안쪽 “집, house, home” 이란 의지(will)이다. 그 이유는 인간이 실지로 살고 거주하는 것은 자기 의지에서 있어지기 때문이다. 의지는 인간 삶의 중심 되는 곳이다. 이 의지가 자유로이 표현되는 정도만큼에서 그의 생각과 행동 역시 진실로 그 사람 것이 된다.
이 비유에서 우리가 발견하는 것 중, “집,” “포도원,” 그리고 “장터”가 있는데 이것은 각기 의지, 이해성, 기억을 표현하고 있다. 주님은 의지 속에서 인간을 내향적으로 인도하시며, 기억 속에 축적된 지식을 수단으로 이해성 속에서 가르치신다.
넓은 측면에서 생각할 때 포도원은 교회이고, 이 교회에 진리가 이식되고 그 안에서 인간에게 가르쳐지면서, 진리에 대한 그의 합리적인 이해를 통해 전환을 이루게 된다. 그러나 이를 개개인의 측면에서 보면, 교회는 신성한 진리의 지식을 수단으로 그의 이해성 또는 지성에 심기어진다.

일꾼의 고용

집주인은 포도원에서 일할 일꾼을 얻으려고 나갔다. 거듭남은 주님으로부터, 또는 인간의 내면으로부터 중간 매체물을 통해 외부로 평화롭게 흐르지만은 않는다. 즉 천국이 인간 의지 안으로 단순히 흘러들고, 그의 이해성을 통해 삶에까지 도달하는 것이 간단하지 않다는 말이다. 이것은 인간이 거듭남에 따라 생명을 받는 질서이지 인간이 의식적으로 거듭 나아지는 질서는 아니다.
거듭남에서 주님의 영향력은 인간의 내면인 그의 의지 안으로 흐르나, 먼저 그의 외면에서, 즉 행동에서 거듭남의 결과가 보여진다. 그런 다음 예외가 있을 수 없는 규칙이 하느님의 법임을 느끼면서 그 법에 순종하게 될 때, 인간은 하느님의 법의 근거를 이해하게 된다.
이렇게 하여 하느님의 영향력은 인간의 외면에서 중간 매체인 이해성을 통과하여 그의 의지 안으로 되돌아온다. 그 다음 의지 안에 있는 선을 사랑함이 행동에 있는 선의 실제와 연합을 이룬다. 이 연합은 진리를 수단으로 하는데, 그 진리는 처음에 기억 안에 놓여졌다가, 후에 이해성 안으로 들어 올려진 다음 의지 안으로 들어가게 되는 과정을 거친다. 이러므로 이해성은 마음속의 포도원이고, 거기서 인간은 자기 삶에 응용될 진리인 열매를 생산하고자 노동을 하는 것이다.

시작 (beginning)

아주 어린 아이들에게 있어, 그들이 의식하는 삶 안의 첫 자질은 애정을 가진 의지이다. 그 다음, 기억이 열려 사실(fact)들이 그 안에 저장되어진다. 의지와 기억은 이해성이 어떤 실재적 형체를 나타내기 오래 전부터 적극적으로 움직인다. 그래서 어린이들은 자기들의 의지를 한껏 발휘하려 들고, 알기를 사랑하면서, 기억 속에 지식을 쌓아 간다. 이후, 이해성이 이 지식을 작동해 가기 시작한다.
합리적 자질이 열리어 지는 때, 즉 젊은이들(youth)은 자기 기억 속에 저장해 둔 모든 지식을 동원해 자기 스스로 생각하는 바, 합리적 자질들이 그의 일꾼이 되어 그의 이해성을 건설하는 곳에서 일하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거듭나는 가운데 있는 우리의 성장 속에서 새로운 출생은 의지 속에서 시작된다. 새 출생 속의 의지가 기억 속에 든 지식을 작동시키는 것이다. 그리고 진리의 이해를 통하여 인간은 진리를 사랑함과 하나를 이루도록 인도되고, 진리의 이해는 진리에 순종함 속에서 이루어진다.

일꾼들

이렇게 해서 기억 속에 담기게 된 것들, 즉 지식들은 의지로 작동되는 것, 즉 이해성이라는 포도원에서 열심히 일하는 일꾼이 되는 것이다. 집주인이 집에서 나와 그분의 포도원에서 일을 할 일꾼을 고용했다. 이 집이란 각 사람의 의지이다. 또한 그 집주인은 최고의 측면에서 보면 주님이시다. 그분이 인간 속에 내재하는 생명이신 바, 인간의 가장 깊은 생명의 소유자(Holder)이시다.
그런고로 집주인은 바깥으로 나가시어 그분의 포도원에서 일할 일꾼을 고용하시는데, 고용할 때란 신성한 영향력이 인간의 의지를 통하여 기억 안으로 흘러들 때이다. 그러면 기억 속에 든 진리에 관한 지식이 일어나 이해성에서 일하기 위해 파견되고, 그것들이 인간으로 하여금 진리의 원리를 합리적으로 터득하게 해준다.
이해성이 인간의 포도원이다. 이 포도원이 인간의 포도원이라 해도, 지극히 높은 견지에서 볼 때, 이것은 주님의 포도원이다. 그 이유는 주님만이 인간의 진정한 생명이시고, 거듭남의 모든 성장을 시작하게 해주시고 운영해 주시는 유일한 분이시기 때문이다.
진리에 관한 지식이란 기억 안에 있는 사실(fact)들과 사상들이다. 의지가 의지의 방향에 따라 사랑과 생각, 그리고 행동이라는 삶 속에서 이 지식들을 써야겠다고 할 때, 이런 지식들은 기억 속에서 기다리면서 포도원에로 불릴 준비가 완료되어 있기만 한 것이다. 그 이유는 이 지식들은 의지가 부르기 전에는 어떤 것도 그들 스스로 행할 수 없기 때문이다.

차이점들

그러나 기억 안에 있는 지식들간에는 서로간에 차이점이 많다. 그 이유는 이것들이 인간 마음의 발달에서 각기 다른 때와 단계에서 기억 속에 이식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것들이 기억 속에서 불려 이해성 안에서 실제의 일에 참여할 경우, 그 시기는 기억 속에 이식되던 거듭남의 단계와는 다른 진보 단계에서 참여하게 되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이 비유의 열쇠를 가지게 된다. 본문의 일꾼들이란 기억 속에 든 지식들인데, 이 지식들은 거듭남에 직접 참여하고 있지는 않다. 그러나 어떤 질서에 따라서 합리적 사고인 정신적인 포도원에로 점진적으로 불리고 있다.

고용

각기 다른 일꾼을 고용할 때마다, 인간은 보다 더 충만해지는 삶을 달성한다. 지식은 거듭남 속에서 일하기 위해 기억으로부터 들어 올려져 이해성에 고용되어, 결국 애정과 하나를 이루는데, 이것이 고용에 따른 보수이다. “일꾼은 제 나름대로 고용될 만한 가치가 있다.” 선함과 진리에 대한 지불은 그것들 자체 내에 존재한다. 우리는 자기가 지닌 선에 변제를 해야 하는게 아니라 은행에 돈을 입금시키듯 선을 비축하는 것이다. “미덕에 대한 보상은 미덕 그 자체이다.”
집주인은 품삯으로서 하루 한 데나리온을 주기로 일꾼들과 합의를 보았다. 주님은 그분의 섭리로 거듭나는 시초에 있는 사람에게 거듭나는 삶에 대한 보상의 어떤 것을 볼 수 있게 허용하신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거듭남의 초기 단계에서 인간은 공적이나 보수를 바래는 생각을 떨구어 낼 수 없기 때문이다.

데나리온 (penny, denarius)

은 한 데나리온은 로마 군인의 하루 일삯이었는데, 그 당시 일꾼의 하루 품삯에 해당되기도 했다. 은(silver)이란 영적 진리를 표현해 준다. 그래서 거듭 나아가는 일을 위해 진리에 관한 지식을 고용하는데 따른 보상은 그 진리를 보다 더 명료하고 높게 지각하게 되는 것이다. 이 보수를 받는 것은 지식을 사용함으로부터 초래되고, 받은 보수로 있어지는 기쁨(delight)은 거듭나는 성장 가운데서 마음에 의해 느껴지게 된다. 그렇게 되는 이유는, 영적 마음은 그 영향력을 아래쪽으로 내려보내 자연적 마음까지 이르러 자연적 마음을 보다 높은 삶의 기운으로 채워 주기 때문이다.
하나의 상태 또는 진보 단계가 마무리될 쯤에서, 의지는 다시 밖으로 나간다. 또는 주님께서 인간의 의지로부터 나가셔서 전보다 더 규모의 큰 활동을 하기 위해 기억에 있는 지식을 일으키신다. 그러면 이 지식들은 이해성에로 들려져 다시 합리적인 진리들이 되어 간다.
이런 다음 더 따뜻한 상태가 마음을 날마다 들어올리는 것이다. 이러면 거듭나는 삶 속에 있는 기쁨으로 매일 더 강건해지고 더 확실한 삶의 방향과 인도를 받게 된다.
거듭나는 중에 제일 먼저 우리 자신을 만들어 주는 원리는 가장 외적이고 가장 일반적인 것들이다. 이것들은 최고로 덜 순수하고 덜 완전한 것에 상당한다. 그래서 그 원리들 속의 많은 부분에 자아가 남아 있는 상태이다. 따라서 처음에 있는 거듭남의 삶은 사실 자아로 인해 거의 전부가 얼룩져 있기도 한다. 다시 말해 이 때의 인간은 자기가 칭찬 받는 것에 상당히 즐거움을 느끼고, 때로 주위의 비평 때문에 실망이라는 고통을 당하기도 한다.

노동 시간 (the hours)

본문에서 각각의 일꾼들은 각각의 시간에 고용되었는데, 그 시간대란 거듭나는데 있어지는 각각의 단계를 표현하고, 일꾼들이란 각기 다른 지식들이 이해성 속에서 실지 작업을 위해 기억에서 뽑혀 오는 질서를 표현하고 있다. 그 당시 유대인의 노동 시간은 해 뜨는 시간에서 해 지는 시간까지였는데 본문을 살펴보면 대략 아침 6시부터 오후 6시까지로 12시간이다.. 따라서 노동 시간은 해뜨는 시각이고 12시간째의 노동시간은 해지는 시각이다.
3, 6, 9, 12시간들이란 3이 배가된 숫자들이다. 그렇게 배가된 이유는 비유에서 취급되는 주제가 진리에 관해서이기 때문이다. 3이란 진리가 충만함, 진리 측면의 진보에서 어떤 시기가 충만해짐을 표현하는 숫자이다.

아껴두시는 것들 (remains)

이 비유를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거듭남의 질서를 다시 거론해 두어야 한다. 우리의 유아 시절과 어린 시절 동안, 주님은 감수성이 강한 자연적인 마음속에 부모나 유모 등에 대한 사랑의 어떤 상태나 선한 애정에 관련된 어떤 상태들을 이식해 두신다. 어린이들의 마음에는 이런 것들이 저장되어 있는 것이다. 새교회에서의 용어로 이런 상태들은 마음 안에 주님이 “아껴 두신 것들, remains, 그루터기”이라 부르는데, 이것들은 장래 쓰임을 받기 위해 마음속에 계속 남아 있는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 속에 조그만 것(remant, remains, 그루터기)을 남겨 두시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소돔과 고모라 같이 되었을 것이다.”
이런 상태들, 혹은 “아껴 두신 것들”은 어린이의 무의식 속에 저장되어 있다. 그러나 인간이 성숙된 연령에 이르면, 이 때부터 인간은 거듭 나아가야만 한다. 이 때 각 영적 원리는 주님으로부터 내향적으로 그 인간에게 흘러든다. 흘러들어 왔다 해서 그 원리들이 그 사람이 의식하는 생명의 일부가 되어 그 사람 것이 될 수는 없다. 오로지 그 사람이 의식 가능한 바깥 삶의 수준에 상응되는 정도에서만 그의 것이 되어진다. 이 바깥 삶은 영적 원리의 기초인바, 각 원리들은 이 토대 위에 거주하고 안식한다.

거듭남의 질서

모든 인간의 거듭나는 실제는 위와 같이 그가 의식하는 삶에서만 이뤄지는 바, 각자의 의식 세계에 있는 마지막이고 가장 외면인 자연적 수준에서 시작된다. 따라서 거듭남은 이미 우리가 알고 있는 법에 단순히 순종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그 다음 우리는 위쪽으로, 그리고 안쪽을 향한 거듭남의 여행이 있어진다. 거듭남의 마지막 단계에 있는 것이 최상의 것인데, 그 이유는 그것들이야말로 가장 내면에 속한 것들이기 때문이다.
먼저 쾌락을 사랑하는 우리의 기질은 발달해 올라오는 의무를 사랑함에 종속되어진다. 그 다음 세상에 대한 자연적 사랑은 영적 사랑인 이웃에 대한 사랑에 의해 조절을 받게 되면서, 자아 사랑에 집착하는 자연적인 사랑은 주님을 사랑하는 천적인 사랑에 굴복한다. 이런 식으로 해서 우리는 점진적으로 순종과 믿음 그리고 사랑이라는 원리를 연속적으로 배양해 간다.
그러나 우리가 주목해 둘 것은, 우리가 의식하는 삶에서 위의 원리가 발달하는 순서는 하느님의 섭리로 우리 마음에 이식된 지식들은 무의식 속에서 발달하는 순서와는 정반대이라는 것이다. 비록 우리가 부모에 대한 유아기의 사랑을 통해, 천적 수준의 “아껴두실 것들”이 제일 먼저 우리 마음에 이식되어져 있기는 한데, 그 이유는 그 당시 우리는 덜 자의식이 있고, 유전적 악 역시 덜 발달되어 있어 아주 높은 천사들이 영적으로 우리(유아)와 연합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진실로, “천국은 유아들 안에 놓여 있는 것이다.” 유아 시절, 우리에게는 부모가 하느님 같다. 그리고 부모에 대한 유아의 사랑은 장차 하느님에 대한 우리의 사랑이 기거하게 되는 자연적인 기초인 것이다. 게다가 부모에 대한 유아의 순종은 차후 주님께 순종하게 하는 기초를 갖게 해준다. 따라서 초기의 순종하는 습관은 굉장히 중요한 셈이다.
이런 유아 시절까지의 단계 후에, 주님은 우리가 친구와 사귀는 관계를 통해 우리 속에 “아껴 두실” 이웃사랑에 관한 영적인 사항들을 이식해 주신다. 더 나아가 젊은 청년기의 단계에서, 주님은 우리가 알고자 하는 바램을 통해 자기가 아는 법에 순종함을 사랑하는데 대한 “아껴 두실” 자연적인 사항들을 이식해 주신다. 이것을 소위 우리는 자연적인 것 안의 영적인 것 (spiritual-natural remains)이라 부르는데, 한 마디로 자연적 수준에서 이해된 영적 원리들로 채워진 자연적 평면을 말한다.

발달

젊은 시절이 무르익을 때, 위에서 살핀 세 가지 “남음”들 중 맨 뒤에 거론한 남음이 맨 먼저 활성화되어진다. 이 남음도 천적인 수준에서 시작한다고 보아야겠지만, 실상 우리가 의식하는 거듭남이란 자연적 수준에서 시작된다. 그리고 이것은 안쪽으로 진행되는데, 거듭남을 측량해서 충분해질 때까지, 즉 지혜의 순진으로 어린 아이같이 될 때까지이다. “이와 같은 것이 하늘나라이다.”
주님은 우리가 의식해내지 못하는 마음속에 선하고 참된 상태들을 “아껴 두시어” 깊숙이 저장해 놓으셨다. 이런 고로 우리가 성숙되는 연령, 즉 젊은 성인에 도착되면, 그분은 아껴 두신 것들을 하나씩 꺼내 주시면서 이제까지 주님 혼자만 거닐 수밖에 없었던 길, 안쪽 마음에로 되돌아 올 수 있게 안쪽으로 위쪽으로 인도해 가신다. 유아기로부터 성인이 될 때까지, 주님은 우리 속에 장차 거듭나는 삶에 필요한 중요한 사항들을 부지런히 이식해 놓으시지만, 우리의 경우는 열심히 자신의 이기적이고 개인적인 삶만을 발달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가 계명을 지키면 자연적인 토대를 구축하게 되고 그 토대로부터, 그 토대 위에서 우리는 보다 높은 인간다움(manhood)을 건설한다.

첫째와 꼴찌

이러므로 우리 삶의 가장 이른 시절에 안쪽 마음에 이식되어 미발달된 채로 있던 싹인 최고의 원리들은 의식세계인 우리 삶에서 활동하여 우리 것이 되는데 이것은 마지막 단계에서 있어진다. 우리 마음에 뿌려진 것들 중 우리에게 꼴찌로 인식되는 지식들, 주님이 “아껴 두신 것들”이란 순진을 사랑하는 데로 되돌아가야 한다는 원리인데, 결국 이 꼴찌인 것 같은 순진을 사랑함은 우리 자신에게 첫째가 된다. 이렇게 해서 “첫째였던 것이 꼴찌가 되고, 꼴찌였던 것이 첫째가 된다.” 이러면 젊은 성인 시절의 애정에 첫째로 부각되어 움직인 것들인 삶의 바깥쪽 측면의 것들은 거듭나는 삶에서 그 나름대로의 적절한 위치에 꼴찌로서 차츰 주저 않고, 대신 우리의 젊은 성인 시절에는 거의 인식조차 하지 못했던 심오한 원리들은 성장이 마무리되는 가운데 지고한 것으로 첫째 자리를 차지한다.
각기 다른 시간에 포도원에 일하러 가는 각기 다른 일꾼들이란 거듭나는 각 단계마다에서 거듭나는 실제에 사용되는 각기 다른 종류의 지식을 표현한다.

열 한 시간

열 한 시간째에 일하도록 불린 이들이란 유아기 때 있는 사랑과 평화에 관해 “아껴두신 것들”, 우리 마음에 맨 먼저 뿌려진 순진의 것, 가장 좋은 지식들을 말한다. 이 “아껴두신 것”이 발달하게 되어 성숙한 지혜의 순진으로 진입하는 시기는 거듭나는 과정의 마지막 단계로서 본문에서는 마지막 시간에 있는 노동시간이 이에 해당된다.
이 “아껴두신 것”이 기억이라는 장터에 할일 없이 빈둥거리고 있었는데, 그런 이유는 그들이 일을 하고 싶지 않아서가 아니라, “아무도 그들에게 일을 시키지 않아서”이였다. 즉 순수한 “아껴두신 것”이 우리가 의식하는 실제 삶에서 아직까지 음미되고 사용되지 않았음을 말한다.
젊은이가 거듭나기 시작할 때, 그는 외적 상태에서 시작한다. 그는 외적 종류에 속하는 지식들이 자기 수준에 알맞는 고로 먼저 음미하면서 자연스럽게 사용한다. 이런 음미와 사용은 유아기 때 저장된 순수한 사랑의 상태를 볼 수 있기 전 오랜 시기 동안 있어진다. 그래서 의식되는 삶에 유아기의 사랑이 일할 수 있으려면 장터에서 제일 오래 기다리는 일꾼같이 지루하게 기다리는 세월을 요한다. 이것들이 생각과 행동을 위해서 이해성이라는 포도원에서 일하도록 불리되 인생 여정의 꼴찌에서 불린다.

지불

인간이 되어 가는 작업의 끝인 날이 저물자, 품삯의 지불이 있게 되었다. 즉 우리가 거듭나는 삶을 마무리 지어야 할 때, 막판에 와서 일한 이들이 영계에서는 맨 먼저 품삯을 받게 된다. 즉, 영계에서는 가장 높고 가장 내면에 속한 것이 주님으로부터 오는 천국적 생명의 흐름을 의지로 맨 먼저 느끼게 한 다음, 이해성을 통해서 바깥쪽인 삶으로까지 확대해져 간다.
우리의 인간다움의 표면 근처에 놓여 있는 외적인 것들은 우리의 가장 안쪽 생명에 있는 주님의 거처에서 상대적으로 더 멀리 떨어져 있는 고로, 주님에게서 흘러나오는 생명을 받는 상태 역시 더 느리고 더 둔하게 수용한다.
본문 1절의 집주인은 8절에서 포도원 주인이라 불리고 있다. 그 이유는 이해성이 의지와 심오하게 조화를 이루게 되고 이 조화 속에 주님의 현존을 우리가 의식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관리인

일꾼에게 품삯을 지불하는 관리인이란 생각하는 마음, 또는 합리적인 마음이다. 이 마음이 거듭남 속에서 영적 마음과 자연적 마음을 연결해 준다. 이 연결로 해서 영적 마음에 있는 것들이 자연적 마음에 담겨 삶 속에서 실현되게 해준다.

결산 (settlement)

맨 먼저 일하게 된 일꾼들은 비록 자기들이 합의한 정당한 품삯을 받기는 했지만 맨 나중에 일하게 된 일꾼들 보다 더 많은 보수를 받지 못했다고 투덜거리며 실망했다. 이 첫 일꾼이란 자연적 마음에 있는 가장 바깥에 속하는 것을 말하는데, 이런 것들은 거듭남이 마무리된 때일지라도 자기 공적의 어떤 것을 내세우려 들고 공적에 대한 칭찬과 보수를 기대하려 한다.
우리 속의 외적인 것들이 힘들게 나른 짐이란 자기가 똑똑하다고 착각 한데서 비롯되어 무거워 진 것이다. “온종일 뙤약볕”이란 자아 사랑의 불이 그것들을 무겁게 덮쳐 누른 것이다. 비유가 또 하나 알게 해주는 것은, 우리의 가장 외적인 자연적 마음이 갖는 생각의 경향은 자아를 위해 권리를 끝까지 주장하려 한다는 것, 신성한 섭리에 늘 불만족 되어 있다는 것을 새삼 느끼게 해준다. 그러나 우리의 안쪽 마음에 있는 높은 원리들은 자아를 깎아 내리고 주님만을 찬양한다. 이 원리가 알고 있는 바는, 천국적 삶은 얼마나 많은 일을 해서 얼마나 많은 보수를 받았느냐는 식의 성취를 논하지 않고 그 일 자체에 있다는 것이다.

양과 질

자연적 마음은 뭔가를 결정짓는데 양에 의해 되기를 바라고 질에 의한 판단에 실패한다. 자연적 인간은 외적인 무게와 크기 외에 어떤 규율이 있다는 것을 모른다. 그러나 주님이 우리에게 가르치시는 바는, 영적인 것들은 영적인 무게와 크기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 즉 품질에 의거한다는 것이다. 어떤 것에 있어서의 영적 무게란 그 속의 선함이고, 영적 크기란 그 속의 진실함이다. 영적인 “사람의 자, 곧 천사의 자”는 휘트(feet)나 인치(inch)같은데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선함과 진리 안에 존재한다.
사물의 참 본성이라는 면에서, 자연적 마음은 충만하게 거듭난 삶 속에서 영적 마음과 같은 수준에 있을 수는 없다. 그러나 제 각각은 각기 나름대로의 충만함 속에 있을 수는 있다. 각각은 하루에 한 데나리온을 벌 수 있다. 제 각각의 수준에서 충만해질 때, 외적 인간이라 해서 잘못된 것은 없다. 다시 말해 눈보다는 발이 덜 예민하게 창조되었는데, 우리는 발더러 왜 눈 같이 예민하지 못하냐고 불평해서는 안되고 또한 발이 덜 예민하다 해서 잘못된 것은 하나도 없는 것이다.
사람다움에 요구되는 모든 부분이 각각에 걸맞은 질서를 유지한다면 최대한의 행복을 가능하게 한다. 우리 사회 생활에서 모든 사람은 어떤 지위에 채용되는데, 각자가 자기 자리에서 자기 위치를 선용하는 동안 가장 행복해지게 될 수 있는 것과 비등하다. 거듭나는 모든 이는 천국에 불려져, 그곳에서 각자에게 알맞은 수준에서 주님으로부터 생명을 받을 수 있게 된다.

부름과 선택

“많은 자가 부름 받았으되, 선택한 자는 매우 적다.” 우리가 진리를 듣게 될 때, 우리는 그 진리가 거듭나도록 불리는 것이다. 그러나 선택한 자란 들은 진리를 사랑하여 행동에 옮기는 자, 선과 진리의 삶을 선택한 자들이다.
“주님은 모든 이에게 선하시고, 그분의 온유하신 자비는 그분의 모든 역사 속에 스며 있다.” 그 이유는 “그분은 만 주의 주가 되시고, 만 왕의 왕이시기 때문이며 그분과 함께 있는 이들이란 불리우자 그 부름을 선택하여 그분께 신실한 가운데 있는 이들이다.”

14
두 아들
– 외적인 악과 내적인 악 –

성서 본문: 마태복음 21장 28-32절

28. “또 이런 것은 어떻게 생각하느냐? 어떤 사람이 두 아들을 두었는데 먼저 맏아들에게 가서 ‘얘야, 너 오늘 포도원에 가서 일을 하여라’ 하고 일렀다. 29. 맏아들은 처음에는 싫다고 하였지만 나중에 뉘우치고 일하러 갔다. 30. 아버지는 둘째 아들에게 가서도 같은 말을 하였다. 둘째 아들은 가겠다는 대답만 하고 가지는 않았다. 31. 이 둘 중에 아버지의 뜻을 받든 아들은 누구이겠느냐?” 하고 예수께서 물으셨다. 그들이 “맏아들입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는 분명히 말한다. 세리와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 가고 있다. 32. 사실 요한이 너희를 찾아 와서 올바른 길을 가르쳐 줄 때에 너희는 그의 말을 믿지 않았지만 세리와 창녀들을 믿었다. 너희는 그것을 보고도 끝내 뉘우치지 않고 그를 믿지 않았다.”

위선

위선자는 공개적인 죄인보다 더 나쁘다. 그 이유가 위선자는 비록 외관상 선하게 보일런지 몰라도 내면상으로 나쁘기 때문이다. 이 사람은 선한 것이 무엇인지 알면서 악을 행한다. 그러나 공개된 죄인, 비록 그가 바깥 행동면에서 잘못이 있다 해도, 그는 자기 행동을 돌이켜 보고, 회개하여 수정해 갈 수 있다.

문맥

이 비유는 앞의 문단들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예수님께서 성전 뜰에서 팔고 사는 상인들을 쫓아내신 후, 대사제와 백성의 원로들이 주님께 와서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지를 따졌다. 이 때 예수님께서는 세례자 요한의 권한에 대한 정당성을 물으심으로 그들의 질문을 거절하셨다. 이렇게 그들의 의표를 찔러 혼동케 된 상태에서 주님은 세 비유, 즉 두 아들, 사악한 소작인, 왕의 아들의 혼인 잔치에 대한 비유를 그들에게 말하셨다.
이 세 비유 속에서, 주님은 대사제와 원로들, 그리고 바리사이파인들에게 그들의 내심이 악하다는 것을 보여 주셨다. 첫째로, 주님은 그들 속에 위선이 있음을 나열하시고, 둘째로 그들이 구세주로서의 주님을 의도적으로 악의를 품고 대했다는 것, 셋째로 주님의 신성한 영향력을 받기를 거절했기에 있게 되는 비참한 종말을 보여주신 것이다.

주님의 오심과 말하심

어떤 사람이 자기 두 아들에게 갔다는 것은 주님 스스로 그분의 신성한 인성으로 오셨다는 것을 언급하고 있다. “오심”이란 신성한 사랑이 인간이라는 조건을 입으신 역사이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자기 아들에게 어떤 것을 말했다고 할 때의 “말했다”란 신성한 지혜의 역사 하심이고, 이 역사는 인간에게 진리를 가르치는 것을 뜻한다. 그런고로 “오심”이란 인간의 의지에 대한 하느님의 활동을 언급해 주고, “말하심”이란 인간의 이해성에 대한 주님의 활동을 언급해 주게 된다. 따라서 “오시어 말하셨다”는 것은 인간의 의지 또는 심정과 그의 이해성 또는 지성에 있어지는 주님의 연계된 활동을 암시해 준다.
주님이 인간에게 다가 가실 때, 그분은 언제나 뭔가를 그 사람에게 말하신다. 이 때 그분은 그 사람과 어떤 거리를 두고 냉담하게 가르치시거나, 그로 하여금 어떤 의심이 있게 하시지도 않으며, 그가 어떤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해서 무관심하게 활동하시지도 않으신다. 신성한 진리의 빛은 태양의 광선과도 같이 인간의 지성에 비추일 때는 언제든지 그 빛 안에 따스함인 신성한 사랑을 동반하여 그 사람의 심정의 문이 진리에 열릴 수 있게 준비시킨다. 냉혹과 무관심이란 것이 존재하는 곳은 언제나 인간 부분뿐이다.

포도원

주님이 큰 아들에게 “와서,” 말하시기를, “아들아, 너 오늘 포도원에 가서 일을 하여라. 넓은 의미에서 보면, 주님의 포도원은 교회를 말한다. 이를 개인 측면에서 살피면, 인간의 이해성이나 지성을 말한다. 이 속에서 진리가 작업을 하고, 작업된 진리를 수단으로 각 사람의 애정은 훈련되고 계발되어진다.
사람을 동물과 구별되게 하는 특성은 인간의 합리성, 자연적으로나 영적으로나 생각하는 능력이다. 인격의 변화는 진리의 원리를 각자가 어떻게 합리적으로 이해해서 행동에 옮기었느냐에 의존된다.
이러므로 주님의 포도원이 있는 곳은 인간의 이해성이다. 진리의 빛이 인간에게 다가올 때 그 진리를 듣고 이해해서 수행해야 하는 것, 이것이 인간의 의무인 것이다. 그래서 그가 해 놓은 일들은 자기 속의 악한 느낌이나 거짓된 생각, 죄가 되는 모든 행동에 반대되어 있어야 한다. 그 대신 모든 선한 느낌과 진정한 생각, 선용은 격려 받아야 할 것이다.

오늘

그리고 주님은 인간으로 오늘 그 일을 해내도록 지휘하신다. 그 이유가 영적으로 오늘이란 인간의 현재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모든 일은 그 일이 필요로 되는 즉시 시작되어 수행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만일 인간이 삶의 현 상태에서 당장 작업해 내지 않는다면, 현재의 인격과 상태들을 바꿀 수 없기 때문이다.
모든 정신적 상태에서의 경우에도, 그 상태에서 이루어진 일은 생각과 느낌의 다른 상태를 이끌어 낸다. 더 높은 상태로 올라가는 방법은 현재 있는 그대로에 어떤 작업이 있게 될 때뿐인데, 그 이유는 그 작업이 더 나은 상태로 올라갈 준비를 해주었기 때문이다. 그런고로 주님의 모든 계명은 현재 속에 존재하므로 당장 그 계명을 응용해 가야 한다. 인간이 하느님의 계명을 이해할 수 있을 때는 언제든지 그 계명은 지금 말하는 것인 바, “너 오늘…일을 하여라”는 말이 언제나 내포되어 있다.
우리가 영적 원리를 납득하는 순간, 우리는 자신의 일상생활에 그 원리를 적용해야 하는 상황 속에 들어가 있는 것이다. 그 원리를 모든 사람에게, 각자의 계발된 정도에 따라, 그리고 그 원리를 이해한 대로 즉시 그 원리에 순종하도록 말하고 있는 것이다. 원리를 지금 이해한 대로 순종하는 것은 그 원리 속에 있는 더 높고 심오한 깨달음에로 올라가는 수단인 것이다.

영원한 날

또 다른 측면에서 볼 때, “오늘”은 영원함을 명시해 주고 있는데, 그 이유는 만일 어떤 이가 거듭나고 있다면, 그의 하루가 영원까지 이어지기 때문이다. 천국의 모습에는 “밤이 없다” (요한계시록 21:25).
그러므로 오늘 일하고 있는 이상, 우리는 장래 내 영혼에 필요한 일을 해야겠다고 상상할 이유가 없는 것이기도 하다. 우리는 “낮 동안”에 일을 해야 한다. 거듭나고 있는 사람에게는 언제나 낮만이 존재한다. 지상 생활 동안 우리가 자신 속의 악한 경향성에 대항하느라 애를 써야(labor)하지만, 천국에서의 그 일은 힘든 노동이 아니라 오직 기쁘게 하는 활동일 뿐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님의 포도원에서 일하기 시작할 때, (넓은 측면에서의 교회와 각자의 지성과 삶 속에서) 우리는 그 일을 이해해서 작업에 들어가야 하고, 그 작업은 즉시 수행되어야 하며, 그 작업이 넌더리나는 지겨운 작업이라고 느껴지는 것이 중단되고 기쁘게 하는 작업이 될 때까지 계속해 가야 할 것이다.

비유의 일반적 의미

일반적 측면에서 비유에서의 주님의 목적은 인간의 두 계층, 즉 이방인과 유대인의 모습을 폭로하는 것이었다. 동시에 모든 시대, 모든 사람의 경우에서 이와 같은 특성을 지닌 사람의 모습도 나열해 주고 있기도 하다.
맏아들은 처음에는 반역적이었으나 나중에 뉘우치고 아버지에게 순종했다. 둘째 아들은 순종한다고 약속하고는 은밀히 불순종했다.

비유의 역사적 적용

역사적으로, 맏아들은 이방인을 표현했다. 그들은 바깥쪽에서 주님께 불순종한 것인데, 그 이유는 그들이 그분의 가르침을 이해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이해하게 되었을 때, 그들은 순종했던 것이다.
둘째 아들은 유대인을 표현했다. 그들은 하느님의 말씀에 충절을 바쳐야 한다는 것을 인정하고, 씌어진 말씀을 잘 간직하면서, 그 말씀의 글자를 잘 지키는 체 했을 뿐, 말씀의 영에 대한 측면에서는 그 영에 상반되게 방치했던 것이다.

의지와 이해성

맏아들에서와 같이 이방인들의 경우, 그들의 의지는 그들의 이해성보다 더 나았다. 그러나 유대인의 경우, 둘째 아들의 경우 같이, 그들의 이해성은 그들의 의지보다 더 나았다. 맏아들은 총명이 필요한 상태였고, 둘째 아들은 진지한 심정이 결핍된 상태였다. 둘째 아들은 거짓 고백을 했으므로 위선적이었고 말씀의 글자를 모독한 것이다. 그러나 말씀을 이해 못한 이들은 그 말씀을 모독할 수가 없다. 그런고로 그들은 자기들의 총명이 열려짐에 따라 보다 쉽게 회개가 가능해진다.
위를 종합하면, 일반적 측면에서의 맏아들은 이방인처럼 인간의 의무를 이해 못한 사람들을 표현하고 있고, 둘째 아들은 유대인처럼 말씀을 가지고 또 그 말씀이 주는 생활의 교훈을 이해하면서도 생활에의 적용이라는 자기들 의무를 심정으로는 하고 싶어하지 않는 이들을 표현하고 있다.
위 두 계층의 사람들 각각은 주님의 포도원에서 일하도록 불리웠다. 즉 거듭나는 사람의 작업, 진리의 씨를 자기 이해성 속에 심고 키워 자기 일상생활에 적용토록 하는 데에 부름 받았다는 말이다. 맏아들은 자기가 말하지 않아야 할 것을 말했으나 자기가 해야 할 것을 행했다. 말함은 이해성으로부터 존재하고 행함은 의지로부터 존재하는 바, 맏아들의 문제점은 그의 이해성에 있었다. 그러나 둘째 아들은 올바른 것을 말했으나 그의 행동은 잘못된 것인바, 그의 문제점은 그의 의지에 있다. 한 마디로 그는 계발되긴 했지만, 위선적이었다는 말이다. 그래서 자기 공의를 앞세우는 사제들과 바리사이파인들을 향해 오늘 비유는 무지했으나 마음씨가 고운 이방인과 잘 짜여진 위선을 대비시킴으로 강경한 견책을 주시고 있는 것이다.

이방인들

이방인들이란 생각 측면에서 하느님의 뜻이나 섭리의 인도하심에 반대는 하나, 정작 자기들이 선하고 진정하다고 믿는 것에는 반대하지 않은 이들을 말한다. 따라서 그들이 계발된 뒤 그들의 진짜 의지로부터 행동할 때, 그들은 의를 행한다. 신성한 말씀의 진짜 의미를 알지 못하는 이상, 그들은 진정한 의미에 일치 않는 많은 생각이나 사상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들이 말씀 속의 진리를 합리적으로 보게 될 때, 그들은 그 가르침을 따른다.

현대의 이방인들

좀더 총명하게 뭔가를 잘 주시해 보는 새교회인이라면, 위에서 거론한 이방인이 어떤 교회와도 인연을 맺지 않는 현시대의 사람들 중에 많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타애 보다 믿음을 더 찬양하는 이들, “믿음만으로 의롭게 됨” 이라든가, “대속” 이라는 잘못된 피상적인 교리를 가르치는 것은 천국적 진리라는 순수한 빛으로 채워져야 할 인간의 마음을 텅 비게 해서 세상에서 거짓된 위치에 처하게 만들고 만다.
이런 불합리하고 피상적인 궤변에 반기를 드는 사람들은 사랑이 메말라 버린 팍팍한 인간 심정의 원인이 사랑의 하느님에 있다고 생각하면서, 그들은 세상에서 주님의 교회에 반발하는 실수를 가지게 된다. 이러한 진리의 잘못된 표현이나 거짓 교리들에 그들이 반발하면서, 이런 거짓 교리에 주님이나 그분의 교회가 놓여지게 되는 상황으로 치닫고 만다. 이런 이들이 이방인이나, 사실 그들이 진정한 하느님이나 진짜 교회에 반대하는 것은 아니고 오직 거짓된 하느님들, 부패된 교회, 눈에 보이게 그럴싸해진 것들에 반대할 따름이다.

무식한 반대

교회가 부패해져 가고 주님의 말씀이 왜곡되었을 때, 인간이 더욱 더 무식하게 되어 간 것은 물론이고, 그들이 이해할 수 없었던 것에 반대하는 가운데 그들은 정말로 참되고 선한 것 중 많은 부분까지에도 반대했다. 그래서 순수한 진리 속에서의 더 많은 계발은 위와 같이 반대한 이들의 더 깊은 의지에 도달되어서 그들이 회개하고 개혁할 수 있게 인도해 줄 것이라 믿는다.
순수한 진리를 가르치는 것이 새교회의 일인바, 이는 하느님의 말씀에 있는 내향적이고 영적인 의미를 열어 주는 것이고, 이런 계발로 인간 속에 주님을 다시 회복시키고 그분의 교회를 재건설해야 한다. 지적으로 잘못되었으나 심정이 선한 사람들(비유 속의 맏아들 같이 그들이 새 진리에도 반발한다 해도) 속의 합리성에 빛이 도달될 때 그들은 회개하고 주님의 포도원에 일하러 갈 것이다.

의도적인 반대

그러나 주님의 말씀을 가졌지만 내심을 악에다 팔아 넘긴 이들은 새 진리를 받지 않을 것이다. 진리가 더 명확히 해주면 해줄수록, 그들은 과거 유대인이 예수님을 배척하듯, 그 진리를 실지로 더욱 반대할 것이다. 주님이 유대인의 악들을 더 꼬집어 주셨을 때, 그들은 더욱 덜 회개하고, 더욱 더 그분을 어떻게 잡아죽일까 궁리만 했었다.
이 비유를 말하신 후, 주님은 대사제와 원로들에게, “이 둘 중에 아버지의 뜻을 받든 아들은 누구이겠느냐?” 라고 물으셨다. 그들 역시, “맏아들입니다” 라고 대답했다.
주님은 모든 인간에게 그분의 말씀 속에 있는 실제적인 진리를 볼 수 있는 합리성을 장치해 두시었다. 물론 인간은 자신의 계발을 위해 가르침이 필요하다. 그러나 인간이 명백한 진리로 적절히 가르쳐질 때, 만일 그들이 진리에 대한 호의가 있다면, 그들은 회개할 것이고, 그 진리대로 살기 위해 일하러 가야 한다.

속과 겉

이제 비유가 얼마나 실제적인지 또 다른 측면에서 살펴보자. 인간 품성에는 두 가지 측면, 즉 내적 측면과 외적 측면, 또는 영적인 것과 자연적인 것이 있다. 거듭나는 사람의 경우, 이 두 측면은 하나로서 함께 움직여 간다. 그 이유는 속과 겉에 있는 품성은 선하고 진정한 것, 양쪽에서 하모니를 이루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와 반대인 확증적으로 악한 품성에서의 경우도, 품성의 속과 겉의 국면은 악하고 거짓되기 위해 서로 일치한다.
그럼에도 악한 사람은 겉으로 선한 모습을 입고 있을 수도 있다. 이 사람은 바깥쪽 행동에서 신성한 법의 글자를 준수하는 한편, 은밀한 그의 의도적 측면에서 그 법의 영을 깨트리고 있을는지 모른다. 두 측면을 떼어놓은 상태로 본다면, 그의 겉 행동은 그의 심정보다 더 나은 셈이다. 즉 내적인 것보다 외적인 것이 더 낫다는 말이 될 것이다. 그러나 또 다른 사람들, 그들의 외적인 것보다 내적인 것이 더 나은 사람도 있다. 미약하나마 그들은 거듭나고 있다. 하지만 아직 그들은 자기의 통제하에 외적 마음을 가져다 놓지 못한 수준이다. 이와 같은 사람은 어느 정도 한계가 있겠지만 자신의 안쪽 마음이 선해지겠다고 하여 의를 행하기도 하지만 한편 그의 자연적 마음은 악에 쉽게 기울고 마는 유전성으로 꽉 차 있을 것이다. 이것은 의도적 이중성인 위선 같은 것이 아니고 진지한 이중성일 뿐이다.
그런 사람은 그의 영 속에서, 즉 그의 안쪽 의식 속에서, 그 의식으로부터 생각하고 느낄 때, 그는 선하고 진정되며 유용한 것을 사랑하여 행해야겠다는 쪽으로 자신의 마음을 움직인다. 그러나 그가 바깥쪽, 즉 자연적인 마음으로 내려가서 느끼고 생각할 때 그는 악에 대한 그의 유전적 경향성들로부터 생각하므로 그는 선한 것에 반대할 것이다. 따라서 그에게 마치 두개의 다른 사람이 있는 셈이 된다. 거듭 나아가려고 애쓰는 모든 이는 마음속에 있어지는 이와 같은 상황들을 경험했었으리라 본다.

두 계층

이 비유는 인간의 두 계층에 대한 상황에 질문을 던져 놓고 있다. 먼저, 바깥쪽 삶에서 신성한 법의 글자를 깨트린 이들, 그럼에도 회개해서 자신의 생활을 수정하여 거듭 나아간 이들, 그리고 둘째로, 바깥쪽 사람에서 신성한 법을 준수하는 체 하는 한편, 영의 측면에서는 진리의 영에 상반되고, 기꺼이 회개를 하지 않고, 따라서 자신의 생활을 수정하지 않는 이들이다.
그래서 인격이 바깥쪽으로 허약한 상태는 비록 악한 듯해도, 그 속의 의지가 썩어 못쓰게 될 정도로 깊이 고정되어진 악은 아니어서 언젠가 눈에 보이는 바깥쪽 삶이 질서 있게 될 수 있음을 비유는 가르치고 있다.
비유의 첫 째 경우는 내적인 것이 외적인 것보다 더 나은 고로, 나중에는 결국 내적인 것이 외적인 것을 좌지우지하게 될 것이나, 둘째 경우는 외적인 것이 내적인 것보다 더 나은바, 이 외적인 것은 심정으로부터 있지 않은 상태이므로 위선적인 것이다.
첫째 경우는 천국과 지옥이 한 인간의 주인 노릇을 하고자 싸우고 있는 상태이나, 둘째 경우는 지옥이 그 인간을 좌지우지하는 상태로서 질서 있는 외적인 것은 늑대가 양의 탈을 쓰고 있듯이 그저 질서적인 체 하고 있을 뿐인 것이다.

아껴 두신 것들 (remains)

주님에 의해 인간의 안쪽 마음에 아껴 두신 선한 상태가 맏아들의 경우는 의지 속의 악들로 인해 닫혀지지는 않았다. 그래서 이 상태들을 가지고 주님은 그 사람이 회개하도록 작용하실 수 있었다. 그러나 둘째 아들의 경우, 심정 속의 악을 자신의 삶에 의해 굳혔는바, 그 아들 속의 “아껴 두신 것들”은 질식한 상태여서 신성한 영향력의 실력 행사를 무모하게 만들었다.
맏아들은 회개했다. 게다가 회개와 더블은 새 심정은 새 삶을 이루었다. 그러나 둘째 아들의 경우, 회개도, 새 심정도, 따라서 새 생활도 없었다. 이 아들은 겉이 번즈그레한 “회칠한 무덤” 일뿐, 그 속은 죽음과 부패라는 것으로 꽉 차 있었다. “나더러 주여, 주여 라고 말한다고 모든 이가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게 아니라, 내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자라야 천국에 들어간다.”
맏아들은 사람의 아들, 즉 말씀의 글자나 진리에 상반되게 말했던 것이나, 둘째 아들은 성령, 내면의 진리, 말씀 속의 영에 상반되게 말했던 것이다.

요한과 예수

예수님께서 대사제와 원로들에게, “나는 분명히 말한다. 세리와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고 있다. 사실 요한이 너희를 찾아와서 올바른 길을 가르쳐 줄 때에 너희는 그의 말을 믿지 않았지만 세리와 창녀들은 믿었다. 너희는 그것을 보고도 끝내 뉘우치지 않고 그를 믿지 않았다.”
세례자 요한은 인간에게 행동 측면에서 회개하도록 요구하는 것, 즉 글자적 측면에서의 말씀을 표현한다. 요한의 세례는 유대인의 세례이지, 기독인의 세례는 아닌 것이다. 이 세례는 말씀의 글자에서 가르치는 것, 이스라엘 예언자들에 의해 있어진 법에로 귀환하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세례는 이보다 더 내면적이다. 이 세례는 행동이나 외적인 것을 넘어서 도달되는 것들이다. 이 세례는 행동이나 밖에 나타난 모습 속에 드러누워 있는 것들, 즉 의지와 이해성인 동기(motive)에 관한 회개를 가르친다. 요한을 영접한 유대인들, 그래서 행동을 고쳐 잡은 이들은 예수님의 세례로 새 인격이 형성되는 기초를 가졌던 것이다. 이와 같이 요한은 예수님의 길을 예비해 주었다. 그러나 요한을 영접하지 않은 이들, 유대인의 표준인 외적인 것들에 의거해서 삶을 수정하지 않은 이들은 예수님도 영접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자기 삶을 개혁하지 않은 사람은 거듭남에 필요한 기초를 가지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외형상에서 무질서했던 이들이라 해도, 그들이 요한의 부름, 즉 말씀의 글자에 귀를 기울였을 때, 예수님의 부름에서 거듭 나아질 수 있었던 것이다.

세리와 창녀

본문의 세리란 로마 지배하에 있던 유대인들로부터 세금을 징수했던 사람들이다. 따라서 세리들이 유대인에게 미움을 받고 경멸 당하기까지 했음은 지당한 이치일 것이다. 마태도 세리였다. 본문의 세리들은 이방인을 표현한다.
죄 가운데 있는 창녀란 거짓을 사랑하는 이들을 표현한다. 이들이 죄 가운데 있다 해도 세상 일각에 있는 상습적인 범죄자라고는 말하기 어려웁고, 흔히 젊은 여자들로서 그들은 그런 삶이 죄악임을 알지 못하거나 되새겨 본 적도 없이 죄라는 바깥 행동에 빠져 있는 여인들이다. 세례자 요한의 선교에서 많은 세리와 창녀들은 회개해서 자기들의 행실을 고쳤다. 그리고 그들은 하늘나라에 갔다. 즉 그들은 자기들 삶을 개혁해서 거듭 나아가는데 필요한 영적 진리를 받을 자격이 있었다는 말이다.

바리사이파인들

경멸받아 버려진 위치에 있는 세리와 창녀들을 회개시켜 삶의 수정이 있게 한 요한과 예수님의 가르침은 상습화된 위선적인 사제들이나 바리사이파인들을 회개시켜 그들의 삶이 진지하게 수정되도록 하여 주질 못했다. 이와 같은 내향적인 악들이 마음속에 있다면, 설사 진리의 역사가 타인들 위에 있어지는 것을 본다 해도, 더욱이 자신 속에서 있어지는 진리의 활동을 알았다 해도 회개하려는 어떤 노력도 하지 않을 것이다. 예수께서 바리사이파인과 율법학자들을 두고,“ 말만 하고 실행하지 않는 자들” 이라고 하셨다. 또한 그들은 “입술로 내게 가까이 와 혀로는 나를 경외한다고 하면서 심정으로는 나에게서 먼 사람들” 이라고 하셨다.
바리사이파인들은 이마나 팔에 성구 넣는 갑을 크게 만들어 매달고 다니며 옷단에는 기다란 술을 달고 다니고, 공공 장소에서 기도를 길게 하며 많은 헌물을 바쳤지만, 내향적으로 악에 차 있고, 주님을 향해 성난 분노로 차 있던 자들이었다. 그래서 말씀하시기를,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아, 너희 같은 위선자들은 화를 입을 것이다. 너희는 박하와 회향과 근채에 대해서는 십분의 일을 바치라는 율법을 지키면서 정의와 자비와 신의 같은 아주 중요한 율법은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십 분의 일세를 바치는 일도 소홀히 해서는 안되겠지만 정의와 자비와 신의도 실천해야 할 것이다.” 바리사이파인 같은 사람을 두고 주님은 말하시기를, “이름만 살아 있을 뿐, 죽은 자들”이라고 하셨다.
바리사이파인들이 회개하는데 큰 장애물은 자기 공적이라는 것이다. 그들이 보여주는 외관상의 질서 정연함 때문에 그들은 자신들로부터 더 진짜이고 심오한 악들을 감추고 있다. 외적인 악들은 더 피상적이어서 더 쉽사리 파악된다. 즉 공개되어 있는 죄인들은 자기들 죄를 보는 것이 보다 쉽다. 고로 성자나 된 듯하게 보이는 사람들보다 더 쉽게 회개하게 된다. 은근히 타인을 경멸하며 자기 공적을 슬며시 추키는 것은 하느님과 인간 양쪽에 반대되는 심정을 단단히 굳게 하여 진리의 더 높은 국면에 상반된 쪽으로만 마음의 문을 연다.

예증

예를 들면, 급한 성미는 비록 좋은 것은 못되지만, 겉으로 온유하고 미끈한 품위 속에 쥐 죽은 듯 하게 미움, 시기, 복수 같은 것을 깔아 놓은 유해한 성미보다는 덜 악한 편일 것이다.
때로 주님께서는 인간으로 막돼먹은 실제의 죄들에 빠지는 것을 허용하셔서 그로 하여금 자신이 죄인인 것을 볼 수 있게 하시고, 회개하여 거듭 나아갈 수 있게도 하신다. 노출된 죄라는 바깥 행위가 없는 때, 인간은 자기 정의라는 더 큰 죄에 빠져들 수 있는 것이다.
비유에서의 두 아들 모두 회개가 필요했다. 이와 같이 그 당시 회개가 필요했던 것은 이방인과 유대인들, 세리와 창녀들, 바리사이파인과 율법학자들 모두에 해당되었다. 자신에게 남들도 다 공인하는 죄가 있을 경우, 또는 자신에게 위선이 정말로 없을 경우, 그 사람은 으시대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모든 이는 회개가 필요하다. 그 이유는 어떤 이가 위선이 없다는 것이 그가 위선 외의 다른 악들이 없다는 것을 보증 못하기 때문이다. 또는 그 사람이 더 지독한 지옥에로 기울지 않고 있다 해도, 자기 속의 악들이 어떤 지옥으로든 자신을 끌고 가지 않을 것이라는 확증은 못되기 때문이다.
세리와 창녀들은 자기들이 위선자가 아닌 고로 천국에 간 것이 아니라, 그들이 회개하고 어떤 방법으로든지 악을 행하기를 끊었기 때문이다. 성실함(sincerity)은 거듭남이 없으면 충분한 것이 아니다. 성실한 죄인은 위선자도 아니요, 천사도 아니다. 그들은 주님의 포도원에서 일하고 있는 상태가 아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들을 일하라고 부르신다. 즉 회개와 개혁에 의해 자신들 속에 있는 주님의 포도원에서 일하라고 부르신다. 그 일이란 우리가 진리를 배우고, 배운 그 진리를 사랑해서 행하는 것이다.

감정에 끌림 (impulsiveness)

이 비유에는 잠깐이라도 멈추어 되새겨 보지도 않은 채 자신의 외적 생각으로부터 말해 버리는 충동적인 사람, 또는 쉽게 감정에 끌려 말하는 사람들을 위해 좋은 경고를 담고 있다. 충동적인 사람의 말은 쉽게 반발을 사게 하는 반역적인 것을 느끼게 하는 일이 흔하다. 그러나 당사자의 경우 “나는 그런 의도는 없었는데…” 라고 말한다. 이럴 경우, 만일 충동적인 사람이 말하기 전에 말하려는 것을 잠깐이라도 생각해 보는 습관을 기른다면, 결국 그 사람은 자신의 외적인 생각과 느낌까지도 본인의 좋은 의도를 전달하는 습관을 얻을 것이라 본다. 이런 습관의 계속이 성경 속의 진리 탐구나 행동 측면에 있게 된다면 진리의 실천은 조금씩 더 진전을 가지게 될 것이다. 말하자면, 자신의 내향적인 생각이나 느낌으로부터 행동이 이루어진다는 말이다. 잠깐 생각하는 습관의 연속은 자신이 꺼내야 할 말의 앞뒤를 반성하게 해주어 바깥 행동이 충동적이려는데 반해 자신의 입을 지켜 주리라 본다. 결국 이런 반복은 자신의 바깥 길에 변화를 줄 수 있게 될 것이다.

우리 자신의 일

주님의 포도원은 마음속에 있는 고로 나 아니고는 어느 누구도 포도원의 일을 해줄 수 없다. 우리가 선과 진리를 내향적으로 사랑하고, 그것들을 바깥 삶에서 실천 해갈 때, 주님의 뜻은 마치 거듭나던 사람이 천국에서 계속 거듭 나아가듯, 우리의 자연적 인간이라는 지상에서 이루어질 것이다.

15
사악한 소작인
– 신성한 진리의 거절 –

성서 본문: 마태복음 21장 33-43절

33. “또 다른 비유를 들겠다. 어떤 지주가 포도원을 하나 만들고 울타리를 둘러 치고는 그 안에 포도즙을 짜는 큰 확을 파고 망대를 세웠다. 그리고는 그것을 소작인들에게 도지로 주고 멀리 떠나 갔다. 34. 포도철이 되자 그는 그 도조를 받아 오라고 종들을 보냈다. 35. 그런데 소작인들은 그 종들을 붙잡아 하나는 때려 주고 하나는 죽이고 하나는 돌로 쳐 죽였다. 36. 지주는 더 많은 종들을 다시 보냈다. 소작인들은 이번에도 그들에게 똑같은 짓을 했다. 37. 주인은 마지막으로 ‘내 아들이야 알아 보겠지’ 하며 자기 아들을 보냈다. 38. 그러나 소작인들은 그 아들을 보자 ‘저자는 상속자다. 자, 저자를 죽이고 그가 차지할 이 포도원을 우리가 가로채자’ 하면서 서로 짜고는 39. 그를 잡아 포도원 밖으로 끌어 내어 죽였다. 40. 그렇게 했으니 포도원 주인이 돌아 오면 그 소작인들을 어떻게 하겠느냐?” 41. 사람들은 이렇게 대답하였다. “그 악한 자들을 모조리 죽여 버리고 제때에 도조를 바칠 다른 소작인들에게 포도원을 맡길 것입니다.” 42. 그래서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성서에서
‘집짓는 사람들이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다.
주께서 하시는 일이라
우리는 놀랍게만 보인다’
고 한 말을 읽어 본 일이 없느냐? 43. 잘 들어라 너희는 하느님의 나라를 빼앗길 것이며 도조를 잘 내는 백성들이 그 나라를 차지할 것이다.”

요약

신성한 진리를 사랑하지 않는 이들은 결국 자기들 마음과 삶에서 진리를 거절하고 만다. 더구나 그 진리들이 자기들 인격 속에서 진리의 본질을 더 나타내면 낼수록 더 완강하게 진리를 거절하며 그 진리의 영향력을 좌절시키려 든다. 그러므로 심판에서 이와 같은 사람은 영적으로 멸망되고야 만다. 그 이유는 그들이 내향적으로 진리를 붙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런 이들이 자기들의 인격을 더 발달시키면 시킬수록, 더욱 신성한 진리에 반대될 것인바, 결국 그들은 자기들 기억 속에서까지도 진리를 지워 버리려 할 정도에 이르고야 만다.

집주인

집주인이란 주님이시다. 그리고 그분의 집, 또는 거하시는 장소는 각 개인의 마음 안에 있다.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그에게 와서 거처를 그와 함께 하리라”

포도원

포도나무는 마음속에서 자라는 진리를 표현한다. 신성한 진리의 측면에서 주님도 자신을 “참 포도나무” 라고 부르셨다. 넓은 의미에서의 포도원은 교회이다. 이곳에 진리가 심어져 자라 선한 삶 속에서 열매를 맺게 된다. 개인 측면에서 볼 때, 주님의 포도원은 인간의 이해성에 놓여지고, 거기에 주님의 말씀 속에 있는 진리들이 심어진다. 교회가 포도원으로 표현될 경우, 교회 속의 모든 것, 즉 교인 속에 있는 지식이나 총명, 그리고 지혜들을 포도원에 포도나무를 심듯이 주님이 심어 주신다.

울타리

“…울타리를 둘러치고는…” 울타리는 방어를 위해, 또는 이쪽과 저쪽을 분리시키기 위해 설치한다. 마음속에 있는 포도원은 그 사람 자신에게 있는 감각적인 것들에서 보호될 필요가 있고, 뿐만 아니라, 타인이 주는 영향력에서도 방어될 필요가 있다. “숲에서 멧돼지가 나와 그것을 망치고, 들판의 들짐승이 그것을 먹어 치운다.”
마음속에서 진리의 성장을 보호해 주는 푸르게 살아 있는 나무의 울타리(hedge)란 삶에 대해 글자 대로에서까지도 교훈을 주는 진리들, 즉 십계명 같은 진리들이다. 행동의 법칙으로서의 이런 계명은 악한 영향력들의 공격에 최선의 방어책이다. 이와 같이 주님의 말씀의 모든 글자는 그 말씀 속의 영적 의미에 담긴 내향적 진리를 지키고, 보호하는 울타리인 것이다. “세상적인 것, 육(flesh)인 것, 그리고 악마”는 언제나 우리의 정신적인 포도원 주위를 배회하며 한시라도 그것을 부수고 들어와 파괴하려 호시탐탐 엿보고 있다.
그리고 울타리는 보호 역활 뿐아니라 이 들판과 저 들판을 분리해 준다. 거듭나는 마음에 있는 원리들은 질서 있게 제자리를 지켜야 한다는 말이기도 하다. 즉 자신의 사랑과 생각 속의 적절한 위치에 다양한 선과 진리들을 놓는 것을 배워야만 한다. 어떤 원리는 다른 것보다 더 중요하고, 어떤 것은 목적이 되고, 어떤 것은 원인이 되며, 어떤 것은 결과에 해당된다고 구분 짓고 처리해 가야함을 배워야 한다.
우리가 정신적 원리를 질서 있게 배치하는 것을 배운 다음, 이를 사용하게 될 때 말씀에서 온 지식은 정신적 울타리가 되어 정신 분야에서 이것과 저것이 분리되고 구별되게 해준다. 사실, 영적 보호는 서로 다른 원리들 사이를 명확하고 합리적으로 구별해 내는 작업에 의존될 때가 상당히 많다.

영적 질서

주님을 첫째에, 이웃을 둘째에, 자신을 꼴찌에 둔다면, 천국 질서를 뒤집으려 하고 지옥의 질서를 건설하려 하는 퇴보적 삶의 위험에서 자신을 보호할 수 있다.
악령은 언제나 우리들 마음을 혼동시켜서 우리가 선과 악을 구별하고, 진리와 거짓을 떼어놓는 실제 삶을 못하게 하려 든다. 그러나 “지식은 힘이다.”
원리 사이를 명확히 구분해 놓지 못하는 마음을 관찰해 보라. 또는 주님이 어떤 분이신지 모르는 마음, 주님이 무엇을 가르치시는지 모르는 마음, 그분이 누구이신지 모르는 마음, 감각적 충동인지, 수호 천사의 격려인지를 구별 못하는 마음, 등등을 관찰해 본다면, 이런 마음들은 악의 영향과 거짓 관념들에 속한 온갖 것의 곤경에 마냥 열려 있음을 발견할 수 있으리라 본다. 이런 마음은 미미한 바람의 힘에도 움직이는 바람개비 같이 고정된 위치가 없다. 따라서 어떤 것도 확언할 수 없는 마음인 것이다.
그러나 적극적이면서 확정된 마음, 뚜렷한 구별을 줄 수 있는 지식을 지닌 마음은 악령들의 제스츄어에 강한 방어 능력이 있는 셈이다. 이 마음은 자기에게 들어오는 각종 영향력의 품질을 구별하는 바, 그 마음의 울타리는 각종 영향력의 뒷배경까지 간파하고 있다. 이 마음은 주님에 속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 거듭나는데 필요한 것이 어느 것인지, 그리고 자아와 퇴보되는 것에 속한 것, 천국에 속한 것과 땅에 속한 것이 어떤 것들인지 조심스럽게 구별함으로서 사전에 경고를 받아 미리 무장을 갖추게 된다. 이 마음은 제아무리 적이 양의 탈을 뒤집어썼다 해도 적의 진짜 속성을 알 수 있다. 적이 양의 탈을 쓰고서 양떼에 섞여 있다 해도 이 마음은 가려낼 수 있는 것이다. 원리들을 이렇게 식별함은 일상생활의 행동 속에서, 애정과 생각 속에서 반드시 있어져야 한다. 원리 사이에 있어야 할 위와 같은 명백한 합리적 식별이 없는 마음은 선과 악에 관한 혼잡을 가져오고, 그 혼잡은 악으로부터의 분리나 실용성이 없어져 간다. 그 이유는 삶을 순수하게 할 울타리가 없기 때문이다. 더불어 보호해 줄 건전한 울타리도 없는 셈이다.
이런 식으로 움직여 간 것은 지상의 교회의 역사를 훑어 알 수 있을는지 모른다. 교회의 구성원들이 교회 내의 원리들을 명백하고 합리적이며 실용성 있는 구별을 유지하는 한 그 교회는 번성해 갔다. 그 교회 안에 감각적인 것을 던졌을 때, 그것이 세상의 것임을 구분하지 않고 탐닉함으로서 그 교인들은 점차 먹혀 들어가 약화되어져 결국 합리적인 명확한 구분도 잃어 실용적인 응용마저 거절되어졌다. 그런 뒤, 교인들은 교회나 자신들에 필수가 되지도 않는 것을 가지고 우상을 만들고, 바깥쪽에 해당되는 것을 가지고 왈가왈부하는 동안 그들은 종교의 내향에 있는 영이 죽어 가는 것을 못본척 해버린 것이다.
결론적으로, 울타리가 포도원을 보호하는데 필수적이듯, 주님의 계명에 의해 자기 속의 원리들을 구분해 놓는 것은 우리의 정신적인 포도원의 안전을 위해 필수 사항인 것이다.

포도즙 틀

그런 다음, 집주인은 “그 안에 포도즙을 짜는 큰 확을 팠다,” 즉 집주인은 포도주 틀을 놓기 위해 어떤 장소를 파고 장래 사용을 위해 그 틀을 장치했다. 집주인인 주님은 영적 삶의 목표 달성이라는 장래의 일을 위해 인간 마음을 준비시키신다. 포도주 틀은 포도에서 포도즙만을 분리시키기 위한 도구이다. 정신적인 삶 속에서 우리의 일들은 포도라는 열매, 다시말해 정신적인 포도원인 자연적인 이해성에 뿌려진 진리의 열매들이다.
우리의 일이 선하다면, 그 일들은 영적 진리라는 명백한 포도 쥬스를 생산할 것이다. 인간은 자연적 진리를 행함으로 영적 진리를 배운다. 다시 말해, 좋은 열매를 생산해 낸 진리는 그 진리의 영도 생산한다. “만일 누군가가 주님의 의지를 행한다면, 그는 그 행함이 하느님에 속한지 그렇지 않는지에 관한 교리도 알게 된다.” 우리는 자기 일의 품질과 그 일 속의 영을 검사해 봄으로서 그 일 속에 체현되어 있는 영적 진리까지 보게 된다. 이 검사가 바로 포도즙 틀을 사용하는 상태이다. 즉 이렇게 검사해 봄은 각 사람의 일의 본질과 그 영을 파악하게 해준다.
포도즙 틀 자체는 합리적 능력, 또는 우리 마음의 생각하는 원리를 말한다. 이 속에서 우리는 자신의 일 속에 있는 영이나 인격의 발달을 위해 즙을 짜는 노력을 하는 것이다. 포도즙 틀을 가지고 포도를 짠다는 것은 주님의 말씀으로 일을 잘 가늠해 본다는 것을 표현한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바깥쪽의 행동으로부터 안쪽에 있는 영이나 그 일의 동기를 분리시킨다.
우리는 행동이라는 바깥쪽 형태에 만족하려는 것이 자신의 느낌에 있음을 알아차릴 필요가 있다. 그리고 그 느낌이 천국에 속한 것인지 세상에 속한 것인지 그 느낌의 동기를 검사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우리의 일이 하느님 안에서 이루어졌는지 또는 자아 속에서 있어졌는지 구분해야 한다. “진리를 행하는 사람은 빛 가운데로 나아가서 그의 행위가 하느님 안에서 있어진 것임을 명백히 만들 것이다.” 포도는 포도주는 아니다. 이와 같이 진리의 바깥쪽 좋은 열매는 그 열매로부터 축출되어지는 영적 진리와는 다른 것이다.

망대

집주인은 포도원에 “망대를 세웠다.” 망대란 관측함으로 포도원을 방어하기 위해 세워진다. 포도가 익어 가는 동안 들짐승이나 적들의 접근을 관찰하기 위해 경비원이 망대에서 보초를 선다. 그렇게 해서 경비원은 어떤 도둑이나 피해로부터 포도원을 방어한다. 때로 망대는 보초를 위해 견고하게 세워지기도 하고 공격당할 경우를 위해 은신할 수 있는 설비도 갖춘다.
이런 망대의 필수 사항은 보다 멀리 그리고 넓은 관찰을 위해 층계를 타고 올라가도록 설계되어야 할 것이고, 방어를 위해 튼튼해야 한다는 것이다.
망대란 내면에 있는 진리를 표현한다. 이 진리는 사물의 표면에 있는 진리보다 훨씬 더 승강된 진리로서 영적 생각의 보다 높은 관점을 산출한다. 게다가 울타리도 방어 역할을 하지만 울타리보다 더 강한 방어력을 갖춘 것이 망대이다.
생각이 높은 위치에 있는 상태에서의 합리적 마음은 경비원과 같은 바, 이 마음은 사물의 상태를 납득하는 고로 감각적 삶이 주는 위험을 직시한다. 돌로 쌓아 만든 망대는 말씀의 글자에서 오는 진리를 표현하고 이 진리는 말씀을 내면으로 이해할 때 주어진다. 이 진리들은 기억에서 들리워 외적 생각 위로 올려지고 이해성 안에 받아들여지면서 심정 안으로도 들어가게 된다.

예증

악이 우리에게 다가서기 전 미리 그 악을 보아야 크게 유리하다. 예를 들어 어떤 것이 자기의 나쁜 성미를 건드렸다고 말해지는 경우를 생각해 보자. 자기의 나쁜 성미가 발동된 후, 우리는 그렇게 성질을 낸데 대해 자기는 가만히 있었는데 뭔가가 자기를 성나게 했기 때문이라고 정당화한다. 그러나 이렇게 올가진 성냄을 정당화한 후에는 처음에 시도했던 화냄보다 더 악화되는 경우가 흔하다. 즉 악을 행한다는 말이다. 이 때에, 자신의 영적인 포도원을 경계하기 위해 내면의 진리 속에 높은 망대인 영적 총명을 설치했다고 가상해 보자. 그러면 우리의 총명은 자신 속의 성미가 들썩거리는 것을 내려다 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 성미를 그냥 놔두면 더욱 악화된다는 것도 미리 예견할 것이다. 이럼으로 나쁜 성미의 접근에 경고가 있게 되는 바, 우리는 그 성미를 내려 누를 준비를 갖출 수 있게 된다.
내면의 진리, 즉 동기와 영을 아는 진리들은 우리로 모든 삶의 탐사를 잘 해갈 수 있게 해준다. 그럼으로 발생될 위험한 것을 미리 관찰 가능하게 한다. 감시와 경고를 위해 우리의 망대는 높이 설치되어야 한다. 때로 우리는 감각적인 생각들로 번민을 갖는 때도 있다. 이럴 때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영적 진리들을 보호할 필요도 생긴다. 이런 상황을 복음서에서,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깨어(경계를 풀지 말고) 기도하라. 마음은 간절하나 몸이 말을 듣지 않는구나. Watch and pray, lest ye enter into temptation; the spirit, indeed is willing, but flesh is weak” (마태복음 26:41.) “주님의 이름은 견고한 망대이신 바, 의로운 자들이 그 안에 달려들어가 안전해진다.”

포도원을 임대함

포도원을 다 마무리 지은 후 집주인은 소작인에게 임대해 준다. 임대에 의해 계약자는 계약서의 내용에 따라 사용하기 위해 자산을 양도받는다. 이것은 인간 마음에서도, 또는 교회에서도 이루어진다. 각 사람의 마음속에서 주님은 포도원을 준비해 두시고, 인간으로 그것을 사용하고 즐기도록 세를 주신다. 인간은 그것을 남용하거나 자기 것이라고 주장할 수는 없다. 교회의 원리는 인간 마음에 심어지도록 가르쳐진다. 그리고 우리는 그 원리들을 계약 조건에 따라 사용할 수 있다. 이 조건이란 십계명이다. 이 계명 하에, 우리는 모든 정신적인 땅과 포도나무들, 즉 교회에 속한 모든 선과 진리들을 취해서 사용하고 즐길 수 있는 권리를 갖게 된다.
그러나 우리는 포도원을 남용이 없는 사용과 더불어 포도원이 주님의 것임을 인정해야 한다. 이와 같이 우리가 사랑과 지혜 그리고 순종함 가운데 살게 될 때, 그분의 포도밭에 열매가 생산되는데, 이 열매를 주님에게 양도해야 한다. 그런데 만일 이 신성한 원리들이 자기 것이라고 간주한다던가, 주님에 대한 충절을 잊음으로 자기가 점유하고 사용한 것을 주님께 돌려 드려야 하는 것을 거절하게 될 때, 우리는 영적인 강도가 되고 마는 것이다.
집주인이 자기 포도원을 세놓는다는 것은 주님께서 그분의 말씀을 통해 인간에게 진리를 교통하심으로 인간으로 각자의 영적인 삶의 일을 준비시키시는 것을 표현한다. 이와 같은 모습이 에덴의 동산 비유에도 있다. 주님께서 아담과 이브를 데려다가, “이 동산을 다스리며 지키게 하셨다.” 즉 동산을 사용하되 그것을 질서 속에 있도록 하고, 어떤 피해에서도 그것을 보호하도록 하셔서, 사랑과 지혜, 그리고 거룩함의 열매가 계속 생산될 수 있도록 하신 것이다.
이런 일 속에서, 마치 소작인이 땅을 갈고 씨를 뿌리고 자라나는 작물을 가꾸어 수확을 거둘 수 있듯이 인간은 영적으로 그렇게 할 수 있다. 그렇다고 소작인은 씨를 만들 수도 없고 그 씨의 성장을 생산해 내지도 못한다. 다만 그는 주님이 설비하신 수단들을 부지런하고 성의 있게 사용할 수는 있다. 동시에 우리는 주님께 해 드릴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고 오로지 주님께 의지할 수밖에 없음을 겸손히 인정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주님은 우리에게 수단들을 주셨고, 뿐만 아니라 수단을 사용할 수 있는 능력까지 주고 계시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 능력을 선용할 때 주님은 우리의 강건함을 존속시켜 주신다.

멀리 떠남 (going to a far country)

그런데 우리가 막상 자신의 일을 행할 때 우리는 마치 자기가 능력이 있어서 일을 잘 처리하는 듯 여긴다. 주님의 손길(agency)이 자기 일 속에서 명백히 보이지 않는다는 말이다. 한 마디로 그분은 멀리 떠나가신 듯 여겨진다. 그래서 자신만이 남아 있는 듯 여긴다. 이것이 본문의 “그것을 소작인들에게 도지로 주고 멀리 떠나갔다”는 것에 대한 의미이다. 장소(place)는 마음의 상태를 표현한다. 우리는 이해성에 진리를 받는데, 특히 이해성이 승강될 때, 그리고 주님의 말씀의 빛으로 이해성이 열릴 때 진리를 받게 된다. 그러나 진리의 실지 사용은 우리의 바깥쪽 생각이 응용해야겠다고 하는 것, 자연적 삶이라는 실용적인 행함 속에 존재한다.

주님의 귀향

우리가 진리를 자신의 행동 안으로 가져다 놓아 진리의 열매를 생산하게 될 때, 즉 진리로부터 실지의 선들을 획득하게 될 때, 이 선한 열매는 주님을 상기하게 한다. 그래서 주님은 진리라는 것만의 형체에서는 인간에게 가까이 계시지 않으나 진리의 삶 속에서 가까이 계신다.
우리가 자신의 이름으로 일을 할 때, 주님은 “멀리 떠나가신 듯” 여겨진다. 그 이유는 마음의 상태가 그분으로부터 멀리 옮겨져 있기 때문이다. 가깝다든가 멀리 있다는 것이 영적으로는 공간에 존재하지 않고 인격에만 존재한다. “주님은 그분께 부르짖는 모든 사람에게, 그리고 진리 가운데서 그분을 부르짖는 모든 이에게는 가까이 계신다.” 그럼에도 악인에 대해 말해지는 바는 “하느님은 그들의 모든 생각 조차에도 계시지 않는다.” 악은 이기적이다. 그래서 그것은 인간을 주님에게서 떼어놓는다. “너의 불법이 너와 너의 하느님 사이를 갈라놓고, 너의 죄가 너로부터 그분의 얼굴을 가리웠다.”
우리는 태양의 빛이 아니면 태양을 볼 수 없다. 사실 태양 빛이 아니면 태양이라는 존재도 알 수 없었을 것이다. 이와 같이 우리는 우리와 교통하게 하는 주님의 진리가 아니면 주님의 현존을 볼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님을 더 찾으면 찾을수록, 더 많은 빛을 가지게 된다. 이렇게 해서 마음속의 진리는 선한 열매를 가져오게 된다. 정신적인 열매가 선함을 무르익게 할 때, 주님은 더욱 더 가까이 와 계신 듯 보인다. 그 이유는 우리가 그분을 더 가까이 끌어 당겼기 때문이다.

수확의 때

이렇게 자기에게 주님을 끌어당김은 수확의 시기까지도 더 가까이 끌어당기게 해준다. 열매는 열리되 기왕이면 많이 열리고 잘 익어 가야 할 것이다. 열매가 완성되기까지의 성장에는 단계를 거친다. 태양이 열매를 무르익게 하듯 정의의 태양이신 주님은 우리의 정신적 열매에 작용하시어 무르익게 해주신다. 정신적인 열매들의 품질은 그 사람의 내향에 있는 동기에 의존된다. 수확의 때란 진리가 이해성에로 반입되어 의지에 영향을 미침으로 실제의 선한 일이 나타날 때를 말한다.
각 사람의 열매는 각 사람 자신 속의 인격과 같은 것이다. “열매로 그 나무를 안다.” 모든 사람은 각자에 걸맞은 열매를 산출한다. 종종 외관상 악인의 일도 선한 이의 열매같이 보일 때도 있다. 그러나 그 품질은 전혀 다르다. 포도의 품질은 포도즙 틀을 거칠 때에 판정된다. 그리고 단맛이든 신맛이든 포도의 맛은포도즙 안에 있게 된다. 정신적인 포도원에 심어진 원리들이 선한 일 속에서 열매를 산출하게 될 때, 우리는 주님께서 그분의 몫이 선한 열매 속에 있음을 주장하시는 그분의 메시지를 받게 된다.

그분은 그분의 종들을 보내어 “도조(열매)를 받아 오라고” 하였다. 집주인의 종들이란 주님의 말씀 속에 있는 진리들이고, 이 진리들이 우리와 주님과의 관계를 가르쳐 준다. 어떤 진리가 이해성에 심어지고, 그 이해성이 의지에 영향을 미쳐 실제의 삶 속에서 열매를 생산하게 될 때 주님은 그분의 말씀 속에 있는 어떤 진리를 우리에게 보내셔서 우리가 획득한 선한 것이 우리의 것이 아님을 상기시켜 주신다. 게다가 우리의 정신적인 포도원의 소유권자가 주님이시다는 것, 우리가 그 포도원을 사용한 내력을 주님께 설명해야 한다는 것을 일깨워 주신다.
역사적 측면에서 볼 때, 주님의 종들이란 모든 시대에 걸쳐 보낸 그분의 예언자나 선생들이다. 이들로 하여금 신성한 생명에 우리가 의존되어 있다는 것을 기억하게 해주셨다. 개인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종들이란 예언자가 가르친 진리들을 말하는 바, 누가복음 1장 70절에서, “예로부터 거룩한 예언자들의 입을 빌어 주님께서 말씀(가르치신)하신 대로”라고 노래해 주고 있다. 글자대로 살펴도 사실인 것은, 사람들, 특히 유대인들은 인간인 예언자들을 때리고, 죽이고 돌로 쳤었다. 그래서 그들은 예언자들을 통해 주님이 가르치신 진리들을 영적으로 박해했던 것이다.
일 속에 존재하는 선한 것은 양에 의해 측정되지 않고 질에 의해 좌우된다. 자기가 해 놓은 선한 일이 많다고 해서 자기야말로 천국에 들어가야 한다고 주장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자기 주장을 펼치는 순간, 그 선한 일이 자기 것이라고 권리를 내세우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이렇게 소유권을 내세울 때 그 선함에서 있어지는 천국적인 특성 모두를 자기 것으로 강취하게 된다.

종들을 학대함

그런데, 이기적인 사람도 겉보기에는 선한 일을 수행할 수 있다. 그러나 그는 그 일을 자신의 이름으로 행한다. 그리고 그가 주님 말씀 속의 진리들을 보고 납득할 경우, 그에게도 주님을 인정하도록 요구되어지는데, 이때에 그는 그 진리들을 거절한다. 그가 주님의 종을 맞이했지만 그를 때리고, 죽이고, 돌로 친다. 진리가 주님에게서 분리될 때, 진리 속의 생명은 그 진리를 분리시킨 마음속에서 거두어진다. 자신의 것이라고 주장하는 진리는 자아 사랑이라는 악에 의해 더렵혀진다.

때리고, 죽이고 돌로 침

종을 때린다는 것은 삶 속의 악을 가지고 진리를 곡해하는 것을 의미한다. 종을 죽인다는 것은 진리를 사랑으로부터, 즉 실용적인 진리의 선용을 떼어 냄으로 삶에서 진리를 박탈하는 것이다. 종을 돌로 쳐죽였다는 것은 진리 속의 진정한 것, 즉 그 속의 영과 씨름해서 진리를 왜곡되게 하여 자기의 악을 좋아하도록 하는 것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좋은 의미의 돌은 자연적인 진리이나, 나쁜 의미에서의 돌은 왜곡된 진리, 진리를 거짓에 응용함으로 마음에 거짓을 만드는 것을 표현해 주기 때문이다.

다른 종들

“지주는 더 많은 종들을 다시 보냈다. 소작인들은 이번에도 그들에게 똑같은 짓을 했다.” 주님은 그분의 신성한 자비 가운데서 인간이 고집 부리는 불법에도 불구하고 인간을 도우시려고 언제나 애쓰신다. 그래서 우리의 영적인 필요성에 부응해서 영적 환경을 재조정해 주신다. 만일 우리가 이 방법으로 주님께 반항하면, 그분은 저 방법으로 우리에게 오시어 구해 주시려 애쓰신다. 그분은 회개하고 수정할 모든 기회를 우리에게 주신다.
위와 같은 처방이 넓은 의미의 인간 교회에 계속 있어 왔고, 개개인의 영혼에도 마찬가지인 것이다. 하느님의 말씀은 읽히고, 설교되어지되 “경계에 경계를, 교훈에 교훈을 여기서도 조금, 저기서도 조금”씩 더하여 간다. 이 종 뒤에 다른 종들이 우리에게 보내지고, 그들은 주님의 메시지를 들고 있다. 그 메시지에서 포도원의 열매를 요구하고 계신다. 만일 단순한 진리가 우리에게 도달되지 못하면, 더 심오한 진리가 우리에게 보내어진다. 이 진리는 보다 더 꿰뚫는 힘을 지닌 진리인 것이다.
그런데도 우리가 사랑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계속 갖가지 형태로 그 진리를 거절하게 된다. 그 이유는 진리가 갖가지 형태로 와서 우리의 악을 견책하기 때문이다. 계명 중 어느 하나를 자발적으로 깨트리는 사람은 계명 모두를 깨트리는 것이 된다. 계명들은 쇠사슬의 고리같이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고리 하나를 끊으면 사슬 전체를 끊는 격이 되기 때문이다. 자기가 아는 진리를 의도적으로 거절하는 사람은 모든 진리 속의 영을 거절하는 것이 된다. 그래서 신성한 진리이신 주님까지 거절하게 된다. 진리들이 지닌 영은 모두 유사하기 때문이다. 진리 하나를 미워하는 자는 모든 진리도 미워하게 되는 바, 그 이유는 그가 진리 속의 신성한 영을 미워하기 때문이다. 본문에서 집주인의 종 하나를 미워한 것이 모든 종을 미워한 것과 같다.

아들

사악한 소작인이 집주인의 종들을 거절한 뒤 그의 아들까지 거절한 것에 별로 의아해 하지 않으리라 본다. “주인은 마지막으로 ‘내 아들이야 알아보겠지.’” 만일 인간에 대한 진리의 호소 중 가장 확실한 것이라면, 아마 주 예수 그리스도, 육을 입으신 신성한 진리는 인간에게 도달된다는 것이리라. 예수님의 아름다운 생애, 드높은 가르침은 어떤 심령에도 도달 가능한 것이다.
예수님의 오심에서, 우리는 교훈과 본보기라는 두 가지를 가진다. 그러나 유대교의 악한 지도자들은 구약 성서에 가르쳐진 진리에 대한 적대 행위보다 더 심각한 적대 행위를 저질렀다. 그들이 주님 속의 영 즉 그분의 품성을 보게 되었을 때, 그들은 그분에게 더 격렬하게 적개심을 발휘했다. 그 이유는 그분의 영이 그들 인격 속에 든 악에 대해 더 강력한 적대 관계를 가진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본문에서 “그러나 소작인들은 그 아들을 보자, ‘저자는 상속자다, 저자를 죽이고 그가 차지할 이 포도원을 우리가 가로채자’” 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와 같이 모든 악한 마음에 있는 목적은 진리의 영향력을 파괴하는 것이다. 그 이유는 만일 진리가 그들 마음에 뭔가를 건설하려 한다면, 필시 세상적인 탐욕을 그들에게서 박탈할 것이기 때문이다.
“저자가 상속자다.” 상속이란 주님을 받는 조건, 그분의 사랑과 지혜 안으로 오는 조건들이다. 악인은 추론하기를, 만일 자기들이 주님의 거처인 새 생명의 상태, 주님이 주셔야만 하는 모든 상속받는 조건인 새 생명을 거절하게 되면 결국 자기들은 자기들이 애쓴 선한 일의 공적을 자기들이 차지할 것이라고 추론하고, 더욱이 자기들 삶 속에서 어떤 신성한 작용도 더 이상 인정할 필요도 없게 될 것이라고 추론한다.
인간은 주님으로부터 그의 영적 생명에 관한 모든 것을 상속받는다. 그래서 인간 속의 원리 중 천국 생명을 받도록 열리게 해주는 것은 겸손과 한 쌍을 이루는 순진이라는 원리이다. 그러나 자아를 찬양하는 마음의 경우 겸손한 순진은 그 마음이 가장 지겨워하는 것들이다. 자기만 챙기려 드는 마음은 자기 속에 상속받아 있는 겸손한 순진이라는 원리를 꿈틀대는 애초부터 깔아뭉개려 갖은 노력을 경주한다. 이렇게 해서 악인 속에서의 외적인 마음은 인간의 내면에 속한 마음이 주님께 열리도록 하시려는 주님의 노력을 온갖 수단을 다 동원해서라도 저지하려 드는 것이다.

악한 소작인은 포도원 주인의 뜻에 세 번씩이나 저항했다. 그들은 처음 보낸 종에게, 두 번째 보낸 종에게, 마지막으로 주인의 아들에게도 저항했다. 표징적 숫자로서의 “셋”이란 진리 측면에서 충만함, 완전함을 말한다. 그러므로 세 번씩 진리를 거절함이란 악인이 진리를 거절하되 완전하고 전적으로 거절했다는 말이고 그들 스스로 진리에 반대되는 거짓 원리의 삶으로 확증해 버렸다는 것이 된다.

붙잡고, 밖으로 끌어내어 살해함

소작인들은 “그를 잡아 포도원 밖으로 끌어내어 죽였다.” “그를 잡았다”는 것은 의지로부터 진리를 거절했다는 것이고, “그를 포도원 밖으로 끌어내었다”는 것은 이해성으로부터 진리를 거절했다는 말이고, “그를 죽였다”는 것은 일상 생활로부터 진리를 거절했다는 것이다. 한 마디로 악한 마음이 진리를 정면으로 마주쳐서 자발적으로 진리의 영향력과 생명 자체를 파괴하여 모든 천국의 사랑까지 말살시키는 것을 말한다.

역사적 적용

역사적으로 볼 때 이 비유는 하느님의 말씀을 가졌던 자, 그리고 그 말씀에 따라 살아야 할 유대인과 관계를 갖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예언자들을 거절했고, 결국 주님 자신까지 거절해 버렸다. 그래서 영적 왕국이 그들로부터 박탈되어 이방인에게 주어졌던 것이다. 사실 주님이 영적 왕국을 그들에게서 빼앗은 것이 아니라, 그들 스스로 그것을 내던진 것이다. 주님은 인간으로부터 그분의 사랑을 결코 철회하지 않으신다. 주님은 인간에게 주시고자 하는 모든 선하고 진정되며 유용한 그분의 선물 뿐아니라, 그보다 더한 것도 인간에게서 철회하신 적이 없으시다. 이런 것들은 그분이 계속 공급해 주시는 선물이요, 선물 속의 선함은 주님으로부터 지금 이 순간도 우리에게 다가 오고 있다. 이런 선물은 주님과 분리될 수 없는 것들이어서 그 속의 선함은 보존되고 있다. 주님의 자비들은 “매일 아침마다, 매일 저녁마다” 존재한다. “주님은 모든 이에게 선하시고, 그분의 온유하심은 그분의 모든 일 속에 스며 있다.” 그분은 악마라 해도 그가 이전보다 더 나빠지는 것까지도 방지하려고 하신다.

상속자

신성한 사랑에서 출생한 아들인 신성한 진리는 신성한 사랑이 교통할 수 있는 모든 것들에 대한 상속자이다. 그 이유가 선은 진리를 수단으로 우리에게 오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신성한 진리를 거절한다면, 우리는 신성한 진리 속에 내재한 신성한 선까지 거절하는 것이다. 진리가 영적으로 주님에게서 상속받을 수 있게 해주는 모든 것을 우리가 거절하는 셈이다.
악한 마음은 진리의 참 영이신 주님을 거절하고, 자기 속의 정신적인 포도원 밖으로 끌어내어 상속물을 송두리째 먹어 치우려 든다. 더불어 이 마음은 하느님에 관한 모든 사상을 헛되게 해서 모든 선과 진리가 자신의 것이라고 떠들려 한다. 결국 자신의 쾌락 속에서 악에 선을 섞어 버리고, 진리를 왜곡해서 신성한 품질을 파괴시킴으로 자신을 하느님의 자리에 앉게 하려 든다.
이럼으로 악한 자는 모든 자기 능력이 전적으로 자신에서 비롯되었다고 하는 바, 그 능력의 사용에 대해 누구에게도 부담을 느끼지 않는다. 이리하여 “상속분을 가로채자”는 것은 심정과 이해성 그리고 삶을 주님에게서 분리시키는 것을 말하게 된다. 예수님께서 말하시기를, “거듭나는 가운데 나를 따르는 자는… 영원한 생명을 상속받게 될 것이다.” “주님은 곧바른 자를 아시고, 그들의 상속분은 영원할 것이다.” 그래서 거듭남이 우리로 주님과 하나를 이룰 때, 거듭나는 사람, 그리고 그 교회는 “주님의 상속”이라고 성경에서도 종종 불리우고 있다.

결과들

사악한 소작인의 악한 행동을 말씀하신 뒤, “그렇게 했으니 포도원 주인이 돌아오면 그 소작인들을 어떻게 하겠느냐?” 라고 물으셨다. 다시 말해 이 물음은 “소작인이 저지른 악한 결과는 무엇일 것이냐?”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주님은 그들을 상하게 하지는 않으시기 때문이다. 악의 벌은 그것 자신의 인격과 조건에서 유래되지 주님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다.
악인의 경우 자기가 받은 처벌이 주님으로부터 온 듯 여길 것이다. 그 이유는 그들이 착각하기를, 만일 그분이 하려고만 하시면, 아마 그분은 딴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악까지도 그 결과에 있어서는 언제나 유쾌해지게 하실 수도 있을 거라는 착각이다. 그러나 이런 착각은 아예 터무니도 없는 발상이다. 주님은 선과 진리, 그리고 생명이시다. 그래서 모든 생명, 모든 기쁨은 그분 안에, 그분에게 근원을 두고 있다. 따라서, 자신이 주님과 분리됨을 뻔히 알고도 의젓하게 여기는 자는 모든 순수한 행복에서 자신을 분리시키는 것이다. “나를 떠난 사람은 잘려 나간 가지처럼 밖에 버려져 말라 버린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주님이 사악한 자를 파괴하시고 벌하신다고 말해질 때, 이는 글자적 의미가 자연적인 겉보기에 따라 말해졌기 때문이지 영적 진리에 따른 것은 아니다. 주님은 진리를 우리에게 가르치시고, 그 진리가 우리를 심판하되 우리가 그 진리를 어떻게 대우했느냐에 의존된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나는 사람을 심판하지 않는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 그 말이 너희를 심판할 것이다”고 말해 두셨다.
악은 스스로 자멸한다. “악이 사악한 자를 죽일 것이다.” 악한 자를 파괴시키는 것은 하느님이 아니라 그들 속의 사악함인 것이다. “죄의 값은 사망이다.” “나는 세상을 멸하려 온 것이 아니라 세상을 구원하러 왔다”고 예수님은 말해 두셨다. 비록 주님께서 만인에게 천국을 주시려고 백방으로 애쓰시지만, 악인들은 천국을 받지 못한다. 그 이유는 그들이 천국을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악인들은 인간 영혼에 천국을 형성하려 하는 영향력에 완강한 고집으로 거절한다.

포도원을 옮김

그러므로 불가피해지는 것은, 포도원을 사악한 소작인에게서 되찾아 다른 사람들에게 주는 작업이다. 십계명에 축적된 주님의 말씀 속의 원리로 살아가는 사람은 거듭 나아지고 악의 지옥에서 구원될 것이다. 그들은 악이 죄가 되는 고로 금하고 선을 행한다.
그러나 선한 원리에 의거 살지 않는 이들은 구원되지 못한다. 그 이유는 그들이 자신들의 심정에 지옥을 만들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후, 그들은 지옥을 향해 가는 쪽을 스스로 원한다. 그 이유는 그들의 내향에 지옥이 들어 있고 천국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들은 천국적 원리로 살아서 천국의 인격을 형성하기를 택하지 않았다는 말이다. 천국은 어떤 장소에 있는게 아니라 천국이 되어 가는 인간의 인격 속에 있다.
진리에 의거 살지 않은 사람들은 결국 진리의 지식마저 잃는다. “누가 나를 사랑한다고 하면 그는 내 말을 지키리라” 고 말해 두셨다. 우리가 주님을 사랑함은 우리가 주님의 말씀 가운데서 자신에게 기쁨을 창출함과 같은 말이다. 즉 우리는 포도원을 열심히 가꿀 것이다. “계명을 주심으로 당신은 내 것이 되어 원수들보다 더 지혜롭게 나를 만드십니다.” “당신의 법령들을 깨우쳐 슬기를 얻었으니 모든 거짓된 길을 역겨워 합니다.” “그분의 계명을 행하는 모든 이는 슬기를 가진다.” 그러나 “가지지 않은 자로부터는 가진 것처럼 보이는 것마저도 빼앗을 것이다.”

계속되는 교회들

하느님의 섭리에서 한 교회가 기울어 질 때는 언제든지 주님은 그분의 포도원을 살아 있도록 하기 위해 또 다른 교회를 일으키셨다. 주님의 오심은 유대 주의의 파멸 뒤 첫 기독교회를 구성하시었다. 그 뒤 약 일 백년 후 첫 기독교회 역시 교리와 삶의 측면에서 부패되었을 때 주님은 그분의 재림을 영으로, 진리 안에서, 즉 그분의 거룩한 말씀 안에 담긴 내향적인 의미, 영적 의미를 밝혀 주심으로 성취하시었다. 그리하여 그분은 새교회(the New-Church), 새 예루살렘(the New-Jerusalem)의 교회를 구성하시어 그분의 포도원에서 일을 얻도록 섭리하셨다. 이 새교회의 진정한 모퉁이의 머릿돌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한 인성에 관한 진리로 서 있고, 세 국면으로 보여지되 한 인물인 한 분 하느님, 예수 그리스도이다. 이것은 구신학의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지만, 지금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어 있다. “만군의 하느님이시어, 하늘에서 내려다보시어 이 포도나무를 보살펴 주십시오. 주님의 오른손이 설비하신 포도원이니이다” (시편 80: 14-15).

16
왕의 아들의 혼인 잔치
– 신성한 진리와 선을 거절함 –

성서 본문: 마태복음 22장 2-14절

2. “하늘 나라는 어느 임금이 자기 아들의 혼인 잔치를 베푼 것에 비길 수 있다. 3. 임금이 종들을 보내어 잔치에 초청받은 사람들을 불렀으나 오려 하지 않았다. 4. 그래서 다른 종들을 보내면서 ‘초청을 받은 사람들에게 가서 이제 잔치상도 차려 놓고 소와 살진 짐승도 잡아 모든 준비를 다 갖추었으니 어서 잔치에 오라고 하여라’ 하고 일렀다. 5. 그러나 초청받은 사람들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어떤 사람은 밭으로 가고 어떤 사람은 장사하러 가고 6. 또 어떤 사람들은 그 종들을 붙잡아 때려 주기도 하고 죽이기도 했다. 7. 그래서 임금은 몹시 노하여 군대를 풀어서 그 살인자들을 잡아 죽이고 그들의 동네를 불살라 버렸다. 8. 그리고 나서 종들에게 ‘혼인 잔치는 준비되었지만 전에 초청받은 자들은 그만한 자격이 없는 자들이었다. 9. 그러니 너희는 거리에 나가서 아무나 만나는 대로 잔치에 청해 오너라’ 하고 말하였다. 10. 그래서 종들은 거리에 나가 나쁜 사람 좋은 사람 할 것 없이 만나는 대로 다 데려 왔다. 그리하여 잔치집은 손님으로 가득찼다. 11. 임금이 손님들을 보러 들어 갔더니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이 하나 있었다. 그를 보고 12. ‘예복도 입지 않고 어떻게 여기 들어 왔소?’ 하고 물었다. 그는 할 말이 없었다. 13. 그러자 임금이 하인들에게 ‘이 사람의 손발을 묶어 바깥 어두운 데 내어쫓아라. 거기서 가슴을 치며 통곡할 것이다’ 하고 말하였다. 14. 부르심을 받은 사람은 많지만 뽑히는 사람은 적다.”

하늘 나라

하늘 나라는 인간의 마음과 행동 속에 있는 사랑과 지혜, 그리고 유용함(usefulness)의 나라이다. 주님의 사랑과 지혜의 현존은 인간 안에 천국을 만든다. “왕”이란 여호와, 신성한 아버지, “왕중의 왕” 이시고, “아들”이란 신성한 인성(Divine Humanity)이다.

혼인

신성한 존재, 한 분 인격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는 신성한 사랑과 지혜, 또는 신성한 선과 진리의 결혼이 있다. 그리하여 진정한 결혼은 주님으로부터 인간 안에 존재하는데, 각 사람의 거듭나는 수준에 따라서 있어진다. 그리고 주님의 생명이 인간 안에 존재하되 각 사람이 완전해진 정도만큼, 다시 말해서 각자의 심정 속에 있는 사랑과 지성 속에 있는 진리의 완전한 하나됨, 또는 그 둘이 결혼된 수준에 의거 존재하게 된다.
또 다른 측면에서 볼 때, 결혼은 주님과 교회 사이에도 존재한다. 그래서 주님의 말씀 가운데서, 그분은 “신랑” 또는 “남편,” 교회는 “신부” 또는 “아내”라 불리운다.
신성한 선과 진리의 완전한 결혼은 아주 미미한 부분(ultimate), 즉 말단의 것들에서조차도 예수 그리스도라는 신성한 인성의 영화되심을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 이 신성한 결혼은 타락된 인간이 회개와 거듭남을 통해 영적 결혼의 상태로 귀환이 가능하게 해준다. 그래서 인간 안에서의 선과 진리의 결혼이 그 사람으로 하여금 천국적 상태의 인격이 되게 해주듯, 하늘 나라도 이런 결혼에 비유된다. 그 이유는 하늘 나라는 그런 결혼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런고로 어떤 사람이라 해도 영적 결혼이라는 조건 속에 존재할 때까지 그는 정신적으로 천국 안에 있지 못한다. 그래서 영적 결혼은 인간 마음의 두 부분인 의지와 이해성의 재 연합인 것이고, 이 연합에 하느님이 함께 연합되신다. 그러나 인간이 타락하는 상태라면 그의 의지와 이해성은 쪼개지고 있는 것이다.

말씀 속의 결혼

영적 결혼은 주님의 말씀의 글자 속에서 그 글자가 이중으로 표현되는 데서 암시해 준다. 이는 성경에서 자주 등장하는데, 하나는 의지 속의 애정과, 다른 하나는 이해성 속의 생각과 관계를 갖고 있다. 예를 들면, “옳은 일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행복하다. 그들은 만족할 것이다”라는 구절에서, 굶주린다는 것은 선을 갈망함에, 목마르다는 것은 진리를 추구함에 관계된다. 이와 같이 주님의 말씀은 인간 안에 영적인 결혼이 창출되도록 노력하고 있다.
추상적 의미에서, “왕”은 내향적인 신성한 진리, 즉 하느님의 말씀 속에 있는 영적 의미이고, “아들”은 말씀의 글자에 있는 진리이다. 그러므로 주님은 그분의 거룩한 말씀 속에서 그 글자와 영이 하나를 이루도록 하시어 인간으로 영적인 결혼을 생산하게 하신다. 주님은 그분 스스로 인간과 하나가, 그리고 인간이 그분과 하나가 될 수 있게 하셔서 인간에게 천국적 삶의 기쁨을 인간 영혼에 있는 혼인 잔치로서 주시는 것이다.

글자 그대로의 그림

이 비유는 위의 사항들을 표징적으로 그려서 우리에게 제공하고 있다. 한 임금이 잔치를 마련하고 있다. 잔칫날 이전 적당한 때에 종들이 손님들을 초대하러 파견된다. 때로 잔치의 정확한 날과 시간이 정해지지 않았는데도 먼저 잔치가 있게 될 것을 예고하러 보내지기도 한다. 그리고 잔치 준비가 마무리 될 때 두 번째 부름을 위해 종들이 파견된다. 처음 때에 초대에 응하겠다고 한 손님은 잔치집 주인이 오라고 할 때에 참석할 것이라는 서약을 이미 해 놓은 셈이다. 따라서 오라고 부름 받을 때 거절하는 것은 자기들의 서약을 위반하는 것이 되고, 그 주인을 우습게 여긴 것이 되고 만다.

역사적 의미

위와 같이 주님의 오심은 예언자들에 의해 미리 말해졌었다. 비록 오시는 그 시간은 확실히 고정되지는 않았었다 해도, 이미 인간들은 초대받은 상태로서, 그분의 오심을 위해, 또는 그분이 가져오실 영적 잔치를 위해 그들 스스로 준비하도록 미리 예고된 것이다. 그래서 주님은 오실 때가 되자, 그의 종 세례자 요한을 앞서 보내시어 그분의 오심을 알리면서 회개와 개혁을 통해 인간이 잔치에 참석 가능한 준비를 마무리하도록 하셨다. 이렇게 신성한 왕은 자기 아들을 위해 혼인 잔치를 만드셨던 것이다. 그 이유가 신성한 진리는 아들 또는 신성한 사랑이 바깥쪽으로 출생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영적 의미

개인적으로 우리 각자는 이 잔치에 참석하라고 부름 받고 있다. 우리를 오라고 하기 위해 보내진 종들이란 주님의 말씀 속에 담긴 진리들이다. 모든 진리는 우리로 사랑과 믿음, 그리고 순종함으로 주님을 찾도록 가르치고 있다. 이 진리를 듣고 읽는 모든 각 사람은 사랑과 지혜, 또는 선과 진리 속에서 있게 되는 혼인 잔치에 초대되어져 있는 것으로 이는 인간의 마음과 삶 속에서 선과 진리가 하나를 이루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그들은 오려 하지 않았다.” 직역하면 “그들은 올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일 것이다. 즉 인간들은 자연적인 애정 속에 있는 감각적 상태에만 머물고 있어서 영적 마음의 상태 안으로 진입하고 싶지 않았다는 말이다. 그래서 문제점의 발단은 인간의 의지 부분이었다. 인간들은 자기들이 지닌 자유 의지를 남용했던 것이다. 인간은 자신을 회개시키고 개혁할 수 있는 힘을 가졌지만,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들은 영적 마음을 소유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역사적 응용

역사적으로, 거룩한 말씀의 초대장을 받아 쥐고도 영적인 잔치에 가지 않았던 이들이란 말씀의 글자를 쥐고 있었으나, 그 말씀의 예언이 성취되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에서 그분을 거절한 유대인들이었다. 유대인들은 잔치에 이미 초대되어져 있었고 자기들도 그 초대를 수락해서 메시아의 오심을 예상해 왔던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주님은 오셔서 본문에서 종을 파견했듯이 그분의 사도들을 파견하시어 유대인들을 잔치에 오라고 부르신 것인데, 이 초대는 그들에 의해 거절당해졌다. 그들은 예수라는 사람이 선포한 잔치 따위를 바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이 바랜 잔치는 자신들의 자연적인 악들을 위한 잔치요, 그 잔치란 자신들이 타국가를 지배하고 싶은 잔치일 뿐이었다. 따라서 주님의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게 아니라 “영”에 속한 나라라는 것, 그 나라에 들어가 즐기려면 자아를 부인하는 회개와 개혁이 필수적이라는 것을 그들이 배우게 되었을 때, 그들은 그 가르침을 지독하게 반대했던 것이다.
주님의 말씀이 부르는데 회개와 개혁을 하지 않은 이들, 오로지 가진 것이라곤 자연적 수준의 마음뿐인 자들은 인격 측면에서 위의 유대인이나 다를 바 없는 것이다. 즉 그들은 자연적 마음, 감각적이고 이기적인 것만 찾는 마음, 선함에 정 반대되는 이들일 뿐이다.

두 번째 부르심

“다시 주인은 다른 종들을 보내었다.” 즉 초대가 반복되었다는 말이다. 역사적으로 첫 초대는 모세와 예언자들을 통해 유대인에게 있어졌었다. 그리고 두 번째 초대(부름)는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을 통하여 있어졌었다. 역사적 인물을 떠난 넓은 의미에서 볼 때, 주님께서는 각 사람에게 그분에 관해, 그리고 천국과 지옥에 관한 것을 가르치심에 의해 진리의 훈육이 각 사람의 이해성에서 만들어진다. 그리하여 주님이 가르치신 사항을 알 수 있을 만큼 충분한 훈육을 각 사람이 가지게 되었을 때, 두 번째 초대가 있게 되는데, 이는 각 사람 안에 있는 영적인 애정을 일깨우심으로 그들의 의지에서 만들어진다.
이리하여, 각자가 결혼이라는 정점에 진정 도달될 수 있도록 해주기 위해, 인간의 정신적 본성의 두 부분인 의지와 이해성이 부름 받는다. 그래서 각 사람은 자기의 의지와 이해성이 결혼하도록, 다시 말해 영적인 결합으로 두 부분이 하나 되도록 하는 기회가 주어진다.
이를 성사시키기 위해 먼저 진리를 수단으로 주님은 그분이 누구이시며 어떤 속성을 가지셨는지, 우리의 속성은 무엇인지, 그리하여 그분과 우리 사이에는 어떤 관계가 있는지를 가르치신다. 그 다음, 두 번째 초대로서 그분은 그분 스스로가 우리에게 연합하시겠다고, 우리가 그분과 연합하면 어떻겠느냐고 제의하시되 사랑을 수단으로 기회를 제공하신다. 그분은 모든 우리의 애정들을 순수한 생명, 천국의 생명으로 채우시겠다고 우리에게 제의하신다.

잔치

초대받는 저녁 식사나 파티는 상대방과의 유대를 돈독하게 하고자 하는 경우가 많다. 우리가 사랑과 지혜 그리고 선용 속에서 주님을 친구로서 여기고 그분과 하나가 되고자 바랠 때, 우리는 그분의 잔치에 참석하는 셈이 된다. 우리가 주님의 법을 자신의 삶의 원칙으로 여겨 순종 할 때, 우리는 그분을 친구로서 사랑하는 것이다. 그분이 말하시는 바, “내 계명을 새겨 지키는 자는 나를 사랑하는 자이다.” 그리고 “만일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지킨다면, 너희는 나의 친구이다”라고 일러두셨다. 그분의 신성한 사랑으로부터 그분은 영적 잔치를 준비해 놓으신다. 그분은 우리와 하나가 되는데 필요한 모든 것을 준비해 두신다. 그분은 우리에게 진리를 주시고 계신다. 그리고 우리가 그 진리를 기쁘게 사랑하는 만큼에서 진리의 사랑을 채워 주신다. 우리가 영적 결혼에 진입하는 정도만큼에서 그분은 우리의 지식과 애정, 진리와 선과 결혼하신다.
이와 같은 잔치가 교회에 있는 성만찬이요, 이 만찬에서 우리는 주님과 하나를 이루는 가운데 진리의 포도주와 사랑의 빵을 받는 것이다. 그래서 이 성만찬은 영적 결합(communion)이라 불리우는데, 그 이유는 그 속에서 신실한 사람의 심정은 주님께 더 가까워지고, 그분에게서 흘러 나와 유입되는 생명에로 그의 심정을 더 활짝 여는 기회가 되기 때문이다. 이와 동시에 사람들은 서로 서로 더 사랑하는 연합으로 더 친밀해지도록 해준다. 우리가 한 아버지의 사랑 안에서 사랑이 더 증가되듯 서로 사랑하는 가운데 서로의 사랑이 배가되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잔치에 부르시되 우리 인간의 모든 부분, 즉 의지와 이해성, 그리고 행동 측면이라는 모든 부분에 걸쳐 부르고 있으신다. 종교는 “믿음만으로”도 아니요, 사랑 측면만으로도 안되고, 선한 일만으로도 완성되지 않는다. 종교는 선한 일속에서 믿음과 사랑이 하나되는 결혼 속에 존재한다.
다시 말해서 종교는 인간 삶에 있는 즐거움을 부정하는 금욕적 생활 속에 있지 않고, 삶의 모든 부분에 주님을 사랑하는 영이 고루 퍼짐으로서 순수해지고 고결해지는 삶의 충만함 속에 존재한다. 그분이 계신 마음은 기쁨이 있고, 그분의 오른 손에는 언제나 즐거움이 존재한다. 이것이 거듭나는 사람에게 있는 즐거움이다.

짐승과 천사

인간은 동물과 천사를 아울러 가지고 있다. 그런데 인간을 짐승같이 만드는 것은 인간이 가진 자연적인 것이나 육적인 생명이 아니라 자기가 지닌 본성을 남용하는데서, 자연적 삶과 영적 삶을 이혼시키는 데서, 인간 속의 두 본성 사이에 꼭 있어야 할 결혼이라는 원칙을 실제에서 부정해 버리는데서 비롯된다. 인간 속에 있는 모든 애정들이 질서가 있다면, 그것들은 수준 여하를 막론하고 제 위치에서 그것 나름대로 정상적인 것이다. 이 모든 애정들의 품질의 좋고 나쁨은 각 애정에 있는 내향적인 생명에 의존된다. 만일 우리가 이기적인 탐욕을 위해서 그 애정들이 사용되게 몰아친다면, 게다가 타인 속의 선한 어떤 것을 경외하지 않으려 한다면, 우리의 애정은 이기적이고 악한 애정이 되고 만다. 그러나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는 가운데 그 애정들을 사용한다면, 그분이 삶의 더 좋은 품질로 채우시기를 바랜다면, 우리 속의 자연적이고 육적인 애정이라 해도 영적인 것들과 질서 있게 연결을 맺게 될 것이다. 마치 우리의 신체가 그 속에 내재하는 영에 의해 움직여지고 있는 경우나 같은 것이다.
인간은 먹고 마시는 감각적인 삶을 즐기되 그것을 순수한 차원에서 즐기도록 설비되어 있다. 만일 어떤 이가 “살기 위해 먹는다”고 한다면, 그는 먹는다는 것을 즐기는 것일는지 모른다. 그 이유는 먹는 것이 그에게 유용하기 때문이고 먹는다는 목적이 실제의 먹는 것과 맞아 떨어진다. 그러나 만일 그가 “먹기 위해 산다”고 한다면 그는 그의 목적을 감각적 즐거움이나 이기적인 즐거움에 두게 되어 결국 그 사람 전체는 이기적일 뿐이다. 왜냐하면 사람의 모든 행동들은 본인의 인격의 품질을 형성하기 때문이다.

준비

종들이 손님들을 부르러 나갔을 때, 그들은 자기들 주인의 이름으로 “보라 잔치상이 다 차려졌다”고 말했다. “보라(behold)!”란 어떤 문제에 대해 초대자들의 시선을 끌기 위한 말이고, 그렇게 해서 그들 앞에 어떤 사건을 뾰족하게 가져다 놓으려 할 때 사용되는 말투이다. 이와 같이 주님의 말씀 속에 있는 진리들은 우리의 시선을 붙잡아서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을 알 뾰족한 기회를 주고 있다.
“내 황소와 살찐 짐승들을 잡아 모든 준비가 갖추어졌다.” 짐승이란 우리 속의 다양한 애정들을 표현한다. 주님께서는 그분의 원리 중에서 순진이라는 원리를 나타내시기 위해 어린 양이라 불리우셨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헤로데를 여우라고 불러서 여우가 표현해 주는 감각적 교활함을 드러내 보여주셨다. 짐승 중에서 황소는 자연적인 애정들을 표현한다. 이 애정은 우리가 매일마다 틀림없이 실지로 해 가는 애정, 즉 일하는 애정인 것이다. 따라서 황소는 삶 중에 있게 되는 실제적인 애정, 일하는 애정인 것이다. 그러므로 황소는 삶에 있게 되는 선함 중에서 외적인 선(external good)을 표현한다. 그러나 살진 짐승(fatling), 그 짐승이 어리거나 조금 성장한 경우까지 포함해서, 이 짐승은 우리의 두 번째 출생, 즉 거듭남 속에 존재하는 애정인 내적 또는 영적인 애정들을 표현한다. 따라서 이 짐승들은 영적인 선을 표현해 준다. 그래서 거듭나는 사람의 충만된 삶에는 황소와 살진 짐승이 음식으로 준비되어 있다. 즉 자연적인 애정과 영적인 애정이 선하다는 말이고 두 가지 모두가 거듭나는 사람을 위한 양식이라는 말이다. 타락하는 사람은 속으로나 바깥으로나 모두 무질서한 상태인 반면, 거듭나는 사람은 안과 밖 모두가 질서 속에 있고 자유롭고 충만함 속에 안주한다. 주님은 사람들을 부르시되 각자가 충만케 한 삶에서 잔치에 부르신다. 그 이유는 각자가 노력해서 채워진 충만한 삶이란 순수해진 상태의 모든 삶을 말하기 때문이다. 바꿔 말해서 충만하고 유용한 삶을 위해 “모든 준비를 갖추는 것이다.” 주님은 거듭 나는 삶의 기쁨 안에서 그분 자신을 인간과 하나가 되도록 추구하신다.

사람들의 응답

위와 같은 주님의 초대에 사람들은 어떤 일반적인 응답을 할까? 필시 모든 사람들의 경우, 자기는 진리를 사랑한다고, 자기는 선을 행하려 한다고 말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말에 대한 테스트가 자기 앞에 실제로 놓일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거듭나는 삶의 기쁨보다는 오히려 감각적이고 이기적인 쾌락을 선호하는 때가 허다하다.

초대를 대수롭지 않게 여김

손님들이 잔치에 불려졌을 때, “그들은 그 잔치를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즉 매우 적은 성의를 그 잔치에 보였다는 말이거나, 그 잔치의 중요성을 낮게 평가했다는 말도 될 것이다. 선과 진리의 천국적 결혼에 이기적인 마음이 불리워질 때, 그 마음은 결혼이 뭐 그리 대단한 것이냐고 반문하면서 회개나 전환 같은 자신의 변화를 생각지도 않는다. 이와 같은 마음에 천국의 삶은 지상적 쾌락을 위해 필수적으로 중요한게 하나도 없는 듯 여겨진다. 그래서 악한 마음은 천국 삶을 뒤집어서 지상적 삶을 그 위에, 천국적 삶은 아래에 처박아 놓는다. 그런 다음, “그는 자기를 만든 하느님을 저버리고 그의 구원의 바위를 경솔히 평가한다.”

“그들은 제 각기의 길을 갔다.” 이 길이란 정신적인 길, 인간이 생각하고 행동하는 방법을 표현한다. 좋은 의미로 볼 때, 길은 선을 달성하는 방법인 진리를 표현한다. 본문의 경우 나쁜 의미에서인바 길은 악인이 행하는 방법인 거짓 원리들이다. 이 길은 주님과는 거리가 멀고 자아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상황에 놓인 길이다. 그래서 이기적인 사람은 자신을 주님과 분리시키며, 선과 진리의 천국적 결혼에서도 자신을 분리시킨다.

밭과 장사

“자기 밭”이란 그 사람의 의지 또는 심정, 그 사람에게 특유한 애정에 있는 원리들에 관계된다. 그 이유는 밭이란 작물이 자라 오르는 땅이요, 물이 진리를 표현하는데 비해 땅은 선을 표현하기 때문이다. 밭과 대조가 되는 “장사”란 정신적으로 사고 파는 것인 이해성에 있는 생각들을 표현한다. 많은 사람들의 경우 천국적인 애정과 생각들을 사양하고, 대신 자신의 삶의 종류인 악한 애정과 거짓된 생각들, 지옥적인 결혼에 이르는 것을 선호한다.
인간이 거듭나는 삶에 있게 되는 천국적인 잔치에 참석하라는 것을 거절한다는 것은 얼른 생각하면 믿어지지 않을는지 모른다. 그러나 모든 역사는 이러한 거절에 대한 분명한 사실을 예증해 주고 있다. 아마 지상적인 왕이 자신을 초대한다거나, 권력자가 자기를 저녁 식사에 초대할 경우, 그 초대를 우습게 여기거나, 그 초대의 중요성을 경멸하는 이는 없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의 천국의 왕의 초대에 경멸을 보여주는 것은 얼마나 대조적일까? 그러나 감각적인 인간이 영적인 선과 진리의 삶에 하등 매력을 느끼지 않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사실 밭이라든가 장사한다는 것은 그 본연의 모습으로는 매우 좋은 것이다. 한 마디로 필요한 것이요 유익한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것들이 심정, 그리고 육체까지에 이르러 온통 관심사를 독점할 경우, 그것들은 우리로 덫에 걸리게 하고 만다. 따라서 자신이 쏟는 외적 삶이나 일에 대한 관심의 양이 문제가 되는게 아니라 그 관심의 품질이 문제가 되는 것이다. 즉 그가 영적인 목적이나 선용을 위해 관심을 쏟는다면, 그 일은 유용한 것이다. 그러나 인간이 외적인 것들만에 정신을 쏟다 보면, 주님의 진리가 주는 모든 선한 영향력을 그들 스스로 파괴하게 된다.

종들

사람들은 그들의 어린 시절 마음에 주님이 아껴 두신 선하고 신성한 상태(remains)들을 통하여 주님의 말씀을 들으며 그 말씀에 관심을 갖게 된다. 이렇게 주님이 아껴 두신 것들이 주님의 종들이다. 그러나 인간이 “에집트의 고기 가마”를 그리워하게 되면, 그들은 금방 진리에 반대하는 흥분을 갖게 된다. 이 흥분 결과를 본문은 말하기를, “그들은 종들을 붙잡아 때려 주기도 하고 죽이기도 했다” 고 기술해 놓고 있다.
첫 초대는 가르침을 통해 있어졌다. 두 번째 초대는 주님이 아껴 두신 것(remains)을 통해 의지에 전달되었다. 악한 자가 이러한 주님의 종들을 붙잡았다는 것은, 그들이 말씀 속의 진리를 광폭한 의지로 반대했다는 말이다. 그들이 종들을 “때려 주었다”는 것은 그들의 이해성이 진리들을 반대했다는 것으로 종합해서 말하면 그들은 주님의 진리를 조롱하며 경멸했다는 말이다. 그 결과 그들은 종들을 “죽였다.” 이는 그들이 일상 생활 속에서 진리에 반대되게 살아서 그 진리 속의 생명을 그들 스스로 파괴했다는 뜻이다.
유대인들이 주님의 예언자를 얼마나 자주 죽였는지, 아예 신성한 예언자, 예언자 중에서 가장 큰 예언자이신 예수님까지 죽였다는 것은 우리 모두 아는 사실이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너는 예언자들을 죽이고 너에게 보낸 이들을 돌로 치는구나. 암탉이 병아리를 날개 아래 모으듯이 내가 몇 번이나 네 자녀를 모으려 했던가. 그러나 너는 응하지 않았다. 너의 성전은 하느님께 버림을 받아 황폐해지리라.”

심판

“이 소식을 들은 왕은 몹시 노하여 군대를 풀어서 그 살인자들을 잡아죽이고 그들의 동네를 불살라 버렸다.” 인간의 마음과 행동이 어떻게 되어 갈지를 주님은 알고 계신다. 그런데 주님이 들으셨다고 말해질 경우, 이는 주님이 들으셨다는 사실을 인간이 인식했음을 의미한다. 즉 왕이신 진리가 인간에게 각자의 상태를 까 벌려 줄 때를 의미하는 것이다.
이런 상황들은 심판을 말하고 있는바, 이는 인간이 주님의 초대를 거절한 결과이고, 신성한 말씀 속의 진리들에 마땅히 있는 선한 직책의 수행을 인간이 거절한 탓에서 비롯되는 심판이다. 인간이 신성한 진리의 실용적인 사용을 부정하고 거절하는 확증을 자신 스스로 가져 버릴 때, 그들이 알고 있는 진리, 그러나 그 진리를 경멸하고 남용하고 있으면, 그 진리는 그들을 심판에로 가져다 놓아준다. 이 진리들은 영적 삶의 법칙들이다. 그래서 그 진리들은 당사자가 되어지고 싶어 자발적으로 선택한 것들 속에 남아 있도록 판결해 준다.
이리하여 인간이 자기 인격 속에 채워져야 할 용적을 다 채우게 되었을 때, 그는 필시 심판에 서게 된다. 심판이란 자기 인격의 결과, 또는 그 인격이 만들어 낸 바깥쪽의 것들이다. 자기 인격이 고정될 때, 그 심판은 마무리되는 것이다. 만일 인간이 기억 속에 진리를 가지고 있고, 심정 속에 선한 나머지들을 저장해 놓고 있다 하자, 그런데도 그가 주님의 종들인 내향적 진리에 반대되게 자신을 끌고 가려 한다면, 그는 그만큼 더 자신이 사랑하여 살고 싶은 악의 형체가 되도록 스스로를 판결하게 된다.
이렇게 되면 신성한 말씀 속의 진리들은 군대가 되어 심판을 집행한다. 사실 주님이시든, 진리이든, 거기에는 어떤 분노도, 복수도 존재하지 않는다. 분노란 악인 속에 존재하는바, 단지 그 분노가 주님에게 있는 듯 여겨지는 것뿐이다. 그렇게 여겨지는 이유는 하느님에 관한 모든 각 개인의 사상은 당사자들의 인격으로 색칠되기 때문이다.
신성한 진리는 설사 인간이 악하다 해도 그를 공격하지 않는다. 그러나 주님께서 인간에게 그분의 진리를 보내실 때, 악인은 그 진리를 뒤집고, 그것을 자신의 지성 속에서 왜곡시켜 거짓으로 만들어 버린다. 진리를 잡고 있는 마음을 파괴시키는 것은 이와 같이 진리가 왜곡되어 만들어진 거짓이다. 본문에서의 군대들이란 악인의 이해성 속에 들어앉은 거짓들이다. 주님이 화를 내신다고 간주하는 사람의 경우, 실제의 분노는 그 사람의 의지 안에 든 악인 것이다. 마음이 생명의 유일한 근원인 주님에게서 더욱 멀어져 갈 때 이 악에 든 거짓 원리가 선과 진리의 살인자를 오히려 파괴해 준다.

동네를 불사름

“살인자의 동네는 불살라졌다.” 즉 거짓 원리들은 인간 마음에 있는 진리에 관한 모든 교리들까지 파괴한다는 말이다. 동네(city)란 마음에 있는 질서 정연한 교리이다. 이 교리는 영을 보호하면서 영의 손과 발이 되어준다.
불은 사랑을 상징한다. 그러나 뒤집어진 사랑, 악한 사랑은 탐욕이다. 이와 같은 사랑은 악하다. 이 악은 타락하는 마음속에서 그나마 남은 교리라는 동네를 불사른다. “악이 사악한 자를 죽인다.” 악은 인간 자신들 안에 존재한다.
악은 태워 없애 버리는 불이기 때문에 지옥에 있는 악인들은 꺼지지 않는 불 속에 있다고 말해진다. 사실 그 불은 악인들 속에 있는 것이다. 그들이 자신을 더 악한 데로 빠지게 하면 할수록, 그들은 스스로 선하고 진정한 모든 원리들을, 모든 천국적 결혼을, 주님의 현존과 영향력에 속한 모든 것을 더욱 더 파괴시키게 된다. 역사적으로 볼 때, 유대인 속에 있던 이런 악한 사랑, 악한 사람이 주 예수 그리스도를 거절하게 만들었고, 스스로 심판하게 했던 것이다. 주님의 혼인 잔치에 오지 않겠다는 이들은 말씀 속에서 주님을 만나지 않겠다는 이들이요, 일상 생활을 그분의 가르침에 순종시킴으로 신성한 선을 사랑하지도, 채용하지도 않겠다는 이들이다.

두 번째 집단이 초대됨

이제 왕은 초대의 형태를 바꾸어 또 다른 손님 집단을 잔치에 부르고 있다. 그래서 왕은 종들에게 “‘혼인 잔치는 준비되었지만 전에 초청 받은 자들은 그만한 자격이 없는 자들이었다. 그러니 너희는 거리에 나가서 아무나 만나는 대로 잔치에 청해 오너라’라고 말하였다.” 인간은 그가 영적 삶의 가치를 이해하여 음미할 때, 거듭나는 속에서 사랑과 믿음, 그리고 순종하는 가운데 주님을 무엇보다 먼저 사랑할 때, 인간다운 자격이 있는 것이다. 인간으로서의 값어치가 있음, 또는 인간으로서 자격이 있다는 것은 인간의 유전적인 자연적 품질이나 그의 주변 환경에 의존되는게 아니라 그의 거듭나는 상태에 달려 있다. 한 마디로 천국적 결혼에 진입하는 정도만큼에서 인간은 “자격”이 주어지는 것이다.
주님의 말씀 속의 신성한 진리, 비록 그 진리가 가르쳐진 사람에게 거절되긴 했지만, 그 진리는 다른 사람들의 마음, 즉 무지로 인해 거짓 속에 처박혀 있던 마음에서 그 거처를 발견한다. 이들을 가르치심으로 주님은 그들과 하나를 이루게 된다.

거리

성경을 보면 가난한 자들이 잔치 자리를 채우기 위해 거리나 길에서 불리는 경우가 더러 있다. 정신적인 길이란 마음이 그 나름대로의 목적을 향해 움직여 가는 방향 또는 길을 말한다. 인간의 정신적인 길이 어떠한지는 그 사람 속에서 통치해 가는 사랑이 무엇인지에 달려 있다. 큰 도로(highway), 또는 주요 도로란 마음의 중요 도로이다. 길, 진리, 또는, 교리, 이것을 가지고 인간의 마음은 그의 통치하는 목적을 향해 여행한다. 본문의 거리라는 단어를 보다 더 직역한다면, “큰 도로가 갈라지는 곳,” 즉 교차로(네거리)라고 볼 수 있다. 천국으로 가는 큰 도로란 주님의 말씀 속의 진리들이다. 그러나 “큰 도로가 갈라지는 교차로”란 마음속의 간접적인 길, 덜 명확하게 보이는 길, 그래서 잘못 하면 평탄하지 못한 길로 들어 설 수 있는 곳이 교차로일 것이다.
씌어진 말씀을 가지지 못했던 이방인들은 천국으로 가는 직선 도로를 알지 못했다. 그 대신 그들은 거짓 교리나 잘못된 견해라는 교차로에서 배회하고 있었다. 한 마디로 그들이야말로 “어둠 속에서 길을 걷던 백성들”이었다. 교회라는 측면에서의 유대인들은 아무 가치가 없었다. 그래서 이방인들이 새 교회가 되도록 부름 받아졌다. 그들은 무지했던 가운데 일부는 마음이 선의적이었고, 또 일부는 악하기도 했다.
그런데 우리의 마음은 이방인의 상태와 유대인의 상태 모두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우리의 주님은 정신적 삶의 큰 도로인 그분의 직접적인 진리를 수단으로 우리로 자신들의 악에서 되돌아서게 하실 수 없을 때, 그분은 그분의 종들인 거룩한 말씀 속의 진리들을 우리 마음속의 이방인 상태인 자연적 마음속에 남은 선의적인 상태에 호소해 보도록 파견하신다. 그러나 그곳에서도 우리는 종종 그분이 보여주시는 명백한 도로로 여행하기를 거절하는 바, 결국 그분은 우리를 정신적 삶의 교차로에서 만나신다. 이 지점은 주님이 우리를 간접적으로 만나시는 방법, 아마도 훈련이라는 것을 허용하심으로 우리와 만나질 수 있게 인도하시는 방법이다. 이리하여 천국 가는 길은 각자의 상태에 알맞은 처방에 의해 결국 당사자에게 매력적일 수 있게 된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이것이 네가 걸을 길이다”고 우리 뒷전에서 말하는 소리를 듣게 된다.

손님을 데려옴

“그래서 종들은 거리에 나가 나쁜 사람 좋은 사람 할 것 없이 만나는 대로 다 데려 왔다. 그리하여 잔칫집은 손님으로 가득 찼다.” 우리의 감각적인 마음에 의해 경시되고 있던 주님의 말씀 속의 진리들은 우리 생각과 느낌의 교차로, 옆길인 간접적 방법까지 동원해서 우리에게 다가온다. 이 진리들은 마음속의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자연적 마음속의 모든 것에 영향을 주려고 애쓴다. 그 이유가 주님의 말씀은 모든 것에 보내져서, 가능만 하다면 모든 것이 거듭 나아가도록 추구하기 때문이며, 하늘 나라와 영적인 결혼 잔치는 인류에서 온 손님들로 메워져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신성한 진리는 모든 이에게 주어지고 있고 신성한 섭리 역시 모든 이에게 작용한다. 특정한 누군가가 지옥에 가도록 예정되어 있는 것은 하나도 있지 않다. 사실 모든 인간에게 신성하게 의도된 예정이 있다면 그것은 천국이다. 영의 혼인 잔치는 모두를 위해 차려져 있다. 그 잔치에 참석 않는 자, 또는 잔치하는 동안 남아 있지 못하는 자는 신성한 사랑과 지혜가 베푸는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자신 속의 이기적이고 악한 삶을 기꺼이 떨구지 못하는 자들이다.
“임금이 손님들을 보러 들어갔더니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이 하나 있었다.” 잔치를 준비하고, 손님들이 다 모이면 주인은 그들을 보고 말을 건네면서 인사하는 것이 통상적인 관습이다. “임금”이란 주님이시다. 그분이 손님을 둘러보신다. 인간의 마음 안에 더 많은 신성한 영이 흘러들면 인간에게 심판이 산출된다. 만일 그가 주님을 사랑하고 있다면, 그는 자기 악을 더 많이 꺼내서 치워 버릴 것이나, 그가 주님을 사랑하고 있지 않다면, 그는 자기가 아는 선과 진리마저 더욱 거부할 것이다.
예복을 안 입은 사람도 친구의 차원에서 말을 건네고 있다. 보다 더 직언 하면 이 친구(friend)란 안면이 있는 사람(acquaintance)이라 할 수도 있다. 안면은 있으나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이란 진리를 알므로 해서 주님을 알고 있는 자, 그러나 자신이 알고 있는 진리를 사랑하지 않는 자, 따라서 주님을 사랑하지 않는 자를 의미한다.

예복 (the wedding-garment)

임금이 손님을 보러 들어갔을 때, 그는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을 발견했다. 다시 말해 그 사람은 때와 장소에 알맞은 옷을 입지 않았다는 말이다. 이 대목을 글자대로 읽고 요즈음의 상식까지 동원해서 생각한다면 예식장에 적합한 옷차림을 하지 않는데 대한 처벌로는 너무 매정하고 불공정한 처사일 듯 보일는지 모른다. 사실 그 사람은 길거리에서 느닷없이 초청 받은 상태이니 어쩌면 집에 돌아가 잘 차려 입을 시간적 여유도 없이 예식장에 왔을는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옛 시대의 고관 대작들의 상설된 연회장에는 언제나 여유 있는 예복을 비치해서 손님이 사용하게끔 되어 있다. 그렇게 해서 잔치에 오는 손님들의 편의를 보아주었다. 만일 그런 편의 마저 마다하고 예복을 입지 않으면 이는 주인을 우습게 여긴 격이 되고 만다. 따라서 연회장의 규칙을 위반한 자는 그 집에서 쫓겨나야 할 것은 지당한 것이다.
이 본문을 영적 의미에서 보면, 이 사람은 불법을 저질러 영적 혼인 잔치에서 자신을 축출시킨 것이다. 신성한 성경 내의 여러 곳에서 사람이나 천사의 의복, 주님의 의복을 언급할 때가 있다. 일례를 들면, 예수님의 변모하심에서, 그분의 외모 변화는 그분의 겉옷까지도 변화시키게 해주었다. 겉옷 또는 의복은 진리들을 표현하는데, 마음을 옷 입히고 있는 것이 진리이다. 모든 애정들은 그 애정에 합당한 진리로 입혀지고 표현하여 그 애정을 드러낸다. 활기 있는 강력한 애정들은 그 자체를 박력 있는 생각과 언어로 옷 입히고 있다. 그러나 냉담하고 꿈 같은 느낌은 쉽고 온건한 생각과 말로 서서히 그 모습을 드러낸다.

예증

시편 104편에서 우리가 주님에 관해 “두루마기처럼 빛을 휘감았습니다”라고 읽게 된다. 빛은 진리의 상징이고, 진리는 마음의 빛이다. 주님은 진리를 가지고 옷을 입으신다. 주님의 겉옷은 신성한 진리이다. 그래서 교회에 대해 전하는 주님의 말씀은, “예루살렘, 거룩한 성아 네 아름다운 옷을 입어라” 이었다.
정신적인 결혼이 선과 진리의 하나됨 또는 사랑과 지혜의 하나됨이듯, 예복을 차려입음은 사랑되어 실제에 쓰여진 진리, 즉 사랑과 결합한 진리이다. 예를 들면, “믿음만으로” 붙잡고 있는 진리는 결혼 예복을 입은 상태가 아니다. 그 이유는 그 진리가 애정과 결혼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임금이 준비해 놓은 옷으로 치장하지도 않고 혼인 잔치에 모습을 드러낸 사람이란, 천국의 진리로 자기 마음을 옷 입히는 노력도 없이, 선과 진리의 천국적 사랑과 영적인 결혼도 하지 않은 채, 자기의 일상 생활에서 선과 진리가 실지로 사용되어 확증하지도 않은 채, “믿음 만”에 의해 거듭나는 삶의 천국적 기쁨을 달성하여 즐겨 보겠다는 사람, 그야말로 손도 안대고 코풀겠다는 항간의 말들이나 다를 바 없는 사람이다.
주님의 말씀 속의 진리는 인간으로 잔치에 오라고 부르고 있지만, 불림을 받는 각 사람은 그분의 초대를 위해 준비해 두신 임금의 옷장인 신성한 성경으로 자신들의 행동 지침을 삼고 있어야 할 것이다. 즉 임금의 아들의 혼인 잔치에 걸맞은 예복으로 자신을 옷 입히고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예복을 입지 않음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이란, 신성한 말씀의 부름에서 천국적 삶을 영위해 보려고 시도하고, 주님과 절친한 교제를 해보겠다고 작정하면서도 진리를 사랑해서 진리대로 살아 보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 사람, 회개와 개혁은 자기에겐 필수 사항이 아니라고 하면서 선한 척 하는 사람을 말한다. 천국적 원리를 자신 스스로 받아 쥐되 인간 쪽에 할당된 의무를 도외시하는 이들에게 주님은 천국을 허락하실 수 없으시다. 천국적 원리를 받아 쥔다는 말은 그 원리로 자기 삶을 꾸려서 자기 삶이 그 원리가 진리임을 확증해 보여 자기 속에 고정시키는 것이다. “너희는 나를 향해 주여, 주여 하면서도 내가 말한 사항들을 왜 지키지 않느냐?” 는 주님의 나무람을 우리는 상고해 보아야 한다.
주님이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을 “보셨다”는 것은, 신성한 진리의 현존은 그 인간의 진짜 인격을 그 사람에게 까 벌려 주신다는 뜻이다.

최상의 의미

가장 높은 의미에서 볼 때, 우리가 왕의 아들의 혼인 잔치에서 입어야 할 예복이란 주 예수 그리스도라는 신성한 인성 속에 있는 진리이다. 그 안에서 신성과 인성이 한 분 하느님 예수 그리스도의 한 인격 속에서 결혼되고 있다. 이 위대한 진리를 넘치는 사랑으로 받는 신실한 마음은 주님에 관해서 그리고 그분의 거룩한 말씀을 영적으로 합리적으로 이해되도록 마음의 안쪽이 열리어 진다. 그래서 사랑과 지혜의 잔치인 그분의 말씀 안에서 주님과 상호 교통을 가진다.
이래서 주님은 모든 사람, 이방인들까지 포함된 모든 사람이 그분의 거룩한 말씀 속에 든 선하고 참된 것을 즐기도록 부르시고 있다. 그분은 모든 이에게 이 잔치를 즐기도록 홍보하시되, 참석자는 반드시 자신들을 정신적으로 옷 입혀야 한다는 것, 즉 삶의 계명인 말씀의 글자 속의 진리로 그들의 정신을 옷 입혀야 한다고 일러두신다.
그러므로 만일 누군가가 진리를 사랑하지도 않고 진리를 실생활에 사용하지도 않는다면, 그가 지닌 진리에 대한 이론뿐인 지식은 천국적인 잔치를 위해 자기 마음을 잘 치장하지 못할 것이다. 심판 속에서 그는 진리의 삶도 없이 존재하는 인간으로 보여질 것인바, 그는 기껏 소유한 진리의 지식마저 잃게 된다. 그 이유는 인간이 저 세상까지 들고 갈 수 있는 것은 지상에서 실습해 쌓아 놓은 삶에 속한 것들뿐이기 때문이다. 진리를 알되 진리를 사랑하지도, 사용하려 들지도 않은 이들은 그가 지닌 이론적인 것까지 모조리 저 세상에서는 거절당한다.
만일 이들이 천국에서 자기들이 지녔었다고 하는 믿음을 근거로 진리의 소유권을 주장한다면, 즉각 천국의 밝은 빛이 그들 마음에 비쳐질 것이고, 그 빛은 그들에게 자신들의 진짜 인격이 어떤 모습인지, 천국의 진정한 속성은 그들 속성과는 전연 같지 않다는 것을 확실히 해준다.

할 말이 없음

위와 같은 사람들은 비유 속의 사람 같이 “할 말이 없다.” 즉, 그들은 천국적 삶을 위해 자신이 부적당함을 확인하게 되어 어떤 변명도 내놓을 수 없다는 말이다. 언어란 생각의 표현이다. 할 말이 없는 자란 자신의 방어를 위해 말할게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고, 표현할 생각도 전연 없는 자이다. 이를 영적으로 보면 그는 천국적 삶에 관해 생각 조차 해보지 않는 사람이다. 그 이유는 그가 천국적 진리로 정신적인 옷을 입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묶음

악이 애정과 은밀한 생각까지 지배토록 되었을 때, 악은 그 인간으로 죄의 노예가 되게 묶는다. “죄를 짓는 자는 누구든지 죄의 종이다.” 이리하여 왕은 예복을 차려 입지 않은 사람에 관해 그의 종들에게 말하기를, “이 사람의 손과 발을 묶어 바깥 어두운 데 내어 쫓으라” 했다. “손과 발을 묶는다”는 것은 마음의 외면과 내면에 있는 능력과 자질을 묶는다는 말이다. 그 이유는 손은 위쪽에서의 말단이고 발은 아래쪽에서의 말단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손과 발 모두는 우리의 능력을 표현하는바 손은 일로, 발은 걷는 것으로 제 능력을 발휘한다.
이러므로 악은 죄에다 인간 전체를 묶는다. 그래서 악인이 타인에게 악을 행하는데서 제지당할 때, 그 악인은 주님이 그들을 묶는다고 말하지만, 사실 그들이 자신의 악으로 자신을 묶는 것이다. 실지로 주님은 이 악인들에게 다가 가신다 해도 “그들이 포로됨에서 자유를 선포하시기 위해서,” 그들을 억류해 놓은 감옥을 열어 자유를 주시기를 바래서일 것이다.

내어쫓음

악들은 인간을 주님으로부터 내어쫓는다. 멀어진 인간의 인격은 주님을 더욱 더 적대시하여 “사람의 자, 곧 천사의 자”라는 표준에서 더욱 멀어져 간다. 그는 천국적 결혼에서 자신을 더욱 멀어지게 한다. 그리하여 결국 그는 바깥 어두운데, 즉 거짓에 자신을 던지고 만다.
거짓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무지 또는 가르침의 결핍으로 인한 거짓인데, 이는 변명할 수 있는 거짓도 된다. 또 하나는 악의 거짓, 이는 내심에서 오는 의도적인 거짓이어서 변명의 여지가 없다. 후자는 진리를 알고 있음에도 진리를 사랑하지도, 행하지도 않는 마음이요, 이 마음이 있을 곳은 바로 바깥(지독하게) 어두운 곳이다. “만일 네 안에 있는 빛이 어둡다면, 그 어두움이야말로 얼마나 큰 어둠이겠느냐.” 어두움의 두 종류가 이사야 60장 2절에서 거론되고 있다. “온 땅이 아직 어둠에 덮여 민족들은 암흑에 싸여 있는데…” 인간이 가진 빛이 크면 클수록, 그가 그 빛을 거절할 때 있게 되는 그의 어두움은 더욱 더 짙어 진다. 태양이 병든 눈을 거절해서 피하는게 아니듯, 인간을 거절하는 것은 주님이 아니라 그 인간의 병든 마음인 것이다.

통곡함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슬피 운다는 것”은 의지의 불행한 상태를 암시한다. 그 이유는 그 인간은 악으로 인해 필시 불행을 자초하고, 자기 욕구를 채우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를 갊, 또는 가슴을 침”이란 지성이 불안한 상태이다. 이 지성은 진리와의 격렬한 충돌 속에 있을 것이고 진리의 빛이 그 지성을 뒤흔들 것이기 때문이다.

부름 받음과 선택받음

“부르심을 받은 사람은 많지만 뽑히는 사람은 적다.” 글자대로 보면, 이 말은 히브리 군인들과 관계가 있다. 20세 이상의 모든 남자는 부름 받아 등록된 뒤, 전쟁이 일어나면, 이 남자들은 열병을 거쳐 그 전투에 적절한 숫자만이 “뽑혀졌다.” 그래서 히브리 군인들은 바후림(bahurim)이라 불렸는데, 그 뜻은 “뽑힘, chosen”이다.
영적으로 불리운 모든 사람이란 주님의 말씀 속에 있는 진리를 들은 이들이다. 뽑힌 사람이란 진리를 듣고, 들은 진리를 사랑하여 행동에 옮긴 이들이다. 즉 주님의 진리를 실제 삶의 원리로 선택한 사람들이다. 인간의 구원은 진정한 교리를 아는 지식만 가지고 되는게 아니라 아는 교리에 따라 살아간 정도에서 구원되어진다. 그렇게 산만큼 그는 자기 지식과 그의 사랑이 영적으로 결혼한 것이고, 자기와 주님이 하나인 것이다. 그래서 “주님과 함께 있는 그들은 불리우고, 뽑히었는바 성실한 이들이다.”

많음과 적음

영적으로 숫자는 양을 표현하지 않고 질을 표현한다. 뽑힌 적은 사람들이란 주님에 대한 사랑과 믿음 그리고 순종이라는 선한 삶에 필수적인 원리들을 잘 배양해 간 사람들이다. 불리운 많은 사람이란 악한 사람 속에 있는 수많은 이기적이고 세상적인 원리들을 가지고 살아온 모든 이들이다. 주님은 선함의 혼인 잔치에 만인을 초대하신다. 이런 그분의 은총 있는 초대는 제각기 다른 사람에 의해 제각기 다른 영접과 취급을 당한다. 주님은 그분이 하실 수 있는 모든 것을 만인을 위해 해 두신다. 그러나 인간은 자기들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주님께서 말하신다. “예루살렘 시민들아! 유다 백성들아! 이제 나와 포도밭 사이를 판가름하여라. 내가 포도밭을 위하여 무슨 일을 더 해야 한단 말인가? 내가 해주지 않은 것이 무엇이 있는가? 포도가 송이송이 맺을까 했는데 어찌하여 들포도가 열렸는가?… 만군의 야훼의 포도밭은 이스라엘 가문이요, 주께서 사랑하시는 나무는 유다 백성이다. 공평을 기대하셨는데 유혈이 웬말이며 정의를 기대하셨는데 아우성이 웬말인가?” (이사야 5:3,4,7).

차이점

오늘 비유는 앞의 비유 “사악한 소작인”과 매우 유사한 듯 보인다. 그러나 앞의 비유는 이해성의 상태에 관계되는 진리를 거절하는 것이고, 오늘 비유는 의지의 상태에 관련되는 선을 거절함이다.

예증

선과 진리의 천국적 결혼에 진입하기를 바래지 않는 사람이 많다는 사실은 매우 슬픈 일이 아닐 수 없다. 이 모습은 오늘 날 사회에서의 결혼 관념이 매우 흐트러진 상태에서 쉽게 예증된다. 사실 어떤 한 쌍이 결혼했을 경우, 그들의 결혼 상태는 대체로 그들이 살아가는 주위 공동체의 영적 상태와 관련이 깊다. 얼마나 그 공동체가 결혼의 천국적 근원을 암시해 주고 잘 준수하느냐에 달려 있다는 말이다. 게다가 그 공동체가 얼마나 이기적이고 세상적이며 감각적이느냐에 따라 그 안에서 결혼한 부부의 상태도 상당한 영향을 받게 된다. 이런 악영향으로 많은 남녀들이 오로지 세상적 동기만을 가지는데 급급하여 결국 결혼의 거룩한 용도를 뒤엎고 마는 것이다.
그래서 사회적 결혼이라는 문제에 대해서도 새교회인은 자기 나름대로 수행할 어떤 의무를 가진다. 사실 우리는 주위 공동체, 더 나아가 사회 전체를 조절할 수는 없지만, 자신의 경우만큼은 자신에 의해 조절이 가능하리라 본다. 우리는 내적 결혼과 외적 결혼 사이의 관계를 가르치고, 그 본을 보여 줄 수 있다. 특별히 우리는 자기 자녀만큼은 사회에서 우세해져 가는 결혼에 관한 참담한 거짓들에 빠지는 것에서 우리의 노력 여하에 따라 예방이 가능할 것이라 본다. 신실한 사랑이 아닌 어떤 다른 원인에서 결혼하는 남녀들, 또는 결혼 관계를 우습게 여겨 그 본성을 쉽게 변질시키는 남녀들은 영적 파멸을 향한 긴 스텝을 밟게 되는 것임을 우리는 직시하여 이를 합리적으로 자녀들에게 설명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내적이든 외적이든, 결혼을 우습게 여겨 버리는 이들에겐 화가 있을 뿐이다. 그 이유는 그들의 영적 파멸이 바야흐로 있어지기 때문이다. 거룩한 말씀 속의 진리 안에서 복을 내리시는 주님은 천국적 삶의 혼인 잔치에 우리를 부르고 계신다. 그리고 영적 결혼을 달성하는데 있어 가장 효과적인 수단의 하나는 진지하고 순수한 외적 결혼이다.

17
잎이 돋는 무화과나무
– 재림의 표시 –

성서 본문: 마태복음 24장 32-35절

32. “무화과나무를 보고 배워라. 가지가 연해지고 잎이 돋으면 여름이 가까워진 것을 알게 된다. 33. 이와 같이 너희도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보거든 사람의 아들이 문 앞에 다가 온 줄을 알아라. 34. 나는 분명히 말한다.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이 모든 일들이 일어나고야 말 것이다. 35. 하늘과 땅은 사라질지라도 내 말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새 생명

이 비유는 두 번째 오심과 관련이 있다. 인간을 향한 신성한 영향력은 그 힘이 올 때마다 새로운 처방을 가지고 인간에게 영향을 주는데, 이는 인간들에게 보다 더 크게 우세해진 선과 진리에 의해 점철되어진다. 인간이 선과 진리에 무관심하다가 결국 그것들에 반대할 때, 주님은 이전에 인간에게 보여진 형태와 다른 형태로 인간에게 나타내 보이시고, 그것을 인간이 기꺼이 원해서 그 원리에 대한 인간의 사랑이 새롭게 갱신되면서 응용할 수 있게 배려하신다. 더 나은 것에로 되돌아가는 인간의 움직임은 그들 생활에 있어지는 더 많은 실제의 선에 의해 두드러진다. 이런 실제의 선함이 증가함은 인간 구원을 위한 신성한 생명의 새로운 유입에 대한 표징이기도 하다.
여름철 새 생명의 활동은 가지가 연해지고 새 잎이 돋아남을 보고 알듯이, 새로운 활동은 새 생명에 대한 표시인 것이다.
이 비유 앞 문단에서 예수님께서는 그분의 제자들에게 그분의 재림과 그 재림이 가져올 교회와 세상에 있을 결과에 대하여 말하셨었다. 상징의 언어로 악의 파멸과 선의 쾌거를 초상화 해주신 것이다.

일어나는 것들

본문과 아주 밀접한 관련을 맺는 구절은 이 비유 앞의 구절들이다. 즉 “그런 재난의 기간이 지나면 곧 해가 어두워지고 달은 빛을 잃을 것이며 별들은 하늘에서 떨어지고 모든 천체가 흔들릴 것이다. 그러면 하늘에는 사람의 아들의 표징이 나타날 것이고 땅에서는 모든 민족이 가슴을 치며 울부짖을 것이다. 그 때에 사람들은 사람의 아들이 하늘의 구름에 권능을 떨치며 영광에 싸여 오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그리고 사람의 아들은 울려 퍼지는 나팔 소리와 함께 천사들을 보내어 그가 뽑은 사람들을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사방에서 불러 모을 것이다.” 이것들이 본문에서 말하려 하고 있는 것들이어서, “이와 같이 너희도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보거든 사람의 아들이 문 앞에 다가온 줄 알아라” 라고 말씀하셨다.

영적 의미

그러므로 오늘 비유를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이런 일들”이란 말씀이 무엇을 표현하는지에 대해 어떤 윤곽을 가져야 한다. 주님은 비질서적 삶 속에서 결과되는 사랑과 믿음의 손실로 인한 첫 기독교회의 파멸에 관해 말씀하신 것이다. 해가 어두워짐이란 빛의 손실, 즉 주님을 사랑하는데 실패했기 때문에 야기되는 신성한 진리의 손실을 표현하신 것이다. 그리고 달이 빛을 잃는다 함은 믿음의 손실을 표현하는데, 그렇게 되는 이유는 이웃을 사랑함을 실패한 연유에서이다. 별들이 떨어짐이란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의 손실을 표현한다. “하늘의 권능(모든 천체)이 흔들린다”는 것은 교회의 기반이 위와 같은 손실로 해서 깨어질 것을 의미한다.
이리하여 주님이 처방하셨던 첫 기독교회는 끝이 오게 된다. 그러나 주님은 신성한 진리로 다시 오시어서 선과 진리를 사랑하는 자, 영적 생명 때문에 심히 슬퍼하는 사람들에게 생명을 주시게 된다. 이를 위해 주님은 거룩한 말씀의 내면에 있는 영적 의미를 밝히 알게(계시)해주셔야 했던 것이다. 이 영적 의미 속에 있는 진리가 사람들 사이에서 선하고 신실한 자들을 함께 모아 새 교회를 건설하시는 수단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본문은 이 새교회의 시작과 그 시작의 표시가 될 것들을 암시해 주고 있다.

나무들

나무들은 생생하게 살아 성장하는 마음 속의 원리들을 표현한다. 성경 속에서 나무들에 대한 언급은 상당히 많은데 그중 특별한 나무의 언급으로는 올리브나무, 포도나무, 무화과나무가 있다. 상징적 언어에서 이 세 나무는 인간 삶의 불연속적 등차인 천적 등차, 영적 등차, 자연적 등차를 표현한다.
올리브나무로 표현되는 천적 등차(the celestial degree)는 주님을 사랑하는 등차요, 마음과 삶 속에 무엇보다 주님을 사랑함이 가득 차 있는 사람이 이에 해당되는 바, 그 사람의 의식 세계에서의 원동력은 주님을 사랑함이다. 이는 또한 선을 사랑함이라고 바꿔 말할 수도 있다.
포도나무로 표현되는 영적 등차는 이타애의 등차 또는 이웃을 사랑함이 원동력이 되는 사랑으로 진리를 사랑함을 원동력으로 삼는 이들이다.

무화과나무

무화과나무로 표현되는 자연적 등차는 법에의 순종을 사랑하는 등차이다. 이는 행동면에서 올바르게 처신하는 것을 사랑함인데, 때로 이 등차는 주님을 사랑하는 의식 세계나 진리 속의 원리들을 확실히 알지 못한 상태에서도 존재한다. 이와 같이 무화과나무는 자연적 등차, 자연적 인간, 또는 인간의 자연적 마음을 표현해 준다. 동시에 무화과나무는 자연적 또는 외적인 교회를 표현하는데, 이러므로 해서 내적 또는 영적 교회와 구별된다.
그중 자연적 인간으로서의 무화과나무를 거론해 본다면, 이 나무의 가지란 인간의 애정들이고, 이 애정들은 그 사람의 원동력이 저장된 창고, 즉 통치하는 사랑(ruling love)으로부터 모든 측면으로 가지(애정)를 뻗쳐 간다. 그리고 그 잎이란 진리를 생각함이요, 이 생각들은 그 사람의 애정에서 발출된다.

연한 가지

따뜻해지는 봄이 되돌아오면, 나무들은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 우선 가지들이 물이 차서 연해지면서 새 잎이 돋아난다. 이와 같이 인간의 마음속에서 새 삶이 일어나면 그 사람의 애정들은 연하고 부드러워진다. 그런 부드러운 애정에서 새로운 생각들이 튀어나와 진리에 관한 새로운 상태에 진입하여 새 삶의 발달이 이루어진다. 인간 속에서 역사하는 하느님의 영향력은 나무의 수액(sap)과도 같아 애정들을 더 새롭고 부드럽게 해주신다.
우리의 신체 속에서도 부드러운 부분들이 더 활기가 있어 생명이 더 가득 차 있다. 딱딱한 부분, 즉 뼈나 피부, 머리털 등은 활력이 가장 적어 생명을 수용하는 신체의 그릇 중에서 가장 적은 생명을 지닌다. 나무에서도 생명과 성장은 딱딱하게 고질화된 부분이 아닌 부드럽고 연한 부분에서 있어진다. 겨울 동안 나무는 딱딱하다. 그러나 되돌아오는 따뜻한 계절은 새 생명을 가져다주어 그 가지들로 연하고 부드럽게 하여 새 잎이 돋아나게 한다.

따뜻한 계절

따뜻한 계절은 열과 빛이 다함께 존재하여 하나로 작용할 때이다. 우리의 삶과 성장에 있어 따뜻한 계절은 진리의 빛과 사랑의 따뜻함이 하나로 묶여 작용할 때이다. 우리의 정신적인 여름은 우리 속에 새 생명이 활동하는 때이다. 그 때란 우리의 마음과 삶에서 있어지는 교회의 새로운 상태인 것이다. 우리의 믿음과 사랑이 하나가 될 때, 이 하나됨은 우리 삶의 원리의 결실인 선한 행위가 생산된다.
이런 마음의 상태는 우리의 의지가 부드러워지는 시작에서, 자아 사랑이라는 딱딱함이 그 딱딱함을 덜 보여 줄 때, 그러면서 타인을 사랑하는 부드러움이 더 증가될 때 우리 곁에 바짝 붙게 되고, 이 새로운 부드러움으로부터 우리는 정신적인 잎인 진리에 대한 새로운 생각들이 새 삶의 증거로서 산출된다. 즉 모든 적극적인 애정은 생각과 상응되는 것들을 계속 생산해 간다는 말이다.
누군가의 지성이 매우 적극적으로 움직이는 상태, 수많은 생각의 다발들이 발견되는 곳에서 늘 발견되는 것은 그 사람의 그런 상태는 그 사람의 어떤 애정이 적극적으로 활동한 결과라는 것이다. 지적인 활동이 영적으로 선하고 참된 생각 속에 있을 때, 선하고 유용한 일 속에서 그 자체를 체현해 내게 되므로, 이는 그 사람에게 정신적인 여름이 가까웠다는 것을 우리로 알게 해준다.
그렇게 알 수 있는 이유는 영적인 여름의 가까움은 시간 속에 있지 않고 상태 속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물론, 자연계에서는 시간과 함께 온다. 그러나 정신 세계에서는 상태나 상황들이 함께 오는 것이다. 따라서 “좋은 때가 온다는 것”은 좋은 상태가 온다는 것이다. 그렇게 옴은 우리가 그 상황 안으로 진입한다는 말이다.

새 성장

새교회가 주님에 의해 형성되어질 때, 그 교회의 성장에 대한 첫 증거들은 자연적 선함에 관한 생각들 중 더 널리 보급된 생각 속에 있게 된다. 그 이유가 모든 진리는 실제에 존재하여, 실제적인 결과를 끌어 내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새 생명이 인간 삶에 작동되어질 때, 그에 대한 첫 증거는 그 사람의 행동에 관한 생각에서 보여진다.
그리하여 새 생명이 작동을 시작하게 되면, 우리는 다른 측면에서의 변화도 반드시 있어야 되는데, 그것은 옛 느낌과 생각을 부서뜨리는 일이다. 그 이유는 옛 느낌과 생각이 부서질 때까지 새로운 삶 속에 그의 이해성의 새로운 상태나 새로운 애정으로부터 오는 새로운 느낌과 생각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가 옛 조건들을 포기하여 그것들의 성장을 저지시킬 때에야 비로소 그는 새 상태에 들어가는데, 마치 소년이 어른이 되려면 소년기를 넘어서야 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이 성장은 점진적으로 되는게 원칙이고, 이는 거듭나는 마음이라 해도 마찬가지이다. 마치 씨에서 열매로까지 가는 나무의 경우나 같을 것이다. 질서의 회복은 악과 거짓 그리고 죄들을 부수고 선과 진리 그리고 의로움의 성장이지만, 이것도 점진적인 성장의 법칙에서 예외 되지 않는다.

옛 것과 새 것

그러므로 옛 조건들을 부수는 것은 새 것이 온다는데 대한 예언이다. 그 이유는 새 것의 영이 옛 것을 부수기 때문이다.
그래서 세상에 오신 예수님께서는, “성서에 ‘사람이 빵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리라’고 하지 않았느냐?” 라고 가르치셨던 것이다. 지상에 인류를 보존하시기 위해 어떤 교회가 하강한다 해도 그 하강 뒤에는 반드시 새교회가 이어져야만 한다. 따라서 어떤 교회의 하강을 우리가 보게 된다면, 그리고 그 교회의 파멸이 임박했다면, 필시 새로운 처방이 있어진다는 것을 우리는 눈치채야 한다.
“이와 같이 너희도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보거든 사람의 아들이 문 앞에 다가 온 줄을 알아라.” 이렇게 우리가 알게 되는 이유가, 인류는 주님과의 의식적인 연결이 아니고서는 어떤 방법으로도 보존될 수 없다는 법칙 때문이다. 따라서 어떤 교회에 대한 처방이 빠른 하강 길에 접어들고 주님의 통로가 막혀버린 것을 보게 될 때, 인간 구원을 위해 주님이 머지 않아 새 처방, 즉 새교회를 구성하실 것임을 알아야 한다.
오늘 비유는 구 교회의 하강과 새 교회의 일어남이라는 두 사건과 관계가 있다. 구 교회가 하강되는 이유는 그들의 삶 속에 악이 드리우고 거짓된 가르침이 우세해짐으로서 영적 진리에 대한 명백한 지식은 그 교회에서 더 이상 존재할 자리를 갖지 못하는 바, 이와 같은 명백한 지식과 이해성 대신, 거기에는 수많은 분노하는 논쟁과 당파적인 편협된 신앙으로 가득 찬다. 이런 국면에서는 선과 진리의 진정한 품질을 인식하거나 보는데 영영 실패하고 말아 결국 그들은 자기들이 알았던 선과 진리마저 모독해 버린다.
이럼으로써 구 교회는 끝장을 맞이하는데, 이것이 성경에서 “시대의 종말, the consummation of the age” 이라고 일컫고 있다. 우리가 흔히 접하는 번역 성경에서는 “세상의 끝, the end of the world” 이라고 번역되어 있다. 이런 교회 상태의 끝에서 새교회가 시작되어 계속 인간들이 악에서 구원 될 수 있게 배려된다.

새교회에 관한 증거

이 비유는 인간의 자연적 평면에서 있게 되는 더 부드럽고 더 수용적이면서 더 유용한 삶을 추구하는 모습들이 인간들 사이에서 증가하는 것을 발견하게 되면 새교회가 시작되었다는 증거로서 보아야 한다고 가르친다. 그 이유는 어떤 효과 있는 원인도 없이 더 나아지는 쪽으로의 성장이 있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 만일 그들이 더 향상되고 있다면, 이는 필시 그 사람에게 그를 더 향상시키는 뭔가가 존재했던 탓이다. 그리고 모든 선의 근원이신 주님으로부터 뭔가가 그에게 왔다는 증거도 된다.

심판

옛 것과 비질서적인 자신 속의 상태들을 깨트리는 것이 옛 상태 속에 있는 사람들에게 있어지는 심판이다. 이와 같은 심판과 그 심판의 결과로 인간은 더 자유롭게 생각하게 되고 더 새로운 생명을 받을 수 있게 된다.
이와 같은 모습을 우리의 신체 조건에서 예를 들어 생각해 볼 수 있다. 때때로 사람들의 건강이 악화되어 열이 치솟을 때가 있다. 이 때의 열은 신체의 불완전한 조건에 대한 심판이다. 만일 아픈 사람이 치솟은 열을 이겨내어 다시 원기를 회복하게 된다면, 열이 발생하기 전보다 더 나은 조건에 있을 때가 많다. 그런 이유는 그가 과거 잘못된 조건을 깨뜨리고 새 건강을 자유롭게 받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정신적 측면에서도 마음이 심판을 준비하여 심판이 무르익을 때까지 그 사람 속의 악은 강세를 더해 간다. 이 심판은 새 삶 속에서 일하게 될 새 진리의 작용에 의한 결과이다. 따라서 새 진리가 각 사람 속에 건설됨으로 인해 옛 조건에서 기꺼이 자유로워진 이들에게 피난처 역할을 해주게 된다.

주님의 현존

태양이 지구와 더불어 언제나 존재하듯, 주님은 인간과 언제나 함께 계신다. 그러나 인간의 악과 거짓들은 마치 지상에서 뿜어 올린 오염된 물질이 태양 광선의 통과를 방해하듯, 주님의 영향이 우리에게 들어오는 문을 닫아 걸게 한다. 그러나 인간의 악들이 심판에 인간 자체를 가져다 놓게 될 때, 주님에게서만 오는 영적 생명의 차단으로 인한 결핍의 증가로 교회가 죽게 될 때, 주님은 새로운 생명을 보내셔서 그 새로운 생명을 기쁘게 받는 이에게 구원이 가능하도록 배려하신다.
비바람이 한참 지나간 뒤의 대기는 깨끗해져 더 찬란한 태양 광선을 맛보게 하듯, 옛 조건들을 깨트림은 그 인간으로 자연스럽게 새 생명을 받게 해준다. “그것이 문 앞에 다가와 있다.” 이 문은 우리의 마음 안에 있다. “들어라, 내가 문 앞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 집에 들어가서 그와 함께 먹고, 그도 나와 함께 먹게 될 것이다.”
우리 마음속의 문의 특징은 경첩이 이중으로 달린 것이다. 그래서 이 문은 안쪽 방향으로, 바깥쪽 방향으로도 움직인다. 그리고 그 문은 위쪽으로, 그리고 아래쪽으로도 열리게 되어 있다. 게다가 노아의 방주가 3층으로 되었듯이, 우리 마음은 3층, 또는 3 등차인 자연적, 영적, 천적 등차로 되어 있다. 그리고 각 등차, 또는 각 층마다 위에서 설명한 문이 달려 있다. 타락하는 마음일 경우, 보다 높은 등차에 있는 문은 닫혀지고, 대신 자연적 마음과 세상 사이에 있는 문 만이 열리어 있다. 그러나 거듭나는 마음의 경우, 이 문은 안쪽(inward)으로 열려 내면의 삶을 인간의 마음이 의식하게 된다.
옛 조건, 또는 타락하던 마음이 깨트려질 때, 새 생명은 우리의 정신적 문 앞에 다가와서 들어 갈 허락을 받기 위해 문을 두드리고 있다. 비록 모든 선이 주님 만으로부터 우리 마음의 안쪽 통로를 통해 오지만, 우리가 먼저 의식하게 되는 것은 우리의 자연적 마음에서의 선이다. 인간에게 의식되는 삶의 첫 문은 자연적 마음에 있고 이 문이 먼저 열리게 된다. 새 생명이 인간에게 올 때, 제일 먼저 그 생명의 영향이 미치는 곳은 자연적 등차인 자연적 평면이다. 그리하여 자연적 선이 먼저 오게 되어 기초를 형성하고 이 기초를 바탕으로 영적 선과 천적 선이 거처를 만든다. 이렇게 되는 이유는, 지상에 발을 붙이고 있는 사람들 모두는 외적인 것들 안에 존재하기 때문이고, 우리는 바깥쪽의 것들과 의무라는 중간에 끼어 살기 때문에 바깥쪽에 응용된 원리만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행동이라는 바깥쪽 삶의 변화는 안쪽에 해당되는 우리 인격이 변화할 것이라는 것에 대한 첫 증거가 되는 것이다.

이 세대

“나는 분명히 말한다.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이 모든 일들이 일어나고야 말 것이다.” 이 세대(generation, birth)란 위에서 설명한 삶의 자연적 평면과 등차를 의미한다. 우리의 느낌과 생각들은 지금도 이 등차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따라서 거듭남이나 새 생명이 온다 해도 우리가 자신들의 자연적 의무나 상태들이 죽어 감으로서 내면의 삶인 영적 삶에 도달될 것이라고 추측해서는 안된다. 오히려 우리는 거듭나고 있다는 것을 “이 세대,” 즉 우리 삶의 자연적 등차, 또는 바깥쪽의 것들, 즉 일상생활에 있게 되는 선함이나 질서, 선용을 가지고 입증해야 한다. “이 모든 일들이 일어나고야(fulfill)말 것이다.” 이렇게 되는 때란 우리의 자연적 마음이 새 생명으로 가득 찰 때이다. 그 이유는 새 생명으로 가득 찼다는 것은 우리의 옛 것이 깡그리 부서졌다는 말이기 때문이다.
글자대로 보면, “이 세대”란 유대 국가였는데, 이 국가는 파괴되지 않고 오히려 신성한 섭리에 의해 보존되었는 바, 그 이유는 히브리어와 구약 성서가 새교회를 위해 보존되어야 했기 때문이다.

영적인 하늘과 땅

그러나 오늘 비유가 영적인 예언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는 것은 본문의 구절, “하늘과 땅은 사라질지라도 내 말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라는 부분에서 알 수 있게 되어 있다. 성경에서 하늘과 땅이 사라진다고 언급하는 어느 경우에서도 그 언어는 상징어이다. 다시 말해 그것은 물질적인 하늘과 땅이 아니라 정신적인 것이라는 말이다. 새 하늘이란 내면의 마음에 있게 되는 천국인 것들에 관한 새로운 상태이고, 새 땅이란 바깥 삶에 관한 것, 즉 외적이거나 자연적인 마음들이 거듭난 상태이다. 이는 옛 조건들이 깨어지고 새 조건들이 창조된다는 말이기도 하다.

새 생명

오늘 비유에서 새 교회(the New-Church)가 무화과나무로 표현된 것은 의미심장한 일이다. 즉, 새교회는 인간들 사이에서 더 큰 실제적인 선함을 결과하게 되는 새 생명 속에 든 생각들에 의해 소개될 것임을 예시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에게 있을 새교회가 역사 한다는데 대한 증거는 교리에 관한 서로간의 독단적인 말싸움에서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 사이에 존재하는 새롭고 보다 더 부드러운 선함이라는 싹에서 발견된다는 것이다. 이 싹은 인간들을 더 새롭게 하여 생명 있게 하는 진리들, 이 싹이 나무가 되어 내는 “잎은 만국 백성을 치료하는 약이 된다” (요한계시록 22:2.)
오늘날 위에서 말한 증거는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아마 인간 틈새에서 아주 조용하게 일하는 새 생명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라 본다. 날마다 신문은 수많은 불법을 나열하고 잇다. 그 반면 더 나은 조건을 암시하는 때에 관한 징조들도 있는 것이다.
더 나은 세상 조건, 이것을 우리는 기대하는데, 이는 부분적이긴 하지만 폭 넓은 분야에 퍼져 있기도 하다. 자연적인 삶을 위한 실제의 진리들, 자연적인 선한 일들 속에 널리 퍼져 있다. 일 예를 들면, 아픈 자, 눈먼 자, 다친 자, 심지어 신음하는 동물들을 위해 병원이라는 형태로 인간 고통의 치료를 위한 사회 단체라든가, 고아나 장애자, 고령자들을 위해 일하는 이들 속에서, 아마 소리 없이 선한 일을 수행하는 이들의 수고는 헤아리기 힘들 것이다.

시작

정말 새 생명에 관한 것들은 자연적인 평면 위에 존재한다. 이 평면 위에 있는 선한 일들은 더 나은 생명을 향한 바깥쪽 일들로서, 이는 더 낫고 더 높은 어떤 것을 담게 될 기초를 형성한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단지 유전적인 선함으로부터, 또는 친절만에 근거해서 시작되는 것, 즉 그 일을 수행하는 사람이 자기 속의 이기적인 목적으로 간섭받지 않을 경우에만 가능한 일일뿐이다. 그리고 이런 것들이 선이며 필수적인 것들로 인정하는데 까지 이르러야 한다. 다시 말해 그 일들의 기원을 영적인 것인 거듭나는 선함으로부터, 비록 그 선함이 눈에 보이는 측면에서 단지 자연적인 것 같이 보이겠지만 일하는 사람의 경우, 거듭나는 선함에 근거를 두고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럼에도 위의 예는 아직 영적인 여름철인 것은 아니고 단지 여름이 온다는 징조들일 뿐이다. 무화과나무의 가지들이 연해지고 그 가지에서 새 잎이 솟아오른다. 즉 선과 진리가 하나 되어 자연적인 평면에서 일할 때, 그것이 인간들 사이에 있는 새교회의 증거임을 알 수 있으리라. 우리는 새교회의 삶을 자연적인 평면에서 이루어지는 실지의 선함 없이, 탁상공론만을 가지고 증거로서 내놓을 수 없다. 회개, 개혁, 그리고 거듭남은 내 이웃, 내 친구, 내가 묻혀 있는 사회 등등이 느끼고 생각할 수 있는 실지의 선함 속에서, 그것이 새교회의 생명 자체가 되어 나에 의해 체현(embody)되고 표현되어야 한다.

희망적인 활동들

1757년, “최후 심판” (이는 영계에서의 영적 심판임)이 있은 뒤, 영들의 중간 세계는 더 나은 질서 속에 있게 되었고, 사람들은 자유롭게 합리적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그 뒤 성경은 더 폭넓게 대중들에 의해 읽혀졌다. 또한 수많은 사려 깊은 책들이 출간되어 폭 넓은 독자층을 형성해 가기도 했다. 한 마디로 이는 합리적 사고를 위해 희망적인 활동인 것이다. 많은 발견과 발명의 시대가 도래했고, 이는 바깥 삶의 각 분야에 응용되었다. 이 모든 것들은 좋은 것들이다.
오래 전에는 몇 사람에 의해 민중이 눌려 지내 왔었고 극히 적은 사람만이 읽을 수 있었으며, 소수만이 대중을 통치하는 법을 만들고 했었다. 이제는 지도자나 그 밑에서 따르는 사람이나 동등한 교육의 기회와 정신 문화를 가지고 생각하고 통치해 가게 되었다. 증기나 전기 등등도 보다 빠르게, 그리고 보다 값싸게 대중들이 혜택을 보게 되었고, 그럼으로 사람들은 더 빈번하게 왕래하고 더 빨리 서로를 알게 되기도 했다. 지도자의 일이나 학식에 대한 혜택도 많은 이들이 더 빨리 나누어 가지는 시대가 도래했다.
간단한 위의 이야기들 외에도 수많은 이야기가 있겠지만 실상 이 모든 것들은 영적 삶의 건설과 성장을 위한 자연적인 기초를 설비해 주는 것이다. 우리는 외적인 것들을 경멸해서는 안되고, 오히려 우리의 영이 그것들을 사랑해서 올바른 방법으로 선용되어져야 할 것이다.

주님의 두 번째 오심

이백여년 전 주님께서는 한 선구자를 들어 써서 첫 기독교회에 대한 마지막 심판과 새교회가 올 것임을 선포하도록 하셨다. 이 새교회란 주 예수 그리스도의 두 번째 오심이요, 그 오심은 새로운 빛과 생명을 흘려 보내시는 가운데 있어지는 영적인 오심이다. 이 선구자가 스베덴볽(swedenborg)이다. 주님은 그를 지휘하시어 그로 하여금 새교회의 저술 속에서 하느님의 말씀 속에 있는 영적 의미를 밝혀 인간으로 알게 하도록 하시었다.
영적 진리가 알려져 사랑되어 실제화 될 때, 우리는 새교회의 일에 관한 영적 증거를 찾게 된다. 진정한 교리 없이 사람들은 새교회인으로 변할 수 없다. 우리가 진리를 사랑해서, “의에 주리고 목말라” 할 때, 신성한 섭리는 우리를 진리의 지식으로 배부르도록 해주시고, 더불어 그 진리에 따라 살 기회도 허락하실 것이다. 새교회가 마음에 내려 올 조건은, 옛 악과 거짓이라는 옛 조건이 깨어지고 제거될 때만이 가능한 것이다.

18
열 처녀
– 사랑 있는 믿음과 사랑 없는 믿음 –

성서 본문: 마태복음 25장 1-13절

1. “하늘 나라는 열 처녀가 저마다 등불을 가지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것에 비길 수 있다. 2. 그 가운데 다섯은 미련하고 다섯은 슬기로왔다. 3. 미련한 처녀들은 등잔은 가지고 있었으나 기름은 준비하지 않았다. 4. 한편 슬기로운 처녀들은 등잔과 함께 기름도 그릇에 담아 가지고 있었다. 5. 신랑이 늦도록 오지 않아 처녀들은 모두 졸다가 잠이 들었다. 6. 그런데 한밤중에 ‘저기 신랑이 온다. 어서들 마중나가라!’ 하는 소리가 크게 들렸다. 7. 이 소리에 처녀들은 모두 일어나 제각기 등불을 챙기었다. 8. 미련한 처녀들은 그제야 슬기로운 처녀들에게 ‘우리 등불이 꺼져 가니 기름을 좀 나누어 다오’ 하고 청하였다. 9. 그러나 슬기로운 처녀들은 ‘우리 것을 나누어 주면 우리에게도, 너희에게도 다 모자랄 터이니 너희 쓸 것은 차라리 가게에 가서 사다 쓰는 것이 좋겠다’ 고 하였다. 10. 미련한 처녀들이 기름을 사러 간 사이에 신랑이 왔다. 준비하고 기다리고 있던 처녀들은 신랑과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 갔고 문은 잠겨졌다. 11. 그 뒤에 미련한 처녀들이 와서 ‘주님, 주님, 문 좀 열어 주세요’ 하고 간청하였으나 12. 신랑은 ‘분명히 들으시오. 나는 당신들이 누군지 모릅니다’ 하며 외면하였다. 13. 그 날과 그 시간은 아무도 모른다. 그러니 항상 깨어 있어라.”

글자적 이야기

이 비유는 동양의 결혼 관습을 연상하게 되면 매우 인상 깊게 된다. 그 곳의 결혼 축제는 때로 며칠 동안 계속 되기도 한다. 그중 가장 중심되는 행사는 신랑이 신부를 처갓집에서 보금자리가 될 집으로 호송해 올 때이다. 이 행사는 통상 친한 친구들과 어울려 파티가 벌어지는 밤중에 거행된다. 그 행사에는 많은 횃불과 합창이나 악기까지 동반되는 매우 흥분되어 기뻐하는 광경이 줄을 잇는다. 몇 명의 친구나 친지들이 신랑의 집에 머물고 있다가 호송 행렬을 환영한다. 이 때 그들은 호송 행렬의 선두가 포착될 때, 그들은 “저기 신랑이 온다. 어서들 마중 나가라!” 라고 크게 외친다.
신랑이 밤중에 신부를 신랑집으로 데려가는 것은 이스라엘 땅에 있었던 관습이라고 유대교의 어떤 라삐(rabbi)는 말해 준다. 그리고 호송되는 여자 주위에는 열 개의 막대기를 든 사람이 따른다. 각 막대기의 꼭대기는 놋쇠 접시 같은 것이 붙어 있는데, 그 접시에는 불을 지피기 위해 기름이나 역청, 옷조각 등이 담겨 있다. 사람들은 이 막대기를 한 손에 들고 다른 손에는 접시 안의 불이 꺼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 연료인 기름병을 들고 있다.

영적 의미

넓은 의미에서 볼 때, 이 비유는 주님의 오심과 그에 따른 심판을 취급하고 있다. 좁은 의미에서, 비유는 사랑과 연합된 믿음을 사랑이 없는 지식일 뿐인 믿음과 서로 대비시키고 있다.
제 17장인 잎이 돋는 무화과의 비유도 주님의 오심과 오실 때 있어질 상태에 관해 뭔가를 알려 주고 있다. 그래서 알게 되는 것은, 인간 생명의 옛 조건은 깨어져야만 하고 새로운 상태들이 깨어져 나간 그 자리에 도입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오늘 비유는 분리되는 두 인간 계층, 새 진리를 바깥 쪽 측면에서 받게 될 이들, 즉 새 진리를 받되 의지와 더불어 이해성에 진리를 받는 이들과 교리로서 진리를 받되 이해성에서만 수용하는 이들이 주님의 재림에서 있어질 결과를 보여주게 된다.

처녀

성경은 교회를 여인 또는 몇 명의 여인들로 자주 표현하고 있다. 결혼하지 않은 여자인 처녀는 주님과 결합하지 않고 있는 교회, 즉 영적 결혼이 안된 상태의 교회를 표현한다. 주님은 신랑이고 교회는 그분의 신부이다. 진정한 신부가 자기 남편을 찾아서 남편의 사랑과 형상을 자기 심정에 받아 들여, 애정이나 생각, 그리고 행동으로 남편에 충실하듯이, 교회는 신성한 신랑을 찾아 그분의 형상을 받고, 그분께 충성을 다한다. “우리를 만드신 분이 우리의 남편이고, 그분의 이름은 만군의 여호와이신 것이다.” 따라서 좋은 처녀란 주님과 결합하려 애쓰는 교회를 표현해 준다.
성경에서 우리는 예루살렘, 또는 유다의 처녀, 딸, 등등과 같은 말을 자주 발견한다. 열 “처녀”란 교회의 모든 것을 표현한다. 그 이유는 “10”은 모든 것, 또는 어떤 것이 가득 차 있음을 자주 표현해 주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의미를 십계명도 가지고 있는데, 십계명은 거듭나는 삶에 있어야 할 선하고 진정한 모든 원리와 그 삶에 있어야 할 우리의 안과 밖에 관한 모든 것을 표현하고 있다.

등불

“처녀들은 저마다 등불을 가지고 신랑을 맞으러 나갔다.” 속이 빈 용기로서 빛을 만들기 위한 등잔은 실제의 삶을 꾸리게 해줄 선하고 진정한 원리들을 수용하게 될 교리, 또는 진리에 관한 지식, 어떤 정신적인 형체나 그릇을 표현한다. “당신의 말씀은 내 발에 등불이요 나의 길에 빛이옵니다” (시편 119:105.) 등불을 가진 열 처녀란 교회 안에 있는 이들, 교리로 가르침을 받아 온 이들, 또는 교리에 어떤 흥미를 가지고 있는 이들을 표현한다. 정신적으로 이들이 “신랑을 맞으러 나갔다”는 것은 자기가 가진 교리가 발하는 빛으로 주님과 천국을 추구하는 것을 말한다.

슬기로움과 미련함

“그 가운데 다섯은 미련하고 다섯은 슬기로웠다.” 천국의 지혜는 알고 있는 진리를 사랑하여 실제에 응용하는데 존재하고, 미련함은 자기가 아는 진리를 사랑하지도 않고 사용하지도 않는데 존재한다. 슬기로움과 미련함이라는 말은 제 1장에서 취급한 마태복음 7장 24-26절에서 이미 설명했던 바 있다. 이 비유에서 슬기로운 사람은 주님의 가르침을 듣고 순종하는 사람이요, “어리석은 자”는 주님의 진리를 듣고서도 사용하지 않은 사람이다.
신랑이 오기 전, 즉 심판이 있기 전, 슬기로운 자나 미련한 자 모두 외적 교회 안에 함께 있었다. 주목해 볼 또 하나의 비유는 밀과 가라지이다. 밀과 가라지는 성장하는 기간 동안 함께 섞여 자랐다. 그리고 양과 염소도 한 무리 속에 섞여 있었다. 그러나 주님의 오심, 심판 때에 위의 두 계층은 분리된다. 인격이 다르다는 것에 대한 결과가 분리인 것이다.

기름

“미련한 처녀들은 등잔을 가지고 있었으나 기름을 준비하지 않았다.” 우리가 기름을 섭취할 경우 신체를 따뜻하게 하고, 기계에 기름을 칠 경우 미끈미끈해서 마찰을 줄여 준다. 이와 같은 특질을 지닌 기름이란 사랑을 원리로 삼는것을 표현한다. 등잔 속에서 빛을 발하는 것은 등잔이 아닌 등잔 속의 기름이다. 등잔은 빛을 만들기 위해 기름을 담는 그릇일 뿐이다. 그래서 등잔은 교리, 또는 지식을 표현하고, 만일 등잔이 기름을 채우고 있다면, 그 등잔은 우리를 계발시켜 총명하게 하는 수단이 된다. 성경을 보면 이스라엘 민족들이 성전 예배 시에 기름을 사용한 것에서도 기름의 특성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빈 등잔은 텅빈 교리, 지적인 것만으로 된 교리, 선과 진리를 사랑함으로 채워져 있지 않은 교리, 그 결과 실제적인 삶에 사용하지 않는 교리를 표현해 준다. 사랑의 기름은 영적 총명을 먹여 살린다. 그러나 사랑이 없는 지식은 진정한 총명을 간직해 주지 않는다.
의지와 더불어 이해성에 진리를 받는 사람은 슬기로운 사람이다. 이들은 등잔에 공급할 기름을 지닌 이들이다. 즉 선과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은 영적 총명을 계속 보존한다. 슬기로운 자는 종교에 관한 지식과 더불어 그 지식에 의거한 삶까지도 이행한다. 그들은 교리를 알고 계명을 지킨다. 그들은 순수한 심정, 계발된 이해성, 그래서 거룩한 삶을 가지고 있다. 어리석은 자는 지식은 가지고 있지만 악을 죄로 알고 끊지 못한다.

신랑의 부재 (absence)

“신랑이 늦도록 오지 않자 처녀들은 모두 졸다가 잠이 들었다.” 여러 비유나 다른 성경 부분에서의 말씀 중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주님이 안 계신 듯 여겨지는 것, 즉 주님의 외관적 부재에 관한 것이다. 본문의 경우, “신랑이 늦는 것”은 신랑이 오는 것을 지켜보는 자로부터이다. 포도원 소작인의 비유에서 포도원 주인은 “…멀리 떠나갔다”는 말로 그분의 부재를 표현해 놓고 있다. 달란트의 비유에서는, 돈의 소유자가 종들에게 돈을 맡기고 “먼길을 떠났다.”
영적 인간의 열린 마음은 주님이 현재 존재하신다고 느낀다. 특별히 그 인간의 삶의 원리 속에 존재하심을 느낀다. 그러나 감각적인 삶에 따른 외적 삶의 세세한 면에서, 바깥쪽 마음이 일하고 즐기는 곳에서 주님의 현존은 거의 있지 않다. 아마 주님의 존재가 아예 없는 듯 여겨진다. 왜냐하면 바깥쪽 마음과 감각적인 마음은 선과 진리를 지각하는데 매우 무디고 희미하기 때문이다.

졸고 잠듦

인간이 감각적인 삶에 푹 빠졌을 경우, 그 상태는 영적으로 보면 졸다가 잠이든 것이다. 이런 상태의 사람은 마음이 높고 영적인 상태에 있을 때인 영적 삶을 내향적으로 실감하지 못한다. 존다는 것은 자연적인 의지의 무딘 상태이고, 잠든다는 것은 자연적인 이해성의 희미한 상태와 관련이 있다. 그래서 인간이 말씀 속의 진리로 가르침을 받게 되면, 그는 자기가 배운 것을 실제화 하기 위해 세상 것 사이에 그것을 놓음으로 해서, 세상 삶 속에서 그 원리들을 확증하게 된다.
그래서 슬기로운 사람이라 해도 세상에서 살아야만 하고 반드시 외적인 것들 속에서 자신의 슬기를 사용해야만 한다. 이 자연계는 우리의 마지막 거처가 아니다. 이 세계에서 우리는 거듭나는 삶을 이룰 수 없다. 이를 두고 본문에서 신랑이 늦게 오자 졸다가 잠이 들었다고 말하고 있고, 이를 더 설명하면 우리는 이 세상에서 천국과 더 완벽하게 접합하는데 우리의 슬기를 다 사용하지 못한다는 말이다. 심판을 맞이 할 완숙된 조건에 다다를 때까지 한 개인이든 한 나라이든 성장과 발달이라는 단계를 거쳐야만 한다. 한 마디로 인격이라는 그릇이 다 찰 때까지 자기 그릇을 채워야만 한다.

한밤중

인격이 다 채워져 마감의 때, 즉 마감의 상태가 되면, 새로운 상태가 시작된다. 비유에서 말하는 “한밤중”이 바로 마감의 때인 것이다. 한밤중은 하루의 끝이면서 다음날, 다음 상태의 시작도 된다. 한밤중은 변화를 이루는 시간, 즉 심판의 때인 것이다.

크게 외침

“…하는 소리가 크게 들렸다.” 크게 외침이란 어떤 사건에 대한 중대한 발표이다. 이와 같이 자연적인 마음 안에서 그 마음의 상태가 심판을 위해 무르익고, 새로운 상태가 막 도래하려 할 때, 주님의 존재는 평상 때의 그분의 진리보다 더 강하게 암시하게 된다. 진리가 인간의 마음을 휘저어 줄 때, 그 진리는 진리의 신성한 근원에 대해 상기시켜 주고 진리 속에 계신 그분의 현존을 인간으로 외치게 하는 바 “저기 신랑이 온다”이다.
크게 외침은 글자대로 말하면 각자에게 만들어진 강한 인상의 결과이다. 이를 영적으로 보면, 크게 외침은 인상 그 자체, 또는 외침 속에서 표현된 마음의 상태이다.
교회의 한밤중이란 옛 교회의 끝이고, 새로운 교회의 시작은 정신적 어둠 속을 걷던 사람들이 큰 영적 빛을 보고 그 빛 속에서 주님의 오심을 알아 차려 주님과 더 가까운 사이가 되어 주님의 교회에 이끌리는 것을 말한다.

신랑이 옴

교회가 주님을 영접할 준비가 되었을 때 주님은 오신다. 즉 “신부가 결혼을 위해 잘 단장했을 때” 이다. 새 예루살렘이 인간에게 내려오기 시작한 것은 인간이 그것을 받을 준비가 되었을 때였다. 어떤 경우에서도 새롭고 더 높은 조건의 도래는 옛 조건에 심판이 있음으로써 옛 것과 새것이 분리될 때만 있게 된다.

주님을 만남

우리가 주님을 만나는 것은 애정과 생각, 그리고 행동에서이다. 진리의 빛이 우리에게 강한 인상을 줄 때, 우리는 감각적 삶인 캄캄한 한밤중으로부터 그분의 진리로 주님과 결합하기 위해 밖으로 나간다. 주님은 영적 원리 안에서 우리에게 다가오시고, 우리가 그 원리에 의거 삶을 영위할 때 우리는 “그분을 맞으러 밖으로 나가는” 것이다. 모든 진리는 우리가 그 진리를 실제에 사용할 때 주님을 맞으러 나가도록 우리를 부른다.

등불을 챙김

“이 소리에 처녀들은 모두 일어나 제 각기 등불을 챙기었다.” 일어난다는 것을 영적으로 보면, 의지가 활동하러 일어나는 것을 말한다. 등불을 챙김이란 지성이 활동하는 것, 즉 지식을 사용하는 것이다. 처녀들이 일어남이란 교인들이 그들 마음을 생각의 더 높은 평면에로 들어올리는 것을 표현한다. 그리고 등불을 챙겨 처녀들이 일어난다는 것은 교인들이 그들의 지적인 지식들을 교회의 교리에 의거 질서 정연하게 하는 것을 표현한다.
슬기로운 처녀, 미련한 처녀, 모두 일어나 자기들의 등불을 챙기었다. 이는 교회 안에는 진리에 진지한 사람, 그렇지 못한 사람, 모두 교회에 참석해서 교리를 배운다는 뜻이다. 그러나 이 두 계층 모두 인격 면에서의 차이점을 금방 드러내게 된다. 그래서 슬기로운 교인은 항구적인 영적 계발의 상태에 들어가고, 미련한 자는 어둠에 빠져 버리고 만다.

기름을 가지고 있지 않음

미련한 처녀들은 자기들의 등불이 꺼져 가고 자기들 수중에 기름이 없는 것을 발견했다. “등불”이란 진리에 관한 지식, 또는 기억으로 알고 있는 교리들이다. 감각적인 삶에 졸고 잠이 들어 있었던 미련한 처녀들, 즉 천국적 기름인 선과 진리를 사랑하는 내향적 마음을 가지지 않은 사람들은 새로운 총명을 받게 해줄 생명에 관한 어떤 것도 마음에 없었다는 것을 발견한다.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동안 위와 같은 사람들은 그들 속의 악한 사랑이 그들의 총명을 꺼져 가게 해서 천국에 관한 진리에 어떤 흥미도 느끼지 못한다.
의지 속의 악, 이해성 속의 거짓, 행동 속의 죄들은 영적인 것들 안에 있는 어떤 순수한 총명을 위해, 주님이 자기에게 오시는데 대해 감격적인 느낌의 어떤 응답도 불가능하게 한다. 악인이라 해도 지식을 획득하는 것은 무척 사랑한다. 그러나 그들은 그 지식 속의 진리를 인간의 영적 원리로서 감지하게 하는 진리 자체에 대한 따뜻한 사랑이 결여되어 있다. 따라서 교회 속의 교리를 단지 지적 흥미로 여긴 이들은 정작 그들 마음을 먹여 살리지도, 영적 총명을 증진시키지도 못한다.
어쨋든 심판에서 진리의 빛이 선과 진리를 사랑해야 할 필요성을 만인에게 보여 줄 때, 미련한 자들은 영적 인간다움을 달성하는 방법을 찾느라고 궁리하기 시작한다.

기름을 요청함

미련한 처녀들은 슬기로운 처녀들에게, “우리 등불이 꺼져 가니 기름을 좀 나누어 다오” 라고 청하였다. 이들은 타인 안에 있는 선함과 사랑에 의지하려 한다. 이들은 “대속”이라는 교리나, “믿음만으로 의롭게 됨” 이라는 교리에 의존하려 한다. 그러나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함으로 자신 속을 채우지 않으면 어느 누구도 순수한 믿음을 가질 수 없다. 믿음“만”의 믿음은 겉치레뿐인 믿음이다. 그리스도의 피란 주님의 영적인 진리가 사랑되고 믿어져서 실제에 사용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예를 들면, 죽어 가는 병자가 건강한 사람의 팔로부터 공급받은 건강한 피를 가지게 되는 경우를 생각해 보자. 그 병자는 그 피로 말미암아 구원되었을까? 맞는 말이다. 그러나 그 구원은 피를 흘려서 된 것이 아니라 피 속의 생명 때문이다. 환자가 피를 공급받음으로 해서 그는 그 피를 자기 생명으로 흡수하여 사용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영적으로 죽어 가는 사람은 그의 심정에 신성한 진리를 받아서 그 진리를 자신의 전체적인 정신 체계를 순환시키는 실제적인 삶의 원리로 사용할 때 구원되는 것이다. 한마디로 그리스도의 영적인 피로 구원된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거절

허지만 슬기로운 처녀들은 미련한 처녀들에게, “우리 것을 나누어주면 우리에게도, 너희에게도 다 모자랄 터이니 너희 쓸 것은 차라리 가게에 가서 사다 쓰는 것이 좋겠다”라고 대답하였다. 어떤 신조나 교파, 구세주까지도 사랑의 기름인 선함을 우리에게 줄 수 없다. 이는 오로지 스스로 그것을 획득하는 방법밖에 없다. 어떤 사람이 타인에게 자기가 아는 진리를 가르칠 수는 있겠지만, 가르친다고 해서 그가 어떤 선함까지 줄 수 없는 것이다. 선함, 사랑은 모든 개개인이 자신 스스로 획득해야만 한다. 각 개인이 주님께 나아가고, 주님의 진리를 매일 실제에 응용함으로 선함을 획득해 가야 한다. 만일 누군가가 선함을 획득하겠다면, 그는 그것을 사야만 한다. 즉 그는 그 선함을 획득하기 위해 자신의 악들을 포기하는 대가를 치러야 하는 것이다.
주님이 교회를 들리신다면 그분의 교리에 관한 수많은 사항들을 발견하실 것이다. 그러나 지식만을 가진 이들은 텅빈 등불을 지닌 자들이요, 일상 생활에서 자기들 지식을 지켜 줄 사랑의 기름이 없는 이들인 것이다. 이와 같은 자들은 결혼 잔치에 참석할 수 없다. 그들은 주님과 결합하는 더 없는 행복을 누릴 자격이 없다. 그 이유는 주님과의 결합, 거듭남은 각자의 의지 속에 있는 선과 이해성 속의 진리와 영적 결혼의 정도만큼에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정신적인 파트너들이 마음 안에서 하나가 될 때, 천국은 그의 마음에 드리워지고, 그 사람은 주님의 결혼 만찬에 참석하게 된다.

잔치에 들어감

미리 준비되어 있던 이들은 주님과 함께 천국적인 상태에 입장한다. 그리고 그들의 마음의 문은 천국에 입장할 조건에 있지 않은 모든 것들에 대해서는 닫혀져 있다.
각 개인의 생활 역시 이와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거듭남을 추구하고 있을 때, 우리의 자연적 마음에는 많은 세상적 욕구와 사상이 자리잡고 있으면서 우리로 인정하고 찬양하도록 강요하고 있다. 그러나 영적인 마음은 일어나서 위를 쳐다보고 있다. 그 마음은 주님을 인정하며 그분의 의를 추구하려 한다. 그래서 우리는 삶의 새로운 품질을 경험하기 시작한다. 사랑은 우리의 총명을 먹여 키운다. 그리고 우리는 선한 목적을 위해 자신의 지식을 사용한다. 그런데 우리는 자기의 지식을 자랑함이나 여타 다른 자만이라는 피상적인 것까지도 거듭나는 인격이 되는데 슬쩍 사용하고 싶어한다. 그러나 문은 그런 것들에 대해서는 굳게 잠겨져 있다. 천국에는 자만 같은 것을 위해 비어 둔 방이 없다. 사실 닫혀진 문은 각자 속에, 각자의 인격 속에 존재하면서 그것들이 천국 쪽의 문을 닫아걸고 있는 것이다.
이리하여 천국은 천국을 예비한 이들에게만 주어질 수 있다는 것을 비유는 가르치고 있다. 즉 천국을 자기 인격 속에 지닌 자라야만 가능하다는 말이다. 어떤 악한 자가 천사들 틈에 끼어 있도록 허락된다 해도 그는 천국 사회가 천국적인 듯 여겨지지 않는다. 그 이유는 천국은 어떤 장소가 아닌, 상태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삶에 의해 인격을 고정시킨다. 악마라는 인격으로 자신을 만든 이들은 천국의 분위기에서 살 수 없는 것이다.

“나는 너를 모르노라”

악한 사람도 천국이야말로 자기들이 기대하는 바람직한 장소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들도 천국에서 살고 싶다고 상상할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 천국은 그들에 대한 천국이 아닌 것이다. 그래서 주님은 그들에게, “나는 너를 모른다,” 즉 그분은 악한 자들의 인격 속에 천국적인 어떤 것이 있는지에 대해서는 모르신다고 말하신다. “주님은 올바른 길을 아신다.” 그러나 그분은 악한 자의 길이 그분의 길이라고 하는 것은 모르신다. 천국은 사랑과 믿음, 그리고 순종이라는 조건 속에 존재한다. 총명의 빛을 생생하게 지키기 위해 순수한 사랑의 기름을 가진 이들, 진리를 알고 그 안 것에 따라 살아간 이들만이 천국적인 조건을 갖춘 것이다. “너희가 이런 사항을 알고 그대로 행한다면 복있을 찌어다.”
주님은 주님을 알고 사랑해서 순종하지 않는 이들에게, “나는 너를 도무지 모르노라” 라고 말씀하신다. 다시 말해 삶에 관한 그분의 신성한 원리들은 주님이 모른다고 하는 이들 속에는 없다는 말이다. 당신이 천국에서 살 수 없는 사람이 되는 이유는 천국을 만드는 원리를 기쁘게 받으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천국은 이타적 사랑이라는 순수한 상태, 순진이라는 순수한 상태, 영적 총명의 순수한 상태인데, 이기적인 애정이라는 불순한 상태, 선함 없는 교리라는 허울뿐인 상태, 기름 없는 등불만을 지녔기 때문이다.

다섯

다섯은 슬기로웠고 다섯은 미련했다는 숫자로 인해 세상이나 교인들 중 정확히 절반만이 구원받고 절반은 그렇게 되지 못할 것이라고 억측해서는 안된다. 비유를 해석하는데 있어 기억해야 할 점은, 비유가 의도하는 교훈들은 영적 원리들이지, 단지 외적인 사실들의 서술이 아니라는 것이다. 주님의 말씀 모두는 영적인 것을 취급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비유적인 가르침들로부터 영적인 결론을 끌어내야 한다. 다섯이라는 숫자가 주는 교훈은 수학적인 양에 관한 것이 아닌 영적 품질에 관한 것이다.
숫자 다섯은 일부 또는 조금을 표현한다. 아마 위와 같이 수학적 기교를 부려 추정해 본다 해도 구원되어질 인류는 최소한 절반은 더 될런지 모른다. 그렇다고 가정해 본다 해도 구원되는 사람들 모두가 천국적 삶의 똑 같은 등차에서 구원되는 것은 아니다. 천국은 삶의 수많은 등차로 이루어져 있다. “내 아버지 집에는 거할 곳이 많다”고 하신 주님의 말씀을 기억해 보면 납득될 것이다. 그러나 거듭남의 결과, 즉 악을 죄로 알고 금하고, 그 대신 주님의 이름으로 선을 행하는 원리를 사용하지 않은 이는 어느 누구도 천국 사회에 끼여들 수 없다.

지켜 보라 (깨어 있어라, watch)

“그러므로 사람의 아들이 오는 그 날과 그 시간은 아무도 모른다. 그러니 항상 깨어 있어라.” 이 절에서도 때에 관한 시간을 말하고 있지만, 그 속의 의미는 품질, 즉 삶의 상태를 언급하고 있다. 그 날과 그 시간이란 의지와 이해성에서 오는 애정과 생각에 관한 상태이다. 우리는 자신의 심정 안에 있는 목적과 동기, 이해성 안에서 작동하고 있는 원리들을 안팎으로 지켜보아야 하며, 자신이 하는 행동, 일들을 언제나 잘 감시해서 자기 속의 목적과 동기, 원리들이 주님의 계명을 잘 체현(embodiment)해 가고 있는지 늘 깨어 점검해야 한다.
우리의 외적 삶 속에 있는 불과 홍수, 우리의 행동을 좀 먹어 가는 나방이나 중독물들이 들어 붙어 우리 삶을 죽어 가게 하지 않도록 경계해야 할 것이다. 영적 강함을 서서히 좀먹어 들어가 무너뜨리려는 악과 거짓, 그리고 죄들의 영향력에 대항해서 영적인 경계를 그치지 않는 것은 각자의 의무이다. 특별히 우리는 바깥쪽 삶만을 경계하는데 그쳐서는 안되고, 우리 속의 악한 경향성과 거짓 관념에 대해서 경계를 늦추어서는 안된다.
경계함에 있어 우리는 자연적인 두려움에 의해 자신이 움직이지 않도록 해야 한다. 자연적인 두려움은 우리의 적극성을 마비시킨다. 따라서 우리는 계명을 지킴으로 기쁨을 발견하는 사랑을 수단으로 경계해야 한다. 우리가 자신의 악 속에 푹 빠져서 도덕적으로나 영적으로나 약해진 상태를 자신에게 말해 줄 수 없다면, 본문에서와 같이 그 날과 그 시간을 알 수 없다면 자신의 삶은 아래쪽을 향해 기울고 있음을 알아채려야 할 것이다.
우리에게 내려 비치는 태양이 언제나 열과 빛을 함께 가지고 있듯이, 우리에게 알려진 진리 자체 속에 주님은 언제나 존재하신다. 이와 같은 진리가 우리의 구속자이시요, 우리의 판관인 것이다. 우리의 자연적 마음은 신성한 영향력이 들어 왔는지, 위험한 것이 들어왔는지, 어느 것도 인식하지 못한다. 따라서 경계를 잘하려면 우리는 반드시 빛을 가져야 한다. 주님의 말씀 속에 있는 진리로, 교회 안에서 가르쳐진 진리로 교리라는 등잔을 가지되, 진리가 가르치는 선함을 위해 진리를 위한 사랑이라는 따뜻한 기름으로 그 등잔을 채워야 할 것이다. 이렇게 하면 우리는 자신 속의 자연적 마음들, 뿐만 아니라 우리 주변에 있는 것들의 품질을 명확히 판별할 수 있을 것이리라. “내가 너희에게 말하는 것, 내가 말하고 싶은 전부는 깨어 있어라이다.”

19
달란트
– 사용의 법칙 –

성서 본문: 마태복음 25장 14-30절

14. “하늘 나라는 또 이렇게 비유할 수 있다. 어떤 사람이 먼 길을 떠나면서 자기 종들을 불러 재산을 맡기었다. 15. 그는 각자의 능력에 따라 한 사람에게는 돈 다섯 달란트를 주고 한 사람에게는 두 달란트를 주고 또 한 사람에게는 한 달란트를 주고 떠났다. 16. 다섯 달란트를 받은 사람은 곧 가서 그 돈을 활용하여 다섯 달란트를 더 벌었다. 17. 두 달란트를 받은 사람도 그와 같이 하여 두 달란트를 더 벌었다. 19. 그러나 한 달란트를 받은 사람은 가서 그 돈을 땅에 묻어 두었다. 20. 얼마 뒤에 주인이 와서 그 종들과 셈을 하게 되었다. 20. 다섯 달란트를 받은 사람은 다섯 달란트를 더 가지고 와서 ‘주인님, 주인께서 저에게 다섯 달란트를 맡기셨는데 보십시오, 다섯 달란트를 더 벌었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21. 그러자 주인이 그에게 ‘잘하였다. 너는 과연 착하고 충성스러운 종이다. 네가 작은 일에 충성을 다하였으니 이제 내가 큰 일을 너에게 맡기겠다. 자, 와서 네 주인과 함께 기쁨을 나누어라’ 하고 말하였다. 22. 그 다음 두 달란트를 받은 사람도 와서 ‘주인님, 두 달란트를 저에게 맡기셨는데, 보십시오 두 달란트를 더 벌었읍니다’ 하고 말하였다. 23. 그래서 주인은 그에게도 ‘잘하였다. 너는 과연 착하고 충성스러운 종이다. 네가 작은 일에 충성을 다하였으니 이제 내가 큰 일을 너에게 맡기겠다. 자, 와서 네 주인과 함께 기쁨을 나누어라’ 하고 말하였다. 24. 그런데 한 달란트를 받은 사람은 와서 ‘주인님, 저는 주인께서 심지 않은 데서 거두시고 뿌리지 않은 데서 모으시는 무서운 분이신 줄을 알고 있었읍니다. 25. 그래서 두려운 나머지 저는 주인님의 돈을 가지고 가서 땅에 묻어 두었읍니다. 보십시오, 여기 그 돈이 그대로 있읍니다’ 하고 말하였다. 26. 그러자 주인은 그 종에게 호통을 쳤다. ‘너야말로 악하고 게으른 종이다. 내가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뿌리지 않은 데서 모으는 사람인 줄로 알고 있었다면 27. 내 돈을 돈 쓸 사람에게 꾸어 주었다가 내가 돌아 올 때에 그 돈에 이자를 붙여서 돌려 주어야 할 것이 아니냐? 28. 여봐라, 저 자에게서 한 달란트마저 빼앗아 열 달란트를 가진 사람에게 주어라. 29. 누구든지 있는 사람은 더 받아 넉넉해지고 없는 사람은 있는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 30. 이 쓸모없는 종을 바깥 어두운 곳에 내어 쫓아라. 거기에서 가슴을 치며 통곡할 것이다.’”

요약

인간은 주님이 자기에게 주신 것을 사용하면서 살아간다. 각 인간의 영적 삶에 있게 되는 수준, 품질, 충만도는 당사자에게 주어진 주님의 선물을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의해 측정되어진다.

문맥의 전후 관계

본문이 포함된 제 25장에서는 이 비유 외에 두개의 비유, 즉 “열 처녀”의 비유와 “양과 염소”의 비유가 있어 서로 비교하게끔 되어 있다. 이 세 비유 모두는 주님의 오심에서 있게되는 심판을 취급하고 있다. 그렇다 해도 이 세 비유의 내용이 반복되는 것은 아니다. 세 비유는 각기 다른 견지에서 취해진 관점을 가지고 심판의 다른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열 처녀”의 비유는 교인의 애정 측면에 거행될 심판을 예증하고, “달란트”의 비유는 교인의 이해성 측면을 더 뾰족하게 전시해 주고, “양과 염소”의 비유는 주님의 오심에 대한 결과와 인간의 행동 측면을 취급하고 있다. 이렇게 해서 세 사건 속에서 인간 삶의 세 분과인 의지, 이해성, 행동을 총망라하고 있다.
누가복음 19장에 “금화”의 비유가 있는데, 이 비유와 오늘 비유는 동일하지는 않지만 본질 형태에서는 아주 유사하다. 두 비유의 목적 측면에서 비유를 읽는 이로 하여금 두 비유를 서로 상충시켜 이해를 증진시켜 주고 있다.

글자적 의미

많은 번역에서 본문 14절은 “하늘 나라는 또 이렇게 비유할 수 있다. 어떤 사람이 먼 길을 떠나면서…”라고 시작한다. 그런데 “하늘 나라는 또 이렇게 비유할 수 있다”는 말은 영어 성경의 경우 이태맄 글씨체로 표기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 이유는 그리스 원본에서 이 말이 발견되지 않지만 예상되는 의미를 완성하기 위해 번역자가 첨부했다는 것을 암시해 주는 것이다. 번역자가 이런 형태를 취한 이유는 많은 비유들이 하늘 나라라는 단어로 시작되기 때문인 듯 하다. 사실 오늘 본문은 “열 처녀” 비유의 마지막 절, “(사람의 아들이 언제 올지) 그 날과 그 시간은 아무도 모른다. 그러니 항상 깨어 있어라. Watch, therefore, for ye know neither the day or the hour wherein the Son of Man cometh” 이 절에 이어 14절에서 “어떤 사람이 먼 길을 떠나면서, as a man travelling”으로 시작한다. 따라서 13절의 “사람의 아들, the Son of Man”이 14절의 “어떤 사람”과 의미를 같이 하고 있음에 틀림없다.

먼길을 떠나는 사람

이 “사람”이란 천상 천하의 한 분 하느님으로서 우리의 모든 것을 주신 주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이분이 우리에게 진리에 관한 필요한 지식들을 모두 주셨을 때, 그분은 우리에게 이 모든 지식을 일상 생활에 응용하도록 하는 것도 첨부되어 있는 것이다. 마치 자기 것인 냥, 자기 능력으로 일을 해내는 듯이 사용하도록 허락되어 있다는 말이다.
그런데 본문을 읽노라면, 주님은 인간의 마음에 필요한 것을 주시고 나서 우리에게서 떠나시고 구원을 제 스스로 해결하도록 내버려두신 듯 여길 수도 있다. 그러나 사실 주님은 떠나 가신게 아니라 인간이 생각할 때 그렇게 보여질 뿐인 것이다. 우리가 가지는 일상 생활 즉 자연적인 모든 세부적인 것에서 주님이 현존하신다는 느낌을 전혀 가지지 않는게 흔하다. 이렇지 않으면, 자연적 인간은 자유로운 가운데 있는 줄을 느끼지 못하고 언제나 주님의 노예인 냥 여겨질 것이다.
실제로 주님으로부터 멀어진 것은 인간이다. 그 이유는 인간은 이해성 안에서 주님과 교제를 가지면서 지식을 응용하기 위해 세상 삶으로 나가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 구절은 인간에게 주님이 “먼 나라”로 떠나신 듯 여기게 해준다. 그 이유는 인간의 감각적인 삶은 내면의 삶으로부터 아주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이고, 내면의 삶 속에서만 인간은 주님의 영향과 현존하심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종 (하인)

본문의 “어떤 사람”은 먼길을 떠나면서 종들을 불렀다. 이 종들이란 교회에 소속된 모든 이, 주님을 섬기겠다고 고백한 모든 이들이다. 넓은 의미에서 보면 만민은 주님의 종이라고 스스로 간주해야 마땅할 것이다.

달란트 (the Talents)

재물(riches)은 필요한 것을 획득하는 수단이다. “달란트, 재능”은 기억이 붙잡고 있는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들, 자신의 심정과 생명이 되는 살아 있는 원리로서의 선과 진리를 획득하는데 준비가 완료되어 있는 지식들을 표현한다. “지식은 힘이다” 인간은 지식을 수단으로 알게 되어 악에서 선한 것을, 죄에서 거룩한 것들을 가려낼 수 있다. 알려진 것들의 축적이 지식이라 불리운다. 이것들이 정신적인 “재능” 또는 마음의 재물이다.
주님은 이런 “지식들”을 인간에게 다양한 수단을 동원하셔서 주고 계신다. 게다가 이런 지식 속에 있는 진리를 지각하는 능력까지 모든 인간에게 주고 계신다. 그래서 만일 인간이 주님을 사랑하고 그분께 순종한다면, 그 사람은 진리를 진리로서 볼 것이고 그것이 진리인줄도 알게 된다. 그러나 진리에 무관심하고 선에 상반되게 놓여, 오히려 악과 거짓을 탐닉한다면, 그는 자기 마음을 진리의 빛 안에서도 눈멀게 할 것이다. 따라서 어떤 이가 설사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을 가졌다손 치더라도 그가 지식을 일상 생활에 응용하지 않는다면, 그 지식들로부터 자신이 받아야 할 어떤 영적 혜택을 누리지 못하고 만다.

일반적인 도덕성

간접적으로 우리는 본문에서 공통된 도덕을 끌어 낼 수도 있고, 모든 우리의 능력과 소유들은 그 종류 여하를 불문하고 주님에 의해 우리에게 위탁된 것이고, 이것들은 일상에서 사용하기 위해서, 주님을 섬기는 데에, 한 마디로 선하고 참된 유용한 삶에 쓰이도록 되어 있다고도 해석할 수 있다. 그 이유는 주님을 섬긴다는 것은 외적 예배만에 국한되는 게 아니라, 사용함이라는 살아 있는 삶 속에서 있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주님을 섬기는 이는 주님이 가르치시는 원리로 사는 사람이고, 그의 전 삶은 주님을 섬김이다. 교회가 해야 할 것(service)은 각 개인으로 하여금 자기의 실생활 안에서 주님을 섬길 수 있도록 그들의 심정을 주님께 가져다 놓는 것이다. 좀더 꼼꼼한 의미로 볼 때 “달란트, 재능”이란 우리의 지식들이고, 선과 진리에 관해 우리가 아는 모든 것을 말한다.

숫자들

본문에서 주인은 각자의 능력에 따라 한 사람에게는 다섯 달란트를 주고, 다른 사람에게는 두 달란트를, 또 다른 사람에게는 한 달란트를 주었다. 글자상으로만 볼 때, 본문의 숫자는 양을 표시하고 있으나, 영적으로 볼 때 이 숫자들은 진리나 인격면에서의 차이점을 표현하고 있다. 비유에서 숫자들은 상징적으로 쓰이고 있지, 수리적 계산으로 사용되지 않음을 주목해야 한다. 그 이유가 비유는 주님의 말씀의 다른 부분들 같이 안쪽 의미, 즉 영적 의미를 가지고 영적인 원리를 다루면서 실생활에 그 원리가 응용되도록 가르치고 있기 때문이다.

하느님이 주시는 것

본문을 읽노라면, 주님께서는 인간에게 각기 다른 수준과 다른 분량에서 진리에 관한 지식을 의도적으로 마음내키는 대로 주고 계신다고 상상될는지 모른다. 주님으로부터 받는 차이는 인간 자신들에게 달려 있다. 본문에서와 같이 주님은 “각자의 능력에 따라” 모든 사람에게 주시고 있다. 즉 그의 능력은 자기의 의지와 노력에 의존되는 것이다.
그런고로 실제적으로 볼 때 각 사람이 지니는 영적 지식은 질이든, 양이든, 각 사람 스스로 결정하게 된다. 따라서 만일 인간이 이 지식들을 받으려 노력한다면, 주님은 누가 됐던지 간에 천국의 축복을 다 주신다. 이를 두고 예수님께서 이렇게도 말하셨다. “네가 생명을 가져볼까 해서 나에게 오지 말라. Ye would come unto Me, that ye might have life.” 실제로 주님은 인간이 취해야 할 것만을 각 사람에게 주실 수 있으시다.
본문의 세 숫자는 외적 교회 안에 있는 인간의 세 층을 표현한다. 교회 안의 모든 이는 가르침에 의해 어떤 지식을 받는다. 그러나 그 가르침을 받는 상태는 아주 다르다.

다섯

숫자, 다섯은 상징면에서 적음, 또는 약간을 말한다. 열의 절반이라는 측면에서의 다섯은 열 손가락이 십계명이듯, 완성을 표현한다. 보리떡 다섯 개로 예수님께서는 무리를 먹이시는 일을 완성하시었다. 다윗은 골리앗과 대적할 때 자갈돌 다섯 개를 취했었고, 베짜타못의 행각은 다섯 개였다. 다섯 달란트를 받은 사람이란 그 사람 속에 천국적인 지식이 있는 마음의 상태, 일상 생활에 사용할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이 약간 있음을 표현하고 있다.

상징 측면에서 둘은 이것과 저것이 결합하는 것, 접합, 하나를 이룸을 표현한다. 특별히 둘이란 사랑과 믿음, 선과 진리, 애정과 생각의 결합을 말한다. 두 달란트가 주어진 사람이란 진리의 지식이 진리를 사랑함과 하나되는 마음의 상태를 표현한다.

하나

둘에 반대되어 사용될 때의 숫자 하나는 분단된 상태를 의미한다. 한 달란트를 받은 사람이란 지식이 있으나 지식만 있다 할 뿐 진리를 사랑함이 없는 마음의 상태를 표현한다.

다섯, 둘, 그리고 하나

세 숫자를 한 가지 사항을 놓고 연속된 의미로 살핀다면, 다섯 달란트란 유아기 때 마음 안에 저장된 지식들, 즉 미래에 사용되기 위해 주님께서 아기 속에 나누어주신 선과 진리의 상태, 다른 용어로 말하면 주님이 “아껴 두신 것들”을 표현한다. 이와 연결해서 볼 때 두 달란트는 어린 시절에 가르침에 의해 받아진 지식을 표현하는데, 이 지식은 후에 거듭남에 의해 진리를 사랑함과 하나를 이룬다. 한 달란트는 청년기나 성년기에 획득된 지식을 표현하는데, 이 지식들은 기억 안에만 있을 뿐 선과 진리를 사랑함과의 어떤 결합도 없다.

장사

다섯 달란트를 받은 사람은 곧 가서 다섯 달란트를 장사하여 다섯 달란트를 더 벌었다. 그리고 두 달란트를 받은 자도 두 달란트를 더 벌었다. 팔고 산다는 것은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을 획득하는 것과 그것들을 가르치는 것을 표현한다. 따라서 달란트를 가지고 장사한다는 것은 그 달란트를 사용함으로 증가시키는 것을 말한다. 지식을 선하게 적당히 활용하면 더 많은 지식을 만든다. 이것이 다섯 달란트, 즉 적은 지식들을 가진 이들, 그리고 두 달란트 즉 진리와 선을 사랑하는 마음을 자기 지식에 결합시킨 이들의 경우이다.

갔다

이 사람들은 “곧 가서 장사했다”고 말해지고 있다. 즉 그들은 일상 생활 속에서 자기들의 지식을 이용했다는 말이다. 이와 같은 응용은 실제를 수단으로 지식들을 증가시켜 준다.

두 배로 된 달란트

두 슬기로운 사람은 달란트의 숫자를 두 배로 불렸다. 그들은 애당초 가지고 시작했던 양만큼 더 만든 것이다. 이와 같이 우리가 자신의 지식을 활용한다면 배가된다. 즉 우리가 그것들을 자연적인 삶 속의 실지 행위들에 적용시키면, 적용시킨 만큼에서 영적 삶에 필요한 양을 되돌려 받는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 자연적인 것들로부터 그것들은 영적인 것이 된다. 이것들이 두 배가 된 것은 질적 측면에서이다. 그 이유는 우리가 자연적 삶 속에서 그것들을 사용했을 때, 그 달란트들은 우리에게 영적 삶이라는 측면에서 새로운 것으로 열렸기 때문이다. 진리가 자연적인 삶 속에서 진리의 자연적인 형태로 실체화되지 않고는 어떤 진리라도 영적 생명을 소유하지 못한다.
그리고 이 달란트는 또 다른 측면에서도 두 배가된다. 즉 그것들은 우리의 이해성에서도 싹이 터서, 즉 애정에 이해성 속의 지식이 결합을 이루는 가운데 더 완벽하게 승강되어 의지와 결합하는 것이다.

땅을 파고 감추어 둠

“그러나 한 달란트를 받은 사람은 가서 그 돈을 땅에 묻어 두었다.” 진리에 관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 진리와 선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는 자는 자기 지식을 실지의 선한 용도에 활용하지 않는다. 땅을 판다는 것, 또는 땅 속에서 뭔가 찾는다는 것은 지식에 관한 사실(fact)을 사실(fact)로서 공부하고 탐사하여 얻으려 하는 것을 말한다. 달란트를 땅에 묻는다는 것은 그 달란트를 아무 쓸모 없게 방치해 두는 것이다.

땅 (earth)

땅이란 우리의 자연적인 마음을 표현한다. 달란트를 땅에 묻는다는 것은 우리의 가장 바깥쪽에 해당하는 감각적인 삶에 속한 것들 안에 자기 지식을 푹 담가 놓는 것을 말한다. 다시 말해서 자기 지식을 수준 낮은 외적 동기, 즉 육적 쾌락이나 명성 따위, 이기심만을 부추기기 위해 자기 지식을 사용하는 것이다. 그러면 그가 가진 지식 속의 진리도 진리의 형체(form)는 소유했겠지만, 그 진리 속에 생명을 주는 영이 없어 선용은 결여되기 마련이다. 우리 모두는 바깥쪽 믿음이라는 것을 가질 수는 있겠지만, 그 속에 영이 없게 되면 사랑 없는 형체만의 믿음이 되어 어떤 좋은 열매의 수확이 불가능해진다. 그래서 열매를 보아 너희는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그 나무가 어떤 나무인지 판단할 수 있다고 주님은 가르치셨던 것이다.

시간

“얼마 뒤에, 주인이 와서 그 종들과 셈을 하게 되었다.” 얼마 뒤라는 시간은 삶의 상태나 조건들을 표현한다. 각 사람의 상태가 심판하기에 적절하게 무르익을 때, 주님은 그 사람에게 온다. 이는 처벌을 위한 심판의 차원이 아니라 열매가 익었을 때, 즉 성장 단계를 마무리 지음으로 씨가 되었을 때의 심판이다. 다시 말해 인간의 인격이 무르익게 될 때 심판이 있는다. 그 이유는 인간은 자신 스스로 심판함이라는 상태에서 살기 때문이다. 따라서 심판은 각자가 형성해 놓은 인격을 각자의 탓으로 여기게 해준다. 즉 그가 만든 것들을 자신이 간직하게 해준다. 그가 영적 인격을 하나도 만들지 못하였다면, 그는 받는게 아무것도 없다. 그래서 그는 자기가 지녔던 선과 진리의 지식마저 잃게 된다. 그나마 지닌 것이 그에게는 아무 소용이 없기 때문이다.

주님이 오심

각 사람은 주님께 자기가 번 것을 가져온다. 그래서 그것들이 주님의 것임을 인정한다. 이와 같이 거듭나는 사람은 주님을 자기 주인으로 인정한다. 자기 지식을 사용해서 순수한 지혜와 총명을 획득한 사람은 자기가 가진 모든 것 때문에 주님께 빚을 지고 있음을, 은혜를 입고 있음을 인정한다. 그는 자기 달란트를 두 배로 가지고 있다. 즉 그들은 자기들이 지닌 달란트가 자연적인 수준뿐이 아닌 영적인 수준까지 가지고 있는 것이다.

칭찬, 상을 받음

주인은 종들에게 “착하고 충성되다”고 칭찬하고 있다. 즉 의지나 심정 속의 선, 이해성 속의 믿음, 그리고 그 선과 믿음의 행동을 칭찬하는 것이다. “잘 하였다”란 그의 양심과 교통하시겠다는 주님의 승인이다. 이 세상에서 보여지는 작은 것들에 충성을 다한 이들은 선을 사랑하는 하늘의 섭리를 발달시킨다. 그래서 그 사람의 마음속에 있는 영적 부분이 열리어져, 그는 자기의 자연적 마음속에 든 생각이나 열정 등 많은 것을 지배할 수 있게 된다.
자연적인 생각들은 비록 그것이 이 세상에서는 낮고 천한 위치에 불과 했었지만 저 세상에서는 명예와 권능이라는 지위로 승진된다. 그러나 이런 이기적 사상 위에 영적 의미들이 부상해서 지배하는 거듭나는 마음의 상태, 즉 내면의 것들이 외면의 것을 좌지우지해 가는 상태가 더욱 칭찬 받을 것임을 보여주게 된다. 이것이야말로 가장 크게 상을 받는 약속인 것이다.

기쁨을 나눔

“자, 와서 네 주인과 함께 기쁨을 나누어라.” 이 구절의 모습은 먼 여행을 갖다 온 주인이 큰 잔치를 벌이고 주인의 재산을 잘 관리한 종들을 초대해서 즐기는 모습을 상상하게 해주고 있다. 이럴 경우 칭찬 받은 두 종들은 자유를 얻고 지위를 부여받아 타인을 통솔하는 위치에까지 올라가기도 한다.
영적으로 볼 때, 주인과 함께 기쁨을 나눈다는 것은 사랑과 순종으로 인해 주님과 결합하게 되는 것, 주님으로부터 천국적 기쁨을 받는다는 것, 선을 사랑하고 행함에서 기쁨을 가진다는 것을 말한다. 이럴 경우 우리는 일상 생활에 있는 모든 자연적인 애정 역시 영적 애정이 주는 형용할 수 없는 기쁨으로 가득 차게 된다.

무서우신 분 (a hard man)

한 달란트를 받았던 종 역시, 비록 그가 그 달란트를 잘 활용은 못했지만 그것이 주님의 것임을 인정하고는 있다. 그러나 그는 자기 주인을 “심지 않은 데서 거두시고 뿌리지 않은 데서 모으시는 무서운 분”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사랑이 결여된 믿음, 또는 지식은 영적 기쁨을 주지도 못하고 증가시키지도 못한다. 거듭나지 않는 자연적 인간은 주님의 속성을 납득 못하는 바, 그분과의 결합은 상상조차 할 수도 없다.
주님을 사랑하여 따스함을 경험한 이들은 그분의 사랑을 알고 그분을 섬기는 일 역시 사랑한다. 그래서 그들은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웁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을 받지 않은 이들은 그분이 엄하고 불공평한 분이어서, 인간에게 선을 사랑하고 행하라고 요구하시면서도 그분은 선과 진리에 대한 어떤 사랑도 인간에게 주지 않는 분이라고 간주해 버린다. 또 그들이 뇌까리는 말인 즉, 주님은 자기들 속에 선과 진리의 어떤 씨도 뿌리지도 않고 인간에게서 수확만 거두시겠다고 요구하시는 분이라고 한다.
자기 달란트를 감추어 둔 사람은 자기가 어떤 잘못도 행한 일이 없다고 생각하는 듯 보여지고 있다. 그의 말을 되씹어 보면, 주님이 자기에게 부당한 일을 책임 지웠다고 까지 생각하는 듯 여겨진다. 악한 자는 주님이 완악하다고 생각한다. 그 이유는 그분이 자기들 악에 반대되기 때문이요, 그들 속성이 그분의 속성과 대치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들이 선을 행하라는 요구를 받는다는 것조차도 고난일 수밖에 없다. 그들은 신성한 섭리를 믿지 않는다. 자기들도 법의 글자를 잘 준수했는데 그 외 뭐가 더 필요하냐고 오히려 따지고 든다. 그래서 자신 만만하게 주님에게 하는 말, “우린 당신께서 우리에게 주신 달란트를 되돌려 주었습니다. 보십시요 여기 그 달란트가 그대로 있읍니다.” 이들의 근심거리는 자연적이고 감각적 수준의 것들이다. 이들 역시 말씀의 글자는 포획하긴 했지만, 그 말씀으로 자신들 속의 악을 검증하지 않았고, 오히려 죄를 변명하려했을 뿐이다.
주인이 이 종에게 대답한바 같이, 만일 인간이 생각하기에 주님이 무서운 분이신 줄 알았다면, 오히려 그는 자기 달란트, 지식을 실지 사용하는 쪽에 더욱 정진했어야 했을 것이다. 자연적인 사람에게서조차 주님은 선용(use)을 요구하신다. 설사 어떤 사람이 선을 행하되 보상만을 기대했다 해도, 어쨋든 주님은 선을 행하기를 원하신다. 이것이 자기 달란트를 사용 않을 바에는 차라리 이자라도 붙도록 해야 한다는 구절에 담긴 의미이다.

악하고 게으름
위의 종을 두고, “악하고 게으르다”고 호통이 쳐지고 있다. 악하고 게으르다는 것은 생각에는 거짓이, 의지에는 악이 들어 있다는 말이다. 그는 자기 달란트를 “돈 쓸 사람, exchanger”에게라도 놓아두었어야 할 것이었다. 즉 그는 자기 지식을 합리적인 생각에 가져다 놓기라도 했더라면, 주님의 인도 하에 그의 바깥쪽 지식에 영적 지식이 첨가될 수도 있었을 것이라는 말이다. 이런 식으로 해서라도 인간은 주님을 영적으로, 자연적으로 인정하여 선하고 기쁜 삶을 영위할 수도 있다.
그러나 지식을 선용하지 않는 자는 그 지식을 마음의 일부가 되게 할 수 없다. 이 사람이 영계로 들어 갈 때 그는 선과 진리에 관한 어떤 것도 바라지 못하게 된다. 따라서 그는 지식이라는 형체까지 그의 마음에서 거절되어 진다. 의지나 행동에 기반을 두지 않은 것들은 그의 인격 속에도 존재 않기 때문이다.

인격
모든 사람은 자신의 의지와 그에 따른 삶을 수단으로 인격의 어떤 품질을 스스로 획득한다. 모든 사람은 선과 진리 또는 악과 거짓을 어떤 정도에서 받아 지닌다. 이 분량이 그의 자신이다. 저 세상에서 그는 이것이 가득 찰 때까지 채운다. 그런데 만일 여기서 그가 알고 있는 진리를 사용 못하게 되면, 저 세상에서는 그 사람의 기억 속에 든 것까지도 떨구어 진다. 그 이유는 그가 지닌 선과 진리에 관한 기억속의 지식이 그를 통치해 온 사랑에 반대되어 자신으로부터 저절로 거절당해지기 때문이다.

가진 자들에게 줌

그러나 악한 자 속의 지식이라 해도 이 지식들은 선한 이들이 선용할 수 있다. 그 이유는 악한 자도 지식들을 가르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 지식들은 비록 악한 자들로부터 영적으로 취해졌다 해도 열 달란트 가진 이들에게 주어질 수 있는 것이다. “가진 사람에게 주어라.” 이렇게 되는 이유는, 선과 진리를 사랑함으로 해서 지식을 획득하여 그 지식을 가지고 더욱 많은 천국적인 것들을 받을 수 있게 하시려는 것이 하느님의 섭리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랑 있는 믿음은 여름철의 태양같이 열과 빛을 가지고 있어 식물들을 번성시켜 준다. 그러나 사랑 없는 믿음은 겨울철의 태양같이 빛은 있지만 열이 없어 식물들로 죽어 있게 만든다.
이러므로 사람들이 지혜와 총명을 받는 것은 선과 진리를 사랑하려는 마음의 양과 질에 따라 가능해진다. 그래서 만일 그가 이 세상에서 위와 같은 사랑을 획득 안했다면, 그의 인격 속에 피상적으로 가졌었던 지식마저도 저 세상에서는 거두어지고 만다. 누가복음의 경우, “그로부터 가진 듯 보이는 것까지도 빼앗길 것이다”고 말하고 있다. 그 이유는 그가 진실로 내향적으로 지식을 가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바깥 어두운 곳

“이 쓸모 없는 종을 바깥 어두운 곳에 내어쫓아라. 거기에서 가슴을 치며 통곡할 것이다.” 글자대로의 언급은 주님이 먼길에서 되돌아 올 때, 쓸모 없는 종으로 하여금 잔치에 참석 못하도록 하고 있다. 영적으로 어두운 곳이란 진리에 문을 닫는 거짓들이다. 어두움이란 진리에 무지함을 말하고, 바깥 어두움이란 진리를 거절함이다. “너희 안에 있는 빛이 어둡다면, 그 어둠이야말로 아주 큰 어둠이 아니겠느냐?” 악한 사람은 어둠을 사랑하고, 그들 행위는 악 뿐이다.

슬피 울며 이를 갊

운다는 것은 선과 진리를 거절함으로 야기되는 슬픔이다. 이를 갊이란 거짓 원리들이 진리에 반대함으로 일어나는 충돌이다. 거짓 원리로 확증된 악한 자는 마치 끈으로 매어 놓은 성난 개와도 같이 무기력한 격노의 상태를 이를 갈아 표현하듯, 가능만 하다면, 모든 선과 진리를 파괴하는 것으로 기쁨을 삼는다.
이빨이란 위장에 들어가는 음식을 사전에 준비하는 신체의 일부인 바, 이는 외적이고 감각적인 생각들을 표현해 준다. 이 생각들이 정신적인 소화 작용을 거쳐야 하는 다각적인 것들을 미리 준비시킨다. 감각적 인간은 진리를 진리로 보는게 아니라 그것에 관해 논쟁하려 든다. 이런 논쟁들은 신학이 영적 진리를 내면의 시각에서 보지 못하는 자들에 의해 토론될 때, 참된 교회에 흙탕물을 일으킨다. 이와 같은 논쟁들이야말로 지옥에서 끊임없이 계속되고 있다. 이를 본문에서 표징적으로 “이를 갊”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자연적 삶 속에 있는 영적인 삶

이 비유는 가르치기를, 영적 삶은 자연적 삶에서 분리되어서는 안된다는 것, 오히려 영혼이 육체 안에 있듯 그 속에 있어야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알고 있는 진리를 자신의 행동에 적용함으로써 선한 자연적 삶 속에 영적 삶이 건설되어야 한다. 그래서 잘못된 것을 행함으로 발생하는 죄, 뿐만 아니라 옳고 선한 것을 행하지 않는 소극적인 태도까지 점검해야 함을 비유는 가르치고 있다. 가진 지식, 아는 진리를 선용하지 않는다면 우리에게는 영적인 빛도 지식도 가진게 아니다. 그것을 사용하지 않은 결과는 그것마저 잃는 것이요, 자신에게 당연히 따라 올 축복마저 포기하는 셈이다.
사람마다 교육 수준이든 마음의 양상이든 다 다르다. 이와 같은 환경 조건의 다른 점은 피할 수 없는 것이다. 이와 같은 자신의 성질, 태어난 조건 등등에 대해 각 개인은 책임이 있는 것은 아니다. 한마디로 자신이 유전 받은 능력, 상속받는 성질 등등에는 책임이 없다는 말이다. 그러나 받은 그것을 어떻게 활용하느냐는 자신의 책임 범주에 들어간다. 악을 죄로 알고 끊고, 선을 행하기 위해 자신의 능력과 지식을 선용하는 이들의 고향은 천국이 될 것이다. 새 교회 속에는 말씀의 글자뿐만 아니라 영적 의미까지 이어지는 포괄적인 지식들이 많이 주어지고 있다. 이런 지식들을 가지고 자신의 정신적 상태를 늘 경계해서 점검해야 할 의무가 있고, 특히 거듭나는 삶의 실지 응용에 이 지식들을 활용하지도 않으면서 지식이 있다고 우쭐대는 일을 삼가야 할 것이다. 더욱 특별한 것은, 비록 타인이 자기와 같은 지식을 가지지 못한게 분명하다 해도 그를 경멸하는 마음을 갖지 않아야 할 것이다. 그 이유는 비록 그 사람이 지식은 덜 소유했을는지 몰라도 우리보다 더 선과 진리를 사랑하는 품성을 갖추어 더 아름답고 유용한 삶을 꾸릴는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20
은밀하게 자라나는 씨
– 은밀한 하느님의 역사 –

성서 본문: 마가복음 4장 26-29절

26. 예수께서 또 말씀하셨다. “하느님 나라는 이렇게 비유할 수 있다. 어떤 사람이 땅에 씨앗을 뿌려 놓았다. 27. 하루 하루 자고 일어나고 하는 사이에 씨앗은 싹이 트고 자라나지만 그 사람은 그것이 어떻게 자라는지 모른다. 28. 땅이 저절로 열매를 맺게 하는 것인데 처음에는 싹이 돋고 그 다음에는 이삭이 패고 마침내 이삭에 알찬 낟알이 맺힌다. 29. 곡식이 익으면 그 사람은 추수 때가 된 줄을 알고 곧 낫을 댄다.”

하늘 나라

천국은 주님의 사랑과 지혜, 선과 진리로 통치되는 인간 마음이면 어느 곳에서나 건설되는 나라이다. 즉 “하늘 나라는 네 마음속에 있다.” 이 하늘 나라는 주님의 말씀 속에 있는 진리가 그 사람의 마음에 이식되어 형성된다.

씨는 진리이다. 진리라는 씨는 선함이라는 생명력을 진리 속에 담고 있다. 이 생명력은 성장 조건이 존재하는 곳에서는 어디서든지 진리의 씨로 하여금 발아하게 하여 싹을 내서 뭔가가 살아 있게 해준다. 천국은 진리와 선을 받는 모든 사람들 안에 이식되어진다. 즉 옥토에 진리를 받는 자란 그 사람의 자연적 의지가 진리를 사랑해 보려 하는 마음에 이식된다는 말이다. 땅이란 인간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는 바, 그 땅의 상황은 그 사람을 좌지우지해 가는 사랑이 어떠한 것이냐에 달려 있게 된다. 씨는 그릇과 같아서 주님에게서 흘러 나가는 생명을 받아 사용해서 성장한다. 이와 같은 게 인간의 마음이다. 즉 자신의 마음 상태에 따라 그릇처럼 각 인간은 생명의 각기 다른 수준과 품질을 받아 성장한다.

씨 뿌리는 자

본문에서의 씨 뿌리는 자는 인간 자신이다. 다른 비유에서 씨 뿌리는 자는 주님을 표현한다. 그 이유는 씨 뿌림이 주님의 작업 부분으로 취급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 비유에서는 씨 뿌리는 인간의 작업 부분과 주님이 하시는 일과 대비되도록 하고 있다. 인간의 일이란 땅을 잘 고르고, 씨를 뿌리고, 수확하는 부분이다. 그리고 주님의 일이란 씨의 은밀한 성장, 성장할 조건의 공급, 더불어 인간이 계속 노력할 수 있게 떠받쳐 주시는 것이다. 따라서 주님이 주무신다거나, 씨가 어떻게 성장하는지 모르시고 있는 분이라고 말할 수도 없을 것이다.

심는 것

본문에서 씨를 땅에 뿌리는 것은 인간이 주님의 말씀으로부터 진리를 배워 그 진리를 자기 마음에 이식하는 일을 표현해주고 있다. 씨가 싹이 튼다는 것은 인간 이해성 안에서 진리가 받아들여져 역사하는 것을 말한다. 그 싹의 성장이란 그 사람의 의지 속에 진리가 받아들여져 생동하는 것이다.

거듭남은 비밀스런 작업이다

인간의 거듭남은 그 거듭남의 작용과 진보를 인간이 모르는 가운데 성취되고 있다. “바람은 제가 불고 싶은 대로 분다. 너는 그 소리를 듣고도 어디서 불어 와서 어디로 가는지를 모른다. 성령으로 난 사람은 누구든지 이와 마찬가지이다.” 즉 주님의 역사는 결과로만 알게 될 뿐, 그 일의 과정은 인간의 실세계에서는 감지 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자고 일어남

자고 깨고 일어남, 그리고 밤과 낮이란 마음의 어떤 상태를 표현해 준다. 즉 마음이 진리에 대한 명백한 빛 속에 있어 그의 마음이 승강될 때, 그의 마음 상태는 낮인 것이다. 그러나 자기에게 진리가 분명치 않고 오히려 희미할 때, 그는 정신적으로 어둠 속에 있는 바, 그의 정신적 경험들은 밤에 있게 되는 것이다. 우리 마음이 영적 진리라는 빛 속에서 적극적일 때, 우리는 깨어 일어나서 뭔가 선용을 이루어 가게 된다. 그러나 우리가 오로지 감각적이고 자연적인 생각이나 느낌에 빠지게 되어 위대한 영적 원리로 보는 시야를 잃게 될 때, 우리는 잠들어 있다고 말해진다. 따라서 잔다는 것은 자연적 마음뿐인 상태이고, 일어남이라든가 깨어 있음은 영적 마음의 상태 안에 있는 것을 말한다.

교체

위의 두 상태는 삶의 과정 속에서 상태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번갈아 있게 된다. 한 때 우리의 마음은 영적 빛에 열리워져 있어 영적인 것들을 명백하고 확실하게 아는 듯 여긴다. 이런 상태들은 실제적인 사건 속에서 진리를 행하는 상태를 필시 동반하는 바, 생활이라는 공통적인 일상 업무에 그 원리를 적용해 갈 때이다. 그가 진리를 실제화할 때 그는 더 많은 진리를 받을 수 있는 그릇을 준비하게 된다.
이렇게 해서 인간은 교훈을 받아 마음이 강해지는 때와 이 마음을 가지고 일상 생활에서 그 교훈을 체현 해내는 때가 번복된다. 인간은 마음을 의기충천하게 해 주는 빛 속에서 언제나 머무를 수는 없다. 그 이유는 자신의 발전 매 단계에서 원리를 적용해 갈 필요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알게 된 진리를 응용함으로 우리는 알고 있는 진리를 심정에 가져오게 되고 삶에 적용하는 것이다. 발전되는 단계를 가질 때 새 단계는 그로 하여금 진리의 새 빛으로 더 진보하게 해준다.
이리하여 알게 되고 실습된 각 진리는 그 진리에 부응되는 선을 발달시킨다. 각 선이 발달되면 그 선은 더 많은 진리 쪽으로 우리를 인도해 준다. 일어나고 자는 것을 되풀이해서 인간은 한 단계 한 단계 훈육되어지면서 그의 원리는 최 말단에까지 적용 가능하게 되어 그는 일상 생활 속에 그 진리를 고정시키고 그 진리를 확증하게 된다.

변화는 무의식 상태에서

만일 인간이 진리를 보기만 한다면 그는 이론가일 뿐이다. 만일 그가 진리를 보지도 못하면 그는 감각적 인간일 뿐이다. 인간이 자기가 아는 진리에 따라 선을 행하는 동안 거듭남은 인간 속에서 계속 진행된다. 진리의 실습은 자기도 모르게 자기 속을 변화시킨다. 그리고 그는 그 변화를 결과에서 경험하게 되지만 그 변화가 오고 역사되는 것을 인식하지 못한다.
그 이유가 주님은 인간을 인도하시되 사랑을 수단으로 내향적으로 인도하시고 각 사람의 의지인 그의 사랑 안에 흘러드시기 때문이다. 인간의 의지로부터 주님은 그의 이해성이 영향을 받게 하신다. 따라서 우리가 선을 기꺼이 사랑한다면 그럴수록 우리는 진리를 더 많이 알게 되고 심사숙고 할 수 있게 된다. 따라서 인간은 자기 사랑 안에 흘러든 것을 그에 대한 애정을 가지고 느끼는 일반적인 감동 그 이상의 것은 가지지 못한다. 그러나 그는 이해성에 흘러드는 것에 대하여는 명백한 감동을 가진다. 그 이유는 이해성으로의 감동만이 그 사람의 생각 속에서 뚜렷한 형체를 취하기 때문이다.

은밀함은 필수이다

인간이 의지에 선을 받되 은밀하게 받아져야만 한다는 것을 우리는 이해할 수 있다. 그 이유는 주님이 인간으로 자기의 전 인격을 재건설하도록 인도하시기 때문이다. 각 사람의 자연성은 비질서적인 정신 조건에 있다. 그래서 그는 자신 속의 악이 선이요 꽤 쓸만한 것인 듯 착각하고 있다. 그러나 주님은 이런 비질서로부터 인간을 인도해 내시기를 바래신다. 그래서 질서적 조건으로, 그 조건 속에서 그가 악을 미워하고 선을 사랑하도록 배려하신다.
그러나 인간은 주님의 명령이 있다고 해서 자신에 반대되는 쪽으로 기꺼이 움직이지 않는다. 그 이유는 자기가 타인의 강요를 받고 있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님은 인간이 자기 스스로 자기를 인도하는 듯 보이도록 주님의 명령이 나타나게 해주시어 자신의 의도에 일치하는 인격 속에서 변화를 가능하게 해주신다. 이러면 인간은 자유로운 듯 느낀다. 그 이유는 자신의 바깥쪽 생각에서 볼 때 자기가 자기를 강요하는 듯 보이지, 어느 누가 강요한 것이라고는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런 방법으로 가능한 수준에서 주님은 각자가 선을 사랑하려는 의도와 자신의 인격을 변화시키겠다는 의도를 인간 속에 은밀히 이식하신다. 따라서 인간은 선한 애정과 진정한 생각이 어떻게 자기 속에서 일어났는가를 보거나 알지도 못하면서 계속 선을 배양해 가는 것이다.

예증

씨가 어떻게 자라는가는 농부가 알아야 할 필수 조항은 아니다. 만일 그가 자기 역할 부분인 땅을 잘 준비하고, 씨를 심고, 이 씨가 잘 자라도록 협력하는데 자기 지식과 능력을 발휘하여 수확을 거둔다면 그는 씨의 성장 결과로서 빵을 먹을 수 있게 된다.
이와 같이 인간이 진리를 배우고 그 진리가 마음에서 성장하도록 능력을 발휘해서 그 진리의 성장에 협력하면, 그는 마음과 생활에서 진리가 성장되는 실제적인 결과를 붙들게 된다. 아마 자기 속의 진리가 어떻게 이식되어 실지의 선이라는 추수를 거두기까지 성장되었는가를 모른다 해도 문제가 안된다는 말이다.
또 다른 예를 생각해 보자. 우리는 매일 음식을 먹는데 그 음식은 다양한 작용을 수행한다. 즉 소화되고 흡수되어 피와 살로 전환된다. 그러나 우리는 자신의 신체 속에서 일어나는 이런 작용을 명백히 느끼거나 지각하지 않는다. 이런 소화 단계들을 알지 않아도 그 단계들의 결과를 붙잡아 살아간다.
이와 같은 것이 영적 생활에도 있다. 주님은 우리의 지식 없이 우리의 정신적인 조건 속에 많은 것을 수행해 주신다. 농부가 씨를 심고, 자고 일어나 밤과 낮이 바뀌되 그는 그 일이 어떻게 라는 방법에 고심하지 않는다. 우리가 진리를 배우고, 일을 해 가되 영적 상태에서도, 자연적 상태에서도 수행해 갈 뿐이다. 그럼에도 내향적인 성장은 우리가 지각 못하는 순간에도 계속되고 있다. 즉 사랑으로 영원히 지켜보시는 주님에 의해 역사 되고 있다는 말이다.

수호 천사

천사와 영인들을 수단으로 주님은 인간을 가르치고 인도하신다. 그러나 인간은 자기를 이끄는 영들을 보지 못한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영들과 얼마나 친숙한 상태인지, 자기 주위에 현존해 있는 그들을 느끼지 못한다는 말이다.
주님으로부터 자기 속으로 선과 진리가 어떻게 흘러들며, 지옥으로부터 자기 속으로 악과 거짓이 어떻게 흘러드는지 자신 스스로의 감각으로 보지 못하도록 되어 있는 것은 신성한 섭리의 법칙에 해당된다. 따라서 신성한 섭리가 자기 속에서 자기로 하여금 악을 반대하고 선을 좋아하도록 은밀히 어떻게 역사하는지 결코 알지 못한다. 그 이유는 인간이 이런 과정을 안다면 그는 자기가 자유롭다고 느끼지도 않기 때문이고, 자기 이성에 따라 자유롭게 자기 의사대로 행동할 수 있다고 느끼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위와 같은 사항들을 자기 삶의 영적 원리로 알고 인정한다면, 주님의 말씀으로부터 있는 교회 원리로 가르쳐지는 것만으로도 충분할 것이다. 이런 사항들을 우리가 바깥쪽 감각들로 알려드는 것은 각자에게 도움이 되지 못하고 만다. 그 이유는 인간이 자기에게 오는 선한 영향력에 반대되는 행동을 취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예증

위의 내용에 대해서는 자기 몸 속에 들어오는 음식이 어떤 과정을 통해, 어떤 화학작용을 거쳐가는 가를 생각해 봄으로도 쉽게 파악된다. 우리는 입으로 들어가는 음식을 보고 먹을 수 있지만 실상 자기 뱃속에 들어가 버린 음식의 과정을 일일이 지켜볼 수 없듯이, 정신적인 양식이 마음의 각 층이나 각 수준에서 어떻게 소화되고 흡수되어 배분되는 신성한 섭리의 모든 내향적 작용을 간섭해 보려 드는 것은 가능할 수 없는 일에 해당된다.

결과로서 알게 된다

비록 우리는 주님의 역사가 우리 속에서 각 단계나 진보 수준을 거치는 과정을 알 수 없다 해도, 그 과정이 끝난 후의 결과는 아주 명백하게 드러나 보인다. 추수 때가 올 때, 우리는 그 추수를 보고 안다는 말이다. 인간이 거듭나질 때, 각 사람은 주님께서 점진적 성장이라는 많은 단계를 통해 자기를 인도해 주셨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리하여 그는 주님의 인도하심에 반대하지 않는다.

예증

농부가 씨의 성장을 생산할 수도 없고, 그 씨가 어떻게 자라는지 알지도 못하지만, 그에게도 자신이 알고 할 수 있는 많은 부분이 있다. 그는 씨를 심는 방법이나 기술을 연마해 갈 수 있다. 그는 불량한 씨와 우량한 씨를 구별해 내는 법을 배울 수도 있다. 그는 땅을 고르고 잘 돌볼 수 있고, 잡초나 돌을 제거하며 여느 짐승이 씨의 성장을 방해 못하도록 울타리를 칠 수도 있다. 그런데 그가 좋은 작물을 수확하지 못한다면, 거기에는 씨 뿌리고 가꾼 농부의 결함이 존재했을는지 모른다.
영적으로 우리는 할 수 있는 것이 많다. 자신이 지닌 능력을 발휘하여 신성한 진리를 받을 수 있게 마음을 준비하여, 주님의 영향이 자기 마음에 계속 미치도록 한다던가, 그분의 수호 천사가 마음의 성장을 계속하도록 허용하는 등등 우리 쪽의 할 일이 많이 있다. 따라서 진리의 성장함이라는 결과를 받는데 실패함은 우리 쪽의 할 일이 다 진전되지 못한 만큼에서 있게 된다.
우리가 해야 할 부분을 알고 행하는 것만으로도 인간에게는 충분하다. 즉 주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 악을 금하고 선을 행하는 것이다. 물론 영적 사항에 관한 큰 지적인 지식을 가진다는 것은 매우 유익하고 기쁜 일이 아닐 수 없다. 어찌 됐든 “지식은 힘”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힘은 지식이 응용되기 전에는 어떤 쓸모도 없는 것이다. 따라서 악을 금하고 선을 행하는 실제 응용에 소용되지 않는 한 모든 우리의 지적인 지식은 아무 실용성이 없게 될 뿐이다.

협동

주님은 우리가 저항할 수 없는 영향력으로 다가 오시어 선으로 채워 주시고 악은 쫓아내어 주신다고 착각해서는 안된다. 단지 각자의 일상 생활 속에서 선과 진리를 기쁘게 응용하려 하는 한도에서 우리 속의 선과 진리를 성장하게 해주실 뿐이다. 즉, 그분은 선과 진리를 사랑하겠다는 우리의 의지를 더 확장시켜 주시어 그분에게서 더 많은 선과 진리를 받게 해주신다는 말이다. 우리가 진리를 배우고 사용해 갈 때, 그분은 은밀하게 더 받게 해주시는 바 이것이 그분의 경이로운 작업인 것은 확실하다.

땅이 열매를 맺는다

그럼에도 행해지는 모든 것은 인간 스스로 해 놓은 냥 보인다. “…땅이 저절로 열매를 맺게 하는 것인데…” 그러나 이 구절의 말은 글자에서까지도 실제적인 사실은 아니다. 왜냐하면 땅은 능동적으로 행동하는게 아니라 수동적이기 때문이다. 즉 작가의 극본 그대로 움직이는 배우 역할을 한다고 봐야 할 것이다. 열이나 빛, 대기, 기타 여러 가지 조건들이 땅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땅으로 의미되는 인간의 자연적 마음은 그 스스로 열매를 맺는 것 같지만 실상 그렇지 않고 주님으로부터 온 다양한 영향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다.
생명력은 땅에 있는게 아니라 씨 안에 있다. 따라서 인간 마음이 스스로 열매를 맺게 하는 것은 아니다는 말이다. 살아 있게 하는 에너지는 인간 안에 있지 않고 주님으로부터 온 진리라는 씨 안에 존재한다. 그러나 밭이라는 인간 마음은 진리를 받는데 준비된 조건 속에 있어야 하는 것만은 틀림없다.

점진적인 성장

씨는 “처음에는 싹이 돋고 그 다음에는 이삭이 패고 마침내 이삭에 알찬 낟알이 맺힌다.” 인간이 진리를 받는 처음에는 그저 생각 수준에서, 즉 미약한 새싹의 수준에서 진리를 받을 뿐이다. 게다가 그 생각도 자신의 것이라고 간주하고 있다. 그런 다음, 인간은 진리를 받되 기억 속에 저장해 둘 만한 지식, 과학적 상식 정도로 진리를 받는다. 후에 그는 진리를 원리로서 보게 된다. 이러면 그가 믿는 진리들이 되는데 이를 두고 믿음 속의 진리라 한다. 그런다고 그의 자연적인 생각이 진리와 일치되어 있는 것은 아직 아니다. 낟알이 이삭 속에서 형성되기 시작한다. 그러나 이 이삭도 쓸모 있기에는 아직 이른 상태다. 이후, 인간은 실제적인 양상, 즉 자기가 할 수 있는 선한 어떤 것 속에서 진리를 본다. 이것이 삶 속의 진리요, 이삭 속에 낟알이 들어찬 상태, 언제라도 양식으로 삼을 수 있는 상태, 사용할 준비가 된 알이 찬 이삭인 것이다. 이 낟알이 사용될 때 진리들은 이타애라는 행동 속에서, 또는 이웃을 사랑함이라는 행동 속에서 생활의 선이 되어진다.
이렇게 해서 마음이 자라나고, 그 마음과 더불어 진리도 성장해 간다. 즉 진리는 먼저 각 사람의 기억 속에 들어오고, 그 다음 그의 이해성 속에서 정리되어, 마지막으로 그의 의지 안에 자리잡는다. 이 성장은 인간이 자기의 자연적 삶 속에서 주님의 진리에 꼭 순종해야 한다는 원칙을 가지고 그분의 계명을 준수해 갈 때만이 진행되어 진다.

받는 것은 다양하다

인간은 진리를 각기 다르게 받아들인다. 그 이유는 인간 각자가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인간 삶 전체를 망라해서, 만일 그가 거듭 나아가고 있다면, 그는 더욱 더 많은 진리를 받고 있는 것이다. 각 사람이 새 진리를 받는 태도는 마음 상태에 달려 있다. 진리를 수단으로 선이 모든 사람 속에 이식되어진다. 천적 수준의 사람은 선을 사랑함으로 그 사람 속에 선이 이식된 경우이다. 이 사람은 아주 높은 수준에서 거듭나는 것이고, 이 선 역시 진리를 수단으로 이식되기는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그 사람 속의 진리는 기억 안에 머물러 있지도 않고, 이것저것 재 보기 위해 이해성 속에서 되씹느라 머뭇거리지 않는 바, 그의 진리는 즉각 그의 의지, 심정 안에로 이동되어 실제적인 선 속에, 즉 생활 속에서 즉각 즉각 응용된다.
그러나 영적 수준의 인간, 즉 선을 사랑해서 진리를 실천하기 보다 진리를 사랑하기에 진리를 실천하겠다는 사람일 경우, 진리들은 그의 이해성에 들어가 거기서 추론의 대상이 되었다가 점차 그의 믿음 속의 진리로 채택되어진다. 이렇게 되면 양심(conscience, con-science, science with man)이 영적 인간 속에 건설되고, 이로부터 그는 악과 거짓에 대항하여 싸우게 된다.
그러나 천적 인간, 즉 실제적인 선으로부터 모든 것을 받는 인간은 자연적 인간 같이 과학에 의해, 영적 인간 같이 양심에 의해 좌지우지되지 않는다. 그는 자기가 아는 정의의 표준에 의해서만 규율되는게 아니라 정의를 사랑함과 선함 속에서의 기쁨에 의해 규율되고, 이 기쁨으로부터 그는 선과 진리에 관한 지각 속에 있는바, 그는 자기 속의 사랑이 증가되는 만큼 그의 진리도 증가된다.

“곡식이 익으면 그 사람은 추수 때가 된 줄을 알고 곧 낫을 댄다.” 예리한 날을 가진 낫, 이 기구는 밑뿌리로부터 낟알들을 분리시키는 바, 진리를 표현하되, 특별히 필수적인 것과 비필수적인 것을, 또는 악에서 선을 구별해 내어 잘라 내는 능력이라는 측면에서의 주님의 말씀을 표현해 준다.
곡식은 차후 사용을 위해 잘라서 분리되고 있다. 이 절단에 수반되는 것으로 자르는 것과 비슷한 과정이 탈곡(도리깨질)이다. 이와 같은 과정을 마음속에서 찾아보면, 신성한 말씀 글자, 특별히 십계명으로 무장한 마음은 가상적인 진리, 눈에 보이게 그럴듯한 진리로부터 진정한 진리를 자르고 분리시킨다. 특히 합리적 사고를 수단으로 꾸준한 사용을 위해 실용적인 선만을 탈곡해 낼 수 있다.

추수

추수란 농부가 땅을 고르고 씨를 뿌리고 잡초를 뽑는 등등 일련의 작업을 마친 후의 좋은 것들이다. 이와 같이 주님의 섭리 속에서 생활 속에 있는 실제의 선은 주님이 인도하시고 역사 하시는 모든 과정을 망라하여 있게 되는 그분의 목적, 즉 추수이다. 농부가 일하면서 작업 계획이 순조롭게 진행되고 기대하는 대로의 씨의 성장을 지켜보면서 기뻐해 가듯, 주님과 그분의 천사들은 우리 마음이 진보하는 매 단계마다에서 선하고 질서 있는 상황을 마련하여 추수 때를 준비해 가고 있을 때 매우 기뻐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도 자기 자녀들이 거듭남을 향해 질서 있는 길로 진보해 가는 것을 볼 때 흐뭇해하기도 한다. 매 단계마다에서, 우리는 진리의 씨를 위해 준비된 땅을 보고 기뻐하고, 성숙과 추수를 향해 그 씨를 계속 돌본다. 이와 같이 주님과 천사들도 우리가 악을 금하고 선을 행하는 것을 지켜보고 매우 기뻐한다. 천사들은 우리 사랑이 선한 자극을 받는 것에, 모든 진정한 생각이나 쓸모 있는 행위에 기쁨을 감추지 못한다. 그래서 그들은 자기들이 해줄 수 있는 모든 것을 우리에게 해주어 우리를 지혜에로 인도하고 어리석음에서 되돌아 서게 해준다.

해야 할 우리 몫

위와 같이 주님과 천사들은 노력하고 있지만, 이는 가만히 있는 자에게 해당되는 말이 아니다. 우리는 씨를 뿌림 즉 진리를 배우고, 사랑과 선용이라는 일상 생활 속에서 실제의 선을 알이 찬 곡식을 모아들이듯 거두어 가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빵을 만들어야 하고 그것을 먹어야만 한다. 우리에게는 자신이 할 수 없는 일이 많고, 따라서 주님께서 우리 심정 속 은밀한 곳에서 우리를 위해 해주셔야 할 일이 많다. 주님이 일을 하실 수 있으시기 위해 마치 농부가 씨를 뿌려 두면 당연히 싹이 올라 올 것을 믿고 있듯 우리는 주님을 신뢰하여야 한다. “은밀한 일들은 우리 하느님 주님에 속한 것이다. 그러나 그 중에서 우리에게 밝혀 주신 일들은 우리와 우리 자녀에게 속한 것이요, 우리로 그 일의 법칙 속의 모든 말씀을 행할 수 있게 하시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해야 할 일도 많다. 이 일의 성사는 우리에게 책임이 있다. 우리는 자기 속 애정이나 생각, 자기 밖 행동 속에서 악을 금할 수 있어야 한다.

영적 상태와 자연적 상태

따라서 실용적인 관점이 즉각 떠오를 것이다. 우리는 자신의 처지에 너무 골몰할 필요가 없다. 그 이유가 인간의 마음 상태는 심오하고 영적 상태에 언제나 있는게 아니기 때문이다. 마음의 높은 상태를 언제나 유지해야 한다고 작정된 것도 아니다. 이런 문제는 자기가 세상에서 떠나 언제나 고고하게 날으기를 추구하겠다는 세속 탈피주의자들의 미묘한 실수에 해당되는 말이기도 하다. 주님은 우리로 자고 일어나는 밤과 낮을 주셨다. 즉 자연적 상태와 영적 상태 사이를 오가도록 해서 우리로 진리를 배워 더 함양된 상태에도 있게 해주시는가 하면, 그걸 가지고 자연적 상태에서 실습하도록 배려도 하신다는 말이다.
그러나 우리가 영적 상태에 오래 있을 수가 없어 자연적 상태에 더욱 자주 있게 된다면, 우리는 악한 자연적 상태를 그만큼 모르게 될 수 있다. 따라서 실지로 위험한 것은 우리 밖인 세상에서 떠도는 악한 상태들이 아니라 우리 속에서 부추겨지는 악들인 것이다. 따라서 재삼 강조해야 할 것은 선한 자연적 삶 속에서 계속 살아가되 주님의 말씀을 계속 배워야 한다는 것, 자신이 계명에 순종하고 있다해서 그것을 뽐내지 말고 당연하게 생각하고 지켜 가야 하는 것, 뭔가 큰 주님의 일을 해내겠다고, 세상에 뭔가 나를 드러내 보겠다는 식으로 포부성을 가지고 계명을 지키려 든다거나 주님 말씀에 관한 지식을 추구하려들지 말 것, 오로지 평탄하고 지극히 단순한 일상 생활 속에서 계명의 준수, 말씀의 실현에 만족해야 하며, 그런 삶 속에 옮겨다 놓은 모든 진리를 주님께서 추수하신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용기

위의 사항들을 우리가 해낼 수 있기 때문에 아마 자기 스스로 자신을 격려해 줄 수 있으리라 믿는다. 위의 일을 해내는데 우리에게는 크나큰 자연적 지식, 학식, 재물, 사회적 지위, 미모 등등 어떤 자연적 조건도 요구되는게 없다. 요구 사항은 계명을 지키는 것, 악을 금하고 선을 행하는 것뿐이다. 이를 행할 때, 주님은 장차 우리가 들어갈 세계에서 쓰게 될 우리 인격을 이타적인 소망과 열망들로 채워 주시어 내향적 성장을 이룩해 주신다.
이 세상은 학교 기숙사일뿐, 오게 되는 저 세상이 진짜 삶이다. 극히 적은 외부 사항들이 지상에서의 행복한 삶에 요구될 뿐이다. 더욱이 외적인 풍요로움이 진짜 행복을 생산하는 것도 아니다. 거듭 나아가는 영적 삶의 요소들을 채우는 이 세상 조건들은 극히 미미한 것뿐이다.

우리 자녀

이 비유는 자녀들에 대한 부모의 의무, 그들이 자연적 세계에서만 자라지 않고 영적 세계에서도 성장하게 해주어야 한다는 것, 그들에게 순수한 진리를 가르쳐야 한다는 것, 그들에게 좋은 본보기가 되어 주어야 한다는 것, 주님이 그들 마음속에서 일하실 수 있도록 그들이 준비하는 것을 도와야 한다는 것 등등을 암시하고 있다. 씨의 성장이 은밀한 비밀이듯이 성장의 실패 역시 비밀이다. 그 비밀에 우리는 간섭할 수가 없다. 그 이유가 우리는 자신의 마음속이든, 자녀의 마음속이든, 되어 가는 그 일을 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마음속의 일이 잘 되어 가게 노력만 해야 할 것이다. 아마 때로 잘 안되어 갈 수도 있을 것이다. 악한 잡초 씨가 땅 밑에서 은밀하게 성장하고 있을는지 모른다. 번드르한 외용물이 오히려 진리의 씨가 성장하는데 더 나쁜 상태일런지도 모른다. 따라서 최선을 다하는 것, 즉 땅을 잘 준비하고, 잡된 씨를 걸러 낸 우량한 씨를 선발해 심고, 자라 오르는 잡초를 계속 뽑아야 하고, 튼튼한 울타리를 내 마음 밭 주위에 둘러쳐 두어야 하는 등등의 우리 몫을 슬기롭게 잘 처리해야 하는 것뿐이다. “만일 네가 이런 사항들을 알고 그대로 행한다면 복 있는 자이다.”

21
소경이 소경을 인도함
– 악은 거짓을 창출한다 –

성서 본문: 누가복음 6장 39절

39. 예수께서는 또 이렇게 비유를 들어 말씀하셨다. “소경이 어떻게 소경의 길잡이가 될 수 있겠느냐? 그러면 둘 다 구덩이에 빠지지 않겠느냐?”

눈이 멈

무지한 교사는 자신과 학생 모두를 잘못 인도한다.
육체적인 소경은 정신적인 소경을 표현해 준다. 정신적으로 소경된 자란 진리의 빛에 정신 속의 눈을 닫고 있는 이들이다. 그 이유가 진리는 진리 자체의 빛에서만 보여지기 때문이다. 거짓 원리를 신봉하여 그 원리를 응용하는 이들은 진리의 빛 가운데 있지 않아서 진리의 빛을 보지 못한다. 한 마디로 그들도 눈이 있지만 보지 못한다는 말이다.

눈먼 것의 등차

그런데 눈이 머는 상태는 신체적으로 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몇 가지 등차가 있다. 소경이란 자연적인 결함이나 각 개인의 나쁜 습관에 기인될는지 모른다. 이와 같이 영적인 소경 역시 무지 또는 악으로부터 기인된다.
따라서 정신적으로 눈이 머는데 몇 가지가 있다. 먼저 진리에 무지한 경우, 즉 진리를 전혀 알고 있지 않은 경우이다. 둘째로, 교리에 어떤 결함이 있는 경우, 즉 진리를 알되 단순히 잘못 이해된 경우의 진리의 앎이다. 셋째로, 진리가 왜곡된 경우가 있다. 이는 진리를 알고는 있으나 말뿐이어서 그 이론을 자신의 이기적인 바램에 걸맞도록 잘못 적용한 경우이다. 넷째로, 의지로부터 진리를 거절한 경우, 즉 어떤 진리가 자신의 의지와 일치 안된다고 느껴져 진리를 기어이 받지 않는 경우이다. “어리석은 자는 심정으로 하느님이 없다고 말한다”는 성경 구절은 위의 네 번째에 해당될 것이다. 이어서 우리에게 해주는 말씀은, “빛을 미워하는 자, 그의 행위는 악할 뿐이다.”
세 번째 경우의 인간은 진리를 왜곡시키고, 인간의 전통에 진리를 끼워 맞춰서 마음에 있는 하느님의 법칙이 어떤 결과를 생산 못하는 경우이다. 이는 진리의 형체만 있을 뿐 진리의 영은 없는 것이다. 따라서 그는 “박하와 회향과 근채에 대해서는 십분의 일을 바치라는 율법을 지키면서 정의와 자비와 신의 같은 아주 중요한 율법은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마태복음 23:23).

바리사이파인과 율법학자

마태복음 23장 16, 17절에서, “눈먼 인도자들”이 바리사이파인과 율법학자들이라고 말해지고 있다. 우리가 재삼 상기해야 할 것은 성경 내의 바리사이파인이나 율법학자는 모든 시대 모든 이들을 위해 성경 내에 존재하며, 마음과 삶이 그들 상태와 비슷한 사람들을 표현하고 있다는 것, 또는 영적 진리의 빛이 자기들의 마음을 바꾸려 하는 것을 허용치 않는 이들을 표현한다는 것이다. 게다가 타인에게 영향을 주는 이들이 자신도, 타인도 잘못 인도하고 있는 이들까지 표현해 주고 있는 것이다. 그 결과 그들 모두는 구덩이(ditch)에 빠지고 만다.

구덩이

눈먼 사람이 자칫하면 구덩이에 빠지기 쉽듯이, 영적 진리에 눈먼 사람은 정신적인 구덩이, 즉 생각과 삶의 거짓 원리라는 것에 쉽게 빠진다.
성경 글자에서 언급되는 말, “음부(pit)에로 내려간다”는 것은 정신적으로 거짓 원리에 빠져든다는 말이다. “그분은 나를 무시무시한 구덩이, 늪에서 건지시고 내 말을 바위 위에 놓아 주셔서 내 가는 길을 건설해 주셨다.” 이 구덩이란 거짓을, 바위란 진리를 말한다. “남을 해치려는 마음을 품은 자는 거짓말을 생산해 낸다. 그는 구덩이를 만들고, 그것을 깊이 판 뒤, 제가 만든 구덩이에 제 스스로 빠진다.” 이런 구절에서 보여주는 바, 사악한 자는 자신의 거짓 원리에 제물이 된다는 것일게다.

타인을 잘못 인도한 경우…

그래서 오늘 비유는 가르치는 자가 자신이 가르치고 영향을 행사하는 이들을 자신과 더불어 구덩이로 끌어내린다는 것을 보게 해준다. 그리고 타인을 잘못 인도하는 악을 보도록 우리에게는 구약성서에 다음과 같은 금지법을 가지고 있다: “귀머거리가 듣지 못한다고 하여 그에게 악담을 하거나 소경이 보지 못한다고 하여 그 앞에 걸릴 것을 두지 말라” (레위기 19:14). “누구든지 물웅덩이를 열어 두거나 물웅덩이를 파고 덮지 않아서 황소나 나귀가 거기에 빠졌을 경우에는, 그 물웅덩이의 임자가 짐승의 임자에게 돈으로 보상해야 한다. 그 대신 죽은 짐승은 그의 것이 된다” (출애굽기 21:33,34). 다시 말해서, 만일 어떤 이가 거짓을 가르쳐서 타인을 잘못 인도했다면, 그는 그 사실을 인정하면서 그 잘못된 것을 자기 탓으로 돌리고 그 대신 진리를 주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리고 그가 잘못을 저지른 만큼, 그 악은 그의 과오가 된다는 것이다.
위의 율법은 우리의 실제 사용을 위해 얼마나 아름다운 법인지 모른다. 우리는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는” 식을 바래서는 안된다. 만일 우리가 자신의 어떤 이기적인 자만, 기타 다른 악들로 인해 어떤 문제의 처리를 잘못되게 했을 때, 우리는 이미 잘못된 것들을 원상태로 되돌리기 위해, 그리하여 우리의 영향이 악이 아닌 선이 되도록 신속 과감하게 행동해야 할 것이다.

본을 보이되 잘못 인도하는 경우…

하느님의 말씀 글자를 가진 이들, 그러나 그 글자를 자신들의 삶 속에서 왜곡하는 이들, 이들은 실제의 경우, 거짓을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그 이유가 인간은 말로 가르치기보다 행동으로 더 가르쳐지기 때문이다. 바리사이파인이나 율법학자들의 경우, 그들은 성서를 가지고 있으면서 왜곡시키므로 그들은 눈먼 자가 눈먼 자를 인도하는 격이다. 신실한 교사라면 거듭남을 위해 인간의 실제 삶 속에 진리를 열심 있게 응용해 가야만 한다.
아마 우리 주위만 둘러보아도 악을 혹독하게 미워하면서도 그것 가지고 세상을 쉽게 살아가는 이들이 많다. 그들은 선함을 좋아하고 악을 미워함에 있어서 그 시대, 그 사회에 흐르는 통상적인 감정을 자신 속에 흡수시킨다. 그러나 그들은 선과 악을 구별하는데 필요한 심오한 지식은 없다. 그리고 자신의 애정과 생각에 대한 품질 측정에서도 합리적으로 보는 시각이 없다. 단지 그들은 무난한 것을 선택한다. 따라서 그들은 별 대수롭지 않는 악일 경우 그 악이 자신에게 접근하는 것을 쉽게 허용한다. 그들은 조그만 악을 격렬한 눈초리로 감시하는 것을 불친절에 속하는 태도가 아닐까 라고까지 생각한다.

교사

진리에 아주 진지한 교사가 있어 위와 같은 계층을 상대한다면, 그는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는 잘못을 피하기 위해 그의 의무를 아주 심각하게 수행하리라 본다. 그는 악이 작게 보이든 크게 보이든 상관없이 모든 악을 혐오하도록 하는 태도를 학생들에게 조장되도록 노력할 것이다. 왜냐하면 작은 악일지라도 그 악은 지옥의 과업을 위해 조금씩 조금씩 힘을 모아들이는 바, 전갈 새끼와 같기 때문이다.
악이 어떠한지 얼마나 지독한 거머리인지 스스로 경험하지 않은 교사일 경우, 그가 진리의 가상 속에서 거짓이라는 실제의 구덩이로 잘못 인도함이 없이 타인에게 진리를 가르칠 거라는 보장은 없다. 따라서 교사는 진리를 교리적으로 배워 기억 속에 잡아 두어야 할뿐 아니라, 진리를 향한 마음이 올바른 상태에도 있어야 할 필요가 있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그 교사는 올바른 교리를 잘못 응용할 것이고, 실제의 경우에서 타인을 잘못 인도하여 해를 받게 할는지 모른다.

예증

예를 들어 생각해 보자. “주님이 다 마련해 주신다”는 진리가 있다. 그런데 이 진리로부터 인간은 각자를 위한 것을 준비하기 위해 스스로 노력할 필요가 없다라고 추론한다면, 이는 잘못된 진리의 응용이 되고 만다. 슬기롭지 못한 사람은 슬기롭지 못한 방법으로 이타애를 행할는지 모른다. 오히려 그런 행동 속에서 타인에게 오히려 피해를 줄는지도 모른다. 그는 거짓이 진리인체 하는 줄도 모르고 거짓을 사용하는 바,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는 우를 범하고 만다.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는 모든 사람, 그들은 행복에로의 길이 하느님에 반대되는 것이 악인 고로 악을 죄로 알고 금하는 행동 강령에 있는 줄을, 주님이 가르쳐 주시는 것을 배우고 순종하는 것에 있다는 것을, 악으로부터 선을 알아야 함을 가르치고 응용하는데 실패하는 이들이다.

진리의 빛

합리적으로 생각하는 이들, 그들은 자신 속의 빛 가운데서 진리가 나타남을 알고 있다. 그러나 비합리적으로 생각하는 이들, 그들은 어떤 내적 시야로부터, 가르쳐진 진리에 대한 어떤 지각으로부터 진리가 있다는 것을 도무지 믿으려 하지 않는다.
내면의 생각은 영적 진리의 빛인 천국의 빛 속에 있다. 그러나 외면의 생각은 자연적인 빛 속에만 존재한다. 그래서 인간의 이해성은 사랑과 지혜에 의해 내면의 빛 속으로 승강되어져야만 한다. 그러면 생전에 결코 들어 본적이 없는 것에 부딪쳐도 그 중에 어떤 것이 진정한 것인지를 알 수 있게 된다. 오로지 감각적일 뿐인 사람은 그의 육체가 태양의 열과 빛을 느끼되 대기를 통과해 완화된 정도만큼에서 느끼는 것같이 천국적인 진리를 감각적 수준을 넘어서서는 알지 못한다.

진리의 영과 형체

따라서 우리는 올바른 교리에 관한 지식을 가졌다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우리에게는 그 지식 속의 영까지 가지고 있어야 한다. 영을 가지는 조건은 진리를 향한 우리의 의지 상태에 달려 있게 된다. 듣는 자의 지혜가 이해하는 것 이상의 어떤 지혜도 더 말해 줄 말은 없다.
논쟁 같은 속에서도 우리는 진리의 형체뿐만이 아닌 진리의 영까지 주장하고 있는 것을 보지 않으면 안된다. 만일 우리가 진리의 형체를 취해서 자신을 실제로 잘못되게 추켜세운다면, 진리를 왜곡시키는 것이 된다. 이 왜곡이 팽창되면서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는 우를 범하고 만다. 이 비유 뒤를 잇는 문맥을 보면, 우리가 타인의 눈에 든 티를 빼내 주겠다고 하기 전, 자신의 눈 속에 든 들보를 빼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다시 말해 진정한 우리의 문제점은 진리가 부족한데 있는 것이 아니라 진리를 지각함이 부족한데 있는 것이다.

율법 같은 진리

진리는 어느 곳에나 존재한다. 어떤 진리가 어디에 있든 법이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어디에나 계시기 때문이고 하느님의 실제 역사는 자연적인 법칙들 속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중심으로부터 외곽에 이르는 모든 창조에서 법은 최상의 위치를 점한다. 그래서 모든 법은 하나의 진리이다. 자연계의 이상한 현상을 관찰할 때 그것이 문명화된 사람에게는 과학적으로 이해되어 받아들이지만 미개인에게는 공포의 자연 법칙으로 다가오게 된다. 그러나 문명화된 사람은 법칙의 지식을 가지고 무지라는 공포를 탈출한다. 이와 비슷하게 영적 무지라는 공포는 영적 진리에 있는 합리적 총명 앞에서는 사라지게 된다.
새교회 속의 진리들로 내면을 교육시킨 마음은 실제 사용을 위해, 영적 삶의 건설을 위해 세워진 합리적 지식이라는 거대한 창고와도 견줄 수 있다.

책임

눈이 먼다는 것은 결함이라고 말하기보다는 오히려 불운일는지 모른다. 이와 비슷한게 무지일 것이다. 모든 사람들이 무지에서 태어나긴 하지만 무지로 어떤 악한 자가 생겼다고 할 경우, 그가 영적 진리에 무지한 채 남아 있도록 방치되어진 것은 진정 아니다. 따라서 모든 사람은 자신의 게으름의 결과에 책임이 있는 것이다.

더 심오한 의미

위와 같은 데에 책임을 느낀다면, 우리는 이 비유에 대해 보다 더 심오한 의미를 찾는데 노력하게끔 해준다. 심오한 의미란 보다 더 실제적인 영적 의미를 말한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눈먼 인도자란 눈먼 의지, 악에 의해 눈이 먼 의지이다. 인도를 받은 눈먼 자란 눈먼 이해성, 거짓에 의해 눈이 먼 이해성을 말한다. 따라서 둘 다 눈이 먼 관계로 둘 다 거짓이라는 구덩이에 빠질 수밖에 도리가 없는 것이다.
이제 우리의 자연적인 의지가 어떠한지 보자. 이 의지는 추진력은 있지만 빛이 없는게 흠이다. 이 의지는 원리를 볼 수가 없고 단지 느낄 수만 있다. 즉 자신이 추진하고 있는 것에 대한 품질을 감별하는 내적 시야가 없다는 말이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우리가 정신적으로 보는 것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도록 마음에 지성 또는 이해성이라는 것을 장치해 두셨다. 이것이 마음의 눈이다. 그래서 우리에게 진리가 가르쳐지면, 심정 속에 거주하는 열정의 속성이 어떠한지 우리는 볼 수 있게 된다.
진리를 보는 이러한 능력은 거듭 나아가는 능력에 의존된다. 의지와 이해성은 이해성 속의 진리와 의지 속의 선이 삶이라는 현장에서 하나가 되는 천국적 결혼으로 상호 협동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어둠을 사랑하고 행실이 악하다면,” 우리의 눈먼 의지는 눈먼 이해성과 짝을 맞추는 바, 둘 다 거짓 원리라는 구덩이에 머리를 디밀게 된다. “눈은 몸의 등불이다.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며 네 눈이 성하지 못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다. 그러니 만일 네 마음의 빛이 빛이 아니라 어둠이라면 그 어둠이 얼마나 심하겠느냐?” (마태복음 6:22,23).

여러 가지 예들

나쁜 충동은 언제나 눈이 먼 인도자이다. 그것을 따른다면 언제나 미련해지게 된다. 악마가 소경의 눈을 뜨게 할 수 있을까? 악한 열정이 우리의 눈으로 하여금 주님의 진리를 보게 할 수 있을까?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우리의 영적인 눈을 닫히게 해 준다. 우리가 분노로 떨 때, 흔히 우리는 영적인 사항에 소경이 되게 하는 감각적인 빛 속에 자신을 빠트린다. 이런 사항들은 우리가 실제의 삶의 법칙으로 취할 수 있는 것이라 본다. 우리가 나쁜 열정 속에 있을 때면 언제든지 우리를 소경 되게 한다. 그것은 눈먼 이해성에 대한 눈먼 인도자이다. 그래서 그것은 우리를 거짓 개념으로, 거짓 결론으로 이끌게 하는데, 설사 우리가 올바른 것을 생각하고, 올바르게 의도하고자 생각하고, 더욱이 올바른 것을 행하려 하는 때 조차에서도 구덩이로 끌고 간다. 분노라는 거룩하지 못한 불로부터는 오로지 감각적 사고라는 시꺼먼 연기만 솟을 뿐이다. 이 연기는 오로지 영적 진리가 발하는 명백한 빛을 희미하게 해줄 뿐이다. 좋은 영향력만이 진리에 우리 마음을 열리게 해줄 수 있다.
위급한 상황 같을 때 우리에게는 선한 충동이 먼저 일어나는 수가 많다. 그러나 위급이 지나면 우리는 그것에 반대되게 행동할 때가 많다. 그런 이유는 우리가 선한 것을 짓밟도록 악한 욕망을 자신 속에 허용하기 때문이다. 주님은 우리 속의 악한 열정이 일어서기 전에 내면의 삶에서 먼저 일어나신다. 그렇지만 우리가 나쁜 충동을 산출하여 선한 것을 거절한다면, 우리는 주님을 지도자로 모시고 그분을 따라가기를 거절하는 셈이 된다. 그 결과는 재난을 당하는 수밖에 도리가 없다.
따라서 우리는 자기 자신의 충동을 신뢰해서는 안된다. 그 이유가 우리에게는 밝혀진 말씀의 빛, 그리고 주님의 리더쉽이 언제나 필요하기 때문이다. 자신이 올바르다고 과신할 때, 우리는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는 잘못을 흔하게 저지른다. 따라서 “너는 스스로 부자라고 하며 풍족하여 부족한 것이 조금도 없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네 자신이 비참하고 불쌍하고 가난하고 눈멀고 벌거벗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라는 계시록 3장 17절의 말씀을 위와 연결해서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소경의 눈이 열림

예언서를 읽게 될 때, 우리는 “소경도 눈을 뜰 것이라…”라는 구절을 읽을 때가 있다. 그런데 많은 이들이 생각하기를, 이 말씀은 이교도들에 적용되는 말이겠지라고 아주 당연하게 생각하나, 우리가 이 구절을 자신에게 특별히 응용하면 우리가 영적 이교도인 것을 잊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게 된다. 얼마나 우리는 거듭나는 삶의 웅대함과 영화로움을 조금도 보지 못하는가? 천국적 진리의 빛에 자신의 영적 눈을 몇 번이나 열리게 했었던고? 반문해 보아야 한다. 보지 못하는 이들만큼이나 우리도 소경인 것을 재삼 검토해야 할 것이다.

치료약

오늘 비유에 이어지는 구절에서, 영적으로 눈이 먼 상태에서 벗어나 천국적 빛 속으로 들어갈 수 있는 수단인 치료약이 무엇인지 발견하게 된다. 즉 “제자가 스승보다 더 높을 수는 없다. 제자는 다 배우고 나서도 스승만큼 밖에는 되지 못한다.” 주님은 스승이고, 우리는 제자이다. 그리고 주님이 진리로 가르치시는 바, 진리는 우리의 스승이다. 그래서 인간이 자신을 평가하건대 진리보다 위에 있다고, 즉 주님 위에 있다고 착각해선 안된다. 그러나 사랑과 믿음, 그리고 순종심을 가지고 진리의 빛과 생명 속에서 자기 스승을 따르는 자, 그는 자기 스승같이 될 것이다. 즉 그는 신성한 스승의 모양과 형상 같이 되어진다는 말이다. “이제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말한 말씀을 통하여 깨끗해진다.”
따라서 자신의 바램과 견해, 그리고 자신을 진리보다 높다고 하는 자는 영적인 소경인 채로 남아 천국적 빛을 볼 수 없다. 그러나 진리를 자아보다 앞세우고 자신의 애정이나 생각, 그리고 행동을 진리에 종속시켜 진리의 지배하에, 그리고 진리를 수단으로 시험을 치뤄가는 사람은 천국 빛 속에 살면서 천국의 스승과 함께 걷게 된다.
인간의 마음에 주님이 영적으로 오신다는 것은 영적 진리의 빛에 인간의 영적 눈, 즉 그의 이해성을 열어 주시는 것을 말한다. “심정이 순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은 하느님을 뵐 것이라.” 다시 말해서 심정이 순결하면 그분의 신성한 진리 안에서, 그분의 거룩한 말씀 속에서 하느님을 뵙게 된다는 말이다. 이 사람들의 심정은 순결하기 때문에, 또는 악에서 자유롭기 때문에, 그들 속의 의지는 그들 이해성을 잘못 인도하는 눈먼 의지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제물

눈먼 상태가 표현한 의미 때문에 이스라엘 국가에서 사제들 중 소경들은 예배를 집전 못하도록 되어 있었다. 게다가 이스라엘족들에게는 어떤 눈먼 짐승도 제물로 주님께 바치지 못하도록 명령되어 있었다.

우리의 영향력

모든 사람 각자는 어떤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 바, 각자는 그 영향력에 책임이 있게 된다. 그리고 각자는 눈먼 인도자가 아닌 좋은 인도자로 부름 받고 있기도 하다. 우리는 이 세상의 일에 대해 책임이 있겠지만, 더 나아가 저 세계에서도 지상 생활에서 가진 영향력이 계속 되어지는 바, 그것에도 책임이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삶의 모든 나쁜 상태는 세월이 흐르면 흐를수록 더 밑으로 쳐져서 본인이 잘못 행하는 것을 당연시하게 하고, 게다가 타인이 올바르게 행하는 것까지 간섭하여 타인마저 자기와 비슷하게 만들려 한다. 결국 모든 악한 열정은 동기 속에 둥지를 틀고 자리잡아 불행의 기초가 되고 만다. 이런 열정이 언제 어디서 멈추겠는지 누가 말할 수 있으랴?
흔히 우리는 자기 속의 악이 터져 나온 이유가 누구누구 때문이라고 생각하면서 자신 속의 자아 사랑을 위로하려 들는지 모른다. 흔히 하는 말 “네가 나로 그렇게 행동하게 했어…”라고 쉽게 결론짓는다. 이런 사건 발생의 경우에도 그 사건의 또 다른 측면이 있다. 설사 타인의 꾐에 빠졌을 때 조차에서도 우리는 자신을 죄 속에 몰아넣을 권리까지 주어져 있는 듯 착각해선 안된다. 넓은 측면에서 볼 때, 우리 속에 든 이기심이라는 지나친 감각적 상태가 자신 속의 악한 기질을 폭발시킨다.

예증

만일 우리가 자기 집 마루 바닥에 인화성 물질을 방치해 둔 상태에서 누군가가 우연히 그곳에 불을 떨어트려 집을 불타게 했을 경우, 우리는 불을 지르게 된 그 사람을 정당하게 혹평할 수는 없다. 그 이유는 불이 쉽게 날 수 있는 조건에 집을 방치해 둔 책임이 우리에게 있기 때문이다.
우리 마음이 요동을 칠 때, 자기 속에 든 악들 중 감금되어야 할 악이 어떤 것인지 알 수 있다. 호랑이는 성을 내고 날뛸 때에야 자신을 진실로 표현하는 때일 것이다. 호랑이가 깊이 잠들고, 비활동적일 때, 호랑이는 자기 특유의 성미를 드러내지 않는다. 이와 같이 우리가 각자 속에 악을 가지고 있다면, 그 악이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상태에서 자신을 판단하기 보다 그 악이 호조건을 만나 날뛸 때 자신속 악의 속성을 판단해야만 할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자신을 가늠할 때 흔히 최상의 상태에서 자기의 특질을 가늠해 보기를 은근히 좋아한다. 우리의 열망이나 포부 같은 것은 그것이 행동 속에서 현실로 나타나기 전까지는 진짜가 아니다. 메말라서 매력 없는 섬에서 온갖 역경을 치르며 사는 사람이 갑자기 바람의 방향이 이상하게 잡혀 본토에서 흘러 넘치는 오렌지의 향긋한 냄새가 그의 코끝에 닿을 때 그의 코는 잠시나마 흥겨운 멜로디 같은 냄새에 취할는지 모른다. 이와 같이 우리가 어렵고 고되며 냉혹한 이기적인 불 속에서 살면서 때로 천국의 멜로디, 향긋한 냄새를 맡게 되어 자신이 노력만 한다면 아마 자신도 사랑스러운 삶 가운데 도달될 수 있을는지 모른다는 것을 잠깐이나마 붙잡아 볼 수 있어 마치 그렇게 된 냥 착각 속에 빠지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천국에 속한 것을 소유하기 앞서 많은 것들이 요구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용기와 사랑

천국적인 것들에로 이끌리는데 도와주는 이들, 또는 이끌어 주는 이가 우리라고 해도, 모두에게는 주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을 듣기 위해, 그분으로부터 나오는 경고를 듣기 위해 영적 용기가 흘러 넘쳐야 한다. 만일 우리가 진리를 사랑한다면, 설사 그 진리가 우리 자신을 심하게 견책할 때조차 에서도 사랑이 그 견책이라는 회초리를 거두어 줄 것임을 알고 인내해야 한다. 그 이유가 진리의 견책은 우리 속의 악에 대한 것이요, 우리 영혼이 악에서 구원되도록 하기 위해서임을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자연적 마음뿐인 상태로 침몰되고, 선의의 비평으로 다가서는 사랑의 힘에 어떤 가치를 부여하는데 실패한다면, 또는 우리의 가장 좋은 친구는 자기 속에 든 어떤 결점을 보지 못하게 덮어 주는 이들이라고 판단하여 격렬한 거짓에 빠지고 만다면, 우리는 가장 미묘하고 위험스러운 영향력을 친구 삼는 것이 되고, 그 반면 천국에서 보내 주는 친구를 거절하게 된다. 그러면 우리의 심정은 자기 기만에 빠지고, 우리의 이해성은 부패된 심정에 노예화되어 시꺼먼 구름으로 가려지고 말 것이다. 한 마디로 우리 심정은 눈먼 인도자가 되어 거짓이라는 비참한 구덩이에 빠지고 말 것이다.

22
빚진 두 사람
– 영적 사랑과 자연적 사랑 –

성서 본문: 누가복음 7장 41-43절

41. “어떤 돈놀이꾼에게 빚을 진 사람 둘이 있었다. 한 사람은 오백 데나리온을 빚졌고 또 한 사람은 오십 데나리온을 빚졌다. 42. 이 두 사람이 다 빚을 갚을 힘이 없었기 때문에 돈놀이꾼은 그들의 빚을 다 탕감해 주었다. 그러면 그 두 사람 중에 누가 더 그를 사랑하겠느냐?” 43. 시몬은 “더 많은 빚을 탕감받은 사람이겠지요” 하였다. 예수께서는 “옳은 생각이다” 하시고…

요약

사람의 인격은 그 사람을 통치하고 있는 사랑(ruling love)의 품질에 좌우된다. 그 사람이 소유한 사랑이 우량한 품질이라면, 그의 실제 삶의 상황은 천국적인 삶이 되고, 그의 사랑의 품질이 불량하다면, 그 사람은 자기를 통치하는 사랑에 걸맞은 것 이상의 더 높고, 더 위대한 실제의 삶 속에 들어 갈 수는 없다. 이것이 비유로서 예증하는 원리이고, 이 원리는 본문 전후 문맥인 36-47절을 연결해서 읽게 되면 이해된다.

자연적 사람은 오해했다

바리사이파인이나 시몬같이 자연적 마음뿐인 사람은 영적 애정에 의해 움직여지는 사람의 목적이나 인격을 언제나 잘못 이해하고 잘못 판단한다. 그 이유는 영적 인간과 자연적 인간은 품질이나 종류 측면에서 본질적으로 다른 세계, 즉 애정이나 생각의 두 가지 다른 정신적 세계에 있기 때문이다.
오늘 비유는 자연적 마음뿐인 사람, 시몬에게 사랑에는 다른 종류, 다른 품질이 있다는 것을, 외적인 삶이 언제나 안쪽 인격의 품질을 언제나 암시해 주는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자연적 마음뿐인 사람은 겉만을 볼 뿐, 안쪽을 볼 수 없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비정상적이었고 죄를 진 경력이 있으나 내향적으로 더 향상된 사람을 독선적인 사람은 쉽게 경멸한다.
이에 연계해서 우리에게 기억되는 또 하나는, 성전에 올라가서 기도하되 자기는 죄 짓는 세리들 같지 않고 의로운 사람이라 하여 정중히 무릎꿇고 기도하는 바리사이파 사람일 것이다. 그러나 주님은 말하시기를, 이 사람(세리)의 집에 구원이 있다고 말씀하셨다.

채권자와 채무자

채권자란 주님이시다. 사실 우리는 자신이 가지게 된 모든 것에 대해 그분에게 변제해야 한다. 비유에서 두 채무자가 언급되는데, 한 사람은 많은 빚을, 또 한 사람은 적은 빚을 지고 있었다. 이 빚에 관한 영적 사항을 살필 때, 우리는 양보다는 질을 간주해야 한다. 모든 이는 각자가 소유하는 것에 대해 주님께 빚을 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자기가 빚을 지고 있는 지를 인식 못하는 사람들은 자기 빚을 인정할리 만무이다. 표현적 언어를 사용하는 비유에서, 주님께 많은 것을 빚지고 있다고 하는 이들은 자기가 주님께 진 빚이 엄청남을 알고 인정하는 이들이요, 따라서 주님께서 자기를 위해 해주셔야 할 것이 아주 많다는 것, 자기는 그 많은 것 전부를 주님께 빚지고 있다는 것을 실감하는 사람을 말한다. 그리고 주님께 빚을 지긴 했지만 얼마 되지 않는다고 말하는 이들은 자기가 주님께 진 빚이 있으나 조금일 뿐이라고 생각하고, 따라서 그렇게 적은 만큼 주님께 빚졌다고 인정하는 이들이다.
500 데나리온을 빚진 사람은 주님이 자기에게 해주실 것이 아주 많다는 이들을 표현하고, 50데나리온을 빚진 사람은 주님이 자기를 위해 일을 하시도록 허용하되 조금만 허용하는 자를 표현한다. 본문을 읽으면서 본문을 비꼬아 생각하면 주님이 불균등하게 인간에게 대하시는 듯 여길 수 있겠지만 그렇지 않고 오히려 주님이 각자를 위해 하실 수 있는 것을 받는 인간의 상태가 불균등할 뿐이다. “나의 방법이 평등치 않다고 말한다마는 오히려 너희들이 방법이 고루지 않더냐?”

각기 다른 인간

“달란트의 비유”와 같이 이 비유에서도 각기 다른 금액이 인간에게 주어졌고 각기 다른 금액에서 인간에게 의무가 주어 지는데, 이는 주님께서 인간에게 각자 재량대로 주시는 것을 기쁘게 받아야 한다는 측면에서 있어지는 인간의 다른 상태를 표현하는 것이다. 물질적인 열과 빛을 받는 만큼이나 자유로이 주님은 모든 인간에게 선과 진리를 주신다. 사랑으로 주님께 자기 심정을 여는 사람, 다시 말해서 주님이 천국적인 사랑으로 자기 속을 채우도록 허용하는 사람은 주님께 많은 것을 빚지고 있다고 인정하는 사람이다. 왜냐하면 그는 자기를 위해, 자기 속에서 많은 것이 행해졌기 때문이다.

신성한 용서

비유의 언어는 자연적 외관에 따라 서술되어진다. 따라서 주님은 이 사람보다 저 사람을 더 용서한 듯 말해지고 있다. 그 이유는 전자가 후자보다 더 많은 빚을 탕감 받았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님 편에서 보는 용서는 무엇일까? 이 용서는 어떤 행동에 대한 벌을 면제해 주는 것만은 아니다. 죄를 따라 다니는 벌은 마치 법률이 사회법을 위반한데 대해 벌금이나 형벌을 부과시키고 있듯, 주님에 의해 죄에 외적으로 첨부된 것이 아니다. 죄가 깨트린 법은 정신 세계의 헌법이라는 것에 소속된 인간 존재에 관한 법인 것이다. 죄에 대한 벌은 법을 깨트린 결과와 분리될 수 없다. 이는 마치 건강한 육체를 지탱하는데 필요한 생활 규칙을 깨트림으로 치르고야 마는 신체적인 고통이나 질병의 경우와 같은 것이다.
의지가 병들어 있거나, 독단적인 처벌까지도 주님께서는 관심을 가지시고 모든 이를 언제나 용서하신다. “못된 행실을 한 자라고 해서 사람이 죽는 것을 내가 기뻐하겠느냐? 주 야훼가 하는 말이다. 그런 사람이라도 그 가던 길에서 발길을 돌려 살게 되는 것이 어찌 내 기쁨이 되지 않겠느냐?” (에제키엘 18:23).
진정한 의미에서 용서를 이해하는 것, 또는 인간이 용서되는 것이란 당사자가 자기 죄를 보고 인정하고 그 죄를 더 이상 저지르지 않는 것이다. 즉 그가 모든 이에게 확장되어지는 신성한 용서를 실제 삶에 사용하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주님께서 의도적으로 인간을 벌하시지 않는다는 사실이 모든 죄에 수반되는 실제의 벌을 제거해 주신다는 것은 아니다. 모든 죄와 그에 따른 벌은 각 사람이 그 죄를 계속 짓고 있는 한 그 죄에서 분리될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가 신성한 용서를 실지로 받는 길은 죄 짓는 일을 중단하여 벌을 피하는 길뿐이다.

빚을 갚음

그러므로 비유에서 더 많은 빚을 져서 더 많은 용서를 받는 듯 여겨지는 사람은 죄 짓는 것을 더 열심히 중단하므로서 거듭남의 더 높은 수준을 달성한 사람이요, 자기 악들로부터 구원됨에 있어서 신성한 용서를 더 음미하고 더 충분히 느낀 사람을 말한다.
비유의 두 사람 모두 자기가 진 빚을 갚았다고 말하고 있지 않다. 즉 두 사람 모두 자신들의 죄를 차감할 수 있는 자기 고유의 선함은 하나도 없다. 그들이 소유한 모든 것은 주님이 그들에게 거저 주신 선물뿐이다. 영적 측면의 모든 것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빚을 전부 갚으라고, 또는 빚의 얼마라도 변제하라고 묻지 않으신다. 오로지 우리가 그분께 빚이 있음을 인정만 하도록 요구하실 뿐이다. 그리고 그분께서 내리시는 상여금을 기쁘게 받기만 하면 된다고 말하신다. 인간은 그분의 상여금을 받기 위해 악행을 중단하고 반드시 그분의 계명에 의거 삶을 꾸려야 하는 것이다. 주님이 주시는 복을 받는 인간의 수용 능력은 당사자가 주님에게 진 빛이 얼마인지 헤아려 인정하는 크기에 의해 결정된다. 주님께 진 빚이 하나도 없다고 하는 사람은 영적 축복을 받을 정신적 상황 속에 있는게 아니다.

인간의 자연적 모습

우리의 마음이 자연적 마음뿐이라면, 우리의 애정들은 이기심뿐이다. 사실 우리는 가족이나, 친구를 자신의 일부로 여겨 사랑한다. 타락한 인간은 사랑의 이기적인 품질 그 이상의 수준에 올라서지 못한다. 이 인간이 내놓는 가장 헌신적이라 하는 사랑도 자아 사랑 중 어느 한 형체에 불과할 뿐이다. 그는 자신의 목적을 위해 타인을 사랑한다. 아마 우리는 자연적으로 사랑하는 누군가를 위해 큰 개인적 희생도 감수해 낼 수도 있다. 그럼에도 우리의 사랑은 내향적 동기에서는 지독하게 이기적일는지 모른다. 자연적 마음뿐인 상황에서 우리 애정들은 매우 협소하고 한정된 수준일 뿐이다. 다시 말해 우리는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을 사랑한다거나, 자신의 자연적 바램들을 기쁘게 만족시켜 주는 사람들만을 사랑한다는 말이다.

거듭남

그러나 우리가 이기심뿐인 사랑을 벗어나는 것, 즉 거듭 나아가기 시작할 때, 우리 사랑은 인격면에서 어떤 변화를 수행한다. 이 변화란 애정 측면의 성격이나 품질의 변화를 말한다. 거듭남을 더욱 반복해 갈 때 우리 사랑은 확장되면서 더불어 타인들에게까지 뻗쳐 그들의 인격이나 사랑의 품질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그리고 자신의 것 보다 그들의 것에 더 많은 흥미를 갖게 된다. 이런 우리의 사랑은 결국 인류라는 범위 까지 포괄적으로 퍼져 가게 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의 사랑이 더 순수하면 할수록 그 사랑은 더 폭넓게 되고 더 자유롭게 모든 사람에게 스며든다.
타락하는 상태일 경우, 우리는 자신에게 반대하는 듯 여겨지는 이들을 미워한다. 그는 자신의 바램이나 계획들에 대해 눈에 나타나는 태도로 만사를 결정지운다. 그러나 거듭남으로 해서 우리는 타인의 입장에 서서 타인을 생각해 보는 것을 점차 배워 간다. 그리고 우리가 그들을 사랑하는 것을 배우되, 단지 그들이 우리에게 어떤 인물이냐만이 아닌, 오히려 그들의 삶과 품질면에서 그들이 어떠해야 할 것인가에 더 관심을 가지고 사랑하게 된다.

견해의 변화

자연적 수준일 경우, 자신을 잘 대우하는 이들을 두고 선하다고 여기나, 영적 수준일 경우, 주님에게 선한 경우인 것, 즉 유용한 삶 속에서 그분의 계명을 지켜 가는 이들을 선하다고 여기게 된다. 주님을 사랑하는 것을 배울 때, 인간이 자기들 속에 주님의 생애를 얼마만큼 가졌느냐에 따라 주님이 그들을 사랑한다는 것도 배우게 된다. 그래서 우리는 모든 사람 속의 영적인 것에 관심을 가지고 사랑하는 것, 그들이 거듭 나아가는 것을 도울 기회와 수단을 추구하는데 초점을 맞추어 사랑하는 것을 배운다. 우리는 죄인을 동정하나, 그 죄인 속에 든 죄는 미워해야 한다.
그러므로 자아 사랑은 모든 것에 배타적이나 거듭나는 사랑은 모든 것을 수용하는바 총괄적이다. 주님은 만인을, 악마까지도 사랑하신다. 그래서 그분은 모든 것이 행복 되도록 추구하신다. 그리고 그분은 각인이 그분의 행복을 받는 한 그렇게 되도록 계속 일하신다.

사랑과 일

위의 주님의 일은 우리 삶의 만사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누군가를 더 사랑하면, 우리는 그들의 복지에 더 관심을 가지고, 그들을 위해 더 해줄 뭔가를 행하게 된다. 그런데 이보다 좀 더 높은 차원도 전개된다. 우리 사랑의 품질은 우리가 그들을 위해서 일하는 것의 품질로 측량되어 진다. 우리는 사랑의 질을 위해 사랑의 부피 측면에 실수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부피가 많은 사랑도 품질면에서 매우 이기적일 수도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된다는 말이다.

예증

한 가지 예를 들어 생각해 보자. 자기가 무척 사랑하는 처녀를 향한 남자의 마음 상태이다. 아마 그는 엄청난 고백을 정중히 무릎꿇고 하였을 수도 있고, 아주 감상적인 언어를 다 동원해 사랑한다는 약속을 하여 그녀 없이 자기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듯 보여지게 할 수도 있다. 그럼에도 그 남자의 사랑은 지독하게도 이기적일는지도 모른다. 영적 사랑은 영적 삶에 중심을 두고 관심을 쏟는다. 이 사랑도 외적인 껍데기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 사랑은 자신의 계획에 상반되는 때조차도 신성한 섭리에 신뢰를 두고 있다. 어떤 건전한 사랑, 또는 영적 사랑은 자신을 자포자기하게 하거나 자신을 죽게 만들도록 이끌지 않는다.
결혼 생활 속에서 사랑의 품질은 표현이라는 양태 속에서 보여진다. 단지 자연적인 사람은 이 세상만을 위해 살고 있고, 뭔가를 소유하는데 소비하는 시간만이 기쁜 시간이다. 자기를 성가시게 하거나 비평 당하지 않는다. 자기에게 오는 어떤 견책이 없을 경우 그의 방종함은 자기 눈에 걸맞아 계속되고, 이 계속 됨은 방종함에 대한 제지가 없는 이상 끝까지 그의 멋대로 이어진다.
자기 자녀에 대한 그의 사랑 역시 자신과 같이 그들에게도 자기 방식으로 몰입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영적 인간 속의 사랑은 그 사랑의 품질 자체가 영적인 바, 영적인 목적만을 바라본다. 따라서 모든 어린이를 주님의 자녀로 간주하여 그들을 주님의 법도에 의해 훈련시킨다. 결혼한 한 쌍의 부부를 생각해도 그 부부 역시 세상 삶이라는 껍데기에서의 동반자로만 보지 않고 차후 영계에서의 영원한 삶을 준비하기 위해 맺어진 영적 존재로서 더 특별히 생각한다.
외적이기만 하고 감각적이며 이기적이고 제멋대로인 부모 또는 결혼한 한 쌍은 겉보기에는 훨씬 더 즐거운 듯, 훨씬 더 안정된 듯 여겨질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들 본성 깊은 속에서 각자의 이기적인 사랑은 각자를 통치하는 원동력이 되어 있다. 이럴 경우 영적으로 보건대 각자는 어떤 것도 사랑하는게 아니다. 고로 그들은 이타적일 경우 어떤 것도 사랑할 수 없다. 그러나 이와 반대인 영적 사랑을 가지고 사랑하는 영적 인간은 영적 견지에서 삶을 관조하고 영적 목적을 위해 일을 한다. 이 사람이 어린 아이들이나 자연적 마음뿐인 성인에게 비쳐지는 모습은 아마 너무 냉조적이고 비동정적인 듯 보일 것이다. 그 이유는 그 사람이 하는 일의 평면은 그 일을 눈으로 보는 사람들의 납득력 위에 있기 때문이다. 이 사람은 영적인 삶을 위해 일하고, 이것을 해내기 위해 그는 그 일에 수반되는 악들과도 싸우지 않으면 안된다. 그 사람의 일을 납득 못하는 사람의 경우, 그들이 영적 애정의 영향력 밑에 있기 전까지는 그들은 영적 인간 속의 사랑의 품질을 음미할 수 없을 것이다.

주님을 사랑함

인간이 주님을 사랑하게 되는 시초에 하느님을 사랑한 이유가 하느님이 자기를 위해 뭔가 해주셨기 때문일 경우가 많다. 이는 그가 하느님을 사랑하되 자신의 목적을 위해, 또는 이기적인 이유 때문에 사랑하는 셈이다. 그러나 이 사람이 거듭남을 반복하면서 그는 주님 사랑의 품질을 구분하는 것을 배워 하느님은 사랑이심을 보기까지 된다. 그 다음 그는 주님의 목적 때문에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이 어떤 분이신지 때문에 사랑하고야 만다.
우리가 자신의 거듭남 속에서, 생활이 계명을 지킴 속에서 주님을 따라갈 때, 우리는 자신들의 사랑의 품질면에서 그분을 더욱 닮아 간다. 그리하여 우리의 정신적 상태들은 변화하여 낡은 것, 이기적인 상태를 벗어나 생활해 감으로 해서 새 조건 속에 자신을 만들어 살게 된다. 이 삶이 향상되면 될수록 주님은 우리를 위해, 우리 속에서 더 많은 것을 하실 수 있게 된다. 자신을 악 위로 들어올리는 개인적 경험에서 주님이 우리를 위해 얼마나 많은 것을 해주셨는가를 배우게 될 때, 우리는 갖가지 종류의 악에 더욱 반대할 수 있고, 특별히 자신 속의 악에 대하여도 반대가 가능해진다.
우리가 비유 속의 진정한 의미를 더 사랑하면 할수록 더욱 용서되어진다. 즉 주님이 우리를 악으로부터 구해 주실 수 있다는 것을 삶과 마음의 조건 속에 받아들이면 들일수록 주님은 그분의 꾸준한 용서하심을 실지 결과에서 우리에게 주실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덜 사랑하는 사람은 주님이 주시는 용서를 받는 수용력 역시 줄어든다. 한 마디로 이들은 천국적 삶에 마음의 문을 덜 열었다는 말이다.

영적인 힘

영적 인격의 힘은 그 사람이 지닌 사랑의 양과 질에 의존된다. 선을 강하게 사랑할 경우, 그 사랑은 필시 악을 강하게 미워함이 동반되어야 하고, 특히 자신 속에 든 악은 더더욱 미워해야 할 것이다. 우리의 영이 주님과 결합하게 될 때만이 신성한 영향력이 우리에게 내려와 우리를 악에서 떼어내 유지시켜 주고, 그 영향은 바깥 삶에까지 다다른다. 계명을 지킴으로 우리가 상호 협동할때만이 위의 섭리는 진행된다. 우리가 주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그분의 뜻을 행함이요, 영적 양식과 물을 그분에게서 공급받는바 강건해진다.

영적인 것과 자연적인 것

비유 속의 두 사람들을 한 측면만 다룬다면, 더 많은 빚을 져서 많은 용서를 받게 된 사람은 거듭남의 더 높은 수준을 달성한 영적 인간을 표현했고, 덜 빚을 져서 결과적으로 적게 용서받은 사람은 계명을 글자대로 열심히 순종했음에도 아직 영적 마음의 상태에 이르지 못한 자연적 인간을 표현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또 하나 생각할 것은 두 사람에게 있는 사랑의 품질은 다르다는 것이다. 인간이 주님을 사랑하는 그 사랑의 품질은 그가 주님으로부터 기쁘게 받아들이는 사랑의 품질이다. 그 이유는 모든 인간은 자기의 악들을 멀리함을 기꺼이 노력하는 그 속에 든 사랑의 품질을 받는 것이기 때문이다. 악을 미워하는 품질은 선을 사랑하는 품질의 척도를 결정해 준다.
주님이 인간의 심정에로 들어가시되, 그분은 선을 사랑함을 가지고, 그리고 악을 미워함을 가지시고 들어가신다. 그리고 인간은 그가 악행을 끊고 주님의 이름으로 선을 행할 때, 들어 온 그분의 사랑을 자신의 것으로 만든다. 그러므로 인간이 주님을 사랑하는 품질의 척도는 그가 타인을 향해 연습되어지는 사랑의 척도로 테스트되는 것이다. 사도 요한은 “예수님이 사랑하신 제자”라 불리웠다. 그 이유는 그가 예수님을 사랑함으로 자기 심정을 열어 그분이 들어오시도록 하여 축복하실 수 있게 했기 때문이다.
인간이 품질이나 부피면에서 많이 사랑할 때, 그의 영적 인격은 더 높게 부상된다. 그 이유는 그가 과거 삶 속에 있는 악들을 거부했고, 그 죄악 속에 든 악들이 형체를 취하는 것을 미워했기 때문이다. 그가 악을 떠나 선 안으로 자신을 진입시켰을 때, 그의 과거 삶 속에 있어 온 죄들은 그에게는 더 이상 들러붙어 있지 않는다. 그것들이 더 이상 그의 일부가 아니라는 말이다. 그 이유가 그는 죄를 짓게 한 과거의 악들을 더 이상 흠모 않기 때문이다. “사랑은 율법을 완성시킨다.” 그 이유는 사랑은 율법을 준수하여 율법의 보호 아래 있기 때문이다.

사랑과 용서

율법의 완성은 율법에 의거하여 사는 사람의 충만된 삶 속에서 있어진다. 주님을 극진히 사랑한 이유로 본문의 여인에게 주님은, “이 여자는 이토록 극진한 사랑을 보였으니 그만큼 많은 죄를 용서받았다”라고 말하신 것이다. 그 이유는 극진한 그녀가 지닌 사랑의 강건함, 그 사랑의 품질에 따라 그녀는 새 삶에 진입되었기 때문이다. 그녀의 현 심정 상태에서 그녀는 더 이상 죄를 범하지 않을 것이다. 죄란 악한 애정과 생각들이 바깥쪽으로 표현되었거나 체현된 상태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죄는 우리 인격이 계속 그 죄 가운데 있는 한, 계속 우리와 함께 머무른다. 그러나 인격이 변할 때, 이전의 인격에 속해 있던 상태를 벗어나는 바, 아픈 뒤, 건강을 되찾듯 병든 조건을 벗어나게 되는 것이나 다름없다.
“죄진 영혼은 정녕 죽으리라.” 이 말씀은 처벌로서가 아닌 죄의 결과에 관한 내용이다. “그러나 만일 못된 행실을 하던 자라도 제 잘못을 다 버리고 돌아 와서 내가 정해 준 규정을 지키고 바로 살기만 하면 그는 죽지 않고 살 것이다” (에제키엘 18:21). 그 이유는 주님의 노력은 인간을 벌하시는데 있는게 아니라 인간을 구원하시는데 있기 때문이다. “하느님이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단죄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아들을 통해 구원하시려는 것이다” (요한 3:17).
아버지는 신성한 사랑이요, 아들은 신성한 진리이시다. 아버지, 또는 신성한 사랑이 아들 즉 신성한 진리를 인간에게 보내신 것은 인간들로 신성한 사랑의 축복을 받을 수 있는 쪽으로 되돌아오도록 가르치시려는 이유 때문이다. 그래서 아버지와 아들은 한 인격이신 한 분 하느님이신 바, 예수님께서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라.”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이라고 말해 두신 것이다.

우리 사랑의 증거

우리가 주님을 사랑한다는 증거에 관해 주님께서, “내 계명을 준수하는 사람이라야 나를 사랑하는 것이다”라고 선포하셨다. 우리가 주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기도 모임에서 땅을 치며 통곡하는 모습으로, 어떤 규모 있는 자선 행위만으로 측정되는게 아니다. 천국의 측량자는 위와 같은 피상적인 것들보다 훨씬 심오하게 모든 것을 꿰뚫어 잰다. 하느님을 사랑한다는 증거는 악을 금한 만큼에서 발견된다. 그 이유는 악은 실제 삶 속에서 하느님께 반대되는 죄이기 때문이다. 진정 우리가 주님을 사랑한다면, 우리는 주님의 목적을 위해 자신 속에서 부풀어오르려는 악한 경향성을 과감히 밟아 눌러야 한다.
동료간에도 위의 원리는 마찬가지이다. 친구에게 큰 사랑을 가지고 베풀고자 한다면, 그 친구에게 있는 악한 경향성을 누르는데 협조하는 것이다.

영적인 동정

누가 진정한 동정심을 발휘하는 것일까? 누군가가 당한 바깥쪽 곤경에 외적 동정심을 가장 크게 발휘한 사람이 아니다. 외적인 전시 그 이상으로 높게 부상한 사람은 곤경에 처한 사람의 영혼을 위해 동정심이라는 그의 힘을 쏟는다. 그리하여 그는 슬픔에 빠지게 한 악들을 멀리하는 이웃의 노력을 도웁는다. 그는 인간의 타락에 통곡만 하지 않고 타락된 상태에서 일어나는 일을 결연하게 돕는다.
순간적인 주목을 끌게 해주는 눈물의 흘림을 얼굴 표면에 있게 하는 사람의 경우, 종종 그 당사자와 거리를 두게 하려는 나쁜 기질도 함유되어 있기도 한다. 그러나 진정한 동정심을 발휘하는 사람은 상대방의 거듭남을 위해 상대방 속의 악을 견책함으로 서로 불쾌해지더라도 기꺼이 그 일을 해낸다. 그는 영적 사랑의 힘으로 탐욕이라는 감각적인 쾌락을 기꺼이 깨트리며, 자연적인 투쟁이나 슬픔 대신 장차 올 세계 안에서 더 높은 삶의 품질을 가질 수 있도록 준비해 간다. 그러기 위해 그 사람은 자기에게 불쾌한 일, 즉 자신 속의 악들을 보게 해주는 사건, 그래서 그 악을 멀리 하게 하는 고통 등을 기꺼이 맞아 드린다.
이런 것이 사랑이요, 이것이 동정이다. 이런 행동은 외적 삶에서 몇 년이 걸리기도 하는 폭 넓고 높은 수준의 동정으로 오로지 외적 삶 너머에 있는 진정으로 영원한 삶에 목적을 둔 동정인 것이다. 하찮은 동정, 감각적인 동정은 신성한 섭리를 잊게 하고 자아 사랑을 부추기는 바, 이런 동정이야말로 순금을 정제하기 위해 조잡한 금을 불 속에서 제련해 걸러내듯 심오하게 깊고 높은 동정심을 발휘해야 한다. 이것이 사랑 있는 동정인 것이다.

거짓으로 나타남

우리에게 곤경을 준 그 진상, 슬픔의 진짜 원인은 기쁘게 버리고 싶지 않았던 것들 속에 있는 진짜 존재들이었을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그 반면, 우리 곤란의 근원인 듯 여긴 것들이 거듭남을 위한 주님의 섭리적인 수단이 되어 있는 경우도 허다하다. 주님의 사랑은 우리의 영적인 선을 보신다. 그리고 우리 속에 거듭나는 인격이 건설되는 것을 추구하신다.

천국적인 방법들

천국적인 사랑의 품질로 자기 심정을 채울 때, 그 사람은 주님이 일하시는 모습 같이 영적인 목적을 위해 합리적인 수단을 가지고 일할 것이다. 이를 행하기 위해 그는 자기 친구들과 연합할 수도 있고, 동료와도, 뿐만 아니라 자신까지도 이에 전력할 것이다. 모든 선은 주님으로부터만 온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 외에, 그분의 방법만이 가장 옳은 것임을 인정하는 것 외에 있을 법한 어떤 방법으로도 감히 여느 행동도 생각도 못할 것이다. 그가 아는 한가지는 주님이 자기를 위해 많은 것을 해주셨다는 것, 따라서 모든 다른 이에게도 그렇게 하실 터인즉, 자기 이웃이 주님께 심정을 더 활짝 열므로 주님이 그들을 위해 더 많은 일을 하실 수 있도록 이웃을 권유해 갈 것이다. 그는 삶의 모든 평면, 모든 수준에서 부드러운 동정심과 더불어 원기 왕성한 사랑을 느낀다. 그는 영적 선에 이바지되는 최선의 방법만에 그의 애정을 노출시킬 것이다.
그가 주님과 더불어 동행하듯 인간과도 동행해서 그의 영적 애정은 영적 인간에 의하지 않고는 발휘하지 않는다. “달란트의 비유”에서 한 달란트를 받은 종 같은 자연적 마음뿐인 사람은 주님을 “무서운 분”으로 간주할 것이다.
주님을 사랑하기 위한 우리의 일은 선한 삶을 유용하게 사용함으로 인격 속의 영성을 증진시켜 주님의 무한한 사랑을 음미하는 것을 배우는 것이다. “슬기로워서 위와 같은 일을 꾸준히 해 나가는 사람은 주님의 자애를 이해하기까지 할것이다.”

23
선한 사마리아 사람
– 이웃 사랑 –

성서 본문: 누가복음 10장 30-37절

30.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예리고로 내려 가다가 강도들을 만났다. 강도들은 그 사람이 가진 것을 모조리 빼앗고 마구 두들겨서 반쯤 죽여 놓고 갔다. 31. 마침 한 사제가 바로 그 길로 내려 가다가 그 사람을 보고는 피해서 지나가 버렸다. 32. 또 레위 사람도 거기까지 왔다가 그 사람을 보고 피해서 지나가 버렸다. 33. 그런데 길을 가던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그의 옆을 지나가다 그를 보고는 가엾은 마음이 들어 34. 가까이 가서 상처에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싸매어 주고는 자기 나귀에 태워 여관으로 데려가서 간호해 주었다. 35. 다음 날 자기 주머니에서 돈 두 데나리온을 꺼내어 주인에게 주면서 ‘저 사람을 잘 돌보아 주시오. 비용이 더 들면 돌아 오는 길에 갚아 드리겠소’ 하며 부탁하고 떠났다. 36. 자, 그러면 이 세 사람 중에서 강도를 만난 사람의 이웃이 되어 준 사람은 누구였다고 생각하느냐?” 37. 율법교사가 “그 사람에게 사랑을 베푼 사람입니다” 라고 대답하자 예수께서는 “너도 가서 그렇게 하여라” 하고 말씀하셨다.

원리

이웃 사랑은 사람에게 베푸는 친절함 속에 있다. 두 큰 계명, 즉 주님을 사랑함과 이웃을 사랑함이 있다는 것이 인간에게 가르쳐질 때, 중요한 사항은 누가 이웃인지, 그리고 무엇이 이타애를 구성하는지, 즉 이웃에 대한 사랑이 무엇인지 이해하는 것이다. 그에 대한 실용적 예가 이 비유이다.

글자적 이야기

어떤 율법교사가 일어서서 예수의 속을 떠보려고 “선생님, 제가 무슨 일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께서는 “율법서에 무엇이라고 적혀 있으며 너는 그것을 읽었느냐?” 하고 반문하셨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고 네 생각을 다하여 주님이신 네 하느님을 사랑하라. 그리고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고 하였습니다.” 이 대답에 예수께서는 “옳은 대답이다. 그대로 실천하여라. 그러면 살 수 있다” 하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율법교사는 짐짓 제가 옳다는 것을 드러내려고 “그러면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께서는 비유로 그에게 대답해 주셨다.

율법교사의 질문

이 율법교사의 질문은 그 당시 예루살렘의 정치 상황을 상기해 본다면 타당할 수도 있을는지 모른다. 그 당시 예루살렘성은 로마 제국의 지배하에 있었고, 그 성내의 도로들은 각 나라에서 모여 든 잡다한 인종들로 붐비고 있던 터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유대인인 율법교사는 이웃에 대한 율법의 의무를 수행하는데 누가 자기의 이웃일 것인지에 매우 심각한 의문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자기 친구, 친척, 좀 더 넓혀 생각해서 자기 나라 등등을 이웃으로 간주해야 할 것은 그에게도 당연했었을 것이다.
그러나 할례도 받지 않은 이교도들, 거룩한 도성을 마구 짓밟은 국가의 적들이라는 떼거리까지 이웃으로 생각하고 느끼면서 행동해야 한다는 것은 그로서는 예상하기 거의 힘들었을 것이다. 더욱이 강한 반감과 더불어 유대인에게 역겨운 인종인 사마리아 사람까지 이웃에 포함된다는 것은 더더욱 상상하기 힘든 일이었다. 아마 저주해야 할 사마리아 사람은 미워하는 것 이상의 어떤 것을 느낄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을는지 모른다.

사마리아인

그 이유가 사마리아 사람이란 과거 이스라엘 왕국의 백성들이 포로로 끌려가고 빈 성읍에 강제 이동시킨 이민자들이었기 때문이다. “아시리아 왕은 바빌론과 구다와 아와와 하맛과 스발와임에서 사람들을 데려다가 그 곳에서 자리잡고 살게 하였다” (열왕기하 17:24). 그래서 유대인들은 예루살렘 성전에 필적할 만한 성전을 그리짐산에 세우기도 한 이 이방인들을 아주 미워했다.

한정된 법

이 율법교사로서는 이방인과 적들을 미워하고 있는 터인지라 그 미워하는 것을 자신 스스로 정당화하려 들고, 자기 백성만이, 더 좁혀 생각하면 제 계층만 이웃이라고 단정하고 싶었을 것은 의아하게 여길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가 내뱉은 첫 질문, “제가 무슨 일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얻겠습니까?” 에 대해서 주님은 율법교사 자신의 일이었던 신성한 법으로 되돌아가도록 하시었다. 그러자 그는 그 법을 적용시키는데 대해 어떤 한계점을 긋기를 바랬던 것이다. 그러나 주님은 비유에서 율법의 적용을 더 넓히셨던 바, 그 법은 온 인류, 더욱이 경멸되고 있는 사마리아 사람 속의 천국적인 자질에까지 넓혀 적용하게 하셨던 것이다.

예루살렘에서 예리고로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예리고로 내려가다가…” 이 여행 코스는 대략 8마일 정도뿐이지만 이 길은 팔레스틴의 길 중에서 가장 나쁘고 위험한 길인지라, “피 흘리는 길”이라고도 까지 불리운 길목도 있었다. 많은 사제나 레위인들이 예리고에 살면서 예배를 집전하기 위해 교대로 예루살렘과 예리고를 왕복해야 하는 도로였기도 하다.
이 길목에서 어떤 이가 강도를 만나 모조리 빼앗기고 마구 두들겨 맞아 반쯤 죽어 있었다.

사제와 레위인

31절에 대한 번역에서 마침(by chance, 우연히) 한 사제가 그 길로 내려가다가…라고 번역하고 있다. 그러나 “by chance”라는 용어보다 “by a coincidence”라는 말이 더 합당할는지도 모른다. 그 이유는 복음서에서의 단어 중 chance(기회), luck(행운), fate(비운), arbitrary fortune(임의적인 우연)과 같은 것을 의미하는 단어가 없는 연유에서인데 참고하기 바란다.
피 흘리며 쓰러져 죽어 가는 사람이 놓인 길을 따라 한 사제가 왔다. 우리가 상상해 볼 때, 아마 이 불쌍한 사람의 생각은 자신의 사제일는지도 모를 그 사람, 아마 예루살렘에서 예배 임무를 마치고 내려가고 있는 사제일는지도 모를 그를 만나게 되었는 고로 큰 도움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을는지 모른다. 그러나 이 사제가 가련한 그 사람을 보았을 때, 그 사람을 피해서 지나가 버렸다. “또 레위 사람도 거기까지 왔다가 그 사람을 보고 피해서 지나가 버렸다.” 두 사람 모두 동정의 말 한 마디, 사랑의 행동 하나도 없이 가 버리고 말았다. 그 사람은 아마 거지 라자로의 헐은데를 핥아 준 개와 같이 여느 개라도 멈춰서 그 사람의 상처를 핥다 주었을는지 모르는 상황에 처해 있었다. 그러나 신성한 법을 준행하며 가르친다고 하는 위의 두 사람은 어떤 동정심을 표현하지도 않았고 자기들이 가르치는 자비를 응용해 볼 기회를 피해 갔을 뿐이다.

사마리아인

죽어 가는 사람의 희망은 이제 다 사라진 듯 했다. 왜냐하면 자기가 존경하는 거룩한 사제마저 자기를 돕지 않았다면, 어느 누가 도움을 줄 수 있을까 라고 생각했을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통상 유대인들이 경멸하던 사마리아 사람이 그 길을 지나가게 되었다. 물론 그로부터도 피 흘리는 유대인은 학대받을 것밖에는 더 기대했을리 만무이다. 그 이유는 유대인들이 사마리아 사람을 너무 경멸해 왔기 때문이다. 요한복음 4장을 보면 시카르 동네에서 사마리아 여인이 예수님께 말하기를, “유대인은 사마리아 사람과 상종하는 일이 없다”라고 말한 구절에서 우리가 가정해 본 위의 말을 뒷받침해 볼 수 있다. 길을 가던 사마리아 사람 역시 상처로 죽어 가는 이 유대인이 정상적 상태라면 자기를 어떻게 대하리라는 것, 만일 자기가 강도를 당해 처지가 바뀐 상태라면 과연 길을 가던 유대인은 도와주지 않을 거라는 것, 등등을 알고 있었을는지 모른다.
그러나 이 사마리아인은 주님을 사랑했고, 이 사랑이 그로 하여금 느끼게 한 것은, 자기를 필요로 할 때 모든 이는 자기의 이웃이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가엾은 마음이 들어 가까이 가서 상처에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싸매어 주었던 것이다.” 이렇게 죽어 가는 유대인을 치료해 준 약들은 그의 여행을 위한 양식들이었다. 그 다음 그는 자기 나귀에 그를 태워 여관으로 데려다가 간호해 주었다. 아마 그가 그 사람을 위해 끝까지 다 해주어야만 한다는 것이 자기 의무라고 까지 생각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다음 날 자기 주머니에서 돈 두 데나리온을 꺼내어 여관 주인에게 주면서 ‘저 사람을 잘 돌보아 주시오. 비용이 더 들면 돌아오는 길에 갚아 드리겠소’ 하며 부탁하고 떠났다.”
자, 이 사마리아 사람이 죽어 가던 유대인을 위해 했던 일은 가벼운 도움만은 아니다. 그는 그 유대인에게 자기 양식, 돈, 간호해 줌 등등을 주었다. 그는 그를 자기 나귀에 태우고, 그를 붙든 채 걸어갔을 것이다. 위험 천만뿐인 도로를 이렇게 걷다 보면 여행 시간도 많이 걸리고 어쩌면 자기까지 강도들에게 당할는지 모를 위험까지 감수했던 것이다.

예수님의 질문

“자, 그러면 이 세 사람 중에서 강도를 만난 사람의 이웃이 되어 준 사람은 누구였다고 생각하느냐?” 라고 주님은 물으셨다. 그러자 율법교사가 자비를 보여준 사람이라고 대답하자, 주님께서는 “너도 가서 그렇게 하여라”라고 말씀하셨다. 이렇게 해서 비유에서 취급되는 큰 문제는 실제적 형체 안에 진리가 놓이는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우리의 이웃이란 우리가 사랑과 도움을 줄 수 있는 것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다.
그런데 우리는 율법교사와 주님의 질문 사이에 놓인 차이점을 주목해 두어야 한다. 율법교사는,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 다시 말해 저의 이웃 사람 같은 사랑과 봉사를 요구할 자격이 있는 자는 누구입니까? 라고 물었는데 비해, 그에 대한 주님의 대답은 오히려 “누구에게 저는 이웃이 됩니까?” 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 비유는 이웃 사람 다운 사랑(neighborly love)은 다른 이들을 향한 우리 자신 속에 있는 사랑하려는 마음의 상태(affection)에 달려 있다는 것, 우리는 만인을 향해 이와 같은 사랑의 조건 속에 있어야 한다는 것, 우리를 필요로 하는 사람은 우리의 사랑, 슬기로움, 효과적인 도움을 불러일으키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우리의 이웃

새교회의 빛을 가지고 우리는 이타애(charity), 즉 이웃 사랑은 만인을 향하여 있는 내향적 인간, 즉 심정 속에 존재함을 알고 있다. 사실 폭넓은 차원에서 볼 때, 만인은 모두 우리의 이웃이다. 그 이유가 모든 이는 하느님의 자녀요, 모두 주님께 되돌아 갈 수 있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은 필요함을 가지고 있고, 그들의 필요함은 우리의 현명한 동정에 호소해야 한다. 모든 이는 천사가 될 능력을 가지고도 있다. 그래서 우리는 각 개인 속에 든 이 능력을 사랑해야 하고, 그 능력이 잘 발달되도록 그를 도와서 그 사람 속에 천국적 인격이 형성되게 해주어야 한다.
추상적 측면에서 볼 때, 선의 원리가 우리가 사랑해야 할 이웃이다. 그래서 타인에게 진정으로 이웃이 되는 것은 그 사람 속에 든 주님에게서 온 선, 즉 그를 통치하고 있는 사랑의 질과 양에 따라야 한다. 그리고 우리 심정이 자기 동료에게 얼마나 가까우냐는 것은 사실 우리 심정이 주님께 얼마나 가까우냐에 의존된다. 다시 말해 주님이 우리 안에 쏟아 부어 주실 수 있도록 주님께 마음의 문을 여는 품질만큼만 우리는 타인에게 쏟아 부어 준다는 것이다.
진정으로 이웃 사람 다운 사랑은 어떤 개인을 선한 원리 위에 붙잡아 두어야 한다고 우리에게 요구하지 않는다. 이웃 사람 다운 사랑은 우리 자신에게, 또는 다른 사람들의 경우도 마찬가지로 악을 억제하고 선을 행하려 애쓴다. 우리가 어떤 이에게 피해를 주는 것 중 가장 큰 것은, 상대방에게 선과 악을 분명하게 구별짓는데 소경이 되게 하여 그 사람으로 악을 행하게 유도하는 짓이다. 상대방이 어떤 잘못된 상태에 있으면서 우리에게 뭔가를 해주기를 바랠 때 무조건 해주는 것이 이웃 사랑이 아니다. 예를 들면 자기 아픈 데를 가지고 동정을 사서 뭔가를 얻겠다는 자, 또는 아픈 데를 일부러 만들어 가지고라도 동정을 사겠다는 얄팍한 극빈자에게는 그들의 응석을 받아 주는 것을 수단으로 하지 말고, 오히려 그들을 훈련시킴으로 도웁는 것이 최상일 수도 있다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 우리가 선이라고 알고 있는 것을 타인에게 실시해야 한다. 이웃 사람 다운 사랑은 인간 안에 있는 선을 찾아내서 그들 안에서 그것이 더욱 배양되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이웃의 등차

이웃에는 몇 가지 등차가 있다. 첫째가는 우리의 이웃은 선 그 자체이신 주님이시다. 둘째는, 천상 천하에 있는 주님의 왕국이다. 셋째는 집합체로서의 교회. 넷째는 나라. 다섯째는 공동 사회. 여섯째는 각 개인이다. 선은 이 순서에 따라 행해져야 한다. 그 이유는 보다 더 큰 것에 속한 선을 진정으로 위할 때 보다 작은 선도 위하는 것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선한 사람을 우리는 사랑한다. 다시 말해 우리는 인격의 연약함에 의존하기보다는 인격의 선함에 더 의존해서 사랑해야 한다는 말이다. 이웃사람다운 사랑은 우리들에게 인간이 행해야 할 선을 사랑하도록 요구하고 있다.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그 이유는 그 사람이 선을 사랑하기 때문이어야 한다. 그런데 그 누군가가 선을 사랑하고 있지 않다면, 우리는 그가 선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을 사랑하여 그 능력이 발달되도록 도와주어 그로 하여금 주님이 자기 속에 천국을 형성시켜 주는 것을 허용할 수 있게 협조해야 한다.
그 이유는 천국은 내향적 조건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하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다”는 구절을 생각해야 한다는 말이다. 그래서 인간이 어떤 사람이든지, 우리는 계속 그 사람을 향해 의를 행하고 있어야 하는 바, 그를 경멸하는게 아니라 그가 달성 가능한 표준에 이르게 도와야 한다. 진실로 이웃 사랑은 주님의 사랑을 닮는데 있다. 그분은 “모든 이에게 선하시다.” “그분은 악한 자나 선한 자 모두에게 해를 비춰 주시고, 의로운 자든, 그렇지 못한 자든 비를 보내 주신다.” 자기에게 잘 대해 주는 사람만을 사랑하는 것은 천국에 있는 교리가 아닌 지옥의 교리이다. 그러나 우리는 위의 교리를 우리의 생각에 앞서 아주 명백하게 간직할 수 없다는 것도 인정하고 있어야 한다. 이웃 사랑은 삶의 원리이지, 감상적인 수준에 속한 진리가 아니다. 이 사랑은 다른 사람에게 선을 행하는 사랑이요, 우리가 주님께로부터 받은 사랑 그 이상은 행해지지도 않는 사랑이다.

예증

바깥쪽 감상주의에 젖어 있는 많은 이들, 그들은 동료가 좁은 길에서 허우적대고 고통받는 것을 보는 것도 실패하면서 자기들 눈은 구름 너머에 두어 절대적 경건만이 자신의 전부인 듯 보이게 행동한다. 주님을 사랑할 때만이 우리의 이웃도 진실로 사랑할 수 있다. 예수께서 말하시기를 “내 형제 중 작은 이에게 행한 것이 곧 나에게도 베푼 것이다.” “네 이웃을 사랑하고 원수를 미워하여라”고 성경을 부패시킨 옛 전통은 말하지만, 주님께서는 “원수를 사랑하여라”고 말하신다. 이러므로 이웃이라는 이름은 온 인류에 해당되는 말이다. 선한 이웃이란 어떤 강박감에서가 아닌 사랑으로부터 필요하다고 여겨지는 어떤 선을 슬기롭게 행할 준비가 갖춰진 사람이다.
수 천 가지 방법으로 이웃 사람 속에 든 선을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빼앗는 자, 이들이 악인인 것이다. 이들이야말로 공동체를 좀먹어 들어가는 강도요, 야바위꾼이요, 기생충 같은 자들인 것이다. 이런 자들에게 희생되는 이들, 희생시키는 이들, 모두를 위해 우리의 동정심은 발휘되어야 한다. 그러나 두 계층에 대한 선의 표현 방법은 아주 다른 것이다. 우리는 두 가지 극과 극이 되는 것, 즉 한편으로 상대방을 경멸하면서, 다른 편으로는 선과 악을 혼동케 하는 동정심의 실수를 피해야 할 것이다.

내향적 의미

어떤 이가 신체적, 물질적 곤란에서 헤어나도록 도우려 했다면, 아마 더 확실히 해야 할 것은 그로 하여금 영적 곤란에서 헤어나게 도웁는 것이 더 효과적일 것이다. 글자 의미에서 볼 때, 오늘 비유는 이타애의 바깥쪽 행동들을 나열하고 있으나, 내향적 의미에서 보면, 이 비유는 이타애의 영적 원리를 초상화해놓고 있다. 자연적 사랑은 상대에 대한 사랑이나, 영적 사랑은 그 상대 속에 있는 선, 또는 그 사람 속에 있을는지 모르는 선을 사랑한다. 이타애는 조금만 행하는 것이 아니라, 가능하면 서로의 능력에 일치하는 정도까지 최대한도로 행해진다.

예루살렘과 예리고

국가의 예배나 가르침을 위해 성전이 세워져 있는 예루살렘이란 예배나 교리라는 측면에서의 교회를 표현한다. 우리가 진리와 교리에 관한 지식을 가지고 있어 그 지식으로부터 주님을 예배하려 할 때 우리는 예루살렘에 있는 것이 된다.
예리고는 가나안의 경계 근처이다. 그래서 예리고는 교회의 바깥, 또는 바깥과 안쪽의 경계인 교회나 삶의 외적 사항들, 교회를 소개하는 진리들을 표현한다. 따라서 예리고는 선과 진리, 그리고 가르침의 외적이고 실제적인 국면을 표현한다. 예리고는 “종려나무성”이라고도 불렸다. 종려나무란 우리의 선이 자라서 열매를 산출하는 애정을 표현한다. 따라서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성에서 예리고로 내려 간다 함은 영적인 교훈으로부터 삶의 실제적인 일로 들어가는 것, 실제의 일에서 선을 발견하려는 것을 표현한다.

강도

예루살렘에서 예리고를 연결하는 길, 즉 원리로부터 실제에로 내려가는 작업에는 많은 위험들이 도사리고 있다. 그 길 주위에는 많은 강도들이 상주하고 있다. 영적인 강도란 인간의 영적 재물을 강취하면서, 그의 영적 생명까지 손상을 입히는 이들을 말한다. 이를 더 세분해서 생각해 본다면 영적 강도란 우리에게 나쁜 영향을 미치게 하는 모든 것, 이것에는 의도적으로 해를 가하는 악인을 포함해서 우리의 판단을 흐리게 하는 친구들, 그럼으로 해서 우리의 악이나 자만심을 부추기는 이들, 게다가 선과 악을 명확히 구별하는데 혼동을 주는 이들, 모두가 포함된다.
악령, 역시 강도이다. 이들의 영향력은 우리의 영적 재물과 생명을 강취해간다. 그것들은 우리의 자연적 열정을 휘저어서 우리의 비이타적인 느낌이나 생각, 행동을 조장시킨다. 그것들은 우리의 애정을 옷입히우고 있는 진리, 즉 의복을 벗겨 간다. 그것들은 거짓 암시라는 것을 우리 앞에 상주시킨다. 그것들은 거짓 추론으로 우리 심정을 상하게 하며 심한 부상을 입게 만든다. 그것들은 우리 속의 영적 생명을 거의 다 강취함으로 우리를 반쯤 죽게 한다. 이리하여 주님을 예배하고자 하는 우리의 심정 상태에 해를 가하는 것이다.
비록 우리가 예루살렘에 있었기는 하지만, 즉 교회에서 가르치는 진리를 알고 있고 주님을 열심히 예배해야겠다는 각오가 되어 있다 해도 막상 삶의 실제에 그 진리들을 응용하려 할 때, 즉 예리고로 내려가는 상황에 진입할 때 우리는 영적 재물을 잃게 되는 위험에 직면하게 된다.

사제와 레위인

위와 같이 우리가 악한 영향력의 폭행에 고통받게 될 때, 사제와 레위인, 즉 거꾸로 되어 버린 교회 속의 악과 거짓들, 거꾸로 된 상태들은 우리를 도울 수 없다. 사실 좋은 의미에서 볼 때 사제는 주님을 사랑함, 레위인은 이웃을 사랑함을 표현해 주지만, 본문 같은 경우는 나쁜 의미 쪽에서 사용되므로 자아 사랑과 세상을 사랑하는 것을 표현하는데 이런 것들은 부패된 교회, 부패된 자연적 마음의 상태 속에 든 것들이다. 이런 것들은 곤경에 빠진 우리를 “피해서 지나가 버린다.” 그것들은 진정한 모든 이타애와 정반대의 위치에 있어 이웃을 돌보지 않는다.
아마 본문의 사제나 레위인은 상처 입어 신음하는 사람을 보고, 자기들을 도와줄 여분의 시간이 없다고 생각했거나, 그 일은 자기와 상관없다고 생각했을는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가 선용을 사랑하는 가운데 있다고 하면, 설사 자기와 일치 않는 사람에 대해서까지 선을 행하는 사랑을 수행해야 할 것이다. 만일 그들 속의 악들이 우리를 성가시게 한다면, 우리는 보다 진지한 사랑 가운데, 또는 나쁜 영적 집단에서 그를 구해 내고 그의 상처를 치료해 주겠다는 바램을 가지고 있다면 그 사람과의 하찮은 문제는 잊어야 하리라 본다.

사마리아인

사마리아인은 고통받는 자를 도와 줄 시간을 발견하고 있다. 사실, 모든 이는 자기가 사랑하는 것을 행할 영적 시간을 발견하게 되어 있다. 어떤 이도 영적으로 의를 행할 수 없는 위치에 놓이지는 않는다. 설사 그가 자기 환경을 모두 좌지우지 할 수는 없겠지만,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의 원리만큼은 언제나 좌지우지 할 수 있는 것이다. 이웃 사랑으로 마음을 채우려는 사람은 영적 강도들에게서 타인을 구해 내려 하는 마음도 있기 마련이다. 그래서 이 사람은 구조해내야 할 천적 사랑인 기름을, 영적 진리인 포도주를 쏟아 붓는다. 그는 실제적인 선한 충고로 부상당한 사람의 상처를 묶어 준다. 그는 거동할 수 없는 사람을 자기 짐승에 태운다. 즉 이 사람은 감추어 놓인 진리에 대한 합리적 이해를 부상자의 마음에 가져다준다는 말이다. 그리고 그는 부상자를 여관, 즉 영적인 양식과 물이 주어지는 교회 학교에 그를 데려다 준다. 그리하여 부상자가 선과 진리에 대해 가르침을 받게 하여 주님과 천사의 보호 속에서 악한 영향력으로부터 더 안전하게 해준다.
이방인이라는 측면에서 사마리아 사람은 자연적 수준의 이타애, 즉 선과 진리를 단순하게 사랑하는 것을 표현한다. 사마리아 사람은 자기가 여행하는 동안, 즉 삶 가운데 자기 영혼을 진보시키는 동안 다른 사람이 지나간 곳에 당도했고, 도움을 요청 받는 상태에까지 왔을 때, 그는 선한 일을 행했다.
그래서 “이튿날,” 즉 새로운 상태, 새로운 조건에 처할 때, 그는 고통받는 자를 더 지원해 주기 위해 두 데나리온을 지불했고, 필요하다면 돌아올 때 더 지불하겠노라고 까지 했다. 다시 말해서 그는 자기가 할 수 있는 모든 것, 고통받는 자를 악과 거짓에서 건져내기 위해 자기 속의 사랑과 지혜의 모든 것을 주었고, 자기 능력이 증가한다면, 또는 타인이 자기를 더 필요로 한다면 더 노력할 결심까지 보였다는 말이다.
위의 강도 당한 사람같이 우리는 자신이 악령에 감염된 것을 발견했을 때, 그 속에서 헤어나는데 필요한 도움을 부패된 사제나 레위인, 즉 부패된 삶 속에 든 악과 거짓이라는 낡은 원리에 기대어서는 소용이 없다. 우리의 안전은 우리 속의 이방인 같은 상태, 즉 선에 대한 단순한 사랑을 통해서만 이루어진다.
이 아름다운 비유의 빛은 과거 예수님의 명백한 가르침에 화를 낸 유대인들을 생각해 보면 얼마나 의미 심장한지 모른다. 진실로 비유 속의 사마리아 사람은 예수의 영을 보여준 것이다. 또 하나 기억해 볼 것은 예수께서 나병 환자 열 명을 고쳐 주셨을 때, 되돌아 와서 하느님을 찬양한 사람은 사마리아 사람뿐이었다는 것이다 (누가복음 17:11-19).

예증

영적 강도에 관한 것을 가지고 예를 들어 생각해 보자. 예루살렘 안에서 살아 왔던 사람, 즉 진정한 교리로 가르침을 받아 오면서 주님을 경배해 오는 습관을 길러 왔던 사람이 있다고 해보자. 그런데 그의 어떤 친구가 “대속죄”라는 교리를 믿도록 그를 설득해 왔을 경우, 그는 죄로부터의 구원이라는 것이 종교적 원리로부터 온 선함 삶 속에 있어야 한다는 믿음이 흔들리면서 소실되기 시작한다. 그 이유는 친구가 말하는 “대속”이라는 원리가 자기 구원에 훨씬 편리할 듯 자아 사랑이 부추기기 때문이다. 또는 과학적인 불신앙이 그를 휘어잡을 경우도 있다. 그럴 때, 그는 자기의 감각으로 입증 안되는 것은 다짜고짜로 거절해 버린다. 그리하여 그는 진리의 지각, 즉 진리에 대한 영적인 열림에 자신의 원리를 의존하려 않고 감각적인 외관에 의존하고 만다.
이렇게 되면 영적 강도는 그에게서 영적 진리를 강탈해 그를 벌거숭이로 만들고, 그를 거짓이라는 몽둥이로 두들겨 패서 거의 죽게 하여 겨우 살아 있는 것이라곤 그의 외적인 것뿐이어서 영적 마음속의 합리적 총명을 열게 해주는 더 높고 더 광대하며 더 거룩한 것은 전부 황폐해지게 한다. 이렇게 된 사람은 영적 삶 속에서만 볼 수 있는 다양성 대신 감각적인 것들로 온통 뒤덮여 있게 되는 바, 모든 인간의 애정과 생각들은 뇌세포의 관계적 위치나 조건에 따른 변화의 일시적 결과일꺼라고 상상하기까지 한다. 따라서 원인과 결과의 관계에서 실수하고 만다. 따라서 소경 지도자가 소경을 인도하듯 둘 다 구덩이에 빠지는 것이다. 그들은 자연적인 결과라는 수준과 평면 그 너머의 것은 볼 수도 없고 그들의 눈은 영적 원인의 광대한 세계에 닫혀 있을 뿐이다.

구원하는 사랑

위와 같이 된 사람, 견디기 힘들 정도로 영적으로 심한 부상을 입어 반쯤 죽은 사람이 되었다 해도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이들은 그들이 처한 위험한 상황에서 구원하고자 하는 강한 바램을 느껴, 어떻게든 그들을 간호해서 생생한 영적 삶에로 되돌아오게 하려 할 것이다. 아마 영적인 악한 집단에 파묻혀 오히려 해를 주려는 사람들까지도 우리는 그들이 속한 악령 집단에 그들의 악을 던져 버려 그 집단에서 빠져 나오게 하려고까지 할 것이다.
또 하나, 우리가 서로간에 있어지는 개인적인 사소한 측면들을 잊을 때, 우리는 이웃 사랑과 선용이라는 보다 더 고상한 원리를 부상시킬 때도 있다. 우리를 박해하고 경멸하는 이들에 대해서 우리에게 주님이 주시는 명령, “너도 가서 그렇게 하여라”가 있음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된다. 천국에 간다 함은 사랑과 자비, 그리고 선용이라는 길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구원

이 비유의 큰 영(Spirit)은 “대속, Vicarious Atonement”이란 없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구원은 “믿음만, Faith alone”으로 되지 않고, 사랑과 믿음, 그리고 순종에 의해서 이루어짐을 보여주고 있다. 주님께서는 율법교사에게 율법 자체가 영원한 생명을 얻는 수단이라고 말하셨다. 또한 “내가 율법과 예언서의 말씀을 없애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아라. 없애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라고도 말씀하셨다. 완성한다는 말은 예수께서 율법에 순종하신 것은 인간으로 율법을 피하는 것이 허용되도록 했다는 것을 의미치 않고, 예수님은 율법을 완성, 즉 율법에 순종하려는 이들에게 자기들 삶 속에서 율법에 순종해야 함을 보여주셨다는 말이다. “만일 네가 생명의 나라로 들어가려거든 계명을 지켜라.” 왜냐하면 계명이 생명의 나라에 들어가는 수단이기 때문이다.

누가 나의 이웃이냐?

“누가 나의 이웃일까?”라는 의문이 마음에 떠오를 때, 그에 대한 답은 각자 자신의 심정 상태에 따라 자동으로 있어질 것이다. 만일 그가 주님을 사랑하고 동료들도 사랑한다면, 인류가 그의 이웃이 될 것이다. 그러나 그가 극도로 자신만을 사랑한다면 이웃 사랑에 대한 그의 생각은 자기 심정의 한계 밑으로만 있어지고 말 것이다.
자기는 좀 잘낫고 남은 좀 모자란 듯 여기는 심정, 이 심정 속에 지옥의 영은 자라 오른다. 자기는 남보다 다른 계층이라는 편견 속에서 지옥의 영은 영양을 공급받는다. 가족의 생계를 위해 힘든 노동도 마다 않고 겸허하게 일하는 사람을 두고 은근히 빗대는 잔인한 경멸 속에도 지옥의 영은 잠복하여 대기하고 있다. 자신의 관점만으로 모든 것을 재야 한다고 우기는 외고집, 협소한 이기심 속에도 지옥의 영은 때를 기다려 놓치지 않는다. 거기에는 필요함을 호소하는 동료를 외면하는 비유 속의 사제와 레위인이 언제나 있는 법이다. 그러나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일과 사랑이 필요한 곳도 있기 마련이다. 자기 양심을 보게 하는 거울로 이 비유를 자기 앞에 걸어 두어 그 거울 속에 레위인이나 사제가 비치지 않는 사람은 행복할 것이다. 감상적 수준뿐 아니라 심정과 행동 지침면에서까지 선한 사마리아 사람이라는 훈훈해 있는 사랑으로 응답하는 자, 그의 사랑하는 심정으로부터 이웃사랑을 필요로 하는 일에 임하는 모든 이에게 주님의 사랑을 흘러 보내는 이들은 행복할 것이다.

새교회

새로운 교회가 부상하는 것은 인간 본성을 위해, 교회가 뒤집혀지는데서 기독인을 구속하기 위해, 새 진리를 가르치기 위해, 모든 이를 사랑과 삶의 새로운 품질로 인도해 주기 위해 절대 요소인 것이다. 이 아름다운 비유 속에 든 사랑의 견책은 우리에게는 너무나 필요하다. “우리 모두는 한 아버지에게서 왔지 않는가?” “한 분 하느님이 우리 모두를 창조하지 않았는가?” “너희는 남에게서 바라는 대로 남에게 해주어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다” (마태복음 7:12).

24
귀찮게 졸라대는 한밤중의 친구
– 영적 생명을 받는데 필요한 노력 –

성서 본문: 누가복음 11장 5-8절

5.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또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 중 한 사람에게 어떤 친구가 있다고 하자. 한밤중에 그 친구를 찾아 가서 ‘여보게, 빵 세 개만 꾸어 주게. 6. 내 친구 하나가 먼 길을 가다가 우리 집에 들렀는데 내어 놓을 것이 있어야지’ 하고 사정을 한다면 7. 그 친구는 안에서 ‘귀찮게 굴지 말게. 벌써 문을 닫아 걸고 아이들도 나도 다 잠자리에 들었으니 일어나서 줄 수가 없네’ 하고 거절할 것이다. 8. 잘 들어라. 이렇게 우정만으로는 일어나서 빵을 내어 주지 않겠지만 귀찮게 졸라대면 마침내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의 청을 들어 주지 않겠느냐?”

원리

천국은 열린 마음 안으로 흘러든다. 따라서 자신의 심정과 이해성이 주님께 언제나 열려 있도록 하여 그분이 선과 진리로 우리를 채울 수 있게 해야 한다. 이 목적을 달성하려면 꾸준하고도 신실한 노력이 절실히 요구된다.

비유의 해석 방법

오늘 본문은 비유가 상응에 의해 영적으로 해석되어야 하며, 단지 자연적 비교 고찰만 가지고는 해석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잘 예증해 주는 보기에 해당되기도 한다. 비유 속의 친구 같이 주님은 인간의 필요에 무관심하시다던가, 인간이 곤란을 받고 있는데 그것을 방치하신다 라고 말하는 것이나, 또는 우리가 고집스럽게 그분께 요구한다면 결국 귀찮아서라도 우리를 위해 주실 것이다라고 말한다던가, 그분의 사랑이 그분이 행동하게끔 밀어붙일 수는 없을 것이라는 등등을 말한다면 신성 모독이 되리라 본다. 주님은 게으르게 가만히 계신 때가 한 번도 없으시다.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분은 졸지도, 잠드시지도 않으신다.”
비유 속의 잠자던 친구의 행동과 주님과의 사이에는 글자적으로 볼 때 유사성이 있지 않다. 이 친구의 행동은 사실 비이웃적이고 비우정적이었다. 그러나 주님은 인간에게 선을 베풀어주실 기회를 놓친 적이 결코 없으시다. 태양이 열과 빛을 언제나 보내듯, 주님은 모든 이에게 그분의 사랑과 지혜를 주시려 애쓰고 계신다. 따라서 영적 생명을 받고자 한다면, 언제라도 가능한 것이다.
그래서 주님이 명백히 하시는 것은 인간의 간구는 부피의 여하로 천국에서 들려지는게 아니라, 품질로 결정된다는 것이다. “너희는 기도할 때에 이방인들처럼 빈말을 되풀이하지 말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해야만 하느님께서 들어주시는 줄 안다. 그러니 그들을 본받지 말아라. 너희의 아버지께서는 구하기도 전에 벌써 너희에게 필요한 것을 알고 계신다.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여라…” 이리하여 가장 전형적인 기도, 주님의 기도가 뒤따른다. 주님은 모든 이를 사랑하신다. 그 사랑을 기꺼이 받지 않는 것은 인간의 부분일 따름이다. “생명을 가지도록 너는 나에게 오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나에게 오는 그를 나는 결코 내쫓지 않을 것이리라.”

무관심의 외모

거짓 교리를 담고 있는 마음에 의해 성경의 글자가 총명치 않게 이해되어 오판된 성서의 의미들로부터서 주님은 도와주어야 할 사람을 언제나 도우시지는 않는다라는 생각을 갖게끔 한다. 여하튼 이와 비슷한 사건들, 간구함에 신속하게 응답은커녕 무관심하셨던 듯 보이는 구절도 있다. 예를 들면 마태복음 15장 21-28절, 마가복음 7장 25-29절에서 어떤 여인이 자기 딸 속에 든 마귀를 쫓아 내 달라고 간청했을 때, “예수님께서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으셨다”라는 구절이 이에 해당될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 뒤 그분은 그 여자에게 간접적인 방법으로 대답하셨고, 결국은 그녀의 딸을 치료해 주셨다.

위의 지체하시게 된 원인

그러나 예수님께서 치료를 더디하신 이유는 그 여인으로 자기 믿음을 강건하게 해주시는데 도와주시려 했기 때문이고, 믿음이 강해짐으로 그녀에게 줄 도움을 받을 조건을 갖추게 하시려는 것 때문이다. 따라서 주님께서 행동을 눈에 띄게 지체하신 것은 인간 자신이 주님에게서 받을 수 있는 조건이 더 강화되도록 해주기 위해서이다. 많은 사람들, 베드로와 같이 자기들이 준비도 되지 않았는데 천국적 삶을 받을 준비가 다된 듯 생각한다. 그래서 주님은 그분의 무한한 지혜와 자비로 우리가 지탱하지도 못할 조건에 접촉되는 때이른 상황으로부터 우리를 지켜 주신다.
인간에게 있는 곤란, 그것이 있게 되는 것은 인간이 선과 진리를 풍부하게 얻을 수 없어서가 아니라, 인간이 그것들을 얻고자 하지 않은 이유에서이다. 즉 선과 진리가 인간의 마음과 삶에 오게 될 때, 그 길을 차단하고 있는 자기 속의 악들을 인간이 포기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말이다. 우리 모두가 아는 진정한 것은, 우리가 어떤 것이 값진 것이냐를 평할 때, 자기가 그것을 얼마나 진심으로 바랬는지, 얼마나 오랫동안 그것을 얻기 위해 일했는지로 판단하는 일이다. 이와 같이 주님께서 눈에 보이게 지체하신 그 행동은 우리 인격을 영적으로 더 강건하게 해주고, 영적 강건함이 우리에게 얼마나 더 값진지를 알게 해주신다.

끈기가 필요함

그런 반면, 본문은 반가워하지 않는 친구와 언제나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시는 주님 사이에 글자적인 유사성은 제공하고 있지 않다. 그럼에도 본문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바, 설사 이기적인 사람이라 해도 그가 끈기 있게 요구한다면 그도 뭔가를 획득할 것이라 하여, 우리가 성의 있고 끈기로 바래고 구한다면 주님의 뜻하심은 결국 우리에게 어떤 영적 선을 주실 것이라는 데에 하등 의심을 남기게 하고 있지 않다. 그러나 조심해야 할 것은, 우리가 하는 열심이라든가 끈기는 주님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게 하기 위하여 필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인격을 발달시키기 위해 필요한 것임을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내적 의미: 친구들

비유에서 언급되는 여러 친구는 주님을 표현하나, 각기 다른 면모에서의 주님이시다. 처음 명명되는 어떤 친구에게 빵을 구하러 갔는데, 이 사람은 선에 관한 측면에서의 주님을 표현한다. 다시 말해 신성한 사랑 측면의 주님이시다. 두 번째 친구, 여행하다가 방금 들린 친구는 진리 측면에서의 주님, 신성한 지혜 측면에서의 주님을 표현하고 있다. 정신적인 길, 이 길을 수단으로 우리는 선함을 향해 여행한다.

여행

여행하는 사람은 삶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진리를 사용하고, 그 진리로 발전하고 있는 사람을 표현한다. 진리 그 자체는 인간의 마음속에서 언제나 여행 중에 있다. 진리는 인간의 기억을 통과하고, 이해성에서 되씹어져서 그의 심정 안으로 여행하는 점진적인 진보를 만들어 간다. 과거 다윗에 대한 나단의 비유에서 같이 진리는 “손님, wayfaring man, 여행자”와도 같아 양식을 필요로 해서 집에 들르게 된 여행자인 것이다. 즉 진리는 인간의 마음에 와서 각 인간의 선한 애정과 하나가 되려고 추구한다는 말이다. 주님이 진리이신 것같이 진리의 여행은 주님의 여행, 인간의 마음에 접근하시어 그 마음에 거처를 두시려고 마음 안에 들어가시려는 주님의 여행이다.

한밤중

여행자는 한밤중에 도착했다. 사실 여행자가 한밤중에 도착하거나 들르는 것은 동쪽 나라에서는 별로 특이한 것은 못된다. 그 나라들은 낮에는 워낙 뜨겁기 때문에 밤중에 여행하는 일이 잦았기 때문이다. 어찌됐든 정신적 측면에서의 한밤중이란 정신적 어두움, 무지의 상태, 마음이 진리에 관한 지식을 획득하기 전의 상태를 말한다. 모든 사람은 자연적으로나 영적으로나 무지함 속에서 태어나는 고로, 모든 이는 지식을 획득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은 진리를 이해하는 상속받은 능력, 합리성을 가지고 있고, 이 능력을 열리게 해서 발달시킬 필요가 있는 것이다. 주님은 한밤중인 우리 마음의 어두움에 강한 감동(인상)이 있게 함으로써 그분의 거룩한 진리로 우리에게 다가오신다.
한밤중(12시)은 이전 날의 끝이요, 또 다른 날의 시작이듯이, 한밤중은 정신적 어두움인 무지의 상태이면서도 마음의 새로운 상태의 시작, 주님으로부터 진리의 가르침을 받게 되는 새로운 상태의 시작도 표현하고 있다. 시편 기자는 노래하기를, “한밤중에 저는 일어나서 당신에게 감사를 올릴 것입니다. 그 이유는 당신의 정의로운 판결 때문입니다.” 이 구절에서 한밤중은 글자대로 보면 다윗에게 있는 헌신적인 습관을 말하고 있는 반면, 그 밤중은 마음이 더 높은 상태로 부상하는 영적 조건, 주님의 의로우심을 우리에게 나타내실 때 한밤중 같은 어두운 마음 상태에 주님의 진리가 왔음을 표현하고도 있는 것이다.
지난번 살핀 열 처녀의 비유를 통해 기억되는 말은, “그런데 한밤중에 ‘저기 신랑이 온다. 어서들 마중 나가라!’ 하는 소리가 크게 들렸다”이다. 그래서 주님이 친구로서, 그분의 진리로 우리의 한밤중, 어두움에 오시게 될 때, 우리는 그 진리에 대한 어떤 사랑을 가지기 시작하고, 얼마간의 성의 있는 바램이 생겨 그것을 받으려 하고, 그 진리가 지적해 주는 실제의 선을 붙들어 보려 하는 바, 우리는 영적으로 일어나게 되어 그 진리를 받을 준비가 갖추어져서 그 진리를 극진하게 대접하려는 자세를 갖춘다.

내어놓을 것이 없다

그러나 우리가 스스로 반성하는 가운데, 주님의 진리를 심사숙고한 결과 알게 되는 것은, 우리 속에 선이 없다는 것을, 그 진리가 집이라고 느낄 수 있는 것이 없다는 것을, 그 진리를 받쳐 줄 기초로 쓸 수 있는 선함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다시 말해 친구가 우리에게 한밤중에 왔으나, 우리의 정신적인 집에는 그에게 내어놓을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는 말이다. 새 진리의 빛으로 자신을 검증할 때, 우리는 자신 속에 어떤 선도 없다는 것을, 진리에 대한 어떤 심오한 사랑도 없다는 것을, 진리에 순종하는 실제적인 삶도 없었다는 사실을 스스로 발견하게 된다.
이런 다급한 상태에서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위급 상태에서의 우리는 자기를 도와줄 또 다른 “친구”를 생각하게 된다. 우리는 주님의 선함을 생각하여 선함을 얻는데 도와줄 수 있는 그분을 찾게 된다. 다시 말해 우리는 그분의 진리가 우리로 정신을 집중하여 지지하도록 요구하고 있음을 알고, 진리를 잘 대접하는데 우리를 도와줄 그분의 사랑을 찾게 된다는 말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그분께 나아가되, 우리가 그분의 진리를 받았음을 인정하면서 나아간다. 그러나 우리가 영접한 그 진리와 하나를 이룰 수 있는 선이 우리 자신의 정신적인 집에는 없음을 인정하면서 그분께 나아가게 된다.

우리가 그분께 나아간 이유는 빵을 위해서이다. 이 빵이란 우리에게 와진 새로운 진리를 먹여서 받쳐 줄 생활 속에 있는 실제의 선이요, 이 선만이 영적 자양분을 우리에게 줄 수 있다. 우리가 실제적인 선함을 위해 요청한 빵은 세 개이다. 빵 세 개란 가득 찬 상태, 모든 등차, 즉 의지, 이해성, 행동에서 충만해진 선, 이 선이 실제적인 선함이다. 숫자로서의 셋이란 진리 측면에서의 충만함, 또는 완성을 표현해 준다.
빵과 연결시켜 볼 때, 본문은 진리의 선, 진리를 받쳐 줄 선함을 언급하고 있다. 그 선함을 우리는 자신의 정신적인 집에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을 우리가 인정해서, 그 선함을 빌리기 위해 주님께 나아간다. 그리고 우리가 자기 것 삼게 되는 정도만큼의 선함을 주님께로부터 받게 된다.
아주 크게 볼 때, 우리는 그분께 권위를 인정하는 것, 즉 법에의 순종을 주님이 명령하시기 때문에 법에 순종해서 선을 취해야 한다. 이래야 빵을 빌릴 수 있다. 이렇게 빌린 후, 우리는 실제적 삶에서 자신의 선함을 만들어야 하고, 선을 사랑함으로부터 주님과 결합하는 가운데 선함을 취득해야 한다.
주님은 우리가 그분께 달라고 말했다고 해서 선함을 우리에게 주실 수 없다. 진리는 우리가 요청하면 가르쳐 질 수 있고 전달되나 선함은 그렇게 되지 않는다. 우리는 자신 스스로 진리를 사용함으로 선함을 만들지 않으면 안된다. 물론 주님은 우리에게 선함을 주신다. 그러나 주실 수 있는 것도 오로지 우리가 그분께 협력할 때만 주실 수 있으시다.

지체함 (delay)

우리가 주님께 다가가 선함을 구할 때, 우선 우리에게 보여지는 그분의 모습은 우리의 요청에 무관심인 듯 여겨지는 것이다. 본문에서와 같이 주님이 “귀찮게 굴지 말게”라고 우리에게 말하시는 듯 여겨진다는 말이다. 물론 이 본문은 단지 외면적 측면일 뿐이다. 그 이유가 주님은 결코 무관심하지도 않으시고, 악한 사람까지 포함해서 어떤 인간을 향해서도 해주기를 싫어하시는 분이 아니시기 때문이다. 그분은 인간에게 선을 주시기 위해서, 지옥의 악마가 당하는 고통을 자초해서 받고 있는 사람의 고통까지도 누구려 뜨려 주시기 위해서 그분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언제나 하고 계신 분이다. 그러나 주님께서 그들을 돕는 방법을 인간이 이해 못할 때, 인간은 주님이 자기들을 돕지 않는다고 착각해 버린다.

안으로부터

집에 있는 친구에 관해 본문이 말하는 바, “그 친구는 안에서…라고 거절할 것이다”라고 적고 있다. 이와 같은 눈에 나타나 보이는 주님의 무관심은 인간이 자신의 무가치함을 보게 되는 그의 안쪽 생각으로부터 일어난다. 그 다음 상상하는 것은, 하느님은 죄인들을 사랑스럽게 쳐다보시려 하시지 않는다고 투덜댄다.

인간이 자기 인격과 주님의 인격 사이의 차이점을 생각할 때, 인간이 상상하려는 것은, 주님이 인간과 주님 사이에 있는 문을 닫아걸고 계시면서 그 문을 다시 열려고 하시지 않는다고 하는 것이다. 문, 또는 문 입구는 이쪽과 저쪽의 두 장소를 연결시키는 수단이다.
우리 마음에는 두 개의 문이 있다. 자연적 문은 이 세상의 자연적 삶과 교통하는 문이고, 영적인 문은 천국을 향해 열리는 문, 영적 삶을 위해 열리는 문이다.
따라서 마음속의 자연적 문은 바깥 세계에 열려 있으나, 영적 문은 그 사람이 그 문을 열려고 할 때까지 닫혀져 있다. 다시 말해, 인간이 회개와 개혁을 통해 주님이 그의 영적 의식에 오기 위해 문을 열 수 있는 정신 상태에 다다를 때까지 그 문은 닫혀 있다는 말이다.
그러나 인간이 상상하는 것은, 주님께서 영적 문을 기꺼이 여시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나 주님은 그분의 신성한 인간을 “문”으로 만들어 두시고, 그분을 통해 인간이 삶의 영성에로 진입하게 섭리해 두셨다. 예수께서, “나는 문이다. 누구든지 나를 거쳐서 들어오면 안전할 뿐더러 마음대로 드나들며 좋은 풀을 먹을 수 있다”라고 말해 두셨던 것이다. 문이 닫혀져 있을 경우, 그 문을 잠그어 놓은 자는 인간이다. 그럼에도 영적 삶에 무지한 사람일 경우, 그는 주님이 그 문을 잠궜다고 착각한다.

침대, 등등

비유 속의 친구가 말하기를, “…아이들도 나도 다 잠자리에 들었으니…”라고 말했다. 부모로부터 태어난 아이들이란 삶의 새로운 원리, 옛 상태에서 뻗어 나온 상태, 옛 것을 계승하는 새로운 상태를 표현한다. 우리가 쉼을 얻는 침대란 교리를 뜻하는 바, 우리의 마음은 그 교리 위에서 쉼을 얻는다. 이에 대한 예를 이사야 28장 20절에서 읽어보자. “침대는 짧아서 길게 눕지 못하고, 이불은 좁아서 몸을 덮지 못한다.” 즉, 거짓 교리는 정신적으로 너무 짧다는 말, 그 교리는 마음이 더 확장되게 허용치도 않고 마음을 자유롭게 해주지도 못하면서, 오히려 우리의 애정을 죄어 매고, 생각을 감금시킨다. 어린이들이 잠자리에 들어가 있었다. 새로운 원리는 주님의 말씀에서 오는 진정한 교리에서만 발견된다는 뜻이다.
성서는 공식화된 교리로서 주어진 것이 아니라 일종의 저수지와도 같이 우리에게 주어져 있다. 성경은 어떤 교리를 총명하고도 합리적으로 이끌어 내고자 할 때 마음껏 퍼낼 수 있는 저수지인 것이다. 자연은 정밀한 과학이 아니고 저장고이다. 자연으로부터 총명하게 합리적으로 이끌어 낸 것이 과학이다. 그러나 정밀한 과학 없이는 자연을 이해할 수 없듯이, 진정한 교리 없이 주님의 말씀은 올바르게 이해되어지지 않는다. 진정한 교리는 영적인 것을 이해하는데 필요한 영의 과학인 것이다. 그래서 주님께 접근하고자 하는 사람이 교리에 관한 적절한 지식이 없으면 자기가 “생명의 빵”인 선함을 획득하는데 주님이 어떻게 돕고 계시는 가를 이해할 수 없게 된다. 이럴 경우, 자기가 교리를 명확하게 이해할 수 없는 연고로 그는 자주 실망한다.

일어남

이렇게 실망할 때마다, 그에게 주님은 “일어나서 줄 수가 없네”라고 대답하시는 듯 여길는지 모른다. 그러나 사실인즉, 본인이 교리에 대해 명확히 이해하는 수준까지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인 것이다. 다시 말해 자기가 자연적 감각의 영역이나 자기 생각 평면 그 이상으로 마음을 승강시키지 않았기 때문이다. 인간이 주님에 관해, 그리고 그분의 인성에 관해 더 높고 더 영적인 관점에로 자신을 일으키려 애쓰지 않는 한, 주님은 그 사람의 마음속에서 “일어나실 수”없다. 우리가 그분을 자신의 생각과 애정 속에서 위로 들어올릴 때만이 하느님은 일어나신다.
이와 같이 주님은 우선 “일어나신” 다음 우리에게 “주신다.” 즉 우리가 주님을 마음에서 높이 드는 때, 그렇게 높이 드는 노력이 우리에게 삶의 새로운 상태를 주게 된다는 말이다. “하느님이 일어나신다. 그분의 적들이 산산이 흩어지고 만다.” 우리가 심정으로 주님을 찬양할 때, 우리 속의 악과 거짓들은 그분의 현존으로부터 산산이 흩어지고 만다는 말이다.

귀찮게 졸라댐

“이렇게 우정만으로는 일어나서 빵을 내어 주지 않겠지만 귀찮게 졸라대면 마침내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의 청을 들어주지 않겠느냐?” 앞 페이지에서 이미 상술한 바와도 같이, 위 본문에서 언급되는 행동은 주님의 방법과는 글자 그대로만 볼 경우 어떤 유사성도 있지를 않다. 그 이유가 “주님은 모든 사람에게 선하시고, 그분의 온유한 자비는 그분의 모든 일 속에 넘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그분은 선한 자든 악한 자든 해를 비춰 주시고, 의로운 자든, 불의한 자든 고르게 비를 내리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주님께서는 모든 인간에게 모든 선을 제공하고 계시지만, 인간이 선을 받기 위해 마음 문을 여는 정도 이상으로는 어떤 이에게든 선을 전달시켜 주실 수 없다.
주님은 인간에 대한 그분의 사랑 때문에, 그분의 진정한 친구라고 한다 해도 그가 바깥쪽 측면에서 요청하는 것이 무엇이 됐든 간에 다 주실 수는 없다. 그러나 그분은 인간이 안쪽 측면에서 바라는 것, 그 바램으로 살고자 하는 것에 한해서만 주실 수 있으시다. 그래서 요청해 온 인간 자신의 끈덕진 노력과 성실함은 그들로 주님의 선물을 받을 수 있게 마음 문을 열게 하는 촉매 역할을 한다.
인간의 기도와 진지한 노력이 주님에게 변화를 주지 않는다. 그리고 그것들이 그분으로 인간에게 주실 수 있는 것 이상을 주시도록 만들지도 않는다. 그러나 그것들은 인간 자신을 변하게 하여 받을 수 있는 그릇을 준비하게 해주는 것이다. “옳은 일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만족할 것이다.” 진리에 목말라 하지 않고 선함에 배고프지 않다는 사람을 선과 진리로 채울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주님은 인간 속에서 일하시되, 먼저 그 사람이 영적 생명을 바래도록 하시고, 그 다음 그의 바램이 선을 갈망하는 의식 세계를 만들도록 해주신다. 그 뒤 그 사람이 진지하게 선해지기를 추구할 때, 그는 그 선함을 주님으로부터 받을 수 있게 자신을 열게 된다. 달라고 보채는 것, 그 자체만으로 인간의 기도가 해답을 초래하는 것이 아니다. 그 이유는 주님은 그 사람이 정작 바랬어야 할 바램과만 교통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이 자기의 의식 세계 안에서 자신 스스로 솔선해서 선하게 살아갈 때, 주님은 선함을 요청한 그의 기도에 응답하실 수 있다.

필요에 따라서

그런 다음 주님은 “그가 청한 만큼”을 인간에게 주실 수 있다. 다시 말해서 그가 받으려고 열어둔 모든 선, 그가 사용하려 하는 모든 것을 받을 수 있다는 말이다. 인간이 자기 속에 든 악에 쉽게 기울려는 경향성(evil inclinations)에 저항하고 금할 때, 그는 자기 마음과 삶 속에 선함을 위한 방을 만든다. “이기는 자에게 모든 것을 상속하겠다.” “네 손을 펴서 살아 있는 모든 것에 대한 바램으로 만족하라… 그분께서는 그분을 경외하는 이들의 바램을 충분하게 채워 주시리라.” 새로운 진리가 친구로서 우리에게 다가올 때, 우리는 주님을 친구라고 부를 수 있고, 다가 온 새 진리에 양식이 될 선함은 우리 마음의 품질에 부응시켜 공급받을 수 있게 된다.
비록 주님이 언제나 우리에게 선과 진리를 전달받게 해주시려 애쓰신다 해도, 정작 그분이 그렇게 하실 수 있는 길은 오로지 주시는 복을 잘 붙잡고, 악은 금하겠다고 하는 우리의 의지를 끈덕지게 지켜 갈 때만이 실제로 가능하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그 이유는 주님께로부터 선을 받는 정도는 스스로 악을 실지로 금하고 있는 정도에 비례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삶 속에 영성을 채워 가려면 영적 삶에 깊은 흥미가 있어야 하고, 그 삶을 추구하는데 꾸준히 노력하는 진지함과 더불어 자신이 살아 내고자 하는 모든 선함을 확실히 받을 수 있다는 것도 알고 있어야 한다.
우리가 해야만 하는 모든 것은 악을 금하고 선을 행하는 것이다. 이를 해내는데 있어서 우리는 의기소침해서는 안되고, 초조해서도 안되고, 실망도 금물이며, 선을 지적해 주는 진리를 의심 없이 배워, 그 선을 획득하기 위해서는 용감무쌍하게 그 진리를 실천해 가야 한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가르침, 뿐만 아니라 가르침에 대한 본보기까지 우리에게 남겨 두신 것이다.

기다림

자연적 인간은 주님의 계획이 마무리되는 것을 기다리는데 무척 피곤해 한다. 결과를 얼른 보고 싶어하는 인간 자신의 성급함은 오히려 계획이 지체되는 한가지 원인도 된다. 사실인즉 언제나 기다리시는 분은 주님이시다. 그분은 인간이 영적 생명을 받을 상태에 오기까지 언제나 기다리신다. 과거 이스라엘 후손이 가나안으로 가는 여정에서 빨리 갈 수 있는 지름길도 있었듯이, 모든 인간과 더불어 약속된 땅으로의 지름길이 존재한다. 만일 인간이 뜻하기만 하면 인간은 그 길을 걸을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 자신의 악들은 인간으로 오래 걸리고 우회하는 길로 가나안을 가도록, 배회하도록 몰아치고 있다. 지름길이란 주님의 계명에 순종하는 길뿐이다.

진지함

우리에게는 더 많은 영적 진지함, 더 많은 지속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올바른 동기를 가진 이들은 언제나 성공한다. “끝까지 참는 자는 구원되리라.” 이에는 자연적인 목적이나 결말뿐만이 아닌 영적인 목적까지 포함되어 있다. 우리는 영성을 보존하기 위해서 악과의 모든 투쟁에 용감하게 견뎌 내야 한다. 항구적인 진지함만이 합리적인 행동으로 선한 목적을 체현해 낸다.
삶에 있어서 한가지 큰 비밀은 만족(contentment)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원한다고 생각하는 것을 가질 수 없다면, 우리는 우리가 가질 수 있는 것을 원하는데 만족해야 한다. 단지 구하기만 한다고 해서 자기가 원하는 것을 당장 가질 수는 없다. 그러나 진정으로 구하는 것을 위해 살아감으로 해서 우리는 그것을 가질 수 있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가 요청한 것을 당장 받지 못하게 될 때, 그분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우리 영혼에 매우 유익한 것을 받을 수 있게 해주신다. 주님은 우리가 슬기롭지 못하게 요구하는 것을 그분의 신성한 지혜로 보류하셔야만 하는 때가 자주 있다.

기도

우리는 외적 형태상에서의 기도 속에서 꾸준히 있어야 할 필요는 없다. 선용(use)은 그 속의 목적이 수행되는데 있다. 따라서 선용은 우리가 외적 형태상의 기도함 속에 계속 머무르도록 허용하지 않는다. 사실 진정한 기도는 우리의 선용이 실제 이루어지는 그 속에 존재한다. 악을 금하고 선을 행하려는 끈질긴 노력이야말로 주님께 도움을 받게 하는 살아 있는 기도이다. 이 기도야말로 최고로 빨리, 쉽사리 응답되어 질 수 있는 기도이다. 왜냐하면 응답은 우리가 받는 강건함과 후원 속에 있고, 이것들이 노력하는 가운데 있는 우리를 떠받쳐 주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말하시기를, “구하라, 받을 것이다. 찾아라,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열릴 것이다.”

25
어리석은 부자
– 세상욕 –

성서 본문: 누가복음 12장 16-21절

16. 비유를 들어 이렇게 말씀하셨다. “어떤 부자가 밭에서 많은 소출을 얻게 되어 17. ‘이 곡식을 쌓아 둘 곳이 없으니 어떻게 할까?’ 하며 혼자 궁리하다가 18. ‘옳지! 좋은 수가 있다. 내 창고를 헐고 더 큰 것을 지어 거기에다 내 모든 곡식과 재산을 넣어 두어야지. 19. 그리고 내 영혼에게 말하리라. 영혼아, 많은 재산을 쌓아 두었으니 너는 이제 몇 년 동안 걱정할 것 없다. 그러니 실컷 쉬고 먹고 마시며 즐겨라’ 하고 말했다. 20.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이 어리석은 자야, 바로 오늘 밤 네 영혼이 너에게서 떠나 가리라. 그러니 네가 쌓아 둔 것은 누구의 차지가 되겠느냐?’ 고 하셨다. 21. 이렇게 자기를 위해서는 재산을 모으면서도 하느님께 인색한 사람은 바로 이와 같이 될 것이다.”

원리

세상욕은 영적 삶에 대한 마음을 닫히게 한다. 자기의 애정과 생각을 감각적 삶에 빨려 들어가게 한 사람은, 비록 그가 세상적 부유함의 쟁탈전에서 괄목할 만큼 뭔가를 이룩했다 해도, 영적 부유함에서는 가난한 채 남아 천국의 복을 받거나 즐기기가 어렵다.

질문자

주님께 부탁을 한 사람의 상태가 세상적 수준인 것은 주님의 시선을 자신에게 끌어당기려 한 태도로부터 추정되어진다. 본문의 때는 예수님께서 많은 군중들에게 영적 삶의 큰 진리를 가르치시는데 열중하고 계신 때였다. 그런데 이 사람은 내면의 삶에 관한 광대한 진리를 받을 생각은 하지 않고, 가르치시고 있는 분위기마저 무례하게 깨트려 가면서 까지 자신의 사소한 문제를 들고 나와 남들 앞에서 시선을 모으려 했다. 그는 자신의 자연적인 목적을 성취하는데 주님의 권위를 약삭빠르게 이용하려 했던 것이다.

응답

그러나 주님은 질문자가 물은 주제보다 오히려 인간 영혼을 만나셨던 것이다. 그분은 사건의 시비를 가리지 않으시고, 이와 비슷한 어느 경우에서나 마찬가지로 자칫 흘려 버리기 쉬운 내향적 원리에 시선을 모으게 하셨다.
주님이 지상에 오신 것은 빛과 삶의 새로운 처방을 주기 위해서 였다. 따라서 그분은 인간의 시민적 업무를 관장하는 재판관이나 재산 분배자가 되도록 그분 자신을 만드시지 않으셨다. 이런 일들을 위해 인간은 법과 법정을 가지고 있다. 주님은 새로운 삶의 새로운 영적인 법을 인간에게 가르치시기 위해 오셨다. 이 법칙이 인간의 마음을 채워서 인간들로 적절한 권위를 지닌 모든 법을 준수토록 영향을 주어야 한다. 그러므로 주님은 이기적인 목적을 위해 그분을 이용하려 드는 사람들을 질책하셨던 것이다.

탐욕

탐욕을 나무라시면서 예수님께서는, “인간의 생명은 자기의 소유가 얼마나 되느냐에 존재하지 않는다” 라는 것을 선포하셨다. 우리의 존재라는 측면에서 사용된 단어 “생명, 삶, life”이란 단지 바깥쪽 생활, 생계에만 있지 않다. 비유가 보여 주는 바, 탐욕은 무덤 넘어 있는 삶을 준비하지 않게 하는 정신적 상황으로 인간을 끌고 간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감각적인 것에 자기의 생각과 애정의 중심을 놓게 되면 그는 자신을 영적인 것에서 닫히게 하기 때문이다.
비유에서 부자는 자기의 재물을 잘못된 방법으로 획득한 것이 아니고, 자신의 밭에서 많은 소출을 얻는 정당한 방법으로 부자가 된 것이다. 따라서 비유가 지적하려는 요점은 부자라는 자체나 부자가 재물을 획득한 방법에 대한 것이 아니라, 재물을 향한 소유자의 마음 상태에 대한 것이다. 주님의 견책은 부자의 소유물이 아니라 소유물을 세상적으로 사랑하는데 있었던 것이다. “재물이 증가한다고 너의 심정을 그것에 기대지 말아라.”

영적 삶의 준비

삶의 목적은 선용(uses)을 수행해 가서 영계를 발달시키는 것인 바, 지상적 쾌락을 추구하는데 자기의 모든 시간과 수단을 소비해서는 안된다. 그래서 비유는 단지 감각적 삶을 살려고 선용을 수행하는데서 은퇴하고 싶은 이들에 대한 경고까지 포함되어 있다.
교회에서의 선용(use)이란 주님의 법칙을 사람들에게 가르치고, 그들에게 이 세상 이후에 있는 진정한 삶, 영원한 삶을 준비하는데 이 세상 삶을 어떻게 활용하여야 하는 가를 보여주어, 그들로 악을 금하고 선을 행하도록 인도해 가는 것이다.

교회와 나라

시민적 문제를 시정하기 위해 주님께 요청한 사람의 권리를 주님이 묵살하신 것은 아니다. 주님은 정의가 발견되는 위대한 원리를 인간에게 가르치시고자 하셨고, 시민 업무는 법집행이라는 시민적 권위에 남겨 두셨다. 그래서 다른 구절에서 주님께서는 사람들로 시민법에 순종하도록 가르치시기도 하셨다. 즉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동시에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에게”라고 말씀하셨다. 그렇다고 모든 것이 하느님에게 속한게 아니다라는 것은 아니고, 단지 시당국은 시민 업무를 처리하는 하느님의 대행인일 뿐이라는 말이다.
교회와 나라는 삶의 각기 다른 평면에서 행정을 펼치는 것이다. 집행이나 해석에 있어 시민법은 시민 업무의 행정을 위해 주님의 종으로 공적 권위의 수중에 있는 것이다. 그러나 영적 법은 주님에 의해 밝혀져 교회에 의해 설명되고 적용되어진다.
따라서 인간이 거듭나게 될 때, 교회에서 가르쳐진 원리, 영적이고 자연적인 모든 삶에 관한 근본 되는 원리에 영향을 받은 사람이 시당국에서 질서 있는 방법으로 행정을 펼치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근본 되는 원리가 바깥 삶에 속한 시민법, 자연적 평면이라는 말단 지점에서 응용되는 것이다. 이리하여 교회는 시공무원을 가르쳐, 그들로 슬기롭고 성실하게 시행정이라는 차원에서 선용을 수행하도록 인도하는 것이다. 공동체라는 것은 인간의 육체와도 같이 각 부분은 제각기 자리를 지키며 역할에 충실하여 건강이 유지되어 가는 것이나 다름없다.

자연적 부와 영적 부

비유의 교훈은 글자적으로나 영적으로나 합당하다. 다시 말해 자연적 부나 영적 부라는 양면 모두에서 진정하다는 말이다. 만일 자연적 부가 선한 목적을 위해 사용되지 않는다면, 재물은 그를 축복하기보다는 오히려 저주해 버린다. 모든 재물에 관해서 생각되어야 할 요점은 그 재물이 각자의 인격 형성에서 어떤 영향을 줄 것이냐? 라는데 있는 것이다. 만일 재물 소유자가 삶의 영적 원리에서 분리된다면, 제아무리 재물이 풍부하다 해도 그것은 그 사람에게 어떤 진짜 이익을 남길 수 없게 된다. 사실 풍부함이 더하면 더 할수록, 그 재물은 소유자의 감각적 욕망을 더 흥분시켜 영적인데 대한 관심까지 더욱 그 사람 속에서 축출시키고 마는 경우가 흔하다. “온 세상을 다 얻었다 해도 자기 영혼을 잃는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이와같이 말할수 있는 이유는 인간의 영이 그의 육체로부터 분리될 때, 자연적 재물은 인간의 재산으로서의 가치를 중단해 버리기 때문이다. 인간이 영계로 가져가는 것은 인격 외에는 아무 것도 없기 때문이다. 위의 말씀은 영적 재물에 속하는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의 경우에도 합당하다. 우리가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을 많이 습득하였으되, 이를 자아 사랑에 남용하고, 자신의 개혁이나 거듭남을 위해 사용하지 않았다면, 그것이 정신적 재물임에도 천국에서 보유할 수 있는 재물은 못될 것이다.
비유 이후에 있는 구절들 속에서 주님께서는 들의 백합에 관한 아름다운 비교를 가지고, 우리 주님은 모두를 돌보아 주시어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 자연적 측면과 영적 측면, 양쪽의 필요함에 예비하고 계심을 가르치신다.

재물에 따른 고민

비유에서 부자는 자기 재물이 풍부해짐으로 말미암아 걱정이 생겼다. 그는 그것들을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몰랐다. 그는 그것들을 저장해 놓을 창고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재물을 필요로 하는 동료에게 좋은 창고가 있지 않았을까? 자기의 잉여 농산물을 위해 최상의 창고는 가난에 찌들린 이들, 불행을 당한 이들이 아닐까?
부자는 자기 창고를 증설하는 방법을 창안해 냈다. 그래서 그가 더 큰 창고를 지어 그의 모든 소출을 저장했을 때, 그는 여러 해를 위해 더 이상 신경 쓸 필요가 없게 되었다. 그에게는 먹고 마시며 즐기는 것만 남게 된 것이다. 그야말로 그는 100%의 감각적 삶을 가졌다고 해도 무방할는지 모른다. 그런데 그는 자기의 영적 삶을 위해 무엇을 했던가? 부자라고 해서 장차 닥칠 세계를 위해 준비할 필요는 없는 것일까?

그의 영혼(soul)이 요구됨

이런 사람이 자아 탐욕으로 불태우며 위로 받고 있는 동안, 어떤 특사가 자기 문을 두드린다. 이 특사는 눈에 보이지 않는 영계로부터 온 특사이다. 이 특사는 덜덜 떠는 부자에게 말한다. 나와 함께 가자. 네 세상 삶을 이제 마감 지어야겠다. 너는 영계로 건너가야만 한다. 이 불쌍해진 부자는 무엇을 해야 할까? 그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가기 싫다고 말할는지 모른다. 슬퍼할는지 모른다. 아마 발버둥칠 것이다. 그러나 순종해야만 할 수밖에 없다. 이 부름에 저항함은 아무 쓸모 없는 짓이다. 가야만 하고 그것도 당장 가야만 하는 것이다.
게다가 그의 영혼(soul)이 가도록 요구된다. 그의 육체는 쓸모 없이 자연계에 버려져야 된다. 그가 자기의 자연적인 삶, 육체적 삶을 위해 장만해 놓아 왔던 모든 것은 쓸모 없는 그의 육체와 함께 자연계에 머물러야 한다. 이제 그의 영혼은 물질적 세계의 모든 것을 더 이상 필요로 하지 않는다. 가련한 물질적인 그의 몸은 더 이상 물질적 소유물을 사용할 수 없다. 그는 그것들 모두를 타인에게 남길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의 영혼은 가야만 한다. 가긴 가되 어떤 조건을 갖추고 그는 가는 것일까? 가야만 하는 그 삶을 위해 그는 어떤 준비를 갖추어 두었을까?
본문의 부자 같은 사람들 모두 다 자기는 이 세상에서 준비할 만큼 잘 쌓아 두었다고 제 나름대로 느낄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는 다음 세계를 위해 어떤 재물도 쌓아 두지 않았다. 이런 사람들은 영계에 대해 자신 스스로 어떤 확신을 가질 필요를 느끼지도 않았었고, 그곳에 들어가려는 어떤 바램도 없었던 이들이다. 그의 생각과 애정은 육적인 것 속에 빨려 들어가 있었고, 육을 넘어 있는 어떤 것도 그에게는 한낱 그림자 같고 가짜 같기만 했던 것이다. 이런 사람이 “자신을 위해 재물을 쌓아 두면서 하느님을 향해서는 부유하지 못했던 사람”인 것이다.

영적 의미에서의 재물 (riches)

영적인 재물이란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들, 알고 있는 교리나 사실들, 그리고 기억 안에 저장된 것들이다. 그래서 영적으로 부자라는 것은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을 풍부하게 소유한 사람, 진정한 교리나 사실들을 잘 공급받은 기억의 소유자, 그래서 만일 그가 뜻하기만 하면 그가 이론적으로 아는 선을 포획할 준비가 된 사람을 말한다. 부자의 밭이란 그의 마음이다. 이 마음이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들을 붙잡고 있다. 이 지식들이 생산할 수 있는 선의 품질은 그 인간의 사랑의 품질과 같은 것이다. 만일 인간의 애정들이 감각적 삶에 중심을 두고 있다면, 그의 지식들, 제 아무리 많다 해도 그의 정신적인 밭은 자연적 측면에 속한 소출만을 많이 거둘 수 있을 뿐이다. 오로지 자연적 삶만을 위해 좋은 것을 생산한다는 말이다. 통치하는 사랑(ruling love)은 인간의 정신 제국 속의 황제 같아서 이 황제 밑에서 모든 것은 좌지우지되고 만다.

혼자 궁리함

“…하며 궁리하다가…” 이를 다시 말하면, 그가 곰곰이 생각하였다는 것, 또는 그가 자기 내면의 생각을 분주히 활동시켰다는 말이다. 사실, 인간 내면의 생각은 그 사람의 진정한 언어이고, 이 언어야말로 자신의 목적과 계획에 대해 발가벗은 이야기를 나누는 말들이다.
영적으로 말한다라는 것은 생각한다는 것을 뜻한다. 그 이유는 입을 통해 나온 말은 우리 생각을 표현한 것일 뿐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옳지 좋은 수가 있다, 또는 내가 이렇게 하리라” 라고 생각하거나, 독백한다. 다시 말해 그의 생각이 그의 의지로부터 일어나는 모습이다. 이때의 경우 의지와 생각은 같은 목적을 향해 협동하고 있다. “내가 어찌 해야 할까?”는 이해성이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내가 이렇게 하리라”라는 것은 어떻게 목적을 성취할 것인가에 관해 의지가 지각했다는 뜻이다. “부정한 청지기”의 비유에서, 청지기가 자신에게, “어떻게 하면 좋을까?”라고 말한 다음, 자기 의지로부터 응답 받기를 “옳지 좋은 수가 있다”라고 했다.

쌓아 둘 곳이 없음

본문의 사람은 이렇게 말한다, “…쌓아 둘 곳이 없으니 어떻게 할까?…” 그는 선하고 기쁘게 하는 것이 자연적인 것이라고 느꼈다. 그러나 그의 기쁨들이 증가하면서 그는 자기가 바래는 자연적인 선함 모두를 쌓을 방이 없다고 생각했다. 즉 그의 이해성이 너무 제한되어 있어서 그가 좋다라고 느끼는 눈에 보이는 것들을 전부 납득하지 못한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의지가 새로운 기쁨들을 느낄 때, 그는 자기 이해성이 팽창되어 자기가 새롭게 좋다고 하는 것들을 어떻게 만들어 갈 것인지를 이해하기를 바랜다. 새 느낌이 증가할 때, 그는 그것을 즐기기 위해 즐길 수 있는 것을 계획할 수 있기를 바랜다.
느낌에 대한 새로운 상태는 생각에 관해서도 새로운 상태를 주게 된다. 따라서 그는 바뀌는 느낌에 일치하도록 자기 생각도 바꾸어야 하는 것이다. 고로, 그는 옛 창고를 헐고 더 큰 것을 짓는다. 즉 그는 자기 의지의 상태에 일치하도록 이해성과 기억의 영역을 넓힌다. 이렇게 넓혀진 이해성 안에 그의 의지에 온 모든 새 느낌을 저장하고 계획하고 즐긴다.
인간 속의 통치하는 사랑이 애정에 관한 새 작물을 내게 될 때마다, 그는 생산물을 더 거두게 되고, 확장된 소출은 그의 이해성을 같은 비례로 더 커지게 한다. 만일 인간의 심정과 이해성이 불일치 한다면, 그 사람은 자신을 분단시키게 된다. 그리고 만일 그 두 가지 중 하나가 다른 하나 뒤에서 꾸물거리거나 뒤쳐지게 되어 보조를 못 맞춘다면, 그는 자유로운 상태 아래 있지를 못한다.

충분히 쌓아 둠

새로운 상태를 느끼는 사람은 느끼는 그 상태를 자기가 다 안다고 생각될 때까지 자기 이해성을 팽창시켜 가서, 그것들을 어떻게 즐길 수 있는지 파악하여 만족하는 상황에 이른다. 그래서 그는 생각하기를, 자기는 스스로 즐길 수 있는 충분한 지식과 좋은 것을 가졌다고 한다. 그 결과, 선에 관한 자기 지식은 저절로 선한 것으로 이미 바뀌었다고 착각하기에 이르고 만다.

먹고, 마심, 등등

이런 뒤 그는 제 영혼에 말하기를, “먹고 마시며 즐겨라”라고 한다. 먹는다는 것은 선이라고 생각되는 것을 가지고 영혼(spirit)에 자양분을 공급하는 것이다. 마신다는 것은 진리를 가지고 영혼이나 마음에 자양분을 공급하는 것이다. 즐긴다는 것은 선과 진리에 의해 생산된 기쁨을 만끽하는 것이다. 그러나 만일 인간의 지식이 추상적인 진리일 뿐이어서, 그 진리가 순수하게 선한 삶을 생산하지 않고 있다면, 그가 헤아리고 있는 선은 순수한 선이 못된다.

어리석은 자: 밤

그 다음, 심판이 닥칠 때, 신성한 진리가 그에게 말하기를, “이 어리석은 자야, 바로 오늘 밤 네 영혼이 너에게서 떠나가리라. 그러니 네가 쌓아 둔 것은 누구의 차지가 되겠느냐?” “어리석은 자”란 자기 기억 속에 지식을 잔뜩 쌓아 두었으나, 악을 죄로 알고 금하는 것, 그리고 선용을 실천함으로 거듭 나는 데에 그 지식을 사용하지 않는 사람이다.
“오늘 밤”이란 속이 깜깜한 상태에 있는 사람, 거짓으로 꽉 찬 사람, 이미 교리를 알고 있으면서도, 진리를 삶의 빛으로 사용하지 않을 때의 상태이다. “네 영혼(soul)이 너에게서 떠나가리라.” 인간이 자연계로부터 분리될 때 심판이 온다는 말이다. 더불어 그가 실제 사용하지 않은 모든 지식들은 그에게서 떠나간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 이유는 그가 다른 삶에 들어갈 때, 그는 자기가 사용치 않은 모든 지식들을 실지로 거절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 지식들은 그의 진짜 삶의 어떤 부분도 형성해 줄 수 없다. 그 지식 가지고 어떤 이윤도 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사람으로부터 그의 영혼을 요구한다. 그 이유는 그가 고향이라고 느낀 감각적인 것들인 자연계를 기꺼이 떠나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느님께 인색함 (하느님께 부유하지 못함)

“자기를 위해서는 재산을 모으면서 하느님께 인색한 사람은 바로 이와 같이 될 것이다.” 만사에서 자신과 자신의 이익만을 돌보고 챙기려는 것은 자신만을 향한 부유함이다. 부유함이란 돈뿐만이 아니다. 돈을 포획 가능케 하는 모든 것, 편하고 안락함, 호화로운 삶, 사람들에게 부러움을 사는 것, 권력, 영향력, 명성 등등과 더불어 지적 부유함도 포함된다. 이기적인 목적, 세상적인 결과를 위해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을 추구하고 획득하는 자 역시 자신만을 위해 재물을 축적한다. 이와 같은 부자가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는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쉬울 것이다.”

악의 요소들

자연적 재물이든 영적 재물이든 간에 세상적으로 사랑하는 데에는 두 가지 곤란한 요소가 들어 있다. 첫째는 세상을 지나치게 사랑하는 것, 둘째는 주님의 섭리를 불신하는 것이다. 이렇게 된 사람들은 자기 영혼을 통째로 물질이 되게 해 버린 경우도 있어 과연 그들이 감각적인 자연계 말고는 어느 곳에서 자기 고향이라고 느낄 수가 있을까 의아할 정도이다. 이런 사람을 두고, “하느님께서 자기를 강건하게 만들지 않았다는 사람, 오히려 자기 재물이 풍부해지는 데에 신뢰를 둔 사람, 자신 스스로 강해졌다는 사람”일 것이다. “어리석은 자의 번영은 그를 파괴시킨다.” “주여, 이 세상에 운명을 건 세상 속 사람들로부터 제 영혼을 건져 주시옵소서…”

실수 속의 위험

위와 같은 삶의 방향에서 인간은 경솔함 앞에 감추어 놓인 덫(실수)에 걸려들는지 모른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의 경우, “나는 돈을 위해 일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나 자신 때문이 아니라 내 자식을 위해서야… 나는 그들이 독립해서 남보라는 듯이 살기를 원해…” 라고 말끝을 맺기도 한다. 얼른 들으면 이타적인 듯 들릴는지 몰라도, 그가 이 세상에서 자기 자식만을 위해 일한다는 것에는 위험한 요소가 숨겨져 있다. 만일 그가 자기 애정이나 생각, 그리고 노력을 가지고 자기 자식들의 금전적 문제를 해결하여 독립되도록 만들고자 한다면, 그는 자녀들로 영적 문제에 흥미 있게 하거나, 영적 문제에 수반되어 그들을 훈련시키는 것 등에는 자칫하면 어떤 열심도 내지 않게 되고 만다. 인간은 자기가 가장 좋은 것이라고 평가하는 것을 위해 일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를 뒤집어 말한다면, 자기가 열성을 내어 일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가장 선한 것이라고 은근히 평가하려는 경향이 짙다. 이런고로 해서, 예를 든 위의 사람은 자기 어린이를 이 세상에서의 재물로 처지게 하고 영계를 위해, 하느님을 향해서는 가난하게 방치하는 결과를 빚는다.

쓸모 있는 재산

정직하게 재산을 모아 영적인 선용과, 자연적 선용을 위해 사용하고자 하는 것은 매우 유익할 것이다. 마태복음 6장 19-21절에서 이렇게 우리를 가르치신다. “재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아라. 땅에서는 좀먹거나 녹이 슬어 못쓰게 되며 도둑이 뚫고 들어와 훔쳐 간다. 그러므로 재물을 하늘에 쌓아 두어라. 거기서는 좀먹거나 녹슬어 못쓰게 되는 일도 없고 도둑이 뚫고 들어 와 훔쳐 가지도 못한다. 너희의 재물이 있는 곳에 너희의 마음도 있다.” 자아 사랑에 속한 재물은 우리 마음과 삶의 지상적 부분인 자연적 마음에 쌓여지는 바, 이 마음은 악과 거짓, 그리고 죄들을 먹여 살린다. 그러나 거듭나는 삶에 쌓아 두는 재물은 우리 마음과 삶의 천국적 부분에 쌓여 우리 영은 파멸적인 악과 거짓의 영향을 벗어나 영원한 우리의 소유가 된다.

하느님께 부함

하느님 편에 서서 부유해지기 위해서는 우리가 지닌 지식의 재물이 우리로 하느님께 인도해 주게 만들어 가야 할 것이다. 따라서 개혁과 거듭남을 위해 정신적 재물을 사용해야 할 것이다. 그 이유는 모든 천국적인 결과와 목적은 주님의 목적과 일치하기 때문이다. 천국적 재물은 사랑과 지혜, 그리고 거룩함이라는 특성에 속한 재물이다. 이 특성에 속한 재물을 가진 사람은 주님의 축복 역시 가지게 된다. 그 이유가 신성한 축복은 위의 특성을 경유하여 내향적으로 우리에게 오기 때문이다. 주님의 축복은 외적인 선물 같은 것으로만 오는게 아니다. 자기 인격 속에 사랑과 지혜, 거룩함이라는 특성이 주님의 축복에 따른 영적 품질과 일치하는 만큼에서 하느님의 축복을 사용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춘다. 천국의 원리를 자기 인격 속에 가진 사람은 천국 안에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 “신성한 천국과 천국적 지혜에 속한 사항들을 사랑하는 이들 위에 천국의 빛이 비추여서 그들은 계발된다” (천국과 지옥 265항).
영적 삶을 얻기 위해 인간은 자기의 이기적 삶을 떨구면서 모든 자연적인 것들 속에 내재된 삶이 영적인 것임을 알고, 감각적인 것들에 더욱 덜 의존해 가는 법을 배워 가야 할 것이다. 이를 비유 뒤에 이어지는 문단에서 가르치고 있다.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하느님께서 의롭게 여기시는 것을 구하여라.” 그러면 이 모든 것(자연적인 것)도 그의 필요에 따라 더하여 주실 것이다.

선용(use)을 사랑함

모든 사람은 선용을 어떻게 사랑하느냐에 따라 영적 삶을 가진다. 따라서 주님의 이름 아래 악을 죄로 알고 금하고 선을 행함으로 그 사람 안에서 선용의 영적 사랑은 형성되어 진다. 다시 말해 사람이 선용을 실천하는 것이란 영적 원리로부터 선을 행할 때 있게 된다. 우선 악을 금해서 자기 마음이 주님께 열려지게 하면, 주님이 들어가시고, 주님께서 그 사람으로 선을 행하게 배려하신다. 영적 목적에 의거 선이 행해질 때 영적 선용이 실천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연적 마음뿐인 사람의 경우, 자기의 모든 삶은 외적인 것들을 감각적으로 즐기는데 존재한다고 상상하는 반면, 영적 마음을 지닌 사람의 경우, 순수한 인간 삶은 그가 감각적 마음의 상태를 벗어나 자기 영혼을 열고 신성한 생명의 흐름을 유입함으로 내면의 행복으로 가득 차게 하는 것임을 경험에 의해 알고 있다. 하느님의 평화는 단지 자연적 마음뿐인 사람의 모든 이해성에서는 빠져나간다.

순수한 자연적 선

자연적 삶 속의 좋은 것들이 각기 제 위치를 벗어나지 않고 영적 삶의 종으로서 활동되고 있다면 선한 것이다. 불이 지펴질 때, 그것들은 “착한 종이면서도 나쁜 주인”도 될 수 있는 것과 같다. 자연적 삶이 마치 진짜 삶인 듯하여 그것 때문에 초조해 하고 걱정하게 될 때 우리는 어리석어진다. 거듭나는 사람에게 실제 필요한 외적인 것들은 거의 없다.
그러나 영혼을 위해 이 세상을 이용하면 우리는 양쪽 세계에 대해 최선의 것을 만들게 된다. 그러면 지상은 주님의 발판이 되고, 그 위에 우리는 서서 그분의 옥좌를 향해 위쪽으로 연결을 이룬다. “의로운 자가 가진 것이 제아무리 작아도 사악한 자의 풍성한 재물보다 더 낫다.” “멸해지는 양식을 위해 일하지 말고, 영원히 있게 하는 양식을 위해 일하라.”

26
허리에 띠를 띠고 불을 켜 놓고 기다려라
-준비된 상태 –

성서 본문: 누가복음 12장 35-48절

35. “너희는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 놓고 준비하고 있어라. 36. 마치 혼인잔치에서 돌아 오는 주인이 문을 두드리면 곧 열어 주려고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처럼 되어라. 37. 주인이 돌아 왔을 때 깨어 있다가 주인을 맞이하는 종들은 행복하다 그 주인은 띠를 띠고 그들을 식탁에 앉히고 곁에 와서 시중을 들어 줄 것이다. 38. 주인이 밤중에 오든 새벽녘에 오든 준비하고 있다가 주인을 맞이하는 종들은 얼마나 행복하겠느냐? 39. 생각해 보아라. 도둑이 언제 올지 집주인이 알고 있었다면 자기 집을 뚫고 들어오지 못하게 하였을 것이다. 40. 사람의 아들도 너희가 생각하지 않은 때에 올 것이니 항상 준비하고 있어라.”
41. 이 말씀을 듣고 베드로가 “주님, 지금 이 비유는 저희에게만 말씀하신 것입니까? 저 사람들도 모두 들으라고 하신 것입니까?” 하고 묻자 주께서 이렇게 대답하셨다. “어떤 주인이 한 관리인에게 다른 종들을 다스리며 제때에 양식을 공급할 책임을 맡기고 떠났다면 어떻게 하는 사람이 과연 충성스럽고 슬기로운 관리인이겠느냐? 주인이 돌아 올 때 자기 책임을 다하고 있다가 주인을 맞이하는 종이 아니겠느냐? 그 종은 행복하다. 44. 틀림없이 주인은 그에게 모든 재산을 맡길 것이다. 45. 그러나 만일 그 종이 속으로 주인이 더디 오려니 하고 제가 맡은 남녀 종들을 때려 가며 먹고 마시고 술에 취하여 세월을 보낸다면 46. 생각지도 않은 날 짐작도 못한 시간에 주인이 돌아 와서 그 종을 동강내고 불충한 자들이 벌받는 곳으로 처넣을 것이다. 47. 자기 주인의 뜻을 알고도 아무런 준비를 하지 않았거나 주인의 뜻대로 하지 않은 종은 매를 많이 맞을 것이다. 48. 그러나 주인의 뜻을 몰랐다면 매맞을 만한 짓을 하였어도 덜맞을 것이다. 많이 받는 사람은 많은 것을 돌려 주어야 하며 많이 맡은 사람은 더 많은 것을 내어 놓아야 한다.”

요점

비유의 힘은 인간으로 주님이 주시고자 하는 것을 받을 준비를 계속 유지하도록, 그렇게 하기 위해 악과 거짓 그리고 죄악에 빠져 받을 수 없는 상태를 피하도록 경고해 주고 있다.

허리에 띠를 띰

동방에서 남자들은 발까지 내려오는 긴 겉옷을 걸쳤었다. 그래서 작업을 한다던가, 여행을 위해서 그들은 띠를 가지고 이 두루마기를 허리에서 죔으로서 긴 옷을 추켜올려 발의 움직임을 좀 더 활발하게 했었다. 이것이 본문에서 “허리에 띠를 띠는” 모습이다. 이에 더해 기억해 보아야 할 구절은, 출애굽기 12장 11절일 것이다. “그것을 먹을 때는 허리에 띠를 띠고 발에는 신을 신고 손에는 지팡이를 잡고 서둘러 먹어야 한다.” 이는 마치 여행 채비를 다한 상태, 또는 작업에 막 들어가려는 준비 태세이다. 이 구절의 요점은 해야만 할 것에 대해 준비 태세를 갖추라는 말이다.
그러나 영적으로 볼 때 허리는 애정을 표현한다. 그래서 허리에 띠를 띠어 옷을 추켜올린다는 것은 진리를 낮은 수준, 즉 자연적 측면에서 들어 올려 내향적 애정으로부터 진리 안에 있어야 할 선을 가늠하는 것을 표현해 준다. 그러므로 허리에 띠를 띤다는 것은 선을 사랑하는 상태에 있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불을 켜 놓음

우리가 등불을 켜 놓는다는 것은 진리 안에 있는 믿음의 상태, 또는 정신적으로 계발된 상태, 즉 총명한 상태를 말한다. 빈 그릇 상태로서의 등은 교리를 표현한다. 이 교리라는 등(그릇)이 사랑이라는 기름으로 채워질 때 마음을 비춰 준다 (이에 대한 설명은 “열 처녀의 비유”를 더 참조할 것). 등불이 켜 있다는 말은 교리를 사용하는 가운데 있거나, 최소한 사용할 준비의 상태에 다가 서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교리 속에 든 진리를 잘 알고, 그 안 것을 일상 생활 속에서 사용하며, 더욱이 느닷없이 발생할 삶의 어떤 상황을 위해서도 준비가 된 상태를 말한다.
이해성 속에 든 진리가 의지 또는 심정 속에 있는 사랑과 결합될 때, 그 둘은 밝게 빛나면서 우리의 총명이 계속 유지되게 해준다. 이러므로서 우리 마음은 삶을 천국 원리의 영향 아래 있게 해준다. 다시 말해서 거룩한 불인 천국적 사랑이 정신 속의 제단 위에서 항구적으로 불타고 있을 것이다. 그 결과 우리는 매일 생활 속에서 주님을 인식하며 살게 된다. “당신의 말씀은 내 발에 등불이요, 나의 길에 빛이옵니다”라는 고백이 삶 속에서 이어진다는 말이다.

집의 주인과 종

본문에서 기다리는 사람은 집안의 종들이다. 영적으로 볼 때, 집주인, 또는 어떤 장소의 주인은 통치하는 사랑(ruling love)에 해당된다. 따라서 종들은 진리에 해당되는 바, 진리들이 그 사랑을 섬긴다. 우리의 애정(affection)들은 각자의 목적을 섬기도록 자기가 알고 있는 진리들을 부린다. 그러나 최고로 높은 의미로 볼 때, 집주인은 주님이시다. 그 이유가 그분은 거듭 나아가는 모든 인간 마음을 다스리시는 진정한 통치자이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거듭나는 사람에게 있는 통치하는 사랑은 주님으로부터 흘러 그 사람에게 들어간 사랑인 것이다. 따라서 자기 주인을 기다리는 종들이란 주님을 섬길 준비가 되어 있는 마음 안에 거주하는 진리들이다.
혼인은 신성한 선 또는 사랑이 신성한 진리 또는 지혜와의 하나됨이다. 이 하나됨은 주님 안에서 언제나 존재하고 있다. 그리고 인간이 거듭나기 시작할 때, 그 인간 안에서도 형성되기 시작한다. 그리하여 그 사람의 거듭남이 진보되는 만큼에서 그 하나됨도 진보되어 간다. 주인이 혼인 잔치에서 돌아오는 때란 우리 영이 결혼하는 상태 속에 들어가는 때이다. 이 때에 그 사람 속의 사랑과 지혜는 주님께 헌신함 속에서 하나를 이룬다.
주님의 오심은 인간의 의지에 신성한 사랑이 접근하는 것을 말한다. 그분이 문을 두드린다는 것은 인간의 이해성에 신성한 진리가 발표되는 것이다. 이 오심과 두드림이 인간과 더블은 주님의 현존을 구성해 주는 것이다. “들어라. 내가 문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 집에 들어가서 그와 함께 먹고, 그도 나와 함께 먹게 될 것이다” (계시록 3:20).

문을 열다

주님에게 문을 여는 것이란 그분께로 의지 또는 심정이 돌아서는 것을 말한다. 이를 실제적 측면에서 보면, 길가에 버틴 장애물, 주님이 못 들어가게 배척하는 것들을 제거한다는 말이다. 이 장애물이란 우리 자신 속의 악과 거짓, 삶에서 영글고 있는 죄악상들이다. 이런 것들이 회개하여 제거될 때, 우리는 즉각 그분께 문을 열어 드리고, 그분은 사랑과 지혜로 들어오신다. 그분은 들어오실 입구를 꾸준히 찾고 계신다. 그리고 영적 생명으로 인간을 축복해 주시려 하시고 있다.

주님을 기다림

주님에게 문이 열려 있도록 하는 것이 인간의 일이다. 일상 생활 속에서 그분의 뜻을 행하는 것이 주님을 기다리는 것이다. 그 이유는 마음이 이런 상태이어야 주님은 오실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그분을 맞이하려고 언제나 준비하는 상태이다. 주님을 기다린다는 것은 자연계에 기현상이 있게 되는 것을 기대하는 정신적 상태, 또는 갑자기 정신이 변화하는 상태 같은 것을 기다린다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계명을 준수해 가는 상태, 선용을 사랑해서 매일 생활에 응용해 가는 상태에서의 기다림을 말한다. 이는 해야 할 뭔가를 기다린다는 말이 아니라 해야만 하는 것을 지금 하고 있는 것, 그리하여 더 큰 생명을 받을 준비가 되어 있도록 자신을 지키고 있는 것을 말한다. 진리의 빛, 사랑의 따뜻함은 일하고 있는 마음, 적극적 자세 속에 있는 마음 안으로 흘러든다. 자신이 지닌 생명보다 더 큰 생명을 기다리는 최선의 방법은 우리가 이미 지닌 영적 생명을 적극적으로 활용해 가는데 있는 것이다.

지켜봄 (watching, 깨어 있음)

지켜본다는 것을 실제적 측면에서 보면 우리 인격이 형성되는 것을 자신이 지켜본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악에 잘 쏠리는 자신의 경향성을 내려 누르고 선을 행하면서 주님이 접근하시는 것을 눈치채는 상태에 자신을 간직한다는 말이다. 그 이유는 주님의 오심은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모든 진리 속에서, 예상하고 있는 모든 선함 속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이 때 주님은 우리 마음에 들어 올 수 있는 입구를 발견하실 수 있고, 들어오셔서 더 많고 더 높은 영적 생명으로 채워 주신다. 이것이 그분께서 내리시는 복이다.
우리가 그분을 섬기는 동안 그분은 우리를 섬겨 주신다. 우리가 그분께 문을 열고 있는 동안 받을 준비가 된 우리 속의 것들에 흘러드신다. 그리하여 “그 주인은 허리에 띠를 띠고 그들을 식탁에 앉히고 곁에 와서 시중을 들것이다.” 이와 같이 마음속에 있는 종 또는 진리가 선 또는 사랑과 하나를 이룰 때 거기에 복이 있다.
우리가 지켜보아 주님을 발견하는 때란, 우리가 영적으로 깨어 있는 때, 즉 감각적 삶에 속한 것들로 인해 푹 잠든 상태가 아니고 영적 원리를 총명하게 응용해 가는 때이다. “내가 이 말을 한 것은 내 기쁨을 같이 나누어 너희 마음에 기쁨이 넘치게 하려는 것이다” (요한복음 15:11).

주님이 인간을 섬김

주님이 스스로 띠를 띠셨다. 그 이유는 그분의 신성한 사랑은 그 자체 사람을 섬길 준비가 언제나 되어 있기 때문이다. 선한 애정이라는 영적 양식을 받도록 준비함으로 그분은 우리로 식탁에 둘러앉게 하신다. 우리 마음에 그분의 진리를 이식해 주시고, 영적 총명을 주심으로 그분은 우리를 섬긴다.

지킴 등등에 관해서

밤을 지키는 상태의 첫 단계는 우리가 진리로 훈육 받는 상태이다. 둘째 단계의 지킴은 우리의 애정들이 우리가 알고 있는 진리와 연합하는 상태이다. 셋째 단계의 지킴은 우리의 선한 애정과 진정한 생각들이 선한 행동 속에서 일을 수행하는 상태이다. 만일 주님께서 둘째, 셋째 단계 중 하나를 통해 우리에게 오신다면, 우리는 그분을 영접할 준비가 되어 있는 상태이다.
“도둑이 언제 올지 집주인이 알고 있었다면 자기 집을 뚫고 들어오지 못하게 하였을 것이다.” 여기서의 집주인이란 통치하는 사랑이다. 만일 통치하는 사랑이 선하다면, 악령의 미묘한 수작이나, 악령이 슬쩍 자신 속에 심으려 드는 거짓된 암시들, 자신의 밑바닥을 파고 들어오려는 짓 등등 모두를 두 눈 크게 뜨고 지킬 수 있을 것이다. 모든 거짓은 우리 속의 선하고 참된 것을 훔쳐 가려는 도둑인 것이다.
도둑처럼 악령은 합리적이고 영적으로 밝은 우리의 상태에서 오는게 아니라, 우리의 마음이 자연적 마음뿐인 상태, 즉 캄캄한 정신 기간동안에 잠입한다. 그리고 그것들은 우리 속의 약해진 상태들을 공격하고, 공격하되 우리 모르게 공격한다. 즉 좀 먹어 들어가는 수법을 쓴다. 이런 수법에서 자신을 지키는 유일한 방법은 자기 마음을 거듭나는 삶의 영적 원리 속에 꾸준히 있게 하는 도리밖에 없다.

사람들이 밤중에 잠자기 위해 물러가 있듯 우리는 일상 생활이라는 외적 용도에로 내려가야만 한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일상 업무 속에서까지 영적 원리들을 응용하고 있다고 하면, 우리는 영적 도둑에 대비해서 집을 지키는 것이 된다.
“가라지”의 비유에서, 원수가 가라지를 뿌린 시간은 밤중이었다. 그 반면 “은밀히 자라나는 씨”의 비유에서, 좋은 씨는 밤, 낮으로 성장했다. 그러므로 사람의 아들의 오심을 위해 주님의 계명 속에 든 진리를 마음속에 늘 간직하면서 거짓 교리와 감각적 현혹이라는 은밀한 영향들에 눈을 치켜 뜨고 지켜봄을 꾸준히 함으로서 준비에 만전을 기해야 한다.
그 이유는 준비 안된 상태, 즉 자신의 도덕적인 상태나 영적 상태의 어두움, 정신적 어두움이 몇 시쯤이나 되는지 말할 수 없다면, 우리는 악과 거짓에 정복당하고 말기 때문이다. 주님의 거룩한 말씀에서 밝혀 주시는 그분의 선함과 진리의 안내에 자신을 의지하지 않는 이상 우리의 정신 조건에는 어떤 안전도 보장 안된다.

관리인, 기타 등등

우리 속의 품위들 중에서 믿음을 표현하는 베드로, 그의 질문에 대한 대답에서 주님께서는 비유 속에 있는 진리들은 모든 이의 정신 조건에 응용되는 것임을 서술해 놓으셨다. 모든 재산을 관리하는 슬기로운 관리인이란 거듭나는 자연적 마음이다. 이 마음이야말로 자연적 의무나 일들을 잘 관리한다. 그 이유는 주인의 뜻, 즉 영의 뜻을 실행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연적 마음이 악과 거짓에 의해 붕괴된다면, 자연적 마음을 섬기는 진리인 남자 종과 마음속의 자연적 애정인 여자 종들 역시 남용 당하고야 만다. 그러면 신성한 진리는 그 마음들을 심판에 서게 하여 그 마음 바탕에 걸맞는 지옥에 빠지는 것을 허용하게 된다. 따라서 빛에 반대되는 죄들은 그것에 비례해서 지옥에로 가라앉고, 그 마음이 그 속의 지식을 덜 전복시킨 만큼에서 그 마음이 자초한 재난도 그만큼 덜해지는 것이다.
고로 자신 위에 작용하려고 애쓰는 영향력에 대해 잘 지켜보도록, 그리하여 우리가 선한 것만을 사랑하는지, 진리를 흠모하고 있는지, 모든 거짓들을 축출하며 죄악된 행위를 거절하고 있는지 자신을 잘 지켜야 한다고 비유는 경고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자연적 마음이 주님의 인도를 받고 있다면, 마치 거듭나는 영혼 속의 슬기로운 관리인같이 제 업무를 잘 해낼 수 있다.
“허리에 띠를 띠라”라는 말은 우리의 애정을 주님에게, 또는 영적 목적과 결과를 위해 들어올리고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등불을 켜 놓으라”는 말은 우리 생각을 교회 속의 교리에서 가르쳐지는 주님의 말씀 속의 진리들로 계속 점검해야 한다는 말이다.

체계로서의 진리들

진리를 총명하게 생각한다는 측면에서 가장 중요한 요점의 하나는, 우리가 진리를 완성된 체계로 마음에 간직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이래야 우리는 계획과 계획이 연결을 이루는 가운데 삶의 전체와 세부 사항에 이르는 모든 측면에서 진리를 꾸준히 응용해 갈 수 있다.

예증

인체를 이해하고자 하는 사람은 처음부터 손가락 정도의 작은 부분부터 이해하려는 데서 시작하지 않고, 전체로서의 인체에 대한 일반적 생각을 얻고 난 뒤, 각 부분과 그 각각의 연결을 개별적으로 공부하면서 전체 체계로서의 인체를 공부해 간다. 게다가 그가 각 부분이 전체와 연결되는 상황까지 공부했다 해도, 인간 영혼을 납득할 때까지는 인간 전체를 이해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가 인간의 영적인 구성과 인체를 이해할 때, 그는 인간이 무엇인지, 다양한 정신적, 육체적 부분 사이의 연결과 그 관계를 납득하게 된다.
이와 같은 상황은 진리를 공부하는데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다양한 관계와 연결들을 가진 서로 밀접한 체계로서 진리를 이해하는데 목표를 두어야만 한다. 손가락이 몸 전체와의 연결에서 떼어져 독립된 상태로 생존할 수 없듯, 개별적인 진리 하나가 전체와의 연결 관계를 끊은 채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어떤 사실 하나가 연결된 것 없이 독단적 사상으로 총명하게 파악되지 못하고 어떤 원리가 체현되어진 것으로 생각해야만 파악된다. 그래서 모든 원리는 단지 눈에 보이는 자연적 형체뿐만 아니라 그 형체의 상응물인 영적 원인 그리고 그 원인과 주님과의 관계까지 파악해 가야 환히 알게 된다.

진리의 빛

우리의 등불이 계속 켜져 있기 위해서 우리는 교리를 기억 속에 담되 교리 속의 진리가 삶에 적용되는 살아 있는 진리로서 알고 이해해야 한다. 우리가 기억한 것은 잊을 수도 있겠지만, 경험에 의해 파악된 진리는 절대로 잊지 못한다. 그 이유는 경험 속에 내재한 원리를 보았기 때문이다. 모든 각각의 진리는 그 나름대로의 수준에서, 삶 나름대로의 평면에서, 그 진리를 받으려 준비된 마음속에서 모두 나름대로의 증거를 확보하고 있다.
영적 빛인 영적 진리, 역시 그 진리 나름대로의 수준에서만 총명할 수 있다. 그래서 우리 마음이 영적 빛 속에 있지 않다면, 영적 진리는 그 사람의 생각 수준에서 나타나는 양상에서만 진리로 보여지고 만다. 더 높고, 더 내면에 속하는 수준에서 진리를 본다면, 더 많은 납득력이 특정 진리에까지 확장되어 더 밝게 우리 등불은 불을 밝힌다.
따라서 삶 속에서 일하고 있는 원리는 우리에게 더 뚜렷한 증거물이다. 고로, 우리 등불이 켜 있게 하기 위해, 우리는 교리를 붙잡되, 알고 있는 수준을 넘어 그것을 실생활에 사용해서 우리 생각의 일부가 되게 하여 행동 속에서 구체화되어 있어야 한다. 진리가 구체화된 상태야말로 우리가 그 진리를 심정으로 사랑하고 있다는 증거이다. 이러면 우리는 어떤 진리를 확증하고 있어 그것을 진리로서, 비록 그 진리가 가장 외적 상태일지언정 진리임을 간파할 수 있다. 그 이유가 우리는 어떤 진리가 생산한 선함이라는 실제 속에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예증

금빛 찬란한 선명한 아침에 창문 너머 멀리 있는 산들을 쳐다본다면 그 산이 상당히 먼 위치임에도 우리는 그 산의 정상을 볼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거기에 산이 있다는 확실성을 가지게 된다. 그러나 구름이 많고 안개가 잔뜩 깔린 날, 다시 창문 너머 그 산을 살피려 한다면 우리 시야에는 그 산이 보이지 않는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 산을 보고 있는 듯, 거기에 산이 있다고 말한다.
그런데 마음에 구름이 잔뜩 깔린 상태에 있을 경우, 왜 우리는 과거 명료한 마음 상태에서 이미 보고 알고 있는 영적 원리의 존재를 의심하고 부정하게 될까? 정신적인 밤의 상태에서 왜 우리는 허리에 띠를 띠고 불을 켜 놓지 못할까? 가장 높은 상태에서 주님이 우리에게 밝혀 주신 그분의 선과 진리가 왜 합리적 이해 속에서 계속 간직되지 못할까?
산 위에 오른 모세와 같이, 인간 삶의 성전에 관한 천국의 모형을 본 뒤, 자연적 삶의 낮은 평면에 내려와 산 위에서 본 바대로의 모형에 따라 왜 성전을 짓지 못할까? 깨끗한 시야가 허락된 아침이라면 우리는 자기 집에서 먼 산까지 갈 수 있는 방향을 짐작해둘 수 있다. 그래서 구름낀 날, 즉 고상한 형체의 진리가 우리의 시야에서 애매 모호한 것 같다 해도 그 산까지의 여행에 확신을 가질 수 있다.
그런데, 왜, 우리의 정신적 삶에 구름이 끼었다 해서 거룩한 말씀의 빛으로 밝혀진 주님의 선하고 진정한 원리가 확실히 존재한다고 말하지 못할까? 정신적인 날이 캄캄해졌다고 해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선을 향한 여정에 왜 확신 있게 들어서지 못할까? 우리는 우리가 가야 할 여행길의 방향을 기억할 것이다. 주님께서 이르시기를,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그래서 그분의 계명은 우리의 여행 방향을 뚜렷이 제시해 준다.
우리는 우리 소유의 집 구조를 알고 있다. 그래서 집안이 캄캄해진다 해도 자기가 갈 통로를 찾을 수 있다. 우리가 주님의 집에 살고 있다면, 우리는 비록 밤이라 해도 집안의 통로를 찾아야 할 것이다. 우리는 영의 고향인 사랑하는 원리들이 가야 할 길을 언제나 알고 있어야 한다. 그러면 우리는 삶의 법칙으로 진리를 이해해서, 그 법칙에 의해 영적 삶을 꾸리게 된다.

삶의 법칙

인간은 동물을 사육하거나 작물을 재배하는데 응용될 원리를 연구하느라 많은 시간과 노력을 경주한다. 그래서 사육자나 농부들은 동식물의 삶에 관한 법칙의 어떤 것을 알아야 성공적으로 경영이 가능해짐을 알고 있다. 그렇다면, 영적 존재, 영원한 존재로서 성장하는 수단인 영적 삶의 법칙에 관해서는 얼마나 더 많이 알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고 있을까? 유전의 법칙이 소떼나 작물의 생산을 증가시키는데 중요하다면, 영적 삶의 법칙은 인간 영의 존재를 발달시키므로 더 중요할 것은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래서 영적 삶을 추구하는 이들은 허리에 띠를 띠고 불을 켜 놓아야 한다. 다시 말해 자신에게 밝혀지는 진리로 오시는 주님을 지켜보는 가운데 일하고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이러기 위해 우리는 진리, 그리고 그 진리 속에 있는 선을 사랑해야만 할 것이다. 그리고 썩지 않은 삶 속에서 진리가 잘 유지되고 있는가를 늘 지켜보아서 자신의 자연적이고 감각적인 입맛이나 고집으로 진리가 비비꼬이거나 뒤집어지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다.

뒤집어진 진리들

많은 이들이 진리의 관계나 연결로부터 추론해서 진리를 수중에 넣을는지 모른다. 그리고는 그 진리를 천국적 조건과는 아주 딴판으로 나타나게 비틀어 버린다. 전문적인 예술가에 의해 모자이크로된 주님의 초상화가 있다고 가정해 보자. 이 초상화에서는 각 조그만 돌들이 있어야 할 제 위치에 놓여졌기 때문에 아름다운 작품이 되고 있다. 그런데 누군가가 이 아름다운 돌의 배열을 무시하고 다시 배열한다면, 비록 돌의 종류나 색깔 모두가 같은 것임에도 그 초상화는 아주 다른 얼굴을 표현하게 된다.
이와 같이 위의 예술가에게 근본이 된 돌과 돌의 관계나 연결을 깨트린다면, 초상화의 원래 형상은 사라지고, 대신 전혀 다른 인물이 표현되고 만다. 진리에 대한 양상도 위의 예나 다름없다. 가장 극도로 중요한 것은 주님이 우리에게 밝혀 주신대로의 진리의 체계를 본래 모습대로 보존하는 것이다. 그러면 그 진리들, 그 진리를 삶에 응용하는 사람들 속에 신성한 형상은 보존되고, 또한 나타나신다. 이 때 주님은 우리 속에서 그분의 형상과 모습이 자라도록 인도해 주신다. 체계적 진리에 관한 지식을 적절히 갖출 경우, 그 체계는 거짓의 체계로부터 우리를 보호해 주게 된다.

예증

건강에 관련해 인체를 공부하는 사람들은 인체의 상황들을 알고 있으면서 무질서된 육체에 있는 질병을 꾸준히 간파해 간다. 이와 같이 건강한 인간 마음을 이해하는 사람은 그 마음의 체계를 납득하고 있는 바 악과 거짓의 현존을 간파해서 거짓 체계의 모두를 거절할 수 있다. 이는 “가라지를 뽑아서 단으로 묶어 불에 태워 버린다”고 하신 마태복음 13장 30절의 구절에 있는 의미이기도 하다. 단을 묶는다는 것은 내 속의 거짓을 분류해 낸다는 것, 불에 태운다는 것은 거짓 체계를 거절해 버리는 것을 의미한다.
화냄이라는 악을 예를 들어 생각해 보자. 그것이 나쁜 것인 줄 모르는 이는 한 사람도 없을 것이라 본다. 화냄이 자아 사랑으로 부추켜지게 될 때 격정으로 비행해서 죄로 이어지는 고속 도로를 건설하고 만다. 이런 간단한 원리의 체계를 우리의 정신적 눈앞에 계속 간직할 수 없을까? 이를 계속 상기하고 있다면, 우리는 분노에 관한 우리의 경향성에 있는 지옥의 품질을 간파할 수 있어, 그런 경우가 드러날 때마다 즉각 그것을 던질 수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행동에 옮겨지기 전 마음속에서 마무리 될 수 있을 것이다.

준비함

우리가 허리에 띠를 띠고, 불을 켜 놓은 채 있노라면, 주님이 계획하시는 것, 우리에게 허용하시는 것이 무엇이 되었든 간에 그것에 대비하고 있는 셈이다. 따라서 예상했던 것, 예상 밖의 것까지에도 준비된 태세에 있는 것이다. 우리는 주님이 우리를 위해 무엇을 설비하시는가에 대해 그것이 우리에게 오기 전에는 사실상 알지 못한다. 그러나 우리는 자기가 무엇을 하든 최선을 다해야 한다. 그런데도 자신이 바랜 것을 했더니 오히려 나쁘게 처리되어 바래지 않았던 것만큼도 못할 수 있다. 마치 기나 긴 항해를 하는 선원에게 다정하게 느껴지는 해안이 오히려 난파된 배를 기다리는 격이 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즉 선원이 배를 해안에 정박시키는 방법 여하에 따라 해안은 친구 수준에서 파괴자의 수준으로 달라질 수 있는 것이다. 자격도 없는 어떤 이가 아주 중요한 직책에서 일을 하고 있을 수 있다. 예를 들면 기차의 선로를 바뀌게 하는 사람의 경우, 그의 팔이 어떻게 움직여 기차를 통과시키느냐에 따라 그 기차는 올바른 선로로 무사히 달리거나, 충돌이라는 파괴쪽으로 갈라지거나 하는 경우이다. 세상사의 수많은 것이 각각의 그 일을 위해 준비해 두는 상태를 계속 유지하는 각 사람의 마음에 달려 있는 경우는 아주 흔하다.
위의 경우는 우리의 아주 사소한 생활 속에서도 적절히 적용되고 있다. 자신에게 언제 비상사태가 있을지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나 그런 사건이 터질 때, 그 일을 슬기롭고 과감하게 해치울 준비가 된 사람은 사건을 슬기롭게 만나는 사람일 것이다.
준비가 어떤 상태에 있느냐는 자기의 할 일에 관해 총명한 지식을 어느 정도 확보하고 있느냐에도 달려 있다. 영적 측면의 준비도 진리를 하나의 체계로 다각적인 연결로서 납득하여 지식을 지니고 있는데 의존된다. “선한 자는 비보를 접해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의 심정은 주님을 신뢰하는 가운데에 고정되어 있다… 따라서 그는 신중하게 자기 업무를 처리한다.”

외적인 것과 내적인 것

인간 삶의 자연적 측면만을 주시하려 드는 외적인 사람은 자기 주위에 속하는 것들이 갑자기 바뀔 때 매우 당황하거나 심히 놀랜다. 그러나 영적 빛에 내면을 열고 있는 사람, 인간 삶을 그 삶의 내적 측면에서 관조하며 사는 사람은 장차 발생할는지 모를 어떤 것에도 이미 준비되어 있다.
외적 측면만을 중시하는 사람이든, 내적 측면을 중시하며 사는 사람이든, 누구나 할 것 없이 자기 바깥쪽에 속하는 일들이 있게 될 사실들을 미리 볼 수는 없다. 외적인데 마음을 두는 사람들은 자기의 주변에 있게 될 일, 흔히 말하는 자기 운세를 점쳐 보려 할는지도 모르겠지만, 내적인데 마음을 두는 사람은 미래를 내다보는 일 그 자체가 자신들의 자유 의지를 뒤흔들고, 혼란을 일으켜 결국 선택 자유를 잃게 된다는 것을 알므로, 자신의 미래 사실들을 아예 내다보고 싶어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그들이 아는 바는, 영적 원리는 확실하다는 것, 영적이든, 자연적 측면에서든 “각기 종류대로 결실을 갖는 것”임을, 따라서 행동에서 구체화될 것은 그 사람의 삶 속에 주어진 어떤 원리라는 것 등등이다. 그래서 다음과 같은 자비로운 약속은 주님께서 언제나 이루신다는 확실성을 가슴으로 꽉 쥐고 있다. “주님을 신뢰하며 선을 행하라. 그래야 너희가 그 땅에서 살 것이고, 너희를 먹여 주실 것이다. 주 안에서 스스로 기뻐해라. 그러면 너희 심정이 바래는 것을 주실 것이다.”

27
열매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
-종교는 삶 속에 있다 –

성서 본문: 누가복음 13장 6-9절

6. 예수께서 그들에게 다음과 같은 비유를 들어 말씀하셨다. “어떤 사람이 포도원에 무화과나무 한 그루를 심어 놓았다. 그 나무에 열매가 열렸나 하고 가 보았지만 열매가 하나도 없었다. 7. 그래서 포도원지기에게 ‘내가 이 무화과나무에서 열매를 따 볼까 하고 벌써 삼년째나 여기 왔으나 열매가 달린 것을 한번도 본 적이 없으니 아예 잘라 버려라. 쓸데 없이 땅만 썩일 필요가 있겠느냐?’ 하였다. 그러자 8. 포도원지기는 ‘주인님, 이 나무를 금년 한 해만 그냥 두십시오. 그동안 제가 그 둘레를 파고 거름을 주겠습니다. 9. 그렇게 하면 다음 철에 열매를 맺을지도 모릅니다. 만일 그 때 가서도 열매를 맺지 못하면 베어 버리십시오’ 하고 대답하였다.”

포도원

“어떤 사람”이란 인간 포도원의 소유자이신 주님이시다. 포도원은 교회이고, 그 안에 신성한 진리가 심어져 열매를 생산한다. “만군의 야훼의 포도밭은 이스라엘 가문이요, 주께서 사랑하시는 나무는 유다 백성이다” (이사야 5:7). 개인별로 볼 때, 포도원이란 각 인간의 이해성에 세워진 교회를 말한다.

나무들

나무란 마음 안에 심어진 원리를 표현하고 있다. 나뭇잎이란 기억 안의 지식들, 또는 알고 있는 것들을 말한다. 꽃은 감정(sentiment), 또는 생각 속의 사상들을 표현해 준다. 그리고 열매는 삶에서 성숙된 원리들, 인간 원리들의 열매, 일들이다. 여러 종류의 나무들이 성경에 언급되는데, 그중 특별한 나무는 올리브, 포도, 무화과나무일 것이다. 이 세 나무는 인간 삶의 세 가지 특별한 국면을 표현하는데, 새교회의 용어로 천적, 영적, 자연적 등차(수준)라고 불린다. 이들은 종류와 품질면에서 서로 다른 등차들이다.
올리브나무로 표현되는 천적인 상태란, 선을 사랑함 즉 신성한 선으로서 주님을 사랑함으로 통치되는 인간 상태이다. 이 사람은 선을 사랑하여 선으로부터 기쁘게 선을 행한다. 중간 등차인 영적 상태가 포도나무로 표현되고 있는데 이는 진리를 사랑함이 그의 애정을 조절한다. 이 사람은 사물 속에서 선보다는 진리를 본다. 하느님을 알되 신성한 진리로서 그분을 안다. 낮은 등차인 자연적 상태, 무화과나무로 표현되고, 그는 원리보다는 행동에 관심이 집중되어 있다. 따라서 그는 주님의 계명에 순종해야 한다는 의무적 차원에서 선을 행한다.

무화과나무

위에서 살핀바 같이 무화과나무는 가장 낮은 등차, 또는 인간 삶 중에서 가장 바깥쪽에 있는 것을 표현한다. 모든 인간은 출생을 수단으로 자연적 등차 안에 먼저 존재한다. 그 다음 영적이고 천적인 것은 거듭남의 “재 탄생” 속에서 발달되어 진다. 자연적 등차는 인간의 바깥쪽 삶과 그 삶에 연계되는 애정이나 생각과 관계를 갖는다. 인간 각자가 자연적 등차에만 관심을 두는 한 그는 계속 자연적 등차에만 머무르게 된다. 그러나 영적이거나 천적인 상태로 되어 가는 이들과 더불어 삶의 새로운 등차는 자연적 등차 속에서, 또는 그 위에 더 첨가되어 발달되어 진다. 모든 인간은 각자 속에 영적이거나 천적 인간으로 될 소질(germ)을 갖고 있어 이 씨가 각자의 일생 중에서 언제일지는 몰라도 열리어 자라게 되어 있다.
자연적 마음만 고집 하는 사람일 경우, 그가 거듭나고 있다 해도 내면의 등차는 열리지 않는다. 그의 거듭남은 자신을 주님의 계명에 순종하게 함으로 선하고 올바른 질서에 있는 자연적 삶에 가져다 놓아준다. 따라서 그의 자연적인 선함은 그 선함 속에 내면의 선함이라는 씨(germ)를 함유한다. 고로 그의 자연적인 선도 천국과 연결을 갖고 있으며 영적인 근원으로부터 존재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영적 근원이 그의 의식 세계까지 팽창된다면 거듭 나아지겠으나, 그의 마음은 영적 또는 천적 등차에 관한 뚜렷한 경험을 즐기지는 못한다.
오로지 자연적 인간의 수준에 있을 경우, 거듭난 자연적 인간까지에는 도달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주님의 계명을 지킴으로 천국에 마음 문이 열리는 수준만큼에서 자연적 인간도 “생명의 나라”에 들어 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주님의 계명을 지키지 않는다면, 그가 제 아무리 진리를 교리로서 붙잡고 있다 해도 소용이 없다. 주님의 가르침을 알고는 있되 순종하지 않는 자는 잎사귀밖에 없는 열매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일 뿐이다.

유대 교회

위의 무화과나무는 주님의 첫 오심에서 보여준 유대교회의 상황이었다. 유대교회는 외향적, 자연적 인격 속에 있었다. 그래서 그 교회는 교회라고 말하기보다는 교회의 표현물이었을 뿐이다. 다시 말해 진정한 영적 교회의 정신적 생명이 담긴 의식이나 행사만을 가진 껍데기 교회였다는 말이다.
그러나 유대교회가 비록 껍데기 수준이었을지라도 자연적 선을 사랑하여 연습하는 것은 가능할 수 있는 것이다. 그 교회들은 예언자를 통해 천국과의 연결도 있었고 더욱이 신성한 명령들을 가지고 있었다. 계속적으로 주님께서는 말씀의 글자적 수준에서 이스라엘 후손들에게 말하시고 있었다. 그런고로 유대인들은 나뭇잎으로 표현되는 진리에 관한 지식을 갖고 있었다. “나무의 잎은 만국 백성을 치료해 준다.” 이는 알고 있는 진리들을 실제 사용한다면 자기들의 악을 치료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러나 유대국가를 상징한 무화과나무는 잎만 무성했다. 주님이 유대교회에 오셨을 때, 그분은 그 나라에 내린 처방(dispensation)에 심판을 놓으셨다. 즉 그분이 이 나무에 가까이 가셨을 때, 주님의 백성에게 마땅히 있어야 할 정의가 없어 주님의 시장하심을 채우실 수 없음을 발견하셨던 것이다. 다시 말해 속이 텅빈 지식만 무성하고 실제의 선함이라는 열매는 하나도 없었다는 것을 발견하신 것이다. 잎만 무성한 지식들만 가지고는 어떤 영적인 사람다움도 건설되어질 수 없는 것이다.

…가 보았지만 (coming and seeking)

포도원 주인은 무화과나무에 열매가 열렸나 하고 “가 보았다.” 무화과나무에 “옴, come”이란 인간에게 선을 가져다주고, 인간 안에서 선을 발견하고자 하는 신성한 사랑의 접근, “구함, seek”은 신성한 지혜의 노력을 표현하는 말이다. 위 두 개의 동사 역시 그저 심심해서 되풀이 된 말도, 우연히 있어진 말이 아님을 우리는 눈치채어야 한다. 주님의 말씀은 주님과 우리가 교통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고, 말씀은 그분의 사랑과 지혜의 속성을 표현해 주고 있다. 이에 더해서 그분의 신성한 권능이 추가되어 질 때가 성경 구절에서 자주 등장하는데 그에 대한 한 예로서, “깨진 심정을 붙잡아 매고,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선포하며, 갇힌 자를 풀어 주도록 그분은 나를 보내셨다”라는 구절에도 있다. 신성한 속성은 주님 안에서는 하나로 되어 있지만 인간의 생각 속에서는 분리될 때가 많다. 주님에게 분노나 성내심은 존재 않는다. 하느님은 사랑이신데, 그분의 사랑은 그분의 지혜와 권능으로 드러내진다.

비유의 개인적 응용

역사적 측면에서 볼 때 이 비유는 유대인과 관계되지만, 개인적 측면에서 볼 때 비유는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 같은 상태의 삶과 관계가 있게 된다. 이런 사람이란 교리에 관한 지식을 풍족히 갖고 있으면서도 삶 속에서 선함이라는 열매를 맺지 못하는 사람이다. 아마 그는 명목만의 기독교인이요, 열심히 기도하고 경건하다고 자처할 뿐 계명의 준수와는 무관한 자이다. 그럼에도 주님께서는 이런 사람들에게 가능할 수 있는 어떤 기회를 본문 말미에서와 같이 부여하고 계신다.

포도원 지기

신성한 진리는 위와 같은 비생산적인 사람들은 이미 정죄되었다고 선포하고 있다. 즉, “그래서 포도원 지기에게 ‘내가 이 무화과나무에서 열매를 따 볼까 하고 벌써 삼 년째나 왔으나 열매가 달린 것을 한번도 본적이 없으니 아예 잘라 버려라. 쓸데없이 땅만 썩일 필요가 어디 있겠느냐?’” 이와 같이 신성한 진리는 악의 정죄를 선포하고 있다. 그러나 신성한 사랑은 언제나 모든 인간을 구하시려는 신성한 섭리를 펼치신다. 이 신성한 섭리가 포도원 지기이다.
“어떤 사람”인 포도원 주인과 “포도원 지기”라는 두 사람이 비유 속에 등장하여 대화하는듯 여겨지지만, 이는 인간이 신성한 진리와 신성한 섭리를 따로 따로 보게 되는 양상을 표현해 놓은 것이다. 사실 위의 둘은 주님 안에서 하나일 뿐이다. 섭리란 신성한 사랑이 신성한 지혜를 통해 권능으로 발휘되는 돌보심이다. 그러므로 인간이 악한 상태에 있을 경우, 그 악은 마땅히 정죄되어지게 되어 있음을 당사자가 알게 되지만, 동시에 신성한 섭리는 모든 인간을 구해 주시려 아주 말단에 이르기까지 역사 하시고 있다는 것도 가르쳐 준다.
그래서 포도원 지기가 주인에게, “주인님, 이 나무를 금년 한 해만 더 그냥 두십시오. 그 동안 제가 그 둘레를 파고 거름을 주겠습니다. 그렇게 하면 다음 철에 열매를 맺을 지도 모릅니다. 만일 그 때 가서도 열매를 맺지 못하면 베어 버리십시요”라고 대답하고 있는 것이다.

무화과나무

무화과나무는 자연적 선, 즉 삶의 바깥쪽에 있는 선을 표현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 선이 순수한 선, 즉 선한 동기로부터 행해질 경우, 이 선도 영적인 근원에서 비롯되는 선이 된다. 잘 성장하고 있는 무화과나무란 교회의 진리들로 가르침을 받은 인간의 자연적 마음(자연적 인간)을 표현하는 바, 그 나무의 잎은 지식들을, 그 나무의 열매는 삶에 있는 실제의 선한 일들을 말한다.
그러나 인간이 눈에 보이는 상태로는 선한 일을 하면서도 그의 영은 선하지 않은 위선일 경우, 그들의 선한 일은 “먹을 수 없게 썩어 버린 무화과”이다 (예레미야 24:3). 그래서 인간이 선한 행동들을 낳기 시작할 때, 그에게 어떤 시험이 있게 되면 그 시험에 맞서지 않고 타협하는 쪽으로 기울어 선행을 중단하고 악을 행할 때, “강풍에 흔들려 미처 익지도 않은 열매가 떨어지는 무화과나무” 같이 되고 만다.

과실수 (fruit-tree)

과실수의 중요한 특징은 열매에 있다. 이와 같이 인간에게 중요한 것은 각자의 원리가 생산하는 열매인 선함이다. 이 선함은 나무의 열매와도 같이 장차 더 많은 열매를 생산하는 씨라는 생명되는 원리가 들어 있다. “열매를 보아 나무를 알 듯” 인간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가시나무에서 어떻게 포도를 딸 수 있으며 엉겅퀴에서 어떻게 무화과를 딸 수 있겠느냐? 이와 같이 좋은 나무는 좋은 열매를 맺고 나쁜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게 마련이다.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나쁜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없다”라고 주님은 우리를 가르치신다 (마태복음 7:16-19).
인간 속에 있는 것은 무엇이든지 그 삶 속에서 저절로 나타난다는 원리에 대한 위의 서술은 아주 분명한 말들이다. 그래서 “너희가 많은 열매를 맺고 참으로 나의 제자가 되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다” (요한복음 15:8). 이사야서에서, 선한 자는 주님께서 영광 받으실 수 있도록 심으신 “정의의 나무”라고 말하고 있다. 시편 1편에서, 선한 자는 “냇가에 심어진 나무 같아서 그 잎사귀가 시들지 아니하고 철 따라 열매맺는다”고 노래하고 있다.
포도원 지기 같은 신성한 섭리는 영적 진리라는 포도나무의 영적 열매를 돌보느라 노력하고, 인간 마음에 있는 모든 무화과나무에서 좋은 무화과가 맺혀지도록 무던히 애쓴다.

3

포도원 주인은 삼 년 동안 나무에서 열매가 열렸나 가 보았다. 셋이란 진리 측면에서의 완성, 또는 충만(fullness)한 상태를 표현한다. 유대교회에서이든, 본문의 무화과나무로 표현된 개개인에서이든, 마음속의 생명인 세 분과, 즉 의지, 이해성, 행동의 어느 분과에서도 순수한 선이 없는 것이다. 이 나무는 제 분수를 모르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주님은 이 나무가 잘려야 할 것이라고 판단하셨다. 그러나 잘리기 전, 인격의 어떤 변화를 기대할 수 있는 모든 기회 역시 주어져야 할 것이라고 판단하시기도 했다.

열매 없는 나무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가 잘리운다는 것을 영적으로 볼 때, 이는 자연적 인간이 자신의 악들로 인해 파괴되어질 때를 말한다. 포도원에는 태양의 빛과 열, 수분, 포도원 지기의 돌봄이 있어 왔다. 따라서 포도원에 있는 무화과나무가 좋은 품질의 나무라면 열매를 생산하여야 할 것이다. 이와 같이 교회 속의 사람들은 각자 선을 행할 모든 기회를 가진다. 교회는 주님의 말씀, 특전, 예식 등등을 가지고 교인에게 선을 행할 기회를 열어 놓고 있다. 그런데도 교인들이 잎사귀밖에 없는 무화과 나무 같이 어떤 실제의 선을 열매 맺지 못한 채 있다면 분명히 뭔가가 잘못되어 있는 것이다.

땅을 괴롭힘 (cumbering the ground)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가 땅을 괴롭히고 있다고 말해지고 있다. 다시 말해 똑 같은 땅에 좋은 나무가 심어졌더라면 열매가 얼마라도 생산되는데, 결국 땅으로 하여금 게으름 피게 만든 격이 되었다는 말이다. 교회 속의 사람이 좋은 열매를 맺지 못할 때, 그 사람은 어떤 선용도 수행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그는 자신을 위해서 쓸모 있지도 않을 뿐 아니라, 남이 수행해 보겠다는 선용의 길을 가로막고 서서 타인으로 하여금 시간을 낭비하게 할는지도 모른다. 더욱이 그의 나쁜 본보기는 타인에게 해까지 입힐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런 인간이라 해도 회개하여 쓸모 있는 인간이 될 기회가 있어 소극적이나마 타인을 섬길 수 있도록 주님의 섭리는 본문의 포도원 지기와도 같이 그 사람에게 역사한다.

땅을 파고 거름을 줌

나무 둘레를 판다는 것은 마음을 가르치는 것, 뭔가를 조사해 보도록 돕는 것을 의미한다. 이렇게 자신의 마음을 뒤져보아 사랑의 따뜻함과 진리의 빛이 그 마음에 와 닿으려 하는 것을 방해하는 것이 무엇이든 자기 속에서 제거하는 것까지도 의미한다. 나무 둘레에 거름을 준다는 것은 시험 속에서 악이 맹렬히 몰아 부치는 것을 허용하여 그 인간으로 그런 시험을 겪을 경우 회개와 개혁 쪽으로 인도되지 않을까 배려하시는 것을 말한다. 본문의 거름이란 거절되어진 물질인 똥거름(manure)인 바, 이는 악을 의미한다. 악마의 악은 똥거름 같이 더럽지만 시험 속에서 좋은 목적을 위해 충당될 때도 종종 있는 것이다.
위와 같은 배려와 섭리의 기회가 주어졌다 해도 악인은 회개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악인들의 삶의 결과는 타인들에게 경종을 울리게 하는데 사용되어질 수 있다. 유대인들, 비록 그들이 국가나 교회라는 측면에서 해체된지 오래되어 수세기를 지나고 있지만 아직도 그들의 특성을 세상에 드러내 주고 있다. 그런 이유가 아마 타인들의 선, 그리고 가능할는지 모를 그들의 선을 위해서 일 것이라 본다.
우리가 주목할 것은, 비유 말미에서 포도원 주인은 포도원 지기에게 대답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는 유대교회가 교회가 될 희망이 전혀 없다는 것을 암시한다. 본문과 유사한 구절이 마태복음 21장 18-22절에 있는데, 거기서 “무화과나무는 곧 말라 버렸다”고 기술되고 있다.
이 나무도 여느 나무들이 가졌던 혜택만큼이나 태양의 빛과 열을 받았었다. 그럼에도 그들이 생산한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주님은 만민에게 똑같이 해주신다. 더욱이 영적으로도, 자연적으로도 똑 같은 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주님은 악한 자에게나 선한 자에게나 해를 비쳐 주시고, 의로운 자든, 의롭지 못한 자이든 비를 내려 주신다.”

하늘나라

하늘나라는 우리 주위 각처에 존재한다. 그 나라는 사랑과 지혜, 선함이라는 내향의 나라이다. 빛이 소경에게도 비추이고 있지만 그는 빛의 존재를 의식하지 못한다. 그의 눈이 열려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소경에게는 빛이 주는 혜택을 누릴 수 없다. 온 천국은 우리로 천국 인격을 갖도록 하기 위해 열렬한 사랑으로 역사해 주고 있다. 말씀 속의 모든 진리들은 주님의 이름으로 우리를 초대하여 이렇게 말하신다, “나에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아마 각자는 자기가 해야 하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정작 자기의 무화과나무에서 열매를 맺힐 수 있게 할 수 있는 수준 이상으로 자기 속의 악을 내던지지 못한다.
정녕 그러하다면, 신성한 섭리는 비생산적인 우리의 나무에 다가 오시어 우리를 도우시는 마지막 기회인 둘레를 파고 똥거름을 주실 것이다. 다시 말해 주님은 교회를 수단으로, 또는 일상 생활이라는 실제의 삶을 수단으로 더 많은 가르침을 주실 것이다. 그리고 그분은 각자의 진짜 상태를, 자기 처지가 어떠한지를 알 수 있도록, 제 분수를 알아차리도록 우리가 시련에 빠지는 것을 허용하실 것이다. 아마도 우리가 회개하여 개혁되지 않을까 하는 기대 속에서…

성장

나무의 성장을 두고 단지 변화라고만 말할 수 없다. 그것은 분명한 계획에 의해 있어진다. 나무는 어떤 출발점 즉 씨나 뿌리로부터 출발하고 있다. 이와 같이 마음의 성장도 어떤 출발점 즉 마음에 뿌리를 내린 어떤 원리, 진리라는 어떤 씨에서 시작된다. 나무가 어떤 의도된 계획에 따라 성장하듯 마음속에 있는 모든 진리는 잘 의도된 천국 질서에 의해 성장한다. 각 진리는 먼저 기억 안에 저장된 지식을 바탕으로 해서 교리로 이해되고, 진리가 인식되면서, 원리가 사랑 받아지게 되면 일상 생활에서 좋은 열매를 맺게 된다. 이런 일련의 과정 중 어느 하나라도 건너뛰면 열매를 맺을 수 없게 되어 있다.
다시 말해서, 나무가 성장하려면 성장할 수 있는 조건에 놓여야 가능하듯이, 마음속의 진리도 사랑에 의해 따뜻함을 입고, 지혜로 밝혀지면서 정성어린 돌봄으로 보호되어야 열매맺는 데까지의 성장이 가능한 것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자신 속의 진리가 주님의 사랑과 지혜, 돌보심이 가능할 수 있게 하는 우리의 임무를 잘 담당하고 있어야 한다. 나무가 계속 잘 성장하려면 주위의 잡초도 제거해야 하며 이 나무를 짓밟는 적으로부터서도 보호받게 해야 한다. 더욱 중요한 것은 우리 속에 비생산적인 나무가 들어 차 있어 정작 자라야 할 진리의 나무가 성장하는 것을 방해 않도록 해야 하는 것이다.

28
낮은 자리에 앉으라
– 겸허함 –

성서 본문: 누가복음 14장 7-11절

7. 그리고 예수께서는 손님들이 저마다 윗자리를 차지하려는 것을 보시고 그들에게 비유 하나를 들어 말씀하셨다. 8. “누가 혼인 잔치에 초대하거든 윗자리에 앉지 말라. 혹시 너보다 더 높은 사람이 또 초대를 받았을 경우 9. 너와 그 사람을 초대한 주인이 와서 너에게 ‘이분에게 자리를 내어 드리게’ 할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면 무안하게도 맨 끝자리에 내려앉아야 할 것이다. 10. 너는 초대를 받거든 오히려 맨 끝자리에 가서 앉아라. 그러면 너를 초대한 사람이 와서 ‘여보게, 저 윗자리로 올라 앉게’ 하고 말할 것이다. 그러면 다른 모든 손님들의 눈에 당신은 영예롭게 보일 것이다. 11.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사람은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사람은 높아질 것이다.”

원리

신성한 진리는 거듭나는 마음에 천국의 질서를 놓는다. 이 질서 속에 인간 삶의 모든 원리들이 각 마음의 품질에 일치되어 배열되고 있다. 먼저 가장 높은 차원으로서 주님이 사랑되어지고, 이웃이 내 몸과 같이 사랑된다. 이를 실제적으로 보면, 거듭나는 모든 삶, 그 삶 속의 심정이나 이해성, 행동의 모든 단계에서 주님의 사랑과 지혜, 또는 선과 진리가 인간 영혼에 있어야 할 영적 요소로서 가장 높은 자리에 놓고, 가장 높은 이 원리를 응용함에 있어, 우리 이웃의 흥미나 권리, 바램들을 자신의 것으로서 지키고 섬기는 것이다. 즉 우리는 천국 원리의 안내에 자기의 심정이나 생각, 그리고 행동 속에 있는 자아를 복종케 하는 것이다.
이런 삶 속에 있을 경우, 우리는 개인 자체를 중요시하지 않고 그 개인 속에 든 원리를 중시하게 된다. 따라서 우리는 모든 개인을 향해서도 각 사람 속에 든 선한 것을 사랑해 주고, 진정한 것이 무엇인지 생각하고, 그로 하여금 올바른 것을 행하게 하는데 관심을 집중한다. 이렇게 선의 사랑을 중시한 상태는 각 사람의 인격에 관심을 둔 상태이다. 그러나 자신만을 극도로 사랑하여 악을 행하는 자는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지 않게 된다. 자아만을 사랑하는데 집중하게 되면 그는 악한 인격을 자신 속에 형성하여 인격의 품질을 저하시키고 깎아 내리게 된다. 그러나 천국 원리의 통치 밑에 자신을 복종시킴으로 스스로 겸손해지려는 사람, 그것을 행하는 선한 자는 천국의 축복에 자신의 심정을 열어 자기 안으로 흘러들게 하여 그의 마음과 삶 속에서 천국이 이루어진다.

글자적 의미

오늘 비유는 동쪽 나라의 잔치 관습을 상상해 봄으로 더욱 이해되어 진다. 잔치에 초대될 경우, 도착한 손님은 먼저 그 집의 안주인에 깍듯이 인사하고, 방에 들어오면 도착한 손님을 향해서도 인사한 뒤 식탁에 앉을 자기 자리를 찾는다. 그가 이 자리를 정할 때, 그는 아직 도착하지 않은 손님까지 계산에 넣어 생각해 보고 자기 좌석이 어디쯤이겠다고 판단을 내린다. 그리고 주인은 윗자리에 앉아야 할 사람이 낮은 자리에 앉아 있을 경우, “여보게 저 윗자리로 올라앉게”라고 하여 자리를 옮기게 한다. 만일 모든 이가 자리를 모두 차지하여 자리가 없을 경우에도 주인은 윗자리에 앉은 이를 일어나라 해서 아래 자리로 옮기게 하고 그를 상석에 앉힌다.
윗자리에 앉게 하려고 예상한 손님을 그 자리에 앉게 하여 경의를 표하는 것은 집주인의 특전에 해당된다. 그러므로 들어오는 각 손님의 최상의 방책은 자기와 주인과의 관계를 생각해서 보다 낮은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이고, 주인이 자기를 불러 윗자리에 앉힐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 것이다.

자기 자랑

자기 자랑은 마음의 상태 중 가장 외적 수준에 속한 것이다. 그래서 세상의 경험은 “자찬은 취할게 아니다”라는 속담에 근간을 두고 있다. 그러나 미성숙된 마음은 자기에게 발달된 최근의 능력이 꽤 대단한 것으로 여겨져 타인 속에도 그 정도, 또는 그 이상의 능력이 있음을 때때로 잊어버린다.
제것만 옳다고 우겨대는 습관에 푹 빠진 것보다 구역질 나는 것은 없을 것이다. 그 이유는 이 습관이 자아 사랑에 근원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 자아 사랑은 그 속에 타인을 경멸하는 태도도 함유하고 있다. 그런고로 이 사랑은 마음을 불균등하게 발달되게 하고, 미 성숙된 채 남겨 놓아, 이기적 마음만이 무성해지게 한다. 그러나 삶의 체험과 정신적 성장은 이런 상태를 벗어나 가치 있는 개개인이 될 수 있는 높은 자리로 들어 올려 준다.
그러므로 자기 주장이나 자만심은 젊은 나이에 많이 돌출 되는데, 특별히 거듭나는 과정 시초에 잘 발견되기도 하나, 이런 것들은 더 나은 인격 품질이 발달함에 따라 자리가 바뀐다. 이와 같이 우쭐해 하는 자기 주장은 젊은 시절의 삶에서는 큰 결함이라고 볼 수 없겠지만 성년 시기의 인격에서는 심각한 오점으로 자리잡는 경우가 허다하다.

정책

본문을 글자대로만 볼 경우, 비유는 세상적 정책을 심각하게 고려하고 있는 듯 여길는지 모른다. 어리석은 자는 겉보기에, 그리고 일시적으로 낮은 자리를 차지하되, 후에 높은 자리로 추켜지기를 기대한다. 그럼으로 그는 자신이 겸손하다는 것을 억지로 나타내 의롭게 보이려 한다. 그가 낮은 자리를 앉는 이유는 행여나 높은 자리에 앉았다가 밀려나 창피나 당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 때문이다. 영적 마음으로 움직이는 사람은 자신이 겸손하다는 것을 드러내려 하지 않는다. 그의 목적은 타인이 칭찬되기를 바래기 때문이다. 그는 마치 바리새인들이 큼직한 성구함을 만들어 차고 다닌다던가 사람들이 잘 볼 수 있는 길에서 기도하듯 하지 않는다.

시작

이 비유는 겸손이라는 원리를 가르치기 위해 주어지고 있다. 그러나 이 원리를 자기 본위 주의로 영글어진 사람으로 하여금 어떻게 붙잡게 할 수 있을까? 유일한 수단은 그의 행동을 질서 속에 정착하게끔 그를 가르치는 것일게다. 다시 말해 이 사람이 어떤 동기로 자기 마음을 조절해 가든 우선 질서 있는 행동을 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가 질서 쪽으로, 그리고 질서 안에 들어오는 매 단계들은 그에게 질서의 영향 밑에 더 확실히 오게 할 기회를 부여하게 된다. 이와 같이 인간은 거듭남을 위한 머나먼 목적을 향해 움직이되 종종 이기적인 동기로부터 시작할 때가 허다하다.
예를 들어보자. 많은 이들이 행동에서 죄짓는 일을 중단하되, 그 이유가 지옥에 가는 것이 두렵기 때문일 경우가 많다. 이런 우리가 지옥을 미워하고 천국을 사랑하는 높은 상태, 악을 죄로 알고 금하는 상태에 도착하는 데에는 신성한 가르침과 인도를 받아야 하는 긴 과정이 요구된다. 많은 경우에서 주님은 쓸모 없게 보이고 좋지도 않게 여겨지는 것들을 통하여 우리를 인도하신다. 그러나 이런 불필요한 듯 여겨지는 것들이라도 해도 우리가 악에서 나와 선 쪽으로 이동하는 진보 단계에 있어야 할 필요 요소도 되는 것이다. 우리의 정신적 에집트와 가나안 땅 사이에 광야가 놓여 있다는 말이다. 이 광야에는 배고픔과 목마름, 전쟁과 염병, 뱀, 강한 적들까지 도사리고 있는 곳이다.

잔치

혼인 잔치에 초대받는다는 것은 영적으로 볼 때 진리로 훈육되는 것을 말한다. 다시 말해, 우리가 삶에 관한 어떤 좋은 원리를 암시 받고 그것을 사랑하고 사용하게 되어 우리 속의 선한 애정이 진정한 생각과 하나를 이루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우리는 거듭나는 보다 높은 상태에로 옮겨질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영적인 잔치, 선한 원리의 잔치에 초대받았을 때, 우리는 자기가 가장 높은 상태에 이르렀다던가, 가장 큰 선을 획득했다고 착각해선 안된다. 초대된 우리는 높은 산을 보고 막 오르려는 등반자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잔치에 참석하러 가는 수준에서의 원리라는 것은 아주 높다거나 가장 내면에 있는 원리는 아닌 것이다.

믿음과 사랑

맨 먼저 우리는 사랑이라는 높은 원리로 행동하기보다는 믿음이라는 원리에서 행동한다. 그 이유가 사랑은 믿음보다 더 내면에 속한 것이고, 사랑의 삶은 믿음의 삶 보다 그 품질이 더 높은 수준이기 때문이다. 구원은 “믿음만”으로 되는게 아니라, 사랑과 믿음, 그리고 순종에 의해 되는 것이다. 거듭 나아가는 여행은 먼저 각자에게 밝혀진 진리에 단순히 순종하는 데에서 출발하게 된다. 이 순종하는 삶은 우리 속에서 진리에 관한 믿음을 발달시킨다. 그리고 이 믿음의 상태 훨씬 멀리에 선을 사랑함이라는 더 높고 더 거룩한 상태가 위치해 있지만 이 사랑은 믿음의 원리 속에서 성장해 간다.
그러나 정신적 진보의 초기 단계에서 우리가 하는 일의 많은 것들이 믿음 안에서 이루어진다. 이런 상태, 이런 시기에서의 우리는 믿음이 최고 높은 원리인 줄 상상하며 행동한다. 그래서 주님이 초대한 식탁에 자신이 앉을 경우, 자신의 믿음이 존경받는 자리, 주님에게 더 가까운 자리에 앉도록 해주고 있다고 상상한다. 그러나 주님이 우리에게 더 가까이 다가오시어, 영의 잔치에서는 믿음이 사랑에 자리를 내어 주어야만 되고, 사랑이 “더 영예로운 사람”이라고 가르쳐 주신다. 첫 기독교회의 치명적인 실수는 믿음을 사랑 위로 추켜세우고, “믿음만으로 구원됨”이라는 거짓 교리를 선포한 것이다. 이것은 교리면에서나 삶의 측면에서나 교회를 부패시킨다.
주님은 잔칫집의 주인이시고, 이 주인은 우리의 믿음과 사랑, 모두를 초대하고 계신다. 그러나 우리가 믿음이 사랑보다 더 높은 자리에 앉아야 한다고 생각할 경우, 식탁에 함께 하신 주님은 우리에게 다가와서 “이 사람에게 자리를 내어 드리게”라고 말하신다. 그래도 주님은 신성한 진리의 잔치에 우리의 지성, 이해성을 부르신 것은 사실이므로 믿음 역시 제자리를 찾아가 앉아야 할 것이다.
주님은 잔치에 우리의 믿음만이 아닌 의지 또는 심정도 초대하셨다. 사랑을 가진 우리의 의지는 겸손해서 아주 낮은 자리에 먼저 앉는다. 그 반면 우리의 믿음은 우월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주님의 부르심에서 주님이 밝혀 주시는 것은 거듭나는 의지 안에 있는 사랑은 거듭나는 이해성 안에 있는 믿음보다 “더 영예로운 사람”이라는 것이다.
주님의 현존, 그분의 잔치에서 사랑은 믿음보다 위에 앉도록 자리가 배정되어 있다. 그래서 주님은 상석에 버젓이 않은 믿음에게 “이 사람에게 자리를 내어 드리게”라고 말씀하시고, 사랑에게 “친구여 저 윗자리로 올라앉게”라고 말하신다. 다시 말해, 영적 삶을 이끄는 원리는 사랑이요, 이 사랑이 주님에게 가장 가까운 자리를 차지해야 올바른 질서라는 말이다. 그 다음 우리는 믿음을 사랑보다 더 추켜세웠던 과거 속의 자신을 창피하게 느끼게 된다.

질서

우리가 더 계발될 경우, 우리는 주님의 창조에 질서와 체계가 존재함을 보게 된다. 더불어 이 질서와 체계는 현재의 우리 마음과 육체에도 있음을 알게 된다. 우리 삶의 각 부분에는 가장 높은 것에서 가장 낮은 것까지, 가장 안쪽에서 가장 바깥쪽에까지 이르는 점진적 변화가 존재한다. 모든 각 애정과 생각은 삶의 질서 안에 제각기 배정 받은 자리가 있다. 이 질서가 보존되지 않으면 우리의 정신적 건강에 혼란이 초래되고 만다. 즉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머리는 언제나 발 위에 있어야 하는 이치와 같다.
진리에 비쳐 보아 인간이 알게 되는 것인즉, 자신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을 받는 그릇에 불과하다는 것, 잘났다고 추켜세울게 자신 속에는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주님에게서 나와 자신에게 흘러든 생명을 빼놓으면 자신은 길에 있는 나무나 돌과 하등 다를게 없기 때문이다. 이 수준에서 더 진전된 진리들을 보고 자기 생명의 근원을 이해하게 되어 주님과 분리된 자신을 생각하면 전혀 무가치함을 심각하게 고려하게 되어 더욱 겸손해지고, 이 때 주님은 천국 생명을 가지고 그 사람 안에 흘러들어 채워 주시어 그가 주님과 더 가까운 결합을 이루도록 그의 인격을 높여 주신다.
그러므로 인간이 더 겸손해지면 해질수록 주님은 그에게, “친구여 윗자리로 올라앉게”라고 말하시는 바, 그의 인격이 주님과 더 가까워지게, 그분의 나라가 그 사람 속에 더 충만하도록 해주신다. 그 반면, 자신이 똑똑하다고 추켜세운다면, 그는 더욱 주님과 등지고 더욱 적게 주님에게서 받게 된다. 그래서 주님은 말하시기를, “내가 명령하는 것을 지키면 너희는 나의 벗이 된다”고 하셨던 것이다.

높은 데로 올라감

본문에서 손님에게 “윗자리에 올라앉게”라고 말해진 후, “그러면 다른 모든 손님들의 눈에 당신은 영예롭게 보일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주님께서 초대한 천국의 혼인 잔치의 손님은 거듭나는 이해성 속의 생각과 의지 속의 애정이다. 이들 모두는 영적 빵인 선을 먹고, 영적 포도주인 진리를 주님의 식탁에서 마신다.
주님께서 초대한 손님들 중에서 존경받는 손님은 주님과 더불어, 식탁에 둘러앉은 이들과 더불어 영예로워진다. 다시 말해 주님에게 가장 가까이 이끌린 사랑, 각 자신을 통치하는 사랑(ruling love)이 거듭나는 마음속의 모든 천국 원리에 의해 인정받아 주님의 식탁에서 영예로운 자리를 배정 받는 것이다.

겸손

우리가 주님과 관계를 맺는 정도, 그분을 예배하는 수준은 자신이 자신을 생각하건대 아무것도 아님을 인정하는 심각성만큼에서 더 심오해진다. 자아를 사랑함, 이 사랑은 자아를 평가해 봄에 있어 추켜세워 주기만 하는 바, 더욱 인격의 가치를 저하시키고 창피하게 만들어 그로 하여금 지옥에 자리를 배정 받게 하고야 만다. 주님 앞에서 자신이 겸손하다는 것은 신성한 원리의 통치에 자신을 복종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고로 우리의 겸손히 더 커질수록, 주님과의 결합도 더 가까이, 더 강하게 이루어진다.
사랑을 자기 원리의 주축으로 삼는 이들은 믿음을 자기 원리의 제 일 번으로 삼는 이들보다 더 겸손하다. 다시 말해 천적인 천사들은 영적인 천사들보다 더 겸손한 상태 속에 있다. 천사들의 능력은 자신이 아무 것도 아닌 것을 인정하는 정도에서, 주님 없이 자신은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얼마나 더 실감 있게 인정하느냐에 따라 좌우된다. 물론 이런 경우의 겸손은 영의 차원인 내향적 겸손을 의미한다. 바깥쪽 겸손은 안쪽 느낌이 바깥으로 표현된 것뿐이다. 따라서 안쪽에 해당되는 영이 없이는 바깥쪽 형체는 단지 죽은 시체일 뿐이다.
겸손한 사람이 기도할 때 무릎을 꿇는 것은, 무릎을 꿇음으로 해서 자기에게 뭔가 더 나은게 오지 않을까 해서, 또는 자기 속의 악을 변명해 보느라 해서가 아니고 오로지 자신이 속으로 겸허한 영을 느끼기 때문일 따름에서이다. 구부린 무릎, 푹 숙인 머리가 지닌 상응에서 오는 것이 저절로 그를 통해 표현되는 것이다.
겸손은 인간이 악에 쉽게 기울려는 자신 속의 자연적 경향성에서 자신을 억제하게 해주는 수단이 된다. 그 이유는, 인간 스스로 자기는 아무 것도 아님을 인정하여 주님을 찾고, 그분께 순종해 보려 애쓰게 될 때, 주님은 그를 인도하실 수 있고 가르쳐 지도해 주실 수 있을 뿐 아니라, 그를 보호하되, 악의 실제 공격에서 뿐아니라 악에 기울려는 자연적 경향성으로부터도 보호가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기만 사랑함, 자기만 잘났다고 추켜세우려 하는 것은 주님의 인도와 보호를 당연하게 거절하고, 자신을 악령의 수중에 밀어 넣으면서 악한 경향성에 푹 빠지고 만다.

겸손과 인격

진정한 겸손은 처벌을 두려워하지 않고 악을 미워한다. 순수한 겸손은 인간의 인격이 얼마나 승강됐느냐에 정확히 비례해서 존재한다. 그런고로 해서 가장 높은 수준의 천사가 가장 큰 겸손을 가지고 있다. 겸손은 북받쳐 오르는 어떤 감상적 느낌에 존재하지 않고 삶의 변치 않는 원리로서 삶 속에 존재한다. 겸손한 자는 과거에 있는 죄들 때문에 통탄만 하고 있는게 아니라 즉각 죄 짓는 일을 중단하고 천국에 속한 선하고 참된 것 속에서 살아간다.
겸손은 하나의 미덕이다. 그 이유는 선한 자로 자기의 결점이나 과오를 보고 알게 해주는 수단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신 속에 결점이 없다고 하는 자들, 그들이 스스로 자기의 선함을 자랑한다 해도 그 사람 속에는 눈부시게 현란한 과오들로 꽉 차 있는게 분명하다. 겸손은 하느님의 의지에 복종하는데 매우 기뻐한다. 겸손은 주님의 계명에 순종하는 행동 속에 존재한다.
인류의 역사는 겸손이 점차 하강하는 역사였으나, 주님이 오시고, 다시 오시는 데서 그 회복이 이루어지고 있다. 태고교회가 가장 겸손했는데, 그 이유는 그 교회인들은 자기들이 주님에게서 떨어져 있을 경우 무가치한 티끌에 불과함을 가장 충분히 느꼈었기 때문이다.
인간 타락을 자초케 한 뱀이란 자연적 감각들이요, 이 감각은 뱀같이 냉혈적이고 삶 밑바닥에서 숨어 기어다니면서 우리로 자신을 추켜세우게 하고 감각적 삶을 지향하여 영적 삶을 잊도록 유도한다. 인간 타락은 악의 결과이다. 그러나 주님은 인간으로 삶의 영성을 되찾게 끌어올리시려 언제나 노력하신다. 자아를 찬양함이란 자신의 애정과 생각 속에서 진리 위에 거짓을, 선 위에 악을 놓는 것이다. 그러나 스스로 겸손한 자, 그는 자기의 외적 삶을 영혼의 종으로 여기고 종의 자리에 앉게 함으로서 선과 진리에 관한 천국의 영향을 드높이도록 자신의 문을 연다.

창피함과 겸허함

자기가 타인보다 덜 가치가 있음을 발견하는 때, 그리고 자기는 하급에 속한다고 생각되어 쓴맛을 느끼는 때, 아마도 인격이나 지위 면에서 능가 못하는 상대방을 부러워하는 때, 등등 같은 상황에서 강제되는 것, 자신을 수치스럽게 여기는 어떤 종류의 창피함이 있다. 이런 종류의 느낌은 겸허함이 아니다. 진정한 겸허는 시기함이나 부러움 없이 자기 위의 상급자를 쳐다보고, 자기 아래의 하급자라고 해서 경멸하지 않고 쳐다본다.
이 사람은 타인 안에 있는 선함을 볼 때 그 선함을 주신 하느님께 감사한다. 바꾸어서 타인이 자기 안에서 선함을 보게 될 때, 자기 선함이 주님으로부터 받은 것임을 상대방에게 알게 해주어 자신을 칭찬하지 않고 주님을 찬양하도록 하는 방법 속에서 삶을 꾸린다.
순수한 겸손은 온유한 영이다. 산상설교에서 “온유한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땅을 차지할 것이다.” 즉 이타애의 선 가운데 있는 자는 마음 속의 하늘인 영과 구별되는 마음 속의 땅인 자연적인 마음을 좌지우지할 힘을 얻는다는 말이다. “온유한 자는 심판 속에서도 그분이 인도하시고, 그분의 길을 가르치실 것이다.” “주께서 너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오로지 자비를 사랑하고, 정의를 행하며, 하느님과 함께 겸손히 걷는 것이 아니더냐?”

자기 주장

자기 것만 주장하는 사람은 그의 영의 측면에서는 지옥에 살고 있고, 온유하고 겸손한 사람은 천국에 살고 있다. 겸손은 어떤 슬픈 표정이나 얌전한 태도에 있는게 아니라, 깔끔히 정렬된 심정과 선한 삶 속에 있다. 지상에서의 통상적인 삶과 천국에서의 삶은 상당히 다르다. 지상에서 인간들은 남보다 우월하기 위해 투쟁을 계속한다. 그래서 각자는 타인에게서 긁어낼 수 있는 한 모든 것을 갈취하려 애쓰고 있다. 천국에 있는 각 사람은 타인을 위해 할 수 있는 한 모든 것을 다 해주려 노력한다. 그래서 그들은 남을 섬기는 데에서 자기의 행복을 발견한다. 각자가 천국에서 살 수 있기 전, 그는 반드시 천국 삶의 조건에 걸맞지 않으면 안된다. 인간은 본래 이기적인 바, 우리는 타인이 칭찬 받기를 바래야 한다. 상대방을 격려한다고 말하면서도 속으로는 자신이 칭찬되어지도록 교묘하게 자신을 사랑하는게 인간임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실용적 의미

비유는 실제 사용을 위한 의미들을 명백하게 드러내고 있다. 주님의 모든 진리는 우리가 주님께 더 가까이 오도록 부르고 있다는 것, 우리가 이기심에서 빠져 나오도록 부른다는 것, 선한 애정이 진정한 생각과 결혼되기를 바란다는 것, 주님의 현존 속에서 그분과 함께 잔치에 참석해 보라는 것, 그래서 자신 속의 모든 악과 거짓, 죄악된 것을 내려놓으라는 것, 어린 아이 같은 순진과 단순함을 지니라는 것, 그러므로 해서 영적 인격이라는 높은 자리에 올라 앉으라는 것이다. “나는 분명히 말한다. 너희가 생각을 바꾸어 어린이와 같이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하늘 나라에서 가장 위대한 사람은 자신을 낮추어 이 어린이와 같이 되는 사람이다” (마태복음 18:3,4).

29
핑계들
– 천국 삶에 무관심 –

성서 본문: 누가복음 14장 16-24절

16.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어떤 사람이 큰 잔치를 준비하고 많은 사람들을 초대하였다. 17. 잔치 시간이 되자 초대받은 사람들에게 자기 종을 보내어 준비가 다 되었으니 어서 오라고 전하였다. 18. 그러나 초대받은 사람들은 한결같이 못 간다는 핑계를 대었다. 첫째 사람은 ‘내가 밭을 샀으니 거기 가 봐야 하겠소. 미안하오’ 하였고 19. 둘째 사람은 ‘나는 겨릿소 다섯 쌍을 샀는데 그것들을 부려 보러 가는 길이오. 미안하오’ 하였으며 20. 또 한 사람은 ‘내가 지금 막 장가들었는데 어떻게 갈 수가 있겠소?’ 하고 말하였다. 21. 심부름갔던 종이 돌아 와서 주인에게 그대로 전하였다. 집주인은 대단히 노하여 그 종더러 ‘어서 동네로 가서 한 길과 골목을 다니며 가난한 사람, 불구자, 소경, 절름발이들을 이리로 데려 오너라’ 하고 명령하였다. 22. 얼마 뒤에 종이 돌아 와서 ‘주인님, 분부하신 대로 다 했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자리가 남았습니다’ 하고 말하니 23. 주인은 다시 종에게 이렇게 일렀다. ‘그러면 어서 나가서 길거리나 울타리 곁에 서 있는 사람들을 억지로라도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도록 하여라. 24. 잘 들어라. 처음에 초대받았던 사람들 중에는 내 잔치에 참여할 사람이 하나도 없을 것이다.”

요약

천국은 자기 인격을 천국 인격으로 만들고자 하는 이들에게 항상 열려져 있다. 그 이유가 천국은 어떤 장소 속에 존재하지 않고 조건(condition) 속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와 반대로 천국 품질을 사랑치 않는 자를 강요해서 천국 인격으로 만들 수 있는 힘은 누구에게도 있지 않다. 천국을 바래지 않는 자에게는 설사 그것이 선물로 주어졌다 해도 받고 싶어하지 않는다. 거룩한 성의 문은 언제나 열려 있지만, 악인은 성 밖에 있기를 더 좋아한다. 그 이유는 그가 선한 인격 바깥쪽에 있기를 더 선호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떤 선한 것에도 배타적인 사람은 설사 주님 자신으로부터 초대를 받았다 해도 선한 인격에로 입문하려 들지 않는 것이다.

잔치

동방에서의 잔치는 걸출한 장소에서 벌어지는데, 흔히 주최자의 지위나 부에 따라 잔치의 규모가 달라진다. 결혼 잔치는 종종 칠일간 계속되었다. 아마 가장 큰 잔치가 있게 되는 경우라면 왕의 취임식에 뒤이은 잔치일 것이다. 그 이유는 그 나라의 남편 격으로 사람들이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주님의 오심에서 그분은 신랑으로, 교회는 신부로 표현되었던 바, 거듭나는 삶은 흔히 결혼 잔치에 비유되어 왔기도 하다.
비유에서 언급하는 “큰 잔치”는 꼭 저녁 만찬이랄 수 없겠지만, 그 날 중 가장 중요한 때이었을 것이라 생각된다. 그러나 핑계(변명)들이 주어진 정황으로 볼 때 즉 그들이 밭을 보러 간다던가, 황소를 부려 보러 간다는 핑계들을 미루어 짐작컨대 낮 동안이었을 것으로 사료된다. 본문의 잔치가 저녁 만찬(supper)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역시 옳다고 생각된다. 그 이유는 저녁은 옛 교회가 기우는 것을 표현하기 때문이다. 잔치란 심정과 지성에 영양분을 공급하는 영적인 선과 진리로 벌어지는 마음의 잔치를 표현한다. 따라서 큰 만찬(great supper), 또는 하루 중 제일 중요한 식사란 각자를 주도하는 사랑(ruling love)과 합리적인 총명에 속한 것들에 영양을 공급하게 되는 정신적 잔치를 표현한다. 한 마디로 이 만찬은 “영혼의 흐름과 이성의 잔치”이다.

어떤 사람

“큰 잔치”를 준비한 어떤 사람이란 신성한 인간, 주님이시다. 그분은 거룩한 말씀 속에 모든 선과 진정한 원리로 영적 잔치를 차려 놓으시어 “선에 굶주린 영혼을 만족하게” 해주신다. “이 산 위에서 만군의 야훼, 모든 민족에게 잔치를 차려 주시리라. 살진 고기를 굽고 포도주를 잘 익히고 연한 살코기를 볶고 포도주를 맑게 걸러 잔치를 차려 주시리라” (이사야 25:6). 주님께서는 그분의 은혜로운 초대에 기쁘게 응낙하는 이들을 위해서 천국 양식으로 차려 놓은 그분의 식탁을 언제나 준비해 놓고 계신다. 이 잔치의 충만함, 이 잔치에 참석 한데 따른 기쁨은 오로지 경험에 의해서만 알 수 있는 충만이요, 기쁨일 뿐이다. 그분의 거룩한 말씀 안에는 인간 영혼에 꼭 필요한 모든 양식이 들어 있다. 선한 애정과 진정한 생각들에 있는 모든 다양함은 심정과 지성을 지탱시켜 주는 양식들이다. 이것이 잔치요, 이 잔치에서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만족을 얻게 된다.”

초대

넓은 측면에서 주님은 그분의 거룩한 말씀을 인간에게 가르치심으로 모든 인간을 천국 잔치에 초대하고 계신다. 그래서 말씀을 듣게 되는 이들은 자신이 주님에게 초대되었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런데, “잔치 시간이 되자,” 즉 인간이 자기 마음으로 하여금 주님의 진리에 더 가까이 접근시키어 소득을 올릴 준비가 되었을 때, 주님의 종들은 그에게 와서 천국 잔치가 준비되었음을 통보한다. 그래서 그 사람에 대한 주님의 특별한 초대는 “그 영과 그 신부에게 어서 오라”고 말해진다.

한결같이…

그러나 비유에서 초대된 손님들은 “한결같이 못 간다는 핑계만 대었다.” 이 핑계는 주최자와의 어떤 동의로, 또는 그와의 불일치로 참석 못하는게 아니라 각자의 목적(purpose) 때문이었다. 목적에 이의가 없어 찬성한 것은 결과나 목적과도 일치를 이룬다. 이 세상 모든 것은 원인과 똑같게 결과를 산출한다. 짐승이나 새들도 같은 종류는 같은 종류의 습관을 가지고 있다. 울새(robin)들은 언제나 같은 노래를 부르고, 어디에 거처를 두던 같은 종류의 둥우리를 친다. 이와 같이 같은 종류의 통치하는 사랑을 가진 마음들은 그 사랑이 서로에게 보이지도 않고 알고 있지 못하다 해도 그들에게 공통된 목적에 의해 말하고 행동하고야 만다.
무수한 형체로된 자아들, 그 인격의 내향적 품질 역시 무수하게 다르겠다고 생각되지만 무수한 그 성질의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공통점이 존재한다. 그것들은 한결같이 선함을 적대시하고, 진리에는 무관심하다. 거룩한 말씀 속의 진리들이 인간의 자연적 마음에 심어졌기는 했지만 감각적 생명인 가시와 엉겅퀴들이 자라 올라 말씀을 질식시키고 열매 없게 만든다.

역사적 응용

천국과 지상 사이에 교통이 있게 유대인들 앞에는 구약성서라는 잔칫상이 펼쳐져 있었다. 따라서 말씀이라는 빛을 가진 유대인들은 빛 가운데 걸었어야 할 것이었다. 그러나 각종의 세상적인 것과 이기적 목적으로부터 그들은 자기들의 감각적 영혼이 즐기기 싫어하는 천국 잔치에의 참석을 피하느라 이리저리 핑계를 대어왔다.

세 핑계

본문에서는 세 핑계만이 주어지고 있다. 그럼에도 초대받은 모든 이들이 한결같이 못 간다는 핑계를 대었다고 말하고 있다. 따라서 본문의 세 핑계는 타락되어 가는 사람의 일반적 상태를 특징 있게 말해 주는 것이다. 각기 특별한 핑계는 세 가지 일반적인 머리 글자로 분류할 수 있다. 즉 거짓 교리로 있게 된 핑계, 악한 애정 속에 있는 이들의 핑계, 잘못된 삶으로 인해 악과 거짓에 결합된 이들의 핑계이다.

첫 핑계

첫 번째 사람은 “밭을 샀으므로” “거기 가보아야겠다”라고 핑계 대었다. 씨가 뿌려지는 밭(field)이란 진리가 뿌려지는 마음을 표현한다. 따라서 마음 중에서 지적 측면을 말한다. 이 사람은 주님의 말씀 속에서 선과 진리라는 큰 잔치에 초대받았다. 그러나 그는 선과 진리라는 음식을 먹고 싶지 않았다. 그는 어떤 거짓 원리에 이미 그의 입맛을 다시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그 원리를 사서, 내 것 삼겠노라고 작정하고 있던 차였다. 지금 그는 그 거짓 원리에로 자기 애정을 가지고 “가서,” 자기 생각을 가지고 더 충분하게 “보아” 확실히 자기 것임을 확인하고 싶기만을 바랬다. 한마디로 그는 그것들이 자신이라고 여기기를 원했다는 말이다. 그는 주님 말씀 속의 선과 진리에 관한 원리 보다 거짓 원리에 더 군침을 흘리고 있었다. 그러하니 그는 주님의 잔치에 갈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주님께서 그분의 종들, 즉 명백한 진리로 이 사람에게 자기 의무를 다하도록 말했을 때, 그는 주님 말씀인 잔치를 원칙적으로는 용납하고 있었지만, 자기의 이기적인 관심거리가 그의 마음을 먼저 점령했던지라, 당장은 갈 수 없다고 핑계를 대어 발을 뺀 것이다.

둘째 핑계

두 번째 사람은 겨릿소 다섯 쌍을 샀는데, (매매가 마무리되기 전) 부려 보러 간다고 핑계대었다. 소(ox)는 동양에서 농사일에 사용되고 있다. 따라서 겨릿소들을 사기에 앞서 그것들이 과연 잘 훈련되고, 힘세고 건강한지 시험해 보는 것은 아주 중요한 것이다. 소란 자연적 애정을 표현하는데,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이 애정이 주는 느낌을 가지고 활동한다. 그러나 타락하는 사람의 경우, 소는 악한 자연적 애정을 표현한다. 이 애정은 악의 자연적 수준에 있는 탐욕들이다. 이것들은 주님의 잔치에 기꺼이 가지 않는다.
이 소들을 부릴 때 멍에를 메게 하거나 소 전부를 한꺼번에 움직일 수 있게, 즉 부리는 소들이 서로 협동해서 일을 할 수 있게 겨리를 지우기도 한다. 다섯 쌍이란 열 마리의 소이다. 본문에서의 열이란 숫자는 자연적 마음속에 있는 타락해 가는 그들의 애정을 말한다. 우리의 열 손가락, 또는 열 발가락은 우리의 자연적 삶 속에 있게 되는 모든 의무들을 표현하고, 이 의무들은 우리의 모든 애정들로부터 흘러나오게 된다. 정신적인 소들, 이런 자연적 애정들을 증명해 보아야겠다는 것은 그것을 작동시켜 본다는 것이요, 그것들에 몰입한다는 것인 바, 그것들로부터 얼마나 많은 즐거움이 나오는지 알아보겠다는 말이다. 이와 같이 우리가 자신 속의 악한 애정들에 몰입되고 말 때, 우리는 주님의 천국 잔치에 갈 수 없노라고 핑계를 대고야 만다.

셋째 핑계

세 번째의 핑계는 결혼이었다. 아주 중요한 약속이 있으면 참석 안해도 된다는 것이 세 번째 사람의 원칙이다. 사실 본문 글자대로 보면, 그는 핑계를 대기는커녕, “내가 지금 막 장가들었는데 어떻게 갈 수가 있겠소?”라고 대들었다. 천국적 결혼은 우리의 선한 애정과 진정한 생각의 정신적 결혼, 또는 우리의 거듭나는 의지와 이해성이 거듭나는 원대한 목적을 위해 하나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와 정반대 되는 결혼, 즉 우리의 악한 애정과 거짓 생각의 지옥적 결혼, 또는 우리의 타락하는 의지와 이해성이 이기적인 목적을 위해 하나 되는 것도 있다. 이런 조건에서의 사람은 천국 잔치를 싫어하는 바, “여건이 이러이러한데 내가… 어떻게 갈 수 있겠나?” 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들의 관심사는 전혀 다른 곳에 있다. 그들은 자기 자신의 잔치를 더 선호하고 있다.

구실(pretext)들

지금 글자대로 볼 때 본문의 핑계들은 참석하고 싶지 않은 이들에게 있는 구실(명분)들이다. 땅을 산 자는 잔치에 참석하고 난 다음 날 땅을 보러 갈 수도 있다. 소를 샀다는 자도 잔치에 참석한 후 소를 시험해 볼 수 있기도 한 것이다. 마누라를 얻었다는 사람도 그녀와의 약속을 잔치 이후로 미뤄진다 해서 그 결혼이 깨지는 것도 아니다. 그 이유는 그 당시의 시대 환경을 참작한다면, 남성은 여성보다 발언권이나 결정권이 훨씬 강하게 작용했던 시대였기 때문이다. 세 핑계들 모두 잔치에 참석하기를 간절히 바랜 사람이라면 하등 문제가 되는 사항들이 아니다. 이 사람들에게 본문의 구실 거리들이 발생했다 해도 그 구실을 차선에 두었다면 잔치에 참석하는데 하등 지장이 없었을 것이다.
이런 핑계들이 당사자를 정당화시켜 주는 이유는 타락하는 인간이 선과 진리라는 천국 잔치에 초대받았기 때문이다. 이 세 핑계는 오늘날 자신의 영적 문제에 무관심한데 대해 자신을 정당화시키는 모든 범주를 망라해 주고 있다. 사업이 바빠서… 재산을 불리느라고… 집안 청소나 빨래가 밀려서… 이런 등등의 세상사들의 처리가 불필요하다고 우길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따라서 이런 등등의 핑계는 외적 문제에 정신이 쏠린 사람들의 일요일 아침을 휘저어 놓아 그 세상 일이 인생의 전부인 듯 확대되어 비쳐진다. 한 가지 주목해야 할 점은, 이런 모든 사항들의 근원지는 자연적인 것에 기울려는 인간 본성이지, 우리의 판단에서 오는게 아니다는 것이다. 한 마디로 이것들은 논리적인게 못되는 바 쉽게 반박되는 핑계들이다. 그들 모두 정직하지 못한 것이다.

글자에서의 교훈

글자대로 볼 때 비유는 위법 사항을 다루고 있지는 않다. 밭을 사서 보러 간다는 것, 소를 샀으니 부려 보아야겠다는 것, 결혼한다는 것, 모두가 인간을 위해 있어질 수밖에 없는 올바른 행위들이다. 그러나 글자에서의 교훈은 자연적 문제들에 마음이 빼앗기도록 허용함으로서 영적 문제를 소홀히 다룬데 대한 것이다. 사실상 시험은 매우 미묘한데, 그 이유는 어떤 사건이 시험이라고 인식하지 못한 채 빠져 있을 때가 허다하기 때문이다.
결국 우리가 주시해야 할 것은, 과연 바깥 일들에 마음이 빠지도록 한 근원이 무엇인가이다. 그것은 자아(self)인 것이다. 자아는 우리를 주님에게서 멀어지게 하는바, 주님의 잔치에 무관심하게 하거나 아예 무시해 버리게 하기까지 만든다. 밭을 사는 비유가 성서에 또 한군데 있다 (마태복음 13:44). “감추어 놓인 보물”이 묻혀 있는 밭, 보물이 있음을 안 이 사람은 진리라는 밭을 샀다. 그가 그 밭을 산 이유는 황금의 선함이라는 큰 보물이 진리라는 밭에 묻혀 있었기 때문이다. 소를 가지고 밭을 갈아 보는 방법 중에도 타락하는 삶에 빠지지 않고서도 경작이 가능할 수 있다. 더구나 결혼하는데 있어서도 그러한 바, 우리가 천국에서 더 멀어지지 않고 오히려 선함이 진리와 결혼한다면 우리는 더욱 더 천국에 가까워진다.

둘째 집단이 초대됨

초대되었던 사람들이 핑계만을 통보했을 때, “심부름 갔던 종이 돌아와서 주인에게 그대로 전하였다. 집주인은 대단히 노하여 그 종더러 ‘어서 동네로 가서 한 길과 골목을 다니며 가난한 사람, 불구자, 소경, 절름발이들을 이리로 데려오너라’하고 명령하였다.” 이 둘째 집단들은 사회적으로 볼 때 별볼일 없는 사람들, 거지 신세에 가까운 사람들이다. 주인이 노했다고 서술되고 있는 것은 선과 악 사이에 존재하는 대립, 서로가 반대됨을 표현하는 것이다. 주님은 악인에 대해서까지도 노하시는 분이 아니다. 그 이유는 그분은 사랑 자체이시기 때문이다. 오로지 자연적 인간이 자연적 수준으로 상상할 때 주님도 성내실 것이라고 착각할 따름에서 본문에 성냈다는 서술이 있어진 것이다. 잔치가 벌어지면 제일 먼저 초대된 사람들이 배부르게 먹고, 남은 것이 있으면 주위를 맴도는 가난한 자, 거지들까지 와서 잔치 음식을 다 먹어 치우는 일이 흔하다. 따라서 비유에서 명명되는 것들은 꼭 특이한 말은 아닌 것이므로 자연스레 이해될 것이다.

표현적인 의미

잔치에 초대된 사람들은 주님의 말씀을 가졌던 유대인들이다. 그리고 유대인들이 거절했을 때 잔치에 입장하게 된 기타 사람들은 유대인들이 생각할 때 버림받은 자들이라고 간주했던 이방인들이다.
사람들이 집들을 짓는 성읍이란 마음 안에 짓게 되는 체계적인 교리를 표현한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은 인간 마음을 향해 하느님으로부터 천국을 거쳐 내려오는 체계적인 진정한 교리를 말한다. 사람들의 통행 수단인 성읍(동네)의 한 길(street)과 골목(lane)이란 정신적인 방법들, 즉 마음속에 있는 크고 작거나, 또는 일반적이거나 개별적인 측면에서 있는 교리 속의 진리를 표현한다. 이 진리들은 주님의 말씀의 글자 안에 존재한다.
주님의 종, 신성한 진리가 우리의 자연적 애정들을 부르고 우리의 이해성에 발표될 때, 우리 속의 이런 것들은 자신들에게 먼저 관심 있는 것이 있어 주님의 잔치에 참석 않겠다고 초대장을 찢어 버리고 만다. 그러나 주님은 사랑하시는 섭리 속에서 다시 종들을 보내어 우리 속의 이방인 같은 상태들, 즉 훈육은 안되어 있지만 호의적인 심정 상태들로 하여금 잔치에 참석하라고 부르신다. 이렇게 해서 주님의 말씀은 모든 것에 퍼져 가고 모든 것을 구하시려 하신다. 하느님의 말씀에 관한 지식이 우리 기억 속 어느 한 귀퉁이에 쳐 박혀 있다 해도 진리인 주님의 종은 그 구석까지 찾아 들어가 거듭나는 삶이라는 천국 잔치에 그 마음들을 부르시는 것이다.

셋째 집단

“길거리(high-way)나 울타리(hedge)곁에 서 있는 사람들”은 성 외곽에 있는 사람들인 바, 이들은 교회 바깥쪽에 있는 사람, 또는 주님의 말씀에 관한 지식이 없는 사람들을 표현하고 있다. 주님의 잔치에서는 이런 사람들이라도 만일 그들이 악을 멀리 하고 선을 행한다면 그들을 위한 자리가 있다는 말이다.

개인적인 적용

이를 각 개인이라는 측면에서 살펴보자. 우리 주님은 우리 속의 통치하는 사랑과 각자를 이끄는 생각들에 진리를 보내신다. 그런데 우리 속의 그 사랑들이 그분의 천국 잔치에 참석하기를 거절할 때, 그분께서는 이방인 같은 상태, 아직 진리에 경청할 여유가 있는 마음의 구석까지 진리를 보내신다. 우리가 자만심에 빠져 있는 가운데서 우리는 자기 속에서 가장 좋고 귀한 것이 자아라고 간주한다. 그러나 우리 속의 가난한 사람, 불구자, 소경, 절름발이 같은 사람 측에 끼지 못할 것 같은 상태들, 자아 찬양을 부추기는 느낌이나 생각들이 무시해 버린 단순하고 어린아이 같은 상태들, 이것들이 주님의 잔치에 참석하게 되는 상태들이다.
타락하는 삶일 경우, 우리는 더 나은 삶의 시작을 경멸한다. 그럼에도 주님은 우리를 각자의 악으로부터의 구원이 성공되게 하시는데, 이때 주님은 우리 속에 있는 바리사이파인이나 서기관들 같이 짐짓 잘난 체하며 목에 힘이 들어간 정신적 상태를 수단으로 이용하지 않고, 각자가 자기 속에서 경멸해 온 것들, 겸허함이나 상냥함, 어린 아이 같은 순진한 상태를 불러일으키시고, 주님의 진리는 우리 속의 그런 것들을 발달시키심으로 악에서의 구원을 성취하신다.
물론 각자 속의 통치하는 사랑(ruling love)도 거듭나져야만 할 것이다. 그러나 거듭난 후의 통치하는 사랑은 이전의 각자 속에 있었던 통치하는 사랑과는 그 품질이 전혀 딴판이 되어 자신도, 누구도 옛것과 비교가 불가능하다. 자신이 가난하다고 하여 목에 힘을 뺀 인격, 자기 속의 선함은 각종 불순한 것과 뒤섞여 있어 온전한 선함이 아닌 불구자 같은 선함뿐이라고 인정하는 인격, 정신적으로 올바로 걷게 하는 수단인 순수한 진리에 무지하다는 절름발이 같은 인격, 진리를 볼 능력이 없다고 말하는 소경 같은 인격, 이와 같이 초라하게 여겨지는 인격들이 하늘의 도움을 기꺼이 용납하고, 천국의 도움에 호의적인 반응을 보인다. 그 이유는 그것들만이 자신이 무지하고 무가치함을 알고 인정하기 때문이다. 터지도록 배부르다는 자에게 밥을 먹으라고 주는 것 같이 어렵고 어리석은 일은 없을 것이다.

억지로라도…

길거리나 울타리 곁에 서 있는 사람들을 억지로라도 데려다가 집을 채우도록 종들에게 명령되고 있다. 사실 이 구절에서의 억지(compel)란 말은 물리적 힘은 아닐 것이라 본다. 종 한 명이 성 외곽의 배회자나 거지 떼거리에 가서 완력을 사용할리 만무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참석하라고 말하는 수준이었을 것이라 본다. 따라서 이들은 자기들의 경향성이 강요받지는 안했다. 그 이유는 그들이 기꺼이 가고 싶었기 때문이다. 만일 그들이 참석을 주저했다고 가상해 본다면, 그 이유는 그들이 잘나서가 아닌 자신의 무가치함 때문이었을는지 모른다. 단지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참석할 수 있게 용기를 주는 어떤 보증뿐일 것이다.
주님은 거룩한 말씀 속에서 종과 같은 부탁하는 어조로 우리를 “억지로라도” 잔치에 참석하도록 하고 계시지 않을까?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지고 허덕이는 사람은 다 내게로 오너라. 내가 편히 쉬게 하리라.” “나에게 오는 사람을 결코 내쫓지 않으리라” 등등의 말씀이 우리 귓전을 스치고 있지 않을까? 주님께서는 그분의 초대장을 이해성에 먼저 보내시고, 후에 심정에도 보내신다.
오늘 비유는 “왕의 아들의 혼인 잔치”와도 매우 유사한 듯 보이고 있다. 그러나 두 비유는 각기 다른 때에 말해지는 바, 동일한 비유로 착각할 필요는 없다. 그 이유는 두 비유 각각은 각기 특별한 사항을 가르치고 있기 때문이다.

초대에 응한 이들

본문 가운데서 주님의 초대를 거절한 이들은 사회적 신분이 높다는 계층이었고, 초대에 응한 이들은 아주 평범한 이들이었음에 주목해 보아야 한다. 그들이 초대에 응하게 된 이유는 그들 마음이 옛 전통에 사로잡혀 있지 않고 권력이나 현재의 신분 따위로 인한 체면과 관계없었기 때문이다. 진리는 “안다는 사람들과 똑똑하다는 사람들에게는 모든 것을 감추이시고,” “오히려 철부지 어린아이들에게는 나타내 보이신다.” 거듭남의 영적 결혼은 선한 생활로 선과 진리를 결합시키는 이들만에게서 성사되는 결혼이다. 따라서 머리로만 진리를 알뿐 그에 따른 행함이 없는 이들에게는 철저히 감추어져 있다. “선한 것들에 배고파하는 이들은 배부르게 되겠지만, 배부르다고 하는 이들은 텅비게 된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은 만족하게 될 것이다.”
자신을 자아 사랑으로 채워 만족하는 이들은 “내향적 만족이 무엇인지조차 모른다. 그 이유는 그들이 말씀을 읽지 않기 때문이며, 더욱이 주님을 찾지도 않기 때문이다. 오로지 그들은 바깥쪽 것들이 무엇인지만을 알고 그것들로 기뻐한다. 그들은 내적인 만족을 가질 수 없다” (A.E. 1162). 주님은 인간이 천국 생명을 받고자 하면 누구에게나 주신다.

핑계와 이유

이제, 우리는 핑계(excuse)와 이유(reason)를 조심스럽게 구별지어 보아야 한다. 뭔가를 하고 싶었는데 할 수 없었던데 대해서는 적절한 이유가 있을 수 있다. 이유는 일반적으로 긍정적인 상태 쪽에 해당되므로 원인을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핑계는 소극적이고 부정적이어서 흥미의 결핍을 보여준다.
인간 마음을 미리 채우고 있는 상태가 그 인간으로 하여금 진리에 얼마나 무관심하게 하는지 모른다. 새교회의 가르침이 그런 마음에 접근하게 될 때 우리 모두 무관심이란 것을 경험할 수 있다. 수많은 이들의 경우, 그들 마음은 감각적인 바램과 계획들로 마음을 꽉 메우고 있다. 그래서 그들은 어떤 영적인 것에도 배고픔을 느끼지 않는다. 어떤 이들은 자신의 사상들, 편견, 자기 견해만이 똑바르다고 은근히 주장하는 자만심, 또는 탐욕의 원형들로 마음속을 꽉 메우고 있다. 따라서 진리에게 들어가 있으라고 방을 내어 줄 여유가 없는 것이다. 또 다른 경우, 어떤 이들은 세상에서 세력을 확보한 어떤 종파의 이론에 마음을 다 홀려서 어떤 새로운 진리도 기대하지도 않고 설사 그가 새 진리를 접할 기회가 있다 해도 자기 속의 옛 것에 도로 만족하고 만다. 어떤 이들은 자연 과학에 마음이 사로잡혀 있어 영적인 것들에 관한 어떤 암시에도 경멸적이다.
위에 열거된 것들 말고도 더 많은 원인들로부터 우리는 과거 성경 시대에 있어온 함성 소리 같은 소리를 자주 듣게 된다. 오래 전이나 지금이나 같은 소리를 듣게 되는 것은 인간 마음이 주님의 것 이외의 것으로 차 있기 때문이다. 그 때나 지금이나 인간 마음을 점령한 것들은 주님을 거절하고 있다. 그래서 주님은 인간이 예상 못하는 통로로 오신다.

우리의 핑계들

주님이 초대하시는데 어떻게 인간이 거절할 수 있단 말인가? 하고 초대 불응 불가론을 펼지도 모른다. 그러나 각자 삶을 뒤져보자. 우리가 아는 각 진리는 주님의 잔치에 우리를 초대하고자 마음 문 밖에서 서성거리고 있다. 자신이 행해야 할 것이라고 아는 것만큼 하지 못할 때, 우리는 그 실패만큼 주님의 초대를 거절하게 된다. 베드로는 자기가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하지 않을 것이라고 장담했었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을 모른다고 했고 게다가 세 번씩이나 계속했다. 우리는 자신이 포기하기를 별로 원하지 않는 것, 자질구레한 일들이라 간주하는 것, 즉 나쁜 버릇(vice)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되지 않는가? 이런 잘못된 습관이나 성벽이 주님의 초대를 수용하지 못하게 하는 핑계들임을 주지해 본적이 있는가? 우리가 주님의 잔치를 소홀히 해 버리게 하는 것이 우리가 이미 잘 키워 마음과 행동에 자리잡아 옳은 것인 냥 비쳐지는 그릇된 습관이 아닌지… 검토해 보아야 할 것이다.
해야 할 일임에도 자기가 하고 싶지 않아서 핑계를 찾는 것은 얼마나 손쉽게 발견해 내는지 모른다. 이렇게 핑계를 대는 습관은 우리 속에서 쉽게 자라 오른다. 주님의 초대가 우리 속에 보다 더 큰 영성을 길러 주므로 참 좋은 일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정작 주님의 초대가 있을 경우 생각하는 것은, 주님께서는 때를 잘못 맞추신다고 결론짓는다. 그 이유는 우리가 이기적이고 세상적인 계획, 또는 자기가 하고 싶지 않은 때, 주님의 초대를 싫어하는 때 주님의 진리가 우리에게 초대장을 전달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때 우리가 그 진리에 대꾸하는 것, 고작 “잠깐 실례하겠습니다”는 한마디로 그분의 정의를 거절한다. 한가지 확실한 것은 자기 이익만 챙기려는 것, 자기 편리주의라는 우리 속의 자아 사랑이나 세상 것만을 사랑함은 우리 속에서 주도권을 주님의 진리에 이양하고 싶어하는 때는 결코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새로운 자극을 받기 위해, 자신의 느낌과 생각들의 새로운 방향을 위해 “억지로라도” 주님께 나아가야 할 것이라 본다. 아마 자녀를 양육해야 할 부모라면 그 자녀에게 위의 사항은 자질구레한 사항들이라 생각되겠지만, 미래에는 그것이 치유되기 힘든 악한 습관이 됨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좋은 때가 언제 오나

많은 사람들이 “행운이 언제나 내게 오려나?” 하고 무척 갈망한다. 그러나 그중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 행운을 위해 노력하지 않고 있다. 우리가 악을 금하며 주님께 나아가는 것만이 천국 잔치에 참석하는 것이다. 좋은 때란, 자신이 그런 때를 맞고 싶다면, 당장이 최적의 때인 것이다. 우리가 큰 특권을 소유했다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그 특전을 남용하지 않고 슬기롭게 사용하는 일이다. 초대받았다는 것과 잔치에 참석했다는 것은 사회적으로나, 영적으로나 동등한 가치를 지닌 상태가 아니다. 수많은 일들이 우리로 잔치에의 참석을 방해할는지 모른다. 우리 모두가 지닌 인격이란 것은 영적 잔치를 위해 인간에게 아주 적합하기도 하지만, 자주 그 잔치를 인간에게서 배척하게 부추키기도 한다. 따라서 주님의 초대를 기쁘게 응낙하는 가장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수단은 억지로라도 그분의 계명에 순종하는 것밖에 없다. 다시 말해 “만일 네가 영생의 나라에 들어가고 싶다면 계명을 지켜라”이다. 계명에의 불순종은 천국에로 초대하는 주님의 초대장을 찢어 버리는 격이다.
그런고로 주님의 초대는 언제나 지금 존재한다. “너희 마음이 완악하지 않다면, 너는 내 말에 귀를 기울일 것이다.” 두 아들의 비유에서 주님은 우리에게, “얘야, 너 오늘 포도원에 가서 일을 하여라…”고 당부하고 계신다. 주님을 예배하는 것은 단지 교회에 가서 무릎꿇는 것으로 마무리 되는게 아니라, 오늘 악을 금하고 선을 행하려 노력하는데서 결실을 본다. 간혹 사람들은 거액을 투자해 지은 웅장한 교회 건물, 감정을 끓게 하는 설교, 북적거리도록 좌석을 메운 교인, 이런 등등의 외적 핑계에서 만족해한다. 주님께 나아 온다는 것은 악에서 빠져나오는 것이다.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초대받은 사람은 행복하다.” “생명의 나무를 차지할 권세를 얻고 성문으로 그 도성에 들어가려고 계명을 지키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러므로 너희는 양식 아닌 것을 위해 돈을 소비하며 만족하지 못할 것을 위해 애쓰느냐? 나에게 귀를 기울여라. 좋은 것을 받아먹어라. 너희 영혼이 풍족하여 기뻐하리라.”

30
망대를 쌓고 전쟁을 치룸
– 거듭남에 드는 비용 –

성서 본문: 누가복음 14장 28-33절

28. “너희 가운데 누가 망대를 지으려 한다면 그는 먼저 앉아서 그것을 완성하는 데 드는 비용을 따져 과연 그만한 돈이 자기에게 있는지 곰곰이 생각해 보지 않겠느냐? 29. 기초를 놓고도 힘이 모자라 완성하지 못한다면 보는 사람마다 30. ‘저 사람은 집짓기를 시작해 놓고 끝내지 못하는구나!’ 하고 비웃을 것이다. 31. 어떤 임금이 다른 임금과 싸우러 나갈 때 이만 명을 거느리고 오는 적을 만명으로 당해낼 수 있을지 먼저 앉아서 생각해 보지 않겠느냐? 32. 만일 당해낼 수 없다면 적이 아직 멀리 있을 때에 사신을 보내어 화평을 청할 것이다. 33, 너희 가운데 누구든지 나의 제자가 되려면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을 모두 버려야 한다.”

요약

자아만을 사랑함(self-love)은 큰 적이요, 악마인바, 우리는 갖가지 형태로 이 큰 적과 싸워야만 한다. 자아 사랑과의 싸움을 위해 우리는 이 싸움에 드는 비용을 계산할 필요가 있고, 싸움에 임하는데 따른 준비 사항이 뭔지 알아야 하며, 그 싸움을 완전하게 마무리 지을 수 있는 방법을 헤아려 둘 필요가 있는 것이다. 자신 앞에 놓인 적을 잘못 판단하지 않기 위해 요구되는 사항이나 닥칠 위험과 싸움이 진행되는 동안 용기를 잃지 않도록 하는 것이 현명한 것이다. 거듭나는 작업은 의식적인 삶의 재조직을 완성하는 것이다. 자신이 은근히 흠모하던 애정이나 생각, 은근히 저지르고 싶은 행동을 포기하는 것, 그리고 새로운 동기와 계획, 새로운 습관의 정착이 거듭남의 애정 속에서 거쳐야 할 작업 단계이다.

두 개로 된 한 비유

본문을 글자대로 읽어 갈 때 두 비유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지 않다고 여겨질는지 모른다. 그럼에도 두 비유는 내향적 측면, 즉 영적 관점에서는 하나로 연결되어 있음을 명확히 알 수가 있다. 망대에 관한 첫 부분은 해야만 하는 것, 일을 해내는데 재원이 충분한지 그 여부를 헤아려 보아야 한다는 것이고. 두 번째 부분은 타인이 우리에 맞서려 하는 것들, 이 반대적인 것들을 극복해 낼 수 있는지 그 여부를 가려 보아야 한다는 것과 관련되어 있다.
이와 같이 일의 시작 초로부터, 인간은 자신에게 심각하게 되묻도록 부름 받고 있는 것이다. 먼저 자기를 거듭 나아가게 하는데 있어 자기를 인도할 진리에 관한 지식을 충분히 장진하고 있는지와 진리를 행동에 옮기되 얼마나 꾸준히 해갈 수 있는지에 대한 자기 심정 속의 성실도가 얼마나 되는지이다. 둘째로 자기 속의 자연적이고 유전적인 경향성과 자기 주위의 악령들이 쏘아붓는 맹폭격을 기꺼이 만나 극복해 갈 수 있는지 어림해 보는 일이다. 그 이유는 우리가 자신의 거듭남에 대해 진지하게 해보려 하면 할수록 자기 속과 자기 주위의 악한 영향력 역시 더욱 거세게 기세를 몰아붙여 우리를 파괴시키려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주님의 진리를 배우고 그에 따라 기꺼이 살아가므로 해서 그분의 인도를 기쁘게 응낙하는 이상, 주님은 우리를 지켜 주시면서 인도하신다.

망대

망대(tower)에는 두 가지 용도가 있다. 즉 관찰과 보호이다. 높은 망대는 먼 거리를 볼 수 있어 적의 접근을 미리 탐지 할 수 있게 하고, 견고한 망대는 공격해 오는 적을 방어하는데 한몫 하게 된다. 망대는 내면의 진리, 사물의 표면 너머로 승강된 진리, 생각의 더 높은 관점을 제공해 주므로 해서 악과 거짓에서 더 크게 보호해 주는 진리를 표현한다.
내면의 진리, 생각이 더 높이 올라 있는 상태, 마치 파수꾼과 같은 영적 진리, 합리적 마음은 사물의 상태를 납득하고 있으므로 감각적 삶의 결과가 주는 위험을 미리 내다본다. “주님의 이름은 견고한 망대이다. 의로운 자는 그 안으로 뛰어들어가 안전해진다.” 악이 우리를 맹습할 때, 우리는 내면의 진리, 즉 높은 관점에 있는 진리, 사물의 바깥 모양 너머로 이해성을 올림으로 안전해 진다. 위와 같은 진리 안에서 우리는 안전과 보호를 발견할 수 있다. 그 이유는 내향적 원리가 인간 삶의 각종 것을 통치하므로 우리는 피상적이고 세상적인 견해나 생각에 대한 경고를 미리 받는 격이 되어 보호되기 때문이다. 사물의 영적 원인을 이해하는 사람은 영적 원인이 구체화된 바깥쪽 현상을 납득할 수 있다.
따라서 망대는 내면의 진리를 표현한다. 망대는 흔히 돌과 돌을 차곡차곡 높이 쌓아 짓는다. 내면의 진리라는 정신적인 망대 역시 감각적인 것 위에 차츰 차츰 쌓여진다. 즉 영적 진리의 빛으로 합리적으로 이해된 주님의 거룩한 말씀 속의 글자적 진리라는 돌로 쌓아 올려 진다. 우리가 글자적 진리 속의 내향적 양상을 납득할 때 우리는 감각이라는 영역 너머로 글자 속의 진리를 승강시켜 정신적인 망대를 쌓을 수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가 삶의 본질적인 법칙을 완성된 건축물로, 즉 우리 내면의 삶을 합리적으로 이해함으로서 내면을 질서 있는 체계로 완성할 때 우리의 정신적인 망대의 건축은 완성되는 것이다. 이렇게 완성된 높은 구조물로부터 우리는 감각적이라는 삶을 내려다보아 감각이 주는 위험의 접근을 미리 관찰하므로서 설사 그것들을 만나더라도 극복이 가능해진다.
“망대를 지으려 하는” 사람이란 하느님의 말씀 속의 진리에 관한 이해를 승강시켜 자기 내면의 진리를 체계화하여 영적 지식을 도모하면서 악에서 보호되기를 목적으로 삼는 마음을 말한다. 이런 망대를 짓겠다고 하는 사람은 먼저 앉아서 그것을 완성하는데 드는 비용을 따져 자기가 망대를 완성할 수 있는지 곰곰이 헤아려 볼 수밖에 없다. 즉 그는 자기 내면의 진리의 품질을 잘 생각해 보고, 자기가 내면의 진리를 잘 이해할 준비가 충분한지, 내면의 진리에서 귀결되는 대로 확실히 따를 수 있는지 곰곰이 생각해 보게 된다는 말이다.

예증

예를 들어 어떤 과학자가 있다고 하자. 그런데 그는 바깥쪽 현상을 생각의 관점으로 삼고, 감각의 빛으로 보여지는 것만을 중심으로 삼으면서도, 자기는 인간 삶을 충분히 이해한다고 착각한다. 이런 착각은 그로 하여금 자기 생각을 자연적인 수준 너머로 결코 승강시키지 못하는 바, 그는 자연계의 삶 그 이상의 높은 어떤 존재에 대하여는 쉽게 부정해 버린다. 이런 마음을 고집하는 한, 영적 망대를 짓는 조건 속에 있는게 아니다. 더구나 그 망대를 완성할 수 있는 조건은 더욱 없다. 설사 그가 감각적 국면으로부터 영적 진리를 보겠다고 시도하는 정신적 활동이 있다 해도 영적 빛으로 본다면 망대를 지으려고 비용을 계산해 보지도 않은, 그래서 건축을 마무리 질 수 없는 상태에서 무작정 짓기를 시작하는 어리석은 자일 뿐이다.

망대를 지음

영적인 망대, 이는 영원히 서 있을 망대인 바, 매우 조심스럽게, 견고하게, 그리고 가능하면 높이 지어져야만 할 것이다. 진리를 배우기 시작하면 망대를 짓는 것이 시작된 것이다. 배운 진리를 이해할 때 그 망대는 위쪽으로 쌓아 올려 건축된다. 그리고 배우고 이해한 진리를 사랑할 때 망대는 완성되어 진다. 그리고 그 망대를 사용할 때, 진리를 실제 사용하되 더 높고 더 내면적 차원에서 사용하는 것이 된다. 내면 속의 진리가 합리적으로 이해되어 사랑되면, 마음이 승강되어 주님과의 결합이 있게 되는 것이다.

비용을 따져 봄

이제 우리가 진리를 이해하는 것을 승강시켜 영적 빛의 수준으로 높이고자 할 때, 우리는 이와 같은 작업에 드는 비용이 얼마인지 가늠해야 한다. 부흥회와 같은 집회에 참석한 이들이 자신의 마음을 완전히 바꾸어 새 사람이 되었다고 생각할 때가 많다. 그럼에도 그 중의 많은 이들이 세상 삶으로 미끄러져 내려진다. 그러면 그들이 과연 진실로 전환되었다고 할 수 있을까? 이렇게 된 이유는 그들이 비용을 계산해 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부흥 집회 속에서 풍기는 감정적인 분위기에만 잠깐 푹 젖었을 뿐이다. 그들은 전환된 마음을 유지 존속시켜 완성하는 것을 수행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들은 하느님의 말씀 속에 있는 진리에 감정적 차원의 흥미만을 놓았을 뿐이다. 그래서 자기가 지닌 자연적 바램이 주님의 말씀에서 얻은 자기 속의 새 진리들을 핍박하게 되면 그 진리는 금방 시들어 버린다. 마치 돌밭에 뿌려진 씨와도 같이 뿌리가 깊이 박히지 않은 탓에 그들이 기껏 작정했던 마음 상태는 시들어 버린다. 그들이 자아 사랑을 기꺼이 포기 못했다는 것, 한 마디로 거듭남은 자기들로서는 너무 비용이 많이 드는 작업이라고 판단되었다는 말이다.
사실상, 우리가 더 거듭 나아 갈 때마다 그 거듭남은 우리에게 더 많은 비용을 요구한다. 그 이유는 인간이 이 수준에서 더 높은 저 수준으로 거듭 나아갔다는 말은 더 큰 댓가를 영적으로 기꺼이 치렀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 그가 더 큰 자기 속의 이기심을 기꺼이 내어 던졌다는 말인 것이다. 자연적인 마음을 건설하는 것 보다 영적인 마음을 건설하는 데에는 더욱 많은 비용이 든다. 더욱이 영적 마음을 건설하는 것보다 천적 마음을 건설하는 데에는 훨씬 많은 비용이 요구된다.

우리를 비웃음

이제 우리가 진리를 생각해 보고 자기의 정신적인 망대를 짓겠다고 하여 시작했는데 진리를 사랑하여 실제 사용함으로 건설을 마무리 짓지 못한다면, 우리 속의 거짓과 악들은 우리를 비웃게 된다. 이 악들은 진리를 자연적 마음으로 끌어내려 경멸하게 된다. 그렇게 되면 진리를 몰랐던 때보다 더 지독하게 빛에 반대되는 죄를 범하게 된다.

공격에 저항함

우리가 정신적인 망대를 지을 재료인 진리에 관한 지식을 가지고 있어서 이 진리를 사랑하여 실제 사용함으로 망대를 짓기로 작정하였다고 한다면 더 많은 의문이 제기되는데, 그것은 우리가 망대를 짓는데 대해 방해하는 요소들, 즉 자기 속의 악에 쉽게 기울려는 경향성, 자기 주위의 악령, 지상의 삐뚤어진 인간들로 인한 우리 안팎에서 오는 공격에 잘 견딜 수 있을는지에 관한 것들이리라.

두 왕들

“어떤 임금이 다른 임금과 싸우러 나갈 때 이만 명을 거느리고 오는 적을 만 명으로 당해 낼 수 있을지 먼저 앉아서 생각해 보지 않겠느냐?” 앞의 왕은 거듭나는 마음을 통치하는 진리이고, 뒤의 왕이란 퇴보되는 마음속에 든 거짓들로 우리의 거듭나는 공사를 방해한다.

병정들

진리의 병정 “일만 명”이란 주님이 우리 속에 아껴 두신 것들, 즉 주님에 의해 인간의 내면, 즉 속마음에 저장해 두신 선과 진리들의 상태를 말한다. 이것들을 수단으로 해서 인간은 자기 생각을 휩쓸려 하는 거짓과 대항하게 된다. 만일 인간이 주님으로부터 온 선과 진리를 가지고 있지 않다면, 그는 악과 거짓에 대항하거나 선과 진리를 위해 싸울 까닭이 없을 것이다.
다른 왕 또는 거짓의 병정 “이만 명”이란 자연적 마음 안에 있는 악과 거짓에 속한 모든 감각적 상태들을 말하고 이것들이 진리가 거듭나는 삶 속에서 돌진하여 승리하지 못하게 대항해 온다. 이러한 감각적인 상태들은 영혼 속에 있는 선하고 진정한 상태보다 갑절로 나타난다. 10의 두 배인 20은 우리 속에 아껴 두신 것 중에서 보다 상급에 속하는 것들이지만, 오늘 본문의 숫자는 이와 정 반대의 의미로 사용되는 바, 주님이 우리 속에 아껴 두신 참된 것을 파괴하려 드는 감각적 악과 거짓을 말한다.
두 왕, 즉 진리와 거짓 사이에 있게 될 싸움이란 거듭나는 마음에 꼭 있게 되는 시험의 시리즈를 말하고, 이런 시험 속에서 우리 속의 악은 보여지고 알려지게 된다. 자신 속의 악이 보여지고 알려져야 그 악을 극복할 기회를 포착할 수 있고 더불어 선 속에서 자신을 확증해 볼 기회도 가능해진다. 따라서 시험을 수단으로 마음의 내면은 열린다.

앉아서 따져 봄

두 비유 각각 속에서 “앉아서 생각해 보지 않겠느냐?”라고 말해지고 있다. 우리가 원리 속에 앉는 것은 그 원리에 자신의 애정을 고정시킬 때이다. 그리고 비용을 계산해 보는 것, 정상을 참작해서 생각하는 것은 지적 부분의 노력을 언급하는 바, 우리가 동원한 원리 위에 생각이 고정될 때이다. 행동, 생각, 애정이 가지는 정신적인 조건은 서로 구별되는데 이를 뚜렷하게 구분 지어 우리로 확실히 알게 하는 성경은 아마 시편 1편이리라 생각된다. 즉 “복되어라 악을 꾸미는 자리에 가지 아니하고, 죄인들의 길을 거닐지 아니하며, 조소하는 자들과 어울리지 아니하는…그에게 안될 일이 무엇이랴!”
인간이 앉아서 비용을 따져 본다던가, 정상을 참작하여 궁리하는 것은 그 사람 속의 이해성과 의지가 어떤 한 가지 일에 동시에 참여하고 있다는 말이다. 지성은 심정을 위해 계산하는 일을 해주고, 심정은 애정을 고정시키는데 지성이 계산한 것을 참작한다. 이 과정 속에서 마음은 그 속에서 일어나는 동기와 계획, 목적의 품질이 어떠한지 볼 수 있게 되어 있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의 말씀의 빛으로 밝혀지는 악과 거짓에 기울려는 자신의 경향성과 맞서 싸우는 만큼에서 주님과 결합을 하게 된다.

전투 상태

종교적 삶은 우리의 수준 낮은 본성과 꾸준한 전투를 수행해 간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앞에 장진된 시련에 대해 미리 경고 받는다. 경고 받음으로 시련에 대비키 위해 미리 무장을 갖춘다. 따라서 전투를 위해 우리를 무장시켜 주는 체계적인 진리를 이해해 둘 필요가 있고, 전투를 계속해 나가기 위해서 주님으로부터 강건함을 계속 얻어야만 되는 것이다.

화평을 청함

우리의 거듭나는 일이 일관적으로 성실치 않게 되면, 우리는 자신 속의 악한 경향성의 세력과의 대치 상태에 비상종이 울리게 되어 실지로는 그 악을 던져 버리지 못한 채 그 악과 평화조약을 맺고야 만다. 더 강한 군대를 거느린 왕과의 싸움에 기죽은 왕과도 같이 우리는 자신 속의 자연적인 악들과 타협을 가지는 바, 진리에 대한 순종을 바깥쪽인 형식상으로만 구체화하여 안쪽 원리를 바깥쪽의 경건함, 즉 경건한 체 하는 것과 대체시키고 만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본문 끝에서, “너희 가운데 누구든지 나의 제자가 되려면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을 모두 버려야 한다”라고 매듭지어 놓으신 것이다. 주님을 따르는 길이란 이기심에 속한 옛 것 모두를 단념해야 하고 주님을 따르는 체 하는 형식적인 경건함 따위로 자기 속의 버려야 할 것을 덮어두고 그것과 평화를 체결하는 시도가 있어서는 안된다.

비용

우리는 거듭나는데 필요한 실제 비용이 얼마나 되는지 자신에게 물어 보아야 할 것이다. 사실, 영적 생명은 주님이 주시는 선물인바 지불하지 않아도 되는 선물이다. 그러나 우리는 스스로 그 선물을 위해 일해야만 한다. 우리는 무지하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으로부터의 가르침이 필요하다. 주님의 계명은 인간 행동에 관한 바깥쪽에 속하는 법칙이다. 그리고 이 법칙을 합리적으로 이해하게 될 때, 그 법칙에는 모든 삶에 대한 원리가 안쪽에 놓여 있음을 볼 수 있게 된다. 진리는 무료이지만, 반드시 배워져야만 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의 거듭남은 진리를 배우고, 그 반면 자기가 여태껏 고이 간직했던 잘못된 사상을 버리는 두 가지 노력이라는 비용을 우리에게 요구하고 있다. 그리고 자아를 억제하는 행동까지 우리에게 비용으로 요구하고 있다. 이 행동이야말로 아주 큰 비용에 해당된다. 덕행(virtue)을 달성하는데 어떤 특별한 방법이 있는게 아니다. 단지 덕행에 반대되는 악덕을 즐기도록 부추기는 자신의 충동을 억제하여 가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예를 들어, 정직함을 달성하려면 자기 속에 있는 부정직해도 괜찮지 않느냐라는 자연적인 경향성들을 굶김으로 해서 이루어진다. 부드러운 성질은 괴팍한 성미로 쉽게 빠지는 자신의 경향성을 억제하고 조절하되 계속 노력함으로 차츰 획득되는 것이다.
거듭남은 우리에게 자아 의지, 자아 총명이라는 것을 포기하도록 비용을 청구하고 있다. 우리가 의존해야 하는 것은 자신의 의지나 자신의 것이라 여겨지는 총명도 아니고 우리가 주님의 진리를 삶에 적용하는 가운데 주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선과 그분이 밝혀 주시는 진리의 영에 의존하는 것을 습득해야만 한다.
거듭남은 자기 공적을 내세우려는 것도 비용으로 우리에게 요구하고 있다. 우리는 완전치 못하다는 것, 게다가 악에 쉽게 기우는 경향이 있다는 것을 배워 둘 필요가 있다. 따라서 거듭남은 우리가 은근히 아끼는 나쁜 습관을 포기하는 대가를 요구하고 있다. 위에 열거한 포기해야 하는 것들, 비용으로 처리해야 하는 것들은 과거 그것들을 양육했던 옛 생명과 함께 죽어져야만 한다. 이런 것들의 포기, 거듭나기 위해 치루는 비용은 자신이 죄 속에서 구원되려는 노력과 관계없는 비 조건적이어서 완전히 처리될 수 있는 것들이다.
거듭남은 세상의 것만이 최고라고 여기려는 우리의 사랑을 대가로 요구하고 있다. 우리는 세상의 명성을 위해서가 아닌 자신의 인격을 위해 일을 해야 한다. 세상이 말하는 표준 위로 부상할 때, 우리는 세상 것에 연연하려 하는 동정심을 상실할 수 있다. 그 이유는 세상은 세상 속의 악들로 운명지어진 이들, 감각적 쾌락들로 어지럽게 된 이들을 결코 그냥 두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세상이 우리로 반대쪽으로 고개를 돌리게 해서 우리로 광신자가, 괴팍해지게, 또는 위선자가 되도록 부르고 있다는 것을 기꺼이 인정할 준비도 되어 있어야 한다. 세상적 삶의 표면 위 높게 자신의 정신적인 망대를 세운 사람을 세상에서는 잘못 이해되고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도 예상하고 있어야 한다. 거듭나기 위해 우리는 자아 사랑에 기초된 세상적 계획들 모두를 반드시 포기하는 대가를 치러야만 한다.

계산

위와 같이 치러야 하는 대가, 비용은 너무 엄청난 것처럼 보이지 않을까? 또는 얻는 것에 비해 비용이 너무 많이 든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까? 우리가 성실 속에 있지 않다면 어떤 것도 성취하지 못한다. 주님이 우리의 건설 공사를 지휘 감독해 주시지 않는다면 그 공사는 헛것이 된다. “주님이 집을 지으시지 않으면 집 짓는 자의 수고는 헛 것이다.” 퇴보되는 상태 속에서 미발달된 인간의 능력은 단지 동물일 따름이다. 거듭난 만큼에서 우리는 천사가 되는 것이다. 따라서 거듭남이 없으면 우리는 사탄 또는 악마가 될 수밖에 없다. 치러야 할 대가만큼 거듭남이 가치가 있는 것인가? 이렇게 되물어 볼는지 모른다. 거듭남은 자기 인격 속에 든 지옥에 기울려는 경향성을 한쪽에 내려놓는 실제적인 작업이다. 퇴보되는 상태에 우리가 있을 경우, 우리는 자신 속의 악과 헤어진다는 것을 아주 큰 손실로 여길 것이다. 그러나 이 손실이라는 것을 비용으로 계산하여 처리한 뒤, 우리가 알게 되는 것은 그것들과의 결별로, 그것들이 없으니까 더 높은 행복이 우리에게 있다는 것이다. 자신 속의 악과의 결별은 열심히 자기 속의 악이 바래고 추구한 어떤 것과의 헤어짐이고, 이는 마치 온 몸을 죽이려 들 듯한 질병과의 헤어짐과 같은 것이다.
우리의 신체는 우리에게 꼭 필요한 부분, 우리의 행복에 불가결한 것인 듯 여겨질 것이다. 그러나 영체로 사는 영계에서 우리는 이전의 육체를 결코 갈망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그것이 없는 덕분에 우리는 더 자유로워졌기 때문이다. 자연적인 것에로 퇴보되는 삶이 없으면, 우리는 더 자유로워지고 더 행복해지게 된다. 사실 거듭나는데 드는 비용은 실제라기 보다는 오히려 가상적인 것이다. 그 이유는 우리가 포기한다는 것은 이기심이라는 비용이고, 거듭나기 위해 우리가 작별하는 그것들은 무용지물보다 더욱 나쁜 것이기 때문이다. 작업 비용은 그에 대한 본성과 그것을 행하는 수단을 자동으로 밝혀 준다.
아주 피상적으로 판단하는 사람의 경우, 이렇게 말한다. “나는 아예 거듭나고 싶지 않아. 그 이유는 그것을 시도하면 할수록 나를 골치 아프게 하는 것을 더 늘어나게 할뿐이니까…” 이런 생각, 심정 상태는 비단 위의 사람 정도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고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누구에게나 접근되고 있다. 그 이유는 우리가 뭔가 잘해 보려고 하면 이전에 전혀 느끼지도 못했던 악들이 퉁겨 오르기 때문이다. 의를 행하기 전 우리는 더 많은 편안감을 갖고 있었다고 생각될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어떤 종류의 편안감이었을까? 아마 그것은 이미 존재하는 위험을 알아차리지 못했던 이유에서 가진 거짓 안전일 것이다. 아마 소경이 구덩이를 보지 못한 관계로 마음 편하게 그쪽으로 유유히 걷는 때의 모습일 것이다. 거듭나는 과정으로 인해 우리는 닥칠 위험을 내다보고, 아마 어느 일부는 지금 겪고 있을는지 모른다. 따라서 그것을 해결하거나 피할 때까지 우리는 편안해질 수 없다.

영적 시험

영적 시험은 거듭나는 사람에게만 오는 시험이다. 그 외의 것들은 영적 시험이 아닌 단지 세상적인 흥분일 뿐이다. 영적 생명을 위해 자신 속의 악과 싸우지 않는 이상 어느 누구도 영적 시험을 겪는게 아니다. 만일 어떤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을 수가 있다고 하면, 주님께서는 그 나무를 더 정정해 주셔서 더욱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있게 해주신다. 악인의 경우, 그는 자기 마음을 바꿀 의도가 없으므로 하느님을 경외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거듭나는 사람은 그의 인격이 변화되고 있는 중인 바, 그에게 오는 시련은 그의 인격을 승화시키는 수단이 되어 준다.
어떤 병자의 경우, 건강을 회복시키는데 있어서 자기의 생활 습관, 자기가 늘 좋아하던 음식을 바꾸어 먹어야 하는 것은 상당한 노력을 요하고 그에겐 일종의 시련이 된다. 그러나 그 시련은 그 사람에겐 그의 건강한 육체를 위한 단련 과정인 바, 매우 가치 있는 일일 것이다. 과거에 먹던 음식이 바뀐 결과 그의 피는 다른 상태로 개선되어 그의 건강은 회복된다. 영적인 측면도 이와 비슷하다. 인간이 자기 삶을 개혁할 때, 그는 차츰 그의 옛 애정, 생각, 행동 지침을 새 것으로 대체해 가서 새 사람이 된다. 우리가 우리 속의 악에 저항할 때만이 선이 우리에게 와질 수 있다. 영적인 선을 우리가 붙잡는 방법은 악을 금하는 생활밖에 더 있을 수 없다. 한 마디로 우리는 하느님과 세상 것을 아울러 섬길 수 없다. 악이 관여된 어떤 것도 천국에는 가지고 갈 수 없다. 악은 지옥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천국에 간다면 반드시 우리는 우리 뒤에 지옥에 속한 모든 것을 먼저 내려놓아야 할 것이다. 천국에 간다는 것은 천국적 원리를 이해하여 사랑해서 생활에 응용한다는 것과 같은 말이다. 실지로 이는 자신 속의 결점을 내려놓고 그 반대되는 장점을 획득한다는 말이기도 하다.

용기를 북돋우라

이제, 위와 같은 진리의 빛으로 자신을 체크한다면 자신이 영적 시험을 겪고 있는 지를 발견하면서 오히려 자신의 용기를 북돋울 수 있다. 그 이유가 이와 같은 체크는 자신이 영적 원리에 진지한 태도로 임하고 있다는 것이요, 그런 고로 해서 자신이 거듭나고 있다는 것을 암시해 주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다면, 자신 속의 악이 들춰내어 질리 만무이고, 그 악에 저항하지도 않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꾸준히 노력해 가노라면, 시험 속에 위험이 존재하지도 않는다. 주님께서 말하시는 바, “네 사는 날을 따라서 능력이 있으리로다” (신명기 33:25)라고 약속하시기 때문이다. 우리 속에서, 우리를 위해 악과 대항하시는 분은 우리가 아니라 주님이시다. 어떤 것도 그분이 아니면 정복할 수 없다. 그분은 자비의 섭리로 인간이 믿음의 진리와 사랑의 선을 간직하는 것이 가능할 때까지 인간으로 그의 생명의 목적인 내면의 믿음과 사랑에로 들어가도록 허용하시지 않는다.
모든 시련에는 그 시련에 벌충(보상)되는게 존재한다. 어두움이 전혀 없을 경우, 아마 우리는 별에 관해 아는게 아무 것도 없을는지 모른다. 선을 위해 일하는 사람의 모든 것은 주님의 영적 선 쪽으로 향해 가고 있는 것이 된다. “주님의 모든 길은 그분의 언약과 율례를 지키는 자에게는 자비와 진리이다.” 우리가 악을 미워하는 것을 배우면, 헤어지기 힘들었던 악도 쉽게 포기된다. 거듭나는 삶은 단번에 성취될 수 있는 가벼운 문제가 아니요 생명에 이르는 일생의 작업임을 비유는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 “끝까지 참고 견디는 자는 구원되리라.” 이와 같이 주님께서 계시록을 통해 격려하고 계신다.

31
잃었던 양 한 마리
– 구원하시는 주님의 사랑 –

성서 본문: 누가복음 15장 3-7절

3. 그래서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셨다. 4. “너희 가운데 누가 양 백 마리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 중에서 한 마리를 잃었다면 어떻게 하겠느냐? 아흔 아홉 마리는 들판에 그대로 둔 채 잃은 양을 찾아 해매지 않겠느냐? 5. 그러다가 찾게 되면 기뻐서 양을 어깨에 메고 6. 집으로 돌아 와 친구들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자, 같이 기뻐해 주십시오. 잃었던 양을 찾았습니다’ 하며 좋아할 것이다. 7. 잘 들어 두어라. 이와 같이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 아홉보다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는 것을 하늘에서는 더 기뻐할 것이다.”

하느님의 사랑

하느님의 사랑은 주시기만 하는 사랑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가 세상에 오신 것은 악과 죄로 잃어버린 이들을 구원해 주시려는 것이다. 그분이 오신 것은 하느님의 분노를 피할 수 있게 하는 어떤 책략이 있어서가 아니다. 그 이유는 신성한 인격은 분노할 수도 없고 여하튼 사랑 않는 속성은 갖고 계시지 않기 때문이다. 하느님은 본질면에서나 인격 측면에서 하나이시다. 구약 성서 속의 여호와와 신약성서 속의 예수 그리스도는 동일한 인격이시다.
그러나 두 개의 각기 다른 교회 처방인 이스라엘 교회와 기독교회, 이는 한 분 신성한 인격에서 두 가지 다른 양상으로 돌출된 것이다. 아버지, 아들, 성령은 한 분 신성한 품성의 세 가지 다른 국면, 한 인물 속에 있는 원리들의 삼위일체인 것이다. “들어라, 이스라엘아, 주 너희의 하느님은 한 분 주이시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도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다”라고 말씀하셨다. 오늘 비유는 주님의 사랑에 관한 속성 또는 그 품질에 관한 아름다운 예증이다.

바리사이파인과 율법학자들

이들이 예수를 보고, “이 사람은 죄인들을 환영한다”라고 말했을 때, 예수께서는 즉각 이 비유로 대답하셨다. 그리고 “그들은 나의 양이다. 나는 잃었던 자들을 찾아 구해 주러 왔다.”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회개시키기 위해서 왔다. 너희들은 의사가 필요치 않지만, 그들은 병든 자들이다.” 자기 공적을 내세우는 바리사이파인이나 율법학자들은 죄인들과 세리들을 경멸하고 미워했는데, 특히 세리들은 로마를 위해 세금을 거둔다고 해서 같은 유대인이지만 배반자 취급을 당했던 것이다.
자기가 잘난 인물이라고 은근히 추켜 대는 바리사이파인들의 경우, 정의는 자기들로 버림받은 자들을 멀리하여 가능한 한 그와 같은 인격자와 연계되지 않도록 요구하고 있는 듯 여겼다. 그러나 주님의 경우, 정의는 위와 같은 자들을 회개시켜 구원받도록 하기 위해 친밀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고 말하신다.
이기적인 바리사이파인이나 율법학자들은 자신이 상당히 중요하다고 하는 착각으로 들떠 있어서 정의에 관한 주님의 생각을 납득할 수 없었다. 오히려 그들에게는 주님이 죄인들과 어울리는 것은 그분이 진정한 메시아가 아니다는 것에 대한 증거였을 뿐이다. 그 이유는 그들에게 오실 메시아는 자기들이 중요하다는 것을 더 한층 높여 주어 한층 더 죄인들과 멀리하게 해주시고 더욱 위대해지게 해줄 것임을 기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추론하고 있는 그들인지라, 죄인들을 사랑하시면서도 바리사이파인들이나 율법학자들을 추켜주시지 않는 예수님이 그들을 위한 진정한 메시아일 수 없다고 평가할 정도가 아니라 협잡꾼일 것이라고 까지 생각했던 것이다.
이렇게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 전체에 관한 완전한 오류 속에 있었던 것이다. 사실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진정한 인격을 받아들일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었다면 구약 성서 자체가 그들에게 주님의 속성을 가르쳐 주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에제키엘 18장 23절에서 주님은 이렇게 가르치신다. “그가 못된 행실을 한 자라고 해서 사람이 죽는 것을 내가 기뻐하겠느냐? 주 야훼가 하는 말이다. 그런 사람이라도 그 가던 길에서 발길을 돌려 살게 되는 것이 어찌 내 기쁨이 되지 않겠느냐?” “악한 자는 그 길을 버려라. 의롭지 못한 자는 그 생각을 버려라. 그리고 주께로 돌아와라. 그러면 그분은 너에게 자비를 베푸시리니, 그분은 통째로 용서해 주실 수 있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영적 의미들: 목자

일 백 마리의 양을 가진 사람은 주님, 신성한 목자, 전 인류의 소유자, 인간 안에 든 선과 진리의 소유자를 표현하고 있다. 구약 성서에서 여호와는 목자라 불리고 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이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라.” 신약 성서에서는 그분 스스로 칭호를 신성한 목자로 부르신다. “나는 선한 목자라…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다.”

구, 신약 성서 모두에서 인간은 주님의 양이라고 불리고 있다. “그분은 우리 하느님이시오, 우리는 그분의 풀밭에 있는 백성, 그분의 수중에 있는 양떼들이다.” 신약 성서에서,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나는 내 양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라 온다. 나는 그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준다.” 추상적으로 볼 때 양은 이타애 또는 이웃 사랑을 표현한다. 넓은 의미에서 우리 마음속의 양이란 애정 속에 있는 선한 모든 원리들이다.

100

100이란 10이나 1000등과 같이 한 바퀴 돈 숫자(rounding number)인 바, 모든 것(all)을 표현한다. 양 일 백 마리란 마음 속에서 거듭나고 있는 모든 애정, 또는 선한 모든 품성을 말한다. 그래서 100이라는 숫자는 수를 세거나 무게를 달 때 또는 비교할 때 어떤 표준으로 흔히 사용된다. 그래서 흔히 쓰는 말 가운데, “누구도 100퍼센트 유감없게 행동 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라는 말도 있다.

한 마리 양을 잃음

일 백 마리 중에서 한 마리 양을 잃는다는 것은 우리의 선한 품성 또는 미덕 중 한 가지를 잃게 되는 것을 말한다. 이는 우리 속의 어떤 선한 품성이 인격의 퇴보에서 고통받을 때 그 품성이 지닌 선함을 잃는 경우, 또는 그 품성의 생명력이나 활동력을 잃게 되는 경우이다. 다시 말해 우리가 그 품성을 우리 마음이나 인격으로부터 잃게 되는 것이다. 이 잃어버림은 장차 그 품성이 할 수 있는 일, 선용(use)을 우리로 잃게 만든다. 흔히 그 선한 품성에 반대되는 악에 빠져들 때 우리는 우리 속의 어떤 선한 품성을 쉽사리 잃는다.

순진(innocence)

정도를 벗어난 마음으로 인해 잃어버린 양 한 마리, 선한 품성이란 특별히 꼬집어 말한다면 순진이라는 원리이다. 순진이란 무지의 순진인 어린아이들에게서 겉으로 발산되는 것과 같은 순진, 단지 때묻은(부패)데서 자유로운 소극적인 상태만을 말하는게 아니다. 영적인 순진이란 지혜로운 순진이다. 이 내향적 순진은 주님을 바라보는 데에서, 자신 스스로 볼 때는 선하고 진정한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100% 인정하여 주님의 원리만이 선하고 참되어서 그 원리를 삶에 적용하여 사랑하려는 그 속에 존재한다. 순진은 의지 부분에 있는 품성인 바, 의지가 주님께로 열려져 그분에게서 생명을 받아 존재할 수 있는 품성이다.
이 순진은 모든 선한 품성의 중심 원리이다. 그리고 이 품성은 자아 사랑이나 자아 총명과는 정 반대 되는 품성이다. 이 순진은 인간이 뒤로 미끄러지면서 잃어버리게 된다. 그 이유는 타락이란 정신적 삶의 국면이 퇴보되어 더 낮은 형태 안으로 가라앉는 것이기 때문이다. 특히 타락은 주님을 바라보는 상태가 점점 더 실패 쪽으로 치닫게 하여 주님이 자신을 인도해 주기를 바라기 보다 자신 스스로 자신을 인도할 수 있다는 쪽으로 고집 부려 가기 때문이다. 이렇게 인간이 타락된 이래, 주님의 노력은 언제나 인간에게 잃어버린 순진을 되찾어 주려는데 있어 왔다. 즉 주님을 신뢰하는 어린 아이 같은 심정 상태, 자아가 아닌 주님을 바라보고 의지하는 마음 상태의 회복에 그분의 노력은 있어졌다.
만일 어떤 사람이 자기 속의 선한 품성에 관해 생각하되 그 품성이 자기 것이라고 결론 맺어 주님과 그 품성 사이에 있어야 할 연결을 끊는다면, 그의 미덕은 천국적 품성과 생명을 잃게 된다. 그 이유는 그 선한 품성 속의 생명은 순간 순간 주님에게서 받아 살아 있기 때문이다. 그가 자기 속의 선한 품성을 주님의 선물로 인정할 때만이 생명은 주님에게서 흘러든다. 이 미덕들이 자신의 것이라고 우긴다면, 그는 순진이라는 품성을 잃게 된다.

광야

잃은 양이 순진인 바, 이것 없이 아흔 아홉 마리의 양, 우리 속의 모든 다른 미덕들은 거의 생명이 없는 조건, 광야 속에 남겨지게 된다. 순진이 없으면, 즉 주님을 인정하여 사랑하지 않고서는 모든 다른 미덕들은 신성한 목자의 현존이 없는 상태, 정신적, 영적 광야에 처하고야 마는 것이다. 결국 많은 위험이 도사리고 있게 된다. 순진이 없으면 자기 속에 있다고 하는 모든 미덕들은 자기 잘난 것, 자아 공적이라는 것에 오염되어 있다. 그러나 주님은 순진이라는 잃은 양을 정신적인 우리(울타리) 속에 있도록 해주시려 노력하신다. 다시 말해 우리로 주님을 인정하여 천국 삶에 마음이 열리도록 강구하신다는 말이다.

잃은 것을 찾으려 함

목자로서의 주님은 모든 영혼 속에서 배회하는 느낌과 생각, 방황하는 모든 정신 상태들을 주목하시면서 그분의 양떼를 언제나 지켜보신다. 그래서 그분은 거룩한 말씀을 내보내거나, 천사들을 시켜서 잃은 양을 찾아 구하도록 하시고 있다.
이와 같이 하느님이 도우시는 원리를 예증해 주는데 있어, 양이라는 짐승은 이야기 속의 의미를 명백히 알게 하는데 최적의 짐승이다. 그 이유는 목자의 보호를 벗어난 양은 집안에서 배회해서 집안의 짐승인 개나 말 같은 집짐승의 위험에 노출되는게 아니라 들짐승의 위험을 우리로 금방 연상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순진이라는 원리 없이, 우리 속에 있는 선물로 받은 대부분의 좋은 것들은 영적 광야에 남겨져, 그의 생각과 애정들 모두 희미해지고 헤매게 되는 바, 주님께 되돌아 옴, 주님을 쳐다보지 않고서는 어느 것도 원 상태로 복귀시킬 수 없다는 것을 느낄 수밖에 없다. 회개로 삶을 수정하는 방법만이 주님과 결합되게 우리 마음을 본래 위치로 되돌아 가게 해준다.
신성한 목자로서의 주님은 우리가 정신적인 양 한 마리, 내향적 순진이라는 원리(주님을 찾는 습관, 주님을 사랑하려 애쓰는 습관)를 잃은 것을 보시면, 그분은 이 잃은 양을 구하러 우리 마음에 출두하신다. 출두하시는 방법에서, 그분은 우리의 합리적 마음이 주님의 도움 없이는 “너희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라는 위대한 사실을 상기하도록 명백하고 강경한 어떤 진리를 각자 마음의 수준에 따라 보내 주신다. 갖가지 방법을 동원하시고, 암벽 같은 비탈지고 험난한 곳까지 다 뒤져서라도 그분의 잃은 양을 찾으러 애쓰신다. 그래서 만일 우리가 기꺼이 순종한다면, 그분은 우리 속의 영적인 양, 순진이라는 심정 상태를 회복시켜 주실 수 있다. 사실 우리 전 생애를 망라해서 주님은 우리가 잃어버린 양을 구해 주시려 강구하시고 계신다. 그분은 잃은 것을 찾을 때까지 그 노력을 결코 중단 않으신다. 단지 우리가 기꺼이 그분의 노력에 부응하고 있다면 말이다. 우리 모두는 이러한 하느님의 조력이 필요하다. 그 이유가 우리는 양과 같아서 쉽게 악에 물들고 말며 제각각의 방법대로 놀아나기 때문이다.

어깨

“그러다가 찾게 되면 기뻐서 양을 어깨에 메고…” 어깨, 이를 수단으로 우리는 힘을 발휘하거나 운반해야 할 뭔가를 떨어트리지 않게 들어 올려 지지할 수 있다. 그래서 어깨는 우리의 힘, 에너지를 표현하게 된다. 그래서 힘을 과시해 보라고 할 때, “네 어깨로 마차를 움직여 보라”고 한다. 이 어깨를 주님의 어깨로 관련지어 생각한다면, 주님은 모든 신성한 권능을 발휘하셔서 타락한 인간으로 하여금 그의 생명의 근원이 주님이심을 알고 그분과의 연결이 회복되게 하신다는 뜻을 암시해 주시는 것이다.
그런데 이 어깨를 우리 측면과 관련지어 생각하면, 모든 정력을 잃어버린 순진을 회복하는데 쏟아서 자아 의존을 깨트려 생명의 근원이신 주님을 찾는데 정진하도록 우리가 부름 받고 있다는 말이다. 이리하여 천국에서 흘러드는 생명이 재 건립된 삶과 직접 접촉되어야만 잃었던 순진은 우리 속 정신적 양떼에 합류된다.
잃었던 순진을 되찾았을 때, 주님을 완전히 인정하는 마음 상태를 회복했을 때, 우리 마음속에 있는 모든 품성을 재촉하여 영적 순진으로 꽉 찬 삶을 향하여 정진하게 하면서 주님만을 의지해야 함을 더욱 인정하는 쪽으로 온 정성이 쏟아지게 한다. 한 마디로 우리 의지 속의 모든 에너지가 순진이라는 원리를 회복시켜 가는데 집중하게 된다는 말이다. 우리는 그 원리를 우리의 정신적 어깨 위에 올려놓고 정신적 고향으로 운반하면서 영영 잃었을 뻔했다가 찾은 기쁨에 듬뿍 젖어야 한다.
이 비유는 인간을 구원하시는 주님의 할당 부분을 보다 더 진열해 놓고 있다. 구원의 역사 중 또 다른 할당 부분, 인간의 부분은 15장 끝 비유인 “방탕한 아들”이 제 정신을 차려 과감히 일어나 아버지께 돌아가는 내용에서 더 뾰족이 다루어지고 있다.

기뻐함

잃은 양을 찾은데 대해 모든 이가 기뻐하고 있다. 잃었던 때의 슬픔만큼 찾은데 대한 기쁨 역시 커진다. 거듭나는 삶을 발전시켜 가는 사람, 그는 천국적 애정과 선용으로 주님과 하나 되어 가는 자신의 모습에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과거 당연시했던 삶으로 영적 생명의 드높은 품성을 세상욕이나 자아 찬양 속에 익사시킬뻔 했음을 더욱 의식해 간다. 그래서 이렇게 외친다. “오 하느님, 깨끗한 심정으로 나를 창조시켜 주소서, 올바른 영이 내 안에 있어 새롭게 되게 하소서… 당신의 구원으로 있게 되는 기쁨 속에 저를 회복시켜 주소서, 당신의 자유로운 영으로 위를 쳐다보게 해 주소서…”
주님을 찾는 질서 있는 삶에 되돌아 온 그는 주님으로부터 자신에게 흘러드는 사랑을 느끼게 된다. 자기의 영적 삶이 회복된데 대해 그는 기뻐한다. 되찾은 순진의 상태, 이 상태는 지혜의 순진이요, 이 순진은 그의 마음을 천국 쪽에 열리게 해서 그로 하늘과 교통이 있게 하여 하늘의 기쁨을 만끽하게 한다. 그의 기도는 이러할 것이다. “오 주여, 당신의 심판으로 나를 도우소서, 저는 잃은 양과도 같이 배반했었나이다. 당신의 종을 찾아 주소서. 저는 당신의 계명을 잊지 않겠나이다.” 회개하는 마음을 향해 주님은 진리를 더 명백해지게 해주신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신다. “내가 너에게 말한 이 모든 것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머물러 너희의 기쁨이 충만해지도록 해주려는데 있다.”

친구와 이웃들

“…집으로 돌아와 친구들과 이웃들을 불러모으고 ‘자, 같이 기뻐해 주십시오. 잃었던 양을 되찾았습니다.’” 우리의 영적 품성 속에 있는 친구와 이웃이란 선한 자연적 품성들인데, 이것들도 함께 기뻐하는 곳으로 불리워 진다. 그래서 하늘과 영적 마음이 교류되어 생산되는 기쁨에 같이 응답하며 느낄 수 있어 한 마디로 영적 마음으로부터 자연적 마음에 이르는 온 마음이 다 함께 기뻐하게 된다.

죄인이 회개함을 기뻐함

“잘 들어 두어라. 이와 같이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 아홉보다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는 것을 하늘에서는 더 기뻐할 것이다.” 이 마지막 구절은 이 비유를 해석하려는 많은 이들에게 장애물이 되고 있다. 그 이유가 죄에서 자유로운 온전한 삶을 꾸리는 사람보다, 잔뜩 죄를 짓고 막판에 회개하는 것이 액면가 이상의 보너스가 제공되는 듯 여겨지기 때문이다. 사실 그렇게 생각하려 드는 것은 이 구절 속의 의미나 이 구절이 표현하는 힘(호소력)을 잘못 이해하는데서 비롯될 뿐이다. 본문은 주님께서 의로운 자보다 죄인을 더 사랑하신다고 말하고 있지 않다. 단지 죄인이 회개하는 것에 기뻐한다고 말하고 있다.

예증

위의 구절을 한 가지 예를 들어 생각해 본다면 보다 더 확실해지리라 본다. 만일 어떤 부모에게 자녀가 여럿 있다고 하자. 그중 한 명은 연약하고, 나머지는 건강하다면, 돌보아야 할 부모의 관심은 허약한 아이에게 더 쏠리는 수밖에 없고, 다른 자녀들이 볼 때, 부모는 비실거리는 동생을 자기들보다 더 사랑하고 반기는 듯 비쳐질 수 있는 것이다. 사실상 자식이 지닌 연약함이라는 고통이 부모의 동정심과 애정을 다른 자녀보다 더 끌어내게 한 것이다. 부모의 노력으로 연약했던 아이의 건강이 회복된다면, 아마 늘 건강한 다른 자녀들보다 더 기쁨을 가져다주는 듯 여겨질 것이다.

영적인 잃음

영적으로 말해서, 순진을 상실함은 우리에게 큰 걱정거리를 안겨 준다. 그래서 잃은 양을 찾아내 양 우리에 도로 집어넣었을 때, 우리는 우리 속에 있는 여타 미덕들로 인해 기뻐함보다 더 한층 기뻐하게 된다. 이렇게 더 기뻐하게 되는 이유는 순진이 우리 속의 모든 선함 품성에 색조를 갖게 해서 기품을 잡아 주기 때문이다. 아마 음악 측면에서 볼 때, 음질(tone)에 해당될 것이다. 순진이 없으면 우리 속의 모든 좋은 품성은 팍팍해져 광야에 있는 것이 된다. 그 이유는 순진이 다른 품성에 생명이라는 활력을 채워 주기 때문이다. 따라서 순진이 회복됨으로 인해 갖는 기쁨은 우리 속의 좋다고 여겨지는 여느 품성의 회복보다 더 한층 높은 기쁨을 실제로 느낄 수밖에 없게 해준다.

회개할 것 없음

이렇게 해서 인간의 온 마음은 “회개할 것 없는” 다른 미덕으로 갖는 기쁨보다 잃었던 양의 되돌아옴으로 더 많은 기쁨으로 충만 된다. “회개할 것 없음”이라는 말은 회개가 필요했음이라는 상태가 과거에 이미 있어졌기 때문에 지금은 회개할 필요가 없다는 말이라고 보아야 한다. 모든 우리 속의 속성들은 때가 찰 때마다 회개를 필요로 한다. 단지 바리사이파인들이 자주 해 왔던 회개, 즉 바깥으로 보기에 회개하는 모습, 외적일 뿐인 정의로움은 그 어느 것도 천국에로 가지고 갈 수 없다. 이런 회개함에 천국은 기뻐하지 않는다.
그 이유가 마지막 절에서 언급하는 기뻐함은 천국에서, 즉 천국적 인격을 지닌 사람 사이에서 있게 될 것이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주님이 어떻게 느끼시든 인간은 불평할 수 없다. 무한이신 그분은 인간 세계의 갖가지 실례나 사건 저 너머에 존재하신다. 천국은 조건(condition) 속에 있다. 그리고 천국은 인간 안에 존재한다. “하늘 나라는 너희 속에 있다.” 따라서 천국의 기쁨은 내면의 기쁨, 영적인 거듭나는 애정이 향유하는 기쁨이요, 거듭나서 기쁨을 갖는 애정을 소유하려면 우리 속의 모든 품성보다 순진의 상태가 회복되는데 있다. 영적 순진은 모든 천국적 품성의 내향적 기초이다.

허용

주님의 섭리가 실제 운용됨에서, 어떤 이의 경우 그는 죄 가운데 푹 빠진 뒤 자기 속의 악을 보고 그 악을 혐오하게 됨으로 인해 특별한 죄에 노출됨이 없이 생활한 평범한 사람들 보다 거듭나는 삶의 더 높은 상태에 도달되는 경우도 있다. 그 이유는 평범한 생활, 특별한 악에 빠지지 않고 그런 대로 삶을 꾸리는 사람이나, 죄로 헝클어진 삶을 사는 사람이나, 누구나 공히 자아 공적이나 자신 속에 실재하는 악에 기울려는 경향성에 무지해 있기는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어떤 마음들은 그 마음이 죄를 혐오하는 상태를 얻기 위해 그 죄에 관한 실제의 경험이 요구되어질 때도 있다. 이런 사람이 회개하여 개혁된다면 더 높은 수준으로 거듭 날지 모른다.
위와 같은 상황이 다소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주님께서는 모든 인간에게 각자의 거듭남에 필요하시다면 위의 상황을 경험토록 허용하신다. 주요한 문제는 우리가 어떤 조건으로부터, 또는 어떻게 잘 해냈는지에 있지 않고 마지막 우리 속에 남는 것, 출생되는 것이 무엇이냐일 것이다. 그러나 회개와 개혁, 그리고 거듭남은 모든 이에게 절대 필요한 순서요, 과정이다. 악을 금하는 것, 이것이 우리에게 있어야 할 제 일 번이요, 그 다음 자신이 할 수 있는 선행을 주님의 이름으로, 그분을 전적으로 의지하는 가운데 작은 것부터 해 나가야 할 것이다. 중요한 우리의 할당 부분은 그분의 계명을 준수하는 일이다.

선한 목자
아주 초기 기독교회, 이 교회는 그 뒤의 교회인 첫 기독교회보다 더 어린 아이 같은 상태에 있었다. 그들은 잃었던 양을 집으로 데려오는 선한 목자로서의 주님의 모습 속에 큰 기쁨을 가지고 있기를 사랑했었다. 이들이 그러했으리라는 것은 그 당시에 관한 유물들에서도 발견해 볼 수 있다.
그들이 마음에 담았던 주님의 모습, 끝이 없고 부드러운 그분의 사랑을 오늘 우리 가슴에 간직한다는 것은 무척 고무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그 이유는 우리가 하느님의 사랑이 담고 있는 속성을 음미해 보겠다고 일어설 때, 우리는 그 사랑 속의 품성을 심정에 충분히 받아 살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 주님은 우리를 악에서 빼내시어 선함으로 이끄시려고 언제나 역사 하신다. 우리의 죄들은 장사꾼의 장부같이 채권자와 채무자처럼 천국 속에 쌓여 있는게 아니다. 그러나 죄란 아팠다가 건강해지는 것과 비슷할는지 모른다. 따라서 우리는 삶의 법칙에 의거 죄에서 빠져 나오는 삶을 스스로 노력해야만 한다. 그래서 과거의 죄에서 스스로 헤어 나와 자신 속의 악을 지긋지긋하게 여기면서 다시는 악의 영향권에 말려들지 않을 때, 주님께서는 그를 부드럽게 인도해 주시어 우리의 노래는 다음과 같으리라. “야훼는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어라. 푸른 풀밭에 누워 놀게 하시고 물가로 이끌어 쉬게 하시니 지쳤던 이 몸에 생기가 넘친다. 그 이름 목자이시니 인도하시는 길, 언제나 곧은길이요, 나 비록 음산한 죽음의 골짜기를 지날지라도 내 곁에 주님 계시오니 무서울 것 없어라. 막대기와 지팡이로 인도하시니 걱정할 것 없어라. 원수들 보라는 듯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부어 내 머리에 발라 주시니 내 잔이 넘치옵니다. 한 평생 은총과 복에 겨워 사는 이 몸, 영원히 주님 집에 거하리이다” (시편 23편).

32
잃었던 은전
– 잃었던 진리의 재발견 –

성서 본문: 누가복음 15장 8-10절

8. “또 어떤 여자에게 은전 열 닢이 있었는데 그 중 한 닢을 잃었다면 어떻게 하겠느냐? 그 여자는 등불을 켜고 집 안을 온통 쓸며 그 돈을 찾기까지 샅샅이 다 뒤져 볼 것이다. 9. 그러다가 돈을 찾게 되면 자기 친구들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자, 같이 기뻐해 주십시오. 잃었던 은전을 찾았습니다’ 하고 말할 것이다. 10. 잘 들어 두어라.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느님의 천사들이 기뻐할 것이다.”

요약

소홀하게 취급한 진리는 그 진리를 사려 깊게 사용할 때까지 실지로는 잃어버린 상태에 있다. 진리를 새롭게 인식하여 실제에 응용할 때 그 진리는 그 진리가 가르치고자 하는 선과 하나를 이룬다. 그리고 이 선은 진리의 내적 생명인 것이다. 우리가 진리와 선을 가지고 정신적 연결을 새롭게 할 때, 우리는 모든 선과 진리의 근원이시오, 모든 생명의 근원이신 주님과의 연결도 새로워진다. 이렇게 새로워진 연결과 더불어 우리는 영적 기쁨의 상태에로 들려진다.

글자적 이야기

세리나 죄인들과 함께 어울리시는 주님을 목격한 위선적인 바리사이파인과 율법학자들은 주님을 죄인으로 취급하여 백성들에게 그분의 영향력이 미치는 것을 파괴시켜 보려 발버둥쳤다. 이런 그들의 악한 인격으로 인해 그들은 사회에서 쫓겨나다시피 한 사람들과 주님이 왜 어울리시는 지에 대한 천국적인 동기를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했던 것이다.

그릇된 판단

자기 위주로 판단하는 악인은 선한 사람들의 동기를 거의 이해 못한다. 이기적인 바램과 계획만을 아는 이들은 타인들이 자기들과는 전적으로 다른 동기에 의해 활동된다는 것을 조금도 보지 못한다. 도덕적 인격의 경우도 위와 같아서 보다 수준이 낮은 인격은 타인 속에 있는 순수한 동기가 보여질 때 매우 의심스러워한다.

응답

악한 자의 비난이나 모략질에 대한 가장 효과적인 응답은 주님께서 15장 첫 문단에서 바리사이파인들에게 대답하신 것들이다. 즉 그분이 그들에게 보여준 것은, 잃은 것을 찾아 주어야 되지 않겠느냐는 것, 신성한 사랑은 가능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모든 죄인을 구해 주신다는 것일게다. 주님이 죄인들과 어울리시는 것은 주님께서 죄인처럼 되고자 해서가 아니라 죄인들이 그분처럼 되도록 유도해 주시려는데 동기가 있다. 선한 사람은 자기 도움을 요청하는 모든 이들에게 자기가 해줄 수 있는 선을 행하는 것을 의무로서 생각하고 기쁜 사건으로 간주한다.

연결

두 비유, “잃었던 양”과 “잃었던 은전”은 인간 삶의 양 측면을 보여주면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잃었던 양”의 비유는 회개하는 인간의 의지 또는 심정 측면과 관계되고 있고, “잃었던 은전”의 비유는 회개하는 인간의 지성 또는 이해성 측면에 관계하고 있다. 그러므로 첫 비유는 인간의 심정과 애정 안에 있는 선과, 둘째 비유는 인간의 지성과 생각 안에 있는 진리와 관계된다.

여인, 은전(silver)

여인은 애정적인 요소들을 표현한다. 금이 선을 표현하는데 비해 은은 진리를 표현한다. 성경에서 진리를 사랑하는 마음(애정)을 가진 교회는 종종 여인, 처녀, 아내들로 표현되고 있다. 은은 진리로 특징 지워지는 수준인 삶의 영적 수준에 있는 것들을 표현하는데, 이에 비해 금은 선으로 특징 지워지는 수준인 천적 수준에 있는 것을 표현한다. “나는 주 구세주, 구속자이다… 나는 동을 위해 금을, 철을 위해 은을 가져오리라.” 이는 주님께서는 우리의 거듭남 속에 자연적인 선 대신에 내적이고 천적인 선을, 거칠고 매서운 자연적 진리 대신 영적 진리를 가져다 주신다는 말이다.

은전 열 닢

비유에서의 “은전”이란 그리스의 동전인데, 각 드라크마(drachma)는 약 15닢(cent)의 가치가 있다. 이 동전은 주로 매일의 생필품을 사는데 사용된 작은 동전이다. 이 동전이 열 개가 있었다. 열이란 표현적 차원에서 볼 때 모든 것(all)을 나타낸다. 따라서 은전 열 닢이란 주님의 말씀에서 온 실생활에 필요한 모든 진리를 표현한다. 여인이 은전 열 닢을 소유하고 있었다는 것은 신성한 말씀으로부터 진리를 풍부히 소유하게 할 애정(말씀을 사랑하려는 마음)을 모두 가지고 있었다는 말이다.

한 닢을 잃음

여인이 은전 한 닢을 잃었다는 것은 삶에 있어 중요한 진리 하나를 삶에 게을리 응용함으로 인해 진리를 잘 붙잡게 해주는 애정까지 잃었다는 것을 표현한다. 예를 들면, 어떤 교인이 많은 진리를 성경에서 끌어 올렸고, 그 진리들 모두 실용적 목적에 사용이 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그 진리들에 자기 애정을 두고 있음에도 어떤 경우, 즉 어떤 악한 느낌이나 거짓된 생각에 자신이 끌려들도록 허용할 때, 또는 자신의 나쁜 습관으로 인해 그 진리의 실용화를 게을리 하게 될 때, 정작 본인이 지녔던 어떤 중요한 진리는 자신의 정신적 눈에서 희미해지게 된다.

예증

예를 들어 한 가지 큰 진리를 거론해 보자. 영적 진리에 관한 모든 우리의 지식은 진리를 발견해 보겠다는 각자의 능력으로부터 발견되는게 아니라 주님이 진리를 밝히 알게 해주심으로 가능한 것이다. 이와 같은 큰 진리를 망각했다고 가상해 보자. 이럴 경우, 우리는 은전 한 닢을 잃은 것이다. 만일 우리가 거듭나려는 노력을 계속하고 있는 중이라면, 잃었던 것으로 인한 거듭남의 손실이 발견되어 느끼기도 할 것이다. 심할 경우, 그 손실은 영적 재난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까지 크게 확대될 수도 있다. 이런 영적 재난 속에서 자신이 주님께만 의지해야 한다는 위대한 진리의 실제 사용을 자신 속의 느낌이나 생각이 엉뚱해서 잃게 되었음을 언젠가 실감하게 된다. 아마 우리는 교회에 있어야 할 위대한 위의 진리를 이론상으로는 믿고 있겠지만, 삶이라는 자기 속에서의 실제 역사를 관조하는 데는 실패하게 된다.
그런데 자신이 정신적인 손실로 고통을 받았다는 것을 실감하기 시작했다고 가정해 볼 경우, 또는 신성한 섭리 속에 있는 진리들이 실제의 문제에 부닥쳐서 우리에게 명백한 어떤 해결을 주지 못함이 과거나 현재나 마찬가지라고 할 경우, 당장 우리가 해야 할 것은 무엇일까? 비유에서의 여자같이, 우리는 등불을 밝히고 잃어버린 진리를 찾아보아야 한다. 샅샅이 뒤지는 과정, 즉 정신의 집을 쓸어 내되 부지런히 하여 그 진리가 우리에게 되돌아 왔음을, 그 진리가 우리에게 명백한 해결책과 힘을 가지고 있음을 발견할 때까지 계속 쓸어 내는 노력이 있어야만 한다.

더운 지역에 있는 집들은 대체로 밖의 열과 강한 빛이 차단되도록 건축되어 있다. 이런 집들도 창문이 있긴 하지만 숫자가 적고 그나마 정문 외에는 대체로 닫혀져 있는데다가 집 자체가 낮은 형태요 돌로 짓는 경우가 많다. 마루라고 해보아야 흙바닥 그대로이다. 그래서 이런 집들의 내부는 상당히 어두운 형편인지라 작은 것을 분실할 경우 찾아내려면 쉽지 않게 되어 있고, 찾으려면 등불을 켜야 가능하다.

등불

본문에서의 불이란 촛불이라기 보다는 등불이라고 생각된다. 등은 교리를 표현하는 기구이다. 속이 빈 등은 사랑이라는 기름을 채우면 진리로 총명한 빛을 발하게 된다. 그리고 진리는 주님의 말씀에서 온다. “당신의 말씀은 내 발에 등불이요, 나의 길에 빛이옵니다.” 주님을 찾지 않는 사람은 악 가운데 빨려 들어 그 사람의 정신적인 빛인 진리를 잃고 만다.

찾아 헤맴

잃은 은전 한 닢을 찾기 위해 등불을 켜든 여자란 주님의 말씀을 실어 날라주는 교회의 교리로 가려고 하는 마음, 즉 진리를 사랑하려는 마음을 상징적인 모습으로 표현하고 있다. 주님의 말씀은 교리에 불이 켜지게 해주어 과거 진리를 우습게 여김으로 인해 우리에게 희미해지고만 중요한 어떤 진리를 다시 실감해 보려 하는 우리의 애정을 돕게 될 것이다.
예를 들면, 주님의 섭리는 일상 생활 속에서 꾸준히 역사 하신다. 이 위대한 진리를 우리는 자기 시야에서 때때로 잃어버린다. 이런 일들이 자주 반복되면서 그 진리는 우리에게 희미해지고 만다. 이 위대한 진리를 잃음으로 인해 우리는 실생활에서 용기를 잃거나 불평 등등으로 가득 차 자신에게 고통을 가하게 된다. 그러나 우리가 교회의 교리를 등불로서 추켜들어 주님의 말씀에로 가게 될 때 그 말씀은 우리를 비추게 되고 우리는 잃었던 진리를 찾을 수 있게 되어 예전처럼 회복된다. 우리는 주님의 말씀으로부터 빛을 획득하는데, 특별히 십계명으로부터이다. 우리는 도와 달라고 주님을 찾는다. 우리는 교회의 교리를 통해 하느님의 말씀으로부터 자신이 계발되고 확증도 할 수 있는 도움을 받기를 기대한다.

집안을 쓸어 냄

잃어버린 동전을 찾기 위해, 이 여자는 등불을 켜 들었을 뿐 아니라, 잃은 은전을 발견할 때까지 열심히 집안을 쓸어 내면서 찾아 헤맸다. 인간이 들어가 사는 집이란 의지를 표현해 주는데, 내향적으로 인간은 자기 의지 속에 거주한다. 인간의 의지 속에 그 인간을 통치하는 사랑(ruling love)이 존재하듯, 각 인간의 인격에도 존재한다. 집안을 쓸어 낸다는 것은 집안을 깨끗하게 하는 것, 집안을 질서 있게 하는 것, 집안에 있던 잡동사니들을 던져 내는 것 등등을 말한다. 따라서 우리가 등불의 도움을 얻어 정신적인 집안을 쓸어 낸다는 것은 우리의 의지 또는 심정의 상황들을 검증해서 의지 안에 있지 않아야 할 것들을 쓸어 모아 던져 내는 것을 말한다.

자아 검증

정신적으로 쓸어 낸다는 말은 우리에게 잘못된 것을 발견하기 위한 자아 검증을 당연히 함축하고 있게 된다. 우리가 집안을 온통 쓸어 내면, 우리는 그 속에 있는 것,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모든 것을 볼 수 있게 된다. 그 다음 우리는 좋은 것을 나쁜 것에서 분리시킨 뒤 나쁜 것만 치워 낸다. 그래서 우리가 자기 심정을 쓸어 낼 때, 심정 속에 널려져 있는 감각적 삶이라는 먼지가 여인이 찾으려 한 은이라는 진리를 덮어 우리로 볼 수 없게 했음을 알게 된다.
쓸어 내면서 우리는 먼지 같은 오물을 보겠지만 보는 이유는 그것들을 치워 내기 위함에서이다. 이와 같이 정신 속을 청소함에서 우리는 자신의 자연적인 애정들을 두껍게 덮고 있는 세상적 욕구와 감각적 삶을 제거하기 위해 들여다봄으로서 자신을 검증하게 된다. 지성을 쓸어 내면서 우리는 그 지성이 드높은 천국 원리들을 수용할 수 있게 준비한다. 마음의 등불이 비췸으로 드러나는 악들을 제거시켜 우리는 지성들을 질서에로 환원시킨다. 자신을 검증함으로서 우리는 속에 든 애정들 하나 하나에 관심을 쏟고 느낌이라는 상태에도 일일이 관심을 쏟을 수 있게 된다.

원인을 발견함

이러한 자아 검증, 그 결과 있어지는 깨끗하게 질서 잡힌 마음은 자기의 문제점이 무엇이었는지, 잃었던 진리가 과거 왜 자신의 느낌과 생각을 꽉 붙들지 못했는가에 대해서, 왜 자신이 진리를 진리답게 신뢰 못했는가에 대해, 일상 생활의 느낌이나 생각, 행동들 가운데서 진리를 신뢰하는데 왜 만족하지를 못했나에 대한 이유들을 발견하게 해준다. 이런 발견으로 과거 정신 속의 은전을 덮어 버렸던 악들을 던져 버릴 수 있다.

기뻐함

깨끗하고 질서 있는 상태로 집안을 관리하는 사람이 느끼는 만족감을 모든 이들도 한 번쯤은 동감했었으리라 본다. 진리를 사랑하는 모든 이들은 자기의 정신적 집이 깨끗하고 올바른 질서로, 감각적이고 더러운 것들을 내던지고 선하고 진정한 원리가 제각기 있어야 할 자리에 놓여진 마음 상태가 가져다주는 당연한 만족감을 느끼게 된다. 이런 깨끗한 마음 상태에서 우리는 실제를 위한 진리의 확신도 가질 수 있는 것이다.

테스트

사실상, 교리가 가르친 그대로의 진리를 확신하고 있는지에 대하여 그 확신도가 우리 마음에 여전히 결여되고 있음을 발견할 때가 많다. 그렇다면 우리는 자기의 정신적 집을 관리하는데 뭔가 문제가 있다는 것, 자기의 정신적 은전을 잃고 있다는 것, 그래서 내향적 집을 말씀으로부터 빛을 내는 교리라는 등불의 도움으로 깨끗이 쓸어 내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만든다. 진리는 우리 마음들을 깨끗하게 해주고 만족하게도 만들어 준다는 것, 진리는 심정 속의 악을 깨끗하게 제거한다는 것, 자칫하면 빠져들기 쉬운 감각적인 하찮은 것들을 진리만이 청소해 줄 수 있다는 확신은 가장 실제적인 방법에 속한다. 이렇게 기도해야 하리라. “깨끗한 심정으로 창조하시어, 올바른 영으로 새로워지게 하소서…”

근면, 끈덕짐

정신적으로 찾으려 하는 것은 실지로 이해성이 행동하는 것이다. 본문의 여인은 “부지런하게,” 그리고 잃은 은전을 발견할 때까지 열심히 찾으려 했다고 말하고 있다. 우리의 의지가 자신 속의 문제에 얼마나 흥미를 갖고 있느냐에 따라 지적 탐색의 강도는 결정되어진다. 우리가 정말로 심정에서 우러나온 흥미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면, 찾아내는 노력에서 중도 하차하지 않는다. 그야말로 찾아질 때까지 끈덕지게 노력할 것이다.
이에 대해 주님이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 “구하라 그러면 얻을 것이고, 찾으라, 그러면 발견할 것이며, 두드려라 그러면 열릴 것이다.” 온 심정을 다하여 이해성이 찾으려는 노력, 이 느낌과 생각이 행동이라는 실제 활동으로 이어질 때 그 노력은 결실을 맺는다. 우리는 자신이 사랑하는 것에 열심을 쏟는다. 그리고 성공적으로 마무리짓겠다고 다짐까지 한다. 원리가 우리에게 되돌아오는 것은 우리가 그 진리를 상실했음을 느낄 때, 그 진리를 직감해 보아야겠다고 작정하는 때이다. 진리가 우리와 함께 여전히 남아 있으려면, 그 진리를 일상 생활에 계속 적용하는 조건에서만 가능해진다. 마음과 삶 속에 있는 진리, 이 진리는 육체 속의 근육과도 같아서 정규적인 훈련이나 사용함 속에서 더 발달되고 더 증가된다.

진리가 파악됨

실제의 원리로서 진리가 지각되는 것은 어떤 경건함에 대한 보상으로 자동으로 주어지는게 아니다. 이는 정신적으로 준비된 상태의 결과이다. 영적 삶은 그 삶을 열심히 추구하는 사람에게, 그 삶을 자기 활동의 중요한 목적물로 삼는 사람에게 온다. 이런 사람이 마음의 영성을 확보할 때, 그 사람 주위의 바깥쪽 모든 것은 영적 삶의 주인이 아닌 종으로서 제각기 자리에 배치되어 움직이게 된다. “너희는 먼저 주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모든 것이 너에게 더해지리라.”

진리가 모호해짐

생활에 적용하지 않는 모든 진리는 우리에게 희미해진다. 예전에 우리가 붙잡고 있던 진리가 자신 속에 없음을 보게 된다면, 이는 우리가 그 진리를 일상 생활에 부단하게 응용하지 않았었다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다시 말해 그 진리가 진리이다는데 대한 확신을 갖고 있지 않았었다는 말이다. 또는 우리가 진리를 명확히 보고 있어야 하는데 그 진리 위에 먼지 같은 불순물이 덮이도록 방치하여 우리 삶에서 진리가 발하는 빛의 힘을 감소시켰다는 말도 된다. 예를 들어보자. 그런 확증이 없었는 듯 여겨질 때가 많다. 왜 그럴까? 가장 간단한 답은 우리가 신성한 섭리를 신뢰 못하여 자신의 방법만으로 삶을 해결해 보려 했기 때문이다. 이럴 때, 우리는 자기의 등불을 켜 두고 집을 쓸어 내면서 잃은 진리를 회복시킬 때까지 꾸준히 노력해야 한다. 우리는 감각이라는 먼지를 털어 내면서 영적 사항에 있는 보다 높은 기운 속에 자신을 들어 올려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대부분의 우리는 감각적인 것들, 먼지로 쉽게 마음을 뒤집어씌우는 경향이 짙다. 따라서 먼지를 꾸준히 정규적으로 청소해 내는 작업이 요구된다. 이와 더불어 우리 애정이나 생각, 행동을 고정시키려 할 때, 즉각 우리 마음을 승강시키려는 의도(억지)를 강행해 보는 습관을 정착시켜야 한다. 그러면 우리는 안쪽 측면에 있는 사항들로부터 생각하게 되고, 겉에 드러나 잘 보이는 낌새나 외관으로 판단하지 않고 정의로운 판단을 가능하게 해준다. 이리하여 매일의 각종 생각들에 영적 원리가 친숙하게 접근되어 있도록 자신을 간직해 가야 한다. 다짐해 둘 것은, 우리의 애정이나 생각, 또는 행동 중 어느 하나라도 썩어지게 되면 제 아무리 오랫동안 붙잡고 있어 왔던 진리, 자신의 생명이라고 큰소리 쳤던 진리라 해도 즉각 그 진리의 생명은 사라져 우리에게 사라져 버린 진리가 되고 마는 것이다.

선과 진리

15장 첫 비유에서, 목자는 남자였으나, 둘째 비유에서 은전의 소유자는 여자이다. 중심 인물들이 그렇게 된 이유는 남자를 남자로 특징짓는 사랑은 선을 사랑함이고, 여자의 특징적인 사랑은 진리를 사랑함이기 때문이다. 남자, 남편, 또는 여자, 아내, 처녀, 과부 등등과 같은 단어들은 취급되는 주제나 예증되는 불연속적인 수준에 따라 의미를 다양하게 표현해 준다. 내면 세계에서 남자는 사랑의 형체이고, 외면 세계로는 지혜의 형체인 반면, 여자는 내면으로는 지혜의 형체이고, 외면으로는 사랑의 형체이다. 이 세상에 사는 우리는 이 세상이라는 자연계, 바깥 세계, 외면의 수준에서 살기 때문에 남자는 지혜 또는 진리라는 지적 측면의 삶에 의해 특징 되어 구분되고, 여자는 사랑 또는 선이라는 애정 측면의 삶으로 특징 되어 구분된다.
그러나 우리가 주목해 둘 것은, 남자가 여자에게 매력을 느끼게 될 때 여자의 총명 때문이 아니라 선함 또는 사랑 때문이다. 그리고 여자가 남자에게 매력을 느끼게 될 때, 남자의 선함 때문이라기 보다는 총명 때문이다. 이렇게 되는 모습을 볼 때,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내면은 그 내면과 같은 것을 끌어당기고, 외면은 자기 외면과 다른 것을 끌어당긴다는 것이다.

친구와 이웃

우리의 영적 성질 속에 있는 친구나 이웃은 우리의 선한 자질들이다. 이 자질들이 우리와 기쁨을 나누자고 본문에서 불려지고 있다. 천국에서 오는 영적 마음과 자연적 마음이 서로 손바닥을 마주치듯 응답하고 느끼고 즐기도록 부름 받는다. 아예 천사들까지도 우리가 잃었다가 다시 발견한 선하고 진정한 원리의 회복에 우리와 함께 기뻐한다. 다시 말해 우리 심정이 회개하는 분위기로 꽉 찰 때, 하늘의 천사들도 화답하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는 말이다.

천사들이 기뻐함

만일 우리가 잃은 선(잃은 양), 잃은 진리(잃은 은전)를 다시 획득하는 데에 자신의 의지를 쏟겠다고 결심한다면, 우리 마음은 자연적으로나 영적으로나 모두 새로워지는 삶 속에서 행복해진다. 뿐만 아니라 천국과의 연결도 새로워진 질서를 갖는다. 이 갱생된 삶은 천사들이 “인간이라는 자녀에 대한 주님의 놀라우신 역사”라는 노래에 더 한층 기쁨을 충만하게 해주는 원인도 된다.
이러므로 진실로 흠모하고, 총명하게 이해해서 부지런히 실습하는 모든 선한 애정은 “영원한 기쁨인 아름다운 것들”을 축복으로 받아 대를 물려 이어 갈 것이다. 그 반면 일상 생활에의 응용을 상실한 모든 선한 원리, 모든 진리, 한 마디로 잃은 진리는 우주 속에 창조되어져 있는 기쁨의 충만도를 줄어들게 할 것이다. 위에서 살핀 결과, 우리 속에 허락된 천국 원리를 생활 속에 열심히 적용 해감을 게을리 함으로 해서, 높은 수준에서 작용되어야 하는 천국 원리를 인간의 원리 아래로 침몰되게 하면 지옥의 죽이는 권세가 더욱 자신에게 방출되도록 허락하는 결과가 되어 우리 마음과 삶에 존재해야 할 천국 원리를 더욱 더 잃게 된다.

33
잃었던 아들
– 주님께 되돌아 온 죄인 –

성서 본문: 누가복음 15장 11-32절

11. 예수께서 또 말씀하셨다. “어떤 사람이 두 아들을 두었는데 12. 작은 아들이 아버지에게 제 몫으로 돌아 올 재산을 달라고 청하였다. 그래서 아버지는 재산을 갈라 두 아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13. 며칠 뒤에 작은 아들은 자기 재산을 다 거두어 가지고 먼 고장으로 떠나 갔다. 거기서 재산을 마구 뿌리며 방탕한 생활을 하였다. 14. 그러다가 돈이 떨어졌는데 마침 그 고장에 심한 흉년까지 들어서 그는 알거지가 되고 말았다. 15. 하는 수 없이 그는 그 고장에 사는 어떤 사람의 집에 가서 더부살이를 하게 되었는데 주인은 그를 농장으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다. 16. 그는 하도 배가 고파서 돼지가 먹는 쥐엄나무 열매로라도 배를 채워 보려고 했으나 그에게 먹을 것을 주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17. 그제야 제 정신이 든 그는 이렇게 중얼거렸다. ‘아버지 집에는 양식이 많아서 그 많은 일꾼들이 먹고도 남는데 나는 여기서 굶어 죽게 되었구나! 18. 어서 아버지께 돌아 가,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19. 이제 저는 감히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할 자격이 없으니 저를 품꾼으로라도 써 주십시오 하고 사정해 보리라.’ 20. 마침내 그는 거기를 떠나 자기 아버지 집으로 발길을 돌렸다. 집으로 돌아 오는 아들을 멀리서 본 아버지는 측은한 생각이 들어 달려 가 아들의 목을 끌어 안고 입을 맞추었다. 21. 그러자 아들은 ‘아버지, 저는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이제 저는 감히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할 자격이 없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22. 그렇지만 아버지는 하인들을 불러 ‘어서 제일 좋은 옷을 꺼내어 입히고 가락지를 끼우고 신을 주어라. 23.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내다 잡아라. 먹고 즐기자! 죽었던 내 아들이 다시 살아 왔다. 잃었던 아들을 다시 찾았다’ 하고 말했다. 그래서 성대한 잔치가 벌어졌다.
25. 밖에 나가 있던 큰 아들이 돌아 오다가 집 가까이에서 음악 소리와 춤추며 떠드는 소리를 듣고 26. 하인 하나를 불러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물었다. 27. 하인이 ‘아우님이 돌아 왔습니다. 그분이 무사히 돌아 오셨다고 주인께서 살진 송아지를 잡게 하셨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28. 큰 아들은 화가 나서 집에 들어 가려 하지 않았다. 그래서 아버지가 나와서 달랬으나 29. 그는 아버지에게 ‘아버지, 저는 이렇게 여러 해 동안 아버지를 위해서 종이나 다름없이 일을 하며 아버지의 명령을 어긴 일이 한 번도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저에게는 친구들과 즐기라고 염소 새끼 한 마리 주지 않으시더니 30. 창녀들한테 빠져서 아버지의 재산을 다 날려 버린 동생이 돌아 오니까 그 아이를 위해서는 살진 송아지까지 잡아 주시다니요!’ 하고 투덜거렸다. 31. 이 말을 듣고 아버지는 ‘얘야, 너는 늘 나와 함께 있고 내 것이 모두 네 것이 아니냐? 32. 그런데 네 동생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 왔으니 잃었던 사람을 되찾은 셈이다. 그러니 이 기쁜 날을 어떻게 즐기지 않겠느냐?’ 하고 말하였다.”

요약

이기적 목적에 써 버린 지식, 지식의 남용은 인간을 재난에 빠트린다. 그러나 그가 재난의 원인을 인식하고, 주님을 인정하는 가운데 진리를 사랑하여 실제에 적용하면, 신성한 영향력은 그를 질서 있는 조건에로 회복되도록 진력한다. 진리나 질서 체계의 한계선을 무너트린 사람이 발견하는 최종의 것은 자기가 바꾼 주인이 얼마나 잔인했는가 일 뿐이다. 주님을 떠난 이후의 인간은 자신의 욕망, 지옥의 사슬에 얽매인 노예로 전락되고 만다. 이 때 그가 배우는 것은, 자기가 탈피하려 했던 천국의 삶, 그 삶의 힘이 자신이 자초한 재난에서 구조해 준다는 것이다. 그 반면, 자연적 수준의 마음, 설사 그 마음이 외견상 질서가 있다 해도, 그 마음은 영적 수준의 마음이 갖는 경험, 또는 신성한 사랑의 품성을 음미하지도 못한다. 그러나 비록 죄인이라 해도 그 사랑 속에서 영적 수준의 마음이 봉기되면, 자연적 수준의 마음이 기껏해야 도달되는 도덕적 품성보다 더 높은 영적 삶에 있는 품성도 음미할 수 있다.

세 비유의 연결

두 비유가 이 비유 앞에 놓여 있다. 세 비유 모두 주님의 사랑을 인간에게 보여주고 있다. 더불어 인간을 죄와 악에서 구원하시려는 주님의 꾸준한 노력을 알게 해주고 있다. “잃었던 양”의 비유는 우리가 선한 어떤 애정을 잃었을 때를 다루는데, 그 슬픔은 잃은 애정을 다시 발견해서 정신 속의 양떼에 합류시킬 때까지 계속되었다. “잃었던 은전”의 비유는 중요한 진리 어떤 하나를 잃는데 대해, 그것을 잃은 이유가 진리를 가볍게 여겨 사용치 않은데 있었음을 다루고 있다. 본문의 비유는 특별하게 죄인이 회개하여 주님께 돌아오는 것, 동시에 주님께서 신속하게 그의 귀향과 협동하심을 나열해 놓고 있다. 주님에게 되돌아오고자 하는 죄인의 바램이 주님 자신에 의해 격려되었듯이 세 비유 모두에서 우리는 인간을 복되게 하시려는 신성의 적극적 활동에서 있게 되는 세 가지 다른 국면을 살필 수 있다.

어떤 사람이 두 아들을 가졌는데…

본문의 “어떤 사람”은 신성한 인간, 주님, 그분 자신이시다. 그래서 “두 아들”이란 교회 안에 있는 인간의 두 부류를 말한다. 교회는 진리를 수단으로 형성되어 있다. 그러나 진리의 지식을 가진 사람은 두 가지 부류로 나뉜다. 하나는, 진리의 지식을 외적으로 갖고 있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형식상으로는 교회 멤버일 수도 있고, 더 나아가 교회의 교리로 자신의 행동을 규율하려는 노력까지 하고 있을는지 모른다. 또 하나의 부류는, 진리를 내면으로 이해하는 사람, 그래서 교회의 내면적 멤버, 또는 그렇게 되어 가고 있는 사람들이다.
첫 부류, 즉 외적 멤버에 속한 이들은 영적 삶 즉 내면의 삶이 없는 선하고 도덕적 삶까지는 쉽게 달성할 수 있을 것이다. 둘째 부류의 경우, 어떤 이는 아주 충동적이어서 삶의 죄 가운데서 방황하기 쉽다. 이런 사람이 방황 속에서 헤어나려면 오로지 회개와 개혁에 의해서만 가능해진다. 그 중의 어떤 사람은 애정 측면보다 지성 측면이 더 현저하게 돌출 되어 있고 또 다른 이는 이와 반대의 측면에서 돌출 되기도 한다. 가끔 어떤 이들은 지성과 애정이 균형을 잘 맞추고 있기도 한데, 이것이 가장 완전한 인격이다.
착하고 도덕적인 사람, 그런데 외적일 뿐인 사람이 이 비유에서 형이고, 죄를 지었으나 회개함으로 높은 품성을 지니게 된 사람이 동생이다. 그러나 죄를 지은 무게가 더 높은 영적 상태에 도달되는데 있어서 필수 조건이라고 착각해선 안된다. 다시 말해 죄를 지어야 높은 영적 상태에 도달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우리는 가능만 하면 죄를 짓는 생활 속에 빠지지 않으면서 우리 속에 든 죄에 빠지려 드는 경향성까지 억누를 수 있어야 한다. 죄를 덜 지으면 지을수록 자신에게 더 바람직하고 더 복된 것이 된다.

본문의 배경

이 비유는 바리사이파인들, 바깥쪽으로 볼 때 매우 질서 있는 삶을 영위하고, 안쪽에는 비이타애와 악한 느낌들을 숨겨 놓는 바리사이파인들, 그 반면 악에 푹 빠졌었으나 이제는 회개하고 개혁되어서 거듭나고 있을지 모르는 사람, 이 두 부류에 대하여 한 비유로 명백한 답을 제시해 주고 있다. 보다 감정적인 사람들이 후자에 속할 때가 흔하다.
비유 속의 동생은 아버지의 집에 함께 사는 것이 자신에게는 속박같이 느껴서 더 큰 자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되는 곳을 갈망했다. 그 바램의 수단으로 쾌락을 사랑하고자, 그는 아버지에게 재산을 나눠 달라고 요구했다.

살아감

인간이 살아가는 것, 또는 살아가는 수단이라는 것을 영적으로 볼 때, 그것은 자신이 어떻게 살 것인가를 가르쳐 주는 지식의 공급,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을 말한다. 이런 지식들이 본문에서 언급되는 재산이다. 이것 없이 인간은 실로 가난할 뿐이다. 이런 재산이란 주님의 말씀, 또는 교회에 있는 가르침이나 교리들이고, 이를 실생활에 응용함으로 인간은 영적으로 살게 된다.

작은 아들의 요구

작은 아들은 아버지의 집에서 함께 살 마음이 없어 자기에게 돌아올 재산을 나누어주기를 원했고, 그것을 가지고 어딘가로 가려고 했다. 이런 생각을 가진 작은 아들이 표현하는 정신적인 모습은, 인간이 자기 속에 든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이 제 소유라고 주장하여 그것이 주님과 연결을 갖고 있는데서 분리되기를, 제 소유임을 인정받기를 바래는 마음 상태이다.
주님의 도움 없이도 자신에게 필요한 선과 진리를 발견하는데 있어 자신은 아주 총명하다고 생각하는 사람, 또는 자신에게 필요한 진리를 알기 위해 주님께 가야만 한다는 것은 자기 위풍 밑에 있는 수준이라고 자처하는 사람이 위의 작은 아들이다. 그래서 그는 자기 지식을 주님과의 연결에서 분리시키고 자기 스스로 그 지식은 자기 것이라고 간주해 놓는다. 이런 심정 상태는 매일의 삶이 주님의 섭리에 의존되어 있음을 인정하는 사람, 즉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라고 진실로 기도하는 사람이 갖는 상태와는 정반대이다.

분가함

작은 아들은 아버지에게서 자기 몫을 떼어 냄으로서 분가하게 되었다. 주님이 주신 삶의 법칙에서 자신을 떼어 내겠다는 사람, 자신의 고집대로 살겠다는 사람은 분가함으로써 자기가 주인이 되었다고 느끼게 마련이다. 그 이유가 인간이 진리를 받되 그 진리가 주님의 진리임을 인정치 않을 때, 그는 그 진리가 자기 소유라고 주장하는 셈이 된다. 이럴 때 그도 역시 교리로서 진리의 어떤 인식 속으로 인도되어 질 수는 있다. 그 마지막 단계, 응용 단계, 훈련 단계에서 그는 자기의 우둔함을 볼 수 있게 되어 회개하고 주님을 인정하기도 한다. 다시 말해 자신이 똑똑하므로 허용이 있어야만 한다. 그 뒤 실패할 때까지 기다리면, 그는 자신의 허점을 자신 스스로 똑바로 확인하게 된다는 말이다. 그러면 주님이 가르치시는 것, 그분이 인도하는 데에 기꺼이 응하게 된다. 이럴 경우만이, 악을 행하는 자유는 지옥의 자유, 죄에 노예가 되는 자유일 뿐, 진정한 자유는 주님의 계명을 준수함 속에 있음이 자연스럽게 가르쳐질 수 있다.

아버지를 떠남

“며칠 뒤에 작은 아들은 자기 재산을 다 거두어 가지고 먼 고장으로 떠나갔다.” 자기 속에 든 지식이 모두 자기 것이라고 소유권을 주장할 때, 과거 주님께 의존해 왔던 그의 마음 상태가 사라지는 것은, 며칠, 또는 몇 단계의 상태 변화도 거치지 않는다. 다시 말해 감각적 마음 상태에 내려가는 것은 금방 이루어진다는 말이다.
작은 아들은 아버지 집에서 쫓겨나서 집을 나가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집이 자기를 속박하고 있는 듯하여 나간 것이다. 따라서 그는 이기적 욕구로 심정을 꽉 메우고 있었다.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아버지가 자기를 위해 베푼 것을 조금이라도 되돌려 드려야 하지 않겠느냐라는 식의 의무감마저도 그의 생각 속에는 아예 있지도 않았다. 그는 자아로 똘똘 뭉쳐져, 세상을 보는 것도 자신이 구심점이 되어서만 볼뿐이다. 세상의 삶이 본문의 “먼 고장,” 아버지 집에서 멀리 떨어진 삶을 말한다. 그런 마음의 상태는 오로지 감각적이고 비질서적이어서 인간 영혼의 고향, 아름다운 집, 아버지의 집에서는 아주 멀리 떨어져 있다.

방탕한 생활

먼 고장에 도착한 아들은 감각적 쾌락에 기울었고, 그 쾌락을 얻고자 “재산을 마구 뿌리며 방탕한 생활을 하였다.” 하늘 아버지와 영적 고향에 관한 사항들은 그의 생각에서 아주 멀리 떨어져 있다. 쾌락만을 추구하는 사람은 자기의 어리석음을 경고해 주려고 일어나는 자기 속의 생각들을 몰아내려고 애를 쓴다. 몰아내려는 유일한 방법이 자기 재산을 마구 뿌리는 것, 자기의 정신적 재산인 지식, 그 지식 속의 실체가 모두 사라질 때까지 감각적 욕망과 쾌락 속에 몰입한다.

흉년

위와 같이 마구 뿌렸으니 “돈이 떨어졌고 그 고장에 흉년까지 겹치자, 그는 알거지가 되고 말았다”는 것은 과히 이상할 것이 없는 일이다. 그의 진리가 그것의 근원이자 생명이신 주님으로부터 분리 될 때, 그가 지닌 진리는 생명력을 잃게 되어 인간 영혼을 떠받칠 수 없게 된다. 진리를 감각적으로 소비해버린 결과로, 그 탕진의 결과로 기대했던 쾌락까지도 남겨 놓지 않는다. 결국 그 마음은 쾌락 같은 즐거움까지도 머지 않아 사라지게 된다. 참으로 그 땅, 그 마음에는 흉년이 오는 것이다. 인간은 영적 삶을 위해 살게 되어 있다. 언제까지나 자기 영혼을 떠받칠 수 있는 것은 영적 생명밖에 없다. 비질서적인 세계, 감각적인 삶에는 언제나 영적 흉년이 있게 마련이다. “사람이 빵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리라.” 이 말씀을 우리는 되새겨야 한다. 그리고 이렇게 기도해야 할 것이다. “당신의 말씀으로 우리는 살 수 있고, 당신의 말씀 안에만 우리의 생명이 있사오니. 저를 회복시키시어 살아 있게 해주소서…”
영적 진리의 빛으로 본다면, 주님을 잊은 지성인, 자기 스스로 총명해질 수 있다고 자부하는 사람보다 더 가련한 대상은 없을 것이다. 그런 자부심에 비해 그는 순수한 인간 생명의 제일 가는 원리에 아주 무식하다. 죄인이 되는 첫 단계는 그가 세상을 자기 종으로 만들 수 있다고 자부하는 것이고, 그의 의기양양한 정복의 결산은 그가 세상의 노예가 된 처절한 모습이다. 이 상태 즈음이면 그는 자기가 지닌 모든 것을 다 탕진한 때이다. 세상은 그 사람으로부터 생명에 속한 모든 것을 다 빨아 낸 뒤, 그를 헌신짝 버리듯 던진다. 알맹이를 까먹고 해안가에 버려져 수두룩하게 쌓인 조개 껍질 수준만이 그에게 남아 있는다.

돼지 치는데 종사함

알거지, 빈 껍질만 남은 작은 아들, 그럼에도 그는 자기 아버지에게 되돌아가지 않았다. “너는 생명을 받기 위해 나에게 오지 않는다.” 이런 사람은 하늘 아버지를 잘못 이해하고 있어서 그분께 되돌아오지 않는 것이다. 따라서 그는 한 단계 더 밑인 외적 상태, 자신을 떠받쳐 줄 수 있다고 생각되는 “그 고장의 어떤 사람”에게 가서 “더부살이,” 즉 거짓 원리의 얼마를 추구해 보는 삶에로 더 처지게 된다. 그 고장의 어떤 사람(citizen), “주인은 그를 농장으로 보내 돼지를 치게 했다.”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돼지 치는 것은 가장 천한 직업이었고, 유대인에게 있어서도 돼지는 불결의 상징이었다. 에집트인들의 경우에도 자기들 성전에 들어가지 못하게 한 유일한 사람은 돼지치는 자였을 정도였다.
돼지떼는 인간을 비굴하게 만드는 이기적인 열정, 감각적 마음속에 있는 낮고 천한 욕망을 표현한다. 정신적으로 돼지를 친다는 것은 돼지가 표현하는 것들, 비굴한 열정들을 키운다는 말이 된다. 우리가 거짓 원리를 채택해서 세상 삶의 낮은 상태, 부절제한 탕진 수준까지, 인간 영혼의 고향인 영적 상태에서 아주 멀어질 때, 양떼를 치는 대신 돼지 떼를 치게 될 때, 우리는 영적으로 “먼 고장의 어떤 사람, 주인”과 결합하게 된다. 돼지 떼가 육적 욕망, 추잡함을 의미한다는 것은 복음서의 기사에서, 주님이 악마들을 내쫓으셨을 때, 그 악마들이 돼지떼에 들어가게 해 달라고 하는 줄거리에서도 살펴볼 수 있다. 이 젊은이에게 돼지 치는 일을 맡긴 주인이란, 그 젊은 이(작은 아들)가 자기 스스로 쾌락의 추구에 가담하고자 채택한 거짓 원리, 삶에 관한 거짓된 견해, 비뚤어진 삶의 목적들을 뜻한다. 주님을 떠난 모든 사람들, 빠르던, 조금 늦던, 조만간에 그는 돼지 치는 일에 종사하고야 만다.

쥐엄나무 열매 (껍질, 찌꺼기, husk, pod)

돼지를 치던 이 젊은이는 너무나 배고파서 돼지가 먹는 찌꺼기라도 먹어 보려 했다. 그가 먹으려 했던 찌꺼기(husk)는 쥐엄나무의 꼬투리(열매)였다. 이 열매들은 돼지를 치는 사료로 사용되는데, 식량이 상당히 위급해졌을 경우, 가난한 자의 식량으로 대체되기도 하는 열매이다. 껍질, 또는 찌꺼기란 외적인 것, 오로지 바깥쪽에 속한 것, 인간 영혼을 지탱시킬 영양분이 하나도 없는 것을 표현한다. 그나마 “그에게 그것을 주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껍질은 인간 마음을 인간답게 해줄 양식을 공급할 수 없다는 말이다.
바닥까지 내려온 작은 아들, 이 젊은이는 철저한 실험을 거친 셈이고, 그 결과 침통한 슬픔 속에 잠겼다. 가고 싶은 데까지 가보고, 하고 싶은 대로 해보되 더 이상 해볼 수 없는 막바지에 이른 순간, 그 순간이야말로 신성한 힘이 그에게 다가올 찬스이다. 그 사람 속에 남겨 두신 상태, 그 사람의 구원을 위해 주님이 그의 마음 속 깊은 곳에 아껴 두신 선과 진리에 관한 상태, 이 그루터기에서 뭔가가 움틀거리기 시작한다. 하느님의 자비하심 속에서 이 젊은이는 보다 나은 본성, 조금밖에 안되지만 뭔가 더 나은 본성이 그로 회개함이 있도록 부추긴다.

자신에게 돌아옴 (제 정신이 듦)

“그제야 그는 제 정신이 들었다.” 과거 이 젊은이는 자기의 어리석음 속에 있었는바, 영적으로 미쳐 있었는 바, 그는 자기를 바깥쪽에 방치해놓고 있었던 것이다. 인간은 합리적일 때 그 합리성이 올바른 자신이다. 합리적으로 생각함을 내팽개칠 때, 인간은 광기가 솟아오르고, 감각적 쾌락 속에 풍덩 빠진다. 이성을 되찾을 때, 인간은 자신 안에 돌아온다. 그리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가 자기 아버지임을 인정할 때 인간은 제정신이 든다. 그 이유는 주님과 결별하고서는 어떤 인간도 인간다울 수 없기 때문이다. “너희는 나를 떠나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제 정신이 들 때 인간은 과거 자기가 타락했던 만큼, 자신 밖으로 멀리 간 만큼, 미래에 더 나은 것을 위한 자신의 용적에 비례되는 만큼의 큰 슬픔과 창피함으로 적셔진다.

종 (하인)

깊은 슬픔 속에 있는 이 젊은이는 과거를 되씹어 본다. “아버지 집에는 양식이 많아서 그 많은 일꾼들이 먹고도 남는데 나는 여기서 굶어 죽게 되었구나!” 아버지의 일꾼이란 보다 수준이 낮은 진리, 자연적인 진리들이다. 이 진리들이 주님과 연결을 맺고 있는 이상, 그 진리도 인간을 선한 생활로, 행복에로 인도해 준다. 주님을 섬기는 상태에 있는 모든 인간은 각자 용적에 따라 충분한 양식이 언제나 준비되어 있다. “주님을 자기 하느님으로 모신 자가 행복하다.” 세상의 감각적 삶이라는 돼지를 치는 가운데 있는 사람들, 영적으로 배고파 허덕이는 사람들에게 하늘 아버지의 집에는 만인을 위해 영적 양식이 풍부함을 늘 일깨워 주시려는 것, 이것이 주님의 자비이다. 이 젊은이가 집을 떠나기 전 위의 사항을 알고 있었을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인간이란 존재는, 대체로 “자기가 강건해진 것은 하느님 덕분이 아니라, 자기 재물, 지식이 풍부해서라고, 자기의 섬뜩한 성질이 자기를 강하게 했다”고 뽐내는 게 인간 아니던가?

배고픔

그런 인간이 이제 확실히 쥔 것은 인간 영혼은 세상이 공급할 수 없는 양식을 갈망하고 있다는 것이다. 하늘 아버지의 지시를 따르고, 그분께 인도 받기를 거절한 자의 종착점은 악마에 노예가 되어 있는 신세뿐임을 확실히 발견한다. 돼지 떼의 양식, 헛것을 열망하는 수준, 낮고 낮아 더 낮아 질 수 없는 바닥까지 내려간 자기, 천사들의 양식에 불만족을 토했던 자기를 확실히 보게 된다. 주님이 인도해 주지 않아도. 세상을 쥐고 흔들겠다고 한 그는 세상 속의 고통스런 것들, 악만을 확실히 보게 되고, 급기야 그는 자기 주위에 찌꺼기들이 풍부하게 널려져 있어도 영적 배고픔으로 죽어 가는 자기를 본다.
이 아들은 자기가 세상에 관해, 진짜 즐거움에 관한 모든 것을 알았다고 생각했다. 고된 경험으로부터 교훈을 배우도록 아버지가 허용하실 수밖에 없었던 이유도 알았다. “경험은 아주 고된 학교임에도 어리석은 자는 그 외의 방법으로는 배우려 들지 않는다.” 그러나 인간 안에 어떤 영성이 남아 있다면, 그는 감각이라는 먼지로 그 영성을 오랫동안 덮어 둘 수는 없다. 돼지 떼나 먹어야 할 껍질 가지고 자신 속의 더 고상한 바램을 만족시킬 수 없는 것이다. 아주 비굴한 삶, 잘못 불러들인 쾌락의 소용돌이에서 그의 불멸의 영혼을 위한 먹이는 없는 바, 영적 기근으로 멸해지고 만다. 이런 상황에서 설사 그 사람이 지옥의 불로 자신을 덥게 해보려 발버둥쳐도, 감각 속의 어떤 것도 따뜻하게 할 수 없는 바, 그의 안쪽에 있는 인간다움은 추위에 덜덜 떨고 있는다.

신성한 인도

인간이 재난을 자초했어도 주님의 사랑은 여전히 그를 따라다니면서, 기회만 되면, 가능한 한 빨리 그를 일으켜 세우시려 하신다. 그래서 그의 기억 속에 숨어 잠적해 버린 어떤 진리 또는 어린 시절에 품었던 어떤 애정 중에 남아 있는 것들, 육의 욕망이 절대로 채울 수 없는 어떤 고상한 허덕거림을 시발점으로 삼으신다. 이리하여 하느님의 사랑은 일을 시작하신다. 이 사랑은 돼지 같은 인간이 그의 껍데기 수준에서 단번에 탈피되도록 보채시지 않는다. 그 대신 가능한 시기에 조금씩 그 사람 속에 더 높은 기운을, 더 고상한 배고픔을 일으키시어 창조하신다. 이 창조가 작동을 시작할 때, 인간은 돼지 떼들이 구역질이 나게 싫어진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의지로, 기꺼이 돼지 떼를 떠나면서 “어서 아버지께 돌아가자”하고 중얼거린다.
이 비참한 사람, 과거 감각적일 뿐인 이스라엘 후손들 같이, 애당초 잘 선택했더라면 덜 고생길로 접어들어 축복의 고향에 당도했겠지만, 이젠 먼길, 우회해서 가야 하는 길을 따라 그의 고향으로 인도된다. 인간 생명에는 보다 더 심오한 생명이 있다는 것을 결코 경험한 적이 없는 젊은 시절의 자연적인 마음에 어떤 확신을 갖게 해준다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지 모른다. 또는 인간다움 속의 진정한 생명은 인격의 영성(spirituality) 안에 존재하지, 감각적 차원 속에 있지 않는다는 것, 인간 삶의 목적, 그 본성을 이해하려면 경험자나 목격자들의 충고 안에 지혜가 들어 있다는 것, 또는 질서 있는 마음과 삶으로 자신이 생활하는지를 소홀히 점검하여 감각적 부절제에 쉽사리 풍덩 빠진 이들은 영적으로 보면 미친 짓을 하는 것이고, 가련한 어리석음 안에 있다는 것, 등등을 젊은이들이 경험하지 않고 확신한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노릇이다.

미친 짓(insanity)

수용소를 메우는 많은 정신 착란증은 이기적 열정에 몰두하고자 정신적 생활이나 절제 있는 생활 규범을 이탈한 직접적 결과일 때가 많다. 이런 광기 있는 삶은 방지될 수도 있었던 것들이다. 특히 초기 삶, 인격이 깨끗하고 고결하면서도 단순했던 초기 삶을 수단으로 주님을 신뢰하는데 만족하는 영과 접합을 이루었다면 돌이킬 수 없는 지경까지 당도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인간 내면의 정신 상태가 무엇 무엇이라고 우리는 똑바르게 단정지을 수는 없다. 그러나 우리의 도덕적인 상태, 자연적 수준의 외면에 속한 것은 어떠 어떠하다고 말할 수 있다. 그래서 올바른 질서 속에, 올바른 원리를 사랑하여 늘 생각하며 행동에 적용하려 노력한다면, 주님께서 우리에게 발달되도록 애써 주시는 선한 영적 인격에 속한 모든 요소 요소들을 떠받쳐 줄 주님의 발판을 마련해 드리게 된다. 한 마디로 우리는 주님의 영을 받는 그릇이 되기 위해 계명을 준수하는 것, 선용을 수행하는데 행복을 느껴야 하는 우리 몫을 감당한다면 나머지는 주님께서 채워 주시어 우리의 “잔은 넘칠 것이다.”

겸손 (humility)

이 비유가 우리에게 명백히 가르치는 것 중 하나는, 겸손이나 순진은 이기적인 번영을 추구해 보겠노라는 사람에게 있어서는 매우 맛없는 메뉴들이라는 것, 따라서 그는 그런 것들을 회피하려 한다는 것, 결국 지속성이 강한 선을 획득하려면, 그는 고통스런 방법, 참아 내야만 된다는 각오로 점철되는 길을 결국 걸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꺼내 보이기를 꺼려하면서, 동시에 그쪽으로 기울고 싶어하는 죄들은 우리를 먼 고장에로 이동시켜 놓고 돼지 떼나 치도록 만든다. 그러나 우리가 솔직 담백하게 털어놓는 죄들, 그 죄가 더 확대되지 않도록 만방으로 애써 중단된 죄들은 우리에게서 떨어져 나간다. 그리고 우리는 아버지의 집을 향해 롯의 아내같이 되돌아보는 일이 없이 총총한 발걸음으로 먼 여행을 하게 된다.
거듭나는 우리의 체험 속에 늘 드리워 있는 것의 하나는, 우리가 어떤 사건에 접해서 뭔가 꼭해야 한다고 생각되는 데도 우리 속 한쪽에선 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하는 소리, 지옥의 자만(pride)이 언제나 꿈틀댄다는 것, 그러나 결국 고쳐야만 되는 자기 속의 자만, 일찌감치 정정하려 했으면 창피함(humiliation)을 겪지 않아도 되었을 것을 이제는 굴욕적인 것을 감수하고라도 해야 하는 지경에 처한다. 이런 모습은 성경에 있는 이스라엘 후손들이 표현해 준 줄거리 곳곳에 스며 있다. 거룩한 땅을 정탐한 뒤 겁에 질려 싸우고 싶지 않았던 이들 중 전진하자고 제의한 두 명만 제외하고 모두 광야에서 죽어야만 했다. 이와 같은 상태는 우리가 거듭 나아가는 삶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반역적인 옛 기질, 이기적인 것만 사랑하려는 품성, 거짓된 생각, 이런 구세대의 것들은 우리가 거듭난 상태, 거룩한 땅에 진입하기 전 시험이라는 광야에서 몽땅 죽어야만 되는 것들이다.
삶 속의 영성은 주님을 진실로 인정하여 그분의 가르침과 인도를 간절히 소망하는 때에야 비로소 존재하기 시작한다. 악마는 주님의 인도에 얼굴을 돌리나 천사들은 그분의 인도를 더욱 사랑하려 한다. 악마는 모든 것을 노예 상태에 놓고 있지만, 천사들은 자유로움 속에 간수한다. “사악한 자에게는…평화가 없다.” 인간 영혼에는 오로지 한 개의 고향, 한 분 아버지밖에 없다. 그분에게서 분리되고, 그 고향을 떠나서는 진정한 어떤 기쁨도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 삶이 주님 안에 있음을 기뻐하는 수준이라면, 자비의 하느님은 그 영혼을 지옥의 악마가 가로채 가게 방치하시지 않는다.

어서 일어나…

“어서 일어나 아버지께 돌아가자.” 오늘 비유를 영적으로 곰곰이 생각해 보면, 이 비유는 정신적으로 일어섬, 또는 보다 더 높은 목적과 계획 쪽으로 마음과 삶을 승강시켜야 함을 취급하고 있다. 비질서적 생활로 자신 속의 영적 실체를 낭비하고 있음을 보게 될 때, 절대 필요한 다음 단계는 더 높고 더 나은 경력을 쌓은 데로 자신을 들어올리는 일이다. 이 일을 진행하려면 그가 알고 있는 모든 진리가 상기되어진다. 이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일어나라, 이제 가자”라고 말하신 대화 속에도 들어 있다. 불멸의 영혼을 결코 만족시켜 줄 수 없는 낮고 낮은 수준으로 생각하고 느끼고 행동한 것에서 툴툴 털고 일어나야 한다. 이 사람, 이 죄인이 이제 보는 것은 자기의 유일한 희망은 주님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중얼거리는 말, 아버지께 돌아가야겠다는 것, 이제라도 내 아버지께 자신 속의 잘못된 것들, 죄들을 고백하여 신성한 자비를 무가치하게 여겼던 것이 자기 심정임을 솔직히 그분 앞에서 인정해야겠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제 주님께서 새로워진 삶을 주시도록 그분의 사랑을 찾게 된다.

품꾼

참회하는 죄인은 무진장 겸손하다. 그는 자기 아버지의 집에서 그분의 상속자요 아들로서 복귀하게 해 달라고 요구하지 않는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이제 저는 감히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할 자격이 없으니 저를 품꾼으로라도 써 주십시오.” 완전히 성장한 아들은 자유 속에 있게 되나, 하인은 주인의 밑에 있다. 결국 죄인이 실감하는 것은, 자기가 죄에 잘 빠지는 경향성 속에 있을 경우, 진리를 사랑하여 그대로 사는 사람이 누리는 자유를 자기는 이제 누릴 수 없다는 것, 오히려 자기는 품꾼, 자연적 마음, 자연적 진리의 지식 속에만 거할 수 있을 뿐이라는 것, 낮은 본성이 언제나 이의를 제기하려 드는 법칙에 순종해 보려면 강한 거부감만이 돌출한다는 것, 등등일 것이다. 따라서 이제 그는 아버지의 명령에 따라 그분을 섬길 수 있는 곳, 자신 스스로 영적 자유를 조절해 가기에는 자신은 너무 미흡한 고로 자기 처지에 알맞은 수준, 낮고 천한 신분, 품꾼의 지위만을 찾는다. 이 죄인의 고백은 그야말로 100% 자신을 드러내는 허심탄회한 고백이다. 그래서 그는 자신을 변명하고자 타인을 혹평해 대는 식의 태도는 갖지 않는다. 이런 등등이 그가 신실하다는 증거가 된다. 비 신실한 자는 언제나 변명을 늘어놓아 자아 사랑을 감출 은신처를 찾느라 그의 눈동자는 쉴 새가 없다. 진실한 참회자는 악과 죄들이 자기 것임을 인식하면서 공정하고도 자유롭게 자기가 죄를 범했음을 완전히 고백한다.

죄는 주님과 반대

비록 인간이 잘못되어 있다 해도, 죄는 오로지 선하신 주님께 반대되는 것이라는 정도는 삐뚤어진 사람도 인정은 한다. “아버지, 저는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라고 본문의 아들은 고백하고 있다. 이 말은 주님에 관한 측면에서 좀 더 세분해 볼 때, 죄는 신성한 사랑에 반대되고, 신성한 지혜에 의해 까벌려지며, 신성한 법칙에 의해 금하는 것들임을 함축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잘못을 깊이 통회하는 다윗은, “제가 얼마나 마음이 이랬다 저랬다 하는지를 알고 있습니다. 저의 죄는 언제나 제 앞에 드리워 있습니다. 저는 당신에게 죄를 범했고, 당신 앞에서 악을 행하였나이다”라고 고백한다. 주님 앞에서 스스로 겸허하지 않는 자는 어떤 선함도 실제로 달성하지 못한다. 그 이유는 그의 자아 사랑이 여전히 자신을 지배하여 그를 악 가운데 있게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겸손은 자아 사랑을 내려놓게 하고 마음을 하늘로 열리게 해서 아버지께 돌아가게 해준다.

아버지와 아들이 만남

인간이 비록 천국 조건에서는 멀지만, 그가 그 조건에로 돌아가겠다는 노력을 시작했을 때, 아버지는 멀리 있는 그를 만나는데 성급해지시고 깊은 애정으로 그를 받아 주신다. “아버지가 아들을 보았다”는 것을 영적으로 생각하면 주님께서는 언제나 인간을 관찰하고 계신다는 것을 인간이 인식하는 것을 말한다. 이것이 인간 이해성에 운행하시는 하느님의 섭리이다. “아버지가 측은함(compassion)을 가졌다”는 말은 주님의 사랑이 인간의 의지에서 행동하는 것, 즉 주님은 언제나 인간을 사랑하신다는 것을 당사자에게 보여주신다는 말이다. 아버지가 그를 만나러 “달려갔다”는 것은 주님의 역사가 인간 생명에 작용하시는 것, 즉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가 그분의 계명에 의거 행해진 인간 사랑의 각각에 어떻게 대하시는 가를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인간이 주님께 돌아 올 때, 주님이 자기에게 달려오시는 듯 인간에게는 여겨진다. 그러나 실상, 주님은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시고, 주님이 오시도록 인간이 마음 문을 얼마나 더 여느냐는 만큼에서 더 가까워지는 것이다.
아버지의 “키스”는 하나 됨의 상징이요, 서로 사랑한다는데 대한 상징적 행동이다. 또한 다시 만났다는 표시(token)이기도 하다. 참회자가 진리를 외적으로 잘 지켜 가는 것밖에 자기는 할 수 없다고 고백하지만, 그가 주님에게서 새 생명을 받으면, 그는 사랑의 자유 속에서, 또는 진리를 영적으로 잘 지켜 갈 수 있게 된다.

하인들, 제일 좋은 옷 등등

아버지는 “하인들에게 말했다.” 이는 신성한 사랑이 말씀에서 오는 삶에 관한 교훈인 실용적인 진리를 수단으로 신성한 사랑의 목적과 계획과 교통하는 것을 뜻한다. 선은 거듭남을 수단으로 말씀을 통하여 참회자에게 도달된다. “제일 좋은 의복” 또는 예복이란 제일 가는 진리, 필수적인 진리들에 관한 지식이다. 이 지식들이 참회자에게 주어져서, 그는 내면의 삶과 외면의 삶, 양면에서 필수로 요구되는 원리들로 옷입혀지게 된다. 주님께 돌아오는 과정 중 제일 처음 있게 되는 것은 주님이 어떤 분이신지, 어떻게 그분이 자신을 도우시는 지에 관한 지식을 새롭게 하는 것이다.

가락지, 신 (ring, shoes)

회개자의 손에 “가락지”를 끼운다는 것은 주님이 그를 사랑하고 도우신다는데 대한 확증이요 서약이다. 통상 반지는 뭔가를 확증하는 것에 대한 징표로 사용되어 왔다. 봉인에 사용된 반지의 경우, 자기 편임을 입증하는데, 또는 동의를 표시하는데 사용되기도 했다. 때로 매우 위급하게 특사를 파견하는 경우, 왕의 가락지를 특사에게 들려 보내 그가 지닌 메시지의 권위를 입증하기도 했다. 특히 결혼에서의 가락지는 결혼의 동의, 서로 묶여졌음을 확증하는 징표로 사용되고 있다.
발을 위한 신은 노예가 맨발로 다니는데 비교해서 자유로움의 표시였다. 신은 일상 생활에 관한 교리들, 또는 지침 사항들을 표현한다. 그러므로 집에 오는 아들을 다시 반기며, 그에게 옷을 입히는 등등은 그가 자유로운 사람, 합리적 인간이 된다는 것을 명시하는 말이다. 그리고 그에게 내면, 외면, 양면에서의 생활 지침을 위해 영적인 진리, 자연적인 진리, 모두를 주신다는 것, 그의 모든 진리들은 사랑의 근원에서 비롯되고 있음을 확증해 주신다는 말이다.

살진 송아지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내다 잡아라. 먹고 즐기자.” 과거 유복한 가정이 잔치를 위해 살진 송아지를 키워 두는 일은 매우 흔한 일이었을 것이다. 본문의 잡는다(kill)로 사용된 단어는 제물을 의미한다. 그리고 제물은 거룩하게 만듦을 뜻한다. 그래서 기쁨이 있게 되는 사건은 상태가 어떤 변화에서 수반되는 영적 기쁨을 표현하고, 이로 말미암아 더 충만된 영적 삶이 받아들여진다.
“살진(fat)”이란 기름이 풍부한 고기인데, 기름(oil)은 따뜻하게 해줌, 선을 부드럽게 사랑하는 것을 표현한다. 자연적 애정인 어미 소의 다음 세대인 송아지는 선한 자연적 애정을 수단으로 발달된 새로운 영적 세대, 즉 영적 애정을 표현한다.
살진 송아지(fatted calf)를 잔치를 위해 준비한다는 것은 우리가 주님께 더 충만하게, 더 신실하게 나아갈 때, 주님이 우리와 교통하실 더 나은 애정에 있게 될 새로운 상태에 진입될 마음을 준비하는 것을 명시하고 있다. 이런 애정들은 새로운 마음 상태에 먼저 오는데, 이 선한 자연적 애정은 천적 애정과 영적 애정의 씨눈을 담고 있다. 그 이유는 모든 선한 자연적 애정들의 내면은 영적이고 천적인 것들로 채워 있기 때문이다. 함께 먹고 즐긴다는 것은 주님과 결합된 사람들, 천국적 삶의 품질이 비슷한 사람들이 갖는 즐거운 회합, 또는 마음이 맞는 사람들의 협의회 같은 것을 표현한다.
이렇게 해서 회개한 사람들은 각자의 신실한 정도에 따라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기쁨을 누리게 된다. 집주인과 더불어 잔치에서 먹는다는 것은 자신의 심정과 지성, 그리고 삶에서 천국적 기쁨을 음미하는 것을 말한다. 하늘 아버지, 주님에게 되돌아옴은 회개한 영혼으로 주님과 하나 되고, 더불어 주님을 사랑하는 모든 이들과도 하나를 이루는 축복을 향유하게 한다.

죽었다가 다시 살아옴

기쁜 잔치에서 방탕아의 아버지는, “죽었던 내 아들이 다시 살아왔다. 잃었던 아들을 다시 찾았다”라고 선포한다. 죄인은 선하고 진정된 것, 즐거운 모든 것에 대하여 죽은 상태이다. 그는 그의 영적 고향, 하늘 아버지의 집에 대하여도 죽어 있고 천사들의 연합에서도 탈퇴하여 죽어 있다. 그의 가족인 온 천국에 대해서도 죽어 있는 셈이다. 한 마디로 그는 생명의 유일한 근원인 주님에게서 떠나 악과 죄로 죽어 있다. 그러나 그가 회개 속에 개혁되어 거듭남을 진척시키면서 그는 영적 생명을 다시 살린다. 그는 천국 진리가 인도해주지 않는 관계로 죄 속에 헤매다가 잃어버린 상태이다. 그러나 거듭나는 가운데 그는 발견되어 진다. 그 이유는 그가 주님께 되돌아 왔기 때문이다.

즐거움이 만들어짐

“그래서 성대한 잔치가 벌어졌다. and they began to be merry.” 애정과 생각 속에 있는 것은 기뻐 뛰는 행동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다. 마치 좋은 뉴스를 받고 어쩔 줄 몰라 하는 모습일 것이다. 내면에 즐거움이 충만하면 그 즐거움에 상응하는 몸짓이 나타나기 마련이다.

희망

비유가 우리에게 보증하는 것은, 비록 우리가 죄인이라 해도 자포자기할 필요까지는 없다는 것, 천국 조건에 맞도록 되돌아 갈 힘이 지독하게 미약하다 해도, 무한하게 한계 없는 부드러운 하늘 아버지의 사랑은 우리를 언제나 보살펴 잃었던 것을 찾으려 애쓰시며 항상 더 낮고 더 높은 삶을 향해 진실로 노력하는 그 노력에 적절한 원조를 계속 해주신다는 것 등등이다.

결과들

비유에서의 아버지는 자비로우시고 관대하시다. 그런 아버지의 행동에 아들 자신의 조건도 상당히 잘 맞추어져 있었다. 아들의 겸허한 회개가 아버지의 사랑을 생산했다고 말할 수도 있다. 만일 아들이 아버지의 집에 돌아오되 마음이 거만한 상태라면 아마 그 아들을 영접하는 아버지의 태도는 심히 다른 양상이었을는지 모른다. 그가 아들이랍시고 권리를 주장하면서 당당하게 들어와 이렇게 말했다고 가정해 보자. “제가 다시 집에 왔습니다. 그런데 저는 당신이 준 재산을 다 써 버렸습니다. 저는 재산이 더 필요합니다. 저는 지치고 배고파요. 그러니 빨리 나에게 먹을 것, 입을 것을 가져다주시고, 되돌아 온 기념으로 살진 송아지도 잡아서 축제를 준비해 줘요…”
이런 식으로 아들이 되돌아 왔을 경우, 성실한 아버지의 대응은 어떤 것이었을까? 아마 “이 녀석, 아직도 고생을 더 맛보아야겠군…”라는 훈련 과정만을 제시했을는지 모른다. 그러나 본문의 아들, 아주 다르게 변한 아들의 심정 상태는 사랑하는 아버지의 도움을 받을 만한 가치를 입증해 주었다. 죄인이 자기의 악한 처지에서 천국으로 들리게 해 달라고 억지를 쓴다면, 그의 행동, 그 말 자체가 그에게 있는 천국 삶을 받을 능력까지 닫히게 하고 만다. 그 이유는 천국은 어떤 장소가 아니라 마음과 삶의 조건 속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영적인 방탕아(prodigal)

글자에 있는 의미로 볼 때, 아들의 회개는 배고픔과 궁핍으로 인해 시작되었던 것 같이 보인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하고 있어야 할 것은, 이런 글자의 이야기는 정의로움 후에 있는 영적인 배고픔과 목마름을 표현한다는 것이다. 방탕한 아들이란 단지 물질이라는 재산을 마구 낭비한 사람만을 말하는게 아니다. 영적으로 본 방탕한 아들이란 영적 삶을 이루겠다고 하여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을 습득한 교인, 그런데 거짓과 악 속에 빠져 자기가 알고 있는 진리에 순종하지 않는 교회 속의 사람들을 말한다.

예증

방탕아에 관한 본문의 그림은 유명한 미술가의 멋진 스케치가 아니다. 이 그림은 진리를 알고 있으면서 자신 속의 이기적 열정에 몰두하는 남녀들을 꼼꼼하게 베끼듯 해 놓은 초상화이다. 미친 사람을 수용한 곳을 보자. 그곳에 가면 아주 가련한 모습들, 움푹 들어간 눈빛들, 그런데도 자신은 왕이고, 자기를 감시하는 사람을 보고는 자기 노예들이라고 떠드는 것을 목격할 수 있다. 어떻게 그가 이렇게 소리칠 수 있을까? 그가 미쳤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상의 더 낮은 수준을 탐닉함으로서 더 큰 자유와 행복을 찾을 수 있다고 착각하여 지상적 아버지의 집을 뛰쳐나간 젊은이들도 위의 정신병자와 대동소이한 것이다. 게다가 행복을 찾고자 해서 이기적인 삶에 빠져들고, 하늘 아버지의 집에 있는 신성한 법칙의 얽매임(?)에서 풀려나겠다고 발버둥치는 사람도 위의 두 부류와 별반 차이가 없는 수준이다.
조금 빠르던, 조금 늦던, 여하튼 이 사람들도 자신이 탐욕에 노예가 되어 있고 악마의 하수꾼였음을 발견한다. 너무 늦지 않게 그가 자신의 어리석음에서 깨어나 겸손과 회개 그리하여 개혁됨으로 아버지께 돌아간다면 복된 일이다. 마치 무덤 사이에서 나온 악령 들렸던 사람이 옷을 바로 입고 멀쩡한 정신으로 예수의 발 앞에 앉아 있는 것과 같으리라 (마가복음 5:15).

진보 단계들

방탕한 아들은 진보의 다음 여섯 단계를 통과해서 일곱 단계에 진입했다. 즉 자아 의지의 상태 → 어리석은 행동 → 비참해짐 → 자신을 들여다봄 → 회개 → 개혁 → 평화의 단계이다. 주님 안에서 영적 쉼의 안식인 일곱째 상태에 이르는데는 여섯 단계가 요구된다. 이것이 새 창조이다.

주님의 사랑

이 비유는 주님을 비난하는 자들에 조롱할 건수를 만들어 주는데, 예를 들면 인간이 세상에서 할 수 있는 온갖 짓을 다 한 뒤 또는 그 반대로 세상에서 할 수 있다고 생각된 것들을 추구했으나 번번이 실패하여 세상에 실망을 느낀 나머지, 이 사람들의 마지막 방책, 또는 도피처로 성자(saint)가 되는 쪽으로 돌아서도 괜찮지 않느냐는 조롱의 근거로 이 비유의 글자가 사용될 소지를 안고 있다.
그렇다 해도 한계가 없는 사랑이신 주님이 위와 같은 사람들을 성자로 만들어 주신다는 증거로 채택되지는 못한다. 세상적인 사람에게 세상욕을 가지고 마음대로 자신의 영혼이 갈망하는 것을 발견하도록 허용해 줄 때 오히려 세상욕에서 떠나는 이들이 많다. 게다가 세상이 인간 영혼이 원하는 것을 결코 만족시켜 주지 못한다는 것은 우리 주위에서 쉽게 목격되는 것들이다. 기독교적 이타애를 높은 수준으로 결코 끌어 올려놓지 못하는 냉혹한 이기심을 경건이라는 것으로 덮어씌우고 있는 성자같이 보이는 위선자들보다 개혁된 세속인이 훨씬 더 낫다.
주님의 축복이 과거 경력과 언제나 맞아떨어지지 않는다는 것, 외적 측면에 있는 보상이나 처벌만을 생각하는 아이들 수준의 자연적 마음뿐인 사람에게는 위와 같은 주님의 섭리는 신앙의 큰 장애물이 되고 있다. 그러나 기억해 둘 것 중 하나는, 신성한 사랑의 노력은 과거 행실 때문에 인간을 처벌만 하시는게 아니라, 과거 행동의 우둔함을 스스로 보게 하여 그 악에서 빠져 나와 구원하시는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주님은 형사가 아니시고, 위대한 외과 의사이시다. “하느님이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단죄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아들을 시켜 구원하시는 것이다.” “잃은 것을 찾게 해서 구원하시려는” 분이 주님이시다.

모든 죄는 위험하다

그러나 죄라는 경력을 쌓는 것이 자신을 거듭나게 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다고 착각해선 안된다. 모든 죄는 심히 위험하고 무서운 파괴력을 지녔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나쁜 경력에서 회개가 있어졌다 해도, 이미 그는 처음의 선으로부터 더 먼 거리에 자신을 서 있게 했음으로 해서 주님께 되돌아오는데 더 고되고 더 긴 시간이 필요해진다. “주님을 신뢰하며 선을 행하라. 그래야 너희는 그 땅에서 잘 살리라.”

주님의 일

예수께서는 유대 땅을 오가시며 영적, 자연적 삶의 법칙을 가르치고, 이 법이 천국적 행동으로 있어지는 모습들을 예증해 주셨으며, 병자를 고쳐 주셨으며, 악마를 내쫓아 주셨고, 죽은 자를 일으키셨다. 이러한 그분의 일들은 오늘날의 천국적 행동들 속에 영적으로 존재하고, 영적 삶을 위해 그분께 돌아오는 모든 영혼 위에, 거듭남으로 그분을 따르는 모든 이에게 똑같이 역사 되고 있다. 그분은 각 인간을 위해 해주실 수 있는 최선을 언제나 해주시고 있으시다.

큰 아들

이상 살핀 내용들, 즉 죄인의 회개와 개혁, 아버지의 사랑과 관대함이라는 아름다운 모든 그림이 다 그려졌음에도 비유는 그림 그리기를 멈추지 않고 있다. 또 다른 측면, 어둡고 찬 그림자가 아버지의 명백하고 따뜻한 햇빛의 흐름에 곁들여 있다. 큰 아들은 화가 나 있었고, 사랑의 잔치에 어떤 동정심도 없다.
큰 아들의 경우에 대해서는 매우 조심스럽게 생각하도록 해주고 있다. 사랑의 하모니에 갑자기 튀어나온 째지는 소리같이, 왜 큰 아들은 자기 목청을 돋구었을까? 그는 두 가지 특질을 소유한 듯 여겨진다. 성실하게 오랫동안 섬김, 계속적으로 순종하는 측면은 그를 칭찬할 만한 대목일 것이다. 그러나 잃었던 동생의 귀환을 반기는데는 전적으로 실패하고, 오히려 동생의 귀환에 분노와 불평을 토함으로 그는 자기 속의 시기함이나 이기적인 비이타애를 여지없이 드러내고야 말았다. 제 잘났다고 마음속으로 으쓱대며 성전을 오가던 바리사이파인같이, 그는 자신의 선한 측면을 떠벌리면서 더 나은 삶으로 되돌아 온 사람이 동생임에도 불구하고 죄인이라고 경멸하고 있었다. 그 이유는 참회자는 개혁된 것이다는 공식으로 생각할 여유가 큰 아들에게는 없었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뜨거운 사랑이 흘러 넘치는 분위기조차도 큰 아들의 냉랭한 가슴을 훈훈하게 만들 수 없었던 것이다.

외적으로 도덕적인 사람

큰 아들은 자연적 마음뿐인 사람, 바깥쪽 생활이 똑바른 사람, 자연적 평면에서만 거듭나고 있는 사람, 그런데 마음과 삶 속에 영성이 없는 사람을 표현하고 있다. 또한 그는 교회의 진리를 외면에서 받아 교회의 외적 멤버에 속한 사람도 표현한다. 겉보기에 생활 규범이 어긋나지 않고 이웃도 돕는 등등, 선한 생활도 계속하는 그야말로 자신은 “근본적으로 선하다”고 속으로 뽐내는 사람, 그럼에도 영적 애정에 속한 내면의 품성을 납득하지 못하는 사람이다. 그는 경건하다고 자처하는 유대인, 그러나 이방인들을 영접하는 주님의 행동에 시기함으로 끓고 있는 사람이다.

밭에서

회개한 작은 아들이 아버지의 집에 당도했을 시간에, 큰 아들은 “밭에 나가 있었다.” 즉 그는 삶의 외적 사항들을 수행하는 것, 법에 순응하는 영 속에 잠겨 있었다는 말이다. 그는 외적인 일에서 쌓은 공적만을 인정할 뿐 아버지가 동생을 환대하는 것에는 분노했다.

대비

큰 아들은 올바른 삶을 꾸렸고, 그 삶의 기록을 자랑하고, 죄에 빠진 사람들을 향해서는 비동정적이었다. 작은 아들은 악을 행했지만 회개하고 개혁되고, 더욱이 매우 겸손해졌다. 이 비교로 볼 때, 동생의 영적 상태는 형보다 더 나은 것이다.

음악과 춤

큰 아들은 “음악 소리와 춤추며 떠드는 소리를 들었다.” 이는 영적 애정과 자연적 애정의 표현이다. 그러나 그는 집주인의 기쁨에 응답할 마음이 없었다. 그는 하인 하나를 불러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물었다. 자연적 인간의 마음이 영적 애정의 분위기에 접촉되면 그 마음은 영적 사랑의 품질이나 본성에 관해 자기의 바깥 생각에 문의한다. 그래서 아는 것은, 주님의 사랑은 회개하는 죄인을 잘 대우하신다는 것이다.

집에 들어가지 않으려 함

그리고 그는 위와 같은 사랑에 한 푼의 동정심도 지니고 있지 않았다. 따라서 그는 시무룩해져 집에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시기하는 자연적 인간의 마음은 영적 사랑이라는 내면의 분위기에 반대됨을 느끼므로 영적 사랑의 분위기에 기꺼이 합세하려 들지 않는다. 형이 동생의 과거 속에 있던 악에 분노를 터트림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그는 동생의 과거 경력에 집착했을 뿐, 현재 동생이 안전하다는 것에 대하여는 아랑곳하지 않는 실수를 저질렀다. 어쩌면 그는 빈털터리 동생의 귀환으로 남은 재산이 다시 나뉘어야 할 것 아닐까라는 걱정이 앞섰을는지도 모른다.

아버지가 달려나옴

큰 아들이 분에 차 씩씩거릴 때, 아버지가 달려나와 그를 달래면서 동생을 환영 하자고 타이르신다. 주님으로부터 온 진리가 자신에게 기울어 있는 자연적 마음에 흘러들어 가능만 하면 천국의 축복인 영적 애정과 하나 되자고 타이르는 것이다. 그러나 아직 거듭나지 못하고 있는 자연적 마음은 천국적 사랑의 기운에 거부감을 느낀다.

불평

자연적 마음의 불평이란 이것이다. 영적 인간은 과거 악행에도 불구하고 사랑과 기쁨의 높은 상태에 들려지는 반면, 자연적 인간은 성실한 순종에도 불구하고 염소 새끼 한 마리, 즉 믿음의 새로운 상태조차도 주어지지 않느냐는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되는 원인은 자연적 인간 그 자체에 있다. 자연적 인간은 마음과 삶의 새롭고 높은 상태로 들려지지 않는다.

아버지의 대답

아버지가 이렇게 대답하셨다. “얘야, 너는 늘 나와 함께 있고 내 것이 모두 네 것이 아니냐?” 교회의 외적 인간, 법을 신성하게 여기고 순종하는 것은 각자에게 정도의 차이가 있겠지만 주님과 언제나 함께 존재한다. 다시 말해 신성한 법의 순종은 절대로 죄에 연결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 법을 수용하는 정도만큼 천국 속의 모든 것은 그에게 알려지고, 그가 음미하고자 한다면 그의 것이 되고, 그가 하고자 한다면 자기 삶의 원리로 사용할 수 있다. 더 전진한다면, 그는 자기의 거듭남을 더욱 진보되게 할 수도 있다. 그가 천국 원리를 사랑하여 사용하고자 한다면 언제나 주님께서 주신다. 남이 자기보다 더 많이 거듭났다고 해서 우리들은 불평할 수 없다. 그 이유가 천국에 속한 것들은 모든 인간이 자유로이 선택할 수 있게 항상 열린 상태에 있기 때문이다.

본래의 선

인간이 젊은 시절부터 질서적인 삶을 영위해서 거듭나는 높은 수준을 달성하여 “본래의 선”에 있을 수 있다면 가장 복된 일이다. 이 일은 만인이 달성해 보려고 노력해야 하는 이상향이다. 이렇게 되려면, 우리는 반드시 자기 속의 악한 경향성을 보고 알아서 그 악한 경향성을 미워하고 그 경향성이 꼼짝 못하게 얽어매 두어야 한다. 그래서 자기 삶이 자연적 질서, 뿐만 아니라 영적 질서 안에 있도록 해야 한다. 그의 자연적 선은 반드시 영적 선으로 속을 채워야 한다. 잘못 행하는 일은 없어야 원칙이지만 그것과 더불어 어떤 잘못된 생각이나 느낌까지도 미워하여 금해야 한다. 이것이 행해질 때까지, 그가 외적으로 올바르다 해도, 그 올바름이 그 사람으로 영적 애정을 음미하거나 경험하는 쪽으로 마음 문이 열리게 하지 못한다.

세 천국

천국은 세 개의 다른 천국으로 되어 있는데, 그 이유는 거듭나는 삶의 품질, 또는 종류가 아주 넓은 측면에서 자연적, 영적, 천적 수준으로 구분되기 때문이다. 보다 높은 천국이 갖는 특별한 품성은 보다 낮은 천국에 있는 이들이 납득하거나 경험하지 못한다.

두 형제

생활 질서가 똑바르지만 마음이 자연적인 사람, 이 사람은 거듭나고 있다 해도, 그는 거듭나는 첫 단계까지만 달성한다. 본문에서 이것이 큰아들, 첫 태생으로 표현되고 있다. 영적 마음의 상태는 거듭남의 둘째 단계인데, 본문에서 작은아들, 거듭남의 발달 과정에서 새롭게 뻗은 둘째 태생으로 표현되고 있다. 그래서 우리에게 보다 더 새로운 영적 조건이 오게 될 경우, 그것은 그가 시험을 견디어 낸 결과로 오는 것이다. 그런데 많은 이들의 경우, 새로운 영적 조건을 갖추기 전 즉 우리에게 있어야 할 진짜 모습을 인식하고 자신을 들여다보아 과감히 일어나서 하늘 아버지에게 되돌아오기 전, 우리가 지닌 영적 실패가 별 것 아닌 듯 여겨 세상적 삶에 속한 것을 탐닉하느라 영적 실체를 쉽게 낭비해 버린다.
그렇게 낭비해 버린 인간이라 해도, 합리성과 선함이 되돌아오면 우리의 외적인 마음은 즐거워하며 기뻐 뛰어야 할 것이다. 우리 각각 속에는 두 아들이 있다. 형이라는 완고한 자연적 상태, 고마움을 모르는 비판적인 상태, 법률같이 딱딱한 상태가 있다. 그 반면 동생인 보다 애정적인 상태, 영적 마음, 악한 경향성에 투쟁하려는 자세, 그래서 자연적 생각이 도달하는 거듭남 보다 더 높은 거듭남을 달성하는 상태가 있다. 결국 이 둘은 재회하여 하나를 이룬다. 악과 거짓이 우리의 애정과 생각 안에서 탐닉을 즐길 때, 우리의 작은 아들은 한동안 잃어버려 죽은 듯 방치된다. 그러나 회개와 개혁이 우리를 더 높은 상태로 들어올릴 때, 잃었던 것은 찾아지고 죽은 듯한 것이 다시 살아난다.

두려움 없이

이쯤에서 우리에게 오는 암시는, 인간은 과거 삶, 그 삶이 비록 지독한 죄인이었다 해도 걱정 속에 살 필요가 없다는 점이다. 회개와 개혁이 진행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면, 우리가 미워해야 하는 악, 내 속에서 쫓아내야 할 악들을 상당히 쫓아낸 뒤이므로 긴급히 쫓아낼 악이 없는 상태이기 때문이다. 주님은 우리를 상업 장부의 차, 대변 관계에 놓아두시는 분이 아니시다. 오로지 순수한 자비 속에서 그분은 우리가 거듭남을 통해 기쁘게 받고자 원한다면 천국 삶과 기쁨 모두를 제공하고 계신다.

거듭남

위대한 원리는 다음과 같이 매우 간단하다. 생명은 하나만이 존재하고 그 하나의 생명은 주님의 생명이시다. 주님과 우리가 올바른 관계, 즉 그분에 대한 사랑과 믿음, 그리고 순종을 유지하는 한 우리는 복되고 행복해진다. 이런 조건은 진실된 선한 원리, 주님의 계명을 지킬 때 형체를 가져 그 존재가 가능해진다. 이런 주님과의 올바른 관계가 이기심과 죄들로 썩어질 때는 언제든지 인간은 행복의 근원이요 수단이 되는 것에서 자신을 스스로 잘라 낸다. 그렇게 잘린 상태에서도 제정신이 들어 회개와 개혁을 강행한다면, 그는 주님, 그리고 행복과의 연결을 회복할 수 있다. 이것만이 주님이 인간을 거듭나게 해주시는 일을 주님으로 하실 수 있게 한다.

무자비 (용서 없음)

큰 아들은 어느 정도, 꽤 쓸만한 외적 질서를 유지했다. 그 반면 그는 모질고 시기하는 것, 무자비한 느낌과 생각을 속으로 흠모했다. 어떤 사건이 돌출 하자마자 그는 자기 속의 위와 같은 인격 속에 든 악한 특성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그는 자신 속에 순진이 있어야 한다는 것도 알고, 또한 자기는 그 순진을 잘 지키고 있다고 자부했지만, 타인의 순진이 타락했을 때 그 사람, 즉 동생을 맹렬하게 단죄했다. 따라서 큰 아들은 거듭 나아가고 있었던게 아니고, 단지 도덕적 삶, 껍데기, 눈으로 보기에 멀쩡한 삶만을 유지했던 것이다. 사실 큰 아들의 행실이 거듭나려고만 한다면, 그가 보다 신실 하려고 했다면, 훨씬 더 빨리, 더 쉽게 거듭날 수 있는 조건을 갖추고 있었던 셈이다. 그는 진리를 보았고 진리로 판단했으되, 진리를 동생에 적용함에 있어서 자기 심정을 채우고 있었어야 할 이타애, 자기의 느낌과 생각을 이끌어 줄 이타애가 결여되어 있었던 것이다. 외적 상태만에 있는 큰 아들, 냉정한 진리만으로 판단한 이 아들이 아버지의 관대한 사랑을 보고 판단하되, 아버지는 정에 매우 약한 분이라고만 결론지은 것이다. 그러나 아버지의 사랑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아버지는 어떤 약함도 없고, 오히려 사랑의 영적 힘만이 드러났을 뿐이다.

독선 (self-righteousness)

도덕적으로, 외적으로 똑바르다는 사람이 죄인을 볼 경우 자기는 최소한 그 사람보다는 더 낫다는 느낌을 갖지 않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이런 느낌을 가진 상태의 사람은 만인이 죄인이라는 것, 단지 은밀해서 탐사가 안될 뿐이요, 공개되지 않았을 뿐이라는 사실을 인정한다는 것도 역시 힘들어 진다. 자기가 남보다 조금은 더 낫다고 하는 우월감은 독선이라는 쪽으로 인간을 기울게 한다. 이 독선은 인간 악 중에서 아주 미묘한 형체로서 독성이 가장 강한 악이기도 하다. 자신이 성자라고 자처한 많은 이들이 죽어 저 세계에 있는 대기소에 들어가면 자신 스스로 큰 실수를 저지르고 있음을 발견한다. “첫째가 꼴찌가 되고, 꼴지가 첫째가 된다”는 것을 많은 이들이 새삼스럽게 발견한다.
독선이라는 악은 바리사이파인들에게 예수님께서 죄인들과 어울리는 모습을 보고 예수도 죄인 아니냐고 상상하게끔 해주었다. 그래서 그들은 그분이 죄를 더 만들어 내려 하고 죄인들을 추방자로 대우하여 정죄하는 대신 오히려 존경받게 한다고, 그리하여 죄를 더 짓게 조장하는 것이 아니냐는 억지를 내뱉게 했던 것이다. 그러나 “세리와 창녀”를 포함한 죄인들은 예수님의 설교에 바리사이파인들과는 수준이 다른 감명을 받았다. 많은 죄인들이 자신들의 모습을 관조하여 회개한 반면, 바리사이파인들은 주님을 향해, 그분이 가르치신 진리, 그분이 인간에게 주신 선을 향해 심정에 있는 문을 더욱 굳게 닫았을 뿐이다.

바리사이즘(Phariseeim)

위와 같은 모습, 그들의 행동 속에 있는 것들을 비유 속의 큰 아들에서 발견할 수 있다. 이 아들은 잃었던 것을 찾으시고자 하는 사랑을 음미하지도 않았고 오히려 분노로 단죄하였다. 게다가 그는 자기 공적에 비등한 보상이 당연히 있어야 할 것, 동생의 죄는 마땅히 그 죄에 꼭 맞는 대가가 치러져야 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런 생각이 돌출 되어 밖으로 나오면서 그는 자기 인격 속에 있어야 할 영성이 결핍되어 있음을 드러냈다. 자신이 매우 올바른 인격이라고 자부하지 않았다면, 그는 동생을 심판하려 들지도 않았을 것이다. 작은 아들이라 해서 만일 그가 자신의 악한 경향성에 잘 저항했을 경우, 그 이상의 높은 상황에 있었던 것은 아니다. 단지, 그는 자신 속의 악을 결코 보지 못하거나, 자신 속에 악이 있음을 결코 인정 안했을 경우보다는 더 높은 영적 조건에 있게 된 것뿐이다. 사실 우리가 하느님께 드릴 제물은 깨어진 우리의 영혼, 그러나 깨진 것을 회개하는 영혼이다. 그분은 깨어진 영혼을 경멸하시지 않으신다.

역사적 적용

주님은 “잃었던 양”과 “잃었던 은전”의 비유로 바리사이파인들에게 그들이 어떻게 행동해야 할 것인가를, “잃었던 아들”에서는 그들이 어떻게 행동했는가를 보여주셨다.
이 비유 안에는 교회가 타락되는 과정인 카인과 아벨, 즉 믿음과 이타애(faith and charity)에 관한 암시가 들어 있다. 형인 카인은 동생 아벨의 제물이 열납되는데 대해 시기하였다. 이 시기심이 결국 아벨을 살해하는 죄악으로 이끌려지게 했다. 이와 똑같은 영이 형의 침통한 분노 속에도 들어 있음을 알게 된다. 잘못된 사람 속에서 믿음과 이타애는 분리되어 있다. 그러나 그 둘은 거듭나는 과정 속에서 다시 하나가 되어야 한다. 인간 속의 의지와 이해성은 인간의 첫 단계에서는 위와 같이 분리되어 있다. 첫 단계란 진리를 알되 진리를 사랑하지 않아 실제에 사용하지 않고 있는 단계이다. 이해성은 관리하기가 쉬운 반면, 의지는 충동적이어서 조절하기가 어렵다. 그러나 거듭남을 일단 시작하면, 의지는 더 높고 더 내면적인 수준까지 달성하게 해준다. 그러면서 의지와 이해성이 하모니를 이루게 된다.

화해 (reconciliation)

비유가 말하고 있지 않은 것 중 하나는, 아버지가 두 아들을 화해시켰는지에 관한 것이다. 비유가 이런 구절을 담을 필요가 없는 이유는 본문이 의지와 이해성, 또는 이타애와 믿음, 혹은 외적 마음과 내적 마음 모두가 거듭나야 한다는 것을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카인과 아벨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가 아는 것은 교회가 타락함에서 “믿음만, faith alone”을 고집하면 이타애가 파멸된다는 것이다. 이 비유에서 알게 되는 것은 새교회에 의해 이타애가 회복된다는 것이다. 형의 반대적인 입장 속에서 알게 되는 것은, 새 예루살렘이 더 높은 인간다움을 회복시켜 가는데 “믿음만”이라는 교리나 종교의 외적인 모든 형체들의 반대 입장에 부딪칠 수밖에 없다는 것이리라.
그러나 아버지는 믿음이라는 형을 설득시켜서 신실한 회개와 개혁, 그리고 거듭남 속에 있는 사랑 또는 이타애라는 동생과 화해되도록 해주실 것이다. 새교회인들이 기독교적인 사랑의 높고 거룩한 삶을 이뤄 간다면, 주님께서는 인간 믿음과 인간 사랑을 거듭남 속에 있는 영적 결혼을 통해 하나 되게 해주실 수 있다. 그러면 새 예루살렘이 하느님께로부터 하늘을 통해 지상의 사람이 사는 곳까지 내려오게 되리라. 그리고 주님은 지상의 왕이 되시고, 그 날에 한 분 주님, 그분의 이름은 하나로만 불리시리라. 아멘.

34
부정한 청지기
– 실행 가능한 지혜 –

성서 본문: 누가복음 16장 1-12절

1.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또 말씀하셨다. “어떤 부자가 청지기 한 사람을 두었는데 자기 재산을 그 청지기가 낭비한다는 말을 듣고 2. 청지기를 불러다가 말했다. ‘자네 소문을 들었는데 그게 무슨 짓인가? 이제는 자네를 내 청지기로 둘 수 없으니 자네가 맡은 일을 다 청산하게.’ 3. 청지기는 속으로 생각했다. ‘주인이 내 청지기 직분을 빼앗으려 하니 어떻게 하면 좋을까? 땅을 파자니 힘이 없고 빌어먹자니 창피한 노릇이구나. 4. 옳지, 좋은 수가 있다. 내가 청지기 자리에서 물러날 때 나를 자기 집에 맞아 줄 사람들을 미리 만들어 놓아야겠다.’ 5. 그래서 그는 자기 주인에게 빚진 사람들을 하나씩 불러다가 첫째 사람에게 ‘당신이 우리 주인에게 진 빚이 얼마요?’ 하고 물었다. 6. ‘기름 백 말이오’ 하고 대답하자 청지기는 ‘당신의 문서가 여기 있으니 어서 앉아서 오십 말이라고 적으시오’ 하고 일러 주었다. 7. 또 다른 사람에게 ‘당신이 진 빚은 얼마요?’ 하고 물었다. 그 사람이 ‘밀 백 섬이오’ 하고 대답하자 청지기는 ‘당신의 문서가 여기 있으니 팔십 섬이라고 적으시오’ 하고 일러 주었다. 8. 그 정직하지 못한 청지기가 일을 약삭빠르게 처리하였기 때문에 주인은 오히려 그를 칭찬하였다. 세속의 자녀들이 자기네끼리 거래하는 데는 빛의 자녀들보다 약다.”
9. 예수께서 말씀을 계속하셨다. “그러니 잘 들어라. 세속의 재물로라도 친구를 사귀어라. 그러면 재물이 없어질 때에 너희는 영접을 받으며 영원한 집으로 들어 갈 것이다. 10. 지극히 작은 일에 충실한 사람은 큰 일에도 충실하며 지극히 작은 일에 부정직한 사람은 큰 일에도 부정직할 것이다. 11. 만약 너희가 세속의 재물을 다루는데도 충실하지 못하다면 누가 참된 재물을 너희에게 맡기겠느냐? 12. 또 너희가 남의 것에 충실하지 못하다면 누가 너희의 몫을 내어 주겠느냐?”

원리

영적 미래를 위해 일하는 선한 사람은 세상 미래를 위해 일하는 사람이 보여주는 것 그 이상으로 실행 측면에서 많은 지혜를 드러내야 한다.

글자적 의미

본문을 피상적으로만 볼 경우, 이 비유는 부정한 수단, 즉 사기치는 일을 잘하는 짓이라고 격려하는 듯 비꼬아 생각할 수도 있게 되어 있다. 그러나 본문을 좀 더 조심스럽게 그리고 논리적으로 생각한다면, 그런 엉뚱한 생각은 가셔지고 말 것이다. 이 비유는 비교해서 생각하도록 되어 있지 않고, 영적인 것과 자연적 사물을 대응시켜 비교하는 상응(correspondence)에 의해서 생각하도록 의도되어 있다. 글자 측면의 의미에서, 이 비유는 자기 기회를 재빨리 포착하여 놓치지 않는 세상적인 슬기로움을 보여준 약은 사람의 경우를 들어서 말하고 있다. 우선 그는 자신이 매우 절박한 사정에 놓이게 됨을 발견하자, 장차 직위가 해제된 후의 자기 살길을 미리 생각하고 살길을 마련하기 위해 즉각적인 결정과 기민한 행동을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 비유의 글자에서 보여주는 도덕성은, 영적 인간에게 임박해진 영적 위험을 피하는데도 세상적 인간이 세상 일에서 보여주는 것 같은 실행력을 발휘해서 미래의 영적 보호나 처소를 준비해 가야 한다는 것이다.

영적 의미들

이 비유는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상응에 의해 정확한 영적 의미를 우리에게 알려 주고 있으므로 아래 문단에서 자세히 설명할 것이다. 주님은 자연적 인간을 두고 말하시어 미래 삶을 위해 자기의 자연적인 재물을 잘 사용해야 할 것이라는 자연적 차원의 추론을 남겨 놓으시지만, 영적 인간을 향해서는 영적 삶의 합리적인 행동 지침을 위한 총명한 방향 설정을 주시고 계신다. 따라서 이 비유의 무대 배경은 시험받고 있는 상태이다.
자연적 인간이 미래 삶을 준비해 둔다는 것은 세상적인 것들을 축적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영적 인간에게 있어서의 미래 삶의 준비란 인격의 성장을 의미한다. 그 이유가 인간이 영적으로 미래를 준비한다는 말은 자신의 악을 자라지 못하도록 억제하면서 자신의 선함을 키워 간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어떤 부자와 청지기

본문의 “어떤 부자”란 신성한 인간, 주님이시다. 이 부자라는 말은 우주 안의 모든 것이 주님의 것이기에 부자라는 말 뿐만 아니라, 모든 선함과 진리가 그분의 것이라는 말까지 포함되고 있음을 먼저 생각하고 있어야 한다. 한 마디로 그분은 선함 자체, 진리 자체, 생명 자체이시다는 말이다. 넓은 측면에서 볼 때, 청지기는 주님의 영적인 재물을 분배하는 교회를 말한다. 좁은 측면에서 볼 경우, 가장 작은 형태의 교회인 각 개인은 주님의 선과 진리에 관한 의무를 지고 있는 주님의 청지기들이다.

재물을 낭비함

주님께서는 청지기가 그분의 재물을 낭비한다는 보고를 받으셨다. 영적 재물이란 영적 삶을 위해 필요한 재물,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 슬기롭게 사용하도록 인간에게 위촉하신 영적 삶에 관한 원리들이다. 이 영적 재물은 그 재물을 소홀히 여긴 사람 즉 진리를 사용하지 않고 경건이라는 형식을 일삼아 온 사람에 의해 낭비되어 진다. 이런 사람들이 집합한 교회는 부주의한 삶을 부추기게 하는 거짓 교리를 가르치는 바 결국 주님의 선들을 낭비하고 만다. 교회의 모든 역사를 망라해서 주님께서는 청지기 직분을 남용한데 대해 셈을 하시었는데, 집합적으로는 거룩한 말씀을 통해, 개인적으로는 각자 속의 양심을 통해 셈(청산)을 하시었다.

청산이 요구됨

인간이 주님께 큰 책임이 있음을 알게 될 때 자연스럽게 그의 양심은 동요를 일으킨다. 인간이 시험 가운데 있을 때 그는 자기 속의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을 자신의 이기적이고 세상적 목적을 위해 사용하려는 쪽으로 기울어지는 자기를 본다. 그러면 자기 주인의 선을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에 관해 자기를 검증하도록 인도되어진다. 인간을 유혹하는 악령은 구원받을 가능성을 이미 넘어서는 죄를 범했다는 것, 한 마디로 영적 고향으로 되돌아가기에는 너무 늦었다는 것을 생각하도록 부추긴다. 그러나 주님은 그 사람 속에 남아 있는 선과 진리를 통해 역사 하시어 그로 하여금 과감함 개혁의 필요성이 일깨워지도록 그를 인도하신다.
심판 속에서 주님의 진리는 모든 사람, 모든 교회로 각자의 청지기 직분에 관해 청산하도록 부르신다. 이 때 생명 있는 진리를 가르치는데 실패한 모든 교회가 듣는 말은, “이제는 자네를 내 청지기로 둘 수 없다”는 정죄뿐이다. 이 말은 인간 역사에 존재하는 모든 교회의 처방에 있어 온 사항이다. 그러나 열려진 말씀, 영적 의미로부터 주님의 진리를 가르치는 교회, 마지막까지 잘 참아 내는 교회가 새 예루살렘교회로 될 것임을 그분은 약속하시었다.

속으로 생각함

인간이 주님의 영적 진리를 낭비했을 경우, “어떻게 하면 좋을까?”라고 “속으로 생각한다.” 양심에 의해 움직여지는 것이 속으로 생각한다는 말이다. 이는 자신의 자연적 악한 경향성에서 어떻게 하면 자유로워질까? 라는 것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서 영적 재물을 소홀히 하면 필히 그것을 잃게 된다는 걱정이 오게 된다는 말이기도 하다.

땅을 팜

“땅을 파자니 힘이 없고…” 근육노동을 매일 해 오지 않던 사람이 갑자기 힘든 일을 해야 할 경우 습관적으로 자기는 할 수 없다고 느낀다. 영적 측면에서 땅을 판다는 것은 더 깊은 원리를 배우기 위해 뭔가를 찾는 것, 또는 연구하고 문의하는 것을 말한다. 사람들이 땅을 파보고 그 땅의 성질을 검사한 뒤 뭔가를 심거나 건축하듯이, 영적 인간도 말씀의 글자나 교리들 너머 있는 뭔가를 정신적으로 추구한다. 이 사람은 이런 뭔가를 파 보아서 그 깊이를 가늠해 보거나, 보물을 발견하고, 더 나은 삶을 건설할 적절한 땅을 발견한다.
그러나 시험 속에 있는 사람은 “나에게는 땅을 팔 힘이 없어”라고 외친다. 그 이유는 자기 스스로의 노력만 가지고는 영적 삶을 획득할 수 없음을 느끼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가 내리는 결론은, 진리를 추구하려면 주님께 의존해야 한다는 것, 만일 자신이 주님의 진리를 소홀히 여긴다면, 자기는 진리를 잃고야 만다는 것, 주님이 밝혀 주시지 않고는 어떤 진리도 자기에게 회복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빌어먹음

“빌어먹자니 창피한 노릇이다.” 이는 시험 속에 있는 사람이 느끼게 되는 것인데, 자기가 이미 진리를 가졌었지만 남용해 버리고, 소홀히 간수한 뒤에, 진리를 달라고 주님께 나아갈 수 없다고 느낀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자신이 얼마나 무기력한 존재인지를 고백하는데 아직도 자존심을 내세운다는 말이다. 그래서 하느님의 자비나 도움을 빌어먹으려 하는 것이다. 그는 시험 중에 있으므로 악령이 그의 마음속에 차 있어 그로 자포자기하는 쪽으로 치닫도록 만들고 있다.

좋은 수가 있다

그러나 그는 자기가 청지기 자리에서 물러날 때 해야 할 것을 결정하고 있다. 즉 자신의 소홀함이나 남용으로 지식이라는 재물을 박탈당하는 자신을 발견한다. 인간의 생각이 위와 같은 상태에 있다 해도 주님은 인간을 계속 관찰하시며 그로 하여금 겸허와 통회 쪽으로 오는 것을 허용하시어 그가 삶의 더 높은 상태로 인도될 수 있게 자신을 스스로 열도록 하신다. 그러면 인간은 자기가 폐물에 불과함을 느끼고 미래에 있을 집을 설비하는 어떤 길을 모색한다.
따라서 정당하지 않았던 청지기의 행동도 주님의 선과 진정한 원리에 있는 영원한 정신적 고향을 설비하고자 노력하는 마음을 표현해 주는 것이 된다.

집, 등등

청지기는 빚진 사람의 집이 자기를 맞아 주기를 원했다. 모든 인간의 영의 집은 그의 안쪽 마음, 즉 의지 안에 있다. 시험을 겪는 동안 인간은 자신의 무가치함을 보고 영적 죽음을 두려워하면서 회개하여 개혁하는 쪽으로 인도되어질 때 그는 타인 속의 선들을 관리하는 청지기라는 정신적 조건(직분), 다시 말해 진리를 배우고 생각만 하던 단계를 벗어난다. 그리하여 그는 가족의 한 사람이듯 선을 사랑하는 더 진보된 조건에로 인도된다. 위와 같은 내용은 우리가 비유의 글자를 가지고는 전혀 나타나지 않는 의미들이다. 진리가 인간 마음에서 통치하는 원리가 되어 있기를 중단하고 사랑이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될 때 그는 더 이상 청지기가 되지 않고 가족의 한 사람이 된다.

빚진 사람을 부름

청지기는 빚진 사람들을 불렀다. 빚진 사람이라는 말은 글자대로 생각해 보면 그들은 상인들 즉 부유한 농장에서 물품을 조달 받은 사람들, 또는 경작지의 일부를 세로 빌렸던 사람들이었을는지 모른다. 어찌됐던 영적 차원에서 모든 인간은 주님께 빚진 자들이다. 자연적 인간은 우리가 주님께 빚지고 있다는 것을 억지로 인정하지만, 영적 인간은 그 사항을 인정하기를 사랑한다. 주님께 진 빚을 다 갚을 자는 이 세상 어느 누구도 없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라 해도 자신의 빚이 얼마인지 인정하는 행동은 100% 가능하다. 바꿔 말해서 빚을 준 사람, 그분이 내리시는 명령을 지킬 수는 있다.
주님께 빚진 사람이란 우리의 의지와 이해성인데, 그 이유는 우리가 그 안에서 살기 때문이고 비유를 읽는 가운데 상상되는 빚진 사람은 상당수에 이를 것 같이 느껴짐에도 불구하고 특별히 두 사람만이 거론되고 있다. 그 이유는 우리의 모든 영적인 빚은 두 종류, 즉 의지와 이해성에 관한 빚으로 총괄해서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애정적 삶과 지적인 삶에서 빚을 지고 있다는 말이다. 기름은 먹을 경우 몸을 따뜻하게 해주고, 기계에 칠 경우 미끈미끈한 특성 때문에 윤활 작용을 한다. 그래서 기름은 애정에 속한 것을 표현하는데, 우리는 이를 두고 사랑의 선(the good of love)이라 부른다. 그 반면 밀은 진리의 선(the good of truth)이라 부르는데, 말을 바꾸어 보면 지적인 삶이 생산하는 실용적인 선들을 표현한다. “당신이 진 빚이 얼마요?” 라는 물음이란, 우리가 주님께 진 빚이 얼마인지, 위의 두 측면의 삶에 받은 축복이 얼마만큼 인지 자기 양심에게 조회해 보는 것을 말한다. 사실 우리의 실제 삶 속에 있는 선한 애정들과 진정한 생각들 모두는 주님으로부터 파생된 것들이다.

빚진 사람 중 한 명이 자기는 기름 백 말을 빚졌다고 인정하고 있다. 또 다른 한 명은 밀 백 섬이라고 인정하고 있다. 올리브 기름과 밀은 거룩한 땅의 주요 산물이다. 그래서 이것들은 영적 삶에 주요 산물인 사랑과 지혜를 표현한다. 백이라는 숫자는 모든 것, 즉 넓은 측면에서의 충만함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가득하게 많다는 것을 통칭하는 숫자인 것이다. 따라서 기름과 밀에서 진 빚의 양이 각기 백이라고 인정한다는 것은 우리가 지닌 모든 선함, 실용적으로 사용하는 모든 진리가 주님께 진 빚임을 인정한다는 말이다.

문서(bill), 등등

문서를 가져다가 앉아서 빠르게 어떤 숫자를 쓴다는 것은, 주님과의 관계를 자신이 납득할 수 있기 위해 꼼꼼한 용어로 주님에게 빚진 부채를 규정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앉는다는 것은 서 있는 상태보다 더 안정된 품새인 바, 이는 의지 상태와 관계가 있다. 우리가 주님께 빚졌음을 인정하기를 바래고 사랑할 때에야 비로소 우리는 자신의 심정에 그 부채액을 적어 놓게 된다.

숫자들

숫자들은 정신적 삶의 상태나 조건들을 표현한다. 100은 충만됨, 완성(full, complete)을 표현한다. 100과 대조시켜 볼 때, 50은 비록 부족하나 그 정도로도 충만하다고 인정함(sufficient)을 표현한다. 주님께 진 빗을 완전히 청산 할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다. 그러나 과거는 과거지사로 내버려두고 선함을 새로운 경력 속에 쌓는 것만큼은 누구에게나 가능하다. 다시 말해 우리가 주님께 진 빚을 갚을 수 있는 행위는 오로지 미래에 한해서만 가능하다는 말이다. 빚을 인정하여 여지껏 해 왔던 악행을 중단하고 계명을 지킴으로 빚의 청산은 일부라도 가능한 것이다. 우리는 기름 백 말을 지불할 수 없고, 단지 오십 말만 지불이 가능하다. 즉 인간이 할 수 있는 온갖 것들이란 지금 할 수 있는 것뿐인바, 과거의 것은 속죄하고, 미래를 선한 질서 속에 간직하는 일 뿐이다.
그러면 주님은 오십 말을 갚는 것, 문서에 적는 것, 부족하지만 충분하다고 인정해 주실 것이다. 그 이유는 어느 누구도 과거로 되돌아가 과거 속에서 다시 행위를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만일 누군가가 진리 안에 지금 앉아서 주님께 빚졌음을 인정한다고 심정에 적은 뒤, 계명을 지켜 간다면, 그는 역시 자기 생명책에 부채액을 기록하는 것도 된다. 그런 뒤 그 책에 의거 그는 심판되어 질 것이다. 그래서 그가 새로운 경력 속에서 살아간다면, 그의 삶은 옛 경력 속에 더 이상 있지 않게 된다. 그리고 자기 부채액의 절반은 취소되어질지 모른다.
어느 인간도 자기가 게을리 취급한 진리를 과거로 되돌아가 회복되게 할 수는 없다. 따라서 살아가고 있는 현재를 개선해서 미래를 설비해 가야 할 것이다. 한 마디로 우리는 자기가 빚진 액, 밀 백 섬을 모두 지불할 수 없다. 그러나 미래를 이제부터라도 설비해 가고 있을 경우, 설사 진리를 소홀히 하려 들거나 부정하기까지 하게 하는 시험을 당해도 견디어 낼 수 있다. 그리하여 시험 속에서이든지 또는 번영 속에서이든지, 진리를 준수하여 따르면서 힘닿는데 까지 빚진 액수의 얼마라도 갚아 갈 수가 있는 것이다.

80

2 X 40, 또는 80은 시험을 표현한다. 그 이유가 80은 40을 두 배 한 것이고, 40은 시험의 상태를 표현하기 때문이다. 40은 성경에서 많이 사용되는 숫자이다. 예를 들면, 40일간의 홍수, 이스라엘 후손들의 광야 생활 40년, 예수님께서 40일간의 단식과 시험 등등이 있다. 이렇게 해서 밀 팔십 섬을 갚는 다는 것은 시험 속에서, 게다가 이중의 시험, 즉 애정과 생각 측면에서 진리를 수단으로 맞서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이는 매일의 생활에서 주님의 말씀을 수단으로 살게 되는 것을 뜻하게 된다. 이런 것만이 우리가 주님께 진 빚을 갚는데 할 수 있는 최선의 것이다. 과거지사에 관한 한, 우리는 “주여, 당신의 종으로 심판 받지 않게 해주소서, 당신이 보시기에 어느 인간이라고 의로웁다고 하실 수 야 없지 않겠습니까? 라고 소리내어 울며 간청 드리는 어린 아이 같은 방법밖에 없다.

청지기를 칭찬함

“그 정직하지 못한 청지기가 일을 약삭빠르게 처리하였기 때문에 주인은 오히려 그를 칭찬하였다.” 이 본문을 생각하되 간과해서는 안될 것은, 칭찬한 사람은 예수님이 아니라 청지기의 주인, 또는 어떤 부자라는 점이다. 다시 말해 누군가가 자신의 소홀함으로 인해 자신의 지위를 잃게 되는 경우(case)에 한해서만 주님께서 필요하셨던 것이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정직한 청지기는 이 비유의 목적을 위해 필수적인 요소를 제공하지 못한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청지기의 부정직한 것, 그의 부정한 수단, 그의 죄과를 옹호하시지는 않았다. 단지 그분께서는 인간에게 있을 장래를 예견해 보는 것, 신중성, 세상적인 지혜, 신속한 해결, 추진력 등을 예증하셨을 뿐이고, 더불어 비상사태에 대처하는 즉응력, 장래를 미리 준비함, 등등의 인간 특성을 열거해 주셨을 뿐이다.

정책, 방책 (policy)

본문에서 사용되는 “약삭빠르게”라는 용어에서, 우리는 지혜라는 생각을 도덕적 수준의 선함과 연계해서는 안되리라 본다. 그 용어는 단지 세상적인 지혜나 신중함, 뱀의 신중함 같은 현명한 정책이나 수단을 의미한다. 이와 같은 특질들은 설사 그 특질이 나쁜 목적에 충당되었다 해도 그 특질 자체는 칭찬될 소질이다. 근면함, 세심함, 신속함, 정확함, 예견하는 습관, 경제성, 과감히 해결해 감, 추진력, 등등은 인격 속의 특질로서 칭찬되어져야 할 소질들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것들을 인간의 영적 품성과 따로 떼어 생각해 보아야 한다.
상응으로 생각한다 해도 위의 특질들은 넓은 측면에서의 품성과 떼어서 따로 생각해야 할 것이다. 예를 들면, 독수리가 지닌 특질인 먼 거리에서도 정확히 사물을 관찰하는 기능은 영적 인간이 갖는 예리하고 광범위하게 예견하는 통찰력(vision)과 상응된다. 이런 사항들이 우리가 독수리에 관해 생각해 보는 사항일 뿐, 그 외에 먹이를 포획하는데 있어서의 독수리의 광폭한 성질을 고려하지 않는다. 이와 같이 부자는 청지기의 입장에서 생각하여 그를 칭찬한 것뿐이다. 사실 그는 자신을 위해서만 일을 잘 처리했을 뿐이다. 게다가 그는 자기가 빠진 딜레마를 피하기 위해 잽싼 실력을 보여주었을 뿐이다.

자기네들끼리에서 더 약음

물질 세계에 있는 동안, 세상적 인간이 영적 인간 보다 더 신중하게 미래를 설비하고 그들 차원에서만 본다면 오히려 더 정력적인 지혜를 보여 주는 사실에 제자들의 시선이 모이도록 주님께서는 배려하셨다. 즉 “세속의 자녀들이 자기네들끼리 거래하는 데는 빚의 자녀들 보다 더 약다(현명하다).” 세속의 자녀란 이 세상을 살아가게 하는 마음, 즉 세상적인 마음을 말한다. 그리고 빛의 자녀란 영적인 빛, 천국적인 진리의 빛으로 다시 태어난 마음들이다.
인간 삶에 있어지는 모든 각 상태들은 우리 속에 있는 통치하는 사랑(ruling love)에 의해 임신되어 출생된다. 세상적 인간은 오로지 세상적 마음으로부터 모든 것을 출생시킨다. 그 인격 속에 있는 모든 것은 세상을 사랑함에 의해 결과가 있어진다. 그래서 세상적 인간은 세상만 위해 살아가는 바, 그는 세상적인 것들에 에너지를 집중시킨다. 따라서 영적 인간이 이 세상에서 하는 행동보다 세상적 인간이 이 세상에서 하는 일은 더 간교하고 약삭빠를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 이유는 영적 인간은 진정한 삶의 자리를 내향의 세계에 두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야훼 하느님께서 만드신 들짐승 가운데 제일 간교한 것이 뱀이었다” (창세기 3:1). 뱀으로 의미되는 감각(senses)들은 그것들 차원에서 즉 감각적 삶이나 외향의 세계에서는 가장 슬기롭다. 그러나 그 슬기롭다는 것은 오로지 그 세계에 엄격히 국한되어 할 수 있는 말일 뿐이다. 예를 들면, 뱀은 양이나 비둘기 보다 더 간교하다. 그럼에도 밤중에는 “올빼미가 독수리보다 더 정확하게 관찰할 수 있다”는 것도 잊어서는 안된다.

신중함이 필요하다

이렇게 비유를 통해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실용적인 것도 가르치시는 바, 세상적 인간이 세상적 타산을 잘 헤아리듯이 우리의 영적 타산을 잘 헤아리고 준비해야 할 것까지 가르치시고 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제자들을 파견하실 때, “너희는 뱀같이 빈틈없고, 비둘기 같이 악의가 없어야 한다” (마태복음 10:16)라고 당부하셨다. 서로 서로 인연을 갖게 되는 우리의 기회, 우리 삶에 주어지는 갖가지 환경 여건, 이것저것 모두를 우리는 평상시에 산출될 수 있는 이윤보다 더 많이 창출되게 하여 영적 삶에 보태야 한다. 다시 말해 교인은 자연적 사항이든, 영적 사항이든, 어느 면에서나 세상 속의 인간에게 있는 재치나 박동력으로부터서도 교훈을 배울 수 있다는 말이다.

세속의 재물로 친구를 만듦

비유를 끝맺는 부분에서 우리가 주목해 둘 것은, 주님께서 칭찬하신 것이 자기 수중에 있는 문제에 대한 적극성만이 아니라, 신실함까지 칭찬하셨다는 것이다. “세속의 재물로 친구를 만들어라”라고 주님이 말씀하실 때, 그분이 가르치시는 것은, 이 세상에 속한 것들을 적이 아닌 영적 삶의 친구로 만들라는 것, 세상적 슬기로움, 신중함, 신속함, 정밀함, 상식, 속담, 등등을 영적 삶의 친구가 되게 하여 잘 이용하라는 것이다. 우리가 이 세상 자체만을 사랑하고 천국 원리들을 잊게 될 때, 이 세상은 영적으로 우리의 적이 되어 간다. 그러나 이 세상을 천국을 위한 훈련소로 생각하여 잘 이용한다면 그것은 우리의 친구가 되어 준다. 돈이든, 정신적 재산이든, 그것이 남용될 경우 그것들은 “불의(세속)의 재물”이 될 것이나, 같은 재물이라 할지라도 영적 삶을 위해 사용될 때 그것들은 불의의 재물이라는 수준을 벗어나 친구가 되어 천국의 집에 들어가는데 우리를 도웁게 된다. 그 이유는 그것들이 천국 진리라는 영적 재물과 협동하여 천국을 위한 우리 인격을 준비하는데 한몫을 담당해 줄 것이기 때문이다.

실패함 (재물이 없어질 때)

우리에게 “재물이 없어질 때 (it fails)”란 우리가 죽는 때이다. 이 때야 말로 이 세상이 우리를 위해 더 이상 어떤 것도 제공하지 못하는 때이다. 더불어 이 세상에 속한 온갖 것이 인간 영혼이 갈망하는 더 높은 것을 만족시켜 주는 것을 멈출 수(실패할 수)밖에 없는 때인 것을 영적으로 확실하게 알 수 있는 때이기도 하다.

충실함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지극히 작은 일에 충실한 사람은 큰 일에도 충실하며 지극히 작은 일에 부정직한 사람은 큰 일에도 부정직할 것이다.” 그 이유는 인간이 삶에 관한 어떤 원리로부터 일하기 때문이고, 원리는 그 원리의 품질을 행동 속에서 행동의 부피에 관계없이 저절로 드러내기 때문이다. “좋은 나무는 좋은 열매를 맺는다.” “선한 자는 자기 심정 속에 있는 선한 보물로부터 선한 것을 생산한다.”

지극히 작은 일과 큰 일

“지극히 작은 일”은 영적 삶의 시작이다. 그래서 만일 어떤 사람이 지극히 작은 일에도 충실하다면 그 충실함은 “큰 일”로 자라게 된다. 다시 말해서 “지극히 작은 일”이란 자연적인 것에 관한 사항들이고, “큰 일”은 영적 사항에 속한 것들이다. 그래서 자연적인 것에 충실한 사람은 영적인 것에도 충실해진다. 그 이유는 똑 같은 내향적 원리가 양쪽 측면에 작용하기 때문이다. 인간에게 부정직한 사람은 주님에게도 부정직해진다. 계명을 글자대로 지키지 못하는 사람은 계명을 영적으로도 지키지 못한다. “내가 너희에게 땅에 속한 것을 말하는데도 믿지 못하는데, 만일 내가 하늘에 속한 것을 말한다면 어떻게 믿을 수가 있겠느냐?”

불충실함

“만약 너희가 세속의 재물을 다루는데도 충실하지 못하다면 누가 참된 재물을 너희에게 맡기겠느냐?” 우리가 불충실할 때 세상도 우리에게 부정직해진다. 그 이유는 우리가 세상을 사랑하고 세상에서 행동하는 것이 올바르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어질 때 어떻게 천국의 더 높은 삶을 달성한다고 기대나 해볼 수 있을까? 만일 우리가 주님의 말씀 글자에 성실하지 않다면 어떻게 세상적 눈에서 감추어져 영적 의미의 심오한 깊음 속에 놓인 영적 진리라는 진정한 재물을 주님이 우리에게 맡기시겠다고 기대나 해볼 수 있을까?
우리가 진리를 소홀히 하고 남용할 때 심정과 이해성에 있는 진리는 죽어 가고 오로지 기억 속에만 남겨져 있는다. 그 진리는 우리의 애정과 생각, 더구나 삶을 통치하지 못한다. 그러면 비록 우리가 진리를 가지고 있다 해도 그 진리는 우리의 것이 아니다. 우리는 그것을 자기 것으로 만들지 못한다. 그래서 본문에서 이렇게 말한다. “너희가 남의 것에 충실하지 못하다면 누가 너희의 몫을 내어 주겠느냐?”
그런고로 “달란트의 비유”에서 주인이 맡긴 한 달란트를 땅에 묻어 두었던 사람의 경우, 그가 지닌 한 달란트마저 빼앗아 열 달란트를 지닌 자에게 주었다. 이와 같이 사용하지 않은 진리는 잃어버리게 되어 있다. 성실하게 처리하지 않은 진리, 그러나 그 진리는 주님의 것이기 때문에 우리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 없다. 오로지 우리는 주님의 진리를 자기 삶에서 사용함으로, 주님과 자신이 협력함으로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 있을 뿐이다.

삶 속의 일

비유를 통해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왜 살고 있는지를 분명히 해야 한다는 것, 사는 것은 거듭나기 위해서라는 것, 주님의 종이요 친구로서 세상을 잘 부려 가는 일에 에너지를 쏟아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시고 있다. 이렇게 해서 주님께 빚진 것의 얼마라도 갚으려고 노력해야 한다. 지극히 작다고(하찮은 듯) 여겨지는 진리라 해도 그것을 성실히 삶에 응용해 갈 때 우리는 주님을 그런 성실로 대하는 것이 된다.
우리는 세상적 영만으로 일하지 않고 선용을 수행하기 위해 상식과 기술, 정력을 사용하여 업무를 처리해 갈 수 있다. 우리는 세상을 적으로서가 아닌 친구가 되도록 사용해 갈 수 있다. 그러려면 우리는 이미 안 진리를 용감하고 정력적으로, 신중하고도 정밀함을 동원해 사용해야 할 것이다. 자연적인 것들이 우리의 열린 영을 만족시켜 주지 못함을 절실하게 실감할 때, 우리는천국 진리의 더 높은 국면들을 영원히 있을 처소로 받게 되리라.

35
부자와 라자로
– 세상의 부와 천국의 부 –

성경 본문: 누가복음 16장 19-31절

19. “예전에 부자 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화사하고 값진 옷을 입고 날마다 즐겁고 호화로운 생활을 하였다. 20. 그 집 대문간에는 사람들이 들어다 놓은 라자로라는 거지가 종기투성이의 몸으로 앉아 21. 그 부자의 식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로 주린 배를 채우려고 했다. 더구나 개들까지 몰려 와서 그의 종기를 핥았다. 22. 얼마 뒤에 그 거지는 죽어서 천사들의 인도를 받아 아브라함의 품에 안기게 되었고 부자는 죽어서 땅에 묻히게 되었다. 23. 부자가 죽음의 세계에서 고통을 받다가 눈을 들어 보니 멀리 떨어진 곳에서 아브라함이 라자로를 품에 안고 있었다. 24. 그래서 그는 소리를 질러 ‘아브라함 할아버지, 저를 불쌍히 보시고 라자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으로 물을 찍어 제 혀를 축이게 해 주십시오. 저는 이 불꽃 속에서 심한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하고 애원하자 25. 아브라함은 ‘얘야, 너는 살아 있을 동안에 온갖 복을 다 누렸지만 라자로는 불행이란 불행을 다 겪지 않았느냐? 그래서 지금 그는 여기에서 위안을 받고 너는 거기에서 고통을 받는 것이다. 26. 또한 너희와 우리 사이에는 큰 구렁텅이가 가로 놓여 있어서 여기에서 너희에게 건너 가려 해도 가지 못하고 거기에서 우리에게 건너 오지도 못한다’ 고 대답하였다. 27. 그래도 부자는 또 애원하였다. ‘그렇다면 할아버지, 제발 소원입니다. 라자로를 제 아버지 집으로 보내 주십시오. 28. 저에게는 다섯 형제가 있는데 그를 보내어 그들만이라도 이 고통스러운 곳에 오지 않도록 경고해 주십시오.’ 29. 그러나 아브라함은 ‘네 형제들에게는 모세와 예언자들이 있으니 그들의 말을 들으면 될 것이다’ 하고 대답하였다. 30. 부자는 다시 ‘아브라함 할아버지, 그것만으로는 안 됩니다. 그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사람이 찾아 가야만 회개할 것입니다’ 하고 호소하였다. 31. 그러자 아브라함은 ‘그들이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도 듣지 않는다면 어떤 사람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다 해도 믿지 않을 것이다’ 라고 대답하였다.

요약

진정한 개혁은 신성한 진리를 자신의 의지와 이해성, 그리고 삶에서 진지하게 받아들일 때 있어진다. 지식이라는 커다란 부유함도 그 지식 속의 진리를 삶 속에다 비축하지 않으면 거듭남과 상관이 없게 된다. 그러나 영적 진리로 삶을 통치하고자 해서 그 진리를 바라는 성실함은 무지한 마음이라 해도 천국의 빛과 따뜻함을 접할 수 있게 된다. 바깥 세계, 눈에 보이는 것들만에 자신의 애정을 쏟고 있다면, 그 심정은 닫혀 천국에 속한 것을 음미하기는커녕 아예 불가능하게 만든다. 그 이유는 그 심정이 이 세계에서든지, 저 세계에서든지 천국 생명을 받고 싶어하지 않기 때문이다.

극과 극

비유가 그리고 있는 것은 삶과 죽음, 그리고 닥쳐올 세계에 관하여 극도로 날카로운 대비 또는 극과 극을 보여 주고 있다. 비유의 의미를 찾는 가운데 우리는 인격의 극과 극이 발견될 것임을 기대해야 할 것이다. 즉 한 인간은 부자이고, 또 다른 인간은 가난하다. 그래서 부자는 화사하고 값진 옷을 입었고, 거지는 누더기를 걸치고 종기 투성이의 몸이었다. 한 사람은 진수성찬으로 날마다 밥상을 차려 먹는 자이고, 다른 사람은 배고픔을 덜기 위해 부수러기를 주어 먹어야 했다. 한 사람은 자기 마음이 바뀌는데 따라 움직여 주는 한 무리의 종들을 거느렸고, 또 한 사람은 개의 동정심을 살뿐 인간적 보살핌에서 거리가 먼 신세에 처해 있었다. 한 사람은 그가 매장될 때 화려한 긴 행렬과 큰 곡소리가 울려 퍼지게 되어 있고, 또 한 사람의 시신은 어느 누구의 곡도, 묘비도 없이 땅 속에 쓰레기 던져지듯 묻히게 되어 있다.
위의 두 사람이 죽었다고, 극과 극의 대비는 끝난 것이 아니다. 한 사람은 호화스럽게 죽어 악의 처소로 내려가 비참하게 깨어났다. 그러나 또 한 사람은 거칠고 냉혹한 돌 같은 인간의 냉대함을 건너 영계에 있는 천사들의 품에 안기었다.
사실 천사들은 부자나 거지, 두 영혼을 천국으로 인도할 준비가 되어 있기는 매 한 가지 이였지만 물질계의 좋은 것에 고착된 심정은 천사들의 초대에 응답할 어떤 이유도 느껴 보지 못했고, 천국의 복을 끌어당길 어떤 내향의 세계도 없었던 것이다.

역사적인 적용

역사적 측면에서 볼 때 이 비유는 유대인과 이방인을 언급하고 있다. 유대인은 구약 성서라는 하느님의 말씀을 소유한 부자였다. 따라서 그들이 뜻하고자 했다면, 그들은 영적 잔치 속에서 언제나 살 수 있게 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방인들은 주님의 말씀에 무지한 상태인 가난한 자들이었다. 이방인들 중 마음씨 고왔던 사람들은 주님의 말씀으로부터 가르침을 받기를 간절히 바랬다. 천국적인 것을 거절하는 유대인들, 거듭나고 있는 많은 이방인들은 말씀 속에서 “선한 것으로 배고픔을 채우려는 자들과 주어진 부유함으로 텅비게 하는 자들” 이다.

표현적 의미들

추상적으로 적용해 볼 때, 이 비유는 어느 개인에 관계된다기 보다는 각 개인의 삶의 조건과 상태에 관계를 갖고 있다. 전체적인 풍경은 거듭나는 각 사람의 마음이다. 우리들 각자는 부자와 라자로, 즉 인격 속에 세상욕과 영성을 가지고 있다. 자연적인 시험은 세상욕인 부자를 총애하고 영성인 라자로는 굶겨서 감각적인 쾌락의 휘황찬란함 속에 내적 삶은 거지 상태로 방치해 둔다.

부자

영적으로 말해서 부자란 주님의 말씀 속의 진리를 많이 아는 사람 그래서 영적 삶의 수단을 많이 소유하고 있는 사람을 말한다. 신성한 진리가 들어 있는 주님의 말씀은 천국을 구성하고 있다. 보다 더 뾰족하게 생각한다면 주님의 말씀 속에 든 영적 의미를 아는 사람, 영적 빛 속에서 진리를 보는 사람은 영적으로 부자이다.

화사하고 값진 옷(purple and fine linen)

상징적으로 겉옷은 진리들, 특히 선한 원리들을 옷입히고 있는 진리들을 표현한다. 하느님의 말씀의 글자는 내향의 의미인 벗기워 있는 진리를 옷입혀서 자연적 인간에게 그 진리를 채용할 수 있게 하고 있다. 화사함(자색, purple)이란 왕권을 상징하는 색깔이다. 새교회의 경우 자색은 지식들, 즉 마음 안에 알려진 다양한 종류의 원리들과 사실들, 또는 우리가 알고 있는 선과 진리에 속한 것들이다. 자색옷(purple garment)이란 우리가 사랑해서 행해야 하는 것들 즉 선에 관한 지식을 표현해 준다. 고운 모시옷(값진 옷, fine linen garment)이란 우리가 믿어야만 하는 것들 즉 진리에 관한 지식을 표현한다. 마음이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으로 부자인 사람은 영적으로 볼 때, 그는 자색의 고운 모시옷(화사하고 값진 옷)을 입고 있는 것과 같다.

호화롭게 생활함

부자는 날마다 호화롭게 생활하고 있었다. 즉 자기가 원하기만 하면 천국적 원리로 삶을 영위할 수 있게 하는 지식을 풍부하게 가진 삶의 조건 속에 있는 인간의 상태를 말한다. 정신 차원에서 그가 잔치를 벌인다란 자기가 아는 것에 기쁨을 느끼는 것을 말한다.

거지

영적으로 볼 때 거지란 지식이 없는 자, 삶에 필요한 것을 알려고 하는 자이다. 단어 라자로란 “도움이 없음, without help”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즉 지식 또는 진리의 도움이 없다는 말이다. 역사적 측면에서 볼 때 라자로는 주님의 말씀의 도움도 없이 살아가는 이방인들을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개인적 측면에서 볼 때 라자로는 우리 마음 중에서 마음씨가 고우나 이방인 같이 무지한 상태, 그러나 배우려고 열심을 내는 어린 아이 같은 상태를 표현한다.

부잣집 대문은 걸인들에게는 좋은 장소이었는데, 그 이유는 돈 많은 이들이 그 대문을 드나들 확률이 높아 음식을 포함하여 여러 가지를 구걸할 수 있는 기회가 높기 때문이다. 문은 집의 밖과 안을 연결하는데 사용된다. 그래서 문은 소개해 주는 진리, 가르침, 또는 교리들을 표현하는데, 이런 것들은 우리 마음이 추구하고자 하는 것들을 소개한다. 모든 과학은 제 나름대로의 입문적인 진리를 가지고 있다. 거지는 대문밖에 있으면서 안으로부터 뭔가를 얻어내려고 하지만 경멸되어져 더욱 밖으로 내쫓김을 당한다.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을 거지 같이 취급했던 것이다. 우리의 자연적 마음은 이방인 같은 어린 아이의 겸손한 상태와 더불어 감각적 수준에서 자기만 중요하게 여기는 상태로 꽉 차 있는 바, 이런 마음 상태들은 자칫하면 경멸되어 내쫓김을 받기 십상이다.

거지의 종기

라자로라는 거지는 “종기 투성이였다.” 마음의 이방인 같은 상태는 비록 그 마음이 고웁다 할지라도 그 속은 왜곡된 자연적 원리 투성이가 있다는 말이다. 건강이 좋은 상태는 건전한 육체를 만들겠지만, 나쁜 상태, 나쁜 혈액은 그 자체가 종기를 생산하게 된다. 이와 같이 거짓 원리들은 그 자체가 불순물이어서 바깥 삶에서도 같은 형태를 보여 줄 수밖에 없다. 이사야서에서 자연적 마음에 관해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머리로부터 발바닥에 이르기까지 성한데가 한군데도 없이, 상처나고, 얻어터져 있고, 곪고 있는 종기 투성이” 라고 읊고 있다. 거지 라자로의 자연적 몸은 불쾌함 그 이상으로 불결한 바, 이와 같이 우리의 거듭나지 못한 자연적 마음은 설사 무지하면서도 호의적이다 할지라도 천사들이 보면 그것들은 아주 불결해 있는 상태이다.

개는 삶의 아주 외적 평면인 감각적 평면에 있는 원리들, 또는 그런 원리로 움직이는 사람들을 표현한다. 이런 원리의 소유자들은 조금 알고 있으면서도 말을 많이 해댄다. 따라서 그들의 행동 역시 아주 외적 용도에만 치중되어 그 쓰임새는 천박할 뿐이다. 감각적인 선, 마치 개와도 같이, 감각적인 것을 신뢰하는데 충성한다. 종기를 치료해줄듯 핥아 대는 개의 모습이란 마음을 질서에로 회복시키겠다고 하는 자연적 선한 애정의 노력을 표현한다. 게다가 그 노력의 품질 역시 매우 수준이 낮은 품질일 뿐이다. 이런 수준에 있는 사람들은 자연적인 동정심만 가지고 있고, 영적으로는 빈곤 상태이어서 가르침과 치료해주기를 바랜다. 더불어 그들 속에 있는 행동 지침들은 진리에 대해 무지하고, 대신 거짓 원리들로 인해 고통받는 상태에 있다.

아브라함의 품

거지는 죽었다. 다시 말해 거지의 자연성이 제거되어 그가 영적 상태로 옮겨졌다는 말이다. 그리고 그는 천사들의 인도롤 받아 아브라함의 품에 안겼다. 아브라함의 품이라는 말은 유대인들이 낙원을 표현할 때 흔히 사용했던 시적인 표현이다. 사랑 받은 제자, 요한은 마지막 성찬 때에 예수님의 품에 기대었다고 말해지고 있다. 심장이 있는 곳인 가슴은 사랑을 표현한다. 아브라함은 주님을 표현하고, 아브라함의 품이란 주님의 사랑을 표현한다.

부자의 죽음, 음부(hades, 황천)

부자도 죽어 땅에 묻혔다. 그도 영계로 건너갔으나 과거 죄 속에 매장된 낮고 감각적인 상태로 가라앉았다.
“그가 죽음의 세계(음부)에서 고통을 받다가 눈을 들어 아브라함을 보았다.” 음부(hades)란 그리스어에서 출발한 단어인데, 이 말은 지옥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죽음과 심판 사이에 있는 중간 상태, 십자가에 매달린 강도가 예수를 뵈올 장소였던 낙원 즉 영들의 세계를 말한다. 이 세계는 인간이 죽은 뒤 맞게 되는 첫 상황으로 모든 인간이 거기에 모여 심판이 있게 된다. 선한 사람은 음부를 지나 천국으로, 악인은 지옥으로 향한다.

영들 세계의 양 측면

인간의 마지막 고향이 세상에서 주어진 기회의 선택 여하에 의거 결정되듯, 영계에도 한쪽은 선한 이들이 천국에 들어 갈 준비를 하는 반면, 다른 쪽에서는 악인들이 지옥에 갈 준비를 하고 있다. 악한 인격은 그 악 자체가 고통을 야기해 내듯, 영계의 악한 측면은 고통하고 있어야만 자기들의 내적 인격을 더욱 발달시켜 확실히 지옥에 갈 수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그들에게 어느 정도나마 자기들 생각을 높여 볼 수 있는 기회가 허용되기도 한다. 그러나 그들 심정은 악을 확증하기 때문에 자기들 인격을 바꾸려 들지 않는다. 아예 자기들이 악해 있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린다.

멀리 떨어진 곳에 있는 아브라함

부자는 멀리 떨어진 곳에 있는 아브라함을 보았다. 멀리 떨어진 이유는 부자의 인격이 천국 조건과 큰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물로 혀를 시원하게

부자는 라자로를 시켜 물을 가져와 자기 혀를 축이게 해 달라고 애원했다. 이 애원은 개혁이나 거듭나고자 해서 요청하는 간절한 기도가 아니다. 그 기도는 비참함의 외침일 뿐이다. 그 이유는 그가 그곳에서는 이 세상에서 했던 것 같이 타인들 속의 선을 괴롭히거나 그들의 진리를 뒤집는 따위의 행동이 불가능하도록 억류된 상태의 자신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물은 글자에 나타나 있는 진리, 마치 생활 속에 스며 있는 십계명 같은 진리를 표현한다. 혀를 축인다(cool)는 것은 신성한 말씀 속의 진리를 뒤집고 공격하는 것, 또는 영적 재물을 남용하거나 엉뚱한데 소비하느라 역성을 내다가 느끼는 갈증의 정신적 상태이다. 그 이유가 영들의 세계에서 악인들은 자기의 진짜 본성을 더욱 드러내면서 자신이 지녔던 진리의 지식까지 더욱 잃게 되기 때문이다.
대화를 하게 하는 혀란 말해지는 교리를 표현한다. 악하고 불친절한 말을 지껄이고 싶어할 때 자기의 혀가 함부로 놀지 않도록 억제하느라 매우 힘들었던 때를 경험했을 줄로 본다. 영들의 세계에서는 악인이 선하고 진정한 원리를 더욱 덜 공격하게 하고 뒤집지 못하도록 되어 가는데 이것이 악인에게는 심한 고통인 것이다. 불꽃이란 자기 자신의 악한 열정이라는 불이다. 물질계의 불은 영체를 가진 영들에게는 아무 영향도 줄 수 없다. 악한 열정을 터트리고 싶은데 자신이 무능력해 있음을 발견하는 것, 이것이 악인에게 있는 처벌에 해당된다.

온갖 좋은 것

아브라함은 부자에게 그가 자연계에서 온갖 좋은 것을 가졌었다는 것을 상기시켜 주고 있다. 자연적 마음뿐인 사람은 바깥쪽 삶에 있는 것에 자기 심정을 고정시키고 그것만이 정말로 좋은 유일한 대상물로 간주할 뿐 천국 삶의 좋은 것을 음미하고 즐기려는 데에는 하등 관심이 없다. 감각적 삶의 것들이 오로지 좋은 것인 냥 보인다. 게다가 영적 삶의 것은 좋은 것은 고사하고 오히려 악하게 보일 뿐이다. 따라서 자연적 인간에게 있어 시련과 시험은 악한 것이라고 여겨질 뿐이다. 사실 시련과 시험이야말로 영적 삶을 위해서는 더욱 좋은 것을 받게 하는 수단이다.
세상적 좋은 것에만 집착된 마음은 이 세상에 있는 좋은 것을 소유하는 것이 복이라고 여기겠지만, 그 복은 천국의 순수하게 좋은 것을 위해 준비하는 상태는 못된다. 시련과 슬픔 등등으로 허우적대는 삶을 통과하면서 인간 마음들은 천국적인 좋은 것을 받을 수 있는 그릇을 개혁을 통해 만들 수 있을는지 모른다. 그러나 악인에게는 시련이 오히려 슬픔을 만든다. “세상적인 사람의 몫은 이 세상에…”라고 시편 기자는 읊고, 세상적인 부자에 관해 예수님께서 말하시기를, “부자에게 화 있을진저, 그 이유는 부유함을 가지고 자기를 위로하기 때문이다.”

환경 조건은 오로지 수단일 뿐이다

가난함이나 부유함 그 자체가 인간 의지를 반대로 구부릴 수는 없다. 선한 사람은 자기 환경이 어떠하든 선한 원리로부터 행동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받는다. 예를 들면 유능한 항해사는 어느 방향에서 바람이 불어오든 배를 원하는 항구에 도착시킬 수 있는 것과 같다. 바람이 배의 방향과 정반대에서 불어올지라도 항해사는 “갈짓자형 항법”으로 전진할 수 있듯이, 선한 사람은 불행을 당해도 그 불행이 자기 목적에 충당될 수 있게 되바꾸어 놓을 수 있다. 지식 또는 지식을 원함은 어떤 사람을 구해 줄 수 있는 반면, 정죄당하게 할 수도 있다. 그리고 알고 있는 것을 선용할 수도 있겠지만 남용해 버릴 수도 있는 것이다. 아는 것이 많되, 그것을 감각적 삶에 충당했다면 그 사람은 감각적 쾌락은 많이 얻겠지만 그의 영혼은 비참해진다. 아는 것이 적을 경우 그것은 시련이나 시험을 종종 발생시키겠지만 비록 적은 지식도 잘 선용하면 천국적 기쁨들로 인도해 준다. “의로운 자의 적은 재물이 사악한 자의 풍부한 재물보다 더 낫다.”

큰 구렁텅이

인간은 죽은 뒤 자기 인격을 바꾸지 못한다. 선과 악 사이에는 “큰 구렁텅이가 놓여 있다.” 이 구렁텅이는 어떤 지역에 위치해 있는 것이 아니라 인격 안에 존재한다. 천국으로부터 악을 분리시키는 이 구렁텅이는 각자 자신의 심정과 삶 속에 있다. 선과 악은 정 반대이다. 그들은 서로 함께 살 수 없다. 그것들 사이에는 공통된 것이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선한 자는 주님으로부터 생명을 기쁘게 받지만 악한 자는 모든 신성과 천국적인 선과 진리를 맹렬하게 거절하며 산다. 따라서 한 사람은 천국에 속해야 하고 또 한 사람은 지옥에 속해야 서로에게 좋은 것이다.
지옥에서도 어떤 선이 성취되고 있다면 주님께서는 천사를 그곳에 심부름을 보낼 수 있을는지 모른다. 그러나 악령은 선을 미워하므로 천사 역시 미워한다. 병든 눈이 강한 햇볕을 직시하면 더 괴로워지듯 그들은 천사를 보면 더욱 괴로워할 것이다. 한 마디로 주님과 천사들이 악마를 위해, 악마를 도울 수 있는 방법이라고는 하나도 없다. 그들은 천국적인 특성의 어느 것도 기꺼이 받지를 않는다.
이 세상에서 자기의 정신적, 물질적 재물을 남용하는 사람, 그는 마치 극장에서 연주하는 사람과도 같다. 연주회가 이어지는 잠깐 동안의 공연 동안 그들은 풍성한 부자 같지만 공연이 끝나면 화려한 예복을 벗어 던지고 집으로 되돌아가는 모습일 것이다.

형제들

다섯 형제 모두 부자와 비슷한 정신 상태에 있는 사람이다. 그의 아버지의 집이란 자기를 통치하는 사랑 그리고 그 사랑으로부터 파생된 것들 모두를 말한다. 악한 마음은 진리를 뒤집고 싶어한다. 만일 그렇게 할 수 없는 처지라 해도 악한 마음은 마음속의 자기 형제들, 악한 사랑에서 뻗어 나온 자연적 마음 안에 있는 각종 거짓 원리들이 자유롭기를 바랜다. 인간이 악한 삶에 자신이 고정되어 있음을 발견할 때, 그가 아직 더 희망하는 것은 자기의 악한 바램과 거짓된 생각을 써먹을 자유의 상태이다.
심판 전, 중간 상태 속에서 이해성이 승강되는 순간이 있게 되면 그는 자기가 진리에 무지했었다는 것, 따라서 진리를 몰라서 되어진 자기 삶을 가지고 자기를 심판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해 댄다. 그러면 모든 진리가 존재하는 주님의 말씀, 모든 마음과 삶이 채택해야 하는 거룩한 말씀이 그 사람에게 보여지고 그가 신성한 말씀을 이미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해준다. 그리고 그 안에 있는 모든 것, 본인이 생각하기에 자기 안에도 선하고 진정한 것이 어느 정도는 있다고 생각된 것들까지도 그의 통치하는 사랑의 품질 때문에 얼룩져 있다는 것, 그의 마음 안에 있는 다른 모든 형제 역시 모두 비슷한 속성을 지니고 모든 선과 진리에 반대하고 있다는 것이 가르쳐진다.

모세와 예언자

“네 형제들에게는 모세와 예언자들이 있으니 그들의 말을 들으면 될 것이다.” “모세와 예언자” 또는 “율법과 예언자”란 구약 성서 전체를 표현하는 말이다. 율법과 예언서는 특별히 유대 교회 회당에서는 늘 읽혀지고 있는 바, 유대인도 신성한 명령을 전혀 몰랐다고 변명할 수 없게 되어 있다. 모세와 예언자의 말을 듣는다는 것은 각자 기억 속에 있는 말씀으로부터 듣는 것, 가르침을 받는 것, 이해성이 듣고 믿는 것, 심정이 듣고 사랑하여 순종하는 것이다.

진리를 받는 것

진리는 진리를 받고자 열린 마음에 그 증거까지 보여준다. 진리는 사랑으로 명백하게 논증해 받는 마음에는 그 진리의 외적인 예증이 필요 없다. 그러나 자연적 인간은 징조와 기적을 요구한다. 요구하는 이유는 그 마음이 진리의 빛으로 열려 있지 않기 때문이다. 악한 사람에게는 진리의 증거가 필요 없고, 단지 진리를 믿겠다는 결심만이 더 필요할 뿐이다. 영적 진리의 증거는 그 진리를 받을 마음이 없는 자에게 더 이상의 충분한 증거도 능력도 결코 없다. 사실 자기가 받아들이고 싶지 않는 것을 강요당하는 것 같이 인간에게는 위험한 것이 없다. 강요로 진리를 믿는 것은 진리를 모독하는 죄를 범하게 되어 더 큰 정죄를 당하기 때문이다.

죽은 자로부터 배우는 것

환상들, 죽은 자와 대화했다 해도, 그것이 당사자로 자기 속의 통치하는 사랑에 반대되는 진리의 확정은 결코 주지 않는다. 만일 주님께서 어떤 인간에게 매우 유익하다 판단되시면, 그분은 그로 진리를 보도록 지적으로 강요하실 수 있다. 또한 예수님 자신 스스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다. 그러나 이 사실은 신성한 인격, 주님의 가르침 속의 진리에 반대하는 그분의 적들에게는 어떤 확신도 주지 않았다. 한 가지 주목할 만한 것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뒤, 그분은 자신을 적들에게는 보여주시지 않고 제자들에게만 보여 주셨다는 것이다. 그리고 사무엘상 28장을 보면, 엔도르에 있는 무당이 사무엘을 죽은 자들로부터 불러내었지만 여전히 사울은 자신을 개혁하지 않았었다. 사실 사울이 무당을 찾아가 죽은 자를 불러 달라고 한 행위 자체가 하느님의 법에 불순종한 셈이다. 주님의 말씀은 모든 인간이 채택할 수 있는 삶의 교훈이나 원리들을 가르쳐 주고 있다. 설사 죽었던 자가 살아난다 해도 우리가 지닌 성경이 가르치는 것보다 더 나은 진리를 가르칠 수 없다.

새교회와 강신술(spiritism)

강신술(심령술)은 새로운 것을 말해 주지 못한다. 그것은 오로지 영적 통찰로 보여져야 하는 것을 바깥쪽 감각으로 입증해 보려고 애쓴다. 사실 이런 노력은 자연주의자들에 속한 사항이라 볼 수 있지 강신술이라고 간주해 볼 수도 없다. 이런 등등은 스베덴볽의 선교와 얼마나 다른지 모른다. 그는 주님께서 말씀을 인간에게 열어 주시기 위해 도구로 사용되도록 부름 받아 계몽되었다. 그래서 모든 진리가 주님의 거룩한 말씀 안에 존재함을 인간에게 보여 주시도록 그는 사용되었다. 사실 상, 그는 근대 강신술에 아주 효과적인 해독제를 제공해 주고 있다. “이들이 거룩한 말씀에 의거 말하지 않는다면, 필시 그들 안에는 빛이 없다.” 우리 자신 속의 악이라는 영적으로 죽은 상태는 어떤 조그만 진리라도 우리에게 확신시켜 줄 수 없다.

믿음은 강요되어서는 안된다

기적들은 주님의 원리에 반대하는 자들을 확신시켜 주지 못했다. “주님께서 그들 앞에서 많은 기적을 베푸셨건만 그들은 도무지 그분을 믿으려 하지 않았다.” 더욱이 그분의 고향에서, “예수께서는 권능 있는 일을 베푸시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그곳 사람들이 믿지 않으려 했기 때문이다.” 아마 기적들로 해서 주님을 믿도록 의도했다면, 주님을 믿으려 들지 않는 그분의 고향에서 더욱 많은 기적이 있었어야 할 것이다. 오늘 날 모든 것을 자연계의 탓으로 돌리려 하는 사람들도 모든 것은 영계에서 근원 된다는 주장에 시큰둥할 것은 분명한 일이다. 인간을 섬뜩 놀라게 해서 천국에 오게 할 수는 없다. 그리고 지옥의 공포가 천국을 만드는 선과 진리의 사랑을 생산하지 않는다. 한 마디로 천국은 긍정적 측면(positive)이지 부정적 측면(negative)이 아니다.
인간은 자기의 외적 인간 속에 있는 악을 죄로 알고 제거해야 할 것이다. 그러면 주님께서 그의 내적 인간 속의 악을 제거시켜 주실 수 있어 인간 전체에서 악이 제거된다. 이 외에 어떤 방법으로도 구원되지 못하는게 하느님의 섭리의 법칙이다. 악이 통치하는 인간은 이미 지옥에 있는 셈이다. 그러나 천국의 원리가 통치하는 인간은 이미 천국의 형체 안에 살고 있는 셈이다. 거듭남은 하느님의 진리 속에 있는 원리들을 그의 심정과 이해성, 그리고 삶 속으로 진심으로 기쁘게 받는 방법 외에는 어떤 방도로도 가능할 수 없다. 본문의 비유는 세상욕에서의 부자와 선함에서의 부자를 대비시켜 주는데 강조를 두고 있다. 이 대비가 천국과 지옥이라는 대비와 정확히 같다고 볼 수는 없겠지만, 지상 삶의 상태들이 결국 천국과 지옥을 만드는 것만은 확실히 짚고 넘어가야 하리라.

36
보잘 것 없는 종
– 자연적인 마음은 영적인 마음을 섬겨야 한다 –

성 서 본 문: 누가복음 17장 7-10절

7. “너희 가운데 누가 농사나 양치는 일을 하는 종을 데리고 있다고 하자. 그 종이 들에서 돌아 오면 ‘어서 와서 밥부터 먹어라’ 고 말할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8. 오히려 ‘내 저녁부터 준비하여라. 그리고 내가 먹고 마실 동안 허리를 동이고 시중을 들고 나서 음식을 먹어라’ 하지 않겠느냐? 9. 종이 명령대로 했다 해서 주인이 고마와해야 할 이유가 어디 있겠느냐? 10. 너희도 명령대로 모든 일을 다 하고 나서는 ‘저희는 보잘 것 없는 종입니다. 그저 해야 할 일을 했을 따름입니다’ 하고 말하여라.”

요약

어느 인간도 주님에 대한 자기의 의무 그 이상을 할 수는 없다. 그 이유가 어떤 선용을 행할 능력이 자기에게 있다는 것을 눈치챌때, 그 선용은 자기의 의무가 되기 때문이다. 주님의 계명을 지키면서 자기의 능력으로 가능한 모든 선은 언제나 인간의 의무가 된다.

글자적 의미

글자적 뜻에 있는 의미는 명백할 것이다. 일상적인 자기의 할일을 해가고 있는 종이 주인에게 어떤 특별한 책임이 있다고 말하지 않듯, 주님의 종인 인간은 자기들이 타인을 섬기는 일을 함에 대하여 어떤 공적도 요구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주인과 종

우리는 두 마음, 또는 마음의 두 부분인 자연적 마음과 영적 마음을 가지고 있다. 주인과 종의 관계는 이 두 마음, 자연적인(외적인) 마음과 영적인(내적인) 마음 사이에 존재한다. 우리의 자연적 마음(자연적 인간)은 내재하는 영의 바램과 명령에 의거해 진리를 배우고, 선을 행한다.

농사 (plowing: 쟁기로 갈아 젖힘)

이 종은 “농사나 양치는 일을 하는 종” 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 종은 작물을 재배하기 위해 씨를 뿌릴 밭을 갈아 엎고 있다. 인간이 밭을 갈아 엎는 것을 영적으로 보면, 그것은 신성한 진리가 그의 일상 생활의 행위에서 자라나도록 진리의 씨를 받을 마음을 준비할 때에 해당된다. 이를 보다 뾰족하게 말한다면, 이는 주님의 말씀으로 부터 신성한 진리를 받기 위해 각자의 이해성을 준비하는 때를 말한다.

양을 침

양떼를 친다는 것은 의지 또는 심정을 계발하는(경작하는) 것을 말한다. 양은 이타애 또는 이웃 사랑에 상응된다. 양을 치는 것, 또는 그것을 관리하는 것은 이타애를 경작하는 것을 표현하고 있다. 이해성이나 의지를 경작한다는 것은 신성한 주인의 명령에 순종하되 신실함과 끈기가 요구되는 높은 질서 수준에 속하는 선용(good uses)들이다.

종의 일

그럼에도 위의 선용은 종, 즉 자연적 마음이 수행하지만 실지로는 영적 마음이 조종하고 있다. 우리는 자신을 강요해서 주님의 가르침을 경청하여 그 가르침을 교훈이나 교리로서 배워야 한다. 게다가 주님이 우리에게 밝혀 주시는 새로운 진리들을 받을 수 있는 상태가 되도록 하려면 자신의 생각과 느낌이 옛 자연적 조건을 탈피(break up) 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의 잘못된 느낌에 저항해야 한다는 것, 그러면서도 주님이 가르쳐 주시는 대로 주님을 향해서, 이웃 동료를 향해서도 가르치신 그대로를 느껴 보려고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밭을 가는 일, 즉 자기 지성을 경작하는 것과 양을 치는 일, 즉 자신의 선한 애정들을 관리하는 것은 주님의 종이 해야 할 날마다의 일인 것이다. 따라서 우리의 자연적 마음은 영적 마음의 종으로서 각자의 수준에서 위의 두 가지 일들을 해야만 한다.

예증

우리가 성질내는 것에 잘 기운다고 하여 분노를 탐익해서는 안되고, 오히려 우리는 그런 인간 경향성에 저항해야 한다.그 이유가 분노는 악에 속한 것이라고 주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치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신 속의 영적 마음이 분노하는 쪽으로 기울기만 하려드는 모든 경향성에서 빠져 나오도록 우리를 받쳐 줄 것이라고 기대해서도 안된다. 우리의 영적 마음은 영향력을 발휘하되 우리에게 무엇이 우리의 의무인가를 볼수 있도록 빛을 제공해 줌으로서, 또는 그 의무를 행하는 노력을 지지함으로서 영향력을 발휘한다. 주인은 종의 일을 하지 않고, 단지 종을 명령하고 지휘 감독하여 종이 열심히 일하도록 할 뿐이다.

영적인 것과 자연적인 것

우리의 외적 부분 즉 자연적 마음과 우리의 내적 부분 즉 영적 마음 사이의 관계를 이 비유는 언급하고 있다. 영적 마음(마음의 영적 부분)은 자연적 마음(마음의 자연적 부분)을 계발하고, 지휘하여 떠받혀 준다. 자연적 마음 그 자체에 국한해 보면 그 마음은 영적 마음의 명령들을 받아 순종한다. 이것이 거듭나는 인간에게 있는 질서요, 천국에 있는 둘 사이의 관계이다. 이 상태에서만 영적 마음과 자연적 마음은 각자의 등차에서 서로 행복으로 채워지게 된다.
그러나 위의 천국 질서가 저지되거나 중단 될때, 인간 전체가 비질서 관계로 돌입되면서 불행으로 그 속을 채워 버린다. 그렇게 되는 이유가 자연적 마음은 영적 마음의 영향력이 없을 경우, 명확하게 볼수 없고 슬기롭게 행동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연적 마음의 실용적인 활동 없이 영적 마음은 반드시 있어야만 되는 바깥쪽 선용을 가질수 없게 된다. 따라서 종과 주인은 서로 기대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들판, 일하고 쉼

“그 종이 들에서 돌아 오면” 에서의 들이란 자연적인 삶이요, 그 삶에서 실제의 일들이 이루어진다. 거기에서 진리들이 배워지고, 선한 애정들도 발달된다. 우리의 상태는 언제나 교체된다. 때로는 일하고 때로는 쉬기도 한다. 일한 뒤의 휴식은 선한 원리를 배워 연마하는 노동 후에 있어지는 평화와 기쁨이라는 정신적인 휴식을 표현해 준다. 우리는 자신 속의 악한 경향성에 저항하느라 노동하고, 선을 행하도록 자신을 밀어부치느라 노동을 한다. 우리는 오로지 영적 마음이 자연적 마음을 지배하는 만큼에서 휴식을 취할수 있다.

먹고 마심

정신적으로 먹고 마신다는 것은 주님의 말씀에 있는 선하고 진정한 원리들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뜻한다. 주님의 말씀에 있는 원리들이 우리의 영적인 양식이다. 주님께서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이루고 그 분의 일을 완성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우리 몸의 자세 중에 앉아 있는 자세란 자신이 하고저 하는 것에 자기의 의지를 고정시킨다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앉아서 먹는다는 것은 주님으로부터 우리에게 오는 선하고 진정한 원리를 음미하며 자신의 의지에 고정시켜 삶에서 자기 원리로 만드는 것을 뜻한다.영적 양식을 이렇게 받게 될 때 즐거운 영적 휴식이 가능해진다.

주인이 먼저 섬겨짐

그러나 자연적 마음은 그 마음의 의무를 수행할 때까지, 혹은 영적 마음이 먼저 채워질 때까지 영적 양식으로 채워지지도 않으며 휴식을 가져볼 수도 없다. 따라서 종이 주인을 대접한 뒤, 자기 저녁 밥도 먹기 위해 앉아야 한다. 그래서 주인이 “내 저녁부터 준비하여라. 그리고 내가 먹고 마실동안 허리를 동이고 시중을 들고 나서 음식을 먹어라” 라고 말하는 것이다.

준비함

준비한다는 것이란, 자연적 마음이 교회의 교리를 배우고 자기속의 악한 경향성을 배척하면서 주님의 계명을 지키도록 하는 등등의 일을 하는 것을 말한다. 종이라는 자연적 마음이 이런 일들을 하게 되는 것이 주인인 영적 마음의 저녁 식사를 준비하는 것이다. 이런 준비가 마무리 되면 우리의 문은 자동으로 열려 주님이 들어 오시어 우리의 영적 마음과 먹고 마신다. 인간이 진리를 응용하기전 그 진리에 관한 지식을 먼저 가지고 있어야 한다. 주님과의 결합은 진리를 수단으로, 진리를 사랑함으로, 진리를 삶에 놓음으로서 이루어 진다. 한마디로 인간은 주님과 반대되는 것들을 던져 버림으로서 주님을 영접할 준비를 해야 한다.

허리를 동임

자기 허리를 동인다는 것은 겉옷의 긴자락을 잘 갈무린 한후 띠로 묶는 것인데, 이렇게 하면 발이 보다 더 자유롭게 움직이게 된다. 겉옷은 지식들,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진리들을 표현해 준다. 이런 진리들은 우리가 사랑에 의거 마음을 상승시킬 때, 그리하여 이 진리들이 보다 더 높은 국면인 영적인 것들을 볼 수 있게 될 때 발을 더 자유롭게 해준다. 따라서 종이라는 자연적 마음도 주인인 영적 마음이 다 먹고 마실때 까지 그 스스로 허리를 동여 매고 봉사해야 한다. 다시말해 신성한 진리로 선한 원리를 실습해감으로서 내향의 영은 주님과 천국과의 결합을 이루게 된다.

섬김 (serving,시중을 듬)

신성한 원리들은 그 원리가 자연적 마음과 삶에서 신실하게 행하여짐으로서 영적 마음 안에서 확증되어 고정 된다. 그런 다음 신성한 영향력이 영적 마음에 흘러들수 있고, 그뒤 자연적 마음 까지 그 영향력으로 채워 진다. 이렇게 해서 주인과 종, 모두가 영적 양식과 물을 먹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자연적 마음이 영적 마음을 섬기기도 전에 그 스스로를 먼저 만족 시키겠다고 세상적 방법을 시도한다면, 진리의 천국적 국면에로 승강되지 않고 오로지 세상적인 것, 자연적인 것만을 받게 된다. 그 결과 무질서와 실수들에 빠져있게 될 것이다. 따라서 영적 마음을 먼저 섬기는 것이 자연적 마음 자체에게도 최선의 방법이 된다. 그 이유는 자연적 마음은 영의 안내로 빛 가운데서 주님을 섬겨야 하기 때문이다. “너희는 먼저 주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외적인) 것도 너희에게 더하여 주시리라.
인간의 역사를 통털어 선에서 이탈하고 인격의 영성과 결별하게 되는 원인은 자연적 마음 그 자체를 먼저 섬기려 시도하는 움직임에 있어 왔다. 이것이 삶의 밑 바닥에 기어 다니는 뱀, 자연적 감각의 조언을 덜컥 삼킴으로 에덴에서 쫓겨나는 것으로 그려진 “인간의 타락”인 것이다. 계발된 영혼의 명령없이 감각만을 수단으로 천국에 도달할 자는 아무도 없다. 그 이유는 자기의 자연적 마음 안에 있는 진리가 주님의 진리라고 인정하여 사랑하고 실천할 때까지 어느 누구도 그 진리 안에 존재하는 선을 음미하여 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거듭나는 질서

우리는 내적인 것, 즉 영혼을 질서속으로 먼저 가져다 놓아야 한다. 영적 마음이 거듭나는 애정으로부터 행동 할때 만이 자연적 마음은 그 속의 자아 의지를 포기하고 영의 안내를 받아 천국적 동인으로부터 행동한다. 천국은 인간에게 내향적으로 온다. “하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다.” 그 다음 영적 마음을 통하여 자연적 마음과 삶도 거듭나는 생명으로 채워진다.
종이 먼저 그의 주인을 섬기고, 그 뒤 먹고 마셔야 한다. 자연적 마음이 영적마음을 어떻게 섬겼느냐에 따라 자연적 마음에 천국적 생명이 채워진다. 영적 마음은 영계를, 자연적 마음은 자연계를 주시하기 마련이다. 인간이 거듭나는 영적 마음으로부터 자연적 마음과 삶도 행동하게 만들면, 그는 천국과 주님으로 부터 행동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가 자연적 마음만으로 행동한다면, 그는 자신 스스로에서 행동하고 있을 뿐인 것이다.

고마워 해야 할 이유가 없다

자연적 마음이 영적 마음을 잘 섬겼다고 해서 영적 마음이 자연적 마음에 고마움을 느낄 필요는 없다. 그 이유가 후자는 영혼을 위해 무언가를 하는 그 이상의 최상의 조건도 달성 할수 없기 때문이다. “그 종이 명령대로 했다고 해서 주인이 고마와해야 할 이유가 어디 있겠느냐?” 다시말해 주인은 종에게 특별히 어떤 고마움을 가질 필요가 없다는 말이다. 이것이 천국의 질서이다. 왜냐하면 육체가 마음을 섬기듯, 외적인 것인 자연적 마음은 내적인 것인 영적인 마음을 섬겨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육체 중에서 피부는 그 속의 심장과 폐 등등을 섬기는 것인데, 그런 질서 속에서 피부는 피부 나름대로의 행복과 긍지를 발견한다.

보잘것 없는 종

“너희도 명령대로 모든일을 다 하고 나서는 ‘저희는 보잘것 없는 종입니다. 그저 해야 할 일을 했을 따름입니다.’ 라고 말하여라.” 다시말해 우리는 자기 삶의 평균 수준 이상으로 주님을 위해 여분의 이익을 생산하지 못한다는 말이다. 주님을 섬기는 가운데 오히려 우리는 자기의 삶을 발견한다. 인간은 자기가 잘났다고 떠벌릴 어떤 것도 없다. 우리는 각자의 의무 그 이상을 해낼 수가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자신의 의무가 무엇인지 찾기 위해 빛을 주시하고 주님께 의존해야 하며 더우기 의무 수행에 지치지 않도록 힘을 달라고 주님께 매달려야 한다.
모든 공적은 주님께 있지 인간에게는 하나도 없다. 주님의 이름으로 하지 않고 어떤 진정한 선을 행할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다. 인간은 오로지 신성한 생명을 받는 그릇일 뿐이다. 인간이 행할 수 있는 최고의 것은 주님을 섬기기 위해 자신을 준비하는 것, 주님의 계명을 지킴으로 행복을 발견하는 것이다. 계명 준수가 인간에게 최고의 이익을 준다고 해서 그것이 어떤 공적이라고 떠벌릴 수 없다.
그러나 타락하는 자연적 인간은 모든 공적을 사사건건 제 잘난 탓으로 돌린다. 그럼에도 “인간은 천국으로부터 주어지는 것 외에 어떤 것도 받을 수 없다.” 작은 시냇물을 보자. 그것들이 모여서 강을 이루고 바다로 흘러 간다. 그런데 강이 바다에 물을 공급했다고 바다에 큰 호의를 베풀었다고 자랑할 수 있을까? 강물은 어디에서, 시냇물은 어디에서 왔는가? 바다로부터 수분의 증발, 구름, 비로부터 야기 된다. 어쩌면 시냇물이 바다를 향해 “나 없이 너는 아무것도 아니야” 하며 우쭐댈런지 모른다. 사실 지상 곳곳에는 주님으로부터 나와 모든 것을 채우고 넘치게 하는 생명의 순환이 존재한다. 그 순환과정 속에서 각기 제 몫을 수행하여 모두가 복을 받고, 감사하는 심정과 거듭나는 삶을 통해 주님께로 되돌아 간다.

겸허

이 비유는 겸허에 관한 교훈을 가르치고 있다. 겸허라는 진리는 저 잘났다고 으시대는 인간에게는 하등의 가치도 없는 진리이다. 우리가 행한 모든 것이란 고작 각자의 의무 이행의 수준을 벗어나지 못한다. 자기 할 일을 다 했다고 자부할 수 있는 인간이 과연 존재할 수 있을까? 그런 인간이 존재한다면, 그 사람은 자신에게 공적이 있다고 권리를 주장하지 않는 사람이리라.

인간의 두 겹 본성

인간 삶에 있는 가장 아름다운 질서는 내적 마음인 영혼이 자연적 마음을 지배하고, 자연적 마음이 그 지배에 기꺼이 순종하는 것에 존재한다. 다시 말해서 동물같은 삶이 거듭나는 영의 지배하에 있을 때이다. 이런 질서속에서 동물적인 본성은 파괴되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세련되어져 사람답게 되어간다. 다시말해 동물적 본성에서 나오는 기쁨이 허용되고, 이에 더하여 그것이 합리적이고 순수하게 되어 간다는 말이다.
절반은 인간이고 절반은 동물인 반인반수의 모습은 고대의 상징적인 신화 같은 것, 즉 스핑크스, 켄타우로스(Centaur)등과 같이 반쪽은 사람이고 반쪽은 사자나 말, 염소로 표현해 놓은 것에서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이런 표현물에서 일치하는 것은, 반쪽 중 위쪽에 사람이 있고 아래쪽은 언제나 동물이 차지 한다는 것이다. 각 경우에 몸체는 짐승이나 그 몸체를 지휘하는 머리 부분은 인간으로 되어 있다. 위의 두 부분중 인간 본성의 측면에서 우리는 위만 쳐다 보는 총명, 잘 세련 되어져가는 애정들을 발견 할 수 있다. 그리고 이것들이 짐승이라는 조잡한 것과 짝을 이루고 있다. 이와 같은 모양을 각자의 유전적 본성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인간의 짐승 부분을 잘 길들일 수 있는 방법, 짐승 수준 너머로 부상하도록 주님은 우리를 도우신다.
짐승 수준 그 이상으로 자신을 올려 놓는다는 것은 힘든 작업이라고 누군가 말할런지도 모른다. 그 이유는 지옥이 천국에 복종한다는 것이 언제나 쉬운 일은 아니기 때문이다. 타락하는 우리의 본성은 언제나 지옥이다. 아래쪽 본성, 수준 낮은 본성이 우리를 더 강하게 붙들수록 그것을 깨뜨리기는 더욱 어려워 진다. 그러나 우리는 이에 대한 완전한 본보기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인성을 입으신 주 예수 그리스도 이시다. 지상에서 그분이 이룩하신 것 처럼 그분은 각자의 수준에 맞게 성취할 힘과 빛을 주고 계신다. 수없는 세대를 거치며 누적된 탐욕이라는 악은 우리의 동물적 본성을 더욱 강한 요새로 발달시켜 놓았다.

이기적 삶

자연적 마음을 완전히 조절해 가야 하는 일, 진실로 사람다운 삶은 종이 주인에게 복종하듯, 외적인 것이 내적인 것에, 자연적인 것이 영적인 것에 복종하는 것이 천국 질서 인데 이를 언제나 상기하며 생활한다는 것이 인간에게는 얼마나 힘든 일인지 모른다.
주인을 먼저 섬겨야 하는 일을 가지고 우리는 얼마나 피곤해 하였을까? 우리의 자연적 마음이 차분히 앉아 제 음식을 먹을 때를 기다리는데 얼마나 지쳐 있는지 모른다. 우리가 천국 질서 쪽으로 향하는 것이란 간단히 말해서 서로가 서로에게 줄수 있는 도움을 찾는 것인데 이를 인식하는데 얼마나 인색 했는지 모른다.

가능성들

모든 인간 존재, 그 존재가 어떤 조건하에 있든지 모든 이들이 우리의 주된 관심의 대상이어야 할 것이다. 우리는 각 개인 속에서 악마와 투쟁하는 인간 영혼을 보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애정, 가능해지는 도움, 영향력 등을 악마에 대항하고 있는 영혼 부분에 쏟아야 하리라.
그럼에도 이런 측면에서의 우리의 활동은 얼마나 미미한지 모른다. 게다가 상대방의 바깥에 관계된 것들, 지위, 실력, 미모, 등등에 우리의 관심을 흘려 낭비 하는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또 다른 측면, 즉 인간의 짐승 부분만을 상대방에게서 끄집어 내려 드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 속에도 의식의 세계에로 깨어나려는 아기 같은 거듭 나려는 삶의 측면도 있다는 것을 눈치채고 있어야 할 것이다. 이런 천국 아기를 실족하게 한다거나, 그 아기를 잘 성장하게 한다거나 하는 두 능력이 각자에게 있다는 것을 자신에게 스스로 되물어 보아야 할 것이다.

영적인 목적

우리는 자질구레한 일상적인 사항까지도 영적인 목적에 짜맞추어 지게 하는 용기를 늘 가지려 노력해야 한다. 대부분 사람들에게 있는 가장 큰 곤란은 그들이 자기들 마음을 승강시켜 영적인 빛 속에서 무언가를 보고 헤아리려 하지 않는 것이다. 그대신 모든 것, 심지어 종교적인 것까지도 조잡한 외적 경로, 감각들로부터 판단해 내려는 습관에 젖어 있다. 그러나 외적인 모든 것은 내적 생명에 종속되어야 한다. 그리고 외적인 것들은 내적인 것들과 연결되어 있는 정도 만큼에서 가치가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하리라.

37
부정한 재판관
– 끊임없는 기도 –

성서 본문 : 누가 복음 18장 1-8절

1.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언제나 기도하고 용기를 잃지 말아야 한다고 이렇게 비유를 들어 가르치셨다. 2. “어떤 도시에 하느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도 거들떠보지 않는 재판관이 있었다. 그 도시에는 어떤 과부가 있었는데 그 여자는 늘 그를 찾아가서 ‘저에게 억울한 일을 한 사람이 있습니다.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십시오.’ 하고 졸라댔다. 3. 오랫동안 그 여자의 청을 들어주지 않던 재판관도 결국 ‘나는 하느님도 두려워 않고 사람도 거들떠보지 않는 사람이지만, 5. 이 과부가 너무도 성가시게 구니 그 소원대로 판결해 주어야지. 그렇게 하지 않으면 자꾸만 찾아 와서 못 견디게 굴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6. 주님께서는 계속해서 말씀하셨다. “이 고약한 재판관의 말을 새겨들어라. 7. 하느님께서 택한 백성들이 밤낮 부르짖는데도 올바르게 판결해 주지 않으시고 오랫동안 그대로 내버려두실 것 같으냐? 8. 사실 하느님께서는 그들에게 지체없이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실 것이다. 그렇지만 사람의 아들이 올 때에 과연 이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 볼 수 있겠느냐?”

요약

거듭나기 위한 끊임없는 노력은 결국은 성취하고야 말 것이다. 거듭남을 추구하는 사람은 자기의 자연적 마음에서 오는 반대적 충동이 있다 해도 영적 마음을 항상 열어 두어 주님의 영향을 받을 필요가 있다. 설사 잘못된 원리가 자신의 자연적 생각을 지배하는 상황에 있다 해도 심정에 있는 성실함, 즉 일상 생활에 사용하기 위해 진리를 갈망할 경우 그 바램은 언제나 그것에 적절한 진리를 얻을 수 있다. 주님께서는 주님을 찾는 이들에게 그분의 신성한 진리로 언제나 함께 하시되 각자의 정신적 수준에 맞추어 지도록 하여 주신다. 그래서 이들이 거듭나는 삶에 들어갈 조건을 구비하면 즉각 그들 속에 있는 적들을 물리쳐 주신다.

도덕

일반적으로 성서의 비유 가운데서 우리는 비유의 도처에서 이야기 속에 있을 도덕적 교훈에 관한 것이 수집되는 경우가 많다. 더욱이 이 비유와 그 다음에 있는 비유의 경우, 각 비유 바로 앞절에서 얻게 되어 있다. 따라서 이 비유의 자연적 수준의 교훈을 찾는 것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 이유는 자물쇠 옆에 열쇠가 놓여 있는 격이기 때문이다. 비유는 영적인 진리를 예증해 주는 자연적인 그림들이다. 각 비유의 그림들은 그림에 앞서 존재하는(pre-exist) 목적(purpose)들로 색이 칠해져 있고, 그 다음 그림 속의 세부 사항들은 목적의 필요성에 따라 배열을 이루고 있다.

글자적 의미

예를 들면 이 비유의 목적은 거듭남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진지하고 끊임없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예증하는데 있다. 비유의 그림을 자연적 수준에서 볼 때, 그 요점은 계속 졸라대는 것, 성가시게 하는 것을 결코 중단해서는 안될 것이라는데 있다.
그런데 주님을 부정한 재판관과 연관시켜 생각하려 들면 어떤 곤란함이 생각 속에 어른거려지게 된다. 그 이유가 주님은 언제나 정의로우시며 자비하시어 언제나 인간을 복되게 하려고만 애쓰시는 분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본문의 경우 나쁜 재판관의 등장은 의도적인 필요성이 대두 되었기 때문이라고 생각될 것이다. 신속한 판결을 집행해 가는 선하고 의로운 재판관의 등장은 본문의 필요 요소가 되지 못할 것이라는 말이다. 오히려 꾸준히 반복적으로 정의로운 재판을 거절해 온 인격이 본문에서 필요했을 것이라 생각될 것이다.

가상으로 비치는 것

위와 같은 재판관의 속성이 타락하는 자연적 인간에게는 주님의 속성이라고 착각해 버릴수도 있다. 일상사의 고통을 해소 해주는 판결을 기다리다 못해 지쳐 있는 사람에게 주님은 매우 무관심하고 아예 부정직하신 듯 비쳐지고 있다. 그 이유가 그분께서는 애타게 기다리는 기도자에게 이내 응답해 주시지 않기 때문이다. 주님께서 응답을 기다리는 사람들을 못 본척 하시는 듯 여겨지도록 비춰질 때, 마치 기도가 아무 소용없는 듯 여겨져 그들로 기도하는 것을 중단하도록 유혹되어 진다. 사실 주님이라는 분은 그들이 정작 받을 수 있는 복 보다 더 많은 복을 받아 가기를 바라고 계신다는 것, 응답이 더딘 원인이 자기들 심정과 삶의 비수용성에 있다는 것을 위의 사람들은 알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체함

사실 본문은 인간이 무작정 요구한다고 자기가 원하는 것을 다 가질 수 있다고 말하고 있지는 않다. 기도를 응답 받는데 있어 하느님께서 지체하시는 듯 여겨지는 경우를 성경을 포함해서 많은 경우에서 우리는 발견한다. 그러나 사실은 이렇다. 인간이 삶의 개혁으로 받을 수 있는 준비가 될 때까지 주님께서는 인격 속에 영성을 주실 수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주님께서는 인간이 인격의 영성에 진입하는 것 외의 다른 수단으로는 인간에게 영적인 복을 주실 수 없다. 다시 말해서 천국의 복을 향해 마음을 열게 해주는 것은 인격이지 어떤 환경이나, 또는 당사자 주위의 여건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림

비유는 그림, 즉 표현일 뿐이다. 이 그림은 거듭남을 향한 시초에 모든 인간의 마음에 영적으로 놓여진다. 우리는 각자의 마음속에 과부와 재판관 양쪽을 다 가지고 있다. 그래서 우리가 진지하고 꾸준하다면, 주님은 우리 속의 재판관으로 하여금 우리 속의 과부에게 판결을 내려 주도록 강요해 주실 것이다.

교훈

글자에서만 볼 때, 비유가 주는 자연적 수준의 교훈은 다음과 같다. 만일 진지하고 끊임없이 성가시게라도 졸라대면, 냉혹하고 무관심한 사람까지도 자기 편으로 끌어들일 수 있다는 것, 의로운 재판관이신 주님이 설사 우리를 잊고 계신 듯 자신에게 여겨질 때조차도 정의를 베푸신다는 것을 비유는 더욱 확실하게 해주고 있다는 것, 이런 등등에서 맺어지는 교훈은 우리가 인내심을 발휘하여 지속성을 가져야 하되, 설사 하느님의 도우심이 지체되는 듯 여겨질 때에도 충분한 이유가 있음을 알면서 인내심을 발휘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진리들은 개인적으로나 교회라는 집합체에서도 응용해 볼 수 있다. 새로운 교회가 많은 박해에 투쟁하는 가운데 난감해져 있다 해도, 주님께서는 그 교인들의 인격과 삶이 허용하는 만큼에서 빠르고도 충분하게 교회를 건설하고 계신다. 주님이 하시는 일에 우리가 성급해 있다면, 그에 대한 치료약은 당사자의 심정과 이해성, 그리고 삶에서 교회의 원리를 더 확대 적용하는 것일 뿐이다. “주님은 은총과 영광을 주신다. 그분은 의롭게 걷는 이에게서 어떤 선도 유보하지 않으신다.” 과거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신 약속, “네 발이 닿는 곳은 다 너의 것이다.” 이것은 오늘의 우리에게도 적용되는 주님의 약속이시다. 영적 원리 위에서 걷고 있는 이상 어떤 영적 원리도 거두어 가시지 않으신다. 따라서 명심해야 할 것은 주님을 기다리는 것, 기다리면서 일하는 것, 그리고 그분을 신뢰하는 것이다. 기다려야 하는 이유는 소원한 사항에 앞서 더 중요한 일이 우리에게 있기 때문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

언제나 기도하고…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언제나 기도하고 용기를 잃지 말아야 한다고 이렇게 비유를 들어 가르치셨다.” 이 구절 때문에 우리는 하루종일 기도하는 자세로만 있어야 하는지에 대해 고민할 필요가 없다. 그 이유는 하루 종일 무릎 꿇고 기도만 하고 있다면, 우리는 선용을 수행할 기회도, 시간도 가지지 못할 것인바, 주님께서 말씀하신 “언제나” 란 하루 종일이라는 뜻은 아닐 것이라는 말이다. 그러나 인간은 자기가 뜻하고자 한다면 기도하는 마음의 상태, 즉 자기의 악한 경향성을 인정하면서 주님께서 주시고자 하는 것들을 듣거나 받을 준비의 상태로, 하늘을 향해 마음 문이 열린 상태로 생활을 꾸려갈 수 있다. 천국이 우리 마음에 영향을 줄 수 있도록 마음 문을 항상 열고 있다면, 그 사람은 내향적으로 예배하는 상태, 사랑의 예배와 그분을 인정하는 상태에 언제나 놓여져 있을 것이다. 따라서 그의 심정은 “제단에서 계속 타고 있는 불” 같이 언제나 있어질 것이다. 이 사람의 삶은 활력 있는 영적 삶으로 가득차 있을 것이다. 그 이유는 가장 지속적이고 가장 효력 있는 기도는 일상 생활 속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용기 없음(fainting)

그러나 인간이 천국적인 것을 무관심하게 방치한다면, 게다가 천국의 소리에 귀를 막으라는 세상의 왁자지껄하는 소리를 허용해 둔다면, 그의 영적 생명은 활력을 잃어 비활동적이 되고 만다. 우리의 육체가 매일 적절한 영양의 공급을 필수로 요구하듯, 영체도 마찬가지이다. 주님의 속성과 인간의 본성을 알면서, 그리고 기도의 진정한 본성과 사용을 아는 사람이라면 그는 주님으로부터 오는 축복을 받을 수 있는 상태에 자신을 가져다 놓기 위해 매일 아침저녁으로 주님께 기도해야 한다는 것, 말씀을 읽는 가정 예배는 꼭 필요하다는 것 등등을 당연히 느끼게 될 것이다. 이 사람은 이 세상 매일의 삶 속에 널려 있는 자질구레한 것, 그리고 위험한 것, 이런저런 것들로부터 자신을 건강하게 유지해가려면 어떻게 위쪽을 쳐다보아야 하는 지를 체험으로 알고 있을 것이다.

재판관

우리 마음속에 있는 “재판관” 이란 합리적 원리, 생각하는 능력들이다. 이것들이 생각에 도착된 것들을 서로 비춰 보고 비교하여 결정 짓는다. 물론 타락하는 인간의 경우, 그의 합리적 능력 역시 타락적이다. 그래서 타락하는 자연적 인간은 자신과 걸맞게 이기적이고 감각적인 자신의 관점에서 생각하고 추론한다. 그는 자신만을 사랑한다. 게다가 자아 사랑을 부추겨 주는 정도에서 세상도 사랑한다. 그의 합리적 능력은 세상 쪽에 활짝 열려 있고 천국 쪽으로는 굳게 닫혀 있다. 그는 세상적인 빛으로 생각하는 바, 영적 어두움에 존재한다. 이것이 부정한 재판관,“하느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도 거들떠보지 않는”자 이다. 이 사람은 사랑이라는 천국 원리로 움직여지지 않는 사람이요, 인간 정의라는 만민이 인정한 규칙에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거짓 원리가 그 사람의 추론을 지배하고, 사리사욕이라는 원칙이 그의 행동 방향을 결정해 줄 뿐이다.

하느님을 두려워하고 사람도 거들떠봄

영적으로 말해서, 하느님을 두려워함(경외함)이란 사랑이 동반된 두려움, 악을 사랑하여 행하는데 따른 두려움, 하느님을 두려워함이 아니라 하느님께 반대되는 어떤 것을 행하면 안될텐데 할 때 있어지는 두려움이다. 사람을 거들떠본다는 것은 이타애의 원리, 또는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는 원리를 중시하는 것이다. 이 원리는 인간에게 선을 행하는 행위 자체에서 구체화된다. 그러므로 거듭나는 인간 속에서의 합리적 능력은 천국의 영적 빛으로 생각한다. 고로 그 능력은 인간에 정의를 베풀게 해 준다. 우리가 타인에게 하는 것이 그분을 향해 하는 것이라고 그분은 가르치시고 있다. 그러나 사악한 자는 “주님의 면전에서 하느님 두려운 게 없다.”

도시

재판관이 살고 있는 “어떤 도시”란 마음이 거주하는 교리이다. 재판관이 부정하고, 판결에 무관심하기조차도 한 사회의 거리를 상상해 보자. 이런 모습을 이사야 59장 14절에서 읽을 수 있다. “공평은 뒤로 제쳐놓았고, 정의는 얼씬도 못하게 하였다. 성실은 대중 앞에서 짓밟혔고, 정직은 통하지 않게 되었다.” 타락하는 마음속에도 그에 상응되는 상태가 존재한다. 그들의 합리적 능력은 자아 사랑에 고용되어 천국의 원리에는 무관심한 바 하느님을 두려워하고 사람을 거들 떠 볼리 만무하다.

과부

이 도시에 같이 거주하는 “과부”가 있다. 이스라엘로 표현되고 진리로 그 특징을 가진 영적 삶의 등차에서 남편은 진리를 이해함을, 아내는 정의를 사모함을 표현한다. 남편이 죽은 아내, 과부일 경우, 이 여자는 진리를 이해함과 결합한채 있지 못하는 진리를 사모함, 즉 진리에 대한 자연적 애정이다. 이 애정은 자신의 안내와 도움이 결핍되어 있어 늘 곤경의 상태 가운데 처하게 된다.
비유는 마음의 상태를 그리고 있는 바, 이 그림 속에서 합리적 능력은 거짓 원리라는 어두운 배경, 세상의 빛 속에 처해 있다. 그런 반면 같은 마음속에 진리의 빛을 갈망하고 추구하려는 진리에 대한 사랑도 존재하고 있음이 과부로 그려 주고 있다. 그런데 이 사랑은 어떤 만족도 얻지 못하고 있다. 그 이유는 합리적 능력이 이기적 삶에 있는 거짓되고 감각적인 사상에 꽉 붙들려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더 많은 빛을 구하는 애정의 하소연이 상달될 리 만무하다.
과부로 표현된 위와 같은 진리에 대한 자연적 애정은 정의를 행하도록 임명된 재판관, 곧 합리적 능력에 기대를 걸고, 그 애정을 학대하는 모든 정신적 어려움, 모든 의구심에서 자유로워지기를 기대하고 있는 것이다.

올바른 판결 (정의를 추구함)

그래서 과부는 “그를 찾아가서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십시오.” 하였다. 본문을 글자대로 다 읽으면, “그 여자는 늘 그를 찾아가서 ‘저에게 억울한 일을 한 사람이 있습니다.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십시오’ 하고 졸라댔다.” 이 여자가 추구한 것은 원한을 갚아 달라는 것이 아니라 속임수에 넘어가 잃은 자기의 권리를 요구한 것뿐이다. 진리에 대한 자연적인 우리의 애정이 악에 의해 핍박당할 때, 다시 말해 우리 인격이 혼합된 상태에 있을 때, 자신을 구원하기 위해 합리적 능력을 찾아간다. 그래서 악하고 거짓된 것과 선하고 진정한 것을 가려냄으로 자신을 건져내고자 한다.
그러나 우리의 자연적인 악들이 우리의 추론하는 능력에 가담되어 있는 한, 추론력 역시 거짓 원리의 지배하에 있게 마련이다. 따라서 진리에 대한 우리의 사랑이 들먹거려 지는 것을 귀찮아 하게 된다. 그러면 우리 마음은 분단 상태, 즉 어떤 진리를 찾겠다고 하는 사랑의 상태와 자연적 자아 사랑이 우리의 추론력을 그 사랑의 지배하에서 풀어 주지 않으려는 상태, 이런 두 상태에 있게 된다.

판결해 주고 싶지 않은 재판관

위와 같은 마음 상태에서 과부는 정의를 재판관에게 구했다. “그는 오랫동안 그 여자의 청을 들어주지 않았다.” 이 부정한 재판관은 자기 속의 선한 원리로부터 판결하고 싶어하지는 않았다. 단지 그는 정책상 판결해 주어야만 한다고 강요받은 것이다. 확정되어 있는 법보다는 자아 의지의 갑작스런 변덕에 의해 움직이는 것은 독재적 통치자들에게 다분히 있는 경향이다. 다시 말해 백성들이 자기를 좋아하게 만드는 방법을 정의에 기초하기보다는 어떤 바람을 일으키는 것, 즉 정책에 의존하는 데, 이런 일은 현대에서도 흔한 것일는지 모른다. 그래서 가난하고 힘없는 자들이 모여 왁자지껄 할 때 정치가들은 그들의 외침을 정책상 역이용하는 것은 오늘날에도 흔히 있는 일이다.

강요당한 재판관

자연적 마음속에 있는 진리에 대한 애정이 빛이 필요하다고 끊임없이 외쳐 대면, 무관심하고 나태한 추론력도 결국 꿈틀거리고야 만다. 자연적 사랑이 진리를 찾기로 작정하여 열심을 낼 때, 우리의 생각은 일어서게 되고 성가실 정도로 외쳐 대는 자연적 사랑과 대결 상태로 불편하게 있느니 보다는 그 사랑에게도 어떤 길을 선택하도록 타협점을 모색하기에 이르고야 만다.

정책과 원리

그러므로 인간이 자기 애정을 더 낫게 실제에 사용하기 위해 진리를 발견하는데 있어 정책이라는 것이 인간을 부추겨 일하게 해준다. 그 이유는 거듭나 보려는 시초에 있는 인간의 경우 그의 두 마음은 분리된 상태이기 때문이다. 이 분단된 상태에서 주님은 인간의 애정에 역사 하시어 진리를 따르도록 재촉하실 수 있다. 이렇게 애정이 그의 합리적 능력을 재촉해서 일하게 하여 순수한 진리를 붙잡도록 함으로 그가 이전에 지녔던 의심이나 악의 박해를 몰아 낼 수 있게 된다. 그리하여 추론하는 능력이 신성한 진리의 영향 밑에 들어오게 될 때, 주님은 그 능력에 역사 하시어 그 능력 자체도 거듭나게 하심으로서, 선한 원리로서 일하게 해서 더 이상 정책적으로 일하는 것을 멈추게 해 주신다. 따라서 거짓 원리가 우리의 합리적 능력을 점검하고 있다 해도, 우리가 진리에 대한 사랑을 조금이라도 가지고 있다면, 우리의 거짓 관념이 진정한 것이 아님을 볼 수 있는 쪽으로 인도되어 결국 우리는 거짓 관념이나 원리를 거절하는데 이르게 된다. 진리를 바라는 진지함이나 꾸준함은 언뜻 보이기에는 세상욕이나 거짓 관념에 투쟁하고 버티느라고 희망이 없는 듯, 또는 고달픈 듯 여겨질지 몰라도 결국 필요한 진리를 획득하고야 만다.

재판관의 말을 새겨들어라

“이 고약한 재판관의 말을 새겨들어라.” 이 말의 의미는 다음과 같다. 우리는 자연적 마음과 그 삶 안에 있는 것들의 상태를 꼼꼼히 생각해 보아야 한다는 것, 그리고 그 상태에서 누구도 진리를 영적인 빛으로 자연스럽게 생각하지 못한다는 것, 다만 세상의 빛과 감각적인 것으로만 생각한다는 것, 누구도 단번에 진실로 합리적일 수 없고 오로지 거듭나는 단계를 밟아야만 가능하다는 것, 우리 속의 자연적인 합리적 능력은 무관심할 수밖에 없고, 더욱이 주님의 영향하에 우리의 애정이 진리를 추구하라고 재촉할 경우, 천국 빛에 더욱 반대한다는 등등이다. 우리의 애정들은 우리에게 진리가 알려지고, 그것을 사랑하여 실제에 사용하지 않고서는 결코 순수해질 수 없다.

표본적인 법들

이스라엘 족에게 주어진 법에는 불의한 재판이나 과부를 억압하는 데에 관한 많은 경고가 포함되어 있다. 이런 모든 법을 오늘날의 우리에게 영적으로 응용해 본다면, 자기 속의 합리적 능력을 악과 거짓의 쪽에서 추론하거나 선과 진리에 역행하여 추론하는 것을 허용치 말라는 경고를 담고 있다. 더 특별한 것은, 우리 속에서 성장하는 진리에 대한 사랑을 박해하거나 억누르지 말라는 것, 그리하여 영적 삶을 진지하게 바래는 우리 속의 마음을 주님께서 채우실 수 있게 하라는 의미까지 우리에게 전달해 주고 있다.

의로운 재판관

합리적 능력은 마치 의로운 재판관처럼 마음속의 각양 각색의 원리들, 애정과 생각 속의 제 각기 다른 종류들을 두려움 없이 올바르게 판결해 준다. 그리하여 우리에게 인간 의무를 행하는데 자유를 주고 제각기 적절한 위치에서 일할 수 있게 해준다. 더욱이 우리 속의 선한 애정과 진정한 생각들을 격려하고 악한 느낌과 거짓된 생각을 던져 버리도록 해준다.

강요당함(imposition)

보호나 안내를 잃은 과부가 파렴치한 인간에게 사기 당하거나 강요당하기 쉽듯이, 애정의 길잡이인 진리에 대한 이해성이 결핍되면 악한 영향을 쉽게 받게 된다. 마치 재판관에게 판결하라고 압력을 넣을 수 있는 사회적 영향력이나 재판관을 매수할 수 있는 돈을 가지지 못한 가난하고 연약한 과부가 재판관 앞에서 매우 무력하게 보이듯이, 우리 속의 자연적인 마음에 진리에 대한 이해가 없게 될 때, 진리에 대한 우리의 애정 역시 무덤덤해진 합리적 능력을 뒤엎는데 매우 무기력한 듯 여겨지고 만다.

마지막 성공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부의 끈질김은 하느님을 사랑하지도 않고, 인간에게 정의롭지도 않았던 상태를 뒤엎었다. 이와 같이 우리 속의 영적인 것이 제 아무리 어둡다 해도, 우리의 합리적 능력이 진리를 사랑하도록 일해 주는데 도무지 협력하지 않을 것 같이 보인다 해도, 만일 우리가 진리에 대한 어떤 사랑을 가지고 있어 진리를 발견해 보겠다고 갈망하고, 조금 뿐인 진리라도 삶에 적용해 가노라면 결국 우리는 실제에 필요한 모든 진리를 획득하게 될 것이다.

지체 되게 하는 것은 자신이다

뭔가가 이루어지는데 너무 갑갑하게 지체되는 듯 여겨지는 것은 매우 단순한 이유, 즉 주님은 진리를 위해 우리의 심정이 준비되기를 기다리고 계신 까닭에서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삶의 원리로 진리에 순종할 준비가 완료 되기전 오랫동안 우리는 진리를 감상적 수준에서 붙잡고 있기 때문이라는 말이다. 이때 주님의 온유하신 자비는 우리가 심정적으로 진리를 채택하지 못하고 있는 진리의 이해를 보류해 주시어 우리를 보호해 주신다.

택한 자의 부르짖음

“하느님께서 택하신 백성이 밤낮 부르짖는데도 올바르게 판결해 주지 않으실까?” 하느님께서 택하신 자란 그분을 사랑하고, 그분께 순종하는 것을 선택한 이들을 말한다. 이들이 “밤낮으로 부르짖는다”는 것은 계발의 상태에서 그리고 어두움과 의심의 상태에서도 부르짖고 있었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마음과 삶이 모든 상태에서 인도받음과 강건함을 주님에게서 찾았다는 것이 된다. 우리 삶에서 정신적인 밤이란 우리가 진리의 빛을 볼 수 없을 때, 또는 주님은 우리에게 해주실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해주시지 않는다고 상상하는 때이다.
그럼에도 우리가 그분의 계명을 지키고 있노라면, 우리의 준비가 완료 되는대로, 아마도 각자의 정신 속에 상당한 적들이 있다 해도, 혹은 우리 속의 느낌과 거짓 생각들이 상당한 세력을 유지해 가고 있다고 해도, 우리가 처한 모든 역경에서 구해 내어 주실 것이다. 다시 말해 주님께서는 고약한 재판관으로 하여금 정의롭게 우리를 판결하도록 강요해 주실 것이다. 그렇게 해서라도 그분은 우리의 합리적 능력을 거듭나게 하시어, 우리로 천국 진리를 보고 알도록 해 주신다.

오랫동안 그대로 내버려 두실 까? (bearing with them)

글자적 의미로 볼 때, 그분은 택하신 백성에게 긴 시련을 참도록 하신다는 것, 그리고 그분은 그 시련을 그들과 함께 견디신다는 것이다. 택한 백성들은 스스로가 타인들이 자기들을 박해하는 것을 참고 견디고 있다고 생각하겠지만 진실로 참으시는 분은 주님이시다. 그이유가 그분은 택한 백성들이 지닌 자연적인 악과 거짓을 보시고도 참고 기다리기 때문이다.
한번은 주님과 제자들이 배를 탔는데 거센 바람이 불어왔다. 그때 주님께서는 주무시고 계셨다. 그래서 자기들이 위험에 직면했는데도 주님은 무관심 하시다고 제자들은 생각하고 말하기를, “선생님, 우리가 죽게 되었는데도 돌보시지 않으십니까?” 그러자 주님께서는 바람을 꾸짖어 제자들을 구해 주셨다 (마가복음 4:35-41). 주님은 영적인 선 쪽으로 우리를 인도하신다. 따라서 우리가 이와 같은 선을 달성하지 못한 상태라면, 우리는 열심히 노력하며 기다려야 한다. 우리의 눈에 주님께서 지체하시는 듯 여겨질 때, 사실 진짜로 지체되게 하는 원인은 영적인 인간다움에 도달하지 못한 우리에게 있는 것이다.

예증

이웃하여 살고 있는 두 가정을 살펴보자. 한 가정의 경우, 부모들은 아이들이 사랑스러워 그들의 응석을 잘 받아 주었지만, “아니오”가 필요할 때 “아니오”라고 잘라 말할 수 있는 강건한 인격을 세워 주지 못했다. 다른 가정의 경우, 부모들은 자녀들의 인격을 훈련시키는데 매우 적극적이었다. 그래서 이 부모들은 아이들의 요구를 종종 거절했다. 위의 두 부모들중 어느 부모가 인생의 전투에 나가는 아이들을 더 잘 준비시켰을까? 어느쪽 부모가 더 진지한 사랑을 아이들에게 베푼 것일까? 말할 것도 없이 자녀들의 요구에 강경했던 부모가 더 높은 질적 차원의 사랑을 가졌다. 이들은 자녀들을 구원하기 위해 부모들 스스로 시련을 참았다. 그 반면 연약한 부모들은 자녀에 대한 사랑이 “내 새끼인데…”라는 이기적 마음이 발동되면서 자녀를 자신의 일부로만 여겼던 것이다. 따라서 아이들의 응석을 받은 만큼 응석이라는 인격에 아이들을 담근 셈이다. 이 부모들은 아이들이 졸라대는 소리에 타협하는 쉬운 방법을 선택했다. 그 결과 집안에서의 훈련 보다 훨씬 더 큰 시련을 아이들의 장래에 낳게 할 소지를 남긴 것이다. 강한 훈련은 미래의 큰 시련을 작은 시련으로, 해볼 만한 시련으로 만들어 준다.
위의 슬기로운 부모들의 예와 같이, 주님은 그분의 자녀들에게 종종 “NO”라고 말하신다. 그 이유는 그들이 원하는 것을 가졌을 때, 그들이 원하는 것 자체가 그들에게 최상의 것이 아닐 것임을 알고 계시기 때문이다. 그분은 우리의 인격을 단련시켜 주신다. 무엇인가가 너무 느리게 진행되어 속이 터질 듯 우리가 느낀다 해도 굳이 실망하여 주저앉을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신성한 섭리는 가능만 하면 빨리 성취해 주시려는 것이 섭리의 속성이기 때문이다. 주님은 선한 모든 바램에 계신다. 게다가 자신 스스로 해야 할 부분, 즉 자신 속의 잘못된 경향성을 배척하며 계명을 지키고 있다면, 각자의 선한 바램이 성취되도록 주님께서 운행하여 주실 것이다. 끈기(patience)는 우리 인격 속에 가장 좋은 특성을 발달시켜 주어 우리의 자연적 포부에 변화가 오게 한다. 아마 우리에게 배고픔과 목마름이 없다면, 우리가 마시는 물, 먹는 양식은 대수롭지 않은 물건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이해에 보탬이 되리라 본다.

하느님의 방법

위와 같이 인내심을 동원하여 기다리면서 자칫 우리가 잊기 쉬운 것은,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배상(redress)해 주실 것을 찾으시는 동시에 우리를 박해한 자들 속에 있는 선도 찾고 계신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우리의 인내심은 우리를 억누른 자를 개혁시키는데 참 수단으로 주님께서 사용하신다. 이는 영적으로나 자연적으로나 공히 진정한 말이다. 주님께서 택한 백성에게 갚아 주시되 오래 내버려두시지 않고 “빠르게” 갚아 주신다는 말은 확실하게 갚아 주신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이유는 영적 사항에는 시간 개념이 없는 고로 빠르게 일한다는 생각은 확실하게 일한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사람의 아들이 올 때에 과연 이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볼 수 있을까?” 이 질문이 비유의 끝 부분에 놓여진 것은, 우리 믿음의 품질은 심정과 이해성, 그리고 삶에 있는 우리의 기도에서 보여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자신의 마음과 삶의 상황이 어떠한지 늘 점검해서 신성한 진리가 우리 속에 오게 될 때 그 진리를 받을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주님의 두 번째 오심

진리를 받을 준비가 된 마음과 삶, 여기에 신성한 진리가 영적으로 오는 바, 이때가 주님이 오시는 날이다. 그런데 어떻게 이 진리를 받아야 할까? 얼마나 많은 믿음과 이타애가 세상에 존재할까? 아마 “많은 이의 사랑은 차갑다.” 신성한 인격에 있는 살아 있는 믿음, 주 예수 그리스도 오직 한 분 하느님에 근거한 믿음, 하느님의 말씀 속에 있는 신성한 속성에 근거한 믿음은 거의 없으리라. 우리는 세상이 일컫는 신학, 소위 정통 신학이라는 옛 사상을 벗어나 믿음이 성장되도록 해야 할 것이다. 진리의 새로운 국면을 찾아 나서야 진리를 가질 수 있다. 새로운 교회는 시작되었다. 그 안에서 주님은 그분의 진정한 속성을 밝히 알려 주셨다. 그 안에서 그분은 말씀을 내향적으로, 영적으로 열어 놓으셨다. 이 새로운 교회, 새 예루살렘의 교회를 주님께서는 신성한 원리를 받을 준비가 된 이들의 심정과 이해성, 그리고 그들의 삶 안에 건설하고 계신다. 비록 그 교인들의 악과 거짓에 대항하는 투쟁이 오래 걸려 지체되고 있다 해도, 또는 새로운 교회의 건립에 반대하는 자들로 인해 느리게 움직이는 듯 인간에게 보인다 해도, 이 건설은 개인적으로나 집합적으로나 반드시 이루어 질 것이다. 이 장엄한 결과를 향해 서 있는 사람들에게 주님은 이렇게 격려하신다. “언제나 기도하고 용기를 잃지 말아라.”

38
바리사이파 사람과 세리
-독선-

성서 본문 : 누가 복음 18장 9-14절

9. 예수께서는 자기네만 옳은 줄 믿고 남을 업신여기는 사람들에게 이런 비유를 말씀하셨다. 10.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갔는데 하나는 바리사이파 사람이었고 또 하나는 세리였다. 11. 바리사이파 사람은 보라는 듯이 서서 ‘오, 하느님! 감사합니다. 저는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욕심이 많거나 부정직하거나 음탕하지 않을 뿐더러 세리와 같은 사람이 아닙니다. 12. 저는 일주일에 두 번이나 단식하고 모든 수입의 십분의 일을 바칩니다.’ 하고 기도하였다. 13. 한편 세리는 멀찍이 서서 하늘을 우러러보지도 못하고 가슴을 치며 ‘오, 하느님! 죄많은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 하고 기도하였다. 14. 잘 들어라. 하느님께 올바른 사람으로 인정받고 집으로 돌아간 사람은 바리사이파 사람이 아니라 바로 그 세리였다.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면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면 높아질 것이다.”

요약

회개하는 죄인이 자기가 선하다고 떠벌리는 자들 보다 더 나은 영적 조건을 갖추고 있다. 도덕적으로 외관이 깨끗한 사람이라 해도 그 심정은 악과 결합되어 있을 수도 있다. 오늘 비유는 풍유적이 아니라 아주 실제적이다. 따라서 그 교훈은 비유에 의해 가르쳐지지 않고 실례에 의해 가르쳐지고 있다. 이 비유는 독선(self-righteousness)을 꾸짖으시기 위해 주어지고 있다.

바리사이파 사람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유대인의 한 계층으로, 이들의 특징은 종교적 행사나 예식에 아주 엄격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들 중의 대다수가 독선적이어서 남을 깔보고 자신들이 타인들 보다 더 거룩하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그들은 겉으로는 매우 친절하고 관대하지만 속으로는 악한 인격의 마음을 표현한다. 이들을 두고 주님은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파사람들아, 너희 같은 위선자들은…” 라고 말씀하셨다 (마태복음 23장).

세리

세리들은 정복자인 로마제국이 유대인들에게 부과한 세금을 거두어들이던 사람들이다. 이 세리들도 대체로 같은 유대인들이었지만 배신자 취급을 당해 왔다. 본문에 등장하는 세리는 겸손한 세리이다. 이들은 자신이 잘났다고 우쭐대지 않는 사람 곧 겸허한 상태에 있는 마음을 표현한다.

성전, 기도, 등등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간다는 것은 우리의 심정이 주님께 말하는 것을 뜻한다. 기도란 주님께 내향의 마음을 여는 것이다. 바리사이파 사람은 보라는 듯이 서서 기도하였다. 그는 자신이 남보다 더 낫다고 느꼈다. 그는 행동 면에서 그것을 보여주고 있다. 게다가 타인에게 이렇게까지 말할 것이다. “나는 혼자 서서 기도해야 한다. 나에게 가까이 붙지 말라. 너 보다 더 거룩하기 때문이다.” 그는 중요한 자리를 자신을 위해 우선 선택한다. 주님께 감사드리는 체 하면서 그는 자신이 선하다고 떠벌리며 타인을 경멸한다.

심정 속의 악

그러나 주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치시는 바, 악은 심정 속에 있다는 것, 심정 속의 악 중 어떤 것은 아직 바깥쪽의 잘못된 행동으로 나올 기회가 없어서일 뿐 밖으로 표출된 악 보다 더 큰 악들이 있을는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자기의 본성이 지독하게 미운 것임을 발견할 때까지 제 눈에 보이는 자신의 모습에 우쭐대는 것이 우리들이다.
선한 사람은 타인이 지니지 못한 어떤 특출함을 자신이 가지고 있다는 것을 스스로 알게 되었다 해도 그것 때문에 으쓱거리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 때문에 주님을 찬양한다. 그는 자신의 장점을 잘 이용해서 많은 이들이 주님께로 인도 되도록 노력한다.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자기의 인격과 경건한 행동을 떠벌렸다. 자기들은 매우 신앙심이 깊어 어김없이 십일조를 바친다고 상상하나, 주님께서는 그들을 두고, “… 정의와 자비와 신의 같은 아주 중요한 율법들을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라고 꾸짖으셨다.

바리사이파 사람의 기도

바리사이파 사람의 기도의 특색은 놀랄 만 하다. 그 기도에는 자기 죄를 인정하는 것도 없고 도움을 필요로 한 것도 없다. 그는 회개할 필요성과 하느님이 도우실 필요를 전혀 느끼지 못하고 있다. 한마디로 자기 만족에 도취되어 있는 것이다. 그들은 자신 속에는 악이 없다고 보는 한편, 타인들의 죄에는 매우 날카로운 시선을 보낸다. 그리하여 타인을 깎아 내림으로 자신을 더 추켜 세우는 것을 추구한다.

타인을 경멸함

고결한 영혼은 고상한 인간을 믿는다. 그러나 교활한 인간은 타인의 동기를 언제나 의심한다. 부패된 영혼은 타인 속에도 미덕이 있다는 것을 믿고 싶어하지 않는다. 타인을 추정해 보는데 자신의 동기가 지닌 품질이 반영될 수밖에 없는 것이 인간이다.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예수님을 부패한 사람으로 간주하였다. 그들이 그렇게 간주한 이유는 주님께서 죄인들과 어울렸다는데 있다. 그들은 인간을 다루시는 데에 있어서 사랑과 동기에 중심을 두시는 주님의 속성을 음미하려 들지 않았다. 우리는 그분의 속성 측면에서 그분께 접근함으로 그분을 이해할 수 있다.
그래서 만일 누군가가 죄인이라 해도, 우리는 그를 동정하여 돕는 쪽에 있어야지 그를 경멸하여 분리하려 해서는 안될 것이다. 그 이유는 모든 인간은 거듭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목적을 위해서라면 누구든지 도울 필요가 있는 것이다. 아마 그도 죄에 빠지기 전, 우리가 심한 시험에 저항했던 것 같이 그도 자기 속의 악한 경향성에 저항해 보려고 노력 했었을는지 모른다.
독선은 악중에서도 가장 지독한 악으로 정복하기에 가장 힘든 악이다. 자신이 성인 군자에 맞먹는다고 상상하거나, 자기가 죽으면 아마 천국 중에서도 상석에 앉게 될 것이라고 어림잡는 이들은 천국적 삶의 조건을 지독하게도 음미하지 못할 것이고, 미안하지만 천국의 하석도 차지하지 못할 것임을 저절로 발견하리라.
타인을 경멸하는 누군가를 발견하면 필시 그에 따른 악도 발견되는 게 통상적이다. 그 사람이 의로운 듯 착각되었다면 그의 의는 필시 외향적 측면일 뿐 심정 측면에서의 의는 아닐 것이다. 선한 자는 악을 미워하되 특별히 자신 속의 악을 미워한다. 따라서 그는 죄인을 미워하지 않으며 업신여기지도 않는다. 이 사람은 죄인을 그의 죄로부터 분리해 낸다 그러나 저 잘났다는 외적인 사람은 죄인을 그의 죄로부터 분리하지 않는다. 그는 타인 속에 있는 악은 경멸하나 자신 속에는 그런 것이 없다고 착각한다.

세리

세리의 조건은 위와 다르다. 경멸과 차별 대우를 받아 온 그는 성전 멀찍이 서서 자신은 성전에 가까이 다가설 존재도 못된다고 여긴다. 그는 낮은 위치, 겸손한 지위만을 취한다. 그는 자신의 눈을 하늘로 감히 들어올리지도 못한다. 자신에 대한 무가치함과 죄의식으로 그는 자신의 인격이 비천하다고 느낀다.
영적으로 세리는 진리로 잘 훈련되지 않은 마음, 진리를 높은 관점으로 끌어올리는데 있어 자기 이해성이 준비 안된 마음, 그럼에도 하느님의 명령에 자신이 불성실했음을 인정하는 마음을 표현한다. “저의 불법이 저를 사로잡아 위를 쳐다보지 못했나이다.” “주님이시여! 정의는 당신의 것일 뿐, 저에게는 잡동사니뿐입니다” 라고 고백하는 마음을 표현한다.

가슴을 침

세리가 자기 가슴을 쳤다는 것은 악의 근원이 자기 심정이요, 이 악은 정죄 되어야 마땅한 것, 그것들에 자신이 반대되게 하려고 무척 노력한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그는 자신 속의 어떤 선함도 떠벌리지 않고 자신이 죄인이라고 솔직하게 인정한다. 그래서 그는 어떤 변명도 늘어놓지 않으며 자기가 의롭다고 어깨를 으쓱대지도 않는다. 그는 어느 누구의 잘못도 혹평하지 않는다. 오로지 이렇게 외친다. “오, 하느님! 죄많은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 그는 자신을 깎아 내리고 주님을 드높인다. 자기만 옳은 줄 아는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제 잘난 척 하는 것만 내놓을 뿐이어서 그들은 주님의 도움을 전혀 느끼지도 않는다. 그러나 회개하는 세리는 “당신 보시기에 어느 누구라도 의롭게 산다고 감히 말할 수 있겠습니까? 부디 당신의 종을 심판하지 마소서…” 라고 간구하는 바, 이 기도의 영은 다음의 시편과 같이 느낀다. “당신은 제물을 즐기지 아니 하시며, 번제를 드려도 받지 아니 하십니다. 하느님, 내 제물은 찢어진 마음 뿐, 찢어지고 터진 마음을 당신께서는 얕보지 아니 하실 것입니다” (51:16,17).

집, 올바름

그래서 주님께서는 “잘 들어라. 하느님께 올바른 사람으로 인정받고 집으로 돌아간 사람은… 바로 그 세리였다.” 라고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마음 속의 집이란 우리의 의지이다. 악은 의지 속에서 시작된다. 그러나 자신 속의 자연적인 악들에 대항하게끔 자기 의지를 놓고 거듭남을 추구하기로 작정해 버리면 언젠가 우리는 결국 “올바른 사람,” 심정과 삶에 의를 만드는 때를 맞이하고야 만다. 성전에서 집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내향적인 영으로부터 자연적인 마음에로 내려가는 때를 말한다. 이때 우리는 실제 행동에서 무언가를 이루게 된다. 집이란 단어를 둘로 대비하여 생각한다면, 인간의 내향적 의지는 하느님의 집(성전)이고, 그의 자연적 의지는 지상에 있는 인간 자신의 집이다.
내향적 의지를 가지고 죄를 뉘우친 세리는 주님을 만나 자기 죄과를 인정한 뒤 자연적 마음과 삶에로 내려가 주님의 자비와 진리라는 측면에서 그의 행동을 올바르게 만들었을 것이다. 세월이 지난 후 그는 자기 속에서 “자비와 진리가 함께 만나고, 정의와 평화가 서로 입맞추었다.” 라고 고백할 것이다. 그가 자신을 보건대 의롭지 못하다고 평가하겠지만, 이제 그는 주님 보시기에 올바른 사람이 된 것이다. 그 까닭은 그가 자신의 무가치함을 위의 것과 동시에 가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는 자기가 행하는 모든 선함을 주님의 공로로 돌리리라.

올바르지 못한 것

그러나 개혁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의를 만들지도 못할 것이다. 그 이유는 자신 속 깊은 곳에 감추어져 놓인 악을 내던지려 노력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기들이 첫째라고 간주하겠지만 천국에서 평가할 때 꼴찌에 지나지 않는다. “너희의 정의가 바리사이파 사람들이나 율법 학자들의 정의를 넘어서지 않고서는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아, 너희 같은 위선자들은 화를 입을 것이다. 너희는 겉은 그럴싸해 보이지만 그 속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썩은 것이 가득차 있는 회칠한 무덤 같다. 이와 같이 너희도 겉으로는 옳은 사람처럼 보이지만 속은 위선과 불법으로 가득차 있다.” 거듭남의 초기에 우리는 마음속에 바리사이파 사람과 세리, 즉 독선과 겸손 둘 다를 지니고 출발한다. 거듭나는 작업은 전자를 추방하고 후자를 발달시키는 과정이다.

우쭐댐

이 비유는 원리를 실제적인 서술로 요약해 놓고 있다. 즉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면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면 높아질 것이다.” 물론, 이 서술이 포함하고 있는 것은 겸손해지되 차후에 우쭐대려고 처음에는 겸손한 척 하는 겉으로만 겸손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이런 자는 자신의 의지, 이해성, 그리고 신중함이 하느님의 선과 진리, 그리고 섭리와 비등하거나 조금 더 높다고 우쭐댈 소질이 충분한 것이다. 이런 자의 행동은 자신을 더 낮은 영적 조건에로 빠뜨리고 말아 실제로 자신이 낮아지고 마는 것이다.
주님께서 그를 벌주기 위해 낮은 데로 빠뜨리는 것이 아니라 저 스스로 인격 면에서 낮은 표준에 머물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의지나 이해성을 신성한 의지나 진리에 종속시켜 그분의 명령에 의해 사는 사람은 실지로 삶의 높은 영적 표준을 채택한 셈이 된다. 인격 면에서 그는 드높임을 받게 된다. 고백도 회개도 하지 않은 죄는 우리와 더불어 남아 있게 되나, 진실로 고백하며 회개해서 더 이상 짓지 않게 된 죄는 우리들로부터 떨어져 나간다. 마치 잘못을 저질렀던 이전의 인격으로부터 멀리 여행하는 듯이 된다.
주님께서 강경하게 정죄하신 악 중에서 자기를 뽐내는 악(self-exaltation)보다 더 큰 악은 없을 것이다. 자기 본위로 움직이고 있는 그분의 제자들에게 겸손을 보여 주시기 위해, “…하늘나라에서 가장 위대한 사람은 자신을 낮추어 이 어린이와 같이 되는 사람이다” (마태복음 18:4) 라고 가르치셨다.

신성한 도움

인간이 자기 스스로 악의 사슬을 끊는다는 것은 아주 어렵다. 그러나 회개는 그의 마음이 신성한 도움을 받을 수 있게 해준다. 그러나 우쭐대는 자는 회개를 추구하지 않는다. 인간이 자기 스스로 행한다고 하여 생산된 선은 순수한 선이 아니다. 이 선은 자기 공적이라는 것으로 이미 색칠해져 있을 뿐이다. 천사들은 주님의 인도와 도움 없이는 어떤 조그마한 선도 행할 능력이 없음을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악마는 어떤 천국적인 선도 받고 싶어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인간이 우쭐댈 때, 그는 인간 삶의 필연적 결과로 자신이 창피를 당해야 한다.
이런 법칙이 어떻게 작동되는가를 우리는 명확히 볼 수 있다. 인간이 자기 생명을 주님으로부터 천국을 통해 끌어당기겠다면, 그는 주님과의 연결을 반드시 가지고 있어야 한다. 이 연결 관계가 더 충분하게 솔직한 관계로 되면 될수록, 더 충만 되고 완전한 삶이 그의 것이 된다. 이 연결 고리를 끊어지게 하는 갖가지 것들은 신성한 축복을 방해하는 요소이다. 자기 본위로 움직이겠다고 하는 인간 속의 갖가지 것들은 천국 생명을 받지 못하게 하여 자신에게 올 수 있는 인격의 생명 고리를 끊어지게 만든다. 인간은 주님으로부터 생명을 받는 단순한 그릇에 불과하다. 이 그릇은 유입되는 생명을 썩게 할 수도 있고, 그 생명을 고결하게 받을 수도 있는 그릇이다.

인간 영역

모든 인간은 각자 자기를 지배하는 사랑으로부터 인격의 품질을 갖게 된다. 이 품질은 인간 전체에 고루 퍼져 있으면서 활동 영역에서 각 인간의 모습을 드러내 준다. 이것은 인간을 두루 감싸고 있는 어떤 분위기인데, 우리는 이를 영역(sphere)이라고 부른다. 식물의 경우, 장미이든 독성이 있는 잡초이든 모두 제 나름대로의 영역을 가지고 있어 그 영역 때문에 우리는 각 식물을 식별한다. 개는 냄새라는 예민한 감각으로 주인의 영역을 알아내서 주인을 따르게 된다. 우리의 영역은 영적이고 자연적인 것 둘 다를 가지고 있다. 주님께서 참생명을 인간에게 흘려 보내실 때, 이 생명은 인간 고유의 영역을 통과하지 않고는 인간에게 흘러들 수 없다. 깨끗한 비라 해도 죽어 썩어 가고 있는 시체에 떨어질 경우 그 비의 영향이 바뀌듯, 인간의 영역은 흘러드는 생명의 품질에 영향을 미친다.

생명의 말씀

천국 생명이라는 동일한 품질이 주님으로부터 모든 인간에게 흐르는 바, 두 가지 부류의 인간이 똑같이 이 생명을 받는다. 그리고 각각은 그 생명을 자기의 고유 품질로 변화시킨다. 악마는 지옥의 영역이 감싸고 있으므로 선을 악으로 부패시키는 바, 주님의 축복을 저주로 바뀌게 한다. 애당초 주님께서 내보내신 생명은 천국적인 것이지만 이 생명은 악마 속에서 지옥이 된다. 주님께서 순수하게 주시는 것들을 인간은 자신의 불순물 안으로 흡입한다. 그런고로 주님은 악마에게 천국을 주실 수 없다. 그 이유는 천국에서와 같이 받지 않기 때문이다. 악으로 빽빽해진 영역은 모든 선과 진리를 질식시켜 썩게 만든다. 마치 유독 가스로 꽉 찬 항아리에 신선한 공기가 유입될 경우 그 공기마저 같은 품질로 떨어져 버리는 격이다. “너의 불법이 너와 하느님 사이를 갈라지게 한 것이다. 너의 죄가 그분의 얼굴을 가리운 것이다.”
주님은 악 속에 거하실 수 없다. 오로지 우리가 받아들인 그분의 선과 진리 속에서만 거하실 수 있다. 그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는 높고 거룩한 곳에 있되, 회개하는 겸손한 영과 더불어 그곳에 있는다. 그리하여 뉘우치는 자들의 심정을 재활시켜주고 겸손한 영을 다시 살려 주리라.” 그러나 저만 옳은 줄 여기는 마음은 이기심과 악이라는 침침한 영역만을 창조하여 천국 원리가 뚫고 들지 못하게 한다. 그러나 겸손은 인간 영역을 부드럽게 하며 신성한 태양이 비치도록 허용하고 굶주리고 목마른 영혼에 천국의 영향이 스며들도록 한다. 그리하여 겸손한 자는 자기가 행한 선함, 자기가 아는 진리들이 자신 스스로에게서 근원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신성한 생명이 계속 자기 속에 흘러듦으로 자기는 한 순간이라도 버틸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있다. 죄를 뉘우치는 겸손한 사람은 자신의 인격과 주님의 인격 사이의 차이점을 보게 된다.

예증

때로 주님께서는 인간이 큰 죄에 빠지는 것까지도 허용하신다. 그 이유는 그가 그렇게 빠지지 않고서는 달리 자기 속의 악을 보고 회개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과정을 거쳐 회개한 사람은 신성한 도움의 절실함을 고통스럽게 의식한다. 그리하여 그는 주님의 도움을 추구하고, 그 도움에 자신의 마음을 연다. 그러나 독선적인 사람은 주님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느끼지 않는 고로 마음 문을 열 필요도 느끼지 않는다.
겸손은 야곱의 사다리와도 같이 인간 마음에 놓여져 천국과 주님에게 까지도 도달 가능하게 해주고, 주님의 특사인 천사들이 내려오는 도구로 사용되어 인간으로 하여금 한 계단 한 계단 높은 위치에로의 인격의 상승이 가능하게 한다. 이런 사람은 “힘에 힘을 보태어 시온의 하느님 앞에 나와 선다.” 인간이 자신의 선함을 떠벌릴 뿐, 자기 속에 악이 있음을 부인할 때, 그는 자기 속의 악을 자기의 것으로 채택하는 바, 그 악 자체가 곧 그 사람 자신이 된다. 이러면 사람 속의 어떤 악도 그 사람으로부터 분리될 수 있는 길이 없다. 죄를 고백하는 겸손한 사람은 그 죄를 자신에게서 분리하고, 자기 속의 악을 거절하며 미워한다. 이런 사람에게 주님은 접근 하실 수 있고, 그가 고백하고 미워하는 죄로부터 그가 멀리 떨어지도록 그를 인도하여 주신다.
자기를 추켜 대는 사람이 자신의 선함을 떠벌려 자기 속의 악도 선이라고 우기는 동안, 겸손한 사람은 이렇게 외친다. “하느님, 선한 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어지신 분이여, 내 죄를 없애 주소서. 허물을 말끔히 씻어 주시고 잘못을 깨끗이 없애 주소서. 내 죄 내가 알고 있사오며 내 잘못 항상 눈앞에 아른거립니다” (시편 51:1-3).

외적인 겸손, 선한 일

인간 겸손의 증거는 그 사람의 예절(manner) 속에서도 발견되지 않는다. 오로지 그의 삶속에서만 발견이 가능하다. 위선은 그 목적을 감추기 위해 겸손의 탈을 뒤집어쓰고 나타나는 때가 아주 흔하다. 경건한 외모 그 자체는 신앙의 등차와 비례하지 않는다. 그것들이 안에 있는 내용물과 상응 될 때, 즉 내향의 원리가 밖으로 빠져 나온 만큼에서만이 비례가 성립된다. 속에 원리가 없는 껍데기는 죽은 것이나 다름없다.
주님을 인정하고 사랑하는 가운데 행하지 않는 인간의 일들은 선이 아니라는 것을 근거로 선한 일은 구원에 필수 요건이 아니라는 것을 더욱 부각시키려 들면 우리는 또 다른 착각의 그물에 걸리고 만다는 것도 미리 눈치채고 있어야 한다. 일만 가지고 인간이 구원되는 것도 아니고 믿음만 가졌다고 가능한 것도 아니다. 오로지 선한 원리로부터 착수된 선한 일 속에 사랑과 믿음이 담겨 있어야 구원이 가능하다. 회개, 그것이 인간을 구원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회개는 인간이 악에서 돌아서게 해서 선 쪽으로 향하게 해준다. 본문의 세리는 갑자기 의로워진 것이 아니라, 사랑과 믿음, 주님께 순종하는 삶을 영위한 결과 점차적으로 올바른 사람이 된 것임을 우리는 간과해서는 안된다.

세련됨 (culture)

오늘 주제는 우리에게 또 하나의 경고도 보내 주고 있다. 즉 외모로 볼 때 세련 되게 보이는 것이 거듭남이라고 착각하지 말라는 것이다. 아주 도덕적이고 세련된 듯 보이는 사람이 더러운 심정을 소유할 수도 있다. 찬란한 깃털로 덮인 새가 지저귀는 소리가 불협화음일 때가 많다. 그 반면 지극히 평범한 깃털을 지닌 새일 지라도 그 소리는 매우 달콤함을 귀에 전달하여 주기도 한다. 감각적인 측면, 즉 외모의 세련됨은 낮고 천한 인격을 덮고 있을 때가 많음을 우리는 유의해야 할 것이다. 악행을 저지른 본산지인 바빌론을 문화적 측면에서 본다면 세련됨의 중심이었다.
외적 세련됨에 도사린 한가지 특별한 위험은 세련되게 보이지 않는 타인을 깔보려는 경향이 짙다는 것이다. 그러나, “하느님은 속마음을 헤아리신다.” 자아를 찬양하는 영, 자아 사랑으로 자신이 부유하다고 느끼는 영은 세상을 향해 자신을 뽐내 보이고, 자만 보다 더 나을 것이 없다고 간주하는 바, 마치 바보들이 돌진하는 곳에서 천사들이 밟힐까 걱정해야 하는 격이다. 이런 영의 소유자는 영적 삶을 위한 최적의 기회를 모두 놓치고 만다. 그러나 겸허한 영, 유전적인 악한 경향성 속의 못된 것들을 인식하는 영의 경우, 설사 아주 힘든 환경 여건에서까지도 거듭날 수 있는 성장의 기회를 주님의 자비는 발견하게 해 주신다. 마치 삭막한 바위틈에 떨어진 씨, 죽음을 피할 수 없는 바위라는 여건 속에서도 씨는 자신의 뿌리를 위한 발판을 발견하고, 더 길고 더 강한 뿌리를 내려보내 얼마 안되는 흙으로부터 성장의 기회를 포착한다. 그리고 그 뿌리는 더욱 힘찬 뿌리를 생산해 바위틈을 비집고 내려가 견고한 기반을 형성해 뭇 나무들처럼 성장을 영위한다. 진실로 “주님께서는 올바르게 살고자 하는 이들로부터 어떤 선도 유보하시지 않는다.” “이 사람아, 야훼께서 무엇을 좋아하시는지 무엇을 원하시는지 들어서 알지 않느냐? 정의를 실천하는 일, 기꺼이 은덕에 보답하는 일, 조심스레 하느님과 함께 살아가는 일, 그 일밖에 무엇이 더 있겠느냐? 그의 이름을 어려워하는 자에게 앞길이 열린다” (미가 6:8).

39
선한 목자
-신성한 사랑-

성서 본문: 요한복음 10장 1-16절

1. 예수께서 또 말씀하셨다. “정말 잘 들어 두어라. 양우리에 들어 갈 때에 문으로 들어 가지 않고 딴 데로 넘어 들어 가는 사람은 도둑이며 강도이다. 2. 양치는 목자는 문으로 버젓이 들어 간다. 3. 문지기는 목자에게 문을 열어 주고 양들은 목자의 음성을 알아 듣는다. 목자는 자기 양들을 하나 하나 불러 내어 밖으로 데리고 나간다. 4. 이렇게 양떼를 불러 낸 다음에 목자는 앞장 서 간다. 양떼는 그의 음성을 알고 있기 때문에 그를 뒤따라 간다. 5. 양들은 낯선 사람을 결코 따라 가지 않는다. 그 사람의 음성이 귀에 익지 않기 때문에 오히려 그를 피하여 달아난다.”
6.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 비유를 말씀해 주셨지만 그들은 그 말씀이 무슨 뜻인지 깨닫지 못하였다.
7. 예수께서 또 말씀하셨다. “정말 잘 들어 두어라. 나는 양이 드나드는 문이다. 8. 나보다 먼저 온 사람은 모두 다 도둑이며 강도이다. 그래서 양들은 그들의 말을 듣지 않았다. 9. 나는 문이다. 누구든지 나를 거쳐서 들어오면 안전할뿐더러 마음대로 드나들며 좋은 풀을 먹을 수 있다. 10. 도둑은 다만 양을 훔쳐다가 죽여서 없애려고 오지만 나는 양들이 생명을 얻고 더 얻어 풍성하게 하려고 왔다.”
11. “나는 착한 목자이다. 착한 목자는 자기 양을 위하여 목숨을 바친다. 12. 목자가 아닌 삯꾼은 양들이 자기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리가 가까이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도망쳐 버린다. 그러면 이리는 양들을 물어 가고 양떼는 뿔뿔이 흩어져 버린다. 13. 그는 삯꾼이어서 양들을 조금도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14. 나는 착한 목자이다. 나는 내 양들을 알고 내 양들도 나를 안다. 15. 이것은 마치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과 같다. 나는 내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바친다. 16. 나에게는 이 우리 안에 들어 있지 않은 다른 양들도 있다. 나는 그 양들도 데려와야 한다. 그러면 그들도 내 음성을 알아 듣고 마침내 한 떼가 되어 한 목자 아래 있게 될 것이다.”

목자

우리의 주님은 신성한 목자이시다. 그분의 신성한 사랑은 우리를 인도하시고 신성한 지혜는 우리를 가르치신다. 그리고 신성한 권능은 우리를 보호하신다. 우리는 이 세 가지 신성한 속성의 하나 됨 속에서, 주 예수 그리스도를 천상 천하의 한 분 하느님으로, 창조자, 구속자, 거듭나게 해주시는 분으로서 보게 된다. 주님은 구약 성서에서, “여호와는 나의 목자이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라…”라고 하여 여호와로서 알려져 있고, 신약성서에서, “나는 선한 목자라…”라고 선포하신다. 오늘 본문, 여타 많은 구절에서,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다” 라고 하시어 예수님은 한 분, 유일한 하느님, 여호와가 그분 자신임을 명백히 해 놓고 있으시다.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은 세 국면인 사랑과 지혜, 그리고 권능에서 신성한 생명을 인간에게 충분히 보여 주었다. 신성한 목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인간은 신성한 섭리의 지키심 아래 천국적 양우리로 인도되어진다.

정확한 의미로 국한해서 볼 때, 양(sheep)은 이타애의 원리, 또는 이웃을 사랑함을 표현한다. 넓은 의미에서, 양은 인간의 애정으로부터 있게 되는 모든 선한 원리를 표현한다. 개인적 측면에서, 주님의 양이란 주님의 사랑과 지혜를 많이 받고자 마음 문을 열고, 받아 자기 삶에서 체현할 준비가 된 이들을 말한다.

양우리 (sheepfold)

양우리는 천국에 있는 주님의 교회, 뿐만 아니라 지상의 교회가 주님께 신실하여 순종하고 있다면 그 교회까지 표현한다. 따라서 양우리는 천국적 조건을 갖춘 모든 이들, 그들이 영계에 있든, 자연계에 있든 모두를 망라하는 주님의 천국적 왕국을 말한다. 개인 측면에서 볼 때, 양우리는 거듭나는 삶 속에서 하나를 이루는 천국적인 선과 진리가 있을 때 우리 마음에도 존재한다. 비교 측면에서 양우리는 포도원으로 표현되는 영적 교회에 비해 천적 교회이기도 하다. 목자는 가르치고 인도하는 사람을 표현한다. 성실한 지도자와 선생은 내면의 사랑과 영적 생명에 의해 움직여지고, 타인들의 영적 생명이 발달되도록 도우려는 사랑으로 움직여진다. 양떼란 지도와 가르침을 받는 이들이다.

인간은 진리로 가르쳐지고 사랑으로 인도되어진다. 그런데 인간이 진리를 사랑할 수 있기 전, 또는 진리에 순종하기 전, 반드시 인간은 그 진리를 알아야만 된다. 이 진리는 영적 삶에로 가는 입구 역할을 한다. 따라서 영적 진리에 관한 지식은 인간으로 영적 삶에 들어가게 하는 문에 해당한다. “만일 너희가 생명의 나라에 들어가려거든 계명을 지켜라.” 그러나 인간이 계명을 지킬 수 있기 전 그는 반드시 계명에 대해 먼저 배워야 한다. 따라서 진리에 관한 지식은 진리의 삶에 인간을 소개시켜 주는 문인 것이다.
신성한 진리 측면에서 주님은 양우리의 신성한 문이시다. 문을 통하여 양우리에 들어가는 것은 진리를 수단으로 주님을 알고, 그분께 나아가, 그분의 신성한 인격 측면에서 그분을 인정하고 믿고 사랑하여 순종하는 것을 말한다. 신성한 인성 측면에서 주님께 접근하는 이들은 그분께 스스로 문을 열고, 양으로 표현되는 영적 선과 진리에 관한 원리들을 스스로 살아 있게 간직한다.
동양의 양우리는 돌담 같은 울타리로 사방이 둘러 쳐져 있고 한쪽에 문이 있어 밤에 모든 양이 들어가고 나면 잠그고, 아침에는 목자가 와서 문을 열고 양떼를 이끈다. 따라서 도둑이나 이리는 문을 열지 않고 다른 방법으로 침입할 것이다.

문지기 (porter, doorkeeper)

문지기란 우리의 합리적 능력, 또는 생각하는 능력을 표현한다. 이 능력은 마음의 문을 지키고 있으면서 우리의 생각과 애정 속으로 들어오려 하는 각종 사항들을 점검한다. 만일 우리가 삶에 관한 주님의 선하고 참된 원리들을 사랑한다면, 그래서 그분의 신성한 섭리들을 신뢰하고 있다면, 주님이 말씀 속에서 자신에게 밝혀 준 진리들은 자신 속에서 문으로 존재한다. 이렇게 우리에게 알려지고 수용한 진리 외에도, 우리의 합리력 역시 문으로서 계속 존재한다. 자신이 알고 인정한 진리의 문을 통과해서 들어가는 것은 무엇이든지 그에게 목자가 된다. 그것들은 천국으로 가는 길을 가르치고 인도한다.

딴데로 넘어 감

그러나 모든 악과 거짓된 영향력은 신성한 진리의 문이 자기들을 점검하기를 거절한다. 그들은 공인된 문으로 들어가지 않고, “딴데로 넘어 들어가려고” 애쓴다. 다시 말해, 우리의 감각적인 열정이나 편견 등을 통하는 부당한 방법을 써서 우리의 생각과 애정에로 들어간다. 자신에게 밝히 알려진 진리 외의 다른 방법, 즉 자신이 선하고 진정하다는 것, 꽤 쓸만하다고 여겨져서 우리 안에 들어오는 모든 것은 우리 영혼을 해치려고 하는 영적인 도둑이며 강도인 것이다. 악에 잘 기울려는 우리의 경향성(즉 우리의 자존심, 분노, 타인을 경멸함, 기타 지옥적 열정)을 통하여 우리에게 영향을 미치려 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환대한다거나 귀를 기울여서도 안된다. 마치 양들이 도둑이나 강도, 이리떼를 양우리에 들어오라고 환영할 수 없는 것과 같다. 이런 사실을 깊이 새겨 둔다면, 지옥이 내뿜는 영향력에 대항하여 투쟁할 때 과히 힘들지 않게 이를 물리칠 수 있을 것이다.
주님은 우리가 신성한 말씀에서 끌어내서 밝혀져 인정한 진리라는 문을 통하여 그분의 천국 영향력을 가지고 우리의 내향적 마음에 들어오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신성한 도움, 영적 생명을 공급받는데 있어서 신성한 말씀을 통하지 않고 삶의 여타 다른 길로 오려는 지옥의 영향, 세상적 방법에 기대해서는 안된다. “너희가 말씀에 의거 말하지 않으면, 너희 안에 빛이 없는 것이다.”

목자와 그의 양떼

동양에서 목자와 양 사이의 관계는 매우 친밀하다. 일반적으로 목자는 양떼의 소유자일 경우가 많다. 초지는 여기 저기 흐트러져 있어 목자와 양떼는 풀밭을 찾아 다녀야 한다. 게다가 물을 마시려면 더욱 먼 거리를 이동해야 했다. 이럴 경우 각종 사나운 들짐승의 공격을 받기 일쑤인 바, 양떼는 목자에 의존되는 일이 다반사였다.

양을 이름지어 부름

우리가 개나 말에 이름을 지어 부르듯, 목자들은 양을 이름지어 부른다. 그래서 양들은 자기 이름을 알고, 목자의 소리도 알고 있다. 양들은 목자를 신뢰해서, 목자가 부를 때 쉽게 다가와 목자가 어디로 가든 그를 따른다. 이와 같이 주님의 양들은 신성한 목자에 신뢰를 갖고 있다. 그들은 그분의 소리를 듣고, 그분의 소리임을 인식하여 그분의 진리에 순종한다. “주님은 그분의 양들을 이름으로 부르신다.” 이름이란 어떤 개인을 표시하기 위해 주어진다. 이름을 근원적으로 살펴보면, 각 개인은 자기들의 품질, 또는 인격의 생김새에 따라 이름이 주어져 있다. 이런 일은 북미의 인디안이나 기타 많은 국가에서 행해져 왔다. 이와 같이 이름은 품질을 표현한다.

양을 부름

우리의 목자 되신 측면에서 주님은 그분의 양들을 이름을 수단으로 해서 부르신다. 즉 노력해서 달성해야 할 영적 삶의 어떤 품질을 우리에게 밝혀 주실 때, 영적 삶의 상태나 품질을 우리에게 밝히 알리실 때, 그분은 진리를 수단으로, 즉 이름을 지어 부르신다. 주님께서는 각 인간의 삶의 매 단계에 있는 품질과 조건에 정확하게 맞도록 그분의 가르침과 인도하심을 채택하신다. 영적으로 그분은 각자에게 필요한 진보, 영적 조건에 채택 가능하기 위해, 순간적으로 그리고 정확하게 신성의 인도가 있기 위해, 그분의 양을 이름지어 부르시고 있다.

밖으로 데리고 나감

위와 같이 해서, “주님은 인간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신다.” 즉 선하고 진정한 원리와 그것을 이해함으로부터 일상 생활에 적용함이라는 데까지 이끄신다. 밖으로 데리고 나가시되 그분은 우리 앞에 서시어 데리고 나가신다. 다시 말해 돼지 떼를 몰아치듯 하는 충동이나 자극을 우리에게 주어 밖으로 몰아내시지 않는다. 마치 양들이 목자에게 인도되듯, 그분은 우리를 인도하신다. 이런 인도하심을 주님은 인간들 앞에서 보여 주신 선한 삶의 예를 가지고 성취하신다. 따라서 주님은 그분의 가르침과 본보기 속에서 언제나 인간 앞에 서 계신다.

목자를 따라감

“양들은 그를 뒤따라간다.” 즉 주님을 사랑하고, 자기 의지를 그분의 의지에 복종되게 하여 그분의 계명을 지킴으로 그분의 사랑 안에 거한다는 말이다. 그래서 그들은 신성한 섭리로 보호되어진다. 그들은 실제의 삶에서 그분을 따른다. 양들은 그분의 목소리를 안다. 즉 그들은 그분의 진리를 이해한다는 말이다. 진리에 순종하기를 기뻐 맞이하는 이들은 진리를 이해하는 상황에 자신을 가져다 놓게 된다. “네가 진리를 알게 되면 진리가 너를 자유케 하리라.” “주님의 뜻을 행하고 있는 그 사람은 교리가 하느님에 속한 교리인지 그렇지 않은지 알게 될 것이다.”

예증

여러분이 목마르고 배고플 때, 자기 육체가 무엇을 원하는지 안다. 그래서 먹고 마실 것을 발견했을 때 여러분은 그것이 먹고 마셔야 할 양식임을 금방 눈치챈다. 그리고 열심히 그것을 먹고 마신다. 그것을 먹어야 하느냐 먹지 않아야 하느냐라는 따위의 어떤 논쟁도 여러분 앞에 필요치 않을 것이다. 영적으로도 이와 같아서,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은 만족을 얻게 되는데, 그 이유는 그들도 자기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알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기 앞에 있는 선과 진리를 금방 눈치챈다. 그들은 천국 원리에 마음이 열리어 있어서 직바로 그 원리에 응답한다. 그들은 선에 속하는 좋은 품질, 진리에 신실해야 함을 직감하고 있다. 이 직감력(intuition)은 동물이 자기 먹이를 찾는 것이나 자기에게 부적당한 것을 경고해 주는 어떤 본능과는 아주 구별되는 능력이다.
주님의 양떼 각각 속에 있는 심정과 이해성은 선하고 진정한 원리에 응답한다. 이는 마치 눈이 빛에, 귀가 소리에 응하는 속도와 같을는지 모른다. 주님에 대한 그들의 사랑, 그분을 따르는 신실함은 영적 원리를 내향적으로 인식하게 한다. 그들이 아는 것은 논쟁 따위로 아는 것도 아니요, 자연적 감각으로 아는 것도 아니고, 심정으로부터 “사랑이 스스로 확신하게 해주는” 가운데 아는 것들이다. 주님의 영적 양들은 진리의 소리를 안다. 그 이유는 진리가 주님처럼 되라고 그들을 가르치기 때문이다.
주님이 산에서 가르치심을 끝내자, “군중은 그의 가르치심(doctrine)을 듣고 놀랐다. 그 가르치시는 것이 율법학자들과는 달리 권위가 있기 때문이었다.” 율법학자들도 교리를 가르쳤지만, 인간의 권위, 전통의 권위를 추켜세웠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분 자신의 권위, 영적 빛으로 진리를 가르치셨다. 볼 눈이 있는 자는 그리스도의 복음서 안에서 진리의 빛을 쉽게 본다.

낯선 사람

주님의 양떼들은 낯선 사람을 따라가지 않을 것이다. 그 이유는 영적으로 낯선 자란 주님과 우리 사이를 이간질하는 자, 주님을 사랑하지도 따르지도 않는 자이기 때문이다. 추상적 측면에서, 낯선 자란 신성한 진리로 볼 때 이상한 것, 즉 거짓 원리이다. 주님을 사랑하여 따르는 사람은 거짓된 설득이나 악한 영향력에 이끌려 가지 않는다. 그들은 그런 영향력을 거절하고 금한다. 악과 거짓에 대한 직감적 거부 반응은 지옥의 영향력이 모습을 드러낼 때마다 자동으로 울리는 경보 장치와 같은 것이다.

표현들

때때로 어떤 이들이 불평한 것 중 하나는, 양과 같이 힘이 없고 무방비 상태인 동물을 가지고 주님을 따르는 자들을 표현한다는 것은 부적당하지 않느냐 하는 것, 오히려 뭔가 더 강력하고 자기 방어력이 있는 짐승이 선한 자들의 표현물로 사용하는게 더 타당치 않을까 하고 말한다. 그러나 이들의 제시는 상응이나 상징의 본성에 무식한 자기를 폭로하는 것밖에 안된다. 자존심이 강하고, 강하다는 자만심으로 꽉 찬 전투성이 강한 짐승, 제 몸을 잘 지킬 수 있는 짐승들은 우리 속의 이기심, 타락하는 마음, 즉 구세주가 필요 없다고 하는 마음을 표현한다. 그러나 인도자를 꼭 구해야 한다는 양의 무력함은 거듭나는 인간, 자신을 구원하는데 자신은 무능력함을 느끼는 인간, 그래서 신성한 인도자가 필요함을 절실하게 느끼는 사람을 표현한다. 양의 유순함, 다정 다감한 속성은 내면이 바뀌어 거듭나는 인간을 표현한다.
이 비유는 일부 바리사이파인을 포함해서 군중을 향해 말해졌다. 그들이 이 비유를 깨닫지 못하는 것은 이상할게 하나도 없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더 가르치셨다. “나는 양이 드나드는 문이다.” 신성한 진리 측면에서 그분은 목자이신 신성한 사랑에로 인도하는 문, 그분의 교회, 천국인 양우리로 들어 갈 수 있는 문이다.

도둑과 강도

“나보다 먼저 온 사람은 모두 도둑이며 강도이다.” 이 말씀은 세상적인 시간이나 개인에 관련시킬 경우 글자대로는 아니다. 그 이유가 주님께서 주님 앞에 먼저 세상에 와서 가르치고 지도한 사람을 저주하실 리 만무이기 때문이다. 이 구절을 영적으로 볼 때, 주님 앞에 먼저 온 모든 것이란 중요도에 있어서 주님보다 자신을 먼저 놓는 모든 것들, 신성한 말씀 속의 진리보다 자신의 논리를 추켜 대는 자들, 주님이 밝혀 주시지 않아도 제 스스로 진리를 알 수 있다고 느끼는 자들을 말한다.
추상적 측면에서 살펴본다면, 악하고 거짓된 모든 원리들은 주님 앞에 자기 것을 먼저 놓으며, 그분 보다 자기 것들이 더 낫다고 추켜올린다. 악한 원리는 선이 자기 것이라고 주장하여 주님으로부터 선을 분리시키려 들므로 그것들은 강도이다. 주님으로부터 선과 진리를 신성한 것들로 여겨 받지 않으면 어느 누구도 그것을 받을 수 없다. 선과 진리가 주님으로부터 분리될 경우, 팔이 신체에서 잘려 나가 있는 것 같이 생명력을 상실하고 만다.

주님에 대한 믿음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신성한 속성을 믿는 것은 영적인 빛에 마음이 열리게 하여 영적으로 총명하게 해준다. 이런 믿음이 없을 경우, 인간은 자연적 빛에서만 살게 되어 영적 빛으로 올라서지 못한다. 천상 천하의 유일한 하느님이 주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인정하는 것은 영적 삶에로 들어가는 문인 것이다. “나를 수단으로 하지 않고는 누구도 아버지께 올 자가 없다.” 즉 신성한 속성과 개성을 알게 만드는 신성한 진리를 수단으로 하지 않고는 어느 누구도 신성한 사랑을 납득할 수 없고, 접근도 불가능하다는 말이다. 주님을 통하여 인간은 내면의 삶인 영적 삶에로 “들어가고,” 실제적 삶인 자연적 삶에로 “나오기도” 하는 바, 신성한 목자에 의해 인도되고 가르쳐지고 보호된다. 그래서 매일 해야 하는 적극적 삶 속에서 천국의 풀밭을 발견해 갈 수 있다. 다시 말해 이들은 신성한 속성의 내면적 이해에로 “들어가고,” “밖으로 나가” 일상 생활의 행위들에 천국 원리를 적용하게 된다.

목숨을 바침

선한 목자로서의 예수님은 인성을 입고 그 인성을 영화시키심 속에서, 마리아에게서 얻게 된 인간적인 모든 것을 죽이심 속에서, 신성한 인간이 신성 자체와 결합됨으로 해서 그분의 생명을 양들을 위해 주셨다. 이런 과정은 우리에게 본보기가 되는 과정이다. 우리가 영적으로 살기 위해 악에 관한 모든 것은 죽어야만 되는 것이다. 거짓 되고 악한 원리들, “도둑이며 강도”인 그것들은 인간에게 와서 모든 선과 진리들을 탈취하려 든다. 그러나 주님은 인간에게 오셔서 더욱 많은 선과 진리를 주시고 악과 거짓에서 선과 진리를 구해 주신다.

삯꾼

비유의 글자에는 선한 목자로서의 주님과 삯꾼 또는 악한 목자로서의 유대인의 지도자들과의 비교가 담겨 있다. 주님은 “목자처럼 그분의 양떼에게 풀을 뜯기시고, 새끼양들을 두 팔로 안아 가슴에 품으시고 젖먹이 딸린 양들을 곱게 몰고 오신다” (이사야 40:11). 그러나 삯꾼은 삯을 받기 위해 일하는 사람이지 자기가 할 수 있는 선을 위해 일하는 것은 아니다. 선한 사람, 비록 그가 적절할 대가를 받고 일하고 있다 해도 자기 일이 유용하기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이 때의 대가는 그의 삶이 기대하는 목적이 아니라 수단일 뿐이다. 이와 같이 영적 마음을 지닌 사람은 음식을 먹되 먹기 위해 사는게 아니라 살아서 유용한 인간이 되기 위해 먹는 것뿐이다. 삯꾼은 자아와 세상을 사랑하는 사람이요, 이기적 목적을 위해 이기적으로 일한다. 삯꾼의 경우, 세상적 소득이 중요한 과제이겠지만, 선한 자의 경우, 그것이 첫 번째 과제가 아니다.
삯꾼은 양을 소유하지 않는다. 즉 그는 삶에서 자신의 원리로 채택된 선한 원리가 없고, 자기 삶에서 그 원리가 체현되지도 않는다. 그는 양의 안전을 전혀 돌보지 않는다. 이런 삯꾼일지라도 원리에 관한 얼마간의 지식은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 지식에 실제로 흥미가 없다. 따라서 악들이 자신 속에서 일어날 때, 그는 그 악들에 투항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리에게 그것들을 내버려 두어 주님이 자신에게 기껏 가르치셨던 선하고 참된 원리들을 흐트러지게 하며 잡히게 한다.

이리

이리란 거짓 원리를 사랑함이다. 이 사랑은 세상적 마음으로부터 선을 포획하고 진리를 흐트린다. 그러므로 이리는 죄인 자신의 심정 속에 존재한다. 그래서 시험이 일어날 때, 즉 악과 거짓이 습격을 감행할 때, 악령이 자기를 덮칠 때, 그 사람 속의 원리의 수준이 삯꾼이어서 선한 원리라는 영적인 양을 내향적으로 돌보지 않는다면, 그는 영적인 양을 보호하기 위해 자기의 이기적 삶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그는 악령과의 대결을 회피함으로 악과 거짓의 진격을 허용하여 주님이 자신의 마음속에 이식해 두신 선과 진리 쪽으로 기울려 하는 품성까지 파괴되게 하고 말 것이다.

안다는 것과 알아지는 것

주님께서는 자기 양을 자기 것으로 알고 계신다. 양들은 그분을 사랑하여 그분 안에 거하고, 그분은 영원한 생명을 그들에게 주신다. 그런데, 주님과 아주 친하다고 떠벌리는 다른 것들도 있다. 심판 있게 될 때,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이렇게 말하신다. “나는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노라.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나에게서 떠나거라.” 그 반면, 주님은 이렇게 말하신다. “나는 내 양들을 안다.” 즉 주님을 사랑하여 삶으로 그분을 따르는 이들은 그분을 구세주로서 안다. 이에 대해 그들은 어떤 논쟁도 요구하지 않고, 인간적 권위로된 주장이나 교조도 필요 없다. 이들은 여인의 외침에 예수님을 뵈러 나온 사마리아인들, 그 뒤 그 여자에게 “우리는 당신의 말만 듣고 믿었지만 이제는 직접 그분의 말씀을 듣고 그분이야말로 참으로 구세주라는 것을 알게 되었소” 라고 말한 사마리아 사람들이다 (요한복음 4장).
세상적 인간은 그리스도에 관해 논하고, 그리스도의 자격 여부를 가지고 말다툼한다. 그러나 영적 인간은 그분을 보고 알고 그분을 사랑하고, 이해하고, 그분을 따라 영적 삶의 축복 안으로 들어간다. 진리는 인간의 영(spirit)에 호소한다. 육체적 눈에 보이는 기적 같은 외적인 사건은 우리의 감각들로 감탄과 경이를 뿜어내도록 강요한다. 그러나 기적들은 인간으로 영적 진리를 확신케 하지 못한다. 열린 영혼(soul)안에만 진리를 진리로서 아는 능력이 있다. 이 능력은 감각에 호소되는 것을 훨씬 멀리 초월한다. 영적 인간에게는 진리 그 자체 이상의 어떤 명백함이 없다. 영적 인간에게는 외부로부터의 어떤 보증(endorsement)도 필요 없다.

순백함(simplicity)의 필요

인간에게 가장 크게 필요한 것은 영(spirit)의 순박함, 삶의 여정에서 주님을 따르는데 필요한 조건들, 겸손, 사랑 있는 온유한 심정이다. 따라서 열이 있는 흥분, 이기적 포부, 예사롭지 않은 사건을 열망하는 따위는 없애야 한다. 그리고 선한 목자의 돌보아 주심 밑에서 일상 생활을 유용하게 만드는 것에 만족할 수 있어야 한다. 신성한 아버지(Divine Father)가 신성한 인성(the Humanity)이라고 인정하면서 신성한 인성은 영화하심(glorification)을 통해 신성한 아버지와 하나를 이루셨다는 것도 인정해야 한다. 이와 같은 상황, 선한 목자로서의 주님이 그분의 양을 인정하시고, 또한 그분의 양들은 각자의 수준에 따라 그분을 인정하면서 거듭남 속에서 그분과 하나를 이룬다.

다른 우리 (the other fold)

어떤 측면에서 볼 때 주님의 양우리란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다. 따라서 이 우리 안에 있지 않은 그분의 다른 양떼란 이방인들, 아직 교회에 들어와 있지 않은 이들, 그러나 가르침을 받아 인도될 사람들이다. 이를 좀더 꼼꼼한 측면에서 살핀다면, 두 우리(the two folds)란 주님의 왕국들, 하나의 거대한 천국을 이룰 천적 왕국과 영적 왕국이다. 영적 천국은 주님께서 육을 입고 오심과 영들의 중간 세계(intermediate world)를 정리 정돈하셨을 때 형성되었다. 이 때 영적 천국은 영들의 세계에서 오래 기다려 온 사람들로 형성되었다. 이렇게 해서 주님은 천적 양우리에 소속되지 않는 이들을 모으시어 한 목자 아래 영적 천국을 이루시게 함으로 그분이 보시기에 천국 전체는 하나의 거대한 양우리가 되었던 것이다.

새 생명을 얻으라

예수님께서는 그분의 생명을 다시 얻기 위해 목숨을 내려 놓으셨다. 이와 같이 거듭남 속에서 우리는 자신 속의 자연적이고, 이기적이며 세상적인 생명을 내려놓고 새로운 영적인 천국 생명을 얻어야 한다. “제 목숨을 살리려고 하는 사람은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얻을 것이다” (마태복음 16:25). 우리가 주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는 때, 그분을 더욱 절대적으로 신뢰하는 때, 이러한 때를 갖게 하는 것은 우리가 세상에서 근심 걱정 없고, 잘 먹고 잘 사는 잘되어 간다는 인생 시기, 가상적인 삶에서 보다 시련과 슬픔의 인생의 시기에 있는 경우가 더 많다. 이 경우에서 우리는 그분의 위대함, 그러면서도 온유하신 그분의 팔이 막다른 골목에 처박힌 극한 상황 넘어로 우리를 들어올리시는 것을 느껴 볼 수 있다. 팔레스타인에 있는 양들 같이 우리에게도 최고의 풀밭은 가파른 암벽 투성이의 산 남쪽 등성이에 펼쳐져 있다. 이 등성이에 도달하기 위해 우리에게는 강함, 용기, 인내가 필요하다. 그런데 신성한 목자는 우리의 강한 정도에 따라 인도해 주시고 유용한 쪽으로 우리 스스로 진력하도록 모든 강함을 주신다.

40
포도나무와 그 가지
– 신성과 인간 생명 –

성서 본문: 요한 복음 15장 1-10절

1. “나는 참 포도 나무요 나의 아버지는 농부이시다. 2. 나에게 붙어 있으면서 열매를 맺지 못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모조리 쳐내시고 열매를 맺는 가지는 더 많은 열매를 맺도록 잘 가꾸신다. 3. 너희는 내 교훈을 받아 이미 잘 가꾸어진 가지들이다. 4. 너희는 나를 떠나지 말라. 나도 너희를 떠나지 않겠다. 포도 나무에 붙어 있지 않는 가지가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는 것 처럼 너희도 나에게 붙어 있지 아니하면 열매를 맺지 못할 것이다. 5.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누구든지 나에게서 떠나지 않고 내가 그와 함께있으면 그는 많은 열매를 맺는다.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다. 6. 나를 떠난 사람은 잘려나간 가지 처럼 밖에 버려져 말라 버린다. 그러면 사람들이 이런 가지를 모아다가 불에 던져 태워 버린다. 7. 너희가 나를 떠나지 않고 또 내 말을 간직해 둔다면 무슨 소원이든지 구하는 대로 다 이루어질 것이다. 8. 너희가 많은 열매를 맺고 참으로 나의 제자가 되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다. 9.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해 왔다. 그러니 너희는 언제나 내 사랑안에 머물러 있어라. 10.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 사랑안에 머물러 있듯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안에 머물러 있게 될 것이다.”

요약

신성한 사랑은 만물의 아버지 되시고, 우주의 생명이다. “그분 안에서 우리는 살고, 움직이며, 자기 존재를 갖는다.” 창조물은 생명의 유일한 근원이신 그분과 연결을 맺는 가운데, 그 연결을 수단으로 해야만 살아 있다.

표현적 의미

이 비유는 심어진 포도나무와 그 나무가 농부에 의해 돌보아 지는 것을 묘사해 놓고 있다. 자라는 나무, 기타 다른 식믈은 마음안에서 자라는 여러 가지 원리들을 표현한다. 농부는 아버지, 신성한 선, 신성한 사랑, 예수 그리스도라는 인성에 내재하는 신성이시다. 인성은 신성한 진리, 또는 신성한 지혜이다. 영화하심 속에서, 신성한 인성은 유일한 하느님, 주 예수 그리스도라는 한분 속에서 본체이신 신성과 하나를 이루셨다. 그래서 주님은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다.” “나를 본 것은 아버지를 본 것이다.” 라고 말씀 하셨다. 사랑은 진리속에 내재하는 생명이다. 그래서 사랑과 진리는 우리가 거듭날 때까지 둘로 존재한다.

포도나무

주 예수 그리스도는 “참 포도나무” 이시다. 그 이유가 그분은 신성한 사랑이 체현되어서 명백해진 신성한 진리이시기 때문이다. 그분은 한 분(one Person) 이신 유일한 하느님이시지만, 인간에게는 사랑과 지혜, 권능이라는 세 국면으로 알려지고 있다. 기독교, 특히 새교회 안에서만 주 예수 그리스도의 속성은 총명하게 이해될 수 있다. 그분은 “참 포도나무” 이시며, 신성한 사랑, 즉 아버지로 속이 채워져 있는 신성한 진리 이시다.

포도원

포도원은 마음안에 있는 교회이다. “만군의 야훼의 포도원은 이스라엘 가문이다” (이사야 5:7). 포도원에 있는 포도나무는 교회안에 있는 주님의 진리이다. 다시말해 교회속에 있는 사람들 안에 있는 주님의 진리이다. 신성한 진리가 인격화(personification) 되었을 경우, 주님은 신성한 사랑이 세상에 심으신 “참 포도나무” 이시다. 아버지로부터 아들이 있듯이, 사랑으로부터 진리는 파생된다. 농부가 포도나무를 심듯이, 아버지인 신성한 사랑은 신성한 인간을 내보내셔서 인간 구원을 위한 교회를 형성해 주시기 위해 세상에 “참 포도나무”를 심으셨던 것이다. 농부가 포도나무를 정성스럽게 가꾸듯, 신성한 사랑은 신성한 인성, 곧 신성한 진리를 돌보신다. “나, 주는 그 나무에 매 순간마다 물을 주며 잘 가꾸리라. 그 나무가 어떤 해도 입지 않도록 밤낮으로 돌보리라.” 신성한 사랑은 신성한 인성을 통하여 우리가 아는 모든 진리들 안에 내재하시어 역사하신다. 진리, 그것만 가지고는 어떤 생명력도 없다. 진리의 생명은 그 진리안에 내재하는 신성한 사랑으로부터 존재한다.

포도나무 가지를 잘라 냄

포도원에서 농부는 죽은 가지를 잘라 내고 살아있는 가지를 정돈해서 더 나은 열매가 맺히도록 한다. 이와 같이 주님은 우리의 마음속에 진리의 포도나무를 심으시고 돌보신다. 악과 거짓이라는 죽어있는 것들을 거두어 내시고, 훈련을 수단으로 우리속에 있는 선한 것들을 깨끗하게 하시어 전 보다 더 나은 선한 것이 되게 해주신다.

가지들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가지에 해당되는 것은 그분의 자연적 어머니로부터 파생된 인간적 애정들이다. 그분은 그런 것들 중 죽은 것은 거두어 내셨고, 좋은 것은 순수하게 하셔서 신성한 생명이 그분안에서 충만 되도록 하시었다. 그러나 인간의 경우 포도나무 가지란 진리는 받는 개개인이다. 가지의 생명은 우주의 한 생명으로부터 뻗쳐나가 있다. 가지가 나무로부터 생명을 받듯, 인간은 주님으로부터 생명을 받는다.
우리를 주님의 포도나무 가지로 만드는 것은 우리 속에 있는 주님의 현존(Lord’s presence) 이시다. 교회는 “주님의 신비한 몸” 이라 불리운다. 유아시절 우리는 포도나무 가지처럼 순진 가운데에 있는다. 그러나 우리가 성숙함에 따라 자아 의지가 튀어 나올 때, 주님은 시험을 통하여 악한 것 곧 죽은 것들을 거두어 내심으로 더 순수해지게 하시고, 좋은 것 곧 살아있는 것을 더 생생하게 하심으로 그분과 더 가까운 하나를 이루도록 역사하신다.

포도나무에 붙어있지 않은 가지

진리를 알고는 있지만, 그 진리를 사랑하지 않아서 실제에 사용하지 않는 모든 사람은 자기를 주님에게서 스스로 분리해 버린다. 진리가 마음 속에서 살아 움직여서 이타애와 사랑을 성장 시키지 않으면 가지들은 열매를 맺지 못할 것이다. 주님은 인간을 위해 그분이 하실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해 주고 계신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인간이 악에 저항하여 그 악을 금하려고 애쓰는 한, 우리 속의 죽은 것, 악한 것을 모두 거두어 주시고, 우리가 받겠다고 애쓰는 한 선한 모든 것을 주신다.
어느 때가 우리에게 있어 행복한 순간일까? 그 때란 주님께서 우리속에 있는 죽은 것인 악한 것을 거두어 가시고 부분적으로 나마 선한 것을 순수하게 해주시겠다고 역사하시는 그분의 일을 우리가 방해하지 않을 때이다. 더 나아가 악에서 건져내어 선쪽으로 한 걸음 더 진전되게 하는 수단이 시련과 훈련임을 스스로 인정하여 기쁜 마음으로 그것을 수용할 때이다. 신성한 사랑은 진리로 우리에게 온다. 따라서 우리가 그 진리를 반갑게 맞이하여 순종한다면, 주님은 더 위대한 선쪽으로 우리를 인도해 주실 것이다.

인간 안에 계신 주님

진리라는 포도나무는 인간 안에 존재 한다. 주님은 인간의 의도, 생각, 행동이라는 의식세계 안에서만 거하실 수 있다. 우리 삶의 모든 환경은 우리의 가지를 쳐내어 정리정돈하는 모든 영적 필요성에 꼭 맞게 되어 있다. 우리 마음에 심어진 주님의 포도나무는 우리가 되어 가기를 원하는 쪽으로 꼭맞추어 성장해 간다. 각양각색의 인간이 있듯이 각양각색의 진리가 존재하고, 한 인간 개체의 경우도 그의 발전 단계에 따라 각기 다른 단계의 진리가 존재 한다. 그러므로 거듭남에 있어서의 우리의 성장이란 우리속에 있는 진리라는 포도나무가 가지를 쳐내 순수하게 되어가는 과정인 것이다. 우리 속의 진리라는 포도나무를 우리가 어떻게 돌보느냐는 것은 주님을 우리가 어떻게 생각하느냐와 맞먹는 것이다. 그 이유는 신성한 진리로서의 주님이 우리안에 있는 포도나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본문에서 이렇게 읽게 된다. “포도나무에 붙어있지 않는 가지가 열매를 맺을 수 없는 것처럼 너희도 나에게 붙어있지 않으면 열매를 맺지 못할 것이다.” 그 이유는 진리의 진정한 열매가 선함이요, 이 선함이 우리속에 있는 주님의 현존인 바, 우리가 그분안에, 그분이 우리안에 거해야 하기 때문이다.

포도나무를 쳐냄

우리가 진보해가는 가운데 있어지는 모든 단계는 종점이 아니고 오로지 발전하고 있는 상태일 뿐이다. 하나의 단계에 도달되는 진보는 더 나은 진보를 위한 준비 단계이다. “열매를 맺는 가지는 더 많은 열매를 맺도록 잘 가꾸신다.” 즉 더 많고 품질이 더 나은 열매를 맺도록 하신다는 말이다. 우리의 영적 진보에 관한 단계들이 이스라엘 족속들의 다양한 여행, 즉 에집트에서 가나안으로, 그리고 가나안의 정복등으로 표현 되어 있다. 아마 더 위대한 정복을 위해 더 많은 여행이 필요할는지 모른다. 우리가 시련을 불행으로 간주하고 있는 동안에도, 그 시련은 우리의 영적 열매를 증가시키기 위해 포도나무를 깨끗이해도 좋다고 우리 자신이 허락하였었다는 것을 기억함으로 시련의 아픔이 옯겨지게 된 때도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구속(the redeemed) 의 역사도 크나큰 시련의 역사를 감수해야 한다. 불필요한 인생 훈련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자신 속의 악들에 저항하려는 노력을 십분의 일이라도 감수하려 들면, 아마도 우리는 머지않아 자기 속의 악들로부터 자유로워 진다.

말씀으로 깨끗하게 함

“너희는 내 교훈을 받아 이미 잘 가꾸어진 나무들이다.” 이 구절에 대해 구번역을 보면, “너희는 내가 일러준 말(Word)로 이미 깨끗하였으니…” 그분이 우리에게 그분 자신을 밝히 알게 해주지 않으시면 우리는 주님을 알 도리가 없다. 그분은 신성한 삶과 인간 삶의 원리들을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밝혀 주심으로 말씀이 삶의 매개체가 되도록 하셨다. 신성한 말씀의 글자적 의미는 감각이라는 우리의 바깥쪽 삶에 와 닿는다. 그리고 안쪽에 해당되는 영적의미는 우리를 영적 총명으로 인도해 준다. 이렇게 말씀을 수단으로 주님은 우리를 위쪽으로, 안쪽으로, 우리의 생각을 들어 올리시고, 우리의 애정을 순수하게 하시며, 행동을 질서속에 놓도록 인도해 가신다. 정신적 포도나무를 쳐내서 개운하게 하신다는 것은 신성한 진리의 영에 일치 않는 모든 느낌이나 생각, 행동을 거절해 가도록 인도하신다는 말이다.
어떤 자연적 물이나 피도 우리를 영적으로 씻어주지는 못한다. 오로지 말씀 속의 진리만이 그 일을 해낼 수 있다. 물이나 피가 가진 상징적 의미는 이러하다. 하느님의 말씀 중 글자는 물이라 불리우고, 영적 의미는 피라 불리운다. 물은 자연적 진리, 즉 행동에 놓이는 진리를 표현한다. 따라서 물로 베풀어지는 세례란 바깥쪽 삶을 씻겠다는 각오를 표현한다. 그러나 거룩한 성찬은 주님의 영적인 피, 즉 신성한 진리와 더불어 있게 된다. 그래서 포도주는 성경 글자에서 까지 “포도의 피” 라고 불리고 있는바, 이는 영적 진리를 표현하는 것이다.

주님 안에 거함

“너희는 나를 떠나지 말라. 나도 너희를 떠나지 않겠다.” 또는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안에 거하리니…” 주님은 모든 것 안에 내재된 생명이시다. 그러나 인간이 이 생명을 받기 위해서, 그분의 생명이 각자 안에 있기 위해서 우리는 반드시 주님안에 거해야 한다. 마치 포도나무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어야 살아있을 수 있는 것과 같다. 모든 인간 각자의 삶의 질과 양은 주님과 각자와의 관계가 갖는 질과 양에 일치 된다. 포도나무 가지는 포도나무가 공급해주는 생명을 사용할 수 만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우리는 주님에 의해 공급되는 생명을 사용하는 태도에 따라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있다. 그래서 주님이 우리에게 나누어 주실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는 질과 양, 그분이 주시는 것을 받겠다는 마음이 열리는 정도에 의존 된다. 거듭나는 인간이 하는 것은 모두 주님으로부터 있어진 것들이다. 주님 없이는 어떤 인간이라도 제 아무리 작다고 말하는 선도 행할 수 없다.
이와 같이 우리의 심정과 삶이 주님과 보다 가깝게, 보다 완전하게 결합될 때, 더 풍성한 열매가, 더욱 품질 좋은 열매가 생산 되는 것이다. 주님이 말씀속에서 그분 자신을 알게 해 주시는 바, 그분의 말씀이 없게 되면 우리는 어떤 선도 행하지 못한다. 그 이유는 우리가 영적 원리에 관해 아는게 아무것도 없게 되기 때문이다. 우리속에는 생명을 유지 보전하게 하는 어떤 것도 없다. 생명은 주님에게서 우리에게로 한 순간, 한 순간 마다 공급되어 진다. 마치 시냇물이 공급지인 샘으로부터 끊임없이 물을 공급받기에 시냇물이 되어 있는 것과 같다. 포도나무 가지 속의 수액(sap)은 포도나무로부터 이다. 육체 속의 피는 심장으로부터 순환된다. 가지와 나무도 비슷하다. 이와같이 인간은 주님과 비슷하게 선을 생산 한다. 물론 그 선 속에 주님의 생명이 순환되는 한도 내에서만 순수한 선이다.

밖에 버려짐

“나를 떠난 사람은 잘려나간 가지 처럼 밖에 버려져 말라 버린다.” 생명의 근원과의 계속적인 연결을 중단하는 사람은 생명의 공급을 잃게 마련이다. 그는 주님에 의해 밖으로 내던져 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인격에 의해 스스로 내던져 지는 것이다. 그는 포도나무에 붙어있지 않겠다고 해서 포도나무로부터 자신 스스로를 자르는 것이다.
“그러면 사람들이 이런 가지를 모아다가 불에 던져 태워 버린다.” 자아만을 사랑하는 원리에 모든 애정이 쏠릴 때, 그 인간은 악한 인간이 되어 스스로 “가지를 모으는” 격이 된다. 그들은 품질면에서 자기들과 비슷한 영계의 사람들과 연합하여 서로 모인다. 그리고 자아들이 빚어낸 지옥의 불인 악한 열정의 불속에 서로 뛰어 든다. 이런 거룩치 못한 욕망의 불속에서 그들에게 남아 있던 모든 천국적인 것들은 그들에게서 사라진다. 지옥은 하느님의 분노가 만든 처벌이 존재하는 곳이 아니다. 영적으로 말한다면 이와 같은 분노는 없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이다. 지옥은 하느님이 내리시는 축복의 사랑을 거절하고, 선을 악으로 돌려 버리는 결과로 있게되는 것을 피할 수 없는 곳이다. 하느님은 각 인간에게 하느님의 심정을 주시고, 그 심정이 서로 사랑하도록 하셨으나, 미움을 사랑하는 쪽으로 돌아선 사람들이 자신의 심정안에 지옥을 만든다. “보아라. 나는 오늘 생명과 죽음, 행복과 불행을 너희 앞에 내놓는다” (신명기 30:15). 생명과 행복은 주님이 인간에게 주신 것을 사용하는데 존재하고, 죽음과 불행은 주님이 주신 것을 남용하는데 존재한다.

구하는 것 (뜻할 것을 물어, asking what we will)

“너희가 나를 떠나지 않고 또 내말을 간직해 둔다면 무슨 소원이든지 구하는 대로 다 이루어 질 것이다 (If ye abide in Me, and My words abide in you, ye shall ask what ye will, and it shall be done unto you).” 인간의 모든 삶, 안쪽으로나, 바깥쪽으로나, 즉 의도면에서나 행동면에서, 영적 측면에서나 자연적 측면에서, 신성한 법에 일치 할 때, 그는 가지가 나무에 붙어 있듯 주님안에 거하게 된다. 그러면 하느님의 생명은 그 인간에게 흘러들고, 채워주시어 복을 받게된다. 이런 식으로 천국의 모든 힘은 인간에게서, 그 인간을 통해 역사되는 바, 그 사람이 하고저 하는 것을 위해 힘을 주신다. 이런 상태에서의 인간은 천국 질서안에 놓여져 있는 것이다. 그가 되고자 하는 것, 하고자 하는 것, 모두는 주님이 뜻하시는 것과 같게된다. 그는 주님이 자기를 인도해 주시는 것을 사랑한다. 그가 바라는 모든 것은 주님으로부터 그에게 오는 것들과 같다. 그는 자기가 뜻하는 모든 것을 이룬다. 그 이유는 그가 천국적 삶과 일치 되는 것만을 뜻하려 하기 때문이다. 그는 악과 거짓을 정복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 그이유는 천국이 그 사람에게 존재해서 지옥을 누르기 때문이다. 그는 주님의 말씀으로부터 가르침을 받는다. 더욱이 그는 말씀안에 계신 주님 자신으로부터 가르쳐진다.
위와 같이 아름다운 인간 삶속에 천국의 복들이 만족되게 주어진다. 모든 바램은 신성한 사랑으로부터, 모든 생각은 신성한 지혜로부터 흐르게 되며 모든 행동은 신성한 힘으로부터 이어진다. 이 사람이 가지고 싶어 바라는 모든 천국 속의 것을 그는 소유할 수 있다. 이 사람이 가지고 싶어 바라는 것 중 천국 밖의 것은 하나도 없다. 자기가 원하는 것에 위와 같이 충분하고도 자유롭게 만족하는 조건에서 그 이상 더 바람직한 것이 있어질 수 있다고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우리의 바램이 보증됨

자기가 원하는 모든 것을 얻는다고 누가 보증할 수 있을까? 아마 아래의 두 가지 경우에만 보증될 것이다. 즉 자기가 자연적으로 바라는 모든 것을 획득하기 위해 그 획득에 반대되는 세력을 누를 힘을 가져야만 하든지, 또는 올바른 것에 대한 어떤 표준을 자기가 인정한 뒤, 자기가 바라는 것들을 그 표준에 맞추어 가든지 해야 할 것이다. 이를 달리 말해 본다면, 자기가 원하는 모든 것을 가질 수 있는 능력을 소유 하든가, 자기가 가질 수 있는 것만을 원하는 쪽으로 자신을 가져다 놓아야만 할 것이다. 그런데 누구나 다 아는 쉬운 것은, 어느 누구도 만물을 자기에게 종속시키고, 만물 속의 법칙을 마음대로 움직이는 주인이 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자기가 원하는 모든 것을 가지는데 성공할 수도 있는데, 이는 자신을 바꾸어지게 함으로서 가능하다. 우리가 주님안에 거하고, 신성한 의지에 자기를 종속 시키는 것, 자기 생각을 신성한 생각에 맞추는 것, 자신의 행동을 주님의 계명에 따라 움직이게 하는 것으로 가능해 진다. 이 사람은 자기가 갖지 못할 어떤 것도 바라지 않는데에 이른다. 그 다음 그는 자기가 하고저 하는 것을 주님께 묻게 되고, 묻는(ask ) 것이 그에게서 이루어 진다. 이루어 지는 이유는 주님이 주시고 싶어 하시는 것만을 주님께 요구(ask)할 것이기 때문이다. 거듭나는 사람, 천국적인 본성은 천국적인 것 외에는 어떤 것도 묻거나 요구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가 자유롭게 가질수 있는 것을 사용하는 면에서 자유롭게 모두 다 사용한다. 포도나무 가지라는 측면에서 그 사람은 포도나무를 통해 순환하는 생명의 모든 혜택을 향유한다. 주님께 거하는 천사들의 지혜는 얼마나 위대할까? 주님의 자비에 저항하는 악마들의 어리석음은 얼마나 처참할까? 각자 헤아려 보라.

각자의 바램들

주님은 악한 인간이 바라는 것이 행동화 되는 것을 억제하는 쪽으로 운행하신다. 왜냐하면 그와 같은 만족은 더 깊은 재난으로 빠지게 할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각자 삶의 매 단계에 있는 본성에 일치되는 것만을 간절히 바랜다. 따라서 그의 본성이 바뀌면, 그가 원하는 것도 변한다. 모든 것은 그것들의 조직화된 상태에 맞추어 바라게 된다. 즉 두 눈은 빛을, 귀는 소리를 바랜다. 물고기는 물을, 새는 공중을, 목축떼는 풀밭을, 육식동물은 고기와 피를 요구한다. 모든 것은 각각의 본성을 먹일 것을 위해 외쳐 호소한다.
위와 똑 같은 법칙에 의해 악마는 복수나 탐욕을 꼭 필요로 하고, 천사는 사랑과 순수성을 위해 겸손히 기도한다. 악마는 그 악마보다 더 사악한 악마에 의해 행동이 자제 되어야 하는 반면, 천사들은 즉각적으로 충만해지는 기쁨이 없는 바램이 아니면 숨도 쉬기 힘들다. “주님은 곧 바로 걷는 이들에게 어떤 선도 유보 하시지 않는다.”

만족

우리의 바램을 충분히 만족하게 하는 길, 영화로운 진리는 우리의 자아 의지가 모든 것을 정복함으로서 되는 것이 아니라, 자아 의지를 주님의 계명에 복종 시키는데에 존재한다. 우리는 무질서 속에 인간 조직이 내어 놓는 기묘한 혜택의 미끼 때문에 서로의 사이가 뒤틀어져 있다. 그래서 이 우주는 각자의 바램과 반대되어 있는 듯 여겨진다. 그러나 우리가 자아 의지에 재갈을 물리고, 천국 질서에로 귀환하면, 온 우주는 우리를 친구로 환대하는 쪽으로 돌아서고, 우리 발 아래에는 각자가 바랠수 있는 것들이 선물로서 놓여진다.
인간은 천국 삶을 위해 창조되어 있다. 인간이 이 삶안에 진입하면 즉각 새로운 세계의 문이 열린다. 그리고 사는 것이 진정으로 시작되었음을 스스로 발견한다. 그 다음 이들은 자기들이 뜻하고저 하는 것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고기는 물을 요구하고, 눈은 빛만을 추구할 것임을 주님께서 아시는 바, 이들이 묻는 쪽으로 이동하게 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주님께서는 만민이 요구할 수 있는 모든 것을 각 인간을 위해 설비해 두셨다. 온 우주를 보라. 그것이 영적이든 자연적이든 인간을 위한 집으로 창조되어 있다. 그리고 인간 조직에 필요한 모든 것이 공급되고 있다. 주님의 선물을 남용하지 않고 사용하는 사람은 그들이 바라는 것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다. 이들에게 꼭 요구되는 한 가지 조건은 그들이 주님안에 거하고 그분의 계명을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 이 조건의 충족없이 인간은 천국적인 복을 받을 수 있는 상태에 도달 할 수 없다.

열매를 맺음

“너희가 많은 열매를 맺고 참으로 나의 제자가 되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다.”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때란, 신성한 사랑이 그분의 자녀들의 삶 안에서 명백하게 들어날 때이다. “너희도 이와 같이 너희의 빛을 사람들에게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 (마태복음 5:16). 주님의 계명을 진실로 지키는 이들은 아버지, 즉 신성한 사랑을 자기의 심정과 삶으로 드높인다. 그들은 자신들의 행동에서 계명을 실천함으로 자기가 주님의 진정한 제자라는 본보기로 증거자가 되어 주님의 선함을 드러낸다.
어떤 진리도 그것이 실제에 사용되어 열매를 맺어야 살아있는 진리가 된다. 영속성을 지닌 씨는 꽃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열매속에 존재한다. 아름다운 진리를 단지 감상적으로만 보는 때가 얼마나 흔한지 모른다. 우리는 자주 진리에 대해 토론하며 생각하기도 한다. 제 아무리 토론하고 생각해도 일상 생활이라는 실제에 놓여지지 않으면 무슨 가치가 있는 것일까? “…열매를 맺지 않는 가지는… 모두 잘리운다.”

열매 맺지 않는 가지들

우리의 영적 조직 안에 있는 어떤 원리들이 체현되지 않을 경우, 그 원리들이 실제 사용될 때까지 그 속의 진리는 우리에게 심각한 진리로 존재한다. 어떤 진리가 매우 옳다고 여겨 반갑게 맞아 들였으나 실제에 사용하지 않았을 경우, 각자의 심판 때에 그 진리들은 영적 삶을 위한 열매를 맺지 않은 죽은 가지인 바, 그 진리들은 우리들에게서 잘리어 진다.

주님의 사랑 안에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해 왔다. 그러니 너희는 언제나 내 사랑 안에 머물러 있어라.” 신성이 사랑을 수단으로 인성과 하나를 이루셨듯이, 신성한 인간은 신성한 진리를 수단으로 살아가는 이들과 사랑 안에서 하나를 이룬다. 신성한 사랑은 신성한 진리 안으로 흘러 들고, 이 신성한 진리는 인간에게로 내려와 꽃을 피우며 신성한 사랑이 열매 맺어지게 한다. 신성한 사랑이 신성한 진리로 하여금 신성한 진리가 되도록 하였듯이, 포도나무인 신성한 진리는 인간이라는 가지들 안에 신성한 생명을 보내준다. 우리가 계속해서 주님을 사랑할 때, 우리는 계속해서 주님의 사랑 안에 있게 된다. 그이유가 주님은 그분을 기쁘게 영접하는 이들 안에 언제나 거하시기 때문이다.

계명을 지킴

“내가 내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 사랑 안에 머물러 있듯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물러 있게될 것이다.” 입으셨던 인성이 신성한 뜻을 성취함으로해서 신성과 하나를 이루셨듯이, 우리가 주님과 하나됨은 신성한 진리에 순종함으로서만 결과를 볼수 있다. 열매를 맺겠다는 인간의 모든 지식이나 지혜 등등 모든 것은 그 인간으로 하여금 악을 죄로 알고 금하고, 주님의 계명을 지키는 쪽으로 인도해 주어야만 된다. “모든 종교는 삶에 관련이 있고, 종교의 생명은 선을 행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계명을 지킴으로 인간은 주님의 형상과 모양을 따라가게 된다. 그렇게 되는 이유는, 계명이 신성한 생명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인간이 주님의 선에 의거 선을 사랑하고 행하는 만큼에서 그는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모든 악은 주님과 진정한 인간 삶의 정반대 이다. 신성한 명령을 준수하는 것은 우리 속의 심정과 삶에 신성한 사랑이 흘러들게하여 더 새롭고 광대해진 삶을 이루게 하며, 더욱 가지를 뻗는 바, “사람의 자, 곧 천사의 자”로 되는 충만을 향해 더욱 정진하게 한다.

삶 속의 진리

우리가 초심자일 경우, 진리의 발견에 매우 흥미있어 한다. 이때의 우리는 진리에 관하여 말을 한다고 하여 보아야 고작 적은 것, 낮은 수준에 불과 하다. 그나마 그 말들이 과거의 이야기들로 되어간다면, 그나마 그 진리는 삶 속에 열매를 맺지도 못한다. 이러면 우리의 가지들은 쳐내지고 깨끗케 할필요가 있게 된다. 우리는 주님의 포도나무에 소속되지 않는 가지, 즉 죽은 것들을 잘아 내어야 한다. 가장 큰 문제는 우리가 얼마나 많은 진리를 알고 있느냐가 아니라, 우리 사랑의 품질, 삶의 품질이 어떠하냐 이다. 우리가 진리에 흥미를 잃고 있다면, 우리는 포도나무에 붙어있지 않게 되어 포도나무의 생명이 우리에게 흘러들지 않는 바, 좋은 열매를 생산하지 못한다. 우리들 안의 어떤 것이 포도나무로부터의 생명의 흐름을 멈춰지게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진리에 대한 우리의 관심도, 진리를 위한 우리의 일, 진리에 반대되는 우리의 바램이나 생각들을 던져 버리려는 우리의 각오 등등은 교회 생활에서 발전하는 우리의 수준, 또는 그 반대인 뒤로 미끄러지는 정도를 측량하게 해주는 계기같은 역할을 담당한다. 그래서 만약 우리가 진리에 대한 흥미를 계속 간직하고 있다면, 이는 마치 큰 포도나무에 붙어있는 성장하는 가지가 되어 날마다 새 순을 더 내고, 새로운 꽃을 피워 새 열매를 산출하는 것과 같아 진다.

새교회 속의 진리들

자기가 갱신되고 있다는 것을 느끼고, 나날이 새롭고 더 나은 성장되는 삶 속에 있다고 느끼는 영혼(soul)의 경우 교회의 진리들은 하느님의 말씀으로부터 끌려 나와지고, 결코 늙거나 케케묵은 것이 되지 않는다. 위쪽으로 올라가고, 그리고 안쪽으로 깊이 들어가는 새로운 단계들은 두 개의 세계, 자연과 영(spirit)이라는 세계에서 새로운 빛과 국면 가운데서 나타난다. 즉 자라고 있는 영혼(soul)이 계속 전시 되면서, 주님의 자비와 선함을 보는데 있어서도 계속 새로운 관점이 자라 오른다. “이런 것들로해서 인간이 살고, 이런 것들 안에 내 영의 생명이 있사옵니다.” 사랑받아진 진리, 삶 속에 있는 진리는 늙거나 녹스는 일이 결코 없다. 진리의 사용(use)은 그 진리를 우리 속에서 생동하게 한다. 마치 계속적인 연습이 신체의 근육을 단련시켜 주는 것과 같다. 진리라는 포도나무의 성장은 계속 새로워 지는 바, 헌 가지는 버리고, 새 가지를 돋아 내서 팽창해가는 내향의 힘으로 움직여 진다.
신성한 말씀 속에 있는 속 뜻을 알게 해주는 새교회의 교리를 안다는 것은 말할 수 없는 큰 특전이다. 그러나 아는 것 만큼이나 책임도 증가 된다. 더욱이 장엄하고 천국적인 진리에 흥미를 잃어간다는 것은 우리가 향해야 할 더 높고 더 거룩한 삶에 흥미가 없다는 말이다. “저에게 깨끗한 심정을 창조하여 주소서. 하느님이시여… 올바른 영이 저에게 있도록 새롭게하여 주소서.”
진리에 대한 흥미가 이전보다 덜해져 간다면, 이는 수많은 세상의 관심사들, 또는 외적 환경에서 과오를 낳게 할 심각한 실수를 저지르는 격이 된다. 세상적 관심사에 더 신경을 써야 하겠다면, 자신의 방향을 결정지워 줄 진리들이 더욱 필요해진다. 좌우지간 우리가 진리에 자꾸 무관심해지고 있다면, 그 원인을 찾기 위해 자신의 심정을 관조할 필요가 있다. 우리가 주님의 진리에 흥미를 잃는다면 우리는 주님 자신에 대한 것 까지 흥미를 잃는다는 결과를 빚는다. 주님께서 이렇게 말하셨다. “너희가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물러 있게 되리라.

부록
(Appendix)

선각자 신학 관련 도서들 목록…3
영계 관련 용어 도표로 스케치…4
선각자의 용어 풀이…6
선각자에게만 유일한 기본 생각들…25
도서 구입 안내…38

선각자 (에마뉴엘 스웨덴볽)의 신학 관련 저서들

1. 직접 출판한 저서들 2. 출판되지 않고 발견된 그의 기록 내지 저술인 것들.

천국의 비밀들 (1749-1756년) 영의 일기(또는 영적 경험) (1745-1765)
천국과 지옥 (1758년) 요한계시록 설명 (1757-1759년)
새 예루살렘과 그곳의 교리 (1758년) 아타나시안 신조 (1759-1763년)
마지막 심판 (1758년) 주님에 관하여 (1759-1763년)
백마 (1758년) 예언서들과 시편의 내적 의미(1759-1763년)
우주에 있는 지구들 (1758년) 마지막 심판 (1759-1763년)
주님에 관한 교리 (1763년) 신성의 사랑 (1759-1763년)
거룩한 성경에 관한 교리 (1763년) 신성의 지혜 (1759-1763년)
삶에 관한 교리 (1763년) 선행의 교리 (1766년)
신앙에 관한 교리 (1763년) 5 기억할만한 관련들 (1766년)
마지막 심판에 관한 계속 (1763년) 결혼에 관해서 (1766년)
신성의 사랑과 지혜 (1763년) 정경들 (1769-1772년)
신성한 섭리 (1764년) 새 교회에 관한 교회의 역사 (1769-1772년)
요한계시록 밝힘 (1766년) 부속물(coronis) (1769-1772년)
부부의 사랑 (1768년) 새 교회로 초대함 (1769-1772년)
간략한 해설 (1769년)
유입, 또는 혼과 몸 사이의 상호 작용 (1769년)
진정한 기독 종교 (1771년)

영계(the Spiritual World)

**천국의 비밀들의 책에 흔히 등장하는 단어들을 그림으로 생각해본다**

1. 평면(plane) 또는 수평(level)에서 생각할 경우:

가장 안쪽(inmost) 부분
내부(internal)
내면(interior)
외면(exterior)
외부(external)
가장 바깥쪽(outmost) 부분

2. 높, 낮이에서 생각할 경우

3층 천국 또는 셋째 천국
가장 높은 천국, 천적 수준의 천사들이 거주한다
주님을 사람함의 천사들

2층 천국, 둘째 천국
중간 천국, 영적 수준의 천사들이 거주한다
이웃을 사랑함의 천사들

1층 천국, 첫째 천국
최말단 천국, 자연적 수준의 천사들이 거주한다
주님의 명령에 순종함을 사랑한 천사들

영들의 세계

가장 온건한 악마들

사탄들

악마들

3. 겹층(layer)으로 생각할 경우

세 다른 크기의 그릇을 포개 놓은 것, 또는
겹으로 이루어진 식물인 양파, 배추 등등을 연상해도 도움이 된다.
가장 정확히 말하려면 세 덩어리의 케익(cake)이 포개진 상태일지 모른다.
이에 대해 선각자의 저서에서 두 용어가 등장하는데
잇따르는 질서(successive order), 끊이지 않는 질서 (continuous order)이다

(1) 잇따르는 질서(successive order)

천적 천국 (셋째 천국, 가장 안쪽 천국) ——————

영적 천국 (둘째 천국, 중간 천국)——————-

자연적 천국 (첫째 천국, 가장 바깥 천국)————-

(2) 끊이지 않는 질서 (continuous order)

천적 천국————————————-
영적 천국———————————–
자연적 천국———————————–

(3) 말씀 안에서의 등차(수준)들

가장 깊은 의미 (최고 의미)
천적 수준의 의미
영적 수준(또는 내적 수준)의 의미
내적 역사적 의미
글자 의미

선각자의 용어 풀이
(Glossary)

** 참고: (commercium) 식의 표기된 것은 라틴어임
이 풀이는 간결해서 좋지만, 한편 너무나 간결해서 어떤 단어의 경우는 이해함에 불리할 수 있는 단점도 있다. 어쨌든 아래의 글들은 Swedenborg Resercher’s Manual by William Ross Woofenden으로부터 발췌되었다. 정확한 이해를 위해 영역본이 필요할 경우 역자에게 연락하기 바란다 (인터넷에서 헌 책은 구매가 가능할지 모른다, 검색해보기 바란다).

감각적인 (Sensuous)
관능적인, 감각의, 그리고 감각 지향의. 섹스적인 것만을 함축하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감각들에서 집중함에 의해 특색을 이루는 것, 감각들에 의해 납득되는 것. 마음의 자연적 수준에서도 가장 낮은 평면.

개혁 (Reformation)
거듭남의 과정 중의 일부를 묘사하는데 사용되었다, 즉 당사자의 바깥쪽 생활을 질서 안에 놓는 것이다. 당사자는 진리가 우세한 순종의 상태에서 진리를 수단으로 선 쪽으로 인도된다. 이것은 주님으로부터 새 의지를 받기 위한 준비단계이다.

거듭남 (Regeneration)
넓은 의미에서 재출생의 모든 과정. 좁은 의미에서 개혁에 뒤이어지는 과정. 주님이 각 개인 안에서 새로운 의지를 만들어가시는 과정, 또는 (삶의) 과정의 목적(goal).

결혼의 (부부의, connubial)
결혼에 관련되는 단어이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것은 결혼에 연계
된 외적인 것들 만에 관련하여, 또는 부정적 측면에서 사용되는 편이다. 새나 동물의 짝짓기에 사용되었다.

고대 교회 (ancient church)
성경에서 노아와 그의 자손들에 의해 표현된 고대 시대 성경 속의 사람들의 종교.

과학물들 (Scientifics)
과학적 진리들을 보라. 지식들, 사실들, 자료들.

과학적 진리들 (Scientific truths)
위 표현은 빈약한 번역일지 모른다, 그 이유는 이 용어가 우리가 아는 “과학(science)”을 가리키는 경우가 매우 드물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연을 연구함으로부터, 그리고 성경의 글자 그대로의 의미로부터 획득한 사실들, 자료들, 진리들이다.

공적 (Merit, meritorious)
흔한 사용법에서 이 단어가 함축하는 것은 긍정적(건설적) 측면이 대세이다. 그러나 선각자가 이 단어를 사용할 때의 경우, 거의 언제나 뜻하는 것은, 공적 추구(merit-seeking), 즉 자비롭게 여겨질 수 있다 싶은 어떤 행위 또는 친절한 어떤 행동에 대하여 돈 또는 명성을 보상을 은근히 기대함이다.

광적 신앙 (Religiosity)
외적, 또는 미신적 믿음 체계, 신봉자의 편에서 내적 약속의 깊이를 갖지 않은 종교를 묘사하는데 사용하였다.

교류 (Intercourse)
왕래함 (commercium)에 대한 오래전의 번역, 상호 작용 (interact)을 뜻한다, 이는 개인들 또는 어떤 것들을 연합시키는 것이다. 개인의 혼과 몸이 어떻게 교통하고 일반적으로 상호 작용하는지를 언급할 때도 사용된다.

교리 (Doctrine)
세 가지를 뜻하려고 사용된다: 1. 배움의 과정, 2. 학식 또는 과학의 분과, 또는 3. 특별한 취지에서 교회의 가르침. 일반적으로 이것은 진실로 종교 생활을 꾸려가기 위하여 절대로 필요한 가르침일 것이다, 그리고 고로 본질적으로 실용적일 것이다.

교회 (church)
이 단어는 흔한 보통의 단어 사용에서도 어떤 영적 생활만도 아니고, 그렇다고 어떤 종파나 조직체만을 지칭할 때도 아닌 것이 뜻해지게 보통이 아닌 의미에서 사용되어진다, 즉 조직체에서이든, 개인적으로 이든, 영적 생활을 사실로 깨달음이다. 고로 개인(person, 개인)은 영적인 교회이다.

균형 (balance)
(평형을 보라.) 천국 세력과 지옥 세력이 균등하게 인간에게 영향을 미치도록 하는 섭리적 상태를 염두해서 사용된다, 하여 당사자가 악의 영향력에 휘둘리는 듯 외관상 나타남에도 불구하고 실상 그는 자유한 상태에서 도덕에 관한 결정들을 만들게 됨을 말할 때 이 단어가 사용되고 있다.

그릇 (Vessel)
인간은 하느님으로부터 생명을 받는 “그릇”이다고 말해진다, 단지 담는 용기라는 말이 아니고 유기적 형체로서 이다.

기억해둘만한 관련 사항들 (Memorable relations)
기억해둘만한 사건(memorabilia, memorable occurrences)라고도 말한다. 선각자가 그의 후기 저서들의 장들에 첨부하는 식으로, 또는 군데군데에 흩뿌리는 식으로 해서 기록했는데, 다른 세계에서의 그의 경험들에 관한 이야기들이다.

기운 (영역, sphere)
모두 각각의 사람들은 자신의 총체적 사랑들로부터 되튀긴 유출물에 에워싸여 있다고 말해진다. 일반적으로 이것은 땅 위에서는 감지될 수 없다. 누군가의 기운이 어떤지는 천국에 있는 모든 이에 의해서는 확연히 감지된다, 하여 상대방과 연계되어도 되는지, 피해야 하는지를 결정하는 기초이다.

길들여진 선 (Domestic good)
개인이 부모로부터 유전적으로 끌어낸 선을 뜻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이것은 당사자가 (선택의) 자유함 안에서 그것을 자기 것이 되게 하지 않으면 “저축”되지 않는다. 또한 “가정의 자연적 선”, 그리고 “자연적 선”이라고도 불리운다. (천국의 비밀 3518항의 창. 27:9에 대한 해석을 참조하라.)

김나지움 (Gymnasium)
유럽에서 공통적으로 사용함에서는 두 번째의 학교 (중고등학교). 선각자는 이 단어를 그룹들의 멤버들이 생각들을 토의하고 그들의 마음들을 실행해보는 영계의 모임들이나 거기의 학교들을 언급하는데 사용했다.

끊이지 않는 등차들 (continuous degrees)
수준들(levels) 또는 단계들(gradations), 마치 찬 것으로부터 따뜻한 것까지, 또는 어둠으로부터 빛으로까지의 경우와 유사하다. 또한 “넓이의 등차들” 또는 “수평적인 수준들”이라 불리운다.

나머지 상태들 (Remnant states)
“리메인스”를 보라.

논리를 더듬어 사고함 (Ratiocination, 합리화함)
“추론(reasoning)”으로만 번역되면 약간 유감스럽다. 이는 거짓 추정들, 거짓 추론, 거짓 연역을 끌어내는 과정을 함축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아마 “합리화 함(rationalizing)”의 뜻을 지닌 최근의 심리학적 용어에 매우 가까울지 모른다.

능력(Faculty)
이런 것을 뜻하는데 사용되었다, 1. 신체적 수단(resource), 2. 가능성, 기회, 3. 타고난 경향(propensity) 또는 능력(ability), 그리고 4. 정신의 품질. 이 마지막 의미에서 보면, 이것은 하느님으로부터 수여됨이다. 이 수여된 것을 올바로 사용함에 의해 당사자는 자기 안에서 주님의 현존하심을 보증받는다.

다써버림(고갈, exinanition)
영이 텅빔, 영적 황무함의 상태. 주님의 경우, 이것은 그분의 인간 부분이 내부의 신성으로부터 분리된 듯 여겨져 있는 겸허의 상태이었다.

담는 어떤 것(용기, containant)
초기 번역자들에 의해 만들어진 단어, 또한 “포용함(continent)”으로도 번역하나 통상적인 수준은 못된다. 이것은 콘테이너, 저장소를 언급하는 것인데, 때로는 마음이 생각들의 “저장소”이다를 서술함에서 심령 연구적 측면에서 사용된다.

더 낮은 땅(Lower earth)
영계에 관한 선각자의 세부적 묘사에서, 더 낮은 땅은 영들의 세계에서는 그 아래쪽 영역이고, 지옥 쪽에서는 그 위쪽 영역이다.

동물 영 (animal spirit)
갈렌(Galen)의 관념에 있는 세 신체 영들 중의 하나. 선각자는 더 순수한 종류의 피를 뜻하기 위해 사용했다. 돌(Dole)의 “신성의 사랑과 지혜” 423쪽에서는 “혼-영”으로 번역하였다.

동물 왕국 (동물 왕국의 경제)
“인간의 혼의 영역의 역학”을 다룬 선각자의 1740년의 저서 Oeconomia Regni Animalis 에 대한 미흡한 번역어 이다.

되풀이하는 결혼들 (Iterated marrages)
반복된 결혼들, 재결혼.

되찾음 (구속, Redemption)
보통의 의미에서 사용되지 않는다, “되사는 것”, 되찾음은 그리스도의 생애 전 과정의 결과로 얻어진 지옥을 복종케 함과 천국의 질서를 다시 세운 것을 뜻한다. 하여 믿는 자에게 가능할 수 있는 개개인의 구원을 만드신 것이다.

리메인스 (Remains)
사랑과 진리에 관한 감명들이 인간에게는 알려지지 않은 신비한 방법에서 주님에 의해 개개인 안에 심어진 사랑과 진리에 관한 깊은 감명들, 이것은 유아로부터 모든 삶을 통하여 각 개인과 더불어 계속 “남아” 있으면서, 재출생을 위한 기초가 되어주고 있다. 이 단어는 “나머지들(remnants)” 또는 “나머지 상태들”으로도 번역하고 있다.

림버스(Limbus, 가장자리, 변방)
“봉투, 덮개(envelope)” 또는 “테두리, 가장자리(border)”로도 번역되었다. 각자의 특질(본성, nature)로부터 끌어내진 가장자리를 뜻하기 위해 사용되었는데, 사후에도 이것은 존속하여 영계에서 (어떤 형체라고 분명하게 묘사할 수는 없지만) 하나의 불변성(fixity), 안정성(stability), 영속성(permanence)을 주고 있다. 이 단어는 쉽게 정의를 내리기가 힘든 복잡한 개념에 있다.

맥시머스 호모 (Maximus Homo)
“웅대한 사람”과 “보편적 인간”을 보라

메디아 (Media)
종종 단수의(유일한, singular), 매개(중간, medium). 이는 사이에서 가는 것들을 뜻한다. 두 실체의 각각으로부터 어떤 것을 도출하는 중간의 것(intermediary), 그리고 개인을 이쪽 편으로 끌어낼 때, 다른 쪽은 종속시키는 효과를 갖게 된다.

모양 (Form)
유기체(organization) 또는 본질이 나타나게 하는 유기적 저장소(organic receptacle)를 철학적 의미로 사용했다. 이것은 외형(shape, 모양)에 관련되지 않고, 질서, 의향, 배열과 실재물의 부분들과 관련된다. 기능 또는 사용과 밀접하게 연합하고 있다.

목적, 원인, 결과 (End, Cause, Effect)
목표(goal) 또는 의도(purpose)의 철학적 의미에서 사용되는데, 목적은 의지력의 사랑 또는 의향(intention)이고, 원인은 의도(purpose)를 성취하려고 이해력을 통하여 있는 수단들이다, 결과는 초래하는 행동, 말함, 감각 또는 생산, 고로 성취됨이다.

묶는 것들(속박됨, bonds)
이는 족쇄를 채우는 식의 뜻에서는 아니고, 어떤 개인이 유독 사랑하는 특별난 것을 뜻한다. 즉 너무나 사랑하기에 그것에 묶인 상태인 듯 되는 것, 하여 사랑된 것의 반대되는 것에 대하여는 금하게 한다(아랑곳하지 않는다). 외적 묶임들은 시민 생활에, 내적 묶임들은 영적 생활에 영향을 준다..

방계적인 선(Collateral good, 부수적인 선, 서자 출신의 선)
자연적 선함과 영적 선함 사이에 놓인 선함, 하여 일부는 자연적 선함, 일부는 영적 선함이 섞인 상태의 선함, 즉 본질적으로는 영적인 것들에 대한 자연적 수준의 사랑, 고로 진짜의 선함은 아니나 진짜의 선함에 관련되고 있다.

별개의 하나 (구분되는 하나, distinctly one)
선각자에게서의 단일성(하나임, oneness)은 단순함이 아니고 목적(의도, purpose)의 통일성(unity)이다. 사랑과 진리는 행동 안에서 분리되어 존재할 수가 없다, 그러나 여전히 그것들의 하나임 안에서 구분될 수 있다, 고로 “별개의” 또는 더 나은 표현으로는 “구분할 수 있게 있는 하나”이다.

부가적인 (adscititious)
때로는 “외래의(adventitious)”로도 번역할 때도 있다, 부가적인(additional), 외적 측면에서 첨가됨

부끄러히 여김 (창피함, 굴욕, Humiliation)
당황함이나, 근대적 의미에서는 그렇게 사용되지 않고, 겸손의 상태를 뜻하기 위하여 사용하고 있다, 이 겸손 안에서 개인은 자기에게 있는 듯 여겨지는 어떤 선 또는 진리가 실제로는 주님의 것이 자기 안에 있는 것임을 인정한다. 이 단어는 주님께서 그분의 영적 텅빔의 상태를 두고 사용하셨다.

부부의 (결혼의, conjugial)
이는 선각자가 철자를 기록함에서 (conjugalis 대신) conjugialis를 더 좋아했다는 점을 반영하기 위해 초기 번역자들이 개발한 단어이다. 이 단어는 결혼에 속하는 것들, 그리고 결혼한 양쪽(부부)가 서로를 위하여 가지는 사랑들에 관련되고 있다. 일반적으로 적극적 자세를 취한다.

불연속 등차들 (discrete degrees)
구분되는 수준들, 이쪽이 저쪽 보다 더 높다, 마치 목적, 원인, 결과의 관계와 같다. 또한 수직적 수준들이라 불리운다, 고도(altitude)의 등차들, 높이의 등차들.

보편적 인간 (Universal Human)
맥시무스 호모에 대한 돌씨의 번역어이다. “웅대한 사람”을 보라.

보편적 교회 (Universal church)
“우주로부터의 교회(the church universal)”, 모든 곳에 존재하는 교회를 말한다, 교회 조직체를 초월한 교회이다. 진실로 전기독교적인 개념, 이 세상의 모든 종교에서 각 종교의 신앙으로부터 있는 신실한 개인들.

사람 (Man, homo, vir)
라틴어는 “사람”을 위해 두 단어들을 가진다: 호모(homo)-개인(person, 남자와 여자 모두), 인류(mamkind), 본질적 개인으로서의 주님; 그리고 버(vir)-남자 인간의 존재.

사정관(assessor, 재산 평가인)
1716년 선각자는 광산 왕립 대학에 “비범한 사정관”으로 위촉되어졌다, 즉 그는 스웨덴 광산국의 협력 멤버로 명명되어졌다. 그는 1724년 사정관 정회원이 되었다. (그때 당시 광산국은 국왕 직속 감시 아래에 있었는데, 그 이유가 왕의 중요한 자금 조달이 금을 비롯한 광산 채굴에 있었기 때문이다 역자주)

사탄 (Satan)
악마를 보라. 악의 욕망들을 지적으로 확증하는 악령. “악한 자”의 이름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항간에서 말해지는 것, 즉 하나의 제 일의 악마 또는 어둠의 제 일 인 자가 있다는 식으로 선각자는 믿지 않는다)

사회 (Society)
연계된 사람들의 그룹, 함께 생활하는 사람의 그룹, 공동체, 다음 세계에서 천사들 또는 영들의 그룹. 또한 스웨덴볼지언들이 자기들의 지역 교회 조직이나 모임을 지칭할때에도 사용했다.

상응 (correspondence)
스웨덴볼기안이즘에 기초되는 개념, 신성과 모든 보다 낮은 생명의 등차들 사이에 있는 원인적인 관계와 기능적인 관계이다, 이것은 신성이 창조의 모든 것 안으로 흘러가는 방식, 또는 법칙이다.

상응물들(correspondences)
응답하고, 걸맞고, 동의하고, 또는 서로에게 유추되는 어떤 것들, 또는 실재물들, 마치 태양의 열과 빛이 하느님의 사랑과 지혜에 상응하는 것과 같다. 고로 열과 사랑, 그리고 빛과 진리는 상응물인 것이다.

새 교회 (New Church) (1)
하느님-인간 관계들의 어떤 새로운 상태를 놓고 일반적으로 사용되었다, 또한 주님만을 인정하고 예배하고, 그분의 말씀을 거룩하게 붙들고, 신성의 진리들을 사랑하고, 그리고 선행으로부터 분리된 신앙을 거절하는 교회 시대를 언급할 때 사용되었다.

새 교회 (New Church) (2)
스웨덴볽의 신학 저서들에서 발견한 교리들에 접착된 어떤 조직화된 종교 그룹을 대중적으로 규정하려고 사용된 명칭이다. 이런 그룹의 개개인들은 새 교회인(a New Churchman)이라 종종 불리운다

새 예루살렘 (New Jerusalem)
성경의 계시록서의 뒷 부분에서 묘사된 상징적 도성이다. 초기 스웨덴볽지언들이 천국의 도성을 수단으로 상징화되고 의미된 교회를 자기들의 교회로서 삼기 위해 이 이름을 채택하였었다.

새 예루살렘의 교회 (Church of the New Jerusalem)
선각자께서 기독교 교리의 본질되는 주석을 이끌어낸 교회들 중에서 가장 일반적으로 사용한 교회의 이름인데, 약식으로 말하면, “새 교회(New Church)” 이다.

선 (Good)
선함 또는 선한 것을 뜻하려고 사용한다, 이것은 신성의 질서에 따라서 생각하고 행동함에 애착함이라고 일반적으로 정의된다. 고로 이것은 쓰임(use)이 포함된 주님과 이웃을 사랑함이 그 품질이다. 인간에 있는 선은 하느님의 신성의 선에 관련이 있다.

선으로부터 진리에 애착함 (Affection of truth from good)
정밀하게 정의를 내린다면 “선행(charity)”이다, 즉 (이웃에) 쓸모있는 행동들을 있게 하는 각 개인들에 있는 선으로부터 만들어내진 진리를 사랑함이다.

선의 진리 (Truth of Good)
이 관용구의 또 다른 대체할 수 있는 어구는 “사랑의 지혜”가 있다. 이는 누군가가 지혜있기를 바램, 또는 지혜 있기를 사랑함을 가지지 않으면 지혜에 도달될 수 없다를 알아채게 한다. 이 사랑으로부터 결과할 수 있는 지혜가 “선의 진리”이다.

선행 (charity)
흔한 대중적인 사용법에서일 경우, 이 단어는 물질적 궁핍을 경감되게 해주는 것(자선 행위)을 뜻한다. 선각자는 이 단어를 영의 측면에서 관심을 갖는 것, 영의 복지를 향상되게 하는 것, 사욕이 없이 주어진 업무에 매진함, 이웃에 선을 행함에서 어떤 보수도 예상되지 않는다해도 심정에서 기쁨을 느끼고 있는 것을 뜻하는데 사용하고 있다.

수정 (변경, Modification)
선각자의 신학 저서 이전의 그의 어떤 저서에서, 본성을 통하여 교통하는 모든 방식을 함축하는 개념으로 사용하였다. 이 생각은 그의 후기 교리 또는 상응물에 관한 개념 안에 통합되고 포함시켜졌다.

순결한 (chaste)
흔히 이해되는 것은 순진한, 순수한, 독신(주의) 따위이다. 선각자는 결혼한 자가 섹스에 대하여 순수하고 깨끗한 자세를 가지는 것을 뜻하는데 사용하였다. 진정한 결혼의 사랑은 “순결함 자체”이다 말하고 있다.

순수 지력 (Pure intellect)
선각자의 신학 저서가 있기 전에서인 이성 심리학(Rational Psychology)이라는 책에서, 그는 순수 지력이란 개인들에게 생각하고 추론하는 힘을 주는 능력이다라고 정의하고 있다, 그리고 이 순수 지력은 하느님으로부터 파생된 직각적인 지혜와 함께 유기체의 모든 과정들을 통치한다.

순진 (Innocence)
라틴어의 뿌리에서는 해가 없음(harmlessness)을 뜻한다. 영적 순진은 자아에 의해 인도되기 보다 주님에 의해 인도되기를 내향적으로 기뻐함이다. 이 특성은 각 개인에 인접되어 있으면서 당사자가 천국으로 인도되는 것을 돕는다.

스톨지 (Storge)
유아를 사랑함을 뜻하는 그맄어로부터 빌려온 단어, 특별히 그들의 부모들에 의해 유아들을 위해 느끼는 사랑. “어버이다운 사랑”, “어버이다운 애정”으로 번역되었다.

시대의 종말 (consummation of the age)
잘못 번역된 킹제임스 성경의 “세상의 끝”을 대체할 수 있는 어구. 이 어구는 시대, 또는 년대의 마감, 또는 끝을 언급한다.

시리즈(Series)
연결된 순서, 생각함의 열차. 선각자의 신학 저서 이전의 시기의 저서에 “시리즈들과 사회” 그리고 “시리즈들과 등차들”의 용어들이 가설로 언급되었는데, 이후 등차에 관한 신학적 개념에 포함시켜졌다.

시험 (Temptation)
나쁜 것을 하도록 부추킴 또는 자극함의 의미에서 사용되지 않는다. 이것은 각 개인의 지배하는 사랑을 공격하여 개인을 심리하고 테스트한다- 당사자의 특성을 밝히 드러내주고, 그 특성이 더 힘세어질 기회를 제공하는 내적 투쟁이다.

신앙의 진리 (Truth of faith)
누군가의 신앙의 부분에 있는 진정한 생각, 그러나 당사자의 삶에서 사용하게 놓여져 있지는 않은 진리이다. 이는 “신앙의 선”에 대조되어 사용된다, 이것은 누군가의 살아있는 신조들로부터 와지는 선함이다.

신성이 되심 (Glorification)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분의 있음의 모든 평면들에 있는 인간적일 뿐인 것을 벗기 위해 그것들을 신성으로 만드시는 과정. 또한 주님의 마음 안에 신성한 의식을 건립하심, 그리하여 그분이 생명 자체가 되셨다를 뜻하는데에도 사용되었다.

신성의 인간 (Divine Human)
새 교회 신학의 중심을 차지하는 생각, 이 용어는 주님의 인간이 신성이 되신 이후의 주 예수 그리스도에 적용된다, 고로 인간의 형체에 있는 신성의 사랑이다-즉 “신위(Deity)”의 모든 충만함이 신체의 형체 안에 살고 있으심”이다. (골. 2:9)

신성의 자연 평면 (Divine Natural)
신성이 되심, 또는 신성으로 만들어진 예수의 마음, 또는 내부의 본성의 자연적 수준, 또는 가장 낮은 수준.

신성이 진행함 (Divine proceeding)
진행함의 행동에 있는 신성, 고로 그분으로부터 방산되는 하느님의 품질들, 성경의 어떤 문맥에서는 성령과 필적되고 있다.

신하 (Subject, 종속하는)
평범한 사용법에 추가하여, 철학적 의미에서는 활동 또는 행위에 기초가 되는 것을 말하는데 사용하였다. 예를 들면, 선행은 “신하”를 가져야만 한다, 즉 선행을 구체화하고, 느끼고, 실시하는 개성.

쓰임 (사용, Use)
쓸모 있는 활동, 목적을 섬기는 기능, 종종 선과 같은 뜻의 선상에 놓이기도 한다. 섬기기를 진짜로 바램이 들어있는 수고함을 정규적으로 함축하고 있다. 고로 “쓰임으로부터의 선, good of use”이 목적이다. 이 목적에 잘 어울리는 알맹이나 동기를 가지고 있는 마음가짐이나 행위.

아니마 (anima, 영혼, 내적 개성, 남성의 여성적 요소)
인간의 혼(soul), 이 단어는 다양한 전통적인 의미선상에 있어 한마디로 통일된 정의는 힘들다. 사후 살게되는 개인의 부분이다. 선각자는 분석 심리학자로 유명한 융(Jung) 보다 훨씬 먼저 이 단어를 사용했지만, 융이 이 단어에 여성의 특성을 할당했으나 선각자의 경우에서는 그런 추가된 의미는 보여지지 않는다.

아니뮤스(animus, 왕성한 정신, 외적 개성, 여성의 남성적 요소)
때로는 “의향(desposition)”으로 번역된다. 이 단어는 (만일 아니마와 대비하여 사용된다면 보다 수준이 낮은 마음,) 일반적으로 마음(mind)에 관련된다. 각자의 기질, 개성.

악 (Evil)
악, 자체만에 주목하면, 선으로부터 절단(severance) 또는 무질서된 선, 하느님으로부터 분리(disunion)와 주님과 천국에 반대함. 고로 개인 안에 있는 악은 그 개인 내부에 있는 지옥이다.

악귀들 (인간의 일생 동안 따라 다닌다는 귀신, Genii)
선각자는 이 용어를 가장 나쁜 종류의 악령들을 지칭하는데 사용하고 있다, 이것은 개인의 의지에 들어붙어 악의에 차서 행동하게 하고, 당사자의 선한 바램들을 악한 의도들 쪽으로 비튼다. 진리를 만들려고 노력하는 자가 이런 악령에게서는 그것이 거짓이고 반대적인 것으로 나타난다.

악마 (devil)
선각자를 위하여서 단어 “악마(devil)”는 지옥들 전체를 뜻한다. 악마는 사후에 있는 악한 개인이다. “사탄”에 대비해볼 때, 사탄은 자신들 안에 있는 악들의 욕망들을 지성적으로 확증한다, 악마들은 그것들을 살아내려 뜻한다.

악의 거짓 (Falsity of evil)
이는 “악으로부터의 거짓(falsity of evil)”라고도 불리운다. 거짓 생각 또는 악한 바램이 원인이 되어 진리가 비뚫어짐.

…안에 (In)
“종사함 안에” 또는 “상태 또는 조건 안에”의 의미에서 자주 사용된다. 선각자의 책에서 우리는 읽는 바, 어떤 개인이 “선 안에”, 또는 “선에 애착함 안에” 있다 등등이라고 읽는다. 이는 그가 선인 것을 사랑함의 상태 안에, 또는 선함의 상태 안에 있다를 뜻한다.

알카넘 (알캐이넘, arcanum)
비밀, 감추인 어떤 것. 이 단어의 복수는 알카나(알캐이너, arcana)이다. “알카나 세레스티아(arcana coelestia), 즉 천국의 비밀들”은 선각자의 가장 방대한 저서 명이다.

양심 (conscience)
선을 악으로부터 구별하는 능력-선천적인 것이 아니고 배워서 획득한 능력인 바 모든 이에게 균일하게 똑같을 수 없다. 선한 자만이 진정한 양심을 가진다. 가짜 양심이 선의로 의도될 수도 있을지 모르나, 신조의 오류들에 부분적으로 기초하고 있다.

양심 장사치들 (conscience mongers)
지나치게 양심적인 인간들, 타인을 혹평하는 인간들.

역사적인 신앙 (Historical faith)
전통에 기초한 “신앙” 또는 타인들의 신조들(믿음들)에 기초한 “신앙”, 고로 진실된 신앙은 아닌 것이 확실하고, 신앙 같이 나타남(껍데기 신앙)일 뿐이다 (“가정의 선”도 참조해보라.)

영계 (영적 세계, Spiritual world)
다음 세계, 또는 사후 개인들의 거처를 일반적으로 아우러서 언급하는 용어이다. 영들의 세계, 즉 사후 들어가는 첫 상태를 위해 선각자가 이름 지은 영들의 세계, 천국과 지옥의 중간에 있는 영들의 세계와 혼동하지 말라.

오류(잘못된 생각, Fallacy)
현혹시키는 나타남. (태양이 “올라온다” 같은 식에서의) 감각들의 오류들이 가장 작은 중대한 것이다. 보다 나쁜 것은 당사자의 보다 수준 낮은 본성으로부터 파생되어진다, 즉 악과 결합된 거짓들이다, 이는 개인의 부분에 신앙의 부족에 기인된다.

외관 (나타남, appearance)
순수한 진리, 또는 신성의 진리를 그 진리가 숙박한 형체들로부터 구별하려고 사용되는 단어이다. 고로, 모든 이는 자기의 유한한 상태에 따라 진리를 볼 때의 그 진리이다. 진리의 이런 나타남을 당사자가 선한 의도로 사용한다면, 이 나타남을 진리로서 주님께서 받아주시기 때문에, 망상(잘못 생각함, illusion)은 아니다.

웅대한 사람 (Grand Man)
라틴어의 맥시무스 호모(maximus homo, 가장 큰 사람, greatest man), 돌(Dole)에 의해서는 “보편적인(우주적인) 인간”으로 번역되었는데, 주님의 “몸”으로서의 천국들 전체, 또는 천국과 땅 위의 교회를 아우르는 주님의 왕국에 관련된다. 때로는 주님 자신을 뜻하는 데에도 사용된다.

유입 (Influx)
흘러듦(inflow), 또는 입력(input) 또는 영향력 (influence)를 뜻한다. 이 단어는 행동하는 모든 힘은 하느님으로부터 창조의 모든 것 안으로 변함없고 중단 없이 흐르고 있다는 근본적인 개념을 묘사하는데 사용된다.

유전적 악 (Hereditary evil)
이 용어는 선각자에 의해 별도의 제한됨도 없이 무조건식으로 사용되는 편이기는 하나, 사실상 그는 전통적 견해는 사절하고, 우리는 실제의 악을 유전적으로 상속하는 것이 아니고 악을 향하려는 경향성들을 상속한다고 주장한다. 우리는 성인들이 되어서는 이것을 확증하거나 채택하거나, 또는 거절하거나 거부할는지 모른다.

유출 (Efflux)
산출(output), 밖으로 흐름. 하느님으로부터 개인들 안으로 흘러든 선과 진리는 되돌아서 이웃을 사랑함의 행동들의 형체로 세상 안으로 흘러나간다. 하느님의 보편적 법은 유입은 언제나 유출에 의거 있게 된다는 것이다.

육체의 (coporeal)
실재를 나타내는데 자주 사용되어 신체적 부분, 또는 신체에 부착된 마음의 부분을 뜻하였다. 신체적, 육체적인 것은 감각과 육체적 쾌락들과 더불어 선취되어 있다.

은근히 주입하다 (Insinuate)
기초되는 라틴어의 의미에서 이 단어는 어떤 것을 노골적 방법이 아닌 미묘하게 받아들여지게 또는 스며들게 하는 것을 뜻한다. 수용자가 주입 과정을 충분히 알아챔이 없이 내면의 위치를 할당하는 것이다.

음란 (간통, scortatory)
성관계가 문란한 것을 묘사한 것이다, 음행, 매춘.

의미함 (Significative)
영적 뜻을 운반하고 가리키는 어떤 것. 특별한 뜻, 뜻있음. 현재는 표현함과 상응함과 구분되어 사용된다.

의지력과 이해력 (Will and understanding)
“의도력과 식별력(intentionality and discernment)”, “자발력과 지력(the voluntary and the intellectual)”. 이것들은 인간의 개성 속의 포괄적인 두 양상들 또는 능력들이다. 의지력은 의지력의 모든 기능들을 포함하고, 신성의 영향력에 반응을 보이고, 수용하는 부분을 섬긴다. 이해력은 식별하는 모든 기능들을 포함하고, 의지력을 가르치고, 그것의 의향들을 집행하는 것을 섬긴다.

이성이 있는 (합리적인, rational)
이 단어는 실명사로 사용하는 경우가 매우 흔해졌다. 천국으로부터의 빛이 세상의 빛 안에 있는 것을 계발하는 정신적 평면이다. 의식되는 마음 중에서 가장 높은 수준이다. 합리적 진리는 자연적인 것들에 관한 영적 진리이다.

이웃 (Neighbor)
내 집 아닌 다음 집에 있는 사람이면 이웃이다가 절대로 아니다. 이런 독특한 생각선상에 있다, 즉 주님으로부터의 선이 이웃인 것이다, 고로 각 개인이 나의 이웃이 되는 척도는 상대방이 주님으로부터의 선을 받아들인 양과 질에서 이다. 고로 가장 비중이 큰 이웃의 순서를 차례로 열거한다면, 주님-교회-나의 나라 등등으로 내려간다.

인식함들(cognitions)
때로는 “지식들”로도 번역된다. 이는 사실들(facts)을 관념들(ideas), 또는 앎의 보다 깊은 수준들 안으로 조직화 함을 뜻하기 위해 사용된다. 엘리엇씨는 그의 새 번역서인 “알카나 세레스티아”에서 “내면의 것들에 관련되는 지식의 항목들”이라 정의하고 있다.

있음 (being, ens)
실재(entity) 또는 구별되는 어떤 것을 뜻하기 위해 사용되는데 선각자는 이 단어를 매우 드물게 사용했다, 또한 순수하게 정신적 건설을 뜻하기 위한 합리성, 이성적 인 것에 대한 어구인 “ens rationis”에서 사용되었다. 이를 있음인 esse, 즉 “혼” 또는 어떤 것의 본질되는 속성과 대비해보라.

있음 (being, esse)
어떤 것에 있는 본질되는 품질, 실체(reality) 자체, 예를 들면, 하느님의 근본적 본질은 신성한 사랑이다.

자기 것이 되게 하다 (appropriate, 사유)
이 단어는 선각자에 의해 형용사로는 한번도 사용되지 않고 동사로만 사용된 특별한 단어인데, 자신에게 고유한 것으로 주장함, 또는 소유하는 것이다.

자기 자신 (Own)
자기 자신은 라틴어 suus 와 proprium 모두를 번역하는데 몇 번역자에 의해 사용되었다. 자아(self), 자아를 위해, 자아로부터 살아감, 이기심이라는 자아를 느낌, 인간의 거듭남에서 자아가 인도함이라는 망상은 필수적이다.

자아 (Proprium)
자기 자신을 보라. 이기심을 느낌이라는 기초적 의미에 추가하여 많은 다른 의미들을 가지는 경우도 있다, 즉 천사적인 자아, 악마적인 자아, 인간 자아, 신성한 자아, 지옥적 자아, 지적 자아, 자발적 자아 등등이다.

자아로서 같이 (as of self)
마치 자기 고유의 힘을 수단으로처럼, 컽으로 보기에 자신 스스로인 듯 하는 것. 선각자의 신학에서 비평적 개념인데, 즉 누군가가 “마치” 자아의 힘에서 인 듯 행동하는 것, 그러나 동시에 모든 힘은 하느님으로부터 온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다.

자연적 인간 (Natural man)
세상적인 것들에 집중적으로 흥미를 가지는 어떤 개인을 뜻한다 할지라도, 그 개인의 전체를 뜻하여서는 일반적으로 사용되지 않는다. 단지 어떤 개개인에게서 가장 수준이 낮은 인간의 마음을 언급할 때 가장 흔히 사용되고 있다.

자연주의자 (Naturalist)
하느님을 믿는 대신 자연을 믿는다는 어떤 개인을 경멸적 의미에서 만 사용되었다, 즉 물질주의자와 비슷하다. 자연주의도 이와 비슷한데, 모든 종교적 개념들의 근원을 자연에 신뢰를 둔 것이라 정의된다.

자유 (Freedom)
애착으로부터 생각하고 뜻하고, 이치에 맞다고 여겨지는 것에 따라서 자유하게 행동하는 것이다. 만일 이것들이 천국적이다면, 자유는 진짜이다; 만일 지옥적이다면, 이것은 외관적일(껍데기적일) 뿐, 실제로는 비 자유함이다. 진정한 자유는 당사자로 자아 강요(self-compulsion)를 사용하는 것을 허용한다.

지배하는 사랑 (Ruling love)
삶을 좌지우지하는 각 개인에 있는 가장 강력한 사랑. 가능할 수 있는 지배하는 사랑은 네 가지로 함축해볼 수 있다: 1. 하느님을 사랑함. 2. 이웃을 사랑함. 3. 자아를 사랑함. 4. 세상을 사랑함이다. 이 중 첫 둘째 만이 거듭나지는 개인을 위하여 받아져야 하는 지배하는 사랑들이다.

지혜 (Wisdom)
많은 지식을 소유함을 언급하는 데에는 거의 사용되지 않는다, 이 용어는 통상 삶에 관한 것만을 서술하는데 사용되고 있다. 지혜는 사랑으로부터 진정한 것을 지각함, 뜻함, 행동함으로 구성된다. 슬기로운 개인은 진리에 기초한 선을 행함을 위한 변동없는
바램을 가지고 있다.

진실한 (True)
절대적 의미에서 진실함은 신성한 사랑의 형체와 수단들이다. 관계적 의미에서, 이것은 개개인의 사랑 속에 있는 지각하고 결과를 있게 하는 기능이다.

진리의 선 (Good of truth)
개개인 안에서 진리를 수단으로 도달되는 상태인데, 이 상태는 사랑의 행동들 안에서 자체를 표현한다, 이를 수단으로 그 진리는 선이 된다. 이것은 영적인 선이라고도 불리운다.

질투 (Jealousy, zelotypia)
선각자는 부부의 사랑의 첫 장에서만 사용하였는데, 귀중한 것을 보호함을 사랑함, 특히 결혼의 사랑을 보호하기를 사랑함을 뜻하기 위해 사용했다. 그는 나쁜 질투가 있다는 것도 인정하고 있으나, 그가 강조하고 싶은 점은 질투의 긍정적 측면에서 이다. 그는 이것을 열정들 중의 열정이라 일컫는다-즉 열정의 진정한 모양새이다.

천사 (angel)
천국에 있는 개인(person). 선각자의 신학에서 모든 천사들은 처음에 자연계에 살았고, 사후 천국에 입장한 사람들이다. 선각자는 천사의 개념을 놓고, 창조로부터의 분리된 계층으로 말하는 것을 거절한다.

천성 (타고난 자질, Genius)
개인의 기질, 특성, 재능, 경향성, 개인과 개인들 집단의 영 또는 품질.

첩 (pellicacy, concubine, mistress)
이 단어는 pellex로부터 인데, 첩을 두고 사는 상태이다

최말단 (Ultimate)
연결 고리의 마지막, 수준이 가장 낮은 것, 가장 외적인 것, 가장 먼 것. “가장 큰 것”을 뜻하기 위해 선각자에 의해 사용되지 않았다.

충격(자극, conatus)
종종 “애씀(endeavor)”으로 번역된다. 일반적으로 행동들 뒤에 놓인 에너지를 두고 사용된다. 특별한 목적들을 쟁취하게 하는 꾸준한 충격을 받는 생활 자세일 수 있다.

타고난 (선천적인, connate)
글자대로 말하면, “출생으로부터 존재하고 있음”이다, 이것은 때로는 유전적 경향성들을 부정하는데 관련되어 사용되고 있다. 또한 자주 비슷한 단어인 생득의(innate, 타고난), 천부의 (inborn), 같은 성질의(congenial)와 더불어 사용된다

탐욕 (cupidity, 강력한 욕망)
(현세에의 욕망을 보라.) 자연적 마음으로부터 일어나는 강력한 욕구, 갈망, 그리워함. 이 단어의 라틴 뿌리는 현세에의 욕망의 뿌리만큼 강한 부정적인 것을 함축하여 운반하지는 것은 아닌 듯 비쳐진다.

태고 교회 (Most ancient church)
선각자는 이 용어를 대문자로 자주 표기했다. 하여 이 이름이 매우 지당하다 싶어서인 듯한 느낌을 우리로 갖게 한다. 이 용어는 신성에 관련하여서 일 경우, 가장 이른 유사 이전(역사 문명 이전)을 언급하는 전문어이다. 이 용어는 창조와 에덴의 동산을 언급하는 창세기서의 사건에 상징적으로 결합되어 있다.

트란스훌럭스 (Transflux)
관통하여 흘러가버림. 주님으로부터의 선이 아무런 효과도 보지 못하고 어떤 개인을 관통하여 흘러가버리는 것을 부정적으로 언급함에 사용되었다. 마치 물이 조리채를 빠져나가는 경우 같다. 이런 개인은 양심 없이 있다라고 말해진다.

평형 (Equilibrium)
(균형을 보라.) 가장 널리 가능할 수 있는 선각자의 번역에서 용어 “평형”이 발견될 것이다. 현재까지에서, 보다 단순하고 충분하게 어울리는 번역문은 돌(Dole)의 번역에서의 “균형”에 번역어의 한계가 그어지고 있는 실정이다.

표현 (Representative)
영적 생각(idea)을 상징하려고 사용되는 자연의 대상물, 개인, 행동, 또는 이 영적 생각 자체. 또한 영계에서 보일 수 있는 형체에서 생각이 표출됨.

합리적인 것 (이성적인 것, Ens rationis)
순수하게 정신적 건축물, 마음 안에서만 존재하는 어떤 것. 어떤 문맥에서는 도깨비불(will-o-the-wisp, ignis fatuus, 환영)에 대충 견주기도 한다. 있음 [ens]를 보라.

허용 (Permission)
이는 신성한 섭리의 한 부분이라 선각자는 규정하고 있다. 허용된 것, 관용(묵인)된 것은 허락된 것, 묵인되어진 어떤 것이나 그렇다고 하느님이 바라는 어떤 것은 아니다. 바람직하지 않은 어떤 행동들을 묵인하는 것은 인간의 자유를 침해하지는 않는다.

현세에의 욕망(concupiscence, 강한 욕망)
몇몇 번역자들에 의해 존속되어 온 라틴어풍의 단어이다. 동사 형체는 어떤 것을 강하게 바램(desire), 또는 갈망함(lust)을 뜻한다. 명사는 강한 욕구를 뜻하는데, 통상적으로는 악, 또는 (섹스 쪽이거나 아니거나 할는지 모르는) 욕망이다. 때로는 탐욕(cupidity)이라는 단어와 분간할 수 없는 경우도 많다.

황폐됨 (Vastation)
황무한 상태, 극점(종말), 다빠져나가 텅빔. 영들의 세계에서 벌어지는 과정, 즉 외적인 악들과 거짓들이 선한 자로부터 제거됨, 그리고 위선적으로 있는 선들과 단지 지식들인 것이 악한 자로부터 제거됨, 하여 어정쩡하게 선과 악이 뒤섞여 있던 세상에서의 인간의 상태가 선과 악이 선명한 상태로 확실히 구분되는 과정에서 사용되는 단어이다.

회개 (Repentance)
재출생에서의 첫 단계, 여기에는 하느님에게 죄들을 고백함, 자기가 용서되기를 간구함이 포함되고, 진정한 선행과 신앙의 교훈들에 따라 새로운 생활을 이끌려는 진실한 노력이 뒤따르는 것이다.

(외부쪽에) 흘러듦 (afflux)
…쪽으로 흐름, 또는 …쪽을 향하여 흐름. 이 방식을 수단으로 주님께서는 악을, 악한 자를 통제하신다. 선과 진리는 악한 자 쪽으로(to) 흐를 수는 있으나, 그렇다고 악이나 악한 자 안쪽으로(into)는 흐르지 않는다. 고로 악이나 악한 자를 통치하는 것은 내부(within)로부터가 아닌 외부(without)로부터 이다. 이 단어는 (내부쪽에) 유입됨(influx, 흘러듦)과 날카롭게 대비되어 선각자의 책에서는 사용되나 한국어에서는 같은 말로 번역되고 있어 가로에 영어를 추가로 기입해서 (역자는) 구별해보고 있다.

선각자에게만 유일한 기본적 생각들(concepts)

1. 하느님에 관하여 선각자에게 밝혀진 기본적 생각들

신성한 생명은 하나이고, (사실) 생명은 이 생명밖에 없다. 주님 만이 생명 자체이시다, 그 이유는 그분이 생명 자체이시기 때문이다. 땅 위 인간과 영계에 있는 인간은 이 생명의 그릇들일 뿐이다.

(참고: 선각자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뜻하기 위해 단어 “주님”을 시종일관하게 사용한다. 또한 이 글 내지 역자의 번역서에서 사용되는 단어 중 개인(個人, 때로는 인물, 人物, person)이 있는데, 그러나 역자가 이 단어를 영한 사전에서 같이 사람 등의 알기 쉬운 단어로 번역하지 않고 조금은 껄끄러운 개인으로 표기하는 이유는 지상에 태어나 아무개라는 이름으로 살았던 물질인 인간, 즉 개인(예를 들면, 예수)을 뾰족이 암시하고 싶어서 이다.)

하느님의 본질에는 두 구성 요소가 있는데, 그것은 사랑과 지혜이다. 하느님의 사랑을 구성하는 세 고유 특성이 있는데, 그것은 그 자체의 바깥쪽 다른 이들을 사랑하는 것, 다른 이들과 하나이기를 바라는 것, 그리고 다른 이들을 자체로부터 복되게 하여주는 것이다.

신성의 사랑과 지혜를 본질 자체 측면에서 일 경우, 우리는 생각조차 할 수 없다. 그 이유는 그것은 무한이어서 우리의 사고력을 초월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랑과 지혜가 상응적(correspondential) 외관에서 일 경우, 우리는 생각해볼 수 있다. 천사의 눈에서, 주님은 태양으로서 나타난다, 이로부터 영적인 열과 빛이 나아가는 바, 유추해봄(analogy)을 수단으로 천사들은 자기들이 유지 지탱할 수 있는 이유는 이 영적 빛과 열, 즉 하느님으로부터 꾸준히 방산되는 신성의 사랑과 지혜에 의해서 이다를 생각하고 알 수 있다.

상응을 수단으로, 이 유추해봄은 땅 위 개인들도 사용할 수 있다. 즉, 자연이 물질적 태양의 열과 빛을 수단으로 매 순간을 유지 지탱하듯, 인간인 나는 주님의 신성한 사랑과 지혜를 수단으로 영적으로 유지 지탱되고 있다는 것을 생각해보고 알 수 있다.

주님(the Lord)은 보편적(우주적) 인간(universal human)이시다. 주 예수 그리스도, 이 분만이 충분하게(fully, 결여됨이 없는) 인간이시다. 이 분으로부터 천사들, 영들, 그리고 지상의 거주민들은 집합적으로 “사람들(men)”이라 불리운다. 이 분이 천국 안으로 유입되심으로 전체 천국은 하나의 인간을 표현하고 닮아 있게 하고 있다. 유추를 수단으로, 땅 위 개인들의 (인간) 본성 안에 있는 천국의 것 만이 진실로 인간(human)이다

새로운 기독 세계의 하느님은 하나의 보일 수 있는 하느님이 계시고, 이 분 안에 보일 수 없는 하느님이 계시는데, 마치 혼이 그의 신체 안에 있는 것과 같다. 만일 누군가가 그렇지 않다라고 판단했다면, 그는 이 하느님과 결합되어질 수 없을 것이다, 그 이유는 하느님과 개인들의 사이에 있는 모든 결합은 상호적(reciprocal) 임이 틀림이 없기 때문이다. 이런 상호성은 보일 수 있는 하느님이 아니면 불가능하다.
위와 비슷하게, 모든 천국들 안에서, 하느님에 관하여 이런 생각밖에 없다: 즉, 그분은 개인이시다는 것, 그리고 이 개인이 주님이시다는 것이다. 골로새서에서 바울의 통찰력이 선각자의 견해가 진실임을 이렇게 증명하고 있다: 즉, 일어나시고 신성이 되신(risen and glorified) 예수 그리스도 안에, 하느님(Godhead)의 모든 충만함이 육체적으로 거주하시고 있다. 땅 위와 천국 안에 있는 사람(people)은 이를 알 수 있다.
하느님 안에 있는 삼위일체(trinity, 三位一體)에 관하여서 성경의 구절들은 상징적 언어에서 말하고 있다. 신성의 삼위일체는 주님의 한 개인 안에 있다, 이 셋을 구별해 알 수 있는 것은 혼, 신체, 그리고 이 둘의 결과인 활동(activity, 행동)으로 이해할 경우에서 이다. 유추를 수단으로 각각의 개인 안에도 삼위일체가 있다. 셋을 한꺼번에 취합하면 하나의 개인을 구성한다: 즉 혼, 신체, 그리고 혼이 신체를 이용한 결과인 행동이다. 그러나 이것은 유한한 삼위일체이다, 그 이유는 인간은 그릇들, 또는 생명의 “기관들(organs, 유기체들)”이기 때문이다. 주님 안에서의 삼위일체는 무한이고, 고로 신성인 이유는 주님은 그분의 인간(human)조차도 생명 자체이시기 때문이다.
아버지이든, 아들이든, 그리고 성령이든, 이 단어의 언급이 있는 말씀 안의 어디에서 이든, 이는 하느님의 속성을 구별해 말해보는 양상일 뿐이다. 다시 말해 하느님의 통일성(unity, 여럿이 아닌 하나) 안에 삼위가 있는 바, 아버지, 또는 성령(님) 같은 식으로 분리적으로는 존재하지 않고, 주님 만으로 존재한다는 말이다. (우리는 하느님을 주님으로만 부르는 것이 합당할지 모른다 역자주) “아버지”, 또는 하느님의 “혼(soul)”과 “영(Spirit)”, 또는 하느님의 활동은 주님 만으로부터 존재하고 출현(coming forth, 존재 안으로 옴)된다. 그러므로 하느님, 그리스도, 또는 성령으로 분리된 존재들로 말하는 듯 여겨지는 성경의 사건들이다 해도 상징적, 유추적으로 이해되어져야 한다. 고로 통찰력은 분리된 둘, 또는 셋의 신성의 존재들로서가 아닌 유일한 하나의 하느님의 속성과 활동의 어떤 양상(면모, aspect)들 쪽으로 있어야 할 것이다.

신성의 사랑은 모든 창조의 근원이고 지탱자이다. 영적인 존재들은 사랑 외에 다른 근원으로부터 존재 안으로 와질 수가 없다; 그리고 창조하는 사랑은 사랑 자체 이신 주님으로부터만 존재 안으로 와질 수가 있다 (세상 밖으로 나타나짐).

모든 창조의 보편적 목적(purpose, 의도)는 창조자가 창조된 우주와 영원히 합류하는(join) 것이다. 이 합류는 이 창조 안에 신성의 본성이 “거주”할 수 있는 존재들이 있어야 가능해진다. 다시 말해 신성에 걸맞는 성질이 각 개인들 안에 있어야 합류가 가능하다는 말이다. 고로 모든 것은 각 개인들의 사용을 위해서 창조되어왔었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모든 창조된 것들의 사용은 가장 바깥 부분들로부터 개인들 쪽으로 등차적으로 올라간다, 그리고 개인들을 통하여 하느님 쪽으로 올라간다. 이것은 “생명의 순환”이라고도 불리운다.
창조의 특별한 목적은 하느님의 사랑을 받고 되돌림을 영원히 계속함으로, 인류로부터 천사들의 천국을 영원히 부풀려감일는지 모른다.

하나의 끈덕진 신학적 관념에 반대하여 있는 것은 이것이다, 즉 하느님은 무로부터 우주를 창조하지 않았다. 무로부터 만들어진 어떤 것도 있을 수가 없다. 모든 것들은 실체(substance, 물질) 자체인 실체로부터 창조되어져 왔다. 이 실체는 신성의 사랑이다. 이 근원으로부터 만 모든 것들은 만들어내지고 지탱되어진다.

하느님은 물질의 우주를 창조하셨는데, 이는 영적 실재(reality)들에 “옷을 주는(clothing)” 것, 그리고 개인들이 원하면, 그들 고유의 자유의지로부터 영적이고 잠재적인 천사의 존재들이 되는 평면(plane)을 제공하기 위하여서 이다.

자연 평면에서 더 이상 진짜 인간 다움(humanity)이 있지 않게 되었을 때, 그리고 인류가 바야흐로 파멸에 직면하려고 했을 때, 즉, 천국으로부터 생명과 빛을 받는 역량을 거의 잃었을 때, 하느님은 그분의 무한성을 유한성으로 만드셨다, 즉 예수 그리스도 라는 개인 안에서 세상 안으로 오셨다. 이때 쾌히 받아들심으로부터 주님이 “입으신” 인간 다움은 인류를 괴롭히는 허약함과 동일한 것을 지닌 지극히 평범한 인간의 어머니 마리아로부터의 것이었다. 그러나 (예수의) 내부에 잠재적인 신성의 거주하심에서 끌어냄을 수단으로 예수는 지상 평면에서 개인들에게 영향을 주는 천국과 지옥의 세력 사이에 있는 균형을 언제나 회복되게 하시면서, 점진적으로, 질서있게(순서적으로), 그리고 완전하게 지옥들의 힘들에 정면으로 맞서 이겨내셨다. 주님의 삶의 모든 과정은 되찾음을 구성하는 것, (즉) 개개인의 구원이 지금 그리고 언제나 가능하게 만드심이다.

2. 영적 세계에 관하여 선각자에게 밝히 알린 기본 생각들

진짜이고 영원한 영적 세계가 있다. 그 세계는 셋으로 구분되는데, 천국, 지옥 그리고 영들이 있는 중간 세계이다.

죽음은 삶에 있는 질서적, 필수적 단계이다. 인간의 신체가 그것의 생각들과 애착들에 상응하는 자연계에 있는 기능들을 더 이상 수행할 수 없을 때, 그 개인은 “죽는다”라고 말해진다, 그러나 개인은 죽지 않는다, 단지 지상 평면에서 사용을 위해 주어진 육체라는 부분들로부터 분리되어질 뿐이다, 개인은 살기를 계속하는데, 그 이유는 개인이 개인인 이유는 신체 때문이 아니라 영 때문, 즉 개인 안에 있는 생각하는 혼, 또는 영이 당사자 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애착과 더불은 생각이 그 개인을 구성한다. 고로 죽음은 이 세계로부터 저 세계로 건너가는 (다리 역할을 하는) 것일 뿐이다.

(자연계) 생명의 모두가 중단되자 마자, 개인은 영들의 세계에서 즉각적으로 소생되어진다. 이것은 가장 높은 천사들의 조력을 받아 주님에 의해 행해진다. 그 다음, 개인은 자기 검증과 자기 인식의 과정을 통하여 안내되어진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 또는 그녀 자신의 결단력이 영원한 집을 천국이든 지옥이든 선택할 수 있다. 어느 누구도 천국으로 입장이 주어지는 수단으로서의 “보상”이라는 것은 없다, 누구도 지옥으로 정죄됨을 수단으로 “처벌”되지 않는다. 천국과 지옥 안에서 모든 이는 자기 자신의 선택을 수단으로 각자의 영역에 있다.

죽음 후에 모두 각각의 개인에게는 자신의 생각들과 애착들을 수정할 충분한 수단들이 수여된다. 모두는 천사들을 수단으로 주님에 의해 가르쳐지고 인도되어진다; 그리고 모두는 자기들이 생명을 따라서 생명을 살아감이다는 것, 그리고 천국과 지옥이 있다는 것을 의식할 때, 그들은 첫째로 모든 진리들을 받아들임에 있다. 그러나 지상에서 (하느님을) 인정하지 않았고, 하느님에 맞서 악들을 죄들로서 금하는 노력을 만들지 않았던 이들은 이내 진리들을 듣는 것에 진저리를 내고 그것은 선택의 문제라고 여기고 물러나버린다. 짧게 말해, 섭리는 모두가 구원되는 쪽으로, 즉 천국을 선택함이 가능해지도록 그것을(진리의 선택을 하도록) 만들고 있다. 그리고 그렇게 선택하지 않은 개인은 홀로 책임질 수 있게 만들어져 있다.

용어 “영”은 영들의 세계라 불리우는 사후 첫 상태에서 일시적으로 있는 자를 뜻하기 위해 사용할 뿐이다. 용어 “천사”는 교육받고 자기 수정을 끝내서 천국에서 자기 자리를 찾아갈 수 있게 된 이들을 뜻한다. 지옥에 자신의 장소를 발견하는 이들은 사탄들 또는 악마들이라 불리워진다.

개인로부터의(각자의) 영이 영들의 세계 안으로 진입하였을 때, 그녀 또는 그의 얼굴과 음성의 음질은 그들이 세상에서 가졌었던 것들에 대단히 비슷하다. 그러나 그 후 얼굴과 여타 얼굴의 생김새들과 행동들은 점차적으로 각자의 애착(affection)들과 당사자를 지배했던 사랑(ruling love)에 일치하도록 바뀌고 있다. (지상에서는 가면을 씀이 가능하나 여기서는 가면이 허용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과거 신체 안에서 영의 생명의 외면의 것들의 사용함이 끝나서, 이 외면의 것들이 곁에 놓여진 지금, 바깥쪽으로의 나타남과 이전의 애착들은 바뀐다, 하여 바뀐 그의 상태란 그가 보여지는 것과 행동하는 것은 그의 내면의 존재와 완전 일치되고 있는 상태의 것이다.

천국의 생활을 세부적인 것까지 말하고저 이 책의 페이지를 할당하기에는 너무나 많은 바, 여기서는 윤곽만을 그리고 지나간다; 우선 그 곳의 삶이 진짜 삶이다는 것, 진짜 당신의 가족들이 거주한다는 것, 직업들(각자 할 일들)이 매우 다양하다는 것, 기쁨만을 언제나 선사하는 공동체와 모임들이 있다는 것이다. (특별한 것은), 거기에 많은 어린 아이들이 있다는 것, 그 이유는 유아기나 어린 아이 시절에 죽은 모두는 천국 안으로 직접 오고 거기서 성장하기 때문이다.

지옥은 기본적으로 천국에 반대되는 것들, 거기를 선택한 이들의 특성이 악인지라 그들의 파괴적 힘에 의해 (모두는) 총체적으로 (언제나) 찡그려져 있다. 거기에는 (주님께서 악한 자를 징벌하려 만든) 불, 유황(불), 또는 기분내키는대로의 임의적 처벌 등등이 없다; 악은 그것 고유의 사용료(toll)를 부담할 뿐이다; 지옥은 객관적으로 불행의 상태이다. 그러나 지옥에 있는 이들은 자신들을 위해 최고의 선택이었음을 자랑하고 있다.

3. 우리에게 있는 하느님의 말씀에 관하여 선각자에게 밝히 알린 기 본 생각들

하느님이 언제나 설비해두시는 것은, 어느 시대를 무론하여 그 시대의 인간다움에 걸맞을 수 있는 신성한 진리의 밝힌(계시) 것을 관리하는 책무에 봉사하는 교회를 인류와 더불어 있게 하신 것이다. 우리가 아는 이 계시는 말씀(Word)이고, 이 말씀은 성경에서 발견되었다. 이 말씀을 수단으로 인류는 천국들과 계속적으로 연결된다. 그러므로 이 말씀에 있는 모두 각각의 표현들 안에 천국의 것들과 연관되는 내적 의미가 있다. 말씀이 내적 의미를 지닌 특성 때문에 말씀은 천국의 마음들과 인간의 마음들을 결합하게 한다.

많은(아마 대부분의) 기독인들이 이의 없이 이구동성 말하는 것은, 말씀은 신성의 호흡이 담겨 있다는(영감되어 있다, inspired) 것, 그러므로 거룩하다 이다. 그렇지만 선각자를 통한 이 계시 앞의 (시대에서) 경우, 말씀 안에서 어디에 말씀의 거룩함 또는 신성이 존재하는지를 알지 못했다. 그 이유가 말씀을 여느 책을 읽듯 평범히 읽는다면 (즉 글자 그대로의 의미에서의 경우라면), 여느 촌뜨기 작가의 저술 같고, 때로는 문체상 (문법도 모르고 씌어진 듯하여) 엇박자인 냥 보이고, 심지어는 현 시대의 저술 보다 수준이 미천한 듯까지 깍아서 평가할 수도 있는 책인 듯 비쳐지게 나타나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하느님을 예배하기를 선택하지 않든지, 또는 하느님 보다 세상의 것들을 존경하는 쪽을 선택하든지 하는 이들은 말씀에 관련해 거룩한 어떤 것이 있을 수 있다는 것마저 부정하는 오류 안으로 쉽사리 추락할는지 모른다. 짧게 말해, 이렇든 저렇든 각자는 말씀을 신성이 거주하는 책임을 수긍하던지 부정하던지는 그의 선택(의 잣대) 안에 있다는 말이다.

어쨌든, (순위에서) 자연 앞에 하느님을 두는 이들, 그리고 진짜로(순수하게) 진리를 찾는 이들은 글자에 있는 많은 서술문들이 주님의 말씀으로서 확인하여 그 글자들을 꾸준히 받아들이고 있다. 사실상 이들의 마음들은 계시(밝히 앎)의 필요와 실재 쪽으로 통찰력이 열려져 있다. 그 이유가 계시 없이 지식은 없고, 결과적으로 하느님을 인정함도 없기 때문이다. 사실상 주어져왔었던 계시를 통하여서만 사람들은 하느님에게 접근할 수 있어, 그분으로부터의 유입을 받고, 자연적 존재로부터 영적 존재로 되어질 수가 있었다.

말씀의 책들은 계속적이고 연결된 내적 의미를 가지는 모든 책들이다. 구약 성서 부분에 있는 이 말씀의 책들은 모세의 다섯 책들, 여호수아, 사사, 사무엘상하, 열왕기상하, 시편, 이사야, 예레미야, 애가, 에스겔, 다니엘, 호세아, 요엘, 아모스, 오바디야, 요나, 미가, 나훔, 하박국, 스바냐, 학개, 스가랴, 말라기; 그리고 신약 성서 부분에서는 마태, 마가, 누가, 요한, 계시록이다.

복음서들은 주님 자신의 말들을 포함한다, 이 말들 안에는 영적 의미들이 숨겨져 있고, 이 영적 의미들을 통하여 천국과의 교통이 가능하다. 사도들의 저술들(서간문)은 교회를 위해 유용하나, 내적 의미를 포함하고 있지는 않다.

말씀의 가장 바깥쪽, 또는 글자적 의미로부터의 모든 세부사항들은 감각 기관(sensory)에 의존하고 싶어하는 이들의 납득력에 적합해 있다, 고로 어린이들과 단순한 이들에게 (특별히) 안성마춤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글자 그대로의 의미의 대부분은 진리의 외관 (측면)들이다, 따라서 그것들이 계발된 이해력으로부터 지각되지 않으면, 그것들이 실제적으로 진리이다고 믿어져버림에 의해 거짓화 되어갈 수 있다. (단순한 자나 어린이들이 아닌 이들, 특히 지식인이라 자부하는 이들이다면) (마음만 먹으면) 거짓화 할 수 있는 위험성이 글자로 있는 많은 서술문의 도처에 산재해 있다. 예를 들면, 하느님은 성내신다, 그분은 시험하신다, 그분이 지옥으로 내던지신다 등등이다; 또한 마지막 심판에서 주님은 글자에 박힌 그대로 구름을 타고 땅 쪽으로 내려오신다… 태양과 달이 빛을 주지 않을 것… 별들은 추락할 것이다 등등도 있다. 이런 서술들은 자연계의 재난을 예보함들이 아니고, 어느 누구 안에서 거행될 수 있는 내적 바뀜들에 대한 상징들임을 알아볼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영적 투시 화법(perpective, 상관 관계, 견지, 시각, 원근법) 뿐이다.

글자 그대로의 의미가 이런저런 방법들에서 잘못 이해되어질 수 있기 때문에, 이 의미는 어떤 상해받음도 허용 않을는지 모르는 글자 안쪽에 숨겨 놓인 진짜 진리들 쪽으로 안내하는 역할로 봉사하고 있다. 이 개인은 이런 식으로 해서, 저 개인은 저런 식으로 해서 글자의 의미를 이해할 때라 해도 영속되는 피해는 있지 않다; 그러나 피해가 가해지는 때이다면, 신성한 진리에 반대하는 거짓들을 첨가할 때이다. 이 짓은 거짓들 안에 있는 자신이 정당하다 하여 그것을 입증하고자 말씀의 서술들을 선택하는 이들에 의하여 자행된다.

말씀 안에 있는 모두 각각의 개인, 장소, 어떤 것, 어떤 사건 등등은 어떤 영적 실재(reality)를 상징하고, 이 실체(reality)와 상응하고 있다. 이런저런 상응을 통한 의미들이 말씀의 영적 의미를 구성한다. 따라서 영적 의미는 글자 안에 나타나 있지 않다. 그것은 글자 그대로의 의미 내부에 있다. 마치 혼이 신체 안에 있는 경우, 지성의 생각이 눈 안에 있는 경우, 사랑의 애착이 얼굴 안에 있는 경우 같다. 말씀을 영적으로 만들어주는 것이 영적 의미이다. 영적 의미야 말로 진실로 주님의 말씀이다.
어쨌든, 글자 그대로의 의미 안에서 말씀은 그것의 충만함으로, 그것의 거룩함에서, 그리고 그것의 힘을 지니고 있다. 그 이유가 글자 그대로의 말씀은 안쪽에 있는 영적 의미들의 거처이자. 그릇들이고, 받침기둥이기 때문이다.

말씀 안에 있는 표현들은 그것들의 시리즈 안에 영적인 생각들을 포함하도록 씌어 있다. 이 영적 생각들은 글자를 읽는 자가 상응 지식에 친숙해 있지 않으면 그 사람에게 나타나지 않는 생각들이다. 이 방법에서 신성은 말씀 안에 감추여 놓여 있다.
상응들이 모든 힘을 가진다, 하여 상응에 따라서 땅 위에서 행하여진 것은 천국 안에서 직접적인 결과를 가진다, 그 이유는 상응은 신성으로부터 있기 때문이다. 사랑의 선과 신앙의 선 안에서 살아가는 이들은 “상응 안에” 있다 라고 말해진다, 그리고 신성은 이 당사자를 통하여, 그리고 당사자 안에서 행동하실 수 있다.

주님의 말씀은 목마른 개인, 생명을 바라는 개인에게 생명을 주고 있다. 이것은 요한의 복음서에서 가르치고 있다. 말씀은 살아 있다, 그래서 생명을 준다, 그 이유는 최고 의미에서 말씀은 주님과 그분의 왕국을 다루기 때문이다. 말씀에 있는 생명은 말씀을 읽는 당사자가 거룩함의 느낌을 갖게 하면서 당사자의 마음 안으로 흘러든다. 이렇기 때문에, 주님은 그분으로 있는 말씀 측면에서, 자신이 영원한 생명 안으로 솟아오르는 물의 원천이다고 선포하신다.

4. 우리 자신과 우리가 의도했던 운명에 관하여 선각자에게 밝히 알 린 기본적 생각

사랑과 지혜, 그러므로 의도력과 분별력이 각자의 생명 자체를 구성한다. 생명이 무엇인지를 아는 자는 드문 편이다. 사람들이 그것에 관하여 생각할 때, 그것은 파악하기 어려운 것, 그것은 개념화에 도전하는 어떤 것인 듯하게 여긴다. 이렇게 응답하는 이유는 하느님 만이 생명이시다는 것, 그리고 그분의 생명은 신성한 사랑과 신성한 지혜이다를 실감 못 하기 때문이다. 이쯤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우리들 자신의 생명은 하느님의 생명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 그 이유는 우리가 그분으로부터 생명을 받는 만큼에서 우리가 생명을 가지기 때문이다. 사랑이 누군가로부터 쇠하여질 때 그는 나태해진다, 지혜가 쇠하여져 갈 때, 그는 무디어져 있다. 만일 이 두 가지가 동시에 쇠하여지면, 그는 말살되고 있다.

신성의 사랑은 이 사랑이 사랑하는 다른 존재들 안에서 이 사랑을 사랑한 당사자를 수단으로 현재의 것이 존재하고 있음과 되어감을 도울 수는 없다. 어쨌든 만일 이런저런 인간의 존재들이 자신들 안에 무한의 어떤 것, 또는 본질적 사랑으로부터의 실체와 생명의 어떤 것, 또는 신성으로부터의 어떤 것을 가졌다면 위의 말함이 발생할 수 없었다. 만일 우리들 안에 무한하고 신성으로부터의 어떤 것이 실제로 있었다면, 하느님은 타인들에 의해 사랑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타인들)는 자신들만을 사랑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 이유가 무한 또는 신성은 특이하고 나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이유 때문에 서로의 사랑은 본질적 사랑으로부터의 어떤 것도 있지 않은 타인들과 더불어서만 발생할 수 있을 뿐이다.

인간의 존재, 본질적으로와 자아 측면 만에 집중한다면, 짐승으로부터 별반 다를 것이 없다. 즉, 오각도 매우 비슷하다, 식욕도, 자연적 수준의 바램들도, 뿐만 아니라 애착들도 피장파장일지 모른다. 개인의 최선의 사랑들조차 매우 비슷하다, 즉 동료를 사랑함, 자식을 사랑함, 결혼한 짝을 사랑함 등등에서 이다. 어쨌든 인간은 내면의 생명을 가지고 있음 덕분에 짐승 보다 상위에 있는다. 이 생명은 주님으로부터 파생된 사랑의 생명과 신앙의 생명이다. 만일 이것이 출석되지 않고 있다면, 그 개인은 결코 인간일 리가 없을 것이다. 더욱이 주님으로부터 이 생명을 통하여 그 개인은 사후 살고 있다.

모든 사람들은 각자의 마음에 속해 있는 내면들의 것에 관련되는 물질의 신체로 이 세계 안에서 옷을 입고 있는 영이다. 신체는 영의 생각함들의 방향과 영의 애착함들의 조절 아래 있다.

인간 종족, 위에서 명기한 대로, 천국이 설립되는 기초이다. 이런 이유로 인간의 창조는 마지막 번째에서 이었다, 그 이유가 마지막 번째가 앞서 창조한 것을 아우르는 기초이기 때문이다. 모든 창조가 하느님으로부터 오기에, 개인들은 신성의 질서의 형체들로 창조되어졌다.

사람들은 자연계와 영계가 외면적으로 결합(join)하게 하는 수단이다. 사실상, 개인이 영적 존재로 되는 정도에서, 그는 두 세계가 외면적, 내면적 결합(conjunction)을 위한 매체가 되어져 있는다.

인간의 혼(soul)은 당사자의 가장 깊고 가장 순도 높은 본질이다. 그러나 본질은 형체를 가져야만 한다, 그리고 혼은 사랑의 모든 것들의 형체로부터 애착(affection)들이라 불리우고, 지혜로부터의 모든 것들의 형체로부터 지각(perception)들이라 불리운다.

개인은 어떤 지식 안으로 태어나지 않는다, 총명 또는 지혜 안으로 태어나지는 것은 더더욱 아니고, 오직 그런 것들을 받는 수용력, 그리고 그것들을 빨아들이는 능력만을 지니고 태어난다. 이것은 두 겹의 방법에서 결과되어진다: 신성이 흘러드는 내적인 방법에 의해서; 세상이 흘러드는 외적인 방법에서 이다. 이것들이 개인 내부에서 만난다, 그리고 그때 개인이 신성에 의해 계발되기를 선택하는 정도에서 개인은 지혜의 상태 안으로 점진적으로 들어간다.

모두 각각의 개인은 자기를 성화(聖化, sanctification)함에서 자아가 인도할 수 있다 라는 환영(幻影, 착각, 잘못 생각함), 자아(selfhood, 이기심)로부터의 느낌, 감각을 가진다. 선각자는 이기심으로부터의 이런 저런 느낌을 “자아(proprium)”라는 단어로 언급하고 있다; 사실 개인을 두고 성화함이라는 단어 보다는 “거듭남”이 더 어울릴 것이다.

신성의 섭리인 것은, 개인은 이성에 일치하여 자유함으로부터 행동하는 것; 또한 개인이 생각하고, 뜻하고, 행동하는 것의 모두는 온전히 자아로부터 있게 나타나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나타남이 없다면, 어떤 것이 그의 것, 또는 자기 자신의 것임을 아무도 느낄 수 없을 것이고, 따라서 개인은 자신 고유의 개인일 수도 없게 되고 만다. 자아로부터의 이런저런 감각 없이 개인에게 귀속되는 것은 어떤 것도 있어질리 만무하고, 고로 개인은 선이든, 악이든 무엇을 행하든지 무관심, 또는 하느님을 믿든, 지옥의 꼬드김을 따라가든 무관심으로 일관되어지고 만다. 줄여 말해, 개인은 개인 당사자될 리 없고, 진실로 인간일 수도 없다는 말이다.

개혁되고 영적으로 되어가는 모든 이의 처음 상태는 그들이 주님에 의해 개혁됨을 믿지 않는 것, 그 대신 자신들에 의해 개혁됨을 믿는 것이다; 즉 선에 대한 모든 뜻함과 진리에 대한 모든 생각함이 자신으로부터 근원되었다고 믿는 것이다. 이 보다 한 술 더 떠진 것은, 주님께서 그들이 이런 상태 안에 있게 배려하시고 있으시다는 점이다. 그 이유는 만일 그가 자신 스스로 하고 있다 하지 않으면, 그는 개혁되어 질 수가 없기 때문이다. 실로, 만일 그들이 거듭남 이전에 너희들 스스로 선을 행할 수 없고, 진정한 어떤 것도 생각할 수 없다고 (주님으로부터) 말해졌었다면, 자기들은 의지와 생각 안으로의 유입을 기다려야 한다고 상상하는 실수로 붕괴되든지, 또는 만일 선과 진리가 자신들 안에서 근원되지 않는다면, 자신들은 기계 같은 처지이다고 상상하는 실수로 어떤 시도도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선과 진리가 자신들로부터 근원된다고 생각하는 것이 첫째로 허용되어야 한다.

그러나 거듭남의 과정이 한참 진행되면서 점차로 조금씩 가르쳐짐이 있어지는 것은, 예전의 자기 느낌과 생각함과 다른 것이 있다는 것, 즉 선하고 진정한 모든 것은 주님으로서만 100% 존재한다는 것이 당사자에게 슬금슬금 비쳐온다. 그리고 거듭남의 과정이 더 한참, 즉 완전함에 거의 접근하다시피 할 때, 당사자에게 주입되는 가르침은, 주님으로부터 있지 않는 것은 악이고 거짓이다는 것이다. 거듭나지고 있는 이들이라면, 그들의 이 세상의 삶 동안 가르쳐짐을 많이 깨닫지 못한 채 기한이 다 찰 경우, 다음 삶에서 이를 깨닫고, 그것을 지각함으로 보도록 인도 받는다.

인간의 자유 의지는 거듭남에 필수적이다. 개인이 모든 애착들과 모든 생각함들에 관련하여 내면적으로 자유함 안에 있지 않으면, 개인은 선과 진리가 뿌리내릴 수 있는 질서 안에 결코 놓여질 수 없다. 이 자유함은 양쪽에 놓여지는 무게가 평형을 이루는 천칭(저울)에 유추되는 방식에서 주님에 의해 유지되어진다. 비슷한 방식에서 주님은 모두 각각의 개인에 대한 선과 악의 영향력이 균형을 맞추고 있게 유지하신다. 그러나 개인은 이에 대해 의식하지 못 한다, 하느님의 선물 중의 하나인 것은, 개인은 자신의 생명을 두고 그것은 자신 고유의 것이다라고 느껴야 한다는 것, 우리가 그것을 그렇게 느끼는 것이 하느님의 뜻이다는 것이다. 이러한 즉, 우리가 말씀에 있는 질서의 법들에 일치하여 살기를 선택할 때, 고로 하느님의 사랑을 받아들이기로 작정함이 온전히 우리 자신으로부터 임을 우리가 느낄는지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은 그분의 손가락을 천칭 위쪽에서 직각으로 세우시어 유지하시면서 선택의 우리의 자유함을 알맞아지도록 조절해주시지만, 그렇다고 강제적 수단으로 자유를 침범하시는 일은 결코 없으시다.

하느님은 악을 창조하시지 않으셨다, 그러나 질서 안에서 실제의 선택들이 인류로 그것을 받아들이도록 허용해버렸을는지 모른다. 만일 사람들이 하느님이 처음 그들을 창조했던 사랑 안으로 태어나졌다면, 어떤 악도 있지 않았을 뿐 아니라, 사람들은 악이 무엇인지도 모르기조차 하여 있었을 것이다. (애당초) 우리가 창조되어진 사랑은 이웃을 사랑함으로부터의 사랑이다. 고로 우리는 우리 자신 만큼, 아니 그보다 더 많이 이웃을 사랑하는 것을 배울는지 모른다, 그리고 이웃에 선을 행함에서 기쁨을 발견할 것이다. 이 사랑이 진실로 인간이다, 그 이유는 이 사랑 안에 짐승으로부터 발견되는 자연적 수준의 사랑과 구별되는 영적 수준의 요소들이 있기 때문이다.

“원죄” 또는 “유전적 악” 같은 것은 없다. 누구도 실제의 악들 안으로 태어나지지 않는다, 그러나 특별한 악들을 향한 다소의 경향과 더불어 악들을 향한 경향성만 지니고 태어난다. 결과적으로, 사후 개인은 악들을 향한 어떤 유전적 경향성으로부터 판단되어지지 않고, 개인이 동의함에서 받아들이고 행동했던 실제의 악들로부터 만 이다.

우리가 실제의 선을 상속하지 않고, 선이 되어질 경향성만이 상속 가능하다는 것도 위와 동일하게 진정하다. 천성적으로 자연적 선과 친절함을 향유한 듯 여겨지는 이들, 그리고 타인에게 선을 행함을 타고난 듯 실행하는 이들이라 여기지는 이들을 목격하는 때도 있다. 그러나 이런 이들이라 해도 그들이 말씀으로부터 선을 행함에 관한 원리들을 동시에 흡입하지 않으면, 그들은 양심을 발달시키지 못한다, 그 이유는 양심은 자연적 선, 또는 유전적 선에 대한 경향성과 그것에 일치하는 생명으로부터 오지 않기 때문이다. 만일 어떤 개인들이 이런 상태에서 영적 세계 안으로 온다면, 그들은 자기들에게 강하게 인상지우는 선과 진리의 원리들을 가지는 것을 포함하여, 테스트되고 심리되는 어려운 과정을 통과해야만 한다. 이 방법에서만이 그들은 천국의 양심을 받을 수 있다.

이른 바, 천국행의 삶을 사는 것은 여느 사람들이 믿는 것 만큼 고되고 힘든 삶이 아니다. 혹 자는 생각한다, 영적 삶을 영위하는 것은 힘든 것이다, 그 이유는 세상을 포기함이 필요하기 때문, 신체와 육에 연합된 식욕들을 포기해야 하기 때문, 그리고 영적 존재들 같이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이들은 이것은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을 거절함을 뜻하는 것으로 받는다, 뾰족하게는 재물과 명성을 거절하는 것, 그리고 하느님, 구원, 영원한 생명에 관하여 꾸준히 경건하게 묵상하는 것, 그들의 생활은 기도함과 말씀을 읽는 것, 여타 경건하다는 저서들을 읽는데 있다고 생각한다는 말이다.

그러나 선각자는 말한다, (그가 저 세계로부터의) 풍부한 경험과 천사들과의 토론은 그로 하여금 위와 상황이 완전 다르다는 것을 알게 해주었다. 사실상, 이 세상을 포기하고, 포기하는 식으로 살았던 사람들이 천국의 환희를 받지 못하는 자신들 때문에 슬픔에 잠긴 삶을 저 세상에서 건설하고 있다. 모두 각각의 개인의 (이 세상에서의) 삶은 그 개인과 더불어 (저 세상에서도 당사자에게) 머물고 있다. 그 이유가 천국의 삶을 받아들이려면 개인은 이 세상에서 그것과 대등한 삶을 살고 있었어야만 했었기 때문이다. 이 세상 삶의 과정에서 있는 시민적, 도덕적 생활을 수단으로 개인은 영적 생명을 획득한다, 사실상, 이 방법만이 영적 생명이 개인 안에서 만들어지게 할 수 있다, 또는 개인의 영이 천국을 위하여 준비되게 해줄 것이다.

천국행으로 인도하는 생활은 실제로 놀라우리만치 단순하다. 당신이 부정직하고 불공정하다고 아는 방법으로 어떤 것을 얻을 때, 특히 당신의 영이 그런 쪽으로 향하여 움직이려 들 때, 당신에게 필요한 딱 하나는 그것이 하느님의 가르침에 반대되기 때문에 행해져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런 방식으로 대수롭지 않다 여겨지는 사소한 악과 거짓으로부터의 것을 부딪치더라도 대수롭지 않은 것이라 여기지 않고 오히려 중요하게 여기며 하나하나를 처리해 소화해나간다면, 점차 당신은 천국 쪽에 당신의 발을 디밀고 있다. 이러할 때 당신의 더 높은 수준의 마음들이 열리어져서 어떤 것이 부정직하고 불공정한 것인지를 뚜렷이 보게 된다; 그리고 그런 것들을 보았을 때, 단번에 그것들을 부수어버릴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모든 이가 인간의 자유 의지 때문에 획득할 수 있는 영적 상태 쪽으로 당신을 인도한다.

** 도서 구입 안내 **

아래 도서들의 대부분은 발행자, 역자가 출판의 모든 과정을 직접 완료한 책이므로 우선 많은 책이 쌓여 있지 않고 부족할 때마다 몇 십권씩 추가로 출판하고 있습니다. 또한 책의 단가는 여느 시중의 책의 단가와는 달리 순수 재료비만을 계상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여느 복사 비용보다 저렴할지 모릅니다. 따라서 이 출판사의 책은 팔릴 때마다 조금씩 적자를 볼 수밖에 없지만, 이 출판사의 바램은 이익 창출이 아니라 이 귀중한 지식을 공유하는 것, 더불어 이 귀중한 지식이 많은 분들의 손 안에, 책꽃이에 있어 필요시 언제나 읽기를 바램에서, 또한 이 지식의 습득은 여느 소설이나 수필집을 대하듯 하여서는 즉각 이해에 와닿지 않는 결점이 있기에, 어쩌면 시험 공부하듯 노력함이 곁들여야 하기에 전자책이나 전화기나 컴퓨터 다운에 앞서 종이책 구입을 권장하는 차원에서 출판 사업을 펴고 있습니다.

펴내는 자: 한광숙, 배제형
펴낸곳: 도서 출판 벽옥
등록: 제 2016-000002호
주소: 전남 화순군 화순읍 안양산로 31-5
전화: (한국) 010-4738-1711 (미국) 1-917-923-9825
홈페이지: baysidechurch.org
biblestudynoteblog.wordpress.com
역자 E-mail : jeandsook@gmail.com

각 도서와 가격

** 각 도서는 대체로 양장본으로 제본하려 노력하고 있습니다. 또한 위 인터넷 주소에서 책을 만나볼 수 있고 다운받아 직접 제본도 가능할 것입니다.

1. 번역 서적

말씀의 합리적 이해 (전 6권. 각 430여쪽) 값 각 권 12000원
비유 (796쪽) 값 25000원
신약 비유 해석 (516쪽) 값 15000원
구약 비유 해석 (394쪽) 값 15000원
이스라엘의 첫 세 왕 (576쪽) 값 15000원
마태복음 해석 (736쪽) 값 15000원
요한복음 해석 (640쪽) 값 15000원
요한계시록 해석 (513쪽) 값 15000원
바이블 스터디 노트 (전 4권, 각 권 평균 650여쪽) 값 각 권 15000원
성경 공과 (전 24권, 각 권 평균 234쪽) 값 각 권 5000원
레위기 해석 (526쪽) 값 15000원
영, 한글 구약 성경 (창세기, 출애굽기 340쪽) 값 5000원
영, 한글 신약 성경 (4 복음, 계시록 406쪽) 값 5000원
성경 상응 사전 (1082쪽) 값 25000원
헬렌 켈러의 신앙 간증 (126쪽) 값 5000원
죽음 그 이후 영들의 세계 그리고 천국과 지옥 (132쪽) 값 5000원
새 예루살렘 그리고 그곳의 교리 (100쪽) 값 5000원
천국의 비밀들 (전 12권 각 500여쪽) 값 각 권 20000원
창세기 요약 해석 (401쪽) 값 15000원
창세기 해석 (전 5권 각 550-630여쪽) 값 각 권 15000원
성경 연구 (전 6권 각 430-480여쪽) 값 각 권 15000원

2. 원서

선각자의 필적이 담긴 쉬밑의 라틴 성경 (900쪽) 값 25000원
알카나 세레스티아 (쟌 엘리엇 영역)
알카나 세레스티아 (쟌 클라우 영역, 쟌 폿스 수정) 값 각 권 20000원
* 이 외의 원서의 종이책 재출판도 준비 중에 있습니다.
* 위 엘리엇 영역본은 copyright이 있을 것 같아서 출판을 미루고 있는 바, 필요한 분은 인터넷 검색이 가능하므로 연락바랍니다.

레위기

레위기를 교정 발간하면서…

말씀은 인류가 저작해 왔던 여느 책들과는 확실히 구분되는 책이다. 그 이유는 크게 나눌 수 있는 세 가지 의미 즉 천적, 영적, 자연적 의미들이 집합하여 완전한 시리즈로서의 내적, 영적 의미를 형성해 가는 방식으로 배열된 상응적 표현으로 빈틈없이 건축되어 있기 때문이다.
역자가 이 책을 처음 접하게 된 계기는 설교 준비를 위해서 자료를 모으던 30 년 전쯤 일 것 같다. 이 책의 특징은 선각자 에마뉴엘 스웨덴볽의 여러 저서 중 가장 큰 시리즈인 12권의 천국의 비밀들에서 취급된 창세기 출애굽기의 해석 원리를 바탕으로 열왕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의 영적 해석을 시도했다는 점이다.
위 책들 중 하나인 레위기서는 25 여년 전쯤 역자가 레위기 전체를 설교로 다루기로 계획하여 그 준비로 번역을 해두었는데 최근 재 정리를 시도했다. 아마 레위기를 읽은 사람 치고 재미있게 읽었다고 말하는 분은 드물지 모른다. 오히려 이 책이 어찌하여 성서의 세 번째 책으로 자리매김되었을 까 의아해하는 편이 더 많을지 모른다.
어쨋든 레위기서의 진가를 헤아려보기를 갈망하는 분이 있다면 이 역서는 그 열망에 도움을 주리라 확신한다. 단지 대단히 느린 정독을 역자가 부탁한다는 것만을 염두하면 될 것이다. 또한 위 선각자의 성경 해석을 다른 성경에 실습하고 싶은 분이 있다면, 이 레위기 해석의 접근 방식은 그 열정에 힘을 보탤 것으로 확신한다.
또한 역자의 저서인 성경 상응 사전 역시 이 레위기서와 같이 상응에 의거한 영적 의미만을 간략히 게재했으므로 곁들이면 성경 연구에 보탬이 될 것이다.

2019. Easter Sunday. in New York. Je H, Bae

** (각 장의 세부적 영적 의미에 있는 숫자들은 각 구절의 의미 파악을 위해 참고한 선각자의 천국의 비밀들의 10837항 중에서의 어느 항을 참조했음을 말하는 것이므로 영적 의미 파악에 보다 더 관심있거나 보다 더 폭넓은 이해를 원하는 독자는 천국의 비밀들의 그 항목 까지 추적해 참고하면 될 것이다. 또한 약자 표기로 T.C.R이 있는데, 이는 선각자의 진정한 기독 종교 라는 책의 항을 말하고 있다. 천국의 비밀들의 경우, 영역서를 읽기가 힘든 분을 위해 역자의 한역본 천국의 비밀도 있다. 또한 영역서, 라틴 원서, 내지 더 많은 참고 자료는 아래 웝싸이트를 검색하기 바라고, 종이 책이 필요할 경우, 아래 전화나 주소로 연락하면 도움을 줄 것이다.)
baysidechurch.org
bible study notes blog.wordpress.com
도서출판 벽옥 (전화: 010-4738-1711)
차례

입문 5
1장 7 10장 165 19장 343
2장 24 11장 181 20장 364
3장 36 12장 206 21장 380
4장 46 13장 213 22장 395
5장 67 14장 244 23장 414
6장 82 15장 273 24장 440
7장 103 16장 290 25장 455
8장 126 17장 313 26장 484
9장 150 18장 325 27장 508

성경 약자표

창 창세기 이 이사야 마 마태복음
출 출애굽기 예 예레미야 막 마가복음
레 레위기 애 예레미야애가 눅 누가복음
민 민수기 겔 에스겔 요 요한복음
신 신명기 단 다니엘 계 요한계시록
여 여호수아 호 호세아 고전 고린도 전서
사 사사기 욜 요엘 고후 고린도 후서
삼상 사무엘상 암 아모스 행 사도행전
삼하 사무엘하 옵 오바댜
왕상 열왕기상 욘 요나
왕하 열왕기하 미 미가
대상 역대상 나 나흠
대하 역대하 합 하박국
스 에스라
욥 욥기 습 스바냐
시 시편 학 학개
잠 잠언 슥 스가랴
아 아가 말 말라기
레 위 기

입문

구 신약 성서 속의 영감된 책들이 씌어진 이래 한가지 확실하게 존재한 것은, 그 책들은 글자적, 문법적, 역사적 의미 외에 영적이고 영원한 실재들(realities)을 묘사하는 감추어진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다. 요즈음 들어 창세기 앞부분의 경우는 역사물이 아니다는 것이 널리 인정받고 있다. 그러하다면 그 책은 필시 감추어 놓인 의미 같은 것을 포함하고 있어야만 한다는 생각이 뒤따를 수밖에 없게 된다. 말씀에 관한 책들, 특히 명백하게 역사적인 책들까지도 역사적인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어떤 것을 포함하고 있다는 증거를 보여줄 수 있는 많은 서술들을 포함하고 있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 그 외 형제들은 창세기와 출애굽기에 기록된 그대로 살았던 실지의 사람들이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표현을 위한 인물들(representative characters)이기도 하다. 그들이 이와 같다는 것을 인정할 때만이 우리는 그들에 관해 말하고 있는 많은 사항들을 적절하게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예를 들어 창세기 15-18장에 기록된 바 같은 아브라함과 여호와의 영적 교통에는 기초적인 영적 가르침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나, 이삭을 제물로 바치려 했던 창세기 22장 등등에도 그와 비슷한 수준의 가르침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누가 눈치챌 수 없을까?
위의 사항 외에도 말씀에 관한 후기에 속하는 책도 전기에 속한 책에 담긴 같은 수준의 진리를 보여주거나 매우 다른 방법으로 각 책 나름대로 진리를 담고 있다. 이렇게 해서 말씀 그 자체는 스스로 확언하기를, 말씀은 한분의 신성과 영적 의미를 담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시편 78편 첫 절에서 이렇게 읽게 된다. “오 내 백성들아, 내 법에 귀를 주어라. 내 입의 말들에 너희 귀를 기울여라. 나는 비유 안에서 내 입을 열 것이다, 나는 옛 비밀한 말들을 발음할 것이다.” 이 구절 다음에서 이스라엘 후손들의 역사에 관해 간략하게 되풀이함으로서 말씀에 있는 이 후손들의 모든 역사는 비유(parable)로서 속뜻을 담고 있다는 것을 입증하고 있다. 그것 뿐만이 아니다. 모세의 법들은 영적 의미와 글자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암시하는 구절들도 있다. 예를 들면 사무엘상 15장 22절에서, “여호와께서, 당신의 말씀을 따르는 것보다 태워 바침이나 평화 제물 바치는 것을 더 기뻐하실 것 같소? 순종하는 것이 제사보다 낫고, 그분의 말씀을 명심하는 것이 염소의 지방보다 낫소.” 이 구절은 이사야 1장 20절에서 말해진 사항과 연결되고 있다. 그래서 마태복음 23장 23절은 모세의 법, 뿐만 아니라 제물들은 비유적인 것임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마지막으로 영감된 책들이 일반적으로나 개별적으로나 공히 내적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는 것은 복음서나 계시록에서도 더 특별하게 알 수 있다. 이로부터 우리가 말하는 것은, 예수의 증거는 예언의 영(spirit)일 뿐 아니라, 말씀 전체는 가장 깊은 뜻에서 그분을 취급하고 있다는 것, 이 가장 깊은 뜻은 제자들로 그것을 이해할 수 있도록 주님의 부활 때에 제자들에게 알려졌다. (계시록 19:10, 누가 24:27, 45) 그러므로 사도들 시대 뒤를 이어 수세기 동안 살았던 초기 기독교인들이 성경은 내적 의미를 함유하고 있다는 것을 믿었던 것은 과히 놀랄 일은 아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런 사실에 관한 그들의 저서에서 그런 사항을 찾아 볼 수 있다. 이에 대한 한 두 개의 예를 들어본다면, 이그나티어스(Ignatius)는 말하기를 (시편 108편에 관해, 26항목), “하느님의 법은 영적이다. 하느님의 법을 영적으로 취하지 않는 자는 진정한 법을 가진 게 아니다.” 어거스틴(Augustine)은 선포하기를, “모세의 저서를 글자 의미대로 취하는 사람들은 하늘 나라에 대해 배우고 싶어하지 않는다.” (contra Faust, lib. 12. 4장) 오리겐(Origen)은 모세법의 성직 임명과 예복에 관해 말하는 도중, “이 규정들 모두가 글자 외에 또 다른 의미에서 취해지지 않는다면….그 규정들은 큰 걸림돌이 될 것이다. 그리고 기독교가 발전되고 교도되기 보다 오히려 전복되는 쪽으로 움직여질 것이다” (레위기에 관해, 7장). 같은 책인 레위기 주석의 또 다른 부분(3장)에서 말하기를, “이 책이 주고 있는 제물에 관한 법은 영적 의미들로 충만 되어 있다.”
이제 한 걸음 더 진전하는 관찰을 하면 총명한 마음들로 하여금 말씀의 모든 부분에는 내적 의미가 있을 뿐 아니라, 그 의미의 해설들이 스웨덴볽의 「천국의 비밀들, Arcana Coelestia」에 수록되어 있다는 것까지도 수긍하게 될 것이다. 스웨덴볽 스스로 선포하기를, 자신은 주님의 재림을 알리는 사람이라는 것, 새로운 기독교 처방에 관한 교리를 인류에게 가르치고자 임명되었다는 것, (T.C.R. 779항) 이 교리는 주님이 밝히 알게 해주셨다는 것, 이 계시는 영적 의미 속에 있는 진리를 역설하고 있을 뿐 아니라, 자연계와 영계 사이에 상응(correspondence)의 보편적 법칙이 있다고 했다. 이 법칙에 의거 말씀은 건축되어 왔고, 이는 주님 스스로만이 건축하실 수 있다고 그는 말했다. 더욱이 영감된 책의 처음부터 끝까지에 있는 모든 부분에 보편적인 법칙을 응용함으로 말씀에서 순수한 내적 의미를 끄집어 낼 수 있다는 것도 명백히 알 수 있다. 그러면 새로운 처방에 관해 선각자가 이룩한 임무는 참되고 진정하다는 것을 알 수 있고, 그를 성실히 따르는 이들은 안전하고 확실한 반석 위에 자신들을 세울 수 있다는 것까지 확인하게 된다. 그 이유가 상응의 법칙을 통하여 주님은 모든 인간에게 말씀으로부터 영적 진리를 가르치시기 때문이다.(T.C.R. 780항)
이제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로 이어지는 계속적인 시리즈에서 주어지는 영적 가르침은 「천국의 비밀들」로부터 전적으로 입증된다. 그리고 이 입증은 그의 저서에서 설명되는 세세한 상응에 전적으로 의존 할 뿐 아니라, 그 책 속에서 예증하는 일반적이고 특수한 법칙과 원리들에 의존하여 이루어질 것이다.

레위기 1 장

성경: 레위기 1장

1. 그리고 주님께서는 모세를 부르셨다, 그리고 만남의 천막으로부터 그에게 이야기하셨다, 말하시기를,
2. 이스라엘의 자손들에게 이야기하거라, 너희 중의 어떤 사람이 주님에게 봉헌물을 바칠 경우, 너희는 가축떼로부터 봉헌물을 바치되, 소떼나 양떼로부터 바쳐라.
3. 만일 그의 봉헌물(oblation)이 소떼로부터의 태워 바침이다면, 그는 그것을 흠이 없는 수컷으로 만남의 천막의 문에서 바쳐라, 그리하면 주님께서 받으실 것이다.
4. 그리고 그는 태워 바치는 제물의 머리 위에 자기 손을 놓아라. 그가 보상을 받도록 그를 위해 그것은 받아질 것이다.
5. 그리고 그는 주님 앞에서 수소를 죽여라. 그리고 성직자인 아론의 아들들은 피를 넘겨받아 만남의 천막의 문에 있는 제단 주위에 뿌려라.
6. 그리고 그는 태워 바치는 제물의 가죽을 벗겨라, 그리고 그것을 조각들로 자르라.
7. 그리고 성직자 아론의 아들들은 제단 위에 불을 놓아라, 그리고 불 위에 장작을 질서있게 놓아라.
8. 그리고 아론의 아들들, 성직자는 (고기)조각들, 머리, 그리고 지방을 제단 위, 불에 있는 장작 위에 질서 있게 놓아라.
9. 그러나 그는 그것의 내장들과 다리들을 물로 씻어라. 그리고 성직자가 제단에서 태워라, 그 이유가 태워 바침은 불로 만든 달콤한 향기를 주님에게 바침이기 때문이다.
10. 그리고 만일 그의 봉헌이 양떼로부터, 양으로부터, 또는 염소들로부터 태워 바침이다면, 그는 그것을 흠이 없는 수컷으로 바쳐라.
11. 그리고 그는 그것을 주님 앞의 북쪽 방향의 제단 측면에서 죽여라. 그리고 아론의 아들들, 성직자들은 그것의 피를 제단 빙둘러 뿌려라.
12. 그리고 그는 그것을 그것의 머리와 지방들과 더불어 조각되게 자를 것이다. 그리고 성직자는 그것들을 제단 위 장작에 질서있게 놓아라.
13. 그러나 그는 내장들과 다리들을 물로 씻어라. 그리고 성직자는 통째로 바쳐라, 그리고 그것을 제단 위에서 태워라. 이것은 불로 만든 달콤한 향기를 주님에게 바침이다.
14. 그리고 만일 주님에 대한 그의 제물이 가금류들로부터의 태워 바침이다면, 그 다음 그는 그의 제물을 호도애로부터, 또는 어린 비둘기로부터 바쳐라.
15. 그리고 성직자는 그것을 제단으로 가져오라, 그리고 그것의 목을 비틀고, 그리고 그것을 제단에서 태워라. 그리고 그것으로부터의 피는 제단 측면에서 흘려라.
16. 그리고 그는 오물을 가진 멀떠구니(crop)를 가지고 가라, 그리고 그것을 재들의 장소에 제단을 벗어나는 동쪽 부분에서 던져라.
17. 그리고 그는 그것을 날개들을 수단으로 찢어라, 그러나 그것을 따로따로가 되게 나누지 말라. 그리고 성직자는 제단 위, 불 위에 있는 장작 위에서 태워라. 이것은 불로 달콤한 향기를 만들어 주님께 바치는 태워 바침이다.

영적 의미 요약

* 주님은 자연적인 선과 영적인 선, 모두로부터 예배되어져야 한다(1-2절).
* 그러나 자연적인 선 또는 애착으로부터의 예배가 시간 차원에서는 먼저 있어진다. (3-9절)
* 둘째로, 예배는 영적 애착으로부터 있어진다. (10-13절)
* 셋째로, 위 두 애착으로부터 예배되어지되, 더 낮은 평면에서도 있어진다. (14-17절)

각 절의 영적 의미

1절. 그리고 주님께서는 모세를 부르셨다, 그리고 만남의 천막으로부터 그에게 이야기하셨다, 말하시기를,

영적 의미

이는 주님으로부터 있는 유입(influx)은 천국을 통하여, 신성한 진리(말씀)를 수단으로, 지각을 주심으로 있어진다를 의미한다.

세부적 영적 의미

주님(또는 히브리어의 경우 여호와)는 사랑 측면에서 신성한 존재(Divine Being)를 말하고;, 부름(calling)이란 유입(influx)을; 모세는 신성한 진리, 또는 말씀을; 이야기하심(speaking) 역시 유입, 의지, 생각을; 만남의 천막은 세 천국을; 말함(saying)은 지각을 의미하고 있다. (A.C. 2001, 6840, 7010,6752, 2951, 3540-3, 1791,1822.)
이 시점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글자에서 특별한 개인이나 장소가 말해질 경우, 내적 의미에서는 모든 인간들과 상태들로 이해되어 진다는 점이다. 생명은 주님으로부터 천국을 통하여 직, 간접적으로 모든 인간에게 흘러든다. 이 유입은 신성한 사랑으로부터 신성한 진리를 수단으로 있어진다. 그러므로 이 유입은 인간의 애착과 생각 속에서 그 자체가 명백해진다. 그 다음 인간은 각기 다른 상태에 따라 다양한 수준에서 지각(perception)을 가진다. 이런 과정들이 우리의 언어에서도 얼마나 많은지 여러분은 곰곰이 생각해 본적이 있는가? 주님은 우리들 각자에게 세 겹의 방법 즉 본문에서 표현된 부르시고(calling), 이야기하시고(speaking), 말하시고(saying) 등의 방법으로 계속적으로 우리에게 호소하시고 있다. 어떻게 가장 높고 최상의 지각으로부터 느끼고, 생각하며, 행동하여야 하는가에 대해서 주님이 그 방법을 가르쳐주시지 않으면 우리는 결코 제대로 되지 않는다. 다음 절을 살피기 전, 잠깐 멈추어 조심스럽게 생각하고 진행해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여호와 또는 주님이라는 단어에 관해 납득되는 명백한 생각을 가지는 것이다. 우리를 위해 가능한 생각은 무엇일까?
히브리어에서 단어 여호와는 여러 갈래에서 근원되고 있다. 이 단어는 어떤 생각도 해볼 수 없는 무한한 완전으로 계신 스스로의 존재, 영원한 신성의 존재, 과거에도 존재하시고, 지금도 존재하시며 장차도 존재하시는 분을 뜻한다 (출애굽기 3:14). 그래서 간혹 어떤 이들이 그분은 “육체도, 또는 그런 어떤 부분도, 열정도 없다”고 말할런지 모른다. 어찌됐든 분명한 것은 말씀 자체도 그분에 관해 “일찍이 하느님을 본 사람은 없다”(요한복음 1:18) 라고 선포하고 있다. 그렇다고 위의 사항들이 단어 여호와가 뜻하는 전부인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이사야 43장 10,11 절에서 “…손으로 빚은 신이 나보다 앞서 있을 수 없고 후에도 있을 수 없다. 나, 내가 곧 여호와이다. 나 아닌 다른 구세주는 없다”라고 읽기 때문이다. 이 대목에서 주시해야 할 것은, 첫째로 우리에게 언제나 가르쳐지는 것은 주님은 “하느님은 모양이 있었다, God formed” 라는 것, 그 이유는 스스로 존재하는 것, 생명 자체는 모든 존재들의 최고의 물질적(substantial)일 것임에 틀림없고 모양이나 속성(quality)이 없는 물체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물론 이 하나의 유일한 물체(substance)는 우리가 인식하지 못한다. 그것은 무한이요 신성이다. 둘째로, “하느님은 모양이 있었다.” 그럼에도 그 모양은 우리의 납득력을 초월함에도, 이와 똑같은 하느님이 후에 우리가 의식 가능한 낮은 수준의 생명에서 모양이 생기시어 구세주가 되고 있다. 말씀의 옛 예언들 모두가 서술하는 것은 여호와 자신이 시간이 차면 구속자, 구세주가 되실 것이라고 했다. 이에 대한 증거는 아래 한, 두 구절으로 충분하리라고 본다.
“그날 이렇게들 말하리라. 이분이 여호와이시라. 구원해 주시리라 믿고 기다리던 우리 하느님이시다. 이 분이 여호와이시다. 우리가 믿고 기다리던 여호와이시다. 기뻐하고 노래하며 즐거워하자. 그가 우리를 구원하셨다.’”(이사야 25:9) “내가 다윗의 정통 왕족을 일으킨 그 날은 오고야 만다. 이는 내 말이라, 어김이 없다. 그는 현명한 왕으로서 세상에 올바른 정치를 펴리라. 그를 왕으로 모시고 유다와 이스라엘은 살 길이 열려 마음놓고 살게 되리라. ‘여호와 우리를 되살려 주시는 이’라는 이름으로 그를 부르리라”(예레미야 23:5-6). “너희를 이집트에서 이끌어 낸 것은 나 여호와 너희 하느님이다. 너희에게 나 이외에 어느 하느님이 있었느냐?”(호세야 13:4) 그리고 우리가 위의 말들이 확증 되도록 신약 성서에 있는 문단을 찾아 볼 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우리의 주님이 이전에 계셨고, 지금도 계신 명백하게 드러내신 여호와이심을 알게 된다. 그러므로 하느님에 관한 진정한 생각은 무한하게 영화로우신 신성한 인간(Divine Man), 즉 단 하나의 인격이 아버지, 아들, 성령으로 체현되어 있는 것, 또는 바울이 표현한 “그리스도의 인간 안에는 하느님의 완전한 신성이 깃들어 있다” (골고새 2:9)와 같은 신성한 삼위일체이다. 그 이유는 그분에 관해서 “….그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 예수는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할 것이다…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임마누엘은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이다”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마태 1:21-23). 또한 그분은 “만민의 주이시다” (사도행전 10:36). “그분은 사람으로 이 세상에 오셨다” (디모데전 4:16). “그분은 하느님의 본질을 그대로 간직하신 분” (히브리 1:3). 신성으로부터 그분은 인성 측면에서도 모든 권능을 가지고 계신다 (마태 28:18). 그분의 이름들은 아버지, 아들, 성령이다 (마태 28:19, 사도행전 19:5). 그분의 인간 본성은 신성이 나타나 보이신 것이다 (요한 14:9, 이사야 9:6,7). “만일 너희가 내가 그 분이라는 것을 믿지 않으면 그와 같이 죄에서 헤어나지 못한 채 죽고 말 것이다”(요한 8:24). “지금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장차 오실 전능하신 주 하느님께서 ‘나는 알파요 오메가다’” (계시록1:8). 이상의 구절에서 그분이 말하신 것, 즉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면서 몸소 하시는 일이다” (요한 14:10).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숨을 내쉬시며 말씀을 계속 하셨다. ‘성령을 받아라…’” (요한복음 20:22) 라는 구절들을 보태어 생각하면, 아버지, 또는 신성한 본성(Divine Nature)은 육체 안에 영혼이 들어 있는 것 같이 예수 안에 계신다는 것, 아들 또는 인간 본성은 신성이 되셨을 때 한 분 신성한 인격 안에서 아버지가 나타나 보이셨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성령은 그분으로부터만 진행된다는 것도 알 수 있으리라. 위에서 살핀 내용들은 우리가 납득할 수 없는 여호와에 관한 유일하게 진정한 생각들인 바, 만일 위의 생각들이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면, 그분에 관한 사상은 뒤집혀지거나 기괴한 곳으로 빠지든지, 아니면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는 쪽에 해당될 것이라 본다. 위의 글을 좀 더 완성하기 위하여 한번 더 노력해본다면, 창세기 1장 26, 27절에 있는 바와 같이, 인간은 하느님의 모양을 따라 형상에서 창조되었다는 것, 이로부터 알 수 있는 첫째 원리는, 하느님 자신도 실지로 사람(Man)임에 틀림없다는 것이다. 더 달리 그분은 계실 수 없었을 것이고, 시간이 차면서 마지막 또는 가장 낮은 수준에서의 한 인간(a Man)이 되셨을 것이다. 그러므로 세상에서 입으신 그분의 인간 본성은 실재적으로나, 실체적으로나 그분의 신성으로부터 파생된 것이다. 거기에는 추상적인 능력, 지혜, 사랑 같은 것은 유한이든 무한이든 존재할 수 없고, 그 결과 추상적인 전지전능, 무소부재 같은 것도 있을 수 없다. (마태 28:18-20 참조) 신성한 삼위일체에 있는 요소들은 전체라는 하나됨을 파괴치 않고는 셋 중 하나, 또는 둘, 혹은 셋 각각이 분리될 수 없다. 모든 생명과 물질 그 자체에 신성한 인간이 없으면, 우주의 영적이고 자연적인 모든 것은 창조되지 않았을 것이고, 더구나 계속 존재할 수도 없다.

2절. 이스라엘의 자손들에게 이야기하거라, 너희 중의 어떤 사람이 주님에게 봉헌물을 바칠 경우, 너희는 가축떼로부터 봉헌물을 바치되, 소떼나 양떼로부터 바쳐라.

영적 의미

위의 유입은 영적 교회 속의 사람들을 가르치시기 위함이고, 이 가르침으로 해서 예배라는 행동은 주님을 인정하고 그분에게 애착을 바치는 것임을 알게 되고, 이 사항들은 반드시 자연적인 것과 영적인 것에 함께 존재해야 한다.

세부적 영적 의미

이야기하여라(speaking)는 유입이고, 말하라(saying)는 지각이나 가르침을; 이스라엘은 영적 (왕국의) 교회(the Spiritual Church)를; 봉헌물을 바침은 주님을 인정함과 예배를; 소떼나 양떼는 자연적인 애착과 영적인 애착을 각기 나타내고 있다. A.C 2951, 1791,1822, 3654, 349,922, 5913,6125
이 절에 있는 영적 의미의 중요한 세 가지 사항은, 유입과 유입의 결과인 계시(밝히 알게 함, revelation)은 간접적으로 뿐만 아니라 직접적으로도 존재한다는 것, 주님께 드리는 예배는 반드시 자유 안에 존재해야 할 것, 그리고 예배는 주님을 인정함이 필수로 있으면서 심정 속의 애착들을 그분께 바쳐야 한다는 것이다. 주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말하시되 직접적으로 하지 않으셨다. 그러나 만남의 천막으로부터 모세를 통해서 말하셨다. 어느 누구도 신성한 생명, 사랑, 또는 선을 신성한 진리를 수단으로 하지 않고서는 받을 수 없다. 그 이유가 사랑은 진리가 아니면 품질(quality)을 가지지 못하고, 진리가 선으로부터 존재치 않으면 생명 없는 진리가 되기 때문이다. 또한 내적 인간(internal man)에 의해 받아진 진리는 외적 인간(external man)이라는 상태 안에 머물러야만 한다. 다시 말해 예배가 강요된 상태에서 있어졌다면 그 예배는 어떤 가치가 있게 될까?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이 주님께 제물이나 태워 바침의 제물을 바치는데 어떤 강요도 있지 않았다. 다시 물어 보자. 사랑 자체는 자유이고, 예배가 자연적이든 영적이든, 모든 예배의 필수 요소는 자유이다는 것을 누가 알지 못할까? 진정으로 주님께 예배하는 것은 안쪽, 바깥쪽의 혼(soul) 모두를 가지고, 모든 심정을 다해 그분을 사랑하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의문이 자연히 제기된다. 앞 절에서 있었던 간단한 소견에서 보여진 것은, 주님은 한 분 신성한 개인(a Divine Person)되신다는 것, 그런 이유는 추상적인 능력이나 지혜, 사랑 같은 것은 있을 수 없기 때문에서 인 것이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주님을 사랑함은 그분의 본질과 관계없이 개인으로서의 사람이란 측면에서 최고로 높이 숭배하는 것이라고 상상해 볼는지 모른다. 그러나 이런 상상은 상당히 잘못된 것이다. 진정한 것은, 우리가 그분을 신성한 한 분의 인물 (a Divine Person)로서 그분을 생각지 않으면 하느님에 관해 올바르게 생각할 수 없다는 것. 이와 동등하게 진정한 것은 우리는 하느님을 한 분(한 개인)으로 막연히 단순하게(simply) 그분을 사랑하거나 예배할 수도 없다는 것이다. 이와 반대로, 우리는 그분의 본질(essence)이란 측면에서, 이와 동시에 개인으로서의 사람이란 측면에서 그분을 사랑하고 예배해야 한다. 자연히 알 수 있는 바는, 주님을 사랑함은 간략히 말해서 그분을 구성하는 선과 진리를 사랑하는 것을 뜻하고, 따라서 우리가 지닌 선과 진리, 애착과 총명에 속한 것은 무엇이든지 그분으로부터 우리 안에 존재함을 인정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위의 사항은 우리가 주님을 섬기는데 우리의 자연적인 애착과 영적인 애착들을 어떻게 헌신해야 하는 가를 이해되게 해준다. 줄여서 말해 본다면, 우리는 주님을 사랑해야만 한다. 그 이유는 그분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그리고 그분은 먼저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과 행복을 나누어 주셨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그분의 사랑에 대한 우리의 보답은 그분으로부터 받은 능력과 애착들을 올바르게 사용함으로 가능해 진다.

3절. 만일 그의 봉헌물(oblation)이 소떼로부터의 태워 바침이다면, 그는 그것을 흠이 없는 수컷으로 만남의 천막의 문에서 바쳐라, 그리하면 주님께서 받으실 것이다.

영적 의미

그리고 만일 주님이 자연적 애착으로 예배되어진다면, 그 애착을 그분께 통째로 바치되, 진리들을 수단으로, 악과 거짓에서 순수해짐으로, 또는 순수한 진리들을 수단으로 하되 주님만이 천국을 통하여 있게 되는 유입을 수단으로 인간이 예배할 수 있도록 힘을 주신다는 것을 인정함과 더불어 있어져야 한다, 그 이유는 이런 예배만이 주님이 받으시기 때문이다.

세부적 영적 의미

태워 바침은 특별히 사랑으로부터의 예배를; 제물은 신앙으로부터의 예배를; 소떼로부터 바치는 제물은 자연적인 선으로부터의 예배를; 태워 바침의 제물은 주님께 드리는 충만된 헌신, 또는 충분히 신성시됨(full sanctification)을; 수컷이란 진리를; 흠이 없음이란 악과 거짓으로부터 순수해짐을; 문(door)이란 주님이 인정하심을; 만남의 천막이란 천국들을; 주님께서 받으실 것 이란 순수하기 때문에 받으심을 뜻한다. (A.C 8680, 5913,6126, 2776, 725, 7837, 3540-3, 9506-1)
이 절에서 특별하게 정리해 보아야 할 요점은 이러하다: 말씀 속의 진리와 악으로부터 순수해짐을 수단으로 하지 않고는 주님께 드리는 진정한 예배는 없다는 것이다. 오늘날, 만일 인간의 심정들이 한결같이 정상이라면 각 개인이 지닌 교리가 무엇이냐는 것은 하등 중요한 사항이 못될 것임은 어린아이도 수긍할 수 있는 이론일 것이다. 따라서 애착보다도 주님을 예배함에 더 요구되는 어떤 것이 있다는 것을 배우게 된다. 그것은 순수한 진리, 또는 교리이다. 애착이 동기의 불순함이나 동기와 더불어 진행되는 어떤 행동이 자기가 옳다고 하는 생각, 짐짓 자기가 선하다고 하는 교리 속의 거짓으로 오염되고 있다면, 어떻게 그 애착이 주님께 바쳐질 수 있을까? 참으로 그것은 불가능이다. 자연적인 선으로부터 우리가 예배드리는 바, 이 선은 예배 이전에 받은 진리, 이 진리가 회개하는 삶에 응용된 뒤, 응용된 진리를 통해 주님으로부터 받게 된 선이어야만 한다. 우리의 제물은 “흠이 없는, 또는 온전한 수컷”이어야 한다. 이렇다면 다시 우리의 진정한 예배에는 뭔가 더 포함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즉 우리가 진리(Truth)의 영향으로 악과 거짓을 멀리하는 바깥쪽 행동만 가지고는 충분치 않다는 말이다. 우리는 주님이 문이심을 인정하여야 한다 (요한 10:7-9). 우리는 천국을 통해 오는 그분의 영향력, 즉 우리에게 흐르는 성령의 역사가 수단이 되어 직접적으로, 또는 우리들의 상태를 조절하여 우리로 예배할 힘을 가지게 해준다는 것을 자신에게 충분히 납득시켜야 한다. 그 이유는 간접적인 유입(influx)이 있는 곳이면 언제든지 직접적인 유입도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를 수단으로 주님은 모든 것을 일반적으로나, 아주 세세한 부분들까지 서로 연결시켜 질서가운데 보존하신다. 참으로 그분은 모든 사람 각자가 드리는 예배를 변함없이 받으시기를 매우 기뻐하신다. 그러나 그 예배에 내적 순수함이 외적 순수함과 더불어 동시에 있지 않으면 주님이 기뻐 받으시는 예배가 되어질 수 없다.

4절. 그리고 그는 태워 바치는 제물의 머리 위에 자기 손을 놓아라. 그가 보상을 받도록 그를 위해 그것은 받아질 것이다.

영적 의미

더불어 위와 같은 예배는 의지와 이해함 속의 모든 힘으로, 내적인 것과 교통됨으로 있는데, 그 이유는 위의 사항들 때문에 악이 제거되고 내적인 것과 결합되기 때문이다.

세부적 영적 의미

손이란 힘(power)을; 제물의 머리에 손을 얹는다는 것은 내적인 것으로부터 외적인 것까지에 이르러 힘이 교통됨을; 보상을 받도록 받아들여짐이란 감사히 생각하고 주님을 매우 기쁘시게 하는 것을, 그 이유는 그렇게 됨으로 해서 악이 제거되어져 내적(Internal) 부분과의 결합이 결과되기 때문이다. A.C 878, 10023, 10042-II. 3절
“보상, 죄를 벗음, atonement”으로 번역되는 히브리 단어의 뜻은 죄를 위한 덮개인데, 통상 세 가지 의미들이 있다고 말해지고 있다. 즉, “죄를 위해 벌금을 무는 것, 분노함을 달래는 것, 재난을 피하는 것”이다. 이런 뜻이 과연 무엇인지 올바르게 알고 싶어 자신에게 되묻겠다면, 이제 제대로 이해되어질 것이다. 이에 대한 대답은 글자 의미로 말하면 태움이고, 영적 의미로는 태움으로 나타난 자연적인 선한 애착이다. 죄를 덮음, 또는 벌금을 문다는 것은 주님으로부터 받게 된 다양한 품질이나 각기 다른 수준에서 있는 선 외에는 더 다른 게 없다는 것을 우리는 진리로 알 수 없을까? 이에 대한 심사숙고의 결과가 우리에게 보여주는 바, 태워 바침이나 제물의 진정한 영적 의미에 관한 것이다. 이것들은 거룩한 삶의 모든 의무에서 주님을 섬기려는 우리의 선한 애착들을 신성하게 함을 나타낸다. 이렇게 헌신하려는 노력이 어떻게 죄를 덮으며, 분노를 달래고, 재난을 피하게 하는지 이제 알아야만 할 것이다. 지금까지 아주 흔하게 믿어온 것 중 하나는, 죄의 보상, 또는 죄를 덮는 것이 그리스도의 죽음, 또는 그리스도가 제물이 됨, 모든 인류의 죄를 위해 그분에게 가해진 벌로 생각해왔던 것이다. 그러나 이런 엉터리 주장은 새 시대의 빛 앞에서 빠르게 사라져 가고 있다. 죄인 자신이든, 그 죄인을 대신한 다른 대체물이든 간에, 단지 처벌을 수단으로 죄가 덮어지거나 제거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비록 처벌이라는 것이 악이 뛰쳐나오는 것을 억누르게 할 수는 있겠지만 그렇다고 처벌이 악을 제거하지 못한다는 것은 누구나 쉽게 이해하는 사실이다. 회개에 관련된 진정한 작업만이 악의 제거를 가능하게 한다. 그리고 어떤 인간의 죄를 위해 또 하나의 처벌, 그 다른 것이 주님의 인간 본성일 것이라 해도 위와 같이 결과될 수 없다는 것은 확실한 일이다. 이사야서에서 말하기를, “그런데 실상 그는 우리가 앓을 병을 앓아 주었으며, 우리가 받을 고통을 겪어 주었는데, 우리는 그가 천벌을 받은 줄로만 알았고 하느님께 매를 맞아 학대받는 줄로만 여겼다. 그를 찌른 것은 우리의 반역죄요, 그를 으스러뜨린 것은 우리의 악행이었다. 그 몸에 채찍을 맞음으로 우리를 성하게 해 주었고, 그 몸에 상처를 입음으로 우리의 병을 고쳐주었다” (43:4,5). 인간을 구속해 주고자 주님께서 고통을 받으셨던 것은 진정한 것이다. 그러나 그분의 고통이나 죽음이 악인이나 악령, 또는 아버지(Father)에 의해 그분에게 가해진 벌이라고 말하는 것은 진정한 것이 아니다. 거듭 말하건대, 참으로 그것은 아니다. 그 반대로 그것은 그분이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셨기” (요한 3:16) 때문이었다. 그분은 어둠의 모든 권세와 맞서시고, 자연적인 것, 물질적인 것에 해당되는 고통을 견뎌내심으로 그분의 인간 본성 측면이 종속되어졌다. 이렇게 그분이 하신 것은 인간이 선과 악 사이에서 완전한 자유를 보존시키심을 수단으로 악의 절대적 우세함에서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서였다. 이러므로 가장 광대한 의미에서 신성한 사랑은 인간으로부터 악을 제거하는 수단으로 인간을 위해 덮개, 또는 보상이 되었고, 지금도 그러하다. 그 이유가 인간에게 주어진 완전한 자유를 악이 강취하려드는데서 구속의 일을 수단으로 인간의 이 자유가 보존되는 바, 이런 견지에서 죄가 덮어진다던가, 제거된다는 것, 따라서 죄가 감추여 놓여 있거나 침묵 속에 들어가 있는 것뿐이다. 또 하나 각 개인의 측면에서 가장 광대한 의미에서 진정한 것은, 주님께서 인간의 자유를 절대적으로 보존하시는 한편, 어머니 쪽에서 유전된 악에 빠지려는 경향성을 추방하시고, 그분의 인간이 신성이 되셨음에도 인간의 악은 인간과 더불어 영원히 남아 있고, 인간이 거듭 나아가면서 각자 속에 있는 선들의 세력이 우세함으로서 인간의 악은 단지 그 선들로 덮여 있거나 침묵의 상태에 있어 그 악이 그 인간을 곤란에 빠트리거나 돌출 하려드는 것이 중단되어 있을 뿐이다. 이상으로부터 4절에서 의미되는 것, 여타 말씀에서 언급되는 덮개 또는 보상, 보상이 보편적으로든, 특수 측면에서이든 공히 무엇을 의미할 것인지 알았으리라 본다 (고린도후 5:18,19 참조).
둘째로 살펴볼 것은, 어떻게 이 보상(atonement)이 분노를 가라앉히게 할 수 있을까? 그리고 주님 안에 분노가 있다라든가, 이 분노가 인간의 고통으로 인해 가라 앉혀질 거라고 생각할 수 있을까? 이다. 그 이유는 무한하게 완전한 주님이 분노하실 리 없는 것은 말라기 3장 6절을 읽어보면 알게 된다. 즉 “나는 여호와라, 나는 변하지 않는다. 너희를 여전히 야곱의 후손으로 대접하리라.” 그런데 신명기 32장 35절에서는, “복수는 나의 것, 대갚음한다.” 우리는 인간을 위해 설비된 주님의 자비, 설사 그 자비가 고통이나 처벌의 허용으로 나타날 경우까지 포함해서 주님의 자비를 이해해야 한다. 그리고 성냄, 분노, 그리고 복수 등등이 주님의 탓으로 돌리고 있는 말씀 안에 있는 진리의 가상(appearance)까지 이해해두어야 한다. 말씀의 외관(appearance)에 나타난 언어들, 분노는 인간이 주님을 싫어하는 것, 또는 개인이라는 측면으로 보면 외적 인간이 내적 인간을 혐오하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 혐오가 분노라는 외관을 띄는 것이다. 그러므로 분노가 보상으로 달래지는 방법은 신성한 사랑과 조화를 이루는 쪽으로 인간이 다가서야 하고, 외적 인간이 내적 인간과 조화를 이루어야 하며, 사랑의 원리로 악을 거절하고, 동시에 선을 보상으로 받아 선과 교통하는 방법 뿐이다.
셋째로 살펴볼 것은, 이 절이나 여타 말씀의 다른 문단에서 언급되는 보상을 수단으로 어떻게 재난이 피해질 수 있을까? 이다. 이 문제는 피해를 생산해내는 것이 악의 참 본성이고, 그 반대의 혜택을 주는 것이 선이라고 하는 간단한 생각만으로도 쉽게 이해될 수 있다. 재난은 사악한 자를 덮칠 것이고, 선을 받음으로 피해질 수 있다. 만일 우리가 소를 바치는 태워 바침이 명시하는 선의 종류에 이 원리를 응용한다면, 인간이 자연적 애착들을 바쳐 주님이 그들에게 주시게 된 능력들을 단지 이기적이고 세상적인 목적에 충당한다면, 그들은 그 행위에 반드시 재난이 수반됨을 예상해야 한다. 그리고 그들이 이 구절들의 내적 의미에 의거 주님에게 자신들의 애착을 헌신할 때, 외적인 것이 내적 인간과 결합함을 통해 이런 저런 재난들은 한 쪽으로 비켜지고, 동시에 주님과의 결합을 가지게 될 것이다. 다음 구절에서, 그리고 레위기서 다른 장에서도 이에 대한 예증은 풍부하게 있다.

5절. 그리고 그는 주님 앞에서 수소를 죽여라. 그리고 성직자인 아론의 아들들은 피를 넘겨받아 만남의 천막의 문에 있는 제단 주위에 뿌려라.

영적 의미

더욱이, 위와 같은 자연적 애착은 주님을 예배하기 위해서 자아부정을 수단으로 준비되어야 한다, 그리고 선으로부터 파생되는 진리들과 그 선과 결합함이 있어야하며 선행은 외적으로나 내적으로나 주님으로부터임을 인정해서 천국에 입장되는 허가를 얻어야 한다.

세부적 영적 의미

수소(bullock)를 죽임은 자아를 부정함으로 준비함을 표시하는데, 그 이유는 주님을 예배함은 자연적 인간 안에 있는 순진의 선으로부터 있어지기 때문이다; 성직자인 아론의 아들들이란 선으로부터 파생된 진리와 그것에 따른 결합을; 피를 넘겨 줌은 선행(charity)이 주님으로부터임을 인정하는 것을; 제단 주변에 피를 뿌림은 내적으로, 외적으로 진리와 선의 결합을; 만남의 천막의 문이란 천국에의 입장을 허가 받기 위하여를 표시하고 있다. (A.C 10024, 9990, 9946, 10027, 1001, 10047, 2356, 3540-3)
이 절에서는 제물로 바쳐지는 동물을 죽이는데 함유된 이중적인 의미들에 주목해 보면 흥미가 있게 될 것이다. 한 가지 의미는, 낡은 것, 또는 단지 자연적 삶 뿐인 것을 거절하는 것이다. 그 이유가 거듭나는 과정에서 우리는 “옛 생활을 청산하여 낡은 인간을 벗어 버려야 한다” (골로새 3:9). 그리고 “새 인간으로 갈아 입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제물이 된 동물은 두 가지 면에서 상응을 가지고 있다. 우선적으로 이 동물은 새롭고 더 높은 삶을 표시한다. 그 이유는 더 높은 삶 만이 주님께 바쳐질 수 있는 삶이기 때문이다. 이와 관계되는 측면에서 볼 때, 이 동물은 완전한 삶이 수용되도록 준비하려면 반드시 낡고 낮은 삶이 거절되어야 하는 것도 의미한다. 즉 죄짓는 영혼은 선한 것을 날마다 계속적으로 거절함으로 죽게 될 것이고, 회개하는 영혼은 악한 것의 거절로 자기 속의 악한 것이 날마다 죽게 될 것이다 (에스겔 18:20, 고린도 전 15:21). 이것은 자아 부정을 꾸준히 연습하는 인간 자신의 협동을 빼놓고는 있어질 수 없는 일들이다. 더불어 생각해 볼 것은, 말씀의 필수인 진리가 어떻게 선으로부터 파생되는지가 아론의 아들들로 표현되고 있는데, 이는 거듭남의 일에서 있어진다. 즉 어떻게 이런 진리들이 선으로부터 능력을 가지며, 어떻게 선행이 인정되고 선과 진리는 천국 삶의 달성을 위해 꼭 결합되어야 할 것 등등이다.

6절. 그리고 그는 태워 바치는 제물의 가죽을 벗겨라, 그리고 그것을 조각들로 자르라.

영적 의미

위의 자연적 애착으로부터 모든 거짓은 분리되어야 한다, 그리고 애착에 관계된 진리들은 자기들의 선 아래 주님에 의해 순서대로 서로 구분되게 배열되어야 한다.

세부적 영적 의미

제물의 껍질을 벗김, 또는 가죽을 벗김은 최 말단에 있는 거짓이 분리됨을 표시한다; 그리고 동물을 여러 조각을 낸다는 것은 선 밑에 진리들을 순서대로 배열한다는 것, 또는 상급의 선 다음에 하급의 선을 차례대로 배열한다는 말이다. (A.C. 10036, 10048.)
여기서 특별히 관찰해 볼 것은, 인간의 거듭나는 일에 관해 언급하는데 불필요한 동물에 대해서는 어떤 방향 제시가 없다는 점이다. 이런 제시가 천국으로부터 밝히 알려줄 필요가 있을 거라고는 누구도 상상하지도 않을 것이다. 언급되지 않는 동물은 예배의 바깥쪽 행동으로서만 그 중요성이 있을 뿐이다. 바깥쪽 행동으로 만의 예배는 주님께서 바래시지 않는다 (시편 40:6-8 참조). 주님이 바라신다면 아주 적은 양 일 뿐이다. 그럼에도 예배 행사 속의 각기 특별한 사항들은 진정한 영적 예배, 그리고 진정한 천국 삶의 불가피한 요소들을 의미하거나 표현하도록 의도해 놓으셨다. 거짓들을 확실히 제거하면서 선하고 참된 애착들을 질서 있게 배열하는 것이 작은 일이라고 생각되면 큰 착각이다. 이 일은 주님만의 일이다. 인간이 협력하는 동안 우리 속에서 실지로 주님만이 이것이든 저것이든 하실 수 있을 뿐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자신이 해내 보려고 신실하게 노력하기도 하지만, 언제나 헛된 일인 듯 여겨지기만 한다. 우리들 중 누구도, “내 행동은 실수하고는 거리가 멀어, 나는 마음 속으로나, 밖으로나 완전해” 라고 말할 자는 없을 것이다. 자신이 잘못 투성이라는 것에 대해 자신 스스로 보증하면 풀이 꺾여 그 자리에 주저앉을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비록 불완전으로 점철된 우리의 노력이지만 결국 성공이라는 관을 쓰게 될 것이다. 각자의 하루 속의 일들이 거듭남이라는 목적을 위해 어떻게 기여하는지를 알 수 없다면 오히려 말씀으로부터 어떻게, 왜…등등을 알고 위로 받게 될 것이다. 즉 시련의 상태를 통과하는 동안 우리 속의 “밀”과 “가라지”는 함께 성장한다 (마태 13:30). 우리는 우리 속의 밀과 가라지가 어떻게 되어 가는지 진실로 알 수 없다. 때로 그 성장은 우리가 느끼고 생각한 것 이상으로 더 나을는지 모르고, 때로 그 반대일 수도 있다. 한가지 확실한 것은 각자의 일상 생활, 매일의 업무를 조심과 근면을 가지고 처리해 가는 것이다. 그래서 만일 우리가 거듭남이라는 목적지에 도달할 때까지 잘 견뎌낸다면, 우리는 구원되어질 것이다. 적절한 때가 오면, “가라지”는 사라지고, “밀”은 곳간에 쌓아질 것이다. 그러면 우리의 모든 상태는 질서 있게 배열될 것이다. 우리 자신과 근사한 이들과 연합하는 것도 정당하고 진정하게 이루어질 것이다. 우리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가 온전하신 것같이 비록 각자 수준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각자 나름대로 온전해진 만큼에서 제자리를 차지하게 되리라.

7절. 그리고 성직자 아론의 아들들은 제단 위에 불을 놓아라, 그리고 불 위에 장작을 질서있게 놓아라.

영적 의미

또한 선과 결합되고, 선에서 파생된 진리를 수단으로 주님이 예배되어지되 사랑으로부터 있어야 한다. 동시에 그 예배는 본인으로부터 행해진 듯, 즉 예배를 드리게 된 공적이 자기에게 있는 듯 여겨져야 한다.

세부적 영적 의미

아론의 아들들(후손들, 혈통)은 선에서 파생된 진리와 이 진리가 선과 결합함을 표현한다; 불은 사랑을 의미한다; 제단은 신성한 선, 또는 사랑(Love) 측면에서 주님을 예배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장작은 공적(merit)에 있는 선들을 의미한다. A.C. 9946, 934, 9964, 2784.

8절. 그리고 아론의 아들들, 성직자는 (고기)조각들, 머리, 그리고 지방을 제단 위, 불에 있는 장작 위에 질서 있게 놓아라.

영적 의미

더불어 선에서 파생되고, 그 선과 결합한 진리들은 완전하게 배열되어야하고, 그 진리와 선은 서로 구분되어지게 하며, 주님을 예배함 속에서 공적(merit) 속에 든 선과 사랑 속에 든 선도 구분이 있어야 한다.

세부적 영적 의미

아론의 아들들, 성직자란 선으로부터 파생된 진리가 선과 결합하는 것을 표시해 놓고 있다. 조각낸 고기를 질서있게 놓는 것은 신성한 질서(순서)에 따라 선과 진리들을 따로 따로 구분하여 배열함을 표시해놓고 있다. 머리란 가장 깊은 것, 특별히 진리 측면에서 가장 깊은 것을; 지방(fat)은 선의 측면에서 가장 깊은 것을; 장작은 공적에 있는 선, 또는 공적을 요구하려드는 경향성이 내포된 인간의 행동을; 불이란 주님을 사랑함을; 제단은 예배를 나타내고 있다. A.C. 9946, 10048, 10033, 2784, 9964.

9절. 그러나 그는 그것의 내장들과 다리들을 물로 씻어라. 그리고 성직자가 제단에서 태워라, 그 이유가 태워 바침은 불로 만든 달콤한 향기를 주님에게 바침이기 때문이다.

영적 의미

그러나 감각적인 느낌과 생각은 그것이 밖에 나타난 것(exterior)이든, 속에 들어 있는 것이든(interior), 회개라는 작업에서 진리를 응용함으로 깨끗해져야 한다, 그러면 자연적 인간 전체는 순수한 사랑으로, 또는 선으로부터 오는 예배에서 주님께 봉헌될 수 있다. 이 봉헌은 주님께서 받으실 수 있고, 당사자에게는 천국의 평화와 쉼이 생산되게 해준다

세부적 영적 의미

내장(intestine)이란 영체에서 가장 낮은 것들, 즉 영적 인간의 외면에 해당되는 것인 감각적인 느낌들과 생각들을; 다리는 육체에서 낮은 것들 그러므로 자연적 인간에게는 내면에 해당되는 감각적인 느낌과 생각들을; 씻는다는 것은 순수해짐, 깨끗하게 함을; 제단 위에서 제물을 사른다는 것은 순수한 사랑으로부터 주님께 자연적 인간 전체를 바치는 것을; 불로 이루어지는 제물은 순수한 사랑으로 예배함을; 달콤한 향기를 주님에게 바침이란 기뻐하시어 받아 주시는 것, 천국적인 쉼과 평화가 생산됨을 각기 나타내고 있다. A.C. 10049, 10050, 3147, 10052, 10055, 10054.
이 절의 글자 의미로부터서도 분명한 것은, 각 절의 세부 사항들은 위에서 살핀 바대로의 증거들과 같은 의미를 포함하고 있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계발된 신앙이 방향을 정해주면서 사랑이 원동력이 되어 주님께 순종하는 완전한 삶만이 진실된 예배일 뿐, 그 외의 예배는 주님을 기쁘시게 해드릴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시점에서 우리가 상기해보아야 할 것은, 말씀의 내적 의미(internal sense)는 거듭나는 인간과 관계가 있고, 가장 깊은 뜻(supreme sense)은 주님의 신성이 되심과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 이에 대해서는 본 주석에서 명확히 보여주게 될 것이다. 위 두 가지를 좀 더 특별히 살펴보자. 주님의 신성이 되심이 인간(Human)과 신성(Divine)이 하나되는 것이듯, 인간의 거듭남은 외적인 것이 내적인 것과 결합하는 것을 말한다. 주님께 인간 전체를 바친다는 말은 수소(bullock)로 의미되는 자연적 인간 뿐만 아니라 수양(ram)으로 의미되는 영적 인간 모두를 헌신해야 한다.

10절. 그리고 만일 그의 봉헌이 양떼로부터, 양으로부터, 또는 염소들로부터 태워 바침이다면, 그는 그것을 흠이 없는 수컷으로 바쳐라.

영적 의미

다시, 만일 주님을 예배함이 영적 애착으로부터, 즉 선행으로부터 이든, 선행의 신앙으로부터이든, 영적 인간이 통째로 주님께 봉헌되어야하고, 이 봉헌은 악에서 순수해진 진리들을 수단으로 있어야 한다.

세부적 영적 의미

양떼에 속하는 동물은 영적 애착을 표현하는데, 그 중 양은 선행을; 염소는 선행으로부터의 신앙을; 태워 바침이란 충만된 헌신, 또는 주님께 거룩해지도록 바침을; 수컷은 진리를; 흠이 없음은 악으로부터 순수해짐을 나타내고 있다. A.C. 5913, 6126, 2776, 725, 7837.

11절. 그리고 그는 그것을 주님 앞의 북쪽 방향의 제단 측면에서 죽여라. 그리고 아론의 아들들, 성직자들은 그것의 피를 제단 빙둘러 뿌려라.

영적 의미

그리고 이와 같은 영적 애착은 그 용도를 위해 채택한 진리들로 예배가 준비되어져야 한다. 그런 다음 선에서 파생된 진리, 선과 결합된 진리에 의거 거룩한 선행은 주님으로부터 있게 되었음을 인정하여 그분과의 결합이 촉진되게 해야한다.

세부적 영적 의미

이것은 동물을 죽인다는 의미가 영적 예배를 위한 준비를 나타낸다는 것으로부터 보여지고 있다. 그리고 제단 북쪽이란 예배 준비를 위해 채택되는 진리를; 아론의 혈통을 이어 받은 성직자란 선으로부터 파생된 진리가 그 선과 결합하는 것을; 제단 주변에 피를 뿌린다는 것은 진리가 선과 결합됨, 그런고로 영적 선과 선행이 주님으로부터 있음을 인정함을 각각 말해주고 있다. A.C. 10024, 4169, 9499, 9648, 9946.

12절. 그리고 그는 그것을 그것의 머리와 지방들과 더불어 조각되게 자를 것이다. 그리고 성직자는 그것들을 제단 위 장작에 질서있게 놓아라.

영적 의미

또한 진리의 적절한 배열이 거행되어야 한다, 진리는 선으로부터 실지로 구별되어야 하고, 공적의 선도 주님을 순수하게 예배하는 가운데 사랑의 선과 구별되게 해야한다.

세부적 영적 의미

고기를 여러 조각으로 만드는 것은 선 밑에 진리를 배열함, 또는 상급의 선 아래 하급의 선들을 배열시키는 것을; 머리란 진리 측면에서 가장 깊은 것을; 지방이란 선의 측면에서 가장 깊은 것을; 고기를 차려 놓는다는 것은 상급 아래에 하급들을 순서대로 실제 배열하는 것을; 그 반면 고기를 조각내는 것은 실제 배열을 위해 준비하는 것을; 장작은 공적의 선을; 불은 사랑을; 제단은 예배를 각각 말하고 있다. A.C. 10048, 10033, 10048, 2784, 9964.

13절. 그러나 그는 내장들과 다리들을 물로 씻어라. 그리고 성직자는 통째로 바쳐라, 그리고 그것을 제단 위에서 태워라. 이것은 불로 만든 달콤한 향기를 주님에게 바침이다.

영적 의미

그리고 감각적인 느낌들이나 생각들은 그것이 속에 든 것이든 밖에 나타난 것이든 회개라는 일에 진리를 응용해서 깨끗해져야 한다. 그런 다음 영적 인간을 통째로 주님께 바치되 순수한 사랑, 또는 선으로부터 있어져야 한다. 이 바침은 주님이 기뻐 받으실 수 있어 천국의 쉼과 평화를 생산한다.

세부적 영적 의미

이 절에서 다시, 내장들은 가장 낮은 것, 즉 영체의 외면에 해당되는 감각적 느낌들과 생각들을; 다리는 자연적 인간에 소속된 외면들을, 고로 육체에게는 내면이 되는 감각적 느낌들과 생각들을; 물에 씻는다는 것은 순수해짐을; 제단 위에서 제물을 사른다는 것은 순수한 사랑으로부터 온 예배로 주님께 영적 인간 전체를 바치는 것을; 불로 만든 제물(태워 바침)은 순수한 사랑으로부터 온 예배를; 주님에게 달콤한 향기를 풍긴다는 것은 즐거이 받으시는 것, 즉 천국적인 쉼과 평화가 생산됨을 각각 말해주고 있다. A.C. 10049, 10050, 3147, 10052, 10055, 10054.

14절. 그리고 만일 주님에 대한 그의 제물이 가금류들로부터의 태워 바침이다면, 그 다음 그는 그의 제물을 호도애로부터, 또는 어린 비둘기로부터 바쳐라.

영적 의미

그리고 셋째로, 만일 주님을 예배함이 이해함으로부터 있게 된다면 그 예배는 신앙의 진리나 선으로부터 있어야한다.

세부적 영적 의미

위에 대한 사항들은 새가 신앙 또는 진리에 관계되는 영적인 것들, 고로 이해함에 관계되는 영적인 것들을; 호도애나 어린 비둘기는 외면에 있는 것과 내면에 있는 것에 관한 것들, 관계적으로 볼 때 선과 진리를; 두 비둘기로 표시되어지는 예배의 상태에는 순진이 포함되어져야 함도 의미하고 있다. A.C. 1826, 1827, 10132.

15절. 그리고 성직자는 그것을 제단으로 가져오라, 그리고 그것의 목을 비틀고, 그리고 그것을 제단에서 태워라. 그리고 그것으로부터의 피는 제단 측면에서 흘려라.

영적 의미

이런 경우 이 예배는 선 자체로부터가 아닌 선을 원리로 해서 있게 되지만, 이것도 신성한 사랑이 유입됨으로 성결되어지며, 그리고 선행 역시 주님으로부터 있게 됨을 인정하나 오로지 외적 방법에서만 인정할 뿐이다.

세부적 영적 의미

위의 사항은 이어지는 15절에서 명확히 보여진다. 즉 성직자가 제단에 제물을 가져오는 것은 선으로부터 주님을 예배하는 것을, 이 경우의 선으로부터라는 말은 실제의 선으로부터가 아닌 선, 즉 생활의 원리로서 채택된 이론상의 선을 말하는데, 그 이유가 새는 이해함 속에 있는 것을 표현하기 때문이다. 목을 비튼 이유는 이해함만으로, 또는 선 만으로의 원리로부터 예배하는 것은 주님과 항구적으로 결합하지 못한다는 것을 말한다. 그럼에도 새의 머리도 제단 위에서 사르라는 것은 신성한 사랑의 영향을 받으면 그 예배도 신성하게 될 수 있다는 말이다. 제단 측면에서 피를 흘린다는 것은 선행이 주님으로부터 있어짐을 인정은 하되 외적인 방법으로만 인정함을 말한다. A.C. 9946, 1826, 8079, 10052, 1001, 10227, 9648, 9499.

16절. 그리고 그는 오물을 가진 멀떠구니(crop)를 가지고 가라, 그리고 그것을 제단 동쪽 부분에서 벗어나, 재가 있는 장소에 던져라.

영적 의미

또한 거짓과 악은 위와 같은 예배로부터 분리되어져야 하고, 그것들이 이기적인 사랑으로부터 발출되어 삶의 최말단까지도 더럽히게 되므로 단죄해야한다.

세부적 영적 의미

오물을 가진 멀떠구니를 함께 떼어버리라는 것은 이해만으로 드리는 예배로부터서도 악과 거짓은 분리되어야 하는 것을 의미하고, 제단 동쪽에서 떨어져 있는 재들의 장소에 던져라는 것은 악과 거짓을 거절함을 의미한다. 그 이유가 버린다는 것은 거절함, 또는 끝장을 보는 것을 표시하기 때문이다. 제단을 벗어나는 쪽(beside the altar)이란 예배와의 어떤 연결로부터, 동쪽은 선을 말하나 이 구절의 경우, 반대 의미를 나타내므로 악을 말한다. 그래서 잿더미(the place of the ashes)란 거짓이 악과 손잡고 있는 상태를; 재는 거짓을; 동쪽은 악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는 자아 사랑과 최 말단의 더러움으로부터 온 저주의 상태이다. A.C. 4883, 5174, 2637, 9964, 7679, 7519, 9723.

17절. 그리고 그는 그것을 날개들을 수단으로 찢어라, 그러나 그것을 따로따로가 되게 나누지 말라. 그리고 성직자는 제단 위, 불 위에 있는 장작 위에서 태워라. 이것은 불로 달콤한 향기를 만들어 주님께 바치는 태워 바침이다.

영적 의미

위와 같은 예배에는 주님과의 상응이나 유사성이 없다. 오로지 주님을 인정함과 신앙의 힘을 통해 있게 되는 예배를 위한 준비일 뿐이다. 그럼에도 이 예배 역시 주님이 받으시고, 그분께 바쳐져야 하는바, 공적의 선은 사랑의 선으로부터 구별되어야한다.

세부적 영적 의미

위의 사항들은 이 절을 살피면서 알게 되리라 본다. 두 날개를 잡고 아주 떨어지지 않게 몸통을 찢어 놓는다는 것은 위와 같은 예배에는 주님과 상응되는 것도, 유사한 것도 없고, 오로지 준비하는 것으로 그치고 있다는 것을 말한다. 그 이유는 동물을 죽이는 것처럼 새를 찢는다는 것도 새를 제물로 준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더불어 고통이나 시험은 진리를 뒤집는다거나, 잘못 이해하는 가운데 악을 탐닉하게 되어 야기되기도 한다는 것도 말해주고 있다. 이에 대하여는 아래에서 계속 살펴본다. 날개를 수단으로 새를 찢는다는 것은 신앙의 힘이 악에게 방법을 알려주므로서 그 힘이 상대적으로 약화되어지는 것, 그러나 주님을 인정하면서 악에 저항함을 통해 시험을 극복함으로 신앙의 힘은 강해진다는 것을 말한다. 선의 원리, 즉 선을 이해하는 것만 가지고는 주님께 대한 어떤 진정한 예배도 드릴 수 없는 바, 진실된 선, 즉 선 만을 진실로 사랑함 만이 주님과 상응관계를 가질 수 있고 외적 인간을 내적 인간과 조화를 이루게 한다. 그럼에도 주님께서는 불완전한 예배도 수락하시는데, 그 이유는 그 예배가 순수한 영적 헌신이 가능한 쪽으로 유도해 주기 때문이다. 이런 연유로 제물을 사른다는 것은 주님과의 결합, 신앙이 선행과 결합하는 것을 표현하고 있다. 장작이란 주님을 사랑함이 인간 제 스스로에서 발상된 행동인 듯 여기는 것을 말하고, 주님께 향기를 풍긴다는 것은 예배를 수락하시는 것, 천국적인 휴식과 평화가 생산되는 것을 말한다. 이리하여 불완전한 예배도 당사자의 아주 깊숙이 존재하는 사랑 또는 선이 우세해지는 상태를 수단으로 거룩해지도록 바쳐질 수 있다. A.C. 1832, 4171, 8764, 1832, 10052, 934, 2784.

1장의 종합적 고찰

이제 제 1장을 간략히 정리해 보자. 본 장의 주제는 주님에 관한 예배이다. 이 예배는 자연적 애착과 영적 애착이 한데 묶여 있어야만 한다. 시간적으로 볼 때, 자연적 애착으로부터 예배가 있게 되고, 둘째로 영적 애착으로부터, 셋째로는 똑같은 애착들이 더 낮은 평면에서도 있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내적 의미가 먼저 서술하는 것은, 자연적 예배와 영적 예배는 한데 묶여져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거듭남 속에서의 주님의 작용은 가장 깊은 곳에서부터 영적 수준을 통하여 자연적 수준으로까지 이어지기 때문이다. 그 다음 내적 의미가 서술하는 것은, 자연적 예배와 영적 예배는 연속적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인간의 경험이 쌓여감에 따라, 그는 삶의 자연적 수준에서 시작하여 후에 영적 수준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연적 인간 (또는 영적 인간)은 내적 인간과 외적 인간으로 되어 있는 고로 외적 인간, 즉 의식되는 자연적 수준에서 먼저 예배가 있게 되고 후에 영적 예배가 있어진다.
그 다음 우리는 주님을 진정으로 예배하는데 따른 요구 사항들을 배운다. 이를 넓은 측면에서 생각해 본다면 각각 다른 수준에서 같은 것이 존재함을 알 수 있다. 첫 필수요건은 대단히 중요하다. 그것은 진리가 있어야만 하고 순수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사실상, 진리들은 인간의 불순함을 자연스럽게 폭로시켜준다. 그러면 회개라는 일을 수단으로 순수해짐이 오게 된다. 그러나 이 두 단계는 그 자체만으로는 충분치 못하다. 반드시 주님과 주님이 천국을 통하여 역사 하신다는 것을 신실하게 인정함으로 주님과의 결합이 있어져야만 한다. 이 과정 후 뒤따라오는 것은, 주님으로부터 외적 인간에 내적 인간이 강하게 작용토록 주님이 역사하시어 두 인간은 서로 동의하여 재회하게 된다. 재회한 인간을 주님이 기뻐 받으신다고 본문에서 말해지고 있다. 그 이유는 내적 인간에게서 분리되어 있는 외적 인간만의 예배는 진정한 상태가 못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두 인간 상태가 동시에 예배되기 위해서는 준비 과정이 필요하다. 이것은 썩은 옛 생활을 거절함으로 가능해지고, 이 거절함은 선과 진리가 더 두드러지게 나타나도록 반사 작용까지 해준다. 이 준비 작업에는 주목해야 할 독특한 것이 있다. 그것은 영적 예배를 위한 준비와 자연적 예배를 위한 준비는 서로가 구별되고 있다는 점이다. 즉 1절에 있는 “제단 북쪽”이라는 서술이 5절에서는 각 목적을 위해 응용된 진리로 있어진다고 말해짐으로 요구되는 사항이 아닐까라는 생각은 사려 깊게 공부하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필시 떠오르고야 만다. 이 말이 왜 11절에서 나타나는지를 우리는 고려해 보아야 한다. 그 이유는, 우리의 예배가 더 내면에서 존재하면 할수록 그 예배는 계발된 마음으로부터, 또는 사랑 있는 심정으로부터 있어지기 때문이다. 영적 인간은 자연적 인간보다 더 명확하게 진리를 본다. 그렇다해도 예배를 위한 준비는 예배 자체만으로 비교해볼 때 희미함 그 이상으로는 결코 존재할 수는 없다. 그런고로 해서 희미함(북쪽)이 거론되는 것이다. 예배를 표현한 동물이 제단 “북쪽”에서 죽여졌는데, “북쪽”은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진리 측면에서의 희미함을 말한다.
우리는 진정한 예배를 위해 요구되는 세 가지를 배워야 할 것이다. 악과 거짓이 심정과 이해함, 그리고 생활에서 제거되어야 한다. 그 다음 주님을 섬기는데 주저함이 없이 자연적 인간이 통째로 헌신되도록 모든 감각적인 느낌이나 생각들을 완전히 순수해지게 함과 더불어 인간의 능력 모두가 주님에 의해 질서있게 따로 따로 정열되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애착에 발생된 위의 것들은 본 장 마지막 문단에서 묘사된 바 같이 지적 능력에도 발생되어야만 한다. 각 문단마다 정확히 같게 음미되는 상징성이 반복되고 있지만, 각 수준에 있게되는 주된 진리는 의지에 이해함이 종속되어야 한다는 것, 또는 외적인 것들은 내적인 것에 종속되어 드러나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해만으로, 또는 신앙만을 통해서는 주님과의 결합은 불가능한 바, 이해함은 반드시 종속되어야 한다는 것, 더불어, 의를 행하고, 자비를 사랑하며 하느님과 더불어 겸손히 살아가는 진정한 삶과 예배가 완전하게 조화를 이루어야 할 것이다 (미가 6:8 참조).
******************************************************

레위기 2장

성경: 레위기 1장

1.그리고 어떤 사람이 주님에게 식사 제물을 바칠 경우 그의 봉헌은 고운 곡식 가루 이다. 그리고 그는 그것 위에 기름을 부어라, 그리고 그 안에 유향을 놓아라.
2. 그리고 그는 그것을 성직자인 아론의 아들들에게 가져오너라. 그리고 그 즉시 그는 거기로부터 고운 곡식 가루 한웅큼을, 그리고 거기로부터 기름을, 거기로부터 모든 유향을 가져 가라. 그리고 성직자는 (그것을) 그것으로부터 기념물로 제단 위에서 태워라. 이는 주님께 달콤한 맛을 불로 만들어 바침이다.
3. 그리고 식사 제물의 남은 것은 아론과 그의 아들들의 것이 된다. 이것은 불로 만든 주님에 대한 제물에서 가장 거룩한 것이다.
4. 그리고 네가 오븐에서 구워낸 식사 제물의 봉헌을 바칠 경우, 그것은 기름과 혼합한 고운 곡식 가루로부터의 누룩 없는 과자, 또는 기름을 바른 누룩 없는 속 빈 과자(wafer) 이다.
5. 그리고 만일 너희 봉헌이 굽기 위한 납작한 냄비(pan)로부터의 식사 제물이다면, 그것은 기름과 혼합한 누룩 없는 고운 가루로부터 이다.
6. 너는 그것을 조각들로 나누어라, 그리고 그 위에 기름을 부어라. 이것이 식사 제물이다.
7. 그리고 만일 너의 봉헌이 튀기기 위한 납작한 냄비로부터의 식사 제물이다면, 그것은 기름과 더불은 고운 곡식 가루로부터 만들어라.
8. 그리고 너는 이런 것들로 만들어진 식사 제물을 주님에게 가져 오너라. 그리고 이것은 성직자에게 넘겨져야 한다. 그리고 그가 그것을 제단으로 가져 오너라.
9. 그리고 성직자는 그것으로부터의 기념물이 되는 식사 제물을 가져올 것이다. 이것은 불로 만든 달콤한 향기를 주님께 바침이다.
10. 그리고 식사 제물의 남은 것은 아론과 그의 아들들의 것이다. 이것은 불로 만들어 주님께 바침의 가장 거룩한 것이다.
11. 주님께 바칠 식사 제물은 누룩과 더불어 만들지 말라. 그 이유가 주님께 불로 만드는 바침에서 너희는 누룩, 어떤 꿀도 태워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12. 첫 열매들로부터의 봉헌으로서 너희는 그것들을 주님에게 바쳐라. 그러나 그들은 달콤한 향기를 위해 제단에 오르지 못한다.
13. 그리고 너는 너희의 식사 제물로부터의 모든 제물을 소금을 가지고 간을 맞추어라. 너는 네 식사 제물로부터 하느님의 언약의 소금이 빠지는 것을 내버려두지 말라. 모든 너희 제물과 더불어 너는 소금을 바쳐라.
14. 그리고 만일 첫 열매들로부터의 식사 제물을 주님에게 바친다면, 너는 식사 제물로서 불에 볶은 이삭에 있는 곡식, 새로운 이삭으로부터 두드려진 곡식을 바쳐라.
15. 그리고 너는 그것 위에 기름을 놓아라, 그리고 거기 위에 유향을 놓아라. 이것이 식사 제물이다.
16. 그리고 성직자는 그것으로부터의 기념물을 태우는데, 그것의 두드려진 곡식의 일부, 그리고 그것의 기름의 일부, 그것의 모든 유향과 더불어 태워라. 이것은 주님께 불로 만든 바침이다.

영적 의미 요약

* 가장 높은 수준인 천적 사랑으로부터 주님을 예배함이 묘사되어있다. (1-3절)
* 그 다음, 내면의 천적 사랑 또는 이웃에 대한 선행으로부터의 예배가 묘사된다. 그리하여 가장 높은 천적인 선 즉 주님을 순수하게 사랑하는 것과 가장 낮은 것이 어떻게 연결을 이루는가를 보여주고 있다. (4절)
* 자연의 내적 부분(Internal of Natural)에 있는 천적인 선으로부터 예배에 관해 위와 비슷한 묘사가 이어지면서 가장 깊은 측면인 천적인 선의 유입에 관해서, 거기에 있는 진리들의 배열에 관한 서술이 동반되고 있다. (5-6절)
* 마지막으로, 자연으로부터의 외적 부분(External Natural)이 묘사되는데, 그것이 보다 높은 사랑으로부터 오는 예배와 비슷하지만, 그것은 보다 낮은 수준 속에 존재한다. (7절)
* 그런 다음, 모든 수준과 방법에 놓인 천적인 예배에는 다음과 같은 특별사항들을 포함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즉, 예배할 수 있는 힘은 주님만으로부터 기인된다; 이 힘은 그분으로부터 파생된 아주 깊은 부분인 천적인 선으로부터 있어짐을 인정해야 한다. 이 힘은 그분으로부터 오는 훈련(excercise)이라는 것; 더불어 예배자는 진리가 선과 결합하는 것이 마치 자신에게서 있어진 줄로 실감하게 된다는 것; 그는 주님을 섬기는데 자기 삶을 헌신할 수 있게 된다는 것; 그는 천국의 기쁨과 평화를 체험할 것이다는 것; 그는 선과 진리를 자기 것이 되게 할 수 있으리라는 것; 그래서 그는 순수한 사랑으로부터 주님을 예배하게 될 것이다. (8-10절).
* 다시 주님에 대한 이 예배는 거짓으로부터 자유로워 있어야 한다는 것; 단지 자연적 기쁨만 가짐으로 해서 이 예배의 가치를 손상시켜서는 안 된다는 것, 자연적 기쁨만 있는 불완전한 예배는 예배를 준비하는 상태에 국한된 것이라는 것; 모든 예배에는 진리가 선을, 선이 진리를 바래는 상호적이어야 한다는 것, 다시 말해서 진리를 실지로 사랑하는 사람은 동시에 선해지기를 바래야 할 것이고, 선해지기를 진실로 바래는 사람은 동시에 진리도 갈망해야 한다. (11-13절)
* 또한 이와 같은 예배가 있는 동안, 또는 준비하는 상태들은 자연적인 선으로부터 있어져야 하고, 천적인 선으로 감화되어진 진리, 그리고 주님을 진실로 인정함이 포함되어 있어야 한다. (14-16절).

각 절의 영적 의미

1절. 그리고 어떤 사람이 주님에게 식사 제물을 바칠 경우 그의 봉헌은 고운 곡식 가루 이다. 그리고 그는 그것 위에 기름을 부어라, 그리고 그 안에 유향을 놓아라.

영적 의미

주님이 천적인 사랑의 선으로부터 예배되어질 때, 그 예배는 순수한 사랑으로부터 나오는 순수한 진리로 있어져야 할 것, 그리고 진리를 지각한데 대해 감사함이 있어야 할 것이다.

세부적 영적 의미

식사 제물은 천적인 선을; 고운 곡식 가루는 선으로부터의 진리 또는 사랑으로부터의 진리를; 기름은 천적인 선을; 유향은 그것의 향내로부터 깊이 감사하게 느끼는 지각을 말하고 있다. Arcana Coelestia 4581, 9995, 2177, 9993,
제1장에서는 세 천국의 순서에 따라, 자연적인 예배와 영적인 예배를 묘사해 주었는데, 본 장에서는 천적인 예배를 묘사하고 있다. 이 셋의 구별은 의무감에서 주님께 순종하는 것, 진리를 사랑해서 주님께 순종하는 것, 선을 사랑해서 주님을 사랑하는 것으로 구분될 때와 같다. 이를 대중적인 방법으로 표현해 본다면, 예배에 있는 자연적인 선, 이는 말씀이 명령하기 때문에 신성한 질서의 법칙에 순종하여 이루어진 선이고, 영적인 선, 이웃에 대한 선행으로부터 신성한 질서의 법칙에 순종하여 생산된 선이고, 천적인 선, 이는 주님을 사랑하는고로 신성한 질서의 법에 순종하여 맺어진 선이다.

2절. 그리고 그는 그것을 성직자인 아론의 아들들에게 가져오너라. 그리고 그 즉시 그는 거기로부터 고운 곡식 가루 한웅큼을, 그리고 거기로부터 기름을, 거기로부터 모든 유향을 가져 가라. 그리고 성직자는 (그것을) 그것으로부터 기념물로 제단 위에서 태워라. 이는 주님께 달콤한 맛을 불로 만들어 바침이다.

영적 의미

그래서 이 예배는 선으로부터 온 진리에 의거 있어짐을 인정해야 할 것이고, 진리 측면에서의 힘, 진리를 흐르게 한 선의 측면에서의 힘, 모든 힘이 충만한 상태에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것들을 지각한데 대해 깊이 감사하는 것이 있어야 한다. 즉 순수한 사랑으로부터 진리와 선이 결합됨으로 자신의 심정을 주님께 봉헌하고, 예배자에게는 기쁨과 평화가 있어지게 된다.

세부적 영적 의미

아론의 아들들, 성직자란 선으로부터의 진리를; 성직자에게 가져옴이란 천적 예배는 선으로부터 온 진리로 되어진다는 것, 그리고 그렇게 된다는 것을 인정함을; 한 줌 가득 움켜쥔다는 것은 예배는 온 힘을 다해 있어져야 함을; 한 움큼을 제단에서 태운다는 것은 순수한 사랑으로부터 온 선에 진리가 결합함을 수단으로 주님께 심정을 봉헌함을; 기념물은 진리 측면에서의 예배의 품질, 또한 기억함을; 주님께 대한 달콤한 맛은 천적인 기쁨과 평화의 상태를 말하고 있다. Arcana Coelestia 9946, 10227, 7518, 10052, 6888, 10054.
위 두 절에 연결해서 특별하게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은 식사 제물에 관해 「천국의 신비, Arcana Coelestia」에서 말하는 사항들이다. 말해지는 곳은 제 4581항과 제 10079항이다. 앞 항에서는 식사 제물이 천적인 선을 의미함을 보여주고 있고, 뒤 항에서는 동물의 제물은 명령된 것이 아니라 허락하신 것, 그 이유가 동물의 제물은 주님이나 천국에서 기뻐하시는 제물이 아니기 때문이고 식사 제물이 기뻐하시는 제물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런 반면, 일반적으로 말해지는 것은, 두 제물 모두 천적인 선을 나타내고 있고, 또 한편 특별하게, 제물의 고기는 영적 선을 표시하면서, 식사 제물 속의 빵은 천적인 선을 표시하기도 한다. 이상으로 분명해지는 것은, 식사 제물은 희생 제물(sacrifices) 보다 상대적으로 더 높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천국의 신비」 제 2177항에서 다른 해석이 주어지고 있다; 희생 제물과 식사 제물은 비슷한 것을 표현하지만, 식사 제물의 경우는 등차가 더 낮은 듯 표현되고 있다. 그 결과 외적인 교회에 속해 있는 것과 영적 교회에 속해 있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 이런 사항들로부터 생각해보면, 식사 제물은 관계적으로 볼 때 희생 제물 보다 수준이 더 낮은 의미를 가졌다는 것이 된다.
위의 글은 다양하고 겉으로 보기에는 상반되는 설명들인 바, 이런 사항들은 깊이 생각해 보려는 마음을 지닌 사람에게 어떤 혼선을 일으킬는지 모른다. 2장의 내적 의미를 살피기 전, 우리가 생각해서 결정지을 것은, 식사 제물이 본 장에서 천적인 선, 또는 영적인 선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분명한 것은, 말씀 속에서 이런 경우는 이런 의미가 되고, 저런 경우에는 또 다른 의미를 표현해 준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렇게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본 장의 내적 의미에 있는 것들의 시리즈는 우리로 하여금 식사 제물이 천적인 선을 의미한다고 결정짓는 쪽으로 기울게 해준다. 1장의 경우, 자연적 선으로부터의 예배를 묘사함으로 시작해서 영적 선으로부터의 예배로 이어져 끝맺고 있는 바, 2장은 각 등차별로 있는 천적인 예배를 묘사하는데 할애되었을 것이라 생각된다. 제2177항에서 식사 제물이 영적 예배를 묘사한다고 말해진 이유는 고운 곡식 가루가 그곳의 구절에서는 생각에 관한 주제를 특별히 다루기 때문으로 생각되어서 이다. 고운 곡식 가루는 빵이 천적인 것을 표시하는데 비해 특별하게는 영적인 것을 표시해주기 때문이다. 이 외에도 위의 다음 구절(창세기 18:7)에서 언급되는 어린 수소가 자연적인 선을 의미한다고 말해져서, 그 순서는 천적인 것으로부터 영적인 것을 통해 자연적인 것으로 끝맺어지고 있다. 그러나 10279항에서는 식사 제물인 빵은 가장 높은 천적인 선을 표시하고, 희생 제물의 고기는 영적인 선을 표시한다고 하여 두 제물을 비교하는 바, 이곳에서는 주님에 대한 예배를 본질적 차원에서 볼 때, 빵과 같이 생각되는 식사 제물이 나타내는 예배 상태 보다 동물의 희생 제물로 나타낸 예배를 하급의 예배 상태로 나타냈다는 것을 알게 해주고 있다.

3절. 그리고 식사 제물의 남은 것은 아론과 그의 아들들의 것이 된다. 이것은 불로 만든 주님에 대한 제물에서 가장 거룩한 것이다.

영적 의미

그리고 이 거룩한 예배로부터 천적 인간은 선과 진리를 음미한다; 이것은 순수한 사랑으로부터 주님을 예배하는 가장 높은 형체이다.

세부적 영적 의미

아론과 그의 아들이란 선 가운데 있는 이들, 그리고 선으로부터 파생된 진리 가운데 있는 이들을; 식사 제물의 남은 부분이 그들의 몫이라 함은 그 제물을 먹는다는 것인 바, 자기 것으로 삼음을; 여호와께 태워 바치는 거룩한 제물 가운데서도 가장 거룩한 제물이란 순수한 사랑으로 주님께 예배함이 가장 높은 형체이다는 것을 각각 말하고 있다. Arcana Coelestia 9946, 2177, 2187, 10055.
이 절에는 거듭나는 삶과 거듭나는 인간의 신비 전체가 포함되어 있다. 그 이유가 이 절은 인간이 한편으로는 주님으로부터 생명을 받으면서, 다른 편으로는 마치 주님이 주시는 생명이 자기 것인 냥 의식하면서 받기 때문이다.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의 유입은 감각적으로는 지각되지 않는다. 그 이유가 흐르는 자체는 마치 선천적으로 인간이 가진 듯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이 천국적인 선을 의식하여 받게 될 때, 그 선의 참 본성은 인간으로 하여금 그것이 자신으로부터가 아니고 주님으로부터 매 순간 계속적으로 오고 있음을 지각하게 해준다. 이것은 식사 제물에서 누룩을 넣지 않은 것으로 표시된 순수함의 결과이다. 이 순수함은 누룩이 의미하는 악과 거짓된 모든 것과 비례 관계에 있다. 이 악하고 거짓된 것들은 회개라는 일, 시험에 승리함으로 제거되고, 그 결과 거룩한 사랑과 선행이 적절히 실감된다. 따라서 이 절에 함축된 가르침은 얼마나 실제적인지 모른다.

4절. 그리고 네가 오븐에서 구워낸 식사 제물의 봉헌을 바칠 경우, 그것은 기름과 혼합한 고운 곡식 가루로부터의 누룩 없는 과자, 또는 기름을 바른 누룩 없는 속 빈 과자(wafer) 이다.

영적 의미

더 나아가, 주님께 대한 예배가 내면의 천적인 선으로부터 일 때, 이는 가장 깊은 선을 포함하는 거짓 없는 순수한 선으로부터 온 예배이거나, 천적 품성으로된 천적인 선의 외면으로부터 있게 되는 예배일 것이다.

세부적 영적 의미

오븐(가마, oven)에서 구워진 것은 천적인 선의 안쪽에 있는 것을 말한다. 이 선은 선행인데, 중간 천국(middle heaven)에서 두드러지는 선이다. 누룩 없이란 악과 거짓에서 순수한 것을 말하고, 과자란 선과 진리가 결합되는 것을 의미하고, 더불어 이웃을 향한 사랑의 선 역시 의미한다. 속 빈 과자(wafer)란 천적 선의 바깥쪽에 있는 것을 말한다. Arcana Coelestia 7356, 2177, 7978, 9994.
누군가가 주님을 영적 선, 또는 자연적 선으로부터 진실로 예배하고자 할 때, 이와 같은 예배에는 천적 선, 또는 천적 천국을 통한 주님의 역사하심이 내포되어 있다는 것을 우리로 알게 해준다; 그 이유는 기름이 고운 곡식 가루에 혼합되었다는 것은 천적 부분이 영적 부분과 결합함(the conjunction of the Celestial with the Spiritual)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5절. 그리고 만일 너희 봉헌이 굽기 위한 납작한 냄비(pan)로부터의 식사 제물이다면, 그것은 기름과 혼합한 누룩 없는 고운 가루로부터 이다.

영적 의미

그리고 이와 같은 예배가 자연의 내적인 것으로부터일 때, 그 예배는 거짓에서 자유롭고, 가장 깊은 천적인 선을 포함하고 있는 선으로부터 파생된 진리로 있어져야 할 것이다.

세부적 영적 의미

튀김용 납작한 냄비(frying pan), 또는 굽기용 납작한 냄비에 구워낸 식사 제물은 자연의 내적 부분(the Internal of the Natural)으로부터 예배함을 말하는데, 그 이유는 영적(내면의) 선을 말하는 가마에 구운 식사 제물 뒤를 이어 언급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고운 곡식 가루를 누룩 없이 기름으로 반죽했다는 것은 진리가 선으로부터 파생되고, 거짓에서 자유롭고, 가장 깊은 천적 선을 함유하고 있음을 말한다. A.C. 7356, 2177, 9995.

6절. 너는 그것을 조각들로 나누어라, 그리고 그 위에 기름을 부어라. 이것이 식사 제물이다.

영적 의미

이 예배 안에는 진리나 애착들이 정확히 배열되어 있어야 하며 또한 가장 깊은 부분의 선의 계속적인 유입도 있어야 한다. 그 이유가 그 예배는 천적인 예배이기 때문이다.

세부적 영적 의미

위의 제물을 잘게 썬다는 것은 진리들과 선들을 빈틈없이 배열하는 것을; 그 위에 기름을 붓는다는 것은 가장 깊은데 있는 선의 유입을; 식사 제물은 천적인 예배를; 각기 의미한다. Arcana Coelestia 10048, 3110, 3728, 9780, 4581.

7절. 그리고 만일 너의 봉헌이 튀기기 위한 납작한 냄비로부터의 식사 제물이다면, 그것은 기름과 더불은 고운 곡식 가루로부터 만들어라.

영적 의미

마지막으로 천적 예배가 자연의 외적 부분으로부터 일 때, 그 예배는 선과 결합된 순수한 진리로부터이어야 한다.

세부적 영적 의미

납작한 냄비(pot, frying pan)에 구운 식사 제물이란 자연의 외적 부분으로부터 예배함을 의미하는데, 그 이유는 시리즈로서 자연의 내적 부분으로부터 예배함의 뒤를 잇기 때문이다. 그리고 고운 곡식 가루를 기름과 혼합함이란 순수한 진리가 선과 결합하는 것을 말한다. Arcana Coelestia 7356, 2177, 9995.

8절. 그리고 너는 이런 것들로 만들어진 식사 제물을 주님에게 가져 오너라. 그리고 이것은 성직자에게 넘겨져야 한다. 그리고 그가 그것을 제단으로 가져 오너라.

영적 의미

위의 모든 방법으로 드리게 되는 예배의 힘은 그분에게서 기인되어진 것이다; 그것이 천적인 선 안에 계신 그분으로부터임을 인정해야 한다; 그리고 그분과 결합하는 훈련이 있어야 할 것이다.

세부적 영적 의미

주님께 식사 제물을 가져온다는 것은 예배하는 힘이 그분으로부터 있어진다고 고백하는 것을 말하고, 그것을 성직자에게 넘김은 그것이 천적 사랑 또는 선 안에 계신 그분으로부터임을 인정하는 것을 말하고, 제단에 가져옴은 예배하는 힘을 갖도록 그분께서 숙달시켜 주심을 말한다. Arcana Coelestia 10227, 10242, 2342.

9절. 그리고 성직자는 그것으로부터의 기념물이 되는 식사 제물을 가져올 것이다. 이것은 불로 만든 달콤한 향기를 주님께 바침이다.

영적 의미

또한, 천적 인간은 그분과의 결합이 마치 자신이 해낸 듯 하게 실감해야 하는데, 이와 더불어 주님을 섬기는데 자기 삶을 헌신하는 힘을 가지고, 평화와 기쁨이라는 거룩한 상태를 받고 있어야 한다.

세부적 영적 의미

기념물(memorial)이란 진리 측면에서의 예배의 품질, 또한 애착 또는 선으로부터 활동이 가능함을 기억함을 말한다. 이 경우, 기념물을 성직자가 취한다는 것은 진리가 선과 결합하는 것을 말하는데, 그 이유가 성직자는 선을 뜻하기 때문이다. 제단 위에서 이 기념물을 사른다는 것은 결합, 그리고 결합으로 주님께 예배함을 말한다. 불로 만든 제물이 주님을 기쁘시게 해드림이란 주님께 헌신함, 그리고 기쁨과 평화의 상태를 말한다. Arcana Coelestia 6888, 7518, 9946, 1728, 10052, 10055, 10054.

10절. 그리고 식사 제물의 남은 것은 아론과 그의 아들들의 것이다. 이것은 불로 만들어 주님께 바침의 가장 거룩한 것이다.

영적 의미

이 거룩한 예배로부터 천적 인간은 선과 진리를 자기 것이 되게 한다. 그 이유가 그 예배는 순수한 사랑으로부터 더없이 거룩하게 주님께 드리는 예배이기 때문이다.

세부적 영적 의미

식사 제물에서 남은 것은 아론과 그의 아들들의 몫이라는 것은, 갖가지 수준에 있는 천적 인간은 거룩한 예배로부터 선과 진리를 자기 것을 삼는다는 말이다. 여호와께 살라 바치는 제물로서 더없이 거룩한 것이란 순수한 사랑으로 주님을 예배함이 가장 거룩하다는 뜻이다. 3절 참조.

11절. 주님께 바칠 식사 제물은 누룩과 더불어 만들지 말라. 그 이유가 주님께 불로 만드는 바침에서 너희는 누룩, 어떤 꿀도 태워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영적 의미

더욱이 천적인 사랑으로부터 드리는 주님에 관한 어떤 예배도 거짓으로 오염되어서는 안 된다. 그 이유는 거짓이나 어떤 자연적 기쁨으로 이 예배에 진입되어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이 예배는 순수한 사랑으로 주님께 드리기 때문이다.

세부적 영적 의미

식사 제물은 천적 사랑으로 주님께 예배함을, 누룩은 거짓을, 꿀은 자연적 기쁨(delight)을 말하나, 이 절에서는 반대적 의미를 나타내고 있다. 여호와께 태워 바친 제물이란 순수한 사랑으로부터의 예배를 말한다. Arcana Coelestia 4581, 2177, 2342, 5260, 10137. 3절 참조

12절. 첫 열매들로부터의 봉헌으로서 너희는 그것들을 주님에게 바쳐라. 그러나 그들은 달콤한 향기를 위해 제단에 오르지 못한다.

영적 의미

위의 사항들이 천적 삶의 진보 초기 단계에는 허용되어지기는 하겠지만, 순수한 사랑으로부터의 예배로서 주님이 받으실 수는 없다.

세부적 영적 의미

이 절은 앞 절에서 보여진 꿀과 누룩의 의미로부터 알 수 있을 것이다.

13절. 그리고 너는 너희의 식사 제물로부터의 모든 제물을 소금을 가지고 간을 맞추어라. 너는 네 식사 제물로부터 하느님의 언약의 소금이 빠지는 것을 내버려두지 말라. 모든 너희 제물과 더불어 너는 소금을 바쳐라.

영적 의미

더 나아가, 천적 사랑으로부터 드리는 모든 예배, 그 예배의 수준에 관계없이, 진리가 선과 결합하고 싶은 바램이, 선이 진리와 결합하려는 바램이 포함되어야 한다. 이 예배에는 부족된 측면이 발생하지 않아야 하는데, 그 이유는 주님으로부터 구원받으려는 인간의 바램, 인간을 구원하시고자 하는 주님의 바램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세부적 영적 의미

소금은 선과 진리가 결합하기를 바램, 그리고 진리와 선이 결합하기를 바램을 뜻한다. 소금이 결핍되거나 중단하지 않도록, 즉 반드시 소금을 치라는 것은 결합하고자 하는 바램이 부족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그 이유는 계약이 결합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모든 제물에 소금을 치라 함은, 모든 예배는 이 결합에 관한 것이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 이유가 예배는 인간이 주님으로부터 구원받고자 하는 바램, 인간 구원을 위한 주님의 바램이 내포되어 쌍방에 상호성이 있기 때문이다. Arcana Coelestia 9207, 10137, 10300.

14절. 그리고 만일 첫 열매들로부터의 식사 제물을 주님에게 바친다면, 너는 식사 제물로서 불에 볶은 이삭에 있는 곡식, 새로운 이삭으로부터 두드려진 곡식을 바쳐라.

영적 의미

그리고 다시 거듭남의 초기 단계에서 주님이 예배되어질 때, 비록 의식 못한다해도, 천적인 사랑으로부터 아주 깊은 예배이어야 하는 바, 천적인 선의 영향을 받고, 선이나 진리 측면에서 시험에 의해 획득된 자연적인 선과 진리의 형체를 외적으로 갖추어야 한다.

세부적 영적 의미

햇곡식으로 된 제물은 거듭남의 준비 단계 중 하나를 말하는데 그 한 단계란, 선에 진리가 이식되는 단계이다. 이 단계 동안, 주님께 드리는 예배는 천적인 선과 대조한다면 상대적으로 불완전한 상태, 12절에서 기술된 누룩과 꿀, 즉 거짓과 자연적 기쁨으로 물들어 있는 상태에 있는 단계이다. 식사 제물은 가장 깊은데 존재하는 사랑, 즉 천적 사랑으로의 예배를 말한다. 이 상태에 있는 인간이라 해도 정작 그 사람은 천적 사랑을 실감하지 못한다. 불에 볶은 이삭이란 천적 선의 영향을 받은 자연적 선, 또는 자연적 인간 안에 있는 선행의 선을 말하고, 두드려져 만든 햇 곡식(bruised corn in the fresh ear)이란 진리의 선, 또는 시험을 통과하는 동안 진리를 수단으로 획득한 선을 말한다. Arcana Coelestia 9204-5, 4581, 9223, 9300, 9295.

15절. 그리고 너는 그것 위에 기름을 놓아라, 그리고 거기 위에 유향을 놓아라. 이것이 식사 제물이다.

영적 의미

이리하여, 천적인 사랑이 그 예배 안에 있어지고, 또한 영적인 사랑도 있게 되는데, 그 이유가 그 예배는 순수한 천적인 예배이기 때문이다.

세부적 영적 의미

기름은 천적 사랑을, 유향은 영적 사랑을, 식사 제물은 순수한 천적 예배를 의미한다. A.C. 4581.

16절. 그리고 성직자는 그것으로부터의 기념물을 태우는데, 그것의 두드려진 곡식의 일부, 그리고 그것의 기름의 일부, 그것의 모든 유향과 더불어 태워라. 이것은 주님께 불로 만든 바침이다.

영적 의미

그러므로 위의 예배에는 진리와 선의 결합이 있고, 시험에서 획득한 선을, 주님에 대한 얼마간의 사랑을, 선행 전부를, 그리고 그 사랑과 선행으로부터 주님을 진실로 인정함으로 주님께 대한 봉헌이 있는다.

세부적 영적 의미

성직자가 기념물(memorial)을 제단 위에서 사른다는 것은, 순수한 사랑으로부터 진리가 선과 결합함을 수단으로 주님께 심정을 봉헌함을 말한다. 두드려진 곡식이란 시험 속에서 획득한 선을; 기름은 천적 사랑을; 향료는 영적 사랑(선행)을; 주님께 태워바치는 제물이란 위의 사랑과 선행으로부터 주님을 진실로 인정함을 말한다. A.C. 10052, 2177, 10303, 10055.

2장의 종합적 고찰

이상에서 살핀 갖가지 등차와 종류의 천적 선에 관한 구절에 담긴 영적 가르침을 실제 응용하는데 대해 곰곰이 생각해본다면, 모든 개개인은 가장 작은 형체로서의 천국인 바, 각 사람은 넓은 측면에서 볼 때 각자 자기 위치에 따라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며 주님께 순종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각자의 가장 깊은 사랑은 천적 사랑일는지 모르고, 그의 내면의 사랑은 영적 사랑일 수 있고, 그의 외면의 사랑은 자연적 사랑일는지 모른다. 어찌됐든 각자는 위의 넓은 측면의 세 천국 중 하나에 해당될는지 모른다. 그런고로, “나는 천적 상태를 가져 볼 수도 없을 거야…”라고 속단하는 말을 할 필요가 없으리라 본다. 그 이유는 모든 사람은 자기가 좋아하면 선한 가운데 있을 수도 있고, 보편적 의미에서의 선이 천적 원리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위의 원리가 삶에 관련되는 실제적 진리이다면, 그것은 말씀을 이해함에 관련된 실제적 진리를 내포하게 된다. 그 이유는 본문을 온전히 그대로 생각한다면, 각 절은 각 등차에 있는 영적 사랑, 또는 자연적 사랑에 관련된 것을 설명할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가 레위기 1장이 태워 바침에 관한 것을 묘사해놓고 있다고 한정지으면, 그 장은 천적 예배에 관한 이야기가 되고, 2장도 식사 제물만을 묘사한다고 한정지으면, 영적 예배에 관한 이야기이고, 3장을 평화 제물로 한정지으면, 자연적 예배에 관한 이야기가 된다. 위와 같이 살펴보면, 1장들은 첫째로 거듭남이 안으로부터 밖으로 계속되는 시리즈일 뿐 아니라, 각 장 자체대로 거듭남의 전 과정을 기술하면서도, 각 과정의 등차와 특별한 관계도 기술하고 있다.
어찌됐든 2장은 첫째로 외적인 것에서 내적인 것으로, 둘째로 정점에 달하면서, 셋째로 인간의 충만되고 자유로운 예배를 기술하면서 동시에 거듭남이 완성될 때 있게되는 자연적 등차까지를 기술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그래서 우리는 위에서 살펴 본 두 가지 방법 모두를 어떤 혼동도 없이 충족시켜 줌을 보여 주어 우리로서는 기뻐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므로 식사 제물이 말씀 속에서 예배를 더 높은 등차도, 더 낮은 등차도 나타내거나 그럴런지도 모른다고 하는 눈에 보이는 역설까지 정당화 해주고 있는데, 오늘 본문의 경우가 이에 해당되는 특별한 예가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식사 제물의 각기 다른 종류에 관한 것을 세세하게 주목해 보지 않고, 단지 그 제물과 관련되어 언급되는 두, 세 가지 사항들의 실용적인 특성만을 지적하는 것으로 마감 지어 보자. 첫째, 누룩 없이 사용되어졌는데, 왜? 그 이유는 누룩이 의미하는 거짓은 식사 제물이 의미하는 선과 합쳐져서 공존할 수 없기 때문이다. 거짓된 모든 교리로부터서 분리되어야 하는 것은 교인의 의무이다. 그래서 예수께서, “바리사이파인의 누룩을 조심하라. 그들의 위선을 조심해야 한다”라고 가르치셨다 (누가 12:1). 이는 순수해지기 위한 아주 뛰어난 우리의 행동강령이다. 안식일에 성소에서 있는 예배에서 참석자가 겉만 번주그레하게 거룩한 체, 회개하는 표정만을 지어낼 경우 거기서의 외적 예배는 어디에 쓸모가 있을까? 차라리 일주일 내내 이어지는 생활 속에서 선을 만들어 내는 사람, 그 일상 생활이야말로 순수한 외적 예배가 될 수 있다. 예배에 거짓이 섞여 비참해지면, 꿀로 상응된 자연적 기쁨이 얼마나 더 돌발적으로 일어나는지 모른다. 부흥집회에 참석한 이들 중 어떤 이는 오로지 자연적 기쁨만으로 감격에 취하는 경우를 더러 찾아볼 수 있을는지 모른다. 세례자 요한에 관해, “그는 메뚜기와 들꿀을 먹고 살았다” (마태 3:4) 라고 말해지고 있다. 그러나 식사 제물에 관한 모세의 법에서 금해지지 않은 외적 예배 안에 있는 진정한 자연적 기쁨은 언제나 한결같이 존재하고 있다. 즉 “이 백성은 내가 기름진 가루로 먹이고 바위에서 따낸 꿀로 배불리리라” (시편 81:16). 바위에서 따낸 꿀이란 진리를 사랑하는 마음이 말씀 속에서 기뻐함을 즐기는 것이다. 선한 생활로 인도하는 진정한 예배, 또한 그 예배가 선한 삶을 결과하게 해주는 데는 거짓이 없어야 하는 것, 단지 자연적 기쁨이 있어야 하는 것 외에 더 첨부된 사항이 있다. 그것은 진리가 선을 바래고, 선이 진리를 바래는 것이다. 이것이 소금으로 의미되고 있다. “너희가 드리는 식사 제물에는 반드시 소금을 쳐야 한다.” 그래서 이미 살핀 바와 같이 언약은 결합을 말한다. 그러므로 예배는 애착 깊고 순수하게 드려야 함과 더불어 반드시 선함이 진리와, 진리가 선함과 결합하는 상호적인 결합이 포함되어 있어야 한다. 이 결합은 외적인 것과 내적인 것의 상호적 결합도 의미한다.
마지막으로, 본문에는 햇곡식을 식사 제물로 하는 사항이 뒤따르고 있다. 이 구절은 어떤 측면에서 볼 때, 거듭남의 시작을 말하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거듭남의 한 건이 완성되어 또 다른 거듭남의 건수가 시작할 때, 앞서 거듭난 삶의 한 부분은 천국 삶의 시작이 되고 있다는 것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이 삶의 위치가 레위기 1-3장의 시리즈 중, 자유로움으로 예배하는 곳, 평화 제물로 표현되는 제 3장의 원인이 되어주고 있다.
******************************************************

레위기 3장

성경: 레위기 1장

1. 그리고 만일 그의 봉헌이 평화 제물로부터의 희생 제물이다면, 만일 그가 암컷이든 수컷이든 소떼로부터 바친다면, 그는 그것을 흠이 없는 것으로 주님께 바쳐라.
2. 그리고 그는 자기 손을 봉헌물의 머리에 놓아라, 그리고 만남의 천막의 문에서 그것을 죽여라. 그리고 아론의 아들들, 성직자들은 제단 주위에 피를 뿌려라.
3. 그리고 그는 평화 제물로부터의 희생 제물을 불로 만든 제물로 주님께 바쳐라. 즉 내장들을 덮은 지방과 내장들 위에 있는 지방이다.
4. 그리고 두 콩팥들, 그리고 그것들 위에 있는 지방, 이는 허리 근처이다, 그리고 간 위에 있는 대망(caul)을 콩팥과 더불어 가져 가라.
5. 그리고 아론의 아들들은 그것을 제단 위 태워 바치는 제물 위에서 태워라, 태워 바치는 제물은 불에 있는 장작 위에 있다. 이것은 달콤한 향기를 불로 만들어 주님께 바침이다.
6. 그리고 만일 주님에게 평화 제물의 희생 제물을 위한 그의 봉헌이 양떼로부터이다면, 그는 수컷 또는 암컷이든 흠이 없는 것을 바쳐라.
7. 만일 그가 자기 봉헌물로 어린 양을 바친다면, 그러면 그는 주님 앞에 그것을 바쳐라.
8. 그리고 그는 그의 손을 자기 봉헌물의 머리에 놓아라, 그리고 만남의 천막 앞에서 그것을 죽여라. 그리고 아론의 아들들은 그로부터의 피를 제단 주위에 뿌려라.
9. 그리고 그는 평화 제물의 희생 제물을 불로 만든 제물로 주님께 바쳐라. 즉 그로부터의 지방, 꼬리 지방 전부, 그는 이것을 등뼈 단단한 데로부터 가져 가라. 그리고 내장들을 덮은 지방, 그리고 내장들 위에 있는 모든 지방,
10. 그리고 두 콩팥들, 그리고 그것들 위에 있는 지방, 이것은 허리 근처이다, 그리고 간 위의 대망, 콩팥과 더불어 가져 가라.
11. 그리고 성직자는 그것을 제단 위에서 태울 것이다. 이것은 주님에게 불로 만든 식품(food)이다
12. 그리고 만일 그의 봉헌물이 염소이다면, 그러면 그는 그것을 주님께 바쳐라.
13. 그리고 그는 그의 손을 그것의 머리 위에 놓고, 그것을 만남의 천막 앞에서 죽여라. 그리고 아론의 아들들은 그것으로부터의 피를 제단 빙둘러 뿌려라.
14. 그리고 그는 그것으로부터 그의 봉헌물을 바칠 것인데, 불로 만들어 주님께 바침이다. 즉 내장들을 덮은 지방, 그리고 내장 위에 있는 지방 모두이다.
15. 그리고 두 콩팥들, 그리고 그것들 위에 있는 지방, 이것은 허리 근처이다, 그리고 간 위에 있는 대망, 콩팥과 더불어 그는 가져 가라.
16. 그리고 성직자는 그것들을 제단 위에서 태워라. 이것은 달콤한 향기를 위하여 불로 만든 제물로부터의 식품이다. 모든 지방은 주님의 것이다.
17. 이는 너희 모든 거주지들에서 대대로 영원한 법령이다, 즉 너희는 지방도 피도 먹지 말라.

영적 의미 요약

* 전체의 주제는 거듭남이 완성될 때, 그리고 거듭나는 동안 때때로 있게 되는 자유로운 상태에서 주님을 예배함에 관한 것이다. 그 중, 자연적 애착으로부터의 예배가 1-5절에 기술되어 있다.
* 그 다음, 순진의 선으로부터의 예배가 6-11절에서 기술되는데, 이 예배에는 선행, 즉 이웃을 사랑함이 포함되어 있다.
* 마지막으로, 신앙의 선으로부터의 예배가 12-16절에서 기술되는데, 이 예배는 이해함을 통해 명백해진 선행이 포함되어 있다.
* 그러나 주님을 예배하는 위와 같은 각 상태에서, 어느 누구도 주님을 떠나서 진리이든, 선이든 독립된 자기 것인냥 자기 것으로 삼을 수 없음이 17절에서 기술되고 있다.

각 절의 영적 의미

1절. 그리고 만일 그의 봉헌이 평화 제물로부터의 희생 제물이다면, 만일 그가 암컷이든 수컷이든 소떼로부터 바친다면, 그는 그것을 흠이 없는 것으로 주님께 바쳐라.

영적 의미

주님을 예배함이 자유 의지로부터 있게될 때, 즉 겉이 결합됨이 증진될 때, 다시 말해 예배가 진리측면에서이든 선의 측면에서이든 자연적 인간 속의 애착들로부터 있어질 때, 그 예배에는 악이나 거짓을 혼합해서는 안 된다.

세부적 영적 의미

본 장에 있는 평화 제물(peace offering)이란 자유로운 상태에서 주님을 예배함을 의미한다. 이 제물이야말로 “외적 부분(External)과 내적 부분(Internal)의 결합을 증진시켜 준다”라고 말해지고 있다. 그 이유는 인간이 마지막 장에서 기술되는 천적 상태에로 진입될 때, 그리하여 그 진입의 결과, 진리를 원리로 해서 행동하는 것을 그만두고 기쁨과 감사함으로 사랑 또는 선으로부터 자유롭게 행동하기를 시작할 때, 이 행동은 자연스럽게 외적 인간 속의 애착이 내적 인간 속의 애착과 조화를 이루고 결합하는데 이르른다. 가축을 제물로 삼는다는 것은 자연적 인간의 애착으로 드리는 예배를 의미한다. 수컷이나 암컷이란 진리 측면이나 선의 측면에 관한 것임을 의미한다. 그리고 주님 앞에 흠이 없는 것이어야 함은 악과 거짓이 혼합되는데서 자유로워야 함을 의미한다. A.C. 10097, 3987, 93, 95, 5913, 6126, 7837.

2절. 그리고 그는 자기 손을 봉헌물의 머리에 놓아라, 그리고 만남의 천막의 문에서 그것을 죽여라. 그리고 아론의 아들들, 성직자들은 제단 주위에 피를 뿌려라.

영적 의미

그러면 속에 있는 모든 힘이 밖의 것과 교통되어서 밖의 것도 준비가 되어 주님을 인정하게 된다. 그리고 천국을 통해 그분으로부터 이 예배에 유입이 있게 된다. 이 예배 동안 진리와 선과의 결합이 있어지고, 이 결합은 주님과 결합되게 할 것이다.

세부적 영적 의미

이런 사항이 제물의 머리에 예배자의 손을 얹는다는 것에서 나타내고 있다. 이는 내적인 것으로부터 외적인 것까지에 이르는 힘의 교통을 말한다. 제물을 만남의 천막 문에서 죽인다는 것은 주님을 인정함으로 외적인 것이 준비되어 천국을 통한 유입이 있어짐을 말한다. 그리고 제단의 주변에 피를 두루 뿌린다는 것은 진리와 선의 결합, 그리하여 주님과도 결합함을 말한다. A.C. 878, 10023, 10024, 2356, 3540-3, 9946, 10047.

3절. 그리고 그는 평화 제물로부터의 희생 제물을 불로 만든 제물로 주님께 바쳐라. 즉 내장들을 덮은 지방과 내장들 위에 있는 지방이다.

영적 의미

이와 같이 자유로운 사랑의 원리를 통해 이 예배가 주님으로부터 있음을 인정하게 될 것이고, 그 결과 가장 낮은 수준의 이해함이나 의지 측면에서 자연적 인간의 가장 낮은 수준에 있는 사랑의 선을 통해서 이 예배가 주님으로부터 이다를 인정할 것이다.

세부적 영적 의미

평화 제물이란 자유로부터의 예배를; 여호와께 태워 바친다는 것은 순수한 사랑으로부터 주님을 인정하는 것, 지방은 선을, 내장을 덮은 지방과 내장에 붙은 모든 지방이란 이해함과 의지 측면에서 가장 낮은 자연적인 선을 말하는데, 그 이유는 이해함은 인간에게 있어 의지의 바깥 형체 또는 의지의 표현일 뿐만 아니라, 의지를 덮고 있기 때문이다. A.C. 10097, 10055, 10033, 353, 9632.

4절. 그리고 두 콩팥들, 그리고 그것들 위에 있는 지방, 이는 허리 근처이다, 그리고 간 위에 있는 대망(caul)을 콩팥과 더불어 가져 가라.

영적 의미

중간 수준, 즉 진리를 식별하고, 그 식별로부터 애착도 식별하는 수준에서, 이 식별을 수단으로 선과 진리의 결합이 결과되어진다, 그래서 내면의 수준에서도 선과 진리의 결합이 있어지는 바, 각 종류의 선들이 분리되게 된다.

세부적 영적 의미

내장은 가장 낮은 수준의 선을 말하는데 비해, 두 콩팥과 거기에 붙어 있는 지방은 진리와 선의 측면에서 중간(middle) 수준을 말하고, 허리(loins)란 진리와 선의 결합을, 간에 붙은 지방이란 자연적 인간 속에 있는 내면의 선을 말한다. 지방을 콩팥에서 떼어낸다는 것은 각기 다른 선들을 주님을 섬기는데 봉헌한다는 것을 말하는데 다음 절에서 더 알게 된다. A.C. 10032, 10074, 353, 3915, 10031.

5절. 그리고 아론의 아들들은 그것을 제단 위 태워 바치는 제물 위에서 태워라, 태워 바치는 제물은 불에 있는 장작 위에 있다. 이것은 달콤한 향기를 불로 만들어 주님께 바침이다.

영적 의미

또한, 위의 것들은 주님께 봉헌되어야 할 것이고, 이것 모두가 주님으로부터 진행되었음을 인정하게 되지만, 처음에 예배자는 자신으로부터인 줄로 알고 봉헌하며, 다시 말해 그는 봉헌에 대한 공적이 자기에게 있다고 한다. 그 뒤 그는 순수한 사랑으로부터 봉헌하게 되는 바, 주님이 기뻐 받으실 수 있게 되어 천국의 삶과 평화가 생산된다.

세부적 영적 의미

아론의 아들들이 모든 지방을 태워 바침의 제물에 얹어 제단에서 사른다는 것은 자연적 인간(외적인 것)을 온전히 주님께 봉헌한다는 말이다. 장작 위란 공적(merit)을 느끼면서 주님을 인정함이 우선 있게 된다는 것이데, 그 이유는 장작(wood)이 공적 의 선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불 위란 위의 인정 후에 오는 느낌이 순수한 사랑으로부터 있어짐을 말한다. 달콤한 향기를 불로 만들어 주님께 바침이란 순수한 사랑으로 예배함, 이 예배는 주님을 기쁘시게 하고 열납하심, 그리하여 천국의 쉼과 평화가 생산된다는 뜻이다. A.C. 10052, 2784, 934, 10052, 10054.

6절. 그리고 만일 주님에게 평화 제물의 희생 제물을 위한 그의 봉헌이 양떼로부터이다면, 그는 수컷 또는 암컷이든 흠이 없는 것을 바쳐라.

영적 의미

다시, 안과 밖의 결합을 증진시켜주는 자유로부터의 예배가 진리나 선의 측면에서 영적 애착으로부터 있게 될 때, 이 예배 역시 악과 거짓에 오염되어 있어서는 안 된다.

세부적 영적 의미

양으로 드리는 평화 제물이란 영적 애착의 영향을 받으면서 자유로이 예배함을 의미한다. 수컷 또는 암컷이란 진리나 선의 측면을 의미하고, 흠이 없음이란 악과 거짓에서 오염되지 않아야 함을 의미한다. A.C. 5913, 6126, 10097, 725, 7837.

7절. 만일 그가 자기 봉헌물로 어린 양을 바친다면, 그러면 그는 주님 앞에 그것을 바쳐라.

영적 의미

만일 이 예배가 순진의 선으로부터이라면, 그 예배가 주님으로부터 있어졌다는 것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세부적 영적 의미

이 절은 어린 양이 순진의 선을 나타내고 있다는 것으로부터 파악된다. 이 절에서 언급되는 어린 양은 선행을 말할는지도 모른다. 그 이유는 히브리어로 양 또는 어린 양을 뜻하기 때문이다. 주님께 제물을 바침은 예배에서 주님을 인정함을 말하고 있다. A.C. 3994, 4169, 10227, 9373.

8절. 그리고 그는 그의 손을 자기 봉헌물의 머리에 놓아라, 그리고 만남의 천막 앞에서 그것을 죽여라. 그리고 아론의 아들들은 그로부터의 피를 제단 주위에 뿌려라.

영적 의미

예배하는 힘이 그분으로부터 있게 된다는 것, 천국을 통한 유입에 의거 예배를 행하도록 자신을 준비시켜 주신다는 것, 그리하여 영적 인간과 주님의 결합이 결과된다.

세부적 영적 의미

제물의 머리에 손을 얹는다는 것은 영적(내적) 원리가 가장 깊은 원리들을 통하여 주님으로부터 오는 예배의 힘과 교통하게 되는 것을 말한다. 동물을 죽임은 예배를 준비함, 그리고 천국을 통한 유입, 주님과의 결합을 말한다. 제단의 주변에 피를 뿌린다는 것은 영적 인간이 주님과 결합함을 말한다. 1장 4절. A.C. 10023, 10024, 2356, 3540-3, 10025, 10047.

9절. 그리고 그는 평화 제물의 희생 제물을 불로 만든 제물로 주님께 바쳐라. 즉 그로부터의 지방, 꼬리 지방 전부, 그는 이것을 등뼈 단단한 데로부터 가져 가라. 그리고 내장들을 덮은 지방, 그리고 내장들 위에 있는 모든 지방,

영적 의미

또한 예배 안에 있는 자유는 기쁨과 평화를 가져다주는데, 그 이유는 사랑을 바탕으로 했기 때문이고, 그 예배는 안에 있는 천국인 선에 따라서, 그리고 최 말단에 있는 천적인 선에 따라 있어지는 바, 이 예배는 자연적 사랑 뿐이다에서 분리되고 온전해진다. 그 다음 이해함과 의지에서 자연적 인간의 가장 낮은 선에 따라서 예배가 있어진다.

세부적 영적 의미

여호와께 제물을 살라 바친다는 것은 이 제물이 기쁨과 평화를 가져온다는 말이다. 그 이유는 이 제물은 사랑에 바탕을 두었기 때문이다. 이 제물로부터의 지방이란 내면에 있는 천적인 선을; 꼬리에 붙은 지방 전부란 외면 또는 최말단에 있는 천적인 선 모두를 말하고; 등뼈(backbone)에서 꼬리를 뗀다는 것은 자연적 사랑 뿐이다에 분리시킴을, 내장을 덮은 지방과 내장에 붙은 모든 지방이란 이해함과 의지에 관한 자연적 인간의 가장 낮은 선을 말한다. A.C. 10055, 10033, 10070, 7837, 10071, 3절 참조.

10절. 그리고 두 콩팥들, 그리고 그것들 위에 있는 지방, 이것은 허리 근처이다, 그리고 간 위의 대망, 콩팥과 더불어 가져 가라.

영적 의미

중간 수준의 선에 의거함, 즉 진리를 식별하는 것, 그로부터 애착을 식별함에 따라서, 식별을 수단으로 진리와 선의 결합이 있게 된다. 그리하여 내면에 있는 선에 의거 선과 진리의 결합이 있게 된다. 그런 다음 각기 다양한 선이 분리되어 진다.

세부적 영적 의미

내장이 가장 낮은 선을 말하듯, 지방이 붙어 있는 콩팥은 선과 진리의 중간 수준을; 허리의 지방은 선과 진리의 결합을; 간의 지방은 자연적(외적) 인간에 있는 내면의 선을; 각 부위에서 기름들을 떼어 낸다는 것은 각기 다른 선들을 주님을 섬기고자 하여 봉헌하는 것을 말한다. A.C. 10032, 10074, 353, 3915, 10031.

11절. 그리고 성직자는 그것을 제단 위에서 태울 것이다. 이것은 주님에게 불로 만든 식품(food)이다

영적 의미

그리고 위의 것이 통째로 주님께 봉헌되었다. 그 이유는 그것 모두는 주님으로부터 온 사랑의 천적 원리이기 때문이다.

세부적 영적 의미

제단 위에서 제물을 사른다는 것은 주님께 봉헌함을; 불로 살라 주님께 바치는 식품 또는 빵은 주님으로부터 온 사랑의 천적 원리를 말한다. A.C. 10053, 276, 10055.

12절. 그리고 만일 그의 봉헌물이 염소이다면, 그러면 그는 그것을 주님께 바쳐라.

영적 의미

다시, 평화를 가져오는 자유스러운 예배가 신앙의 선으로부터 있게 된다면, 이 예배 역시 주님으로부터 있어진다를 인정해야 할 것이다.

세부적 영적 의미

이 절은 염소가 신앙의 선, 또는 진리의 선을 의미한다는 데서 알게 될는지 모른다. 그리고 염소를 여호와께 바침은 주님을 인정함을 명시하고 있다. A.C. 10227, 9373.

13절. 그리고 그는 그의 손을 그것의 머리 위에 놓고, 그것을 만남의 천막 앞에서 죽여라. 그리고 아론의 아들들은 그것으로부터의 피를 제단 빙둘러 뿌려라.

영적 의미

그리고 내적 인간이 이 선 안으로 힘을 가지고 흐르게 되어, 외적 인간도 천국을 통해 오는 영적 생명의 유입으로 준비된다. 그 다음 신성한 진리가 신성한 선과 결합되어지되 천적 선에서 파생된 거룩한 진리들을 수단으로 있게 된다.

세부적 영적 의미

제물의 머리에 손을 얹는다는 것은 내적인 것이 외적인 것을 가지고, 즉 신앙의 선이 힘을 가지고를 말한다. 만남의 천막 앞에서 제물을 죽인다는 것은 천국을 통한 유입으로 예배가 준비되는 것을, 그리고 아론의 아들들이 피를 제단 주변에 두루 뿌린다는 것은 신성한 진리가 천적인 선에서 파생되는 거룩한 진리를 수단으로 신성한 선과 결합되어짐을 말한다. A.C. 10047, 9946.

14절. 그리고 그는 그것으로부터 그의 봉헌물을 바칠 것인데, 불로 만들어 주님께 바침이다. 즉 내장들을 덮은 지방, 그리고 내장 위에 있는 지방 모두이다.

영적 의미

이리하여 주님이 예배에서 인정되어지되 천적 사랑으로부터 이해함과 의지에 관한 자연적 인간 속의 가장 낮은 선을 통해 있어진다.

세부적 영적 의미

평화 제물로 봉헌된 것은 자유로부터의 예배를; 제물을 주님께 살라 바침은 순수한 사랑으로 주님을 인정함을; 지방은 선을; 내장을 덮은 지방은 이해 측면에서의 가장 낮은 자연적 선을; 내장 위에 붙은 지방은 의지 측면에서의 가장 낮은 자연적 선을 각각 말한다. A.C. 10097, 10055, 10033, 353, 9632.

15절. 그리고 두 콩팥들, 그리고 그것들 위에 있는 지방, 이것은 허리 근처이다, 그리고 간 위에 있는 대망, 콩팥과 더불어 그는 가져 가라.

영적 의미

진리와 애착을 식별하는 선, 즉 중간 수준의 선을 통해서 진리와 선의 결합이 결과되어 진다. 그리고 내면의 선을 통하여 선과 진리의 결합이 결과 되어 각각의 선들이 분리되어 진다.

세부적 영적 의미

내장이 가장 낮은 선을 말하고 있듯, 지방이 붙어 있는 두 콩팥은 선과 진리의 중간 수준을; 허리는 진리와 선의 결합을; 간에 붙은 지방은 자연적(외적) 인간 속에 있는 내면의 선을; 콩팥에서 지방을 떼어냄이란 각 종류의 선이 주님을 섬기고저 봉헌되어짐을 말해주기 때문인데, 이는 다음 절에서 나타난다. A.C. 10032, 10074, 353, 3915, 10031.

16절. 그리고 성직자는 그것들을 제단 위에서 태워라. 이것은 달콤한 향기를 위하여 불로 만든 제물로부터의 식품이다. 모든 지방은 주님의 것이다.

영적 의미

그리고 위의 선들이 예배에서 신앙의 선들로부터 봉헌될 것이다. 그 이유는 이런 선까지도 신성한 사랑에 의해 성별되어 있어 천국의 쉼과 평화를 생산해 주기 때문이다. 천적인 선이 역사하는 어디서든지 그 선은 주님으로부터 있게 되었음을 반드시 인정해야 한다.

세부적 영적 의미

제단 위에 있는 제물은 주님께의 봉헌을; 주님께 태워 바치는 제물의 식품 또는 빵은 그분으로부터 온 사랑이라는 천적 원리를; 달콤한 향기, 또는 쉼의 냄새란 천국의 쉼과 평화를 생산하는 것을; 지방은 모두 여호와께 바침, 즉 모든 지방은 주님의 것이라는 것은 천적인 선 모두는 주님으로부터 존재함을 뜻한다. A.C. 10052, 276, 10055, 10054, 10033.

17절. 이는 너희 모든 거주지들에서 대대로 영원한 법령이다, 즉 너희는 지방도 피도 먹지 말라.

영적 의미

위의 모든 것은 선을 받아 가는 거듭남에 있는 신성한 질서의 항구적인 법칙이다. 어떤 천적인 선이나 진리도 자연적 인간이 원래 자기 것인 냥 자기 것으로 삼을 수 없다.

세부적 영적 의미

위의 사항이 영원히 지킬 법령이라 함은, 이는 신성한 질서라는 항구적인 법이라는 것을; 대대로 지킬 규정이라 함은 선을 계속 받아감으로 해서 거듭 나아간다는 것을; 먹는다는 것은 내 것 삼음을; 지방은 천적인 선을; 피는 신성한 진리를 말해주고 있다. A.C. 7884, 7931, 1041, 2187, 10033, 10026.

3장의 종합적 고찰

이제 3장의 전체에 흐르는 일반적 특성 몇 가지를 살펴보는 기회를 갖기로 해보자. 인간이 영적 상태에서 천적 상태에로 건너갈 때, 다시 말해서 그 사람의 원리에서 사랑이 우세해질 때, 가장 명확한 것은 그 사람에게 자유가 필수 요건으로 등장한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모든 자유는 통치하는 사랑(ruling love) 속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렇다해서, 이 사람이 주님을 예배하는데 있어 이전에는 자유가 없었다고 가상하는 것은 너무 성급한 결론이 될 수밖에 없다. 단지 이전에는 그가 충분한 자유로 예배하지 않았다는 것일 뿐이다. 어떤 상태에서라도 주님을 진실로 예배하기 위해서 예배자는 진실로 예배드리려 하는 것을 자유로이 선택해야만 한다, 이는 그가 자기의 자연적 경향성을 정복하겠다고 결심이라도 한 듯 예배 드리는 쪽을 억지로 선택할 때 조차에서도 자유로운 선택은 있어져야만 한다. 이럴 경우마다, 본인이 자주 느끼게 되는 것은 자기는 자유롭지 않은 상태에서 예배하는 듯 여겨질는지 모른다는 것일 게다. 이런 상황은 자신에 대해 실망하고 있다 라고 말하기보다는 오히려 잘 버티고 있다고 표현해야 옳은 판단이 될 것이다. 선한 목적을 성취하기 위한 인내 속에 참으로 본 장에서 제물이 뜻하는 가장 좋은 의미인 순수한 자유가 감추어 놓여 있는 것이다.
그러나, 식사 제물처럼 평화 제물도 성경의 어떤 부분에서는 단지 자유를 넌지시 비추는 수준의 불완전한 자유의 상태를 말하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그 이유는, 우리가 영적 시련이나 시험들을 통과하는 많은 과정에서 기쁨과 평화의 시절이 우리 속에서 일어나되, 마지막으로 우리의 것이 될 천국적 자유, 즉 진정한 자유의 상태에 앞서서 미리 맛만 보는 순간들, 즉 걱정과 불안으로부터 온 자유를 거쳐야 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상태 속에서 자유 의사에 따른 제물이 바쳐질 수 있게 애착과 감사라는 것을 수단으로 자신을 자극(고무)시키거나, 감사하는 마음과 기쁨의 내적 상태를 어떤 행동을 통해 표현해서 구체화하기도 한다. 그래서 우리의 마지막 제물인 평화 제물은 각 사람의 수준에 맞추어 각각의 내적 인간과 외적 인간이 하모니를 증진시키는데 결코 실패하지 않게 된다. 이 하모니 없이 충만된 천국의 자유는 존재할 수 없고 영원할 수도 없는 것이다.
위의 생각은 즉각 또 다른 생각을 해보도록 우리를 인도하게 된다. 우리의 자연적 인간이 순수해지는 만큼에 똑같이 비례해서 진정한 자유도 우리 속에 건설된다는 것이다. 앞에서 살핀 바, 내장, 콩팥, 간에 관한 특별한 언급은 이 기관들이 여러 가지 수준에서의 영적 순수함과 정확히 상응하고 있는 이유를 보여주고 있다. 사실상 모든 우리의 악들은 자연적 수준에 뿌리를 두고 있는 고로 우리가 깨끗해지는 수단 역시 자연적 수준에서 발견될 수밖에 없다.
또 하나 주목해 둘만한 가치가 있는 것은, 우리가 자신의 몸을 건강한 상태로 유지하려고 기발한 수단을 동원해서 애쓴다해도 자신이 생각했던 목표에 꼭 맞게 있어지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그 이유가 어떤 행동들로 해서 자신이 동원한 건강 비결이 적절하게 체력이 증진되게 해주기도 하지만 오히려 더 상처를 입히는 경우도 발생하기 때문일 것이다. 어떤 수단을 동원한다 해도 결론적인 것은 우리가 건강을 완전히 좌지우지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주님만이 그것을 하실 수 있으시다. 신체 건강이라는 한 가지 측면만을 우리가 얼른 생각해 보아도 계속적인 신성한 현존과 그 능력의 보편성과 실존에 관한 경이롭고 확증되는 증거들을 볼 수 있다. 이와 같다는데 의심할 여지가 없는 것이 영적 수준에서도 존재한다. 우리는 악과 거짓으로부터 자신을 순수해지게 할 수 없다. 순수해지게 해 주실 수 있는 분은 주님뿐이시고 그 방법 또한 짐작하기 힘들 정도로 다양하다. 주님의 선함, 실재의 천적 원리는 우리의 영적 존재의 최말단에까지 현존한다. 그렇게해서 그분의 선함은 우리를 도우시고, 최말단에 있는 선함은 틀림없이 보존되어야 하고 주님께 성별되어야 한다. 그 이유는 그 선함이 그분께로부터 왔기 때문이다. 이것이 지방으로 나타나고 있고, 내장에 붙은 지방은 우리 삶의 최말단 부분에 있는 선함을 나타내고 있다.
그래서 선함만 가지고 순수해지지 않는다. 선함은 진리를 수단으로 작동된다. 진리와 거짓 사이를 선에 근거해서 식별해 내는 진리의 역할 부분이 본문에서 두 콩팥으로 표현되어져 있다. 이 식별은 아주 완전한 바, 과정의 방향이 어떠한지를 우리가 주창할 수 없음을 느끼게 하고 만다. 주님만이 방향을 설정하신다. 그러나 우리는 진리나 선함을 획득함에서 그분과 협동할 수 있는 능력은 가지고 있다.
본문에서 다음 사항들이 관찰되고 있다.
1) 인간이 순수해져 가는 모든 과정을 주님으로부터 오는 힘을 자발적으로 행사해 봄으로 완전하고 영원한 그분과의 결합을 낳고, 순수해지는 모든 과정은 세 겹의 방법, 본문에서 내장, 콩팥, 간으로 표현된 방법으로 자연적 인간 안에서 언제나 있게 되는데, 이는 그 주체가 영적 인간이든 자연적 인간이든 방법은 동일하다.
2) 주님으로부터 오는 진리나 선을 받았다고 해서 그것이 자신의 것이 되어 대대로 물려 줄 수도 있는 선천성이 되는 것은 불가능한 바, 거듭나는 인간은 주님의 선과 진리를 담는 그릇일 뿐이어서 이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선하고 완전한 영적 힘과 자연적 기쁨을 위해 우리의 창조자요, 구속자이시며, 거듭나게 해주시는 주님께 계속 의지해야만 할 것이다.
**************************************************

레위기 4장

성경: 레위기 1장

1.그리고 주님께서 모세에게 이야기하셨다, 말하시기를,
2. 이스라엘의 자손들에게 이야기하여, 말하라, 만일 누군가가 주님께서 행하여져서는 안된다고 명령한 것의 어떤 것에서 부지불식간에 죄를 짓는다면, 그리고 그것들 중의 어떤 것을 행한다면,
3. 만일 기름부은 성직자가 백성 위에 죄있어지도록 하여 죄를 지었다면, 그러면 그가 죄진 것, 그의 죄를 위해 그로하여금 흠이 없는 거세한 어린 수소를 죄 바침을 위해 주님께 바치게 하라.
4.그리고 그는 주님 앞 만남의 문으로 수소를 가져 와라. 그리고 그는 자기 손을 수소의 머리에 놓아라, 그리고 주님 앞에서 수소를 죽여라.
5. 그리고 기름부워진 성직자가 수소의 피를 가져 와라, 그리고 그것을 만남의 천막으로 가져오너라.
6. 그리고 성직자는 자기 손가락을 피에 담그어라, 그리고 성소의 베일(veil) 앞, 주님 앞에 일곱 번 뿌려라.
7. 그리고 성직자는 주님 앞 달콤한 향의 제단의 뿔들에 피를 놓아라. 이 제단은 만남의 천막 안에 있다. 그리고 수소의 모든 피를 태워 바치는 제단의 받침에 부어라, 이 제단은 만남의 천막의 문에 있다.
8. 그리고 죄 바침(sin offering)으로부터의 수소의 모든 지방을 그는 그것으로부터 가져 가라. 즉 내장들을 덮은 지방, 그리고 내장들 위에 있는 모든 지방이다.
9. 그리고 두 콩팥들, 그리고 그것들 위에 있는 지방, 이것은 허리 근처이다, 그리고 간 위의 대망을 콩팥과 더불어 그는 가져가라.
10. 평화 제물의 희생제물로부터의 수소(ox)를 취급한 그대로와 같다. 그리고 성직자는 그것들을 태워 바치는 제단 위에서 태워라.
11. 그리고 수소의 가죽, 그리고 모든 그것의 고기, 그것의 머리와 더불어, 그리고 그것의 다리들, 그리고 그것의 내장들, 그리고 그것의 똥,
12. 수소 전부 조차 그는 진영 밖 깨끗한 장소, 재들을 쏟는 곳에 운반하라, 그리고 그것을 불과 더불어 장작 위에서 태울 것이다. 재들을 쏟는 거기서 그것은 태워져야 한다.
13. 그리고 만일 이스라엘의 전체 회중이 잘못을 한다면, 그리고 어떤 것이 집회의 눈으로부터 감추여 있다면, 그리고 그들이 주님이 하지 말라고 명령했던 것들의 어떤 것을 행동했다면, 그리고 죄 지음이 있다면,
14.그들이 죄지은 죄가 알려질 때, 그 다음, 집회는 죄 바침을 위해 어린 수소를 바쳐라, 그리고 그것을 만남의 천막 앞으로 가져 와라.
15. 그리고 회중의 장로들은 그들의 손을 주님 앞 수소의 머리에 놓아라. 그리고 그 수소는 주님 앞에서 죽여져야 한다.
16. 그리고 기름부워진 성직자가 만남의 천막으로 수소의 피를 가져 와라.
17. 그리고 성직자는 피에 자기 손가락을 담근다, 그리고 그것을 주님 앞, 베일 앞에 일곱 번 뿌려라.
18. 그리고 그는 만남의 천막 안에 있는 주님 앞에 있는 제단의 뿔들 위에 피를 놓아라, 그리고 모든 피는 태워 바침의 제단 받침에 쏟아라, 이 제단은 만남의 천막의 문에 있다.
19. 그리고 그로부터의 모든 지방은 그것으로부터 떼어 내라, 그리고 제단에서 그것을 태워라.
20. 그는 수소를 가지고 이렇게 하라. 그는 죄의 제물의 수소를 가지고 했던 것 같이 이것도 그렇게 하라. 그리고 성직자는 그들을 위하여 보상을 받게 하라, 그리고 그들은 용서된다.
21. 그리고 그는 수소를 진영 밖으로 운반 하라, 그리고 첫 번째의 수소를 태운 방식대로 그것을 태워라. 이것은 집회(assembly)를 위한 죄 바침이다.
22. 통치자가 죄지을 때, 그리고 그의 하느님 주님이 하지 말라고 명령했던 모든 것들 중의 어떤 하나를 부지불식간에 행할 때, 그리하여 죄가 있어 질때,
23. 만일 그의 죄가 그가 어떤 점에서 죄지었나를 그에게 알게 만들었다면, 그는 자기 제물로 흠이 없는 수컷 염소를 가져 와라.
24. 그리고 그는 자기 손을 염소의 머리 위에 놓아라, 그리고 그들은 주님 앞 태워 바치는 제물을 죽인 장소에서 그것을 죽여라. 이것은 죄 바침이다
25. 그리고 성직자는 자기 손가락으로 죄 바침의 제물의 피를 가져 와라, 그리고 그것을 태워 바치는 제단의 뿔들에 발라라, 그리고 그로부터의 피는 태워 바침의 제단의 받침에 쏟아라.
26. 그리고 그것으로부터의 모든 지방은 평화 제물의 희생 제물을 태우던 그대로 제단에서 태워라. 그리고 성직자가 그의 죄에 관하여 보상을 받게 하라, 그리고 그는 용서된다.
27. 그리고 만일 일반 백성 중의 누군가가 부지불식간에 죄지어 주님께서 하지 말라고 명령해두었던 것들 중의 어떤 것을 행하는 중이다면, 그리고 죄 있음에 있다면.
28. 만일 그의 죄가 그가 죄지었다는 것을 그에게 알게 만들었다면, 그러면 그는 자기가 죄지은 그의 죄를 위해 그의 봉헌물로 흠이 없는 암컷 염소를 가져와라.
29. 그리고 그는 자기 손을 죄 바침의 제물의 머리 위에 놓아라, 그리고 태워 바침의 장소에서 죄 바침의 제물을 죽여라.
30. 그리고 성직자는 그의 손가락으로 그것으로부터의 피를 가져 가라, 그리고 그것을 태워 바침의 제단의 뿔들에 바르라, 그리고 그것으로부터의 모든 피는 제단의 받침에 쏟아라.
31. 그리고 그것으로부터의 모든 지방은 그가 가져 가라, 마치 평화 제물의 희생 제물로부터 가져 감과 같다. 그리고 성직자는 주님에게 달콤한 향기를 위해 그것을 제단 위에서 태워라. 그리고 성직자는 그를 위하여 보상을 만들고, 그는 용서된다.
32. 그리고 만일 그가 죄 바침의 제물을 위한 자기 봉헌물로서 어린 양을 가져온다면, 그는 흠이 없는 암컷으로 그것을 가져 와라.
33. 그리고 그는 자기 손을 죄 바침의 제물의 머리에 놓아라, 그리고 그들이 태워 바치는 제물을 죽이던 장소에서 죄 바침의 제물을 위해 그것을 죽여라.
34. 그리고 성직자는 자기 손가락으로 죄 바침의 제물의 피를 가져 가라, 그리고 그것을 태워 바침의 제단의 뿔들에 놓아라, 그리고 그것으로부터의 모든 피는 제단의 받침에 쏟아라.
35. 그리고 그것으로부터의 모든 지방을 그가 가져 가라, 마치 어린 양의 지방을 평화 제물의 희생 제물로부터 가져간 것과 같다. 그리고 성직자는 그것들을 불로 만든 주님의 제물 위에, 제단 위에서 태워라. 그리고 성직자는 그가 죄지었던 것을 만짐 으로서 그를 위하여 보상을 받게 하라, 그리고 그는 용서된다.

영적 의미 요약

* 자연적 수준에서의 천적 인간이 순수해짐, 과오 없이 범한 잘못으로부터, 그 과정에는 주님을 예배함이 포함되어 있음이 1-12절에서 기술되고 있다.
* 영적 인간의 순수해짐, 그리고 주님의 예배가 그 과정에 포함되어 있다. 13-21절
* 자연적 인간의 순수해짐, 그들의 예배, 그들의 거듭남이 취급되는데, 첫째로 선으로 인도하는 진리의 상태가 기술된다. 22-26.
* 둘째로, 진리의 선, 즉 생활의 원리로 채택된 선의 상태에 관하여. 27-31절
* 마지막으로, 가장 깊은 상태인 순수한 선의 상태에 관하여. 32-35절

각 절의 영적 의미

1절. 그리고 주님께서 모세에게 이야기하셨다, 말하시기를,

영적 의미

신성한 진리를 수단으로 지각을 주시는 주님으로부터 유입이 있다.

세부적 영적 의미

주님 또는 여호와란 사랑 측면에서의 신성한 존재를; 이야기하심(speaking)이란 유입을; 모세란 신성한 진리, 또는 말씀을, 말함(가라사대, saying)은 지각을 각각 명시하고 있다.
위의 구절 같은 서술은 본문 외에도 말씀 속에서 자주 있게 되는데, 그 이유를 살펴두는 것은 도움이 되리라 본다. 이 말들은 내적 의미에서 새로운 시작(a new beginning)을 의미한다. 시작이라 해도 최초의 시작이 아닌 이전 것에 계속되는 새로운 시작, 그래서 주제가 바뀌는 것, 다시 말해 이 주제에서 다른 주제로 옮겨가는 새로운 시작을 의미한다. 각 시작 단계의 일반 주제는 다른 상태들에서 인간이 주님을 예배해온 것들이다. 본 장도 이 주제 가운데서 연속되는 것 중 하나이다. 앞의 장들이 다양한 애착들로부터 주님을 찬양하는데 비해 본 장은 죄와 잘못의 결과로 바쳐야 할 예배를 묘사하고 있다. 우리가 거듭나는 과정의 경험에 비추어 본다면, 내적, 외적인 삶의 변화들은 새로운 생각 상태, 새로운 계시들을 가져다준다. 그러므로 말씀 자체는 여러 장소에서 우리에게 새로운 빛을 비쳐 주는데, 그 이유는 악에 저항하려고 결심하여 계속해 간 결과인 우리의 모든 변화는 진리에 대한 우리의 지각을 더 명확하게 만들어, “심정이 순수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라”는 말씀에서 표현하는 법칙을 완성하게 한다. 심정이 순수해진다는 것은 애착이 순수해진다는 것이고, 하느님을 본다는 것은 순수해진 애착의 결과로 진리를 더 명백하게 식별한다는 말이다. A.C. 2001, 2951, 7010, 6752, 1791, 1822, 7191.

2절. 이스라엘의 자손들에게 이야기하여, 말하라, 만일 누군가가 주님께서 행하여져서는 안 된다고 명령한 것의 어떤 것에서 부지불식간에 죄를 짓는다면, 그리고 그것들 중의 어떤 것을 행한다면,

영적 의미

그리고 영적 교회의 사람에게 밝히 알게 하시는 것, 즉 그가 악을 금하는 신성한 진리에 관한 세부 사항들을 실수와 무지로 위반할 때, 그리고 위반할 의도는 없었지만 죄를 실지로 범하게 될 때에 관하여,

세부적 영적 의미

이야기하라(speaking)란 계시를; 이스라엘 백성은 영적 교회를; 실수로 죄를 짓는다는 것은 무지와 잘못으로 신성한 법을 위반하는 것을; 주님이 하지 말라고 명령한 것이란 명백히 피할 수도 있는 악들을; 그것을 하였다는 것은 죄를 범하는 것을 말한다. A.C. 3654, 9136, 10042, III

3절. 만일 기름부은 성직자가 백성 위에 죄있어지도록 하여 죄를 지었다면, 그러면 그가 죄진 것, 그의 죄를 위해 그로 하여금 흠이 없는 거세한 어린 수소를 죄 바침을 위해 주님께 바치게 하라.

영적 의미
예를 들면, 주님에게서 받음으로 천적 선 안에 내향적으로 있는 사람이 실수해서 선 가운데 있지는 않으나 진리 가운데 있는 더 낮은 상태에 있는 사람, 즉 자연적 인간에 소속되는 무지의 순진 가운데 있는 사람에게 피해를 줄 때, 그는 순진의 선으로부터 주님을 예배해야 할 것이다. 그 실수는 그의 탓으로 돌리지 않고, 악의 면제가 거행될 것이다.

세부적 영적 의미

기름 부어 세운 성직자란 주님으로부터 받은 천적인 선 가운데 있는 이들을; 성직자가 죄를 짓는다는 것은 이 구절의 경우 잘못을; 죄있어지도록 함이란 잘못의 결과, 즉 피해를; 성직자와 관련된 백성이란 보다 낮은 상태에 있는 이들, 즉 진리 안에는 있으나 선 안에는 아직 있지 못하는 이들을; 이 절의 성직자란 무지의 순진 가운데 있는 성직자이고, 흠이 없는 수소란 자연적 인간 안에 있는 순진의 선을; 죄의 제물이란 잘못이 귀속되지 않고 용서가 거행될 것을 명시하고 있다. 1장 4절의 설명을 보면 보상(atonement)에 관한 주제가 다루어져 있다. 이에 더하여 한 가지 더 생각해 본다. 죄의 용서는 인간의 회개에, 회개하는 상태에서 주님을 예배함에, 그 결과 인간이 선의 상태에 오게 되는 것, 말을 바꾸어 본다면, 하느님과 인간을 사랑하는 상태로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보상, 실지의 보상, 화해이다 (로마서 5:11, 고린도후서 5:19). A.C. 9954-7, 2절, 6451, 1259, 3절, 5913, 6126, 7837, 3400, 10122, 1장 4절.

4절. 그리고 그는 주님 앞 만남의 문으로 수소를 가져 와라. 그리고 그는 자기 손을 수소의 머리에 놓아라, 그리고 주님 앞에서 수소를 죽여라.

영적 의미

그리고 이 예배는 주님의 인정과 천국을 통한 그분의 역사가 있어야 할 것이다. 순진의 선으로 들어가는 내적 인간의 유입이 능력을 가지고 외적 부분에 있어야 한다. 그리고 자연적 인간은 자아를 부정함으로 이 예배를 준비해야 할 것이다.

세부적 영적 의미

이것들은 다음 사항을 생각해 보면 더 알게 된다. 만남의 천막 문간에 수소를 가지고 온다는 것은 주님을 인정하고, 그분의 역사하심이 천국을 통하여 임을 인정하는 것이고; 그 머리에 손을 얹는다는 것은 내적 인간이 힘 있게 외적 인간의 순진의 선 안으로 유입된다는 것을; 주님 앞에서 그것을 죽인다는 것은 자아를 부정함으로 이 예배는 준비된다는 것을 각각 명시하고 있다. A.C. 2356, 3540-3, 878, 10023, 10024, 9990.

5절. 그리고 기름부워진 성직자가 수소의 피를 가져 와라, 그리고 그것을 만남의 천막으로 가져오너라.

영적 의미

그리고 실수한 당사자는 자기의 본질적 선으로부터 자연적 인간에 있는 순진의 선에 관련된 신성한 진리를 분별하여 그것이 주님으로부터 천국을 통해 존재함을 인정해야 한다.

세부적 영적 의미

이것은 진실이다, 그 이유는 기름 부어 세운 성직자가 진리와 결합된 위반자에게 속한 본질적인 선을 나타내고 있기 때문이다. 수소의 피는 자연적 인간에 있는 순진의 선과 관련되는 신성한 진리를; 그 피를 만남의 천막으로 가지고 온다는 것은 주님을 인정하고 그분의 영향이 천국을 통해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을 각각 명시한다. A.C. 9954-7, 10047, 2356, 3540-3.

6절. 그리고 성직자는 자기 손가락을 피에 담그어라, 그리고 성소의 베일(veil) 앞, 주님 앞에 일곱 번 뿌려라.

영적 의미

그리고 이 선은 비록 진리와 선의 가장 깊은 결합의 상태를 보지 못해도 진리는 자연 평면 안에서 선과 결합되어야 한다는 것을 인정하는 거룩한 상태에서 신성한 진리를 수단으로 한 어떤 힘을 가진 신성한 선으로부터 작동되어야 한다.

세부적 영적 의미

여기서 성직자가 손가락을 피에 담근다는 것은 신성한 진리를 수단으로 어떤 능력을 가진 신성한 선의 역사를; 주님 앞에서 피를 일곱 번 뿌린다는 것은 자연 평면에 있는 선과 결합되어야 한다는 것을 인정하는 거룩한 상태를; 그 피가 수소의 피라는 것은 자연 평면에 있는 것을; 성소의 베일(휘장) 앞에 뿌린다는 것은 가장 깊게 결합하는 상태는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뜻이다. A.C. 7430, 10047, 716, 5913, 6126, 9670, 3207.

7절. 그리고 성직자는 주님 앞 달콤한 향의 제단의 뿔들에 피를 놓아라. 이 제단은 만남의 천막 안에 있다. 그리고 수소의 모든 피를 태워 바치는 제단의 받침에 부어라, 이 제단은 만남의 천막의 문에 있다.

영적 의미

그럼에도 이 결합은 천적 수준과 영적 수준을 통하여 존재하되, 그에 관한 최 말단 진리들에서까지 존재한다, 그리고 거기서도 주님으로부터 있어졌음이 인정되어야 한다. 그 인정을 수단으로 완전함이 자연적 수준에서 결과될 것이다.

세부적 영적 의미

달콤한 향의 제단의 뿔들 위에 피를 붓는다는 것은 결합이 천적인 수준과 영적인 수준을 통하여 있게 된다는 것, 그리고 최말단 진리에서도 있게 된다는 것, 이 결합이 주님으로부터임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을 명시하고 있다. 만남의 천막 문에 있는 태워 바치는 제단 받침에 수소의 피를 붓는다는 것은 결합은 자연적 수준에서도 역시 결과되어야 하며 위와 같이 인정함으로 완성되어야 할 것을 명시하고 있다. A.C. 10176, 10208, 2832, 10642, 10047, 2356, 3540-3.

8절. 그리고 죄 바침(sin offering)으로부터의 수소의 모든 지방을 그는 그것으로부터 가져 가라. 즉 내장들을 덮은 지방, 그리고 내장들 위에 있는 모든 지방이다.

영적 의미

모든 천적 선은 자연적 선 뿐인 것에서 구별되고 분리되어야 하는데, 이는 이해함과 의지에 관한 가장 낮은 수준에서도 수행되어야 한다.

세부적 영적 의미

수소의 기름은 천적인 선을; 떼어 낸다는 것은 자연적 선 뿐인 데서 분리되어 구별시켜야 한다는 것인데 이는 3장 4, 5절에서 살핀바 있다. 그리고 내장을 덮은 지방, 내장에 붙어 있는 지방이란 가장 낮은 수준의 선, 또는 의지와 이해함의 자연적 수준을 명시한다. 3장 4, 5절 3장 3절 참조.

9절. 그리고 두 콩팥들, 그리고 그것들 위에 있는 지방, 이것은 허리 근처이다, 그리고 간 위의 대망을 콩팥과 더불어 그는 가져가라.

영적 의미

중간 수준인 진리와 애착의 식별함이 진리와 선의 결합을 결과하게 하고, 내면 수준에서는 선과 진리의 결합을 결과되게 한다.

세부적 영적 의미

두 콩팥과 거기에 붙어 있는 지방, 곧 허리 근처에 붙은 지방, 그리고 간에 붙은 지방 덩어리는 중간 수준, 즉 진리가 선과 결합하여 결과되는 것인 진리와 애착을 식별하는 것, 그리고 선이 진리와 결합함으로 결과되는 내면의 등차를 명시한다. 3장 4절 참조.

10절. 평화 제물의 희생제물로부터의 수소(ox)를 취급한 그대로와 같다. 그리고 성직자는 그것들을 태워 바치는 제단 위에서 태워라.

영적 의미

자유 의지에서 주님을 예배하는 것과 같다. 그래서 모든 다양한 선들이 주님께 전부 봉헌되어야 한다.

세부적 영적 의미

여기서, “평화 제물이 된 수소에서 떼어내는 경우처럼 떼어야 한다”는 것은 자유 의지로부터 주님을 예배할 때와 같다는 것을 명시하고 있고; 그것을 성직자가 태워 바치는 제단 위에서 살라야 한다란 선에 속한 모든 다양한 것들은 주님께 모두 봉헌되어야 한다는 것을 명시한다. 3장 5절 참조. A.C. 10097.

11절. 그리고 수소의 가죽, 그리고 모든 그것의 고기, 그것의 머리와 더불어, 그리고 그것의 다리들, 그리고 그것의 내장들, 그리고 그것의 똥,

영적 의미

자연적일 뿐인 모든 선과 진리, 가장 깊은 것, 중간 것, 가장 낮은 것, 이리하여 완전히 불순한 모든 것

세부적 영적 의미

수소 가죽은 자연적 진리 뿐인 모든 것; 그 고기란 자연적 선 뿐인 모든 것; 다리는 중간 수준에 속한 선; 머리는 가장 깊은 수준의 선; 내장은 가장 낮은 수준의 선; 똥은 완전히 불순한 모든 것을 각기 명시하고 있다. A.C. 3540, 10040, 10048, 10049, 10050, 10037.

12절. 수소 전부 조차 그는 진영 밖 깨끗한 장소, 재들을 쏟는 곳에 운반하라, 그리고 그것을 불과 더불어 장작 위에서 태울 것이다. 재들을 쏟는 거기서 그것은 태워져야 한다.

영적 의미

배설물에 속한 것 거듭나지 못한 자연적 인간에 속한 모든 것은 천국적 삶에서 분리되어야 한다. 이와 같이 분리하는 행동 자체는 순수하다. 그리고 이러한 분리는 그 목적에 부합되어야 한다. 이리하여 공적을 주장하려드는 자연적 선은 사악한 자의 경우 자아 사랑으로 황폐될 것이고, 영적 인간의 경우에는 주님을 사랑함으로 거절될 것인 바, 그 이유는 그 배설물이 더 이상 선용의 수단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세부적 영적 의미

그 수소 전부란 거듭나지 못한 자연적 인간 전체를; 진영 밖은 천국 삶에서의 분리를; 깨끗한 곳이란 분리하는 행동은 순수하다는 것; 재들의 장소란 그것들의 용도에 사용한 것들의 제거를; 장작이란 공적의 선을; 불이란 사랑을; 태운다는 것은 자아 사랑을 통해 황폐해짐, 또는 상황에 따라서 주님 사랑을 통해 거절함도 명시한다. A.C. 4236, 4545, 2625, 9723, 2784, 934, 2445, 2449.

13절. 그리고 만일 이스라엘의 전체 회중이 잘못을 한다면, 그리고 어떤 것이 집회의 눈으로부터 감추여 있다면, 그리고 그들이 주님이 하지 말라고 명령했던 것들의 어떤 것을 행동했다면, 그리고 죄 지음이 있다면,

영적 의미

영적 인간 뿐만 아니라 천적 인간이 잘못했는데도 아직 그에 관해 모르고 있는 도중 신성한 질서에 반대되는 실제의 죄가 범해져 결과적으로 죄가 있게 될 때,

세부적 영적 의미

이스라엘 온 회중이란 영적인 교회를; 명백하게 잘못함이란 실수로 죄를 짓는 것; 그 사실을 모르고 있다는 것은 이해함이 진리에 무지한 상태에 있다는 것을; 주님이 하지 말라고 명령하신 것 가운데 어떤 하나라도 어겼다는 것은 신성한 질서에 반대되는 죄를 범하는 것을; 죄 있다는 것은 잘못을 의식함을 각기 나타내고 있다. A.C. 3654, 9156, 6721, 4526, 5076, 3400.

14절. 그들이 죄지은 죄가 알려질 때, 그 다음, 집회는 죄 바침을 위해 어린 수소를 바쳐라, 그리고 그것을 만남의 천막 앞으로 가져 와라.

영적 의미

이와 같은 잘못과 죄를 영적 인간이 발견했을 때, 그 악이 제거되기 위해 순진 가운데 있는 선을 위한 자연적 애착으로 주님을 예배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 예배는 주님을 인정하고 그분으로부터 천국적 생명이 있음을 인정함으로 행해져야 한다.

세부적 영적 의미

죄가 알려진다는 것은 진리의 지식으로부터 과오를 발견한다는 것을; 제물이 되는 어린 수소는 자연적 인간에 있는 순진의 선으로부터 주님을 예배한다는 것; 죄 바침이란 악의 제거를; 그 제물을 만남의 천막으로 가져온다는 것은 주님을 인정하면서 천국의 생명은 그분으로부터임을 인정하는 것을 나타낸다. A.C. 2230, 10122, 2356, 3540-3.

15절. 그리고 회중의 장로들은 그들의 손을 주님 앞 수소의 머리에 놓아라. 그리고 그 수소는 주님 앞에서 죽여져야 한다.

영적 의미

그래서 주님을 인정함과 더불어 자연적 애착 안으로 내적 인간으로부터의 힘있는 유입이 있어진다. 그리하여 자연적 인간은 자아를 부정함으로 예배를 준비한다.

세부적 영적 의미

회중의 장로란 집합체라는 측면에서의 내적 인간을, 그 이유가 그들은 지혜의 중요 요점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수소의 머리 위에 손을 얹는다는 것은 자연적 애착 안으로의 힘 있는 유입을; 주님 앞에서란 주님을 인정하는 것을; 수소를 죽임은 이런 예배를 위해 자아를 부정함으로 준비하는 것을 말한다. A.C. 6524, 878, 10023, 10024, 9990.

16절. 그리고 기름부워진 성직자가 만남의 천막으로 수소의 피를 가져 와라.

영적 의미

자연적 인간에서 작동하는 천적 사랑의 선으로부터 온 신성한 진리는 순진의 선이 천국을 통하는 주님에게 있음을 인정하고 더불어 순진의 선에 관련된 것을 식별한다.

세부적 영적 의미

기름 부어진 성직자란 위반자의 근본되는 선이 진리와 결합되어짐을; 수소의 피는 자연적 인간 안에 있는 순진의 선에 관련된 신성한 진리를; 그 피를 만남의 천막으로 가져옴이란 주님을 인정함과 그분의 영향이 천국을 통해 있음을 인정하는 것을 말한다. A.C. 9954, 10047, 2356, 3540-3.

17절. 그리고 성직자는 피에 자기 손가락을 담근다, 그리고 그것을 주님 앞, 베일 앞에 일곱 번 뿌려라.

영적 의미

또한 능력을 지닌 신앙의 진리들에서 작동하는 천적 선으로부터 진리가 선과, 또는 신앙이 선행과 결합함이 비록 영적 인간 속의 천적 생명이 모호한 상태라 해도 거룩한 상태에서 천적 천국을 통하여 주님으로부터 있다를 인정해야 할 것이다.

세부적 영적 의미

성직자가 피에 손가락을 담근다는 것은 신성한 선이 신성한 진리에 의거 어떤 능력을 가지고 작업함을; 그 피를 주님 앞에 일곱 번 뿌린다는 것은 자연 평면에서 진리가 선과 결합되어야 한다는 것을 인정하는 거룩한 상태를; 그 피가 수소의 것이란 자연 평면에 속한 것이라는 것; 성소의 베일 앞에서 뿌린다는 것은 결합의 가장 깊은 상태는 눈에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한다. A.C. 7430, 10047, 716, 5913, 6126, 9670, 3207.

18절. 그리고 그는 만남의 천막 안에 있는 주님 앞에 있는 제단의 뿔들 위에 피를 놓아라, 그리고 모든 피는 태워 바침의 제단 받침에 쏟아라, 이 제단은 만남의 천막의 문에 있다.

영적 의미

역시 영적 수준에서의 진리가 선과 결합함은 예배에서 힘있게 인정되어야 하고, 자연 평면에서 충만하게 결과되어야 하되 주님을 인정함, 즉 천국을 통해 그분이 역사 하심을 인정함으로 되어져야 한다.

세부적 영적 의미

만남의 천막 안 주님 앞인 제단의 뿔에 피를 붓는다는 것은 영적 수준에서 진리가 선과 결합하는 것은 예배에서 힘 있게 인정됨을; 만남의 천막 문에 있는 태워 바침의 제단 받침에 수소의 피를 붓는다는 것은 이 결합이 자연 평면 안에서도 역시 주님을 인정하고 천국을 통해 그분이 역사하심을 인정함으로 완전하게 결과되어야 함을 말한다. A.C. 10176, 10208, 2832, 10642, 10047, 2356, 3540-3.

19절. 그리고 그로부터의 모든 지방은 그것으로부터 떼어 내라, 그리고 제단에서 그것을 태워라.

영적 의미

그러나 영적 인간의 자연적 수준에 있는 천적 선에 속한 것은 무엇이든지 주님으로부터임을 인정해서 그분께 모두 봉헌되어야 할 것이다.

세부적 영적 의미

기름은 천적인 선을; 제단 위에서 태움은 인정함을 수단으로 예배에서 신앙과 사랑 모두가 주님께 봉헌되어야 함을 말한다. A.C. 10033, 10052.

20절. 그는 수소를 가지고 이렇게 하라. 그는 죄의 제물의 수소를 가지고 했던 것 같이 이것도 그렇게 하라. 그리고 성직자는 그들을 위하여 보상을 받게 하라, 그리고 그들은 용서된다.

영적 의미

이것은 자연 평면이 순수해지고 성별되는 법칙이다. 죄를 면제하는 경우에서와 같이 실수한 경우도 같은 바, 주님으로부터의 선에 관한 상태, 그 결과 순수해짐은 영적 인간과 주님과의 화해, 외적인 것이 내적인 것과 조화되게 해준다.

세부적 영적 의미

수소를 가지고 위와 같이 행하여지는 것은 자연 평면의 신성시 됨과 순수함을 위한 법칙이라는 것; 그가 죄 바침의 소를 가지고 했던 것 같이 행하라는 것은 죄를 사면하는 경우 같이 잘못한 것들도 마찬가지이다는 것을; 성직자가 보상을 받게 하면 용서된다는 것은 주님으로부터 온 선에 관한 상태, 그에 따른 순수해짐은 영적 인간이 주님과, 외적 부분이 내적 부분과 조화(reconciliation)를 이루는 결과를 가져온다. A.C. 9391, 7837, 10042, III. 9506-1, 10023, 10042, II.

21절. 그리고 그는 수소를 진영 밖으로 운반 하라, 그리고 첫 번째의 수소를 태운 방식대로 그것을 태워라. 이것은 집회(assembly)를 위한 죄 바침이다.

영적 의미

그리고 모든 자연적 애착 뿐인 것은 그 생명이 천적 인간에 속하든, 영적 인간에 속하든 천국 생명에서 분리되어야 한다. 그 이유는 그것들이 자아 사랑으로 살라지기 때문이고, 인간 전체에서 악과 잘못이 제거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세부적 영적 의미

진지 밖으로 수소를 운반함이란 자연적 애착 뿐인 것은 천국적 삶에서 분리되어야 할 것을; 앞의 수소에게 했던 것 같이 이란 영적 인간을 위한 것도 천적 인간을 위한 것과 동일하다는 것, 그 이유는 성직자가 천적인 것, 그리고 집합체로서의 영적인 것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진지 밖에서 수소를 태운다는 것은 이기적 사랑에 의해 소멸됨을; 집회를 위한 죄의 제물이란 인간 전체로부터 온 잘못과 악을 제거함을, 그 이유는 집회가 외적 인간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A.C. 10040, 4236, 9954-7, 3654, 934, 2445, 2449, 3654, 10243.

22절. 통치자가 죄지을 때, 그리고 그의 하느님, 주님이 하지 말라고 명령했던 모든 것들 중의 어떤 하나를 부지불식간에 행할 때, 그리하여 죄가 있어 질 때,

영적 의미

신앙의 진리로 움직여지는 누군가가 악의는 없으나 무지해서 악을 죄로 알고 금하는 계명을 위반하여 죄가 있게 될 경우,

세부적 영적 의미

통치자(ruler, prince)란 제일 가는 진리들 중 하나 또는 신앙의 진리 중 어느 하나를; 하지 말라고 명령된 것을 부지불식 간에 했을 때란 무지를 통해 죄짓는 것을; 하지 말아야 하는 것들이란 죄로서 금해야 하는 악과 거짓들을; 그래서 죄가 있음이란 유죄를 초래하는 것을 말한다. A.C. 2089, 8314, 9156, 19942, III.

23절. 만일 그의 죄가 그가 어떤 점에서 죄지었나를 그에게 알게 만들었다면, 그는 자기 제물로 흠이 없는 수컷 염소를 가져 와라.

영적 의미

이런 사람이 자기 과오를 지각하도록 계발될 때, 그는 잘못에서 자유로운 자기 신앙의 진리로부터 주님을 예배해야 한다.

세부적 영적 의미

자기의 잘못이 알게 만들어진다는 것은 그가 자기 과오를 지각하도록 진리(Truth)로 계발되는 것을; 제물을 가져옴이란 주님을 예배한다는 것을; 수염소란 신앙의 진리를; 그리고 흠이 없는 것이란 잘못으로부터 자유함을 말한다. A.C. 2230, 349, 922, 4169, 725, 7837.

24절. 그리고 그는 자기 손을 염소의 머리 위에 놓아라, 그리고 그들은 주님 앞 태워 바치는 제물을 죽인 장소에서 그것을 죽여라. 이것은 죄 바침이다

영적 의미

그 다음 내적 인간이 능력을 가지고 신앙의 진리에로 흘러들고, 그는 자아 부정으로 자신을 준비시켜 사랑으로부터의 주님을 예배하고, 악은 제거된다.

세부적 영적 의미

염소 머리에 손을 얹는다는 것은 내적 인간이 능력을 가지고 외적 인간에 있는 신앙 속의 진리에로 흐르는 것을; 염소를 죽인다는 것은 사랑으로부터 주님을 예배하려면 자아를 부정함으로 준비되어야 함을; 태워 바치는 제물을 죽이는 자리에서란 사랑으로부터 예배하는 상태를; 이것이 죄 바침이다는 것은 이와 같은 예배에 의해 악이 제거됨을 말한다. A.C. 878, 10023, 10024, 4169, 2625, 923, 3400, 10122.

25절. 그리고 성직자는 자기 손가락으로 죄 바침의 제물의 피를 가져 와라, 그리고 그것을 태워 바치는 제단의 뿔들에 발라라, 그리고 그로부터의 피는 태워 바침의 제단의 받침에 쏟아라.

영적 의미

그래서 선의 원리로부터 신앙의 진리는 어떤 능력으로 활기를 얻게 된다. 그래서 진리가 선과 결합함이 자연적 수준에서 거행된다.

세부적 영적 의미

성직자란 선의 원리를; 염소의 피는 신앙의 진리를; 그 피에 손가락을 담근다는 것은 선이 어떤 능력을 가지고 진리 위에 작업함을; 제단의 뿔에 그 피를 바른다는 것은 진리가 선에 내적으로 결합하는 것을; 그리고 태워 바치는 제단 받침에 그 피를 붓는다는 것은 진리가 선에 자연적 수준에서 결합함을 말한다. A.C. 9946, 10047, 4169, 7430, 10047.

26절. 그리고 그것으로부터의 모든 지방은 평화 제물의 희생 제물을 태우던 그대로 제단에서 태워라. 그리고 성직자가 그의 죄에 관하여 보상을 받게 하라, 그리고 그는 용서된다.

영적 의미

자연적 인간에 속해 있는 천적인 것은 주님으로부터 임을 인정해서 자유 의지라는 원리로부터 그분께 봉헌되어야 한다. 이런 방법 속에서 악이 제거되고 용서가 뒤따른다.

세부적 영적 의미

제단에서 태우는 지방이란 자연적 인간에 속해 있는 천적인 선은 주님으로부터 있음을 인정하여 그분께 봉헌되어야 할 것을; 평화 제물의 지방 처럼 이란 자유 의지를 원리로 함을; 성직자가 보상을 받게 함은 악의 제거, 그 결과 용서받음을 말한다. A.C. 10033, 10052, 10097, 9506-1, 10042, II.

27절. 그리고 만일 일반 백성 중의 누군가가 부지불식간에 죄지어 주님께서 하지 말라고 명령해두었던 것들 중의 어떤 것을 행하는 중이다면, 그리고 죄 있음에 있다면.

영적 의미

내면에 있는 신앙의 선 안에 있는 누군가가 악한 의도 없이 무지로 인해 악을 죄로 알고 금하여 하지 말라는 명령을 위반해서 죄가 있게 될 경우,

세부적 영적 의미

일반 백성 중의 누군가(보다 엄밀히 말한다면 그 땅의 백성 중 누군가)란 내면에 있는 신앙의 선 중의 어느 하나를; 주님께서 하지 말라고 명령하신 것을 하나라도 실수로 죄짓는다는 것은 악한 의도 없이 무지로 죄 지음을 말한다. A.C. 2928, 2950, 5076, 3400.

28절. 만일 그의 죄가 그가 죄지었다는 것을 그에게 알게 만들었다면, 그러면 그는 자기가 죄지은 그의 죄를 위해 그의 봉헌물로 흠이 없는 암컷 염소를 가져와라.

영적 의미

자기의 잘못이 발견될 때, 그는 악이나 잘못을 혼합함이 없이 자기 신앙의 선으로 주님을 예배하면서 질서의 법에 반대되게 행동했음을 인정해야 한다.

세부적 영적 의미

자기에게 죄가 알려짐이란 그의 잘못이 말씀으로부터 온 진리를 수단으로 발견될 때를; 제물로 흠이 없는 염소를 가져온다는 것은 어떤 악이나 잘못을 혼합시켜 놓지 않은 신앙의 선으로부터 주님을 예배함을; 그리고 그가 저지른 죄 때문이란 질서의 법칙에 반대되는 행동을 자신이 했다는 것을 인정함을 말한다. A.C. 2230, 349, 922, 4169, 725, 7837, 9506, 10023, 10042, II.

29절. 그리고 그는 자기 손을 죄 바침의 제물의 머리 위에 놓아라, 그리고 태워 바침의 장소에서 죄 바침의 제물을 죽여라.

영적 의미

그러면 내적 인간은 능력을 가지고 외적 인간으로 흐를 것이고, 내면의 인간은 사랑으로부터 주님에 대한 예배를 준비하게 될 것이다.

세부적 영적 의미

죄 바침의 제물의 머리에 손을 얹는다는 것은 내적 인간이 힘있게 외적 인간에 있는 신앙의 선 안으로 흐른다는 것을; 그리고 태워 바침의 제물을 죽이는 자리에서 죽인다는 것은 사랑으로부터 주님을 예배하기 위한 내적 인간의 준비를 말한다. A.C. 878, 10023, 10024, 4169, 2625, 923.

30절. 그리고 성직자는 그의 손가락으로 그것으로부터의 피를 가져 가라, 그리고 그것을 태워 바침의 제단의 뿔들에 바르라, 그리고 그것으로부터의 모든 피는 제단의 받침에 쏟아라.

영적 의미

그리고 천적 선으로부터 신앙의 선은 활성화되어, 진리는 내면에 있는 어떤 힘과 결합될 것이다. 더구나 진리와 선과 결합이 자연 평면에서 결과될 것이다.

세부적 영적 의미

성직자가 그 피를 손가락에 찍어 태워 바침의 제단의 뿔들에 바른다는 것은 천적 선으로부터 신앙의 선은 활성화되고, 힘있게 내면에 있는 진리와 결합된다는 것; 그리고 나머지 피는 제단 밑바닥에 쏟는다는 것은 진리가 선과 결합함은 자연 평면에서도 역시 결과되어야 함을 말한다. A.C. 9946, 10047, 4169, 7430, 10047.

31절. 그리고 그것으로부터의 모든 지방은 그가 가져 가라, 마치 평화 제물의 희생 제물로부터 가져 감과 같다. 그리고 성직자는 주님에게 달콤한 향기를 위해 그것을 제단 위에서 태워라. 그리고 성직자는 그를 위하여 보상을 만들고, 그는 용서된다.

영적 의미

그 이유가 이와 같은 예배에 있는 모든 천적인 선은 악과 잘못에서 분리될 것인 바, 마치 자유 의지로 신실하게 숭배하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은 그분을 받아들여 감사함으로 주님께 봉헌되어야 한다. 이렇게 해서 악이 제거되고, 외적 인간은 내적인 것과 재 연합한다.

세부적 영적 의미

지방은 천적 선을, 떼어 냄은 악과 잘못에서 분리시킬 것을(3장 4, 5절 참조); 평화 제물이란 자유 의지로부터 숭배함을; 제단 위에서 태움은 주님께 봉헌함을; 주님께 달콤한 향기를, 또는 쉼의 냄새란 깊이 감사하고 그분이 받으실 수 있다는 것을; 성직자가 보상을 받게 하여 용서됨은 악이 제거되어 외적 인간이 내적 인간과 재회하는 것을 말한다. A.C. 10003, 10097, 10052, 10054, 9506-1, 10023, 10042, II.

32절. 그리고 만일 그가 죄 바침의 제물을 위한 자기 봉헌물로서 어린 양을 가져온다면, 그는 흠이 없는 암컷으로 그것을 가져 와라.

영적 의미

그런데 어떤 사람이 가장 깊은 예배인 천적 사랑으로부터 주님을 예배한다면, 그것은 악과의 어떤 혼합도 있어서는 안 된다.

세부적 영적 의미

죄 바침의 제물로 바치는 양은 천적 사랑, 그리고 그 순진은 가장 깊다는 것을; 암컷이란 수컷이 진리를 명시함에 비해 선을 나타내고; 흠이 없다는 것은 악과의 어떤 혼합도 없어야 함을 말한다. A.C. 10132, 725, 7837.

33절. 그리고 그는 자기 손을 죄 바침의 제물의 머리에 놓아라, 그리고 그들이 태워 바치는 제물을 죽이던 장소에서 죄 바침의 제물을 위해 그것을 죽여라.

영적 의미

그러면 내적 인간은 능력을 가지고 외적 인간 안으로 흘러 들 것이다. 이리하여 그는 사랑으로부터 주님을 진정하게 예배한다.

세부적 영적 의미

자기 손을 죄 바침의 제물의 머리에 얹는다는 것은 내적 인간이 힘있게 외적 인간에로 흐르는 것을; 태워 바침의 제물을 죽이는 자리에서 죄 바침의 제물을 죽인다는 것은 사랑으로부터 주님을 진정으로 예배하기 위해 준비함을 말한다. A.C. 878, 10023, 10024, 2625, 923.

34절. 그리고 성직자는 자기 손가락으로 죄 바침의 제물의 피를 가져 가라, 그리고 그것을 태워 바침의 제단의 뿔들에 놓아라, 그리고 그것으로부터의 모든 피는 제단의 받침에 쏟아라.

영적 의미

그러면 주님으로부터 천적인 선은 어떤 능력을 가져 살아 움직인다. 진리는 선과 결합된다. 또한 진리가 자연 평면에 있는 선과 완전히 결합하게 된다.

세부적 영적 의미

성직자가 손가락에 죄 바침의 제물의 피를 찍어 태워 바침의 제단의 뿔에 바른다는 것은 주님으로부터 순진 속의 천적인 선은 어떤 능력을 가져 살아 있게 되고, 진리가 가장 깊은 부분에서 결합하게 된다는 것을; 피를 제단 기초에 붓는다는 것은 진리가 선과 자연 평면 속에서 완전히 결합함을 말한다. A.C. 9946, 7430, 10207, 10047.

35절. 그리고 그것으로부터의 모든 지방을 그가 가져 가라, 마치 어린 양의 지방을 평화 제물의 희생 제물로부터 가져간 것과 같다. 그리고 성직자는 그것들을 불로 만든 주님의 제물 위에, 제단 위에서 태워라. 그리고 성직자는 그가 죄지었던 것을 만짐 으로서 그를 위하여 보상을 받게 하라, 그리고 그는 용서된다.

영적 의미

이리하여 천적인 모든 선은 자유로운 예배 상태에서 순진의 선으로 비축되어진다. 그리고 주님으로부터 인정되어지고 예배 동안 그분께 봉헌된다. 그 이유가 그것은 순수한 사랑으로부터 온 주님의 예배이기 때문이다. 예배자는 주님과 재회되고, 외적 인간은 내적 인간과 재회될 것이며, 악으로부터의 완전한 분리가 결과되리라.

세부적 영적 의미

기름의 의미가 천적 선을 나타내고; 떼어냄은 악과 잘못에서 분리됨을(3장 4, 5절 참조); 제단에서 태움은 주님께의 봉헌을; 불로 만든 제물이란 순수한 사랑으로부터의 예배를; 성직자가 그를 위해 보상을 받게 함, 그리고 그가 용서됨이란 주님으로부터 온 천적 사랑에 의해 악이 제거되어 주님과 재회하고, 외적 인간이 내적 인간과도 재회하는 것, 그리하여 악으로부터 완전히 분리되는 상태를 말한다. A.C. 10033, 10097, 10052, 934, 10055, 9506-1, 10023, 10042, II.

4장의 종합적 고찰

위에서 주어진 간략한 주석들을 가지고 본 장 전체에 관한 일반적인 재음미를 유익하게 끌어갈 수 있으리라 본다. 앞의 장에서 진행된 것은 순수함으로 주님을 예배하는 자연적, 영적, 천적 애착들을 기술한 진리의 연결된 시리즈들로서 모든 진정한 예배의 본질은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는데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주님을 예배한다는 것은 그분을 사랑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런 진리가 실감되어 질 때, 자연스럽게 수반되는 것은 어느 누구도 주님을 알지 못하면서 주님을 예배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 이유가 상대방에 대해 아무것도 아는 게 없는데 하물며 상대방을 사랑한다는 것은 말도 안되는 소리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배에서 제일 가는 것은 예배의 대상에 관한 올바른 지식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즉각 이런 질문이 발생되고 만다. “어떻게 그런 지식이 획득될 수 있을까?” “인간은 창조되어 있는 자기 주위의 눈에 보이는 것으로부터 하느님의 실존이나 그분이 누구신지까지도 알 수 있게 되어있지 않을까?” 확실한 것은 그렇지 않다는 대답 뿐이다. 그 이유는 그런 식의 관찰로 하느님의 존재, 또는 그분의 인격을 알게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과학이나 철학에서 꽤 뭔가를 달성했다고 하는 이들이 오히려 더욱 하느님의 존재를 부정해왔기 때문이다.
“누가 하느님의 신비를 파헤칠 수 있을까?” (욥기 11:7). 이상에서 살핀 바대로, 하느님에 관한 생각, 그분에 관한 수동적인 어떤 지식들은 계시(밝히 알게 해줌)에 의해 하느님 자신으로부터만 우선적으로 올 수 있을 뿐이다는 것이다. 그 이유가 우리는 신성한 존재에 관한 실존을 거의 상상해 볼 수 없는데 그 이유는 신성한 존재가 인간에게 그분에 관해 생각하는 능력을 부여했기 때문이다. “하느님을 믿되 그분으로부터의 어떤 계시가 없이 믿는다면 그 신앙은 올바르지 못하고 슬기롭지도 않을 것이다.” 그러나 확실히 해두어야 할 한 가지는, 주님은 인간에게 그분 자신을 언제나 밝혀 주셔 왔다는 것이다. 이 밝히 알려주심(계시)을 우리는 말씀(the word), 또는 그분으로부터 진행된 신성한 진리, 그 진리가 대화 형체로 있었든지, 아니면 대대로 물리도록 작문 형태로 되었든지 모두 신성한 진리라 부른다. 이런 견해의 요점으로부터 지금 우리가 공부하는 말씀 역시 주님으로부터 모두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 존재란 말씀의 영과 생명, 그리고 바깥 형체에 이르기까지 모두를 포함해서 하는 말이다. 말씀으로부터 우리는 주님에 관한 지식을 가지는 바, 말씀에 우리는 현재 소유하는 그분에 관한 지식보다 더 해박한 지식을 의뢰해야 한다.
말씀은 글자적 의미에서까지, 그리고 내적 의미의 세부 사항에 이르기까지에서, 우 리가 그분을 정확하게 예배할 수 있도록 주님의 속성을 보여주고 있다. 그분은 본질적으로 스스로 실존하시는 분(Being), 사랑 자체와 지혜 자체가 하나된 분이시다. 인간이 향유하는 사랑과 총명 모든 것은 그분으로부터 진행된다. 그러므로 그분은 모든 선과 완전한 선물을 주시는 자요, 그분과 더불어서는 어떤 변덕도 바뀜도 없다. 우리가 그분을 예배한다면, 다시 말해 우리가 그분을 사랑한다면, 우리 역시 그분으로부터 받은 선함, 진리, 행복에 관한 것을 이웃 동료에게 주는 자이어야 할 것이다.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선하고 진정한 것을 사랑하고, 심정으로부터 그것들을 행하는 것이다” (천국과 지옥 16항). 그런고로 예배란 성소에서 의식이나 예식을 수단으로, 또는 기도나 찬양, 말씀을 읽고 설교를 듣는 것만으로 주님을 숭배하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런 각종 것들은 그분을 사랑함으로부터 주님을 진정으로 예배하게 하는 것을 도와주는 것일 뿐이다. 또는 그분에 대한 우리의 사랑의 결과이다.
위에서 살핀 일반적인 소견은 진정한 예배가 무엇이어야 하는지, 어떻게 진정한 예배가 항상 있어야 하는지 살핀 셈이다. 이와 더불어 본 장에서 주목해 볼 것은, 4장의 내적 의미는 무지와 실수로 질서의 법칙을 위반해서 죄가 있게 되는 사람과 더불어 존재하는 삶 속의 예배에 관해 특별히 언급하고 있다. 본 장의 서술에서 밝게 비추고 있는 한 가지 확실한 진리는 인간이 높은 지위의 계층이던, 낮은 계층이던, 집단적인 인간 사회이든, 개인이든 실수하기 쉽다는 것, 그 결과로부터 구원될 수 있는 길은 오로지 사랑으로 주님을 실지 예배하는 것 뿐이다. 그 이유가 죄의 면죄, 또는 죄가 용서됨이라고 통상 우리가 말하는 그 용어는 신성한 질서 법칙에 따라 순수한 사랑을 통하여 악이나 잘못을 제거한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우리가 주목해 볼 사항은, 실수로 위반한 네 가지 종류로부터 요구되는 제물은 외적 측면에서 일반적인 유사성을 갖고 있다는 점이다. 이 유사성을 간단히 줄여 말해 본다면, 각 사항 모두는 회개라는 작업, 비록 비의도적인 실수까지도 회개라는 일을 거쳐야만 한다는 것, 그리고 그 회개가 순진 안에 있다는 것이 주님으로부터 인지되어야 하되, 자신 고유의 선 때문에 순진한 게 아니라 자기 선을 통치하는 사랑에 의거 순진함을 주님께 입증해야 한다. 그런 이유로 수소, 염소, 양들이 각기 종류와 수준은 다르지만 동등하게 순진을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주님을 예배함에 일반적인 유사성이 있다면, 거기에는 역시 특별한 차이점을 들어 천적, 영적, 자연적 사람 사이에 있기 마련이다. 그래서 본 장에서 이 세 가지 차이가 각각에 적절한 상징으로 묘사되고 있다. 그러므로 이 사항에 주목해 보자. 비의도적으로 죄를 범한 성직자의 경우와 회중의 경우와를 비교해 보면, 우리가 발견하는 것은, 후자는 위반 사항을 알지 못하고 있다가 나중에 그에 관한 정보를 얻게 되었다라고 말해지고 있는데, 전자의 경우는 그렇게 말해지고 있지 않는 바, 이는 성직자로 표시된 천적 인간과 집회(회중)으로 표시된 영적 인간에 있는 특성상의 한 가지 뾰족한 차이점을 암시해 주고 있다. 천적 인간은 선의 상태로부터 자기들의 잘못(error)들을 지각(perceive)한다. 그러나 영적 인간은 진리에 관한 자기들 지식으로부터 잘못들을 발견해야 한다.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도 상상해 보는 것 같다. 태고 교회가 하강을 개시하기 전, 천적 인간은 악이나 잘못이란 주제와는 관련될 게 하나도 있지 않을 것이라고, 그들의 거듭남은 아주 낮은 단순한 자연적 선으로부터 영적 선을 통과해서 천적 선이라는 완전한 상태로 결과되어 지도록 진보를 해왔을 것이라고 상상한다. 그러나 창세기 첫 장에서 주어지는 바대로의 그들의 거듭남을 조심스럽게 살핀다면, 아주 초기의 천적 사람들, 마치 야생 동물같이 살았던 그들이라고 해도 그들이 악이나 잘못이라는 것과 전혀 관련이 없었던 게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해준다. 그 이유는 깊음의 얼굴 위에 있었던 (짙은) 어둠은 욕망(lust)을 나타내는 것인 바, 이는 거듭나지 않은 자연적 인간을 말하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우리가 알게 되는 것은, 태고 교회 사람들, 즉 영적 부류와 구별되는 천적 부류에 속했던 사람들도 악이나 잘못을 하는 범주에 속해 있었다는 게 분명하고, 태고 교회가 하강하기 시작했을 때 자유를 남용함으로 타락한 이들도 똑 같은 것이다. 악의 근원, 그리고 악의 원인이 창세기 첫 장 앞에서 서술되어 있지는 않다 해도 확실한 것은 그것들이 이미 존재했을 것임에 의심의 여지가 없다는 말이다. 천적 인간에 속하는 가장 높은 질서는 완전한 상태에서 점차 하강했고, 가장 낮은 질서는 전혀 그렇게 할 수 없었다는 것을 어떻게 상상해 볼 수 있을까? 위에서 살핀 생각들, 그리고 본 장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인간의 천적 부류도 실수할 수 있고, 영적 부류나 마찬가지로 죄에 빠질 수도 있다는 것이다.
천적 질서와 영적 질서 사이에 있게 되는 차이점 중 또 다른 뾰족한 점이 본 장 줄거리에서 암시되고 있다. 그 차이는 이해함 측면 뿐 아니라 의지 측면에서도 있다. 그 이유는 천적 인간의 의지가 성직자로, 영적 인간의 의지가 장로로 명시되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천적 인간의 의지는 사랑 또는 선인 반면, 영적 인간의 의지는 진리 또는 지혜인데, 장로는 지혜의 중심 요점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천적 인간의 의지는 영적 인간의 의지보다 더 내면적이다. 그럼에도 양쪽 경우에서 내적 인간이 외적 인간에게 능력을 가지고 흘러들어 양쪽 인간이 조화를 이루게 한다.
세 번째로 주목할 수 있는 특별한 것은, 영적 수준의 경우에도 죄를 벗겨주는 자는 장로가 아니라, 성직자라는 점이다. 그 이유인즉, 영적 천국의 생명은 주님으로부터 천적 천국을 통해 파생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천적 인간에 특별한 것은 순수한 선만이 인간과 주님과의 완전한 재회, 그리고 외적인 것이 내적인 것과의 완전한 조화를 온전히 결과할 수 있게 한다.
이제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의 경우, 그리고 일반 백성, 정확히 말해서 그 땅의 백성에 관한 경우를 살펴보자. 먼저 이미 위에서 살핀 것을 다시 확인해 본다면, 성직자가 죄지었을 때, 진리를 선에 결합시킨 이름을 표현하는 기름부어 세운 성직자가 죄지은 것까지 포함해서, 죄 지었을 경우, 성직자는 백성에게 죄가 있도록 만들었다. 그리고 그가 죄를 벗었을 때 백성 역시 죄를 벗게 되어 양쪽 모두 죄가 제거되었다. 만일 누군가가 비의도적인 죄를 지었으면서도 자기에게 의지하고 있는 이들이 피해받지 않도록 할 수 있단 말인가? 더욱이 내면적으로, 애착들이 금지된 행로에서 방황하는데 그의 지성들이 손상을 입지 않은 채 남아 있을 수 있을까? 다시 말해 어떤 개인이 실수했는데, 그의 실수가 그의 공동체에 아무 영향도 주지 않을 수 있을까? 내면적으로 본다면, 자연 평면에 있는 외적 측면의 지적인 원리들, 이것들이 애착을 인도해 주어야 하는데 잘못했을 경우 그 애착의 잘되고 못되는 상황에 영향을 주지 않는다고 생각할 수 있을까?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이란 자연적 인간 속성 중에서 외적 인간에 정확히 상응한다는 것은 그에게 흠이 없는 수컷, 염소를 바치도록 요구되는데서 관찰되어 진다. 그의 제물이 수소가 아닌 염소인 이유는, 염소는 자연적 인간 중 외적 인간 부분에서 애착 측면보다는 지적 측면에 속한 것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그 염소가 수컷이라는 것은 그를 통치하는 동기가 신앙에 있는 진리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이 흠이 없다는 것은 순진의 상태에 속하는 것은 순수하고 완전하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서이다. 삶의 진실된 원리를 지닌 신앙에 있는 것이라곤 진리밖에 없는 자연적 인간은 의도적으로 죄를 범하거나 잘못에 빠지지 않는다. 이런 경우 우리가 하나 더 주목할 것은, 성직자가 손가락에 염소의 피를 찍어 태워 바치는 제단의 뿔들에 바르도록 요구되었지 분향단의 뿔 위에 바르도록 요구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는 제물을 바치는 사람이 자연 평면 중에서 외적인 것으로부터 온 예배를 나타내는 것임을 또다시 보여주고 있다.
이제 네 번째 항목을 살피는 차례이다. 여기서 관찰되는 것은, 세 번째 항목과 다르게 주목되는 세부 사항이 하나 내지 두개가 열거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 사람은 그 땅의 백성(일반 백성)중 한 사람이라는 것인데, 이 사람은 내면에 존재하는 것, 즉 진리로부터 파생된 선 가운데 있는 사람들을 표현한다. 그런고로 해서 그의 제물은 염소이되 암컷이었다. 암컷은 선과 상응된다. 이 외에 열거된 사항들은 인간이 종교적인 경험을 얻어 가는 초기, 그의 경험이 어느 정도 진전을 이룰 때까지 그 사람을 통치해야 하는 신앙 속에 있는 진리를 나타내 주는 세 번째 항목인 통치자 위치에 있는 사람의 경우와 똑같다. 그러나 이 신앙의 진리는 원리로서 선 가운데만 남아 있도록 해주기에는 너무 미흡하여 자연적 인간 수준에도 남아 있게 하지 못한다. 따라서 신앙의 진리는 각자의 수준에 맞추어 천적인 상태가 되어야 하고, 그럼으로서 선 자체를 사랑하는데 까지, 거기에 속해 있는 순진에까지 진보되어야 한다. 그래서 마지막 경우에서 양으로 바쳐지는 제물도 염소로 바쳐지는 제물과 같은 용어로 묘사되고 있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4장 전체를 망라해서 한 개의 시리즈로 내적 의미를 가지게 된다.
******************************************************

레위기 5장

성경: 레위기 1장

1. 그리고 만일 누군가가 죄짓고, 그는 엄명(adjuration, 맹세 시킴)의 음성을 듣고, 그가 (그 죄를) 보았든지 알았든지 하는 것에 증인이 된 그가 (그것을) 발언하지 않으면, 그러면 그는 불법을 저지른 것이다.
2. 또는 만일 누군가가 어떤 깨끗지 않은 것, 즉 깨끗지 않은 짐승의 사체, 또는 깨끗지 않은 가축의 사체, 또는 깨끗지 않은 기는 것의 사체이든, 만졌다면, 그리고 만져진 것이 그 사람으로부터 감추여(모른채) 있다면, 그는 불결하다, 그러면 그는 죄가 있다.
3. 또는 만일 그가 사람의 불결함을 만진다면, 그 사람의 불결함이 무엇이든 그것 가지고 (만진) 그는 불결하다, 그리고 이 불결함이 그로부터 숨겨(모른채) 있다. 그가 그것에 관해 알 때, 그러면 그는 죄가 있다.
4. 또는 만일 누군가가 악을 행하는 것이든, 선을 행하는 것이든 자기 입술로 무모하게 맹세한다면, 그가 맹세와 더불어 무모하게 발언한 것이 무엇이든, 그리고 그것이 그 사람으로부터 숨겨(모른채)있다. 그가 그것에 관해 알 때, 그 다음 그는 그것들 중의 하나에 죄가 있다.
5. 그리고 필시 있을 것은, 그가 이런 것들 중의 하나에 죄가 있을 때 그는 그 중에서 자기가 죄 지었었음을 고백하는 것이다.
6. 그리고 그는 자기가 죄지었던 자기의 죄를 위해 주님에게 죄가 있음의 제물(guilt offering)을 가져 와라. 이는 암컷으로 양떼, 어린 양, 또는 죄 바침 (sin offering)을 위한 염소이다. 그리고 성직자는 그의 죄에 관한 것대로 그를 위해 보상을 받게 하라.
7. 그리고 만일 그의 재산(means) (형편)이 어린 양을 (바치기에) 충분치 않다면, 그러면 그는 자기가 죄를 지었다는것을 위해 그의 죄가 있음의 제물을 가져오는데, 호도애(turtledove) 둘, 또는 어린 비둘기(young pigeon) 둘을 가져와라. 하나는 죄 바침을 위해, 다른 하나는 태워 바침을 위해서 이다.
8. 그리고 그는 그것들을 성직자에게 가져 와라, 그는 죄 바침을 위한 것을 먼저 바쳐라, 그리고 그것의 목으로부터 그것의 머리를 비틀어라, 그러나 그것을 쪼개어 나누지 말라.
9. 그리고 그는 제단의 측면에 죄 바침의 제물의 피를 뿌려라. 그리고 나머지 피는 제단의 받침에 흘릴 것이다. 이것이 죄 바침이다.
10. 그리고 그는 두 번째로 태워 바침을 위해 조례에 의거 바쳐라. 그리고 성직자는 그가 죄지었던 그의 죄에 관해서 그를 위해 보상을 받게 하라, 그리고 그는 용서된다.
11. 그러나 만일 그의 재산 (형편)이 호도애 둘이나 어린 비둘기 둘을 바칠 (여력이) 충분치 않다면, 그 다음 그는 자기가 죄지었던 것을 위한 자기 제물로 죄 바침을 위해 고운 곡식 가루 십분의 일 에바를 가져오되 그는 어떤 유향도 그 위에 놓지 말 것이다. 그 이유는 이것이 죄 바침의 제물이기 때문이다.
12. 그리고 그는 그것을 성직자에게 가져 와라, 그리고 성직자는 그것으로부터 기념물로 그것의 한 웅큼을 가져 오라, 그리고 그것을 제단에서, 불로 만든 주님께의 제물 위에서 태워라. 이것이 죄 바침이다.
13. 그리고 성직자는 그가 이런 것들 중 어떤 것에 죄지었던 그의 죄를 만지듯 그를 위해 보상을 만들어라, 그리고 그는 용서된다. 그리고 남은 것은 식사 제물의 경우 같이 성직자의 것이다.
14. 그리고 주님께서 모세에게 이야기하셨다, 말하시기를,
15. 만일 누군가가 주님의 거룩한 것들에서 불법 침입하고, 부지불식간에 죄를 진다면, 그러면 그는 주님에게 그의 죄가 있음의 제물을 가져오되, 죄가 있음의 제물을 위해 성소의 세겔에 따라 몇 세겔인지를 은으로 네가 추정하여 양떼로부터 흠이 없는 수양을 가져오게 하라.
16. 그리고 그는 그가 거룩한 것들에 죄를 범한 것에 보상을 만들어라, 그리고 거기에 오분의 일을 추가하라, 그리고 그것을 성직자에게 주어라. 그리고 성직자는 죄가 있음의 제물의 수양을 가지고 그를 위해 보상을 받게 하라, 그리고 그는 용서된다.
17. 그리고 만일 누군가가 죄짓고, 그리고 주님께서 하지 말라고 명령했었던 것들의 어떤 것을 한다면, 비록 그가 그것을 몰랐다 해도, 아직 그는 죄가 있다, 그리고 그는 불법을 저지른 것이다.
18. 그리고 그는 죄가 있음을 위한 네 추정치에 따라 양떼로부터 흠이 없는 수양을 성직자에게 가져 와라. 그리고 성직자는 그가 부지불식 중에 잘못하고 그것을 몰랐던 것에 관하여 그를 위해 보상을 받게 하라, 그리고 그는 용서된다.
19. 이것이 죄가 있음의 제물이다. 그는 주님 앞에 확실하게 죄가 있다.

영적 의미 요약

* 진리의 확증에 관하여. 1절
* 불순한 애착을 통해 각각의 등차에 있어진 무지로부터의 죄에 관하여. 2-13절
* 의지에 관한 내적 예배에 있는 잘못에 관하여. 14-16절. 그리고 이해함에 관한 잘못 17-19절

각 절의 영적 의미

1절. 그리고 만일 누군가가 죄짓고, 그는 엄명(adjuration, 맹세 시킴)의 음성을 듣고, 그가 (그 죄를) 보았든지 알았든지 하는 것에 증인이 된 그가 (그것을) 발언하지 않으면, 그러면 그는 불법을 저지른 것이다.

영적 의미

만일 영적 교회에 속한 누군가가 신성한 질서를 범한다면, – 즉 지각을 통해서였든지, 타인으로부터 받게 된 지식으로부터이든지 자기 이해함이 증명함으로 인해 진리를 확증한 후, – 그 진리에 따라 말하거나 행동함을 거절하면, 그에 따른 악은 자기 탓이 된다. 다시 말해서, 진리를 지각하는 사람, 진리에 관한 지식을 가진 사람이 그 진리로부터 자신이 비켜나지 않도록 진리를 알아차리게 되었음에도 그 진리에 따라 말하거나 행동한다면 그에 따른 악은 자기 탓이 된다.

세부적 영적 의미

죄 짓는다는 것은 신성한 질서를 범하는 것을; 엄명(선서를 하게 함)의 소리를 듣는 것은 이해함의 증언으로 진리를 확증하는 것을 명시하는데, 그 이유는 들음은 지각을; 소리는 진리의 통첩인 바, 이해함에 호소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선서 또는 맹세는 진리의 확증을 의미하고; 증인(witness)은 진리를 수단으로 선을 확증함; 본다는 것은 지각을; 만나는 것은 지식을; 똑바로 말하지 않는다는 것은 진리에 의거 말하고 행동하는 것을 게을리 함, 또는 거절함을 명시하는 바, 그 이유는 명백하게 말하지 않는 것은 말로 진리를 인정하지 않는 것, 그 결과 행동으로도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본문의 경우에는 죄를 지었다 함은 악에서 기인되는 것을 명시한다. 그러나 다른 견해에서 볼 때 맹세함은 선과 진리를 싫어함을 말한다. (A.C. 5076, 3163, 8361, 6971, 2842, 4197, 2150, 2230, 7550, 9937, 1423).

2절. 또는 만일 누군가가 어떤 깨끗지 않은 것, 즉 깨끗지 않은 짐승의 사체, 또는 깨끗지 않은 가축의 사체, 또는 깨끗지 않은 기는 것의 사체이든, 만졌다면, 그리고 만져진 것이 그 사람으로부터 감추여(모른채) 있다면, 그는 불결하다, 그러면 그는 죄가 있다.

영적 의미

또 누구든지 가벼운 수준에서 자연적 인간에 있는 불순한 애착들, 거기에 있는 악들에 따라 행동해서, 그가 그 악과 관련을 갖고, 가장 깊은 수준이든, 내면 또는 외부에 속하든지 간에 어떤 영적 생명이 없게 되면, 그리고 이것들이 무의식적으로 자기에게 발생했다해도, 그는 악 가운데 있는 것이다.

세부적 영적 의미

뭔가를 만졌다(touch)란 애착에 속한 것, 즉 교통함(communication), 변형함(translation), 영접함(reception)을 말한다. 불결한 것은 불순함, 또는 악한 애착을; 사체란 영적 생명이 결여된 것을; 불결한 들짐승, 불결한 가축, 불결한 기는 것(creeping things)이란 내부, 내면, 외부의 불결한 것들을, 감추어 놓였다는 것은 무의식적으로 발생하는 것을, 그리고 죄있다 함은 악 가운데 있음을 말한다. A.C. 4404, 10199, 10130, 3900, 987, 46, 994, 6721, 3400.

3절. 또는 만일 그가 사람의 불결함을 만진다면, 그 사람의 불결함이 무엇이든 그것 가지고 (만진) 그는 불결하다, 그리고 이 불결함이 그로부터 숨겨(모른채) 있다. 그가 그것에 관해 알 때, 그러면 그는 죄가 있다.

영적 의미

또 가벼운 수준이지만 누군가가 불순함을 야기케 하는 자기 속의 악들이 무엇이었든지 그에 따라 행동한다면, 그 악 역시 이기적이고 세상적 생명에 바탕을 두기 때문에 그가 설사 무의식에서 잘못된 행동을 했다 해도, 그가 그 행동의 불순함을 보게 될 때, 그는 자기가 악하다는 것을 고백해야 한다.

세부적 영적 의미

만진다(touch)는 것은 2절에서 살핀 바와 같다. 불결함(uncleanness)은 영적 불순함을; 그리고 불결한 동물과 구별되는 사람의 불결함은 악과 거짓을 통해 있는 내면의 불순함을 말한다. A.C. 10130, 7424.

4절. 또는 만일 누군가가 악을 행하는 것이든, 선을 행하는 것이든 자기 입술로 무모하게 맹세한다면, 그가 맹세와 더불어 무모하게 발언한 것이 무엇이든, 그리고 그것이 그 사람으로부터 숨겨(모른채) 있다. 그가 그것에 관해 알 때, 그 다음 그는 그것들 중의 하나에 죄가 있다.

영적 의미

다시, 만일 누군가가 잘못된 열정을 통해 진리 가운데서 이든, 거짓 가운데에서 이든 자신을 확증한다면 그의 잘못이 무엇이든, 설사 그가 무지하다해도 그는 악 가운데 있었음을 인정해야 한다.

세부적 영적 의미

맹세함이란 진리 또는 거짓을 확증하는 것을; 무모하게 맹세함이란 히브리 원어에서 보여주는 바대로 잘못된 열정으로부터 말하거나 행동하는 것을; 진리나 거짓을 행한다는 것은 그것에 따라 산다는 것을; 그러나 입술로 진리나 거짓을 말한다는 것은 이해함 속에서 진리나 거짓을 먼저 확증한다는 것을; 모르고 했음이란 무지한 상태를; 그것을 알게 됨이란 훈육을; 죄 있다는 것은 악 가운데 있다는 것을 말한다. A.C. 2842, 5755, 1285, 2230, 3400.

5절. 그리고 필시 있을 것은, 그가 이런 것들 중의 하나에 죄가 있을 때 그는 그 중에서 자기가 죄 지었음을 고백하는 것이다.

영적 의미

위의 사항 중 어느 하나에 죄가 있게 될 때, 그 안에서 자기가 죄 있는 자였음을 고백하고;

세부적 영적 의미

이 절의 내적 의미는 다음 절의 내적 의미와 거의 동일하게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이 절에서 보다 더 주목되는 것은 죄에 관한 바깥쪽 고백은 그 고백이 있도록 한 구체적인 악에 관한 안쪽에서의 인정함이 바깥 것과 함께 있지 않으면 아무 가치가 없는 입술 뿐의 고백이라는 것이다. 그런고로 내향에서의 인정과 고백이 글자적 서술에 포함되어 있음을 유의해야 한다. A.C. 2320, 2880.

6절. 그리고 그는 자기가 죄지었던 자기의 죄를 위해 주님에게 죄가 있음의 제물(guilt offering)을 가져 와라. 이는 암컷으로 양떼, 어린 양, 또는 죄 바침 (sin offering)을 위한 염소이다. 그리고 성직자는 그의 죄에 관한 것대로 그를 위해 보상을 받게 하라.

영적 의미

그런 다음, 회개의 일을 행하는 가운데 순진의 외적 선으로부터 이든, 내적으로부터 이든 주님을 예배해야 할 것이다. 그러면 그는 자기가 선 가운데 깊이 있기 때문에 그의 악은 면죄되고 그는 주님과 결합하게 될 것이다.

세부적 영적 의미

양이나 염소를 바치는 죄가 있음의 제물은 내적, 외적에서의 순진의 선으로부터 주님을 예배함을 말한다. 암컷은 특별히 선을 명시하고 있고, 흠없음이란 악과 거짓에서 순수함을 나타내되 회개의 일이 포함되고 있다. 성직자란 가장 깊은 선을; 보상을 받게 함은 악의 제거와 주님과의 결합을 말한다. A.C. 10132, 4169, 725, 7837, 9946, 9506, 10023, 10042, II.

7절. 그리고 만일 그의 재산(means) (형편)이 어린 양을 (바치기에) 충분치 않다면, 그러면 그는 자기가 죄를 지었다는 것을 위해 그는 죄가 있음의 제물을 가져오는데, 호도애(turtledove) 둘, 또는 어린 비둘기(young pigeon) 둘을 가져와라. 하나는 죄 바침을 위해, 다른 하나는 태워 바침을 위해서 이다.

영적 의미

그런데 그가 순진의 천적 선이나 영적 선 가운데 있지 않다면, 그는 신실된 회개와 신실한 애착으로 내적 또는 외적인 신앙의 선으로부터 주님을 예배해야 할 것이다.

세부적 영적 의미

양이나 염소 하나라도 마련할 재산(means)이 없다는 것은 순진의 천적 또는 영적 선 어느 하나에 속한 것이 없는 탓에 나타나는 무능력을 말하고; 이 절에서의 죄가 있음(guilt)이란 무지로 저질러진 죄(sin)을 말하고; 호도애나 어린 비둘기란 내적, 외적 측면에 있는 신앙의 선을 말한다. 죄 바침이나 태워 바침의 제물은 죄의 용서, 그리고 주님과의 결합을 말한다. A.C. 10132, 4169, 1827, 10132, 870, 3400, 10122, 8680, 10053.

8절. 그리고 그는 그것들을 성직자에게 가져 와라, 그는 죄 바침을 위한 것을 먼저 바쳐라, 그리고 그것의 목으로부터 그것의 머리를 비틀어라, 그러나 그것을 쪼개어 나누지 말라.

영적 의미

이 예배는 선의 원리로부터 행해야 할 것이고, 회개로 충만된 예배를 진행해야 한다. 그 이유는 예배가 악으로 인해 내적인 것이 외적인 것과 분리되어 있기 때문이고, 이와 같은 예배는 선보다는 오히려 진리로부터 있어 주님과 상응되지 않기 때문이다.

세부적 영적 의미

이 절에서 성직자에게 제물을 가져옴이란 예배는 선을 원리로 해서 존재해야 한다는 것을 인정함을 말한다. 죄 바침의 제물로부터 바친다는 것은 회개는 예배에 앞서 선행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목을 부러뜨림은 예배에서 내적인 것과 외적인 것을 분리함을 말하고; 새(bird)로 명시된 이해함으로부터의 예배는 주님과 항구적으로 결합되게 해주지 못한다는 것을 말한다. 떨어지지 않게 함이란 주님과 부합됨이 없다는 뜻이다. (A.C. 9946, 10227, 3400, 10122, 8079, 1832).

9절. 그리고 그는 제단의 측면에 죄 바침의 제물의 피를 뿌려라. 그리고 나머지 피는 제단의 받침에 흘릴 것이다. 이것이 죄 바침이다.

영적 의미

게다가 각 상태에 따라 충만해지는 것이 자연적 수준에서 이든, 영적 수준에서 이든 선이 진리와 결합해야 할 것이다.

세부적 영적 의미

죄 바침의 제물의 피를 제단 측면에 뿌림은 각자의 상태에 따라 영적 수준에서 선과 진리의 결합을 의미한다. 나머지 피를 제단 받침에 흘린다는 것은 각자의 상태에 따라 자연적 수준에서 충만된 결합을 명시하는 것이고; “이것이 죄 바침이다”라 함은 그 예배에도 악의 제거가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A.C. 9736, 10185, 10047, 3400.

10절. 그리고 그는 두 번째로 태워 바침을 위해 조례에 의거 바쳐라. 그리고 성직자는 그가 죄지었던 그의 죄에 관해서 그를 위해 보상을 받게 하라, 그리고 그는 용서된다.

영적 의미

그러나 진정한 예배는 회개함이 포함되어야 하는 바, 즉 사랑으로부터의 예배가 신성한 질서에 따라 있어야만 한다. 그러면 선을 사랑함이 함부로 놀려 범한 악을 제거 시켜 속죄가 된다.

세부적 영적 의미

법을 따라 두 번째 새를 태워 바침의 제물로 바친다는 것은 진정한 예배에는 반드시 회개가 포함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는 태워 바침의 상응으로부터 알 수 있다 (1장 14-17절 참조). 성직자가 그를 위해 보상을 만들고 그는 용서받는다는 것은 선을 사랑함은 무모하게 범한 악을 제거해서 면죄가 될 것임을 말한다. A.C. 8680, 10053, 9506, 10042 II.

11절. 그러나 만일 그의 재산 (형편)이 호도애 둘이나 어린 비둘기 둘을 바칠 (여력이) 충분치 않다면, 그 다음 그는 자기가 죄지었던 것을 위한 자기 제물로 죄 바침을 위해 고운 곡식 가루 십분의 일 에바를 가져오되 그는 어떤 유향도 그 위에 놓지 말 것이다. 그 이유는 이것이 죄 바침의 제물이기 때문이다.

영적 의미

만일 어떤 이가 신앙의 선 가운데 있지 않고 진리 가운데 있다면, 회개와 순종을 통한 주님께의 헌신이 그 진리에 부응해서 있어야 하는데, 그 이유는 그 헌신이 천적인 사랑과 영적인 진리로부터 있을 수 없기 때문에, 그것이 첫 실례에서 악의 제거만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세부적 영적 의미

호도애나 어린 비둘기 두 마리도 마련 못한다는 것은 신앙의 선 가운데 있지 않다는 것을; 가루 십분의 일 에바를 제물로 가져옴이란 신앙의 진리로부터 예배함을; 기름이나 유향을 그 위에 얹지 말라는 것은 이 예배는 천적 사랑과 영적 진리로 있어질 수 없다는 말인데 그 이유는 그 예배의 첫 실례에 악의 제거만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A.C. 870, 1827, 10132, 9995, 10136-7, 10137.

12절. 그리고 그는 그것을 성직자에게 가져 와라, 그리고 성직자는 그것으로부터 기념물로 그것의 한 웅큼을 가져 오라, 그리고 그것을 제단에서, 불로 만든 주님께의 제물 위에서 태워라. 이것이 죄 바침이다.

영적 의미

그러나 이것은 주님께의 진정한 예배를 표시하는 선을 기반으로 있어야 하는 바, 삶 속에 새겨져서, 악이 거절되어야 할 것이다. 그 이유는 신성한 사랑은 악에 반대되기 때문이다.

세부적 영적 의미

성직자에게 제물을 가져옴이란 위의 경우의 예배가 아직 선을 원리로 해서 있다는 것이다. 성직자가 기념물(표시)로 가루 한 움큼을 쥔다는 것은 진리로부터의 이 예배도 순수한 예배요, 힘도 있는 예배임을 나타내고; 제단에서 태운다는 것은 진리가 선과 결합함으로, 그 결과 생활 속에 새김으로 주님께 헌신함을 말한다. 이것이 죄 바침의 제물이라 함은 악이 거절되어 진다는 것, 그 이유가 불로 의미되는 신성한 사랑은 악과 반대되기 때문이다. A.C. 9946, 6888, 7518, 10052, 3400, 10055.

13절. 그리고 성직자는 그가 이런 것들 중 어떤 것에 죄지었던 그의 죄를 만지듯 그를 위해 보상을 만들어라, 그리고 그는 용서된다. 그리고 남은 것은 식사 제물의 경우 같이 성직자의 것이다.

영적 의미

그러면 선은 그 선이 어떤 형체이든 그 속에서 악을 제거해 주게 되어 죄의 면제가 따르고, 선이 음미되어 천적 사랑이나 영적 사랑으로부터 예배하는 경우같이 될 것이다.

세부적 영적 의미

성직자가 그를 위해 보상을 만든다는 것은 모든 형체 속에서 선은 악을 제거한다는 말이다. 그가 용서받는다는 것은 악의 제거, 사면을 의미한다 (10절 참조). 나머지가 성직자의 몫이라는 것은 선이 음미되어짐을 뜻하는데, “식사 제물처럼”이란 이 예배도 천적, 영적 사랑으로부터의 예배와 동등하다는 말이다. A.C. 9506-1, 10023, 10042, II. 9946, 2177, 2187, 4581, 9995, 2장 1절 참조.

14절. 그리고 주님께서 모세에게 이야기하셨다, 말하시기를,

영적 의미

더욱이 지각을 주심으로, 신성한 진리를 수단으로 주님께서 밝혀 주심이 있게 된다.

세부적 영적 의미

여호와란 사랑 측면에서의 신성한 존재를 말한다. 이야기하심(speaking)은 유입(influx)을; 모세는 신성한 진리 또는 말씀을 표현하는 것이고; 말함(saying)은 지각을 명시하고 있다. A.C. 2001, 2951, 7010, 6752, 1791, 1822, 4장 1절 참조.

15절. 만일 누군가가 주님의 거룩한 것들에서 불법 침입하고, 부지불식간에 죄를 진다면, 그러면 그는 주님에게 그의 죄가 있음의 제물을 가져오되, 죄가 있음의 제물을 위해 성소의 세겔에 따라 몇 세겔인지를 은으로 네가 추정하여 양떼로부터 흠이 없는 수양을 가져오게 하라.

영적 의미

만일 누군가가 모르는 가운데 내적 예배 안에 있는 신성한 법칙, 외관상으로 볼 때 사랑 또는 선으로부터 있는 신성한 법칙을 위반하고 있음에도 아직 그가 내적 또는 영적 수준에 있는 순진의 선으로부터 주님을 예배하고 주님을 인정하고 있고, 악에 물들지 않고 영적 진리에 거하고 있다면, 이것에 선이 결합되어 죄가 제거되게 해 줄 것이다.

세부적 영적 의미

누군가가 여호와에게 거룩한 것을 바칠 때 성실치 못하게 실수해서 제대로 바치지 못했을 경우가 명시하는 바는, 만일 누군가가 내적 예배에서 신성한 법을 잘 몰라서 범할 경우를 말하는데, 이 의미는 실수 또는 잘 몰라서 죄를 짓는 것, 즉 무지로 인해 죄를 짓는데 대한 의미에서 알 수 있다. 주님의 거룩한 것은 14장 2절에서 언급하는 주님께서 하지 말라는 명령을 어겼을 경우와 구별되는 서술이다. 그래서 전자는 내적 예배에서 범해지는 잘못을; 후자는 외적 예배가 마치 선으로부터의 예배인 냥 보이는 예배를 말한다. 수양이란 내적 인간에게 있는 순진의 선을 명시하고; 흠이 없음이란 악에 오염되지 않았다는 것; 그 양이 몇 세겔의 은(silver)에 해당되는가 추산함은 당사자에 있는 영적 진리의 품질에 의거함을; 성소 세겔로 단다는 것은 진리가 선과 결합함을; “죄가 있음의 제물을 위하여”이란 죄가 있음이 제거될 것임을 말한다. A.C. 9156, 10042, III. 10149, 3400, 2001, 10042, 7837, 2959, 3400.

16절. 그리고 그는 그가 거룩한 것들에 죄를 범한 것에 보상을 만들어라, 그리고 거기에 오분의 일을 추가하라, 그리고 그것을 성직자에게 주어라. 그리고 성직자는 죄가 있음의 제물의 수양을 가지고 그를 위해 보상을 받게 하라, 그리고 그는 용서된다.

영적 의미

그리고 회개는 내적 예배에 있는 그의 잘못에 관해서도 있어져야 하는데, 더욱이 진리의 나머지 중 어떤 것은 선을 수단으로 자기 것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이렇게 해서 다시 선은 악을 제거하여 죄의 용서가 따라야 한다.

세부적 영적 의미

보상을 받게 한다는 것은 회개의 일을 행하는 것을; 거룩한 것을 제대로 바치지 못했다는 것은 내적 예배에 있는 잘못을 (15절 참조); 오분의 일을 더 보태라는 것은 얼마만큼 남아 있는 진리를; 그것을 성직자에게 낸다는 것은 선을 수단으로 자기 것 되게 함을 성직자가 보상을 받게 함은 선이 악을 제거함을; 그가 죄를 용서받았다는 것은 악이 실제로 제거됨을 각각 말한다. A.C. 9087, 9097, 9130, 649, 10227, 9946, 10042, 10절 참조.

17절. 그리고 만일 누군가가 죄짓고, 그리고 주님께서 하지 말라고 명령했었던 것들의 어떤 것을 한다면, 비록 그가 그것을 몰랐다 해도, 아직 그는 죄가 있다, 그리고 그는 불법을 저지른 것이다.

영적 의미

누군가가 악을 거절해야 하는 것과 같은 신성한 법칙을 위반한다면, 비록 그가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해도 그는 죄 지은 것이고 악이 그에게 부착된 것이다.

세부적 영적 의미

죄 진다는 것은 신성한 법을 위반했다는 것, 주님께서 하지 말라고 명령했던 어떤 것이란 거절해야 할 악들을 (4장 2절 참조); 죄가 있다란 악 가운데 있음을; 모르고 했다 함은 그 사실에 관해 무지함을; 그는 불법을 저지른 것이다란 이 경우에서는 악이 그에게 붙어 있을 것임을 나타내고 있다. A.C. 5076, 3400, 6721, 2230, 9937.

18절. 그리고 그는 죄가 있음을 위한 네 추정치에 따라 양떼로부터 흠이 없는 수양을 성직자에게 가져 와라. 그리고 성직자는 그가 부지불식 중에 잘못하고 그것을 몰랐던 것에 관하여 그를 위해 보상을 받게 하라, 그리고 그는 용서된다.

영적 의미

그런고로 그는 영적 선, 또는 내적 인간에 있는 순진의 선으로부터 자기 상태에 의거, 그리고 진리의 품질에 따라 주님을 예배해야만 한다. 그래서 선을 수단으로 악은 그가 필요로 하는 만큼, 즉 죄가 의지와 이해함에서 무지를 통해서 거행된 것 만큼에서 청산되어 면죄가 뒤따른다.

세부적 영적 의미

죄가 있음의 제물을 위한 성직자의 추정치에 따라 양떼 가운데서 흠이 없는 수양을 성직자에게 가져옴이란 악 가운데 있었던 정도만큼 진리의 품질이나 상태도 비례해서 내적 인간에 있는 순진의 선, 또는 영적 선으로부터 주님을 예배함을 말한다 (15절 참조). 부지불식 중에 잘못한 것을 성직자가 보상을 받게 해서 용서받게 됨이란 선을 수단으로 악은 청산되어지되 죄가 의지와 이해함에서 무지로 거행되었던 만큼에서 청산되어 사면으로 이어질 것이다. A.C. 9946, 10042, 10절 참조.

19절. 이것이 죄가 있음의 제물이다. 그는 주님 앞에 확실하게 죄가 있다.

영적 의미

모든 예배는 다소 차이는 있겠지만 악에서 잘못으로 얼룩 지워진다. 그래서 그 예배는 신성한 선의 정밀 검사를 피할 수 없다.

세부적 영적 의미

죄가 있음의 제물이란 악의 제거를 위한 예배를; 주님께 확실히 죄가 있음이란 악과 잘못이 신성한 진리를 수단으로 하는 신성한 선의 정밀 조사를 피할 수 없다는 뜻이다. A.C. 3406, 2001.

5장의 종합적 고찰

4장은 무지로 저질러진 죄들을 내적 의미에서 질서 있게 이야기하고, 그 죄가 자연적 또는 외적 인간에 있는 순진의 선으로부터의 예배로 감면되어지되, 천적인 것들에서 시작해서, 영적인 것들로 진행되어 자연적인 것들로 마감 짓고 있다. 이 진행 순서의 각각에 있는 제물은 자기 것이 되어진 순진의 선을 표현하고 있다. 그리고 5장에서도 같은 주제가 계속되고 있되, 앞 장처럼 천적, 영적, 자연적인 사항을 각각 언급하고 있으나, 교리에 관련되기보다는 오히려 자연적 애착에 관련된 잘못으로 인한 죄들을 포함하고 있다. 이렇게 생각되는 이유는, 4장의 각 경우에서 무의식적인 잘못은 주로 주님께서 하지 말라고 명령된 사항에 반대되어 야기된 잘못들이나, 본 장의 경우에서 있는 잘못은 불결한 어떤 것에 닿음, 함부로 맹세함, 또는 선을 행하든 악을 행하든 충동적인 것과 관계가 있다.
둘째로, 본 장의 첫 절은 세부적으로 배열되어 있어 뭔가 설명을 필요로 하고 있다. 그렇게 배열되어 있는 것은 앞 부분의 영적 의미에서의 일반 주제에서 다루어진 모든 것의 결말을 형성해 주기 위해서이다. 동시에 뒤이어지는 부분에 관한 일반 주제를 시작하거나 소개도 겸하고 있다. 또한 진정한 교리에 무지해서 죄를 짓는 것이라든가, 선과 악을 구별치 못해서 죄를 짓는 것만을 함축하는 것은 아니다. 이 점은 이해함에 획득된 진리가 확증되든지, 혹은 악과 거짓이 그 진리에 반대하고 있든지 하는 것에 관해 주저하는 상태를 묘사해 놓고 있다. 여기서 표현된 특성은 선서하는 소리, 맹세하는 소리를 듣는 것, 또는 영적으로 의지의 결정과 행동으로 인해 진리를 확증하는 소리를 듣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역시 그는 저주하는 소리, 또는 영적인 진리로부터 자신을 비키게 한데 대한 소리를 듣기도 한다. 이 소리들은 어디서부터 진행되고 있을까? 이 소리들은 천국 또는 지옥과 연락 관계를 가진 결과이다. 우리 모두는 이 소리들을 듣는다. 우리 모두는 우리의 말이나 행동에서 진리를 체현하든지, 안하든지 결정해야만 한다. 부지중에 범해지는 죄는 우리에게 참으로 많다. 그리고 이 죄들 모두가 우리를 저주하는 것은 아닌데, 그 이유는 비록 우리 지성이 진리와 거짓 사이를 식별하는데 있어서 시련이라는 주위의 환경으로 인해 실패했다 해도 우리 심정은 올바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진리를 알게 되거나 보았을 때, 그러므로 해서 진리에 목격자가 되었을 때, 즉 우리가 애착을 가지고 진리를 받았을 때, 사랑의 기름이 진리 위에 부어졌을 때, 그러면 우리 자신이 그 진리를 비켜가지 않도록 조심하게 해준다. 그런데 죄짓거나 잘못할 경우, 우리의 나중 상태는 처음 상태보다 더 나쁜 쪽에 속하게 된다.
셋째로, 우리가 정착시켜야만 하는 진리 또는 거짓, 뿐만 아니라 선 또는 악 중의 하나에 관한 것이다. 그 이유는 우리가 진리를 수단으로 않고서는 선을 확증할 수 없고, 거짓을 수단으로 하지 않고는 악도 확증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 외에도 만일 우리가 선으로부터 내향으로 진리를 확증한다면, 비록 우리가 불결한 것에 영적으로 닿는 경우가 있다 해도 악 가운데 남게 되거나 불결함을 낳지 않을 것이다. 그런 이유로 첫 절이 우연히 발생하는 불순함을 주제로 소개하고 그 불순함에 순수해지는 수단까지 소개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2, 3, 4, 5절의 순서로 공부를 진행해야 한다. 이 절들은 자연적 인간에 있는 악한 애착들에 오염되어 결과되는 불법의 시리즈를 기술해 놓고 있다. 이런 오염이 우리 모두에게 있다는 것은 각자의 내적 삶을 주의 깊게 응시해보는 사람이라면 어느 누구도 의문을 제기하지 못할 것이다. 먼저 우리가 곰곰이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은 단어 시체(carcase)가 악한 애착들을 나타내기 위해 사용되고 있다는 것이다. 시체는 영적 생명에 속한 모든 것이 결핍되어 있는 것이다. 그것은 “모양을 갖추지 않고 아무것도 생기지 않은 것(without form and void)” 또는 “헛되고 무익한(wasteful and void)” (창세기 1:2) 것들이다. 그 이유는 악한 애착들 속에는 어떤 진리도, 선도 없다. 그럼에도 그것들은 거듭나고 있는 사람의 생각 안에 스스로 모습을 드러내 각 개인의 생명의 일부로서 실지로 나타난다. 이 나타남은 기뻐하는 것을 수단으로 자체를 명백히 보인다. 주님에 속한 것이 아니라 지옥에 속한 것이기에 실지로 죽어 있는 것들이 가장 즐거워한다. 우리 자신의 실제적인 악 때문에 우리 스스로 지옥적 기쁨에 비슷해지려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악령은 우리 안으로 흘러들 수 있고 오래 전 이미 회개해서 죽어버린 것 같은 못된 것들이 우리 속에서 살아 있는 듯 믿게 만들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2, 3절의 내적 의미에서 읽게 되는 불결한 것들에 닿는다는 것에 대한 설명이다. 위와 같은 종류의 죽은 애착들이 언제, 어떻게 그 스스로 모습을 드러내는지에 대하여 말해줄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것들은 우리의 거듭남이 상당한 진보를 했었을 때조차 에서도 우리를 선동하고 있다. 그래서 이것들이 뭔가 꿈틀거릴 때 우리로 잘 처신하는 방법은 5절에서 가르치는 바와 같이, “우리가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악밖에는 없나이다”라고 진실로 고백하는 것이다. 2절에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채용되어진 상응에 의해 암시되는 불결한 애착들은 세 수준으로 외적 인간에 속하고 있다. 그러나 3절에서 짐승과 사람 사이의 영적인 구별로 내적 인간에 속하고 있다. 또한 이 절에서 등장하는 사람이라는 히브리 단어는 “ish”가 아닌 “adam”임도 주목해 보아야 한다. 그 이유가 전자는 진리, 총명에 상응되나 후자는 선, 애착에 상응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애착이 이 절의 주제가 되는 것을 알게 된다. 무슨 일이든지(선한 일이든, 악한 일이든) 함부로 입술을 놀려 맹세를 말하는데 대해 4절이 묘사하는 것은, 이해함이 결부된 의지의 충동적인 결정으로 우리가 어떤 사건 자체 내지 그 내용의 품질을 충분히 생각해 봄도 없이, 또는 그 속에 악한 애착이 함유되어 있는 줄을 확인해 봄도 없이 무턱대고 결정하는 일에 대한 것이다. 그러므로 내적 의미에서 이 세 절(2,3,4절)이 기술하는 바는, 자연적 사랑의 선동으로부터 악을 확증하고, 그 다음 내향의 사랑인 세상과 자아 사랑으로부터 확증하고, 마지막으로 강력하게 충동적인 악의 세력으로부터 인간이 행동에 옮기되, 그가 바깥쪽 상태나 여건에 무지해서 그 행동의 결과가 선해지는지 악해지는지 조차 모른 상태에서도 마구잡이로 움직이게 만든다는 것이다.
이상에서 우리는 교회 속의 사람들을 유혹하거나 만연시키는 악한 애착들의 시리즈를 살폈다. 다음에 생각해 볼 것은 예배를 통해 순수해지는 수단들이다. 이 수단들은 천적, 영적, 자연적 또는 감각적 인간에 의해 각기 따로 채용되고 있다. 이에 대한 줄거리가 6절부터 13절까지에 기술되고 있다. 6절에서는 천적, 영적 인간의 예배가 함께 기술되고 있고, 7절은 선과 진리에 관한 자연적 인간의 내적 부분을 구성하는 것에 관해서, 11절은 자연적 인간의 외적 부분을 구성하는 것에 관해 기술되고 있다. 이외에도 우리가 곰곰이 생각해 보아야 할 중요 사항이 더 있다. 각 경우마다 회개는 꼭 있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8절에서 보는 바와 같이 회개는 진정한 예배에 선행되어야만 한다. 그래서 악은 반드시 금해져야 하고 선은 의무로서 반드시 행해져야 한다. 더욱이 선이 기뻐하는 것으로 충분히 실감하기 전에 악이 먼저 완전히 제거되어야 한다. 불완전한 예배의 상태 동안, 외적 인간은 내적 인간에 상반된 채로 있게 된다. 따라서 주님과의 상응도 그 수준에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9절에서 보는 바와 같이 자연적, 영적 수준 모두에서 진리가 선과 결합되어야 한다. 이제 우리가 이해해야 할 사항들은, 이 결합은 사랑 또는 선이나 6장에서 더 충분히 기술되는 바와 같은 예배의 의식이 있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 모두 쉽게 알 수 있는 바는, 사랑에 의해 주님과 우리가 결합하는 그 수준은 우리의 악이 제거되는 수준에 정확히 일치한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주님과 우리가 결합하는 것을 방해하는 것은 악, 그리고 거짓, 또는 잘못들밖에는 더 없기 때문이다. 이런 진리가 제 11절에서 잘 예증되어 있다. 즉 죄의 제물로 바쳐지는 곡식 가루에 기름이나 유향을 얹지 못하도록 명령되고 있다. 이 말은 우리의 보다 낮은 수준에서의 예배 상태가 천적 사랑과 영적 사랑에 의해 어떤 영향도 받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 우리의 예배가 천적 또는 영적 예배의 수준에 충분히 도달되지 못했다는 것 뿐이다. 순수한 모든 예배는 사랑의 어떤 것으로부터만 존재해야만 한다는 것, 가장 높고 깊은 예배는 사랑의 어떤 것으로부터만 있어져야 한다는 것은 우리 모두 실지로 알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예배를 법으로서 준행해야 한다. 우리가 법을 알고 있다는 것만을 이유로 해서 우리는 그 사랑 안으로 들어 가지지 않는다. 또는 각자의 수준에 차이가 있을지언정 각자의 능력으로 최선을 다해 법에 따라 행동했다는 이유만으로도 그 사랑 안에 진입되지는 않는다. 우리는 반드시 기다려야 하고, 인내해서 그 목적을 잘 보전하고 있어야 한다. 결국 우리가 열망한 그 후에 그 사랑을 실감하게 될 것이다. 잊지 않아야 할 것은, 이 사랑은 주님으로부터 이미 우리 속에 존재한다는 것, 이 사랑은 우리의 본질적 부분이라는 것, 우리가 충분히 거듭났다고 판단될 때조차 에서도 우리는 이 사랑 위에 서지 못한다는 것, 그 이유는 이 사랑은 우리의 순수한 개성(individuality)이기 때문이고, 보다 낮은 수준의 모든 우리의 사랑은 각기 적절한 순서로 이 사랑 아래 배치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저자가 가끔 생각했었던 것은, 우리의 가장 높은 능력은 우리가 태어날 때 이미 주님께서 우리 속에 있게 해주셨다는 것, 그러나 그 능력의 실현은 우리의 이성과 자유가 사용하는 여부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여하튼 확실한 것은 우리는 그 능력을 발휘함으로 삶을 시작하지 않는다는 것, 또한 우연히 그 능력이 발휘될 어떤 기회가 있었다 해도, 또는 그 능력에 대한 희미한 지각이라도 갖게 되었다 해도, 많은 우리의 주위의 환경 여건이 그 위에 구름같이 덮여있어 우리는 오로지 그 능력의 한 부분만을 알고, 한 부분만을 사랑할 뿐이다. 그럼에도 12, 13절의 영적 가르침으로부터 우리가 확신해야 하는 것은, 마지막 성공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 우리의 외적 인간뿐만 아니라 내적 인간도 우리를 다른 인간 존재(계시록 2:17)와 구별되게 하는 기쁨 또는 선을 자기 것이 되게 하거나 체현해 내게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14절은 주제가 바뀌는 것을 보여주는 바, 주제는 외적 인간에 관련을 갖는 잘못을 생각해 봄에서 내적 인간에 두드러지게 있는 잘못을 거론하고 있다. 이렇게 판단되는 이유는, 14절의 “여호와에게 거룩한 것”이라는 표현 때문이다. 또한 6장 7절까지 포함해서 있는 잘못이라는 것의 매 경우에서 내적 인간에 있는 순진의 선을 명시하는 수양이 제물로 바쳐지기 때문이다. 사실상 내적 의미에서의 일반 주제는 이 절과 더불어 다시 마감되고 있다. 그리고 이 절은 성서의 장과 절로 쪼개지는 구약 성서가 원본이나 번역이라는 양쪽 모두에서 내적 의미에 관한 어떤 지식이나 참고도 없이 명확하게 나뉘고 있다는 것에 우리로 주목하게 해주기도 한다. 오늘 우리가 살피는 본문의 경우 히브리 성경의 분류는 내적 의미의 시리즈와 일치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런 일치가 언제나 있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 한 예로, 창세기 2장의 첫 세 절은 1장의 결론을 실지로 형성하고 있다. 더 설명하면, 어떻게 한 인간이 영적 상태를 벗어나 천적 상태로 건너가게 되는가, 그러므로 해서 거듭나는 과정을 완성하는가를 보여주고 있다. 그 다음 2장 4절은 새로운 주제를 시작하는데, 이는 영적 수준에서 거듭나는 질서와 구별되는 천적 수준에서 거듭나는 질서에 관해서이다.
다시 본문을 진행하면서 이제 주목해 볼 것은 내적 인간의 잘못들은 세 종류로 나뉘고 있다는 것인데, 의지 측면에 관해 언급되는 것이 15-16절에서, 이해함 측면에 관한 언급이 17-19절에서 나타나고 있다. 그리고 행동 측면에 관하여는 6장 1-7절에까지 진전되어 언급되고 있다. 외적 인간의 잘못에 관한 줄거리에서 발생되지 않은 이유로 특별히 언급해 보아야 할 유일한 것은, 성소 세겔로 달아 몇 세겔 짜리가 되어야 하는가를 모세가 결정하도록 하는 내용이다. 이미 살핀 바대로 이 구절이 뜻하는 것은, 내적 인간 속에 있는 순진의 선으로부터의 예배는 선이 결합될 진리의 품질에 있어서 외적 인간에 있는 예배와 더 특별하게 다르다는 것이다. 1장에서 이미 살핀 바와 같이 모든 예배는 진리를 수단으로 있어지고, 그 진리로부터 예배의 품질도 갖게 되나, 외적 예배의 품질은 내적 예배에 있는 품질만큼 명백하지는 않다. 그 이유가 예배는 더 내적으로 더 세세하게 존재하므로 이에 진리가 선과 결합하는 것도 결정되기 때문이다. 이에 추가해서 예배자의 순진의 수준과 품질은 더욱 강력해져 순수해진다. 이로부터 말씀 속의 내적 의미는 글자 의미 속의 일반 진리를 확증한다. 그리고 경험이 주는 증거들은 외적 예배가 무지의 순진 쪽에 더 기울어 있다는 것, 내적 예배는 지혜의 순진 쪽에 더 기울어 있음을 확실히 해준다.
마지막으로 관찰해 볼 것은, “여호와가 하지 말라고 명령한 것”은 이해함에 있는 잘못에 관한 줄거리이고, “여호와에게 거룩한 것”은 의지의 잘못에 관한 줄거리로 두 문단은 서로 구분되고 있다는 점이다.

**********************************************

레위기 6장

성경: 레위기 1장

1. 주님께서 모세에게 이야기하셨다, 말하시기를,
2. 만일 누군가가 죄지은다, 그리고 주님에 대하여 죄를 범한다, 그리고 공탁금이나 매매 같은 문제에서 그의 이웃을 거짓되게 취급하거나, 또는 도둑질하거나 이웃을 압박한다면,
3. 또는 잃어졌던 것을 발견했었고, 그리고 그 점을 거짓으로 다루고, 그리고 거짓말로 맹세한다. 이 모든 것들의 어떤 것에서 사람이 행동한다, 그 점에 대해 죄짓고 있다.
4. 그러면 그는 죄지었다, 그리고 죄가 있음 일 것인즉, 그는 도둑질로 취한 것, 또는 압박하여 얻었던 것, 또는 그에게 위탁되었던 공탁금, 또는 그가 발견했던 잃었던 것을 원래대로 복구하라,
5. 또는 그가 거짓으로 맹세했었던 것에 관하여 어떤 것. 그는 그것을 충분하게 원래대로 해놓아라, 그리고 거기에 오분의 일을 더 보태라. 그는 그것과 관계있는 자에게 자기가 죄가 있음을 발견한 그 날에 그것을 주어라.
6. 그리고 그는 주님에게 죄가 있음의 제물을 양떼로부터의 흠이 없는 수양으로 죄가 있음의 제물에 대한 너의 추정치(estimation)에 따라 성직자에게 가져 와라.
7. 그리고 성직자는 주님 앞에서 그를 위해 보상을 받게 하라, 그리고 그는 용서된다. 이 용서는 그로 하여금 죄가 있어지게 행한 것은 무엇이든지에 관하여 이다.
8. 그리고 주님께서 모세에게 이야기하시어, 말하시기를,
9. 아론과 그의 아들들에게 명령하여, 말하라, 이것은 태워 바치는 제물의 법이다. 태워 바치는 제물은 아침 까지 온 밤을 제단 위, 화덕(hearth)에 있어야 한다. 그리고 제단의 불은 거기에서 계속 타고 있어야 한다.
10. 그리고 성직자는 그의 아마포 옷을 입어라, 그리고 그의 아마포 반바지(bleeches)를 그는 그의 살에 입어라. 그리고 그는 불이 제단에서 태워 바치는 제물을 태워버려 나온 재들을 가져다가 제단 측면에 그것들을 놓아라.
11. 그리고 그는 그의 옷들을 벗을 것이다, 그리고 다른 옷들을 입을 것이다, 그리고 재들을 진영 밖 깨끗한 장소로 운반하라.
12. 그리고 제단 위의 불은 거기서 계속 타고 있어야 한다, 그것은 꺼지지 않아야 한다. 그리고 성직자는 매일 아침 그것에 장작을 태워라. 그리고 그는 그것 위에 태워 바치는 제물을 정돈하여 놓아라, 그리고 거기에서 평화 제물의 지방을 태워라.
13. 불은 제단 위에서 계속 타고 있어야 한다. 이것은 꺼지지 않아야 한다.
14. 그리고 이것은 식사 제물의 법이다. 아론의 아들들이 제단 앞, 주님 앞에 그것을 바쳐라.
15. 그리고 그는 거기로부터 식사 제물의 고운 곡식 가루 한웅큼, 그것으로부터 기름, 그리고 식사 제물 위에 있는 모든 유향을 가져 가라, 그리고 그것을 주님께 달콤한 향기를 위해 그것으로부터의 기념물로 제단 위에서 태워라.
16. 그리고 그것으로부터의 남은 것은 아론과 그의 아들이 먹는다. 이것은 거룩한 장소에서 누룩 없이 먹어라. 만남의 천막의 뜰에서 그들은 그것을 먹어라.
17. 누룩과 더불어 구워져서는 안된다. 나는 불로 만든 내 제물로부터 그들의 몫으로 그것을 주었다. 이것은 가장 거룩하다, 마치 죄로 인해 바치는 제물 같이, 죄가 있음으로 해서 바치는 제물도 같다.
18. 아론의 자손들에서 모든 남성은 불로 만든 주님의 제물로부터 당연한 몫을 너의 자손 대대로 영원히 먹을 것이다. 그것들을 만지는 자는 누구든지 거룩해진다.
19. 그리고 주님께서 이야기하셨다, 말하시기를,
20. 이것은 아론과 그의 아들들의 봉헌이다, 이것을 그들은 자기가 기름부워지는 그 날에 바쳐라. 즉 식사 제물을 위한 고운 곡식 가루 십분의 일 에바를 항구적으로 아침에 그것의 절반을, 그리고 저녁에 그로부터의 절반을 (바쳐라).
21. 굽는 납작한 냄비에서 기름을 가지고 그것을 만들어라. 그것이 적셔질 때, 너는 가져올 것이다. 구워진 조각들 가지고 너는 주님에게 달콤한 향기를 위한 식사 제물을 바쳐라.
22. 그리고 아론의 아들들 사이로부터 아론 대신에 있을 기름부워진 성직자가 그것을 바쳐라. 영원한 법령에 의해 이것은 주님에게 온전히 태워져야 한다.
23. 그리고 성직자의 모든 식사 제물은 온전히 태워야 한다. 그것이 먹어져서는 안된다.
24. 그리고 주님께서 모세에게 이야기하셨다, 말하시기를,
25. 아론과 그의 아들들에게 이야기하거라, 말하시기를, 이것은 죄 바침의 제물의 법이다. 태워 바치는 제물이 죽여지는 장소에서 죄 바침의 제물을 주님 앞에서 죽여라. 이것은 최고로 거룩하다.
26. 죄를 위해 그것을 바친 성직자가 그것을 먹는다. 거룩한 장소에서, 만남의 천막의 뜰에서 그것을 먹어라.
27. 그것으로부터의 고기에 접촉하는 것은 무엇이든 거룩해 진다. 그리고 어떤 옷에 그것으로부터의 피가 뿌려짐이 있을 때, 너는 뿌려진 그 곳을 거룩한 장소에서 씻어라.
28. 그것(고기)이 끓여진 흙으로 만든 그릇은 깨트려라. 그리고 만일 그것이 놋쇠로 만든 그릇에서 끓여진다면, 그 그릇은 문질러 닦고, 물로 행굴 것이다.
29. 성직자들 사이에 모든 남성은 그것을 먹는다. 이것은 최고로 거룩하다.
30. 그리고 죄 바침의 제물은 그것의 피를 거룩한 장소에서 보상을 만들기 위해 만남의 천막 안으로 가지고 오면 먹지 못한다. 그것은 불로 태워라.

영적 의미 요약
(*본 장의 장과 절은 개역 성경을 따랐음)
* 신앙 속의 진리에 어긋나는 행위들이 묘사되고 있다. 그럼에도 그 행위에 대한 회개, 내적 인간 안에 있는 순진의 선으로 주님을 예배하여 그 결과 그분과 재회한다. 1-7절.
* 천적 인간의 예배, 또는 주님을 순수하게 사랑함으로 그분을 예배함에 관련되는 신성한 법칙들. 8-13절
* 영적 인간의 예배, 또는 이웃을 사랑함으로부터의 예배에 관련된 신성한 법칙들. 14-18절.
* 진리들이 선과 충분히 결합할 때, 또는 충분히 거듭나는 상태에서 주님을 예배함에 관련되는 법칙들. 19-23절.
* 실제의 악들을 제거하기 위해 주님을 예배하는데 관련된 법칙들. 24-30절.

각 절의 영적 의미

1절. 주님께서 모세에게 이야기하셨다, 말하시기를,

영적 의미

영적 교회의 사람에게 신성한 진리를 수단으로 지각을 주심으로 밝히 알게 하신다.

세부적 영적 의미

여호와는 주님의 사랑 측면에서의 신성한 존재를; 이야기함(speak)은 유입을; 모세는 신성한 진리 또는 말씀을 표현한다. 그리고 말함(saying)은 지각을 각기 뜻한다. A.C. 2001, 2951, 7010, 6752, 1791, 1822, 4장 1절 참조.

2절. 만일 누군가가 죄지은다, 그리고 주님에 대하여 죄를 범한다, 그리고 공탁금이나 매매 같은 문제에서 그의 이웃을 거짓되게 취급하거나, 또는 도둑질하거나 이웃을 압박한다면,

영적 의미

신앙 속의 진리에 어긋나는 행위로 질서의 법칙을 위반할 때, 그 행위는 언제든지 기억 속에서, 이해함 속에서, 의지 속에서 선행으로부터 신앙을 분리시킴으로 신앙을 왜곡하는데 이는 자신에게서 기인되거나 선행의 선을 위반할 경우,

세부적 영적 의미

죄 짓는 것은 신성한 질서를 위반하는 것; 주님께 죄를 범한다 또는 불성실함이란 신앙 속의 진리에 어긋나는 행위(offence)를; 이웃을 거짓되게 취급하는 것은 진리를 선행에서 떼어냄으로 왜곡하는 것이다. 그 이유가 이웃이란 선 가운데, 선행 가운데 있는 사람을 말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웃을 거짓으로 대하는 것은 진리를 선행으로부터 분리시키는 것이다. 위탁물(deposit)은 “모든 사용을 위해 쌓아둔 것,” 따라서 기억 속에 있는 것을; 수중에 들어와 있는 것 또는 공탁금, 담보물(second deposit, fellowship, bargain, pledge)은 이해함 안에 있는 것을; 훔치는 것(robbery)은 자기 속의 진리가 자기가 잘나서 라고 우길 때 일어나는 의지의 행동을; 압박하는 것(oppressing)은 선행의 선을 위반하는 것을 말한다. A.C. 5076, 9156, 6711, 6712, 8087, 5299, 10062, 8906, 6711, 6712.

3절. 또는 잃어졌던 것을 발견했었고, 그리고 그 점을 거짓으로 다루고, 그리고 거짓말로 맹세한다. 이 모든 것들의 어떤 것에서 사람이 행동한다, 그 점에 대해 죄짓고 있다.

영적 의미

또는 진정한 교리를 지각했거나 발견했는데, 그것을 잃었다던가, 왜곡하든지, 특히 이런 잘못들을 행동 가운데 또는 말 가운데 표현했다면 이와 같은 왜곡을 자신 스스로 확증하는 바가 된다.

세부적 영적 의미

잃었던 물건을 발견하는 것은 진정한 교리를 발견하는 것을; 그 점을 거짓으로 다룬다란 진정한 교리를 왜곡하는 것을; 거짓말로 맹세한다란 거짓된 것을 확증하는 것을; 이런 사람이 저지를 수 있는 죄란 대화나 행동으로 악과 거짓을 표현하는 것을 말한다. A.C. 9150, 8087, 2842, 5076, 9156.

4절. 그러면 그는 죄지었다, 그리고 죄가 있음 일 것인즉, 그는 도둑질로 취한 것, 또는 압박하여 얻었던 것, 또는 그에게 위탁되었던 공탁금, 또는 그가 발견했던 잃었던 것을 원래대로 복구하라,

영적 의미

그가 내적으로, 외적으로 죄를 지었다고 고백할 때, 그는 주님으로부터 온 것을 자기에게서 근원되었다고 주장한 것, 선의 원리를 모독하는 것, 삶에 진리를 응용하지도 않고 기억 속에만 처박아 둔 것, 교회를 회복시켜주는 참된 교리를 썩게 하는 등등의 행위를 중단해야 한다.

세부적 영적 의미

만일 그가 죄지었고 죄 있다면이란 내적으로 외적으로 있게 되는 고백을; 도둑질로 취한 것을 되돌려줌이란 주님으로부터 자신 속에 있게 된 것들을 가지고 제 잘난체하던 것을 중단하는 것을; 압박해 (빼았었던) 것을 돌려줌이란 선과 선행에 관한 원리를 구박하던 행위를 중지하는 것을; 공탁금을 돌려줌이란 실제 사용도 않으면서 기억 속에서만 갖고 있던 진리를 더 이상 붙잡고 있지 않음을; 분실물을 돌려줌이란 교회를 회복시켜주는 진정한 교리를 더 이상 썩지 않게 한다는 말이다. A.C. 5076, 3400, 8906, 6711, 6712, 5299.

5절. 또는 그가 거짓으로 맹세했었던 것에 관하여 어떤 것. 그는 그것을 충분하게 원래대로 해놓아라, 그리고 거기에 오분의 일을 더 보태라. 그는 그것과 관계있는 자에게 자기가 죄가 있음을 발견한 그 날에 그것을 주어라.

영적 의미

또는 거짓 교리를 스스로 확증했을 경우, 그는 충분하게 회개해야 할 것이다. 악을 금하는 것 뿐 아니라, 진리를 실제 사용해서 자신에게 얼마간의 아껴둘 것이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 진실로 옳다고 여길 것은 자기에게 있는 선과 진리 모두는 주님의 것임을, 자기 속은 악한 것뿐임을 겸손히 인정해야 한다.

세부적 영적 의미

거짓으로 맹세했었던 어떤 것을 원래대로 복구하는 것이란 거짓 교리를 확증하는 것을 중단한다는 것을; 그 물건의 모든 것을 갚는다는 것은 회개를 하는 것뿐 아니라 악을 금하고 대신 진리를 실천한다는 것을; 오분의 일을 더 보태어 갚는다는 것은 주님이 아껴두시는 것들을 심는 것, 임자에게 갚는다는 것은 선과 진리를 주님의 것으로 돌린다는 것을; 죄가 있음을 발견한 날 갚는다는 것은 자신 안의 악이 악으로 실감되어지는 상태를 뜻한다. A.C. 8087, 2842, 9087, 9097, 9130, 649, 5291, 487, 3400, 9133.

6절. 그리고 그는 주님에게 죄가 있음의 제물을 양떼로부터의 흠이 없는 수양으로 죄가 있음의 제물에 대한 너의 추정치(estimation)에 따라 성직자에게 가져 와라.

영적 의미

위와 같은 상황에 이어 그는 거짓과 결별하고 내적인 것 속의 순진의 선으로 주님을 진실로 예배할 것이다. 그의 선의 품질은 외적 인간에서 진리가 명백히 드러난 만큼에서 결정되는 바, 신앙 속의 진리가 주님으로부터임을 인정하면서 그 진리에 어긋났었던 행위를 위해서 이다.

세부적 영적 의미

죄가 있음의 제물로 수양이란 내적 인간에 있는 순진의 선으로부터 주님을 예배하는 것을; 흠이 없음이란 악으로부터 자유롭다는 것을; 양떼 가운데에서란 영적인 것에서; 값을 추산한다는 것은 외적 인간에서 진리로 명백해진 선의 품질에 따른다는 것을; 죄가 있음의 제물을 성직자에게란 신앙 속의 진리에 어긋난 행위 때문임을; 제물을 성직자에게 가져온다는 것은 신앙의 진리는 주님으로부터 있어짐을 인정하는 것을 뜻한다. A.C. 3400, 2001, 10042, 7837, 5913, 6126, 2959, 9156, 3670.

7절. 그리고 성직자는 주님 앞에서 그를 위해 보상을 받게 하라, 그리고 그는 용서된다. 이 용서는 그로 하여금 죄가 있어지게 행한 것은 무엇이든지에 관하여 이다.

영적 의미

선에 관한 그의 상태가 악을 제거하고 주님과 재회하게 해주는데, 그의 악이 과거 어떤 본성이었든지, 어떤 품질이었든지 면제될 것이다.

세부적 영적 의미

성직자가 그의 죄를 벗겨주는 것이란 주님으로부터 온 선이 악을 제거해 줄 것이고 주님과의 재회를 만들어 준다는 것을; 그가 용서 받는다는 것은 면죄를; 그가 죄있어지도록 행한 것은 무엇이든 이란 악의 본성이나 품질이 무엇이든을 뜻한다. A.C. 9946, 10042, 8393, 9506, 3400.
** 위 1-7절에 관한 추가 설명.
위 1-7절은 내적 의미에서 실수로 범해진 죄에 관해 일반 주제를 마감짓고 있는 고로, 마지막에 있는 몇 절을 재음미해 보아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제 5장에 있는 주제가 계속되어 7절에서 결론짓고 있다. 허지만 6장 첫 절이 새 주제를 암시하고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왜 이렇게 되어 있는 것일까?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일반 주제에는 세 개의 작은 분과로 나뉘어 있다. 첫 분과는 내적 인간의 의지에 관련된 것을 묘사하고, 둘째 분과는 이해함에 관련된 것을, 셋째 분과는 행동에 관련된 것을 묘사하고 있다. 이어서 2절과 3절에서는 인간이 받아들여 행동이라는 것으로 체현해 내는데 까지에 걸쳐서 있게 되는 것, 즉 진리가 기억 안으로 들어오고, 이해함 안으로, 외적 측면의 의지 안으로, 내적 측면의 의지 안으로, 진리를 모독하는 것, 내적으로 진리를 모독하는 것에 따른 심각히 생각해 보아야 할 여섯 가지 잘못들에 관한 시리즈가 있게 된다. 그중 마지막 것은 악과 거짓을 확증해 주는 잘못인데, 이 죄는 그 앞에서 다섯 개의 연속적 경고에도 불구하고 있어지는 죄의 항목이다. 교회에 널리 알려져 있는 것은 이런 거듭남의 질서인데, 그것은 인간이 가르침을 받고 총명해지는 상태를 거쳐 순종함으로부터 사랑 또는 선의 상태에 이른다는 것이다. 그리고 명백한 것은 위의 세 단계의 진보를 거치는 가운데 인간은 무수하게 많은 실수들이 있게 된다는 것, 각자가 진행하는 거듭남의 질서 중 자신에게 특히 효과가 있게 되는 상태나 수준에 따라 각자의 거듭나는 품질이 좌우된다는 것이다. 이로부터 우리가 알게 되는 것은 본문의 여섯 가지 잘못들에 관한 용어가 왜 그렇게 나열되어 있는가이다. 그리고 이 용어들이 4, 5절에서 회개의 일을 묘사하기 위해 다시 언급될 때 이 용어들의 순서가 바뀌어 있는 것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 원인은 각자와 더불은 진리의 배열은 주님으로부터 선을 받되 자기에게 효과있는 상태가 어떤 것인지에 따라 결정되는 이유에서이다. 그러므로 인간이 회개하는 상태에 오게 될 때 내면에 있는 것들이 우선적으로 회개를 진행하고, 외면의 것은 두 번째 중요한 일에 해당된다. 따라서 본문에서 훔치거나 빼앗음으로 취득한 것들이 먼저 거론되고, 영적으로 기억에 관련되는 것들이 그 뒤를 이어 언급되고 있다. 이 사항 속에는 중요한 가르침이 함유되어 있다. 진정한 회개는 견해(opinion)의 변화나 행동만의 변화보다는 동기(motive)가 바뀌어야 한다는 것이다. 사실 회개하는 상태는 과도기에 불과한 상태이다. 따라서 선을 실감하기 위해서는 완성을 이루어야만 한다.
위의 논지는 우리가 조금 더 심각하게 생각해 보아야 할 또 다른 문제를 가져다준다. 그것은 오분의 일을 더 보태라는 것으로 표현된 아껴두어야 할 것(remains)이 심어짐(implantation)이다. 아껴둘 것이란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한 애착과 참된 생각들이다. 우리가 그것들을 의식치 못하는 시기(유아 시절이 가장 대표되는 시기임)에서 주님은 인간에게 그것을 저장해 놓으신다. 이렇게 주님은 내적 인간에 저장하셔서 거듭날 때가 차면 인간이 사용할 수 있도록 미리 준비해 놓으신다. 인간이 이것들을 사용할 시기가 도래하면 주님이 아껴두신 것들은 외적 인간 안에 이식되어 뿌리를 내린다. 외적 측면에서 이것들은 꽃을 피우고 열매를 생산한다. 이것이 아껴두셨던 것들이 이식되는 것이요, 이를 수단으로 인간의 거듭남이 성취되어 주님과의 결합이, 내적 인간과 외적 인간의 결합이 성사를 이룬다. 물론 이런 일들은 각자가 자기의 악과 잘못들을 회개하는 정도에 비례해서 가늠되며, 동시에 죄의 용서가 있고 그 결과 모든 선과 진리가 내향으로는 지각되고 외향으로는 그것들이 주님으로부터 임을 인정하게 된다. 이제 5절에 있는 영적 가르침에 관해 합리적으로 실용적으로 그 가치를 찾았을 줄로 생각된다. 더불어 5절이 어떻게 앞 절과 뒷 절에 연결되는가도 가늠했으리라 본다. 6절과 7절의 상세한 설명은 앞의 장들에서 누차 있어졌으므로 참조하기 바란다. A.C. 6156, 1616, 5897-11, 1737, 2284.

8절. 그리고 주님께서 모세에게 이야기하시어, 말하시기를,

영적 의미

더불어 지각이 있게 하는 신성한 진리를 수단으로 주님으로부터의 계시가 있는다.

세부적 영적 의미

여호와란 사랑 측면에서의 신성한 존재를; 이야기하심(speaking)이란 유입을; 모세란 신성한 진리 또는 말씀을 표현하고; 말함(saying)은 지각을 뜻한다. A.C. 6156, 1616, 5897-11, 1737, 2284.

9절. 아론과 그의 아들들에게 명령하여, 말하라, 이것은 태워 바치는 제물의 법이다. 태워 바치는 제물은 아침 까지 온 밤을 제단 위, 화덕(hearth)에 있어야 한다. 그리고 제단의 불은 거기에서 계속 타고 있어야 한다.

영적 의미

선 가운데 있는 이들, 그리고 선으로부터의 진리 가운데 있는 이들에게 유입을 통해 순수한 사랑으로부터 주님을 예배함에 관해, 자기 상태가 희미할 경우 이 사랑은 지배력이 있게 되고, 자기 상태가 밝은 경우 자신 스스로 결정해서 이루어진 듯 되어 진다. 그 이유가 사랑은 꾸준하고 결코 소멸되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세부적 영적 의미

아론과 그의 아들들에게 지시함은 선과 그로부터 파생된 진리 가운데 있는 이들에게 있는 유입을; 말함은 지각을; 태워 바침을 드리는 법이란 순수한 사랑으로 주님께 예배드림에 관한 것을; 제단에서 타는 그 불 위의 태워 바침의 제물이란 사랑이 주권을 가져야 할 것임을 뜻하는데, 그 이유는 불이 타고 있다는 것이 사랑이 활성화되어 있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밤새도록 이란 희미한 모든 상태를; 아침이란 밝게 빛남의 상태를; 제물이 불 위에 타고 있어야 함은 사랑은 항상 존재해야 한다는 것, 결코 소멸되어서는 안 된다는 원칙을 마치 스스로 결정한 듯 한 인간의 결심을 말한다. A.C. 5486, 9946, 1791, 1822, 8680, 9723, 6832-3, 9787, 2784.

10절. 그리고 성직자는 그의 아마포 옷을 입어라, 그리고 그의 아마포 반바지(bleeches)를 그는 그의 살에 입어라. 그리고 그는 불이 제단에서 태워 바치는 제물을 태워버려 나온 재들을 가져다가 제단 측면에 그것들을 놓아라.

영적 의미

그래서 천적 선은 신앙 속의 진리로 모습을 드러내며 진리가 선과 결합함으로 외적으로나 내적으로나 유지 존속될 것이다. 그래서 예배의 이전 상태가 어떠하든 그 상태의 선용에 충당되며 그럼으로 해서 승강된다. 그러나 이전 상태는 종속된 위치에 있어야 할 것이다.

세부적 영적 의미

성직자가 아마포 옷을 입음이란 천적인 선은 신앙의 진리들에서 명백해질 것임을; 아마포 반바지를 자기 살에 입는 것은 진리가 선과 결합하는 것은 내적으로 뿐만 아니라 외적으로도 결합되어야 한다는 것을; 성직자가 재를 취한다는 것은 이전의 상태가 어떠했든지 그 상태는 승강될 것임을; 재를 제단 옆에 둔다는 것은 이전 상태가 승강을 이루어도 그것은 따로 따로 종속되어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A.C. 9946, 9814, 9959, 160, 161, 9723, 9736, 10185.

11절. 그리고 그는 그의 옷들을 벗을 것이다, 그리고 다른 옷들을 입을 것이다, 그리고 재들을 진영 밖 깨끗한 장소로 운반하라.

영적 의미

진리의 상태가 변하면 선의 상태도 그에 따라 언제나 변화된다. 그리고 더 이상 사용되지 않는 진리와 선의 지식은 천국 삶에서 분리되어 조용한 곳인 외적 기억 안에 있게 되고, 그곳은 악에 오염되지 않는다.

세부적 영적 의미

그 옷을 벗고 다른 옷으로 갈아 입는다는 것은 진리에 관한 상태의 변화는 언제나 선에 관한 상태의 변화를 동반할 것이다는 것을, 그 이유는 옷(garment)이 진리들을 의미하고; 성직자는 선을; 벗고 입는다는 것은 상태의 변화를 말하기 때문이다. 진지 밖 깨끗한 곳에 그 재를 내다버림은 더 이상 사용이 요구되지 않는 지식들은 악에 오염 안되어 정지 상태인 외적인 기억에 머물러 천국 생명과 분리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을 뜻하는데, 그 이유는 진영 밖이란 천국 생명에서의 분리를, 깨끗한 곳이란 분리라는 행동은 순수하다는 것, 또는 정지 상태인 외적 기억을 뜻하기 때문이다. A.C. 9814, 9946, 3405, 4236, 4545, 2625, 9723.

12절. 그리고 제단 위의 불은 거기서 계속 타고 있어야 한다, 그것은 꺼지지 않아야 한다. 그리고 성직자는 매일 아침 그것에서 장작을 태워라. 그리고 그는 그것 위에 태워 바치는 제물을 정돈하여 놓아라, 그리고 거기에서 평화 제물의 지방을 태워라.

영적 의미

그러나 순수한 사랑, 가장 깊은 예배는 계속 활동하여 소멸되어서는 안 된다. 그리고 이 사랑은 각자의 매 새로운 상태에서 자기가 노력해서 선한 듯 하게 결과될 것이다. 애착과 생각의 완전한 배열이 유지되어야 하고 특히 자유와 평화의 원리에서 천적 선을 주님께 돌려야 할 것이다.

세부적 영적 의미

이 절에 대한 윤곽은 불의 의미에서 명확해진다. 이 불은 순수한 사랑인 예배의 가장 깊은 것을; 불이 탄다함은 이와 같은 예배가 활동되고 있음을; 타고 있는 불이 꺼지지 않아야 한다는 것은 사랑이 꺼져서는 절대 안 된다는 것을; 성직자는 아침마다 장작을 지피라는 것은 위와 같은 예배는 선 가운데 있는 이들에 의해 결과되되 각자의 매 새로운 상태에서 마치 자신이 선해서 그렇게 하는 듯 이루어진다는 것을; 태워 바침의 제물을 장작 위에 차려놓는다 함은 애착과 생각들이 완전하게 정리정돈 됨을; 평화 제물의 지방을 그 위에서 사른다함은 자유의 원리로부터 온 천적 선은 주님에게 돌려야함을, 그 이유는 지방이 천적 선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평화 제물이란 자유로부터 온 예배를 말한다. A.C. 9723, 6832-3, 9946, 2784, 7844, 5288, 10033, 353, 10097, 2776.

13절. 불은 제단 위에서 계속 타고 있어야 한다. 이것은 꺼지지 않아야 한다.

영적 의미

그 이유는 심정으로부터 주님을 예배할 경우 신성한 사랑과 자비는 인간과 더불어 항존하고 결코 중단되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세부적 영적 의미

여기서 불은 신성한 사랑과 자비를 말한다. 그 불이 계속 타고 있음이란 신성한 사랑과 자비는 인간과 더불어 꾸준히 존재함을; 꺼지지 않는다 함은 신성한 사랑과 자비는 결코 중단되는 일이 없다는 것을 말하는데, 한 가지 명확한 것은 이 절이 앞 절에서 이미 언급되었다는 것이다. 같은 서술이 반복된 것은 글자 의미에서는 강조를 위한 것이겠지만, 영적 의미의 경우, 내적 의미의 시리즈를 탐사할 수 있기 위해서이며 신성한 사랑과 자비는 바뀔 수 없다는 진리를 알게 해준다. A.C. 1528, 10133.

14절. 그리고 이것은 식사 제물의 법이다. 아론의 아들들이 제단 앞, 주님 앞에 그것을 바쳐라.

영적 의미

영적 수준에서 천적 사랑으로 주님을 예배함 또는 선행으로부터 예배함에 관한 질서의 법칙은 이러하다. 이 예배는 신성한 선으로부터 파생된 신성한 진리들로 진행되는데 이것이 영적인 예배이다.

세부적 영적 의미

법이란 태워 바침으로 의미된 주님을 사랑함과 관련되는 진리들을 말하고, 이웃을 사랑함은 식사 제물로 의미되고 있다. 그러므로 본 장의 시리즈에서의 식사 제물은 영적 수준에 있는 천적인 사랑 다시 말해 선행으로부터의 예배를 말해주게 된다(2장 1-2절 참조). 아론의 아들들이란 영적인 예배는 신성한 선으로부터 파생된 신성한 진리로부터 진행된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제물을 제단 앞 주님께 바침이란 영적 예배는 천적인 수준과 결합되어야 한다는 것을; 그리고 이 예배는 주님으로부터임을 말하고; 제단은 주님, 그리고 주님께 대한 예배를 명시하기 때문이다. A.C. 1121, 2177, 9946, 10024, 9714.

15절. 그리고 그는 거기로부터 식사 제물의 고운 곡식 가루 한웅큼, 그것으로부터 기름, 그리고 식사 제물 위에 있는 모든 유향을 가져 가라, 그리고 그것을 주님께 달콤한 향기를 위해 그것으로부터의 기념물로 제단 위에서 태워라.

영적 의미

또한 이 예배는 선에서 파생되는 순수한 진리 안에 있는 영적 인간과 더불은 충만된 능력으로 있게 된다. 이에 더하여 진정한 예배는 천적, 영적 선과 진리를 가지고 있다. 그 이유는 이 예배 속의 사람은 내적 기억 안에 새겨진 거룩한 평화와 쉼의 상태에서 모든 선이 주님으로부터임을 인정할 것이기 때문이다.

세부적 영적 의미

한웅큼 집는다는 것은 충분한 능력이 행사된다는 것을; 고운 곡식가루는 선에서 파생된 순수한 진리를; 기름과 유향은 천적이고 영적인 선과 진리를; 식사 제물 위에란 진정한 예배를(위 14절 참조), 한웅큼 집어 낸 것을 제단에서 태운다 함은 주님께 성별되게 드림을 다시 말해 모든 선과 모든 진리는 그분께로부터 임을 인정하는 것을 말한다. 달콤한 항기, 또는 쉼의 냄새란 거룩한 평화와 쉼의 상태를; 기념물이란 내면의 기억에 새겨지는 것을 말한다. A.C. 7518, 9995, 2177, 10177, 10052, 10055, 10054, 6888.

16절. 그리고 그것으로부터의 남은 것은 아론과 그의 아들이 먹는다. 이것은 거룩한 장소에서 누룩 없이 먹어라. 만남의 천막의 뜰에서 그들은 그것을 먹어라.

영적 의미

선 가운데 있는 이들, 이 선으로부터 진리 가운데 있는 이들, 즉 천적, 영적 인간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을 자기 것으로 삼을 수 있다. 그리고 이 선은 거짓으로부터 분리된 상태라야만이 자기 것으로 삼을 수 있다. 그리고 거룩한 상태에서, 마음의 자연적 수준에서도 자기 것으로 삼을 수 있게 되는 바, 모든 수준에서 충만해진다.

세부적 영적 의미

거기에 남은 것은 아론과 그의 아들들만이 먹을 수 있다는 것은 주님으로부터 온 선은 천적인 것과 영적인 것을 수단으로 자기 것이 됨을; 누룩이 없다는 것은 거짓된 상태와 분리되어있음을; 거룩한 장소에서 먹는다 함은 거룩함의 상태 즉 사랑과 신앙의 상태가 자기 것이 됨을; 만남의 천막의 뜰에서란 마음의 자연적 수준에서, 그런고로 모든 수준에 있게 되는 상태를 말하는데, 그 이유는 뜰(court)이란 가장 바깥 천국 즉 자연적 천국을 말하기 때문이다. 이 바깥 수준에서 “모든 내면에 있는 것들이 질서 있게 집합되어 각기 형체를 이루며 연결된다.” 이러므로 해서 각 수준에 있는 것들이 충만되어 있게 된다. A.C. 9946, 2177, 2187, 2342, 3652, 9741, 9825, 9824.

17절. 누룩과 더불어 구워져서는 안 된다. 나는 불로 만든 내 제물로부터 그들의 몫으로 그것을 주었다. 이것은 가장 거룩하다, 마치 죄로 인해 바치는 제물 같이, 죄가 있음으로 해서 바치는 제물도 같다.

영적 의미

위의 자기 것으로 삼는 상태의 준비에서까지도 거짓의 혼합이 있어서는 안 된다. 이것은 주님께서 신성한 사랑과 자비에 의거 천적, 영적 인간에게 주시는 선물이다. 이것은 마음의 각 수준에 채택되는 가장 깊은 선이다. 그리고 이것은 악과 잘못에서 해방되는 이전의 상태 중 가장 깊은 수준이다.

세부적 영적 의미

누룩을 넣어 굽지 말라는 것은 우리가 주님께로부터 온 선을 자기 것 삼기 전 준비할 때부터서도 거짓과 혼합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주님께 살라 바친 제물에서 아론과 그의 아들들의 몫이란 식사 제물로 표현된 선은 천적 인간과 영적 인간에게 주님이 내리신 선물이라는 뜻이다. 더 없이 거룩하다 함은 위의 선은 마음의 각 수준에 채택되는 가장 깊은 선임을 명시하고 있다. A.C. 8496, 7906, 4397, 9946, 10055, 10042, 9156.

18절. 아론의 자손들에서 모든 남성은 불로 만든 주님의 제물로부터 당연한 몫을 너의 자손 대대로 영원히 먹을 것이다. 그것들을 만지는 자는 누구든지 거룩해진다.

영적 의미

그래서 이 천적, 영적인 선은 의지 안에 있는 선으로부터 이해함 안에 있는 진리 가운데 있는 모든 사람에 의해 자기 것으로 삼아질 것이다. 이는 상태가 변화하는 가운데서도 마치 자기 것인 듯 영원히 있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신성한 사랑으로부터 존재하여 인간이 받는 것이고 그 사람에 의해 인정된다. 정녕 모든 사람은 각자가 생산하는 거룩함이 어떠하든, 설사 아주 경미하다 해도 이와 같은 선과 접촉될 것이다.

세부적 영적 의미

다음과 같이 설명된다. 식사 제물은 천적이고 영적인 선을; 아론의 후손 가운데 남자란 선으로부터 온 진리를; 먹는다함은 자기 것 삼음을; 자손대대로 영원한 법 또는 규정이란 상태의 매 변화 때마다 자신의 것인 듯 여기며 선을 받는다는 것을 말하는데, 그 이유는 이것이 천국 질서이기 때문이다. 주님께 불로 태워 바침이란 신성으로부터 인간에 의해 받아짐을; 제물에 닿는 것은 무엇이든 거룩해진다는 것은 이와 같은 선에 접촉되는 모든 것은 그 접촉이 아무리 경미하다 해도 거룩함의 상태임을 말한다. A.C. 4581, 2177, 725, 9946, 2187, 7884, 7931, 9845, 1712, 10055, 10023.

19절. 그리고 주님께서 이야기하셨다, 말하시기를,

영적 의미

더구나 지각을 주시는 신성한 진리를 수단으로 신성한 선이 밝혀주시는 사항이 있다.

세부적 영적 의미

여호와란 사랑 측면에서의 신성한 존재를; 이야기하심(speak)이란 유입을; 모세는 신성한 진리 또는 진리를; 말함(saying)은 지각을 각각 뜻한다. A.C. 2951, 7010, 6752, 1791, 1822, 4장 1절 참조.

20절. 이것은 아론과 그의 아들들의 봉헌이다, 이것을 그들은 자기가 기름부워지는 그 날에 바쳐라. 즉 식사 제물을 위한 고운 곡식 가루 십분의 일 에바를 항구적으로 아침에 그것의 절반을, 그리고 저녁에 그로부터의 절반을 (바쳐라).

영적 의미

진리가 선과 밀접하게 결합할 때, 천적 선 그리고 그 선으로부터 진리 안에 있게 되는 이들은 예배에서 주님을 인정한다는 것, 그런 예배, 그런 사람들에게 신성한 선으로부터의 신성한 진리는 영원히 남아 있을 것이요, 예배에 기쁨과 평화를 가져오므로 이 모든 것이 주님으로부터임을 인정한다.

세부적 영적 의미

아론과 그의 아들이란 선 가운데 있어 그 선으로부터 파생된 진리 안에 거하는 사람들을 말한다. 봉헌(oblation)이란 예배에서 주님을 인정하는 것을; 기름 부을 때란 진리가 선과 친밀하게 결합되는 상태를; 정기적으로 바치는 고운 곡식 가루 십분의 일 에바란 신성한 선으로부터 신성한 진리에서 아껴두신 것들(remains)은 항구적으로 충분하다는 것을; 아침에 절반, 저녁에 절반이란 밝은 상태와 희미한 상태 모든 상태에서라는 뜻이다. A.C. 9946, 349, 922, 9954-7, 576, 10136, 10133, 10255, 6000, 9787.

21절. 굽는 납작한 냄비에서 기름을 가지고 그것을 만들어라. 그것이 적셔질 때, 너는 가져올 것이다. 구워진 조각들 가지고 너는 주님에게 달콤한 향기를 위한 식사 제물을 바쳐라.

영적 의미

그리고 위와 같은 상태의 준비는 외면의 진리들을 수단으로 천적인 선에 의해 작동될 것이다. 그 과정 속에서 진리가 선 아래 질서있게 배열된다. 그리하여 그것이 주님으로부터임을 인정하고 예배는 평화와 기쁨을 가져온다.

세부적 영적 의미

기름을 반죽하여 굽는 납작한 냄비에서 구운 식사 제물이란 위와 같은 상태를 위한 준비는 천적 선에 의해 작동되는 외면의 진리를 수단으로 한다는 것을; 적신 채로 가져온다는 것은 진행(processing) 중에 있음을; 여러 조각을 낸다는 것은 선 밑에 진리를 질서 있게 배열함을; 주님을 기쁘시게 해드림이란 평화와 환희를 주시는 분이 주님이심을 인정하는 상태를 말한다. A.C. 8496, 7356, 2177, 9993, 10048, 3110, 10054.

22절. 그리고 아론의 아들들 사이로부터 아론 대신에 있을 기름부워진 성직자가 그것을 바쳐라. 영원한 법령에 의해 이것은 주님에게 온전히 태워져야 한다.

영적 의미

그리고 진리와 결합된 외적인 선은 충분한 결합을 결과하면서 본질이 되는 선을 섬길 것이다. 그리고 이와 같이 내적인 것으로부터 오는 외적 예배는 영원히 있게 될 것이다.

세부적 영적 의미

아론의 뒤를 이어 기름 부어지는 성직자란 외적 선이 진리와 결합되어 본질되는 선을 보살펴주는 것을; 식사 제물이란 결합을 결과되게 하는 것을(20절 참조); 영원히 지킬 규정으로 이 제물을 주님께 온전히 태운다는 것은 내적인 것에서 근원되는 외적 예배는 영원히 있게 된다는 것을 뜻한다. A.C. 9954-7, 10017, 18절 참조.

23절. 그리고 성직자의 모든 식사 제물은 온전히 태워야 한다. 그것이 먹어져서는 안 된다.

영적 의미

선으로부터 온 가장 깊은 모든 예배는 주님께 그 원인을 돌려야 한다. 그 이유가 인간은 자신 스스로부터서는 선을 자기 것으로 삼을 수 없기 때문이다.

세부적 영적 의미

성직자가 바치는 식사 제물을 온전히 살라야 함은 선으로부터 드리는 가장 깊은 예배는 온전히 주님께 돌려드려야 함을; 먹어져서는 안 된다는 것은 인간은 자신 스스로 선을 자기 것 되게 할 수 없다는 것을 뜻한다. A.C. 9946, 10055, 2187.

24절. 그리고 주님께서 모세에게 이야기하셨다, 말하시기를,

영적 의미

더 나아가, 지각을 주시는 신성한 진리에 의해 신성한 선으로부터 계시가 있는다.

세부적 영적 의미

주님(여호와)란 사랑 측면에서의 존재를; 이야기하심(speaking)은 유입을; 모세는 신성한 진리 또는 말씀을; 말함(saying)은 지각을 말한다. A.C. 2951, 7010, 6732, 1791, 1822.

25절. 아론과 그의 아들들에게 이야기하거라, 말하시기를, 이것은 죄 바침의 제물의 법이다. 태워 바치는 제물이 죽여지는 장소에서 죄 바침의 제물을 주님 앞에서 죽여라. 이것은 최고로 거룩하다.

영적 의미

유입을 수단으로 선 가운데, 그 선으로부터 진리 가운데 있는 이들에게 악에서 해방되는 동안의 예배에 관해서이다. 이 예배의 가장 깊은 것은 순수한 사랑으로부터 오는 주님의 예배인 것으로 판명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 예배를 준비함도 신성한 사랑으로부터이라는 것은 똑같다. 한 마디로 이 예배도 가장 깊은 예배의 결과이다.

세부적 영적 의미

“아론과 그의 아들들에게 이야기하거라, 말하시기를”란 선 가운데 있는 이들에게는 유입(influx)이; 진리 가운데 있는 이들에게는 지각(perception)이 주어진다는 말이다. 죄 바침의 제물의 법이란 악에서 해방되는 동안에 있게 되는 예배에 관해서라는 뜻이고; 죄 바침의 제물이 태워 바침의 제물을 죽이는 자리에서 죽여야 함은 악에서 해방되는 동안의 예배는 순수한 사랑으로부터 주님을 예배하는 태워 바침의 제물에 관한 의미와 똑 같이 위 예배는 순수한 사랑으로부터임을; 최고로 거룩함은 위 예배가 가장 깊은 예배의 결과이라는 뜻이다. A.C. 9946, 2951, 1791, 1822, 3400, 10053, 2625, 10024, 10129.

26절. 죄를 위해 그것을 바친 성직자가 그것을 먹는다. 거룩한 장소에서, 만남의 천막의 뜰에서 그것을 먹어라.

영적 의미

선 가운데 깊이 있는 사람은 외적으로 있는 선을 자기 것으로 삼게 될 것이다. 이것은 예배의 거룩한 상태이다. 이것은 영적, 천적 인간으로부터 파생되는 자연적 인간 안에서 자기 것으로 삼게 될 것이다.

세부적 영적 의미

죄를 위해 그것을 바치는 성직자가 그것을 먹는다함은 선 가운데 아주 깊이 있는 사람은 외적으로 선을 자기 것 되게 하리라는 것을; 그 제물을 거룩한 장소에서 먹는다함은 위 예배의 거룩한 상태를; 만남의 천막의 뜰 이란 자연적 인간 안에서의 자기 것 삼음을 말한다. A.C. 9946, 2187, 9741, 9825.

27절. 그것으로부터의 고기에 접촉하는 것은 무엇이든 거룩해 진다. 그리고 어떤 옷에 그것으로부터의 피가 뿌려짐이 있을 때, 너는 뿌려진 그 곳을 거룩한 장소에서 씻어라.

영적 의미

그러므로 외적 예배는 내적인 것으로부터 거룩하게 될 것이다. 선행의 거룩한 상태가 이와 같은 예배에 있는 진리와 결합될 때, 죄로부터 깨끗해짐이 이 거룩한 상태에서 거행될 것이다.

세부적 영적 의미

그 고기에 닿는 것은 다 거룩하다함은 외적인 것도 내적인 것으로 인해 거룩해진다는 것을 뜻한다. 접촉한다(touch)는 것은 영적인 접촉(contact)을 말한다. 죄 바침의 제물의 고기란 외적 예배를; 거룩함이란 내적 예배와 연결되는 결과임을; 죄 바침의 제물의 피가 옷에 뿌려졌음이란 위의 예배 안에서 진리와 결합한 선행의 거룩한 상태인데, 그 이유가 본문에서의 피는 선행을; 옷은 진리를 명시하기 때문이다. 피가 뿌려지는 동안은 결합하는 동안을 말하고; 뿌려진 피를 씻는다는 것은 순수해짐을; 거룩한 장소란 거룩한 상태를 각기 말한다. A.C. 4404, 10199, 8682, 10040, 1001, 1073, 10047, 3147, 2625, 25-26절 참조.

28절. 그것(고기)이 끓여진 흙으로 만든 그릇은 깨트려라. 그리고 만일 그것이 놋쇠로 만든 그릇에서 끓여진다면, 그 그릇은 문질러 닦고, 물로 행굴 것이다.

영적 의미

그러나 이와 같은 예배에 도구가 되었을 뿐인 자연적 애착은 분리되어야 할 것이다. 만일 이런 자연적 애착이 주님으로부터 와서 선한 것이라면 모든 악과 거짓으로부터 필히 깨끗해 있어야 할 것이다.

세부적 영적 의미

흙으로 만든 그릇은 자연적 애착만을 뜻하나, 본문의 경우 사용 도구인 진리에 관한 애착을 말한다. 깨트린다는 것은 분리됨 또는 제거함을; 놋그릇에 넣고 끓였다함은 선으로부터 파생된 진리를 수단으로 준비됨을; 문질러 닦고, 물로 행군다는 것은 악과 거짓 모두로부터 순수해짐을 말한다. A.C. 10105, 5948, 9163, 10105, 10105.

29절. 성직자들 사이에 모든 남성은 그것을 먹는다. 이것은 최고로 거룩하다.

영적 의미

선으로부터 오는 모든 진리는 그것 자체에 있는 선을 자기 것으로 삼을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내적인 것과 결합된 외적 예배이다.

세부적 영적 의미

남자로서 성직자인 사람이 먹는다는 것은 선으로부터 온 모든 진리는 그 사람 자신의 선이 될 것이라는 뜻이다. 이것이 최고로 거룩하다 함은 외적 예배가 내적 예배와 결합되었다는 것을 말하는데, 그 이유는 이 예배가 죄에서 순수해짐을 포함하기 때문이다. 가장 거룩함은 가장 깊은 상태, 내적인 것을 말한다. A.C. 725, 9946, 2187, 3400, 10129.

30절. 그리고 죄 바침의 제물은 그것의 피를 거룩한 장소에서 보상을 만들기 위해 만남의 천막 안으로 가지고 오면 먹지 못한다. 그것은 불로 태워라.

영적 의미

내면이 깨끗해지기 위해 주님을 예배함, 이는 천국을 통해 주님으로부터 진행되는 선행의 본질되는 원리로부터 있게 된다. 그리고 이는 죄로부터 깨끗해지게 하여 외적인 것이 내적인 것과 재회하게 한다. 그러나 인간에 의해 본래 자기 것이라고 우겨서는 안 된다. 이는 주님으로부터 모두 있어진 것임을 인정해야 하며 그분께 모두 바쳐져야 한다.

세부적 영적 의미

죄 바침의 제물의 피를 만남의 천막 안으로 가져 옴이란 내면이 순수해짐을 포함하는 신실한 예배를; 피는 선행을; 천막으로 가져옴은 내면이 순수해질 수 있는 것, 천국을 통해 주님으로부터 있어짐을 인정하는 상태를 말한다. 성소에서 죄를 벗겨줌이란 거룩한 상태에 있는 내적 인간과 외적 인간이 재회하는 것을; 먹지 말라는 것은 인간이 자신의 것으로 삼지 말라는 것을; 불로 태움은 주님께 모두를 헌납함을 말한다. A.C. 3400, 1001, 2356, 3540-3, 10042, 2625, 2187, 10052.

6장의 종합적 고찰

첫 장부터 살펴온 다양한 상태, 다양한 조건에서 주님을 예배하는 모습들을 표현하는 태워 바침과 제물에 관한 신성한 법의 세부 사항들을 이제 조심스럽게 다시 새겨 보아야 한다. 먼저, 가장 높은 수준에 속하는 예배에 관한 점, 다시 말해서 주님 또는 그분으로부터 오는 선함과 진리에 대한 가장 순수한 사랑, 선함과 진리 자체를 위해서 일 경우의 예배이다. 이 예배의 법칙은 무엇일까? 이미 읽은 구절들에서 알 수 있는 바, 위의 예배는 인간 안으로 생명이 신성하게 유입되면서 한편으로 유입 받는 당사자가 주님과 협동할 때만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태워 바침의 제물은 아침이 될 때까지 밤새도록 장작 위에 있도록 명령되어 있었다. 거듭나는 모든 과정에서 신성한 사랑이 인간 안으로 흘러드는 역사가 중단되는 일이 결코 없다. 그리고 각 사람 안에서 예배라는 처방을 생산하면서 이 사랑은 예배자의 각기 특별한 개성 안에서 드러나진다. 모든 사람은 주님을 예배하되 각자 자기가 예배하는 듯 해야만 한다. 다시 말해서 각자가 신중히 생각해서 자발적으로 예배하지 않으면 진정한 예배는 존재될 수 없다는 말이다. 이것이 태워 바침의 제물이 장작(firewood) 위에 있도록 명령하신 구절의 의미이다. 이해를 돕기 위해 자연계에서의 열을 주목해 보자. 우리는 이 열을 태양으로부터 획득하되 대기를 통해서 얻게 된다. 이를 영적으로 보면, 신성한 사랑은 언제나 인간과 더불어 현존하시되 그 수단은 각 인간에게 있는 적절한 매개체를 통해 현존하신다. 이 매개체가 성경에서 성령 또는 위로자라 불리는 신성한 진리이다. “내가 시대 끝날 까지 너희와 함께 있으리니…” (마태 28:20). “아침이 될 때까지 온 밤을…” 신성한 사랑은 결코 주무시지 않는다. 열에 대해 또 한가지 생각해 볼 것은, 열을 얻을 수 있게 하는 장작, 즉 의식적으로 눈에 보이는 물질이 없으면 열을 획득할 수 없다는 점이다. 이것이 창조의 법칙이요 영적으로 거듭남의 법칙이기도 하다. 인간은 자기의 의지와 이해함을 주님으로부터 취해서 마치 자기 것인 냥 사용한다. 그리하여 최말단 속에서 거듭남을 구성하는 천국적 결혼인 교회와 주님과의 결합을 이룬다. 이런 결합은 인간의 고유한 것(proprium), 다시 말해서 자기가 실감하는 삶에 결과되므로 마치 자신의 것인 듯 여긴다. 이것은 인간 삶의 광대한 법칙이라 부를 수도 있다. 그 이유는 이것이 삶의 기초요 이 기초 가장 높은 곳에 주님 자신이 존재하시기 때문이다.
주님에 대한 가장 높은 사랑, 탁월한 천적 상태라 부를 수 있는 주님을 사랑함에 관련되는 또 다른 법이 있다. 아름다운 옷은 그 옷을 입은 자를 알맞게 장식해서 그 사람을 표현해 주듯이 주님을 사랑함이 진리 안에서 나열되는 것이다. 그것들은 선으로부터 파생되는 진리들, 선을 표현하는 진리들, 선과 결합된 진리들이다. 본문에서 선으로부터 파생된 진리가 성직자의 옷으로 의미되고, 선을 표현하는 진리란 상황에 따라 옷을 바꿔 입는 모습으로, 선과 결합된 진리는 맨살에 옷을 걸치는 것으로 표현되고 있다.
천적 예배에 관련된 세 번째 법은 재를 내다버리는 행동으로 표현되고 있다. 가장 높은 선으로 인도하는 각 사람의 상태들이 그 선에 비해 하급으로 우선 간주하여 이미 행해진 것들을 한쪽으로 젖혀놓지 않으면 그는 가장 높은 선을 실감하는데 이를 수 없다. 이러면서도 그는 자기가 하급이라고 여긴 것들을 아주 귀하게 여겨 그것에 신뢰를 두고 있어야 한다. 종교 생활에서 어느 정도 진전을 가진 사람이라면 현재의 순수한 경험과 비교해 볼 때 어린 시절 종교 생활 속의 거룩한 상태들이 비록 재와 같이 여겨지겠지만 그 상태들이 선한 삶을 불러일으키는데 아주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생각되고 느껴질 때 어느 누구가 자기의 어린 시절 종교 생활을 마음에서 회상해 볼 수 없다 할까? 확실한 것은 어느 누구도 그것을 잃지 않는다는 점이다. 어린 시절 거룩한 상태들은 정말로 “진지 밖”에 있다. 그래서 그것들은 천국 질서의 한 부분을 형성할 수 없다. 그럼에도 그것들은 “깨끗한 곳”에 있다. 다시 말해 그것들은 악하고 거짓된 것의 한 부분이 되어질 수 없다는 말이다. 달콤함은 우리의 초기 상태들에 존재한다. 그럼에도 하나의 법칙으로 그 달콤함은 완전이라는 우리 상태 안에서 활동하지 않고 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천적 예배의 네 번째 법이 있다. 천적 예배는 가장 깊은 것(inmost)으로부터 꾸준히 유지되어야 한다는 것, 이는 애착들이 질서있게 배열되어야 한다는 것, 가장 깊은 사랑은 평화와 힘이라는 상태로 모습을 드러내야 한다는 것, 위 사항은 반드시 인간에 의해 성취되어야 한다는 것, 그 이유가 주님의 사랑과 자비는 결코 실패하지도 않으며 결코 꺼지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이에 덧붙여 알 수 있는 것은 주님의 사랑과 자비는 선한 자 뿐 아니라 악한 자에게도 적용될 수 있다는 것인데, 그 이유는 주님의 사랑과 자비는 극을 이루는 두 계층 모두가 생명을 잃지 않게 배려하시기 때문이라는 것과 양측 모두 자기들 조건을 개선할 수 있다는 것, 그들이 영원히 연계될 자신의 존재에서 더욱 더 질서있게 배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상에서 알 수 있는 바는, 천적 예배의 법칙은 신성한 사랑으로부터 즉각 진행된다는 것, 이 역사는 환희와 평화로 천국들을 채우고, 각자가 획득한 품성에 따른 인간 존재의 상태와 조건이 최상이 되도록 영원히 영향을 주고 있다는 것이다.
주님을 사랑하는 천적 예배에 관한 위와 같은 특별한 언급에 이어 따라 오는 것은 영적 예배의 법칙인데, 이 법칙은 선행 또는 이웃을 사랑함에 특별한 관계를 가지게 된다. 바꿔 말해서 천적 예배는 신성한 선에 관계되는 반면, 영적 예배는 신성한 진리에 관계된다. 그 이유가 선행의 선은 진리를 매개체로 해서 획득되기 때문이다. 아론의 아들들로 식사 제물을 바치도록 하는 의무 규정이 위에 대한 표현이라는 것을 우리는 관찰해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구절에는 주님을 사랑함과 이웃을 사랑함 둘 다가 포함되어 있는데, 그 이유는 “주님께” 와 “제단 앞”이 언급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구절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한 가지가 더 있다. 이웃에 대한 진정한 사랑은 말씀으로부터 진리를 받으면서 주님을 인정하지 않고는 존재될 수 없다는 것이다. 이제 15절은 영적 예배가 천적 예배와 어떻게 연결되는 가를 보여 준다. 즉 두 예배 모두 예배라는 행동 속에서 능력을 구체화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동기로서 선행을 가지는 진리를 원리로 하여 이웃에 선을 행하는 것은 진실로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마태 25:40). 이것이 기름 먹은 곡식 가루를 한웅큼 집어내 유향 전부와 함께 제단에서 태우는 것이다. 이 속에 선한 행동, 선으로부터의 진리, 주님께 대한 사랑, 신성한 진리를 듣되 감사히 여기며 지각함, 신성한 사랑의 힘있는 영향력, 이 모두가 하나로 응집되어 있다. 그러나 법에 순종해야 한다는 단순한 행동 속에 있는 영적 인간은 그 행동 안에 포함되어 있는 위와 같은 모든 것들을 보지도 못하고 느끼지도 못한다. 그런고로 그는 자기가 행하는데 충만된 힘은 실감하지도 못한다. 다음 세 절은 이를 보여준다. 이 법칙은 선을 행함을 수단으로 선을 자기 것 삼게 한다는 것이다. 이 선은 자기 생명의 일부가 된다. 마치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가 자기 고유의 것이나 된 듯 여겨질 정도로 사유화되지 않으면 영적 생명을 가지지 못한다 (요한 6:53). 이제 두 단어 사유(자기 것이 되게 함, appropriation)와 인간 고유(자아, proprium) 사이에 연결이 있음을 주목해 보자. 그러면 다음 세 절에 있는 세부 지시 사항에 대한 근거를 알게 된다. 식사 제물은 누룩 없이, 거룩한 장소에서, 만남의 천막의 뜰 안에서 먹도록 지시하고 있다. 이는 선을 사유하기 위한 조건들이다. 늘 악과 거짓을 거절해야 하고, 진리를 사랑함으로 거룩해야 하고, 자연적 차원에서는 종교 생활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사유를 위한 준비 과정에서부터 주님이 주시는 선물이요 영혼을 살찌우는 선과 진리를 위해 악과 거짓을 멀리해야만 한다. 이러면 선이 작동되고 인간이 협동하는 곳, 그곳이 비록 저지른 악이나 부주의로 인한 잘못을 회개하는 때이라 하더라도 거기에는 거룩함의 상태가 존재된다. 이런 거룩함의 상태는 거듭나는 과정에서 선함의 수준이 어떠하든 진리 가운데 있는 모든 이에게 관련된다. 이 상태는 외적 인간과 결합하는 수단도 되는 고로 18절에서 규정(statue)이라는 표현이 사용되고 있다. 또한 영적 차원에서 내적 인간이 함께 하는 바 아론의 아들로 표현되고 있다. 인간이 선한 삶이라는 진정한 예배에서 주님을 인정할 때 있어지는 신성한 사랑의 결과가 위와 같다. 선과 진리는 주님으로부터이기 때문에 인간의 이기심과 다르다는 것은 그가 선과 진리의 거룩함을 의식하지 않고는 제아무리 작은 선과 진리도 의식 속에서 감화 받을 수 없다.
이제 넓은 주제 안에 있는 작은 주제가 등장하는데 19절에서부터 나타난다. 아론과 그의 아들들을 위한 특별한 식사 제물이 있다. 이는 거듭나는 과정에서 선 가운데 내향적으로 있는 모든 이를 위한 제물이고, 기름부어질 때란 선이 천국적 삶을 실감하는 진리와 마지막으로 결합할 때의 제물이기도 하다.
선과 진리를 자기 것 삼는 최고의 과정이 위와 같은데 이 단계가 식사 제물로 표현되는 영적 삶의 법을 마무리 짓는다. 이 경우에서 짚어보아야 할 것은 아껴둔 것(remains)들은 충만해 있다는 것, 다시 말해 선의 상태에서 온 진리의 아껴둔 것들인데, 이는 진리의 이해도가 밝든, 희미하든 두 상태 모두에서 (충만이) 계속된다는 것이다. 이에 관련하여 다음 절에서 관찰되는 바, 이 완전한 천적 상태는 적절한 준비 과정에 의해 달성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빵굽는 것, 빵굽는 방법으로 표현되고 있다. 이는 선 밑에 진리들을 질서있게 배열함으로 천적인 것을 준비해 가는 인간의 영적 체험인데 사실 이는 주님의 일로서 우리에게 비밀스러운 것이지만 마치 당사자가 진행하는 듯 보인다. 거듭남에서 각자는 자기가 자유로이 그 일을 해가기 때문에 자기가 일구어낸 듯 생각할는지 모른다. 그러나 주님 자신이 가장 많은 부분을 해주시고 있다. 사실 어떤 측면에서 볼 때 그분만이 일하신다고 해야 옳은 것이다 (이사야 44:24). 그러므로 성직자의 식사 제물에 관한 세 가지 중요한 법이 그 뒤를 잇고 있다. 즉 성직자만이 제물을 바칠 수 있고 바친 제물은 주님께 온전히 살라 바칠 것, 성직자가 바치는 모든 식사 제물은 온전히 사를 것, 아무도 그것을 먹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즉 외적인 선은 결합을 도모하기 위해 내적인 것을 섬겨야 한다는 것, 이 상태에서의 예배는 선을 주님께 모두 돌려야 한다는 것, 위 사항은 가장 낮은 천국 또는 가장 수준 낮은 예배에서도 그대로 이행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 이유는 어떤 천사, 어떤 사람도 선과 진리의 결합을 완전하게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오로지 그들은 선이 자기 것인 듯 사유할 뿐이다.
마지막으로 이 장은 죄 바침의 제물에 관련된 법을 서술함으로 마감짓고 있다. 죄 바침의 제물은 회개하는 동안 실지의 악들을 제거하는 예배이다. 먼저 이 예배는 가장 깊은 선으로부터 진행된다. 비록 이와 같은 선이 아주 깊은 차원인지라 아직 실감 안되고 있다 해도 어찌됐든 가장 깊은 데에서부터 진행되어진다. 그래서 죄 바침의 제물은 “최고로 거룩한 것”이라고 서술되고 있다. 둘째로 선은 예배의 위 같은 상태에서 자기 것이 되어진다. 자기 것이 된 상태 역시 거룩하다. 그리고 이 상태는 자연적 수준 안에 존재한다. 셋째로 “닿는 것”이란 모든 자연적 애착들이고, 이 애착에 속한 생각들이 옷으로 의미되는데, 이것 모두 거룩해지고 순수해진다. 넷째로 단지 도구로 사용된 자연적 애착은 주님으로부터 온 선이 순수해지는 동안 분리되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모든 진리는 선을 자기 것으로 삼는데, 이러는 가운데 선행에 속한 모든 선은 주님께 돌려야 하고 자기 고유에 속한 것이라고 해서는 안 된다. 이렇게 해서 온전한 재회가 주님과 인간 사이에 형성되고, 순수한 사랑으로 주님께 온전히 봉헌된다.
이상으로부터 우리는 어떻게 거듭나는 과정의 세부 사항들이 말씀에서 묘사되는 가를 살펴보았다. 이 거듭남에 대한 묘사가 이스라엘 교회와 유대 교회라는 처방 속의 다양한 제사를 수단으로 각기 다른 방법에서 묘사되어져 있다.
***********************************************************

레위기 7장

성경: 레위기 1장

1. 그리고 이것은 죄가 있음의 제물(guilt offering)의 법이다
2. 그들은 태워 바치는 제물을 죽이는 장소에서 죄가 있음의 제물을 죽여라. 그리고 그로부터의 피를 그는 제단 빙둘러 뿌려라.
3. 그리고 그는 그것으로부터의 모든 지방을 바쳐라. 즉 꼬리에 있는 지방, 그리고 내장들을 덮은 지방.
4. 그리고 두 콩팥들, 그리고 그것들에 있는 지방, 이것은 허리 근처이다, 그리고 간 위에 있는 대망을 콩팥과 더불어 가져 가라.
5. 그리고 성직자는 주님에게 불로 만든 제물을 위해 제단에서 그것들을 태워라. 이것이 죄가 있음의 제물 (바침)이다.
6. 성직자들 사이에 모든 남성은 그것으로부터의 (것을) 먹는다. 이것은 거룩한 장소에서 먹을 것이다. 이것은 최고로 거룩하다.
7. 죄의 제물 (바침) 같이 죄가 있음의 제물 (바침)도 그러하다. 그것들을 위한 법은 하나이다. 그것과 함께 보상을 받게 하는 성직자, 그가 그것을 가진다.
8. 어떤 사람의 태워 바치는 제물을 바친 성직자, 바로 그 성직자가 자기가 바친 태워 바치는 제물의 가죽을 자신의 것으로 한다.
9. 오븐(oven)에서 구워진 모두 각각의 식사제물, 그리고 튀기는 납작한 냄비에서 옷을 입힌 모든 것, 그리고 구워내는 납작한 냄비 위에서 (구운 모든 것)은 그것을 바치는 성직자의 것이다.
10. 그리고 기름과 섞이거나 마른 식사 제물 모두 각각은 아론의 아들들이 균등하게 가진다.
11. 그리고 이것은 누군가가 주님에게 바치는 평화 제물의 희생 제물의 법이다.
12. 만일 그가 감사함(thanksgiving)을 위해 그것을 바칠 경우, 그러면 기름을 섞은 누룩 없는 과자들, 그리고 기름을 바른 누룩 없는 웨이퍼들, 그리고 고운 곡식 가루에 기름을 섞은 과자들을 바쳐라.
13. 누룩 있는 빵을 가지고 그는 감사함을 위한 자기 평화 제물의 희생 제물과 더불어 자기 봉헌물을 바쳐라.
14. 그것으로부터 그는 들어 올리는 제물을 위해 각 봉헌물로부터 한 개를 바칠 것이다. 그것은 평화 제물의 피를 뿌리는 성직자의 몫이 된다.
15. 그리고 감사함을 위한 그의 평화 제물의 희생제물의 고기는 봉헌한 날에 먹어라. 그는 아침까지 그것의 어떤 것도 남겨두어서는 안된다.
16. 그러나 만일 그의 봉헌의 희생 제물이 서약, 또는 자유 의지의 바침이다면, 그것은 그의 희생 제물을 바친 그 날에 먹을 것이다. 그리고 내일 그것의 남은 것을 먹을 것이다
17. 그러나 셋째 날에 희생 제물의 고기의 남은 것은 불로 태울 것이다.
18. 그리고 만일 그의 평화 제물의 희생 제물의 고기의 어떤 것이 셋째 날에 먹게 된다면, 그것(제물)은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이고, 그것(제물)을 바친 자에게 귀속시켜지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역겨운 것이다. 그것을 먹은 혼은 자기 불법을 낳는다.
19. 그리고 불결한 어떤 것에 접촉한 고기는 먹지 말라. 그것은 불로 태워야 한다. 그리고 고기에 관하여, 깨끗한 모든 이는 그것으로부터 (것을) 먹어라.
20. 자기의 불결함을 가진 채 주님께 속한 평화 제물의 희생 제물의 고기를 먹는 혼은 그의 백성들로부터 잘리울 것이다.
21. 그리고 누군가가 어떤 불결한 것, 사람의 불결함, 또는 불결한 짐승, 또는 어떤 불결한 역겨운 것에 접촉되었을 때, 그리고 주님에 속한 평화 제물의 희생 제물의 고기를 먹을 때, 그 혼은 자기 백성으로부터 잘리울 것이다.
22. 그리고 주님께서 모세에게 이야기하셨다, 말하시기를,
23. 이스라엘의 자손들에게 이야기하라, 말하기를, 너는 소, 또는 양, 또는 염소로부터의 지방을 먹지 말라.
24. 스스로 죽은 것으로부터의 지방, 그리고 짐승에 찢겨진 것으로부터의 지방은 여느 다른 섬김에 사용되어질지 모른다. 그러나 너희는 그것을 절대로 먹지 말라.
25. 짐승의 지방, 사람들이 주님께 불로 만든 제물을 바친 것으로부터의 지방을 먹는 자는 누구든지, 정녕 그 혼은 자기 백성으로부터 잘리울 것이다.
26. 그리고 너희는 너희 거주지들의 어떤 곳에서도 가금류로부터 이든, 짐승으로부터 이든 어떤 종류의 피도 먹지 말라.
27. 어떤 피 이든 먹는 자는 누구든지, 그 혼은 그의 백성으로부터 잘리울 것이다.
28. 그리고 주님께서 모세에게 이야기 하셨다, 말하시기를,
29. 이스라엘의 자손들에게 이야기하라, 말하시기를, 주님께 자기 평화 제물의 희생 제물을 바치는 자는 그의 평화 제물의 희생 제물로부터 그의 봉헌물을 가져올 것이다.
30. 자기 자신의 손들이 불에 의해 주님께 (바치는) 제물을 가져와라. 가슴과 더불어 지방을 가져 와라, 가슴은 주님 앞에 흔들어 바치기 위해 흔들어라.
31. 그리고 성직자는 제단에서 지방을 태워라. 그러나 가슴은 아론과 그의 아들들의 것이다.
32. 그리고 오른쪽 넓적다리를 너희는 너의 평화 제물의 희생 제물로부터 들어올려 바침을 위해 성직자에게 주어라.
33. 아론의 아들들 중에서 평화 제물의 피, 그리고 지방을 바친 자는 그의 몫으로 오른쪽 넓적 다리를 가져라.
34. 나는 평화 제물의 희생 제물로부터의 흔들어진 가슴과 들어올린 넓적 다리를 이스라엘의 후손들로부터 가져갈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이스라엘의 자손으로부터 영원히 당연한 것으로서 성직자 아론과 그의 아들들에게 줄 것이다.
35. 이것은 불로 만든 주님의 제물로부터, 아론의 기름부워진 몫, 그리고 그의 아들들의 기름부워진 몫인데, 그분이 성직자의 직무에서 주님을 섬기도록 그들을 내놓은 날,
36. 즉, 주님께서 그들을 기름부웠던 날에, 그것들을 주도록 이스라엘의 자손들에게 명령하셨다. 이것은 그들 대대로 영원히 당연하다.
37. 이것은 태워 바침의 법, 식사 바침의 법, 죄를 바침의 법, 죄가 있음을 바침의 법, 신성하게 함(consecration)의 법, 그리고 평화 제물의 희생 제물의 법이다
38. 이것을 주님께서는 시내산에서 모세에게 명령하셨는데, 이 날에 그분은 시내의 광야에서 주님에게 그들의 봉헌들을 바치라고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령하셨다.

영적 의미 요약

* 신앙 속의 진리로 주님을 예배하는데 따른 신성한 질서의 법칙. 1-7절
* 인간이 선을 마치 자기 것인 냥 삼을 수 있는 일반 법칙 8-10절.
* 자유로이 주님을 예배하는데 따른 법칙. 11-21절
* 인간이 선과 진리를 자신의 것으로 삼을 수 없는 일반 법칙. 22-27절
* 영적 선과 천적 선이 주님으로부터라고 인정되고, 주님에 의해 생명이 주어질 때, 주님에게서 온 능력들을 실습함으로 이 두 선은 자기 것이 된다. 28-36절.
* 예배에 관한 신성한 질서의 일반 요약. 37-38절.

각 절의 영적 의미

1절. 그리고 이것은 죄가 있음의 제물(guilt offering)의 법이다

영적 의미

신앙의 진리로 주님을 예배함에 관한 신성한 질서의 법칙, 동시에 외면의 악들로부터 해방됨에 관한 것은 다음과 같다: 위와 같은 예배, 해방은 선의 측면에서의 가장 깊은 상태로부터 파생된다.

세부적 영적 의미

죄가 있음의 제물이란 신앙의 진리로 예배함을, 더불어 외면의 악들에서 해방됨을; 더 없이 거룩한 제물이란 위와 같은 예배와 해방은 선에 관한 측면의 가장 깊은 상태에서 기인되었음을 의미한다. A.C. 9156, 3400, 10129.

2절. 그들은 태워 바치는 제물을 죽이는 장소에서 죄가 있음의 제물을 죽여라. 그리고 그로부터의 피를 그는 제단 빙둘러 뿌려라.

영적 의미

위와 같은 예배나 해방을 위한 준비는 순수한 사랑에서 주님을 예배함과 비슷하거나 같은 것에 기초를 둔다: 그리고 이 예배와 해방을 수단으로 진리와 선의 결합이 모든 형식과 수준에서 결과되어진다.

세부적 영적 의미

바쳐진 동물을 죽임이란 위와 같은 예배를 준비함을; 그 동물을 태워 바침의 제물을 죽이는 자리에서란 위와 같은 예배는 순수한 사랑에서 주님을 예배함과 비슷하여 그것에 기초를 두고 있다는 것을; 제단을 빙둘러 피를 뿌린다는 것은 이런 예배와 해방됨으로 해서 진리가 선과 결합함이 모든 형식과 등차에서 결과된다는 것을 뜻한다. A.C. 10024, 10053, 2623, 10047.

3절. 그리고 그는 그것으로부터의 모든 지방을 바쳐라. 즉 꼬리에 있는 지방, 그리고 내장들을 덮은 지방.

영적 의미

위의 결합에서 비롯되는 모든 선은 모두 주님의 것으로 돌려야 하는데, 이에는 모든 외면의 것, 자연적 선까지 포함해서이다.

세부적 영적 의미

지방을 모두 바친다는 것은 위와 같은 예배 속의 모든 선은 주님께 돌려야 한다는 것을; 꼬리의 지방은 외면에 속한 자연적 선을; 내장을 덮은 지방은 외적 측면에 있는 자연적 선을 나타내고 있다. A.C. 10033, 10071, 10029, 10030, 9632.

4절. 그리고 두 콩팥들, 그리고 그것들에 있는 지방, 이것은 허리 근처이다, 그리고 간 위에 있는 대망을 콩팥과 더불어 가져 가라.

영적 의미

또한 진리의 순수함 또는 식별, 그리고 천국적 결혼으로 이끌어 주는 선, 진리의 식별을 증진케 해주는 내면의 자연적 선과 더불어 이상의 모든 것은 이기적인 선으로부터 분리되어야 할 것이다.

세부적 영적 의미

두 콩팥과 거기에 붙어 있는 지방이란 진리를 깨끗하게 함과 식별함을, 그로 인해 선까지 깨끗하게 하고 식별되게 함을; 허리란 진리와 선의 결합을; 간과 콩팥에 붙은 지방이란 진리의 식별을 증진시키는 내면 속에 있는 자연적 선을; 지방을 떼어냄이란 이기적인 선으로부터 분리함, 멀리함, 그 결과 주님을 섬기도록 성별되게 하는 것을 뜻한다. A.C. 10032, 10074, 3915, 10031.

5절. 그리고 성직자는 주님에게 불로 만든 제물을 위해 제단에서 그것들을 태워라. 이것이 죄가 있음의 제물 (바침)이다.

영적 의미

그리고 위의 모든 것은 주님의 덕분으로 돌려야 하고, 그리고 순수한 사랑으로 예배하는 가운데 그분께 바쳐야 한다. 이것이 외면에 있는 악에서 해방되는 예배이다.

세부적 영적 의미

성직자가 그것들을 받아 제단에서 여호와께 태우는 제물로 바친다는 것은 선에 속한 모든 다양한 것들은 주님께 돌려야 하고 순수한 사랑으로 예배함으로 그분께 바쳐져야 한다는 것을, 이것이 죄가 있음의 제물이다 함은 이것이 외면에 있는 악으로부터 해방되게 하는 예배이다는 것을 명시한다. A.C. 10052, 10055, 3400, 10042.

6절. 성직자들 사이에 모든 남성은 그것으로부터의 (것을) 먹는다. 이것은 거룩한 장소에서 먹을 것이다. 이것은 최고로 거룩하다.

영적 의미

그리고 선행의 선에서 비롯되는 신앙 속의 진리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위 예배 가운데서 선을 자기 것으로 삼게 될 것이다. 이것은 거룩한 상태에서 자기 것으로 삼는 것이고, 가장 깊은 선이 바깥쪽에서 표현된 것이다.

세부적 영적 의미

그것을 먹을 수 있는 성직자가 된 모든 남자란 선행의 선에서 생겨나는 신앙의 진리 안에 있는 이들은 이 예배 속에 있게 되는 선을 자기 것으로 삼을 수 있다는 것을; 거룩한 장소란 거룩한 상태를; 더 없이 거룩함이란 가장 깊은 선이 바깥쪽에서 표현됨을 나타내고 있다. A.C. 725, 9946, 2187, 2625, 10129.

7절. 죄의 제물 (바침) 같이 죄가 있음의 제물 (바침)도 그러하다. 그것들을 위한 법은 하나이다. 그것과 함께 보상을 받게 하는 성직자, 그가 그것을 가진다.

영적 의미

그리고 이 예배는 신앙의 선으로 주님께 예배함으로 하나되고, 그로부터 인간은 내면의 악으로부터 해방된다; 넓은 측면에서의 악에서 해방됨과 똑같다; 그리고 악으로부터 해방되고 주님과 재회함으로 선 가운데 있게 되는 사람들은 위 예배 속에 있는 선을 자기 것으로 삼게 될 것이다.

세부적 영적 의미

죄 바침의 제물과 죄가 있음의 제물의 규정이 같다는 것은 이 예배는 신앙의 선으로부터 주님을 예배하는 것은 한 가지이고, 그로 인해 내면의 악에서 인간이 해방되는 것도 마찬가지임을 명시한다. 위 두 제물에 한 가지 법이 있다는 것은 넓은 측면에서 해방됨은 똑같은 규정임을 말한다. 그리고 보상을 받게 하는 성직자란 선 가운데 있는 이들은 악에서 해방됨과 주님과의 재회를 수단으로 이 예배 속의 선을 자기 것으로 삼게 될 것임을 명시하고 있다. A.C. 9156, 10042, 9946, 10042, 2187.

8절. 어떤 사람의 태워 바치는 제물을 바친 성직자, 바로 그 성직자가 자기가 바친 태워 바치는 제물의 가죽을 자신의 것으로 한다.

영적 의미

주님에게 전적으로 바친 사람으로부터 온 선은 예배자에 의해 자기 것으로 삼게 되되, 오로지 외적인 것만, 또는 마치 자기가 선의 주인인 듯 여기는 한도에서 자기 것으로 된다.

세부적 영적 의미

성직자란 예배함으로부터 오는 선을 명시하고, 태워 바침의 제물은 주님께 온전히 바침을, 가죽이란 외적인 것을, 성직자가 가죽을 차지함이란 외적 측면에 한해서만 자기 것으로 삼는 것, 또는 마치 자기 것인 듯 여기는 것을 말한다. A.C. 9946, 8680, 3540, 2187.

9절. 오븐(oven)에서 구워진 모두 각각의 식사 제물, 그리고 튀기는 납작한 냄비에서 옷을 입힌 모든 것, 그리고 구워내는 납작한 냄비 위에서 (구운 모든 것)은 그것을 바치는 성직자의 것이다.

영적 의미

이런 자기 것을 삼는 범위는 진리가 선과 결합하는 장소인 자연적 인간에 있는 세 등차의 모든 상태에서이다.

세부적 영적 의미

태워 바침의 제물이 천적 예배의 상태를 의미하고 식사 제물이 영적 예배의 상태를 의미하는 바, 이 구절에서의 식사 제물은 위 두 상태 중 중간 상태를 명시한다. 오븐, 튀기는 납작한 냄비, 굽는 납작한 냄비란 자연에 있는 선의 다양함 또는 외적 인간에 있는 선의 다양함을; 구워냄이란 준비됨이 자연적 인간 안에서 진리가 선과 결합함으로 거기서 거행됨을; 고운 곡식 가루는 진리를; 뜨거움은 선을 명시하고 있다. A.C. 2177, 7356, 8496, 2177, 934.

10절. 그리고 기름과 섞이거나 마른 식사 제물 모두 각각은 아론의 아들들이 균등하게 가진다.

영적 의미

그리고 예배 속의 모든 신실한 행동은 그것이 애착으로부터 의식해서 이든, 애착 없이 가상적인 신앙의 진리로부터 이든, 인간에게 소속되는 것은 외적으로만 또는 마치 자기 것인 냥 여기는 것뿐이다.

세부적 영적 의미

식사 제물은 천적, 영적으로 있는 예배의 신실한 행동을, 기름에 반죽함은 의식적으로 선 또는 애착으로부터 임을, 반죽하지 않은 것(마른 것)은 애착 없는 외견상인 것을, 아론의 모든 아들이란 외적에서만 자기 것이 됨을 말하는데, 그 이유는 서로의 관계 측면에서 볼 때 아들은 외적 측면에 있는 진리를, 대 성직자로서의 아론은 내적 측면에 있는 선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A.C. 4581, 2177, 8185, 9946.

11절. 그리고 이것은 누군가가 주님에게 바치는 평화 제물의 희생 제물의 법이다.

영적 의미

모든 개개인의 경우에서 자유로부터 주님을 예배하는데 관련된 신성한 질서의 법칙이 있다.

세부적 영적 의미

평화 제물에 관한 규정이란 각 개인의 경우에서 자유로이 주님을 예배함에 관련된 신성한 질서의 법을 말한다. A.C. 3880, 10097, 10137.

12절. 만일 그가 감사함(thanksgiving)을 위해 그것을 바칠 경우, 그러면 기름을 섞은 누룩 없는 과자들, 그리고 기름을 바른 누룩 없는 웨이퍼들, 그리고 고운 곡식 가루에 기름을 섞은 과자들을 바쳐라.

영적 의미

예배에 감사의 표시가 있다 하면, 그 예배는 거짓에 오염 안 된 천적 선과 결합된 진리로부터 있어야 할 것이고, 세 등차에서도 위의 진리는 선에서 비롯되어야 하며 선으로 인도해야 할 것이다.

세부적 영적 의미

이 구절에서 누룩 없이 기름으로 반죽하여 만든 과자, 누룩 없이 기름만 발라 만든 웨이퍼(wafer, 속빈 과자), 고운 곡식 가루를 기름에 개어 과자 모양으로 만든 것이란 각 세 등차에서 진리가 선과 결합한 것, 거짓에 오염 안된 것, 위와 같은 진리는 선에서 기인되고, 선으로 인도함을 명시하고 있다. A.C. 3880, 7906, 9993, 9994, 9995.

13절. 누룩 있는 빵을 가지고 그는 감사함을 위한 자기 평화 제물의 희생 제물과 더불어 자기 봉헌물을 바쳐라.

영적 의미

그리고 감사함으로부터 주님을 자유롭게 예배하는 사람은 천적 사랑에 예배의 바탕이 있어야 하고, 더불어 자신 속에는 악뿐임을 겸손히 인정하며 시험을 통하여 주님에 의해 순수해졌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세부적 영적 의미

감사함을 위한 평화 제물과 더불어 바치는 누룩 넣은 과자란 은택을 느껴서 자유로이 주님을 예배하는 사람은 자신 속에 든 것은 악뿐이다는 것, 시험들을 통해 주님에 의해 이 악들이 깨끗해졌음을 인정하는 바, 천적 사랑에 예배의 바탕을 둔다. A.C. 7906.

14절. 그것으로부터 그는 들어 올리는 제물을 위해 각 봉헌물로부터 한 개를 바칠 것이다. 그것은 평화 제물의 피를 뿌리는 성직자의 몫이 된다.

영적 의미

그러므로 이 천적 상태는 주님으로부터 받은 것이라고 고백되어야 하며, 그 결과가 자기 것으로 삼은 순수한 천적 상태이고, 그는 위와 같은 예배에서 진리를 선에 결합해야 한다.

세부적 영적 의미

들어 올려 바치기 위한 제물 중 하나란 주님만으로부터 선을 받았다는 것을; 그것이 성직자의 것이라 함은 순수한 천적 선은 위와 같은 예배에서 진리를 선에 결합하는 사람에 의해 자기 것이 된다는 것을 명시한다. A.C. 10097, 9946, 10047.

15절. 그리고 감사함을 위한 그의 평화 제물의 희생 제물의 고기는 봉헌한 날에 먹어라. 그는 아침까지 그것의 어떤 것도 남겨두어서는 안 된다.

영적 의미

받은 축복의 고마움으로 있게 되는 예배 속에 있는 세부적인 선은 천적 사랑의 상태에서만 자기 것으로 삼아진다. 그리고 이와 같은 선은 만일 이기적인 사랑으로 한 쪽이라도 오염되어 있거나, 거듭남의 새로운 상태에서 분리되어 있다면 자기 것으로 삼지 못한다.

세부적 영적 의미

바치는 그 날 고기를 먹는다 함은 은택에서 비롯된 예배 속의 특별한 선은 준비의 상태에서만 자기 것이 된다는 것을, 아침까지 남겨두지 말라는 것은 만일 이기적 사랑에 한편으로는 오염되었거나 또는 거듭남의 새로운 상태에서 분리된다면 절대로 자기 것으로 삼을 수 없다는 말이다. A.C. 2187, 487, 10114-17, 7860, 8480-3.

16절. 그러나 만일 그의 봉헌의 희생 제물이 서약, 또는 자유 의지의 바침이다면, 그것은 그의 희생 제물을 바친 그 날에 먹을 것이다. 그리고 내일 그것의 남은 것을 먹을 것이다

영적 의미

그러나 주님이 설비해줄는지 모른다는 바램에서, 또는 자연적 사랑으로부터 영적 사랑 또는 선행에서 기인되는 자유로운 예배에서 선은 각 경우 즉 특별한 상태뿐만 아니라 아껴두신 것들을 통해 항구적으로 자기 것으로 삼아질 것이다.

세부적 영적 의미

서약이란 영적 사랑으로부터의 예배와 주님이 설비하시도록 하는 자발적인 행위를 의미하는 바, 마음에 우러나서 드린 제물은 자유로운 가운데서의 예배를, 먹는다는 것은 자기 것으로 되는 것을, 날이란 상태를, 다음 날이란 이후 항구적으로 있게 됨을 명시하고 있다. A.C. 3880, 10097, 2187, 487, 3998, 8788.

17절. 그러나 셋째 날에 희생 제물의 고기의 남은 것은 불로 태울 것이다.

영적 의미

그럼에도 심판이 진행됨, 선의 상태가 완성되었을 때 이기적 선에 속한 모든 것은 마지막 시험들에서 승리를 통해 사라져 버릴 것이다.

세부적 영적 의미

사흘째 되는 날까지 남은 고기를 불에 태운다는 것은 심판의 과정에서 선의 상태가 완성될 때 단지 이기적일 뿐인 선은 사라지게 될 것이라는 말이다. A.C. 8480-3, 10115, 900.

18절. 그리고 만일 그의 평화 제물의 희생 제물의 고기의 어떤 것이 셋째 날에 먹게 된다면, 그것(제물)은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이고, 그것(제물)을 바친 자에게 귀속시켜지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역겨운 것이다. 그것을 먹은 혼은 자기 불법을 낳는다.

영적 의미

그러나 만일 위의 과정 중에서 이기적인 선을 자기 것으로 만들면 그 선은 주님과 결합하지 못하며, 천국적 선으로 돌리지도 못한다. 그 이유는 그것은 천적 선에 정반대 되기 때문인 바, 이기적 선 안에 있는 사람은 그의 악이 거짓과 결합된 채 남아 있게 된다.

세부적 영적 의미

제물의 고기는 천적 선을 말하나 이 절에서는 반대 의미로 사용되는 바, 이기적 선을 말하는데 그 이유는 선이 남용되었음을 명시하기 때문이다. 여호와께 못마땅하게 보여짐이란 주님과 절대로 결합되지 못함을, 귀속됨도 없게 된다는 것은 이기적 선은 천국적 선으로 그에게 귀속될 수 없다는 것, 오히려 불결하게 있는 사람은 거짓과 결합되는 악 속에 남아야만 한다는 말이다. A.C. 10114, 9713, 1813, 6052, 7454, 9937.

19절. 그리고 불결한 어떤 것에 접촉한 고기는 먹지 말라. 그것은 불로 태워야 한다. 그리고 고기에 관하여, 깨끗한 모든 이는 그것으로부터 (것을) 먹어라.

영적 의미

악에 오염된 선은 어떤 선이든지 자기 것으로 삼지 않는 게 합법적이다. 이런 선은 시험에 의해 순수해지게 하거나 또는 천국 사랑에 의해 극복되어야 한다. 그러나 선은 악에서 순수해진 모든 사람에 의해 자기 것으로 삼을 수 있다.

세부적 영적 의미

이 구절에서의 고기는 선을 명시했다. 접촉한다는 것은 영적으로 접촉됨을; 불결한 것이란 악한 애착을; 먹지 못함이란 시험에 의해 깨끗하게 됨, 또는 천국적 사랑의 힘으로 극복함을; 깨끗하게 된 사람이 먹는다 함은 선은 악에서 깨끗해진 사람에 의해 그의 것이 된다는 말이다. A.C. 10114, 4404, 10130, 7816, 934, 2187, 10130.

20절. 자기의 불결함을 가진 채 주님께 속한 평화 제물의 희생 제물의 고기를 먹는 혼은 그의 백성들로부터 잘리울 것이다.

영적 의미

외적 자유로부터 주님을 예배하는 가운데 선을 자기 것으로 삼으면서도 내적으로 자신을 순수하게 하는 회개의 일을 하지 않을 때 그는 진리와 선으로부터 통째로 분리되어 진다.

세부적 영적 의미

불결한 몸으로 여호와께 바친 평화 제물의 고기를 먹는 사람은 그 백성으로부터 추방시킨다 함은 외적 자유에서 주님을 예배하는 가운데 선을 자기 것으로 삼으면서도 내적으로 자신을 깨끗하게 하는 회개의 일을 행하지 않는 사람은 진리와 선에서 전적으로 분리될 것임을 명시하고 있다. A.C. 2187, 3880, 10097, 10130, 5302, 3294-5.

21절. 그리고 누군가가 어떤 불결한 것, 사람의 불결함, 또는 불결한 짐승, 또는 어떤 불결한 역겨운 것에 접촉되었을 때, 그리고 주님에 속한 평화 제물의 희생 제물의 고기를 먹을 때, 그 혼은 자기 백성으로부터 잘리울 것이다.

영적 의미

악에 접촉함으로 오염되도록 자신을 허용한 사람, 그 허용이 내적으로 이든, 외적으로 이든 모두 해당된다. 그리고 외적 예배만으로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을 자기 것으로 삼은 체하는 사람은 선과 진리로부터 분리되어진다.

세부적 영적 의미

불결한 것과 접촉한다는 것은 악과 접촉한다는 것을, 사람, 짐승, 더러운 것이란 서로간의 관계측면에서 볼 때 내적으로, 내면에서, 외적으로라는 말이다. 여호와께 바친 평화 제물 고기를 먹는다는 것은 외적으로 선을 자기 것 삼았다고 추정하는 것을; 백성으로부터 추방함이란 진리와 선에서 분리됨을 말한다. A.C. 10139, 10130, 7523, 6052, 2187, 5302, 3294-5.

22절. 그리고 주님께서 모세에게 이야기하셨다, 말하시기를,

영적 의미

지각을 주는 신성한 진리를 수단으로 하여 주님으로부터의 계시가 있다.

세부적 영적 의미

여호와는 사랑 측면에서의 신성한 존재를; 이야기하심은 유입(influx)을; 모세는 신성한 진리 또는 말씀을; 그리고 말함은 지각을 명시했다. A.C. 2951, 7010, 6752, 1791, 1822.

23절. 이스라엘의 자손들에게 이야기하라, 말하기를, 너는 소, 또는 양, 또는 염소로부터의 지방을 먹지 말라.

영적 의미

영적 교회에 소속된 사람에 대한 가르침, 그는 자연적 상태 이든 영적 상태에서 이든, 선으로 인도하는 진리의 상태에 있다 해도 자신으로부터서는 천적 선을 자기 것으로 삼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지각한다.

세부적 영적 의미

이스라엘 백성에게 일러라란 지각하는 영적 교회 속의 사람에 대한 가르침을, 먹는다는 것은 자기 것으로 삼는다는 것을, 지방이란 천적 선을, 소, 양, 염소란 서로의 관계적 측면에서 볼 때 자연적 선과 영적 선, 그리고 선으로 인도하는 진리의 상태를 말한다. A.C. 7063, 3654, 1791, 2187, 10033, 5913, 6126, 4169.

24절. 스스로 죽은 것으로부터의 지방, 그리고 짐승에 찢겨진 것으로부터의 지방은 여느 다른 섬김에 사용되어질지 모른다. 그러나 너희는 그것을 절대로 먹지 말라.

영적 의미

더불어 영적 생명이 없는 애착들, 탐욕으로 상해받는 애착들은 수단으로서는 사용이 가능하나, 그렇다고 영적 인간에 의해 자기 것으로 삼아질 수는 없다.

세부적 영적 의미

죽은 짐승의 지방이란 영적 생명이 없는 애착을; 찢긴 짐승의 지방이란 탐욕으로 인한 상처를; 다른 일에 사용한다는 것은 위의 애착들은 수단으로서는 사용될 수 있다는 것을; 먹지 못함이란 자기 것으로 삼을 수 없음을 말한다. A.C. 4171, 2541, 5148, 2187.

25절. 짐승의 지방, 사람들이 주님께 불로 만든 제물을 바친 것으로부터의 지방을 먹는 자는 누구든지, 정녕 그 혼은 자기 백성으로부터 잘리울 것이다.

영적 의미

그리고 만일 어떤 사람이 예배에서 주님께로부터 온 선을 자기 것으로 삼되 그것이 절대로 자기 것이라고 주장한다면 그는 그것으로 인해 교회로부터 분리되어 진다.

세부적 영적 의미

여호와께 태워 바치는 가축의 지방을 먹는 사람(soul)은 백성으로부터 추방시켜야 한다는 것은 만일 누군가가 주님이 자기 것 삼으라고 한 선을 가지고 원래 자기 것이라고 우겨대려 한다면 그는 교회에서 분리되어 진다는 말이다. A.C. 2187, 10055, 3294-5.

26절. 그리고 너희는 너희 거주지들의 어떤 곳에서도 가금류로부터 이든, 짐승으로부터 이든 어떤 종류의 피도 먹지 말라.

영적 의미

더욱이 영적 인간이 지적 측면 또는 의지 측면에서이든지 간에 자기가 주님에게서 받는 선이 절대적인 자기 소유라고 주장하는 것은 불법적이다.

세부적 영적 의미

어디에서 살든지 모든 새와 짐승의 피를 먹지 말라는 것은 주님께로부터 선은 지적 측면에서 이든 의지측면에서 이든 본래 자기 것이라고 영적 인간이 주장하는 것은 불법이라는 말이다. A.C. 2187, 10033, 40, 46.

27절. 어떤 피 이든 먹는 자는 누구든지, 그 혼은 그의 백성으로부터 잘리울 것이다.

영적 의미

외적 예배에서 위의 사항을 위선적으로 행한다면, 누구든지 간에 그는 그것 때문에 교회로부터 분리되어진다.

세부적 영적 의미

어떤 피든지 그것을 먹는 사람(soul)은 겨레로부터 추방하라는 것은 외적 예배에서 위선적으로 선을 자기 것 삼는 사람은 그것 때문에 교회로부터 분리되어야 한다. A.C. 10033, 2187, 5302, 3294-5.

28절. 그리고 주님께서 모세에게 이야기 하셨다, 말하시기를,

영적 의미

지각을 주는 신성한 진리로 주님이 이렇게 밝히신다.

세부적 영적 의미

여호와란 사랑측면에서의 신성한 존재를; 말하심이란 유입을; 모세는 신성한 진리 또는 말씀을; 말함은 지각을 명시하고 있다. A.C. 2001, 2951, 7010, 6752, 1791, 1822.

29절. 이스라엘의 자손들에게 이야기하라, 말하시기를, 주님께 자기 평화 제물의 희생 제물을 바치는 자는 그의 평화 제물의 희생 제물로부터 그의 봉헌물을 가져올 것이다.

영적 의미

영적 교회의 사람에 대한 가르침이다. 자유로부터 주님을 예배하는 상태에서 그는 내향적으로 순수한 선 안에 있어야 하고 그 선으로부터 행하되 마치 자신이 그렇게 하는 듯 행해야 할 것이다.

세부적 영적 의미

이스라엘 백성에게 일러라는 것은 지각을 주시는 영적 (왕국의) 교회 속의 사람에 대한 가르침이다는 것을; 평화 제물이란 자유로이 주님을 예배함을; 주님께 봉헌을 가져옴이란 당사자가 내향적으로 순수한 선 가운데 있음을; 그의 평화 제물로부터의 희생 제물이란 이 선으로부터 행동하되 마치 자신의 선인 듯 행동하는 것을 말한다. A.C. 7063, 3634, 1791, 10097, 2001.

30절. 자기 자신의 손들이 불에 의해 주님께 (바치는) 제물을 가져와라. 가슴과 더불어 지방을 가져 와라, 가슴은 주님 앞에 흔들어 바치기 위해 흔들어라.

영적 의미

자신의 의지와 이해함을 훈련시킴으로 그는 자신을 순수한 사랑으로부터 내향적으로 바칠 것이다. 그리고 영적 선 안의 천적 사랑으로 그는 예배해서 영적 선이 생명이 있게 해서 완전해지게 된다.

세부적 영적 의미

자기 손으로 불로 만드는 주님께 대한 제물을 가져옴은 자신의 의지와 이해함을 훈련함으로 그는 순수한 사랑으로부터 주님께 자신을 내향적으로 바치게 될 것임을; 가슴과 더불어 지방이란 그가 천적인 것으로부터 영적 선 안에서 예배할 것임을; 흔듦은 주님으로부터 생명을 얻는 것을 말한다. A.C. 10062, 10055, 10033, 10087, 10083, 10093.

31절. 그리고 성직자는 제단에서 지방을 태워라. 그러나 가슴은 아론과 그의 아들들의 것이다.

영적 의미

그리고 천적 선을 수단으로 그는 예배에서 즉각 주님과 결합되고, 의식되는 삶의 천적 등차에 있는 영적 선을 수단으로 그는 선행의 거룩한 원리를 깨닫는다.

세부적 영적 의미

성직자가 제단에서 지방을 사른다함은 예배에서 천적 선에 의해 주님과 결합함을; 갈비는 아론과 그의 후손의 몫이라 함은 선행으로 주님과 결합함을 명시한다. A.C. 10033, 10052, 10087.

32절. 그리고 오른쪽 넓적다리를 너희는 너의 평화 제물의 희생 제물로부터 들어올려 바침을 위해 성직자에게 주어라.

영적 의미

천적 결혼에서 결합된 가장 깊은 천적 선과 진리는 자유로운 상태로부터의 예배에서 주님께 모두 돌려 드려야 하고 그렇게 되면 선을 받을 수 있고 그 선이 활성적이 되어 외적으로 선용될 것이다.

세부적 영적 의미

오른쪽 넙적다리는 평화 제물의 희생 제물로부터 들어올린 성직자에게 주라는 것은 천적 결혼에서 결합을 이루는 가장 깊은 천적 선과 진리는 반드시 자유로운 상태의 예배에서 주님께 모두 돌려야 한다는 것, 받게 되는 선이 사용될 때는 외적으로 활성적이어야 한다는 말이다. A.C. 10092-3, 10097.

33. 아론의 아들들 중에서 평화 제물의 피, 그리고 지방을 바친 자는 그의 몫으로 오른쪽 넓적 다리를 가져라.

영적 의미

선으로부터 오는 가장 깊은 천적 진리, 이를 수단으로 진리가 선과, 선이 진리와 결합함이 예배 안에서 결과되고, 이는 외적으로 불완전한 점이 없지 않으나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을 생활로서 즉각 자기 것으로 만든다.

세부적 영적 의미

평화 제물의 피와 지방을 바친 아론의 후손이 오른쪽 넓적다리를 가지라는 것은 상대적으로 불완전한 외적 예배에서 진리와 선, 선과 진리의 결합함이 결과된 선으로부터의 가장 깊은 천적 진리는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의 생명을 즉각 자기 것 삼는다는 것이다. A.C. 9946, 10047, 10033, 10092-3, 2187.

34절. 나는 평화 제물의 희생 제물로부터의 흔들어진 가슴과 들어올린 넓적 다리를 이스라엘의 후손들로부터 가져갈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이스라엘의 자손으로부터 영원히 당연한 것으로서 성직자 아론과 그의 아들들에게 줄 것이다.

영적 의미

모든 활동의 근원인 영적 선과 천적 선은 악에서 해방되었기에 향유하는 기쁨과 자유로움에서 있는 예배에서 영적 인간에 의해 주님께 모두 돌려야 한다. 그럼에도 이 선은 영적 인간과 천적 인간에 의해 자기 것으로 삼아지는데 마치 영원히 자기 것인 냥 되고 이는 타고난 본능적 능력을 훈련함에서 기인된다.

세부적 영적 의미

흔들어 바친 가슴과 들어 올려 바친 넓적다리는 영적 선과 천적 선을; 이스라엘 후손에게 평화 제물을 받음이란 위의 두 선이 활성화되는 근원이 주님으로부터 이다는 것을; 그 중에서 (평화 제물의 제물 중에서)란 예배가 자유로부터 있을 때를; 아론과 그의 후손에게 준다는 것은 위의 두 선을 신성한 선과 진리이신 주님께 돌려야 함을;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길이 길이 지켜야할 규정이란 위의 두 선은 천적, 영적 인간에 의해 자기 것이 되되, 마치 영원히 자기 것인 듯, 자기의 본래 능력을 실시함에서 기인된 듯 삼을 것이라는 말이다. A.C. 10087, 10092-3, 10097, 10277, 9946, 10093, 9946, 7884, 7931, 1712.

35절. 이것은 불로 만든 주님의 제물로부터, 아론의 기름부워진 몫, 그리고 그의 아들들의 기름부워진 몫인데, 그분이 성직자의 직무에서 주님을 섬기도록 그들을 내놓은 날,

영적 의미

신성한 생명과의 결합은 가장 깊은 수준인 천적 등차에서, 그리고 의지와 이해함에 결과되어지는데 결과되는 때란 사랑으로부터의 예배가 비록 불완전하다해도 신실하게 할 때, 그리고 그분에 대한 순수한 예배에서 모든 생명이 주님으로부터임을 아주 깊게 인정할 때이다.

세부적 영적 의미

기름 부어진 몫이란 신성한 생명과 결합을 주는 것을; 아론과 그의 후손들이란 신성한 선과 신성한 진리를; 그런고로 의지와 이해함 측면에서는 가장 깊은 천적 등차를; 여호와께 살라 바침이란 사랑으로부터가 비록 불완전하지만 신실하게 주님을 예배함을; 아론과 그의 후손들이 여호와의 성직자로 임명되는 날이란 모든 생명은 그분을 순수하게 예배하는 가운데 그분으로부터 있게 됨을 인간이 내향적으로 인정할 때를 말한다. A.C. 9954, 9946, 10055, 10097.

36절. 즉, 주님께서 그들을 기름부웠던 날에, 그것들을 주도록 이스라엘의 자손들에게 명령하셨다. 이것은 그들 대대로 영원히 당연하다.

영적 의미

그리고 주님의 유입을 수단으로 하는 영적 교회 속의 모든 사람들은 가장 깊은 생명이 그분으로부터 존재함을 그분과 결합함을 수단으로 예배에서 인정함이 가능하다.

세부적 영적 의미

그들을 기름 부어 세우신 날 이것을 그들에게 주라고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령하심이란 영적 교회의 모든 사람은 주님으로부터의 유입을 수단으로 하고 가장 깊은 생명이 그분과 결합하는 예배가 그분으로부터임을 인정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을; 대대로 지켜야 할 규정이란 영적 인간은 천국에서 거듭나는 삶의 모든 상태에서 항구적으로 주님을 인정해야 함을 말한다. A.C. 5486, 10227, 3654, 10097, 7884, 7931, 9845, 1712.

37절. 이것은 태워 바침의 법, 식사 바침의 법, 죄를 바침의 법, 죄가 있음을 바침의 법, 신성하게 함(consecration)의 법, 그리고 평화 제물의 희생 제물의 법이다

영적 의미

위 사항들은 주님을 인정하고 그분을 예배하는데 관련된 신성한 질서의 법칙들인데, 이는 천적, 영적 선을 받는 모든 등차에서, 악으로부터 해방되되 외, 내적 측면 모두에서, 주님과의 결합에 관한 것에서, 비록 불완전하지만 자유로부터 주님을 예배하는 모든 수준에 적용된다.

세부적 영적 의미

태워 바침의 제물과 식사 제물과 죄 바침의 제물과 죄가 있음의 제물과 신성하게 함과 평화 제물에 관한 법들이라 함은 신성한 질서의 법칙인 것, 즉 주님을 인정함에 관련하여, 천적 선과 영적 선을 받는 모든 등차에서의 그분의 예배, 즉 내적, 외적으로 악에서 해방되는 측면과 주님과 결합하는 측면 그리고 불완전한 상태지만 자유로부터 주님을 예배하는 측면에 관련된 것들을 말한다. 위의 내용은 지금까지 살펴온 여러 구절의 설명을 참조하면 이해될 것이다.

38절. 이것을 주님께서는 시내산에서 모세에게 명령하셨는데, 이 날에 그분은 시내의 광야에서 주님에게 그들의 봉헌들을 바치라고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령하셨다.

영적 의미

그래서 참으로 위의 사항들은 선의 원리로부터 신성한 진리에 있는 가르침의 상태에서 시작되는데, 이 때 신성한 생명은 가르침의 아주 희미한 상태에 있는 최 말단까지 흘러 내려간다.

세부적 영적 의미

주님이 시내산에서 모세에게 명령하심이란 선의 원리로부터 신성한 진리로 가르침이 시작되는 것을, 주님이 모세에게 명령함이란 최말단까지에 주님의 유입이 있다는 것을, 시내 광야에서 여호와께 제물을 바칠 것이라 함은 가르침의 상태가 희미해 있으면서 주님을 예배하는 것을 말한다. A.C. 7010, 6752, 8753, 5486, 349, 922, 8753.

7장의 종합적 고찰

위와 같이 본 장의 각 절에 대한 증거들을 완성하면서 우리는 앞에 계속 전개되는 예배에 관한 신성한 질서의 다양한 법을 설명하는데 유용한 내용들을 나열해 가고 있다. 오늘날 모든 사람들은 우주의 외적인 것들은 법칙에 의해 규율되어지고 있다고 기꺼이 믿고 있다. 그리고 어떤 것은 이해가 되고 설명도 가능하지만 어떤 것은 도무지 이해가 안되는 것도 기꺼이 인정하기도 한다. 어찌됐든 인간은 자연의 법칙을 이해하는 능력을 부여받고 있고 자신이 자연과 조화를 가져옴으로 물질적 편안함과 행복을 설비할 수 있는 능력도 가지고 있다.
위의 경우가 우주의 외적 측면에 한정된 사항인 바, 그 외적 측면의 원인에 해당되는 우주의 내적 측면 역시 법칙에 의해 규율되고 있을 것이라고 우리로 곰곰이 생각해 보게끔 만든다. 인간이 자연계와 조화를 이루고 살 듯 자연계의 원인이 되는 것과도 친숙해져 그것에 따라 살아가는 것도 동등하게 필요하리라 본다. 자연의 법칙에 잘 순응함으로 자연적 인간이 큰 혜택을 보듯 영적 인간은 영의 법칙에 순종함으로 큰 혜택을 입을 수 있게 된다. 영의 법칙을 잘 알고 그것을 실습해 감이 없이 자연적 법칙 만에서의 순종은 인간이 바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성취하게 해주지 못한다. 더욱이 복음서의 경우 주님께서는 그의 제자들에게 하늘나라와 그분의 의를 먼저 구하라고 충고하고 있지 않는가?
우주의 내적인 것을 규율하는 법칙들은 어떻게 발견해서 이해할 수 있을까? 이 탐사는 자연적 과정만으로는 안되고 계시(밝히 알려 주심)에 의해 가능하다. 자연적 인간은 자기 능력을 넘어있는 영적 법칙을 발견할 수도 없고 더욱이 그 법칙을 살아 있게 할 수도 없다. 또 한 가지 영적 인간이 비록 계시로 영적 법칙을 이해할 수 있다 해도 자기 단독으로는 그것들을 발견할 수 없다. 그 이유는 영적 법칙은 무한이신 주님께 근원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어느 누구도 무한을 납득할 수 없고 오로지 무한에서 기인되는 것이 계속 존재하고 그 무한이 숙박할 수 있는 적절한 조건만이 가능하다. (요한복음 1:18). 그러므로 계시는 말씀에서 계속 주어져왔고 사실 언제나 우리로 그 무한을 밝히 알게 해주고 있다 (요한복음 1:1). 이런 연유로 말씀 안에는 영적 법칙이 함유되어 있으면서 상응을 수단으로 그 자태를 드러내는 바, 이를 수단으로 인간은 말씀 속의 영적 진리를 탐사할 수 있지만 그 외 어떤 방법으로도 탐사는 불가능하다(마태 13:34, 시편 78:2). 위를 참고로 해서 본문에 놓인 법칙들을 곰곰이 생각해 보자.
신앙 속의 진리 안에 있는 사람들의 예배를 규율하는 첫 법칙이 서술되고 있다. 이 예배는 선의 측면에서 가장 깊은 상태에서 발생된다. 어찌됐든 예배자는 이 법칙이 작동되는 것을 의식적으로 눈치채지 못한다. 그 이유는 이 예배자는 선의 가장 깊은 상태가 무엇인지 모르고 있고, 주님이 그 상태를 통해 자신에게 역사한다는 것을 지각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 예배에는 위의 법칙이 존재한다(AC1555항). 두 번째 법칙은 이 예배를 준비하는 것은 순수한 사랑에서 예배를 준비하는 것과 비슷하다는 것이다. 무엇이 준비하는 것일까? 그것은 자아를 부정하고, 악을 죄로 알고 금하며, 주님을 인정하는 것이다. 옛 생활은 거절되어야 하고, 옛 생활에서 있었던 기쁨을 단념해야 하며, 진리에 의거 행동할 결심이 실습되어야만 한다. 마지막 단계에는 주님을 인정하고 그분께 책임을 갖는 상태가 반드시 포함되어야 한다. 위 사항들은 신앙 속의 진리로 예배하는 가운데 결과되는 것들이다. 비록 진리에의 순종은 주님이 명령하신 사항인지라 이해하든 못하든 우선 순종하고 보겠다는 원칙 하에서 이루어졌다 해도 그는 위의 결과들을 의식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세 번째 법칙은 이러하다. 진리는 반드시 선과 결합해야 한다는 것, 다시 말해 신앙은 그 신앙의 수준에 맞는 사랑과 결합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예배자가 위 사항에 관심을 계속 두고 있는 한, 위의 사항은 순종하는 삶을 수단으로 결과되어진다. 그러나 주님의 경우 관심을 두는 사항은 선의 상태 밑에 진리가 배열되는 것인 바 이 단계에서도 실현된다. 다시 말해서 순종함은 예배자로 결합을 확증하게 하고 동시에 주님의 은밀한 역사로 예배의 더 높은 등차를 위한 준비가 되게 상태가 승강된다. 네 번째 법, 이 법이 3-5절에 기술되고 있다. 기름으로 명시된 이 예배 속의 모든 선, 콩팥으로 명시된 모든 진리, 그리고 그 선과 진리의 외적, 내적 측면에서의 모두는 주님께 돌려야 하고 그분을 섬기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선으로부터 기인되는 진리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은 선을 자기 것 삼게 되는데 단지 외적 측면에서 다시 말해서 마치 자아로부터 선이 있는 듯 삼게 된다. 그 이유는 기름과 피에 관련되는 고기는 외적인 것을 명시하기 때문이다. 다섯 번째 법은 신앙 속의 진리, 신앙 속의 선으로부터 주님을 예배함은 동일하다는 것이다. 그 이유가 이 둘은 모두 악을 제거하는 것과 관련되고 예배자의 두 계층들은 8-10절에 기술된 법에 의거 선을 자기 것으로 삼을 수 있다. 그래서 이 구절은 예배의 각기 다른 상태들에서 자기 것이 되는데 적용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로서 알게 되는 일반적인 법이란 아주 높은 천국의 천사나 가장 미미한 천사에 이르기까지 모두는 생명 또는 사랑을 자기 것으로 삼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주님만이 스스로 존재하는 생명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매 순간마다 생명의 근원에 의존해야 한다. 생명이 자기 것이라는 망상에 사로잡혀 자신의 자유로운 결정을 남용함에서 모든 악은 비롯된다. 그러나 여섯 번째 법, 즉 자기 것 삼음에 대한 일반적 법은 조금 더 곰곰이 생각해야 한다. 6절에서 제물의 고기에 관해 말해지기를 “남자로서 성직자가 된 사람은 먹을 수 있다”라 했는데, 이는 아직 실현되지 못하고 있는 선에서 기인되는 진리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은 선을 자기 것 삼게 될 것임을 영적으로 뜻한다. 그러나 8절에서 성직자에 관해 말해지기를 그는 태워 바침의 제물의 가죽을 차지할 것이라고 했는 바 이를 영적으로 보면 선은 그 선의 말단에 있는 진리를 자기 것 삼게 될 것과 뿐만 아니라 선은 천적 예배에서조차 외적으로 사람에 의해 자기 것이 될 것이라는 말이다. 이 상응적 서술의 또 다른 국면이 있는데, 인간이 내적으로 선 가운데 충분히 있을 때 그는 선을 외적으로 자기 것이 되게 할 수 있는데 이것이 고기를 먹는 것으로 표현되어 있고, 뿐만 아니라 그는 가죽을 차지한다는 것으로 표현된 말단적 진리까지 자기 것이 된다는 말이다. 이제 모세법 속의 내적 의미에 따른 세 개의 양상들은 서로가 부합되어 합리적인 해석을 갖게 해준다. 자기 것으로 삼는 것의 완성에는 세 가지 사항이 있다; 첫째 우리는 선과 진리를 계속해서 받는 그릇임을 자각할 것, 둘째 내적인 것이 외적인 것을 자기 것 삼는다는 것, 세째 우리가 주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내적으로 더 채우면 채울수록 말단적인 것들도 더욱 완성되고 충만해져 외적 삶의 즐거움까지 누린다는 것이다. 이제 하나 더 보여주는 사항이 있다. 어떻게 9-10절의 영적 의미가 영적, 자연적, 뿐 아니라 천적 인간과 더불어 완성되도록 이 법 속에서 일하는 가에 대해서다. 이 구절에서의 “아론의 아들들”에는 자연적 선 뿐만 아니라 영적 선으로부터 진리 안에 있는 이들을 포함하고 있다는 것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그 이유는 아론의 모든(one as well as another) 아들들이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더불어 우리가 유념해야 하는 것은, 우리가 해설에 필요한 통상적인 언어로 영적 의미를 서술할 경우, 우리는 시리즈가 쓰여질 때 포함되는 진리의 한 가지 양상 그 이상의 것은 표현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제 21절까지의 내적 의미에서 몇 가지를 주목해서 살펴보자. 세부적 영적 의미에서 보여준 바대로 평화 제물에 관한 여러 가지 법들은 각 개인의 경우에서 자유로이 주님을 예배하는데 관련되는 신성한 질서의 법들을 명시하고 있다. 서술된 내용을 글자대로 거듭 읽기만 해도 이 서술은 표면에서 나타나는 것 이상을 포함하고 있어야 하는 것은 누구나 대강 짐작하리라 본다. 예를 들면, 받은 축복이 고마워서 드리는 희생 제물의 고기는 바치는 그 날 먹도록 규정되었지만 서약한 대로 드린 제물이나 마음에 우러나서 드린 제물은 다음 날에 먹어도 된다고 왜 명령하고 있는지를 글자만 가지고 누가 설명할 수 있을까? 그러나 내적 의미는 우리에게 그 이유를 보여 준다. 인간 삶의 어떤 수준에서든 진정한 예배를 실지로 구성하는 한 가지 것이 있다. 그것은 자기를 위해 예배의 대상을 사랑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는 내면의 동기나 이유가 조금 약한 상태와는 품질 면에서 다른 사랑이다. 주님의 속성 때문에 그분을 사랑하고 예배하는 것은 주님이 자신에게 증여한 혜택(복받음) 때문에 그분을 사랑하고 예배하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한 위치에 있다. 따라서 받은 축복이 고마워서 드리는 예배는 우리 삶의 어떤 수준에서도 순수한 사랑에서 예배하는 것보다 하급이다. 물론 우리는 누군가를 수단으로 각자에게 수여된 축복에 감사해야 하는 것은 지당한 것이다. 은혜를 모르는 배은망덕은 일종의 범죄 같아서 그런 사람은 자신 스스로 배은망덕함도 죄이다는 것을 발견하지 못한다. 주님은 그분의 친절하심이 우리를 강요하기 때문보다는 그분 자신의 이름을 위해 그분을 사랑하기를 원하시지 않을까? 그분의 친절을 사랑하는 것은 좋은 것이다. 그러나 그분 자체를 사랑하는 것 즉 그분의 친절을 모방하는 것이 더 나은 것이다. 이로부터 알 수 있는 바, 왜 받은 축복이 고마워서 드리는 제물은 사랑으로부터(마음에 우러나서) 드리는 제물보다 하급인지, 왜 전자와 후자는 구별되어야 하고, 왜 후자 속에 진정한 감사가 있는지, 이를 본문의 글자대로 말한다면, 왜 우리는 받은 축복이 고마워서 드리는 제물의 고기는 바친 그 날 먹어야 하는지, 이를 영적으로 말한다면 우리의 감사함(gratitude)이 주님에 대한 진정한 사랑과 분리되어야 하는지 알게 해준다. 이것이 11-15절의 내적 의미에 있는 실질 내용이기도 하다. 그러나 평화 제물에는 받은 축복(gratitude)에 고마워서 드리는 제물 외에도 서약한 대로 드리는 제물도 포함되어 있다. 스웨덴볽의 「천국의 신비」 3880항을 참조해 보면 전자는 주님을 사랑함과 구별되는 이웃을 향한 선행으로부터 드리는 예배 또는 천적 예배와 구별되는 영적 예배를 표현한다는데 대한 다양한 성경 인용 구절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러므로 서약한 대로 마음에 우러나서 드리는 제물(free-will offering)은 자유로부터 온 자연적 예배를 명시하고 있다. 자유로부터 주님을 예배하는 것이 사랑으로부터 주님을 예배하는 것이다. 모든 평화 제물에 관해 말해지는 바, 평화 제물은 “깨끗하게 되고 성별되기 위함보다는 평안함에 속하는 바 그 제물은 거룩한 장소에서 먹도록 되어있고, 신성한 예배로부터 심정 속의 기쁨을 입증하게 된다” (AC 10114항). 이로부터 분명한 한 가지는 평화 제물은 시험에서 승리한 후 사랑의 자유로부터 드리는 예배나 충분히 거듭난 상태에서 드리는 예배를 표현한다는 것이다. 이런 조건하에 선을 자기 것 삼는 것이 제물을 먹는 것으로 명시되어 있고 이와 같이 자기 것 삼음은 계속적으로 있었고 현재에서도 존재한다는 것이 첫째 날 먹고 남은 것을 “다음 날” 먹는 것으로 명시되고 있다. 왜냐하면 인간은 천적 선을 자양분으로 언제나 삼아야 하며, 거듭나는 동안일 경우 그는 시험 후 평화와 쉼의 상태에서 계속적으로 선을 자기 것 삼음으로 영양분을 공급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해서 12절에서 기술된 바와 같은 천적 상태에 도달한 까닭에 그는 이를 넘어 갈 수 없다. 이것이 셋째 날 또는 마지막 새로운 상태이므로 그날 가운데서 선을 자기 것 삼을 수 있을 뿐이다. 그 반면 영적 인간은 선을 자기 것 삼는 상태 즉 선을 실감하는 상태에서 “다음 날”이라는 천적 상태를 기대하게 된다. 그리고 자연적 인간은 영적, 천적 상태를 즐거이 기대할 수 있다. 이상에서 살핀 바에서 알게 되는 것 하나는 자기 것으로 삼는 법이 15절과 16절에서 다르게 기술되었는지에 대한 이유이다. 선을 자기 것 삼는 데에 관한 또 다른 법이 이제 우리로 시선을 모으게 하고 있다.
그 중 첫 번째 사항이 17절에 표현되어 있는데, 그것은 심판의 과정에서 단지 이기적일 뿐인 선은 사라지게 된다는 것이다. 이는 세부적 영적 의미에서 보여준 바대로 이다. 이 구절은 순수한 선 가운데 있는 이들에게 적절하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18절의 경우는 사악한 자에 관해서이다. 이기적인 선이 심판의 과정에서 자기 것이 될는지 모른다. 그렇게 되면 그것은 주님과 천국 삶에서 자신을 떼어내는 원인이 되고 만다. 게다가 악의 확증과 더불어 항구적으로 악 속에 있게 된다. 그 이유는 모든 사람 각자에 해당되는 마지막 심판은 자연계에서 떠난 직후 곧바로 있기 때문이다. 그런 뒤 인간은 더 이상 선과 악의 선택의 자유를 누릴 수 없다 (천국과 지옥 480항). 그리고 그는 가르쳐질 여지를 남기지도 않을 것인 바, 악 속에 영원히 거해야만 한다. 이 말에 한 가지 더 첨부해 본다면, 아마 그 사람은 그런 상황에 있는 것이 자신을 위해 더 나은 처지일 것이다. 그 이유는 그것이 자기로 선과 진리로부터 완전히 분리해 주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분리는 그 사람에게 고통의 원인이 된다. 다음 두 절에 포함되어 있는 세 번째 법은 선을 자기 것 삼는 것은 악으로부터 깨끗해짐으로 있게 된다는 것이다. 그 반면 네 번째 법은 이 시리즈를 끝내는 바, 바깥쪽으로는 정의로우면서 내향으로는 불순해서 위선과 모독에 묶여 있을 경우, 이것 역시 선과 진리로부터의 분리는 필수적으로 있게 된다는 것을 선포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모든 이런 법이 보여주는 것은, 선은 가르쳐지고 있는 상태나 싸우는 상태 동안에서는 인간에 의해 실감되지도 않고 자기 것 삼아지지도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나 훈육과 투쟁 이후 주님이 자유와 기쁨으로 진정으로 예배되어질 때 가능해진다.
이제 자유로부터 예배하는 가운데 선을 자기 것 삼는 일반 주제에 관한 두 개의 중요한 작은 분과가 등장한다. 전자는 아무도 선과 진리를 절대 자기 것으로 삼을 수 없다는 것, 그럼에도 후자에서 인간은 모든 것이 자신에게 달려 있는 듯 행동하면서 동시에 그렇게 행동하게 한 힘이 주님으로부터 왔음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선을 이식할 목적으로 진리로 훈육되는 인간의 어린 시절 상태로부터 시작해서 있게 되는 모든 경우에 있는 예배의 법에 관한 일반 요약으로 본 장은 결말을 짓고 있다. 이에 관한 것은 3장에서도 발견될 것이다. 그러나 본 장의 경우는 좀 더 특별한 것이 있다. 그 이유가 여기서 말하는 바는, 인간이 어떤 선이나 진리를 자신으로부터라고 하면서 자기 것 삼는 것은 불가능할 뿐 아니라 단지 자연적일 뿐인 애착, 따라서 영적 생명이 없는 애착들은 수단으로는 사용할 수 있지만 자기 것으로 삼아질 수는 없다고 하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우리는 인간이 거듭나기 전에 있는 이기적이고 뒤집혀있는 삶이 어떻게 적절히 사용되어야 하는 가를 보게 되고 어떻게 신성한 섭리가 그런 삶을 수단으로 더 높은 삶에로 인간을 인도해 가는 가를 보게 해준다. 이 경우가 그렇게 안 된다면, 어떻게 인간이 자기의 옛 부패된 삶에서 천국적인 삶 안으로 가져다 놓는지를 알기 힘들다. 더구나 그것은 자연적 삶이 진행되고 영적 삶이 그 뒤를 따르는 모든 인간 경험에 의거 존재한다. 비록 이것이 모순적인 일같이 보일는지 몰라도 거듭남의 경우에서도 거듭남이 진행되고 깨끗해짐이 그 뒤를 잇는 것은 마찬가지 순서이다. 세상 안에서의 인간은 변화무쌍한 삶을 살아가고 있고, 비록 그가 의를 행한다고 하는 결정을 내렸다 해도 실지 자기가 천국에 기울고 있는지 지옥에 기울고 있는지 거의 알지 못한다. 따라서 우리는 “주님을 신뢰하면서 선을 행하라. 그리하면 그 땅에 거하게 되고 먹여지리라”는 말씀에 순종해갈 수밖에 없다. 그래서 29-36절에 있는 내적 의미는 주제를 또 다른 국면에서 더 첨가하고 있다. 인간은 자신의 능력으로부터 해내는 듯 전력을 다해 주님을 예배하지 않고는 구원되어질 수 없다는 법이다. 제물을 손수 가져온다는 것은 자신의 능력으로 행동한다는 것을 명시한다. 가슴(갈비) 부위와 더불은 지방은 영적 선 안에 있는 천적 선을 명시하는 것이고, 그것을 흔든다함은 주님으로부터 생명을 얻는 것을 말한다. 우리는 자신들 속에서 있어지는 내면의 역사를 보거나 느낄 수는 없다. 알 수 있는 것이 있다고 생각해본다면 그것은 아마 자기 의무를 행한 결과일 뿐이다. 이와 연결해서 한 걸음 더 전진되는 바, 31절의 영적 가르침에서 승강이 있게 된다. 이 구절이 보여주는 바, 가슴 고기(갈비)가 명시하는 것인 선행을 실감함 또는 선을 자기 것 삼는 것은 기름으로 명시되는 가장 깊은 선은 모두 주님으로부터이고 선행의 생활에서 섬김으로 성별되어야만 한다는 것을 진실로 인정하는데 달려 있다는 것이다. 이 진리는 그 다음 구절에서 강조되고 있다. 오른쪽 넓적다리를 들어 올림이란 주님을 인정함과 동시에 그분과의 결합을 명시하는 반면, 아론과 그의 후손의 몫이 된다는 것은 자기 것이 된다는 것, 그 결과 삶 속에서 사용됨을 명시하고 있다. 그 이유가 선은 말이나 행위로 표현되지 않으면 실지 자기 것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33-34절의 내적 의미 중 두 가지 점은 설명이 필요하리라 본다. 가장 깊은 천적 진리로부터의 예배는 외적인 것 안에 존재하는 바 상대적으로 불완전하다고 앞서 살핀 바 있다. 이는 모든 외적 예배에 관해 진정한 것이고 이것이 내적인 예배와 구별되는 점이다. 스웨덴볽의 「천국의 신비」 9946 끝항과 10047항을 보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주님이 그분의 인간을 신성이 되게 하실 때와 같이 그분은 인간을 거듭나게 한다. 그 이유는 인간과 함께 하는 주님은 내적 경로를 통해 선을 가지고 영혼 안으로 흘러드시고, 진리는 외적 경로 즉 듣고 보는 경로를 통해 흘러 들게 하신다. 그래서 인간이 악에 저항하는 만큼에서 주님은 선이 진리와 결합되게 하시어 그 사람의 선이 이웃을 향한 선행과 하느님을 사랑하는 선이 되게 하신다.” 또한 34절에 관해 말해지는 바, 영적 선과 천적 선은 “인간에게 내재하는 능력은 훈련(실습)함에서 기인된다.” 내재하는 힘(innate powers)이란 주님으로부터 받은 힘, 즉 새로운 의지와 이해함을 사용하는 힘을 의미한다. 이 힘은 마치 자신 본래에 속한 힘 같이 행동에서는 나타난다. 이러므로 35절에서 말하는 바, “주님에 대한 예배가 비록 불완전하다 해도 사랑으로부터 신실하게 예배되어져야 할 것”이라 하고 36절의 경우, 인간은 자기의 가장 깊은 생명이 주님으로부터 존재함을 인정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줄여 말해서 아론과 그의 후손들의 기름부어진 몫이란 가장 높은 선은 주님께로부터 이며 그분과 결합함으로, 그 결합으로 인해 그 선을 자기 것 삼게 되는 것을 인정하도록 인간에게 능력이 부여되었다는 것 외의 더 다른 의미는 없다.
**************************************************

레위기 8장

성경: 레위기 1장

1. 그리고 주님께서 모세에게 이야기하셨다, 말하시기를,
2. 아론과 그의 아들들을 데려와라, 그리고 옷들, 기름붓는 기름, 그리고 죄 바침의 제물로부터의 수소, 수양 두 마리, 그리고 누룩 없는 빵 바구니,
3. 그리고 너는 만남의 천막의 문에 회중이 모이게 하라.
4. 그리고 모세는 주님께서 자기에게 명령했던 대로 실시했다. 그리고 회중은 만남의 문에 모여졌다.
5. 그리고 모세는 회중에게 말했다, 이것은 주님께서 행해져야한다고 명령하셨던 것이다.
6. 그리고 모세는 아론과 그의 아들들을 데려왔다, 그리고 물로 그들을 씻었다.
7. 그리고 그는 그(아론)에게 상의(coat)를 입히고, 그를 띠(girdle)로 둘렀다, 그리고 길고 품이 큰 겉옷(robe)으로 그를 옷입혔다, 그리고 그(him) 위에 에봇을 입혔다, 그리고 그는 그를 에봇의 기묘하게 짜진 끈(band)으로 둘렀다, 그리고 그것과 함께 그에게 그것을 묶었다.
8. 그리고 그는 그(아론) 위에 가슴받이를 두었다. 그리고 가슴받이에 그는 우림과 둠밈을 놓았다.
9. 그리고 그는 그의 머리에 관(miter)을 씌웠다. 그리고 그는 관 위, 앞에 금판을 붙여 거룩한 왕관(crown)(이 되게 했다). 주님께서 모세에게 명하신 대로였다.
10. 그리고 모세는 기름붓는 기름을 가져왔다, 그리고 성막에 발랐다, 그리고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에도 발랐다, 그리하여 그것들을 신성하게 했다.
11. 그리고 그는 제단 위에 그것을 일곱 번 뿌렸다, 그리고 제단과 그것의 모든 기구들, 그리고 물두멍과 그것의 받침에 발라서 그것들이 신성해지게 했다.
12. 그리고 그는 아론의 머리 위에 기름을 부었다, 그리고 그에게 기름을 부어 그를 신성해지게 했다.
13. 그리고 모세는 아론의 아들들을 데려왔다, 그리고 그들에게 상의를 입히고, 그들을 띠로 매고, 그들 위에 머리띠를 맸다. 주님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대로 였다.
14. 그리고 그는 죄 바침의 수소를 끌어왔다. 그리고 아론과 그의 아들들은 자기들의 손을 죄 바침의 수소의 머리 위에 놓았다.
15. 그리고 그는 그것을 죽였다. 그리고 모세는 피를 가져갔다, 그리고 그것을 자기 손가락을 가지고 빙둘러 있는 제단의 뿔들에 발랐다. 그리고 제단을 순수해지게 했다, 그리고 피를 제단 받침에 부었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 보상을 받게 하여 그것이 신성해지게 했다
16. 그리고 그는 내장 위에 있는 모든 지방, 그리고 간의 대망, 그리고 두 콩팥들, 그리고 그것들의 지방을 가져갔다, 그리고 모세는 그것을 제단에서 태웠다.
17. 그러나 수소, 그리고 그것의 가죽, 그것의 고기, 그리고 그것의 똥을 그는 진영 밖에서 불로 태웠다. 주님께서 모세에게 명하신 대로 였다.
18. 그리고 그는 태워 바침의 수양을 증정했다. 그리고 아론과 그의 아들들은 수양의 머리 위에 그들의 손을 놓았다.
19. 그리고 그는 그것을 죽였다. 그리고 모세는 제단 빙둘러 피를 뿌렸다
20. 그리고 그는 수양을 조각들로 잘랐다. 그리고 모세는 머리, 그리고 조각들, 그리고 지방을 태웠다.
21. 그리고 그는 물로 내장과 다리들을 씻었다. 그리고 모세는 제단 위에서 수양 전체를 태웠다. 이것은 달콤한 향기를 위한 태워 바침이었다. 이것은 주님께 불로 만든 제물이었다. 주님께서 모세에게 명하신대로였다.
22. 그는 다른 수양, 성직 수임의 수양을 바쳤다. 그리고 아론과 그의 아들은 수양의 머리 위에 자기들의 손을 놓았다
23. 그리고 그는 그것을 죽였다. 그리고 모세는 그것으로부터의 피를 가져갔다, 그리고 아론의 오른쪽 귀의 끝 위에, 그의 오른손의 엄지손가락 위에, 그리고 그의 오른발의 엄지발가락 위에 그것을 발랐다
24. 그리고 그는 아론의 아들들을 데려왔다, 그리고 모세는 그들의 오른쪽 귀의 끝에, 그리고 그들의 오른손의 엄지손가락에, 그리고 그들의 오른 발의 엄지발가락에 피를 발랐다
25. 그리고 그는 지방, 그리고 꼬리 지방, 그리고 내장 위에 있는 모든 지방, 그리고 간의 대망, 그리고 두 콩팥들, 그리고 오른쪽 넓적다리를 가져왔다.
26. 그리고 주님 앞에 있었던 누룩 없는 빵의 바구니로부터, 그는 한 개의 누룩 없는 과자, 그리고 한 개의 기름 들어간 빵, 그리고 한 개의 속 빈 과자를 가져갔다, 그리고 그것들을 지방 위에, 그리고 오른쪽 넓적다리 위에 놓았다.
27. 그리고 그는 전부를 아론의 손 위에, 그리고 그의 아들들의 손 위에 놓았다, 그리고 주님 앞에서 흔드는 바침을 위해 흔들었다.
28. 그리고 모세는 그들의 손으로부터 그것들을 가져갔다, 그리고 그것들을 태워 바치는 제물 위 제단에서 태웠다. 그것들은 달콤한 향기를 위한 성직 수임이었다. 이것은 주님께 불로 만든 바침이었다.
29. 그리고 모세는 가슴을 가져왔다, 그리고 주님 앞에 흔드는 바침을 위해 그것을 흔들었다. 이것은 성직 수임의 수양으로부터의 모세의 몫이었다. 주님께서 명하신 대로 (였다).
30. 그리고 모세는 기름붓는 기름을, 그리고 제단 위에 있었던 피를 가져왔다, 그리고 그것을 아론 위에, 그의 옷들에, 그리고 그의 아들들 위에, 그리고 그와 더불은 그의 아들들의 옷들에 그것을 뿌렸다. 그리고 아론, 그의 옷들, 그리고 그의 아들들, 그리고 그와 더불은 그의 아들들의 옷들을 신성하게 했다.
31. 그리고 모세는 아론에게 그리고 그의 아들들에게 말했다, 만남의 천막의 문에서 고기를 끓이라. 그리고 거기서 그것과 성직 수임의 바구니에 있는 빵을 먹어라, 내가 아론과 그의 아들들에게 그것을 먹을 것이다고 명령하여 말한 대로 이다.
32. 그리고 고기와 빵의 남는 것을 너희는 불로 태울 것이다.
33. 그리고 너희는 성직 수임의 날들이 충만되어질 때 까지, 칠일 동안 만남의 천막의 문으로부터 나가지 말 것이다, 그 이유가 그는 너를 칠일 동안 신성하게 할 것이기 때문이다.
34. 이 날 행하여졌던 것 같이 그렇게 주님은 너를 위하여 보상을 만들라고 명령하셨다.
35. 그리고 만남의 천막의 문에서 너희는 낮과 밤 칠 일 동안 거주할 것이다, 그리고 주님으로부터의 책무를 준행할 것이다, 그래야 너희는 죽지 않는다. 그 이유는 내가 그렇게 명령했기 때문이다.
36. 그리고 아론과 그의 아들들은 주님께서 모세의 손을 수단으로 명령하셨던 모든 것들을 행했다.

영적 의미 요약

* 본 장의 일반 주제는 주님의 영화하심, 동시에 인간의 거듭남에 관해서이다. 1-5절
* 먼저 주님에 관련된 사항이다. 어머니로부터 온 인성을 벗으시는 것, 그리고 인간에 관련된 사항은 회개함으로 실지의 악에서 깨끗해지는 것. 6절.
* 그런 다음 계속되는 순서로서 신성한 진리들을 받는다. 그리고 진리가 선과 결합함에서 지혜를 받아 계발된다. 7-13절.
* 또한 자연적 애착들도 반드시 깨끗해져서 더 높은 애착들과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14-17절.
* 한 걸음 더 나아가 영적 애착들 모두는 주님께 바쳐져야 한다. 그러면 순진의 선은 내적으로 뿐만 아니라 외적으로도 실감되어 진다. 18-21절.
* 그리하여 거듭나는 인간은 선을 실감하기 시작하고, 진리를 수단으로 선이 삶 속에서 실지 행동한다. 그 결과 진리와 선이 상호 결합함으로 해서 선행의 능동적인 삶이 있어진다. 22-30절.
* 위의 결과 어떤 악과도 혼합되지 않고 선을 충분히, 항구적으로 자기 것 삼을 수 있어진다. 이리하여 주님의 영화하심과 인간의 거듭남이 성취되어 진다. 첫 째 모든 악으로부터 완전히 분리될 것, 둘 째 모든 선과 진리를 완전한 순종 속에서 받아들일 것, 이는 주님으로부터 오는 유입 즉 신성한 질서의 법칙에 의거하되 주님의 일에 인간이 협동함으로 된다. 31-36절.

각 절의 영적 의미

1절. 그리고 주님께서 모세에게 이야기하셨다, 말하시기를,

영적 의미

신성한 진리가 지각을 줌으로서 주님이 밝히 알게 해주신다.

세부적 영적 의미

주님(여호와)란 사랑 측면에서의 신성한 존재를; 이야기하심(speaking)이란 유입(influx)을; 모세란 신성한 진리 또는 말씀을; 말함(saying)은 지각(perception)을 각각 뜻한다. A.C. 2001, 2951, 7010, 6752, 1791, 1822.

2절. 아론과 그의 아들들을 데려와라, 그리고 옷들, 기름붓는 기름, 그리고 죄 바침의 제물로부터의 수소, 수양 두 마리, 그리고 누룩 없는 빵 바구니,

영적 의미

천적 선과 그로부터 나온 진리에 관하여; 천적 선과 결합된 영적 진리에 관하여; 자연적 선과 영적 선이 악으로부터 깨끗해지는 것에 관하여, 또는 외적 인간과 내적 인간이 깨끗해지는 것에 관하여; 모든 등차에서 천적 선이 거짓에서 자유로워지는 것에 관하여, 그리고 그릇인 감각적인 것에 관하여;

세부적 영적 의미

아론과 그의 아들들은 천적 선과 그 선으로부터의 진리들을; 옷들이란 천적 선과 결합될 영적 진리들을; 기름붓는 기름이란 천적 선을; 수소는 외적 인간에 있는 자연적 선을; 수양은 내적 인간에 있는 영적 선을; 그리고 태워 바침과 제물이란 악으로부터 깨끗해짐을; 그리고 누룩 넣지 않은 바구니는 그릇에 해당되는 감각 측면의 모든 등차에 있는 거짓으로부터 자유로운 천적 선을 각각 뜻한다. A.C. 9946, 9814, 9954, 10011, 9990, 9991, 9996, 10080.

3절. 그리고 너는 만남의 천막의 문에 회중이 모이게 하라.

영적 의미

주님의 인간이 신성이 되심에 관하여, 각자의 힘이 미치는 한도에서 거듭나게 하시는 것은 각 사람으로 천국적 삶을 즐길 수 있도록 해주시기 위함이다.

세부적 영적 의미

모이게 하라(assembling)의 의미는 주님의 보편적 유입의 결과인 질서대로의 배열을 명시하는 바, 주님의 인간이 신성이 되심과 인간의 거듭남을, 온 회중이란 인간의 모든 애착과 힘(power)들을 말하는데 그 이유는 인간과 더불어 교회를 구성하는 모든 것 또는 모든 영적인 것, 즉 진리와 선에 속한 모든 것, 신앙과 선행에 속한 모든 것을 말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만남의 천막의 문이란 위의 사항들이 인간으로 천국적 삶을 소개해 주거나 그 삶에 들어가게 하는 수단이 된다는 뜻이다. A.C. 6338, 7843, 2356, 3540-3.

4절. 그리고 모세는 주님께서 자기에게 명령했던 대로 실시했다. 그리고 회중은 만남의 문에 모여졌다.

영적 의미

위 사항은 신성한 진리를 수단으로 결과되는데, 이 진리에 신성한 선의 유입이 있음으로 주님의 인간은 최 말단까지 신성이 되시고, 인간은 각자의 능력 내에서 거듭날 수 있게 된다. 이는 천국적 삶을 위한 준비요, 주님을 인정하는 시작이기도 하다.

세부적 영적 의미

모세는 신성한 진리 또는 말씀을; 명령은 유입을; 주님 또는 여호와(여호와)는 사랑 측면에서의 신성한 존재를; 회중은 주님의 인성 그리고 인간의 다양한 힘들을; 모인다(being assembled)는 여기서는 천국적 삶을 위해 준비함을; 그리고 문은 주님을 인정함을 각각 뜻한다. A.C. 7010, 6752, 5846, 2001m 7830, 7843, 6338, 2356, 3540-3.

5절. 그리고 모세는 회중에게 말했다, 이것은 주님께서 행해져야한다고 명령하셨던 것이다.

영적 의미

또한 교인이라는 세부사항에도 신성한 진리 또는 말씀을 수단으로 주님의 인간이 신성이 되심과 인간의 거듭남에 관한 지각을 주신다.

세부적 영적 의미

모세는 신성한 진리 또는 말씀을, 말함(saying)은 지각을, 회중은 교회 속의 사람을, 그리고 주님께서 이렇게 하라고 분부하셨다함은 주님의 인간이 신성이 되심과 인간의 거듭남을 말하는데 이는 앞에서 언급하였다. A.C. 7010, 6752, 1791, 1822, 7830, 7843.

6절. 그리고 모세는 아론과 그의 아들들을 데려왔다, 그리고 물로 그들을 씻었다.

영적 의미

주님의 경우, 어머니 쪽에서 온 인간을 벗으시는 것, 인간의 경우, 회개를 수단으로 실제의 악에서 깨끗해지는 것에 관한 사항이 첫 번째 일이다.

세부적 영적 의미

아론과 그의 아들들은 신성한 선과 진리 측면에서의 주님, 인간이 주님으로부터 선과 진리를 받는 것을; 그리고 물로 씻음은 주님의 경우 어머니 쪽에서 온 인간 본성을 벗으심을; 인간의 경우 회개의 일 또는 악에서 깨끗해짐을 각기 뜻한다. A.C. 9946, 10239, 3147, 10002.

7절. 그리고 그는 그(아론)에게 상의(coat)를 입히고, 그를 띠(girdle)로 둘렀다, 그리고 길고 품이 큰 겉옷(robe)으로 그를 옷입혔다, 그리고 그(him) 위에 에봇을 입혔다, 그리고 그는 그를 에봇의 기묘하게 짜진 끈(band)으로 둘렀다, 그리고 그것과 함께 그에게 그것을 묶었다.

영적 의미

천적 천국과 영적 천국의 매체를 하나로 해주는 가장 깊은 진리들을 받아들임이 있다; 진리들을 하나로 해주면서 각각을 식별하는 사랑의 공통된 끈에 대해서; 영적 왕국의 내면의 진리에 관해서; 내면의 진리로부터 온 최 말단 진리에 관해서; 이 진리들을 서로 접하게 하는 공통되는 끈에 대해서.

세부적 영적 의미

상의(속옷, coat)은 천적 천국과 영적 천국을 하나로 해주는 매개인 가장 깊은 진리(천적 진리)를; 띠(girdle)는 이러한 진리들을 하나로 하면서 진리들을 식별하게 하는 사랑의 공통된 묶음을; 길고 품이 큰 옷(겉옷, robe)은 영적 왕국의 내면에 있는 진리들을; 에봇(ephod)은 내면에 있는 진리들로부터 있게 되는 최말단의 진리를; 관대(the band of the ephod)는 내면의 진리와 최말단의 진리가 결합되게 하는 공통되는 묶음을 각각 뜻한다. A.C. 10004, 9828, 10014, 10005, 9824, 10006, 9837.

8절. 그리고 그는 그(아론) 위에 가슴받이를 두었다. 그리고 가슴받이에 그는 우림과 둠밈을 놓았다.

영적 의미

신성한 선으로부터 빛을 내는 신성한 진리의 계시가 있는데, 이것은 선과 진리의 명백한 지각을 가지고 최 말단까지에 이르게 교인들의 마음을 채운다.

세부적 영적 의미

가슴받이(breastplate)는 신성한 진리가 선으로부터 빛을 발하는 것을; 그리고 우림과 둠밈(Urim and Thummim)은 선과 진리를 명백하게 지각함으로 최말단까지 채우는 교인의 마음을 각각 말한다. A.C. 10007, 9905.

9절. 그리고 그는 그의 머리에 관(miter)을 씌웠다. 그리고 그는 관 위, 앞에 금판을 붙여 거룩한 왕관(crown)(이 되게 했다). 주님께서 모세에게 명하신 대로였다.

영적 의미

위의 사항 외에도 가장 깊은 곳에 주님으로부터 온 지혜가 있고, 이 깊은 데로부터 최 말단까지 그 지혜로부터, 또는 신성한 인간으로부터 계발이 되는데, 이는 신성한 진리 안에로 신성한 선의 유입에 의한다.

세부적 영적 의미

아론의 머리 위에 놓인 관(mitre)은 가장 깊은 측면에 있는 주님으로부터 온 지혜를, 그리고 금판(golden plate), 거룩한 왕관(crown)은 신성한 선이 신성한 진리에로 유입됨에 따라 신성한 인성으로부터의 계발 또는 최 말단에서의 계발을 각각 명시한다. A.C. 9827, 10008, 9930, 9932, 10009, 2001, 5486, 7010.

10절. 그리고 모세는 기름붓는 기름을 가져왔다, 그리고 성막에 발랐다, 그리고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에도 발랐다, 그리하여 그것들을 신성하게 했다.

영적 의미

더 나아가, 가장 깊은 부분에 있는 신성한 진리는 신성한 선과 결합한다. 그로부터 중간 천국에 있는 이들의 내용물이 성별된다. 게다가 그 천국에 있는 이들과 상응되게 거듭나는 인간 마음 속의 내용물도 성별된다.

세부적 영적 의미

모세는 신성한 진리를, 그가 기름을 가져옴이란 신성한 선과의 결합을, 성막과 그 안의 모든 것에 기름을 부음이란 중간 천국에 있는 이들의 내용물과의 결합, 또는 그 천국과 상응되는 거듭나는 사람의 마음 속에 있는 내용물과의 결합을, 그리고 그것을 성별함이란 그 결과, 즉 거룩한 상태를 각각 명시한다. A.C. 7010, 10010-11, 9504, 9820, 9956.

11절. 그리고 그는 제단 위에 그것을 일곱 번 뿌렸다, 그리고 제단과 그것의 모든 기구들, 그리고 물두멍과 그것의 받침에 발라서 그것들이 신성해지게 했다.

영적 의미

또한 충만되고 거룩함의 모든 상태에 있는 사랑으로 주님께 예배하는 가운데 선은 진리와 결합되어진다. 이는 결합을 수단으로 주님께 바쳐지는 영혼 뿐만 아니라, 이를 받는 그릇인 진리의 내면과 외면까지 다 바쳐진다. 이리하여 순수하고 거룩해진다.

세부적 영적 의미

기름을 제단 주위에 뿌린다는 것은 사랑으로부터 주님께 예배하는 가운데 선이 진리와 결합하는 것을; 일곱 번이란 모든 충만과 거룩함에서를; 그리고 제단과 거기에 딸린 모든 기구, 물두멍과 그 받침을 기름으로 성별한다는 것은 결합을 수단으로 주님께 영혼을 바칠 뿐만 아니라 그릇에 해당되는 진리를; 그 진리가 내면에 속하든, 외면에 속하든 모두 봉헌하는 것, 그래서 외부에 있는 진리 역시 순수하고 거룩함을 입게 된다는 것을 각각 말한다. A.C. 9954, 10127, 716, 9954, 10274.

12절. 그리고 그는 아론의 머리 위에 기름을 부었다, 그리고 그에게 기름을 부어 그를 신성해지게 했다.

영적 의미

그러나 특별히 신성한 선 자체가 주님의 인간으로 흘러 생명있게 해야 하고, 인간 영혼은 선이 진리와 결합함으로 해서 가장 높은 등차부터 낮은 부분까지 생명 있게 되어야 한다.

세부적 영적 의미

아론을 성별하기 위해 그의 머리에 기름을 붓는다는 것은 신성한 선 자체가 주님의 인간으로 흘러 생명 있고, 인간의 영혼은 선과 진리가 결합하면서 가장 높은 등차에서부터 가장 낮은 등차에 이르기까지 생명 있게 된다는 말이다. A.C. 10010, 10011.

13절. 그리고 모세는 아론의 아들들을 데려왔다, 그리고 그들에게 상의를 입히고, 그들을 띠로 매고, 그들 위에 머리띠를 맸다. 주님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대로 였다.

영적 의미

다시 신성한 진리 또는 말씀의 도움(도구)으로 영적 인간, 뿐만 아니라 천적 인간은 진리로 훈육되어야만 하고, 애착의 공통되는 끈으로 매어져야 한다. 그리고 천적인 지혜가 부여되어야만 하되, 그것은 신성한 질서, 즉 신성한 진리 안에 신성한 선이 유입함에 의해야 한다.

세부적 영적 의미

여기서 모세는 신성한 진리 또는 말씀을; 아론의 아들들은 천적 인간과 구별되는 영적 인간을; 속옷을 입힌다는 것은 진리로 훈육되는 것을; 띠란 애착의 공통되는 묶음을; 머리띠를 매어주었다는 것은 지혜로부터 온 총명이 부여되는 것을; 그리고 주님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대로란 신성한 선이 신성한 진리에로 유입됨 또는 신성한 질서에 의거함이라는 뜻이다. A.C. 7010, 9946, 9814, 10014, 9949, 10016, 5486, 911.

14절. 그리고 그는 죄 바침의 수소를 끌어왔다. 그리고 아론과 그의 아들들은 자기들의 손을 죄 바침의 수소의 머리 위에 놓았다.

영적 의미

자연적 인간이 영적 인간과 천적 인간, 주님과 결합하기 위해서는 깨끗해져야 한다. 그러므로 반드시 신성한 선과 진리를 받아들임이 있어야 하는데 자연적인 것은 전폭적으로 천적, 영적 차원으로부터 있어져야 한다.

세부적 영적 의미

죄 바침의 제물이 될 수소란 자연적 인간과 그 인간의 깨끗해짐을, 그리고 아론과 그의 아들들이 수소의 머리에 손을 얹는다는 것은 능력이 받아지고 교통되고 전환되는 것, 그리하여 더 높은 능력들이 더 낮은 힘과 결합하는 것을 각기 말한다. A.C. 10021, 10023.

15절. 그리고 그는 그것을 죽였다. 그리고 모세는 피를 가져갔다, 그리고 그것을 자기 손가락을 가지고 빙둘러 있는 제단의 뿔들에 발랐다. 그리고 제단을 순수해지게 했다, 그리고 피를 제단 받침에 부었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 보상을 받게 하여 그것이 신성해지게 했다

영적 의미

이에는 준비가 되어야만 하는 바, 자연적 인간 안에 숙박하는 신성한 진리는 각자의 상태에 따라 주님을 예배하는 가운데 효력있게 작용되어야 한다. 그러면 자연적 인간은 깨끗해질 것이고, 이 순수함이 감각적 삶에까지 퍼져야 영적 인간과 하모니를 이룰 수 있다.

세부적 영적 의미

수소를 죽인다는 것은 준비함을; 모세는 신성한 진리를; 자연적 인간에 숙박함이 수소의 피로; 제단 뿔들에 피를 바른다는 것은 주님을 예배함에서 능력있게 역사함을; 손가락이란 힘을; 죄 바침의 제물인 수소란 자연적 인간이 깨끗해짐을; 제단 뿔에 있는 피란 감각적 삶 또는 최말단까지 깨끗해짐을; 제단 밑바닥에 피를 쏟는 것은 자연적 인간은 반드시 영적 인간과 하모니가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A.C. 10024, 7010, 10026, 10027, 9964, 7430, 10024, 10186, 10028.

16절. 그리고 그는 내장 위에 있는 모든 지방, 그리고 간의 대망, 그리고 두 콩팥들, 그리고 그것들의 지방을 가져갔다, 그리고 모세는 그것을 제단에서 태웠다.

영적 의미

또한 가장 낮은 등차의 모든 선; 내면에 속하는 자연적 선, 진리를 식별해 주는 자연적 능력, 이것이 선과 결합하는 것, 이 모두는 주님께 되돌려 바쳐져야 한다.

세부적 영적 의미

여기서 내장에 붙은 기름이란 가장 낮은 등차에 있는 선을; 간에 붙어 있는 대망(기름덩어리)이란 자연적 선의 내면을; 두 콩팥과 거기에 붙어 있는 기름이란 선을 가진 식별하는 진리들의 자연적 힘을; 그리고 제단 위에서 사름은 주님이 힘의 원인되심을 알고 그분께 바치는 것을 각기 말한다. A.C. 10033, 353, 9632, 10031, 10032, 10074, 10052.

17절. 그러나 수소, 그리고 그것의 가죽, 그것의 고기, 그리고 그것의 똥을 그는 진영 밖에서 불로 태웠다. 주님께서 모세에게 명하신 대로 였다.

영적 의미

그러나 자연적 인간 뿐인 것, 거짓이나 이기적 애착, 선과 식별되어야 하는 각종 악과 더불어 있는 자연적인 것들은 천국 삶에서 거절되어야 한다. 그래서 그것들은 이기적 사랑으로 불살라져야 하는데 그 이유는 신성한 진리 안에 있는 이들 안으로 신성한 선이 유입되는 것과 상반되기 때문이다.

세부적 영적 의미

이 경우 수소는 단지 자연적 인간; 그리고 고기는 그 인간 속의 악을; 가죽은 거짓을; 똥은 악한 모든 것; 이것들은 식별되어 선과 분리되어야 한다는 것을; 불에 태운다는 것은 자아 사랑을 통해 천국적 삶에서 거절됨을; 그리고 진지 밖에서란 지옥을; 주님이 모세에게 명하신 대로란 신성한 선이 신성한 진리에로 유입됨을 각각 말한다. A.C. 10035, 10036, 10037, 10038, 2001, 5486, 5486, 7010.

18절. 그리고 그는 태워 바침의 수양을 증정했다. 그리고 아론과 그의 아들들은 수양의 머리 위에 그들의 손을 놓았다.

영적 의미

더 나아가, 자연적 인간에 있는 순진의 선 또는 선행인 영적 선은 깨끗하게 해서 주님께 바쳐야 한다. 이를 위해 천적 선과 이 선으로부터의 진리들을 통해 주님으로부터 오는 능력의 교통이 있어야 한다.

세부적 영적 의미

수양은 내적 인간에 있는 순진의 선 또는 선행인 영적 선을; 태워 바침으로 드림이란 주님께 완전하게 바침 또는 완전한 거듭남 그리하여 깨끗해짐을; 아론과 그의 아들들이 그 수양의 머리에 손을 얹는다는 것은 천적 선과 그 선에 속한 진리들을 통하여 주님으로부터 오는 능력과 교통됨을 각각 말한다. A.C. 10042, 10053, 9946, 10023.

19절. 그리고 그는 그것을 죽였다. 그리고 모세는 제단 빙둘러 피를 뿌렸다

영적 의미

이를 위해 준비가 있어야 한다. 신성한 선이 신성한 진리와 결합함은 내적 인간 안에서 결과되어야 한다.

세부적 영적 의미

수양을 죽임은 준비함을; 그리고 그 피를 제단 주변에 뿌림은 신성한 선과 신성한 진리의 결합은 내적 인간에서 결과된다는 것을 말한다. A.C. 10024, 10047.

20절. 그리고 그는 수양을 조각들로 잘랐다. 그리고 모세는 머리, 그리고 조각들, 그리고 지방을 태웠다.

영적 의미

더불어 거듭나는 인간과 더불어서도 선과 진리의 적절한 배열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이것들은 주님께 속한다고 생각하여 그분께 바쳐야하되 순수한 사랑으로부터 가장 깊은 것들에 관해, 외면에 속한 것들, 모든 천적인 선까지 모두 바쳐야 할 것이다.

세부적 영적 의미

수양을 조각낸다는 것은 거듭나는 사람에게서 선과 진리가 적당히 배열되는 것을; 그리고 모세가 머리와 조각으로 만든 고기와 지방을 사르는 것은 선과 진리는 반드시 주님의 것인 바 그것의 가장 깊은 것도, 외면에 있는 것도, 사실상 천적 선 모든 것이 순수한 사랑으로 그분께 바쳐져야 한다는 말이다. A.C. 10048, 10052, 10051, 10033.

21절. 그리고 그는 물로 내장과 다리들을 씻었다. 그리고 모세는 제단 위에서 수양 전체를 태웠다. 이것은 달콤한 향기를 위한 태워 바침이었다. 이것은 주님께 불로 만든 제물이었다. 주님께서 모세에게 명하신대로 이었다.

영적 의미

더욱이 감각적 애착과 자연적 애착들 모두는 말씀 속의 진리를 적용함으로 깨끗해져야 한다; 그리고 내적 인간 전체는 주님께 봉헌되어야 한다; 그 이유는 이런 봉헌으로 천국적 평화와 쉼을 실감하기 때문이다; 이것이야말로 순수한 사랑으로부터 그분으로부터 오는 유입과 말씀 속의 진리에 순종하는 인간과의 협동을 수단으로 주님을 예배하는 것이다.

세부적 영적 의미

내장과 다리를 물로 씻음은 감각적인 것과 자연적 애착을 말씀 속의 진리를 적용함으로 깨끗해져야 한다는 것을; 수양을 온통 제단에서 태움이란 내적 인간 전체를 주님께 봉헌함을; 달콤한 향기(sweet savor), 쉼의 냄새(odor of rest)란 천국적인 쉼과 평화가 실감되는 것을; 불로 태워 바치는 제사란 순수한 사랑으로부터 예배함을; 그리고 주님이 모세에게 명하신대로란 말씀 속의 진리에 순종함을 통해 그분과 협동하는 것과 그분으로부터 유입이 있음을 각각 말한다. A.C. 10049, 10050, 2702, 10052, 10054, 10055, 2001, 5486, 7010.

22절. 그는 다른 수양, 성직 수임의 수양을 바쳤다. 그리고 아론과 그의 아들은 수양의 머리 위에 자기들의 손을 놓았다

영적 의미

그러나 이제 두 번째로, 신성한 진리와 천국 안에서 신성한 선으로부터 진행되어야 한다. 이는 선이 진리를 수단으로 행동하기 위함이다; 그리고 이 진리 안에로 신성한 선의 유입이 있어 신성한 진리는 능력을 가져야 한다.

세부적 영적 의미

두 번째 수양이란 천국에서 신성한 진리가 신성한 선으로부터 진행된다는 것을 명시하고 있는데, 진리가 선으로부터 행동되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그리고 아론과 그의 아들들이 수양의 머리에 손을 얹는다는 것은 신성한 선의 유입 그리하여 신성한 진리가 능력을 가짐을 나타내고 있다. A.C. 10057, 10058.

23절. 그리고 그는 그것을 죽였다. 그리고 모세는 그것으로부터의 피를 가져갔다, 그리고 아론의 오른쪽 귀의 끝 위에, 그의 오른손의 엄지손가락 위에, 그리고 그의 오른발의 엄지발가락 위에 그것을 발랐다

영적 의미

이에 대해 준비사항이 이루어지되, 선용이 수행되기 위해서요, 이 준비는 성별된 영혼으로부터, 또는 주님에게서 내려오는 능력을 지닌 신성한 진리의 충만으로부터 천적 등차에서 지각을 주시고, 거듭나는 과정에 있는 사람, 또는 천적 천국에 있는 이들의 자연적, 영적 등차에 총명을 주시게 된다.

세부적 영적 의미

수양을 죽임은 준비함을 명시하는데 이 구절의 경우 봉헌된 영혼으로부터 또는 신성한 진리의 충만함으로부터 사용함이 있게 되는 것을 말하는데, 그 이유는 두 번째 수양은 성직 수임에 쓸 수양(the ram of consecration, or of the falling of the hand)이라 불리기 때문이다. 피란 천국에서 주님의 신성한 선으로부터 진행되는 신성한 진리를; 아론의 오른쪽 귓바퀴에 피를 바름은 천적 등차에서 선으로부터 오는 진리를 충분히 지각함을; 오른 엄지손가락에 피를 바름은 영적 등차에 있는 총명을; 그리고 오른 엄지발가락에 피를 바름은 천적 천국이나 거듭나는 과정에 있는 사람에게 있어서 자연적 등차 또는 최말단에 있는 총명을 각각 말한다. A.C. 10059, 10060, 10061, 10062, 10063.

24절. 그리고 그는 아론의 아들들을 데려왔다, 그리고 모세는 그들의 오른쪽 귀의 끝에, 그리고 그들의 오른손의 엄지손가락에, 그리고 그들의 오른 발의 엄지발가락에 피를 발랐다

영적 의미

또한 낮은 천국을 위해 준비되고 있는 이들에게도 위와 같은 질서에서 지각과 총명을 주신다; 두 경우 모두 제 나름대로의 형태나 등차에서 예배가 있다해도 선과 진리의 결합은 꼭 있어야 한다.

세부적 영적 의미

아론의 아들들은 하급에 속하는 천국에 있는 이들을; 제단 주변에 피를 뿌림은 갖가지 형태나 등차의 예배에 있는 선과 진리의 결합을 각각 명시한다. A.C. 9946, 10099, 10047.

25절. 그리고 그는 지방, 그리고 꼬리 지방, 그리고 내장 위에 있는 모든 지방, 그리고 간의 대망, 그리고 두 콩팥들, 그리고 오른쪽 넓적다리를 가져왔다.

영적 의미

그러나 모든 천적-영적 선, 외면, 외부, 내면; 식별함 또는 깨끗케 하는데 사용되는 모든 영적 진리, 그리고 이 진리가 선과 결합함, 그리고 천국적 결혼에서 내면의 모든 진리가 선과 결합한다;

세부적 영적 의미

기름은 천적인 모든 것과 영적 선을; 꼬리에 붙어 있는 지방이란 진리의 선 또는 외면의 선을; 내장에 붙은 지방은 외부의 선을; 간에 붙어 있는 대망은 내면에 있는 선을; 두 콩팥과 거기에 붙어 있는 지방은 식별하게 해주고 깨끗하게 하는 모든 영적 진리, 그리하여 선과 결합하는 진리들을; 그리고 오른쪽 넓적다리는 천국적 결혼으로 선과 결합된 내면의 진리를 각각 말한다. A.C. 10033, 10071, 10030, 10031, 10032, 10075.

26절. 그리고 주님 앞에 있었던 누룩 없는 빵의 바구니로부터, 그는 한 개의 누룩 없는 과자, 그리고 한 개의 기름 들어간 빵, 그리고 한 개의 속 빈 과자를 가져갔다, 그리고 그것들을 지방 위에, 그리고 오른쪽 넓적다리 위에 놓았다.

영적 의미

가장 깊은 천적 선 모두; 내면의 천적 선 모두; 그릇의 역할을 하는 감각 측면에 있는 최 말단의 천적 선 모두는 그 근원이 천국적 결혼을 통하는 신성한 선이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세부적 영적 의미

바구니는 그릇 역할을 하는 감각적인 것들을; 누룩 넣지 않은 떡이란 악과 거짓으로부터 순수해진 것을; 누룩 없는 과자 한 개란 가장 깊은 천적 선을; 기름 넣어 만든 과자 한 개란 천적 선의 모든 내용물을; 속빈 과자 한 개란 천적 선의 최말단에 있는 모든 것을; 그리고 이것들을 지방과 오른쪽 넓적다리에 얹음이란 위의 모든 것은 천적 결혼을 통해 신성한 선으로부터 존재함을 각각 말한다. A.C. 9996, 10080, 9992, 10077, 10078, 10079, 10033, 10075.

27절. 그리고 그는 전부를 아론의 손 위에, 그리고 그의 아들들의 손 위에 놓았다, 그리고 주님 앞에서 흔드는 바침을 위해 흔들었다.

영적 의미

이리하여 천적 천국과 영적 천국에 있는 모든 것과 교통되고, 그리고 생명있게 되고, 또는 주님으로부터 활력이 있게 된다.

세부적 영적 의미

이것을 모든 아론과 아론의 아들들의 손에 얹음이란 이것들이 주님께 속한 천국에 있는 것들임을 인정하고, 그것들 모두는 주님과 교통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함을, 그리고 흔들어 바치는 제물로서 주님 앞에서 흔든다는 것은 생명은 주님으로부터 얻는다는 것을 각각 말한다. A.C. 10082, 10083.

28절. 그리고 모세는 그들의 손으로부터 그것들을 가져갔다, 그리고 그것들을 태워 바치는 제물 위 제단에서 태웠다. 그것들은 달콤한 향기를 위한 성직 수임이었다. 이것은 주님께 불로 만든 바침이었다.

영적 의미

신성한 진리 또는 말씀을 도구로 해서 이상의 모든 능력들은 기쁨과 평화를 가져다주는 선한 생활의 예배로 주님께 봉헌되어야 한다. 이 예배는 순수한 사랑으로 주님께 드리는 예배이기 때문이다.

세부적 영적 의미

여기서 모세는 신성한 진리를; 태워 바치는 제단 위에서 태운다는 것은 선한 생활이라는 예배로 주님께 봉헌함을; 달콤한 향기, 또는 쉼의 냄새를 위해 주님께 봉헌함이란 환희와 평화의 상태를; 그리고 주님께 불로 만들어 바침이란 순수한 사랑으로 주님을 예배함을 각각 말한다. A.C. 7010, 10052, 10054, 10055.

29절. 그리고 모세는 가슴을 가져왔다, 그리고 주님 앞에 흔드는 바침을 위해 그것을 흔들었다. 이것은 성직 수임의 수양으로부터의 모세의 몫이었다. 주님께서 명하신 대로 (였다).

영적 의미

그런고로 영적 천국에 있는 신성한 진리 속의 모든 사람은 주님으로부터 온 선행의 능동적 삶을 영위한다. 그 이유가 선행은 영적 인간, 영적 천국의 필수요소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곳은 주님으로부터 유입되는 신성한 진리를 수단으로 한다.

세부적 영적 의미

모세가 가슴(breast)을 가져가서 주님 앞에서 흔들어 바침을 위해 그것을 흔든다는 것은 영적 천국에서 신성한 진리들에 있는 모든 것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행의 능동적인 삶을 영위한다는 것을; 성직 수임의 제물로 바친 수양 고기 중에서 모세의 몫이란 선행은 영적 인간의 필수요, 영적 천국의 근본이다는 것; 그 이유가 모세는 신성한 진리들 가운데 있는 천국의 사람을 말하기 때문이다. 가슴은 선행을 말한다. 성직 수임(채움)의 수양(the ram of filling)은 영적 인간이 활동면이나 능력에서 충분히 거듭난 상태를, 그리고 주님께서 모세에게 지시하신 대로란 주님으로부터 유입되는 신성한 진리를 수단으로 함을 각각 말한다. A.C. 10087, 10089, 10090, 10087, 10057, 7010, 5486, 2001.

30절. 그리고 모세는 기름붓는 기름을, 그리고 제단 위에 있었던 피를 가져왔다, 그리고 그것을 아론 위에, 그의 옷들에, 그리고 그의 아들들 위에, 그리고 그와 더불은 그의 아들들의 옷들에 그것을 뿌렸다. 그리고 아론, 그의 옷들, 그리고 그의 아들들, 그리고 그와 더불은 그의 아들들의 옷들을 신성하게 했다.

영적 의미

더욱이 신성한 진리를 도구로 해서 높은 천국과 낮은 천국에서 진리와 선의 상호적인 결합이 거행되어 인간 통째로 천적 선과 진리 차원에서, 영적 선과 진리 차원에서 성별된다.

세부적 영적 의미

모세는 신성한 진리를; 아론과 그의 옷(garment)들은 상급의 천국에 있는 신성한 선과 신성한 진리를; 그의 아들과 그들의 옷들은 하급에 천국에 있는 신성한 선과 신성한 진리를; 뿌림이란 결합을; 기름과 피 모두를 사용했다함은 하나는 신성한 진리를, 다른 하나는 신성한 선을 표현하도록 해서 상호간의 결합을 말하고 있다. 이리하여 천적 선과 진리, 영적 선과 진리는 측면에서의 거룩함을 뜻하고 있다. A.C. 7010, 10067, 10068, 10065, 10066, 10069.

31절. 그리고 모세는 아론에게 그리고 그의 아들들에게 말했다, 만남의 천막의 문에서 고기를 끓이라. 그리고 거기서 그것과 성직 수임의 바구니에 있는 빵을 먹어라, 내가 아론과 그의 아들들에게 그것을 먹을 것이다고 명령하여 말한 대로 이다.

영적 의미

더불어 천적 인간과 영적 인간에게 신성한 진리를 수단으로 지각이 있어진다. 그러므로 준비가 있어야 하는 바, 이는 주님을 인정함과 천국을 통해 그분의 유입이 있다는 것을 인정함으로 해서 선을 자기 것 삼아야 하는 것이다. 이에는 신성한 질서에 따라 거듭나는 사람이라는 그릇 안에 있는 천적, 영적 선 모두까지 포함된다.

세부적 영적 의미

여기서 말함(saying)은 지각을; 모세는 신성한 진리를; 아론과 그의 아들들은 천적, 영적 인간을; 그 이유는 그들이 관계적으로 선과 진리를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만남의 천막의 문에서 고기를 끓인다는 것은 주님을 인정하고 그분의 영향이 천국을 통해 있음을 인정함으로 해서 선을 자기 것 삼는 준비를; 먹는 것은 자기 것 삼는다는 것을; 고기는 영적 선을; 빵은 천적 선을; 바구니는 그릇 또는 외적 측면의 감각들을, 아론과 그의 아들들이 그것을 먹는다는 것은 천적, 영적 인간이 자기 것으로 삼는다는 것을; 모세에게 지시하셨다는 것은 신성한 질서에 의거함을 말한다. A.C. 1791, 1822, 7010, 9946, 10105, 2356, 3540-3, 2187, 10106, 10107, 5486, 10119.

32절. 그리고 고기와 빵의 남는 것을 너희는 불로 태울 것이다.

영적 의미

주님으로부터 와서 자기 것으로 삼지 않은 모든 선은 자아 사랑에 속한 것인 바 반드시 거절해야 하고 일소시켜야 할 것이다.

세부적 영적 의미

남은 고기와 빵을 불에 태운다는 것은 주님으로부터 온 자기 것이 되지 않은 모든 선은 자아 사랑인 바 반드시 거절되고 일소시켜야 한다는 뜻이다. A.C. 10114, 10115.

33절. 그리고 너희는 성직 수임의 날들이 충만되어질 때 까지, 칠 일 동안 만남의 천막의 문으로부터 나가지 말 것이다, 그 이유가 그는 너를 칠 일 동안 신성하게 할 것이기 때문이다.

영적 의미

주님의 인간이 신성이 되심 같이 인간의 거듭남도 모든 국면에서 충만되고 완전해야 한다. 그러하면 거듭난 사람은 천국적 삶을 영원히 즐기게 된다.

세부적 영적 의미

성직 수임이 진행되는 칠 일 동안 만남의 천막의 문을 나서지 말라는 것은 주님의 인간이 신성이 되심과 인간의 거듭남은 모든 국면에서 반드시 충만되고 완성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의식이 칠 일 간 계속 된다는 것은 거듭나는 사람은 천국 상태를 영원히 즐기게 된다는 뜻이다. A.C. 2356, 3540-3, 10102, 10103, 10460.

34절. 이 날 행하여졌던 것 같이 그렇게 주님은 너를 위하여 보상을 만들라고 명령하셨다.

영적 의미

거듭남의 모든 상태는 모든 악에서 해방되고 주님과 재회하는 모든 과정과 그분의 형상을 표현하는 것이고, 이 과정들은 그분을 섬기려고 전력을 다하는 천적인 헌신을 수단으로 한다.

세부적 영적 의미

보상을 만드는 의식을 오늘 한 것을 본 따 그대로 하라고 주님이 명령하셨다는 것은 거듭남의 모든 상태, 그 형상 면에서 전 과정을 표현하는 것임을 말하는데 그 이유는 성직 수임(식)은 칠 일 간 매일 거행하게 되어 있기 때문이고, 숫자 일곱은 “규모가 크든 작든 시작부터 끝까지 모든 기간”을 말하기 때문이다. A.C. 10127, 10407.

35절. 그리고 만남의 천막의 문에서 너희는 낮과 밤 칠 일 동안 거주할 것이다, 그리고 주님으로부터의 책무를 준행할 것이다, 그래야 너희는 죽지 않는다. 그 이유는 내가 그렇게 명령했기 때문이다.

영적 의미

더욱이 거듭나는 사람은 주님을 인정하는 것과 그분께서는 신성이 되심을 수단으로 인간 구원을 위해 천국을 통해 역사 하신다는 것을 인정하는 일이 결코 중단되어서는 안 된다. 이 일은 마음이 밝은 상태일 때이든 희미한 상태일 때이든 모든 상태에서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해서 그는 주님의 법도를 충실히 이행하게 되고 그분과의 협동으로 영적 죽음에서 구원된다.

세부적 영적 의미

만남의 천막의 문이란 주님을 인정하고 그분의 역사하심이 천국을 통해 있어짐을 인정하는 것을, 문 앞에서 밤, 낮으로 칠 일 간 머무른다는 것은 충만되고 완전하게 인정하는 것인 바 항구적으로 인정함을, 밤과 낮이란 밝은 모든 상태와 희미한 모든 상태를, 주님의 분부를 지킨다는 것은 주님의 법도를 충실히 이행하는 것을, 죽지 않음이란 영적 죽음에서 해방됨을, “이것이 주님께서 명령하신 것”이란 주님과의 협동을 말하는데, 그 이유는 유입에 의거한 행동이 강압에 의해서가 아닌 각자가 흡족한 가운데 행해지는 것, 진실로 주님의 명령 또는 분부를 지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A.C. 2356, 3540-3, 10102, 10103, 936, 9149, 81, 6105.

36절. 그리고 아론과 그의 아들들은 주님께서 모세의 손을 수단으로 명령하셨던 모든 것들을 행했다.

영적 의미

이와 같이 해서 주님의 인간은 신성이 되시고, 인간은 통째로 거듭나는데 이 거듭남은 신성한 말씀에서 기술하는 바대로의 상응과 유입에 의해 이루어진다.

세부적 영적 의미

아론과 그의 아들들이 주님께서 모세를 시켜 지시하신 대로 행한다는 것은 주님의 인간이 신성이 되심, 인간의 거듭남, 모두는 유입과 상응을 통한 협동을 수단으로 함을 명시하고 있다. A.C. 5486, 6105.

8장의 종합적 고찰

이 장 전체는 일반적으로 볼 때 내적 의미에서 출애굽기 29장과 거의 비슷하다. 물론 그 해석 역시 같아서 두 장 모두는 주님의 인간이 신성이 되심과 인간의 거듭남에 관해 서술해 주고 있다. 그러나 세부 사항에서 상이한 점이 있는 바 이에 주목해서 살펴볼까 한다.
그러므로 관찰하게 될 첫 사항은 각 장이 소개 또는 서문으로 시작된다는 점에 대해서이다. 출애굽기는 첫 세 절이 서문에 해당되고 본 장의 경우는 첫 다섯 절 까지이다. 양 책의 서문 안에 있는 일반 진리는 주님의 인간이 신성이 되신 것, 그리고 주님께서 인간의 내면에 속한 것을 통하여 역사하시고 인간은 외부 사항에서 협동함으로 거듭난다는 것이다. 전자는 수소, 두 수양, 누룩 넣지 않은 빵으로, 후자는 바구니로 표현되고 있다. 셋째로 우리가 보게 되는 점은, 양 책의 경우에서 희생 제물에서 바친 것들은 인간이 주님으로부터 받은 보다 높은 애착들을 명시한다는 것, 그래서 거듭남의 질서에 따라 명명되고 있는 바, 인간에게는 외적 측면에 속한 것들로부터 내적 측면으로 나타나고 있다. 또한 온 회중이 만남의 천막의 문에 모인다는 것은 주님을 인정함으로 하나가 되는 인간의 보다 낮은 애착들을 표현하고 이 애착이 천국 삶의 길을 가는 시작임을 표현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주목해 볼 만한 것은, 아론과 그의 아들들이 계속 두 가지 측면에서의 표현을 계속해 가고 있다는 것, 즉 주님으로부터 즉각 진행되는 신성한 선과 신성한 진리 측면과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에 관한 원리들을 받는 그릇인 교회 속의 사람들 측면을 이중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한편 양 책 서문에서 강조하는 것은 주님의 뜻은 행해져야 한다는 것이다. 보다 낮은 삶에서 보다 높은 삶으로의 승강으로, 보다 높은 삶을 보다 낮은 삶 안에서 표현하는 장엄한 수단은 순종인 바, 이 순종이 출애굽기에서는 첫 절에, 레위기에서는 마지막 절에 언급되고 있다. 순종이 언급되는 구절이 배열상 차이가 있는 것은 사랑이 우리를 인도하는 수단이 될 때는 첫 번째 되지만 사랑의 상태에 대한 결과를 나타낼 경우 마지막이 되기 때문이다.
이제 세부 사항들을 살펴보기로 하자. 양 책의 각각으로부터 배우게 되는 것은, 악이나 잘못들로부터 순수해지는 것이 주님의 인간이 신성이 되심과 인간의 거듭남 모두에서 첫 번째 일이라는 것인데, 이것이 아론과 그의 아들들을 물로 씻기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주님에게는 깨끗하게 해야 할 그분 자신에 관한 어떤 악도 없다. 오로지 어머니 쪽 생명으로부터 온 악에 대한 경향성만을 지녔을 뿐이다. 그런고로 그분의 경우에서 씻는다는 것은 악에 대한 경향성들을 완전히 제거하는 것, 어머니 쪽의 생명을 제거하는 것을 말하게 되고 이 제거의 결과란, 참으로 신성한 생명 자체가 몸(Body)이라는 최말단 평면에로 내려오는 것이요, 이 몸은 인간의 몸처럼 “썩은 것이 보이는” 상태일 수 없다. 그 이유는 신성에 근원되어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맨 먼저 신성한 존재에 의해 물체가 생산되고, 두 번째로 그분의 생명에 의해 그 물체는 형태를 갖추고 조직화된다. 이런 점에서 이 물체는 불멸이다. 이런 생각이 우리로 알 수 있게 해주는 것은, 물질적인 것과 구별되는 신성한 실체인 것에 관한 속성이다. 그 반면 인간은 부모로부터 오는 악에 대한 유전적 경향성들, 뿐만 아니라 실제의 악도 가지고 있다. 인간은 천국적 삶을 충분히 받기 전, 물과 상응되는 말씀의 외부 측면에 속하는 진리들을 자기 삶에 적용해감으로 계속해서 깨끗해져야 한다. 참으로 모든 사람은 “선행을 배우기” 전에 “악행을 중단하는” 것을 먼저 이룩해야 한다. 이 대목에서 주목해둘 것은, 인간의 경우 저질러진 악과 잘못들이 실지로 철폐되는 것은 아니고 당사자와 더불어 영원히 남아 있는다. 다시 말해 진실된 회개의 효과는 악을 절대적으로 파괴시켜 버리는 것은 아니고 오로지 더 이상 눈에 나타나지 않게 제거된다는 말이다.
회개로 악이 제거되는 효과가 이제 등장한다. 이 효과는 말씀을 통해 주님으로부터 오는 천국적 진리들을 인정하여 수용하며 사랑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사항들이 아론과 그의 아들들의 옷들로 표현되어지고 있는데 이에 대해서 좀 더 주목해보아야 하리라 생각된다. 위 사항에 대해서 레위기의 줄거리는 출애굽기의 것보다 조금 더 다양하다. 그리고 말씀의 글자는 내적 의미에 관한 명확한 목적 없이는 어떤 서술로도 존재하지 않는 바, 레위기가 출애굽기보다 옷에 관해 더 서술된 것에 관한 의미도 살펴두는 것이 타당하리라 생각된다. 위 문단 초두에서 말한 대로 출애굽기는 주님의 인간이 신성이 되심, 그리고 교훈을 받고 있는 이들, 다시 말해서 선 쪽으로 인도하는 진리의 상태 안에 있는 이들과 관련된 인간의 거듭남을 묘사하고 있다. 레위기 역시 대체로 비슷하나 특별한 것은 선의 상태 안으로 진입된 행동을 하는 이들의 거듭남을 더 묘사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런 이유를 우리는 옷들을 명명하는데서 발견하게 된다. 이를 영적으로 보면, 진리가 배열되는 점에 관한 것이다. 레위기의 경우는 출애굽기보다 옷을 명명하는데 있어 보다 더 세밀하고 충만되어 있다. 예를 들면 레위기의 경우, 정규적 순서로 되어 있는 바, 그 순서는 띠를 가진 상의(속옷), 길고 품이 큰 옷(겉옷), 에봇, 에봇의 띠, 이 뒤를 이어 가슴받이, 우림과 둠밈, 관, 금판이다. 출애굽기의 순서는, 상의(속옷), 길고 품이 큰 옷(겉옷), 에봇, 가슴받이, 에봇의 띠, 이 뒤를 이어 관과 거룩한 왕관이다. 출애굽기의 경우 왜 상의의 띠는 생략되었을까? 그리고 왜 에봇의 띠 앞에서 가슴받이가 명명되었을까? 또는 왜 에봇의 띠 뒤에 가슴받이가 명명되지 않았을까? 영적 왕국에서 상의의 띠는 가장 깊은 사랑의 끈을 말한다. 그리고 에봇의 띠는 사랑의 바깥 끈을 말한다. 그러므로 상의의 띠는 생략된 반면 에봇의 띠는 언급되는 바, 그것은 영적 인간의 초기 경험에서는 내적인 것의 영향을 상대적으로 외적인 것 보다 덜 받는 바 외적 애착들의 영향 하에 더 있어진다는 것을 암시해 주고 있다. 그리고 레위기서의 경우 두 띠의 배열이 적합하게 명명되고 있음을 암시하는 바, 인간의 거듭남이 더 진전된 상태에서는 외적 끈 보다 내적 끈에 의해 더 인도된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내적인 것들이 더 완전하기 때문이다. 가슴받이에 관련해보면, 가슴받이는 신성한 선으로부터 빛이 나는 신성한 진리를 말한다, 그러므로 띠는 사랑에 속하는 공통된 끈을 뜻한다. 두 번째로 명명되는 레위기의 경우, 거듭나는 후기 단계에서는 사랑이 통치하는 힘이 된다는 것을 뜻한다. 진실로 통치하는 힘은 사랑이다. 특히 최말단 사항들 즉 행동으로 표현되는 사랑, 이 사랑은 가장 낮은 등차로부터 가장 높은 등차까지에 이르는 모든 선과 진리를 하나로 묶어 준다. 사랑이 통치할 때 또 다른 결과가 뒤따라오는데 그것은 진리를 밝히 알게 하는 것(계시)이 더욱 눈부시게 빛난다는 것이다. 이 사항은 왜 우림과 둠밈이 출애굽기에서는 생략되고 레위기에서는 언급되는지 까지 설명해준다. 관과 금판이 두 책 모두 마지막 순서에서 언급이 있게 되는데, 이는 각기 신성한 지혜와 총명, 그리고 신성한 인간으로부터 오는 계발을 말한다. 이렇게 설명된다. “신성한 선이 신성한 진리 안으로 유입됨에 따른다”는 말이다. 그 이유가 레위기에서는 금판이 거룩한 왕관이라고도 불리고 있다. 이에 비해 출애굽기에서는 거룩한 왕관만 언급하고 있다. 이런 사항이 보여주는 바는, 거듭남에 있는 계발의 차원에서 진리가 선으로 인도하는 것은 선을 직접 실행하는 상태에 비해 크지 않다는 점이다. 또 하나 주목되는 것은, 히브리 어순에서, 그리고 각 단어의 상응에 의거해 보면, “금으로 된 판(plate of gold)”은 선에서 나오는 진리를, “거룩함의 왕관(crown of holiness)”은 진리로부터 나오는 선을 뜻하는 바, 전자는 선이 더 완전한 상태를, 후자는 훈육되는 상태인 바 전자보다 덜 완전한 선의 상태이다. 본문의 경우 위 두 표현이 동시에 표현되었는데, 이는 진리와 선의 결합, 충만함을 암시해 주고 있다. 마지막으로 주목되는 한 가지란, 스웨덴볽이 출애굽기의 이 부분에 대해 시리즈별로 내적 의미를 살피는데 한 가지 생략된 부분이 나타나고 있다는 점이다. 그는 자기 방식대로 올바르게 29장의 4-9절을 인용한 후 그는 각 문장의 영적 의미에 대해 서술하고 있다. 그러나 제 5절의 마지막 부분, 즉 “에봇의 띠로 그를 매어 주어라”에 대한 의미를 주지 않고 있다. 이는 그의 저서 천국의 신비 9837항에 의거 생각하면, “일반적인 끈, 이를 수단으로 내적인 것들을 서로 연결을 지으면서 하나로 묶여짐”을 의미한다. 그리고 “바깥쪽 끈, 에봇은 영적 왕국의 외적 측면을 의미한다.” 제 9999항에 있는 시리즈에서의 내적 의미와 제 10006, 10007항에서 각 용어에 대한 의미가 증거되고 설명되고 있고, 더욱이 제 5절 끝은 글자적 의미로 보아도 고려해야 할 문장에 해당된다. 그러므로 해설이 생략된 끝 부분 역시 영적 의미에서도 그 절과 부합되는 의미들이 뒤따라야 하는데 왜 끝 부분에 대한 영적 의미가 생략되었을까? 말씀의 글자에는 어떤 글자 하나도 불필요한 게 없고 첨가해야 할 필요가 대두되는 곳도 있을 수 없다. 그러면 그 끝 부분에 대한 설명은 무엇일까? 10006항에서 에봇에 관해 말하는 내용에는 에봇의 띠에 관한 것도 분명히 포함되고 있다. 참고로 주어진 9824항을 숙독해 보면 나타나기도 한다. 이 외에도 “아론과 그의 아들들”의 띠에 관한 언급이 9절에 있는 바, 이 구절의 주석은 제 5절의 생략된 주석을 보충해 줄 것으로 여겨진다. 더욱이 스웨덴볽은 10006항에서 9824항을 참고토록 언급하고도 있다. 따라서 생략된 것은 부주의로 있어졌던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레위기 8장 7절은 에봇이 “속에 있는 모든 것을 에워쌈”이라는 의미인데 이 의미가 그 단어의 어원에서 유래됨을 보여주고도 있다. 그러므로 띠는 에봇의 한 부품으로 생각해야 하는 바, 그 띠에 관한 내적 의미 역시 에봇에 관해 말해진 것에 포함되고 있다.
두 책에서 차이가 있는 항목들을 비교하면서 생각하는 가운데 옷 다음에 관찰되는 것은 기름 붓는 것에 관해서다. 이것 역시 출애굽기 보다 레위기가 더 충분히 기술해놓고 있다. 그 이유는 선의 직접적 실행은 삶의 모든 등차, 가장 높은 것에서 낮은 것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성별되도록 해주기 때문이다. 아론의 머리에 기름을 붓는 출애굽기의 의미는 가장 높은 의미인 위대한 진리를 표현하는 것인 바, 즉 주님의 인간은 그분이 임신되고 출생함으로부터 본래 있었다는 것, 그 인간의 모든 등차 안에 신성이 전적으로 존재했다는 것을 표현한 것이다. 그러나 레위기에 기술된 바대로 살피면, 신성이 되시는 과정을 수단으로 주님의 인간은 실제적으로, 더 충분히 신성이 되셨다는 것, 계속되는 질서 속에서 선과 진리의 결합이 있어왔다는 것을 표현하고 있다. 이 계속적인 질서 속에서의 결합이 성막과 그 안의 모든 것, 제단과 거기에 딸린 모든 기구, 물두멍과 그 받침들에 기름 붓는 것으로 나타내고 있다. 이 뒤를 계속 이어 아론의 머리에 기름을 부어 그를 성별하고 있다.
아론 자신의 옷과 그의 아들들의 옷은 천적 측면에서 진행되어 나오는 신성의 영적 측면과 제각기 보다 낮은 등차에 있는 영적 진리들을 의미한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이제 제물에 관한 사항을 생각해 보기로 하자. 자연적 인간의 깨끗해짐이 수소와 그 수소 주변에 깔린 줄거리로 묘사되고 있는데, 두 책 모두 같은 순서로 되어 있다. 그리고 내적 인간의 깨끗해짐이 태워 바침의 제물로 바쳐지는 첫 수양으로 나타내고 있는 바, 이에 대해서는 두 책 모두 비슷하므로 세부사항에 대한 설명은 건너뛰기로 한다. 그러나 두 번째 수양의 바침은 살펴야 할 것으로 본다. 수양 두 마리가 제물이 되는 것이 먼저 우리로 이상하게 여기게 할는지 모른다. 그 이유는 첫 수양이나 둘째 수양이나 같은 상응을 가지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수양이 두 번 반복되는 이유는 인간의 서로 다른 두 상태들이 표현되기 때문인데, 첫 수양은 선 쪽으로 인도하는 진리를, 둘 째 수양은 선으로부터 진행되는 진리를 표현한다. 이를 바꿔 말해보면, 전자는 거듭나는 과정에 있는 인간의 삶을, 후자는 진리를 수단으로 삼아 선을 행동하기 시작할 때인 거듭난 이후의 인간의 삶을 말한다. 그런고로 해서 두 번째 수양은 성직 수임의 수양(the ram of consecration, the ram of fillings, the ram of the filling of the hand)이라 불러지고 있다. 이런고로 꼭 언급하고 넘어가야 할 중요한 생각이 있게 된다. 현재 우리는 말씀의 영적 의미를 정확하게 이해해서 해석하고 있다고 말할 수 없고, 단순히 글자 의미에 있는 각각의 용어들에 대한 의미와 상응을 알아보는 수준일 따름이다. 다시 말해서 넓은 측면에서의 영적 사항들을 어느 정도까지만 파악할 뿐이다. 그 이유가 어떤 세부사항의 경우에서는 높은 영감을 필요로 하는 곳이 있기 때문이다. 이 사항은 오늘 본문의 경우에도 예외없이 적용되고 있기도 하다. 그래서 스웨덴볽의 저서가 우리가 살피는 대목들을 분명하게 구분해주지 않을 경우, 주님의 계속적 계발의 도움이 없을 경우 어떤 대목의 경우는 감추어 놓인 의미를 발견하기란 거의 불가능한 실정이다. 그래서 어떤 이들의 경우, 실토하는 것은 주님이 특별히 임명한 사람, 즉 스웨덴볽과 같은 사람이 아니고서는 그런 난이한 대목에 대해 지각할 사람이 없을 것이라고 보고 있다. 그렇긴 해도 경건하고 조심스럽게 말씀을 연구하는 보통의 사람이 겸손한 마음으로 주님께 의지하고 있다면 어려운 대목에 대한 이해가 불가능해야 할 특별한 이유는 없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어찌됐든 의심치 않는 것은 취급되는 본문의 시리즈와 비슷한 대목의 구분을 알게 될 때, 어떻게 그 안의 각 세부사항들이 그 안의 진리들을 확증할 수 있게 병합되는가 까지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23절은 선으로부터 행동한 일반적인 결과, 즉 진리들을 지각하는데 따른 일반적인 결과를 기술하고 있다. 그리고 사용함(uses)이 있기 위해 최말단 사항들에 진리가 더 강하게 작용하는 것도 묘사해놓고 있다. 이런 부류의 사람들은 “거듭나는 과정에 있는 사람, 그리고 천적, 영적 천국에 있는 사람”이라고 말해도 타당할 것으로 본다. 그 이유는 거듭나는 과정에 있는 사람의 경우도 선으로부터 행동하는 것, 다시 말해 이기적 동기가 전혀 혼합되지 않은 선행으로부터의 기쁨을 잠깐이나마 맛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제 29절까지에 이른 구절들을 살펴보자. 이 부분에서는 선으로부터의 기쁨을 어떻게 충분히 실감하느냐가 기술되고 있다. 그리고 천적 인간에 의해서는 그런 실감이 주님으로부터임을 충분히 인정하여 수용한다는 것, 그리고 그 실감이 영적 인간에 의해서는 더욱 활성화되어 증가된다는 것이다. 이런 사항들이 흔들어 바치는 넓적다리와 가슴(갈비), 그리고 그에 수반된 각종 제물로 나타내고 있다. 이 모든 것이 통째로 주님께 봉헌되어야 하는 것들이다.
이제 특별히 흥미를 갖게 하는 구절에 다가서고 있다. 본문 30절은 최고 높은 천국에서 있어지는 것, 신성한 인간 안에서 신성한 진리가 신성한 선과 상호적으로 하나되는 것, 그리고 더 낮은 천국에서도 이와 같은 하나됨이 있다는 것을 기술해 주고 있다. 그 결과 이 절은 인간 각 개인이 어느 천국에 속하든 간에 거듭나는 사람에게는 각자 속에서 선과 진리의 상호적인 결합이 있다는 것에 대해서도 기술해놓고 있다. 주님의 측면에서 신성이 인간에, 인간이 신성에 상호적으로 하나를 이루는 사항은 그분이 세상에 계셨을 때 그분 스스로의 능력에 따라 결과되었다. 그 이유는 신성이 그분 안에 계셨고, 그 신성이 주님의 참 영혼, 생명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사항을 인간 측면에서 생각한다면 위의 상호적인 하나됨(reciprocal union)을 주님 측면의 하나됨과 구별하기 위해 우리는 결합(conjunction)이라 부른다. 그 이유는 인간은 자기 스스로 생명을 가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간이 주님에게 자신을 결합한다 라고 말해질 때, 그것 역시 바깥쪽 나타남에 불과하다. 이로부터 우리가 반드시 짚어보고 넘어가야 할 점이란, 주님께서 과학물, 지식, 진리들을 수단으로 하시어 그분 자신에 인간이 결합되도록 하신다는 것이다. 바꿔 말하면 선 자체가 진리와 결합하도록, 그리고 진리가 선과 결합되도록 하는 역사가 거듭나고 있는 사람 안에서 이루어진다. 이 신비함에 관한 지식이 우리에게 어찌됐든 필요하다. 그 이유가 어느 누구도 하느님이 다 알아서 해주겠지라고 읊으면서 만사를 무익하게 처리하거나 자기 손을 내려놓는 태도에 대한 답변이 되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은 악을 금하고 진리를 수용하는데 있어서 마치 자신 스스로 해내는 듯 행동해야만 한다. 그 이유가 이런 조건에서만 주님께서 각 사람 안에서 진리가 선과 상호 결합하는 결과가 있도록 역사하실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내용이 30절에서 모세가 기름과 피를 가져다가 아론과 그의 옷에, 아론의 아들과 그의 옷에 뿌리는 묘사에 담겨 있다. 그러나 이런 질문이 있을는지 모른다. “언제 이런 상호적인 결합이 인간과 더불어 개시되는가?” 이 결합은 인간이 자신의 의식하는 상태에서 보편적인 진리를 확언하자마자 시작된다. 그리고 이 확언으로부터 세부적인 사항에 관련되는 진리들을 스스로 결정한다. 이 결정으로부터 그는 새로운 생활로 인도되기 시작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본문의 내용을 출애굽기의 내용과 비교해가면서 연구해 가면 각 책의 상호적인 결합이 서로 다른 위치를 점유하는 데에 대해 놀랠 필요는 없으리라 생각된다. 그 이유는 이런 상황이 거듭나는 사람에게 언제나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거듭남이 진행되는 정도에 따라 그 품성은 다양해질 것이다. 이런 이유로 출애굽기에서는 레위기의 8장 30절이 두 번째 수양 제물 앞에 높여져 있고 레위기의 경우는 수양 뒤에 놓여 있기도 하다. 여하튼 위 사항에도 내적 의미에 바탕을 둔다면 이유는 존재한다. 이에 대해서는 10067항에 충분한 설명이 있다. 이 항을 참조하면 이 상호적인 결합은 인간과 더불어 항구적이라고 선포되고 있고, 인간이 자기 스스로 악과 잘못들을 끊어버리는 정도만큼에서 정확하게 진리가 선과 결합되도록 주님이 역사해주신다는 생각까지 우리로 강하게 확증하도록 해주려는 경향이 있다. 그런 다음 출애굽기 29장 21절에서 묘사된 바와 같은 상호적인 결합은 레위기 8장 30절에서 묘사되는 것에 비해 보다 하급에 속한다는 것까지 입증해주는 경향이 있다.
31절부터 끝 절까지는 위에서 살핀 바 있는 상호적인 결합의 당연한 결과인 인간이 선을 자기 것으로 삼는 것에 관해 말하고 있는 바 이에 대해서는 더 자세한 설명은 굳이 요구되지 않을 것이라 본다. 한 가지 주목해 둘 것은 자기 것으로 삼는 것은 거듭나는 삶에서 관을 쓰게 되는 행동이요, 천사들에게 있어서 이런 행동은 계속적인 체험에 속한다. 이것이 성직 수임식은 칠 일간 거행된다는 말로 묘사되고 있다. 그리고 35절의 “죽지 않도록 주님의 분부를 지키라”는 권고는 출애굽기 29장 36절의 권고와 같은 일반적 진리, 화해의 칠 일 동안 매일 죄 바침의 제물로 수소를 바치라는 것, 즉 인간의 깨끗해짐은 천국에서 이든, 지상에서 이든 계속적으로 있어야 한다는 것, 아마 깨끗해지는 노력은 영원히 있어야 함을 지적하고 있다.
**********************************************************

레위기 9장

성경: 레위기 1장

1. 그리고 팔 일째 날에, 모세는 아론과 그의 아들들, 그리고 이스라엘의 장로들을 불렀다.
2. 그리고 그가 아론에게 말했다, 당신에게 죄 바침을 위해 수송아지, 그리고 태워 바침을 위해 흠이 없는 수양을 가져오라, 그리고 주님 앞에 그것들을 바치라.
3. 그리고 이스라엘 자손에게 너는 이야기하라, 말하기를, 너희는 죄 바침을 위해 수염소를, 그리고 태워 바침을 위해 일 년된 흠이 없는 송아지와 어린 양을 가져오라.
4. 주님 앞에 희생 제물로 바치기 위해 평화 제물을 위한 황소와 수양. 그리고 기름 섞은 식사 제물. 오늘 주님께서 너희에게 나타나시기 때문이다.
5. 그리고 그들은 모세가 명령한 것을 만남의 천막 앞에 가져왔다. 그리고 모든 회중은 나아와 주님 앞에 섰다.
6. 그리고 모세는 말했다, 이것은 주님께서 너희가 하라고 명령하신 것이다. 그리고 주님의 영광이 너에게 나타날 것이다.
7. 그리고 모세는 아론에게 말했다, 제단 가까이 나아오라, 그리고 당신의 죄 바침과 당신의 태워 바침을 바치라, 그리고 당신 자신을 위하여, 그리고 백성을 위하여 보상을 받게 하라. 그리고 백성의 봉헌을 바치라. 주님께서 명령하신대로이다.
8. 그리하여 아론은 제단으로 가까이 나아갔다, 그리고 죄 바침의 송아지를 죽였다. 이것은 자신을 위해 있었다.
9. 그리고 아론의 아들들은 그에게 피를 제출했다. 그리고 그는 피 안에 자기 손가락을 담궜다, 그리고 그것을 제단의 뿔들에 놓았다, 그리고 제단의 받침에 피를 부었다.
10. 그러나 죄 바침의 지방, 그리고 콩팥들, 그리고 간으로부터의 대망을 그는 제단 위에서 태웠다. 주님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대로이다.
11. 그리고 고기와 가죽을 그는 진영 밖에서 불로 태웠다
12. 그리고 그는 태워 바치는 제물을 죽였다. 그리고 아론의 아들들은 그에게 피를 전달했다, 그리고 그는 제단 빙둘러 그것을 뿌렸다.
13. 그리고 그들은 그에게 태위 바치는 제물, 조각 조각 된 (고기), 머리를 전달했다. 그리고 그는 제단 위에서 그것들을 태웠다
14. 그리고 그는 내장과 다리들을 씻었다, 그리고 그것들을 제단 위 태워바치는 제물 위에서 태웠다.
15. 그리고 그는 백성들의 봉헌을 제출했다, 그리고 백성을 위해 있었던 죄 바침의 염소를 가져왔다, 그리고 그것을 죽였다, 그리고 죄를 위해 그것을 바쳤다, 처음 같이 이다.
16. 그리고 그는 태워 바침의 제물을 제출했다, 그리고 그것을 규정대로 바쳤다.
17. 그리고 그는 식사 제물을 바쳤다, 그리고 거기로부터 그의 손을 채웠다, 그리고 그것을 아침의 태워 바침의 제물에 더하여 , 제단 위에서 태웠다.
18. 그는 또한 평화 제물로부터의 희생 제물, 황소와 수양을 죽였다, 이것은 백성을 위해서 였다. 그리고 아론의 아들들은 그에게 피를 전달했다, 그리고 그는 그것을 제단 빙둘러 뿌렸다.
19. 그리고 황소의 지방. 그리고 수양의 지방, 꼬리 지방, 그리고 내장을 덮은 지방, 콩팥들, 그리고 간의 대망.
20. 그리고 그들은 가슴들 위에 지방을 놓았다, 그리고 그는 제단에서 지방을 태웠다.
21. 그리고 가슴들과 오른쪽 넓적다리를 아론은 주님 앞에서 흔들어 바침을 위해 흔들었다. 모세가 명령했던 대로 이다.
22. 그리고 아론은 백성을 향하여 그의 손들을 들어올렸다, 그리고 그들을 축복했다. 그리고 그는 죄 바침의 제물로부터, 태워 바침의 제물로부터, 그리고 평화 제물들로부터 내려왔다.
23. 그리고 모세와 아론은 만남의 천막으로 갔다, 그리고 나왔다, 그리고 백성에게 축복했다.
24. 그리고 주님 앞으로부터 불이 나왔다, 그리고 제단 위에 있는 태워 바치는 제물과 지방을 태웠다. 그리고 모든 백성들이 이것을 보았을 때, 그들은 소리쳤다, 그리고 그들의 얼굴을 아래로 떨구었다.

영적 의미 요약

* 다양한 애착들 즉 자연적, 영적, 천적 애착으로부터 주님을 예배할 사람들이 준비해야 하는 새로운 선의 상태에 관한 가르침, 이는 신성한 인성 안에서 명백해지기 위해서이다. 1-4절.
* 위 목적을 위해 순종하게 되면 그의 이해성과 의지, 그리고 행동에는 더 많은 지각이 있게 된다. 5-6절.
* 전 후 순서에 따른 예배. 7-21절.
* 그 결과 즉 주님과 더 가까운 결합; 인간 부분에서 충분한 상호 결합; 신성한 사랑이 최말단까지 충만되어 우리에게 명백해진다. 그 결과 완전하게 밝히 알게 되면서 심오한 겸손의 상태를 생산한다. 22-24절

각 절의 영적 의미

1절. 그리고 팔 일째 날에, 모세는 아론과 그의 아들들, 그리고 이스라엘의 장로들을 불렀다.

영적 의미

인간이 선 가운데 있을 때 새로운 상태가 발생하는데, 주님으로부터의 신성한 진리가 그 사람의 천적, 영적, 자연적 등차에 작용된다.

세부적 영적 의미

…되는 날이란 주제가 바뀜을 명시한다. 팔 일째란 새로운 상태를, 모세란 주님으로부터 오는 신성한 진리를, 부름이란 유입과 주님의 역사(일)하심을, 아론과 그의 아들이란 천적 상태와 영적 상태를, 이스라엘의 장로들이란 자연적 상태를 각각 명시한다. A.C. 4978, 9227, 7010, 6752, 6840, 9946, 9421, 9422.

2절. 그리고 그가 아론에게 말했다, 당신에게 죄 바침을 위해 수송아지, 그리고 태워 바침을 위해 흠이 없는 수양을 가져오라, 그리고 주님 앞에 그것들을 바치라.

영적 의미

그리하여 천적 선으로부터 지각이 있게 된다. 이는 자신 스스로 가진 것은 악밖에 없음을 인정하면서 자연적 인간 안에 있는 순진의 선으로부터 주님을 예배하고 진리와 결합되는 것이다. 그 다음 영적 인간 또는 내적 인간 안에 있는 순수한 순진의 선으로 모든 선은 주님으로부터만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한다.

세부적 영적 의미

말함(saying)이란 지각을; 아론은 천적 선을; 수송아지는 자연적 인간 안에 있는 순진의 선을; 수컷은 진리를; 죄 바침의 제물은 자신 스스로부터는 악밖에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인정함을; 태워 바침의 수양은 내적 인간 안에 있는 순진의 선을; 흠이 없음이란 순수한 것을; 주님 앞에 그것을 바침이란 모든 선은 주님으로부터임을 인정하는 것을 각각 명시한다. A.C. 1791, 1822, 9946, 2830, 9391, 725, 3400, 10042, 7837, 9293.

3절. 그리고 이스라엘 자손에게 너는 이야기하라, 말하기를, 너희는 죄 바침을 위해 수염소를, 그리고 태워 바침을 위해 일 년 된 흠 없는 송아지와 어린 양을 가져오라.

영적 의미

위에 이어지는 가르침이 영적 인간에게 그가 지각한 것을 통해 주어지는 바, 주님을 예배함은 선과 결합된 신앙의 진리로부터, 인간 스스로는 악밖에 없음을 인정하면서, 모든 선은 주님으로부터만 존재함을 인정하되 그 인정함은 외적, 내적 인간 양 측면에서 충만되고 순수한 순진의 선으로부터 있어야 한다.

세부적 영적 의미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야기하여 말함(speak and say)이란 영적-자연적 인간에게 지시하심을; 죄 바침의 제물인 수염소란 선과 결합된 신앙의 진리를; 죄 바침의 제물은 인간 스스로는 악밖에 없다는 것을 인정함을; 송아지는 외적 측면에 있는 순진의 선을; 그리고 어린 양은 내적 측면에 있는 순진의 선을; 일 년 된 흠이 없는 것이란 모든 충만과 순수함 안에 있는 것을; 태워 바침이란 모든 선은 주님으로부터 있다는 것을 예배 안에서 인정하는 것을 각각 말한다. A.C. 2951, 7304, 4286, 4169, 725, 3400, 10042, 2830, 9391, 10132, 7839, 7837.

4절. 주님 앞에 희생 제물로 바치기 위해 평화 제물을 위한 수소와 수양. 그리고 기름 섞은 식사 제물. 오늘 주님께서 너희에게 나타나시기 때문이다.

영적 의미

또한 주님께 드리는 예배는 자연적 선, 영적 선의 측면에서 외부가 평화로운 상태에서 있어야 한다. 그리고 예배는 영적 선이 천적 선과 결합함을 통해야 하는 바, 그 이유는 새로운 상태 안에서 주님은 밝히 알려지기 때문이다.

세부적 영적 의미

평화 제물인 수소(ox)와 수양이란 자연적 선과 영적 선에 관련하여 외적 평화의 상태에서 주님을 예배하는 것을, 주님에게 제물로 삼음이란 인정함과 그에 따른 예배를, 기름에 반죽하여 만든 식사 제물이란 영적 선이 천적 선과 결합함을, 오늘 주님께서 나타나신다란 새로운 상태에서 주님이 자신을 드러내 보여 주신다는 것을 각각 뜻한다. A.C. 2180, 10042, 10097, 9293, 2177, 9227.

5절. 그리고 그들은 모세가 명령한 것을 만남의 천막 앞에 가져왔다. 그리고 모든 회중은 나아와 주님 앞에 섰다.

영적 의미

인간이 주님을 인정하고 그분의 역사가 천국을 통해 신성이 유입되어짐에 의거 있어짐을 인정할 때 실지로 위 구절의 사항은 거행된다. 그리하여 거듭나는 인간 속의 모든 능력들은 하나가 된다.

세부적 영적 의미

지시함은 유입을; 만남의 천막이란 천국들을; 주님 앞에 모든 회중이 서 있음이란 그분 앞에서 거듭나는 인간에 종속되는 모든 능력들이 하나가 되어 있음을 각각 뜻한다. A.C. 5486, 3540-3, 7830, 7843, 3136, 9293.

6절. 그리고 모세는 말했다, 이것은 주님께서 너희가 하라고 명령하신 것이다. 그리고 주님의 영광이 너에게 나타날 것이다.

영적 의미

한 가지 더 있게 되는 것, 뚜렷한 지각이 신성한 진리를 통하여 주어지는 바, 이와 같은 예배는 주님께서 받으신다는 것, 이 예배를 통해 주님은 자신을 드러내신다.

세부적 영적 의미

모세가 말함이란 신성한 진리를 통해 오는 뚜렷한 지각을; 주님께서 지시하신 일들이란 주님으로부터 유입됨으로 해서 그분에게 열납될 수 있다는 것을; 주님의 영광이 나타남이란 주님이 그분 자신을 분명하게 밝혀 주심을 각각 명시한다. A.C. 1791, 7010, 5486, 5922.

7절. 그리고 모세는 아론에게 말했다, 제단 가까이 나아오라, 그리고 당신의 죄 바침과 당신의 태워 바침을 바치라, 그리고 당신 자신을 위하여, 그리고 백성을 위하여 보상을 받게 하라. 그리고 백성의 봉헌을 바치라. 주님께서 명령하신대로 이다.

영적 의미

이로부터 지각이 천적 선 가운데 있는 이들에게 있게 되는 바, 주님께 접근하고 있다는 것, 이와 동시에 인간은 악밖에 가진 게 없으므로 무가치하다는 것, 모든 선은 주님으로부터만 있어진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 순서는 이러하다. 주님에 관련되는 사항은 인간은 신성과 하나임을, 인간에 관련되는 사항이란 우리는 악의 청산을 의지와 이해함 또는 내적 측면과 외적 측면에서 신성의 유입에 의거 실시함으로 주님과의 재회를 건설할 수 있다는 것이다.

세부적 영적 의미

모세가 아론에게 말함이란 신성한 진리로부터 천적 선 가운데 있는 이들에게 있게 되는 지각을; 제단으로 가까이 감이란 주님께 접근함을; 죄 바침의 제물을 바침이란 인간은 무가치하다는 것, 그 이유는 자신 스스로일 경우 악밖에 없기 때문이다는 것을; 태워 바침을 드림이란 모든 선은 주님에 속한다는 것을; 아론이 자신과 백성을 위해 보상을 만드는 것이란 주님에 관련될 경우 인간은 신성과 하나이다는 것을 인정할 수 있게 되고, 인간의 경우 주님과의 재회가 이해함과 의지 측면에서 건립될 수 있다는 것을; “너 자신과 백성”이란 의지와 이해함에 관한 사항임을; 그 이유는 아론은 선을, 백성은 진리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백성이 드리는 제물이란 주님을 예배함과 외적 인간 뿐만 아니라 내적 인간에서도 재회함을; “주님께서 지시하신 대로”이란 신성의 유입에 의거함을 각각 명시하고 있다. A.C 1791, 7010, 9946, 921, 6843, 3400, 10042, 10053, 10055, 259, 6451, 5486.

8절. 그리하여 아론은 제단으로 가까이 나아갔다, 그리고 죄 바침의 송아지를 죽였다. 이것은 자신을 위해 있었다.

영적 의미

천적 선 가운데 있는 이들은 자연적 인간 안에 있는 순진의 선으로부터 예배를 준비하고 자기 속에는 악밖에 없음을 인정함으로 해서 주님께 가까워진다.

세부적 영적 의미

이 구절에서 아론은 천적 선 가운데 있는 이들을; 가까이 나아감이란 주님께 접근함을; 죄 바침의 송아지를 잡음이란 자연적 인간 안에 있는 순진의 선으로부터 주님께 대한 예배를 준비하는 것을; 죄 바침이란 인간 스스로부터는 악밖에 없음을 인정함을 각각 뜻한다. A.C. 9946, 921, 6843, 10024, 2830, 3400, 10042.

9절. 그리고 아론의 아들들은 그에게 피를 제출했다. 그리고 그는 피 안에 자기 손가락을 담궜다, 그리고 그것을 제단의 뿔들에 놓았다, 그리고 제단의 받침에 피를 부었다.

영적 의미

선행 가운데 있는 이들은 신성한 진리가 천적 사랑을 통해 주님으로부터 존재한다는 것, 그리고 선으로부터 있는 진리에 능력이 존재함을 인정하는 동안, 진리가 선과 결합함이 예배에서 확증되어진다. 그리고 자연적 인간 역시 선으로부터 있는 진리의 유입을 최말단에까지 받게 된다.

세부적 영적 의미

아론의 아들들이란 선행 가운데 있는 이들을 명시하는데 그 이유는 그들이 “천국에서 신성한 선으로부터 오는 신성한 진리”를 통해 주님으로부터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한다는 것을; 아론이 손가락에 피를 찍음이란 선으로부터 온 진리의 능력을; 그 피를 제단 뿔들에 바름이란 진리가 선과 결합된 것을 예배에서 확증함을; 피를 제단 밑바닥에 쏟음이란 자연적 인간 역시 최말단에서 선으로부터 온 진리의 유입을 받는다는 것을 각각 명시한다. A.C. 9946, 9293, 10047, 7430, 10208.

10절. 그러나 죄 바침의 지방, 그리고 콩팥들, 그리고 간으로부터의 대망을 그는 제단 위에서 태웠다. 주님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대로이다.

영적 의미

이 모든 선, 이 선과 결합된 진리, 내적 측면과 외적 측면 모두에서 이것들이 주님으로부터 있어진 것임을 충분히 인정하여 그분을 섬기는데 헌납된다. 이 헌납은 예배에서 진리에 선이 유입됨에 의해 이루어진다.

세부적 영적 의미

지방은 천적 선을; 두 콩팥은 진리를; 간에 붙은 대망(기름덩어리)이란 외적 인간 또는 내적 인간에 있는 내면의 선을; 제단에서 사름이란 모든 선이 주님으로부터임을 충분히 인정하는 것, 그리고 그분을 섬기는데 헌신되는 것을; 주님이 모세에게 명령하셨다는 것은 예배에서 선이 진리에 유입됨에 의거한다는 것을 각각 명시한다. A.C. 10033, 10032, 10031, 10053, 10055, 2001, 5486, 7010.

11절. 그리고 고기와 가죽을 그는 진영 밖에서 불로 태웠다

영적 의미

자연적 애착들과 그 능력 안에 있는 악하고 거짓된 모든 것은 분리되어 자아 사랑과 결합되어야 하고 천국 삶의 실현에 존재해서는 안 된다.

세부적 영적 의미

진지 밖에서 고기와 가죽을 불로 태워버림은 자연적 애착들, 그로부터의 능력들에 있는 악하고 거짓된 모든 것은 분리시켜 자아 사랑과 결합되어야 하고, 천국적 삶을 실현하는 이들과 함께 존재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각각 명시한다. A.C. 10035, 10036, 10038.

12절. 그리고 그는 태워 바치는 제물을 죽였다. 그리고 아론의 아들들은 그에게 피를 전달했다, 그리고 그는 제단 빙둘러 그것을 뿌렸다.

영적 의미

모든 선이 주님으로부터만 존재함을 인정하는 천적 선으로부터 주님을 예배할 준비가 된 사람들; 영적 진리는 그분으로부터 천적 사랑을 통해 있어짐을 인정하는 선행 가운데 있는 이들; 이들에게는 진리가 선과 결합함이 모든 방식과 수준에서 확증되고 건설되어 진다.

세부적 영적 의미

아론은 천적 선 가운데 있는 이들을; 태워 바침의 제물을 죽임은 천적 선으로부터 주님을 예배하기 위해 준비함을; 태워 바침이란 모든 선이 주님으로부터임을 인정하는 것을; 아론의 아들들이 아론에게 피를 가져옴이란 선행 가운데 있는 사람들이 영적 진리는 천적 사랑을 통해 주님으로부터임을 인정하는 것을; 제단 주변에 뿌림이란 진리가 선과 결합하는 것은 모든 방법과 수준에서 존재한다고 확증하는 것을 각각 명시한다. A.C. 9946, 10024, 10053, 10055, 10047.

13절. 그리고 그들은 그에게 태위 바치는 제물, 조각 조각 된 (고기), 머리를 전달했다. 그리고 그는 제단 위에서 그것들을 태웠다

영적 의미

그리고 신성한 진리를 수단으로 선과 진리들은 따로 따로 구분되어 배열되는데 이것이 최말단 사항으로부터 가장 깊은 부분에 이르러 결과되어진다. 그리고 모든 선은 그분으로부터 존재함을 인정함으로 모든 것이 주님께 헌납되어진다.

세부적 영적 의미

태워 바침의 제물을 조각내어 머리와 함께 아론에게 드림이란 선과 진리는 따로 따로 구분되어 최말단으로부터 가장 깊은 데에 이르기까지 결과된다는 것, 그 이유는 아론의 아들들은 신성한 진리를; 머리가 포함되는 조각조각 냄은 최말단부터 가장 깊은 것에 속한 것을; 그리고 조각조각 냄이란 따로 따로 배열함을; 제단 위에서 태움이란 모든 선은 그분으로부터 있어진다는 것을 인정하여 모든 것을 그분께 헌신하는 것을 각각 명시한다. A.C. 9946, 10049-51, 10048, 10053, 10055.

14절. 그리고 그는 내장과 다리들을 씻었다, 그리고 그것들을 제단 위 태워바치는 제물 위에서 태웠다.

영적 의미

그러나 감각적이고 육적인 가장 낮은 선 그리고 자연적인 외면의 선은 그 선들 모두가 주님으로부터 임을 심정에서 인정함으로 해서 깨끗해진다. 그리하여 그 선들 모두의 근원도 주님께 돌리면서 그분을 섬기는데 헌납된다.

세부적 영적 의미

내장과 다리를 씻고 그것들을 태워 바침의 제물에 얹어 놓고 제단에서 태움이란 감각적이고 육적인 가장 낮은 수준의 선, 그리고 자연적 수준에 있는 외면의 선도 주님으로부터 임을 심정으로부터 인정하여 깨끗해지게 하고, 따라서 그것들 모두도 주님의 것임으로 그분을 섬기는데 바쳐져야 한다는 것을 각각 명시한다. A.C. 10049-51, 10055.

15절. 그리고 그는 백성들의 봉헌을 제출했다, 그리고 백성을 위해 있었던 죄 바침의 염소를 가져왔다, 그리고 그것을 죽였다, 그리고 죄를 위해 그것을 바쳤다, 처음 같이 이다.

영적 의미

또한 가장 깊은 곳에 있는 천적 선을 통해 자기들에 속해 있는 순진의 선으로부터 신앙의 진리 가운데 있는 이들은 자기들에 소속된 순진의 선으로부터 예배하되, 앞 절에서와 같이 자신들 스스로로부터는 악밖에 없음을 인정하여 자신을 스스로 준비되게 해서 예배한다.

세부적 영적 의미

아론은 가장 깊은데 있는 천적인 선을, 백성의 제물인 수염소는 신앙의 진리 가운데 있는 이들을, 수염소를 죽임은 준비함을, 죄를 벗기 위해 그것을 바친다는 것은 자신들 스스로는 악밖에 없음을 인정하는 것이 포함되어 있는 예배를, 먼저처럼 이란 이전의 경우에서와 같다라는 뜻임을 각각 나타내고 있다. A.C. 9946, 4169, 725, 10024, 3400, 10042.

16절. 그리고 그는 태워 바침의 제물을 제출했다, 그리고 그것을 규정대로 바쳤다.

영적 의미

모든 선이 주님으로부터 신성한 질서에 따라 존재함을 인정함으로 그 선들 모두는 주님께 헌납되어 진다.

세부적 영적 의미

태워 바침의 제물을 끌어다가 규정대로 바친다는 것은 신앙의 선 가운데 있는 이들은 모든 선이 신성한 질서에 의거 그분으로부터 있게 됨을 인정함으로 주님께 모두 헌신한다는 것을 명시한다. A.C. 10055, 7995.

17절. 그리고 그는 식사 제물을 바쳤다, 그리고 거기로부터 그의 손을 채웠다, 그리고 그것을 아침의 태워 바침의 제물에 더하여, 제단 위에서 태웠다.

영적 의미

또한 천적 선을 통해 주님이 예배되어지되, 이는 영적 선이 천적 선과 결합함으로부터이다. 그리고 이 결합은 모든 충만과 능력과 함께 이루어진다. 이와 같은 결합이 주님으로부터 있다고 예배에서 인정하는 것이요, 이 예배는 새로운 천국적 상태 안에서 영적 선으로부터, 천적 선으로부터 따로 따로 구분되어 있는다.

세부적 영적 의미

아론은 천적 선을; 식사 제물은 영적 선이 천적 선과 결합함으로부터 있게 되는 예배를; 한 움큼 가득이란 모든 충만과 능력으로부터임을; 그것을 제단에서 태운다 함은 이와 같은 결합이 예배에서 주님으로부터 있게 됨을 인정하는 것을; 아침의 태워 바침의 제물에 보탠다는 것은 새로운 천국적 상태에서 영적 선과 천적 선으로 주님을 예배하는 것을 따로 따로 더하는 것을 각각 명시한다. A.C. 9936, 2177, 10019, 10053, 10055, 10134, 10136, 9299.

18절. 그는 또한 평화 제물로부터의 희생 제물, 수소와 수양을 죽였다, 이것은 백성을 위해서 였다. 그리고 아론의 아들들은 그에게 피를 전달했다, 그리고 그는 그것을 제단 빙둘러 뿌렸다.

영적 의미

또한 천적 사랑을 통해 자연적, 영적 수준에 있는 평화로운 자유의 상태에서 주님이 예배되어진다. 영적 진리는 천적 선을 통해 주님으로부터 임을 인정하는 이들의 예배는 진리가 선과 결합함이 결과되어 건설된다.

세부적 영적 의미

아론은 천적 사랑을; 수소와 수양을 죽임은 자연적, 영적 수준에서 예배를 준비함을; 평화 제물이란 자유로부터 오는 예배를; 아론의 아들들이란 영적 진리 가운데 있는 이들을; 아론에게 피를 바친다는 것은 천적 선을 통해 주님으로부터 있게 됨을 인정하는 것을; 피를 제단 주변에 뿌린다는 것은 이 예배에서 진리가 선과 결합하는 것이 결과되어 건설됨을 각각 명시하고 있다. A.C. 9946, 10024, 2180, 10042, 10097, 10047, 9293.

19절. 그리고 수소의 지방. 그리고 수양의 지방, 꼬리 지방, 그리고 내장을 덮은 지방, 콩팥들, 그리고 간의 대망.

영적 의미

그래서 자연적 인간과 영적 인간 속의 모든 선; 자연적 선의 모든 외면과 외적인 선; 그리고 자연적 진리의 모든 내면, 자연적 선의 모든 내면;

세부적 영적 의미

수소와 수양의 지방이란 자연적 인간과 영적 인간에 속하는 모든 선을; 꼬리와 내장을 덮은 지방이란 모든 외면과 외부에 있는 자연적 선을; 콩팥은 모든 내면의 자연적 진리들을; 간에 붙은 대망이란 내면에 있는 자연적인 선 모두를 각기 명시하고 있다. A.C. 10033, 2180, 10042, 10071, 10029, 10030, 10032, 10031.

20절. 그리고 그들은 가슴들 위에 지방을 놓았다, 그리고 그는 제단에서 지방을 태웠다.

영적 의미

거룩한 선행 속의 선까지 모두 합하여 이것들 모두는 순수한 사랑으로 주님께 헌납된다.

세부적 영적 의미

지방이 가슴 위에 놓임이란 천적 선이 선행의 선과 결합하는 것을; 제단에서 태움은 순수한 사랑으로 주님께 헌신함을 각각 명시한다. A.C. 10033, 10087, 10053, 10055.

21절. 그리고 가슴들과 오른쪽 넓적다리를 아론은 주님 앞에서 흔들어 바침을 위해 흔들었다. 모세가 명령했던 대로 이다.

영적 의미

그런데 모든 거룩한 선행, 천국적 결혼에 관련되는 모든 것들, 그러므로 모든 선이 주님으로부터 존재하고 협동과 유입에 의거 그분에 의해 생명있게 됨을 천적 인간을 수단으로 인정되어진다.

세부적 영적 의미

이 구절에서 가슴(갈비)은 모든 거룩한 선행을; 뒷다리(넓적다리)란 천국적 결혼에 관련되는 모든 것, 그런고로 모든 선을 합친 것을; 아론이 그것들을 흔듦이란 모든 선이 주님으로부터 존재함을 천적 인간을 수단으로 인정하는 것을; 그것들을 흔들어 바침은 주님으로 말미암아 생명이 있게 되었음을 각기 명시한다. A.C. 10087, 10073, 9946, 10089.

22절. 그리고 아론은 백성을 향하여 그의 손들을 들어올렸다, 그리고 그들을 축복했다. 그리고 그는 죄 바침의 제물로부터, 태워 바침의 제물로부터, 그리고 평화 제물들로부터 내려왔다.

영적 의미

이러므로 신성한 능력은 내적 인간이 외적 인간과 결합되는 데에 함께 결과된다. 더욱이 후자는 천국에서 삶을 즐기는데 그 즐김이 마치 자기 것인 듯하고 그 삶은 모든 악으로부터 영원히 보존되고 선으로부터 주님을 예배하는 능력까지 보존되면서 완전한 평화와 쉼의 상태까지 즐기게 된다.

세부적 영적 의미

아론이 백성을 향하여 손을 들고 복을 빈다는 것은 신성한 권능을 가지고 내적 인간과 외적 인간의 결합이 결과되는 것을; 그가 죄 바침과 태워 바침과 평화 제물을 모두 드리고 내려옴이란 생명이 마치 자기 것인 듯 외적 인간이 천국에서도 즐긴다는 것을; 그 반면 죄 바침, 태워 바침, 평화 제물은 모든 악에서 영원히 보존해 주심과 선으로부터 주님을 예배하는 능력을, 완전한 평화와 쉼의 상태를 각기 관계적으로 명시하고 있다. A.C. 5328, 3514, 6451, 4964, 4969, 3400, 10053, 10097, 10054.

23절. 그리고 모세와 아론은 만남의 천막으로 갔다, 그리고 나왔다, 그리고 백성에게 축복했다.

영적 의미

그리하여 신성한 진리와 선이 천국을 통해 주님으로부터 진행된다. 이리하여 외적 인간과 내적 인간의 상호 결합이 있으면서 주님이 그분 자신을 드러내신다.

세부적 영적 의미

모세와 아론이 만남의 천막에 갔다가 나오면서란 신성한 진리가 주님으로부터 천국을 통해 진행되는 것을; 그들이 백성에게 복을 빌어줌이란 외적 인간과 내적 인간이 상호 결합하는 것을 명시하는데 이는 둘이라는 의미로부터 분명해진다. 주님의 영광이 나타남이란 주님이 그분을 밝히 들어내심을 명시하고 있다. A.C. 7010, 9946, 3540-3, 9927, 3514, 8427.

24절. 그리고 주님 앞으로부터 불이 나왔다, 그리고 제단 위에 있는 태워 바치는 제물과 지방을 태웠다. 그리고 모든 백성들이 이것을 보았을 때, 그들은 소리쳤다, 그리고 그들의 얼굴을 아래로 떨구었다.

영적 의미

이로부터 신성한 사랑이 거듭나는 사람의 심정과 지성으로 내려와 천국의 기쁨으로 채워지고, 그 결과 주님께서 우리로 밝히 알게 해주시어 심오하게 겸허한 상태에 이르른다.

세부적 영적 의미

불이 주님으로부터 나옴이란 신성한 사랑의 하강을; 태워버림 또는 삼켜버림이란 충분히 결합함을; 그리고 유입을 수단으로 결합이 행해질 경우 어떤 상해도 있지 않음을; 태워 바침의 제물과 지방이란 거듭나는 사람의 심정과 지성이 이 선의 기쁨으로 채워짐을; 백성이 그것을 봄이란 주님으로부터 오는 명백한 계시(밝히 암)를; 환성을 올리며 얼굴을 아래로 떨구었다는 것은 심오한 겸허의 상태를 각각 명시한다. A.C. 934, 6499, 6834, 10533, 2187, 5149, 10053, 10055, 10033, 2150, 8815, 1999-1.

9장의 종합적 고찰

본 장 첫 절의 “팔 일째 되는 날”이란 천적 상태의 시작을 의미하는 바, 우리의 흥미를 자연스레 끌게 하는 묘사이다. 이 구절을 이해하려면 천적 상태를 구성하게 하는 조건 즉 선을 사실(fact)로서 깨닫는 처음의 상태를 곰곰이 생각해보아야 한다. 그러나 자신이 결코 경험하지 못한 상태를 두고 이럴 것이라고 이해하면서 거듭남을 통과한다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이다. 더구나 있지도 않은 것을 생각해냄으로 해서 개념 형성을 가져보려고 할는지도 모른다. 인간이 더 이상 분단된 마음을 갖지 않을 경우 더 이상 시험으로 고생하지 않는다는 것은 말씀에서 배워진 모든 것에서 확증받게 된다. 그 이유가 그의 외적 인간이 내적 인간에 종속되어 그 둘이 하모니를 이루기 때문이다. 거기에 쉼과 평화가 있게 되는데 이것이 평화 제물로 명시되고 있다.
다시, 우리가 말씀으로부터 받는 가르침 중 하나는 천국에는 밤이 없다는 것이다. 사실 거기에도 아침으로부터 저녁까지라는 하루의 변화와 상응되는 상태의 변화는 있다. 그러나 거기에는 밤이 없고 어떤 겨울도 없다. 그 반대로 영적 빛과 열의 증가는 있는데 그 이유가 본문이 가르치는 바대로 주님께서 그분 자신을 드러내시기 때문이다.
이런 상태는 실재하는 악이나 잘못들에서 자유로워진 결과에서만 있을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기쁜 일인가! 우리는 그 안으로 들어 갈 때가 오기를 얼마나 갈망하고 있을지!
위에 대한 것을 순서대로 간추려 보게 되면 더불어 그 외 다른 중요 사항도 명백히 알게 될 것이다. 태워 바침과 희생 제물로 나타낸 주님에 대한 예배가 천국에 있다는 것은 별로 의아하게 생각되지 않을 것이다. 그 이유는 항구적인 선의 상태란 선용의 삶에서 그분을 항구적으로 예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예배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특별한 것은 진행 순서에서 죄 바침이 먼저 있어진다는 것이다. 천국에 있는 사람들은 죄를 짓지 않을 텐데 왜 보상받게 함이라는 예배가 순서상 먼저 있어야 한단 말인가? 라는 반문이 있어질 것이라 본다. 그렇게 되는 이유는 비록 그들이 죄를 짓지 않는다 해도 자신들 스스로는 악밖에 가진 게 없다는 것을 인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사실 천국에서는 이와 같은 인정함 없이는 어느 누구도 거기에 있을 수 없다 (AC868항). 그러므로 천국에서도 조차 죄 바침으로 나타낸 예배는 먼저 있어져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선으로부터가 아니면 어느 누구도 진실로 예배드릴 수 없다. 오로지 순진이 진리와 결합된 자라야 하는 바, 이것을 송아지로 나타내고 있다. 그 이유가 송아지는 자연적 수준에 있는 순진의 선이기 때문이고, 이제 그것이 보다 높은 수준과 하모니를 이룬다. 이 외에 관찰되는 것이 있다. 이 예배의 본질은 선이라는 것인데, 그 이유는 지방만이 제단에서 태워졌기 때문이고, 그 반면 고기와 가죽은 진지 밖에서 태워졌는데 이는 모든 악과 거짓은 천국 예배에서 거절되어야 함을 명시하는 것이다.
천국에서 충분히 거듭난 천적 인간은 천적 사랑 자체로부터 주님을 예배한다. 다시 말해 그 사람은 모든 선이 그분으로부터라고 이 예배에서 인정하고 동시에 주님만을 위해 예배드린다. 그러므로 이 문단에서 알 수 있는 것 또 하나는, 위 사항이 천적 인간으로 구성되는 천국이라는 것, 이를 다른 관점으로 옮겨 보면 이는 내적 인간을 구성하는 요소라는 것이다. 주님을 사랑함이 아론의 태워 바침과 죄 바침으로 의미되는 바, 이는 내적, 외적으로 있는 순진의 선을 뜻한다. 이 순진의 선은 무지로부터의 순진이 아니라 지혜로부터의 순진이다.
위의 영감된 묘사를 되새겨 보는 가운데 생각해 볼 또 하나는 영적-자연적 인간의 상태, 뿐만 아니라 천적 인간의 상태에 대해서이다. 이 상태들의 상응이 바쳐지는 동물들에서 명확한 차이가 보여져 잘 규명되는 것은 아니다. 그 이유가 죄 바침의 제물이 수염소, 태워 바침의 제물이 송아지와 어린 양이기 때문이다. 이제 주목해보아야 하는 것은, 천적 인간의 경우 순진의 외적 선은 영적-자연적 인간의 내면과 동일하다는 점, 두 수준들이 서로 겹치는 방식으로 연결되고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는 점이다. 천적 인간이 태워 바침의 제물로 수양을 가짐에 반하여 영적 인간은 송아지가 아니라 어린 양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어린 양은 천적 인간의 순진과 상응되고, 수양은 영적 인간과 상응되고 있어야 우리에게 수긍이 갈는지 모른다. 이와 같이 눈에 나타나 보이는 불일치가 어떻게 일치할 수 있게 될까? 이렇게 식별해 봄으로 가능할 수 있다. 천적 인간의 가장 깊은 선은 천적 인간의 영적 수준 안에 포함되어져 표현된다. 그러므로 “수양”은 “어린 양”을 포함하면서 그 어린 양을 표현하는 것이다. 그러나 영적-자연적 인간의 선은 천적 인간의 선을 함유는 하지만 표현하지 못한다. 이런 경우가 본문에서 언급되고 있다. 즉 “송아지”는 “어린 양”을 포함은 하나 어린 양에 합당한 외적인 것은 못된다. 그 이유는 “수양”이 이에 해당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 천적 인간과 영적-자연적 인간 사이의 또 다른 차이점을 발견하게 된다. 즉 전자의 경우 식사 제물이나 평화 제물이 생략된다는 점인데 그 이유는 영적-자연적 인간에 의해 바쳐지는 것들의 의미에는 온 천국과 거듭나는 온 인간을 하나로 묶어 포함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첫 문단의 지시 사항에서는 식사 제물이 평화 제물 뒤에서 언급되고 있는데도 정작 예식이 거행되는 데에서는 태워 바침의 제물 뒤를 잇고 있다. 그 이유는 지시 받는 상태에서는 내적인 것과 외적인 것 사이를 하나로 되게 하는 매개체가 아직 적용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경험이 오게 될 때 그것들은 각기 적절한 위치를 갖는다. 그래서 식사 제물에 의해 의미되는 것들이 주님께서 신성시하실 경우 하나로 묶는 매개가 되는데 이는 곡식과 기름의 관계적인 의미들로부터 나타난다. 그리고 인간이 거듭나는 경우 결합하는 매개가 된다. 그러므로 우리가 알게 되는 것은, 말씀의 글자적 의미들은 그 안의 내적 의미의 요구에 부응되도록 특별하고도 정확하게 배열되고 있다는 점을 어설프게나마 더듬어 볼 수 있다. 보다 더 세심하게 연구하는 사람은 자신 스스로 위의 사항 외에 더 많은 의미들을 발견해 가리라 믿는다. 이제 마지막 문단에 있는 아론의 축복 그리고 모세와 아론이 만남의 천막에 들어갔다가 함께 나오면서 복을 비는 것에 대해 조금이나마 언급해야 할 것으로 본다.
이제 아론이 그의 손을 들고 백성에게 복을 빌어 주는 것은 주님이 진실로 예배될 때 주님 스스로 교회와 그 교회의 각 사람들과 결합하시는 것을 분명하게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모세와 아론이 만남의 천막에 들어갔다가 함께 나와 다시 백성에게 복을 빌어 준 것은 인간과 주님의 상호 결합에 대한 것을 상징하고 있다. 그 이유는 지도자로서 법률 제정가와 대 성직자는 신성한 진리와 신성한 선의 측면에서 온 교회를 명시하고, 두 번의 축복은 주고받는(상호) 결합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마지막 절은 본 장을 마무리해 주기에 아주 적절한 내용이 될 것이라 본다. 우선 우리가 깊이 상기해 보아야 할 대목은 가르멜산에서 엘리야가 쌓아 바친 제물에 대한 것이다. “…그러자 여호와의 불길이 내려와 제물과 함께 나무와 돌과 흙을 모두 태웠고 도랑에 괴어 있던 물을 한 방울도 남기지 않고 말려 버렸다” (열왕기상 18:38). 신성한 사랑은 언제나 주님으로부터 나와 우주 안의 모든 이들에게 영향을 미친다. 그 이유는 신성한 사랑은 그분으로부터 계속적으로 존재하는 생명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어떤 인간 존재도 영원히 썩어 없어지지 않는다. 신성한 생명은 영적 죽음의 원인일 수 없다. 그리고 어떤 존재가 인간이라면 그는 신성한 생명은 썩어 없어질 수 없다는 것을 자기 상태의 구성 요소에 따라 단순히 받을 수 있다 (천국과 지옥 39항). 이 사실을 곰곰이 생각한다면, 설사 그 사람이 최악의 악령이라 해도 결국 모든 인간 존재는 자기 생명의 평면을 질서 안으로 가져다 놓을 수밖에는 도리가 없다. 동시에 그 평면에서 영원히 머무르게 된다 (마태 25:46, 천국과 지옥 480항). 이런 상태가 각자에게 있어서 질서에 놓인 것이고 질서있는 상태에 머무르는 것이다. 그 이유는 비록 그가 자신이 받는 주님의 사랑을 되갚을(reciprocate) 수 없다 해도 그 사람 안에는 주님으로부터 온 생명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님의 사랑에 보답(reciprocate)하는 천사들, 이로 인해 주님께서 흡족해 하시는 제물을 바치는 천사들의 경우를 우리는 어떻게 말해보아야 할까? 이 제물은 최고로 좋은 의미, 즉 파괴라는 의미에서가 아닌 “태워 버림”이다. 이 “태워짐(consumed)”은 주님께서 기뻐 흠양하시는 것과 같은 등차에서의 의미이다. 그 이유는 이 제물이야말로 상호적인 사랑(reciprocal love)에 대한 증거가 되기 때문이다.
“…온 백성이 그것을 보고 소리치고, 그들의 얼굴을 아래로 떨어드렸다.” 이 모습은 천국에서는 언제나 있는 모습이다. 거기에서는 주님의 영광을 보지 못하는 것이 불가능한 일이요, 겸허함으로 심정을 채우지 않는 게 불가능하다. “심정이 깨끗한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하느님을 뵙게 될 것이다” (마태 5:8).

************************************************

레위기 10장

성경: 레위기 1장

1. 아론의 아들들, 나답과 아비후는 그들 각기 자기의 향로를 가져왔다, 그리고 그 안에 불을 놓았다, 그리고 그 위에 향을 놓았다, 그리고 주님 앞에 이상한 불을 바쳤다, 이것은 주님께서 그들에게 명령하시지 않았다.
2. 그리고 주님 앞으로부터 불이 나왔다, 그리고 그들을 삼켰다, 그리고 그들은 주님 앞에서 죽었다.
3. 그 다음 모세가 아론에게 말했다, 이는 주님께서 이야기하셨던 것이다, 말하시기를, 나는 나에게 가까이 오는 그들 안에서 신성하여질 것이다, 그리고 내 백성 앞에서 나는 영광되어질 것이다. 그리고 아론은 자기 평화를 붙잡았다.
4. 그리고 모세는 아론의 삼촌 웃시엘의 아들들, 미사엘과 엘사반을 불렀다, 그리고 그들에게 말했다, 가까이 오너라, 성소 앞으로부터 진영 밖으로 너의 형제들을 운반하라.
5. 그리하여 그들은 가까이 왔다, 그리고 진영 밖으로 그들을 그들의 상의(coat) 안에서 운반했다. 모세가 말했던대로 이다.
6. 그리고 모세가 아론에게, 그리고 그의 아들들, 엘르아살과 이다말에게 말했다. 당신들의 머리의 털을 풀지 말라, 너희의 옷들을 찢지 말라. 그리하여 너희가 죽지 않도록, 그분이 회중에게 분노하시지 않도록 하라. 그러나 너희의 형제, 이스라엘의 전체 집(가문)은 주님께서 지피신 태움에 통탄하게 하라.
7. 그리고 너희는 죽지 않도록 만남의 문으로부터 나가지 말라. 그 이유가 주님으로부터 부어진 기름이 네 위에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은 모세의 말들에 따라 했다.
8. 그리고 주님은 아론에게 이야기하셨다, 말하시기를,
9. 네가 만남의 천막으로 갈 때, 너희가 죽지 않도록 너와 네 아들들은 포도주나 독한 술을 마시지 말라. 이것은 너의 자손들 대대로 영원히 법령일 것이다.
10. 그리고 너희는 거룩한 것과 보통의 것에, 불결한 것과 깨끗한 것을 구분해 두어라.
11. 그리고 너희는 주님께서 모세의 손을 수단으로 그들에게 이야기했었던 모든 법령을 이스라엘의 자손들에게 가르쳐라.
12. 그리고 모세는 아론, 그리고 남은 두 아들들, 엘르아살과 이다말에게 이야기했다, 불로 만들어 주님께 바친 제물의 남은 식사 제물은 제단 옆에서 누룩 없이 그것을 먹어라. 그 이유는 이것은 최고로 거룩하기 때문이다.
13. 그리고 너희는 그것을 거룩한 장소에서 먹을 것이다. 그 이유는 이것은 불로 만들어 주님께 바친 제물로부터의 네 몫, 그리고 네 아들들의 몫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나는 명령받았다.
14. 그리고 흔든 가슴과 들어 올린 넓적 다리를 너희는 깨끗한 장소에서 먹을 것이다. 당신과 당신의 아들들, 그리고 당신과 더불은 당신들의 딸들이 (먹을 것이다). 그 이유가 그것들은 당신의 당연한 몫으로, 그리고 당신의 아들들의 당연한 몫으로 이스라엘의 자손들로부터의 평화 제물의 희생 제물로부터 주어졌기 때문이다.
15. 들어올린 넓적다리와 흔든 가슴을 그들은 주님 앞에서 그것을 흔들어 바침의 흔들기를 위해 불로 만드는 제물의 지방과 더불어 가져갈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영원히 당연한 몫으로 당신과 더불은 당신의 아들들의 것일 것이다. 주님께서 명령하신 대로 였다.
16. 그리고 모세는 죄 바침의 염소를 부지런히 찾았다, 그리고 보라, 그것은 태워져 버렸다. 그리고 그는 남은 아론의 아들들, 엘르아잘과 이다말에게 화를 냈다, 말하기를,
17. 어찌하여 너희는 성소의 장소에서 죄 바침의 제물을 먹지 않았느냐? 이것이 최고로 거룩함을 알지 않느냐? 그리고 그는 주님 앞에서 백성들을 위해 보상을 받기 위해 회중의 불법을 짊어지라고 너에게 그것을 준 것이다.
18. 보라, 그것의 피가 성소 안으로 가져와지지 아니했다. 너희는 성소에서 그것을 확실히 먹었어야 했다, 내가 명령한대로 이다.
19. 그리고 아론이 모세에게 이야기했다, 보라, 오늘 그들은 자기들의 죄 바침과 태워 바침을 주님 앞에 바쳤다. 그리고 이런 일이 나에게 떨어졌다. 그리고 만일 내가 오늘 죄 바침의 제물을 먹었다면, 그것이 주님의 시야에서 흡족하게 기뻐하셨을까?
20. 그리고 모세가 이를 들었을 때, 그의 시야에서 아주 좋아 보였다

영적 의미의 요약

* 교리는 있되 선한 삶이 없는 이들은 이기적 사랑에 의해 예배를 모독한다. 그 결과 황폐된다. 그러나 선한 사람은 자기들 예배가 외적으로뿐 아니라 내적으로도 충실하도록 훈육받는다. 단지 외적 예배일 경우 그 예배는 제거되어져야 한다. 선한 이들과 더불어서도 두 가지 예배는 분리되어서는 안되는데 그 이유는 모독이 발생되기 때문이다. 1-7절
* 이렇게 천적 인간은 훈육된다. 그들의 예배는 진리로부터가 아닌 선으로부터 있어야 한다는 것, 진정한 예배와 거짓 사이에 분명한 구분이 있어야 한다는 것, 천적인 것은 영적인 것과 함께 흘러든다는 것, 그 이유는 후자가 신성한 진리로 훈육을 받을 수 있기 위해서이다. 8-11절.
* 천적 인간과 영적 인간이 선을 자기 것으로 삼는 것에 관하여, 전자의 경우 모든 생명이 주님으로부터 존재함을 어떻게 지각하는가, 후자의 경우 위의 사항을 어떻게 인정하는가에 관하여. 12-15절.
* 더 나아가 모독하는 예배에서 선을 자기 것으로 삼지 못하는 데에 관한 가르침, 결과적으로 볼 때 순진의 선을 수단으로 주님과 결합하지 못한다는 것, 그러므로 악으로부터의 해방도 없다는 것에 관하여. 16-20절.

각 절의 영적 의미

1절. 아론의 아들들, 나답과 아비후는 그들 각기 자기의 향로를 가져왔다, 그리고 그 안에 불을 놓았다, 그리고 그 위에 향을 놓았다, 그리고 주님 앞에 이상한 불을 바쳤다, 이것은 주님께서 그들에게 명령하시지 않았다.

영적 의미

말씀으로부터 선과 진리에 관한 교리를 가졌으나 그에 따른 삶이 없는 이들은 비록 진리인 그들의 교리가 천적인 선으로부터 이라 해도 그 교리는 악한 욕망과 거짓 추구로 주님의 예배를 오염시킨다. 따라서 그들은 신성의 유입과 정반대 되는 자아 사랑으로부터 예배한다.

세부적 영적 의미

아론의 아들 나답과 아비후는 내적, 외적 두 측면에서의 말씀 속의 교리들, 이 구절의 경우 문맥에서 보여주듯 생명이 없는 선과 진리에 관한 교리를 말한다. 나답이라는 이름은 “자유”와 “자발적인 선물” 또는 “왕자”라는 뜻인 바, 상응에 의하면 말씀의 내적인 것에서 파생되는 선과 진리를 말하고, 아비후는 “나의 아버지는 그 사람”이라는 뜻인 바, 말씀의 외적인 것에 속한 선과 진리임을 암시하고 있다. 아론의 아들은 일반적으로 선으로부터의 진리들을; 이상한 불이란 악의 욕망을; 이 구절에 있는 향로는 거짓의 추구를; 불은 이기적 사랑을; 주님이 명령하시지 않은 것이란 신성한 유입에 반대되는 것임을 각각 나타내고 있다. A.C. 9375, 9670-2, 1482, 3703-3, 9965, 934, 5486.

2절. 그리고 주님 앞으로부터 불이 나왔다, 그리고 그들을 삼켰다, 그리고 그들은 주님 앞에서 죽었다.

영적 의미

그러므로 자아 사랑의 욕망, 사악한 자들이 주님의 탓이라고 하는 고통이 그들을 통째로 삼킨다. 그리하여 그들은 모든 선과 진리에서 황폐해지고 만다.

세부적 영적 의미

주님 앞에서 나온 불과 그 불이 나답과 아비후를 삼킴이란 이기적 사랑 속의 탐욕, 사악한 자들이 주님께 탓을 돌리는 고통이 그들을 전적으로 사른다는 것을; 주님 앞에서 그들이 죽는다는 것은 사악한 자는 선과 진리 모두가 완전히 황폐해진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 A.C. 934, 2447, 5149, 7699.

3절. 그 다음 모세가 아론에게 말했다, 이는 주님께서 이야기하셨던 것이다, 말하시기를, 나는 나에게 가까이 오는 그들 안에서 신성하여질 것이다, 그리고 내 백성 앞에서 나는 영광되어질 것이다. 그리고 아론은 자기 평화를 붙잡았다.

영적 의미

그리고 지각이 신성한 진리를 수단으로 선 가운데 있는 이들에게 주어지는 바, 발생되는 것은 사악한 자와 선한 자에 관한 질서의 법칙에 의거한다는 것, 예배로 주님께 접근할 경우 반드시 외적으로 뿐 아니라 내적으로 접근해야 한다는 것, 진리 뿐 아니라 선으로 접근해야 할 것, 외적 교회의 사람 뿐 아니라 내적 교회의 사람에 의거 접근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순수한 선 가운데 있는 이들은 묵묵히 따를 뿐 왜곡된 예배를 막을 수 없다.

세부적 영적 의미

모세가 아론에게 말함이란 지각이 신성한 진리를 수단으로 선 가운데 있는 이들에게 주어진다는 것을;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이란 신성한 질서에 의거한 것을; 주님이 그분께 가까이 오도록 그들을 성별하셨다는 것은 예배에서 주님께 접근하는 이들은 내적, 외적으로 접근되어야 한다는 것을; 그분이 온 백성 앞에서 영광되어진다는 것은 표면상 진리 가운데 있는 이들 뿐 아니라 표면상 선 가운데 있는 이들에 관해서도 그렇게 하신다는 것, 또는 외적 교회에 속한 이들과 관계해서도, 내적 교회에 속한 이들과 관계해서도 그렇게 하신다는 것; 아론이 자기 평화를 붙잡고 있다(hold the peace)는 것은 순수한 선 가운데 있는 이들은 묵묵히 따를 뿐 예배가 뒤집히는 것을 방어할 수 없다는 것을 나타내주고 있다. A.C. 1791, 7010, 9946, 1728, 9820, 1259, 3295, 6864, 8176.

4절. 그리고 모세는 아론의 삼촌 웃시엘의 아들들, 미사엘과 엘사반을 불렀다, 그리고 그들에게 말했다, 가까이 오너라, 성소 앞으로부터 진영 밖으로 너의 형제들을 운반하라.

영적 의미

선한 생활로 있는 순수한 예배의 한계를 벗어나는 위선적인 모든 예배에 반대하는 것은 가장 외적인 형태에 있는 선행으로부터 파생된 최말단의 진리와 애착들의 직무인바, 이것이 신성한 진리에 따르는 것이다.

세부적 영적 의미

모세는 신성한 진리를 표현하고; 부름은 유입(influx, afflux) 또는 현존을; 미사엘과 엘사반은 관계적으로 볼 때 “청구하는 사람,” “하느님이 보호하는 사람”이라는 뜻인 바 최말단의 진리들과 애착을 말한다. 웃시엘이란 “하느님의 강함”을 뜻하는 바 진리를 수단으로 하는 선의 힘을 말한다. 또한 “하느님의 아이”라고도 뜻하는 바, 이럴 경우는 순진 안에 있는 선으로부터 온 진리의 힘을 나타내준다. 아론의 삼촌은 천적인 선, 또는 가장 외적 형태에 있는 선행, 다시 말해 2차적인(collateral) 천적 선인데 이는 이기적 사랑이 먼저 주도권을 쥠으로 해서 부패되든지, 이기적 사랑에 의해 일시적으로 영향을 받든지 하는 어느 한쪽에 해당된다. 이 구절의 경우 후자는 모세로 표현되는 신성한 진리의 영향 밑에서 있어진 사실로부터 나타나는 바대로 최말단 진리들에 있는 이들이 그렇게 행동했음을 명시한다. 그들이 말함이란 최말단에 있는 이들의 부분에서 선과 진리를 지각함을; 불러놓고(draw near)란 거기에도 하모니가 된 상태가 있을 것임을; 형제(조카)들을 성소에서 진지 밖으로 끌어냄이란 선한 생활로 있게 되는 순수한 예배의 한계를 넘는 위선적인 모든 예배의 제거를, 이로부터 우리가 배우는 바, 아론에 의해 표현되는 천적인 선 또는 주님을 사랑함은 그 사랑이 명백해지는 마음의 수준에 따라 다양한 형태를 입을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말씀의 글자 의미에 있는 순수한 최말단적인 선과 진리들에 있는 것들이 거짓 예배를 제거하는데 기여함으로 해서 더 높은 선을 섬기게 된다는 것도 알 수 있다. A.C. 7010, 6840, 7955, 8960, 8964, 6443, 3519, 7840, 3796, 3803, 9946, 3129, 3796, 3803, 9946, 1822, 9378, 4236.

5절. 그리하여 그들은 가까이 왔다, 그리고 진영 밖으로 그들을 그들의 상의(coat) 안에서 운반했다. 모세가 말했던 그대로 이다.

영적 의미

그러면 이렇게 실지로 있게 된다. 모든 불순한 예배는 그 안에서 썩어진 진리와 더불어 제거되는 것이다.

세부적 영적 의미

그들이 모세가 시키는 그대로 들어감은 신성한 진리의 지시에 의거 실제로 발생하는 것을; 그들이 그들의 상의 안에서 진지 밖으로 끌어냄이란 썩어진 진리들을 지닌 모든 불순한 예배가 제거됨을 각기 말한다. A.C. 9378, 7010, 4236, 99, 429.

6절. 그리고 모세가 아론에게, 그리고 그의 아들들, 엘르아살과 이다말에게 말했다. 당신들의 머리의 털을 풀지 말라, 너희의 옷들을 찢지 말라. 그리하여 너희가 죽지 않도록, 그분이 회중에게 분노하시지 않도록 하라. 그러나 너희의 형제, 이스라엘의 전체 집(가문)은 주님께서 지피신 태움에 통탄하게 하라.

영적 의미

또한 교회 안에 있는 천적이고 영적인 선과 진리 가운데 있는 이들은 이렇게 지각한다. 바깥쪽으로만 거룩한 듯 나타나는 모독된 예배가 제거됨, 또는 단지 표현적일 뿐인 예배가 제거되는 것에 대해 설사 그 제거가 내적인 것으로부터 외적인 것이 분리되는 일이 거행되지 않도록, 그리고 주님이 혐오하시는 것이 수반되지 않기 위해서 내적으로나 외적으로나 슬퍼해서는 안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외적 교회에 있는 이들에게는 진정한 예배의 손실 때문에 가상적으로라도 슬퍼하도록 허용되어있다.

세부적 영적 의미

일렀다 함은 지각을, 아론과 그의 아들 엘르아잘과 이다말은 천국 가운데 그리고 영적인 선과 진리 가운데 있는 교인들을 말하는데, 그 이유는 아론의 아들이 자연적 선을 의미하도록 보여지기 때문이다. 이에 비해 나답과 아비후는 본래의 모습대로라면 그들은 영적 선을 의미한다. 그럼에도 두 형이 죽어 그들이 표현한 영적 선이 중단되자 동생들이 그 자리를 승계 받아 영적 선을 표현하게 되었다. 이스라엘 온 가문은 외적 또는 자연적 선을, 머리를 풀지 말고 옷을 찢지 말라는 것은 내적으로, 외적으로 슬퍼하지 말라는 것을; 죽음이란 외적인 것이 내적인 것으로부터 분리되는 것, 이렇게 해서 영적으로 죽은 것을; 주님께서 온 회중에 분노하신 게 아님이란 주님에게는 혐오하심이 없음을; 태워죽은 자들을 위해 이스라엘 온 가문이 슬퍼하도록 허용되었다는 것은 외적 교회에 있는 이들은 진정한 예배의 손실에 대해 가상적으로 슬퍼하도록 허용하심을 말하고 있다. A.C. 1822, 9812, 9810, 9811, 10244, 4286, 9960, 4763, 272, 9965, 5798, 4286.

7절. 그리고 너희는 죽지 않도록 만남의 문으로부터 나가지 말라. 그 이유가 주님으로부터 부어진 기름이 네 위에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은 모세의 말들에 따라 했다.

영적 의미

그러나 내적 예배 가운데 있는 이들은 그 예배에서 결코 분리되어서는 안 된다. 그 이유가 그 분리는 영적 수준이요, 그들은 진리를 사랑했고 그 진리와 선이 결합되었던 상태였으므로 더 심한 모독의 원인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모독이 질서의 법칙을 따라 발생되지 않도록 하는 것은 신성한 섭리이다.

세부적 영적 의미

아론과 그의 두 아들은 내적 예배에 있는 이들을, 만남의 천막 문을 나서지 말라는 것은 내적 예배로부터 분리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죽는다란 외적인 것이 내적인 것에서 분리됨 그리고 인간이 주님으로부터 분리됨을, 그들 위에 기름부어 세움이란 표현이 시작되는 것, 진리가 선과 결합함, 따라서 주님과의 결합을, 이를 위반하면 모독이 있게 된다. 모세의 말에 따라 행동함은 신성한 진리의 법칙에 순종함을, 이 순종을 수단으로 주님께서는 모독에서 인간을 보존하신다. A.C. 2356, 3540-3, 10244, 9954, 3398, 7010.

8절. 그리고 주님은 아론에게 이야기하셨다, 말하시기를,

영적 의미

더 나아가 계시가 있는 바 천적 인간에게 지각이 있게 된다.

세부적 영적 의미

여호와는 사랑 측면에서의 신성한 존재를; 말씀하심(speaking)은 유입을; 아론은 신성한 선을; 말함(saying)은 지각을 나타낸다. A.C. 2001, 2951, 9946, 1791, 1822.

9절. 네가 만남의 천막으로 갈 때, 너희가 죽지 않도록 너와 네 아들들은 포도주나 독한 술을 마시지 말라. 이것은 너의 자손들 대대로 영원히 법령일 것이다.

영적 의미

주님을 예배함은 영적이든 천적이든 진리로부터 있어서는 안되고 오직 선으로부터 있어야 한다. 그 이유는 그들에게 영적 죽음을 초래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천적 예배에 관한 이 법칙은 영원히 준수되어야 할 것이다.

세부적 영적 의미

만남의 천막으로 들어감이란 사랑(선행, 순종)으로부터 주님을 예배함을; 포도주나 독주를 마시지 말라함은 영적이든 천적이든 진리로부터 주님을 예배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이 대목에서 주목해둘 것은 술을 두 겹으로 표현한 것인데 포도주는 영적인 것에 관련되고 독주(strong drink)는 천적인 것에 관련되고 있다. 이 의미가 좋은 의미와 나쁜 의미에 관련되는 사항을 알아보려면 이 구절과 더불어 이사야 5장 22절을 읽어보면 된다. 아론과 그의 아들이란 천적인 것과 영적인 것을; 죽지 않음이란 분리되지 않음을; 대대로 영원히 지킬 규정이란 신성한 질서의 외적인 법칙임을 말하고 있다. A.C. 2356, 3540-3, 9812, 1072, 683, 9946, 10244, 7884, 7931, 1041.

10절. 그리고 너희는 거룩한 것과 보통의 것에, 불결한 것과 깨끗한 것을 구분해 두어라.

영적 의미

내적인 것과 결합된 거룩한 외적 예배와 분리된 상태의 예배, 천적 천국과 영적 천국 사이를 진정으로 구분할 것, 후자는 전자에 비해 보다 불완전하다.

세부적 영적 의미

분간함이란 따로따로의 분별이 만들어져야 할 것을; 거룩한 것과 보통의 것 사이란 거룩한 외적인 예배가 내적인 것과 결합된 것 사이를; 이것이 분리되는 것이 시리즈로부터 나타난다. 또한 이 분리의 의미는 거룩한 것과 보통의 것의 의미로부터, 또는 보통의 것(common)이라는 말의 히브리 어원을 참조하면 거룩한 것과 모독되어 있는 것임을 알 수 있을 것이라 본다. 깨끗한 것과 불결한 것이란 예배 안에 이기적 사랑으로 진리를 자기 것으로 삼는 것이 포도주를 마시는 것이고, 이것은 “천적 천국과 영적 천국 사이에” 위치한다. 그 이유가 천적 인간이 영적 인간과의 특별한 차이가 “포도주를 마시지 않는 것”으로 구별되는데 다시 말해 진리가 선으로부터 분리 안된 상태에 있는 것이 천적 인간의 특징이기 때문이다. A.C. 2146, 2434, 2190, 3899, 10307, 10309, 10310, 987, 994, 10130, 1072, 2187.

11절. 그리고 너희는 주님께서 모세의 손을 수단으로 그들에게 이야기했었던 모든 법령을 이스라엘의 자손들에게 가르쳐라.

영적 의미

또한 천적 천국은 상대적으로 불완전한 영적 천국, 즉 신앙을 수단으로 선행에 근거하는 천국의 상태에 적절한 선과 진리로 흘러들게 된다.

세부적 영적 의미

이스라엘 백성을 가르치는 것이 천적 인간에 관해 말해질 경우 이는 외적 경로로 해서 이해함 안으로 받게 된 것을 배우고 기억하도록 해주시는 것을 말한다. 이와 관련된 사항은 T.C.R. 8항에서도 더 얻을 수 있다. 이스라엘 백성이란 영적 인간을, 규정이란 천국의 질서로부터 흐르는 진리들과 외적 규범들을, 주님께서 모세를 시켜 말씀하신 것이란 신앙을 수단으로 선행으로부터 온 예배에 관련된 것을, 그 이유는 주님 또는 여호와가 사랑 측면에서의 신성한 존재를 말하기 때문이다. 이 신성한 존재는 영적 인간에게서는 선행의 형체를 갖는다. 그리고 모세가 신성한 진리를 표현하는 바 더 낮은 수준인 신앙의 형체를 취한다. A.C. 7007, 3654, 7884, 2001, 9812, 7010, 4448.

12절. 그리고 모세는 아론, 그리고 남은 두 아들들, 엘르아살과 이다말에게 이야기했다, 불로 만들어 주님께 바친 제물의 남은 식사 제물은 제단 옆에서 누룩 없이 그것을 먹어라. 그 이유는 이것은 최고로 거룩하기 때문이다.

영적 의미

신성한 질서의 법칙에 따라 천적 인간은 자기 생명의 모든 수준에서 주님에게서 오는 선을 자기 것으로 삼아야 한다. 이는 순수한 사랑으로부터 주님을 예배한 결과인데, 그 이유는 이와 같은 예배와 선은 가장 깊은 예배요 선이기 때문이다.

세부적 영적 의미

모세가 신성한 진리를 표현하는 바, 아론, 엘르아잘과 이다말은 계속적인 등차로 있는 천적인 선을; 모세가 이들 세 명에게 말함이란 신성한 질서의 법칙에 의하는 것 또는 상응과 유입에 의한 것임을; 남겨져 있는 것 그리고 남겨진 식사 제물이란 교회 안에 있는 것들 중에서 남아있는 것, 그리고 교회 속의 것들이 부패되어지고 난 후 남아있는 선들을 말하는데 이는 본 장의 연속되는 시리즈가 보여주고 있다. 식사 제물을 먹음이란 선을 자기 것으로 삼는 것을; 주님께 살라 바친 제물이란 순수한 사랑으로부터 온 예배의 결과를; 누룩 없이란 거짓에서 자유로움을; 제단 옆이란 선으로부터 온 예배의 상태 안에서를; 최고로 거룩함이란 가장 깊은 예배와 가장 깊은 선을 각기 말한다. A.C. 9812, 1728, 2951, 1831, 1832, 468, 2187, 10055, 2342, 9964, 3210.

13절. 그리고 너희는 그것을 거룩한 장소에서 먹을 것이다. 그 이유는 이것은 불로 만들어 주님께 바친 제물로부터의 네 몫, 그리고 네 아들들의 몫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나는 명령받았다.

영적 의미

그래서 선은 천적, 영적 교회 또는 천국을 수단으로 하는 거룩한 상태에서 자기 것으로 삼아져야 한다. 그 이유는 진리가 아닌 선으로부터 예배하는 것은 천적, 영적 천국에 속하기 때문이요, 이는 신성한 유입에 따른 결과이기 때문이다.

세부적 영적 의미

거룩한 장소에서 먹는다란 거룩한 상태에서 자기 것으로 삼는 것을; 식사 제물이 아론과 그의 아들들의 몫이란 진리로부터가 아닌 선으로부터 주님을 예배하는 천적, 영적 교회들에 선이 소속된다는 것을; 주님께 태워 바친 제물이란 순수한 사랑 또는 선으로부터의 예배를; 이렇게 해야 한다는 지시란 신성한 유입의 결과를 각각 말하고 있다. A.C. 2187, 3652, 4581, 2177, 9946, 7884, 7931, 10055, 5486.

14절. 그리고 흔든 가슴과 들어 올린 넓적다리를 너희는 깨끗한 장소에서 먹을 것이다. 당신과 당신의 아들들, 그리고 당신과 더불은 당신들의 딸들이 (먹을 것이다). 그 이유가 그것들은 당신의 당연한 몫으로, 그리고 당신의 아들들의 당연한 몫으로 이스라엘의 자손들로부터의 평화 제물의 희생 제물로부터 주어졌기 때문이다.

영적 의미

이와 같이 유입을 수단으로 천적 인간의 지적 원리와 자발적인 원리들은 생기 있게 되고, 외적 측면에 있는 생각과 애착도 거짓이나 불완전함이 없는 가운데 선이 자기 것으로 삼아지게 된다. 그리고 평화와 자유로부터의 외적 예배가 설사 불완전하게 남아 있다 해도 이것들은 내적으로는 순수한 원리로 있는다. 이상은 영적 인간의 경우이다.

세부적 영적 의미

흔들어 바친 가슴과 들어 올린 넓적다리란 천적 교회 (의 수준)에 속한 사람의 지적인 원리들과 자발적인 원리들을 말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지적인 원리(intellectual principle)는 선행이고 자발적인 원리(voluntary principle)는 주님을 사랑함이기 때문이다. 흔든다(waving)란 인정함으로 생명있게 됨을; 들어 올림(heaving)이란 활동하는 가운데 천적 사랑으로부터 지각하는 것을; 깨끗한 장소에서 먹는다는 것은 거짓이나 불완전함이 없는 상태에서 자기 것으로 삼는 것을; 아들들은 생각들을; 딸들은 외적으로 있는 애착들을; 그 반면 당신(thou, 형)은 내적인 것을; 성직자로서의 아론과 그의 아들들이란 내적으로 있는 인간의 순수한 원리를; 받아야 할 몫 또는 규정이란 신성한 질서에 따른 것을; 이스라엘 백성의 평화 제물의 제물로부터이란 평화와 자유의 상태로부터 오는 외적인 예배가 상대적으로 불완전한 상태까지도 임을; 아론과 그의 아들들과 관련시켜 생각할 경우 이스라엘 백성은 영적 교회의 외적인 것을; 이 외적인 것은 영적 인간의 예배가 천적 인간의 예배와 비교해 볼 때 보다 덜 완전한 상태이다. A.C. 10087, 10090, 10092, 10093, 2187, 4545, 2625, 489, 9946, 5912, 7884, 7931, 10097.

15절. 들어올린 넓적다리와 흔든 가슴을 그들은 주님 앞에서 그것을 흔들어 바침의 흔들기를 위해 불로 만드는 제물의 지방과 더불어 가져갈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영원히 당연한 몫으로 당신과 더불은 당신의 아들들의 것일 것이다. 주님께서 명령하신 대로 였다.

영적 의미

영적 인간의 거룩한 예배가 생명있게 되는 것은 선행을 수단으로 할 때이고 영적인 것과 천적인 것의 결합은 순수한 사랑과 천적인 선으로부터 있어진다. 그리고 이와 같은 예배는 천적 천국을 통하여 주님으로부터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선과 진리 모두는 영원히 신성한 질서에 따라야 한다.

세부적 영적 의미

이스라엘 백성의 제물은 영적 인간의 거룩한 예배를, 흔든다란 생명있게 됨을, 가슴은 선행을, 넓적다리는 선과 진리의 결합 또는 천적 결혼, 그러므로 영적 천국과 천적 천국 사이의 결합을, 살라바치는 제물이란 순수한 사랑으로부터 예배함을, 지방이란 천적인 선을, 그것이 아론과 그의 아들의 것이다란 이와 같은 예배는 천적, 영적 천국을 통하여 주님으로부터 임을 인정하는 것을, 주님께서 지시하신 영원히 지킬 규정이란 신성한 질서에 의거한다는 것을 각각 말한다. A.C. 922, 3654, 10093, 10087, 10075, 10033, 10055, 7884, 2951.

16절. 그리고 모세는 죄 바침의 염소를 부지런히 찾았다, 그리고 보라, 그것은 태워져 버렸다. 그리고 그는 남은 아론의 아들들, 엘르아잘과 이다말에게 화를 냈다, 말하기를,

영적 의미

인간이 자아 사랑으로 예배를 더럽힐 때 자연적 인간 안에 있는 순진의 선은 그 자아를 통해 사멸되어 진다. 이 결과로 진리와 선에 관한 외적 인간은 신성한 진리로부터 비켜지는 바, 이런 지각이 있게 된다.

세부적 영적 의미

모세가 그들이 죄의 제물로 바친 수염소가 어찌 되었는가를 조사해 본다와 그것이 불에 태워졌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란 신성한 질서에 의거한 것, 인간이 이기적 사랑으로 예배를 모독할 때 자연적 인간 안에 든 순진의 선은 이 이기적 사랑을 통해 멸해지고 만다는 것을 명시하고 있다. 그 이유는 모세는 신성한 진리를 표현하고, 신성한 진리는 신성한 질서를, 열심히 추구함(조사해봄)이 신성한 진리에 관해 말해질 경우 이는 예견하심과 전능하심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염소는 자연적 인간에 있는 순진의 선을 명시하는데, 그 이유가 염소는 선과 결합된 신앙 속의 진리이기 때문인데 선이 없는 예배는 존재할 수 없고 모든 선 안에는 순진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염소가 태워졌음이란 순진의 선이 이런 이기적 사랑으로 해서 멸해짐을 말한다. 그리고 모세가 엘르아잘과 이다말에게 화를 냄이란 신성한 진리가 외적 인간을 싫어함을 말하는데 그렇게 되는 때는 교회가 부패해졌을 때, 다시 말해 나답과 아비후로 명시되는 것, 이기적 사랑에 있는 것들로 예배가 모독되어졌을 때이다. 그러면 외적 교회에 있는 단순한 선은 내적 교회들에 의해 일시적으로 반감을 사게 되고 고통을 당한다. 그런고로 “살아남은” 두 아들이라고 말해지고 있다. 이 “살아남은”이란 외적 인간 안에 남겨져 있는 것들을 뜻한다. 추궁함(saying)은 지각을 말한다. A.C. 7010, 1728, 4718, 4719, 4169, 725, 2526, 7840, 9955, 5798, 468, 1791, 1822.

17절. 어찌하여 너희는 성소의 장소에서 죄 바침의 제물을 먹지 않았느냐? 이것이 최고로 거룩함을 알지 않느냐? 그리고 그는 주님 앞에서 백성들을 위해 보상을 받기 위해 회중의 불법을 짊어지라고 너에게 그것을 준 것이다.

영적 의미

악에서 해방되기 위하여 예배 속의 선은 그 선에서 결과되는 거룩한 상태에서 자기 것이 되어야 한다. 그 이유가 이 선은 가장 거룩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천적 진리와 선을 통해 주님은 인간이 악과 싸우도록 하시어 인간이 그분과 재회할 수 있게, 다시 말해 외적 인간이 순수한 회개로 내적 인간과 하모니를 이루도록 하신다.

세부적 영적 의미

거룩한 자리에서 죄 바침의 제물을 먹는 것은 악에서 해방되게 하는 예배 속의 선은 거룩한 상태에서 자기 것으로 삼아져야 한다는 것을, 최고로 거룩함이란 이와 같은 예배는 가장 깊은 선으로부터 존재한다는 것을, 아론의 아들에게 준 것이란 모든 선은 주님으로부터 천적인 선과 진리를 통해 존재한다는 것을, 회중의 불법을 짊어지어 주님 앞에서 보상을 받게 한다는 것은 주님께서 인간을 위해 악과 싸우신다는 것, 그리하여 인간이 그분과 다시 만날 수 있도록, 또는 외적 인간이 이 순수한 회개로 내적 인간과 조화를 가지는 것을 말한다. A.C. 3400, 2187, 3652, 3210, 5619, 9937, 10042.

18절. 보라, 그것의 피가 성소 안으로 가져와지지 아니했다. 너희는 성소에서 그것을 확실히 먹었어야 했다, 내가 명령한대로 이다.

영적 의미

그러나 예배가 모독되는 경우 거기에서 신성한 진리와 신성한 선의 결합이 없고, 외적 인간과 내적 인간의 결합도 없다. 그렇다해도 거기에는 신성한 질서에 따라 있어야 한다.

세부적 영적 의미

성소 안으로 피를 가지고 들어가지 않았음이란 모독된 예배의 경우 거기에는 신성한 진리가 신성한 선과 결합하는 것이 없다는 것을 말한다 (제 4장 5-10절 참조). 수염소는 성소 안에서 먹지 말고 성막 뜰 안에서 먹는다(6장 26절 참조)는 것은 외적 인간과 내적 인간 사이에는 조화가 없다는 것; “내가 하라는 대로”란 신성한 질서에 따라서 있어야 할 것을 말한다. A.C. 9741, 1010, 1728, 2951.

19절. 그리고 아론이 모세에게 이야기했다, 보라, 오늘 그들은 자기들의 죄 바침과 태워 바침을 주님 앞에 바쳤다. 그리고 이런 일이 나에게 떨어졌다. 그리고 만일 내가 오늘 죄 바침의 제물을 먹었다면, 그것이 주님의 시야에서 흡족하게 기뻐하셨을까?

영적 의미

그러므로 신성한 진리를 수단으로 하는 신성한 선으로부터 지각이 이렇게 있게 된다. 악에서 해방되고 선과 교통하려는 표현적 예배는 제공되어져 왔었다. 그러나 거기에는 주님과의 어떤 외적 결합도 없다. 설사 외적인 것이 내적인 것에서 분리되었을 때도 없다. 그 이유는 모독된 예배에서의 경우 외적 결합조차도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선을 외적으로 자기 것 만드는 것조차도 모독되는 상태에서는 불가능할 뿐이다.

세부적 영적 의미

이 구절의 이야기함(speak, 변명)은 말함(saying)처럼 지각을 말한다. 아론은 신성한 선을; 모세는 신성한 진리를; 죄 바침과 태워 바침은 악에서 해방되기 위한 표현적 예배를, 더불어 선과 교통하기 위한 표현적 예배도 말한다. 그런데 이 제물의 바침은 명령에 의거 아론이 바친 게 아니었다. 오늘이란 그와 같은 상태를, “나에게 이런 일이 닥쳤다”는 것은 모독된 예배로는 결합이 불가능하다는(2절 참조)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이런 경우에 죄의 제물을 먹는다는 것은 선과 진리 대신 악을 자기 것으로 삼는 것을 표현한다. 그런고로 주님께 기뻐하시지 않는 것, 주님이 보시기에 선하지 않는 것이다. A.C. 1791, 1822, 9946, 7010, 3400, 8680, 665, 487, 2187, 2572.

20절. 그리고 모세가 이를 들었을 때, 그의 시야에서 아주 좋아 보였다

영적 의미

신성한 진리로 해서 신성한 선에서 오는 이런 지각은 모독된 예배의 실지 상태에 따라 정확히 존재한다.

세부적 영적 의미

모세가 듣는다는 것은 신성한 선으로부터 신성한 진리를 수단으로 지각함을; 모세가 생각하기에 아주 좋아보였다는 것이란 모독된 예배에서 각 경우의 실제 상태에 따라 정확히 있어진다는 것을, 그런 이유로 모독된 예배도 신성한 선이 신성한 진리와 하나됨에 따라 정확하게, 전능하심에 따라 정확히 존재함을 명시하고 있다. A.C. 3163, 7010, 9946, 2572.

10장의 종합적 고찰

내적 의미로 볼 때 본 장의 첫 절은 인간 사이에 너무나 공통되는 하나의 사실을 우리에게 놓아주고 있다. 많은 이들이 이기적인 원리로 주님을 예배한다. 그 이유가 여기서 언급되는 “다른 불(strange fire)”이란 이기적인 사랑을 말하기 때문이다. 많은 이들의 경우 비슷한 것은 야곱 즉 그가 형 에서의 분노를 피해 시리아로 달아났었을 때 서원했던 모습이다. “만일 제가 이 길을 가는 동안 하느님께서 저와 함께 하여 주시고 저를 지켜 주시어 먹을 양식과 입을 옷을 마련해 주시고 무사히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게만 하여 주신다면, 저는 여호와님을 제 하느님으로 모시겠습니다…” 이와 같은 예배는 위 야곱이 표현하는 인간인 자연적 인간에만 국한되어있다. 자연적 인간은 하느님을 잠정적(일시적)으로만 받아들인다. 이 예배가 비록 잠정적이고 가상적이지만 점차 진짜(실지) 기독교적인 예배에로 인도해준다. 하느님에 관한 어떤 확증이 없는 상태가 위의 상태인데 이것이 나답과 아비후로 상징화된 거짓 예배자들 임을 본문이 뜻하고 있다. 그러므로 “야곱”이 “이스라엘” 또는 거듭남에 의해 진실로 영적 인간이 되지 않으면 자연적 인간 자체는 통째로 이기적인 것만에 골몰하여 자신 속에 가득 찬 이기적 원리들만에 의해 완전히 조절되어가고야 만다. 이것이 본문 첫 절의 시리즈, 즉 주님으로부터 불이 나오고, 나답과 아비후가 타버리고, 주님 앞에서 죽고 마는 것으로서 표현되어져 있다.
이에 이어지는 모세의 말들과 아론의 침묵을 곰곰이 생각해 보자. 모세로 표현된 신성한 진리는 사악한 자들이야말로 황폐해져야 한다는 법을 확인하고 있고 신성한 선으로서의 아론은, 그 법을 묵묵히 따르고 있다. 다시 말해 질서의 요구에 따라 정확하게 발생하는 것은 신성한 자비심에 반대될 리가 없다는 말이다. 어떤 인간 존재라 해도 절대로 돌이켜질 수 없는 고통에 처해질 수 있다고 우리가 상상하지 말라는 것, 그 이유가 주님은 지옥도 규율하시기 때문이다.
이제 다음 과정 즉 사악한 자가 선한 자들로부터 분리되는 과정인 둘째 문단을 찬찬히 생각해 보자. 황폐해짐(vastation)이란 어떤 사람이 파괴됨을 의미하는 게 아니다. 오히려 거기에는 모든 사람이 영원히 보존된다는 것을 포함하고 있다. 더 설명하면 전체적 측면에서 우주의 보존, 시험을 치르는 상태에서 모든 인간으로 선과 악이 균형(equilibrium)을 이루도록, 그리하여 선택의 자유가 100% 보장 되도록 보존하는 것까지 포함되어 있다. 이 의미가 규정을 위반한 성직자를 진지 밖으로 끌어내는 과정에 포함되어 있다. 이 문단에서 고용되는 사람들의 이름이 지닌 의미나 상응은 매우 암시적이다. 심판 때에 선한 자가 분리되고 그 뒤에 악한 자도 떨어져나가는 것은 마지막 결과로 이끄는 과정인 것은 더 말할 것도 없는 진리이다. 이것이 웃시엘과 그의 아들로 명시되어지고 있다. 시체를 그들의 상의(속옷)과 더불어 제거하는 것은 황폐됨 속에서 부패된 진리 또는 거짓이 그에 대응하는 악들과 결합한다는 말이다. 악한 자는 거짓을, 선한 자는 진리를 사랑한다. 천국에 있는 이들, 지옥에 있는 이들이든 거기서는 누구도 분단된 마음을 가질 수 없어 어느 누구도 선을 뜻하면서 거짓을 생각한다던가, 악을 행하면서 진리를 생각할 수 없다. 선함을 가진 천국에 있는 이들에게는 그 선함에 적합한 진리가 주어지고, 그 반면 지옥에 있는 선함을 가지지 못한 이들로부터는 그들이 선을 해칠 수밖에 없는 고로 진리가 제거된다 (마태 25:39 참조).
위와 같은 것이 사악한 자들에게 있었고 선한 자들의 경우 다음과 같은 사항을 보여준다. 인간의 완전한 상태에서 악은 선으로부터 분리될 뿐 아니라, 선 역시 각기 다른 종류와 등차로 정밀하게 구분되어진다. 다시 말해 천적 인간의 선이 영적 인간의 선으로 될 수 없다는 말이다. 이 문단에서 인간 삶의 등차들에 대한 정의가 잘 내려지고 있다. 더욱이 내적 인간과 외적 인간의 구별 역시 잘 나타내주고 있다. 천국에 있는 이들의 행복은 정밀한 구분에 상당히 의존되어 있다. 따라서 복잡하고 뒤섞여 있는 상태로 있는 지상 위 인간의 경우는 천국에 있는 행복을 실감하기가 어렵게 되어 있다. 잃은 형제를 위해 내적 인간은 슬퍼하는 것이 금하여져 있는 반면 외적 인간은 슬퍼해야 한다고 하는 내용에 이상한 느낌이 들지 않을까? 주님을 모독하는 예배의 결과로 고통당하는 악한 자에 대해서 내적 인간은 어떤 동정도 하지 않되 외적 인간은 슬퍼해도 좋다는 것은 어쩌면 불평등한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되지 않을까? 결코 그렇게 생각하거나 느껴서도 안될 것이다. 그 이유는 선함이 진보되는 수준에 비례해서 인간의 진정한 동정심은 더 순수하고 더 진해질 뿐이기 때문이다. 오로지 가장 높으신 분, 가장 거룩한 주님만이 동정심 그 자체이시다 (요한복음 11:33-39 참조). 죽은 자를 슬퍼하는데 있어서 아론과 그의 남은 아들들에게는 금지 명령이 떨어지고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허락 명령이 있게 된 것이 외적, 천적 인간에게는 동점심이 없기 때문에서가 아니라 오히려 훨씬 더 깊은 동점심을 가진 탓이다. 이들은 바깥쪽 눈에 보이게 표시를 내는 데에는 부족하지만 죽은 자를 두고 슬퍼하는 상징성에 대한 순수한 지식은 충분히 지각하고 있다. 더구나 순수한 사랑과 동정심을 가지고 있다. 그 이유는 아론과 그의 아들로 의미된 이들의 상태는 주님을 가장 내적으로 사랑하기 때문이다. 아론과 그의 아들들이 이스라엘 가문으로서 슬퍼하지 말라는데 대한 의미는 더 높은 선과 진리의 상태가 더 낮은 상태의 선과 진리로 되돌아가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한 것은 머리털과 겉옷의 상응에서 찾아진다. 그들이 만남의 천막 문간 밖으로 나가지 말라는 것은 의지 측면에서 그렇게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인데 이는 만남의 천막 문간이 천적 인간의 자발적인 삶 또는 넓은 측면에서 내적 인간의 한계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 뒤를 잇는 문단들은 일반적인 진리에 관심을 두고 또 다른 국면에서 보다 더 내면적 상태에 관련하여 일반적 진리를 전시해 놓고 있다. 특별히 천적, 영적 천국에서의 예배 또는 천적, 영적 인간의 예배가 이 문단의 주제가 되어 있다. 그러나 여기에도 이미 살핀 바 있는 자연적 인간의 예배를 포함하고 있을 것으로 생각되는데 그 이유가 모든 예배는 선 또는 사랑과 떨어져서는 존재하지 못하기 때문이요, 진리로부터서는 어떤 예배도 존재할 수 없고 진리는 수단으로서만 가능할 뿐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것이 스웨덴볽의 출애굽기 20장 22절(A.C. 8940항)의 설명과 불일치되는 듯 여겨질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렇지는 않다. 그 부분에서도 진리의 선을 함축하고 있고 지적 예배 뿐인 경우가 정죄되기 때문이다. 더구나 영적 인간은 진리를 원리로 해서 예배한다고 말해질 때, 다시 말해서 주님의 명령 사항인지라 예배 의식을 지키는 것 즉 진리에 순종하기 위해서 주님을 예배한다고 말해질 때 원리(principle)라는 단어는 애착을 포함하여 넌지시 비추는 말이 되고 있는데 그 이유는 움직이게 하는 힘은 어느 때나 애착이기 때문이다. 천적 인간과 영적 인간은 “포도주를 마시지 않는 것” 즉 진리로부터의 예배를 갖지 않는 것이 동등한 수준에 결코 있을 수는 없다. 이 뒤의 구절이 이와 연결되는 것을 언급하고 있다. 영적 인간에 관련되는 인간의 기능은 매우 흥미있는데, 그 이유는 진리 안에서의 훈육이라 해도 선으로부터 어떻게 있어야 하는지를 보여주지 않을 경우 성공적인 가르침이 될 수 없는 까닭에서 이다. 이는 가르쳐지는 사람이든 가르치는 사람이든 모두 해당된다. 성공적인 선생은 가르치기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살아남은 아론의 아들, 그리고 태워 바치고 남은 식사 제물을 잘 생각해보면 전자는 교회가 부패되어졌을 때 그 교회 안에 남아 있는 선 가운데 있는 이들을, 후자는 그들이 자기들 것으로 삼았던 선들을 각각 의미함을 알게 된다. 더불어 그들이 자기 것으로 삼은 선은 주님으로부터 천적, 영적 사랑을 통해 존재했다는 것까지 알 수 있는데 이 사항은 “흔든 가슴과 들어올린 넓적다리”로 명시되고 있다. 그런데 다음 절에는 “들어올린 넓적다리와 흔든 가슴”이라고 하여 앞 절과 뒷 절에서 서로 자리가 바뀌어 묘사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순서가 바뀌고 번복되는 듯한 언급은 거듭남의 첫 단계가 외적인 상태로부터 내적인 상태로 가고, 둘째 단계로 내적 상태로부터 외적 상태로 가는 번복되는 과정을 암시하는 묘사이다. 완성된 상태에서 선이 활동하는 것은 내적인 것에서 외적인 것으로 이어지는 단계이다. 이 두 단계(과정)는 거듭남에서 동시적으로 발생될 뿐만 아니라 연속적이기도 하다. 인간은 외적 측면으로부터 내적 측면에로 향하는 바깥쪽에서의 진보를 해 가는 한편, 주님께서는 천국을 통해 내적 측면에서 외적 측면에로 역사하신다. 또한 각 사람에게 각기 다른 평면이 주님에 의해 인간 안에서 형성된다.
이 장 전체와 관련시켜 죄 바침의 제물의 손실을 생각해 본다면 두 가지 요점이 우리의 시선을 집중하게 한다. 부패된 교회 안에서 사악한 자는 염소로 명시되고 있는 자연적 인간의 순진의 선으로부터 주님을 예배할 수 없다. 그리고 이 선은 부패라는 일반적 상태 때문에 그 선의 활동이 방해되어 진다. 그 이유는 모독된 예배나 이기적인 예배 속의 거짓들은 주님으로부터 온 선을 수단으로 하여 악에서 해방되게 해주려는 진리나 회개를 촉구하는 진리가 잘못을 저지르도록 원인을 제공하고 있다. 이것이 수염소가 불에 태워진 것과 모세가 엘르아잘과 이다말에게 화를 내는 것으로 의미되고 있다. 이제 우리가 주목해 볼 것이 있다. 신성한 진리를 그 자체로만 생각해 본다면 신성한 진리는 회개가 이기적 동기로부터와 거짓 원리에서 악을 금하기만 했을 뿐 선을 자기 것으로 삼지 못한 것을 똑바로 추궁한다. 그 반면 신성한 선은 진리 자체의 본성을 인식하면서 외적 교회에서도 선 가운데 실제로 있는 이들은 내향적으로 회개를 한다는 것, 그들이 거짓 원리로 잘못 예배하고 있다 해도 그런 이유가 교회가 부패되어 거짓 원리가 우세한 까닭에서 임을 인정한다. 그래서 이들이 외향적으로 선을 자기 것으로 삼을 수 없었다는 것도 인정한다. 이런 사항은 거짓이 거짓으로 확실히 보여져 거절이 가능한 때, 심판 때에는 해결될 문제라는 것까지 인정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두 가지 대비되는 사항 즉 나답과 아비후가 표현한 것, 즉 악한 심정이 거짓 교리와 병합되는 고로 해서 회개하지 못하는 것과 엘르아잘과 이다말이 표현한 것, 진리인 줄로 알았던 거짓 교리로 해서 길을 잃고 타락되었던 것, 이 둘의 차이점에 주목해두어야 할 것이다. 이로부터 우리는 악은 하느님과 선과 진리에 반대되는 죄로서 알고 금하는 것을 옷을 입고 다니듯 우리의 습관이 되게 하면 그것이 선을 순수하게 자기 것으로 삼게 하는 원인이 된다는 것, 신성한 진리와 신성한 선은 교회의 모든 상태에서도 인간의 구원이라는 목적을 위해 얼마나 협력하고 있는지 조금이나마 가늠해 볼 기회를 본 장은 제공하고 있다.
**********************************************

레위기 11장

성경: 레위기 1장

1. 그리고 주님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이야기하셨다, 그들에게 말하시기를,
2. 이스라엘의 자손들에게 이야기하라, 말하기를, 이것들은 너희가 땅 위 모든 짐승들 사이에서 먹을 살아있는 것들이다.
3. 짐승들 사이에서 굽이 나누어 있고, 그리고 발굽이 갈라져 있고, 그리고 되새김을 하는 것은 무엇이든 너희는 먹어라.
4. 그럼에도 너희는 굽이 나누이고 되새김하는 그것들로부터의 이것들은 먹지 못한다. 즉, 낙타, 이것은 되새김은 하나 굽이 나뉘어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은 너희에게 불결하다.
5. 바위너구리(coney), 이것은 되새김질은 하나 굽이 나누어있지 않은 바, 그것은 너희에게 불결하다.
6. 그리고 토끼, 이것은 되새김은 하나 굽이 나뉘지 않은 바, 이것은 너희에게 불결하다.
7. 그리고 돼지, 이것은 굽이 나뉘고 발굽이 갈라져 있으나 되새김을 하지 않기에 이것은 너희에게 불결하다.
8. 너희는 이것들의 고기를 먹지 말라, 그리고 이것들의 시체를 너희는 만지지 말라. 그것들은 너희에게 불결하다.
9. 너희는 물들에 있는 모두로부터의 이것들을 먹어라. 즉, 물들 안에서, 바다들 안에서, 강들 안에서 지느러미와 비늘이 있는 것, 그것들을 너희는 먹어라.
10. 그리고 물들에서 움직이는 모두로부터의, 그리고 물들에서 있는 살아있는 모든 생물로부터의, 바다 안에서, 그리고 강들 안에서 비늘과 지느러미를 가지지 않은 모두, 그것들은 너희에게 지긋지긋함 이다.
11. 그리고 그것들은 너희에게 지긋지긋함 이다. 너희는 그것들의 고기를 먹지 말라, 그리고 그것들의 시체를 너희는 지긋지긋해 하라.
12. 물들에서 비늘이나 지느러미가 없는 것은 무엇이든, 이것은 너희에게 역겨움이다.
13. 그리고 너희는 가금류 사이에서 이것들을 역겨워 하라. 그것들은 먹어져서는 안된다, 그것들은 역겨웁다. 즉 독수리(eagle), 그리고 수염수리(gier eagle), 그리고 물수리(ostray).
14. 솔개(kite), 그리고 각 종류의 송골매(falcon)
15. 각종 까마귀(raven) 모두 각각.
16. 타조(ostrich), 그리고 부엉이(night hawk), 갈매기(sea mew), 각종 매(hawk).
17. 올빼미(little owl) 가마우지(cormorant), 부엉이(great owl).
18. 그리고 부엉이(horned owl), 그리고 사다새(pelican), 그리고 독수리(vulture).
19. 황새(stork) 각종 왜가리(heron)와 후투티(hoopoe)와 박쥐(bat)이다
20. (발) 넷 모두 위에서 가는 날개달린 기는 모든 것들은 너희에게 역겨웁다.
21. 그럼에도 너희는 발 넷 모두 로 가는 날개 달리고 기는 모든 것들로부터서는 먹어도 된다. 이것들은 땅 위로 동시에 뛰도록 발들 넘어 다리들을 가지고 있다.
22. 그것들에서 이런 것들 까지 너희는 먹어도 된다. 즉 각종 메뚜기(locust), 그리고 각종 베짱이(bald locust), 각종 귀뚜라미(cricket), 각종 팟종이(grass-hopper)
23. 그러나 발 넷을 가진 날개달린 기는 모든 것들은 너희에게 역겨웁다.
24. 그리고 이것들에 의해 너희는 불결해질 것이다. 즉, 그것들의 시체에 접촉하는 자는 누구든지 저녁 때까지 불결하다.
25. 그리고 그것들의 시체를 조금이라도 나르는 자는 누구든지 자기 옷들을 빨아라, 그리고 저녁 때까지 불결하다.
26. 굽이 나뉜 짐승 모두 각각, 그리고 발굽이 갈라지지 않은 것, 새김질 않는 것은 너희에게 불결하다. 그것들을 만지는 모든 이는 불결하다.
27. (발) 넷 모두를 사용하여 가는 모든 짐승들 사이에, 그것의 (발톱 있는) 발 위에서 가는 짐승은 무엇이든, 그것들은 너희에게 불결하다. 그것들의 시체를 만지는 자는 저녁 때까지 불결하다.
28. 그리고 그것들의 시체를 나르는 자는 자기 옷을 빨아라, 그리고 저녁 때까지 불결하다. 그것들은 너희에게 불결하다.
29. 그리고 이것들은 땅 위에서 기는 것들 사이에서 너희에게 불결한 것들이다. 즉 쪽제비(weasel), 쥐, 각종 큰 도마뱀(great lizard).
30. 도마뱀붙이(gecko), 육지 악어(land-crocodile), 도마뱀(lizard), 사막 도마뱀(sand-lizard) 카멜레온(chameleon).
31. 이것들은 기는 모든 것 사이에서 너희에게 불결한 것들이다. 그것들이 죽을 때 그것들에 닿는 자는 누구든지 저녁 때까지 불결 하다.
32. 그리고 그것들 중의 어떤 것, 그것들이 죽을 때 그 위에 떨어지는 것은 무엇이든, 그것은 불결할 것이다. 그것이 나무 그릇이든, 의복이든, 가죽이든, 자루이든, 그것이 무엇이든, 그것 가지고 어떤 일이 행해지면, 그것은 물 안에 놓여야만 한다, 그리고 그것은 저녁까지 불결하다. 그런 다음 그것은 깨끗할 것이다.
33. 그리고 질그릇 모두 각각, 이 안으로 그것들 중의 어떤 것이 떨어지면, 무엇이 그것 안에 있든 불결하다. 그리고 그것을 너희는 깨트려라.
34. 먹을런지 모를 (거기 안의) 모든 식품, 그것 위에 물이 오면, 불결하다. 그리고 이런 그릇으로 마셔지는 모든 마실 것은 불결하 다.
35. 시체의 (어떤 부분이) 떨어진 모든 것, 각각은 불결하다. 즉 오븐이든, 납작한 냄비들을 위한 레인지(range)이든, 그것은 불결하다, 그리고 너에게 불결할 것이다.
36. 그럼에도 샘, 또는 물의 모아짐이 있는 구덩이는 깨끗하다. 그러나 그것들의 시체에 닿는 것은 불결하다.
37. 만일 그것들의 시체의 어떤 것이 파종되려 하는 어떤 뿌려지고 있는 씨에 떨어진다면, 그것은 깨끗하다.
38. 그러나 만일 물이 씨 위에 놓인다면, 그리고 그것들의 시체의 (어떤 것이) 거기 위에 떨어진다면, 그것은 너희에게 불결하다.
39. 그리고 만일 너희가 먹을지도 모르는 어떤 짐승이 죽는다면, 시체를 만진 그는 그것 때문에 저녁 때까지 불결하다.
40. 그리고 그것의 시체를 먹는 자는 자기 옷들을 빨아라, 그리고 저녁까지 불결하다. 그것의 시체를 나르는 자는 자기 옷들을 빨아라, 그리고 저녁 때까지 불결하다.
41. 그리고 땅 위를 기는 모두 각각의 기는 것은 역겨움이다. 그것은 먹지 말라.
42. 배로 가는 것은 무엇이든, (발)넷 모두 위에서 가는 것은 무엇이든, 많은 발을 가지고 있는 것은 무엇이든, 땅 위에서 기는 모든 기는 것 까지, 그것들을 너희는 먹지 말라. 그 이유가 그것들은 역겨운 것이기 때문이다.
43. 너희는 기는 어떤 기는 것 가지고 네 자신을 역겨워지게 만들지 말라, 너희를 더러워지게 할 것인, 그것들과 더불어 네 자신을 불결하게 만들지 말라.
44. 나는 주 너의 하느님이다, 그러므로 너희 자신을 신성해 있게 하라, 나는 거룩하다, 고로 너희도 거룩히 있으라. 너희는 땅위에서 움직이는 기는 것들의 어떤 방식으로 자신을 더럽혀지게 하지 말라.
45. 나는 너희 하느님이기 위해 이집트의 토지로부터 너희를 데려온 주님이시다. 그러므로 너희는 거룩해야 한다, 내가 거룩하기 때문이다.
46. 이것이 짐승의 법, 가금류의 법, 그리고 물들에서 움직이는 살아있는 생물 모두 각각의 법, 그리고 땅 위에서 기는 생물 모두 각각의 법이다.
47. 불결한 것과 깨끗한 것 사이에, 그리고 먹어도 되는 살아있는 것과 먹지 말아야 하는 살아있는 것 사이를 구별하기 위한 (법들) 이다.

영적 의미의 요약

* 교인이 자기 것으로 삼을 수 있는 선한 애착, 불순하므로 자기 것으로 삼을 수 없는 악한 애착에 관한 가르침. 1-8절.
* 자기 것이 될 수 있는 기억 속에 든 말씀의 진리들, 그리고 그렇지 않은 것에 관하여. 9-12절.
* 자기 것이 되어서는 안되는 악한 생각들에 관한 세부 항목. 13-19절.
* 감각적이고 육적인 것을 자기 것으로 삼는데 대하여. 20-23절.
* 피해야 하는 영적 불순함을 일으키는 몇 가지 원인들이 특별히 열거된다. 24-28절.
* 가장 저급에 속하는 감각적이고 육적인 것들, 이것들이 불순해지게 하는 원인인 바, 자기 것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 29-38 그리고 41-43절.
* 올바른 질서 상태에서 자기 것으로 삼아진 모든 애착들도 선과 진리가 황폐해지면 불순해지고, 이 불순과 접촉된 애착도 불순한 애착이 되므로 상태의 변화로 제거되어야 한다. 39-40절.
* 주님은 순수함 자체시오 거룩 자체이시기 때문에 인간 구원을 위해 각자가 거룩해지고 순수해지기를 선택한다면 가능하게 해두셨다. 44-45절.
* 위의 사항들은 느낌과 생각 안에 있는 순수한 것과 불순한 것에 관련되는 사항이요, 선과 악에 관해 자기 것이 될 수 있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에 관한 신성한 질서의 법칙이다. 46-47절.
각 절의 영적 의미

1절. 그리고 주님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이야기하셨다, 그들에게 말하시기를,

영적 의미

지각을 주심으로 주님으로부터 오는 신성한 진리와 선에 관한 유입이 있다.

세부적 영적 의미

여호와란 사랑 측면에서의 신성한 존재를; 이야기하심(speaking)은 유입을; 모세는 신성한 진리 또는 말씀을; 아론은 신성한 선을; 말함(saying)은 지각을 각각 명시해준다. A.C. 2001, 2951, 7010, 9946, 1791, 1822.

2절. 이스라엘의 자손들에게 이야기하라, 말하기를, 이것들은 너희가 땅 위 모든 짐승들 사이에서 먹을 살아있는 것들이다.

영적 의미

외적 측면에서 영적 교회인이 자기 것으로 삼아야 하는 선에 관해 밝히 알게 하신다.

세부적 영적 의미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르심은 영적 교회인으로 밝히 알게 하심을, 먹을 수 있는 짐승과 동물이란 자기 것이 될 수 있는 선한 애착을, 땅이란 외적 인간을 명시하고 있다. A.C. 10355, 3654, 2187, 27, 913.

3절. 짐승들 사이에서 굽이 나누어 있고, 그리고 발굽이 갈라져 있고, 그리고 되새김을 하는 것은 무엇이든 너희는 먹어라.

영적 의미

영적 애착의 내적 측면이나 외적 측면에 상응되는 모든 자연적 애착, 합당한 반성으로 획득되는 진리에 관한 모든 자연적 애착들은 자기 것으로 삼아도 된다.

세부적 영적 의미

굽이 갈라진 짐승이란 영적 애착과 상응되는 애착들, 그 이유는 동물이 애착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굽(hoof)이란 가장 저급에서의 진리에 관한 애착을 뜻하는 바, 갈라짐, 나누어짐(part, divide)이란 더 높은 애착과의 상응을; 발굽이 갈라진 짐승이란 영적 애착과 상응을 가지는 자연적 애착을; 갈라져 있다(cloven)는 것은 나뉨(division)을 뜻한다. 가장 낮은 것 또는 감각적인 것 그리고 자연적인 것은 각기 외적인 것과 내적인 것에 관련을 가진다. 새김질(반추)하는 것이란 응당 치러져야 할 반성으로 자기 것이 되는 진리에 관한 모든 자연적 애착을 말한다. 이 부분에서 우리가 알게 되는 반추작용(chewing the cud)에는 세 가지 사항이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일 것이다. 먼저 먹은 음식을 토해 올리는 작용(bring up the cud)인데 이는 지식의 승강 또는 진리가 외적인 기억으로부터 이해함 안으로 들어옴으로, 들어온 진리가 곰곰이 되새겨 보는 상태는 음식물을 잘게 씹어 곤죽으로 만드는 작용으로 나타나고, 되새겨진 진리를 자기 것 삼는 상태가 잘 씹은 음식을 다시 삼키는 작용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A.C. 44, 7729, 1832, 2162, 1832, 4171, 제 1장 17절, 3171, 7607-2, 6183, 6844, 3661, 5508, 2187.

4절. 그럼에도 너희는 굽이 나누이고 되새김하는 그것들로부터의 이것들은 먹지 못한다. 즉, 낙타, 이것은 되새김은 하나 굽이 나뉘어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은 너희에게 불결하다.

영적 의미

그러나 비록 합당한 반성으로 진리와 연합되어 있거나 영적 애착과 상응된다 해도 어떤 애착의 경우는 자기 것으로 삼아질 수 없다. 예를 들면 심사숙고함으로 얻어진 진리와 연결된 애착이라 해도 그것이 영적 사랑에 상응되지 않으면 불순하기 때문이다.

세부적 영적 의미

새김질하는 짐승이나 굽이 갈라진 짐승이라도 먹지 못함이란 자기 것으로 삼을 수 없는 어떤 애착들, 그것들이 되새겨봄에서 진리와 연결되지 않는 경우나 영적 애착과 상응되지 않는 경우의 애착들은 자기 것이 되지 못한다. 낙타란 지식을 단지 이기적으로 사랑함 또는 보상을 기대하여 지식을 사랑함을; 불결하다(unclean) 함은 영적 애착과 상응 않는 결과로 있어지는 불순함을 말한다. 제3절, A.C. 3048, 3816, 3956, 10130.

5절. 바위너구리(coney), 이것은 되새김질은 하나 굽이 나누어있지 않은 바, 그것은 너희에게 불결하다.

영적 의미

지적으로만 지식을 사랑함, 이것이 참으로 반성되어 나왔다해도 영적 사랑과의 상응이 결핍되어 있으면 불순하다.

세부적 영적 의미

사반(Shaphan, 바위너구리, coney, Hyrax Syriacus)이란 지식을 지적으로만 사랑함을 나타내고 있는데, 그 이유는 지식을 이기적으로만 사랑함에 이어 순서대로 뒤따르기 때문이다. 새김질은 하나 굽이 갈라지지 않았다는 것은 곰곰이 되새겨 보고 있는 데도 영적 차원과의 상응이 결핍된 것을; 그것이 부정하다는 것은 지식을 지적으로만 사랑함은 불순하다는 것을 말한다. A.C. 10130, 제 3절.

6절. 그리고 토끼, 이것은 되새김은 하나 굽이 나뉘지 않은 바, 이것은 너희에게 불결하다.

영적 의미

지식을 감각적으로만 사랑함 역시 위와 같이 불순하다.

세부적 영적 의미

토끼(hare)란 지식을 감각적으로만 사랑함을 말하는데 그 이유는 토끼가 시리즈의 세 번째에 있기 때문이다. 토끼가 새김질은 하나 굽이 갈라지지 않았다 함은 지식에 대한 이 사랑이 참으로 되새겨보기는 하지만 영적 사랑과 상응되고 있지는 않다는 말이다. 이것이 불결하다란 그것이 불순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구절에는 한 가지 의문이 되는 것이 있다. 토끼류(rock-badger, hare)는 낙타처럼 반추 동물은 아니다. 그럼에도 위 두 가지 동물이 새김질을 한다고 말해지고 있다. 이에 대한 설명을 붙여 본다면 이러하다. 잘 새김질한다(bring up the cud)는 용어는 낙타 뿐 아니라 토끼 같은 동물에도 응용되고 있다. 그 이유가 이 동물도 뺨 부분의 텅빈 아구에 보존된 음식물이 적긴 하지만 잘 분쇄하는 습관이 있기 때문이다. 또한 휴식을 할 때 앞니가 서로 서로 일하고 있는데 이렇게 해서 물어 뜯는 용도에 적합하도록 앞니가 보존된다. 그런고로 해서 거룩한 저자에 의해서는 이런 동물도 실지로 새김질하는 것으로 계산되고 있다. 이렇게 추측해본다고 해서 말씀의 글자 의미가 매우 빈약해서 보충해야 할 게 있다는 식으로 말씀에 대해 오판해서는 안 된다. 이미 살핀 바 있지만 말씀의 최말단 의미는 진리의 외관을 포함하고 있다. 더불어 표현과 상응되는 값어치는 글자적 서술이 역사적으로 옳지 않다 해서 그 가치가 덜한 곳은 한군데도 없다. 예를 들면 해가 멈추어 서 있다 라는 구절(여호수아 10:13)이나, 주님께서 시험받으실 때 아주 높은 산꼭대기에서 한 순간에 온 세상 나라를 보셨다(마태 4:8)라는 구절 등등이 있다. 따라서 우리가 본문에 관한 더 많은 세부 사항을 알려면 사반이나 토끼 항목에 관해 백과사전까지 참조하면 더 충분한 이해를 갖게 된다. A.C. 10130, 제3절.

7절. 그리고 돼지, 이것은 굽이 나뉘고 발굽이 갈라져 있으나 되새김을 하지 않기에 이것은 너희에게 불결하다.

영적 의미

부를 획득하는데 게걸스런 사랑, 이것은 탐욕 또는 단순히 육적인 것을 욕심 내는 것인 바, 설사 그것이 영적 사랑과 상응된다 해도 만일 그 목적을 위해 진리를 반영하지 않는다면 불순한 것이다.

세부적 영적 의미

돼지는 부를 획득하려는 게걸스런 사랑, 이른 바 탐욕 또는 단순히 육적 수준에서 욕심내는 것을 말한다. 굽이 두 쪽으로 갈라졌다는 것은 영적 사랑에 상응되도록 할 수 있는 능력을; 새김질을 않는다란 진리를 되새겨보지 않는다는 것을; 불결하다란 영적인 불순을 말한다. A.C. 1742, 10130, 제 3절.

8절. 너희는 이것들의 고기를 먹지 말라, 그리고 이것들의 시체를 너희는 만지지 말라. 그것들은 너희에게 불결하다.

영적 의미

그러므로 위의 애착들 어느 것도 영적 인간에 의해 자기 것 삼아질 수 없다. 제 아무리 적은 것이라 해도 허용해서는 안 된다. 그 이유는 불순하기 때문이다.

세부적 영적 의미

이런 동물의 고기는 먹지 말라 함은 영적 인간은 이와 같은 애착들을 자기 것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는 것을; 그 시체에 닿아도 안 된다는 것은 그 애착의 아주 작은 것도 탐닉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불결하다는 것은 영적인 불순함을 말한다. A.C. 2187, 4404, 10199, 3900, 10130.

9절. 너희는 물들에 있는 모두로부터의 이것들을 먹어라. 즉, 물들 안에서, 바다들 안에서, 강들 안에서 지느러미와 비늘이 있는 것, 그것들을 너희는 먹어라.

영적 의미

영적 인간이 영적 삶을 진보되게 할 목적에서 계발되는 신성한 말씀으로부터의 진리는 자기 것이 되게 할 수 있다. 그리고 최말단의 삶이나 선한 일에서 그 진리가 체현되고 표현되어야 한다. 이 사항은 진리의 외적, 내적, 가장 깊은 측면 모두에서 진실이다.

세부적 영적 의미

물에 사는 것들이란 말씀 속의 진리를; 먹는다란 자기 것 만듦을; 고기란 과학물들을; 지느러미란 동물이나 인간의 발과 다리처럼 자연적 수준의 힘, 이를 수단으로 영적 삶의 진보가 만들어진다. 비늘이란 완전히 외적인 부분에 속한 것들을, 본문의 경우 선한 일 가운데서 표현되는 최말단 진리를, 그리고 이 진리에 관계되어 따로 있는 가장 깊은 진리도 명시하고 있다. A.C. 2702, 2187, 40, 991, 4381, 4382, 4383, 6693.

10절. 그리고 물들에서 움직이는 모두로부터의, 그리고 물들에서 있는 살아있는 모든 생물로부터의, 바다 안에서, 그리고 강들 안에서 비늘과 지느러미를 가지지 않은 모두, 그것들은 너희에게 지긋지긋함 이다.

영적 의미

그러나 영적 진보를 내다보고 계발되지 않는 진리, 진보를 목적으로 최말단에서 체현 안되는 것들, 그 용도가 내적이든, 가장 깊은 내면이든, 외적이든, 또는 감각적이고 육적일 뿐인 것은 지옥적인 것이 되고 더럽힐 뿐이다.

세부적 영적 의미

비늘과 지느러미가 없는 고기란 영적 진보를 위해 발달되지 않는 진리를, 이 목적을 위해 최말단에서 체현되지 않는 진리를 말한다. 바다, 강, 개울이란 내면과 가장 깊은 내면, 그리고 외면을; 물에서 우글거리는 것들, 물 안에 있는 생물이란 감각적이고 육적인 것들을; 그것들이 지긋지긋함이다란 그것들은 지옥적이고 모독하는 것들이라는 말이다. 제 9절, A.C. 40, 41, 6052, 7454.

11절. 그리고 그것들은 너희에게 지긋지긋함 이다. 너희는 그것들의 고기를 먹지 말라, 그리고 그것들의 시체를 너희는 지긋지긋해 하라.

영적 의미

참으로 위의 사항은 영원하다. 자기 것이 되게 할 수 없다. 위의 사항이 아주 미미한 수준의 것이라 해도 영적 인간은 절대 허용해서는 안 된다.

세부적 영적 의미

이것들이 지긋지긋하다고 반복된 이유는 이와 같은 사항들은 영원히 지옥적이고 모독하는 것들이라는 말이다. 그 고기를 먹지 말라는 것은 자기 것으로 삼지 말라는 것을; 그 시체를 지긋지긋한 것으로 여겨라란 아무리 미미한 것이라 해도 절대 방종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말한다. A.C. 618, 5253, 2187, 3900, 6052.

12절. 물들에서 비늘이나 지느러미가 없는 것은 무엇이든, 이것은 너희에게 역겨움이다.

영적 의미

외적 기억에서 획득되어지는 것은 무엇이든, 그것이 거짓이든 진실한 것이든 영적 진보에 관한 것이 없고, 삶에 선용되기 위해 습득되지 않는다면 어느 것이든 자기 것으로 삼을 수 없다.

세부적 영적 의미

비늘이나 지느러미가 없다는 것은 영적 삶의 진보나 삶의 선용을 위한 게 없다는 것을; 역겨운 것이란 위의 것은 지옥적이고 모독하는 것들임을, 그러므로 자기 것이 되게 할 수 없다는 것을, 그래서 그것에 대해 “외적 기억에서 획득되는 것”이라 말하고 있다. 그 이유는 11, 12절이 각각 영적 의미를 갖는 바, 하나는 내면에 속한 것, 또 하나는 내부에 있는 것과 관계되기 때문이다. 제 9절, A.C. 6052.

13절. 그리고 너희는 가금류 사이에서 이것들을 역겨워 하라. 그것들은 먹어져서는 안 된다, 그것들은 역겨웁다. 즉 독수리(eagle), 그리고 수염수리(gier eagle), 그리고 물수리(ostray).

영적 의미

아래의 사항들은 지옥적인 것이요 생각 속에서 순결을 빼앗는 바 깊이 사려해야 한다. 그것들, 즉 합리적 능력인 의지와 이해함 그리고 행동에서 올라오는 가장 깊은 거짓들은 자기 것이 되게 해서는 안 된다.

세부적 영적 의미

새나 가금류는 합리적이고 지적인 것, 그러므로 생각과 관계되는 것을 말한다. 먹지 말라란 자기 것으로 삼아서는 안 됨을; 독수리는 의지 측면에 있는 합리적 능력을 남용함으로 발생되는 가장 깊은 측면의 거짓들; 수염수리(the gier-eagle)란 이해함 측면에서 있는 합리적 능력의 남용으로 발생되는 가장 깊은 측면의 거짓들을 말한다. 물수리(흰꼬리수리, ospray)는 삶 또는 행동 측면에서 위와 유사한 거짓을 말한다. A.C. 40, 6052, 2187, 3901, kitto, art. “ozniyah” 참조.

14절. 솔개(kite), 그리고 각 종류의 송골매(falcon)

영적 의미

의지와 똑같은 종류에 속한 내면의 거짓들, 그들 본성에 따른 이해함과 똑같은 종류의 내면의 거짓들

세부적 영적 의미

솔개(검은소리개, kite)도 위의 독수리와 같은 종류에 있는 내면의 거짓을 말하는데, 그 이유는 솔개 역시 독수리와 비슷하게 먹이를 포획하기 때문이다. 각종 송골매(붉은소리개, falcon)에도 위와 같은 설명이 주어진다. 전자는 의지에 속한 내면의 거짓, 후자는 이해함에 속한 내면의 거짓을 말한다. A.C. 778, 866, 988, 욥기 28:7.

15절. 각종 까마귀(raven) 모두 각각.

영적 의미

각 본성에 의거한 같은 종류의 최말단에 있는 거짓들

세부적 영적 의미

각종 까마귀란 마음의 내면 등차에 있는 최말단 거짓들을; “각종, after its kind”이란 이 절과 다음 절에서 영적으로 “본성에 의거해서,” 즉 동물과 새들에 다양한 종류가 있듯이 애착과 생각의 다양한 종류를 말한다. 창세기 1:11, 12, A.C. 775.

16절. 타조(ostrich), 그리고 부엉이(night hawk), 갈매기(sea mew), 각종 매(hawk).

영적 의미

자연적 수준의 능력을 남용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즉 악으로부터 온 가장 깊은 거짓들, 악으로부터 온 내면의 거짓들, 악으로부터 온 첫 등차의 외면에 있는 거짓들, 그들 본성에 따른 같은 종류의 악에서 온 가장 깊은 거짓들.

세부적 영적 의미

앞 세 절은 합리적 능력을 남용하는 것과 관련되고, 이 절과 다음 절은 자연적 능력을 남용하는 것에, 18-19절은 감각적 능력을 남용하는 것에 관련되어 묘사되는데 이는 시리즈로부터 명백해진다. 거론되는 새들은 크게 세 분과로 나뉘고 있는데 각 분과는 7개로 구성된다. 이는 본문과 신명기 14장 12-18절에서도 같다. 그러나 이 시리즈 즉 14절의 경우는 신명기의 같은 문단에서 세 마리가 명명된데 비해 두 마리만 거론되어 예외를 이루고 있다. 이에 대해서는 조금 더 설명해야 할 것으로 본다. 숫자 3×7 또는 21은 좋은 의미일 경우 완전함 또는 거룩함을, 나쁜 의미일 경우 황폐함 또는 모독함과 상응된다. 그런고로 타조는 자연적 마음에 있는 악으로부터 온 가장 깊은 거짓들을; 올빼미는 악으로부터 온 내면의 거짓들을; 갈매기는 악으로부터 온 외적인 거짓들을; 매는 악으로부터 온 가장 깊은 거짓들을 말한다. 이상은 시리즈에서 첫 등차에 해당된다. A.C. 2788, 433, 5268, 예레미야 애가 4:3, 욥기 39:26.

17절. 올빼미(little owl) 가마우지(cormorant), 부엉이(great owl).

영적 의미

악에서 온 내면의 거짓들, 그리고 둘째 등차의 악에서 온 외면에 있는 거짓들, 또한 세째 등차의 최말단 즉 가장 수준 낮은 거짓들,

세부적 영적 의미

올빼미(little owl)는 악으로부터 온 내면의 거짓들을 말하고, 가마우지는 악으로부터 온 외적인 거짓들, 이는 시리즈에서 둘째 등차에 속한다. 부엉이(great owl)는 최말단 또는 가장 낮은 수준의 거짓들을 말하는데 이는 시리즈에서 셋째 등차에 속한다. A.C. 866, 4967, 이사야 34:11).

18절. 그리고 부엉이(horned owl), 그리고 사다새(pelican), 그리고 독수리(vulture).

영적 의미

감각적 애착을 남용함에 관련되는 것은 무엇이든지, 즉 가장 깊은 거짓, 내면의 거짓, 첫 등차인 외면의 거짓들.

세부적 영적 의미

부엉이(horned owl, 백조), 펠리컨(사다새), 독수리(vulture, 흰물오리)는 시리즈에 따라서 감각적 애착의 첫 등차에서 제각기 가장 깊은 거짓, 내면의 거짓, 외면의 거짓들을 말한다. 시편 102:6, A.C. 866, 4967.

19절. 황새(stork) 각종 왜가리(heron)와 후투티(hoopoe)와 박쥐(bat)이다

영적 의미

본성에 따른 가장 깊은 거짓과 내면의 거짓들, 그리고 거기서 둘째 등차인 외적인 것, 그리고 거기에 셋째 등차인 가장 낮은 종류의 거짓들.

세부적 영적 의미

황새(stork,고니), 왜가리(heron, 푸른 해오라기), 후투티(hoopoe, 오디새)는 시리즈에 의거 둘째 등차에서 각각 가장 깊은 거짓, 내면의 거짓, 외면의 거짓을 말한다. 박쥐는 시리즈에 의거 셋째 등차에서 가장 저급의 거짓을 말한다. 스가랴 5:9, 이사야 2:20, A.C. 8932, 10582.

20절. (발) 넷 모두 위에서 가는 날개달린 기는 모든 것들은 너희에게 역겨웁다.

영적 의미

영적 생명의 겉모습은 가지고 있으나 거듭 안 난 의지 속에 있는 모든 생각과 느낌, 이것들이 아직 타락된 채 있어 악과 더블은 거짓의 결합으로부터 활동 중일 경우 지옥적이요 불순한 바 자기 것으로 삼아질 수 없다.

세부적 영적 의미

기어다니면서도 날개가 달렸다 함은 거듭나지 않은 의지 속의 생각과 느낌, 그러나 영적 삶의 외관을 지닌 것을 말한다. 네 발로 걷는다란 타락되고 모독된 것을; 역겨웁다(abomination)란 타락되고 모독된 것이 확증된 상태를 말한다. A.C. 9331, 8764, 247, 248, 6052.

21절. 그럼에도 너희는 발 넷 모두로 가는 날개 달리고 기는 모든 것들로부터서는 먹어도 된다. 이것들은 땅 위로 동시에 뛰도록 발들 넘어 다리들을 가지고 있다.

영적 의미

위의 것 중 자연적 인간의 감각적이고 육적인 수준 위로 승강될 수 있는 애착과 생각이라면 자기 것으로 삼을 수 있다.

세부적 영적 의미

네 발로 기어다니되 날개 있는 것이란 이 구절의 경우 감각적이고 육체적인 수준 이상으로 승강될 수 있는 보다 낮은 수준의 애착들을 말한다. 발 위에 다리가 있다함은 단지 자연적 수준에서 보다 높은 선과 진리와 교통을 가지는 것을 뜻한다. 걷는 것 같이 땅위로 뛰어 오른다는 것은 영적 삶의 진보나 활동을; 먹는다란 자기 것으로 삼는다는 것을 말한다. A.C. 994, 10050, 8420, 2187.

22절. 그것들에서 이런 것들 까지 너희는 먹어도 된다. 즉 각종 메뚜기(locust), 그리고 각종 베짱이(bald locust), 각종 귀뚜라미(cricket), 각종 팟종이(grass-hopper)

영적 의미

그리고 이와 같은 것, 예를 들면, 의지와 이해함의 가장 낮은 선한 애착들을 그 속성에 따라 내면이나 외면에 속해 있는 것들이다.

세부적 영적 의미

이 구절에서 명명되는 여러 가지 곤충(locust)들은 각각의 본성에 따라 내면과 외면의 가장 낮은 수준의 애착들을 말한다. A.C. 7643, 775, see kitto, Encyclopadia, art, “chagab.”

23절. 그러나 발 넷을 가진 날개달린 기는 모든 것들은 너희에게 역겨웁다.

영적 의미

영적 삶에 종속되지 않은 감각적이고 육적인 모든 쾌락이나 기쁨들, 이것들은 악과 거짓에 결합되어 있기 때문에 지옥적인 것으로, 지독하게 혐오스러운 것으로 간주해야 한다.

세부적 영적 의미

네 발을 가지고 기어다니는 날개 돋친 모든 것이란 영적 삶에 종속되지 않은 감각적이고 육체적인 기쁨과 쾌락을 말한다. 그 이유는 그것들에는 악과 더불은 거짓과의 결합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역겨웁다란 지옥적이고 모독된 것을 말한다. A.C. 9331, 1686, 6052.

24절. 그리고 이것들에 의해 너희는 불결해질 것이다. 즉, 그것들의 시체에 접촉하는 자는 누구든지 저녁 때까지 불결하다.

영적 의미

위 사항을 실제 응용하면 불결해진다. 그것의 아주 작은 사항이라도 탐낸다면 불순함의 원인이 된다. 이런 것들은 상태를 바꿈으로만 제거될 수 있다.

세부적 영적 의미

“이런 것들이 너희를 지긋지긋해지게 한다”란 불순한 어떤 것을 실행함을 말한다. 건드림은 영적으로 접촉 또는 탐닉을; 저녁때까지란 상태의 마지막, 또 다른 상태의 시작을 말한다. A.C. 10130, 7844.

25절. 그리고 그것들의 시체를 조금이라도 나르는 자는 누구든지 자기 옷들을 빨아라, 그리고 저녁 때까지 불결하다.

영적 의미

더구나 이와 같은 악을 생각만 한다 해도 외적 부분을 깨끗하게 할 필요성을 요구한다. 그 필요성이 없어질 때까지 불순한 채 있게 된다.

세부적 영적 의미

시체를 나른다란 영적 생명이 결핍된 것 즉 악으로부터 생각하는 것을; 옷을 빤다란 외적 부분을 깨끗케 함을; 저녁 때까지 불결(unclean)하다란 상태가 변화할 때까지 불순하다는 것을 말한다. A.C. 8764, 3900, 3147, 1073, 10130, 7844.

26절. 굽이 나뉜 짐승 모두 각각, 그리고 발굽이 갈라지지 않은 것, 새김질 않는 것은 너희에게 불결하다. 그것들을 만지는 모든 이는 불결하다.

영적 의미

영적 사항과 상응을 가지되 외적일 뿐 내적으로가 아닌 모든 애착은 불순한데, 그 이유가 그 애착들은 선을 위해 신성한 진리를 가지고 되새겨 보지 않기 때문이다.

세부적 영적 의미

굽이 나뉜 짐승이란 영적 애착과 외적으로 상응되는 애착들을; 굽이 갈라지지 않은 것이란 영적 애착과 내적으로 상응되지 않는 것을; 새김질 않음이란 선을 목적으로 해서 진리를 되새겨보는 데로 인도하지 않는 것을; 불결한 것이란 영적으로 불순한 것을; 닿음이란 영적으로 접촉함을 말한다. A.C. 44, 7729, 1832, 2162, 1832, 4171, 제 3절, 10130.

27절. (발) 넷 모두를 사용하여 가는 모든 짐승들 사이에, 그것의 (발톱 있는) 발 위에서 가는 짐승은 무엇이든, 그것들은 너희에게 불결하다. 그것들의 시체를 만지는 자는 저녁 때까지 불결하다.

영적 의미

삶의 과정에서 영적 애착과 결합하지 않으려 하여 오직 자연적 수준에 머무는 모든 애착들 역시 불순하다. 이런 애착들의 지극히 작은 것도 영적 애착이 결여돼 있는 바 불순하게 하는 원인이므로 오로지 상태를 바꿈으로써만 제거될 수 있다.

세부적 영적 의미

(발톱있는) 발(paws)로 걸어다니는 것이란 통째로 자연적인 모든 애착을; 네 발로 걷는 동물이란 악이 거짓과 결합된 고로 삶의 과정에서 영적 애착과의 결합을 승인하지 않는 애착을; 불결한 것이란 영적 불순함을; 시체에 닿는다란 영적 생명이 결여된 애착에 접촉함을; 저녁 때까지 불결하다란 상태가 변할 때까지 불순함을 말한다. A.C. 2162, 4403, 9331, 1686, 8420, 10130, 3900, 7844.

28절. 그리고 그것들의 시체를 나르는 자는 자기 옷을 빨아라, 그리고 저녁 때까지 불결하다. 그것들은 너희에게 불결하다.

영적 의미

위의 사항 외에 일상 생활에서 생각되는 모든 악한 애착들도 외면의 측면에서 순수함이 필요하다. 이것 또한 불순해짐을 피할 수 없는 바 상태의 변화로 제거해야 한다.

세부적 영적 의미

시체를 나름, 또는 운반함이란 삶의 보통 생활에서 이런 악을 생각했을 경우를; 옷을 빨라란 외적 인간을 깨끗하게 함을; 저녁 때까지 불결하다란 상태가 변할 때 까지 불순함을; “이런 것들은 너희에게 불결하다”란 자연 평면의 내, 외부 측면에서, 그리고 의지와 이해함 측면에서 불순한 것들에 관하여 진리가 확증함을 말한다. A.C. 8764, 3900, 3147, 1073, 10130, 7844, 3388, 6663.

29절. 그리고 이것들은 땅 위에서 기는 것들 사이에서 너희에게 불결한 것들이다. 즉 쪽제비(weasel), 쥐, 각종 큰 도마뱀(great lizard).

영적 의미

감각적이고 육적인 애착들 중 다음의 것도 불순하다. 감각적 사랑을 통해 진리에 억지로 무식해지려는 것, 탐욕, 본래부터 육적 애착일 뿐인 것들.

세부적 영적 의미

땅을 기어다니는 기는 것(creeping thing)이란 감각적이고 육체적인 애착들을; 쪽재비 또는 두더지는 감각적 사랑을 통해 고집스럽게 진리에 무지한 것을; 쥐는 탐욕(avarice)을; 큰 도마뱀은 본성에 의거 육적일 뿐인 애착의 기쁨을 말한다. A.C. 9231, kitto, art. “choled weasel,” 1994, 938, 954, 994, 775, kitto, art. “Isab” 참조.

30절. 도마뱀붙이(gecko), 육지 악어(land-crocodile), 도마뱀(lizard), 사막 도마뱀(sand-lizard) 카멜레온(chameleon).

영적 의미

위 사항으로부터 파생되는 갖가지 악과 거짓들과 함께 내면적으로 거짓이 선을 뒤집음, 내면적으로 악이 진리를 부패시킴, 외면적으로 선이 뒤집힘, 외면적으로 진리가 썩어짐, 불합리한 겉모습에서 일어나는 감각의 유혹.

세부적 영적 의미

여기서 명명되는 동물들은 육체적 애착에서 파생되는 각종 악과 거짓들을 말한다. 그 이유는 그것들 중 넷은 도마뱀과 비슷한 종류이고, 카멜레온은 도마뱀의 한 종류이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해석이 주어지는 바, 거짓에 의해 내면적으로 선이 뒤집힘, 외면적으로 선이 뒤집힘, 외면적으로 진리가 썩어짐, 거짓된 외관으로부터 나오는 감각적 기만을 말한다. A.C. 994, kitto, arts, “anakah, coach, letaah, chomet, tinshemeth, chameleon 참조.

31절. 이것들은 기는 모든 것 사이에서 너희에게 불결한 것들이다. 그것들이 죽을 때 그것들에 닿는 자는 누구든지 저녁 때까지 불결 하다.

영적 의미

위의 것들은 가장 낮은 품성의 불순한 애착들인바, 그것들과 경미하게 접촉되어도 상태를 불순하게 만든다. 이것들은 상태의 변화로 제거될 수 있다.

세부적 영적 의미

불결한 기는 것이란 가장 낮은 품성의 불순한 애착들을; 닿음이란 영적 접촉을; 시체 또는 죽은 것이란 영적 생명이 없는 것을; 저녁 때까지 불결함은 상태가 변할 때까지 불순함을 말한다. A.C. 994, 10130, 3900, 7844.

32절. 그리고 그것들 중의 어떤 것, 그것들이 죽을 때 그 위에 떨어지는 것은 무엇이든, 그것은 불결할 것이다. 그것이 나무 그릇이든, 의복이든, 가죽이든, 자루이든, 그것이 무엇이든, 그것 가지고 어떤 일이 행해지면, 그것은 물 안에 놓여야만 한다, 그리고 그것은 저녁까지 불결하다. 그런 다음 그것은 깨끗할 것이다.

영적 의미

완전하게 황폐된 위의 것들의 상태 안에서는 제 아무리 우연히 그것에 대해 관대한 태도를 보였다 해도 불순함의 원인이 된다. 이 방자함은 선 또는 진리를 내면적 또는 외면적으로 그릇이 되는 의지 또는 이해함에 영향을 끼친다. 이런 그릇이 사용되어지려면 반드시 진리의 영향 밑에 있어야 하는데 상태가 변화할 때까지는 불순한 채 남아 있는다. 상태가 변화되면 지정된 목적에 충당될 수 있다.

세부적 영적 의미

앞 절과 이 절에서 죽은 것이란 완전히 황폐함을 말한다. 그러므로 그 시체 위에 떨어지는 것이란 악을 우연히 탐닉하는 것(악을 관대히 처리하는 것)을 말한다. 그 이유가 이 접촉은 고의가 아니기 때문이다. 부정함은 영적 불순을 말한다. 나무 그릇이란 저장소로서의 의지를; 옷은 저장소로서의 이해함을; 가죽(skin)은 의복(clothing)같이 저장소로서의 진리를; 자루(sack) 역시 옷과 같은 것을 말한다. 다시 말해 전자는 이해함에, 후자는 의지에 관련된다. 앞의 한 쌍은 각각 외적인 것을, 그 뒤의 한 쌍은 각각 내적인 것과 관계된다. 사람이 쓰는 물건은 무엇이든 간에란 어떤 용도에 충당될 수 있는 저장소를 말한다. 그것을 물에 담근다란 진리로 깨끗하게 함을; 저녁까지 불결하다는 것은 상태가 변할 때 까지 불순함을; 그 뒤에는 깨끗하다란 그릇(vessel)으로 의미되는 외적 자질의 상태는 지정된 목적을 섬길 수 있다는 것, 그 이유는 그것이 내적 상태와 조화를 이룰 것이기 때문이다. A.C. 6119, 10130, 643, 2189, 9215, 5489, 683, 9215, 1472, 3147, 7844, 1487.

33절. 그리고 질그릇 모두 각각, 이 안으로 그것들 중의 어떤 것이 떨어지면, 무엇이 그것 안에 있든 불결하다. 그리고 그것을 너희는 깨트려라.

영적 의미

선에 밀착되어 있는 모든 그릇들이 거짓으로 더렵혀지면 가장 저급의 악들로 오염된 것인 바 그 그릇 속의 선은 불순하다. 따라서 그릇 자체가 분리되어야 할 것이다.

세부적 영적 의미

여기서 오지 그릇(an earthen vessel)이란 선과 일치 않고 거짓으로 더럽혀진 자연적일 뿐인 저장소를, “그 속에 빠진 것”이란 감각적 애착으로 오염된 것을, 불결하다란 영적 불순함을, 그 이유는 이 저장소가 선용되는 측면, 또는 선의 측면이 손상을 입기 때문이다. 그릇을 깨트려 버림이란 이 저장소는 분리되어져야 함을 말한다. A.C. 10105, 제 29, 30절 참조. A.C. 10130, 9163.

34절. 먹을런지 모를 (거기 안의) 모든 식품, 그것 위에 물이 오면, 불결하다. 그리고 이런 그릇으로 마셔지는 모든 마실 것은 불결하다.

영적 의미

자기 것으로 삼을 수도 있는 그릇 속의 선, 그러나 악의 거짓으로 오염되어 있는 바, 불순하다. 따라서 자기 것으로 삼을 수 있었던 그 선으로부터의 모든 진리 역시 불순하다.

세부적 영적 의미

그릇 안에 있는 먹을 수 있는 양식이란 자기 것 삼아도 될 용기 속의 선을; 이 절에서의 물이란 거짓을; 마심이란 진리를; 불결한 것이란 영적 불순함을 말한다. A.C. 7480, 2187, 3168, 10130.

35절. 시체의 (어떤 부분이) 떨어진 모든 것, 각각은 불결하다. 즉 오븐이든, 납작한 냄비들을 위한 레인지(range)이든, 그것은 불결하다, 그리고 너에게 불결할 것이다.

영적 의미

위와 같은 악들로 아주 경미하게 외적으로만 오염되었어도 그 모든 것은 불순하다. 선이 준비되도록 하는 데에나, 그리고 진리를 자기 것 삼는데 있어서 준비 사항으로 충당되는 그것은 불순한 바 분리되어야 하며 계속 분리가 진행되어야 한다.

세부적 영적 의미

“모든 것”이란 외적인 것을 말하는데 이는 뒤따르는 사항에서 명백하다. 주검은 영적 생명이 결여된 것을; 불결한 것이란 불순함을; 오븐이란 자연적 또는 외적 기쁨 또는 사랑, 좋은 것과 나쁜 것을; 부숨이란 분리함을; “불결해진다”란 불순함의 계속을 말한다. A.C. 3900, 10130, 7356, 9163.

36절. 그럼에도 샘, 또는 물의 모아짐이 있는 구덩이는 깨끗하다. 그러나 그것들의 시체에 닿는 것은 불결하다.

영적 의미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 또는 진리에 관한 넓은 측면에서의 그릇, 예를 들면 내면적 또는 외면적인 기억, 또는 글자 의미에서의 말씀의 내, 외면적 사항들은 위와 같은 오염에서 순수하다. 어찌됐든 영적 생명이 결여된 것과는 아주 가벼운 접촉을 가졌어도 그 진리는 불순하다.

세부적 영적 의미

샘 또는 웅덩이, 그 안에 물이 모여 있을 경우 이는 선 또는 진리에 관한 넓은 측면에서의 저장소(receptacle), 즉 기억 또는 말씀을; 부정하지 않음이란 순수함을; 물에 시체가 닿을 경우 그것은 진리가 영적 생명이 결여된 것과 접촉 또는 오염되는 것, 그러므로 불결하다. A.C. 3424, 679, 2702, 3900.

37절. 만일 그것들의 시체의 어떤 것이 파종되려 하는 어떤 뿌려지고 있는 씨에 떨어진다면, 그것은 깨끗하다.

영적 의미

만일 교인이 가르침을 받는 상태에서 위의 악들이 그의 생각을 오염시키고 있다 해도 이미 심어진 진리들은 순수하다.

세부적 영적 의미

파종할 씨란 진리로 훈육되는 상태를; 시체 또는 시체의 일부가 씨에 떨어짐은 생각 안에서 악으로 인해 진리가 오염되는 것을; 깨끗하다(clean)란 불순함에서 자유로워짐을 말한다. A.C. 932, 3900, 제 32절, 10130.

38절. 그러나 만일 물이 씨 위에 놓인다면, 그리고 그것들의 시체의 (어떤 것이) 거기 위에 떨어진다면, 그것은 너희에게 불결하다.

영적 의미

그러나 가르침을 받는 상태라 해도 거짓이 진리와 혼합되고 있다면, 또는 이런 악으로부터 인간이 거짓을 좋아하도록 처리한다면 거기에는 불순이 존재한다.

세부적 영적 의미

낟알이 물에 젖었다란 거짓이 진리와 유유하게 혼합됨을; 시체란 악이 진리를 모독함을; 불결함은 불순함을 말한다. A.C. 10130, 제 34절, 932, 3900.

39절. 그리고 만일 너희가 먹을지도 모르는 어떤 짐승이 죽는다면, 시체를 만진 그는 그것 때문에 저녁 때까지 불결하다.

영적 의미

또한 자기 것으로 삼아질 수 있는 어떤 애착이라도 선과 진리에 관해 황폐해진다면 그 죽은 애착에 대해서는 제 아무리 경미한 관대함도 상태의 변화가 거행될 때까지는 불순하다.

세부적 영적 의미

먹어도 되는 짐승이란 자기 것으로 삼아도 되는 애착을; 죽는다란 영적 죽음 또는 황폐함을; 시체에 닿는다란 그 죽은 애착을 방치함을; 불결해짐이란 불순함을; 저녁 때까지란 상태가 변할 때까지를 말한다. A.C. 644, 2187, 10130, 3900, 7844, 제 28절 참조.

40절. 그리고 그것의 시체를 먹는 자는 자기 옷들을 빨아라, 그리고 저녁까지 불결하다. 그것의 시체를 나르는 자는 자기 옷들을 빨아라, 그리고 저녁 때까지 불결하다.

영적 의미

죽은 애착을 자기 것으로 만드는 사람은 상태의 변화가 거행될 때까지 불순하다. 그리고 그의 외적 인간은 반드시 깨끗해져야 한다. 설사 그가 이 죽은 상태를 좋아하는 쪽으로 생각하는 것을 허용할 때도 그는 상태가 변화될 때까지 불순하다.

세부적 영적 의미

죽은 고기를 먹는다란 죽은 상태에 있는 그 애착을 자기 것 삼는 것을; 저녁때까지 불결하다란 상태가 변할 때까지 불순함을; 옷을 빤다란 외적 인간을 깨끗하게 함을; 시체를 가져다 치움이란 그 죽은 상태를 좋아하여 생각하는 것을 말한다. A.C. 2187, 3900, 7844, 3147, 1073, 8764, 3900.

41절. 그리고 땅 위를 기는 모두 각각의 기는 것은 역겨움이다. 그것을 먹지 말라.

영적 의미

그러므로 넓은 측면에서 감각적이고 육적일 뿐인 애착들은 불순하므로 자기 것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

세부적 영적 의미

땅위를 기어다니는 기는 것이란 감각적이고 육적인 애착을; 역겨운 것(abomination)이란 지옥적이고 모독한 것을, 그런 고로 불순한 것을; 먹지 말라란 자기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말한다. A.C. 9331, 6052, 2187.

42절. 배로 가는 것은 무엇이든, (발)넷 모두 위에서 가는 것은 무엇이든, 많은 발을 가지고 있는 것은 무엇이든, 땅 위에서 기는 모든 기는 것 까지, 그것들을 너희는 먹지 말라. 그 이유가 그것들은 역겨운 것이기 때문이다.

영적 의미

거짓과 악이 결합되도록 하는 감각적일 뿐인 모든 애착, 삶의 진보 과정에서 감각적이 되도록 처리한 모든 애착, 오로지 감각적 애착뿐인 것들, 그래서 더 높은 삶에서 분리되어야만 하는 애착들은 더럽고 지옥적인 바 자기 것으로 삼아질 수 없다.

세부적 영적 의미

배로 가는 것이란 오로지 감각적일 뿐인 애착을; 발이 넷이란 삶의 과정에서 거짓이 악과 결합하도록 처리한 것을; 많은 발을 가졌다란 더 심하게 자연적이거나 감각적인 것을; 먹지 않음이란 절대 자기 것으로 삼지 않음을; 역겨웁다란 지옥적이고 모독된 것을 말한다. A.C. 247, 248, 1686, 2162, 2187, 6052.

43절. 너희는 기는 어떤 기는 것 가지고 네 자신을 역겨워지게 만들지 말라, 너희를 더러워지게 할 것인 그것들과 더불어 네 자신을 불결하게 만들지 말라.

영적 의미

영적 인간은 감각적일 뿐인 애착을 탐닉함으로 자신을 썩게 해서는 안 된다. 그는 그것들로 자신을 불순하게 해서 더럽혀지게 해서는 안 된다.

세부적 영적 의미

기어다니는 기는 것으로 자신을 더럽게 하지 않는다란 단지 감각적일 뿐인 애착들을 심하게 탐닉하지 않음을; 자신을 역겨워지게 하지 않음이란 불순하고 모독하지 않도록 심사숙고함을 말한다. A.C. 6052, 9331, 10130.

44절. 나는 주 너의 하느님이다, 그러므로 너희 자신을 신성해 있게 하라, 나는 거룩하다, 고로 너희도 거룩히 있으라. 너희는 땅위에서 움직이는 기는 것들의 어떤 방식으로 자신을 더럽혀지게 하지 말라.

영적 의미

주님은 선 자체와 진리 자체가 하나되어 계신 분이시다. 그러므로 인간은 선과 진리를 결합되게 함으로 거룩해져야 한다. 그 이유는 주님께서 위의 하나됨으로 해서 거룩 자체가 되어 계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영적 인간은 더 높은 삶에서 분리된 어떤 감각적 애착으로도 자신을 더럽혀서는 안 된다.

세부적 영적 의미

“나는 주 너희 하느님이다”란 주님은 선 자체와 진리 자체가 하나되신 분임을; 거룩하게 행동하여 거룩하게 됨이란 교인은 스스로 선과 진리가 결합되게 함으로 거룩해져야 한다는 것, 그 이유가 주님께서는 하나됨을 수단으로 거룩 자체이시기 때문이다. 땅 위를 기어다니는 기는 것에 닿아 불결하게 되지 않는다란 영적 인간은 더 높은 생명과 분리된 어떤 감각적 애착으로 자신을 더럽혀서는 안 된다는 것을 말한다. A.C. 2001, 4211, 8887, 9331, 10130.

45절. 나는 너희 하느님이기 위해 이집트의 토지로부터 너희를 데려온 주님이시다. 그러므로 너희는 거룩해야 한다, 내가 거룩하기 때문이다.

영적 의미

더욱이 주님은 구속의 역사로 자연적 인간의 굴레로부터 영적 인간을 해방시키시어 그 영적 인간이 그분을 섬기도록 힘을 주신다. 이런 연유로 사람은 각자의 수준에서 거룩해질 수 있다. 아마 주님이 거룩함 자체이시듯 그도 거룩해질 수도 있다.

세부적 영적 의미

주 하느님이 이집트의 속박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데려옴이란 자연적 인간일 수밖에 없는 굴레로부터 영적 인간을 해방시키심을; 이스라엘족의 바깥쪽 거룩함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순수한 거룩함을 말한다. A.C. 8866, 8788.

46절. 이것이 짐승의 법, 가금류의 법, 그리고 물들에서 움직이는 살아있는 생물 모두 각각의 법, 그리고 땅 위에서 기는 생물 모두 각각의 법이다.

영적 의미

이상 살핀 사항은 의지와 이해함 속의 자연적 애착에 관한 신성한 질서의 법칙이다. 그리고 감각적이고 육적인 애착에 관한 신성한 질서의 법칙이다.

세부적 영적 의미

이것이 짐승과 새와 물에서 움직이는 모든 동물과 땅 위를 기어다니는 모든 동물에 관한 법(law)이다란 의지와 이해함 속의 자연적 애착들; 감각적이고 육적인 애착들에 관한 신성한 질서의 법칙임을 말한다. A.C. 44, 40, 991, 9331.

47절. 불결한 것과 깨끗한 것 사이에, 그리고 먹어도 되는 살아있는 것과 먹지 말아야 하는 살아있는 것 사이를 구별하기 위한 (법들) 이다.

영적 의미

위 사항들은 의지와 이해함 속의 자연적 애착들; 감각적이고 육적인 애착들에 관한 신성한 질서의 법칙인데, 이 법칙들은 불순함과 순수함, 자기 것으로 삼아질 수 있는 것과 그렇지 못한 것 사이의 구별을 만드는데 그 목적이 있다.

세부적 영적 의미

불결한 것과 깨끗한 것 사이를 구별함이란 인간의 애착과 생각 안에서 순수한 것과 불순한 것을 구별한다는 것을; 먹을 수 있는 동물과 먹을 수 없는 동물을 구별함이란 자기 것으로 삼을 수 있는 주님에게서 온 선한 애착과 자기 것 삼을 수 없는 인간 또는 지옥에서 온 악한 애착을 분별하는 것을 말한다. A.C. 10130, 2187.

11장의 종합적 고찰

이 장을 통째로 놓고 생각해 본다면 흥미 있는 부분이 될 것이다. 그 이유는 거듭나는 과정에서 악과 거짓으로부터 깨끗해져야 하되 세부적으로, 그리고 계속적으로 깨끗해져야 하는 것이 절대로 필요하다고 명백하게 증명하기 때문이다. 특별히 보여주는 또 한 가지는 선과 진리는 주님으로부터 내적 인간을 통해 충만된 상태에서 자연적 인간 안에 흘러드는 바, 위와 같은 깨끗해짐 없이는 각자의 것이 될 수 없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영적 인간이라면 이렇게 큰 소리로 다음 구절을 외쳐야 하리라. “하느님, 나를 살펴보시고 내 마음 알아주소서, 나를 파헤쳐 보시고 내 근심 알아주소서. 죽음의 길 걷는지 살피시고 영원한 길로 인도하소서” (시편 139:23, 24).
사실 주님께서는 특별히 파헤치시지 않으셔도 각 인간의 세세한 상태까지 다 헤아리고 있으시다. 말씀으로부터 온 진리의 빛으로 날마다 파헤쳐 깨끗해지는 과정에서 주님과 협동하도록 우리의 생각과 애착을 수색하도록 요구되는 것은 정녕 우리 자신이다. 얼마나 조금도 틀림없게 우리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방금 인용한 위의 구절 외에도 말씀의 오늘 부분에 있는 내적 의미의 모든 세부 사항으로부터서도 아주 명백해질 것이다.
이 말씀 부분을 재조명하면서 아마 우리는 자신을 검사하는 기회를 동시에 갖게 되리라 본다. 우선 주목할 것은 우리가 자기 것 삼아도 되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에 대한 묘사에 대해서인데 이것은 앞 장이 마감되는 부분에서 이 주제에 관해 말해지고 있다. 즉 자연적 인간 안에 있는 순진의 선이 손실됨으로 부패된 예배, 이 순진의 선에서 오는 예배의 손실로 부패된 예배가 말해지고 있다는 말이다. 왜 그럴까? 그 이유란, 본 장에서 기술되는 세부적인 방법 안에서 우리가 깨끗해지지 않는다면 작은 어린이와 같이 하늘 나라를 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즉 모든 충만됨에서 순진의 선을 우리 것이 되게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자기 것이 되게 한다는 것(to appropriate, 사유함)은 자기 외의 다른 근원으로부터 온 것을 자기 생명 속에 합병시키는(incorporate)것이다. 마치 우리가 먹고 마시면 자연계의 법칙에 의해 공급되는 것을 신체의 한 부분이 되게 하는 것과 같은 현상이다. 우리가 음식이라고 여겨질 수 없는 것을 먹고 마실 수 없듯이 영적 인간은 불일치 하는 애착들을 자기 것으로 되게 할 수 없다. 다시 말해 영적 인간은 이를 행할 수 없다. 우리가 본문의 시리즈로부터 알게 되는 것은 위와 같은 점에서 우리를 위해 필요한 두 가지 사항이 있다는 점이다. 애착이 우리 자신을 만든다는 점에서 그것들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것과 반드시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그리고 동시에 합당한 반성의 결과로 있어져야 한다. 예를 들어보자. 천성적으로 친절한 기질도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데 일치되는 것의 하나이다. 그러나 그 기질이 단순히 자연적인 수준일 뿐 그에 따른 심사숙고함과 식별력도 없이 무작정 친절이라는 행동이 나간다면 그 행동은 삶의 실질 부분이 될 수 없고 되어서도 안 된다. 이와 대비되는 경우도 있다. 우리가 매우 조심스런 생각들로 애착을 신장시킬 경우이다. 그럼에도 그 애착이 우리에게 꼭 좋을 수만은 없다. 그 이유는 그 애착이 주님으로부터 오는 순수한 애착에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맺어지는 결론은 우리의 영적 양식을 취함에 있어 선이 순수한 진리와, 또는 진리가 순수한 선과 병합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 이다. 분별 없는 선행은 우리에게 매우 나쁘다. 심사숙고된 이기심은 더욱 크게 나쁘다. 그 이유는 전자는 영적으로 “새김질하지 않는” 것이고, 후자는 “굽이 나뉘지 않은” 상태이기 때문이다.
시리즈가 보여 주는 바와 같이, 지식을 이기적으로 사랑하는 것, 지식을 지적으로만 사랑하는 것, 지식을 감각적으로 사랑하는 것, 이 모두는 인간에게 자양분을 공급하지 못한다. 게다가 하늘 아버지로부터 오는 선한 생명에 모두 다 반대되는 탐욕만에 직결될 뿐이다.
위와 같은 상황이 말씀에서 획득된 진리가 선을 붙잡는 데에도 적용되고 있다. 말씀은 영적 진리로 가득 찬 큰 대양(ocean)이다. 한 마디로 이 대양은 신성에 근원을 두는 바 한계가 없는 대양이다. 그래서 그 안에는 살아 있는 진리의 원리들이 우글거리는데 그것이 고기들이다. 그러나 그 고기들도 영적 진보를 위해 포획되어져야 한다. 다시 말해 유용함(usefulness)을 위해 즉 선함과 진리만을 위해 사용되어야 한다. 이 사항 외에는 어떤 이유이든, 어떤 조건에서이든 말씀의 공부 내지 연구는 불순함을 결과되게 할 뿐이다.
또한 살아있는 원리들이 말씀 안에서 단지 자연적 지식이라는 큰 대양과 함께 존재하듯이 공중의 새들과 상응하는 것들과도 비슷하게 존재한다. 사실 레위기의 본문(13절)의 경우에서는 깨끗한 새(clean bird)들은 먹을 수 있다고 말해지고 있지 않으나 신명기 14장 11절의 경우 이를 기술하고 있다. 즉 말씀 속의 순수한 진리들은 자유로이 자기 것이 되게 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왜곡된 온갖 종류의 진리, 융화될 수 없는 거짓들은 불순하기 때문에 자기 것이 되게 해서는 안 된다.
다음 문단(20절 이하)은 더욱 중요한데 그 이유는 감각적 애착들에 관련된 것들을 실제 삶에서 준수될 수 있게 아주 조심스럽게 구분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가 흔히 잘못되게 생각해버리는 것이 있다. 즉 감각적이고 육체적(sensual and corpoeal)이라 부르는 인간의 가장 수준 낮은 애착들은 진실로 더 높은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는 모두 거절되어야 한다고 말하는 점이다. 이 문제를 올바르게 생각하려면 다음 사항이 중요하다. 즉 인간은 악 그 자체로 된 생명의 그릇이라 할 수 있는 어떤 자질 또는 기능은 실지로 부여되어 있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로지 남용(abuse)에 의해서 악이 될 뿐이다. 그 이유가 인간이 천사같이 영원하기 위해서 완전한 인간 생명을 구성하는데 필요한 최말단의 애착과 기쁨이 없이는 영원히 존재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고로 발 넷을 가짐 또는 발 넷으로 기어다니는 기는 것에 관한 세부적인 구분이 있게 된다. 감각적인 기쁨들이 있는 곳은 어디든지 악이 거짓과 결합한 채로 있어 불순함이 존재한다. 그러나 반대로 완전한 종속이 있을 경우, 즉 감각적이고 육체적인 기쁨이 천적이고 영적인 기쁨과 하모니를 이룬다면, 인간으로 충만되고 완전하게 해주는 최말단의 진리와 선을 진정으로 자기 것이 되게 할 수 있다. 한 마디로 다음 구절이다.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하느님께서 의롭게 여기시는 것을 구하여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 (마태 6:33).
이제 위 문단 뒤를 잇는 구절로부터 배우는 바, 외적인 것들이 내적인 것도 없이, 합당하게 되새겨 봄도 없이 상응하는 것, 내적인 선과 진리도 없이 바깥쪽으로만 선같이 보일 수 있다는 것, 이것이 위선이요 사기이다. 그런고로 이런 사악함에 접촉됨에서 오는 아주 경미한 불순함까지 피하기 위해서 특별히 조심해야 한다. 이것이 시체에 접촉하는 것으로 의미되고 있다. 이와 같은 접촉이 우연히 있어졌다 해도 불순함은 여전히 수반된다. 이 상태는 저녁 때까지, 즉 상태의 변화가 있기 전에는 제거되지 않는다. 이 구절과 연결해서 이제 생각해 볼 것이 있다. 어떻게 우리 안에서 악령에 의해 악한 생각이 휘저어 일어나느냐? 그렇게 휘저어 일어난 것이 거듭남에서 우리 삶의 한 부분을 이루지 않도록, 즉 더 큰 악과 더 큰 불순함이 결과되는 쪽으로 휘저어진 것이 일치되지 않도록 즉각 그런 생각을 거절하는 것이 얼마나 절실히 요구되느냐 이다. 그 이유는 비록 우리가 어떤 악한 생각을 가지는데 책임이 없다 해도 그것 자체는 마치 과거의 악한 상태들이라는 죽은 시체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우리가 과거의 악한 상태에 대한 태도에는 책임이 있다. 이 외에도 우리가 아는 바, 우리 안에서 가라지와 밀은 우리가 보호 감찰되는 상태가 실현되는 때 즉 추수 때까지 함께 자란다는 것이다. 그 다음 악한 생각들은 자유와 평화의 천국적 삶이 열리는 영광의 새벽 이전에 사라지게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매우 조심스럽게 되새겨 볼 점이 있다. 우리의 영원한 영적 삶에 합류시킬 것과 합류시켜서는 안되는 것에 대해서인데 이것이 마지막 문단에서 영적 의미로 멋진 구분을 서술하고 있다. 참으로 순수한 선과 진리는 오염되어 질 수 없고 실지로 사악하고 신성을 더럽힌 것이 거룩하고 순수한 것으로 전환될 수도 없다. 그런데도 예외되는 경우가 각 개인들에서 나타나기도 한다. 이는 우리로 천사들의 삶을 실감해 볼 기회를 갖도록 배려하심에서 이다. 이런 주님의 배려에 우리는 깊은 감사를 드리고 그에 대한 것을 늘 기억해야 할 것이다. 이런 감사함, 경외함이 없다면 “심판 날에 자기가 지껄인 터무니없는 말을 낱낱이 해명해야 되리라” (마태 12:36). 또 하나 기억해 둘 일은 영원까지, 천국 자체까지도 우리의 상태를 개선하도록 어떤 방이 남겨져 있는다는 것, 그러므로 비록 우리가 한 분 웅대한 사람(the Grand Man) 안에서 미세한 어떤 부분의 직능을 수행하는데서 결코 벗어나지 못한다는 조건이 붙어 있기는 해도 우리의 유용함(usefulness)이 더 넓혀져 갈 수 있게 배려해 주시는 것도 그분은 잊지 않고 계신다 (AC1276, 1277항 참조).

레위기 12장

성경: 레위기 1장
1. 주님께서 모세에게 이야기하셨다, 말하시기를,
2. 이스라엘의 자손들에게 이야기하라, 말하기를, 만일 여인이 씨를 잉태하여 남자 아이를 낳았다면, 그녀는 칠일 동안 불결하다. 그녀의 월경으로부터의 불순함 같이 그녀는 불결하다.
3. 그리고 팔 일째 날에 그의 표피의 살을 할례하라.
4. 그리고 그녀는 삼십 삼 일 동안 자기 피가 순수해지게 함을 계속해야 한다. 그녀는 거룩히 여겨진 것을 만지지 말 것, 성소 안으로 오지 말라. 이는 그녀의 순수해짐이 완성될 때까지이다.
5. 그러나 만일 그녀가 소녀 아이를 낳는다면, 그녀는 2주 동안 그녀의 불순함(월경) 같이 불결하다. 그리고 그녀는 육십 육일(threescore and six)동안 자기 피의 순수해짐을 계속해야 한다.
6. 그리고 그녀의 순수해짐의 날들이 충만될 때, 아들을 위하여, 또는 딸을 위하여, 그녀는 태워 바침을 위해 일 년 된 어린 양, 그리고 죄 바침을 위해 어린 비둘기(young pigeon), 또는 호도애(tultledove)를 만남의 문으로, 성직자에게로 가져 오라.
7. 그리고 그는 주님 앞에 그것을 바쳐라, 그리고 그녀를 위해 보상을 받게 하라. 그리고 그녀는 그녀의 피의 원천으로부터 깨끗해 있을 것이다. 이것은 낳은 아이가 남성이든, 여성이든 그녀를 위한 법이다.
8. 그리고 만일 그녀의 재력이 어린 양을 바치기에 충분치 못하다면, 그러면 그녀는 호도애 두 마리, 또는 어린 비둘기 두 마리를 가져와라. 한 마리는 태워 바침을 위해, 그리고 다른 것은 죄 바침을 위해서 이다. 그리고 성직자는 그녀를 위해 보상을 받게 하라, 그리고 그녀는 깨끗해 진다.

영적 의미 요약

* 이 가르침은 교회 속의 사람에게 주어지는 바, 그 사람과 더불어 진리가 수정되고 임신되어 출생할 때 거기에도 인간 고유(proprium, 자아, man’s own)는 불순하다. 그리고 내적으로는 순수하다. 이는 거듭나는 과정에서 조차도 마찬가지이다. 1-2절.
* 그러나 거듭남의 상태가 완성될 때 최말단까지 이르러 순수함이 있게 된다. 이 순수한 상태는 질서의 법칙에 따라 성취되어진다. 3-4절.
* 또한 선을 인정하고 받아들임에서의 순수한 상태는 선이 진리와 결합하는 것을 포함한다. 그리고 질서의 법칙에 따라 있는다. 5절.
* 그리고 순수한 상태와 거듭남이 완성될 때 순진의 선으로부터 주님을 예배하게 된다. 여기에 주님의 재회 또는 외적 인간과 내적 인간과의 재회가 있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는 천적 인간과 영적 인간과 더불어 거행된다. 6-8절.

각 절의 영적 의미

1절. 주님께서 모세에게 이야기하셨다, 말하시기를,

영적 의미

1. 신성한 진리를 수단으로 지각을 주시는 주님으로부터의 계시가 있다.

세부적 영적 의미

주님(여호와)란 사랑 측면에서의 신성한 존재를; 이야기하심(speaking)이란 유입을 명시하고; 모세란 신성한 진리 또는 말씀을 표현하고 있고; 말함(saying)이란 지각을 뜻한다. A.C. 2001, 2951, 7010, 6752, 1791, 1822.

2절. 이스라엘의 자손들에게 이야기하라, 말하기를, 만일 여인이 씨를 잉태하여 남자 아이를 낳았다면, 그녀는 칠일 동안 불결하다. 그녀의 월경으로부터의 불순함 같이 그녀는 불결하다.

영적 의미

영적 교회의 사람에게 가르치시는 바, 교회에서 보편적, 일반적, 또는 세부적으로 주님으로부터 온 진리가 수정되고 임신되어 출생할 때 인간 고유 또는 외적 인간에게는 불순한 상태가 있다. 그리고 내적 인간 안에, 마찬가지로 거듭나는 과정 중에 주님으로부터 온 거룩함 속에서도 선이 진리와 아직 분리되어 있으면 불순함이 존재한다.

세부적 영적 의미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야기하여 말함은 영적 교회 속의 사람에게 가르치심을, 아기를 가짐(seed)이란 주님으로부터 수정되는 진리를 명시한다. 자연적인 임신과 출생은 영적 임신과 출생에 상응된다. 남자 아이란 진리를, 불결하다란 영적 불순함을, 여자란 인간 고유(proprium) 또는 외적 인간(External)을, 그리고 남편은 주님 또는 내적 인간(Internal)을 명시한다. 칠 일이란 거듭나는 전체 과정을, “월경하는 동안의 불순함”이란 선과 진리가 분리됨으로부터 일어나는 영적 불순함을 명시한다. A.C. 7304, 3654, 255, 256, 880, 2586, 725, 10130, 253, 4434, 2044, 4161.

3절. 그리고 팔 일째 날에 그의 표피의 살을 할례하라.

영적 의미

그러나 거듭남의 상태가 완성되어질 때, 그래서 영적 삶의 새로운 상태가 개시될 때, 모든 불순함은 자연적 수준에 속하는 최말단까지, 또는 자연적 수준에서까지 제거되어진다.

세부적 영적 의미

팔 일째 되는 날 포경을 잘라 할례를 베푼다는 것이란 거듭나는 상태가 완성되고 새로운 상태가 개시되면 모든 불순함은 제거되는데 그 제거는 자연적 수준의 최 말단 까지에서 이루어짐을 명시한다. A.C. 9227, 9269-5, 2039, 2041.

4절. 그리고 그녀는 삼십 삼 일 동안 자기 피가 순수해지게 함을 계속해야 한다. 그녀는 거룩히 여겨진 것을 만지지 말 것, 성소 안으로 오지 말라. 이는 그녀의 순수해짐이 완성될 때까지이다.

영적 의미

진리를 받아들이고 인정하는 그 뒤를 잇는 순수해지는 상태는 질서에 의거 완성되어야만 한다. 악으로부터 순수해짐이 완전할 때까지 진리는 충분히 실감될 수 없고 선을 충분히 고용할 수도 없다.

세부적 영적 의미

여인이 삼십 일 하고 삼 일간 계속 피를 순수하게 함이란 진리를 받아들이고 인정하는 그 뒤를 잇는 순수해짐의 상태는 질서에 의거 완성되어져야 한다는 말이다. 이는 3, 그리고 3에 곱하여져 있어지는 30이라는 숫자의 의미로부터 나타난다. 즉 30은 전체라는 측면에서 선과 진리에 속한 모든 것, 다시 말해 진리와 선의 완전함을 말한다. 기간이 차서 깨끗해지기 까지 거룩한 것에 닿지 말고 성소에 들어가지 말라란 악으로부터 순수해짐이 완전할 때까지 진리를 충분히 실감할 수 없고, 선을 충분히 즐길 수도 없다는 말이다. 거룩한 것에 닿음은 진리를 실감함을 뜻한다. 성소에 들어감은 선을 즐긴다는 말이다. 날수가 찬다란 순수함의 완성을 명시한다. A.C. 4495, 10262, 6024, 10130, 4575, 9903, 10129.

5절. 그러나 만일 그녀가 소녀 아이를 낳는다면, 그녀는 2주 동안 그녀의 불순함(월경) 같이 불결하다. 그리고 그녀는 육십 육일(threescore and six)동안 자기 피의 순수해짐을 계속해야 한다.

영적 의미

그러나 선을 받아들여 인정할 경우 순수한 상태에는 선이 진리와 결합하는 것도 포함되어 있다. 그리고 순수함의 과정 뒤에 오는 것도 질서에 의거 완성되어야 한다.

세부적 영적 의미

소녀 아이를 낳는다란 선을 인정하여 수용함을, 2주간 불결하다란 순수해지는 과정은 선이 진리와 결합하는 게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육십 육 일(three score and sixty days)이란 33과 똑같은 방법의 질서에 의거 완전하게 순수해짐을 말한다. A.C. 6677, 10130, 5194, 4177, 4495, 10262, 6024.

6절. 그리고 그녀의 순수해짐의 날들이 충만될 때, 아들을 위하여, 또는 딸을 위하여, 그녀는 태워 바침을 위해 일 년 된 어린 양, 그리고 죄 바침을 위해 어린 비둘기(young pigeon), 또는 호도애(tultledove)를 만남의 문으로, 성직자에게로 가져 오라.

영적 의미

악에서 순수해짐이 진리 또는 선을 받아들이고 인정하여 완성되어 질 때 순진의 선으로부터 주님을 예배함은 완전해지고 항구적이 될 것이다. 또는 주님을 예배함이 순진의 선으로부터 내적 외적으로 있어지는데 예배의 수단은 순진의 상태로부터 그분을 인정함과 천국을 통한 그분의 역사하심에 의한다.

세부적 영적 의미

아들을 낳았든지 딸을 낳았든지 기간이 차서 몸이 깨끗해짐이란 진리든지 선이든지 수용해서 인정하여 깨끗해짐이 완성될 때를, 태워 바침으로 일 년된 어린 양 한 마리를 가져옴이란 순진의 선으로부터 주님을 예배함은 완전하고 영구적이다는 것을; 호도애나 어린 비둘기를 죄 바침의 제물로 가져옴이란 순진의 상태에 부응되게 악이 용서됨을; 만남의 천막 문으로란 주님과 천국을 통해 오는 그분의 역사를 인정함을; 성직자란 선의 상태를 말한다. A.C. 4495, 10262, 6024, 725, 10132, 7839, 2356, 254-3, 9946.

7절. 그리고 그는 주님 앞에 그것을 바쳐라, 그리고 그녀를 위해 보상을 받게 하라. 그리고 그녀는 그녀의 피의 원천으로부터 깨끗해 있을 것이다. 이것은 낳은 아이가 남성이든, 여성이든 그녀를 위한 법이다.

영적 의미

예배하는 가운데 주님에게 일치함 또는 재회함, 또는 외적 인간이 내적 인간과 재회함이 결과될 것인데, 그 이유는 모든 불순함이 제거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진리나 선을 받아들이고 인정하고 실감함에 관련된 거듭남의 법칙이다.

세부적 영적 의미

주님께 제물을 바쳐 깨끗하게 함이란 예배의 이 상태에서 인간이 주님에게 동의함, 인간이 주님과 재회함, 또는 외적 인간이 내적 인간과 재회함이 결과될 것임을; 그 여인이 피의 샘을 깨끗이 함이란 영적 불순함이 제거됨을; 산모가 사내아이를 낳았거나 계집아이를 낳은 다음 지킬 법이라 함은 진리와 선을 받아들이고 인정하고 실감함에 관련된 거듭남의 법칙임을 말한다. 제 1장 3절, A.C. 10042 II, 4545, 2586, 725.

8절. 그리고 만일 그녀의 재력이 어린 양을 바치기에 충분치 못하다면, 그러면 그녀는 호도애 두 마리, 또는 어린 비둘기 두 마리를 가져와라. 한 마리는 태워 바침을 위해, 그리고 다른 것은 죄 바침을 위해서 이다. 그리고 성직자는 그녀를 위해 보상을 받게 하라, 그리고 그녀는 깨끗해 진다.

영적 의미

그런데 거듭나고 있는 교인이 천적 선으로부터 주님을 예배하는 상태 즉 삼층 천국의 천사가 되는 삶의 일을 완성할 수 없다면 영적 선으로 그 일을 해내서 이층 천국의 천사 또는 최말단 천국의 천사라도 되어야 하는데 그 수단은 선행으로부터 주님을 예배함과 그 상태에 부응되는 악을 제거함으로 가능하다. 이렇게 해도 그는 완전하게 깨끗해질 것이다.

세부적 영적 의미

새끼 양 한 마리도 바칠 힘이 없다란 천적 사랑으로 주님을 예배할 수 없음을; 호도애 두 마리나 어린 비둘기 두 마리를 구해서 한 마리는 태워 바침으로; 한 마리는 죄 바침으로 드린다란 영적 선인 선행(charity)으로 주님을 예배함을; 성직자가 그녀를 위해 보상을 받게 한다란 인간이 주님과 재회함, 또는 외적 인간이 내적 인간과 재회함을; 그 여인은 깨끗해진다란 순수해짐의 완성된 상태를 뜻한다. A.C. 10132, 1826, 1827, 10053, 3900, 제 1장 3절, 10042 II, 4545.

12장의 종합적 고찰

오늘의 짧은 본문을 주의 깊게 검토해 보면 요한복음 3장 1-5절에 걸쳐 있는 말씀, 우리에게 흥미를 주는 말투로 말씀하신 거듭남, 다시 태어남의 과정, 즉 “누구든지 새로 태어나지 아니하면 아무도 하느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 물과 성령으로 새로 태어나지 않으면 아무도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라는 구절이 본문에 포함되어 있음을 알게 된다. 위 구절에는 특유한 차이점을 가지고 어조가 강한 반복이 들어있다. 이 말들이 영적으로 무엇을 함축하고 있는지는 기독계에 널리 이해되어 있다. “육(the flesh)에서 나온 것은 육이며 영(the spirit)에서 나온 것은 영이다”라는 구절이 의미하는 것을 모든 이가 분명하게 식별할 수 있다. 즉 “육”과 “영”은 서로 완전히 구분되고 서로 용납될 수 없는 것들이라고 까지 말하고 있다. 그러나 그와 같이 있어져서는 안될 것이다. 서로가 상반되고야마는 상태는 인간이 “옛” 삶을 선택하고 “새” 삶을 거절함으로서 야기되는 바 인간 자신에 의해 저질러지고 있다. 그 반면 인간이 “새” 삶을 선택한다 해도 그 새 삶은 사실 옛 것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그 이유가 교회는 인간에게 적당한 삶, 인간 자아(proprium) 안에서 형성될 뿐 그 외 달리는 가능할 수 없기 때문이다. 바로 이 점을 본 장은 첫 마디에서 말하고 있다. “아기(seed)를 밴” 여인이라는 말이 그것이다. 그러나 여기서의 여인, 인간 자아 안에 있는 교회로서의 여인은 애착을 말한다. 그러므로 교회가 우리 안에서 형성되어 지기 위해서는 진리를 사랑하는 것, 아마 제 자신을 위해서 진리를 사랑하는 것까지 포함해서 어찌됐든 진리를 사랑해야만 한다. 우리가 거듭 나아지겠다면 진리를 사랑해야만 한다. 이렇게 사랑하는 주체인 인간 자아의 품성을 잘 생각해 보면 이런 결론을 얻게 된다. 즉 교회가 우리 안에서 형성되게 하는 애착은 어찌됐든 처음에는 순수한 애착 또는 진리를 순수하게 사랑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거듭남을 전체로서 관찰해 보면 그것이 완성될 때까지는 많든 적든 거기에는 불순함이 상존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말씀이 가르치는 것이고 그것은 거듭나고 있는 당사자의 경험에 따라 존재한다. 신성이 되어 가시는 주님의 인간의 경우에서조차 부활하실 때까지 어머니 쪽에서 받은 유전적인 생명의 영향을 계속 받아 가셔야 했다. 이런 점까지 생각하면서 우리가 지닌 불순함을 생각하면 아니 슬퍼질 수 없다. 그 반면 불순한 우리 상태는 결국에 가서는 중단되어야 한다는 것, 그럼에도 천국 자체 안에는 절대적인 순수함이 존재하고 있는 게 아니라는 생각까지 더해보면 우리는 어떤 위로를 받을 수도 있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순수 자체가 될 수 없는 바 더 큰 순수함은 가능하지 않다는 말도 된다.
이제 다른 주제에 주목해 보자. 즉 아들을 임신하는 것과 딸을 임신하는 것 사이의 다른 점에 관해서 이다. 거듭남에서 먼저 있게 되는 것은 진리를 실감하는 것인데 (깨닫는 것, realization), 그 뒤에 선이 실감되어 진다. 그런데 표면상으로만 본다면 여기서 암시되는 합법적으로만 불순한 상태에 두 가지 다른 상태가 있다는 것은 약간 이상한 듯 여겨질 수도 있다. 즉 계집아이를 낳았을 경우, 왜 그 여인의 불결한 기간은 사내아이를 낳았을 때 보다 두 배가 되어야만 한다는 걸까? 두 배(double)라는 말, 두 주간 또는 두 칠 일 간 등등에서와 같이 이 단어는 상응적 차원에서 볼 때 중요한 과정이라는 뜻을 암시하고 있다. 이미 살핀 바 있지만 선이 임신되어진다 함에는 선이 진리와 결합함이 있음이 당연히 포함되어 있다. 인간은 진리 한쪽만으로는 주님과 결합되지 않는다. 단지 진리로 주님과 교통하고 있을 뿐이다. 그렇다해도 진리를 사랑함은 주님과 결합할 수 있는 길을 준비해준다. 본문에서 두 배라는 말이 의미하는 것은 실제에서 사용된 진리(practical truth)인데 이는 완전한 거듭남이다. 즉 완전한 거듭남은 선과 진리의 결합을 통해 주님과도 결합하는 것이다. 이 문제에 있어서 우리가 담당할 몫은 무엇일까? 선과 진리의 결합이 결과될 수 있도록 진리에 꾸준히 순종하고 진리에 따라 계속 살아가는 것이다. 진리와 선은 우리가 진리를 사랑함을 통하여 잠정적(potentially)으로는 결합되어 있다. 그러나 선과 진리는 순종을 수단으로 하지 않고서는 실제로는 결합되지 않는다. 주님게서는 “만일 네가 나를 사랑한다면”라고 말하시고, “내 계명을 지켜라”라고도 말하셨다. 지금까지 살핀 내용에서 어떻게 인간 자아(proprium) 안에서 교회가 실지로 그리고 충만되게 형성되는가를 알게 되었으리라 본다. 또 하나 여기서 말해지는 결합(conjunction)은 선과 진리가 내적으로 결혼해야 할 뿐만 아니라 외적으로도 결혼되어야 한다는 것, 다시 말해서 내적 또는 영적 인간이 외적 또는 자연적 인간과 결합해야 한다는 것, 이렇게 결합하려면 진리를 실습함을 통해 불순함을 제거함으로서 이루어진다는 사실까지 언급하고 있다.
이제 거듭남의 결과를 곰곰이 생각해 보기로 하자. 거듭남이 선행되고 순수해짐이 그 뒤를 이어 있게 된다는 것이 신성한 질서들의 법이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의 경우 순수해짐이 선행되고 그 뒤에 거듭남이 있는 듯 나타난다. 그 이유는 거듭남이 있기 전 반드시 인간의 바깥 측면이 개혁(reform)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분명한 바 인간은 새로 태어남이 먼저 있지 않으면 영적 생명을 가지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영적으로 죽어있는 사람이 어떻게 순수해질 수 있다는 말일까? 외적 순수함이 완전한 거듭남에 선행된다 해도 거듭남이 먼저 오고 그 뒤를 바로 이어 순수해짐이 있게 됨은 삶 전체를 통해 내내 흐르는 것이 진정한 사실이다. 이 순수해짐이 본문에서 여덟째 날에 할례 받는 것, 그리고 죄 바침으로 표현되어져 있다. 그러나 이즈음해서 다시 우리가 주목해 볼 것이 있다. 주님에 대한 순수한 예배를 표현하는 제물이 차례대로 언급되고 있다는 것, 그 이유는 태워 바침의 제물이 죄 바침의 제물에 선행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거듭남의 결과는 내적, 외적으로 순진에 바탕을 둔 천국적 선의 상태로부터 주님을 순수하게 예배하는 것이다. 이 뒤를 이어 완전히 순수해짐이 있게 된다. 즉 천국에서 순수해져 가는 상태는 더 많은 시험들을 미리 배제한다는 말이다. 비록 천국에 있는 사람들이 계속해서 영원까지 순수해져 간다 해도 천국에 있는 이상 어느 누구도 시험되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 지상 시간으로 이 천 여 년이 지나간 천국에서의 우리의 완전한 상태는 어떠한 것일까? 확실한 한 가지가 있다면 우리는 웅대한 사람(the Grand Man, 주님) 안에서 천국의 직능 중의 극히 작은 부분을 열심히 담당하면서 그 일에 기뻐하는 모습, 우리가 어떤 착상도 만들 수 없는 사랑과 지혜가 더 증가되고 더 강도가 높은 상태가 되어 있는 모습일 것이다. 우리가 죽어 계곡 저 아래 있는 동안이나, 자기 심판을 기다리는 동안이나, 현재까지 포함해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용기를 갖는 것, 인내를 가지고 달리는 것, 우리 앞에 놓인 경주에 불굴의 인내력을 발휘하는 것이리라.

레위기 13장

성경: 레위기 1장

1. 그리고 주님께서 모세에게 그리고 아론에게 이야기하셨다, 말하시기를,
2. 사람이 자기 살의 피부에 도두라짐, 딱지, 선명한 반점을 가질 때, 그것은 자기 살의 피부에서 나병(leprosy)의 역병(plague)이 되어 간다, 그러면 그는 성직자 아론에게, 또는 성직자 그의 아들들 중 한 명에게 데려와져야 한다.
3. 그리고 성직자는 살의 피부에 있는 역병을 관찰하라. 그리고 만일 역병에 있는 털이 희게 변했다면, 그리고 역병의 외관이 그의 살의 피부 보다 더 깊다면, 그것은 나병이라는 역병이다. 그리고 성직자는 그를 살펴볼 것이다, 그리고 그는 불결하다고 발표한다.
4. 그리고 만일 선명한 반점이 그의 살의 피부에서 희고, 그것의 나타남이 피부보다 더 깊지 않다면, 그리고 그로부터의 털이 희게 변하지 않았다면, 성직자는 역병을 가진 그를 칠일 동안 격리해두라.
5. 그리고 성직자는 칠 일째 날에 그를 살펴볼 것이다. 그리고, 보라, 만일 그의 눈에서 역병이 머물고 있고, 역병이 그의 피부에서 퍼지지 않았으면, 성직자는 칠 일간 그를 격리해두라.
6. 그리고 성직자는 칠 일째 그를 살펴볼 것이다. 그리고, 보라, 만일 역병이 어둑하다, 그리고 재앙이 피부에 퍼지지 않았다면, 그다음 성직자는 그가 깨끗하다고 발표하라. 그것은 딱지(scab)이다. 그리고 그는 그의 옷들을 빨으라, 그리고 깨끗하다
7. 그러나 그가 자기의 깨끗해짐을 위해 자신을 성직자에게 보인 후, 만일 딱지가 피부에서 번져 갔다면, 그는 다시 성직자에게 자신을 보여야 한다.
8. 그리고 성직자가 살펴 보라, 그리고, 보라, 만일 딱지가 피부에서 퍼지고 있다면, 그다음 성직자는 그가 불결하다고 발표하라. 이것은 나병이다.
9. 나병이라는 역병이 인간에게 있을 때, 그러면 그는 성직자에게 데려와져아 한다.
10. 그리고 성직자는 살펴볼 것이다, 그리고 보라, 만일 피부에서 흰 도두라짐이 있다면, 그리고 털이 희게 변했다면, 그리고 도두라짐에 빨간 생살이 빠르게 있다면,
11. 이것은 그의 살의 피부에 있는 오래된 나병이다, 그리고 성직자는 그가 불결하다고 발표하라. 그는 그를 격리하지 말라. 그이유가 그가 불결하기 때문에서이다.
12. 그리고 만일 나병이 피부에서 퍼져가서, 그리고 나병이 나병을 가진 그의 모든 피부, 즉 머리부터 발까지를 덮고 있다면, 그렇게 성직자에게 나타난다면,
13. 그다음 성직자는 살펴 보라. 그리고 보라, 만일 나병이 그의 모든 살을 덮었다면 그는 역병을 (가진) 그를 깨끗하다고 발표하라. 그것은 모두 희게 변했다. 그는 깨끗하다.
14. 그러나 빨간 생살이 그 사람과 더불어 나타나는 때는 언제이든지, 그는 불결하다
15. 그리고 성직자는 빨간 생살을 살펴 보라, 그리고 그를 불결하다고 발표한다. 빨간 생살은 불결하다. 그것은 나병이다.
16. 또는, 만일 빨간 생살이 다시 변한다면, 그리고 희게 바뀌어진다면, 그러면 그는 성직자에게 가라.
17. 그리고 성직자는 그를 살펴볼 것이다. 그리고 보라, 만일 역병이 희게 변했으면, 성직자는 역병(을 가진) 그를 깨끗하다 발표하라. 그는 깨끗하다.
18. 그리고 살이 그것의 피부에서 종기를 가질 때, 그리고 나을 때,
19. 그리고 종기 있는 자리가 희게 도두라지거나, 선명한 반점, 빨간 흰 반점이 있다, 그러면 성직자에게 보여라.
20. 그리고 성직자는 살펴 보라, 그리고 보라, 만일 그것의 나타남이 피부보다 더 낮다면, 그리고 그것의 털이 희게 변했다면, 그다음 성직자는 그가 불결하다고 발표하라. 이것은 나병의 역병이다, 그것이 종기에서 나타났다.
21. 그러나 만일 성직자가 그것을 살펴 보고, 보라, 거기 안에 흰 털이 없고, 그리고 피부보다 더 낮지 않고, 단지 어슴프레하다면, 성직자는 그를 칠 일간 격리해 두라.
22. 그리고 만일 이것이 피부에 퍼지고 있다면, 그다음 성직자는 그가 불결하다고 발표하라. 그것은 역병이다.
23. 그러나 만일 선명한 반점이 그 위치에서 머문다면, 그리고 퍼지지 않고 있다면 그것은 종기의 상처 자국이다. 그리고 성직자는 그가 깨끗하다고 발표하라.
24. 또는 살이 그것의 피부에서 불로 데어짐을 가질 때, 그리고 데짐의 살이 바르게 선명한 반점, 빨간 흰, 또는 흰 반점이 될 때,
25. 그 다음 성직자는 그것을 살펴 보라. 그리고 보라, 만일 선명한 반점에 있는 털이 희게 변하여지고, 그것의 나타남이 피부 보다 더 깊다면, 그것은 나병이다, 나병이 데어짐에서 나타난 것이다. 그리고 성직자는 그가 불결하다고 발표하라. 이것은 나병의 역병이다.
26. 그러나 만일 성직자가 그것을 살펴보고, 보라, 선명한 반점에 흰 털이 없고, 피부보다 더 낮지 않으나 어슴프레하다면, 그 다음 성직자는 그를 칠 일간 격리 해두라.
27. 그리고 성직자는 그를 칠 일째 날 살펴 보라. 만일 이것이 피부로 퍼졌다면, 그다음 성직자는 그가 불결하다고 발표할 것이다. 그것은 나병의 역병이다.
28. 그리고 만일 선명한 반점이 제자리에 머물고, 피부에 번지지 않고, 어슴프레하다면, 성직자는 그가 깨끗하다고 발표할 것이다. 그 이유가 그것은 데어짐으로부터의 상처자국이다.
29. 그리고 남자, 또는 여자가 머리에, 또는 수염에 역병을 가질 때,
30. 그러면 성직자는 역병을 살펴 볼 것이다. 그리고 보라, 만일 그것의 나타남이 피부보다 더 깊다면, 그리고 황색의 가는 털이 그것 안에 있다면, 그다음 성직자는 그가 불결하다고 발표한다. 그것은 두창(scall)이다, 그것은 머리나 수염의 나병이다
31. 그리고 만일, 성직자가 두창의 역병을 살펴보고, 보라, 그것의 나타남이 피부보다 더 깊지 않고, 그것 안에 검은 털이 없다면, 그러면 성직자는 두창의 역병을 (가진) 그를 칠 일간 격리해두라.
32. 그리고 칠 일째 날 성직자는 역병을 살펴 보라. 그리고 보라, 만일 두창이 퍼지지 않고, 황색 털이 그 안에 없고, 그리고 두창의 나타남이 피부 보다 더 깊지 않다면,
33. 그러면 그는 면도하라, 그러나 두창은 면도하지 말라. 그리고 성직자는 두창(을 가진) 그를 칠 일간 더 격리하라.
34. 그리고 칠 일째 날 성직자는 두창을 살펴 보라. 그리고, 보라, 만일 두창이 피부에 퍼지지 않았고, 그것의 나타남이 피부 보다 더 깊지 않다면, 그러면 성직자는 그가 깨끗하다고 발표한다. 그리고 그는 자기 옷들을 빨아라 , 그리고 깨끗하다.
35. 그러나 만일 두창이 자기 옷을 깨끗이 한 후 피부에서 퍼지고 있다면.
36. 그 다음 성직자는 그를 살펴 보라. 그리고 보라, 만일 두창이 피부에 퍼졌다면, 성직자는 황색 털을 수색하려 들지 말라. 그는 불결하다.
37. 그러나 만일 그의 눈에서 두창이 머물고 있고, 그리고 검은 털이 거기 안에서 자랐다면. 두창이 치료되어지고 있다, 그는 깨끗하다. 그리고 성직자는 그가 깨끗하다고 선포한다.
38. 그리고 남자 또는 여자가 자기 살의 피부에 선명한 반점들, 희고 선명한 반점들 조차 가질 때,
39. 그다음 성직자는 살펴 보라. 그리고 보라, 만일 그들의 살의 피부에 있는 선명한 반점들이 투미한 흰색일 때, 이것은 피진(tetter)이다, 이것이 피부에 나타난 것이다. 그는 깨끗하다.
40. 그리고 만일 사람의 털이 그의 머리로부터 떨어진다면(빠진다면), 그가 대머리이다면, (아직) 그는 깨끗하다.
41. 그리고 만일 그의 털이 그의 머리의 앞부분으로부터 빠진다면, 그는 앞이마 대머리이다. (아직) 그는 깨끗하다.
42. 그러나 만일 대머리, 또는 앞이마 대머리 안에 빨간 흰 역병이 있다면, 그것은 그의 대머리, 또는 그의 앞이마 대머리에서 나타난 나병이다.
43. 그다음 성직자는 그를 살펴볼 것이다. 그리고, 보라, 만일 역병으로부터의 도두라짐이 그의 대머리에서, 또는 그의 앞이마 대머리에서, 마치 살의 피부에서의 나병 같이 빨간 흰색이다면,
44. 그는 나병 있는 사람이다, 그는 불결하다. 성직자는 그가 불결하다고 확실히 발표할 것이다. 그의 역병이 그의 머리에 있다.
45. 그리고 역병이 있는 나환자, 그의 옷들을 찢으라, 그리고 그의 머리의 털은 풀어 놓아라, 그리고 그는 자기 윗입술을 덮을 것이다, 그리고 외칠 것이다, 나는 불결하다, 불결하다.
46. 역병이 자기 안에 있는 모든 날들 동안 그는 불결하다. 그는 불결하다. 그는 홀로 거주하라. 진영 밖이 그의 거주지 이다.
47. 나병의 역병이 안에 있는 옷 또한 그것이 양털 옷이든, 아마포 옷이든.
48. 그것이 날줄, 또는 씨줄이든, 아마포로 이든, 양털로 이든. 가죽에서이든, 또는 가죽 제품 어떤 것에서 이든.
49. 만일 역병이 옷에서, 또는 가죽이든, 또는 날줄(warp)이든, 또는 씨줄(woof)이든, 또는 가죽 제품의 어떤 것에서 이든 푸루퉁하거나 빨간색이다면, 성직자에게 보여야 한다.
50. 그리고 성직자는 역병을 살펴 보라, 그리고 칠 일 동안 역병을 가진 것을 격리해둔다.
51. 그리고 그는 칠 일째 날 역병을 살펴라. 만일 역병이 옷에서, 날줄이든, 씨줄이든, 또는 가죽이든, 가죽이 어떤 섬김에 사용되었든 퍼졌다면, 역병은 악성 나병이다. 그것은 불결하다.
52. 그리고 그는 옷을, 날줄이든, 씨줄이든, 양털로 되었든, 아마포로 되었든, 가죽으로 된 어떤 것이든 역병이 있는 것을 태울 것이다. 그 이유가 그것은 악성 나병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불에서 태워져야 한다.
53. 그리고 만일 성직자가 살피고, 그리고 보라, 역병이 옷에서, 날줄에서, 씨줄에서, 또는 가죽의 어떤 것에서 퍼지지 않았다면.
54. 그러면 성직자는 역병이 있는 것을 씻으라고 그들에게 명령하라, 그리고 그는 그것을 칠 일 동안 격리하라.
55. 그리고 역병이 씻어진 후 성직자는 살피라. 그리고 보라, 만일 역병이 색이 바뀌지 않았다면, 그리고 역병이 퍼지지 않았다면, 그것은 불결하다. 너는 그것을 불에서 태워라. 그것의 드러냄이 안쪽이든 바깥쪽이든 그것은 악성이다.
56. 그리고 만일 성직자가 살핀다, 그리고, 보라, 역병이 씻긴 후 어슴프레하다면, 그 다음 그는 그것을 찢을 것인데, 옷이든, 가죽으로부터이든, 날실로부터이든, 씨줄로부터이든 찢으라.
57. 그리고 만일 그것이 여전히 옷에서, 그것이 날실에서이든, 씨줄에서이든, 또는 가죽의 어떤 것에서이든 나타난다면, 그것이 나타나고 있다. 너는 역병이 있는 것을 불로 태워라.
58. 그리고 옷, 날실이든, 씨줄이든, 또는 가죽의 어떤 것으로 이든, 너는 그것을 빨아라, 만일 역병이 그것들로부터 떠나진다면, 그다음 그것을 두 번째 빨아라, 그리고 깨끗하다.
59. 이것은 양털 옷 또는 아마포 옷, 날실이든, 씨줄이든, 또는 가죽의 어떤 것이든, 옷이 깨끗함을 발표하기 위하여, 또는 그것이 불결함을 발표하기 위한 법이다.

영적 의미 요약

* 진리의 모독을 발견하는 순서에 관한 일반 법칙, 즉 만일 인간이 외적으로 불순하면서 동시에 내적으로는 진리를 인정하는 신앙이 있다면 거기에 모독만이 있을 뿐이다, 1-8절.
* 확인된 모독의 상태에 관하여, 9-11절
* 불순함과 모독에 관한 것이 감각적 사랑으로부터, 18-23절; 세상적 사랑으로부터, 24-28절; 이기적 사랑으로부터, 29-37절.
* 불순함과 모독에 관한 몇 가지 다른 경우를 생각하고 있다, 38-44절.
* 모독자가 슬퍼할 수 있는 상태가 그려져 있다, 45-46절.
* 선이든 진리이든, 그것이 내적, 내면, 외적이든 교리에 관한 법칙, 이는 모독을 일으키는 원인인 거짓에서 순수해져야 한다, 47-59절.

각 절의 영적 의미

1절. 그리고 주님께서 모세에게 그리고 아론에게 이야기하셨다, 말하시기를,

영적 의미

주님께서 지각을 주심으로 진리 가운데 있는 이들과 선 가운데 있는 이들을 밝히 알게 하신다.

세부적 영적 의미

주님이란 사랑 측면에서의 신성한 존재를; 이야기하심(speaking)은 유입을; 모세는 신성한 진리 또는 말씀을; 아론은 신성한 선을; 말하심(saying)은 지각을 각각 뜻한다. (2001, 2951, 7010, 9946, 1791, 1822)

2절. 사람이 자기 살의 피부에 도두라짐, 딱지, 선명한 반점을 가질 때, 그것은 자기 살의 피부에서 나병(leprosy)의 역병(plague)이 되어 간다, 그러면 그는 성직자 아론에게, 또는 성직자 그의 아들들 중 한 명에게 데려와져야 한다.

영적 의미

내적 인간에게서 파생된 외적 인간 안에 있는 악한 애착, 감각이나 세상 또는 이기적 사랑에서 온 욕망들이 적극성을 띄울 때 진리를 모독하는 원인이 된다. 이런 모독 상태에 있는 사람은 신성한 선 또는 이 선으로 진행되는 신성한 진리의 영향 밑에 들어가야 한다.

세부적 영적 의미

살의 피부(살갗)이란 내적 인간으로부터 파생되는 외적 인간을, 도두라짐, 딱지, 선명한 반점이란 각각 감각적, 세상적, 이기적 사랑에서 오는 악한 애착을 명시하고 있다. “각각 세상적, 이기적 사랑”을 뜻하는 이유는 히브리 단어들이 내적 의미로 볼 때 하강하는 시리즈 즉 악이 더욱 더 악해지는 것을 암시하기 때문이다. 나병이란 주님께서 아껴두신 것들(remains)을 파괴하는 쪽으로 가고 있는 진리의 모독을 말한다. 아론 성직자나 그의 아들 성직자 중 누구에게든지 데려 옴이란 신성한 선의 영향 밑에 가져옴 또는 신성한 선에서 진행되는 신성한 진리에로 가져옴을 뜻한다. (9215, 780, 7524, 2240, 7408, 9394, 6963, 10219, 9946)

3절. 그리고 성직자는 살의 피부에 있는 역병을 관찰하라. 그리고 만일 역병에 있는 털이 희게 변했다면, 그리고 역병의 외관이 그의 살의 피부 보다 더 깊다면, 그것은 나병이라는 역병이다. 그리고 성직자는 그를 살펴볼 것이다, 그리고 그는 불결하다고 발표한다.

영적 의미

그리고 신성한 선으로부터 신성한 진리를 수단으로 내적 인간에게서 온 외적 인간의 상태를 검증하여 모독 여부를 가려야 한다. 만일 거기서 거짓이 진리를 썩게 하고 있다면, 동시에 그 썩음이 주님을 인정하고 믿는다고 하는 내적 인간으로부터 일 경우 모독이 존재한다. 이 사항이 불순하다는 것은 신성한 선으로부터 지각되어 밝혀져야 한다.

세부적 영적 의미

성직자가 피부에 생긴 병을 살펴봄이란 신성한 선으로부터 신성한 진리를 수단으로 내적 인간에서 파생되는 외적 인간의 상태가 모독되었는지 검사함을; 병든 자리에 난 털이 희어짐이란 거짓으로 부패된 최말단의 진리를; 병든 자리가 우묵하게 들어갔다는 것은 부패함이 내적 인간 즉 주님을 인정하고 그분을 믿는 마음으로부터 있다는 것을 말하는데 그 이유가 피부(skin)가 외적인 것을, 살(flesh)은 내적인 것을 명시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기서 함축해서 포함하고 있는 살아있는 살(flesh)은 인정함과 신앙을 뜻하고 있다. 나병이란 진리의 모독을; 성직자가 이 사람을 들여다봄이란 신성한 선으로부터 오는 지각과 계시를; 불결함이란 영적 불순함을 말한다. (2245, 2246, 9215, 780, 3301, 8459, 4007, 6963, 9946, 10130)

4절. 그리고 만일 선명한 반점이 그의 살의 피부에서 희고, 그것의 나타남이 피부보다 더 깊지 않다면, 그리고 그로부터의 털이 희게 변하지 않았다면, 성직자는 역병을 가진 그를 칠 일 동안 격리해두라.

영적 의미

만일 이기적 사랑의 욕망이 내적 인간에서 온 외적 인간 속의 진리를 부패 시켰다면, 그리고 이 부패가 외적일 뿐이라면, 그리고 이 욕망으로부터 온 거짓들이 진리를 뒤집지 않았다면, 위 진리 안에서 작용하는 선의 영향으로 억제함이라는 거룩한 상태가 있다.

세부적 영적 의미

선명한 반점(어루러기, bright spot)이란 이기적 사랑의 욕망을, 살갗에 있는 것이 희다란 거짓으로 진리가 부패함을, 피부보다 더 깊게(우묵하게) 들어가지는 않았음이란 외적으로만 부패했음을, 털이 희어지지 않았음이란 이기적 사랑으로부터 오는 거짓으로 진리가 부패하되 내적으로는 부패하지 않았음을, 성직자란 선이 작용함을, 칠 일간 격리함이란 자아를 억제하는 거룩한 상태를 말한다. (제 2, 3절 참조, 9215, 9946, 784, 6854-3, 716)

5절. 그리고 성직자는 칠 일째 날에 그를 살펴볼 것이다. 그리고, 보라, 만일 그의 눈에서 역병이 머물고 있고, 역병이 그의 피부에서 퍼지지 않았으면, 성직자는 칠 일간 그를 격리해두라.

영적 의미

선의 영향이 더 강하게 느껴져 완성될 때에 악이 조절되고, 외적 인간의 진리들이 더 이상 썩지 않고 있다면, 선의 영향 밑에서 두 번째 억제함이 발생된다.

세부적 영적 의미

칠 일째 되는 날 성직자가 살펴봄이란 선의 영향이 억제하는 상태의 완성을 더 강하게 느꼈음을; “성직자의 눈으로 보아서”란 선으로부터 오는 진리의 지각을; 병이 더하지는 않고 있음이란 악이 조절되고 있다는 것을; 살갗으로 더욱 번져 나가지 않았다란 악이 외적 인간 속의 진리를 더 부패시키지 않았다는 것을; 성직자가 그를 칠 일간 더 격리시킴이란 선의 영향 하에 억제함의 두 번째 상태가 발생하는 것을 뜻한다. (2245, 2246, 9946, 5304, 10219, 10219, 9215, 4035, 784, 6854-5, 716, 9946)

6절. 그리고 성직자는 칠 일째 그를 살펴볼 것이다. 그리고 보라, 만일 역병이 어둑하다, 그리고 재앙이 피부에 퍼지지 않았다면, 그 다음 성직자는 그가 깨끗하다고 발표하라. 그것은 딱지(scab)이다. 그리고 그는 그의 옷들을 빨으라, 그리고 깨끗하다

영적 의미

선의 영향이 더욱 강해져 썩으려는 경향성이 더 약해지고, 외적 인간의 진리가 더럽혀지지 않고 있다면 비록 세상적 사랑을 통해 부패했을지라도 모독은 없다. 그러나 그 진리들도 깨끗해져야 한다.

세부적 영적 의미

다시 칠 일째 되는 날 성직자가 살펴봄이란 선의 영향이 억제하는 상태의 완성을 더 강하게 느꼈음을; “성직자의 눈에서, if in his eyes”란 선으로부터 오는 진리의 지각을, 병이 조금 나아졌다란 부패되려는 경향이 조금 더 약해졌음을; 살갗에 더 번지지 않았음이란 외적 인간 속의 진리가 손상되지 않았음을; 성직자가 그를 깨끗한 사람이라고 선언함이란 내적으로 불순함이 없다는 것을; 단순한 피부병(scrab)이란 외적으로 불순함을; 옷을 빨아 입으면 깨끗해진다란 진리를 따름으로 깨끗해짐을 말한다. (2245, 2246, 9946, 2044, 10219, 9215, 4035, 4545, 7524, 2240, 3147, 4545)

7절. 그러나 그가 자기의 깨끗해짐을 위해 자신을 성직자에게 보인 후, 만일 딱지가 피부에서 번져 갔다면, 그는 다시 성직자에게 자신을 보여야 한다.

영적 의미

그러나 완성되어 가는 모든 상태의 계속적 단계에서 깨끗해짐을 위해 선에서 오는 억제함의 영향에도 불구하고 세상적 사랑이 계속 된다면 위 영향은 다시 재개되어야 한다.

세부적 영적 의미

살갗에 딱지가 퍼져감이란 세상적 사랑으로부터 오는 부패함이 계속되는 것을; 성직자가 진단해 보고 깨끗하다고 선언한 후란 완성되어 가는 계속적인 상태 안에 있는 깨끗해지기 위한 선으로부터 오는 억제함의 영향에도 불구하고를; 또 다시 성직자에게 자신을 진단 받음이란 선의 영향이 다시 발휘됨을 각각 뜻한다. (2245, 2246, 9946, 9215, 780)

8절. 그리고 성직자가 살펴 보라, 그리고 보라, 만일 딱지가 피부에서 퍼지고 있다면, 그다음 성직자는 그가 불결하다고 발표하라. 이것은 나병이다.

영적 의미

검증해 본 가운데 부패가 계속되고 그 결과 모독함이 있다면 불순함이 있게 된다. 그 이유는 거듭나는 과정에 있는 선의 영향에 충분히 반대했기 때문이다.

세부적 영적 의미

성직자가 살펴봄이란 선으로부터의 검사가 더 있음을; 딱지가 살갗에 번져 나갔다란 부패가 계속되어 팽창되고, 동시에 인정함과 신뢰함의 상태가 거기에 포함되어 있고 억제하는 상태 안에 있음을 함축한다. 성직자가 그를 불결한 자라고 선언함이란 거듭나는 과정에서 선에 반대하여 일어나는 불순함을 각각 뜻한다. (2245, 2246, 9946, 7524, 2240, 4035, 6963, 10130)

9절. 나병이라는 역병이 인간에게 있을 때, 그러면 그는 성직자에게 데려와져아 한다.

영적 의미

그래서 다시 인간이 모독함에 있게 될 때에도 그는 신성한 선의 영향 밑에 있는다.

세부적 영적 의미

사람에게 나병이 생겼을 경우에 그를 성직자에게 데려옴이란 누군가가 모독하는 상태에 있을 때 그는 신성한 선의 영향 밑에 더 있게 됨을 말한다. (6963, 9946)

10절. 그리고 성직자는 살펴볼 것이다, 그리고 보라, 만일 피부에서 흰 도두라짐이 있다면, 그리고 털이 희게 변했다면, 그리고 도두라짐에 빨간 생살이 빠르게 있다면,

영적 의미

그 다음 선으로부터의 진리로 검증이 있게 되고, 만일 외적 인간 속의 진리가 감각적 욕망으로 부패되고 있고 이 욕망의 거짓이 진리를 뒤집었다면, 그런데도 주님을 인정하고 그분을 믿노라고 한다면,

세부적 영적 의미

성직자가 살펴봄이란 선으로부터 진리가 검사함을; 살갗에 흰 도두라짐이 생긴다란 감각적 욕망으로 외적 인간 속의 진리가 부패함을; 털이 희어짐이란 더 내면적으로 거짓에 의해 진리가 부패함을; 그 도두라짐에서 빨간 생살이 났다란 주님의 인정과 그분을 신뢰하는 것을 말한다. (9946, 2245, 2246, 제 2절 참조, 제 3절 참조, 6963)

11절. 이것은 그의 살의 피부에 있는 오래된 나병이다, 그리고 성직자는 그가 불결하다고 발표하라. 그는 그를 격리하지 말라. 그 이유가 그가 불결하기 때문에서 이다.

영적 의미

그것은 내적 인간으로부터 오는 외적 인간에 있는 진리의 모독을 확증한 상태이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거기가 불순하다는 것에 대해 선으로부터 온 진리가 증거 한다. 이와 같은 상태에 있는 사람은 더 이상 억제 될 리도 없다. 그는 내적으로나 외적으로나 불순해 있다.

세부적 영적 의미

살갗에 생긴 병이 오래 된 나병이라 함은 내적 인간에서 파생되는 외적 인간에 있는 진리의 모독이 확증된 상태를, 그를 불결한 자라고 성직자가 선언함이란 불순한 상태를 선으로부터의 신성한 진리가 증언함을, 격리하지 않는다란 이런 상태에 있는 것은 더 억제될 수 없다는 것을, “그는 불결하다”란 내적, 외적으로 있는 진리의 모독으로 불순함을 각각 뜻한다. (2348, 9946, 10130, 784, 6854-5)

12절. 그리고 만일 나병이 피부에서 퍼져가서, 그리고 나병이 나병을 가진 그의 모든 피부, 즉 머리부터 발까지를 덮고 있다면, 그렇게 성직자에게 나타난다면,

영적 의미

만일 어떤 이가 깊은 측면에서는 자아 사랑으로, 최말단 측면에서는 감각적인 사랑으로 외적 인간 안의 진리를 완전히 모독했다면,

세부적 영적 의미

나병이 살갗에 온통 번짐이란 외적 인간에서의 완전한 모독을; 성직자가 본 바 머리로부터 발끝까지란 선으로부터 온 진리의 증언에 의거 가장 깊은 내면에 있는 자아 사랑으로부터 최말단에 있는 감각적 사랑까지를 말한다. (6963, 9215, 9632, 7442, 2245, 2246, 9946)

13절. 그다음 성직자는 살펴 보라. 그리고 보라, 만일 나병이 그의 모든 살을 덮었다면 그는 역병을 (가진) 그를 깨끗하다고 발표하라. 그것은 모두 희게 변했다. 그는 깨끗하다.

영적 의미

선으로부터 온 진리의 증거에 따라 검사가 거행된다. 만일 모독이 다 되어있으나 진리의 지식으로부터만 발생되고 내적으로 인정함이나 신앙으로부터 발생되지 않았다면 신성한 진리를 수단으로 하는 신성은 이와 같은 인물은 내향적 모독으로부터는 순수하다고 지각한다.

세부적 영적 의미

성직자가 살펴봄이란 신성한 선이 신성한 진리를 수단으로 검사함을; 나병이 온 몸(all the flesh)에 덮였다란 모독이 전체적임을; 몸이 온통 희게 되었을 뿐이다란 진리의 지식으로 생기는 것일 뿐 내적인 인정이나 신뢰로부터가 아님을; 성직자가 그를 깨끗한 자라고 발표함이란 신성한 선이 신성한 진리를 수단으로 이와 같은 인물의 모독은 내향적으로부터가 아님을 지각함을; 온통 희다란 악으로부터 온 거짓이 외적 측면에서 우세해져 있음을; 그럼에도 그가 깨끗한 자이다란 내향적으로는 모독이 없음을 각각 말한다. (9946, 2245, 2246, 6963, 9632, 9946, 4545)

14절. 그러나 빨간 생살이 그 사람과 더불어 나타나는 때는 언제이든지, 그는 불결하다

영적 의미

그러나 만일 내적으로 인정함과 신앙이 있을 경우 거기에는 불순함이 있다.

세부적 영적 의미

그의 몸 어딘가에 빨간 생살(성난 살)이 나타남이란 내적으로 인정함과 신뢰함을, 부정하다란 모독 때문에 불순함을 말한다. (780, 6963, 10130)

15절. 그리고 성직자는 빨간 생살을 살펴 보라, 그리고 그를 불결하다고 발표한다. 빨간 생살은 불결하다. 그것은 나병이다.

영적 의미

신성한 진리를 수단으로 신성한 선은 위 불순함이 있다고 지각하고 선포하는데, 그 이유가 인정함과 신앙이 있을 때 진리가 썩는 것은 그것이 진짜로 내적 모독이기 때문이다.

세부적 영적 의미

성직자가 성난 살을 보고 불결하다고 발표함이란 신성한 선이 신성한 진리를 수단으로 불순함을 지각하는 것을, 성난 살이 불결하고 거기에 나병이 있다란 진리가 부패하되 거기에 인정함과 신뢰함까지 있게 되면 진정한 내적 모독이다는 뜻이다. (9946, 2245, 2246, 10130, 6963)

16절. 또는, 만일 빨간 생살이 다시 변한다면, 그리고 희게 바뀌어진다면, 그러면 그는 성직자에게 가라.

영적 의미

모독중인 사람이 주님을 인정하는 것과 그분에 대한 신앙을 가지기를 중단한다면 모독은 외적인 측면에서만 있게 되는 바 그는 신성한 선의 영향 하에 다시 와야만 한다.

세부적 영적 의미

빨간 생살(성난 살, raw flesh)이 다시 희어지면이란 모독하는 어떤 사람이 주님을 인정함과 그분에 대한 신뢰를 중단하는 것을, 모두 희어짐이란 외적으로만 모독함을, 성직자에게 다시 옴이란 신성한 선의 영향 밑에 다시 오는 것을 뜻한다. (6963, 13절 참조, 9946)

17절. 그리고 성직자는 그를 살펴볼 것이다. 그리고 보라, 만일 역병이 희게 변했으면, 성직자는 역병(을 가진) 그를 깨끗하다 발표하라. 그는 깨끗하다.

영적 의미

만일 거기에 더 이상 인정함과 신앙이 없다고 신성한 진리가 지각한다면, 그 다음 신성한 선으로부터 이와 같은 사람은 내적 모독에서 순수하다고 선포된다.

세부적 영적 의미

성직자가 살펴봄이란 신성한 선으로부터 신성한 진리를 수단으로 지각함을; 병든 자리가 모두 희어짐이란 인정함과 신뢰함이 더 이상 없는 것을; 성직자가 깨끗하다고 선언함이란 이와 같은 사람은 내적 모독에서는 깨끗하다고 선으로부터 선포가 있음을 말한다. (2245, 2246, 9946, 6963, 9632, 4545)

18절. 그리고 살이 그것의 피부에서 종기를 가질 때, 그리고 나을 때,

영적 의미

영적 인간의 생명 중 기억 안의 진리가 있는 곳, 외적 측면이 감각적 사랑의 불순함과 추악함으로 더렵혀졌을 경우 이는 진리의 영향으로 바깥쪽으로는 치료가 되는데,

세부적 영적 의미

살갗이 곪았다가 나았다란 영적 인간의 생명이 외적 측면 즉 기억 안의 진리가 있는 곳이 감각적 사랑의 불순함과 추잡함으로 손상되었다는 것, 그럼에도 바깥쪽의 것은 진리의 영향으로 치료된다는 것을 말한다. (7524, 9245, 780, 8365)

19절. 그리고 종기 있는 자리가 희게 도두라지거나, 선명한 반점, 빨간 흰 반점이 있다, 그러면 성직자에게 보여라.

영적 의미

영적 생명이 내향적으로 남아 있는 동안 진리가 감각적 사랑 또는 이기적 사랑으로 썩어져 선이 거짓과 합병된 듯 나타나지도록 된다면 신성한 선은 그런 상태에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이다.

세부적 영적 의미

곪았던 자리가 다시 희게 도드라지거나 불그스름한 선명한 반점이 생긴다는 것은 손상된 생명이 내향적으로 남아 있다는 것, 그 이유는 희게 부어 오름이 감각적 사랑으로 부패된 진리를; 선명한 반점(어루러기, bright spot)는 이기적 사랑으로 부패된 진리를; 빨간 흰색(불그스름하게 희다, reddish white)란 선이 거짓과 합병된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성직자에게 보인다란 신성한 선이 그런 상태에 영향을 미칠 것임을 말한다. (제 2절, 6402, 3300, 8459, 4007, 2245, 9946, 제 3절)

20절. 그리고 성직자는 살펴 보라, 그리고 보라, 만일 그것의 나타남이 피부보다 더 낮다면, 그리고 그것의 털이 희게 변했다면, 그 다음 성직자는 그가 불결하다고 발표하라. 이것은 나병의 역병이다, 그것이 종기에서 나타났다.

영적 의미

그리고 선으로부터의 신성한 진리가 정밀 탐사한 바, 얼마간의 인정함과 신앙이 실지 있고, 더하여 거짓으로 인한 진리의 모독까지 있다는 것이 보여지면 거기에는 불순함이 있다. 그리고 이 진리의 모독은 감각적 사랑이 널리 퍼진 데에 기인된다.

세부적 영적 의미

성직자가 살펴봄이란 신성한 진리를 수단으로 하는 선으로부터의 탐사를; 피부 보다 더 낮다(우묵하게 들어감)이란 거기에 어떤 인정함과 신뢰가 있다는 것을; 털이 희어짐이란 거기에 거짓에 의한 진리의 부패가 있음을; 성직자가 불결하다고 선언함이란 거기에 불순함이 있음을; 나병이란 아껴두신 것들을 파괴하려는 경향이 있는 진리의 모독을; 종기에서 나타남(곪아터짐)이란 감각적 사랑이 득세함에서 발생된다는 것을 뜻한다. (2245, 2246, 9215, 780, 6963, 제 3절 참조, 10130, 6963, 10219, 7524)

21절. 그러나 만일 성직자가 그것을 살펴 보고, 보라, 거기 안에 흰 털이 없고, 그리고 피부보다 더 낮지 않고, 단지 어슴프레하다면, 성직자는 그를 칠 일간 격리해 두라.

영적 의미

그러나 선으로부터 검사한 바, 감각적 사랑의 악에서 온 거짓이 진리를 부패시키지 않았고 인정함과 신앙이 없는 바 외향적으로만 불순할 뿐이라면 영적 인간은 거듭나는 과정에서 외적 거룩함의 상태를 수단으로 제한 받아지고 있는 것이다.

세부적 영적 의미

성직자가 살펴봄이란 선으로부터의 검사를, 거기에 흰털이 없음이란 감각적 사랑의 악으로부터 온 거짓들이 진리를 썩게 하지는 아니했음을, 우묵 들어가지 않았음이란 인정함도 신뢰함도 없다는 것을, 병세가 완화되고 있음(the plague being dim or weak)이란 외적으로만 불순하고 있음을, “어슴프레함, 완화, dim”이란 악이 상대적으로 약화됨을, 성직자가 칠 일간 그를 격리시킴이란 자아 억제가 외적으로 있는 거룩한 상태를 뜻하고 있다. (9946, 2245, 2246, 제 3절, 9215, 780, 6963, 10219, 3493, 784, 6854-5, 716, 9946)

22절. 그리고 만일 이것이 피부에 퍼지고 있다면, 그다음 성직자는 그가 불결하다고 발표하라. 그것은 역병이다.

영적 의미

그리고 억지를 부려 썩어짐이 팽창되고 있다면 진리에 의한 선으로부터 아껴두실 것을 파괴시키려는 강한 경향성을 가지고 진리를 모독하고 있음이 입증되어진다.

세부적 영적 의미

살갗에 도두라짐이나 선명한 반점이 더 퍼졌다란 부패가 고집스럽게 팽창함을, 성직자가 그를 불결한 자라고 선언함은 모독이 있다는 것이 선으로부터 진리를 수단으로 증명됨을, “그것은 역병이다(병 증세이다)”란 아껴두신 것들을 파괴하려는 경향이 강한 것을 말한다. (10219, 9215, 4035, 9946)

23절. 그러나 만일 선명한 반점이 그 위치에서 머문다면, 그리고 퍼지지 않고 있다면 그것은 종기의 상처 자국이다. 그리고 성직자는 그가 깨끗하다고 발표하라.

영적 의미

그러나 이기적 사랑에 의한 썩게 하는 영향력이 점검되어 거기에 감각적 사랑의 불순함만 있다면, 선으로부터 이것은 불순함이 아니다고 선포된다.

세부적 영적 의미

선명한 반점이 제자리에서 더 번져 나가지 않았다란 부패의 영향이 점검되었음을, 퍼지지 않음이란 악의 증가 또는 팽창이 없음을, 종기의 상처자국(곪았던 흔적)에 불과함이란 감각적 사랑의 불순함이 남아 있음을, 성직자가 그를 깨끗한 자라고 선언함이란 선으로부터 불순함이 없다고 선포하는 것을 뜻한다. (제 2절, 4926, 시편 106:23, 4033, 7519-5, 868, 4545)

24절. 또는 살이 그것의 피부에서 불로 데어짐을 가질 때, 그리고 데짐의 살이 바르게 선명한 반점, 빨간 흰, 또는 흰 반점이 될 때,

영적 의미

그리고 다시, 진리가 기억 안에 있는 곳, 외적 측면에서 영적 인간의 생명이 이기적 사랑에서 오는 세상적 사랑의 열정으로 손상을 입는다면, 그리하여 마치 선이 위 두 사랑 중 어느 쪽에서 오는 거짓과 합병된 듯 외관에 보여진다면,

세부적 영적 의미

불에 덴 살갗이란 기억 안에 있는 진리가 있는 곳인 외적 측면에 관한 영적 인간의 생명이 세상적 사랑의 열정으로 손상을 입었음을, 데인 자리가 부어 올라 불그스름하고 희끗희끗한 선명한 반점이 돋는다란 마치 선이 위 사랑의 어느 것으로부터 오는 거짓과 합병된 듯 보이는 것을 말한다. (9955, 6963, 19절, 9215, 6402, 3300, 8459, 4007)

25절. 그 다음 성직자는 그것을 살펴 보라. 그리고 보라, 만일 선명한 반점에 있는 털이 희게 변하여지고, 그것의 나타남이 피부 보다 더 깊다면, 그것은 나병이다, 나병이 데어짐에서 나타난 것이다. 그리고 성직자는 그가 불결하다고 발표하라. 이것은 나병의 역병이다.

영적 의미

그러면 신성한 선으로부터의 검사가 더 있게 된다. 만일 이기적이고 세상적 사랑으로부터 온 거짓이 진리를 부패시켰고 거기에 어떤 인정함과 신앙이 있다면 세상적 사랑의 열정으로부터 진리가 모독된 것이 확실하다. 그것은 불순하다. 그리고 그것은 아껴두신 것(remains)을 파괴하기까지 한다.

세부적 영적 의미

성직자가 살펴봄이란 신성한 선으로부터 검사함을; 선명한 반점에 있는 털이 희어짐이란 이기적이고 세상적인 사랑으로부터 온 거짓이 진리를 썩게 했음을; 우묵하게 들어갔음이란 인정함과 신앙이 있음을; 나병이란 진리의 모독을; 데인 자리에서 터졌다란 진리의 모독은 세상적 사랑이 득세함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성직자가 그를 불결한 자라고 선언함이란 불순함이 있다는 것을; 나병의 역병이란 아껴두신 것들을 파괴하려는 경향이 있는 모독을 말한다. (2245, 2246, 9946, 3절, 9215, 780, 6963, 9955, 9946, 10130, 10219)

26절. 그러나 만일 성직자가 그것을 살펴보고, 보라, 선명한 반점에 흰 털이 없고, 피부보다 더 낮지 않으나 어슴프레하다면, 그 다음 성직자는 그를 칠 일간 격리 해두라.

영적 의미

그러나 신성한 선이 신성한 진리로 검사했는데 거짓이 진리를 썩게 하지 않았고 거기에 인정함과 신뢰함이 없고 오직 불순함이 바깥쪽에서만 있다면 영적 인간은 거듭나는 과정에서 바깥쪽을 거룩하게 함으로 제지되고 있다.

세부적 영적 의미

성직자가 살펴봄이란 신성한 선이 신성한 진리를 수단으로 검사함을, 선명한 반점이 돋은 자리에 난 털이 희어지지 않았음이란 거짓으로 인한 진리의 부패가 없다는 것을, 우묵하게 들어가지 않고 병이 완화된 듯 함이란 인정함과 신앙이 없고 오직 바깥쪽이 불순함을, 성직자가 그를 칠 일간 격리함이란 거듭나는 과정에 있는 바깥쪽 거룩한 상태로 억제함을 말한다. (9946, 2245, 2246, 3절, 9215, 780, 6963, 3493, 21절, 784, 6854-5, 716)

27절. 그리고 성직자는 그를 칠 일째 날 살펴 보라. 만일 이것이 피부로 퍼졌다면, 그다음 성직자는 그가 불결하다고 발표할 것이다. 그것은 나병의 역병이다.

영적 의미

이 상태의 결말에서 검사가 더 있게 되는데 거기에 고집 불통으로 부패함이 팽창되고 있다면 불순함이 있는 바, 진리가 모독되고 있는 것이다.

세부적 영적 의미

칠 일째에 성직자가 살펴봄이란 상태의 마무리에서 한번 더 검사가 있음을, 그것이 피부에 퍼졌음이란 부패의 팽창이 고집스럽게 있음을, 성직자가 그를 불결한 자라고 선언함이란 불순함을, 나병의 역병(나병 증세)이란 아껴두신 것들을 파괴하려 드는 진리의 모독을 말한다. (2245, 2246, 9946, 2044, 10219, 9215, 4035, 9946, 10130, 6963, 10219)

28절. 그리고 만일 선명한 반점이 제자리에 머물고, 피부에 번지지 않고, 어슴프레하다면, 성직자는 그가 깨끗하다고 발표할 것이다. 그 이유가 그것은 데어짐으로부터의 상처자국이다.

영적 의미

그러나 이기적이고 세상적인 사랑이 점검되어져 부패함의 억지 팽창이 없고 단지 바깥쪽이 불순한 채로 있다면, 비록 세상적 사랑이 활동적이라 해도 거기에는 내적 불순함이 없고 단지 이기적이고 세상적인 사랑의 상태가 남아 있는 정도라고 신성한 선은 선포한다.

세부적 영적 의미

선명한 반점이 제자리에서 더 번져나가지 않았다란 이기적이고 세상적인 사랑이 점검되어졌음을, 번지지 않고 완화되고 있다란 부패가 고집스럽게 팽창은 않고 단지 바깥쪽으로 불순할 뿐임을, 덴 자리가 부어 오름이란 세상적 사랑으로부터 감각적 사랑이 적극성을 가짐을, 성직자가 그를 깨끗한 자라고 선언함은 모독으로부터 오는 불순함이 없음을, “그것은 데인 흔적”이라 함은 이기적이고 세상적 상태의 남은 것들을 뜻한다. (2절, 4926, 시편 106:23, 4035, 3493, 21절, 2절, 9055, 9946, 4545, 868, 7519-5)

29절. 그리고 남자, 또는 여자가 머리에, 또는 수염에 역병을 가질 때,

영적 의미

강렬한 이기적 사랑과 거짓으로 영적 인간 안에 있는 진리와 선에 관해 남은 것을 파괴하려는 경향성을 띄울 때,

세부적 영적 의미

29. 남자든지 여자든지 머리나 수염(턱)에 역병(피부병)이 생겼다란 영적 인간이 열성적인 이기적 사랑과 그 거짓으로부터 자신 안에 있는 선과 진리에 관해 아껴두신 것을 파괴하려는 경향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명시한다. (257, 3301-7, 10219, 718, 725)

30절. 그러면 성직자는 역병을 살펴 볼 것이다. 그리고 보라, 만일 그것의 나타남이 피부보다 더 깊다면, 그리고 황색의 가는 털이 그것 안에 있다면, 그 다음 성직자는 그가 불결하다고 발표한다. 그것은 두창(scall)이다, 그것은 머리나 수염의 나병이다

영적 의미

그러면 신성한 선으로부터 검사가 있게 되는데, 이 경우에서 얼마간의 인정함과 신뢰함이 있고, 지옥적인 이기적 사랑에서 오는 거짓이 진리를 집요하게 부패시키고 있다면 거기에 불순함이 확실히 있고, 이 사랑과 거짓으로부터 생기는 부패 행위로 진리의 모독이 있다.

세부적 영적 의미

성직자가 병을 살펴 봄이란 위 경향성에 관한 검사가 신성한 선으로부터 만들어짐을, 그 자리가 우묵하게 들어감이란 어느 정도의 인정함과 신뢰함을, 거기에 난 털이 누렇고 가늘어졌다란 지옥적인 이기적 사랑으로부터 오는 거짓을, 털은 좋은 의미에서 진리를 말하고 금같이 누렇다 함은 선을 말하지만 이 구절에서는 반대 의미로 되었는 바 거짓과 악을 뜻한다. 성직자가 그를 불결하다고 발표함이란 분명히 불순함을, 머리나 턱에 생기는 나병 또는 두창이란 이기적인 사랑과 거짓으로부터 발생하는 부패 행위로부터 진리가 모독됨을 말한다. (9946, 2245, 2246, 10219, 6963, 9215, 780, 3301, 8458, 5204, 10130, 7524, 257, 3310-7)

31절. 그리고 만일, 성직자가 두창의 역병을 살펴보고, 보라, 그것의 나타남이 피부보다 더 깊지 않고, 그것 안에 검은 털이 없다면, 그러면 성직자는 두창의 역병을 (가진) 그를 칠 일간 격리해두라.

영적 의미

그러나 신성한 선이 신성한 진리로 검사한 바, 거기에 인정함과 신뢰함이 없고 진리가 가혹하게 황폐되지 않았다고 보여지면 신성한 선으로부터 거듭나는 과정에서 억제함과 거룩함의 상태가 있는다.

세부적 영적 의미

성직자가 두창의 역병을 살펴봄이란 신성한 선으로부터 신성한 진리를 수단으로 검사가 있음을; 우묵하게 들어가지 않았음이란 인정함과 신뢰함이 없다는 것을; 검은 털도 나지 않았음이란 혹독하게 황폐되지 않았음을; 성직자가 환자를 격리시킴이란 신성한 선으로부터 거듭나는 과정에서 억제와 거룩함의 상태가 있다는 것을 말한다. (2245, 2246, 9946, 9215, 780, 6963, 3993, 3994, 784, 6854-5, 716)

32절. 그리고 칠 일째 날 성직자는 역병을 살펴 보라. 그리고 보라, 만일 두창이 퍼지지 않고, 황색 털이 그 안에 없고, 그리고 두창의 나타남이 피부 보다 더 깊지 않다면,

영적 의미

이 상태가 끝날 때쯤 신성한 선으로부터의 검사가 있어진다. 부패하는 상태가 억지 팽창이 없고 자아 사랑에서 온 열정적인 거짓이 진리를 부패시키지 않았고, 거기에 인정함과 신뢰함도 없다면,

세부적 영적 의미

칠 일째에 성직자가 살펴봄이란 상태의 마무리에서 있는 검사를; 두창이 번지지 않았다란 부패함이 고집스럽게 팽창하지 않았다는 것을; 누런 털이 없다란 강렬한 거짓으로 진리가 부패하지 않았음을; 두창이 난 자리가 우묵하게 들어가지 않았다란 인정함과 신뢰함이 없다는 것을 뜻한다. (2245, 2246, 9946, 2044, 257, 3310-7, 4035, 3301, 8458, 5204, 9215, 780, 6963)

33절. 그러면 그는 면도하라, 그러나 두창은 면도하지 말라. 그리고 성직자는 두창(을 가진) 그를 칠 일간 더 격리하라.

영적 의미

그 다음 자아 사랑으로부터 온 거짓들이 거절되고 있으나 아직 자아 사랑 자체는 완전하게 물러가지 않고 있다면 거듭나는 과정에서 억제함과 거룩함이 더 많이 요구된다.

세부적 영적 의미

털을 깎음이란 이기적 사랑으로부터 거짓들을 거절함을; 두창이 난 자리의 털을 깍지 않음이란 이기적 사랑 자체가 완전히 폐지된 것은 아님을; 칠 일간 더 격리시킴이란 거듭나는 상태에 있는 억제와 거룩함의 상태가 더 있음을 말한다. (3301, 7524, 6963, 275, 784, 6854-5, 716)

34절. 그리고 칠 일째 날 성직자는 두창을 살펴 보라. 그리고 보라, 만일 두창이 피부에 퍼지지 않았고, 그것의 나타남이 피부 보다 더 깊지 않다면, 그러면 성직자는 그가 깨끗하다고 발표한다. 그리고 그는 자기 옷들을 빨아라 , 그리고 깨끗하다.

영적 의미

다시 이 상태의 마무리에서 검사가 있게 된다. 그래서 이기적 사랑으로부터 온 부패가 외적 인간 안에 있는 진리들에 퍼져 가지 않았다면, 동시에 인정함과 신뢰함도 없다면 신성한 선으로부터 거기에 내적 모독이 없다고 선포되고 깨끗해짐이 외적으로 거행되고 거기에 불순함이 없다.

세부적 영적 의미

다시 칠 일째 되는 날 성직자가 두창을 살펴봄이란 상태의 마지막에서 다시 검사함을; 두창이 살갗에 번지지 않았음이란 이기적 사랑으로부터의 부패가 외적 측면에 있는 진리에까지 퍼지지 않았음을; 그 자리가 우묵하게 들어가지도 않았다란 인정함이나 신뢰함이 없다는 것을; 성직자가 그를 깨끗한 사람이라고 발표함이란 내적 모독이 없음을; 옷을 빨아 입으면 깨끗하다란 외적으로 순수하고 불순함이 없음을 말한다. (2245, 2246, 9946, 2044, 257, 3301-7, 4035, 9215, 780, 6963, 994-6, 4545, 3147)

35절. 그러나 만일 두창이 자기 옷을 깨끗이 한 후 피부에서 퍼지고 있다면.

영적 의미

그러나 거기에 순수함이 어느 정도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부패함이 고집스럽게 팽창되고 있다면,

세부적 영적 의미

깨끗하다고 선언한 후 두창이 살갗에 번짐이란 깨끗해졌음에도 불구하고 부패가 고집스럽게 팽창됨을 말한다. (257, 3301-7, 4035, 3147, 4545)

36절. 그 다음 성직자는 그를 살펴 보라. 그리고 보라, 만일 두창이 피부에 퍼졌다면, 성직자는 황색 털을 수색하려 들지 말라. 그는 불결하다.

영적 의미

그러면 진리에 의거 선으로부터의 검사가 더 실시된다. 만일 부패가 억지스럽게 팽창되고 있다면, 자아 사랑으로부터 오는 거짓이 열성을 내는데도 묵과하고 있다면 거기에는 악이 거짓과 결합함으로 불순함이 있다.

세부적 영적 의미

성직자가 그를 살펴봄이란 진리를 수단으로 선이 더 검사함을; 두창이 살갗에 번졌다란 부패가 고집스럽게 팽창되었음을; 성직자가 털이 누렇게 되었는지 조사할 것도 없다란 이기적 사랑으로부터 강렬한 거짓의 현존이 등한시되고 있음을; 그가 부정하다란 영적으로 불순함을 말한다. (9946, 2245, 2246, 257, 3301-7, 4035, 8458, 5204, 10130)

37절. 그러나 만일 그의 눈에서 두창이 머물고 있고, 그리고 검은 털이 거기 안에서 자랐다면. 두창이 치료되어지고 있다, 그는 깨끗하다. 그리고 성직자는 그가 깨끗하다고 선포한다.

영적 의미

그 다음 부패가 두려움으로부터 강제로 제지되고 있음이 신성한 진리로부터 명백해진다면, 그 이유는 모든 진리의 황폐함이 진행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그러면 바깥쪽으로 불순함의 제거가 있다. 그리고 신성한 진리로 신성한 선은 이와 같은 황폐함이 있음을 보지만 거기에 진리의 모독은 없다고 선포한다.

세부적 영적 의미

성직자의 눈에 두창이 더하지 않게 보이면이란 부패가 두려움으로 인해 강제적으로 억제되고 있다는 것이 신성한 진리로부터 명백해짐을; 거기서 검은 털이 나옴이란 이제 모든 진리의 황폐가 거행되었음을; 두창이 나았다란 모독이 없음을; 성직자가 그를 깨끗한 자라고 선언함이란 신성한 선이 신성한 진리를 수단으로 이를 선포함, 더불어 모독으로 인한 불순함이 없음을 뜻한다. (9946, 5304, 4926, 시편 106:23, 3994, 8365, 4545)

38절. 그리고 남자 또는 여자가 자기 살의 피부에 선명한 반점들, 희고 선명한 반점들 조차 가질 때,

영적 의미

교인의 의지나 이해함 안에서 이기적 사랑이 영향력을 미쳐 진리가 부패하고 있다면,

세부적 영적 의미

남자든지 여자든지 살갗에 선명한 반점이 생겼을 경우 또는 그 반점이 희어도란 교인의 의지와 이해함 안에서 악한 의도 없이 이기적 사랑의 영향이 있는 것을 말한다. (7524, 9215, 4035, 2, 3절)

39절. 그다음 성직자는 살펴 보라. 그리고 보라, 만일 그들의 살의 피부에 있는 선명한 반점들이 투미한 흰색일 때, 이것은 피진(tetter)이다, 이것이 피부에 나타난 것이다. 그는 깨끗하다.

영적 의미

거기에도 역시 진리에 의한 선의 영향력이 미치게 되고, 이와 같은 부패함이 외적일 뿐이고 악한 의도 없이 자연적 사랑의 충동으로부터 이라면 거기에는 근본적인 불순함은 없다.

세부적 영적 의미

성직자가 살펴봄이란 진리를 수단으로 선이 영향을 줌을; 살갗에 생긴 어루러기가 희끄무레 하다란 부패함이 외적 부분에만 있음을; 살갗에 피진이 있는 정도에 불과하다란 악한 의도 없이 자연적 사랑이 활동적임을; 정하다란 심각할 정도의 불순함은 없다는 것을 말한다. (9946, 2245, 2246, 10219, 3493, 7525, 9215, 4035, 4545)

40절. 그리고 만일 사람의 털이 그의 머리로부터 떨어진다면(빠진다면), 그가 대머리이다면, (아직) 그는 깨끗하다.

영적 의미

또한 악한 의도 없이, 알지도 못한 채 부패된 애착에서 생긴 것이 진리를 이해할 능력을 없게 했다면 거기에는 불순함이 없다.

세부적 영적 의미

사람의 머리털이 빠진 것 즉 대머리인데도 깨끗하다란 애착이 모르는 사이에 부패된 상태, 그 결과 불순함은 없음을 뜻한다. (3301-5, 257, 3301-8, 4545)

41절. 그리고 만일 그의 털이 그의 머리의 앞부분으로부터 빠진다면, 그는 앞이마 대머리이다. (아직) 그는 깨끗하다.

영적 의미

또한 위 사항이 서로 비슷한 결점으로부터 더 내면에서 발생했다 해도 거기에 불순함은 없다.

세부적 영적 의미

앞머리의 털이 빠져 대머리인데도 깨끗하다란 더 내면의 애착이 알지 못하게 부패된 상태인 바 위 구절과 같은 결점이므로 불순함은 없다는 뜻이다. (9936, 3301-5, 3301-9, 4545)

42절. 그러나 만일 대머리, 또는 앞이마 대머리 안에 빨간 흰 역병이 있다면, 그것은 그의 대머리, 또는 그의 앞이마 대머리에서 나타난 나병이다.

영적 의미

또 다른 측면, 즉 누군가가 내면 또는 가장 깊은 애착 측면에서 진리에 부족해 있다면, 부패되고 있다면, 더불어 그의 생활이 선이 거짓과 결합한 상태로 이는 아껴두신 것들(remains)을 파괴하는 경향이 있고, 또한 그는 자기와 더불어 남아 있는 적은 양의 진리를 모독하는 가운데 있는 것이다.

세부적 영적 의미

이 구절에서의 대머리, 앞이마가 대머리인 것은 진리가 없는 내면의 애착과 더 깊은 내면의 애착을 명시한다. 불그스레하고 희끗희끗한(reddish-white) 병증세란 선과 거짓이 합병된 것 그리고 주님이 아껴두신 것들(remains)을 파괴하려 드는 것을; 나병이 생겼다란 알지 못했던 부패된 상태가 알게 되면 진리를 더욱 강하게 모독하려는 기질이 있음을 뜻한다. (257, 9936, 3301-9, 19절, 10219, 6963)

43절. 그다음 성직자는 그를 살펴볼 것이다. 그리고, 보라, 만일 역병으로부터의 도두라짐이 그의 대머리에서, 또는 그의 앞이마 대머리에서, 마치 살의 피부에서의 나병 같이 빨간 흰색이다면,

영적 의미

그러면 이런 인물은 자기도 모르게 신성한 진리를 수단으로 신성한 선의 영향 밑에 들어와진다. 그리고 그의 상태가 내면 또는 가장 깊은 내면의 애착 측면에서 선이 거짓과 합병됨으로 야기되고 있다면 거기에는 바깥쪽에서 진리가 모독된 것이 나타난다.

세부적 영적 의미

성직자가 그를 살펴봄이란 위와 같은 인물도 신성한 진리를 수단으로 하는 신성한 선의 영향 밑에 무의식중에 데려와짐을, 대머리나 앞이마 대머리에 희끗희끗하면서 불그스레한 병 증세가 있다란 내면의 애착 또는 더 깊은 내면의 애착 측면에서 선이 거짓과 합병된 것을, 이 증세가 나병 같은 것이란 진리가 모독되어 바깥쪽에 나타남을 뜻한다. (9946, 2245-6, 19절, 10219, 257, 9936, 3301-6, 6963, 9215, 780)

44절. 그는 나병 있는 사람이다, 그는 불결하다. 성직자는 그가 불결하다고 확실히 발표할 것이다. 그의 역병이 그의 머리에 있다.

영적 의미

그는 진실로 진리를 모독했다. 그리고 불순하다. 따라서 신성한 진리로 신성한 선은 그의 상태가 이기적 사랑이 우세해진 탓이라고 지각한다.

세부적 영적 의미

나환자 그리고 불결하다란 진리를 실지로 모독함과 불순함을; 성직자가 그를 불결하다고 선언함이란 신성한 선이 신성한 진리를 수단으로 불순함을 지각하는 것을; 병 증세가 머리에 있다란 이런 상태는 이기적 사랑이 득세함에서 일어난다는 것을 뜻한다. (6963, 10130, 9946, 2245, 2246, 10219, 257)

45절. 그리고 역병이 있는 나환자, 그의 옷들을 찢으라, 그리고 그의 머리의 털은 풀어 놓아라, 그리고 그는 자기 윗입술을 덮을 것이다, 그리고 외칠 것이다, 나는 불결하다, 불결하다.

영적 의미

모독죄를 범한 사람은 반드시 그 죄 탓으로 진리를 잃은 것에 슬퍼해야 한다. 그 이유는 기억 안에 있는 진리가 선 밑에 질서 있게 배열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자기 언어로 진리를 체현할 능력이 없다. 그리고 그는 의지와 이해함 양 측면에서 불순하다.

세부적 영적 의미

나병이 있는 사람이란 아껴두신 것들을 파괴하려는 쪽으로 모독을 범하는 사람을; ;을 찢음이란 잃은 진리 때문에 통곡함을, 머리를 풀음이란 진리가 선 밑에서 질서 있는 방법으로 배열되지 않았다는 것을; 윗입술을 가리움이란 대화로 진리를 체현할 능력이 없음을; “불결하다” “불결하다” 라고 외침이란 의지와 이해함 양면에서 불순함을 말한다. (6963, 10219, 4763, 9960-5, 1286, 9632, 10130, 683)

46절. 역병이 자기 안에 있는 모든 날들 동안 그는 불결하다. 그는 불결하다. 그는 홀로 거주하라. 진영 밖이 그의 거주지 이다.

영적 의미

그렇다. 모독의 상태가 지속하는 한 그는 계속 불순하다. 그는 내적으로 외적으로 불순하다. 그는 선과 함께 하는 천국과 연합될 수 없다. 그는 지옥의 사악한 것들과 연합해야 하는 것을 피할 수 없으리라.

세부적 영적 의미

병증세가 있는 만큼 불결하다란 모독함이 지속되고 있는 한 불순함도 계속된다는 것을; 그가 불결하다란 내적 뿐만 아니라 외적으로 불순함을; 홀로 살아감이란 선과 더불은 천국과의 연합이 없음을, 여기서 적용되는 홀로 삶은 반대적 의미이다. 그가 진지 밖에서 자리잡고 산다란 지옥에 있는 사악한 자들과 연계됨을 뜻한다. (487, 683, 139, 3580, 10038)

47절. 나병의 역병이 안에 있는 옷 또한 그것이 양털 옷이든, 아마포 옷이든.

영적 의미

진리가 거짓과 혼합되어 있는 교리 역시 모독이다. 이 모독은 선이든 진리에 관련되었든 모두 모독이다.

세부적 영적 의미

옷(garment)이 나병 증세를 가지고 있음이란 진리가 거짓과 혼합되어 담겨 있는 교리를, 양털 옷과 아마포옷이란 선에 관련된 것과 진리에 관련된 것을 말한다. (5006, 6963, 10219, 9470)

48절. 그것이 날줄, 또는 씨줄이든, 아마포로 이든, 양털로 이든. 가죽에서이든, 또는 가죽 제품 어떤 것에서 이든.

영적 의미

내면의 진리 또는 선, 외면의 진리 또는 선, 혹은 최말단의 진리, 또는 그 선에 관계되든,

세부적 영적 의미

날줄 또는 씨줄이란 내면의 진리 또는 선을; 아마포 또는 양털이란 외면의 진리 또는 선을; 가죽 또는 가죽으로 만든 어떤 것이란 최말단의 진리와 선을 말한다. (5006, 6963, 10219, 9470)

49절. 만일 역병이 옷에서, 또는 가죽이든, 또는 날줄(warp)이든, 또는 씨줄(woof)이든, 또는 가죽 제품의 어떤 것에서 이든 푸루퉁하거나 빨간색이다면, 성직자에게 보여야 한다.

영적 의미

더욱이 교리가 이해함 또는 의지 속의 거짓으로 부패되었다면, 다시 말해 이기적 사랑으로부터, 세상을 사랑함으로부터 부패되었다면, 그것이 가장 깊은 내면, 내면, 최말단이든 그것은 모독된 교리이다. 그래서 그것은 신성한 선의 영향 밑에 가져다 놓아야 한다.

세부적 영적 의미

옷이든 가죽이든 푸루퉁하거나 빨간색 자국이 있음이란 이해함 또는 의지 속의 거짓들, 즉 세상적 사랑 또는 이기적 사랑으로부터 온 거짓들을 수단으로 부패된 교리를; 날실, 또는 씨줄이나 가죽으로 만든 어떤 물건이란 내면, 가장 깊은 내면, 또는 최말단인 것을; 나병 증세란 모독하여 아껴두신 것들을 파괴하려는 것을; 성직자에게 보임이란 신성한 선의 영향 밑에 가져옴을 말한다. (996, 3300, 5006, 9215, 9915, 6963, 10219, 9946)

50절. 그리고 성직자는 역병을 살펴 보라, 그리고 칠 일 동안 역병을 가진 것을 격리해둔다.

영적 의미

그리고 신성한 진리를 수단으로 하는 신성한 선에 의해 그것은 테스트되어야만 한다. 그리고 그 안에 있는 사람은 거듭남의 과정에서 그로부터 제지되는 거룩한 상태에로 놓여져야 한다.

세부적 영적 의미

성직자가 역병을 살펴봄이란 신성한 선으로부터 신성한 진리를 수단으로 테스트함을, 칠 일간 따로 둠이란 신성한 선으로부터 오는 억제와 거룩함을 말한다. (2245, 2246, 9946, 784, 6854-5, 716, 9946)

51절. 그리고 그는 칠 일째 날 역병을 살펴라. 만일 역병이 옷에서, 날줄이든, 씨줄이든, 또는 가죽이든, 가죽이 어떤 섬김에 사용되었든 퍼졌다면, 역병은 악성 나병이다. 그것은 불결하다.

영적 의미

이 상태가 완성될 때, 부패함이 선이든 진리이든 내적으로 이든 외적으로 이든 팽창되었다면 그 품질 또는 그 사용이 무엇이었든 간에 그것은 모독된 교리이고 확실하게 불순하다.

세부적 영적 의미

칠 일째 그 물건을 살펴봄이란 상태가 완성될 때 검사가 더 있어짐을; 옷이나 날실이나 씨줄이나 가죽이든 살펴봄이란 진리나 선 그것이 내적으로, 외적으로 부패가 팽창되었음을; 가죽으로 만든 어떤 것이든 병이 더 번졌으면 악성 나병이요 불결하다란 그 품질이 무엇이든 그 사용처가 어떤 것이든 그것은 모독된 교리이고 확실하게 불순함을 말한다. (2245, 2246, 9946, 2044, 4035, 9915, 9215, 5148, 10219, 6963, 10130)

52절. 그리고 그는 옷을, 날줄이든, 씨줄이든, 양털로 되었든, 아마포로 되었든, 가죽으로 된 어떤 것이든 역병이 있는 것을 태울 것이다. 그 이유가 그것은 악성 나병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불에서 태워져야 한다.

영적 의미

이와 같은 교리, 그것이 선에 관계되든 진리에 관계되든 내면이든, 가장 깊은 내면이든 또는 외적이든 모두 거절되어야 한다. 그것은 진리가 모독된 상태이다. 이것은 의지와 이해함 양쪽 모두에서 거절되어야 한다.

세부적 영적 의미

옷을 태움이란 이기적 사랑으로 오염되었으므로 위와 같은 교리는 거절함을; 날실이든, 씨줄이든, 양털로 이든, 아마포로 이든, 가죽으로 만든 어떤 것이든 이란 가장 깊은 내면이든, 내면이든, 외면이든 임을; 병이 생겼음이란 아껴두신 것을 파괴하려는 경향이 있다는 것을; 악성 나병(a fretting leprosy)이란 진리의 모독을, 불에 태움이란 의지뿐만 아니라 이해함 측면에서 거절함을 말한다. (934, 9915, 9215, 10219, 6963, 934, 683)

53절. 그리고 만일 성직자가 살피고, 그리고 보라, 역병이 옷에서, 날줄에서, 씨줄에서, 또는 가죽의 어떤 것에서 퍼지지 않았다면.

영적 의미

그러나 선으로부터 오는 진리의 빛을 수단으로 하면 어느 누구라 해도 그가 지닌 교리는 그것이 선에 관계되든 진리에 관계되든, 그것이 내적이든 외적이든 부패가 계속되지 않는다.

세부적 영적 의미

성직자가 살펴봄이란 신성한 선이 신성한 진리를 수단으로 검사함을; 병이 더 번지지 않았음이란 교리가 계속 부패되고 있지 않음을; 천이나 이불이나 어떤 가죽으로 만든 물건이든 이란 내적으로 또는 외적으로 선 또는 진리에 관련됨을 말한다(2245, 2246, 9946, 4035, 9915, 9215)

54절. 그러면 성직자는 역병이 있는 것을 씻으라고 그들에게 명령하라, 그리고 그는 그것을 칠 일 동안 격리하라.

영적 의미

그 다음 주님으로부터 온 선의 영향 밑에서 그것은 깨끗해진다. 그리고 거기에 억제함이라는 두 번째 상태가 있게 되고 거듭나는 과정의 거룩한 상태가 있을 것이다.

세부적 영적 의미

성직자가 명령함이란 주님으로부터 온 선의 영향 밑에 임을, 빤다란 깨끗케 함을, 칠 일간 따로 둔다란 거듭나는 과정에 있는 거룩함, 억제의 두 번째 상태를 말한다. (9946, 5486, 784, 6854-5, 716)

55절. 그리고 역병이 씻어진 후 성직자는 살피라. 그리고 보라, 만일 역병이 색이 바뀌지 않았다면, 그리고 역병이 퍼지지 않았다면, 그것은 불결하다. 너는 그것을 불에서 태워라. 그것의 드러냄이 안쪽이든 바깥쪽이든 그것은 악성이다.

영적 의미

깨끗해짐이 거행될 때 다시 선으로부터의 검사가 만들어진다. 만일 아껴 두신 것들을 파괴하려는 경향을 지닌 부패의 속성이 외관으로나 본질에서나 아직도 있다면 그것은 불순하므로 거절되어야 한다. 그것은 자연적 인간 외면에서이든 내면에서이든 진리를 모독하고 있다.

세부적 영적 의미

병이 생긴 물건을 빤 다음에 성직자가 살펴봄이란 깨끗해짐이 거행될 때 다시 검사가 있게 됨을; 그 병이 그대로 남아 있음이란 아껴두신 것들을 파괴하려는 경향이 있는 부패의 품질이 아직도 그것의 본질과 같다는 것을; 번지지 않았음이란 아직도 외관상 똑같다는 것을; 그것이 불결하다란 불순함을; 태움이란 거절을; 악성이다란 진리가 모독된 상태임을 말한다. 그리고 대머리 또는 앞이마 대머리가 외면 측면과 내면 측면을 말하는데, 히브리어의 표현들이 옷 또는 가죽으로 만든 어떤 것에 응용될 경우 이는 특별히 자연 평면의 외면 또는 내면을 암시한다. (2245, 2246, 9946, 3147, 996, 3300, 9215, 4035, 934, 6963, 257, 9936)

56절. 그리고 만일 성직자가 살핀다, 그리고, 보라, 역병이 씻긴 후 어슴프레하다면, 그 다음 그는 그것을 찢을 것인데, 옷이든, 가죽으로부터이든, 날실로부터 이든, 씨줄로부터 이든 찢으라.

영적 의미

위와 반대로 깨끗해진 후에 부패됨이 바깥쪽에만 있다면 그것의 품질 수준이 어떠하든 그것으로 인해 슬퍼해야 한다.

세부적 영적 의미

성직자가 살펴봄이란 신성한 선이 신성한 진리를 수단으로 검사함을; 빤 다음이란 깨끗해진 후에 임을; 병자국이 줄었다란 부패함이 바깥 측면일 뿐임을; 옷이나 가죽에서 또는 날줄이나 씨줄에서 병자국을 떼어냄이란 부패된 품질이 어떠하든 슬퍼함을 뜻한다. (9946, 2245, 2246, 3147, 10219, 3493, 21절, 4763, 9915, 9215)

57절. 그리고 만일 그것이 여전히 옷에서, 그것이 날실에서이든, 씨줄에서이든, 또는 가죽의 어떤 것에서이든 나타난다면, 그것이 나타나고 있다. 너는 역병이 있는 것을 불로 태워라.

영적 의미

아직도 불순함과 부패함이 가장 깊은 내면에서, 내면에서, 외면에서 항존하고 있다면, 그것은 내적인데서 오는 외적 부패함이다. 따라서 그것은 이기적 사랑의 결과로 알고 통째로 거절되어야 한다.

세부적 영적 의미

그 후에 옷에서, 날줄이든 씨줄이든 가죽으로 만든 어떤 물건이든 병이 다시 나타남이란 불순함과 부패가 가장 깊은 내면에서, 내면에서, 외적으로 항존 함을; 병이 재발함(breaking out)이란 내적 측면으로부터 오는 외적인 부패를; 병이 생긴 물건을 불에 태움이란 이기적 사랑의 결과들은 모두 거절되어야 한다는 것을 말한다. (5006, 10219, 9915, 9215, 3708, 934)

58절. 그리고 옷, 날실이든, 씨줄이든, 또는 가죽의 어떤 것으로 이든, 너는 그것을 빨아라, 만일 역병이 그것들로부터 떠나진다면, 그 다음 그것을 두 번째 빨아라, 그리고 깨끗하다.

영적 의미

순수해진 교리가 어떤 품질이든, 어느 수준에 있든 그것이 지적으로 순수하다면 그것은 동기로부터 순수해 있는 바, 전체적으로도 순수하다.

세부적 영적 의미

옷이나 날줄이나 씨줄이나 가죽으로 만든 어떤 물건이든지란 품질이나 수준이 어떠하든지 임을, 빤다란 악과 거짓으로부터 순수해짐을, 병자국이 없어졌다란 지적으로 순수함을, 다시 빤다란 병자국의 동기 측면에서 깨끗하게 됨을, 깨끗하다란 전체적으로 순수함을 뜻한다. (47, 48절, 3147, 10219, 2841, 4545)

59절. 이것은 양털 옷 또는 아마포 옷, 날실이든, 씨줄이든, 또는 가죽의 어떤 것이든, 옷이 깨끗함을 발표하기 위하여, 또는 그것이 불결함을 발표하기 위한 법이다.

영적 의미

이것은 교리가 모독을 일으키는 거짓으로부터 순수해지는 것, 교리가 선에 관계되든, 진리에 관계되든, 내적이든, 내면이든, 외적이든 교리에 관한 신성한 질서의 법칙이다.

세부적 영적 의미

나병 증세에 관한 규정이란 교리에 관한 모독으로부터 깨끗하게 됨에 관련되는 신성한 질서의 법칙임을; 양털이나 모시로 만든 날줄이나 씨줄이나 가죽으로 만든 어떤 물건이란 내적, 내면, 외적 측면에서의 선 또는 진리에 관한 것임을; 그것이 깨끗하거나 불결하다고 발표함이란 깨끗케 됨 또는 그 반대에 관한 결정을 뜻한다. (6963, 3147, 5006, 47, 48절, 4545, 10130)

13장의 종합적 고찰

진리의 모독에 관련된 본 장의 내용들을 영적 의미에서 다시 생각해 보게 되면 이 악이 얼마나 보편화 되었는지 우선 생각하는 쪽으로 우리를 이끌어 주게 된다. 그 이유는 거듭나는 체험을 하나라도 가지고 있는 사람의 경우 그가 많든 적든 진리를 모독한 적이 없다고 고백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 모두는 진리를 모독한 적이 있다. 다시 말해 우리 모두는 이기적 용도로 진리를 일부러 응용한 적이 있을 것이다는 말이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우리는 주님을 인정하고 진리가 그분으로부터 계속 진행된다는 사실까지도 인정한다. 어떤 견지에서 생각해 본다면 이런 모독은 인간이 피할 수 없는 듯 나타난다. 그 이유가 우리는 진리를 마치 자기 것인 듯 하여 사용해야 하기 때문이고, 자신의 편의를 위해서도 진리를 응용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 해도 위와 달리 진리를 사용하는 방도는 없다고 생각될까? 만일 진리가 우리에게 무익하다면 우리는 진리에 대하여 전혀 고민될 게 없을까?
그러면 이로부터 우리가 모독 가운데 있는지 있지 않은지를 결정하는데 따른 어려움을 즉시 보게 된다. 어찌됐든 한 가지 같은 사항은 위 사항에 관해 우리가 자신을 아는 것 보다 주님이 더 잘 알고 계신다는 것, 주님만이 눈에 나타날 뿐인 모독과 진짜 모독 사이를 구별하도록 우리를 가르칠 수 있으시고 그 고민에서 건져 주실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 주제에 있는 여러 가지 분과들을 잘 생각해 보자. 그러면 우리는 먼저 일반 법칙을 잡게 되리라.
이기적인 사랑, 세상적인 사랑, 또는 감각적인 사랑이 자기를 이끄는 동기가 되지 않도록 할 때 우리가 진리를 이기적 목적에 사용하지 않는 듯 나타난다. 이것이 첫 단원(1-8절)에서 설명되고 있다. 이와 연결되어 오는 첫 교훈은 겸손 중의 하나와 두 번째로는 최고 의미에서 본문에서 검사하는 성직자로 표현된 분 즉 주님을 신뢰함 중의 하나에 해당된다. 요컨대 악이 우리의 살갗보다 더 깊지 않다면 주님이 보시기에 우리는 깨끗한 자일는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가 잘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은 검사되는 과정에 관해서이다. 이 과정은 자아 억제(self-restraint)에 관한 두 가지 상태를 포함하고 있다. 즉, 우리의 자연적 수준의 이해함과 의지는 주님께 바쳐져야 하거나 성별 되어야 한다. 이것이 두 번씩 칠 일간 격리하는 것으로 표현되고 있다. 여기서 또한 우리가 주목할 것은 거듭남의 전체가 묘사되어 있다는 것, 게다가 긴 거듭남 중 한 부분까지도 묘사되고 있다는 것인데 그 이유는 숫자 7이 이를 암시하기 때문이다. 또한 심판의 과정이 성직자가 세 번째 들여다보는 묘사에 포함되어 있는데, 증세가 열거되는 각 경우에서 있고, 이 증세는 악의 확증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결과적으로 선으로부터의 완전한 분리가 필요함을 보여준다. 그 이유는 세 번째 검사가 이를 함축하고 있기 때문이다. 심판 때에 선한 자는 완전해지고 사악한 자는 혹독하게 황폐해진다. 따라서 심판 후에는 모독이 더 이상 가능치 않다(누가 13:32절 참조). 사실 사악한 자는 섞인 상태인 어정쩡한 상태에 머무르는 것 보다 선과 진리로부터 완전히 분리되는 게 더 낮다.
몇 가지 세부 사항들, 우리가 조심스럽게 정리해 보아야 할 것들이 둘째, 셋째 단원에 있다. 본문은 오래된 나병(old leprosy)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는 악이 확증된 상태를 암시한다. 이 상태로 고통받는 사람은 밀폐되지 않을 것인데 그 이유는 이와 같이 확증된 상태는 거듭남으로 제거할 수 없고 황폐됨(vastation)으로 제거되기 때문이다. 선과 진리가 황폐화되고만 사람은 모독을 저지를 수 없다. 여기서 묘사되는 위의 상태를 마태복음 7장 31-33절의 해석과 비교하면 유익할 줄로 본다. 본문 16-17절로부터 배울 수 있는 바와 같이 인간이 선과 악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 가운데 있는 한, 순수한 회개로 제거되지 않는 모독의 상태는 없다. 그러나 나쁜 것(badness)을 확증한 상태는 이에서 제외되고 있다. 따라서 확증하는 상태를 결정짓는 것은 주님이 아니라 인간 자신이다. 그러므로 선과 진리에 반대되는 위선을 수단으로 자신 스스로 확증하는 정도까지 진리를 모독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귀담아 두어야 할 것이다.
위 단원에서 특별한 점 또 한가지는, 피부병(leprous)이 완전히 퍼진 사람이 깨끗하다고 선언되는 것인데 그 이유가 이와 같은 경우는 내적으로의 어떤 인정함과 신뢰함이 없이 오로지 외적으로 모독한 것을 표현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모독의 상태는 치료 즉 제거될 수 있는 바 그 이유가 그 병은 오로지 바깥쪽 부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경우에서도 위선이 있는 곳에는 악을 확증하는 상태가 있는 바 치료될 수 없다(열왕기하 5:27 참조). 이쯤해서 설명이 요구되는 요점이 있다. 어째서 인정함과 신뢰함이 없는 이들에게는 깨끗하다고 또는 영적으로 깨끗하다고 말해질 수 있을까에 대한 것이다. 이 질문의 답은 이러하다. 그가 내적으로 모독하지 않았기 때문에 깨끗하다는 말이고 거듭남으로 만 깨끗해질 수 있다. 이렇게 해서 인정함과 신뢰함을 획득하면서 동시에 회개의 일을 수행하게 된다. 또 하나 주목해둘 게 있다. 인정함과 신뢰함이 없을 경우 내적 모독은 있을 수 없다 해도, 그리고 진리에 관한 지식이 없는 외적인 것도, 인정함과 신뢰함이 없는 외적인 것은 모독의 원인이 안 된다는 것, 그러나 인간의 이기심에서 우러나는 세상욕이나 감각적인 것이 모독의 진짜 원인이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다음 단원에서 보여지고 있다.
18절로부터 37절에 이르기까지에는 위 세 가지 사랑(감각적, 세상적, 이기적)으로부터 오는 진리의 모독이 종기(곪은 것, boil)로부터의 증상으로, 데인 것(burning)으로부터의 증상으로, 그리고 머리와 턱수염에 관한 사항에 있는 나병의 모습들로 표시되고 있다. 이에 대한 세부 설명을 간단히 말해 본다면, 여러 종류의 진리의 모독 안에 굳게 자리잡고 있는 것은 각종 거짓들과 악한 애착들이라는 것, 이것들이 시리즈로 언급되는 흰털, 누르스름한 털, 검은 털로 그려지고 있다. 또한 악한 사랑들의 세부 속성이 말해지는데, 이는 영적 투쟁의 체험을 가진 교인들에게는 이미 알려져 있는 속성들이다. 이것들 모두는 아주 보편적이고 음험하며 쉽사리 인간을 썩게 만드는 것들인 바 자칫하면 우리로 진리를 모독하게 만드는 중요한 요인들이라는 정도의 언급으로도 충분한 설명이 되리라 생각된다. 따라서 악이나 잘못들, 그리고 모독의 죄들은 계명 안에 이미 포함되어 있고 우리 삶 전체를 통해 열심히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는 경고와 쌍을 이루고 있다는 것은 지당할 수밖에 없으리라.
위 사항에 더 첨가되는 교훈이 머리 부분에 있는 나병 증세에서 거론되고 있다. 이로부터 우리가 배우는 바, 우리 안에는 실현 안 된 진리의 모독에 관한 바깥쪽 나타남이 의지와 이해함이라는 양 측면에서 있다는 것, 이것은 이기적 사랑의 영향 아래에서까지 있게 된다는 것, 이와 같이 여겨지지 않는 것 중에도 진짜 모독이 있게 된다는 것이다. 게다가 우리 자신은 위 사항에 관해 단언할 수 없다. 그 반면 여기서 우리가 보게 되는 것은 주님만이 우리의 진짜 상태를 아신다는 것, 또한 그분께서 우리에게 이 사항을 밝히 알게 해 주실 것이라는 것이다. 게다가 우리 자신이 주님과 협동하지 않고는 우리 속의 악한 상태는 우리들로부터 제거되거나 삭제될 수 없다는 것이 확실하게 된다. 어찌됐든 우리가 쉽게 빠질 수 있는 악 중 감추어 놓여 있는 독한 악들은 쉽사리 공개되어 명백해지지 않는다. 어쩌면 우리가 그 악을 기꺼이 제거하겠노라고 확고한 의지를 지켜나가는 것만으로도 인간 측면에서는 충분할는지 모른다. 그러므로 이런 사항들에 관해 우리를 계발해 주시도록 기꺼이 바래면서 주님을 따르는 것, 자칫하면 우리가 품게 되는 타락된 생명 속에 있는 독한 악을 내포하는 것 중 어느 일부가 우리에게 명백해질 때 회개하면서 우리가 아직 감지 못한 결점으로부터서도 깨끗해질 수 있게 간구하는 것만이 우리의 의무이다. (시편 19:12 참조)
우리가 나병자의 모습, 가엾고 의지할 데 없는 상황을 생각하면서 그 병이 뜻하는 진리를 알도록 하시는 바, 본문은 더욱 인상깊어지고야 만다. 모독자는 지성과 심정이라는 양 측면 모두에서 죄를 범했음을 인정해야만 한다. 그는 자기 삶이 무 질서적임을 직시해야만 한다. 그는 진리를 놓고 말은 옳게 잘 하면서도 자기 삶으로 진리를 입증하는데 얼마나 무능력한 인간인가를 알아야만 한다. 그 이유가 자기 속에 든 이기적인 사랑이 진리를 오염시켰기 때문이다는 것도 알아야만 한다. 그는 내적으로만 수용할 수 있는 천국적 삶에서 한 때라도 분리되어 있지 않으면 안 된다. 그는 자신 스스로는 깨끗해질 수 없음을 느껴야 한다. 그러면서도 깨끗해지려면 신성한 법칙에 순종해야만 한다는 것, 시리아 장군 나아만이 예언자의 명령에 순종해서 요르단 강에 일곱 번 자신을 스스로 씻어 깨끗해지듯 해야만 한다(열왕기하 5:10-14).
본문의 뒷 단원은 내적 의미로 볼 때 흥미를 더 해주고 있다. 나병이 살갗뿐만 아니라 옷에도 있을 수 있다는 대목이다. 즉 모독은 진리 자체뿐만 아니라 교리에도 있을 수 있다는 말이다. 현재 어떤 이들은 이렇게 생각하는 것, 즉 교리는 삶을 순수하게 하도록 설비된 것 중 과히 중요한 위치는 못되는 듯 여길는지 모른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가벼운 추측은 큰 오류가 되고 만다. 그 이유는 거짓과 혼합 안된 진정한 교리, 악에 오염되지 않은 진정한 교리만이 실지로 우리를 깨끗하게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말씀이 이 사항을 가르치고 있다는 것은 과히 놀랄 일은 아니 될 것이다. “여호와의 말씀이야말로 진실된 말씀, 흙도가니에 일곱 번 녹여 거른 순 은입니다”(시편 12:6). 말씀 안에 거짓 교리들은 하나도 없다. 그러나 진리는 이기적이고 세상적 사랑의 영향을 받아 잘못 해석됨으로 왜곡되어진다. 이로부터 교리 안에 모독이 스며든다. 이것이 푸루퉁하고 빨간 자국이다. 이제 검사 과정을 주목해서 보자. 어떻게 앞의 묘사와 유사한가를 살펴보자. 그 이유는 결국 순수해져야 하는 것은 인간이지 교리가 아니기 때문이다. 만일 인간이 순수해진다면 그는 거짓을 거절할 것이나 그가 악에 기울어 있다면 그는 자기의 악한 상태를 확증하려 들 것이다. 따라서 이것들은 영적인 불로 태워져야 한다. 우리가 거짓 교리를 제거하는데 가장 좋은 방법은 심정 또는 애착이 순수해 있도록 하는 것밖에 없을 것 같다. 이는 참으로 심판의 방법이기도 하다. 사후 만일 어떤 이가 선함을 가지고 있다면 그는 그 선에 맞는 진리가 주어질 것이나 선함을 가지지 않은 사람으로부터서는 그가 가진 듯 나타나는 진리도 거둬간다. 따라서 옷감 이전의 천을 짜는 작업이 얼마나 중요한지 새삼 느끼게 해준다. 베를 짜는 작업(weaver) 또는 천으로 명시되는 게 천국의 원리, 즉 선의 원리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 진리 위에 선이 지나가고 선이 지나간 그 위에 진리가 지나가는 작용, 이해함 위에 의지가…, 외적 인간 위에 내적 인간이…, 이와 같이 할 때만이 악과 거짓에서 자유로운 천국적인 예루살렘이라는 아름다운 옷을 생산할 수 있다. 그리하면 주님과 결혼하는 때 우리는 그 옷을 입고 내적으로 외적으로 온전한 상태로 주님과 영원하게 결합하리라.
*************************************************

레위기 14장

성경: 레위기 1장

1. 그리고 주님께서 모세에게 이야기하셨다, 말하시기를,
2. 이것은 나환자가 깨끗해지는 날 그에 관한 법이다. 그는 성직자에게 데려와져야 한다.
3. 그리고 성직자는 진영에서 나가라. 그리고 성직자는 살펴 보라, 그리고 보라, 만일 나병이라는 역병이 나환자에서 치료되었다면,
4. 그러면 성직자는 깨끗해지려 하는 그를 위하여 살아있는 깨끗한 새 두 마리, 삼목(cedar), 그리고 주홍색 (실), 그리고 우슬초를 가져오라고 명령하라.
5. 그리고 성직자는 흐르는 물 위 질그릇에서 새 중의 한 마리를 죽이라고 명령하라.
6. 살아있는 새의 경우, 그는 그대로 가져갈 것이다, 그리고 삼목, 그리고 주홍색(실), 그리고 우슬초를 가져갈 것이다, 그리고 그것들과 살아있는 새를 흐르는 물 위에서 죽여진 새의 피에 담글 것이다.
7. 그리고 그는 나병으로부터 깨끗해지는 그 사람 위에 일곱 번 뿌릴 것이다, 그리고 그는 깨끗하다고 발표하라. 그리고 살아있는 새는 열린 들판으로 가게 하라.
8. 그리고 깨끗해지게 되는 그 사람은 자기 옷들을 빨아라, 그리고 그의 모든 털을 면도하라. 그리고 물로 자신을 목욕하라, 그는 깨끗하다. 그 후 그는 진영 안으로 오라, 그러나 자기 천막 밖에서 칠 일간 거주하라.
9. 그리고 칠 일째 날에 그는 그의 머리와 턱수염과 눈썹의 모든 그의 털을 면도하고, 모든 그의 털 까지조차 면도하라. 그리고 그는 그의 옷들을 빨아라, 그리고 그는 물에서 자기 살을 목욕하라, 그리고 그는 깨끗하다.
10. 그리고 팔 일째 날에 그는 흠이 없는 수컷 어린 양 두 마리를 가져 오라, 그리고 일 년 된 흠이 없는 암컷 어린 양 한 마리, 그리고 식사 바침을 위해 기름을 섞은 고운 곡식가루 (에바, ephah의) 십분의 삼, 그리고 기름 한 록(log)을 가져 오라.
11. 그리고 그를 깨끗하게 하는 성직자는 이런 것들과 깨끗해지는 사람을 만남의 천막 문에서 주님 앞에 서게 하라.
12. 그리고 성직자는 수컷 어린 양 한 마리를 가져 와라, 그리고 죄 바침을 위해, 그것과 기름 한 록을 바치라, 그리고 그것들을 주님 앞에서 흔드는 바침을 위해 흔들라.
13. 그리고 그는 그들이 성소의 장소에서, 죄 바침과 태워 바침의 제물을 죽인 장소에서 수컷 어린 양을 죽여라. 죄 바침의 제물이 성직자의 것이듯, 죄가 있음의 제물도 그러하다. 이것은 최고로 거룩하다.
14. 그리고 성직자는 죄가 있음의 제물의 피를 가져 오라, 그리고 성직자는 깨끗해지게 되는 그 사람의 오른쪽 귀에, 그리고 그의 오른 손의 엄지손가락 위에, 그리고 그의 오른 발의 엄지발가락 위에 그것을 바르라.
15. 그리고 성직자는 기름 한 록을 가져 오라, 그리고 그것을 그의 자신의 왼쪽 손바닥에 붓는다.
16. 그리고 성직자는 그의 왼손에 있는 기름에 그의 오른 손가락을 담글 것이다, 그리고 주님 앞에서 자기 손가락으로 기름을 일곱 번 뿌려라.
17. 그리고 그의 손에 있는 기름의 나머지를 성직자는 깨끗해지려는 사람의 오른쪽 귀의 끝에, 그리고 그의 오른손의 엄지 손가락 위에, 그리고 그의 오른 발의 엄지발가락 위에, 죄가 있음의 제물의 피 위에 바르라.
18. 그리고 성직자의 손에 있는 기름의 나머지를 그는 깨끗해지려는 그 사람의 머리 위에 부으라. 그리고 성직자는 주님 앞에 그를 위하여 보상을 받게 하라.
19. 그리고 성직자가 죄 바침의 제물을 바쳐라, 그리고 자기의 불결함 때문에 깨끗해지려 하는 그를 위해 보상 받게 하라. 그 후 그는 태워 바침의 제물을 죽여라.
20. 그리고 성직자는 제단 위에 태워바치는 제물과 식사 제물을 바칠 것이다. 그리고 성직자는 그를 위하여 보상(atonement)을 받게 하라. 그리고 그는 깨끗하다.
21. 그리고 만일 그가 가난하여 그만큼을 얻을 수 없다면, 그러면 그는 흔들어지기 위해 죄가 있음의 제물로 수컷 어린 양 한 마리를 가져와서 그를 위하여 보상(atonement)을 받게 할 것이다, 그리고 식사 제물을 위하여 기름을 섞은 고운 곡식 가루 (에바의) 십분의 일, 그리고 기름 한 록(log) (을 가져올 것이다).
22. 그리고 호도애 두 마리, 또는 어린 비둘기 두 마리, 그가 얻을 수 있는 한도에서. 그리고 하나는 죄 바침의 제물, 다른 하나는 태워 바치는 제물이다.
23. 그리고 팔 일째 날에 그는 성직자에게, 주님 앞, 만남의 천막의 문으로 자기의 깨끗해짐을 위해 그것들을 가져 오라.
24. 그리고 성직자는 죄가 있음의 제물의 어린 양, 그리고 기름 한 록을 가져 오라, 그리고 성직자는 주님 앞에서 흔들어 바침을 위해 그것들을 흔들어라.
25. 그리고 그는 죄가 있음의 제물의 어린 양을 죽일 것이다, 그리고 성직자는 죄가 있음의 제물의 피를 가져오라, 그리고 그것을 깨끗해지려는 그 사람의 오른쪽 귀의 끝에, 그리고 그의 오른손의 엄지에, 그의 오른발의 엄지에 바르라.
26. 그리고 성직자는 자기 왼손의 손바닥에 기름을 부어라.
27. 그리고 성직자는 자기 왼손에 있는 기름 얼마를 자기 오른손가락으로 주님 앞에서 일곱 번 뿌려라.
28. 그리고 성직자는 그의 오른손에 있는 기름을 깨끗해지게 하는 그 사람의 오른쪽 귀의 끝에, 그리고 그의 오른손의 엄지에, 그리고 그의 오른발의 엄지에 바르고, 죄가 있음의 제물의 피가 있는 곳에 덧바르라.
29. 성직자의 손에 있는 남은 기름을 그는 깨끗해지는 그 사람의 머리 위에 부을 것이다, 하여, 주님 앞에서 그를 위해 보상을 받게 할 것이다.
30. 그리고 그는 호도애 한 마리, 또는 어린 비둘기 한 마리를 그가 얻을 수 있는 한도에서 바쳐라.
31. 그가 얻을 수 있는 한도 조차에서, 하나는 죄 바침을 위해, 그리고 다른 하나는 태워 바침을 위해, 식사 제물과 함께 (바칠 것이다). 그리고 성직자는 깨끗해지려는 그를 위해 주님 앞에서 보상을 받게 할 것이다.
32. 이것은 나병환자가 자기의 깨끗해짐에 속하는 것을 얻을 수 없을 경우, 그 사람에 관한 법이다.
33. 그리고 주님께서 모세에게 그리고 아론에게 이야기하셨다, 말하시기를,
34.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소유하라고 준 것, 가나안의 토지 안으로 올 때, 그리고 나는 너희의 소유의 토지의 집에 나병의 역병을 놓는다.
35. 그 다음 집을 소유한 그 사람은 가서 성직자에게 말하여, 내가 보기에 집에 역병이 있는 것 같다고 말할 것이다.
36. 그리고 성직자는 명령하라, 즉 그들은 성직자가 역병을 보려고 그 집에 가기 전에 그 집을 비울 것, 하여 집에 있는 모든 것은 불결해지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그 후 성직자는 집을 보러 가라.
37. 그리고 그가 역병을 살펴 보라, 그리고 보라, 만일 역병이 집의 벽에서 녹색을 띄거나 빨간 색을 띄면서 속이 빈 바퀴쇠 (형태)로 있고, 그리고 그것의 나타남이 벽보다 더 낮다면.
38. 그다음 성직자는 집에서 나가 집의 문에 가라, 그리고 칠 일간 그 집을 잠구어라.
39. 그리고 성직자는 칠 일째 날 다시 올 것이다, 그리고 살펴라. 그리고, 보라, 만일 역병이 집의 벽에 퍼졌다면.
40. 그다음 성직자는 그들이 역병이 있는 돌을 가져가서 성읍 밖 불결한 장소에 그것들을 던지도록 명령하라.
41. 그리고 그는 그 집 내부를 빙둘러 긁어내게 하라, 그리고 그들은 성읍 밖 불결한 장소에 그들이 긁어낸 회반죽(mortar)을 쏟아라.
42. 그리고 그들은 다른 돌들을 가져와라, 그리고 그것들을 이 돌들 대신에 놓아라. 그리고 그는 다른 회반죽을 가져와라, 그리고 집에 회반죽을 바르라.
43. 그리고 그가 돌들을 빼내어 간 후, 그가 집을 긁어낸 후, 집에 회반죽을 바른 후, 만일 역병이 다시 오고, 집에 나타났다면.
44. 그 다음 성직자는 안으로 와서 살펴라, 그리고, 보라, 만일 역병이 집에 퍼져 있다면, 이것은 집에 있는 악성 나병이다. 그것은 불결하다.
45. 그리고 그는 집을, 집의 돌들을, 그것의 목재를, 집의 회반죽을 부수어라. 그리고 그는 성읍으로부터 불결한 장소로 그것들을 운반하라.
46. 더욱이 집이 잠궈져 있는 동안 집안으로 가는 사람은 저녁 때까지 불결하다.
47. 그리고 집에 눕는 자는 자기 옷을 빨아라. 그리고 집에서 먹은 자는 그의 옷들을 빨아라.
48. 그리고 집에 회반죽을 바른 후, 만일 성직자가 들어가서 살피고, 보라, 역병이 집에 퍼지지 않았다면. 그다음 성직자는 집이 깨끗하다고 발표하라, 그 이유는 역병이 치료되었기 때문이다.
49. 그리고 그는 집을 깨끗이 하기 위해 새 두 마리, 삼목, 주홍색(실), 그리고 우슬초를 가져 가라.
50. 그리고 그는 새 한 마리를 흐르는 물 위 질그릇에서 죽여라.
51. 그리고 그는 삼목, 그리고 우슬초, 그리고 주홍색(실), 그리고 살아있는 새를 가져 와라, 그리고 죽인 새의 피에 그것들을 담그되, 흐르는 물에서이다, 그리고 일곱 번 집에 뿌려라.
52. 그리고 그는 새의 피를 가지고, 그리고 흐르는 물을 가지고, 그리고 살아있는 새를 가지고, 그리고 삼목을 가지고, 그리고 우슬초를 가지고, 그리고 주홍색 (실)을 가지고 집을 깨끗하라.
53. 그러나 그는 살아있는 새를 성읍으로부터 열린 들판으로 가게 하라. 이리하여 그는 집을 위해 보상 받게 하라. 그러면 그것은 깨끗하다.
54. 이것은 나병의 역병의 모든 방법을 위하여, 그리고 두창을 위한 법이다,
55. 그리고 옷의 나병을 위하여, 그리고 집을 위하여.
56. 그리고 도두라짐을 위하여, 그리고 딱지를 위하여, 그리고 선명한 반점을 위하여.
57. 그것이 불결할 때, 그리고 그것이 깨끗할 때를 가르치려는 것. 이것은 나병의 법이다.

영적 의미 요약

* 진리를 모독한 사람을 깨끗하게 하는 신성한 질서의 법칙, 먼저 선과 진리에 관한 그의 애착이 말씀을 통해 내적으로 깨끗해진다. 1-7절
* 그 다음 외적으로, 그리고 자신 스스로 깨끗해지는 듯 있게 된다.8-9절
* 셋째로, 천적, 영적 선과 진리로 주님을 예배해서 죄와 죄의식을 제거하고, 동시에 주님께 심정을 바친다. 10-20절
* 더불어 외적 교회의 사람들에게도 위와 비슷한 상태의 예배가 있게 된다. 21-32절
* 거듭나는 사람이 선을 최말단에서 받는 가운데 모독할 수 있는 경향성에 관한 가르침, 더불어 깨끗하게 되는 수단에 관한 가르침. 33-53절
* 다양한 방법에서 모독에 관계되는 신성한 법칙에 관한 일반적 요약. 54-57절

각 절의 영적 의미

1절. 그리고 주님께서 모세에게 이야기하셨다, 말하시기를,

영적 의미

주님께서 신성한 진리로 지각을 주시어 밝히 알게 하신다.

세부적 영적 의미

주님(여호와)이란 사랑 측면에서의 신성한 존재를; 이야기하심(speaking)이란 유입을; 모세란 신성한 진리, 또는 말씀을; 말함(saying)이란 지각을 뜻한다.(2001, 2951, 7010, 1791, 1822)

2절. 이것은 나환자가 깨끗해지는 날 그에 관한 법이다. 그는 성직자에게 데려와져야 한다.

영적 의미

진리를 모독한 상태로부터 개인 또는 교회를 깨끗하게 하는 질서의 법칙에 관하여 그는 신성한 선의 영향 밑에 직접 데려와져야 한다.

세부적 영적 의미

나환자가 깨끗해지는 날의 법이란 진리를 모독한 상태로부터 각 개인 또는 교회를 깨끗하게 하는 점에 관한 질서의 법칙임을; 그를 성직자에게 데려와야 함이란 모독자는 신성한 선의 영향 밑에 직접 와져야 함을 말한다.(6963, 487, 2634, 4545, 9946)

3절. 그리고 성직자는 진영에서 나가라. 그리고 성직자는 살펴 보라, 그리고 보라, 만일 나병이라는 역병이 나환자에서 치료되었다면,

영적 의미

그리고 신성한 선은 천국을 통하는 신성한 진리를 수단으로 작용한다. 만일 모독이 거듭남으로 제거되었다면,

세부적 영적 의미

성직자가 진영 밖으로 나감이란 신성함은 신성한 진리를 수단으로 천국을 통해 역사 하심을; 치료된 나병자란 거듭남으로 모독이 제거됨을 말한다.(9946, 10038, 2245, 2246, 10219, 6963, 8363)

4절. 그러면 성직자는 깨끗해지려 하는 그를 위하여 살아있는 깨끗한 새 두 마리, 삼목(cedar), 그리고 주홍색 (실), 그리고 우슬초를 가져오라고 명령하라.

영적 의미

그 다음 거듭나는 사람의 영혼에 주님으로부터의 유입이 있게 되는 바, 진리의 애착이 선과 결합되고, 그럼으로 움직여지는 바 거짓으로부터 깨끗해진다. 또한 그는 말씀으로부터 선과 결합된 내면의 진리, 선과 결합된 외면의 진리를 획득할 것이다. 그리고 자신 스스로 깨끗해지듯 여기게 하는 외적 진리도 획득한다.

세부적 영적 의미

성직자가 지시를 내림이란 거듭나는 사람의 영혼 안으로 주님이 유입해 주시는 것이 있음을; 살아있는 깨끗한 새 두 마리란 선과 결합한 진리의 애착을; 삼목이란 선과 결합한 내면의 진리를; 주홍색 (실)이란 선과 결합한 외면의 진리를; 우슬초란 깨끗해지는데 사용되는 외적 진리를; 각각 뜻한다. 그리고 위 사항들은 자진해서 이루어지는데, 이 말이 깨끗게 하는 사람을 위해 가져옴에 함축되어 있다.(776, 9182-6, 3938-8, 4545, 5194, 7918, 9468-9, 7918, 6744)

5절. 그리고 성직자는 흐르는 물 위 질그릇에서 새 중의 한 마리를 죽이라고 명령하라.

영적 의미

선으로부터 지각은 있어지는 바, 이는 선으로부터 활성화된 말씀 또는 말씀 속의 진리를 수단으로 있게 된다. 그러나 선을 사랑함에서 분리된 채 진리를 사랑할 경우, 필요한 준비를 제공하는 그릇인 자연적 마음은 영적 생명이 없다는 것을 인정한자.

세부적 영적 의미

성직자가 명령함이란 그 안에로 흘러든 선으로부터 지각됨을; 흐르는 물(생수, 생명 있는 물)이란 선으로부터 활성화된 말씀 속의 진리를; 새 한 마리를 죽임이란 진리의 애착이 선의 애착으로부터 분리될 경우 거기에는 영적 생명이 없음을 인정함으로 준비된다는 것을; 질그릇이란 자연적 마음에 있는 저장소를 말한다.(9946, 5486, 5732, 3424, 10024, 6767, 10105, 3079, 5948)

6절. 살아있는 새의 경우, 그는 그대로 가져갈 것이다, 그리고 삼목, 그리고 주홍색(실), 그리고 우슬초를 가져갈 것이다, 그리고 그것들과 살아있는 새를 흐르는 물 위에서 죽여진 새의 피에 담글 것이다.

영적 의미

그러므로 주님으로부터 흐르는 선에 대한 애착 덕택에 선이 진리와 결합함이 있는 바, 선에 근거를 둔 내면의 진리, 선에 근거를 둔 외면의 진리, 그리고 말씀으로부터 온 외적 진리와도 결합이 있고, 이 진리가 자연적 인간 안에 있는 선과도 상호 결합함이 있는데, 이때 말씀 속의 진리의 영향을 받아 자아 부정이 존재한다.

세부적 영적 의미

살아있는 새란 선을 사모함을, 삼목(송백나무,백향목), 주홍색 (실), 우슬초는 선에 속한 내면의 진리, 선에 속한 외면의 진리, 말씀으로부터 순수해지기 위한 진리를; 살아 있는 새와 위 세 가지를 모두 가져온다란 주님으로부터 온 선이 말씀 속의 진리와 결합함을; 흐르는 물 위에서 죽여진 새의 피에 위 네 가지를 담근다란 주님으로부터 거듭남을 수단으로 해서 자연적 인간 속의 생명이 살아 있게 되는 것, 이리하여 진리와 선이 상호 결합하는데 이것은 진리의 영향으로 자아 부정이 있었을 때 이루어진다.(9182-6, 7918, 9468-9, 9229-4, 10024, 6767, 제 5절)

7절. 그리고 그는 나병으로부터 깨끗해지는 그 사람 위에 일곱 번 뿌릴 것이다, 그리고 그는 깨끗하다고 발표하라. 그리고 살아있는 새는 열린 들판으로 가게 하라.

영적 의미

모독에서 깨끗해지는 사람 안에 위 결합은 거듭나는 상태에 있는 신성한 선으로부터 확인 되어진다. 그 다음 완전한 순수함이 있고 동시에 선을 사랑하는 천국적 삶을 즐기는 가운데 완전한 자유도 누린다.

세부적 영적 의미

나병에서 정하게 될 사람 위에 일곱 번 뿌림이란 위 결합은 신성한 선을 수단으로 모독에서 깨끗해지려는 사람 안에서 확인되어진다는 것을; 그가 깨끗하다고 발표함이란 완전히 깨끗해졌음을; 살아있는 새를 열린 들판으로 가게 함이란 선을 사랑하는 천국적 삶을 즐기는 완전한 자유를 뜻한다.(10047, 716, 4545, 6963, 9946, 4545, 7439, 3310, 99, 1869)

8절. 그리고 깨끗해지게 되는 그 사람은 자기 옷들을 빨아라, 그리고 그의 모든 털을 면도하라. 그리고 물로 자신을 목욕하라, 그는 깨끗하다. 그 후 그는 진영 안으로 오라, 그러나 자기 천막 밖에서 칠 일간 거주하라.

영적 의미

위에 더하여 외적 인간은 독립적으로 또는 자신 스스로 하는 듯이 모든 등차, 내적, 내면, 최말단 속에 든 거짓으로부터 깨끗해져야 한다. 그가 깨끗해진다면 그는 천국적 삶을 받게 되는데, 이 삶은 이기적 사랑을 완전하게 금함으로 거듭남 속의 거룩한 상태를 입도록 설비되어 있다

세부적 영적 의미

옷을 빤다란 외적 인간의 최말단이 깨끗해짐을; 털을 깎음이란 내면에 관한 사항이 깨끗해짐을; 목욕함이란 내적 사항이 깨끗해짐을; 깨끗함이란 순수한 상태를; 진영으로 들어옴이란 천국 삶을 받게 됨을; 자기 천막 밖에서 칠 일간 거주함이란 이기적 사랑을 완전히 자제함으로 거듭나는 상태가 거룩해짐을 말한다.(3147, 3301-5, 3147, 4545, 1293, 1566, 2044, 10038)

9절. 그리고 칠 일째 날에 그는 그의 머리와 턱수염과 눈썹의 모든 그의 털을 면도하고, 모든 그의 털 까지조차 면도하라. 그리고 그는 그의 옷들을 빨아라, 그리고 그는 물에서 자기 살을 목욕하라, 그리고 그는 깨끗하다.

영적 의미

그 다음 위 첫 상태가 끝나고 두 번 째 상태가 이어진다. 이 상태에서 모든 수준 속에 있는 외면의 거짓들이 제거된다. 그렇다, 아주 완전하게 제거된다. 그리하여 순수해짐이 모든 수준에서 완성된다.

세부적 영적 의미

칠 일째란 위 첫 상태의 완성을, 머리털과 수염과 눈썹까지 몸의 털을 깎음이란 모든 수준에 있는 거짓의 제거를, 이렇게 온 몸의 털을 깎음이란 의지와 이해함에 있는 거짓을 완전히 제거함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고, 옷을 빨고, 물로 목욕하여 깨끗해짐이란 순수해짐이 모든 수준에서, 내적, 외적으로 충만해짐을 말한다.(2044, 3301-8, 683, 3147, 4545)

10절. 그리고 팔 일째 날에 그는 흠이 없는 수컷 어린 양 두 마리를 가져 오라, 그리고 일 년 된 흠이 없는 암컷 어린 양 한 마리, 그리고 식사 바침을 위해 기름을 섞은 고운 곡식가루 (에바, ephah) 십분의 삼, 그리고 기름 한 록(log)을 가져 오라.

영적 의미

그런 뒤 천국 삶의 새로운 상태 속에서 선과 결합된 순진 속의 진리와 천국 수준에 있는 거짓에서 자유로워 있음으로부터 주님을 예배함으로 두 개의 보증이 계속되어진다. 그래서 천국 선과 결합된 선의 진리로부터 충만함, 그리고 천적 선과 결합된 선의 진리로부터 충만함, 그리고 천적 선 자체로부터 영적 수준에 적합해지게 된다.

세부적 영적 의미

여덟 째 날이란 천국 삶의 새로운 상태를 말하는데, 두 주기(칠 일째, 팔일 째)에서 깨끗하게 됨이 반복된 것은 이중으로 보증되는 것을 말한다. 흠이 없는 수양 두 마리, 흠이 없는 일년 된 암양 한마리란 선과 결합된 순진 속의 진리로 예배함, 그리고 거기에 모든 충만 됨이 있는 바, 천적 수준에 있는 거짓에서의 자유도 있음을; 식사 제물로 기름과 혼합된 고운 가루 에바의 십 분의 삼과 기름 한 록이란 천적 선과 결합한 진리의 선으로부터 오는 모든 충만함 그리고 영적 수준에서 적용되는 바와 같은 천적 선 그 자체로부터를 말한다. 이 구절의 경우 어린 양을 바침은 천적 예배를; 식사 제물은 영적 예배를 말하고 있다.(9227, 683, 2966, 7837-9, 5194, 2177, 10136-7, 2788, 2177-2, 4581-4)

11절. 그리고 그를 깨끗하게 하는 성직자는 이런 것들과 깨끗해지는 사람을 만남의 천막 문에서 주님 앞에 서게 하라.

영적 의미

신성한 선의 영향 하에 교회 속의 사람은 주님을 순수하게 예배함으로 깨끗해진다. 무엇보다 먼저 그분을 인정하고 그분께서는 우리의 거듭남과 구원을 위해 천국을 통해 역사하심을 인정해야 한다.

세부적 영적 의미

성직자란 신성한 선을; 깨끗하게 함이란 영적으로 깨끗해짐을; 제물이란 주님을 진정으로 예배함을; 만남의 천막 문, 주님 앞에 선다란 주님을 인정함, 그리고 그분께서는 인간의 거듭남과 구원을 위해 천국을 통해 역사 하신다는 것을 말한다.(9946, 4545, 922, 2356, 3540-3)

12절. 그리고 성직자는 수컷 어린 양 한 마리를 가져 와라, 그리고 죄 바침을 위해, 그것과 기름 한 록을 바치라, 그리고 그것들을 주님 앞에서 흔드는 바침을 위해 흔들라.

영적 의미

위 결과 주님은 내적 인간 속에 있는 순진의 진리로부터 예배되어지고, 그럼으로해서 악의 면죄가 있고, 천적 사랑으로부터 인정하는 바, 모든 애착이 활성화됨이 그분으로부터 임을 인정한다.

세부적 영적 의미

성직자가 어린 수양 한 마리를 기름 한 록과 함께 죄가 있음의 제물로 주님께 흔들어 바침이란 결과적으로 주님이 내적 인간 안에 있는 순진 속의 진리로 예배되어지고, 그럼으로 해서 악의 사면이 있고, 더불어 이런 애착들이 모두 활성화되는 것은 주님 때문임을 천적사랑으로부터 인정되어질 때를 말한다.(7837, 7838, 3400, 2177, 10083)

13절. 그리고 그는 그들이 성소의 장소에서, 죄 바침과 태워 바침의 제물을 죽인 장소에서 수컷 어린 양을 죽여라. 죄 바침의 제물이 성직자의 것이듯, 죄가 있음의 제물도 그러하다. 이것은 최고로 거룩하다.

영적 의미

순진의 선으로부터 이 예배를 위한 준비는 악을 제거함이다. 그리고 내적으로 천적 선을 받는다. 그렇다. 마음의 가장 깊은 수준 안에까지 받는다. 그이유가 실제의 악이 제거되는 것도 주님으로부터이다. 무지의 선의 상태에서 범해진 악의 제거도 주님으로부터이다. 악이 제거되기를 기대하는 예배는 본질적으로 거룩하다.

세부적 영적 의미

수양을 죽임이란 순진 속의 진리로 이 예배를 준비한다는 것을; 죄 바침의 제물과 태워 바침의 제물을 죽이는 자리에서란 악의 제거를 위해, 그리고 내적으로 천적 선을 받기 위해 예배하는 상태를; 성소(거룩한 자리)란 마음의 가장 깊은 곳에서 까지를, 죄 바침의 제물처럼 죄가 있음의 제물도 성직자의 것이란 실제의 악이 제거되는 것도 주님으로부터이고, 무지로 순진해 있는 상태에서 악이 범해진 경우까지도 그러하다는 것을; 그것은 최고로 거룩하다란 이와 같은 악을 제거하려는 이 예배는 본질적으로 거룩하다는 것을 말한다.(10024, 7837, 7838, 2625, 3400, 10053, 3652-3, 3210, 10042, 3210, 10129)

14절. 그리고 성직자는 죄가 있음의 제물의 피를 가져 오라, 그리고 성직자는 깨끗해지게 되는 그 사람의 오른쪽 귀에, 그리고 그의 오른 손의 엄지손가락 위에, 그리고 그의 오른 발의 엄지발가락 위에 그것을 바르라.

영적 의미

그리고 이와 같은 예배에 포함된 거룩한 진리는 순진의 선을 통해 주님으로부터 진행되는데 진리의 원리를 내면부터, 모든 행동인 외적으로부터 순종함으로 악을 금하는 능력과 교통한다.

세부적 영적 의미

성직자가 죄가 있음의 제물의 피를 가져옴이란 이와 같은 예배 안에 포함된 거룩한 진리는 순진의 선을 통해 주님께로부터 진행된다는 것을; 그 피를 오른쪽 귓바퀴에 바른다란 내적으로 있는 진리의 원리로부터 온 순종을 수단으로 악을 금하게 하는 능력과 교통됨을; 오른쪽 엄지손가락이란 위와 같되 내적으로, 오른쪽 엄지발가락이란 위와 같되 외적으로 모든 행동 안에서 능력이 교통됨을 말한다.(제 12절, 10060, 9946, 10061, 10062, 10063)

15절. 그리고 성직자는 기름 한 록을 가져 오라, 그리고 그것을 그의 자신의 왼쪽 손바닥에 붓는다.

영적 의미

의지를 통하여 작용하는 신성한 선이 힘있게 이해함 안으로 흐른다.

세부적 영적 의미

성직자가 기름 한 록을 가져다가 자기의 왼손 바닥에 쏟는다란 의지를 통해 역사 하는 신성한 선이 힘있게 이해함으로 흐른다는 것을 말한다.(9946, 2177, 10062)

16절. 그리고 성직자는 그의 왼손에 있는 기름에 그의 오른 손가락을 담글 것이다, 그리고 주님 앞에서 자기 손가락으로 기름을 일곱 번 뿌려라.

영적 의미

이것은 일반적일 뿐만 아니라 세부적이기도 하다. 이로부터 교회 속의 사람에게 진리를 수단으로 능력 있게 선을 받아들인다. 그리고 자기 속에서 선과 결합하게 된 것이 전적으로 주님으로부터임을 모든 충만과 거룩함 속에서 인정한다.

세부적 영적 의미

성직자가 왼손에 있는 기름에 오른 손가락을 담근다는 것은 교통하는 능력은 일반적 측면 뿐만 아니라 세부 측면에서도 마찬가지라는 것을 말하는데, 첨부해둘 것은 손의 각 부분은 손 전체와 같은 힘을 나타내 준다는 것, 오른손과 왼손을 사용함은 선이 진리를 수단으로 역사하는 것을 뜻한다. 기름은 선을, 주님 앞에서 성직자가 손가락으로 기름을 일곱 번 뿌림은 당사자 안에서 진리가 선과 결합하게 된 것은 오로지 주님 때문이다는 것을 모든 충만함과 거룩함 속에서 인정하는 것을 말한다.(7430, 10062, 2177, 10047, 2044, 716)

17절. 그리고 그의 손에 있는 기름의 나머지를 성직자는 깨끗해지려는 사람의 오른쪽 귀의 끝에, 그리고 그의 오른손의 엄지 손가락 위에, 그리고 그의 오른 발의 엄지발가락 위에, 죄가 있음의 제물의 피 위에 바르라.

영적 의미

이에 수반되는 것은 진리가 주님으로부터 교통하는 힘을 받을 뿐 아니라 선 역시 받는데 이때 인간은 모독으로부터 깨끗해지고, 필수적인 힘이 선을 원리로 함으로부터 의지 안에, 진리와 선이 내면에서 결합함으로부터 이해함안에, 매 행동에서 진리가 선과 결합함으로 삶 안에 놓여진다. 이런 사항은 무지의 순진으로부터 예배하는 것에서까지도 동등하다.

세부적 영적 의미

기름은 선을; 피는 진리를; 죄가 있음의 제물의 피 위에 기름을 놓음이란 진리를 수단으로 선으로부터 능력이 있다는 것을; 나병에서 깨끗하게 되는 사람에게 그것을 바름이란 진리를 모독한데서 깨끗해지는 사람들과 더불어서 임을; 오른쪽 귓바퀴에란 선으로부터 순종을 수단으로 의지 안에서를; 오른 엄지손가락 위에란 내면적으로 진리가 선과 결합함으로 이해함안에서를; 오른 엄지 발가락 위에란 모든 행동 안에서, 무지의 순진으로 예배함에서 조차까지 포함되는 모든 행동 안에서 진리가 선과 결합함을 수단으로 하는 삶 속에서를 뜻한다.(2177, 6963, 4545, 10061, 10063, 3400, 2542)

18절. 그리고 성직자의 손에 있는 기름의 나머지를 그는 깨끗해지려는 그 사람의 머리 위에 부으라. 그리고 성직자는 주님 앞에 그를 위하여 보상을 받게 하라.

영적 의미

그 뿐만이 아니다. 위와 같은 예배의 결과로 선은 가장 깊은 내면에 건설되면서 결국 전체 인간에 건설되어 모독으로부터 깨끗해진다. 이러므로 해서 외적 인간이 내적 인간과 재회하고 주님에 의해 악으로부터의 완전한 해방이 결과된다.

세부적 영적 의미

남은 기름을 정하게 될 사람의 머리에 붓는다는 것은 가장 깊은 내면에 설립되는 선을; 여기서의 머리는 그 사람 전체를 말한다. 주님 앞에서 성직자가 보상 받게 만듦이란 외적 인간이 내적 인간과 재회함, 그리고 주님에 의해 악에서 완전히 해방됨을 말한다.(257, 7859, 제 1장 3절, 10042II)

19절. 그리고 성직자가 죄 바침의 제물을 바쳐라, 그리고 자기의 불결함 때문에 깨끗해지려 하는 그를 위해 보상 받게 하라. 그 후 그는 태워 바침의 제물을 죽여라.

영적 의미

이 모든 사항은 주님과 재회한 사람에 의하여 겸손히 인정되어진다. 그는 자기의 불순함을 고백하고, 이제 순수한 사랑으로부터 주님을 예배하도록 준비되어 지고,

세부적 영적 의미

성직자가 죄 바침의 제물을 바쳐 깨끗하게 될 사람을 위해 보상 받게 만듦이란 위 모든 사항들이 주님과 재회한 사람에 의해 겸손히 인정됨을, 그리고 나서 태워 바침의 제물을 죽인다란 순수한 사랑으로 주님을 예배하는 결과 안에서 준비됨을 말한다.(9939, 10042, 10024, 10053)

20절. 그리고 성직자는 제단 위에 태워바치는 제물과 식사 제물을 바칠 것이다. 그리고 성직자는 그를 위하여 보상(atonement)을 받게 하라. 그리고 그는 깨끗하다.

영적 의미

위에 수반되는 사항이 따른다. 모든 천적 선, 모든 영적 선이 주님으로부터 임을 심정으로부터 인정하면서 그분을 섬기는데 헌신되어진다. 더불어 악이 삭제되면서 완전하게 순수해짐이 있는다.

세부적 영적 의미

성직자가 태워 바침의 제물을 제단 위에 바쳐 보상 받게 만듦이란 모든 천적, 영적 선은 주님으로부터라는 것, 악의 사면과 더불어 완전한 순수함이 있으면서 그분을 전적으로 섬겨야 함을 인정하게 됨을 뜻한다.(10042, 2177, 4545)

21절. 그리고 만일 그가 가난하여 그만큼을 얻을 수 없다면, 그러면 그는 흔들어지기 위해 죄가 있음의 제물로 수컷 어린 양 한 마리를 가져와서 그를 위하여 보상(atonement)을 받게 할 것이다, 그리고 식사 제물을 위하여 기름을 섞은 고운 곡식 가루 (에바의) 십분의 일, 그리고 기름 한 록(log) (을 가져올 것이다).

영적 의미

그러나 만일 진리를 모독한 사람이 내적 교회 속에 있지 않고 외적 교회에 있다면, 그리하여 심오한 수준에서 선과 진리를 받을 수 없다면, 그렇다해도 그는 보다 낮은 평면에서 무지 안에 있는 순진의 선으로라도 주님을 예배할 수 있다. 이렇게 해도 그는 주님으로부터 생명을 받을 수 있고 악의 제거로 주님과 재회할 수 있다. 또한 자기 수준에서 진리가 선과 결합됨으로부터 예배할 수 있다. 이 선은 가장 깊은 내면에 있는 천적 선으로부터 있는 선이다.

세부적 영적 의미

사람이 너무 가난해서란 어떤 사람이 내적 교회 속에 있지 않고 외적 교회 속에만 있는 경우를, 이런 것을 바칠 힘이 없다면 이란 큰 규모의 수준으로 선과 진리를 받지 못하고 있음을, 죄가 있음의 제물로 수양 한 마리를 가져옴이란 보다 낮은 평면에서 무지의 순진의 선으로부터 주님을 예배하는 것을, 흔든다란 주님으로부터 온 생명을, 보상 받게 만듦이란 악의 제거를 수단으로 주님과 재회함을, 식사 제물로 기름에 섞은 고운 곡식 가루 십분의 일 에바를 가져옴이란 자기 수준에서 주님을 예배하되 가장 깊은 속에 있는 천적 선으로부터 온 선과 결합된 진리로부터 예배함을 말한다.(9209, 4372, 7837-9, 3400, 10083, 제 1장 3절, 10042II, 2177, 10136-7)

22절. 그리고 호도애 두 마리, 또는 어린 비둘기 두 마리, 그가 얻을 수 있는 한도에서. 그리고 하나는 죄 바침의 제물, 다른 하나는 태워 바치는 제물이다.

영적 의미

또한 그는 악을 제거함과 선을 영접하는 양 측면에 있는 자기 상태에 따라 신앙 속의 선과 진리로라도 주님을 예배할 수 있다.

세부적 영적 의미

힘이 자라는 대로 호도애 두 마리 또는 어린 비둘기 두 마리를 가져옴이란 악을 제거하고 선을 받는 자기 상태에 따라 신앙 속의 선과 진리로 주님을 예배하는 것을 말한다.(1826, 1827, 3400, 10053)

23절. 그리고 팔 일째 날에 그는 성직자에게, 주님 앞, 만남의 천막의 문으로 자기의 깨끗해짐을 위해 그것들을 가져 오라.

영적 의미

깨끗해지기 위한 자기 삶의 새로운 상태에서 그는 새 삶이 주님으로부터이라는 것, 그것이 천국을 통해 주님으로부터임을 인정한다.

세부적 영적 의미

여덟 째 날이란 새로운 상태를, 깨끗하게 되려고 주님 앞, 만남의 천막 문, 성직자에게 제물을 가지고 감이란 순수해진 후 자기의 생명은 천국을 통해 주님으로부터 임을 인정함으로 모든 생명을 그분께 돌리는 것을 말한다.(10042, 2356, 3540-3)

24절. 그리고 성직자는 죄가 있음의 제물의 어린 양, 그리고 기름 한 록을 가져 오라, 그리고 성직자는 주님 앞에서 흔들어 바침을 위해 그것들을 흔들어라.

영적 의미

또한 그는 자기와 함께 있는 무지의 순진 속의 모든 선, 가장 깊은 천적 사랑의 모든 선이 생명이 있게 된 것은 그의 예배 안에 계신 주님으로부터임을 인정할 것이다.

세부적 영적 의미

성직자가 죄가 있음의 제물로 바치는 어린 양과 기름 한 록을 가져가서 주님 앞에서 흔들어 바침이란 무지의 순진 속에 있는 모든 선, 가장 깊은 천적 사랑 속의 모든 선은 그가 예배하는 동안 주님으로부터 생명을 얻게 된다는 것을 말한다.(7837, 7838, 3400, 2177, 10083)

25절. 그리고 그는 죄가 있음의 제물의 어린 양을 죽일 것이다, 그리고 성직자는 죄가 있음의 제물의 피를 가져오라, 그리고 그것을 깨끗해지려는 그 사람의 오른쪽 귀의 끝에, 그리고 그의 오른손의 엄지에, 그의 오른발의 엄지에 바르라.

영적 의미

그 다음 그는 무지 안에 있는 순진의 선으로부터 주님을 예배하도록 자신을 준비시킬 것이다. 그리고 이와 같은 예배에 포함된 거룩한 진리는 주님으로부터 진행되고 있음을 인정할 것이고, 내면적으로 있는 진리의 원리로부터, 그리고 외적으로 있는 모든 행동에서 순종함을 수단으로 악을 금하는 능력과 교통하게 될 것이다.

세부적 영적 의미

죄가 있음의 제물인 어린 양을 죽임이란 무지 속에 있는 순진의 선으로부터 주님을 예배하고자 준비하는 것을; 성직자가 피를 가져옴이란 이와 같은 예배에 포함된 거룩한 진리는 주님으로부터 진행된다는 것을 인정함을; 그 피를 오른 엄지손가락, 오른 엄지발가락에 바름은 내적으로, 내면적으로, 그리고 행동에서 외적으로 진리를 원리로 하는 순종을 수단으로 악을 금하는 능력과 교통함을 말한다.(9946, 제 12절, 10060, 10061-3)

26절. 그리고 성직자는 자기 왼손의 손바닥에 기름을 부어라.

영적 의미

다시 주님으로부터 작동되는 신성한 선이 능력을 가지고 이해함안으로 흘러들 것이다.

세부적 영적 의미

성직자가 자기 왼손 바닥에 기름을 부음이란 주님으로부터 역사되어 신성한 능력이 이해함안으로 흐를 것임을 말한다.(9946, 2177, 10062)

27절. 그리고 성직자는 자기 왼손에 있는 기름 얼마를 자기 오른손가락으로 주님 앞에서 일곱 번 뿌려라.

영적 의미

이 사항은 일반적일 뿐 아니라 세부적으로도 있는다. 이로부터 교회 속의 사람은 진리를 수단으로 능력을 가진 선을 받게 되고, 자기 안에서 있는 선과 진리의 결합이 주님으로부터 전적으로 있어짐을 모든 충만과 거룩함 안에서 인정한다.

세부적 영적 의미

성직자가 왼쪽 손에 있는 기름 얼마를 오른 손가락으로 그에게 주님 앞에서 일곱 번 뿌림이란 이 사항은 일반적일 뿐만 아니라 세부적으로도 같다는 것, 이로부터 교회인은 진리를 수단으로 능력 있게 선을 받는다는 것, 교인 안에서 선이 진리와 결합하는 것은 전적으로 주님으로부터 이다는 것을 모든 충만과 거룩함 속에서 인정함을 말한다.(제 16절)

28절. 그리고 성직자는 그의 오른손에 있는 기름을 깨끗해지게 하는 그 사람의 오른쪽 귀의 끝에, 그리고 그의 오른손의 엄지에, 그리고 그의 오른발의 엄지에 바르고, 죄가 있음의 제물의 피가 있는 곳에 덧바르라.

영적 의미

위 사항에 수반되는 것이 있다. 주님으로부터 받은 진리, 그리고 선에 능력이 전달된다. 이때 인간은 모독으로부터 깨끗해지고, 이 능력의 필수적인 것들은 의지 안에서는 선이 원리로부터 순종함으로, 이해함안에서는 진리와 선이 내면적으로 결합함으로부터 순종함으로, 생활 안에서는 진리가 선과 결합함이 매 행동마다에 있어짐으로 존재한다.

세부적 영적 의미

성직자가 자기 손에 있는 기름을 깨끗하게 될 사람의 오른 쪽 귓바퀴, 오른 엄지발가락에 바르고, 죄가 있음의 제물의 피에 덧바른다는 것은 주님으로부터 받은 진리가 능력과 교통할 뿐만 아니라, 모독에서 순수해질 때 선 역시 능력을 가지는 바, 선을 원리로 한 순종을 수단으로 의지 안에서, 진리가 선과 내면적으로 결합함으로 이해함안에서, 매 행동에서 진리가 선과 결합함으로 삶 속에서 그 선은 능력의 본질이 됨을 뜻한다.(제 17절)

29절. 성직자의 손에 있는 남은 기름을 그는 깨끗해지는 그 사람의 머리 위에 부을 것이다, 하여, 주님 앞에서 그를 위해 보상을 받게 할 것이다.

영적 의미

그 뿐만이 아니다. 이와 같은 예배의 결과로 선은 가장 깊은 속에서, 그런고로 전체 인간에서 건설된다. 이때 그는 모독에서 깨끗해진다. 이리하여 외적 인간이 내적 인간과 재회되고, 주님에 의해 악에서 완전히 해방된다.

세부적 영적 의미

성직자의 손에 남아 있는 기름을 깨끗하게 될 사람의 머리에 부어 주님 앞에서 보상 받게 만듦이란 위와 같은 예배의 결과로 선은 가장 깊은 내면에서 설립되는바, 그가 모독에서 순수해질 때 전체 인간에서도 설립된다는 것, 이리하여 외적 인간이 내적 인간과 재회하는 결과를 갖게 되고, 주님에 의해 악에서 완전히 해방된다는 것을 말한다.(제 18절)

30절. 그리고 그는 호도애 한 마리, 또는 어린 비둘기 한 마리를 그가 얻을 수 있는 한도에서 바쳐라.

영적 의미

다음으로 힘이 미치지 못하여 겨우 바친 산비둘기나 집비둘기 가운데서 한 마리를,

세부적 영적 의미

힘이 미치지 못해 겨우 바친 호도애나 어린 비둘기 한 마리란 신앙의 선 또는 신앙의 진리로도 자기 상태에 따라서 주님께 예배할 수 있다는 말이다.(1826-7)

31절. 그가 얻을 수 있는 한도 조차에서, 하나는 죄 바침을 위해, 그리고 다른 하나는 태워 바침을 위해, 식사 제물과 함께 (바칠 것이다). 그리고 성직자는 깨끗해지려는 그를 위해 주님 앞에서 보상을 받게 할 것이다.

영적 의미

악의 제거를 위해 또는 선을 내, 외적으로 받기 위해, 그리하여 외적 인간과 내적 인간이 재회하기 위해 주님을 자기 상태에 따라 예배하는 것조차도 깨끗해지려는 사람과 함께 하시는 주님에 의해 결과되어진다.

세부적 영적 의미

한 마리는 죄 바침의 제물로, 한 마리는 태워 바침의 제물로 바침이란 주님을 예배하는 자기 상태에 맞게 악이 제거되고 선을 받게 됨을, 식사 제물과 함께란 외적으로, 내적으로 임을, 성직자가 주님 앞에서 그의 부정을 벗김이란 외적 인간과 내적 인간 사이의 재회는 깨끗해지게 되는 사람과 더불어 주님에 의해 결과된다는 뜻이다.(3400, 10053, 10절, 10042, 4545)

32절. 이것은 나병환자가 자기의 깨끗해짐에 속하는 것을 얻을 수 없을 경우, 그 사람에 관한 법이다.

영적 의미

이상은 모독으로부터 깨끗해지겠다는 사람, 내적 교회 속에 있지는 않으나 외적 교회 속에 있는 사람, 그러므로 해서 천국 생명을 충분히 받지 못하는 사람을 위한 신성한 질서의 법칙이다.

세부적 영적 의미

정하게 되는 제물을 넉넉히 바칠 수 없는 사람에 대한 규정이란 내적 교회 속에 있지 않고 외적 교회 속에만 있어 천국 생명을 넉넉히 받을 수 없는 사람이 모독에서 깨끗해지려 할 때 그를 위한 법임을 뜻한다.(2634)

33절. 그리고 주님께서 모세에게 그리고 아론에게 이야기하셨다, 말하시기를,

영적 의미

진리 안에 있는 이들과 선 안에 있는 이들에게 지각을 주심으로 주님께서 밝히 알게 하신다.

세부적 영적 의미

주님(여호와)란 사랑 측면에서의 신성한 존재를; 이야기하심(speaking)이란 유입을; 모세는 신성한 진리를; 아론은 신성한 선을; 말함(saying)이란 지각을 뜻한다.(2001, 2951, 7010, 9946, 1791, 1822)

34절.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소유하라고 준 것, 가나안의 토지 안으로 올 때, 그리고 나는 너희의 소유의 토지의 집에 나병의 역병을 놓는다.

영적 의미

주님께서 주시는 가나안 토지에 들어감이란 여기서의 경우 “인간이 내적 인간 속에, 그리고 외적 인간 속에 생명을 받음으로 천국적 상태를 실감하는 것, 즉 주님께서 그분의 의지를 나누어주신 것” 이라는 뜻이다. 너희가 소유한 땅에 있는 집에 나병이 생김이란 “그들 영혼의 최말단 저장소에 아주 경미한 모독이라도 있을 경우”를, 이렇게 의미되는 이유는 그 나병은 외관상으로만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발생 여부를 측정하는 것을 암시하기 때문이다.(1413, 2658, 10219, 6963, 1488, 696)

세부적 영적 의미

주님께서 나누어 주신 그분의 의지인 생명을 내적 인간과 외적 인간에서 받아 천국 상태를 실감하고 있는 때 조차에서도 영혼의 최말단 저장소(receptacle)에 모독이 아주 경미하지만 얼마라도 있다면

35절. 그 다음 집을 소유한 그 사람은 가서 성직자에게 말하여, 내가 보기에 집에 역병이 있는 것 같다고 말할 것이다.

영적 의미

그러면 영적 생명을 받는 사람은 그 생명을 파괴하려드는 자신 스스로의 경향성을 선이 우세한 상태에서 지각할 것이다.

세부적 영적 의미

그 집 임자란 영적 생명을 받은 상태에 있는 사람을, 성직자에게 와서 말함이란 선이 우세해 있는 상태에서 지각함을, “나병 같은 것이 집에 보입니다” 란 자기 속 영적 생명을 파괴시키려는 쪽으로 자신이 기울고 있음을 지각함을 말한다.(6690, 3209, 9946, 10219, 6963, 1488)

36절. 그리고 성직자는 명령하라, 즉 그들은 성직자가 역병을 보려고 그 집에 가기 전에 그 집을 비울 것, 하여 집에 있는 모든 것은 불결해지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그 후 성직자는 집을 보러 가라.

영적 의미

그리고 그는 자신의 것으로 되어 있는 어떤 선이나 진리가 결여되어 있음을 고백하도록 인도 될 것이다. 그렇게 인도되는 이유는 자기 상태가 계발되기 위해서, 그 계발을 통하여 모독의 불순함에서 주님으로부터 가지게 된 선과 진리가 자기 안에 보존되기 위함 때문이다.

세부적 영적 의미

성직자가 명령함이란 지각을 주는 선으로부터 온 유입, 그런고로 주님에 의해 인도됨을; 그 집을 비움이란 자기는 자신 스스로 어떤 선이나 진리도 없다고 고백함을; 성직자가 병을 검사하러 감이란 진리를 수단으로 선으로부터 자기 상태에 관한 계발이 있음을; 집안에 있는 모든 것이 불결해지지 않게 함이란 그가 주님으로부터 가진 선과 진리는 그 사람 안에서 모독이 불순으로부터 보전됨을 말한다.(2951, 17, 9946, 2150, 10219, 10219, 6963, 10130)

37절. 그리고 그가 역병을 살펴 보라, 그리고 보라, 만일 역병이 집의 벽에서 녹색을 띄거나 빨간 색을 띄면서 속이 빈 바퀴쇠 (형태)로 있고, 그리고 그것의 나타남이 벽보다 더 낮다면.

영적 의미

그런 다음 신성한 선으로부터의 검증이 있어질 것이다. 그래서 만일 선을 받는 외적 저장소에서 모독하려는 경향이 있고 최말단의 거짓들을 진리로 적용함으로 거룩한 진리를 모독하려는 경향, 이 경향성이 주님 안에서 신앙을 충분히 즐기고 있는데 우쭐댐의 충동으로부터 오는 생각이 있는 이유로 선이 결핍되어 있다면,

세부적 영적 의미

성직자가 병을 검사함이란 신성한 선으로부터의 검증이 있을 것임을; 나병이 집 벽에 생기어 녹색을 띄거나 빨간색을 띄고 속이 빈 바퀴쇠(hollow srtakes)형태이면 이란 선에 관한 외부 저장소 안에 모독하려는 경향이 있는 것, 거기에 진리같이 나타나는 거짓으로 최말단의 진리가 모독되는 것, 게다가 자아 찬양의 자극으로 유발된 생각이 들어 있어 선이 없음을; 벽보다 더 낮게(lower) 보임이란 주님에 대한 신앙을 충분히 즐기고 있을 때 조차까지를, 이 구절에서의 벽은 피부(skin)와 같은 의미를 표현하고 있다.(9946, 2245, 2246, 10219, 6963, 6419, 2233, 996, 3300, 17, 9215, 780)

38절. 그다음 성직자는 집에서 나가 집의 문에 가라, 그리고 칠 일간 그 집을 잠구어라.

영적 의미

그러면 신성한 선은 받아들이는 곳에서 철수하는바 억제된 상태가 수반되는데, 이는 거듭남의 거룩한 상태를 수단으로 깨끗해짐이 유발되도록 하기 위해서 이다.

세부적 영적 의미

성직자가 그 집 문 밖으로 나감이란 신성한 선이 그 저장소로부터 철수한 것처럼 있음을, 칠 일간 그 집을 잠가 둠이란 거듭나는 거룩한 상태가 깨끗해짐으로 유인 될 수 있기 위해 자제하는 상태를 말한다.(2356, 784, 6854-5, 716)

39절. 그리고 성직자는 칠 일째 날 다시 올 것이다, 그리고 살펴라. 그리고, 보라, 만일 역병이 집의 벽에 퍼졌다면.

영적 의미

위 상태 후 검증이 더 거행된다. 만일 그 저장소에 진리를 모독하려는 경향이 더 팽창되어 있다면,

세부적 영적 의미

칠 일째 성직자가 다시 와서 봄이란 위 상태 후 검증이 더 거행됨을, 그 집 벽에 병이 더 번졌으면 이란 그 저장소에 모독하려는 경향이 더 확장되었음을 말한다.(2044, 2245, 2246, 10219, 4035)

40절. 그 다음 성직자는 그들이 역병이 있는 돌을 가져가서 성읍 밖 불결한 장소에 그것들을 던지도록 명령하라.

영적 의미

그러면 그에게 유입된 신성한 선이 신성한 진리를 통하여 불순한 거짓들은 이 저장소로부터 거절되어야 한다는 것, 모든 불순물은 지옥으로부터 임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 그런고로 신앙의 교리로부터 분리되어야 한다는 것을 밝힌다.

세부적 영적 의미

성직자가 명령함이란 신성한 진리를 통해 밝히 알게 해주는 신성한 선으로부터 유입되는 게 있다는 것을, 병이 있는 돌을 빼냄이란 불순한 거짓들은 그 저장소로부터 거절되어야함을; 성읍 밖 더러운 곳에 내다 버림이란 이런 거짓들은 모든 불순함의 근원지인 지옥으로부터 임이 인정되어져야 한다는 것을 말한다.(2951, 643, 10219, 10130, 4744-3, 402)

41절. 그리고 그는 그 집 내부를 빙둘러 긁어내게 하라, 그리고 그들은 성읍 밖 불결한 장소에 그들이 긁어낸 회반죽(mortar)을 쏟아라.

영적 의미

더불어 그 저장소는 선의 영향을 수단으로 자기 자신 또는 이기적 사랑으로부터 온 거짓과 혼합된 모든 것에서 순수해지게 하되 완전하게 되기까지 이다. 그리고 악한 애착도 위의 거짓과 부합되는바 거절되게 하여 모든 불순함이 있는 지옥에로 던져야 한다.

세부적 영적 의미

그 집안 벽을 돌아가며 다 긁어냄이란 선의 영향을 받아 그 저장소는 이기적 사랑으로부터 완전하게, 또는 인간 자아로부터 온 거짓과의 모든 혼합에서 깨끗해져야 할 것 임을, 긁어낸 그 흙을 마을 밖 불결한 장소에 쏟아버림이란 이런 거짓과 부합되는 악한 애착 자체도 모든 불순함의 근원지인 지옥으로부터인 바 거절되어야 한다는 것을 말한다. (9946, 1488, 6669, 6669, 4744-3, 402)

42절. 그리고 그들은 다른 돌들을 가져와라, 그리고 그것들을 이 돌들 대신에 놓아라. 그리고 그는 다른 회반죽을 가져와라, 그리고 집에 회반죽을 바르라.

영적 의미

더불어 이 저장소 안에 말씀으로부터 온 순수한 진리들을 삽입해야 한다. 이것들은 진리를 위한 순수한 애착에 부합되는 바, 선이 진리들 안에서 형성되듯 나타난다.

세부적 영적 의미

다른 돌들을 주어다가 그 돌들 대신 끼우고, 다른 회반죽을 가져다가 그 집을 바름이란 이 저장소는 말씀에서 오는 순수한 진리로 채워져야 한다는 것, 이것들은 진리를 위한 순수한 애착과 일치하는 원인이 되는바, 선이 진리 안에서 형성된 듯 나타남을 말한다.(643, 6669)

43절. 그리고 그가 돌들을 빼내어 간 후, 그가 집을 긁어낸 후, 집에 회반죽을 바른 후, 만일 역병이 다시 오고, 집에 나타났다면.

영적 의미

비록 거짓이 적절히 제거되었고 진리가 선과 부합되게 만들어졌는데에도 모독의 악이 재발한다면,

세부적 영적 의미

병이 다시 번짐이란 모독의 악이 재발됨을, 돌들을 치워 낸 후, 그 집 벽을 긁어 낸 후, 벽을 바른 후 란 “거짓들이 훈련에 의해 상당히 제거되어 진리가 선과 부합되었을 때 조차에서도”를 말한다. 이 구절에서 주목할 점은, 그 집 벽을 긁어내되 집 안벽, 따라서 옛 벽을 제거했다는 것인데, 이는 바쳐지는 동물의 경우 살에 붙은 가죽을 제거하는 것과 상응적인 가치가 동일하다. 물론 이는 최말단의 악과 거짓을 거절함, 게다가 이 거절함에는 훈련(discipline)이 당연히 포함된다.(10219, 6963, 643, 6669, 10036)

44절. 그 다음 성직자는 안으로 와서 살펴라, 그리고, 보라, 만일 역병이 집에 퍼져 있다면, 이것은 집에 있는 악성 나병이다. 그것은 불결하다.

영적 의미

그러면 신성한 선은 더 강하게 그 저장소에로 흘러들 것이다. 그리고 만일 진리를 모독하려는 경향성, 또는 아주 경미한 수준이라 해도 실지로 모독함이 있다면, 그것은 선이 규율하는 곳에 흥분을 일으키는 바 불순함이 있는 것이다.

세부적 영적 의미

성직자가 보러 옴이란 신성한 선이 이 저장소에 더 강하게 유입 됨, 따라서 검증을; 병이 그 집에 퍼졌음이란 모독하려는 경향의 팽창 또는 경미하지만 실제로 모독했음을; 이 구절에서의 나병이란 선이 규율해야 하는 곳을 성나게 함을; 불결하다란 영적 불순함을 말한다.(9946, 2245, 2246, 10219, 6963, 4035, 6963, 10130)

45절. 그리고 그는 집을, 집의 돌들을, 그것의 목재를, 집의 회반죽을 부수어라. 그리고 그는 성읍으로부터 불결한 장소로 그것들을 운반하라.

영적 의미

이런 경우 선의 저장소는 그 속의 거짓과 악에 관한 것을 거절하여야 한다. 그리고 그것들과 결합함으로 밀착된 것들까지 거절되어야 한다. 정녕 그렇다 거절되어 지옥으로 던져서 진정한 교리로부터 분리시켜야 하리라.

세부적 영적 의미

집을 헐되 돌과 재목을 헐어 내림은 그 저장소에 있는 악과 거짓을 거절함을; 회반죽을 헐어냄은 악과 거짓에 부착된 모든 것을 거절함을; 성읍 밖 더러운 곳에 내다버림은 진짜 교리로부터 분리해서 지옥으로 버림을 말한다.(10643, 1488, 643, 6669, 4744-3, 402)

46절. 더욱이 집이 잠궈져 있는 동안 집안으로 가는 사람은 저녁 때까지 불결하다.

영적 의미

더구나 자기 삶이 이와 같은 불순한 저장소가 되도록 허용한 모든 사람은 그의 그런 상태에 변화가 있을 때까지 불순하다.

세부적 영적 의미

집을 잠가 둔 사이 그 집에 들어간 사람은 그날 저녁때까지 불결하다란 생명을 이와 같은 불순, 불순한 저장소가 되도록 허용한 사람은 상태가 변화할 때까지 불순하다는 것을 뜻한다. (1488, 6854-5, 10130, 7844)

47절. 그리고 집에 눕는 자는 자기 옷을 빨아라. 그리고 집에서 먹은 자는 그의 옷들을 빨아라.

영적 의미

이와 같은 불순함에서 편안함을 취한 모든 이, 그 편안함을 잠깐 취했다해도 그는 말씀 속의 진리로 깨끗해져야만 한다. 그리고 이런 상태에서 선을 자기 것으로 삼으려고 시도한 모든 이도 위와 같은 방법으로 깨끗해져야 한다.

세부적 영적 의미

그 집에 들어가 누워있었던 사람은 옷을 빨아 입어야 한다란 이와 같은 불순함에 기대어 쉰 모든 사람은 말씀의 진리로 깨끗해져야만 할 것 임을, 그 집에 들어가 음식을 먹었어도 옷을 빨아 입어야 한다란 그 상태에서 선을 자기 것으로 삼겠다고 하는 모든 사람도 위와 같은 방법으로 깨끗해져야 함을 뜻한다. (3696, 3147, 1073, 2187, 3147, 1073, 1488)

48절. 그리고 집에 회반죽을 바른 후, 만일 성직자가 들어가서 살피고, 보라, 역병이 집에 퍼지지 않았다면. 그다음 성직자는 집이 깨끗하다고 발표하라, 그 이유는 역병이 치료되었기 때문이다.

영적 의미

만일 신성한 선이 흘러들고 신성한 진리로 검증함이 있고, 진리가 선에 밀착되어진 후 그 저장소에 모독이 더 팽창 안 되었다면 선은 진리를 수단으로 순수해진다는 것을 밝힌다. 그 이유는 깨끗함이 훈육(discipline)에 의해 결과되었기 때문이다.

세부적 영적 의미

성직자가 다시 들어가 검사함이란 신성한 선으로부터 유입되는 것을; 신성한 진리로 검증함을; 병이 더 번지지 않았다란 모독이 더 팽창 안되었음을; 그가 집을 회반죽으로 바른 후 란 진리가 선과 부합된 이후를; 병이 물러갔으므로 성직자가 그 집을 깨끗하다고 선언함이란 선은 저장고가 훈련에 의해 깨끗해졌다는 것을 진리를 수단으로 밝히 알게 된다는 것을 말한다. (9946, 2245, 2246, 4035, 10219, 6963, 643, 6669, 9946, 1488, 4545, 10219, 8365)

49절. 그리고 그는 집을 깨끗이 하기 위해 새 두 마리, 삼목, 주홍색(실), 그리고 우슬초를 가져 가라.

영적 의미

그러므로 깨끗해지는 수단은 선에 대한 애착, 선으로 활성화 된 진리, 내면의 진리, 선과 결합된 외면의 진리들을 응용하는 것이다.

세부적 영적 의미

집을 깨끗하게 하는데 새 두 마리, 삼목, 주홍색(실), 우슬초를 가져옴이란 깨끗해지게 하는 수단들, 즉 선의 애착, 선으로부터 활성화된 진리, 내면의 진리, 외면의 진리, 이것이 응용되어 진다.(4545, 1488, 776, 9182-6, 3938-8, 5194)

50절. 그리고 그는 새 한 마리를 흐르는 물 위 질그릇에서 죽여라.

영적 의미

선을 사랑함에서 떨어져 있는 진리의 사랑에는 영적 생명이 없다는 것, 고로 선을 받기 위해 자연적 마음 안에서 그 저장소를 준비해야만 한다는 것을 선으로부터 온 말씀 또는 선으로부터 활성화된 진리를 수단으로 지각해야 할 것이다.

세부적 영적 의미

흐르는 물 위 질그릇에서 새 한 마리를 죽임이란 진리의 애착이 선의 애착에서 분리되면 영적 생명이 없다는 것이 선으로부터 말씀을 수단으로 또는 선으로부터 활성화 된 진리를 수단으로 지각된다는 것, 선을 받으려면 자연적 마음에 있는 저장소가 준비되어야 함을 말한다.(3424, 10024, 6767, 5948, 10105, 3079, 제 5절)

51절. 그리고 그는 삼목, 그리고 우슬초, 그리고 주홍색(실), 그리고 살아있는 새를 가져 와라, 그리고 죽인 새의 피에 그것들을 담그되, 흐르는 물에서이다, 그리고 일곱 번 집에 뿌려라.

영적 의미

위의 결과, 주님으로부터 흘러드는 선한 애착을 통해 선이 진리와 결합함, 즉 선이 내면과 외면에 있는 진리와 말씀으로부터 온 진리와의 결합이 있다. 그리고 깨끗해지려는 사람 안에 있는 이 결합은 거듭나는 거룩한 상태 안에서 신성한 선으로부터 확인되어 진다.

세부적 영적 의미

삼목, 주홍색(실), 우슬초, 살아있는 새를 가져다가 흐르는 물과 죽인 새의 피에 담그고 그 피를 일곱 번 그 집에 뿌린다란 주님으로부터 흐르는 선에 대한 애착을 통해 선이 진리와 결합함이 선에 근거한 내면의 진리와도 결합하고, 말씀으로부터 온 외면의 진리와 선과도 결합이 있어지는 바, 깨끗해지게 되는 사람 안에서의 이 결합은 거듭나는 거룩한 상태에서 신성한 선으로부터 확증이 되어진다는 뜻이다. (9182-6, 7918, 9468-9, 7846, 9229-4, 10024, 6767, 6절, 10047, 716, 4545, 6963, 9946, 제 7절)

52절. 그리고 그는 새의 피를 가지고, 그리고 흐르는 물을 가지고, 그리고 살아있는 새를 가지고, 그리고 삼목을 가지고, 그리고 우슬초를 가지고, 그리고 주홍색 (실)을 가지고 집을 깨끗하라.

영적 의미

그리하여 선의 저장소는 외적 진리의 거룩한 애착, 말씀으로부터 온 거룩한 진리, 선에 대한 애착, 특별하게 말씀에서 온 내면, 외면에 있는 진리가 선과 결합됨을 수단으로 깨끗해지게 된다.

세부적 영적 의미

그 집을 새의 피와 흐르는 물로 깨끗하게 함이란 선의 저장소는 외적 진리에 대한 거룩한 애착과 말씀으로부터 온 거룩한 진리를 수단으로 깨끗해지게 됨을; 그리고 살아있는 새, 삼목, 우슬초, 주홍색(실)로 그 집을 깨끗하게 함이란 선에 대한 애착을 가지고, 말씀으로부터 온 내면, 외면의 진리를 수단으로, 그 다음 선과 결합하는 것을 말한다. (7846, 3424, 9182-6, 제 51절)

53절. 그러나 그는 살아있는 새를 성읍으로부터 열린 들판으로 가게 하라. 이리하여 그는 집을 위해 보상 받게 하라. 그러면 그것은 깨끗하다.

영적 의미

마지막으로 선에 대한 애착은 천국 삶과 행복을 내, 외적으로 충분히 즐기는 가운데 완전히 자유로운 상태에 놓여진다. 그리하여 외적인 선은 내적인 선과 재회하고 완전한 순수함이 우세해진다.

세부적 영적 의미

살아 있는 새를 성읍 밖, 열린 들판으로 보냄이란 선에 관한 애착이 천국 삶을 충분히 즐기고 내, 외적으로 행복하고, 자유를 완전하게 누림을; 그 집을 위해 보상 받게 만듦이란 외적 선이 내적 선과 재회함, 순수해짐이 확실히 우세해짐을 말한다. (7439, 3310, 99, 1869, 9182-6, 10042ii,1488, 4545)

54절. 이것은 나병의 역병의 모든 방법을 위하여, 그리고 두창을 위한 법이다,

영적 의미

이상은 진리를 모독하는 것과 거듭나는 과정에서 활성화되어 진리를 모독하려는 경향이 있는 악한 애착들에 관한 신성한 질서의 법칙들이다.

세부적 영적 의미

이것이 각종 나병과 두창에 관한 법이란 이것은 진리를 모독함에 관하여, 거듭남에서 활성화되어 모독하려드는 악한 애착들에 관한 신성한 질서의 법칙이라는 뜻이다.(10219, 6963, 7524)

55절. 그리고 옷의 나병을 위하여, 그리고 집을 위하여.

영적 의미

위의 악한 애착들이 진정한 교리를 모독하고, 외적 인간 안에 있는 선의 저장소를 모독시키는 바, 이 악한 애착에 관하여,

세부적 영적 의미

옷이나 집에 생기는 나병에 관하여란 진정한 교리를 모독하는 악한 애착, 외적 인간에 있는 선의 저장소가 모독되는 것에 관하여(5006, 6963, 1488)

56절. 그리고 도두라짐을 위하여, 그리고 딱지를 위하여, 그리고 선명한 반점을 위하여.

영적 의미

감각적 사랑, 세상의 사랑, 자아의 사랑으로부터 모독하려 드는 악한 애착들의 제거에 관하여,

세부적 영적 의미

도두라짐, 딱지, 선명한 반점에 관한 법이란 감각적 사랑으로부터, 세상을 사랑함으로부터, 이기적 사랑으로부터 모독하려는 악한 애착을 제거함에 관하여(7524, 2240, 제 2절)

57절. 그것이 불결할 때, 그리고 그것이 깨끗할 때를 가르치려는 것. 이것은 나병의 법이다.

영적 의미

이상은 신성한 질서에 의거 진리를 모독함에 관하여, 의지와 이해함의 양 측면에서 순수한 것과 불순한 것 사이를 식별하는 방법을 교인들이 알 수 있게 하기 위함이다.

세부적 영적 의미

불결한 경우와 깨끗한 경우를 가르치기 위해서요 이것이 나병에 관한 법이라 함은 이로부터 교회의 사람은 어떻게 불순함과 순수함의 구별이 의지와 이해함의 양 측면에서 식별이 가능한가를 알게 된다를 명시한다.(7007, 10130, 4545, 683, 2634)

14장의 종합적 고찰

본 장의 글자 의미로부터 알 수 있는 한 가지 명확한 것은 이 글들에는 감춰진 어떤 의미들을 포함해야만 할 것이라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는 본 장 전체에 걸쳐 언급되는 각 의식들을 납득할 수 있게 설명하기가 곤란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경건하게 상응의 법칙이 주는 빛을 따라 살펴서 주님의 말씀에 무엇이 쓰여 있는가를 살펴보기로 하자.
시작에서 우선 주목해야 할 것이 있다. 진영 밖으로 나가는 성직자가 발견하는 사람은 다 나은 나병 환자라는 점이다. 병이 낳는다는 것은 나병이 제거되었다는 것을 뜻하는 것인바, 이 사람은 깨끗하게 하는 의식 이전에 이미 깨끗해진 것이다. 어떻게 이렇게 되는 걸까? 이는 주님만이 진리를 모독하는 죄로부터 인간을 구원해 주실 수 있다는 것, 눈에 보이는 예식들 즉 어떤 형태의 예배도 구원을 결과하지 못한다는 것을 보여 주시는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모독자가 깨끗해지는 데는 의식들이나 제물로 표현되고 있는 각종 사항을 이행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이행함은 마치 본인이 스스로 하듯 있어져야 한다. 이런 착각들, 즉 주님께서 치료하시는 동안 인간에게 위와 같은 행동이 꼭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니고 우리가 치료된 뒤 자기 몫을 하면 된다고 하는 식의 추론은 금물이다.
그러면 내적 모독에서 해방되는 수단은 무엇일까? 그 수단은 외면과 내면에 대한 애착, 다른 말로 바꾸면 주님에 의해 인간에게 주어진 진리와 선에 대한 애착들이다. 이 애착들이 새들로 표현되어져 있는데, 그 이유는 영적 인간의 새로운 삶은 그의 이해함 안에서는 형성될 수 있지만 부패된 그의 의지를 통하여서는 거듭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 새들은 살아있는 깨끗한 새 이어야 했다. 그 이유는 모든 생명은 주님으로부터, 순수한 것은 주님 만으로부터 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중 한 마리는 흐르는 물 또는 생명 있는 물 위 질그릇 안에서 죽이도록 된 것은 자연적 인간의 저장소(그릇)안에서는 자아부정을 수단으로 준비된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다. 그 이유가 순수해지게 만듦은 말씀 속의 진리가 선과 결합됨, 또는 신앙 속의 진리가 선행과 결합됨을 수단으로 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살아있는 물(생수)로 나타내지고 있다. 그 뿐만이 아니다. 영적으로 깨끗해지는 사람의 의무는 넓은 측면에서 있는 말씀으로부터의 진리에 만족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는 또한 식별력을 동원한 경험 즉 세부적인 진리들을 자기 애착의 생명이 순수해지는데 채택해감으로 배워가야 한다. 이리하여 다양한 진리들이 삼목, 주홍색(실), 우슬초로 의미되고 있다. 이제 조심스럽게 관찰해 볼 것은, 자신의 깨끗해짐을 위한 인간의 노력이 주님의 보이지 않는 역사에 의해 어떻게 도움을 받는가에 대해서 이다. 살아 있는 새와 그 외 열거된 것들을 죽은 새의 피에 담근다는 것은 신성한 역사를 상징해 놓은 표현이다. 육(flesh)에 관한 것이 죽게 될 때 영에 관한 것이 살아난다. 그 외 다른 방도는 없다. 물론 이것은 사랑을 수단으로 주님과 결합하는 데로 이끈다. 마지막으로 매우 미묘하게 자유로운 상태로 까지 인도되는데 이것이 살아있는 새를 열린 들판으로 가게 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러므로 이것은 순수해지는 우리 과정의 첫 부분에 해당된다. 이 과정은 전 인생에 걸쳐서 까지 계속 되는 바, 이것이 나병에서 깨끗해지려고 하는 사람에게 일곱 번 뿌리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 이제 두 번째 부분을 생각해 보자.
자연적 또는 외적 인간에 관련된 순수해짐이 여기서 영적으로 고려되고 있다. 그래서 이것이 빨고, 목욕하고, 깎는 것으로 상징화되고 있다. 이에 대한 것은 매우 잘 알려져 있으므로 별도의 예증이 필요 없으리라 본다. 그리고 그것들은 세 겹(three fold)이다. 그 이유가 인간 삶 자체의 각 수준(degree)은 따로 따로 된 수준으로 구성되기 때문이다. 이 수준은 창조된 만물의 가장 큰 것부터 지극히 작은 것 안에까지 존재한다. 그러나 본문에서는 옷, 털, 몸으로 명명되고 있는데, 거듭나는 과정의 이 부분은 내면 밖으로부터 진행되고 있다는 것, 외면의 범위에 있는 신성한 역사와 상응하고 있음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는 거듭나는 법칙, 즉 인간은 물로 다시 나야 하지만 영으로도 다시 나야 한다는 법칙과 일치를 이루고 있다. 이제 주목이 요구되는 것이 있다. 외적 인간 안에서 순수해진 결과는 비록 특별 사항에서는 아닐지라도 일반적으로 천국 상태 안으로 당사자를 소개한다는 것이다. 깨끗하게 된 나병자는 진영 안으로 들어갈 수는 있지만 그의 집에 입장하는 것은 허락 안되고 있다. 진영(camp)이란 선 밑에 진리들이 배열되는 질서로 된 천국 상태를 말한다. 그러나 집(house), 최상의 의미에서 생각할 때, 선에 관련된 특별한 상태를 말한다. 그래서 어느 누구도 칠 일간 이라는 말로 의미되는 것, 거듭남을 수단으로 하지 않고서는 특별한 선의 상태는 실감할 수 없다. 칠 일 동안 그는 자신의 이기적 삶을 모두 거절하게 되면서 진리 뿐만이 아닌 선에 관련된 것까지 깨끗해지는 것이다. 그런 다음 두 번째로 옷을 빠는 것, 털을 깎는 것, 목욕하는 것, 이중에서도 털을 깎는 행위의 표현이 보여주듯 거짓들을 한 건 한 건, 세부적으로 더 거절해간다. 이리하여 의식의 둘째 단원은 마감된다. 그러나 아직 셋째 단원에서 더 곰곰이 생각 할 것이 있다.
여기서 팔 일째란 천국 삶의 새로워지고 충만된 상태를 말한다. 이 상태에서 주님은 제 각각 수준의 선으로부터 진실로 예배되어지는 바, 이것이 여러 가지 제물로, 더 특별하게는 피와 기름의 적용에서 보여진다. 이 적용은 신성한 진리와 선이 인간이나 천사에게 스며들되 얼마나 충만되고 완전한가를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최상의 표현 방법에 해당된다. 이에 대하여는 앞장들에서 충분히 설명된 바 있으므로 여기서 반복하여 설명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그래도 한 가지 상념해야 할 것은 있다. 천국 안에서 조차도 죄가 있음의 제물과 죄 바침의 제물이 있다는 것, 즉 인간은 자신 스스로는 언제나 잘못을 저지르기 쉽다는 것, 인간에겐 악밖에 없다는 것, 따라서 계속적으로 주님에 의해 선 가운데 보존되어야만 한다는 것을 인정함은 천국에도 있다는 말이다. 수양 두 마리란 순진의 진리인데 이를 수단으로 인정함이 만들어지고, 암양 한 마리란 순진의 선인데, 영적인 태워 바침의 제물 즉 주님께 전적으로 봉헌함(consecration)을 각각 의미하고 있다. 그러므로 본 장 앞에서 살펴 본 것과 같다. 그러나 본 장의 경우 보다 더 놀랄만한 방법으로 보상을 받게 하는 것이 진실로 선 또는 사랑이라는 것을, 그럼에도 동시에 그 선 또는 사랑은 진리를 수단으로 결과를 보고 있다. 그러므로 일상 생활 속에서 사랑을 원리로 더 선호할 경우라 해도 그 수단으로 진리가 필요함을 잊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그래서 선에 근거한 이 진리(truth from good)가 우리 행동 안으로 오도록 해서 우리가 주님과 재회하여야 한다. 따라서 오른쪽 귀, 오른쪽 손, 오른쪽 발에 피를 뿌리고 기름을 바르는 것, 그 뿐만이 아니라 귀의 끝, 손의 엄지손가락, 발의 엄지발가락에 뿌리고 바른다는 것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이는 선함은 우리의 진리와 결합해야 한다는 것, 이 진리는 우리의 행동 안에서 나타나야 한다는 것, 최말단 사항들 역시 이렇게 되어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이것이 주님을 신뢰하고 선을 행하는데 적절한 방법이다. 진행에 앞서 이에 대한 준비가 15-16절에 있는 바 이를 정리해 보자. 이해함에 의거하여 의지라는 내면에 일하심(operation)이 있다. 의지는 주님으로부터 선을 받는다. 이것이 성직자가 기름 한 록을 취하여 자기 왼손 바닥에 붓는 모습이다. 붓는다(pouring)이란 유입(influx)을 말한다(열왕기하 4:4). 그리고 왼손은 이해함을, 그 다음 왼손바닥에 있는 기름은 선이 진리 안에서 그 모습을 드러내는 것을 뜻한다. 그 다음 왼손에 있는 기름에 오른 손가락을 담그는(dipping)것은 이 뒤의 구절에 있는 바와 같이 인간이 최말단 사항들 안으로 선과 진리를 가져다 놓을 수 있기 전, 의지와 이해함이 상호작용 하여 결합함을 수단으로 어떻게 능력이 인간에게 오는 가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 이유가 인간은 외적 경로를 수단으로 그의 이해함에 진리를 받는다. 다시 말해 그가 말씀을 읽는다거나 성경 공부에 참석하는 등등을 수단으로 가르침을 받음으로 진리를 받는다. 이리하여 그가 진리를 실제에 놓기 전 인정함이라는 수단으로 준비와 결합을 가질 수 있다.
그러므로 교회 속의 사람은 천국 삶으로 인도되어지도록 곰곰이 생각하는 노력이 교회 밖의 사람보다 더 있어야 한다. 이 노력에 관련되는 유용한 사항들이 본 장의 나머지에서 아직 더 언급되고 있다.
어떤 사람의 경우, 설사 이 사람이 천국에 있는 사람이라 해도 그가 너무 영적으로 가난해서 순진의 내적 선으로부터 주님을 예배할 수 없는 경우가 있다. 그렇다해도 그는 보다 낮은 평면에서 예배할 수는 있다. 그 이유는 세 천국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최말단 천국(첫 번째 천국)에 알맞게 거듭나진 사람은 그보다 더 높은 천국, 영적 천국이나 천적 천국으로 올라가거나 그 천국의 일원이 되는 것은 불가능하다. 참으로 그곳에서는 그렇게 되어 보겠다는 바램조차도 불가능하다. 모든 사람은 각기 자신의 천국에 영원히 머무르는 것에 결국에는 만족해야 한다. 그렇다해도 영원히 발전해 가는 기회(scope)는 거기에도 역시 존재하고 있다. 이와 같은 예배가 두 번째의 수양과 암양 대신 호도애나 어린 비둘기 두 마리로 대체되는 것, 그리고 보다 덜 비싼 식사 제물로 대체되는 것이 의미하는 바다. 본 장에서 이 예배는 제물보다 수준이 낮은 예배를 표현하고 있다. 식사 제물에 관한 사항은 앞 장들에서 설명된 바 있어 생략해도 되리라 본다. 그 이유가 이에 대한 묘사가 앞 장들과 동일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에 한 가지 덧 붙이고 싶은 것은, 어떤 관점에서 모든 인간의 거듭남은 비슷하다고 하는가를 배우고 넘어가자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게 되는 이유가 모든 인간 존재들은 주님의 형상과 모양에 따라 창조되었다는 것, 그런 이유로 거듭남으로 해서 그분의 모양과 형상이 될 수 있다는 원리 때문이다. 우리가 계속 살피는 말씀의 내적 의미(internal sense)에서 끌어올린 지식의 진짜 값어치는 우리 각자가 주님과 협동함을 수단으로 자신의 소질(capabilities)들이 발달되도록 노력해 가는 것, 동시에 자신이 남보다 위에 있는 줄로 착각하려는 환상에 빠지지 말아야 하는 것에 있다. 따라서 자신의 가능성을 넘어서는 것을 열망하려 들기보다는, 또는 위대해지기(greatness)보다는 선해지려고(goodness) 어린 아이 같은 겸손함으로 하늘나라를 받으려고 배워야 하리라.
그런데 우리 집에 있는 나병은 무엇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나병이 우리의 신체나 마음에 영향을 주는 질병이라고 생각해 보는 것은 과히 어렵지는 않다. 그러나 이 주제를 다루어야 할 저자의 경우에서도 나병이 집에 감염되었다라고 생각하지 않는 견해 쪽에 있는 바 본문의 글자 표현 그대로 집에 나병이 생겼다 라고 생각하기에는 힘들다. 그러나 영적으로 생각할 경우는 다르다. 집이란 마음에 있는 선의 저장소로서는 최말단에 속한다. 그러기에 이 집은 내면이 불순한 경우 쉽게 그 영향을 받는다. 그 이유는 내적 인간이 외적 인간을 형성하게 되는 것이 법칙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 모두에게는 자기의 영적인 집을 지으라고 요구되고 있다. 우리를 위해 좋은 영적인 집은 모래 위가 아닌 반석 위에 지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서도 영적으로 깨끗하게 해야 한다는 것, 감각적이고 육적인 애착까지도 깨끗하게 해야 함이 중요한 사항이고, 이런 측면에서 집이나 옷이나 다를 게 없으리라.
바로 위에서 까지 우리는 각자 앞에 큰 작업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일반적 측면의 모독에서 해방되는 것과 동일하게 바깥쪽에서도 깨끗해지는 과정을 주목해 본다는 것은 흥미 있게 된다. 우리가 말하는 갖가지 종류의 단어들, 우리가 행하는 선한 행동들이 최상의 동기로, 계발된 판단으로부터 튀어나와 일하고 있음에도 아직 우리는 자아로 초점을 돌리고야 마는 생각들로 얼마나 얼룩져 있는가? 순수한 애착들, 생명 있는 진리들, 주님과 더 가까운 결합 말고 무엇이 있을까? 지상 위 우리의 육체가 살아 있으려면 계속적인 운동과 힘을 내고 있어야한다. 천국에서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거기서 우리는 계속적인 깨끗해짐이 있어야 한다. 그 이유는 우리가 사랑하는 진리, 우리가 사랑하는 선을 모독하지 않기 위해서 이다. 따라서 우리의 머리, 손, 발, 그리고 입는 옷이 모독하는 것을 완전하게 피할 수는 없다 해도 그것들 모두의 적절한 선용은 계속 이어질 것이다. 이 사항이 본문 뒷부분의 서술에서 보여주고 있다.

레위기 15장

성경: 레위기 1장

1. 주님께서 모세에게 그리고 아론에게 이야기하셨다, 말하시기를,
2. 이스라엘의 자손들에게 이야기하라, 그리고 그들에게 말하라, 어떤 사람이 그의 살로부터 유출(issue)을 가질 때, 그의 유출 때문에 그는 불결하다.
3. 그리고 이것은 그의 유출에서 그의 불결함이다, 즉 그의 살이 그의 유출을 계속하든, 또는 그의 살이 그의 유출을 멈추었든, 이것은 그의 불결함이다.
4. 유출을 가진 자가 누운 침대 모두는 불결하다. 그리고 그가 앉은 모든 것도 불결하다.
5. 그리고 그의 침대에 접촉하는 자는 누구이든 그의 옷들을 빨아라, 그리고 자신을 물로 목욕하라, 그리고 저녁 때까지 불결하다.
6. 유출을 가진 자가 앉았던 어떤 것에 앉은 자는 자기 옷들을 빨아라, 그리고 물로 자신을 목욕하라, 그리고 저녁 때까지 불결하다.
7. 그리고 유출을 가진 자의 살에 접촉한 자는 자기 옷들을 빨아라, 그리고 자신을 물에서 목욕하라, 그리고 저녁 때까지 불결하다.
8. 그리고 만일 유출을 가진 그가 깨끗한 사람에게 침을 뱉는다면. 그다음 그는 자기 옷들을 빨아라, 그리고 물로 자신을 목욕할 것이다, 그리고 저녁 때까지 불결하다.
9. 그리고 유출을 가진 자가 (짐승 위에) 타려고 (사용한) 안장은 어떤 것이든 불결하다.
10. 그리고 유출하는 자 아래 있었던 어떤 것에 접촉하는 자는 누구든지 저녁 때까지 불결할 것이다. 그리고 이런 것을 나르는 자는 자기 옷들을 빨아라, 그리고 자신을 물로 목욕하라, 그리고 저녁 때까지 불결하다.
11. 그리고 유출을 가진 자가 자기 손들을 물로 행구어냄(rinse)도 없이 누군가를 만진다면, 그는 자기 옷들을 빨아라, 그리고 자신을 물로 목욕하라, 그리고 저녁 때까지 불결하다.
12. 그리고 유출을 가진 자가 만진 질그릇은 깨뜨려라. 그리고 모든 나무 그릇은 물에서 행구라.
13. 그리고 유출을 가진 자가 자기의 유출을 깨끗이 했을 때, 그러면 그는 자기의 깨끗해짐을 위하여 칠 일을 자신에게 셀 것이다. 그리고 자기 옷들을 빨 것이다. 그리고 그는 자기 살을 흐르는 물에서 목욕하라, 그러면 깨끗하다.
14. 그리고 팔 일째 날 그는 자기에게 호도애 두 마리, 또는 어린 비둘기 두 마리를 가져 와라, 그리고 주님 앞, 만남의 천막으로 올 것이다, 그리고 그것들을 성직자에게 주어라.
15. 그리고 성직자는 그것들을 바칠 것인데, 하나는 죄 바침을 위해, 또하나는 태워 바침을 위해서이다. 그리고 성직자는 그의 유출됨을 위해 주님 앞에서 그가 보상 받게 할 것이다.
16. 그리고 만일 어떤 사람의 성교(copulation)의 씨가 그 사람으로부터 나갔다면, 그 다음 그는 물에서 온 몸을 목욕할 것이다, 그리고 저녁 때까지 불결하다.
17. 그리고 성교의 씨 위에 있는 모든 옷, 모든 가죽은 물로 빨아라, 그리고 저녁 때까지 불결하다.
18. 여인이 남자와 성교의 씨와 더불어 누울 것이다면, 그들 모두 물에서 자신들을 목욕하라, 그리고 저녁 때까지 불결하다.
19. 그리고 만일 여인이 유출을 가진다면, (그리고) 그녀의 살에서 그녀의 유출이 피이다면, 그녀는 칠 일 동안 불순해 있다. 그리고 그녀를 만지는 자는 누구든지 저녁 때까지 불결하다.
20. 그녀가 그녀의 불순함에서 누운 모든 것은 불결하다. 그녀가 앉은 모든 것 역시 불결하다.
21. 그리고 그녀의 침대를 만지는 자는 누구든지 자기 옷들을 빨아라, 그리고 물에서 자신을 목욕할 것이다, 그리고 저녁까지 불결하다.
22. 그리고 그녀가 앉는 어떤 것을 만진 자는 누구든지 자기 옷들을 빨 아라, 그리고 물로 자신을 목욕하라, 그리고 저녁 때까지 불결하다.
23. 그리고 만일 그것이 침대 위에, 또는 그녀가 앉는 어떤 것 위에 있는데, 그가 그것을 만진다면, 그는 저녁까지 불결하다.
24. 그리고 만일 어떤 사람이 그녀와 눕는다면, 그리고 그녀의 불순함이 그 사람 위에 있다면, 그는 칠 일 동안 불결하다. 그리고 그가 누운 모든 침대는 불결하다.
25. 그리고 만일 여인이 그녀의 불순함의 기간 동안이 아닌 많은 날 동안 그녀의 피의 유출을 가진다면, 또는 만일 그녀가 그녀의 불순함의 때를 넘어 유출을 가진다면. 그녀의 불결함의 유출의 모든 날들을 그녀는 그녀의 불순함의 날들이나 마찬가지이다. 그녀는 불결하다.
26. 그녀가 자기의 유출이 있는 모든 날들에 누운 모든 침대는 그녀의 불순함으로부터의 침대이다. 그리고 그녀가 앉은 모든 것은 그녀의 불순함으로부터의 불결함 같이 불결하다.
27. 그리고 이런 것들을 만지는 자는 누구든지 불결하다, 그리고 그의 옷들을 빨아라, 그리고 물에 자신을 목욕하라, 그리고 저녁 때까지 불결하다.
28. 그러나 만일 그녀가 자기의 유출로부터 깨끗해진다면, 그러면 그녀는 칠 일을 자신에게 셀 것이다, 그리고 그 후 그녀는 깨끗하다.
29. 그리고 팔 일째 날 그녀는 자기에게 호도애 두 마리, 또는 어린 비둘기 두 마리를 가져 와라, 그리고 그것들을 성직자에게, 만남의 천막의 문으로 가져 가라.
30. 그리고 성직자는 하나는 죄 바침을 위해, 또 하나는 태워 바침을 위해 바쳐라, 그리고 성직자는 그녀의 불결함으로부터의 유출을 위해 주님 앞에서 그녀를 위한 보상을 받게 할 것이다.
31. 고로 너희는 이스라엘의 자손들이 자기들의 불결함으로부터 분리되게 할 것이다, 하여, 그들이 자기들 가운데 있는 내 성소를 더럽힐 때, 그들이 자기들의 불결함에서 죽지 않게 하라.
32. 이것은 유출을 가진 사람에 관한 법, 그리고 성교의 씨를 자기로부터 나가게 하여 그것으로해서 불결해 있는 사람에 관한 법이다.
33. 그리고 자기의 불순함으로 아프고 있는 그녀에 관해서, 그리고 유출을 가진 사람, 남자와 여자, 그리고 불결해 있는 그녀와 눕는 자에 관해서.

영적 의미 요약

* 감각적, 세상적, 또는 이기적 사랑으로부터 흐르는 거짓의 결과인 영적 불순함의 상태에 관하여, 1-15절.
* 자신의 선에 진리가 결합하지 않음으로 발생하는 불순함에 관해서, 이와 같은 불순함을 수단으로 진리들이 손상되는데 대해서, 거듭나는 동안 선과 진리의 결합과 연결되는 양쪽 모두 순수해져야 한다는 것, 16-18절.
* 거듭나는 동안 악의 거짓으로부터 발생하는 자연적 애착의 불순함에 관해서, 19-24절.
* 거듭나는 과정에 있지 않은 자연적 애착이 악의 거짓으로 불순해짐에 관해서, 25-30절.
* 이와 같은 거짓으로 인해 선이 오염되어 영적으로 죽지 않기 위해 악의 거짓에서 순수해져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것에 관해서, 31절.
* 본 장의 가르침에 관한 일반 요약. 32-33절.

각 절의 영적 의미

1절. 주님께서 모세에게 그리고 아론에게 이야기하셨다, 말하시기를,

영적 의미

주님께서 진리와 선 가운데 있는 이들에게 지각을 주심으로 밝히 알게 해주신다.

세부적 영적 의미

주님(여호와)이란 그분의 사랑 측면에서의 신성한 존재를; 이야기하심(speaking)이란 유입을; 모세란 신성한 질서 또는 말씀을; 아론은 신성한 선을; 말함(saying)은 지각을 말한다. (2001, 2951, 7010, 9946, 1791, 1822)

2절. 이스라엘의 자손들에게 이야기하라, 그리고 그들에게 말하라, 어떤 사람이 그의 살로부터 유출(issue)을 가질 때, 그의 유출 때문에 그는 불결하다.

영적 의미

영적 교회 속의 사람에 대한 가르침이다. 누가 감각적으로부터, 세상적 사랑으로부터, 또는 이기적 사랑으로 생각하고 있다면 악으로부터 온 거짓인 바, 불순하다.

세부적 영적 의미

이스라엘 백성에게 일러줌이란 영적 교회의 사랑에 대한 가르침임을; 어떤 사람이 자기 살로부터 유출을 가짐, 그리고 그것 때문에 불결하다란 누군가가 감각으로부터, 세상적 사랑으로부터, 이기적인 사랑으로부터 생각하므로 해서 악과 불순함으로부터의 거짓이 있게 된다는 것을 말하는데 이에 관해 더 첨가해 둘 말이 있다. “인간 안에는 고유 의지와 지성이 있다. 그 의지는 악이고 그 지성은 그 악에서 파생된 거짓이다. 전자 즉 인간 고유의 의지가 인간의 살로 지성은 그 살 속의 피로 의미된다.” 이로부터 관찰해 본다면 본문에서 언급하는 유출(issue, flux)은 악한 애착으로부터 흐르는 악한 생각들을 말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3절. 그리고 이것은 그의 유출에서 그의 불결함이다, 즉 그의 살이 그의 유출을 계속하든, 또는 그의 살이 그의 유출을 멈추었든, 이것은 그의 불결함이다.

영적 의미

그리고 이것이 생각 안에 있는 거짓 또는 불순함의 근원인 바, 악이 거짓과 결합되어 있든 또는 마치 그것들이 분리된 듯 보여도 그것은 거짓의 근원이다.

세부적 영적 의미

그의 유출함은 불결하다란 생각 속에 있는 불순함의 근원이 악이라는 것, 바꾸어 말하면 거짓의 불순함을, 유출이 계속 이든지 그렇지 않든지란 악이 거짓과 결합되어 있든지 또는 악과 거짓이 분리되어 있는 듯 보이든지를 말하는데 이 경우의 흐른다(running)란 사상이 흐르고 있다는 것을 시사하고, 멈추었다(stop)란 흐름이 억제되어 있음을 말한다. (10130, 843)

4절. 유출을 가진 자가 누운 침대 모두는 불결하다. 그리고 그가 앉은 모든 것도 불결하다.

영적 의미

모든 자연적 애착 또는 교리가 타락된 사랑으로부터 온 생각에 의해 오염이 되면 불순하다. 또한 타락된 사랑으로부터 온 이런 생각에 의해 확인되면 불순하다.

세부적 영적 의미

유출을 가진 사람이 누웠던 자리(bed)가 불결하다란 타락된 사랑으로부터 온 생각에 의해 오염된 자연적 애착 또는 교리는 불순함을; 앉았던 곳도 불순하다란 위와 같은 생각으로 굳혀진 사랑으로부터의 모든 애착들은 순수하지 못함을 뜻한다.(6188, 10360, 10130, 9422, 10130)

5절. 그리고 그의 침대에 접촉하는 자는 누구이든 그의 옷들을 빨아라, 그리고 자신을 물로 목욕하라, 그리고 저녁 때까지 불결하다.

영적 의미

위와 같은 자연적 수준의 생각 또는 애착과 아주 경미하게 접촉되었다해도 그것들은 내적, 외적으로 깨끗하게 만들 필요가 있다. 그래서 그 상태에 변화가 있을 때까지 불순의 원인이 된다.

세부적 영적 의미

그 사람의 침대에 닿은 사람은 옷을 빨아 입고 물로 목욕을 해야 하고, 저녁 때까지 불결하다란 위와 같은 자연적일 뿐인 애착 또는 생각에 아주 경미하게 접촉만 해도 내적, 외적으로 깨끗해짐이 요구되는 바, 상태의 변화가 거행될 때까지 불순함의 원인이 된다. (10130, 6188, 10360, 3147, 5006, 7844)

6절. 유출을 가진 자가 앉았던 어떤 것에 앉은 자는 자기 옷들을 빨아라, 그리고 물로 자신을 목욕하라, 그리고 저녁 때까지 불결하다.

영적 의미

또한 악한 실제 또는 교리로 자신이 확인되도록 조처한 모든 사람, 넓게는 부패된 교회, 각 개인이 그렇게 했었던 바 내적, 외적으로 깨끗해져야 하거나, 또는 생각과 애착이 깨끗해져야 하는 바, 상태 변화가 발생 할 때까지 그는 순수해질 수 없다.

세부적 영적 의미

유출을 가진 자가 앉았던 어떤 것에 앉은 사람도 옷을 빨아 입고 물로 목욕을 해야 하고, 저녁 때까지 불결하다란 넓은 의미에서의 부패된 교회, 또는 어떤 개인이 그렇게 한다고 해서 자신도 그와 같이 악한 행동으로 확증하려는 사람도 내적, 외적으로, 또는 생각과 애착에 관한 것에서 깨끗해져야 하는바, 상태의 변화가 발생할 때까지 순수해질 수 없다. (6188, 제 2절, 3147, 10130, 7844)

7절. 그리고 유출을 가진 자의 살에 접촉한 자는 자기 옷들을 빨아라, 그리고 자신을 물에서 목욕하라, 그리고 저녁 때까지 불결하다.

영적 의미

만일 어떤 사람이 감각적, 세상적, 또는 이기적 사랑에서 일어나는 거짓된 교리 가운데 있는 다른 이와 애착을 수단으로 자신을 접촉하게 했다면 그는 외적. 내적으로 깨끗해져야 한다. 이런 깨끗해짐을 통하여 상태의 변화가 발생할 때까지 불순할 것이다.

세부적 영적 의미

유출을 가진 사람의 살에 닿은 사람이란 감각적, 세상적, 이기적 사랑들로 발생하는 교리의 거짓 안에 있는 어떤 사람의 애착을 수단으로 자신을 결합시키는 사람을; 옷을 빨아 입고 물로 목욕을 한다란 외적, 내적으로 깨끗해짐을; 저녁때까지 불결하다란 상태가 변할 때까지 불순함을 말한다.(10130, 780, 10283, 10130, 3147, 5006, 10130, 7844)

8절. 그리고 만일 유출을 가진 그가 깨끗한 사람에게 침을 뱉는다면. 그다음 그는 자기 옷들을 빨아라, 그리고 물로 자신을 목욕할 것이다, 그리고 저녁 때까지 불결하다.

영적 의미
한 가지 더 있다. 만일 악으로부터 온 이와 같은 거짓 안에 있는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을 기어이 부패되게 했다면, 당한 그 사람은 외적. 내적으로 깨끗해져야 한다. 그도 상태의 변화가 없이는 순수해 질 수 없다.

세부적 영적 의미

유출을 가진 사람이 뱉은 침이 깨끗한 사람에게 튀었을 경우란 진리의 왜곡을 수단으로 왜곡하지 않고 있는 사람을 고집스럽게 부패시키는 악으로부터 온 거짓 가운데 있을 경우를 말한다. 그 이유는 좋은 의미에서 침 뱉음(spitting), 그리고 침을 뱉어 흙을 갬은 진리가 선과 결합함, 그리하여 신앙의 선을 생산함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와 반대 의미일 경우, 타인에게 침이 튀어 가게 함은 타인의 생명을 썩게 하는 것, 거짓을 가진 교리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옷을 빨고 물로 목욕함은 내적, 외적으로 순수해짐을, 저녁때까지 불결하다란 상태가 변할 때까지 불순함을 말한다. (6660-6, 4835-4, 3147, 5006, 683, 10130, 7844)

9절. 그리고 유출을 가진 자가 (짐승 위에) 타려고 (사용한) 안장은 어떤 것이든 불결하다.

영적 의미

악으로부터 온 위의 거짓과 접촉됨으로 오염된 지성 안에 있는 진리의 모든 저장고도 불순하다.

세부적 영적 의미
유출을 가진 사람이 타고 다니던 안장(saddle)이 불결하다란 위와 같은 거짓과 접촉됨으로 오염된 지성 안에 있는 진리의 모든 저장소도 불결함을 말한다.(5531, 2761, 2762, 10283, 10130)

10절. 그리고 유출하는 자 아래 있었던 어떤 것에 접촉하는 자는 누구든지 저녁 때까지 불결할 것이다. 그리고 이런 것을 나르는 자는 자기 옷들을 빨아라, 그리고 자신을 물로 목욕하라, 그리고 저녁 때까지 불결하다.

영적 의미

위와 같은 방법으로 오염된 의지 속에 있는 선의 모든 저장고도 상태가 변할 때까지 불순하다. 그리고 이런 오염에 관해 단순히 생각만 해도 필시 요구되는 사항은 상태의 변화요 이 변화로 내, 외적으로 깨끗해져야 하리라.

세부적 영적 의미

그가 깔고 앉았던 것에 닿은 사람, 그것을 가지고 다니는 사람이란 전자의 경우는 의지 안에 있는 저장고가 오염된 것, 후자는 불결한 것을 생각만 함으로 해서 오염되는 것을; 옷을 빨고 물로 목욕을 함이란 내적으로, 외적으로 깨끗해져야 함을; 저녁때까지 부정하다란 상태가 변할 때까지 불순함을 말한다.(10130, 3079, 5948, 8764, 3147, 5006, 10130, 7844)

11절. 그리고 유출을 가진 자가 자기 손들을 물로 행구어냄(rinse)도 없이 누군가를 만진다면, 그는 자기 옷들을 빨아라, 그리고 자신을 물로 목욕하라, 그리고 저녁 때까지 불결하다.

영적 의미

또한 만일 악으로부터 온 거짓 안에 있는 사람이 자기와 순수한 사람 양쪽에 공통되는 어떤 애착을 수단으로 영적 접촉을 했다면, 순수했던 그 사람은 바깥쪽의 자신을 깨끗하게 해야 한다. 이런 접촉도 외적, 내적으로 순수해져야 할 필요성을 만드는바 상태의 변화가 있어야 하리라.

세부적 영적 의미

유출을 가진 사람이 물로 행구지 않은 손으로 누군가를 건드린다란 영적으로 악으로부터 오는 거짓 가운데 있는 사람, 또는 진리를 왜곡하는 사람이 외적으로 깨끗해짐도 없이 서로 간에 공통되는 어떤 애착을 수단으로 접촉을 가질 경우를; 접촉 당한 사람도 옷을 빨아 입고 물로 목욕해야 하며 저녁때까지 불결하다란 상태가 변할 때까지 내적, 외적으로 깨끗해져야 함을 말한다. 여기서 한가지 주목해둘 것이 있다. 그것은 닿는다(touching)와 손만을 씻는다(washing the hands only)에 관한 것이다. 첫 단어는 “상대방의 의지가 동의해서 하나를 만드는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리고 두 번째 단어의 경우, 발과 손을 씻음은 자연적 인간 측면을 깨끗하게 함과 관계되고, 머리를 씻음은 영적 인간 측면을 깨끗하게 함과 관계를 가진다.(10283, 10130, 3147, 7844, 7442-3)

12절. 그리고 유출을 가진 자가 만진 질그릇은 깨뜨려라. 그리고 모든 나무 그릇은 물에서 행구라.

영적 의미

가장 수준 낮은 진리의 저장고라 해도, 설사 그것이 악에서 온 위의 거짓에 매우 가볍게 오염되었다 해도 거절되어야 한다. 그리고 선의 가장 수준 낮은 저장고 역시 위와 같은 처지인바 진리를 통해 깨끗해져야 한다.

세부적 영적 의미

유출을 가진 사람이 만진 질그릇이란 악에서 나온 거짓에 오염된 선이 없는 진리의 가장 수준 낮은 저장소를; 나무그릇이란 선의 저장소를; 깨뜨림 또는 물로 씻음은 진리를 통하여 거절하거나 깨끗해지는 것을 뜻한다.(10105, 10130, 10283, 643, 9163, 3147)

13절. 그리고 유출을 가진 자가 자기의 유출을 깨끗이 했을 때, 그러면 그는 자기의 깨끗해짐을 위하여 칠 일을 자신에게 셀 것이다. 그리고 자기 옷들을 빨 것이다. 그리고 그는 자기 살을 흐르는 물에서 목욕하라, 그러면 깨끗하다.

영적 의미

악의 거짓으로부터 순수해지겠다는 사람은 거듭나는 과정을 통과해야만 하는 바, 선으로부터 활성화된 진리를 수단으로 내, 외적으로 깨끗해진다. 그러면 그는 순수하게 될 것이다.

세부적 영적 의미

유출을 가진 사람이 그 병이 나아 깨끗하게 되는 경우란 악한 사랑으로부터 진리를 왜곡하는 사람이 깨끗해짐을, 깨끗하게 되기까지 칠 일간을 센다는 것이란 그가 거듭나는 과정을 통과해야만 한다는 것을(창세기 1장 참조), 옷을 빨고 흐르는 물에 목욕을 함이란 내적, 외적으로 깨끗해짐을, 깨끗하게 됨이란 영적으로 깨끗해짐을 말한다. (4545, 3147, 5006, 3424, 4545)

14절. 그리고 팔 일째 날 그는 자기에게 호도애 두 마리, 또는 어린 비둘기 두 마리를 가져 와라, 그리고 주님 앞, 만남의 천막으로 올 것이다, 그리고 그것들을 성직자에게 주어라.

영적 의미

그리고 그의 새로운 상태에서 선 또는 신앙 속의 진리로부터 주님을 예배 할 것이고, 천국을 통해 주님으로부터 선을 받고 있음을 인정한다. 그리고 선에 관한 자기 상태도 이로부터 임을 인정한다.

세부적 영적 의미

여덟 째날 이란 새로운 상태를, 호도애 또는 어린 비둘기 두 마리란 신앙 속의 선 또는 진리로부터 주님을 예배함을; 만남의 천막 문간, 주님 앞으로 나감이란 천국을 통해 주님으로부터 신앙 속의 선과 진리를 받고 있음을 인정함을; 성직자에게 제물을 줌이란 선에 관한 측면의 자기 상태로부터임을 각각 말한다.(9227, 1826, 1827, 2356, 3540-3, 9946)

15절. 그리고 성직자는 그것들을 바칠 것인데, 하나는 죄 바침을 위해, 또 하나는 태워 바침을 위해서이다. 그리고 성직자는 그의 유출됨을 위해 주님 앞에서 그가 보상 받게 할 것이다.

영적 의미

그리고 이러한 선의 상태로부터 그는 진실로 예배 드릴 수 있을 것이다. 먼저 악이 제거 되기 위하여, 둘째로 그가 주님께 헌신되기 위해서 이다. 이런 과정에서 신성한 선은 악에서 온 거짓이 제거되게 해주시고 외적 인간과 내적 인간의 재회가 결과될 것이다.

세부적 영적 의미

성직자가 제물을 바침이란 선의 상태로부터 예배드려야 진실된 예배가 됨을, 한 마리는 죄 바침의 제물로, 또 한 마리는 태워 바침의 제물로란 악은 제거될런지 모르고, 그리고 주님께 자신을 바치기 위해서 임을, 성직자가 주님 앞에서 그의 유출을 위해, 그를 위하여 보상 받게 함이란 위 방법에서 신성한 선으로부터 악에서 온 거짓이 제거되고 외적 인간과 내적 인간 사이의 재회가 결과될 것임을 말한다. (9946, 3400, 10053, 10283, 10042II)

16절. 그리고 만일 어떤 사람의 성교(copulation)의 씨가 그 사람으로부터 나갔다면, 그 다음 그는 물에서 온 몸을 목욕할 것이다, 그리고 저녁 때까지 불결하다.

영적 의미

다시, 거듭나는 과정에서 어떤 이에게 있는 신성한 진리의 씨가 자체 속의 선과 결합되지 못함으로 해서 진리를 무효화시키고 있다면 그의 진리의 상태가 선에로 완전히 인도될 때까지 선을 원리로 하는 생활 속에서 진리를 응용함으로 완전하게 깨끗해져야 한다.

세부적 영적 의미

성교 속의 어떤 남자의 씨가 그로부터 나갔다(going out) 함은 거듭나는 과정에서 누군가에게 있는 신성한 진리의 씨가 그 진리에 적합한 선과 결합되지 못함으로 그 씨가 무효화되고 마는 것을; 물로 온 몸을 씻는다란 선을 원리로 생활에 진리를 응용함을; 저녁때까지 불결하다란 선 쪽으로 인도되고 있는 진리의 상태가 결말을 볼 때까지 불순할 것임을 말한다. (880, 1798, 4837, 3147, 1798, 780, 7844, 9274)

17절. 그리고 성교의 씨 위에 있는 모든 옷, 모든 가죽은 물로 빨아라, 그리고 저녁 때까지 불결하다.

영적 의미

인간과 더불은 진리의 모든 상태, 그것이 외적이든 내적이든, 그 안에 진리가 선과 결합된 애착이 있는데 뒤집혀 있다면 순수해져야만 할 것이다. 그러나 진리의 상태가 선으로 인도되는 결말이 날 때까지 온전치 못해 있다.

세부적 영적 의미

성교의 씨가 묻은 옷과 피부는 물로 씻어야하고 저녁때까지 불결하다란 인간과 함께 하는 진리에 관한 모든 상태, 그것이 외적이든 내적이든 그 안에서 진리가 그 자체의 선과 결합하려는 애착이 뒤집혀 있을 경우 반드시 깨끗해져야 하는데, 이는 진리가 선 쪽으로 인도되는 상태가 완전히 끝날 때까지는 완전하게는 깨끗해지지 않는다는 뜻이다. (9215, 880, 1798, 4837, 3147, 7844, 9274)

18절. 여인이 남자와 성교의 씨와 더불어 누울 것이다면, 그들 모두 물에서 자신들을 목욕하라, 그리고 저녁 때까지 불결하다.

영적 의미

결합을 위해 진리의 씨를 받는 중인 선에 관한 자연적 모든 애착, 이 애착이 영적 애착과 상응되고는 있지만 받는 중일 경우 상대적으로 불순하다. 따라서 위 두 애착 모두는 진리와 선이 충만 되게 결합함으로 해서 상태에 변화가 있기까지 진리로 깨끗해지도록 요구된다.

세부적 영적 의미

이 구절에서의 여인은 선에 관한 자연적 애착을; 남자는 진리에 관한 영적 애착을 말하는데, 그 이유는 여기서 남자(man)라는 단어로 사용된 히브리어가 “ish”이기 때문이다. 씨(seed)란 선과 결합하려는 진리를; 여인은 자연적 애착을; 남자는 영적 애착을 뜻한다. 두 사람 다 물로 씻어야 하고 저녁때까지 불결하다란 진리가 선과 충분히 결합함으로 있어지는 상태의 변화가 결과되어야 깨끗해짐을 말한다. (915, 880, 1798, 3969-2, 155, 7884, 9274, 3147)

19절. 그리고 만일 여인이 유출을 가진다면, (그리고) 그녀의 살에서 그녀의 유출이 피이다면, 그녀는 칠 일 동안 불순해 있다. 그리고 그녀를 만지는 자는 누구든지 저녁 때까지 불결하다.

영적 의미

또한 어떤 자연적 애착이 거듭남을 수행하는 상태에서 이기적 사랑의 악으로부터 온 거짓으로 부패되었다면, 그 자연적 애착은 거듭나야 한다. 그것이 아무리 경미하게 탐닉했다 해도 진리의 상태가 선으로 인도 될 때까지 불순하다.

세부적 영적 의미

여인이 피를 흘림이란 자연적 애착이 이기적 사랑 속의 악에서 나오는 거짓으로 부패됨을; 그녀의 살에서 그녀의 유출이 피이다(월경)란 거듭남을 수행하고 있는 상태를; 칠 일간 불결하다란 자연적 애착은 거듭나지게 될 것임을(창세기 1장 참조); 그 여인에게 닿은 사람은 저녁때까지 불결하다란 진리의 상태가 선으로 인도되는 때까지 경미한 탐닉도 불순함을 말한다. (3969, 155, 10283, 4161, 716, 10130, 7844, 9274)

20절. 그녀가 그녀의 불순함에서 누운 모든 것은 불결하다. 그녀가 앉은 모든 것 역시 불결하다.

영적 의미

이 자연적 애착으로 오염된 모든 교리는 불순하다. 그리고 거짓으로 이 애착을 확인한 모든 상태도 불순하다.

세부적 영적 의미

불결한 기간 중 그 여인이 누웠던 모든 것이 불결하다란 위 자연적 애착으로 오염된 모든 교리가 불순함을; 앉았던 자리가 불결하다란 거짓으로 위 애착을 확증한 모든 상태가 불순함을 말한다. (6188, 10360, 10130, 9422)

21절. 그리고 그녀의 침대를 만지는 자는 누구든지 자기 옷들을 빨아라, 그리고 물에서 자신을 목욕할 것이다, 그리고 저녁까지 불결하다.

영적 의미

이런 교리에 아주 경미한 접촉으로 영향을 입은 모든 사람도 상태가 바뀔 때까지 외적, 내적으로 깨끗해져야 한다.

세부적 영적 의미

그 여인의 침대에 닿은 사람이란 매우 경미한 수준이지만 거짓 교리에 영향을 받은 모든 사람은 불순함을; 옷을 빨아 입고 물로 목욕해야 함이란 내적, 외적으로 깨끗해져야 함을; 저녁때까지 불결하다란 위 상태가 끝나기까지 불순함을 말한다.(10130, 6188, 3147, 5006, 7844)

22절. 그리고 그녀가 앉는 어떤 것을 만진 자는 누구든지 자기 옷들을 빨아라, 그리고 물로 자신을 목욕하라, 그리고 저녁 때까지 불결하다.

영적 의미

악의 실제, 그로부터 파생된 거짓이 확인 되는 데에 자신을 동참시킨 모든 사람도 상태가 종결될 때까지 외, 내적으로 깨끗해져야 한다.

세부적 영적 의미

그 여인이 앉았던 자리에 닿은 사람이란 악을 실습함으로 자신을 확증하게 하려 한 어떤 사람들을; 옷을 빨아 입고 물로 목욕함이란 내적, 외적으로 순수해짐을; 저녁때까지 불결하다란 상태가 종결 될 때까지 불순함을 말한다.(10130, 9422, 3147, 5006, 7844)

23절. 그리고 만일 그것이 침대 위에, 또는 그녀가 앉는 어떤 것 위에 있는데, 그가 그것을 만진다면, 그는 저녁까지 불결하다.

영적 의미

만일 악에서 온 이 거짓이 진리 속의 교리 또는 선의 교리가 오염되었는데 그 영향을 받고 있는 자연적 애착을 가진 사람일 경우도 상태의 변화가 거행될 때까지 불순하다.

세부적 영적 의미

그 여인이 누웠던 자리와 앉았던 어떤 것 위에 있는 물건이란 악에서 나온 거짓이 진리 또는 교리를 오염시킨 경우를; 닿는다란 영향 하에 있게 됨을; 저녁때까지 불결함이란 상태가 변할 때까지 불순함을 말한다.(3969-2, 155, 10283, 10360, 9422, 3522, 10130, 7844)

24절. 그리고 만일 어떤 사람이 그녀와 눕는다면, 그리고 그녀의 불순함이 그 사람 위에 있다면, 그는 칠 일 동안 불결하다. 그리고 그가 누운 모든 침대는 불결하다.

영적 의미

만일 진리 안에 있는 사람이 이 애착과 자신이 결합되고 있어 그 거짓이 그를 오염되게 하고 있다면, 그도 거듭나는 거룩한 상태를 통해야만 한다. 그리고 그것 때문에 그의 교리는 불순해 있을 것이다.

세부적 영적 의미

그 여자와 한 자리에 든 남자란 진리 안에 있는 어떤 사람이 위 애착과 그로부터의 거짓을 자신과 결합시킬 경우를; 그 여인의 불결이 그 남자에게 묻었다란 위 애착과 그 거짓으로 해서 오염됨을; 칠 일간 불결하다란 거듭나는 거룩한 상태를 통하여 감을; 그 남자가 누웠던 모든 침대가 불결하다란 그 교리도 이로 인해 불순해짐을 말한다. (10283, 10130, 제 2절, 716, 10130, 10360, 10130)

25절. 그리고 만일 여인이 그녀의 불순함의 기간 동안이 아닌 많은 날 동안 그녀의 피의 유출을 가진다면, 또는 만일 그녀가 그녀의 불순함의 때를 넘어 유출을 가진다면. 그녀의 불결함의 유출의 모든 날들을 그녀는 그녀의 불순함의 날들이나 마찬가지이다. 그녀는 불결하다.

영적 의미

그리고 만일 어떤 자연적 애착이 악에서 온 거짓으로 오염되고 있는데, 이때의 상태가 거듭남으로 인도되지 않는 중이거나 거듭나는 상태를 통과하는데 실패한 때이라면, 이 상태가 지속되는 한 그것은 불순하다. 거듭남을 수행하는 상태도 마찬가지이다. 이런 상태는 더 심하게 불순하다.

세부적 영적 의미

여인이 월경 때가 아닌데도 오랫동안 하혈함이란 어떤 자연적 애착이 거듭나도록 하는 상태로 인도되지 않고 악에서 나오는 거짓에 오염될 경우를; 월경이 더 오래 계속됨이란 거듭나는 상태를 통과하는데 실패함으로부터를(창세기 1장 참조); 하혈하는 동안이 월경하는 때처럼 이란 위 실패의 상태가 계속되는 한 거듭남을 수행하는 동안에 불순하듯이 불순하다. 그 여자가 불결하다란 더 심하게 불순함을 말한다. (4161, 10283, 716, 487, 10130, 4161)

26절. 그녀가 자기의 유출이 있는 모든 날들에 누운 모든 침대는 그녀의 불순함으로부터의 침대이다. 그리고 그녀가 앉은 모든 것은 그녀의 불순함으로부터의 불결함 같이 불결하다.

영적 의미

거짓에 있는 위의 자연적 애착으로 오염된 모든 교리는 불순하다. 그리고 거짓으로 확인하는 이 자연적 애착의 모든 상태도 불순하다. 이것이 거듭남을 수행하는 상태라 해도 동등하게 불순하다.

세부적 영적 의미

그 여인이 하혈하는 동안 누웠던 모든 침대는 월경 때 누웠던 잠자리와 마찬가지로 불결하다란 속에 거짓이 든 자연적 애착으로 오염된 모든 교리는 불순하다는 것을; 그 여인이 앉았던 곳도 월경 때 불결하듯이 불결하다란 자연적 애착을 거짓으로 확증한 모든 상태는 거듭나는 동안 불순하듯이 불순함을 말한다.(10360, 10283, 10130, 9422, 10130, 10283, 4161)

27절. 그리고 이런 것들을 만지는 자는 누구든지 불결하다, 그리고 그의 옷들을 빨아라, 그리고 물에 자신을 목욕하라, 그리고 저녁 때까지 불결하다.

영적 의미

이런 왜곡된 상태에 영향을 매우 적게 받았다고 하는 사람도 불순하다. 따라서 상태가 끝날 때까지 외적, 내적으로 깨끗해져야 한다.

세부적 영적 의미

이런 것들을 만지는 사람은 불결하다란 이런 왜곡된 상태로 영향을 매우 적게 받았다 해도 불순함을; 옷을 빨아 입고 물로 목욕함이란 말씀을 통해 내적, 외적으로 깨끗해짐을; 저녁때까지 불결하다란 상태가 변하기까지 불순함이 계속된다는 것을 말한다.(10130, 10283, 3147, 5006, 2702, 10130, 7844)

28절. 그러나 만일 그녀가 자기의 유출로부터 깨끗해진다면, 그러면 그녀는 칠 일을 자신에게 셀 것이다, 그리고 그 후 그녀는 깨끗하다.

영적 의미

그러나 만일 이 자연적 애착이 거짓에서 벗어나 깨끗해진다면 깨끗해짐이 거듭나는 결과임을 인정하게 된다. 그 이유는 깨끗해짐은 거듭남을 동반하기 때문이다.

세부적 영적 의미

그 여자가 깨끗하게 되려면 칠 일을 세어야 된다란 만일 이 자연적 애착이 거짓에서 깨끗해지려면 깨끗해짐은 거듭남의 결과로 된다고 인정해야 한다는 것, 그 이유는 깨끗해짐은 거듭남에 따라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4545, 창세기 1장, 716, 10239)

29절. 그리고 팔 일째 날 그녀는 자기에게 호도애 두 마리, 또는 어린 비둘기 두 마리를 가져 와라, 그리고 그것들을 성직자에게, 만남의 천막의 문으로 가져 가라.

영적 의미

위 깨끗해진 자연적 애착의 새로운 상태 또는 이 상태가 활성화되고 있는 사람 속의 자연적 애착 속에서 그 사람은 신앙의 진리와 선으로부터 주님을 예배할 것이고 그분의 영향이 천국을 통해 온다는 것을 인정할 것이다.

세부적 영적 의미

팔 일째란 위 자연적 애착의 새로운 상태를, 호도애 또는 어린 비둘기 두 마리란 신앙의 선 또는 진리로부터 주님을 예배함을, 그것들을 만남의 천막 문, 주님께 가져옴이란 주님과 천국을 통해 그분의 영향력이 오고 있음을 인정하는 것을 말한다. (9227, 1826, 1827, 9946, 2356, 3540-3)

30절. 그리고 성직자는 하나는 죄 바침을 위해, 또 하나는 태워 바침을 위해 바쳐라, 그리고 성직자는 그녀의 불결함으로부터의 유출을 위해 주님 앞에서 그녀를 위한 보상을 받게 할 것이다.

영적 의미

또한 신성한 선으로부터 악이 제거 될 것이고 주님을 사랑함을 실감할 것이다. 그리고 외적 인간과 내적 인간의 재회가 악으로부터 오는 거짓, 그로 인한 불순함을 제거할 것이다.

세부적 영적 의미

성직자가 한 마리는 죄의 제물로, 또 한 마리는 태워 바침의 제물로 바친다란 신성한 선으로부터 악의 제거와 주님을 사랑함을 실감하게 될 것임을; 성직자가 주님 앞에서 그 여인의 불결함의 유출을 위해 그 여인을 위해 보상을 받게 함이란 악으로부터 온 거짓의 제거와 불순함이 제거됨으로 외적 인간과 내적 인간이 재회함을 말한다. (9946, 3400, 10053, 10042II, 10130, 10283)

31절. 고로 너희는 이스라엘의 자손들이 자기들의 불결함으로부터 분리되게 할 것이다, 하여, 그들이 자기들 가운데 있는 내 성소를 더럽힐 때, 그들이 자기들의 불결함에서 죽지 않게 하라.

영적 의미

이렇게 하여 영적 교회 속의 모든 사람은 깨끗하게 만들어져 그 속의 악이 영적 죽음을 일으키지 않게 된다. 한편 그들은 외적 인간과 내적 인간의 하모니를 원해야 하는바, 이 하모니에 주님으로부터 온 천적 원리들이 건설되어진다.

세부적 영적 의미

이스라엘 백성이 그들의 불결함에서 분리되어야 할 것이란 영적 교회의 모든 멤버는 순수해져야 할 것임을; 불결함 때문에 죽지 않는다란 악이 영적 죽음의 원인은 아님을; 그들 가운데 있는 나의 성소를 더럽힐 때란 외적 인간과 내적 인간이 조화를 이루는 곳이 주님에게서 오는 천국 원리가 설립된 장소인데 이것이 결핍되는 경우를 말한다. (3654, 10130, 10283, 129, 3210, 6028)

32절. 이것은 유출을 가진 사람에 관한 법, 그리고 성교의 씨를 자기로부터 나가게 하여 그것으로 해서 불결해 있는 사람에 관한 법이다.

영적 의미

이것은 이기적 사랑에서 오는 거짓을 제거하는 신성한 질서의 법칙이요, 이는 진리와 선의 천국적 결혼의 성결됨을 위반하여 불순함이 생산되는 것을 예방하기 위한 것이다.

세부적 영적 의미

유출을 가진 자에 관한 법, 그리고 성교의 씨를 자기로부터 나가게 하여 불결한 자에 관한 법이란 이기적인 사람에게서 파생되는 거짓을 제거하기 위한 신성한 질서의 법칙이고, 불순함을 생산하는 원인, 즉 진리와 선의 천국 결혼이라는 성스러움을 위반하지 않게 하기 위한 법이라는 말이다.(10283, 880, 1798, 4837, 2634, 10130)

33절. 그리고 자기의 불순함으로 아프고 있는 그녀에 관해서, 그리고 유출을 가진 사람, 남자와 여자, 그리고 불결해 있는 그녀와 눕는 자에 관해서.

영적 의미

이는 천국 결혼을 준비하는 사람에게서 악이 제거되기 위해서, 영적 그리고 자연적 애착들로부터 악에서 나온 거짓의 제거를 위해서, 그리고 영적 애착이 자연적 애착과 불순하게 결합함을 제거하기 위해서 이다.

세부적 영적 의미

자기의 불순함으로 아프고 있는(월경하고 있는) 여인에 관해서 이란 거듭나는 과정 안에 있는 이들로부터 거짓을 제거해 주는 법 임을; 유출을 가진 자, 남녀란 영적, 자연적 애착으로부터 일반적으로 오게 되는 악에서 나온 거짓의 제거를 위해서 임을; 불결한 여인과 한 자리에 든 남자란 영적 애착과 자연적 애착의 불순한 결합의 제거를 위해서 임을 말한다. (2634, 10283, 4161, 915, 10283, 4433, 10130)

15장의 종합적 고찰

우리 앞에 전개되는 신성한 진리를 곰곰이 생각하기 전 우선 우리에게 두 가지를 먼저 생각해보도록 암시되는 사항이 있다. 첫째 주님께서는 유입(influx)해 주심과 가르치심(훈육, instruction)을 수단으로 교회 속의 각 개인을 가르치신다(teach)는 것, 둘째 유출을 가진 본문의 사람은 각각의 사람의 상태에 종속되어 있는 어떤 모형(type)이라는 것이다. 우리 모두 차이는 있을지언정 신성한 진리로부터 오는 얼마의 빛을 가지고 있다. 즉 내면적으로 계발을, 외면적으로 가르침이라는 빛을 가지고 있다는 말이다. 그래서 우리가 유입과 계발을 생각해 볼 때 후자는 전자 없이는 거의 사용되지 못한다는 것을 식별할 수 있을는지 모른다. 모든 살아 있는 창조물 중 인간 만에 주어진 축복 받은 능력이라면 그것은 영적인 빛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일 게다. 마찬가지로 큰 축복이란, 영적 빛을 수단으로 말씀에서 오는 진리를 알 수 있고, 이러므로 해서 자기 살(flesh)로부터의 유출로 명시된 것, 즉 자기의 자연적 이기심으로부터 오는 거짓된 것을 생각해 보는 정도만큼에서 진리를 발견해 갈 수 있다는 것이다.
이기적 심정으로부터 악한 생각들이 나온다(마가 7:21). 그러나 이런 악한 생각들을 기어이 연출하고 싶다거나 탐닉하는 것만 마음 속에서 나올 수 밖에 없게 되어 있는 게 인간 자체라면 그것을 책임지어야 하는 쪽이 인간이라고 잘라 말할 수는 없다. 이에 대해서는 더 곰곰이 생각해 보기 바란다. 어찌됐든 이런 나쁜 생각들은 사악한 영들로부터 우리 안으로 흘러든다. 그렇게 되는 이유는 우리 속에는 사악한 영들이 매력을 갖는 악의 뿌리가 있기 때문이다. 바로 이 악의 뿌리를 우리가 보아야 한다고 요구되는 것이요, 주님께서 말씀을 수단으로 볼 수 있게 장치해두셔서 우리는 각자의 영적인 유출들을 깨끗하게 할 수 있다.
다음으로 주목해 볼 사항은 유출이 계속되는 것과 되지 않은 것 사이의 차이점이다. 주목하고자 하는 이유는 전자는 의지의 작용을, 후자는 의지에 찬성하지 않는 것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이와 더불어 주목해 둘 것은 비록 후자의 경우가 양심이 저지하려는 영향을 포함하고 있긴 하지만 그래도 둘 다 모두 영적으로 불순한 상태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악한 생각의 두 가지 상태들이 “누웠던 자리”와 “앉았던 곳”으로 나타내고 있다. 물론 하나는 이해함에, 다른 하나는 의지에 관계되는 말이다.
위를 이어 몇 가지 케이스가 보여주는 것은, 우리 안으로 계속 흘러드는 것을 확증해 주는 악한 생각들 때문에 다른 사람이 불순해져 고통을 당하는 경우들이다. 어찌됐든 우리가 위와 같은 생각들을 입으로 뱉었기 때문에서 만은 아니고, 타인이 우리 주위를 싸고 있는 영적 분위기에 오염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기운은 설사 우리가 아무 말하지 않고 있는 경우에도 타인과 교통을 이루는 일이 허다하다. 위에 대해 한번 더 조명을 비추어 생각해 본다는 것은 가치 있는 일이라 생각되는데 그 이유는 우리가 어떤 의도도 없이 무의식적으로 타인에게 해를 주게 되는 경우까지도 없도록 하는 게 더 나을 것이기 때문이다. 다음 경우들을 잘 생각해보자. 거짓 교리는 사실 사람을 죽어가게 하는 것들인데, 만일 거듭나고 있는 사람이 이 교리를 마신다 해도 그 교리는 죽게 할 정도로 상해는 입히지 못한다. 그러나 거기에 영적 접촉이 있게 된다면 불순함을 생산하게 만든다. 이보다 더 심한 위험도 있을 수 있다. 만일 어떤 이가 자기에게 영향을 준 교리를 수단으로 거짓을 확증하는 쪽으로 처신했다면 확실한 것은 그가 자신 속에서 불순함을 생산하는 정도보다 더 심한 것, 즉 자신을 상하게 한다. 이 사람은 자기에게 영향을 준 사람 속에 든 애착이 자신과 결합되게 한다. 이보다 더 심한 상해는 이런 상태에 있는 사람이 신중한 태도로 불순함이 초래되게 했을 경우에 있게 된다. 그러므로 이런 경우는 일반적으로 애착 측면에서 있어진다. 그리고 이와 비슷한 결과를 지성 측면에서도 발견하는데, 지성 측면의 생각들이든, 생각과 더불은 느낌들이든 다 해당된다. 이것들이 본문에 타고 다니던 것(saddle, 안장)들과 그 뒤에 언급되는 것들로 명시되고 있다. 이에 대한 해석은 시리즈가 보여주고 있다. 즉 깨끗해짐은 진리를 수단으로 해야만 가능하다는 것, 그 다음 저녁때라 불리고 팔 일째로 표현되는 상태의 결말인 주님을 진정으로 예배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살핀 사항들은 거듭나는 사람에게 있게 되는 진짜 경험들에 해당된다. 따라서 상응의 언어로 기술된 말씀을 곰곰이 되새겨 보게 되면 각자의 영적 진보를 한 층 더 증진시키는 기회가 된다. 더불어 악한 모든 생각들은 더욱 경계해야 하겠다는 각오도 서리라. 잊어서는 안될 사항은 시험에 빠지지 않게 해달라는 기도가 자동으로 더욱 있어져야 할 것이다.
이제 선함과 진리의 천국적인 결혼을 생각해 볼 차례이다. 이는 거듭남의 극점(완성)일뿐 아니라 거듭나는 과정을 총망라한다고 말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이 천국 결혼보다 더 거룩한 것, 더 순수하다는 것, 더 깨끗하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해서 주님이 그분의 교회와 결합되는 것이 결혼에 비유되고 있다.(계시록 21:2) 참으로 주님이 장치해두신 한 남자와 한 여자의 진정한 결혼은 이 천국적인 결혼에 그 근원을 두고 있다(마태 19:4-6). 그러므로 일남일녀의 결혼도 천국 결혼처럼 동등하게 거룩하고, 순수하며 깨끗하다. 그럼에도 이제 관찰해 보아야 하는 것은 거듭나는 동안에 두 가지 의미에 있는 결혼과 연결되는 것 조차에서도 불순함이 있다는 것이다. 우리 앞에 전개되는 영적 시리즈는 이것이 주제가 된다.
어떻게 신성한 진리의 씨가 그 진리에 맞는 선과 결합하지 못함으로 해서 더럽혀지고 말까? 주님에게서 나오는 신성한 진리가 순수하듯 우리 안에 있는 선에서 나오는 진리도 순수하다. 단지 그것이 우리의 거듭나는 인품을 구성하는 한도만큼에서 이다. 그러나 모든 인간 존재는 타락된 개성을 가지고 태어난다. 그래서 위 두 가지 개성은 인간 속의 나 자신(proprium) 또는 주님과 구별되는 인간의 복합 생명을 구성한다. 인간이 태어날 때 가지고 있는 게 악밖에 없고 따라서 잘못된 것밖에 없는 고로 어떻게 악으로부터 온 거짓이 우리 안에 있는 선으로부터 온 진리를 오염시킬까에 대해, 그리고 그것이 모든 불순함의 근원이 되고 있다는 것까지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결혼에 관련하여 천사들이 순수하듯 우리도 순수해지길 원한다면 우리는 내적, 외적으로 거듭나야만 한다는 것, 즉 이해함과 의지 양면이 거듭나야 한다. 이것이 우리 앞에 있는 가르침의 실체요 총 합산이다. 여기에 덧 붙여져야 하는 게 있다. 이 전체적 측면에서의 순수해짐은 마치 우리 자신 스스로 이룩해낸 듯 모두 함께 결과되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어느 누구도 거듭나지 않으면 진정한 천국적인 결혼 수준의 사랑 안에 있을 수 없고, 그가 자신을 위해 주시는 주님의 위대한 사랑을 받았으되 다시 주님을 사랑하지 않으면 거듭날 수도 없고 그분과의 결합이 영원까지 이어질 수도 없다. 간단히 말해서 우리는 그분을 사랑한다. 그 이유는 그분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이다.
본 장의 나머지 구절들에 있는 세부 사항에 대해서 일일이 생각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그 이유는 대부분 이미 상술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한 가지 필요한 것은 월경이 있는 동안(the time of her impurity or separation) 하혈(issue)이 있는 것과 월경 때가 아니거나 월경 기간을 넘었는데도 하혈이 있는 것 사이의 차이점이다. 이로부터 배우는 바, 혹간 어떤 이들은 전혀 거듭나지 못할는지도 모른다는 것, 혹 어떤 다른 이들의 경우 거듭나는 과정이 실패될는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이에 첨가해서 상기해둘 서술은, “천국에 있는 모든 사회에 대칭되는 사회가 지옥에 있다. 또한 양쪽 사회는 무수할 정도로 많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 위해서 우리는 다각적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천국을 그저 구한다(seek)고 해서 들어가는 게 아니라 오히려 천국은 악과 싸워 승리하는 사람만이 가는 곳이다. 주님의 이 말씀을 상기해 보라. “사실 많은 사람들이 구원의 문으로 들어가려고 하겠지만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있는 힘을 다하여라” (누가 13:24).
**********************************************

레위기 16장

성경: 레위기 1장
1. 아론의 두 아들들이 주님 앞에 가까이 나아가 죽었을 때, 그들이 죽은 후, 주님께서 모세에게 이야기하셨다.
2. 그리고 주님께서 모세에게 말하셨다, 아론 네 형제에게 이야기하라, 즉 그는 궤 위에 있는 자비석(mercy-seat) 앞, 베일(veil) 안쪽 거룩한 장소 안으로 어느 때이든 오지 말라. 그 이유는 내가 자비석 위 구름 안에서 나타날 것이기 때문이다.
3. 아론은 거룩한 장소 안으로 오너라. 즉 죄 바침을 위해 어린 수소, 그리고 태워 바침을 위한 수양.
4. 그는 거룩한 아마포 상의를 입어라, 그리고 그는 아마포 반바지를 그의 살에 걸쳐라, 그리고 아마포 띠를 가지고 띠를 맬 것이다, 그리고 아마포 관을 가지고 그는 차려입어라. 이것들은 거룩한 옷들이다. 그리고 그는 자기 살을 물로 목욕하라, 그리고 그것들을 입어라.
5. 그리고 그는 이스라엘 자손의 회중으로부터 죄 바침을 위해 수염소 두 마리, 그리고 태워 바침을 위한 수양 한 마리를 가져 오라.
6. 그리고 아론은 죄 바침의 수소를 증정하라, 이것은 자신을 위해서이다, 그리고 자신을 위해, 그리고 그의 가문을 위해 보상 받게 한다.
7. 그리고 그는 염소 두 마리를 가져 오라, 그리고 그것들을 만남의 천막의 문에서 주님 앞에 두어라.
8. 그리고 아론은 염소 두 마리 위에 제비를 던져라. 하나는 주님을 위해, 그리고 다른 하나는 아사셀(Azazel)을 위해.
9. 그리고 아론은 제비가 주님을 위해 떨어진 염소를 증정하라, 그리고 그것을 죄 바침을 위해 바쳐라.
10. 그러나 아사셀을 위해 제비가 떨어진 염소는 주님 앞에 산채로 놓아두어 그것을 위한 보상 을 받게 하고, 아사셀을 위해 광야로 그것을 떠나 보내라.
11. 그리고 아론은 죄 바침의 수소를 증정하라, 이는 자신을 위해서이다, 그리고 자신을 위해, 자기 가문을 위해 보상 받게 하라, 그리고 자신을 위해 있는 죄 바침의 수소를 죽여라.
12. 그리고 그는 주님 앞으로부터 불 붙은 숯을 가득 채운 향로를 가져 오라, 그리고 그의 손에 두드려 작아진 달콤한 향을 가득 채우고, 그리고 그것을 베일 안쪽으로 가져 가라.
13. 그리고 그는 주님 앞 불 위에 향을 놓아라, 하여, 향의 구름이 그가 죽지 않게 증거(궤) 위에 있는 자비석을 덮을 것이다.
14. 그리고 그는 수소의 피를 가져 와라, 그리고 그것을 동쪽 자비석 위에 그의 손가락으로 뿌려라. 그리고 자비석 앞에서 그는 자기 손가락으로 피를 일곱 번 뿌려라.
15. 그 다음 그는 죄 바침의 염소를 죽여라, 이는 백성을 위해서이다, 그리고 그것의 피를 베일 안쪽으로 가져 와라, 그리고 그가 수소의 피를 가지고 실시한 그대로 그것의 피를 가지고 실시한다, 그리고 그것을 자비석 위에, 그리고 자비석 앞에 뿌릴 것이다.
16. 그리고 그는 거룩한 장소를 위하여 보상(atonement)을 받게 하라, 그 이유는 이스라엘의 자손들의 불결함 때문, 그리고 그들의 범칙들, 모든 그들의 죄들을 아울러서이기 까지 때문이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그는 그들의 불결함 한가운데에서 그들과 함께 거주하는 만남의 천막을 위해서도 그렇게 실시하라.
17. 그리고 그가 거룩한 장소에서 보상을 받게 하려고 들어가고, 그가 나올 때까지 만남의 천막 안에 사람이 있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자신을 위해, 그의 집안 식구들을 위해, 그리고 이스라엘의 모든 회중을 위해 보상을 받게 하라.
18. 그리고 그는 주님 앞에 있는 제단으로 나가라, 그리고 그것을 위해 보상을 받게 하라, 즉 수소의 피를 가져 와라, 그리고 염소의 피를 가져 와라, 그리고 그것을 빙둘러 있는 제단의 뿔들 위에 발라라.
19. 그리고 그는 자기 손가락을 가지고 일곱 번 그것 위에 피를 뿌려라, 그리고 그것이 이스라엘의 자손들의 불결함으로부터 깨끗해지게(hallow) 하라.
20. 그리고 그가 거룩한 장소, 그리고 만남의 천막, 그리고 제단을 위해 보상 받게 함을 끝냈을 때, 그는 살아있는 염소를 제출한다.
21. 그리고 아론은 그의 손 모두를 살아있는 염소의 머리에 놓아라, 그리고 그것 위에 이스라엘의 모든 불법들, 그리고 그들의 모든 범칙들, 그들의 죄들까지 고백하라. 그리고 그는 그것들을 염소의 머리 위에 놓아라, 그리고 준비가 된 사람의 손에 의해 광야 안으로 그것을 떠나보내라.
22. 그리고 염소는 고독한 토지 쪽으로 자기 위에서 그들의 모든 불법들을 나를 것이다.
23. 그리고 아론은 만남의 천막 안으로 가라, 그리고 그가 거룩한 장소 안으로 갔을 때, 그가 입은 것, 즉 아마포 옷들을 벗어라, 그리고 거기에 그것들을 남기고 가라.
24. 그리고 그는 거룩한 장소에서 물로 자기 살을 목욕하라, 그리고 그의 옷들을 입어라, 그리고 나간다, 그리고 자기의 태워 바침의 제물과 백성들의 태워 바침의 제물을 바쳐라, 그리고 자신과 백성을 위해 보상을 받게 할 것이다.
25. 그리고 죄 바침의 제물의 지방을 그는 제단 위에서 태울 것이다.
26. 그리고 염소를 아사셀에게 보낸 사람은 자기 옷들을 빨아라, 그리고 물로 자기 살을 목욕하라, 그리고 후에 그는 진영 안으로 올 것이다.
27. 그리고 죄 바침의 제물의 수소, 그리고 죄 바침의 제물의 염소, 이것들의 피는 거룩한 장소에서 보상을 받기 위해 가져와지고, 진영 밖으로 운반하라. 그리고 그들은 그것들의 가죽들, 그리고 그것들의 고기, 그리고 그것들의 똥을 불에서 태워라.
28. 그리고 그것들을 태운 사람은 자기 옷들을 빨아라, 그리고 자기 살을 물로 목욕하라, 그리고 그 후에 그는 진영으로 와라.
29. 그리고 이것은 너희에게 영원한 법령이다. 즉 일곱 째 달에, 그 달의 열 번째 날에, 너희는 너희 혼들을 괴롭게 하라, 그리고 본토박이이든, 너희 사이에 체류하는 외국인이든 아무 일도 하지 말라.
30. 이 날에 너희를 깨끗하게 하기 위해, 너희를 위해 보상을 받게 할 것이다. 모든 너희의 죄들로부터 너희는 주님 앞에서 깨끗해질 것이다.
31. 이것은 너희에게 엄숙한 쉼의 안식일이다, 그리고 너희는 너희 혼들을 괴롭혀라. 이것은 영원히 법령이다.
32. 그리고 기름부워지고, 자기 아버지 대신에 성직자이도록 성직에 임명되는 성직자가 보상을 받게 하라, 그리고 아마포 옷을 입어라, 거룩한 옷들 까지 입어라.
33. 그리고 그는 거룩한 성소를 위하여 보상을 받게 할 것이다, 그리고 그는 만남의 천막을 위하여, 제단을 위하여 보상을 받게 할 것이다. 그리고 그는 성직자들을 위하여 그리고 집회의 모든 백성을 위하여 보상을 받게 할 것이다.
34. 그리고 일 년에 한번 이스라엘의 자손들을 위해 보상을 받게 하는 것은 너희에게 끝없는 법령이다. 그리고 그는 주님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셨던 대로 실시했다.

영적 의미 요약

* 외적일 뿐인 예배가 인간에 의해 거절될 때 가장 깊은 내면의 선이 명백히 나타남에 관하여, 즉 이 선은 외적, 내적으로 악의 제거를 수단으로, 주님께 헌신함으로, 진리의 힘을 빌려서 명백히 나타남에 관하여 주님께서 밝히 알게 해주심이 있다, 1-4절.
* 또한 거기에는 악의 제거가 외적으로 뿐만 아니라 내적으로 있되 주님을 인정함을 수단으로, 선택의 자유를 수단으로, 예배를 수단으로, 악의 거절을 수단으로 있어진다, 5-10절.
* 이 깨끗해짐의 전 과정이 더 세밀하게 기술되고 있다, 11-22절.
* 그럼 다음 모든 진리가 주님으로부터 있음을 진실로 인정함이, 순수한 사랑으로부터 예배하는 상태가, 인간의 가장 높은 선은 주님으로부터 임을 고백함이, 그리고 계속 깨끗해져 감은 천국적 상태를 실감하기 위해서 필요하다는 것이 뒤따르고 있다, 23-28절.
* 마지막으로 거듭나는 과정과 깨끗해짐의 거룩한 과정의 결과로 천국적 평화와 쉼의 충만된 즐거움이 있게 되는데 영원까지 있게 된다, 29-34절.

각 절의 영적 의미

1절. 아론의 두 아들들이 주님 앞에 가까이 나아가 죽었을 때, 그들이 죽은 후, 주님께서 모세에게 이야기하셨다.

영적 의미

내적 예배가 없고 세상과 자아로부터 온 외적 예배는 위선적이요 모독된 예배인 고로 폐지될 때 주님으로부터 밝히 알게 하시는 사항이 있다.

세부적 영적 의미

주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심이란 신성한 진리를 수단으로 밝히 알게 하심(계시)을; 아론의 두 아들이 죽었음이란 내적 예배가 없는 자아와 세상 사랑으로부터 온 외적 예배의 폐지를; 이기적 사랑만으로 주님 앞에 가까이 감이란 위선적이고 모독하는 예배를 드리는 것, 10장의 경우 이상한 불을 바치는 것으로 표현되고 있다. (2001, 2951, 7010, 7699, 7738, 934, 2447, 5149, 10장 2절, 3934-3, 10287)

2절. 그리고 주님께서 모세에게 말하셨다, 아론 네 형제에게 이야기하라, 즉 그는 궤 위에 있는 자비석(mercy-seat) 앞, 베일(veil) 안쪽 거룩한 장소 안으로 어느 때이든 오지 말라. 그 이유는 내가 자비석 위 구름 안에서 나타날 것이기 때문이다.

영적 의미

이 밝히 알게 하심(계시)은 외적일 뿐만이 아닌 내적인 삶이기도 한 바 이렇게 가르치신다. 즉 신성한 선으로부터의 주님을 예배할 때 인간은 교회의 모든 상태에서 천적인 가장 깊은 선을 지각하거나 실감할 수 없다는 것, 이 선은 중간 수준의 선에 의해 영적 선과 구별되어진다는 것, 이 선 안에서 주님은 나타나시어 모든 예배를 듣고 받으신다는 것, 그리고 각 심정이 신성한 법칙을 받는 것을 수단으로 인간에게서 악을 제거하신다는 것이다. 그렇게 하시는 이유는 위와 같이 하시지 않으면 인간이 죽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인간의 희미한 상태에도 그분은 자신을 밝히 보여 주시는데 이는 신성한 자비 덕분이다.

세부적 영적 의미

주님이 모세에게 말씀하심이란 진리 가운데 있는 이들에게 계시함을; 모세가 아론에게 말함은 선 가운데 있는 이들에게 계시함을; 이 둘을 관계적 측면에서 볼 경우, 전자는 외적 계시를, 후자는 내적 계시를 말한다. 너의 형 아론이란 진리에 대한 선의 관계를, 보통 때는 성소 베일 안쪽 궤 위에 있는 자비석 앞으로 나가지 말라란 선으로부터 주님을 예배함에서 인간은 교회의 어느 상태에서도 천적인 가장 깊은 선을 지각 할 수도 없고 실감 할 수도 없다는 것, 이는 중간 매체의 선을 수단으로 영적 선과 구별된다는 것을; 자비석 앞이란 주님께서 모든 예배를 듣고 받으시기 위해 계신 장소요, 거기서 주님은 인간의 악을 제거하신다는 것을; 궤 위란 신성한 법을 심정에서 받는 것을, 죽지 않도록이란 가까이 오는 그가 멸해지기 때문임을; 자비석 위에서 구름 가운데 나타나실 것이란 주님께서는 그분 자신을 인간의 희미한 상태에서도 밝히시는데 이는 신성한 자비로부터 발생함을 말한다.(7010, 9946, 6998, 5121, 4267, 6998, 6901, 2212, 9670, 9506, 10269, 9485, 9818, 7699, 7738, 8106, 9506)

3절. 아론은 거룩한 장소 안으로 오너라. 즉 죄 바침을 위해 어린 수소, 그리고 태워 바침을 위한 수양.

영적 의미

다음 방법들은 선 가운데 있는 인간, 그리고 신성이 되심 가운데 계신 주님을 가장 깊은 삶에로 인도 해준다. 즉 인간은 외적 인간 또는 자연적 수준 안에 있는 악을, 더불어 내적 인간 또는 영적 수준에 있는 악을 순진의 선을 수단으로 깨끗해지게 해야만 한다. 그리고 영적 수준에서 그는 사랑의 선으로부터 완전히 헌신함으로 주님을 예배해야만 한다.

세부적 영적 의미

아론의 성소에 들어감이란 다음 방법들로 해서 인간은 선 가운데, 주님 자신은 신성이 되심 가운데서 가장 깊은 삶에로 인도된다는 것을; 어린 수소는 죄 바침의 제물로, 수양 한 마리는 태워 바침의 제물로란 외적 인간 또는 자연적 수준 안에 있는 악을 깨끗하게 함과 순진의 선을 수단으로 영적 수준 또는 내적 인간 안에 있는 악을 깨끗하게 함을; 태워 바침의 제물로 수양을 바침이란 사랑의 선으로 완전히 헌신함도 뜻한다.(9946, 9670, 9670-6, 9990, 9991, 10053)

4절. 그는 거룩한 아마포 상의를 입어라, 그리고 그는 아마포 반바지를 그의 살에 걸쳐라, 그리고 아마포 띠를 가지고 띠를 맬 것이다, 그리고 아마포 관을 가지고 그는 차려입어라. 이것들은 거룩한 옷들이다. 그리고 그는 자기 살을 물로 목욕하라, 그리고 그것들을 입어라.

영적 의미

또한 위와 같이 깨끗해짐은 선으로부터의 진리로도 결과되는데, 즉 외면에 있는 자연 평면 속의 진리들을 수단으로, 진리와 선이 외적으로 결합하는 교리에 의해, 진리와 선이 내적으로 결합하여 서로에게 공통되는 묶임에 의해, 가장 깊은 진리의 총명에 의해, 결과된다. 그 이유는 인간이 생활에 외적 진리들을 적용함으로 회개의 일을 행할 때 위 사항을 수단으로 인간은 순수해지고 거룩해지기 때문이다.

세부적 영적 의미

명명되는 옷들은 위와 같이 깨끗해짐이 선으로부터의 진리로 결과됨을 나타내고 있다. 거룩한 아마포 상의(coat)는 자연적 인간 외면에 있는 진리를; 맨살에 아마포 잠방이를 걸침이란 진리가 선과 외적으로 결합함에 관한 교리를; 아마포로 만든 관대를 띰이란 진리가 선과 내적으로 결합하도록 해주는 서로 공통되는 묶음을; 아마포로 만든 사모란 아주 깊은 진리의 총명함을; 이것이 거룩한 옷이다 함은 선과 결합된 진리들 또는 선을 위해 잡고 있는 진리들을; 물로 살을 씻고 이 옷을 입으라 함은 생활에 외적 진리를 응용함으로 회개의 일을 행함을 말한다. (9670-6, 7601-5, 9960-18, 9961, 9828, 9827, 2146, 3147, 8914)

5절. 그리고 그는 이스라엘 자손의 회중으로부터 죄 바침을 위해 수염소 두 마리, 그리고 태워 바침을 위한 수양 한 마리를 가져 오라.

영적 의미

더구나 외적 인간은 악이 제거되게 하는 신앙의 진리를 적용함으로, 그리고 선행으로부터 주님께 헌신함으로 거짓에서 깨끗해져야 한다.

세부적 영적 의미

이스라엘 백성에게 죄 바침의 제물로 수염소 두 마리와 태워 바침의 제물로 수양 한 마리를 가져오라 함이란 외적 인간은 신앙의 진리들을 응용함으로 거짓에서 깨끗해져 이를 통해 악이 제거되고 선행으로부터 주님께 헌신해야 함을 말한다. (9670-6, 4169, 725, 10042, 10053)

6절. 그리고 아론은 죄 바침의 수소를 증정하라, 이것은 자신을 위해서이다, 그리고 자신을 위해, 그리고 그의 가문을 위해 보상 받게 한다.

영적 의미

그리고 자연적 수준 속의 내면도 주님을 인정함을 통해 악이 제거됨으로 해서 깨끗해져야 하고, 그러므로 해서 자연적 인간과 영적 인간의 재회가 선과 진리 양면에서 결과된다.

세부적 영적 의미

회중에 관련시켜 비교해 볼 때 아론은 외적 인간에 관련되기 보다는 내적 인간에 속한 것을, 그 이유가 아론은 선을, 회중은 진리를 나타내기 때문이다. 수소란 자연적 인간 안에 있는 순진의 선을; 죄 바침의 제물이란 순진이 이 선을 통해 악이 제거되도록 예배함을; 아론이 자신과 가문을 위해 보상을 받게 함이란 선과 진리 양쪽에 관련되는 바 자연적 인간이 영적 인간과 재회함을, 그 이유는 아론 자신은 선을, 그의 아들들은 가문을 구성하는 바 진리를 말하기 때문이다. (9946, 4547-21, 9990, 3400, 9946)

7절. 그리고 그는 염소 두 마리를 가져 오라, 그리고 그것들을 만남의 천막의 문에서 주님 앞에 두어라.

영적 의미

이러면 신앙의 진리가 주님으로부터 있다는 것과 그분께서는 천국을 통해 역사하신다는 것을 인정하게 될 것이다

세부적 영적 의미

아론이 염소 두 마리를 가져다가 만남의 천막 문간 주님 앞에 세워놓음이란 신앙의 진리들이 주님으로부터 임을 인정하고 그분의 역사가 천국을 통해 있음을 인정하는 것을 말한다.(9670-6, 4169, 725, 2456, 3540-3)

8절. 그리고 아론은 염소 두 마리 위에 제비를 던져라. 하나는 주님을 위해, 그리고 다른 하나는 아사셀(Azazel)을 위해.

영적 의미

신성한 섭리에 의해 인간은 선과 악, 진리와 거짓 중 하나를 자신을 위해 선택해야만 한다.

세부적 영적 의미

제비뽑음이 아론에 의해 말해질 경우, 이는 신성한 섭리에 의존함을; 제비 하나는 주님께란 인간이 선을 자유롭게 선택함을; 제비 하나를 아사셀에게란 아사셀이 “추방, dismissal”이란 뜻인 바, 이는 인간이 악을 제 스스로 거절함을 뜻한다. “인간은 선과 악 중 하나, 또는 진리와 거짓 중 하나를 자신을 위해 선택해야만 한다”라고 말해진다. 즉 선택을 자유롭게 행사해야 한다는 말이다. 그 이유는 모세의 지시에 아론의 순종이 포함되어 있으면서도 동시에 신성한 섭리에 의존함이 제비를 뽑는데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삶의 모든 행동 속에서 선을 원리로 해서 움직일 경우 그는 신성한 섭리에 의존하는 것이 된다 (시편 37:3참조). (9946, 3239, 9093-5, 2001, 10023)

9절. 그리고 아론은 제비가 주님을 위해 떨어진 염소를 증정하라, 그리고 그것을 죄 바침을 위해 바쳐라.

영적 의미

그런 다음 그는 선을 원리로 해서 악이 제거되고 거절될 수 있도록 주님을 예배해야만 한다.

세부적 영적 의미

아론이 주님의 몫으로 떨어진 염소를 끌어다가 죄 바침의 제물로 바침이란 악이 거절되고 제거되기 위해 인간은 선을 원리로 해서 주님을 예배해야만 한다는 것을 말한다. (9946, 9670-6, 4169, 725, 3400)

10절. 그러나 아사셀을 위해 제비가 떨어진 염소는 주님 앞에 산채로 놓아두어 그것을 위한 보상을 받게 하고, 아사셀을 위해 광야로 그것을 떠나 보내라.

영적 의미

그리고 반드시 인정해야 할 것이 있다. 인간은 자신만으로는 악에서 온 거짓 안에 실지로 있다는 것, 외적 인간과 내적 인간이 재회하려면 위의 거짓을 완전히 거절해야 한다.

세부적 영적 의미

아사셀의 몫으로 뽑힌 수염소는 산채로 여호와 앞에 세워 두었다가 죄 바침의 제물로 삼아 광야에 있는 아사셀에게 보내라 함은 인간 스스로부터는 악에서 나오는 거짓 안에 실지로 있는 바, 이런 거짓을 완전히 거절함으로 인간이 내적 인간과 재회할 수 있으려면 주님 앞에서 자신의 참 모습이 어떠한지 인정해야만 한다는 뜻이다. (9670-6, 10042II)

11절. 그리고 아론은 죄 바침의 수소를 증정하라, 이는 자신을 위해서이다, 그리고 자신을 위해, 자기 가문을 위해 보상 받게 하라, 그리고 자신을 위해 있는 죄 바침의 수소를 죽여라.

영적 의미

그러나 무엇보다도 먼저, 선 가운데 있는 그는 자기 속의 선이 주님으로부터임을, 그래서 악이 제거되고 자연적 인간과의 재회도 있어 자기 속의 선이 내, 외적으로도 결과된다는 것, 이러므로 해서 주님을 예배할 준비도 갖추어진다는 것을 반드시 인정해야 한다.

세부적 영적 의미

아론이 자신을 위한 죄 바침의 제물로 수소를 증정함이란 무엇보다 우선적으로 선 가운데 있는 사람은 자신의 선이 주님으로부터임을 인정해야만 한다는 것을; 수소란 자연적 인간 안에 있는 순진의 선을; 죄 바침의 제물이란 이 순진의 선을 통해 악의 제거가 있도록 예배함을; 아론이 자신과 자기 집안을 위해 보상을 만듦이란 자연적 인간이 영적 인간과 재회하되 선과 진리가 내, 외적으로 있게 됨을 말하는데 그 이유가 아론은 선을, 그의 집안을 구성하는 실지 인물이 그의 아들이므로 진리를 의미해서이다. 자신을 위해 죄 바침의 제물인 수소를 죽임이란 주님에 대한 예배를 준비함을 말한다. 세심한 독자의 경우 6절의 구절이 11절에서 반복되고 있다는 것에 주목하게 될 줄로 본다. 더불어 본 장의 10절까지는 전체에 대한 서론이자 요약이다는 것도 짐작할 것이다. 그 이유는 전체의 주제가 악과 거짓을 항구적으로 제거함에 관하여 서술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적 의미에서의 요약은 위 사항이 주님에 의해 설비되어 있다는 것, 내적 인간, 이를 보다 엄격히 말한다면 자연적 인간의 내적 부분은 거듭남이 개시될 때 악에서의 해방이 잠재적으로 있다는 것, 그렇게 해서 인간에게 위 사항이 보존 될 경우 그는 악으로부터의 시험이 함축하는 만큼에서 충분히 구원될 것임을, 이 때 사람에게는 선이 우세해지는 상태에로 진입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염두해 둘 사항은 깨끗해짐은 천국 자체 안에서도 역시 항구적으로 존재한다는 것, 따라서 계속되는 천국 삶에서도 거듭남의 진보는 영구히 이어지고 있다는 것에 관해서이다. (5619, 9990, 3400, 9946, 4574-4, 10024, 10211)

12절. 그리고 그는 주님 앞으로부터 불 붙은 숯을 가득 채운 향로를 가져 오라, 그리고 그의 손에 두드려 작아진 달콤한 향을 가득 채우고, 그리고 그것을 베일 안쪽으로 가져 가라.

영적 의미

주님으로부터 선을, 말씀으로부터 진리를 받는 것, 이것이 예배에서 감사를 나타냄이요 그가 받을 수 있는 것들이다. 그리고 이것은 선 밑에 조심스럽게 구분시켜 배열된다. 그러면 그는 가장 깊은 선에 대한 지각을 가지게 될 것이다.

세부적 영적 의미

주님 앞 제단에서 숯불을 향로에 담는다란 순수한 예배에서 주님으로부터 선을 받는 것, 이 선이 진리 안에서 체현되고 진리라는 저장소에 담겨 있다는 것을; 향이란 선으로부터 예배하는 가운데 감사히 받게 되는 말씀으로부터 온 진리를; 향기 좋은 향가루란 선 밑에 진리를 조심스럽게 구별하여 배열함을; 베일 안으로 향가루를 가져감이란 이로부터 가장 깊은 내면의 선을 지각함을 말한다. (5531, 934, 9714, 9475, 5620, 10303, 9670-6)

13절. 그리고 그는 주님 앞 불 위에 향을 놓아라, 하여, 향의 구름이 그가 죽지 않게 증거(궤) 위에 있는 자비석을 덮을 것이다.

영적 의미
그 다음 역시 신성한 선으로부터 진리와 선의 결합이 거행될 것인 바, 신성한 사랑과 자비가 예배자의 상태에 따라 외관에 희미하게 드러나는데, 이는 신성한 사랑의 명백함이 너무 강할 경우 영적 죽음이 있지 않도록 하시기 위해서 이다.

세부적 영적 의미

아론은 신성한 선을, 불 위에 있는 향이란 진리가 선과 결합함을; 향의 연기(cloud)로 자비석을 덮음이란 신성한 사랑과 자비가 예배자의 상태에 따라 외관상 희미하게 드러냄을; 증거(궤) 위에 있는 자비석이란 신성한 사랑이 말씀 속의 진리로 흐름을; 죽지 않도록 이란 신성한 사랑이 너무 많이 모습을 나타냄으로 영적 죽음이 초래되지 않도록 이란 뜻이다. (9946, 9475, 934, 9670-6, 9506, 9503, 7699, 7738)

14절. 그리고 그는 수소의 피를 가져 와라, 그리고 그것을 동쪽 자비석 위에 그의 손가락으로 뿌려라. 그리고 자비석 앞에서 그는 자기 손가락으로 피를 일곱 번 뿌려라.

영적 의미

그러면 깨끗해진 자연적 선으로부터 온 진리가 신성한 선으로부터 나오는 신성한 진리와 결합될 것이다. 이것은 거듭남에서 주님으로부터 획득한 거룩한 상태로부터 자연적 인간 안에서 능력을 가지고 이루어질 것이다.

세부적 영적 의미

수소의 피란 깨끗해진 자연적 선으로부터의 진리를, 동쪽에 있는 자비석 위란 신성한 선으로부터 진행되는 신성한 진리와 더불어를, 손가락이란 힘을, 이것은 자연적 인간 안에서 말해지는 사항인데, 그 이유는 수소의 피와 관련되고 있기 때문이다. 자비석 앞에 일곱 번 뿌림이란 거룩한 상태가 주님에게서 오는 거듭남으로 획득됨을 말한다.(창세기 1장 참조), (10047, 10026, 9506, 9503, 1250, 1430, 716)

15절. 그 다음 그는 죄 바침의 염소를 죽여라, 이는 백성을 위해서이다, 그리고 그것의 피를 베일 안쪽으로 가져 와라, 그리고 그가 수소의 피를 가지고 실시한 그대로 그것의 피를 가지고 실시한다, 그리고 그것을 자비석 위에, 그리고 자비석 앞에 뿌릴 것이다.

영적 의미

또한 자연적 인간의 바깥부분, 또는 신앙의 선 안에 있는 이들도 똑같은 방식으로 준비되어야 한다. 그 이유는 이 선 속의 진리도 천적 선같이 주님으로부터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거기에서도 내적, 외적인 결합이 있어야 한다.

세부적 영적 의미

그가 백성을 위한 죄 바침의 제물인 수염소를 죽임은 자연적 인간의 외적인 것 또는 신앙의 선 가운데 있는 사람은 위와 같은 방법으로 준비되어야 한다는 것, 베일 안으로 피를 가져감이란 이 선의 진리도 천국 선을 수단으로 주님으로부터 있게 되어 인간의 상태에 적응됨을; 자비석 위와 자비석 앞에 피를 뿌림은 위와 같되 내적, 외적으로 결합되어야 함을 말한다.(10024, 9670-6, 4169, 725, 4574-4, 10047, 9506)

16절. 그리고 그는 거룩한 장소를 위하여 보상(atonement)을 받게 하라, 그 이유는 이스라엘의 자손들의 불결함 때문, 그리고 그들의 범칙들, 모든 그들의 죄들을 아울러서 이기까지 때문이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그는 그들의 불결함 한 가운데에서 그들과 함께 거주하는 만남의 천막을 위해서도 그렇게 실시하라.

영적 의미

참으로, 천적 선이라 해도, 또는 이 선 안에 있는 이들이라 해도 반드시 신성한 선과 재회를 이루어야 하는데, 그 이유는 인간 그 스스로는 내면 이든 외면 이든 모두 불순하고, 악밖에 없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영적 선, 또는 그 선 안에 있는 이들, 자연적 선 또는 그 선 안에 있는 이들도 재회해야 한다. 이는 악뿐인 자신을 스스로 인정함을 수단으로 주님께서 가장 깊은 것들로부터 가장 표면의 것들에까지 이르러 인간과 현존하실 수 있게 하시기 위해서 이다.

세부적 영적 의미

성소를 위해 보상을 만듦이란 참으로 천적 선 또는 천적 선 안에 있는 이들 조차도 신성한 선과 재회하여야 함을; 이스라엘 백성의 불결함과 잘못들 그리고 지은 죄 때문이란 인간 자체로서는 외면이나 내면 모두에서 불순하고 악밖에 없기 때문임을; 불결해 있는 만남의 천막을 위해 이를 행해야 한다란 인간에게는 악밖에 없다는 자기 몫을 인정함으로 인간의 가장 깊은 내면의 것에서 가장 표면의 것에 이르러 주님이 함께 하시도록 하기 위해 영적 선 안에 있는 이들, 또는 자연적 선 안에 있는 이들도 위의 천적 선에 있는 사람들 같이 행해져야 한다는 뜻이다. (3210, 10042ii, 10130. 9156, 3530-3, 10153, 10130)

17절. 그리고 그가 거룩한 장소에서 보상을 받게 하려고 들어가고, 그가 나올 때까지 만남의 천막 안에 사람이 있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자신을 위해, 그의 집안 식구들을 위해, 그리고 이스라엘의 모든 회중을 위해 보상을 받게 하라.

영적 의미

그럼에도 진실로 자기의 생명이 재회하기 위해 가장 깊은 선으로부터 인간의 예배도 마치 자기 스스로 예배드리는 것 같이 전적으로 있어지되 거기에는 악이나 거짓이 가장 깊은 선과, 내면의 선과, 가장 바깥쪽의 선과의 어떤 혼합도 있어져서는 안 된다.

세부적 영적 의미

아론이 지성소에 들어갈 때 아무도 만남의 천막 안에 있지 말라란 가장 깊은 선으로부터 오는 인간에 의한 주님의 예배는 어떤 악과 거짓의 섞임 없이 자신 스스로 예배드리듯 있어져야 한다는 것을; 자기와 자기 집안과 이스라엘에 온 회중을 위해 보상을 만듦이란 가장 안쪽의 선, 내면의 선, 가장 바깥의 선에 관하여 인간의 생명과 주님의 생명이 재회함을 말한다.(9946, 3210, 7424, 10042ii,9946, 4574-4)

18절. 그리고 그는 주님 앞에 있는 제단으로 나가라, 그리고 그것을 위해 보상을 받게 하라, 즉 수소의 피를 가져 와라, 그리고 염소의 피를 가져 와라, 그리고 그것을 빙둘러 있는 제단의 뿔들 위에 발라라.

영적 의미
위 결과로 해서 신성한 선으로부터 온 천적 선이 인간의 최말단에까지 흐를 것이고, 거룩한 예배에서 진리와 선의 결합이 서로 간에 그리고 상호적으로 있으면서 말씀의 글자적 의미 속의 신성한 진리를 수단으로 충만되어 능력을 가지게 된다.

세부적 영적 의미

아론이 주님 앞에 있는 제단으로 나감이란 신성한 선으로부터 온 천적 선이 인간의 최말단에까지 흐르게 될 것임을, 보상을 만듦이란 외적 인간이 내적 인간과 재회함을, 수소의 피, 염소의 피를 가져오고 제단 뿔들 위에 두루 바름이란 거룩한 예배에서 진리가 상호 간에 그리고 쌍방 간에 결과될 것을 말한다. 위에서 “말씀의 글자 의미에 있는 신성한 진리를 수단으로 충만함과 능력…”이라고 말한 이유는 제단의 네 귀퉁이에 각각 뿔이 있기 때문인데 이는 완성을 의미하고 신성한 진리는 말씀의 글자 의미 안에서 완성과 충만을 이루기 때문이다. (9946, 5337, 10001, 10242, 10042ii, 제 14,15절, 10027, 9720, 6943, 9349)

19절. 그리고 그는 자기 손가락을 가지고 일곱 번 그것 위에 피를 뿌려라, 그리고 그것이 이스라엘의 자손들의 불결함으로부터 깨끗해지게(hallow) 하라.

영적 의미

이 사항들은 거듭남의 거룩한 상태에서 인간 각자의 상태에 의해, 깨끗해짐과 예배함에 의해 인간의 타락한 상태에 있는 모든 불순함에서 교인을 해방되도록 하는 능력의 실시가 성취될 것이다.

세부적 영적 의미

손가락으로 제단에 피를 일곱 번 뿌려 이스라엘 백성의 불결함을 벗겨 깨끗하게 함이란, 이는 거듭나는 거룩한 상태 안에서 깨끗해짐과 예배를 수단으로 각자 상태에 따라 능력을 발휘함을 통해 성취되어야 할 것인 바, 이로부터 교회 속의 사람은 타락하려드는 상태에 기우는 것까지 포함된 불순함에서 해방될 수 있다는 말이다. (10047, 제14,15절, 10027, 716, 창세기 1장, 4545, 10130)

20절. 그리고 그가 거룩한 장소, 그리고 만남의 천막, 그리고 제단을 위해 보상 받게 함을 끝냈을 때, 그는 살아있는 염소를 제출한다.

영적 의미
그러므로 이제 거듭남의 상태가 내적 인간, 내면의 것들, 그리고 외적 인간이 주님과 재회함으로 충분히 완성될 때, 자신의 자연적 인간 안에는 지옥에서 온 악의 거짓으로 인해 얼마나 악으로 가득 차 있었던 가를 주님 앞에서 인정할 것이다.

세부적 영적 의미

성소와 만남의 천막과 제단을 깨끗하게 하는 예식을 끝내고 살려둔 염소를 끌고 옴이란 거듭나는 상태가 그 사람의 내적 인간, 내면의 것, 외적 인간의 모든 것이 주님과 재회함으로 충분히 완성되어질 때, 그 사람은 주님 앞에서 자기 속에 악으로 가득 차 있는 것이 지옥으로부터 와서 자연적 인간 안에 든 악에서 온 거짓의 유입에 의한 것임을 인정하는 것을 말한다.(10042ii, 3210, 3540-3, 10001, 9670-6)

21절. 그리고 아론은 그의 손 모두를 살아있는 염소의 머리에 놓아라, 그리고 그것 위에 이스라엘의 모든 불법들, 그리고 그들의 모든 범칙들, 그들의 죄들까지 고백하라. 그리고 그는 그것들을 염소의 머리 위에 놓아라, 그리고 준비가 된 사람의 손에 의해 광야 안으로 그것을 떠나보내라.

영적 의미

그리고 가장 깊은 선의 상태로부터, 의지와 이해함이 모든 능력을 다해서, 그는 이렇게 지각하여 고백한다. 전체적으로나 모든 각 부분들에서 신앙의 선에 어긋나던 점을, 신앙의 진리에 어긋났던 점을, 거룩한 선행 자체에 어긋났던 점이 있어 자기는 죄를 범했다는 것, 그렇지만 주님에 의해서라면 악을 거절 할 수 있다는 것, 그 악을 신성한 인간의 능력을 통해 자신에게서 분리되게 해서 그 악의 근원인 지옥에로 던질 수 있다 라고 고백한다.

세부적 영적 의미

아론이 살려둔 염소 머리 위에 두 손을 얹는다란 인간이 자기 속 가장 깊은 내면에 있는 선으로부터 의지와 이해함에 있는 모든 능력을 동원해 행동할 것임을; 이스라엘 백성이 저지른 온갖 잘못과 일부러 거역한 온갖 죄악을 아론이 고백함이란 전체 그리고 세부 사항에 관하여, 신앙 속의 선을 위반한 점들에 관하여, 신앙 속의 진리에 위반한 것들, 거룩한 선행 자체에 위반한 것 등등에 관해서 자신이 죄가 있음을 지각하고 고백하는 것을; 그 모든 죄를 염소 머리에 씌움이란 고백된 그 악들을 거절할 수 있는 힘과 자신이 그것들에서 분리될 수 있게 되는 것은 오로지 주님으로부터 온 능력만에 의해서 임을; 염소를 광야로 내어 보냄이란 지옥을 거절함을; 준비가 된 사람의 손으로란 신성한 인간의 능력에 의해서 임을, 그 이유가 손은 능력을 뜻하고, 그가 악과 잘못들을 거절할 수 있게 하는 모든 능력은 신성한 인간으로부터 진행되어 나오기 때문이다. 그리고 주님은 인간을 구원하실 준비가 언제나 되어 계신 분이시기 때문이다. (10023, 9946, 8066, 10061-2, 9156, 878, 6280-i)

22절. 그리고 염소는 고독한 토지 쪽으로 자기 위에서 그들의 모든 불법들을 나를 것이다.

영적 의미

거짓과 악이 분리되는 일은 주님께서 구속의 일을 통해 행하실 것이다. 그리고 거짓과 악은 선과 진리가 없는 이들과 더불어서만 남아 있게 된다.

세부적 영적 의미

염소가 그들의 죄를 모두 짊어짐이란 위 사항은 주님께서 구속의 역사를 통해 이루어질 것임을; 염소가 고독한 토지(황무지)로 가게 놓아둠이란 악과 함께 있는 거짓의 제거를; 이 구절에 있는 고독한 토지(solitary land)는 악을, 황무지(wilderness)란 거짓을 말한다. 그 반면 땅(land) 또는 황무지가 고독한 땅이라 불릴 경우, 이는 악과 거짓이 선과 진리로부터 분리된 채 남아있는 상태를 말한다. (9937-8, 683)

23절. 그리고 아론은 만남의 천막 안으로 가라, 그리고 그가 거룩한 장소 안으로 갔을 때, 그가 입은 것, 즉 아마포 옷들을 벗어라, 그리고 거기에 그것들을 남기고 가라.

영적 의미

그런 다음 선 가운데 있는 이들은 천국 삶의 즐거움에 거하게 되고, 거듭남으로 결과되는 모든 진리는 주님으로부터 왔을 뿐 자신으로부터 온 게 아니라는 것, 비록 자신 스스로 가지고 있어 행한 듯 보이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을 인정하게 될 것이다.

세부적 영적 의미

아론이 만남의 천막으로 들어옴이란 선 가운데 있는 사람은 천국 사람의 즐거움 안으로 들어갈 것임을, 고운 아마포 옷을 벗어 거기에 놓아둠이란 거듭남에서 결과된 모든 거룩한 진리들은 비록 자신 스스로 그 진리를 찾아 사용했다 할지라도 자신으로부터가 아닌 주님으로부터 임을 철저히 인정함을 말한다. (3540-3, 9670-6, 제 4절)

24절. 그리고 그는 거룩한 장소에서 물로 자기 살을 목욕하라, 그리고 그의 옷들을 입어라, 그리고 나간다, 그리고 자기의 태워 바침의 제물과 백성들의 태워 바침의 제물을 바쳐라, 그리고 자신과 백성을 위해 보상을 받게 할 것이다.

영적 의미

이런 거룩한 상태에서 그는 순수한 사랑으로부터 드리는 예배를 통해, 게다가 주님과 재회된 내적, 외적 인간 모두에서 깨끗해지는 것을 계속해 갈 것이다.

세부적 영적 의미

성소에서 아론이 목욕함이란 위 거룩한 상태에서도 깨끗함은 계속 있어야 한다는 것을; 옷을 입음이란 진리로 입히는 것을; 나옴(coming forth)이란 이 구절의 경우 새 삶이 작동하는 것을; 자기의 태워 바침의 제물과 백성의 태워 바침의 제물을 바침이란 내적, 외적 인간 모두에서 순수한 사랑으로 예배함을; 자신과 백성의 보상을 만듦이란 주님과의 재회, 그리고 외적 인간이 내적 인간과 재회함을 말한다. (3147, 3210, 1853, 10053, 제 4,5절, 10042ii)

25절. 그리고 죄 바침의 제물의 지방을 그는 제단 위에서 태울 것이다.

영적 의미

그리고 심정으로부터 자기의 천적 선 모두가 주님의 은혜 때문으로 돌릴 것이다.

세부적 영적 의미

제단에서 죄 바침의 제물의 지방을 태운다란 모든 천적인 것을 주님께 진심을 다해 돌려드림을 말한다. (10033)

26절. 그리고 염소를 아사셀에게 보낸 사람은 자기 옷들을 빨아라, 그리고 물로 자기 살을 목욕하라, 그리고 후에 그는 진영 안으로 올 것이다.

영적 의미

신성한 인간으로부터의 유입을 통하여 이루어지되 자신이 해낸 듯 악에서 온 거짓을 거절한 모든 사람들은 이렇게 인정하게 될 것이다. 즉 자기가 천국적 상태에 들어가 계속 머무르기 위해서는 외적, 내적으로 계속 깨끗해져가야만 한다는 것이다.

세부적 영적 의미

아사셀에게 염소를 가게 한 사람이란 높은 의미에서는 주님을 나타내고 있으나, 낮은 의미에서는 신성한 인간으로부터 온 유입을 통해 악과 거짓을 거절하되 그것이 자신 스스로 행하듯 거절한 사람을 말한다. 자기 옷을 빨고 물로 목욕함이란 내적, 외적으로 깨끗해짐을, 진영으로 옴이란 위 사람이 천국 상태에로 들어와 거기에 남기 위해서를 말한다. (99378, 3147, 5006, 9215, 4236)

27절. 그리고 죄 바침의 제물의 수소, 그리고 죄 바침의 제물의 염소, 이것들의 피는 거룩한 장소에서 보상을 받기 위해 가져와지고, 진영 밖으로 운반하라. 그리고 그들은 그것들의 가죽들, 그리고 그것들의 고기, 그리고 그것들의 똥을 불에서 태워라.

영적 의미

순종이라는 자연적 인간의 선, 그리고 그로부터 있게 되는 신앙 속의 진리는 거듭나는 동안 즉 깨끗해지는 동안에도 영적 인간은 이렇게 실감한다. 이는 천국적 상태로부터 분리되어야 한다는 것, 그리고 거듭나는 과정에 연결되어 있는 모든 악과 거짓, 선과 진리인 듯 보여지는 것까지 순수한 천국 사랑의 힘으로 전부 거절되어야 한다.

세부적 영적 의미

죄 바침의 제물의 수소와 염소란 거듭나는 동안 실감된 신앙 속의 진리, 순종이라는 자연적 인간의 선을; 그 제물의 피를 성소에 가져옴이란 진리가 선과 결합한 결과 깨끗해짐을; 진지 밖으로 내어감이란 천국 상태에서 분리함을; 불로 태움이란 순수한 천국 사랑의 힘을 수단으로 거절함을; 또는 이기적 사랑에 오염된 이유로 정죄함을; 제물의 가죽, 살고기, 똥이란 불순한 것과 섞여 있는 진리와 선같이 보여지는 것들 모두를 말한다. (9990, 4169, 725, 10047, 10042ii, 4236, 934, 10055, 10035-7)

28절. 그리고 그것들을 태운 사람은 자기 옷들을 빨아라, 그리고 자기 살을 물로 목욕하라, 그리고 그 후에 그는 진영으로 와라.

영적 의미

거절의 과정 이후 즉 갖가지 종류의 악과 거짓을 가진 가상들을 거절함이 자신 스스로 해결한 듯 해치운 사람이라 해도 천국 상태를 충분히 실감하기에 앞서 더욱 외적으로 순수해져가야 한다.

세부적 영적 의미

위 제물을 태운 사람도 옷을 빨아 입고 자신을 물로 목욕한 후에야 진영으로 들어 올 수 있다란 거절이라는 과정이 끝난 후 조차에서도 갖가지 종류의 악과 거짓들로 나타나는 것들을 자신 스스로 하듯 거절하는 사람이라야 더욱 외적으로 깨끗해져서 천국 상태를 더욱 더 실감하게 된다는 말이다. (934, 10055, 3147, 4236)

29절. 그리고 이것은 너희에게 영원한 법령이다. 즉 일곱 째 달에, 그 달의 열 번째 날에, 너희는 너희 혼들을 괴롭게 하라, 그리고 본토박이 이든, 너희 사이에 체류하는 외국인 이든 아무 일도 하지 말라.

영적 의미

이것은 거듭나는 과정 즉 신앙과 선행의 거룩한 상태에 있는 외적 인간을 깨끗하게 하는데 관련되는 신성한 질서의 영원한 법칙이다. 이때 선과 진리에 관한 아껴두실 것들이 시험에 승리함을 통해 그 속에 충분히 이식된다. 이로부터 천국적 평화와 쉼을 실감하게 된다. 이 법칙은 내적 교회의 사람 이든 외적 교회의 사람 이든 똑같이 적용된다.

세부적 영적 의미

대대로 지킬 규정이란 신성한 질서의 영원한 법칙 임을, 일곱째 달의 십 일에 너희는 너희 영혼(으로 인해) 괴로워 해야 할 것이다(ye shall afflict your souls)란 선과 진리에 관해 아껴두신 것들이 충분히 이식되어진 거듭나는 과정에서 신앙과 선행의 거룩한 상태에 있는 외적 인간의 깨끗함에 관하여를, 아무 일도 하지 않음 또는 안식일이란 시험에서 승리한 상태, 그로부터 천국 상태를 실감함과 휴식을, 본토인, 체류하는 외국인이란 위의 규정은 내적 교회에 속하든 외적 교회에 속하든 똑같이 응용될 수 있음을 말한다.(7884, 851, 570, 1947, 8889-90, 7908)

30절. 이 날에 너희를 깨끗하게 하기 위해, 너희를 위해 보상을 받게 할 것이다. 모든 너희의 죄들로부터 너희는 주님 앞에서 깨끗해질 것이다.

영적 의미

위 법칙에 의거해서 주님의 인간이 신성이 되심에서는 신성한 인간이 신성 자체와, 그리고 거듭나는 과정에서는 인간이 주님과, 또는 외적 인간이 내적 인간과의 재회가 성취되어질 수 있다. 위 모든 과정의 결과는 인간을 충분히 구원시켜 주는바, 그가 천국 상태에 있도록, 모든 실제의 악과 거짓, 불순함으로부터도 해방되게 한다.

세부적 영적 의미

“이 날은 너희가 깨끗해지도록 너희에게 보상을 받게 할 것이다”란 주님의 인간이 신성이 되심 측면에서는 인간과 신성이 재회하는 것, 거듭남의 측면에서는 인간이 주님과 재회하는 것, 그리고 외적 인간이 내적 인간과 재회함으로만 성취될 수 있을 것임을 말한다. “모든 너희의 죄가 주님 앞에서 깨끗해질 것이라”란 천국 상태에 있는 사람이 모든 실지의 악과 거짓 그리고 불순함으로부터 완전히 해방되는 것이 거듭남의 모든 과정의 결과임을 말한다.(10042ii, 4545)

31절. 이것은 너희에게 엄숙한 쉼의 안식일이다, 그리고 너희는 너희 혼들을 괴롭혀라. 이것은 영원히 법령이다.

영적 의미

정녕 위 천국적 상태는 시험에 승리함에서 파생되는 쉼과 평화의 상태이다. 더구나 이 상태는 영원한 상태이다.

세부적 영적 의미

철저하게 쉬어야 하는 안식일이요 너희 영혼으로 인해 괴로워하는 날이요 대대로 지킬 규정이다 함은 이 천국 상태는 시험에 승리함에서 오는 평화와 쉼의 상태요, 영원한 상태 임을 말한다. (8889, 8890, 7884)

32절. 그리고 기름부워지고, 자기 아버지 대신에 성직자이도록 성직에 임명되는 성직자가 보상을 받게 하라, 그리고 아마포 옷을 입어라, 거룩한 옷들 까지 입어라.

영적 의미

이것은 계속적인 교회 상태 안에서 진리와 결합함을 수단으로 하는 천국 선에서 모두 결과된다. 그리고 주님과의 재회는 자연적 인간에 있는 외면의 진리들을 도구로 삼아 결과된 것인 바 이도 거룩함의 상태이다. 그 이유는 이런 진리들도 선으로부터인바 거룩하기 때문이다.

세부적 영적 의미

대를 이어가며 성직자 직분을 맡도록 예식을 갖추어 기름 부어 세운 그가 아마포로 만든 제복, 곧 거룩한 옷을 입고 있다란 위 상태는 교회의 계속되는 상태 속에서 진리와 결합함을 수단으로 하는 천국 선으로부터 모두 결과될 것이요, 그리고 주님과의 재회는 자연적 인간의 외면에 있는 진리를 도구로 해서 결과 될 것이요, 거룩함이라는 상태는 위 진리들이 선으로부터 거룩하기 때문이다. (9946, 9954, 10076, 5912, 10042ii, 7601, 2146)

33절. 그리고 그는 거룩한 성소를 위하여 보상을 받게 할 것이다, 그리고 그는 만남의 천막을 위하여, 제단을 위하여 보상을 받게 할 것이다. 그리고 그는 성직자들을 위하여 그리고 집회의 모든 백성을 위하여 보상을 받게 할 것이다.

영적 의미

그렇다. 이런 수단들까지도 인간은 모든 천국들, 즉 천적, 영적, 자연적 천국과 조화되도록 해야 한다. 이 조화는 선에 관해서도, 진리에 관해서도 모두에서 있어야 한다.

세부적 영적 의미

거룩한 장소와 만남의 천막과 제단, 성직자와 집회의 백성을 위해 깨끗하게 함이란 위의 수단으로 해서 인간은 천적, 영적, 자연적 천국 모두와 그리고 선에 관하여, 진리에 관하여 모두에서 하모니가 있게 된다는 것을 말한다. (10042ii, 3540-3, 994-6, 1259)

34절. 그리고 일 년에 한번 이스라엘의 자손들을 위해 보상을 받게 하는 것은 너희에게 끝이 없는 법령이다. 그리고 그는 주님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셨던 대로 실시했다.

영적 의미

이것은 악에 관한 인간의 상태 때문에 있어지는 주님과의 재회에 관한 영원한 법칙이다. 이 법칙은 모든 교인과 더불어 영구적이다. 이 속에서 선은 주님으로부터 온 진리에 의거 언제나 행동한다.

세부적 영적 의미

이것은 끝이 없는 법령이라 함은 이것은 신성한 질서의 영원한 법칙이라는 것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일 년에 한 번씩 보상을 받게 함이란 악에 관한 인간의 상태 때문에 있게되는 주님과의 재회를, 또 이것은 항구적임을; 주님이 모세에게 명령하신 대로 함이란 위의 일 속에서 선은 주님으로부터 온 진리에 따라 언제나 행동한다는 것을 말한다. (7884, 10042ii, 10211, 9946, 7010, 20001)

16장의 종합적 고찰

본 장은 보상(Atonement)에 관한 장이라 불리워도 괜찮을 정도로 보상에 관한 많은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 따라서 실제의 응용에 적절하기도 하다. 본 장의 시작부터 우리를 위한 교훈이 놓여져 있다. 교회 속의 사람에 대한 계시는 계속 있지만, 그 계시는 인간의 상태에 상당히 좌우된다. 우리는 우리 한 가운데에 말씀을 언제나 가지고 있다는 것은 빼거나 더 할 필요도 없는 진실이다. 그러나 우리 속에서 이미 친숙해진 진리들을 언제나 똑같은 빛에서 보지 않는 것도 언제나 있는 진실이기도 하다. 아론의 두 아들, 나답과 아비후의 죽음은 외적일 뿐인 예배는 철저히 거절된다는 것을 표현하고 있다는 것은 이미 살핀 바 있다. 한 가지 확실하다고 생각되는 것은, 위의 나답과 아비후의 사건이 지닌 의미가 각 자의 경우에서 있게 될 때마다 영적 분위기는 더 명백해진다는 것, 즉 천국의 태양이 우리 위에 내리비칠 것이고, 우리는 진리를 알게 되는데 과거 새로운 빛으로 충분히 알았다고 생각하고 있던 과거 속의 진리까지 포함해서 다시 알게 된다. 우리는 각자의 마음에 아주 풍부하게 진리를 저장하려고 지적 수단을 동원해 애를 쓴다. 그렇게 하는 것이 매우 유익한 일인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제 아무리 많은 진리의 지식이 저장되었다 해도 형식주의(externalism)를 탈피해 들리워질 때 만이, 들어 올려진 것만큼에서만 진리의 참 맛, 그 영광을 실감할 수 있다. 그렇다고 너무 걱정할 필요도 없다, 그 이유가 우리는 주님을 예배하면서 잘못된 것을 거절하기도 하고 올바른 것은 소중히 하는 노력을 때때로 실행하기 때문이다. 이럴 때마다 우리는 새로운 계시(밝히 알게 해주심)를 가지게 된다.
이제 본문으로 들어가자. 오늘 본문에서 아론은 선의 상태를 표현한다. 그러나 보다 정밀하게 말한다면, 표현하는 선의 상태보다 더 높은 신성한 진리로 계발된 외적인 선을 표현하고 있다. 이상스럽게 말하는 듯 여겨지기도 하겠지만, 진리는 이 외적인 선을 무엇보다 먼저 가르친다는 것, 그렇다해도 이 선은 아주 깊은 사항들 안으로 들어가게 해줄 수는 없다. 그리고 모든 것은 한 때라도, 또는 모든 상태에서 이 외적인 선에 머무른다. 이 얼마나 장엄한 진리인가? 그 이유가 우리의 영적인 집의 기초와 낮은 층은 반드시 잘 놓여져야 하기 때문이다. 자연적 삶을 선하게 꾸릴 수 없는 사람은 영적인 삶 역시 선하게 꾸릴 수 없다. 따라서 우리는 먼저 자연적 진리들을 배워야만 한다. 이것이 구름인 바, 우리가 영적 진리의 영광을 납득 할 수 있기 전, 꼭 거쳐가야 할 일이다. 그러면 어떻게 인간은 거룩한 진리로 명시되고 있는 이 거룩한 삶에로 진입할 수 있을까? 확실한 방법은 회개의 일을 수단으로, 주님을 섬기는데 모든 애착을 바침으로, 질서를 따르기 위해 말씀 속의 귀중한 모든 진리를 적절히 사용함으로, 계발된 총명과 병합된 사랑이라는 쌍방에 공통되는 끈(bond)을 수단으로 질서를 따름으로 가능해진다. 이는 먼저 내적 측면의 선으로부터, 그 다음 외적 측면의 진리로부터 행해져야 한다. 이것이 본 장의 서문의 절반에 해당된다. 더불어 이런 상태를 수단으로 그 삶을 실감하기를 갈망하는 상태에 있다면 주님께서 그 삶의 맛을 보게 해준다.
한 걸음 더 전진된 상태가 서문 후반에 기술되고 있다. 여기서 우리의 시선을 모아 보아야 할 것은 두 마리의 염소, 그리고 왜 두 마리이어야 하는지, 성직자의 경우 한 마리만 필요했었는 바 궁금한 대목이 생기지 않을 수 없다. 백성을 위해서는 두 마리 염소가, 성직자를 위해서는 수소 한 마리가 죄 바침의 제물로 요구되고 있다. 그러나 태워 바침의 제물로서는 각기 수양 한 마리가 요구되고 있다. 이쯤해서 본문을 곰곰히 생각하는 것을 잠시 중지하고 과거 심각하게 가르쳐온 사항, 즉 “그리스도, 천국의 어린 양이 우리 죄를 짊어지셨다”라는 대목을 기억에서 끄집어내어 보자. 위 말은 그분께서 모든 인류를 위해 보상(속죄, atonement)를 만드셨다는 것, 즉 죄로 인해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의 처벌을 인간 대신 실제로 짊어지셨다는 말이다. 우리가 궁금히 여기게 하는 것은 왜 그분이 세상의 죄를 짊어 나르는 하느님의 어린 양이라 불리셨는가, 그럼에도 보상(속죄)에 관한 본문의 경우 죄를 짊어나르는 모습을 어린 양이 아니라 왜 두 염소가 확실하게 그려주고 있는가에 대해서이다.
이외에 또 하나 궁금한 것은, 주님을 위해 제비 뽑힌 염소는 죄 바침의 제물로 바쳐지고, 아사셀을 위해 뽑힌 염소는 산채로 광야에 내보냈는가 이다. 더 주목해 볼 것은, 보상은 죽여진 수소와 염소의 피를 뿌리는 등 세세하게 예식이 진행되도록 지시되고 있는 반면 아사셀을 위한 염소에 관하여는 그 염소가 그들의 모든 죄를 나른다 라고 간단히 언급하고 말았는가 이다. 이 사항들을 자세히 들여다보기로 하자. 너무나 흔하게 알려진 견해에 의하면, 제물로 바쳐진 동물은 인류를 위해 벌과 대체 되는 것으로서 십자가 위에서 제물이 된 주님을 표현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조금만 더 신경을 기우려 생각한다면 위의 말은 본문의 경우에는 해당이 안 된다는 것을 보여 줄 것이다. 그 이유는 태워 바침의 제물들은 주님에게 달콤한 향기(a sweet savor unto the Lord)라 불리고, 제물은 그분의 식사(His meat)라고 불리기 때문이다. 이 외에도 죄 바침의 제물은 최고로 거룩하다고 까지 말하고 있다. 이런 생각들로부터 명백해지는 사항이 있다. 그것들이 죄에 대한 처벌을 표현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유월절 양으로서 희생되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유월절을 지킵시다(Christ our passover is sacrificed for us; therefore let us keep the feast)” (고린도전 5:7-8) 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태워 바침의 제물이나 제물들은 인간이 지닌 애착들 중 최고의 애착들을 주님께 바치는 것으로 간주해야 하는데 이에 대해서 얼마나 더 추론해야 납득이 갈까? 하느님의 어린 양은 주님의 인간 부분이 신성이 되시어 그분 안의 신성과 하나를 이루는 것을 뜻한다. 실상, 어린 양이란 순진 안에 있는 가장 높은 수준의 천적 선, 그리고 주님 안에서 신성한 선, 또는 신성한 인간을 명시하는 용어이다. 이 사항들이 악의 절대적 권세로부터 모든 인류를 구속해 주셨고, 이것이 악을 제거하는 바, 그분을 믿고 그분을 사랑함으로 거듭남을 통해 자기의 악이 제거되기를 소원하는 각 개인에게 있는 악도 제거 해준다. 결코 다른 방법에서가 아닌 위와 같은 방법에서 주 예수는 세상의 죄를 짊어 나르는 진정한 하느님의 어린 양이시다.
그렇다면 왜 오늘 본문에서 주님이 수소나 염소가 아닌 어린 양으로 표현되지 않았을까? 그 이유는 신성한 진리의 몇 가지 세부 사항이 어린 양이 등장될 경우 잘 표현될 수 없기 때문이다. 수소와 염소가 등장한 것은 주님에 관련된 사항, 즉 자연적 측면의 신성이 되심이 내적 측면과 외적 측면에서 인간성이 전적으로 거절되었다는 것까지 의미되도록 하시기 위해서, 그런 반면 태워 바침의 제물인 수양은 영적 측면을 명시해 주고 있다. 제물로 바쳐지는 어린 양, 수양, 수소, 염소에 대한 뜻을 우리가 헤아린다면, 신성이 되신 인성을 가장 높은 수준에서 가장 낮은 수준에 이르기까지 모두를 말씀 속에서 어떻게 표현하고 있을 것인가를 알게 될 것이다. 더불어 충분히 거듭난 사람의 선한 애착들이 두 염소가 지닌 의미에서 아주 확실한 방식이 동원되어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제물로 바쳐진 동물들, 죄 바침의 제물까지 포함해서 이것들이 처벌로 고통 당하는 희생자(victim)를 표현하거나 의미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얼마나 잘못되었는지를 보여준다.
이제 위 사항들은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는 주님의 피에 관한 공부 쪽으로 우리를 옮겨가게 한다. 그리고 만남의 천막과 성막의 여러 부분에 연속적으로 피가 뿌려지는 사항에 관한 공부가 이어진다. 우선 후자를 먼저 거론해 보자. 예비 행위가 우리로 먼저 주목하게 한다. 제단에서 불을 취하고 향기로운 향가루를 들고 베일 안으로 들어가는 것에 대해서이다. 이는 인간이 자기가 가장 깊은 선을 지각할 수 있기 전, 거듭나는 과정에서 선과 진리를 미리 영접함으로 준비되어야만 한다는 뜻이다. 그 다음 그가 이 지각을 가졌을 때, 이 지각 자체는 관계적으로 선함과 진리의 외적 측면과 희미한 결합을 구성한다. 그 뒤 모든 국면에서 충만된 결합이 있게 될 것이다. 이런 준비과정, 그 과정에서 간혹 체험을 허락하시는 주님께 먼저 감사를 드려야 할 것이다. 그 이유는 준비 과정에서 조금 밖에 안되는 것을 음미했다 해도 우리 기억에 남아 꾸준히 우리를 자극하여 준비 완료라는 미래 상태를 향해 기쁘게 도전하도록 해주기 때문이다. 이와 연결된 가르침을 상기해 보도록 하자. 즉, 우리는 천국적 삶을 실감하되 수준별로 실감하도록 소개되어야만 한다. 그 이유는 우리의 현재 수준에 걸맞지 않을 경우 영적인 상해를 받거나 죽음을 초래하기 때문이다. 그렇다해도 왜라는 질문을 다시 던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 이유는 선과 진리 또는 주님이 우리를 파괴되게 하거나 상함을 입게 하기 때문이라는 것은 당치 않은 것이고 단지 우리 자신이 알아 차리지도 못하는 악이나 실수가 우리로 잘못된 행위를 저지르게 하므로 해서 영혼에 상함을 입히고 때로는 죽게 하기 때문이다.
주님의 피는 그분으로부터 오는 신성한 진리를, 그분의 살은 신성한 선을 의미한다. 이 두 가지를 하나로 묶어 말하면 주님의 생명을 명시하는 말이다. 이러므로 그분이 말하시기를, “너희가 사람의 아들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지 않으면 너희 안에 생명을 가지지 못한다” (요한 6:53), 그리고 “사실은 사람의 아들이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목숨을 바쳐 몸값을 치르러 온 것이다” (마태 20:28). 이 두 절을 한데 묶어 보면, 인간은 주님으로부터 선과 진리를 받음으로 영적 자양분을 얻게 되고 뿐만 아니라 악에서 해방된다는 것, 같은 말로서 죄에서 깨끗해진다는 것이다 (계시록 1:5). 그러므로 그분이 신체적으로 당하신 고통이나 실제의 죽음, 지옥의 모든 권세와 치른 영적 싸움인 그분의 시험들이 각 개인을 죄로부터 깨끗하게 할 수 있다 라는 생각을 품는 사람은 누구든지 누군가에게 사기 당해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분께서는 시험과 시험에서의 승리를 하나의 수단으로 해서 집합적 측면에서의 인류를 악의 절대적 권세로부터 영원히 해방되게 하셨다. 이것이 구속의 일(the work of Redemption)이다. 그 반면 이 위대한 일의 결과로 모든 사람은 말씀 속의 진리, 특별한 용어로는 “사람의 아들”을 수단으로 바깥쪽 자기 삶이 우선 깨끗해진다. 이로 인해 우리는 선함과 진리라는 주님의 생명을 받는데 이것이 살과 피로, 또는 성만찬의 빵과 포도주로 의미되고 있다. 이로부터 우리는 주님과 결합을 가진다. 이 결합은 각자 삶의 모든 수준을 망라해서 있어진다. 그런 이유는 각자에게 선과 진리의 결합이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제물로 바쳐진 동물의 피를 뿌리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리고 이것이 보상(Atonement)이라는 위대한 일을 구성한다. 이 보상은 가장 높은 의미에서는 주님 안에서 인간이 신성과, 신성이 인간과 결합하는 것을 의미하고, 낮은 의미에서는 주님이 인간과 결합한다는 것, 그리고 인간이 주님과 결합하는 상호적 결합을 말한다. 이에는 주님께서 신성이 되심을 수단으로 인성을 신성으로 만드셨듯이 거듭남으로 천사가 된 사람 속의 내적 인간과 외적 인간의 결합이라는 의미도 포함하고 있다.
이상으로부터 만남의 천막 각 부분에 제물로 바쳐진 동물의 피를 뿌림으로 죄를 벗게 하는 예식에 관한 의미를 충분히 보았으리라 생각된다. 그러나 아직 더 생각해 보아야 할 요점이 있는데, 이 예식 후에 아사셀을 위한 염소로 보상을 왜 만들었는가? 왜 예식 자체는 매 해 어떤 날에 한 번 거행되는 것인가? 진짜 보상 또는 재회에 관한 사항은 악에서 해방됨과 주님으로부터 선을 받는 것으로 구성되고 있다는 것은 이미 살핀 바 있다. 그러면 추방이라는 예식에 무엇이 포함되고 있을까? 그것이 뜻하는 바, 인간이 거듭난 후, 그러므로 천국 자체까지 일괄해서 주님께서는 계속 거듭난 사람으로부터 악이 제지되고 선 안에 그가 거주하도록 배려하신다는 것, 이는 신성한 인간으로 존재하는 고정된 선, 세력이 강한 선을 통해 전력을 쏟는 영향력을 수단으로 이루어 주시고 있다는 것, 이 일은 악이 제자리에 머물도록 지금, 그리고 영원까지 큰 힘으로 작용되고 있다는 것, 악이 아주 경미한 수준의 차이를 두고 우세해지는 것까지도 막으신다는 것, 각 사람이 제 나름대로의 선용의 삶을 누리도록 영원히 배려하신다는 것을 뜻한다. 이는 최상의 의미에서 언제나 준비를 갖춘 사람, 천국에서는 천사 자신이다. 그리고 거듭나고 있는 사람의 경우, 이것은 그가 지닌 선과 진리의 강하고 고정된 원리로서 드러내진다. 이상에서 살핀 내용은 염소를 추방함에 뒤를 잇는 반복된 씻음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나마 설명이 되어준다. 다시 말해서, 천국에서 주님은 천사들을 계속적으로 더욱 더 깨끗해지게 하신다. 그리고 지상의 교회에서도 마찬가지로 섭리하신다. 사랑하는 심정으로부터 자기의 영적 태워 바침의 제물을 바치는 신실한 예배자를 그분께서는 안팎으로 깨끗하게 해 주신다.
마지막으로 보상의 날이 매 해 한 번, 일곱 째 달, 그 달의 십 일에 있어지는 이유, 그 날이 안식일이라고 하는 이유에 대해서이다. 인간은 영원히 깨끗해지고 있다. 그것은 신앙과 선행이라는 거룩한 상태에서 결과된다. 이것이 쉼과 평화라는 영원한 안식일을 생산한다. 그 이유는 천국에서는 모든 영적 전투가 중지되고 각 천사들이 자신으로부터 스스로 하듯 자유롭게 계속 행동할 수 있는데 그들에게 필요한 계속적인 깨끗해짐 만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상의 저녁과 아침, 봄과 여름에 상응되는 상태의 다양함 만을 통과해 가기 때문이다. 더불어 이런 변화를 수단으로 그 천사는 유한함의 상태에서는 분리될 수 없는 경미한 불완전함으로부터서도 더욱 더 자유로워져 가기 때문이다.
**********************************************

레위기 17장

성경: 레위기 1장

1. 그리고 주님께서 모세에게 이야기하셨다, 말하시기를,
2. 아론에게, 그리고 그의 아들들에게, 그리고 이스라엘의 모든 후손에게 이야기하라, 그리고 그들에게 말하라, 즉 이것은 주님께서 명령하신 것이다, 말하기를,
3. 이스라엘의 집으로부터 있는 자는 사람은 누구든지, 진영 안에서이든, 진영 밖에서이든 소, 또는 어린 양, 또는 염소를 죽일 경우,
4. 그리고 그것을 만남의 문으로 가져와 주님에게 봉헌물로 그것을 바치지 않을 경우이다, 즉 피는 그 사람에게 귀속되어질 것이다. 그는 피를 흘렸다. 그리고 그는 자기 백성 사이로부터 잘리울 것이다.
5. 그런즉 이스라엘의 자손들은 열린 들판에서 희생시키는 것, 곧 그들의 희생 제물을 가져 와라, 그들은 그것들을 주님에게, 만남의 천막의 문으로, 성직자에게 가져 오라, 그리고 그것들을 주님에게 평화 제물들의 희생 제물로 바쳐라.
6. 그리고 성직자는 만남의 천막의 문에서 주님의 제단 위에 피를 뿌려라, 그리고 주님에게 달콤한 향기를 위해 지방을 태워라.
7. 그리고 그들은 자기들이 그것들을 따라 음행하며 숭배한 수염소에게 자기들의 희생 제물을 더 이상 바치지 말라. 이것은 그들의 세대를 통털어 그들에게 영원한 법령이다.
8. 그리고 너는 그들에게 말하라, 이스라엘의 집안에 속한 자이든지, 또는 그들 사이에 체류하는 낯선 사람의 집안에 속하는 자이든, 누구든지 태워 바침, 또는 희생 제물을 바칠 경우,
9. 그리고 그것을 주님에게 바치려고 만남의 천막으로 가져오지 않을 경우, 이런 사람도 자기 백성으로부터 잘리울 것이다.
10. 그리고 이스라엘의 가문에 속한 이들이든, 또는 그들 사이에 체류하는 낯선 사람들의 집에 속한 사람이든 어떤 방법으로이든 피를 먹는 자에 대하여, 나는 피를 먹은 그 혼에 맞서 내 얼굴을 놓을 것이다, 그리고 그를 자기 백성 사이로부터 자를 것이다.
11. 육(flesh)의 생명은 피에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너희 혼들을 위한 보상을 받게 하려고 제단 위에서 너희에게 그것을 주었었다. 그 이유가 생명을 이유로 보상을 받게 하는 것은 피이기 때문이다.
12. 그러므로 나는 이스라엘의 자손들에게 말했다, 너희의 혼은 피를 먹지 말라, 너희 사이에 체류하는 어떤 낯선 사람도 피를 먹지 말라.
13. 그리고 이스라엘의 자손들로부터의 사람이든, 그들 사이에 체류하는 낯선 사람이든, 사냥하여 먹으려 하여 어떤 짐승 또는 가금류를 가졌을 경우, 그는 그것으로부터의 피를 쏟아라, 그리고 그것을 먼지(흙, dust)로 덮을 것이다.
14. 모든 육의 생명에 관하여, 그것의 피는 그것의 생명과 모두 하나이다. 그러므로 나는 이스라엘의 자손들에게 말했다, 너희는 육의 피는 여하튼 먹지 말 것이다. 그 이유가 모든 육의 생명은 그것의 피이기 때문이다. 그것을 먹는 자는 누구든지 잘리울 것이다.
15. 그리고 저절로 죽은 것, 또는 짐승으로부터 찢기워 죽은 것을 먹는 모든 혼 각각, 그가 본토박이이든, 또는 낯선 사람이든, 그는 물로 자기 옷들을 빨아라, 그리고 물로 자신을 목욕하라, 그리고 저녁 때까지 불결하다. 그 다음 그는 깨끗하다.
16. 그러나 만일 그가 그것들을 빨지 않는다, 자기 살을 목욕하지 않는다, 그러면 그는 자기 불법을 낳는다.

영적 의미 요약

* 선과 진리의 모든 수준에 있는 이들에게 주님께서 밝히 알게 하시는 사항이 있다. 만일 예배할 수 있는 그들의 힘이 천국을 통해 그분께로부터 오고 있음을 그들이 인정하지 않는다면 그들은 거룩한 선과 진리의 법칙을 위반한다는 것, 그 이유는 모든 진정한 예배는 내적 인간과 외적 인간이 조화를 이루도록 선으로부터 진실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1-5절.
* 이런 예배만이 진리가 선과 결합하게 해주고, 선행 없는 신앙을 제거해주는 바, 그것만이 항구적이고 영원하다, 6-7절.
* 그러므로 이런 예배를 갖지 않는 사람은 누구나 주님께서는 신성한 진리들로부터, 교회로부터 분리시키신다, 8-9절.
* 악과 거짓을 혼합시킴으로 거룩한 선행을 위반하는 사람은 자신을 주님에게서 돌리게 하고 진리로부터 자신을 분리한다. 그 이유가 선행은 교회의 생명인바 외적 예배는 반드시 내적 예배인 교회의 생명과 조화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10-12절.
* 설득(persuasion)을 원리로 선 또는 진리를 자기 것으로 삼으려는데 대하여, 단지 자연적으로부터의 설득일 경우, 악에 오염된 선으로부터의 설득일 경우, 13-16절.

각 절의 영적 의미

1절. 그리고 주님께서 모세에게 이야기하셨다, 말하시기를,

영적 의미

주님께서 신성한 진리를 수단으로 지각을 주시어 밝히 알게 하신다.

세부적 영적 의미

주님(여호와)란 그분의 사랑 측면에서의 신성한 존재를; 이야기하심(speaking)이란 유입을; 모세는 말씀 또는 신성한 진리를; 말하심(saying)이란 지각을 각각 뜻한다. (2001, 2951, 7010, 1791, 1822)

2절. 아론에게, 그리고 그의 아들들에게, 그리고 이스라엘의 모든 후손에게 이야기하라, 그리고 그들에게 말하라, 즉 이것은 주님께서 명령하신 것이다, 말하기를,

영적 의미

가르침이 유입과 계몽을 수단으로 천적수준의 선과 진리 안에 있는 이들에게, 그리고 영적 수준의 선과 진리가운데 있는 이들에게 주어지는 바, 이로부터 다음 사항이 보여진다.

세부적 영적 의미

모세가 말함이란 신성한 진리를 수단으로 하는 훈육을; 아론에게란 선 가운데 있는 이들에게를; 그의 아들들이란 진리가운데 있는 이들에게를; 이스라엘 백성이란 영적인 선과 진리 가운데 있는 이들에게를; “이것은 여호와의 말씀이시다”라고 말함(saying)은 유입과 보여진 것으로부터의 예증을 말한다. (7010, 10355, 9946, 3654, 5486, 5732, 1791, 1822)

3절. 이스라엘의 집으로부터 있는 자는 사람은 누구든지, 진영 안에서 이든, 진영 밖에서 이든 소, 또는 어린 양, 또는 염소를 죽일 경우,

영적 의미

자연적 선으로부터 또는 천적 선으로부터 또는 영적 선으로부터 이든지, 교회 내에서 이든지 교회 밖에서 이든지 주님을 예배하고자 준비하는 사람은 누구나

세부적 영적 의미

제물로 하려고 동물을 죽이는 어떤 사람이란 누군가가 예배를 준비 할 경우를; 소(ox)나 어린 양이나 염소란 자연적, 천적, 영적 선을 관계적 측면에서 뜻한다. 진영 안에서 이든 진영 밖에서 이든 이란 교회 안에서이든 밖에서 이든을 뜻하는데, 그 이유는 진영(camp)은 천국을 뜻하는 바, 그로부터 오는 교회도 의미하기 때문이다. (10024, 10132, 10038)

4절. 그리고 그것을 만남의 문으로 가져와 주님에게 봉헌물로 그것을 바치지 않을 경우이다, 즉 피는 그 사람에게 귀속되어질 것이다. 그는 피를 흘렸다. 그리고 그는 자기 백성 사이로부터 잘리울 것이다.

영적 의미

자연적 선으로부터 또는 천적 선으로부터 또는 영적 선으로부터 이든지, 교회 내에서 이든지 교회 밖에서 이든지 주님을 예배하고자 준비하는 사람은 누구나 그는 거룩한 선과 거룩한 진리에 위반되고, 그럼으로 해서 그는 자신을 천국과 교회로부터 분리시킨다.

세부적 영적 의미

만남의 천막 문에 제물을 가져오지 않음이란 천국을 통해 주님과 결합함을 수단으로 예배할 능력을 받게 된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음을, 주님의 성막 앞에서 그분께 대한 제물이란 모든 선을 가장 깊은 내면의 원리를 통하여 주님으로부터 있다는 것을, 흘려진 피가 당사자에게 귀속된다는 것, 그리고 피를 흘리는 것이란 거룩한 선과 거룩한 진리에 위반함을, 백성으로부터 잘라져 나감이란 천국과 교회로부터 분리됨을 말한다. (2356, 3540-3, 349, 922, 9481, 374, 683, 5302, 3294-5)

5절. 그런즉 이스라엘의 자손들은 열린 들판에서 희생시키는 것, 곧 그들의 희생 제물을 가져 와라, 그들은 그것들을 주님에게, 만남의 천막의 문으로, 성직자에게 가져 오라, 그리고 그것들을 주님에게 평화 제물들의 희생 제물로 바쳐라.

영적 의미

영적 인간이 알고 계속 존속시켜가야 할 것은, 예배에 있는 모든 선한 애착 속의 기쁨과 즐거움, 그것이 신성한 선에서 분리된 듯 나타나더라도 그것은 진실로 천국을 통해 주님과 결합함으로 주님으로부터 있게 된다는 것, 그리고 이는 선을 원리로 하는 수단으로 완전한 자유 속에 있는 예배에서 외적 인간과 내적 인간이 조화를 이루기 위해서이다.

세부적 영적 의미

이스라엘 백성이란 영적 인간을, 열린 들판에서 죽이려던 짐승들을 만남의 천막 문간의 주님께 가져옴이란 예배 안에 있는 모든 선한 애착 속의 기쁨과 즐거움은 마치 신성한 선으로부터 분리된 듯 나타나도 실지로는 천국을 통해 그분과 결합함을 수단으로 주님으로부터 임을 인정하는 것을, 성직자에게 가져옴이란 선을 원리로 하는 수단을, 평화 제물로 주님께 바침이란 외적 인간이 완전하게 자유로운 예배에서 내적 인간과 조화를 이루는 것을 말한다.(3654, 349, 368, 369, 2356, 3540-3, 10097)

6절. 그리고 성직자는 만남의 천막의 문에서 주님의 제단 위에 피를 뿌려라, 그리고 주님에게 달콤한 향기를 위해 지방을 태워라.

영적 의미

그러므로 선으로부터의 진리와 선의 결합이 천적 선임을 인정함을 통해 결과 될 것인데, 그 이유가 주님께 깊이 감사하며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는 모든 시험으로부터 계속적인 힘을 생산한다.

세부적 영적 의미

성직자가 만남의 천막 문 앞 주님의 제단에 피를 뿌림이란 선과 진리의 결합이 결과됨이 선으로부터 임을; 지방을 태워 주님에게 향기를 풍기는 것이란 “이는 깊은 감사를 나타내는 것, 주님이 열납하시는 것, 그리고 모든 시험들로부터 계속적인 쉼을 생산하기 때문에” 천적 선의 근거를 주님께 돌리는 것을 말한다. (9946, 10047, 2356, 3540-3, 10054, 10033)

7절. 그리고 그들은 자기들이 그것들을 따라 음행하며 숭배한 수염소에게 자기들의 희생 제물을 더 이상 바치지 말라. 이것은 그들의 세대를 통털어 그들에게 영원한 법령이다.

영적 의미

거듭나는 영적 인간은 진리를 계속 왜곡되게 하는 수단인 선행 없는 신앙의 거짓들로부터 주님을 예배하지 않을 것인 바, 그들의 외적 예배도 천국 삶의 과정에서 내적 예배와 완전한 조화를 이룰 것이다.

세부적 영적 의미

더 이상 제물을 수염소들에게 바치지 못한다란 거듭나는 사람은 더 이상 선행 없는 신앙 속의 거짓들로부터 주님을 예배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그것들을 따라 음행을 저지른다란 위의 거짓을 수단으로 진리가 계속 왜곡되는 것을, 대대로 길이 지킬 법령이란 천국 삶의 과정에서 외적 예배는 내적 예배와 완전한 조화를 영원히 이룰 것임을 말한다. (349, 922, 4169, 2466, 7884, 9789)

8절. 그리고 너는 그들에게 말하라, 이스라엘의 집안에 속한 자 이든지, 또는 그들 사이에 체류하는 낯선 사람의 집안에 속하는 자 이든, 누구든지 태워 바침, 또는 희생 제물을 바칠 경우,

영적 의미

더 나아가 천적이든 영적이든 표면적으로 주님을 예배하는데 종사하게 되는 내적 이든, 외적 이든, 영적 교회의 모든 사람에게 신성한 진리를 수단으로 지각함이 있다.

세부적 영적 의미

그들에게 말하다란 신성한 진리로부터 더 많은 지각이 있음을; 이스라엘 가문에 속한 사람이란 내적 교회에 속한 사람을; 그들 가운데 체류하는 낯선 사람이란 외적 교회에 속한 사람을; 태워 바침의 제물이나 희생 제물이란 천적이든 영적이든 주님을 예배하는데 표면에서 종사하고 있는 것을 말한다. (1791, 1822, 7010, 3654, 7908, 923)

9절. 그리고 그것을 주님에게 바치려고 만남의 천막으로 가져오지 않을 경우, 이런 사람도 자기 백성으로부터 잘리울 것이다.

영적 의미

그런데 예배 할 수 있는 힘은 천적 사랑의 원리를 통해 인간이 주님과 결합함에서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경우, 그는 교회에서 분리되어지고 신성한 진리에 무지해버리고 말 것이다.

세부적 영적 의미

만남의 천막 문으로 그것을 가져오지 않음이란 예배하는 힘은 인간이 천국을 통하여 주님과의 결합을 수단으로 있게 된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을; 그 사람이 백성 사이로부터 잘리움이란 교회로부터 분리되고 신성한 진리에 무지해 있게 된다는 것을; 그 반면 주님 앞에 제물을 바침이란 순수한 사랑으로부터 주님을 예배함을 말한다. (2356, 3540-3, 5302, 3294-5, 2001)

10절. 그리고 이스라엘의 가문에 속한 이들 이든, 또는 그들 사이에 체류하는 낯선 사람들의 집에 속한 사람 이든 어떤 방법으로 이든 피를 먹는 자에 대하여, 나는 피를 먹은 그 혼에 맞서 내 얼굴을 놓을 것이다, 그리고 그를 자기 백성 사이로부터 자를 것이다.

영적 의미

내적으로든 외적으로든 영적 교회에 속한 모든 사람이 자연적일 뿐인 사람 속의 악과 거짓을 혼합시킴으로 거룩한 선행을 위반할 경우, 주님에게 등을 돌리는 것이다. 그 이유는 그가 진리를 모독하여 결과적으로 모든 진리에서 분리되었기 때문이다.

세부적 영적 의미

이스라엘 가문에 속한 사람이든, 그들 가운데 체류하는 낯선 사람이든 이란 영적 교회에 있는 사람이 내적으로 이든 외적으로 이든을, 어떤 방법으로든 피를 먹으면 이란 단지 자연적 일 뿐인 삶 속에 있는 악과 거짓을 혼합시킴으로 거룩한 선행을 위반 할 경우를, 주님께서 그 혼에 맞서 그분의 얼굴을 놓으시고 그를 백성 사이로부터 자른다란 그 사람이 진리를 모독한 바 주님으로부터 돌아서는 것, 그 결과 모든 진리로부터 서도 분리됨을 말한다. (3654, 7908, 1001-1003, 7599, 5302, 3294-5)

11절. 육(flesh)의 생명은 피에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너희 혼들을 위한 보상을 받게 하려고 제단 위에서 너희에게 그것을 주었었다. 그 이유가 생명을 이유로 보상을 받게 하는 것은 피이기 때문이다.

영적 의미

외적예배는 내적 예배와 진실로 조화를 이루어야 할 것인 바 천국적 예배가 그렇게 되어있다. 그 이유가 그 예배 속에는 신성한 진리와 신성한 선의 결합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외적 인간은 내적 인간과 조화를 이루게 되는데, 그 이유는 신성한 진리가 인간을 악에서 깨끗하게 하기 때문이고, 이 깨끗해짐은 생명 자체인 신성한 선으로부터 있어지기 때문이다.

세부적 영적 의미

육의 생명은 그 피에 있다란 외적 예배는 내적 예배와 진실로 하모니를 이루어야만 한다는 것을, 주님께서 제단에서 피를 주심이란 천국의 예배 역시 위와 같다는 것, 그 이유는 거기서도 신성한 진리가 신성한 선과 결합함이 있기 때문이다. 보상을 받게 함이란 외적 인간이 내적 인간과 조화를 이루는 것을, 이 피가 생명 또는 혼인 이유로 해서 보상을 받게 함이란 이것 역시 위와 같은데 그 이유도 신성한 진리가 악으로부터 인간을 깨끗하게 해주기 때문이고, 신성한 진리는 생명 자체인 신성한 선으로부터이기 때문이다. (156, 870, 1001, 10047, 10042ii, 3704, 4180)
위 마지막 부분을 조심스럽게 공부한다면 어떻게 해서 어떤 때는 피가 선행 또는 선을 나타내고, 어떤 때는 신앙 또는 진리를 나타내는지에 관해 이해 할 수 있게 된다. 위 모두는 주님으로부터 진행되고 있고, 한 가지 표현으로서 신성한 진리라고 불리고 있기도 하지만 인간의 생명인 선과 진리 모두는 신성한 진리 안에 존재한다.

12절. 그러므로 나는 이스라엘의 자손들에게 말했다, 너희의 혼은 피를 먹지 말라, 너희 사이에 체류하는 어떤 낯선 사람도 피를 먹지 말라.

영적 의미

위의 이유로 해서 주님이 영적 인간에게 가르치시는 바, 내적 인간 또는 외적 인간 안에서 거룩한 것을 모독된 것과 혼합하는 것은 불법적이라는 것이다.

세부적 영적 의미

주님께서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해줌(saying)이란 위의 이유로 인간은 주님으로부터 가르쳐진다는 것을; 너희, 너희가운데 체류하는 낯선 사람도 피를 먹지 말라란 거룩한 것을 모독된 것과 섞는 것은 내적 인간에서 이든, 외적 인간 또는 교회 이든 모두 불법이라는 뜻이다. (3654, 7304, 1001-1003, 7908)

13절. 그리고 이스라엘의 자손들로부터의 사람 이든, 그들 사이에 체류하는 낯선 사람이든, 사냥하여 먹으려 하여 어떤 짐승 또는 가금류를 가졌을 경우, 그는 그것으로부터의 피를 쏟아라, 그리고 그것을 먼지(흙, dust)로 덮을 것이다.

영적 의미

그러므로 영적 교회의 모든 인간, 내적으로 이든 외적으로 이든, 설득을 원리로 해서 선에 속한 어떤 애착이나 진리에 속한 어떤 애착이든 자기 것으로 삼으려 할 때 그는 악밖에는 아무것도 없어 죽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스스로 진실되게 인정함으로 거룩한 것에서 모독된 것을 분리시켜야 한다.

세부적 영적 의미

이스라엘 백성 또는 그들 사이에 체류하는 낯선 사람이란 영적 교회의 모든 사람이 내적으로 이든 외적으로 이든을; 사냥함이란 설득의 원리로 획득함을; 먹어도 좋은 짐승이나 새 란 자기 것으로 삼을는지도 모를 선이나 진리를; 피를 흘려내고 흙으로 덮는다란 자기에게는 악밖에 없어 정녕 죽을 수밖에 없음을 스스로 진실되게 인정함으로서 거룩한 것과 모독된 것을 분리시킨다는 것을 뜻한다. (3654, 7908, 3309, 40, 44, 2187, 1001-3, 9127, 249)

14절. 모든 육의 생명에 관하여, 그것의 피는 그것의 생명과 모두 하나이다. 그러므로 나는 이스라엘의 자손들에게 말했다, 너희는 육의 피는 여하튼 먹지 말 것이다. 그 이유가 모든 육의 생명은 그것의 피이기 때문이다. 그것을 먹는 자는 누구든지 잘리울 것이다.

영적 의미

외적 인간 속의 모든 진정한 생명도 내적 인간 안에 있는 주님의 신성한 생명으로부터이다. 이로부터 인간에게 가르쳐지는 바 그 생명을 자기 것으로 삼음으로 해서 모독하지 말라. 그 이유는 진리 안에서 명백해지는 선이 주님으로부터 온 인간의 생명이기 때문이다. 그 생명을 자신의 소유인 냥 여기는 사람은 모든 선과 진리로부터 자신을 분리시키게 된다.

세부적 영적 의미

모든 육의 생명이 피이다란 외적 인간의 모든 순수한 생명은 내적 인간 안에 있는 주님의 신성한 생명으로부터 임을; “내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말했다”란 위의 이유로 인간은 가르쳐진다는 것을; 어떤 육의 피도 먹지 말라란 생명을 자기 것으로 삼음으로 해서 모독하지 말라를; 피는 곧 모든 육(flesh)의 생명이다란 진리로 명백히 드러나지는 선은 주님으로부터 온 인간의 생명이다를; 피를 먹는 사람은 내가 백성 가운데서 자를 것이다란 생명이 자기 고유의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은 모든 선과 진리로부터 그 자신이 분리된다는 것을 말한다. (A.C 1001-1003, 3704, 4180, 3654, 7304, 1001-1003, 2187, 3704, 4180, 5302, 3294-5)

15절. 그리고 저절로 죽은 것, 또는 짐승으로부터 찢기워 죽은 것을 먹는 모든 혼 각각, 그가 본토박이 이든, 또는 낯선 사람 이든, 그는 물로 자기 옷들을 빨아라, 그리고 물로 자신을 목욕하라, 그리고 저녁 때까지 불결하다. 그 다음 그는 깨끗하다.

영적 의미

그리고 영적 교회의 모든 사람, 또는 자연적이고 영적 생명이 없는 것들을 자기 것으로 삼을 경우, 또는 부주의해서 악에 의해 피해를 당한 것을 자기 것으로 삼을 경우, 그 사람은 설사 그가 본질적으로 선해서 내적 교회나, 외적 교회 속에 있는 사람이라 해도 말씀을 수단으로 내, 외적으로 깨끗해져야 한다. 그 사람도 이런 깨끗해짐이 있도록 상태가 변할 때까지는 불순한 채 남아 있으리라.

세부적 영적 의미

자연사한 짐승을 먹는 혼(soul)이란 영적 생명이 없고 단지 자연적일 뿐인 것을 자기 것으로 삼는 모든 사람을, 짐승에게 찢겨 죽은 것을 먹는 사람이란 악에 의해 피해 당한 것을 부주의해서 자기 것으로 삼는 모든 사람을, 본토박이든지 체류하는 낯선 사람이든지란 그가 내적 교회 속에 있든지 외적 교회 속에 있든지를, 옷을 빨고 물로 목욕하라, 그리고 저녁때가 되어야 불결함을 벗고 깨끗하게 된다란 말씀을 수단으로 외적, 내적으로 깨끗해짐을, 상태가 변할 때까지란 불순한 채 남아 있으나 깨끗해짐으로 변화된다는 것을 말한다. (2187, 4171, 3654, 7908, 3147, 5006, 10130, 7844, 4545)

16절. 그러나 만일 그가 그것들을 빨지 않는다, 자기 살을 목욕하지 않는다, 그러면 그는 자기 불법을 낳는다.

영적 의미

그러나 만일 그가 위 방법으로 자신을 깨끗하게 하지 않으면 악은 여전히 그와 더불어 남아 있게 된다.

세부적 영적 의미

옷을 빨지도 않고 목욕도 하지 않음이란 자신을 깨끗하게 하는데 게으르다는 것을, 자기 불법을 낳을 것이다란 악이 그와 함께 남아 있음을 뜻한다.(3147, 5006, 9937)

레위기 17장의 종합적 고찰

이 장의 시작 부분을 사려 깊게 읽는 사람이라면 거기에 감추어 놓인 의미, 즉 영적 의미가 있다는 것을 단 번에 눈치채리라 본다. 주님을 예배하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그가 어느 장소에서 이건, 어느 시간 이었든 상관없이 가능해야 할 터인데 본문의 경우 진실된 예배는 그렇게 할 수 없다고 언급된 듯 여겨지기 때문이다. 더구나 만남의 천막 문 외의 어떤 장소에서 제물을 바치려고 시도하는 이들에게는 매우 심각한 처벌이 있을 것이라고 지시되고 있다. 그러면 여기에 포함된 내적 의미를 우리는 어떻게 알아야 한다는 말일까? 이는 말씀이 쓰여진 수단인 상응을 가지고 이해해 봄으로써만 가능할 수 있다. 그 외 어떤 안내도 받을 수가 없다. 만일 우리가 역사적 측면에서의 의미로부터 자신의 결말을 축출해 보겠다고 시도하면 혼동되어 잘못된 해석만이 그 결과가 되고야 만다. 상응의 지식을 오늘날의 우리에게 허락하신 주님께 우선 감사드리고 시작해 보자. 말씀 자체에서 우리에게 보여주는 제물의 넓은 의미는 다음 구절이 잘 나타내고 있다. “당신은 제물을 즐기지 아니하시며, 태워 바침을 드려도 받지 아니하십니다. 하느님, 내 제물은 찢어진 마음 뿐, 찢어지고 터진 마음을 당신께서 얕보지 아니하십니다” (시편 51:16, 17). 이 구절이 말하는 바, 진짜 제물에는 주님께 바치는 애착이 포함되어야 하고 이것이 여러 가지 동물들로 명시되는데, 이 동물 각각은 어떤 특별한 애착을 말하고, 어떤 사람에 의해 선택된 애착(동물)은 때나 장소에 관계 없이 주님을 섬기는데 봉헌할 수 있다.
그러나 다시 언급해야만 하는 것은, 위와 같은 것이 제물에 관한 감추어진 의미라는 것을 알 때, 왜 그 제물들이 만남의 천막 문에서가 아니면 바쳐질 수 없다 라고 말한 본문의 진짜 의미에 매우 궁금해 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렇게 되는 이유는 제물을 바치는 과정에는 동물 뿐만 아니라 장소와도 상응 관계가 있고, 이에 더해서 건축물의 각 부분과의 상응까지 관계되고 있기 때문이다. 각기 다른 장소들은 각기 다른 상태들을 표현한다. 게다가 이 장소에서 저 장소로 이동하는 것은 상태의 변화를 말한다. 이는 아주 명확하다. 이를 본문과 연결해서 생각해 볼 경우, 비록 인간이 어느 장소에서 주님을 진실로 예배한다 해도 그들은 어느 상태에서 이든 진실되게 주님을 예배할 수 없다는 것을 즉각 인식할 수 있다. 그러면 이것은 한계 또는 금지에 속하는 원인이 되고 있다는 말이다. 자기의 심정과 지성이 이기적인 것들, 세상적인 것들, 또는 쾌락(pleasure)에 관한 것들로 차 있는 경우 같이 자연적일 뿐인 상태에서는 주님은 예배할 수 없다. 이 사항은 모든 사람이 알고 있을 것이라고 본다. 다시 말해 우리가 주님의 집에 들어 갈 때 위와 같은 생각들을 벗어 던져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보편화 될 정도로 모두 알고 있다. 이로부터 수소 또는 어린 양 또는 염소를 진영 내에서 또는 진영 밖에서 또는 들판에서 죽이는데 대한 의미를 납득할 수 있다. 주님으로부터 온 우리의 선한 애착들은 교회 내에서 또는 교회 밖에서 실감해 보지도 않은 예배의 외관만에 의해서도 오염될 수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이 허울 좋은 예배에 부착되어 있는 처벌을 생각해보자. “피는 그 사람에게 귀속되었다. 그리고 그는 자기 백성으로부터 잘리울 것이다.” 왜곡된 예배를 갖는 사람은 자기가 고백한 거룩한 원리에 어긋나는 바, 어긋난 만큼 그는 그 원리에서 분리된다는 것이다. 이럼에도 외적 예배가 내적 예배로부터 분리되어 있는 것은 얼마나 흔한지 모른다. 사실 이런 점에 있어서 죄 없다 할 사람은 극소수일 것이다. “너는 살아 있다고 말하지만 실상 죽어있다” 라고 평가받은 사르디스 교회인 같이 우리도 지내왔기 때문이다. (계시록3:1) 그러면 치료 약은 무엇일까? 본문이 우리에게 말하는 바, 만남의 천막 문에로 제물을 가져다가 거기서 바쳐야 하는 것이다. 실제의 문제로 생각 할 때 우리가 주님을 진실로 인정하고 그분을 예배 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한 장소 즉 한 가지 상태만이 있을 뿐이다. 그것은 지식을 통해, 신앙을 통해, 사랑을 통해, 그리고 그 자체를 나열하는 순수한 선의 상태이다. 다른 말로 바꾸어 말해보면 그것은 우리를 선 쪽으로 소개하는 진리의 상태, 즉 문은 우리가 신실성과 진리 안에서 주님을 예배하겠다고 말할 때 지상의 성전 안으로 입장할 수 있게 해주는 것과 같다. 이 진정한 예배가 성직자가 피를 흘리고 지방을 살라 향기를 풍겨 여호와를 기쁘시게 하는 데에 의미되어 있다. 그 반면 이전의 거짓 예배는 폐지되어지는데 이것이 이름을 거론해서 언급된 우상에서 나타나 있다. 그러므로 교회 속의 사람들은 자기의 습성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그래서 직접 수반되는 예배에 관한 신성한 법을 적절한 가치에서 생각해 보아야 하리라 본다. 이렇게 할 경우 자신이 주님의 법을 제대로 이행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실지의 경우 그는 자기가 시정해야 할 사항에 자기도 모르게 친숙해진다. 선해지기를 바래면서 그분의 계명을 원리로 삼아 정직하고 근면하게 노력하지 않으면 주님을 진실로 예배할 수 없다는 것을 누가 잘 알지 못하고 있는다고 버젓이 말할 수 있을까 말이다.
이제 다음 단원을 살펴보자. 비록 지금까지 취급해온 말씀의 부분에 부주의한 예배라 해도 또는 모독자라고 까지 아직은 말할 수 없다 해도 그가 잘못된 과정을 계속 고집해 간다면 모독했다고 까지 간주 할 수 없는 경우까지도 실지 모독하는 쪽으로 기울고야 만다. 피채 고기를 먹는 것에 이런 사항이 함축되어 있는데 이는 거룩한 것에 모독된 것을 섞는 것이다. 선과 진리를 인정하고 믿고 사랑하는데도 그에 반대되는 생활을 영위할 경우에 발생된다. 이 경우의 악의 종류는 수없이 많이 있는데 일부의 경우는 이미 거론했던 적이 있다. 인간이 모독을 경미하게 저지를 수도 있고 심하게 저지를 수도 있다. 어떤 경우는 치료될 수 있고 때로는 치료될 수 없을는지도 모른다. 잘 짜여진 각본으로 실시된 위선의 경우가 아마 아주 심한 경우라고 생각될 수도 있다. 그러므로 위선의 초기 징조와 그 때를 미리 감지하여 방비하는 것이 상책이 될 것이다. 정죄되어야 마땅한 게 악이므로 그것을 금하는 행동 습관을 꾸준히 배양해 가고 선을 표현해 내는데 근면해야 하리라 생각된다. 파멸로 끌어들이는 이기심, 세상적 관심, 감각적 측면에 몰입되어 우리 자신은 늘 오염되기 일쑤지만 신성한 법을 단지 고백만 하는 수준에서 그 법에 다가가서 나의 삶이 조화를 이루도록 갖가지 배려를 해 가는 것이 최상의 삶의 방향인 것은 지극히 평범한 사람일지라도 수긍되는 말일 것이다.
위에 관련되어 아직 더 생각해 볼 측면들이 본문에 남아 있다. 오히려 잘 경청해둘 주제라 생각된다. 선과 진리의 원리를 소홀히 함 또는 그 실행에 게을렀던 것, 또는 선과 진리의 원리를 교묘히 위반하는 사항에 첨가되는 것은 그 위반을 더 강도있게 만드는 설득(persuasion)이라는 논리이다. 이것이 본문과 말씀의 다른 부분에서 사냥함(hunting)으로 표현되고 있다. “니므롯은 여호와께서도 알아주시는 힘센 사냥꾼” (창세기 10:9)이라고 말해지고 있는데 이에 관한 주석을 보면, “그것은 그가 많은 것을 설득했음을 의미한다. 이렇게 구변이 센 양상은 선행에서 분리된 신앙의 본성이나 말씀에 있는 사냥이라는 말의 의미로부터도 잘 보여진다. 선행에서 분리된 신앙은 쉽게 설득된다. 인류 속의 대다수는 내적으로 무엇이 있는지, 외적으로 무엇이 있는지 모른다. 게다가 삶의 더 많은 부분이 감각적 쾌락들, 탐욕들에 푹 담겨있다. 그러므로 인류의 대다수가 선행에서 분리된 신앙을 원리로 하는 종교에 너무나 쉽게 포착되고 만다… ‘너희가 새를 사냥하듯 영혼들을 사냥하는 그 방석을 내가 너희 팔에서 떼어버리고 너희가 새처럼 사냥한 그 영혼들을 놓으며 또 너희 수건을 찢고 내 백성을 너희 손에서 건지고 다시는 너희 손에 사냥물이 되지 않게 하리라…’(에스겔 13:20,21) 이 구절은 사냥이 의미하는 것을 설명해준다. 즉 설득을 수단으로, 인지(cognition)라는 작용을 수단으로 해서 상대방을 기만하는 것이 사냥이다. 그리하여 자기들이 좋아하는 방향으로 타인들의 경향성이 자진해서 따라가도록 유인하여 뒤집는다.” 위로부터 본문이 말하는 설득이라는 본성까지도 알 수 있다. 여기에 덧붙여 니므롯의 뜻이 반역적인, 고집적인(rebellious), 또는 하강이 정지됨(sleep of descent), 규율력이 마비됨(sleep of him that rules)이다는 것까지 생각하면 더욱 확실히 알게 해줄 것이다. 우리 자신의 불의한 심적 태도를 더 악화되게 하는 것, 또는 영적 진보에 누구에게 필수 요건인 귀중한 자유를 타인에게서 약화되게 하는 행위 같은 것을 가능한 피할 수 있도록 노력을 다 해야 할 것이라 생각된다.
위에 덧붙여 주지해둘 사실이 끝 부분에 있다. 완전한 상태에 있게 되는 외적 인간의 삶은 내적 인간의 완전한 삶에서 파생된다는 것, 따라서 인생을 수련 중인 상태에서 자기의 불순함을 깨끗하게 하지 못할 경우 그 상태에 남아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본문을 통해 말씀의 내적 의미를 찾아 보겠다는 노력, 더 높은 삶을 영위해야겠다는 성의가 우리에게 더욱 있어지기를 바랄 뿐이다. 그 이유는 신성한 진리 안에 포함된 세부 사항들까지 세심하게 검사해 자신에게 더욱 반영시켜 갈수록 우리는 저 세상 삶에 있을 마지막 목표를 향해 인내를 가지고 달려 갈 수 있는 더 많은 용기를 얻게 되고 더욱 더 계발되어 정확한 목표 지점을 보면서 달리므로 더 행복하고 더 침착한 여유도 있게 되리라.
************************************************

레위기 18장

성경: 레위기 1장
1. 그리고 주님께서 모세에게 이야기하셨다, 말하기를,
2. 이스라엘의 자손들에게 이야기하라, 그리고 그들에게 말하기를, 나는 너희의 하느님 주님이다.
3. 너희가 거주했던 이집트의 토지로부터의 행실들을 따라 너희는 행동하지 말라. 그리고 내가 너희를 데려갈 가나안의 토지의 행실들을 따라 행동하지 말라. 너희는 그들의 법령들에서 걷지 말라.
4. 내 판단들을 너희는 실시하라. 그리고 내 법령들에서 걷기 위해 그것을 너희는 지켜라. 나는 너희의 하느님 주님이시다.
5. 너희는 그러므로 내 법령들을, 그리고 내 판단들을 준수할 것이다. 사람이 이것을 실시하면, 그는 그것들 안에서 살 것이다. 나는 주님이다.
6. 너희는 (그들의) 벌거벗음의 덮개를 벗기려고 자기와 가까운 친척의 누구에게도 접근하지 말 것이다. 나는 주님이시다.
7. 네 아버지의 벌거벗음, 네 어머니의 벌거벗음 조차도, 너희는 덮개가 벗겨있게 말라. 그녀는 너의 어머니이다. 너는 그녀의 벌거벗음의 덮개를 벗기지 말라.
8. 네 아버지의 아내의 벌거벗음의 덮개를 너는 벗기지 말라. 이것은 네 아버지의 벌거벗음이다.
9. 네 아버지의 딸, 또는 네 어머니의 딸, 집에서 출생했든, 밖에서 출생했든, 네 누이의 벌거벗음, 그들의 벌거벗음의 덮개를 너는 벗기지 말라.
10. 네 아들의 딸, 또는 네 딸의 딸의 벌거벗음이라해도, 그들의 벌거벗음의 덮개를 너는 벗기지 말라. 그 이유가 그들의 것은 네 자신의 벌거벗음이기 때문이다.
11. 네 아버지의 아내의 딸의 벌거벗음, 네 아버지로부터의 출생인바, 그녀는 네 누이이다, 너는 그녀의 벌거벗음의 덮개를 벗기지 말라.
12. 너는 네 아버지의 누이의 벌거벗음의 덮개를 벗기지 말라. 그녀는 네 아버지의 가까운 친척되는 여인이다.
13. 너는 네 어머니의 자매들의 벌거벗음의 덮개를 벗기지 말라. 그 이유가 그녀는 네 어머니의 가까운 친척 여인이기 때문이다.
14. 너는 네 아버지의 형제의 벌거벗음의 덮개를 벗기지 말라, 너는 그의 아내에게 접근하지 말라. 그녀는 너의 아주머니(aunt)이다.
15. 너는 네 며느리의 벌거벗음의 덮개를 벗기지 말라. 그녀는 네 아들의 아내이다. 너는 그녀의 벌거벗음의 덮개를 벗기지 말라.
16. 너는 네 형제의 아내의 벌거벗음의 덮개를 벗기지 말라. 이것은 네 형제들의 벌거벗음이다.
17. 너는 여인과 그녀의 딸의 벌거벗음의 덮개를 벗기지 말라. 너는 그녀의 아들의 딸을, 또는 그녀의 딸의 딸의 벌거벗음의 덮개를 벗기려고 데려가지 말라. 그들은 가까운 친척되는 여자들이다. 이것은 사악하다.
18. 그리고 너는 그녀의 일생 동안 다른 사람과 비교하여 그녀의 벌거벗음의 덮개를 벗겨서 그녀와 경쟁자가 되도록 그녀의 자매를 여인으로 데려오지 말라.
19. 너는 그녀의 불결함으로 인해 그녀가 불순해 있는 한, 벌거벗음의 덮개를 벗기지 말라.
20. 그리고 너는 네 자신이 그녀와 더불어 더럽혀지도록 네 이웃의 아내와 육체적으로 눕지 말라.
21. 너는 네 씨의 어떤 것이 몰렉에게 불을 통과하게 만들려하여 그들을 주어서는 안될 것이다. 너는 네 하느님의 이름을 모독 말 것이다. 나는 주님이시다.
22. 너는 여자(womankind)와 눕듯이 남자(mankind)와 눕지 말 라. 이것은 역겨웁다.
23. 그리고 너는 그것과 더불어 네 자신이 더럽혀지게 어떤 짐승과도 눕지 말라. 어떤 여인도 그것과 누우려고 짐승 앞에 서지 말라, 이것은 혼동이다.
24. 너희는 이런 것들의 어떤 것에서 자신을 더럽히지 말라. 그 이유는 내가 너희 앞에서 내쫓는 나라들이 이런 것들로 더럽혀 있기 때문이다.
25. 그리고 토지는 더럽혀 있다. 그러므로 나는 그것 위에 있는 그것으로부터의 불법을 방문할 것이다, 그리고 토지는 그녀의 주민들을 토해낼 것이다.
26. 너희는 그러므로 내 법령들과 내 판단들을 준수하라, 그리고 이런 역겨운 것의 어떤 것도 실시하지 말라. 본토박이이든, 너희 사이에 체류하는 낯선 사람이든 실행하지 말라.
27. (모든 이런 역겨운 짓들을 토지의 사람들이 했었다, 이것이 너희 앞에 있었던 짓들이다, 그리고 토지는 더럽혀져 있다.)
28. 토지가 너희 앞에 있었던 나라를 토해내듯, 너희가 토지를 더럽혀 토지가 너희 역시 토해내지 않게 하라.
29. 이런 역겨운 짓의 어떤 것이라도 실시한 자는 누구든지, 그것들을 행한 혼은 정녕 자기 백성 사이로부터 잘리운다.
30. 그러므로 너희는 내 명령(charge)을 지켜라, 하여, 너희는 이런 역겨운 관습들을 행치 말라, 이것이 너희 앞에 있었다, 그리고 너희는 자신을 그것으로 더럽히지 말라. 나는 너희 하느님 주님이시다.

영적 의미의 요약

* 교회인은 자연적 인간 수준 또는 교회 속의 악과 거짓에 따라 살아서는 안 된다는 것, 선과 진리이신 주님과 결합하여 그분만을 예배해야 한다, 1-5절.
* 그러므로 일반적으로 인간은 악과 거짓에 결합함으로 선과 진리를 모독하는 것이 금하여진다, 6절.
* 세부적으로도 사생아가 출생하는 식의 결합들을 수단으로 선과 진리를 모독해서도 안 된다. 이것이 시리즈로 기술되고 있다. 이를 수단으로 부패된 교회가 더 더러워지면서 어느 것이 선과 악인지 실감할 수 없게 한다, 7-25절.
* 반대로 영적 교회인은 순수한 선과 진리에서 완전히 분리되지 않도록, 그분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의 천국 결혼을 결과하는 주님께의 순종이 될 수 없게 하는 것들, 즉 역겨운 행위를 피해서 자신이 너무 썩지 않도록 신성한 진리에 따라 살아야만 한다, 26-30절.

각 절의 영적 의미

1절. 그리고 주님께서 모세에게 이야기하셨다, 말하기를,

영적 의미

주님께서는 신성한 진리를 수단으로 지각을 주시어 밝히 알게 하신다.

세부적 영적 의미

주님(여호와)란 사랑 측면에서의 신성한 존재를; 이야기하심(speak)이란 유입을; 모세는 신성한 진리 또는 말씀을; 말함(say)은 지각을 말한다. (2001, 2951, 7010, 1791, 1822)

2절. 이스라엘의 자손들에게 이야기하라, 그리고 그들에게 말하기를, 나는 너희의 하느님 주님이다.

영적 의미

영적 교회인에 대한 가르침이다. 이 가르침으로부터 그는 주님이 유일한 하느님이시고, 그분으로부터 모든 선과 진리가 결합된다는 것을 배운다.

세부적 영적 의미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렇게 이야기하라란 영적 교회인에 대한 가르침, 이로부터 그는 배우게 된다는 것을; “나는 주 너희 하느님이다”란 주님이 유일한 하느님이시고 그분으로부터 모든 선과 진리가 결합된다는 것을 말한다. (7010, 3654, 10355, 1791, 1822, 2001)

3절. 너희가 거주했던 이집트의 토지로부터의 행실들을 따라 너희는 행동하지 말라. 그리고 내가 너희를 데려갈 가나안의 토지의 행실들을 따라 행동하지 말라. 너희는 그들의 법령들에서 걷지 말라.

영적 의미

그러므로 그는 자기가 태어난 자연적일 뿐인 상태 속의 악과 거짓에 따라서 살지 말 것이며, 영적 교회인에 의해 계승되어 온 부패된 교회 속의 악과 거짓에 따라서도 살지 말 것, 더 이상 어떤 외적인 예배도, 우상을 숭배하는 것도 안 된다.

세부적 영적 의미

너희는 너희가 살던 이집트 토지의 행실들을 따라 하지 말라란 우리가 태어난 상태인 자연적일 뿐인 상태 속의 거짓과 악들에 따라 살아서는 안 된다는 것을, 내가 너희를 이끌고 들어갈 가나안 토지의 행실들을 따라 하지 말라란 부패된 교회의 악과 거짓에 따르지 말 것, 이것들이 영적 교회에 계승된다는 것을, 그들의 규정을 따르지 말라란 더 이상 외적이고 우상 숭배적으로 예배하지 말라는 것을 뜻한다. (5755, 5276, 1293, 1868, 8420, 7884, 8357)

4절. 내 판단들을 너희는 실시하라. 그리고 내 법령들에서 걷기 위해 그것을 너희는 지켜라. 나는 너희의 하느님 주님이시다.

영적 의미

위와 반대로 주님은 말씀으로부터 오는 내적, 외적 진리를 수단으로, 이 진리를 일상 생활에서 순종함으로 예배되어진다. 그 이유는 그분은 선과 진리가 결합한 것으로, 선으로부터 파생된 진리로서, 외적 인간이 내적 인간과 조화를 이루고 있으신 분으로 명백하기 때문이다.

세부적 영적 의미

주님의 판단을 따르는 것, 그분의 법령을 지켜 걷는다는 것은 말씀을 수단으로 또는 내적, 외적 진리를 수단으로 또는 일상 생활에서 순종함을 수단으로 그분께 예배하는 것을; “나는 주 너의 하느님”이라고 말하신 이유는 주님께서 그분 자신을 선과 진리가 결합되어 계신 분으로, 선에서 파생되는 진리이신 분으로, 외적 인간이 내적 인간과 하모니를 이루신 분으로 나타내 보여주시기 위해서이다. (5755, 8357, 2001)

5절. 너희는 그러므로 내 법령들을, 그리고 내 판단들을 준수할 것이다. 사람이 이것을 실시하면, 그는 그것들 안에서 살 것이다. 나는 주님이다.

영적 의미

그러므로 인간은 처음에 외적 예배에서 시작하되 내적 인간이 되어 가는 법칙에 따라 내적 인간 쪽으로 인도되어간다. 그리하여 그는 주님을 특별히 신성한 선이 되시는 분으로 인정한다.

세부적 영적 의미

주님의 규정과 판단을 지킨다는 것은 인간은 내적 예배를 인도하는 외적 예배에 먼저 종사한다는 것을, 그것을 행하고 그대로 살아간다는 것은 내적 인간이 되게 해주는 법칙에 순종함을, “나는 주이시다”란 그가 주님을 신성한 선으로 특별히 인정하는 것을 말한다. (8357, 5755, 2001)

6절. 너희는 (그들의) 벌거벗음의 덮개를 벗기려고 자기와 가까운 친척의 누구에게도 접근하지 말 것이다. 나는 주님이시다.

영적 의미

그런고로 영적 인간은 결합을 통해 유전적, 실제적인 악과 거짓들을 수단으로 거룩한 진리를 모독하는 것이 금하여진다. 그 이유가 신성한 선이 요구하시는 바, 선은 진리와 결합하는 것만이 합법적이라고 하시기 때문이다.

세부적 영적 의미

자기와 가까운 친척의 누구에게도 접근하지 말라란 결과적으로 영적 인간은 결합을 수단으로 유전적 또는 실제적인 악과 거짓으로 오염시켜 거룩한 진리를 모독하는 것이 금하여져 있다는 것을, “나는 주이시다”란 신성한 선이 요구하시는 바, 선은 진리와 더불어서만 합법적으로 결합할 수 있다는 것, 또한 이런 결합을 확증할 수 있다는 것이다. (6348, 4434, 9960, 2001, 7192)

7절. 네 아버지의 벌거벗음, 네 어머니의 벌거벗음 조차도, 너희는 덮개가 벗겨있게 말라. 그녀는 너의 어머니이다. 너는 그녀의 벌거벗음의 덮개를 벗기지 말라.

영적 의미

그러므로 선을 유전적 악으로 직접 오염시켜 모독하던가 그 악을 본질적인 거짓과 결합시킴으로 모독하는 것은 신성한 질서에 반대된다. 이 거짓은 새로운 악의 형체의 외적 근원이 되고 있다.

세부적 영적 의미

네 아버지의 벌거벗음, 네 어머니의 벌거벗음의 덮개를 벗기지 말라란 본질적인 악과 결합됨을 통해 유전적 악으로 직접 오염시켜 선을 모독하는 것은 신성한 질서에 반대된다는 것을, 그 이유는 이런 간음으로 선이 모독되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유전적인 악을, 어머니는 그 악과 결합된 거짓을 뜻하고 있다. “그 여자가 네 어미라”란 이 거짓은 악의 새로운 형체의 외적 근원이라는 것을; 그 여자의 벌거벗음의 덮개를 벗기지 말 것이란 오염과 폭로를 말한다. (6348, 3703-20, 1815, 1895, 9960-10)

8절. 네 아버지의 아내의 벌거벗음의 덮개를 너는 벗기지 말라. 이것은 네 아버지의 벌거벗음이다.

영적 의미

또한 외적 인간 안에 있는 유전적인 악과 결합되어 있는 거짓으로 오염시켜 선을 모독하는 것도 불법적이다. 그 이유는 이와 같은 거짓도 유전적 악의 또 다른 형체일 뿐이다.

세부적 영적 의미

네 아버지의 아내의 벌거벗음의 덮개를 벗기지 말라란 외적 인간 안에 있는 유전적인 악과 결합되어 있는 거짓으로 오염시켜 선을 모독하는 것은 불법이다는 뜻이다. 아버지란 유전적 악을, 아비의 아내란 외적 인간 안에서 유전적 악과 결합된 거짓을, 그것은 곧 네 아버지의 벌거벗음이다란 이런 거짓도 유전적 악의 또 다른 형체일 뿐이다를 말하는데 그 이유는 진리가 선의 형체이듯 거짓은 악의 형체이기 때문이다. (6348, 3703-20, 409, 1369, 9637)

9절. 네 아버지의 딸, 또는 네 어머니의 딸, 집에서 출생했든, 밖에서 출생했든, 네 누이의 벌거벗음, 그들의 벌거벗음의 덮개를 너는 벗기지 말라.

영적 의미

이해함 안에 있는 거짓으로 오염시켜 진리를 모독하는 것, 그것이 내면의 유전적 애착으로부터이든, 외면으로부터이든, 이 거짓은 내적 또는 외적 인간 안에서 활성화되고 있는 바 불법이다.

세부적 영적 의미

누이란 이해함 안에 있는 거짓을 말하는데 그 이유는 좋은 의미에서 누이는 지적인 진리를 뜻하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딸 또는 어머니의 딸이란 내면의 유전적 악 또는 외면의 유전적 악에서 진행됨을; 집에서 출생했든 밖에서 출생했든 이란 내적 인간 또는 외적 인간 또는 교회 안에서 활성화되어 있음을 말하는데 이 경우는 본토박이와 체류하는 사람의 의미에서와 비슷하다. 그들의 벌거벗음의 덮개를 벗기면 안 된다란 진리의 왜곡과 위와 같은 품성을 모독함은 불법이라는 뜻이다. (1475, 568, 1815, 1895)

10절. 네 아들의 딸, 또는 네 딸의 딸의 벌거벗음이라 해도, 그들의 벌거벗음의 덮개를 너는 벗기지 말라. 그 이유가 그들의 것은 네 자신의 벌거벗음이기 때문이다.

영적 의미

실제의 악 또는 거짓으로부터 튀어나오는 악한 애착으로 오염시켜 진리를 모독하는 것도 불법이다. 그 이유는 이런 애착은 실제의 악이 더 증강되어 있기 때문이다.

세부적 영적 의미

아들의 딸, 딸의 딸이란 실제의 거짓과 악에서 튀어나오는 악한 애착을 뜻한다. 아들은 거짓을, 딸은 악을 의미한다. 이 구절에서 실제의 거짓과 악이다고 해석할 수 있는 이유는 본문의 아들, 딸은 인간 고유에 속한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버지의 자녀 또는 어머니의 자녀라는 의미와 구별된다. 그들의 벌거벗음의 덮개를 벗기지 말라란 이런 오염으로 진리를 모독하고 왜곡하는 것은 불법이다는 것을; 그것은 곧 너 자신의 벌거벗음이다란 이런 종류의 악한 애착은 실제의 악이 강도가 더 높아진 것임을 말한다. (568, 6348, 313, 494)

11절. 네 아버지의 아내의 딸의 벌거벗음, 네 아버지로부터의 출생인 바, 그녀는 네 누이이다, 너는 그녀의 벌거벗음의 덮개를 벗기지 말라.

영적 의미

외적 인간에 있는 거짓과 결합된 악에서 튀어나오는 유전적 악의 애착으로 오염시켜 진리를 모독하는 것도 불법이다. 그 이유는 이해함 안에서 진리가 합법적으로 결합되어질 수 없게 한 실제의 거짓이기 때문이다.

세부적 영적 의미

어머니가 아닌 아버지의 아내의 경우 밀접한 관계는 못되는 바, 친어머니의 경우 외적 인간 안에 있는 유전적 악과 결합된 거짓을 말하고(8절 참조), 아버지의 아내의 딸은 유전적 악과 거짓의 결합에서 발생하는 외적 인간 안에 있는 유전적인 악한 애착을 말한다. “그녀는 네 누이이다”란 이 애착은 이해함 안에 있는 실제의 거짓을 말한다 (9절 참조). 그녀의 벌거벗음의 덮개를 벗기지 말라란 진리를 이런 악으로 오염시켜 모독하고 왜곡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568, 1475, 6348)

12절. 너는 네 아버지의 누이의 벌거벗음의 덮개를 벗기지 말라. 그녀는 네 아버지의 가까운 친척되는 여인이다.

영적 의미

내적 인간과는 직접 결합되지는 않았어도 이해함 안에 있는 거짓으로 오염시켜 진리를 모독하는 것도 불법이다. 그 이유는 이것도 유전적 악과 같은 평면에 있는 악이기 때문이다.

세부적 영적 의미

아버지의 누이(고모)란 직접적인 결합은 없지만 내적 인간에서 유전적 악과 합병되어 있는 이해함 안의 거짓을 뜻한다. 네 아비의 가까운 친척되는 여인이다란 이것도 유전적 악과 같은 평면에 있는 거짓임을, 벌거벗음의 덮개를 벗기지 말라란 진리를 위의 거짓에 대한 애착으로 오염시켜 모독하고 왜곡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3703-20, 1475, 6348)

13절. 너는 네 어머니의 자매들의 벌거벗음의 덮개를 벗기지 말라. 그 이유가 그녀는 네 어머니의 가까운 친척 여인이기 때문이다.

영적 의미

외적 인간과 직접 결합되지는 않았어도 유전적 악과 결연 관계인 이해함 속의 거짓으로 오염시켜 진리를 모독하는 것도 불법이다. 그 이유는 위와 같다.

세부적 영적 의미

어머니의 자매(이모)란 외적 인간 안에서 직접적인 결합은 아니지만 유전적 악과 병합되어 있는 이해함 안의 거짓을 말한다. 네 어미와 가까운 친척 여인이다란 외적 평면에 있는 유전적 악과 같은 평면에 있는 거짓을; 벌거벗음의 덮개를 벗겨서는 안 된다란 진리가 위의 거짓을 사랑함으로 오염되어 왜곡되거나 모독되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1815, 1895, 1475, 3160, 6348)

14절. 너는 네 아버지의 형제의 벌거벗음의 덮개를 벗기지 말라, 너는 그의 아내에게 접근하지 말라. 그녀는 너의 아주머니(aunt)이다.

영적 의미

영적 인간이 유전적 악에서 분가한 악과 결합된 거짓을 통해 이 악으로 오염시켜 선을 모독하는 것도 불법이다. 그 이유는 유전적 생명에서 더 멀리 떨어진 바깥쪽 형체에 해당되기 때문이다.

세부적 영적 의미

아버지의 형제(삼촌)이란 방계적인 유전적 악들을, 삼촌의 아내란 유전적 악과 결합된 거짓을, 그녀는 네 아주머니이다란 이 거짓은 더 멀리 떨어진 유전적 삶의 바깥 형체라는 것을, 그녀의 벌거벗음의 덮개를 벗기지 말라란 이런 거짓으로 선을 오염시켜 모독하는 것은 불법이라는 뜻이다. (3612, 1369, 3612, 4145, 6348)

15절. 너는 네 며느리의 벌거벗음의 덮개를 벗기지 말라. 그녀는 네 아들의 아내이다. 너는 그녀의 벌거벗음의 덮개를 벗기지 말라.

영적 의미

그가 자신의 악과 결합된 거짓으로 오염시켜 선을 모독하는 것도 불법이다. 그 이유는 이것이 위와 같이 악의 바깥 형체이기 때문이다.

세부적 영적 의미

며느리란 실제의 악과 결합된 거짓을; 그녀가 네 아들의 아내이다란 이 악의 바깥쪽 형체임을; 벌거벗음의 덮개를 벗기지 말라란 이런 거짓으로 오염시켜 선을 모독하는 것은 불법이라는 뜻이다. (4843, 10490, 3049, 5337, 9474-3, 6348)

16절. 너는 네 형제의 아내의 벌거벗음의 덮개를 벗기지 말라. 이것은 네 형제들의 벌거벗음이다.

영적 의미

방계에 속하는 악과 결합된 거짓으로 오염시켜 선을 모독하는 것도 불법이다. 그 이유는 이것이 위와 같이 악의 바깥 형체이기 때문이다.

세부적 영적 의미

형제란 2차적인 악을; 아내란 이 악과 결합된 거짓을; 형제의 벌거벗음이란 이 악의 바깥 형체를; 벌거벗음의 덮개를 벗기지 말라란 이런 거짓으로 오염시켜 선을 모독하는 것은 불법이라는 뜻이다. (3612, 1369, 9960-18, 3049, 5337, 9474, 6348)

17절. 너는 여인과 그녀의 딸의 벌거벗음의 덮개를 벗기지 말라. 너는 그녀의 아들의 딸을, 또는 그녀의 딸의 딸의 벌거벗음의 덮개를 벗기려고 데려가지 말라. 그들은 가까운 친척되는 여자들이다. 이것은 사악하다.

영적 의미

실제의 악으로부터, 이 악이 거짓으로부터 이든, 악으로부터 온 악 이든 이 악으로 오염시켜 진리를 모독하는 것은 불법이다. 위 악들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 이 오염은 악이 매우 강도 높게 된 것이다.

세부적 영적 의미

여인과 그녀의 딸이란 거짓과 거짓에서 파생된 악을; 그녀의 아들의 딸(손녀)이란 거짓으로부터 오는 악, 그 악으로부터 오는 악을; 이 악들이 연합되어 있다는 것이 그들은 한 핏줄이라는 것으로 나타내고 있고 벌거벗음의 덮개를 벗겨서는 안 됨은 이런 악들로 오염시켜 진리를 모독하고 왜곡하는 것은 불법이라는 뜻이다. 그것은 사악하다란 이 악들이 매우 강하다는 뜻이다. (1369, 568, 3160, 6348)

18절. 그리고 너는 그녀의 일생 동안 다른 사람과 비교하여 그녀의 벌거벗음의 덮개를 벗겨서 그녀와 경쟁자가 되도록 그녀의 자매를 여인으로 데려오지 말라.

영적 의미

이해함 안에 있는 상충되는 거짓들이 동시에 다툼으로 오염시켜 진리를 모독하는 것도 불법이다. 왜냐면 이것은 거짓의 충돌을 야기시키기 때문이다.

세부적 영적 의미

자매란 이해함 안에 있는 거짓들; 두 자매란 애착으로 서로 상층 되는 거짓들을; 경쟁자가 됨이란 거짓들의 싸움을; 벌거벗음의 덮개를 벗기지 말라란 이런 거짓들로 오염시켜 진리를 모독하고 왜곡하는 것을; 그녀가 살아있는 동안이란 거듭나는 동안 느낌과 생각들이 싸우는 상태가 활동함을 말한다. (3160, 6420, 9308, 6348, 4366-2)

19절. 너는 그녀의 불결함으로 인해 그녀가 불순해 있는 한, 벌거벗음의 덮개를 벗기지 말라.

영적 의미

자연적 애착일 뿐인 것이 너무 많아 야기되는 왜곡된 진리로 오염시켜 진리를 모독하는 것도 불법이다.

세부적 영적 의미

월경으로 불결한 것, 그로 인해 분리되어 있는 것이란 거듭나는 동안 자연적 애착만이 너무 풍부한 탓에 야기되는 왜곡된 진리를, 벌거벗음의 덮개를 벗기지 말라란 이런 왜곡으로 오염시켜 진리를 모독하는 것은 불법이라는 뜻이다. (10130, 4161, 6348)

20절. 그리고 너는 네 자신이 그녀와 더불어 더럽혀지도록 네 이웃의 아내와 육체적으로 눕지 말라.

영적 의미

교회의 선을 간음하여 모독하는 것은 불법이다. 이것은 가장 크게 불순하다.

세부적 영적 의미

이웃의 아내와 육체적으로 눕지 말라란 가장 큰 불순함인 교회 속의 선을 간음질 함으로 모독하는 것은 불법이라는 말이다. (6348)

21절. 너는 네 씨의 어떤 것이 몰렉에게 불을 통과하게 만들려하여 그들을 주어서는 안 될 것이다. 너는 네 하느님의 이름을 모독 말 것이다. 나는 주님이시다.

영적 의미

이기적 사랑을 통해 교회의 발단이 되는 진리를 왜곡하는 것은 불법이다. 그 이유는 진리는 신성한 선의 형체인 바 언제나 경건되게 붙잡고 있어야 한다.

세부적 영적 의미

네 씨의 어떤 것(자식)이 불을 통과하도록 몰렉에게 바치지 말라란 이기적 사랑을 통해 교회의 발단이 된 진리를 왜곡시켜 모독하는 것은 불법임을; 네 하느님의 이름을 모독하지 말라란 진리는 언제나 경외되어야 한다는 것을 뜻하는데, 특별히 첨가해 말해둘 것은, 주님 안에서 인간이 신성과 결합하는 것 또는 신성한 인간을 뜻한다는 것, “나는 주님(여호와)이다”란 신성한 진리는 신성한 선의 형체임을 말한다. (1610, 934, 2468-16, 6280, 2001)

22절. 너는 여자(womankind)와 눕듯이 남자(mankind)와 눕지 말라. 이것은 역겨웁다.

영적 의미

감각적 사랑으로부터 거짓을 가지고 진리를 오염시키는 것은 불법이다. 이는 가장 타락되고 혐오되는 오염이다.

세부적 영적 의미

여인과 자듯 남자와 자지 말라 그것은 망측한 짓이다란 감각적 사랑으로부터 온 거짓을 가지고 진리를 오염시키는 것은 불법이요 가장 타락된 것, 혐오해야 할 것이란 뜻이다. (725, 2056, 6052, 6348)

23절. 그리고 너는 그것과 더불어 네 자신이 더럽혀지게 어떤 짐승과도 눕지 말라. 어떤 여인도 그것과 누우려고 짐승 앞에 서지 말라, 이것은 혼동이다.

영적 의미

악을 가지고 진리를 오염시키는 것, 뿐만 아니라 거짓을 가지고 선을 오염시키는 것은 일반적으로 불법이다.

세부적 영적 의미

어떤 짐승하고 교접을 해서 더럽혀지지 말라, 여인도 짐승과 교접을 해서 추잡해지지 말라란 악을 가지고 진리가 오염되는 것, 뿐만 아니라 거짓을 가지고 선이 오염되는 것은 일반적으로 모독 행위이다. (46, 1326, 6348)

24절. 너희는 이런 것들의 어떤 것에서 자신을 더럽히지 말라. 그 이유는 내가 너희 앞에서 내쫓는 나라들이 이런 것들로 더럽혀 있기 때문이다.

영적 의미

참으로 영적 인간은 위의 온갖 종류의 모독으로 자신이 불순해지게 해선 안 된다. 그 이유는 이것이 악을 확증하고 있는 부패된 교회인의 실지 모습이요, 신성한 진리의 능력에 의해 거절되어야만 하는 썩은 교회인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세부적 영적 의미

이런 행위 중 어느 하나라도 저질러 자신을 더럽히지 말라란 영적 인간은 모독의 어떤 것 가지고도 자신을 불순하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그래서 쫓아낼 나라들이란 이상의 것들은 악으로 확증한 부패된 교회의 실제요, 신성한 진리의 힘으로 거절되어진다는 것을 말한다. (10130, 6348, 1205, 2657)

25절. 그리고 토지는 더럽혀 있다. 그러므로 나는 그것 위에 있는 그것으로부터의 불법을 방문할 것이다, 그리고 토지는 그녀의 주민들을 토해낼 것이다.

영적 의미

교회가 지독하게 썩어지면 그 썩은 결과인 고통을 감수해야 하고 더 이상 선인지 악인지를 구별하여 실감할 수 없어 완전히 모독되어 있는다.

세부적 영적 의미

토지는 더럽혀 있다란 거절된 교회는 심각하게 썩어진다는 것을; 불법을 방문함이란 썩어진 결과로 고통받을 것을; 그 땅이 거주민을 토해 내리라란 이 교회는 선이든 악이든 적절히 실감할 수 없다는 것을 뜻한다. (10130, 696, 9937, 9527, 3705)

26절. 너희는 그러므로 내 법령들과 내 판단들을 준수하라, 그리고 이런 역겨운 것의 어떤 것도 실시하지 말라. 본토박이 이든, 너희 사이에 체류하는 낯선 사람 이든 실행하지 말라.

영적 의미

그러나 진실로 영적 인간은 내적, 외적으로 신성한 법에 순종적이다. 그래서 모든 모독, 그것이 내적 교회에 속하든 외적 교회에 속하든 모두 혐오한다.

세부적 영적 의미

주님의 법령과 판단들을 준수하고 역겨운 짓을 하지 않음이란 진실로 영적 인간은 내, 외적으로 신성한 법에 순종하고, 모든 모독하는 것을 역겨워한다는 것을, 본토박이 이든 너희 가운데 체류하는 낯선 사람 이든 이란 그가 내적 교회에 속하든지 외적 교회에 속하든지를 뜻한다. (8387, 6052, 8013)

27절. (모든 이런 역겨운 짓들을 토지의 사람들이 했었다, 이것이 너희 앞에 있었던 짓들이다, 그리고 토지는 더럽혀져 있다.)

영적 의미

위 같은 부패는 이기적 사랑과 세상적 사랑에 있는 이들에게 공통된 것, 이 두 사랑은 유전적 사랑인데, 인간이 실제의 악을 심사숙고해서 탐닉하여 선택할 때 이 사랑은 처음으로 활동을 개시한다.

세부적 영적 의미

“이런 온갖 역겨운 짓은 너희에 앞서 살던 사람들이 했던 것이다”란 이런 부패된 것들은 이기적이고 세상적 사랑 안에 있는 이들에게 공통된 짓이라는 뜻, 너희에 앞서 있었던 것들이란 공동체로서, 개인적으로서도 교회에 앞서 있었던 영적인 것들, 그런고로 유전적 속성으로부터 오는 상태들이라는 뜻임을; 그 땅이 더럽혀졌다란 이기적이고 세상에 속한 뒤집힌 사람들로부터 파생된 실제의 악들이라는 뜻이다. (1205, 693, 8551, 10130)

28절. 토지가 너희 앞에 있었던 나라를 토해내 듯, 너희가 토지를 더럽혀 토지가 너희 역시 토해내지 않게 하라.

영적 의미

과거 뒤집혀진 교회가 그러했듯이 그도 역시 진리를 고집하여 썩게 하여 모독해 간다.

세부적 영적 의미

“너희 보다 앞서 거기에 살던 민족을 토해 냈듯이 너희도 그 땅을 더럽히면 그 땅이 너희를 토해 내리라”란 뒤집혀진 옛 교회가 그러했듯이 영적 인간도 진리를 고집 부려 부패시키면 모독하여 더러워진다 라는 뜻이다. (9527, 10130)

29절. 이런 역겨운 짓의 어떤 것이라도 실시한 자는 누구든지, 그것들을 행한 혼은 정녕 자기 백성 사이로부터 잘리운다.

영적 의미

이런 망측한 짓들 가운데 어느 한 가지라도 저지른 사람은 그가 누구든지 간에 겨레로부터 추방당해야 한다.

세부적 영적 의미

“이런 역겨운 짓을 하는 사람은 누구든지”란 본 장에서 묘사된 바 같이 선하고 참된 것을 모독하는 모든 사람을; 백성으로부터 잘리움이란 진리들 안에 있는 이들로부터 철저히 분리됨을 말한다. (6052, 5302, 1259)

30절. 그러므로 너희는 내 명령(charge)을 지켜라, 하여, 너희는 이런 역겨운 관습들을 행치 말라, 이것이 너희 앞에 있었다, 그리고 너희는 자신을 그것으로 더럽히지 말라. 나는 너희 하느님 주님이시다.

영적 의미

그러므로 영적 인간은 잘 순종해서 옛 부패된 교회처럼 극도로 모독함으로 불순해지지 않도록 해야 한다. 그리고 선과 진리가 하나되어 계신 주님만을 예배해야 한다.

세부적 영적 의미

주님께서 지키라고 한 것을 잘 지킴이란 순종해야 함을, 어떤 역겨운 관습을 따라 하지 말라란 옛 썩어진 교회들처럼 극도로 모독하지 않도록을, 스스로 자신을 더럽히지 않는다란 불순해지지 않음을, “나는 주 너의 하느님이다”란 주님만이 선과 진리가 하나되어 계신 분으로 예배되어야 함을 뜻한다. (8830, 8513, 6052, 8550, 8551, 10130, 2001)

18장의 종합적 고찰

이 장의 주제와 관련되는 서문은 매우 의미심장한데 그 이유는 신성한 분께서 계속적으로 세 번씩 그분을 선포하시기 때문이다. 우선 그분께서는 사랑과 지혜가 하나된 한 분 신성한 존재로서의 자연적 인간을 그분 스스로 명백히 나타내고 있으신다. 이로 인해 우리는 그분이 무한하게 영광스러우신 신성한 사람이신 분으로 자연스럽게 생각되게 되어있고 그러므로 해서 사랑과 지혜, 선과 진리 또는 애착과 총명이 유한한 인간을 구성하게 됨을 이해하게 해준다. 이는 깊이 숙고해 보지 않고 단순하게만 생각하는 자연적 인간 뿐 아니라 식별해내는 영적 인간의 경우에도 적용된다. 이렇게 말한 이유는 제 4절의 내적 의미가 “선에서 파생된 진리, 외적 인간이 내적 인간과 조화를 이루고 있으신 분으로서” 두 번째 그분을 선포하시기 때문이다. 이렇게 선포하신 이유가 더 있다. 자연적 수준에서 영적 수준으로 옮겨갈 때 그 사람이 선의 상태로 진행되는 것은 진리를 수단으로 가능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자연적 수준이 영적 수준과 결합함으로 진행된다. 그러나 세 번째 선포(21절)에서는 “나는 여호와이다”라고만 언급되고 있는데 그 이유는 영적 수준에서 천적 수준으로 되는 것은 순종을 수단으로, 진리와 선이 결합함으로, 진리를 수단으로 하되 선에 근거해 살아가기 때문이다. 거듭나고 있는 모든 이는 위 과정을 통과해야만 하고 그렇게 해 감으로서만 그는 본문에 언급되는 여러 가지 특별한 방법으로 선함이나 진리를 모독하려는 자신 속의 경향성을 극복해 갈 수 있다.
주제 전체가 몇 마디 말로 우선 표현되고 있고 이 표현에 이어 “나는 주님(여호와)이다”가 다시 반복되면서 넓은 측면에서 금하는 것을 확실히 해 두시는데 이에 덧붙여 주님은 거듭나는 사람과 더불어서만, 마치 선과 진리가 신성한 존재 안에서 하나되어 있듯, 합법적으로 결합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다음 차례로 넘어가 생각해 보자. 충분히 거듭난 사람은 벗겨진 자신의 영적인 벌거벗음이 영원히 주님에 의해 보존된다는 사실 속에 심오한 진리 하나가 포함되어 있다. 그 벌거벗음이란 그의 생명에 있는 유전적으로 받은 악과 자신이 실제로 만들어낸 악들이요, 사실 이것은 폐지되어질 수 없고 영원히 남게 되지만 활동하지 않는 상태로 머물고 노출되지도 않는다. 본문에 나열된 금지된 것을 준행할 때에야 어떤 상황에서도 선과 진리를 모독할 가능성을 배제하고 모든 불순함에서 자유로워져 극도로 완전하고 순수한 천사들 같은 삶을 영위한다는 것을 알게 해준다. 이와 동시에 인정할 수밖에 없는 것은, 주님으로부터 떨어져서는 지상 위 교회 안의 누구도, 천국 안의 어느 천사라도 악밖에 가진 게 없고 주님으로부터 온 사랑과 선행으로 덮여 있던 이미 획득한 악한 상태와 감추어 놓였던 유전적 악까지 벌거벗겨지고 말아서 선과 진리를 모독하는 데로 노출된다는 것, 우리는 지상 생활동안 모든 악과 거짓을 거부해야 할 것, 동시에 모든 선함과 진리를 사랑해서 실습하여 그 둘을 진정으로 결혼시켜야 죄를 벗는다는 것들이다.
위와 같은 사항은 본문에 포함된 또 다른 요점을 생각하게 하고 있다. 본문에 게재된 불법적인 연결들, 통상적으로도 허용되지 않는 결혼들이 우리로 되새겨 보게 하는 것이 있다. 즉 천국적인 결혼, 주님과 그분의 교회와의 결혼, 일반 측면에서인 선함과 진리의 결혼은 세부적 측면에서도 마찬가지로 간주되어야 하리라는 것이다. 모든 선은 그에 반대되는 악이 있고, 모든 진리도 그와 반대되는 거짓이 있는데 교인들은 이렇게 천국적인 것에 반대되는 것을 가지고 자신을 더럽히고 모독을 범하지 않아야 할 뿐 아니라 모든 선은 반드시 그에 어울리는 진리와, 모든 진리는 그에 어울리는 선과 결합되어야 하는 바 그 외 여느 다른 것은 안 된다. 그 이유는 그것들이 진정한 결혼이 아닌 것은 명백하기 때문이다. 남자이든 여자이든 각 개인의 생명은 서로 구분되는 바 이는 되풀이 될 수 없고 선 또는 진리가 지니는 구분된 형체 역시 되풀이 되어 서로 바뀔 수도 없는 바, 남녀는 각기 선 또는 진리와 상응되는 진정되고 영원한 결혼이 존재할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상응되는 이 결혼이 이 세상에서 결과되지 않는다면 천국에서도 그렇게 결과되리라는 것은 확실하다. 결혼에 관한 같은 성질의 두 마음은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 그리고 분리될 수 없다는 것은 마태복음에 있는 말씀, “하느님께서 짝 지워 놓은 것을 사람이 나눌 수 없다” 로부터 알 수 있다(19:4-6). 이 구절로부터 알 수 있는 바, 진정한 결혼은 거듭남과 서로 손을 맞잡고 나아간다는 것, 지상의 결혼은 진정한 천국의 결혼을 옷입고 있는 듯 표현한다는 것, 사랑이 어떠하다 해도 거룩하다는 것이다.
위의 선함과 진리의 결혼에 관한 위반들이 어떤 모독을 구성하게 되는가를 첨가해서 우리 앞에 있는 주제를 취급하는 가운데 내적 의미들로부터 그 이유를 이제 관찰해 보게 된다. 이 모든 것들은 한 가지 일반적 서술 즉 인간의 유전적 생명에는 악밖에 없다는 서술에 포함된다. 그러나 많은 이들이 생각하는 것 중 하나는 아이들의 좋은 기질이나 나쁜 기질은 부모로부터 유전된다는 것, 그런고로 진리 또는 거짓을 획득하는 좋은 능력 역시 유전된다고 귀결 짓는다. 이런 기질이나 능력이 우리에게 확인되는 사항임은 부정할 수 없지만 그렇다해도 인간은 출생시 악밖에 없다고 말해야 하는데 어째서 그럴까? 유한한 인간 존재인 이상 어느 누구도 선함을 상속해 줄 수 없다. 선함의 유일한 근원은 주님 뿐이시기 때문이다. 따라서 선함은 부모로부터 아이들에게 유전될리 만무이다. 오로지 거듭남을 통해 주님으로부터 받을 수밖에 없다. 소위 사람들이 유전적으로 받았다고 불리는 선은 유전적으로 받아진 악에 의해 오염되어진다. 다음 성경 구절을 참고로 더 생각해 보기 바란다. 마태복음 19:17; 요한 3:5,6; 열왕기상 8:46.
위에서 살핀 바를 본문과 연결 지어볼 때 명백해지는 하나는, 용어 아버지, 어머니, 형제, 자매 등등이 상응적으로 사용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 단어들은 좋은 의미일 경우 주님으로부터 오는 다양한 애착과 총명의 형체를 명시하지만 본문의 경우 나쁜 의미인 바 다양한 악과 거짓들을 나타내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주님을 믿지 않는 바리사이파인을 두고 이렇게 말하셨다. “너희는 악마의 자식들이다. 그래서 너희는 그 아비의 욕망대로 하려고 한다. 그는 처음부터 살인자였고 진리 쪽에 서 본 적이 없다. 그에게는 진리가 없기 때문이다. 그는 거짓말을 할 때마다 제 본성을 드러낸다. 그는 정녕 거짓말쟁이이며 거짓말의 아비이기 때문이다”(요한 8:44). 여기서 “네 아비가 악마”라 말한 것은 어떤 개인적 악마를 지칭하는 게 아니라 집합체로서의 모든 지옥, 지옥을 만들어 주는 이기적 사랑이라는 원리이다. 따라서 용어 아버지란 모든 악과 거짓은 이기적 사랑에서 나온다는 것을 의미하게 된다. 요한복음 8장 44절은 본 장에 있는 아버지라는 용어에 주어진 의미와 아버지와 관련되는 모든 친척 관계되는 것들의 의미에 대해서까지 충분한 근거를 제시해 주고 있다. 주님의 교회인으로서 우리는 자신 스스로 본문에 상징화되어 있는 모든 악과 거짓에 열심히 대적해야 한다. 그것들과 단호하게 싸워야 한다. 본문에 게재된 자연적, 영적 차원에서의 결합들로 해서 천국적인 것들, 결혼에 관계된 진정한 사랑의 순수함과 거룩함을 모독하도록 결코 허용해서는 안 되리라. 이 각오를 더 확고히 해주는 구절 중 하나를 읽어보자.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아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 나는 아들은 아버지와 맞서고 딸은 어머니와, 며느리는 시어머니와 서로 맞서게 하려고 왔다. 집안 식구가 바로 자기 원수다”(마태 10:34-36).
이제 본문을 살피는 결론 부분으로서 마지막 몇 절에서 사용되는 말씀, “이 모든 역겨운 짓들”이 대표하는 의미인 실지의 악과 유전적 악과를 구별해 보자. 그 이유가 이에 대하여는 주의를 기울여 기억해 두어야 하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이 부모나 선조로부터 자연적인 선을 물려받았다고 해도 그 선은 그 사람의 천국적 생명의 어떤 부분이 되어 그를 구원해 주지 않는다. 이와 마찬가지로 유전적으로 받은 어떤 악한 상태도 그 사람을 지옥 가도록 정죄하는 근거가 되지 못한다. 왜 그렇게 되는 걸까? 그 이유는 어느 누구도 어떤 아이 속에 있는 유전적으로 받은 특이한 조건이 무엇이다 라고 말할 수 없고, 그가 이런 조건을 벗어날 수 없다 라고도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어린이들은 이 문제에 관한 책임에서 자유로워 있다. 오로지 모든 사람은 유전적 경향성들로 해서 스스로 악을 채용해서 생산할 경우, 다시 말해 질서의 법칙을 자신 스스로 위반한 결과인 새로운 악의 형체에만 책임이 있다 (에스겔 18:20). 이와 연결되는 다음 서술은 매우 유익하리라 본다. “유아로 죽은 뒤 성인이 된 어떤 사람이 천국에 있었는데 그는 이런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자기가 지닌 선은 주님으로부터 받은 게 아니라 원래 자기 속에 있었다고 그는 생각하고 있다. 그러므로 해서 그는 자신에게 선천적으로 지녔었던 악한 삶으로 되돌려 보내졌다. 그 다음 이 상황이 나로 하여금 지각하게 한 것은 그가 남을 통치하고 싶어하는 바램을 가졌다는 것, 그가 음탕한 빛을 만들었다는 것, 이것은 그의 부모로부터 온 유전적으로 파생된 악으로부터 초래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자신이 위와 같을 뿐이라는 것을 인정하자 마자 그는 전과 같이 천사들에게 다시 받아들여졌다. 어느 누구도 유전적으로 받은 악 때문에 저 세상에서 고통받지 않는다. 그 이유는 그 악은 그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고로 그에 대해 책임이 없다. 오로지 그는 자신이 저지른 악 때문에 오는 벌로 고통받는다. 이것은 그 사람 자신의 것인 바, 위에서 말한 바 같이 유전적인 악을 자기 것으로 삼은 실제적인 삶에 비례된다”(A.C. 2307, 966). 거듭나는 과정에서 단지 자연적일 뿐인 선한 기질이 사용되는 것에 대하여는 아래 인용문에서 알 수 있을는지 모른다. “진리에 관한 자연적인 선은 개혁되기 전에는 영적인 선 즉 신앙의 선, 선행의 선이 아니다. 그러므로 영적 선을 받기 위해서 인간은 반드시 거듭나야 한다. 거듭남이 결과되는 사이에 그에게 우선 붙어 있는 것은 순수한 진리 그 자체로부터 라기 보다는 또 다른 근원으로부터 온 진리인데 이 진리는 위로 부합되지는 못하고 단지 순수한 진리들을 소개하는 역할을 한다. 소개가 끝나면 순수하지 않은 진리들은 분리되어 진다… 이는 마치 과일이 열리는 과정 즉 열린 열매의 처음 단계는 맛없는 쥬스로 꽉 차 있는데 이렇게 순수하지 않은 쥬스는 달콤한 쥬스를 위한 수단이 되는 바, 후자가 진행되어 가면서 전자는 사라지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자연적 수준의 인간은 거듭난다. 인간의 자연적 선 그 자체만 볼 경우 그 선은 주인과 종의 관계 같이 합리적으로 선을 기쁘게 섬기거나 순종하려 들지 않고 오로지 명령으로 간주할 뿐이다. 그러므로 질서 있게 진행되는 바, 고분고분해지고 기꺼이 섬기는 상태로 가려면 그것이 지닌 강한 욕망(현세에의 욕망)이 약해질 때까지 시험이나 황폐해지는 상황을 수단으로 쉴새 없이 고뇌를 감수해야 한다. 그 다음 주님으로부터 내적 인간을 통해 선행과 신앙의 선이 유입됨으로 해서 그것은 부드러워지고 유전적으로 받은 선은 근절되어가고 그 자리에 새로운 선이 이식된다. 이식된 선 안에 신앙의 진리들이 우리도 모르게 박혀진다. 이는 마치 인간의 심정에 삽입된 기질(fibre)같은데, 이 기질을 통해 새로운 쥬스가 산출되어져서 새로운 심정이 점차 자라 오른다”(A.C. 3470). 그러므로 우리는 마지막 구절, 영적 의미에서나 글자 그대로에서나 모두에게 정직 성실하게 직시해 두어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자신에게 유익한 것, 진정한 천국 상태인 선함과 진리 그리고 선용의 순수한 상태를 위해 노력한 댓가로 수확하기를 바래고 이는 오로지 거듭남을 수단으로, 거듭남에 수반되는 깨끗해짐으로, 더욱이 오직 주님으로부터서 만 달성될 수 있다.

레위기 19장

성경: 레위기 1장

1. 그리고 주님이 모세에게 이야기하셨다, 말하시기를,
2. 이스라엘의 자손의 모든 회중에게 이야기 하라, 그리고 그들에게 말하라, 너희는 거룩할 것이다. 그 이유는 나 주 너희의 하느님은 거룩하기 때문이다.
3. 너희 모두 각 사람은 자기 아버지, 그리고 자기 어머니를 경외하라. 그리고 너희는 내 안식일을 지켜라. 나는 주 너의 하느님이다.
4. 너희는 우상들로 돌아서지 마라, 네 자신을 위하여 부어 만든 신들을 만들지 말라. 나는 주 너의 하느님이다.
5. 그리고 너희가 주님에게 평화 제물의 희생 제물을 바칠 때, 너희는 그것이 받아질 수 있도록 바칠 것이다
6. 그것은 너희가 그것을 바친 같은 날 먹어라, 그리고 내일에도 먹어라. 그리고 만일 셋째 날까지 남아있는 것은 무엇이든, 그것은 불로 태워라.
7. 그리고 만일 셋째 날에 조금이라도 먹게 된다면, 이것은 역겨운 짓이다. 이것은 받아지지 않을 것이다.
8. 그것을 먹는 모든 이는 자기 불법을 낳을 것이다, 그 이유는 그가 주님의 거룩한 것을 먹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혼은 자기 백성으로부터 잘리울 것이다.
9. 그리고 너희는 너희의 토지의 수확물을 베어들일 때, 너는 네 들판의 모퉁이들을 몽땅 베어들이지 말라, 너는 네 수확물의 이삭을 그러모으지 말라.
10. 그리고 너는 네 포도원의 이삭을 줍지 말라, 너는 네 포도원의 떨어진 열매를 그러모으지 마라. 너는 그것들을 가난한 자와 낯선 자를 위해 남겨라. 나는 주 너의 하느님이다.
11. 너희는 훔치지 말라. 너는 거짓되게 장사하지 말라, 서로에게 거짓말하지 마라.
12. 그리고 너희는 내 이름을 수단으로 거짓되게 맹세하지 말라, 그럴 경우 너는 네 하느님의 이름을 모독하는 것이다. 나는 주님이다.
13. 너는 네 이웃을 압제하지 말라, 그로부터 강탈하지 말라. 고용된 종의 임금을 밤새 아침까지 너와 함께 머무르게 말라.
14. 너는 귀먹은 자를 저주하지 말 것이고, 소경 앞에 장애물을 두지 말라, 그러나 너는 네 하느님을 경외하라. 나는 주이다
15. 너희는 재판에서 공정하지 않게 실시하지 마라. 너는 가난한 자라 해서 편애하지 말고, 힘있는 자라 해서 존경하지 말라. 그러나 너는 공정하게 네 이웃을 판결하라.
16. 너는 네 백성 사이에서 나쁜 소문을 퍼트리려고 오르고 내려가고 하지 말라. 너는 네 이웃의 피를 (보려고) 맞서지 말라. 나는 주이다.
17. 너는 네 심정에서 네 형제를 미워하지 말라. 너는 네 이웃을 확실하게 꾸짖어라, 그리고 그 사람 때문에 죄를 낳지 말라.
18. 너는 네 백성의 후손들에 맞서 원한을 품거나 복수하려 들지 말라, 그러나 너는 네 자신 같이 네 이웃을 사랑하라. 나는 주이다.
19. 너희는 내 법령들을 지킬 것이다. 너는 종류가 다른 것이 생겨나게 네 가축을 놔두지 말라. 너는 두 종류의 씨를 네 들판에 뿌리지 말라. 두 종류의 직물을 뒤섞은 옷을 네 위에 걸치지 말 라.
20. 그리고 여인과 육체적으로 눕는 자가 있을 경우이다, 그녀가 여종이고, 남편과 약혼되어 있다, 그리고 전혀 몸값을 치루지 않았고, 자유가 그녀에게 주어지지 않고 있을 경우, 그들은 처벌되어진다. 그들은 죽음에 놓이지는 않을 것이다, 그 이유는 그녀가 자유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21. 그리고 그는 주님에게, 만남의 천막 문으로, 자기의 죄가 있음의 제물을 가져올 것이다, 죄가 있음의 제물은 수양이다.
22. 그리고 성직자는 그가 죄지은 그의 죄를 위하여 주님 앞에서 죄가 있음의 제물의 수양을 가지고 그를 위하여 보상을 만들 것이다. 그리고 그는 지었던 자기 죄를 용서받는다.
23. 그리고 너희가 토지에 들어가서, 그리고 식품을 위해 온갖 나무들을 심을 때, 너희는 그것의 열매를 할례받지 못한 것 같이 간주할 것이다. 그것들은 삼 년을 할례받지 아니한 것으로 너희에게 있을 것이다. 그것을 먹어서는 안된다.
24. 그러나 사 년째 해에 그것의 모든 열매는 거룩할 것인즉, 주님에게 드려 찬양할 것이다.
25. 그리고 다섯 째 해에 너희는 그것의 열매를 먹을 것인데, 너희 에게 소출이 증가되리라. 나는 주 너의 하느님이다.
26. 너희는 피와 더불어 어떤 것도 먹지 말라. 너희는 마술을 사용하지 말라, 점을 치지 말라.
27. 너희는 너희 머리의 모퉁이를 둥글게 하지 말라, 너는 네 수염의 모퉁이를 손상되게 말라.
28. 너희는 너희 몸에 죽은 자를 위하여 어떤 베임도 만들지 마라. 너는 네 위에 표 자국을 내지 마라. 나는 주이다.
29. 네 딸을 창녀로 만들어 그녀를 더럽히지 마라. 하여, 토지가 매춘으로 타락되어 사악함이 가득차지 않게 하라.
30. 너희는 내 안식일을 지킬 것이다, 그리고 내 성소를 소중히 하라. 나는 주이다.
31. 너희는 영들과 친밀하다는 그들에게 돌아서지 말고, 마법사에게 돌아서지 말라. 그들을 추종하여 그것들로 말미암아 더럽혀지지 않게 하라. 나는 주 너의 하느님이다.
32. 너는 백발의 머리 앞에서 일어설 것이다, 그리고 노인의 얼굴을 존경하라, 그리고 너는 네 하느님을 경외하라. 나는 주이다.
33. 그리고 만일 낯선 자가 너의 토지에서 너와 함께 체류한다면, 너희는 그에게 나쁘게 대하지 말라.
34. 너와 더불어 체류하는 낯선 자는 너희 사이에 있는 본토박이 같이 너에게 있어야 한다, 그리고 너는 그를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그 이유는 너희가 이집트의 토지에서 낯선 자들이였기 때문이다. 나는 주 너의 하느님이다.
35. 너희는 재판에서, 계량에서, 무게를 담에서, 치수를 잼에서 부당함이 없게 실시하라.
36. 올바른 저울, 올바른 추, 올바른 에바(ephah), 그리고 올바른 힌(hin)을 너희는 가져라.
37. 그리고 너희는 모든 나의 법령들을 준수할 것이다, 그리고 모든 나의 판결들, 그리고 그것들을 실시할 것이다. 나는 주이다.

영적 의미 요약

* 다음과 같은 가르침이 주어진다; 인간은 자신 안에서 선과 진리가 결합되게 해야 한다. 그 결합을 존경하고 사랑할 것. 진정한 예배에서 자신을 확증되게 하라. 우상숭배인 이기적인 사랑과 세상적인 사랑을 금해야 한다. 진리가 명백히 보여준 그대로 선을 사랑하라. 자유 속에서 예배하라. 선을 자기 것이 되게 하라. 심판 과정에서 악을 거절하라. 특별히 모독을 피해야 하는데 그 이유는 이것이야말로 자신이 악 속에 있음을 스스로 확증하기 때문이다, 1-8절.
* 심판 시기에 선과 진리는 어떤 이기적인 동기도 없는 선행의 일을 하는 가운데 주님께 바쳐야 한다, 9-10절.
* 영적 책임이 포함되는 여러 가지 금지사항, 11-18절.
* 잘 꾸며 저지른 사악함이 아닌 거듭남의 과정에서 있게 되는 선한 애착과 악의 불법적인 결합에 관하여, 그리고 그 치료와 결과에 관하여, 19-22절.
* 완전한 상태에서 선을 자기 것으로 삼는데 대하여, 상대적으로 불완전한 상태에서, 충만되게 실감함, 아껴두시는 것들의 이식을 수단으로 풍부하게 증가됨, 23-25절.
* 영적 인간이 게을리 해서는 결코 안 되는 여러 가지 금지 조항과 의무 조항에 관하여, 26-37절.

각 절의 영적 의미

1절. 그리고 주님이 모세에게 이야기하셨다, 말하시기를,

영적 의미

지각을 주시는 신성한 진리를 수단으로 주님께서 밝히 알게 하신다.

세부적 영적 의미

주님(여호와)란 사랑 측면에서의 신성한 존재를; 이야기하심이란 유입을; 모세란 신성한 진리 또는 말씀을; 말하심이란 지각을 각각 명시한다. A.C. 2001, 2951, 7010, 1791, 1822.

2절. 이스라엘의 자손의 모든 회중에게 이야기 하라, 그리고 그들에게 말하라, 너희는 거룩할 것이다. 그 이유는 나 주 너희의 하느님은 거룩하기 때문이다.

영적 의미

영적 교회 속의 모든 사람이 가르침을 받아야 하는 이유는 각자 안에서 진리가 선과 결합해야만 한다는 것을 이해하기 위해서인데 그런 이유는 주님 안에서 그 둘은 하나되어 있기 때문이다.

세부적 영적 의미

이스라엘 온 회중에게 “나 여호와가 너희 하느님이다”라고 일러 말하심이란 영적 교회 속의 모든 사람은 가르쳐져야 하는 바 그렇게 해서 그가 이해하고 그는 자신 안에서 선과 진리를 결합시켜야 하는데 그 이유는 그 둘은 주님 안에서 하나되어 있기 때문이다. A.C. 7010, 3654, 10355, 1791, 2146, 2001.

3절. 너희 모두 각 사람은 자기 아버지, 그리고 자기 어머니를 경외하라. 그리고 너희는 내 안식일을 지켜라. 나는 주 너의 하느님이다.

영적 의미

그러므로 영적 인간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신성한 진리와 선을 존경하고 사랑해야 한다. 그리고 거듭남으로 그 둘이 결합되게 해야 한다. 이런 방법으로만 주님에 관한 진정한 예배가 건립되고 확증된다.

세부적 영적 의미

각자 자기 부모를 경외해야 함이란 영적 인간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신성한 진리와 선을 존경하고 사랑해야 한다는 것을; 안식일을 지킴이란 거듭남으로 선과 진리가 결합되게 함을; “나 여호와 너희 하느님”이란 위 방법만이 참된 주님의 예배를 건설하고 확증함을 말한다. A.C. 8897, 8889, 7192.

4절. 너희는 우상들로 돌아서지 마라, 네 자신을 위하여 부어 만든 신들을 만들지 말라. 나는 주 너의 하느님이다.

영적 의미

그러므로 영적 인간은 이기적인 사랑에서 뛰쳐나오는 거짓과 악들에 자신이 빠져들고 동시에 주님에게 등을 돌리는 것을 금해야 한다. 반드시 진리 안에서 명백해진 그대로 선을 사랑함으로 주님만을 예배해야 한다.

세부적 영적 의미

우상에로 돌아서는 것이란 주님으로부터 뒤돌아서 세상적 사랑에서 튀어나오는 악과 거짓에 전념하는 것을; 신을 부어 만듦이란 이기적 사랑에서 위와 같이 되는 것을, “나 여호와 너희 하느님”이란 진리로 명백해지는 선을 사랑함으로 주님을 예배함을 말한다. A.C. 1205, 8869, 2001.

5절. 그리고 너희가 주님에게 평화 제물의 희생 제물을 바칠 때, 너희는 그것이 받아질 수 있도록 바칠 것이다

영적 의미

그래서 이 예배는 완전한 자유로움에서 있어야 하는데 그 이유는 이런 예배만 주님께서 응낙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세부적 영적 의미

그분의 마음에 들도록 평화 제물을 바침이란 신성한 선에 관해 이기적 선으로부터가 아닌 자유로부터 예배함을 말한다. A.C. 10097, 2001, 9506.

6절. 그것은 너희가 그것을 바친 같은 날 먹어라, 그리고 내일에도 먹어라. 그리고 만일 셋째 날까지 남아있는 것은 무엇이든, 그것은 불로 태워라.

영적 의미

또한 위와 같은 예배 속의 선은 교인에 의해 계속적으로 우선적으로 자기 것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 예배 안에 이기적이고 세상적인 사랑이 가담한 애착은 자기 것을 삼아서는 안 되고 시험에서 승리함을 통해 반드시 거절되어야 한다.

세부적 영적 의미

제물은 바치는 날과 그 다음 날까지 먹어야 함이란 위의 예배 속의 선은 우선적으로, 계속적으로 자기 것으로 삼아진다는 것을; 사흘째 되는 날 남은 것을 불에 사름이란 위의 예배에서 이기적이고 세상적 사랑이 가담된 애착은 자기 것으로 삼을 수 없는 바 시험에 승리함을 통해 심판의 과정에서 거절되어야 한다. A.C. 2187, 7887, 3998, 8788, 8480-3, 10115, 900.

7절. 그리고 만일 셋째 날에 조금이라도 먹게 된다면, 이것은 역겨운 짓이다. 이것은 받아지지 않을 것이다.

영적 의미

그런데 위 과정에서 누군가가 선 뿐만 아니라 악까지 자기 것을 삼는다면 그는 선을 모독하는 것이다. 이런 모독은 용납될 수 없다.

세부적 영적 의미

사흘째 날 먹는다란 심판 동안에 자기 것으로 삼음을; 역겨운 짓이란 예배가 모독됨을, 받지 않으심이란 모독된 이 예배는 열납될 수 없다는 뜻이다. A.C. 2187, 900, 6052, 9506.

8절. 그것을 먹는 모든 이는 자기 불법을 낳을 것이다, 그 이유는 그가 주님의 거룩한 것을 먹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혼은 자기 백성으로부터 잘리울 것이다.

영적 의미

위와 같은 행위를 저지르는 모든 이는 자신이 악 가운데 있음을 확증하고 건립한 것이다. 악과 선을 섞을 경우 모독이라는 것을 피할 도리가 없다. 이런 사람의 모든 진리는 황폐되어 질 수밖에 없다.

세부적 영적 의미

그것을 먹는 자는 불법을 낳을 것이다란 모독된 예배를 가지는 자는 자신을 악 가운데 있게 하는 것임을; 주님의 거룩한 것을 모독함이란 악에 선을 혼합시키는 것임을; 백성으로부터 잘리움이란 그들의 모든 진리들이 황폐하게 된다는 뜻이다. A.C. 9965-3, 2187, 6052, 5302, 1259.

9절. 그리고 너희는 너희의 토지의 수확물을 베어들일 때, 너는 네 들판의 모퉁이들을 몽땅 베어들이지 말라, 너는 네 수확물의 이삭을 그러모으지 말라.

영적 의미

심판에서 선이 실감 될 때 내적으로부터의 힘을 가지고 표현된 최말단의 선을 더 이상 이기적인 목적으로 자기 것을 삼아서는 안 된다. 또한 외적으로 이기적 동기를 가지고 그 선을 오염시켜서도 안 된다.

세부적 영적 의미

수확물이란 심판에서 선을 실감함을; 들판의 구석구석까지 거두어들이지 않음이란 내적으로 충만되고 힘있게 되어 최말단에 표현되는 가운데 이기적 목적에 실감된 선을 자기 것을 삼지 않음을; 거두고 남은 이삭을 줍지 않음이란 실감된 선은 외적으로 이기적 동기를 수단으로 오염되어서는 안 됨을 뜻한다. A.C. 9295, 10669, 3310, 6188, 9494, 9273, 9146.

10절. 그리고 너는 네 포도원의 이삭을 줍지 말라, 너는 네 포도원의 떨어진 열매를 그러모으지 마라. 너는 그것들을 가난한 자와 낯선 자를 위해 남겨라. 나는 주 너의 하느님이다.

영적 의미

더 나아가 위의 영적 선처럼 영적 진리의 경우도 자신에게서 근원된 듯 여기지 말고, 그 진리로 결과된 선도 자아로부터인 듯 여기지 말라. 이는 거룩한 선행인 바 이것이 외적으로 충분히 실감될 때 오염된다. 반대로 이 사항들은 선행의 일 가운데서, 그리고 어떤 이기적 동기가 없는 선행으로부터의 신앙 속에서 주님께 바쳐져야 한다.

세부적 영적 의미

포도원을 속속들이 훑트지 않음이란 영적 선처럼 영적 진리도 취급된다는 것 즉 그것이 자아에서 비롯된 줄 여기지 말라는 것을; 포도원의 떨어진 포도를 줍지 말라란 거룩한 선행을 결과되게 하는 선이 외적으로 충분히 실감될 때 위와 같이 오염되어서는 안 됨을; 가난한 자와 외국인이 줍도록 그것을 남겨둠이란 위의 경우와 반대로 위의 사항들은 이기적인 어떤 동기가 없는 선행으로부터 오는 신앙과 선행의 일 속에서 주님께 바쳐져야 함을; “나는 주 너희 하느님”이란 인간은 선과 진리, 그 둘의 결합 속에서 건설되고 확증되어야 함을 뜻한다. A.C. 9139, 10669, 9273, 1071, 10669, 4955, 10669, 2146, 2001, 7192.

11절. 너희는 훔치지 말라. 너는 거짓되게 장사하지 말라, 서로에게 거짓말하지 마라.

영적 의미

주님께 속한 것을 자신의 것으로 돌리는 것은 신성한 질서에 위배된다. 즉 거짓 가운데 있으면서 동시에 진리 가운데 있다거나 악 가운데 있으면서 동시에 선 가운데 있어서는 안 된다.

세부적 영적 의미

훔치지 말라란 주님에 속하는 것을 자아로부터 라고 하는 것은 신성한 질서에 위배됨을, 사기치지 말라란 거짓 가운데 있지 말고 진리 가운데 있으라는 것을, 이 사람이 저 사람을 속이지 말라란 악 가운데 있지 말고 선 가운데 있으라는 것을 뜻한다. A.C. 8906, 683, 8908.

12절. 그리고 너희는 내 이름을 수단으로 거짓되게 맹세하지 말라, 그럴 경우 너는 네 하느님의 이름을 모독하는 것이다. 나는 주님이다.

영적 의미

위선으로 진리에 어긋나게 자신을 확증하는 것은 영적 인간을 위해 합법적인 게 아니다. 이는 본질적으로 주님이 신성한 선이심을 가르치는 진리를 모독하는 것이다.

세부적 영적 의미

주님의 이름으로 거짓되게 맹세해서 하느님의 이름을 모독한다는 것은 진리를 알고 이해하는 영적 인간이 위선으로 자신이 확증되게 하려는 것은 불법인데, 그 이유는 이 짓은 본질적으로 신성한 선이신 주님을 가르치는 진리를 모독하기 때문이다. “나는 주”란 취소할 수 없는 확증이란 뜻이다. A.C. 8882, 2001, 2842, 7192.

13절. 너는 네 이웃을 압제하지 말라, 그로부터 강탈하지 말라. 고용된 종의 품삯을 밤새 아침까지 너와 함께 머무르게 말라.

영적 의미

영적 인간은 선행에 위반되는 짓을 해서는 안 되는 바 자기 형제의 신앙 속에 있는 진리를 형제에게서 박탈되게 해서는 안 된다. 보상을 목적으로 자연적 인간 수준에서 선을 행하는 사람은 그 상태에 자신이 있음을 확증해서는 안 된다. 그 이유는 비록 그 선행이 거듭나기 이전의 선용이라 해도, 자연적 수준의 삶이라는 희미함에서 있어졌다 해도 이는 천국적 선이 실감될 때 반드시 거절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세부적 영적 의미

이웃을 억압함이란 선행을 위반함을; 그 사람으로부터 강탈함이란 그가 지닌 신앙 속의 진리를 강탈함을; 품삯을 받는 종이란 보상을 목적으로 선을 행하는 사람을, 아침까지 삯을 미루지 말라란 위의 상태가 자신 속에 있음을 확증해서는 안 됨을, 그 이유는 비록 위의 상태가 거듭나기 전의 선용이고 자연적 삶이라는 희미한 상태에서였다 해도 위 상태는 천국적 선이 실감될 때 거절되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삯을 지니고 있지 말라란 계속되기 위해 예비 상태를 허용함을, 보상을 목적으로 선을 행하는 상태는 단지 자연적인 상태일 뿐이다. 밤은 이런 상태의 희미함을, 아침은 천국적 선이 실감될 때 있어지는 상태를 말한다. A.C. 9196, 8906, 8002, 3816, 9787, 9787.

14절. 너는 귀먹은 자를 저주하지 말 것이고, 소경 앞에 장애물을 두지 말라, 그러나 너는 네 하느님을 경외하라. 나는 주이다

영적 의미

누군가가 선을 지각하는데 부족하다거나 또는 진리를 이해함이 부족하다 해도 영적 인간은 그를 따돌려서는 안 된다. 그와 반대로 그는 이런 사람을 향해 사랑과 선행을 실행해서 자신이 선 가운데 더 굳게 서 있도록 해야 한다.

세부적 영적 의미

귀머거리에게 저주하지 말라란 선을 지각하는데 부족한 이들을 따돌리지 말라는 것을; 소경 앞에 장애물을 놓지 말라란 진리를 이해하는데 부족한 이들이라고 따돌리지 말라는 것을; 네 하느님을 두려워함이란 위와 같은 사람을 향해 선행과 사랑을 실시하라는 것을; “나는 너의 주”라 함은 위와 같은 과정을 수단으로 영적 인간은 자신을 선 가운데 더욱 강하게 건설해야 함을 뜻한다. A.C. 9397-3, 2383, 2836, 2001, 7192.

15절. 너희는 재판에서 공정하지 않게 실시하지 마라. 너는 가난한 자라 해서 편애하지 말고, 힘있는 자라 해서 존경하지 말라. 그러나 너는 공정하게 네 이웃을 판결하라.

영적 의미

참으로 영적 인간은 모든 부정(불공평)을 피해야 하는 바 신중함 없이 선을 행해서도 안 되고 지적인 힘만으로 진리를 증진시키려 해서도 안 된다. 그는 모든 선이 지탱되도록 선행과 진리를 결합시켜 행동해야 한다.

세부적 영적 의미

공정하지 못한 재판을 하지 말라란 참으로 영적 인간은 진리를 수단으로 선에 의거 행동함으로 모든 불공정을 피하라는 것을; 가난한 자(영세민)을 두둔하지 않음이란 식별력 없이는 선을 행하지 말라를; 힘(세력) 있는 자를 봐주지 말라란 지적 능력만을 총동원함으로 진리를 증진시키려 들지 말라를; 이웃을 정의롭게 재판함이란 모든 선을 지지함에 있어 선행에 진리를 결속시켜 행하라는 뜻이다. A.C. 2258, 8315, 2258.

16절. 너는 네 백성 사이에서 나쁜 소문을 퍼트리려고 오르고 내려가고 하지 말라. 너는 네 이웃의 피를 (보려고) 맞서지 말라. 나는 주이다.

영적 의미

그는 타인에게 친구인 체하여 선행을 위반해서도 안 되고 타인이 선 쪽으로 인도해주는 진리의 상태에 아직 있다면 그의 잘못들을 꼬집어내는 비열한 수준으로 내려와서도 안 된다. 타인이 주님으로부터 가지게 된 것 즉 선과 결합하는데 필요한 내면의 진리를 받는 것을 방해함으로 선 가운데 있는 이들의 영적 삶을 부패시키면 안 된다.

세부적 영적 의미

나쁜 소문을 퍼트림이란 타인에게 친절을 먼저 옷입힘으로 선행과 진리를 위반하여 타인의 잘못을 노출시키는 야비함으로 인격이 처지는 것을 말하는데 그 이유는 나쁜 소문을 퍼뜨리는 것(tale-beareing or slandering)은 악한 동기로부터 타인에 관해 지닌 지식을 상품화하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이 히브리 단어는 나쁜 소문을 퍼뜨림이라는 뜻만 아니라 동사로 사용될 경우 상인처럼 여행하는 뜻도 지니기 때문이다. 겨레 가운데 선 쪽으로 인도하는 진리의 상태에 있는 사람을; 네 이웃을 죽을 죄인으로(피를 보려고) 고발함이란 자기들 속의 선과 결합하는데 필요한 내면의 진리를 영접하려는 것을 뒤집음으로 선 가운데 있는 이들의 영적 삶을 부패시킴을; “나는 주”란 그들의 선이 주님으로부터임을 확증함을 뜻한다. A.C. 4815, 2967, 5312, 2425, 9127, 4926, 7192.

17절. 너는 네 심정에서 네 형제를 미워하지 말라. 너는 네 이웃을 확실하게 꾸짖어라, 그리고 그 사람 때문에 죄를 낳지 말라.

영적 의미

그렇다. 그는 선에서 내향적으로 비켜서서는 안 된다. 오히려 외향으로 선을 실습해야 한다. 즉 참된 것을 사랑함으로부터 잘못된 것을 질책하는데 주저해서는 안 되며 형제 안에 악이 있을 경우 자연적 친절함 때문에 그 악을 너그러이 봐주면 안 된다.

세부적 영적 의미

심정으로 형제를 미워말라란 선으로부터 내향적으로 비켜서지 말라를, 이웃의 잘못을 타일러 줌이란 참된 것을 사랑함으로부터 잘못된 것을 질책하는데 주저하지 말라를, 그래야 그 죄에 대한 책임을 벗는다란 형제 안에서 악이 인식될 때 자연적 친절 때문에 악을 너그러이 봐주어 넘어가지 말라는 뜻인데 그 이유는 “죄에 대한 책임”이란 이 절의 경우 견책하지 않음으로 잘못을 행한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그 사람 때문, because of him”이란 진리와 관계 없는 선행 또는 자연적 친절에서 오는 느낌을 뜻하기 때문이다. A.C. 3488, 2360, 7542, 4700, 2425, 9937, 2425.

18절. 너는 네 백성의 후손들에 맞서 원한을 품거나 복수하려 들지 말라, 그러나 너는 네 자신 같이 네 이웃을 사랑하라. 나는 주이다.

영적 의미

영적 인간은 악에 악으로 되돌리거나, 이기적 충동으로부터서는 진리이든 거짓이든 타인의 견해에 반대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그는 선행으로부터 만사를 해결해야 한다. 그 이유는 주님이 선행의 본질되시기 때문이다.

세부적 영적 의미

원수를 갚지 말라란 악을 악으로 되돌리지 않음을, 네 백성의 후손(동족)에게 앙심을 품지 말라란 다른 이의 견해가 진리이든 설사 거짓이든 이기적 충동으로부터서는 그 사람의 견해에 반대하지 말라를,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함이란 선행으로부터 만사를 처리하는 것을, “나는 주”란 주님은 본질적으로 사랑과 선행이심을 뜻한다. A.C. 1259, 489, 8223, 2425, 2001.

19절. 너희는 내 법령들을 지킬 것이다. 너는 종류가 다른 것이 생겨나게 네 가축을 놔두지 말라. 너는 두 종류의 씨를 네 들판에 뿌리지 말라. 두 종류의 직물을 뒤섞은 옷을 네 위에 걸치지 말 라.

영적 의미

영적 인간은 외적 사항들에 있는 신성한 질서의 법칙을 모두 준수해야 한다. 즉 선행의 선에 악을 섞는 것 그것이 자연적 수준이든 영적 수준이든 섞음질로 선을 모독해서는 안 되고, 거짓을 진리에 첨가함으로 진리를 모독해서도 안 되며, 참된 교리와 거짓을 동시에 고백함으로 이중적인 품성을 바깥쪽에서도 지니면 안 된다.

세부적 영적 의미

내 법령을 지킴이란 외적 사랑 속에 있는 신성한 질서의 법칙을 모두 준수함을; 종류가 다른 것과 교미시키지 않음이란 선행의 선이 자연적 수준이든 영적이든 그 선에 악을 혼합시켜 모독하지 말라는 것, 다시 말해 불법적인 결합으로 선을 모독하지 말라는 것을; 서로 다른 종자를 들판에 섞어 뿌리지 말라란 진리에 거짓을 혼합함으로 모독하지 말라는 것 또는 선의 상태에 있음으로 모독하지 말라는 것, 동시에 선 쪽으로 인도하는 진리의 상태에 있음으로 모독하지 말라는 것을; 종류가 다른 실을 섞어 짠 옷을 걸치지 말라란 참된 교리와 거짓을 동시에 고백함으로 바깥쪽으로 이중 품성에 있지 말라는 것을 뜻한다. A.C. 8357, 5913,6126, 9182, 9274, 2576-15, 9274.

20절. 그리고 여인과 육체적으로 눕는 자가 있을 경우이다, 그녀가 여종이고, 남편과 약혼되어 있다, 그리고 전혀 몸값을 치루지 않았고, 자유가 그녀에게 주어지지 않고 있을 경우, 그들은 처벌되어진다. 그들은 죽음에 놓이지는 않을 것이다, 그 이유는 그녀가 자유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영적 의미

거듭나는 과정 중에 자연적 인간의 불완전한 애착을 영적 인간의 선한 애착과 결합시킬 경우, 그가 아직은 악에서 충분히 해방되지 않았거나 전적으로 자유함에서 행동할 수 없는 상태였다 해도 그는 자기 잘못의 탓으로 비록 단죄되지 않겠지만 고통을 받게 될 것이다. 그 이유는 그가 충동의 영향 밑에 있었고 영적 자유에서 심사숙고된 선택으로부터 행동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세부적 영적 의미

여종인 여인과 잠자리에 든다는 것은 영적 인간 속의 선한 애착이 자연적 인간 속의 불완전한 애착과 결합하는 것을; 남자와 약혼함이란 거듭나는 과정에 있음을; 아직 몸값을 치루지 않았음이란 아직 악에서 구원되지 않았음을; 아직 자유를 얻지 못했음이란 아직 전적으로 자유로부터 행동할 수 없음을; 처벌됨 또는 “문책함”이란 위와 같은 잘못들로 인한 결과로 고통받음을; 죽이지는 말라란 절대적으로는 단죄되지 않음을; 그 여자가 자유인이 아니기 때문이란 충동의 영향 밑에 있어왔다는 것, 영적 자유에서 심사숙고된 선택으로 행동되지는 않았다는 것을 뜻한다. A.C. 6348, 3654, 8890, 8996, 6279, 696, 2242, 5605, 892.

21절. 그리고 그는 주님에게, 만남의 천막 문으로, 자기의 죄가 있음의 제물을 가져올 것이다, 죄가 있음의 제물은 수양이다.

영적 의미

이 사람은 자기 악과 잘못을 제거하기 위해 주님을 예배해야 하되 그 예배에서 모든 선은 천국을 통해 주님으로부터임을 인정해야 한다. 이때 내적 인간 안에 있는 순진의 선을 수단으로 주님과의 결합이 있게 된다.

세부적 영적 의미

수양을 죄가 있음의 제물로 만남의 천막 문으로 가져와 주님께 바침이란 위와 같은 사람은 자기 악과 잘못을 제거하기 위해 주님을 예배하되 모든 선은 천국을 통해 주님으로부터 존재함을 인정함으로 예배해야 한다. 이때 내적 인간 안에 있는 순진의 선을 수단으로 그분과의 결합이 있어진다. A.C. 3400, 2356, 3540-3, 10042.

22절. 그리고 성직자는 그가 죄지은 그의 죄를 위하여 주님 앞에서 죄가 있음의 제물의 수양을 가지고 그를 위하여 보상을 만들 것이다. 그리고 그는 지었던 자기 죄를 용서받는다.

영적 의미

그러면 선 때문에 외적 인간은 내적 인간과 재회하는데 이때 그는 자기의 약함 때문에 죄를 지었는 바 주님을 신실하게 인정하는 회개를 통하여야 한다. 그리하여 그의 악은 주님에 의해 삭제될 것이다.

세부적 영적 의미

성직자가 죄가 있음의 제물로 수양을 가지고 그를 위해 보상을 만들어 그가 용서됨이란 위의 선 때문에 외적 인간은 회개를 통해 내적 인간과 재회하게 된다는 것, 그가 자기 약함으로 죄를 지었지만 아직 주님을 진실로 인정하고 있다면 회개를 통해 그 악은 주님에 의해 삭제된다는 것을 뜻한다. A.C. 9946, 10042, 868.

23절. 그리고 너희가 토지에 들어가서, 그리고 식품을 위해 온갖 나무들을 심을 때, 너희는 그것의 열매를 할례받지 못한 것 같이 간주할 것이다. 그것들은 삼 년을 할례받지 아니한 것으로 너희에게 있을 것이다. 그것을 먹어서는 안 된다.

영적 의미

회개를 통해 선이라는 천국적 삶 속에 있게 되면 선용을 위해 진리가 선으로부터 실습되는데 이 때 인정해야 하는 것이 있다. 즉 제 아무리 완벽한 인간의 행동에도 상대적으로 불순함이 있다는 것, 이는 거듭나는 기간 뿐 아니라 천국 자체도 그러하다는 것, 이기적 사랑으로부터 파생될 경우 인간도 천사도 선을 자기 것으로 결코 삼을 수 없다는 것이다.

세부적 영적 의미

그 토지에 들어감이란 회개를 통해 선이라는 천국적 삶을 실감함을; 거기서 식품을 위해 온갖 나무를 심는다란 삶에 충당하기 위해 다각도로 진리가 선으로부터 실시됨을; 그 열매를 할례받지 못한 것 같이 여김이란 인간이 제아무리 완벽한 행동을 했다해도 상대적으로 불순함이 있음을 인정함을; 삼 년 동안의 열매를 할례받지 않은 것으로 여김이란 거듭나는 동안, 그리고 천국 그 자체에서까지도 선은 주님으로부터만 계속 존재함을; 먹지 말라란 이기적 사랑으로부터 선은 자기 것으로 삼아질 수 없음을 말한다. A.C. 3705, 8326, 2039-6, 2788, 2187.

24절. 그러나 사 년째 해에 그것의 모든 열매는 거룩할 것인 즉, 주님에게 드려 찬양할 것이다.

영적 의미

선과 진리가 충만되게 결합된 상태에 있고, 이기적 삶이 사그러져 있을 경우 선은 진실로 실감되겠지만 심정으로부터 그 선의 근원을 주님께 돌려야 한다.

세부적 영적 의미

넷째 해에 열리는 열매는 거룩하므로 주님을 찬양하는데 바쳐져야 함이란 선과 진리의 결합이 충만된 상태에 있고 이기적 삶이 수그러들었을 경우 선은 진실로 실감되어 심정으로부터 주님께 선의 근원을 돌린다는 뜻이다. A.C. 10136, 2146, 8042, 3880-4.

25절. 그리고 다섯 째 해에 너희는 그것의 열매를 먹을 것인데, 너희에게 소출이 증가되리라. 나는 주 너의 하느님이다.

영적 의미

그 다음 따라 오는 사항은 주님이 아껴두신 것이 선을 자기 것으로 삼음을 수단으로 외적 인간 안에 이식될 것인데 이는 선과 진리가 더 풍부히 증가되기 위해서 이고, 그럼으로 주님을 더욱 충만되게 인정하고, 그 결과 그분을 사랑함에 대해 더욱 강하게 확증받게 된다.

세부적 영적 의미

다섯 째 해에 열리는 열매를 먹는다란 선을 자기 것 삼음으로 아껴두신 것들이 외적 인간 안에 충분히 이식됨을, 소출이 증가됨이란 선이 풍부하게 증가되는 질서 안에 있음을, “나는 주”라 함은 그분에 대한 사랑을 더욱 강하게 확증함을 뜻한다. A.C. 5291, 6156, 2187, 8326, 4481, 2001, 7192.

26절. 너희는 피와 더불어 어떤 것도 먹지 말라. 너희는 마술을 사용하지 말라, 점을 치지 말라.

영적 의미

영적 인간은 선에 악을 섞음으로 선을 모독하거나 거짓을 만들어내 내적, 외적 인간 속의 진리와 섞음으로 거짓이 진리처럼, 악이 선인 듯 나타나게 해서는 안 된다.

세부적 영적 의미

피가 든 채로는 어떤 것도 먹지 말라란 영적 인간은 선에 악을 섞음으로 선을 모독하지 말라를, 마술을 쓰거나 점을 치지 말라란 거짓이 진리인 듯, 악이 선인 듯 나타나게 만들므로해서 내적, 외적으로 있는 진리를 모독하지 말라는 것을 뜻한다. A.C. 10033, 7297, 683.

27절. 너희는 너희 머리의 모퉁이를 둥글게 하지 말라, 너는 네 수염의 모퉁이를 손상되게 말라.

영적 의미

내적으로 악을 가지고 선을 썩게 하는 것, 외적으로 거짓을 가지고 진리를 썩게 하는 것은 불법이다.

세부적 영적 의미

머리의 모퉁이(관자놀이)의 머리를 둥글게 깍지 말고, 수염의 모퉁이를 손상되게 말라(구레나룻을 밀지 말라)란 내적 측면에서는 악을 가지고 선을 부패시키고, 외적으로는 거짓을 가지고 진리를 부패시키는 것은 불법이다는 뜻이다. A.C. 3301, 5247-3.

28절. 너희는 너희 몸에 죽은 자를 위하여 어떤 베임도 만들지 마라. 너는 네 위에 표 자국을 내지 마라. 나는 주이다.

영적 의미

영적 인간은 자신이 외적 고행을 치루어 악을 제거할 수 있다고 착각하거나 외적 예배만으로도 항구적인 선을 증진시킬 수 있다고 상상해서는 안 된다. 그 이유는 모든 참된 예배는 주님으로부터 오는 순수한 선을 수단으로 해야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세부적 영적 의미

너희 몸에 죽은 자를 위하여 어떤 베임도 만들지 말라란 영적 인간은 외적 고행을 한다고 자기 악이 제거될 수 있다고 상상하거나 외적 예배를 잘 지키면 선을 증진시킬 수 있다고 상상해선 안 된다. 거기에는 내적으로 거룩함이 없다. “나는 주”란 모든 진정한 예배는 주님으로부터 오는 순수한 선을 수단으로 존재한다를 뜻한다. A.C. 9056, 9386, 81, 272, 2001.

29절. 네 딸을 창녀로 만들어 그녀를 더럽히지 마라. 하여, 토지가 매춘으로 타락되어 사악함이 가득차지 않게 하라.

영적 의미

그러므로 진리에 관한 애착이 왜곡됨으로 모독되어서는 안 된다. 이렇게 왜곡시킴이 증가하고 번성하여 악까지 확증해버리는 일이 없기 위해서이다.

세부적 영적 의미

네 딸을 창녀로 더럽히지 말라. 그래야 그 토지가 매춘으로 타락되어 사악함이 가득차지 않을 것이다란 진리를 위한 애착이 거짓으로 모독되지 않아야 이런 거짓들이 증가되어 넘실거리지 않으며 악 역시 확증되지 않을 것임을 뜻한다. A.C. 489, 6348, 2905.

30절. 너희는 내 안식일을 지킬 것이다, 그리고 내 성소를 소중히 하라. 나는 주이다.

영적 의미

그 반면 천국적 선의 상태는 항구적이어야 하고 천국적 진리의 상태는 언제나 거룩해 있어야 하는 바, 그 이유는 주님이 거룩함 자체이기 때문이다.

세부적 영적 의미

안식을 지키고 성소를 소중히 여김이란 위와 반대로 천국적 선의 상태가 항구적이고 천국적 진리의 상태가 언제나 거룩해 있을 것임을, “나는 주”란 주님만이 거룩함 자체이시다는 뜻이다. A.C. 8887, 2001, 2190.

31절. 너희는 영들과 친밀하다는 그들에게 돌아서지 말고, 마법사에게 돌아서지 말라. 그들을 추종하여 그것들로 말미암아 더럽혀지지 않게 하라. 나는 주 너의 하느님이다.

영적 의미

영적 인간은 악이 선 같이 보이게, 거짓이 진리인 듯 여겨지게 하는 거꾸로 된 질서를 수단으로 선을 증진시키겠다고 시도하지 말라. 위와 같은 생각 속에 주입되는 악령은 반드시 퇴치해야 하는 바 불순함만을 생산하기 때문이다. 인간에 의해 확증되어질 것은 오로지 선과 진리의 결합 뿐이다.

세부적 영적 의미

영들과 친밀한 자나 마법사(죽은 사람의 혼백을 불러내는 것이나 점쟁이와) 가까이하지 말라란 질서에 위배되는 일 즉 악을 선처럼 보이게, 거짓이 진리처럼 여기게 함으로 선을 증진시키려 시도하지 말라는 것을, 위의 일을 추구하거나 그것 가지고 불결해지지 말라란 위와 같은 생각들 안에 주입되는 악령은 불순함을 생산하는 바 그것에 저항해야 함을, “나는 주 너의 하느님”이란 선과 진리의 결합만이 인간에 의해 확증되어야 함을 뜻한다. A.C. 7297, 9188, 2001, 7192.

32절. 너는 백발의 머리 앞에서 일어설 것이다, 그리고 노인의 얼굴을 존경하라, 그리고 너는 네 하느님을 경외하라. 나는 주이다.

영적 의미

거듭나는 삶을 진보시켜 간 사람들의 총명, 성숙한 이들에게 있는 신성한 지혜를 인정하고 존경해야 한다. 신성한 지혜 자체를 존경해서 그것이 신성한 선 안에서 건립되게 해야 한다.

세부적 영적 의미

백발의 머리 앞에서 일어서고 노인의 얼굴을 존경하라란 지혜가 완숙된 이들에게 있는 신성한 지혜, 거듭나는 삶을 발전시킨 이들의 총명을 인정하여 존경하라는 것을; 하느님을 경외하라란 신성한 지혜 자체를 존경하라를; “나는 주”란 신성한 선 안에서의 건설을 뜻한다. 6524-5, 2001, 3718-9, 2001.

33절. 그리고 만일 낯선 자가 너의 토지에서 너와 함께 체류한다면, 너희는 그에게 나쁘게 대하지 말라.

영적 의미

영적 인간은 교회에 있는 가르침을 요구하는 이들에 세세한 관심을 가져서 그가 자기들의 선을 증진시키는데 게으르지 않도록 해야 한다.

세부적 영적 의미

너희 땅에 함께 사는 외국인을 괴롭히지 말라란 가르침을 요구하는 이들에게 세세한 관심을 두어 그들이 자기들 선을 배가하는데 게을러지지 않도록 하라는 뜻이다. A.C. 7908.

34절. 너와 더불어 체류하는 낯선 자는 너희 사이에 있는 본토박이 같이 너에게 있어야 한다, 그리고 너는 그를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그 이유는 너희가 이집트의 토지에서 낯선 자들이였기 때문이다. 나는 주 너의 하느님이다.

영적 의미

참으로, 가르침을 필요로 하는 이들도 선 가운데 있는 이들이나 마찬가지로 생각하고 그들을 향하여 선행이 실시되어져야 하리라. 그 이유는 애당초 모든 이는 자연적일 뿐인 인간 수준에 얽매여 있었는 바 가르침이 필요하기 때문이고, 어차피 인간이 완전해지려면 선과 진리 모두를 주님에게서 받아야 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세부적 영적 의미

너와 더불어 체류하는 낯선 자를 본토박이처럼 대해줘라란 가르침을 필요로 하는 이들은 선 가운데 있는 이들처럼 평가하라는 것을, 체류자를 네 몸같이 사랑하라란 선행은 위의 사람들을 향해 실시되어야 함을, “너도 이집트 땅에서 낯선 자들 이었다”란 모든 이는 애당초 자연적 인간의 굴레 아래 있었는 바, 가르침이 필요하다는 것, “나는 주 너의 하느님”이란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 모두는 인간이 완전해지기 위해 필요하다는 뜻이다. A.C. 7908, 3705,2425, 5406, 4749, 2001.

35절. 너희는 재판에서, 계량에서, 무게를 담에서, 치수를 잼에서 부당함이 없게 실시하라.

영적 의미

엄격한 정의는 내적이든, 내면에 속한 사항이든, 외적 사항이든, 진리에 의거, 진리를 수단으로 선행이 실시될 때 있어져야 한다.

세부적 영적 의미

재판할 때, 물건을 재고 달고 되고 할 때 부정하게 하지 말라란 엄격한 정의는 선행이 실시되는 동안 진리에 의거 진리에 따라 있어야 하는데 이는 내적, 내면, 외적 사항 모두에 해당된다는 뜻이다. A.C. 5755, 8357, 3104.

36절. 올바른 저울, 올바른 추, 올바른 에바(ephah), 그리고 올바른 힌(hin)을 너희는 가져라.

영적 의미

그러므로 영적 인간은 내적으로 공평과 정의를, 외적으로 정의와 공평을 연습해야 한다. 그 이유는 이 목적을 위해 주님께서 인류를 구속하셨기 때문이다.

세부적 영적 의미

“바른 저울, 바른 추, 바른 에바, 바른 힌을 써야 한다“란 영적 인간은 내적으로 공평과 정의를; 외적으로 정의와 공평을 연습해야 한다는 것을; ”나는 주 너의 하느님“이란 위 목적을 위해 주님께서 인류를 구속하셨음을 뜻한다. A.C. 3116, 3104, 10136, 8864-6.

37절. 그리고 너희는 모든 나의 법령들을 준수할 것이다, 그리고 모든 나의 판결들, 그리고 그것들을 실시할 것이다. 나는 주이다.

영적 의미

그러므로 인간은 외향적으로나 내향적으로나 행동면에서나 거룩해져야 한다. 이는 주님의 본질이 신성한 선이심을 인정함으로서만 결과될 수 있다.

세부적 영적 의미

주님의 모든 법령, 모든 판결들을 준수해 그대로 살라란 인간은 바깥쪽, 안쪽, 모든 행동에서 온전히 거룩해야 한다는 것을; “나는 주”란 위 사항은 주님의 본질이 신성한 선이심을 인정함으로써만 결과 될 수 있음을 뜻한다. A.C. 8357, 5755, 2001.

19장의 종합적 고찰

이 장의 요약을 정독해보면 알게 되는 바, 첫 8절까지에서 언급되는 것 즉 내적 의미의 시리즈 과정으로 자주 되돌아 가도록 하는 언급이 있다는 것, 그래서 이는 불필요한 반복인 듯 여겨질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그러나 주님의 말씀 안에서 이런 반복은 없다. 본문의 경우에서도 주목해야 할 중요한 것들이 새로운 연결, 새로운 빛에서 표현되고 있다. 예를 들면 아홉 개의 서로 다른 요점들이 8절까지에서 명명되고 있고 그 각각은 시리즈의 질서와 완전함이 영적 의미에서 보여지게 진행되고 있음을 주시해야 하리라.
이 문단에서 가장 흥미 있는 사항은 아마 평화 제물에 관해 말해지는 것이리라 생각된다. 이 구절을 있는 글자 그대로 추켜들어 생각한다면 주어진 방향을 위해 만족할 만한 근거를 발견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아마 어떤 깨끗한 상황들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 그리고 범죄자에게 발표될 파면장 같은 심각함은 설명하고 있지는 않다는 정도는 쉽게 알 것이라 본다. 내적 의미에 의해서도 이런 사항은 보여지지만 이보다 더 많은 사항들이 있다. 첫째 날과 둘째 날은 인간이 자기 심판을 준비하는 상태들이고, 셋째 날은 그 심판의 상태를 명시하고 있고 평화 제물은 인간이 준비 중인 상태 동안 예배와 자기 것으로 삼음을 위해 있어지는 자유의 상태를 의미한다. 그러나 심판 과정은 외적 인간이 내적 인간과 완전한 조화를 이루도록 가져다 놓는 것으로 구성되어진다. 이 때의 자유로운 상태는 앞의 자유 상태와 동일하지 않다. 후자의 경우 선과 악 사이의 자유로운 결정, 뿐만 아니라 애착 또는 사랑에 관한 자유로운 선택이다. 그러나 지금 그것은 건립된 통치하는 사랑만으로 있어지는 자유일 뿐이다. 그래서 지금 우리가 잘 숙고해 보아야 하는 것은 왜 셋째 날에 남아 있는 평화 제물은 불에 사르라고 하셨는가에 대해서이다. 그 이유는 선을 통치하는 사랑은 모든 이기적인 사랑을 거절하고, 악을 통치하는 사랑은 그 사랑을 채택하는 바 시리즈가 기술하는 그대로 그 결과가 있어지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는 불이란 위 두 가지 사랑과 상응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떻게 말씀의 내적 의미가 천사들의 서술을 확증해 주는지 우리로 알게 해준다. 심판의 과정에서 결정되는 것이 통치하는 사랑인 바 우리 모두를 위한 교훈은 명확해진다. 즉 우리가 천국에 가고자 한다면 오늘이라 불리는 지금 일을 해야만 한다. 그 이유는 밤이 이내 오기 때문이고 낮에 구원을 위해 작업해 놓지 않은 사람이 있다면 밤에 그 일을 해낼 수 없기 때문이다. 선한 자는 천국에 그의 영원한 평화 제물이 있으나 사악한 자는 그렇지 못하다. 5절과 6절의 영적 가르침을 비교해보고 9절과 10절의 영적 가르침도 잘 주시해 보면 세부적으로 연결을 이루어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들판과 포도원의 수확에 관한 언급 모두가 심판의 주제가 계속됨을 보여주는데, 이는 어떻게 선행과 신앙이 선한 자와 더불어 우세해지는 가와 어떻게 외적 인간의 의지와 이해함이 내적 인간의 것과 조화를 이루는지 예증해 주기 위한 것이다.
11절로부터 시작되는 도덕적 가르침은 글자 의미에서 매우 중요하다. 그래서 말씀의 내적 의미가 때로 수준을 낮출 때도 있는 듯 보일는지 모르지만 오히려 이런 방법으로 해서 내적 의미 자체가 더 명백해진다. 그러면서도 두 의미의 확실한 구분은 유지되고 있다. 예를 들면 훔치지 말라는 글자대로의 의미와 이의 영적 의미인 것 즉 주님에 속한 것을 자신의 것으로 여기지 말라는 의미 사이에는 비슷한 게 없다. 그럼에도 명백한 바는 심사숙고해서 훔치는 사람, 그 행위를 저지르겠다고 고집부리는 사람은 자기 생명이 자신의 것이라고 주장하고 주님에 대한 자기 책무를 부정한다는 것이다. 그와 반대로 주님을 진실로 인정하는 사람은 훔치지도, 거짓말하지도, 본문이 금지하는 어떤 것들도 심사숙고 하려들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가 식별하는 바, 계명을 지키는 것, 그것을 지키지 않아서 닥치는 결과를 두려워해서 이든, 순종하는 게 자신에게 이익이 되어서이든 계명을 지킴보다 선하고 참된 원리들로 자신을 건립하는 것이 선한 삶으로의 지름길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행함으로 우리는 잔과 접시의 안쪽을 먼저 깨끗하게 해서 그 다음 바깥쪽도 깨끗해지게 할 수 있을는지 모른다 (마태 26:26). 그렇다해도 영적으로 뿐만 아니라 글자적으로 내적 깨끗함과 외적 깨끗함은 따로 따로 구분될 필요가 있다. 비록 내적 순수함이 외적 순수함의 원인이 되어준다 해도 서로는 구분이 있어야 한다. 따라서 품값을 다음 날 아침까지 미루는 구절의 요점에 주목해 보게 된다. 사회적 측면에서 품값을 미루었다라고 해서 큰 피해를 입혔다고 말할 수는 없다. 때로 전혀 피해가 없을 수도 있다. 아예 어제 일한 것을 아침에 계산해 줄 수 있을는지 모른다. 그러나 영적으로 자신에게 고용된 종의 품삯을 지참하고 있도록 자신을 허용한다는 것은 유용한 것을 계속해가려는 것인데 그 목적이 선용 자체가 아닌 선용에 따른 보상을 기대하고 계속하려는 것이다. 물론 이런 상태도 준비 상태인 바 허용은 가능할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가 유용함 그 자체를 사랑하는 것을 실감할 때 그런데도 보상을 어느 정도 기대하고 있다 해도 그것만을 위해 더 이상 일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를 곰곰이 생각해 보면 선용을 사랑하면서 동시에 선용의 결과로 보상받기를 기대하는 것을 자기의 통치 원리로 삼을 자는 아무도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만일 그가 선용을 사랑하는 가운데 있다면 그 사랑은 아침에 떠오르는 태양 같아서 그는 밤의 어두움과 비슷한 보상을 기대하는 사랑 가운데에는 계속 머무를 수 없다. 이 점에 관해 지면을 더 할애할 수 없어 생략하기로 하고 불법적인 결합에 관해 살피기로 하자.
거듭나는 동안의 인간은 보다 낮은 상태, 예비적인 상태에 있는 바 그 상태가 미치는 영향력을 받지 않을 수가 없다. 그런 반면 한쪽에서는 보다 높은 상태가 점점 강세해지고 있다. 이런 상태가 불법적인 결합의 원인이 된다. 따라서 우리의 선한 애착들, 그것이 자연적 수준 이든 영적 수준 이든 악에 오염되는 것을 허용해서는 안 된다. 이것이 종류가 다른 가축을 교미시키지 말라는 뜻에 함축된 의미이다. 애착 속의 참된 것은 내적, 외적인 지적 능력들에도 응용되어야 한다. 그래서 만일 우리가 진리를 원리로 채택했다면, 또는 정직한 심정, 선한 심정이라는 들판에 말씀이라는 씨를 뿌리겠다고 작정했다면 우리는 거짓을 경작하는 것 역시 해서는 안 된다. 그 이유는 우리는 한쪽으로는 높은 상태를 실감하고 다른 쪽으로는 낮은 상태를 실감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진정한 교리와 거짓된 교리를 동시에 믿을 수 없다는 것, 또는 이미 잘 진보된 삶 속에 있는 순수한 진리에 피상적인 진리를 혼합할 수 없다는 말이다.
이제 위 가르침의 큰 가치를 보고 느꼈으리라 생각된다. 따라서 그 가르침을 실제 사용해 가는 것이 얼마나 절실한 필수 사항인지까지 자연히 알게 되리라 본다. 더불어 우리가 얼마나 불완전한지, 삶의 여행을 하는 가운데 더 높은 느낌이나 더 나은 판단은 쉽사리 질책하고 마는 일도 얼마나 흔한지 되돌아보면 생각나지 않을 수 없는 사항이 이미 몸을 바친 여종과의 불법적인 결합에서 보여준다. 여종이란 여주인이 시키는 것 즉 영적 애착이 시키는 대로 할 경우 완전한 자연적 애착이겠지만 본문의 경우에서는 그와 반대인 바 불완전한 자연적 애착을 의미한다. 이 대목을 영적 차원에서 더 살피면 더욱 흥미있게 된다. 이 여자는 남편을 가졌다. 우리의 것인 자연적 애착은 권위나 힘만으로 계속 점검되고 종속된 상태에 있으면서 장차 천국적인 결혼을 향해 진보해 가는 상태에 있다. 그렇긴 해도 이 애착은 악에서 충분히 해방된 상태 또는 선이라는 순수하게 자유로운 상태에 도달되어 있지는 않다. 본문 구절의 경우 영적 인간이 불법적으로 자신을 오염시키는 것, 또는 영적 삶은 아직은 불완전한 자연적 삶과 결합시키는 결정적인 잘못을 저지르고 있다. 이것은 종교적인 생활 속에서 우리 모두가 자칫 저지르기 쉬운 행위에 대한 간단한 그림이다. 인간은 어느 순간 자신의 자태를 바꾸어 적과 뒷거래를 하기 일쑤이고 그러다 보면 자기에게 어떤 사항은 허용된다는 꾀임에 넌지시 넘어가 주는 바 악한 애착이 주는 쾌락에 포로가 된다 (민수기 25:1-3). 그런 와중에서도 더 나은 우리 본성은 이렇게 역설하고 있다. 우리가 타락된 것은 사실이나 그렇다고 더 높은 본성이 멸해진 것은 아니라는 것, 따라서 우리가 회개하여 주님을 예배하라고 타이른다. 이리하여 있게되는 사항들이 21절 이하의 제물을 바치는 모습에서 나타나는데 이에 대한 영적 의미는 앞 장들에서 설명된 바 있으므로 생략한다.
23절부터의 내용은 위 절에 있는 제물과의 어떤 연결이 글자에 나타나지도 않은 채 배열을 이루고 있다. 우리가 시험에 빠져 있었던 이후 우리의 상태는 승강되는데 이 때 우리는 자신의 천국적인 상태가 무엇일 것인지에 관해 더 올바르고 더 특별한 지각을 얻는다. 이 때 더 이상한 것은 애당초 예상했던 자신의 천국적 상태와 다르다는 것이다. 이 문단의 교훈에서 알게되는 것은 설사 우리가 천국에 들어갔다 해도 처음에는 자신들의 불완전함을 지니고 있고 얼마나 자신이 형성한 선이 부족한지 실감한다는 것이다. 사실 이 상태는 주님과 충분히 결합하기 위한 준비 상태이고 이후 넷째, 다섯째 해로 명시된 아껴두신 것을 온전히 자기 것으로 삼게 된다. 다시 주목해 볼 것은, 셋째, 넷째 사항에 관한 것인데 이는 글자에서는 나타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적 의미에서는 보여진다. 그나마 일반적 진리만이 보여지는데 천국에서는 어떤 종류의 악도 발생치 않는다는 것이다. 이 시리즈를 주목해 볼 경우 알게 되는 또 한 가지는 모독에 관한 세 가지 연속적인 수준들 즉 의지와 이해함, 그리고 심사숙고된 진리의 왜곡, 그렇게 해서 악을 확증하는 위험에 빠지는 사항에 관해서이다. 이것 또한 천국에서는 거행될 수는 없다. 오히려 이와 반대되는 영원한 안식만이 거기에 있고 거기서는 진리가 선과 결합하는 것, 주님만이 예배된다. 사실 이런 사항 모두는 인간 삶의 가장 깊은 수준에 관한 것이다. 이와 유사한 어떤 것, 중간 수준이 31-32절에서 말해지고 있다. 이 절에 뒤이어 마지막까지에는 최말단 수준에 이르는 아주 명백하게 해주는 언급이 주어지고 있다. 각 수준에 관한 언급들은 “나는 주”라는 엄한 확언과 확증으로 매듭짓고 있다.
천사들 삶의 모든 수준은 아주 정밀하게 구별되는데 이 구별은 일반 측면 뿐 아니라 세부 측면에서도 그러하다. 더구나 모든 이런 수준들은 최말단에서 까지 충만된 상태에 있는데 이를 36-37절이 강조해서 말하고 있다. 이제 간략히 상기해볼 사항은 이 세상에서의 우리 삶은 천국 삶을 준비하기 위해서라는 것, 결과적으로 이 시리즈는 지상의 진정한 교회 상태를 낮은 수준에서 묘사하도록 여러 가지를 채택하고 있다는 것이다.
************************************************

레위기 20장

성경: 레위기 1장
1. 그리고 주님께서 모세에게 이야기하셨다, 말하시기를,
2. 더욱이, 너는 이스라엘의 자손들에게 말할 것이다, 몰렉에게 자기 씨를 주는 자, 그가 이스라엘의 자손들로부터이든, 이스라엘에 체류하는 낯선 자이든, 누구든지 정녕 죽음에 놓인다. 토지의 백성이 돌로 그를 쳐죽여라.
3. 나 역시 내 얼굴을 그 사람에 맞서 두리라, 그리고 그를 겨레로부터 자를 것이다. 그 이유는 그가 자기 씨를 몰렉에게 주어 내 성소를 더럽혔고, 내 거룩한 이름을 모독했기 때문이다.
4. 그리고 만일 토지의 백성이 몰렉에게 자기 씨를 주는 이 사람으로부터 자기들의 눈을 감추이게 어떤 방법들을 실시한다면, 그리고 그 사람을 죽음에 놓이게 하지 않는다면.
5. 그러면 나는 내 얼굴을 그 사람에, 그리고 그의 가족에 맞서게 둘 것이다, 그리고 그 사람, 그리고 몰렉과 더불어 매춘을 범하려고 그 사람을 따라 우상을 숭배한 모든 자들을 겨레로부터 자를 것이다.
6. 그리고 영들과 친밀하다는 자들에게, 그리고 마법을 부린다는 자들에게 돌아서 그들을 따라 우상을 숭배한 혼, 나는 내 얼굴을 그 혼에 맞서게 둘 것이다, 그리고 겨레로부터 그를 자를 것이다.
7. 그러므로 네 자신을 정화하라, 그리고 거룩히 있으라. 나는 주 너의 하느님이다.
8. 그리고 너희는 내 법령을 지켜라, 그리고 그것들을 행하라. 나는 너를 정화하는 주이다
9. 자기 아버지, 자기 어머니를 저주하는 모든 자는 확실히 죽음에 놓일 것이다. 그는 자기 아버지, 또는 자기 어머니를 저주했다. 그의 피가 그 사람 위에 있다.
10. 그리고 또다른 사람의 아내와 간음을 범하는 사람, 그의 이웃의 아내와 간음을 범한 그 사람까지, 간음자와 간음녀는 죽음에 확실히 죽어야 한다.
11. 그리고 자기 아버지의 아내와 눕는 자는 자기 아버지의 벌거벗음의 덮개를 벗겼다. 그들 둘 다 확실히 죽어야 한다. 그들의 피가 그들 위에 있다.
12. 그리고 만일 사람이 자기 며느리와 눕는다면, 그들 둘 다 확실히 죽어야 한다. 그들은 혼동을 만들었다. 그들의 피가 그들 위에 있다.
13. 그리고 만일 사람이 남자와 눕는다면, 그들 둘 다 역겨운 짓을 범했다. 그들은 확실히 죽어야 한다. 그들의 피가 그들 위에 있다.
14. 그리고 만일 사람이 아내와 그녀의 어머니를 데려간다면, 그것은 사악하다. 그들을 불로 태워라, 그 사람과 그들 모두 이다. 하여 너희 사이에 사악함이 없게 하라.
15. 그리고 만일 사람이 짐승과 눕는다면, 그는 확실히 죽어야 한다. 그리고 너희는 짐승을 죽여라.
16. 그리고 만일 여인이 어떤 짐승에 접근하고 함께 눕는다면, 너는 여인을 죽여라, 그리고 짐승도. 그것들은 확실히 죽어야 한다. 그들의 피가 그들 위에 있다.
17. 그리고 만일 사람이 자기 누이, 자기 아버지의 딸, 또는 자기 어머니의 딸을 데려가고, 그리고 그녀의 벌거벗음을 보고, 그녀가 그의 벌거벗음을 본다면, 이것은 창피스러운 짓이다. 그리고 그들은 이스라엘의 자손들의 시야에서 잘리우게 하라. 그는 자기 누이의 벌거벗음의 덮개를 벗겼다. 그는 자기의 불법을 낳았다.
18. 그리고 만일 사람이 아픔을 가진 여인과 눕는다, 그리고 그녀의 벌거벗음의 덮개를 벗긴다면, 그는 그녀의 샘을 벗겨지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녀는 자기의 샘의 덮개를 벗겼다. 그리고 그들 둘 다 겨레로부터 잘라라.
19. 그리고 너는 네 어머니의 자매, 네 아버지의 누이의 벌거벗음의 덮개를 벗기지 말라. 그는 자기의 가까운 친척을 벗기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기들의 불법을 저지른다.
20. 그리고 만일 사람이 자기 삼촌의 아내와 눕는다면, 그는 자기 삼촌의 벌거벗음의 덮개를 벗겼다. 그들은 아이 없이 죽는다.
21. 그리고 만일 사람이 그의 형제의 아내를 데려갈 것이다면 이것은 불순함이다. 그는 자기 형제의 벌거벗음의 덮개를 벗겼다. 그들은 아이가 없이 있을 것이다.
22. 너희는 그러므로 모든 나의 법령을, 그리고 모든 나의 판단을 지켜라, 그리고 그것들을 행할 것이다. 하여, 내가 너를 데려가는 그 토지가 너를 토해내지 않을 것이다.
23. 그리고 너희는 내가 네 앞에서 내쫓는 나라의 관습들에서 걷지 말라. 그들이 이 모든 짓을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러므로 나는 그들을 몹시 싫어했다.
24. 그러나 나는 네게 말했다, 너희는 그들의 토지를 상속받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젖과 꿀이 흐르는 토지, 그것이 너희의 소유가 되도록 그것을 네게 준다. 나는 너희를 이 백성들로부터 분리한 주 너희의 하느님이다,
25. 너희는 그러므로 깨끗한 짐승과 불결한 짐승, 그리고 불결한 가금류와 깨끗한 가금류를 분류할 것이다. 그리고 너희는 내가 너희로부터 분리한 불결한 것, 즉 짐승에 의해, 또는 가금류에 의해, 또는 지면에 풍부한 어떤 것에 의해 네 혼이 지긋지긋해지게 만들지 말라.
26. 그리고 너희는 나에게 거룩히 있으라. 나 주가 거룩하고, 그리고 너희를 백성들로부터 분리했기 때문이다, 너희는 나의 것이다.
27. 영과 친밀하다거나 마법을 쓰는 남자, 또는 여자는 죽음에 확실히 놓인다. 그들은 돌로 그들을 쳐죽여라. 그들의 피는 그들 위에 있다.

영적 의미 요약

* 이기적 사랑으로 진리를 모독함에 관하여, 그리고 모독 죄를 범한 이들의 결과에 대해서, 그 죄를 너그러이 봐주려는 이들에 관하여, 1-5절.
* 영들과의 불법 교통에 따른 위험, 6절.
* 내적, 외적으로 거룩한 삶이 필요함, 그리고 신성한 선과 진리를 싫어한 결과들, 7-9절.
* 여러 각도로 선과 진리를 모독한 결과들, 10-21절
* 신성한 질서의 영적 법칙에 순종할 필요성, 불순종의 위험, 22-24절.
* 또한 인간은 애착과 생각에서 순수한 것과 불순한 것을 조심스럽게 한다. 그는 반드시 거룩하고 순수해야 한다. 그 이유는 그가 악과 거짓들로부터 분리되어 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적, 외적으로 질서의 법칙을 남용함으로 선과 진리를 뒤집은 이들은 스스로 완전하게 황폐되고 만다는 것을 상기해야 한다, 25-27절.

각 절의 영적 의미

1절. 그리고 주님께서 모세에게 이야기하셨다, 말하시기를,

영적 의미

주님께서 지각을 주시는 신성한 진리를 수단으로 밝히 알게 하신다.

세부적 영적 의미

주님(여호와)는 사랑 측면에서의 신성한 존재를; 이야기하심(speaking)은 유입을; 모세는 신성한 진리 또는 말씀을; 말하심(saying)은 지각을 각각 뜻한다. (2001, 7010, 6752, 1791, 1822)

2절. 더욱이, 너는 이스라엘의 자손들에게 말할 것이다, 몰렉에게 자기 씨를 주는 자, 그가 이스라엘의 자손들로부터 이든, 이스라엘에 체류하는 낯선 자 이든, 누구든지 정녕 죽음에 놓인다. 토지의 백성이 돌로 그를 쳐죽여라.

영적 의미

이 가르침은 영적 교회 속의 사람 즉 내적 교회에 속하든, 외적 교회에 속하든 모든 이에 해당된다. 그가 이기적 사랑을 위해 진리를 사용함으로 진리를 모독하는 경우가 있다면 그는 모든 진리들을 빼앗기게 되고 악과 거짓이 날라다 주는 처벌로 고통받게 된다.

세부적 영적 의미

이스라엘 백성에게 말하심이란 영적 교회의 사람에게 주어지게 되는 가르침임을; 이스라엘 백성과 거기에 체류하는 자들이란 내적 교회와 외적 교회를; 몰렉에게 제 자식을 바치는 이들이란 이기적 사랑에 진리를 바침으로 진리를 모독하는 것을; 반드시 죽어야 함은 깡그리 황폐하게 됨을; 백성들이 돌로 침이란 모든 진리가 박탈되고 동시에 악과 거짓이 그에게 가져다주는 벌로 고통받음을 뜻한다. (7304, 3654, 7908, 1610, 934, 2468-16, 2908, 1259, 7456)

3절. 나 역시 내 얼굴을 그 사람에 맞서 두리라, 그리고 그를 겨레로부터 자를 것이다. 그 이유는 그가 자기 씨를 몰렉에게 주어 내 성소를 더럽혔고, 내 거룩한 이름을 모독했기 때문이다.

영적 의미

또한 위의 사람은 자신으로부터 신성한 선과의 모든 결합과 신성한 진리에 관한 모든 지식을 빼앗긴다. 그 이유는 이기적 사랑을 통하여 교회의 진리를 모독함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거룩한 모든 선과 이 선을 표현하는 거룩한 모든 진리를 썩게 하기 때문이다.

세부적 영적 의미

주님이 그 사람에게 진노하심이란 이런 사람은 신성한 선과의 모든 결합이 자신에게서 박탈된다는 것을; 그를 겨레로부터 추방함이란 진리에 관한 모든 지식을 상실함을; 그 이유가 몰렉에게 자식을 바쳤기 때문이란 이기적 사랑을 통해 교회 속의 진리를 모독했기 때문임을; 주님의 성소를 더럽힘이란 주님으로부터 오는 거룩한 선을 썩게 함을; 주님의 거룩한 이름을 욕되게 함이란 선의 표현인 거룩한 진리를 썩게 함을 각각 뜻한다. (222, 223, 5302, 1259, 1610, 934, 2468-16, 10130, 3210, 8882)

4절. 그리고 만일 토지의 백성이 몰렉에게 자기 씨를 주는 이 사람으로부터 자기들의 눈을 감추이게 어떤 방법들을 실시한다면, 그리고 그 사람을 죽음에 놓이게 하지 않는다면.

영적 의미

교회 속의 사람이 여하튼간에 위와 같은 중대한 범죄를 너그러이 봐주고 이 모독을 완벽하게 거절 않는다면,

세부적 영적 의미

그 땅의 백성이란 교회 속의 사람을, 그 사람을 눈감아 주는 어떤 방법이란 이런 극악한 죄를 면하려는 어떤 방법, 의도를 뜻하는데 그 이유는 그들이 눈을 가지고도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몰렉에게 자식을 줌이란 이기적 사랑을 통해 교회 속의 진리를 모독함을, 그를 죽이지 않는다면 이란 위와 같은 모독을 완전히 거절하지 않는다면을 뜻한다. (2928, 2950, 2701-4, 1610, 934, 2468-16, 2908, 7456)

5절. 그러면 나는 내 얼굴을 그 사람에, 그리고 그의 가족에 맞서게 둘 것이다, 그리고 그 사람, 그리고 몰렉과 더불어 매춘을 범하려고 그 사람을 따라 우상을 숭배한 모든 자들을 겨레로부터 자를 것이다.

영적 의미

그 자신 역시 주님으로부터 오는 천국적 사랑에 대한 지각, 이는 일반 측면이든 세부측면 이든 모두 상실할 것이다. 그리고 이기적인 사랑을 통하여 진리를 왜곡하는 이들은 교회에서 분리되고 더 이상 어떤 진리도 지각할 수 없으리라.

세부적 영적 의미

주님이 그 사람에게 진노하심이란 악을 변명해대는 사람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천국 사랑을 지각하는 것을 스스로 잃게 될 것임을; 그와 그의 가족까지란 일반적 차원과 세부적 차원까지를; 자른다함은 교회로부터 분리되어짐을; 몰렉에게 자식을 바침이란 이기적 사랑을 통해 진리를 왜곡하고 모독함을, “겨레로부터 자름”란 위의 사람은 진리를 더 이상 지각할 수 없을 것임을 뜻한다. (222, 223, 9807, 1424, 5302, 1610, 934, 2468-16, 1259)

6절. 그리고 영들과 친밀하다는 자들에게, 그리고 마법을 부린다는 자들에게 돌아서 그들을 따라 우상을 숭배한 혼, 나는 내 얼굴을 그 혼에 맞서게 둘 것이다, 그리고 겨레로부터 그를 자를 것이다.

영적 의미

영계의 사악한 자들과 불법 교통하여 질서를 위반하고 헛된 노력을 함으로서 악이 선같이 보이게, 거짓이 진리처럼 나타나게 왜곡하는 이들은 선에 관한 모든 지각을 잃게 될 것이고 더 이상 진리를 이해할 수 없게 되리라.

세부적 영적 의미

영들과 친밀하다는 자(죽은 자의 혼백을 불러내는 사람)이나 마법을 부리다는 자(점쟁이)와 친하게 지내는 이들이란 불법인 질서의 남용으로 영계의 사악한 자들과 교통을 해서 악이 선 같이 보이게 만들고 거짓이 진리처럼 나타나게 만들려 애쓰는 이들을’ 그들을 따라 우상을 숭배함이란 진리의 왜곡을; 주님이 그 영혼에 진노하심이란 그는 선에 관한 지각 모두를 잃게 됨을; 겨레로부터 추방함이란 그는 더 이상 진리를 이해할 수 없을 것임을 뜻한다. (7297, 9188, 6348, 222, 223, 5302, 1259)

7절. 그러므로 네 자신을 정화하라, 그리고 거룩히 있으라. 나는 주 너의 하느님이다.

영적 의미

그러므로 영적 인간은 자기를 잘 간수해서 순수하고 거룩한 삶을 영위해야 한다. 이 길만이 진리와 결합하는 모든 선의 근원이신 주님과 결합할 수 있다.

세부적 영적 의미

네 자신을 정화하여 거룩히 있으라란 영적 인간은 자신을 잘 간직해 순수하고 거룩한 삶을 영위해야 함을; “나는 주 너의 하느님”이란 거룩해 있어야 주님과 결합할 수 있는데, 그분은 진리와 결합하는 모든 선의 근원 되신다는 것을 뜻한다. (8042, 2001)

8절. 그리고 너희는 내 법령을 지켜라, 그리고 그것들을 행하라. 나는 너를 정화하는 주이다

영적 의미

그는 이를 내적으로, 뿐만 아니라 외적으로 의지와 이해함 모두에서 행해야 한다. 그 이유는 외적 인간이 내적 인간과 결합할 수 있는 것은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향한 선행으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세부적 영적 의미

주님의 규정을 지켜 그대로 행함이란 영적 인간은 이를 행하되 내적 측면에서, 뿐만 아니라 외적 측면, 의지와 이해함 모두에서 행해야 한다는 것을; “나는 너희를 정화하는 주”란 외적 인간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을 수단으로 또는 주님 사랑과 이웃을 향한 선행을 수단으로만 내적 인간과 결합할 수 있음을 뜻한다. (8357, 683, 2001, 8042)

9절. 자기 아버지, 자기 어머니를 저주하는 모든 자는 확실히 죽음에 놓일 것이다. 그는 자기 아버지, 또는 자기 어머니를 저주했다. 그의 피가 그 사람 위에 있다.

영적 의미

신성한 선과 진리로부터 자신을 비껴가게 하려는 사람은 자신을 전체적으로 황폐케 한다. 그는 두 가지 모두를 신중하게 거절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는 자신의 거짓 속에 머물러야만 한다.

세부적 영적 의미

아버지나 어머니를 저주하는 자란 신성한 선과 신성한 진리를 비켜 가려는 것을, 죽어야 마땅함이란 송두리째 황폐됨을, 부모에게 저주함이 반복되는데 이 경우의 뜻은 선과 진리 모두를 신중히 거절하는 것을, 그가 피를 흘려야 함이란 그는 자신의 거짓에 머무르게 됨을 뜻한다. (379, 8897, 2908, 379, 8897, 683, 4735-12)

10절. 그리고 또다른 사람의 아내와 간음을 범하는 사람, 그의 이웃의 아내와 간음을 범한 그 사람까지, 간음자와 간음녀는 죽음에 확실히 죽어야 한다.

영적 의미

교회의 선을 섞음질 하는 자, 그 선이 외적 이든 내적 이든 그는 선에 관한 지식, 진리를 지각함이 모두 황폐해질 것이다.

세부적 영적 의미

이웃집 아내와 간통함이란 외적, 내적인 교회의 선을 간음질 하는 것을; 간음한 남자와 여자는 정녕 죽으리라란 선에 관한 지식, 진리에 대한 지각이 완전히 황폐해짐을 뜻한다. (6348, 2908, 제 18:20절)

11절. 그리고 자기 아버지의 아내와 눕는 자는 자기 아버지의 벌거벗음의 덮개를 벗겼다. 그들 둘 다 확실히 죽어야 한다. 그들의 피가 그들 위에 있다.

영적 의미

이기적 사랑으로 오염시켜 선을 모독하는 자는 자신 안에 있는 선과 진리를 더 격렬하게 파괴한다. 그가 자신 속에서 선과 악을 섞었기 때문이다.

세부적 영적 의미

제 아비의 아내와 한자리에 든다 함은 이기적 사랑으로 선을 오염시켜 선을 모독함을; 아비의 벌거벗음의 덮개를 벗김이란 위와 같은 오염을; 두 사람은 반드시 사형을 당해야 함이란 선과 진리의 파멸이 자신 속에서 있는데 그 이유는 선과 악을 혼합시켰기 때문이다. 그들의 피가 그들 위에 있다란 그들은 거짓 속에서 머무를 것임을 뜻한다. (6348, 3703-20, 210, 제 18:7,8절 2908, 4735-12)

12절. 그리고 만일 사람이 자기 며느리와 눕는다면, 그들 둘 다 확실히 죽어야 한다. 그들은 혼동을 만들었다. 그들의 피가 그들 위에 있다.

영적 의미

거짓을 자신 속의 악에 결합함으로 선을 모독하는 교회 속의 사람, 이렇게 해서 선행의 거룩한 원리를 모독한다면 선과 진리의 황폐해짐이 그 결과인데 그 이유는 그가 또다시 선과 악을 섞었기 때문이요 이런 사람은 자신의 거짓 속에 거해야 하리라.

세부적 영적 의미

자기 며느리와 한자리에 드는 사람이란 자신의 악과 결합된 거짓을 가지고 오염시켜 선을 모독함을; 둘 모두 정녕 죽으리라란 선과 진리에 관한 황폐는 확실히 결과됨을; 그들이 추잡한(혼돈된) 짓을 했다란 다시 선과 악이 혼합되었음을; 그들이 피를 흘림이란 이런 사람은 거짓 속에서 머무를 것임을 뜻한다. (4843, 10490, 제 18:15절, 2908, 1326, 4735-12)

13절. 그리고 만일 사람이 남자와 눕는다면, 그들 둘 다 역겨운 짓을 범했다. 그들은 확실히 죽어야 한다. 그들의 피가 그들 위에 있다.

영적 의미

감각적 사랑으로 진리에 거짓을 결합시켜 진리를 모독하는 외적 교회 속의 사람이 있을 경우 이는 지옥의 역겨운 짓인 바, 이런 사람은 전체적으로 황폐되어 자신의 거짓 속에 거해야 한다.

세부적 영적 의미

여자와 한자리에 들 듯 남자와 한자리에 드는 남자란 감각적 사랑으로부터 오는 거짓을 가지고 진리와 결부되게 함으로 진리를 모독하는 외적 교회인을; 망측한 짓이란 영적으로도 망측함을; 정녕 죽으리라란 완전히 황폐해짐을; 그들의 피가 그들 위에 있다란 그들은 거짓 속에서 머무를 것임을 뜻한다. (725, 6348, 2056, 제 18:22절, 6052, 4735-12)

14절. 그리고 만일 사람이 아내와 그녀의 어머니를 데려간다면, 그것은 사악하다. 그들을 불로 태워라, 그 사람과 그들 모두 이다. 하여 너희 사이에 사악함이 없게 하라.

영적 의미

누가 선에 인접해 있는 교회의 진리를 악에 인접되어 있는 거짓으로 오염시켜 모독한다면, 이는 심각한 모독이다. 이런 것은 이기적 사랑으로 살라져야 하고 교회로부터 반드시 분리되어야 순수하고 거룩해지게 된다.

세부적 영적 의미

그녀의 어머니와 인척 관계가 있는 아내(모녀)란 내적 교회에 관계되는 외적 교회를; 이 경우처럼 아내를 갖고 아내의 어머니를 아내로 더 갖는다란 악에 인접된 거짓으로 오염시켜 선에 인접된 교회의 진리를 간음질하여 모독함을; “그것은 더러운 짓”이란 매우 심한 모독임을; 그와 두 여인을 불로 태운다란 이런 사람은 이기적 사랑으로 태워질 것임을; “다시는 너희 사이에 이런 사악함이 없어야 한다”란 교회는 선에서 악을 분리함으로 순수하고 거룩해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3703-2, 3703-20, 4843-4, 10490, 9264, 934, 6571)

15절. 그리고 만일 사람이 짐승과 눕는다면, 그는 확실히 죽어야 한다. 그리고 너희는 짐승을 죽여라.

영적 의미

누가 자연적 인간 속의 악한 애착을 진리에 합하려 한다면 그는 황폐해질 것이고 그것의 자연적 애착도 황폐될 것이다.

세부적 영적 의미

가축과 교접하는 사람이란 단지 자연적인 수준의 인간에 있는 악을 가지고 진리와 결합하는 것을; 정녕 죽으리라란 황폐함, 선과 진리에서의 완전한 분리를 말한다. (46, 725, 2908, 제 18:23절)

16절. 그리고 만일 여인이 어떤 짐승에 접근하고 함께 눕는다면, 너는 여인을 죽여라, 그리고 짐승도. 그것들은 확실히 죽어야 한다. 그들의 피가 그들 위에 있다.

영적 의미

자연적 인간의 선이 거짓으로 오염되어 모독되어진다면 위와 같은 황폐가 수반되는 바, 그들에게서 모든 선과 진리가 이탈되어 거짓 속에 머물어야 한다.

세부적 영적 의미

짐승을 가까이 하여 교접한 여자란 자연적 인간에 있는 선이 거짓으로 오염되어 모독된다면을; 여인과 짐승을 죽인다란 황폐함이 위와 같이 있게 됨을; 그들이 정녕 죽게 되리라란 의지와 이해함에서 황폐해짐 또는 내적, 외적 인간 측면이 황폐해짐을; 그들의 피가 그들 위에 있다란 그들은 거짓 속에 머무름을 뜻한다. (46, 725, 683, 4735-12, 제 18:23절)

17절. 그리고 만일 사람이 자기 누이, 자기 아버지의 딸, 또는 자기 어머니의 딸을 데려가고, 그리고 그녀의 벌거벗음을 보고, 그녀가 그의 벌거벗음을 본다면, 이것은 창피스러운 짓이다. 그리고 그들은 이스라엘의 자손들의 시야에서 잘리우게 하라. 그는 자기 누이의 벌거벗음의 덮개를 벗겼다. 그는 자기의 불법을 낳았다.

영적 의미

내적 교회 속의 사람이 의지로부터 이든 이해함으로부터 파생되었든 거짓을 수단으로 진리를 모독한다면 그는 진리와 거짓에 상호반감을 사는 원인이 되는 것이요 지긋지긋한 일인 바, 이 모독 때문에 교회로부터의 분리를 피할 수 없다. 그는 악을 확증하는 수밖에 없다.

세부적 영적 의미

제 아비의 딸이든지, 어미의 딸이든지, 제 누이를 데리고 살면서 그녀의 벌거벗음을 보고 여자는 그의 벌거벗음을 본다란 의지와 이해함에서 파생되는 거짓으로 오염시킴으로, 그리고 진리와 거짓을 상호 뒤집음으로 진리를 모독함을; 이것은 파렴치한 짓이다란 이런 모독은 구역질나는 모독임을; 겨레의 시야에서 잘리운다란 교회로부터의 분리는 피할 수 없음을; 제 누이의 벌거벗음의 덮개를 벗겼다란 진리의 모독을; 불법을 낳았다란 악 속에서 확증함을 뜻한다. (508, 1815, 1898, 6348, 6047, 5302, 1259, 제 18:9절, 9937-11)

18절. 그리고 만일 사람이 아픔을 가진 여인과 눕는다, 그리고 그녀의 벌거벗음의 덮개를 벗긴다면, 그는 그녀의 샘을 벗겨지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녀는 자기의 샘의 덮개를 벗겼다. 그리고 그들 둘 다 겨레로부터 잘라라.

영적 의미

더욱이 교회 속의 사람이 왜곡된 진리로 선 또는 진리를 오염시켜 부패되게 한다면, 그는 내면적으로, 상호적으로 모독이라는 죄를 짓게 된다. 이런 모독은 교회로부터 완전히 분리되는 원인이다.

세부적 영적 의미

아픔을 가진 여인(월경 중에 있는 여인)과 한자리에 들어 그 벌거벗음의 덮개를 벗김이란 모독인 왜곡된 진리를 가지고 오염시켜 선이나 진리를 부패시킴을; 그녀의 샘을 벗김이란 내면의 왜곡과 모독을; 여자가 자기의 샘의 덮개를 벗어 (피나는 곳을 드러냄)이란 상호적임을; 겨레로부터 추방함이란 이런 모독은 교회로부터 완전히 분리되는 원인이 됨을 뜻한다. (6348, 제 18:19절, 4861, 5302, 1259)

19절. 그리고 너는 네 어머니의 자매, 네 아버지의 누이의 벌거벗음의 덮개를 벗기지 말라. 그는 자기의 가까운 친척을 벗기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기들의 불법을 저지른다.

영적 의미

이기적 사랑에 인접해 있는 이해함 안에 있는 거짓, 그것이 내적 측면 이든 외적 측면 이든 그것을 가지고 진리를 부패되게 하는 것은 정당치 못하다. 그 이유는 이것이 모독이요 거짓을 확증하는 일만을 생산하기 때문이다.

세부적 영적 의미

네 이모, 네 고모의 벌거벗음의 덮개를 벗기지 말라란 외적이든 내적이든 이해함에 있는 거짓을 진리와 결합시켜 진리를 부패시키는 것은 합법적이지 못하다를; 가까운 친척이란 이기적인 사랑에 인접된 거짓을; 불법을 낳는다란 거짓으로 확증함을 뜻한다. (6348, 3703-20, 1475, 1815, 1895, 제 18:12-13절, 3703-2, 9937-11)

20절. 그리고 만일 사람이 자기 삼촌의 아내와 눕는다면, 그는 자기 삼촌의 벌거벗음의 덮개를 벗겼다. 그들은 아이 없이 죽는다.

영적 의미

교회 속의 사람이 방계적인 선 속에 있는 악을 선에 결합함으로 해서 선을 부패시킨다면 이는 모독이다. 이런 사람은 악 속에 자신이 있음을 확증하는 것이다. 그들과 함께 하는 교회는 선과 진리가 증가될 리 만무하다.

세부적 영적 의미

숙모와 한자리에 든 사람, 그리고 삼촌의 벌거벗음의 덮개를 벗김이란 모독인 2차적인 선 속의 악을 교회의 선에 결합함으로 교회의 선을 부패시킴을; 죄를 낳음이란 악 가운데 확증을; 후손을 보지 못함이란 선과 진리의 증가가 없음을 뜻한다. (6348, 3612, 1369, 제 18:14절, 9937-11, 9156, 489, 2908)

21절. 그리고 만일 사람이 그의 형제의 아내를 데려갈 것이다면 이것은 불순함이다. 그는 자기 형제의 벌거벗음의 덮개를 벗겼다. 그들은 아이가 없이 있을 것이다.

영적 의미

그가 자연적 인간에 있는 악을 자연적 인간 안에 있는 선과 결합함으로 해서 그 선을 부패시킨다면 이는 모독이다. 결과적으로 선과 진리의 증가가 거기에는 없다.

세부적 영적 의미

제 형제의 아내를 데리고 산다란 자연적 인간 안에서 악의 거짓을 결합시킴으로 자연적 인간 속의 선이 부패되게 함을; 제 형제의 벌거벗음의 덮개를 벗김이란 이 악의 바깥쪽 형체가 밝히 드러남을; 후손을 보지 못함이란 선과 진리의 증가가 없을 것임을 뜻한다. (3612, 1369, 6348, 제 18:16절, 10130, 9960-18, 3049, 5387, 9474, 489)

22절. 너희는 그러므로 모든 나의 법령을, 그리고 모든 나의 판단을 지켜라, 그리고 그것들을 행할 것이다. 하여, 내가 너를 데려가는 그 토지가 너를 토해내지 않을 것이다.

영적 의미

그러므로 영적 인간은 거룩해야만 하는데 이는 내적, 외적 모두에서 이다. 그래야 그 교회는 모독을 범하는 일이 없게 되리라.

세부적 영적 의미

주님의 법령과 판단을 지켜 행함이란 영적 인간은 바깥쪽, 안쪽 모두에서 거룩해야만 함을, “내가 너희를 이끌어 들여 살게 할 그 땅이 너희를 토해 버리지 아니함”이란 이 교회에 모독이 있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임을 뜻한다. (8357, 5755, 3705, 9507, A.R. 205)

23절. 그리고 너희는 내가 네 앞에서 내쫓는 나라의 관습들에서 걷지 말라. 그들이 이 모든 짓을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러므로 나는 그들을 몹시 싫어했다.

영적 의미

위 인간은 부패된 교회 속의 악에 의거 살아서는 안 된다. 그 이유가 부패된 교회는 진리를 모독하여 주님에게서 제 스스로 분리되었기 때문이다.

세부적 영적 의미

네 앞에서 내쫒는 나라의 관습들에서 걷지 말라. 그들이 이 모든 짓을 했기 때문이다란 부패된 교회 속의 악에 따라 살지 말라를; 그 나라들을 싫어한다란 이 교회는 진리를 모독해서 주님으로부터 그 자체 분리되었음을 뜻한다. (1205, 2657, 1205, 693, 696)

24절. 그러나 나는 네게 말했다, 너희는 그들의 토지를 상속받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젖과 꿀이 흐르는 토지, 그것이 너희의 소유가 되도록 그것을 네게 준다. 나는 너희를 이 백성들로부터 분리한 주 너희의 하느님이다,

영적 의미

신성한 선의 바램은 영적 인간이 천국 삶을 내적으로, 외적으로 모두 받아서 안전해지는 것이다. 이 삶 안에는 진리가 선과 결합하여 풍부하게 있고 자연적 기쁨도 풍부하다. 이를 통해 주님은 진실로 예배되고 이 교회 속의 사람들은 다른 이들과 구별되어지리라.

세부적 영적 의미

“나는 네게 말했다, 너희는 그들의 토지를 상속받을 것이다”란 영적 인간은 내적, 외적으로 천적 생명을 받음으로 안전하기를 신성한 선이 바래시고 있음을; 젖과 꿀이 흐르는 토지란 선에 결합된 진리가 풍부함과 자연적 기쁨을; “나는 주 너의 하느님”이란 이를 통해 주님이 진실로 예배됨을; 너희를 이 백성으로부터 분리함이란 교회 속의 사람들은 타인과 구별됨을 뜻한다. (2001, 3705, 2658, 5602, 2001, 6653)

25절. 너희는 그러므로 깨끗한 짐승과 불결한 짐승, 그리고 불결한 가금류와 깨끗한 가금류를 분류할 것이다. 그리고 너희는 내가 너희로부터 분리한 불결한 것, 즉 짐승에 의해, 또는 가금류에 의해, 또는 지면에 풍부한 어떤 것에 의해 네 혼이 지긋지긋해지게 만들지 말라.

영적 의미

그러므로 순수한 것과 불순한 것을 조심스럽게 구별해야 하는데 이 구별은 의지와 이해함 모두에서 있어야 한다. 그리고 교인은 어떤 악이나 거짓으로 자신을 썩게 해서는 안 된다. 또는 선과 진리와 구분되는 어떤 감각적인 기쁨, 이것 때문에 불순해지는 바 이것이 자신과 섞여지게 해서도 안 된다.

세부적 영적 의미

깨끗한 짐승과 불결한 짐승, 깨끗한 가금류와 불결한 가금류를 분리함이란 의지와 이해함의 측면에서 순수한 것과 불순한 것 사이의 구분을 조심스럽게 하라는 것을; 짐승이든, 가금류이든, 지면에 풍부한 어떤 것이든 너희에게 불결하다고 구분해 놓은 것으로 네 혼이 지긋지긋해지게 말라란 교인은 어떤 악이나 거짓 또는 선과 진리와 구분되는 감각적 기쁨과 불순함을 가지고 자신을 썩게 해서는 안 됨을 뜻한다. (46, 745, 4545, 10130, 40)

26절. 그리고 너희는 나에게 거룩히 있으라. 나 주가 거룩하고, 그리고 너희를 백성들로부터 분리했기 때문이다, 너희는 나의 것이다.

영적 의미

따라서 영적 인간은 순수하고 거룩해야만 하는데 그 이유는 주님이 순수함과 거룩함 그 자체되시기 때문이다. 주님만이 부패된 교회의 악과 거짓들로부터 구해내서 거듭나게 해주실 수 있다.

세부적 영적 의미

이스라엘 백성은 주님에게 거룩해야 하는데 그 이유는 그분이 거룩하고 그 백성을 그분의 것이 되도록 뭇 백성에게서 갈라 세웠기 때문이다란 영적 인간은 순수하고 거룩해야만 하는 바, 그 이유는 주님이 순수함, 거룩함, 그 자체이시요, 주님만이 부패된 교회 속의 악과 거짓들에서 구원해서 거듭나게 해주실 수 있기 때문이다. (3654, 2190, 3210, 6653, 2405)

27절. 영과 친밀하다거나 마법을 쓰는 남자, 또는 여자는 죽음에 확실히 놓인다. 그들은 돌로 그들을 쳐죽여라. 그들의 피는 그들 위에 있다.

영적 의미

그러므로 내적, 외적 모두에서 질서를 남용함으로 선과 진리를 뒤집는 이들은 자신을 황폐되게 한다. 그들에게서 모든 진리는 이탈된다. 그들은 자신의 거짓으로 포기된 채로 있게 된다.

세부적 영적 의미

영과 친밀하다는 자(죽은 사람의 혼백을 불러내는 사람)이나 마법을 쓰는 남자나 여자(점쟁이)가 있으면 이란 내적, 외적으로 질서를 남용함으로 선과 진리를 뒤집는 이들을; 확실히 죽는다란 그들 스스로 완전히 황폐해짐을; 돌로 쳐죽여라란 모든 진리가 박탈됨을; 그들의 피는 그들 위에 있다란 자신의 거짓에 파묻힘을 뜻한다. (7297, 9188, 2908, 8799, 4735-12)

20장의 종합적 고찰

이 장에서 말해지는 모독에 관한 종류들은 가장 타락된 이기적인 사랑으로 선함과 진리를 파괴한다는 점에서 다른 모독의 종류와 다르다. 이렇게 읽어볼 수 있기 때문이다. “몰렉에게 자식을 바친다는 것은 육에 속한 사랑, 즉 지옥적인 거짓을 받는 쪽으로 인도할 뿐인 살인, 미움, 간음, 원수 갚음 같은 비열한 사랑을 애용함으로 교회 속의 교리, 말씀 속의 진리를 파괴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거짓들이 몰렉에게 바치는 자식들로 의미되고 있다. 몰렉은 암몬의 우상이었는데 그것들을 힌놈 골짜기에 있는 도벳에 세워 거기서 아들과 딸들을 태워 바쳤다” (열왕기상 21:7, 열왕기하 23:10). 몰렉은 왕이다는 뜻도 있다. 그러므로 불로 의미되는 이기적 사랑으로부터 통치하는 거짓을 뜻한다. 골짜기는 낮은 상태, 타락된 상태를 명시하고 힌놈(Hinnon)은 그들의 부유함을 뜻한다. 이 경우에는 거꾸로 된 진리의 지식을 의미한다. 도벳은 태우는 곳, 내뱉음, 혐오함 등의 뜻을 지니고 있다. 이런 상응들로부터 사악한 자의 본성 즉 몰렉에게 자식을 바치는 모습으로 나타낸 그 본성이 더 잘 이해되리라 본다. 혼백을 불러내는 자와 상담하는 것과 연결해서 관찰해 보면 전자는 애착이 타락된 것, 후자는 이해함이 부패된 것을 말한다. 사실상 이것들은 이 뒤에 수반되는 모독에 관한 세부사항들을 대표하는 일반적 서술로 간주할 수 있을는지도 모른다. 단지 앞 장에서 채택된 것과는 순서가 다르다. 우리는 이 순서가 바뀐 이유나 바뀜의 본성을 알 수 없다 해도 어찌됐든 영적 진리의 어떤 것을 암시하기 위해 의도된 것만은 확실하다. 그러나 이 장의 내적 의미에서의 일반 주제는 모독에 관한 여러 종류들의 처벌, 바꾸어 말하면 모독을 탐닉한 결과들이다. 이런 것들은 돌로 쳐서, 태워 죽이는 처벌, 일반적으로 겨레로부터의 추방, 죄벌을 면치 못함, 죄를 낳음, 후손이 끊김 등등인데 이를 영적 의미로 이해하면 된다. 아마 이런 사항 하나 하나를 조금씩 되새겨 보는 게 좋을 것 같다.
위와 같은 처벌이 이 세상에서 어떤 특수한 사회 환경 밑에서 임의대로 있는 것도 가능하겠지만 어찌됐든 인간의 영적 삶에 국한해 볼 경우 거기에는 질서라는 신성한 법칙을 위반한데 따른 자연적 수준의 결과로서의 처벌은 없다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누구도 처벌하시지 않는다. 악 자체가 그에 상당하는 벌을 자초하는 것이다. 주님의 처벌이 있을 수 있는 경우를 억지로 생각해 보면 당사자에게 선하고 유용한 목적을 위할 경우 외에는 더 이상 생각해 볼 수 없다. 마태복음 25장 46절에서와 같은 “영원한 벌” 같은 것이 있다고 믿는 것은 필수 사항은 아니다. 오히려 악령에 관계가 있는데 이럴 경우 영원하다. 우리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아두어야 하리라 본다. 영원한 고통은 정녕 있을 수 없다. 주님께서 어떤 용도를 위해 허용하시는 것이 끝없는 고통, 괴로움이다 라고 어떻게 상상이라도 해볼 수 있을까? 예를 들면 어떤 생명 있는 존재가 영원한 불 속에 머물도록 단죄되었다면 그것은 무슨 용도에서 였을까? 이런 표현에 대한 해결의 실마리는 상응의 법칙이 풀어줄 수 있다. 최상의 의미에서 불은 사랑을 의미한다. 그 이유는 불이 사랑과 상응하기 때문이다. 이 사랑은 주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이다. 그러나 반대적 의미에서 불은 자신만을 위하는 것, 자아와 세상만을 사랑함도 뜻한다. 이 사랑이 악령을 구성하는 사랑이다. 더욱이 모든 사랑, 즉 선하든 악하든 그 사랑 안에 있는 이들은 그 사랑으로 기뻐한다. 그런고로 악령에게 조차 있는 통치하는 사랑은 비록 그 불이 꺼질 수 없을지라도 영원한 처벌이라 불리는 것으로서 당사자들에게 해당될 수는 없다. 그러면 영원히 벌받음이란 무슨 뜻일까? 이는 벌받음이라는 두려움에서 발생하는 영원한 억류이다. 벌(punishment)이라고 번역된 그리스 단어는 억류를 의미한다. 이를 통치하는 정부 형태로 보면 지옥이라는 항구적인 조건을 기술해 준다. 따라서 그들은 고통받을까 두려워함으로 영원히 억류되는 것이다. 이 두려움이 더욱 거세지면 그들 영역에서 법을 위반하지 못한다. 따라서 어떤 때든 어떤 상태 이든 그들이 이 두려움의 억류에 순종하는 한 그들은 어떤 처벌 속에 있다고는 볼 수 없다. 이상과 같은 넓은 측면에서의 관점을 먼저 지니고 본 장에서 언급되는 특수한 처벌을 이제 생각해 보자.
일반적으로 볼 때 사형에 처함이라는 말은 선함과 진리의 상태에서 분리되어 악과 거짓의 상태에 있음을 의미한다. 이런 글을 읽어 알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천국, 특별하게는 영원한 행복이 생명이라 불리는 이유는 이러하다. 천국에서는 선의 지혜와 진리의 이해가 있다. 선의 지혜와 진리를 이해하는 가운데 모든 생명의 근원이신 주님으로부터 생명이 존재한다. 그러나 지옥의 경우 위와 반대인 바 선 대신 악, 진리 대신 거짓이 있어 영적 생명이 꺼져 있다. 그러므로 지옥은 상대적으로 죽음이다. 그 이유가 영적 죽음이 악과 거짓이고, 이로부터 인간은 악한 것을 뜻하고 거짓된 것을 생각하기 때문이다. 악귀(genii)나 악령은 그렇게 살지 말라고, 그들이 죽어 있다고 타이르는 말을 기꺼이 들으려 하지 않는다. 그 이유가 자기들도 뜻하고 생각할 수 있기 때문에 자기들도 생명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선과 진리 안에 생명이 있는 바 악과 거짓에는 어떤 생명도 없다고 말해지지만 그들은 그 반대이다.” 돌로 쳐서 죽임이란 이미 살핀 바 같이 황폐되어짐, 모든 진리가 박탈됨을 의미한다. 태워 죽임은 황폐되어짐, 모든 선이 박탈됨, 같은 말로서 이기적 사랑으로 살라져 버림을 의미한다. 겨레에서 추방이란 교회로부터의 피할 수 없는 분리, 그런고로 진리에 관한 지식을 상실함을 뜻한다. 따라서 완전히 황폐됨이 이런 뜻에 함축되고 있지 않는다는 것도 더불어 알 수 있다. 누군가가 사악한 행동을 할 경우 분리는 피할 수 없지만 그럼에도 그에게 진실된 회개가 있을 경우 구원이라는 기회는 남겨져 있다는 말이다. 다음 차례로서 주목해 볼 것은 면할 길 없는 죄의 벌과 죄의 벌을 받는 것 사이의 차이점인데 이는 각기 다른 경우에서 언급되고 있다. 전자는 거짓을 확증하는 것, 후자는 악을 확증하는 것을 말한다. 마지막으로 후손을 보지 못하고 죽는다는 것인데 이는 선과 진리의 증가가 없다는 것을 뜻한다. 이런 모든 예들로부터 우리가 확실히 배우는 바, 악과 거짓을 다각도로 탐닉한 결과는 그 결과 역시 다양하다는 것, 그런고로 갖가지 사악함은 그것에 어울리는 처벌을 받게 되는데 이 처벌을 피하는 길은 오직 그 악을 거절하는 행동밖에 없다. 이 행동은 내향이든 외향이든 그 행동을 초래하게 하는 악과 거짓의 세부적 측면에서부터 거절이 있어져야 한다.
마지막 우리가 주목해 보고 끝내야 할 한 가지가 더 있다. 자기 부모를 악담하는 사람에 관한 것이다. 그는 죽되 피를 흘리고 죽어야 한다고 말해지고 있다. 이를 글자 의미로만 보면 그는 자신이 그 악담한 것 때문에 처벌이 있어야 한다는 것일 게다. 다른 구절의 경우도 모두 마찬가지로 위와 비슷할는지 모른다. 그러나 영적 의미일 경우, 일반적으로 악은 그 자체 자기 벌을 가져온다는 것, 그 결과 자신의 거짓 속에 머물러 있게 된다. 그 이유는 그가 신성한 선과 진리를 거절하는 것이 부모를 악담하는 것에 대한 의미인 바, 그는 위와 같은 상태에 머무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선과 진리의 결합은 거듭남이 존재하는 곳에는 언제나 상존하듯 그 반대인 악과 거짓의 결합은 거듭나지기를 허용치 않는 이들의 삶 속에 언제나 상존한다. 우리가 확실히 해두어야 하는 것은 모든 이는 거듭나아질 기회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기회가 인간에게 없다면 구속이라는 주님의 역사는 헛될 뿐이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의 경우 자기는 부당하게 고통받고 있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나 그렇게 정죄된 사람이 있다면 그는 자기에게 주어져온 모든 경고를 흘려 버리기를 스스로 선택했었기 때문임을 명심해야 한다. 그러므로 본문에서 자주 반복된 서술 “그의 피가 그 사람 위에 있다”라는 말씀은 글자 의미로나 영적 의미에서나 매우 강한 어조여서 우리로 하여금 멈칫하게 한다. 또한 위 말씀은 주님을 십자가에 못박겠다고 하는 아래 구절에 있는 사람들의 아우성 소리의 격렬한 본성까지 실감 있게 한다. “그 사람의 피에 대한 책임은 우리와 우리 자손들이 지겠습니다.” 이는 신성한 진리 모두를 일시에 거절하는 것, 부패된 유대교를 수단으로 악에서 오는 거짓을 쌍손으로 환영하는 것을 동시에 의미한다(마태 27:25).
******************************************************

레위기 21장

성경: 레위기 1장

1. 그리고 주님께서 모세에게 말하셨다, 아론의 아들들, 성직자에에게 이야기하라, 그리고 그들에게 말하라, 자기 백성 사이에 죽은 자로해서 자신을 더럽히는 자가 없게 하라.
2. 그의 친척은 예외이다, 즉 자기와 가까운 친척, 자기 어머니, 아버지, 아들, 딸, 형제.
3. 그리고 자기와 가깝고, 남편이 없고, 처녀인 그의 누이 때문이라면 자신을 더럽힐 수 있다.
4. 그는 백성들 사이에서 우두머리인즉 자신이 모독되도록 자신을 더럽히지 말라.
5. 그들은 자기들의 머리 위에서 대머리를 만들지 말라, 그들은 자기들의 수염의 모퉁이를 면도하지 말 것과 자기들 살에 어떤 베임도 만들지 말라.
6. 그들은 자기들의 하느님에게 거룩히 있으라, 그리고 자기들의 하느님의 이름을 모독하지 말라. 그 이유는 불로 만든 주님에 대한 제물, 자기들 하느님의 빵을 그들은 바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거룩하게 있으라.
7. 그들은 창녀인 여인, 또는 모독된 여인을 데려오지 말라. 그들은 남편으로부터 포기당한 여인을 데려오지 말라. 그는 자기 하느님에게 거룩하기 때문이다.
8. 그러므로 너는 그를 신성시해야 한다. 그 이유는 그가 너희의 하느님의 빵을 바치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너를 정화하는 나 주가 거룩하기 때문이다.
9. 그리고 어떤 성직자의 딸, 만일 그녀가 창녀짓을 하여 자신을 모독한다면, 그녀는 그녀의 아버지를 모독하고 있다. 그녀는 불로 태워라.
10. 그의 형제들 사이에 대 성직자인 자는 자기 머리에 기름이 부어졌고, 성직 수임을 받아 옷들을 입었는바, 머리를 풀거나 자기 옷들을 찢지 못한다.
11. 그는 어떤 죽은 몸에로 가지못하고, 그의 아버지를 위해, 또는 자기 어머니를 위해 자신을 더럽혀서는 안된다.
12. 그는 성소를 떠나지 못한다, 자기 하느님의 성소를 모독해서도 안된다. 그 이유는 자기 하느님의 기름부음의 기름의 왕관이 그 사람 위에 있기 때문이다. 나는 주이다.
13. 그는 처녀 상태의 여인을 아내를 데려와라.
14. 과부, 또는 이혼 당한 자, 또는 모독한 여인, 창녀, 이들을 데려오지 말라. 그러나 자기 자신의 백성으로부터의 처녀를 그는 아내로 데려와라.
15. 그리고 그는 자기 백성 사이에서 자기 씨를 모독되게 하지 말라. 그 이유가 나는 그를 신성시 하는 주이기 때문이다.
16. 그리고 주님께서 모세에게 이야기하셨다, 말하시기를,
17. 아론에게 이야기하라, 말하기를, 자손대대로 네 씨로부터 있는 자가 흠을 가지고 있다면, 그가 자기 하느님의 빵을 바치려 접근하게 해서는 안된다.
18. 흠을 가진 자는 누구이든 접근하지 못한다. 즉 소경, 절음발이, 또는 편평한 코를 가진 자, 또는 여분의 어떤 것을 가진 자.
19. 또는 망가진 발, 또는 망가진 손이 있는 자,
20. 또는 곱추, 또는 난쟁이, 또는 자기 눈에 흠있는 자, 또는 괴혈병 있는 자, 또는 딱지투성이(scabbed)인 자, 또는 불알이 깨진 자.
21. 흠을 지닌 성직자, 아론의 씨로부터의 사람은 불로 만드는 주님의 제물을 바치러 가까이 오지 않을 것이다. 그는 흠을 가지고 있다. 그는 자기 하느님의 빵을 바치려 가까이 오지 못한다.
22. 그는 가장 거룩한 자기 하느님의 빵, 그리고 거룩한 자기 하느님의 빵 모두를 먹을 것이다.
23. 그는 베일 안으로, 제단 가까이 오지 못할 것이다. 그 이유는 그가 흠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하여, 그는 내 성소를 모독하지 말 것이다. 그 이유가 나는 그들을 정화하는 주이기 때문이다.

영적 의미 요약

* 선 가운데 있는 이들, 이로부터 진리 가운데 있는 이들이 금해야 할 여러 가지, 1-9절.
* 영화하시는 가운데 있는 주님, 천적 인간에 관한 위와 비슷한 금지조항과 지시들, 10-15절.
* 선 가운데 있는 이들, 이로부터 진리 가운데 있는 이들의 거듭나는 삶이 충분히 발달하는데 따른 장애물에 관하여, 16-23절.

각 절의 영적 의미

1절. 그리고 주님께서 모세에게 말하셨다, 아론의 아들들, 성직자에게 이야기하라, 그리고 그들에게 말하라, 자기 백성 사이에 죽은 자로해서 자신을 더럽히는 자가 없게 하라.

영적 의미

주님께서 지각을 주시는 신성한 진리를 수단으로 선 가운데 있고 그로부터 진리 가운데 있는 영적 교회 속의 사람들이 영적 생명이 없는 거짓으로 오염되지 않도록 밝히 알게 하시는 사항이 있다.

세부적 영적 의미

주님께서 모세에게 말하심은 신성한 진리를 수단으로 신성한 선으로부터의 계시임을; 말함은 유입과 지각, 그리고 계시(밝히 알게 함)를; 아론의 아들 성직자들에게 이야기하라란 선 가운데 있고 그로부터 진리 가운데 있는 영적 교회 속의 사람이 가지는 지각을; 성직자는 자기 백성 사이에 죽은 자로 해서 자신을 더럽히지 말라란 위와 같은 품성을 지닌 사람은 영적 생명이 없는 거짓으로 오염되어서는 안 됨을 말한다. (2001, 7010, 5743, 10130, 3813, 5407)

2절. 그의 친척은 예외이다, 즉 자기와 가까운 친척, 자기 어머니, 아버지, 아들, 딸, 형제.

영적 의미

천사들, 즉 천적 진리와 천적 선에 있는 이들, 또는 영적 진리와 그 진리로부터의 애착에 있는 이들, 또는 영적 선에 있는 이들 조차도 피할 수 없는 것은 제외된다.

세부적 영적 의미

그의 친척은 예외이다란 천사들에게 조차 피할 수 없는 것은 제외한다는 뜻인데, 그 이유는 가까운 친척이란 이 구절에서 유전적인 악과 거짓을 말하고 동시에 비록 인간이 거듭났다해도 그에게 남아 있는 실제적인 악과 거짓을 뜻하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진리 측면에서의 천적 인간을; 아버지는 선 측면에서의 천적 인간을 말하나 반대 의미로는 거짓과 악을 뜻한다. 아들은 진리 측면에서의 영적 인간을; 딸은 애착 측면 또는 선행의 선 측면에서의 영적 인간을 말하나 반대 의미로는 거짓과 악을 뜻한다. 형제는 영적 선을 의미하나 본문의 경우 자연적 수준에 있는 영적 선 또는 교회의 외적 측면 또는 최말단 천국에서의 선을 뜻하지만 반대 의미로 본문이 사용하는 바, 악을 뜻한다. (3703-2, 3703-20, 568, 9946, 9950, 5686, 10490)

3절. 그리고 자기와 가깝고, 남편이 없고, 처녀인 그의 누이 때문이라면 자신을 더럽힐 수 있다.

영적 의미

또는 순수하게 이해함 안에 영적 진리를 지닌 이들이라 해도 아직 선과 결합이 안되고 있을 경우 주님 보시기에는 순수하지 못하다. 이것을 영적 인간은 인정해야 한다.

세부적 영적 의미

누이는 자연적 인간의 이해함에 있는 영적 진리를 뜻하나 반대 의미로는 거짓을; 처녀는 순수한 것을; 자기에게 가까운 자란 가까운 친척과 동일한 뜻을; 남편이 없음이란 선과 결합 하지 않은 진리를; “자신을 더럽히지 말라”란 악과 거짓을 함유한 것이 인간인 바, 천국도 주님 보시기에 깨끗하지는 않다는 것을 영적 인간은 이를 인정해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3160, 3703-22, 3081, 3703-20, 2728, 10130)

4절. 그는 백성들 사이에서 우두머리인즉 자신이 모독되도록 자신을 더럽히지 말라.

영적 의미

그러나 선 가운데 있는 이들이라 해도 선은 모든 진리의 본체인 바, 영적 생명이 없는 거짓으로 자신이 오염되게 해서는 안 된다. 그 이유는 이것이 모독이기 때문이다.

세부적 영적 의미

자신을 더럽히지 말라란 어찌됐든 선 가운데 있는 사람들은 부주의해서 라든지 심사숙고해서 든지 악과 거짓으로 오염되어서는 안 됨을, 백성의 우두머리란 선이 진리의 본체인 바, 선은 진리 위에 있다는 것을, “자신을 더럽히지 말라”란 이는 분명히 모독임을 뜻한다. (10130, 2148, 9667, 1259, 571, 582)

5절. 그들은 자기들의 머리 위에서 대머리를 만들지 말라, 그들은 자기들의 수염의 모퉁이를 면도하지 말 것과 자기들 살에 어떤 베임도 만들지 말라.

영적 의미

선 가운데 있는 이들은 자연적 인간 내면 또는 외면에 진리가 없는 채로 있어서는 안 되고, 그의 자연적인 선은 그릇된 관념의 원인인 외관을 중시함과 각종 오류에서 파생되는 거짓들로 해서 손상을 입게 해서는 안 된다.

세부적 영적 의미

대머리를 만들거나 수염의 모퉁이(구레나룻)을 만들지 말라란 내면 이든 외면 이든 자연적 인간에 진리가 없으면 안 된다는 것을, 몸에 칼자국을 내지 말라란 그릇된 관념의 원인인 오류와 외관으로부터 나오는 거짓으로 그의 자연적 선이 손상을 입어서는 안 됨을 뜻한다. (5247-3, 9056, 2799-23)

6절. 그들은 자기들의 하느님에게 거룩히 있으라, 그리고 자기들의 하느님의 이름을 모독하지 말라. 그 이유는 불로 만든 주님에 대한 제물, 자기들 하느님의 빵을 그들은 바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거룩하게 있으라.

영적 의미

그러므로 선 가운데 있는 이들은 진리 가운데에도 온전히 있어야 한다. 신성한 인간을 부정함으로 그 진리를 모독하지 말라. 그 이유가 그들은 순수한 사랑으로 주님을 예배해야 하고 모든 선은 신성한 진리이신 그분으로부터 존재함을 인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그들은 거룩한 것이다.

세부적 영적 의미

하느님에게 거룩해 있음이란 선 가운데 있는 이들은 진리 가운데에도 역시 온전하게 있어야 함을; 하느님의 이름을 모독하지 말라란 신성한 인간을 부정함으로 진리를 모독 말라를; 불로 살라 주님께 바침이란 순수한 사랑으로 주님을 예배함을; 하느님의 빵을 그들이 바친다란 모든 선은 그분으로부터 신성한 진리를 수단으로 있게 됨을 인정함을; 그러므로 거룩하리란 본문의 경우 선과 진리를 결합함을 통해 거룩해야 함을 뜻한다. (2001, 6887, 8882, 10055, 276, 9993, 2001, 9993, 2001, 2190)

7절. 그들은 창녀인 여인, 또는 모독된 여인을 데려오지 말라. 그들은 남편으로부터 포기당한 여인을 데려오지 말라. 그는 자기 하느님에게 거룩하기 때문이다.

영적 의미

그런고로 선 가운데 있는 사람은 왜곡된 진리로 또는 모독하는 왜곡된 진리로 또는 선행과 분리된 신앙과 결합하는 것은 불법이다. 그 이유는 선과 진리만이 함께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세부적 영적 의미

창녀나 모독된 여인(몸을 더럽힌 여자)를 얻지 말라란 왜곡된 진리, 그것이 확증되었든 아직 확증 안 되었든 자신에게 결합시키는 것은 선 가운데 있는 이들에게 불법임을; 남편에게 소박맞은 여자를 취하지 말라란 선행에서 분리된 신앙을 자신과 결합되게 말라는 것을; 하느님께 거룩해 있음이란 선과 진리만이 서로 일치함을 뜻한다. (6348, 4844-16, 2190)

8절. 그러므로 너는 그를 신성시해야 한다. 그 이유는 그가 너희의 하느님의 빵을 바치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너를 정화하는 나 주가 거룩하기 때문이다.

영적 의미

그러므로 모든 이는 선과 진리가 결합되게 해야 하고 자신의 선이 진리 안에 계신 주님으로부터 있게 되었다는 것, 주님께서 자신으로 하여금 진리를 수단으로 선 가운데 있음이 확증되도록 힘을 주시어 가능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세부적 영적 의미

그를 신성시함이란 선 가운데 있는 모든 이는 진리와 결합해야 함을; 하느님의 빵을 바침이란 선은 진리 안에 계신 주님으로부터 임을 인정함을; 그는 너희에게 거룩하다란 인간은 이를 행할 수 있다는 것, 즉 주님으로부터 선이 있다는 것을 인정할 수 있다는 것을; “너희를 정화하는 나 여호와가 거룩하다”란 그는 진리를 수단으로 선 안에서 자신을 확증시킬 힘을 주님으로부터 가진다를 뜻한다. (276, 999-3, 9946, 2001, 2190, 9680)

9절. 그리고 어떤 성직자의 딸, 만일 그녀가 창녀짓을 하여 자신을 모독한다면, 그녀는 그녀의 아버지를 모독하고 있다. 그녀는 불로 태워라.

영적 의미

선을 향한 애착, 만일 그것이 왜곡된 진리와 결합한다면 모독되어진다. 그로 인해 선 자체가 모독된다. 그러면 이기적 사랑으로 선에 관한 측면의 황폐함이 반드시 뒤따른다.

세부적 영적 의미

성직자의 딸이란 선에 관한 애착을; 창녀로 놀아남이란 진리의 왜곡을; 이것이 모독인 바, 그 이유는 선에 관한 애착이 거짓으로 오염되었기 때문이다. 불로 태워라란 이기적 사랑을 통해 모든 선이 황폐해짐을 말한다. (6775, 6348, 4601-2, 934)

10절. 그의 형제들 사이에 대 성직자인 자는 자기 머리에 기름이 부어졌고, 성직 수임을 받아 옷들을 입었는바, 머리를 풀거나 자기 옷들을 찢지 못한다.

영적 의미

또한 주님은 신성한 인간 측면에서 볼 때 신성한 진리가 신성한 선에 하나되어 계신 것인 바, 이로부터 천적 인간 안에서도 신성한 선은 신성한 진리를 수단으로 명백해진다. 그러므로 진리가 분산됨으로 선이 분산되지 못하는데 이는 내적 이든 외적 이든 모두 해당된다.

세부적 영적 의미

형제 사이에서 대 성직자란 주님은 그분의 인간 부분에서 신성한 진리와 신성한 선이 하나되어 있음을, 이로부터 천적 인간 안에서 신성한 선은 그 선으로부터 진행되는 신성한 진리로 명백해진다는 것을; 자기 머리 위에 기름을 부었음이란 위 결합을; 성직 수임을 받아 옷들을 입었다는 것은 신성한 선은 신성한 진리 안에서 명백해짐을; 머리를 풀거나 옷을 찢지 말라란 내적 으로든 외적 으로든 진리를 분산시켜 선까지 분산되게 말라를 뜻한다. (9946, 9806, 10010, 10011, 9999, 4247-3, 4763)

11절. 그는 어떤 죽은 몸에로 가지 못하고, 그의 아버지를 위해, 또는 자기 어머니를 위해 자신을 더럽혀서는 안 된다.

영적 의미

신성한 인간 측면의 주님은 인간 측면에 있는 유전적 악과 거짓으로 전혀 오염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천적 인간은 실제의 악과 거짓 속에 남겨진 것들로 해서 오염되지 않는다.

세부적 영적 의미

대 성직자는 어떤 죽은 몸에도 가지 못하고 자기 부모가 죽어도 가까이 가서 자신을 더럽혀서는 안 된다란 신성한 인간 안에 계신 주님은 유전적인 악과 거짓으로 오염되지 않으며, 천적 인간은 그에게 남아있는 실제의 악과 거짓들로 해서 오염되지 않음을 뜻한다. (9946, 9806, 10130, 3813, 3703-20)

12절. 그는 성소를 떠나지 못한다, 자기 하느님의 성소를 모독해서도 안 된다. 그 이유는 자기 하느님의 기름부음의 기름의 왕관이 그 사람 위에 있기 때문이다. 나는 주이다.

영적 의미

선 가운데 있는 사람은 거듭난 천적 인간 같이 되는데 있어서 중단은 없다. 그는 선을 진리에서 분리시킴으로 어떤 수준에 있는 선이라 해도 모독하지 않을 것이다. 그 이유는 그가 삶의 투쟁에서 승리하였기 때문에, 그러므로 진리를 선과 결합시켰기 때문에, 그리하여 그 진리는 선을 완전히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세부적 영적 의미

성소를 떠나거나 성소를 더럽히지 못한다란 선 안에 있는 사람은 거듭나는 천적 인간 같이 거듭남이 결코 중단되지 않는다. 그는 어떤 경우에서도, 아주 경미한 수준에서 일지라도 선에서 진리를 분리시킴으로 선을 모독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하느님의 기름부음의 기름의 왕관이란 삶의 투쟁에서 승리함으로부터 선과 진리의 결합이 있음을, “나는 주”라 함은 위 진리는 선을 완전히 표현한다는 뜻이다. (4144, 3210, 8882, 9930, 9954, 2001)

13절. 그는 처녀 상태의 여인을 아내를 데려와라.

영적 의미

이러므로 그분의 인간을 신성이 되게 하신 주님은 모든 불순함 속에 있는 악을 제거함으로 그분의 교회와 영원히 결합된다. 그래서 거듭난 사람은 불순함 없이 선과 진리가 결합된 가운데 있게 된다.

세부적 영적 의미

처녀만을 아내로 맞아라란 그분의 인간을 신성이 되게 하신 주님은 모든 불순함을 교회로부터 제거함으로 그분의 교회와 결합하게 됨을, 거듭나는 사람은 불순함 없이 선과 진리가 결합되어야 함을 뜻한다. (1468, 3081)

14절. 과부, 또는 이혼 당한 자, 또는 모독한 여인, 창녀, 이들을 데려오지 말라. 그러나 자기 자신의 백성으로부터의 처녀를 그는 아내로 데려와라.

영적 의미

거듭나는 사람이 진리 없는 선 가운데 또는 선이 없는 진리 가운데 있는 것은 불가능하다. 더구나 모독하는 왜곡된 진리가 자신과 결합되게 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거듭나는 과정에서 모든 악에서 깨끗해져야 하리라.

세부적 영적 의미

과부란 진리 없는 선 또는 선이 없는 진리를; 모독한 여자도 선이 없는 진리를; 창녀란 왜곡된 진리를; 처녀란 모든 악에서 깨끗한 교회를; 아내란 선과 결합된 진리, 그러므로 천적인 결혼 상태임을 뜻한다. (9198, 4844-16, 3081, 1468)

15절. 그리고 그는 자기 백성 사이에서 자기 씨를 모독되게 하지 말라. 그 이유가 나는 그를 신성시 하는 주이기 때문이다.

영적 의미

마지막으로 천적 인간은 진리를 모독 말아야 할 것이다. 이를 수단으로 낮은 수준에서도 교회가 증가되고 팽창된다. 그 이유는 그가 신성한 선으로부터 행동하기 때문이고 이를 수단으로 그는 순수하고 거룩해진다.

세부적 영적 의미

자기 백성 사이에서 자기 씨를 모독되게 하지 말라란 천적 인간은 진리를 모독해서는 안 되는데 이러므로 해서 그 교회는 낮은 수준에서까지 증가되고 팽창된다는 것을; “그를 신성시되게 하는 이는 나 주이다”란 천적 인간은 신성한 선으로부터 행동해야 한다는 것, 이를 수단으로 그는 순수해지고 거룩해짐을 뜻한다. (880, 1259, 2001, 8042)

16절. 그리고 주님께서 모세에게 이야기하셨다, 말하시기를,

영적 의미

더 나아가 지각을 주시는 신성한 진리를 수단으로 주님께서 밝히 알게 하신다.

세부적 영적 의미

주님(여호와)이란 사랑 측면에서의 신성한 존재를; 이야기하심(speaking)이란 유입을; 모세란 신성한 진리 또는 말씀을; 말하심은 지각을 말한다. (2001, 2951, 7010, 1791, 1822)

17절. 아론에게 이야기하라, 말하기를, 자손대대로 네 씨로부터 있는 자가 흠을 가지고 있다면, 그가 자기 하느님의 빵을 바치려 접근하게 해서는 안 된다.

영적 의미

천적 인간 또는 선 가운데 있는 이들의 경우 그들이 거듭나는 모든 과정에서 진리를 수단으로 온전해지지 않을 경우 모든 선이 신성한 진리를 수단으로 주님으로부터 온다는 것을 충분하게 인정할 수 없다.

세부적 영적 의미

아론은 선 가운데 있는 천적인 사람을; 이 사람에게 이야기하심이란 신성한 진리를 수단으로 가르쳐 짐을; 아론의 후손이란 선으로부터의 진리 가운데 있는 이들을; 자손대대로란 거듭나는 모든 과정 동안을; 흠이 있음(몸이 온전하지 않음)이란 진리를 수단으로 아직 완전해지지 않았음을; 자기 하느님께 빵을 바치러 접근하지 못함이란 위와 같은 사람은 모든 선이 신성한 진리를 수단으로 주님에게서 있음을 충분히 인정할 수 없다는 뜻이다. (9946, 7304, 7010, 880, 1041, 7837, 10042 II, 2165, 2001, 5619)

18절. 흠을 가진 자는 누구이든 접근하지 못한다. 즉 소경, 절음발이, 또는 편평한 코를 가진 자, 또는 여분의 어떤 것을 가진 자.

영적 의미

선 또는 진리 측면에 어떤 결함이 있는 사람은 누구든지 위와 같은 것을 인정하는데 방해받는다. 그 결함을 예를 들어 말한다면, 그가 자연적 인간 안에 있는 선 또는 진리에 무지할 경우, 그의 영적 성장이 훼방될 경우, 그의 지적 능력을 자연적 수준에서 자랑할 경우 등등이다.

세부적 영적 의미

흠을 가진 자 누구든지 이란 선 이든 진리 이든 어떤 결함이 있는 사람은 누구든지를; 그는 접근하지 못한다란 위와 같은 진리를 인정하는데 그는 방해받게 됨을; 소경이란 진리에 무지한 사람을; 절음발이란 자연적 인간 안에 있는 선에 무지한 사람을; 편평한 코를 가진 자란 영적 성장이 훼방 놓여진 사람을; 여분의 어떤 것(너무 키가 큼, superfluous, too tall)이란 자기의 지적 능력을 자연적 수준에서 자랑하는 사람을 뜻한다. (7837, 제 17절, 2383, 210, 4302, 10109, 5658, 7984-3, 581, 583, 1673-3)

19절. 또는 망가진 발, 또는 망가진 손이 있는 자,

영적 의미

자기의 자연적 수준의 애착들이 거꾸로 된 상태인 사람, 영적 능력들이 심하게 훼손된 상태인 사람,

세부적 영적 의미

망가진 발이란 자연적 애착들이 거꾸로의 상태인 것을, 망가진 손이란 영적 힘이 훼손된 것을 뜻한다. (9163, 2162, 9163, 5328)

20절. 또는 곱추, 또는 난쟁이, 또는 자기 눈에 흠있는 자, 또는 괴혈병 있는 자, 또는 딱지투성이(scabbed)인 자, 또는 불알이 깨진 자.

영적 의미

영적 사항들을 승강 시키는데 힘이 약한 자, 진리를 삶에 응용하는데 결함이 있는 사람, 지성이 약한 사람, 악이나 거짓들로 해서 외향적으로 괴로움을 받고 있는 사람, 또는 진리를 선에 결합하는 능력에 상해를 받은 사람들,

세부적 영적 의미

곱추란 자신을 영적 수준으로 승강 시키는 힘이 약해진 것을 (눅. 13:11-13 참조); 난쟁이란 진리를 생활에 응용하는데 있어 흠이 있는 것을; 눈에 흠이 있는 것은 지성이 약한 것을; 딱지투성이(scabby, full of warts)이란 거짓들이나 악들로 해서 바깥쪽에서 괴로워하는 것을; 불알이 깨진 것은 진리가 선과 결합하는 힘이 상해를 입은 것을 뜻한다. (6952-1, 6952-6, 누가 13:11-13, 10550, 10303, 431, 7837, 2148, 7524, 10303, 431, 2173, 5053, 5060)

21절. 흠을 지닌 성직자, 아론의 씨로부터의 사람은 불로 만드는 주님의 제물을 바치러 가까이 오지 않을 것이다. 그는 흠을 가지고 있다. 그는 자기 하느님의 빵을 바치려 가까이 오지 못한다.

영적 의미

선 가운데 있는 사람, 또는 내적인 선으로부터 진리 가운데 있는 사람, 그런데 외적으로는 결핍되어있다면 모든 선이 신성한 사랑을 통해 주님으로부터 있게 됨을 충분히 인정할 수 없다. 그는 자기 결함 때문에 방해받는다. 이럴 경우 주님과 영원히 결합할 수는 없다.

세부적 영적 의미

성직자 아론의 씨로부터의 사람이되…안 되는 자란 선 가운데 있지 않은 것 또는 내적 선의 진리 가운데 있지 않음을; 흠이 있음이란 외적으로 결핍된 것이 있음을; 주님께 불로 살라 바치는 제물을 드리러 가까이 나옴이란 모든 선은 신성한 사랑을 통하여 주님으로부터임을 충분히 인정할 수 있다는 것을; “흠이 있는 사람”이란 자기 결함으로 방해받음을; 그는 하느님께 빵을 바치러 가까이 오지 못함이란 그는 위와 같이 인정을 수단으로 외적 측면에서 주님과 결합될 수 없음을 뜻한다. (9946, 7837, 10042 II, 10055, 7837, 10042 II, 2165)

22절. 그는 가장 거룩한 자기 하느님의 빵, 그리고 거룩한 자기 하느님의 빵 모두를 먹을 것이다.

영적 의미

참으로 그는 의지와 이해함 측면에서 내적으로 선을 자기 것이 되게 할 수 있다.

세부적 영적 의미

가장 거룩하거나 거룩한 하느님의 빵을 먹는다란 그는 의지와 이해함에서 내적으로 선을 자기 것으로 삼을 수 있음을 뜻한다. (2187, 2165, 3210)

23절. 그는 베일 안으로, 제단 가까이 오지 못할 것이다. 그 이유는 그가 흠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하여, 그는 내 성소를 모독하지 말 것이다. 그 이유가 나는 그들을 정화하는 주이기 때문이다.

영적 의미

그러나 그는 외관에 속한 모든 것을 제거함으로 자신의 가장 깊은 선을 실감할 준비를 아직 갖추지 않고 있다. 자기 결함이 제거될 때까지 그는 주님을 진실로 예배할 수 없다. 그래서 만일 위선이 명백히 드러난다면 그는 그 선을 모독할 것이다. 그러나 신성한 선으로부터의 주님이 그의 장애물을 제거하실 것이다. 그 이유는 그분만이 인간을 최대 한도로 정화해주실 수 있기 때문이다.

세부적 영적 의미

베일 안으로 가지 말라란 그가 가장 깊은 선을 실감하는데는 아직 준비되지 않았음을; 베일은 외관(appearances)을; 흠이 있기 때문에 제단 가까이 오지 못함이란 그의 결함이 제거될 때까지 그는 주님을 진실로 예배할 수 없음을; “나의 성소를 모독하지 말라”란 만일 위 선이 그에게 명백해진다면 그는 그 선을 모독할 것임을; “나는 그들을 정화한다”란 신성한 선으로부터 주님은 이 장애물을 제거하실 것인데 그 이유는 그분만이 최대한도까지 인간을 정화해 주실 수 있기 때문임을 뜻한다. (9670, 2576, 4541, 7837, 3210, 9670, 2001, 9229)

24절. 모세는 이 말씀을 아론과 그의 아들들과 이스라엘 모든 백성에게 일러주었다

영적 의미

이상 모든 것은 선 가운데 있는 사람, 천적, 영적 천국에 속한 사람 또는 최말단 천국들에 속한 사람들이 받아 적어야 할 신성한 진리이다.

세부적 영적 의미

모세가 아론에게, 그의 아들들에게, 그리고 모든 이스라엘의 아들들에게 이야기를 함이란 천적 선 안에 있는 자에게, 영적 선 안에 있는 자에게, 최말단 천국들에 있는 자에게 신성한 진리를 받아적게 하심이다. (AC7010, 2951, 9946, 4286)

21장의 종합적 고찰

이 장의 영적 의미는 큰 흥미를 주고 있다. 그 이유는 말씀의 여러 부분들에 있는 가르침을 확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선의 상태를 실감한 사람은 선 쪽으로 인도하는 진리의 상태로 되돌아가서는 안 된다는 것, 더욱이 자연적인 것에 깔려 있는 악이나 잘못들로 인한 불완전한 상태에는 더욱 되돌아가지 말아야 한다 라든가, 이런 사항을 인간의 완전한 상태를 묘사하는 것으로 생각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어쨌든 완전한 상태에서는 인간이 되돌아 갈 수도 없을 것인데 그 이유는 그가 되돌아가는 것을 더 이상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한 가지 큰 이유는 인간이 선 가운데 건설될 때 그는 더 이상 시험에 고통받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서술을 읽을 수 있다. “지옥과의 전투와 승리라는 점은 이러하다. 한 때 그것을 정복한 사람은 계속적으로 그렇게 해간다. 그 이유는 정복을 수단으로 그는 지옥을 누룰 힘을 획득하였기 때문이다. 그가 신앙 속에 있는 진리, 사랑 속에 있는 선을 자신 스스로 자기이 것 되게 해서 확증하게 되면 그 후 지옥은 그에게 어떤 시도도 감히 하기 힘들어진다.” 본문의 각 절에서의 설명이 보여주었듯이 성직자는 선, 또는 선 가운데 있는 이들을 말한다. 이는 주님께서 언급하신 대목, “지붕에 있는 사람은 집안에 있는 세간을 꺼내러 내려오지 말며 들판에 있는 사람은 겉옷을 가지러 집으로 돌아가지 말아라” (마태. 24:17,18)에 있는 사람과 같다. 이 말씀의 의미는, “선 가운데 있는 사람은 신앙의 교리들에 들어있는 여러 가지 것들로 되돌아가지 말라”는 뜻이다. 더 자세히 언급한다면, 선 가운데 있는 이들은 악과 잘못들, 본문에서 더럽혀지는 원인으로 언급된 여러 가지 사항의 의미이기도 한 각종 악과 잘못들 쪽으로 자신이 되돌아가지 않도록 하라는 뜻이다. 자신을 더럽게 하는 것들이 가까운 친척(일가 친척)으로 표현되고 있다. 천사들이 선 가운데 자신을 건설하듯 하는 방법은 무엇일까? 일반적으로 자기 스스로 자신 속에 있을 수 있는 것이라고는 악밖에 없다는 것을 솔직히 인정하는 것, 특별한 측면에서는 비록 천사가 된 그들에게 더 이상 활동적이지 않은 유전적 악과 자신이 저질렀던 실제의 악으로 인해 자기 생명 속에 남아있는 악들을 고백하는 것도 있다. 이런 것들이 천사들에게 남아 있는데 그 이유는 그것이 인간 존재의 구성 성분이기 때문, 다시 말해 한 때라도 자신에게 알려져서 생각했고 말했던 것, 또는 행동된 것은 그의 기억으로부터 절대적으로 지워질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비록 많은 이들이 각자 자기들 기억 안에 서로 똑같은 것을 가졌다고 가정해도 실제로 똑같은 두 사람은 존재할 수 없다는 말도 된다. 왜 그렇게 안 될까? 그 이유는 모든 이 각자 안에 있는 선은 다양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두 명의 똑같은 사람이 영원히 존재될 수 없다. 이 다양한 선을 수단으로 그와 함께 있는 진리가 질서 있게 배열된다. 또한 이런 과정으로부터 각자는 생명을 지닌다. 그러면 이 진리가 선의 품질을 결정 짓는다. 이렇게 선과 진리의 상호작용이 있다. 본문에서 예증되는 구절들 속의 진리를 수단으로 우리는 어떤 것이 참되고 거짓된 것인지 일반적인 지식을 이해하게 되고, 선을 수단으로 어떤 것이 선 또는 악인지 일반적인 애착을 이해하게 된다. 인간 체험은 이 세상까지 포함해서 체험 속에 나열되는 진리를 보여주는데 한 몫을 한다. 사실 우리는 오래 전에 있었던 일들이 잊어버린 듯 생각되어도 다시 기억에 떠올리는데 별 노력이 없어도 가능하다. 그 외에도 “심판의 날에 자기가 지껄인 터무니없는 말을 낱낱이 해명해야 한다” (마태. 12:36).
그러나 이런 물음도 있을는지 모른다. 만일 인간의 생명에 속한 것이 위와 같이 남아 있는다면 일가 친척인 아버지나 어머니, 아들, 딸, 형제, 자매 때문에 영적으로 자신을 더럽혀 있게 된 악밖에 없음을 천국에서조차 항구적으로 인정해야 한다면 그의 악이 수그러져 있는다는 데 대한 질서의 법칙은 무엇인가? 이는 보편적 법칙에 의해 있게 되는데 저 세상에서는 심판의 과정을 통해 악과 선이 분리되고 이 분리 때문에 시험 역시 더 이상 있지 않는다. 이를 잘 생각해 보면 선 가운데 있는 사람, 설사 천국에 있다 해도 자신을 더럽힐 수도 있을는지 모른다는 것, 어떤 측면에서 그는 2, 3, 4, 11절과 같이 행할 수 없다. 물론 본문의 첫 문단은 선 가운데 있는 영적 인간, 천국에 있는 영적 인간, 선을 원리로 하는 지상의 영적 인간에 관련된 사항들이다. 이런 점에서 이 문단이 주는 가르침이 있다. 영적 인간은 세 등차에서 유전적인 악과 실제의 악으로 해서 자신이 더러워져 있음을 항구적으로 인정해야 하는 한편, 그런 모독에 빠지는 시험에 한껏 저항해 가서 실제의 악을 탐닉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다음 문단은 특별한 흥미를 주는데 그 이유는 그분의 인간을 신성이 되게 하시는 주님, 이로부터 가장 깊은(높은) 삼층 천국의 천적 인간에 관련된 사항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도 두 가지 사항 즉 대 성직자로 표현되는 가장 깊은 천국의 천적 인간과 보통 성직자로 표현되는 보통의 천적 인간 사이의 차이점에 관해서 이다. 주님의 인간과 인간 사이의 본질적 차이는 주님의 인간은 임신과 출생부터 신성(무한)하였고 이에 반해 인간은 임신과 출생부터 유한하다. 그런고로 주님의 인간은 신성이 되심을 수단으로 외적 측면까지, 즉 모든 측면이 신성으로 충만 되셨다. 그 이유는 본질적으로 신성이었던 것만이 실지로도 신성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유한한 인간은 어떤 과정을 거쳐도 신성으로 만들어질 수 없다. 또 한 가지, 주님의 인성은 임신과 출생을 수단으로 신성이 되셨지만 그분에게는 유전적인 악이 내적으로는 없으셨고 게다가, 어떤 실제적인 악도 없으셨다. 그러나 유전적인 악을 외적으로 가지셨는데 이는 처녀인 그의 어머니로 부터이다. 반면 보통의 인간은 양 부모로부터서 유전적으로 악을 가지고, 이에 더해 실제 자기가 만든 악까지 가지고 있다. 이상의 관점은 본문에서 보통의 성직자는 그의 어머니, 아버지, 그 외 일가 친척으로 해서 더럽혀지는 것이 허용되는 가에 대한 이유를 알기 위해 미리 거론해 둔 것이다. 그래서 위 두 가지 차이점이 본문에 기록되었는 바, 보통의 모든 사람은 유전적 악과 실제의 악을 가지고 있고 이는 영원히 그와 함께 남아 있는 까닭에 각 인간은 거듭나는 동안, 거듭난 후라 해도 위 사실을 반드시 인정해야만 한다는 것, 이에 비해 주님은 그분의 인간을 신성이 되게 하심을 수단으로 유전적인 어머니 쪽의 생명은 사라졌는데, 그 이유는 그분에게 알맞은 인간 삶은 어떤 부분에서도 실지 없으셨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그분은 시험을 이기시고 악의 권세를 정복하셨으며 인간 삶의 최말단에 속하는 것까지도 신성이 되게 하셨다. 따라서 그분은 이 세상에서 가졌던 육체와 더불은 죽음으로부터서 일어나셨는 바, 이는 보통의 인간과 아주 다른 점이다. 그런고로 그분은 그분의 어머니나 아버지로 해서 자신을 더럽히지 않았다. 이를 영적으로 말할 경우 그분은 유전적인 거짓과 악이 전혀 남아 있지 않게 되셨다는 말이다.
다음으로 살필 것은 후자의 다른 점, 즉 삼층 천국의 천적 인간과 여느 천국 인간의 차이점인데, 이것 역시 대 성직자와 보통 성직자를 수단으로 표현되어 있다. 삼층 천국의 천사에게는 유전적인 악과 실제의 악이 남아 있지 않다고 말할 수 있을까? 결코 그렇지 않다. 그 이유는 창조된 인간, 태어난 인간 모두는 거듭남이 요구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 역시 자신 스스로서는 악밖에 가진 게 없음을 인정하지 않고는 삼층 천국에 머무를 수 없다. 그 이유는 태고적 사람(the Most Ancient People)도 거듭남은 요구되었기 때문이다. 그들도 타락한 인간 속에 있는 욕망으로 괴로워했다. 그렇게 괴로워했던 그들이 최상의 상태에 속한 태고 교회를 구성했던 그들의 후손들에게 악과 거짓을 물려주었다. 이 교회의 모든 멤버 역시 그들이 지닌 유전적 악과 실제의 악 그리고 후손에 내려온 악들 모두 때문에 거듭남은 더욱 요구되었다. 이런 악은 구속하심이 대두될 때까지 계속 퇴적 되어왔다. 태고 교회의 천적 인간 또는 삼층 천국의 천적 인간은 자기들에게 유전적 악이 없어서 보통의 천적 인간과 다른 것이 아니라, 그들은 이해함을 통해서가 아닌 의지를 통해 거듭났다는데서 다르다. 다시 말해서 진리를 통하여서가 아닌 선을 통하여 거듭났다는 말이다. 그들은 선으로부터 진리를 분리시키지 않는 바, 본문 12절에서 그들은 성소로부터 나가지 말라고, 그들의 하느님의 성소를 모독하지 말라고 말해지고 있는 것이다. 자기 부모가 죽어도 가까이 가서 부정을 타면 안 된다고 그들에 관해 말해진 것은, 비록 천적 수준인 그들이 천적이나 자신 스스로서는 악밖에 없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해도 그들에게 남아 있는 유전적 악 또는 거짓 이든, 실제의 악 또는 거짓 이든 그것들로 해서 더럽혀지지 않음을 명시해 주시려는 데 있다.
본 장의 마지막 문단에서는 영적 결함들이 일일이 열거되어 말해지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세 가지 사실만을 주목하기로 한다. 어느 누구도 진리를 수단으로 하지 않으면 자기 수준에 맞추어 천적 인간이 되는 것, 다시 말해 진리가 없으면 자기 수준에 맞추어 선을 충분히 실감할 수 없다. 어느 누구도 불완전한 자신 그대로에서 천적 인간이 되거나 선을 실감할 수 없다. 천사 같은 가장 깊은 수준의 삶을 충분히 실감할 수 있게 해 주실 수 있는 분은 주님 뿐이시다. 천적 인간, 그가 삼층 천국의 천사가 되려면 비록 그가 의지를 통하여 거듭나고 있다 해도 진리를 수단으로 완전해져야 한다. 영적 인간, 그가 이층 천국의 천사가 되려면 먼저 진리에 관한 가르침을 받아야 한다. 자연적 인간, 그가 일층 천국 즉 최말단 천국의 천사가 되려면 그의 천국 삶을 구성하게 되는 단순한 순종의 상태에 도달될 수 있도록 진리에 관한 지식에 의존해야 한다. 따라서 위 세 천국의 천사들 모두 주님께 감사 드려야 하는 공통된 한 가지는 우리에게 말씀이라는 선물을 주신데 대하여서 일 것이다.
두 번째, 우리 품성 속에 있는 결함들은 우리가 발전하는데 장애물이다. 비록 그 결함들이 선을 우리 것이 되게 하는 점진적인 진보에 방해 안 되는 듯 여겨도 결국 장애물인 것은 부정 못한다. 우리는 갖가지 이유들로 해서 가장 깊고 높은 생명으로 충만된 예배를 드릴 수 없다. 그 이유는 우리 삶의 여행이 소경과 절름발이 같은 자세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많은 측면에서 빈약하다. 그렇다 해도 우리가 진리와 선을 원리로 채택하여 그 안에 굳게 서있는다면 우리 주님의 살을 먹고, 우리 주님의 피를 영적으로 언제나 마실 수 있다.
셋째로, 주님을 인내로 기다리는 우리 몫을 해나가노라면 우리 결함이 어떤 것이든 주님께서는 제거해 주시어 깨끗해져 거룩해질 수 있다. “악한 자는 망하게 마련이요, 여호와를 기다리는 자 땅을 물려받으리라” (시편 37:9).
********************************************************

레위기 22장

성경: 레위기 1장
1. 그리고 주님께서 모세에게 이야기 하셨다, 말하시기를.
2. 아론과 그의 아들들에게 이야기하라, 그들은 이스라엘의 후손들이 나를 거룩히 받드는 것, 즉 그들의 거룩한 것들로부터 그들 자신들을 분리하여, 그들이 내 거룩한 이름을 모독하지 않게 하라. 나는 주이다.
3. 그들에게 말하라, 자손 대대로 너의 씨로부터 있는 자는 누구든지 이스라엘의 자손들이 주님에게 바친 것, 즉 거룩한 것들에 접근하는데, 그의 불결함을 가지고 있으면, 그 혼은 내 앞에서 잘리운다. 나는 주이다.
4. 아론의 씨로부터 있는 자가 나병이나 유출을 가지고 있을 경우, 그가 깨끗해질 때까지 그는 거룩한 것들을 먹지 못한다. 그리고 죽은 자로 인해 불결한 어떤 것에 닿은 자, 또는 자기의 씨가 자기로부터 나간 사람.
5. 또는 자기를 불결하게 만들런지 모르는 어떤 기는 것을 만진자는 누구든지, 또는 지니고 있는 불결함이 무엇이든 불결함을 가지고 있을런지 모르는 사람과 접촉한 자,
6. 이렇게 접촉한 혼은 저녁까지 불결하다, 그리고 그가 물로 자기 살을 목욕하지 않으면 거룩한 것을 먹지 못한다.
7. 그리고 태양이 질 때, 그는 깨끗해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후에 그는 거룩한 것들을 먹을 것이다, 그 이유는 이것이 그의 빵이기 때문이다.
8. 저절로 죽은 것, 또는 짐승들로부터 찢기운 것은 그것과 함께 자신을 더럽게 하는 바 그는 먹지 말라. 나는 주이다.
9. 그러므로 그들은 내 명령을 지켜서, 그들이 그것 때문에 죄짓지 않도록 하라, 그리고 만일 그들이 그것을 모독하면 그 때문에 죽을 것이다. 나는 그들을 정화하는 주이다.
10. 낯선 자는 거룩한 것을 먹지 못한다. 성직자의 체류자나 고용된 종도 거룩한 것을 먹지 못한다.
11. 그러나 만일 성직자가 어떤 혼을 산다면, 자기 돈으로 구매하면, 그는 그것을 먹을 것이다. 그리고 성직자의 집에서 출생된 자도 그러한 바, 그들은 그의 빵을 먹을 것이다.
12. 그리고 만일 성직자의 딸이 낯선 자에게 시집간다면, 그녀는 거룩한 것에서 들어올린 제물을 먹지 못한다.
13. 그러나 만일 성직자의 딸이 과부이다면, 또는 이혼했다면, 그리고 아이가 없다면, 그리고 자기 아버지의 집으로 되돌아와 어린 시절 같이 있다면, 그녀는 그녀의 아버지의 빵을 먹을 것이다. 그러나 낯선 자는 그것으로부터의 것을 먹지 못한다.
14. 그리고 만일 사람이 모르고 거룩한 것을 먹었다면, 그다음 그는 그것에 오분의 일을 (더하여) 놓을 것이다, 그리고 성직자에게 거룩한 것을 주어라.
15. 그리고 그들은 이스라엘의 자손들이 주님에게 바친 거룩한 것들을 모독하지 말라.
16. 그들이 자기들의 거룩한 것들을 먹을 때, 죄가 있음을 가져오는 불법을 그들로 하여금 낳게 하는 원인이 된다. 나는 그들을 정화하는 주이다.
17. 그리고 주님께서 모세에게 이야기하셨다, 말하시기를,
18. 아론에게, 그리고 그의 아들들에게, 그리고 이스라엘의 모든 자손들에게 이야기하라, 그리고 그들에게 말하기를, 이스라엘의 가문으로부터이든, 이스라엘에 있는 낯선 자이든 누구든지, 자기 봉헌물을 바칠 경우, 그것이 자기들의 서원들로부터의 어떤 것이든지, 또는 자발적인 바침이든지, 이것을 그들이 태워 바침으로 주님께 바칠 경우,
19. 너희는 받아지도록 소들(beeves)이나 양들이나 염소들로부터 흠이 없는 수컷을 바쳐라.
20. 그러나 흠이 있는 것은 무엇이든, 너희는 바치지 말라, 그것은 너를 위해 받아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21. 그리고 누구든지 서약을 성취하기 위해, 또는 자발적으로 바치고 싶어서이든, 주님에게 평화 제물의 희생 제물을 바칠 경우, 그것은 소떼나 양떼로부터 이다. 그것이 받아지기 위해서는 온전해야 할 것이다. 거기에 흠이 없어야 한다.
22. 눈먼 것, 부러진 것, 또는 절뚝거리는 것, 또는 혹(wen)달린 것, 또는 비듬투성이(scurvy), 또는 딱지(scabbed) 있는 것, 이런 것들을 너희는 주님에게 바치지 말 것, 그것들을 주님에게 제단 위에서 불로 바치지 말라.
23. 너무 길거나 너무 짧은 몸 부위를 가진 수소나 어린 양은 너희 자발적 바침을 위해서는 바쳐도 좋다. 그러나 서약을 위해서는 그것은 받아지지 않는다.
24. 불알이 타박상을 입은 것, 으스러진 것, 또는 깨진 것, 또는 잘라진 것의 경우, 너희는 주님께 바치지 못한다. (고로) 너희는 너희 토지에서 (이것을) 행치 말 라.
25. 낯선 자의 손으로부터 이런 것들 중의 어떤 것을 너희는 너희 하느님의 빵으로 바치지 말 라. 그 이유는 그들의 부패함이 그것 안에 있기 때문, 그것들에 흠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너희를 위하여 받아지지 않을 것이다.
26. 그리고 주님께서 모세에게 이야기하셨다, 말하시기를,
27. 수소, 또는 양, 또는 염소가 산출될 때, 그 다음 그것은 칠 일 동안 어미 아래 있을 것이다. 그리고 팔 일째로부터 그리고 그 이후 그것은 주님에게 불로 만드는 제물의 봉헌물로 받아질 것이다.
28. 그리고 그것이 암소나 암양이든지 너희는 그것과 그것의 새끼를 같은 날에 죽이지 말라.
29. 그리고 너희가 주님에게 감사함의 희생제물을 바칠 때, 너희는 받으실 수 있는 것을 바쳐야 한다.
30. 같은 날에 그것은 먹어질 것이다. 너희는 아침까지 그것의 어떤 것도 남겨두지 말라. 나는 주이다
31. 그러므로 너희는 내 명령들을 지켜라, 그리고 그것들을 행하라. 나는 주이다.
32. 그리고 너희는 내 거룩한 이름을 모독하지 말라. 그러나 나는 이스라엘의 자손들 사이에서 거룩하다고 존대를 받아야 할 것이다. 나는 너희를 거룩하게 하는 주이다.
33. 너희 하느님이 되기 위해 너를 이집트의 토지로부터 데려 왔다. 나는 주이다.

영적 의미 요약

* 선 가운데, 그리고 그 선에서 파생된 진리 가운데 있는 사람들에 대한 가르침, 여러 가지 불순함들로 해서 더럽혀질 때 그들은 주님을 인정할 수 없고 예배할 수도 없다. 따라서 모독하는 죄를 범하지 않아야 할 것이다, 1-9절.
* 선을 자기 것이 되게 할 수 있는 품질을 갖추지 못한 이들에 관하여, 모독이 있지 않도록 해야 하리라, 10-16절.
* 선으로부터의 모든 예배는 진리를 수단으로 완전해져야 한다. 어떤 악이나 거짓 때문에 불완전한 예배는 열납될 수 없다, 17-25절.
* 주님을 예배하는데 모독을 피하기 위한 세부 사항들이 더 추가된다, 26-33절.

각 절의 영적 의미

1절. 그리고 주님께서 모세에게 이야기 하셨다, 말하시기를.

영적 의미

지각을 주시는 신성한 진리를 수단으로 주님께서 밝히 알게 하신다.

세부적 영적 의미

여호와란 사랑 측면에서의 신성한 존재를; 이야기하심은 유입을; 모세는 신성한 진리 또는 말씀을; 말하심은 지각을 말한다. (2001, 2951, 7010, 1791, 1822)

2절. 아론과 그의 아들들에게 이야기하라, 그들은 이스라엘의 후손들이 나를 거룩히 받드는 것, 즉 그들의 거룩한 것들로부터 그들 자신들을 분리하여, 그들이 내 거룩한 이름을 모독하지 않게 하라. 나는 주이다.

영적 의미

천적이거나 영적인 선 가운데 있는 이들에게 가르침이 주어진다. 불순할 경우 그들은 주님을 예배함과 영적 교회 사람의 성직 임무에서 분리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모독이 있지 않도록 하라. 그 이유는 천적, 영적 선과 진리는 신성한 선을 표현한 것이기 때문이다.

세부적 영적 의미

아론과 그의 아들들에게 이야기하심이란 천적, 영적 선 가운데 있는 이들에게 가르치심을; 이스라엘의 자손들의 거룩한 것들로부터 그들 자신들을 분리함이란 그들은 주님을 예배함에서 분리될 수밖에 없음을; 또한 주님을 예배하는 성직 임무에서 분리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그 이유는 모든 진정한 예배는 선을 수단으로 결과되고, 아론과 그의 아들은 성직자들로서 표현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나를 거룩히 받드는 것”란 위의 예배, 성직 임무는 거룩하다는 것을; “나의 거룩한 이름을 모독하지 않게 하라”란 신성한 선과 진리는 자신들 안에 있는 천적, 영적인 선과 진리를 더럽힘으로 모독된다는 것을; “나는 주”란 천적, 영적인 선과 진리는 신성한 선으로부터 존재함을 뜻한다. (2951, 7010, 9946, 9903, 2776, 9946, 8882, 2001)

3절. 그들에게 말하라, 자손 대대로 너의 씨로부터 있는 자는 누구든지 이스라엘의 자손들이 주님에게 바친 것, 즉 거룩한 것들에 접근하는데, 그의 불결함을 가지고 있으면, 그 혼은 내 앞에서 잘리운다. 나는 주이다.

영적 의미

그런고로 천적 인간과 영적 인간이 지각하는 바, 누구든지 모든 선과 진리, 거룩함이 그분으로부터라고 인정함으로 해서 순수한 예배 안에서 주님께 접근 될 것인데, 그럼에도 이기적 동기로부터 주님께 접근을 한다면 선과 진리에서 분리되는데, 그 이유는 그 근원이 주님이시기 때문이다.

세부적 영적 의미

그들에게 말하라란 그러므로 천적 인간과 영적 인간은 지각함을; 너희 후손 대대로 이스라엘 백성이 여호와께 바치는 거룩한 제물을 가까이 하는 자란 순수한 예배 안에서 주님께 접근하는 사람은 누구든지를; 이 예배는 제물을 바침으로 표현되고 있고 “주님의 거룩한 것들”이란 모든 선과 진리, 거룩함은 그분으로부터 존재함을 인정하는 것까지 포함된다. 불결함이 있는 자란 이기적 동기가 혼합되어 모독함을, 주님 앞에서 잘리움이란 선과 진리에서 분리되고, 따라서 주님에게서도 분리됨을; “나는 주”란 주님이 모든 선의 근원임을 뜻한다. (9946, 10249, 2776, 9903, 349, 5619, 868, 8882, 10130, 5302, 223, 2001)

4절. 아론의 씨로부터 있는 자가 나병이나 유출을 가지고 있을 경우, 그가 깨끗해질 때까지 그는 거룩한 것들을 먹지 못한다. 그리고 죽은 자로 인해 불결한 어떤 것에 닿은 자, 또는 자기의 씨가 자기로부터 나간 사람.

영적 의미

선으로부터의 애착을 지녔는데, 외적 이든, 내적 이든 진리를 모독하는 사람은 그가 예배에서 이기적 동기로부터 행동하기를 멈출 때까지 선을 자기 것이 되게 할 수 없다. 이는 아래에 열거되는 것에 아주 경미하게 접촉해도 마찬가지인 바, 즉 영적 생명이 없는 표면적 행사에 불과한 예배, 또는 선에서 분리된 진리의 애착으로 드리는 예배,

세부적 영적 의미

아론의 후손은 누구를 막론하고 나병자든 유출을 가진 자든 이란 진리를 외적, 내적으로 모독하는 사람을, 그 이유는 그가 선으로부터 나오는 애착 안에 있기 때문이다. 깨끗해지게 되기 전에는 거룩한 음식을 먹지 말라란 예배에서 이기적 동기로 행동하는 것을 중단할 때까지 선을 자기 것을 삼을 수 없다는 것을; 죽은 자로 해서 어떤 불결한 것에 닿은 사람이란 영적 생명이 없는 오로지 예식뿐인 예배에 아주 경미하게 접촉함을; 씨가 나간 자(정액을 흘린 사람)이란 선에서 분리된 진리의 애착으로 예배함을 뜻한다. (6963, 10283, 10130, 10249, 9946, 2187, 4545, 10130, 5407, 880, 1798, 4837)

5절. 또는 자기를 불결하게 만들런지 모르는 어떤 기는 것을 만진 자는 누구든지, 또는 지니고 있는 불결함이 무엇이든 불결함을 가지고 있을런지 모르는 사람과 접촉한 자,

영적 의미

또는 불순함의 원인인 감각적일 뿐인 기쁨, 또는 종류가 어떠하든 불순해지게 되는 여하한 악들,

세부적 영적 의미

기는 것을 만진 자란 단지 감각적 기쁨 뿐인 불순한 것과 접촉함을, 어떤 종류의 불결 이든 불결한 사람과 접촉한 자란 종류 여하를 막론하고 불순해지려는 어떤 악들을 뜻한다. (10130, 746, 7424, 10130)

6절. 이렇게 접촉한 혼은 저녁까지 불결하다, 그리고 그가 물로 자기 살을 목욕하지 않으면 거룩한 것을 먹지 못한다.

영적 의미

위와 같은 행동은 상태의 변화가 있을 때까지 불순해 있게 한다. 그래서 그는 회개함에서 진리로 깨끗해질 때까지 선을 자기 것으로 삼을 수 없다.

세부적 영적 의미

불결한 것에 닿은 사람은 저녁 때까지 불결하다란 위 같은 행동은 인간의 상태가 변할 때까지 불순하게 한다는 것을, 목욕을 할 때까지는 거룩한 음식을 먹지 못함이란 회개 함 속에서 진리로 깨끗해질 때까지 선을 자기 것 삼을 수 없음을 뜻한다. (10130, 7844, 2187, 2776, 3147)

7절. 그리고 태양이 질 때, 그는 깨끗해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후에 그는 거룩한 것들을 먹을 것이다, 그 이유는 이것이 그의 빵이기 때문이다.

영적 의미

그러나 이기적 사랑을 거절함으로 위 상태가 죽어질 때 그 사람은 깨끗하다. 그러면 선을 자기 것으로 삼을 것이다. 그 이유는 그것이 그의 통치하는 기쁨이요 그의 영적 삶을 지탱하게 해 주기 때문이다.

세부적 영적 의미

해가 질 때 깨끗하게 된다란 이기적 사랑을 거절함으로 상태가 지나갈 때 그 사람은 깨끗해진다는 것을, 그 다음에야 자기 양식인 거룩한 음식을 먹는다란 그의 통치하는 기쁨이 선이기 때문에 선을 자기 것으로 삼게 될 것이고, 그 선만이 그의 영적 생명을 받쳐 줄 수 있다는 뜻이다. (8615, 8487, 4545, 2187, 2776, 2105)

8절. 저절로 죽은 것, 또는 짐승들로부터 찢기운 것은 그것과 함께 자신을 더럽게 하는 바, 그는 먹지 말라. 나는 주이다.

영적 의미

그러나 자연적일 뿐인 선, 다시 말해 무의식중에 악과 혼합된 선은 자기 것이 되게 못한다. 그 이유는 그것이 그를 불순하게 하기 때문인 바 그의 선은 주님으로부터서만 있어야 하리라.

세부적 영적 의미

자연사한 짐승이나 찢겨 죽은 짐승은 불결하게 하는 바 먹지 말라란 그는 단지 자연적일 뿐인 선은 자기 것 삼지 않아야 한다는 것, 또는 무의식적으로 악과 혼합되어지는 자연적인 선을 자기 것 삼지 않아야 하는데 그 이유는 그 선이 그를 불순하게 해주기 때문이다. “나는 주”란 그의 선은 오로지 주님으로부터만 있다는 것을 뜻한다. (2187, 4171, 10130, 2001)

9절. 그러므로 그들은 내 명령을 지켜서, 그들이 그것 때문에 죄짓지 않도록 하라, 그리고 만일 그들이 그것을 모독하면 그 때문에 죽을 것이다. 나는 그들을 정화하는 주이다.

영적 의미

그러므로 교인들은 내적 선과 진리가 외적인 것과 결합해 있음으로 예배하되 자신이 악 속으로 붕괴되지 않도록 하라. 모독은 그를 황폐케 하고야 만다. 그 이유는 주님으로부터 온 선만이 인간을 거룩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세부적 영적 의미

주님의 명령을 지킴이란 교인은 외적인 것과 결합된 내적 선과 진리로 예배해야 함을; 그대로 지켜 죄를 낳지 않도록이란 그가 악 쪽으로 붕괴되지 않기 위해서임을; 죽으리라란 황폐됨 또는 모든 선과 진리가 박탈됨을; 그들이 그것을 모독한다면이란 모독 때문임을; “나는 그들을 정화하는 주”란 주님 만으로부터 오는 선만이 인간을 깨끗하게 함을 뜻한다. (3382, 9156, 9937, 2908, 2001, 8042)

10절. 낯선 자는 거룩한 것을 먹지 못한다. 성직자의 체류자나 고용된 종도 거룩한 것을 먹지 못한다.

영적 의미

교회 밖의 사람은 거룩한 선을 자기 것으로 삼는 것, 단지 자연적 수준일 뿐인 사람이 그렇게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교회 내라도 자연적 수준의 지식 속에 있는 사람, 또는 뭔가를 얻고자 올바른 것을 행하는 사람도 선을 자기 것으로 삼을 수 없다.

세부적 영적 의미

낯선 자는 거룩한 음식을 먹지 못한다란 교회 밖의 사람은 거룩한 선을 자기 것 삼지 못함을; 이를 다른 말로 표현하면, 자연적일 뿐인 사람은 거룩한 선을 자기 것 삼지 못함을; 성직자를 찾아온 사람(체류자)이나 그의 고용된 종도 거룩한 음식을 먹지 못함이란 자연적 지식으로 교회 내에 있는 사람과 이득을 위해 의를 행하는 사람은 거룩한 선을 자기 것으로 삼을 수 없다는 뜻이다. (4544, 8002)

11절. 그러나 만일 성직자가 어떤 혼을 산다면, 자기 돈으로 구매하면, 그는 그것을 먹을 것이다. 그리고 성직자의 집에서 출생된 자도 그러한 바, 그들은 그의 빵을 먹을 것이다.

영적 의미

그러나 진리에 순종하는 선한 생활을 수단으로 죄로부터 구속되어진다면 선을 자기 것으로 삼을 수 있다. 내적으로 선 가운데 있는 사람은 외적으로 있는 선을 자기 것으로 삼을 수 있으리라.

세부적 영적 의미

성직자가 사들인 혼, 성직자의 집에서 태어난 혼이란 진리에 순종함으로 선한 생활을 하여 죄에서 구속되는 사람과 내적으로 선 가운데 있는 사람을, 그들이 빵을 먹을 수 있다란 자기 것으로 삼음을 뜻한다. (5374, 9946, 1708, 2187, 2165)

12절. 그리고 만일 성직자의 딸이 낯선 자에게 시집간다면, 그녀는 거룩한 것에서 들어올린 제물을 먹지 못한다.

영적 의미

만일 누가 내적으로 주님으로부터 파생된 선에 대한 애착 가운데 있는 데도 이기적 사랑 속의 악을 그 애착에 결합시켜 모독한다면 그 애착이 주님으로부터 임을 지각하는 선을 자기 것으로 삼는 것은 불가능하다.

세부적 영적 의미

낯선 자와 결혼한 성직자의 딸은 거룩한 양식으로 들어 올린 제물을 먹지 못한다란 만일 누가 내적으로 주님에게서 오는 선의 애착 안에 있으면서도 이기적 사랑의 악을 그 애착과 결합시킴으로 그 애착을 모독한다면, 주님으로부터 있게 됨이 지각되는 천적 선을 자기 것으로 삼는 것은 불가능하다. (3703-15, 9946, 2173, 4544, 2187, 10093)

13절. 그러나 만일 성직자의 딸이 과부이다면, 또는 이혼했다면, 그리고 아이가 없다면, 그리고 자기 아버지의 집으로 되돌아와 어린 시절 같이 있다면, 그녀는 그녀의 아버지의 빵을 먹을 것이다. 그러나 낯선 자는 그것으로부터의 것을 먹지 못한다.

영적 의미

누가 선한 애착을 가지고 있되 진리 또는 선이 없이 비생산적인데도 선과 내적 연관을 지니고 있어 마치 거듭나는 초기 같다면 그 선을 자기 것으로 삼을 수 있을는지 모른다. 그러나 자연적일 뿐인 애착은 자기 것으로 삼을 수 없다.

세부적 영적 의미

성직자의 딸이란 선의 애착 가운데 있는 사람을, 과부 또는 이혼함이란 진리 또는 선이 없음을; 자식이 없다란 진리 또는 선이 생산되지 않음을; 아버지의 집으로 되돌아옴이란 서로가 내적으로 연합됨을; 어렸을 때와 같이란 거듭나는 시작 때와 같이를; 제 아버지의 빵을 먹는다란 아직 선이 자기 것 될 수 있음을; 낯선 자는 먹지 못함이란 자연적일 뿐인 애착은 선을 자기 것으로 삼을 수 없음을 뜻한다. (3703-15, 4844-16, 489, 3703-15, 3183, 4544, 2187)

14절. 그리고 만일 사람이 모르고 거룩한 것을 먹었다면, 그 다음 그는 그것에 오분의 일을 (더하여) 놓을 것이다, 그리고 성직자에게 거룩한 것을 주어라.

영적 의미

누가 무지해 가지고, 또는 부주의해서 거룩한 선을 모독했다면 그는 제 스스로 자기에게 선이 남아 있는 게 없다는 것, 주님으로부터 받아야 함을 인정함으로 원상 회복해야 한다.

세부적 영적 의미

사람이 모르고 거룩한 것을 먹을 경우란 누가 몰라 가지고 또는 부주의해서 거룩한 선을 모독하는 경우를; 거룩한 음식의 오 분의 일을 더 보탠다란 제 스스로는 남아 있을 선이 없음을 인정함으로 원상 복귀해야만 함을; 성직자에게 거룩한 음식을 줌이란 그가 주님으로부터 선을 받음을 뜻한다. (9156, 10042 II, 2187, 2776, 9946, 10227, 2776)

15절. 그리고 그들은 이스라엘의 자손들이 주님에게 바친 거룩한 것들을 모독하지 말라.

영적 의미

선 가운데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도 자기 속의 선이 모두 주님의 것인데 자기 것이라고 우겨 그 선을 모독해서는 안 된다.

세부적 영적 의미

이스라엘 자손이 주님께 바친 거룩한 것들을 모독하지 말라란 선 가운데 있는 사람은 누구나 주님께 모두 되돌려야 할 것들을 자기 공적인냥 치부하여 모독해서는 안 됨을 뜻한다. (8882, 2776, 9946)

16절. 그들이 자기들의 거룩한 것들을 먹을 때, 죄가 있음을 가져오는 불법을 그들로 하여금 낳게 하는 원인이 된다. 나는 그들을 정화하는 주이다.

영적 의미

그렇게 행하면 그는 책임져야 할 악한 상태에 자신을 가져다 놓게 된다. 그러면 그가 선을 받는데 손상을 입는다. 그러므로 진실로 인정해야 하는 것은 자신을 거룩하게 하는 모든 선은 주님으로부터 이다는 것이다.

세부적 영적 의미

그들로 해서 죄를 가져오는 불법을 낳게 한다는 것은 그렇게 행함으로 책임져야 하는 악한 상태에 자신이 있게 한다는 것을; 그들이 거룩한 음식을 먹을 경우란 위 경우에 선이 손상을 입음을; “나는 그들을 정화하는 주이다”란 인간을 거룩하게 하는 모든 선은 주님으로부터임을 진정으로 인정해야만 한다는 것을 뜻한다. (9937, 2187, 2776, 2001, 8042)

17절. 그리고 주님께서 모세에게 이야기하셨다, 말하시기를,

영적 의미

더 나아가 지각을 주시는 신성한 진리를 수단으로 주님께서 밝히 알게 하신다.

세부적 영적 의미

여호와란 사랑 측면에서의 신성한 존재를; 말씀하심이란 유입을; 모세란 신성한 진리 또는 말씀을; 말하심이란 지각을 뜻한다. (2001, 2951, 1791, 1822)

18절. 아론에게, 그리고 그의 아들들에게, 그리고 이스라엘의 모든 자손들에게 이야기하라, 그리고 그들에게 말하기를, 이스라엘의 가문으로부터 이든, 이스라엘에 있는 낯선 자 이든 누구든지, 자기 봉헌물을 바칠 경우, 그것이 자기들의 서원들로부터의 어떤 것 이든지, 또는 자발적인 바침 이든지, 이것을 그들이 태워 바침으로 주님께 바칠 경우,

영적 의미

천적, 영적, 자연적 선 가운데 있는 이들, 그가 내적, 외적 교회 어디에 속해 있든 모든 이 각자가 자유 가운데 주님을 예배하되 그 목적이 악을 제거하기 위해서, 은택의 느낌을 가져서, 주님께 전적으로 자신을 헌신하고 싶은 바램을 내향으로 가지고 있다면,

세부적 영적 의미

아론과 그의 아들, 이스라엘 모든 백성에게 이야기하심이란 천적, 영적, 자연적 선 가운데 있는 이들에 대한 가르침 임을; 이스라엘 가문에 속한 사람과 그들에게 붙어 사는 낯선 자란 내적 교회와 외적 교회에 속한 이들을; 봉헌물을 바침이란 주님을 예배함을; 마음에 우러나서 드리거나 서약을 위해서란 은택에 감사해서든지 악을 제거하기 위해서이든지 자유로움으로부터 예배함을; 태워 바침으로 드림이란 주님께 완전히 헌신함을 뜻한다. (9946, 4286, 3654, 7908, 923, 3880, 10053)

19절. 너희는 받아지도록 소들(beeves)이나 양들이나 염소들로부터 흠이 없는 수컷을 바쳐라.

영적 의미

그의 예배를 주님이 받으실 수 있게 하려면 이기적이거나 세상적 동기가 전혀 없어야 한다. 이는 자연적 선의 수준 이든, 영적 선의 수준 이든, 신앙의 선 이든 모두 해당된다.

세부적 영적 의미

흠 없는 수컷이란 진리를 수단으로 선으로부터 예배함, 그리고 이기적, 세상적 동기가 없이 예배함을, 소나 양이나 염소 가운데서란 자연적 선으로부터, 영적 선으로부터, 신앙의 선으로부터를; “그분이 받으신다”란 주님이 받을 수 있는 것을 뜻한다. (725, 7837, 2180, 2088, 4169, 9506)

20절. 그러나 흠이 있는 것은 무엇이든, 너희는 바치지 말라, 그것은 너를 위해 받아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영적 의미

따라서 그 예배가 이기심 또는 세상욕으로 오염되어 있다면 받으실 수 없다.

세부적 영적 의미

흠 있는 것을 바치지 말라, 그리고 그것은 받아지지 않음이란 예배가 이기심과 세상 욕으로 더러워진다면 받아질 수 없음을 뜻한다. (7837, 9506)

21절. 그리고 누구든지 서약을 성취하기 위해, 또는 자발적으로 바치고 싶어서 이든, 주님에게 평화 제물의 희생 제물을 바칠 경우, 그것은 소떼나 양떼로부터 이다. 그것이 받아지기 위해서는 온전해야 할 것이다. 거기에 흠이 없어야 한다.

영적 의미

그리고 그가 자유함에서 주님을 예배하여 외적 인간이 내적 인간과, 의지와 이해함 양쪽에서 하모니를 이루거나, 또는 사랑과 신성한 섭리에의 복종이 자연적 애착 수준이나 영적 애착 수준에서 있어져 예배한다면 이 예배는 완전할 것이다. 그리고 이기적이거나 세상적 동기가 혼합되어서는 안 된다.

세부적 영적 의미

주님께 평화 제물을 바친다는 것은 자유로부터 예배함을; 서약을 성취하기 위해서든가 마음에 우러나서 바치든지란 의지와 이해함의 양 측면에서 외적 인간이 내적 인간과 조화를 이루도록, 또는 자연적 애착 측면과 영적 측면에 관한 신성한 섭리에 복종함으로부터 또는 사랑으로부터임을; 흠이 없음이란 이 예배는 완전해야 하는 것, 그리고 이기적이고 세상적 동기가 어떤 혼합도 없어야 함을 뜻한다. (10097, 3880, 5913, 6126, 7837, 9506)

22절. 눈먼 것, 부러진 것, 또는 절뚝거리는 것, 또는 혹(wen)달린 것, 또는 비듬투성이(scurvy), 또는 딱지(scabbed) 있는 것, 이런 것들을 너희는 주님에게 바치지 말 것, 그것들을 주님에게 제단 위에서 불로 바치지 말라.

영적 의미

주님을 예배함은 무지로부터, 이해함이나 의지 속의 불완전한 애착으로부터, 또는 감각적, 세상적, 이기적인 결함들로 부패된 자연적 애착으로부터 있어져서는 안 된다. 그 이유는 이런 것들이 주님께 봉헌될 수 없는 인간을 섬기는데 만 소용이 닿기 때문이다.

세부적 영적 의미

눈먼 것이나 뼈가 부러진 것, 절뚝거리는 것이나 혹 달린 것, 비듬투성이, 딱지 있는 것이란 의지 속의 불완전한 애착으로부터, 세상적, 이기적, 감각적인 것으로 부패된 자연적 애착으로부터의 예배를; 이것들을 주님께 바치지 못하고 주님께 바치려고 제단에서 태워 바치지도 못한다란 이런 애착들은 주님께 전적으로 봉헌되어질 수 없고, 인간을 섬기는데 만 바칠 수 있을 뿐임을 뜻한다. (2383, 9163, 210, 4302, 7524, 제 21장 18-20절, 923, 10053, 10055)

23절. 너무 길거나 너무 짧은 몸 부위를 가진 수소나 어린 양은 너희 자발적 바침을 위해서는 바쳐도 좋다. 그러나 서약을 위해서는 그것은 받아지지 않는다.

영적 의미

그러나 비록 불완전하다 해도 순진에 바탕을 둔 외적, 또는 내적 애착은 자유로이 예배될 때 주님께 바칠 수 있다. 그러나 의지와 이해함 모두를 수단으로 확증되었다면 위의 예배는 받아질 수 없다.

세부적 영적 의미

수소나 어린 양 가운데 한 다리는 길고 한 다리는 오그라진 것을 마음에 우러나 바치는 제물로 삼을 수 있다란 순진에 바탕을 둔 외적 또는 내적 애착들은 비록 불완전해도 그의 예배 드림이 마음에 우러난 경우라면 주님께 바칠 수도 있다는 것을; 서약을 위해서는 위의 짐승을 바칠 수 없다란 불완전함이 이해함과 의지 모두에서 확증되어 있다면 위의 예배는 받아질 수 없음을 뜻한다. (10021, 10132, 10109, 581, 583, 673-3, 21장 18절, 10097, 3880, 9506)

24절. 불알이 타박상을 입은 것, 으스러진 것, 또는 깨진 것, 또는 잘라진 것의 경우, 너희는 주님께 바치지 못한다. (고로) 너희는 너희 토지에서 (이것을) 행치 말라.

영적 의미

사랑과 지혜, 선함과 진리, 선행과 신앙, 또는 애착과 총명의 천국적 결혼을 위반함을 통해 내적, 외적으로 거룩치 못하다거나 불순해 있는 애착은 내적이든 외적이든 주님을 예배함에 봉헌될 수 없다.

세부적 영적 의미

불알이 타박상을 입은 것, 으스러진 것, 깨진 것, 잘라진 짐승이란 사랑과 지혜, 선함과 진리, 선행과 신앙, 또는 애착과 총명이라는 천국 결혼을 위반하여 내적, 외적으로 불순하여 거룩치 않은 것을; 너희 땅에서 그런 것을 바치는 일이 없어야 한다란 위의 애착은 내적으로나 외적으로나 주님을 예배하는데 봉헌될 수 없다는 뜻이다. (10303, 431, 2173, 5053, 5060, 9163, 9056, 2799-23, 923, 683)

25절. 낯선 자의 손으로부터 이런 것들 중의 어떤 것을 너희는 너희 하느님의 빵으로 바치지 말라. 그 이유는 그들의 부패함이 그것 안에 있기 때문, 그것들에 흠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너희를 위하여 받아지지 않을 것이다.

영적 의미

어떤 종류이든 자연적일 뿐인 사랑의 힘으로 주님의 진정한 예배를 증진시키려 들지 말라. 그것들은 느낌과 생각에서 불순하기 때문이요 주님과 결합할 수 없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세부적 영적 의미

위의 불구나 병신을 낯선 자의 손에서 받아 너희 하느님의 빵으로 바치지 말라란 주님을 진정으로 예배함을 증진시키는데 어떤 종류의 자연적 사랑 만에서 나오는 힘을 사용하지 말라를; 부패함이 그들 안에, 흠이 그들 안에 있어 열납되지 않는다란 그것들을 주님께 드릴 수 없고 결합되게 할 수도 없다는 뜻이다. (4544, 878, 2165, 923, 10420, 7837, 6832, 9506)

26절. 그리고 주님께서 모세에게 이야기하셨다, 말하시기를,

영적 의미

지각을 주시는 신성한 진리로 주님께서 더 밝히 알게 하신다.

세부적 영적 의미

주님(여호와)란 사랑 측면의 신성한 존재를; 이야기하심은 유입을; 모세는 신성한 진리 또는 말씀을; 말하심은 지각을 말한다. (2001, 2951, 7010, 1791, 1822)

27절. 수소, 또는 양, 또는 염소가 산출될 때, 그 다음 그것은 칠 일 동안 어미 아래 있을 것이다. 그리고 팔 일째로부터 그리고 그 이후 그것은 주님에게 불로 만드는 제물의 봉헌물로 받아질 것이다.

영적 의미

시초가 되는 자연적 애착, 영적 애착, 또는 진리의 애착들은 교회 안에서 선을 원리로 작동됨을 통하여 깨끗해져야 한다. 그러면 그 뒤에 오는 새 상태에서 순수한 영적 예배로 주님을 섬기는 가운데 바쳐지게 될 것이다.

세부적 영적 의미

수소나 양이나 염소가 산출됨이란 초기에 해당되는 자연적 애착 또는 영적 애착 또는 진리의 애착을; 제 어미 품에 칠 일 동안 있음이란 교회 안에서 선을 원리로 작동되어 깨끗해지는 것을; 팔 일 째 되는 날로부터 주님께 태워 바치면 받아진다란 뒤이어 오는 새로운 상태에서 순수하고 영적인 예배로 주님을 섬기는데 바쳐짐을 뜻한다. (2180, 2088, 4169, 264, 창세기 1장, 716, 289, 290, 2044, 923, 10055)

28절. 그리고 그것이 암소나 암양이든지 너희는 그것과 그것의 새끼를 같은 날에 죽이지 말라.

영적 의미

자연적 인간 또는 영적 인간 안에 있는 선은 이전의 선과 이후의 선이 뒤섞이게 해서는 안 된다. 새 영적 삶의 상태가 이전의 상태를 계승해가기만 해야 한다.

세부적 영적 의미

같은 날에 암소나 암양(ewe)을 새끼와 함께 죽이지 말라란 자연적 인간 안에 선이 있든, 영적 인간 안에 선이 있든 전자의 선이 후자의 선과 혼합되어서는 안 됨을, 오직 영적 삶의 상태는 이전 상태를 계승해야만 함을 뜻한다. (2180, 2088, 10024, 487, 2866)

29절. 그리고 너희가 주님에게 감사함의 희생제물을 바칠 때, 너희는 받으실 수 있는 것을 바쳐야 한다.

영적 의미

은택의 영으로부터 주님을 자유로이 예배하면 외적 인간과 내적 인간의 결합이 있게 된다.

세부적 영적 의미

감사함의 희생제물을 바치되 그분이 받으실 수 있는 것을 바치라란 은택의 고마움으로 마음에 우러나 주님을 예배하는 가운데 내적 인간과 외적 인간의 결합이 있을 것임을 말한다. (3880, 9506, 10042 II, 제 1장 3,4절)

30절. 같은 날에 그것은 먹어질 것이다. 너희는 아침까지 그것의 어떤 것도 남겨두지 말라. 나는 주이다

영적 의미

그 결합에서 선을 자기 것으로 삼음은 준비되는 상태 안에만 있게 되는 바, 어떤 이기적인 동기, 세상적 동기가 그것을 썩게 하지 말라. 그 이유는 순수한 애착들을 주님의 것으로 돌려야 하는데 그것들은 주님으로부터 근원 되었기 때문이다.

세부적 영적 의미

같은 날 먹는다란 선을 자기 것 삼음은 위 준비하는 상태에만 있을 수 있음을; 아침까지 남겨두지 못함이란 이기적 동기는 자기 것 삼은 선을 부패시킬 것임을; “나는 주”란 순수한 애착만이 주님께 돌려 드릴 수 있는데 그 이유는 그분으로부터 왔기 때문을 뜻한다. (2187, 487, 10114-7, 7860, 8480-3, 2001)

31절. 그러므로 너희는 내 명령들을 지켜라, 그리고 그것들을 행하라. 나는 주이다.

영적 의미

참으로 진정한 예배는 주님의 도움을 수단으로 신성한 계명들을 내적, 외적으로 순종함에서 있어진다.

세부적 영적 의미

주님의 명령을 지켜 행함이란 참으로 진정한 예배는 주님의 계명을 내적, 외적으로 순종함으로 있게 됨을, “나는 주”란 주님의 도우심으로 라는 뜻이다. (3382, 5755, 2001)

32절. 그리고 너희는 내 거룩한 이름을 모독하지 말라. 그러나 나는 이스라엘의 자손들 사이에서 거룩하다고 존대를 받아야 할 것이다. 나는 너희를 거룩하게 하는 주이다.

영적 의미

주님으로부터 오는 신성한 진리를 자기 것으로 돌리지 말라. 그럴 경우 모독이 있게 된다. 따라서 진정한 영적 인간은 내향으로, 외향으로도 거룩해야만 한다. 모든 거룩함은 주님으로부터 내적 인간을 통해 존재한다.

세부적 영적 의미

“내 거룩한 이름을 모독하지 말라”란 주님에게서 오는 신성한 진리를 자아의 것으로 삼지 말라를; “나는 이스라엘 자손 사이에서 거룩하다고 존대를 받아야 할 것이다”란 진정한 영적 인간은 내향과 외향의 양쪽에서 거룩해져야만 함을; “너희를 거룩하게 한 이는 나다”란 모든 거룩함은 주님으로부터 내적 인간을 통하여 있게 된다는 뜻이다. (8882, 2001, 3654, 4286, 2001, 1557)

33절. 너희 하느님이 되기 위해 너를 이집트의 토지로부터 데려 왔다. 나는 주이다.

영적 의미

신성한 진리를 받고 이 진리로 시험과 싸워감을 통해서 각자 속에 있는 특이한 악에서 실제 구원해 주시는 구속의 역사를 통해 신성한 진리는 인간과 교통된다. 그리하여 주님이 신성한 사랑이심을 분명히 인정할 수 있게 된다.

세부적 영적 의미

“너희의 하느님이 되기 위해 이집트 땅에서 너희를 이끌어 냈다”란 거룩함이 인간에게 교통되는 것은 악으로부터 실지 구원되는 구속의 일을 통해서인데, 이는 각 사람의 세부 측면에서 신성한 진리를 받고 이를 통해 시험과의 싸움에서 있어짐을; “나는 주”란 위와 같은 과정으로 해서 자신에게 드러나 명백해진 신성한 사랑이신 주님을 인정할 수 있게 된다는 뜻이다. (8866, 2001)

22장의 종합적 고찰

본 장을 다시 곰곰이 생각해 보는데 필요한 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바치는 거룩한 제물”이 영적으로 의미하는 것을 명백하게 알아두는 것이다. 이는 주님을 예배함, 그리고 이 예배의 성직 임무 수행을 뜻한다고 앞에서 살폈었다. 그러나 이스라엘 족에 의해 주님께 바쳐지는 것은 예배드리는 사람이 주님을 섬기는데 헌신하는 선한 애착, 그리고 이 애착이 주님으로부터 임을 인정하는 것을 실지로 표현한다. 그 이유가 모든 진정한 예배는 이런 헌신과 인정함으로 구성되기 때문이다. 그 다음 이런 예배를 집전하는 것은 진정으로 예배하는 외적 형체에 해당된다. 따라서 이런 선한 애착들이 수행하려 뜻하는 선용의 수행 속에서, 성소에서 주님을 예배하고 인정하는 가운데에서도 모두에 해당된다. 그런고로 성직자가 거룩한 제물을 함부로 다루면 안 된다는 말씀이 지닌 의미는 엄밀히 보면, 선용을 수행할 때 이든 공적 예배에 참석할 때 이든 이기적 동기 그 자체가 표현되는 것은 어떤 것이든 매우 조심스럽게 분리되고 거절되어야 한다는 것, 이는 성직 임무 수행에만 국한 되는 게 아니라 교인 전체에 해당된다. 따라서 이 가르침은 아주 무게 있는 가르침이다. 따라서 아주 심각하게 생각해 두어야 할 것이다. 우리가 수행하는 선용이나 예배에 이기적 동기를 혼합시킬 때 우리는 “불결해지게” 된다. 우리 모두 경험에서 알고 있는 바, 우리는 걸핏하면 이기적 생각이 말함이나 행동 속에 있어 곤경을 초래한다는 것이다. 또 하나 더 경험으로 인정하는 바, 우리가 이기적인 생각과 느낌을 탐익하여 허용할 때 우리는 진실로 신성한 현존으로부터 분리됨 또는 “추방된다”는 것이다.
예배 중인 사람이 그 예배로부터 거룩한 음식을 먹는 것, 즉 선과 진리를 자기 것으로 삼는 것을 방해하는 불순함에 관해 몇 가지 사항의 언급이 주어지고 있다. 나병자란 예배를 외적으로 이기적 용도에 응용하여 진리를 모독함을, 유출(고름)은 악한 애착에서 흘러나오는 악한 생각인데 본문과 연결해 말할 경우 선으로부터의 예배를 내적으로 모독함을, 죽은 시체에 닿아 불결함은 영적 생명이 결여된 애착, 사랑이 없음을, 그 사람으로부터 정액이 분출됨은 진리가 선에서 분리된 것을, 기는 짐승이란 단지 감각적이기만 한 것을, 감각적일 뿐인 것은 그 자체 죽어 있는 것인 바, 선과 진리를 거절하는 자연적일 뿐인 애착을, 찢겨 죽은 것이란 무의식적으로 악과 혼합되는 것을 각기 표현한다. 이상의 여러 가지 것들은 영적 인간이 선과 진리라는 주님의 생명을 받는 것을 방해한다는 것은 쉽게 알 수 있으리라 본다. 우리는 위와 같은 것들에 의식적으로 오염되면서 동시에 주님을 예배할 수 없고 선을 자기 것이 되게 할 수 없다. 만일 이것들이 무의식적으로 행해졌다면 물로 씻는 것 즉 진솔한 회개를 통해 깨끗해짐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 여기서 두 가지 사항은 조심스럽게 주목해 보아야 하리라 본다. 회개 후라 해도 저녁 때까지, 즉 그의 심판이 거행되어 가라지가 밀에서 분리되는 때까지 그 회개자는 전체적으로는 깨끗하지 않다. 이런 이유는 한꺼번에 깨끗해지는 것 즉 잘못들이나 악을 한꺼번에 제거하려 들면 선 자체까지 피해를 입거나 파괴까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마태 13:29). 둘째로, 거듭나는 동안, 그리고 마지막으로 심판에서 태양으로 명시되는 이기적 사랑의 거절이 끝나게 된다. 사실 해가 진다는 것은 주님에 대한 사랑이 하강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만, 때로 이는 이기적 사랑이 끝나는 것도 의미한다. 이런 질문이 즉각 있을 수 있다. “인간이 자신을 사랑하는 것 또는 자기에게 타당한 삶으로부터 행동하는 것이 어떻게 중단될 수 있단 말인가?” 우리가 응답해야만 하는 것은, 위와 같은 중단은 필수적인 것이 아니고 유해하다는 것인데 그 이유가 교회도 인간 자아에 생명을 불어넣어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간은 자기를 위해 주님의 사랑을 주고받을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인간은 자신 스스로부터인 듯 행동해야 한다. 그러나 자기가 수행하는 온갖 것이 이기적이 되는 것을 중단함으로서만 이 가치 부여도 유효하다. 그러므로 자아를 타당하게 사랑함은 모든 악의 원인이라 말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뒤집히면 이기심이라 불리게 된다. 이런 문제에 관한 진리는 “그들은 내가 지키라고 한 것을 그대로 지켜야 죄벌을 받지 않을 것이다. 그것을 어기면 죽으리라”는 구절이 글자 의미에서, 영적 의미에서도 매우 강하게 보여 준다. 따라서 주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생명을 타당하게 사용하는지에 우리에게 책임이 있음을 스스로 계속 느끼고 있어야만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리라 생각된다.
위 구절에 이어지는 10절의 영적 의미들을 반복해 읽게 되면 상응으로부터 있게 되는 가르침들을 저절로 알 수 있으리라 본다. 교회 밖의 사람도 거듭날 수 있고 선을 자기 것으로 삼을 수 있을는지 모른다. 그럼에도 그는 더 진보할 수 없고, 그의 자연적 선이 영적 선이 될 수도 없다. 그리고 교회 안에 있다 해도 가르침을 받고만 있는 수준에 머무는 사람도 마찬가지이다. 두 부류의 사람 모두 필수 조항인 인간과 주님과의 협동 작전이라 말할 수 있는 선에 대한 새 의지가 적절히 실시되지 않고 있다. 그러나 11절의 경우는 10절과 매우 다르다. 이에 관한 진리를 보는 데는 실패할 수 없으리라. 그 다음 구절의 경우는 심각한 품성에 해당된다. 그 이유는 확증된 모독의 상태이기 때문이다. 거듭나는 삶을 어느 정도 진보시킨 교인의 경우 이 구절 같은 모독을 범하지 않기 위해 이 구절을 그대로 지나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선 또는 진리에 관한 지식이 아직 없는데도 선에 관한 애착 속에 있는 사람의 경우는 위와 다른데 그 이유는 명백하다. 우리가 흔히 범하는 잘못들이 주님께서 우리 속에 아껴 두신 것들을 통하는 선의 상태로부터 주님을 인정하여 어떻게 치료되는가는 쉽게 이해해 볼 수 있다. 이에 관해 주어진 예가 이 문단의 마지막(16절)에 묘사되어 있다. 여하튼 어떤 때에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거룩한 양식을 자기 것으로 삼을까? 우리는 매일 생활 속에서 특별한 노력을 기울이지 않은 채 그야말로 섭리적으로 천국적 영향을 받는 때가 자주 있다. 한 예만 들어보자. 우리가 어떤 책을 단지 흥미만을 위해 읽을 때가 있다. 그렇다해도 그 안에 있는 뭔가가 우리로 선한 느낌과 생각들을 가지도록 영감을 불러일으킨다. 이런 느낌들은 우리 속에 남아 있도록 저장되는데 이후 우리의 상태에 적절한 시기를 갖게 되면 이런 느낌과 생각들은 거듭나는 자연적 인간 안에 이식되어진다. 게다가 일상 생활 속에서 꾸준히 노력해야 할 때, 또는 심각한 영적 싸움이 있게 될 때 위와 같이 저장된 느낌과 생각들을 회상함으로 더 강한 힘을 얻는데 이는 대다수의 사람의 체험에 다분히 들어 있을 것이라 본다.
다음 시리즈를 조심스럽게 공부해 보면 두 개의 일반적이고 실용적인 진리들이 더욱 확증될 기회를 가지리라 본다. 첫째로 주님께서 받으시는 예배를 드리려면 예배는 선으로부터 또는 애착이 있어야 하되 반드시 진리를 수단으로 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수컷을 바쳐야 한다로 의미되고 있다. 둘째로 예배는 악과 거짓에 오염되어서는 안 된다. 이것이 흠이 없어야 함으로 의미되고 있다. 더 나아가 위 일반 원칙은 주님께 내적 인간을 충분히 봉헌해야 한다는 것도 언급하고 있다. 이것이 태워 바침으로 나타내고 있고 의지와 이해함에 관한 외적 인간을 바침은 서약과 마음에서 우러난 제물로 명시되고 있다. 이제 흠이 있는 것, 또는 악과 거짓에 속하는 특별한 종류들이 열거되는데 이를 살펴보자. 첫 세 가지는 마음의 영적 수준과 관계되고 나머지 세 가지는 자연적 수준과 관계된다. 그 이유는 눈이 멀고, 부러진 것, 불구인 것은 혹이나 비듬투성이, 딱지 있는 것에 비해 더 심한 몸의 고통을 말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두 부류 모두 나쁜 것은 마찬가지지만 전자는 후자보다 더 심한 영적 결함을 의미한다. 이 정도의 상응은 말씀의 다른 부분에서도 언급이 많으므로 누구나 쉽게 지각하리라 본다. 확실하게 무지한 사람, 눈이 먼 짐승 같고, 애착이 불완전한 사람은 부러진 짐승 같고, 눈이 멀지도 않고 부러지지도 않았는데도 영적 삶을 진보시키지 못하는 사람, 자기 행동에 자기의 지식과 애착을 담아 표현 못하는 사람은 불구인 짐승 같은 바 주님이 기뻐 받으시는 예배를 드릴 수 없다. 그리고 내적으로 계발되어 있고 마음도 호의적인데 활력이 없는 채, 그의 자연적 애착만을 허용할 때 혹 달린 상태(score, wen)에 비유되고, 그가 감각적 능력만을 발휘할 때의 경우는 비듬(옴)증세(scurvy)에, 그가 육적 기쁨만을 허용할 때의 경우는 딱지(종기)(scab) 증세와 비슷하다.
이에 이어지는 구절 역시 방관하지 않아야 할 품질들이다. 심정으로부터 진행되고 마음에 우러나 드리는 결함 있는 예배가 외적 또는 내적 순진을 동반하는 경우 소나 양으로 명시되는데 이 예배는 마치 완전한 예배인 듯 취해지고 있다. 그러나 이 예배가 이해함에 의해 확증될 경우는 주님이 받을 수 없다. 이렇게 되는 이유는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서약(vow), 물론 좋은 의미에서는 의지로부터 이해함이 결정하는 것, 또는 주님이 설비해 주신 그대로를 수용하는데 기뻐함을 뜻한다. 그러나 이 본문 이 문단의 경우 불완전한 예배와 연결을 이루고 있는 바, 예배가 이해함을 수단으로 확증됨을 의미한다. 진정한 고백은 의지와 관계되고 본문 같은 경우는 불완전한 예배라는 계산적인 서약인 바, 이해함에 관계된다. 24, 25절은 천국 결혼에 관련되지만 여기서는 흠 있는 예배와 관련되어 예증해 주고 있다.
나머지 문단을 글자대로 읽으면서 생각해 보라. 그러면 왜 어떤 동물이 태어난 후 정확히 칠일 간 어미 품에 두어야 하는지, 왜 팔 일째 되어야 바칠 수 있는지, 왜 감사 제물은 그 날로 다 먹고 다음 날까지 남겨두지 못하는지, 왜 신성한 존재는 이집트의 속박에서 해방시켜 주었기 때문에 마땅히 존대 받아야 하는지에 대해 쉽게 머리에 착상되지 않을는지 모른다. 그러나 상응의 도움을 수단으로, 주님께서 해주시는 계발을 힘입어 내적 의미 안으로 들어갈 때, 위와 같은 주님의 세부 지시 사항이 왜 그러한지 이해할 수 있다. 말씀은 표현적인 교회를 계승하게 될 미래 세대의 영적 교회에 도움을 주시고자 쓰여져 있다. 그 이유는 칠 일간 이란 거듭나는 거룩한 상태를, 팔 일 째란 거듭남을 이어받는 새로운 상태를 명시하기 때문이다. 어미와 그 새끼를 같은 날 죽이지 말라란 인간 삶의 계속되는 상태들은 혼동되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감사 제물은 바친 그 날로 먹고 다음 날까지 남겨두지 말라란 은택으로 우러나서 드리는 예배는 이기적 사랑으로 오염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뜻한다. 주님의 계명을 지키라는 것, 그분의 이름을 모독하지 말고 오로지 거룩히 여겨야 할 것, 이집트의 속박에서 해방시켜 주었기 때문이다란 거룩한 상태가 주님을 순종함에 포함되어야 하는 바, 그 이유는 단지 자연적일 뿐인 삶의 속박에서 해방되게 해주시고 사랑으로 주님과 영원히 결합되게 해 주셨기 때문이다.

******************************************************

레위기 23장

성경: 레위기 1장

1. 그리고 주님께서는 모세에게 이야기하셨다, 말하시기를,
2. 이스라엘의 자손들에게 이야기 하라, 주님의 절기들, 이것을 너희는 거룩한 모임이다고 선포할 것이다, 이것들이 나의 절기들이다.
3. 육 일 동안 일을 할 것이다. 그러나 칠 일째 날은 엄숙한 쉼의 안식일, 거룩한 모임이 있다. 너희는 어떤 일도 하지 말라. 그것은 너희의 모든 거주지에서 주님에게 안식일이다.
4. 이것들은 주님의 절기들, 거룩한 모임들이다, 이것을 너희는 그것들의 지정된 계절에서 선포하라.
5. 첫째 달에서, 그 달의 십 사일 저녁은 주님의 유월절이다.
6. 같은 달의 십 오일은 주님에게 누룩 넣지 않은 빵의 절기(무교절)이다. 칠 일 동안 너희는 누룩 넣지 않은 빵을 먹어라.
7. 첫째 날에 너희는 거룩한 모임을 가져라. 너희는 노예근성의 일을 하지 말라.
8. 그러나 너희는 칠 일 동안 주님에게 불로 만든 제물을 바쳐라. 칠 일째 날에 거룩한 모임이 있다. 너희는 노예근성의 일을 하지 말라.
9. 그리고 주님은 모세에게 이야기하셨다, 말하시기를,
10. 이스라엘의 자손들에게 이야기하라, 그리고 그들에게 말하시기를, 내가 너희에게 준 토지 안으로 들어올 때, 그리고 거기로부터 수확물을 거둘 때, 그러면 너희는 성직자에게 너의 수확물의 첫 열매들의 곡식단을 가져 와라.
11. 그리고 그는 주님 앞에서 곡식단을 흔들어라, 너를 위하여 받아질 것이다. 안식일 다음 날, 성직자는 그것을 흔들어라.
12. 그리고 네가 곡식단을 흔든 날에, 너는 주님에게 태워 바침을 위해 첫 번째 해의 흠이 없는 수양을 바쳐라.
13. 그리고 그것의 식사 제물은
기름을 섞은 고운 곡식 가루 십분의 이 (에바), 달콤한 향기를 위해 불로 만든 제물이다. 그리고 그것의 음료 제물은 포도주, 사분의 일 힌이다
14. 그리고 너희는 이 동일한 날 까지, 너희가 너희 하느님에게의 봉헌물을 가져올 때까지, 빵을, 볶음 곡식도, 생이삭도 먹지 말라. 이것은 모든 너의 거주지들에서 대대로 영원한 법령이다.
15. 그리고 너희는 안식일 다음 날로부터, 너희가 흔드는 바침의 곡식단을 가져온 날로부터 너는 (날수를) 세라. 일곱 안식일들이 거기에서 (셈을) 완성할 것이다
16. 일곱째 안식일 이후 다음 날이면 오십 일이 세어질 것이다. 그리고 너희는 주님에게 새로운 식사 제물을 바쳐라.
17. 너희는 너희 거처로부터 십분의 이 에바로 만든 빵덩어리를 가져와라. 이것은 주님에게 첫 열매를 위해 누룩을 넣어 구워라.
18. 그리고 너희는 빵과 더불어 한 살 된 흠 없는 어린 양 일곱과 어린 수소 하나, 그리고 수양 둘을 빵과 더불어 제출하라, 그것들은 그것의 식사 제물과, 그리고 그것의 음료 제물과 더불어 주님에게 태워 바쳐라. (이는) 주님에게 달콤한 향기의 불로 만든 제물이다.
19. 그리고 너희는 죄 바침을 위해 수염소 하나, 그리고 평화 제물의 희생 제물로 일년된 수양 둘을 바쳐라.
20. 그리고 성직자는 주님 앞에서 흔들어 바침을 위한 첫 열매로부터의 빵과 더불어, 두 어린 양과 더불어 그것들을 흔들어라. 그것들은 성직자를 위한 주님에게 거룩하다.
21. 그리고 너희는 바로 같은 날에 선포하라. 거기서 너에게 거룩한 모임이 있을 것이다. 너희는 노예근성의 일을 하지 않아야 한다. 이것은 너희 대대로 영원히 너의 거주지들에서 법령이다.
22. 그리고 너희가 너의 토지의 수확물을 거둘 때, 들판의 모퉁이까지 싹슬어 거두지 마라, 너는 네 수확물의 이삭을 모아들이지 마라. 너는 그것들을 가난한 자와 낯선 자를 위해 남겨두라. 나는 주 너의 하느님이다.
23. 주님께서 모세에게 이야기하셨다, 말하시기를,
24. 이스라엘의 자손들에게 이야기 하라, 말하기를, 일곱째 달에서, 그 달의 첫째 날에, 너희에게 엄숙한 쉼이 있는다, 나팔을 불어 기념하는 (날), 거룩한 모임(이 있다).
25. 너희는 노예근성의 일을 하지 말라. 그리고 너희는 주님에게 불로 만든 제물을 바쳐라.
26. 그리고 주님께서 모세에게 이야기하셨다, 말하시기를,
27. 이 일곱째 달의 십 일은 보상의 날이다. 너에게 거룩한 모임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너희는 너희 혼들을 괴롭힐 것이다. 그리고 너희는 주님에게 불로 만든 제물을 바쳐라.
28. 그리고 너희는 동일한 이 날 어떤 일도 해서는 안된다. 그이유가 이것은 보상의 날이어서, 너의 하느님 주님 앞에 너를 위해 보상을 받기 때문이다.
29. 같은 이 날 괴로움 받지 않는 혼은 누구든지 그의 백성들로부터 잘리운다.
30. 그리고 같은 이 날에 어떤 일이든지 하는 혼은 누구이든 나는 그의 백성들 사이로부터 그 혼을 파괴할 것이다.
31. 너희는 여하튼 일을 하지 말 것이다. 이것은 너의 모든 거주지들에서 대대로 영원히 법령이다.
32. 너에게 엄숙한 싐의 안식일이 있다. 그리고 너희는 너희 혼을 괴롭게 하라. 달의 아홉째 날 저녁, 저녁으로부터 저녁까지 너희는 너의 안식일을 지켜라.
33. 그리고 주님께서 모세에게 이야기하셨다, 말하기를,
34. 이스라엘의 자손에게 이야기하라, 말하기를, 이 일곱째 달의 십오 일은 주님에게 칠일 동안 장막(tabernacle)의 절기이다.
35. 첫째 날에 거룩한 모임이 있을 것이다. 너희는 노예근성의 일을 하지 말라.
36. 칠 일 동안 너희는 주님에게 불로 만든 제물을 바쳐라. 팔 일째에 너에게 거룩한 모임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너희는 주님에게 불로 만든 제물을 바쳐라. 이것은 엄숙한 집회이다. 너희는 노예근성의 일을 하지 말라.
37. 이것들은 주님의 절기이다, 너희는 거룩한 모임이 있기 위해, 주님께 불로 만든 제물, 태워 바침, 그리고 식사 제물, 희생 제물, 음료 제물을 각기 그것 (바치는) 날에 바치도록 (절기를) 선포하라.
38. 주님의 안식일 외에, 그리고 너의 선물들 외에, 그리고 모든 너의 서원물 외에 그리고 모든 자유의 바침 외에, 이것을 너희는 주님에게 드리라.
39. 너희가 토지의 열매들을 거두어 들일 때, 일곱 째 달의 십 오 일에 너희는 칠일 동안 주님의 절기를 지킨다. 첫째 날은 엄숙한 쉼이다. 그리고 팔 일째 날은 엄숙한 쉼의 날이다.
40. 그리고 너희는 첫째 날에 훌륭한 나무들의 열매, 종려나무의 가지들, 무성한 나무들의 큰가지, 그리고 개울의 버드나무를 가져와라. 그리고 너희는 칠 일 동안 주 너의 하느님 앞에서 즐거워하라.
41. 그리고 너희는 해마다 칠 일을 주님에게 절기로 그것을 지킬 것이다. 이것은 너의 대대로 영원한 법령이다. 너희는 일곱 째 달에 그것을 지켜라.
42. 너희는 칠 일 동안 초막(오두막, booth)에서 거주하라. 이스라엘(족)에 속하는 본토박이인 모든 이는 초막에서 거주한다.
43. 내가 이스라엘의 자손들을 이집트의 토지로부터 데려올 때내가 그들을 초막에 거주하게 만들었다는 것을 너의 자손 대대로 알게 하려 해서이다. 나는 주 너의 하느님이다.
44. 그리고 모세는 이스라엘의 자손들에게 주님의 절기들을 선언하였다.

영적 의미 요약

* 넓은 측면에서 거듭나는 삶의 계속적인 상태들에 관하여, 이에는 악과의 싸움 그리고 쉼의 상태가 포함되어 있다, 1-3절.
* 거듭나는 삶에 종속될 첫 번째 상태는 악에서의 해방 중 하나인데 이에는 선과 결합하는 진리를 내면으로 받는 것과 깨끗해짐 그리고 선 밑에 진리들이 배열되는 것이 포함되어 있다, 4-8절.
* 거듭나는 삶에 종속될 두 번째 상태는 선 안에 진리가 이식되는 것이다, 9-22절.
* 그 결과 밝히 알게 됨에 관한 것, 23-25절.
* 그 결과 모든 악이 제거됨에 관하여, 26-32절.
* 거듭나는 삶에 종속될 세 번째 상태는 선이 이식되는 것, 이에는 모든 완전함과 거룩함에 있는 심정의 기쁨과 즐거움을, 가장 낮은 원리에서 가장 높은 원리에 이르기까지 쉼과 평화의 상태를 가지게 되고 이 상태는 계속 갱신되어진다, 33-34절.
(* 성경 구절은 44절까지 인데 요약 부분에서는 34절로 끝나고 있음. 역자주)

각 절의 영적 의미

1절. 그리고 주님께서는 모세에게 이야기하셨다, 말하시기를,

영적 의미

주님께서 신성한 진리를 수단으로 지각을 주시어 밝히 알게 하신다.

세부적 영적 의미

주님(여호와)란 사랑 측면에서의 신성한 존재를; 이야기하심(speaking)이란 유입을; 모세란 신성한 진리 또는 말씀을; 말함(saying)이란 지각을 뜻한다. (2951, 7010, 1791, 1822)

2절. 이스라엘의 자손들에게 이야기 하라, 주님의 절기들, 이것을 너희는 거룩한 모임이다고 선포할 것이다, 이것들이 나의 절기들이다.

영적 의미

영적 교회인에 대한 가르침이다. 이 가르침으로부터 그는 거듭나는 삶에 관한 일반적 상태를 분별하며, 이 삶에 있는 세부적 상태들을 신성한 질서로 배열하고 규율해 가게 된다.

세부적 영적 의미

이스라엘 백성에게 일러둠이란 영적 교회인이 식별할 수 있게 가르치심을; 주님의 절기(축절)들이란 거듭나는 삶의 계속되는 상태들을; 거룩한 모임이도록 이 절기들을 선포함이란 모든 진리들은 선에 의거 질서대로 배열되어야 함을; “이것들이 나의 절기들이다”란 신성한 질서에 따름을 각각 말한다. (10355, 3654, 1791, 1822, 9294, 7891, 5288, 37, 10133)

3절. 육 일 동안 일을 할 것이다. 그러나 칠 일째 날은 엄숙한 쉼의 안식일, 거룩한 모임이 있다. 너희는 어떤 일도 하지 말라. 그것은 너희의 모든 거주지에서 주님에게 안식일이다.

영적 의미

그러나 악과 싸우는 상태들이 먼저 선행되고 그 뒤를 이어 일반적인 쉼과 평화의 상태가 있게 된다. 이 가운데 진리들이 선으로부터 질서 있게 배열된다. 그러면 이기적 동기로부터 행동될 리 없고 시험에 견디어낼 필요도 없는 바, 주님으로부터 온 선이 그의 모든 세부 상태에 이르기까지 자유롭게 그리고 기쁘게 받아지기 때문이다.

세부적 영적 의미
육 일 동안 일을 함이란 악과 싸우는 상태가 선행됨을; 칠 일째 되는 날은 엄숙한 쉼의 안식일이다란 위 전투에 수반되는 넓은 측면에서의 쉼과 평화의 상태를; 거룩한 모임이란 모든 진리들은 선으로부터 오는 질서에 따라 배열될 것임을; 어떤 일도 하지 말라란 인간은 이기적 동기로부터 행동하지 않는 것 또는 시험을 견디어 내는 것이 없어야 함을; “이 날은 주님에게(여호와에게 바치는) 안식일이다”란 자유롭게, 기쁘게 주님에게서 선을 받음을, “너희의 모든 거주지에서”란 세부적인 특별한 상태에 관하여를 각각 뜻한다. (84, 8889, 7891, 8890, 8888, 8889, 2001, 471)

4절. 이것들은 주님의 절기들, 거룩한 모임들이다, 이것을 너희는 그것들의 지정된 계절에서 선포하라.

영적 의미

일반적 상태는 그 안에 종속된 상태들을 포함한다. 또한 이 안에는 선 밑에 진리들의 배열이 있고 이 배열이 질서 있게 계속됨을 인간은 실감한다.

세부적 영적 의미

이것들은 주님의 절기들, 거룩한 모임들이다, 이것을 너희는 그것들의 지정된 계절에서 선포하라란 넓은 측면에서의 거듭나는 상태에는 종속되는 상태들이 포함된다는 것, 그 안에는 선 밑에 진리들이 배열되는데 이것이 질서적으로 이어져감을 인간이 실감하게 된다는 것을 말한다. (9294, 5288, 37, 10133)

5절. 첫째 달에서, 그 달의 십 사일 저녁은 주님의 유월절이다.

영적 의미

그래서 종속된 첫 상태는 주님이 악에서 해방해 주신 상태이다. 이 상태 중 사랑으로부터 온 신앙의 상태가 가장 우세해져 있는다. 그리고 의지와 이해함 모두가 신성한 진리에 복종함으로 해서 거룩한 상태가 동반되어진다.

세부적 영적 의미

정월 십 사일 저녁은 주님의 유월절이란 종속된 첫 상태는 주님께서 악으로부터 해방시켜 주시는 것 중 어떤 것 한 가지를, 정월 십 사일이란 사랑으로부터 오는 신앙의 상태가 우세해져 거룩함의 상태가 동반된다는 것을, 해거름 또는 저녁 동안이란 의지와 이해함 양면에서 신성한 진리에 복종함을 통하여를 뜻하는데, 그 이유는 위 상태는 이기적 사랑만이 우세했던 상태가 끝나고 주님의 뜻에 순종하는 상태가 시작되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며, 그리고 순종이란 의지로부터 진행되고 이해함에 의해 인도 받아감을 뜻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7867, 859, 7900, 7844, 8750-3)

6절. 같은 달의 십 오일은 주님에게 누룩 넣지 않은 빵의 절기(무교절)이다. 칠 일 동안 너희는 누룩 넣지 않은 빵을 먹어라.

영적 의미

그 다음 즉각 새로운 상태, 즉 거짓에서 깨끗해지는 것, 더 나아가 선을 자기 것으로 삼게 되는 거룩한 상태가 뒤를 잇는다.

세부적 영적 의미

정월 십 오일이란 위 새로운 상태 안에 있음을; 누룩 없는 빵의 절기(무교절)이란 거짓에서 깨끗해짐을; 누룩 없는 빵을 칠 일간 먹음이란 위의 상태에서 거룩함이 더 진전된 상태를; 먹는다란 선을 자기 것으로 삼는 것을 말한다. (8400, 9296-5, 9287, 9294, 716, 2187)

7절. 첫째 날에 너희는 거룩한 모임을 가져라. 너희는 노예 근성의 일을 하지 말라.

영적 의미

그 안에 진리에 관한 지식들이 선 밑에 우선 배열되는데 이 동안에는 시험이 없다.

세부적 영적 의미

첫째 날에 거룩한 모임을 열고 모든 노예 근성의 일(생업)에서 손을 뗌이란 위 상태 안에 먼저 진리에 관한 지식들이 선 밑에 배열되고, 배열되는 동안에는 시험이 없음을 말한다. (7891, 8888, 8890)

8절. 그러나 너희는 칠 일 동안 주님에게 불로 만든 제물을 바쳐라. 칠 일째 날에 거룩한 모임이 있다. 너희는 노예 근성의 일을 하지 말라.

영적 의미

그런 다음 선으로부터 제 스스로 주님을 인정함이 있어진다. 그리고 계속해서 진리들이 더 완전하게 배열되면서 시험으로부터의 더 큰 해방이 있는다.

세부적 영적 의미

칠 일간 주님께 제물을 태워 바침이란 주님이 선으로부터 자유롭게 인정됨을; 칠 일째 되는 날 거룩한 모임을 가진다란 진리들이 더 완전하게 배열됨을; 노예 근성의 일(생업)을 하지 않음이란 시험에서 더 많이 자유로워짐을; 계속성이 칠 일 동안 제물을 바침으로 나타내고 있는데, 그 이유가 칠이라는 숫자는 거룩함과 쉼 그리고 평화, 뿐만 아니라 충만함과 완성됨까지 뜻하기 때문이다. (10055, 716, 923, 7891, 10127)

9절. 그리고 주님은 모세에게 이야기하셨다, 말하시기를,

영적 의미
다시 주님께서는 신성한 진리를 수단으로 지각을 주시어 밝히 알게 하신다.

세부적 영적 의미

주님(여호와)란 사랑 측면에서의 신성한 존재를; 이야기하심(speaking)이란 유입을; 모세란 신성한 진리 또는 말씀을; 말함(saying)이란 지각을 말한다. (2001, 2951, 7010, 1791, 1822)

10절. 이스라엘의 자손들에게 이야기하라, 그리고 그들에게 말하시기를, 내가 너희에게 준 토지 안으로 들어올 때, 그리고 거기로부터 수확물을 거둘 때, 그러면 너희는 성직자에게 너의 수확물의 첫 열매들의 곡식단을 가져 와라.

영적 의미

영적 교회인은 유입과 가르침을 통하는 바, 거듭나는 삶에 종속되는 두 번째 상태 안에서 진리들이 선 안에 이식되기 시작한다. 그 다음 이식된 진리들은 기쁘게 순종함을 원리로 해서 질서 안에 모두 집합되며 이 모든 것이 주님께서 해 주신 것임을 인정한다.

세부적 영적 의미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야기하라란 영적 교회인에 대한 가르침임을; 주님께서 주시는 땅으로 들어가서 추수를 할 때란 거듭나는 삶의 두 번째 종속되는 상태에서 진리들이 선 안에 이식되기 시작할 때를; 수확물의 첫 곡식단을 성직자에게 가져옴이란 위의 진리들이 주님께로부터 임을 인정함으로서 기쁘게 순종함이라는 원리로부터 그 진리들이 한데 모아지는 것을 말한다. (10355, 3654, 1791, 1822, 9294, 3705, 995, 10083)

11절. 그리고 그는 주님 앞에서 곡식단을 흔들어라, 너를 위하여 받아질 것이다. 안식일 다음 날, 성직자는 그것을 흔들어라.

영적 의미

이 선으로부터 영적 인간은 생명 있게 되고 그의 예배는 주님께 깊은 감사를 나타내는 바 주님께서 받으실 수 있다. 이 예배에는 항구적으로 있게 되는 거룩한 쉼과 평화의 상태가 포함되어 있다.

세부적 영적 의미

주님께서 받으시도록 곡식단을 흔듦이란 선으로부터 오는 인간의 영적 생명은 주님에 의해 생명이 있어지고 그분으로 인해 활동하게 됨을, 받으심이란 그분께 드리는 위의 예배는 주님에 대한 깊은 감사의 표시인 바 그분께서 열납하신다는 것을, 안식일 다음 날 곡식단을 흔들어 바친다란 선으로 말미암아 진리가 생명 있게 됨은 영원히 존재할 쉼과 평화의 상태 안에 포함되어져 있음을 말한다. (84, 8889, 3998, 요한 14장 27절, 16장 33절)

12절. 그리고 네가 곡식단을 흔든 날에, 너는 주님에게 태워 바침을 위해 첫 번째 해의 흠이 없는 수양을 바쳐라.

영적 의미

이러한 초보적인 선의 상태에서 주님은 순진의 상태로부터 예배된다. 이 예배에서 진리는 선의 저장소임을 인정함이 있고, 모든 거짓과 악들이 제거되는 바, 주님을 섬기는데 완전히 봉헌된다.

세부적 영적 의미

곡식단을 흔든 날에 일 년된 흠이 없는 어린 수양을 바치라란 초기에 해당되는 위와 같은 선의 상태에서는 순진의 상태로부터 주님을 예배함을, 동시에 진리들은 선을 저장하는 곳임을 인정하고 모든 악과 거짓이 제거되면서 주님을 섬기려는 충만된 헌신이 있게 된다. (3994, 725, 7837, 7839, 349, 923)

13절. 그리고 그것의 식사 제물은 기름을 섞은 고운 곡식 가루 십분의 이 (에바), 달콤한 향기를 위해 불로 만든 제물이다. 그리고 그것의 음료 제물은 포도주, 사분의 일 힌이다

영적 의미

위 상태에는 아껴두신 것들을 통해 충만됨 속에서 진리와 결합된 선을 내면으로 받는 것이 포함되어 있다. 이는 주님으로부터 온 순수한 사랑을 수단으로 결과된 것이고, 쉼과 평화의 기운이 바깥으로 흘러나와 그 자체를 드러낸다. 또한 이해함 안에 선과 결합된 내면의 진리가 있고, 이를 수단으로 해서 교리가 승강 되면서 영적으로 되는 시작이 있다.

세부적 영적 의미

식사 제물은 기름을 섞은 고운 곡식 가루 십 분의 이 에바란 위 상태 안에는 주님께서 아껴두신 것들을 통하여 선이 진리와 충만되게 결합됨이 포함되어 있음을; 달콤한 향기를 위해 불로 만든 제물이란 위 상태는 주님으로부터 오는 순수한 사랑의 작용으로 결과되어 거기에 쉼과 평화의 기운이 흘러들면서 외적으로도 그 자체가 명백해 진다는 것을; 음료 제물로 포도주 사분의 일 힌이란 진리의 외적 상태가 이해함 안에서 선과 결합됨이 있는데 이러므로 해서 교리들이 승강 되어 영적 수준이 되어지기 시작한다는 뜻이다. (2177, 5194, 576, 10137, 10262, 4581-5, 요한 2장 1-11절)

14절. 그리고 너희는 이 동일한 날 까지, 너희가 너희 하느님에게의 봉헌물을 가져올 때까지, 빵을, 볶음 곡식도, 생이삭도 먹지 말라. 이것은 모든 너의 거주지들에서 대대로 영원한 법령이다.

영적 의미

우선 주님을 진실로 인정하게 되는 상태 즉 선의 상태가 개시되기 전에는 어떤 선도 내적으로 자기 것이 되게 할 수 없고 선과 진리에 관한 애착도 외적으로 자기 것이 되게 할 수 없다. 이는 세부적인 거듭남이 계속 진보하기 위해, 그리고 영적 생명을 받기 위한 외적 기초가 된다.

세부적 영적 의미

제물을 바치는 날 이전에는 빵도, 볶은 곡식도, 생 이삭도 먹지 못한다란 선의 상태가 개시될 때까지는 어떤 선도 내적으로 자기 것으로 삼을 수 없고, 외적으로 있는 선과 진리에 대한 애착도 자기 것이 되게 할 수 없다는 것을; 너희의 하느님에게 바치라란 자기 것으로 삼기 전 반드시 주님이 진실로 먼저 인정되어야 함을; 대대로 길이 지킬 법령이다란 주님을 인정함은 계속되는 거듭나는 과정의 외적 기초가 된다는 것, 그리고 거듭남의 세세한 과정에서 영적 생명을 받는 영원한 외적 기초가 된다는 것을 말한다. (5212, 9295, 7884, 9845, 471)

15절. 그리고 너희는 안식일 다음 날로부터, 너희가 흔들어 바침의 곡식단을 가져온 날로부터 너는 (날수를) 세라. 일곱 안식일들이 거기에서 (셈을) 완성할 것이다

영적 의미

선 안에 진리가 이식되는 상태가 진보되는 것은 쉼과 평화를 결과하게 하는 악과 잘못들에서 승리하는 거룩한 순종을 수단으로 생명을 얻었던 초기 상태에 이어 영원히 계속된다.

세부적 영적 의미

(날 수를) 셈이란 상태들의 품질을 알아낸다는 것을; 곡식단을 가져옴이란 선 안에 진리가 이식되는 상태가 더 진전됨을; 다음 날이란 항구적이고 계속적임을; 곡식단을 흔듦이란 생기 있게 됨을; 만 일곱 주간이란 악과 잘못들에서 승리하여 쉼과 평화의 거룩한 상태가 옴을 각각 말한다. (10217, 9204, 9295, 3998, 10083, 716, 8889, 8890)

16절. 일곱째 안식일 이후 다음 날이면 오십 일이 세어질 것이다. 그리고 너희는 주님에게 새로운 식사 제물을 바쳐라.

영적 의미

항구적으로 발전해감 속에는 내적으로 선에 관한 것 뿐만 아니라 이식된 진리가 충만해지는 상태까지 포함된다. 그리고 이식된 진리와 결합한 내면의 선까지 충만된다. 그러므로 주님은 새로운 예배 상태에서 더욱 충분히 인정되어진다.

세부적 영적 의미

일곱째 안식일 다음 날까지 해서 오십 일을 셈이란 항구적으로 진보해 가는 것들, 이에는 내적으로 선에 관한 것뿐만 아니라 외적으로 이식되기 위해 진리가 충만 하는 상태까지 포함됨을; 새로운 식사 제물을 주님께 바침이란 내면에 있는 선이 이식되는 진리와 결합함으로 해서 새로운 예배 상태에서 주님이 더욱 인정되어짐을 뜻한다. (2252, 3998, 2177, 349)

17절. 너희는 너희 거처로부터 십분의 이 에바로 만든 빵덩어리를 가져와라. 이것은 주님에게 첫 열매를 위해 누룩을 넣어 구워라.

영적 의미

그리하여 인간이 지각하는 바, 제 스스로 행동하는 것 같지만 자기는 자기 속에 주님이 아껴 두신 것들을 통해 주님께서 생기를 넣은 진리와 결합한 선으로부터 행동하고, 이해함 안에는 선에서 오는 순수한 진리가 있게 되었다는 것, 이는 시험에 승리함으로 획득된다는 것, 진리를 사랑함으로 선이 더욱 진보된다는 것을 지각한다.

세부적 영적 의미

너희는 너희 거처로부터 십분의 이 에바로 만든 빵덩어리를 가져온다란 인간이 지각하는 바, 자기는 진리와 결합된 진리에 대한 애착으로부터 행동하는 것이 자신 스스로 그렇게 하는 듯 여기고 있다는 것, 이 행동은 우리 속에 아껴 두신 것들을 통해 주님께서 생명 있게 하셨다는 것이다. 이것이 고운 곡식 가루였다 함은 이해함 안에 있는 선에서 온 진리의 순수한 상태를; 이 가루에 누룩을 넣고 굽는다란 시험에서 승리함을 통해 획득되어졌음을; 이것이 주님께 드리는 첫 열매(맏물)이란 진리를 사랑함을 통해 선을 실감하는 쪽으로 발전됨을 뜻한다. (9205, 5194, 576, 2177, 8496, 7906, 9295, 10083)

18절. 그리고 너희는 빵과 더불어 한 살 된 흠 없는 어린 양 일곱과 어린 수소 하나, 그리고 수양 둘을 빵과 더불어 제출하라, 그것들은 그것의 식사 제물과, 그리고 그것의 음료 제물과 더불어 주님에게 태워 바쳐라. (이는) 주님에게 달콤한 향기의 불로 만든 제물이다.

영적 의미

이제 주님은 가장 깊은 천적 선이 작동되어 인정되어지는데 이에는 거짓에서 자유로워진 순진이라는 충만된 거룩함이 포함되어 있고, 또한 주님과 협동하는 결합으로 해서 외적, 내적 인간 안에 순진의 선이 있게 된다. 이 결합을 수단으로 선과 진리에 관한 측면에서, 외적 진리와 선에 관한 측면에서 충분히 정화되는데 이 모든 것은 인간을 위한 그분의 순수한 사랑을 통해 주님이 해주셨음을 인정한다. 그 결과 쉼과 평화를 더욱 많이 결과하게 된다.

세부적 영적 의미

빵과 더불어 일곱 어린 양이란 이제 가장 깊은 천적 선의 작용으로 주님이 인정되어짐을; 흠이 없음이란 거짓에서 자유로움을; 어린 수소 한 마리와 수양 두 마리란 외적 인간과 내적 인간 안에 있는 순진의 선을; 둘이란 결합을, 그러므로 주님에 관한 내적 인간 부분일 경우 협동을 말한다. 태워 바침의 제물이란 위 결합을 수단으로 충분히 성별 됨을; 식사 제물과 음료 제물이란 내면에 있는 선과 진리, 외면에 있는 진리와 선에 관한 것임을; 불로 태워 바침이란 이 모든 것은 인간을 위한 그분의 순수한 사랑을 통해 주님으로부터임을 인정하는 것을; 주님께 달콤한 향기를 풍김이란 쉼과 평화의 상태로 한걸음 더 진전되었음을 말한다. (349, 10132, 7839, 716, 7837, 9591, 10042, 5194, 10053, 2177, 10137, 10054, 10855)

19절. 그리고 너희는 죄 바침을 위해 수염소 하나, 그리고 평화 제물의 희생 제물로 일 년된 수양 둘을 바쳐라.

영적 의미

위 사항 외에 인정함이 더 있다. 즉 모든 악과 거짓은 주님이 제거해 주신다는 것, 모든 순진의 선은 외적, 내적 인간이 진리로 충만된 가운데 주님으로부터 받게 된다는 것, 이렇게 주님이 해주셨기 때문에 우리가 완전한 자유 속에서 예배드릴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세부적 영적 의미

죄 바침을 위해 수염소 한 마리란 위 상태에 하나 더 인정하는 상태가 있는데 이는 모든 악과 거짓은 진리 또는 신앙을 수단으로 주님께서 제거해 주신다는 것이다. 평화 제물로 그 해 태어난 수양 두 마리란 순진의 모든 선은 내적, 외적 인간에 있는 진리가 충만해진 가운데 주님으로부터 받아지고, 그러므로 해서 완전한 자유 속에서 주님이 예배된다는 뜻이다. (4169, 725, 3400, 349, 10132, 5194, 725, 7839, 10097)

20절. 그리고 성직자는 주님 앞에서 흔들어 바침을 위한 첫 열매로부터의 빵과 더불어, 두 어린 양과 더불어 그것들을 흔들어라. 그것들은 성직자를 위한 주님에게 거룩하다.

영적 의미

이리하여 인간의 모든 삶, 내적으로 있는 선의 측면, 외적으로 있는 선의 측면 모두 그리고 선 안에 진리가 처음 이식된 때로부터 그것이 완성되기까지 모든 측면이 주님으로부터 생명을 받아 살아있게 된다. 그리고 모든 선의 근원이 주님이심을 진실로 인정하게 된다.

세부적 영적 의미

성직자가 위의 제물을 흔든다란 인간의 생명, 그것이 내적으로 있는 선 이든, 외적으로 있는 선 이든 모두 주님에 의해 생명 있게 된다는 것을; 곡식단을 흔듦은 선 안에 진리가 이식되기 시작함을; 첫 열매로서 드리는 빵을 흔듦은 위의 이식 작업이 충만해졌음을; 이것은 성직자의 몫이고 주님에게 거룩하다란 인간이 자기 것으로 삼는 모든 선의 근원이 주님이심을 진실로 인정함을 뜻한다. (9295, 10083, 10079, 제 11, 20절, 9223, 8042, 2187, 6148-7)

21절. 그리고 너희는 바로 같은 날에 선포하라. 거기서 너에게 거룩한 모임이 있을 것이다. 너희는 노예 근성의 일을 하지 않아야 한다. 이것은 너희 대대로 영원히 너의 거주지들에서 법령이다.

영적 의미

위 결과로 있는 상태에서 주님께서는 매우 밝히 알게 해 주신다. 즉 선 아래 진리가 완전하게 배열되고, 주님을 예배함 안에서 이기적이고 세상적인 동기들로부터 행동하려드는 모든 기질로 야기되는 시험도 정지된다.

세부적 영적 의미

같은 날 (모임을) 선포함이란 위의 결과 그 상태에 주님으로부터 충분히 밝히 알게 하심이 있다는 것을; 이것이 거룩한 모임이다란 선 밑에 진리가 완전히 배열됨을; 어떤 노예 근성의 일(생업)에 종사하지 말라란 시험이 정지되었음을; 어디서 살든 대대로 길이 지킬 규정이다란 주님을 예배하는 가운데 이기적이고 세상적인 동기로부터 행동하려던 모든 기질이 사라짐을 뜻한다. (8802, 8815, 7891, 8890, 7884, 471, 9845, 8888)
주목해둘 게 있다. 14절의 끝 부분에서 “대대로, generations”라는 말이 “거하는 곳들, dwellings” 앞에 오고 있는데 이는 일반적 상태들로부터 세부적인 상태로 발전함을 명시해 주고 있고, 본 절의 경우 14절과 반대 순서인 바 이는 진리가 선 안에 충분히 이식될 때, 선 밑에 진리가 질서 있게 배열되는 상태가 세부적으로도 있게 됨을 명시해 놓고 있다.

22절. 그리고 너희가 너의 토지의 수확물을 거둘 때, 들판의 모퉁이까지 싹슬어 거두지 마라, 너는 네 수확물의 이삭을 모아들이지 마라. 너는 그것들을 가난한 자와 낯선 자를 위해 남겨두라. 나는 주 너의 하느님이다.

영적 의미

그러므로 이제는 진리가 선 안에 이식된다 해도 그 진리가 능력 있게 최말단에서 표현될지라도 이기적 용도에 충당하려고 더 이상 자기 것으로 삼지 않고, 선은 외적으로 있는 이기적인 동기로 더 이상 오염이 안 된다. 오히려 이 모든 선과 진리를 선행과 선행으로부터 오는 신앙의 일들로 해서 주님께 돌리는 바, 거기에는 어떤 이기적, 세상적인 동기가 없게 된다.

세부적 영적 의미

추수할 때 곡식을 모조리 거두지 말고, 거두다 남은 이삭도 줍지 말라란 진리가 선 안에 이식되는 때 내적으로 있는 능력들이 최말단에서 표현된다 해도 더 이상 이기적 용도를 위해 자기 것으로 삼지 않으며, 외적으로도 그러한 것임을; 그것을 가난한 자와 외국인이 줍도록 하라, 나는 너희 하느님이시다란 이기적이고 세상적 동기가 없는 선행과 그 선행으로부터 온 신앙으로 일하게 된 것을 주님께 돌려 드림을 뜻한다. (4955, 10669, 2146, 2001, 7192, 제 19장 10절)

23절. 주님께서 모세에게 이야기하셨다, 말하시기를,

영적 의미

더 나아가, 주님께서는 신성한 진리를 수단으로 지각을 주시어 밝히 알게 해 주신다.

세부적 영적 의미

여호와란 그분의 사랑 측면에서의 신성한 존재를; 이야기하심(speaking)이란 유입을; 모세란 신성한 진리 또는 말씀을 표현하고; 말하심이란 지각을 뜻한다. (2951, 7010, 1791, 1822)

24절. 이스라엘의 자손들에게 이야기 하라, 말하기를, 일곱째 달에서, 그 달의 첫째 날에, 너희에게 엄숙한 쉼이 있는다, 나팔을 불어 기념하는 (날), 거룩한 모임(이 있다).

영적 의미

영적 교회인에 대한 가르침이다. 이 가르침으로부터 그가 지각하는 바, 선 쪽으로 인도하는 진리의 상태 또는 신앙의 상태가 선 안에 진리가 이식됨으로 마감 지어질 때 거룩한 평화의 상태가 수반되고 거기에 주님께서 밝히 알게 해 주심도, 선 밑에 진리가 재배열된다는 것까지 지각한다.

세부적 영적 의미

이스라엘 자손에게 일러둠이란 영적 교회인에 대한 가르침, 이로부터 그가 지각한다는 것을; 일곱째 달 첫 날 반드시 쉬어야 한다란 신앙의 상태 또는 진리의 상태가 발전함은 선 쪽으로 인도해 가는 진리가 이식됨으로 마감 짓게 됨을; 엄숙한 쉼 또는 안식일이란 위의 발전에 따라 오는 거룩한 평화의 상태를; 나팔을 불어 기념함이란 주님께서 밝히 알게 하심을; 거룩한 모임이란 선 밑에 진리들이 재배열됨을 말한다. (10355, 3654, 1791, 1822, 851, 893, 894, 851, 8802, 7891, 8815, 6888, 8620)

25절. 너희는 노예 근성의 일을 하지 말라. 그리고 너희는 주님에게 불로 만든 제물을 바쳐라.

영적 의미

위 결과 영적 싸움, 그리고 이기적이고 세상적 사랑까지 중지된다. 동시에 순수한 천적 사랑으로부터 주님을 예배하게 된다.

세부적 영적 의미

어떤 노예 근성의 일(생업)에도 종사하지 말라란 영적 싸움 그리고 이기적, 세상적 사랑으로 행동함이 정지됨을; 주님께 태워 바침이란 정지됨과 동시에 순수한 천국적 사랑으로부터 주님을 예배한다는 것을 말한다. (8888, 8890, 10055)

26절. 그리고 주님께서 모세에게 이야기하셨다, 말하시기를,

영적 의미

다시 주님께서는 신성한 진리를 수단으로 지각을 주시어 밝히 알게 하신다.

세부적 영적 의미

여호와란 사랑 측면에서의 신성한 존재를; 이야기하심(speaking)이란 유입을; 모세란 신성한 진리 또는 말씀을 표현하고; 말함이란 지각을 뜻한다. (2001, 7010, 1791, 1822)

27절. 이 일곱째 달의 십 일은 보상의 날이다. 너에게 거룩한 모임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너희는 너희 혼들을 괴롭힐 것이다. 그리고 너희는 주님에게 불로 만든 제물을 바쳐라.

영적 의미

진리가 선 안에 이식될 때 거기에는 악의 충분한 제거가 있고, 선 밑에 진리가 재배열되며, 인간 스스로에는 악밖에 가진 게 없는 바, 주님으로부터 순수한 사랑을 받아야만 그분을 예배할 수 있다고 고백하게 된다.

세부적 영적 의미

칠월 십일은 보상(죄 벗음)의 날이다란 진리가 선 안에 이식될 때 거기에는 악이 완전히 제거됨도 있다는 것을; 이 날 거룩한 모임을 열라란 선 밑에 진리가 재배열됨을, 혼을 괴롭힘(단식함, afflicting the soul)이란 인간 스스로서는 악밖에 없음을 고백하는 것을, 주님께 태워바친다란 순수한 사랑으로부터 예배할 수 있게 됨을 말한다. (2075, 10042-III, 7891, 1937, 1947, 10055)
주목해둘 게 있다. 위 구절에서 언급되고 있는 단식(영혼을 괴롭게 함)이 스스로의 강박 충동(self-compulsion)을 뜻하는 듯 보여진다. 그럼에도 분명한 것은 자아 강박 충동과 함께 예비 사항으로 붙어 다니는 것은 인간 스스로는 악밖에 없어 자신 스스로 계명을 지킴으로 주님으로부터서만 선을 행할 수 있음을 고백하는 것이다. “너는 네 영혼을 괴롭게 하리라”라는 표현도 내적 의미로 볼 때 거기에는 진실된 겸허함이 이미 포함되어 있다. 이 겸허 없이 인간은 합당한 고백을 할 수 없다. (1937-1항)

28절. 그리고 너희는 동일한 이 날 어떤 일도 해서는 안 된다. 그 이유가 이것은 보상의 날이어서, 너의 하느님 주님 앞에 너를 위해 보상을 받기 때문이다.

영적 의미

위 상태에서는 견뎌내어야 할 어떤 시험도 없는데 그 이유는 선과 진리 양 측면에서 주님으로부터 오는 외적 인간과 내적 인간과의 재회가 있기 때문에서 이다.

세부적 영적 의미

이 날에 어떤 일도 하지 못함이란 위 상태에서는 견뎌 내어야 할 어떤 시험도 없다는 것을, 너희 하느님 주 앞에서 보상의 날이라 함은 외적 인간이 내적 인간과 재회함, 이는 주님으로부터 이고 선과 진리 양면 모두에서 재회가 있다. (8888, 8890, 10042-III, 683, 2001)

29절. 같은 이 날 괴로움 받지 않는 혼은 누구든지 그의 백성들로부터 잘리운다.

영적 의미

만일 위 상태에서 인간 스스로는 악밖에 가진 게 없음을 인정하려 들지 않는다면 그는 그 이유로 해서 교회로부터 분리되어야만 하리라.

세부적 영적 의미

이 날 괴로움 받지(단식하지) 않는 사람은 누구를 막론하고 그의 백성들로부터 잘리운다(겨레로부터 추방시켜야 한다)란 위의 상태에서 누군가가 자신 스스로부터서는 악밖에 없음을 인정하려 들지 않는다면 그는 그 이유로 해서 그 즉시 교회로부터 분리된다. (1937, 1947, 10042-III, 5302, 1259)

30절. 그리고 같은 이 날에 어떤 일이든지 하는 혼은 누구이든 나는 그의 백성들 사이로부터 그 혼을 파괴할 것이다.

영적 의미

또한 넓은 의미의 교회의 위 상태 안에 있는 누군가가 영적 싸움에 종사하고 있거나 또는 이기적, 세상적 동기로 행동하고 있다면 그는 반드시 교회에서 분리될 필요가 있다.

세부적 영적 의미

이 날 일을 하는 사람은 그의 백성 사이로부터 그 혼을 파괴함(겨레로부터 추방함)이란 위와 같은 교회의 일반적인 상태에 있는 누군가가 영적 싸움에 종사하고 있거나 세상적, 이기적 동기로부터 행동한다면 그는 반드시 분리될 필요가 있게 된다. (8888, 8890, 5302, 1259)

31절. 너희는 여하튼 일을 하지 말 것이다. 이것은 너의 모든 거주지들에서 대대로 영원히 법령이다.

영적 의미

그 이유가 거듭남을 진전시키고 있는 사람은 이기적, 세상적 동기로부터 행동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은 내적, 외적 인간 모두에 해당되고, 거듭남의 모든 세부적인 상태에도 해당된다.

세부적 영적 의미

어떤 일도 하지 않는 것, 이것은 대대로 길이 지킬 법령이다란 거듭나는 과정에 있는 사람은 이기적, 세상적 동기로부터 행동해서는 안 된다는 것과 이는 내적, 외적 인간에, 그리고 세세한 모든 상태에서도 해당됨을 뜻한다. (8888, 8890, 7884, 471, 9845)

32절. 너에게 엄숙한 싐의 안식일이 있다. 그리고 너희는 너희 혼을 괴롭게 하라. 달의 아홉째 날 저녁, 저녁으로부터 저녁까지 너희는 너의 안식일을 지켜라.

영적 의미

이 상태에서는 천국적인 쉼과 평화를 미리 맛봄이 있고, 인간 스스로는 악밖에 없음을 진실로 인정함도 있는데 이는 신앙과 선행의 결합이 이전 상태에서 새로운 상태로 바뀔 때 있게 되는 희미함 속에서 거행될 때이다. 그 이유가 희미한 상태는 주님 안에서의 쉼과 평화의 상태에 앞서 있기 때문이다.

세부적 영적 의미

엄숙히 쉬는 안식일이다란 위의 상태에서는 천국적인 쉼과 평화를 미리 맛볼 수 있음을; 단식함이란 인간 스스로는 악밖에 없음을 인정하는 것을; 그 달 구일 저녁부터 안식일을 지킴이란 신앙이 선행과 결합함은 이전 상태에서 새 상태로 변화함에서 발생하는 희미함에서 거행된다는 것, 그 이유는 희미한 상태는 주님 안에서 있게 되는 쉼과 평화의 상태 앞에 있기 때문이다. (851, 1937, 1947, 제 27절, 2075, 7844, 851)

33절. 그리고 주님께서 모세에게 이야기하셨다, 말하기를,

영적 의미

더 나아가 주님께서는 신성한 진리를 수단으로 지각을 주시어 밝히 알게 하신다.

세부적 영적 의미

여호와란 사랑 측면에서의 신성한 존재를; 이야기하심(speaking)은 유입을; 모세는 신성한 진리 또는 말씀을 표현하고; 말하심(saying)은 지각을 뜻한다. (2001, 2951, 7010, 1791, 1822)

34절. 이스라엘의 자손에게 이야기하라, 말하기를, 이 일곱째 달의 십오 일은 주님에게 칠 일 동안 장막(tabernacle)의 절기이다.

영적 의미

영적 교회인에게 가르침이 있다. 이로부터 지각하는 바, 새로운 상태는 선 안에 진리가 이식되는 그 뒤를 이어야만 한다는 것, 이 새로운 상태란 진리 안에 선이 이식되는 것이요 이것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거듭나는 작업의 정점이라는 것이다.

세부적 영적 의미

이스라엘 백성에게 일러둠이란 영적 교회인에 대한 가르침, 이로부터 그는 지각함을; 일곱째 달 십오 일부터 장막절(초막절, feast of tabernacles)이다란 새로운 상태는 선 안에 진리가 이식됨에 이어 오게 된다는 것, 이 새로운 상태란 진리 안에 선이 이식되는 것이요, 이는 주님으로부터 오는 거듭나는 작업의 최정점이라는 뜻이다. (10355, 3654, 1791, 1822, 9294, 9295, 9296-5, 716)

35절. 첫째 날에 거룩한 모임이 있을 것이다. 너희는 노예 근성의 일을 하지 말라.

영적 의미

그런고로 선 밑에 진리가 새롭게 배열된다. 그리하여 이기적이고 세상적인 모든 동기를 마지막으로 거절해 버리면서 시험이 끝난다.

세부적 영적 의미

첫 날 거룩한 모임을 열고 노예 근성의 일(생업)에 종사하지 말라란 위로부터 선 밑에 진리가 새롭게 배열되어서 이기적으로 세상적인 모든 동기의 마지막 거절과 더불어 시험도 끝나게 됨을 뜻한다. (7891, 8888, 8890)

36절. 칠 일 동안 너희는 주님에게 불로 만든 제물을 바쳐라. 팔 일째에 너에게 거룩한 모임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너희는 주님에게 불로 만든 제물을 바쳐라. 이것은 엄숙한 집회이다. 너희는 노예 근성의 일을 하지 말라.

영적 의미

순수한 사랑으로부터 주님을 예배하는 거룩한 상태에 포함되는 것들, 즉 이 새로운 상태 안에는 선 밑에 진리가 재배열됨이 있고, 의지뿐만 아니라 이해함 측면에서 거룩한 예배의 재배열이 있고, 또한 세상적, 이기적 동기를 거절함과 더불어 외적 인간 안에도 선 밑에 진리가 질서 있게 배열된다.

세부적 영적 의미

칠 일간 주님께 제물을 태워 바침이란 순수한 사랑으로부터 주님을 예배하는 거룩한 상태를, 팔일 째 거룩한 모임을 연다란 이 새로운 상태에서 선 밑에 진리가 재배열됨을, 다시 주님께 제물을 태워 바침이란 의지 뿐만 아니라 이해함 측면까지에서 있는 거룩한 예배, 그러므로 이는 상호적이다. “이 날은 축제일(엄숙한 집회)이다”란 외적 인간 안에서 선 밑에 진리들이 질서 있게 배열됨을, 노예 근성의 일(생업)을 하지 말라란 이 역시 이기적이고 세상적 동기를 거절해야 함을 뜻한다. (716, 10055, 9296-5, 7891, 9296-5, 8888, 8890)

37절. 이것들은 주님의 절기이다, 너희는 거룩한 모임이 있기 위해, 주님께 불로 만든 제물, 태워 바침, 그리고 식사 제물, 희생 제물, 음료 제물을 각기 그것 (바치는) 날에 바치도록 (절기를) 선포하라.

영적 의미

가장 보편적인 거듭남 안에 있는 선을 자기 것을 삼는 데에 종속되는 상태들, 이 상태는 모든 이에게 질서에 따라 발생된다. 즉 진리의 새 배열이 거행되는 것, 이는 완전히 봉헌함을 수단으로 순수한 사랑으로부터 주님을 예배하기 위해서, 주님을 인정함으로 내면의 선을 자기 것으로 삼기 위해서, 영적 진리를 자기 것으로 삼기 위해서 거행된다.

세부적 영적 의미

이것들은 주님의 절기이다란 거듭남 가운데는 선을 자기 것으로 삼는 데에 종속되는 일반적인 상태들이 있다는 것을; 거룩한 모임을 선포함이란 위 상태에서 진리들의 새로운 배열이 거행된다는 것을; 제물을 주님께 불로 태워 바침이란 순수한 사랑으로부터 주님을 예배함을; 태워 바침은 충만된 봉헌, 식사 제물과 제물은 주님을 인정함으로 내면에 있는 선을 자기 것 삼는 것, 음료 제물(제주)을 그날그날 절차를 따라 바침이란 각 상태에 따라 영적 진리를 자기 것으로 삼아 감을 뜻한다. (9294, 7891, 10055, 10053, 2177, 4581, 10079, 10137, 10262, 4581-5, 487)

38절. 주님의 안식일 외에, 그리고 너의 선물들 외에, 그리고 모든 너의 서원물 외에 그리고 모든 자유의 바침 외에, 이것을 너희는 주님에게 드리라.

영적 의미

가장 일반적인 상태 외에도 더 있다. 즉 선은 주님으로부터만 있다는 것, 인간은 진리로 더 다져져야 한다는 것, 주님을 예배함은 자기 스스로 그분께 모든 선을 돌려야만 함을 인정하는 것이다.

세부적 영적 의미

그 외 주님의 안식일이란 가장 일반적인 또는 보편적인 상태를; 선물이란 선이 주님으로부터임을 인정함; 서약함이란 인간은 진리들로 확증할 수도 있다는 것을; 마음에 우러나서(자유 의지로) 바침이란 주님을 예배함은 자유로운 상태로부터 있어야 함을; 주님께 바치는 것들이란 모든 선은 그분으로부터임을 인정함을 뜻한다. (84, 8889, 5619, 3880, 10097, 5619)

39절. 너희가 토지의 열매들을 거두어 들일 때, 일곱 째 달의 십 오 일에 너희는 칠일 동안 주님의 절기를 지킨다. 첫째 날은 엄숙한 쉼이다. 그리고 팔 일째 날은 엄숙한 쉼의 날이다.

영적 의미

그러므로 선행과 결합된 신앙으로 충만된 마지막 새로운 상태가 있다. 이 상태들이 선한 일로 결실을 맺을 때 거기에 가장 높은 원리로부터 가장 낮은 원리에 이르기까지 쉼과 평화, 이와 더불어 완전하고 충만된 심정 속의 기쁨과 즐거움이 있게 된다. 이 상태는 항구적으로 갱신되어간다.

세부적 영적 의미

칠월 십 오일이란 신앙이 선행과 결합해서 충만해지는 상태 중 마지막 새로운 상태를; 거둔 땅의 소출이란 신앙과 선행이 선한 일들 안에서 열매를 맺을 때를; 칠 일간 주님의 절기를 지킴이란 모든 완성함과 거룩함 속에서 심정이 기뻐하고 즐거워함을; 첫 날 엄숙하게 쉬고 팔일 째에도 엄숙하게 쉬어라란 항구적으로 갱신되어지는 쉼과 평화의 상태가 가장 수준 낮은 원리에서 높은 수준에 이르기까지 모두 되어져 이를 통해 진리와 선, 선과 진리의 상호결합이 있게 됨을 뜻한다. (9294, 9295, 9296-5, 2044, 851, 7690, 9286, 9287, 2044, 716, 84, 8889, 9296-5)

40절. 그리고 너희는 첫째 날에 훌륭한 나무들의 열매, 종려나무의 가지들, 무성한 나무들의 큰 가지, 그리고 개울의 버드나무를 가져와라. 그리고 너희는 칠 일 동안 주 너의 하느님 앞에서 즐거워하라.

영적 의미

그러므로 이 상태에는 진리들로부터 오는 온갖 종류의 즐거움, 즉 영적, 합리적, 자연적, 감각적 진리들로부터 오는 즐거움이 있다. 또한 심정과 이와 병합된 이해함으로부터 주님 가운데서 즐거워하는 충만된 상태, 거룩한 상태도 있다.

세부적 영적 의미

첫 날 훌륭한 나무의 과일, 종려나무 가지, 무성한 나무의 큰 가지, 개울의 버드나무를 가져옴이란 위의 상태에서는 진리들 즉 영적, 합리적, 자연적, 감각적 진리들로부터 오는 온갖 종류의 선을 즐기게 된다는 것을; 칠 일간 주 너의 하느님 앞에서 즐거워 하라란 심정과 이해함이 병합되어 주님 안에서 기뻐하는 거룩한 상태를 뜻한다. (9296-6, 2001, 2044, 716)

41절. 그리고 너희는 해마다 칠 일을 주님에게 절기로 그것을 지킬 것이다. 이것은 너의 대대로 영원한 법령이다. 너희는 일곱 째 달에 그것을 지켜라.

영적 의미

그리고 위 상태는 거듭나는 사람 즉 외적, 내적 인간의 양 측면 모두에서 항구적으로 거룩한 상태이다. 이는 신앙을 수단으로 인정하는 데서 시작되어 사랑으로부터 즐거워하는 끝에까지 이르는 거듭나는 상태의 최정점이다.

세부적 영적 의미

해마다 칠 일간 주님에게 바치는 축제일로 지킴이란 위의 상태는 항구적으로 거룩한 상태가 될 것임을; 대대로 길이 지킬 규정이란 외적으로도 항구적임을; 일곱째 달이란 거듭나는 상태는 신앙을 수단으로 주님을 인정함으로 시작해서 사랑으로부터 즐거워하여 끝맺는다는 것을 뜻한다. (2044, 716, 7884, 851)

42절. 너희는 칠 일 동안 초막(오두막, booth)에서 거주하라. 이스라엘(족)에 속하는 본토박이인 모든 이는 초막에서 거주한다.

영적 의미

참으로 위 상태는 선 가운데 건설되는 내적 교회인, 외적 교회인에 속하는 갖가지 수준의 교회인에 대한 천적 상태이다.

세부적 영적 의미

칠 일간 초막에서 거하되 이스라엘 국민은 누구나 초막에서 살아야 한다란 위 사항들을 갖가지 수준에 있는 교인들의 천적 상태, 즉 선 안에서 건설되는 내적, 외적으로 있는 교회에 속하는 사람들의 상태라는 뜻이다. (9296-6)

43절. 내가 이스라엘의 자손들을 이집트의 토지로부터 데려올 때, 내가 그들을 초막에 거주하게 만들었다는 것을 너의 자손 대대로 알게 하려 해서 이다. 나는 주 너의 하느님이다.

영적 의미

그러므로 모든 이가 알아야 하는 바, 자연적일 뿐인 인간 수준의 굴레를 주님께서 벗겨주실 때,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의 거룩한 상태는 영적 교회인에 소속된다는 것, 이리하여 그는 선과 진리가 영원히 결합함으로 심정과 이해함 안에서 그분을 인정할 수 있게 된다.

세부적 영적 의미

“이렇게 하는 것은 내가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 땅에서 이끌고 나올 때 초막에서 살게 했던 일을 후손 대대로 상기시켜 주려는 것이다. 나 여호와가 너희 하느님이다”이란 모든 이가 알아야 할 것이 있는 바,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의 거룩한 상태는 영적 교회인이 주님에 의해 자연적일 뿐인 인간의 굴레에서 해방될 때에 그들에게 귀속되고, 그렇게 해방시켜 주신다는 것을 영적 교회인으로 하여금 선과 진리가 영원히 결합함을 수단으로 심정과 이해함에서 인정하게 하려는데 있다는 뜻이다. (9296-6, 8866, 2001, 9845)

44절. 그리고 모세는 이스라엘의 자손들에게 주님의 절기들을 선언하였다.

영적 의미

말씀 안에 있는 기쁨과 즐거움과 더불어 선을 자기것이 되게 하는 거듭남의 위 거룩한 과정에 관해 밝히 알게 하시는 것은 신성한 섭리에 속한다.

세부적 영적 의미

모세가 주님의 절기들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선포함이란 선이 말씀 안에 있는 기쁨과 즐거움으로 더불어 자기 것이 되는 거듭나는 이 거룩한 과정을 밝히 알게 하시는 것은 신성한 섭리에 속한다 라는 뜻이다. (7010, 3654, 10355, 9294, 2187)

23장의 종합적 고찰

본 장의 주제들을 살펴보기에 앞서 생각해 보아야 할 네 가지 것이 있다. 즉 글자적 의미 측면에서의 말씀, 글자적 의미에 있는 상응, 상응을 수단으로 글자적 의미가 함유하고 있는 내적 의미, 내적 의미에 묘사되어 있는 인간을 실지 체험하는 상태들이다. 말씀은 인류가 저작해 왔던 여느 책들과는 확실히 구분되는 책이다. 그 이유는 크게 나눌 수 있는 세 가지 의미 즉 천적, 영적, 자연적 의미들이 집합하여 완전한 시리즈로서의 내적, 영적 의미를 형성해 가는 방식으로 배열된 상응적 표현으로 빈틈없이 건축되어 있기 때문이다. 말씀을 얼핏 본다면 마치 글자적 의미가 영적 의미를 생산하고 있는 듯 여겨질는지 모른다. 따라서 말씀의 외관인 글자적 의미를 가지고 확증하는 것은 잘못된 방식이다. 사실 말씀의 글자적 의미 또는 외관을 생산하는 것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말씀 속의 내적 의미이다. 마치 주님께서 신성한 사랑으로부터 그분의 신성한 진리를 수단으로 영계의 모든 것, 자연계의 모든 것을 생산하시는 것과 같다. 따라서 자연계는 영계의 상응물일 뿐이다. 이 방식으로 말씀을 생각하게 되면 이른바 창조물들은 인간의 생산물이 아니라 신성한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자연계의 모든 것에는 최말단 형체로서의 신성한 진리 또는 신성한 지혜가 있는 것이다. 따라서 말씀은 최말단 형체 안에 있는 신성한 인간이요, 바꿔 말해 본질인 신성한 생명 또는 사랑이 최말단 형체 안에 있는 것이다. 더 나아가 유한한 인간 생명은 무한하신 분 즉 신성한 인간의 생명으로부터인 바, 말씀은 인간 존재가 거듭나아가는데 따르는 모든 상태들을 기술하고 있다는 것까지도 자연히 납득된다. 그러므로 여느 인간 생명 그리고 그 생명의 상태 변화를 묘사해 주는데 있어 이 세상 어떤 것도 말씀보다 더 완전하게 그려내 주지 못한다. 본 장에 묘사된 것으로부터 배우는 바, 인간은 거듭나는 동안 그 사람과 더불어서 싸움과 쉼이 번복되어 가는 상태들을 체험해 간다는 것이다. 한가지 유의할 사항이 있다. 싸움의 상태가 여섯 번 반복된다고 해서 거기에 꼭 맞게 여섯 번의 쉼의 상태가 있으리라는 수학공식 같은 생각을 글자 의미로부터 가져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 이유가 육 일 간 또는 여섯 번이라는 숫자 여섯은 영적으로는 양을 말하는게 아니라 상태들의 품질을 명시하기 때문이다. 간단히 말해서 6은 전투 상태를, 7은 휴식 상태를 의미한다. 이미 살핀바 있지만 말씀 안에서 위 두 숫자 모두는 각기 다른 국면에 있는 충만과 완성을 명시한다. 본 장에서 6은 싸움에 관련되는 모든 상태를, 7은 쉼에 관련되는 모든 상태들을 명시하고 있고 이로부터 알게 되는 것이 있다. 인간의 일반적인 상태는 세부적인 상태와 구별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주목해 두어야 한다. 그 이유는 글자적 의미 만에서 생각을 끌어낼 경우 내적 의미에 관한 우리의 지각함이 혼동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이제 주목해 볼 것은, 안식일이 거룩한 모임이라 불리는 것, 글자적 의미로 이렇게 불리는 것은 매우 적절한 표현이라는 것에 대해서이다. 어찌됐든 이런 생각은 영적일 경우 사라지게 되어있고 동시에 이는 주님에 의해 선 밑에 진리들이 질서 있게 배열되는 것으로 이해하게 된다. 그 이유는 선을 수단으로 진리들은 결합되고, 선으로부터 진리들은 생명과 활동력을 가진다. 그리고 진리들 안에 있는 선에 의거 인간은 각자의 품질을 지니게 된다. 그러므로 해서 “너희는 어디에서 살든지 이 날은 주님에게 안식일이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 이유가 사람들이 집안에 거주하듯 선은 진리 안에 언제나 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 특정한 개인 안에 있는 선은 여느 어떤 개인 안에 있는 선과 언제나 구별되고 진리들 역시 마찬가지이다.
일반적 상태에는 종속되는 세부적인 상태들이 언제나 포함되어 있다. 세부 상태 중 첫 번째 상태는 주님에 의해 악으로부터 해방되는 상태임은 두 말할 여지가 없다. 이는 인류라는 전체적 측면에서, 또는 개개인의 측면에 적용해서 생각해 볼 수 있다. 모든 인간은 인간 측면에서의 주님에 관한 가설을 수단으로 구속되어 왔다. 이 가설 안에는 인간을 속박하는 지옥의 권세를 이겨내시는 것, 그러므로 해서 거의 잃어버릴 뻔 했던 자유, 즉 선과 악 중 어느 하나를 선택하는 자유가 각 개인들에게 보존되게 해 주셨던 사항이 포함되어 있다. “거의 잃어 버릴 뻔 했던”이라고 말하는 이유는 악의 권세가 절대적으로 득세하기 시작했기 때문인데 만일 구속의 역사가 결과되지 않았다면 인류는 멸망되고 말았을 것이다. 그 이유는 인간의 안전은 선과 악 또는 천국과 지옥 사이의 영적 균형(equilibrium)에 의존되기 때문이다. 이 균형으로 인해 인간은 선택의 자유 속에 거할 수 있다. 그러므로 주님의 강림은 당연히 있어져야 했던 것이고 이 위대한 구속이 성취되는 한편 건전한 마음을 지닌 모든 사람은 계속 선택하는 자유를 가졌고 악을 선택하게 하는 강요가 없어졌던 것이다. 예를 들면 세례자 요한의 선교에 사람들이 귀를 기울이게 되는 것, 마태복음 7장 끝 절의 경우같이 주님의 가르침에 경청하게 된 것 모두가 이에 해당된다. 이후 인간의 자유는 절대적으로 잃어버리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고 앞으로도 그러하리라.
이제 악으로부터 해방되는 사항을 일반 측면 뿐만 아니라 개인 측면에서도 생각해 보자. 이는 주님이 하시는 일에 인간이 협동(co-operation)함을 통해 주님께서 결과되게 하신다. 그 이유는 협동하느냐 않느냐를 선택하는 자유가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자유 의지 또는 자유로운 결정을 각 개인이 실시하는 사항이 유월절이 제정되는 사건으로 표현되어져 있는데 좀 더 집어내어 말한다면 어린 양 또는 염소를 선택하는 것으로 의미되고 있다 (출애굽 12:5). 그 이유가 이 짐승이 순진 측면의 주님으로부터 온 선을 나타내고, 이 선이 인간을 해방한다. 그리고 이 짐승의 고기를 먹는 것은 이 선을 자기 것으로 삼는 것을 나타내 주고 있다. 한편, 그 피는 집의 좌우 문설주와 문 상인방에 바르도록 지시되었는데 이는 자연적 수준의 인간 안에 있는 진리들이 앞서 받아들여지게 됨을 의미한다. 본 장을 다루는 이 지면을 통해 유월절의 사건 모두를 설명할 수는 없고 단지 그 사건이 개개인의 측면에서 있게 되는 구속의 방법을 묘사하고 있다는 것만을 강조하고 생략하기로 한다. 위와 같은 관점이 무교절, 누룩 없는 빵을 먹는 절기에 관한 사항에도 적용된다. 누룩이 안 들어간 빵을 먹는 것, 즉 무교절은 거듭나는 과정에서 개개인이 깨끗해지는 것을 나타내준다. 무교절에 관한 주제를 살피는 가운데 명확히 알게 되는 것은 보편적인 구속과 세부적인 구속 즉 인류라는 차원에서의 구속과 각 개인 차원에서의 구속이 어떻게 연결을 이루고 있는가에 대해서이다. 한 가지 상념해야 할 사항은, 위의 구속 또는 악에서의 해방, 그 결과 깨끗해짐은 언제나 인간과 더불어서라는 것, 그리고 이는 계속적인 경험 뿐만 아니라 한 가지 경험 안에서 동시에 일어나기도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악행을 계속 중단해가고 선행을 잘 배우려고 노력하고 있다면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위의 역사를 차츰 밝히 알게 해 주신다.
인간 거듭남에 종속된 두 번째 상태는 위의 사항보다 좀더 신경을 써야 하리라 본다. 이 두 번째 상태가 추수절(the feast of Pentecost)로 표현되고 있는데 선 안에 진리가 이식되는 상태이다. 이 표현은 악에서 해방됨이라는 앞 문단의 주제만큼 쉽게 이해될 수 없는 말이라 생각된다. 따라서 이런 질문이 있을는지 모른다. “어떻게 선 안에 진리가 이식될까?” 사실 대답은 단순하다. 인간이 진리를 원하고 사랑해서 실천할 때 그 진리는 선 안에 이식되어진다. 그러나 우리가 진리를 알고 있지 않다면 어떻게 진리를 바래고 사랑하고 실천할 수 있을까? 이 질문으로부터 얻게 되는 명확한 것은, 가르침을 받는 상태가 먼저 있어야 할 것이라는 것, 이 가르침 안에 진리들이 있고, 이 진리가 땅(마음)에 뿌려져서 풍성한 수확을 거둘 수 있도록 장치되어 있다는 것일 게다. 추수절의 햇곡식(첫 열매)은 거듭나는 인간이 습득한 진리들에 의거 자기 생활을 만들어 가는 과정 중 첫 노력을 상징하기에 꼭 맞는 표현이다. 그래서 두 번째 절기와 연결을 이루게 하는 햇곡식에 관련된 사항이 매우 상세하게 언급되고 있다. 우리의 초년 시절에 단순한 자극 때문만이 아닌 원리로 삶을 꾸린다는 것은 대단히 큰 가치가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진리를 습득하지만 자신 스스로 그 진리에 언제나 순종되도록 준비되는 것은 아니다. 한가지 여기서 알게되는 것은 진리가 선 안에 이식되는 과정은 악으로부터의 해방에 이어 시작되어 항구적으로 있어진다는 것이다. 그리고 순종의 각 행동은 올바른 방향으로의 한 단계이다. 이런 한 단계가 시작되기 전 먼저 주님을 인정함이 있게 되는데 이것이 곡식단을 흔듦으로 표현되어 있다. 이 흔듦(waving)은 신성한 작용의 결과 또는 신성이 마음에 흘러듦으로 인해 있게 되는 마음의 활동이다. 유월절은 유대교의 달력으로 보아서 7월 14일이고, 안식일이 15일, 흔들어 바침은 16일에 있어진다. 이는 인간 삶에 있는 상태들에는 연속성이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다시 말해 우리는 거듭나는 과정 속에서 순종을 수단으로 진리를 선 안에 항구적으로 이식해 간다는 것을 뜻한다. 그리고 우리는 선과 진리에 관한 각자의 애착을 주님께 바침으로 그분을 예배하게 되어 있다. 이것이 어린 양을 바치는 것, 식사 제물, 음료 제물을 바치는 것으로 의미되어 있다. 그렇게 예배드렸다고 해서 진리가 선 안에 완전히 이식되는 정점인 마지막을 장식하는 절기에 도착된 것은 아니다. 영적으로 어떤 셈(count)을 해야 할 게 있다. (날 수를) 세어 본다는 것은 각자의 상태에 관한 품질을 알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날수를 제대로 헤아릴 줄 알게 하시어 우리의 심정이 지혜를 얻게 하소서.” 이는 시편 90편 12절의 말씀이다. 이는 주님만이 우리 속 모든 상태에 관한 품질을 아실 수 있어 각자 상태의 품질에 꼭맞는 납득을 해주실 수 있으시다는 뜻이다. 그래서 그분만이 우리의 모든 상태를, 아마 우리가 할 수 없는 것들까지 모두를 정리정돈 해 주신다. 또한 우리의 상태들은 선 안에 진리가 이식됨을 수단으로 결과되는 선의 발전에 달려 있다. 이로부터 우리가 지각할 수 있는 것은 세부적으로 있는 사항들, 즉 흔들어 바침의 반복, 추가되는 세세한 제물들에 관한 비밀스런 원인들일 것이다. 그리하여 선 밑에 진리들이 완전히 배열되는 상태, 이른 바 “충분히 밝게 하심, 충만된 계시”라는 최정점에 도달되어 각종 시험들, 즉 주님을 예배하는데 이기적이고 세상적 동기로부터 행동하려는 모든 기질이 정지된다. 이 항목에서 특이한 것은 누룩을 넣어 만든 새 식사 제물이다. 그 이유가 일반적으로 제단에 바쳐지는 식사 제물에는 누룩을 넣어 굽지 않도록 명령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본문의 경우 이에 반대되는데 왜 그럴까? 그 이유는 진리가 선 안에 이식되는 동안 진리가 먼저 깨끗하기 위해 진리와 거짓의 싸움이 있게 된다는 것을 분명히 우리로 알도록 명시해 두시기 위해서이다.
이제 선의 이식을 의미하는 세 번째 절기를 살피기 전 먼저 주목해 보아야 할 것이 있다. 나팔 부는 절기(새해맞이)와 보상(죄 벗음)의 날과 더불어 절기 세 가지 모두가 칠월에 거행된다는 것이다. 중간 중간에 있는 절기들이 정확히 지정된 날 칠월에 거행되어야 하는 이유가 글자적 의미에서는 발견할 수 없다. 그러나 영적 의미로는 충분한 설명이 가능하다. 일곱째 달은 진리가 선 안에 이식되는 작업이 계속되는 동안 거룩한 신앙의 상태가 최정점에 이르는 것을 명백히 표현한다. 그리고 칠월 첫째 날과 열 번째 날도 특별한 의미를 갖고 있다. 즉 특별한 계시(밝히 알게 해 주심, 첫째 날)는 진리가 선 안에 충분히 이식되게 하고, 이 이식된 진리는 숫자 열로 명시되는 주님께서 우리 속에 아껴두신 것들(remains)이 충만해지는 상태로 완성된다는 뜻이다. 이에 필수적으로 수반되는 사항은 악의 완전한 제거인데 이것이 보상받는 날로 의미된다. 이에 관해서는 제 16장에서 충분히 살폈으므로 생략한다. 엄밀히 말한다면 완전한 악의 제거나 계시는 인간의 실제 경험에 의거한 심판 과정에서 있게 된다. 다시 말해 우리 속에 든 악이 충분히 제거되기 전에는 우리 속에 진리가 아무리 많아도 선이 되지 않는다. 따라서 개개인에 관련된 거듭나는 과정을 묘사하고 있는 본문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새삼 느낄 수밖에 없으리라.
한정된 지면 관계로 세 번째의 큰 절기에 관련하여 한 두 가지 것만을 살펴볼까 한다. 이 절기는 선이 진리 안에 이식되는 것을 의미한다. 먼저 상기해둘 사항이 있다. 우리 삶의 두 상태들이 두 번째, 세 번째 절기로 나타내지고 있다는 것, 비록 우리가 의식하는 상태에 따라 계속적으로 거행되고 있다 해도 우리는 전자의 상태에 있을 경우 자연적 삶 속에서 선을 충분히 실감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자연적 수준의 인간은 그 속에 있는 악과 잘못들 때문에 영적 수준의 인간과는 하나를 이루지 못한다. 더구나 주님으로부터 있어지는 선이 이식되는 것은 진리의 이식과 거의 동시적으로 발생한다. 한마디로 우리는 거의 동시에 물과 성령으로 태어나진다. 인생이라는 여행에 위 사항을 첨가해 생각해 본다면 여행기간 동안 일어나는 수많은 사건에 얽힌 심정 상태의 변화가 있을 때마다 큰 위로가 될 수도 있다. 여행의 종착지인 천국에서 실감하게 될 마지막 선의 상태는 아주 어린 삶의 시기에 주님께서 우리 안에 이식해 두신 선과 정확히 같을 것임은 두말할 여지가 없다.
선의 이식을 의미하는 절기들이 수확하는 절기(the feast of the ingathering)라 불릴 뿐 아니라 장막절(the feast of tabernacles)이라고도 불리고 있다. 장막(초막)절은 사람들이 칠 일간 자기 집처럼 거주하는 곳이 천막이기 때문이다. 누군가가 텐트에 거주함은 선이 진리 안에 거주하는 것, 또는 내적 인간이 외적 인간 안에 거하는 것을 명시해준다. 이로부터 알 수 있는 장막절에 관한 게 있다. 즉 선이 이식될 때 외적 인간은 내적 인간과 하나를 이루고 선은 최말단에 존재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 절기라는 것이다. 모든 인간은 이 세상, 저 세상 삶 모두에서 선에 관한 자기의 외적 상태가 내적 상태와 하모니를 이룩하도록 노력해 가는 과정은 계속된다. 계속되는 가운데 있게 되는 충만함의 모두 안에서 위 두 상태의 일치는 점점 더 쉽게, 더 빨리 이루어져 가게 된다.
마지막으로 주목해둘 것이 있다. 훌륭한 과일과 종려나무가지가 위 장막절의 의미와 어떻게 연결되는 가에 대해서이다. 이 구절은 우리가 완전한 상태 안에서 온갖 종류의 선들, 외적으로나 내적으로 있는 모든 선들을 어떻게 즐기게 되는지를 보여주려는 것이다. 식물 형태로 볼 때 종려나무에는 가지가 없다. 그러나 그 나무에는 나뭇가지처럼 보이는 무성한 잎들을 가지고 있다. 형태가 이러하다고 해서 그 나무가 지니는 의미에 어떤 변화가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상응으로 살피면 알게 되므로 첨언했을 뿐이다. 본 장에 걸쳐 있는 각종 절기를 내적 의미로 살폈다. 이는 거듭나는 인간의 전 생애, 계속적인 체험과 더불어 동시에 일어나는 거듭남, 주님의 역사에 인간의 협동이 어우러져 거듭남은 작은 완성에 작은 완성이 겹쳐 물방울에 물방울이 합쳐져 시냇물과 강물이 되듯 어떻게 완성되는가를 우리로 발견하게 해 준다.
*************************************************

레위기 24장

성경: 레위기 1장

1. 그리고 주님께서 모세에게 이야기하셨다, 말하시기를,
2. 이스라엘의 자손들에게 명령하여, 그들이 너에게 빛을 내기 위해 찧어 만든 순수한 올리브 기름을 가져오게 하여, 등불이 계속적으로 타도록 하라.
3. 증거(궤)의 베일 밖, 만남의 천막에서, 아론은 등불이 저녁부터 아침까지 주님 앞에서 계속적으로 (빛을 내게) 정돈하라. 이것은 너의 세대를 통틀어 영원한 법령이다.
4. 그는 계속적으로 주님 앞 순수한 등잔대 위에 등불을 배열하라.
5. 그리고 너는 고운 곡식 가루를 가져와, 그리고 그것으로 열 두 과자(cake)들을 구워라. 십분의 이 에바가 과자 하나이다.
6. 그리고 너는 그것들을 두 줄로, 각 줄에 여섯 개씩, 주님 앞 순수한 탁자 위에 차려놓아라.
7. 그리고 너는 각 줄 위에 순수한 유향을 놓아라, 하여, 이것은 기념물을 위한 빵(bread), 주님에게 불로 만든 제물이다.
8. 안식일 마다 그는 계속적으로 주님 앞에 그것을 차려 놓아라. 이것은 이스라엘의 후손들을 위하여서이고, 영원히 지속되는 언약이다.
9. 그리고 이것은 아론과 그의 아들들을 위해 있다. 그리고 그들은 거룩한 장소에서 그것을 먹어라. 그 이유가 이것은 영구적인 법령을 수단으로 불로 만든 제물인 바, 그에게 최고로 거룩하기 때문이다.
10. 그리고 자기 아버지가 이집트인인 이스라엘의 여인의 아들이 이스라엘의 자손들 사이에서 밖에 나갔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여인의 아들과 이스라엘의 사람이 진영에서 서로 승강이했다.
11. 그리고 이스라엘의 여인의 아들이 (주님의) 이름을 모독하였다, 그리고 저주했다. 그리고 그들은 그를 모세에게 데려왔다. 그리고 그의 어머니의 이름은 슬로밋인데, 단 지파 디브리의 딸이다.
12. 그리고 그들은 그를 안쪽에 가두었다, 하여, 주님의 입에서 그들에게 선포가 있을지 몰라서였다.
13. 그리고 주님께서 모세에게 이야기하셨다, 말하시기를,
14. 진영 밖으로 저주했던 그를 끌어내라. 그리고 그의 저주하는 말을 들었던 모든 이는 그들의 손을 그의 머리 위에 놓게 하라, 그리고 모든 회중이 그를 돌로 치게 하라.
15. 그리고 너는 이스라엘의 자손들에게 이야기하라, 말하기를, 자기 하느님을 저주하는 자는 누구든지 자기 죄를 낳는다.
16. 그리고 주님의 이름을 모독하는 자, 그는 확실히 죽음에 놓인다. 모든 회중이 그를 반드시 돌로 칠 것이다. 낯선 자이든 본토박이이든 (주님의) 이름을 모독할 경우, 죽음에 놓이게 하라.
17. 어떤 사람을 세게 때려 죽게 만드는 자는 정녕 죽음에 놓인다.
18. 그리고 짐승을 세게 쳐서 죽게 만든 자는 그것을 변제할 것이다. 즉 목숨을 위해서(인바) 목숨으로 (변제하라).
19. 그리고 만일 사람이 자기 이웃을 흠집나게 했다면, 그가 했던 대로 그것을 그에게 해줄 것이다.
20. 파괴(breach)에는 파괴로, 눈에는 눈으로, 이에는 이로 (되갚으라). 즉 그가 사람에게 손상을 입게 하였으면, 그렇게 그도 손상을 입게 하라.
21. 그리고 짐승을 죽인 자는 그것을 변제하라. 그리고 사람을 죽인 자는 죽음에 놓인다.
22. 낯선 자이든, 본토박이 이든 너희는 한가지 법을 가진다. 그 이유가 내가 주 너의 하느님이기 때문이다.
23. 그리고 모세가 이스라엘의 자손들에게 이야기했다, 그리고 그들은 진영으로부터 그를 데리고 나갔다, 그리고 그를 돌로 쳐죽였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자손들은 주님께서 모세에게 명령한 대로 실시했다.

영적 의미 요약

* 영적 인간의 상태에 적합한 천적 사랑의 선은 모든 영적 진리의 근원이며 영적 왕국에서 항구적으로 빛이 되어 있다, 1-4절.
* 천적, 영적 선이 명백해짐 다시 말해 주님에 대한 순수한 사랑과 이웃을 향한 사랑에 관하여, 이 두 선은 정밀하게 구별된다는 것, 이 두 선은 영적 투쟁으로 획득된다는 것, 이 두 선은 인간의 저장소 안에 존재한다는 것, 이 두 선은 주님으로부터 존재함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 이 두 선은 각각에 상응하는 진리를 동반한다는 것, 이 두 선은 인간에 의해 자기 것으로 삼아지게 된다는 것에 관하여, 5-9절.
* 교회에 만연되고 진리를 더럽히는 악에서 나온 거짓들에 관하여, 특히 신성한 인간에 관한 교리를 모독함에 관하여, 이런 악한 품성을 지닌 자들은 한동안 외적인 속박으로 억류되었다가 심판을 맞게 되어 단죄된다는 것에 관하여, 10-14절.
* 모독에 관하여, 진리와 선에 가해진 피해에 대하여, 악과 거짓들이 스스로 심판을 하게 되는 응보에 관하여, 15-23절.

각 절의 영적 의미

1절. 그리고 주님께서 모세에게 이야기하셨다, 말하시기를,

영적 의미

지각을 주시는 신성한 진리를 수단으로 주님께서 밝히 알게 하신다.

세부적 영적 의미

주님(여호와)란 사랑 측면에서의 신성한 존재를; 말씀하심은 유입을; 말하심은 지각을; 모세는 신성한 진리 또는 말씀을 각기 명시한다. (2001, 2951, 7010, 1791, 1822)

2절. 이스라엘의 자손들에게 명령하여, 그들이 너에게 빛을 내기 위해 찧어 만든 순수한 올리브 기름을 가져오게 하여, 등불이 계속적으로 타도록 하라.

영적 의미

주님으로부터 영적 교인에게 유입되는 것 때문에 영적 교인은 자기 상태에 걸맞는 천적 사랑의 선을 영적 진리의 근원이 되는 빛으로 인정하게 된다.

세부적 영적 의미

이스라엘 백성에게 명령함이란 영적 교회인에게 주님으로부터의 유입이 있음을, 빛을 내기 위해 순 올리브 기름을 모세에게 가져옴이란 영적 교회 상태에 적합한 천적 사랑의 선은 신성한 진리를 수단으로 주님으로부터 있게 됨을 인정함을, 빛을 내기 위한 기름이란 선이 진리의 근원이라는 것을, 계속 불을 밝힘이란 항구적으로 영적 왕국에 빛이 있도록 하기 위함을 뜻한다. (5486, 3654, 886, 10303, 7010, 9296-5, 9667, 9549, 9550, 10200-02)

3절. 증거(궤)의 베일 밖, 만남의 천막에서, 아론은 등불이 저녁부터 아침까지 주님 앞에서 계속적으로 (빛을 내게) 정돈하라. 이것은 너의 세대를 통틀어 영원한 법령이다.

영적 의미

그 이유가 위 빛은 인간의 천적 수준으로부터 영적 수준으로 흐르면서 희미한 상태와 밝은 상태 안에 있는데 이는 천적 선의 작용을 통하여서이다. 이 빛은 거듭나는 과정동안, 그 후 영원하게 내적 인간과 외적 인간 모두에게 빛이 되어 있다.

세부적 영적 의미

아론이 등불을 켜서 만남의 천막 안 증거궤 앞 베일 밖에 두어 저녁부터 아침까지 계속 주님 앞을 비추게 함이란 이 빛은 천적 선이 작동함으로 해서 희미한 상태에서 밝은 상태에 이르는 모든 상태 안에 있는 인간 마음의 영적 수준에 천적 수준으로부터 흘러감을 뜻한다. 이것은 너의 세대를 통틀어 영원한 법령이다란 이는 내적, 외적 인간 모두에, 거듭나는 기간 그리고 그 후의 기간에 걸쳐 있는 영원한 규정이라는 뜻이다. (9946, 10200-02, 9670, 3540-2, 10133, 7884, 7931)

4절. 그는 계속적으로 주님 앞 순수한 등잔대 위에 등불을 배열하라.

영적 의미

그 이유가 영적 수준은 계속 주님에게서 오는 거짓과 혼합 안 된 신성한 진리의 특별한 저장소이기 때문이다.

세부적 영적 의미

그는 계속적으로 주님 앞 순수한 등잔대 위에 등불을 배열하라란 영적 수준은 주님으로부터 계속 오는 거짓과 혼합 안 된 신성한 진리를 저장하는 특별한 곳이다는 뜻이다. (9548-50, 10133)

5절. 그리고 너는 고운 곡식 가루를 가져와, 그리고 그것으로 열 두 과자(cake)들을 구워라. 십분의 이 에바가 과자 하나이다.

영적 의미

또한 순수한 천적 진리 안에 천적 선이 있어 명백해진다. 그리하여 영적 선이 영적 인간에 의해 획득된다. 위 순서를 통해 천적 천국과 영적 천국이 결합되어진다.

세부적 영적 의미

고운 곡식 가루를 가져다가 열 두 과자들을 구워라란 천적 진리, 그 안에서 천적 선이 명백해진다. 그런고로 해서 영적 선이 영적 왕국에 파생된다. 과자 한 개는 십 분의 이 에바이다란 천적, 영적 천국이 결합됨을 통하여를 뜻한다. (9995, 2177, 2280, 3272, 2177, 2280)

6절. 그리고 너는 그것들을 두 줄로, 각 줄에 여섯 개씩, 주님 앞 순수한 탁자 위에 차려놓아라.

영적 의미

위와 같이 결합된다 해도 영적 선은 천적 선에서 구별되어 진다. 그리고 위 두 선 모두 충만된 시험에서의 승리를 통해 획득된다. 위 두 선은 영적 교회인의 저장소 안에 있게 되고 이 선이 주님으로부터 임을 인정한다.

세부적 영적 의미

여섯 개씩 두 줄로 주님 앞 순수한 탁자 위에 차려 놓아라란 위와 같음에도 불구하고 영적 선은 천적 선과 구분된다는 것, 둘 다 시험에 완전히 승리함으로 획득된다는 것, 둘 다 영적 교회인의 저장소 안에 있다는 것, 그리고 둘 다 주님으로부터 임을 인정한다는 뜻이다. (5194, 9864, 8888, 9545, 2001, 3272)

7절. 그리고 너는 각 줄 위에 순수한 유향을 놓아라, 하여, 이것은 기념물을 위한 빵(bread), 주님에게 불로 만든 제물이다.

영적 의미

위 선은 각각에 상응하는 진리를 동반하는데 이 진리는 일반적으로 볼 때 신앙의 진리이다. 그 이유가 진리는 선의 형체, 선을 표현해 주기 때문이다. 이 진리를 통해 선은 항구적으로 기억 안에 있는다. 그리하여 주님이 인정되어져 사랑으로부터, 이 사랑과 결합된 신앙을 수단으로 예배되어진다.

세부적 영적 의미

주님께 태워 바치는 제물이요 기념을 위한 빵이 되도록 각 열 위에 순수한 향을 올려 놓아라란 위의 선들은 그 선에 상응되는 진리를 동반한다는 뜻인데, 그 이유는 진리가 선을 표현하고 그 선의 형체이고, 이 진리를 통해 선은 기억 속에 항구적으로 있게 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주님은 사랑으로부터 그 사랑과 결합된 신앙을 수단으로 인정되어진다. (2177, 10177, 6888, 10055)

8절. 안식일 마다 그는 계속적으로 주님 앞에 그것을 차려 놓아라. 이것은 이스라엘의 후손들을 위하여서이고, 영원히 지속되는 언약이다.

영적 의미

천적, 영적 선 모두 주님으로부터 인간에게 파생되나, 주님께서는 그분의 인간이 신성이 되심을 수단으로 하시는 바, 위 선들은 인간과 함께 신성한 인간으로부터 존재한다. 따라서 천적, 영적 선을 수단으로 교회 속의 사람은 주님과 영원한 결합을 이룬다.

세부적 영적 의미

안식일 마다 계속적으로 주님 앞에 그것을 차려 놓아라란 천적 선이든 영적 선이든 모두 주님으로부터 인간에게 파생된 것임을, 이는 이스라엘 백성을 위한 영원히 지속되는 언약이다란 주님의 인간이 신성이 되신 덕택에 위의 선들은 신성한 인간으로부터 인간과 더불어 있게 되었음을, 이를 수단으로 교인은 주님과 영원히 결합할 수 있다는 뜻이다. (2177, 8886, 8889, 8886, 8889, 665, 666)

9절. 그리고 이것은 아론과 그의 아들들을 위해 있다. 그리고 그들은 거룩한 장소에서 그것을 먹어라. 그 이유가 이것은 영구적인 법령을 수단으로 불로 만든 제물인 바, 그에게 최고로 거룩하기 때문이다.

영적 의미

이리하여 천적, 영적 인간 모두는 거룩한 상태에서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을 자기 것으로 가능하게 된다. 그런 이유는 선은 천적 인간의 참 생명으로 진리 안에서 직접 명백해지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위 인간으로 주님을 인정할 수 있게 해서 탁월한 수준의 사랑 속에서 주님을 예배할 수 있게 한다.

세부적 영적 의미

그것은 아론과 그의 아들들을 위함이란 천적, 영적 인간을 위한 선임을, 그들은 그것을 거룩한 장소에서 먹어야 한다란 위 선들은 거룩한 상태에서 자기 것으로 삼을 수 있음을, 여호와께 태워 바치는 음식 가운데서도 더 없이 거룩한 바, 영구적인 법령이다란 선은 천적 인간의 참 생명이요, 진리 안에서 직접적으로 명백해진다는 것을, 이 인간은 빼어난 수준의 사랑으로 주님을 인정하고 예배할 수 있음을 뜻한다. (9946, 2187, 3210, 10055, 7884, 7931)

10절. 그리고 자기 아버지가 이집트인인 이스라엘의 여인의 아들이 이스라엘의 자손들 사이에서 밖에 나갔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여인의 아들과 이스라엘의 사람이 진영에서 서로 승강이했다.

영적 의미

위와 다른 면이 있다. 자연적 사랑 뿐인 데에 있는 악에서 파생되는 거짓이 영적 교회를 뒤집으려는 이기심인데, 계속 이 교회에 만연되고 이 결과 다툼이 발생한다.

세부적 영적 의미

아버지가 이집트 출신인 이스라엘 여인의 아들이란 자연적 사랑 뿐인 악으로부터 파생된 거짓을; 이 악은 거꾸로 된 영적 교회에 있는 이기심에 근원된다는 것을; 이스라엘 백성 중에서 빠져나갔다란 교인에게 악에서 나온 거짓이 유입됨을; 이스라엘 여인의 아들과 이스라엘 사람이 진영에서 다툼이란 거짓이 만연되고 그것과 싸우는 것을 뜻한다. (1147, 3654, 3703-20, 9391-10, 3703, 7488, 7124, 1571)

11절. 그리고 이스라엘의 여인의 아들이 (주님의) 이름을 모독하였다, 그리고 저주했다. 그리고 그들은 그를 모세에게 데려왔다. 그리고 그의 어머니의 이름은 슬로밋인데, 단 지파 디브리의 딸이다.

영적 의미

이리하여 교회 안에 있는 거짓 즉 악에서 나오는 거짓 속에 있는 모든 이들은 교회의 진리를 더럽히는데, 특히 신성한 인간에 관한 교리를 더럽힌다. 그렇게 해서 이들은 스스로 주님께 등을 돌려 자신들이 악 가운데 있음을 확증한다. 그러므로 이런 상태에 있는 이들은 신성한 진리의 심판에 놓여지면 이들의 교회는 끝장을 본다. 이런 상태의 외적 근원은 감각적이고 육적 기쁨인데, 이 기쁨은 감각적 오류로부터, 바깥쪽인 외관으로부터 사물을 판단하는 오로지 자연적 수준뿐인 인간의 착상으로부터 온다.

세부적 영적 의미

이스라엘 여인의 아들이 주님의 이름을 모독함이란 교회 안에 있는 거짓 또는 악에서 나오는 거짓 속에 있는 이들은 교회의 진리들을 모독하는데 특히 신성한 인간에 관한 교리를 모독한다. 그러므로 해서 그들 스스로 주님께 등을 돌리고 자신들이 악에 있음을 확증하게 된다는 것을; 모세에게 데려옴이란 교회의 말기에 신성한 진리의 심판에 서게 됨을; 그 어미의 이름은 슬로밋인데 단 지파에 속한 디브리의 딸이었다란 위 상태의 외적인 근원지는 감각에 관한 오류들로부터, 그리고 오로지 외관으로만 판단하는 자연적일 뿐인 인간의 상상으로부터 오는 감각적이고 육적일 뿐인 기쁨이다. 그 이유가 어머니는 외적 근원을; 이름은 품질 또는 상태를; 슬로밋이란 “나의 평화, 나의 행복, 나의 보상”이라는 뜻을 지녔기 때문이다. 사실 슬로밋이 지닌 뜻은 좋은 의미에서는 천국의 평화, 행복, 그리고 보상이지만 본문의 경우 반대 의미인 바 오로지 감각적이고 육에 속한 행복 또는 기쁨을 뜻한다. 딸은 좋은 의미에서는 애착 또는 선을 뜻하나 이 구절의 경우 그 반대인 악한 애착을 뜻하고 있다. 디브리는 “설득력이 있는, 능변이 있는”(Gesenius 참조), “들로부터의 어떤 것”(Früst 참조)을 뜻한다. 그러므로 본문의 경우 감각적인 것에 바탕을 둔 생각들 또는 감각 속의 오류들을 뜻할 것이라 생각된다. 단은 판결하는 자, 그리고 좋은 의미에서 거듭나지는 처음 사항에 있게 되는 진리의 확언, 그리고 거듭난 이들에게 있는 마지막 사항들이다. 본문의 경우 반대 의미인 바, 바깥쪽인 외관으로부터 사물을 판단하기만 하는 자연적 인간이 상상하여 추론함을 뜻한다. (1147, 8882, 6887, 379, 7010, 931, 1815, 8897, 144, 145, 4681, 995, 489, 568, 9987, 4440, 3923, 6397-6401)

12절. 그리고 그들은 그를 안쪽에 가두었다, 하여, 주님의 입에서 그들에게 선포가 있을지 몰라서였다.

영적 의미

이런 품성을 지닌 이들은 그들 악이 극점에 달하는 상태가 올 때까지 한동안 외적 속박으로 억류된다.

세부적 영적 의미

주님의 입에서 선포가 있을 때까지 그를 가두어 놓음이란 위 품성을 지닌 사람들은 그의 악이 극에 달할 때까지 한동안 외적 속박으로 억류되어진다는 뜻이다. (5037, 5096, 4217, 9096)

13절. 그리고 주님께서 모세에게 이야기하셨다, 말하시기를,

영적 의미

그 다음 지각을 주시는 신성한 진리를 수단으로 주님께서 밝히 알게 하신다.

세부적 영적 의미

주님(여호와)란 사랑 측면에서의 신성한 존재를; 이야기하심은 유입을; 모세는 신성한 진리 또는 말씀을; 말하심은 지각을 뜻한다. (2001, 2951, 7010, 1791, 1822)

14절. 진영 밖으로 저주했던 그를 끌어내라. 그리고 그의 저주하는 말을 들었던 모든 이는 그들의 손을 그의 머리 위에 놓게 하라, 그리고 모든 회중이 그를 돌로 치게 하라.

영적 의미

악과 거짓으로 확증한 이들의 진짜 품성은 심판 과정에서 밝히 드러나져야 한다는 것, 그리고 불순종을 통해 스스로 확증했다는 것이 신성한 진리의 증언으로 입증될 때, 자기들 삶의 결과는 단죄되고 영적 인간에 의해 거절되어진다.

세부적 영적 의미

저주한 자를 진영 밖으로 끌어냄이란 악과 거짓이 확증된 진짜 품성은 심판 과정에서 명백해져야만 함을; 그가 저주하는 것을 들은 모든 사람이 그 사람 머리에 손을 얹는다란 신성한 진리의 증언으로 입증함을; 온 회중이 그를 돌로 친다란 그 삶의 결과에 대한 단죄, 영적 인간에 의한 거절을 뜻한다. (379, 10038, 10023, 9311, 4197, 10023, 6338, 8799, 7456)

15절. 그리고 너는 이스라엘의 자손들에게 이야기하라, 말하기를, 자기 하느님을 저주하는 자는 누구든지 자기 죄를 낳는다.

영적 의미

사악한 삶으로 주님에게 등을 돌리는 자는 자신의 선택에 의해 황폐되고 만다는 것이 신성한 진리의 증언이다.

세부적 영적 의미

이스라엘 백성에게 일러 말함이란 이것은 신성한 진리의 증언이다를; 저주함이란 사악한 생활로 주님께 등을 돌리는 것을; 죄를 낳음이란 자신이 선택해서 황폐해짐을 뜻한다. (7010, 10355, 1822, 379, 8882, 9937)

16절. 그리고 주님의 이름을 모독하는 자, 그는 확실히 죽음에 놓인다. 모든 회중이 그를 반드시 돌로 칠 것이다. 낯선 자 이든 본토박이 이든 (주님의) 이름을 모독할 경우, 죽음에 놓이게 하라.

영적 의미

특히 진리를 모독한 이들의 경우는 더욱 그러하다. 그 결과 그들에게서는 모든 진리가 박탈된다. 그가 교회의 내적 상태 이든, 외적 상태 이든 모두 해당된다. 그 이유는 이런 모독은 내적 이든 외적 이든 계속될 수 없고 오로지 제거되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세부적 영적 의미

주님의 이름을 모독한 자는 반드시 사형 시켜라란 특별히 진리를 모독하는 이들, 그들은 모든 진리를 박탈당하는 결과를 맞이하고야 만다는 것을; 온 회중이 그를 돌로 치라란 거짓은 처벌되고 교회에 의해 거절된다는 것을; 낯선 자 이든 본국인 이든 이란 그들이 교회의 외적 측면에 속하든, 내적 측면에 속하든 임을; 내 이름을 모독한 자는 정녕 죽으리라란 이런 모독은 내적으로 이든 외적으로 이든 계속 될 수 없는 바 오로지 제거되어야만 한다는 뜻이다. (8882, 6887, 2908, 6338, 8799, 7456, 7908, 8882, 6887, 2908)

17절. 어떤 사람을 세게 때려 죽게 만드는 자는 정녕 죽음에 놓인다.

영적 의미

시련(수습) 받는 상태에서 악한 생활로 진리를 거절하는 이는 반드시 황폐됨을 겪게 되리라.

세부적 영적 의미

남의 목숨을 끊은 자는 반드시 죽어야 한다란 수련 상태에서 악한 생활로 진리를 거절한다면 황폐됨을 겪어야 한다는 뜻이다. (8902, 4251, 2908)

18절. 그리고 짐승을 세게 쳐서 죽게 만든 자는 그것을 변제할 것이다. 즉 목숨을 위해서(인바) 목숨으로 (변제하라).

영적 의미

그러나 누가 자연적 인간 안에 있는 선한 생활만을 파괴했다면 그는 이기적 삶을 거절함으로 거듭날 수 있어 천국 생명을 받을 수도 있다.

세부적 영적 의미

짐승의 목숨을 끊은 자는 변제하라(산 짐승으로 보상하라)란 누가 자연적 인간 안에 있는 선한 생활만을 파괴한다면 그는 이기적 삶을 거절함으로 거듭날 수 있고 천국 삶을 받아들일 수도 있다. (4251, 7424, 9097, 9048, 9049)

19절. 그리고 만일 사람이 자기 이웃을 흠집나게 했다면, 그가 했던 대로 그것을 그에게 해줄 것이다.

영적 의미

반대로 만일 그가 다른 사람 안에 있는 선행을 파괴한다면 그 사람 안에 있는 선행 역시 파괴될 것이다.

세부적 영적 의미

누구든지 동족에게 상처를 입힌 자에게는 같은 상처를 입혀라란 누가 타인의 선행을 파괴한다면 자신에게 있는 선행도 자신에 의해 파괴됨을 뜻한다. (7837, 10490, 9048, 9049)

20절. 파괴(breach)에는 파괴로, 눈에는 눈으로, 이에는 이로 (되갚으라). 즉 그가 사람에게 손상을 입게 하였으면, 그렇게 그도 손상을 입게 하라.

영적 의미

위 경우는 이해함, 의지, 바깥쪽 생활 측면에서이다. 그 이유는 악은 그 악 위에 피할 수 없는 처벌을 가져오고, 거짓으로부터 행동하는 이는 거짓의 결과로 고통 당해야 한다.

세부적 영적 의미

파괴함에는 파괴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란 19절의 경우가 의지, 이해함, 바깥쪽 생활에 관한 것임을; “남에게 상처를 입힌 만큼 자신도 상처를 입는다”란 악은 피할 수 없는 처벌을 제 스스로 가져온다는 것, 거짓으로부터 행동하는 사람은 거짓의 결과로 고통받는다를 뜻한다. (9163, 2148, 6380, 9048, 9049)

21절. 그리고 짐승을 죽인 자는 그것을 변제하라. 그리고 사람을 죽인 자는 죽음에 놓인다.

영적 의미

외적 인간 안에 있는 선만 파괴한 사람은 회개로 거듭날 수 있다. 그 반면 내적 인간 안에 있는 선을 파괴한다면 황폐되고야 만다.

세부적 영적 의미

남의 짐승을 죽인 자는 물어주어야 하고 살인한 자는 사형에 처해야 함이란 외적 인간 안에 있는 선만을 파괴한 사람은 회개로 거듭날 수 있으나, 내적 인간 안에 있는 선을 파괴한다면 황폐되어질 수밖에 없다. (8902, 9097, 7424, 2908)

22절. 낯선 자 이든, 본토박이 이든 너희는 한 가지 법을 가진다. 그 이유가 내가 주 너의 하느님이기 때문이다.

영적 의미

위 같은 응보의 법칙은 교회 내에 있는 사람 이든 밖에 있는 사람 이든 공히 적용된다. 그 이유는 신성한 선은 신성한 진리에 의거 불변하게 행동되기 때문이다.

세부적 영적 의미

외국인 이든, 본국인 이든 한 가지 법만 있을 따름이다. 나는 주 너의 하느님이다란 응보의 법칙은 교회 내에 있든, 밖에 있든 공히 적용되는데, 그 이유는 신성한 선은 신성한 진리에 의거 불변하게 행해지기 때문이다. (9048, 9049, 6887, 2001)

23절. 그리고 모세가 이스라엘의 자손들에게 이야기했다, 그리고 그들은 진영으로부터 그를 데리고 나갔다, 그리고 그를 돌로 쳐죽였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자손들은 주님께서 모세에게 명령한 대로 실시했다.

영적 의미

그러므로 신성한 진리는 악이 거짓과 결합하도록 내버려 두어 악 가운데 있는 자들을 거절하는 도리 외에 심판에서 달리 행할 수 없다. 그리하여 지옥적 삶 가운데 있는 이들은 신성한 선으로부터 나온 신성한 진리에 순종하는 천국적 삶 속에 있는 이들로부터 분리되어진다.

세부적 영적 의미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야기함이란 신성한 진리는 심판에서 악 가운데 있는 이들을 거절할 도리밖에 없음을; 저주한 자를 진영 밖으로 끌어내 돌로 쳤다란 악은 악 속의 거짓과 결합되도록 내버려둠을; 주님이 모세에게 명령하신 대로 이스라엘 백성이 했다란 지옥적인 삶 속에 있는 이들은 신성한 선으로부터 신성한 진리에 순종하는 천국적 삶 가운데 있는 이들에게서 분리되어짐을 뜻한다. (7010, 2951, 3654, 379, 10023, 10038, 6338, 8799, 7456, 3654, 7010, 2001, 5486)

24장의 종합적 고찰

만물이 존재하게 되는 보편적 원리들을 알고 있다면 거기서 파생되는 모든 세세한 사항들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모르고 있는 사람보다 더 나은 위치에 있게 된다.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는 보편적 원리이다. 이런 연유로 교회에 관한 저술 속에서 위 원리는 대단히 많게 사용되고 있다. 선과 진리의 형체가 아닌 창조물에 관한 착상은 창조물 안에는 아무 것도 없다. 무엇 보다 먼저, 선은 작동 중인 사랑 외에 더 다른 게 아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들이 사랑하는 것을 놓고 선한 것이라고 말하고, 자기 사랑에 일치하는 것들, 제 사랑을 체현해 주고 표현하는 것들을 두고 참된 것이라고 말한다.
어찌됐든 사랑은 보편적인 것이라 불리는 것이 합당할는지 모른다. 그 이유는 사랑은 사랑이기 때문이고 사랑은 주님, 지존하신 분, 만물은 그분으로부터이기 때문이다. 신성한 사랑이 모든 것의 근원이라고 알게 되면 넓은 측면에서의 사랑은 인간 존재들 안에서 아주 다양하게 사랑 자체를 전시한다는 것에도 주목해 보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러면 신성한 사랑에 관한 뭔가 다른 구분된 정의가 무엇일까라고 묻지 않을 수도 없다. 이렇게 간단히 말해볼 수 있다. 생명과 행복, 기쁨과 즐거움을 이기적인 어떠한 동기 없이 나누어 주는 게 사랑이라는 것, 또는 인류로부터 천국을 형성하는 게 사랑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신성한 선은 위 사랑이 명백해진 상태이다. 이를 본문에서 순수한 올리브 기름으로 나타내고 있다. 이런 기름이 언급된 말씀 몇 군데를 살펴보자. 즉 레위기 8장 10-12절, 열왕기상 1장 39절, 열왕기하 4장 2-7절, 누가복음 10장 34절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위 기름을 가져온다는 것은 자기가 받고 있는 선함이 주님으로부터 임을 인정하는 것이 인간에게 할당된 부분임을 명시하는 말이다. 찧어서 짰다는 것은 위 상태에 순응한다는 뜻이고, 그 기름은 불을 밝히기 위함이라는 것은 선이 진리의 근원이라는 뜻이다. 이 등불을 늘 켜둔다는 말은 영적인 빛은 선의 상태로부터 언제나 있게 된다는 말이다. 위와 같이 본문의 첫 단원에는 매우 중요한 의미들이 함축되어 있다. 이런 사항이 뒤로 이어지는 구절들에서 세부적으로 명백해지고 있다. 왜 위 등불이 베일 밖에 위치하고 있을까? 영적 인간은 선과 진리를 자기가 사용하는 위치에 계속 놓고, 그 선과 진리를 자기의 모든 상태 속에서 제 자신으로부터인 듯 변장하여 나타나야만 한다는 것, 동시에 이 인간이 알아야 하는 것은 작동하는 힘은 등불 뒤 베일 안에 존재한다는 것, 다시 말해 그가 현명하다면 자신의 납득을 초월해 존재하는 신성한 신비를 꿰뚫어 보려고 시도하지 않아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 각각에 걸맞는 천국을 지니고 즐긴다는 것은 생각만 해도 얼마나 기쁜 일인가! 게다가 자신이 결코 도달하지도 못할 어떤 드높은 위치를 포부적으로 갈망해대거나 바래지 않으면서 자신의 위치에서 더 나은 상태로만, 최소한 더 이상 뒤로 미끄러질 염려는 없다고 생각한다면 얼마나 편하게 기쁨을 즐길 수 있는가 말이다. 이 문단을 맺는 말, “이것은 너희가 대대로 길이 지킬 법령이다”는 특별히 주목해 두어야 한다. 그 이유는 법령이란 내적 삶의 상태로 결과되는 외적 삶에 관한 상태임을 이 부분에서 특별히 의미하고 있기 때문이다. 완전히 거듭나기 전 내적 인간과 외적 인간 사이에는 계속되는 다툼이 있다. 이를 두고 시험(temptation)이라 부른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위 같은 종류의 다툼은 없고 평화로운 상태, 언제나 하모니만이 있을 뿐이다. 그런고로 이 세상 삶이라는 여정 동안 시험이나 위의 다툼 같은 것을 거쳐 가는 게 꽤 가치 있는 고통이라고 반문해 볼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말씀의 글자 속에 있는 내적 의미를 자세히 관찰함으로 수습기간인 이 세상 삶에 필요한 힘과 용기를 수집해야 하리라. 이제 두 번째 문단을 살펴보자.
먼저 주목해 볼 것이 있다. 빵은 천적 선을 의미하고 선은 진리에 앞서 존재한다. 그럼에도 등불을 밝히는데 대한 지시 사항이 빵을 거론한 이 문단 앞에 전개되어 있다. 왜 그렇게 되어 있을까? 그 이유는 본문의 일반 주제가 영적 천국과 영적 교회이기 때문이다. 또한 주님으로부터 진행되는 신성한 진리는 비록 천적 천국까지도 그들 상태에 적합하기 때문이고 신성한 선 역시 신성한 진리 안에 거처를 두기 때문이다. 그 외 달리는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 또는 사랑이 그분에 의해 받아질 수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런 경우가 천적 인간에 해당되는 바 진리를 수단으로 선의 상태에로 인도되는 영적 인간의 경우 더더욱 해당되는 바, 천적 인간은 주님을 사랑하는 그들의 사랑으로 구별되고, 영적 인간은 선행 또는 이웃을 사랑하는 그들의 사랑으로 구분되어지는 것이다.
위에서 살핀 내용들이 어떻게 그러한지를 보여주게 된다. 베일 밖에 있는 모든 것은 영적 인간에 관련되는 것이다. 그리고 천적 인간을 통해 간접적으로 오는 신성한 사항에 관한 지각이 영적 인간에게는 천적 인간을 통해 간접적으로 온다. 이를 다시 생각해 보면 의미심장한 실용적인 열매를 얻게 된다. 즉 주님을 사랑하지 않는 이상 진정한 선행(이웃 사랑)이 있을 수 없다는 것, 순수한 신앙과 선행이 없으면 진정한 자연적 친절 또는 선도 없다는 것, 보다 낮은 천국의 기쁨은 보다 높은 기쁨이 없으면 존재할 수 없다는 것, 그 반면 악은 위의 사항들을 남용함으로서 생산된다는 것이다.
완전한 삶은 정밀한 구분을 만들면서 동시에 각각의 적절한 관계를 앎으로서만 획득될 수 있다. 숫자 여섯이 나타낸 것, 즉 다툼이 없음, 또는 기꺼이 잘 해내는 상태에 인간이 도달했다 해도 인간은 역시 자연적인 상태에 필연코 남아 있어야 한다. 순수한 탁자로 의미된 것, 즉 더러움에서 자유로워진 자연적 삶으로부터서 영적, 천적 삶은 분리되어질 수 없는 바 우리가 선을 지닌다 해도 그 선에 상응하는 진리 없이는 불가능하고, 우리의 예배와 기도가 주님이 기뻐하시어 받을 수 있기 위해서는 향을 피워 올리는 것, 즉 진정한 예배자는 불로 명시되는 천국적 사랑의 열렬함이 진리와 결합되어 있어야만 한다. 이제 이런 사람은 자신이 진실로 사랑하는 것이 최상의 것임을 기억하고 있다. 이런 상태는 안식일로 의미되는 싸움으로부터 자유로워진 상태에서만 존재한다. 그리고 이 사람은 어느 정도지만 더 높은 삶, 그 삶의 천국적 질서를 실감한다. 이 실감함은 계약으로 상징되는 것, 즉 주님과 결합할 수 있게 한다. 그리하여 이 사람은 순종을 사랑하는 거룩한 상태에서 먹는 것으로 명시된 것, 자기 삶 속의 선을 자기 것으로 삼는다. 선을 자기 것이 되게 하는 것이야말로 타인과 구별되게 하는 선용의 삶으로, 언어나 행동으로 표현되는 사랑으로부터 오는 충만한 내적 예배인 것이다.
천국적 선과 진리의 근원, 그 결과들을 생각해 보는 위 문단을 떠나 이제 우리는 악과 거짓의 근원, 그 결과를 응시하는 쪽으로 방향을 바꾼다. 이렇게 갑자기 방향이 바뀌는 게 불합리한 듯 여겨질지 모르지만 우리에게는 너무나 필수적이다. 그 이유는 두 품질을 대비해 보게 될 때 얼마나 반대되는지 밝히 알게 해 주기 때문이다. 또 하나 이유는 선한 품질로부터 악의 품질이 어떤지를 볼 수 있지만 악의 품질로부터서는 선의 품질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악한 자가 개혁이라든가 거듭나는 길을 걸을 때 악한 자의 이해함도 선과 진리를 지각할 수도 있다. 그 이유는 인간 존재로 태어나는 모든 사람은 거듭날 수 있는 능력을 소유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악 이든 선 이든 선택하도록 강요당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악이나 지옥의 근원은 주님이 아니고 자연적 수준의 능력을 남용한 인간으로부터 이다. 이런 사실이 이스라엘 여인의 아들의 아버지가 이집트 출신이라는 이야기로 묘사되고 있다.
이스라엘 여인의 아들은 아버지 쪽의 근원이 악 인 바 악에서 파생된 거짓을 뜻한다. 그런고로 주님께서 이렇게 말하신다. “너희는 악마의 자식들이다. 그래서 너희는 그 아비의 욕망대로 하려고 한다. 그는 처음부터 살인자였고 진리 쪽에 서 본 적이 없다. 그에게는 진리가 없기 때문이다. 그는 거짓말을 할 때마다 제 본성을 드러낸다. 그는 정녕 거짓말쟁이며 거짓말의 아비이기 때문이다”(요한 8:44). 거짓의 근원을 알려주는 어떤 견해도 위 말씀보다 더 명백할 수 없을 것이다. 그래도 본문을 통해 좀 더 들여다보는 것은 유익하리라 생각된다. 좋은 의미에서 이스라엘 여인은 진리에 대한 애착이고 그녀의 아들은 그 진리 자체이다. 이를 염두에 두면 그 뒤에 따라오는 모독을 더 잘 이해하게 된다. 그 이유는 누가 진리를 조금이라도 인정하지 않는 상태에 있다면 그는 진리를 모독할 수 없다. 이런 이유로 시비가 진영 즉 교회 내에서 벌어졌다는 대목이 기술되는 것이다. 진영이란 천국을 의미한다. 이렇게 생각하면 계시록 12장 7절에 기술된 것과 같은 하늘에서의 전쟁이라고도 생각될지 모른다. 그러나 계시록의 전쟁이란 사라져버린 이전 천국에서의 싸움, 즉 사라져 버리는 부패된 교회에서의 싸움을 의미한다. 이와 같은 사항이 본 장에서 두 사람 사이에 있는 싸움이다. 어찌됐든 천국 자체 안에서는 싸움이 있을 수 없다. 그 이유는 거기서 누구든 주님의 도움으로 모든 시험을 극복하기 때문이다.
마지막 문단의 세부 사항들은 앞 장들에서 살핀 바 있으므로 특별히 재고할 필요가 없으리라 생각된다. 이 문단의 일반적 시리즈 역시 앞의 세부적 영적 의미들과 연결해 생각하면 확실히 알게 될 것이다. 그러나 한 가지는 짚어두고 끝내야 하리라 생각된다. 신성과 영적 법칙을 위반했어도 회개로 구원되어 깨끗해질 수 있는 반면, 악한 상태를 확증했을 경우 천국적 삶에서 영원히 분리되는 결과를 초래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본문의 내적 의미가 주는 사항들을 심각하게 되새겨 보아야 한다. 우리는 정의 속에 자신이 있음을 확증하게 하는 일관된 삶, 다시 말해 하느님의 법을 지켜 가는 삶에 어떤 예외도 두지 않는 삶 속에서 성실하게 삶의 문제를 해결해 가야 할 것이다. 이렇게 강행할 때만이 더 없는 영원한 행복을 가져다준다. 그래서 이렇게 쓰여 있다. “나는 승리하는 자들에게 하느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게 하겠다” (계시록 2:7).

레위기 25장

성경: 레위기 1장

1. 주님께서 시내산에서 모세에게 이야기하셨다, 말하시기를,
2. 이스라엘의 자손들에게 이야기하라. 그리고 그들에게 말하라, 너희는 내가 너에게 주는 토지에 오면, 그다음 토지가 주님에게 안식을 지킨다.
3. 육 년 동안 너는 네 들판에 씨를 뿌려라, 그리고 육년 동안 너는 네 포도원을 가지치기를 하라, 그리고 그것의 열매를 그러모아라.
4. 그러나 칠 년째는 토지를 위한 엄숙한 쉼의 안식, 주님에게 안식이다. 너는 네 들판에 씨를 뿌리지 말고, 네 포도원의 가지치기를 하지 말라.
5. 저절로 성장한 너의 수확물을 거두지 말라, 그리고 너의 손질하지 않은 포도나무로부터의 포도들을 너는 그러모으지 말라. 이것은 토지를 위한 엄숙한 쉼의 해이다.
6. 그리고 토지의 안식년은 너를 위한 식품을 위해 있는다. 즉 너를 위해, 그리고 네 종과 여종을 위해, 그리고 네가 고용한 종과 너와 더불어 체류하는 네 낯선 사람을 위해.
7. 그리고 네 가축떼를 위해, 그리고 네 토지에 있는 짐승들을 위해 그것의 모든 소출은 식품을 위해 있다.
8. 그리고 너는 네게 일곱 안식의 해를, 칠 년을 일곱 번 셀 것이다. 그리고 일곱 안식년의 날들, 하여, 사십 구년이 네게 있는다.
9. 그다음 너는 일곱째 달의 십일에 큰 나팔소리를 널리 보내라. 즉 보상 받는 날에 너희는 네 모든 토지를 망라해 나팔 소리를 널리 보내라.
10. 그리고 너희는 오십 년째 해를 거룩하게 하라. 그리고 그곳의 모든 주민들에게 토지를 통털어 자유를 선포하라. 이것은 너희에게 희년이다. 그리고 너희는 모든 사람을 각자의 소유지로 돌아가게 하라, 그리고 너희는 모든 사람을 그의 가족에게로 돌아가게 하라.
11. 희년은 너에게 이런 오십 년일 것이다. 즉 너희는 씨뿌리지 말라, 그것 안에서 저절로 성장한 것을 거두지 말라, 가치쳐주지 아니한 포도나무의 포도들을 모우지 말라.
12. 이것이 희년인바, 이것은 너희에게 거룩이다. 너희는 들판의 소출을 먹는다.
13. 희년의 바로 그 해에 너희는 모든 사람을 각자의 소유지로 돌려보내라.
14. 그리고 만일 네가 네 이웃에게 어떤 것을 팔거나, 네 이웃의 손으로부터 살 때, 너희는 서로에게 잘못되게 하지 말라.
15. 희년 이후의 년수에 따라서 네 이웃으로부터 사라, (그리고) 농작물의 년수에 따라 그는 네게 팔라.
16. 년수가 많음에 따라 그것의 값은 올라가고, 그리고 년수가 적음에 따라 너는 그것의 값을 줄여라. 그이유가 농작물의 숫자로 그는 네게 팔 것이기 때문이다.
17. 그리고 너희는 서로 나쁘게 하지 말라. 그러나 너는 네 하느님을 경외하라. 그이유가 나는 주 너의 하느님이기 때문이다.
18. 그러므로 너는 내 법령을 행하라, 그리고 내 판단을 지키고 그것들을 행하라. 그리고 너희는 토지에서 안전하게 거주할 것이다.
19. 그리고 토지는 그녀의 열매를 산츨할 것이다, 그리고 너희는 양껏 먹을 것이다,그리고 그 안에서 안전히 거주할 것이다.
20. 그리고 칠 년째 해에 우리는 무엇을 먹을 것인가? 보라, 우리는 씨를 뿌리지 않을 것이고, 우리의 소출을 그러모으지 아니할 것이다 하고 말한다면.
21. 그다음 나는 육 년째 해에 너희 위에 내 복을 명령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삼 년을 위한 열매를 산출할 것이다.
22. 그리고 너희는 팔 년째 해에 씨를 뿌려라, 그리고 옛 창고에 있는 열매들을 먹어라. 구 년째 해까지, 그녀의 열매들이 나오기 까지, 너희는 옛 창고(의 것을) 먹어라.
23. 그리고 토지는 영구히 팔지 말라. 그 이유는 토지는 나의 것이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너희는 낯선 사람들이고 나에게 몸붙여 사는 체류자들이기 때문이다.
24. 그리고 네 소유의 모든 토지에서, 너희는 토지의 되찾음을 수여할 것이다.
25. 만일 네 형제 중 누가 지독하게 가난하다면, 그리고 그의 소유의 얼마를 판다면, 그다음 그에게 가장 가까운 친척이 올 것이다, 그리고 그의 형제가 판 것을 되찾으라.
26. 그리고 만일 그것을 되찾을 사람이 없다면, 그리고 그가 지독하게 부자이고 그것을 되찾기에 충분하다면.
27. 그다음 그에게 그것의 판 햇수를 계산하게 하고 그는 그것을 판 사람에게 여분을 반환하라. 그리고 그는 자기 소유지로 되돌아 가라.
28. 그러나 만일 그가 자신을 위해 그것을 되돌려 얻을 수 없다면, 그다음 그가 판 것을 그것을 산 자의 손에서 희년까지 머무를 것이다. 그리고 희년에 그것은 나갈 것이다, 그리고 그는 자기 소유지로 되돌아 간다.
29. 그리고 만일 벽을 두룬 성에 있는 거주하는 집을 판다면, 그다음 그는 그것을 판 그 해 안에 그것을 되찾을 수도 있다. 한 해 동안 그는 되찾을 권리가 있다.
30. 그리고 만일 그것이 한 해 안에 되찾지 못하면, 그다음 벽있는 성에 있는 집은 영구히 그 자손 대대로 그것을 산 자의 것이 된다. 그것은 희년에 나가지 않을 것이다.
31. 그러나 빙두른 벽이 없는 마을의 집은 시골의 들판들과 같은 것으로 간주할 것이다. 그것들은 되찾을 수 있다, 그리고 그것들은 희년에 나갈 것이다.
32. 그럼에도 불구하고 레위인의 성읍들, 그들 소유의 성읍들 속의집들은 레위인이 언제나 되찾을 수 있다.
33. 그리고 만일 레위인들 중의 누가 되찾는다면, 그다음 팔렸던 집, 그리고 그의 소유의 성읍은 희년에 나갈 것이다. 그 이유가 레위인들의 성읍들은 이스라엘 자손 사이에서 그들의 소유이기 때문이다.
34. 그러나 그들 성읍들의 외곽에 있는 들판은 팔려지지 않을 것이다. 그이유가 이것은 그들의 영구한 소유지이기 때문이다.
35. 그리고 만일 네 형제가 지독하게 가난하다면, 그리고 그의 손이 너에게 기대고 있다면, 너는 그를 받쳐줄 것이다. 즉 낯선 자나 체류자로서 그는 너와 함께 살 것이다.
36. 너는 그 사람으로부터 이자를 취하거나 소출을 가져가지 말라. 그러나 네 하느님을 경외하라. 하여, 네 형제는 너와 함께 살 수 있다.
37. 너는 그에게 이자를 붙이는 돈을 주지 말라, 그리고 그에게 소출을 위하여 네 양식을 주지 말라.
38. 나는 주 너의 하느님이다, 즉 너희의 하느님이기 위해, 가나안의 토지를 네게 주려고, 이집트의 토지로부터 너를 데려왔다.
39. 그리고 만일 네 형제가 지독하게 가난하여, 자신을 네게 판다면, 너는 그를 노예로서 섬기게 만들지 말라.
40. 고용한 종 같이, 체류자 같이, 그는 너와 있을 것이다. 그는 희년의 해까지 너를 섬길 것이다.
41. 그다음 그는 너로부터 나갈 것이다, 그와 그와 더불은 어린이들(이 나갈 것이다). 그리고 자기 원래의 가족으로 되돌아갈 것이다, 그리고 자기 아버지(조상)의 소유지로 그는 되돌아갈 것이다.
42. 그들은 내가 이집트의 토지로부터 데려온 나의 종(servant)들인 바, 그들은 노예로서는 팔려지지 않는다.
43. 너는 그를 가혹하게 통치하지 말라. 그러나 네 하느님을 경외하라.
44. 그리고 너는 남자 노예들과 여자 노예들은 소유할 것이다. 너 주변의 나라들로부터 너는 남종과 여종을 살 것이다.
45. 더욱이 너 사이에 체류하는 낯선 자의 어린이들로부터 너는 살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네 토지에서 낳은 너와 더불어 있는 그들의 가족들로부터 (살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네 소유물이다.
46. 그리고 너희는 그들을 네 이후 너의 자손을 위해 소유물로 붙잡도록 상속을 하라. 그들로부터 너는 너의 종을 영원히 취한다. 그러나 네 형제, 이스라엘 자손을 너는 지배하지 말라, 서로가 가혹함을 가지고 지배하지 말라.
47. 그리고 만일 너와 더불어 있는 낯선 자나 체류자가 지독하게 부유해지고, 그들 옆의 너는 지독하게 가난해져 있어, 너와 함께 있는 낯선 자나 체류자에게 자신을 판다면, 또는 낯선 자의 가족이 되었다면,
48. 그가 팔려진 이후, 그는 되찾을 수 있다. 그의 형제 중의 하나가 그를 되찾을 수도 있다.
49. 또는 그의 삼촌, 또는 그의 삼촌의 아들이, 또는 그에게 가까운 친척의 누구가 그를 되찾을 수 있다. 또는 만일 그가 지독하게 부자로 된다면, 그는 자신을 되찾을 수 있다.
50. 그리고 그는 그가 자신을 판 해로부터 희년 까지를 자기를 산 자와 계산하라. 그리고 그의 판매가는 년수에 따라서, 그가 그에게 고용된 종으로서의 시간에 따라서이다.
51. 만일 아직도 많은 년수가 (남아) 있다면, 년수에 따라 그가 사들여진 값으로부터 그의 되찾음의 값을 되물려라.
52. 그리고 만일 희년까지 몇 년 남았다면, 그러면 그는 그와 셀 것이다. 즉 그의 년수에 따라 그는 자기 되찾음의 값을 도로 줄 것이다.
53. 고용된 종으로 매 해 그는 그와 더불어 있을 것이다. 그는 네가 보기에 가혹하게 그를 다루지 말라.
54. 그리고 만일 그가 이런 (수단)으로 되찾아지지 못한다면, 그다음 그는 자기 어린이와 더불어 희년에 가서야 나갈 것이다.
55. 나에게 이스라엘의 자손은 종들이다. 그들은 내가 이집트의 토지로부터 데려온 나의 종들이다. 나는 주 너의 하느님이다.

영적 의미 요약

* 영적 인간에게 가르침이 있다. 주님에 대한 사랑이 완전할 때 쉼과 평화가 있다. 이 상태는 악과 싸워 승리하는 상태가 충만될 때를 전제로 한다. 이 상태 안에 있는 자연적 인간은 합법적인 기쁨을 즐기게 된다, 1-7절.
* 위의 인간의 경우처럼 천적 인간도 마찬가지이다. 거듭남이 완성된 상태에서 그는 선과 진리가 더 강렬하게 된 상태에로 들어간다. 이 안에서 완전한 자유가 있고, 이 안에는 완전한 정의가 있고, 이 안에는 삶에 필요한 모든 것이 공급되어 있어 선이 결핍될 수 없다. 그 이유는 그가 그것들을 계속 간직하고 있어 주님에 의해 악에서 해방되어 있기 때문이다, 8-24절.
* 완전한 천국 상태에 들어가기 위해 정식으로 준비해야 하는 사람이 거듭나는 동안 준수해야 할 법칙에 관하여, 변동하는 상태에 관계되는 것들, 다양한 환경 속에서 그 사람과 함께 있는 선과 진리가 양도되고 되찾음에 관하여, 25-55절.

각 절의 영적 의미

1절. 주님께서 시내산에서 모세에게 이야기하셨다, 말하시기를,

영적 의미

신성한 선으로부터 진행되는 신성한 진리를 수단으로 주님께서 지각을 주시어 밝히 알게 하신다.

세부적 영적 의미

주님께서 시나이 산에서 모세에게 일러 말하심이란 신성한 선으로부터 진행되는 신성한 진리를 수단으로 주님께서 밝히 알게 하심을 뜻한다.(2001, 2951, 7010, 1822, 8399 )

2절. 이스라엘의 자손들에게 이야기하라. 그리고 그들에게 말하라, 너희는 내가 너에게 주는 토지에 오면, 그다음 토지가 주님에게 안식을 지킨다.

영적 의미

영적 교회의 사람에게 유입과 가르침을 수단으로 알게 하시는 바, 주님에 대한 사랑이 천적 상태이면 쉼과 평화가 있게 된다는 것이다.

세부적 영적 의미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야기하라란 영적 교회의 사람에게 유입이 있고 또한 가르침이 있다는 것을; 주님께서 주시는 토지에 옴이란 천국 상태에 들어감을; 주님에게 안식일을 지킴이란 쉼과 평화의 상태를 뜻한다.( 2951, 10355, 3705, 87 )

3절. 육 년 동안 너는 네 들판에 씨를 뿌려라, 그리고 육년 동안 너는 네 포도원을 가지치기를 하라, 그리고 그것의 열매를 그러모아라.

영적 의미

위 상태에 다음 사항이 선행되어진다. 인간의 거듭 나아감은 악과 싸우는 상태가 충만해짐을 수단으로 하는데 이 충만에는 다음 사항이 포함된다. 의지 측면이 시험을 받는 동안 선에 관한 지식이 신장되고, 이해함 측면이 시험받는 동안 진리에 관한 지식이 받아들여진다. 그리고 선한 일들이 선행을 원리로 수행되어진다.

세부적 영적 의미

육 년 동안 들판에 씨를 뿌리고 포도원의 가지치기를 하고 열매를 그러모아라란 거듭나는 동안 이렇게 진행된다는 것, 악과 충분히 싸우는 상태를 수단으로 해서 의지 측면에서는 시험이 포함되는데 이 시험동안 선에 관한 지식이 함양되고, 이해함 측면의 시험에서 진리에 관한 지식이 흡수되고, 선한 일들이 선행의 원리로 수행된다.
(8888, 737, 9272-3, 9277 )

4절. 그러나 칠 년째는 토지를 위한 엄숙한 쉼의 안식, 주님에게 안식이다. 너는 네 들판에 씨를 뿌리지 말고, 네 포도원의 가지치기를 하지 말라.

영적 의미

위의 상태가 완성될 때 사랑으로부터의 선인 천국적 수용은 쉼과 평화를 준다. 이는 신성한 사랑으로부터 온전히 있어 질 뿐, 인간이 내적 측면 이든 외적 측면 이든 진리의 상태로부터 선의 상태로 진행시키는 게 아니다.

세부적 영적 의미

칠 년째에 그 땅을 위해 엄숙히 쉬게 하는 안식년이 되게 해서 주님의 안식년을 지켜, 들에 씨를 뿌리지 말고 포도원의 가지치기를 하지 말라란 위 상태가 완성될 때 사랑으로부터 오는 선을 천국적으로 받게 되어 쉼과 평화가 주어지는데 이는 외적 측면 이든 내적 측면 이든 인간이 진리의 상태에서 선의 상태로 진행시키는 게 아니라 모두 신성한 사랑으로 있어진다는 뜻이다.( 9274, 9272, 9277 )

5절. 저절로 성장한 너의 수확물을 거두지 말라, 그리고 너의 손질하지 않은 포도나무로부터의 포도들을 너는 그러모으지 말라. 이것은 토지를 위한 엄숙한 쉼의 해이다.

영적 의미

위 사람은 이기적 사랑에서 튀어나오는 어떤 애착이나 자아에서 파생되는 총명으로 획득되는 어떤 진리도 자기 것으로 되게 하지 말라. 그 이유가 위 상태는 시험에서 완전히 자유로워진 것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세부적 영적 의미

저절로 성장한 너의 수확물을 거두지 말라, 그리고 너의 손질하지 않은 포도나무로부터의 포도들을 너는 그러모으지 말라. 이것은 토지를 위한 엄숙한 쉼의 해이다란 인간은 이기적 사랑으로부터 나오는 어떤 애착도, 자아 총명으로부터 획득되는 어떤 진리도 자기 것이 되지 못한다는 것, 그 이유가 이 상태는 시험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것 중의 하나이기 때문이다.(9278, 9279 )

6절. 그리고 토지의 안식년은 너를 위한 식품을 위해 있는다. 즉 너를 위해, 그리고 네 종과 여종을 위해, 그리고 네가 고용한 종과 너와 더불어 체류하는 네 낯선 사람을 위해.

영적 의미

위와 같을 경우 선 자체가 영혼 즉 내적 인간, 내면의 이해함과 의지 그리고 외면의 의지와 이해함에 진리를 생산하여 자양분을 공급한다.

세부적 영적 의미

그 토지의 안식은 식품을 위함이란 선 자체는 영혼에 자양분을 공급하는 진리를 생산한다. 그이유가 안식은 진리를 수단으로 형성되는 선의 상태를 의미하기 때문이고 선과 진리는 인간의 순수한 영적 양식이 되기 때문임을; “너희”란 영적 인간 자신 그러므로 내적 인간을; 남종과 여종이란 내면의 이해함과 의지를; 고용한 종(품꾼)이란 보상을 위해 선을 행하는 것, 그러나 이 구절의 경우는 선에 대한 외면의 의지를 나타내는데 그 이유는 좋은 측면에서 사용되기 때문이다. 너와 더불어 체류하는 낯선 자란 낯선 것이면서도 동시에 훈육되는 상태에 있는 것 즉 외면의 이해함을 뜻한다.
(8889, 680, 제2절, 3654, 2541, 2567, 8002 )

7절. 그리고 네 가축떼를 위해, 그리고 네 토지에 있는 짐승들을 위해 그것의 모든 소출은 식품을 위해 있다.

영적 의미

위 같을 때, 외적 감각과 육적 애착도 종속된 상태에서 기쁨과 쾌락을 풍부히 즐긴다.

세부적 영적 의미

가축이란 감각적인 애착을, 그 땅에 있는 짐승 또는 산 짐승이란 육적인 애착을, 여기서 말해지는 감각적 또는 육적이라 함은 시리즈에서의 의미이다. 그것의 모든 소출은 식품을 위해 있다란 거론되는 모든 애착들이 종속된 탓에 기쁨과 즐거움을 풍부히 누린다는 뜻이다.( 6049, 46, 680)

8절. 그리고 너는 네게 일곱 안식의 해를, 칠 년을 일곱 번 셀 것이다. 그리고 일곱 안식년의 날들, 하여, 사십 구년이 네게 있는다.

영적 의미

천적 교회 속의 사람이 지니는 선의 품질은 내, 외적으로 더욱 강도가 높아진다. 또한 진리가 선과 결합하는 것도 내, 외적으로 더 강도가 높아진다.

세부적 영적 의미

일곱 해를 일곱 번 해서 안식년을 세어라. 이렇게 일곱 안식년을 일곱 번 맞아 사십 구 년이 됨이란 천적 교회 사람의 품질은 선의 상태에서 강도가 더 하다는 것, 이는 내적, 외적 측면 모두에서 그러하고, 진리의 상태 역시 내적, 외적 측면 모두에서 더욱 강도 높다는 것, 이는 숫자 일곱이 거룩함을 의미함에서 나타난다. 해들(years)은 세부적인 상태들을, 날들(days)은 일반적인 상태들을, 처음에 표현된 두 겹은 내적 인간에 관련되고, 뒤의 두 겹은 외적 인간에 관련된다. 내적 측면들에 있는 것은 세부적 사항들에 있는 것을, 외적 측면에 있는 것들은 일반 사항들이다. 이중 표현이 두 쌍인 것은 의지와 이해함에 각각 관련된다. 사십 구란 초기에 해당되는 결합을 말한다. (A.C 8802, 716, 488, 3513, 3739, 683, 1988, 2252 )

9절. 그 다음 너는 일곱째 달의 십일에 큰 나팔소리를 널리 보내라. 즉 보상 받는 날에 너희는 네 모든 토지를 망라해 나팔 소리를 널리 보내라.

영적 의미

이로 인해 천적 선의 일반적 지각이 영적 인간에게 파생되어 진다. 이는 영적 인간 속에 아껴 두신 것이 충만될 때 매체 역할을 하는 천사를 통해 이루어지고 그때의 상태는 신앙과 선행이 결합한 상태 중의 하나이다. 이 결합은 악을 제거함으로 외적 인간이 내적 인간과 하모니를 가져올 때 발생한다. 그 이유는 진리의 지각은 천적 선의 지각을 동반하기 때문이다.

세부적 영적 의미

일곱째 달 십 일에 나팔소리를 널리 보냄(크게 울림)이란 천적 선의 지각 또는 주님 사랑에 대한 일반적인 지각이 영적 인간에게 파생되어짐을, 보상 받는 날 이란 악의 제거를 수단으로 외적 인간이 내적 인간과 하모니를 이룰 때를, 그 이유가 진리에 대한 지각은 천적 선의 지각을 동반하기 때문이다. 열(ten)은 아껴두신 것의 충만된 상태를, 일곱째 달은 선행이 신앙과 결합된 상태를 말한다. (716, 8802, 2075, 851, 10042II, 8802, 3107,851 )

10절. 그리고 너희는 오십 년째 해를 거룩하게 하라. 그리고 그곳의 모든 주민들에게 토지를 통털어 자유를 선포하라. 이것은 너희에게 희년이다. 그리고 너희는 모든 사람을 각자의 소유지로 돌아가게 하라, 그리고 너희는 모든 사람을 그의 가족에게로 돌아가게 하라.

영적 의미

그 다음 천적 사랑이 충만 되고 거룩함 속에 있게 된다. 완전히 자유로운 상태가 온 천국에 널리 퍼지는데 이는 가장 깊은 천국에서 선과 진리가 결혼함으로 결과되는 것이고, 이로부터 각자에게 있는 특별한 선과 진리를 실감하게 된다.

세부적 영적 의미

오십 년째 되는 해를 거룩히 여겨 너희 토지의 모든 주민들에게 자유를 선포함이란 참으로 천적 사랑은 충만함과 거룩함 속에 있다는 것, 그 안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상태가 온 천국을 장악한다는 것을, 희년(Jubilee)은 “가장 깊은 천국에서 선과 진리의 결혼으로 결과됨”을 뜻한다. 제 소유지를 찾아 돌아가 제 가족(지파)에게로 돌아감이란 위 상태로부터 각 사람은 각자에 특별한 진리와 선을 실감함을 뜻한다.
(2252, 8042, 892, 8802, 2028-9, 7833, 3239 )

11절. 희년은 너에게 이런 오십 년일 것이다. 즉 너희는 씨뿌리지 말라, 그것 안에서 저절로 성장한 것을 거두지 말라, 가치쳐주지 아니한 포도나무의 포도들을 모우지 말라.

영적 의미

중간 천국 안에서 역시 선행이 충만된 상태에서 받아진다. 거기서 더 이상 진리로부터 선으로의 어떤 진행도 없고 의지나 이해함 측면에서 있는 자연적일 뿐인 선을 자기 것으로 삼는 일도 없다.

세부적 영적 의미

오십 년이 되는 해가 희년이다란 중간 천국에서도 역시 선행이 충만 되게 받아들임이 있다는 것을, 뿌리지도 말고 거두지도 말라란 위 상태에서는 진리로부터 선으로까지의 어떤 진행도 없다는 것을, 저절로 자란 것도 거두지 말고 저절로 자란 포도덩굴의 포도도 따지 말라란 의지 이든 이해함 이든 자연적일 뿐인 선을 자기 것으로 삼는 일이 없음을, 순을 쳐주지 않은 포도나무란 선이 없는 진리를, 거둔다란 자기 것으로 삼음을 뜻한다. (A.C 2252, 9274, 9272, 9277, 3580,1071, 9273 )

12절. 이것이 희년인바, 이것은 너희에게 거룩이다. 너희는 들판의 소출을 먹는다.

영적 의미

최말단 천국에서의 가장 깊은 선은 순종을 사랑함이요. 이 순종이란 진리가 생활 안에서 선과 결합하는 것, 이 천국 사람은 진리를 실제화 할 때 그 선을 자기 것으로 삼는다.

세부적 영적 의미

이 해가 희년이다란 위 상태는 최말단 천국에도 진정 그러하다는 것, 즉 이 천국의 가장 깊은 선은 순종을 사랑하는 것임을, 이 해가 거룩하다란 삶 안에서 선과 진리가 결합함을, 들판에서 난 소출을 먹는다란 이 천국의 사람들이 선으로부터의 진리를 실제 사용할 때 그 선을 자기 것이 되게 한다는 뜻이다.(2252, 9812, 2146, 2187, 3310 )

13절. 희년의 바로 그 해에 너희는 모든 사람을 각자의 소유지로 돌려보내라.

영적 의미

각 천국은 완전한 사랑으로 충만 되어 각자는 자신의 특별한 선을 영원까지 즐기게 된다.

세부적 영적 의미

이 희년에 저마다 자기 소유지로 돌아간다란 완전한 사랑이 충만한 가운데, 각 천국 안에서 모든 이는 자신의 특별한 선들을 영원히 즐긴다는 뜻이다.(2028, 2029, 7833, 3239 )

14절. 그리고 만일 네가 네 이웃에게 어떤 것을 팔거나, 네 이웃의 손으로부터 살 때, 너희는 서로에게 잘못되게 하지 말라.

영적 의미

선이 상호적으로 서로 간에 교통되어 받아진다 해도 각 개인에게 어떤 손실도 없다.

세부적 영적 의미

무엇을 사거나 팔거나 할 때 서로 잘못되게 말라란 선이 교통되어 상호적으로 서로 간에 받게 될 때에 어떤 개별적인 것에서도 손실이 없어야 한다는 뜻이다.
(5886, 2967, 9196 )

15절. 희년 이후의 년수에 따라서 네 이웃으로부터 사라, (그리고) 농작물의 년수에 따라 그는 네게 팔라.

영적 의미

가장 깊은 자기 속에서 선과 진리가 결혼함으로 거듭나는 선의 품질에 의거 모든 것 속의 선을 각기 즐길 수 있다. 그리고 주님으로부터 결합된 선과 진리를 받은 데 따라서 모든 것에 선을 교통시킬 수 있다.

세부적 영적 의미

희년이 몇 해가 지났는지에 따라 이웃에게서 사라란 각자의 가장 깊은 속에서 선과 진리가 결혼함을 수단으로 거듭나는 가운데 있는 선의 품질에 따라 각각은 모든 것 속의 선을 즐길 수 있다는 것을; 농작물의 년수를 세어 팜(소출을 거둘 햇수를 세어 팜)이란 주님으로부터 결합된 선과 진리를 각 인간이 받음에 따라 그는 모든 이에게 있는 선을 교통할 수 있다는 뜻이다.(10217, 8802, 2967, 10217, 5212, 5886 )

16절. 년수가 많음에 따라 그것의 값은 올라가고, 그리고 년수가 적음에 따라 너는 그것의 값을 줄여라. 그 이유가 농작물의 숫자로 그는 네게 팔 것이기 때문이다.

영적 의미

각자는 자기 선으로부터의 진리의 상태에 따라 선용의 능력이 모든 천국에 있게 된다. 각 사람의 진리의 품질은 각 사람의 선에 따라 있어진다.

세부적 영적 의미

햇수가 많으면 값을 많이 치르고 적으면 값을 적게 치룸이란 각자의 선에서 오는 진리의 상태에 따라 그의 힘은 온 천국에 사용된다는 것을, “농작물의 숫자로(소출을 거둘 햇수를 따라) 팔아야 하기 때문”이란 모든 이의 진리의 품질은 그의 선에 의한다는 뜻이다. (6172, 6285, 2966-7, 10217, 5212, 5886)

17절. 그리고 너희는 서로 나쁘게 하지 말라. 그러나 너는 네 하느님을 경외하라. 그이유가 나는 주 너의 하느님이기 때문이다.

영적 의미

누구도 천국에서 불의하게 행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천국 안의 사람은 선으로부터 오는 진리에 의거 행동하기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그와 더불어 진리는 그의 선을 표현한다. 그리고 주님의 인간 역시 신성을 표현하고 있다.

세부적 영적 의미

서로 나쁘게 하지 말라란 천국에서는 어느 누구도 불의하게 행동하지 않음을, 하느님을 경외함이란 선으로부터 진리에 의거 행동함을, “나는 주 너의 하느님”이란 각자에게 있는 진리는 그의 선을 표현한다는 것, 주님의 인간도 신성이 표현된 것임을 뜻한다. (9196,2826-5, 2001, 3049 )

18절. 그러므로 너는 내 법령을 행하라, 그리고 내 판단을 지키고 그것들을 행하라. 그리고 너희는 토지에서 안전하게 거주할 것이다.

영적 의미

그러므로 외적 예배는 내적 상태에 의거 정확히 있어져야 한다. 그리고 바깥쪽 삶은 온전해서 거짓이 침입할 수 없어야 한다.

세부적 영적 의미

주님의 법령을 행함이란 외적 예배는 정확히 내적 예배에 따라야 함을, 주님의 법을 지킴이란 외적 인간에 관련된 서술이고, 그대로 행함은 내적 인간에 관련된 서술이다. 그 토지에서 안전하게 산다란 거짓의 어떤 침입에서도 자유로울 것임을 뜻한다. (2001, 7884, 8357, 4480, 10160 )

19절. 그리고 토지는 그녀의 열매를 산출할 것이다, 그리고 너희는 양껏 먹을 것이다,그리고 그 안에서 안전히 거주할 것이다.

영적 의미

천국에서는 선용의 결핍이 없다. 모든 이는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을 충분히 자기 것으로 삼는다. 어느 누구도 악에 침입 당하는 위험을 받지 않는다.

세부적 영적 의미

그 토지가 열매를 산출함이란 천국에서 사용하는데 어떤 부족함도 없음을, 양껏 먹음이란 모든 이는 힘껏 충만 되게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을 자기 것으로 삼음을, 그 땅에서 안심하고 산다란 어느 누구도 악에 습격 당하는 위험에 처하지 않음을 뜻한다.(3705, 7690, 2187, 4480, 10160, 683 )

20절. 그리고 칠 년째 해에 우리는 무엇을 먹을 것인가? 보라, 우리는 씨를 뿌리지 않을 것이고, 우리의 소출을 그러모으지 아니할 것이다 하고 말한다면.

영적 의미

비록 천사들이 자기들 선의 상태를 알고 있어서 자기들로서는 선을 받거나 자기 것 되게 할 수 없다 할지라도,

세부적 영적 의미

“너희는 혹, 칠 년째 되는 해에는 씨를 심지도 말고 소출을 거두지도 말라면 무엇을 먹을 것인가 라고 말한다면”이란 참으로 천사들이 자기들 선의 상태를 지각해서 자기들 스스로서는 선을 받을 수도 없고 자기 것 삼을 수도 없다 해도를 명시하는데, 그 이유는 “…말한다면”이 선한 인간 또는 천사의 지각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무엇을 먹을 것인가”란 자기들 스스로는 선을 자기 것 삼을 수 없다고 하는 생각을 의미한다. “일곱째 해”란 선이 충만된 상태를, 뿌리지도 거두지도 말라란 그들 스스로서는 진리를 획득하지도, 선을 자기 것으로 삼지도 못함을 말한다. (1822, 2187, 9274, 9272, 9273)

21절. 그다음 나는 육 년째 해에 너희 위에 내 복을 명령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삼 년을 위한 열매를 산출할 것이다.

영적 의미

그럼에도 그들이 아는 것은, 유입해 주심과 상응을 수단으로 거듭나는 일과 그에 따른 깨끗해짐을 통하여 주님과 결합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기들은 천사들의 어떤 상태의 생활에서도 선을 행할 수 있다고 확신한다.

세부적 영적 의미

주님의 명령으로 육 년째 되는 해에는 삼 년 먹을 열매를 산출하게 하리라란 그들이 아는 바, 또 한 가지란 주님과 결합하려면 유입과 상응을 수단으로 해야 되고 거듭남과 그에 따른 깨끗해짐을 통해야 한다는 것, 그리하여 자기들이 천사들의 삶의 모든 상태에서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을 행할 수 있다는 것을 확신하는 것이다.
(5486, 3514, 3017, 8988, 8891, 913 )

22절. 그리고 너희는 팔 년째 해에 씨를 뿌려라, 그리고 옛 창고에 있는 열매들을 먹어라. 구 년째 해까지, 그녀의 열매들이 나오기 까지, 너희는 옛 창고(의 것을) 먹어라.

영적 의미

그들의 영원한 생활은 주님으로부터 계속 갱신되어가기 때문에 그들은 진리를 함양할 힘을 가지고 있어 그분으로부터 오는 선을 자기 것으로 되게 한다. 그 이유가 그들은 그분과 세 겹의 결합을 가지기 때문이고 그 선은 그분과 영구적으로 교통되기 때문이다.

세부적 영적 의미

팔 년째 되는 해란 그들의 영원한 삶은 주님으로부터 계속적으로 갱신된다는 것을, 씨를 뿌리고 옛 창고에 있는 열매들을 먹는다란 위로부터 그들은 진리를 함양할 힘을 갖고 그분으로부터의 선을 자기 것 삼음을, 묵은 곡식이란 주님께서 아껴두신 것들 속의 선은 영원함을, 구 년째란 주님과의 세 겹된 결합을, 소출이 날 때까지 묵은 곡식을 먹음이란 선은 주님에 의해 항구적으로 교통되어짐을 뜻한다. (2044, 9227, 9272, 2187, 5299, 5370, 1854, 2075, 2788-10, 913, 5299, 5370, 1854)

23절. 그리고 토지는 영구히 팔지 말라. 그 이유는 토지는 나의 것이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너희는 낯선 사람들이고 나에게 몸붙여 사는 체류자들이기 때문이다.

영적 의미

주님으로부터 천국 안에서 받게 된 선은 딴 데로 돌려지지 않는다. 그것은 주님이 계속 주시는 선물이다. 천사들은 그분으로부터 내적, 외적인 모든 선을 계속 받는다.

세부적 영적 의미

이 땅은 영구히 팔지 말라 란 천국에서 주님으로부터 받아지는 선은 결코 소외될 수 없음을; 그 토지는 주님의 것이다 란 선은 주님이 계속 주시는 선물임을; 이스라엘 백성은 그분에게 몸붙여 사는 체류자란 천사들은 그분으로부터 내적, 외적인 모든 선을 계속 받음을 말한다. (3705, 4758, 3705, 8002)

24절. 그리고 네 소유의 모든 토지에서, 너희는 토지의 되찾음을 수여할 것이다.

영적 의미

위 사항은 모든 천국의 천사들이 인정하는 바이고, 더불어 자기들은 주님에 의해 악으로부터 억제되고 선 가운데 계속 있게 된다는 것도 인정하고 있다.

세부적 영적 의미

소유하는 토지 어디에서나 제 토지는 되돌려 살 수 있다란 모든 천국에서 위 사항은 그들에 의해 인정되고 있고, 자기들은 주님에 의해 악에서 유보되고 선 안에 있게 된다는 것도 인정한다는 뜻이다. (3705, 8002, 2966, 10218)

25절. 만일 네 형제 중 누가 지독하게 가난하다면, 그리고 그의 소유의 얼마를 판다면, 그다음 그에게 가장 가까운 친척이 올 것이다, 그리고 그의 형제가 판 것을 되찾으라.

영적 의미

더구나 영적 교회의 사람이 비록 선 가운데 있음에도 진리가 부족할 경우, 그리고 시험 상태 동안 그의 선과 진리가 소외되어 있다 해도 그가 선을 원리로 삼은 덕택에 주님에 의해 보호되고 보존되는 바, 소외되었던 선과 진리도 싸움에 승리함으로 회복될 것이다.

세부적 영적 의미

“네 형제 중 누가 지독하게 가난하다면”이란 비록 영적 교회인이 선 가운데 있다 해도 진리가 결핍할 경우를; 제 소유를 판다란 시험이 있는 동안에 선과 진리가 소외됨을,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주님으로부터 온 선이 거듭나고 있는 그 사람과 더불어 실지로는 소외된 게 아니기 때문이다. 그와 가까운 친척이 와서 그의 형제가 판 것을 되돌려 산다란 선을 원리로 삼은 덕택에 주님에 의해 보호되고 보존되며 시험에 승리함을 통해 소외된 선이든 진리든 모두 회복됨을 말한다. (2360, 9207-7,3705, 4758, 제 23 절, 3703-2, 2937, 2966)

26절. 그리고 만일 그것을 되찾을 사람이 없다면, 그리고 그가 지독하게 부자이고 그것을 되찾기에 충분하다면.

영적 의미

그런데 만일 영적 교회인이 선을 원리로 하지 않고 있음에도 풍부한 진리를 갖추고 있다면 나중에 회개의 일을 거쳐 주님으로부터 선을 실지로 받게 된다.

세부적 영적 의미

“되돌려 살 사람이 없다면”이란 선을 원리로 하지 않고 있음을, 부유해짐이란 풍부한 진리들이 공급됨을, 되돌려 살 힘이 생겼다란 그가 회개의 일을 통해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을 실지 받게 되어 감을 뜻한다. (3703-2, 2937, 2966, 10152)

27절. 그다음 그에게 그것의 판 햇수를 계산하게 하고 그는 그것을 판 사람에게 여분을 반환하라. 그리고 그는 자기 소유지로 되돌아 가라.

영적 의미

그의 선의 품질은 거듭남으로 선 가운데 이식된 진리의 품질에 의거 있어진다. 그래서 주님이 자기에게 만들어 주셨던 선, 그가 소외되게 했던 선들은 그 선을 일반적 형체로 한동안 보존하는 천국 사회에 있는 이들을 통해 주님 만으로부터 실지로 있다는 것을 그는 인정할 것이다. 그러면 거듭나는 주제가 자신을 특별한 선 안으로 충분히 오게 해주리라.

세부적 영적 의미

판 햇수를 센다란 그의 선의 품질은 거듭남을 수단으로 선 안에 이식된 진리의 품질에 의거 있어짐을; 나머지는 그 땅을 산 사람에게 물어줌이란 자기가 소외시켰던 선, 자기로 하여금 할 수 있게 주님이 만드신 선, 이 선들이 일반 형태로 한동안 천국 사회 안에서 보존되게 하셨다는 것을 인정함을; “제 소유지로 돌아감”이란 그가 특별한 자기의 선 안으로 충분히 오게 될 것임을 뜻한다. (10217, 3705, 4758, 2037, 9087, 9097, 2966, 3705, 4758)

28절. 그러나 만일 그가 자신을 위해 그것을 되돌려 얻을 수 없다면, 그다음 그가 판 것을 그것을 산 자의 손에서 희년까지 머무를 것이다. 그리고 희년에 그것은 나갈 것이다, 그리고 그는 자기 소유지로 되돌아 간다.

영적 의미

그러나 만일 인간의 상태가 이럴 경우 즉 거듭남이 진리에 관해 또는 선에 관해 소외되어 있어 지연될 경우 그가 밝히 알게 되어 자기 삶의 가장 깊은 수준에서 선과 진리가 충분히 결합하는 결과가 있을 때까지 그를 위해 소외된 선은 주님에 의해 보존 될 것이다. 이 결합으로 해서 선은 주님에게서 흘러 갈 것이고 진리는 그의 외적 인간 안에서 그 선과 결합될 것이다.

세부적 영적 의미

스스로서는 되돌려 살 수 없다란 그의 상태는 거듭남이 지연되는 것과 같음을; 그가 팔았던 것이란 그가 소외되게 한 것, 진리의 결함으로 계속 소외되어 있는 것을, 그가 판 것이 산 사람의 손에서 희년이 올 때까지 남아 있는다란 이와 같이 소외된 선 또는 진리는 그가 밝히 알게 되어 그의 가장 깊은 수준에서 선과 진리가 충분히 결합하는 결과가 있을 때까지 그를 위해 주님에 의해 보존 될 것임을, 희년이 되어 해약이 이루어져 제 소유지로 돌아감이란 위 결합 때문에 선은 주님으로부터 흘러가게 되고 진리는 외적 인간 안에서 그 선과 더불어 즐겨지게 된다. (9087, 9097, 2966, 3705, 4758, 3705, 4758, 878, 2964, 2966, 8802, 2028, 2029, 7833, 3239)

29절. 그리고 만일 벽을 두룬 성에 있는 거주하는 집을 판다면, 그다음 그는 그것을 판 그 해 안에 그것을 되찾을 수도 있다. 한 해 동안 그는 되찾을 권리가 있다.

영적 의미

누가 교회의 교리로 건립되어 그 까닭에 방어 할 수 있는데 선이 한동안 소외 된 채 있다면 시험에 승리함을 수단으로 시련기간 동안 소외된 상태를 회복할 것이다. 그 이유는 그가 선과 악 중 하나를 선택하는 자유 가운데 아직 있기 때문이다.

세부적 영적 의미

누가 성곽 도시 안에 있는 주택을 판 경우란 자기를 방어해주는 교회의 교리가 건립된 누군가에게서 선이 소외될 경우를; 팔린 후 한 해동안 무를 힘을 가진다란 시험에 승리함을 수단으로 비록 수련 기간 동안 선의 상태가 소외되었다 해도 회복 될 수 있음을; 무를 수 있는 유효 기간은 일 년이다란 그는 아직 선과 악 중 하나를 선택할 자유 속에 있기 때문임을 뜻한다. (2233, 4758, 402, 6419, 2966, 2906, 4758, H.H, 479, 480)

30절. 그리고 만일 그것이 한 해 안에 되찾지 못하면, 그 다음 벽이 있는 성에 있는 집은 영구히 그 자손 대대로 그것을 산 자의 것이 된다. 그것은 희년에 나가지 않을 것이다.

영적 의미

그런데 시련 상태 동안 위 같은 결과가 없다면 이 선은 거듭남을 수단으로 획득하는 자에게 확증 될 것이나 그것을 거절하고 소외되게 한 사람에게는 심판에서 그의 것이 되어 질 수 없다.

세부적 영적 의미

한 해 기간 내에 무르지 못함이란 구속은 수련 상태에서는 결과되지 않음을; 성곽 도시에 있는 그 집은 아주 산 사람의 것이 되어버린다란 이 선은 거듭남을 수단으로 그 선을 획득한 사람에게 확증될 것임을; 희년이 되어도 해약이 안 된다란 선을 소외되게 했거나 거절한 사람은 심판에서까지 그 선을 자기 것이 되게 할 수 없다는 뜻이다. (2966, 2906, 2232, 6419, 402, 984, 2964, 1041, 8802)

31절. 그러나 빙두른 벽이 없는 마을의 집은 시골의 들판들과 같은 것으로 간주할 것이다. 그것들은 되찾을 수 있다, 그리고 그것들은 희년에 나갈 것이다.

영적 의미

교회 밖 선 가운데 있어 진정한 교리로 보호되지 않는 선한 이방인 사이에 있는 사람이라면 그는 심판에서 밝히 알게 될 때 진리로 가르쳐 질 수 있다. 그 이유는 그들에게 있는 선은 가장 깊은 수준에서 진리와 결합되기 때문이다.

세부적 영적 의미

성 밖에 있는 시골집은 들에 있는 것으로 간주한다란 교회 밖 선 가운데 있는 이들, 그리고 진정한 교리로 보호되지 않는 이들은 선한 이방인 사이에 있는 것과 같다는 것을; 희년이 되면 해약되고 물러진다란 위의 사람들은 심판에서 밝히 알게 되어질 때 진리로 훈육될 수 있음을 뜻하는데 그 이유는 그들에게 있는 선은 가장 깊은 수준의 진리와 결합되어지기 때문이다. (2233, 3271, 7407, 620, 2966, 8802)

32절. 그럼에도 불구하고 레위인의 성읍들, 그들 소유의 성읍들 속의 집들은 레위인이 언제나 되찾을 수 있다.

영적 의미

그럼에도 선으로부터 진리 가운데 있는 이들, 그리고 진리를 체현 해낸 이들은 소외된 진리 또는 선을 되찾을 능력을 계속 갖고 있다.

세부적 영적 의미

레위인들의 성읍이란 선에서 파생되는 진리들을, 그들이 소유한 성읍의 집이란 진리로 체현되어진 선을, 언제든지 레위인은 무를 수 있다란 그들은 소외된 선과 진리를 구속하는 능력 가운데 계속 있음을 뜻한다. (402, 6716, 2233, 2966, 3705, 9150)

33절. 그리고 만일 레위인들 중의 누가 되찾는다면, 그다음 팔렸던 집, 그리고 그의 소유의 성읍은 희년에 나갈 것이다. 그 이유가 레위인들의 성읍들은 이스라엘 자손 사이에서 그들의 소유이기 때문이다.

영적 의미

선이 진리로 활동하는 곳은 어디서든지 심판에서 선이 진리와 아주 깊숙한 수준에서 결합되는 바 소외된 진리 이든 선 이든 회복되어 진다. 그 이유는 진리로 체현된 선이 확증될 경우, 이 선은 영적 교회인의 필수되는 생명이 되기 때문이다.

세부적 영적 의미

레위인 중의 누가 되물림이란 선이 진리로 말미암아 작동되는 곳은 어디든지를, 팔려진 집 그리고 그의 소유가 된 성은 희년이 되면 무효가 된다란 심판에서 선이 가장 깊게 진리와 충분히 결합될 때 소외된 선 이든 진리 이든 회복된다는 것을, 레위인들의 소유가 된 성은 이스라엘 자손 사이에서 영원히 그들 소유이다란 진리 안에서 체현된 선은 확증되어질 때 영적 교회인의 본질 되는 생명 임을 뜻한다.(6716, 2966, 2233, 402, 2029, 2966, 8802, 2028, 2029, 3654)

34절. 그러나 그들 성읍들의 외곽에 있는 들판은 팔려지지 않을 것이다. 그 이유가 이것은 그들의 영구한 소유지이기 때문이다.

영적 의미

진리와 선이 충분히 결합되어 있는 사람의 외적인 선은 소외될 수 없다. 그 이유는 이런 상태라면 외적 선 역시 주님으로부터 온전히 있게 됨을 지각하기 때문이다.

세부적 영적 의미

그들 성읍들의 외곽에 있는 들판은 영구 소유지로서 사고 팔 수 없다란 진리와 선이 충분히 결합되어 내적으로 있는 사람에게 있는 외적인 선은 그것이 제 탓이라고 하여 소외되어질 수 없다. 그 이유는 그 모든 것이 주님으로부터 임을 그가 지각하기 때문이다. (7407, 6078, 402, 4758, 6148, 2029)

35절. 그리고 만일 네 형제가 지독하게 가난하다면, 그리고 그의 손이 너에게 기대고 있다면, 너는 그를 받쳐줄 것이다. 즉 낯선 자나 체류자로서 그는 너와 함께 살 것이다.

영적 의미

진리가 결핍되어 선을 행할 힘이 부족한 외적 교회에 있는 사람, 그래서 진리 없는 자연적 선을 행하고 있다거나 선과 진리에 대해 가르침을 받는 과정에 있는 사람들을 후원하는 것이 영적 교회인의 의무이다.

세부적 영적 의미

“만일 네 형제가 옹색해져서 의탁해야 할 처지라면”이란 진리들이 부족해서 선을 행할 힘이 결핍된 외적 교회 안에 있는 이들을, 그를 붙들어줌이란 그를 지원해 줌을, 그가 낯선 자나 체류자(식객)로 살아감이란 한 동안 위 같은 사람들은 진리 없는 자연적인 선으로부터 행동하거나 선과 진리에 대한 가르침을 받는 과정에 있게 됨을 뜻한다. (1222, 2360, 9209, 878, 3901-2, 6343, 8002)

36절. 너는 그 사람으로부터 이자를 취하거나 소출을 가져가지 말라. 그러나 네 하느님을 경외하라. 하여, 네 형제는 너와 함께 살 수 있다.

영적 의미

보상을 기대해서라든가 세상적, 이기적 동기로부터 타인에게 선을 행하지 말라. 오로지 외적 인간은 하모니가 유지되게 해서 사랑과 진리에 바탕을 둔 거룩한 두려움을 느껴서 도움을 받아야 할 것이다.

세부적 영적 의미

세나 이자를 그에게서 받지 못함이란 선은 보상을 기대해서, 세상적이거나 이기적 동기로부터 행해져서는 안 된다는 것을, 하느님을 경외함이란 외적 인간은 사랑과 진리에 바탕이 있는 거룩한 두려움을 느낌으로 도움 받아져야 함을, “네 형제는 너와 함께 살 수 있다”란 하모니가 유지될 수 있기 위하여를 뜻한다. (9210, 2826, 1222, 290)

37절. 너는 그에게 이자를 붙이는 돈을 주지 말라, 그리고 그에게 소출을 위하여 네 양식을 주지 말라.

영적 의미

세상적 동기 이든 이기적 이든 어느 것으로부터서 이든 보상을 목적으로 선을 행하는 것은 불법이 되는 바,

세부적 영적 의미

그에게 이잣돈을 놓지 못하고 양식을 장리로 꾸어 주지도 못한다란 세상 동기 또는 이기적 동기로부터이든 보상을 기대해서 선을 행하는 것은 불법이다는 뜻이다.(9210)

38절. 나는 주 너의 하느님이다, 즉 너희의 하느님이기 위해, 가나안의 토지를 네게 주려고, 이집트의 토지로부터 너를 데려왔다.

영적 의미

그 이유는 주님께서는 순수한 사랑과 진리로부터 행동하시고 영적 인간이 주님으로부터 선을 받고 이 선으로 해서 진리까지 받을 수 있게 하시기 위해 위와 같은 모든 동기들로부터 그를 구속해 주셨기 때문이다.

세부적 영적 의미

”나 여호와가 너희를 이집트 땅에서 이끌어낸 너희 하느님이다. 나는 너희에게 가나안 땅을 주어 너희의 하느님이 되리라”란 주님은 순수한 사랑과 진리로 행동하시는 바, 위와 같은 동기들로부터 영적 인간을 구속해주시는 것은 그가 주님으로부터 선을 받을 수 있게, 그럼으로 해서 진리까지 받을 수 있게 해주려는 이유에서이다. (2001, 2966, 3705)

39절. 그리고 만일 네 형제가 지독하게 가난하여, 자신을 네게 판다면, 너는 그를 노예로서 섬기게 만들지 말라.

영적 의미

더구나 외적 인간이 영적 인간에 스스로 복종할 때 진리 없는 외적 인간이라 해도 이기적 동기로 조절되어서는 안 된다.

세부적 영적 의미

“너희 동족 중 누가 옹색해져 너에게 몸을 판다면 그를 노예 부리듯 부리지 못한다”란 진리가 없는 외적 인간도 그 인간이 영적 인간에 스스로 복종할 경우 이기적 동기로부터 통제되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1222, 9209, 6142, 6143, 8074)

40절. 고용한 종 같이, 체류자 같이, 그는 너와 있을 것이다. 그는 희년의 해까지 너를 섬길 것이다.

영적 의미

종교에서 그가 보상을 목적으로, 또한 자연적 수준의 마음이 내켜서 하는 행동은 한동안 허용되고, 또 수련 기간의 상태에서 계속될 지라도,

세부적 영적 의미

그가 품꾼이나 식객처럼 주인과 함께 있음이란 종교에서조차 보상을 기대해서, 또는 자연적 수준의 마음만이 내켜서 행동할지라도를, 희년이 될 때까지 섬김이란 위 행동은 잠시 허용되고 수련 상태에서는 계속 될 수 있다는 뜻이다. (8002)

41절. 그다음 그는 너로부터 나갈 것이다, 그와 더불은 어린이들(이 나갈 것이다). 그리고 자기 원래의 가족으로 되돌아갈 것이다, 그리고 자기 아버지(조상)의 소유지로 그는 되돌아갈 것이다.

영적 의미

그럼에도 선과 진리가 영적 인간에게 가장 깊은 수준에서 충만되게 결합될 때, 자연적 인간도 선의 측면에서 진리의 측면에서 모두 자유로워 질 것이다. 영적 인간처럼 의지와 이해함 모두에서 영적 동기로부터 행동할 것이다.

세부적 영적 의미

희년에 그를 자식들과 함께 내보냄이란 선과 진리가 영적 인간과 더불어 가장 깊은 수준에서 충분히 결합될 때 자연적 인간의 선 이든 진리 측면 이든 자유로워질 것 임을, 자기 지파와 자기 조상의 소유지로 돌아감이란 영적 인간의 경우같이 그는 의지와 이해함 측면에서 영적 동기들로부터 행동할 것이라는 뜻이다. (8802, 489, 2966, 7833, 3239, 2028, 2029)

42절. 그들은 내가 이집트의 토지로부터 데려온 나의 종(servant)들인 바, 그들은 노예로서는 팔려지지 않는다.

영적 의미

그 이유는 자연적 인간도 단지 자연적일 뿐인 애착으로부터 주님에 의해 구속되었기 때문인 바 소외되어서는 안 되고 이기적 사랑으로부터 영적 인간에 의해 규율되어서는 안 되리라.

세부적 영적 의미

그들은 내가 이집트 땅에서 이끌어낸 나의 종들인 바 종이 팔리듯 팔려서는 안 된다란 자연적 인간도 주님에 의해 자연적일 뿐인 애착에서 구속되는 바 소외당해서는 안되고 이기적 사랑으로부터 영적 인간에 의해 통치되어서도 안 된다는 뜻이다. (7038, 8866, 4758, 8974)

43절. 너는 그를 가혹하게 통치하지 말라. 그러나 네 하느님을 경외하라.

영적 의미

자연적 인간은 선에서 떨어진채 있는 진리로 규율되어서는 안 되고 선과 결합된 진리로 규율되어야 하리라.

세부적 영적 의미

심하게 부리지 말고 하느님을 경외 해라란 그는 선에서 분리된 진리로 통치되어서는 안 되며 오로지 선과 결합된 진리로만 통치되어야 한다는 뜻이다.(6148, 4180)

44절. 그리고 너는 남자 노예들과 여자 노예들은 소유할 것이다. 너 주변의 나라들로부터 너는 남종과 여종을 살 것이다.

영적 의미

그러나 악이 있는 애착과 자연적인 능력들, 또는 악 가운데 있는 자들은 처벌이라는 두려움을 수단으로 통제될 수 있을는지 모른다.

세부적 영적 의미

나라 주변에 있는 남자 노예나 여자 노예(bondmen and bondmaid)란 악이 있는 자연적 힘과 애착들을, 그들을 남자 노예와 여자 노예로 사라란 위의 힘과 애착은 처벌의 두려움으로 통제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7998, 7999, 3718)

45절. 더욱이 너 사이에 체류하는 낯선 자의 어린이들로부터 너는 살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네 토지에서 낳은 너와 더불어 있는 그들의 가족들로부터 (살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네 소유물이다.

영적 의미

또한 자연적 인간 속의 악으로부터 오는 거짓 가운데 있는 이들, 그리고 훈육 받고 있는 이들은 자기들의 이기적인 두려움과 동기들에 호소함을 수단으로 통제될는지 모른다. 그 이유가 이것들은 교회와 연결되어 받아지는 선과 진리를 증진되게 하는 수단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은 한동안 종속될 수도 있다.

세부적 영적 의미

몸붙여 사는 외국인의 자손이란 자연적 인간의 악에서 온 거짓 속에 있는 이들, 그리고 가르침 밑에 있는 이들을, “너희 땅에 와서 낳은 자식과 너희와 섞여 사는 그들의 친척들에게서 사라”란 이들은 그들의 이기적인 두려움과 동기에 호소하게 함으로 통제될 수 있음을, 소유로 삼음이란 그들은 교회와 연결됨으로 받게 되는 선과 진리가 증진해 주는 수단이 될 수도 있음을, 그리고 이런 사람은 한동안 종식되어야 함을 뜻한다. (1147, 8002, 7998, 7999, 3718, 1215, 1145, 1708, 2028, 2029)

46절. 그리고 너희는 그들을 너 이후 너의 자손을 위해 소유물로 붙잡도록 상속을 하라. 그들로부터 너는 너의 종을 영원히 취한다. 그러나 네 형제, 이스라엘 자손을 너는 지배하지 말라, 서로가 가혹함을 가지고 지배하지 말라.

영적 의미

그런고로 거듭나는 과정에서 자연적 애착은 영적 힘으로 통제될 수도 있고 진실로 종속될는지 모른다. 참으로 자연적 힘은 계속 종속되어야 하리라. 그러나 영적 동기로부터 자진해서 종속된 자연적 힘은 이기적 동기로부터 또는 선이 없는 진리로부터 통제되어서는 안 된다.

세부적 영적 의미

자손 대대로 물러 준다란 거듭나는 과정 속에서도 역시 자연적 애착들은 영적 힘에 의해 통제되어야 하고 진실로 종속되어야 함을; “그들을 종으로 영원히 부린다”란 참으로 자연적인 힘은 계속적으로 종속되어야 함을; 너희 동족 이스라엘 백성끼리는 아무도 심하게 부릴 수 없다란 영적 동기로부터 기꺼이 종속하는 자연적인 힘은 이기적 동기로부터 라든가 선이 없는 진리로부터 통제되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1799, 1802, 2567-7, 4286, 6148, 4180)

47절. 그리고 만일 너와 더불어 있는 낯선 자나 체류자가 지독하게 부유해지고, 그들 옆의 너는 지독하게 가난해져 있어, 너와 함께 있는 낯선 자나 체류자에게 자신을 판다면, 또는 낯선 자의 가족이 되었다면,

영적 의미

이 외에, 만일 자연적인 수준의 마음이 내켜서 선을 행하는 이들, 또는 선이 없이 진리 가운데 있는 이들이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에 풍부해 있는 데도, 외적 교회 속의 인간이 진리에 결핍되어 있어 선과 진리가 소외된 채 있고, 악과 거짓들이 위 같은 자연적 성향을 통해 힘을 발휘하고 있다면,

세부적 영적 의미

외국 출신 거주자란 가르침 밑에 있는 사람, 그런고로 선이 없는 진리 가운데 있는 사람, 동시에 자연적 수준에서 마음이 내킴으로부터 행동하는 사람을; 부유해짐이란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을 풍부히 가지고 있음을; 너희 동족이란 외적 교회에 속한 사람을; 매우 가난해짐이란 진리에 결핍되어 있음을; 외국인에게 자신을 팜이란 선과 진리가 소외되고 악과 거짓들이 자연적 수준의 마음을 지배함으로 해서 세력을 가지고 있음을 뜻한다. (8002, 10227, 1222, 4758)

48절. 그가 팔려진 이후, 그는 되찾을 수 있다. 그의 형제 중의 하나가 그를 되찾을 수도 있다.

영적 의미

위와 같은 고통 당하는 이들에게도 구속은 가능하다. 그들도 자기들이 사랑하는 단순한 선으로부터의 진리에 순종함으로 구원될 수도 있다.

세부적 영적 의미

팔린 후 이더라도 풀려 날 수 있고 그의 동기 중 누가 물러 낼 수 있다란 위와 같아서 고통받는 이들도 구속 될 수 있다는 것, 그 이유는 그들도 자기들이 사랑하는 단순한 선 속의 진리에 순종함으로 구원될 수 있기 때문이다. (4758, 2966, 1222)

49절. 또는 그의 삼촌, 또는 그의 삼촌의 아들이, 또는 그에게 가까운 친척의 누구가 그를 되찾을 수 있다. 또는 만일 그가 지독하게 부자로 된다면, 그는 자신을 되찾을 수 있다.

영적 의미

또는 방계에 속하는 외적인 선 또는 진리를 수단으로, 또는 자기들 상태에 걸맞은 어떤 종류의 선이든 그 선을 수단으로, 또는 만일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이 그들에게서 증가된다면 그들 스스로 구속 될 수도 있다.

세부적 영적 의미

그의 삼촌 또는 삼촌의 아들이란 방계에 속하는 외적 선 또는 진리를, 가까운 친척 중 누구란 그들 상태에 적합한 어떤 종류의 선을; 만일 그가 부유해진다면 이란 만일 진리와 선에 관한 지식이 그들에게 증가 된다 면을; 물러냄이란 생활에 진리를 응용함으로 악에서 해방됨을 뜻한다.(3612, 489, 3703-2, 10227, 2966)

50절. 그리고 그는 그가 자신을 판 해로부터 희년 까지를 자기를 산 자와 계산하라. 그리고 그의 판매가는 년수에 따라서, 그가 그에게 고용된 종으로서의 시간에 따라서이다.

영적 의미

이렇게 구속됨은 수련 기간의 상태 동안에 해당되는 거듭나는 과정에서 노력함으로 성취되어진다. 자기들 삶의 품질은 계속되는 상태에 있어지는 선과 진리에 의거 있어진다. 그리고 선을 취득함에 있는 이기적 동기들의 세력이 어떠 하느냐에 의거 있어진다.

세부적 영적 의미

팔려진 해에서 희년까지의 햇수를 계산함이란 위와 같은 구속은 수련 상태 동안 거듭나는 과정에서 노력하여 성취 될 수 있다는 것을, 그의 판매가는 년수에 따라서 이다란 그들 삶의 품질은 계속되는 상태에 있는 진리의 선에 따라 정해짐을, 고용된 종으로 침이란 선을 획득하는 것은 이기적 동기가 얼마나 우세해 있었는가에 의해 지연될 것임을 뜻한다. (10217, 2937, 4758, 8802, 2252, 8002)

51절. 만일 아직도 많은 년수가 (남아) 있다면, 년수에 따라 그가 사들여진 값으로부터 그의 되찾음의 값을 되물려라.

영적 의미

이런 영향에 의거 자기들은 주님에 의해 그들에게 자유로이 주어진 신성한 진리를 수단으로 악에서 구원되고 선 안에 보존되었다는 것을 인정하리라.

세부적 영적 의미

희년까지 남은 햇수가 많으면 그 햇수를 따라 그 만큼 많이 내고 무를 수 있다란 악에서 해방되어 선 안에 보존된 것은 주님에 의해 그들에게 자유로이 주어진 신성한 진리를 수단으로 있어졌다는 것을 위의 영향에 따라 인정함을 뜻한다. (2966, 10217)

52절. 그리고 만일 희년까지 몇 년 남았다면, 그러면 그는 그와 셀 것이다. 즉 그의 년수에 따라 그는 자기 되찾음의 값을 도로 줄 것이다.

영적 의미

만일 진리와 가장 깊은 선과의 결합이 덜 떨어진 상태라면 그 품질은 자기들의 생명이 주님으로부터 임을 인정하는 수준에 따라 있어질 것이다.

세부적 영적 의미

희년까지 남은 햇수가 적으면 그만큼 적게 무름이란 선과 더불어 진리의 충분한 결합이 아직 멀리 떨어지지 않고 있다면 자기 생명이 주님으로부터 임을 아직 인정하고 있는 수준에 따라 그의 상태는 정해질 것임을 뜻한다. (2966,10217)

53절. 고용된 종으로 매 해 그는 그와 더불어 있을 것이다. 그는 네가 보기에 가혹하게 그를 다루지 말라.

영적 의미

계속되는 상태들 안에 있는 이기적 동기들의 영향에 비례해서 그들의 일반적 상태가 있어질 것이다. 자연적 인간이 영적 인간을 지배하도록 허용되지는 않으리라.

세부적 영적 의미

그를 한해 한해 고용된 종으로서 대접을 해야 하고 심하게 부리지 못한다란 계속되는 상태 안에 있는 이기적 동기의 영향에 따라 그들의 일반 상태가 있어진다는 것, 자연적 인간은 영적 인간을 누르도록 허용되지 않았다는 뜻이다. (8002, 487, 488, 6148, 4180)

54절. 그리고 만일 그가 이런 (수단)으로 되찾아지지 못한다면, 그다음 그는 자기 어린이와 더불어 희년에 가서야 나갈 것이다.

영적 의미

만일 선 가운데 있는 위와 같은 자연적 인간이 제반 경험들을 수단으로 교회 속의 거짓의 힘에서 구속되지 않는다 해도 그들이 선 가운데 있었던 이유로 심판에서 진리가 선과 가장 깊은 수준에서 상호적으로 서로 결합될 것이다.

세부적 영적 의미

그가 이런 조건으로 물리지 못했으면 희년에야 자식들과 함께 해약이 된다란 만일 위와 같이 선 가운데 있는 자연적 인간이 위 같은 경험에 의해 교회 안에 있는 거짓의 권세에서 충분히 구속되지 않는다 해도 심판에서는 그들이 선하기 때문에 진리는 모든 충만함 속에서 상호적으로, 서로 간에 가장 깊게 그 선과 결합된다는 뜻이다. (2966, 8802, 2252, 489)

55절. 나에게 이스라엘의 자손은 종들이다. 그들은 내가 이집트의 토지로부터 데려온 나의 종들이다. 나는 주 너의 하느님이다.

영적 의미

그 이유는 영적 교회인은 내적으로 이든 외적으로 이든 주님의 종들이요, 주님께서 내적 인간에 있는 것들, 외적 인간에 있는 것들, 모두 구속 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주님은 교회인과 더불어 진리가 모든 선과 결합하는 유일한 근원으로서 예배되어져야 하리라

세부적 영적 의미

이스라엘 백성은 주님의 종이다란 영적 교회인은 내적으로 외적으로도 주님의 종 임을; 이집트 땅에서 데려옴이란 주님께서는 내적 인간 인 것과 외적 인간 모두를 구속해주셨음을; “나는 주 너의 하느님”이란 그분은 교인 속에서 선과 진리를 결합되게 하는 유일한 근원이심을 각기 뜻한다. (3654, 1713, 7038, 8866, 2001)

25장의 종합적 고찰

성경을 세심하게 읽는 독자라면 본문과 다음 두 장은 레위기 전체에 걸쳐 있는 내적 의미의 시리즈에서 정점을 이루는 부분임을 이미 알고 있으리라 본다. 그 이유가 지금 다루어 온 본문이 갖가지 수준에서 갖가지 국면에서 인간 거듭남이 충만 되는 것을 주제로 하기 때문이다. 간단히 살펴보자.
통상적으로 말한다면 안식일 또는 쉼의 날은 모든 영적 싸움이 끝났을 때 있게 되는 거듭남의 완성을 표현한다는 것은 기독교계에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런 이유로 천국 자체가 영원한 안식일이라고도 불린다. 인간이 모든 시험에서 영원히 쉬는 상태, 그 결과 주님을 영원히 예배하는 곳이 천국인 것은 맞는 말이다. 그러나 누군가가 상상했듯, 천국에서의 쉼과 평화라는 상태는 활동 없는 영원한 상태, 천사들의 할 일은 오로지 성소를 돌보는데, 주님을 예배하고 찬양하는데 영원히 고용되고 있다고 생각했다면 그것은 착각일 뿐이다. 천국의 쉼과 평화는 영적 전투로부터 자유로운 것, 그곳에서 영원히 있게 되는 예배는 선한 생활로 이루어진 예배이고, 이 생활은 각종의 선용을 수행함 속에서, 선용을 수행하여 기쁨을 느끼는 가운데서, 순수한 선용의 품질이 무엇인지 식별하는 지혜를 가지고 이루어진다. 천국에서 천사들의 생활에도 계절, 즉 상태의 변화가 있되 그 안의 모든 사람은 그분의 인간을 신성이 되게 하신 주님과 하나가 되고, 신성한 존재에 대한 가르침과 모든 선이 주님으로부터 라고 입을 모아 실감하는 가운데 서로의 사랑을 표현한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그분의 자녀들로부터 찬양을 받는데 그 이유는 그들이 신성한 사랑과 지혜에 진정 감사를 느끼기 때문이요, 이 사랑과 지혜는 그분과 자녀 간에 상호 교통이 가능하게 한다. 게다가 그분이 찬양과 예배에 흡족해 하시는 것은 자아 영광으로 도취하셔서가 아니다. 천사들조차도 자아 영광 같은 것 때문에 찬양과 영예와 영광으로 기뻐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런 일이 있으면 고개를 돌린다. 그 이유는 모든 진짜 축복은 주님으로부터만 가능함을 그들이 너무나 잘 알고 있고, 영예로 단순히 기뻐해지는 것은 자신 속에 잠복된 자아 사랑의 어떤 암시 때문인 것까지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통상의 안식일이 완전한 천국 상태이어야 이치가 맞는다. 한 마디로 안식년, 희년은 천국 상태가 더욱 강렬한 완전함을 명시한다. 다른 측면에서 생각해 본다면 세 가지 안식은 낮은 천국, 중간 천국, 높은 천국을 각기 의미한다는 것을 본 장의 모든 항목들로부터 자세히 나타나고 있다.
안식년에는 세 가지 사항이 지시되고 있다. 그중 두 가지가 본문에서 언급되는데, 그것은 씨를 뿌리고 거둠을 중지하는 것과 가난한 자와 짐승에게 토지의 산물을 주라는 명령이다. 그리고 또 한가지 사항은 신명기 15장 1-3절에 있는데 모든 빚을 삭쳐 주라는 명령이다. 이제 이 세 가지 명령의 영적 취지를 생각해보자. 육 년 동안은 씨를 뿌리고 거두어들이고 들과 포도원에서 열심히 일하게 되어있다. 이 육 년은 영적 전투를 하는 인간의 상태들을 의미하고 칠 년째는 쉼과 평화를 의미하고 있다. 그러나 이에 대한 의미만이 위 사항 만에 포함된 전부는 아니다. 그 이유는 씨를 뿌리고 거두는 육 년은 우리 지성이 진리로 계발되는 쪽으로 인도되고, 심정은 지식을 사랑함으로부터 선한 원리를 채택하여 주님과 이웃을 순수하게 사랑해야 한다는 의무감 밑에 선을 실행해보는 것까지 포함하여 의미되는 용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칠 년째란 사랑을 완전히 실감해서 과거의 상태들이 중지되는 것까지 의미하는 용어이다. 물론 전투의 상태와 계발의 상태는 동시에 존재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천국 상태에서 지성의 계발은 없지 않을까? 라고 생각해 볼 수 있을는지 모른다. 확실히 그러하다. 그러나 천국 상태에서 우리가 선해지기 위해 지식을 획득하고 우리의 능력들을 발달시키려는 것 대신 우리는 선을 세부적으로 사랑하는 결과, 위 사항들이 행해져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자신의 기능 면에서와 일반적 선용 면에서 우리의 목적은 더욱더 완전해져 간다고 표현되어야 할 것이다.
천국 삶에 포함되어 있는 두 번째 사항은 내적, 외적으로 있는 모든 선한 것들을 즐기는 그 속에 자유가 있다는 것, 다른 말로해서 모든 선한 것을 자기 것 삼는데 있어 자연적 인간 안에서 뿐아니라 영적 인간 안에서도 자유가 있다는 것이다. (5-7절) 셋째로, 위 자유의 더 나은 상태가 빚을 사면해주는 것으로 나타내지고 있다. 이는 “주님으로부터 이다고 인정하는 진리에 순종하는 모든 상태가 선을 사랑함으로 해서 순종하는 상태, 즉 진리를 원리로 할 때 있어지는 의무감의 순종이 중단되고 사랑이 지금은 모든 행동의 동기이기 때문이다. 이 상태에서는 선행이 우세해져 자아 강박감으로부터 자유로움이 뒤따른다.” (신명기 15:1-3). 이 셋째 항목은 차후 신명기를 살필 때 더 자세히 거론 할 것이다.
두 번째 항목에서는 희년을 생각해 보아야 하는데 이 희년은 천적 인간의 완전한 상태, 또는 천국, 영적 인간에 속하는 것 또는 어떤 세부적인 측면에서의 천국의 완전한 상태를 표현한다. 이는 시리즈의 배열로부터 알게 된다. 그 이유가 시리즈의 뒷부분은 앞 부분에 의존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이것에 응용되는 것은 다른 것과도 관련되기 때문이고 더 멀리까지 즉 완전한 자연적 인간 또는 최말단 천국에까지 관련을 이룬다. 이것이 일곱째 달 십일, 보상(죄 벗음)받음의 날, 나팔을 분다로 표현되어 있다. 왜 그럴까? 신성한 사항을 더 명백하게 지각하거나 밝히 알게 되면 반드시 악의 제거, 아마 완전한 악의 제거가 따르기 때문이다. 그러면 선이 주님으로부터 흘러들게 되고, 주님께서 우리 속에 아껴둔 것들이 열매를 맺는 바, 신앙의 상태가 충만 되어 완성된다.
위의 결과 기쁨이 어떠한지 실감해 보자. 거기에 전체 인간을 망라해서 완전한 자유가 있는다. 거기에 가장 깊은 수준에서 주님과의 충만된 결합이 있는다. 이로부터 바깥쪽 즉 자연적 평면에 있는 선한 모든 것을 충분히 즐기기까지 한다. 이런 이유 때문에 희년이 세 번 말해진 것이다. 그리고 저마다 제 소유지로 돌아간다는 것에 각자가 지닌 선을 실감하는 것이 상징화되어 있다. 천국은 하나의 장엄한 인간이고, 거기서 각 천사는 자신에게 꼭 맞는 기능을 가진다. 게다가 각 천사는 그 직능을 포기하려는 바램을 갖는 적이 없다. 그들은 삶 전체를 통해 사고 파는 일을 계속한다. 즉 간직하려 했던 것과 헤어지고 한때 자신의 것으로 되어 있던 것이 영구히 자신의 것으로 획득된다. 그래서 모든 것은 내향의 삶 속에 있는 깊은 쉼 속에서 올바른 생각과 느낌이 신비스런 하나됨에 의존한다. 우리는 영적으로 옹색한데 그 이유는 부유한데 부유한지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좌우지간 우리가 고향, 우리의 소유지에로 되돌아 갈 때 우리는 결코 우리의 부자 된 것들을 잃지 않게 된다. 그래서 우리의 희년에 비정의는 없고 어느 형제에게도 잘못하는 일도 없을 것이다. 그 이유는 우리의 삶이 사랑과 총명으로 완성되기 때문이다(17절). 따라서 이 절에 이어지는 두 절은 우리로 하여금 천국에서는 어떤 악과 거짓도 괴롭힐 수 없다는 것, 거기에는 충만된 즐거움만이 있으리라는 것을 보증해주고 있다. 이 항목 끝에 있는 요점은 매우 흥미 있다. 천사들, 또는 각 수준에 있는 모든 천적 인간이 의식하는 바, 자기들이 주님께 의존되어 있다는 것, 그분만이 자기들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주실 수 있는다는 것, 자기들의 선은 어느 누구의 것도 될 수 없고 소외당할 수도 없다는 것, 이 선은 주님의 것이라는 것, 자기들 스스로서는 선을 가지지 못하고, 지식을 지니는 것조차도 불가능하다는 것, 이런 사항들을 자기들은 계속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사항은 완전한 인간에 속하는 모든 상태들이다. 이런 상태로 가기 위해 불완전한 인간에게 분투노력함이 필요한 것이다.
이제 25절 이하에 있는 여러 가지 규정들, 거듭남에 관련된 사항을 살펴보자. 첫 대목에는 두 가지 경우가 있다. 전자는 가까운 친척이 있어 되돌려 살 경우, 후자는 친척이 없어 되돌려 사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그래서 전자는 거듭나는 동안에 선 가운데 있긴 하나 그 선이 소외되게 한 상태이고, 후자는 선이 없이 진리 가운데만 있어 선이 소외되게 한 상태이다. 어찌됐든 악에 어떤 길을 허용할 때 우리는 선과 진리가 소외당하게 만든다. 이런 경우의 발생은 거듭남의 진보가 시작되려할 때 또는 진보해가고 있을 때 자칫 일어나기 쉬운 상태들이다. 그래서 이 구절은 각 경우에 발생하는 것을 가르치고 있다. 그런데 되물려 살 친척은 누구일까? 이 친척이란 자신이 속한 천사들 사회에 있는 일반적 선을 통해서, 그리고 가장 깊은 측면에 있는 선을 통해 역사 하시는 주님이시다. 모든 이는 자신이 선을 행하겠다고 선택만 하면 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 그 이유는 모든 사람은 구속되어 있어 선과 악 사이를 선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고로 두 번째의 경우가 주어지고 있다. 부자가 된 가난한 사람은 위 능력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자기가 소유한 진리를 적절히 사용하는 것, 주님을 인정하고 회개의 일을 수행해 갈 수 있다. 이런 과정 속에서 자신의 구속이 나타나게 된다. 이제 27절에 기술된 과정에 주목해 보자. 이 과정은 천국의 신비 제 2966항에 있는 가르침 즉 “되찾는 값이란 인간이 수용하는 것, 수용하는 정도만큼을 서술하는 용어이다”는 사항과 일반적으로 일치한다. 그가 그것을 팔 사람에게 나머지를 회복시켜주는 것을 “자기로 가능할 수 있게 된 선은 그 선을 일반 형태로 한동안 보존되게 한 천국 사회 안에 있는 이들을 통해 주님 만으로부터임을 인정함”을 뜻한다. 이는 천국의 신비 제 8685항에서 알 수 있는데, 또한 그곳에서 보여주는 것은, 자신의 선한 상태에 오게 될 때 그 사람에게 직, 간접적으로 주님으로부터의 유입이 있는다는 것, 즉 직접적으로는 주님 자신으로부터서, 간접적으로는 천국을 통해 유입이 있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전에, 또한 “한 동안” 직접적인 유입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알게 되는 바, 어떻게 거듭나는 인간이 그의 천국 사회를 통해, 그 사회에서 선에 관한 자기 상태를 실감하게 되는가에 대하여서 이다. 이에 대한 사항은 28절에 기술된 바 같은 거듭남이 지연되는 경우까지 설명해준다.
다음 문단에 관한 검토는 외적 측면에 보다 더 치우쳐 있는 이들과 더불어 있는 소외된 선의 구속함(되찾음)에 관한 것이다. 이에 대한 기본 되는 진리는 유효기간 일 년(whole year)으로 나타내진 것 즉 수련 기간 동안 또는 자연적인 삶 동안에서만 되칮아 질 수 있다는 것이다. 수련 기간 동안 모든 이는 선과 악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 속에 있다는 것, 이 상태는 자연적인 삶에 한정되어 있다. 그 이유는 자연적인 삶이 최말단 삶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언제나 기억하고 있어야 하는 것은, 거듭남은 창조같이 첫 번째 되는 것, 즉 가장 높은 원리들의 작용으로부터 있게 되어 마지막 째 되는 것 또는 가장 낮은 원리가 높은 원리에 협동하는 작용으로 이루어진다는 것, 더 달리는 거듭남이 결과될 수 없다는 것에 대해서다. 이 진리에 관하여는 천국과 지옥 470-483항을 읽기 바란다. 그 항을 보면 성경으로부터, 추론으로부터, 스웨덴볽의 경험으로부터의 확증들이 있다. 그러나 레위인들의 성읍이나 집들은 언제든지 글자대로 보면 약정된 해가 넘었어도 무를 수 있다고 말해지고 있다. 이는 일반 진리와 모순되는 듯 여겨진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그 이유는 레위인들은 어느 정도라도 이미 선 가운데 있는 사람, 또는 진리의 선 가운데 있는 사람, 거듭남의 진보를 만들고 있는 사람을 표현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언제든지, at any time”라는 용어는 수습 기간 동안 어느 상태에서 이든지를 뜻하는 것으로 해석되어야 할 것이라 본다. 이 수습 기간은 하나의 희년으로부터 그 다음의 희년까지의 햇수들로 표현된다. 이는 희년의 의미로부터 알 수 있다. 레위인에 관해 말해지는 한 가지가 더 있다. 그들의 마을에 딸린 들판은 사고 팔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라는 말인데, 이는 외적인 선은 내적으로 선과 진리가 충분히 결합되어 있을 경우 소외 되어질 수 있다는 것을 명시한다.
위 사항 외에도 여러 가지 규정들이 있는데 여기서 상세하게 설명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주님과 종에 관련되는 것, 모두 희년에 관계되고 있다. 이에 대해서는 몇 가지 일반적 관점만을 언급하면 충분할 것으로 본다. 본문에 주어진 지시 사항에서 아주 명확한 것은, 인간이 자기 동족을 노예로 만드는 것은 신성한 사랑의 속성에 일치되지 않는다는 것, 신성한 질서에 따른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자손들은 동족을 노예로 삼아 팔고 사지 않도록 명령받았는데 이래야 주님의 의지에 일치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종으로 부리려는 쪽으로 행동하려는 것은 그들이 지닌 자연적 수준의 마음에 있는 성향이었기 때문에 여기서 기술되는 규정들은 그들이 지닌 오로지 자연적일 뿐인 사랑을 온건하고 부드러워지게 하려는 쪽으로 의도 된 것만은 틀림없다. 이런 경우와 비슷한 성서 구절이 마태복음 19장 8절인데 아내와 이혼하는 것을 허용하는 것을 인용한 대목에서 이다. 이런 허용의 이유까지도 그들 심정이 완악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복음서로부터서도 보다 쉽게 이해되는데 이는 내적 의미를 밝히 알게 되면 확증까지 되어진다.
주인과 종의 관계가 비록 천국에서도 확실히 구분 지어져 있다 할지라도 그곳에서의 모든 통제는 서로 간의 사랑으로 이루어진다. 주인은 종을 사랑하면서 사랑으로부터 지시하고, 종은 주인을 사랑하면서 사랑으로부터 순종해간다. 이는 이기적 사랑에서 발생되는 지배를 사랑하여 통치하는 것과 상반된다. 이기적 사랑은 권력을 사랑하고 세상에 있는 재물 모두를 소유하려드는 욕망으로 만인을 종속되게 하려 든다. 이런 저런 것을 생각해 볼 때 본문에서 거론되는 영적인 모든 규정들이 얼마나 우리를 유익하게 해주는지 감지할 수밖에 없도록 만든다. 세부 사항에서 주목되는 한 가지는, 자신을 통치하는 원리를 이기적 사랑 안에 둔 이들은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는 원리로는 통제 될 수 없다는 것, 그들은 이 사랑을 실감 못할 뿐아니라 결코 실감하길 원치도 않는다는 것, 그러므로 자기들 삶의 평면을 통제하는 법칙에 따라 고통의 두려움으로 강제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렇게 되어질 때 결국 그런 조치에 대한 의심도 없어져 그것에 만족하는 바 고통도 더이상 없게 된다. 그런 이유는 주님 자신이 천국 뿐아니라 지옥도 통제하시기 때문이고 양쪽 모두에서 그분의 통치는 신성한 사랑과 지혜, 통치의 목적은 인류로부터 천국을 형성하고 보존하시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수련 기간인 자연계의 삶에 아직 있는 우리들은 자기를 정녕 천국 사랑으로 통제되도록 선택하는 것, 자신의 상태에 따라 모든 인간 영혼의 영원한 복지를 사랑해 가는 것을 선택해야 하리라. 그리하여 인생 어느 국면에서 이든 주님의 모양과 형상에 가능한 가까이 접근되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

레위기 26장

성경: 레위기 1장

1. 너희는 우상들을 만들지 말라, 너희는 새긴 상, 또는 기둥을 곧추세우지 말라, 너희는 너의 토지 안에 석상을 놓지 말라, 이것들에 절하지 말라. 그 이유는 내가 주 너의 하느님이기 때문이다.
2. 너희는 내 안식일들을 지켜라, 그리고 내 성소를 공경하라. 나는 주이다.
3. 만일 너희가 내 법령들에서 걷고, 내 명령들을 지키고, 그것들을 실행한다면.
4. 그러면 나는 그것들의 때에 맞추어 비들을 내릴 것이다, 그리고 토지는 그녀의 소출을 낼 것이다, 그리고 들판의 나무들은 그것들의 열매를 산출할 것이다.
5. 그리고 너의 타작은 너의 포도 수확에까지 이르고, 그리고 포도수확은 파종기에까지 이를 것이다. 그리고 너희는 너의 빵을 배불리 먹을 것이다, 그리고 너의 토지에서 안전하게 거주할 것이다.
6. 그리고 나는 토지에 평화를 줄 것이다, 그리고 너희는 드러누울 것이다, 그리고 아무도 너를 두렵게 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악한 짐승들이 네 토지로부터 중단되게 할 것이다, 검이 네 토지를 통과하지 않으리라.
7. 그리고 너희는 너의 적들을 추격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너희 앞에서 검에 의해 쓰러질 것이다.
8. 그리고 너희 중 다섯이 백명을 쫒고, 그리고 너의 백명은 만명을 쫒을 것이다. 그리고 너의 적들은 검에 의해 네 앞에서 쓰러질 것이다.
9. 나는 너희에게 관심을 둘 것이다, 그리고 너를 열매픙성하게 만들고, 그리고 너희를 불어나기 만들 것이다. 그리고 너희와 더불은 내 언약을 확립할 것이다.
10. 그리고 너희는 오래 보관한 묵은 것을 먹을 것이다, 그리고 너희는 새 것 때문에 묵은 것을 내놓을 것이다.
11. 그리고 나는 너희 사이에 내 장막을 세워 둘 것이다. 그리고 내 혼이 너를 혐오하지 않을 것이다.
12. 그리고 나는 너희 사이에서 걸을 것이다, 그리고 너의 하느님일 것이다, 그리고 너희는 내 백성일 것이다.
13. 나는 주 너의 하느님, 너희를 이집트의 토지로부터 데려와서, 너희가 그들의 노예가 되지 않도록 했다. 그리고 나는 네 멍에의 가름대를 부수었다, 그리고 너를 직바로 걷게 만들었다.
14. 그러나 만일 너희가 나에게 귀기울이지 않고 이 모든 명령들을 실행 않는다면.
15. 그리고 만일 너희가 내 법령을 거절한다면, 그리고 너희 혼이 내 판단들을 혐오한다면, 하여, 내 모든 명령들을 행하지 않을 것이다면, 내 언약을 깨트린다면,
16. 나 또한 너희에게 이것을 행하리라. 즉 나는 너희 위에 공포를 임명할 것이다, 즉 폐병과 열병이다, 하여, 눈이 없어지고, 혼은 한탄하며 지내게 만들 것이다. 그리고 너희는 너의 씨들을 뿌리나 헛될 것이다, 그이유가 네 적들이 그것을 먹을 것이기 때문이다.
17. 그리고 나는 내 얼굴을 너와 맞서 놓을 것이다, 그리고 너희는 네 적들 앞에서 쳐죽임을 당할 것이다. 너를 미워하는 그들이 너를 지배할 것이다. 그리고 너희는 추격하는 자가 아무도 없는데 도망 할 것이다.
18. 그리고 만일 너희가 이런 것들로 해서도 나에게 귀기울이지 않는다면, 그다음 나는 너의 죄들을 위해 일곱 배를 더 응징할 것이다.
19. 그리고 나는 네가 자랑해대는 네 힘을 부러뜨릴 것이다. 나는 너의 하늘을 쇠로, 네 땅을 놋쇠로 만들 것이다.
20. 그리고 너의 강함은 헛되이 소비될 것이다. 그 이유가 네 토지가 그녀의 소출을, 토지의 나무들은 그것들의 열매를 내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21. 그리고 만일 너희가 나에게 반대적으로 걷는다면, 그리고 나에게 경청 않는다면, 나는 네 죄들에 의거 일곱 배 더 재앙을 네 위에 가져올 것이다.
22. 그리고 나는 너희 사이에 들판의 짐승을 보낼 것이다, 이것들이 너로부터 네 어린이들을 강탈할 것이다, 그리고 네 가축떼를 파괴할 것이다, 그리고 너로 숫자가 적어지게 만들 것이다. 그리고 너의 길들은 황폐해질 것이다.
23. 그리고 만일 이런 것들에 의해 너희가 나에게 개혁되질 않고, 나에 반대로 걷는다면,
24. 그다음 나 또한 너에게 반대로 걸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너를 네 죄들을 위해 일곱 배 세게 칠 것이다.
25. 그리고 나는 네 위에 검을 가져올 것이다, 하여, 언약의 앙갚음을 집행할 것이다. 그리고 너희는 성읍들 안에 함께 모일 것이다. 그리고 나는 너희 사이에 유행병을 보낼 것이다. 그리고 너희는 적의 손 안으로 넘겨질 것이다.
26. 내가 빵의 네 지팡이를 부러뜨릴 때, 열 여인이 하나의 오븐에서 네 빵을 구울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네 빵을 무게로 달아 다시 전달하리라. 그리고 너희는 먹을 것이다, 그리고 만족하지 않을 것이다.
27. 그리고 너희가 이런 모든 것에서도 나에게 경청하지 않고, 나에게 반대하여 걷는다면,
28. 그다음 나는 더 맹렬하게 너와 반대되게 걸을 것이다. 그리고 나 역시 네 죄를 위해 일곱 배를 네게 징계할 것이다.
29. 그리고 너희는 네 아들들의 살을 먹을 것이다, 그리고 네 딸들의 살을 너는 먹을 것이다.
30. 그리고 나는 너의 높은 장소들을 파괴할 것이다, 그리고 너의 태양-상들을 잘라 내릴 것이다, 그리고 너의 우상들의 시체 위에 네 시체를 던질 것이다. 그리고 내 혼은 너를 혐오할 것이다.
31. 그리고 나는 너의 성읍들을 황폐해지게 만들 것이다, 그리고 너의 성소들을 황량하게 가져다 놓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너의 달콤한 향기의 풍미를 냄새맡지 않을 것이다.
32. 그리고 나는 토지를 황무함으로 가져다 놓을 것이다. 그리고 그 안에 거주하는 네 적들이 그것에 깜짝 놀랄 것이다.
33. 그리고 너를 나는 나라들 사이에 흩어지게 할 것이다, 그리고 나는 네 뒤를 좇아 검을 뺄 것이다. 그리고 너의 토지는 황무해질 것이다, 그리고 너의 성읍들은 황폐해 있을 것이다.
34. 그다음 토지가 황폐해 있는 한, 토지는 그녀의 안식을 즐길 것이다, 그리고 너희는 너의 적들의 토지 안에 있을 것이다. 그때 조차도 토지는 쉴 것이다, 그리고 그녀의 안식을 즐길 것이다.
35. 그것이 황폐한 채 있는 한, 그것은 쉼을 가질 것이다. 너희가 그것 위에 거주할 때 그것이 너의 안식시에 가지지 못했던 쉼까지 가질 것이다.
36. 너희 중에 남아있는 그들에 관하여, 나는 그들이 적들의 토지에서 겁에 질려 살게 할 것이다. 그리고 떨어지는 잎의 소리가 그들 뒤를 쫓을 것이다, 그리고 누군가가 검을 피해 도망하듯 달아날 것이다. 그리고 아무도 추격하지 않아도 그들은 엎어질 것이다.
37. 그리고 그들은 아무도 뒤쫒지 않는데도, 마치 검 앞에 있기라도 한듯 서로에게 걸려 넘어질 것이다. 그리고 너희는 네 적들 앞에 서있을 힘도 가지지 못할 것이다.
38. 그리고 너희는 나리들 사이에서 멸해질 것이다, 그리고 네 적들의 토지가 너를 먹어치울 것이다.
39. 그리고 너로부터 남은 그들은 네 적들의 토지 안에서 자기들의 불법을 한탄할 것이다. 조상들의 불법으로 한탄 할 것이다.
40. 그리고 그들은 자기들의 불법을, 자기들 조상들의 불법을, 자기들이 나에 맞서 범칙한 자기들의 법위반을 고백할 것이다, 그리고 또한 그들이 나에게 반대하여 걸었기 때문에,
41. 나 역시 그들에 반대하여 걸었고, 그들을 그들의 적들의 토지 안으로 데려 왔다. 그다음 만일 그들의 할례받지 아니한 심정이 겸허해지고, 그들이 자기들의 불법에 대한 벌을 받아들인다면,
42. 그다음 나는 야곱과 더불은 언약을 기억할 것이다. 그리고 역시 이삭과 더불은 언약도, 그리고 또한 아브라함과 더불은 나의 언약도 나는 기억할 것이다. 그리고 나는 토지를 기억할 것이다.
43. 토지는 그들 없이 황폐해 있는 동안, 토지 역시 그들로부터 떠나 그녀의 안식들을 즐길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자기들의 불법의 처벌을 받아들일 것이다. 그 이유는 그들이 내 판단들을 거절했고, 그들의 혼이 내 법령을 혐오했기 때문이다.
44. 그리고 이런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자기들의 적들의 토지에 있는 동안, 나는 그들을 거절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그들이 깡그리 파괴되라고 그들을 혐오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과 더불은 내 언약을 깨뜨리지 않을 것이다, 그 이유는 나는 주 그들의 하느님이기 때문이다.
45. 그러나 나는 그들을 위하여 그들 선조들과의 언약, 곧 내가 그들의 하느님이 되도록 나라들이 보는 앞에서 이집트의 토지로부터 데려 온 것을 기억할 것이다. 나는 주이다.
46. 이것들이 법령들과 판단들과 법들인즉, 이것을 주님께서 자기와 이스라엘 자손 사이에 시내산에서 모세의 손을 수단으로 만드셨다.

영적 의미 요약

* 인간이 어떤 이기적인 애착, 어떤 세상적인 애착에 집착되지 않도록, 그리고 무엇보다도 먼저 천적 사랑으로부터 주님을 예배하도록 명령하신다. 그 이유는 그가 순종할 경우 평화와 고요의 상태를 포함하는 모든 영적 축복을 즐기게 되고, 모든 시험들에서 보호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주님께서는 그분의 백성과 함께 계시는 바, 선용으로 작동되는 삶이 우세해진다. 그 이유는 그분께서 구속해 주시는 일을 완성하셨기 때문이다, 1-13절.
* 위와 반대로 영적 교회인이 불순종해서 주님과 그분의 신성한 법도를 거절한다면 본문에 기술된 바 같이 온갖 종류의 재난을 겪게 된다, 14-39절.
* 그러나 타락한 상태에 있다 해도 자신이 사악했다는 것을 고백하고 진실로 회개 할 경우 주님께서는 그를 다시 받아 주실 것이다. 그 이유는 그분께서 구속의 일이 결과되게 하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말씀을 수단으로 각 사람의 삶의 상태에 적용될 수 있는 충분한 진리들을 공급해 주시었다, 40-46절.

각 절의 영적 의미

1절. 너희는 우상들을 만들지 말라, 너희는 새긴 상, 또는 기둥을 곧추세우지 말라, 너희는 너의 토지 안에 석상을 놓지 말라, 이것들에 절하지 말라. 그 이유는 내가 주 너의 하느님이기 때문이다.

영적 의미

영적 인간에게 명령되는 바, 어떤 이기적 애착 또는 그 애착에서 파생되는 거짓들, 그것들이 내적 인간 또는 외적 인간, 설사 교회에 있다 해도 그것들로 예배하는데 자신이 빠져들어 그것에 노예가 되어서는 안 된다. 그 이유는 주님만이 예배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세부적 영적 의미

어떤 우상도 만들지 말라란 영적 인간은 어떤 이기적 애착을 예배하는 데에 자신이 빠지게 해선 안 됨을, 새긴 상을 만들지 말라란 이기적 애착에서 파생된 어떤 거짓도 예배하지 말 것을, 엎드려 절하려고 토지에 기둥을 곧추 세우거나 석상을 놓지 말라란 악과 거짓을 예배하여 악과 거짓에 노예가 되지 말 것을 각기 뜻한다. 우상(idols)과 새긴 상(graven images)은 내적 인간에, 기둥(pillars)과 석상(figured stones)은 외적 인간에 관계된다. “나는 주 너의 하느님”이란 주님만이 예배되어야 함을 말한다. (8869, 10643, 8873, 8106, 2001)

2절. 너희는 내 안식일들을 지켜라, 그리고 내 성소를 공경하라. 나는 주이다.

영적 의미

그러므로 무엇보다 우선적으로 주님은 천적 사랑으로부터 거룩함에서 진행되는 진리를 수단으로 예배되어야 한다. 그 이유는 주님을 사랑함이 모든 예배의 필수이기 때문이다.

세부적 영적 의미

주님의 안식일을 지키고 그분의 성소를 귀하게 여김이란 무엇보다 우선적으로 천적 사랑으로부터, 그리고 그로부터 진행되는 진리를 수단으로 주님이 예배되어져야 하는데, 그 이유는 주님을 사랑함이 모든 예배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87, 3210, 2001)

3절. 만일 너희가 내 법령들에서 걷고, 내 명령들을 지키고, 그것들을 실행한다면.

영적 의미

그래서 교인이 신성한 질서의 법칙에 따라 내향적으로나 외향적으로나 살아간다면,

세부적 영적 의미

주님의 법령대로 걷고, 그분의 명령을 준수해서 그대로 행한다면 이란 만일 교인이 신성한 질서의 법칙에 의거 바깥쪽으로, 안쪽에서도 살아 간다면을 뜻한다. (8420, 3382, 4258)

4절. 그러면 나는 그것들의 때에 맞추어 비들을 내릴 것이다, 그리고 토지는 그녀의 소출을 낼 것이다, 그리고 들판의 나무들은 그것들의 열매를 산출할 것이다.

영적 의미

그러면 그는 주님으로부터 자기 상태에 따라 신성한 진리의 유입을 받게 되고, 그 선으로부터 진리도 불어나 다시 그 선은 진리를 수단으로 열매를 맺게 된다.

세부적 영적 의미

때에 맞추어 비를 주심이란 각 사람의 상태에 따라 주님으로부터 신성한 진리의 유입을 받는 것을, 토지가 소출을 냄이란 진리가 선으로부터 배가됨을, 들판의 나무들이 열매 맺음이란 다시 선이 진리를 수단으로 결실을 갖게 됨을 뜻한다. (8416, 2571, 4981, 983, 3310)

5절. 그리고 너의 타작은 너의 포도 수확에까지 이르고, 그리고 포도 수확은 파종기에까지 이를 것이다. 그리고 너희는 너의 빵을 배불리 먹을 것이다, 그리고 너의 토지에서 안전하게 거주할 것이다.

영적 의미

거듭남을 통하여 선을 실감하게 됨은 신성한 진리들과 공존할 것이다. 선 안에 진리가 주입되는 방식으로 신성한 진리를 수용하는 것이 충만히 이루어지는 바, 천국적 삶의 상태는 악과 거짓이 침입하려드는 데서 안전하리라.

세부적 영적 의미

타작이 끝나면 포도를 수확함이란 거듭남을 통하여 선을 실감함은 진리를 받는 것과 동시에 있게 됨을, 포도 수확이 끝나면 씨를 뿌림이란 신성한 진리를 받는 것은 선 안에 진리가 심어지는 것과 동시에 있게 됨을, 배불리 먹는다란 선을 자기 것이 되게 함이 충만될 것임을, 안전하게 그 땅에 거함이란 천국 삶의 상태는 악 또는 잘못이라는 것들의 습격에서 안전함을 뜻한다. (6377-4, 4482, 9272, 2187, 2165, 2177, 10160)

6절. 그리고 나는 토지에 평화를 줄 것이다, 그리고 너희는 드러누울 것이다, 그리고 아무도 너를 두렵게 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악한 짐승들이 네 토지로부터 중단되게 할 것이다, 검이 네 토지를 통과하지 않으리라.

영적 의미

또한 평화가 마음에 넘치고, 고요가 생활 속에 널리 퍼져 있는 바, 어떤 악과 거짓도 건드리지 못한다. 그 이유는 악한 열정이 완전히 제거되었고 파괴하는 거짓 역시 더 이상 교회를 황폐되게 하는 원인이 못 되기 때문이다.

세부적 영적 의미

그 땅에 평화를 줌이란 평화가 마음에 고루 미칠 것임을, 너희는 드러누울 것이다(걱정이 없음)이란 고요함이 삶 속에 차있는 것, 악과 거짓이 소동을 일으키지 못할 것을; 악한 짐승(맹수)가 그 땅에서 중단됨이란 악한 열정이 전부 제거 될 것임을; 검이 네 토지를 통과하지 않음이란 파괴하는 거짓들이 더 이상 교회를 황폐되게 하는 원인이 안 될 것을 뜻한다. (3696, 2799)

7절. 그리고 너희는 너의 적들을 추격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너희 앞에서 검에 의해 쓰러질 것이다.

영적 의미

따라서 시험이 발생할 때 선을 사랑함이 악들을 흩어지게 하고 진리를 사랑함은 거짓들을 사그라지게 하리라.

세부적 영적 의미

너희 적들을 몰아 붙여 네 앞에서 검에 맞게 하리라란 시험이 발생할 때 선을 사랑함이 악을 흩트고, 진리를 사랑함이 거짓을 종식시킨다는 뜻이다. (2851, 9259, 2799)

8절. 그리고 너희 중 다섯이 백 명을 쫒고, 그리고 너의 백 명은 만 명을 쫒을 것이다. 그리고 너의 적들은 검에 의해 네 앞에서 쓰러질 것이다.

영적 의미

그 이유는 진리가 아무리 적게 남아 있다 해도 풍부한 거짓들보다 더 강한 힘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요, 선을 아무리 적게 실감했다 해도 악의 모든 힘에 저항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신성한 진리는 타락한 자연적 모든 애착의 반발에 승리를 보장 해주리라.

세부적 영적 의미

너희 중 다섯이 백 명을 추격함이란 담고 있는 진리가 아주 조금이어도 풍부한 거짓보다 더 강한 힘이 있을 것을; 백 명이 만 명을 무찌른다란 선을 실감함이 아무리 적어도 악의 모든 권세를 꺾을 수 있다는 것을; 네 앞에서 너의 적이 쓰러진다란 신성한 진리는 타락한 자연적 애착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승리를 보증함을 뜻한다.(5291-2, 2686, 576, 2575, 2686, 683, 2851, 9259, 2799)

9절. 나는 너희에게 관심을 둘 것이다, 그리고 너를 열매 픙성하게 만들고, 그리고 너희를 불어나기 만들 것이다. 그리고 너희와 더불은 내 언약을 확립할 것이다.

영적 의미

그래서 신성한 선은 영혼을 내적으로 채우고 외적으로는 선 자체가 명백해지게 되어 진리들이 풍성해지면서 인간은 주님과 결합하리라.

세부적 영적 의미

주님께서 너희에게 관심을 가진다란 신성한 선이 영혼을 내적으로 채울 것 임을, 열매 풍성하게 함이란 외적으로 선이 명백해짐을, 너희를 불어나게 하리라란 진리들도 풍성해질 것을, 주님이 너희와 맺은 계약이란 인간은 주님과 결합하게 될 것 임을 뜻한다. (2001, 10420, 983, 665)

10절. 그리고 너희는 오래 보관한 묵은 것을 먹을 것이다, 그리고 너희는 새 것 때문에 묵은 것을 내놓을 것이다.

영적 의미

더 나아가 오랫동안 저장되었던 아껴두신 것들에 있는 선을 자기 것으로 삼게 되고, 진리는 변함 없이 실패 없는 정신을 통해 충만 되어짐을 즐기리라.

세부적 영적 의미

오래 보관한 묵은 곡식을 먹음이란 오래 저장되고 있던 아껴두신 것들로부터 선이 자기 것 되는 것을; 새 것 때문에 묵은 것을 퍼냄이란 진리는 꾸준히 충만 되게 즐기게 되고 갱신되는데 결코 실패하지 않음을 뜻한다. (2187, 5299, 5370, 1854, 8400, 3768, 5244)

11절. 그리고 나는 너희 사이에 내 장막을 세워 둘 것이다. 그리고 내 혼이 너를 혐오하지 않을 것이다.

영적 의미

또한 주님은 그분의 백성과 함께 거하시는 바, 상응에 관해 부족하게 앎이 천국 진리를 충분히 지각하는 것을 방해 않으리라.

세부적 영적 의미

주님께서 너희가운데 그분의 장막을 세우고 그분의 혼이 너를 혐오하지 않을 것이다란 주님께서 그분의 백성과 함께 계실 것이고 상응 지식의 결핍으로 천국 진리를 충분히 지각하는데 방해받지 않을 것을 뜻한다. (9668, 9784, 7327)

12절. 그리고 나는 너희 사이에서 걸을 것이다, 그리고 너의 하느님일 것이다, 그리고 너희는 내 백성일 것이다.

영적 의미

적극적인 선용의 삶이 우세해져 천국 축복을 서로 즐기게 됨이 있게 된다.

세부적 영적 의미

주님께서 너희 사이에서 거닐으시어 너희 하느님이 되시고, 너희는 그분의 백성이 된다란 선용이라는 적극적 삶이 천국 축복을 상호 즐김으로 해서 우세해진다는 뜻이다. (519,2001,1259, 2004)

13절. 나는 주 너의 하느님, 너희를 이집트의 토지로부터 데려와서, 너희가 그들의 노예가 되지 않도록 했다. 그리고 나는 네 멍에의 가름대를 부수었다, 그리고 너를 직바로 걷게 만들었다.

영적 의미

이렇게 된 연유는 주님께서 그분의 인간을 신성이 되게 하심을 수단으로 영적 인간을 단지 자연적일 뿐인 것의 속박에서 영원히 구속해주시어 자연적인 것에 노예가 되지 않도록 해주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간 거듭남에 장애가 되는 것은 하나도 남아 있지를 않다. 그래서 처음에는 단지 자연적 인간이었겠지만 후에는 진정으로 영적 인간이 되리라.

세부적 영적 의미

“나는 주 너희 하느님, 너희를 이집트에서 이끌어 냈다”란 주님께서는 그분의 인간을 신성이 되게 하심을 수단으로 영적 인간이 더 이상 자연적일 뿐인 인간의 노예가 되지 않도록 그 속박에서 벗어나게 되찾아 주셨음을; 너희가 맨 멍에의 가름대를 부수어 너희로 떳떳이 살게 하리라란 인간 거듭남에 장애가 되는 찌꺼기들이 없어 자연적일 뿐인 상태에서 후에 진정 영적 인간이 되게 해주시겠다는 뜻이다. (2001, 8866, 1664-2, 9496, 892, 6952)

14절. 그러나 만일 너희가 나에게 귀기울이지 않고 이 모든 명령들을 실행 않는다면.

영적 의미

그러나 위와 반대일 경우, 즉 영적 인간이 바깥쪽에서나 안쪽 측면에서나 불순종하면

세부적 영적 의미

주님의 규정을 귀담아 듣지 않고 그분의 계명을 행치 않는다란 불순종이 바깥쪽으로, 안쪽에서도 있음을 뜻한다.(2542, 3382)

15절. 그리고 만일 너희가 내 법령을 거절한다면, 그리고 너희 혼이 내 판단들을 혐오한다면, 하여, 내 모든 명령들을 행하지 않을 것이다면, 내 언약을 깨트린다면,

영적 의미

그래서 외적 예배에 게을러지고 내면의 진리에 대한 공부를 경멸하여 불순종이 내적으로 확산되어 주님과의 결합이 깨뜨려진다면,

세부적 영적 의미

주님의 법령을 거절함이란 외적 예배를 게을리 함; 그분의 판단을 혐오함이란 내면의 진리에 관한 공부를 경멸함을; 모든 명령들을 행치 않음이란 불순종이 내적으로 확산되었음을; 계약을 깸이란 주님과의 결합이 깨어짐을 뜻한다.(8357, 3382, 665)

16절. 나 또한 너희에게 이것을 행하리라. 즉 나는 너희 위에 공포를 임명할 것이다, 즉 폐병과 열병이다, 하여, 눈이 없어지고, 혼은 한탄하며 지내게 만들 것이다. 그리고 너희는 너의 씨들을 뿌리나 헛될 것이다, 그 이유가 네 적들이 그것을 먹을 것이기 때문이다.

영적 의미

그러면 영적 인간은 그 결과에 고통받게 된다. 그 이유는 그 자신 스스로 신성한 실재의 두려움을 자신 위에 불러오는 바 진리가 황폐해지고 선을 파괴하는 맹렬한 열정의 힘이 덮쳐 모든 진리들을 거두어가 차츰 선에 관한 모든 원리까지 강탈해간다. 그래서 더 이상 진리로부터 선으로의 발전도 없게 되는데 그 이유는 삶 속의 악이 영적 성장을 파괴하기 때문이다.

세부적 영적 의미

“나도 너희에게 이렇게 하리라”란 영적 인간이 위 결과로 고통을 겪게 됨을; 너희 위에 공포, 폐병과 열병이 덮친다란 그는 자신 위에 신성한 실재의 두려움, 진리는 황폐되고 선을 파괴하는 맹렬한 열정을 초래되게 함을; 네 눈이 사그라지고 네 혼은 한탄함이란 모든 진리가 거두어지고, 선에 관한 모든 원리도 차츰 박탈된다는 것을; 씨를 뿌려봐야 헛된 바 그 이유는 네 적들이 그것을 먹어치우기 때문이다란 이 인간은 더 이상 진리로부터 선 쪽으로 인도됨이 없을 것인 바, 그 이유는 삶에 있는 악이 영적 성장을 파괴시키기 때문이다. (696, 986, 8364, 3820, 1436, 7795, 9272, 2851, 5149)

17절. 그리고 나는 내 얼굴을 너와 맞서 놓을 것이다, 그리고 너희는 네 적들 앞에서 쳐죽임을 당할 것이다. 너를 미워하는 그들이 너를 지배할 것이다. 그리고 너희는 추격하는 자가 아무도 없는데 도망 할 것이다.

영적 의미

또한 사람은 내적 선과 진리를 더 이상 납득 못하게 된다. 그는 악이 가져다주는 처벌로 고통받게 된다. 이기적인 지배욕이 강세해지고 신성한 진리에 무지해서 야기될 고통의 두려움이 더욱 격렬해 지리라.

세부적 영적 의미

“주님께서 그분의 얼굴을 너희와 맞서게 놓으리라”란 인간은 더 이상 내적 선과 진리를 납득 못함을; 네 적들 앞에서 쳐죽임을 당한다란 그들은 악이 가져다주는 처벌로 고통을 겪게 됨을; 너를 미워하는 그들이란 이기적인 지배욕이 강세해짐을; 아무도 추격하지 않는데도 도망침이란 신성한 진리에 무지한 바 더욱 강한 두려움에 고통을 겪게 됨을 뜻한다. (222, 358, 7871, 2851, 10814, 1689, 270)

18절. 그리고 만일 너희가 이런 것들로 해서도 나에게 귀기울이지 않는다면, 그다음 나는 너의 죄들을 위해 일곱 배를 더 응징할 것이다.

영적 의미

참으로 영적 인간이 불순종하겠다고 고집 부린다면 그는 악과 거짓의 결합, 완전히 황폐된 상황에 자신을 가져다 놓게 되리라.

세부적 영적 의미

“그런데도 너희가 내 말에 경청 않으면 나는 너희 죄를 일곱 배로 벌하겠다” 란 만일 영적 인간이 불순종을 고집 한다면 악이 거짓과 결합함을 자초해서 완전히 황폐해지리라는 뜻이다. (2542, 696, 433, 10360)

19절. 그리고 나는 네가 자랑해대는 네 힘을 부러뜨릴 것이다. 나는 너의 하늘을 쇠로, 네 땅을 놋쇠로 만들 것이다.

영적 의미

또한 자아 총명을 자랑함을 통해 그의 모든 진리는 박탈된다. 내적 측면은 혼합 안 된 거짓들이 통치하고 외적 측면에는 자연적 기쁨만 있으리라.

세부적 영적 의미

자랑하는 네 힘을 부수리라란 자아에서 나오는 총명을 자랑함으로 해서 그에게서 모든 진리가 박탈될 것임을, 네 하늘을 쇠같이 네 땅을 놋쇠 같이 만든다란 내적 인간 측면에서는 혼합 안 된 거짓들이 통치 할 것이고, 외적 측면에서는 자연적 기쁨만 있게 됨을 뜻한다. 이 구절의 쇠와 놋쇠는 반대적 의미에서 사용되고 있다. (8678, 10481, 4535, 425)

20절. 그리고 너의 강함은 헛되이 소비될 것이다. 그 이유가 네 토지가 그녀의 소출을, 토지의 나무들은 그것들의 열매를 내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영적 의미

거짓이 선하고 참된 것을 생산할 리 만무이다. 악이 선을, 악에 바탕을 둔 거짓이 진리를 생산함은 불가능이다.

세부적 영적 의미

힘을 써 봐야 헛되다란 거짓에서 선하고 참된 것이 생산 될 리 만무함을, 토지가 소출을 내지 않음이란 악이 선을 생산하는 것은 불가능함을, 나무는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이나 지각을 뜻하나 이 구절에서는 반대 의미여서 악하고 거짓된 것에 관한 지식과 지각을 뜻하고 있다. (3727, 2571, 4981, 7690)

21절. 그리고 만일 너희가 나에게 반대적으로 걷는다면, 그리고 나에게 경청 않는다면, 나는 네 죄들에 의거 일곱 배 더 재앙을 네 위에 가져올 것이다.

영적 의미

그래도 영적 인간이 신성한 질서의 법칙에 반대되는 생활을 고집하고 신성한 법칙에 불순종하겠다면 신성한 진리인 말씀에서 표현된 바 같이 완전한 황폐함이 그의 악행 수준에 따라 그를 덮으리라

세부적 영적 의미

주님에 반대되게 걷고 그분께 경청 않는다란 신성한 질서의 법에 반대되게 사는 것을 고집하고 신성한 사랑으로부터 세워진 법들에 불순종하기를 고집함을, 그리고 신성한 진리인 말씀에서 표현된 대로의 순종을 거절함을, 죄에 따라 일곱 배나 더한 재앙을 주님이 내리심이란 완전히 황폐함이 악행 수준에 따라 영적 인간을 타도 할 것임을 뜻한다. (519, 2001, 2542, 696, 433, 10361)

22절. 그리고 나는 너희 사이에 들판의 짐승을 보낼 것이다, 이것들이 너로부터 네 어린이들을 강탈할 것이다, 그리고 네 가축떼를 파괴할 것이다, 그리고 너로 숫자가 적어지게 만들 것이다. 그리고 너의 길들은 황폐해질 것이다.

영적 의미

그이유가 혐오스러운 악한 애착이 그를 소유하게 되어 모든 순진, 모든 선한 자연적 애착, 진리로부터 행동할 능력까지 박탈할 것이다. 결국 진정한 교회의 어떤 교리도 거기에 있지 않으리라.

세부적 영적 의미

너희 사이에 들판의 짐승(맹수)를 보낸다란 지긋지긋한 악한 애착들이 영적 인간을 점유할 것임을; 네 어린아이들을 강탈한다란 모든 순진이 그에게서 박탈됨을; 네 가축을 파괴함이란 모든 선한 자연적 애착까지 그에게서 박탈될 것임을; 소수만이 남게 만든다란 진리로부터 행동할 모든 힘이 그에게서 박탈됨을; 너의 길이 삭막해진다란 그에게는 진정한 것인 교회의 진리도 없을 것임을 뜻한다. (3696, 5342-2, 430, 9135-2, 2227, 2234, 411)

23절. 그리고 만일 이런 것들에 의해 너희가 나에게 개혁되질 않고, 나에 반대로 걷는다면,

영적 의미

그래도 더욱 신성한 법칙에 반대하여 바깥쪽으로도 순종하기를 거절한다면,

세부적 영적 의미

이래도 개혁되지 않고 주님께 반대하여 걷는다란 신성한 법도에 더욱 반대하고 바깥쪽으로 불순종한다면을 뜻한다. (696, 519, 2001)

24절. 그다음 나 또한 너에게 반대로 걸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너를 네 죄들을 위해 일곱 배 세게 칠 것이다.

영적 의미

그러면 더욱 격렬한 황폐가 그 사람 위에 있게 된다. 그 이유는 신성한 기운의 현존으로부터 몸부림치는 고통을 겪게 되고 거룩하고 순진하고 평화스러운 모든 것을 더 심하게 두려워 할 것이기 때문이다.

세부적 영적 의미

너에게 맞선다란 자신에게 더욱 심한 황폐함을 자초한다는 것을; 너를 부수리라란 그는 신성한 기운으로부터 찢기는 고통을 겪음을; 그 이유는 그의 거짓이 신성한 선과 진리에 반대되기 때문이다. 네 죄에 일곱 배 란 거룩하고 순수하고 평화스러울 수 있는 모든 것이 공포의 원인임을 뜻한다. (696, 519, 10510, 433, 10361)

25절. 그리고 나는 네 위에 검을 가져올 것이다, 하여, 언약의 앙갚음을 집행할 것이다. 그리고 너희는 성읍들 안에 함께 모일 것이다. 그리고 나는 너희 사이에 유행병을 보낼 것이다. 그리고 너희는 적의 손 안으로 넘겨질 것이다.

영적 의미

그런 이유가 악으로부터 오는 거짓들이 주님과 결합할 가능성들을 그 사람에게서 파괴시켜 버리고, 거짓이라는 바깥 장벽들이 들러 쳐지며, 어떤 선한 나머지도 없게 되어 악만이 그를 장악하리라.

세부적 영적 의미

계약을 어긴 것을 보복하게 너희에게 검을 가져온다란 악으로부터 온 거짓이 영적 인간을 뒤덮어 주님과 결합 가능한 영적 인간의 모든 것이 파괴 될 것임을, 성 안으로 피해 모이면 이란 그는 거짓의 외적 장벽들로 둘러쳐지게 됨을, 너희 사이에 유행병을 보냄이란 아껴두신 것들이 온통 멸해짐을, 적의 손에 넘어감이란 악이 그 사람을 완전히 장악함을 뜻한다. (2799, 665, 8223, 6463, 402, 2851, 878)

26절. 내가 빵의 네 지팡이를 부러뜨릴 때, 열 여인이 하나의 오븐에서 네 빵을 구울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네 빵을 무게로 달아 다시 전달하리라. 그리고 너희는 먹을 것이다, 그리고 만족하지 않을 것이다.

영적 의미

선한 애착들이 완전히 황폐될 때 가득 찬 거짓들만이 그에게 악한 애착의 수준에 따라 이기적 사랑의 열기로부터 자양분을 공급할 것인 바, 이런 악을 자기 것으로 삼음은 지옥 사랑들의 열망을 채워줄 뿐이다.

세부적 영적 의미

지팡이 같은 빵이 끊어짐이란 선한 애착들이 완전히 황폐됨을; 여인 열 명이 한 오븐(oven)에서 너의 빵을 굽는다란 충만해진 거짓들이 이기적 사랑의 열로 그를 위해 자양분을 공급한다는 것을; 무게로 달아 네 빵을 받는다란 악한 애착의 품질에 의거함을; 먹되 만족치 못함이란 위 같은 악들을 자기 것 삼아 보아야 지옥 사랑들의 계속되는 열망에 흡족하지 않음을 뜻한다. (9163, 9323, 9716, 409, 8496, 9323, 7356, 2187, 8410)

27절. 그리고 너희가 이런 모든 것에서도 나에게 경청하지 않고, 나에게 반대하여 걷는다면,

영적 의미

더 더욱 영적 인간이 순종을 거절하여 신성한 법칙에 계속 반대하려 든다면,

세부적 영적 의미

이렇게 해도 너희가 내 말을 경청 않고 반대쪽으로만 걷겠다면 이란 만일 영적 인간이 순종을 거절하고 신성한 법에 계속 반대할 것이다 면을 말한다. (2542, 519)

28절. 그다음 나는 더 맹렬하게 너와 반대되게 걸을 것이다. 그리고 나 역시 네 죄를 위해 일곱 배를 네게 징계할 것이다.

영적 의미

그러면 이런 반대함의 결과는 더욱 격렬해진다. 선에 관한 모든 것의 황폐해짐은 이런 삶의 당연한 결과가 되리라.

세부적 영적 의미

크게 노하여 맞서겠고 너희 죄의 일곱 배로 징계한다란 위 같은 반대의 결과가 더욱 격렬해질 것 임을, 그 이유는 모든 선의 황폐됨이 위 삶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519, 696, 10618, 433, 10361)

29절. 그리고 너희는 네 아들들의 살을 먹을 것이다, 그리고 네 딸들의 살을 너는 먹을 것이다.

영적 의미

악은 이해함과 의지 또는 생각과 애착 자체 모두를 살라 버리리라.

세부적 영적 의미

네 아들들의 살을 먹고 네 딸들의 살을 먹는다란 악은 이해함과 의지 또는 생각과 애착 양 측면에서 자체가 살라진다는 뜻이다. (5149, 8408, 568)

30절. 그리고 나는 너의 높은 장소들을 파괴할 것이다, 그리고 너의 태양-상들을 잘라 내릴 것이다, 그리고 너의 우상들의 시체 위에 네 시체를 던질 것이다. 그리고 내 혼은 너를 혐오할 것이다.

영적 의미

더 나아가, 이해함에서 온 예배라는 모든 외형, 의지에서 온 예배라는 모든 외형은 파괴되리라. 삶의 죽은 형체만이 주님에게서 돌려서게 만든 악의 탐닉을 통해 영혼도 없이 남아 있으리라.

세부적 영적 의미

네 높은 장소(산당)을 헌다란 이해함으로부터 온 예배 같은 듯 여겨진 모든 외관이 파괴 될 것을; 네 태양-상을 잘라버림이란 의지로부터 온 예배같이 보이는 외관이 파괴될 것임을; 네 우상의 주검 위에 네 주검도 던져진다란 삶의 죽은 형체만이 영도 없이 남게 됨을; “내 혼이 너를 혐오한다”란 비켜 있는 상태를 뜻한다. (2722, 2441, 3900-10, 3605, 693, 694)

31절. 그리고 나는 너의 성읍들을 황폐해지게 만들 것이다, 그리고 너의 성소들을 황량하게 가져다 놓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너의 달콤한 향기의 풍미를 냄새맡지 않을 것이다.

영적 의미

진리로 질서있는 체 했던 것들은 진짜 황폐함으로 본색을 들어낸다. 그럴싸했던 예배의 모든 것은 폐지된다. 평화와 쉼에 관한 더 이상 왜곡된 것도, 흠양될 예배도 더이상 없다.

세부적 영적 의미

너희 성읍들을 폐허로 만든다란 진리로 잘 배열된 듯 보이는 것도 진짜로는 황폐해 있다는 것이 노출될 것임을; 네 성소들이 황량해지게 한다란 예배인 것 같은 모든 것도 포기 될 것임을; 달콤한 향의 풍미를 냄새맡지 않을 것이다란 거기에는 쉼이 왜곡되게 나타나는 것, 예배에서 감사히 여겨 나타나는 어떤 것도 없을 것임을 뜻한다. (402, 411, 9457, 411, 10054)

32절. 그리고 나는 토지를 황무함으로 가져다 놓을 것이다. 그리고 그 안에 거주하는 네 적들이 그것에 깜짝 놀랄 것이다.

영적 의미

황막해짐은 모든 선한 애착에 걸쳐 완전하게 있게 되어 사악한 자들 스스로도 놀랄 수밖에 없으리라.

세부적 영적 의미

네 토지가 황량해지고 그 안에 거주하는 적들이 놀라리라 란 삭막해짐이 선한 애착 모두에서 완전하여 사악한 자들까지도 놀라게 될 것임을 뜻한다. (620, 411, 2851)

33절. 그리고 너를 나는 나라들 사이에 흩어지게 할 것이다, 그리고 나는 네 뒤를 좇아 검을 뺄 것이다. 그리고 너의 토지는 황무해질 것이다, 그리고 너의 성읍들은 황폐해 있을 것이다.

영적 의미

그런고로 뒤집혀져 부패된 영적 인간은 악과 거짓에 온전히 주어질 것이다. 거짓은 끝까지 그를 추격한다. 그래서 모든 선한 애착은 진리를 잃어버리고 진정한 교리에 관한 모든 지식은 선을 상실한다.

세부적 영적 의미

나라 사이에 너희를 흩트리라란 뒤집혀지고 부패된 영적 인간은 악과 거짓까지 모두 포기됨을; 검을 빼들고 네 뒤를 쫓는다란 거짓들이 계속 그들을 추격함을, 네 토지는 황량해짐이란 모든 선한 애착이 삭막해짐을, 네 성읍이 폐허가 됨이란 진정한 교리에 관한 모든 지식이 선에 관하여 황폐해질 것을 뜻한다. (6361, 1259, 2799, 620, 411, 402)

34절. 그다음 토지가 황폐해 있는 한, 토지는 그녀의 안식을 즐길 것이다, 그리고 너희는 너의 적들의 토지 안에 있을 것이다. 그때 조차도 토지는 쉴 것이다, 그리고 그녀의 안식을 즐길 것이다.

영적 의미

그러면 진정한 영적 인간은 모든 악의 억압을 수단으로 천적 사랑의 완전한 천국 상태를 즐기게 되리라. 이는 외적으로 뿐만 아니라 내적으로도 진정하다.

세부적 영적 의미

토지가 황량해 있는 동안 너희가 적의 땅에 있는 동안 그 토지는 안식을 누리리라란 진정한 영적 인간은 모든 악의 억압을 수단으로 천적 사랑의 완전한 천국적 상태를 즐기게 될 것 임을; “그리하여 그 토지는 쉬면서 안식을 즐긴다”란 위 사항은 외적으로 뿐 아니라 내적으로도 또는 이해함 뿐 아니라 의지에서도 참되다를 뜻한다. (620, 87, 411, 2851, 683)

35절. 그것이 황폐한 채 있는 한, 그것은 쉼을 가질 것이다. 너희가 그것 위에 거주할 때 그것이 너의 안식시에 가지지 못했던 쉼까지 가질 것이다.

영적 의미

그 이유는 모든 악의 억압은 교회가 부패된 영적 인간과 더불은 내적인데서 분리된 외적인 것을 수단으로 가질 수 없었던 평화까지 가져다 줄 것이다.

세부적 영적 의미

“너희가 여기에 사는 동안 안식년에도 쉬지 못하던 토지가 황량해 있는 동안 쉬게 되리라”란 악의 모든 억압이 평화를 가져오는데 교회가 가질 수 없었던 평화까지도 갖게 되는데 이는 부패된 영적 인간과 더불어 있는 내적인 것에서 분리된 외적 예배를 수단으로 한다. (411, 620, 87, 제 14-15절)

36절. 너희 중에 남아있는 그들에 관하여, 나는 그들이 적들의 토지에서 겁에 질려 살게 할 것이다. 그리고 떨어지는 잎의 소리가 그들 뒤를 쫓을 것이다, 그리고 누군가가 검을 피해 도망하듯 달아날 것이다. 그리고 아무도 추격하지 않아도 그들은 엎어질 것이다.

영적 의미

진정한 교회에 아주 경미한 수준에서 몰려든 사악함으로 해서 그들은 악을 거절하는 모든 힘을 잃을 것이다. 신앙의 흔적까지도 거꾸로 된다. 그래서 진리가 자기를 파괴하는 듯 여겨 진리를 피하는데 기뻐하고, 선이 재난을 가져오는 듯해서 선으로부터 도망함에 기뻐하게 된다.

세부적 영적 의미

“너희 중 남아 있는 자들에 관하여”란 진정한 교회에 출몰하는 것이 아주 경미한 수준에서 계속되는 사악함에 관하여를; 적들의 토지에서 겁에 질려 산다란 악과 거짓 사이에서 거절됨을 통해 모든 힘을 상실함을; 나뭇잎 떨어지는 소리가 그들 뒤를 쫓는다란 신앙의 아주 작은 자국까지도 반감을 사게 됨을; 아무도 쫓아오지 않는데 넘어지고 검을 피해 도망하듯 달아남이란 그들은 진리가 자기들을 파괴하는 듯 여겨 진리에서 피하는 것을 매우 기뻐함을; 그리고 선 역시 자기들에게 재난을 줄 것 같이 여겨 선에서도 도망함을 매우 기뻐한다는 뜻이다. (7564-5, 6111, 7272, 216, 884, 4555, 1689, 2799, 696)

37절. 그리고 그들은 아무도 뒤쫒지 않는데도, 마치 검 앞에 있기라도 한 듯 서로에게 걸려 넘어질 것이다. 그리고 너희는 네 적들 앞에 서있을 힘도 가지지 못할 것이다.

영적 의미

그이유가 황폐된 상태의 사악한 자는 진리와 거짓을 식별할 수 없다. 그들은 선과 악의 차이점을 납득 못한다.

세부적 영적 의미

뒤쫓아오지도 않는 검 앞에서 엎치락뒤치락함이란 황폐 속의 사악한 자는 진리와 거짓을 식별 할 수 없음을; 너는 적과 대적할 힘이 없다란 그들은 선과 악의 차이를 전혀 납득 못함을 뜻한다. (9163-2, 2799, 696, 7530, 4926-5, 2851)

38절. 그리고 너희는 나리들 사이에서 멸해질 것이다, 그리고 네 적들의 토지가 너를 먹어치울 것이다.

영적 의미

그 이유가 악들은 다른 사람의 것을 파괴한다. 거짓도 거짓끼리의 싸움으로 살라져 버린다.

세부적 영적 의미

나라들 사이에서 망하고 네 적의 토지가 너를 먹어치운다란 악은 서로가 파괴하고 거짓은 거짓들과의 싸움으로 철저히 살라지고 만다는 뜻이다. (1849, 7655, 620, 2851, 5149)

39절. 그리고 너로부터 남은 그들은 네 적들의 토지 안에서 자기들의 불법을 한탄할 것이다. 조상들의 불법으로 한탄 할 것이다.

영적 의미

아주 조금 남은 선까지도 확증한 악들로 해서 흩어지고 만다. 악에서 온 거짓의 확증 역시 모든 진리를 흔들 것이다.

세부적 영적 의미

너희 중 남아있는 자들은 적들의 토지에서 자기들의 불법을 한탄 한다란 겨우 남은 선까지도 악의 확증을 통해 사라져버리고 말 것 임을; 조상들의 불법으로 한탄함이란 악에서 온 거짓으로의 확증은 모든 진리를 사라지게 할 것 임을 뜻한다. (7564, 1460-2, 예레미아4:9, 620, 2581, 7564, 9156, 3703-20)

40절. 그리고 그들은 자기들의 불법을, 자기들 조상들의 불법을, 자기들이 나에 맞서 범칙한 자기들의 법위반을 고백할 것이다, 그리고 또한 그들이 나에게 반대하여 걸었기 때문에,

영적 의미

그러나 부패된 상태의 교회에 있는 선한 이들은 이렇게 인정한다. 자기들은 거짓들 속에 악 가운데 있는 이들의 거짓 속에 있다는 것, 이런 거짓들 때문에 진리에 무지해 있다는 것, 신성한 진리에 반대되게 살고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

세부적 영적 의미

자기들의 죄와 조상의 죄를 고백함이란 영적 교회의 부패된 상태 안에 있는 선도 인정하는 것은 자기들은 악 속에 있는 이들 속의 거짓들로부터 거짓 속에 파묻혀 있다는 것을; 나에 맞서 범칙한 것이란 그들이 신성한 진리에 반대되어 있는 거짓들 때문에 오는 진리에 무지해서 잘못한 것을; 그리하여 주님에 반대되게 걷는다란 그들의 실지 악들 때문에 그들은 진리에 반대되게 살았다는 뜻이다. (9156, 3703-20, 9156, 519)

41절. 나 역시 그들에 반대하여 걸었고, 그들을 그들의 적들의 토지 안으로 데려 왔다. 그다음 만일 그들의 할례받지 아니한 심정이 겸허해지고, 그들이 자기들의 불법에 대한 벌을 받아들인다면,

영적 의미

그러므로 진리가 자기들 원수나 된 듯 나타나 자기들에 있는 악을 괴롭힌다. 그러나 만일 선한 자가 이렇게 고백한다면, 악은 스스로를 벌해 자기들 스스로는 불순한 것밖에 없다는 것을 고백한다면,

세부적 영적 의미

주님이 그들과 맞서고 그들을 적들의 토지에 데려다 놓았다란 진리가 그들에게 적이 된 듯 나타나고, 악이 그들에게 과해짐을, 할례 받지 않은 심정이 겸허해진다란 악은 그 자체가 벌한다라고 그들이 고백함을, 자기 죄벌을 달게 받음이란 자기들 스스로는 불순함밖에 없다는 것을 그들이 고백함을 뜻한다.(7272, 7225, 7418-3, 7225, 3994)

42절. 그 다음 나는 야곱과 더불은 언약을 기억할 것이다. 그리고 역시 이삭과 더불은 언약도, 그리고 또한 아브라함과 더불은 나의 언약도 나는 기억할 것이다. 그리고 나는 토지를 기억할 것이다.

영적 의미

그들은 주님과 결합할 수도 있는데, 먼저 그분으로부터 오는 선을 받은 자연적 수준의 상태를 통해서, 둘째로 그들의 영적 상태를 통해서 세째로 그들의 천국 상태를 통해서 결합될 수 있다.

세부적 영적 의미

야곱과 이삭 그리고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을 기억하고 토지를 기억함이란 그들은 먼저 그분으로부터 선을 받는 자연적 상태를 통해 주님과 결합 할 수 있고, 두 번째로 영적 상태에서, 셋째로 천적 상태에서 결합 할 수 있다는 것, 그 다음 선으로 인도 해주는 진리도 공급될 것임을 뜻한다. (840, 665, 6098, 620)

43절. 토지는 그들 없이 황폐해 있는 동안, 토지 역시 그들로부터 떠나 그녀의 안식들을 즐길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자기들의 불법의 처벌을 받아들일 것이다. 그 이유는 그들이 내 판단들을 거절했고, 그들의 혼이 내 법령을 혐오했기 때문이다.

영적 의미

그러나 악 가운데 있는 모든 이는 진정한 교회로부터 분리될 것인데 이 교회는 악에서 분리될 때 선의 상태를 보호해주게 된다. 악한 자는 자기들 악의 결과대로 살아 견뎌가야 한다. 그 이유는 제 스스로 신성한 진리를 거절했고, 내적인데서 분리된 외적 예배를 바치기까지 했기 때문이다.

세부적 영적 의미

그들 없이 황폐해 있는 토지란 악 가운데 있는 모든 이들은 진정한 교회에서 분리될 것임을; 토지는 폐허가 된 동안에 안식을 누림이란 악이 분리될 때 교회는 선의 측면이 보호될 것임을; 자기들의 불법의 벌을 받아들인다란 자기들 악의 결과대로 살고 견뎌야 함을; 주님의 심판을 거절하고 그분의 법령을 혐오함이란 신성한 진리를 내적으로 거절하고 내적 예배에서 분리된 외적 예배 마저 드리는 것을 거절함을 뜻한다. (87, 620, 411, 9937, 9257, 8357)

44절. 그리고 이런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자기들의 적들의 토지에 있는 동안, 나는 그들을 거절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그들이 깡그리 파괴되라고 그들을 혐오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과 더불은 내 언약을 깨뜨리지 않을 것이다, 그 이유는 나는 주 그들의 하느님이기 때문이다.

영적 의미

주님께서는 사악한 자가 황폐될 때에도 그들을 보호해 주시기를 멈추시지 않는다. 또한 그들이 보호가 없음으로 야기되는 지독한 파괴를 허용치도 않으신다. 그 이유가 그분께서는 비록 열리지는 않은 채 있는 그들 생명 속의 더 높은 수준을 통해 결합을 유지시키고 있으시기 때문이다. 이런 결합 때문에 그들은 영원히 살아가야만 한다. 주님께서 사악한 자와 결합되어 있는 것은 그들도 선해질 수 있도록, 더 높은 수준으로 완전해 질 수 있도록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세부적 영적 의미

적의 땅에 있는 그들이 거절되지는 않는다란 그럼에도 주님께서는 사악한 자들이 황폐될 때 그들을 보호하시는 것까지 중단하시는 것은 아님을; 그들이 깡그리 파괴되도록 혐오하시지는 않을 것이란 보호가 결핍되어 지독하게 파괴되는 것을 허용치 않을 것임을; 그들과 맺은 언약을 깨지 않을 것이다란 그분께서는 그들에게 아직 열리고 있지 않은 더 높은 수준의 생명을 통해 그들과 계속되어 있을 것임을; 이 결합 때문에 그들은 영원까지 계속 살아야만 함을; “나는 주 너희 하느님”이란 주님은 사악한 자들과도 결합되어 있는데 그 이유는 그들도 선해질 수 있도록, 더 높은 수준으로 완전해질 수 있도록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1875, 620, 2851, 3605, 693, 694, 696, 9163, 665, 4364-3, 4525, 2001)

45절. 그러나 나는 그들을 위하여 그들 선조들과의 언약, 곧 내가 그들의 하느님이 되도록 나라들이 보는 앞에서 이집트의 토지로부터 데려 온 것을 기억할 것이다. 나는 주이다.

영적 의미

이런 결합 때문에 주님께서는 사악한 자도 살아 있게 허용하신다. 절대적 악의 속박에서 인류를 구속하심으로 그분께서는 그들을 보호하실 수 있었기 때문에, 그분으로부터 아직도 그들은 영원히 자기들 생명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세부적 영적 의미

주님께서 그들을 위해 그들 선조와 맺은 계약을 기억함이란 이 결합 때문에 주님께서는 사악한 자도 살아 있게 허용하심을; 그분이 그들의 하느님이시도록 나라들이 보는 가운데 이집트 땅에서 선조들을 이끌어 내셨음이란 악의 절대적인 속박에서 인류를 되찾으심으로 그분께서는 인류를 보호하실 수 있으시다는 것을; “나는 주”란 그분으로부터 그들은 영원히 계속 자기 생명을 가진다는 뜻이다. (4525, 2001, 8866, 10152, 2706)

46절. 이것들이 법령들과 판단들과 법들인즉, 이것을 주님께서 자기와 이스라엘 자손 사이에 시내산에서 모세의 손을 수단으로 만드셨다.

영적 의미

이상의 사항들은 영적 인간의 외적 측면, 내면의 측면, 내적 측면에 관련된 질서의 법칙이요, 이를 수단으로 해서 주님과 인간 종족사이의 결합이 유지되는데, 이는 그분의 신성한 사랑으로부터 있고 그분의 신성한 진리를 수단으로 해서 가능해진다.

세부적 영적 의미

주님께서 모세의 손을 수단으로 시내산에서 당신과 이스라엘 자손 사이에 세우신 여러 가지 법령과 판단들과 법들이란 위 사항들은 영적 인간의 외적 측면과 내면, 그리고 내적 측면에 관한 질서의 법칙들이고, 이를 수단으로 주님과 인간 종족이 결합되는데 이는 신성한 진리를 수단으로 그분의 사랑으로부터이다. (8357, 7995, 3654, 8399, 7010)

26장의 종합적 고찰

다시 생각해보는 말씀의 부분에는 일반적으로 세 가지가 명확히 존재한다. 즉 주님과 말씀에 포함된 바와 같은 신성한 질서의 법칙에 순종할 경우의 유리한 것들, 불순할 경우 자신에게 자초하고 마는 재난들, 부패된 교회라는 조건이나 부패된 사람인 것도 아닌데 회개해야 하고 거듭남을 원해야 한다는 것에 대하여서이다.
위 간략한 소개가 의미심장해지는 이유는 인간은 자신과 세상 것을 숭배하려드는 경향이 있지만 그 반면 어떤 상태로든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할 예배의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인류 시작 초부터 있어 왔는데 아마 언제나 그런 상태에 있을 것이다. 그 이유가 인간은 악과 선 사이를 선택할 자유 속에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창조된 맨 처음의 인간은 어떤 것을 행하면 잘못된 것이고, 어떤 다른 것만을 행해야 올바르다는 것에 관해 지각이 없을 경우 위 자유 선택을 행사할 수 없었다. 그들이 거듭나는 상태에서 창조된 게 아니라 거듭날 능력만을 가지고 태어났기 때문이다. 그리고 거듭나지 않은 천사는 천국에 없다. 따라서 그들은 자신들 스스로서는 악밖에 가진 게 없음을 인정하지 않는 천사도 없다. 그래서 최초의 창조된 인간 존재들, 그들이 누구이던, 설사 그들이 영적 질서와 구별되는 천적 질서 속에 있었다 해도 악에 빠졌고, 그들 후손에 자기들 악을 전달해 주었다. 이로부터 지금까지 모든 각 사람은 거듭남을 위한 능력을 가지고 있어 그가 선택만 하면 거듭날 수 있게 되어있다.
따라서 두 문단의 주석으로서 우리가 주목하게 되는 것은, 글자 측면에서의 호소함은 인간의 이기적인 원리까지 쉽게 인지되도록 만들어져 있다는 점, 즉 순종한 사람에게는 이러이러한 좋은 것들이 약속되고, 사악한 자에게는 심한 처벌로 위협되고 있다. 이는 모든 인간이 자연적일 뿐인 상태에서 태어나기 때문에 당연한 것인 바, 각 사람은 자신으로부터 느끼고 생각하고 행동해야 한다는 것을 필수 요건이 되게 해서 차츰 시간의 흐름 속에서 어떻게 자신을 위해 준비해야 하는가, 어떻게 하면 인류에 계속 떨어지기 쉬운 본문 같은 재난들을 피할 수 있는 가를 심각히 생각하게 해준다. 만일 우리가 사회에 짐이 되지 않기 위해 가족이나 자신을 위해 준비할 수 없다면 타인의 복지라 할 수 있는 더 높은 선용을 어떻게 수행할 수 있으며 더 나아가 인간 사이에 주님의 나라가 세워지는 데에 한 몫을 담당할 수 있겠는가? 더 더욱 필수적인 것은, 자신을 위해 준비해 가는데, 설사 근면을 발휘해서 자기 재산을 관리하여 낭비되지 않고 잘 사용된다 해도 그 모든 행동 역시 이기적 동기로부터 있어져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주님께서 특별한 사건에 관련해 언급된 것이지만 위와 같은 신중함을 발휘하신 때도 있으셨다는 것을 다음 구절에서 찾아 볼 수도 있다. 즉 “사람들이 모두 배불리 먹고 난 뒤에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조금도 버리지 말고 남은 조각을 다 모아 들여라’하고 이르셨다”(요한 6:12) 이상과 같이 행동하는데 있어 어떻게 하면 통치하는 동기들을 더 높은 동기를 간직하면서 해낼 수 있는가를 본문 첫 문단에 있는 내적 의미가 보여주고 있다. 사람에게 원기를 주는 나무의 열매, 곡식과 포도주로 표현된 의미들만이 인간으로 이타적이 될 수 있게 하는 참 원리들이다. 그 이유는 주님으로부터 온 천국적 진리, 선한 행동의 다양한 종류들은 자연적 삶의 수준까지도 유용해지게 하기 때문이다. 영혼에 자양분을 주는 생명의 빵, 하느님 나라의 포도주, 이것들은 품성 속에 신뢰되는 힘과 에너지를 주면서 모두 이타적인 것들이다. 그래서 단순한 인간 복지에만 국한되는 게 아니라 형체가 어떠하든 모든 형체 속에서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게 해준다. 다음 사항도 진실이다. 즉 이기적인 사람들이 위 원리들을 이기적인 용도에까지 적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언제든지, 어느 때든지 그들이 남용한 참 진리와 선함은 그들을 단죄하고 그들 본성으로부터 가르쳐지도록 평가하면서 더 나은 쪽을 역설한다. 그 다음으로 이어지는 것들은 피할 수 없는 당연한 결과들, 외관으로는 그 반대같이 보일 수도 있는 결과들이 거론되는데 어찌됐든 선과 진리는 동시에 존재한다는 것, 두 원리의 동시 존재는 언제나 평화와 안전의 확고부동한 거처를 제공한다.
첫 문단을 끝내기 전, 악을 정복하는 진리의 힘에 관하여 곰곰이 생각해야만 할 것이라 본다. 즉 아껴두시는 것들의 이식과 그 이식된 것들을 자기 것으로 삼는 것에 관해, 주님을 진정으로 예배함에 관해, 우리가 그분을 진실로 예배할 수 있는 이유에 대해서이다. 신성한 존재는 전능하시다는 것, 이 사항은 널리 인정된 진리여서 이를 부정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런데 전능하심의 속성에 관해서는 잘 이해되지 않고 있다. 주님은 어떤 것이든 하실 수 있는 분이시다 라고 믿는 반면 그 어떤 것은 신성한 사랑에 일치해야하는 것을 뜻한다는 것을 우리는 잊고 있다. 그러므로 그분이 많은 것을 해주실 수 있기는 불가능하다. 그 이유는 신성한 사랑에 관한 그분의 속성에 반대되는 게 너무나 많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분께서는 인간 영혼을 파괴하실 수 없다. 그분은 사랑 외에는 더 달리 인간 영혼을 향해 행동하실 수 없다. 설사 최악의 악령이라 해도 그들이 삶을 계속 할 수 있는 것은 궁극적으로 그분의 실패할 수 없는 사랑 때문이다. 게다가 주님께서는 잘못된 어떤 것을 행할 수 없다. 그 이유는 잘못된 것은 신성한 지혜에서 나오는 그분의 신성한 법칙에 반대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 하늘 아버지의 전능하심은 모든 것을 행하는 힘을 가지고 있으시다는 것을 뜻하는 게 아니라 그분은 모든 힘의 근원 되신다는 사실에 있는데, 그 이유는 그분이 모든 생명의 근원이기 때문이요 생명 없는 힘이라는 것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사항에 그분이 신성한 사랑이실 뿐 아니라 신성한 질서이시다는 것을 더 첨가 해보면 그분께서는 그분의 질서에 반대되게 행하실 수 없다는 것도 당연지사로 생각 될 수밖에 없다. 모든 힘의 근원 되심이 명백한 바 천사 또는 선한 자는 그분으로부터서만 힘을 가진다는 것, 이와 반대로 사악한 자는 선한 자를 향해 힘을 가진 게 아니라는 것도 명백해진다. 이런 생각들은 방금 위에서 명명한 네 요점 중의 첫째를 예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말씀에서 많이 말해지는 것, 그래서 스웨덴볽의 저서에서도 많이 거론되는 것은 리메인스(아껴두신 것들, remains)에 관해서 이다. 유아 때부터 삶의 마지막까지 주님께서는 인간 안에다 계속적으로 아껴 저장해두시는 것들이 있다. 설사 당사자가 선한 용도로 아껴 두신 것을 사용하든 그렇게 안 되고 말든, 그것들이 절대적으로 파괴되거나 상실되지 않도록 설비해두신다. 그것들은 모든 선하고 참된 영향이나 감명, 모든 거룩한 애착, 생활 속에서 가지게 되는 모든 경건한 생각 등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것들은 주님에 의해 저장되어 보존된다. 이것들은 주님의 영이 작동하는 거듭 나아지는 사람 안에 있는 것들이요, 이것들이 창세기 1장 2절, 요한복음3장 5절에서 물(water)로 상징화되어 있다. 본문이 가르치는바, 인간이 거듭날 때 이것들은 외적 인간 안에 이식되어 명백해져 그 사람의 실제 생명의 일부가 되어 더욱 풍성해지고 더욱 드높여 지게 된다고 말한다. 이와 거듭나는 당사자의 것이 되는 모습이 오랫동안 간직했던 묵은 곡식을 먹는 것, 새 곡식 때문에 묵은 곡식을 꺼내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러면 이 결과는 무엇일까? 그 결과는 하느님의 성막에 인간과 함께 있는 것, 모든 악에서 완전히 해방됨으로 해서 예배가 진실 되고 거룩하고 순수해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억압받은 이집트의 속박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해방되는 말씀에 담겨있다.
두 번째 문단은 비교적 긴데 부패된 교회와 연결되는 많을 요점들을 말하고 있다. 이런 상태는 끝장을 보게 되는 것까지 이어져 가고 있는데 앞의 장들에서 누누이 설명된 바 있으므로 긴 본문에 비해 설명은 간단히 해도 될 것으로 본다. 이런 사항들을 잘 생각해봄에 있어 먼저 상기해둘 필요가 있는 것은, 주님께서는 어떤 인간에게도 악이나 처벌을 가져다주시지 않는다는 것, 실제로 발생하는 끔찍한 고통까지도 그러하다. 그래서 본문에서 명명되는 여러 가지 재난으로 표현된 것 모두는 악한 상태의 자연스런 결과일 뿐이다. 그런고로 사악한 자들 스스로 재난을 불러들인다. 그러므로 본문에서 주님은 이런 재난을 그분 스스로 있게 하신다든가 그런 재난이 그분의 탓인 듯 여겨지게 한 이유는, 그분께서는 자연적, 영적, 모두 포함되는 우주의 만물을 통제하신다는 것, 나쁜 자, 악령들은 거짓과 악 속에 있기 때문에, 그것을 수단으로 그들은 약해지고 어두워져 있는데 그들은 주님께서 자기들을 실제 벌한다고, 자기들 고통의 원인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함 때문이다. 이를 좀더 세심하게 생각해본다면 각자의 처지와 상태에 따라 생각하는 게 각자를 위해 더 나을는지 모른다. 그 이유는 각자가 그렇게 생각함으로 악한 자들도 이 세상에 있는 동안 외적인 회개의 상태로 인도되어, 잘된다면 나중에 외적 회개가 순수한 회개가 될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런데 만일 그들이 저 세상에 있어 악 속에 있는 자기들을 확증한다면 하느님께서는 자기들이 질서에 위반되어서 심한 고통을 겪도록 허용하고 지시를 내렸다는 쪽으로 설득되고 마는바, 그들은 더 강한 억제로 들어가서 그들이 할 수 있는 어떤 쓸모 있음을 기꺼이 수행할 수 있게 배려된다. 그 이유는 각 사람 모두는 결국 쓸모 있어짐의 어떤 형체가 되어가기 때문이요, 이것이 어떤 환경이나 조건 밑에서의 신성한 정부 체제의 목적이기 때문이다.
마지막 문단은 보다 더 세심하게 생각해보아야 할 것인데, 그 이유가 교회의 마지막에서 선 가운데 있는 이들만이 회개의 기회를 가지는 게 아니라, 확증된 악한 상태에 있는 사악한 자들, 비록 주님이 그들과 상반되지만 아직 주님에 의해 보호되고 언젠가 어떤 유용함이 되도록 배려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마지막 문단은 자연스럽게 두 부분, 즉 40-42절과 43-45절로 나뉘어 있다. 이 여섯 절 모두를 하나로 취급하면 한 가지 사실, 즉 신성의 방침에는 마지막 상태에서 선한 자나 악한 자 모두에서 사랑과 자비 중 하나를 포함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이 문항을 보면, 자기들의 불법을 고백하는 이들은 회개의 일을 하는 이들, 그러므로 교회의 마지막에서 선 가운데 있는 이들을, 그 반면 그 땅을 버린 이들, 그들이 없는 그 땅이 안식을 누리는 것은 악한 상태가 확증되었기 때문에 자신을 교회로부터 분리시킨 이들을 명시하고 있다. 따라서 다른 용어들도 위 원칙에 따라 적용되었다. 예를 들면 “자신의 불법에 대한 처벌”이 어느 구절에서는 자신들에게는 불법밖에 없음을 스스로 고백하는 것으로, 또 다른 구절에서는 자신의 악의 결과에 따라 살고 견뎌야 하는 것으로 풀이되고 있다. 이와 같이 44-45절에 있는 사악한 자들에 관해 언급한 주석 역시 43절에 기술된 품성에 의거하고 있다. 영어 번역 성경에 있는 표현 “because, even because”가 포함하는 내적 의미는 그들이 의지와 이해함 양면에서 확증된 상태를 나타내는 말이다.
이상의 마지막 문단의 두 부분의 비교 검토 역시 어떻게 주제를 예증하는지 알게 된다. 그리하여 우리로, 어떻게 주님의 사랑과 자비가 매우 험악한 상태의 인간 존재에 까지 영원히 뻗쳐 가는 가를 미약하나마 실감하게 해 준다. 그리고 누가복음13장 34-35절을 본문의 주제와 함께 생각해보길 바란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너는 예언자들을 죽이고 하느님께서 보내신 사람들을 돌로 치는구나! 암탉이 병아리를 날개 아래 모으듯이 내가 몇 번이나 네 자녀들을 모으려 했던가! 그러나 너는 응하지 않았다. 너희 성전은 하느님께 버림을 받을 것이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찬미 받으소서!’ 하고 너희가 말할 날이 올 때까지 너희는 정녕 나를 다시 보지 못하리라.”

레위기 27장

성경: 레위기 1장

1. 그리고 주님께서 모세에게 이야기하셨다, 말하시기를,
2. 이스라엘의 자손에게 이야기 하라, 그리고 그들에게 말하라, 사람이 서약을 이루려 할 때, 그 인물은 네 평가에 의해 주님을 위해 있을 것이다.
3. 그리고 네 추정가는 이십 세부터 육십 세까지의 남성일 경우, 성소의 세겔로 은 오십 세겔이다.
4. 만일 여성이면 그다음 네 추정가는 삼십 세겔이다
5. 그리고 만일 오 세로부터 이십 세까지이다면 네 추정가는 남성은 이십 세겔, 여성은 십 세겔이다.
6. 그리고 만일 한 달로부터 오 세 까지이다면, 그다음 네 추정가는 남성은 은 다섯 세겔, 여성은 은 삼 세겔이다.
7. 그리고 만일 육십 세 그 이상이다면, 네 추정가는 남성은 은 십오 세겔, 그리고 여성은 은 십 세겔이다
8. 그러나 만일 그가 네 추정가 보다 더 가난하다면, 그다음 그는 성직자 앞에 놓여질 것이다, 그리고 성직자가 그를 평가한다.
9. 그리고 만일 어떤 사람이 주님에게 봉헌물을 바치는 것이 짐승이다면, 이런 것의 모두가 주님에게 거룩하다.
10. 그는 그것을 나쁜 것을 좋은 것으로, 좋은 것을 나쁜 것으로 변경하지 못한다. 그리고 만일 짐승을 짐승으로만 바꿀 것이다면, 그다음 그것과 그것과 바꾸어지려는 이것 모두가 거룩하다.
11. 그리고 만일 이것이 불결한 짐승이다면, 이것으로부터 그들은 주님에게 봉헌물을 바치지 못할 것이다. 그다음 그는 성직자 앞에 그 짐승을 놓아야 한다.
12. 그리고 성직자가 그것이 좋은지 나쁜지를 평가하라, 네 성직자가 그것을 평가하는대로, 그것은 그렇게 있을 것이다.
13. 그러나 만일 그가 참으로 그것을 되찾겠다면, 그러면 그는 네 추정값에 오분의 일을 보태라.
14. 그리고 사람이 자기 집을 주님에게 거룩해 있도록 신성하게 할 때, 그러면 성직자는 그것이 좋은지 나쁜지, 그것을 추정하라. 성직자가 그것을 추정하는대로 그렇게 그것은 서있을 것이다.
15. 그리고 만일 그것을 신성하게 한 그가 자기 집을 되찾을 것이다면, 그다음 그는 그것에 대한 네 추정값의 오분의 일의 돈을 더하라, 그리고 그것은 그의 것이다.
16. 그리고 만일 사람이 주님에게 자기 소유지의 일부를 신성하게 할 것이다면, 그다음 네 추정값은 그것의 씨뿌림에 따라 있다. 보리 한 호멜의 씨뿌림은 은 오십 세겔(로 평가될 것)이다
17. 만일 그가 희년의 해로부터 자기 들판을 신성하게 한다면, 네 추정에 따라 그것은 서있을 것이다.
18. 그러나 만일 그가 희년 이후 자기 들판을 신성하게 한다면, 그다음 성직자는 그에게 희년의 해까지 남은 년수에 따라 돈을 계산하라, 그리고 감해지는 액수는 네 추정값으로부터 만들어 질 것이다.
19. 그리고 만일 들판을 신성하게 한 그가 참으로 그것을 되찾을 것이다면, 그다음 그는 그것에 네 추정값의 오분의 일을 더하라, 그리고 그것이 그에게 보증을 설 것이다.
20. 그리고 만일 그가 들판을 되찾지 않을 것이다면, 또는 만일 그가 또다른 사람에게 들판을 팔았다면, 그것은 더 이상 되찾지 못한다.
21. 그러나 들판이 희년에서 나갈 때, 그것은 마치 들판이 헌납된 것 같이 주님에게 거룩하다. 그것의 소유는 성직자이다.
22. 그리고 만일 그가 자기 소유지가 아닌, 자기가 샀던 들판을 주님에게 신성하게 한다면,
23. 그다음 성직자는 그에게 희년의 해까지 네 추정값의 가치를 계산할 것이다. 그리고 그는 주님께 거룩한 것으로 그 날에 네 추정값을 매길 것이다
24. 희년의 해에 들판은 그것을 팔았던 자에게, 토지의 소유가 속해 있었던 자에게 되돌아 간다.
25. 그리고 모든 네 추정값은 성소의 세겔에 따라서 이다. 즉 이십 게라가 한 세겔이다.
26. 짐승 사이에 첫배 새끼 만이 주님에게 첫배 새끼로 만들어지는 바, 아무도 그것을 신성하게 하지 못한다. 그것이 황소이든 양이든 그것은 주님의 것이다.
27. 그리고 만일 그것이 불결한 짐승으로부터 이다면, 그다음 그는 너의 것 추정값에 따라 그것의 값을 치루라, 그리고 그것에 그것의 오분의 일을 보태라. 또는 만일 그것이 되찾아지지 않는다면, 그다음 그것은 너의 추정값에 따라 팔리운다.
28.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쳐진 것, 즉 그가 가진 모든 것, 그것이 사람이든, 짐승이든, 또는 자기 소유의 들판이든 사람이 주님에게 바친 것은 팔려지거나 되찾지 못한다. 바쳐진 모든 것은 주님에게 최고로 거룩하다.
29. 바쳐짐이 사람일 경우, 아무도 몸값을 치루고 되찾지 못한다. 그는 정년 죽음에 놓여야 한다.
30. 그리고 토지의 모든 십분의 일, 토지의 씨뿌림으로부터 이든 나무의 열매로부터 이든, 주님의 것이다. 그것은 주님에게 거룩하다.
31. 그리고 만일 사람이 십분의 일의 뭔가를 되찾겠다면, 그는 그것에 그것의 오분의 일을 추가할 것이다.
32. 목축이나 양떼의 모든 십분의 일, 막대기 아래를 지나가는 열 번째는 주님에게 거룩하다.
33. 그는 그것이 좋은지, 나쁜지를 헤아리지 못한다, 그는 그것을 바꾸지 못한다. 그리고 정녕 그가 그것을 바꾸겠다면, 그러면 그것과 바꾸려는 그것 둘 다 거룩할 것이다. 그것은 되찾아지지 못한다.
34. 이것들은 명령들이다, 이것을 주님께서는 시내산에서 이스라엘 자손을 위해 모세에게 명령하셨다.

영적 의미 요약

* 의지와 이해함이 함께 심사숙고 하는 가운데 주님을 모시는 모든 이는 주님으로부터 온 진리의 선을 받는 상태 또는 품질에 의거 평가되어진다, 1-8절.
* 주님을 섬기되 내면에 있는 애착을 바침, 그리고 그 품질의 평가에 관하여, 9-13절.
* 위와 같되 외면에 있는 자연적 애착들에 관하여, 14-15절.
* 주님을 섬기되 진리 측면에서의 외면에 있는 자연적 인간을 바침, 그리고 차이가 있는 환경에서의 평가들에 의하여, 16-25절.
* 특히, 어느 누구도 선함을 자기 탓으로 여겨서는 안 된다. 그 이유는 선함은 주님으로부터만 존재하기 때문이다. 불순한 자연적인 선, 이는 주님으로부터가 아닌 바, 순수한 선으로 대체되어야 한다.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은 소외될 수 없고 이기적 용도에 충당되어서도 안 된다. 아껴두신 모든 것은 주님으로부터 임을 인정해야 한다. 인간에게 있는 모든 선과 진리는 자기 속에 주님께서 아껴두신 것들을 수단으로 인정되어야 한다. 어느 누구도 자신에서 비롯되는 총명으로 자신의 품질을 평가해서는 안 된다, 26-33절.
* 위 모든 사항은 신성한 선의 유입으로부터 신성한 진리로 된 신성한 질서의 법칙들이다. 이 모든 것은 영적 인간의 유익을 위해 주님의 순수한 사랑과 자비에서 비롯되어 있다, 34절.

각 절의 영적 의미

1절. 그리고 주님께서 모세에게 이야기하셨다, 말하시기를,

영적 의미

지각을 주는 신성한 진리를 수단으로 주님께서 밝히 알게 하신다.

세부적 영적 의미

주님(여호와)란 사랑 측면에서의 신성한 존재를, 이야기하심은 유입을, 모세는 신성한 진리 또는 말씀을, 말하심은 지각을 뜻한다. (2001, 2951, 7010, 1791, 1822)

2절. 이스라엘의 자손에게 이야기 하라, 그리고 그들에게 말하라, 사람이 서약을 이루려 할 때, 그 인물은 네 평가에 의해 주님을 위해 있을 것이다.

영적 의미

영적 인간은 반드시 가르침을 받아야 한다는 것, 자신의 의지와 이해함이 동의함으로 신중하게 자신을 주님께 바치는 모든 이는 주님으로부터 온 진리의 선을 받는 상태 또는 품질에 의거 평가가 있어진다.

세부적 영적 의미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야기함이란 영적 인간은 가르쳐져야만 함을; 사람이 서약을 성취함이란 의지와 이해함이 동의하는 가운데 심사숙고 해서 주님께 자신을 바치는 사람을; 그 사람이 주님을 위해 “평가, (값을 매김)”이란 주님으로부터 온 진리의 선을 받는 상태나 품질에 의거 평가되어짐을 뜻한다. (3654, 7304, 3732, 3880, 2001, 7010)
이 구절에서 이해하고 넘어갈 것이 있다. 가장 높은 측면에서 신성한 진리만이 예배하는 모든 이의 진짜 품질을 식별할 수 있다. 낮은 측면에서 선은 거듭나는 모든 사람의 본질인 반면, 진리는 그 생명의 형체이다. 그러므로 형체로부터 품질을 밝히 알게 된다.

3절. 그리고 네 추정가는 이십 세부터 육십 세까지의 남성일 경우, 성소의 세겔로 은 오십 세겔이다.

영적 의미

그러므로 진리와 선에 총명한 이들은 그 총명을 통해 신성한 진리에 의거 진리를 충만 되게 받음으로 시험에 견딜 능력을 지니고 있다. 오히려 시험을 수단으로 그 진리는 선과 결합한다.

세부적 영적 의미

이십 세 된 남자의 값이란 진리와 선에 총명한 이들을, 육십 세 까지란 총명을 통해 시험에 견딜 능력이 있음을; 값을 매김이란 신성한 진리에 따라서임을; 은 오십 세겔이란 진리를 충분히 받는 상태를; 성소 세겔에 따라서 란 “시험을 수단으로 선과 결합되어짐을” 뜻한다. (725, 2280, 10225, 3306, 8888, 7010, 2959. 3210)

4절. 만일 여성이면 그다음 네 추정가는 삼십 세겔이다

영적 의미

그러나 지식 없이 애착으로부터서 진리에 총명한 이들은 시험에 견딜 능력을 덜 갖게 되는 바 주님을 온전하게 예배 할 수 없다.

세부적 영적 의미

여자이면 삼십 세겔이다 란 지식 없이 애착으로부터 진리에 총명한 이들은 시험에 견딜 능력이 덜 한 바 주님을 완전히 예배할 수 없다는 뜻이다. (725, 2276)

5절. 그리고 만일 오 세로부터 이십 세까지이다면 네 추정가는 남성은 이십 세겔, 여성은 십 세겔이다.

영적 의미

다시, 진리와 선에 무지한 상태에서 주님을 예배하고 자신을 그분께 바치고자 하는 이들은 선을 사랑하는 마음 때문에 구원된다. 그러나 진리들이 결핍되어서 악과 싸우지 못한다. 그러나 선을 사랑함에 있을 경우의 그들의 품질은 그들 속에 리메인스(remans, 아껴두신 것) 덕택에 구원을 위한 능력을 가진다.

세부적 영적 의미

오 세로부터 이십 세까지란 진리와 선에 무지한 상태에서 주님을 예배하는 이들 또는 그분께 자신을 바치고자 하는 이들을;, 값을 매김이란 신성한 진리에 의거함을; 남자는 이십 세겔이란 어떤 진리를 가진 선 때문에 구원은 되나 전투를 위해서는 충분치 못함을; 여자는 십 세겔이다 란 선에 대한 애착뿐이라면 그 품질은 리메인스(remans, 아껴두신 것) 덕택에 구원받을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다. (2280, 7010, 725)

6절. 그리고 만일 한 달로부터 오 세 까지이다면, 그 다음 네 추정가는 남성은 은 다섯 세겔, 여성은 은 삼 세겔이다.

영적 의미

그러나 유아의 선 속에 있는 이들, 그들의 신앙이 싹틀 조짐만 있고 선행은 아주 조금만 있을 경우, 그들은 영적 생명을 지니되 매우 조금 뿐인데 그 이유는 소량의 진리가 애착과 결합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더욱 작아질 경우 거기에는 진리는 없고 애착만 있게 된다.

세부적 영적 의미

한 달 된 나이로부터 오 세까지란 유아의 선 가운데 있는 바 그 신앙이 싹틀 가능성만 있을 뿐이고 선행은 매우 적은 양을 지닌 이들을, 값을 매김이란 신성한 진리에 의거함을, 사내아이는 은 오 세겔이다란 영적 생명의 품질이 작다는 것을, 그 이유는 애착에 결합된 진리가 적기 때문이다. 여자아이는 은 삼 세겔이란 애착만 있고 진리가 없어 더욱 적음을 뜻한다. (2280, 10225, 7010, 725, 4495-3, 10225)

7절. 그리고 만일 육십 세 그 이상이다면, 네 추정가는 남성은 은 십오 세겔, 그리고 여성은 은 십 세겔이다

영적 의미

지혜의 선 속에 있는 이들, 그들은 시험을 충분히 거친 상태인 바, 그 생명의 품질은 진리가 풍부하면서도 선과 결합되어 있어 새로운 상태, 즉 그들은 진리를 수단으로 사랑으로부터 행동한다. 그러나 조금밖에 안 되는 진리가 선과 결합할 경우 그들의 품질은 리메인스(remans, 아껴두신 것)가 충만된 상태로부터 존재한다.

세부적 영적 의미

육십 세 이상이란 시험의 과정을 충분히 거처 지혜의 선 가운데 있는 이들을, 값을 매김이란 신성한 진리에 의거함을, 남자는 십 오 세겔이다 란 진리가 풍부하고 새 상태에서 선과 결합된 생명의 품질이요 이 품질에서 그들은 진리를 수단으로 사랑으로부터 행동함을, 여자는 십 세겔이란 적은 진리가 애착과 결합될 때 그 품질은 리메인스(remans, 아껴두신 것)가 충만됨으로부터 있게 됨을 뜻한다. (7010, 10225, 8400, 9296-5, 10225, 576)

8절. 그러나 만일 그가 네 추정가 보다 더 가난하다면, 그다음 그는 성직자 앞에 놓여질 것이다, 그리고 성직자가 그를 평가한다.

영적 의미

그러나 진리에서 파생되는 품질이 없는 이들은 그들이 지닌 선의 상태로부터서 가늠해 보아야한다. 그 이유는 선은 선의 품질을 표현하는 진리를 생산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주님께 헌신하려는 그 사람이 지닌 선으로부터의 진리에 의거 위 사람은 평가되어지게 된다.

세부적 영적 의미

매긴 값보다 더 가난한 사람이 성직자 앞에 선다란 진리로부터 파생된 품질을 가지지 않은 이들은 선에 관한 그들의 상태를 가지고 검토됨을, 성직자가 그 사람의 값을 매김이란 선은 그 선의 품질을 표현하는 진리들을 생산함을, 서약하는 자의 능력에 따라 성직자가 값을 매김이란 주님께 자신을 바치려는 사람에게 있는 선으로부터 오는 진리에 의거 위의 사람은 평가되어짐을 뜻한다. (7010, 4459-4, 9946, 4985, 8304, 3732, 3880, 9946)

9절. 그리고 만일 어떤 사람이 주님에게 봉헌물을 바치는 것이 짐승이다면, 이런 것의 모두가 주님에게 거룩하다.

영적 의미

자기는 주님으로부터 있게 되었다고 인정함을 수단으로 내면에 있는 자연적 애착들을 주님을 섬기는데 바치고자 하는 이들은 그것으로 인해 거룩한 상태로 들어간다.

세부적 영적 의미

짐승이란 사람 또는 “혼, soul”에 관련된 것을 명시하는데 내면에 있는 자연적 애착을, 봉헌물로 바침이란 그것이 주님으로부터 이다는 것을, 이런 사람이 드리는 모든 것은 거룩하다란 거룩함의 상태가 예배에서 진실로 인정함에서 비롯된다는 뜻이다. (1823, 349, 5619, 8402)

10절. 그는 그것을 나쁜 것을 좋은 것으로, 좋은 것을 나쁜 것으로 변경하지 못한다. 그리고 만일 짐승을 짐승으로만 바꿀 것이다면, 그다음 그것과 그것과 바꾸어지려는 이것 모두가 거룩하다.

영적 의미

위에 속하는 사람이 선 또는 진리가 우세해 있는 상태에서 다른 데로 건너가는 것, 혹은 악 또는 거짓이 우세해지는 상태는 허용될 수 없다. 내면에 있는 통치하는 애착으로 예배하는 사람이 외면에 있는 애착으로 내려가 예배할 수 없다. 그러나 자신의 의지에 반대되는 시험의 과정에서 선과 악 사이에서 오르내리고 있다면, 승리를 수단으로 선이 확증되고 악이 거절되는데 확증과 거절 모두 거룩하다.

세부적 영적 의미

그것은 변경하지 못하고, 바꾸지도 못한다란 위의 사람이 선 또는 진리가 우세해 있는 상태에서 악 또는 거짓이 우세해지는 상태로 건너가는 것을 허용할 수 없음을, 좋은 것을 나쁜 것과 나쁜 것을 좋은 것과 바꾸지 못함이란 내면에서 통치해주는 애착으로부터 예배하는 사람은 외면에로 내려 갈 수 없고 그 반대도 될 수 없음을, 짐승끼리 맞바꾸려고 하면 그 바꾸려던 둘 다 거룩해진다란 인간이 자기 의지에 반대되는 시험의 과정 중 선과 악 사이에서 흔들거리고 있다면 승리를 수단으로 선이 확증되고 악이 거절되는 바, 확증과 거절 모두가 거룩함을 뜻한다. (1463, 683, 1276, 1377, 1823, 8042, 847)

11절. 그리고 만일 이것이 불결한 짐승이다면, 이것으로부터 그들은 주님에게 봉헌물을 바치지 못할 것이다. 그 다음 그는 성직자 앞에 그 짐승을 놓아야 한다.

영적 의미

누가 자기의 내면에 있는 자연적 애착을 주님께 바치고자 하는데 그 애착이 불순하다면 그는 자기 속에서 우세해 있는 선의 상태로부터 주님께 자기의 불순함을 인정해야 하리라.

세부적 영적 의미

그것이 주님께 제물로 바칠 수 없는 불결한 짐승일 경우 성직자 앞에 세워 둔다란 누가 자신의 내면에 있는 자연적 애착을 주님께 바치고 싶은데 그것이 불순할 경우 그는 자기 속에서 우세해 있는 선이 통치하는 상태로부터 자기의 불순함을 주님 앞에서 인정해야 할 것을 뜻한다. (10130, 9946)

12절. 그리고 성직자가 그것이 좋은지 나쁜지를 평가하라, 네 성직자가 그것을 평가하는 그대로, 그것은 그렇게 있을 것이다.

영적 의미

이로부터 그는 불순한 자연적 애착들의 품질을 알게 되고 동시에 자기 예배의 신실한 상태를 평가할 수 있다.

세부적 영적 의미

성직자가 그것이 좋은지 나쁜지 평가함이란 그런고로 그는 불순한 자연적 애착들의 품질을 알게 될 것임을, 다시 말해 선에 관한 자기 상태로부터 알게 됨을, 성직자가 평가한 그대로 그 값이 결정됨이란 위와 동시에 그는 자기 예배의 신실성을 평가하게 될 것이다를 뜻한다. (9946, 10217)

13절. 그러나 만일 그가 참으로 그것을 되찾겠다면, 그러면 그는 네 추정값에 오분의 일을 보태라.

영적 의미

그래서 그가 자기 예배의 상태에 따라 회개의 일을 진실로 행한다면 자기 속에 아껴 저장된 선한 어떤 것들로부터의 인정도 있게 되리라.

세부적 영적 의미

그것을 되찾고 싶을 경우 그는 그 값에 오분의 일을 더해야 함이란 만일 그가 예배의 자기 상태에 따라 회개의 일을 진실로 행한다면 그는 리메인스(remans, 아껴두신 것) 속에 있는 선으로부터서도 인정함이 있을 것임을 뜻한다. (2996, 6156)

14절. 그리고 사람이 자기 집을 주님에게 거룩해 있도록 신성하게 할 때, 그러면 성직자는 그것이 좋은지 나쁜지, 그것을 추정하라. 성직자가 그것을 추정하는 대로 그렇게 그것은 서있을 것이다.

영적 의미

누가 선의 저장소인 외면에 있는 자연적 애착을 예배에서 주님께 바치겠다면 이런 애착의 품질도 선에 관해 우세해 있는 상태에 따라 있게 된다. 그 이유는 이 선이 예배의 품질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세부적 영적 의미

자기 집을 주님께 바쳐 신성해지게 함이란 선의 저장소인 외면에 있는 자연적 애착들을 예배에서 주님께 바침을, 좋은지 나쁜지를 성직자가 평가함이란 이 애착들의 품질은 선에 관해 우세해 있는 그의 상태에 따라 아직은 있다는 것을, 성직자가 평가한 대로 되어짐이란 이것이 예배에 있는 품질에 관해 결정되는 것이기 때문임을 뜻한다. (1488, 8042, 7724, 10217)

15절. 그리고 만일 그것을 신성하게 한 그가 자기 집을 되찾을 것이다면, 그 다음 그는 그것에 대한 네 추정값의 오분의 일의 돈을 더하라, 그리고 그것은 그의 것이다.

영적 의미

예배자가 주님으로부터 회개의 일을 기쁘게 행하고자 한다면 그는 자신에게 남아 있는 선의 상태로부터 오는 어떤 인정함을 수단으로 행해야 하고 이에 더하여 자신 속에 악이 있음을 인정해야한다. 그러면 그는 선을 자기 것 같이 삼게 되리라.

세부적 영적 의미

신성하게 한 자기 집을 되찾을 경우 매겨진 값의 오분의 일에 해당하는 돈을 더해야 그의 것이 됨이란 만일 예배자가 회개의 일을 주님으로부터 기꺼이 할 경우 그는 선에 관해 아껴두신 자기 상태로부터 어떤 인정함을 수단으로 회개가 있게 되는데 이에 더 보태야 하는 것은 자기가 악 속에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것이 그의 것이다란 그는 자신으로부터 인 듯 선을 자기 것 삼게 될 것을 뜻한다. (2966, 6156, 1488)

16절. 그리고 만일 사람이 주님에게 자기 소유지의 일부를 신성하게 할 것이다면, 그다음 네 추정값은 그것의 씨뿌림에 따라 있다. 보리 한 호멜의 씨뿌림은 은 오십 세겔(로 평가될 것)이다

영적 의미

누가 진리에 관한 외면에 있는 자연적 인간을 그분을 섬기는데 바침으로 주님을 예배하겠다면 이 예배의 품질은 선 안에서 진리를 받는 정도에 따라, 다시 말해 진리의 선에 따라 정해진다. 그리고 그 상태는 그 선에 의거 충만 될 것이다.

세부적 영적 의미

누가 자기 소유의 들판 일부를 주님께 바쳐 신성해지게 함이란 누가 진리에 관한 측면에서의 자연적 인간을 주님을 섬기는데 바침으로 주님을 예배할 경우를; 값을 매김이란 신성한 진리에 의거함을; 거기에 뿌리는 씨앗에 따라서란 위의 예배의 품질은 선 안에 있는 진리를 받는 측면에서 있게 됨을; 보리 한 호멜 뿌리는 양의 값이 은 오십 세겔이다란 진리의 선에 의거해서, 그 선에 따라 충만된 상태가 있을 것임을 뜻한다. (9272, 10262, 7602, 2261, 425, 2959)

17절. 만일 그가 희년의 해로부터 자기 들판을 신성하게 한다면, 네 추정에 따라 그것은 서있을 것이다.

영적 의미

그래서 예배의 이 상태가 자기 생명의 가장 깊은 곳에서 선과 진리의 결혼으로부터 파생되고 있다면 그것은 확증되어 선의 그 상태는 영구적이 된다.

세부적 영적 의미

희년의 해로부터 자기 들판을 신성하게 한다면 네 추정에 따라 그것은 서있는다 란 예배의 상태들이 자기 생명의 가장 깊음에서 선과 진리가 결혼함에서 파생되어진다면 그 상태는 확증되어지고 선의 상태는 영구적일 것이 된다. (4982, 8042, 8802, 7010, 4926)

18절. 그러나 만일 그가 희년 이후 자기 들판을 신성하게 한다면, 그 다음 성직자는 그에게 희년의 해까지 남은 년수에 따라 돈을 계산하라, 그리고 감해지는 액수는 네 추정값으로부터 만들어 질 것이다.

영적 의미

그러나 예배의 이 상태가 위와 같은 가장 깊은 결합에서 파생되지 않고 단지 선으로부터 기대 할 수 있는 정도에 그치고 있다면 그 품질은 거듭나는 과정에서 획득된 진리에 따라 있어진다. 그런고로 시작에서도 덜 완전하리라.

세부적 영적 의미

희년이 지나서 자기 들판을 신성해지게 함이란 예배의 상태가 위와 같이 가장 깊은 결합으로부터 파생되지 않고 기대만 될 뿐이다 면을, 성직자가 희년까지 남은 년수를 세어 그 값을 그에게 세어 줌이란 선으로부터의 품질은 거듭나는 동안 선 안에 이식된 진리를 획득한 정도에 따라 있게 될 것임을 뜻한다. (8802, 9946, 10217, 725, 2966)

19절. 그리고 만일 들판을 신성하게 한 그가 참으로 그것을 되찾을 것이다면, 그 다음 그는 그것에 네 추정값의 오분의 일을 더하라, 그리고 그것이 그에게 보증을 설 것이다.

영적 의미

만일 예배자가 선한 자기 상태로부터 회개의 일을 수행하는 것을 참고 견디지만 회개의 선으로부터 주님을 예배하지 못 할 경우, 그런데 아껴두신 선한 어떤 것으로부터 주님을 인정하고 있다면 그는 주님으로부터 새 생명을 계속 받을 것이고 선한 그의 상태도 확증될 것이다.

세부적 영적 의미

신성해지게 바친 들판을 되찾을 경우, 매겨진 값에 오분의 일을 더 하면 자기 것이 된다란 예배자가 회개의 일을 하는 동안은 선에 관한 자기 상태로부터 버텨내는데도 그가 회개의 선으로부터 주님을 예배하지 못하고 있고, 그러나 자기는 주님으로부터 새 생명을 계속 받고 있다는 것을 아껴두신 선의 상태로부터 인정하고 있다면 선에 관한 그의 상태는 확증된다는 것을 뜻한다. (4982, 8042, 2966, 6156, 4926)

20절. 그리고 만일 그가 들판을 되찾지 않을 것이다면, 또는 만일 그가 또 다른 사람에게 들판을 팔았다면, 그것은 더 이상 되찾지 못한다.

영적 의미

그러나 이와 같은 예배가 일시적일 뿐이고 회개가 따르지 않으면, 다시 말해서 악을 확증함을 통해 그의 선이 소외되고 있다면 그의 구속은 불가능하다.

세부적 영적 의미

들판을 되찾지 않음이란 위와 같은 예배는 일시적일 뿐 회개가 수반되지 않음을, 남에게 그 들판을 팜이란 악을 확증한 결과로 선이 소외됨을, 더 이상 그 들판은 물러내지 못함이란 악이 확증되었으나 아직도 되찾음(구속)은 가능할 수 있다는 뜻이다. (2966, 4758, 4747)

21절. 그러나 들판이 희년에서 나갈 때, 그것은 마치 들판이 헌납된 것 같이 주님에게 거룩하다. 그것의 소유는 성직자이다.

영적 의미

그러나 심판에서 그 사람과 함께 있는 진리의 선으로 예배하는 모든 상태는 가능한 한 그에게 이로운 쪽으로 있어질 것이다. 그 이유는 그것이 진리와 선에 괸한 양면에서 거룩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모든 상태는 주님으로부터 이기 때문이다.

세부적 영적 의미

희년이 될 때 그 들판은 주님에게 거룩하다란 심판에서 진리의 선으로부터 예배한 모든 상태는 예배자에게 이익이 되는 한도에서 있게 된다는 것을, “바쳐진 들판 같이…”란 반대 의미 일경우, 이는 악과 거짓으로 확증되어 완전히 정죄되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좋은 의미일 경우, 이는 진리와 선으로부터 예배되어져 거룩해진 것을 뜻한다. 그 소유가 성직자에게 있다란 위와 같은 모든 상태도 주님으로부터 임을 뜻한다. (4982, 8042, 8802, 9193, 8042, 9946)

22절. 그리고 만일 그가 자기 소유지가 아닌, 자기가 샀던 들판을 주님에게 신성하게 한다면,

영적 의미

더구나 예배의 이런 상태가 단지 외적 동기들로부터 획득되어 옷을 입듯 하고 있을 뿐 순수한 선으로부터가 아니라면,

세부적 영적 의미

자기 소유였던 들판은 아니지만 사들인 들판을 주님께 바쳐 거룩하게 함이란 위와 같은 예배의 상태가 단지 외적인 동기들로부터 획득되고 입혀져 있을 뿐 순수한 선으로부터가 아니면을 뜻한다. (8042, 4982, 2967, 4397)

23절. 그다음 성직자는 그에게 희년의 해까지 네 추정값의 가치를 계산할 것이다. 그리고 그는 주님께 거룩한 것으로 그 날에 네 추정값을 매길 것이다

영적 의미

그러면 이와 같은 예배의 품질은 선으로부터 신성한 진리에 의거 예배자의 가장 깊은 상태가 무엇인지에 관해서, 심판에서 있어질 것이 식별된다. 그래서 순수한 선을 원하도록 그는 강요 당할 것이리라.

세부적 영적 의미

성직자가 네 추정값의 가치를 계산함이란 이와 같은 예배의 품질은 선으로부터 신성한 진리에 의거 식별될 것임을; 희년까지란 예배자가 어떨 것인지 또는 예배자가 심판에서 그의 가장 깊은 상태에 관해 어떨 것인지를, 주님께 거룩한 것으로 당일에 값을 매겨줌이란 그는 이 상태에서 순수한 선을 원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을 인정하도록 강요될 것임을 뜻한다. (9946, 10217, 7010, 8802, 2966, 8802, 7010, 2119)

24절. 희년의 해에 들판은 그것을 팔았던 자에게, 토지의 소유가 속해 있었던 자에게 되돌아 간다.

영적 의미

심판에서 모든 선은 주님으로부터 있고 그 선은 거듭남을 수단으로 획득된다는 것이 보여질 것이다.

세부적 영적 의미

희년이 되면 들판을 팔았다 해도 토지의 상속권을 가진 임자에게 그 들판이 돌아간다란 심판에서 순수한 선은 주님으로부터 임을 알게 될 것이고 거듭남을 수단으로 획득된 모든 선도 주님으로부터 임을 알게 되리라. (8802, 4982, 2028-9, 7833, 3239)

25절. 그리고 모든 네 추정값은 성소의 세겔에 따라서 이다. 즉 이십 게라가 한 세겔이다.

영적 의미

인간의 상태에 괸해 신성한 진리가 평가함은 선에서 파생된 진리에 따라 있게 된다.

세부적 영적 의미

값을 매기는 모든 것은 성소의 세겔에 의거함이란 인간의 상태에 관한 신성한 진리의 평가는 선으로부터 파생되는 진리에 의거 있게 됨을, 이십 게라가 한 세겔이다란 선에 관해 아껴두신 모든 것을 뜻한다. (10221, 2959, 10222)

26절. 짐승 사이에 첫배 새끼 만이 주님에게 첫배 새끼로 만들어지는 바, 아무도 그것을 신성하게 하지 못한다. 그것이 수소이든 양이든 그것은 주님의 것이다.

영적 의미

진리에 앞서서 존재한 선은 주님으로부터 있어진 선인 바, 어느 누구도 선의 존재가 자기 탓이라고 주장해서는 안 된다. 이 선의 수준이 영적 선이든 자연적 선이든 모두 주님으로부터 이다.

세부적 영적 의미

짐승 중 맏배란 진리에 앞서 존재하는 선을, 맏배는 주님에게 첫배 새끼로 돌려야 한다란 주님께로부터 기인된다고 생각해야 함을; 어느 인간도 그것을 신성하게 하지 못함이란 어느 인간도 그 선이 자기 것이라고 해서는 안 됨을; 뿐만아니라 지식만으로 존재하는 진리는 거룩한 상태를 생산하지 않음을, 소든 양이든 그것은 주님의 것이다란 선이 자연적 선이었든 영적 선이었든 모두 주님으로부터 존재함을 뜻한다. (3325-8, 5619, 5913, 6126)

27절. 그리고 만일 그것이 불결한 짐승으로부터 이다면, 그 다음 그는 너의 것 추정값에 따라 그것의 값을 치루라, 그리고 그것에 그것의 오분의 일을 보태라. 또는 만일 그것이 되찾아지지 않는다면, 그 다음 그것은 너의 추정값에 따라 팔리운다.

영적 의미

그러나 주님으로부터가 아닌 불순한 자연적 선은 신성한 진리를 통해 순수한 선으로 대체되어진다. 이리하여 주님께서 각 사람 안에 아껴 두신 것들로해서 인정하는 어떤 것을 수단으로 자연적 인간은 위의 선을 획득한다. 만일 회개가 수행되지 않으면 자연적일 뿐인 선은 거절되는데, 그 이유는 그 선은 신성한 진리와 하모니를 이루지 못하기 때문이다.

세부적 영적 의미

불결한 짐승이란 불순한 자연적 선을, 매겨진 값에 따라 그 값을 치르고 되찾음이란 불순한 자연적 애착도 신성한 진리를 통해 순수한 선으로 대체될 수 있음을; 그 값에 오분의 일을 더 함이란 위 방법 속에서 자연적 인간도 아껴두신 것들로부터 오는 인정함을 수단으로 선을 획득함을; 되찾지 않겠다란 회개의 일이 수행되지 않으면을; 매겨진 값에 판다란 자연적일뿐인 선은 거절되어져야 한다는 것, 그 이유는 신성한 진리와 조화를 이루지 않기 때문이다. (46, 10130, 8078, 7010, 2966, 4758)

28절.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쳐진 것, 즉 그가 가진 모든 것, 그것이 사람이든, 짐승이든, 또는 자기 소유의 들판이든 사람이 주님에게 바친 것은 팔려지거나 되찾지 못한다. 바쳐진 모든 것은 주님에게 최고로 거룩하다.

영적 의미

더구나 자신의 것으로 여겨지는 삶으로부터, 또는 자신의 재량으로 주님께 바치는 애착이나 힘, 그것은 내적이든, 내면이든, 외적이든 소외되어진다거나 또는 이기적이고 세상적인 용도에 충당되지 못한다. 그것도 주님께 모두 돌려드려야 한다.

세부적 영적 의미

가진 것 중에서 주님께 바치기로 결심해서 바쳐진 것은 그것이 사람이든 짐승이든, 소유한 들판이든, 팔거나 물러 내지 못한다란 자기 것처럼 보이는 그 삶으로부터, 또는 자기 재량으로 주님께 바치는 애착이나 능력, 그것이 내적이든, 내면에 있든, 외적이든 소외되어져서는 안 되고, 이기적이고 세상적인 용도에 응용되어서는 안 된다. 바쳐진 것은 모두 주님께 더 없이 거룩하다란 위 사항은 주님으로부터 완전히 비롯된다는 뜻이다. (9193, 8042, 2001, 7424, 4982, 4758, 2966, 8078, 8042)

29절. 바쳐짐이 사람일 경우, 아무도 몸값을 치루고 되찾지 못한다. 그는 정년 죽음에 놓여야 한다.

영적 의미

한마디로 내적으로 인정함으로부터 주님께 헌신하는 것은 이기적 사랑을 수단으로 소외될 수 없다. 모두는 진리가 선과 결합함을 수단으로 주님께 모두 그 원인을 돌려야 한다. 그러므로 옛 생명은 거절되어야 하고 새 생명은 영원해야만 한다.

세부적 영적 의미

완전히 바치기로 해서 바쳐진 사람은 되찾을 수 없고 반드시 죽여야 한다란 내적으로 인정해서 주님께 바치는 것은 어떤 것이든 이기적 사랑으로 소외되어질 수 없다는 것, 그것은 진리가 선과 결합함으로 주님께 온전히 돌려드려야 한다는 것, 그런고로 옛 삶은 거절되어야만 한다는 것, 새로운 삶은 확실히 영원하다는 뜻이다. (9193, 683, 2966, 4758, 1408, 1854)

30절. 그리고 토지의 모든 십분의 일, 토지의 씨뿌림으로부터 이든 나무의 열매로부터 이든, 주님의 것이다. 그것은 주님에게 거룩하다.

영적 의미

진리에 관해 아껴두신 것이든, 선에 괸해 아껴두신 것이든 인간과 함께 있는 모든 아껴두신 것은 주님으로부터 이다. 그것들은 신성한 자비로부터 인간 안에 저장되어 있을 뿐이다.

세부적 영적 의미

씨뿌림에서 나는 곡식이든 나무에 열리는 열매이든 토지에서 난 것의 십분의 일은 주님의 것이다란 사실 인간에게 있는 아껴두신 모든 것, 그것이 진리에 속하든 선에 속하든 모두 주님으로부터 있는 것이다. 그리고 신성한 자비로부터 인간 안에 저장된 것임을 뜻한다. (576, 57, 8042)

31절. 그리고 만일 사람이 십분의 일의 뭔가를 되찾겠다면, 그는 그것에 그것의 오분의 일을 추가할 것이다.

영적 의미

회개의 일을 수단으로 선을 마치 자기 것처럼 삼기 위해서 그 선이 주님으로부터 전적으로 있다는 것을 자기 속에 아껴두신 것 속의 선들로부터 인정해야만 한다.

세부적 영적 의미

자기의 십분의 일 중 어떤 것을 되찾고 싶다면 오분의 일을 더 해야 한다란 인간이 선을 자기 것이 되게 하기 위하여, 회개의 일로 마치 자기 것이듯 되게 하려면 아껴두신 것의 어떤 선으로부터 인정함이 있어야 하고, 더 나아가 모든 선이 주님으로부터 임을 확실히 인정해야 한다. (2966, 6156)

32절. 목축이나 양떼의 모든 십분의 일, 막대기 아래를 지나가는 열 번째는 주님에게 거룩하다.

영적 의미

그러므로 자연적이고 영적인 모든 선은 진리의 힘으로 획득되는데, 자신 스스로 행동하듯 움직이는 사람을 수단으로 하되 위의 선 모두가 아껴주신 것들을 수단으로 주님으로부터 임을 인정해야 하리라.

세부적 영적 의미

목축이든 양떼이든 지팡이 밑에서 오가는 것은 무엇이든 그 십분의 일은 주님께 거룩하다란 자연적이고 영적인 모든 선, 이 선이 진리의 힘으로, 마치 자신 스스로 인 듯 행동함으로 해서 획득되는데 이것 모두는 주님께서 아껴두신 것을 수단으로 있어졌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는 뜻이다. (576, 5913, 6126, 4876, 2001)

33절. 그는 그것이 좋은지, 나쁜지를 헤아리지 못한다, 그는 그것을 바꾸지 못한다. 그리고 정녕 그가 그것을 바꾸겠다면, 그러면 그것과 바꾸려는 그것 둘 다 거룩할 것이다. 그것은 되찾아지지 못한다.

영적 의미

인간이 자기 총명으로 선이든 악이든 자기 품질을 평가하려 들어서는 안되고, 선에서 악으로 되돌아가도록 허용할 수 없고, 시험의 흔들림에서 악에 빠지지 않는다면 악에서 저항하고 선 쪽으로 결정함을 수단으로 주님께 예배해야 한다. 이럴 경우, 두 상태는 거룩해 진다. 인간은 선과 진리의 상태로부터 악과 거짓의 상태로 건너 갈 수 없다.

세부적 영적 의미

좋고 나쁜 것을 헤아리지 못하고 바꾸지도 못한다란 인간은 자기 품질이 선한지 악한지를 자기로부터 파생된 총명으로부터서 평가하지 못하며 또한 선으로부터 악으로 되돌아 가는 것도 허용되지 못함을; 기어이 바꾼다면 바꾸려는 것 모두 거룩하다란 시험이 요동칠 때에 악에 빠진다면 그는 악에 저항하고 선 쪽에서 결심함을 수단으로 주님을 예배해야만 한다는 것을; 되찾지 못함이란 인간은 선과 진리의 상태로부터 악과 거짓의 상태에로 건너 갈 수 없음을; 이를 다른 말로 표현하면, 인간은 구속의 일을 수단으로 주님으로부터 전적으로 있는 아껴두신 것 속의 선과 진리를 자신의 것으로 주장할 수 없다는 뜻이다. (4162, 1276, 1377, 847, 8042, 2966)

34절. 이것들은 명령들이다, 이것을 주님께서는 시내산에서 이스라엘 자손을 위해 모세에게 명령하셨다.

영적 의미

모든 위의 사항은 신성한 질서의 법칙이요, 이는 신성한 선이 신성한 진리에 유입되어서 비롯되고, 이는 주님의 순수한 사랑과 자비로 영적 인간의 유익을 위한 것이다.

세부적 영적 의미

이것들은 명령이요 주님께서 이스라엘 자손을 위해 시내산에서 모세에게 명령 하셨다란 모든 위의 사항들은 신성한 질서의 법칙이요, 이는 신성한 선의 유입이 신성한 진리 안에 있게 되어서 이고, 이는 주님의 사랑과 자비로부터 영적 인간의 유익을 위해서 이다. (2634, 2951, 2001, 7010, 3654, 8753)

27장의 종합적 고찰

우선 주목해 보아야 할 주제는 어떤 사람이나 물건을 평가함(값을 매김)이 모세나 성직자들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에 관해서이다. 글자대로 일 경우 평가란 제한된 의미 즉 값을 매김 그대로 이다. 그러나 영적일 경우는 그렇지 않다. 그 이유가 내적 의미는 보편적 의미 이어서 대체로 인류에 관계되는 바, 특정한 어떤 국가나 개인에 국한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모세의 평가는 신성한 진리로 모든 이에 대한 주님의 평가이다. 누군가에 대해 주님이 하시는 평가에는 미미한 실수조차 결코 없다. 더구나 모든 각 개인은 주님의 평가에 의거 영원까지 자기에게 할당된 위치를 가지게 된다. 이는 너무나 확실한 바, 우리 삶이 건설되는 기초인 이 세상에서 태어나 이루어진 삶에 따라 지옥 이든 천국 이든 우리의 위치는 결정되어 고정되어진다. 이런 생각은 이제 공부하는 본문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주고 있다.
비록 값을 매김이 주님의 권한에 절대적으로 속한다 해서 인간이 그것을 이해 못하도록 장치해두신 게 아니라 그 반대이다. 몇 세겔로 값을 매김, 특히 인간 존재를 몇 세겔의 가치가 있다고 하는 것은 매우 이상한 느낌을 줄런지 모른다. 그러나 수를 세고 물건을 달고, 재는 측량은 내적 의미에서는 사랑과 총명에 관한 우리의 품질을 발견하는 것과 관계된다는 것을 알고 있다면, 주님으로부터 오는 능력을 수단으로 자신을 평가하든 타인을 평가하든 지극히 올바르게 평가하는 것은 모두 가장 가치가 있는 완성(accomplishment)임을 보게 된다. 비록 모든 평가가 주님으로부터, 또는 그분의 말씀으로부터 거행되는 것이 확실하다 해도 자신의 운명을 고정시켜주는 삶은 타인이 아닌 나 자신이다. 지상 마지막 순간에서 우리가 어떤 인격이 되어있든 그 인격이 자신과 꼭 맞고 거기에 자신이 언제나 만족해 있는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이렇게 고백하고 있다. “날수를 제대로 헤아릴 수 있도록 가르치시어 지혜의 심정을 얻게 하소서” (90:12). 이제 우리 모두는 위 구절을 이해하고 있으리라 본다. 설사 상응이라 불리는 지식이 없다 해도 우리가 해야만 하는 것이 어떤 것들인지 그것들의 광대함과 중량감을 느끼리라. 사실 자연계에 사는 동안에도 주님으로부터 오는 힘으로 누구를, 또는 어떤 사물의 값을 매길 수 있다는 것은 아마 최고도로 가치있는 일 임은 틀림없다. 이를 행할 수 있는 사람은 가장 성공적으로 자기 지식을 응용했다고 보아야 하는 바, 최고의 사람이라 생각된다. 이를 행할 수 없는 이들은 상대적으로 값이 덜 나가는 사람이 된다. 그러나 어떤 환경 조건에서도 한 인간 존재의 가치는 너무나 커서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바, 본문의 값을 매김(estimation)이 지닌 의미의 절대적 측면에서는 어느 누구라도 그 값을 잃는 경우를 주님께서는 허락하지 않으신다. 천사와 악마는 대단히 큰 차이가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들이 반대되기 때문이다. 이는 악과 선, 거짓과 진리 사이에 놓인 반대됨과 같다. 그럼에도 이 모든 것, 가장 나쁜 악령 조차도 주님의 견지에서는 돌보아 줄 가치가 있으시다. 물론 어느 누구도 자기가 선택하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악령이 되도록 강요당하지 않는다. 게다가 무한하신 분이 보시는 수준에서 어떤 대상을 우리는 볼 수 없다는 것도 안다. 그럼에도 자신이 자유로이 선택해서 자신이 흡족해 하는 것도 없이, 그 만족이 피할 수 없는 제한을 포함함도 없이 영원한 존재로 살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다는 것을 확실히 해두는 것은 유한한 우리의 능력을 가지고 주님으로부터서 100%가능하다.
주제와 연결되는 일반적인 진리들을 위와 같이 생각해보게 되면 이제 흥미를 주는 본문에 묘사된 목차들의 일반 요점을 살피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첫 문항에 기술된 네 가지 사항들은 「천국의 비밀들 10225항」에서 모두 설명되어 있다. 따라서 한, 두가지 정도의 실용적인 측면 외에 더 확대 해 볼 필요는 없으리라 본다. 첫째로, 거듭남에 있게 되는 발전은 점진적이다는 것, 그래서 인간의 자연계 삶의 각기 다른 시기들로 묘사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마치 이 장소에서 저 장소로 이동하는 여행 또는 토지를 경작하는 과정과도 비슷하다. 성경의 어떤 부분에서는 이를 두고 창조의 일이라 부르고, 다른 곳에서는 새로운 탄생이라고도 일컫고 있다. 이와 같이 여러가지 다른 묘사들을 수단으로 거듭남에 관한 다양한 진리들이 말씀의 영적 의미에서 명백하게 그 모습을 나타내 주고 있다. 그리고 모든 각 경우마다 그것은 점진적이다. 우리는 잎이 돋을 때, 이삭이 패일 때, 그리하여 그 이삭 안에 알곡이 가득찰 때까지를 맞이한다. 한 단계 한 단계를 거쳐서 하늘 나라에 도달해야 하는 것이 우리 인간임을 실감하면 이 세상 삶에 적지 않은 위로를 받게 된다. 본문의 첫 문단에서 꼭 주목해두고 싶은 것이 있다. 모든 이가 유아로부터 노령에로 전진해가는 것과 똑같게 거듭난다고 이해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될 경우도 있지 않느냐고 혹 어떤 이는 반문 할 런지 모른다. 그러나 여러 인간의 삶을 관찰해 본 사람이라면 실질적인 과정은 삶의 초기 또는 후기에도 개시되기도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게다가 극단적인 경우 어떤 이에게는 전혀 개시조차 되지 않는 경우도 발생한다. 어떤 이의 경우 실제 40살을 먹고 있는데도 그의 거듭남은 유아로부터 다섯 살 또는 십대까지로 본문에서 상징화 된 초보적인 상태에 머물고 있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유아라 불리는 자연계의 것과 거듭나는 상태와의 상응 차원에서는 아직 선을 붙들고 있다고 말해지고 있다. 어찌됐든 우리는 위의 사항들을 유념해두면 매우 유익하리라 생각된다.
둘째로, 본문에서 삶의 각기 다른 시기가 정규적인 순서로 언급되고 있지 않다는 것에 관해서이다. 인생의 셋째 시기에 해당되는 나이(이십세)가 시리즈들의 문을 열고 둘째 시기, 첫째 시기 그리고 넷째 시기로 이어지고 있다. 그리고 이 문단은 모세가 아닌 성직자가 가난한 자의 값을 매김으로 마감되고 있다. 왜 이렇게 되는 걸까? 본 장의 전체 주제가 영적 교회의 상태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영적 사항에 관련되는 것, 즉 영적 교회의 내적 상태에 관한 묘사가 선행된 다음, 셋째 시기와 둘째 시기인 영적 교회의 외적 상태가 기술된다. 그 다음 천적 사항에 관련되는 것 즉 무지의 순진에 관해 먼저 기술되고 지혜의 순진이 뒤따르는데 이것이 인생의 첫째 시기와 넷째 시기로 각각 나타내고 있다. 그러나 가난한 이들은 각 층의 사람들, 즉 그들의 상태가 선의 측면에서, 선으로부터 진행된 진리 측면에서 값을 매길 수 있을 뿐인 사람들을 의미하고 있다. 그래서 지금 순서대로 뒤따르는 내용은 자연적 애착들, 그것의 내면과 외면에 있는 것들, 그리고 자연적 수준의 지적 능력들 또는 지식에 대한 애착, 뿐만 아니라 자연적 수준의 기쁨들이 열거되고 있다. 넷째 문단에서 주어지는 세부 사항들을 숙고하게 되면 우리가 상기 할 수밖에 없는 것은 주님의 말씀이 헤아리는 속성에 관한 것이다. 이 품성을 수단으로 모든 이는 그의 삶에 따라 평가되어 판단되어 진다. 따라서 우리가 회개를 하되 가장 좋은 동기, 가장 높은 동기로 이루어지는 순수한 회개가 절대 필요하다는 것을 자연히 느끼게 만든다. 따라서 시편의 말씀을 응용하면 더욱 유익하리라. “하느님, 나를 헤쳐 보시어 내 심정을 알게 해주소서 나를 파헤쳐 내 생각을 알게 하소서, 사악한 길 걷는지 보게 하시고 영원한 길로 나를 인도해 주소서” (시편 139:23-24).
마지막 문단에 포함된 영적 진리를 호기심의 눈초리로 흘겨보기만 해도 그 속에 얼마나 실용적 중요성이 훌륭하게 담겨 있는지 누가 알 수 없을까? 우리 모두가 대단히 성품이 호의적이라 가정해보아도, 흔들거리는 삶의 상태 동안 자신의 총명과 신중성을 한껏 발휘해 얻은 선함들이라 해도 그 선이 주님으로부터 이요 그분이 소유자이심을 망각하는 일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진짜 선함을 행하는데 있어 친절과 관대함이 단지 자연적 수준의 충동에 멈추어 있어 거듭남에서는 실수가 얼마나 연발되는지는 헤아리기 힘들 정도이다. 이런 것들을 식별하고 응용해가기 위해 말씀의 가르침에서 꾸준히 배워 간다면 우리 거듭남은 더욱 정진되어 자연적일 뿐인 애착들의 품질이 과연 무엇인지 지각할 능력을 갖추게 되고 수준 낮고 천한 애착들을 거절하면서 진정한 선함의 공적을 자신에게 돌리지 않으면서 선을 행할 수 있으리라. 더구나 이런 능력이 확실히 있게 되는 조건은 주님을 인정함이 심정으로부터 더욱더 있게 됨에 비례한다는 것, 이에 신성한 진리를 계발된 이해함으로 받아 결합시켜야 한다는 것, 심정과 이해함이 하나되어 결론지은 원리들이 일상 생활에서 적절히 응용되어야 하리라.

부록
(Appendix)

선각자 신학 관련 도서들 목록…3
영계 관련 용어 도표로 스케치…4
선각자의 용어 풀이…6
선각자에게만 유일한 기본 생각들…25
도서 구입 안내…38

선각자 (에마뉴엘 스웨덴볽)의 신학 관련 저서들

1. 직접 출판한 저서들 2. 출판되지 않고 발견된 그의 기록 내지 저술인 것들.

천국의 비밀들 (1749-1756년) 영의 일기(또는 영적 경험) (1745-1765)
천국과 지옥 (1758년) 요한계시록 설명 (1757-1759년)
새 예루살렘과 그곳의 교리 (1758년) 아타나시안 신조 (1759-1763년)
마지막 심판 (1758년) 주님에 관하여 (1759-1763년)
백마 (1758년) 예언서들과 시편의 내적 의미(1759-1763년)
우주에 있는 지구들 (1758년) 마지막 심판 (1759-1763년)
주님에 관한 교리 (1763년) 신성의 사랑 (1759-1763년)
거룩한 성경에 관한 교리 (1763년) 신성의 지혜 (1759-1763년)
삶에 관한 교리 (1763년) 선행의 교리 (1766년)
신앙에 관한 교리 (1763년) 5 기억할만한 관련들 (1766년)
마지막 심판에 관한 계속 (1763년) 결혼에 관해서 (1766년)
신성의 사랑과 지혜 (1763년) 정경들 (1769-1772년)
신성한 섭리 (1764년) 새 교회에 관한 교회의 역사 (1769-1772년)
요한계시록 밝힘 (1766년) 부속물(coronis) (1769-1772년)
부부의 사랑 (1768년) 새 교회로 초대함 (1769-1772년)
간략한 해설 (1769년)
유입, 또는 혼과 몸 사이의 상호 작용 (1769년)
진정한 기독 종교 (1771년)

영계(the Spiritual World)

**천국의 비밀들의 책에 흔히 등장하는 단어들을 그림으로 생각해본다**

1. 평면(plane) 또는 수평(level)에서 생각할 경우:

가장 안쪽(inmost) 부분
내부(internal)
내면(interior)
외면(exterior)
외부(external)
가장 바깥쪽(outmost) 부분

2. 높, 낮이에서 생각할 경우

3층 천국 또는 셋째 천국
가장 높은 천국, 천적 수준의 천사들이 거주한다
주님을 사람함의 천사들

2층 천국, 둘째 천국
중간 천국, 영적 수준의 천사들이 거주한다
이웃을 사랑함의 천사들

1층 천국, 첫째 천국
최말단 천국, 자연적 수준의 천사들이 거주한다
주님의 명령에 순종함을 사랑한 천사들

영들의 세계

가장 온건한 악마들

사탄들

악마들

3. 겹층(layer)으로 생각할 경우

세 다른 크기의 그릇을 포개 놓은 것, 또는
겹으로 이루어진 식물인 양파, 배추 등등을 연상해도 도움이 된다.
가장 정확히 말하려면 세 덩어리의 케익(cake)이 포개진 상태일지 모른다.
이에 대해 선각자의 저서에서 두 용어가 등장하는데
잇따르는 질서(successive order), 끊이지 않는 질서 (continuous order)이다

(1) 잇따르는 질서(successive order)

천적 천국 (셋째 천국, 가장 안쪽 천국) ——————

영적 천국 (둘째 천국, 중간 천국)——————-

자연적 천국 (첫째 천국, 가장 바깥 천국)————-

(2) 끊이지 않는 질서 (continuous order)

천적 천국————————————-
영적 천국———————————–
자연적 천국———————————–

(3) 말씀 안에서의 등차(수준)들

가장 깊은 의미 (최고 의미)
천적 수준의 의미
영적 수준(또는 내적 수준)의 의미
내적 역사적 의미
글자 의미
선각자의 용어 풀이
(Glossary)

** 참고: (commercium) 식의 표기된 것은 라틴어임
이 풀이는 간결해서 좋지만, 한편 너무나 간결해서 어떤 단어의 경우는 이해함에 불리할 수 있는 단점도 있다. 어쨌든 아래의 글들은 Swedenborg Resercher’s Manual by William Ross Woofenden으로부터 발췌되었다. 정확한 이해를 위해 영역본이 필요할 경우 역자에게 연락하기 바란다 (인터넷에서 헌 책은 구매가 가능할지 모른다, 검색해보기 바란다).

감각적인 (Sensuous)
관능적인, 감각의, 그리고 감각 지향의. 섹스적인 것만을 함축하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감각들에서 집중함에 의해 특색을 이루는 것, 감각들에 의해 납득되는 것. 마음의 자연적 수준에서도 가장 낮은 평면.

개혁 (Reformation)
거듭남의 과정 중의 일부를 묘사하는데 사용되었다, 즉 당사자의 바깥쪽 생활을 질서 안에 놓는 것이다. 당사자는 진리가 우세한 순종의 상태에서 진리를 수단으로 선 쪽으로 인도된다. 이것은 주님으로부터 새 의지를 받기 위한 준비단계이다.

거듭남 (Regeneration)
넓은 의미에서 재출생의 모든 과정. 좁은 의미에서 개혁에 뒤이어지는 과정. 주님이 각 개인 안에서 새로운 의지를 만들어가시는 과정, 또는 (삶의) 과정의 목적(goal).

결혼의 (부부의, connubial)
결혼에 관련되는 단어이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것은 결혼에 연계
된 외적인 것들 만에 관련하여, 또는 부정적 측면에서 사용되는 편이다. 새나 동물의 짝짓기에 사용되었다.

고대 교회 (ancient church)
성경에서 노아와 그의 자손들에 의해 표현된 고대 시대 성경 속의 사람들의 종교.

과학물들 (Scientifics)
과학적 진리들을 보라. 지식들, 사실들, 자료들.

과학적 진리들 (Scientific truths)
위 표현은 빈약한 번역일지 모른다, 그 이유는 이 용어가 우리가 아는 “과학(science)”을 가리키는 경우가 매우 드물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연을 연구함으로부터, 그리고 성경의 글자 그대로의 의미로부터 획득한 사실들, 자료들, 진리들이다.

공적 (Merit, meritorious)
흔한 사용법에서 이 단어가 함축하는 것은 긍정적(건설적) 측면이 대세이다. 그러나 선각자가 이 단어를 사용할 때의 경우, 거의 언제나 뜻하는 것은, 공적 추구(merit-seeking), 즉 자비롭게 여겨질 수 있다 싶은 어떤 행위 또는 친절한 어떤 행동에 대하여 돈 또는 명성을 보상을 은근히 기대함이다.

광적 신앙 (Religiosity)
외적, 또는 미신적 믿음 체계, 신봉자의 편에서 내적 약속의 깊이를 갖지 않은 종교를 묘사하는데 사용하였다.

교류 (Intercourse)
왕래함 (commercium)에 대한 오래전의 번역, 상호 작용 (interact)을 뜻한다, 이는 개인들 또는 어떤 것들을 연합시키는 것이다. 개인의 혼과 몸이 어떻게 교통하고 일반적으로 상호 작용하는지를 언급할 때도 사용된다.

교리 (Doctrine)
세 가지를 뜻하려고 사용된다: 1. 배움의 과정, 2. 학식 또는 과학의 분과, 또는 3. 특별한 취지에서 교회의 가르침. 일반적으로 이것은 진실로 종교 생활을 꾸려가기 위하여 절대로 필요한 가르침일 것이다, 그리고 고로 본질적으로 실용적일 것이다.

교회 (church)
이 단어는 흔한 보통의 단어 사용에서도 어떤 영적 생활만도 아니고, 그렇다고 어떤 종파나 조직체만을 지칭할 때도 아닌 것이 뜻해지게 보통이 아닌 의미에서 사용되어진다, 즉 조직체에서이든, 개인적으로 이든, 영적 생활을 사실로 깨달음이다. 고로 개인(person, 개인)은 영적인 교회이다.

균형 (balance)
(평형을 보라.) 천국 세력과 지옥 세력이 균등하게 인간에게 영향을 미치도록 하는 섭리적 상태를 염두해서 사용된다, 하여 당사자가 악의 영향력에 휘둘리는 듯 외관상 나타남에도 불구하고 실상 그는 자유한 상태에서 도덕에 관한 결정들을 만들게 됨을 말할 때 이 단어가 사용되고 있다.

그릇 (Vessel)
인간은 하느님으로부터 생명을 받는 “그릇”이다고 말해진다, 단지 담는 용기라는 말이 아니고 유기적 형체로서 이다.

기억해둘만한 관련 사항들 (Memorable relations)
기억해둘만한 사건(memorabilia, memorable occurrences)라고도 말한다. 선각자가 그의 후기 저서들의 장들에 첨부하는 식으로, 또는 군데군데에 흩뿌리는 식으로 해서 기록했는데, 다른 세계에서의 그의 경험들에 관한 이야기들이다.

기운 (영역, sphere)
모두 각각의 사람들은 자신의 총체적 사랑들로부터 되튀긴 유출물에 에워싸여 있다고 말해진다. 일반적으로 이것은 땅 위에서는 감지될 수 없다. 누군가의 기운이 어떤지는 천국에 있는 모든 이에 의해서는 확연히 감지된다, 하여 상대방과 연계되어도 되는지, 피해야 하는지를 결정하는 기초이다.

길들여진 선 (Domestic good)
개인이 부모로부터 유전적으로 끌어낸 선을 뜻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이것은 당사자가 (선택의) 자유함 안에서 그것을 자기 것이 되게 하지 않으면 “저축”되지 않는다. 또한 “가정의 자연적 선”, 그리고 “자연적 선”이라고도 불리운다. (천국의 비밀 3518항의 창. 27:9에 대한 해석을 참조하라.)

김나지움 (Gymnasium)
유럽에서 공통적으로 사용함에서는 두 번째의 학교 (중고등학교). 선각자는 이 단어를 그룹들의 멤버들이 생각들을 토의하고 그들의 마음들을 실행해보는 영계의 모임들이나 거기의 학교들을 언급하는데 사용했다.

끊이지 않는 등차들 (continuous degrees)
수준들(levels) 또는 단계들(gradations), 마치 찬 것으로부터 따뜻한 것까지, 또는 어둠으로부터 빛으로까지의 경우와 유사하다. 또한 “넓이의 등차들” 또는 “수평적인 수준들”이라 불리운다.

나머지 상태들 (Remnant states)
“리메인스”를 보라.

논리를 더듬어 사고함 (Ratiocination, 합리화함)
“추론(reasoning)”으로만 번역되면 약간 유감스럽다. 이는 거짓 추정들, 거짓 추론, 거짓 연역을 끌어내는 과정을 함축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아마 “합리화 함(rationalizing)”의 뜻을 지닌 최근의 심리학적 용어에 매우 가까울지 모른다.

능력(Faculty)
이런 것을 뜻하는데 사용되었다, 1. 신체적 수단(resource), 2. 가능성, 기회, 3. 타고난 경향(propensity) 또는 능력(ability), 그리고 4. 정신의 품질. 이 마지막 의미에서 보면, 이것은 하느님으로부터 수여됨이다. 이 수여된 것을 올바로 사용함에 의해 당사자는 자기 안에서 주님의 현존하심을 보증받는다.

다써버림(고갈, exinanition)
영이 텅빔, 영적 황무함의 상태. 주님의 경우, 이것은 그분의 인간 부분이 내부의 신성으로부터 분리된 듯 여겨져 있는 겸허의 상태이었다.

담는 어떤 것(용기, containant)
초기 번역자들에 의해 만들어진 단어, 또한 “포용함(continent)”으로도 번역하나 통상적인 수준은 못된다. 이것은 콘테이너, 저장소를 언급하는 것인데, 때로는 마음이 생각들의 “저장소”이다를 서술함에서 심령 연구적 측면에서 사용된다.

더 낮은 땅(Lower earth)
영계에 관한 선각자의 세부적 묘사에서, 더 낮은 땅은 영들의 세계에서는 그 아래쪽 영역이고, 지옥 쪽에서는 그 위쪽 영역이다.

동물 영 (animal spirit)
갈렌(Galen)의 관념에 있는 세 신체 영들 중의 하나. 선각자는 더 순수한 종류의 피를 뜻하기 위해 사용했다. 돌(Dole)의 “신성의 사랑과 지혜” 423쪽에서는 “혼-영”으로 번역하였다.

동물 왕국 (동물 왕국의 경제)
“인간의 혼의 영역의 역학”을 다룬 선각자의 1740년의 저서 Oeconomia Regni Animalis 에 대한 미흡한 번역어 이다.

되풀이하는 결혼들 (Iterated marrages)
반복된 결혼들, 재결혼.

되찾음 (구속, Redemption)
보통의 의미에서 사용되지 않는다, “되사는 것”, 되찾음은 그리스도의 생애 전 과정의 결과로 얻어진 지옥을 복종케 함과 천국의 질서를 다시 세운 것을 뜻한다. 하여 믿는 자에게 가능할 수 있는 개개인의 구원을 만드신 것이다.

리메인스 (Remains)
사랑과 진리에 관한 감명들이 인간에게는 알려지지 않은 신비한 방법에서 주님에 의해 개개인 안에 심어진 사랑과 진리에 관한 깊은 감명들, 이것은 유아로부터 모든 삶을 통하여 각 개인과 더불어 계속 “남아” 있으면서, 재출생을 위한 기초가 되어주고 있다. 이 단어는 “나머지들(remnants)” 또는 “나머지 상태들”으로도 번역하고 있다.

림버스(Limbus, 가장자리, 변방)
“봉투, 덮개(envelope)” 또는 “테두리, 가장자리(border)”로도 번역되었다. 각자의 특질(본성, nature)로부터 끌어내진 가장자리를 뜻하기 위해 사용되었는데, 사후에도 이것은 존속하여 영계에서 (어떤 형체라고 분명하게 묘사할 수는 없지만) 하나의 불변성(fixity), 안정성(stability), 영속성(permanence)을 주고 있다. 이 단어는 쉽게 정의를 내리기가 힘든 복잡한 개념에 있다.

맥시머스 호모 (Maximus Homo)
“웅대한 사람”과 “보편적 인간”을 보라

메디아 (Media)
종종 단수의(유일한, singular), 매개(중간, medium). 이는 사이에서 가는 것들을 뜻한다. 두 실체의 각각으로부터 어떤 것을 도출하는 중간의 것(intermediary), 그리고 개인을 이쪽 편으로 끌어낼 때, 다른 쪽은 종속시키는 효과를 갖게 된다.

모양 (Form)
유기체(organization) 또는 본질이 나타나게 하는 유기적 저장소(organic receptacle)를 철학적 의미로 사용했다. 이것은 외형(shape, 모양)에 관련되지 않고, 질서, 의향, 배열과 실재물의 부분들과 관련된다. 기능 또는 사용과 밀접하게 연합하고 있다.

목적, 원인, 결과 (End, Cause, Effect)
목표(goal) 또는 의도(purpose)의 철학적 의미에서 사용되는데, 목적은 의지력의 사랑 또는 의향(intention)이고, 원인은 의도(purpose)를 성취하려고 이해력을 통하여 있는 수단들이다, 결과는 초래하는 행동, 말함, 감각 또는 생산, 고로 성취됨이다.

묶는 것들(속박됨, bonds)
이는 족쇄를 채우는 식의 뜻에서는 아니고, 어떤 개인이 유독 사랑하는 특별난 것을 뜻한다. 즉 너무나 사랑하기에 그것에 묶인 상태인 듯 되는 것, 하여 사랑된 것의 반대되는 것에 대하여는 금하게 한다(아랑곳하지 않는다). 외적 묶임들은 시민 생활에, 내적 묶임들은 영적 생활에 영향을 준다..

방계적인 선(Collateral good, 부수적인 선, 서자 출신의 선)
자연적 선함과 영적 선함 사이에 놓인 선함, 하여 일부는 자연적 선함, 일부는 영적 선함이 섞인 상태의 선함, 즉 본질적으로는 영적인 것들에 대한 자연적 수준의 사랑, 고로 진짜의 선함은 아니나 진짜의 선함에 관련되고 있다.

별개의 하나 (구분되는 하나, distinctly one)
선각자에게서의 단일성(하나임, oneness)은 단순함이 아니고 목적(의도, purpose)의 통일성(unity)이다. 사랑과 진리는 행동 안에서 분리되어 존재할 수가 없다, 그러나 여전히 그것들의 하나임 안에서 구분될 수 있다, 고로 “별개의” 또는 더 나은 표현으로는 “구분할 수 있게 있는 하나”이다.

부가적인 (adscititious)
때로는 “외래의(adventitious)”로도 번역할 때도 있다, 부가적인(additional), 외적 측면에서 첨가됨

부끄러히 여김 (창피함, 굴욕, Humiliation)
당황함이나, 근대적 의미에서는 그렇게 사용되지 않고, 겸손의 상태를 뜻하기 위하여 사용하고 있다, 이 겸손 안에서 개인은 자기에게 있는 듯 여겨지는 어떤 선 또는 진리가 실제로는 주님의 것이 자기 안에 있는 것임을 인정한다. 이 단어는 주님께서 그분의 영적 텅빔의 상태를 두고 사용하셨다.

부부의 (결혼의, conjugial)
이는 선각자가 철자를 기록함에서 (conjugalis 대신) conjugialis를 더 좋아했다는 점을 반영하기 위해 초기 번역자들이 개발한 단어이다. 이 단어는 결혼에 속하는 것들, 그리고 결혼한 양쪽(부부)가 서로를 위하여 가지는 사랑들에 관련되고 있다. 일반적으로 적극적 자세를 취한다.

불연속 등차들 (discrete degrees)
구분되는 수준들, 이쪽이 저쪽 보다 더 높다, 마치 목적, 원인, 결과의 관계와 같다. 또한 수직적 수준들이라 불리운다, 고도(altitude)의 등차들, 높이의 등차들.

보편적 인간 (Universal Human)
맥시무스 호모에 대한 돌씨의 번역어이다. “웅대한 사람”을 보라.

보편적 교회 (Universal church)
“우주로부터의 교회(the church universal)”, 모든 곳에 존재하는 교회를 말한다, 교회 조직체를 초월한 교회이다. 진실로 전기독교적인 개념, 이 세상의 모든 종교에서 각 종교의 신앙으로부터 있는 신실한 개인들.

사람 (Man, homo, vir)
라틴어는 “사람”을 위해 두 단어들을 가진다: 호모(homo)-개인(person, 남자와 여자 모두), 인류(mamkind), 본질적 개인으로서의 주님; 그리고 버(vir)-남자 인간의 존재.

사정관(assessor, 재산 평가인)
1716년 선각자는 광산 왕립 대학에 “비범한 사정관”으로 위촉되어졌다, 즉 그는 스웨덴 광산국의 협력 멤버로 명명되어졌다. 그는 1724년 사정관 정회원이 되었다. (그때 당시 광산국은 국왕 직속 감시 아래에 있었는데, 그 이유가 왕의 중요한 자금 조달이 금을 비롯한 광산 채굴에 있었기 때문이다 역자주)

사탄 (Satan)
악마를 보라. 악의 욕망들을 지적으로 확증하는 악령. “악한 자”의 이름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항간에서 말해지는 것, 즉 하나의 제 일의 악마 또는 어둠의 제 일 인 자가 있다는 식으로 선각자는 믿지 않는다)

사회 (Society)
연계된 사람들의 그룹, 함께 생활하는 사람의 그룹, 공동체, 다음 세계에서 천사들 또는 영들의 그룹. 또한 스웨덴볼지언들이 자기들의 지역 교회 조직이나 모임을 지칭할때에도 사용했다.

상응 (correspondence)
스웨덴볼기안이즘에 기초되는 개념, 신성과 모든 보다 낮은 생명의 등차들 사이에 있는 원인적인 관계와 기능적인 관계이다, 이것은 신성이 창조의 모든 것 안으로 흘러가는 방식, 또는 법칙이다.

상응물들(correspondences)
응답하고, 걸맞고, 동의하고, 또는 서로에게 유추되는 어떤 것들, 또는 실재물들, 마치 태양의 열과 빛이 하느님의 사랑과 지혜에 상응하는 것과 같다. 고로 열과 사랑, 그리고 빛과 진리는 상응물인 것이다.

새 교회 (New Church) (1)
하느님-인간 관계들의 어떤 새로운 상태를 놓고 일반적으로 사용되었다, 또한 주님만을 인정하고 예배하고, 그분의 말씀을 거룩하게 붙들고, 신성의 진리들을 사랑하고, 그리고 선행으로부터 분리된 신앙을 거절하는 교회 시대를 언급할 때 사용되었다.

새 교회 (New Church) (2)
스웨덴볽의 신학 저서들에서 발견한 교리들에 접착된 어떤 조직화된 종교 그룹을 대중적으로 규정하려고 사용된 명칭이다. 이런 그룹의 개개인들은 새 교회인(a New Churchman)이라 종종 불리운다

새 예루살렘 (New Jerusalem)
성경의 계시록서의 뒷 부분에서 묘사된 상징적 도성이다. 초기 스웨덴볽지언들이 천국의 도성을 수단으로 상징화되고 의미된 교회를 자기들의 교회로서 삼기 위해 이 이름을 채택하였었다.

새 예루살렘의 교회 (Church of the New Jerusalem)
선각자께서 기독교 교리의 본질되는 주석을 이끌어낸 교회들 중에서 가장 일반적으로 사용한 교회의 이름인데, 약식으로 말하면, “새 교회(New Church)” 이다.

선 (Good)
선함 또는 선한 것을 뜻하려고 사용한다, 이것은 신성의 질서에 따라서 생각하고 행동함에 애착함이라고 일반적으로 정의된다. 고로 이것은 쓰임(use)이 포함된 주님과 이웃을 사랑함이 그 품질이다. 인간에 있는 선은 하느님의 신성의 선에 관련이 있다.

선으로부터 진리에 애착함 (Affection of truth from good)
정밀하게 정의를 내린다면 “선행(charity)”이다, 즉 (이웃에) 쓸모있는 행동들을 있게 하는 각 개인들에 있는 선으로부터 만들어내진 진리를 사랑함이다.

선의 진리 (Truth of Good)
이 관용구의 또 다른 대체할 수 있는 어구는 “사랑의 지혜”가 있다. 이는 누군가가 지혜있기를 바램, 또는 지혜 있기를 사랑함을 가지지 않으면 지혜에 도달될 수 없다를 알아채게 한다. 이 사랑으로부터 결과할 수 있는 지혜가 “선의 진리”이다.

선행 (charity)
흔한 대중적인 사용법에서일 경우, 이 단어는 물질적 궁핍을 경감되게 해주는 것(자선 행위)을 뜻한다. 선각자는 이 단어를 영의 측면에서 관심을 갖는 것, 영의 복지를 향상되게 하는 것, 사욕이 없이 주어진 업무에 매진함, 이웃에 선을 행함에서 어떤 보수도 예상되지 않는다해도 심정에서 기쁨을 느끼고 있는 것을 뜻하는데 사용하고 있다.

수정 (변경, Modification)
선각자의 신학 저서 이전의 그의 어떤 저서에서, 본성을 통하여 교통하는 모든 방식을 함축하는 개념으로 사용하였다. 이 생각은 그의 후기 교리 또는 상응물에 관한 개념 안에 통합되고 포함시켜졌다.

순결한 (chaste)
흔히 이해되는 것은 순진한, 순수한, 독신(주의) 따위이다. 선각자는 결혼한 자가 섹스에 대하여 순수하고 깨끗한 자세를 가지는 것을 뜻하는데 사용하였다. 진정한 결혼의 사랑은 “순결함 자체”이다 말하고 있다.

순수 지력 (Pure intellect)
선각자의 신학 저서가 있기 전에서인 이성 심리학(Rational Psychology)이라는 책에서, 그는 순수 지력이란 개인들에게 생각하고 추론하는 힘을 주는 능력이다라고 정의하고 있다, 그리고 이 순수 지력은 하느님으로부터 파생된 직각적인 지혜와 함께 유기체의 모든 과정들을 통치한다.

순진 (Innocence)
라틴어의 뿌리에서는 해가 없음(harmlessness)을 뜻한다. 영적 순진은 자아에 의해 인도되기 보다 주님에 의해 인도되기를 내향적으로 기뻐함이다. 이 특성은 각 개인에 인접되어 있으면서 당사자가 천국으로 인도되는 것을 돕는다.

스톨지 (Storge)
유아를 사랑함을 뜻하는 그맄어로부터 빌려온 단어, 특별히 그들의 부모들에 의해 유아들을 위해 느끼는 사랑. “어버이다운 사랑”, “어버이다운 애정”으로 번역되었다.

시대의 종말 (consummation of the age)
잘못 번역된 킹제임스 성경의 “세상의 끝”을 대체할 수 있는 어구. 이 어구는 시대, 또는 년대의 마감, 또는 끝을 언급한다.

시리즈(Series)
연결된 순서, 생각함의 열차. 선각자의 신학 저서 이전의 시기의 저서에 “시리즈들과 사회” 그리고 “시리즈들과 등차들”의 용어들이 가설로 언급되었는데, 이후 등차에 관한 신학적 개념에 포함시켜졌다.

시험 (Temptation)
나쁜 것을 하도록 부추킴 또는 자극함의 의미에서 사용되지 않는다. 이것은 각 개인의 지배하는 사랑을 공격하여 개인을 심리하고 테스트한다- 당사자의 특성을 밝히 드러내주고, 그 특성이 더 힘세어질 기회를 제공하는 내적 투쟁이다.

신앙의 진리 (Truth of faith)
누군가의 신앙의 부분에 있는 진정한 생각, 그러나 당사자의 삶에서 사용하게 놓여져 있지는 않은 진리이다. 이는 “신앙의 선”에 대조되어 사용된다, 이것은 누군가의 살아있는 신조들로부터 와지는 선함이다.

신성이 되심 (Glorification)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분의 있음의 모든 평면들에 있는 인간적일 뿐인 것을 벗기 위해 그것들을 신성으로 만드시는 과정. 또한 주님의 마음 안에 신성한 의식을 건립하심, 그리하여 그분이 생명 자체가 되셨다를 뜻하는데에도 사용되었다.

신성의 인간 (Divine Human)
새 교회 신학의 중심을 차지하는 생각, 이 용어는 주님의 인간이 신성이 되신 이후의 주 예수 그리스도에 적용된다, 고로 인간의 형체에 있는 신성의 사랑이다-즉 “신위(Deity)”의 모든 충만함이 신체의 형체 안에 살고 있으심”이다. (골. 2:9)

신성의 자연 평면 (Divine Natural)
신성이 되심, 또는 신성으로 만들어진 예수의 마음, 또는 내부의 본성의 자연적 수준, 또는 가장 낮은 수준.

신성이 진행함 (Divine proceeding)
진행함의 행동에 있는 신성, 고로 그분으로부터 방산되는 하느님의 품질들, 성경의 어떤 문맥에서는 성령과 필적되고 있다.

신하 (Subject, 종속하는)
평범한 사용법에 추가하여, 철학적 의미에서는 활동 또는 행위에 기초가 되는 것을 말하는데 사용하였다. 예를 들면, 선행은 “신하”를 가져야만 한다, 즉 선행을 구체화하고, 느끼고, 실시하는 개성.

쓰임 (사용, Use)
쓸모 있는 활동, 목적을 섬기는 기능, 종종 선과 같은 뜻의 선상에 놓이기도 한다. 섬기기를 진짜로 바램이 들어있는 수고함을 정규적으로 함축하고 있다. 고로 “쓰임으로부터의 선, good of use”이 목적이다. 이 목적에 잘 어울리는 알맹이나 동기를 가지고 있는 마음가짐이나 행위.

아니마 (anima, 영혼, 내적 개성, 남성의 여성적 요소)
인간의 혼(soul), 이 단어는 다양한 전통적인 의미선상에 있어 한마디로 통일된 정의는 힘들다. 사후 살게되는 개인의 부분이다. 선각자는 분석 심리학자로 유명한 융(Jung) 보다 훨씬 먼저 이 단어를 사용했지만, 융이 이 단어에 여성의 특성을 할당했으나 선각자의 경우에서는 그런 추가된 의미는 보여지지 않는다.

아니뮤스(animus, 왕성한 정신, 외적 개성, 여성의 남성적 요소)
때로는 “의향(desposition)”으로 번역된다. 이 단어는 (만일 아니마와 대비하여 사용된다면 보다 수준이 낮은 마음,) 일반적으로 마음(mind)에 관련된다. 각자의 기질, 개성.

악 (Evil)
악, 자체만에 주목하면, 선으로부터 절단(severance) 또는 무질서된 선, 하느님으로부터 분리(disunion)와 주님과 천국에 반대함. 고로 개인 안에 있는 악은 그 개인 내부에 있는 지옥이다.

악귀들 (인간의 일생 동안 따라 다닌다는 귀신, Genii)
선각자는 이 용어를 가장 나쁜 종류의 악령들을 지칭하는데 사용하고 있다, 이것은 개인의 의지에 들어붙어 악의에 차서 행동하게 하고, 당사자의 선한 바램들을 악한 의도들 쪽으로 비튼다. 진리를 만들려고 노력하는 자가 이런 악령에게서는 그것이 거짓이고 반대적인 것으로 나타난다.

악마 (devil)
선각자를 위하여서 단어 “악마(devil)”는 지옥들 전체를 뜻한다. 악마는 사후에 있는 악한 개인이다. “사탄”에 대비해볼 때, 사탄은 자신들 안에 있는 악들의 욕망들을 지성적으로 확증한다, 악마들은 그것들을 살아내려 뜻한다.

악의 거짓 (Falsity of evil)
이는 “악으로부터의 거짓(falsity of evil)”라고도 불리운다. 거짓 생각 또는 악한 바램이 원인이 되어 진리가 비뚫어짐.

…안에 (In)
“종사함 안에” 또는 “상태 또는 조건 안에”의 의미에서 자주 사용된다. 선각자의 책에서 우리는 읽는 바, 어떤 개인이 “선 안에”, 또는 “선에 애착함 안에” 있다 등등이라고 읽는다. 이는 그가 선인 것을 사랑함의 상태 안에, 또는 선함의 상태 안에 있다를 뜻한다.

알카넘 (알캐이넘, arcanum)
비밀, 감추인 어떤 것. 이 단어의 복수는 알카나(알캐이너, arcana)이다. “알카나 세레스티아(arcana coelestia), 즉 천국의 비밀들”은 선각자의 가장 방대한 저서 명이다.

양심 (conscience)
선을 악으로부터 구별하는 능력-선천적인 것이 아니고 배워서 획득한 능력인 바 모든 이에게 균일하게 똑같을 수 없다. 선한 자만이 진정한 양심을 가진다. 가짜 양심이 선의로 의도될 수도 있을지 모르나, 신조의 오류들에 부분적으로 기초하고 있다.

양심 장사치들 (conscience mongers)
지나치게 양심적인 인간들, 타인을 혹평하는 인간들.

역사적인 신앙 (Historical faith)
전통에 기초한 “신앙” 또는 타인들의 신조들(믿음들)에 기초한 “신앙”, 고로 진실된 신앙은 아닌 것이 확실하고, 신앙 같이 나타남(껍데기 신앙)일 뿐이다 (“가정의 선”도 참조해보라.)

영계 (영적 세계, Spiritual world)
다음 세계, 또는 사후 개인들의 거처를 일반적으로 아우러서 언급하는 용어이다. 영들의 세계, 즉 사후 들어가는 첫 상태를 위해 선각자가 이름 지은 영들의 세계, 천국과 지옥의 중간에 있는 영들의 세계와 혼동하지 말라.

오류(잘못된 생각, Fallacy)
현혹시키는 나타남. (태양이 “올라온다” 같은 식에서의) 감각들의 오류들이 가장 작은 중대한 것이다. 보다 나쁜 것은 당사자의 보다 수준 낮은 본성으로부터 파생되어진다, 즉 악과 결합된 거짓들이다, 이는 개인의 부분에 신앙의 부족에 기인된다.

외관 (나타남, appearance)
순수한 진리, 또는 신성의 진리를 그 진리가 숙박한 형체들로부터 구별하려고 사용되는 단어이다. 고로, 모든 이는 자기의 유한한 상태에 따라 진리를 볼 때의 그 진리이다. 진리의 이런 나타남을 당사자가 선한 의도로 사용한다면, 이 나타남을 진리로서 주님께서 받아주시기 때문에, 망상(잘못 생각함, illusion)은 아니다.

웅대한 사람 (Grand Man)
라틴어의 맥시무스 호모(maximus homo, 가장 큰 사람, greatest man), 돌(Dole)에 의해서는 “보편적인(우주적인) 인간”으로 번역되었는데, 주님의 “몸”으로서의 천국들 전체, 또는 천국과 땅 위의 교회를 아우르는 주님의 왕국에 관련된다. 때로는 주님 자신을 뜻하는 데에도 사용된다.

유입 (Influx)
흘러듦(inflow), 또는 입력(input) 또는 영향력 (influence)를 뜻한다. 이 단어는 행동하는 모든 힘은 하느님으로부터 창조의 모든 것 안으로 변함없고 중단 없이 흐르고 있다는 근본적인 개념을 묘사하는데 사용된다.

유전적 악 (Hereditary evil)
이 용어는 선각자에 의해 별도의 제한됨도 없이 무조건식으로 사용되는 편이기는 하나, 사실상 그는 전통적 견해는 사절하고, 우리는 실제의 악을 유전적으로 상속하는 것이 아니고 악을 향하려는 경향성들을 상속한다고 주장한다. 우리는 성인들이 되어서는 이것을 확증하거나 채택하거나, 또는 거절하거나 거부할는지 모른다.

유출 (Efflux)
산출(output), 밖으로 흐름. 하느님으로부터 개인들 안으로 흘러든 선과 진리는 되돌아서 이웃을 사랑함의 행동들의 형체로 세상 안으로 흘러나간다. 하느님의 보편적 법은 유입은 언제나 유출에 의거 있게 된다는 것이다.

육체의 (coporeal)
실재를 나타내는데 자주 사용되어 신체적 부분, 또는 신체에 부착된 마음의 부분을 뜻하였다. 신체적, 육체적인 것은 감각과 육체적 쾌락들과 더불어 선취되어 있다.

은근히 주입하다 (Insinuate)
기초되는 라틴어의 의미에서 이 단어는 어떤 것을 노골적 방법이 아닌 미묘하게 받아들여지게 또는 스며들게 하는 것을 뜻한다. 수용자가 주입 과정을 충분히 알아챔이 없이 내면의 위치를 할당하는 것이다.

음란 (간통, scortatory)
성관계가 문란한 것을 묘사한 것이다, 음행, 매춘.

의미함 (Significative)
영적 뜻을 운반하고 가리키는 어떤 것. 특별한 뜻, 뜻있음. 현재는 표현함과 상응함과 구분되어 사용된다.

의지력과 이해력 (Will and understanding)
“의도력과 식별력(intentionality and discernment)”, “자발력과 지력(the voluntary and the intellectual)”. 이것들은 인간의 개성 속의 포괄적인 두 양상들 또는 능력들이다. 의지력은 의지력의 모든 기능들을 포함하고, 신성의 영향력에 반응을 보이고, 수용하는 부분을 섬긴다. 이해력은 식별하는 모든 기능들을 포함하고, 의지력을 가르치고, 그것의 의향들을 집행하는 것을 섬긴다.

이성이 있는 (합리적인, rational)
이 단어는 실명사로 사용하는 경우가 매우 흔해졌다. 천국으로부터의 빛이 세상의 빛 안에 있는 것을 계발하는 정신적 평면이다. 의식되는 마음 중에서 가장 높은 수준이다. 합리적 진리는 자연적인 것들에 관한 영적 진리이다.

이웃 (Neighbor)
내 집 아닌 다음 집에 있는 사람이면 이웃이다가 절대로 아니다. 이런 독특한 생각선상에 있다, 즉 주님으로부터의 선이 이웃인 것이다, 고로 각 개인이 나의 이웃이 되는 척도는 상대방이 주님으로부터의 선을 받아들인 양과 질에서 이다. 고로 가장 비중이 큰 이웃의 순서를 차례로 열거한다면, 주님-교회-나의 나라 등등으로 내려간다.

인식함들(cognitions)
때로는 “지식들”로도 번역된다. 이는 사실들(facts)을 관념들(ideas), 또는 앎의 보다 깊은 수준들 안으로 조직화 함을 뜻하기 위해 사용된다. 엘리엇씨는 그의 새 번역서인 “알카나 세레스티아”에서 “내면의 것들에 관련되는 지식의 항목들”이라 정의하고 있다.

있음 (being, ens)
실재(entity) 또는 구별되는 어떤 것을 뜻하기 위해 사용되는데 선각자는 이 단어를 매우 드물게 사용했다, 또한 순수하게 정신적 건설을 뜻하기 위한 합리성, 이성적 인 것에 대한 어구인 “ens rationis”에서 사용되었다. 이를 있음인 esse, 즉 “혼” 또는 어떤 것의 본질되는 속성과 대비해보라.

있음 (being, esse)
어떤 것에 있는 본질되는 품질, 실체(reality) 자체, 예를 들면, 하느님의 근본적 본질은 신성한 사랑이다.

자기 것이 되게 하다 (appropriate, 사유)
이 단어는 선각자에 의해 형용사로는 한번도 사용되지 않고 동사로만 사용된 특별한 단어인데, 자신에게 고유한 것으로 주장함, 또는 소유하는 것이다.

자기 자신 (Own)
자기 자신은 라틴어 suus 와 proprium 모두를 번역하는데 몇 번역자에 의해 사용되었다. 자아(self), 자아를 위해, 자아로부터 살아감, 이기심이라는 자아를 느낌, 인간의 거듭남에서 자아가 인도함이라는 망상은 필수적이다.

자아 (Proprium)
자기 자신을 보라. 이기심을 느낌이라는 기초적 의미에 추가하여 많은 다른 의미들을 가지는 경우도 있다, 즉 천사적인 자아, 악마적인 자아, 인간 자아, 신성한 자아, 지옥적 자아, 지적 자아, 자발적 자아 등등이다.

자아로서 같이 (as of self)
마치 자기 고유의 힘을 수단으로처럼, 컽으로 보기에 자신 스스로인 듯 하는 것. 선각자의 신학에서 비평적 개념인데, 즉 누군가가 “마치” 자아의 힘에서 인 듯 행동하는 것, 그러나 동시에 모든 힘은 하느님으로부터 온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다.

자연적 인간 (Natural man)
세상적인 것들에 집중적으로 흥미를 가지는 어떤 개인을 뜻한다 할지라도, 그 개인의 전체를 뜻하여서는 일반적으로 사용되지 않는다. 단지 어떤 개개인에게서 가장 수준이 낮은 인간의 마음을 언급할 때 가장 흔히 사용되고 있다.

자연주의자 (Naturalist)
하느님을 믿는 대신 자연을 믿는다는 어떤 개인을 경멸적 의미에서 만 사용되었다, 즉 물질주의자와 비슷하다. 자연주의도 이와 비슷한데, 모든 종교적 개념들의 근원을 자연에 신뢰를 둔 것이라 정의된다.

자유 (Freedom)
애착으로부터 생각하고 뜻하고, 이치에 맞다고 여겨지는 것에 따라서 자유하게 행동하는 것이다. 만일 이것들이 천국적이다면, 자유는 진짜이다; 만일 지옥적이다면, 이것은 외관적일(껍데기적일) 뿐, 실제로는 비 자유함이다. 진정한 자유는 당사자로 자아 강요(self-compulsion)를 사용하는 것을 허용한다.

지배하는 사랑 (Ruling love)
삶을 좌지우지하는 각 개인에 있는 가장 강력한 사랑. 가능할 수 있는 지배하는 사랑은 네 가지로 함축해볼 수 있다: 1. 하느님을 사랑함. 2. 이웃을 사랑함. 3. 자아를 사랑함. 4. 세상을 사랑함이다. 이 중 첫 둘째 만이 거듭나지는 개인을 위하여 받아져야 하는 지배하는 사랑들이다.

지혜 (Wisdom)
많은 지식을 소유함을 언급하는 데에는 거의 사용되지 않는다, 이 용어는 통상 삶에 관한 것만을 서술하는데 사용되고 있다. 지혜는 사랑으로부터 진정한 것을 지각함, 뜻함, 행동함으로 구성된다. 슬기로운 개인은 진리에 기초한 선을 행함을 위한 변동없는
바램을 가지고 있다.

진실한 (True)
절대적 의미에서 진실함은 신성한 사랑의 형체와 수단들이다. 관계적 의미에서, 이것은 개개인의 사랑 속에 있는 지각하고 결과를 있게 하는 기능이다.

진리의 선 (Good of truth)
개개인 안에서 진리를 수단으로 도달되는 상태인데, 이 상태는 사랑의 행동들 안에서 자체를 표현한다, 이를 수단으로 그 진리는 선이 된다. 이것은 영적인 선이라고도 불리운다.

질투 (Jealousy, zelotypia)
선각자는 부부의 사랑의 첫 장에서만 사용하였는데, 귀중한 것을 보호함을 사랑함, 특히 결혼의 사랑을 보호하기를 사랑함을 뜻하기 위해 사용했다. 그는 나쁜 질투가 있다는 것도 인정하고 있으나, 그가 강조하고 싶은 점은 질투의 긍정적 측면에서 이다. 그는 이것을 열정들 중의 열정이라 일컫는다-즉 열정의 진정한 모양새이다.

천사 (angel)
천국에 있는 개인(person). 선각자의 신학에서 모든 천사들은 처음에 자연계에 살았고, 사후 천국에 입장한 사람들이다. 선각자는 천사의 개념을 놓고, 창조로부터의 분리된 계층으로 말하는 것을 거절한다.

천성 (타고난 자질, Genius)
개인의 기질, 특성, 재능, 경향성, 개인과 개인들 집단의 영 또는 품질.

첩 (pellicacy, concubine, mistress)
이 단어는 pellex로부터 인데, 첩을 두고 사는 상태이다

최말단 (Ultimate)
연결 고리의 마지막, 수준이 가장 낮은 것, 가장 외적인 것, 가장 먼 것. “가장 큰 것”을 뜻하기 위해 선각자에 의해 사용되지 않았다.

충격(자극, conatus)
종종 “애씀(endeavor)”으로 번역된다. 일반적으로 행동들 뒤에 놓인 에너지를 두고 사용된다. 특별한 목적들을 쟁취하게 하는 꾸준한 충격을 받는 생활 자세일 수 있다.

타고난 (선천적인, connate)
글자대로 말하면, “출생으로부터 존재하고 있음”이다, 이것은 때로는 유전적 경향성들을 부정하는데 관련되어 사용되고 있다. 또한 자주 비슷한 단어인 생득의(innate, 타고난), 천부의 (inborn), 같은 성질의(congenial)와 더불어 사용된다

탐욕 (cupidity, 강력한 욕망)
(현세에의 욕망을 보라.) 자연적 마음으로부터 일어나는 강력한 욕구, 갈망, 그리워함. 이 단어의 라틴 뿌리는 현세에의 욕망의 뿌리만큼 강한 부정적인 것을 함축하여 운반하지는 것은 아닌 듯 비쳐진다.

태고 교회 (Most ancient church)
선각자는 이 용어를 대문자로 자주 표기했다. 하여 이 이름이 매우 지당하다 싶어서인 듯한 느낌을 우리로 갖게 한다. 이 용어는 신성에 관련하여서 일 경우, 가장 이른 유사 이전(역사 문명 이전)을 언급하는 전문어이다. 이 용어는 창조와 에덴의 동산을 언급하는 창세기서의 사건에 상징적으로 결합되어 있다.

트란스훌럭스 (Transflux)
관통하여 흘러가버림. 주님으로부터의 선이 아무런 효과도 보지 못하고 어떤 개인을 관통하여 흘러가버리는 것을 부정적으로 언급함에 사용되었다. 마치 물이 조리채를 빠져나가는 경우 같다. 이런 개인은 양심 없이 있다라고 말해진다.

평형 (Equilibrium)
(균형을 보라.) 가장 널리 가능할 수 있는 선각자의 번역에서 용어 “평형”이 발견될 것이다. 현재까지에서, 보다 단순하고 충분하게 어울리는 번역문은 돌(Dole)의 번역에서의 “균형”에 번역어의 한계가 그어지고 있는 실정이다.

표현 (Representative)
영적 생각(idea)을 상징하려고 사용되는 자연의 대상물, 개인, 행동, 또는 이 영적 생각 자체. 또한 영계에서 보일 수 있는 형체에서 생각이 표출됨.

합리적인 것 (이성적인 것, Ens rationis)
순수하게 정신적 건축물, 마음 안에서만 존재하는 어떤 것. 어떤 문맥에서는 도깨비불(will-o-the-wisp, ignis fatuus, 환영)에 대충 견주기도 한다. 있음 [ens]를 보라.

허용 (Permission)
이는 신성한 섭리의 한 부분이라 선각자는 규정하고 있다. 허용된 것, 관용(묵인)된 것은 허락된 것, 묵인되어진 어떤 것이나 그렇다고 하느님이 바라는 어떤 것은 아니다. 바람직하지 않은 어떤 행동들을 묵인하는 것은 인간의 자유를 침해하지는 않는다.

현세에의 욕망(concupiscence, 강한 욕망)
몇몇 번역자들에 의해 존속되어 온 라틴어풍의 단어이다. 동사 형체는 어떤 것을 강하게 바램(desire), 또는 갈망함(lust)을 뜻한다. 명사는 강한 욕구를 뜻하는데, 통상적으로는 악, 또는 (섹스 쪽이거나 아니거나 할는지 모르는) 욕망이다. 때로는 탐욕(cupidity)이라는 단어와 분간할 수 없는 경우도 많다.

황폐됨 (Vastation)
황무한 상태, 극점(종말), 다빠져나가 텅빔. 영들의 세계에서 벌어지는 과정, 즉 외적인 악들과 거짓들이 선한 자로부터 제거됨, 그리고 위선적으로 있는 선들과 단지 지식들인 것이 악한 자로부터 제거됨, 하여 어정쩡하게 선과 악이 뒤섞여 있던 세상에서의 인간의 상태가 선과 악이 선명한 상태로 확실히 구분되는 과정에서 사용되는 단어이다.

회개 (Repentance)
재출생에서의 첫 단계, 여기에는 하느님에게 죄들을 고백함, 자기가 용서되기를 간구함이 포함되고, 진정한 선행과 신앙의 교훈들에 따라 새로운 생활을 이끌려는 진실한 노력이 뒤따르는 것이다.

(외부쪽에) 흘러듦 (afflux)
…쪽으로 흐름, 또는 …쪽을 향하여 흐름. 이 방식을 수단으로 주님께서는 악을, 악한 자를 통제하신다. 선과 진리는 악한 자 쪽으로(to) 흐를 수는 있으나, 그렇다고 악이나 악한 자 안쪽으로(into)는 흐르지 않는다. 고로 악이나 악한 자를 통치하는 것은 내부(within)로부터가 아닌 외부(without)로부터 이다. 이 단어는 (내부쪽에) 유입됨(influx, 흘러듦)과 날카롭게 대비되어 선각자의 책에서는 사용되나 한국어에서는 같은 말로 번역되고 있어 가로에 영어를 추가로 기입해서 (역자는) 구별해보고 있다.

선각자에게만 유일한 기본적 생각들(concepts)

1. 하느님에 관하여 선각자에게 밝혀진 기본적 생각들

신성한 생명은 하나이고, (사실) 생명은 이 생명밖에 없다. 주님 만이 생명 자체이시다, 그 이유는 그분이 생명 자체이시기 때문이다. 땅 위 인간과 영계에 있는 인간은 이 생명의 그릇들일 뿐이다.

(참고: 선각자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뜻하기 위해 단어 “주님”을 시종일관하게 사용한다. 또한 이 글 내지 역자의 번역서에서 사용되는 단어 중 개인(個人, 때로는 인물, 人物, person)이 있는데, 그러나 역자가 이 단어를 영한 사전에서 같이 사람 등의 알기 쉬운 단어로 번역하지 않고 조금은 껄끄러운 개인으로 표기하는 이유는 지상에 태어나 아무개라는 이름으로 살았던 물질인 인간, 즉 개인(예를 들면, 예수)을 뾰족이 암시하고 싶어서 이다.)

하느님의 본질에는 두 구성 요소가 있는데, 그것은 사랑과 지혜이다. 하느님의 사랑을 구성하는 세 고유 특성이 있는데, 그것은 그 자체의 바깥쪽 다른 이들을 사랑하는 것, 다른 이들과 하나이기를 바라는 것, 그리고 다른 이들을 자체로부터 복되게 하여주는 것이다.

신성의 사랑과 지혜를 본질 자체 측면에서 일 경우, 우리는 생각조차 할 수 없다. 그 이유는 그것은 무한이어서 우리의 사고력을 초월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랑과 지혜가 상응적(correspondential) 외관에서 일 경우, 우리는 생각해볼 수 있다. 천사의 눈에서, 주님은 태양으로서 나타난다, 이로부터 영적인 열과 빛이 나아가는 바, 유추해봄(analogy)을 수단으로 천사들은 자기들이 유지 지탱할 수 있는 이유는 이 영적 빛과 열, 즉 하느님으로부터 꾸준히 방산되는 신성의 사랑과 지혜에 의해서 이다를 생각하고 알 수 있다.

상응을 수단으로, 이 유추해봄은 땅 위 개인들도 사용할 수 있다. 즉, 자연이 물질적 태양의 열과 빛을 수단으로 매 순간을 유지 지탱하듯, 인간인 나는 주님의 신성한 사랑과 지혜를 수단으로 영적으로 유지 지탱되고 있다는 것을 생각해보고 알 수 있다.

주님(the Lord)은 보편적(우주적) 인간(universal human)이시다. 주 예수 그리스도, 이 분만이 충분하게(fully, 결여됨이 없는) 인간이시다. 이 분으로부터 천사들, 영들, 그리고 지상의 거주민들은 집합적으로 “사람들(men)”이라 불리운다. 이 분이 천국 안으로 유입되심으로 전체 천국은 하나의 인간을 표현하고 닮아 있게 하고 있다. 유추를 수단으로, 땅 위 개인들의 (인간) 본성 안에 있는 천국의 것 만이 진실로 인간(human)이다

새로운 기독 세계의 하느님은 하나의 보일 수 있는 하느님이 계시고, 이 분 안에 보일 수 없는 하느님이 계시는데, 마치 혼이 그의 신체 안에 있는 것과 같다. 만일 누군가가 그렇지 않다라고 판단했다면, 그는 이 하느님과 결합되어질 수 없을 것이다, 그 이유는 하느님과 개인들의 사이에 있는 모든 결합은 상호적(reciprocal) 임이 틀림이 없기 때문이다. 이런 상호성은 보일 수 있는 하느님이 아니면 불가능하다.
위와 비슷하게, 모든 천국들 안에서, 하느님에 관하여 이런 생각밖에 없다: 즉, 그분은 개인이시다는 것, 그리고 이 개인이 주님이시다는 것이다. 골로새서에서 바울의 통찰력이 선각자의 견해가 진실임을 이렇게 증명하고 있다: 즉, 일어나시고 신성이 되신(risen and glorified) 예수 그리스도 안에, 하느님(Godhead)의 모든 충만함이 육체적으로 거주하시고 있다. 땅 위와 천국 안에 있는 사람(people)은 이를 알 수 있다.
하느님 안에 있는 삼위일체(trinity, 三位一體)에 관하여서 성경의 구절들은 상징적 언어에서 말하고 있다. 신성의 삼위일체는 주님의 한 개인 안에 있다, 이 셋을 구별해 알 수 있는 것은 혼, 신체, 그리고 이 둘의 결과인 활동(activity, 행동)으로 이해할 경우에서 이다. 유추를 수단으로 각각의 개인 안에도 삼위일체가 있다. 셋을 한꺼번에 취합하면 하나의 개인을 구성한다: 즉 혼, 신체, 그리고 혼이 신체를 이용한 결과인 행동이다. 그러나 이것은 유한한 삼위일체이다, 그 이유는 인간은 그릇들, 또는 생명의 “기관들(organs, 유기체들)”이기 때문이다. 주님 안에서의 삼위일체는 무한이고, 고로 신성인 이유는 주님은 그분의 인간(human)조차도 생명 자체이시기 때문이다.
아버지이든, 아들이든, 그리고 성령이든, 이 단어의 언급이 있는 말씀 안의 어디에서 이든, 이는 하느님의 속성을 구별해 말해보는 양상일 뿐이다. 다시 말해 하느님의 통일성(unity, 여럿이 아닌 하나) 안에 삼위가 있는 바, 아버지, 또는 성령(님) 같은 식으로 분리적으로는 존재하지 않고, 주님 만으로 존재한다는 말이다. (우리는 하느님을 주님으로만 부르는 것이 합당할지 모른다 역자주) “아버지”, 또는 하느님의 “혼(soul)”과 “영(Spirit)”, 또는 하느님의 활동은 주님 만으로부터 존재하고 출현(coming forth, 존재 안으로 옴)된다. 그러므로 하느님, 그리스도, 또는 성령으로 분리된 존재들로 말하는 듯 여겨지는 성경의 사건들이다 해도 상징적, 유추적으로 이해되어져야 한다. 고로 통찰력은 분리된 둘, 또는 셋의 신성의 존재들로서가 아닌 유일한 하나의 하느님의 속성과 활동의 어떤 양상(면모, aspect)들 쪽으로 있어야 할 것이다.

신성의 사랑은 모든 창조의 근원이고 지탱자이다. 영적인 존재들은 사랑 외에 다른 근원으로부터 존재 안으로 와질 수가 없다; 그리고 창조하는 사랑은 사랑 자체 이신 주님으로부터만 존재 안으로 와질 수가 있다 (세상 밖으로 나타나짐).

모든 창조의 보편적 목적(purpose, 의도)는 창조자가 창조된 우주와 영원히 합류하는(join) 것이다. 이 합류는 이 창조 안에 신성의 본성이 “거주”할 수 있는 존재들이 있어야 가능해진다. 다시 말해 신성에 걸맞는 성질이 각 개인들 안에 있어야 합류가 가능하다는 말이다. 고로 모든 것은 각 개인들의 사용을 위해서 창조되어왔었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모든 창조된 것들의 사용은 가장 바깥 부분들로부터 개인들 쪽으로 등차적으로 올라간다, 그리고 개인들을 통하여 하느님 쪽으로 올라간다. 이것은 “생명의 순환”이라고도 불리운다.
창조의 특별한 목적은 하느님의 사랑을 받고 되돌림을 영원히 계속함으로, 인류로부터 천사들의 천국을 영원히 부풀려감일는지 모른다.

하나의 끈덕진 신학적 관념에 반대하여 있는 것은 이것이다, 즉 하느님은 무로부터 우주를 창조하지 않았다. 무로부터 만들어진 어떤 것도 있을 수가 없다. 모든 것들은 실체(substance, 물질) 자체인 실체로부터 창조되어져 왔다. 이 실체는 신성의 사랑이다. 이 근원으로부터 만 모든 것들은 만들어내지고 지탱되어진다.

하느님은 물질의 우주를 창조하셨는데, 이는 영적 실재(reality)들에 “옷을 주는(clothing)” 것, 그리고 개인들이 원하면, 그들 고유의 자유의지로부터 영적이고 잠재적인 천사의 존재들이 되는 평면(plane)을 제공하기 위하여서 이다.

자연 평면에서 더 이상 진짜 인간 다움(humanity)이 있지 않게 되었을 때, 그리고 인류가 바야흐로 파멸에 직면하려고 했을 때, 즉, 천국으로부터 생명과 빛을 받는 역량을 거의 잃었을 때, 하느님은 그분의 무한성을 유한성으로 만드셨다, 즉 예수 그리스도 라는 개인 안에서 세상 안으로 오셨다. 이때 쾌히 받아들심으로부터 주님이 “입으신” 인간 다움은 인류를 괴롭히는 허약함과 동일한 것을 지닌 지극히 평범한 인간의 어머니 마리아로부터의 것이었다. 그러나 (예수의) 내부에 잠재적인 신성의 거주하심에서 끌어냄을 수단으로 예수는 지상 평면에서 개인들에게 영향을 주는 천국과 지옥의 세력 사이에 있는 균형을 언제나 회복되게 하시면서, 점진적으로, 질서있게(순서적으로), 그리고 완전하게 지옥들의 힘들에 정면으로 맞서 이겨내셨다. 주님의 삶의 모든 과정은 되찾음을 구성하는 것, (즉) 개개인의 구원이 지금 그리고 언제나 가능하게 만드심이다.

2. 영적 세계에 관하여 선각자에게 밝히 알린 기본 생각들

진짜이고 영원한 영적 세계가 있다. 그 세계는 셋으로 구분되는데, 천국, 지옥 그리고 영들이 있는 중간 세계이다.

죽음은 삶에 있는 질서적, 필수적 단계이다. 인간의 신체가 그것의 생각들과 애착들에 상응하는 자연계에 있는 기능들을 더 이상 수행할 수 없을 때, 그 개인은 “죽는다”라고 말해진다, 그러나 개인은 죽지 않는다, 단지 지상 평면에서 사용을 위해 주어진 육체라는 부분들로부터 분리되어질 뿐이다, 개인은 살기를 계속하는데, 그 이유는 개인이 개인인 이유는 신체 때문이 아니라 영 때문, 즉 개인 안에 있는 생각하는 혼, 또는 영이 당사자 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애착과 더불은 생각이 그 개인을 구성한다. 고로 죽음은 이 세계로부터 저 세계로 건너가는 (다리 역할을 하는) 것일 뿐이다.

(자연계) 생명의 모두가 중단되자 마자, 개인은 영들의 세계에서 즉각적으로 소생되어진다. 이것은 가장 높은 천사들의 조력을 받아 주님에 의해 행해진다. 그 다음, 개인은 자기 검증과 자기 인식의 과정을 통하여 안내되어진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 또는 그녀 자신의 결단력이 영원한 집을 천국이든 지옥이든 선택할 수 있다. 어느 누구도 천국으로 입장이 주어지는 수단으로서의 “보상”이라는 것은 없다, 누구도 지옥으로 정죄됨을 수단으로 “처벌”되지 않는다. 천국과 지옥 안에서 모든 이는 자기 자신의 선택을 수단으로 각자의 영역에 있다.

죽음 후에 모두 각각의 개인에게는 자신의 생각들과 애착들을 수정할 충분한 수단들이 수여된다. 모두는 천사들을 수단으로 주님에 의해 가르쳐지고 인도되어진다; 그리고 모두는 자기들이 생명을 따라서 생명을 살아감이다는 것, 그리고 천국과 지옥이 있다는 것을 의식할 때, 그들은 첫째로 모든 진리들을 받아들임에 있다. 그러나 지상에서 (하느님을) 인정하지 않았고, 하느님에 맞서 악들을 죄들로서 금하는 노력을 만들지 않았던 이들은 이내 진리들을 듣는 것에 진저리를 내고 그것은 선택의 문제라고 여기고 물러나버린다. 짧게 말해, 섭리는 모두가 구원되는 쪽으로, 즉 천국을 선택함이 가능해지도록 그것을(진리의 선택을 하도록) 만들고 있다. 그리고 그렇게 선택하지 않은 개인은 홀로 책임질 수 있게 만들어져 있다.

용어 “영”은 영들의 세계라 불리우는 사후 첫 상태에서 일시적으로 있는 자를 뜻하기 위해 사용할 뿐이다. 용어 “천사”는 교육받고 자기 수정을 끝내서 천국에서 자기 자리를 찾아갈 수 있게 된 이들을 뜻한다. 지옥에 자신의 장소를 발견하는 이들은 사탄들 또는 악마들이라 불리워진다.

개인로부터의(각자의) 영이 영들의 세계 안으로 진입하였을 때, 그녀 또는 그의 얼굴과 음성의 음질은 그들이 세상에서 가졌었던 것들에 대단히 비슷하다. 그러나 그 후 얼굴과 여타 얼굴의 생김새들과 행동들은 점차적으로 각자의 애착(affection)들과 당사자를 지배했던 사랑(ruling love)에 일치하도록 바뀌고 있다. (지상에서는 가면을 씀이 가능하나 여기서는 가면이 허용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과거 신체 안에서 영의 생명의 외면의 것들의 사용함이 끝나서, 이 외면의 것들이 곁에 놓여진 지금, 바깥쪽으로의 나타남과 이전의 애착들은 바뀐다, 하여 바뀐 그의 상태란 그가 보여지는 것과 행동하는 것은 그의 내면의 존재와 완전 일치되고 있는 상태의 것이다.

천국의 생활을 세부적인 것까지 말하고저 이 책의 페이지를 할당하기에는 너무나 많은 바, 여기서는 윤곽만을 그리고 지나간다; 우선 그 곳의 삶이 진짜 삶이다는 것, 진짜 당신의 가족들이 거주한다는 것, 직업들(각자 할 일들)이 매우 다양하다는 것, 기쁨만을 언제나 선사하는 공동체와 모임들이 있다는 것이다. (특별한 것은), 거기에 많은 어린 아이들이 있다는 것, 그 이유는 유아기나 어린 아이 시절에 죽은 모두는 천국 안으로 직접 오고 거기서 성장하기 때문이다.

지옥은 기본적으로 천국에 반대되는 것들, 거기를 선택한 이들의 특성이 악인지라 그들의 파괴적 힘에 의해 (모두는) 총체적으로 (언제나) 찡그려져 있다. 거기에는 (주님께서 악한 자를 징벌하려 만든) 불, 유황(불), 또는 기분내키는대로의 임의적 처벌 등등이 없다; 악은 그것 고유의 사용료(toll)를 부담할 뿐이다; 지옥은 객관적으로 불행의 상태이다. 그러나 지옥에 있는 이들은 자신들을 위해 최고의 선택이었음을 자랑하고 있다.

3. 우리에게 있는 하느님의 말씀에 관하여 선각자에게 밝히 알린 기 본 생각들

하느님이 언제나 설비해두시는 것은, 어느 시대를 무론하여 그 시대의 인간다움에 걸맞을 수 있는 신성한 진리의 밝힌(계시) 것을 관리하는 책무에 봉사하는 교회를 인류와 더불어 있게 하신 것이다. 우리가 아는 이 계시는 말씀(Word)이고, 이 말씀은 성경에서 발견되었다. 이 말씀을 수단으로 인류는 천국들과 계속적으로 연결된다. 그러므로 이 말씀에 있는 모두 각각의 표현들 안에 천국의 것들과 연관되는 내적 의미가 있다. 말씀이 내적 의미를 지닌 특성 때문에 말씀은 천국의 마음들과 인간의 마음들을 결합하게 한다.

많은(아마 대부분의) 기독인들이 이의 없이 이구동성 말하는 것은, 말씀은 신성의 호흡이 담겨 있다는(영감되어 있다, inspired) 것, 그러므로 거룩하다 이다. 그렇지만 선각자를 통한 이 계시 앞의 (시대에서) 경우, 말씀 안에서 어디에 말씀의 거룩함 또는 신성이 존재하는지를 알지 못했다. 그 이유가 말씀을 여느 책을 읽듯 평범히 읽는다면 (즉 글자 그대로의 의미에서의 경우라면), 여느 촌뜨기 작가의 저술 같고, 때로는 문체상 (문법도 모르고 씌어진 듯하여) 엇박자인 냥 보이고, 심지어는 현 시대의 저술 보다 수준이 미천한 듯까지 깍아서 평가할 수도 있는 책인 듯 비쳐지게 나타나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하느님을 예배하기를 선택하지 않든지, 또는 하느님 보다 세상의 것들을 존경하는 쪽을 선택하든지 하는 이들은 말씀에 관련해 거룩한 어떤 것이 있을 수 있다는 것마저 부정하는 오류 안으로 쉽사리 추락할는지 모른다. 짧게 말해, 이렇든 저렇든 각자는 말씀을 신성이 거주하는 책임을 수긍하던지 부정하던지는 그의 선택(의 잣대) 안에 있다는 말이다.

어쨌든, (순위에서) 자연 앞에 하느님을 두는 이들, 그리고 진짜로(순수하게) 진리를 찾는 이들은 글자에 있는 많은 서술문들이 주님의 말씀으로서 확인하여 그 글자들을 꾸준히 받아들이고 있다. 사실상 이들의 마음들은 계시(밝히 앎)의 필요와 실재 쪽으로 통찰력이 열려져 있다. 그 이유가 계시 없이 지식은 없고, 결과적으로 하느님을 인정함도 없기 때문이다. 사실상 주어져왔었던 계시를 통하여서만 사람들은 하느님에게 접근할 수 있어, 그분으로부터의 유입을 받고, 자연적 존재로부터 영적 존재로 되어질 수가 있었다.

말씀의 책들은 계속적이고 연결된 내적 의미를 가지는 모든 책들이다. 구약 성서 부분에 있는 이 말씀의 책들은 모세의 다섯 책들, 여호수아, 사사, 사무엘상하, 열왕기상하, 시편, 이사야, 예레미야, 애가, 에스겔, 다니엘, 호세아, 요엘, 아모스, 오바디야, 요나, 미가, 나훔, 하박국, 스바냐, 학개, 스가랴, 말라기; 그리고 신약 성서 부분에서는 마태, 마가, 누가, 요한, 계시록이다.

복음서들은 주님 자신의 말들을 포함한다, 이 말들 안에는 영적 의미들이 숨겨져 있고, 이 영적 의미들을 통하여 천국과의 교통이 가능하다. 사도들의 저술들(서간문)은 교회를 위해 유용하나, 내적 의미를 포함하고 있지는 않다.

말씀의 가장 바깥쪽, 또는 글자적 의미로부터의 모든 세부사항들은 감각 기관(sensory)에 의존하고 싶어하는 이들의 납득력에 적합해 있다, 고로 어린이들과 단순한 이들에게 (특별히) 안성마춤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글자 그대로의 의미의 대부분은 진리의 외관 (측면)들이다, 따라서 그것들이 계발된 이해력으로부터 지각되지 않으면, 그것들이 실제적으로 진리이다고 믿어져버림에 의해 거짓화 되어갈 수 있다. (단순한 자나 어린이들이 아닌 이들, 특히 지식인이라 자부하는 이들이다면) (마음만 먹으면) 거짓화 할 수 있는 위험성이 글자로 있는 많은 서술문의 도처에 산재해 있다. 예를 들면, 하느님은 성내신다, 그분은 시험하신다, 그분이 지옥으로 내던지신다 등등이다; 또한 마지막 심판에서 주님은 글자에 박힌 그대로 구름을 타고 땅 쪽으로 내려오신다… 태양과 달이 빛을 주지 않을 것… 별들은 추락할 것이다 등등도 있다. 이런 서술들은 자연계의 재난을 예보함들이 아니고, 어느 누구 안에서 거행될 수 있는 내적 바뀜들에 대한 상징들임을 알아볼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영적 투시 화법(perpective, 상관 관계, 견지, 시각, 원근법) 뿐이다.

글자 그대로의 의미가 이런저런 방법들에서 잘못 이해되어질 수 있기 때문에, 이 의미는 어떤 상해받음도 허용 않을는지 모르는 글자 안쪽에 숨겨 놓인 진짜 진리들 쪽으로 안내하는 역할로 봉사하고 있다. 이 개인은 이런 식으로 해서, 저 개인은 저런 식으로 해서 글자의 의미를 이해할 때라 해도 영속되는 피해는 있지 않다; 그러나 피해가 가해지는 때이다면, 신성한 진리에 반대하는 거짓들을 첨가할 때이다. 이 짓은 거짓들 안에 있는 자신이 정당하다 하여 그것을 입증하고자 말씀의 서술들을 선택하는 이들에 의하여 자행된다.

말씀 안에 있는 모두 각각의 개인, 장소, 어떤 것, 어떤 사건 등등은 어떤 영적 실재(reality)를 상징하고, 이 실체(reality)와 상응하고 있다. 이런저런 상응을 통한 의미들이 말씀의 영적 의미를 구성한다. 따라서 영적 의미는 글자 안에 나타나 있지 않다. 그것은 글자 그대로의 의미 내부에 있다. 마치 혼이 신체 안에 있는 경우, 지성의 생각이 눈 안에 있는 경우, 사랑의 애착이 얼굴 안에 있는 경우 같다. 말씀을 영적으로 만들어주는 것이 영적 의미이다. 영적 의미야 말로 진실로 주님의 말씀이다.
어쨌든, 글자 그대로의 의미 안에서 말씀은 그것의 충만함으로, 그것의 거룩함에서, 그리고 그것의 힘을 지니고 있다. 그 이유가 글자 그대로의 말씀은 안쪽에 있는 영적 의미들의 거처이자. 그릇들이고, 받침기둥이기 때문이다.

말씀 안에 있는 표현들은 그것들의 시리즈 안에 영적인 생각들을 포함하도록 씌어 있다. 이 영적 생각들은 글자를 읽는 자가 상응 지식에 친숙해 있지 않으면 그 사람에게 나타나지 않는 생각들이다. 이 방법에서 신성은 말씀 안에 감추여 놓여 있다.
상응들이 모든 힘을 가진다, 하여 상응에 따라서 땅 위에서 행하여진 것은 천국 안에서 직접적인 결과를 가진다, 그 이유는 상응은 신성으로부터 있기 때문이다. 사랑의 선과 신앙의 선 안에서 살아가는 이들은 “상응 안에” 있다 라고 말해진다, 그리고 신성은 이 당사자를 통하여, 그리고 당사자 안에서 행동하실 수 있다.

주님의 말씀은 목마른 개인, 생명을 바라는 개인에게 생명을 주고 있다. 이것은 요한의 복음서에서 가르치고 있다. 말씀은 살아 있다, 그래서 생명을 준다, 그 이유는 최고 의미에서 말씀은 주님과 그분의 왕국을 다루기 때문이다. 말씀에 있는 생명은 말씀을 읽는 당사자가 거룩함의 느낌을 갖게 하면서 당사자의 마음 안으로 흘러든다. 이렇기 때문에, 주님은 그분으로 있는 말씀 측면에서, 자신이 영원한 생명 안으로 솟아오르는 물의 원천이다고 선포하신다.

4. 우리 자신과 우리가 의도했던 운명에 관하여 선각자에게 밝히 알 린 기본적 생각

사랑과 지혜, 그러므로 의도력과 분별력이 각자의 생명 자체를 구성한다. 생명이 무엇인지를 아는 자는 드문 편이다. 사람들이 그것에 관하여 생각할 때, 그것은 파악하기 어려운 것, 그것은 개념화에 도전하는 어떤 것인 듯하게 여긴다. 이렇게 응답하는 이유는 하느님 만이 생명이시다는 것, 그리고 그분의 생명은 신성한 사랑과 신성한 지혜이다를 실감 못 하기 때문이다. 이쯤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우리들 자신의 생명은 하느님의 생명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 그 이유는 우리가 그분으로부터 생명을 받는 만큼에서 우리가 생명을 가지기 때문이다. 사랑이 누군가로부터 쇠하여질 때 그는 나태해진다, 지혜가 쇠하여져 갈 때, 그는 무디어져 있다. 만일 이 두 가지가 동시에 쇠하여지면, 그는 말살되고 있다.

신성의 사랑은 이 사랑이 사랑하는 다른 존재들 안에서 이 사랑을 사랑한 당사자를 수단으로 현재의 것이 존재하고 있음과 되어감을 도울 수는 없다. 어쨌든 만일 이런저런 인간의 존재들이 자신들 안에 무한의 어떤 것, 또는 본질적 사랑으로부터의 실체와 생명의 어떤 것, 또는 신성으로부터의 어떤 것을 가졌다면 위의 말함이 발생할 수 없었다. 만일 우리들 안에 무한하고 신성으로부터의 어떤 것이 실제로 있었다면, 하느님은 타인들에 의해 사랑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타인들)는 자신들만을 사랑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 이유가 무한 또는 신성은 특이하고 나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이유 때문에 서로의 사랑은 본질적 사랑으로부터의 어떤 것도 있지 않은 타인들과 더불어서만 발생할 수 있을 뿐이다.

인간의 존재, 본질적으로와 자아 측면 만에 집중한다면, 짐승으로부터 별반 다를 것이 없다. 즉, 오각도 매우 비슷하다, 식욕도, 자연적 수준의 바램들도, 뿐만 아니라 애착들도 피장파장일지 모른다. 개인의 최선의 사랑들조차 매우 비슷하다, 즉 동료를 사랑함, 자식을 사랑함, 결혼한 짝을 사랑함 등등에서 이다. 어쨌든 인간은 내면의 생명을 가지고 있음 덕분에 짐승 보다 상위에 있는다. 이 생명은 주님으로부터 파생된 사랑의 생명과 신앙의 생명이다. 만일 이것이 출석되지 않고 있다면, 그 개인은 결코 인간일 리가 없을 것이다. 더욱이 주님으로부터 이 생명을 통하여 그 개인은 사후 살고 있다.

모든 사람들은 각자의 마음에 속해 있는 내면들의 것에 관련되는 물질의 신체로 이 세계 안에서 옷을 입고 있는 영이다. 신체는 영의 생각함들의 방향과 영의 애착함들의 조절 아래 있다.

인간 종족, 위에서 명기한 대로, 천국이 설립되는 기초이다. 이런 이유로 인간의 창조는 마지막 번째에서 이었다, 그 이유가 마지막 번째가 앞서 창조한 것을 아우르는 기초이기 때문이다. 모든 창조가 하느님으로부터 오기에, 개인들은 신성의 질서의 형체들로 창조되어졌다.

사람들은 자연계와 영계가 외면적으로 결합(join)하게 하는 수단이다. 사실상, 개인이 영적 존재로 되는 정도에서, 그는 두 세계가 외면적, 내면적 결합(conjunction)을 위한 매체가 되어져 있는다.

인간의 혼(soul)은 당사자의 가장 깊고 가장 순도 높은 본질이다. 그러나 본질은 형체를 가져야만 한다, 그리고 혼은 사랑의 모든 것들의 형체로부터 애착(affection)들이라 불리우고, 지혜로부터의 모든 것들의 형체로부터 지각(perception)들이라 불리운다.

개인은 어떤 지식 안으로 태어나지 않는다, 총명 또는 지혜 안으로 태어나지는 것은 더더욱 아니고, 오직 그런 것들을 받는 수용력, 그리고 그것들을 빨아들이는 능력만을 지니고 태어난다. 이것은 두 겹의 방법에서 결과되어진다: 신성이 흘러드는 내적인 방법에 의해서; 세상이 흘러드는 외적인 방법에서 이다. 이것들이 개인 내부에서 만난다, 그리고 그때 개인이 신성에 의해 계발되기를 선택하는 정도에서 개인은 지혜의 상태 안으로 점진적으로 들어간다.

모두 각각의 개인은 자기를 성화(聖化, sanctification)함에서 자아가 인도할 수 있다 라는 환영(幻影, 착각, 잘못 생각함), 자아(selfhood, 이기심)로부터의 느낌, 감각을 가진다. 선각자는 이기심으로부터의 이런 저런 느낌을 “자아(proprium)”라는 단어로 언급하고 있다; 사실 개인을 두고 성화함이라는 단어 보다는 “거듭남”이 더 어울릴 것이다.

신성의 섭리인 것은, 개인은 이성에 일치하여 자유함으로부터 행동하는 것; 또한 개인이 생각하고, 뜻하고, 행동하는 것의 모두는 온전히 자아로부터 있게 나타나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나타남이 없다면, 어떤 것이 그의 것, 또는 자기 자신의 것임을 아무도 느낄 수 없을 것이고, 따라서 개인은 자신 고유의 개인일 수도 없게 되고 만다. 자아로부터의 이런저런 감각 없이 개인에게 귀속되는 것은 어떤 것도 있어질리 만무하고, 고로 개인은 선이든, 악이든 무엇을 행하든지 무관심, 또는 하느님을 믿든, 지옥의 꼬드김을 따라가든 무관심으로 일관되어지고 만다. 줄여 말해, 개인은 개인 당사자될 리 없고, 진실로 인간일 수도 없다는 말이다.

개혁되고 영적으로 되어가는 모든 이의 처음 상태는 그들이 주님에 의해 개혁됨을 믿지 않는 것, 그 대신 자신들에 의해 개혁됨을 믿는 것이다; 즉 선에 대한 모든 뜻함과 진리에 대한 모든 생각함이 자신으로부터 근원되었다고 믿는 것이다. 이 보다 한 술 더 떠진 것은, 주님께서 그들이 이런 상태 안에 있게 배려하시고 있으시다는 점이다. 그 이유는 만일 그가 자신 스스로 하고 있다 하지 않으면, 그는 개혁되어 질 수가 없기 때문이다. 실로, 만일 그들이 거듭남 이전에 너희들 스스로 선을 행할 수 없고, 진정한 어떤 것도 생각할 수 없다고 (주님으로부터) 말해졌었다면, 자기들은 의지와 생각 안으로의 유입을 기다려야 한다고 상상하는 실수로 붕괴되든지, 또는 만일 선과 진리가 자신들 안에서 근원되지 않는다면, 자신들은 기계 같은 처지이다고 상상하는 실수로 어떤 시도도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선과 진리가 자신들로부터 근원된다고 생각하는 것이 첫째로 허용되어야 한다.

그러나 거듭남의 과정이 한참 진행되면서 점차로 조금씩 가르쳐짐이 있어지는 것은, 예전의 자기 느낌과 생각함과 다른 것이 있다는 것, 즉 선하고 진정한 모든 것은 주님으로서만 100% 존재한다는 것이 당사자에게 슬금슬금 비쳐온다. 그리고 거듭남의 과정이 더 한참, 즉 완전함에 거의 접근하다시피 할 때, 당사자에게 주입되는 가르침은, 주님으로부터 있지 않는 것은 악이고 거짓이다는 것이다. 거듭나지고 있는 이들이라면, 그들의 이 세상의 삶 동안 가르쳐짐을 많이 깨닫지 못한 채 기한이 다 찰 경우, 다음 삶에서 이를 깨닫고, 그것을 지각함으로 보도록 인도 받는다.

인간의 자유 의지는 거듭남에 필수적이다. 개인이 모든 애착들과 모든 생각함들에 관련하여 내면적으로 자유함 안에 있지 않으면, 개인은 선과 진리가 뿌리내릴 수 있는 질서 안에 결코 놓여질 수 없다. 이 자유함은 양쪽에 놓여지는 무게가 평형을 이루는 천칭(저울)에 유추되는 방식에서 주님에 의해 유지되어진다. 비슷한 방식에서 주님은 모두 각각의 개인에 대한 선과 악의 영향력이 균형을 맞추고 있게 유지하신다. 그러나 개인은 이에 대해 의식하지 못 한다, 하느님의 선물 중의 하나인 것은, 개인은 자신의 생명을 두고 그것은 자신 고유의 것이다라고 느껴야 한다는 것, 우리가 그것을 그렇게 느끼는 것이 하느님의 뜻이다는 것이다. 이러한 즉, 우리가 말씀에 있는 질서의 법들에 일치하여 살기를 선택할 때, 고로 하느님의 사랑을 받아들이기로 작정함이 온전히 우리 자신으로부터 임을 우리가 느낄는지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은 그분의 손가락을 천칭 위쪽에서 직각으로 세우시어 유지하시면서 선택의 우리의 자유함을 알맞아지도록 조절해주시지만, 그렇다고 강제적 수단으로 자유를 침범하시는 일은 결코 없으시다.

하느님은 악을 창조하시지 않으셨다, 그러나 질서 안에서 실제의 선택들이 인류로 그것을 받아들이도록 허용해버렸을는지 모른다. 만일 사람들이 하느님이 처음 그들을 창조했던 사랑 안으로 태어나졌다면, 어떤 악도 있지 않았을 뿐 아니라, 사람들은 악이 무엇인지도 모르기조차 하여 있었을 것이다. (애당초) 우리가 창조되어진 사랑은 이웃을 사랑함으로부터의 사랑이다. 고로 우리는 우리 자신 만큼, 아니 그보다 더 많이 이웃을 사랑하는 것을 배울는지 모른다, 그리고 이웃에 선을 행함에서 기쁨을 발견할 것이다. 이 사랑이 진실로 인간이다, 그 이유는 이 사랑 안에 짐승으로부터 발견되는 자연적 수준의 사랑과 구별되는 영적 수준의 요소들이 있기 때문이다.

“원죄” 또는 “유전적 악” 같은 것은 없다. 누구도 실제의 악들 안으로 태어나지지 않는다, 그러나 특별한 악들을 향한 다소의 경향과 더불어 악들을 향한 경향성만 지니고 태어난다. 결과적으로, 사후 개인은 악들을 향한 어떤 유전적 경향성으로부터 판단되어지지 않고, 개인이 동의함에서 받아들이고 행동했던 실제의 악들로부터 만 이다.

우리가 실제의 선을 상속하지 않고, 선이 되어질 경향성만이 상속 가능하다는 것도 위와 동일하게 진정하다. 천성적으로 자연적 선과 친절함을 향유한 듯 여겨지는 이들, 그리고 타인에게 선을 행함을 타고난 듯 실행하는 이들이라 여기지는 이들을 목격하는 때도 있다. 그러나 이런 이들이라 해도 그들이 말씀으로부터 선을 행함에 관한 원리들을 동시에 흡입하지 않으면, 그들은 양심을 발달시키지 못한다, 그 이유는 양심은 자연적 선, 또는 유전적 선에 대한 경향성과 그것에 일치하는 생명으로부터 오지 않기 때문이다. 만일 어떤 개인들이 이런 상태에서 영적 세계 안으로 온다면, 그들은 자기들에게 강하게 인상지우는 선과 진리의 원리들을 가지는 것을 포함하여, 테스트되고 심리되는 어려운 과정을 통과해야만 한다. 이 방법에서만이 그들은 천국의 양심을 받을 수 있다.

이른 바, 천국행의 삶을 사는 것은 여느 사람들이 믿는 것 만큼 고되고 힘든 삶이 아니다. 혹 자는 생각한다, 영적 삶을 영위하는 것은 힘든 것이다, 그 이유는 세상을 포기함이 필요하기 때문, 신체와 육에 연합된 식욕들을 포기해야 하기 때문, 그리고 영적 존재들 같이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이들은 이것은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을 거절함을 뜻하는 것으로 받는다, 뾰족하게는 재물과 명성을 거절하는 것, 그리고 하느님, 구원, 영원한 생명에 관하여 꾸준히 경건하게 묵상하는 것, 그들의 생활은 기도함과 말씀을 읽는 것, 여타 경건하다는 저서들을 읽는데 있다고 생각한다는 말이다.

그러나 선각자는 말한다, (그가 저 세계로부터의) 풍부한 경험과 천사들과의 토론은 그로 하여금 위와 상황이 완전 다르다는 것을 알게 해주었다. 사실상, 이 세상을 포기하고, 포기하는 식으로 살았던 사람들이 천국의 환희를 받지 못하는 자신들 때문에 슬픔에 잠긴 삶을 저 세상에서 건설하고 있다. 모두 각각의 개인의 (이 세상에서의) 삶은 그 개인과 더불어 (저 세상에서도 당사자에게) 머물고 있다. 그 이유가 천국의 삶을 받아들이려면 개인은 이 세상에서 그것과 대등한 삶을 살고 있었어야만 했었기 때문이다. 이 세상 삶의 과정에서 있는 시민적, 도덕적 생활을 수단으로 개인은 영적 생명을 획득한다, 사실상, 이 방법만이 영적 생명이 개인 안에서 만들어지게 할 수 있다, 또는 개인의 영이 천국을 위하여 준비되게 해줄 것이다.

천국행으로 인도하는 생활은 실제로 놀라우리만치 단순하다. 당신이 부정직하고 불공정하다고 아는 방법으로 어떤 것을 얻을 때, 특히 당신의 영이 그런 쪽으로 향하여 움직이려 들 때, 당신에게 필요한 딱 하나는 그것이 하느님의 가르침에 반대되기 때문에 행해져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런 방식으로 대수롭지 않다 여겨지는 사소한 악과 거짓으로부터의 것을 부딪치더라도 대수롭지 않은 것이라 여기지 않고 오히려 중요하게 여기며 하나하나를 처리해 소화해나간다면, 점차 당신은 천국 쪽에 당신의 발을 디밀고 있다. 이러할 때 당신의 더 높은 수준의 마음들이 열리어져서 어떤 것이 부정직하고 불공정한 것인지를 뚜렷이 보게 된다; 그리고 그런 것들을 보았을 때, 단번에 그것들을 부수어버릴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모든 이가 인간의 자유 의지 때문에 획득할 수 있는 영적 상태 쪽으로 당신을 인도한다.

** 도서 구입 안내 **

아래 도서들의 대부분은 발행자, 역자가 출판의 모든 과정을 직접 완료한 책이므로 우선 많은 책이 쌓여 있지 않고 부족할 때마다 몇 십권씩 추가로 출판하고 있습니다. 또한 책의 단가는 여느 시중의 책의 단가와는 달리 순수 재료비만을 계상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여느 복사 비용보다 저렴할지 모릅니다. 따라서 이 출판사의 책은 팔릴 때마다 조금씩 적자를 볼 수밖에 없지만, 이 출판사의 바램은 이익 창출이 아니라 이 귀중한 지식을 공유하는 것, 더불어 이 귀중한 지식이 많은 분들의 손 안에, 책꽃이에 있어 필요시 언제나 읽기를 바램에서, 또한 이 지식의 습득은 여느 소설이나 수필집을 대하듯 하여서는 즉각 이해에 와닿지 않는 결점이 있기에, 어쩌면 시험 공부하듯 노력함이 곁들여야 하기에 전자책이나 전화기나 컴퓨터 다운에 앞서 종이책 구입을 권장하는 차원에서 출판 사업을 펴고 있습니다.

펴내는 자: 한광숙, 배제형
펴낸곳: 도서 출판 벽옥
등록: 제 2016-000002호
주소: 전남 화순군 화순읍 안양산로 31-5
전화: (한국) 010-4738-1711 (미국) 1-917-923-9825
홈페이지: baysidechurch.org
biblestudynoteblog.wordpress.com
역자 E-mail : jeandsook@gmail.com

각 도서와 가격

** 각 도서는 대체로 양장본으로 제본하려 노력하고 있습니다. 또한 위 인터넷 주소에서 책을 만나볼 수 있고 다운받아 직접 제본도 가능할 것입니다.

1. 번역 서적

말씀의 합리적 이해 (전 6권. 각 430여쪽) 값 각 권 12000원
비유 (796쪽) 값 25000원
신약 비유 해석 (516쪽) 값 15000원
구약 비유 해석 (394쪽) 값 15000원
이스라엘의 첫 세 왕 (576쪽) 값 15000원
마태복음 해석 (736쪽) 값 15000원
요한복음 해석 (640쪽) 값 15000원
요한계시록 해석 (513쪽) 값 15000원
바이블 스터디 노트 (전 4권, 각 권 평균 650여쪽) 값 각 권 15000원
성경 공과 (전 24권, 각 권 평균 234쪽) 값 각 권 5000원
레위기 해석 (526쪽) 값 15000원
영, 한글 구약 성경 (창세기, 출애굽기 340쪽) 값 5000원
영, 한글 신약 성경 (4 복음, 계시록 406쪽) 값 5000원
성경 상응 사전 (1082쪽) 값 25000원
헬렌 켈러의 신앙 간증 (126쪽) 값 5000원
죽음 그 이후 영들의 세계 그리고 천국과 지옥 (132쪽) 값 5000원
새 예루살렘 그리고 그곳의 교리 (100쪽) 값 5000원
천국의 비밀들 (전 12권 각 500여쪽) 값 각 권 20000원
창세기 요약 해석 (401쪽) 값 15000원
창세기 해석 (전 5권 각 550-630여쪽) 값 각 권 15000원
성경 연구 (전 6권 각 430-480여쪽) 값 각 권 15000원

2. 원서

선각자의 필적이 담긴 쉬밑의 라틴 성경 (900쪽) 값 25000원
알카나 세레스티아 (쟌 엘리엇 영역)
알카나 세레스티아 (쟌 클라우 영역, 쟌 폿스 수정) 값 각 권 20000원
* 이 외의 원서의 종이책 재출판도 준비 중에 있습니다.
* 위 엘리엇 영역본은 copyright이 있을 것 같아서 출판을 미루고 있는 바, 필요한 분은 인터넷 검색이 가능하므로 연락바랍니다.

창세기

편저자 서문

제 아무리 인간이 이기적이다고 당신이 생각하고 있을지라도 분명한 것은 인간의 본성 안에 어떤 원리들이 있다는 것…(No matter how selfish you think man is, it’s obvious that there are some principles in his nature….) 이 글은 아담 스미스의 도덕 감정론의 첫 장의 첫 글귀인데, 이는 그의 책의 출발이자, 그의 책의 근간이 인간 본성을 관찰하고 주목함에 있다는 것, 또한 인간 본성을 파악하는 것이 너와 나… 라는 우리들의 삶에서 얼마나 중요한지를 피력한 글귀 같이 여겨져 여기에 인용했다. 또한 그의 두 번째 책 “국부론” 역시 이기적일 뿐인 인간 본성과 나라의 재물과의 관계를 파헤쳤다고 대단히 간결하지만 이 책과 연관지으면, 그렇게 역자는 말해보고 싶다.
이 책 “창세기 해석”은 이기적일 뿐인, 그래서 악 뿐인 인간 본성의 상태가 어떻게 바뀌어가는지, 즉 주님께서 인간 본성을 아시는 바, 인간 구원을 위해 적절한 섭리를 어떻게 펼치시는 지를 조금이나마 실감나게 알게해 줄 것이다. 하여 이 책을 정독하면 아담 스미스의 책 뿐만 아니라 칸트의 저서인 “순수 이성 비판”, 궤테의 “파우스트” 등등의 책들을 섭렵하는 것을 어렵지 않게 해줄 것이라 믿는다.
왜 주님은 인간 구원을 위해 수많은 페이지를 할애하여 우리에게 정독하라고 성경을 주셨을까? 인간 구원은 그의 생활이 개혁되어 거듭남인 주님으로부터의 새 창조가 그분을 믿는다고 고백만 하면 한번에 받아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인간의 마음은 하루에도 수백 번 뒤엎을 수 있게 복잡한 구조를 지녔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간이 주님을 만나는 것, 하여 새 생명을 받아 처음의 인간(자연적 수준의 인간)이 아닌 새로운 인간(영적 수준의 인간)이 되는 것이 쉽지 않기에 성경은 이를 셀수 없이 많은 경우들을 이야기 형체로, 비유 형태로 많은 페이지를 할애하여 반복적이고 중복되는 듯 여겨지지만, 이를 통해 주님에 관하여와 그분의 왕국(천국과 지옥)에 관하여 우리로 알게 해주시고 있다.
이 책은 천국의 비밀들 (Secrets of Heaven, 라틴어로는 알카나 세레스티아, Arcana Coelestia)을 성경의 구절만을 중심으로 재 편집했다.
여러분께서 마음의 가장 깊은 안쪽에 거주하시는 주님을 찾아가 만나뵙는데 이 책이 한몫 해주길 기도한다.
더 많은 자료는 baysidechurch.org 또는 biblestudynotesblog.wordpress.com을 검색하면 도움을 줄지 모른다.

6. 19. 2016 뉴욕 베이사이드에서 배제형.

창세기 제 1 장

성경: 창세기 제 1 장

1. 시작에서 하느님께서 하늘들과 땅을 창조하셨다.
2. 땅은 공허하고 텅비었고, 그리고 짙은 어둠이 깊음의 얼굴들 위에 있었다. 그리고 하느님의 영이 물들의 얼굴들 위에서 움직이셨다.
3. 하느님께서 말하셨다, 빛이 있으라, 그리고 빛이 있었다.
4. 그리고 하느님께서 빛을 보셨더니, 그것은 선이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빛과 어 둠 사이를 구별하셨다.
5.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빛을 낮이라 부르시고 어둠을 그분은 밤이라 부르셨다. 그리 고 저녁과 아침은 첫째 날 이었다.
6. 그리고 하느님께서 말하셨다, 물들 한가운데 광활한 공간이 있고, 그것이 물들 안 에서 물들 사이를 구별되게 하라.
7.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광활한 공간을 만드셨다, 그리고 광활한 공간 아래에 있는 물 들과 광활한 공간 위에 있는 물들 사이에 구분이 있게 하셨다. 그리고 그것은 그 렇게 있었다.
8. 하느님께서는 광활한 공간을 천국이라 부르셨다. 그리고 저녁과 아침은 둘째 날 이 었다.
9. 그리고 하느님께서 말하셨다. 하늘 아래에 있는 물은 모두 한 장소로 모이고, 마른 [토지]가 나타나게 하자. 그리고 그렇게 되었다.
10.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마른 [토지]를 땅이라 부르셨다. 그리고 물들이 함께 모인 것을 바다들이라 부르셨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보셨더니 그것은 선 이었다.
11. 하느님께서 말하셨다, 땅은 부드러운 풀잎을 내고, 풀잎은 씨를 산출하라, 그리고 과일 나무는 땅에서 본질적으로 씨가 있는 과일을 그 종류대로 맺으라. 그리고 그것은 그렇게 있었다.
12. 그래서 땅은 부드러운 풀잎, 그 종류대로 씨를 산출하는 풀잎을, 본질적으로 씨가 있는 열매를 맺는 나무를 내놓았다. 하느님께서 보셨더니 이것은 선 이었다.
13. 저녁과 아침은 셋째 날 이었다.
14. 그리고 하느님께서 말하셨다. 하늘들의 광활한 공간에 발광체들이 있어 낮과 밤이 구별되게 하라, 그리고 그것들을 표시와 계절과 날과 해를 위해 있게 하라.
15. 그리고 그것들이 하늘의 광활한 공간에 있는 발광체들을 위해 있게 하여 땅에 빛 을 주게 하라. 그리고 그것은 그렇게 있었다.
16.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두 개의 큰 발광체를 만드시고, 더 큰 발광체는 낮을 규율하 고, 보다 작은 발광체는 밤을 규율하게 하셨다. 그리고 별들(도 만드셨다).
17.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그것들이 땅에 빛을 주도록 하늘의 광활한 공간에 두었다.
18. 낮을 규율함, 그리고 밤을 규율함, 그리고 빛과 어둠 사이를 구분함; 그리고 하느 님께서는 그것이 선 이었음을 보셨다.
19. 저녁과 아침은 넷째 날 이었다.
20. 하느님께서 말하셨다. 물들은 기는 것(동물),(과) 살아있는 혼을 기게 하 는 원인이 되라. 그리고 새는 하늘들의 광활한 공간의 얼굴들의 위쪽, 땅 위에서 날으라.
21.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큰 고래들, 그리고 물들이 각 종류에 따라 기게 한, 기는 모 든 살아있는 혼, 그리고 날개 달린 모든 새들을 그 종류대로 창조하셨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보셨더니 그것은 선 이었다.
22. 그리고 하느님께서 이것들에 복주셨고 말하시기를, 열매를 많이 맺고 번성하라, 그리고 바다들에 있는 물들을 채우라, 그리고 새는 땅에서 번성할 것이다.
23. 저녁과 아침은 다섯째 날 이었다.
24. 그리고 하느님께서 말하셨다, 땅은 그 종류대로 살아 있는 혼을 내라; 그리고 짐 승, 그리고 그 자체 움직이는 것, 그리고 땅의 야생 동물을 그 종류대로 내라; 그 리고 그것은 그렇게 있었다.
25.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땅의 야생 동물을 그 종류대로, 그리고 짐승을 그 종류대로, 그리고 지면에서 기는 모든 것을 그 종류대로 만드셨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보셨 더니 그것은 선 이었다.
26. 하느님께서 말하셨다, 우리가 우리의 모습에 따라 우리의 형상에서 사람을 만들 자. 그리고 그것들로 바다의 고기와 하늘들의 새와 짐승과 모든 땅, 그리고 땅 위 에서 기는 모든 기는 것들을 다스리게 하자
27.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그분 고유의 형상으로 창조하셨고, 하느님의 형상 안 에서 그분은 그를 창조하셨다; 남성과 여성(으로) 그분은 그들을 창조하셨다.
28.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그들에게 복을 주셨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그것들에게 말하 셨다. 열매를 많이 맺으라, 그리고 번성하라, 그리고 땅을 계속 채우라, 그리고 땅 을 정복하라; 그리고 바다의 물고기, 하늘들의 새, 땅위에서 기는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을 다스려라.
29. 그리고 하느님께서 말하셨다, 보라, 나는 너에게 온 땅의 얼굴들에 있는 씨를 맺 는 모든 풀잎, 그리고 열매있는 모든 나무를 준다; 씨를 산출하는 나무, 그것은 너에게 양식을 위하여 있을 것이다.
30. 그리고 땅의 모든 야생 동물에게, 그리고 하늘들의 모든 새에게, 그리고 살아 있 는 혼이 있는 땅 위에서 기는 모든 것에게, 푸른 모든 풀잎은 양식을 위하여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그렇게 있었다.
31.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그분이 만드신 모든 것을 보셨고, 바라보셨더니 그것은 참 선 이었다. 그리고 저녁과 아침은 여섯째 날 이었다.
각 절의 내적 의미

1절. 시작에서 하느님께서는 하늘(들)과 땅을 창조하셨다.
최 고대의 시간이 ‘시작’이라 불리운다. 이는 예언자들에 의해 여러 구절들에서 “옛(것)의 날들”, 그리고 또한 “영원의 날들”로 불리우고 있다. “시작”은 또한 인간이 거듭나지고 있는 때에서 첫 기간을 포함하는데, 그 이유는 그 때 인간은 새로이 태어나지고, 생명을 받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거듭남 자체는 인간의 “새로운 창조”라고 불리운다. 예언서의 거의 모든 부분들에 있는 “창조”, “형성”, “만듦”이라는 단어가 의미에서는 약간씩 차이는 보이지만 대체로 거듭남을 의미하고 있다. 이사야서의 경우:
내 이름을 수단으로 불리우는 모든 자(를), 나는 내 영광을 위해 그를 창조했고,
나는 그에게 모양을 주었다, 그렇다, 나는 그를 만들었다 (이. 43:7).
그러므로 주님은 “되찾으시는 분,” “자궁으로부터 모양을 주시는 분,” “만드시는 분,” 그리고 또한 “창조하시는 분”이시라 불리운다; 이사야서에서
나는 여호와 네 거룩한 자, 이스라엘의 창조자, 네 왕이다 (이. 43:15).
다윗서에서:
창조된 사람들이 야(Jah)를 찬양할 것이다 (시. 102:18).
당신은 당신의 영을 내보내시고, 그들이 창조되어지고, 그리고 당신은 지면의
얼굴들을 새로이 하십니다 (시. 104:30).
“하늘”이 내적 인간을, “땅”이 외적 인간을 의미하고 있는 것은 뒤이어지는 구절로부터 알게 될런지 모른다.

2절. 땅은 공허하고 텅비었고, 그리고 짙은 어둠이 깊음의 얼굴들 위에 있었다. 그리고 하느님의 영이 물들의 얼굴들 위에서 움직이셨다.
인간의 거듭남 이전, 그는 “공허하고 텅빈 땅”이라 불리우는데, 또한 선과 진리가 전혀 씨뿌려지지 않았던 “지면”이라고도 불리운다; “공허하다”는 선에 관한 것이, “텅비다”는 진리에 관한 것이 씨뿌려지지 않았다는 말이다. 이로 인해 “짙은 어둠”이 오는데, 즉 우둔함, 그리고 주님에 관한 신앙에 속하는 모든 것에 무지함, 그 결과 영적 측면에 속하는 모든 것과 천국의 생명에 무지함(이다). 이런 인간을 예레미야를 통해 주님께서 이렇게 묘사하신다:
내 백성들은 우둔하다, 그들은 나를 알지 못해 왔다; 그들은 어리석은 아들들이다,
그리고 총명하지 않다; 그들은 악을 행하는 데는 영리하다, 그러나 선을 행하기 위해서
그들은 지식을 가지고 있지 않다. 나는 땅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보라 공허하고
텅빔(이다), 그리고 하늘들, 그리고 그것들은 빛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예. 4:22-23).

“깊음의 얼굴들”은 거듭나지 않고 있는 인간의 욕망들(craving, 또는 탐욕들). 그리고 거기로부터 근원하는 거짓들이다. 거듭나지 안ㅎ고 있는 자는 이 욕망들과 거짓으로 되어 있고, 이 안에 완전히 침수되어 있다. 이 상태는 빛을 가지지 못하는 바, 그는 “깊음”, 또는 불명확하고 혼돈된 어떤 것과 같다. 또한 이런 인물들은 말씀의 여러 구절들에서 “깊은 곳”, 그리고 “바다의 깊은 곳”이라 불리는데, 이것이 인간이 거듭나기 전, “말라붙어 있다,” 또는 “황폐되어 있다.” 이사야서의 경우:
고대의 날들 안에서, 옛 세대들 안에서와 같이 눈뜨고 있게 하소서.
당신은 바다, 큰 깊은 곳의 물들을 말라붙게 하신 그분, 몸값을 치루고
되찾는 자가 건너가도록 바다의 깊은 곳을 길로 만드신 그분 아닙니까?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되찾은 자가 돌아올 것입니다 (이. 51:9-11).
위와 같은 사람이 천국으로부터 보여질 경우, 생명력이 결여된 검은 덩어리같이 나타난다. 같은 방식의 표현들이 예언자들에 의해 자주 말해지는데, 인간의 황폐함을 포함한다. 이것은 거듭남에 앞서 있다; 그 이유가 인간이 참된 것을 알고, 선인 것으로 감동 받기 전, 참된 것과 선인 것이 들어옴에 저항하고 방해하는 이것 저것들이 반드시 제거되어 있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새 인간이 임신되어질 수 있기 앞서, 반드시 옛 인간은 죽을 필요가 있다.

“하느님의 영”을 수단으로 주님의 자비가 뜻해진다. 이 영이 “움직인다,” 또는 암탉이 자기 알들을 품듯이 “품으신다” 라고 말해지고 있다. 하느님의 영을 움직이게 하는 것은 주님께서 인간 안에 감추여 있게 하신 것, 또는 소중히 보관하시는 것에 해당하는 것이다. 이것은 말씀 안에서 두루 리메인스(remains, 아껴두신 것), 남아 있게 하신 것(remnant)이라 일컬어지는데, 이것은 참된 것과 선인 것에 관한 지식들로 구성되어 있다. 이것은 인간의 외적인 것들이 깡그리 피폐될 때까지 빛 또는 낮 안으로 결코 와지지 않는다, 이 지식들이 이 구절에서 “물들의 얼굴들”이라 불리운다.

3절. 하느님께서 말하셨다, 빛이 있으라, 그리고 빛이 있었다.
첫 상태는 선인 것과 참된 것이 더 높은 어떤 것임을 알기 시작할 때이다. 인간의 외적 측면은 모두 다 선하고 참된 것이 무엇인지를 알려고도 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그것들은 자아를 사랑함과 세상을 사랑함에 속하는 모든 것들을 두고도 선이라고 공상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아 사랑과 세상 사랑에 호의를 보이는 모든 것들을 참된 것이라고 공상한다; 하여 (공상한) 이런 선들이 악들이고, 이런 진리들이 거짓들임은 눈치채지도 못한다. 그러나 인간이 새로운 것을 마음에 품을 때, 그는 먼저 자기의 선들이 선들이 아님을 알기 시작한다, 그리고 또한, 그가 빛 안으로 올 때, 주님이 계신다는 것, 그리고 그분이 선과 진리 자체이심을 (알게 된다). 인간들은 주님이 실재하심을 알아야 한다는 것을 그분 자신께서 요한복음서에서 이렇게 가르치신다:
너희는 내가 있다는 것을 믿지 않으면, 너희는 너희 죄들 안에서 죽을 것이다 (요. 8:24).
또한, 주님이 선 자체, 또는 생명, 그리고 진리 자체, 또는 빛이시다, 그 결과 주님으로부터가 아니면 선도, 진리도 있지 않다는 것을 이렇게 선포하셨다:
시작에서 말씀이 계셨다, 그리고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다, 그리고 하느님은
말씀이셨다…모든 것들이 그분에 의해 만들어졌다, 그리고 그분 없이 만들어졌던
어떤 것도 있지 않았다. 그분 안에 생명이 있었다, 그리고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그리고 이 빛이 어둠 안에서 빛나고 있다. 그분은 참 빛이셨다,
이 참 빛이 세상 안으로 오는 모두 각각의 사람을 비추고 있다 (요. 1:1, 3-4, 9).

4, 5절 그리고 하느님께서 빛을 보셨더니, 그것은 선 이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빛과 어둠 사이를 구별하셨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빛을 낮이라 부르시고 어둠을 밤이라 부르셨다. 그리고 저녁과 아침은 첫째 날 이었다.
빛이 “선”이라 불리운다, 그 이유는 빛이 선 자체이신 주님으로부터 있기 때문이다. “어둠”은 인간에게 새로운 것이 임신되어 태어나기 전, 빛인 듯 나타났던 이런 저런 모든 것들을 뜻한다. 그 이유는 악이 선인 듯, 거짓이 진리인 듯 나타났었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어둠인데, 인간 자신에 어울리는 것들로만 구성되어 있고, 인간에게 여전히 남아있는 것들이다. 주님으로부터 있는 것은 무엇이든 “낮”에 비교되는데, 그 이유는 낮은 빛 속에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인간 고유에 속한 것은 무엇이든 “밤”에 비교되는데, 그 이유는 밤은 어둠 속에 있기 때문이다. 이런 비교함들은 말씀 안에서 자주 발생한다.

5절. 그리고 저녁과 아침은 첫째 날 이었다.
“저녁”을 수단으로, “아침”을 수단으로 뜻해지는 것이 지금 식별되어질 수 있다. “저녁”은 앞서 있는 모두 각각의 상태를 뜻하는데, 그 이유는 저녁이 그늘의 상태, 또는 거짓으로부터와 신앙 없음으로부터의 상태이기 때문이다; “아침”은 이후의 모두 각각의 상태, 빛 속의 것, 또는 진리로부터와 신앙에 관한 지식으로부터의 것이다. 일반적 의미에서 “저녁”은 인간 고유에 속해 있는 모든 것들을 의미한다; 그러나 “아침”은 주님으로부터 있는 것 모두를 말하는데, 다윗을 통해 이렇게 말해졌다:
여호와의 영이 내 안에서 이야기하셨다, 그리고 그분의 말이 내 혀 위에 있었다;
이스라엘의 하느님이 말하셨다, 이스라엘의 바위가 나에게 이야기하셨다. 그분은
태양이 올라오고, 구름들 없는 아침일 때, 밝게 빛나심으로부터, 비를 주심으로부터
부드러운 풀잎이 땅으로부터 밖으로 솟구치는 때의 빛 같이 계신다 (삼하 23:2-4).
“저녁”은 신앙이 없을 때, 그리고 “아침”은 신앙이 있는 때인 바, 세상에 주님의 오심이 “아침”이라 불리운다; 그리고 그분이 오시는 때에 신앙이 없기 때문에, “저녁”이라 불리우기에, 다니엘서에서:
거룩한 자가 나에게 말했다, 저녁조차 그것이 아침이 되는 때,
이천 삼백(일) (단. 8:14, 26).
마찬가지로 이 구절의 말씀에서도 “아침”이 주님의 모두 각각의 오심을 표시하기 위해 사용되어지고 있다; 결과적으로 아침은 새로운 창조에 관한 표현인 것이다.

“날”이 때 자체를 표시하기 위해 사용되는데 말씀에서 이보다 더 공통되는 표시함은 아무 것도 없을 것이다. 이를 위해 이사야서를 보자:
여호와의 날이 가까이 있다. 잘 보라, 여호와의 날이 온다. 나는 천국들을 흔들 것이다,
땅은 내 성남의 분노의 날에 그녀의 장소로부터 흔들릴 것이다. 그녀의 때는 오는 것
근처에 있다, 그리고 그녀의 날들은 오래 끌어지지 않을 것이다 (이. 13:6, 9, 13, 22).
그녀의 오랜 것은 고대의 날들로부터 이다. 그리고 두로는 왕 한명의 날들에 따라
칠십 년을 잊혀져 있을 그 날이 올 것이다 (이. 23:7, 15).
“날”이 때를 표시하기 위해 사용되는 바, 때는 그 때의 상태 또한 표시하는데 사용되어지고 있다. 예레미야서를 보자:
우리에게 화있다, 그 이유는 날이 기울었기 때문, 그 이유가 저녁의 그림자들이
뻗쳐져 있기 때문이다 (예. 6:4).
그리고 다른 구절에서:
만일 너희가 날에 관한 내 언약, 그리고 밤에 관한 내 언약을 헛되이 만들 것이다면,
그들의 계절에는 낮도 밤도 있지 않을 것이다 (예. 23:20, 또한 25).
그리고 다른 구절에서:
옛 것으로부터 이듯 하여지게, 우리의 날들을 갱신하소서 (애. 5:21).

6, 7절. 그리고 하느님께서 말하셨다, 물들 한 가운데 광활한 공간이 있고, 그것이 물들 안에서 물들 사이를 구별되게 하라.
하느님의 영, 또는 주님의 자비가 낮 안으로 참된 것에 관한 지식들과 선인 것에 관한 지식들을 낳고, 그리고 주님이 계시다는 것, 그분이 선 자체, 진리 자체 이시다는 것, 그분으로부터가 아니면 선과 진리는 없다는 첫째가는 이 빛들이 주어진 후, 그 다음 그분은 내적 측면과 외적 측면 사이에, 결과적으로 내적 인간 안에 있는 지식들과 외적 인간 안에 있는 기억 속의 지식들 사이에 구별을 만드신다. 내적 인간은 또한 “광활한 공간”이라 불리운다; 내적 인간 안에 있는 지식들이 “광활한 공간 위쪽의 물들”이라 불리운다; 그리고 외적 인간의 기억 속의 지식들은 “광활한 공간 아래쪽의 물들”이라 불리운다.
인간은 거듭나지고 있음 이전 일 경우, 그는 어떤 내적 인간이 존재하는지조차 모르고, 그는 내적 인간의 본성과 품질에 대하여는 아주 많이 덜 친숙해 있다. 그는 내적 인간과 외적 인간이 서로로부터 구분되어 있지 않다고 상상한다. 그 이유가, 육체적이고 세상적인 것들 안에 침수된 상태에서 그의 내적 인간 역시 그것들 안에 침수되어 있기 때문이다. 하여, 구분된 것이 혼동되고 불명료한 단일체를 구성하고 있다. 그러므로 첫 번째 말해졌다, “물들 한가운데 광활한 공간이 있어라,” 그리고 그 다음, “물들 안에서 물들 사이에 구별이 있게 하자”; 그 뿐만이 아니다, “광활한 공간 아래 있는 물들과 광활한 공간 위에 있는 물들 사이에 구별이 있게 하자,” 이는 다음 절에서 말해진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광활한 공간을 만드셨다, 그리고 광활한 공간 아래에 있는
물들과 광활한 공간 위에 있는 물들 사이에 구분을 만드셨다. 그리고 그것은
그렇게 있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광활한 공간을 천국이라 부르셨다 (창. 1:7-8).
인간이 거듭남의 과정에서 주목하는 다음 것은 그가 내적 인간이 있다는 것, 또는 내적 인간 안에 있는 것들은 선들과 진리들이고, 이것들은 주님 만으로부터 있다는 것을 알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거듭나아져 가고 있는 때에도, 외적 인간은 여전히 선들은 자신으로부터 행해진 것, 진리들은 자신으로부터 말해지고 있다고 상상하는 본성 속에 있다. 인간이 주님의 그것들을 수단으로 인도되어지나 마치 자신 속의 것들을 수단으로 인도되는 듯 하여 선인 것을 행하고, 진리인 것을 말하는 까닭에, 7절에서도 광활한 공간 아래의 물들에 관한 구분이 먼저 언급되고, 그 뒤에 광활한 공간 위의 물들에 관한 언급이 있다. 인간은 자신 속의 것들을 수단으로, 감각들의 오류들을 수단으로, 뿐 아니라 탐욕들을 수단으로 인도되어지고, (그것이) 주님에 의해 참되고 선한 쪽으로 구부려진다는 것 또한 천국의 신비이다, 하여 거듭남의 모든 움직임과 순간 하나하나, 일반적, 세부적으로 공히 저녁으로부터 아침까지, 고로 외적 인간으로부터 내적 인간으로, 또는 “땅”으로부터 “하늘”로 진행된다. 그러므로 광활한 공간, 또는 내적 인간이 지금은 “천국”이라 불려진다.

“땅을 뻗는 것과 천국들을 뻗치는 것”이라 말하는 것은 거듭남을 취급할 때 예언자들이 흔히 사용하는 형체이다. 이사야서를 보자:
고로 여호와 너를 되찾으시는 분, 그리고 자궁으로부터 네게 모양을 주신 그분이
말 하신다; 나는 모든 것들을 만드는 여호와, 나 자신 천국들 만을 뻗어 나아가게
하는 여호와, 땅을 널리 뻗게하는 여호와이시다 (이. 44:24).
그리고 다시, 주님의 강림이 공개적으로 말해지는 대목에서:
상한 갈대를 그분은 부러뜨리시지 않는다, 그리고 연기나는 심지를 그분은 꺼지게
하시지 않는다; 그분은 심판을 진리 쪽에서 낳으실 것이다 (이. 42:3).
즉, 그분은 오류들을 부러뜨리시지 않고, 탐욕들을 꺼지게 하시지 않으나, 그것들을 선하고 참된 것 쪽으로 구부리신다; 그러므로 뒤잇는 바:
여호와 하느님께서 천국들을 창조하신다, 그리고 그것들을 뻗쳐지게 하신다;
그분은 땅을 뻗게 하신다, 그리고 땅으로부터 소출(을 내신다); 그분은 그것 위의
사람들에게 숨을 주신다, 그리고 그 안에서 걷는 그들에게 영(을 주신다) (이. 42:3-5).
같은 취지를 두고 다른 구절들을 나열함으로 인한 중복된 언급은 삼갈 것이다.

8절. 저녁과 아침은 둘째 날 이었다.
“저녁,” “아침,” 그리고 “날”에 관한 뜻은 위 5절에서 언급된 바 있다.

9절. 그리고 하느님께서 말하셨다. 하늘 아래에 있는 물은 모두 한 장소로 모이고, 마른 [토지]가 나타나게 하자. 그리고 그렇게 되었다.
내적 인간과 외적 인간이 있다는 것, 진리들과 선들이 주님으로부터, 내적 인간으로부터, 내적 인간을 통하여 외적 인간에게 흘러든다는 것이 알려질 때, 비록 그것이 그렇게 나타나지지 않을지라도, 그 다음 이런 진리들과 선들, 또는 거듭나고 있는 인간 안에 있는 선하고 참된 것에 관한 지식들은 인간의 기억 안에 저장된다, 그리고 기억 속의 지식들 안에 분류되어져 저장된다; 그 이유가 외적 인간의 기억 안으로 은근히 심어진 것, 그것이 자연적인 것이든, 영적인 것이든, 천적인 것이든, 무엇이든 (일단은) 기억 속의 지식들로서 거기에 머무른다, 그리고 거기로부터 주님에 의해 (꺼내져) 나와진다. 이런 지식들이 “한 장소로 다함께 모아진 물들”이고, “바다들”이라 불리운다. 그러나 외적 인간 자신은 “마른 [토지]”로 불리우나, 다음 절에서 즉시 “땅”이라 불린다.

10절.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마른 [토지]를 땅이라 부르셨다. 그리고 물들이 함께 모인 것을 바다들이라 부르셨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보셨더니 그것은 선 이었다. “물들”이 지식들을 의미하는 것은 말씀에서는 매우 흔히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로 “바다”는 지식들이 수집됨을 의미한다. 이사야서를 보자:
땅은 물들이 바다를 덮듯 여호와에 관한 지식들로 가득할 것이다 (이. 11:9).
그리고 같은 예언서에서, 지식들의 결핍이 취급되어진다:
물들이 바다로부터 실패할 것이다, 그리고 강이 말라붙되 깡그리 말라질 것이다,
그리고 시내들이 물러날 것이다 (이. 19:5-6).
새로운 교회에 관해 이야기하는 학개서에서:
나는 천국들과 땅, 그리고 바다 그리고 마른 [토지]를 흔들 것이다; 그리고 나는
모든 민족들을 흔들 것이다; 그리고 모든 민족들의 바람이 올 것이다; 그리고
나는 이 집을 영광으로 채울 것이다 (학. 2:6-7).
그리고 거듭남의 과정 안에 있는 사람에 관하여, 스가랴서에서:
거기 한 날이 있을 것이다, 그 날이 여호와에게 알려질 것이다; 낮도 아니고,
밤도 아니다; 그러나 저녁 때에 비쳐짐이 있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날에 생명 있는
물들이 예루살렘으로부터 나갈 것이다, 그것의 한쪽 부분은 동쪽의 바다를 향하여,
그리고 그것들의 한쪽은 뒤쪽의 바다를 향하여 (나갈 것이다) (슥. 14:7-8).
거듭나져서 여호와를 예배할 황폐한 사람을 다윗이 묘사하고 있다:
여호와께서는 그분이 가둔 자들을 경멸하시지 않는다; 천국들과 땅, 바다와 바다
안에서 기는 모든 것이 그분을 찬양할 것이다 (시. 69:33-34).
“땅”이 (받아 담는) 용기를 의미한다는 것은 스가랴서로부터 나타난다:
여호와께서 천국들을 뻗치게 하신다, 그리고 땅의 기초들을 놓으신다, 그리고
그분의 한 가운데에서 인간의 영에 모양을 주신다 (슥. 12:1).

11, 12절. 하느님께서 말하셨다, 땅은 부드러운 풀잎을 내고, 풀잎은 씨를 산출하라, 그리고 과일 나무는 땅에서 본질적으로 씨가 있는 과일을 그 종류대로 맺으라. 그리고 그것은 그렇게 있었다. 그래서 땅은 부드러운 풀잎, 그 종류대로 씨를 맺는 풀잎을, 본질적으로 씨가 있는 열매를 맺는 나무를 내놓았다. 하느님께서 보셨더니 이것은 선 이었다.
“땅” 또는 인간이 주님으로부터인 천적인 씨들을 받고 선하고 참된 것으로부터의 어떤 것을 생산할 준비가 되었을 때, 그 다음 주님께서는 먼저 부드러운 것이 솟아오르게 하시는데, 이것이 “부드러운 풀잎”이라 불리운다; 그 다음 더 쓸모있는 어떤 것, 이는 그 자체 안에 씨를 다시 맺는데, “씨를 산출하는 풀잎”이라 불리운다; 그리고 드디어 열매가 많이 열리게 되는 선으로부터의 어떤 것이 그것의 종류에 따라 각각 “자체 안에 씨를 가진 과일을 맺는 나무”라 불리운다. 거듭나아지고 있는 인간이 처음 가지는 품질은, 자기가 행하는 선, 자기가 말하는 진리가 자기로부터 이다 라고 상상하는 것, 실재로 모든 선과 모든 진리는 주님으로부터 있어도 그는 그렇게 상상한다. 하여 그것들이 자신으로부터 있다고 상상하는 누구이든지 그는 아직까지는 진정한 신앙으로부터의 생명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럼에도 그는 이후에 (생명을) 받을런지 모른다; 그 이유는 그가 아직까지는 그것들이 주님으로부터 있다 라고 믿을 수 없기 때문에, 그는 신앙으로부터의 생명을 받도록 준비하는 상태에 아직은 머물고 있기 때문이다. 이 상태가 여기서 생명 없는 것들을 수단으로 표현되어져 있다, 그리고 신앙으로부터의 생명의 계속됨이 생명 있는 것들을 수단으로 표현된다.
씨뿌리시는 그분은 주님이시고, “씨”는 그분의 말씀이다, 그리고 “땅”은 인간이다. 이에 대하여는 그분 자신이 선포해주셨다 (마 13:19-24, 37-39; 막 4:14-21; 눅 8:11-16). 세 복음서 모두 대체로 이렇게 묘사되고 있다:
하느님 왕국은 이러한 바, 마치 땅에 씨를 던지는 사람 같다, 그리고 잠들고
밤과 낮이 일어난다, 그리고 씨는 성장하여 일어선다, 그는 어떻게를 알지 못한다;
그 이유가 땅이 그녀 자신으로부터의 열매를 가져다 주기 때문인데, 먼저,
싹을 내고, 그 다음 이삭, 그후 이삭 안에 알찬 곡식(을 가져다 놓는다) (막 4:26-28).
“하느님의 왕국”을 수단으로, 보편적 의미에서 천국 전체가 뜻해진다; 덜 보편적 의미에서, 주님의 진정한 교회; 그리고 세부적 의미에서, 진정한 신앙 속에 있는 모든 이, 또는 신앙 속의 생명을 수단으로 거듭나진 모든 이(가 뜻해진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인물 역시 “천국”이라 불려지는데, 그 이유는 하느님의 왕국이 그 사람 안에 있기 때문이다. 이를 주님께서 누가복음서에서 가르치신다:
바리새인들이 언제 하느님의 왕국이 올 것이냐고 그분에게 요구했을 때, 그분은
그들에게 대답하여 말하셨다, 하느님의 왕국은 눈에 보이게 오지 않는다:
그들이 말한다, 오 여기다, 또는 오, 저기다! (그러나) 아니다. 그 이유가 잘 보라,
하느님의 왕국은 너희의 안쪽에 있기 때문이다 (눅 17:20-21).
이것은 인간의 거듭남에 관한 세 번째 무대(단계), 즉 회개하는 인간의 상태이다, 그리고 (이 상태 역시) 같은 방식, 즉 그늘로부터 빛으로, 또는 저녁으로부터 아침으로 진행한다;

그러므로 (13절에서) 말해진다. 그리고 저녁과 아침은 셋째 날 이었다.

14-17절. 그리고 하느님께서 말하셨다. 하늘들의 광활한 공간에 발광체들이 있어 낮과 밤이 구별되게 하라, 그리고 그것들을 표시와 계절과 날과 해를 위해 있게 하라. 15 그리고 그것들이 하늘의 광활한 공간에 있는 발광체들을 위해 있게 하여 땅에 빛을 주게 하라. 그리고 그것은 그렇게 있었다. 16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두 개의 큰 발광체를 만드시고, 더 큰 발광체는 낮을 규율하고,보다 작은 발광체는 밤을 규율하게 하셨다. 그리고 별들(도 만드셨다). 17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그것들이 땅에 빛을 주도록 하늘의 광활한 공간에 두었다.
큰 발광체들을 수단으로 뜻해지는 것은 우선 신앙의 본질인 것과 새로이 창조되어가는 이들과 더불어 신앙의 본질이 진보하는 것을 알지 않으면 명료하게 이해되어질 수 없다. 신앙의 참 본질과 생명은 주님 뿐 이시다. 그 이유는 주님을 믿지 않는 자는 생명을 가질 수 없기 때문인데, 이를 주님께서 요한복음서에서 이렇게 선포해 두셨다:
아들을 믿는 자는 영원한 생명을 가지나, 아들을 믿지 않는 자는 생명을 볼 수 없고,
하느님의 분노가 그 사람 위에 머무를 것이다 (요 3:36).
새로이 창조되어가는 이들과 더불어 있는 신앙의 진보는 다음과 같다. 첫째, 그들은 생명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 이유는 생명은 선인 것과 참된 것에만 있고 악과 거짓 안에는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후에 그들은 신앙을 수단으로 주님으로부터 생명을 받는다. 첫 번째, 지식일 뿐인 기억 속의 신앙을 수단으로; 다음에 지성적인 신앙인 이해함에 있는 신앙을 수단으로; 마지막으로 사랑으로부터의 신앙, 또는 구원을 가능케하는 신앙인 심정에 있는 신앙을 수단으로 생명을 받아간다. 이 세 종류 중 첫 두 종류는 3절로부터 13절에서 생명 없는 것들을 수단으로 표현되어져 있다. 그러나 사랑을 수단으로 생명을 주는 신앙은 20절부터 25절 까지에서 생명 있는 것들에 의해 표현되어져 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사랑, 그리고 사랑에서 파생된 신앙이 지금 여기서 먼저 취급되어지고, “발광체들”이라 불리운다; 사랑은 “낮을 규율하는 더 큰 발광체”이다; 사랑으로부터 파생된 신앙은 “밤을 규율하는 더 작은 발광체”라 불리운다; 그리고 이 두 발광체들은 하나를 만들고 있어야 하는 바, 그것들에 관해 말해질 때, 복수를 암시하지 않게 단수 표현으로 “발광체들이 있어라”라고 말해지고 있다.
내적 인간에 있는 사랑과 신앙은 육체상의 외적 인간에 있는 열과 빛과 비슷하다. 이런 이유로 해서 전자는 후자를 수단으로 표현되어진다. 이런 연유에서 발광체들이 “하늘의 광활한 공간 안에 있다,” 또는 내적 인간 안에 있다 라고 말해지는 것이다; 큰 발광체는 내적 인간의 의지 안에, 그리고 작은 발광체는 내적 인간의 이해함 안에 놓인다; 그러나 그것들은 태양의 빛이 그 빛을 받는 대상 안에서 오로지 있어지듯 의지와 이해함 안에서만 나타난다. 의지는 사랑을 가지고 감동되고, 이해함은 진리 또는 신앙을 가지고 감동되는데 이는 주님의 자비로 가능해지는 영역에 속한다.

“큰 발광체들”이 사랑과 신앙을 의미한다는 것, 그리고 “태양, 달, 그리고 별들”이라고도 불리는 것은 예언서로부터도 분명해진다. 에스겔서를 보자:
내가 너희를 소멸할 때, 나는 하늘들을 덮고 거기 있는 별들을 검게 만들 것이다;
나는 구름으로 태양을 덮을 것이고, 달은 그녀의 빛을 주지 않을 것이다; 하늘의
빛으로부터의 모든 발광체들을 나는 네 위에서 검게 만들 것이다, 그래서 나는
네 토지 위에 어둠을 놓을 것이다 (겔. 32:7-8).
위 구절에서는 바로와 이집트인들이 취급되는데, 말씀에서 그들을 수단으로 감각과 기억 속의 것만으로부터의 원리가 뜻해진다; 그리고 감각과 기억속의 것만을 수단으로, 사랑과 신앙이 소멸되어져 갔었음을 아래 구절에서 살필 수 있다:
여호와의 날이 황폐함 안에 토지를 놓기 위해 온다, 그 이유가 하늘의 별들과
거기로부터의 별자리들이 그들의 빛을 주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태양은 그의 나감(해돋음)에서 어둡게 되어지고, 달은 그녀의 빛이 비추지 않게
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 13:9-10).
다시, 요엘서에서:
여호와의 날이 온다, 어둠의 날이고 짙은 어둠의 날이다; 땅은 그분 앞에서 떨린다,
하늘들이 동요한다; 태양과 달은 검어진다, 그리고 별들은 그것들의 빛남을
철수할 것이다 (욜 2:1-2, 10).
다시, 이사야서에서, 주님의 강림에 관해서, 그리고 이방인들이 계발됨에 관해서, 결과적으로 새로운 교회(a new church)에 관해서, 그리고 세부적 측면에서는 어둠 안에 있는 모두에 관해서, 그리고 빛을 받는 모두, 그리고 거듭나지고 있는 모두에 관해 말하는데 다음과 같다:
일어나라, 빛나게 하라, 네 빛이 오기 때문이다; 잘 보라 어둠이 땅을 덮고, 짙은 어둠이
사람들을 덮고 있다, 그래서 여호와께서 네 위에서 일어나실 것이다, 그리고 이방인들이
네 빛 쪽으로 올 것이다, 그리고 왕들은 네 일어남으로부터의 빛남 쪽으로 올 것이다;
여호와께서는 너에게 영원한 빛으로 계실 것이다, 네 태양은 더 이상 저물지 않을 것이다, 네 달이 그 자체를 철수하는 일도 없을 것이다, 그 이유가 여호와가 너에게
영원한 빛이실 것이기 때문이다 (이. 60:1-3, 20).
다윗서에서:
총명 안에서 여호와께서는 하늘들을 만드신다; 그분은 물들 위 너머에
땅을 뻗치신다; 그분은 큰 발광체들을 만드신다, 태양은 낮을 규율하고,
달과 별들은 밤을 규율한다 (시. 136:5-9).
그리고 다른 구절에서:
네 여호와를 찬송하라, 태양과 달아, 그분을 찬송하라, 빛으로부터의
너희 모든 별들아, 그분을 찬송하라, 너희 하늘들 속의 하늘들아,
그리고 하늘들 위 너머 있는 네 물들아 (시148:3-4).
위 모든 구절들에서 “발광체들”은 사랑과 신앙을 의미한다. 하여 “발광체들”이 주님을 향하여 있는 사랑과 신앙을 표현하고 의미했기 때문에 유대 교회 안에서 영구적으로 발광체가 저녁으로부터 아침까지 계속 불타고 있어야함을 엄히 명령해두셨는데, 그 이유는 이 교회 안에 있는 명령 사항들이 주님을 표현했기 때문이다. 이 발광체에 관해서 이렇게 쓰여 있다:
그리고 너는 이스라엘의 아들들에게 명령해서, 그들로 너에게 발광체를 위해
기름을 가져오게 해서 등이 계속적으로 밝히고 있게 할 것이다. 베일 밖,
만남의 천막에서 아론과 그의 아들들은 저녁으로부터 아침까지 여호와 앞에서
그것을 배열할 것이다 (출. 27:20-21).
이것들이 사랑과 신앙을 의미한다는 것, 이것들에 주님께서는 불붙이시어 내적 인간 안에 빛이 드리우게 하시고, 내적 인간을 통하여 외적 인간 안에도 빛을 드리우시는데, 이는 신성한 주님의 자비에 속하는 바, 적당한 장소에서 알릴 것이다.

사랑과 신앙이 처음 “큰 발광체들”이라 불리우고, 후에 사랑은 “더 큰 발광체”, 그리고 신앙은 “더 작은 발광체”라 불리운다; 그리고 사랑에 관해서는 “낮을 규율한다”고 말해지고, 신앙에 관해서는 “밤을 규율한다”라고 말해진다. 이것들은 감추여져 있는 신비함인 바, 날들에 관한 이 끝에서, 주님의 신성한 자비의 허락이 있어 그것들을 설명해 볼 것이다. 이런 비밀들이 날들의 이 끝 안에 더 특별하게 감추어져 있는 이유는 지금이 시대의 종말, (즉) 어떤 사랑도 거의 없고, 그 결과 어떤 신앙도 거의 드문 때이기 때문인데, 주님 자신이 복음서들에서 다음의 말로 예견해 두셨다:
태양이 어두워질 것이고, 달은 그녀의 빛을 주지 않을 것이며, 별들은 천국으로부터
떨어질 것이다, 그리고 천국들의 권능들이 흔들릴 것이다 (마. 24:29).
위 구절에서 “태양”을 수단으로 사랑이 뜻해지는데, 이것이 어둡게 되어진다; “달”을 수단으로 신앙이 뜻해지는데, 이것이 빛을 주지 않는다; 그리고 “별들”을 수단으로 신앙에 관한 지식이 뜻해지는데, 이것이 천국으로부터 추락한다, 그리고 이것들은 “천국들의 미덕들과 능력들”이다.
태고 교회는 사랑 자체 외에 다른 신앙이 없음을 인정했다. 천적인 천사들 역시 사랑으로부터 있는 신앙을 제외하면 신앙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한다. 천국 전체는 사랑으로부터의 천국인데, 그 이유는 사랑으로부터의 생명 외에 다른 생명이 천국들에는 없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천국의 모든 행복이 파생되어 나온다, 이는 너무나 위대해서 그것을 묘사할 재간은 아무 것도 없고, 어떤 인간의 생각에 의해서도 마음에 품어진 적이 없다. 사랑의 영향 아래 있는 이들, 심정으로부터 주님을 사랑하는 이들이 알고 선포하고 지각하는 모든 것은, 모든 사랑, 그 결과 모든 생명은 사랑만으로부터 있다는 것이다. 고로 모든 행복은 주님으로부터서만 온다, 그래서 그들은 사랑의 미미한 것, 생명의 미세한 것, 또는 행복의 아주 작은 것조차도 자신으로부터는 가지지 않는다. 모든 사랑은 주님만으로부터 온다는 것이 그분의 변모하심의 사건에서 큰 발광체, 또는 태양을 수단으로 표현되어져 있는데, 이렇게 쓰여 있다:
그분의 얼굴은 태양같이 빛을 발했고, 그분의 의복은 빛같이 희었다 (마. 17:2).
가장 깊게 있는 것들이 얼굴에 의해, 의복에 의해서는 가장 깊게 있는 것들로부터 진행되는 것들이 의미되고 있다. 고로 주님의 신성이 “태양”, 또는 사랑에 의해 의미된다; 그리고 그분의 인성은 “빛”, 또는 사랑으로부터 진행하는 지혜를 수단으로 의미되어져 있다.

각자의 능력에서도 쉽게 알아지는 것은, 얼마간의 사랑도 없이 가능할 생명은 없다는 것, 그리고 사랑으로부터 흐르는 것이 아니고도 가능할 환희(joy)는 없다는 것이다. 어쨌든 사랑이 이러하고, 생명도 이러하고, 환희도 이러하다: 만일 당신이 사랑들, 바램들(desires, 이것도 사랑으로부터 있기 때문)을 제거한다면, 생각함은 즉시로 중지될 것이고, 당신은 죽은 인물 같이 되어 있을 것이다. 이는 생명에 대하여 나에게 보여졌던 바와 같다. 자아 사랑들과 세상 사랑들도 생명과 환희와 유사한 어떤 것을 그것들 안에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것들 모두는 진정한 사랑, 즉 인간은 모든 것들 위 너머에 주님을 사랑함이, 그리고 자신 같이 이웃을 사랑함이 존재하는 진정한 사랑에 반대되기에, 그것들은 사랑들이 아닌 미워함들 임이 분명해질 것은 틀림 없다. 그 이유가 누군가가 자신과 세상을 사랑하는 정도에 비례하여 그는 자기 이웃을 미워하고, 그러므로 주님도 미워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진정한 사랑은 주님을 사랑함이고, 진정한 생명은 그분으로부터의 사랑 속의 생명이다, 그리고 진정한 기쁨은 이 생명으로부터의 기쁨이다. 진정한 사랑, 진정한 생명은 한분으로부터 밖에 있을 수 없다, 이로부터 진정한 기쁨들과 더없는 진정한 행복들이 흐른다, 천국들 안에 있는 천사들의 경우가 이와 같다.

사랑과 신앙은 분리를 허용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그것들은 하나로 구성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둘은 똑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발광체들”에 관해 말해지는 처음 대목에서, 그것들은 하나로서 간주된 바, “하늘들의 광활한 공간 안에 발광체들(sit luminaries) 이 있어라” 하고 말해진다. 이 상황에 관하여 아래의 경이로운 세부사항들을 관련시켜서 설명하도록 나에게 (주님으로부터) 허락되어졌다. 천적 천사들, 주님으로부터 자기들 안에 있는 천적 사랑의 덕택으로 이 사랑으로부터 신앙에 관한 모든 지식들 안에 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생명과 총명으로부터의 빛 안에 있는데, 이것의 어떤 것도 거의 묘사되어질 수 없다. 그 반면 사랑 없이, 신앙의 교리물로부터의 지식들 안에 있는 영들은 생명의 차거움과 빛의 희미함 안에 있는 바, 그들은 천국들의 첫 문지방에조차도 접근 할 수 없고 다시 뒤돌아 도망한다. 그들 중의 몇은, 비록 그분의 가르침들에 따라 살아오지도 않았으면서도, 자기들은 주님을 믿어왔었노라고 말한다, 이런 품성을 두고 주님께서 마태복음서에서 말하셨다:
나에게 주여, 주여 라고 말하는 모든 이가 천국들의 왕국 안으로 들어가지 않는다;
그러나 내 뜻을 행하는 자가 들어 간다: 그 날에 많은 이들이 나에게 주여, 주여,
우리가 당신의 이름으로 예언하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당신의 이름으로 악마들을
내쫓았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당신의 이름으로 많은 경이한 일들을 행하지 않았습니까?
라고 말할 것이다 (마 7:21,22, 끝절까지).
여기에서 명백해지는 바는, 사랑 안에 있는 이들은 신앙 안에도 역시 있고, 그것에 의해서 천국의 생명 안에도 있다는 것, 그러나 신앙 안에 자기들은 있다 라고 말하는 이들이 사랑의 생명 안에도 있는 것은 아니다는 것이다. 사랑 없는 신앙의 생명은 마치 열이 없는 태양의 빛 같고, 겨울철과 같은 바, 아무 것도 자라지 못하고, 모든 것들이 움직이지 못하고 죽은 듯 있다; 이와 반대로 사랑으로부터 진행하는 신앙은 봄철의 태양의 빛 같아, 태양의 열매 풍성하게 하는 열의 결과로 모든 것들은 성장하며 번성한다. 이것은 영적인 것과 천적인 것들에 관련하여서도 거의 비슷하다. 하여 말씀 안에서도 이것들은 세상과, 땅의 얼굴 위에 존재하는 것들 가지고 통상적으로 표현되어져 있다. 신앙 없음, 그리고 사랑 없는 신앙은 주님에 의해 “겨울”에 비교되어지고 있다. 시대의 종말을 미리 말하시는 마가복음서에서:
너희의 도망감이 겨울에 있지 않도록 기도하라, 그 이유가 이것들은 재해의 날이기
때문이다 (막 13:18-19).
“도망감”은 마지막 때를 뜻한다. 또한 인간이 죽을 때인 그 사람의 때도 뜻한다. “겨울”은 사랑이 결여된 생명이다; “재해의 날”은 다른 삶에서 겪는 비참한 상태이다.

인간은 두 가지 능력을 가지고 있다: 의지력(뜻함, will)과 이해력(이해함, understanding)이다. 이해함이 뜻함에 의해 통치되어질 때, 그것들은 함께 한 개의 마음(one mind)을 구성한다, 고로 한 개의 생명을 구성한다. 그 이유가 인간이 뜻하고 행동하는 것을 그는 생각하고 의도 또한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해함이 뜻함에 일치하지 않을 때 (신앙을 가지고 있다 말하면서 그 신앙에 정반대되어 사는 이들의 경우 같이), 그러면 한 개의 마음은 둘로 분리되어진다. 즉 한 개는 천국 안으로 자체를 드높이려는 바램을 지니고, 다른 하나는 지옥을 향하여 간다; 의지가 모두 각각의 행동 안에서 행위자 일 경우, 전체 인간은 만일 주님의 자비가 그 인간 위에 드리워 있지 않다면 지옥 안으로 곤두박질하여 빠지고 말 것이다.

신앙이 사랑으로부터 분리된 이들은 신앙이 무엇인지조차 모르고 있다. 신앙에 관해서 생각하고 있을 때, 어떤 이들은 이는 단지 생각하기이다 라고, 어떤 이는 주님을 향하여 방향을 잡은 생각하기 이다 고 상상하고, 그것은 신앙으로부터의 교리이다 라고 하는 자는 거의 없다. 그러나 신앙은 신앙으로부터의 교리가 함유하는 모든 것들에 대한 지식과 인정함, 뿐만 아니라 특별하게 신앙으로부터의 교리가 가르치는 모든 것들에 순종하는 것이다. 신앙으로부터의 교리가 가르치고 사람들로 순종하라 하는 첫째가는 것들은 주님을 사랑함과 이웃을 향한 사랑이다, 그 이유가 만일 인간이 이 두 교리 안에 있지 않다면, 그는 신앙 안에 있지 않다. 이것을 주님께서 마가복음에서 아주 명백하게 가르치시는 바 그것에 관한 의구심을 떨쳐버리게 한다.
마가복음서에서:
모든 명령 중의 첫째[이다], 귀 기울여라, 오 이스라엘이여; 주 우리의 하느님은
한 분 주님이시다. 너희는 모든 네 심정으로, 그리고 모든 네 혼으로, 그리고
네 모든 지성으로, 그리고 모든 네 힘으로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할 것이다:
이것이 첫째 명령이다. 그리고 둘째도 비슷하다, 즉 이것이다, 너희는 너의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할 것이다. 이것보다 더 큰 명령은 없다 (막 12:29-31).
마태복음서에서, 앞의 명령들을 “첫째이고 큰 명령”이라 부르시고, “이 명령에 모든 율법과 예언들이 걸려있다”라고 말하신다 (마 22:37-41). “율법과 예언들”은 넓은 측면에서 신앙으로부터의 교리이고, 전체 말씀이다.

광명체들이 “표시들을 위해, 그리고 계절들을 위해, 그리고 날들을 위해, 그리고 햇수들을 위해” 있을 것이다 라고 말해졌다. 이 말들 안에는 현재 펼쳐 볼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비밀들이 포함되어져 있다. 물론 글자 의미 안에는 신비한 종류의 어떤 것도 나타나 있지는 않다. 여기서는 영적이고 천적인 것들의 교체(alternations)가 일반적, 세부적 측면에서 있다는 것, 이것들이 날들과 햇수들에 비교되어진다는 것을 주목해보는 것으로 만족해야 할 것 같다. 날들의 변화는 아침으로부터 정오로, 그로부터 저녁으로, 그리고 밤을 통과하여 아침으로 이다; 햇수들의 변화도 이와 유사하다, 즉 봄으로부터 여름으로, 가을로, 그리고 겨울을 통하여 봄으로 이다. 하여, 열과 빛의 교체가, 그리고 땅의 생산물의 교체가 있다. 이 변화들에 영적이고 천적인 것들의 교체가 비교되어진다. 이와 같은 교체와 다양함 없는 생명은 불변할 것인 바, 결과적으로 생명이 전혀 없다; 선과 진리는 식별되고 구별되어질리 없을 것이고, 지각됨은 더 더욱 없을 것이다. 이런 교체들이 예언서들에서 “법칙들, ordinances, 정해놓은 질서”로 불리었다. 예레미야서를 보자:
여호와께서 말하셨다, 이 분은 빛을 위해 낮에는 태양을 주신다,
그리고 달과 별들의 법칙은 밤에 빛을 위해서이다…이 규례들은
내 앞으로부터 물러나지 않을 것이다 (예. 31:35-36).
그리고 같은 예언서에서:
여호와께서 말하셨다, 만일 낮과 밤에 관한 내 언약이 서있지 않다면, 그리고
만일 내가 하늘과 땅의 법칙을 놓아두지 않았다면 (예. 33:25).
그러나 이런 것들에 관하여, 주님의 신성한 자비로부터 창세기 8:22(에서 살핀다).

18절. 낮을 규율함, 그리고 밤을 규율함, 그리고 빛과 어둠 사이를 구분함;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그것이 선 이었음을 보셨다. “낮”에 의해 선이 뜻해지고, “밤”에 의해 악이 뜻해진다; 그러므로 선들은 낮의 일들이라 불리우나, 악들은 밤의 일들이라 불린다; “빛”에 의해 진리가 뜻해진다, 그리고 “어둠”에 의해 거짓이 뜻해진다. 주님께서 말하시는 바:
사람들은 빛보다 어둠을 사랑했다. 진리를 행하는 자는 빛 쪽으로 온다 (요. 3:19, 21).

19절. 그리고 저녁과 아침은 넷째 날 이었다.

20절. 하느님께서 말하셨다. 물들은 기는 것(동물),(과) 살아 있는 혼(soul)을 기게 하는 원인이 되라. 그리고 새(fowl)는 하늘들의 광활한 공간의 얼굴들의 위쪽, 땅 위에서 날으라.
큰 발광체들이 불을 밝혀오고 내적 인간 안에 장소를 두고, 이로부터 외적 인간도 빛을 받은 이후, 인간은 처음으로 살아 있기를 시작한다. 지금까지의 인간은 자신이 행한 선을 놓고 그것은 자신으로부터 있어진 것, 자기가 말한 진리를 두고서는 그것은 자신으로부터 였다고 상상하는 까닭에 그는 살아 있어 왔다고 말해지기는 거의 힘들다; 그리고 인간은 자신으로부터는 죽어 있다, 자신 안에 있는 것은 악과 거짓인 것 밖에 아무 것도 없다, 그러므로 그가 자신으로부터 생산하는 것은 무엇이든 살아 있지 않다, 그 까닭은 그는 그 자체가 선인 선을 행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인간은 선인 것을 생각조차 할 수 없고, 선인 것을 뜻할 수도 없고. 결과적으로 주님으로부터가 아니면 선인 것을 행할 수 없다는 것은 신앙으로부터의 교리로부터 모든 이 각각에게 명백해져야만 할 것이다. 그러기에 주님께서 마태복음서에서 말하신다:
선한 씨를 뿌리는 그분은 사람의 아들이다 (마. 13:37).
어떤 선도 선의 진짜 원천으로부터가 아니면 와질 수 없는데, 이 선의 원천은 오직 한 분이신 바, 주님께서 다른 복음서에서 말하신다:
한 분, 하느님 외에 선한 자는 없다 (눅. 18:19).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 생명 쪽으로 인간을 소생시키실 때, 즉 그를 거듭나게 하실 때, 먼저 그분은 그에게 그가 자신으로부터 선인 것을 행하고, 참인 것을 이야기하는 것을 허용하신다. 그 이유가 최초 시기의 인간은 자신으로부터인 듯 하는 것 외 다른 것은 마음에 품어질 수도 없기 때문, 그리고 믿는 쪽으로 인도되는 길, 후에 모든 선과 진리는 그분만으로부터 있다는 것을 지각하도록 인도되는 길은 먼저 자신으로부터인 듯 하는 방법 밖에 없기 때문이다. 인간이 (주님의 허용하심에서) 이와 같은 길(방도, way)에서 생각하는 동안, 그의 진리들과 선들은 “부드러운 풀”에, 또한 “씨를 산출하는 풀잎”에, 그리고 마지막으로 “과일을 맺는 나무”에 비교되어진다. 이 모두는 생명이 없다; 그러나 지금 그는 사랑과 신앙을 수단으로 생생해지고, 주님이 자기가 행하는 모든 선, 자기가 말하는 모든 진리를 역사하심을 믿는다. 하여 그는 먼저 “물의 기는 것들”에, 그리고 “땅 위에서 나는 새들”에, 또한 짐승에 비교되어진다. 이것들은 모두 생명 있는 것들이다. 그리고 “생 혼들”이라 불리운다.

“물들이 생기게 한 기는 것들”을 수단으로 외적 인간에 속하는 기억 속의 지식들이 의미되어진다; 일반적으로 “새들”은 합리적, 지적인 것들이 의미된다. 이로부터 후자는 내적 인간에 속한다. “물들의 기는 것들”, 또는 “물고기들”은 기억 속의 지식들을 의미한다는 것은 이사야서로부터 분명해진다:
나는 왔고 거기에 사람은 없었다; 내 견책에서 나는 바다를 말렸다, 나는 강들을
황무지로 만든다; 그것들의 물고기에서는 고약한 냄새가 날 것인데, 그 이유는
물이 없어 목말라 죽기 때문이다; 나는 하늘들을 검음으로 옷 입힌다 (이. 50:2-3).
이것이 에스겔서로부터서는 한층 더 명백해진다. 거기서 주님은 새 성전(the new temple), 또는 일반적 측면에서의 새로운 교회(a new church), 그리고 교회 속의 인간, 또는 거듭나는 인물을 묘사하신다; 그 이유가 거듭나는 모든 이 각각은 주님의 성전(a temple)이기 때문이다:
주 여호비께서 내게 말하셨다. 이 물들은 동쪽을 향한 경계선 쪽으로 유출될 것이다,
그리고 바다를 향하여 갈 것인데, 바다 안으로 인도되는 바, 물들이 치료될 것이다;
그리고 강물이 가는 곳은 어디이든 기어다닐 모든 생 혼은 살아있게 될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는 극도로 많은 물고기가 있을 것인데, 그 이유는 이 물들이 그쪽으로
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들은 치료될 것이다, 그리고 강이 닿는 쪽의 모든 것은
살아있을 것이다; 그리고 어부들이 엔게디로부터 에네글라임까지 그것 위에 서서,
그물을 펼칠 것이다; 그것들의 물고기는 종류별로 있을 것인데, 마치 큰 바다의
물고기 같이 극도로 많을 것이다 (겔. 47:8-10).
“엔게디로부터 에네글라임까지 어부들”과 “그물을 펼침”은 신앙으로부터의 진리들로 자신의 자연적 인간을 훈육받을 이들을 의미한다.
“새들”은 합리적이고 지성적인 것들을 의미한다는 것은 예언서들로부터 분명해진다. 이사야서에서:
동쪽으로부터 새를 부르고, 먼 토지로부터 내 의도에 맞는 사람을 부른다 (이. 46:11).
그리고 예레미야서에서:
내가 잘 보니 사람이 없었고, 하늘들의 모든 새들이 도망가 버렸다 (예. 4:25).
에스겔서에서:
나는 우람한 삼목의 새 싹을 심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가지를 들어 올릴 것이다,
그리고 열매를 맺을 것이다, 그래서 장엄한 삼나무일 것이다; 그리고 그것 아래
날개 달린 모두 각각의 새가 거주할 것이다, 거기로부터의 가지들의 그늘 아래에서
그들은 거주할 것이다 (겔. 17:22-23).
그리고 새로운 교회에 관해, 또는 거듭나는 사람에 관해 말하는 호세아서에서:
그 날에 나는 그들을 위해 들판의 들짐승과, 지면의 움직이는 것들과
언약을 만들 것이다 (호. 2:18).
“들짐승”이 들짐승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 “새”가 새를 의미하지 않을 것은 모든 이에게 자명할 것이다, 그 이유는 주님께서 그들과 “새로운 언약을 만드신다”고 말해지기 때문이다.

인간에게 어울리는 것은 무엇이든 그 자체 안에 생명이 없다, 그래서 그것이 명백하게 만들어질 때는 언제나, 그것은 딱딱한 (느낌), 마치 뼈만 앙상한 물체나 검은 물질 같다; 그러나 주님으로부터인 것은 무엇이든 생명을 가지고 있고, 그 안에는 영적인 것과 천적인 것을 포함하고 있다. 이것이 모습을 보일 때 인간적이고 생생함이 나타난다. 이것은 신용할 수 없는 듯 보일런지 모르나 지독하게도 진실되다. 하여 천사들의 영 안에 있는 단 하나인 모두 각각의 사상, 생각하기, 표현은 그것의 미세한 세부 사항들 안에도 생명 자체이신 주님으로부터 진행하는 애착을 포함하고 있다. 그리하여 주님으로부터 있는 것은 무엇이든 그것들 안에 생명을 가진다, 그 이유가 그것들은 그분을 향한 신앙을 포함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이)이 구절에서 “생 혼”에 의해 의미되어져 있다; 그것들은 신체의 한 특성(species)이라 할 수 있는 것 역시 가지고 있는데, 이 구절에서는 “자체를 움직이는 것”, 또는 “기어다닌다, creeps”에 의해 의미되어져 있다. 어쨌든 이런 진리들은 인간에게는 아직까지는 깊은 수준의 비밀들일 뿐이다. 그리고 지금은 “생 혼”, 그리고 “자체를 움직이는 것”만이 언급되어 취급되어지고 있다.

21절.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큰 고래들, 그리고 물들이 각 종류대로 기어다니게한 기는 모든 살아 있는 혼, 그리고 날개 달린 모든 새들을 그 종류대로 창조하셨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보셨더니 그것은 선 이었다.
“물고기들”은, 앞서 말했던 바 같이 기억 속의 지식들을 의미하는데, 지금은 주님으로부터의 신앙을 수단으로 생명이 있다, 고로 살아 있다. “고래들”은 기억 속의 지식들에 종속됨 안에 있는 그 지식들의 일반적 원리들이다, 그리고 일반적 원리들로부터 세부적인 것들이 있다; 그 이유가 세부적인 것들이 존재하되 일반적 원리 아래 있지 않은 것은 우주 안에 없기 때문이다. “고래들”, 또는 “큰 물고기들”은 때로는 예언자들에 의해서도 언급되기도 하는데, 거기서도 그것들은 기억 속의 지식들 속의 일반적인 것들을 의미한다. 이집트 왕 바로(그를 수단으로 인간의 지혜나 총명, 즉 일반적 측면에서의 지식이 표현되어져 있다)가 “큰 고래”라 불리운다. 에스겔서를 보자:
잘 보라, 나는 너에 맞서 있다, 이집트의 왕 바로여, 자기 강들 한 가운데 누워있는
큰 고래여, 하여, 내 강은 나의 소유이다, 그리고
나는 나 자신을 만들었다 말했다 (겔. 29:3).
그리고 또 다른 구절에서:
이집트 왕 바로를 위해 애가를 채택하라, 그리고 그에게 말해라,
너는 바다들에 있는 고래 같다, 그리고 네 강들 안에서 나갔다,
그리고 네 발로 물들을 괴롭혔다 (겔. 32:2),
이런 말들을 수단으로 기억적 지식들을 수단으로, 고로 자신들로부터 신앙 속의 비밀들 안으로 진입하기를 바라는 이들이 의미되어져 있다. 이사야서에서:
그 날에 여호와께서는 그분의 단단하고 크고 강한 검을 가지시고 꽤나 긴 뱀
리워야단, 꼬불꼬불하기까지 한 뱀 리워야단을 방문하실 것이다. 그리고
그분은 바다 안에 있는 고래들을 죽이실 것이다 (이. 27:1).
“바다 안에 있는 고래들을 죽임”에 의해서 진리로부터의 일반적 원리들조차 모르는 인물들이 의미되어지고 있다. 그래서 예레미야서에서:
바빌론의 왕 느부갓네살이 나를 삼켰다, 그는 나를 괴롭혔다, 그는 나를 텅빈
그릇으로 만들었다, 그는 나를 고래같이 들이켰다, 그는 자기 배를 나의 맛있는
것을 가지고 채웠다, 그는 나를 내 던졌다 (예. 51:34),
고래가 요나에게 했듯, 그는 이 구절에서 “맛있는 것”이라 부르는 신앙으로부터의 지식들을 삼켰음을 명시하고 있다; “고래”는 신앙에 관한 지식들로부터의 일반적 원리들을 단지 기억 속의 지식으로만 소유하는 이들, 그리고 이런 방식 안에서 행동하는 이들을 명시하고 있다.

22절 그리고 하느님께서 이것들에 복 주셨고 말하시기를, 열매를 많이 맺고 번성하라, 그리고 바다들에 있는 물들을 채우라, 그리고 새는 땅에서 번성할 것이다.
주님으로부터 자체 안에 생명을 가지는 모든 것은 그 자체 열매를 많이 맺고 광대하게 번성한다; 이는 육체 안에서 살 때보다 다른 삶에서는 깜짝 놀라는 수준에서 (전개된다). 말씀에서 “열매를 맺는 것”은 시랑으로부터 있는 것들을, 그리고 “번성하는 것”은 신앙으로부터 있는 것들을 단정하고 있다. 말씀에서 있는 주님의 “복 주심” 역시 열매를 많이 맺음과 번성함을 의미하는데, 그 이유는 복 주심이 사랑과 신앙으로부터 진행되기 때문이다.

23절. 저녁과 아침은 다섯째 날 이었다.

24, 25절. 그리고 하느님께서 말하셨다, 땅은 그 종류대로 살아있는 혼을 내라; 그리고 짐승, 그리고 그 자체 움직이는 것, 그리고 땅의 야생 동물을 그 종류대로 내라; 그리고 그것은 그렇게 있었다. 25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땅의 야생 동물을 그 종류대로, 그리고 지면에서 기는 모든 것을 그 종류대로 만드셨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보시니 그것은 선 이었다.
인간, 땅 같아서, 신앙에 관한 지식들이 그 인간 안에 먼저 뿌려지지 않으면 선으로부터의 어떤 것도 생산할 수 없는 바, 무엇에 의하여 인간은 믿어지고 행함이 있는 지를 알아야 할런지 모른다. 말씀을 듣는 것은 이해력의 직무이고, 그것을 행하는 것은 의지력의 직무이다. 말씀을 들었는데, 그것을 행하지 않는 것은 마치 우리가 믿노라고 말하는데, 자기의 신조에 따라 살지 않을 때의 경우와 같다; 이럴 경우 우리는 들음과 행함을 분리하고 있다, 고로 분단된 마음(mind)을 가진다, 하여 주님께서 “어리석은 자”라 부르시는 자가 되어 간다. 아래 구절을 읽어보자:
내 말들을 듣고, 그리고 그것들을 행하는 자는 누구이든, 나는 그를 반석 위에
자기 집을 건축한 슬기로운 인간에게 비교할 것이다: 그러나 내 말들을 듣고,
그리고 그것들을 행하지 않는 모든 이를, 나는 모래 위에 자기 집을 건축한
어리석은 자에 비교할 것이다 (마. 7:24, 26).
이해함에 속하는 것들은, 앞서 보였던 바 같이, “물들이 생기게 한 기는 것들”, 그리고 또한 “땅위에 있는 새”, 그리고 “광활한 공간의 얼굴들 위에”에 의해 의미되어져 있다; 그러나 뜻함 속에 있는 것들은 여기서 “땅이 생산하는 생 혼”, 그리고 “짐승”, 그리고 “기는 것”, 또한 “그 땅의 야생 동물”에 의해 의미되어져 있다.

고로 태고 때에 살았던 이들은 이해함과 뜻함에 관련되는 것들을 (한꺼번에) 의미했다; 그러므로 예언서들에서, 구약 성경의 말씀 안에서 비슷한 것들이 여러 다른 동물들을 수단으로 꾸준히 표현되어져 있다. 짐승(beast)들은 두 종류가 있다; 악한 짐승, 그렇게 부르는 이유는 그것들이 피해를 입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선한 짐승, 그것들은 피해를 주지 않기 때문이다. 인간 안에 있는 악은 악한 짐승들에 의해 의미되는데, 예를 들면, 곰들, 이리들, 개들 등등이다; 그리고 선하고 온화한 것들은, 어린 암소, 양, 어린 양이 지닌 본성을 수단으로 의미되어지고 있다. 이 구절에서 참조되는 짐승들은 선하고 온화한 것들이다, 그런고로 애착(affection)들을 의미하는데, 그 이유는 창세기 1장이 거듭나지고 있는 이들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 안에서보다 더 수준 낮은 것(애착)들, 이것들은 신체와 더 잘 연결되는데, “그 땅의 야생 동물들”이라 불리우고, 그리고 탐욕들(cupidities)과 쾌락들(pleasures)이다.

“짐승들”이 인간의 애착들, 악한 자의 경우는 악한 애착, 선한 자의 경우는 선한 애착을 의미한다는 것은 말씀 안의 수많은 문단들로부터 분명해지는데, 몇 구절만 살핀다. 에스겔서에서:
잘 보라, 나는 너를 위하여 있다, 그래서 나는 너를 뒤돌아 볼 것이다, 하여
너희는 갈고 뿌릴런지 모른다, 그리고 나는 네 위에서 사람과 짐승을 불어나게
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들은 불어나 열매를 산출할 것이다; 그리고 나는 너의
고대 때 안에서와 같이 너희를 살도록 해 주겠다 (겔. 36:9, 11, 거듭남을 취급함).
요엘서에서:
내 들판의 너희 짐승들은 걱정하지 말라, 그 이유는
광야의 거주하는 장소가 풀이 무성해지기 때문이다 (욜. 2:22).
다윗서에서도 역시:
이렇게 나는 어리석었다, 나는 당신 앞에서 짐승 같이 있었습니다 (시. 73;22).
예레미야서에서, 거듭남을 취급하면서:
잘 보라, 그 날이 온다, 여호와께서 말하시는 바, 나는 이스라엘 가문과 유다 가문을
사람의 씨와 짐승의 씨를 가지고 씨뿌릴 것이다, 그리고 나는 건축하고 심는
그들을 돌보아 줄 것이다 (예. 31:27-28).
“야생 동물들”도 비슷한 의미를 가진다, 호세아서를 보자:
그 날에 나는 그들을 위해 들판의 야생 동물들과 더불어, 그리고 하늘들의 새와 더불어, 그 리고 땅의 기는 것과 더불어 언약을 만들 것이다 (호. 2:18)
욥기서에서:
너는 땅의 야생 동물들을 두려워 말라, 그 이유는 네 언약이 들판의 돌들과
더불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들판의 야생 동물들은 너와 평화로이
있을 것이다 (욥. 5:22-23).
에스겔서에서:
나는 너와 평화의 언약을 만들 것이다, 그리고 악한 야생 동물들이 토지로부터
중지되게 할 것이다, 하여 그들은 광야 안에서 확신을 갖고 거주할 것이다 (겔. 34:25).
이사야서에서:
들판의 야생 동물들이 나를 존경할 것이다,
그 이유는 내가 광야에 물들을 주었기 때문이다 (이. 43:20).
에스겔서에서:
하늘들의 모든 새들이 자기들의 둥지를 그 굵은 가지들에 만들었다, 그리고
그 나뭇가지 아래 들판의 모든 야생 동물들이 자기들의 새끼들을 낳을 것이다.
그리고 그 그늘 아래 모든 민족들이 거주할 것이다 (겔. 31:6).
이 대목은 아시리아인을 두고 말해지는데, 그들을 수단으로 영적 (평면의) 인간(the spiritual man)이 의미되어져 있다, 그리고 그가 에덴의 동산에 비교되어진다.
다윗서에서:
너희는 그분을 찬양하라, 모든 그분의 천사들아, 땅으로부터 여호와를 찬양하라,
너희 고래들아, 과일 나무들아, 야생 동물아, 그리고 모두 각각의 짐승아,
기는 것이여, 그리고 날고 있는 새여 (시. 148:2, 7, 9-10).
위 구절에서의 언급은 같은 것(한 가지 것)에 관해서이다. “고래”, “과일 나무”, “야생 동물”, “짐승”. “기는 것”, “새” 들이 인간 안에 있는 살아있는 원리들을 의미하지 않으면 그것들로 여호와를 찬양하라고 불러지지도 않을 것이다.
예언자들은 “짐승들”과 “땅의” “야생 동물들”, 그리고 “짐승들”과 “들판의” “야생 동물들”을 조심스럽게 구별해 놓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 안에 있는 선들이 “짐승들”이라 불리는데, 천국에서 주님에게 가장 가까이 있는 이들이 “동물들”이라 불리는 것과 꼭 같다. 에스겔서와 계시록서 모두에서:
모든 천사들이, 그리고 원로들이, 그리고 네 동물들이 왕좌를 빙둘러 섰다,
그리고 자기들의 얼굴을 왕좌 앞에 떨구었다, 그리고 어린 양을 경배했다
(계. 7:11; 19:4).
복음을 가진 이들은 창조물이라 불린 그들에게 전도했다, 그 이유는 그들이 새로이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너희는 세상 안으로 가라, 그리고 모든 창조물에게 복음을 전하라 (막. 16:15).

이런 말들이 거듭남에 관련하여 비밀들을 포함하고 있다는 것은 앞 구절(24절)에서 말해졌던 바와 뒷 구절(25절)로부터 분명하다, 즉 땅은 “생 혼, 짐승, 그리고 땅의 야생 동물”을 낳았다, 이에 반해 다음 절에서는 순서가 바뀌고 있다. 즉 하느님께서는 “땅의 야생 동물을” 만드셨다 라고 말해졌다, 그리고 “짐승”의 순서는 마찬가지이다; 그 이유는 첫째로, 그리고 그후 그가 천적 수준이 되어갈 때까지, 인간은 자신에 관한 것을 만들어 가고 있다; 고로 거듭남은 외적 인간으로부터 시작하여, 내적 인간 쪽으로 진행한다; 그러므로 여기서(25절)는 또 다른 순서가 있다, 그리고 외적인 것들이 먼저 언급되었다.

그 다음 인간이 이해력에 속하는 신앙의 원리로부터 이야기할 때, 그리고 그것에 의해서 자신이 참된 것 안에 있음과 선인 것 안에 있음을 확증할 때 그는 거듭남의 다섯 번째 상태 안에 있음이 나타난다. 그러면 그 사람에 의해 낳는 것들은 생명이 있음이다, 그래서 “바다의 물고기들”, 그리고 “하늘들의 새들”이라 불리운다. 그가 이해함에 속하는 신앙으로부터, 그리고 뜻함에 속해 있는 신앙에서 파생된 사랑으로부터 진리들을 이야기하고, 선들을 행할 때, 그는 여섯째 상태 안에 있다; 그 다음 그가 낳는 것은 “생 혼”, 그리고 “짐승”이라 불린다. 그리고 그 다음 그가 신앙으로부터 뿐 아니라, 사랑으로부터 행동하기를 시작할 때, 그는 “하느님의 형상(image)”인 영적 (평면의) 인간(a spititual man)이 되어 간다. 이것이 지금 다루어지는 주제이다.

26절. 그리고 하느님께서 말하셨다, 우리가 우리의 모습에 따라 우리의 형상 안에서 사람을 만들자. 그리고 그것들로 바다의 고기 위에서, 그리고 하늘들의 새 위에서, 그리고 짐승 위에서, 그리고 모든 땅 위에서, 그리고 땅에서 기는 모든 기는 것들 위에서 통치권을 가지게 하자.
태고 교회 안에서 주님께서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대화하셨던 이 교회인과 더불어, 주님께서는 사람(a Man) 같이 나타나셨다; 이 대목에 관련하여서는 많은 말을 한참 더 해야 하겠지만, 때가 아직 도착한 것 같지는 않다. 어쨌든 태고 교회인들은 자기들을 두고 아무도 사람이라는 표현을 쓰지 않고 단지 주님 자신, 그리고 그분으로부터 있는 것들에 국한해 사용했다; 그들이 자신을 “사람들”이라 부르지 않았으나 단지 자신들 안에 있는 어떤 것들, 즉 사랑으로부터의 모든 선과 신앙으로부터의 모든 진리를 두고 (“사람” 칭호를 붙였는데), 자기들이 이것을 주님으로부터 가졌음을 지각했다. 그들이 “사람으로부터” 있었다고 말했는데, 그 이유는 그것들이 주님으로부터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고로 해서 예언서들 안에서, “사람”과 “사람의 아들”을 수단으로 주님이 뜻해진다; 그리고 내적 의미에서, 지혜와 총명; 고로 거듭나지는 모든 이(까지도 뜻해진다). 예레미야서를 보자:
나는 땅을 잘 보았다, 그리고 보라, 그것은 공허하고 텅빔 이었다, 그리고 하늘들,
그리고 그것들은 빛을 가지지 않았다. 나는 잘 보았고 보니 사람이 없었다,
그리고 하늘들의 모든 새들은 도망가 버렸다 (예. 4:23, 25).
아래 구절, 이사야서에서는 내적 의미에서 , “사람”에 의해 거듭나는 인물이 뜻해지고, 최고 의미에서는 한 분 사람으로서의 주님 자신이 뜻해진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 그를 만들어 내신 분, 여호와께서 말하신다,
나는 땅을 만들었다, 그 위에 사람을 창조했다; 나, 내 손들이 천국들을 펼쳤다,
그리고 그것들의 모든 군대에게 나는 명령했다 (이. 45:11, 12).
그러므로 주님께서 사람으로서 예언자들에게 나타나셨다. 에스겔서를 보자:
광활한 공간 위쪽에, 사파이어 보석의 나타남 같은, 왕좌의 모습이 (있고),
그것 위에 사람의 나타남 같은 모습이 (계셨다) (겔. 1:26).
그리고 다니엘에 의해 보여질 때, 그분은 “사람의 아들”, 즉 사람이라 불리셨다. 다니엘서에서:
나는 보았다, 그리고 잘 보니, 사람의 아들 같은 분이 하늘의 구름들을
사용하시어 왔다, 그리고 날들의 옛적부터 계신 분에게 왔다, 그리고 그들이 그분을
그분 앞 가까이 데려왔다; 그리고 그에게 권세와 영광과 왕국이 주어졌고,
모든 백성, 민족, 언어들이 그분을 섬기도록 했다; 그분의 권세는 영원한 권세여서
사라지지 않을 것이고, 그분의 왕국은 파괴되는 일이 없을 것이다 (단. 7:13, 14).
주님 역시 자신을 “사람의 아들”, 즉 사람이라 부르신다, 그리고 다니엘서와 같이, 영광 안에서 그분이 오심을 미리 말하시고 있다:
그때 그들은 사람의 아들이 권능과 큰 영광과 더불어 하늘의 구름들 안에서
오는 것을 볼 것이다. (마. 24:30).
“하늘의 구름들”은 말씀의 글자적 의미이다; “권능과 큰 영광”은 말씀의 내적 의미이다. 이 의미는 주님과 그분의 왕국만에 관련되는 일반적, 세부적 측면 모두에서 있는 의미이다; 그리고 이로부터 내적 의미는 그것의 권능과 영광을 파생시킨다.

태고 교회는 “주님의 형상”을 수단으로 표현될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이) 이해했다. 인간은 자기가 천사와 영들을 통하여 주님의 통치하심 아래 있다는 것, 모든 이 각각과 더불어 최소한 두 영들과 두 천사들이 있다는 것에 무지해 있다. 영들을 수단으로 인간은 영들의 세계와, 천사들을 수단으로 천국과 교통한다. 영들을 수단으로 영들의 세계와, 천사들을 수단으로 천국과, 그리하여 천국을 통해 주님과의 교통이 없으면, 인간은 전혀 살 수 없다; 인간의 삶은 이 결합에 전적으로 의존된다. 고로 만일 영들과 천사들이 물러가 버린다면, 그는 그 즉시 사멸되고 말리라.
그런데 인간이 타락하고 있다면, 거듭날 때와 전혀 딴판이다. 타락하는 동안 악령이 그와 함께 있고, 악령이 그를 좌지우지 하는 바, 비록 천사가 현존하지만, 천사는 그가 최고로 수준 낮은 악에 빠지지 않도록, 그가 어떤 선 쪽으로 구부려지도록 해보는 것 이상 다른 어떤 것도 할 수 없다. 사실상 그가 선 쪽으로 구부려지게 하는 것은 탐욕들을 수단으로, 진리 쪽으로는 감각들의 오류들을 수단으로 해서 이다. 이때에도 인간은 그와 함께 있는 영들을 통하여 영들의 세계와 교통을 한다, 그러나 천국과의 교통은 그다지 많지 않다, 그 이유는 악령이 통치하고 천사들은 악령들의 통치를 막으려 하는 수준, 소극적 자세를 취해야 하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이 거듭날 때, 천사가 통치하고, 그래서 그는 모든 선들과 진리들로 감화된다, 그리고 악들과 거짓들에 관련해서는 그것들에 대한 걱정과 공포 수준에서만 그치고 있다. 실로 천사들이 그를 인도하나, 오직 봉사할 뿐인데, 그 이유는 주님 만이 천사들과 영들을 통하여 인간을 통치하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이 천사들의 섬김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바, 이 구절에서 “우리가 우리의 형상 안에서 사람을 만들자”라고 복수로 말해지지만, 여전히 주님만이 통치하시고 배치하시기 때문에, 다음 절에서는 “하느님께서 그분의 형상 안에서 그를 창조하셨다”라고 단수로 말해진다. 이것을 주님께서는 이사야서에서 분명하게 선포하신다:
그런고로 여호와, 너를 되찾으신 자, 그리고 너를 자궁으로부터 만들어내신 그분,
나 여호와가 모든 것들을 만들고, 천국들을 펼치시며,
나 자신에 의해 땅을 퍼트린다 (이. 44:24).

“형상”에 주목해보자. 형상(image)은 모습(likness)은 아니나, 모습에 따라 있는다; 그러므로 “우리가 우리의 모습에 따라서(after) 우리의 형상 (안)에서 만들자”라고 말해지고 있다. 영적 인간이 형상이고, 천적 인간은 “모습”, 또는 유사함(similitude)이다. 이 장에서는 영적 (평면의) 인간이 다루어진다; 다음 장에서는 천적 (평면의) 인간이 다루어진다. “형상”인 영적 (평면의) 인간이 주님에 의해 “빛의 아들”이라 불리운다. 요한복음서에서:
어둠에서 걷는 자는 그가 어디로 가는지를 모른다. 너희가 빛을 가지는 동안,
너희는 빛의 아들일런지 모른다 (요. 12:35, 36).
그분은 또한 “친구”라고 일컬으신다:
만일 너희가 내가 명령한 것은 무엇이든 행한다면 너희는 나의 친구들이다
(요. 15:14-15).
그러나 천적 (평면의) 인간, 이 인간은 “모습(likeness)”인데, “하느님의 아들”이라 불리 운다. 요한복음서에서:
그러나 그분을 받아들인 많은 이들, 그들에게 그분은 하느님의 아들이 되는
능력을 주었다, 그분의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조차 (주셨다).
이는 피로부터가 아니고, 육의 의지로부터도 아니고, 인간의 의지로부터도 아니고
하느님으로부터 태어나진 것이다 (요. 1:12-13).

인간이 영적 (평면)에 있는 한, 그의 통치권은 외적 인간으로부터 내적 인간 쪽으로 진행된다. 하여 26절에서 말해지는 바: “그것들로 바다의 고기 위에서, 그리고 하늘들의 새 위에서, 그리고 짐승 위에서, 그리고 모든 땅 위에서, 그리고 땅에서 기는 모든 기는 것들 위에서 통치권을 가지게 하자.” 그러나 그가 천적 평면의 인간이 되어갈 때, 그래서 그가 사랑으로부터 행할 때, 그러면 그의 통치권은 내적 인간으로부터 외적 인간 쪽으로 진행한다. 주님께서 다윗서에서 자신을 묘사하시는데, 더불어 그분의 모습인 천적 평면의 인간도 묘사 하신다:
당신은 그를 당신 손으로부터의 일들 위에서 통치권을 가지게 만드셨다;
당신은 그분의 발 아래 모든 것들, 양떼와 모든 가축떼, 또한 들판의 짐승들,
하늘들의 새, 그리고 바다의 물고기, 그리고 바다의 길을 통과하는 것이
무엇이든 놓아두셨다 (시. 8:6-8).
이 시편 구절에서, “짐승들”이 먼저 언급되고 그 다음 새, 물고기의 언급이 있다, 그 이유는 천적 인간은 의지에 속하는 사랑으로부터 진행하는 바, 영적 인간과 다르다. 하여 영적 인간의 경우는 이해력에 속하는 “물고기들”과 “새”가 먼저 명명되어졌다, 그리고 이것은 신앙 쪽이다; 그리고 “짐승들”은 후에 언급되었다.

27절.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그분 고유의 형상으로 창조하셨고, 하느님의 형상 안에서 그분은 그를 창조하셨다.
“형상”이 여기서 두 번 언급된 이유는 이러하다. 즉 신앙, 이해력에 속하는데, “그분의 형상”이라 불리운다; 이에 반하여 사랑, 의지력에 속하는데, 이것은 영적 인간에서는 뒤에 따라 온다, 그러나 천적 인간에서는 의지 측면인 사랑이 앞에 오는 바, “하느님의 형상”이라 불리운다.

남성과 여성(으로) 그분은 그들을 창조하셨다. 내적 의미에서 “남성과 여성”을 수단으로 뜻해지는 것이 무엇인지는 태고 교회에게는 잘 알려져 있으나, 말씀의 내면의 의미가 이 교회의 후손 사이에서 잃어져 버렸을 때, 이에 따른 비밀들 역시 멸해졌다. 그것들의 결혼들은 행복과 즐거움의 최고의 근원들이었다. 그리고 무엇이든 그들은 결혼에 비교했었는데, 이렇게 함으로 결혼의 더없는 행복을 지각하기 위해서였다. 또한 내적 인간인 그들은 내적인 것만으로 기뻐했다. 외적인 것들을 그들은 눈으로 단지 볼 뿐이고 (외적인 것이) 표현한 것만을 생각했다. 따라서 그들에게 외적인 것들은 별 것이 아니었고, 단지 내적인 것 쪽으로 자기들의 생각을 돌리게 하는 어느 정도의 수단이 되어주는데 불과했다. 하여 천적인 것 쪽으로, 그리고 자기들의 전부되시는 주님 쪽으로, 그 결과 천국의 결혼 쪽으로, 이로부터 그들은 그것의 결혼들로부터의 행복이 와진다는 것을 지각했다. 영적 인간에게 있는 이해함을 그들은 남성이라 부르고, 뜻함을 여성이라 부른다, 그리고 이것들이 하나로서 행동할 때, 그들은 그것을 결혼이라 불렀다. 이 교회로부터 관례가 된 말(speech)의 형체가 왔는데, 이 관례 때문에 교회 자체는 선으로부터 있는 교회의 애착으로부터 마치 “시온의 처녀”, “예루살렘의 처녀” 등등의 말 같이, “딸”, 그리고 “처녀”, 그리고 “아내”라 불리웠다. 이 주제를 놓고 살피는 것은 2:23과 3:15에서 있을 것이다.

28절.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그들에게 복을 주셨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그것들에게 말하셨다. 열매를 많이 맺으라, 그리고 번성하라, 그리고 땅을 계속 채우라, 그리고 땅을 정복하라; 그리고 바다의 물고기 위에서, 하늘들의 새 위에서, 땅 위에서 기는 살아있는 각기 모두 위에서 통치권을 가져라.
태고 사람들은 이해함과 뜻함, 또는 신앙과 사랑의 결합(conjunction)을 결혼이라 불렀던 바, 이 결혼으로부터 생산된 선에 관한 모든 것을 그들은 “열매를 많이 맺음”, 그리고 진리에 관한 모든 것을 “번성함”이라 일컬었다. 이리하여 그것들은 예언서들 안에서 그렇게 불리워진다. 한 예로 에스겔서를 보자:
나는 너 위에서 인간과 짐승을 번성하게 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들은 번성하고
열매를 맺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너를 너희의 고대 때들 같이 거주하게 해 줄
것이다, 그리고 네 시작들에서보다 더 나을 것이다, 그래서 너희는 내가 여호와임을
알 것이다, 그렇다, 나는 사람이 네 위에서, 내 백성 이스라엘 위에서조차 걷게
해 줄 것이다 (겔. 36:11-12).
위 구절에서 “인간”을 수단으로 이스라엘로 불리우는 영적 인간이 뜻해진다; “고대 때들”을 수단으로 태고 교회가, “시작들”을 수단으로 홍수 이후 고대 교회가 뜻해진다. 진리 측면인 “번성함”의 언급이 먼저 있고, 그 후에 선의 측면인 “열매를 많이 맺음”의 언급이 있는 이유는 현재 다루는 대목이 거듭나아지고 있는 인간이지 거듭나진 인간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해함이 뜻함과, 또는 신앙이 사랑과 하나되어질 때, 그 인간은 주님에 의해 “결혼한 토지”라 일컬어진다. 이사야서를 보자:
네 토지를 두고 폐물이라 더 이상 칭하지 않고, 헵시바(내 기쁨이 그녀 안에 있다)
라 불리워질 것이고, 네 토지는 쁄라(결혼했음)라 부를 것인데, 그 이유는 여호와께서
네 안에서 기뻐하시기 때문, 그리고 네 토지는 결혼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 62:4).
거기로부터 유출되는 열매들은 진리로부터인 바, “아들들”이라 불리우고, 선으로부터 있는 이들은 “딸들”이라 불리운다. 이는 말씀 안에서 매우 흔하다. 많은 진리들과 선들이 있을 때,
땅은 “계속 충전되어진다”, 또는 “채워진다”; 그 이유는 주님께서 (거듭나는) 인간에게 복 주시며 이야기하실 때, 즉 그 인간 위에서 일하실 때, 선과 진리의 광대한 증가가 있어지기 때문인 바, 주님께서 마태복음서에서 말하신다:
천국들의 왕국은 겨자-씨 한 알 같은데, 이것을 인간이 가져다가 자기 들판에 뿌렸다,
이것은 모든 씨들 중에서 지극히 작으나, 그것이 성장될 때, 그것은 풀잎들 사이에서
가장 커져서, 나무가 되어간다, 그리하여 천국들의 새들이 와서 그 나무의 가지에
자기들의 둥지를 짓는다 (마. 13:31-32).
“겨자-씨의 한 알”은 인간이 영적 (수준)으로 되어가기 이전에서의 인간의 선이다. 하여 이 선은 “모든 씨들 중에서 지극히 작다.” 그 이유는 거듭나기 전의 인간은 자기로부터 선을 행한다고 생각하기 때문, 그리고 인간이 지닌 것은 악 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거듭남의 상태 안에 있을 경우, 그 사람 안에는 선에 관한 어떤 것이 있으나 그 선은 모든 선 중에서 가장 작은 선이다.
좀 더 설명하면, 신앙이 사랑과 접합할 때, 신앙은 더 크게 성장하고, “풀잎”이 되고, 마지막으로 결합이 완성되어, “나무”가 된다. 그 다음 “천국들의 새들” (이 구절들에서의 경우 진리들, 또는 지상적인 것들을 명시하고 있음) 이 “그 나뭇가지에 자기들의 둥지를 짓는다.” 이것은 기억 속의 지식들이다. 인간이 영적 (평면의) 수준으로 되어가는 때 뿐만 아니라, 영적 (평면의) 수준에 이르러서도, 그는 전투하는 상태 안에 있는 바, 본문에서 “땅을 정복하고 통치권을 가져라” 라고 말해진다.

29절. 그리고 하느님께서 말하셨다, 보라, 나는 너에게 온 땅의 얼굴들에 있는 씨를 맺는 모든 풀잎, 그리고 열매 있는 모든 나무를 준다; 씨를 산출하는 나무, 그것은 너에게 식량을 위하여 있을 것이다.
천적 인간은 천적인 것들만으로 기뻐해진다. 그 이유는 그것들이 자기 생명과 일치하기 때문이다. 하여 이것들은 천적 식량이라 불리운다. 영적 인간은 영적인 것들을 가지고 기뻐해진다. 그 이유는 이것들이 자기 생명과 일치하기 때문, 하여 영적 식량이라 불리운다. 자연적 인간도 위와 마찬가지로 자연적인 것들 가지고 즐거워해진다. 이것이 그의 생명 속에 있는 바, 식량이라 불리는데, 간략히 말해 기억 속의 지식들에 존재한다. 영적 인간이 여기서 다루어지는 바, 그의 영적 식량이 표현물을 수단으로 묘사되는데, “씨를 맺는 풀잎”, 그리고 “열매가 있는 나무”와 같다. 일반적으로는 “씨를 산출하는 나무” 이다. 그의 자연적 식량은 다음 절에서 묘사되어 있다.

“씨를 맺는 풀잎”은 사용을 중요시하는(주목해서 보는, regards) 각각 모두의 진리이다; “열매가 있는 나무”는 신앙으로부터의 선이다; “열매”는 주님께서 천적 인간에게 주시는 식량, 그러나 “열매를 생산하는 씨”는 그분이 영적 (평면의) 인간에게 주는 식량이다. 그러므로 “씨를 산출하는 나무, 네게 그것은 식량을 위해 있을 것이다”라고 말해진 것이다. 천적 식량이 나무로부터의 열매라 불리우는 것은 천적 인간이 취급되는 다음 장으로부터 분명해지는데, 여기서는 이를 확증하는 수준에서 에스겔서로부터 주님의 이 말들만을 인용해보자:
강가, 거기로부터 강둑 위, 이쪽에, 저쪽에, 식량의 각각 모두의 나무가 올라오는데,
이 나무의 잎은 시들지 않고, 거기로부터 열매가 사라지는 일이 없다;
그것은 그것의 달 안에서 다시 태어나진다; 그 이유는 이것들은 성소로부터의
물들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거기로부터의 열매는 식량을 위해 있을 것이다,
그리고 거기로부터의 잎은 치료약을 위해 있을 것이다 (겔. 47:12).
“성소로부터 유출되는 물들”은 “성소”이신 주님의 생명과 자비이다. “열매”는 지혜,
이것이 그들을 위한 식량일 것이다; “잎”은 그들의 사용(use)을 위해 있게 될 총명이
다, 그리고 이 사용이 “치료약”이라 불려진다. 그러나 이 영적 식량이 “풀잎”이라 불리는데, 다윗서로부터 나타난다:
나의 목자, 나는 부족하지 않을 것이다; 당신께서는 나로 풀잎의 초장에
눕게 만드신다 (시. 23:1,2).

30절. 그리고 땅의 각각 모두의 야생 동물에게, 그리고 하늘들의 각각 모두의 새에게, 그리고 살아있는 혼이 있는 땅 위에서 기는 모든 것에게, 각각 모두의 푸른 풀잎은 식량을 위하여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그렇게 있었다.
동일한 인간의 자연적 평면의 음식물이 여기서 묘사되어져 있다. 그의 자연물이 “땅의 야생 동물”과 “하늘들의 새”를 수단으로 의미되어져 있고, 이것에 야채와 풀잎의 푸른 것이 식량을 위해 주어져 있다. 그의 자연적 식량과 영적 식량 모두 다윗서에서 이렇게 묘사되어져 있다:
여호와께서는 짐승을 위해 풀이 자라게 하신다, 그리고 사람의 섬김을 위해 풀잎을,
하여 그는 땅으로부터 빵을 낳을런지 모른다 (시. 104:14),
이 구절에서 “짐승”은 11,12절에서 언급된 땅의 야생 동물과 하늘들의 새 모두를 표
현하기 위해 사용되어져 있다.

“야채와 풀잎의 푸른 것” 만이 자연적 인간을 위한 식량으로 묘사된 이유는 이러하다. 거듭남의 과정에서, 인간이 영적으로 만들어질 때, 그는 전투를 꾸준히 실시해간다, 이렇기 때문에 주님의 교회는 “전투원”이라 불리우기도 한다; 그 이유가 거듭나기 전, 탐욕들이 통치권을 가지는데, 그 이유는 전체 인간은 오로지 탐욕들과 이 탐욕들로부터 파생된 거짓들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거듭나는 동안 이런 탐욕들과거짓들이 한방에 폐지되어질 수 없다, 그 이유는 한방에 폐지되면 그가 획득하고 있는 생명의 전부가 탐욕들과 거짓들인데, 한방에 그의 모든 생명이 파괴되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악령들이 인간과 더불어 계속하는 짓을 내버려두다 보면, 악령들은 인간의 탐욕들을 흥분시키는데, 이 흥분으로 인해 이것들이 느슨해지는 틈이 생기는데, 이는 무수한 방법들에서 있고, 그것들이 주님에 의해 선 쪽으로, 하여 개혁되어질 수 있는 쪽으로 구부려질 수 있다. 전투 시기에서, 악령들은 선하고 참된 것 모두에 맞서, 즉 주님을 향하고 있는 사랑과 신앙, 이것들이 영원한 생명을 가지게 하기 때문에 극도의 미움을 결과 맺는 바, 풀잎의 푸른 것과 야채에 비교되는 식량밖에 그 인간에게 남기는 것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는 그에게 씨를 맺는 풀잎, 그리고 열매 있는 나무에 비교되는 식량 역시 주신다. 이 식량이란 환희와 기쁨과 더불어 있는 고요와 평화의 상태들이다.; 그리고 이 식량을 주님께서는 간헐적으로 인간에게 주신다.
주님께서 인간을 매 순간, 어쩌면 각각 모두의 순간의 지극히 작은 것에 이르기까지에서 방어해주시지 않으면, 인간은 주님을 향한 사랑과 신앙에 관련되는 것들에 맞서는 영들의 세계 안에서 우세를 떨치는 형언할 수 없는 격렬함과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의 미워함의 결과로 곧바로 사멸될 수밖에 없다. 이런 사실의 확실함을 내가 확언할 수 있는데, 나는 (신체를 떠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수 년 동안 다른 삶 안에 있는 영들과 연합되어 왔었기 때문이고, 심지어는 최악의 영들과도 (접촉)되었기 때문이다. 때로 나는 수 천의 영들에 둘러싸인 채로 그들이 독액을 내품는 것도 (당하게) 허용되어진 바 있다. 그들은 가능한 모든 방법에서 나에게 떼지어 달려들었다. 그렇지만 내 머리털 하나 다치게 할 수 없이 안전했던 것은 주님의 보호 덕택이었다. 이런 저런 많은 경험들로부터 나는 영들의 세계와 그곳의 본성에 관하여, 뿐 아니라 영원한 생명의 행복을 누리기 위하여 반드시 견뎌내야 하는 거듭나는 이들의 전투에 관하여도 통째로 교육받아 왔다. 그러나 이런 사실들을 의심없는 신앙으로 믿어짐에서 이런 일반적 묘사만으로 잘 교육될 자는 없을 것이다. 세부적 사항들이 주님의 자비로부터 다음 장에서 관련되어 있을 것이다.

31절.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그분이 만드신 모든 것을 보셨고, 바라보시니 그것은 참 선 이었다.
이 상태는 “참 선”이라 불린다. 앞의 상태에서는 단지 “선”이라 불리웠다; 그 이유는 지금 신앙으로부터 있는 것들이 사랑으로부터 있는 것들과 하나(one)를 만들기 때문이다. 그리고 고로 결혼이 영적인 것들과 천적인 것들 사이에 결과되어져 있다.

신앙에 관한 지식들에 관련되는 모든 것들, 그리고 주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으
로부터 있는 모두가 천적 (수준)이라 불려진다; 전자는 이해력에 속하고 , 후자는 그
의 의지력에 속한다.

인간 거듭남의 때들과 상태들은 일반적, 세부적 측면에서 여섯으로 나뉘어진다. 그리고 그의 창조의 날이라 불리어진다; 그 이유가, 점차로, 전혀 인간이지도 않음으로부터, 그는 처음 한 가지씩 어떤 것이 되어간다. 그렇게 해서 조금씩 그는 여섯째 날까지 도달한다. 여섯째 날 안에서 그는 하느님의 형상이 되어간다.

한편 주님께서는 그를 위해 악들과 거짓들에 맞서 계속적으로 싸우신다. 그리고 전투들을 수단으로 진리와 선 안에서 그를 확증하신다. 전투의 때는 주님께서 일하시는 때이다; 그러므로 예언서들에서 거듭남은 하느님의 손가락의 일이라 불리어진다. 그분은 우리가 사랑을 원리로하여 행동할 때까지 쉬시지 않는다; 그 다음 전투가 중지된다, 일이 꽤 많이 진전되어 갔을 때, 신앙이 사랑과 결합되어지는 바, 이것이 “참 선”이라 불리워 진다; 그 이유는 그 때 주님께서 그분의 모습으로서 그를 움직이시기 때문이다. 여섯째 날의 끝에서 악령들은 떠난다. 그리고 선한 영들이 악령들의 자리에 들어 앉는다. 그리고 인간은 천국 안으로 입문되어진다. 또는 천적인 낙원 안으로 입문되어진다. 이에 관하여는 다음 장의 몫이다.

이상 살핀 내용은 말씀의 내적 의미이고, 말씀 속의 최고의 생명이며, 글자의 뜻으로부터는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사실 여기에 담긴 비밀들은 너무나 많아 이 작은 몇 페이지로 그것들을 펼쳐 전개하는 것은 무리였을 것은 의심치 않는다. 따라서 매우 작은 한, 두 가지, 즉 거듭남이 이 장에서 취급된다는 것, 이 거듭남은 외적 인간으로부터 내적 인간으로 진행한다는 것 정도 뿐이다. 천사들이 말씀을 지각하는 것은 이러하다: 그들은 글자 안에 있는 것의 어떤 것도 전혀 알지 못하는데, 단 하나의 단어를 놓고서도 그러하다; 더욱이 그들은 말씀의 역사적 예언적 부분들에서 자주 오르내리는 나라들, 성들, 강들, 인물들의 이름은 더 더욱 모른다. 그들은 단어들과 이름들에 의해 의미된 것들로부터서만 생각(idea)을 가진다. 고로 낙원에 있는 아담을 수단으로 그들은 태고 교회를 지각하는데, 그럼에도 그 교회가 아닌, 그 교회 속의 주님에 대한 신앙을 지각한다. 노아를 수단으로 그들은 태고 교회의 후손들과 더불어 잔존하여 아브람의 때까지 계속되었던 교회를 지각한다. 아브라함을 수단으로 그들은 그 개인을 결코 지각하지 않고, 그가 표현했던 것, 즉 구원해주는 신앙을 지각할 뿐이다; 이 외 훨씬 많다. 한마디로 그들은 이름들과 단어들과는 완전히 동떨어진 영적인 것들과 천적인 것들을 지각하고 있다.

말씀 안에는 일반적으로 네 가지의 문체가 있다. 첫 번째 문체는 태고 교회로부터의 문체이다. 표현의 이 형식은 지상적이고 세상적인 것이 언급될 때, 영적이고 천적인 것에 관해 생각하는 것과 같은 방식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자신들을 표현물을 수단으로 표현할 뿐만 아니라 이것들이 자기들에게 더 생명을 주도록 하기 위하여 어
떤 종류의 역사적 시리즈들로 만들어 나갔다; 그리고 이것은 그들에게 아주 높은 등급에서 기쁨을 주었다. 이 문체로부터 한나가 예언했다, 말하기를:
높고, 높은 것을 말하라! 고대의 것이 네 입으로부터 나오게 하라 (삼상 2:3).
이런 표현들이 다윗서에서 “옛 (시절)로부터의 어두운 말들”이라 일컬어졌다. 창조에 관한 세부 사항들, 에덴의 동산, 등등, 아브람의 때까지 내려온 것들을 모세가 태고 교회의 후손들로부터 가졌다.
두 번째 문체는 역사물이다. 이는 안쪽으로는 아브람의 때로부터 있는 모세의 책들에서 발견된다. 그리고 여호수아, 사사기, 사무엘, 열왕기로부터의 말씀에서 발견된다. 이 책들 안에서 역사적 사실들은 그것이 글자의 의미에서 나타내는 것과 같다; 그럼에도 그것들 모두는 내적 의미에서는 아주 다른 것들을 일반적, 세부적 측면 모두에서 포함하고 있다. 이 책의 의미는 주님의 신성한 자비로부터 뒤이어지는 페이지들에서 그것들 순서 안에서 (열거 된다).
세 번째 문체는 예언적인 것이다. 이것은 태고 교회에서 아주 높게 받들어 모시다시피 해 왔던 말들로부터 태어났다. 어쨌든 이 문체는 태고 교회 문체처럼 연결되거나 역사적 형체 안에 있지 않고, 깨어져 있고, 내적 의미 안에서가 아니면 이해는 불가능에 가까웁다. 그러나 그 안에는 가장 깊은 비밀들이 있다. 그리고 이 비밀들은 아름답게 연결되는 질서를 따르고 있다. 그러면서 외적 인간과 내적 인간에; 교회의 많은 상태들에; 천국 자체에; 그리고 가장 깊은 의미에서 주님에 관련되고 있다.
네 번째 문체는 다윗의 시편들의 것이다. 이는 예언적 문체와 통상적 (우리의) 언어 사이인 중간에 해당되는 문체이다. 여기서 주님은 왕으로서의 다윗이라는 인물 아래, 내적 의미 안에서 취급되시고 있다.
***************************************************

창세기 제 2 장

성경: 창세기 2장

1. 그리고 하늘들과 땅이 마무리되어졌다, 그리고 그것들의 모든 군대.
2. 그리고 일곱째 날에 하느님께서는 만들어 가시던 그분의 일을 끝내셨다; 그리고 그 분은 일곱째 날에 만드시던 그분의 모든 일로부터 쉬셨다.
3.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일곱째 날에 복을 주셨고, 그 날을 거룩하게 하셨다. 그 이유 는 그분이 만드시고 창조하셨던 그분의 모든 일로부터 쉬셨기 때문이다.
4. 하늘들과 땅의 태생이 이러하다, 즉 여호와 하느님께서 땅과 하늘을 만드셨던 날, 그분이 그들을 창조하셨을 때이다.
5. 땅에는 들판의 관목이 아직 없었고, 그리고 성장하는 들판의 풀잎이 아직 없었다. 그 이유는 여호와 하느님께서 땅에 비를 내리지 않아서였다. 그리고 지면을 경작 할 사람이 없었다.
6. 그리고 그분께서 땅으로부터 안개가 올라오게 하시자 지면의 모든 얼굴은 적시워 졌다.
7. 그리고 여호와 하느님께서 지면으로부터의 먼지로 사람을 만들어 내셨다, 그리고 그의 콧구멍에 생명들의 숨을 불어 넣으셨다, 그래서 사람은 살아있는 혼이 되었 다.
8. 여호와 하느님께서 에덴 안에 동쪽으로 동산을 창설하셨다, 그리고 거기에 그분은 그분께서 만드신 사람을 두셨다.
9. 여호와 하느님께서는 지면으로부터 바라보기에 바람직하고 식품으로 좋은 모든 나 무가 자라게 하셨다. 또한 동산 중앙에는 생명들의 나무가 있었고, 그리고 선과 악 에 관한 지식의 나무도 있었다.
10. 강이 에덴으로부터 나와서 동산을 적셨고, 거기서부터 갈라져서 네 머리가 되었 다.
11. 첫째 강의 이름은 비손이다. 이 강은 금이 있는 곳, 하윌라 온 땅을 에워싸고 있 다.
12. 이 토지의 금은 선(good)이다. 거기에는 벧엘리움과 호마노 돌(onyx stone)도 있 었다.
13. 그리고 둘째 강의 이름은 기혼이고. 구스 온 땅을 에워싸고 있다.
14. 셋째 강의 이름은 힛데겔이고, 이 강은 앗수르를 향하여 동쪽으로 가고 있다. 그리고 넷째 강은 유브라데이다.
15. 여호와 하느님께서는 동산을 경작하고 돌보도록 사람을 데려다가 에덴의 동산에 놓으셨다.
16. 여호와 하느님께서는 사람에게 명령하여, 말하시기를. 너는 동산의 모든 나무로부 터 먹어도 된다.
17. 그러나 너는 선과 악에 관한 지식의 나무로부터 먹지 말라, 그 이유는 그것을 먹 는 그 날에 너는 죽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18. 그리고 여호와 하느님께서 말하시기를. 사람이 홀로있는 것은 좋지 않으니, 내가 그와 함께 있을 도움을 만들리라.
19. 여호와 하느님께서는 지면으로부터 들판의 모든 짐승과 하늘의 모든 새들을 만들 어 내셨다. 그리고 사람이 그것들을 어떻게 부를 것인지를 보시기 위해 그에게 데려왔다. 그래서 사람이 모든 살아있는 혼을 부르자, 그것이 이름이 되었다.
20. 그리고 사람은 모든 짐승에게, 하늘의 새에게, 들판의 모든 야생 동물에게 이름을 주었다. 그러나 사람과 함께할 도움은 발견되지 않았다.
21. 여호와 하느님께서 깊은 잠이 사람에게 떨어지게 하자, 그는 잤다. 그리고 그분은 그의 갈빗대 중 하나를 취하셨고, 그 대신 그 곳을 살로 폐쇄하셨다(메우셨다).
22. 여호와 하느님께서 사람으로부터 취한 갈빗대로 그분께서는 여자를 건축하셨고, 그녀를 사람에게 데려왔다.
23. 그리고 사람이 말했다. 지금 이는 내 뼈들 중의 뼈요 내 살 중의 살이다. 그러므 로 그녀는 아내라 불리울 것인데, 그녀가 사람으로부터 취해졌기 때문이다.
24. 그러므로 남자는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날 것이고, 그리고 그의 아내와 굳게 결합할 것이고, 그리고 그들은 한 몸이리라.
25. 그리고 그들, 남자와 그의 아내 모두는 벌거벗고 있었고,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각 절의 내적 의미

1절. 그리고 하늘(들)과 땅이 마무리되어졌다, 그리고 그것들의 모든 군대.
이 구절은 이제 인간이 “여섯째 날”을 통과하여 영적 수준에 이르렀음을 의미하고 있다. “하늘”은 그의 내적 인간이고, “땅”은 그의 외적 인간이다. “그들의 군대”란 사랑, 신앙, 그리고 사랑과 신앙에 관한 지식이다. 이 세 가지는 앞 장에서 “큰 발광체”와 “별”로 의미되었었다. 내적 인간이 “하늘”이라, 외적 인간이 “땅”이라 불리우는 것은 앞 장에서 이미 인용된 구절들로부터 명백한 바, 이사야서를 더 추가해본다:
나는 사람을 속이 찬 금보다, 오히려 오빌의 귀한 금보다 더 드물어지게 만들겠다;
그러므로 나는 하늘들을 공포로 세게 칠 것이고,
땅은 그것의 장소로부터 흔들릴 것이다 (이. 13:12-13).
너는 하늘들을 뻗치고, 땅의 기초를 놓는 너를 만든 자 여호와를 잊고 있다; 그러나
나는 네 입에 내 말들을 놓을 것이다, 나는 너희를 내 손의 그림자 안에 감출 것이다,
하여 나는 하늘들을 뻗게하고, 땅의 기초를 놓을 것이다 (이. 51:13, 16).
위 인용 구절을 보면 “하늘”과 “땅”이 사람을 함축하고 있다는 것이 분명하다; 그 이유가 비록 그것들이 태고 교회를 첫째로 언급하고 있다 할지라도, 그럼에도 말씀의 내면들은 교회에 관해 말해질 때 교회 속의 멤버들 각각 모두 역시 언급한다고 보아야 하기 때문, 교인이 세부적 측면에서 교회가 아니다면, 일반적 측면의 교회의 부분이 되는 것도 가능할 리 없기 때문, 즉 주님의 성전이 아닌 자가 성전에 의해 의미되는 것, 즉 천국과 교회일 수 없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태고 교회는 단수 표현을 써서 “사람”이라 불리운다.

인간이 “여섯째 날”이 되어갔을 때, “하늘들과 땅과 그것들 속의 모든 군대”가 “마무리되어졌다”라고 말해지고 있다. 그 이유는 그때 사랑과 믿음이 하나를 만들기 때문이다. 이렇게 하나를 이루면 신앙이 아닌 사랑이, 바꿔말하면 영적 수준의 원리가 아닌 천적 수준의 원리가 그의 제일가는 원리가 된다. 즉 천적 인간(a celestial man)이 되는 것이다.

2, 3절. 그리고 일곱째 날에 하느님께서는 만들어 가시던 그분의 일을 끝내셨다; 그리고 그분은 일곱째 날에 만드시던 그분의 모든 일로부터 쉬셨다. 3.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일곱째 날에 복을 주셨고, 그 날을 거룩하게 하셨다. 그 이유는 그분이 만드시고 창조하셨던 그분의 모든 일로부터 쉬셨기 때문이다.
천적 인간이 “일곱째 날”이다. 주님께서 육 일 동안 일하셨기 때문에 “그분의 일”이라 불리워진다. 모든 전투가 중단되었으므로 주님은 “그분의 모든 일로부터 쉬신다”라고 말해지고 있다. 이렇기에 일곱째 날은 성별되었고 안식일이라고 불렀다. 히브리어에서 안식일은 쉼을 의미하고 있다. 이리하여 인간은 창조되었고, 형태를 갖추었고, 만들어졌다.

천적 인간이 “일곱째 날”이다는 것, 그러므로 일곱째 날은 거룩하게 하셨다는 것, 그리고 안식일이라 불렀다는 것은 지금까지 발견되지 않았던 신비이다. 그 이유는 누구도 천적 인간의 본성에 관해 친숙해 있지 않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영적 인간의 본성에 친숙한 자는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친숙치 못한 결과 영적 인간과 천적 인간의 본성은 같은 것으로 만들어져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두 인간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는데, 제 81항에서 잠깐 살핀 바 있다. 일곱째 날에 관한 것, 그리고 천적 인간이 “일곱째 날” 또는 “안식일”이다는 것은 주님 자신이 안식일이시다는 사실로부터 분명하다. 이렇게 말씀하신다:
사람의 아들은 또한 안식일의 주님(Lord)이다 (막 2:27),
위 구절의 단어들은 주님이 사람 자신이시고, 안식일 자체이심을 함축하고 있다. 천국들 안에서와 땅 위에 있는 그분의 왕국이 그분으로부터 안식일, 영원한 평화와 쉼이라 불리운다.
여기서 취급되는 태고 교회는 이 교회 뒤를 이었던 모든 교회를 능가하는 주님의 안식일이었다. 물론 여기서의 교회에 뒤이어 있는 주님의 가장 깊은 (수준의) 교회 역시 안식일이다; 그리고 거듭나는 모두 각각의 인물도 천적 수준이 되어갈 경우, 역시 그러하다, 그 이유는 그 인물은 주님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이런 것들이 유대 교회 안에서 노동의 날들, 그리고 안식일이었던 일곱째 날을 수단으로 표현되어졌다; 그 이유가 이 교회 안에 설립된 모든 것은 주님과 그분의 왕국에 관련한 표현물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같은 것이 전진하고 쉬었을 때의 궤에 의해서도 표현되어졌다. 그 이유가 광야에서 궤의 여행들은 전투들과 시험들을, 궤가 쉼은 평화의 상태가 표현되어졌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궤가 전방을 향해 놓여질 때, 모세가 말했다:
일어나십시오, 여호와시여, 그리고 당신의 적들을 흐트시고, 당신의 얼굴 앞에서
당신을 미워한 자들이 도망치게 하십시오. 그리고 궤가 쉴 때, 그는 말했다,
여호와시여, 이스라엘의 천 만(인)에게 돌아오소서 (민. 10:35-36).
위 구절은 궤가 “이스라엘을 위해 쉴 곳을 수색하기 위해” 여호와의 산으로부터 나간 것을 두고 말해졌다 (민 10:33).
천적 인간의 쉼이 이사야서에서 안식일을 수단으로 묘사되어져 있다:
만일 네가 네 발을 안식일로부터 되돌려, 내 거룩함의 날에 네 바램을 행하지 않고,
안식일의 것들을 기뻐함들이라 부르고, 여호와의 거룩한 것을 존경할 수 있고,
그것을 존대하고, 네 자신의 방법을 행치 않고, (헛된) 말을 하지 않는다면;
그 다음 너희는 여호와로 즐거워해질 것이고, 나는 땅의 드높다하는 것들 너머에서
네가 태어나지게 할 것이고, 야곱의 유산으로 너희를 먹일 것이다 (이. 58:13-14).
위와 같은 품질이 천적 인간의 품질인 바, 그는 자신의 바램에 따라서가 아닌, 주님의 선한 즐거움, 즉 그분의 “바램”에 따라 행한다. 그리하여 그는 내적 평화와 행복을 향유한다. 여기서 이것이 “땅의 드높다 하는 것 너머 드높여 있는 것”을 수단으로 표현되어 있다. 동시에 외적 고요함과 기쁨, 이는 “야곱의 유산을 가지고 먹여짐”에서 표현되어져 있다.

“여섯째 날”이 된 영적 인간이 천적 수준이 되기를 시작할 때, 이 상태가 여기서 취급되고, 이것이 “안식일의 전야(eve)”로서, 유대 교회에서 (안식일 이전 날) 저녁으로부터 안식일의 거룩함을 지킴에 의해 표현되었다. 천적 인간은 이제 말해지게 되는 “아침”이다.

천적 인간이 “안식일”, 또는 “쉼”인 이유는 영적 인간이 천적 인간이 될 때 전투는 중지되기 때문이다. 이때 악령들은 물러가고, 선한 영들, 뿐 아니라 천적 천사들이 접근한다; 이것이 표출되면 악령의 잔존은 가능치도 않아 멀리멀리 떠난다. 사실 전투를 수행한 것은 인간 자신이 아닌 주님이셨는 바, 본문에서 주님께서 “쉬셨다”라고 말해지는 것이다.

영적 인간이 천적 수준이 될 때, 그는 “하느님의 일”이라 불리워진다, 그 이유는 주님만이 그를 위해 싸우시고, 창조하시고, 모양을 내시고 그를 만드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하느님께서는 일곱째 날에 그분의 일을 마치셨다” 말해진다; 그리고 “그분은 그분의 모든 일로부터 쉬셨다”는 두 번 언급되고 있다. 예언자들에 의해 반복적으로 말해지는 것은 사람이 “여호와의 손가락의 일, 또는 손의 일”이라 일컫는 것이다. 이사야서를 보자:
고로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 그를 지은 자 여호와께서 말하셨다, 너희는 나에게
표시들을 물어라, 너희가 내게 부탁한 내 아들들에 관하여, 그리고 내 손들의 일에
관하여 물어라. 나는 땅을 만들었고, 그것 위에 사람을 창조했다; 나, 내 손이
하늘들을 뻗쳤고, 그리고 그것들의 모든 군대를 나는 명령했다. 그 이유는 하늘들을
창조하신 여호와, 땅을 모양을 주고 그것을 만드신 하느님 자신이 말하시기 때문;
그분이 그것을 세우신다, 그분은 그것을 공허하게 창조하시지 않는다, 그분은 그것을
사람이 살 수 있게 모양을 내셨다; 나는 여호와이고 나 외에 하느님은 없다
(이. 45:11-12, 18, 21).
이로부터서도 분명한 바, 새로운 창조, 또는 거듭남은 주님만의 일이다는 것이다. “창조”, “모양”. 그리고 “만듦”이라는 표현이 아주 구분되게 사용되는데, 즉 “하늘들을 창조함, 땅을 형성함, 그것을 만듦”인데, 이사야서의 다른 장소도 보자:
내 이름에 의해 불리우는 모든 이, 나는 그를 내 영광을 위해 창조했고,
나는 그에게 모양을 주었다, 그렇다, 나는 그를 만들었다 (이. 43:7),
그리고 또한 창세기의 앞장과 이 장에서; “그분은 만드심에 있으신 하느님이 창조하신 모든 그분의 일로부터 쉬셨다” 는 본문의 구절에서도, 주님이 “창조자(creator)”, “모양을 주시는 분(former)”, 또는 “만드시는 분(maker)”이라 불리는데, 이런 단어 사용법은 내적 의미에서 우리로 구분된 생각을 전달하고 있다.

4절. 하늘들과 땅의 태생은 이러하다. 즉 여호와 하느님께서 땅과 하늘을 만드셨던 날, 그분이 그들을 창조하셨을 때이다.
“하늘들의 태생과 땅의 태생”은 천적 인간을 형성함(formation)들이다. 여기서 천적 인간의 형성함이 취급된다는 것은 뒤이어지는 모든 세부 사항들로부터 분명하다. 즉 풀잎이 아직 자라지 않는다는 점, 지면을 경작할 사람이 없다는 점, 사람의 모양을 내신 분이 여호와 하느님이신 점, 이 후에 그분은 모두 각각의 짐승과 하늘들의 새를 만드셨는데, 이 만드심은 이미 앞장에서 있었다는 점; 이런 앞뒤 상황으로 미루어 또다른 사람이 여기서 취급된다는 것은 분명하다. 하나 더 구별되는 점은, 영적 인간을 취급하는 앞 장에서는 주님이 단순하게 “하느님”으로 불리셨는데, 여기서는 처음 동안은 “여호와 하느님”으로 불리신다는 점이다; 더 나아가, 지금은 “지면” 그리고 “들판”이 언급되는 반면, 앞 장의 경우는 오직 “땅”만이 언급되었다. 이 구절에서도 역시 “땅”에 앞서 “하늘”이 먼저 언급되고 , 후에 “땅”이 먼저 언급된다; 이런 이유는 “땅”은 외적 인간을, 그리고 “하늘”은 내적 인간을 의미하기 때문, 그리고 영적 인간에서의 재형성(reformation)은 “땅”으로부터, 즉 외적 인간으로부터 시작하는 반면, 여기서 취급되는 천적 인간은 내적 인간으로부터, 또는 “하늘”로부터 시작하기 때문이다.

5, 6절 땅에는 들판의 관목이 아직 없었고, 그리고 성장하는 들판의 풀잎이 아직 없었다. 그 이유는 여호와 하느님께서 땅에 비를 내리지 않아서였다. 그리고 지면을 경작할 사람이 없었다. 6. 그리고 그분께서 땅으로부터 안개가 올라오게 하시자, 지면의 모든 얼굴은 적시워졌다.
“들판의 관목” 그리고 “들판의 풀잎”을 수단으로 외적 인간이 생산하는 일반적 측면에서의 모두가 뜻해진다. 영적 인간의 수준에 남아있는 동안, 영적 (평면의) 인간의 외적 인간은 “땅”이라 불리우나, 천적 (평면의) 인간이 될 때, 천적 (평면의) 인간의 외적 인간은 “지면(ground)” 그리고 또한 “들판(field)”이라 불리운다. “비”, 이는 곧 이어 “안개”라 불리우는데, 전투가 중지될 때 있는 평화로부터의 고요함이다.

그러나 이런 것들이 포함하는 것을 지각함은 인간의 상태가 영적 수준으로부터 천적 수준으로 되는 동안의 상태를 알지 않으면 가능할 수 없다. 그 이유는 그것들은 깊게 감추여 있기 때문이다. 인간이 영적 수준인 동안, 그의 외적 인간은 내적 인간에 순종하거나 내적 인간을 섬기는데 기꺼이 하려 들지 않는다. 따라서 전투는 상존한다; 그러나 그가 천적 수준이 될 때, 외적 인간의 내적 인간에의 순종과 섬김은 기꺼이 있는다. 그러므로 전투는 중지되고, 고요함이 결과된다 (87항 참조). 이 고요함이 “비”와 “안개”를 수단으로 의미되어진다. 이 둘은 비슷한 수증기여서, 이것으로 외적 인간은 내적 인간으로 물을 공급 받거나 적시어진다; 평화의 산물, 이 고요함이 “들판의 관목” 그리고 “들판의 풀잎”이라 불리는 것을 생산한다. 이것은 특별하게는 천적 수준의 영적 근원(a celestial spiritual orgin)으로부터의 기억 속의 것들과 합리적 마음 속의 것들이다.

전투의 정지, 또는 탐욕들과 거짓들로 야기된 쉼 없음의 정지에서 있는 외적 인간의 평화 속의 고요함에 대한 본성은 평화의 상태에 친숙해 있는 이들에게만 알려질 수 있다. 이 상태의 기쁨은 매우 깊은 수준이어서 기쁨이라는 여하한 생각의 범주를 넘는다: 이것은 전투의 정지 뿐 아니라 내면의 평화로부터 진행하는 생명이고, 감히 묘사할 수 없을 정도의 방식 안에서 외적 인간에게 감명을 안긴다; 신앙으로부터의 진리, 사랑으로부터의 선, 이것들은 평화의 기쁨으로부터 그것들의 생명을 끌어내고, 그때 출생되어진다.

천적 인간의 상태는 평화의 고요함을 선물받고,-비에 의해 새로워짐-그리고 악과 거짓인 것의 노예됨으로부터 해방되는데, 주님께서 에스겔서에 이렇게 묘사해 놓으셨다:
나는 그들과 평화의 언약을 만들 것이다, 그리고 악한 들짐승이 그 토지로부터
중지되게 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광야에서 안전하게 거주할 것이다, 그리고
숲에서 잠잘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들과 그들의 장소를 빙둘러 내 언덕을 축복되게
만들 것이다; 그리고 나는 계절에 따라 비가 내려오게 할 것이다; 그것은 축복의
비일 것이다. 그리고 들판의 나무는 그것의 과일을 산출할 것이다, 그리고
땅은 그것의 소출을 낼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안전히 자기들의 지면 위에서
거주할 것이다, 그리고 내가 그들의 멍에의 고삐를 부수고, 너희들로 자기들을
섬기라고 한 자들의 손으로부터 해방되게 할 때, 내가 여호와 임을 알 것이다;
그리고 너희는 나의 양떼, 내 목장의 양떼이다, 너희는 사람이고,
나는 너희의 하느님이다 (겔. 34:25-27, 31).
그리고 이것이 “셋째 날”에 결과된다는 것, 이는 말씀에서 “일곱째”와 같은 의미를 가지는데, 호세아서에서 이렇게 선포되었다:
이틀 후 그분은 우리를 살아있게 하실 것인데, 셋째 날에 그분은 우리를
일으키실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분 앞에서 살 것이다, 그리고 여호와를
알 것이다, 힘껏 알려고 할 것이다; 그분의 나가심은 새벽같이 준비될 것이다,
그리고 그분은 우리에게 비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같이 오실 것이다 (호. 6:2-3).
그리고 이 상태가 “들판이 성장함”에 비교되어지고 있는데, 고대 교회에 관하여 말하는 에스겔에 의해 선포되어진다:
나는 너로 들판이 성장함 같이 번성하게 했다, 그래서 너는 불어나고 성장했다,
하여 특출하게 꾸며지기에 이르렀다 (겔. 16:7).
그리고 이렇게도 비교되어져 있다:
주님께서 심으신 어린 가지, 그리고 여호와의 손이 하신 일 (이. 60:21).

7절. 그리고 여호와 하느님께서 지면으로부터의 먼지(로) 사람을 만들어 내셨다(formed), 그리고 그의 콧구멍에 생명들의 숨을 불어 넣으셨다, 그래서 사람은 살아있는 혼이 되었다.
“지면의 먼지로 사람을 만들어 내시는 것”은 천적 평면의 외적 인간을 만들어내시는 것이다. 이 인간은 이전에는 사람이지 않았다: 그 이유는 5절에서 “지면을 경작할 사람이 없었다” 라고 말해졌었기 때문이다. “생명들의 숨을 그의 콧구멍 안으로 불어넣는 것”은 그에게 신앙과 사랑의 생명을 주는 것이다; 그리고 ”사람은 살아있는 혼이 되었다“에 의해 천적 평면의 외적 인간은 살아있게 만들어졌음이 의미되어 있다.

외적 인간의 생명이 여기서 취급되는데, 앞 두절에 있는 이해함 또는 신앙의 생명, 그리고 이 절에 있는 의지 또는 사랑의 생명이다. 지금까지의 외적 인간은 내적 인간과 더불어 전투에 임함에서 기꺼이 내적 인간에 굴복하고 섬기려 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외적 인간은 “사람”이 아니었다. 어쨌든 천적 (평면의) 외적 인간으로 만들어진 지금, 내적 인간에 순종하고 섬기기를 시작한다, 그래서 신앙의 생명과 사랑의 생명을 수단으로 “사람”을 만든다. 신앙의 생명이 그를 준비시키고, 그를 “사람”이 되게 하는 것은 사랑의 생명이다.

“여호와 하느님께서 그의 콧구멍 안으로 숨을 불어 넣으셨다”에 관하여는 이러하다: 고대 시대에서, 그리고 말씀에서, “콧구멍”을 수단으로 냄새 때문에 있는 감사히 여긴 것은 무엇이든, 이것은 지각을 의미한다고 이해되어졌다. 이런 중요성 때문에 여호와에 관련해 반복적으로 쓰여 있는 대목은, 태워바치는 제물로부터, 또는 그분과 그분의 왕국을 표현하는 여러 가지 것들로부터 “그분은 쉼의 냄새를 맡으셨다”이었다; 그리고 사랑과 신앙에 관련되는 것들은 그분에게 최고로 감사해야 하는 바, “그분은 그분의 콧구멍을 통하여 생명들의 숨을 쉬셨다”라고 말해진다. 이로부터 여호와의 기름부은 자, 즉 주님에 관하여 “콧구멍의 숨”이라 불리어진다 (애4:20).그리고 주님 자신 “그분의 제자들에게 숨을 내뿜으시면서” 이 구절과 같은 것을 의미해두셨다.
그분은 그들에게 숨을 내뿜으시며 말하셨다, 너희는 성령을 받으라 (요. 20:22).

생명이 “숨을 쉼”을 수단으로, 그리고 “숨”을 수단으로 묘사되어진 이유는 태고 교회의 사람들은 사랑과 신앙의 상태를 호흡의 상태들을 수단으로 지각하였기 때문인데, 이것이 그들의 후손에서는 변화되었던 것이다. 이 호흡에 관해서는 아직까지는 말해진 바 아무 것도 없다. 그 이유는 오늘날 이와 같은 것은 깡그리 모르게 되었기 때문이다. 어쨌든 태고 교회인들은 이것에 매우 친숙해 있었다. 그리고 다른 삶 안에 있는 이들에게는 그렇게 있다. 그러나 이 땅 위에서는 더 이상 누구에게도 존재하지 않는다. 사람들이 영 또는 생명을 “바람”에 비교하는 것도 이런 흔적 때문이다. 주님 역시 인간의 거듭남을 이야기 하실 때 사용하셨다. 요한복음서에서:
바람은 그것이 바라고 싶은 곳으로 분다, 그리고 너는 그것으로부터 소리를 들으나,
그것이 어디에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를 말할 수 없다: (참) 영으로부터
태어나지는 모두 각각의 사람도 이와 같다. (요. 3:8).
다윗서에서도:
여호와의 말에 의해 천국들이 만들어졌다, 그리고 그분의 입의 숨에 의해
그것들 속의 모든 군대(가 만들어졌다) (시. 33:6).
당신께서 그들의 숨을 그러모으시니, 그들은 끝을 보고, 자기들의 먼지로
되돌아 간다; 당신께서 당신의 영을 내보내시니, 그들은 창조되었고, 그리고
당신은 지면의 얼굴들을 새로이 하십니다 (시. 104:29-30).
“숨”이 신앙의 생명과 사랑의 생명을 위해 사용된 것은 욥기서로부터도 나타난다:
그분은 인간 안에서 영이시다, 그리고 솨다이의 숨이 그들에게 이해력을 준다 (욥. 32:8).
하느님의 영이 나를 만드셨다, 그리고 솨다이의 호흡이 나에게 생명을 주었다 (욥. 33:4).

8절. 여호와 하느님께서 에덴 안에 동쪽으로 동산을 창설하셨다, 그리고 거기에 그분은 그분께서 만드신 사람을 두셨다.
“동산”에 의해 총명이, “에덴”에 의해 사랑이, “동쪽”에 의해 주님이 의미되어진다; 결과적으로 “동쪽 에덴의 동산”은 천적 인간의 총명이 의미되고, 이 총명은 사랑을 통하여 주님으로부터 흐른다.

생명, 또는 생명의 질서가 영적 (평면의) 인간과 더불어서 일 경우, 비록 그것들이 주님으로부터 신앙을 통하여 그의 이해력, 추론력, 그리고 기억력 안으로 흐르고 있지만, 영적 (평면의) 인간의 외적 인간은 내적 인간과 다툰다. 고로 마치 총명이 주님으로부터 흘러드는게 아니라 자신으로부터 기억력이나 추론력 안으로 흐르는듯 나타난다. 그러나 천적 (평면의) 인간과 더불은 생명, 또는 생명의 질서는 주님이 사랑을 통하여 흘러들고, 사랑으로부터의 신앙이 그의 이해력, 추론력, 그리고 기억 속의 것들 안으로 흘러간다. 그래서 내적 인간과 외적 인간 사이에 다툼은 없는 바, 그는 이것이 실지로 그렇다고 지각한다. 고로 영적 인간과 더불어 거꾸로 되어 있어 왔던 질서가 천적 인간과 더불어 원위치를 찾은 바가 지금 묘사되어 있다. 이 질서, 또는 사람이 “동쪽 에덴에 있는 동산”이라 불리어진다. “동쪽에서 에덴 안에 여호와 하느님에 의해 창설된 동산”은 최고의 의미에서는 주님 자신이시다. 가장 깊은 의미(inmost sense)에서, 마찬가지인 보편적 의미에서, 이는 주님의 왕국이다, 그리고 인간이 천적 수준이었을 때 그가 위치되는 천국이다. 이런 그 사람의 상태는 그가 천국에 있는 천사들과 더불어 있다. 마치 그들 사이에 하나의 천사인 듯하다; 그 이유는 인간은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도 동시에 천국 안에 있도록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이 상태 안에서 그의 모든 생각들, 그리고 생각들로부터의 관념들, 그의 말들과 행동들에 이르기까지 열려있고, 주님으로부터조차도 열려있다. 그리고 그것들 안에는 천적 수준인 것과 영적 수준인 것을 포함하고 있다; 그 이유가 이런 것들의 각각 모두는 그것 내에 주님의 생명을 가지고 있어 그 사람으로 지각할 수 있게 하기 때문이다.

“동산”이 총명을, “에덴”이 사랑을 의미한다는 것은 이사야서에서도 나타난다:
여호와께서는 시온을 위로하실 것이다, 그분은 그녀의 황폐된 모든 장소를
위로하실 것이다, 그리고 그분은 그녀의 광야를 에덴같이 만드실 것이다,
그리고 그녀의 사막은 여호와의 동산같이 만드실 것이다; 환희와 즐거움이
그 안에서 발견될 것이다, 고백함과 노래하는 음성(이 들릴 것이다) (이. 51;3).
이 문단에서, “광야”, “환희”, 그리고 “고백함”은 신앙의 천적인 것들, 또는 사랑에 관련되는 것을 표현하는 말투이다; 그러나 “사막”, “즐거움”, 그리고 “노래하는 음성”은 신앙의 영적인 것들, 또는 이해력에 속하는 것을 표현하는 말투이다. 전자는 “에덴”과 관련되고, 후자는 “동산”에 관련되고 있다; 이 예언자와 더불어 위 두 표현들은 똑 같은 것에 관하여 꾸준히 발생하고 있다. 이 중의 하나는 천적인 것, 다른 하나는 영적인 것들이다. “에덴에 있는 동산”에 의해 의미된 것은 10절에서 더 보여질지 모른다.

주님이 “동쪽”이시다는 것은 말씀으로부터도 나타난다. 에스겔서에서:
그분은 나를 문으로, 동쪽의 길이 쳐다보이기조차 하는 문으로 데려왔다, 그리고
잘 보니 이스라엘의 영광이 동쪽의 길로부터 왔다; 그리고 그분의 음성은
많은 물들의 음성과 같았다, 그리고 땅은 그분의 영광을 가지고 빛났다 (겔. 43:1-2, 4).
주님이 “동쪽”이신 결과 때문에 성전 건물 앞에서 그들이 기도할 때 자기들의 얼굴을 동쪽으로 돌리는 거룩한 관습이 표현물인 유대 교회 안에서 우세를 떨쳤다.

9절. 여호와 하느님께서는 지면으로부터 바라보기에 바람직하고 식량으로 좋은 모든 나무가 자라게 하셨다. 또한 동산 중앙에는 생명들의 나무가 있었고, 그리고 선과 악에 관한 지식의 나무도 있었다.
“나무”는 지각을; “바라보기에 바람직한 나무”는 진리를 지각함을; “식량으로 좋은 나무”는 선을 지각함을; “생명들의 나무”는 사랑과 사랑으로부터 파생된 신앙을; “선과 악에 관한 지식의 나무”는 감각적인 것으로부터, 즉 기억 속의 지식으로부터 파생된 신앙을 의미한다.

여기서 “나무”가 지각들을 의미하는 이유는 천적 인간이 취급되기 때문에서 이다. 그러나 주제가 영적 인간일 경우는 달라진다. 그 이유는 주제의 본성에 서술 부분이 의존되기 때문이다.

오늘날 지각(perception)이 무엇인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이것은 진리와 선인 것인지의 여부에 관하여 주님만으로부터 있는 어떤 내적인 감각이다; 그리고 이것은 태고 교회에게는 아주 잘 알려져 있었다. 이 지각은 천사들에게는 아주 완전한 바, 그것을 수단으로 그들은 진리이고 선인 것에 관하여 알아채고 지식을 얻는다; 또한 주님으로부터 있는 것도, 그리고 자신으로부터의 것도; 뿐 아니라 자기들에 다가오는 누군가의 품질도 단지 그가 접근만 해도, 그의 사상들의 딱 하나만으로부터도 그의 품질을 알아챈다. 영적 인간은 지각을 가지고 있지 않고, 양심을 가지고 있다. 죽은 사람은 양심조차 없다; 그리고 매우 많은 사람이 양심이 무엇인지 모른다, 지각이 무엇인지는 더더욱 모른다.

“생명들의 나무”는 사랑과 사랑으로부터 파생된 신앙이다; “동산의 중앙에”는 내적 인간의 의지 안에 있다. 의지(will), 이는 말씀 안에서 “심정(heart)” 이라 불리우는데, 인간과 천사들과 더불어 주님의 제일가는 소유물(possession)이다. 그러나 누구나 자신으로부터서는 선을 행할 수 없는 바, 설사 의지가 인간이라 단정할지라도, 의지, 또는 심정은 인간의 것이 아니다; 인간이 의지라 부르는 것인 탐욕은 인간의 것이다. 그 다음 의지가 “동산의 중앙에” 있고, 거기에 생명들의 나무가 놓여져 있다, 그리고 인간은 의지를 가지고 있지 않고, 단지 탐욕만 가지고 있기에, “생명들의 나무”는 주님의 자비이고, 주님으로부터 모든 사랑과 신앙이 오는 바, 결과적으로 모든 생명이다.

그러나 “동산의 나무”의 본성, 또는 지각; “생명들의 나무”, 또는 사랑과 사랑으로부터 파생된 신앙의 본성; 그리고 “지식의 나무”, 또는 감각적인 것만에서, 또는 기억 속의 지식만에서 근원되는 신앙의 본성은 뒤를 잇는 페이지들에서 보여질 것이다.

10절. 강이 에덴으로부터 나와서 동산을 적셨고, 거기서부터 갈라져서 네 머리가 되었다.
“에덴으로부터의 강”은 사랑으로부터의 지혜를 의미한다. 그 이유는 “에덴”이 사랑이고, “동산을 적시는 것”은 총명이 수여되는 것; “거기서부터 네 머리로 갈라졌다”는 것은 뒤 구절에 이어지는 바 같이 네 강들을 수단으로 총명을 묘사함이기 때문이다.

태고 사람들은 사람을 “동산”에 비교할 때, 지혜 역시, 그리고 지혜에, “강들”에 관련되는 것들도 비교했다. 그들은 그것들을 단지 비교하는데 그치지 않고, 실제적으로 그렇게 일컬었다. 그 이유가 이런 방법이 그들이 이야기하는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후에 예언자들 안에도 똑 같은 것이 있었다. 그들은 때로는 그것들을 비교했고, 때로는 그렇게 불렀다. 이사야서를 보자:
네 빛은 어둠 안에서 일어날 것이다, 그리고 너의 짙은 어둠은 낮의 빛같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너는 물로 적셔진 동산같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물들의 배출구처럼 너의 물들은 마르지 않는다 (이. 58:10-11).
신앙과 사랑을 받는 이들을 취급하면서. 다시 거듭나는 자에 관해 이야기한다:
그들이 심어짐은 골짜기들 같고, 강가의 동산들 같고, 여호와께서 심은 침향목 같고,
물들 옆에 있는 삼목들 같다 (민. 24:6).
예레미야서에서:
여호와를 신뢰하는 사람은 복되다; 그는 물들 옆에 심은 나무같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녀의 뿌리들을 강가로 내보낸다 (예. 17:7-8).
에스겔서에서 거듭나는 자가 동산과 나무에 비교되지 않고 그렇게 불리운다:
물들이 그녀를 자라게 만들었다, 물들의 깊음이 그녀를 위로 치솟게 했다,
강이 그녀가 심어진 주위를 빙둘러 달렸다, 그리고 그것의 수로들을 들판의 모든
나무들에게 내보냈다; 그녀는 그녀의 위대함 안에서, 그녀의 가지들의 길이에서
아름다움이 만들어졌다, 그 이유가 그녀의 뿌리가 많은 물들 옆에 있었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동산에 있는 삼나무는 그녀를 감추이게 하지 못했다; 전나무는 그녀의
굵은 가지들 같지 않았다, 그리고 플라타너스나무는 그녀의 가지들 같지 않았다,
하느님의 동산에 있는 어떤 나무도 그녀의 아름다움에서 그녀와 동등하지 않았다;
나는 그녀를 그녀의 가지를 많게 해서 아름답게 만들었다, 그리고
하느님의 동산에 있던 에덴의 모든 나무들은 그녀를 부러워했다 (겔. 31:4, 7-9).
이 인용 구절로부터 태고 사람들은 사람을, 또는 사람 안에 있는 것을 “동산”에 비교했을 때, 그들은 적시어지게 하는 수단인 “물들”과 “강들”을 추가했다는 것, 그리고 이런 물들과 강들이 그의 성장을 있게한 것들을 뜻했다는 것도 분명해진다.

비록 지혜와 총명이 인간 안에서 나타난다 해도, 그것들은, 말했던 바와 같이, 주님만으로부터 있기에 에스겔서에서 유사한 표현물을 수단으로 이렇게 선포되었다:
잘 보니, 물들이 동쪽에 있는 집의 문지방 아래로부터 유출되었다;
그 이유는 집의 얼굴이 동쪽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말했다, 이 물들은
동쪽을 향하여 있는 경계선 밖으로 유출하여, 그리고 평지로 내려간다, 그리고
바다로 간다. 바다 안으로 인도된 물들이 치료할 것이다; 그리고 강의 물이 가는 곳은
어디에서든지 기는 살아있는 모두 각각의 혼은 살 것이다. 그리고 거기로부터의
강둑 위 강가, 이쪽과 저쪽에, 식량을 위한 모든 나무들이 올라온다, 이들의 잎은
시들지 않고, 거기로부터의 열매는 소진되는 일이 없을 것이다; 그것은 그것의
달들 안에서 다시 태어나진다, 그 이유는 그것의 물들이 성소로부터 유출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거기로부터의 열매는 식량을 위하여 있을 것이다, 그리고
거기로부터의 잎은 치료약을 위해 있을 것이다 (겔. 47:1, 8-9, 12).
여기서 주님이 “동쪽”에 의해, 그리고 “성소”에 의해 의미되고, 거기로부터 물들과 강물들이 유출되었다. 계시록서에서도 마찬가지 방식이다:
그리고 그는 나에게 하느님과 어린 양의 왕좌로부터 나오는 수정 같이
빤짝빤짝 빛나는 생명의 물의 순수한 강을 보여주었다. 도성의 길
한 가운데에서 흐르고, 강의 이쪽과 저쪽에는 생명의 나무가 있어,
열 두 과일들을 맺는데, 그 나무의 과일은 매달 산출되고 있었다;
그리고 나무의 잎들은 민족들을 치료하기 위해 있었다 (계. 22:1-2).

11,12절. “첫째 강의 이름은 비손이다. 이 강은 금이 있는 곳, 하윌라 온 토지를 에워싸고 있다. 12. 이 토지의 금은 선(good)이다. 거기에는 벧엘리움과 호마노 돌(onyx stone)도 있었다.
“첫째” 강, 또는 “비손”은 사랑으로부터 있는 신앙으로부터의 총명을 의미한다; “하윌라 토지”는 마음(mind)을 의미한다; “금”은 선을 의미한다; “벧엘리움과 호마노 돌”은 진리를 의미한다. “금”은 두 번 언급되었는데, 그 이유는 이것이 사랑으로부터의 선과 사랑으로부터의 신앙의 선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벧엘리움과 호마노 돌”은 하나는 사랑으로부터의 진리와 다른 하나는 사랑으로부터의 신앙의 진리이기 때문에 언급되었다. 이와 같은 (상태가) 천적 인간이다.

어쨌든 이런 것들이 내적 의미 안에 있는 바, 이것들을 서술해낸다는 것은 무척 어려운 문제이다. 그 이유는 오늘날 사랑으로부터의 신앙에 의해 뜻해지는 것, 그리고 지혜와 지혜로부터 파생된 총명에 의해 뜻해지는 것이 무엇인지 아무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외적 인간들은 기억 속의 지식 밖에는 거의 알지 못한 바, 그들은 총명과 지혜, 그리고 신앙을 기억 속의 지식이라 부르기 때문이다. 외적 인간들은 사랑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조차 없다, 그리고 많은 이들이 의지력과 이해력이 무엇인지 모른다, 그리고 그것들은 한 개의 마음을 구성한다고 알고 있다. 그럼에도 이것들의 각각은 구분된다, 그렇다, 아주 확실히 구분된다, 그리고 천국 전체는 주님에 의해 사랑과 신앙에 의거 최고로 구분이 잘되는 방식 안에서 정돈되어 있다. 이것은 무수하기도 하다.

더 나아가 (천국 전체에) 알려져있는 바, 사랑으로부터, 고로 주님으로부터 있지 않은 지혜는 없다는 것, 신앙으로부터, 고로 주님으로부터가 아닌 어떤 총명도 있지 않다는 것; 그리고 사랑으로부터, 고로 주님으로부터가 아니고는 선은 없다는 것; 그리고 신앙으로부터, 고로 주님으로부터가 아니면 진리는 없다는 것이다. 사랑과 신앙으로부터, 고로 주님으로부터 있지 않은 것이 실지로 이런 이름들에 의해 불려지는데, 그것들은 가짜이다.

말씀 안에서 지혜로부터의 선, 또는 사랑으로부터의 선이 “금”을 수단으로 의미되고 표현되어진다는 것보다 더 공통적인 것은 없을지 모른다. (언약)궤에, 성전에, 금빛의 탁자에, 촛대에, 그릇들에, 그리고 아론의 의복 위에 있는 모든 금은 지혜로부터의 선 또는 사랑으로부터의 선을 의미했고 표현했다. 예언서들에서도 그러하다. 에스겔서를 보자:
네 지혜와 네 총명 안에서 너는 네 재물을 얻었다,
그리고 네 금고에 금과 은을 얻었다 (겔. 28:4).
거기서 지혜와 총명으로부터의 것이 “금과 은”이다는 것, 또는 선한 것과 참된 것임은 명백하게 말해진다, 그 이유가 “은”은 진리를 의미하는데, (언약)궤에서, 성전에서도 그러하다. 이시야서에서:
수많은 낙타들, 미디안과 에바의 단봉 낙타들이 너희를 덮을 것이다;
그것들 모두는 세바로부터 올 것이다, 그것들은 금과 향을 가져올 것이다,
그리고 그것들은 여호와의 찬양들을 내보일(show forth) 것이다 (이. 60:6).
고로 또한:
동쪽으로부터 현자들이 예수가 태어나셨을 때 그분에게 와서, 꿇어 그분을 경배했다;
그리고 그들은 자기들의 금고를 열어, 그들은 그분에게 금, 그리고 유향, 그리고
몰약을 선물들로 바쳤다 (마. 2:1, 11).
여기서도 역시 “금”은 선을 의미한다; “유향과 몰약”은 사랑과 신앙으로부터 때문에 감사히 여기는 것들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러므로 이것들은 “여호와의 찬양들”이라 불리운다. 그러므로 다윗서에서 말해진다:
그는 살(live) 것이다, 그리고 그에게 세바의 금으로부터 주어질 것이다; 기도가 그를
위해 계속적으로 만들어질 것이다, 그리고 매일 그는 그에게 복을 빌 것이다 (시. 72:15).

신앙으로부터의 진리가 말씀 안에서 귀중한 “돌들”에 의해 의미되고 표현되었는데, 이는 판단(judgment)의 가슴받이에 있는 것들, 그리고 아론의 에봇의 어깨 위에서와 같다. 가슴받이에서,“금, 푸른색, 빛나는 심홍색, 두 번 물들인 진홍색, 그리고 꼬아만든 고운 아마포”는 사랑으로부터 있는 것들을, 귀중한 “돌들”은 사랑으로부터의 신앙 속에 있는 것들을 표현했다; 마찬가지로 에봇의 어깨 위, 두 개의 “기억함의 돌들”, 이는 호마노 돌인데, 금으로 박아 끼워 놓였다 (출 28:9-22). 귀중한 돌들의 이 의미는 에스겔서로부터도 명백하다, 거기서, 지혜와 총명인 천국의 재물을 소유한 사람에 관해 이야기하면서, 말해진다:
지혜가 가득하고, 아름다움이 완전한 너는 하느님의 동산, 에덴 안에 있어 왔다;
귀중한 모두 각각의 돌이 네 덮개였다, 홍옥 , 황옥, 금강석, 녹주석, 호마노,
그리고 벽옥; 청옥, 녹옥수, 녹옥, 그리고 금; 네 작은 북(taboret)과 네 피리에 관한
솜씨가 네 안에 있었다; 네가 창조되었던 그 날에 그것들이 준비되어졌다;
너는 네가 창조된 날로부터 네 길들에서 완전하였다 (겔. 28:12-13, 15),
위의 말들이 돌들 (자체)를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 그러나 신앙으로부터의 천적인 것과 영적인 것들을 의미한다는 것은 모든 이에게 분명할 것이다; 그렇다, 각 돌은 신앙 속의 어떤 필수 요소를 표현하였다.

태고 사람들은 “토지들”에 관해 이야기했을 때, 그들은 그것들에 의해 의미된 것을 이해했다. 예를 들면, 오늘날, 가나안의 토지나 시온 산이 천국을 의미한다는 관념을 가지는 것과 같다. 태고인들은 이런 장소들이 언급될 때, 어떤 토지나 산 자체를 생각하는 비중보다는 그것들이 의미하는 것만에 더 생각이 쏠려 있었다. 이 구절의 “하윌라 토지”에서도 마찬가지 이다. 이는 창세기 25:18에서 다시 언급되는데, 거기서 이스마엘의 아들들에 관해 말해지는 대목, 즉 그들은 “하윌라로부터 앗시리아로 향하는 , 이집트 앞 수르(Shur)에 이르기까지에서 거주했다” 이다. 천국의 관념 안에 있는 이들은 이런 말들로부터 총명, 그리고 총명으로부터 흐르는 것 밖에 더 지각하는 것이 없다. 비손 강이 “하윌라의 온 토지를 에워싸고 있다”에서 말한 “에워 쌈”의 경우도 마찬가지 이다. 그들은 안으로 흐름을 지각한다; 이와 비슷한 모습이 아론의 어깨 위 호마노 돌들인데, 이 돌들은 금으로 에워싸 박아끼워져 있다 (출. 28:11). 그들은 사랑으로부터의 선이 신앙의 진리 안으로 흐른다는 것을 지각한다. 많은 다른 예들의 경우도 있다.

13절. 그리고 둘째 강의 이름은 기혼이고. 구스 온 토지를 에워싸고 있다.
“둘째 강”은 “기혼”이라 불리우는데, 선한 것과 참된 것, 또는 사랑과 신앙에 속하는 모든 것들에 관한 지식을 의미한다, 그리고 “구스의 토지”는 마음(mind) 또는 능력(faculty)을 의미한다. 마음은 의지력과 이해력으로부터 구성된다;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들은 이해력에 속해 있다.

“구스의 토지”, 또는 에티오피아, 더 나아가, 금, 귀중한 돌들, 그리고 향신료들이 풍부함은 앞서 말했듯이, 선, 진리, 그리고 이 둘로부터 파생되는 감사히 여기는 것들, 말하자면, 사랑과 신앙에 관한 지식들의 것들 같은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이사야 60:6; 마태복음 2:1, 11; 시 72:15를 인용한 페이지로부터 분명해진다. 비슷한 것들이 말씀에서 “구스”, 또는 “에티오피아”, 그리고 “세바”를 수단으로 뜻해지는데, “구스의 강들”이 언급된 스바냐서로부터 명백해진다:
아침에 그분은 빛을 위해 그분의 판단을 주실 것이다; 그 이유는 그때 나는
명료한 언어를 가지고 백성에게 돌아올 것이기 때문이다, 하여 그들은 모두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를런지 모르고 한 개의 어깨로(일치 단결하여) 그분을
섬길런지 모른다; 구스의 강들의 출입구로부터 나의 청원자들이 나의 공물을
가져올 것이다 (습. 3:5, 9-10).
그리고 다니엘서에서, 북쪽과 남쪽의 왕에 관해 이야기하면서:
그는 금과 은의 보물 위에서, 그리고 이집트의 바람직한 모든 것들 위에서
권능을 가질 것이다; 그리고 리비아인들과 에티오피아인들이 그의 발걸음
아래 있을 것이다 (단. 11:43),
거기서 “이집트”는 기억 속의 지식들을 명시한다, 그리고 “에티오피아인들”은 지식들을 의미한다.
마찬가지로 에스겔서에서:
세바와 라아마의 상인들, 이들은 모든 향신료의 최고 등급에서, 그리고
모두 각각의 귀중한 돌에서, 그리고 금에서 네 상인들이었다 (겔. 27:22),
이들을 수단으로 같은 방식에서 신앙의 지식들이 의미되어진다. 이렇게 다윗서에서도, 주님을, 결과적으로 천적 인간을 이야기 하면서:
그의 날들에서 정의로운 자가 번성할 것이다, 그리고 달이 없을 때까지 평화의
풍부함이 있을 것이다, 다르싯의 왕들과 섬들의 왕들이 선물을 가져올 것이다,
시바와 시바의 왕들이 선물을 바칠 것이다.
이 말들은 앞 절과 뒤잇는 절의 연결로부터 명백해지는 바 신앙의 천적인 것을 의미한다. 비슷한 것들이 솔로몬을 방문한 스바의 여왕, 그리고 그녀가 내놓은 어려운 질문들, 그리고 솔로몬에게 향신료, 금, 그리고 귀중한 돌들에 의해서도 의미되었다 (왕상. 10:1-2). 그 이유는 예언서 뿐아니라 말씀의 역사적 부분에 포함된 모든 것들도 의미하고, 표현하고, 그리고 비밀들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14절. 셋째 강의 이름은 힛데겔이고, 이 강은 앗수르를 향하여 동쪽으로 가고 있다. 그리고 넷째 강은 유브라데이다.
“힛데겔 강”은 추론함(reason)이다, 또는 추론으로부터의 명민함(clearsightness)이다. “앗수르”는 합리적인 마음이다; “앗수르를 향하여 동쪽으로 가는 강”은 추론의 명민함은 주님으로부터 내적 인간을 통하여 외적 인간 속에 있는 합리적인 마음 안으로 옴을 의미한다; “브라데”, 또는 “유브라데”는 기억 속의 지식이고, 이 지식은 최말단(ultimate), 또는 경계선(boundary)이다.

“앗수르”는 합리적인 마음, 또는 인간의 합리적인 것을 의미한다는 것은 예언서들로부터 분명해지는데, 에스겔서를 보자:
잘 보라, 앗수르는 레바논에 있는 삼나무, 꽤 많은 가지들과 그늘 드리우는
숲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 높이는 드높다; 그리고 그것의 분지는 굵은 가지들
사이에 있었다. 물들이 그녀를 자라게 만들었다, 물들의 깊음이 그녀를
드높게 했다, 강이 그녀의 심어진 곳을 빙둘러 달렸다 (겔. 31:3-4).
합리적인 것이 “레바논에 있는 삼나무”라 불리운다; “굵은 가지들 사이에 있는 분지”는 기억 속의 지식을 의미한다. 기억 속의 지식이 이 서약 안에 있는 바, 이사야서에서 이에 대해 더 명료해질 것이다.
그 날에 이집트로부터 앗수르로 가는 길이 있을 것이다, 그래서 앗수르는
이집트에 올 것이다, 그리고 이집트는 앗수르로 갈 것이다, 그리고 이집트인들은
앗수르를 섬길 것이다. 그 날에 이스라엘은 이집트와 앗수르와 더불어 세 번째 되어,
토지 한 가운데에서 복될 것인 바, 여호와 체바옫(Zebaoth)께서 복 주시며 말하시기를,
이집트 내 백성, 그리고 내 손의 일들 앗수르, 그리고 내 상속자 이스라엘은
복 되다 (이. 19:23-25).
위 구절 내지 다른 인용 구절에서도 이집트에 의해 기억 속의 지식이, 앗수르에 의해 추론함이, 이스라엘에 의해 총명이 의미된다.

“이집트”에 의해서와 같이 “유브라데” 역시 기억 속의 지식들, 또한 감각적인 것들이 의미된다. 이 감각적인 것들로부터 기억 속의 지식들이 얻어진다. 이는 예언서로부터 분명해지는데, 미가서를 보자:
나의 적(she-enemy)이 말했다, 여호와 네 하느님은 어디 있느냐? 그가 네 성벽들을
건설하는 날, 그 날 법령이 멀리 옮겨질 것이다; 그 날 그는 앗수르로부터 네게,
그리고 이집트에게, 그리고 [유브라데] 강에 올 것이다 (미. 7:10-12).
이렇게 예언자들은 인간이 천적 인간이 되어가도록 그를 거듭나게 할 주님의 오심에 관하여 이야기한다. 예레미야서에서:
네가 시홀의 물들을 마시려고 이집트의 길에서 무엇을 하려드느냐?
네가 [유브라데]강의 물들을 마시려고 앗수르의 길에서 무엇을 하려드느냐? (예. 2:18),
거기서 “이집트”와 “유브라데”도 마찬가지로 기억 속의 지식을 의미하고, “앗수르”는 거기서부터 파생된 추론들이 의미되는 바, 다윗서에서:
당신께서는 포도나무를 이집트로부터 나가게 만드셨다; 당신은 민족들을 몰아내셨다;
당신은 그녀를 심으셨다; 당신은 그녀의 어린 가지들이 바다에까지 뻗게 하셨다,
그리고 그녀의 굵은 가지들은 (유브라데) 강까지로 뻗게 하셨다 (시. 80:8, 11),
거기서 역시 “유브라데 강”은 감각적인 것과 기억으로부터의 것을 의미한다. 그 이유가 유브라데는 앗시리아로 향한 이스라엘의 경계였기 때문이다. 마치 기억으로부터의 지식이 영적 인간과 천적 인간의 총명과 지혜의 경계선인 것과 같다. 같은 것이 아브라함에 의해 말해진 것을 수단으로 의미되어진다:
네 씨에게 나는 이 토지, 이집트의 강으로부터 큰 강, 유브라데 강에 이르러
줄 것이다 (창. 15:18).
이 두 경계선들도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

천적 질서의 본성, 또는 생명 속의 것들이 어떻게 진행되는가는 이런 강들로부터 분명하다. 즉 “동쪽”이신 주님으로부터, 그리고 그분으로부터 지혜가 진행되고, 지혜를 통하여 총명이, 총명을 통하여, 추론함이, 추론함을 수단으로 기억 속의 지식들은 생기 있어진다. 이것이 생명의 질서이고, 천적 인간들은 이와 같은 바, 그들은 “슬기롭고, 총명하며, 그리고 지식이 있는 자”이다 (신. 1:13,15). 그런고로 궤를 건축한 브살렐에 관해 말해지기를:
하느님의 영을 가지고, 지혜 안을, 이해력을, 지식을, 그리고
그의 모든 일을 채우셨다 (출. 31:3, 35:31, 36:1-2).

15절. 여호와 하느님께서는 동산을 경작하고 돌보도록 사람을 데려다가 에덴의 동산에 놓으셨다.
이미 상술했듯, “에덴의 동산”을 수단으로 천적 인간의 모든 것이 의미되었다; “이 동산을 경작하고 돌보는 것”을 수단으로 모든 것을 즐기도록 천적 인간에게 허락되어졌다가 의미되어 있다. 그러나 그것들은 주님의 것이므로 그것을 자신의 것으로 소유해서는 안되었다.

천적 인간은 인정한다. 그 이유는 모든 것들, 일반적, 세부적 측면에서 모두는 주님의 것임을 지각하기 때문이다. 영적 인간도 천적 인간과 참으로 똑같게 인정하나, 그 인정은 입을 가지고서 이다. 그 이유는 그가 그것을 주님으로부터 배웠기 때문이다. 세상적이고 육체적인 인간은 그것을 인정하지 않고 승인도 없다; 그러나 그가 가진 것은 무엇이든 그는 그것이 자기 것이라 부른다, 그리고 그것을 잃는 것은 자신을 멸하게 한다고 상상한다.

지헤, 총명, 추론, 지식은 인간으로부터 있지 않고, 주님으로부터 있다는 것은 주님께서 가르치신 모두로부터 분명하다; 마태복음에서, 주님이 집주인, 즉 포도원을 창설하고, 그 것 주위에 울타리를 치고, 농부들에게 세를 준 주인에 비유되고 있다 (21:33). 그리고 요한복음서에서:
진리의 참 영이 모든 진리 안으로 너희를 안내할 것이다: 그 이유가 그는
자신으로부터 이야기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듣는 것은 무엇이든,
[그것]을 이야기할 것이다: 그는 나를 신성화 할 것이다: 그 이유가 그는 나의 것을
받을 것이고, [그것]을 너희에게 선포할 것이기 때문이다 (요. 16:13-14).
인간은 천국으로부터 그에게 주어지지 않으면 아무 것도 받을 수 없다 (요. 3:27).
이것이 실제로 그렇다는 것은 천국의 신비에 조금만이라도 친숙해진 이들에게는 알려져 있다

16절. 여호와 하느님께서는 사람에게 명령하여, 말하시기를. 너는 동산의 모든 나무로부터 먹어도 된다.
“모두 각각의 나무를 먹는 것”은 선하고 참된 것을 지각함으로부터 아는 것이다. 그 이유가, 이미 주목했던 바 같이, “나무”는 지각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태고 교회의 사람들은 계시들을 수단으로 진정한 신앙에 관한 지식들을 가졌다. 그 이유는 그들은 주님과, 그리고 천사들과 대화했기 때문이다, 또한 환상과 꿈에 의해서도 가르쳐졌다. 이 가르침은 그들에게는 최고의 기쁨이자, 낙원의 기쁨이었다. 그들은 주님으로부터 계속적으로 지각을 가졌다, 하여 그들은 기억 안에 쌓아둔 것으로부터 꺼내 되튀겨 봄으로 어떤 것이 참되고 선한지의 여부를 즉시 지각했고, 거짓된 어떤 것 자체가 표출될 때, 그것을 피할 뿐 아니라 공포가 엄습하는 바 그것을 아예 무시해버렸다; 이것이 천사들의 상태이다. 후에, 태고 교회의 이 지각 대신, 이전에 계시되어 왔었던 것으로부터 선하고 참된 것에 관한 지식이 계승되어졌다, 그 후에는 말씀 안에 선하고 참된 것에 관한 지식이 계승되어져 (지금까지에) 이르고 있다.

17절. 그러나 너는 선과 악에 관한 지식의 나무로부터는 먹지 말라, 그 이유는 그것을 먹는 그 날에 너는 죽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 설명해 온 것까지 취합해보면, 이 구절의 말들은 자아와 세상으로부터가 아니다면 모두 각각의 지각을 수단으로 주님으로부터 파생된 참되고 선한 것과 친숙해지는 것은 허용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즉, 우리는 감각으로부터의 것들과 기억 속의 것들을 수단으로 신앙의 신비를 파헤쳐 보겠다해서는 안된다. 그 이유는 이럴 경우, 신앙의 천적인 것(천적 등급)이 파괴될 것이기 때문이다.

감각과 기억으로부터의 것들을 수단으로 신앙의 신비를 탐사하고 싶은 바램(desire)이 다음 장에서 취급되듯이 태고 교회의 후손들이 타락하는 원인이었을 뿐 아니라, 모두 각각의 교회의 타락의 원인이기도 하다; 그 이유가 이로부터서는 (생각에는) 거짓들만, 생활에는 악만이 출현하기 때문이다.

세상적이고 육체적인 인간은 자기 심정에서 말한다. 만일 내가 신앙에 관해, 그리고 신앙에 관련한 모든 것에 관해 가르침을 받지 않았다면, 내가 보기 위해 감각적인 것을 수단으로 했을 것이고, 내가 이해하기 위해 기억 속의 것들을 수단으로 했을 것이니, 나는 믿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이 사람은 자연적인 것들이 영적인 것들과 반대되어져 있을 수 없다는 판단 아래 자신을 확증한다. 고로 이 사람은 천적인 것과 신성인 것이 감각적인 것으로부터 가르쳐지기를 바란다. 그러나 이 바램의 실현은 낙타가 바늘 귀를 통과하는 것보다 더 불가능하다; 그 이유는 그가 이런 식을 수단으로 더 바랄수록 그는 더 눈먼 자가 되기 때문이다. 결국 그는 모든 것이 아무 것도 없는 수준, 급기야는 영적인 것, 영원한 생명, 어떤 것이든 믿지 않게되고 만다. 이런 것은 당사자가 당연하다고 여기는 원리로부터 온다. 그리고 이것이 “선과 악에 관한 지식의 나무로부터 먹는 것” 이다. 누군가가 이로부터 더 먹을 수록 그는 더 죽은 자가 된다. 그러나 세상으로부터가 아닌, 주님으로부터 슬기로워진 사람은 자기 심정에서 이렇게 말한다. 주님은 반드시 믿어져야만 한다는 것, 즉 주님이 말씀에서 이야기 하신 것은 반드시 믿어져야 한다는 것, 그 이유는 그것들이 진리들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원리에 따라 그는 자기 생각들을 규율한다. 그는 (이 원리를 원칙으로) 추론으로부터의 것들, 지식으로부터의 것들, 감각으로부터의 것들, 자연으로부터의 것들을 수단으로 자신을 확증한다. 그리고 확증이 있지 않은 것들은 한쪽으로 내던진다.

인간은 자기가 당연하다고 여기는 원리들을 수단으로 통치되어진다는 것은 모든 이가 알고 있을지 모른다. 이는 거짓된 것조차도, 그리고 그의 모든 지식과 추론함은 그의 원리들을 찬성하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을지 모른다; 그 이유가 무수한 생각들은 자기 마음에 표출된 것을 지지하는 쪽으로 구부려드는 경향이 있기 때문, 고로 인간은 거짓된 것 안에서도 확증이 가능하다. 그러므로 (자기 눈에)보여지고, 이해될 때까지 믿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원리로 당연시하는 사람은 결코 믿을 수 없다. 그 이유는 영적인 것과 천적인 것들은 눈으로 보여질 수 없고 상상 같은 것 가지고 마음에 품어볼 수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정한 질서는 인간이 주님으로부터, 즉 말씀으로부터 슬기로워지는 것이다, 모든 것은 이 뒤를 따르는 것이다. 하여 그는 추론에 관한 문제들, 기억 속의 지식들에 관한 문제들조차도 계발되어진다. 그 이유가 과학들을 배우는 것이 금지된다는 것은 결코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들은 인간의 삶에 유익하고 삶을 기쁘게 할 것이기 때문. 또한 신앙 안에 있는 사람도 세상의 지식을 습득하고 생각하고 말하는 것이 금해지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이것도 이 원리로부터, 즉 주님의 말씀을 믿는 것으로부터 있어야 한다. 가능한한, 영적이고 천적인 진리들을 세상 지식 속의 친근해진 말 안에서 자연적 진리들을 수단으로 확증하는 것이다. 어쨌든 그의 출발점은 주님이어야지, 자신이 아니다; 그 이유가 전자는 생명이고, 후자는 죽음이기 때문이다.

세상으로부터 슬기로워지기를 바라는 사람은 자기 “동산”을 감각적인 것들과 기억 속의 것들로부터 가진다; 자아를 사랑함과 세상을 사랑함이 그의 “에덴”이다; 그의 “동쪽”은 서쪽, 또는 자신이다; 그의 “유브라데 강”은 그의 모든 기억 속의 지식이고, 이것은 정죄되어진다; 그의 “둘째 강”, “앗시리아”인 곳, 거짓들을 대량으로 생산하는 얼빠진 추론들이다; 그의 “셋째 강”, “유브라데”인 곳, 거기로부터 파생된 악과 거짓으로부터의 원리들이다. 이것들이 그의 신앙에 관한 지식들이다; 그의 “네째 강”은 거기서 파생된 지혜이다. 이것은 말씀에서 “마술”이라 불리운다. 그러므로 “이집트”-이는 기억 속의 지식을 의미하는데-후에 이 지식은 마술이 되었는 바, 그런 사람도 의미한다. 이는 말씀으로부터 알 것이다. 이 사람은 자아로부터 슬기로워지기를 바라고 있다. 이에 관해 에스겔서를 보자:
고로 주 여호비께서 말하셨다, 잘 보라, 나는 너, 이집트의 왕 바로,
자기 강들의 한가운데 드러누운 큰 고래에 맞서 있다, 이 자가 말했다,
내 강은 나의 것이다, 그리고 나는 나 자신 그것을 만들었다. 그리고 이집트의 토지는
황무하고 피폐된 채로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내가 여호와임을 알 것이다,
이 강은 나의 것, 그리고 내가 그것을 만들었다 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겔. 29:3, 9).
이런 사람은 “지옥에 있는 에덴의 나무”라 불리워진다, 같은 예언서에서, 바로, 또는 이집트인이 이런 말들로 취급되어진다:
내가 그를 구덩이 안으로 내려간 그들과 함께 지옥 안으로 내려가게 만들었을 때;
그들에게 너는 에덴의 나무들 사이에 있는 영광과 위대함 안에 있음 같게 만들어져
있지 않았더냐? 그럼에도 너는 에덴의 나무들과 함께 더 낮은 땅 안으로,
할례받지 않은 자 한가운데에서, 검으로 죽임을 당한 그들과 더불어 내려가게
만들어질 것이다. 이것이 바로와 그의 군대이다 (겔. 31:16, 18),
위에서 “에덴의 나무들”은 말씀으로부터의 지식들을 명시한다, 이것을 그들은 추론들을 수단으로 모독한다.

18절. 그리고 여호와 하느님께서 말하시기를, 사람이 홀로 있는 것은 좋지 않으니; 내가 그와 함께 있을 도움을 만들리라.
“홀로(alone)”를 수단으로 의미된 바, 그는 주님에 의해 인도되는 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자기(self)와 세상에 의해 인도되기를 바랐다는 것이다; “그와 함께 있을 도움”은 인간의 자기 자신을 의미하고, 이것은 동시에 “여인으로 건축된 갈빗대”라 불리웠다.

고대 때에 천적 인간 같이 주님의 안내 아래 있었던 이들을 두고 “홀로 거주함”이라 말했었다. 그 이유는 이들은 악들, 또는 악령들에 의해 있는 (악과 거짓에) 감염됨이 더 이상 없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이스라엘 자손들이 (가나안 토지에서) (타)민족들을 몰아내었을 때, 그들 만이(alone) (그 토지에서) 거주함을 수단으로도 유대 교회 안에서 표현되어졌다. 이런 연유로, 이것이 말씀에서 주님의 교회에 관해 말해질 때 그녀는 “홀로”이다 하고 때로는 말해진다. 예레미야서를 보자:
일어나라, 너는 확신을 갖고 거주하는 조용한 민족에 이르러라, 주님께서 말하신다,
거기는 문들이나 빗장이 없다; 그들은 홀로 거주하고 있다 (예. 49:31).
모세의 예언에서:
이스라엘은 홀로 확신을 갖고 거주했었다 (신. 33:28).
그리고 발람의 예언에서는 더 명료하다:
보라, 백성들이 홀로 거주한다, 그리고 민족들 사이에서
세어지지 않을 것이다 (민. 23:9),
여기서 “민족들”은 악들을 의미한다. 태고 교회의 후손들은 홀로 거주할 의향이 없었다. 즉 천적 인간이기를 바라지 않았다. 마치 유대 교회, 즉 이스라엘 후손이 민족들 사이에 있기를 바란 것과 같다. 태고 교회 후손이 홀로 있기를 바라지 않았기 때문에, “사람이 홀로 있는 것은 좋지 않다”라고 말해진다. 그 이유가 바라고 있는 자는 이미 악 안에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것이 그에게 수여되었다.

“그와 함께 있을 도움”이 인간의 자기 자신을 의미한다는 것은 이 자기 자신의 본성, 그리고 뒤이어지는 것, 둘 다로부터 분명해진다. 어쨌든 여기서 취급된 교회의 사람이 호의를 가졌던 바, (주님의) 자기 자신(an own)이 그에게 수여되었는데, 이런 종류의 자기 자신이 마치 그의 자기 자신 같이 나타났는 바, “그와 함께 있을 도움”이라 말해졌다.

인간의 자기 자신에 관하여, 세분하면, 육체적, 세상적 인간과 더불은 인간의 자기 자신, 영적 인간과 더불은 인간의 자기 자신, 천적 인간과 더불은 인간의 자기 자신, 이런 것들의 본성을 (말로) 설명하려면 무수한 것들을 열거해야 할 지 모른다. 육체적이고 세상적인 인간과 더불어서, 그의 자기 자신은 그의 모든 것이다. 그는 그의 자기 자신 밖에 아는 것이 더 없다. 앞서 말했듯이 이 인간은 만일 자기 자신을 상실하면 자기는 멸해지고 말 것이다 라고 상상한다. 영적 인간과 더불어서도 외관은 앞의 인간과 비슷하다. 그 이유가 비록 그가 주님이 모든 것의 생명이시다는 것, 지혜와 이해함을 주신다는 것, 결과적으로 생각하고 행하는 힘을 주신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해도, 그는 자기 심정의 신조로부터라기보다는 입술로부터의 고백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천적 인간은 주님이 모두의 생명이시다는 것, 생각하고 행하는 힘을 주신다는 것을 식별한다, 그 이유는 그는 그것이 그렇게 실제로 있음을 지각하기 때문이다. 그는 그의 자기 자신을 결코 바라지 않는다, 그럼에도 자기 자신(an own)이 주님에 의해 그에게 주어진다, 이 자아는 선하고 참된 것에 관한 모든 지각과 결합되어 있다, 그리고 모든 행복과도 결합되어 있다. 천사들은 이와 같은 (주님의) 자기 자신(an own) 안에 있다, 그리고 동시에 최고 높은 평화와 고요함 안에 있는다. 그 이유가 그들의 자기 자신 안에 주님의 것이 있기 때문이다. 하여 주님은 그들의 자기 자신을 통치하시고, 그들의 자기 자신을 수단으로 그들을 통치하신다. 이 자기 자신은 더할나위 없는 천적 자체이다. 이에 반해 육체적 인간의 것은 지옥적이다. 그러나 이 자기 자신은 이후 더 취급할 것이다.

19, 20절. 여호와 하느님께서는 지면으로부터 들판의 모든 짐승과 하늘의 모든 새들을 만들어 내셨다. 그리고 사람이 그것들을 어떻게 부를 것인지를 보시기 위해 그에게 데려왔다. 그래서 사람이 모든 살아있는 혼을 부르자, 그것이 이름이 되었다. 20절 그리고 사람은 모든 짐승에게, 하늘의 새에게, 들판의 모든 야생 동물에게 이름을 주었다. 그러나 사람과 함께 할 도움은 발견되지 않았다.
“짐승들”을 수단으로 천적인 애착들이, 또는 의지 측면의 애착들, “하늘들의 새들”을 수단으로 영적 애착들이, 또는 이해함 측면의 애착들이 의미되어진다. “그가 그것들을 부르는 것을 보시기 위해 그것들을 그에게 데려 옴”에 의해 그 사람으로 그것들의 품질을 아는 것이 가능하게 하심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가 그것들에게 이름들을 주는 것”은 그가 그것을 알았다를 의미한다. 그러나 그는 주님에 의해 그에게 주어진 선에 대한 애착들과 진리에 관한 지식에 애착함들의 품질을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는 그의 자아에 기울어져 있었다. 이것이 앞절에서와 같은 표현, 즉 “그와 함께 있을 도움이 발견되지 않았다”에 표현되어 있다.

“짐승들”과 “동물들”을 수단으로 고대적으로는 애착들과 인간 안에 이와 비슷한 것들을 의미했다는 것은 오늘날의 경우에서는 낯설지 모른다; 그러나 이 때의 사람들은 천적인 관념 안에 있었는 바, 그리고 이와 같이 동물들을 수단으로 영들의 세계에서 표현되었는 바, 그리고 사실상, 그들이 이런 동물과 닮았는 바, 그들이 이야기했을 때, 그들은 그밖의 것을 뜻하지도 아니했다. 마찬가지로 짐승들이 언급되는 말씀 안에서도 일반적 측면이든, 특수적 측면이든, 위의 방식 외의 방법으로 의미를 뜻하는 곳은 없다. 예언적 말씀 전체는 위와 같은 방식으로 가득 차 있다. 그러므로 각각의 짐승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알지 못하면, 내적 의미를 포함하는 말씀의 이해는 불가능하다. 앞서 주시했던 바같이 짐승은 두 종류로 있다. 하나는 악하고 유해한 짐승들, 그리고 선하고 해가 없는 짐승들이 있다. 선한 짐승들에 의해서는 선한 애착이 의미되는데, 이런 짐승으로는 양, 어린 양, 비둘기 등등이다; 이것이 이미 취급한 천적 인간, 또는 천적인 영적 인간인 바, 같은 것이 여기서도 뜻해지고 있다. 일반적으로 “짐승들”이 애착들을 의미하는 것은 45-46항의 몇 인용구절로부터 알 수 있을 것인 바 여기서 추가로 확증해 볼 필요는 없으리라 본다.

“이름을 수단으로 부름”이 품질(quality)을 아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은 고대인들이 “이름”을 수단으로 어떤 것의 본질을 이해했기 때문에서이다. 그리고 “이름을 수단으로 보는 것과 부르는 것”에 의해 그들은 품질을 안 것을 이해했다. 이런 이유에서 그들은 자기들의 아들, 딸들에게 의미된 것에 따라 이름들을 주었다. 그 이유는 모두 각각의 이름은 그것 안에 특유한 어떤 것을 가졌기 때문이다. 이름으로부터, 이름을 수단으로, 그들은 자기들의 어린이들의 본성과 근원을 알런지 모른다. 이 부분은 미래의 책, 즉 야곱의 열 두 아들을 다루는 때 주님의 자비로부터 알게 될 것이다. 이름들이 이름 불러진 것의 근원과 품질을 함축하는 바, “이름으로 부름” 역시 같은 이해의 범주이다. 이것은 고대인들 사이에 말하는 관습적 양식이었으나 이를 이해하지 못하는 자들은 이런 것들이 의미되는 것에 의아해 할지 모른다.

말씀 안에서도 “이름”이 어떤 것의 본질을 의미했고, “이름으로 부르고 보는 것”에 의해서도 품질을 아는 것을 의미했다. 이사야서를 보자:
나는 네게 어둠의 보물들을 줄 것이다, 그리고 은밀한 장소의 감추인 재물을 네게
줄 것이다, 하여 너는 나, 여호와, 네 이름으로 너를 부른 분, 이스라엘의 하느님 임을
알 것이다. 야곱 내 종을 위하여, 내가 선택한 이스라엘을 위하여 나는 네 이름으로
너를 부르기까지 했다, 나는 너를 별명으로 불렀다,
그리고 너는 나를 알지 못하였다 (이. 45:3-4).
이 인용구절에서, “이름으로 부르는 것” 그리고 “별명으로 부르는 것”은 품질을 미리 아는 것을 의미한다.
다른 구절에서:
너는 새로운 이름으로 불러질 것이다, 이것을 여호와의 입이 선포하실 것이다 (이. 62:2),
이는 또 다른 품성이 되어가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이는 앞 뒤 구절로부터 나타난다.
다른 구절에서:
두려워 말라, 오 이스라엘이여, 그 이유가 나는 너를 되찾았고,
나는 네 이름으로 너를 불렀기 때문. 너는 나의 것이다 (이. 43:1),
이는 그분이 그들의 품질을 아셨음을 명시한다.
같은 예언서에서:
네 눈을 높게 들어올려라, 그리고 이것들을 누가 창조하였는지를 잘 보라,
그들의 군대를 수를 세어 데려내왔다. 그분은 그들을 이름으로
모두 부르실 것이다 (이. 40:26),
이는 그분이 그들 모두를 아셨음을 뜻한다.
계시록서에서:
너는 사데에서조차 몇 이름들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자기들의 의복들을 더럽히지 않았다; 그리고 그들은 흰(옷)을 입고 나와 함께 걸을 것이다; 그 이유는 그들은 가치 있기
때문이다. 이겨내는 그는 흰 의복이 입혀질 것이다; 그리고 나는 생명의 책에서
그의 이름을 삭제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의 이름을 내 아버지 앞에서,
그리고 그분의 천사들 앞에서 고백할 것이다 (계. 3:4-5).
이들의 이름들이 생명의 어린 양의 책 안에 Tm여 있지 않다 (계. 13:8)
위 인용 구절에서의 “이름들”에 의해서는 결코 이름들을 뜻하지 않고 품질들을 뜻한다. 천국 안에서는 누군가의 이름이 알려진 적이 없다. 오직 그의 품질만 알려져 있다.

서술되어 왔었던 것으로부터, 의미된 것의 연결이 알려질런지 모른다. 18절에서, “사람이 홀로 있는 것은 좋지 않다, 나는 그에게 그와 함께 있을 도움을 만들겠다”, 그리고 현재, “짐승”들과 “새들”이 이야기되어지고 있다. 이는 앞서 (1장에서) 취급되어졌었다, 그리고 즉시 반복되는 것, “사람을 위해 그와 함께 있을 도움이 발견되지 않았다.” 이는 비록 그가 선에 대한 애착과 진리에 관한 지식을 알게 허용되었을 지라도 그는 그의 자기 자신에 여전히 기울어 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 이유가 그들의 자기 자신인 것을 바라는 이들은 주님의 것들을 경멸하기 시작하고, 어쨌든 그들은 그것을 표현도 하고 보여주기도 하기 때문이다.

21절. 여호와 하느님께서 깊은 잠이 사람에게 떨어지게 하자, 그는 잤다. 그리고 그분은 그의 갈빗대 중 하나를 취하셨고, 그 대신 그 곳을 살로 폐쇄하셨다(메우셨다).
가슴의 뼈인 “갈빗대”를 수단으로 인간의 자기 자신이 뜻해진다, 이 안에는 생명력이 거의 없으나 인간이 친애하는 (주님의) 자기 자신(an own)이다; “갈빗대의 자리에 있는 살”에 의해 생명력이 있는 (주님의) 자기 자신(an own)이 뜻해진다; “깊은 잠”에 의해 그가 그의 자기 자신인 것을 가진듯 자신에게 비쳐지게 놓이는 상태가 뜻해진다. 이 상태는 잠이 든 것과 닮아있다. 그것 안에 있는 동안 그는 살고,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함이 자신으로부터라는 것밖에 아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이 거짓이다는 것을 알기 시작할 때, 그러면 그는 마치 잠에서 깨듯 일어난다, 그리고 깨어 있는다.

인간의 자기 자신(그리고 실로 그가 친애하는 것)이 가슴의 뼈인 “갈빗대”라 불린 이유는, 고대 사람들 사이에서, 가슴이 선행(charity)을 의미했다는 것, 그리고 갈빗대는 심장과 폐 모두를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뼈는 천한 것을 의미했는데, 그 이유는 그것들이 생명력이 조금이기 때문이다; 그 반면 살(flesh)은 생명력을 가진 것과 같은 것을 명시했다. 이 의미의 바탕은 태고 교회의 사람들에게 알려진 가장 깊은 신비 중의 하나이다. 이에 관하여는 주님의 신성한 자비로부터 이후 살핀다.

말씀에서도 역시 인간의 자기 자신은 “뼈들”에 의하여 의미되어지고 있다, 그리고 실로 자아는 주님에 의해 생기있어 진다. 이사야서로 보자:
여호와께서는 가믐에서도 네 혼을 만족하게 하실 것이다, 그리고 네 뼈들을
방심하지 않게 만드실 것이다, 그리고 너는 물을 댄 동산 같이 있을 것이다 (이. 58:11).
그때 너희는 볼 것이다, 그리고 네 심정은 기뻐할 것이다,
그리고 네 뼈들은 잎 같이 돋아날 것이다 (이. 66:14).
다윗서에서:
나의 모든 뼈들이 말할 것입니다, 여호와여, 누가 당신 같으리이까? (시. 35:10).
이것은 에스겔서로부터 더 명백해진다, 거기서 뼈에 살이 붙음에 관하여, 그리고 그것들 안으로 영이 놓이는 것에 관하여:
여호와의 손이 나를 계곡 한 가운데 놓았다, 그리고 그곳은 뼈들로 가득했다;
그리고 그분이 나에게 말했다, 이 뼈들에게 예언하라, 그리고 그들에게 말하라,
오 너 마른 뼈들아, 여호와의 말을 들어라; 고로 주 여호비께서 이 뼈들에게 말하신다,
잘 보라, 나는 너에게 숨을 가져올 것이다, 그리고 너는 살 것이다, 그리고
나는 네 위에 힘줄들을 놓을 것이다, 그리고 가죽으로 너를 덮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네 안에 숨을 놓을 것이다, 그리고 너는 살 것이다,
그리고 너희는 내가 여호와이심을 알 것이다 (겔. 37:1, 4-6).
인간의 자기 자신, 천국으로부터 관조할 때, 전체적으로 뼈만 앙상한, 생명없는 어떤 것 같이 나타난다. 그래서 매우 추하고, 결과적으로 그 자체 죽은 것 같다. 그러나 주님에 의해 생기있어질 때, 그것은 살같이 보인다. 그 이유가 인간의 자기 자신은 인간에게는 그것이 어떤 것이나 되는 듯, 참으로 모든 것 같이 보일지라도 그것은 단지 죽은 어떤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 안에 살아있는 것은 무엇이든 주님의 생명으로부터 이다. 만일 이 생명이 철회된다면, 그는 돌 만큼이나 죽은 자 되어 내동댕이 쳐진다; 그 이유가 인간은 오직 생명의 기관(organ), 그리고 기관이라 말해주어야 할 정도, 그리고 생명의 애착 같은 것일 뿐이다. 주님만이 그분의 자기 자신을 가지고 있으시다. 이 자기 자신을 수단으로 그분은 인간을 되찾으셨다. 그리고 이 자기 자신을 수단으로 그분은 인간을 구원하신다. 주님의 자기 자신은 생명이다. 그리고 그분의 자기 자신으로부터, 인간의 자기 자신, 그 자체 죽은 것이나, 살아있게 만들어진다. 주님의 자기 자신은 주님의 말들로부터도 의미되어지고 있다. 누가복음서에서:
영은 살과 뼈들을 가지고 있지 않으나 너희가 보는 바대로 나는 가지고 있다 (눅. 24:39).
또한 유월절 어린 양의 뼈는 부러뜨리지 않아야 한다에 의해서도 뜻해져 있다 (출. 12:46).

인간이 자기 자신 안에 있을 때, 또는 자기는 자기 자신으로부터 살고 있다고 가정할 때 이 인간의 상태는 “깊이 잠듦”에 비교되어진다. 고대인들은 실지로 깊이 잠듦이라 불렀었다; 이사야 29:10의 경우, 그들은 “깊은 잠의 영을 그들 위에 쏟았다”, 그리고 예레미야 51:57의 경우, 그들은 깊이 잠들어 있다(sleep a sleep) 등등 말해지고 있다. 인간의 자기 자신은 그 자체에서는 죽어 있다는 것, 그리고 스스로로부터 생명을 가질 자는 아무도 없다는 것은 영들의 세계 안에서 아주 분명하게 보여져 왔었는 바, 거기서 자신들 밖에 더 사랑하는 자가 없는 악령들, 자기들은 자신들로부터 살고 있다고 억지 주장하는 악령들은 감지할 수 있는 경험에 의해 (그렇지 않음을) 확신시켜졌다, 그리고 자기들은 자신들로부터서는 살지 못함을 고백하도록 강요 당했다. 수 년 동안 나는 특별한 방법에서 인간의 자아와 더불어 있는 경우가 어떤지를 알도록 허락되어졌었다, 그래서 나는 나 자신으로부터는 아무 것도 생각할 수 없다는 것, 생각 속의 모든 관념은 (우리에게) 흘러들고 있다는 것을 명확하게 지각하는 것이 나에게 수여되었다. 그리고 때로는 나는 그것이 어떻게, 어디로부터 흘러드는지를 지각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자기는 자신으로부터 산다고 상상하는 인간은 거짓인 것 안에 있다, 그리고 자기는 자신으로 산다고 믿는 것을 수단으로 악하고 거짓인 모든 것을 자신의 것이 되게 한다. 만일 그의 믿음이 어떤 경우 속의 진짜의 진리에 일치하고 있다면, 이 사람은 악하고 거짓된 모든 것을 자신의 것이 되게 실행하는 일은 결코 없었을 것이다.

22절. 여호와 하느님께서 사람으로부터 취한 갈빗대로 그분께서는 여자를 건축하셨고, 그녀를 사람에게 데려왔다.
“건축하는 것”은 (땅에) 뒹굴고 있는 것을 일으켜 세우는 것이 의미되어진다; “갈비”를 수단으로, 인간의 자기 자신은 살아있지 않다는 것; “여인”을 수단으로 인간의 자기 자신은 주님에 의해 살았다는 것; “그분이 그녀를 사람에게 데려 옴”을 수단으로 그의 자기 자신인 것이 그에게 수여되었다는 것이 의미되어지고 있다. 이 교회의 후손은 자기들의 부모 같이 천적 인간이기를 원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의 자기 자신의 스스로 안내함 아래 있기를 원했는 바, 고로 이 후손들은 그들의 자기 자신으로 기울고 있는 바, (주님의) 자기 자신(an own)이 그들에게 수여되었고, 계속 이 자기 자신(an own)은 주님에 의해 살아 있었다. 그러므로 (이것이) “여인”이라 불리었고, 후에 “아내”라고 불리었다.

여인이 사람의 갈빗대로부터 만들어내지지 않았다라고 (글자로부터) 식별하는 것, 하여 이 대목에는 지금까지 누군가들이 알아채린 것보다 더 깊은 비밀들이 함축되어져 있다는 것을 식별하는 데는 주의력이 요구되지만 누군가의 경우들은 거의 이 대목에 집중력을 발휘하지 않는다. 그리고 “여인”을 수단으로 사람의 자기 자신이 의미되어진다는 것은 (먹도록) 유혹되어진 자가 여인이었다는 사실로부터 알아질런지 모른다; 그 이유가 유혹하는 것은 그의 자기 자신, 똑 같은 것으로, 자기를 사랑함과 세상을 사랑함밖에 더 없기 때문이다.

갈빗대가 “여인으로 건축”되어진다고 말해지고, 앞 장에서 거듭남이 취급될 때 사용한 단어인, “창조되어졌다”, 또는 “형성되어졌다(formed),” 또는 “만들어졌다(made)”가 본문의 여인에게는 사용되지 않고 있다. 그런 이유는 “건축하는 것”은 (땅에) 뒹굴고 있었던 것을 일으켜세우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의미 안에서 이 단어가 사용되는 구절을 찾아 읽으면, “건축”하는 것이 악들에 관해 서술되고, “일으켜세우는” 것은 거짓들에 관해 서술되고 있다. 그리고 “새롭게 하는(renew)” 것은 악과 거짓 모두에 관련되어 사용되고 있다. 이사야서를 보자:
그들은 영원으로부터 쓸모 없는 것들을 건축한다, 그들은 고대의 황무한 것들을
다시 세운다, 그리고 그들은 쓸모 없는 성들, 대대로 황폐해 있던 것을 새롭게
할 것이다 (이. 61:4).
위 구절에서의 “쓸모 없는 것들(wastes)”, 다른 인용구절에서도 악들을; “황무한 것들(desolations)”은 거짓들을; “건축하는 것(build)”은 전자에 적용되고, “다시 세우는 것(set up again)”은 후자에 적용된다, 그리고 이 구분은 예언자들에 의해 조심스럽게 주목되고 있다. 예레미야서를 보자:
그럼에도 여전히 나는 너를 건축할 것이다, 그리고 너는 건축되어질 것이다,
오 이스라엘의 처녀여 (예. 31:4).

인간의 자기 자신은 악과 거짓을 빼면 자기 자신으로 가능해질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 이유가 인간의 자기 자신은 악 자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인간은 악과 거짓밖에 더 아니다. 이 대목은 인간 자아 속의 것들이 영계에서 관조하도록 표출되어졌을 때, 분명히 알게 되었는데, 그것들은 모양없이 나타나서 더 흉측하게 그려내본다 하는 것도 불가능했다. 그럼에도 자기 자신의 본성에 따라 차이는 있는데, 눈에 보이게 진열된 자기 자신 속의 것들은 공포를 일으켰다, 마치 악마로부터는 도망치고 싶듯, 자신으로부터 도망하기를 바랄 뿐이었다. 그러나 주님에 의해 살아있는 인간의 자기 자신 속의 것들은 아름답고 사랑스럽게, 주님의 천적인 것이 응용되는 생명에 따라 다양하게도 나타난다; 실로 선행을 증여받았던 이들, 또는 선행으로 해서 생명있는 이들은 최고의 아름다운 모습을 지닌 소년소녀들 같이 나타난다; 그리고 순진 안에 있는 이들, 벌거벗고 있는 유아들 같고, 그들의 가슴을 빙둘러 화환으로 꾸미고, 머리에는 왕관을 쓰고, 다이아몬드 같은 분위기에서 살고 놀고 있다, 그리고 진짜 가장 깊은 데로부터 행복을 지각하고 있다.

“갈빗대가 여인으로 건축되어졌다”는 대목에는 누군가가 글자로부터 발견했다는 것 너머에 아주 깊게 감추인 것들이 있다; 그 이유가 주님의 말씀에서 가장 깊은 내용은 주님 자신, 그분의 왕국, 이로부터 말씀의 모든 생명이 온다는 것을 중시하기 때문이다. 이 구절은 이 말씀의 가장 깊은 내용 안에서 천국의 결혼을 중시하고 있다. 천국의 결혼은 주님에 의해 살아있는 인간의 자기 자신 같은 본성 속에 존재하는 바, 이것은 주님의 “신부와 아내”라 불리운다. 고로 생기있는 인간의 자기 자신은 사랑의 선과 신앙의 진리 모두를 지각한다, 결과적으로 형언할 수 없는 행복과 결합된 모든 지혜와 총명을 소유하고 있다. 그러나 살아있는 이 자기 자신의 본성, 즉 주님의 “신랑과 아내”라 불리는 자기 자신은 간결하게는 설명되어질 수 없다. 그러므로 천사들이 자신으로부터 살고 있다는 것 외에 달리 알지 못한다는 것이 이 주제에서 반영되고 있지는 않다 하더라도, 천사들은 주님으로부터 살고 있다는 것을 지각함을 주목하는 것만에서 (이해함에) 만족해야 할 것 같다. 천사들은 사랑의 선과 신앙의 진리로부터 아주 조금만 떠나도 그들은 변화를 지각하는 애착의 본성을 지녔기에, 그들은 형언할 수 없는 자기들의 평화와 행복을 향유함 속에 있다. 이 자아가 예레미야에서 뜻해지고 있다:
여호와께서 땅에서 새로운 것을 창조하였다, 여인이 남자를 두를 것이다 (예. 31:22 ).
위 인용구절에서도 역시 천국의 결혼이 의미되어져 있다. 즉 “여인”을 수단으로 주님에 의해 생생해진 자기 자신이 뜻해진다, 이 구절로부터 여인은 “두르다, compass”라는 표현으로 서술되고 있다. 그 이유는 살로 만든 갈빗대가 심장을 에워싸(encompass) 듯, 이 자기 자신의 본성은 에워싸는 것 같기 때문이다.

23절. 그리고 사람이 말했다. 지금 이는 지금 내 뼈들 중의 뼈요 내 살 중의 살이다. 그러므로 그녀는 아내라 불리울 것인데 그 이유는 그녀가 남자(vir)로부터 취해졌기 때문이다.
“뼈들 중의 뼈, 살 중의 살”은 외적 인간의 자기 자신을 의미한다; “뼈”, 이 자기 자신은 생명이 그리 많지 않다, 그리고 “살” 이 자기 자신은 생기 있어진 자기 자신이다. 더 나아가 사람은 내적 인간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의 존재로부터(내적 인간으로부터) 외적 인간과 이렇게 짝을 이루는 바, 뒤이어지는 구절에서 이전에 “여인”이라 불리던 자기 자신이 여기서 “아내”라 명명되어졌다. “지금”은 상태가 바뀌었기 때문에 이때에 결과되었음을 의미한다.

“뼈들 중의 뼈와 살 중의 살”이 내적 인간이 안에 있는 외적 인간의 자기 자신을 의미했던 연유로, 그들의 자기 자신이라 일컬을 수 있는 모든 이들, 나아가 한 가문 속의 이들, 한 가족 속의 이들, 꽤 가깝다 하는 이들까지도 “뼈들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일컬어 말했다. 고로 라반이 야곱에게 말했다,
정녕 너는 내 뼈이고 내 살이다 (창. 29:14).
그리고 아비멜렉이 자기 어머니의 형제들에 관해서, 그리고 자기 어머니의 아버지의 가문 속의 가족을 두고,
나는 네 뼈이고 네 살임을 기억하라 (사. 9:2).
이스라엘 지파들이 다윗에게 자신들에 관해 말했다.
잘 보시오, 우리는 당신의 뼈이고 당신의 살입니다 (삼하. 5:1).

남자가 내적 인간, 같은 것으로 총명하고 슬기 있는 자를 의미한다는 것은 이사야서로부터 명백하다:
나는 잘 보았다, 그리고 남자(vir)가 없다, 그들 사이에서조차,
그리고 조언자가 없다 (이. 41:28),
위 구절은 슬기롭고 총명한 자가 없음을 뜻한다. 또한 예레미야서에서:
너는 예루살렘의 거리들을 이리저리로 달려라, 그리고 네가 사람을 발견할 수 있는지,
진리를 추구하는 (자), 실행하는 정의가 있는지를 살펴라 (예. 5:1).
“정의를 실행하는 자”는 슬기로운 인물을 뜻한다; 그리고 “진리를 추구하는 자”는 총명한 자를 뜻한다.
그러나 천적 인간의 상태가 이해되고 있지 않으면, 이런 경우가 어떻게 이런 것들과 더불어 있는지를 지각하는 것은 쉽지 않다. 천적 인간 안에서 내적 인간은 외적 인간으로부터 구분되어 있다. 실로 이 구분은 아주 잘되어 있어 천적 인간은 내적 인간에 속하는 것을, 외적 인간에 속하는 것을, 그리고 어떻게 외적 인간이 주님에 의해 내적 인간을 통하여 통치하시는지를 지각한다. 그러나 천적 인간의 후손의 상태는, 외적 인간에 속하는 그들의 자기 자신을 바란 결과로, 아주 바뀌어져, 그들은 외적 인간으로부터 구분되는 내적 인간을 더 이상 지각하지 못했다. 하여, 이 후손들은 내적 인간은 외적 인간과 하나이다고 상상했는데, 그 이유는 이런 식의 지각은 인간이 그의 자기 자신 쪽으로 기울 때 거행되기 때문이다.

24절. 그러므로 남자는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날 것이고, 그리고 그의 아내와 굳게 결합할 것이고, 그리고 그들은 한 몸이리라.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는 것”은 내적 인간으로부터 물러나는 것이다. 그 이유는 내적 인간이 외적 인간을 임신하고 낳기 때문이다; “그의 아내와 굳게 결합하는 것”은 내적 인간이 외적 인간 안에 있을런지 모른다는 것이다; “하나의 몸이다”는 것은 두 인간들은 거기서 함께 있다는 것; 이전에 내적 인간과 내적 인간으로부터의 외적 인간은 영(spirit)이었는데, 지금 그것들은 몸(육, flesh)이 되었다. 고로 천적 생명과 영적 생명은 자아에 결합되어 있다, 하여 그것들은 하나로서 있을지 모른다.

태고 교회의 이 후손은 악은 아니었고, 여전히 선 이었다; 그리고 그들이 외적 인간 안에서, 또는 그들의 자아 안에서 살기를 바랐기 때문에, 이것이 주님에 의해 그들에게 허락되어진 것 뿐이다; 어쨌든, 영적인 것과 천적인 것이 자비로 거기 안에 주입되어져 있다. 어떻게 내적인 것과 외적인 것이 하나로서 행동하는지, 또는 어떻게 그것들이 하나로서 나타나는지는, 이것이 저것 안으로의 유입(influx)이 알려지지 않으면, 알아질 수 없다. 이것에 대한 생각을 품어보기 위해 행동이라는 것을 예로 취해보자. 행동 안에 선행(charity)이, 즉 사랑과 신앙이, 그리고 이것들 안에 주님이 있지 않으면, 행동은 선행의 일, 또는 신앙의 열매 라고 불려질 수 없다.

진리와 올바름에 관한 모든 법칙들은 천적인 시작들로부터, 또는 천적 인간의 생명의 질서로부터 흐른다. 그 이유가 전체 천국은 주님만이 천적 인간이시기 때문, 그리고 그분이 천국의 모든 것 안에 모두이시고 천적 인간이신 바, 이로부터 그들은 천적이라 불리우기 때문이다. 진리와 올바름의 모두 각각의 법칙이 천적 시작들로부터, 또는 천적 인간의 생명의 질서로부터 내려오는 바, 마찬가지로 특별한 방식에서 결혼의 법칙이 실행된다. 천적(또는 천국의) 결혼으로부터, 이 결혼에 의거, 땅 위 모든 결혼들이 파생되어 있음에 틀림이 없다; 그리고 이 결혼은 하나의 하느님, 하나의 천국, 또는 주님이 머리되는 하나의 교회와 같다. 이로부터 파생된 결혼의 법칙은 하나의 남편과 하나의 아내가 있다는 것이다. 이럴 경우, 그들은 천적인 결혼을 표현하고, 천적 인간의 본보기이다. 이 법칙은 태고 교회의 사람들에게 밝히 알려졌을 뿐 아니라, 그들의 내적 인간 안에 새겨져 있었다. 그러므로 그 당시 남자는 하나의 아내 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들은 하나의 집을 구성했다. 그러나 그들의 후손이 내적 인간이기를 중단하고, 외적 인간이 되었을 때, 그들은 여러 아내들과 결혼했다. 태고 교회의 사람들이 결혼 문제에서 천적인 결혼을 표현했기 때문에, 결혼의 사랑은 그들에게 있어 일종의 천국과 천국의 행복이었다, 그러나 교회가 기울었을 때, 그들은 결혼의 사랑에서 행복의 어떤 것도 더 이상 지각하지 못했다. 그러나 숫자로부터의 쾌락 안에 있었는데, 이 쾌락은 외적 인간의 즐거움이다. 이것이 주님에 의해 “심정의 완악함”이라 불려졌다. 이것 때문에 그들은 여러 아내와 결혼하는 것이 모세에 의해 허용되어졌다, 하여 주님께서 가르치신다:
그러자 예수께서 대답하여 그들에게, 너희 심정의 완악함 때문에, 그는 이런 명령서를
너희에게 써준 것이다. 그러나 창조의 시작으로부터, 하느님께서는 그들을 남성과
여성으로 만드셨다. 이런 원인 때문에 사람은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그의 아내에게 굳게 결합할 것이다; 그래서 그들 둘은 하나의 몸일 것이다:
그런 다음 그들은 더 이상 둘이 아니고, 하나의 인간이다.
그러므로 하느님이 함께 결합하신 것을, 사람은 떼어놓지 말라 (막. 10 5-9).

25절. 그리고 그들, 남자와 그의 아내 모두는 벌거벗고 있었고,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그들이 “벌거벗고 있었고 부끄러워 하지 않았음”은 그들은 순진하였음을 의미한다. 그 이유가 주님께서는 순진을 받아들이기 어려움을 방지하시기 위해 그들의 자기 자신 안으로 순진을 주입하셨기 때문이다.

인간의 자기 자신, 앞서 서술했듯이, 단지 악이다, 그리고 관조해보도록 자아가 진열될 경우, 어떤 모양인지 알 길이 없이 (흉칙하)다. 그러나 선행과 순진이 주님으로부터 자기 자신 안으로 주입될 때, 이 자기 자신은 선하고 아름답게 나타난다 (154항 참조). 선행과 순진은 인간의 자기 자신(인간 안의 악하고 거짓인 것)을 너그러이 봐 줄 뿐아니라, 마치 그것이 철폐되기라도 한듯 하여 있게 해준다. 이를 놓고 어린 아이들을 관찰해보자. 어린 아이들 안에서 악과 거짓은 아이들이 자기들의 부모와 서로를 사랑하고 있는 한, 감추여 있지 않을 뿐 아니라 즐거움이기까지 한다. 그리고 그들의 유아적 순진은 그 자체를 보인다. 이로부터 그가 순진의 어느 수준이라도 소유하지 않으면 천국 안으로의 입장을 허락받을 자는 아무도 없는 이유를 알런지 모른다. 이렇게 주님께서 말하셨다:
그러나 예수께서 그것을 보시고, 매우 언짢으셨다, 그리고 그들에게 말하셨다,
어린 아이가 내게 오는 것을 내버려두고, 그들을 금하지 말라: 그 이유가 하느님의
왕국은 이와 같음 속에 있기 때문이다. 참으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느님의 왕국을 어린 아이 같이 받지 않는 자는 누구든지,
그는 거기 안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막. 10:14-16).

“벌거벗음으로부터 그들은 부끄러워하지 않았다”는 것이 순진을 의미한다는 것은 뒤이어지는 것을 수단으로 입증되어진다. 그 이유가 성실과 순진이 떠났을 때 그들은 자기들의 벌거벗음을 두고 부끄러워했다. 그리고 그것이 자기들에게 수치스러운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므로 그들은 자신을 숨겼다. 같은 것이 영들의 세계에 있는 표현물들로부터도 분명해진다. 그 이유가 그들이 자신의 무죄를 증명하기를 원하여 자기의 죄없음을 증명할 경우, 그들은 자기들의 순진을 증명하려고 벗은 자신을 표출했기 때문이다. 특별하게는 천국에 있는 순진한 자로부터 분명해진다. 그들은 자신들의 순진의 본성에 따라 화환으로 장식하고 벗은 유아들로서 나타난다. 한편, 순진을 그리 많이 가지지 않은 이들은 그 (수준에) 어울리고 빛나는 의복 안에서 있는데, 이 천사들은 예언자들에 의해 가끔 보여진 바 있다.

위의 예는 말씀의 이 장 안에 포함된 것들의 몇에 불과하다. 여기서 발표되는 것은 극히 적을 뿐이다. 천적 인간을 취급했는 바, 이 인간은 현재로서는 거의 누구에게도 알려진 바 없기에, 여기서 설명하는 미미한 것 마저 불명료해 할 수 밖에 없을지 모른다.

만일 누군가가 각 구절에 얼마나 많은 신비가 포함되고 있는지를 안다면, 그는 깜짝 놀랄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 이유가 포함된 수많은 신비를 말하지 않고 지나쳐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이 글자에 보여진 바는 미미하기 때문이다. 이 문제를 짧게 서술하기 위하여: 글자의 말들은, 그것들이 있는 그대로 정확하게, 영들의 세계 안에서 아름다운 질서에서, 생생하게 표현되어진다. 그리고 거기서 생생하게 표현된 것은 무엇이든 표현물 안에 있는 세세한 것들에 이르러 두 번째 천국 안에 있는 천사와 같은 영들에 의해 지각되어진다; 천사와 같은 영들에 의해 지각된 것들은 세 번째 천국 안에 있는 천사들을 수단으로 형언할 수 없는 천사와 같은 관념 안에서 풍부하고 가득차게 지각되어진다. 그리고 이것은 주님의 선하신 기쁨에 일치되어 끝없는 다양함 안에 있다. 이와 같음이 주님의 말씀이다.
***************************************************

창세기 제 3 장

성경: 창세기 3:1-13절

1. 뱀은 여호와 하느님께서 만드신 들판의 여느 야생 동물보다 더 미묘했다. 그리고 그는 여자에게 말했다. 참으로, 하느님께서 너더러 동산의 모든 나무로부터 먹지 말라고 했느냐?
2. 그러자 여인이 뱀에게 말했다. 우리는 동산의 나무의 열매로부터 먹을 수 있지만
3. 동산의 한 가운데 있는 나무의 열매로부터, 하느님께서 말하시기를, 너는 그것으로 부터 먹지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네가 죽지 않기 위해서이다.
4. 그리고 뱀이 여인에게 말했다, 너는 정녕 죽지 않을 것이다.
5. 그 이유가 하느님께서는 네가 그것을 먹는 날에 네 눈들이 열려질 것이고, 네가 선 과 악을 앎에서 하느님같이 있을 것임을 알기 때문에서 이다.
6. 그리고 여인은 그 나무가 식품을 위해 좋고, 눈을 기쁘게 하고, 총명을 주고 싶어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녀는 열매를 취해서 먹었다, 그리고 그녀는 자기와 함 께 있는 그녀의 남자(vir)에게 주었다, 그리고 그는 먹었다.
7. 그리고 그들 모두의 눈이 열려졌다, 그리고 그들은 자기들이 벌거벗었음을 알았다. 그래서 그들은 무화과 나뭇잎을 꿰맸다. 그리고 자신들이 띠를 만들었다.
8. 그리고 그들은 낮의 공기에서 동산을 스스로 거니시고 있는 여호와 하느님의 목소 리를 들었다. 그래서 사람과 그의 아내는 여호와 하느님의 얼굴로부터 동산의 나 무 사이에 자신들을 숨겼다.
9. 여호와 하느님께서 사람(homo)에게 소리치셨다. 그리고 그에게 네가 어디 있느냐? 라고 말하셨다.
10. 그리고 그가 말하기를, 나는 동산에서 당신의 목소리를 들었고, 벌거벗었기에 나 는 두려워져서 나 자신을 숨겼습니다.
11. 그리고 그분께서 말하셨다, 누가 네가 벌거벗었다고 너에게 말했느냐? 너는 내가 먹지 말아야 한다고 명령한 나무로부터 먹었느냐?
12. 그리고 사람이 말했다, 당신께서 나와 함께 있도록 나에게 준 여인, 그녀가 나에 게 나무로부터 주었고, 내가 먹었습니다.
13. 그리고 여호와 하느님께서 여인에게 말했다, 왜 너는 이런 짓을 했느냐? 그리고 여인이 말했다, 뱀이 나를 꾀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먹었습니다.
14. 그래서 여호와 하느님께서 뱀에게 말하셨다, 네가 이런 짓을 했기 때문에 너는 모 든 짐승, 들판의 모든 야생 동물을 초월하여(above) 저주되고, 배로 다닐 것이며, 네 사는 날 동안 너는 먼지를 먹게 되리라.
15. 그리고 나는 너와 여자 사이에, 그리고 네 씨와 여자의 씨 사이에 증오(enmity) 를 놓을 것이다. 그는 네 머리를 짓밟을 것이고, 너는 그분의 뒤꿈치에 상처를 입 힐 것이다.
16. 그리고 여자에게 그분은 말하시기를, 내가 슬픔과 임신을 크게 늘릴 것이다. 슬픔 가운데 너는 아들들을 낳을 것이고, 너의 순종함이 너의 사람(남자)에게 있어, 그 는 너를 지배할 것이다.
17. 그리고 사람에게 그분은 말하시기를, 네가 네 아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기 때 문에, 그리고 내가 너에게 먹지 말라고 명령하여 말한 나무를 먹었기에 너 때문 에 지면은 저주된 바 너는 네 사는 모든 날들 동안 큰 슬픔 가운데 땅의 것을 먹 게 될 것이다.
18. 그리고 지면은 너에게 가시와 엉컹퀴를 산출하고, 너는 들판의 풀잎을 먹으리라.
19. 네가 지면으로 되돌아갈 때까지 너는 네 얼굴의 땀 속에서 빵을 먹을 것이다. 그 이유가 너는 먼지인 바 먼지로 되돌아 가야 하기 때문이다.
20. 그리고 사람은 그의 아내의 이름을 이브라 불렀는데 그 이유는 그녀가 모든 생명 있는 것의 어머니였기 때문이다.
21. 그리고 여호와 하느님께서는 사람과 그의 아내를 위해 가죽 코트(옷)를 만드셨고, 그들을 옷입혔다.
22. 그리고 여호와 하느님께서 말하시기를, 보라 사람이 선과 악을 앎에서 우리 중의 하나같이 되었다. 그리고 이제 그가 손을 내밀어 생명들의 나무 역시 가져 가서 먹고 영생하지 않도록 하리라.
23. 그러므로 여호와 하느님께서는 그를 에덴의 동산으로부터 내보내어 그가 있어지 게 했던 지면을 경작하게 하셨다.
24. 그래서 그분은 사람을 쫓아내셨다. 그리고 그분은 그룹들이 동쪽으로부터 에덴의 동산을 향하여 살게 만드셨고, 그 자체 회전하는 검의 불꽃이 생명들의 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셨다.

각 절의 내적 의미

1절. 뱀은 여호와 하느님께서 만드신 들판의 여느 야생 동물보다 더 미묘했다; 그리고 그가 여자에게 말했다. 참으로, 하느님께서 너더러 동산의 모든 나무로부터 먹지 말라고 했느냐?
여기서 “뱀”을 수단으로 인간이 신뢰를 두는 감각적 부분이 뜻해진다; 여기서의 “들판의 야생 동물”을 수단으로, 이미 살핀 바 같이, 외적 인간의 모두 각각의 애착이 뜻해진다; “여인”을 수단으로 인간의 자기 자신이 뜻해진다; 뱀이 한 말, “참으로, 하느님이 말하시기를, 너더러 모두 각각의 나무로부터 먹지 말라 하더냐?”에 의해 그들은 의심하기 시작했다가 뜻해진다. 여기서 취급되는 주제는 태고 교회의 세 번째 후손이다. 이 교회는 그들이 그렇다 하는 것을 보고 느끼지 않으면 계시된 것을 믿지 않기를 시작했다. 그들의 첫 상태, 이것은 의심 중의 하나였는데, 여기서와 다음에 이어지는 구절에서 묘사되어 있다.

태고인들은 인간 안에 있는 것들을 짐승들과 새들에 비교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렇게 그들을 일컬었다; 그리고 이런 그들의 말하는 관습적 방식이 홍수 후 고대 교회 안에까지 남아있었다. 그리고 예언자들 사이에서 보존되어졌다. 그들은 인간 안에 있는 감각적인 것들을 “뱀들”이라 불렀다, 그 이유는 뱀이 땅에 아주 가깝게하여 살고 있듯, 육체에 가장 밀접한 것, 육체 다음에 해당되는 것이 감각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또한 감각들의 증거들에 기초한 신앙의 비밀들에 관한 추론들을 그들은 “뱀의 독”이라 일컬었다. 그리고 추론자들 자신들을 “뱀들”이라 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인물들이 감각적인 많은 것으로부터, 즉 가시적인(visible) 것으로부터 (지상적인 것, 육체적인 것, 세속적인 것, 그리고 자연적인 것, 등등) 추론하기 때문에, “뱀은 들판의 여느 야생 동물보다 더 미묘했다.”
그리고 다윗서에서, 추론들을 수단으로 인간을 유혹하는 이들에 관해 말한다:
그들은 자기들의 혀를 뱀같이 날카롭게 한다;
독사의 독이 그들의 입술들 아래 있다 (시. 140:3).
그리고 다시:
그들은 거짓을 말하면서 자궁으로부터 길을 벗어나고 있다. 그들의 독은 뱀의 독
같고, 그녀의 귀를 멈추게하는 독성 강한 귀머거리 독사 같다. 하여 그녀는
불평자들의 음성을, 매력으로 홀리는 현자의 음성을 듣지 못한다 (시. 58:3-6).
위 구절에서 현자가 말하는 것, 또는 현자의 음성을 들으려하지도 않는 추론들을 “뱀의 독”이라 불리운다. 이러므로 고대인들 사이에 속담이 된 것이, “뱀은 귀를 멈추게 한다”이다. 아모스서에서:
마치 사람이 집에 와서, 벽에 자기 손을 기댔는데, 뱀이 그를 물었다.
여호와의 날은 빛 없는 어둠이지 않더냐? 그 안에 빛남 없는
짙은 어둠이기까지 않더냐? (암. 5:19-20)
“벽에 있는 손”은 자기에게서 파생되는 힘을 뜻한다. 그리고 감각적인 것을 신뢰함, 이로부터 눈 멀음이 오는데, 위에 묘사되어 있다.
예레미야서에서:
이집트의 음성은 뱀 같이 갈 것이다, 그 이유는 그들이 강력함에서 갈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무패는 자의 도끼들을 가지고 그녀에게 올 것이다. 그들은
그녀의 숲을 찍어 내릴 것이다. 여호와께서 말하신다. 그것이 수색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그들은 메뚜기보다 더 번성했다. 그래서 셀 수 없다. 이집트의
딸이 수치함에 놓일 것이다. 그녀는 북쪽의 사람의 손에 넘겨질 것이다 (예. 46:22-24).
“이집트”는 감각적인 것들과 기억 속의 지식들로부터 신성한 것들을 추론함을 명시한다. 이런 추론들이 “뱀의 음성”이라 불리운다; 그리고 거기로부터 눈 멀음이 야기되었다. “북쪽의 사람”(이 야기된 것이다). 욥기서에서:
그는 독사들의 독을 빨 것이다; 독사들의 혀가 그를 죽일 것이다.
그는 시내들을, 꿀과 버터가 흐르는 강들을 보지 못할 것이다 (욥. 20:16-17).
“꿀과 버터의 강들”은 영적인 것들과 천적인 것들이다. 이것은 추론자들에 의해 보여질 수 없다; 그리고 추론들이 “독사의 독”과 “독사들의 혀”라 불리운다. 뱀에 관한 것은 14,15절에서 더 살핀다.

고대 때에, 계시된 것들보다 감각적인 것들을 더 신용했던 이들을 “뱀들”이라 불렀다. 그런데 이것은 오늘날의 경우, 더 악화되어 있다. 그 이유가 지금 그들은 자기들이 볼 수 없고 느낄 수 없는 모든 것을 믿지 않을 뿐 아니라, 고대인들에게는 알려지지도 않았던 지식들을 수단으로 믿을 수 없음 안에서 자신들을 확증하기 때문이다. 고로 자신들이 더 큰 수준에서의 눈 멀음을 야기시킨다. 어떻게 이들이 자신들을 눈 멀게 하는지, 그후 보는 것, 듣는 것이 아무 것도 없게 만드는지, 감각적인 것들로부터 천국의 문제들에 관한 자기들의 결말들을 만들어내는 자들, 기억 속의 지식에 관하여, 그리고 철학에 관하여 (결말을 내는 자들), 그리고 “귀머거리 뱀들”, 뿐 아니라 말씀에서 자주 말해지는 더 치명적인 “날고 있는 뱀들”인 자, 이런 사람들이 영에 관하여 믿는 것을 아래에서 예를 들어 조금 생각한다.
감각적 인간, 또는 자기 감각들의 증거를 믿는 자는 영의 존재를 부정한다. 그 이유는 그가 그것을 볼 수 없기 때문이다. 말하기를, “내가 그것을 느낄 수 없기 때문에 그것은 아무 것도 아니다: 내가 보는 것, 만지는 것을 나는 존재들이라고 안다.” 기억적 지식으로부터의 인간, 또는 자기의 결말을 그의 기억 속의 지식들로부터 만들어 내는 자가 말하기를, 수증기나 열, 또는 옅은 공기 안으로 이내 사라져버리는 과학의 어떤 다른 실재물을 제외하면 무엇이 영인가? 동물들 또한 신체나 감각, 또는 추론에 유추되는 것을 가지지 않는가? 그럼에도 이것은 죽을 것이다고 확언한다. 그런데 인간의 영은 살아있을 것이다 하는 것은 어불성설 아닌가? 고로 그들은 영의 존재를 부정한다.
철학자들, 그들은 인류의 여타 사람들보다 더 날카로울 것인데, 그들은 자신들도 이해 못하는 전문용어 같은 말투로 영에 관하여 이야기한다. 그 이유는 그들이 그것들에 관하여 논쟁하기 때문이다. 하여, 물질적인 것, 유기체적인 것, 또는 광범위한 것으로부터 끌어내 영에 적용할 수 있는 표현은 단 한 개가 아니다고 경쟁하는 바, 그들은 그것을 자기들의 관념으로부터 추상화 하였는 바, 그것은 그들로부터 사라지고 만다. 결국 아무 것도 없는 셈이다. 좀 더 분별있는 자는 영은 생각이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생각에 관하여 그들이 추론하는 가운데, 모든 실재성을 그것으로부터 분리한 결과로, 결국 그들은 육체가 종료될 때 영도 사라져버린다고 결론맺는다. 고로 감각의 것들로부터 기억 속의 지식에 관하여, 그리고 철학에 관하여 추론하는 모든 이는 영의 존재를 부정한다. 고로 영과 영적인 것에 관하여 말해진 것은 무엇이든 믿지 않는다. 심정이 단순한 자는 위와 같지 않다: 만일 사람들이 영의 존재를 두고 의문이 있다면, 그들은 그것이 존재함을 안다고 말한다. 그 이유는 자기들이 사후 살 것이라고 주님께서 말하셨기 때문이다; 고로 자기들의 합리성을 소멸되게 하는 대신, 그들은 주님의 말씀을 수단으로 영의 존재를 살아있게 한다.

천적 인간이었던 태고인들 사이에서, “뱀”을 수단으로 용의주도함이 의미되었다. 또한 감각적 부분을 통하여 그들은 상해받음으로부터 안전해지기 위해서 용의주도함(circumspection)을 발휘했다. “뱀”으로부터의 이 의미는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로부터도 분명해진다:
잘 보라, 나는 너희를 이리들 한 가운데로 양을 보냄 같이 보낸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들 같이 신중하고, 비둘기 같이 단순하라 (마. 10:16).
그리고 또한 광야에 세운 “구리뱀”으로부터, 이를 수단으로 주님 안에 있는 감각적 부분이 의미되어져 있고, 주님만이 천적 인간이시고, 주님만이 모두를 돌보시고 모두를 위해 섭리하신다가 의미되어 있는 바, 구리뱀을 올려다 본 모든 이는 (생명이) 보존되었다.

2,3절. 그러자 여인이 뱀에게 말했다. 우리는 동산의 나무의 열매로부터 먹을 수 있지만 3 동산의 한 가운데 있는 나무의 열매로부터, 하느님께서 말하시기를, 너는 그것으로부터 먹지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네가 죽지 않기 위해서이다.
“네가 먹어도 되는 나무의 열매”는 태고 교회로부터 그들에게 밝히 알리신 신앙으로부터의 선과 진리, 또는 신앙에 관한 지식들을 의미함은 이미 2장 16절, 천적 인간, 또는 태고 교회를 다루는 대목에서 말한 것, 즉 “동산의 나무”라 말하지 않고 여기서는 “네가 먹을 수 있는 나무의 열매”라고 언급한 사실로부터 분명하다. “동산의 나무”는 선하고 참된 것에 관한 지각이다; 본문의 선과 진리는 “동산의 나무”가 근원이기 때문에 여기서는 “열매”라 불리우고, 말씀에서 자주 “열매”에 의해 의미되고 있다.

“그들이 먹어도 되는 나무의 열매”가 태고 교회로부터 그들에게 밝히 알려주신 신앙 속의 선과 진리, 또는 신앙에 관한 지식들을 의미함은 이런 사실, 즉 천적 인간, 또는 태고 교회를 취급할 때(창. 2:16)의 경우 같이, “동산의 나무”라 말해지지 않고, “그들이 먹어도 되는 나무의 열매”라고 말해진 사실로부터 분명해진다. “동산의 나무”는 선하고 진리인 것을 지각함이다. 이 구절의 선과 진리는 선과 진리의 근원으로부터 있기 때문에 “열매”라 불리운다. 또한 말씀의 많은 곳에서도 “열매”라는 단어를 통해 이 의미가 전달되고도 있다.

“지식의 나무”가 “동산의 한가운데” 있는 것으로 말해진 이유인즉, 비록 2장 9절에서 동산의 한 가운데에는 지식의 나무가 아닌 생명들의 나무라 할지라도, 동산의 “한 가운데”란 가장 깊은 것(the inmost)을 의미해서 였다; 그리고 천적 인간의, 또는 태고 교회의 가장 깊은 것은 “생명들의 나무”, 즉 사랑과 사랑으로부터 파생된 신앙이었다; 이에 반해 이 인간, 천적으로부터의 영적 인간(a celestial spiritual man)일런지 모르는 이 인간과 더불어, 또는 이 후손과 더불어 신앙이 동산의 “한 가운데”, 또는 가장 깊은 곳에 있었다. 태고 교회 때에 살았던 사람들의 품질을 묘사하는 것은 더 충분하게는 불가능하다. 그 이유는 오늘날, 그들의 천성(genius)이 알려진 것이 거의 없는데다가, 지금 누군가와 더불어 발견되는 것도 완전히 다르다 해야 마땅하기 때문이다. 어쨌든 그들의 천성으로부터 얼마의 생각을 가져다가 살피면 이럴 것 같다. 그들은 선으로부터 진리를 알았다, 또는 사랑으로부터 그들은 신앙 속에 있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이 세대가 종료되었을 때, 이 세대와는 완전히 다른 천성을 승계했다. 즉 그들은 사랑으로부터, 또는 사랑으로부터 신앙 속에 있는 것을 식별하는 대신, 그들은 진리를 수단으로 선인 것에 관한 지식을 획득했다, 또는 신앙에 관한 지식으로부터 사랑 속에 있는 것을 획득했다. 그리고 그들 중의 아주 많은 사람들은 지식 외에 남은 것은 거의 없었다. 이와 같은 것이 세상의 파멸을 방지하시려 홍수 후에 만든 변화(의 원인이)였다.

홍수 앞의 태고인의 것 같은 천성은 발견되지 않고, 오늘날은 존재하지도 않음을 염두에 둔다면, 이 구절의 말들이 순수한 의미에서 무엇을 함축하는지를 총명하게 설명해낸다는 것은 쉬운 문제는 아니다. 어쨌든 이런 구절도 천국에서는 완전하게 이해되었다. 그 이유는 천적이라 불리는 천사들과 천사와 같은 영들은 홍수 이전 거듭나진 태고인과 같은 천성으로부터 있기 때문이다; 한편 영적이라 칭해지는 천사들과 천사와 같은 영들은 홍수 이후 거듭나진 자들과 유사한 천성(genius)으로부터 있다. 이 두 천성(genius)은 무제한으로 다양함 안에 있다.

천적 인간이었던 태고 교회는 “지식의 나무로부터 먹는 것”, 즉, 감각적인 것들과 기억 속의 지식들로부터 신앙에 속하는 것을 배우는 것은 그만두어야 했을 뿐 아니라, 이 나무를 만지는 것, 즉 감각적인 것들과 기억 속의 지식들로부터 신앙에 관한 문제인 어떤 것을 생각하는 것이 허용조차 되지 않았다. 이는 그들이 천적 삶으로부터 영적 삶으로 가라앉지 않도록, 아래쪽으로 향하지 않도록 배려하심에서 이다. 천적 천사들의 생명이 더 내면적으로 있는 경우, 그들은 신앙이 이름 불러지는 것조차, 또는 영적인 것에 관여되는 어떤 것이든 내버려두지 않는다; 그리고 만일 이것이 다른 사람들에 의해 말해진다면, 신앙 대신 그들은 자신들에게만 알려진 차이와 더불어 사랑으로부터 지각을 가진다; 고로 신앙으로부터 있는 것은 무엇이든 그들은 사랑과 선행으로부터 끌어낸다. 그들은 신앙에 관해 있는 어떤 추론을 들을 경우 더욱 덜 참는다. 신앙에 관한 기억 속의 지식의 작은 어떤 것을 두고도 그러하다; 그 이유가 사랑을 통하여 그들은 주님으로부터 선하고 참된 것에 관한 지각을 가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지각으로부터 그들은 어떤 것이 그렇다인지, 아니다인지를 즉시로 알고 있다. 그러므로 신앙에 관한 어떤 것이 말해질 때, 그들은 그것이 그러하다, 또는 그러하지 않다 라고 간단하게 대답한다. 그 이유는 그들이 주님으로부터 그것을 지각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마태복음서에서 주님에 의해 의미되어 있다:
너희의 의사전달은 예, 예; 아니다, 아니다 이도록 하라;
그 이유가 이보다 더 있는 것은 무엇이든 악으로부터 오기 때문이다 (마. 5:37).
그 다음 이것이 지식의 나무의 열매를 만지는 것이 허용되지 않음에 의해 뜻해졌다; 그 이유가 만일 그들이 그것을 만진다면, 그들은 악 안에 있을 것, 즉 그들은 “죽는”결과를 만들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천적 천사들은 다른 천사들처럼 다양한 주제들을 놓고 다함께 대화한다. 그러나 천적 언어, 즉 사랑으로부터 만들어내고 도출된 언어 안에서 이다. 이는 영적 천사들의 것보다 더욱 말로 나타낼 수 없는 수준이다.

영적 천사들은 신앙에 관하여 대화하고, 지성으로부터, 추론으로부터, 그리고 기억 속의 것들을 수단으로 신앙 속의 것들을 확증한다. 그러나 그들은 이런 바탕들 위에서 신앙에 관한 문제들에 관하여 자기들의 결론들에 이르지는 않는다; 그럴 경우 그들은 악 안에 있기 때문이다. 그들 역시 비록 천적 천사들의 것 같지는 않다 해도 신앙의 모든 진리를 지각하는 능력이 주님에 의해 증여되어 있다. 영적 천사들의 지각은 주님에 의해 생생해진 일종의 양심이고, 이는 실로 천적 지각 같이 나타난다. 그래도 같은 것은 아니다, 오직 영적 지각일 뿐이다.

4, 5절. 그리고 뱀이 여인에게 말했다, 너는 정녕 죽지 않을 것이다. 5 그 이유가 하느님께서는 네가 그것을 먹는 날에 네 눈이 열려질 것이고, 네가 선과 악을 앎에서 하느님 같이 있을 것임을 알기 때문에서 이다.
“나무의 열매를 먹음으로 그들의 눈이 열림”은 만일 그들이 감각과 지식 속에 있는 것으로부터, 즉 자신들로부터 신앙에 관한 것들을 검사한다면, 신앙들이 마치 잘못된 것처럼 보이리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들이 “선과 악을 앎에서 하느님 같이 있을 것”은 만일 그들이 자신들로부터 그렇게 했다면, 그들은 하느님 같이 있을 것이고, 자신들을 안내할 수 있다는 것을 표시한다.

모두 각각의 구절은 교회에 있는 특수한 상태, 또는 상태의 변화를 포함하고 있다: 앞서 있는 구절의 경우, 비록 그들이 기울어졌긴 했지만 그럼에도 그들은 그것이 불법적이다고 지각했다; 이 구절의 경우, 그들이 선조로부터 들어왔던 것들이 진리이었는지를 알아보려 한 이래, 의심의 전조(incipient), 즉 그것이 자기들을 위해 합법적인지 아닌지에 대해 의구심을 품었다. 그리고 그렇게 그들의 눈은 열려졌다; 드디어 자기 사랑(self-love)이 주도권을 쥔 결과, 그들은 자신들 스스로 인도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고로 주님 같이 되기 시작했다; 그 이유가 자기 사랑 같은 본성은 주님의 인도하심에 복종하고 싶어하지 않기 때문, 그리고 믿어져야 한다는 것에 관하여 기억 속의 지식과 감각 속의 것들과 더불어 상담하여 스스로 안내되고 싶어한다.

자기들의 눈들이 열리고, 선과 악인 것을 하느님 같이 아는 자, 그리고 자신을 사랑하고, 동시에 세상적 학식이 뛰어난 이들, 누가 더 강한 신조를 가진 것일까? 그리고 누가 더 눈이 멀었을까? 이렇게 이들에게 물어보자. 그러면 이내 알게 되는 것은 그들은 영의 존재를 아는 것조차 없고, 믿는 것은 더욱 없다는 것이다; 영적, 천적 본성과는 너무나 친숙한 게 없다; 그들은 영원한 삶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 이유가 그들은 사멸하는 야수같이 있다고 자신들을 믿기 때문이다; 그들은 주님을 인정하지 않고, 자신들과 자연을 숭배한다. 자기들의 표현(법)에서 안내되기를 원하는 자들 중의 어떤 이들은, 자기들도 모르는 자연 속의 어떤 최고의 존재(ens)가 모든 것들을 통치한다 하고 말한다. 이 말함이 그들로 기억 속의 지식들과 감각으로부터의 것들을 수단으로 다각도의 방법에서 자신들을 확증하는 원리이다. 만일 그들이 뻔뻔해지면, 그들은 모든 우주를 두고도 같은 말을 할 것이다. 비록 이런 인물들이 신들(gods) 같이, 또는 최고 슬기로운 자 같이 있기를 바랄지라도, 만일 그들이 자기들 자아의 어떤 것을 가지고 있지 않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는지 질문 받으면, 그들은 그것은 존재를 가지지 않는 것이다고, 그리고 만일 그들이 자아인 모든 것을 박탈 당한다면, 그들은 아무 것도 아닐 것이라고도 대답할지 모른다. 만일 그들이 주님으로부터 사는 것이 무엇인지를 질문받으면, 그들은 그것을 공상이라고 생각한다. 만일 그들이 양심이 무엇인지 아는지를 물으면, 그들은 그것이 단지 상상의 창조물인데, 하층 계급을 관리하는 억제 수단일 뿐이라고 말할지 모른다. 만일 그들이 지각이 무엇인지 아는지를 물으면, 그들을 그 물음을 비웃고, 그것을 열광적인 잡동사니라 부를지 모른다. 위와 같은 것이 그들의 지혜라는 것, 그들이 가진 “열린 눈”이다. 그리고 그들이 가진 “신들(gods)이다. 이런 원리들을 두고, 자기들은 대낮보다 더 명료하다고 생각하고, (이런 원리들을) 자기들의 출발점으로 삼고 계속 전진한다. 이 방식 안에서 신앙 속의 비밀들에 관하여 추론한다; (끝까지 가면) 어둠의 심연밖에 결과될 어떤 것이 있을까? 모든 여타 사람들 너머있는 이들이야말로 세상을 유혹해대는 “뱀들”이다. 그러나 태고 교회의 이 후손들은 아직까지(이 구절까지)는 위와 같은 품성을 지닌 것은 아니었다. 이런 식으로 되어간 것은 본장의 14-19절에서 다루어진다.

6절. 그리고 여인은 그 나무가 식량을 위해 좋고, 눈을 기쁘게 하고, 총명을 주고 싶어한다 고 보았다, 그래서 그녀는 열매를 취해서 먹었다, 그리고 그녀는 자기와 함께 있는 그녀의 남자(vir)에게 주었다, 그리고 그는 먹었다.
“식량을 위해 좋다”란 탐욕(cupidity)을; “눈을 기쁘게 한다”란 공상을 의미한다; 그리고 “총명을 주고 싶어한다”란 쾌락(pleasure)을 의미한다: 이것들은 자기 자신으로부터, “여인”으로부터 있다; “남자가 먹음”을 수단으로 합리성이 동의함이 의미되어진다.

이는 태고 교회의 네 번째 후손 이었다. 이들은 자기-사랑을 수단으로 유혹되는 자신들을 내버려두었다. 그리고 감각으로부터의 것들과 기억 속의 지식으로부터의 것에 의해 확증되지 않으면 밝히 알려주신 것을 믿으려하지 않았다.

“나무가 식량을 위해 좋고, 눈을 기쁘게 하고, 총명을 주고 싶어 한다”와 같이 여기서 채용된 표현들은 의지 측면에 더 특별한 관계를 가진 태고 시절에 살았던 이들의 천성에 잘 어울리는 표현법이다. 그 이유는 그들의 악들은 의지 부분으로부터 흘러나오기 때문이다. 홍수 후에 살았던 사람들을 다루는 말씀에서의 이런 표현들은 이들의 의지 측면이라기보다는 이해력 측면에 관련되어 사용되어지고 있다; 그 이유가 태고인은 선으로부터 진리를 가졌으나, 홍수 이후 살았던 사람들은 진리로부터 선을 가졌기 때문이다.

인간의 자기 자신(own)이 무엇인지는 이런 방법에서 서술될런지 모른다. 인간의 자기 자신은 자기를 사랑함과 세상을 사랑함으로부터 솟구치는 모든 악과 거짓이다. 또한, 주님과 말씀을 믿지 않는 것으로부터, 또한 감각으로부터와 기억 속의 지식을 수단으로 하여 납득되어질 수 없는 것은 아무 것도 아니라고 상상함으로부터 솟구치는 모든 악과 거짓이다. 이 방법 안에서 인간은 오로지 악과 거짓만으로 되어갔다. 그러므로 모든 것들을 거꾸로 중요시 한다; 악인 것들을 선으로, 선인 것들을 악으로, 거짓인 것을 진리로, 진리인 것을 거짓으로 보고 있다; 실제로 존재한 것들을 아무 것도 아니다고 상상한다. 아무 것도 아닌 것을 전부라고 상상한다. 그들은 미움을 사랑이라고, 어둠을 빛이라고, 죽음을 생명이라고 거꾸로 부른다. 말씀에서 이런 사람들이 “절름발이”, “소경”이라고 불리워진다. 이런 것이 인간의 자아이다. 이것은 그 자체 지옥의 것들, 저주되는 것들이다.

7절. 그리고 그들 둘 다의 눈이 열려졌다, 그리고 그들은 자기들이 벌거벗었음을 알았다.
“그들의 눈이 열려짐”은 그들이 자기들의 내면의 지령(dictate)으로부터 알고 있음과 인정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그들이 “벌거벗었음”은 그들이 이전처럼, 순진 안에는 더 이상 있지 않고, 악 안에 있음을 의미한다.

“눈이 열렸음”을 수단으로 내면의 지령이 의미되어진다는 것은 말씀에서 이와 비슷한 구절로부터 분명해진다. 즉, 발람이 자신을 두고 한 말, 그가 환상을 가진 결과로, “눈이 열려진 사람”이다고 자신을 부르는 대목으로부터 (민 24:3). 그리고 요나단으로부터, 그가 벌집으로부터 맛보았을 때, 그것이 악이었음을 내부로부터 지령을 가졌다, 하여 그는 자기 “눈이 보았다”고 말했는데, 즉 계발되어져서, 자기가 몰랐음을 보았다. (삼상. 14:29). 더 나아가, 말씀에서 “눈”은 이해함을 나타내기 위해, 거기로부터 있는 내면의 지령을 나타내는데 자주 사용되어지고 있다.
다윗서에서:
제가 죽음의 잠을 자지 않도록 나의 눈을 밝게 하소서 (시. 13:3).
위 구절의 “눈”은 이해력을 나타낸다. 이와 같이 에스겔서에서도 이해하고 싶어하지 않는 이들에 관해 말하면서, “보는 눈을 가지고, 보지 않는다” (겔. 12:2). 이사야서에서:
그들이 자기들의 눈을 가지고 보지 않도록 그들의 눈을 닫으라 (이. 6:10).
이는 그들이 이해하지 않도록 그들은 눈 멀어져야 한다는 것을 명시한다. 이렇게 모세가 백성들에게 말했다:
여호와께서는 너희에게 알 심정을, 볼 눈을, 들을 귀를 주시지 않았다 (신. 29:4).
이 구절의 “심정”은 의지를, “눈”은 이해함을 명시한다. 이사야서에서 주님에 관련해 말해진다:
그분은 소경의 눈을 여실 것이다 (이. 42:7).
같은 예언서에서
“소경의 눈이 짙은 어둠으로부터, 어둠으로부터 볼 것이다” (이. 29:18).

“그들이 벌거벗었음을 알고 있음”을 수단으로 자기들이 전과 같이 순진 안에는 더 이상 있지 않고, 악 안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고 인정한다가 의미되어 있다. 이는 앞 장의 마지막 절로부터 명백하다. 거기서 말해진다. “그리고 그들 둘 다가 벌거벗었다, 남자와 그의 아내, 그리고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라고 하여 이 구절은 “그들이 벌거벗었기 때문에 부끄러워하지 않았다”가 순진이다를 의미한다고 보일런지 모른다. 이 반대가 이 구절 같이 “부끄러워함”에 의해, 이 구절에서 말해진 것, 그들은 “무화과나뭇잎을 함께 꿰맸다, 그리고 자신들을 숨겼다”에 의해 의미되어진다; 그 이유가 순진이 없음, 벌거벗음은 불명예와 창피함이기 때문인데, 이것에는 악을 자각함이 붙어 다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에서 말씀에서 “벌거벗음”은 창피함과 악의 유형으로 사용되어진다. 그리고 거꾸로 된 교회를 서술하기도 한다. 에스겔서에서:
너는 벌거벗고 알몸이었다, 그리고 네 피를 짓밟고 있었다 (겔. 16:22).
그들은 그녀의 벌거벗은 알몸인 채로 놔둘 것이다,
그리고 벌거벗음은 덮어지지 않을 것이다 (겔. 23:29).
계시록서에서:
나는 네가 옷입혀지도록, 하여 네 벌거벗음이 나타나지 않도록
나에게서 흰 의복을 사라고 충고한다 (계. 3:18).
그리고 마지막 날에 관하여:
깨어 있어 자기의 의복을 간수하여 자기가 벌거벗은 채로
걷지 않도록 한 사람은 행복하다 (계. 16:15).
신명기서에서:
만일 사람이 자기 아내에게서 어떤 벌거벗음을 발견했다면,
이혼 증서를 그녀에게 써주게 하라 (신. 24:1).
똑 같은 이유로 해서 아론과 그의 아들들은 그들이 제단에 와서 섬길 때, “그들의 벌거벗음의 살을 덮어 그들이 불법을 저질러 죽지 않도록” 고운 아마포의 반바지를 입도록 명령되었다 (출. 28:42-43).

그들이 “벌거벗었다”라고 불려지는데, 그 이유는 그들의 자기 자신에 남아있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자기 자신, 즉 자신에 남은 자들은 총명과 지혜, 신앙으로부터의 어떤 것도 더 이상 가지지 않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그들은 진리와 선에 관하여는 “벗은 채”로 있는 바, 그들은 악 안에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자아는 악과 거짓에 아무 것도 아니다는 것은 다음과 같은 사실로부터 분명해지게 되었다. 영들이 자신들로부터 말하는 것은 무엇이든 여하튼 악과 거짓이었던 관계로, 그들이 자신들로부터 이야기한 것을 나로 하여금 알게 만들 때는 언제든지, 나는 즉시 그것이 거짓이었다는 것을 알았다. 그들은 자기들이 말한 것을 의심하지 않도록하려고 진리로부터 라고 설득해도 마찬가지였다. 같은 식으로, 어떤 인물들이 영적인 삶과 천적인 삶에 관한 것들을 두고, 또는 신앙에 관한 것들을 두고 추론하기 시작할 때마다, 나는 그들이 의심하고, 부정조차 했다는 것을 지각할 수 있었다. 그 이유는 신앙에 관해 추론하는 것이 의심하는 것과 부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것 모두는 자기(self), 또는 자기 자신(own)으로부터인 바, 그들은 단지 거짓들 만으로 가라앉는다, 결과적으로 짙은 어둠의 심연, 즉 거짓들에 (침몰된다). 그들이 심연 안에 있을 경우, 제 아무리 작은 이의제기도 수 천의 진리들을 압도한다. 예를 들면, 미세한 먼지 부스러기도 눈의 동공에 붙어 있으면, 우주와 그것 안에 포함된 모든 것을 닫히게 하는 경우와 같다. 이런 인물들에 관해 주님께서 이사야서에서 말하신다:
자신들의 눈에서 슬기롭다하고, 자신들의 얼굴 앞에서 총명하다
하는 자들에게 화가 있다 (이. 5:21).
네 지혜와 네 지식, 그것이 너를 돌아서게 했다. 그리고 너는 네 심정 안에서 말했다,
나, 그리고 나 외에 아무 것도 없다; 그리고 악이 네게 올 것이다. 너는 그 악이
어디로부터 일어나는지를 모를 것이다, 해악이 네 위에 떨어질 것이다,
이것을 너는 속죄받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황폐함이 갑자기 네 위에 닥칠 것이다,
이에 관해 너는 알아채리지 못한다. (이. 47:10-11).
예레미야서에서:
모든 사람은 지식을 수단으로 어리석게 만들어진다. 모든 주물공은 새긴 상을
수단으로 혼동되어진다. 그 이유가 그의 부어 만든 상이 거짓말이기 때문이다.
그것들 안에 숨이 없기 때문이다 (예. 51:17).
“새긴 상”은 거짓이다, 그리고 “부어 만든 상”은 인간 자아 속의 악이다.

그래서 그들은 무화과 나뭇잎을 꿰맸다. 그리고 자신들에게 띠들을 만들었다. “무화과 나뭇잎을 꿰매는 것”은 자신들을 변명하는 것이다; “무화과나무”는 자연적 선이다; 그리고 “자신들에게 띠들을 만드는 것”은 부끄럽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이렇게 태고인들은 이야기했다. 그리고 그들은 이 교회의 이 후손들을 묘사했는 바, 이는 그들이 이전에 향유했던 순진 대신 자연적 선만을 소유했고, 이 선을 수단으로 그들의 악은 감추어져 있게 되었음을 의미하고 있다; 그리고 자연적 범주에 있는 바, (이런) 자기들이 부끄럽다고 생각한 것이다.

“포도나무”가 말씀에서 영적 선을, “무화과나무”는 자연적 선을 의미하기 위하여 사용되었다는 것은 오늘날 널리 알려져 있지 않는데, 그 이유는 말씀의 내적 의미가 잃어져 왔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표현들이 발생하는 곳은 어디든지, 그들은 이런 뜻들을 의미하고 포함한다; 주님께서 “포도원”과 “무화과나무”에 관한 것을 비유에서 이야기 하셨다. 마태복음서에서:
그분이 길에서 무화과나무를 보셨을 때, 그분은 그것에 오셨다, 그리고 거기에서
아무 것도 발견하지 못하셨다, 그러나 잎들만 (발견하셨다), 그리고 그것에 말하셨다,
이후로 영원히 나무에서 열매가 자라게 하지 말자. 그리고 곧바로 무화과나무는
시들어버렸다 (마. 21:19),
위 구절을 수단으로 선이 없다, 자연적 선조차 없다는 것이 땅 위에서 발견되어졌다가 뜻해진다. 이와 비슷한 대목이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의 의미인데, 예레미야서에서:
그들이 역겨운 짓을 범했을 때 그들이 부끄러워하더냐? 아니다, 그들은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들은 어떻게 얼굴이 붉혀지는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나는 필시 그들을 그러모을 것이다, 여호와께서 말하신다; 포도나무 위에
포도들이, 무화과나무 위에 무화과들이, 그리고 잎들이 떨어질 것이다 (예. 8:12-13),
위 구절을 수단으로 모든 선, 영적, 자연적 선이 멸해질 것이다. 그 이유는 그들은 너무나 타락하여 부끄럽다 하는 느낌조차 잃었기 때문이다. 오늘날 악 안에 있는 이들도 비슷해서, 그들은 자기들의 사악함에 얼굴을 붉히기는 커녕 아예 그것을 자랑으로 만든다. 호세아서에서:
나는 광야에 있는 포도나무 같은 이스라엘을 발견하였다; 나는 너의 조상들을
시작에서는 무화과나무에 있는 첫 익은 것으로 보았다 (호. 9:10).
그리고 요엘서에서:
두려워 말라, 내 들판의 너희 짐승아, 그 이유가 나무가 자기 열매를 맺을 것이고,
무화과나무와 포도나무가 그것의 강함을 산출할 것이기 때문이다 (욜. 2:22).
위 구절의 “포도나무”는 영적 선을, “무화과나무”는 자연적 선을 명시한다.

8절. 그리고 그들은 낮의 공기에서 동산을 스스로 거니시고 있는 여호와 하느님의 목소리를 들었다. 그래서 사람과 그의 아내는 여호와 하느님의 얼굴로부터 동산의 나무 한 가운데에 자신들을 숨겼다.
“동산을 스스로 거니시는 여호와 하느님의 목소리”를 수단으로 그들을 두렵게 느끼게 한 원인인 내적 지령이 의미되어졌다. 이 지령은 그들이 소유해왔던 지각의 나머지(residue)이다; “공기”, 또는 “낮”의 “숨”을 수단으로 교회가 아직 지각의 어떤 나머지를 소유했었을 때의 기간이 명시되어진다; “여호와 하느님의 얼굴로부터 자신들을 숨김”은 지령을 두려워하는 것, 그 이유가 악을 의식하는 이들의 경우가 되기를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이 자신들을 숨긴 “동산의 나무 한 가운데”를 수단으로 자연적 선이 의미되어진다. 가장 깊은 것이 “한 가운데”라 불리우고 있다; “나무”는 앞서와 같이 지각을 명시한다; 그러나 매우 적은 지각이 남아 있었던터라 마치 한 개 밖에 남은 것이 없는 듯, 이 나무는 단수로 말해지고 있다

“동산을 스스로 거니시는 여호와 하느님의 목소리”를 수단으로 그들이 두려워했던 내적 지령이 뜻해진다는 것은 말씀에서 “목소리”의 의미로부터 분명해진다. 말씀에서 “여호와의 목소리”는 말씀 자체, 신앙의 교리, 양심, 또는 내향적으로 주의를 줌, 또한 거기로부터 결과하는 모든 책망, 등을 가리키기 위해 사용되어지고 있다. 계시록서에서:
천사는 사자가 으르렁거리듯 큰 음성으로 외쳤다. 그리고 그가 외쳤을 때,
일곱 우레가 그들의 음성들을 발음했다 (계. 10:3),
다시 계시록서에서:
일곱 번째 천사의 음성의 날에, 하느님의 신비는 끝날 것이다 (계. 10:7).
다윗서에서:
하느님을 노래하라, 주님을 찬양하라, 그분은 옛 것 속에 있었던
천국들의 천국들을 타신 분이시다; 보라, 그분은 그분의 목소리를,
그분의 강하심의 목소리를 내보내실 것이다 (시. 68:32-33).
“옛 것 속에 있었던 천국들의 천국들”은 태고 교회의 지혜를 표시한다; “목소리”는 계시를, 또한 내적 지령을 표시한다. 다시:
여호와의 음성이 물들 위에 있으시다; 여호와의 음성이 능력 안에 계신다; 여호와의
목소리가 영광으로 계신다; 여호와의 음성이 삼나무들을 부러뜨리신다; 여호와의
목소리가 불의 불꽃을 가르신다; 여호와의 목소리에 광야가 흔들린다; 여호와의
목소리가 암사슴으로 새끼를 낳게 만드시고 숲들을 벗기신다 (시. 29:3-5, 7-9).
그리고 이사야서에서:
여호와께서는 그분의 목소리의 특출함이 들려지게 하실 것이다.
그 이유가 여호와의 목소리를 통하여 앗수르를 타도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이. 30:30-31).

“스스로 거니시는 목소리”는 남아있는 지각이 거의 없었음이 뜻해진다. 그리고 마치 자체, 그리고 들리지 않음을 수단으로 하는 듯 홀로인 것이 뜻해진다. 이는 다음 절, 즉 “여호와께서 사람을 부르셨다”로부터 명백해진다. 마찬가지로 이사야서에서:
광야에 있는 하나의 외침의 목소리, 목소리가 말했다, 소리쳐라 (이. 40:3,6).
“광야”는 신앙 없는 교회이다; “하나의 외침의 목소리”는 주님의 강림을 통고함이다, 그리고 일반적으로는 그분의 오심의 모두 각각의 통고, 마치 거듭나는 자에게 그분이 오실 때마다 있는 통고 같다. 거듭나는 자들과 더불어 내적 지령이 있다.

“공기” 또는 “낮의” “숨”을 수단으로 교회가 아직 얼마간의 지각이지만 남아있는 기간이 의미되어진다는 것은 “낮”과 “밤”의 의미로부터 분명하다. 태고인들은 교회의 상태들을 낮의 때들과 밤의 때들에 비교했다. 낮의 때들은 교회가 아직 빛 안에 있었는 때, 그러므로 이 상태가 “낮의” 숨, 또는 공기에 비교되었다. 그 이유는 그들에게 아직 지각이 약간 남아 있었고, 이를 수단으로 그들은 자기들이 타락했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주님 또한 신앙 있음의 상태를 “낮”, 신앙 없음의 상태를 “밤”이라 부르신다; 요한복음서에서:
나는 낮이 있는 동안 나를 보내신 그분의 일들을 해야만 한다:
밤이 온다, 그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다 (요. 9:4).
똑 같은 이유로 해서 거듭남의 상태들이 제1장에서 “날들, days”로 불렸다.

“여호와의 얼굴로부터 자신들을 숨기는 것”이 지령을 두려워하는 것, 마치 악을 의식하는 이들의 경우(case)가 되고 싶지 않다는 것을 뜻하는 것은 제 10절, “나는 동산에서 당신의 목소리를 들었습니다, 제가 벌거벗었기 때문에 저는 두려웠습니다”라는 그들의 응답으로부터 분명해진다. “여호와의 얼굴”, 또는 주님의 얼굴은 자비, 평화, 그리고 모두 각각의 선 임은 아래 인용 구절의 축복으로부터 분명하다:
여호와께서는 그분의 얼굴을 네 위에 비추신다, 그리고 네게 자비를 베푸신다;
여호와께서는 그분의 얼굴을 네 위에 들어올리신다, 그리고
너에게 평화를 주신다 (민. 6:25-26).
그리고 다윗서에서: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자비하시다, 그리고 우리에게 복주신다,
그리고 그분의 얼굴로 우리 위에서 비추게 하신다 (시. 67:1)
많은 이들이 누가 우리에게 어떤 선을 보일 것이냐? 말합니다. 여호와시여,
당신은 우리 위에 당신의 얼굴의 빛을 들어 올리소서 (시. 4:6).
그러므로 주님의 자비가 “(그분의) 얼굴들의 천사”라 불려진다. 이사야서에서:
나는 여호와의 자비들에 관하여 언급을 할 것이다; 그분은 그의 자비들에 따라,
그의 자비들의 많음에 따라 보답할 것이다; 그리고 그분은 그들의 구원자가 되셨다.
그들의 모든 고난에서 그분은 고난받으셨다, 그리고 그분의 얼굴의 천사가 그들을
구원했다; 그분의 사랑과 그분의 동정하심에서 그분은 그들을 되찾으셨다 (이. 63:7-9).

“주님의 얼굴”이 자비, 평화, 그리고 모두 각각의 선이신 바, 분명한 것은, 그분은 자비로부터 모든 이를 중시하신다는 것, 그분의 용모를 어떤 자로부터도 결코 비켜두시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비키는 것은 인간이다. 인간이 악 안에 있을 때, 자기 얼굴을 돌린다. 이사야서에서 주님에 의해 말해진다:
너의 불법들이 너와 너의 하느님 사이를 분리되게 했다.
그리고 너의 죄들이 너로부터 그분의 얼굴이 숨겨지게 했다 (이. 59:2);
그리고 여기서, “그들은 자신들을 여호와의 얼굴로부터 숨겼다, 그들이 벌거벗었기 때문이다.”

자비, 평화, 그리고 모두 각각의 선, 또는 “여호와의 얼굴”은 지각을 가진 이들과 더불은 지령의 원인이다. 그리고 또한 비록 다른 방식에서이다 해도 양심을 가진 이들과 더불어서도 지령의 원인이다. 그리고 이 지령들은 언제나 자비스럽게 역사한다. 그러나 이 인간의 상태, 즉 태고 교회의 이 후손의 상태는 자연적 선 중의 하나 였다; 그리고 자연적 선 안에 있는 그들의 품성은 자신들을 두려움이나 수치심을 통하여 자신들을 숨긴다. 그 이유는 그들이 벌거벗었기 때문이다; 반면, 자연적 선이 결여된 자들은 자신들을 숨기지 않는다, 그 이유는 그들은 수치심에 무감각하기 때문인데, 이들에 관하여는 예레미야 8:12-13을 보라.

“동산의 나무 한 가운데”가 자연적 선, 이 선 안에 “나무”라 불리는 얼마간의 지각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은 천적 인간이 거주한 “동산”으로부터 분명하다; 그 이유가 선하고 참된 모든 것이 “동산”이라 불리기 때문. 물론 이것은 선하고 참된 것을 경작한 인간에 따라 차이는 있다. 선 안의 가장 깊은 곳이 천적 수준이지 않으면 선이 아니다. (그 이유가) 가장 깊은 곳으로부터, 이를 통하여 주님으로부터 지각이 오기 (때문이다). 이 가장 깊은 곳이 여기서 “한 가운데, midst”라 불려지고 말씀의 많은 곳에서도 마찬가지이다.

9, 10절. 여호와 하느님께서 사람에게 소리치셨다. 그리고 그에게 네가 어디 있느냐? 라고 말하셨다. 10 그리고 그가 말하기를, 나는 동산에서 당신의 목소리를 들었고, 벌거벗었기에 나는 두려워져서 나 자신을 숨겼습니다.
“소리침”, “동산에서의 목소리”, “벌거벗어 두려워함”, “자신을 숨김” 등은 이미 앞에서 살핀 바 있어 생략한다. 그가 어디에 있는지, 무엇을 하고 있는지 맨 먼저 인간에게 물어지는 것은 말씀에서 매우 흔한 일에 속한다. 묻는 까닭은 그가 그것에 대해 고백하고 인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지각, 내적 지령, 양심의 근원은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관계로 이 주제에 관련하여 어떤 것을 살펴보는 것은 유익할 것 같다. 인간이 영들과 천사들을 수단으로 주님에 의해 통치되는 것은 큰 진리에 속한다. 악령이 통치하기를 시작할 때, 천사들은 악들과 거짓들을 비키게 하려고 노력한다. 이로부터 전투가 발생한다. 이 전투로부터 인간은 지각, 지령, 양심을 수단으로 감지할 수 있어진다. 이 세 가지 것, 그리고 또한 시험들을 수단으로 인간은 자기와 함께있는 영들과 천사들을 명백하게 볼 수 있고, 자기는 영들과 천사들이 아무 것도 아니라고 믿는다고 말할 정도로 육체적 측면에 깊이 침몰된 것도 아님을 명백히 보게 된다. 그런데 이런 인물들, 설사 수 백 번 이런 전투들을 느끼기조차 해도 여전히 그것들은 상상적인 것, 무질서한 마음의 결과 이다고 말한다. 나는 이런 전투를 느껴보도록, 수 천 번 그것들의 생생한 느낌을 가지도록 허락되어, 수 년 동안 꾸준히, 그것들이 왔다가 떠날 때 그것들을 야기시킨 누구, 무엇, 어디에 관하여 (감지해왔다); 그리고 나는 그들과 대화했었다.

천사들이 신앙의 진리와 사랑의 선에 반대되는 어떤 것에 들어가도 되는지 안되는지의 허가를 발견하는 절묘한 지각을 서술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천사들은 그것에 관하여 거의 알지 못하는 인간 자신보다 수 천 번씩 들어가는 것, 들어 갈 때에 관한 품질을 더 완전하게 지각한다. 천사는 생각의 아주 작은 부분이라 해도 가장 위대한 인간이 지각하는 것보다 더 충분하게 지각한다. 이것은 실로 믿을 수 없겠지만, 최고로 진리이다.

11-13절. 그리고 그분께서 말하셨다, 누가 네가 벌거벗었다고 너에게 말했느냐? 너는 내가 먹지 말아야 한다고 명령한 나무를 먹었느냐? 12 그리고 남자가 말했다, 당신께서 나에게 여자를 주셨고, 그녀가 나에게 나무(의 실과)를 주어 내가 먹었습니다. 13 그리고 여호와 하느님께서 여자에게 말하셨다, 왜 너는 이런 짓을 했느냐? 그리고 여자가 말했다, 뱀이 나를 꾀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먹었습니다.
위 말들의 의미는 전에 설명했던 것으로부터 분명해진다. 즉 인간의 합리성은 (합리성의) 자기 자신에 의해 속임을 당해지도록 자체를 내버려두었다. 그 이유는 속임 당함 자체가 (자기를 사랑함을 수단으로 하는 바,) 인간의 합리성에 가치가 있다 (판단되었기) 때문이다. 하여 인간의 합리성은 자기가 볼 수 있고 느낄 수 있는 것 아니면 아무 것도 아니라고 믿었다. 모든 이가 아는 바, 여호와 하느님이 뱀에게 이야기하시지 않았다는 것, 그리고 실로 뱀은 없었다는 것, 더 나아가 그분이 “뱀”에 의해 의미되어진 감각적 부분에 말을 한 것은 아니다는 것; 그러나 이 대목들에는 다른 의미를 포함한다는 것, 즉 그들은 감각들에 의해 자신들이 미혹되게 했음을 지각했다는 것, 그런데도 여전히, 자기-사랑의 결과로, 그들은 주님에 관하여, 그분에 대한 신앙에 관하여 들었던 진리를 자기들이 믿기에 앞서 그것들을 확인해보고 싶었다는 것이다.

이 후손을 통치하는 악은 자기를 사랑함(love of self)이었다. 그렇다고 그들이 지닌 세상을 사랑함까지도 오늘날 존재하는 세상을 사랑함 만큼을 동시에 가진 것은 아니다; 그 이유가 그들은 오늘날과 달리 자기 식솔들, 가족 범주 안에서 살았던 바, 부를 축적하려는 오늘날 사람의 세상을 사랑함 같은 것은 없었다.

홍수 이전에 존재했던 태고 교회의 악, 뿐 아니라 홍수 이후에 존재한 고대 교회의 악, 또한 유대 교회의 악, 그후 주님의 오심 이후 새로운 교회, 또는 이방인들의 교회의 악, 또한 오늘날 교회의 악은 그들이 주님과 말씀을 믿지 않는 것, 그리고 자신들과 자신의 감각들을 믿는 것이다. 이로부터 신앙은 없다, 그리고 신앙이 없는 곳에 이웃을 사랑함도 없다. 그 결과 모든 것이 악과 거짓이다.

오늘날 이 악은 이전 시대 때보다 더 악화되어 있다. 그 이유는 인간들이 고대인들에게 알려지지 않은 기억 속의 지식들을 수단으로 감각들로부터는 쉽사리 믿기지 않던 것도 지금은 확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어둠을 형언할 수 없는 수준까지 치닫게 했다. 만일 인간들이 이 원인으로부터 있는 어둠이 얼마나 대단한지 알았다면, 그들은 깜짝 놀라고야 말았으리라.

기억 속의 지식들을 수단으로 신앙의 신비를 탐구하는 것은 낙타가 바늘 귀를 통과하는 것, 또는 갈빗대가 심장이나 가슴의 원 섬유(fibrils)들을 규율하려는 만큼이나 불가능할 것이다. 이 정도에 맞먹는 것이, 우리의 감각들과 기억 속의 지식들과 영적이고 천적인 것과의 관계일 것이다. 무수하다 말해야 마땅한 자연의 감추인 것들을 탐사하려는 자는 하나도 거의 발견하지 못한채, 오히려 그것들을 탐사하는 동안 오류에 빠지는 경우는 잘 알려져 있다. 영적 삶과 천적 삶 속의 감추인 진리들을 탐사하는 동안의 경우는 훨씬 더 하다. 그 삶에는 우리가 자연에서 대견치 않게 볼 수 있는 하나를 두고도 얼마나 많은 비밀함들이 존재하는지! 한가지 예를 들어 살피고 지나가자. 인간은 자신으로부터서는 악 밖에 행할 수 없고, 주님으로부터 돌아설 수 밖에 없다. 그럼에도 이런 행함과 돌아섬을 인간이 하는 것이 아니라, 그와 함께 있는 악령들이 하고 있다. 이 악령들이 그것들을 하는 것이 아니라 악령들이 그들의 자기 자신을 만든 악 자체가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악을 행하고 주님으로부터 자신을 돌아서게 하고, 과오 안에 있다; 그러고도 아직 그는 주님으로부터 만 살고 있다. 또 한편 이런 경우도 있다. 인간은 자신으로부터서 선인 것을 행하고, 주님에게 돌아서는 것이 가능하지 않다. 그러나 이것은 천사들을 수단으로 행하여진다. 천사들이 그것을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만이 그것을 하신다. 그리고 여전히 인간은 자신으로부터인 것 같이 선인 것을 행할 수 있고, 자신을 주님에게 돌아서게 할 수 있다. 이런 사실들은 우리의 감각, 기억 속의 지식, 철학을 수단으로 결코 납득되어질 수 없다. 만일 우리의 이런 것에 조언을 구하겠다면, 그것이 진리이다 해도 필시 부정되어지고야 만다. 말해진 것으로부터 분명한 것은, 믿음의 문제를 두고 감각적인 것들과 기억 속의 지식들에 조언을 구하는 것은 자신들을 의심 안으로 던져 넣을 뿐 아니라 부정함 안으로, 즉 짙은 어둠 안으로, 그리고 결과적으로 모든 탐욕들 안으로 던지게 한다는 것이다. 그 이유가 그들이 거짓인 것을 믿을 때, 그들은 또한 거짓인 것을 행한다. 그리고 그들의 영적이고 천적인 것은 존재를 가지고 있지 않다고 믿을 때, 그들은 육체와 세상 속에 있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없다고 믿는다. 하여 그들은 자기와 세상에 속하는 모든 것을 사랑한다. 그리고 이 방법에서 거짓인 것으로부터 탐욕들과 악들이 튀어나온다.

14절. 그래서 여호와 하느님께서 뱀에게 말하셨다, 네가 이런 짓을 했기 때문에 너는 모든 짐승, 들판의 모든 야생 동물보다 뛰어나게(above) 저주되고, 배로 다닐 것이며, 네 사는 날 동안 너는 먼지를 먹게 되리라.
“여호와 하느님께서 뱀에게 말하셨다”란 그들은 (자기들의 타락의) 원인이 자기들의 감각적인 부분(sensuous part)에 있음을 지각했음을 의미한다. “뱀은 모두 각각의 짐승과 들판의 모두 각각의 야생 동물보다 뛰어나게(above) 저주되었다”란 그들의 감각적인 부분이 자체를 천국적인 것으로부터 비켜, 육체(body) 속에 있는 것들 쪽으로 돌아 섬으로 자체를 저주했음을 의미한다. 전과 같이 여기서도 “짐승”, “들판의 야생 동물”은 애착들을 의미한다. “뱀이 배로 다님”은 그들의 감각적인 부분은 더 이상 천국에 속하는 위 쪽을 쳐다볼 수 없고 오로지 육체와 땅에 속한 아래 쪽만을 볼 수 있음을 의미한다. “네 사는 날 동안 먼지를 먹는다”란 그들의 감각적인 부분은 육체와 땅에 속한 것 말고는 그 어떤 것 가지고도 살 수 없게 되었음을, 바꿔말하면 그것은 지옥(infernal)적인 것이 되었음을 의미한다.

태고의 천적 인간에서의 육체의 감각적인 것들은 내적 인간에게 고분고분하고, 도움이 되는 본성의 범주였고, 이 수준 이상으로 그것들은 취급받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이 자신들을 사랑하기 시작했을 때, 그들은 내적 인간 앞에 육체의 감각적인 것을 놓았다. 그러므로 이것들은 분리되어지고 육체적인 것이 되었다. 그리고 그렇게 저주되었다.

“여호와 하느님께서 뱀에게 말하심”을 수단으로 자기들의 타락의 원인이 감각적 부분임을 그들이 지각함을 의미함은 이미 상술한 바 있어 여기서는 생략한다.

“그분이 뱀에게, 너는 모두 각각의 짐승보다 뛰어나게, 들판의 모두 각각의 동물보다 뛰어나게 저주되었다 라고 말하신 것은 감각적인 것은 천국적인 것으로부터 그 자체를 비켜, 육체의 것 쪽으로 돌렸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은 말씀의 내적 의미로부터 분명하게 보여질런지 모른다. 여호와 하느님은 결코 저주하시지 않는다. 그분은 누군가에게 결코 화내시지 않는다. 그리고 누군가를 시험으로 인도하시는 일도 결코 없다. 결코 벌하시지 않는다. 그러니 저주하시는 일은 더더욱 없다. 저주하는 것은 지옥의 패거리이다. 그 이유가 이런 해를 주는 일은 자비와 평화, 그리고 선함의 원천으로부터는 결코 진행되지 않는다. 이렇게 말해진 이유는 말씀의 다른 부분에서도 마찬가지이지만, 여호와 하느님께서 그분의 얼굴을 돌리시고, 화내시고, 벌하시고, 시험하시고, 죽이시고, 저주조차 하시는 것은 우주에 있는 모든 것, 모든 사람, 악 자체, 처벌들, 시험들을 통치하시고 배려하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렇게하여 사람들이 가장 일반적인 생각을 가졌을 때, 그 후에 그분이 어떻게 처벌과 시험으로부터 악을 돌리심에 의해 모든 것을 통치하시고 배려하시는 가를 인간은 배우게 된다. 말씀을 가르치고 배움에서, 이 가장 일반적인 생각은 반드시 제일 먼저 와져야만 한다; 그러므로 글자 의미는 이와 같은 의미들로 꽉 차있다.

“짐승과 들판의 야생 동물”이 애착들을 의미하는 것은 제 45, 46항에서 말했던 것으로부터 알 것인 바, 아래 인용구절로 족할 것이다. 다윗서로부터:
당신, 오 하느님, 당신의 친절하심으로부터 비를 보내소서; 당신은 노동하시는 당신의
유업을 확증하십시요; 당신의 야생 동물이 그 안에 거주할 것입니다 (시. 68:9-10),
이 구절 역시 “야생 동물”은 선에 애착함을 표시한다. 그 이유는 이것이 “하느님의 유업 안에 거주한다”라고 말해지기 때문이다. 여기서, 그리고 창세기 2장 19, 20절에서도 또한 “짐승과 들판의 야생 동물”이라 언급되어진다. 그 반면 창세기 1장 24, 25절에서는 “짐승과 땅의 야생 동물”이라 명명되는 이유는 현재 구절은 교회, 또는 거듭난 사람을 취급하고, 이에 반해 창세기 첫 장은 아직까지는 교회이지는 않은 교회, 또는 이제 막 거듭나는 인간을 취급하기 때문이다; 그 이유로 “들판(field)”은 교회, 또는 거듭난 자에 응용되어진다.

“뱀이 자기 배로 간다”는 그들의 감각적 부분은 더 이상 위쪽인 천국의 것들을 쳐다보지 못하고, 육체와 땅의 것들 쪽인 아래쪽을 향한다는 것을 표시한다는 것은 고대 시대 때에, “배(belly)”를 수단으로 땅에 가장 가까운 것들이 의미되어졌다는 사실로부터 분명해진다; “가슴(chest)”을 수단으로 땅 위쪽에 있는 것들; 그리고 “머리(head)”를 수단으로 가장 높은 것들이 의미되어졌다. 그 자체로 인간 본성의 가장 낮은 부분인 감각적 부분은 “그것의 배로 갔다”고 여기서 말해진다. 그 이유는 감각적 본성이 땅인 것 쪽으로 돌아서버렸기 때문이다. (뱀의 배가) 땅을 내리 누름(depression), 머리 위에 먼지를 뿌림은 유대 교회에서 비슷한 의미를 가졌다. 다윗서를 보자:
어찌하여 당신께서는 당신의 얼굴을 숨기시고, 우리의 비참함과 압제 당함을 잊으십니까?
그 이유는 우리의 혼이 먼지에 절했고, 우리의 배가 땅에 들러붙었기 때문입니다.
일어나시어, 우리를 도우소서, 그리고 당신의 자비하심을 위하여 우리를
되찾으소서 (시. 44:24-26),
위 구절에서도 역시, 인간이 여호와의 얼굴로부터 비킬 때, 그는 자기 배를 수단으로 먼지 쪽에, 땅 쪽에 착 달라붙는다는 것이 분명해진다. 마찬가지로 요나서에서, 요나가 던져진 큰 물고기의 “배”를 수단으로 땅의 더 낮은 부분이 의미되어지고 있다. 그의 예언을 보자:
지옥의 배로부터 나는 소리쳤다, 그리고 당신께서는 제 음성을 들으셨습니다 (욘. 2:2),
위 구절의 “배”는 더 낮은 땅을 표시한다.

그러므로 인간이 천국의 것들을 중요시했을 때, 그는 “똑바로 서서 걷는다”, 그는 “위쪽을 쳐다본다”, 또는 그는 “앞으로” 향한다 등등으로 말해진다. 이 표현 모두 같은 것을 뜻한다; 그가 육체적이고 땅의 것을 중요시할 때, 그는 “땅에 절했다”, 그리고 “아래쪽을 본다”, 또는 “뒤쪽을 향한다”라고 말해진다. 레위기서를 보자:
나는 너희를 이집트의 토지로부터 데려 내와 너희가 그들의 종이 되지 않도록 한
너희 하느님 여호와이다; 그리고 나는 너희의 멍에의 끈들을 부수었다, 그리고 너희를
똑바로 서서 가게 만들었다 (레. 26:13).
미가서에서:
그 때부터 너희는 너희 목들을 제거하지 않을 것이고,
너희는 똑바로 서서 가지 않을 것이다 (미. 2:3).
예레미야 애가서에서:
예루살렘은 죄를 지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녀를 경멸한다, 그 이유가 그들이 그녀의
벌거벗었음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렇다, 그녀는 신음하며 뒤쪽으로 돌아섰다.
높은 곳으로부터 그분은 내 뼈들 안으로 불을 보내셨다, 그리고 나를 뒤쪽으로
되돌아 가게 만드셨다; 그분은 나를 황폐해지게 만드셨다 (애. 1:8, 13).
그리고 이사야서에서:
여호와 당신은 되찾으시는 분, 슬기로운 자들을 뒤쪽으로 돌리시고,
그들의 지식을 어리석게 만드신다 (이. 44:24-25).

“네 사는 날 동안 먼지를 먹는 것”이 감각적인 부분은 육체와 땅으로부터 인 것 외에는 어떤 것을 가지고도 살 수 없음을 의미한다는 것, 더 말하자면, 그것이 지옥이 되었다는 것은 말씀에서 “먼지”의 의미로부터 분명해진다; 미가서를 보자:
당신의 사람들을 영원의 날들에서 같이 먹이십시요. 민족들이 보고 자기들의 모든 능력을
두고 얼굴을 붉힐 것입니다; 그들은 뱀 같이 먼지를 핥을 것입니다. 그들은
땅의 기는 것(뱀) 같이 자기들의 은신처(holds)들로부터 흔들 것입니다
(미. 7:14, 16, 17).
이 구절의 “영원의 날들”은 태고 교회를 뜻한다; “민족들”은 자기들의 자아를 신뢰하는 자들을 뜻하는 바, 이들로부터 “그들은 뱀 같이 먼지를 핥을 것이다”라고 서술되고 있다. 다윗서에서:
야만인들은 하느님 앞에서 절할 것입니다,
그리고 당신의 적들이 먼지를 핥을 것입니다 (시. 72:9).
“야만인들”, “적들”은 지상과 세상 것만을 중요시하는 이들이다. 이사야서에서:
먼지가 뱀의 빵일 것이다 (이. 65:25).
“먼지”가 영적인 것들과 천적인 것들을 중요시하지 않는 이들, 육체적이고 지상적인 것만을 중요시하는 이들을 의미하기에, 주님께서 그분의 제자들에게 당부하시기를, 만일 너희가 들어간 성이나 집에 가치가 없다면, 너희는 “너희의 발로부터 먼지를 흔들어 털어라” 하셨다 (마. 10:14). (“먼지”가 정죄되는 것, 지옥인 것을 의미하는 것은 제 19절로부터 더 보여진다.)

15절. 그리고 나는 너와 여자 사이에, 그리고 네 씨와 여자의 씨 사이에 증오(enmity)를 놓을 것이다; 그는 네 머리를 짓밟을 것이고, 너는 그의 뒤꿈치에 상처를 입힐 것이다.
이 구절이 주님께서 세상 안으로의 첫 강림하심을 예언한 대목임은 모든 이가 눈치채고 있다; 실로 이것은 말들 자체로부터 분명하게 나타난다, 그러므로 이 구절로부터, 그리고 예언서들로부터, 유대인들조차 메시아가 오시기로 되었음을 알았다. 어쨌든 지금까지도, 이 구절 속의 특별한 말들, 즉 “뱀”, “여인”, “뱀의 씨”. “여인의 씨”, “짓밟혀질 뱀의 머리”, “뱀이 상처입힐 뒤꿈치”에서 특별하게 뜻해지는 바를 이해한 자는 없었다. 그러므로 그것들은 꼭 설명하여야 할 것이라 본다. 이 구절에서의 “뱀”은 일반적 측면에서의 모든 악을 뜻하는데, 더 뾰족히 말하면 자기를 사랑함(love of self)을 뜻한다. “여자”는 교회를 뜻한다. “뱀의 씨”는 모든 불신앙 (infidelity)을, “여인의 씨”는 주님에 대한 신앙을, “그분, He”는 주님 자신을, “뱀의 머리”는 일반적으로 악의 지배(권력)을, 특별히 자기를 사랑함이 지배함을, “짓밟음”은 의기소침됨(depression)을, 짓밟은 이유는 “배로 다니고 먼지를 먹도록”하기 위해서 이다, 그리고 “뒤꿈치”란 가장 낮은 자연 평면(the lowest natural), 예를 들면 유형적, 육체적 물질적(corporeal)인 것을 뜻하는데, 뱀은 이런 것들에만 “상처를 입힐” 수 있을 뿐이다.

“뱀”이 일반적 측면에서는 모든 악을, 특별하게는 자기를 사랑함을 뜻하는 이유는 모든 악의 일어남이 마음의 감각적 부분과 기억 속의 지식으로부터 있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뱀”에 의해 제일 먼저 의미되어지고 있다.; 그러므로 여기서 뱀은 모두 각각의 악을, 특별하게는 자기를 사랑함, 또는 이웃과 주님을 미워함을 표시한다. 이 악과 미워함은 그 종류가 다양해서, 수많은 특질들로 구성되고, 더 나아가 수많은 종류로 구성되는 바, 말씀 안에서도 뱀들의 종류는 다양하게 표현되어, 미움이라는 독의 종류에 따라, “뱀(snake)”, “독사(cockatrice)”, “불의 뱀(fiery serpent)”, “날으는 큰 뱀(serpent that fly)”, 그리고 “기는 뱀(that creep)”, “독사(viper)” 등등으로 묘사되고 있다. 이사야서를 보자:
너 불레셋이여, 너희를 치던 막대가 부러졌다고 기뻐환호하지 말라. 그 이유가
뱀의 뿌리로부터 독사가 나오고, 그것의 열매는 날으는 불뱀일 것이기 때문이다
(이. 14:29).
“뱀의 뿌리”는 감각과 기억 속의 지식과 연결되는 마음 부분, 또는 원리를 표시한다.; “독사(cockatrice)”는 거기로부터 파생된 거짓 안에서 근원하는 악을 표시한다; 그리고 “날으는 불뱀”은 자기를 사랑함으로부터 오는 탐욕을 표시한다. 같은 예언서의 다른 구절에서 이렇게도 묘사되어 있다:
그들은 독사의 알들을 부화한다. 그리고 거미줄을 친다; 그들의 알을 먹는 자는
죽는다, 그리고 그것이 으깨질 때, 독사가 나온다 (이. 59:5).
여기 창세기에서 묘사된 뱀은 계시록에서 “크고 붉은 뱀”이라 불리운다, 그리고 “늙은 뱀”, 또한 온 세상을 미혹하는 “악마와 사탄”이라고도 불린다 (12:3, 9; 20:2), 거기서 그리고 다른 장소들에서도 “악마”를 수단으로 다른 사람들 위에 군림하는 (한명의) 특별한 악마가 아니라 악령들의 패거리, 또는 악 자체가 뜻해짐도 첨언해둔다.

“여인”을 수단으로 교회가 뜻해진다는 것은 이미 살핀 바인, 천국의 결혼에 관한 것으로부터 분명해진다. 천국의 결혼의 본성은 천국, 결과적으로 교회가 교회의 자기 자신을 수단으로 그들의 자기 자신 안에 있는 만큼에서 주님에게 결합되는 것이다. 그 이유가 그들의 자기 자신 없이 합일(union)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자비하신 주님께서 이 자기 자신 안으로 순진, 평화, 그리고 선을 은근히 심어두실 때, 이 자기 자신도 여전히 인간의 것인 자기 자신으로서 나타난다. 그러나 천국적이고 가장 행복하게 되어간다. 주님으로부터 있는 천국적이고 천사의 자기 자신의 품질(이 있고), 그리고 (본래의) 자기 자신의 품질, 이것은 자기(self)로부터(이기) 때문에 지옥적이고 악마적인데, (이 차이는) 확실히 말해 질 수 없다. 이 차이는 천국과 지옥 비슷하다.

천국적이고 천사 같은 자기 자신 때문에 교회는 “여인”, “아내”, “신부”, “처녀”, 그리고 “딸”이라 불리운다. 그녀가 계시록서에서 “여인”이라 불리워진다:
여인이 태양을 옷입고, 달을 그녀의 발 아래 두고, 열 두 별들의 왕관을
그녀의 머리 위에 쓰고 있었다. 그리고 용은 남자 아이를 낳은 여인을
박해했다 (계. 12:1. 4-5, 13).
이 인용구절에서, “여인”을 수단으로 교회가; “태양”을 수단으로 사랑이; “달”을 수단으로 신앙이; “별들”을 수단으로 신앙으로부터의 진리들이 뜻해지는데, 이것 모두를 악령들은 미워하고 극도로 박해한다. 교회가 “여인”이라, 또는 “아내”라 불리는 이사야서를 보자:
너를 만드신 분은 너의 남편, 군대들의 여호와가 그분의 이름이시고, 그리고
너를 되찾으시는 이스라엘의 거룩한 분이시고, 그분은 온 땅의 하느님이라 불리신다;
여호와께서 너를 부르시되, 여인이 버림받고, 영에서 고뇌한 것 같이,
그리고 젊은 시절의 아내 같이 부르셨다 (이. 54:5-6),
위 구절에서 남편/만드는 자는 (히브리어의 이중(dual)인) 일종의 복수로 있다. 그 이유는 자아(selfhood, proprium)가 동시에 [취급되어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인이 버림받음”, 그리고 “젊은 시절의 아내”는 고대 교회와 태고 교회를 특별하게 의미하는데, 이와 마찬가지인 말라기서를 보자:
여호와께서는 너와 네 젊은 시절의 아내 사이에 증언을 해두셨다 (미. 2:14).
그녀가 계시록서에서 “아내”와 “신부”로 불리워진다:
나는 자기 남편을 위해 단장한 신부로서 준비되어 하느님으로부터 천국의
안에서 밖으로 내려오는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을 보았다: 이리로 오라,
내가 네게 신부, 어린 양의 아내를 보여줄 것이다 (계. 21:2, 9).
(주님의) 교회가 예언서의 많은 곳에서 “처녀”, “딸”로 불리운다.

“뱀의 씨”를 수단으로 모든 불신앙(신을 믿지 않음, infidelity)이 뜻해짐은 “뱀”이 모든 악이다는 의미로부터 분명해진다; “씨(seed)”는 생산하고 생산되는 것, 또는 낳고 낳아지는 것이다; 그리고 교회가 여기서 이야기되고 있는 바, 이것은 불신앙이다. 이사야서에서, 뒤집혀 있는 유대 교회의 상태에 관련하여, 그것이 “악행자의 씨”, “간음의 씨”, “거짓의 씨”라 불리운다: 즉,
죄짓는 민족, 불법이 쌓인 백성들, 악행자들의 씨, 파괴자들인 아들들에게
화가 있다; 그들은 여호와를 버렸다, 그들은 이스라엘의 거룩한 분을 성나게 했다,
그들은 뒤쪽을 향하여 자신들을 떼어 놓았다 (이. 1:4).
이리로 가까이 오라, 너 음행자의 아들들아, 간음자의 씨들아,
너희는 위법의 자녀, 거짓의 씨가 아니더냐 (이. 57:3-5).
그리고 다시, “뱀” 또는 “용”에 관해 말하는데, 루시퍼(14:12)라 불러진다:
너는 역겨운 어린 가지 같이 네 무덤으로부터 내던져졌다, 그 이유는
네가 네 토지를 부패하게 했고, 네가 네 백성을 죽였기 때문이다; 악행자의
씨는 영원까지 부를 일이 없을 것이다 (이. 14:19-20).

“여인의 씨”가 주님에 대한 신앙을 의미한다는 것은 교회인 “여인”의 의미로부터 분명해진다. 이 “씨”는 신앙밖에 더 없다, 그 이유가 교회가 교회라 불려지는 이유는 주님을 믿는 신앙으로부터 이기 때문이다. 말라기서에서, 신앙이 “하느님의 씨”라 불려진다: 즉,
여호와께서 너와 네 젊은 시절의 아내 사이에서 증거해두셨다; 그리고 영의
나머지를 가진 자는 그렇게 행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러므로 이 자는 하느님의
씨를 추구하고 있는 것 아니냐? 그러나 너는 네 영을 관찰하여,
네가 네 젊은 시절의 아내를 두고 불성실해지지 않도록 하라 (말. 2:14-15).
위 구절에서 “젊은 시절의 아내”는 고대와 태고 교회들이다, 이 교회의 “씨” (또는 신앙)을 두고 예언자가 말한다. 이사야서에서 이 교회에 관련해:
나는 네 목마름에 물들을 부을 것이다, 그리고 네 마른 땅 위에 홍수들을;
나는 나의 영을 네 씨 위에 부을 것이다, 그리고 내 축복을 네 후손 위에 (이. 44:3).
계시록서에서:
용은 여인에게 화가 치밀었다, 그래서 하느님의 명령들을 준수하고,
예수에 관한 증거를 가진 그녀의 씨들과 전쟁을 만들려고 나갔다 (계. 12:17).
그리고 다윗서에서:
나는 나의 뽑은 자와 언약을 만들었다, 나는 내 종, 다윗에게 맹세했다, 영원까지
나는 네 씨를 건설할 것이다, 그리고 그의 씨는 영원히 지속될 것이다, 그리고 그의
왕좌는 천국들의 날들 같다; 그의 씨는 영원히 지속될 것이다, 그리고 그의 왕좌는
태양 같이 내 앞에 있을 것이다 (시. 89:3-4, 29, 36),
위 구절에서 “다윗”은 주님을 뜻한다; “왕좌”는 그분의 왕국을; “태양”은 사랑을; 그리고 “씨”는 신앙을 뜻한다.

신앙 뿐 아니라, 주님 자신 역시 “여인의 씨”라 불리신다. 그 이유는 그분만이 신앙을 주시기 때문, 그분이 신앙이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분은 자기를 사랑함과 세상을 사랑함을 통하여 지옥적이고 악마적인 자기 자신으로 온전히 타락한 교회 안에서 기꺼이 태어나시려 했는데, 그 이유는 그분의 신성의 권능을 수단으로 그분이 그분의 인간 실체 안에서 인간의 자기 자신과 신성의 천적 자기 자신을 하나되도록, 하여 그분 안에서 그것들이 하나이도록 하시기 위함 때문이었다; 이 합일(union)이 결과되지 않았으면, 세상 전체는 지독하게 파멸되었을 것이다. 주님이 “여인의 씨”이셨기 때문에 “그것(it)”이 아닌 “그분(He)”으로 말해지고 있다.

“뱀의 머리”가 일반적으로는 악이 지배함, 특수하게는 자기를 사랑함이 지배함을 뜻한다는 것은 그것의 본성으로부터 분명해질 것이다. 이것의 본성은 너무 비참해서 지배권을 추구할 뿐 아니라, 땅 위 모든 것을 지배하려 든다; 그리고 그것에 만족치 못해 천국에 있는 것까지 지배하려 한다. 더 나아가 주님 자신까지도 지배하려 든다…그렇다해도 만족치 못한다. 이것은 자기를 사랑함으로 불붙어지는 시초 안에 잠재되어 있다. 만일 이것이 탐닉되어지되, 제한이 없어져 있다면, 이것은 순간에 튀어올라, 그것의 열망하는 높이까지 치솟을 것임을 우리는 지각할 것이다. 이로부터 어떻게 “뱀”, 또는 자기를 사랑함으로부터의 악이 지배력을 발휘하기를 바라는지, 얼마나 많이 자기 지배력을 거절하는 모든 이들을 미워하는지 분명하다. 이것이 자체를 드높이는 “뱀의 머리”, 그리고 땅쪽으로 “짓밟아 내어” “배로 다니고, 먼지를 먹도록” 하시려는 뱀의 머리이다. 또한 “뱀” 또는 “용”이 “루시퍼”라 불리우고 있다. 이사야서에서:
오 루시퍼야, 너는 네 속으로 말했다, 나는 천국들로 올라갈 것이다, 나는 내
왕좌를 하느님의 별들 너머로 드높일 것이다, 그리고 나는 회중의 산 위, 북쪽에
앉을 것이다, 나는 구름들의 높이 너머로 올라갈 것이다, 나는 가장 높은 자와
동등하게 만들 것이다; 허나 너는 구덩이 쪽으로,
지옥 아래로 데려가 질 것이다. (이. 14:12-15).
“뱀”, “용”이 계시록서에서도 그가 그의 머리를 드높이는 것에 관련해 묘사되고 있다:
크고 붉은 용, 일곱 머리와 열 뿔, 많은 왕관을 가졌는데;
그러나 그는 땅으로 내던져졌다 (계. 12:3, 9).
다윗서에서:
여호와께서 내 주님에게 말하신다, 너는 내가 네 적들을 네 발판으로 만들 때까지,
내 오른편에 앉으라; 여호와께서는 시온으로부터 네 강함의 막대를 내보실 것이다,
그분은 민족들을 심판하실 것이다, 그분은 죽은 몸들로 채우실 것이다, 그분은
많은 토지 위에서 머리를 부수실 것이다; 그분은 길에서 시내를 마실 것이다,
그러므로 해서 그분은 머리를 들어올리실 것이다. (시. 110:1-2, 6-7).

“짓밟음”, 또는 “상하게 함”이 의기소침함을 뜻하는 것은 그것이 “배로 다니고 먼지를 먹도록” 강요당하기 위해서인 바, 이 절과 앞 절로부터 분명하다. 마찬가지로 이사야서에서:
여호와께서는 높은데 거주하는 그들을 아래로 내던지셨다; 드높은 성을 그분은
낮추실 것이다; 그분은 그것을 땅에까지 낮추실 것이다; 그분은 그것을 먼지까지에로
넘어뜨리실 것이다; 발이 그것을 밟아 뭉갤 것이다 (이. 26:4-6).
다시 이사야서에서:
그분은 손으로 땅쪽으로 내던지실 것이다;
그것들은 발로 짓밟힐 것이다-자만의 왕관이다 (이. 28:2-3).

“뒤꿈치”에 의해 가장 낮은 자연의 것, 또는 육체의 것이 뜻해짐은 태고인들이 인간 안에 있는 여러 가지 것들을 생각했던 방법이 알려져야 이것도 알게 된다. 그들은 천적인 것들과 영적인 것들은 머리와 얼굴에 관계된다고 생각했다; 이들(선행과 자비)로부터 출시된 것은 가슴에; 자연적인 것들은 발에; 보다 더 낮은 것들은 발바닥에; 가장 낮은 자연적인과 육체적인 것들은 뒤꿈치에 관계된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이것들이 서로 관련이 있다 생각한 것이 아니라 그렇게 그것들을 불렀다. 추론의 가장 낮은 것들이 기억 속의 지식들인데 야곱이 단을 두고 예언한 것에 의해 뜻해지고도 있다: 즉,
단은 길가에 있는 뱀, 작은 길에 있는 독사(adder)여서 말(horse)의 뒤꿈치를 물을 것이다.
그리고 승마자는 뒤쪽으로 떨어진다 (창. 49:17).
다윗서에서:
내 뒤꿈치의 불법이 나를 휘감았습니다 (시. 49:5).
마찬가지 방식에서 야곱이 자궁으로부터 나올 때, 야곱에 관련하여:
그의 손이 에서의 뒤꿈치를 붙잡고 있었는 바,
이로부터 그는 야곱이라 불려졌다 (창. 25:26),
이름 “야곱”은 “뒤꿈치”로부터 기인했는데, “야곱”으로 의미된 유대 교회가 뒤꿈치를 상하게 했다. 뱀은 가장 낮은 자연의 것들만을 상하게 할 수 있을 뿐 아니라 그것이 독사의 종류가 아니면, 인간 안의 내면의 자연적인 것들을 다치지 못하게, 인간의 영적인 것들은 더욱더 다치지 못하게 하고 천적인 것은 거의 다치지 못하게 하는데, 이것을 주님께서는 그의 지식을 사용함 없이 결점 안에서 보존하시고 비축해놓시고 있다. 고로 주님에 의해 비축된 것이 말씀에서 “리메인스(remains)”라고 불리운다. 뱀이 홍수 때의 사람들 안에 있는 가장 낮은 자연적인 것을 파괴한 방식은 자기를 사랑함과 감각적 원리를 수단으로 한 것이다; 유대인들 사이에서의 경우는 감각적인 것들, 전통들, 하찮은 것, 그리고 자기를 사랑함과 세상을 사랑함을 수단으로 해서 였다; 그리고 오늘날의 경우, 뱀이 감각의 것들, 기억 속의 것들, 철학 속의 것들, 동시에 자기와 세상을 사랑함을 수단으로 어떻게 파괴해왔고 어떻게 계속 파괴해가는 지는 추후 신성한 자비로부터 말해질 것이다.

이상 말해진 것으로부터 명백해지는 것 또 하나는 이것이 주님께서 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세상에 오실 그때의 교회에 밝히 알려졌다는 점이다.

16절. 그리고 여자에게 그분은 말하시기를, 내가 슬픔과 임신을 크게 늘릴 것이다. 슬픔 가운데 너는 아들들을 낳을 것이고, 너의 순종함이 너의 남자(vir)에게 있어, 그는 너를 지배할 것이다.
“여자”는 자아(proprium)와 관계 있는 교회, 자아를 사랑한 교회를 의미한다. “슬픔을 크게 늘린다”란 전투와 전투로 야기되는 불안을 의미한다. “임신”은 모든 생각을, “그녀가 슬픔 가운데 낳는 아들”은 그 교회가 생산하는 진리들을, “남자”란 전과 같이 여기서도 그 교회가 순종할 합리성과 그 교회를 지배할 합리성을 의미한다.

교회가 “여인”을 수단으로 의미되어지는 것은 앞서 살핀 바 있다. 그러나 여기서는 여인을 수단으로 본래 의미된 교회가 뒤집혀진 상태에서의 교회이다. 그 이유는 뒤집혀진 태고 교회의 후손이 지금 다루어지기 때문이다.

감각적 부분이 그 자체를 비킬 때, 또는 그 자체를 저주할 때, 그 결과는 악령들이 강력하게 싸우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여기에 따라붙는 천사들의 노동은 더 심해지는 바, 이 전투가 본문에서 “나는 네 임신과 아들들의 출생에 관련하여 네 슬픔을 크게 늘리겠다”라는 말로 묘사하고 있다. 즉 진리에 대한 생각과 진리를 생산함들에 관련하여 수고가 클 것이다는 말이다.

말씀에서 “임신과 아들들의 출생”은 영적 의미에서 취해진 것-“임신”은 생각과 심정의 고안을 위해, “아들들”은 진리들을 위해 취해진 것임은 호세아서로부터 분명해진다:
에브라임에 관하여, 그들의 영광은 출생으로부터도, 자궁으로부터도, 임신으로부터도 새같 이 날아갔다; 설사 그들이 자기들의 아들들을 양육한다 해도, 나는 그것들을 빼앗아 사람 없게 할 것이다, 내가 그들로부터 떠날 때 그들에게 화가 있다 (호. 9:11-12),
위에서 “에브라임”은 총명, 또는 진리를 이해함; 그리고 “아들들”은 진리들 자체를 의미한다. 그밖의 구절에서도 에브라임은 총명있는 자, 또는 우둔한 자를 의미한다:
산고의 슬픔들이 그에게 닥친다, 그는 지혜 없는 아들이다, 그 이유가 그때에
그는 아들들의 자궁의 깨트림에서 서있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호. 13:13).
그리고 이사야서에서:
얼굴을 붉혀라, 오 시돈아, 그 이유가 바다가 말했었다, 바다의 요새(fortress),
말하기를, 나는 산고를 겪지 않았다, 낳지도 않았다, 나는 젊은 남자들을 기르지도
않았다, 소녀들을 성장하게 하는 원인도 아니었다; 이집트에 관한 보고(report)에서 같이, 그들은 두로의 보고에 따라 산출할 것이다 (이. 23:4-5),
“시돈”은 신앙에 관한 지식 안에 있어왔던 이들, 그러나 기억 속의 지식을 수단으로 그 지식을 파괴한 이들, 하여 불임(barren)이 되어버린 이들을 뜻한다.
다시 예언서에서, 거듭남을 같은 예언서에서 취급하면서, 그리고 신앙으로부터의 진리들이 아들들에 의해 의미된다:
그녀는 산고가 있기 전 그녀는 낳는다; 그녀의 고통이 오기 전, 그녀는 남자 아이를
(낳아서) 인계했다; 누가 이런 것들을 들었던가? 그리고 내가 낳게하지 않았더냐?
여호와께서 말하신다; 내가 낳게하고 닫히게 하지 않더냐?
네 하느님이 말하신다 (이. 66:7-9).
그러므로 천국의 결혼으로 임신하고 태어나는 선들과 진리들이 마태복음서에서 주님에 의해 “아들들”이라 불리운다:
선한 씨를 뿌리시는 분은 사람의 아들이시다; 들판은 세상이다;
그리고 씨는 왕국의 아들들이다 (마. 13:37-38).
그리고 구원하는 신앙으로부터의 선들과 진리들을 그분은 “아브라함의 아들들”이라 부르신다 (요. 8:39); 그 이유가 “씨”는 신앙을 표시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씨”로부터 있는 “아들들”은 신앙으로부터의 선들과 진리들이다. 이로부터 또한 주님께서는 자신이 “씨”이신 바, 자신을 “사람의 아들”이라, 즉 교회 속의 신앙이라 부르신다.

“남자(vir)”에 의해 합리성이 의미되어진다는 것은 이 장의 6절로부터 나타난다. 즉 여인이 자기와 함께 있는 그녀의 남자에게 주었다, 그는 먹었다, 이를 수단으로 그가 동의했음이 뜻해지는 대목에서 이다; 마찬가지로 앞에서 남자에 관해 말해진 것, 거기서 남자에 의해 슬기롭고 총명한 자가 뜻해진다. 어쨌든 여기서의 경우 “남자”는 합리성(the rational)을 표시한다. 그 이유는 지식의 나무로부터 먹음을 수단으로 지혜와 총명이 파괴된 결과, 남은 것은 아무 것도 없기 때문, 합리성은 총명의 모조품(imitation)이어서 마치 총명일 듯할 뿐이다.

모든 법과 교훈은 천적인 것과 영적인 것으로부터, 즉 그것의 진정한 시작으로부터 출시되는 바, 결혼의 이 법이 그러해야 하는 바, 요구되는 것은, 여인의 자기 자신 속에 있는 것인 바램(desire)으로부터 행동하는 아내, 이 바램은 남자 같이 합리성으로부터 라고 말할 수 없는 바, 아내는 남자(합리성)의 신중함에 복종해야 한다.

17절. 그리고 사람에게 그분은 말하시기를, 네가 네 아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기 때문에, 그리고 내가 너에게 먹지 말라고 명령하여 말한 나무로부터 먹었기에 너 때문에 지면은 저주된 바 너는 네 사는 모든 날들 동안 큰 슬픔 가운데 땅의 것을 먹게 될 것이다.
“사람이 자기 아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임”이란 사람(남자)이 동의 했음, 또는 합리성이 동의했음을 의미한다. 동의함으로 말미암아 합리성 역시 비켜섰다. 또는 스스로 저주하였다. 그 결과 외적 인간 전체도 자체를 저주했는 바, “너 때문에 지면이 저주되었다”로 표시되었다. “그 원인으로 슬픔 가운데 먹는다”란 그의 삶의 미래 상태는 불쌍할 것임을, 그리고 이는 교회의 마지막 까지에서조차도, 즉 “네 사는 모든 날들 동안” 불쌍할 것임을 뜻한다.

지면(ground)이 외적 인간을 의미한다는 것은 이전에 상술한 “땅”, “지면”, “들판”의 서술로부터 분명해진다. 인간이 거듭나질 때, 그는 “땅”이라고는 더 이상 부르지 않고, “지면”이라 불리운다. 그 이유는 천적 씨가 자기 안에 이식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또한 “지면”에 비교되어지고 말씀의 많은 구절들에서도 “지면”이라 불리운다. 선과 진리의 씨가 외적 인간 안에, 즉 그의 애착과 기억 안에 이식되어진다. 그러나 내적 인간 안에는 아니다. 그 이유는 내적 인간 안에는 인간의 자기 자신으로부터는 아무 것도 없고, 오직 외적 인간 안에만 있기 때문이다. 내적 인간 안에 선들과 진리들이 있는데, 이것들이 더 이상 표출되어 나타나지 않을 때, 인간은 외적, 또는 육체적이다; 어쨌든 선들과 진리들은 인간의 지식 없이 주님에 의해 내적 인간 안에 비축되어 있는데, 이것들은 외적 인간이 (죽었거나,) 거의 죽은 정도의 상태, 통상적으로, 시험, 불행, 아픔, 그리고 죽음의 시간 같은 기회 외에는 (잠간이라도) 출시되지 않는다. 합리성 역시 외적 인간에 속해 있다. 그리고 그 자체 내적 인간과 외적 인간 사이의 일종의 매체(medium)이다; 그 이유가 내적 인간은 합리성을 통하여 육체적 외적 인간에서 실행하기(operate) 때문이다. 그러나 합리성이 동의할 때, 합리성은 내적 인간으로부터 외적 인간을 분리한다. 하여 내적 인간의 존재는 더 이상 알려지지 않고, 그 결과로 내적 인간으로부터 있는 지혜와 총명도 알려지지 않는다.

여호와 하느님이 “지면”, 또는 외적 인간을 “저주하시지” 않았다. 그러나 외적 인간이 내적 인간으로부터 자체를 비켜 세웠다, 즉 자체를 저주했다. 이는 제245항에서 살핀 바 있어 생략한다.

“큰 슬픔 안에서 지면으로부터 먹는 것”은 삶의 비참한 상태를 의미한다는 것은 앞 절과 뒤를 잇는 구절로부터 “먹는 것”이 내적 의미에서 사는 것을 언급한 것임에서 분명해진다. 또한 이런 삶의 상태는 악령이 싸우려들고, 천사가 이에 맞서 애쓸 때인 전투의 결과로서 일어난다. 게다가 이 전투에서 악령이 지배력을 확보할 경우, 한층 더 비참해진다; 그 이유가 이때 악령들이 외적 인간을 지배하고, 천사들은 내적 인간만에 머물기 때문이다. 이로부터는 리메인스(remains)가 거의 없어 천사들은 인간을 방어해줄 거기로부터의 어떤 것을 거의 가져오지 못한다; 이로 인해 비참함과 걱정 불안이 발생한다. 죽어있는 사람들은 이런 비참이나 걱정을 느끼는 것은 거의 없다. 그 이유는 비록 그들이 자신을 두고 누구보다 더 진실되다고 생각할지라도, 그들은 더 이상 사람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그들은 천적인 것과 영적인 것, 그리고 영원인 것에 대해 야수들이 아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야수같이 그들은 지상의 것 쪽인 아래쪽을, 또는 세상의 것 쪽인 바깥쪽을 쳐다보며, 합리성과 합작하여 자기들의 좋아함(inclination)과 감각 측면들에 몰입한다. 그들은 죽어 있으므로 영적 전투나 시험들을 더 이상 계속할 필요가 없다. 그들은 악령에 항복한 셈이다. 하여 그들의 생명은 그들의 무거운 탐욕의 무게 아래 깊이 침몰되어 있다. 그것으로 해서 그들은 자신들을 더 한층 저주하여, 지옥의 더 깊은 곳으로 자신들을 빠뜨린다; 그들은 가장 비참한 고통을 견디어낸다. 이와 같은 것이 또한 지면은 저주 받는 것, 슬픔 가운데 그것을 먹는 것에 의해 의미되고 있다.

“네 사는 모든 날”이 교회의 끝을 의미한다는 것은 여기서 취급한 주제가 개개인이 아닌 교회와 교회의 상태라는 사실로부터 분명하다. 이 교회의 날들의 끝은 홍수의 때였다.

18절. 그리고 지면은 너에게 가시와 엉컹퀴를 산출하고, 너는 들판의 풀잎을 먹으리라.
“가시와 엉컹퀴”에 의해 저주와 황폐함이; 그리고 “너는 들판의 풀잎을 먹을 것”에 의해서는 그는 야생 동물같이 산다는 것이 뜻해진다. 인간은 그의 내적 인간이 외적 인간과 분리되고, 내적 인간은 극히 일반적인 방식으로만 외적 인간에 작동할 때, 그는 야생 동물처럼 사는 것이다. 그 이유가 인간은 주님으로부터 그의 내적 인간을 통하여 받는 것으로부터 사람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외적 인간으로부터 파생하는 것 가지고는 야생 동물이다. 내적 인간으로부터 분리된 외적 인간, 그 자체만 국한하면 야생 동물이 가지는 것, 즉 비슷한 본성, 바램, 식욕, 공상, 그리고 감정, 비슷한 신체 기관에 이르러 동물보다 더 다를 것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추론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추론함이 외적 인간으로 하여금 주님으로부터 생명의 유입을 받음을 수단으로 영적 실체(substance)로부터 가진 것이 있는 듯 자신을 여겨지게 한다. 이런 여김마저도 이와은 인간에게는 뒤집혀 있고, 하여 죽음인 악의 생명이 되어간다. 이로부터 그는 죽어있는 인간이라 불리운다.

“가시와 엉컹퀴”가 저주와 황폐함을 의미한다는 것은 축복과 번성함을 표시하는 말인 추수함과 열매 나무로부터 분명해진다. “가시(thorn)”와 “엉컹퀴(thistle)”, “찔레(brier)”, “가시나무(bramble)”, “쐐기풀(nettle)”은 서로 비슷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말씀에서 분명해진다. 호세아서에서:
보라, 그들은 황폐함 때문에 달아나버렸다; 이집트가 그들을 그러모을 것이다;
멤피스가 그들을 매장할 것이다; 그들이 은(silver)을 탐내나, 쐐기풀이
그들에게 상속될 것이다; 가시나무가 그들의 천막들 안에 있을 것이다 (호. 9:6).
위 구절에서 “이집트”와 “멤피스”는 자신들과 기억 속의 지식들로부터 신성한 것들을 이해하려고 애쓰는 것을 표시한다. 같은 예언서에서:
아웬의 드높은 장소들, 이스라엘의 죄는 파멸될 것이다; 가시와 엉컹퀴가
그들의 제단들 위에서 자랄 것이다 (호. 10:8),
위 구절에서 “아웬의 드높은 장소들”은 자기를 사랑함, 그리고 “제단들 위에 있는 가시와 엉컹퀴”는 모독을 의미한다. 이사야서에서:
쾌 쓸만한 들판들 때문에, 열매있는 포도나무 때문에 젖꼭지 위에서 슬퍼할 것이다;
내 백성의 지면 위에 가시돋힌 엉컹퀴가 자랄 것이다 (이. 32:12-13).
그리고 에스겔서에서:
이스라엘 가문을 찌르는 가시나무, 그들을 빙둘러 있는 모두로부터 고통 주는
엉컹퀴가 더 이상 있지 않을 것이다 (겔. 28:24).

“들판의 풀잎을 먹는 것”(즉 야생 식량)은 야생 동물과 비슷하게 사는 것을 표시한다는 것은 느부갓네살에 관해 말해진 다니엘서로부터 분명해진다:
그들은 너를 사람으로부터 몰아낼 것이다. 너의 거주함은 들판의 짐승들과 더불어
있을 것이다; 그들은 수소들 같이 네가 풀을 먹게 할 것이다,
그리고 일곱 때가 너를 지나갈 것이다 (단. 4:25).
그리고 이사야서에서:
너는 내가 그것을 오래 전에 어떻게 행하였는지를 듣지 못하였느냐? 나는 옛적의
말들로부터 그것을 만들었다; 지금 나는 그것이 지나가게 하였다, 그리고 성채,
울타리 있는 성읍들이 돌무더기로 황폐되어 뉘여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주민들,
힘이 약한 바, 어쩔줄 몰라하고 수치를 당할 것이다; 그들은 들판의 풀로, 풀잎의
푸른 것으로, 지붕의 풀로 만들어졌다. 그리고 들판은 곡식이 서있기 전에 바싹
말리울 것이다 (이. 37:26-27).
위 구절은 “들판의 풀”, “풀잎의 푸른 것”, “지붕의 풀”, “바싹 말라진 들판”을 수단으로 의미된 것을 설명하고 있다; 그 이유가 여기서 취급된 주제가 홍수 전의 때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오래 전”, “옛적의 날들”에 의해 뜻해져 있다.

19절. 네가 지면으로 되돌아 갈 때까지 너는 네 얼굴의 땀에서 빵을 먹을 것이다. 그 이유가 너는 먼지인 바 먼지로 되돌아 가야 하기 때문이다.
“얼굴의 땀 속에서 빵을 먹는다”란 천적인 것을 싫어하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가 취해졌던 지면으로 되돌아 감”이란 거듭나기 전의 상태인 외적 인간으로 거슬러 되돌아 감을, “너는 먼지이니 먼지로 되돌아 가라”란 그는 죄있는 바 지옥이다.

“얼굴의 땀에서 빵을 먹는 것”이 천적인 것을 싫어함을 의미하는 것은 “빵”의 의미로부터 분명해진다. “빵”을 수단으로 영적인 모든 것과 천적인 모든 것이 뜻해진다. 이 둘은 천사들의 식량이다. 인간들에게서 빵이 결핍될 때와 같이 이것들이 천사들로부터 결핍되면 그들은 사는 것이 중단되고 만다. 천국에 있는 천적이고 영적인 것은 땅에 있는 빵과 상응한다는 것은 말씀의 많은 구절로부터 보여진다. 주님이 “빵”이시다는 것, 그 이유가 그분으로부터 천적이고 영적인 것은 무엇이든 진행되기 때문인데, 이를 그분 자신께서 요한복음서에서 가르치신다:
이것은 천국으로부터 내려오는 빵이다; 이 빵을 먹는 자는 영원히 살 것이다 (요. 6:58).
그러므로 빵과 포도주는 성찬에서 상징물로 채용되고 있다. 또한 이런 천적인 것이 만나에 의해 표현되어져 있다. 천적, 영적인 것이 천사들의 식량을 구성한다는 것은 주님의 말들로부터 명백해진다:
인간은 빵만에 의해서 살지 않는다, 그러나 하느님의 입으로부터 진행되는
모두 각각의 말을 수단으로 산다 (마. 4:4),
즉, 주님의 생명으로부터, 이 생명으로부터 천적, 영적인 모든 것이 와진다.
홍수 직전 존재했던 태고 교회의 마지막 후손, 여기서 취급된 인간은 (천적, 영적인 것을) 통째로 잃었고, (그 대신) 감각적이고 신체적인 것들 안에 침수되어, 그들은 신앙 속의 진리인 것, 주님이 누구이셨는지, 또는 이 분이 오시어 자기들을 구해주신다는 것, 등등에 관해서 들어보는 것조차 더 이상 반가워하지 않았다. 이런 주제들이 (그들 앞에) 꺼내질 때, 그들은 비켜 뒤돌아섰다. 이런 (지독한) 싫음이 “얼굴의 땀에서 빵을 먹는 것”으로 묘사되고 있다. 유대인들, 그들이 천국의 것들이 존재함을 인정하지 않고, 세상적 메시아만을 갈구한 결과, 만나를 두고 싫어함을 느낄 수 밖에 없었다. 그 이유는 만나가 주님을 표현했기 때문, 하여 그들은 그것을 “천한 빵”이라 불렀는데, 이것 때문에 불뱀이 그들에게 보내졌다 (민. 21:5,6). 더 나아가 천국의 것들을 역경과 고난의 그들의 상태에서 그들에게 나누어주셨다. 이 천국의 것들은 그들이 눈물 안에 있을 때, 그들에 의해 “역경의 빵”, “고난의 빵”, 그리고 “눈물의 빵”으로 불리었다. 이 구절에서, 싫어함과 함께 받아진 천국의 것이 “얼굴의 땀 속의 빵”이라 불리운다.

지금 말해진 것들은 내적 의미이다. 그러나 글자에보다 밀접해 있기를 고집하는 자라면, 그는 이를 두고, 인간은 그의 얼굴의 땀을 수단으로, 또는 노동을 수단으로 지면으로부터 자신을 위해 빵을 획득해야 한다 라고 이해한다. 그러나 어쨌든, 여기서 “인간”은 어떤 인간이 아닌 태고 교회를 뜻한다; “지면”은 지면을 뜻하지 않는다. “빵”은 빵을 뜻하지 않는다. “동산”은 동산을 뜻하지 않는다. 그러나 천적인 것과 영적인 것들을 뜻하는데, 이에 대한 것은 누누이 설명했다.

“네가 취해진 것인 지면으로 되돌아 감”을 수단으로 교회가 거듭남 이전과 같은 외적 인간으로 되돌아갈 것임이 의미되어지는 것은 “지면”이 외적 인간을 의미한다는 것으로 분명해진다. 그리고 “먼지”는 정죄된 것과 지옥의 것을 의미한다는 것 또한 뱀을 말했을 때의 대목으로부터 분명해진다. 이미 살핀 먼지에 대한 내용에 다윗서로부터의 다음 인용구절을 추가해 보자:
먼지된 자로 내려가는 모든 이들, 그리고 자기들의 혼을 살아있게 못할 자도
여호와 앞에서 절한다 (시. 22:29).
당신은 당신의 얼굴을 숨기신다, 그들이 근심한다; 당신께서 그들의 숨을 가져가신다.
그들은 종료된다. 그리고 그들의 먼지로 되돌아 간다 (시. 104:29),

위 구절들을 시리즈로 취합하면, 감각적 부분이 천적 평면으로부터 그 자체를 비켜서게 했다는 것 (14절); 주님께서는 그것들을(천적인 것과 감각적 부분들을) 다시 결합되게 하실 목적으로 세상에 오실 것(15절); 외적 인간이 그 자체를 비켜서게 한 결과 전투가 발생했다는 것(16절); 이로부터 재난이 발생했다는 것(17절); 정죄됨(18절); 마침내 지옥이다는 것(19절). 이런 것들이 홍수 쪽으로 내려가는 넷째 후손으로부터 그 교회 안에서 연속적으로 있어진 것이다.

20절. 그리고 사람은 그의 아내의 이름을 이브라 불렀는데 그 이유는 그녀가 모든 생명있는 것의 어머니였기 때문이다.
이 구절의 “사람(homo)”은 태고 교회의 사람, 또는 천적 인간을 뜻하고 있다. 그리고 그의 “아내”와 “모든 생명있는 것의 어머니”는 교회를 뜻한다. 그녀는 “어머니”라 불리는데 그녀가 첫 번째 교회이기 때문이다; 더불어 이 교회는 생명 자체이신 주님에 관한 신앙을 소유하기에 “생명있다”이다.

“사람”이 태고 교회의 인간, 또는 천적 인간을 뜻하는 것은 이미 살폈다; 동시에 살폈던 것은, 주님만이 사람이시다는 것, 그리고 그분으로 모두 각각의 천적 인간도 사람이다는 것, 그 이유는 천적 인간은 그분의 모습 안에 있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이 교회의 모두 각각의 교인은 어떤 예외나 구분됨 없이, “사람”이라 불렸다. 그러나 이 이름은 짐승과 구별하기 위해, 사람으로 나타난 신체를 지닌 누구에게나 응용되고 말았다.

“아내”를 수단으로 교회가, 보편적 의미에서는 천국 안과 땅 위의 주님의 왕국이 뜻해진다는 것은 이미 살폈다; 그리고 이로부터 “어머니”에 의해서도 같은 뜻이 있다. 말씀에서 교회가 “어머니”라 불리는데, 이사야서를 보자:
어디에 네 어머니의 이혼 증서가 있느냐? (이. 50:1).
예레미야서에서:
네 어머니는 크게 부끄러워했다; 너를 낳은 그녀가 수치심으로 뒤덮혀 있다 (예. 50:12).
에스겔서에서:
너는 그녀의 남자와 그녀의 아들을 싫어한 네 어머니의 딸이다;
너의 어머니는 헷족이었다, 그리고 너의 아버지는 아모리 족이었다 (겔. 16:45).
위 구절에서, “남자”는 주님과 천적인 모든 것; “아들들”은 신앙 속의 진리들; “헷족”은 거짓인 것; 그리고 “아모리족”은 악인 것을 표시한다. 같은 예언서에서:
네 어머니는 네 모습에서 물가에 심어진 포도나무 같다;
그녀는 많은 물들 때문에 잎이 풍성하고 열매가 많다 (겔. 19:10).
여기서 “어머니”는 고대 교회를 표시한다. “어머니”라는 말 표현은 태고 교회를 위해서는 더 특별하게 적용할 수 있는데, 그 이유는 이 교회가 첫 교회이기 때문, 그리고 여느 다른 교회보다 주님에 의해 더 사랑된 교회이다.

그녀가 생명 자체이신 주님에 대한 신앙을 소유했던 결과로 “살아있는 모든 것의 어머니”라 불리운 것도 이미 살핀 바 있다. 한 개의 생명 그 외에 더 생명이 있을 수는 없다. 이 하나의 생명으로부터 모든 것의 생명이 있다. 그리고 생명이신 주님에 대한 신앙이 아니면 생명있는 생명은 있을 수 없다. 그리고 그분으로부터가 아니면 생명있는 신앙은 있어질 수 없다. 결과적으로 그분은 신앙 안에 계신다. 이러하기에, 말씀에서 주님만이 “살아계시다(living)”, 그리고 “살아계신 여호와”라 이름불러지신다 (예. 5:2; 12:16; 16:14, 15; 23:7; 겔. 5:11); “영원히 사시는 분” (단. 4:34; 계. 4:10; 5:14; 10:6); “생명의 원천” (시. 36:9); “살아있는 물들의 원천” (예. 17:13). (그분으로, 그분에 의해 사는) 천국이 “살아있는 자의 토지”라 불리운다 (이. 38:11; 53:8; 겔. 26:20; 32:23-27, 32; 시. 27:13; 52:5; 142:5). 그리고 주님에 대한 신앙 안에 있는 이들이 “살아있는 자”라 불리는데, 다윗서에서:
우리의 혼을 살아있는 자 사이에 놓는 분 (시. 66:9).
그리고 신앙을 소유한 이들이 “생명들의 책 안에” 있다 라고 말해진다 (시. 69:28), 그리고 “생명의 책에서” (계. 13:8; 17:8; 20:15). 그러므로 그분에 대한 신앙을 받는 이들은 “살아있게 만들어짐” 이라고 말해진다 (호. 6:2; 시. 85:6). 그 반면, 신앙 안에 있지 않은 이들이 “죽은(dead)”이라고 불려진다; 이사야서에서:
죽은 자는 살아있지 않을 것이다; 르비딤은 다시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 이유는 당신이 방문하시어 그들을 파괴하셨기 때문이다 (이. 26:14),
이는 자기를 사랑함을 가지고 부풀려진 이들을 뜻하고 있다; “다시 일어 나는 것”은 생명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의미한다. 그들은 “찔렀다(piersed)” 라고도 말해진다 (겔. 32:23-26, 28-31). 그들은 또한 주님에 의해 ”죽은(dead)”이라고 말해진다 (마. 4:16; 요. 5:25; 8:21, 24, 51, 52). 지옥 역시 “죽음”이라 불려진다 (이. 25:8; 28:15).

이 절에서 그녀의 젊은 시절인 꽃 안에 있는 때, 첫 때가 묘사되는데, 천국의 결혼을 표현한다. 이러기에 그녀는 결혼을 수단으로 묘사되어지고, “생명”을 뜻한 단어인 “이브(Eve)”라 불리워진다..

21절. 그리고 여호와 하느님께서는 사람(homo)과 그의 아내를 위해 가죽 코트(coat, 옷)를 만드셨고, 그들을 옷입혔다.
이 말들은 주님께서 그들을 영적 선과 자연적 선 안에서 가르치셨음을 의미한다; 그분이 그들을 가르치심이 “만드심”과 “옷을 입힘”에 의해 표현되어져 있다. 그리고 영적 선과 자연적 선이 “가죽 옷”에 의해 의미되었다.

이런 것들의 의미는 글자로부터는 결코 나타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여기에 어떤보다 깊은 의미가 들어 있음은 분명해진다. 그 이유가 여호와 하느님께서 그들을 위해 가죽 옷을 만드시지 않았다는 것은 누구나 익히 알 것이기 때문이다.

“가죽 옷”이 영적 선과 자연적 선을 의미하는 것은 내적 의미로부터 밝히 알려주심과 말씀의 이와 비슷하게 표현된 여러 구절들을 비교함이 아니면 누구도 분명해지지 않는다. 일반적 말투인 “가죽(skin)”이 여기서 사용된다. 그러나 이것은 염소 새끼, 양, 또는 숫양의 피부(가죽)이라고 이해된다. 이 동물들은 말씀에서 선, 선행(charity)에 애착함들을 의미한다. 그리고 선행으로부터 있는 것이 제물로 사용된 양을 수단으로 의미되어진다. 선행의 선, 즉 영적 선과 자연적 선이 수여된 이들이 “양” 이라 불리워진다. 이로부터 주님은 “양의 목자”라 불리워진다. 그리고 선행이 수여된 이들이 “그분의 양”이라 불리우는 것은 누구나 알 것이다.

그들을 “가죽 옷으로 입히셨다”라고 말해진 이유는 태고인들은 그들의 순진 때문에 벌거벗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이 자기들의 순진을 잃었을 때, 그들은 자기들이 악 안에 있다는 것을 자각했다. 이것 역시 “벌거벗었음”이라 불리워진다. 모든 것들은 (태고인들의 말하는 방법에 일치하여) 역사적으로 밀착되게 나타나는 바, 여기서 “그들이 벗고 있지 않도록 옷입히셨다”, 또는 악 안에 있지 않도록 옷입히셨다. 그들이 영적 선과 자연적 선 안에 있음은 제1-13절에서 그들에 관해 주목했을 때, 그리고 여기서 “여호와 하느님께서는 가죽 옷을 만드셨고, 그들을 옷입히셨다”에 관련 된 것으로부터 분명해진다; 그 이유가 여기서는 이와 같은 선이 수여된 이들, 즉 교회의 첫 후손-더 정확히는 둘째와 셋째 후손을 취급하기 때문이다.

새끼 염소들, 양, 염소들, 그리고 숫양들의 가죽이 영적 선들과 자연적 선들을 의미하는 것은 야곱이 취급된 말씀, 그리고 궤가 취급된 말씀의 내적 의미로부터 분명해진다. 야곱의 경우가 이렇게 말해진다: 그는 “에서의 의복을 입었다”. 그리고 벌거벗겨진(매끈한) 상태의 그의 손과 목은 “염소들의 새끼의 가죽으로” (덮혀졌다). 그리고 이삭이 그것들을 냄새 맡을 때, 그는 말했다, “내 아들의 냄새는 들판의 냄새 같다”(창. 27:15, 16, 27). 이 가죽들이 영적 선과 자연적 선 이다는 것은 주님의 신성한 자비로부터 이 장소에서 보여질 것이다. 궤에 관련하여서는 이렇게 말해졌다. 천막의 덮개는 “숫양의 가죽들과 오소리의 가죽들로부터” 였다 (출. 26:14; 36:29). 그리고 그들이 전진할 때, 아론과 그의 아들들은 궤를 “오소리의 가죽으로부터의” 덮개로 덮었다, 마찬가지로 탁자와 그릇들, 촛대와 그 기구들, 금 제단, 그리고 섬김의 기구들과 제단의 기구들도 덮었다 (민. 4:6-14). 주님의 자비하심으로부터 이 장소에서 보여진 바, 이 가죽들은 영적 선과 자연적 선을 의미한다는 것, 그 이유는 궤, 성막, 천막, 거룩함으로 옷입은 때 아론 위에 있던 것은 무엇이든 천적인 것과 영적인 것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하여 그것들에는 제 아무리 소소한 것이라 해도 표현성을 지니지 않은 것은 없었다.

천적 선은 옷입혀지지 않는다, 그 이유는 그것은 가장 깊은데 있고 순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천적으로부터의 영적 선(celestisl spiritual good, 영계의 선)이 먼저 옷입혀지고, 그 다음 자연적 선(자연계의 선)이 옷입혀진다. 그 이유가 이들은 더 외적 선이다. 이런 이유로 이것들은 “옷”에 비교되고 “옷”이라 불리운다; 고대 교회에 관해 말하는 에스겔서에서:
나는 너를 수를 놓은 (옷으로) 입히고, 오소리(가죽으로) 신겼다,
나는 너를 고운 아마포로 띠를 둘렀다. 그리고 나는 너를 비단으로 덮었다 (겔. 16:10).
이사야서에서:
네 아름다운 의복을 입어라, 오 예루살렘, 거룩함의 성이여 (이. 52:1).
계시록서에서:
자기들의 의복을 더럽히지 않은 자, 그들은 흰(옷)을 입고 나와 함께 걸을 것이다.
그 이유가 그들은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계. 3:4-5),
위 계시록에서 24 원로들이 “흰 의복을 입었다”라고 말해진다 (계. 4:4). 고로 더 외적인 선들, 이것들이 천적으로부터의 영적, 그리고 자연적 선인데, “의복들”이다; 그러므로 선행으로부터의 선이 수여된 이들은 천국에서 빛나는 옷을 입는다; 그러나 여기
서, 아직 육체에서 이기 때문에, “가죽옷”으로 입혀졌다.

22절. 그리고 여호와 하느님께서 말하시기를, 보라 사람이 선과 악을 앎에서 우리 중의 하나 같이 되었다. 그리고 이제 그가 손을 내밀어 생명들의 나무로부터 역시 가져 가서 먹고 영생하지 않도록 하리라.
이 구절 처음의 “여호와 하느님”은 단수로 언급되지만 후반부에서는 “우리”라 하여 복수로 언급된 이유는 단수로 표현된 “여호와 하느님”은 주님을 의미하고 동시에 복수 즉 “우리”로 표현된 “여호와 하느님”은 천사들의 천국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사람이 선과 악을 앎”이란 그가 천적인 수준에 이른 것, 즉 슬기롭고 총명해진 것을 의미한다. “그가 손을 내밀어 생명들의 나무로부터 또한 가져 가지 않도록”이란 그는 신앙의 신비에 관해 정통해져서는 절대 안됨을 뜻한다. 그 이유가 “영원히 사는” 것, 즉 그는 결코 구원될 수 없기 때문이다.

여기 두 신비가 있다: 첫째로, “여호와 하느님”은 주님을, 그리고 동시에 천국을 의미한다; 둘째로, 그들이 신앙의 신비에 정통해졌다면, 그들은 영원히 멸해지리라는 것이다.

첫 번째 신비에 관한 것: “여호와 하느님”을 수단으로 주님과 천국이 동시에 뜻해진다. 말씀에서, 비밀한 이유 때문에 언제나, 주님은 때로 단지 “여호와”, 때로 “여호와 하느님”, 때로 “여호와” 그리고 그 다음 “하느님”, 때로 “주 여호비”, 때로 “이스라엘의 하느님”, 때로 “하느님”만으로 불리신다. 하여 창세기의 첫 장에서, 또한 말해지는 바, “우리가 우리의 형상에서 사람을 만들자”이어서 복수 형태이다. 그분은 “하느님”만으로 불리신다, 즉 다음 장, 천적 인간이 취급되는 대목까지 “여호와 하느님”이라 불리시지 않는다. 그 다음 그분이 “여호와”라 불리시는 이유는 그분만이 본질로부터 존재, 또는 살아계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느님”이라 불리시는 이유는 그분은 모든 것을 하실 수 있기 때문에, 권능으로부터 하시기 때문이다. 이런 구분이 만들어지는 것은 말씀으로부터 분명해진다 (이. 49:4, 5; 55:7; 시. 18:2, 28, 29, 31; 31:14). 이렇기 때문에 사람과 더불어 이야기한 모두 각각의 천사나 영, 그리고 어떤 권능을 소유했다고 가정되는 모두 각각의 천사나 영이 “하느님”으로 불리운다 다윗서를 보자:
하느님은 하느님의 회중 안에 서 있으셨다,
그분은 신들의 한 가운데에서 심판하실 것이다 (시. 82:1);
누가 하늘(sky)에서 여호와에게 비교되겠느냐?
누가 신들의 아들들 사이에서 여호와와 비슷할 것이냐? (시. 89:6)
너는 신들(gods)의 하느님(God)에게 고백하라,
너는 주들(lords)의 주님(Lord)에게 고백하라 (시. 136:2-3).
인간들 역시 능력을 소유한 경우 “신들”이라 불리운다 (시. 82:6; 요. 10:34, 35). 모세 역시 “바로에게 신”이라고 말해진다 (출. 7:1). 이런 이유 때문에 히브리어에서의 “하느님”은 복수인 “엘로힘(Elohim)”이다. 그러나 천사들이 인정하는 바는, 자기들은 미미한 권능도 자신들로부터는 소유하지 않고 오직 주님으로부터서만, 그리고 한분 하느님 밖에 계시지 않는 바, 말씀에서 “여호와 하느님”을 수단으로 주님만이 뜻해진다. 그러나 창세기 첫 장에서와 같이 어떤 것이 천사들의 섬김(minitry)을 수단으로 결과되어지는 곳에서 그분은 복수 숫자에서 말해지신다. 여기서 역시 천적 인간은, 인간 범주에서인 바, 주님과 비교함에 놓여질 수 없었고, 오직 천사들로만 인 바, 사람이 “선과 악을 앎에 우리 중의 하나 같이 되었다”라고, 즉 슬기롭고 총명해지게 되었다고 말해진다.

둘째 신비는 그들이 신앙의 비밀들에 정통해졌다면, 그들은 영원히 멸해지고야 만다는 것에 대해서이다. 이것이 “지금 그가 자기 손을 내밀어, 생명들의 나무로부터 취해서, 먹고, 영원히 살지 않도록”아라는 말들에 의해 의미되어져 있다. 이 경우는 이러하다: 인간들이 생명의 질서들을 역으로 향하게 하였을 때, 그리고 (생명의 질서들에 따라) 사는 것이 반갑지 않을 때, 또는 자신들로부터와 그들의 자기 자신으로부터가 아니면 슬기로워지고 싶지 않을 때, 그들은 자기들이 들었던 신앙에 관한 모든 것이 과연 그러한지, 또는 아닌지를 추론한다; 그리고 그들이 이 추론을 감각과 기억 속의 지식 속의 자신들로부터와 그들의 자기 자신으로부터 시작할 때, 이 추론은 반드시 부정함 쪽으로, 결과적으로 성령모독과 모독함 쪽으로 결론을 맺고야 만다. 마침내 그들은 거룩한 것에 모독된 것을 혼합하는 것도 망설이지 않는다. 인간이 이렇게 되어갈 때, 그는 저쪽 삶에서 정죄되므로 구원의 다른 희망이 남아있지 않다. 그 이유가 모독을 수단으로 혼합된 것들은 혼합된 채로 남아있어, 거룩한 것에 대한 어떤 생각이 그 자체를 표출할 때면 언제나 거룩한 그것과 결합된 모독된 어떤 것에 대한 생각 역시 거기에 같이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인물은 지옥에 떨어진 자 외에 어떤 (천국)사회 안에 있어질 수 없는 이유는 다른 삶에서 극도로 절묘하게 지각되어지는데, 영들의 세계에 있는 영들에 의해, 그리고 천사들의 세계에 있는 영들에 의해서는 더욱 더 절묘하게 지각된다. 그렇게 천사들은 단 하나의 생각을 수단으로도 인물의 품성을 파악한다. 결합된 모독과 거룩한 것의 분리는 지옥의 고통 같은 것을 수단으로 하지 않으면 결과될 수 없는 바, 이를 알아챈 사람이라면, 그가 지옥 자체를 피하고 싶어하는 만큼, 모독하는 것도 피하려 할 것이다.

신앙의 비밀들이 유대인들에게 결코 밝혀지지 않은 이유는 이러하다. 그들은 사후 산다는 것, 주님이 그들을 구원하시려 오시리라는 것조차도 믿지 않았다. 이런 대단한 무지와 우둔함을 그들은 고수했고, 계속 고수했는 바, 그들은 내적 인간의 존재, 또는 내적인 어떤 것의 존재를 알지 못했고 알고 있지 않다. 만일 그들이 그것을 인정하기 위해 알고 있어왔고 지금 그것을 알고 있다면, 그것을 모독하고야 마는 품성을 그들은 지니고 있었다. 그러면 다른 삶에서 그들을 구원하는 희망은 있지 않게 된다. 이것이 요한복음서에서 주님에 의해 뜻해져 있다:
그분은 그들의 눈을 멀게 하셨고, 그들의 심정을 단단해지게 하셨다;
하여 그들은 [그들의] 눈을 가지고 보지 못하게, [그들의] 심정을 가지고 이해하지 못하게, 전환되지 (않게), 내가 그들을 치료하지 (않게) (요. 12:40).
그리고 비유가 별도의 설명없이 주님에 의해 그들에게 말해진 이유이다:
그들이 보는데 보지 못하고; 그리고 그들이 듣는데 듣지 못하고,
그들이 이해 못하게 (하시려 해서) 때문이다 (마. 13:13).
같은 이유 때문에 신앙의 모든 비밀들은 그들로부터 감추어져 있고, 그들의 교회 속의 표현물 아래 숨겨졌다. 같은 이유로 예언적 스타일(style)도 이와 같은 특성으로부터 있다. 어쨌든 아는 것과 인정하는 것 두 가지가 있다. 아는데 인정하지 않는 것은 마치 그가 모르는 듯하다; 그러나 인정하고, 후에 성령모독과 모독하는 이들이 있는데, (위의) 주님의 말들에 의해 뜻해져 있다.

인간은 자기가 설득되어진 모든 것들을 수단으로 생명을 획득한다, 즉, 그가 인정하고 믿는 것을 수단으로 생명을 획득한다. 그가 설득되지 않은 것, 또는 인정하지 않고 믿지 않는 것으로부터서는 그의 마음이 영향을 받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가 설득되어져, 인정하고, 그것들을 부정하지 않으면, 아무도 거룩한 것을 모독할 수 없다. 인정하지 않는 이들은 알고는 있을런지 모르나, 그들은 마치 알지 못한 것처럼 있다. 그리고 존재를 가지지 않은 것들을 알고 있는 이들과 같다. 이것이 주님의 강림 시기의 유대인들의 경우이다. 그래서 그들은 말씀에서 “황폐됨(vastated)”, “황폐해져 있음(laid waste)”. 즉 어떤 신앙도 더 이상 가지지 않고 있다 라고 말해진다. 이런 상황에서는 그들이 열린 말씀의 내면의 목차들을 가지고 있다 해도 그들을 다치게는 하지 않는다. 그 이유가 그들은 어떤 인물을 보고 있음, 여전히 보지 못함; 들음, 여전히 듣지 못함이기 때문; 이들의 심정은 막혀 있다; 이들에 관해서 주님께서 이사야서에서 말하신다:
가서 이 백성에게 말하라, 너희는 듣기는 하나, 깨닫지 못한다, 그리고 보기는 하나,
알지 못한다. 이 백성의 심장을 살찌게 만들어라, 그리고 그들의 귀를 무겁게 만들어라,
그리고 그들의 눈을 흐려지게 하라, 하여 그들이 자기들의 눈으로 보지 않도록,
그들의 귀로 듣지 않도록, 그들의 심정으로 깨닫지 않도록, 그리고 전환이 있어
그들이 치료되지 않도록 하라 (이. 6:9-10).
신앙에 관한 비밀들은 인간이 지독하게 황폐되어 더 이상 믿지 않는 상태 안에 있을 때까지 밝히 알려지지 않는다는 것이 주님에 의해 같은 예언서의 뒤이어지는 구절에서 명백하게 선포하신다:
그때 내가 말했다. 주여, 얼마나 오래? 그리고 그가 말하셨다, 성들이 황무해져,
거주민들이 없을 때까지; 그리고 집들에는 사람이 있지 않을 때까지, 그리고
지면이 지독하게 황폐되어질 때까지, 그리고 여호와께서 사람을 옮기실 때까지 (이. 6:12).
그분이 슬기있는, 또는 인정하고 믿는 “사람”이라 불리신다. 이미 말했듯, 유대인들은 주님의 강림 시기에 황폐된 상태였다. 같은 이유에서 유대인들은 그들의 탐욕들을 수단으로, 특히 그들의 허욕(avarice)을 수단으로 계속 그들의 품성이 지속되었는 바, 그들은 수 천 번 주님으로부터 듣더라도, 그들의 교회 속의 표현물들이 각각의 세부 사항에서 그분에 관한 것을 의미하고 있다 해도, 그들은 여전히 아무 것도 믿지 않고 인정도 하지 않았다. 이것은 대홍수 이전 사람들이 에덴의 동산 밖으로 내쫓긴 이유, 그리고 그들이 어떤 진리도 더 이상 인정할 수 없는 때까지 황폐된 이유이다.

이 모두로부터 “그가 손을 내밀어, 생명들의 나무로부터 취해서 먹고, 영원히 살지 않도록”이라는 말들에 의해 뜻해진 것이 분명해진다. “생명들의 나무로부터 가져가서 먹는 것”은 사랑과 신앙으로부터 있는 것은 무엇이든 인정할 수 있도록 아는 것이다; 그 이유가 생명이 복수로 있는 경우, 즉 “생명들(lives)”은 사랑과 신앙을 표시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먹는 것”은 전과 같이 여기서도 아는 것이다. “영원히 사는 것”은 사후 지옥에 떨어져 영원히 사는 것이다. “죽어있는(dead)” 사람이라 말해진 것은 그가 육체의 생명이 죽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죽음의 삶을 살 것이기 때문에서 이다. 그 이유가 “죽음(death)”은 지옥에 떨어짐과 지옥이기 때문이다. 표현, “산다”가 에스겔서에서도 본문과 비슷하게 사용되고 있다:
너희는 내 백성을 위해서는 혼들을 사냥하고, 네 자신들을 위해서는 살아있게
보존한다, 그리고 너희는 죽이지 않아야 하는 혼들을 죽이고, 살아있지 않아야 할
혼들을 살아있게 만들므로 내 백성 사이에서 나를 모독했다 (겔. 13:18-19).

23절. 그러므로 여호와 하느님께서는 그를 에덴의 동산으로부터 내보내어 그가 있어지게 했던 지면을 경작하게 하셨다.
“에덴의 동산에서 내보냄”이란 모든 총명과 지혜가 박탈되는 것이다. “그가 있어지게한 지면을 경작함”이란 거듭나기 전의 상태인 육체의 상태가 되는 것이다.
“에덴의 동산으로부터 내보내”지는 것이 모든 총명과 지혜가 박탈되어지는 것임은 상술했던 바와 같이 “동산”, “에덴”의 의미로부터 분명해진다; 그 이유가 “동산”은 총명, 또는 진리를 이해함을 의미하고, 사랑을 의미하는 “에덴”은 지혜, 또는 선을 뜻함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가 있어지게 한 지면을 경작함”은 그가 거듭남 전에 있던 것 같은 상태인 육체적으로 되어감을 의미함은 19절에서 이미 상술했다.

24절. 그래서 그분은 사람을 쫓아내셨다. 그리고 그분은 그룹들이 동쪽으로부터 에덴의 동산을 향하여 살게 만드셨고, 그 자체 회전하는 검의 불꽃이 생명들의 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셨다.
“사람을 쫓아내는 것”은 선에 관한 모든 의지와 진리에 관련된 모든 이해를 깡그리 박탈하는 것인 바 그는 박탈된 만큼에서 선과 진리로부터 분리되어 있다. 따라서 그는 더 이상 사람이 아니다. “그룹들이 동쪽으로부터 살게 만드심”이란 그가 신앙의 비밀스런 어떤 것에 들어감을 금하는 것이다. 그 이유가 “에덴의 동산을 향한 동쪽”은 천적인 것, 그리고 이것으로부터의 총명이기 때문이다. “그룹들”은 인간이 신앙에 관한 것들에 들어가려 하는 것을 방지하시려는 주님의 섭리를 의미한다. “스스로 회전하는 검의 불꽃”이란 신앙의 신비에 진입하기를 원할 정도로 미친듯한 탐욕과 설득력을 지닌 자기-사랑을 의미하는데, 이것들은 육체와 지상에 속한 것에 도취되고 만다. 이렇게 되어지는 이유는 “생명들의 나무의 길을 지키는” 목적, 즉 거룩한 것들을 모독함을 예방해 주시려는 목적 때문에서 이다.

여기서는 여섯째와 일곱째 후손들이 취급된다, 이들은 홍수를 수단으로 멸해졌다, 그리고 “에덴의 동산 밖으로 내쫓긴”, 즉 진리에 대한 모든 이해함이 박탈되어졌다. 그리고 그들의 사악한 탐욕들과 설득력만 그들에게 남아서, 그들은 마치 사람이 아닌듯 되었다.

“동쪽”과 “에덴의 동산”의 의미는 위에서 주어졌는 바, 더 상술함은 필요 없을 것 같다; 그러나 “그룹들(cherubim)”은 인간이 그의 자기 자신으로부터, 그리고 그의 기억 속의 지식으로부터 있는 것으로부터 신앙에 관한 비밀들에 사악하게 들어가서, 그것들을 모독하여 자신을 파멸에로 치닫지않도록 하시려는 주님의 섭리를 표시하고 있다는 것은 이 그룹들이 언급되는 모든 구절들로부터 분명해진다. 유대인들은 만일 그들이 주님의 오심에 관하여, 교회의 모형, 내지 표현물이 그분에 관한 것을 의미함에 관하여, 사후 삶에 관하여, 내면의 인간과 말씀의 내적 의미에 관하여 명확한 지식들을 소유했다면, 그들은 그것들을 모독하고야 말아, 영원히 멸해지고 마는 품질의 소유자들 이었다; 그러므로 이것이 궤 위쪽 자비석 위의 그룹들, 성막의 휘장 위에, 베일 위에, 성전 안에서, 그룹에 의해 표현되어졌다; 그리고 주님께서 그것들을 간수하심에서도 의미되었다 (출.25:18-21; 26:1, 31; 왕상. 6:23-29, 32). 그 이유가 증거를 안에 담은 궤는 이 구절에 있는 생명들의 나무와 동일했기 때문이다. 즉 주님과 주님에게만 속한 천적인 것을 의미했다. 이로부터 주님은 “그룹에 앉아 계신 이스라엘의 하느님”이라고도 자주 불리우셨다. 그리고 이로부터 주님은 “그룹사이에서” 모세와 아론에게 말하셨다 (출. 25:22; 민. 7:89). 또한 에스겔서에서 명백하게 묘사되어 있다:
이스라엘의 하느님의 영광이 그분이 계셨던 그룹 위로부터 집의 문지방 쪽으로
들어 올려졌다. 그리고 그분은 아마포로 옷입은 사람을 불러, 그에게 말하셨다,
성 한 가운데를 통과하여, 예루살렘의 한 가운데를 통과하여 가라, 그리고
거기로부터 행해진 모든 역겨움 때문에 울며 탄식하는 사람들의 머리 위에
표를 놓아라. 그리고 그분은 다른 사람들에게 말하셨다, 너희는 그를 따라
성을 통과하여 가며, 쳐죽여라; 네 눈이 남은 것을 보게 말라, 너는 동정심을
가지지 말라; 노인, 젊은이, 그리고 처녀, 유아, 그리고 여인들을 섬멸되게 죽여라;
집을 더럽혀라, 그리고 뜰들을 죽은 자로 채워라 (겔. 9:3-7).
그분이 아마포로 옷입은 사람에게 말했다, 그룹 아래쪽 바퀴 사이로 가라,
그리고 그룹들 사이로부터 숯불로 네 손바닥을 채워라, 그리고 그것들을 성에
흩뿌려라; 그룹이 그의 손을 그룹들 사이로부터 그룹들 사이에 있는 불에게 내밀었다,
그리고 그것을 아마포로 옷입은 사람의 손바닥에 놓았다,
그는 그것을 가지고 밖으로 나갔다 (겔. 10:2, 7).
위 구절로부터도 신앙의 비밀들 안으로 들어감에서 인간들을 방지해주시는 주님의 섭리가 “그룹들”에 의해 의미되고 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이 그들의 사악한 탐욕들에 남겨졌다는 것이 “성에 흩뿌린 불”에 의해, 그리고 “누구도 남겨두지 말라”에 의해 의미되어져 있다.

“자체를 회전하는 검의 불꽃”은 사악한 탐욕들과 설득들을 가진 자기-사랑, 이것이 [신앙의 비밀들 안으로] 진입하기를 바라나, (오히려) 육체적이고 지상의 것들 쪽으로 휩쓸려버리고 만다가 의미되어 있다는 것은 말씀의 많은 구절로부터 확증 가능하나 (대표적으로) 에스겔서만을 발췌해 본다:
예언하여 말하라, 고로 여호와께서 말하신다, 검에게 말하라, 검아, 그것은 날이
선 검이다, 또한 극도의 살육을 만들려고 광을 낸 검이다; 그것의 날카로운 것은
번개같이 있을런지 모른다. 그 검이 그의 죽임의 검으로 세 번씩 두 번을 죽이게 하라;
큰 살육의 검, 이것이 그들의 침실 안으로 들어간다, 하여 그들의 가슴이 녹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위법들은 증대되어 있다. 나는 그들의 모든 문들에 검의 공포를 놓았다.
오라! 그것은 번개로서 만들어져 있다 (겔. 21:9-10, 14-15).
여기서 “검(sword)”은 인간이 선하고 참된 것을 하나도 보지 못하고, 오직 거짓들과 반대의 것들만을 보는 인간의 황폐함을 의미함이 “증대하는 위법들”에 의해 표시되어 있다. 신앙의 비밀들 안으로 들어가기를 바라는 이들에 관해서 나훔서에서 말해진다. “말을 탄 기병, 그리고 검의 불꽃, 그리고 창의 번쩍임, 그리고 수 많은 죽은 자” (나. 3:3).

이 절에 있는 각각의 세부적인 표현은 아주 깊은 취지로부터의 많은 비밀들을 포함하고 있는 바 (이 취지는 홍수에 의해 멸해진 사람들의 천성에 적용할 수 있는데, 이 천성은 홍수에 뒤이어 살았던 이들의 천성과는 완전히 다르다), 이 비밀들을 설명해내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여 우리는 간략하게 주목해본다. 그들의 처음 부모들, 즉 태고 교회를 구성한 이들은 천적 인간들이었다. 결과적으로 그들은 자기들 안에 이식된 천적 씨들을 가졌다; 그로부터 그들의 후손들은 자기들 안에 천적 근원으로부터 씨를 가졌다. 천적 근원으로부터의 씨는 사랑이 마음 전체를 통치하고, 그것이 하나를 만든다. 그 이유가 인간의 마음(human mind)은 두 부분들, 즉 의지력과 이해력으로 구성되기 때문이다. 사랑, 또는 선은 의지에 속하고, 신앙, 또는 진리는 이해함에 속한다; 그리고 사랑, 또는 선으로부터 태고인들은 신앙, 또는 진리에 속하는 것을 지각했다. 이렇게 하여 그들의 마음은 하나였다. 이런 인류의 후손과 더불어, 동일한 천적 근원으로부터의 씨가 필연적으로 남는데, 그들의 부분에 있는 진리와 선으로부터 떨어져나감이 어떤 정도이든 그것은 지극히 위험한데, 그들의 전체 마음은 다른 삶에서 회복이 거의 불가능할 만큼 뒤집혀졌다. 이와는 다르게, 천적 씨를 소유하지 않고 영적 씨만을 소유한 자는 다르다. 이들은 홍수 후의 사람들, 오늘날의 사람들에게 해당될 것이다. 이들 안에는 사랑이 없다. 그 결과 선으로부터의 의지가 없다. 그러나 여전히 신앙에 관련된 가능성, 그리고 진리를 이해함이 있다. 이를 수단으로 이들은 선행의 어느 수준까지는 데려와 질 수 있다. 그러나 방법은 다른데, 즉 진리에 관한 지식들과 파생된 선에 바탕을 둔 양심이 주님에 의해 은근히 주입됨을 수단으로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상태는 홍수 이전과는 아주 다른 방법이다. 이 상태에 관하여는 주님의 자비로부터 차후 (살핀다). 이런 것들은 오늘날의 세대에게는 매우 친숙치 못한 신비에 해당된다. 그 이유는 오늘날, 천적 인간이 무엇인지, 영적 인간이 무엇인지조차도, 인간 마음의 품질, 그로부터 결과되는 삶, 사후 삶에 관해 아는 자가 없기 때문이다.

다른 삶에서, 홍수에 의해 멸해진 이들의 상태는 그들이 영들의 세계 안에, 또는 다른 영들과 더불어 있을 수 없는 상태여서, 그들은 다른 사람들의 지옥들과 분리된 어떤 지옥 안에 있다. 그래서 마치 어떤 산 아래 있는 듯하다. 이것은 그들의 끔직한 공상들과 설득들의 결과로 사이에 끼어든 산 같이 나타난다. 그들의 공상들과 설득들은 다른 영들 안에서 심오한 혼미함을 생산하는 바, 그들은 자기들이 살아있는지, 죽은지를 알지 못한다. 그 이유가 그것들은 진리에 대한 모든 이해력을 그들로부터 박탈하여 그들이 아무 것도 지각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설득력은 그들이 세상에 거처를 두었던 동안에도 있었다; 그리고 다른 삶에서 이들은 일종의 죽음 같은 것을 자기들에게 유발하지 않고서는 다른 영들과 연계될 가능성이 없음이 미리 보여졌기 때문에 그들 모두는 사멸되었다. 그리고 주님의 신성한 자비로부터, 그분은 홍수 이후에 산 이들 위에 (홍수 이전 상태와는) 다른 상태들을 유발하셨다.

이 절에서, 이런 홍수 이전의 상태는 충분하게 묘사되어져 있는 셈이다. 즉 그들이 “내쫓겼다”, 또는 천적 선으로부터 분리되었다, 그리고 “그룹들이 동쪽으로부터 에덴을 향하여 놓여졌다”. 이 표현, 즉 “동쪽으로부터 에덴의 동산을 향하여”는 (홍수 이전의) 그들에게만 적용할 수 있는 표현이다. 그리고 이후에 살았던 이들에 관련해서는 사용되어질 수 없다. (이후 살았던) 그들에 관련된 표현이라면, “에덴의 동산으로부터 동쪽을 향하여”라고 표현해야 적절할 것이다. 마찬가지 방식으로, “자체를 회전하는 검의 불꽃”이라는 말의 경우, 오늘날 사람에 적용한다면, “자체 회전하는 불꽃의 검”이어야 할 것이다. “생명들의 나무” 역시 오늘날의 경우라면, “생명 나무”가 적절 할 것이다. 시리즈(series)에는 다른 것을 언급함이 없어 추가 설명은 가능할 수 없으나, 천사들에 의해서는 이해되어진다. 이들에게는 주님께서 그것들을 밝히 알리신다; 그 이유가 모두 각각의 상태는 무한한 비밀들을 포함하는데, 인간들에게 알려진 하나로부터 조차에서도 그러하다.

여기서 첫 인간에 관해서 말해진 것으로부터, 분명해지는 것은, 오늘날 존재하는 모든 유전적 악이 왜곡되어 가상된 것은 그것이 그로부터(첫 인간)으로부터 오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 이유가 “사람”이라는 이름 아래 여기서 취급된 것은 태고 교회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교회가 “아담”이라 불리울 때, 인간이 지면으로부터 있었다는 것, 또는 사람 아님이 주님으로부터 거듭남을 수단으로 그가 사람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이 이름, 사람에 관한 근원과 의미이다. 그러나 유전적 악에 관련하여서는 이러하다. 실제적 죄를 범하는 모든 이는 그 죄에 의해서 자신 안에 본성을 유발시킨다, 그리고 그것으로부터의 악이 그의 자녀 안에 이식되어진다, 그리고 유전되어간다. 고로 모두 각각의 부모로부터, 아버지로부터, 할아버지로부터, 증조부로부터, 그리고 이어지는 그들의 선조들로부터 내려온다. 이렇게되어 악은 내려가는 각 자손에서 늘어나고 증대되어, 각 인물과 더불어 남는다, 그리고 그의 실제적인 악을 수단으로 더 불려진다. 이것은 주님에 의해 거듭나지는 이들 안에서를 제외하면, 해를 주지 않도록 사라지는 일은 결코 없다. 주의 깊은 관찰자라면, 부모의 악한 경향성들이 그들의 자녀들 안에 눈에 보이게도 남는다는 사실에서 이 진리를 수단으로 증거를 볼런지 모른다. 이리하여 한 가족, 그리고 전체 인류조차 이것 때문에 서로서로로부터 구별될런지 모른다.
***************************************************

창세기 제 4 장

성경: 창세기 제 4 장

1. 그리고 사람이 그의 아내 이브를 알았고, 그리고 그녀는 임신했고, 그리고 가인을 낳고, 그리고 말하기를, 나는 남자, 여호와를 얻었다.
2. 그녀는 그의 아우 아벨을 낳아 추가했다. 그리고 아벨은 양떼의 목자였고, 가인은 지면의 경작자였다.
3. 그리고 날들의 끝에서 가인은 여호와께 예물로서 지면의 열매를 가져왔다.
4. 그리고 아벨, 그도 또한 자기 양떼의 맏배와 그로부터의 지방(fat)을 가져왔다. 그 리고 여호와께서는 아벨과 그의 예물을 지켜보셨다.
5. 그러나 가인과 그의 예물을 그분은 지켜보시지 않았다. 그래서 가인의 노염이 극도 로 지펴졌고 그리고 그의 얼굴들은 떨구어졌다.
6. 그리고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말하셨다, 왜 너의 노염이 지펴졌느냐? 그리고 왜 네 얼굴이 (땅으로) 떨어졌느냐?
7. 만일 네가 잘 행동하고 있다면 (얼굴을) 들어 올리지 않겠느냐? 그리고 만일 네가 잘 행동하지 않고 있다면 죄가 문에 드러눕는다. 그리고 너에게 그의 바램이 있다. 그런데 너는 그를 지배한다.
8. 그리고 가인이 그의 형제 아벨에게 말했다. 그리고 세월이 지나 그들이 들판에 있 었을 때, 가인이 그의 형제 아벨을 향하여 일어나 그를 죽였다.
9. 그리고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말하셨다, 네 형제 아벨은 어디에 있느냐? 그리고 그 가 말했다, 나는 모릅니다, 제가 내 형제의 경호인 입니까?
10. 그리고 그분은 말하셨다, 네가 무엇을 저질렀느냐? 네 형제의 피들의 목소리가 지 면으로부터 나에게 소리치고 있다.
11. 그리고 지금 너는 지면으로부터 저주되었다. 지면은 네 손으로부터 네 형제 아벨 의 피들을 받으려고 그 입을 열었다.
12. 네가 지면을 경작할 때 이제부터는 지면이 너에게 지면의 힘을 더해 주지 않을 것이다. 너는 땅에서 도망자와 방랑자 일 것이다.
13. 가인이 여호와께 말하였다. 내 불법이 제거되어 질 수 있기에는 너무 큼니다.
14. 보라 당신께서 나를 지면의 얼굴로부터 오늘 저를 축출하셨고, 그리고 당신의 얼 굴로부터 내가 숨겨졌습니다. 그리고 나는 땅에서 도망자와 방랑자입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 나를 발견하는 사람마다 나를 죽일 것입니다.
15. 여호와께서 그에게 말하셨다, 그러므로 가인을 죽이는 자는 누구에게나 그 앙갚음 이 일곱 배나 있게 되리라. 그리고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표를 놓아 그를 발견하 는 자가 그를 죽이지 못하도록 하셨다.
16. 그리고 가인은 여호와의 얼굴로부터 떠났다, 그리고 에덴의 동쪽을 향하여 놋의 땅에서 거주했다.
17. 그리고 가인이 그의 아내를 알았다, 그리고 그녀는 임신했다, 그리고 에녹을 낳았 다. 그리고 가인은 성을 쌓았는데 그 성의 이름은 그의 아들의 이름을 따라 에녹 이라 불렀다,
18. 그리고 에녹에게서 이랏이 태어났다. 그리고 이랏은 므두야엘을 낳았고, 므두야엘 은 므드사엘을 낳았고, 그리고 므드사엘은 라멕을 낳았다.
19. 그리고 라멕은 두 아내를 취했다. 그 중 한 아내의 이름은 아다였고, 그리고 다른 아내의 이름은 씰라였다.
20. 아다가 야발을 낳았고, 야발은 천막들에 거주하는 자의 조상이었고, 육축의 조상 이었다.
21. 그리고 그의 형제의 이름은 유발이었고, 그는 하프와 오르간을 연주하는 모든 자 의 조상이었다.
22. 그리고 씰라, 그녀는 두발-가인을 낳았고, 놋쇠와 쇠를 다루는 모든 기술공의 선 생이었다. 그리고 두발-가인의 누이는 나아마였다.
23. 그리고 라멕이 그의 아내들, 아다와 씰라에게 말했다, 내 목소리를 들어라, 너희 라멕의 아내들이여, 그리고 너희 귀를 가지고 내 연설을 지각하라. 그 이유는 내 가 나의 부상을 인하여 남자를 죽였고, 내 상처로 인해 어린 것을 살해했기 때문 이다.
24. 만일 가인을 위해 일곱 배의 앙갚음이 있다면, 진실로 라멕을 위해서는 칠십 칠 배의 앙갚음이 있을 것이다.
25. 그리고 사람이 그의 아내를 다시 알았고, 그녀는 아들을 낳았고, 그의 이름을 셋 이라 불렀다. 그 이유는 하느님께서 나에게 아벨 대신 또 다른 씨를 지명하셨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가인이 아벨을 살해했기 때문이다.
26. 그리고 셋에게, 그에게도 역시 아들이 태어났다. 그리고 그는 그의 이름을 에노스 라 불렀다. 그때에 그들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했다.

각 절의 내적 의미

1절. 그리고 사람이 그의 아내 이브를 알았고, 그리고 그녀는 임신했고, 그리고 가인을 낳고, 그리고 말하기를, 나는 여호와(로부터) 남자를 얻었다.
“사람과 그의 아내 이브”는 태고 교회를 의미한다. 이 교회의 첫 자식, 즉 첫 출생은 신앙(faith)이다. 이 신앙이 “가인”이라 불리고 있다. 그녀가 말한 “나는 여호와(로부터) 남자를 얻었다”란 “가인”이라 불리는 이들이 지닌 신앙은 그 자체 (사랑, 선행과) 따로 떨어져있는 것으로 인식되고 그렇게 인정했음을 의미한다.

앞의 세 장들에서 “사람과 그의 아내”를 수단으로 태고 교회가 의미되어졌다는 것은 의심함이 없도록 충분히 보여주었다. 그리하여 살핀 것들에 의심이 없다면, 이 교회에 의해 결과된 임신과 출생도 우리가 말했던 것으로부터 있다고 보여진다. 이름들을 주는 것은 태고 교회의 관례에 해당하는 일이었다. 그리고 이름을 수단으로 무엇인가를 의미했다. 이것이 족보의 틀을 짜는 셈이기도 하다. 교회 속의 것들도 이런 방식에서 서로에 관련되고 있다. 즉 족보에서 같이 이쪽이 임신하고, 또 다른 것을 출생하는 것이다. 이로부터 말씀에서도 교회 속의 것들을 “임신”, “출생”, “자손”, “유아들”, “작은 아이들”, “아들들”, “딸들”, “젊은 사람들”, 등등으로 불리우는 일이 매우 많다. 말씀의 예언적 부분들에는 이런 표현들이 매우 풍부하다.

“나는 여호와(로부터) 남자를 얻었다”라는 말은, “가인”이라 불리는 이들과 더불어 신앙이 따로 떨어져서 있는 것으로 인식되고 인정되었음을 의미한다는 것은 이 장의 시작에서 말해진 것으로부터 분명하다. 본래 그들은 마치 신앙이 무엇인지에 무지한 것처럼 있었다. 그 이유는 그들이 신앙 속의 모든 것을 지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이 신앙을 구분된 교리로 만들기를 시작했을 때, 그들은 자기들이 지각으로부터 가졌던 것을 취해서, 그것들을 교리 안으로 환원해 놓고, 그것을 마치 새로운 어떤 것을 발견하기라도 한 듯, “나는 여호와(로부터) 남자를 얻었다”라고 불렀다; 고로 전에 심정에 새겨졌던 것이 단지 앎의 문제 수준이 되고 말았다. 고대 시대 때에 그들은 새로운 모두 각각의 것에 이름을 주었다. 그리고 이런 방식에서 이름들에 포함된것이 설명되었다. 그래서 이스마엘이라는 이름의 의미는 “여호와께서 그녀의 고뇌를 들으셨다” 말함을 수단으로 설명되어진다 (창. 16:11); 르우벤의 경우, “여호와께서 내 고통을 보셨다”라는 표현을 수단으로 (창. 29:22); 이름 시므온은 “여호와께서 내가 덜 사랑받은 것을 들으셨다”라고 말함을 수단으로 (창. 29:33); 그리고 유다의 경우, “이 때 나는 여호와를 찬양할 것이다”를 수단으로 (창. 29:35); 그리고 모세에 의해 지어진 제단이 “여호와는 내 군기” (출. 17:15)라고 불리었다. 마찬가지 방식에서 신앙의 교리가 여기서 “나는 여호와(로부터) 남자를 얻었다”, 또는 “가인”이라 명명되었다.

2절. 그녀는 그의 아우 아벨을 낳아 추가했다. 그리고 아벨은 양떼의 목자였고, 가인은 지면의 경작자였다.
태고 교회의 두 번째 자식(출생)은 선행(charity)인데 이 선행이 “아벨”, “형제”로 의미되고 있다. “양떼의 목자”란 선행의 선을 실행하는 자를 명시한다. “지면의 경작자”란 선행이 전혀 없는 자이다. 신앙이 사랑으로부터 분리되면 그 분리가 어느 정도이든 그것은 신앙이 아니다.

교회의 두 번째 자식이 선행이다는 것은 교회가 임신하고 낳는 것은 신앙과 선행밖에 더 없다는 사실로부터 분명하다. 똑 같은 의미가 야곱으로부터 레아의 첫 자녀를 수단으로 의미되어진다; “르우벤”은 신앙을 표시하고 있다; “시므온”은 행동에 있는 신앙을; 그리고 “레위”는 선행을 표시한다 (창. 29:32, 33, 34). 그러므로 레위 지파는 성직 직분을 받았고, “양떼의 목자”를 표현했다. 선행이 교회의 두 번째 자식인 바, “형제”라고 불리우고, “아벨”이라 명명되어진다.

“양떼의 목자”가 선행의 선을 실행하는 자이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명확해 있음에 틀림없다. 그 이유는 이것은 구, 신약 성경에서 친숙한 모양새이기 때문이다. 이끌고 가르치는 이들이 “목자”라 불린다. 그리고 인도받고 가르침을 받는 이들은 “양떼”라 부른다. 선행의 선쪽으로, 선행의 선을 가르치지 않는 자는 진정한 목자가 아니다.; 그리고 선쪽으로 인도되지 않고, 선인 것을 배우려하지 않는 이들은 양떼 속에 있지 않다. “목자”와 “양떼”에 관한 위의 의미를 확증해보고자 말씀을 인용하는 것은 거의 필요하지 않을 것 같지만, 아래 몇 군데 살피고 지나 가자. 이사야서에서:
주님께서는 네가 지면에 뿌린 네 씨에 비를 주실 것이다. 그리고 지면의 소출로부터
빵을 (먹을 것이다); 그 날에 그분은 넓은 풀밭에서 네 가축을 먹이실 것이다 (이. 30:23).
위 구절에서 “지면의 소출로부터의 빵”은 선행을 표시한다.
다시 이사야서에서:
주 여호비께서 목자같이 그분의 양떼를 먹이실 것이다; 그분은 그분의 팔 안으로
어린 양들을 그러모으실 것이다. 그리고 그분의 가슴 안에서 운반하실 것이다.
그리고 어린 것과 함께 있는 양들을 부드럽게 인도하실 것이다 (이. 40:11).
다윗서에서:
귀를 주소서, 오 이스라엘의 목자시여, 양떼같이 요셉을 인도하시는 분이시여;
그룹들 위에 앉으신 분이시여, 빛을 비추이소서 (시. 80:1).
예레미야서에서:
나는 시온의 딸을 미모의 섬세한 여인에 견주었다; 목자와 양떼가 그녀에게 올 것이다,
그들은 그녀 가까이 빙둘러 천막을 고정시킬 것이다,
그들은 모든 이를 그의 자신의 공간(에서) 먹일 것이다 (예6:2, 3).
에스겔서에서:
고로 주 여호비에게 말한다, 나는 그들을 인간의 양떼로서, 거룩한 양떼로서,
예루살렘의 양떼로서 정해 놓은 때들에서 불어나게 할 것이다;
그렇게 황폐된 성들은 인간의 양떼로 채울 것이다 (겔. 36:37, 38).
이사야서에서:
아라비아의 모든 양떼들이 네게로 다함께 모아질 것이다,
느바욧의 숫양들은 너를 섬길 것이다 (이. 60:7).
선행의 선쪽으로 인도하는 자들은 “양떼를 그러모으는” 자들 이다; 그러나 그들을 선행의 선쪽으로 이끌지 않는 자는 “양떼를 흐트는”자들 이다; 그 이유가 모두 함께 모으고, 하나로 연합하는 것이 선행 속에 있고, 모든 흐틈과 해체함은 선행의 결핍으로부터 이기 때문이다.

신앙을, 즉 기억 속의 지식(memory-knowledge)을, 지식(knowledge)을, 그리고 신앙의 교리들을 쓸모가 있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인간이 신앙이 가르치는 것과 같게 되는 것 말고 더 쓸모 있는 것이 있을까? 그리고 신앙이 가르치는 제일의 것은 선행이 아닌가? (막. 12:28-35; 마. 22:34-39). 이것은 신앙이 목표로 삼는 모든 것의 정점이다. 그리고 만일 이것이 달성되지 않는다면, 모든 지식 또는 교리는 단지 텅빈, 아무 것도 아닌 것밖에 무엇인가?

“지면의 경작자(tiller of the ground)”는 선행이 결여된 자이다. 이 자는 제아무리 많은 사랑으로부터 분리된 신앙 안에 있는다 해도 그는 신앙이 없는 셈이다는 것은 뒤이어지는 구절, 즉 여호와께서는 그의 공물을 존중하지 않으셨다는 것, 그가 그의 아우를 살해한 것, 즉 “아벨”로 의미되는 선행을 파괴한 것으로부터 명백해진다.
육체적이고 지상의 것들을 바라보는 이들이 “지면을 경작하는”이들이다. 이는 지나온 구절, 즉 인간이 “지면을 경작하도록 에덴의 동산에서 내쫓김”인 창. 3:19, 23에서 말해진 바로부터도 분명해진다.

3절. 그리고 날들의 끝에서 가인은 여호와께 예물로서 지면의 열매를 가져왔다. “날들의 끝”이란 시간이 흐름에 따라서가 뜻해진다. “지면의 열매”란 선행이 없는 신앙의 일들을, “여호와께 가져온 공물”은 이 신앙에서 파생된 예배를 뜻한다.

“날들의 끝”은 시간의 경과임은 모든 이에게도 자명할 것이다. 처음에서, 즉 신앙이 순박함 안에 있는 동안, “가인”이라 불리는 교리는 나중에 열납되지 못할 만큼까지 있지는 않은듯 나타난다는 사실은 그들이 그들의 자식을 “여호와(로부터) 사람”이라 일컬은 것에서 분명해진다. 고로 처음 당시의 신앙은 “날들의 끝”, 즉 시간이 경과된 후에서 만큼 사랑으로부터 분리되어 있지는 않았다는 말이다; 마치 진정한 신앙의 교리라면 사랑으로부터의 분리를 원하지 않듯 그렇게 처음에는 있었다는 말이다.

“지면의 열매”가 선행 없는 신앙의 일들이 뜻해지는 것은 뒤따라오는 것으로부터 나타난다; 그 이유가 선행이 결핍된 신앙의 일들은 그 자체 죽은 것, 즉 신앙 없음의 일들이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단지 외적 인간만의 일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예레미야서에 쓰여 있다:
어찌하여 사악한 자가 번영을 누립니까? 당신께서 그들을 심으셨고, 그들은 뿌리를
뻗었습니다; 그들은 계속 갔습니다, 그들 역시 열매를 맺습니다; 당신은 그들의 입
가까이에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신장(감정과 애정)으로부터서는 멀리 계십니다;
얼마나 오래 토지가 슬퍼할 것입니까? 그리고 모두 각각의 들판의 풀잎은 얼마나
오래 시들고 있어야 합니까? (예. 12:1, 2, 4).
“그들의 입에 가까이, 그러나 신장으로부터는 멀다”는 선행으로부터 분리된 신앙 속에 있는 이들을 표시한다. 이들에 관하여 “토지가 슬퍼한다”라고 말해진다. 같은 예언서에서 이런 일들이 “열매의 일들”이라 불리운다:
사기침이 모든 것들 너머 있는 것이 심장이라, 그것이 구제 불능인 것을 누가
알 수 있을까? 나 여호와가 심장을 수색하고, 신장을 심리하여 그의 길들에 따라,
그의 일들의 열매에 따라 주기까지 할 것이다 (예17:9, 10).
미가서에서:
토지는 황폐될 것인데,
그 안에 거주하는 그들 때문이다. 그들의 일들의 열매 때문이다 (미. 7:13).
이런 “열매”는 열매가 아니다는 것, 또는 “일”은 죽어 있다는 것, 그리고 열매와 뿌리는 멸해진다는 것이 아모스서에서 선포되어진다:
나는 그들 앞에서 아모리족을 파괴했다. 그들의 키는 삼나무보다 더 컷고,
그들의 강함은 상수리나무보다 더 강했다; 그럼에도 나는 위로부터는
그들의 열매를, 아래로부터는 그들의 뿌리를 파괴했다 (암. 2:9).
그리고 다윗서에서:
당신은 땅으로부터 그들의 열매를 파괴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씨를 인간의 아들로부터 (끊을 것입니다) (시. 21:10).
그러나 선행의 일들은 살아있다, 그래서 그것들에 관하여 선포되는 바, 그것들은 “아래쪽으로 뿌리를 뻗고, 위쪽으로는 열매를 맺는다”이다. 이사야서에서:
유다 가문으로부터 탈출한 남은 자가 다시 아래쪽으로 뿌리를 내리고,
위쪽으로 열매를 맺을 것이다 (이. 37:31).
“위쪽으로 열매를 맺는 것”은 선행으로부터 행하는 것이다. 이런 열매가 “빼어난 열매”라고 불리운다. 같은 예언서에서:
그 날에 여호와의 어린 가지가 아름답고 영광스러워 있을 것이다, 그리고 땅의 열매는
이스라엘로부터 도망한 그들을 위해 특출하고 아름답게 (있을 것이다) (이. 4:2).
이것은 또한 “구원의 열매”이다. 그래서 같은 예언서에서 그렇게 불리운다:
위로부터, 아래로 떨어트려라, 너 천국들(heavens)아, 그리고 하늘들(skies)이
정의를 아래로 쏟게하라; 땅이 열리게 하라, 그리고 그것들의 구원의 열매를
산출하게 하라, 그리고 정의가 함께 솟아오르게 하라;
나 여호와가 그것을 창조할 것이다 (이. 45:8).

“공물”을 수단으로 예배가 뜻해진다는 것은 유대 교회의 표현물들로부터 명백해진다. 유대 교회의 여러 종류의 제물들, 뿐 아니라, 땅의 첫 열매들과 땅의 생산물의 첫 소산들, 그리고 첫 출생의 봉헌, 등등이 “공물”이라 불렸는데, 이것들 안에 예배가 존재했다. 그리고 그것들이 천국의 것들을 표현했고, 모든 것이 주님에 관련되고 있는 바, 진정한 예배가 이런 공물들을 수단으로 의미되어져 있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자명할 것이다. 그 이유가 이것을 표현하지 않으면 (성경의) 표현물들은 무슨 (소용이) 있을까?, 또는 일종의 우상 내지 죽음의 것이 아니라면 내적인 것 없는 외적인 것 만은 무슨 소용이 있을까? 라는 반문 때문이다. 외적인 것들은 내적인 것들로부터 , 즉 주님으로부터 내적인 것들을 통하여 생명을 지닌다. 이렇게 숙고해봄으로부터 분명해지는 바, 표현 교회(유대 교회)의 모든 공물들은 주님을 예배함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에 관하여는 주님의 신성한 자비로부터 이어지는 페이지들에서 세부적으로 다룰 것이다. 일반적으로 “공물”이 예배를 뜻한다는 것은 예언서들 두루에서 분명해진다. 말라기서에서:
그분의 오심의 날에 누가 버티어지겠느냐? 그분은 은의 주물자로서 제련자로서
앉으실 것이다. 그리고 그분은 레위의 아들들을 정화하실 것이다. 그들을 금과 은을
걸러내듯 하실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정의 안에서 공물을 여호와께 바칠 것이다.
그 때 유다와 예루살렘의 공물은 여호와께 영원의 날들 안에서 같이,
고대의 햇수들 안에서 같이 기쁨이 될 것이다 (말. 3:2, 3, 4).
“정의 안에 있는 공물”은 내적인 공물이다. 이것을 “레위의 아들들”, 즉 거룩한 예배자들이 바칠 것이다. “영원의 날들”은 태고 교회를, “고대의 햇수들”은 고대 교회를 의미한다. 에스겔서에서:
내 거룩함의 산에서, 이스라엘의 높이의 산에서, 거기서 이스라엘의 모든 가문,
모든 토지가 나를 예배할 것이다; 거기서 나는 그것들을 받을 것이다, 그리고
거기서 나는 너희의 봉헌물들을, 그리고 너의 모든 거룩해짐 안에 있는
너희 공물들의 첫 열매들을 요구할 것이다 (겔. 20:40).
“봉헌물들”, 그리고 “거룩해짐 안에 있는 공물들의 첫 열매들”은 주님으로부터 선행을 수단으로 거룩해진 일들이다. 스바냐서에서:
에티오피아의 강들 너머로부터,
나에게 탄원하는 자가 나의 공물들을 가져올 것이다 (습. 3:10).
“에티오피아”는 천적인 것들, 즉 사랑, 선행, 선행으로부터의 일들을 소유한 이들을 표시한다.

4절. 그리고 아벨, 그도 또한 자기 양떼의 맏배와 그로부터의 지방(fat)을 가져왔다. 그리고 여호와께서는 아벨과 그의 예물을 지켜보셨다.
이미 살핀 바대로 “아벨”을 수단으로 선행이 의미되어진다; 그리고 “양떼로부터의 맏배들”을 수단으로 거룩인 것, 주님으로부터서만 있는 것이 의미되어진다; “지방”을 수단으로 천적 (평면) 자체, 이것 역시 주님으로부터 있는 것; 그리고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공물을 지켜 보셨다”를 수단으로 선행에 관한 것들과 선행에 바탕을 둔 모든 예배는 주님을 매우 흡족하시게 함을 뜻한다.

“아벨”이 선행을 의미함은 앞서 살폈다. 선행을 수단으로 이웃을 향한 사랑, 그리고 자비가 뜻해진다; 그 이유가 이웃을 자기 같이 여겨 사랑하는 자는 이웃의 괴로움들이 자신을 향해서 있는듯 여겨 이웃에 자비로워져 있기 때문이다.

“양떼의 맏배들”이 주님만으로부터 있는 것들을 의미한다는 것은 표현 교회의 맏배, 또는 첫 출생으로부터 분명해진다. 이것들은 모두 거룩이었다. 그 이유는 그것들이 주님에 관련을 가지기 때문이다. 즉 주님만이 “첫 출생”이시기 때문이다. 사랑과 사랑에서 파생된 신앙이 첫 출생이다. 모든 사랑은 주님으로부터 있다. 사랑의 조각 하나도 인간으로부터 있지 않다. 그러므로 주님만이 “첫 출생”이시다. 이것이 고대 교회에서 여호와에게 거룩하게 바쳐진 인간과 짐승의 첫 출생을 수단으로 표현되어졌다 (출13:2, 12, 15); 그리고 비록 레위가 르우벤과 시므온 뒤를 이어 출생해서 첫 출생은 아니지만, 그가 내적 의미에서 사랑을 의미한 까닭에 신앙을 의미한 위 두 형을 대신하여 첫 출생으로 열납되고, 성직 직분이 할당되었다 (민. 3:40-45; 8:14-20). 모든 것의 첫 출생으로서의 주님에 관하여, 그분의 인간 실체에 관련하여, 다윗서에 이렇게 쓰여 있다:
그는 나를 나의 아버지, 나의 하느님, 그리고 내 구원의 반석이라 부를 것이다.
나는 또한 그를 내 첫 출생으로, 땅의 왕들 위에 높은 자로 만들 것이다 (시. 89:26, 27).
그리고 계시록서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죽은 자로부터의 첫 출생,
그리고 땅의 왕들 중의 제 1인 자 (되셨다) (계. 1:5).

“지방”을 수단으로 천적 (평면) 자체가 의미되어진다. 이것 또한 주님으로부터 있다. 천적 (평면)은 사랑으로부터 있는 모두이다. 신앙이 사랑으로부터 있을 때 그 신앙 역시 천적 (평면)이다. 선행은 천적 (평면)이다. 선행으로부터의 모든 선은 천적 (평면)이다. 이런 모든 것이 제물에 있는 여러 종류의 기름들을 수단으로, 구분해 보면, 간(liver), 또는 대망막(caul)을 덮은 지방을 수단으로; 신장(kidneys) 위에 있는 지방을 수단으로; 내장(intestines)들을 덮거나, 내장들 위에 있는 지방을 수단으로 표현되어지고 있다. 이것들은 거룩했다. 그래서 제단 위에서 태워바치는 공물로 바쳐졌다 (출 29:13, 22; 레. 3:3, 4, 14; 4:8, 9, 19, 26, 31, 35; 8:16, 25). 그러므로 그것들은 “여호와께 쉼을 위한 불을 수단으로 하는 공물의 빵”이라 불리웠다 (레. 3:14, 16). 같은 이유에서 유대 백성들은 “대대로 영원한 규례” 라고 불리는 것을 수단으로 짐승의 지방을 먹는 것을 금해왔다. 이것은 교회가 내적인 것을 인정조차 하지 않았기 때문, 천적인 것은 더 더욱 인정하지 않았다.
“지방”이 천적인 것들을 의미하는 것, 그리고 선행으로부터의 선들을 의미하는 것은 예언서들로부터 분명하다; 이사야서에서:
어찌하여 너희는 빵도 아닌 것을 위해 은을 다느냐? 그리고 만족치도 못하는 것을
위해 너희는 노동하느냐? 너는 나에게 열심히 귀기울여라. 너희는 좋은 것을 먹고,
네 혼은 살찌움 안에서 즐거움에 놓일 것이다 (이. 55:2).
그리고 예레미야서에서:
나는 많은 지방으로 성직자들의 혼을 채울 것이다,
그리고 내 백성은 내 선으로 충분히 채울 것이다 (예. 31:14),
위 구절에서 많은 지방이 뜻해지는 것이 아니라 천적 평면으로부터의 영적 선 임이 분명하다. 이와 같이 다윗서에서:
그들은 당신 집의 많은 지방으로 채워졌습니다, 그리고 당신은 그들이 당신의
맛있음의 강을 마시게 만듭니다. 그 이유가 당신과 함께 생명들의 원천이 있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빛 안에서 우리는 빛을 봅니다 (시. 36: 8, 9).
여기서 “많은 지방”과 “생명들의 원천”은 사랑으로부터 있는 천적인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맛있음의 강”과 “빛”은 사랑으로부터의 신앙 속에 있는 영적인 것을 의미한다. 다시 다윗서에서:
내 혼은 뼈골과 많은 지방으로 물릴정도로 채워졌습니다,
그리고 내 입은 노래들의 입술들을 가지고 당신을 찬양할 것입니다 (시. 63:5),
같은 방식에서 “지방”은 천적 (평면)을 표시한다. 그리고 “노래들의 입술들”은 영적 (평면)을 표시한다. 이것이 천적인 것임은 이것이 혼을 충분히 채울 것이기 때문이다.
같은 이유 때문에 땅의 첫 출생에 해당되는 첫 열매들이 “지방”이라 불리운다 (민. 18:12).
천적인 것들의 종류(genera)들은 무수하고 이에서 분류되는 종류(species)는 더 한층 무수한 바, 그것들이 모세가 백성들 앞에서 암송한 노래 안에 일반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암소의 버터, 그리고 양떼의 우유, 어린 양들과 숫양들의 지방과 더불어,
바산의 아들들, 그리고 염소의 아들들, 밀의 신장(kidneys)의 지방과 함께;
그리고 너는 섞지 않은 포도의 피 안에서 마실 것이다 (신. 32:14).
내적 의미로부터가 아니고는 위 구절의 표현들의 의미들을 누군가가 알아내는 것은 불가능하다. 내적 의미 없이, “암소의 버터”, “양의 우유”, “어린 양들의 지방”, “숫양들과 염소들의 지방”, “바산의 아들들”, “밀의 신장의 지방”, 그리고 “포도의 피”의 표현들은 단어들의 나열에 불과해지고, 더 나아가 아무 것도 아닌 상태에 머문다. 그럼에도 이것들 전체와 각각은 천적인 것들의 종류들과 부류들을 의미한다.

“여호와께서는 아벨, 그리고 그의 공물을 지켜보셨다”란 선행 속의 것들, 그리고 선행에 바탕을 둔 모든 예배는 주님을 흡족하게 한다는 것은 앞서 “아벨”, “그의 공물”을 언급할 때 설명되었다.

5절. 그러나 가인과 그의 예물을 그분은 지켜보시지 않았다. 그래서 가인의 노염이 극도로 지펴졌고 그리고 그의 얼굴들은 떨구어졌다.
이미 서술했듯이, “가인”을 수단으로 사랑으로부터 분리된 신앙, 또는 이런 분리가 가능하다고 인정하는 교리가 의미되어진다. “그의 공물은 지켜보시지 않음”이란 그의 예배는 받을 수 없음을 의미한다. “가인의 노염이 극도로 지펴졌고 그의 얼굴은 떨구어졌다”란 그의 내면이 바뀌었음을 의미한다. “노염”은 선행이 떠났음을 표시했다. “얼굴들”은 내면들을, 이것들이 “떨구어짐”은 내면들이 바뀌었음이다.

“가인”은 사랑으로부터 분리된 신앙, 또는 이런 분리의 가능성을 인정하는 교리가 의미된다는 것; 그리고 “그분이 지켜보시지 않은 공물”이란 그의 예배는 열납될 수 없음을 의미하는 것은 이미 살폈다.

“가인의 노염이 지펴졌다”가 선행이 떠났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은 후에 그가 선행을 의미한 자기 아우를 죽인 대목과 관련하여 살피면 명백해진다. 노염(anger)은 누군가가 자기 자신의 사랑과 그것의 탐욕들에 반대되어진 결과로부터 있는 일반적 애착(affection)이다. 이것은 악령들의 세계에서는 확실하게 지각되어진다. 그 이유는 그 세계에 주님에 맞서 있는 일반적 노염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 노염은 악령들의 선행 없음의 결과, 미움 안에 있음, 자기 자신의 사랑과 탐욕들을 좋아하지 않는 것은 무엇이든 흥분을 일으킨 결과물이다. 말씀에서, “노염”, “분노”, “격노”라는 단어가 여호와에 관련해 자주 서술되는 편이나, 이런 것들은 인간으로부터 있는 것, 그것이 인간에게 나타나는 외관 때문이다. 고로 다윗서에 쓰여 있다:
그분은 그들을 향하여 그분의 콧구멍의 노염을, 그리고 분노를, 그리고 격노를,
그리고 곤경을, 그리고 악한 천사들의 훼방질을 보내셨다; 그분은 그분의 노염
때문에 길을 저울질 하셨다. 그분은 죽음으로부터 그들의 혼을
보류하시지 않는다 (시. 78:49, 50).
여호와께서는 누군가 위에 그분의 노염을 보내시지 않는다. 그러나 인간들이 자신들 위에 노염을 보내는 것이다; 그분은 그들 사이에 악한 천사들을 보내시지 않는다. 그러나 인간이 그 천사들을 자신에게 끌어당긴다. 그러므로 그분은 “그분의 노염 때문에 길을 저울질하셨다, 그리고 죽음으로부터 그들의 혼을 보류하시지 않았다”가 첨가되고 있다; 그러므로 이사야서에서 말해진다, “그가 여호와에게 올 것이다, 그리고 그분에게 격노한 모두는 부끄러움을 당할 것이다”(이. 45:24). 이 구절로부터 분명한 바, “노염”은 악들이다는 것, 또는 같은 말로, 선행으로부터 떠남이다.

“얼굴들이 떨구어짐”이 내면들이 바뀌었음을 의미하는 것은 “얼굴”과 “떨구어짐”의 의미로부터 분명해진다. 고대인들과 더불어 얼굴은 내적인 것들을 의미했다. 그 이유가 내적인 것들이 얼굴을 통하여 빛을 내기 때문이다; 그리고 태고 때에는 얼굴이 내적인 것들과 완전히 일치되어 있어 인간의 얼굴로부터 각 사람의 의향이나 마음의 상태를 볼 수 있었다. 그들은 얼굴에 의해 보여진 것이 이것인데, 다른 것을 생각하고 있으면, 괴물 같은 것으로 심각하게 생각했다. 내부의 것이 얼굴에 의미되는 바, (속과 겉이 다른 것인) 흉내냄과 속임은 흉측할 뿐이었다. 선행이 얼굴로부터 빛을 발할 때, 그 얼굴은 “들어 올림”이라고 말해진다; 그리고 그 반대가 발생할 때, 얼굴이 “떨구어진다”라고 말해진다. 그러므로 주님에 관해 말해지는 대목인 감사 기도에서, “그분은 그분의 얼굴들을 인간 위에 들어 올리신다”라고 말해진다 (민. 6:26; 시. 4:6). 이를 수단으로 주님은 인간에게 선행을 주신다가 의미되어 있다. “얼굴이 떨구어짐”에 의해 뜻해지는 것이 예레미야서로부터 나타난다:
나는 나의 얼굴을 너를 향하여 떨구어지게 만들지 않을 것이다,
그 이유가 나는 자비하기 때문이다, 여호와가 말하신다 (예. 3:12).
“여호와의 얼굴”은 자비이다, 그리고 그분이 누군가 위에서 “그분의 얼굴을 들어올리실 때” 이것은 자비로부터 그분이 그 사람에게 선행을 주심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 반대는 그분이 “얼굴을 떨구어지게 만드실” 때, 즉 인간의 얼굴이 떨구어질 때이다.

6절. 그리고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말하셨다, 왜 너의 노염이 지펴졌느냐? 그리고 왜 네 얼굴이 (땅 쪽으로) 떨어졌느냐?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말하심”이란 양심이 지령(dictate)을 받았다가 뜻해진다. “그의 노염이 지펴졌고 그의 얼굴(안색)이 떨어졌다”란 선행이 떠났고 그의 내면들이 바뀌었음을 의미한다.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말하셨다”가 양심이 지령을 받았다를 뜻한다는 것은 유사한 구절들을 위에서 설명했는 바, 확증은 필요 없을 것이다.

7절. 만일 네가 잘 행동하고 있다면 (얼굴을) 들어 올리지 않겠느냐? 그리고 만일 네가 잘 행동하지 않고 있다면 죄가 문에 드러눕는다. 그리고 너에게 그의 바램이 있다. 그런데 너는 그를 지배한다.
“만일 네가 잘 행동하고 있다면 (얼굴을)들어 올린다”란 만일 네가 호의적이면 너는 선을 행할 마음을 가지고 있음을 의미한다. “만일 네가 잘 행동하지 않고 있다면 죄가 문에 드러눕는다”란 만일 네가 호의적이지 않다면 너는 선행 없음인 바, 악 임을 의미한다. “너에게 그의 바램(desire)이 있다, 그런데 너는 그를 지배한다”란 선행은 너와 함께 있기를 바라고 있다. 그러나 그렇게 되지 않는 이유는 신앙이 선행을 지배하고 싶어하기 때문이다.

“가인”이라 불리는 신앙의 교리가 여기서 묘사되어진다. 이 교리는 사랑으로부터 신앙을 분리한 결과, 사랑의 자식에 해당하는 선행으로부터도 역시 분리되어 있다. 교회라는 것이 있는 곳은 어디이든, 이단들(heresies)이 일어난다. 그렇게 발생되는 이유는 인간이 신앙의 어떤 세부 조항에 집중해버리면, 그는 그 조항을 주요한 것(일 적인 것)으로 만든다; 그 이유가 어떤 하나의 것에 집념하는 동안 그것을 여느 다른 것에 앞서 놓아두려는 것이 인간 사고의 속성이기 때문이다. 특히 그의 상상력이 그것에서 자기 자신을 발견이라도 한 듯 주장할 때, 게다가 자기를 사랑함과 세상을 사랑함이 그것을 부풀릴 때 세부항목이 전체 항목인듯 대체시켜버린다는 말이다. 하여 모든 것이 그것에 일치하고 확증도 주는듯 해진다. 이것은 비록 그것이 거짓이다 해도 마침내 그것이 맞다고 맹세하기까지 치닫는다. 이런 경로에서 “가인”으로 불리는 이들이 신앙을 사랑보다 더 본질인 것으로 만들었다. 결과적으로 이들이 사랑 없이 살았을 때, 자기를 사랑함과 공상이 다함께 그것을 확증함에 공모했다.

“가인”이라 불리우는 신앙에 관한 교리의 본성이 이 절에서 그것에 관한 묘사로부터 보여진다. 이로부터, 그것은 선행이 신앙에 결합되어질 수 있었다는 것, 하여 신앙이 아니고 선행이 지배권을 가지리라는 것이 나타나고 있다. 이러하기 때문에, 먼저 말해지는 바, “만일 네가 잘하고 있다면, 너는 (얼굴을) 들지 않겠느냐?”이고, 이것이 의미하는 바, 만일 네가 호의적이다면(선량한 마음을 품고 있다면), 선행이 현존하고 있을런지 모른다 이다; 그 이유가 “잘 행함”은 내적 의미에서, 호의적인 마음 자세임을 의미하기 때문, 선인 것을 행함은 선인 것을 뜻함으로부터 나오기 때문이다. 고대 때에 행동과 의지는 하나였다; 행동하는 것을 보면 그들은 상대방의 의지를 알았다. 하여 그때 당시 흉내냄이라는 것은 알려져 있지도 않았다. “들어 올림(uplifting)”은 선행이 현존함을 의미한다는 것은 얼굴을 말할 때 이미 살폈다. “얼굴을 들어올림”은 선행을 가지는 것이다. 따라서 “얼굴을 떨굼”은 그 반대이다.

두 번째로, 말해지는 바, “만일 네가 잘하지 않고 있다면, 죄가 문에 누워있다”이다. 이는 만일 네가 호의적이지 않다면, 선행은 현존하지 않는 바, 악이다를 의미한다. “죄가 문에 누워 있음”이 들어가기를 갈망하는 악, 이미 악이다 하는 것은 누구나 쉽게 파악될 것이다; 그 이유가 선행이 없을 때, 거기에는 무자비함과 미움이 있고, 한마디로 모두가 악이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죄(sin)가 “악마”라, 즉 지옥들의 패거리라 불려진다. 이것은 선행이 결여될 때는 언제나 즉시 가까이(“문”)에 존재한다; 따라서 악마와 그의 패거리들을 마음의 문으로부터 몰아내는 유일한 수단은 주님을 사랑함과 이웃을 향한 사랑 뿐이다.

세 번째 장소에서 말해진다. “너에게 그의 바램(desire)이 있다, 그리고 너는 그를 지배하고 있다”이다. 이 구절을 수단으로, 선행은 신앙과 거주하기를 바란다는 것, 그런데 그렇게 할 수 없는 이유는 질서에 반대되는 것인, 신앙이 선행을 지배하기를 원하기 때문임이 의미되고 있다. 신앙이 지배권을 가지려 추구하는 한, 신앙은 신앙이 아니다. 신앙이 신앙이 되어가려면, 선행이 통치해주어야 한다. 선행은 열과 빛의 본체인 불꽃에 비교될런지 모른다. 그 이유가 열과 빛이 그것으로부터 있기 때문이다; (선행에서) 분리된 신앙은 불꽃 속에서 열이 빠진 빛에 비교되는 바, 이 때는 만물이 움직이지 못하는 계절, 죽어있는 계절인 겨울의 빛이다.

8절. 그리고 가인이 그의 형제 아벨에게 말했다. 그리고 세월이 지나 그들이 들판에 있었을 때, 가인이 그의 형제 아벨을 향하여 일어나 그를 죽였다.
가인이 아벨에게 말했다”란 시간의 간격을 의미한다. “가인”은 사랑으로부터 분리된 신앙을, 아벨은 선행을 의미한다. 선행은 신앙의 형제이기에 여기서도 두 번씩 “그의 형제”라 말하고 있다. “들판”은 교리로부터 있는 모든 것들을 의미한다. “가인이 그의 형제를 향해 일어나 그를 죽였다”란 (신앙과 선행이) 분리되면 신앙은 선행을 절멸시킨다는 것을 의미한다.

선행이 신앙의 “형제”이다는 것, “들판”은 교리로부터 있는 것은 무엇이든을 의미한다는 것, 이 두 가지 외의 다른 것은 비슷한 인용 구절로 확증해볼 필요까지는 없어도 될 것 같다. 선행이 신앙의 “형제”이다는 것은 신앙의 본질, 또는 실체로부터 누구나 명백해질 것이다. 이런 형제 관계가 에서와 야곱을 수단으로 표현되고, 그들이 다툰 바탕은 장자권과 지배권이었다. 또한 형제 관계가 유다에 의한 다말의 아들들인 베레스와 제라를 수단으로도 표현되어졌다 (창. 38:28, 29, 30); 그리고 에브라임과 므낫세에 의해 (창. 48:13, 14); 그리고 위 두 가지에서, 뿐 아니라 다른 유사한 경우에서, 다툼은 장자권과 지배권에 관한 것 때문이었다. 그 이유가 신앙과 선행, 모두가 교회의 자식이기 때문이다. 가인인 신앙이 이 장의 1절에서 “사람”이라 불리우고 있다. 그리고 선행은 “형제”라 불리우고 있다 (이. 19:2; 예. 13:14 참조); 이외 여러 구절에서 그렇게 불리우고 있다. 신앙과 선행의 합일(union)이 “형제들의 언약”이라 불리우고 있다 (암. 1:9). 가인과 아벨의 형제 관계와 유사한 것은 야곱과 에서의 경우이다; 야곱은 그의 형 에서를 밀어내기를 바라고 있었다. 호세아서를 보자:
야곱을 그의 길들에서 방문하시고, 그의 행동에 따라 그분은 그에게 보응하실 것이다;
그는 자궁 안에서 그의 형 에서를 밀어냈다(호. 12:2,3).
그러나 에서, 또는 에서로 표현되는 선행이 마침내 지배권을 가진다는 것이 아버지 이삭의 예언자적 예견으로부터 나타난다:
검을 수단으로 너는 살 것이다, 그리고 네 아우를 섬길 것이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 너는 지배권을 가질 것이다.
즉 너는 네 목으로부터 그의 멍에를 부러트릴 것이다 (창. 27:40).
또는 같은 것으로 이방인들의 교회, 또는 새로운 교회가 에서에 의해, 유대 교회가 야곱에 의해 표현되어졌다; 그리고 이것이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을 형제들로 인정할 것이라고 자주 말해진 이유이다; 그리고 이방인들의 교회, 또는 원시적인(primitive) 교회에서, 모든 이는 선행으로부터 형제들이라 불렀다. 말씀을 듣고, 그것을 행하는 자는 주님에 의해 형제라 불리우고 있다 (눅. 8:21); 듣는 이들은 신앙을 가지는 것과 같다; 행하는 이들은 선행을 가지는 것과 같다; 그러나 듣고, 또는 자기들은 신앙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고, 행함이 없는 것, 선행을 가지지 않는 것은 형제가 아니다. 그 이유는 주님께서 그들을 바보들이라 부르기 때문이다 (마. 7:24. 26).

“들판”이 교리를 의미하는 것, 결과적으로 신앙과 선행의 교리에 속하는 것은 무엇이든을 의미하는 것은 말씀으로부터 분명해진다. 예레미야서에서:
들판에 있는 오 나의 산이여, 나는 네 소유물들과 모든 네 보물들을
전리품으로 줄 것이다 (예. 17:3).
위 구절의 “들판”은 교리를 의미한다; “소유물들”과 “보물들”은 신앙의 영적 재물, 또는 신앙의 교리에 속하는 것들을 표시한다. 예레미야서에서:
레바논의 눈이 내 들판의 바위로부터 실패할 것이냐? (예. 18:4).
이것은 시온에 관하여 선포한 것, 즉 신앙의 교리가 심히 궁핍해질 때, 그녀는 들판 같이 갈아엎을 것이다고 선포한 것이다 (예.26:18; 미. 3:12). 에스겔서에서:
그는 토지의 씨를 가져갔다, 그리고 그것을 씨뿌림의 들판에 놓았다 (겔. 17:5),
위 구절은 교회와 교회의 신앙을 취급하고 있다; 그 이유가 교리가 교회 안에 있는 씨로부터 “들판”이라 불리우기 때문이다. 에스겔서에서:
그리고 들판의 모든 나무들에게 나 여호와가 높은 나무를 내려 놓는다는 것을
알게 하자 (겔. 17:24).
요엘서에서:
들판은 못쓰게 되어졌다. 지면이 슬퍼한다, 그 이유는 곡식이 황폐해졌기 때문이다,
새로운 포도주가 말라진다, 기름이 쇠약해진다, 농부가 부끄러워한다, 들판의 수확이
멸해졌다, 들판의 모든 나무들이 시들어졌다 (욜. 1:10, 11, 12).
위 구절에서 “들판”은 교리를 의미한다. “나무들”은 지식을, “농부”는 예배자들을 의미한다. 다윗서에서:
들판과 그 안의 모든 것이 드높일 것이다,
그 다음 숲의 모든 나무들이 노래할 것이다 (시. 96:12),
위 구절의 경우에서, 들판이 드높일 수 없고, 숲의 나무들이 노래할 수 없는 것은 완전하게 분명하다.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은 인간 안의 것들, 신앙에 관한 지식이다. 예레미야서에서:
얼마나 오래 토지가 슬퍼하고,
모두 각각의 들판의 풀잎이 시들어 있어야 합니까? (예. 12:4),
위 구절에서 토지도 들판의 풀잎도 슬퍼할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이 표현들은 인간 안에 있는 어떤 것이 황폐해 있는 동안과 관련이 있다. 비슷한 구절이 이사야서에서 나타난다:
산들과 언덕들이 네 앞에서 노래부르러 뛰쳐나올 것이고,
들판의 모든 나무들이 손뼉을 칠 것이다 (이. 55:12).
주님께서 시대의 종말을 예견하시는 대목에서 신앙의 교리를 “들판”이라 부르신다:
그때 들판에 두 사람이 있을 것이다. 하나는 데려가지고
하나는 남겨질 것이다 (마. 24:40; 눅. 17:30),
위 구절에서 “들판”은 두 가지 신앙의 교리, 즉 진정한 교리와 거짓된 교리를 뜻한다. 들판이 교리를 뜻하기 때문에, 신앙의 어떤 씨를 받는 자는 누구든지, 인간이든, 교회이든, 또는 세상이든 “들판”이라 불리운다.

이상으로부터 그 다음을 잇는 것은 다음의 말들, “가인이 그의 형제 아벨을 향하여 일어나 그를 죽였다, 그들이 들판에 함께 있었을 때였다.” 이는 신앙과 선행 모두 신앙의 교리로부터 있는 동안, 사랑으로부터 분리된 신앙은 여전히 선행을 무시하고, 결국 소멸시킨다는 것을 표시하고 있다; 선행의 어떤 일 없이 신앙만으로 구원이 가능하다는 것은 요즈음의 사람들의 경우이다. 그 이유가 이런 가상 속에서 비록 그들이 사랑 없으면 신앙은 구원하지 못한다고 입술로 고백하고, 알고있다 해도 여전히 선행을 소멸하기 때문이다.

9절. 그리고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말하셨다, 네 형제 아벨은 어디에 있느냐?” 그리고 그가 말했다, 나는 모릅니다, 제가 내 형제의 경호인 입니까?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말하셨음”은 선행 또는 “형제 아벨”에 관한 지령을 내부로부터 있게한 어떤 지각력(perceptivity)을 의미한다. 가인의 대답, “나는 모릅니다. 제가 내 형제의 경호인 입니까?”란 신앙이 두루 생각해 본 결과 선행이 별 것도 아닌데, 선행에 도움이 되어 줄 필요가 없다는 것, 마지막으로 더 심사숙고 한 결과 모든 신앙이 선행의 모든 것을 거절했음을 의미한다. 이런 식으로 그들의 교리는 되어 갔다.

“여호와께서 말하심”을 수단으로 태고인들이 지각을 가졌음을 의미하는데, 그 이유는 이들은 주님께서 자기들에게 지각하는 능력을 주셨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이 지각은 사랑이 제 1 순위에 머무르는 동안만 지속될 수 있었다; 그러나 주님을 사랑함, 그 결과인 이웃을 향한 사랑이 중단되었을 때, 지각은 사멸되었다; 그러나 사랑이 남은 만큼에서는 지각도 남아있었다. 이 지각력은 태고 교회에서 번창했다, 그러나 신앙이 사랑으로부터 분리되었을 때, 홍수 이후의 사람들 같았을 때, 즉 선행이 신앙을 통하여 주어졌을 때, 양심이 지각을 계승하였다. 양심 역시 방법은 다르지만, 지령(dictate)을 주기는 한다. 이에 대하여는 주님의 신성한 자비를 수단으로 이후 살핀다. 양심이 받아쓰기를 할 때(지령을 받을 때)도, 말씀에서는 (태고, 고대 시절에서나) 마찬가지 방식인 “여호와께서 이야기 하신다”를 사용하고 있다; 그 이유는 양심은 밝히 알려주신 것(계시된 것, revealed)들로부터, 그리고 말씀으로부터 인식(cognition)된 것들로부터, 그리고 말씀이 이야기할 때, 또는 지령을 줄 때 형성되어지기 때문이다. 이때 이야기하시는 분은 주님이시다; 이로 인해, 양심에 관한 어떤 주제, 신앙에 관한 어떤 주제를 두고 언급할 때, “주님이 말하신다”라고 하는 표현은 오늘날 대중화되다시피 했다.

“경호인(keeper)”은 유대 교회에서 문지기나 수위 (문지방을 지키는 자)와 마찬가지로 섬기는 것을 의미한다. 신앙은 선행의 “경호인”이라 불리우는데, 이는 섬겨야한다는 사실로부터, 선행은 “가인”이라 불리는 교리의 원리로부터 섬김을 받아야 한다는 사실로부터, 7절에 말한 바 같이 신앙은 통치받아야 한다는 사실로부터 이다.

10절. 그리고 그분은 말하셨다, 네가 무엇을 저질렀느냐? 네 형제의 피들의 목소리가 지면으로부터 나에게 소리치고 있다.
“네 형제의 목소리”란 폭력이 선행에 휘둘러졌음을 의미한다. “피들이 소리침”이란 죄있음을 고발함을, “지면”은 종파(schism), 또는 이단(heresy)을 의미한다.

“피들의 목소리”가 폭력이 선행에 저질러졌음을 의미하는 것은 말씀의 여러 구절들로부터 명백해진다. 말씀 안에서 “목소리”는 고발하는 어떤 것, “피”는 어떤 종류의 죄, 특별히 증오함(hatred)을 표시한다; 그 이유가 자기 형제를 향하여 증오함을 낳는 자는 누구든지 자기 심정 안에서 살해하기 때문이다; 주님께서 가르치신다:
너희는 옛 시대로부터의 그들에 의해 말해진 것, 즉 너희는 살인하지 말라; 그리고
살인하는 자는 누구든지 재판의 위험에 있을 것임을 들었었다: 그러나 나는 네게
말한다, 이유 없이 자기 형제에게 성 내는 자는 누구든지 재판의 위험에 있을 것이다:
그리고 자기 형제에게 라가 라고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평의회(에 출석하는) 위험에 놓일 것이다: 너는 바보야 하고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지옥 불의 위험에 있을 것이다
(마. 5:21, 22),
위 구절의 말을 수단으로 증오함의 수준이 뜻해진다. 미움은 선행에 반대된다, 그리고 여하한 방법을 취해서라도 선행을 살해한다. 만일 손으로 살해 못한다면, 영 안에서라도 살해한다. 증오함의 행동은 오직 외적 제약에서만 멈추어 있는 듯할 뿐이다. 그러므로 모든 증오함은 “피” 이다. 예레미야서에서:
왜 너희는 사랑을 구하려고 네 길들을 선하게 만드느냐 ?
네 치맛자락에서조차 궁핍한 순진한 자들의 혼들의 피들이 발견되어졌다 (예. 2:33, 34).
그리고 증오함이 “피”를 수단으로 표시되듯, 갖가지의 불법도 표시한다. 그 이유는 불법의 샘이 증오함이기 때문이다. 호세아서에서:
그들은 거짓 맹세하고, 거짓말하고, 죽이고, 훔치고, 간음을 범한다. 그리고
그들은 피들 안에서 피를 만진다; 그러므로 토지가 슬퍼하고,
그 안에 거주하는 모든 이가 참혹하게 살고 있다 (호. 4:2, 3).
그리고 무자비함에 관해 말하는 에스겔서에서:
너는 피들의 성을 심판하느냐? 그리고 모든 그녀의 역겨운 짓을
그녀로 알게 만드느냐? 성 한 가운데에서 피들을 흘리는 성.
너는 네가 뿌린 그들의 피를 통하여 죄있게 되었다 (겔. 22:2, 3, 4, 6, 9).
에스겔서에서:
토지는 피들의 심판으로 차 있다, 그리고 성은 폭력으로 차 있다 (겔. 7:23).
그리고 예레미야서에서:
예루살렘 한 가운데에서 정의로운 자의 피를 흘린 예루살렘의 예언자들의 죄들,
그녀의 불법 때문에, 그들은 거리들에서 눈먼채 방황하고,
그들은 피로 오염되어 버렸다 (애. 4:13, 14).
이사야서에서:
주님께서 심판의 영으로, 그리고 불타는 영으로 시온의 딸들의 더러운 것을
씻어내실 때, 그리고 한 가운데로부터 예루살렘의 피들을 정화 하실 때, (이. 4:4).
그리고 다시:
너희의 손바닥들은 피 안에서 더럽혀졌다,
너희의 손가락들은 불법 안에서 더러워졌다 (이. 59:3).
에스겔서에서, 예루살렘의 불법을 이야기하면서, 이것이 “피들”이라 불려진다:
내가 너를 지나쳐갔다, 그리고 너를 보았더니, 네 자신의 피들을 짓밟았다, 그리고
나는 네게 말했다, 네 피들을 살아있게 하라, 그렇다, 나는 네게 말했다,
네 피들을 살아있게 하라 (겔. 16:6, 22).
마지막 때의 무자비함과 증오함이 계시록서에서 피를 수단으로 묘사되어 있다 (16:3, 4). “피들”이 복수 단어로 언급된다. 그 이유는 불의와 역겨운 모든 것은 증오함으로부터 분출하기 때문이다. 이 반대는 선과 거룩한 모든 것이 사랑함으로부터 분출된다. 그러므로 자기 이웃을 향하여 증오함을 느끼는 자는 기회가 생기면 살인을 저지를 수밖에 없다. 어쩌면 기회가 올 때가 아니라 기회를 만들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것이 그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것이다. 이것이 이 구절에서 “피들의 목소리”를 수단으로 의미되고 있다.

“목소리가 외침”, 그리고 “외침의 목소리”는 말씀에서 흔히 사용되는 표현의 형체이다, 그리고 어떤 시끄러움, 동요, 혼란, 또한 행복한 어떤 사건에서도 사용되는 형체이다 (출. 32:17, 18; 습. 1:9, 10; 이. 65:19; 예. 48:3). 이 구절의 경우는 고발함(규탄함, accusation)을 표시한다.

위로부터 “피들의 외침”은 죄지었음을 규탄함을 의미함이 뒤이어진다; 그 이유가 폭력을 사용하는 이들이 죄지음을 껴안고 있기 때문이다. 다윗서에서:
악이 사악한 자를 죽일 것이다,
그리고 의로운 자를 미워하는 그들은 죄있을 것이다 (시. 34:21).
에스겔서에서:
네 성은 네게 뿌린 죄들로 말미암아 죄를 지었다 (겔. 22:4).

“지면(ground)”이 여기서 종파(schism), 또는 이단(heresy)을 의미하는 것은 “들판”이 교리를 의미한다는 사실로부터 분명해진다. 그러므로 교리 안에서 들판을 가지는 “지면”은 종파이다. 인간 자신은 “지면”이다, 또한 “들판”이기도 하다. 그 이유는 교리나 종파, 이단 같은 것들이 인간 안에서 심어지고 싹틔우기 때문이다. 게다가 인간은 자기 안에 심어진 것으로부터 인간이기 때문이다. 즉 선하고 참된 것으로부터 선하고 참된 인간이, 악하고 거짓된 것으로부터 악하고 거짓된 인간이다는 말이다. 어떤 특별한 종파, 또는 이단 안에 있는 자는 그것으로부터 명명되어진다. 이 구절의 “지면”은 인간 안에 있는 종파, 이단을 표시하기 위해 사용된 것이다.

11절. 그리고 지금 너는 지면으로부터 저주되었다. 지면은 네 손으로부터 네 형제 아벨의 피들을 받으려고 그 입을 열었다.
“너는 지면으로부터 저주되었다”란 종파를 통해 그는 돌아섰다를 의미한다. “땅이 그 입을 열었다”란 이교가 그것들을 가르쳤음을 의미한다. “너로부터 네 형제의 피들을 받는다”란 선행과 분리된 신앙이 선행에 폭력을 휘둘러 선행을 멸절했음을 의미한다.

이런 것들이 의미되는 것은 이미 살핀 바 있다. “저주됨”은 선에 반대됨이다. 그 이유가 불법들과 역겨움들, 또는 증오함들은 인간을 (주님으로부터) 돌아서게 하는 것들이다. 하여 인간이 아래쪽만을 향하게, 즉 육체적, 지상적인 것만을 중요시하게, 결국 지옥으로부터 있는 것들 쪽으로 치닫게 한다. 이런 것은 선행이 추방될 때, 소멸될 때 발생된다. 그 이유가 주님과 연결되는 끈이 끊어지기 때문이다. 즉 선행, 또는 사랑과 자비만이 우리로 그분과 결합되게 하는 끈이기 때문이다는 말이다. 그리고 선행 없는 신앙은 결코 결합의 끈이 아니다. 그 이유는 이것은 신앙이 아니기 때문, 단지 지식이기 때문, 지옥의 패거리들이 소유한 신앙의 것과 같기 때문, 이런 신앙 가지고 (악마들은) 선한 자를 미혹하고 자신을 빛의 천사인체 덧칠해놓고 있다; 자기 입술로부터 내뱉는 설교가 비록 자기 심정 속에는 한 개도 같은 것이 없을지라도 사악한 설교자들은 버젓이 대단한 경건심을 가지고 그럴듯하게 늘어 놓는다. 기억 안에만 머문 신앙, 그로부터 파생된 생각들이 어떤 소용이 있을 거라 판단할만큼 (머리가) 둔한 자가 (세상에) 있을까? 의지나 의도로부터 나온 것이 아닌데도 본질이 어떠해도 뭔가에 동의하거나 그것을 높게 평가해주는 일이 가당하기나 한 것일까? 이 사람과 저 사람이 결합하게 하고 서로가 기뻐하게 하는 것은 이럴 것이다. 의지가 진짜 인간이다. 의지가 따르지 않는 생각이나 말은 아니다. 인간은 의지로부터 자기의 본래의 모습과 의향을 획득한다. 그 이유는 의지가 인간에게 감동을 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일 누구가 선인 것을 생각한다면, 신앙의 본질, 선행인 것이 생각 안에 있는데, 그 이유는 선인 것을 행할 의지가 생각 안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일 그가 선인 것을 생각하고 있다고 말하는데, 여전히 사악하게 살고 있다면, 그는 악인 것 외에는 어떤 것도 가능할 수 없다, 그러므로 신앙은 없다.

12절. 네가 지면을 경작할 때 이제부터는 지면이 너에게 지면의 힘을 더해주지 않을 것이다. 너는 땅에서 도망자와 방랑자일 것이다. “지면을 경작함”은 종파나 이단을 탐닉하는 것을 의미한다. “너에게 그 힘을 더해주지 않을 것이다”란 열심히 재배하고 탐닉해봤자 무모할 것(barren)임을 뜻한다. “땅에서 도망자와 방랑자이다”란 무엇이 선하고 참된 것인지 모르는 것이다.

“지면을 경작하는 것”이 이 종파 또는 이단을 탐닉하는 것을 뜻하는 것은 위에서 살핀 “지면”의 의미로부터 나타난다. “그것의 힘을 더해주지 않음”이 그것의 무모함을 표시한다는 것은 지면에 관해 말해진 것으로부터, 그리고 단어들 자체로부터, 그리고 심사 숙고 해봄으로부터 분명해진다. 선행 없는 신앙을 고백하는 이들은 신앙 없음을 고백하는 것임은 위에서 말한 바와 같다.

“땅에서 도망자와 방랑자이다”가 선하고 진리인 것을 모르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은 말씀에 있는 “배회함”과 “도망함”의 의미로부터 분명해진다. 예레미야서에서:
예언자들과 성직자들이 거리에서 눈먼채 배회할 것이다, 그들은 피로
오염되어 왔다; 그들은 (성직자나 예언자의 옷을) 만지는 것을 할 수 없다 (애. 4:13-14),
위 구절에서 “예언자들”은 가르치는 이들, 그리고 “성직자들”은 그에 따라 사는 이들이다; “거리에서 눈먼채 배회하는 것”은 참되고 선인 것을 모르는 것이다.
아모스서에서:
들판의 한쪽에는 비가 왔다, 그리고 들판의 한쪽은 비가 내리지 않아 시들어졌다;
그렇게 두, 세 성읍이 물을 마시려고 한 성으로 베회할 것이다, 그리고 만족하지 못할 것이 다 (암. 4:7-8),
위 구절에서 “비가 내린 들판의 한쪽”을 수단으로 선행으로부터 있는 신앙의 교리가 의미되어진다; 그리고 “비가 내리지 않은 들판”의 “부분(쪽, part),” 또는 “조각(piece)”을 수단으로 선행 없는 신앙의 교리가 의미되어진다. “물을 마시려 배회하는 것”은 진리를 추구하는 것을 표시한다.
호세아서에서:
에브라임은 쳐죽임을 당했다, 그들의 뿌리는 말라졌다, 그들은 열매를 맺지 못할
것이다; 나의 하느님이 그들을 내쫓으실 것이다, 그 이유는 그들이 그분에게
귀기울이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민족들 사이에서
방랑자일 것이다 (호. 9:16,17).
“에브라임”은 그가 요셉의 첫 출생이었기 때문에 여기서 진리, 또는 신앙을 이해함을 표시한다; “말라버린 뿌리”는 열매맺을 수 없는 선행을 표시한다; “민족들 사이에 방랑자”란 참되고 선한 것을 모르는 이들이다.
예레미야서에서:
너희는 아라비아를 향하여 올라가라, 그리고 동쪽의 아들들을 황폐되게 하라.
너희는 극도로 도망하고 배회한다; 하솔의 주민들은 스스로를 위해 깊은 데로
내려가게 하자 (예. 49:28, 30).
“아라비아”와 “동쪽의 아들들”은 천적 부유함, 또는 사랑으로부터 있는 것들을 소유함을 의미한다. 이것이 황폐될 때 “도망하고”, “배회한다”, 즉 “도망자와 방랑자”라고 말해지는데, 그들이 선인 것이 하나도 없을 때이다. “하솔의 주민들”, 또는 영적 부유함을 지닌 이들, 즉 신앙으로부터 있는 것을 소유한 이들에 관하여, 그들은 “깊음 안으로 내려가게 하자”라고 말해지는데, 그들이 멸한다는 뜻이다.
이사야서에서:
너희의 맨 먼저 되는 모든 자들은 모두가 배회할 것이다, 그들은 활 앞에 묶여졌다,
그들은 멀리 도망했다 (이. 22:3),
“환상의 골짜기”를 놓고 말함, 또는 신앙은 선행 없이 가능하다는 공상에 관해 말한다. 이로부터 이사야서 22:14에서 말해진 이유가 나타난다. 즉 선행으로부터 떨어진 신앙을 고백하는 자는 “도망자와 방랑자”이다는 것, 즉 선과 진리를 아는 것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13절. 가인이 여호와께 말하였다. 내 불법이 제거되어 질 수 있기에는 너무 큼니다.
“가인이 여호와께 말하였다”란 어떤 내적 고통 때문에 돌출되어 자기가 악했었다고 하는 어떤 고백을 의미한다. “내 불법은 제거되어질 수 있기에는 너무 크다”란 자기가 악했었다는 고백 때문에 있게 되는 자포자기를 의미한다.

이 구절로부터 나타나는 바는, 선에 관한 어떤 것이 아직은 가인에게 남아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후에 그나마 조금 있던 선행으로부터의 모든 선이 멸절되는 것이 19, 23, 24절의 라멕에 관한 언급으로부터 명백해진다.

14절. 보라 당신께서 나를 지면의 얼굴들로부터 오늘 저를 축출하셨고, 그리고 당신의 얼굴로부터 내가 숨겨졌습니다. 그리고 나는 땅에서 도망자와 방랑자입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 나를 발견하는 사람마다 나를 죽일 것입니다.
“지면의 얼굴들로부터 축출됨”은 교회의 모든 진리와 분리되어지는 것을 의미한다. “당신의 얼굴들로부터 숨겨짐”이란 사랑으로부터의 신앙에서 나오는 모든 선에서 분리되어짐을 의미한다. “땅에서 도망자와 방랑자이다”란 무엇이 참되고 선한지를 모르는 것이다. “나를 발견하는 모든 이가 나를 죽이려 할 것이다”란 모든 악과 거짓이 그를 파괴할 것임을 의미한다.

“지면의 얼굴들로부터 축출되는”것이 교회의 모든 진리로부터 분리되는 것이다는 것은 “지면”의 의미로부터 분명해진다. 지면은 순수한 의미에서는 교회, 또는 교인, 그러므로 교회가 고백하는 무엇이든 이다. 단어의 의미는 주제가 취급되어짐에 따라 다양해진다. 그러므로 신앙을 잘못 고백하는 이들조차도 의미에 포함될 수 있다. 즉 이단이나 종파를 고백하는 이들도 또한 “지면”이라 불려진다는 말이다. 여기서 “지면의 얼굴들로부터 축출됨”은 교회의 진리 안에 더 이상 있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당신의 얼굴들로부터 숨겨지는” 것은 사랑의 신앙으로부터의 모든 선으로부터 분리되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은 “여호와의 얼굴들”의 의미로부터 분명해진다. “여호와의 얼굴”은 자비임은 이미 말했다. 이로부터 사랑의 신앙으로부터의 모든 선들이 진행된다. 그러므로 신앙의 선들이 여기서 그분의 “얼굴들”을 수단으로 의미되어진다.

“도망자와 방랑자”이다는 것은 참되고 선인 것을 모른다는 것을 뜻한다.

“저를 발견하는 모든 이가 나를 죽일 것입니다”는 모든 악과 거짓이 그를 파괴할 것임을 의미한다는 것은 이미 말해진 것을 뒤잇고 있다. 이 경우는 이러하다. 인간이 자신으로부터 선행을 박탈할 때, 그는 자신을 주님으로부터 분리한다. 그 이유는 선행만이, 즉 이웃을 향한 사랑만이, 그리고 자비만이 인간을 주님과 결합되게 해주기 때문이다. 선행이 없는 곳, 거기에 분리됨이 있다, 그리고 분리됨이 있는 곳에서, 인간은 자신에, 또는 그의 자기 자신에 남아 있다; 그러면 그가 생각하는 것은 무엇이든 거짓이고 그가 뜻하는 것은 무엇이든 악이다. 이것들은 인간을 죽인다, 또는 남아있는 생명이 없게 만든다.

악과 거짓 안에 있는 이들은 죽임을 당할 거라는 계속적인 두려움 안에 있다. 모세로부터 이렇게 묘사되어 있다:
너희의 토지는 황무해질 것이다, 그리고 너희의 성들은 황폐되어질 것이다, 그리고
너희로부터 남은 그들 위에 나는 그들의 적들의 토지에서 그들의 심정 안으로
연약함을 가져올 것이다, 그리고 굴러가는 잎의 소리가 그들을 칠 것이다, 그들은
검으로부터 도망치듯 도망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아무도 추격하지 않는데도
넘어질 것이다. 그들은 아무도 추격하지 않아도 마치 검 앞에서 인 것처럼
자기 형제에 걸려 넘어질 것이다 (레. 26:33, 36-37).
이사야서에서:
반역자가 불충하게 취급한다, 그렇다, 반역자의 불충 안에서 그들은 반역적으로 다룬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 두려움의 씨끄러움으로부터 도망하는 자가 구덩이에 빠질 것이다,
그리고 구덩이의 한 가운데로부터 올라오는 자는 덫에 걸릴 것이다;
거기로부터의 위법은 그것 위에서 매우 무거울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추락하고 다시 일어나지 못할 것이다 (이. 24:16-20).
예레미야서에서:
잘 보라, 나는 너희 위에 두려움을 가져온다, 모든 너의 주위로부터 너희는
그의 얼굴들을 향하여 모든 사람을 몰아낼 것이다, 그리고 아무도 배회하는
그를 그러모우지 못할 것이다 (예49:5).
이사야서에서:
우리는 말을 타고 도망할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도망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날랜 (말을)을 타고 도망할 것이다, 그러므로 너를 추격하는 그들은
더 날랜 (말을) 탈 것이다; 일 천 명이 한 명의 꾸짖음에서 도망할 것이다,
다섯 명의 꾸짖음에서 너희는 도망할 것이다 (이. 30:16-17).
위 구절들과 말씀의 여러 구절들에서, 거짓과 악 안에 있는 이들이 “도망함”으로서, 그리고 “죽을까 두려워함”으로서 묘사되고 있다. 그들은 모든 사람을 두려워한다, 그 이유는 그들은 자기들을 보호할 자를 가지지 못하기 때문이다. 악과 거짓 안에 있는 이들은 자기들의 이웃을 미워한다, 하여 그들 모두는 서로를 죽이기를 바라고 있다.

다른 삶에서 악령들의 상태는 악과 거짓 안에 있는 이들이 모든 사람을 두려워한다는 것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자신들로부터 모든 선행을 박탈해버린 악령들은 배회하고, 이 장소 저 장소로 도망다닌다. 그들이 어디로 가든지, 만일 어떤 단체로 간다면, 그들이 단지 오는 것만으로도 그들의 품성을 즉각 지각한다. 그 이유가 그 세계에서는 지각력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악령들은 단체원을 몰아내려 할 뿐 아니라, 심각하게 그들을 처벌하려든다, 그리고 이런 악의를 가지고 할수만 있다면 그들을 죽이려한다. 악령들은 서로를 괴롭히고 벌줌에서 최고의 즐거움을 만끽한다. 이것이 그들의 가장 높은 희열이다. 지금도 악과 거짓 자체가 이런 것의 원인임이 알려지기조차 하지 않았다. 어떤 이가 누군가를 위해 바라면 그것이 자신에게 되돌아온다. 거짓은 그 자체 안에 거짓의 처벌을 가진다. 악은 그 자체 안에 악의 처벌을 가진다. 결과적으로 그들은 이런 처벌의 두려움을 자신들 안에 가진다.

15절. 여호와께서 그에게 말하셨다, 그러므로 가인을 죽이는 자는 누구에게나 그 앙갚음이 일곱 배나 있게 되리라. 그리고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표를 놓아 그를 발견하는 자가 그를 죽이지 못하도록 하셨다.
“가인을 죽이는 자에게는 그 앙갚음이 일곱 배나 있는다”란 분리된 신앙이라 해도 그 신앙에 폭행을 하는 것은 신성한 것을 더럽힘(sacrilege)이 될 것임을 의미한다.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표를 놓아 그를 발견하는 자가 그를 죽이지 못하도록 하심”이란 주님께서 인류의 사용을 위해 신앙이 보존되도록 하기 위해 특별한 방법(particular manner)으로 신앙을 구별해두셨음을 의미한다.

우리가 이 구절의 내적 의미를 명료하게 밝히기 앞서, 필요한 것은 어떻게 이 경우가 신앙과 더불어 있는가를 아는 것이다. 태고 교회는 사랑으로부터 있는 신앙이 아니면 신앙 없음을 인정하는 것이 그들의 특성이었다. 하여 그들은 시랑으로부터의 신앙 외에는 언급조차 꺼려왔다. 그 이유가 주님으로부터 사랑을 통하여 그들은 신앙에 속하는 모든 것을 지각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위에서 이야기한 천적 천사들이 이와 같은 속성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예견된 바, 인류가 이런 특성 속에 있을 수 없다는 것, 신앙이 주님을 사랑함으로부터 분리될 것이라는 것, 그리고 신앙은 그 스스로 교리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하여 설비된 것이 있다. 신앙을 통하여, 즉 신앙에 관한 지식을 통하여, 인간은 주님으로부터 선행을 받을 수 있다는 것, 고로 지식, 또는 들음이 먼저 올 것이다는 것, 그 다음 지식 또는 들음을 통하여, 선행, 즉 이웃을 향한 사랑, 그리고 자비가 주님에 의해 주어질 것이다는 것, 그리하면 선행은 신앙으로부터 분리될 수 없을 뿐 아니라, 신앙 속의 제1의 것을 구성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태고 교회가 가졌던 지각 대신 양심이 계승되고 이 양심은 선행과 결합한 신앙을 통하여 획득된다. 양심은 진리인 것을 받아 적는 것 (지령을 받는 것)이 아니고, 주님께서 말씀에서 그렇게 말하셨기 때문에 진리이다. 홍수 이후 교회들 대부분은 이런 특성 속에 있었고, 주님의 강림 이후 소박한 교회(원시적인 교회, primitive church), 또는 첫 교회 역시 그러했다. 그리고 이를 수단으로 영적 (왕국의) 천사들과 천적 (왕국의) 천사들은 구별되어진다.

인류가 영원한 사망으로 멸하여지지 않도록 위와 같이 예견되어 설비해두셨기에, 여기서 선포되는 것은, 선행으로부터 분리된 신앙이 의미되어지는 가인에게 누구도 폭력을 행사하지 못한다는 것, 더 나아가 표가 가인 위에 놓였다는 것, 이는 그것의 보존을 확실히 하시기 위해 특별한 방식에서 신앙을 구별해두셨다는 것이다. 이것들은 지금까지 밝혀지지 않은 신비이다. 그리고 주님께서 결혼과 고자들에 관련된 것을 말하시는 대목 안에 참조되게 해두셨다. 마태복음서에서:
자기들의 어머니의 자궁으로부터 그렇게 태어나는 고자들이 있다; 그리고
사람들로부터 만들어진 고자들이 있다; 천국의 왕국을 위하여 자신을 고자로 만든
고자들이 있다; [이것을] 받을 수 있는 자, 자기로 하여금 [이것을] 받게 하라
(마. 19:12).
천국의 결혼에서 이들은 “고자들”이라 불리운다; “자궁으로부터 그렇게 태어난” 고자들은 천적 (평면의) 천사들과 유사하다; “사람들로부터 만들어진” 고자들은 영적 (평면의) 천사들과 유사하다; 그리고 “스스로 그렇게 만든” 고자들은 천사 같은 영들과 비슷하다. 이 영들은 선행으로부터 라기보다는 순종으로부터 행한다.

“가인을 죽이는 자에게는 그 앙갚음이 칠 배가 그에게 주어질 것이다”라는 말은 신앙이 분리된 때조차에서도 신앙에 폭력을 행사하는 것은 신성을 더럽히는 것이 된다는 것인데, 이는 선행으로부터 분리된 신앙인 “가인”, 그리고 신성한 숫자인 “일곱”의 의미로부터 분명해진다. 숫자 “일곱”은 거룩함으로 높이 평가되어졌는데, 이는 창조의 육일에 이어지는 일곱째 날로 잘 알려져 있다. 이 일곱째 날은 천적 인간이고, 이 인간 안에 평화, 쉼, 그리고 안식일이 있다. 이로부터 이 숫자는 유대 교회의 예식들 안에서 자주 등장한다. 그리고 신성함이 있는 어느 곳에서든 이 숫자가 발생한다. 그리고 이로부터 시간의 더 큰 기간과 덜 큰 기간이 일곱들로 구별되어져, “주들(weeks)”이라 불리운다. 그리고 메시아의 오심의 큰 간격들인 주도 있다 (단. 9:24-25); 그리고 칠 년의 시간이 라반과 야곱에 의해 “주(week)”라 불려졌다. 이런 이유 때문에, 일곱이 언급되는 어디이든지, 숫자 일곱은 거룩함, 또는 범할 수 없음으로 간주되어졌다. 고로 우리는 다윗서에서 읽는다.
하루에 일곱 번씩 나는 당신을 찬양합니다 (시. 119:164).
이사야서에서:
달의 빛이 태양의 빛 같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태양의 빛은 일곱 날들의
빛 같이 일곱 배일 것이다 (이. 30:26).
위 구절에서 “태양”은 사랑을 , “달”은 사랑으로부터의 신앙을 의미한다. 이 신앙은 사랑 같이 있을 것이다. 인간의 거듭남의 기간들이 일곱에 도착하기에 앞서, 즉 천적 인간이 되기에 앞서 여섯으로 구별되어졌듯이, 인간의 황폐해지는 기간도 천적인 것이 하나도 남아있지 않을 때까지의 기간도 일곱으로 구별되어진다. 이것이 몇 번의 유대인들의 포로됨에 의해, 마지막, 또는 바빌론에의 포로됨에 의해 표현되어졌다. 이 포로됨은 10년씩 일곱, 또는 칠십 년이 지속되었다. 그리고 땅이 그것의 안식을 갖는 것이 일곱 때라고 말해졌다. 똑 같은 것이 느부갓네살을 수단으로 표현되어졌다. 다니엘서에서:
그의 심정은 인간으로부터 바뀔 것이다, 그리고 짐승의 심정이 그에게
주어질 것이다, 그리고 그를 일곱 번 지나갈 것이다 (단. 4:16. 23, 32).
그리고 마지막 때의 황폐해짐에 관하여 계시록서에서:
나는 천국에서 또 다른 크고 경이로운 표시를 보았다. 일곱 천사들이
일곱 재앙들을 가지고 있었다 (계. 15:1, 6-8);
그리고 같은 책에서:
이방인들이 거룩한 성을 일곱을 여섯 번씩, 즉 마흔 두 달을 밟을 것이다 (계. 11:2).
나는 안쪽과 뒤쪽에 쓰여지고, 일곱 봉인으로 봉하여진 책을 보았다 (계. 5:1).
같은 이유 때문에 처벌의 가혹함과 증가되게 함이 숫자 일곱에 의해 표현되어졌다. 모세의 책에서:
만일 너희가 모든 이것 때문에 여전히 나에게 순종하고 싶지 않다면,
나는 네 죄들을 일곱 배로 응징할 것이다 (레레. 26:18, 21, 24, 28).
그리고 다윗서에서:
(그 모독을) 그들의 가슴 안으로 일곱 배로 하여
우리의 이웃들에게 갚아주십시오 (시. 79:12).
지금 신앙에 폭력을 행사하는 것은 신성을 더럽히는 것-이 신앙이 섬김에 사용될 것이라고 말해졌는 바, “가인을 살해하는 자는 누구든지, 앙갚음이 그에게 일곱 배로 하여 되갚을 것”이라 말해졌다.

“여호와께서는 누구도 그를 죽이지 않도록 가인 위에 표를 놓으셨다”는 주님께서 신앙이 보존되도록 특별한 방식으로 신앙을 구별해두셨다가 의미된다는 것은 “표(mark)”, 그리고 구분하는 수단으로 누군가에 “표를 놓는 것”의 의미로부터 분명해진다. 에스겔서에서:
여호와께서 말하셨다, 예루살렘의 한 가운데를 통하여, 성 한가운데를 통하여 가라,
그리고 모든 역겨운 짓 때문에 통곡하고 신음하는 사람들의
이마에 표를 만들어라 (겔. 9:4),
위 구절에서 “이마에 표를 해두는 것”이 그들의 머리들의 앞 부분에 선을 긋거나 점을 찍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을 다른 이들로부터 구분하는 것을 뜻한다. 계시록서에서:
메뚜기들은 이마에 하느님의 표를 가지지 않은 사람들만을
다치게 하는 것이었다 (계. 9:4),
위 구절에서 표를 가지는 것은 구별되는 것을 뜻한다. 같은 책에서 “이마와 손에 표”에 관해서도 읽게 된다 (계. 13:16). 같은 것이 유대 교회에서 손과 이마에 첫째되는 큰 명령을 묶는 것이 표현되어졌다. 모세의 책에서:
들어라, 오 이스라엘아, 우리의 하느님은 한분 여호와이시다; 그리고 너희는
여호와 네 하느님을 네 모든 심정으로, 네 모든 혼으로, 네 모든 힘으로 사랑할 것이다,
그리고 너희는 이 말들을 네 손에 표시하여 묶을 것이다, 그리고 이 말들은 너희
눈들 사이에서 부적으로 있을 것이다 (신. 6:4, 8; 11:13, 18).
이를 수단으로 첫 명령들은 여타 다른 명령들을 사랑함과 구별되어졌다. 따라서 “손과 이마에 표를 함”의 의미가 분명해진다.
이사야서에서:
나는 모든 민족들과 혀들을 그러모으러 온다; 그리고 그들은 와서 내 영광을 볼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들 위에 표를 놓을 것이다 (이. 66:18-19).
그리고 다윗서에서:
오 제게로 돌아서십시오, 그리고 나에게 자비를 베푸십시오, 당신의 힘을 당신의
종에게 주시고, 당신의 몸종의 아들을 구해주십시오. 선을 위해 제게 표를
놓아주십시오, 그리고 나를 미워하는 그들이 보고 부끄러워할 것입니다 (시. 86:16-17).
이상의 구절들 만으로도 표의 의미는 이제 분명하다. 그러므로 가인이라 불리는 특별한 인물 위에 어떤 표가 놓였다는 상상은 하지 않을 것이다. 그 이유는 말씀의 내적 의미는 글자의 의미에서 포함된 것들과 다르기 때문이다.

16절. 그리고 가인은 여호와의 얼굴로부터 떠났다, 그리고 에덴의 동쪽을 향하여 놋의 땅에서 거주했다.
“가인이 여호와의 얼굴로부터 떠났다”란 신앙이 사랑으로부터의 신앙에서 비롯되는 선과 분리되어졌음을 의미한다. “그가 놋의 땅에 거주했다”란 진리와 선의 바깥쪽을 의미한다. “에덴의 동쪽을 향하여”는 이전에 사랑이 통치했던 곳인 지적인 마음 근처를 의미한다.

“여호와의 얼굴로부터 떠났다”는 것이 사랑의 신앙 속의 선으로부터 분리되었음을 의미한다는 것은 14절의 해설에서 보일런지 모른다; “놋의 땅에 거주하는 것”이 진리와 선의 바깥쪽을 의미한다는 것은 놋의 의미가 “방랑자와 도망자”이다는 것, 방랑자와 도망자는 진리와 선이 결핍된 것임으로부터 분명해진다. “에덴의 동쪽을 향하여”는 이전에 사랑이 통치했던 곳인 지적 마음 가까이, 그리고 또한 이전에 선행이 통치했던 곳인 합리적 마음 가까이를 의미한다. 이는 “에덴의 동쪽”의 의미에 관해서 말해진 것, 즉 “동쪽”이 주님이시다는 것, “에덴”이 사랑이다는 것의 의미로부터 분명해진다. 태고 교회인과 더불어 의지와 이해함은 하나였다. 그 까닭은 의지로부터 있는 사랑과 이해함으로부터 있는 신앙 사이를 구분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 그 이유는 사랑이 모든 것의 모두였고, 신앙은 사랑으로부터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앙이 사랑으로부터 분리된 후, 즉 “가인”이라 불리운 이들의 경우 같이, 의지가 더 이상 통치하지 못했다. 그 마음에서는 의지 대신 이해함이, 또는 사랑 대신 신앙이 통치했다. 이것이 가인이 “에덴의 동쪽을 향하여 거주했다”라고 말해지고 있다; 그 이유는 방금 앞서 살핀대로, 신앙이 구별되었기 때문, 즉 인류의 미래에 사용되도록 보존하시려 “신앙 위에 표가 놓였기 때문”이다

17절. 그리고 가인이 그의 아내를 알았다, 그리고 그녀는 임신했다, 그리고 에녹을 낳았다. 그리고 가인은 성을 쌓았는데 그 성의 이름은 그의 아들의 이름을 따라 에녹이라 불렀다.
“가인이 그의 아내를 알았고, 그녀가 임신했고, 에녹을 낳았다”란 이 종파(schism) 또는 이 이단(heresy)이 그 자체 “에녹”이라 불리는 또 다른 종파, 또는 이교 신앙을 생산했음을 의미한다. “그가 지은 성”이란 가인으로부터 나온 교리적인 모든 것과 이단의 모든 가르침을 의미한다. 종파나 이교 신앙이 에녹이라 불려졌기 때문에 “그 성의 이름이 그의 아들의 이름을 따라 에녹이라 불렀다”라고 말해지고 있다.

“가인이 그의 아내를 알았다, 그리고 그녀는 임신했고, 에녹을 낳았다”가 어떤 종파, 또는 이교가 그 자체로부터 또 다른 이교를 생산했다는 것은 이전에 말했던 것으로부터, 그리고 첫 절에서, “사람과 그의 아내 이브가 가인을 생산했다”라는 말로부터 분명해진다; 이렇게 임신과 출생에서 지금의 경우도 앞의 경우와 비슷하다. 이 생산이 교회에 관해서이든, 이교에 관해서이든, 거기로부터 그들은 족보를 만들어냈다. 그 이유가 이것들은 서로에게 유사하게 있기 때문이다. 임신된 한 개의 이교로부터 수많은 이교들이 다시 출생되어진다.

교리물과 가르침을 가진 이교가 “에녹”이라 불렸다는 것은 이 이름으로부터 어느 정도까지는 분명해진다. 이는 가르침이 그렇게 시작했다, 또는 개시되었다를 뜻한다.

“지어진 성”을 수단으로 이 이교로부터 나온 모든 교리물과 이교의 가르침이 의미되었다는 것은 성의 이름이 발생하는 말씀의 모든 구절로부터 분명해진다; 그 이유가 성이 언급되어도 성을 뜻하지 않고 언제나 교리적인 어떤 것, 그 밖의 이교물에 관한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천사들은 성이 무엇인지에, 또는 어떤 성의 이름이 무엇인지에 무지했다; 그런 까닭은 그들은 영적이고 천적인 것만을 생각할 뿐이었기 때문에서이다. 다시 말해 그들은 성이나 성의 이름이 지니는 의미만을 가졌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거룩한 성”, 또는 “거룩한 예루살렘”은 일반적 측면에서의 주님의 왕국, 또는 각 개별적 측면에서는 이 왕국 안에 있는 것이 뜻해진다는 것이다. “성(city)”, 또는 “시온의 산” 역시 비슷하게 이해된다; 후자는 신앙 속의 천적인 것들, 전자는 영적인 것들을 표시한다.
천적 자체와 영적 자체가 “성들”, “궁전들”, “집들”, “(성)벽들”, “(성)벽들의 기초들”, “(성)루벽”, “문들(gates)”, “빗장들”, “성전”에 의해 묘사되어진다 (겔. 48장, 계. 21장 15에서 끝까지를 참조). 계시록의 21:2, 10에서는 거룩한 예루살렘이라 불려진다; 그리고 예레미야서 13:18에서 거룩한 예루살렘으로 취급되고 있다. 다윗서에서 “지극히 높으신 자의 성막들의 거룩한 장소, 하느님의 성”이라 불리운다 (시. 46:4); 그리고 에스겔서에서, “성, 거기 여호와” (겔. 48:35), 이에 관해 이사야서에 쓰여있다:
외국인의 아들들이 당신의 성벽을 세울 것이다. 당신을 경멸한 그들 모두가
당신의 발바닥에서 자신을 구부릴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너를 여호와의 성,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의 시온이라 부를 것이다 (이. 60:10, 14).
스가랴서에서;
예루살렘을 진리의 성으로 부를 것이다;
그리고 시온의 산, 거룩함의 산 (이라 부를 것이다) (슥. 8:3),
위 구절에서 “진리의 성”, 또는 “예루살렘”은 신앙의 영적인 것들을 의미한다; 그리고 “거룩함의 산”, 또는 “시온의 산”은 신앙의 천적인 것들을 의미한다.
신앙의 천적인 것들과 영적인 것들이 성을 수단으로 표현되는 바, 유다의 성들과 이스라엘의 성들 또한 그러하다. 그것들 각각은 그 성의 이름이 불려질 때 그것 자신의 특별한 의미로부터 교리물의 어떤 것을 지닌다. 그러나 내적 의미로부터 외에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 자는 아무도 없다. 교리적인 것들이 “성들”을 수단으로 의미되듯, 이교들 역시 그러하다. 각각 성의 이름에 따라 각각의 성은 특수한 이교적 어떤 견해를 의미한다. 현재로서 우리는 아래의 구절들로부터만 볼 수 있는데, 일반적으로 “성”은 교리적인 어떤 것, 또는 그밖에 이교적인 어떤 것을 의미한다는 것만을 알 수 있다.
고로 우리는 이사야서에서 읽는다:
그 날에 가나안의 입술로 이야기하는 이집트의 토지에 다섯 성들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여호와 체바옫에게 맹세한다; 하나는 멸망(Heres)의 성이라 부를 것이다
(이. 19:18).
위 구절에서 취급된 주제는 주님의 강림 때에서 영적인 것들과 천적인 것들에 관한 기억 속의 지식이다. 그래서 다시, 환상의 골짜기, 즉 공상의 골짜기를 취급할 때:
너는 동요함으로 가득 차 있다, 야단 법석인 성, 떠들썩한 성 (이. 22;2).
예레미야서에서, “남쪽에” 있는 이들에 관해서, 즉 진리의 빛에 있는 이들에 관해서, 그리고 그것을 소멸한 자에 관해서:
남쪽의 성들은 닫혀져 왔었다, 그리고 아무도 그것들을 열지 못할 것이다 (예. 13:19).
여호와께서 시온의 딸의 성벽을 파괴하시기로 작정하셨다; 그러므로 그분은 성벽과
성루가 슬퍼지게 만든다; 그들은 모두 쇠약해졌다. 그녀의 문들은 지면 안으로
가라앉았다; 그분은 파괴하시고 그녀의 빗장들을 부수셨다 (애. 2:8-9),
위 구절에서 “성벽”, “성루”, “문들”, 그리고 “빗장들”을 수단으로 교리적인 것들만이 뜻해짐을 알런지 모른다.
마찬가지 방식에서 이사야서에서;
이 노래는 유다의 토지에서 노래할 것이다, 우리는 튼튼한 성을 가지고 있다;
구원함이 성벽들과 성채들에 놓일 것이다; 너희는 문들을 열어라, 하여 성실을
지키는 의로운 나라들이 안으로 들어갈런지 모른다 (이. 26:1-2).
나는 당신을 드높일 것입니다, 나는 당신의 이름을 고백할 것입니다. 그 이유가
당신은 성을 돌무더기로, 방어하는 성을 페허로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외국인들의
궁전이 성으로 영원히 세워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강한 백성들이 당신을
존경할 것이고, 포악한 민족들의 성이 당신을 두려워 할 것입니다 (이. 25:1-3),
이 구절에서는 특별한 성을 언급하지 않고 있다. 발람의 예언에서:
에돔이 상속자일 것이다, 그리고 야곱으로부터 한 사람이 지배권을 가질 것이다,
그리고 성의 나머지를 파괴할 것이다 (민. 24:18-19),
위 구절에서의 “성”이 성을 뜻하지 않은 것은 누구에게나 자명할 것이다. 이사야서에서:
텅빔의 성은 부셔져 있다; 모든 집은 닫혀 있다, 하여 거리들에
포도주를 두고 외친 자들이 들어갈 수 없다 (이. 24:10-11),
위 구절에서, “텅빔의 성”은 교리의 텅빔을 표시한다; 그리고 “거리들”은 성에 속하는 그밖의 것들, 거짓들이든, 진리들이든 어느 것을 의미한다. 계시록서에서:
일곱째 천사가 그의 대접을 쏟았을 때, 큰 성이 세 부분으로 갈라졌다,
그리고 민족들의 성들이 무너졌다 (계. 16:17, 19).
“큰 성”은 이교적인 어떤 것, “민족들의 성들”도 마찬가지를 표시한다는 것은 모든 이도 아는 바일 것이다. 큰 성이 요한이 본 여인이었다고 설명되었다 (계 19:18); 여인은 앞서 보여준 품성의 교회를 표시한다.

위에서 우리는 성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살폈다. 그러나 창세기의 이 부분 모두가 역사적 형체를 띄고 있어, 글자 의미를 찾는 이들에게는 가인이 성을 건설했고 에녹이라 불렀다는 것 이상의 의미로는 더 비쳐질 수 없다. 그러나 가인이 아담의 첫 출생임에도 불구하고 인구가 상당한 것이 상상되는 바 앞뒤 순서가 맞지 않는 셈이다 (14절 참조); 하여 이 역사적 시리즈의 배경을 살펴두어야 한다. 태고인들은 모든 것들을 표현적 모양 아래 역사적 형체로 배열하는 것에 익숙해 있었다. 그리고 이런 연구는 그들에게 가장 높은 수준의 즐거움이었다. 그 이유가 그렇게 하면 모든 것들이 살아있는 듯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18절. 그리고 에녹에게서 이랏이 태어났다. 그리고 이랏은 므두야엘을 낳았고, 므두야엘은 므드사엘을 낳았고, 그리고 므드사엘은 라멕을 낳았다.
위 이름들은 “가인”이라 불리는 첫 번째 (이교)로부터 파생된 이교들(heresies)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름들 외에는 그들에 관한 잔존하는 기록 같은 것은 없는 바 이름 외에 더 말하는 것은 불필요할 것 같다. 굳이 뭔가 추적하려 한다면 이름이 파생된 근원을 더듬는 정도일 것 같다. 예를 들면 “이랏”은 그가 “성으로부터 내려옴”, 즉 “에녹”이라 불리는 이교로부터 내려옴 정도일 뿐이다.

19절. 그리고 라멕은 두 아내를 취했다. 그 중 한 아내의 이름은 아다였고, 그리고 다른 아내의 이름은 씰라였다.
“라멕”은 순서대로 보면 가인의 여섯 번째에 해당된다. 그에게는 더 이상 어떤 믿음도 있지 않은 바 무용지물(vastation, laid waste)을 의미한다. 그의 “두 아내”는 새로운 교회가 일어서는 것을 의미한다. “아다”는 이 새로운 교회의 천적인 것과 영적인 것의 어머니를, “씰라”는 자연적인 것의 어머니를 의미한다.

“라멕”이 황폐됨을 의미하는 것, 또는 신앙 없음을 의미하는 것은 23-24절로부터, 즉 “나의 부상당함에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에 어린 것을 살해했다”에서 분명해진다; 그 이유가 이 구절에서 “사람”은 신앙을, “어린 것”은 선행이 의미되기 때문이다.

일반적인 교회의 상태는 이런 상황이다. 시간의 경과에서, 교회는 진정한 신앙으로부터 떠나, 황폐되었다고 말해질 수 있는 상태에까지, 즉 신앙이 아예 없는 상태로까지 치닫는다. 이런 과정은 가인족(Cainites)이라 불려진 태고 교회의 경우이다, 또한 홍수 후 고대 교회, 유대 교회와 더불어서도 마찬가지 경우이다. 주님의 강림 때에 이 마지막 상황은 그들이 주님에 관하여 아는 것이 아무 것도 없는 황폐해진 상태였다. 그분이 그들을 구원하시러 오신다는 것, 그분에 대한 신앙 역시 아는 것조차 없었다. 오늘날 이것은 완전하게 황폐되었으므로 그것 안에 남아있는 신앙은 없다. 그럼에도 여전히 남은 것이 있는데 그것은 교회의 핵심에 관한 것이다. 이것을 신앙에 관하여 황폐된 이들은 인정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것은 태고 교회와 함께 있었다. 이 교회로부터의 나머지가 홍수 때까지 남아 있었다, 그리고 홍수 사건 후에도 계속 남았다. 교회의 이 나머지가 “노아”라 불리운다.

교회가 심히 황폐해져 더 이상 어떤 신앙이 없게 되었을 때, 그 때, 전과 달리, 교회는 새로이 시작한다, 즉 새로운 빛이 빛을 발한다, 이것이 말씀에서 “아침”이라 불리운다. 새 빛, 또는 “아침”이 교회가 황폐해질 때까지 빛을 발하지 않는 이유는 신앙의 것들과 선행의 것들이 모독된 것들과 혼합되었기 때문에서 이다; 그리고 그들이 이 상태 안에 남아있는 한, 빛 또는 선행의 어떤 것이 은근히 심어지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 이유는 “가라지”가 모든 “좋은 씨”를 파괴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앙이 없을 때, 신앙은 더 이상 모독되어질 수 없다. 그 이유는 인간은 자기들에게 선포된 것을 더 이상 믿지 않기 때문이다; 인정함도 믿지도 않고 단지 알고만 있는 이들은 모독할 수 없다. 이는 이미 주목해본 바 있다. 이것은 오늘날 유대인들의 경우이다. 이들은 오늘날 기독인들 사이에 사는 결과, 기독인들이 주님이라 부르는 그분이 자기들이 기다린 메시아일지 모른다고 눈치채는 정도일 뿐이다. 하여 여전히 그들은 (메시아가 오신다고) 예상한다. 따라서 그들은 이를 모독할 수 없는데, 그 이유는 그들이 이것을 인정하고 믿지도 않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는 주님에 관하여 들은 적이 있는 모하멭이나 이방인들도 같은 처지이다. 이런 이유로 주님께서는 유대 교회가 인정하고 믿는 것이 전무할 때까지 세상에 오시지 않았다.

위의 경우는 “가인”이라 부르는 이교와 더불어서도 똑같다. 이 이교도 시간이 흐르면서 황폐해졌다. 비록 이 이교가 사랑을 인정했을지라도, 여전히 신앙을 사랑 위에 놓았고, 이로 인해 이 이교도 점진적으로 방황해갔는데, 순서상 여섯째인 라멕에서는 신앙조차 송두리째 부정했다. 이 때가 당도하자, 새 빛, 또는 아침이 빛을 발했다. 그리고 새로운 교회가 만들어졌는데, 이것이 “아다와 씰라”로 명명되어진다. 이들은 “라멕의 아내들”이라 불리웠다. (새로운 교회를 구성하는) 이들인데도 그녀들은 비록 라멕이 신앙이 전혀 없음을 의미할지라도 그의 아내들이라 불리운다. 이는 신앙이 없는 유대인들의 내적 측면과 외적 측면의 교회와 같다. 즉 야곱의 아내들인 레아와 라헬의 경우와 같은데, 레아는 외적 측면의 교회를, 라헬은 내적 측면의 교회를 표현한다. 이 교회들은 비록 둘로 나타나고 있을지라도 여전히 하나이다; 그 이유는 외적 측면, 또는 표현적 측면이 내적 측면으로부터 분리되면, 우상적인 어떤 것, 또는 죽은 것 밖에 더 아니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외적 측면과 함께한 내적 측면은 교회를 구성하고, 하나되기조차 한다. 이와 같은 교회가 여기서 아다와 씰라의 경우이다. 야곱과 그의 후손, 라멕의 경우같이, 신앙이 없게 되었을 때, 교회는 그들과 더불어 남아있을 수 없었다. 그리고 이방인들에게 이동되어졌다. 이방인들은 불신앙으로 살아온 것은 아니고 신앙에 관해 무지함 안에서 살아온 이들이었다. 드문 경우이기는 하지만 교회가 황폐될 때 그들 사이에도 진리들을 가진 이들이 그 안에 있을 수가 있다. 그러나 모든 진리에서 아무 것도 알지 못하고 있는 이들에게로 교회는 이동되어진다. 그 이유가 이들은 조금이라도 아는 자들보다 훨씬 더 신앙을 잘 껴안기 때문이다.

황폐함(vastation)은 두 종류로부터 있다; 첫째로, 아는 이들과 알기를 원하지 않는 이들, 또는 보는 이들과 보기를 원하지 않는 이들, 마치 옛날의 유대인들과 작금의 기독인들 같다; 그리고 둘째로, 자기들의 무지함의 결과로 알지도 못하고 보지도 못하는 이들, 마치 고대와 근대의 이방인들 같다. 황폐함의 마지막 때가 아는 이들과 알기를 바라지 않는 이들, 즉 보는 자들과 보기를 바라지 않는 이들에게 닥칠 때, 새로운 교회가 발생하는데, 이들 사이에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이방인들이라 부르는 이들과 더불어 발생한다. 이것이 홍수 전에 있었던 태고 교회와 더불어, 그리고 홍수 이후 고대 교회와 더불어, 또한 유대 교회와 더불어 일어났다. 전에는 새 빛이 있지 않다가 완전한 황폐 이후 빛을 발한 이유는 이미 말했듯이, 그들이 더 이상 밝히 안 것들을 모독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기들이 진리를 인정도 하지 않고 믿지도 않기 때문이다.

황폐함의 마지막 때와 새로운 교회가 일어나기 전에 존재해야만 하는 것이 예언서들에서 주님에 의해 자주 선포되어지고 있다. 예언서들에서, 신앙의 천적인 것들에 관련하여서는 “황폐함(vastation)”, “황폐케함(laying waste)”; 그리고 신앙의 영적인 것들에 관련하여서는 “황무함(desolation)”이라 불려지고 있다. 또는 “종말(consummation)”과 “끊음(cutting off)”으로도 말해지고 있다. (이. 6:9, 11-12; 23:8-끝까지; 24; 42:15-18; 예. 25; 단. 8; 9:24-끝절까지; 습. 1; 신. 32; 계. 15; 16; 그리고 뒤잇는 장들에서.)

20절. 아다가 야발을 낳았고, 야발은 천막에 거주하는 자의 조상이었고, 육축치는 자의 조상이었다.
“아다”는 신앙 속의 천적이고 영적인 것들의 어머니를 의미함은 이미 위에서 말했다. “야발은 장막에 거주하는 자의 조상이었고, 육축을 했다”란 사랑의 거룩한 것들에 관한 교리, 그리고 그로부터 파생된 선, 즉 천적인 것들을 의미한다.

“아다”를 수단으로 신앙 속의 천적인 것들의 어머니가 의미된다는 것은 그녀의 첫 출생 야발이 “천막에 거주하는 자의 조상, 그리고 육축치는 자의 조상”이라 불리운 것으로부터 분명해진다. 이는 천적 (평면)이다 그 이유는 이것들은 사랑의 거룩한 것들과 사랑에서 파생된 선들이기 때문이다.

“천막에 거주하는 것”이 사랑의 거룩인 것을 의미한다는 것은 말씀에서 천막의 의미로부터 분명해진다. 다윗서에서:
여호와여, 누가 당신의 천막에 거주하겠습니까? 누가 당신의 거룩함의 산에
거주할 것입니까? 직바르게 걷는 사람, 정의를 일삼는 사람, 자기 심정 안에서
진리를 이야기하는 사람(입니다) (시. 15:1-2),
이 구절에서, “천막에 거주하는 것” 또는 “거룩함의 산”에 거주하는 것이 사랑의 거룩한 것들을 수단으로, 즉 직바르게 걷는 것, 정의를 일삼는 것을 수단으로 묘사되어진다. 다시:
그것들의 소식(line)이 온 땅을 통하여 나가고, 그것들의 이야기는 세상의 끝까지
퍼져 간다. 그것들 안에서 그분은 태양을 위하여 천막을 놓으신다 (시. 19:4),
위 구절에서 “태양”은 사랑을 표시한다, 다시:
나는 당신의 천막 안에서 영원히 거주할 것입니다,
나는 당신의 날개의 덮음을 신뢰할 것입니다 (시. 61:4),
위 구절에서 “천막”은 천적인 것을, “날개의 덮음”은 천적인 것에서 파생된 영적인 것을 표시한다. 이사야서에서:
자비를 수단으로 왕좌는 굳건하게 만들어졌다, 그리고 진리 안에, 다윗의
천막 안에 왕좌에 앉으신 이가 심판하시고, 공정을 추구하시고,
정의를 서두르신다 (이. 16:5),
위에서 “천막”은 사랑의 거룩인 것을 표시한다. 이는 “공정, 판결함”, 그리고 “정의를 서두르심”의 언급을 수단으로 볼 수 있을런지 모른다. 다시:
시온을 쳐다 보라, 우리의 지정된 축제의 성이다; 네 눈이 예루살렘,
조용한 주택, 움직이지 않을 천막을 볼 것이다 (이. 33:20),
천국의 예루살렘에 관해 이야기하면서
예레미야서에서:
고로 여호와께서 말하셨다, 잘 보라, 나는 야곱의 천막들로부터의 포로된 자를
다시 데려온다, 그리고 그의 거주지에 자비를 가질 것이다, 그리고 성은 그녀의
자신의 더미 위에 건설되어질 것이다 (예. 30:18);
“천막들로부터의 포로된 자”는 천적인 것의 황폐됨, 또는 사랑의 거룩한 것들의 황폐됨을 의미한다. 아모스서에서:
그 날에 나는 무너진 다윗의 장막을 일으켜 세울 것이다; 그리고 터진 곳을 울타리로 두를 것이다; 나는 그것의 파멸들을 일으켜 세울 것이다, 나는 영원의 날들 안에서 같이 그것을 건설할 것이다 (암9:11),
위에서, “장막”은 천적인 것과 거기로부터의 거룩한 것들을 표시한다. 예레미야서에서:
온 토지가 황폐되어 있다, 갑자기 내 천막들이 황폐되어 있다,
그리고 내 커튼들이 순간에 (황폐되었다) (예. 4:20).
내 천막이 황폐되어 있다, 그리고 모든 나의 끈들이 잡아뜯겼다, 내 아들들이
나로부터 가버렸다, 그리고 그들은 있지 않다; 더 이상 내 천막을 펴줄 자가 없다
그리고 내 커튼들을 쳐줄 자가 없다 (예. 10:20),
위에서 “천막”은 천적인 것들을, “커튼들”과 “끈들”은 천적인 것에서 파생된 영적인 것들을 의미한다. 다시:
그들의 천막들과 그들의 양떼들을 그들이 가져갈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을 위해
그들의 커튼들을, 그들의 모든 그릇들을, 그리고
그들의 낙타들을 끌어갈 것이다 (예. 49:29),
아라비아와 동쪽의 아들들에 관해 이야기 하면서, 이들을 수단으로 천적인 것, 또는 거룩인 것을 소유한 이들이 표현되어졌다. 다시:
시온의 딸의 천막 안으로 주님께서는 불 같은 그분의 분노를 쏟으셨다 (애. 2:4),
신앙의 천적 또는 거룩한 것들의 황폐됨을 이야기한다.
“천막”이 사랑의 천적인 것과 거룩한 것을 표현하기 위해 말씀에서 고용된 이유는 고대 때에 그들은 자기들의 천막 안에서 예배의 거룩한 의식을 수행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이 예배 속의 것들을 모독함으로 해서 천막을 모독하기를 시작했을 때, 성막이 지어졌고, 후에는 성전이 건축되었다, 그러므로 천막은 성막과 성전에 의해 표시된 모든 것을 표현했다. 같은 이유에서 거룩한 사람이 “천막”, “성막”, 그리고 주님의 “성전”이라 불리운다. 천막, 성막, 성전이 같은 의미를 가지는 것이 다윗서에서 분명해진다:
한가지 것을 나는 여호와께 물었다, 나는 추구할 것인 즉, 나는 내 삶의 모든 날들을
여호와의 집 안에 머무르며, 여호와를 달콤함에서 바라보며, 아침 일찍 그분의 성전을
방문하는 것이다; 그분은 악의 날에 나를 그분의 성막 안에 감추어 둘 것이다;
그분의 천막의 은밀한 곳에 나를 감추어 둘 것이다; 그분은 나를 바위 위에
올려놓으실 것이다. 그리고 지금 내 머리를 내 주위의 내 적에 맞서 들어 올리실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분의 천막에서 큰 소리 내어 제물을 바칠 것이다 (시. 27:4-6).
최고 의미에서, 주님의 인간 실체 측면에서의 그분이 “천막”, “성막”, “성전”이시다; 이로부터 모두 각각의 천적 인간도 그렇게 불리운다, 또한 천적이고 거룩한 모든 것도 그렇게 불리운다. 태고 교회가 이 교회 뒤를 잇는 여느 교회보다 주님을 더 사랑했고, 그들은 홀로 살거나 가족 단위로 살았으므로 자기들의 천막 안에서 거룩한 예배를 드렸다. 그러므로 천막은 성전보다 더 거룩한 것으로 생각했는데, 이것이 모독되었다. 그것을 회상하면서 초막절이 제정되었다. (이 절기는) 그들이 땅의 생산물을 그러모을 때, 태고인들 같이, 천막 안에 거주하는 것이다 (레. 23:39-44; 신. 16:13; 호. 12:9).

“육축치는 자의 조상”이 사랑의 거룩한 것들로부터 파생된 선을 의미한다는 것은 이 장의 2절로부터 분명해진다. 2절에서, “양떼의 목자”가 선행의 선을 의미함을 살폈다. 여기서는 “목자(shepherd)” 대신 “조상(father)”이, 그리고 “양떼(flock)” 대신 “육축(cattle)”이라는 단어가 사용되고 있다; 그리고 야발이 조상이라고 말해진 이유인 단어 육축은 천막 바로 뒤를 이어 등장하는 바, 이것은 사랑의 거룩한 것으로부터 나오는 선을 의미한다는 것, 그리고 사람의 주택은 천막이고, 가축의 주택은 가축 우리 임도 뜻하고 있다. 이 구절의 이런 표현들이 사랑의 천적인 것들로부터 있는 선들을 의미하는 것은 말씀의 다양한 구절로부터 분명해진다. 예레미야서를 보자:
나는 내가 그들을 흐트러버렸던 모든 토지들로부터 내 양떼의 남은 것들을
모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들을 그들의 (양)우리(fold) 안으로 데려올 것이다,
하여 그들은 열매가 풍성하고 번성할 것이다 (예. 23:3).
에스겔서에서:
나는 그들을 좋은 풀밭에서 먹일 것이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높은 산 위에
그들의 우리(fold)가 있을 것이다; 거기서 그들은 좋은 우리 안에 누워있을 것이다,
그리고 살찐 목장에서 그들은 이스라엘의 산 위에서 먹을 것이다 (겔. 34:14),
위에서 “우리들(folds)”과 “목장들(pastures)”은 사랑으로부터의 선들을 표시한다, 이로부터 “지방이 많음, 살쪘음(fatness)”이 서술된다. 이사야서에서:
그분은 너희가 지면에 뿌린 너희의 씨에 비를 주실 것이다; 그리고 지면의
생산물로부터의 빵은 살쪄(fat)있고 기름이 가득할 것이다;
그 날에 그분은 너희 가축을 넓은 초장에서 먹이실 것이다 (이. 30:23),
위에서, “빵”은 천적인 것을 의미했다, 그리고 가축이 먹을 초장의 “살찜(fat)”은 천적인 것으로부터 파생된 선들을 의미했다. 예레미야서에서:
여호와께서는 야곱을 되찾으실 것이다, 그들은 높은 시온에 와서 노래할 것이다,
그리고 여호와로부터의 선이 밀을 위해, 새 포도주를 위해, 기름을 위해,
양떼의 새끼들을 위해, 목축떼를 위해 흐를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혼은 물을 댄 동산으로 있을 것이다 (예. 31:11-12),
위에서 여호와의 거룩한 것이 “밀”과 “기름”으로, 거룩함에서 파생된 선이 “새 포도주”와 “양떼의 새끼(sons)들과 목축떼”, 또는 “가축(cattle)”으로 묘사되었다. 다시;
목자들과 그들의 가축의 양떼들이 시온의 딸에게 나올 것이다;
그들은 그녀를 향하여 빙둘러 자기들의 천막들을 칠 것이다;
그들은 각자 자기들의 공간에서 먹일 것이다 (예. 6:3).
“시온의 딸”은 천적 교회를 표시한다, 이 교회로부터 “천막들”, “가축의 양떼”들이 서술되고 있다.

사랑의 거룩한 것들과 이로부터의 선들이 의미되는 것은 이런 사실로부터도 분명해진다. 즉, 야발이 최초로 “천막에 거주하고 육축하는 자”는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 이유가 아담과 이브의 둘째인 아벨을 취급하는 대목에서, 그가 “양떼의 목자”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야발은 순서대로라면 가인으로부터 내려온 일곱째 후손이었다는 점이다.

21절. 그리고 그의 형제의 이름은 유발이었고, 그는 하프와 오르간을 연주하는 모든 자의 조상이었다.
“그의 형제의 이름은 유발이었다”란 아다와 똑 같은 교회 속의 영적인 것들에 관한 교리를 의미하고, “하프와 오르간을 켜는 모든 자의 조상”이란 믿음 속의 선과 진리를 의미한다.

20절은 사랑으로부터 있는 천적 (평면의) 것들을 취급했으나, 21절은 신앙으로부터 있는 영적 (평면의) 것들을 취급하고 있다. 이것들이 “하프”와 “오르간”으로 표현되어졌다. 줄을 사용한 악기들, 하프 같은 악기는 신앙으로부터의 영적인 것들을 의미하는 것은 심사숙고 해보면 분명해진다. 여러 악기들, 또한 노래함이 표현 교회의 예배에서 위와 같은 것들을 표현해준 이유에서, 그 당시에도 많은 성악가와 음악가가 있어 왔다. 천국의 모든 기쁨(joy)이 심정의 즐거움(gladness)을 생산하기에 이것들이 노래를 수단으로 표현되었다. 그리고 이 노래함은 현악기를 수단으로 더욱 효과를 높였다. 심정 속의 모두 각각의 애착이 이렇게 동반되어진다: 애착이 노래를 생산한다, 결과적으로 애착은 노래와 연결되어져 있다. 심정의 애착은 천적 (평면)이나, 그 결과인 노래함은 영적 (평면)이다. 노래함과 노래와 비슷한 것이 영적인 것을 표시하는 것은 두 종류로 된 천사 합창단이 천적 부류와 영적 부류로 되어 있는 것에서 나에게 분명해졌다. 영적 합창단들은 그들이 노래함에 떠는(vibrant) 음색이 있어 천적 합창단으로부터 쉽게 구별되었다. 이 음색은 현악기의 소리에 비교할 수 있다. 이런 등등은 차후 주님의 신성한 자비로부터 말해질 것이다. 태고인들은 천적인 것은 심장의 영역에, 영적인 것은 폐들의 영역에 속한다고 보았다. 그 결과 노래하는 음성, 악기들의 소리도 폐의 영역에 속하는 것으로 분류했다. 이런 생각의 바탕은 심장과 폐가 결혼, 즉 사랑과 신앙의 결혼 같은 것만을 표현하는 것일 뿐 아니라 천적인 천사가 심장의 영역에, 영적인 천사가 폐의 영역에 속한다는 것에 있다. 이와 같은 것이 이 구절에서 뜻해지는 이유는 이 구절의 말들이 모두 하느님의 말씀이다는 원칙 때문이다. 즉 유발이 하프나 오르간을 연주하는 자의 조상이라는 단순한 사실만에 하느님의 말씀을 국한 시키면, 그 말은 아무런 생명도 없고, 생명 없는 것은 말씀 속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는 논리만으로도 알 수 있을런지 모른다.

천적인 것들이 사랑의 거룩한 것들과 이로부터 파생된 선들 이듯, 영적인 것들은 신앙의 진리들과 선들이다; 그 이유가 진리인 것, 뿐 아니라 선인 것을 이해하는 것은 신앙의 범주에 속하기 때문이다. 신앙에 관한 지식들은 위 두 가지(천적, 영적) 모두를 포함한다. 그러나 신앙이 가르치고자 하는 것은 천적 (평면의) 것이다. 신앙이 천적, 영적인 두 평면에 연루되기에, 신앙은 두 악기들, 즉 하프와 오르간에 의해 의미된다. 하프는 현악기인 바, 영적 진리를, 오르간은 현악기와 관악기 중간인 바, 영적 선을 의미한다.

말씀에는 여러 가지 악기들이 등장한다. 각각의 악기는 각기 나름대로의 의미를 지닌다. 이에 관한 세부사항은 주님의 신성한 자비로부터 그 각기 적당한 장소에서 더 설명한다. 여기서는 다윗서에서 말해진 것만을 추가해 본다:
나는 여호와의 천막에서 큰 소리내어 제물들을 바칠 것입니다, 나는 노래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나는 여호와께 찬양을 부를 것입니다 (시. 27:6),
위에서 “천막”은 천적인 것을 표현한다, 그리고 “큰 소리 냄”, “노래함”, “찬양을 부름”은 천적인 것으로부터 파생된 영적인 것을 표현한다. 다시:
여호와에게 노래하라, 오 너희 의로운 자야, 그 이유가 그의 찬양은 곧바른 자를
위해 알맞기 때문이다; 너희는 하프로 여호와께 고백하라, 수금(현악기)으로
노래하고 열 줄로 된 악기로 노래하라. 그분에게 새로운 노래를 부르라,
큰 소리내어 노련하게 연주하라; 그 이유가 여호와의 말씀은 올바르시고,
그분의 모든 일은 진리 안에 있기 때문이다 (시. 33:1-4),
위 구절은 신앙으로부터의 진리들을 표시하는데, 이 진리들에 관련되어 이런 것들이 말해지고 있다.
즉 영적인 것들, 또는 신앙의 진리들과 선들이 하프와 수금, 노래와 이에 유추되는 악기들을 가지고 경축되었다. 그러나 신앙으로부터의 천적인 것들은 관악기, 즉 나팔 같은 것 가지고 경축되었다; 이런 이유로 성전에서 여러 악기들이 사용된 것이다. 하여 이 주제(subject), 또는 저 주제가 어떤 특정한 악기로 경축되었기에, 그 결과 악기가 등장하는 성서 대목에서는 사용된 악기 이름으로도 그 대목의 의미 파악에 도움을 준다.
다시:
나는 수금을 가지고 당신의 진리까지도 고백할 것입니다, 오 나의 하느님;
당신에게 나는 하프를 가지고 찬양합니다, 오 당신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여;
제 입술이 제가 당신을 찬양할 때 노래할 것입니다, 그리고 내 혼을 당신은
되찾으셨습니다 (시. 71:22-23),
위에서 신앙으로부터의 진리들이 의미되었다. 다시:
여호와에게 고백으로 답하라, 우리의 하느님에게 하프로 찬양하라 (시. 147:7);
“고백”은 신앙의 천적인 것과 관계되는데, 그 대상이 여호와이시다. “하프로 찬양을 하라”는 신앙의 영적인 것에 관계를 가지므로 그 대상은 하느님이시다. 다시:
그들이 춤을 추어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하게 하자,
그들이 소고와 하프로 그분에게 찬양을 드리게 하자 (시. 149:3),
위에서 그들이 찬양하는 악기인 “소고”는 선을 의미한다, 그리고 “하프”는 진리를 의미한다.
다시:
나팔 소리로 하느님을 찬양하라; 수금과 하프로 그분을 찬양하라; 소고와 춤으로
그분을 찬양하라; 현악기와 오르간으로 그분을 찬양하라; 큰 소리의 심벌즈로
그분을 찬양하라; 큰 소리내는 심벌즈로 그분을 찬양하라 (시. 150:3-5).
이 악기들은 찬양의 주제 속에 있는 신앙의 선들과 진리들을 표시한다; 각각의 악기가 각각 다른 의미를 갖지 않는다면, 위 구절에서 여러 악기가 언급된 것을 두고 말씀을 신뢰 못할지도 모른다. 다시,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들에 관련하여:
오 당신의 빛과 당신의 진리를 보내소서, 그것들이 저를 인도하게 하소서,
그것들이 저를 당신의 거룩함의 산으로, 당신의 주택으로 데려가게 하소서,
그리고 저는 하느님의 제단으로, 하느님에게 갈 것입니다, 내 드높임으로부터의
즐거움(에서); 그렇습니다, 저는 하프로 당신에게 고백할 것입니다,
오, 하느님, 나의 하느님 (시. 43:3, 4).
이사야서에서, 신앙에 있는 것들에 관련하여, 그리고 그로부터의 지식들에 관련하여:
하프를 가져오라, 성을 돌아다녀라, 연주를 잘하라, 많은 노래를 불러라,
하면, 네가 기억 안으로 불러질지 모른다 (이. 23:16).
계시록서에서 이와 같은 것이 더 명백하게 표현되어졌다:
네 생물과 이십 사 원로들이 어린 양 앞에 엎드렸는데, 그들 각각은 하프와
성인들의 기도인, 향 제물로 가득한 금 대접을 가지고 있었다 (계. 5:8),
위에서 “하프들”은 신앙의 진리들이, “향 제물이 가득한 금 대접”은 신앙의 선을 의미한다. 다윗서에서 악기들을 켜는 것이 “찬양들”과 “고백함들”이라 불리운다 (시. 42:5; 69:31). 그리고 또 다른 구절인 계시록서에서:
나는 많은 물소리 같은 천국으로부터의 음성을 들었다,
그리고 나는 자기들의 하프를 가지고 연주하는 하프 연주자들의 소리를 들었다,
그리고 그들은 새로운 노래를 불렀다 (계. 14:2-3).
그리고 또 다른 대목에서:
나는 하느님의 하프를 가지고 유리 바다에 서 있는 그들을 보았다 (계. 15:2).
이런 점은 알아두면 유익할 것 같다. 즉 천사들과 영들은 선과 진리에 관련된 자기들의 차이에 따라 소리들을 구별하는데, 이 소리들을 노래하고 악기들을 켬으로 생산한다, 아울러 음성들도 생산한다; 그리고 그들은 소리가 똑 같은 자는 아무도 없음을 인정한다. 하여 소리들, 악기들의 소리는 각자가 지닌 선하고 참된 것의 본래의 모습에 일치하고 있다.

22절. 그리고 씰라, 그녀는 두발-가인을 낳았고, 놋쇠와 쇠를 다루는 모든 기술공의 선생이었다. 그리고 두발-가인의 누이는 나아마였다.
“씰라”는 새로운 교회의 자연적인 것들의 어머니를 의미함은 이미 말했다. “두발-가인, 구리와 쇠를 다루는 모든 기술공의 선생”이란 자연적인 선과 진리에 관한 교리를 의미한다. “놋쇠”는 자연적 선을, “쇠”는 자연적 진리를 표시한다. “나아마, 두발-가인의 누이”란 두발-가인과 유사한 교회, 또는 그 교회의 바깥쪽에 관한 자연적 선과 진리에 관한 교리를 의미한다.

이 구절에 있는 새로운 교회가 어떠한 경우인지는 내적 측면과 외적 측면 모두를 가졌던 유대 교회의 형성 과정을 들여다 보아 알 수 있을 것 같다; 내적 교회는 천적인 것들과 내적인 것들로, 외적 교회는 자연적인 것들로 각기 구성된다. 내적 교회는 라헬에 의해, 외적 교회는 레아에 의해 표현되었다. 그러나 야곱, 또는 야곱보다는 오히려 말씀에서 “야곱”으로 지칭되는 그의 후손은 외적인 것들만을 바라고 있었고, 예배 역시 외적인 것만을 중요시했기에, 레아가 라헬에 앞서 야곱에게 주어졌다; 그리고 침침한(blear) 눈을 지닌 레아에 의해 유대 교회가 표현되어졌다. 그리고 라헬에 의해 이방인들로 부터의 새로운 교회가 표현되었다. 이런 연유로 “야곱”은 예언서들에서 두 의미를 지니고 있다. 하나는 뒤집힌 상태의 유대 교회를, 또 하나는 이방인들의 진정한 외적 교회이다. 내적 교회가 의미되었을 때, 그는 “이스라엘”로 불렸다; 이런 주제들은 차 후 주님의 신성한 자비로 더 말할 것이다.

두발-가인이 “모든 기술공의 선생(instructor)”이라 불리운다. 즉 “야발과 유발”의 경우는 “조상(father)”이라 불렀는데, 여기서는 아니다; 그 이유는 천적인 것과 영적인 것, 또는 내적인 것들이 (두발 -가인에) 앞서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야발과 유발의 경우는 내적인 것들이 (그 두 사람에) 앞서 존재했기에 이를 표시하고자 이 두 사람에게는 “조상”이라는 단어가 사용된 것이다. 이에 반해 자연적, 또는 외적인 것들은 (그들 모두에) 앞서 존재했고, 지금은 단지 내적인 것에 응용되는 것 뿐이다. 하여 두발-가인은 “조상”이 아닌 “선생”이라 불리우고 있다.

말씀에서 “기술공”은 슬기롭고 총명하며, 박식한 사람을 의미한다. 이 구절의 경우, “놋쇠와 쇠를 다루는 모두 각각의 기술공”은 자연적 선과 진리에 친숙해 있는 사람들을 의미한다. 계시록서에서:
이렇게 사정봐줌 없이 이 큰 도성 바빌론은 내던져졌다, 그리고 더 이상 발견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하프 연주자들, 그리고 음악가들, 그리고 피리부는 사람들,
그리고 나팔부는 사람들의 음성이 더 이상 너에게 들리지 않을 것이다; 공예품을
다루는 어떤 장인(기술공)도 더 이상 너에게서 발견되지 않을 것이다 (계. 18:21-22).
위 구절에서 “하프 연주자”는 진리들을; “나팔 부는 자”는 신앙의 선들을; “공예품을 다루는 기술공”은 알고 있는 자, 또는 진리와 선에 관한 기억 속의 지식을 각각 의미한다. 이사야서에서:
기술공이 새긴 (우)상을 녹여 만든다, 그리고 제련공이 그 상에 금을 뿌린다,
그리고 은사슬을 달아준다; 그는 새긴 상이 움직이지 않도록 준비하려고
슬기로운 기술공을 구한다 (이. 40:19-20),
위 구절은 공상으로부터 자신들을 위해 거짓인 것-새긴 상-을 날조하고, 그것이 진리라고 나타나도록 그것을 가르치는 이들에 관한 것이다.
예레미야서에서:
그들은 얼이 빠져 있으면서 동시에 멍청하기도 하다, 무익한 교리들, 그것은 나무토막 밖에
더 아니다. 두드려서편 은은 다르싯에서, 금은 우바스로 부터 샀다, 기술공의 작품,
그리고 제련공의 손 작업; 그것들 모두는 잔재주 부리는 자의 일이다 (예. 10:1, 8-9),
위 구절은 거짓들을 가르치는 이들, 자기의 발명품을 말씀으로부터 모은 말들 가지고 날조하는 이들이다, 그러므로 이것이 “무익한 교리”라고 불리우고 “잔재주 부리는 자의 일”이라 불리운다. 이런 인물들으 고대 때에는 우상을 만드는 기술공으로 표현했다. 이 우상들, 거짓들을 기술공들이 금으로, 즉 선으로 장식했다; 은으로, 또는 진리의 외관으로 꾸몄다; 그리고 청색 (옷)으로, 의복으로, 또는 눈에 보이게 일치하는 자연적인 것으로 입혔다.

“놋쇠(brass)”가 자연적 선을 의미한다는 것은 오늘날 알려져 있지 않다. 또한 말씀에서 언급되는 모든 금속이 각기 특별한 내적 의미를 가지고 있음도 알려져 있지 않다. “금”은 천적 선을; “은”은 영적 진리를. “쇠”는 자연적 진리를; 그 외 다른 금속도 마찬가지, 그리고 “나무(wood)”와 “돌”도 마찬가지 이다. 증거궤에서, 성막에서, 성전에서 이런 저런 금속과 나무, 돌이 각기 특별한 의미에서 사용되었는데, 이에 관하여는 차후 주님의 신성한 자비로부터 살필 기회가 있을 것이다. 아래에서 몇 인용구절 가지고 일부만을 살펴보자. 이사야서로부터 :
너희는 이방인들의 젖을 빨 것이다, 그리고 왕들의 가슴을 빨 것이다. 그 이유가 나는
놋쇠를 위해 금을, 쇠를 위해 은을, 나무를 위해 놋쇠를, 돌을 위해 쇠를 가져올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네 공물을 평화로, 네 강요자를 의로운 자로 만들 것이다 (이. 60:16-17),
위 구절은 주님의 강림, 그분의 왕국, 천적 교회를 취급하고 있다. “놋쇠를 위해 금”이란 자연적 선을 위해 천적 선을; “쇠를 위해 은”이란 자연적 진리를 위해 영적 진리를; “나무를 위해 놋쇠”란 육체적인 선을 위해 자연적 선을; “돌들을 위해 쇠”란 감각적 진리를 위해 자연적 진리를 가져다 주시겠다는 의미이다. 에스겔서에서:
야완, 두발, 메섹, 이들은 네 상인들이었다, 사람의 혼들,
그리고 놋쇠의 그릇들을 가지고 너와 장사했다 (겔. 27:13),
위 구절은 두로에 관해 말하고 있는데, 이 구절을 수단으로 영적, 천적 부유함을 소유한 이들이 의미되었다; “놋쇠 그릇들”은 자연적 선들이다.
모세의 책에서:
토지의 돌들은 쇠이고, 거기의 산으로부터 너희는 놋쇠를 캘 것이다 (신. 8:9),
위 구절의 “돌들”은 감각적 진리를, “쇠”는 자연 평면, 즉 합리적 진리를; 그리고 “놋쇠”는 자연적 선을 표시한다. 에스겔이 보았다:
살아있는 4 창조물들, 또는 그룹들, 이들의 발은 닦아 광을 낸 놋쇠 같이 번득거렸다
(겔. 1:7),
위 구절의 “놋쇠”는 자연적 선을 의미한다, 그 이유가 인간의 “발”이 자연적인 것을 표현하기 때문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다니엘에게 나타났다:
아마포 옷을 입은 사람, 그의 허리는 우바스의 금으로 띠를 둘렀다, 그의 몸은
녹주석(beryl) 같았다, 그의 팔과 발은 닦아 광을 낸 놋쇠의 겉모습 같았다 (단. 10:5-6).
“구리뱀(민. 21:9)”이 주님의 감각적이고 자연적인 선을 표현했다는 것을 위 구절로부터 알런지 모른다.

“쇠”가 자연적 진리를 의미하는 것은 에스겔이 두로에 관해 말한 대목으로부터 분명해진다:
다시스는 네 교역자였다. 그 이유는 그것에 은, 쇠, 주석, 납 등의 많은 재물들(riches)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너의 거래업자였다. 단, 야완, 그리고 우잘(Meusal)이
네 교역에 빛나는 쇠를 공급했다; 계피(cassia)와 창포(calamus)가 네 장터에 있었다
(겔. 27:12, 19).
위 구절에서 천적, 영적 재물이 의미되었다; 그리고 각 표현들, 이름만 언급하고 있어도 거기에는 특별한 의미를 가진다. 그 이유는 주님의 말씀은 말 뿐이 아닌 영적 차원을 말씀 안에서 취급하기 때문이다.
예레미야서에서:
누가 쇠, 북쪽으로부터의 쇠를, 그리고 놋쇠를 부술 수 있느냐? 네 물질과 네 보물들을
나는 댓가없이 전리품으로 줄 것이다, 그 이유는 너의 죄들 때문이다 (예. 15:12-13),
위 구절의 “쇠”와 “놋쇠”는 자연적 진리와 선을 의미한다; 이것이 북쪽으로부터 왔다는 것은 감각적이고 자연적 수준인 것이다는 말이다; 그 이유가 자연적 수준인 것은 천적, 영적 수준에 비교해보면 상대적으로 짙은 어둠 같기 때문이다 (즉 빛이 밝은 남쪽에 비해 “북쪽”은 어둡다); 또는 그늘같다, 이것이 여기서 “어머니”인 “씰라”를 수단으로 의미되어져 있다. “물질(substance)”과 “보물”은 천적, 영적 재물이다.
다시 에스겔서에서:
너는 쇠냄비를 가져오라, 그리고 그것을 너와 성 사이에 쇠벽으로 삼을 수 있게
놓아라, 그리고 네 얼굴을 그것을 향하여 놓아라, 그리고 포위 공격한 것 같이
그것을 있게 하라, 그리고 너는 그것을 옥죄게(straiten) 하고 있어라 (겔. 4:3),
위 구절을 보면 “쇠”는 자연적 진리를 의미한다. 강함이 진리의 속성이라 말해지는데, 그 이유는 쇠의 강도에 버텨낼 (물질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이유 때문에, 쇠를 수단으로 진리, 또는 신앙 속의 진리가 의미되는데, 이것이 “조각으로 부수어진다” 그리고 “바스라진다”고 다니엘서 2:34, 40에서 기록되고 있고, 계시록서에서는:
이겨내는 자, 그에게 나는 민족들을 다스리는 주권을 줄 것이다. 하여 그는 그들을
쇠막대를 가지고 그들에게 풀을 먹일런지 모른다; 마치 그들이 옹기장이의
그릇들을 산산이 부수듯이 말이다 (계. 2:26-27).
여인이 남자 아이를 생산했다, 이 아이는 쇠 막대를 도구로해서 모든 민족들에게
풀을 뜯게 할 것이다 (계12:5).
“쇠 막대”란 주님의 말씀으로부터 있는 진리임이 계시록에서 설명되고 있다:
나는 천국이 열려있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잘 보니, 흰 말이, 그리고 그(말) 위에
앉으신 분은 성실과 진실이라 불리셨다, 그리고 정의 안에서 그분은 심판을 행하시고
싸우신다; 그분은 피에 담근 의복으로 입으셨다, 그리고 그분의 이름은 하느님의
말씀이라 불리었다; 그분의 입으로부터, 날카로운 검이 나온다, 그것 가지고 그분은
민족들을 쳐죽이셨다; 그리고 그분은 쇠 막대를 가지고 그들에게 풀을 먹이신다
(계. 19:11, 13, 15).

23절. 그리고 라멕이 그의 아내들, 아다와 씰라에게 말했다, 내 목소리를 들어라, 너희 라멕의 아내들이여, 그리고 너희 귀를 가지고 내 연설을 지각하라. 그 이유는 내가 나의 부상을 인하여 남자를 죽였고, 내 상처로 인해 어린 것을 살해했기 때문이다. “라멕”은 무용지물, 황폐함을 의미함은 이미 말했다. 그가 “그의 아내들, 아다와 씰라에게 너희 귀를 가지고 내 연설을 지각하라 라고 말했다”란 고백을 의미하는데, 이 고백은 라멕의 “아내들”로 의미되는 교회가 있는 곳에서만 만들어 질 수 있다는 것이다. “내가 내 부상을 인해 사람을 죽였다”란 그가 신앙을 소멸시켰음을 의미한다. 그 이유는 “사람”이 신앙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내 상처로 인해 어린 것을 살해했다”란 그가 선행을 소멸시켰음을 의미한다. “부상”, “상처”란 더 이상 온전함이 없음을 의미한다. “부상”은 신앙이 황폐되었음(desolated)을, “상처”는 선행이 황폐되었음(devastatied)을 의미한다.

이 절의 내용과 다음 절을 보면, “라멕”은 황폐되었음을 의미함이 분명하다; 그 이유가 그는 말하기를, 자기는 “사람을, 어린 것을 죽였다”고, 그리고 “가인을 위해서는 일곱 배, 라멕을 위해서는 “칠십 칠 배”로 앙갚음한다 라고 했기 때문이다

남자가 신앙을 의미하는 것은 이 장 1절, 이브가 말한 것, 그녀가 가인을 낳았을 때, “나는 남자, 여호와(로부터) 얻었다”로부터 분명해진다; 신앙으로부터의 교리가 “남자, 여호와”라 불렸다. 이미 살핀 바 같이, 남자, 또는 남성은 이해력을 의미하고, 이해력은 신앙 속에 있다. 그가 “어린 것” 또는 “어린 아이”라 부른 선행을 소멸했다가 뒤이어지고 있다. 그 이유는 신앙을 부정하고 살해하는 자는 동시에 신앙으로부터 태어나는 선행 역시 부정하고 살해하기 때문이다.

말씀에서 “어린 것” 또는 “어린 아이”는 순진, 그리고 선행 또한 의미한다. 그 이유가 진정한 순진은 선행없이 존재할 수 없고, 진정한 선행은 순진없이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순진에는 세 등급이 있는데, 말씀에서, “젖먹이(suckling)”, “유아(infant)”, “어린 아이들(little children)”에 의해 의미되었다; 진정한 순진이 진정한 사랑, 또는 선행 없이는 존재하지 못하는 바, 세 가지 순진에 수반되는 사랑도 세 등급들이 있다. 즉 어머니, 또는 유모를 향한 온유한 사랑인 젖먹이의 사랑, 그 다음 부모를 향한 사랑인 유아의 사랑, 그 다음 선행, 이는 선생님을 향한 사랑인 어린 아이의 사랑과 비슷하다. 고로 이것이 이사야서에서 말해진다: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살 것이다, 그리고 표범이 염소 새끼와 함께 누워 있을
것이다; 그리고 송아지, 그리고 어린 사자, 그리고 비육 가축도 함께,
그리고 어린 아이가 그것들을 인도할 것이다 (이. 11:6).
위에서 “어린 양”, “염소 새끼”, 그리고 “송아지”는 순진과 사랑의 세 등급을 의미한다; “이리”, “표범”, “어린 사자”는 그 반대이다; 그리고 “어린 아이”는 선행이다. 예레미야서에서:
너희는 너희 혼들에 맞서 이 큰 악을 저질러 너희로부터 남자와 아내, 유아와
젖먹이를 유다 한 가운데로부터 잘라내어 하나도 남지 않게 한다 (예. 44:7).
“남자와 아내”는 이해함과 의지로부터의 것들, 또는 진리와 선에 속한 것들을 표시한다; 그리고 “유아와 젖먹이”는 사랑의 첫째 등급을 표시한다. “유아”와 “어린 아이”가 순진과 선행을 표시하는 것은 누가복음서에서 주님으로부터 분명해진다:
사람들이 그분에게 유아들을 데려왔다, 그분이 그들을 만지도록 하려 해서 였다:
그러나 [그분의] 제자들이 이것을 보았을 때, 제자들은 데려온 자들을 나무랬다.
그러나 예수께서 그분에게로 그들을 불렀다, 그리고 말했다, 어린 아이가 나에게
오게 내버려두라, 그들을 금하지 말라: 그 이유가 하느님의 왕국은 이와 같음으로부터
있기 때문이다. 참으로 나는 네게 말한다, 어린 아이 같이 하느님의 왕국을
받지 않는 자는 누구든지 결단코 그 안에 들어가지 못한다 (눅. 18:15-17).
주님 자신이 “어린 아이”, 또는 “아이”라 불리우신다 (이. 9:6), 그 이유는 그분이 순진 자체이시고 사랑 자체이시기 때문이다. 같은 구절(9:6)에서 그분이 “경이로우신 분, 상담자, 하느님, 영웅, 영원하신 아버지, 평화의 제 1 인 자”라고 말해지시고 있다.

“부상(wound)”과 “상처(bruise)”에 의해 더 이상 온전함(soundness)이 없음이 의미되는 이유는, “부상”은 신앙이 황폐됨을, “상처”는 선행이 황폐됨을 각기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부상”은 “남자”를 서술하고, “상처”는 “어린 것”을 서술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신앙과 선행의 황폐됨이 이사야서에서 마찬가지로 묘사되고 있다:
발바닥부터 머리까지 그것 안에는 온전한 것이 없다; 그러나 부상과 상처와
갓만들어진 종기를 그들은 짓눌러 짜지도 않고, (천으로) 감아주지도 않고,
기름으로 누그러지게 하지도 않는다 (이. 1:6).
위 구절에서 “부상”은 황폐된 신앙을 서술하고 있다, “상처”는 황폐된 선행을, 그리고 “종기”는 황폐된 신앙과 선행 모두를 서술하고 있다.

24절. 만일 가인을 위해 일곱 배의 앙갚음이 있다면, 진실로 라멕을 위해서는 칠십 칠 배의 앙갚음이 있을 것이다.
이 말들은 그들이 “가인”으로 의미되는 신앙을 소멸했음, 즉 폭력을 휘둘러 신성한 것을 더럽혔음을 의미한다. 이와 동시에 신앙을 통하여 태어나질 선행을 소멸했음, 즉 더 중대한 신성한 것에 속하는 것인 선행을 소멸했음을 의미한다. 이런 연유로 죄가 있었는 바 이것이 “칠십 칠 배의 앙갚음”이다.

“일곱 배로 앙갚음”인 가인의 경우는 “가인”에 의해 뜻해진 분리된 신앙에 폭력을 휘둘러 신성이 더럽혀짐을 의미하는데, 이는 15절에서 살핀 바 있다. 그리고 “칠십 칠 배의 앙갚음”은 훨씬 더 큰 신성을 더럽힘이고, 이에 대한 결과는 지옥에 확실히 감이다. 이는 “칠십 칠 배”의 의미로부터 분명해진다. 숫자 “일곱”이 거룩이다는 것은 “일곱 째 날”이 천적 인간, 천적 교회, 천적 왕국, 그리고 최고 높은 의미에서 주님 자신을 의미한다는 사실로부터 근원한다. 이로부터 숫자 “일곱”은, 말씀 어디에서 이든, 거룩인 것, 또는 가장 신성한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 거룩(holiness)과 신성(sanctity)은 문맥에 따라 있거나 또는 그것을 서술하거나 한다. 이로부터 숫자 “칠십”의 의미도 오고 있다. 칠십은 일곱 시대들을 함유하고 있다; 말씀에서, 한 시대(age)는 십 년이다. 가장 거룩한 어떤 것, 또는 신성한 어떤 것이 표현되어질 때, “칠십 칠 배”로 말해진다. 사람이 자기 형제를 일곱 번 까지만 용서하지 말고 일흔 번씩 일곱 번을 용서하라고 주님께서 말하신 경우가 이에 해당될 것이다 (마. 18:22). 이는 그들이 죄짓는 만큼 용서도 많아야 할 것, 하여 용서함은 끝이 없을 것, 또는 영원히 있을 것, 그러하니 이것은 거룩이다는 것이 뜻해진다. 여기서의 경우, 라멕은 “칠십 칠 배로 앙갚음될 것”이란 지옥에 떨어짐을 뜻한다. 그 이유는 최고로 신성한 것을 위반했기 때문이다.

25절. 그리고 사람(homo)이 그의 아내를 다시 알았고, 그녀는 아들을 낳았고, 그의 이름을 셋이라 불렀다. 그 이유는 하느님께서 나에게 아벨 대신 또 다른 씨를 지명하셨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가인이 아벨을 살해했기 때문이다.
“사람(homo)”과 그의 “아내”는 이 구절의 경우 “아다와 씰라”로 의미된 새 교회(the new church)를 뜻한다; 그리고 그녀의 “아들”, 그의 이름은 셋인데 그는 새로운 신앙(a new faith)을 의미하고 이 신앙을 수단으로 선행이 획득될 수 있을런지 모른다. “하느님께서는 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에 또 다른 씨를 지명했다”란 가인이 분리했고 소멸했던 바로 그 선행이 이 교회에 주님에 의해 주어졌음을 의미한다.

이 구절의 “사람과 아내”가 19절의 아다와 씰라에 의해 의미된 새 교회(the new church)를 뜻하는 것은 글자 의미로부터 알 수 있거나 추리할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다. 그 이유는 “남자와 그의 아내”는 앞서 이미 태고 교회와 그 후손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를 내적 의미에서 살피고, 더불어 5:1-4에서 남자와 그의 아내, 그들이 낳은 셋이 다시 언급되는 대목으로부터 위의 의미는 분명해진다. 물론 5장의 언급이 이 절과 단어까지 같은 것은 아니고, 이 경우, “남자와 그의 아내”가 태고 교회의 첫 후손으로 의미되고 있다. 만일 이 구절이 앞서 있는 구절의 반복에 불과하다면, 다시 언급되지 않았을 것은 누구나 어렵지 않게 짐작될 것이다. 예를 들면, 창세기 1장에서, 사람의 창조, 땅의 열매들, 짐승들의 창조를 가지고 영적 인간의 창조가 취급되었는데, 2장에 들어서서, 다시 천적 인간을 취급하면서도 비슷한 것이 다시 거론되는 경우이다. 어떤 반복이 사람이든, 사물이든 있을 경우, 거기에는 각기 다른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의미의 구별과 파악은 내적 의미 외에는 가능하지 않다. 이 구절에서는 연결됨 자체가 주어져왔었던 의미를 확증하게 해준다. 추가로 고려해 볼 것은, 남자와 그의 아내라는 용어는 부모격인 교회인지 의문시되고 있다 (토의 중에 있다)를 의미하는 일반적 말투(term)이다는 점에 대해서이다.

그녀가 셋이라 이름 지은 그녀의 “아들”에 의해 새로운 신앙, 그리고 이 신앙을 수단으로 선행이 달성될 수도 있다가 의미되어 있다는 것은 전에 이미 서술한 것과 가인에 관련된 것, 즉 그에게 표를 놓아 아무도 그를 죽이지 못하도록 하셨다는 것으로부터 분명해진다. 그 이유는 시리즈로 서 있는 주제가 다음과 같기 때문이다: 사랑으로부터 분리된 신앙은 “가인”에 의해; 선행은 “아벨”에 의해 의미되었다; 그리고 분리된 상태에 있는 신앙이 선행을 소멸함이 가인이 아벨을 죽임에 의해 의미되었다. 선행이 주님에 의해 이식되기 위해 신앙이 보존됨이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표를 놓아 누구도 그를 죽이지 못하게 하심에서 의미되었다. 이후 사랑의 거룩한 것과 사랑으로부터 파생된 선한 것이 신앙을 통하여 주님에 의해 주어지는 것이 아다가 낳은 야발에 의해 의미되었다; 그리고 신앙의 영적 (평면)이 주어진 것이 야발의 형제 유발에 의해 의미되었다; 그리고 이 둘로부터 자연적 선과 진리가 왔는데, 이것이 씰라가 낳은 두발-가인에 의해 의미되었다. 그리고 창세기 4장을 결말짓는 마지막 두 절에서, 우리는 지금까지의 모든 요약을 가진다. 즉 “남자와 그의 아내”에 의해 앞서(19절) 아다와 씰라라고 불리었던 새로운 교회(the new church)가 의미되고, 셋에 의해 신앙을 통해 선행이 이식됨이 의미되고, 이어 26절에서, “에노스”에 의해 신앙을 통해 이식된 선행이 의미되었다.

“셋”은 이 구절에서 새로운 신앙, 즉 선행을 오게 하는 신앙이 의미되는데, 이는 그의 이름으로부터 설명되어진다. 이 이름은 “하느님께서 가인이 살해한 아벨 대신 또 다른 씨를 지명(appoint)”하셨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하느님께서 “또 다른 이름을 지명하셨다”는 것은 주님께서 또 다른 신앙을 주셨다는 것을 뜻한다; “또 다른 씨”란 선행을 오게 하는 신앙이다. “씨”가 신앙을 의미하는 것은 255항에서 살폈다.

26절. 그리고 셋에게, 그에게도 역시 아들이 태어났다. 그리고 그는 그의 이름을 에노스라 불렀다. 그때에 그들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했다.
“셋”은 선행을 있게 하는 신앙을 의미함은 이미 말했다. 그의 “아들”의 이름은 “에노스”인데 그는 신앙의 제 1의 원리가 선행임을 주목해서 보는 교회를 의미한다. 그때에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했다란 이 교회가 선행으로부터 예배함을 의미한다.

“셋”에 의해 선행을 오게 하는 신앙을 의미함은 앞 부분에서 이미 언급했다. 셋의 “아들, 에노스”는 선행을 신앙의 제 1의 원리로 중요시하는 교회를 의미함은 앞에서 살폈고, 또한 “에노스”로 그의 이름이 불리는 것에서 분명해진다. 에노스는 “인간(man, 또는 person)”을 뜻하는데, (엄밀히 말하면) 이는 천적 인간은 아니고, 영적 본성을 지닌 인간(human with spiritual nature)이다. 이 이름 바로 뒤를 이어 같은 의미를 지니는 표현, “그때 그들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했다”에서도 더 분명해진다.

바로 위에 인용한 말들이 선행으로부터 있는 이 교회의 예배를 의미한다는 것은 “여호와의 이름을 부름”이 그 당시 주님을 예배함에 대한 관습적, 일반적 언어 스타일이다는 사실로부터 분명해진다; 그리고 이 예배가 선행으로부터 있었다는 것은 앞 부분에서는 주님이 “하느님”으로 불리우다가 여기서 “여호와”로 불리우는 것에서도 알 수 있다. 주님은 선행으로부터가 아니면 예배되어질 수 없다. 그 이유는 진정한 예배는 선행으로부터가 아니면 심정으로부터가 아닌 단지 입술로만으로는 가당치 않기 때문이다. “여호와의 이름을 부름”이 주님에 대한 모든 예배의 언어상의 관습적 형체인 것은 말씀으로부터 나타난다; 아브라함의 경우, “그는 여호와께 제단을 건설했다, 그리고 여호와 이름을 불렀다” (창. 12:8; 13:4); 그리고 그는 “브엘세바에 상수리나무를 심었다, 그리고 거기서 영원하신 하느님,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 (창. 21:33). 이 표현이 모든 예배를 표현하는 것은 이사야서로부터 명백하다:
여호와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께서 말하셨다, 너는 나를 부르지 않았다, 오 야곱아,
그러나 너는 나를 피곤해 있게 하여 왔다, 오 이스라엘아, 너는 나에게 태워바치는
제물로 작은 가축을 가져 왔다, 너는 네 제물을 가지고 나를 존경하지 않았다. 나는
공물을 가지고 나를 섬기라고 시키거나, 향을 피우느라 네가 피곤해지라고 시킨적이 없다
(이. 43:22-23),
위 대목에서 모든 표현 뿐인 예배(representative worship)에 관한 요약이 주어져 있다.

(무당이 주문을 외우는 식 같이) 여호와의 이름을 불러 탄원하는 것이 이 때 당시 개시되었다고 (상상해서는) 안된다. 이에 관하여는 태고 교회에서 언급되었다. 즉 태고 교회는 주님만을 숭배하고 예배했을 뿐 여느 다른 어떤 것(신들)들은 생각조차에도 없었다. 또한 아벨이 양떼의 맏배를 공물로 가져온 것도 보태어 생각하면 될 것이다; 따라서 이 구절의 “여호와의 이름을 부름”은 새 교회(the new church)의 예배를 의미하는 것이지 더 다른 것은 아니다. 즉 앞의 교회가 “가인”과 “라멕”이라고 불리는 이들에 의해 절멸된 이후 있어진 새 교회의 예배다는 말이다.

위에 설명한 이 장의 내용들로부터 미루어 분명해지는 또 하나는 태고 시대 때에, 태고 교회로부터 갈라져 나간 많은 교리들과 이교들이 있었을 것이라는 점이다. 이들의 그 각각도 나름대로의 이름을 가졌다는 것, 그리고 이들도 어쩌면 오늘날보다 훨씬 더 심오한 생각의 성과를 올렸을 확률도 높다는 점이다. 그 이유는 그때의 사람들이 최고로 여긴 것이 (요즈음 부자되고 잘난 사람됨이 인간의 목표인냥 되어버린 것의 반대인) 주님을 생각함, 주님을 섬김이었기 때문이다.
***************************************************

창세기 제 5 장

성경: 창세기 제 5 장

1. 이것은 사람의 출생들에 관한 책이다. 하느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셨던 그 날, 그분 은 하느님의 모습대로 그를 만드셨다.
2. 그분은 그들을 남성과 여성으로 창조하셨고, 그리고 그분은 그들에게 복을 주셨고, 그리고 그들이 창조되던 그날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부르셨다.
3. 사람은 일백 삼십 년을 살았다. 그리고 그의 형상을 따라 그의 모습대로 낳았고, 그의 이름을 셋이라 불렀다.
4. 그리고 그가 셋을 낳은 후 사람의 날들이 팔백 년 이었다, 그리고 그는 아들들과 딸들을 낳았다.
5. 사람이 살았던 모든 날들은 구백 삼십 년 이었다, 그리고 그는 죽었다.
6. 그리고 셋은 일백 오 년을 살았고, 에노스를 낳았다.
7. 그리고 셋은 에노스를 낳은 후 팔백 칠 년을 살았다, 그리고 아들들과 딸들을 낳았 다.
8. 그리고 셋의 모든 날들은 구백 십이 년 이었다, 그리고 그는 죽었다.
9. 그리고 에노스는 구십 년을 살았다, 그리고 게난을 낳았다.
10. 그리고 에노스는 그가 게난을 낳은 후 팔백 십오 년을 살았다, 그리고 아들들과 딸들을 낳았다.
11. 그리고 에노스의 모든 날들은 구백 오 년 이었고, 그는 죽었다.
12. 게난은 칠십 년을 살았다, 그리고 마하랄엘을 낳았다.
13. 그리고 게난은 그가 마하랄엘을 낳은 후 팔백 사십 년을 살았고, 그리고 아들들과 딸들을 낳았다.
14. 그리고 게난의 모든 날들은 구백 십 년 이었다, 그리고 그는 죽었다.
15. 그리고 마하랄렐은 육십 오 년을 살았다, 그리고 야렛을 낳았다.
16. 그리고 마하랄렐은 그가 야렛을 낳은 후 팔백 삼십 년을 살았다, 그리고 아들들과 딸들을 낳았다.
17. 그리고 마하랄렐의 모든 날들은 팔백 구십 오 년을 살았다, 그리고 그는 죽었다.
18. 그리고 야렛은 일백 육십 이 년을 살았다, 그리고 에녹을 낳았다.
19. 그리고 야렛은 그가 에녹을 낳은 후 팔백 년을 살았고, 아들들과 딸들을 낳았 다.
20. 그리고 야렛의 모든 날들은 구백 육십 이 년 이었다, 그리고 그는 죽었다.
21. 그리고 에녹은 육십 오년을 살았다, 그리고 므두셀라를 낳았다.
22. 그리고 에녹은 그가 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 년을 하느님과 함께 걸었다, 그리고 아들들과 딸들을 낳았다.
23. 에녹의 모든 날들은 삼백 육십 오 년 이었다.
24. 그리고 에녹이 하느님과 함께 걸었다, 그리고 그는 더 이상 있지 않았다, 그 이유 는 하느님께서 데려가셨기 때문이다.
25. 므두셀라는 일백 팔십 칠 년을 살았다, 그리고 라멕을 낳았다.
26. 므두셀라는 그가 라멕을 낳은 후 칠백 팔십 이 년을 살았다, 그리고 아들들과 딸 들을 낳았다.
27. 그리고 므드셀라의 모든 날들은 구백 육십 구 년 이었다, 그리고 그는 죽었다.
28. 그리고 라멕은 일백 팔십 이 년을 살았다, 그리고 아들을 낳았다.
29. 그리고 그는 그의 이름을 노아라 불렀고, 말하기를, 그가 여호와께서 저주하신 지 면에서 우리 손들의 수고와 우리의 일로부터 우리를 위로할 것이다.
30. 그리고 라멕은 그가 노아를 낳은 후 오백 구십 오 년을 살았다, 그리고 아들들과 딸들을 낳았다.
31. 그리고 라멕의 모든 날들은 칠백 칠십 칠 년 이었다, 그리고 그는 죽었다.
32. 그리고 노아는 오백 년의 아들이었다. 그리고 노아는 셈, 함, 야벳을 낳았다.

각 절의 내적 의미

1절. 이것은 사람의 출생들에 관한 책이다. 하느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셨던 그 날, 그분은 하느님의 모습 안에서 그를 만드셨다. “출생들에 관한 책”은 태고 교회 속에 있던 이들의 목록표이다. “하느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셨던 그 날”은 그가 영적 (수준)으로 만들어졌음을 표시하고 있다. “하느님께서 그를 하느님의 모습 안에서 만드셨다”란 그가 천적 (수준)으로 만들어졌음을 의미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것은 태고 교회에 관한 묘사이다.

“출생들에 관한 책”이 태고 교회 속에 있는 이들의 목록표이다는 것은 뒤잇는 말씀으로부터 아주 분명하다. 그 이유가 여기로부터 11장, 에벨의 때까지에서 있게되는 이름들은 인물(person)들을 뜻하는 것이 결코 아니고, 실제의 것들이기 때문이다. 태고 때에 인류는 가족(house)들, 가문(family)들, 민족(nation)들로 구별되어졌다; 가족의 구성원은 남편과 아내, 그들의 자녀, 그리고 가족을 섬겼던 이들(종, 하인)이다. 가문은 가족의 수가 많든 적든 집합적 가족들이다. 가문들은 멀리 떨어져 산 것은 아니나, 그렇다고 붙어 산 것도 아니다; 그리고 민족은 많든 적든 가문들로 구성되었다.

그들이 자기들끼리만 거주했고, 가족, 가문, 민족으로만 구별된 까닭에, 이것에 의해 교회가 보존되는 수단이 되어 주었다. 그 이유가 모든 가족, 가문은 그들의 부모에 의존되는 바, 사랑 안에, 진정한 예배 안에 남아 있을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더 주목되는 것은, 각 가족은 가족들 서로로부터 구분되는 특유한 천성 속에 있었다는 점이다; 자녀들, 그 아래 있는 자손들도 그들의 부모로부터 특유한 천성이 파생되어 간다는 것, 이와 같이 표가 나는 특성은 그들의 얼굴에 의해, 그 외 다른 특유함에 의해 구별되게 한다는 것은 누구나 잘 아는 사실이다. 뒤섞이지 않고 정확한 구분이 있도록 그들이 위 같은 방식으로 거주하는 것을 주님께서는 반겨하셨다. 이것은 주님의 왕국에 대한 살아있는 표현이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주님의 왕국은 무수한 사회들로 구성되고, 각 사회들은 그들이 지닌 사랑과 신앙에 따라 서로 구분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이미 주목했던 바 같이, “홀로 산다”, “천막에서 거주한다”를 수단으로 뜻해진다. 같은 이유 때문에 유대인들이 가족, 가문과 민족으로 구분되어지는 것, 모든 이가 그의 자신의 가족 내에서 결혼을 맺는 것을 주님은 반겨하셨다; 이 점에 관하여는 이후 주님의 신성한 자비로부터 (살필 기회가 있을 것이다.)

“하느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날”에 의해 그의 존재가 영적 수준으로 만들어짐이 의미된 것, 그리고 “하느님께서 그분의 모습(likeness) 안에서 만드심”에 의해 그의 존재를 천적 수준으로 만드셨음이 의미된 것은 위에서 말해진 것과 보여준 것으로부터 나타난다. “창조한다(create)”는 표현은 인간이 새로이 창조되어질 때, 또는 거듭나질 때의 경우에 적절한 표현이다; 그리고 단어 “만들다(make)”는 인간이 완전해질 때의 경우에 적절하다; 그러므로 말씀에서 “창조함(creating),” “형성함(forming),” “만듦(making)”을 사용하는데 정밀한 구분이 있음이 제 2 장에서와 같이 관찰되어진다. 제 2 장의 경우, 영적 인간을 천적 인간으로 만드심이 “하느님께서는 그분의 모든 일, 즉 하느님이 만드심 안에서 창조하신 일로부터 쉬셨다”에서 말해진다; 다른 구절 역시, “창조함”은 영적 인간에 관련되고, “만드는 것”, 즉 완전해지는 것은 천적 인간에 관련되어 있다 (제 16, 88항도 참조).

“하느님의 모습”이 천적 인간이고, “하느님의 형상”이 영적 인간이다는 것은 이전에 살폈다. “형상(image)”은 모습에 앞선 준비이다. 그리고 “모습(likeness)”은 실재의 복제(replica)이다. 그런 이유는 천적 인간은 그분의 “모습”대로, 주님에 의해 완전히 규율되어지기 때문이다.

이 구절이 취급하는 것이 태고 교회의 출생, 또는 증식됨인 바, 영적 상태로부터 천적 상태로 가는 것이 먼저 묘사되었다. 그 이유가 증식(propagation)은 이 뒤를 잇기 때문이다.

2절. 그분은 그들을 남성과 여성으로 창조하셨다, 그리고 그분은 그들에게 복을 주셨고, 그리고 그들이 창조되어진 그 날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부르셨다.
“남성과 여성”이란 신앙과 사랑의 사이에 있는 결혼을 의미한다.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부르셨다”란 이것이 교회(the church)임을, 뾰족한 의미에서는 사람(Man, homo)으로 불려지는 교회를 의미한다.

“남성과 여성”에 의해 신앙과 사랑 사이에 있는 결혼이 의미된다는 것은 앞서 선포하고 입증도 했다. 거기서 남성, 또는 남자(vir)는 이해력, 그리고 이해력에 속하는 모든 것을 의미한다, 그 결과 신앙에 속하는 모든 것이다; 여성, 또는 여인은 의지력, 또는 의지력에 소속하는 것들, 그 결과 사랑에 속하는 모든 것이다; 그러므로 그녀는 이브라 불리운다. 이 이름은 생명을 의미하고, 생명은 사랑 속에만 존재한다. 그러므로 여성에 의해 교회가 의미된다. 이는 이미 살폈다; 남성은 교회 속의 사람(vir)으로 의미된다. 여기서의 주제가 교회의 상태, 즉 교회가 영적 상태이었을 때, 그리고 이 상태 후에 천적 상태로 만들어졌다. 그러므로 남성이 여성에 앞서 언급된 것인데, 이는 창. 1:26, 27 의 경우도 같다. “창조한다”가 영적 인간에 관련되고 있다; 그러나 결혼이 있게 된 후에, 즉 교회가 천적 상태로 만들어진 후에는 남성과 여성이라 말하지 않고 “사람(homo)”이라 말해진다. 사람은 이 결혼 때문에 남성과 여성 둘 다가 의미에 포함된다; 그러므로 이제 뒤잇는 말은, “그분께서는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부르셨다”이다. 사람을 수단으로 교회가 의미되어진다.

“사람”이 태고 교회이다는 것은 자주 말했고 앞서 살폈다; 그 이유가 최고 의미에서 주님 자신만이 사람이시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천적 교회는 주님의 모습인 바, 사람이라 불리운다. 영적 교회는 주님의 형상이었기 때문에 나중에서야 천적 교회로 불리게 된다. 그러나 일반적 의미에서, 인간의 이해력을 가진 모든 이는 사람이라 불리운다. 그 이유가 이해력 덕택에 인간은 사람이고, 그 이해력에 따라서 이 인물이 다른 인물과 구분되는데, 즉 주님을 사랑함에 바탕을 둔 그의 신앙에 따라 구분지어짐이 있게 된다는 말이다.
태고 교회, 그리고 모두 각각의 진정한 교회, 이 교회 사람, 또는 주님을 사랑함으로부터, 그리고 그분에 대한 신앙으로부터 사는 이들은 특별하게 “사람”이라 불리운다. 이를 말씀으로부터 확인해보자. 에스겔서로부터:
나는 네 위에서, 이스라엘의 모든 가문 위에서, 그것의 모두 위에서 사람이 번성되게
할 것이다; 나는 네 위에서 사람과 짐승이 불어나게 해서 그들은 번성하고 열매를
많이 맺을 것이다; 나는 네 고대의 것에 따라 너희가 거주하게 할 것이다; 그리고
나는 네 시작 때보다 더 잘되게 할 것이다; 그리고 나는 네 위에서 사람이 걷게
할 것이다, 내 백성 이스라엘이여 (겔. 36:10, 11, 12),
위에서 “고대의 것”에 의해 태고 교회가 의미된다; “시작”에 의해 고대 교회가 의미된다; “이스라엘의 가문”, 그리고 “백성 이스라엘”에 의해 원시 교회, 또는 이방인의 교회가 의미된다; 이 교회들 모두가 “사람”이라 불리운다.
모세의 책에서:
영원의 날들을 회상하라, 너희는 대대로의 햇수들을 이해하라; 가장 높으신 분이
민족들에게 상속분을 줄 것이데, 그 때 그분은 사람의 아들들을 떼어 놓으실 것이다.
그분은 이스라엘 자손의 숫자에 따라 백성의 경계들을 정하실 것이다 (신. 32:7, 8),
위에서 “영원의 날들”에 의해 태고 교회가; “대대로”에 의해 고대 교회가; “사람의 아들들”에 의해 주님을 향한 신앙 안에 있는 이들이 뜻해진다. 이 신앙이 “이스라엘의 자손의 숫자들”이다. 거듭나는 인물이 “사람”이라 불린다, 예레미야서로부터 나타난다:
나는 땅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보라 그것은 텅비었고 공허했다; 그리고 하늘들,
그리고 그것들은 빛을 가지지 않았다; 나는 바라보았다, 그리고 보라, 사람이 없다,
그리고 하늘들의 모든 새들이 도망 갔다 (예. 4.:23, 25),
위에서 “땅”은 외적 인간을 의미한다: “하늘”은 내적 인간이다; “인간”은 선을 사랑함이다; “하늘들의 새들”은 진리를 이해함이다.
다시:
잘 보라 내가 이스라엘의 가문, 유다의 가문을 사람의 씨를 가지고,
짐승의 씨를 가지고 씨뿌릴 것이다 (예. 31:27),
위에서 “인간”은 내적 인간을 의미한다, “짐승”은 외적 인간을 의미한다. 이사야서에서:
너는 콧구멍 안에 숨이 있는 사람인 것을 멈추어라.
그 이유가 어떤 점에서 그를 세어야하는지 때문이다 (이. 2:22),
위에서 “사람”은 교인을 의미한다. 다시:
땅의 거주민들은 불태워질 것이다. 사람은 매우 조금 남을 것이다 (이. 24:6),
위에서 “사람”은 신앙을 가지는 이들을 의미한다. 다시:
작은 길들이 황폐되었다. 여행자가 길 위에서 중단되었다. 그는 언약을
헛되이 만들었다, 그는 성들을 경멸했다, 그는 사람을 중시하지 않았다,
땅은 슬퍼하고 활기를 잃는다 (이. 32:8, 9),
히브리 발음에서 “에노스(Enosh)”는 사람을 표시한다. 다시:
나는 사람을 정금보다 더 귀하게 만들겠다, 그리고 오빌의 금보다 사람을
더 귀하게 만든다; 그러므로 나는 하늘들을 흔들 것이다,
땅들이 그것의 장소로부터 움직일 것이다 (이. 13:12, 13),
위의 사람이란 단어에서 앞쪽은 “에노스”이고, 뒤쪽은 “아담”이다.

그가 “아담”이라 불리운 이유는 단어 “아담”이 사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개역 한글 등등에서는 아담으로 번역되고 있다); 그러나 그가 “아담”이라는 이름을 수단으로 불러지는 것은 결코 적절치 않다. 그러나 “사람(Man)”이어야 한다. 이는 이 구절과 이전 구절들로부터 분명하다. 즉 [어떤 경우] 그는 단수로 말해지지 않을 때도 있다. 그리고 사람은 남자와 여자 모두를 아울러 부르기 위해 사용되고 있다. 이 구절에서도 “그분은 그들이 창조되던 그 날에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부르셨다”라고 말해지는 바, 복수임이 분명하다는 것은 누구나 인정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제 1 장에서, “우리가 우리의 형상 안에서 사람을 만들자, 그리고 바다의 물고기를 그들이 다스리게 하자 (27, 28)”라고 말해지고 있다. 또한 이 구절이 취급하는 주제로부터 더 파악된다. 즉 인류의 첫 사람인 누군가의 창조가 아닌, 태고 교회라는 점이다.

“이름을 부름”, 또는 “이름을 수단으로 부름”이 말씀에서 어떤 것의 품질을 아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은 이전에 이미 살폈다. 현재의 경우 이것은 태고 교회의 품질과 관련되어, 인간이 지면으로부터 취해졌다는 것, 또는 주님에 의해 거듭나졌다는 것을 표시하고 있다. 그 이유가 단어 “아담”은 “지면”을 뜻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후에 그가 천적 수준으로 만들어졌을 때, 그는 주님을 사랑함에서 근원되는 신앙 덕택에 가장 뛰어나게 “사람”이 되었다.

그들이 창조되어진 그 날에서 “사람”이라 불려진 것은 제1장 26,27절로 부터도 나타나고 있다. 즉 여섯 째 날의 끝에서, 이는 안식일의 저녁에 응답하고 있다, 또는 안식일, 또는 일곱 째 날이 시작했을 때에 응답한다; 그 이유가 일곱 째 날, 또는 안식일이 천적 인간이기 때문이다. 이는 이미 살폈다.

3절. 그리고 사람은 일백 삼십 년을 살았다. 그리고 그의 형상을 따라 그의 모습대로 낳았고, 그의 이름을 셋이라 불렀다.
“일백 삼십 년”이란 새로운 교회가 일어나기 전 시간을 의미한다. 이 새로운 교회는 태고의 사람들의 교회를 많이 닮지 않았다고 말할 수는 없는 바, 이 교회는 “그의 형상을 따라 그의 모습대로”라고 말해지기 때문에서 이다. 여기서의 단어 “모습, likeness”은 신앙에 관계되고, “형상, image”은 사랑에 관계된다. 이 교회가 “셋”이라 불리우고 있다.

“년들(years)”, 그리고 “년들의 숫자들(numbers of years),” 제 5장에서 자주 발생하는 단어들인데, 이것들이 내적 의미에서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글자 의미에 머무는 이들은 그 숫자들은 몇 세기, 몇 백 년 같은 오랜 세월이라고 상상했다. 그러나 여기로부터 창세기 12장까지에는 글자 의미에서 나타남에 의거한 역사적인 것은 아무 것도 없고, 일반적, 세부적으로 있는 모든 것들은 다른 문제들을 포함하고 있다. 이것은 이름들 뿐만 아니라 숫자들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말씀에서 자주 언급되는 편에 속하는 숫자로는 3과 7이 있다. 이 두 숫자는 어디서 언급이 있든, 때들(the times), 또는 다른 것들이 포함되거나 표현하는 상태들(the states)에 관련한 거룩한 어떤 것, 또는 아주 신성한 어떤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아주 짧은 시간의 간격과 매우 긴 시간의 간격이나 (예를 들면, 하루-일 년-십 년-백 년 등등과) 같은 의미를 가진다. 그 이유가 부분들이 전체에 속하듯, 아주 작은(짧은) 것이 아주 큰(긴)것에 속해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전체가 부분들로부터, 가장 큰 것이 가장 작은 것들로부터 나오기 위하여 그것에는 반드시 닮음(likeness)이 있어야만 한다. 고로 이사야서에서:
지금 여호와께서 이야기 하셨다. 말하시기를, 삯꾼의 햇수들 같이, 삼 년 내에,
그리고 모압의 영광은 하잘 것 없는 영광으로 될 것이다 (이. 16:14).
다시:
고로 주님께서 나에게 말하셨다, 일 년 내에, 삯꾼의 햇수에 따라,
그리고 게달의 영광은 살라져버릴 것이다 (이. 21:16),
위에서 가장 작고 가장 큰 간격이 의미되었다. 하박국서에서:
여호와, 저는 당신의 명성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두려워졌습니다; 오 여호와시여,
햇수들의 한 가운데에서 당신의 일을 되살아나게 하소서,
햇수들의 한 가운데에서 알게 만드소서 (합. 3:2),
위에서 “햇수들의 한 가운데”란 주님의 강림을 의미한다.보다 적은 간격에서, 이것은 주님의 오심의 모두 각각을 의미한다. 이런 오심은 흔히 인간이 거듭나질 때에 있다.;보다 큰 간격에서의 경우는, 주님의 교회가 새로이 일어날 때에 있다. “되찾음(구속함)의 해”라 불리는 것도 마찬가지 경우이다. 이사야서에서:
복수의 해가 내 심정 안에 있다, 그리고 내 되찾음의 해가 오고 있다 (이. 63:4).
사탄이 결박되어 있는 천 년 (계. 20:2, 7), 그리고 첫 부활의 천 년 (계. 20:4, 5, 6), 이런 천 년 역시 시간 간격의 천 년을 의미함은 결코 아니고, 그것들의 상태들이다; “날들(days)” 또한 햇수와 더불어 상태들을 표현하는데 사용되어진다. 그리고 상태들은 날들이나 햇수들의 숫자에 의해 묘사되어진다. 이 장의 경우 때들 역시 상태들을 포함한다; 그 이유가 모두 각각의 교회는 각기 유전적으로 지닌 천성에 그 자체 획득한 천성이 합쳐져 달라진 상태에 따라 지각의 상태도 차이가 나는 상태 안에 있기 때문이다.

이 장에서 열거되는 이름들, “셋,” “에노스,” “게난,” “마할랄엘,” “야렛,” “에녹,” “므두셀라,” “라멕,” “노아”는 아주 많은 교회들을 의미한다. 이 교회들 속에서 첫째이고 제1의 교회가 “사람(Man)”으로 불리었다. 이 교회들의 제일 중요한 특성은 지각이었다. 그러므로 이 때에 속해 있는 교회의 차이는 지각의 차이였다. 하여 지금 나는 이 지각(perception)에 관해 잠깐 설명해두어야 할 것 같다. 모든 천국은 선과 진리에 관한 지각이 지배하고 있다. 그러나 이에 대한 묘사는 설명되어질 수 없이 무수하고, 특히 똑 같은 두 개의 사회도 존재하지 않는다; 거기에 존재하는 지각들은 대단히 크게 종류들(genera)과 부류들(species)로 구별된다. 종류들은 무수하고, 각 종류는 또한 무수하다; 이에 관하여는 주님의 신성한 자비로부터 차 후 더 언급될 것이다. 거기에 있는 지각의 종류들은 무수하고, 각 종류 안의 부류 역시 무수함에 비교하면, 오늘날의 세상이 천적이고 영적인 것에 관하여 아는 것이 얼마나 미미한지 모른다. 오늘날의 사람들은 지각이 무엇인지 모른다. 설사 지각이 이것이라고 알려준다면, 그런 것의 존재 자체를 믿는 것조차 하지 않는다; 물론 이외의 사항도 이와 마찬가지이기도 하다. 태고 교회는 주님의 천적 왕국을 표현했다. 이 교회의 지각도 일반적(generic)이고 특수적(specic) 차이들을 갖고는 있다. 그런 반면, 지각의 가장 일반적 본성마저 오늘날은 거의 알고 있지 않다. 따라서 이 교회들의 지각의 종류와 부류들은 부득이 어둡고(dark) 기묘한(strange) 것 인 냥 인간들에게 나타난다. 그 당시 태고인들은 가족(house)들, 가문(family)들, 민족(nation)들로 구별되었을 뿐이고, 결혼 역시 그들의 가족 내지 가문 내에서 이루어져 왔다. 이는 지각의 종류와 부류가 부모로부터 정밀하게 전수되고 보존되기 위하여서 였다. 한마디로 출생적 특성이 대대로 전수되어 보존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태고 교회에 속했던 이들은 천국에서 함께 거주한다.

“셋”이라 불리운 교회는 태고 교회에 가장 가깝다는 것을 서술한 말, 즉 사람이 그의 모습 안에서, 그의 형상을 따라 낳았다, 그리고 그의 이름을 셋이라 불렀다 라고 말한 것으로부터 분명해진다; 단어 모습(likeness)은 신앙에 관련되고, “형상”은 사랑에 관련되고 있다; 그 이유가 이 교회는 사랑과 사랑에서 파생된 신앙에 관하여 태고 교회 같지 않다는 것이, 방금 전에 말한 것, 즉 “남자와 여자로 그분은 그들을 창조하셨고, 그리고 그들에게 복을 주셨다, 그리고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부르셨다”로부터 명백해지는데, 이 구절을 수단으로 여섯째 날의 영적 인간이 의미되어, 이 사람의 모습은 여섯째 날의 영적 인간 쪽 이었다. 즉 사랑이 제일의 원리이라기보다는 여전히 신앙이 사랑과 결합된 수준이다는 말이다.

이 구절의 “셋”은 4장 25절의 “셋”과 다른 교회가 뜻해진다는 것은 제 435항에서 알런지 모른다. 다른 교리로부터의 교회들이 같은 이름을 수단으로 불리었다는 것은 앞장 17, 18절에서 “에녹”과 “라멕”이 불리었는데, 이 장에서 역시 “에녹”과 “라멕”이(21, 30절) 다른 교회의 이름으로 불리는 것으로부터 미루어 알 수 있다.

4절. 그리고 그가 셋을 낳은 후 사람의 날들이 팔백 년 이었다, 그리고 그는 아들들과 딸들을 낳았다.
“날들”은 일반적 측면에서의 때들(시간들)과 상태들을; “햇수”는 특별한 측면에서의 시간과 상태들을 의미한다. “아들들과 딸들”은 태고 교회 사람들이 지각한 진리들과 선들을 의미한다.

“날들(days)”이 일반적 측면에서 때들과 상태들을 의미하는 것은 첫 장, 창조의 “날들”에서 살핀 바 있고, 이 외 더 다른 의미는 가지지 않는다. 말씀에서 모든 때를 “날들”로 부르는 것은 통상적인데, 이 장에서도 마찬가지이다 (5, 8, 11, 14, 17, 20, 23, 27, 31); 그러므로 때들의 상태들도 일반적 측면에서는 “날들”로 의미된다; 그리고 “햇수들”이 추가될 때, 하여 햇수들의 계절들에 의해서는 상태들의 품질, 고로 특별한 상태들이 의미된다. 태고인들은 자기들의 숫자들을 가졌다. 이 숫자들을 수단으로 그들은 교회에 관련되는 여러 가지 것들을 의미했다. 예를 들면, “3”, “7”, “10”, “12”, 그리고 이 숫자들이 합성되어 여러 다른 숫자들도 있다. 이를 수단으로 그들은 교회의 상태들을 묘사했다. 그러므로 이 숫자들은 설명에 많은 시간이 요구되는 비밀들을 포함한다. 숫자들은 교회의 상태들을 설명하는 것, 또는 판단하는 것이었다. 똑 같은 것들이 말씀의 많은 부분에서 발생하는데, 특히 예언서에서 이다. 그리고 유대인의 예식 행위에서도 제물, 식사 공물, 헌물, 등등 여러 예식 안에 숫자들이 있는데, 적용됨에 따라 차이는 있으나 거룩한 것들을 의미한다. 이 장 4절에서의 경우, “팔 백”이다. 다음 절에서는 “구 백 삼십 년”이다. 그리고 그 뒤를 이어 숫자들이 등장하는데, 이는 그들의 교회의 상태들의 변화이고, 그들의 일반적 상태에 응용되는 바, 자세히 설명하기에는 너무나 많다. 이 책의 미래 부분에서, 주님의 신성한 자비 속에서, 12까지의 단순한 숫자에 한해 설명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이 간단한 숫자를 알지 못하면, 이 숫자로 합성된 숫자의 파악은 불가능하다.

“날들”이 일반적으로 상태들을 의미하고, “햇수들”은 특별한 상태들을 의미한다는 것은 말씀으로부터 나타난다. 에스겔서에서:
너는 날들이 가까이 오게 했다, 그리고 네 햇수까지 와 있다 (겔. 22:4),
역겨운 짓들을 저지른 이들에 관하여, 그리고 그들의 죄들이 가득 차버렸다는 것, 그들의 일반 상태가 “날들”에 의해, 특별한 상태가 “햇수”로 서술되었다. 다윗서에서:
당신께서는 왕의 날들에 날들을 더하실 것이다, 그리고
그의 햇수들은 대대로까지 미치게 하실 것이다 (시. 61:6),
위 구절은 주님과 그분의 왕국에 관해서, “날들”과 “햇수들”은 그분의 왕국의 상태를 의미한다. 다시:
나는 옛 것의 날들을, 시대들의 햇수들을 곰곰이 생각해 봅니다 (시. 77:5),
“옛 것의 날들”은 태고 교회의 상태를, “시대들의 햇수들”은 고대 교회의 상태를 의미한다. 이사야서에서:
복수의 날이 내 심정 안에 있다, 그리고 내 되찾음의 해가 오고 있다 (이. 63:4),
마지막 때들에 관해 말하시는데, 거기서 “복수의 날”은 지옥에 떨어짐의 상태를, “되찾음의 해”는 복됨의 상태를 의미한다. 다시:
주님이 받아 주실 수 있는 해, 그리고 우리의 하느님이 복수하시는 날을 선포하는 것;
슬퍼하는 모두를 위로하시는 것 (시. 61:2),
위에서 “날들”과 “해들”은 모두 상태들을 의미한다. 예레미야서에서:
옛 것으로부터 같이 우리의 날들을 새로이 하소서 (애. 5:21),
위에서 상태들이 명백히 뜻해진다.
요엘서에서:
여호와의 날이 온다, 그 이유는 그것이 가까이 있기 때문이다. 즉 어둠의 날,
짙은 어둠의 날, 구름 짙고 희미함의 날이다; 이와 비슷한 것은 있은 적이 없다,
이것 이후도 없을 것이다, 대대로의 햇수에서조차 (없을 것이다) (욜. 2:1, 2),
위에서 “날”은 어둠의 상태, 짙은 어둠의 상태, 구름 짙고 희미함의 상태, 각각이 특별한 측면에서, 그리고 일반적 측면에서는 모두와 더불어이다. 스가랴서에서:
나는 하루 날에 이 토지의 불법을 옮길 것이다; 그 날에 너희 네 동료 사람에게 포도나무 아래에서,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외칠 것이다 (슥. 3:9, 10).
그리고 또 다른 장소에서:
여호와께 알려진 날 하나가 있을 것이다, 그 날은 밤도 아니고, 낮도 아니다,
그리고 저녁 시간에 빛이 있을 것이다 (슥 14:7),
위 구절에서 상태가 뜻해짐이 분명하다. 그 이유는 “밤도 아니고, 낮도 아닌 , 저녁 시간에 빛이 오는” 날이라 말해지기 때문이다. 같은 것이 십계명에 있는 표현들로부터 나타난다:
네 아버지와 네 어머니를 존경하라, 네 날들이 길어질 것이고, 지면 위에서
너는 잘되어 갈 것이다 (신. 5:6; 25:15),
위 구절에서 “길어진 날들”을 가진다는 것은 목숨이 길어진다가 아니라 행복한 상태를 의미한다.
글자 의미에서는 마치 “날들”이 시간을 의미하게 나타나는 것을 필요로 하지만, 내적 의미에서는 상태를 의미한다. 천사들은 내적 의미 안에 있는 바, 그들은 시간이 무엇인지 모른다. 그 이유는 그들에게는 시간들을 구별하게 하는 태양도 달도 없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그들은 날들과 햇수들을 모른다, 오직 상태들이 어떤지, 상태가 어떻게 바뀌는지만 알 뿐이다. 그러므로 내적 의미에서 있는 천사들 앞에서 모든 것은 문제(matter)에 관련되고, 시간과 공간은 사라진다. 에스겔서의 이 구절의 글자 의미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날들이 가까웁다, 여호와의 날조차 가까웁다, 구름의 날이다;
이것은 민족들의 때일 것이다 (겔. 30:3).
그리고 요엘서에서:
오호라 날을 위하여! 여호와의 날이 가까움을 위하여,
그리고 황폐됨으로 그것은 온다 (욜. 1:15),
위 구절에서 “구름의 날”은 구름, 또는 거짓을 의미한다; “민족들의 날”은 민족들, 또는 사악함을 의미한다; “여호와의 날”은 황폐됨을 의미한다. 시간의 관념이 제거될 때, 그 시간에 존재했던 것들의 상태에 관한 관념들이 남는다. 이 장에서 언급되는 “날들”과 “햇수들”에 관련하여서도 똑같다.

“아들들과 딸들”은 그들이 지각으로부터 가졌던 진리들과 선들이다. 실제로 “아들들”은 진리들을, 그리고 “딸들”이 선들을 의미하는 것은 예언서들의 많은 구절로부터 분명해진다; 그 이유가 말씀에서는 옛날 때와 같이 교회의 임신과 출생을 “아들들과 딸들”로 부르기 때문이다, 이사야서에서:
이방인들이 네 빛에 올 것이다, 그리고 왕들이 네 일어남의 빛남에 올 것이다;
네 눈을 들어올려 주위를 빙둘러 보라; 그들이 스스로 모든 것을 가지고 네게 온다;
네 아들들이 멀리로부터 올 것이다, 네 딸들이 네 편에서 유모일 것이다; 그때 너는
보고 멋지게 늘어질 것이다, 그리고 네 심정은 놀라워질 것이다,
그리고 확장될 것이다 (이. 60:3, 4, 5),
위 구절에서 “아들들”은 진리를, “딸들”은 선을 의미한다.
다윗서에서:
외국인의 아들들로부터 우리를 건져주소서, 구출하소서, 그들의 입은 헛됨을
말합니다; 하여 우리의 아들들은 그들의 젊음 안에서 성장한 식물 같이 있을런지
모르고, 우리의 딸들은 성전의 모양(form)으로 자른 모퉁이돌 같이 있을런지 모릅니다
(시. 44:11, 12),
위에서 “외국인의 아들들”은 가짜 진리들, 또는 거짓들; “우리의 아들들”은 진리에 관 한 교리물을; “우리의 딸들”은 선에 관한 교리물을 의미한다.
이사야서에서:
내가 북쪽에게 말할 것이다, 포기하라, 그리고 남쪽에게, 감추어 두려워하지 말라;
멀리로부터 내 아들들을 데려온다, 그리고 내 딸들을 땅 끝들로부터 데려온다;
눈 먼 백성들을 데려온다, 그리고 그들은 눈을 가질 것이다; 귀머거리, 그리고
그들은 귀를 가질 것이다 (이. 43:6, 8),
위 구절에서 “아들들”은 진리들을; “딸들”은 선들을; “눈 먼자”는 진리들을 보게 될 이들; 그리고 “귀머거리”는 진리들에 순종할 이들을 의미한다.
예레미야서에서:
부끄러움이 우리의 젊은 시절로부터 우리의 조상의 노동을 삼켰다; (즉)
그들의 양떼들, 그들의 목축들, 그들의 아들들, 그들의 딸들(이다) (예. 3:24),
위에서 “아들들”, “딸들”은 진리들과 선들을 의미한다. “자녀들”, “아들들”이 진리들을 의미함은 이사야서로부터 분명해진다:
이제 야곱은 부끄러워하지 않을 것이다, 그의 얼굴은 이제는 창백함의 밀(납)이
발라져 있지 않을 것이다; 그 이유가 그가 그의 한 가운데에서 내 손의 일로부터
그의 자녀를 볼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내 이름을 신성스럽게 할 것이다,
그리고 야곱의 거룩한 이를 신성하게 할 것이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하느님을
경외할 것이다; 영 안에서 잘못으로 헤매던 그들 역시 이해함을 알 것이다
(이. 29:22, 23, 24),
위에서 “야곱의 거룩한 이, 이스라엘의 하느님”은 주님을 의미한다; “자녀”는 거듭나는 자, 선과 진리의 이해함을 가진 자를 의미한다.
다시:
노래하라, 아이를 못낳는 너, 불모인(자)여, 그 이유가 결혼한 아내의 아들들보다
황무한 자의 아들들이 더 많기 때문이다 (이 54:1),
위에서 “황무한 자의 아들들”은 원시 교회(primitive church), 또는 이방인들의 교회 속의 진리들을 의미한다; “결혼한 아내의 아들들”은 유대 교회 속의 진리들이다.
예레미야서에서:
내 천막은 황폐된채 있고 내 (천막)줄은 뽑혀져버렸다;
내 아들들은 나로부터 나가버렸다, 있지 않다 (예. 10:20),
위에서 “아들들”은 진리들을 의미한다. 다시:
그의 아들들은 이전 같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모임(congregation)은
내 앞에 설립될 것이다 (예. 30:20),
위에서 “아들들”은 고대 교회의 진리들을 의미한다. 스가랴서에서:
나는 네 아들들을 휘저을 것이다, 오 시온아, 네 아들들과 더불어,
오 야완아, 그리고 너를 용사의 검 같이 만들어라 (슥. 9:13),
위에서 사랑으로부터의 진리들이 의미되고 있다.

말씀에서 “딸들”이 자주 선들을 표시하고 있다; 다윗서에서:
왕의 딸들이 네 귀중한 것들 사이에 있었다; 네 오른편에 오빌의 최상의
금 안에 있는 여왕이 있다; 두로의 딸이 선물을 가지고 있다; 왕의 딸은
안쪽에 있는 모든 영화로움이다; 금으로 된 작은 구멍(eyelet)의 작업이
그녀의 의복이다; 네 조상 대신 네 아들들이 있을 것이다 (시. 45:10-17),
위에서 선, 그리고 사랑과 신앙으로부터의 아름다움이 “딸”에 의해 묘사되어져 있다. 이로부터 교회들이 선들 덕택에 “딸들”이라 불리운다. 마치 “시온의 딸”, “예루살렘의 딸”과 같다 (이. 37:22, 그 외 많은 구절에서); 교회들이 “내 백성의 딸들”이라 불리운다 (이. 22;4). “다시스의 딸” (이. 23:10), “시돈의 딸” (이. 23:12), 그리고 “들판에 있는 딸들” (겔. 26:6, 8).

같은 것들이 이 장에서 “아들들”과 “딸들”에 의해 의미된다 (4, 7, 10, 13, 16, 19, 26, 30). 그러나 교회들이 위와 같고, 아들들과 딸들이 위와 같은데, 즉 선들과 진리들과 같다; 진리들과 선들이 따로따로 구분되어 지각되는듯 서술되는데, 그 이유는 이상 살핀 내용들이 태고 교회를 서술하기 때문이고, 이 교회가 여타 다른 교회들, 계승되어져 가는 모든 교회의 부모격이고 제일 가는 교회이기 때문에서 이다.

5절. 사람이 살았던 모든 날들은 구백 삼십 년 이었다, 그리고 그는 죽었다.
여기서 “날들”과 “햇수들”은 때들과 상태들을 의미한다; “사람이 죽었다”에 의해 더 이상 이와 같은 지각이 존재하지 않았음이 의미되었다.

“날들”과 “햇수들”이 때들과 상태들을 의미함에 대한 설명은 더 필요하지 않을 것이나, 세상에서 때(시간)들과 치수들은 필수적이다, 이것에 관련되는 것은 자연의 최말단에 속하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날들과 햇수들, 또한 치수들에 사용된 숫자가 말씀에서 적용될 때는 언제든지 숫자의 의미에 일치하여 때들과 치수들로부터 추상적으로 의미를 가진다; 예를 들면, 일하는 육일, 일곱째 날은 거룩하다는 것; 희년 (jubilee)은 매 49년 째에 선포하고, 50년 째에 기념할 것이다는 것; 이스라엘의 지파들이 열 둘이다는 것, 주님의 사도들이 열 둘이다는 것; 칠십 원로들, 주님의 칠십 제자들; 등등, 숫자들이 적용된 것들로부터 추상적으로 특별한 의미를 가지는 성경에서의 예들은 훨씬 더 많다; 이렇게 추상할 때, 상태들이 숫자들에 의해 의미된다.

그가 “죽었다”가 이와 같은 지각은 더 이상 있지 않았다를 의미하는 것은 말씀에서의 “죽다”에 대한 의미로부터 분명해진다. 즉 어떤 것이 존재해 왔었는데 중지되는 것이다. 고로 계시록서에서:
사데에 있는 교회의 천사에게 쓰거라; 이런 것들을 하느님의 일곱 영들, 그리고
일곱 별들을 가지신 분께서 말하신다: 나는 네 일들, 즉 네가 살아있다 그리고
죽어있다는 이름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경계하라 그리고 이제 막
죽으려하는 그 남은 것들을 강건하게 하라: 그 이유가 나는 하느님 앞에서
완전한 네 일들을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계. 3:1, 2).
예레미야서에서:
나는 네가 낳아지지 않은 또 다른 나라로 너를 낳은 네 어머니를 내쫓을 것이다,
그리고 너는 거기서 죽을 것이다 (예. 22:26),
위에서 “어머니”는 교회를 의미한다. 이미 여러 번 말했던 바 대로, 교회와 더불어, 교회는 그 본래의 모습이 차츰 퇴색되고 퇴보해가다가 급기야 본래의 모습을 상실하는데, 그 주된 요인은 유전적 악이 증가한 탓이다. 이 악은 이어져 내려가는 부모들이 자신들이 상속받은 악에 자신이 만든 악을 추가해 형성되기 때문이다. 부모에게 있는 모든 실제의 악은 어떤 종류의 본성을 옷입는다, 그리고 이것이 상습적으로 재발할 때, 그들에게 본성이 되어간다, 그리고 이것이 그들의 유전적 악에 보태진다, 그리고 그들의 자녀에게 전이 된다, 하여 후손에게 계속 전이 된다. 이런 방법 안에서 유전적 악은 후손들 안에서 광대하게 증가되어 있다. 이런 것은 자녀들의 악한 경향성이 그의 선조들의 악한 경향성과 꼭 같음이 발견된다는 사실로부터도 극히 일부라도 확인해 볼 수 있다. 아담으로부터 우리 안에 이식되어져 온 악 외에는 유전적 악은 없다고 하는 의견은 완전한 거짓 주장이다. 진실은 이렇다. 즉, 모든 이 각자는 자신의 실제적인 죄들을 수단으로 유전적 악을 만든다, 그리고 이 악을 그가 상속받은 악들에 보탠다. 이런 과정에서 악은 축적되고, 모든 후손들 안에 남는데, 주님에 의해 거듭나아지는 이들 안에서가 아니면 줄어들지 않는다. 모두 각각의 교회 안에서 이것이 퇴보의 제일의 원인인데, 이것은 태고 교회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어떻게 태고 교회가 퇴색되어 갔는지는 지각이 무엇인지를 먼저 알지 않으면 설명되어질 수 없다. 그 이유가 이 교회는 지각하는 교회이고, 이 교회가 오늘날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교회의 지각은 그 교인들이 주님으로부터 선하고 참된 것을 지각함 안에서 존재한다. 마치 천사들의 경우와 같다; 여기서 말하는 선하고 참된 것은 시민 사회의 것과 동등하게 여겨서는 안되고, 이는 주님을 사랑함으로부터와 주님에 대한 신앙으로부터의 것임을 확실히 구분지어 생각해두어야 한다. 지각이 무엇인지는 삶에 의해 확증되어져 나오는 신앙의 고백으로부터 알려질 수 있고, 그것이 어떤 존재를 가지는지를 안다.

6절. 그리고 셋은 일백 오 년을 살았고, 에노스를 낳았다.
“셋”은 이미 주목했던 그대로 두 번째 교회이다. 이 교회는 아버지격인 태고 교회보다는 덜 천적 수준이긴 하나 그래도 태고 교회 반열에는 낄 수 있다 (제3절 참조). “그가 일백 오 년을 살았다”란 때들(시간)과 상태들을 의미함은 앞의 구절과 같다. “그가 에노스를 낳았다”란 그들로부터 “에노스”라 불리는 또 다른 교회가 이어져 내려 왔음을 의미한다.

“셋”이 두 번째 교회인데, 이 교회의 부모되는 태고 교회보다는 덜 천적 수준이지만, 여전히 태고 교회 중의 하나이다는 것은 제3절의 셋에 관해 말했던 것으로부터 나타날런지 모른다, 이미 말했듯, 교회와 더불은 경우에도, 점차적으로, 그리고 시간이 흐르면서, 앞서 살핀 이유 때문에 퇴색되었다.

그가 “에노스를 낳았다”가 그들로부터 또 다른 교회, “에노스”라 불린 교회로 내려갔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은 이 장에서 이름들이 교회들 외 다른 것들은 의미하지 않는다는 사실로부터 분명해진다.

7, 8절. 그리고 셋은 에노스를 낳은 후 팔백 칠 년을 살았다, 그리고 아들들과 딸들을 낳았다. 8.그리고 셋의 모든 날들은 구백 십이 년 이었다, 그리고 그는 죽었다. “날들”과 “햇수들”의 숫자는 앞에서와 같이 여기서도 때들(시간)과 상태를 의미한다. 그가 “죽었다”는 의미 역시 같은 맥락이다.

9절. 그리고 에노스는 구십 년을 살았다, 그리고 게난을 낳았다.
“에노스”는 전과 같이 세 번째 교회를 의미한다. 이 교회는 두 번째 교회보다 더욱 덜 천적 수준이었다. 하지만 이 교회 역시 태고 교회 중의 하나였다. “게난”은 네 번째 교회를 의미하는데 이 교회는 앞의 교회를 계승하고 있다.

교회들이 시간의 과정에서 서로 계속되어 간다는 점, 이로부터 이것이 저것으로부터 태어나졌다고 말해지는 바, 이는 마치 열매들, 또는 후손들과 더불은 경우와 똑같다. 이런 것들의 한 가운데, 즉 그것들의 가장 안쪽들 안에, 마치 열매들 속의 열매, 또는 후손들 속의 씨들이 있듯, 이 씨로부터 정규적인 질서 안에서 연속되는 부분들이 살아 있는다. 그 이유가 더 멀리 있는 것들은 가장 안쪽으로부터 주변을 향하여 있기 때문, 다시 말해, 열매, 또는 후손의 본질이 그것들 안에서 있되, 바깥쪽을 향하여 가서 가장 안쪽 것의 종착지인 그것들의 덮개, 또는 외피에 도달하며 존재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두뇌의 경우에서도, 외피의 실체라 불리는 미묘한 기관의(organic) 형체들인 가장 안쪽 부분들 안에서, 이로부터, 이를 수단으로 혼들이 진행되어 나간다; 그리고 이로부터 정규적 순서에서,보다 더 순수한 덮개들이 그 뒤를 이어 받는다, 그 다음 더 밀도 높은 것들이, 그리고 마지막으로 뇌막이라 불리는 일반적 덮개들, 이것은 아직 더 일반적 덮개들에서 종결되어진다. 그리고 마지막 모든 것의 가장 일반적인 것은 두개골이다.

위 세 교회들, “사람”, “셋”, “에노스”가 태고 교회를 구성한다. 물론 각 교회는 지각의 정도에 따라 완전함에서 차이를 지니고 있다: 첫 교회의 지각력은 이어지는 교회들에서 쇠약해져 더욱 일반적 수준이 되어갔다. 이는 위에서 주목한 열매들, 또는 두뇌의 경우와 같다. 완전함(의 수준)은 지각함의 능력이 (얼마나) 명료한지에 따라 (결정된다.) 지각력은 지각함이 덜 명료해지고 더 일반적이 될 때 줄어져 간다. 그리하여 더 불명료한 지각이 더 명료한 지각을 계승하는 것이다. 결국 그것은 자취를 감춘다.

태고 교회의 지각하는 능력은 선하고 참된 것을 지각함 안에 존재했을 뿐만 아니라 덕행(well-doing, 선행)으로부터 올라오는 행복과 기쁨 안에 존재했다. 선인 것을 행함 안에 있는 행복감과 즐거움 없이는 이 지각력은 생명을 가지지 못하나, 이 행복과 즐거움 덕택에 그것은 생명을 가진다. 태고 교회가 향유했던 것과 같은 사랑과 사랑에서 파생된 신앙의 생명은 (나 자신이 세상에서) 쓸모 있음(use)이 되어 있는 동안, 즉 선과 진리가 유용함 안에서 있는 동안 생명을 가진다는 말이다; 쓸모 있음으로부터, 쓸모 있음을 수단으로, 쓸모 있음에 따라 생명은 주님에 의해 주어진다; 쓸모 없음인 것 안에 생명은 없다. 그 이유는 쓸모 없는 것은 (헌 신짝 내던지듯) 내던져지고 말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태고 교회는 주님의 모습이었다. 그러므로 지각하는 힘들(powers)에서 그들은 그분의 형상들이 되었다. 지각하는 힘은 선하고 참된 것을 앎 안에 존재한다, 결과적으로 신앙으로부터 있는 것 안에 존재한다: 사랑 안에 있는 자는 앎 안에서 즐거워하지 않고, 선하고 참된 것을 행함 안에서, 즉 유용함을 추구함 안에서 행복과 즐거움을 누린다.

10, 11절. 그리고 에노스는 그가 게난을 낳은 후 팔백 십오 년을 살았다, 그리고 아들들과 딸들을 낳았다. 11 그리고 에노스의 모든 날들은 구백 오 년 이었고, 그는 죽었다.
여기서도 “날들”, “년 수”, “아들들과 딸들”, 그가 “죽음” 등등이 의미하는 것은 이미 살핀 바와 똑같다.

“에노스”는 앞서 주목한대로, 세 번째 교회로 아직 태고 교회 중의 하나이나, 덜 천적 수준이고, 결과적으로 “셋”의 교회보다 덜 지각적이다. “셋” 역시 “사람”이라 불린 부모되는 교회보다는 덜 천적 수준이고 덜 지각적이다. 이 세 교회들이 태고 교회를 구성하는데, 첫 교회는 그 뒤를 잇는 교회에 비해 상대적으로 열매들 속의 핵심이었다. 이에 반해, 나머지 두 교회는 첫 교회의 막질(membranaceous) 부분이었다.

12절. 게난은 칠십 년을 살았다, 그리고 마하랄엘을 낳았다.
“게난”은 네 번째 교회를 의미하고, “마하랄엘”은 다섯 번째 교회이다.

“게난”으로 불리는 교회는 앞의 세 교회가 지닌 완전한 것, 즉 지각력에서 위 세 교회 서열에는 낄 수 없다. 즉 앞의 세 교회들과 구분된다는 말이다. 즉 앞의 세 교회가 일반적으로 차츰 되어가는 중 이었음에 비해 이 교회는 아예 일반적이 되어 버렸다는 말이다. 이 상태는 실로 묘사되어지지 않고 있으나, 이후 살피는 “에녹”과 “노아”라 불리는 교회의 묘사로부터 약간은 어림잡을 수 있다.

13, 14절. 그리고 게난은 그가 마하랄엘을 낳은 후 팔백 사십 년을 살았고, 그리고 아들들과 딸들을 낳았다. 14 그리고 게난의 모든 날들은 구백 십 년 이었다, 그리고 그는 죽었다.
“날들”과 “년 수들”의 숫자들은 전과 같은 의미이고, “아들들과 딸들” 역시 진리들과 선들을 의미하고 이로부터 교인들은 지각을 가졌으나 앞의 교회보다 더욱 일반적 방법(general manner)으로 가졌다. 그가 “죽었다”란 지각의 이런 상태가 중지됨을 의미함은 앞의 구절과도 같다.

여기서 주목해 둘 것은 모든 것들은 교회의 상태에 관련됨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이다.

15절. 그리고 마하랄렐은 육십 오 년을 살았다, 그리고 야렛을 낳았다.
“마하랄렐”은 다섯 번째 교회를, “야렛”은 여섯 번째 교회를 의미한다.

지각력이 감소해갔을 때, 하여 더 특수한 측면, 또는 명료함에서 더 일반적 측면, 희미함으로 쇠퇴되어 갔듯, 사랑의 생명, 또는 쓸모 있음의 생명 역시 그러했다; 그 이유가 사랑이나 쓸모 있음의 생명과 지각력의 생명은 같기 때문이다. 선으로부터 진리를 아는 것이 천적 수준이다; “마하랄렐”로 불리는 교회를 구성한 이들의 생명은 그들이 쓸모 있음으로부터 얻는 즐거움보다 진리들로부터 얻는 즐거움을 더 좋아했음에서 비롯되었다. 이에 관하여는 저 세상 삶에서 이와 같은 사람 사이에 내가 있어본 경험으로부터 알게 되었다.

16, 17절. 그리고 마하랄렐은 그가 야렛을 낳은 후 팔백 삼십 년을 살았다, 그리고 아들들과 딸들을 낳았다. 17 그리고 마하랄렐의 모든 날들은 팔백 구십 오 년을 살았다, 그리고 그는 죽었다.
이 구절 역시 앞의 구절의 의미와 동일하다.

18절. 그리고 야렛은 일백 육십 이 년을 살았다, 그리고 에녹을 낳았다.
“야렛”은 여섯 번째 교회를, “에녹”은 일곱 번째 교회를 의미한다.

“야렛”이라 불리는 교회에 관하여는 관련된 사항이 아무 것도 없다; 그러나 그것의 특성은 “마하랄렐”과 “에녹”으로부터 알 수 있을런지 모른다. 그 이유가 이 둘 사이의 매체, 내지 중간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19, 20절. 그리고 야렛은 그가 에녹을 낳은 후 팔백 년을 살았고, 아들들과 딸들을 낳았다. 20 그리고 야렛의 모든 날들은 구백 육십 이 년 이었다, 그리고 그는 죽었다.
위 말들의 의미는 앞 절과 거의 동일하다. 대 홍수 이전의 사람들의 나이가 앞의 절들이 말한 것 같이, 즉 야렛은 구백 십이 년을 살았다든가, 므두셀라는 구백 육십 이 년을 살았다와 같이 실지로 오래 살지 않았음이 아니라는 것은 모든 이에게 주님의 신성한 자비로부터 다음 장 3절, “그들의 날들은 일백 이십 년이 되리라”는 구절에서 설명해 볼 것이다. 즉 년 수는 어떤 특정한 사람의 나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때들과 상태들을 의미한다.

21절. 그리고 에녹은 육십 오년을 살았다, 그리고 므두셀라를 낳았다.
“에녹”은 일곱 번째 교회를, “므두셀라”는 여덟 번째 교회를 뜻한다.

“에녹”이라는 교회의 품질은 다음 절에서 묘사되고 있다.

22절. 그리고 에녹은 그가 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 년을 하느님과 함께 걸었다, 그리고 아들들과 딸들을 낳았다.
“하느님과 함께 걷는 것”이란 신앙에 관한 교리를 의미한다. 그가 “아들들과 딸들을 낳았다”란 진리들과 선들에 관한 교리적인 문제들(matters)을 의미한다.

그 당시 태고 교회와 계승된 교회들에서 지각의 문제들(matters)이었던 것들로부터 교리들의 뼈대를 구축해서 이 교리들이 선하고 참된 것을 아는 규칙으로 사용할 수 있게 한 이들이 있었다. 이 인물들이 “에녹”이라 불리었다. 이것이 “그리고 에녹은 하느님과 함께 걸었다”라는 말에 의해 의미되었다; 그리고 그들은 그 교리를 “에녹”이라 불렀다; 마찬가지로 이것은 이름, “에녹”이 “가르치다(instruct)”를 뜻함에 의해서도 의미되기도 한다. 이와 똑같이 “걷는다”라는 표현으로부터, 그리고 그가 “여호와와 더불어서”가 아니라 “하느님과 더불어 걸었다”라고 말해진 사실로부터도 분명해진다: “하느님과 더불어 걷는” 것은 가르치는 것과 신앙의 교리에 따라 사는 것이나, “여호와와 더불어 걷는” 것일 경우, 이는 사랑의 생명으로 사는 것이다. “걷는 것”은 “법 안에서 걷는다”, “규례 안에서 걷는다”, “진리 안에서 걷는다” 등등과 같이 사는 것을 의미하는 관습적 언어 형체이다. “걷는”것은 길(way)에 더 적절히 어울리는 단어인 바, 진리에, 결과적으로 신앙의 교리에 더 친근하다. 말씀에서 “걷는” 것에 의해 의미되는 것이 구절에 따라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대략 아래 구절들로부터 나타날 것이다.
미가서에서:
그분께서 네게 선인 것을 보여주셨다, 오 사람아, 그리고 여호와께서 네게 무엇을
요구하시는 것은, 오직 공정을 행하는 것, 자비로부터의 사랑을 베푸는 것,
그리고 네 하느님과 함께 걸음으로 네 자신을 겸손해지게 하는 것이 아니더냐? (미. 6:8),
위에서 “하느님과 더불어 걷는” 것은 여기서 암시된 것들에 따라 사는 것을 의미한다; 어쨌든 여기서 “하느님과 더불어” 라고 말해지는 한편, 에녹에 관해서는 또 다른 단어 “하느님과 더불어로부터”가 의미되는 것이 사용되고 있다. 하여 표현이 애매모호하다. 다윗서에서:
당신께서는 충동질 받음으로부터 저를 구해주셨습니다. 하여 나는 산 자의
빛 안에서 하느님 앞에서 걸을런지 모릅니다 (시. 56:13),
위에서 “하느님 앞에서 걷는” 것은 신앙의 진리 안에서 걷는 것, 이는 산 자의 빛이다. 마찬가지가 이사야서에서:
어둠 안에서 걷는 사람들이 큰 빛을 본다 (이. 9:1).
이렇게 주님께서 모세에 의해 말하신다:
내가 한 가운데에서 걸을 것이다, 그리고 네 하느님일 것이다,
그리고 너는 내 백성일 것이다 (레. 26:12),
그들이 법의 교리에 따라 살 것을 의미하면서,
예레미야서에서:
사람들은 그들이 사랑하며, 섬기며, 그에 따라 걷고, 추구하던 태양과 달 앞에,
하늘들의 별들에 그것들을 흐트러 놓을 것이다 (예. 8:2),
위 구절에서 명백한 구분이 사랑의 것들과 신앙의 것들 사이에 있다; 사랑의 것들은 “사랑하는,” “섬기는”에 의해 표현되고, 신앙의 것들은 “걸음,” “추구함”으로 표현되어져 있다. 예언적 저술(writing)의 모두에서 모든 표현은 정밀하게 되고 있다. 하여 이 단어를 저 단어로 적당히 섞어 쓰는 일은 없다. 그러나 “여호와와 더불어 걷는 것,” 또는 “여호와 앞에서”는 말씀에서 사랑의 생명을 사는 것을 의미한다.

23, 24절. 에녹의 모든 날들은 삼백 육십 오 년 이었다. 24 그리고 에녹이 하느님과 함께 걸었다, 그리고 그는 더 이상 있지 않았다, 그 이유는 하느님께서 데려 가셨기 때문이다.
“에녹의 모든 날들이 삼백 육십 오 년 이었다”란 그들이 조금밖에 없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가 “하느님과 함께 걷는 것”은 신앙에 관한 교리를 의미한다. “그는 더 이상 있지 않았다. 하느님이 데려가셨기 때문이다”란 후세의 사용을 위해 이 교리를 보존하셨심을 의미한다.

“그는 더 이상 있지 않았다, 그 이유가 하느님이 그를 데려가셨기 때문”이라는 말들에 관하여가 후세의 사용을 위해 이 교리의 보존을 의미하는데, 에녹의 경우, 이미 말했던 바 같이, 그는 태고 교회에서 지각의 주제(matter)가 되어왔던 교리로 환원하였다는 것, 그리고 이 교회 때에는 환원된 이 교리를 허용하실 수 없었다는 것이다; 그 이유가 지각에 의해 안다는 것은 교리에 의해 배움으로부터 와는 매우 다른 것이기 때문이다. 지각 안에 있는 이들은 그들이 안 것을 공식화한 교리에 의해 굳이 배울 필요가 없었다. 예를 들면: 어떻게 생각하는 것이 잘하는가를 아는 예술가는 예술의 어떤 규칙에 의해 가르침을 받을 이유가 없다, 그 이유는 가르침을 받는 중에 잘 생각하는 그의 능력이 오히려 손상 입을 가능성도 있기 때문이다. 마치 스콜라식(scholastic, 학교 교육의) 먼지(혼란)로 해서 오히려 궁지에 몰리는 경우도 가능하다는 말이다. 지각을 수단으로 배우는 이들에게 주님께서는 내적 경로를 수단으로 선하고 참된 것을 알게 하셨다; 그러나 교리로부터 배우는 이들에게, 지식이 외적 경로를 수단으로, 또는 신체적 감각들을 수단으로 주어진다; 그리고 그 차이는 빛과 어둠의 차이와 비슷하다. 천적 인간에게는 명세서 같은 자세한 설명이 필요 없다. 그 이유는 그들은 상태나 주위 환경에 일치하여 아주 미세하고 특유한 것들 안으로 들어가기 때문이다. 그러나 태고 교회의 지각력이 멸하여질 것이 예견되었고, 이후 인류는 참되고 선인 것을 교리를 수단으로 배우리라는 것, 또는 어둠을 수단으로 빛에 나아온다는 것이 예견되었는 바, 여기서 “하느님께서는 그를 데려가셨다”고 말해진다. 즉 후세의 사용을 위해 교리를 보존하셨다는 말이다.

“에녹”이라 불리운 이들과 더불은 지각의 상태와 품질이 나에게 알려졌었다. 이것은 어떤 명료함 없는 일종의 희미한 지각이었다; 그 이유가 이런 경우 마음은 마음의 바깥쪽 상황만으로 교리적인 것들로 결정하기 때문이다.

25절. 므두셀라는 일백 팔십 칠 년을 살았다, 그리고 라멕을 낳았다.
“므두셀라”는 여덟 번째 교회를, “라멕”은 아홉 번째 교회를 의미한다.

이 교회의 품질이 언급된 곳은 아무 곳에도 없다; 그러나 그것의 지각력이 일반적이고 희미하다는 것은 “노아”라 불리는 교회의 묘사로부터 분명해진다; 완전함이 퇴조된 만큼, 완전한 지혜와 총명도 퇴조된 것이다.

26, 27절. 므두셀라는 그가 라멕을 낳은 후 칠백 팔십 이 년을 살았다, 그리고 아들들과 딸들을 낳았다. 27 그리고 므드셀라의 모든 날들은 구백 육십 구 년 이었다, 그리고 그는 죽었다.
이 구절도 상기 구절들과 동일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28절. 그리고 라멕은 일백 팔십 이 년을 살았다, 그리고 아들을 낳았다.
“라멕”은 여기서 아홉 번째 교회를 의미한다. 그런데 이 교회의 진리와 선에 관한 지각은 대단히 일반적이고 희미해져서 거의 없다시피 된 바 교회는 실상 무용지물의 교회였다. “아들”은 새로운 교회의 출현을 의미한다.

“라멕”은 진리와 선에 대한 지각이 매우 일반적이고 매우 희미해져 지각이 없다고 해야할 정도로만 남아 있는 교회, 결과적으로 교회가 황폐해졌음을 의미하고 있다는 것이 앞 장에서 말해진 것과 다음 절에서 이어지는 것으로부터 나타난다. 제4장에 있는 “라멕”은 제 5장에 있는 “라멕”과 거의 같은 의미인 황폐됨을 의미로 가진다. (4장의 경우, 18, 19, 23, 24절 참조); 그리고 그를 낳은 자 또한 거의 같은 이름인 “므두사엘”인 바, 의미 또한 거의 같다. “므두사엘”과 “므두셀라”는 막 죽으려하는 어떤 것이 의미되어진다; 그리고 “라멕”에 의해서는 파괴되는 것이 의미되어진다.

29절. 그리고 그는 그의 이름을 노아라 불렀고, 말하기를, 그가 여호와께서 저주하신 지면에서 우리 손들의 수고와 우리의 일로부터 우리를 위로할 것이다.
“노아”는 고대 교회(the Ancient Church)를 의미한다. “여호와께서 저주하신 지면으로부터 우리 손들의 수고와 우리의 일로부터 우리를 위로함”이란 교리를 의미한다. 이 교리를 수단으로 뒤집혀져 왜곡되어 갔던 것들이 회복되어지게 된다.

“노아”에 의해 고대 교회, 또는 홍수 이후 세 교회들의 부모되는 교회를 의미했다는 것은 노아를 크게 다루는 다음 페이지(page)에서 나타날 것이다

제 5장에 있는 이름들은 교회들, 같은 말로 교리들을 의미한다; 그 이유가 교회는 교리로부터 존재와 그것의 이름을 갖기 때문이다; 고로 “노아”는 태고 교회로부터 남은 교리, 또는 고대 교회를 의미한다. 교회들, 또는 교리들과 더불어 어떻게 이런 경우가 있어지는가는 앞서 서술했었다. 즉 그들이 기운다, 그리고 그 기움은 신앙의 선들과 진리들의 어떤 것도 남아 있지 않을 때까지이다는 것, 하여 교회는 황폐되어져 있다고 말씀에서 말하여진다. 그러나 여전히 리메인스(remains, 아껴두심)는 항상 보존되고 있다는 것, 또는 비록 극소수일지라도 누군가와 더불어 신앙 속의 선과 진리는 남아 있다; 그 이유가 신앙 속의 선과 진리가 이들 극소수 안에서라도 보존되지 않으면, 인류가 천국과 결합하는 일은 없게될 것이기 때문이다. 개인적 차원에서 인간 안에 있는 리메인스를 생각해보면, 이것을 덜 가진 자일 수록, 그가 소유한 지식과 이성은 덜 계발되어진다. 그 이유가 선과 진리의 빛은 리메인스로부터, 또는 주님을 통하여 리메인스로부터 흘러들기 때문이다. 만일 인간 안에 리메인스가 없다면, 사람일 수가 없고 야수보다 더 천박할 것이다; 더 적은 리메인스가 거기 있다면 덜 사람인 것이다. 더 있다면 더 사람이 되어 있다. 리메인스는 천국의 별과 같다. 이 별이 작다면, 빛 또한보다 작아진다. 더 크다면 빛 역시 더 밝아진다. 태고 교회로부터 남게된 매우 적은 리메인스들이 노아로 불리는 교회를 구성한 이들 사이에 있었다; 그러나 이 남은 것은 지각으로부터의 남은 것이 아니고, 완전함으로부터의 것이다, 그리고 태고 교회 안에 있는 지각으로부터의 것들로부터 파생된 교리로부터의 남은 것이다; 그러므로 새로운 교회가 주님에 의해 지금 일으켜졌다. 이 교회는 태고 교회와는 완전히 다른 태생적 특성으로부터 이다. 하여 고대 교회라 불리워진다. 고대란 홍수 이전 시대들의 마감에서 존재하여 홍수 이후 첫 기간 동안 존재한 경우를 두고 말해진다. 이 교회에 관하여는 주님의 신성한 자비에 의해 이후 더 말해질 것이다.

“여호와께서 저주하신 지면으로부터 우리의 손들의 수고함과 일로부터 우리를 위로하심”에 의해 이 교리로 해서 뒤집혀만 갔었던 것이 회복되어짐이 의미되어진다는 것은 주님의 신성한 자비로부터 이어지는 페이지(page)들에서 나타날 것이다. “일(work)”에 의해 그들은 노동과 고생을 하지 않으면 참된 것을 지각할 수 없다는 것이 의미되어지고 있다. “여호와께서 저주하신 지면으로부터 우리의 손들의 수고함”에 의해 그들은 아무 선도 행할 수 없다는 것이 의미되어진다. 고로 라멕을 묘사한 것은 황폐된 교회였다. “일과 손들의 수고함”이 있는 때는 자신들로부터, 또는 자기 자신(own)으로부터 인간이 참된 것을 추구하고 선인 것을 행하는 때이다. 이 일과 수고함으로부터 와지는 것은 여호와께서 저주하신 지면으로부터인 것은 아무 것도 없고 오직 거짓과 악밖에 없다. (“여호와께서 저주하심”에 의해 의미된 것은 제 245항에서도 알런지 모른다.) “위로함”은 노아와 관련되고 있다. 이것에 의해 새로운 거듭남, 고로 새로운 교회가 의미되고 이것이 고대 교회이다. 이 교회, 또는 “노아”는 그러므로 마찬가지로 쉼(rest)을 의미하고, 쉼으로부터 오는 위로가 의미되는데, 태고 교회에 관해 말했던 부분, 즉 주님이 쉬신 일곱 째 날이 의미된다. (84-88항도 참조.)

30, 31절. 그리고 라멕은 그가 노아를 낳은 후 오백 구십 오 년을 살았다, 그리고 아들들과 딸들을 낳았다. 31 그리고 라멕의 모든 날들은 칠백 칠십 칠 년 이었다, 그리고 그는 죽었다.
“라멕”은 무용지물이 된 교회를 의미한다. “아들들과 딸들”은 이런 교회의 임신과 출생들을 의미한다.

라멕에 관계되는 것은, 그가 아들들과 딸들을 낳았다는 것, 이것은 이와 같은 교회의 임신과 출생이다는 것 외에 더 이상은 없는 바, 이 주제에 더 머무를 필요는 없는 것 같다. 출생들이 무엇인지, “아들들과 딸들”이 무엇인지는 교회로부터 나타난다; 그 이유가 교회가 이런 종류이면 그것으로부터의 출생 또한 그러할 것이기 때문이다. “므두셀라”와 “라멕”으로 불리운 교회 모두 홍수 전에 기간이 만료되었다.

32절. 그리고 노아는 오백 년의 아들 이었다. 그리고 노아는 셈, 함, 야벳을 낳았다.”
“노아”는 고대 교회를 의미한다. “셈, 함, 야벳”은 세 개의 고대 교회들을 의미한다. 이 교회들의 부모는 “노아”라 불리는 고대 교회였다.

“노아”로 부른 교회가 홍수 전에 있는 교회로는 세어지지 않았다는 것은 29절로부터, 즉 “여호와께서 저주하신 지면으로부터 그들의 손들의 수고와 그들의 일로부터 그들을 위로하실” 것이다고 말한 대목으로부터 나타난다. “위로받음”은 교회가 살아남고 참아내는 것이다. 노아와 그의 아들에 관하여는 이후 주님의 신성한 자비로부터 살필 것이다.

앞 페이지들에서 홍수 전에 존재한 교회들에 의해 소유된 지각에 관하여 말했었다, 그리고 오늘날 지각은 거의 알려지지 않고 있다, 하여 어떤 이는 계시의 계속이라 하고…어떤 이는 인간들 안에 이식된 어떤 것이라 하고…혹 자는 상상이라 하고…갖가지 말들이 제멋대로 나부끼고 있다; 지각은 사랑으로부터의 신앙 안에 있는 이들에게 주님에 의해 주어지는 참 천적 자체(the very Celesstial itself)와 같다. 그리고 끝없이 다양해지는 보편적 천국 안에 있는 지각과 같다: 그러므로 지각이 무엇인지에 관한 약간의 개념이라도 사람들 사이에 있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주님의 신성한 자비로부터, 천국들 안에 존재하는 주요한 종류의 지각을 이어지는 페이지에서 서술해보게 된다.
***************************************************

창세기 제 6 장

성경: 창세기 제 6 장

1. 사람이 지면의 얼굴에서 그 자신을 늘려가는 것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들에 게서 딸들이 태어났다.
2. 그리고 하느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을 보니 그들이 선 이었다, 그리고 하느님의 아들들은 자기들이 선택한 모든 것을 그 자신에게 아내로 취했다.
3. 그리고 여호와께서 말하셨다, 나의 영은 사람을 영원히 타이르지 않으리라, 그 이 유는 그는 육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의 날들은 일백 이십 년 이리라.
4. 그 당시, 땅에 네피림이 있었다. 그리고 특히 하느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에게 들어간 이후, 그리고 그들이 그들에게 낳아 주었는데, 네피림과 똑 같은 용사가 되 었고, 이 용사들은 옛날에 있었고 유명한 사람이었다.
5. 그리고 여호와께서는 사람 속의 악이 땅 위에 번창했고, 그리고 그의 심정 속의 생 각의 모든 상상들이 매일 악할 뿐임을 보셨다.
6. 그리고 이것은 여호와께서 사람을 만드신 것을 후회되게 했다, 그리고 그분으로하 여금 그분의 심정에서 몹시 슬퍼하게 했다.
7. 그리고 여호와께서 말하셨다, 나는 내가 지면의 얼굴에 창조했던 사람을 파괴하리 라. 사람과 짐승, 기는 것들, 하늘의 새를 파괴하리라. 그 이유는 나는 내가 그것들 을 만든 것을 후회했기 때문이다.
8. 그리고 노아는 여호와의 눈에서 은총을 발견했다.
9. 이것들은 노아로부터의 출생들이다. 노아는 그의 세대에서 올바른 자요 완전한 사 람이었다. 노아는 하느님과 함께 걸었다.
10. 그리고 노아는 세 아들들, 셈, 함, 야벳을 낳았다.
11. 그리고 땅은 하느님 앞에서 부패되어 있었다. 그리고 땅은 폭행으로 채워져 있었 다.
12. 그리고 하느님께서 땅을 보셨다, 그리고 들여다보니 그것은 부패되어 있었다, 그 이유가 모든 육체가 땅에서 그것의 길을 타락시켰기 때문이다.
13. 그리고 하느님께서 노아에게 말하셨다, 모든 육체의 끝이 내 앞에 와 있다. 그 이 유는 땅이 그들의 얼굴로부터 폭행으로 채워져 있다, 그리고 보라 나는 땅과 함 께 그들을 파괴하리라.
14. 너는 고페르 목재(gopher wood)로 방주를 만들고, 너는 대저택들을 방주에 만들 어라, 그리고 그것을 역청으로 안팎으로 역청칠을 하라.
15. 이런 식으로 너는 방주를 만들어라. 방주의 길이는 삼백 큐빗이고, 넓이는 오십 큐빗이며, 높이는 삼십 큐빗이다.
16. 너는 방주에 창문을 만들어라, 그리고 너는 창문을 위로부터 한 큐빗에서 마무리 하라. 그리고 너는 방주의 문을 옆쪽에 두어라. 너는 가장 낮은 층, 둘째 층, 셋째 층을 만들 것이다.
17. 그리고 나는, 내가 땅 위에 물들의 홍수를 가져와서 하늘들 아래로부터 있는 생 명들의 호흡이 있는 모든 육체를 파괴하리라; 땅 위에 있는 모든 것도 소멸할 것 이다.
18. 그리고 나는 너와 나의 언약을 세우겠다. 그리고 너는 방주로 들어 가되, 너, 그 리고 너의 아들들, 너의 아내, 네 아들들의 아내들도 너와 함께 들어가라.
19. 그리고 모든 육체의 살아 있는 모든 것 각각 한 쌍을 너와 함께 방주로 들어오게 해서 생명이 보존되게 만들어라. 그들은 숫컷과 암컷일 것이다.
20. 새는 각 종류대로, 짐승은 각 종류대로, 지면에서 기는 것도 각 종류대로, 모든 종류가 한 쌍씩 너에게로 들어와서 생명이 보존되게 하라.
21. 너는 먹어야 하는 모든 양식을 너에게로 가져오라, 그리고 그것들을 너에게로 수 집하라. 그리고 그것들은 너와 그들을 위한 양식일 것이다.
22. 노아는 하느님께서 그에게 명령한 모든 것에 따라 했다. 그렇게 그는 했다.

각 절의 내적 의미

1절. 사람이 지면의 얼굴에서 그 자신을 늘려가는 것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들에게서 딸들이 태어났다. “사람”은 여기서는 그 당시 존재하던 인류의 종족을 의미한다. “지면의 얼굴”은 교회가 있었던 모든 지역을 의미한다. “딸들”은 이 사람의 의지에 관련되는 것들, 결과적으로 그리워함(yearning)을 의미한다.

“사람”에 의해 그 당시 존재한 인류 종족, 실로 악 이었던 종족, 썩어 있었던 종족이 의미된다는 것은 3절, 즉 “내 영은 영원히 사람을 타이르지 않을 것이다, 그 이유가 그가 육이기 때문이다”로부터 나타난다. “사람 속의 악이 번창했고, 그의 심정 속의 생각들의 상상은 오로지 악 이었다” (5절). “나는 내가 창조한 사람을 파괴할 것이다” (7절); 그리고 다음 장 (7:21-22)에서, “모든 육은 죽었다, 땅에서 기었던 것, 코로 생명들의 호흡을 하던 모든 것이 죽었다.” 사람에 관련해 이미 말했던 바, 주님 만이 사람이시다는 것, 그리고 그분으로부터 모든 천적 인간, 또는 천적 교회가 “사람”이라 불리운다. 이로부터 여타 다른 교회들도 모두 사람들이라 불리운다: 개개인의 차원에서도, 무슨 신앙이든 상관없이 야수로부터 구별되고 사람되기는 교회의 경우와 마찬가지 이다. 주님으로부터 있는 것, 즉 리메인스를 가짐을 통하여를 제외하면 사람은 사람이 아니고, 야수와 구별되지 않는다. 리메인스가 우리를 사람이라 불리도록 하는 것을 가능하게 한다, 그리고 리메인스가 이것을 가능하게 하고, 리메인스가 주님의 것이기 때문에, 다시 그것은 우리의 상태가 심히 악하다 해도 주님으로부터 우리로 하여금 사람의 이름을 획득하게 한다. 다시 말해, 우리가 리메인스를 가지지 않으면 사람일리 없고 어쩌면 야수보다 더 하위일지 모른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다.

“지면의 얼굴들”은 교회가 있는 모든 지역을 의미한다는 것은 “지면”의 의미로부터 분명해진다; 그 이유가 말씀은 “지면(ground)”과 “땅(earth)”을 정밀하게 구분하기 때문이다; “지면”은 교회를 의미한 어디이든, 또는 교회에 속하는 어떤 것이다; “지면”으로부터 “사람”, 또는 “아담”이 오고, 아담은 “지면”을 뜻한다; “땅”은 다양한 장소에서 교회가 없음, 또는 교회에 속하는 어떤 것이 없음이 뜻해진다. 예를 들면, 1장에서는 “땅”만이 명명되고 있다, 그 이유는 아직까지는 교회, 또는 거듭나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2장의 경우, “지면”이 처음 언급된다, 그 이유는 교회가 있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여기서도 말해지고, 다음 장에서(7:4, 23), “모든 물질은 지면의 얼굴로부터 파괴될 것이다”에서도 “지면”은 교회가 있는 지역을 의미하고 있다; 그러나 창. 7:3에서 막 창조되어져야 할 교회에 관해 말하시면서, “지면의 얼굴 위에서 씨가 살아있게 보존하는 것”이 말해진다. “지면”은 말씀 어느 곳에서나 같은 의미를 가진다; 이사야서를 보자:
여호와께서 야곱 위에 자비를 가지실 것이다, 그리고 아직은 이스라엘을 선택하실
것이다, 그리고 그들을 그들 자신의 지면 위에 놓으실 것이다, 그리고 백성들이
그를 데려 갈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장소로 그들을 데려올 것이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가문은 여호와의 지면 위에서 그것들을 상속받을 것이다 (이. 14:1-2),
만들어져 있었던 교회에 관해 말하신 것이다; 이에 반해 같은 장에서 교회가 없음이 “땅”이라 불린다 (이. 14:9, 12, 16, 20-21, 25-26).
다시:
그리고 유다의 땅은 이집트에게 공포일 것이다; 그 날에 가나안의 입으로 말하는
다섯 성이 이집트의 토지에 있을 것이다 (이. 19:17-18),
위에서 “지면”은 교회를 의미한다, 그리고 “토지”는 교회가 없는 곳이다. 다시:
땅은 술취한 자 같이 앞 뒤로 휘청거릴 것이다; 여호와께서 높은 곳에서 높은 자의
군대 위에 방문하실 것이다, 그리고 지면 위에 있는 지면의 왕들 위에 방문하실 것이다.
(이. 24:20-21).
예레미야서에서:
닳아 해진 지면 때문에, 그 이유는 땅 위에 비가 없기 때문에, 농부는 부끄러워할
것이다, 그들은 자기들의 머리를 덮을 것이다, 그렇다, 암사슴이 들판에서
새끼를 낳았다 (예. 14:4-5),
위의 “땅”은 “지면”을 포함하는 땅이다, 그리고 “지면”은 “들판”을 포함하는 지면이다.
같은 예언서에서:
그분은 이스라엘의 후손을 북쪽의 토지로부터, 내가 그들을 몰아낸 모든 토지들로부터
데려왔다, 그리고 그들은 그들 자신의 토지에서 거주할 것이다 (예. 23:8),
위에서 “토지”와 “토지들”은 교회들이 없는 곳이다; “지면”은 교회가 있는 곳, 진정한 예배가 있는 곳이다. 다시:
나는 예루살렘의 남은 자들을, 이 토지 안에 남은 그들을, 그리고 이집트에 거주하는
그들을 줄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들을 폭동에 넘길 것이다, 그 이유는 악이
땅의 모든 왕들에게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검을, 기근을, 그들 사이에 염병을
보낼 것이다, 하여 그들이 내가 그들에게 주고, 그들의 선조에게 준 지면으로부터
싹쓸어 사라질 때까지 보낼 것이다 (예24:8-10),
위에서 “지면”은 교리와 교리에서 파생된 예배를 의미한다; 그리고 이와 마찬가지가 예. 25:5에도 있다.
에스겔서에서:
나는 너희가 흐트러져 있어 왔었던 토지들(lands)로부터 너희를 그러모을 것이다,
그리고 내가 너희를 이스라엘의 토지 안으로 다시 데려올 때, 내가 너희 조상에게
주려고 내 손으로 들어올린 토지 안으로 데려올 때, 너희는 내가 여호와인 줄을
알 것이다 (겔.20:41-42),
위에서 “지면”은 내적 예배를 의미한다; 내적 예배가 없을 때 “토지”라 불리운다. 말라기서에서:
나는 너를 위하여 너를 소멸되게 하는 그를 견책할 것이다, 그리고 그는 지면의 열매를
너를 위해 썩지 않게 할 것이고, 포도나무가 들판에서 너를 위하여 빼앗김을
당하지 않게 할 것이다. 하여 모든 민족들이 너를 복되다 부를 것이다,
그 이유가 너는 매우 기쁜 토지일 것이기 때문이다 (말. 3:11-12),
위에서 “토지”는 (담는) 용기(container)를 표시한다, 그러므로 이것은 인간임이 분명하다. “지면”이 교회, 또는 교리를 표시할 때, 인간이 “토지”라 불리우고 있다.
모세의 책에서:
노래하라, 오 너희 민족들아, 그의 백성들아, 그분은 그분의 지면을 위하여,
그분의 백성을 위하여 죄씻음을 만드실 것이다 (신. 32:43),
위에서 이방인들의 교회가 분명하게 의미되는데, 이것이 “지면”이라 불리운다. 이사야서에서:
아이가 악을 거절하고 선을 선택하는 것을 알기 앞서, 지면은 버려짐을 당해
있을 것이고, 이것을 너희는 양쪽의 왕들의 면전에서 증오할 것이다 (이. 7:16),
위는 주님의 강림을 말하고 있다; “지면이 버려짐을 당해 있을 것”은 교회, 또는 신앙의 진정한 교리를 표시한다. “지면”과 “들판”은 씨가 뿌려짐으로부터 그렇게 불려진다는 것은 분명하다. 이사야서에서:
그때에 내가 지면에 뿌릴 네 씨에게 비를 주실 것이다; 지면 위에서 노동하는
수소들과 어린 나귀들 (이. 30:23-24).
그리고 요엘서에서:
들판은 황폐해 있다, 그리고 지면은 슬퍼했다,
그 이유는 곡식이 못쓰게 되었기 때문이다 (욜. 1:10).
그러므로 “사람”은 히브리어에서 “아담”이라 불리우고, “지면”은 교회를 의미함이 분명하다.

진정한 신앙의 교리 안에서 훈육된 이들이 사는 모든 지역이 교회의 지역이라 불리운다; 마치 가나안의 토지, 유대 교회가 거기 있었을 때이고, 지금의 경우 유럽 지역, 기독교가 있는 것과 같다; 이 지역 바깥의 토지나 지역들은 교회의 지역, 또는 “지면의 얼굴들”이 아니다. 홍수 이전 교회가 있던 곳은 에덴의 동산에서 흘러나온 강들이 에워싼 토지들로부터 나타날런지 모른다. 이를 수단으로 말씀의 여러 장소에서 가나안의 토지의 경계들이 묘사되고 있다; 또한 “토지 안에” 있었다는 네피림에 관해 이어지는 구절로부터도; 그리고 이 네피림이 가나안의 토지에 거주했고 이들로부터 이다는 아낙의 후손들을 언급한 구절로부터도 알 수 있을 것이다 (민. 13:33).

“딸들”이 이 인간의 의지로부터 있는 것, 결과적으로 그리워함(yearning)을 의미하는 것은 창. 5:4에서 “아들들과 딸들”에 관해 말했던 바로부터 알 수 있을 것이다. 그 구절에서, “아들들”은 진리들을, 그리고 “딸들”은 선들을 의미하고 있다. “딸들”, 또는 선들은 의지로부터 있다. 그러나 인간이 존재하는 것은 그의 이해함이 존재하는 것이고, 그의 의지가 존재하는 것과 같다. 고로 “아들들과 딸들”이 존재하는 것이다. 현재의 구절은 부패된 상태의 인간을 다루고 있다. 하여 그는 의지가 없고 의지 대신 탐욕이 있을 뿐이다. 이 탐욕이 당사자가 상상하기로는 그의 의지인 것이어서 그렇게 불리워진다. 문장에서 서술되는 것은 서술되는 것의 품질과 일치되기 마련이다. 사람으로부터 출생한 딸들이 여기서 서술되는 바, 딸들도 부패된 인간이다.
“딸들”이 의지로부터의 것들을 의미하지만, 거기에 선으로부터의 의지가 없다면 그 의지는 의지가 아니라 그리워함(yearning)에 불과하다; “아들들”이 이해력으로부터의 것들을 의미하지만, 진리를 이해함이 없을 경우, 그 이해력은 공상에 불과하다. 여성 섹스(female sex)의 경우, 의지, 또는 탐욕이 이해력보다 더 그들 안에서 지배하도록 만들어져 있다. 여성들의 기질의 경향이 이러하고, 그것의 본성이 이러하다. 이에 비해 남성의 경우, 지성, 또는 이성이 마음을 우선적으로 통치한다. 이로부터 두 이성의 결혼은 모두 각각의 인간 안에서 의지와 이해함의 결혼과 같다; 본문 당시 선으로부터의 의지는 없으나, 아직은 지성적인, 또는 합리적인 어떤 것은 주어질 수 있었는데, 이런 이유로 유대 교회에서 아내는 순종하고, 남편의 특권을 법제화 해 둔 이유이기도 하다.

2절. 그리고 하느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을 보니 그들이 선 이었다, 그리고 하느님의 아들들은 자기들이 선택한 모든 것을 그 자신에게 아내로 취했다.
“하느님의 아들들”은 신앙의 교리적인 것들을 의미한다. “딸들”은 그리워함을 의미함은 이미 말했다. “하느님의 아들들은 사람의 딸들이 선 이었다고 보면서, 자기들이 선택한 모든 것을 그 자신에게 아내로 취했다”란 신앙의 교리적인 것들이 그 자체를 그리워함들과 결합시킨 것, 사실상 그리워함이 무엇이었든 모두 교리적인 것들과 결합시켰다는 말이다.

“하느님의 아들들”에 의해 신앙의 교리적인 것들이 의미되는 것은 “아들들”의 의미로부터 분명해지는데, 이는 5장 4절에서 살폈다. 거기서 “아들들”은 진리들을 의미했다. 교회의 진리들은 교리적인 것들이다. 교리적인 것들은 그 자체에서는 진리들인데, 그 이유는 여기서 다루는 이들은 이 교리들을 태고인들로부터 전설(tradition, 구전)을 수단으로 가졌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것들이 “하느님의 아들”이라 불리우고 있다; 그것들이 관계적 차원에서 그렇게도 불리우는데, 그 이유는 그리워함이 “사람의 딸들”이라 불리우기 때문이다. 이 교회인의 품질이 여기서 묘사되는데, 즉 그들은 거룩인 것인 교회의 진리들을 그리워함 안에다가 침수시켰다. 그리하여 그 거룩한 진리들을 더럽혔다; 그리고 이 방법 안에서 그들은 자기들을 매우 강하게 설득했던 원리들까지 확증해 버렸다. 이런 일이 어떻게 발생했을까를 짐작해보려면 아마 각자 자신 속이나 타인 속에서 이런 현상이 지나가는 것을 주목하면 쉽게 가능할지 모른다: 어떤 주제에 관련하여 자신을 설득하는 이들의 경우, 그는 사람들이 진리이다고 상상하는 것, 필요하면 사람들이 주님의 말씀 안에 포함되었다고 발견함을 수단으로 해서라도 자신을 설득한다; 그들이 받은 원리들에 기우는 한편, 설득도 되어가는데, 그들은 모든 것을 그 주제에 동의하고 좋아하게 만든다. 이에 더하여 자기를 사랑함의 영향 아래 더 있을 수록 그는 설득된 주제를 더 견고하게 붙잡는다. 이러한 인종(race)에 관한 것은 주님의 신성한 자비로부터 차 후 더 살필 것이다. 묘한 이야기이지만, 우리가 그들의 무서운 설득들을 취급할 때, 발견되는 것은, 그들이 추론들을 수단으로 해서 흘러드는 것을 결코 허용하지 않고 오직 그리워함을 수단으로 했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그들은 현존하는 영들 안에서 합리적으로 있는 모든 것을 죽인다는 것이다. 이로부터 “하느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을 선 이었다고 보면서, 그들이 선택한 모든 것을 아내들로 자신들에게 취했다”는 구절의 의미가 나타난다, 즉 그들은 그들의 그리워함들에, 사실상 어떤 그리워함이었든지 신앙의 교리들을 결합시켰다는 것이다.

인간이 자기의 신앙의 교리들을 사악한 그리워함들에 침수시키는 품성을 지닐 때, 그는 진리들을 모독한다, 그리고 자신으로부터 리메인스들을 빼앗긴다. 설사 그것들이 남아있다 해도 생산성이 없다. 그 이유가 리메인스가 산출되어 보았자 모독되어 있는 것들에 의해 다시 모독되기 때문에 산출이 있으나마나 이다. 말씀에 대한 모독들은 마치 (피부의) 경결을 생산한다. 이 경결이 폐쇄(obstruction)의 원인이다. 그리고 리메인스의 선들과 진리들을 흡수해 버린다. 그러므로 비록 거짓 원리들 안에 있는 이들이 주님의 말씀이 진리들임을 믿지 않을지라도, 사람들이 주님의 말씀을 모독하는 짓은 피하게 하는 것이 상책인데, 그 이유는 말씀 안에 영원한 생명이 있기 때문이다.

3절. 그리고 여호와께서 말하셨다, 나의 영은 사람을 영원히 타이르지 않으리라, 그 이유는 그는 육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의 날들은 일백 이십 년 이리라.
“나의 영이 사람을 영원히 타이르지 않으리라고 여호와께서 말하심”이란 사람을 더 이상 전과 같은 방법으로 인도하시지 않음을 의미한다. “그가 육체(flesh)이기 때문이다”란 그가 물질적인(corporeal) 인간이 되었기 때문임을 의미한다. “그의 날들은 일백 이십 년 이리라”란 그는 신앙으로부터의 리메인스(remains)를 가져야만 할 것임을 의미한다.

내 영은 인간을 영원히 타이르지 않을 것이라고 여호와께서 말하심에 의해 인간은 더 이상 과거와 같은 방법으로 인도하시지 않으실 것임을 의미한다는 것은 앞서 말한 대목과 뒤잇는 구절로부터 분명해진다. 앞의 구절에서, 인간들은 자신들의 신앙의 진리, 또는 교리들을 그리워함들에 침수시킴을 통하여 그들은 더 이상 타일러 질 수 없게 되었다는 것, 즉 악이 무엇인지 더 이상 알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진리와 선을 지각하는 모든 능력이 그들의 설득들을 통하여 소멸되었는 바, 자기들의 설득들에 일치할 때만 그것이 진리이고 선이라고 믿게 된 것이다. 홍수 이후 교인들은 아주 다르게 되었다. 그들과 더불어서는 양심이 지각의 자리를 계승하였다. 이를 통하여 그들은 타일러 질 수 있었다. “여호와의 영이 질책하심(reproof)”은 내향의 지령, 지각, 또는 양심을 의미한다; 그리고 “여호와의 영”은 참되고 선한 것의 유입을 의미 한다; 이사야서를 보자:
나는 영원히 다투지 않을 것이다, 나는 영원히 화내지 않을 것이다, 그 이유는
영이 내 앞에서 궤멸하고 내가 만든 혼도 (그러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 57:16).

“육(flesh)”은 인간이 물질적이 되어갔음을 의미한다는 것은 말씀에서 육의 의미로부터 나타난다. 말씀에서 육은 일반적으로는 모두 각각의 인간, 그리고 특별하게는 물질적 인간을 의미하는데 사용되어진다. 모두 각각의 인간을 의미하기 위해 사용되는 경우를 보자. 요엘서에서:
나는 내 영을 모든 육 위에 쏟을 것이다, 그리고
너의 아들들과 딸들이 예언할 것이다 (욜. 2:28),
위에서 “육”은 인간을 의미한다, 그리고 “영”은 주님으로부터 진리와 선의 유입을 의미한다. 다윗서에서:
당신께서는 기도를 들으십니다, 당신에게 모든 육이 나아올 것입니다 (시. 65:2),
위에서 “육”은 모두 각각의 사람을 표시한다. 예레미야서에서:
인간을 신뢰하는 사람에게 저주가 있다, 그리고 육이 그의 팔을 만든다 (예. 17:5),
위에서 “육”은 인간을 의미한다, 그리고 “팔”은 힘(power)이다. 에스겔서에서:
모든 육이 안다는 것 (겔. 21:4-5).
스가랴서에서:
잠잠히 있으라, 모든 육이여, 여호와 앞에서 (슥. 2:13),
위에서 “육”은 모두 각각의 인간을 표시한다.
물질적 인간을 특별하게 의미하는 것의 경우를 보자. 이사야서에서:
이집트인은 인간이지 사람이 아니다, 그리고
그의 말(horse)들은 육이지 영이 아니다 (이. 31:3),
위 구절에서, 그들의 기억 속의 지식은 물질적임을 의미하고 있다; “말들”은 이 구절, 그 밖의 구절에서도 합리성을 표시한다. 다시;
그가 오른 손을 움추릴 것이다, 그리고 배고플 것이다; 그리고 그는 왼손에서
게걸스럽게 먹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만족해지지 않을 것이다;
그들 모든 이가 자기 자신의 팔의 육을 먹을 것이다 (이. 9:20),
인간의 자기 자신은 모두 물질적임을 의미하고 있다. 이사야서에서:
그는 혼으로부터, 그리고 육에 이르기까지 살라질 것이다 (이. 10:18),
위에서 “육”은 물질적인 것들을 의미한다. 다시:
여호와의 영광이 밝히 알릴 것이다, 그리고 모든 육이 그것을 함께 볼 것이다;
음성이 말했다, 외쳐라; 그리고 그는 말했다, 내가 무엇을 외칠 것인가?
모든 육은 풀이다 (이. 40:5-6),
위에서 “육”은 물질적인 모두 각각의 사람을 의미한다.
이사야서에서:
불 안에서 여호와께서는 논쟁하실 것이다, 그리고 그분의 검을 가지고 모든 육과
더불어 (논쟁하실 것이다), 그리고 여호와로부터 죽은 자가 불어나질 것이다 (이. 66:16),
위에서 “불”은 그러워함들을 처벌함을; “검”은 거짓들을 처벌함을; 그리고 “육”은 인간의 물질적인 것들을 의미한다. 다윗서에서:
하느님께서는 그들이 육이었다는 것, 스러지는 숨이다는 것,
그리고 (그것은) 다시 오지 않는다 (시. 78:39),
육(고기를)을 갈망하는(먹고 싶어하는) 광야에 있는 백성들에 관해 말하실 때, 그들은 물질적이었다는 것; 그들이 육을 바램은 그들이 물질적인 것들 만을 바랐음을 표현하였다 (민. 11:32-34).

인간의 날들이 일백 이십 년이다는 것은 인간은 신앙으로부터의 리메인스를 가져야 한다를 의미함은 창. 5:3-4절에서 살핀 바 있는 “날들”과 “햇수들”이 때들과 상태들을 의미함에서 나타난다; 그리고 태고인들은 간단한 숫자들과 이 숫자들을 합성하여 만든 숫자들을 가지고 교회에 있는 상태들과 변화함들을 의미했다; 그러나 그들이 교회를 평가하여 수치로 나타낸 본래의 모습은 오늘날은 완전히 상실되어져 있다. 이 구절에서도 숫자들이 등장하는데, 그나마 이를 이해해 보려면 최소한 1부터 12까지의 단순한 숫자의 감추어놓인 의미의 이해가 먼저 되어있어야 본문의 120년도 그 의미를 가늠해 볼 수 있다. 본문을 글자대로 이해한다면 사람의 목숨이 120년이다는 말이지만, 홍수 이후에도 더 오래 산 사람들이 11장만 보아도 수두룩하고, 노아의 경우도, 홍수 이후 “350년”을 살았다고 말하고 있다 (창. 9:28). 이렇게만 간단히 생각해보아도 성경의 숫자들에는 깊은 의미가 내포되어야 할 것이다 라고 짐작될 것이다. 숫자 “120” 안에 포함된 것은 숫자 “10”과 “12”로부터 나타난다. “120”의 의미는 이 두 숫자가 곱해질 때 120이 만들어진다는 것으로부터, 그리고 10과 12의 의미로부터 신앙으로부터의 리메인스를 의미함이 보여질런지 모른다. 숫자 “10”은 말씀에서, “1/10(십분의 일, 열 번째, tenth)”과 더불어, 리메인스(remains)를 의미하고 표현한다. 이 리메인스는 주님에 의해 내적 인간 안에서 보존되어지고, 거룩하다. 그 이유는 이것들은 주님으로부터만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숫자 “12”는 신앙, 또는 한 개의 복합체(complex)에서 신앙에 관계되는 모든 것들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이 두 숫자가 합성되어진 것은 신앙으로부터의 리메인스를 의미한다.

숫자 “십”, 그리고 “십분의 일”이 리메인스를 의미한다는 것을 말씀에서 확인해보자:
많은 집들이 크고 아름다우나 거주할 자 없이 황폐해 있을 것이다; 그 이유가
포도원 10 에이커에서 1 바트가 생산되고, 1 호멜의 씨가 1 에바를 산출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 5:9-10),
위 구절은 영적 (평면)의 것들과 천적 (평면)의 것들이 황폐해짐에 관하여서 이다: “포도원 10 에이커가 1 바트를 만든다”란 영적 평면으로부터의 리메인스가 거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1 호멜의 씨가 1 에바를 산출함”은 천적 평면으로부터의 리메인스가 거의 없음을 의미한다. 이사야서에서:
그리고 많은 것들이 토지 한 가운데에서 버려짐을 당할 것이다. 그럼에도
십분의 일이 그것 안에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되돌아 올 것이다, 그리고
그럼에도 그것은 다 소모되어질 것이다 (이. 6:12-13);
위에서 “토지 한 가운데”란 내적 인간을 의미한다; “십분의 일 부분”은 리메인스가 적음을 의미한다. 에스겔서에서:
너희는 정의로운 추를, 그리고 정의로운 에바를, 그리고 정의로운 밧을 가질
것이다: 에바와 밧은 한 개의 칫수로부터 있을 것이다. 즉 밧은 호멜의 십분의
일을 담는다, 그리고 에바도 호멜의 십분의 일을 담는다. 그것으로부터의 칫수는
호멜에 따라 있을 것이다; 그리고 기름에 관한 규례이다, 기름의 밧, 한 고르는
열 밧, 한 호멜, 그 이유가 열 밧이 한 호멜이기 때문이다 (겔. 45:10-11, 14).
위 구절들에서 여호와의 거룩한 것들이 칫수를 수단으로 몇 종류가 다루어지고 있다; 여기서 “10”은 천적 평면으로부터와 이로부터 파생된 영적 평면으로부터의 리메인스가 의미된다; 이 외에도 이 예언서의 앞 장(40장)의 천국의 예루살렘과 새 성전의 묘사에서 언급되는 여러 칫수 역시 많은 비밀들을 포함하고 있다.
아모스서에서:
처녀 이스라엘은 타락했다, 그녀는 더 이상 일어나지 못할 것이다. 고로
주 여호비께서 말하신다, 천 명이 성을 나가면 백 명이 남아 있을 것이고,
백 명이 나가면 열 명이 이스라엘의 가문에 남을 것이다 (암. 5:2-3),
위에서 리메인스를 말하고 있는데, 그것이 매우 적게 남아 있는다는 것, 오직 “십분의 일 부분”, 또는 리메인스로부터의 리메인스만 있다는 말이다. 다시:
나는 야곱의 자랑거리와 그의 궁전을 몹시 싫어한다, 그리고 성, 그리고
그것의 충만함은 봉쇄될 것이다. 그리고 만일 한 집에 열 사람이 남아 있다면,
그들은 죽기조차 할 것이다 (암.6:8-9),
거의 남아있지 않는 리메인스를 말하고 있다. 모세의 책에서:
암몬족과 모압족은 여호와의 회합에 오지 못할 것이다.
그들의 열 번째 후대에까지조차 영원히 여호와의 회합에 오지 못할 것이다 (신.23:3);
“암몬족과 모압족”은 신앙의 영적인 것과 천적인 것을 모독함을 의미한다. 앞 절에서는 리메인스가 말해지고 있다.
이로부터 “십분의 일”이 리메인스를 표현함도 나타나는데, 말라기서를 보자:
너희 모두는 보물 집 안으로 십일조(십분의 일들, tenths)를 가져오라,
하여 내 집 안에 노획물(booty)이 있을런지 모른다, 그리고 그것들로 너희가
이것에서 분발하는지를 나에게 입증하게 하라, (하여) 내가 하늘의 큰 폭포를
열지 않도록, 그리고 네게 축복을 쏟아 내도록 (말. 3:10);
“내 집 안에 노획물이 있을런지 모른다”란 내적 인간 안에 있는 리메인스를 의미한다, 이 리메인스가 “노획물”에 비교되어지고 있다. 그 이유가 이 리메인스는 엄청나게 많은 악들과 거짓들 사이에서 비밀리(by stealth)에 은근히 심어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리메인스를 수단으로 모든 축복이 온다. 모든 인간의 선행은 내적 인간 안에 있는 리메인스를 수단으로 오고 있다는 것, 또한 이것이 유대 교회에서 이런 규례에 표현되어져 있다. 즉 그들이 십일조 바치기를 모두 마쳤을 때, 그들은 그것을 레위인, 외국인, 고아, 과부에게 줄 것이다 (신. 23:3 이하 참조).
리메인스는 주님만에 속한 까닭에, 십분의 일들은 “여호와께 거룩함”이라 불리운다; 모세의 책에서:
토지의 모든 십분의 일들, 토지의 씨의 모든 십분의 일들, 나무의 열매로부터의
모든 십분의 일들, 그것들은 여호와의 것이고, 여호와께 거룩함이다: 목축의
모든 십분의 일들, 양떼의 모든 십분의 일, 목자의 막대 아래를 지나가는
무엇이든, 십분의 일은 여호와에게 거룩함일 것이다 (레. 27:30-31).
십계명은 “열 가르침들, 또는 열 말(word)들”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 그리고 여호와께서는 그것들을 돌판들(tables)에 쓰셨다는 것은 리메인스를 의미하고, 이것이 여호와의 손에 의해 씌어짐은 리메인스는 주님만으로부터 있다는 것, 그것들이 내적 인간 안에 있음이 돌판들에 의해 표현되고 있다 (신. 10:4).

숫자 “12”가 신앙, 또는 사랑으로부터 있는 것들, 한 복합체 안에 이것으로부터 파생된 신앙으로부터의 것들을 의미함은 성경의 많은 구절로부터 확증이 가능하다. 모두가 익히 아는 대표적 예를 들면, 야곱의 “열 두” 아들로부터와 그들의 이름들, 이스라엘의 “열 두” 지파들, 그리고 주님의 “열 두” 사도들 등등이다; 창세기 29, 30 장을 취급하는 근처에서 주님의 신성한 자비로부터 차 후 살필 것이다.

본문의 숫자만 살펴도 주님의 말씀은 그것의 품 안에, 내면의 깊숙한 곳에 얼마나 많은 비밀들을 포함하고 있는지, 눈에는 전혀 나타나지 않는 비밀들이 있는지는 분명해졌을 것이다. 물론 다른 말씀의 경우도 이와 비슷하다.

여기서 취급된 홍수 이전 사람들과 더불어 리메인스가 거의 남지 않았다는 것이 주님의 자비로부터 차 후 그것들에 관해 말해지는 곳에서 분명해질 것이다; 그리고 어떤 리메인스도 그들 사이에서는 보존될 수 없었는 바, 리메인스를 가질 “노아”라 불리는 새로운 교회가 여기서 말해진다; 이것에 관하여도 역시 주님의 신성한 자비로부터 차 후 살핀다.

4절. 그 당시, 땅에 네피림이 있었다. 그리고 특히 하느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에게 들어간 이후, 그리고 그들이 그들에게 낳아 주었는데, 네피림과 똑 같은 용사가 되었고, 이 용사들은 옛날에 있었고 유명한 사람이었다.
“네피림”이란 자기들의 고고하고 탁월한 설득력을 통해 거룩하고 참된 모든 것의 빛을 만든 이들을 의미한다. “그리고 특히 하느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에게 들어간 이후, 그들이 그들에게 낳았다”란 자기들의 그리워함 안에 신앙 속의 교리들을 파묻고, 참된 것을 수단으로 거짓된 것을 설득할 때 네피림이 발생함을 의미한다.

“네피림”은 자신의 고고하고 탁월한 설득력을 통하여 거룩하고 참된 모든 것의 빛을 만든 이들을 의미하는 것은 앞 대목과 뒤를 잇는 대목으로부터, 즉 그들은 자기들의 그리워함 안에 신앙의 교리들을 침수시킴이 “하느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에게 들어감, 그리고 그(녀)들이 그들에게 낳아줌”에 의해 의미된 것에서 나타난다. 자기를 설득함과 이 설득의 공상들은 그것들로 들어간 것들이 불어남에 따라서도 증가하는데, 결국 지우려해도 지워지지 않는 때까지 (절대 떼어지지 않는 때까지)에 치닫고 말 때까지 증가한다; 그리고 신앙의 교리들이 이것에 보태어질 때, 그러면 최고로 센 설득력의 원리들로부터 그들은 거룩하고 참된 모든 것의 빛을 만든다, 그리고 “네피림”이 된다. 홍수 이전에 살았던 이 종족(race)은 이러했다, 즉 그들은 자기들의 끔찍한 공상들을 수단으로 모든 영들을 숨막히게 하여 죽기까지도 가능하게 하는 특성 때문에 (저 세상에 있는) 영들은 (이 네피림의 설득력 때문에) 생각하는 힘을 온통 빼앗기고 반쯤 죽어버리는 느낌을 받는다;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심을 수단으로 이 독 있는 종족들로부터 영들의 세계를 자유해지게 하시지 않았다면, 거기에 존재할 영은 아무도 없었을 것이고, 결과적으로 영들을 통하여 주님에 의해 통치되는 인간 종족은 멸해졌으리라. 그러므로 지금 이 네피림들은 지옥에서 특별한 관리 아래, 즉 안개로 덮힌 육중한 둥근 돌 아래 있는 지옥, 왼쪽 발 뒤꿈치 아래에서 (통제되어), 매우 경미한 일어섬도 허용될 수 없다. 고로 이 최고로 위험한 패거리로부터 영들의 세계는 자유해 있다. 이에 관하여와 이 독 있는 설득력에 관하여는 주님의 신성한 자비로부터 차 후 별도로 언급할 것이다. 말씀 안에서 “아낙”과 “르바임”이 네피림의 후손이라 칭해지고 있다. “아낙”에 관해 모세의 책을 보자:
거기서 우리는 네피림을, 네피림으로부터의 아낙 후손들을 보았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
눈으로 보아도 메뚜기(grasshopper)들 같았고, 그들이 보았어도 그랬을 것이다 (민. 13:3).
그들이 르바임이라 불리운 것도 모세의 책에서 나타난다:
엠족속이 모압 토지에서 전에 거주했는데, 이들은 크고, 많고, 그리고 아낙같이
키가 컸는 바, 이들은 아낙족속으로, 르바임족속으로 간주되었다,
그리고 모압족이 그들을 엠족이라 불렀다 (신. 2:10-11).
네피림에 관한 언급은 더 이상 없다, 그러나 르바임은 예언서에 묘사되고 있다. 이사야서에서:
아래쪽 지옥이 너 때문에 흥분되어 있는다, 오고 있는 너를 만나려고 해서이다,
그것은 너를 위하여 르바임을 휘저었다 (이. 14:9),
위 구절은 (네피림 비슷한) 영들의 거처인 지옥에 관해서 이다. 다시 이사야서에서:
너희 죽은 자는 살아나지 못할 것이다, 르바임은 일어나지 못할 것이다,
그 이유는 당신께서 방문하시어 그들을 파괴하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의 모든 기억이 멸해지게 만드셨기 때문이다 (이.26:14),
위 구절 역시 지옥이 언급된다, 이로부터 그들은 다시는 더 일어나지 못한다. 다시 이사야서에서:
당신의 죽은 자는 살아날 것입니다. 당신의 시체, 그들은 다시 일어날 것입니다;
깨어나 노래하라, 먼지 안에 거주하는 너희들아, 그 이유가 풀잎들의 이슬이 당신의
이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당신은 르바임의 토지로 내쫓을 것입니다 (이. 26:19);
“르바임의 토지”는 위에서 언급한 지옥이다. 다윗서에서:
당신께서는 죽은 자에게 경이로움을 보이시렵니까? 르바임이 일어날 것입니까?
그들이 당신에게 고백할 것입니까? (시. 88:10),
위 구절 역시 마찬가지 방식에서 르바임의 지옥에 관해 말하는데, 그들이 일어나지 못한다는 것, 그런고로 그들의 설득력으로부터의 끔찍한 독을 가지고 영들의 세계에출몰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인류가 이런 끔찍한 공상과 설득력에 물들어버리는 일이 더 이상 있지 않도록 섭리해 두셨다. 홍수 이전 살았던 이들이 이런 본성과 천성을 지녔는 바, 그들은 상대방을 자신의 것에 물들어지게 할 수 있었다. 그 이유는 아직 알려진 바 없어 주님의 신성한 자비로부터 차 후 (927항)에서 살핀다.

그 후 하느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에게 들어갔다, 그리고 그녀들이 그들에게 낳았다. 이는 그들이 자기들의 그리워함 안에 신앙의 교리물들을 침수시켰을 때 그들은 네피림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의미는 2절의 “하느님의 아들들”이 신앙의 교리적인 것들, 그리고 “딸들”은 그리워함들이다는 것으로부터 알게 된다. 그것들에 의해서 생산된 출생들은 빛을 만들어 신앙의 거룩한 것들을 모독하는 것 밖에 더 없게 된다. 그 이유가 인간이 그리워하는 것, 자기를 사랑함과 세상을 사랑함으로부터의 것인 바, 모두 거룩하고 참된 것에 반대되어 있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지금 인간 안에서 그리워함들이 득세하는 상황이어서 거룩하고 참된 것, 그리고 이것이 있다고 인정하는 것 마저 그리워함 안에 침수시키는 바, 인간과 더불은 모든 것은 끝장나 있다. 그 이유가 그리워함은 인간에게서 뿌리뽑혀 질 수 없고 분리됨도 불가능해져 있기 때문이다; 그리워함(yearning)은 (우리가 가지는) 모두 각각의 생각(idea)에 꽉 달라붙어 있다. 다른 삶의 경우에서도 서로가 교통하는 수단은 바로 생각(idea)이다. 그리하여 거룩하고 참된 어떤 생각이 산출되면, (그리워함으로 인해) 그 즉시 모독하고 거짓인 것이 이 참된 생각에 붙어 떨어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런 인물들은 분리되어져야만 하고 지옥 맨 아래로 내쳐져야 한다.

네피림이 자기를 사랑함으로부터 “용사”라 불린다는 것은 말씀 여러 곳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예레미야서에서:
바벨의 용사들은 싸우기를 그만두었다, 그들은 자기들의 성채 안에 앉아 있다,
그들의 기력은 떨어진다, 그들은 여인들 같이 되어간다 (예51:30),
위에서 “바벨의 용사‘는 자기를 사랑함을 가지고 먹어치운 이들을 표시한다. 예레미야서에서:
검이 거짓말쟁이를 향하여 있다, 그리고 그들은 미쳐 있을 것이다,
검이 그녀의 용사를 향하여 있다, 그리고 그들은 낙담될 것이다 (예.50:36).
나는 낙담한 그들을 보았다, 그리고 뒤로 돌아섰더니, 그들의 용사들이 산산조각나
있었다, 그리고 되돌아보지도 않고 도망하느라 급급했었다; 두려움이 (용사를) 빙둘러
있었다; 발빠른 자도 도망하지 못할 것이고, 용사도 피하지 못할 것이다, 올라오라,
너희 말들아, 그리고 격노하라, 너희 병거들이여, 그리고 용사들은 앞으로 나아가라,
구스인이여, 붓인이여, 루딤인(Lydians)들이여 (예. 46:5-6, 9),
추론함들로부터 있는 설득력에 관해서이다. 다시:
우리는 용사이다, 전쟁을 위한 강함의 사람들이다 말하는데 어찌된 것이냐?
모압은 황폐해져 있다 (예. 48:14-15).
성이 점령당하고, 그리고 튼튼한 성채가 사로잡혀졌다, 그리고 그 날에
모압의 용사의 심장은 산고로 괴로워하는 여인의 심장 같이 되어 있다 (예.48:41).
마찬가지로 말해진다:
에돔의 용사의 심장 (예. 49:22).
여호와께서 야곱을 되찾으셨다, 그리고 야곱보다 더 강한 자의 손으로부터
그에게 앙갚음하셨다 (예. 31:11),
위에서 “힘 셈(mighty)”이 (히브리어에서는) 또 다른 단어로 표현되어져 있다. 네피림으로부터 있는 아낙족속이 “용사”라 불리우는 것이 모세의 책에서 보여진다:
너희는 너희보다 더 크고 더 숫자도 많은 민족들을 소유하러 가기 위해 오늘
요단을 건너라. 그들의 성들은 크고 견고하며 하늘에 닿고 있다. 사람들은 크고
키가 큰데, 아낙의 후손들이다. 너희는 그들을 안다, 그들에 관해서 너희는
(이렇게) 들었다; 아낙의 후손 앞에 설 자 누가 있느냐? (신. 9:1-2).

5절. 그리고 여호와께서는 사람 속의 악이 땅 위에 번창했고, 그리고 그의 심정 속의 생각의 모든 상상들이 매일 악할 뿐임을 보셨다.
“여호와께서는 사람 속의 악이 땅 위에서 번창했음을 보셨다”란 선한 의지가 없어짐이 시작되었음을 의미한다. “그의 심정 속의 생각의 모든 상상은 매일 악할 뿐이었다”란 참됨과 선에 관한 지각이 없었다를 의미한다.

사람 속의 악이 땅 위에서 번창했다란 선한 의지가 없음이 시작되었다가 의미된다. 이는 위에서 말한 것으로부터, 즉 어떤 의지도 더 이상 없고, 탐욕만이 남았다는 것; 그리고 “땅에 있는 사람”의 의미로부터 분명해진다. 글자 의미에서 “땅”은 인간이 있는 곳이다. 내적 의미에서는 사랑이 있는 곳이다, 그리고 사랑이 의지 속에, 또는 탐욕 속에 있는 바, 땅은 인간의 의지 자체를 뜻하기 위해 취해진다. 그 이유가 인간은 앎이나 이해함으로부터보다는 뜻함으로부터 인간이기 때문이다. 또한 알고 이해한 것 역시 결국 의지로부터 흘러나오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그가 뜻하지 않은 어떤 것을 말하거나 행동하고 있을 때, 여전히 말이나 행동과는 멀리 떨어져 그를 통치하는 의지의 어떤 것이 있다. “가나안의 토지”, 또는 “거룩한 토지”가 사랑을 표시한다는 것, 결과적으로 천적 인간의 의지를 표시한다는 것은 말씀의 많은 구절로부터 확증될 것이다; 마찬가지로, 다양한 민족들의 토지도 그것들의 사랑들을 표시한다, 이것들은 일반적으로는 자기를 사랑함과 세상을 사랑함이다; 그러나 이런 주제는 앞으로도 자주 등장하는 바, 여기서는 더 언급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위에서 살핀 것과 본문을 연결해서 나타나는 것은, “땅 위 사람의 악”에 의해 그의 자연적 악이 의미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의지 속에 있다, 그리고 이것이 “불어났다”라고 말해진다. 이는 모든 것이 타락된 후에 그 타락된 것이 불어났다가 아니라 처음에는 그들이 타인을 위해 선을 원했다는 것, 이것이 차츰 자신들을 위한 선의 섞임이 불어난 것이다; 뒤집힘이 완성된 것이 “심정의 생각들의 상상”에 의해 의미되어지고 있다.

심정의 생각들의 상상이 날마다 오직 악 뿐이었다란 진리와 선을 지각함이 없었음을 의미한다. 그 이유는, 앞서 말하고 보여준 바 대로, 그들은 그들의 더러운 그리워함에 신앙의 교리적인 것들을 침수시켰기 때문, 그리고 이것이 모든 지각을 상실하게 해버렸다, 그리고 지각의 자리를 무서운 설득력이 꿰찾다, 즉 , 최고로 깊이 뿌리박혀 치명적인 공상이 자리를 차지했는 바, 이는 소멸과 질식됨의 원인이었다. 이런 치명적인 설득력이 “심정의 생각들이 상상하는 것”에 의해 의미되어져 있다. 이 말에서 “생각들”을 빼내고 문장을 연결하면 “심정의 상상들”이 되는데, 이는 자기를 사랑함, 또는 그리워함으로부터의 악이 의미되어진다. 이것이 8장에서, 노아가 태워바치는 제물을 드린 후 여호와께서 말하신 것, “나는 인간 때문에 다시는 지면을 저주하지 않을 것이다, 그 이유는 인간의 심정의 상상은 그의 어릴적부터 악하였기 때문이다”에서 나타난다 (창8:21). “상상(imagination)”은 인간이 자신을 위해 창안하는 것이다. 이것 가지고 인간은 자신을 설득한다; 하박국서를 보자:
새긴 우상은 조각자가 만든 것인데 그것이 네게 무슨 유익을 주겠느냐?
부어 만든 우상도 주조자가 벙어리 우상을 만들고저 자기 상상에 의지한 것이니
그것도 거짓말하는 선생이 아니더냐? (합. 2:18),
“새긴 상”은 누군가의 자기(self)를 수단으로 임신되고 부화된 원리들을 근원으로 하는 거짓된 설득력들을 의미한다; “새기는 자(fashioner)”는 자기가 자기를 설득하는 자이다. 이 “상상”이 이 사람이라 단언된다. 이사야서에서:
오 너희의 외고집이여! 옹기장이를 진흙이라 여기고, 옹기 그릇이 그것을
만든 자에게 그가 나를 만들지 않았다 하고 말한다; 그리고 모양 지음을 받은 것이
그것에 모양을 준 자에게, 그는 총명이 없다 말해도 되는 것이냐? (이. 29:16)
위 구절에서 “모양 지음을 받은 것”이란 인간의 자기 자신에 근원하는 생각을 의미한다, 그리고 거기로부터 파생된 거짓인 것으로부터의 설득력을 의미한다. “모양 지음을 받은 것” 또는 “상상된 것”, 일반적으로 인간의 심정, 또는 의지로부터 창안한 것이다. 다윗서로부터:
여호와께서는 우리의 방식(fashioning)을 아신다,
그분은 우리가 먼지 임을 기억하신다 (시.103:14).
모세의 책에서:
나는 내가 그를 토지 안으로 데려오기 앞서
오늘날 그가 하는 그의 상상을 알고 있다 (신. 31:21).

6절. 그리고 이것은 여호와께서 사람을 만드신 것을 후회되게 했다, 그리고 그분으로 하여금 그분의 심정에서 몹시 슬퍼하게 했다.
“그분이 후회하셨다”란 자비(mercy)를 의미한다. “그분이 심정에서 슬퍼하셨다” 역시 자비를 의미한다. 단지 “후회”는 지혜 쪽과 관련이 있고, “슬퍼함”은 사랑 쪽과 관련이 있을 뿐이다.

이것은 여호와께서 땅 위에 사람을 만드신 것을 후회되게 했다는 것은 자비를 의미한다는 것, 그리고 “그분이 심정에서 슬퍼하셨다”도 비슷한 의미를 가지는 바, 이로부터 분명해지는 것은, 여호와께서는 결코 회개하시지 않는다는 것, 그 이유는 그분은 일반적, 세부적으로나 모든 것을 영원으로부터 미리 보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분이 인간을 만드셨을 때, 즉 사람을 새로이 창조하셨을 때, 그리고 그가 천적 수준의 인간이 될 때까지 그들을 완전하게 하셨을 때, 역시 그분은 시간의 과정에서 인간이 여기서 묘사된 바 같은 식으로 되어가리라는 것도 미리 보셨다. 이렇게 그분은 미리 보셨기 때문에 그분은 후회하실 수 없었다. 이것이 사무엘이 말한 대목으로부터 명백하게 나타난다:
이스라엘의 무적이신 분은 거짓말 하시거나 후회하시거나 하시지 않는다,
그 이유는 그분은 회개하는 사람이 아니시기 때문이다 (삼상.15:29).
그리고 모세의 책에서:
하느님은 거짓말해야 할 사람이 아니시다, 또는 회개를 해야 하는 인간의 아들도
아니시다; 그는 말하셨고, 행하지 아니하셨더냐? 또는 그분이 말하셨는데, 그리고
그분께서 그것을 선한 쪽으로 만드시지 않더냐? (민. 23:19).
그러나 “회개하는 것”은 자비 있으심을 의미한다. 여호와, 또는 주님의 자비에는 인류를 향하여 주님에 의해 행해지는 모든 것이 포함된다. 다시 말해, 인류는 주님께서 그들 각각의 상태에 따라 불쌍히 여겨 주어야 하는 상태에 있다; 그리하여 그분은 처벌받게 허용한 인간의 상태를 불쌍히 여기신다, 또한 선을 즐기도록 수여해준 자도 불쌍히 여기신다; 처벌되어지는 것도 주님의 자비로부터 있다, 그 이유가 자비는 처벌 속의 모든 악을 선 쪽으로 선회하게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선을 향유하게 수여하는 것도 자비로부터 있다, 그 이유는 선인 어떤 것이 자신의 공적 때문이라 할 자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모든 인류는 악하고, 인간 스스로부터서는 모두가 지옥행 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지옥행에서 건져짐을 받는 것도 자비로부터 있다; 자비는 인간을 불행으로부터 건지고, 지옥으로부터 건진다는 사실로부터 그것의 이름을 가진다; 이것이 인간에 관련하여 자비라 불리우는 이유는 인류 모두가 불행한 상태에 있기 때문이고, 자비는 그들 모두를 향한 사랑의 결과이다.

“후회하시고”, 그리고 “심정에서 슬퍼하시는 것”이 주님의 속성이라 단언되고 있다. 그 이유는 인간의 모든 자비에서 그와 같은 느낌이 일도록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도 그러하도록 “후회함”, “슬퍼함”이 외관에 따라 말해진다. 이는 말씀의 많은 구절에서도 마찬가지의 나타남이 등장한다. 주님의 자비가 무엇인지 아무도 알 수 없다. 그 이유는 이 자비는 인간의 이해력을 무한하게 초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의 자비가 무엇인지는 후회와 슬퍼함에 있다고 우리는 안다; 인간은 자신의 납득력에 따라 자비에 관한 그의 생각을 만들어 내지 않으면, 그는 그것에 관한 어떤 개념도 가질 수 없다, 그러면 그는 가르침을 받을 수도 없다; 이것이 왜 인간의 고유성(property)이 주님, 또는 여호와의 속성(attribute)이라 단언되는가의 이유이다. 그래서 마치 인간이 하는 것, 벌 주고, 시험에로 인도하고, 파괴하고, 성내고 하는 것들을 주님도 하신다고 표현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그분은 누구를 처벌하신 적이 없으시고, 누구를 시험 가운데 인도하신 적도 없고, 결코 어떤 것도 파괴하지 않으시며, 성내신 적도 한 번도 없으시다. 주님의 속성이 이러함에도, 후회함이나 슬퍼함이 그분의 속성이라 단언함이 이어진다; 그 이유는 이쪽의 단언이 다른 쪽의 단언을 이해하게 해주기 때문이다. 아래 인용 구절로 이를 확실히 짚고 넘어가자.
에스겔서에서:
내 성냄이 극에 다다를 것이다, 나는 내 분노를 쉬게 만들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나를 후회하게 할 것이다 (겔. 5:13).
위에서 “성냄”, “분노”가 서술되고 있기 때문에, “후회함” 역시 서술되어진다. 스가랴서에서: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하신다. 너희 조상들이 나로 성내도록 하였을 때, 내가 악을
행하기로 생각하였고, 나는 후회하지 않았다, 그러나 오늘에 이르러서 다시 나는
예루살렘과 유다의 집에 선을 행하려 생각하고 있다 (슥. 8:14-15).
위 구절에서 여호와께서 “악을 행하시려 생각했다”고 말해지나 그분은 누구에게나 결코 악을 행하지 않으신다. 오히려 모두에게, 각각의 사람에게 선을 베푸신다. 모세의 책에서, 모세가 여호와의 얼굴의 참으심을 간구했을 때:
당신의 성내심의 분노로부터 돌아서소서, 그리고 이 백성을 향한 이 악을
당신께서 후회하소서; 그리고 여호와께서는 이 백성에게 행하려 말하신 것을
후회하셨다 (출.32:12, 14).
위에서 “성내심의 분노”가 여호와의 속성이다, 그리고 “후회하심”도 그분의 성내심의 결과이다고 표현되었다. 요나서에서, 니느웨왕이 말했다:
하느님께서 돌아서시지 않고 후회하시지 않을지, 그리고
그분의 성내심의 화로부터 돌아서시고, 우리를 멸하시지 않을지 누가 아느냐? (욘. 3:9).
위 구절도 앞의 인용구절과 비슷하다. “후회하심”이 “성내심”이 있기 때문이다 라고 서술된다.
호세아서에서:
내 심정이 내 내부에서 돌아섰다; 나의 후회함들이 함께 불켜졌다;
나는 나의 성냄의 분노를 집행하지 않을 것이다 (호. 11:8-9);
위 구절 역시 “후회함들이 불켜진” 심정을 두고 말해지고 있다. 이는 본문에서 그분은 “심정에서 슬퍼하셨다”와 같은 맥락이다. “후회하심”은 큰 자비를 표시함은 요엘서를 보면 명백하다:
여호와 네 하느님에게 돌아서라; 그 이유가 그분은 은혜로우시고 동정심이 많으시다,
성내심은 느리고 자비는 풍부하시다, 그리고 악에는 후회하신다 (욜. 2:13);
위에서 “후회”는 자비를 분명히 표시하고 있다. 예레미야서도 보자:
만일 그들이 청종하여 모두가 그의 악한 길에서 돌아서면, 그것은 나로
(내가 그들에게 내리려던) 악을 후회하게 할 것이다 (예. 26:3),
위 구절은 자비를 가지신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만일 이 민족이 그들의 악으로부터 돌아서면,
이것은 나로 (그들에게 내리려던) 악을 후회하게 할 것이다 (예.18:8);
위 구절 역시 그들이 돌아서는 조건에서 “회개”는 자비를 표시한다. 주님의 자비가 자기로부터 떠나게 하는 자는 정작 인간 자신이다: 주님께서는 인간으로부터 자비를 베푸시기를 철회하신 적이 없으시다.

위의 인용 구절, 내지 수많은 구절로부터 알 수 있는 것은, 말씀이 인간에게 나타나는 것(appearances)에 따라 기록되어졌다는 것이 분명해진다. 그런고로 말씀에 기록된 글자를 근거 삼아 들이대어 거짓 원리들을 확증하기를 바라고 있다면 이는 아주 쉬운 작업이다. 그러나 두 가지 측면이 있다. 하나는 말씀을 수단으로 거짓 원리들을 확증하는 것이다. 또 하나는 말씀 안에 있는 것을 순박하게 믿는 것이다. 거짓 원리를 확증하는 자의 경우, 첫 번째 작업은 자기가 절대 물러서지 않을 원리, 즉 절대 양보 못할 원리 원칙을 가정해 세워둔다. 그 다음 이 원리들을 확증해줄 만한 것들을 어디서이든, 특히 말씀으로부터 긁어모우고, 축적해둔다. 그리하여 그 자신 더 이상 진리를 찾을 데가 없다고 자신을 스스로 설득할 때까지 축적해간다. 그러나 단순 소박하게 믿는 자의 경우, 그는 물러서지 않을 원리를 세우지 않는다, 그러나 말씀을 놓고 이 말씀은 진리이다고 주님이 말하셨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자신의 이해를 돕기 위해 말씀의 다른 구절로부터 이해함을 증진시켜 확실한 가르침을 얻을 때, 묵묵히 따르며 그의 심정은 기쁨으로 가득해 있다. 단순 소박하게 믿는 사람들조차도 주님은 성내시고, 처벌하시고, 후회하시고, 슬퍼하신다고 믿는다. 그렇게 믿는 것이 악을 두려워하고 선을 행하며, 해를 받지도 않는다; 그 이유가 이 믿음이 그 사람으로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보신다를 믿게 하기 때문이다; 어쨌든 이런 신앙을 가진 자가 이 세상에서 계발되는 기회를 얻지 못하면, 다른 삶에서 계발되어진다. 이와는 아주 다른 경우가 있다. 자기가 이미 설정해 놓은 원리들로부터 연역하여 나와지는 어떤 것을 자신이 믿어지게 설득하는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 흠취된 이들의 경우이다.

“후회하심”이 지혜와 관계가 있고, “심정에서 슬퍼하심”은 사랑 측면에 관계를 가진다는 것은 인간의 수준에 일치되는 것이 아닌 이상, 즉 외관을 수단으로 하지 않으면 인간의 납득력에 설명되어질 수는 없다. 인간 안에서 생각함 속의 모두 각각의 관념 안에는 이해함으로부터와 의지로부터의 어떤 것, 또는 그의 생각함과 그의 사랑으로부터의 어떤 것이 있다. 관념(idea)이 그의 의지 또는 사랑으로부터 도출되지 않으면 그것은 관념이 아니다. 그 이유는 그의 의지로부터가 아니면 그는 전혀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다. 생각함과 의지 사이에는 파기할 수 없는 영구적인 결혼 같은 것이 있다. 그리하여 인간의 생각함의 관념 안에는 그의 의지 또는 그의 사랑으로부터 있는 것들이 본시 가지고 태어나기라도한듯 점착되어 있다. 인간에 있는 이런 상태로부터 인간은 주님의 자비, 즉 지혜와 사랑 안에 포함된 것을 놓고 마치 알고 있는듯, 아마 오히려 그에 관한 어떤 관념을 만들어 내는 것이 가능한듯 착각한다. 고로 예언서들, 특히 이사야서에서, 모든 것에 관련해 이중적 표현들을 사용하는 곳이 의외로 많다. 그렇게 표현한 이유는 이쪽 표현이 영적 (평면)인 것을 서술하면, 다른 쪽 표현은 천적 (평면)을 서술하려는 때문이다. 주님의 자비의 영적 평면은 지혜이고; 천

7절. 그리고 여호와께서 말하셨다, 나는 내가 지면의 얼굴에 창조했던 사람을 파괴하리라. 사람과 짐승, 기는 것들, 하늘의 새를 파괴하리라. 그 이유는 나는 내가 그것들을 만든 것을 후회했기 때문이다.

여호와께서 말하셨다, 나는 사람을 파괴할 것이다. 이는 인간이 자신을 소멸할 것임을 의미한다. 이는 앞서 설명한 것으로부터, 즉 벌하시고, 시험하시고, 악을 행하시고, 파괴하고 죽이고 저주하시는 것이 여호와, 또는 주님의 속성같이 표현됨에 관련하여 설명한 대목을 다시 생각하면 분명해진다. 예를 들면, 창세기 38:7, 10절에서, 그분은 유다의 첫 출생 엘을 죽이셨다; 그리고 유다의 또 다른 아들 오난도 죽이셨다; 여호와께서는 이집트의 첫 출생 모두를 죽이셨다 (출. 12:12, 29). 그리고 예레미야서에서:
나는 나의 성냄과 나의 분노에서 그들을 죽였다 (예. 33:5).
다윗서에서:
그분은 그들을 그분의 성냄의 분노에; 격한 성내심에,
그리고 격노하심과 곤경에 내던지고, 악한 천사들을 보내신다 (시. 78:49).
아모스서에서:
악한 일이 성에 발생하는데, 여호와께서 이것을 하시지 않았겠느냐? (암. 3:6).
계시록서에서:
일곱 금빛의 대접이 영원히 사시는 하느님의 분노로 가득 차 있다 (계. 15:1; 16:1).
위 모든 구절에서 하는 말은 비록 그분의 본래의 모습과는 반대일지라도 어쨌든 여호와를 서술하고 있다. 이렇게 반대적으로라도 서술되어야 하는 첫 번째 이유는 주님께서 일반적, 세부적 측면에서 모든 것을 통치하신다는 아주 일반적인 관념을 만들어 줄런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후에 악한 어떤 것도 주님으로부터 있지 않다는 것, 더군다나 누군가를 죽이는 일은 없다는 것을 배운다; 자신 위에 악을 가져오는 것은 인간 본인이다는 것, 하여 자신을 파멸로 치닫게 하는 것이 인간 자신임을 배운다. 설사 이것이 당사자가 직접적으로 자초하지 않은듯 해도 그를 흥분시키고 유도하는 악령의 짓임을 배운다; 그러나 결국은 인간 자신이다, 그 이유는 그가 믿기 때문에 그가 행위자 되기 때문이다. 본문에서 “나는 사람을 파괴할 것이다”라고 여호와께서 말하시는데, 사실상 인간이 자신을 파괴하고 소멸되게 한다.
이런 모습은 지옥에서 고통 가운데 있는 이들로부터 분명해진다. 이들은 자신들에게 내린 처벌을 계속 애석해 하고 처벌의 모든 악을 주님께 그 탓을 돌리고 있다. 악령들의 세계에서는 타인에게 피해를 주고 처벌하는 일을 자기의 즐거움이자 가장 큰 기쁨으로 만드는 자도 흔하다; 게다가 이 짓을 하는 자들은 이것이 주님으로부터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런 자들에게 악의 어느 한 조각도 주님으로부터 있지 않다는 것, 처벌의 원인은 그들 자신에게 있다고 말하여진다; 그 이유가 악이 악을 행한 자에게 되돌아 오는 공평(equilibrium)의 법칙이 다른 삶에서는 있기 때문이다. 이것으로 해서 악의 처벌이 있다. 누구도 이것에서 예외는 없다. 이것은 악의 수정됨을 위하여 허용된다고 말해진다. 주님께서는 여전히 처벌의 모든 악을 선으로 되돌리신다; 그리하여 주님으로부터 나가는 것은 선밖에 어떤 것도 없게 된다. 허용(permission)이 무엇인지는 아무도 알지 못해왔다; 허용된 것은 허용한 그분에 의해 행해져 있다고 믿어진다. 그 이유는 그분이 허용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실인즉, 아주 딴 방법으로 이다, 이에 관하여는 주님의 신성한 자비로부터 차 후 살핀다 (2447항 참조).

내가 창조한 사람을, 지면의 얼굴 위로부터. 이 사람은 태고 교회의 후손으로부터의 사람을 의미한다. 이는 이미 말해온 것들로부터, 즉 그분이 “창조”한 사람, 즉, 그분이 거듭나게 한 사람; 그리고 그 후에 그분이 “만든” 사람, 즉 완전해진 사람, 또는 천적 수준이 될 때까지 거듭난 사람으로부터 분명해지고; 뿐 아니라 그것의 존재로부터, 즉 “지면의 얼굴 위로부터”에서도 분명해진다. “지면”은 교회가 존재하는 곳이다. 이와 똑 같은 것이 자기들의 그리워함 안에 신앙의 교리들을 침수시킨 이들이 취급된 사실들로부터도 분명해진다; 그리고 신앙의 교리적인 것들을 가지지 못한 이들은 그렇게 침수할 수 없었다. 교회 바깥에 있는 자들은 진리와 선에 무지해 있다. 어쩌면 이런 무지에 있는 이들은 신앙의 진리들과 선들에 반대되는 것을 말하고 행동하면서도 어떤 종류의 순진 안에 있을런지 모른다; 그 이유가 이들은 과거 어릴적 자신들이 양육되어온 것, 그때부터 진리와 선이라고 믿어왔던 것으로부터 예배에 대한 어떤 열정으로부터 행동할런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앙의 교리를 확실히 가진 이들의 경우는 이와는 딴판이다. 이들은 진리를 거짓들에 섞을 수 있다, 거룩한 것을 모독된 것과 뒤섞을 수 있다. 이들에게 다른 삶에서 거주하게 할당된 영역은 이방인들이라 불리는 이들보다도 훨씬 더 열악하다. 이들에 관해 주님의 신성한 자비로부터 차 후 살필 기회가 있을 것이다.

사람과 짐승 모두, 그리고 기는 것. 이 대목이 의지로부터 있는 것은 무엇이든 소멸 하리라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사람”, “짐승”, “기는 것”의 의미로부터 분명해진다. 인간은 오로지 의지력과 이해력으로부터서만 인간이고, 이를 수단으로 야수로부터 구별된다; 그 외 여러 측면에서는 인간도 야수들과 비슷한 것이 많다. 본문의 사람들의 경우, 선을 뜻함과 진리를 이해함 모두가 멸하여졌다. 선을 뜻함을 대신하여 광기의 그리워함이 있었다. 진리를 이해함을 대신하여 비상식적인 공상이 있었다. 그리고 이것들이 그들의 그리워함과 뒤범벅이 되었다. 그리하여 그들의 리메인스는 마치 파멸된 것처럼 있었는 바, 그들은 소멸될 수 밖에 없었다. 의지로부터의 모든 것들이 “짐승들”과 “기는 것들”이라 불리운다는 것은 짐승과 기는 것들을 살핀 앞의 대목으로부터 분명해질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취급되는 인간의 특성인, “짐승”은 선한 애착을 의미하지 않고, 악한 애착을, 결과적으로 그리워함을 의미한다; 그리고 “기는 것들”에 의해서는 육체적, 감각적인 애착들을 의미한다. 이에 대한 말씀으로부터의 확증은 이미 살핀 바 있어 생략한다.

하늘들의 새가 이해함으로부터 있는 것, 즉 생각함으로부터 있는 것은 무엇이든을 의미한다. 이는 앞 1장에서 알 수 있을 것이다.

8절. 그리고 노아는 여호와의 눈에서 은총을 발견했다.

“노아”에 의해 새로운 교회가 의미되어진다. 이 새로운 교회는 홍수 이전의 교회인 태고 교회와 구별되도록 고대 교회(the ancient church)라 불리우는 바, 고대 교회는 홍수 이후에 있는 교회이다. 위 두 교회들의 상태는 전적으로 달랐다. 태고 교회는 선을 지각하고, 이 지각으로부터 파생된 진리를 주님으로부터 가지는 방식이었다. 고대 교회의 상태, 또는 “노아”는 그들이 선과 진리에 관한 양심(conscience)을 가지는 방식이었다. 이는 지각을 가짐과 양심을 가짐 사이의 차이와 같다고 말해도 무난하다. 더불어 태고 교회와 고대 교회의 차이라 규명해도 하자가 없다. 지각(perception)은 양심이 아니다; 천적 평면(the celestial)은 지각을 가진다; 영적 평면(the spiritual)은 양심을 가진다. 태고 교회는 천적(celestial) 수준이었고, 고대 교회는 영적(spiritual) 수준이었다.
태고 교회는 주님으로부터 직접적인 계시를 가졌다. 그 수단은 영들과 천사들과 한 식구 됨(consort)으로 해서, 또한 환상들과 꿈들로 해서 였다. 이를 통해서 선하고 참된 것에 관한 일반적인 지식을 가지도록 그들에게 주어졌다; 그들이 일반적 지식을 획득한 후, 이러한 이끌어가는 일반적 원리들은 지각들을 수단으로 셀 수 없는 많은 것들에 의해 확증되어졌다; 그리고 이 무수한 것들은 일반적 원리와 유기적인 관계를 갖는 특별 항목, 세부 사항이었다. 그런고로 날이 가면 갈수록 이끌어가는 일반적 원리들은 늘어나는 세부 항목들로 해서 더욱 확실한 원리임이 확증된다; 그들은 일반적 원리에 일치하지 않는 것은 무엇이든 그것은 아니다고 지각했다; 그 반면 일치하지 않는 것은 그것은 맞다고 지각했다. 천적 평면의 천사들은 이런 품성을 지니고 있다.
태고 교회의 일반적 원리들은 천국의 진리들이고 영원한 진리들이다. 이러하다; 주님이 우주를 통치하신다는 것, 모든 선과 진리는 주님으로부터 있다는 것, 모든 생명은 주님으로부터 있다는 것, 인간의 자기 자신은 악 밖에 없다는 것, 그리고 그 자체 죽어있다는 것; 이와 유사한 많은 다른 품성들도 있다. 그리고 그들은 이런 진리들을 받쳐주고 확증하게 하는 수도 없는 것들을 주님으로부터 지각으로 받았다. 그들과 더불어 사랑은 신앙의 제 1 원리였다. 사랑을 수단으로 신앙으로부터 있는 것은 무엇이든 지각하도록 주님으로부터 그들에게 주어졌다. 이로 인해 그들과 더불어 신앙은 사랑이었다, 그러나 고대 교회는 판이하게 다르다, 이에 관하여는 차 후 주님의 신성한 자비로부터 살필 것이다.

그는 여호와의 눈에서 은총을 발견하였다란 주님께서 인류를 이런 방식으로 구원하실 것을 예견하셨음을 의미한다. 주님의 자비에는 온 인간 종족의 구원이 포함되어 있고, 주시하시고 있다; 이것은 그분의 “은총(grace)”의 경우도 동일하다. 그러므로 인간 종족의 구원이 의미되고 있다. “노아”는 새로운 교회, 뿐만 아니라 새로운 교회의 신앙도 의미한다. 이 신앙은 선행(charity)으로부터 있는 신앙이었다. 그런고로 주님께서는 선행으로부터의 신앙을 통하여 인류는 구원되어질 것임을 예견하신 것이다 (이 신앙은 차 후 살핀다).
말씀에서 단어 “자비”와 “은총” 사이에 구별이 있다. 그리고 이것들을 받는 이들 사이에 존재하는 차이와도 일치한다; “자비”는 천적인 수준에 있는 이들에게 적용되고, “은총”은 영적인 수준에 있는 이들에게 적용된다. 그 이유가 천적 평면은 자비 밖에, 영적 평면은 은총 외에 거의 어떤 것도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천적 평면은 은총이 무엇인지 모르고, 영적 평면은 자비가 무엇인지 모른다. 다시 말해 천적 평면은 자비만 존재하고 영적 평면은 은총만 존재한다. 이 둘은 각기 다른 겸손(humility, 부끄러워함, humiliation)을 바탕으로 하여 있다. 심정의 겸손함에 있는 이들은 주님의 자비를 빈다(beg); 그러나 생각함의 겸손함에 있는 이들은 주님의 은총을 간절히 구한다(seek); 그리고 만일 후자들이 자비를 간구(pray)한다면, 시험의 상태, 또는 입만 가지고 행하여지는 상태에 있을 경우이다. “노아”라 불리는 새 교회는 영적 수준이지 천적 수준은 아니기 때문에, 여호와의 눈에서 “자비”를 발견하였다가 아닌 “은총”을 발견하였다고 말해진다.
말씀에서도 “자비”와 “은총”에 구별이 있는 것은 여호와께서 “자비로우시고 은혜로우신”이라고 일컬어지는 많은 구절들로부터 분명해진다 (예를 들면, 시편 103:8; 11:4; 145:8; 요엘 2:13). 이런 구별이 있는 구절을 몇 군데라도 찾아보자. 예레미야서에서:
그런고로 여호와께서 말하신다, 검을 놔두고 간 백성들이 광야에서 은총을
발견하였다, 내가 그에게, 이스라엘에게 휴식을 주러 갔을 때이다. 여호와께서
멀찍이서 나에게 나타나셨다; 그리고 나는 너를 영원한 사랑으로 사랑했다;
그러므로 자비 안에서 나는 너를 이끌었었다 (예. 31:2-3),
위 구절에서 “은총”은 영적 평면을 서술하고 “자비”는 천적 평면을 서술하고 있다. 이사야서에서: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은총을 주시려고 기다리신다,
그러므로 너희 위에 자비를 가지도록 자신을 드높이신다 (이. 30:18).
위 구절 역시 “은총”은 영적 평면을 주시하고, “자비”는 천적 평면을 주시한다. 이와 비슷한 대목이 롯이 천사에게 말하는 구절이다:
당신의 종이 간절히 바라는 것은 당신의 눈에서 은총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당신은 자비를 크게 만드셔서 당신께서는 제 혼이 살아있게 만들고저
저와 함께 작업하셨습니다 (창. 19:19).
“은총”은 신앙으로부터 있는, 또는 이해력으로부터 있는 영적인 것들에 관련된다는 것은 위 구절에서, “당신의 눈에서 은총을 발견하였다”로부터 분명해진다; “자비”는 사랑으로부터, 또는 의지로부터 있는 천적인 것들에 관계가 있다는 것은 천사에게 “작업한 자비”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그리고 “혼을 살아있게 만들었음”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말해진 것에서 분명해진다.

9절. 이것들은 노아로부터의 출생들이다. 노아는 그의 세대에서 올바른 자요 완전한 사람이었다. 노아는 하느님과 함께 걸었다.

“노아의 출생들”에 의해 새로운 교회로 재구성 또는 거듭남에 관한 특징 열거가 의미된다. 이는 창. 2:4; 창. 5:1에서 살핀 바에서 분명해진다.

노아는 그의 세대에서 올바른 자요 완전한 사람이었다. 이것은 그가 선행을 수여받아질 수 있는 사람임을 의미한다. 이는 “올바름”이 선행으로부터의 선에 관련을 가지고, “완전함”은 선행으로부터의 진리에 관련된다는 것으로부터, 또한 이 교회의 필수 요소가 선행이다는 점으로부터 분명해진다. 이에 관하여는 차 후 주님의 신성한 자비로부터 더 살핀다. “올바름”이 선행의 선에, “완전함”이 선행의 진리에 관련됨을 이사야서로부터 보자:
그들은 내 길들에 관한 지식을 날마다 구하고 바랄 것이다, 마치 정의를 행하고
자기들의 하느님의 공정을 버리지 않는 민족들 같다; 그들은 나에게 정의의 판결을
구할 것이다, 그리고 하느님께의 접근을 갈망할 것이다 (이. 58:2).
여기서 “공정”은 진리로부터 있는 것을 표시한다, 그리고 “정의”는 선으로부터 있는 이들이다. “정의와 공정을 실행함”은 참되고 선한 것을 행함을 위한 설립된 관용적 표현이 되었다 (이. 56:1; 예. 22:3, 13, 15; 23:5, 33:14, 16, 19도 참조). 주님께서 말하셨다:
정의로운 자는 내 아버지의 왕국에서 태양 같이 빛을 낼 것이다 (마. 13:43),
“정의로운 자”는 선행을 수여받는 자를 뜻한다. 시대의 종말에 관하여 그분은 말하셨다:
천사들이 나가서 의로운 자 사이에서 사악한 자를 떼어낼 것이다 (마. 13:49).
위에서도 역시 “의로운 자”는 선행의 선 안에 있는 이들을 표시한다.
“완전함”이 선행으로부터 있는 진리를 의미하는데, 그 이유는 진리는 또 다른 많은 근원으로부터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주님으로부터의 선행의 선으로부터 있는 것이 “완전함”, 또는 “완전한 사람”이라 불리우고 있다. 다윗서에서:
당신의 천막에 누가 체류할 것입니까? 당신의 거룩함의 산에 거주할 자 누구입니까?
완전함에서 걷는 자, 정의를 일삼는 자, 그리고
그의 심정에서 진리를 말하는 사람입니다 (시. 15:1-2).
“완전한” [또는 완벽한] 사람이 여기서 묘사되어진다. 다시:
거룩한 자에게 당신께서는 거룩한 당신 자신을 보이실 것이다; 완전한 사람에게
당신은 완전한 당신 자신을 보이실 것이다 (시. 18:25),
위에서 “완전한 사람”은 거룩함으로부터 그렇게 있는 자, 또는 선행의 선이다. 그리고 다시:
여호와께서는 완전함 안에서 걷는 그들로부터 선을 보류하시지 않는다 (시. 84:11).
“완전한 사람”은 선으로부터 진리인 자, 또는 선행으로부터 진리를 말하고 행하는 자이다는 것은 “걷다”와 “길”이 완전인 것, 즉 온전함(wholeness, entirety)에 자주 적용된다는 것에서, 또한 진리에 속해있는 단어, “직바름(uprightness)으로부터 분명해진다. 다윗서를 보자:
나는 완전한 자에게 그가 나에게 오는데 얼마나 먼 길인지를 가르칠 것입니다.
나는 내 심정의 완전함 안에서 내 집 안에서 걸을 것입니다 (시. 101:2),
그리고 제 6절에서:
완전함 안에서 걷는 자가 나를 섬길 것입니다 (시. 101:6).
길에서 완전한 자, 여호와의 법 안에서 걷는 자는 복되다 (시. 119:1).
완전함과 직바름이 나를 지킬 것이다 (시. 25:21).
완전한 자에 주목하고 직바른 자를 주시하라, 그 이유가
이 사람의 끝은 평화이기 때문이다 (시. 37:37).
위의 여러 구절로부터 분명해지는 것은 “의로운 자”라 불리는 자는 선인 것을 행하는 자, “완전한 자”라 불리는 자는 진리인 것을 행하는 자이다는 것, 이것들 역시 “정의 와 공정”을 행하는 것이다. “거룩함”과 “정의로움”은 신앙의 천적 수준이다; “완전함” 그리고 “공정함(judgement)”은 천적 수준에서 파생된 영적 수준이다.

“세대들”이 신앙으로부터의 것들(신앙 발달의 단계들)이다는 것은 역사적인 것인 글자 의미로부터는 나타나지 않는다; 따라서 여기서는 내적인 것만을 다루는 바, 신앙의 세대들이 의미되었다. 이것은 또한 세대들이 다른 말들과 연결되지 않는 것에서도 분명하다. 이는 말씀의 다른 구절에서도 확인된다. 이사야서에서:
너로부터 있을 자들이 옛 것의 황폐된 장소를 건설할 것이다; 너는 대대로의 기초를
일으켜 세울 것이다; 그리고 너는 파괴함을 수리하는 자라,
작은 길들을 거주하도록 회복하는 자라 불러질 것이다 (이. 58:12).
이 모든 것들은 신앙으로부터 있는 것을 의미한다; “옛 것의 황폐된 장소”란 신앙 속의 천적인 것들; “대대로의 기초들”은 신앙 속의 영적인 것들을 의미하는데, 이것들이 고대 시대로부터 소멸되어 왔다.
다시:
그들은 옛 황폐된 것들을 건설할 것이다, 그들은 이전의 황폐된 것들을 일으킬 것이다,
그들은 황폐한 성들, 대대로의 황폐된 것들을 새로이 할 것이다 (이. 61:4);
이 구절도 앞 구절과 비슷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다시:
그들은 헛되이 노동하지 않을 것이다, 곤경을 위해 산출하지 않을 것이다;
그 이유가 그들은 여호와의 복된 씨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과 더불은 자손도 (그러하다) (이. 65:23).
위에서 “산출함(bring forth, generare)”은 신앙으로부터의 것들을; “노동함(labor)”은 사랑으로부터의 것들을 서술한다. 사랑으로부터의 것들로부터 그들은 “여호와의 복된 씨”이고; 신앙으로부터의 것들로부터 그들은 “자손”이다.

“하느님과 더불어 걷는 것”이 신앙의 교리를 의미하는 것은 지난 번, 에녹 (창. 5:22, 24)을 살핀 대목으로부터 알런지 모른다. 에녹을 두고, “그는 하느님과 함께 걸었다” 하고 말해진다. 이는 후손의 사용을 위해 보존된 신앙의 교리를 의미하고 있는데, 이 후손이 바로 지금 거론되고 있기에 이 구절에서도 같은 어구인 “하느님과 함께 걸었다”가 다시 등장하고 있다.

이 교회 사람의 품질이 9절에서 일반적 수준에서 묘사되어 있다. 엄밀히 구분하면 이 교회는 아직까지는 이 구절 그대로와 같은 수준은 아니다. 그 이유가 이 교회의 형성(formation)이 뒤이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그런 수준이 되어간다는 것; 즉 신앙의 지식을 수단으로 그는 선행을 수여받아질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그렇게 선행으로부터 행동한다는 것, 그리고 선행의 선으로부터 진리인 것을 안다는 것이다. 이런 이유에서 문구 역시 선행의 선, 즉 올바른 자가 먼저 있고, 그 다음 선행의 진리, 즉 완전한 자가 뒤이어진다. 선행, 이미 말한 바대로 이웃을 향한 사랑과 자비이다; 그리고 이는 태고 교회의 사랑, 즉 주님을 사랑함보다 낮은 수준의 사랑이다. 그런고로 지금은 외적인 쪽으로 더 가 있는 셈이다, 그리고 (사랑이 아닌) 선행이라 불리어진다.

10절. 그리고 노아는 세 아들들, 셈, 함, 야벳을 낳았다.

노아는 세 아들들을 낳았다. 이는 거기로부터 세 종류의 교리가 출현했음을 의미한다. 이는 앞서 이름들의 의미를 살핀 곳에서, 이름들은 교회, 또는 교리들 밖에 더 다른 의미는 없음에서 분명해진다. 여기서도 같은 맥락이다; 그러나 여기서의 경우, 이 세 이름들은 주님께서 이 천성을 지닌 사람이 선행을 수여받을 수 있다는 예견하심의 연결 차원에서 언급될 뿐이다. 이 세 교리는 차 후 셈, 함, 그리고 야벳을 취급하는 곳에서 주님의 신성한 자비로부터 기술될 것이다.

“노아는 의롭고 완전하였다”는 것, 그는 “하느님과 함께 걸었다”는 것, 그리고 이 구절에서 그는 “세 아들들을 낳았다”는 것, 모두가 과거 시제에서 말하여진다, 그럼에도 이 표현들은 미래를 내다보고 있다. 이는 내적 의미에서는 시간과 관련 없음을 알게 해줄런지 모른다; 그리고 이런 (표현법을) 원어에서는 좋아하고 있다. 그래서 원어에서 때때로 한 개 그리고 같은 단어가 (시제가 바뀔 경우) 다른 단어들을 사용하지 않고 어떤 시간대나 무엇이든지에 응용한다. 그 이유는 이를 수단으로 내면의 것들이 더 명확하게 나타나기 때문이다. 언어는 이것을 내적 의미로부터 끌어내는 바, 이것은 누군가가 믿을 수 있는 것보다 더 다양하다; 그러므로 이 언어 표현은 시간이나 구별함에 의해 제한받아짐으로 고민하지 않아도 된다.

11절. 그리고 땅은 하느님 앞에서 부패되어 있었다. 그리고 땅은 폭행으로 채워져 있었다.

“땅”이 종족을 의미한다는 것은 앞서 땅과 지면의 의미를 살필 때 언급된 것에서 분명해진다. “땅”은 말씀에서 매우 자주 사용되는 단어 중 하나이다; 이 단어를 수단으로 주님의 진정한 교회가 있는 “토지(land)”가 의미되어진다, 즉 “가나안의 토지” 같은 경우이다; 또한 교회가 있지 않은 “토지”도 있다. 즉 이집트, 또는 이방인들의 “토지” 같은 경우이다. 그리하여 이것으로 거기 거주하는 종족이 표시된다. 이것이 종족을 표시하는 바, 마찬가지로 거기 거주하는 종족 속의 모든 이도 표시한다. 교회는 천적 사랑으로부터 “토지”라 불리워진다. 이는 “가나안의 토지” 같은 경우이다; 그리고 불순한 사랑들로부터는 “이방인들의 토지”라 불리운다. 그러나 이식되어진 신앙으로부터 “지면”이라 불리운다; 그 이유는 토지나 나라는 지면을 담는 그릇이고, 지면은 들판을 담는 그릇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사랑은 신앙을 담는 그릇이고, 신앙은 이식된 신앙에 관한 지식들을 담는 그릇이다는 말이다. 여기서의 “땅”은 천적인 사랑의 모든 것과 교회의 모든 것이 멸해진 종족을 위해 사용되고 있다

땅이 그들의 끔찍한 설득력들 때문에 “썩어지고”, 더러운 그리워함 때문에 “폭행으로 차있다”라고 말해진 것은 동사 “썩다”와 단어 “폭행”의 의미로부터 분명해진다. 말씀에서 이 말이 저 말을 위해 가져다 쓰는 일은 결코 없다. 그러나 문장의 표현이 한결같도록 서술하는 단어만으로도 내적 의미까지 즉시 나타나게 하는 경우가 있는데, 여기서 사용한 단어 “썩다”와 “폭행”이 그 한 예이다. “썩다”는 그것이 황폐해질 때 이해함 측면의 썩음이고; “폭행”은 그것이 황폐할 때 의지 측면의 폭행이다. 고로 “썩은 것”은 설득력들을 서술하고, “폭행”은 그리워함들을 서술한다.

“썩은 것”이 설득력들을 서술하는 것은 이사야서로부터 분명하다:
그들은 내 거룩함의 모든 산에서 다치지 않을 것이고, 썩지 않을 것이다;
그 이유는 땅이 여호와의 지식으로 가득해 있기 때문이다 (이. 11:9);
그리고 이사야서 65장 25절에서도 “다치는 것”은 의지에. 또는 그리워함에, “썩은 것”은 이해함에, 또는 거짓의 설득력들에 관계되고 있다. 다시:
죄지은 민족, 불법을 일삼는 백성들, 악행 자들의 씨,
썩은 자인 아들들에게 화가 있다 (이. 1:4).
위에서, 그리고 다른 구절에서도, “민족” 그리고 “악행 자들의 씨”는 의지, 그리워함으로부터 있는 악들; “백성들” 그리고 “썩은 자인 아들들”은 이해력, 또는 설득력으로부터 있는 거짓들이다. 에스겔서에서:
너희는 네 모든 길들에서 그들보다 더 썩었다 (겔. 16:47).
위에서 “썩다”는 이해함, 또는 추론함, 또는 생각함으로부터의 것들을 서술한다; 그 이유가 “길”은 진리를 의미하는 단어이기 때문이다. 다윗서에서:
그들은 썩은 것을 행했다, 그리고 역겨운 일을 행했다 (시. 14:1).
위에서 “썩은 것”은 끔찍한 설득력들을 표시한다, 그리고 “역겨운”은 일 안에 있는 더러운 그리워함을 표시한다, 이 그리워함으로부터 일이 진행되어진다. 다니엘서에서:
62주에 메시아가 중단하실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 그에게 속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을 것이다; 그리고 지도자의 백성은 도성과 성소를 썩게 할 것이다,
그리고 거기로부터 홍수와 더불어 있을 것이다 (단. 9:26).
위 구절 역시 “썩다”는 거짓인 것으로부터의 설득력, 이로부터 “홍수”가 서술되어진다.

땅은 폭행으로 가득찼다. 이렇게 말해진 것은 그들의 더러운 그리워함들 때문에, 자기를 사랑함, 또는 과도한 거만으로부터 와지는 것들 대부분 때문임은 말씀으로부터 분명해진다. 인간이 거룩한 것들을 모독함으로 그것들에 폭력을 휘두를 때, 마치 홍수 직전 사람들이 갖가지 종류의 그리워함 안에 신앙의 교리적인 것들을 침수해버린 경우 같을 때, 이를 두고 “폭행”이라 말해지는 것이다. 에스겔서에서:
내 얼굴을 나는 그들로부터 돌릴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내 거룩한 [장소]를
모독할 것이다, 그리고 강도들이 내 거룩한 장소 안으로 들어가서 거룩함을
모독할 것이다. 사슬을 만들어라; 그 이유는 토지는 피들의 심판으로 가득하다,
그리고 성은 폭행이 가득하다 (겔. 7:22-23).
“폭행”은 위에서 그들이 누구인지를 서술해준다, 그리고 그들이 우리가 서술한 것과 같다는 것을 서술한다. 다시:
그들은 고독함에서 자기들의 빵을 먹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적막함에서
자기들의 물들을 마실 것이다, 그리하여 그녀의 토지는 그것의 충만함으로부터
황폐될런지 모른다, 그 이유는 거기 안에 거주하는 그들 모두의 폭행 때문이다
(겔. 12:19).
“그들이 고독함에서 먹을 빵”은 천적인 것들, 그리고 “그들이 적막함에서 마실 물들”은 영적인 것들, 이것들에 그들은 폭력을 가하고 모독해버린 것이다.
이사야서에서:
그들의 직물들은 의복들로 되지 못할 것이다 그들은 자기들의 일들 안에서
덮지 못할 것이다; 그들의 일들은 불법의 일들이다, 그리고 폭력의 행위가
그들의 손에 있다 (이. 59:6).
여기서 “직물들” 그리고 “의복들”은 이해함으로부터의, 즉 생각함으로부터의 것들; “불법” 그리고 “폭력”은 의지, 즉 일들로부터의 것들을 서술하고 있다. 요나서에서:
모든 이 각각은 자기들의 악한 길에서,
자기 손에 있는 폭행으로부터 돌아서게 하라 (욘. 3:8),
위에서 “악한 길”은 거짓들을 서술하고, 이는 이해함으로부터 있는 것들이다; 그리고 “폭행”은 악들을 서술하고, 이는 의지로부터 있는 것들이다. 예레미야서에서:
소문이 일 년 안에 올 것이다, 그리고 토지 안에 폭행 (예. 51:46).
“소문”은 이해함으로부터 있는 것들, “폭행”은 의지로부터 있는 것들을 표시한다. 이사야서에서:
그분은 폭행을 가한 적이 없다, 그분의 입에서 어떤 사기침도 없었다 (이. 53:9).
위에서 “폭행”은 의지로부터의 것을; “그분의 입에 있는 사기침”은 이해함으로부터 것들을 표시한다.

(진정한) 교회가 있지 않은 상태가 이 대목에서 취급된다는 것은 앞 절의 경우, 단어 “여호와”가 사용되다가, 이 구절 그리고 이 장의 이어지는 구절에서 단어 “하느님”이 사용되기 때문에서 알게 된다. 교회가 있을 경우, “여호와”가 사용되는데, 창세기 첫 장 같이 교회가 없을 경우, 하느님이, 제 2장에서는 교회가 있었는 바, “여호와 하느님”이 사용되고 있다. 이름 “여호와”는 가장 거룩하다, 그리고 교회에 만 속해 있다; 그러나 이름 “하느님”은 가장 거룩하다고 까지 할 만큼 거룩하지는 않다. 그 이유가 인간이 존재하는 모든 곳에 하느님들은 존재하기 때문이다. 진정한 신앙에 관한 지식을 갖지 않으면 누구도 이름 “여호와”를 말하는 것은 허용되지 않았다; 그러나 이름 “하느님”은 누구라도 말할런지 모른다.

12절. 그리고 하느님께서 땅을 보셨다, 그리고 들여다보니 그것은 부패되어 있었다, 그 이유가 모든 육체가 땅에서 그것의 길을 타락시켰기 때문이다.

하느님께서 땅을 보셨다. 이는 하느님이 인간을 알고 계셨음을 의미한다. 그 이유는 영원으로부터 모든 것을 아시는 분이 하느님이시라고 모두가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느님은 인간이 이런지 저런지 보실 필요도 없으셨다는 말도 된다. “보는”것은 인간의 몫이다, 그러므로 이미 지나온 6절이나 그 밖의 경우에서 말씀은 인간이 “보는” 것에 일치되어 말해지고 있다; 어떤 경우는 하느님께서 “눈을 가지고 보신다”라고 까지 (인간 바닥 수준에서) 말해지기도 한다.

그 이유는 모든 육체가 땅에서 그것의 길을 썩혔기 때문이다. 이는 인간의 물질적 본성이 진리에 관한 모든 이해력을 파괴했음을 의미한다. 이는 “육(flesh)”의 의미로부터 분명해진다 (3절 참조). 육체는 일반적으로는 모두 각각의 인간을 뜻한다, 그리고 세부적으로는 물질적(corporeal) 인간, 또는 육체로부터 있는 모든 것을 뜻한다; 그리고 “길”의 의미가 진리를 이해함, 즉 진리 자체인 것으로부터 위 의미는 분명해진다. “길”이 진리를 이해함, 즉 진리를 서술한다는 것은 이미 여러 인용구절을 살폈는데, 아래 몇 개 더 추가해보자. 모세의 책으로부터:
여호와께서 말하셨다, 일어나라, 너는 여기로부터 빠르게 내려 가라; 그 이유는
네 백성들이 자신들을 썩혔다; 그들은 내가 그들에게 명령한 길로부터 갑자기 돌아섰다;
그들은 자기들에게 부어만든 상을 만들었다 (신. 9:12, 16),
그들의 진리들인 그분의 명령들로부터 돌아서버렸음을 뜻한다.
예레미야서에서:
그분의 눈들은 사람의 아들들의 모든 길들에 열려 있어,
모두 각각의 사람에게 그의 길들에 따라, 그의 일들의 열매에 따라 주신다. (예. 32:19).
위에서 “길들”은 명령들에 따른 삶이다; “그의 일들의 열매”는 선행으로부터의 삶이다. 그런고로 “길”은 진리들을 서술하고 있다, 이것은 가르침들과 명령들로부터 있는 것들이다. 그리고 “사람[homo]의 아들”의 의미와 남자[vir]의 의미는 이미 살폈다. 이 구절과 비슷한 구절이 같은 예언서에서 7:3; 17:10에도 있다. 그리고 호세아서에서:
나는 그의 길들에서 그를 방문할 것이다, 그리고
그에게 그의 일들을 되돌려 갚을 것이다 (호. 4:9).
스가랴서에서:
너는 네 악한 길들에서 돌아가라, 그리고 네 악한 일들로부터 돌아서라.
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의 길들에 따라, 그리고 우리의 일들에 따라
우리에게 행하려 생각했던 것같이 말이다 (슥. 1:4, 6).
위 구절 역시 의미는 비슷하나 그것들이 악한 길들과 악한 일들이므로 반대적 의미이다. 예레미야서에서:
나는 그들에게 한 개의 심정, 한 개의 길을 줄 것이다 (예. 32:39).
“심정”은 선들을 의미한다, 그리고 “길”은 진리들을 의미한다. 다윗서에서:
저로 당신의 명령들의 길을 이해하게 만드십시요; 나로부터 거짓말의 길을 옮겨 주십시요; 그리고 제게 당신의 법을 은혜스럽게 수여하십시오. 저는 진리의 길을 선택했습니다.
저는 당신의 명령들의 길을 달릴 것입니다 (시. 119:27, 29-30, 32).
위에서 “명령들의 길”이 “진리의 길”이다 불리운다. 이것의 반대가 “거짓말의 길”이다. 다시:
저로 당신의 길(way)들을 알게 만드십시오, 오 여호와여, 제게 당신의
작은 길(path)들을 가르치십시오. 제 길을 당신의 진리 안에서 인도하십시오,
그리고 저를 가르치십시오 (시. 25:4-5).
위 구절 역시 “길”은 진리를 분명히 표시한다. 이사야서에서:
여호와께서는 누구와 더불어 의논을 하셨는지, 누가 그를 훈육했는지, 그리고
[누가] 공정의 길을 그에게 가르쳤는지, 그리고 [누가] 지식을 그에게 가르쳤는지,
그리고 [누가] 그를 이해함의 길을 알게 만들었는지 (이. 40:14),
위 구절은 진리를 이해함을 위해서가 분명하다. 예레미야서에서:
그런고로 여호와께서 말하셨다, 너희는 길에 서서 보라, 그리고 옛 작은 길들을
물어보라, 좋은 길이 어디 있는지, 그리고 그 안에서 가라 (예. 6:16).
위 구절 역시 “길”이 진리를 이해하기 위해 놓여져 있다. 이사야서에서:
나는 너희 알지 못하는 길에서 눈먼 자를 인도할 것이다, 그들이 알지 못해왔던
작은 길에서 나는 그들을 인도할 것이다 (이. 42:16).
단어 “길(way),” “작은 길(path),” “거리(street),” “도로(road),” “좁은 길(lane)” 등등은 진리를 서술한다. 그 이유는 그것들이 진리로 인도하기 때문이다; 예레미야서에서:
그들은 보조 도로, 즉 다듬지 않은 길에서 걸으려하다가 고대의 작은 길들에서,
자기들의 길들에서 자신들을 걸려 넘어지게 한다 (예. 18:15).
사사기서에서:
야엘의 시절에 작은 길들이 중단되었다, 그리고 작은 길에서 걷던 자들이
구불어진 작은 길을 통해 갔다. 도로들이 이스라엘에서 중단되었다 (사. 5:6).

여기서의 내적 의미는 이렇다. 교회가 있던 토지에 있는 자는 누구이던 “자기의 길을 썩혔다”, 즉 모든 자는 진리를 이해할 수 없었다 이다. 그 이유가 모든 이가 물질적이 되었기 때문, 이 자들은 앞 절의 사람들 뿐 아니라 “노아”로 불린 이들, 특히 이 구절과 다음 구절에 있는 사람들까지 아우른다. 그 이유가 이들은 거듭나기 전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먼저 말해진 이유는 다음 절에서 그들의 거듭남이 다루어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주 조금 교회의 것이 남은 까닭에 “여호와”가 아닌 “하느님”이 지금은 명명된다. 이 절에서 남은 진리가 없다고 말해졌다. 그리고 다음 절에서 “노아”라 불린 이들이 가진 리메인스 외에는 아무 선도 없다고 말해진다. (그 이유가 리메인스가 없으면 구원도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이 알았던 교리적인 문제들도 남은 것이 없다. 선한 의지가 존재하지 않는 곳에는 진리를 이해함도 없다. 의지력이 있지 않을 경우, 이해력도 있지 않는다; 의지가 있다면, 이해함도 있다. 태고인들은 선한 의지를 가졌다. 그 이유는 그들이 주님을 사랑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로부터 그들은 진리에 대한 이해를 가졌다. 그러나 이 이해력은 의지력과 함께 완전히 사멸됐다. 아무리 그럴지라도 자연적 선, 뿐만 아니라 어떤 종류의 합리적 진리가 “노아”라 불려지는 이들과 더불어 남았다. 그러므로 그들은 거듭나아질 수 있었다.

13절. 그리고 하느님께서 노아에게 말하셨다, 모든 육체의 끝이 내 앞에 와 있다. 그 이유는 땅이 그들의 얼굴로부터 폭행으로 채워져 있다, 그리고 보라 나는 땅과 함께 그들을 파괴하리라.

“하느님께서 말하셨다”는 그러하였음을 의미하는 것은 여호와는 있음(being) 자체이시다는 사실로부터 분명하다.

모든 육체의 끝이 내 앞에 와 있다 란 인간 종족은 사멸할 수 밖에 없다를 의미한다. 이는 문장의 단어들 자체, 그리고 육체의 의미, 즉 모두 각각의 인간은 물질적 인간을 일반적, 특수적 측면에서 뜻함으로부터 분명해지는데 이미 설명한 바 있다.

땅이 폭행으로 가득 차 있다 란 그들이 더 이상 선한 의지를 가지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이는 11절에서 “폭력”의 의미를 살필 때 말했다. 앞 절에서는 진리를 이해함이 말해지고, 여기서는 선한 의지가 말해진다. 그 이유는 이 둘 모두 교인과 더불어 멸해지기 때문이다.

위의 경우에 대한 설명이다. 태고 교회에 속한 사람을 포함해 진리를 이해함과 선한 의지를 갖지 않은 인간은 아무도 없다. 인간이 천적 수준에 이르렀을 때, 그들은 선한 의지와 진리를 이해함을 가져버린 것처럼 나타난다, 그럼에도 그것은 주님만으로부터 이다. 이것을 천적 인간들 역시 알고 인정하고 지각한다. 천사들 역시 이와 마찬가지이다. 이렇게 알지 않고, 인정하지 않고, 지각하지 않는 자는 선한 의지가 없고, 진리를 이해함도 없다. 모두 각각의 인간, 모두 각각의 천사, 최고로 천적 수준의 누구라해도 그의 자기 자신(own)에는 거짓과 악 밖에 없다; 이런 이유를 욥기 15장 15절을 참작하면 주님 이전 천국들은 깨끗하지 않았음이 알려져 있었던 것으로 미루어 짐작해도 이해될 것이다. 더불어 모든 선과 진리는 주님만에 속한 것, (주님만으로부터 우리에게 있어지기) 때문이다. 인간이 완전해질 수 있는 만큼에서, 주님의 신성한 자비도 그 만큼 허락되어, 그 만큼 그는 완전해진다. 말하자면, 선한 의지와 진리를 이해함도 그 만큼 받는다는 말이다; 그러나 그가 받을 수 있는 만큼 받은 것마저도 그가 가진 것은 오로지 가진듯 보이는 것(appear)일 뿐이다. 모든 인간은 완전해질 수 있다 -결과적으로 주님의 자비로부터 이 선물을 받을 수 있다 -그러나 받는 (양과 질은) 두 가지 조건에 따라, 즉 그의 삶의 실제 행동들에 일치되게, 그리고 자기 부모들을 수단으로 이식된 유전적 악에 걸맞추어 결정된다.

진리를 이해함과 선한 의지가 적당한 의미에서 무엇인지를 납득되도록 말하는 것은 지극히 힘든 것 같다. 그 이유가 사람은 자기가 생각하는 것이 이해함(력)으로부터 있다 라고 상상하고, 그렇게 부르고 있기 때문이다; 그가 바라는 모든 것을 그는 의지로부터 있다 라고 상상하고, 그렇게 부르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을 설명하는데 더 한층 힘들게 하는 것은, 오늘날의 사람들은 이해력 속에 있는 것은 의지력 속에 있는 것으로부터 구분되어 있다는 것에 무지해 있어서 이다. 그 이유가 그들이 어떤 것을 생각할 때 그들은 자기들이 그것을 뜻한다고 말하기 때문, 그리고 그들의 어떤 것을 뜻할 때 그들은 자기들이 그것을 생각한다 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힘든 한 가지 원인이고, 또 다른 힘든 이유는, 인간은 육체에 속한 것 안에만 있다는 것, 즉 자기들의 삶은 극도로 외적인 것 안에 있다고 알고 있는 것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그들은 모두 각각의 사람 안에는 내면(interior)이라는 어떤 것이 있다는 것, 더 나아가 내면 안에 내면이 있는 것, 즉 가장 안쪽(inmost) 내면이 있다는 것; 그리고 그의 물질적이고 감각적인 부분은 가장 바깥쪽(outermost)일 뿐이다는 것이다. 바램(욕구, desire)들, 그리고 기억 속의 것들은 내면이고; 애착(affection)들과 합리적인 것들은 바램과 기억 속의 것들보다 더 내면적이다; 그리고 선한 의지와 진리를 이해함은 가장 안쪽(inmost)이다. 그리고 이것들은 서로로부터 구분되어 있는데, 어느 것도 구분되어 질 수 없는 것은 없다. 육체적(corporeal) 인간은 위 모든 것을 하나로 만든다, 그리고 그것들을 구별하지 못한다 (confound). 이런 이유 때문에 육체가 죽을 때 모든 것도 죽게 되어 있다 라고 믿는다; 그렇게 믿을지라도 사실인즉, 죽은 다음, 그는 먼저 살기를 시작한다. 이 삶은 그의 내면들을 수단으로 그것들의 순서 안에서 밀접하게 서로 서로의 뒤를 이어 간다. 만일 그의 내면들이 이렇게 구분이 되지 않고, 그리하여 이것 뒤를 이어 저것이 계승되지 않는다면, 인간들은 다른 삶에서 각자의 내면들에 따라 영들, 천사 같은 영들, 천사들로 결코 구분되어 있지 않을 것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세 천국들이 있고, 각 천국은 다른 천국과 (철저히) 구분되고 있다. 위와 같은 추가 설명을 통해 적절한 의미에서 진리를 이해함과 선한 의지가 무엇인지 어림잡아졌으리라 생각한다; 그리고 그것들은 천적 인간, 또는 셋째 천국의 천사들에 만 해당되어 서술될 수 있다.

앞 절과 이 절에서 말해진 것은 홍수 이전 교회의 날들의 끝에서 진리를 이해함과 선한 의지의 모든 것이 사멸되었다는 것, 그리하여 홍수 이전 사람들 사이에 (있던) 끔찍한 설득력들과 더러운 그리워함들은 흔적조차도 나타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노아”라 불리는 이들과 더불어 그들 안에서는 리메인스가 계속 존재했으나, 이 리메인스(remains)는 이해함(understanding)과 뜻함(will)의 어떤 것을 산출할 수 없었고, 오로지 합리적(rational) 진리와 자연적(natural) 선 만의 산출이 가능했다. 그 이유가 리메인스의 실행(operation)은 인간의 본성(nature, 본래의 모습)에 따라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리메인스를 통하여 이 사람들은 거듭나질 수 있었다; 그리고 설득력들이 (이 거듭남을) 방해하지 못했고, 리메인스를 통한 주님의 역사하심(operation)에 흡수되었다. 설득력들, 또는 거짓의 원리들이 모든 역사함(operation)을 방해함에 뿌리를 둘 때, 그래서 이것들이 먼저 뿌리 뽑혀지지 않으면 인간은 결코 거듭나아질 수 없다. 이에 관하여는 차 후 주님의 신성한 자비로부터 (더 살핀다).

나는 그들을 땅과 더불어 파괴할 것이다. 이는 교회와 더불어 인간 종족이 사멸되리라는 것을 의미함은 “땅과 더불어”라고 말해진 대목에서 분명해진다; 그 이유가 “땅”은 넓은 의미에서 사랑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고로 교회의 천적 수준의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여기에서의 경우, 사랑이 없고, 천적인 것에 속한 것도 남아있지 않은 바, 여기서의 “땅”은 자기를 사랑함, 또는 천적 수준의 것에 반대되는 것들을 의미한다. 그럼에도 거기에 교회의 사람이 있었다. 그 이유는 그들이 신앙의 교리적인 것들을 가졌기 때문이다. 이미 상술했던 바 같이, 땅은 지면의 그릇이고, 지면은 들판의 그릇이듯, 사랑은 신앙의 그릇이고, 신앙은 신에 관한 지식들의 그릇이기 때문이다.

“내가 그들을 땅과 더불어 파괴할 것이다”가 교회와 더불어 인간 종족이 멸해질 것이다를 의미한 이유는 이러하다: 만일 주님의 교회가 땅 위에서 완전히 소멸되어진다면, 인간 종족은 결코 존재할 수 없고 모조리 사멸된다. 이미 말한 바대로, 교회는 심장(heart)과 같다: 심장이 살아 있는 한, 이웃되는 내장이나 조직들이 살 수 있다; 그러나 심장이 죽자 마자, 그것들 역시 모조리 죽는다. 땅위에서 주님의 교회는심장과 같아, 거기서부터 인간 종족, 그것의 한 부분이 교회 바깥쪽일지라 해도 생명을 가진다. 이런 이유는 누구에게도 전혀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이것의 일부라도 알도록 서술해두어야 할 것 같다. 땅 위 전체 인간 종족은 여러 부분들을 가진 신체 같이 존재하는데, 그 안에서 (주님의) 교회는 심장 영역에서 존재한다; 그리고 이 교회가 주님이 천국과 영들의 세계를 통하여 하나이도록 하는 심장으로의 역할을 하지 않으면, 분리됨은 당연할 것이다; 그리고 주님으로부터 인간 종족의 분리됨이 있었다면, 인간 종족은 그 즉시 멸종되었을 것이다. 이것은 인간의 첫 창조로부터 교회가 언제나 있어온 이유이기도 하다. 또한 교회가 멸해질 때이면 언제나 다시 교회는 누군가와 더불어 남아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또한 이것은 주님께서 세상에 오신 이유이기도 하다. 만일 그분의 자비로 그분이 오시지 않았다면, 땅 위 전체 인간 종족은 사멸되고 말았으리라. 그 이유가 그 당시 교회는 그 극점에 치닫고 있어, 어떤 선과 진리도 거의 살아 남아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인간 종족은 천국과 영들의 세계를 통해 주님과 결합하지 않으면, 인간 그 자체만 주시해본다면, 그는 야수보다 더 수치스럽기 때문이다. 만일 인간을 자신 안에만 남겨둔다면, 이내 그는 자신의 파멸, 그리고 모든 것의 파멸로 돌진할 것이다; 그 이유가 그가 바라는 것의 전부가 그것이기 때문이다. 그분의 질서는 자신같이 타인을 사랑하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 모든 이가 타인보다 더 자신을 사랑하고 있다, 그런고로 모든 타인을 미워하고 있다. 그러나 야생 동물의 경우는 아주 다르다: 그들의 질서는 그들이 사는 것에 따른 것이다. 그런고로 그들이 존재하는 질서에 꼭 맞추어 그들은 살고 있다. 인간은 자기 질서(이웃을 자신같이 사랑함)에 정반대되고 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이런 인간 위에 측은해 하심을 가지시지 않으면, 동시에 인간들을 천사들을 통하여 주님에게 결합되게 하시지 않으면, 인간은 단 한 순간도 살 수 없다; 그러나 인간은 모른다.

14절. 너는 고페르 목재로 방주를 만들고, 너는 대저택들을 방주에 만들어라, 그리고 그것을 역청으로 안팎으로 바르라.

“방주”가 “노아”라 불리는 교회, 또는 이 교인을 의미하는 것은 다음 절에서 방주에 대한 묘사로부터 충분하게 설명되어진다; 그리고 주님의 말씀은 어느 구절에서나 천적인 것들과 영적인 것들을 포함하고 있다는 사실로부터도 분명해진다; 즉 말씀은 영적이고 천적이다는 말이다. 방주가 역청으로 입혀지는 것, 방주의 칫수, 방주의 건축, 그리고 홍수 등등이 글자 대로의 의미 그 이상을 표현하는 것이 없다면, 거기에는 영적, 천적인 의미는 아예 없고, 역사적 어떤 것만 있을 것인 바, 여느 특이한 작가에 의해 서술된 것 이상, 인류를 위해 별 소용이 닿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주님의 말씀은 어느 구절에서나 말씀의 가슴에, 내면에, 영적인 것, 천적인 것, 또는 둘 모두를 한꺼번에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방주와 방주에 관하여 말해진 모든 것에는 지금까지 밝히 알려지지 않은 감추인 것들이 의미되어 있음은 확실하다
이는 말씀의 다른 장소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예를 들어 말씀에는 대표적인 중요한 세 궤(ark)가 등장한다. 하나는 배라고 하는 궤, 즉 방주이다. 두 번째는 작은 상자, 또는 작은 궤인데, 모세가 이것에 감추여져 강가 사초(sedge)에 놓여졌다 (출. 2:3);보다 더 고상한 실예는 광야에서의 거룩한 궤이다. 이 궤는 시내산에서 모세에게 보여준 모형에 따라 만들어졌다. 만일 궤에 관련된 각각 그리고 모든 것들이 주님과 그분의 왕국을 표현하지 않고 있다면, (우리의 예배 역시) 일종의 우상 숭배, 우상 예배의 수준밖에 더 아닐 것이다. 마찬가지 생각에서 솔로몬의 성전 역시 (물질적) 그 자체, 즉 금, 은, 삼나무, 돌 등등 때문에 거룩한 것이 아니라, 그것들이 표현하는 것 때문에 거룩한 것이다. 이 구절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만일 방주와 그 건축, 그리고 그에 따른 세부 사항들이 교회에 관한 감추인 어떤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면, 말씀은 주님의 말씀일 리가 없고, 단지 죽은 글자, 여느 모독적인 작가의 글 수준에 머물 것이다. 그러므로 방주는 “노아”라 불리는 교회, 교인을 의미함이 분명해진다.

“고페르 목재”는 강한 욕망들을, “대저택”은 이 인간의 두 부분들, 즉 의지력과 이해력을 의미한다는 것은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았다. 어떻게 되어 의미가 이런지는 먼저 어떻게 이런 경우가 교회와 더불어 있게 되었는지를 말하지 않으면 아무도 알 수 없다. 태고 교회는 이미 자주 말했던 바 같이 사랑으로부터 신앙 속에 있는 것을 알았다; 다시 말해, 선한 의지로부터 진리를 이해했다는 말이다. 그러나 이 후손들은 유전에 의해 탐욕들도 상속받았고, 이것이 의지 속에서 그들을 통치했는 바, 이 탐욕 안에 그들은 신앙으로부터의 것들을 침수되게 했다, 그래서 그들은 “네피림”이 되었다.
그리하여 주님께서 만일 사람들이 이런 본성을 계속 지닌다면, 필시 인간은 영원히 사멸하리라고 예견하셨다. 따라서 그분은 의지력을 이해력으로부터 분리하는 것, 인간은 이전처럼 선한 의지를 수단으로가 아닌, 진리를 이해함을 통하여 선한 의지력처럼 나타나는 선행을 수여받아 (거듭남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런고로 이 새로운 교회는 “노아”라 불리게 된 것이다. 이 교회는 태고 교회와는 아주 다른 본성을 지니고 있다. 사실 이 교회 외에도 그 당시 다른 교회들도 있었다. 창세기 4:26을 보면 에노스라 불리는 교회도 있다. 그 외 다른 교회들은 언급됨이나 묘사됨이 기록상으로는 잔존하지 않는다. 오직 이 교회 “노아”가 여기서 기술되는데, 그 이유는 이 교회만이 태고 교회와 아주 다른 본성을 지녔기 때문이다.

이 노아 교회인은 그가 의지력이라 불리는 부분이 개혁될 수 있기 전 이해력이라 불리는 부분이 개혁되어야 하는 바, 여기서 의지력에 속한 것들이 이해력에 속한 것들로부터 어떻게 분리되는지를 묘사하고 있다. 그리하여 의지력에 속한 것들에 어떤 것도 접촉하지 못하도록 의지 측면의 것들은 덮어서 가려져 있거나 따로 떼어 비축한듯한 상태로 있다. 그 이유가 의지속의 것들이 탐욕들의 부추킴으로 동요될 경우, 멸해지고 말기 때문인데, 차 후 더 살핀다. 이 인간의 두 부분들 -의지력과 이해력- 은 인간 안에서 완전히 구분되고 있어서 아마 이보다 더 완벽한 구분된 어떤 것은 없다. 나에게 이에 대한 확실함을 갖도록 영들과 천사들의 이해력이 (관찰함이) 나에게 주어졌다. 이들의 이해력은 머리 또는 두뇌의 왼쪽 부분 안으로 흐른다, 그리고 의지력에 속한 것들은 오른쪽 부분으로 흐른다; 그리고 얼굴에서도 같았다. 천사 같은 영들이 안으로 흘러들 때, 그 흐름은 공기 속의 아주 부드러운 숨 쉼같았다; 그러나 악령이 흘러들 때, 끔찍한 설득력들과 공상을 가지고 두뇌의 왼쪽 부분 안으로 범람하듯 밀려든다. 그리고 탐욕들과 더불어 오른쪽 안으로 흘러드는데, 이 흘러듦은 공상과 탐욕들의 범람함 같았다.

위 모두로부터 명백해지는 바, 방주에 관한 첫 묘사, 즉 고페르 목재로 건축함, 대저택들, 역청으로 안과 밖의 표면을 덮음, 등의 묘사는 의지력에 속한 부분이 침수됨으로부터 보존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해력에 속한 부분만이 열려짐이 16절에서, 그리고 가장 낮은 창문, 둘째, 그리고 셋째 창문으로 해서 묘사되었다. 이런 것들이 쉽게 믿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 이유는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의미들은 인간의 무지함을 수단으로 감추어져 있는 최소한의 의미이고 가장 일반적 의미에 불과하다. 만일 하나하나의 세부사항들이 말해진다면 그 하나하나조차도 납득할 수 없을 것이다.

이제 단어들 자체의 의미에 주목해 보자: “고페르 목재”는 강한 욕망을, “대저택”은 인간의 두 부분을 의미한다는 것이 말씀 안에서도 분명해진다. 고페르 목재는 전나무(fir) 같은 유황 성분을 많이 함유한 목재이다. 이런 종류의 나무는 다른 것들도 있다. 어쨌든 나무가 지닌 유황 때문에 이 목재는 강한 욕망을 의미한다, 그 이유는 쉽게 불이 잘 붙기 때문이다. 태고인들은 인간 안에 있는 것들을 금, 은, 놋쇠, 철, 돌, 그리고 목재(나무)에 이렇게 비교했다. 인간의 가장 안쪽 천적 평면의 것은 금에, 그의보다 낮은 천적 수준인 것은 놋쇠에, 그리고 가장 낮은 것, 또는 물질적인 것은 목재에 비교했다. 그러나 그의 가장 안쪽 영적 평면의 것은 은에, 그의보다 낮은 영적 평면의 것은 철에, 그의 가장 낮은 것은 돌에 비교했다. 이와 같은 내적 의미가 성경에서 그것들이 언급될 경우 그것들의 의미가 된다. 이사야서에서:
놋쇠를 위해 나는 금을, 그리고 철을 위해 나는 은을, 그리고 목재를 위해 나는
놋쇠를, 돌을 위해 철을 가져올 것이다; 나는 네 관리들을 평화로 만들 것이다.
네 강제 집행 관리들을 정의로 만들 것이다 (이. 60:17).
위 구절은 주님의 왕국과 그 안에 있는 것을 다루고 있다. 거기서의 금속들은 영적이고 천적인 것들이다; 이렇게 의미되는 것은 “평화”와 “정의”가 언급된 것으로부터 분명해진다. “금”, “놋쇠”, “목재”는 각각이 상응하여, 의지력에 속한 것, 또는 천적인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은”, “철”, “돌”은 각각이 상응하여 이해력에 속한 것, 즉 영적인 것들을 의미한다.
에스겔서에서:
그들은 네 재물들을 망쳐놓을 것이고 네 전리품을 상품으로 만들 것이다;
네 돌들, 그리고 네 목재 (겔.26:12).
위 구절에서 “재물들”, “상품”이 세상의 재물과 상품을 뜻하지 않고, 천적인 것과 영적인 것을 뜻함은 분명하다; 돌들과 목재도 마찬가지이다. “돌들”은 이해력에 속한 것들, 그리고 “목재”는 의지에 속해 있는 것들이다. 하박국서에서:
돌들이 (성)벽으로부터 외친다, 그리고 목재로부터의 들보가 대답한다 (합. 2;11).
“돌”은 가장 낮은 수준의 이해력을, “목재”는 가장 낮은 수준의 의지력을 표시하는데, 이것들이 어떤 것이 감각적 지식으로부터 추출되어 나올 때 대답해준다. 다시:
깨어있으라 하고 목재에게 말하는 자에게 화가 있다; 그리고 벙어리 돌에게 일어나라
하고 말하고, 이것이 가르칠 것이다 하는 자에게 화가 있다. 잘 보라 그것은 금과 은으로
씌워져 있다. 그것들에는 숨이 없다.
그러나 여호와는 그분의 거룩함으로부터의 성전 안에 계신다 (합. 2:19, 20).
위 구절에서도 역시 “목재”는 탐욕을 표시한다; “돌”은 가장 수준 낮은 이해력을 표시한다, 그러므로 “벙어리”다는 것과 “가르친다”가 그것을 서술하고 있다; “그것에는 숨이 없다”란 그것은 천적이든, 영적이든 아무 것도 표현하지 않는다는 것, 단지 성전에 있는 돌, 목재, 그리고 이것들이 금과 은과 함께 묶여져 있는 상황일 뿐이다.
예레미야애가서에서:
우리는 은을 주고 우리의 물들을 마신다; 우리의 목재는 값을 치루고 온다 (애. 5:4).
위에서 “물들”과 “은”은 이해력으로부터의 것들; 그리고 “목재”는 의지로부터의 것들을 의미한다. 다시:
목재에게 말한다, 너는 내 아버지이다; 그리고 돌에게는, 너는 나를 낳았다 (애. 2:27).
위에서 “목재”는 탐욕을 표시하고, 이것은 의지 속에 있다, 거기로부터 임신한다; 그리고 “돌”은 감각적인 지식이고, 이로부터 “낳는다.” 다른 예언서를 보면, “나무와 돌을 섬기는 것”이 나무와 돌로 만든 우상을 예배하기 위해 놓였다. 이를 수단으로 그들이 탐욕과 공상을 섬겼다가 의미되었다; 또한 예레미야서 3:9을 보면 “나무와 돌을 가지고 간음을 범함”도 있다. 호세아서에서:
내 백성이 그들의 목재들에게 문의한다, 그리고 목재로 만든 지팡이가
그들에게 선포한다; 그 이유는 매춘의 영이 그들을 이끌어갔기 때문이다 (호. 4:12),
위는 그들이 목재로 된 새긴 상에게, 또는 그리워함(탐욕)의 우상에게 문의함을 의미하고 있다.
이사야서에서:
도벳은 어제로부터 준비되어졌다, 쌓아올린 것은 불이고 많은 장작이다,
여호와의 숨이 불타는 유황의 시내 같다 (이. 30:33).
위에서 “불,” “유황,” “장작”은 더러운 탐욕들을 표시한다. 일반적으로, “목재(나무, 장작)은 가장 수준 낮은 의지로부터의 것들을 의미한다; 귀한 목재들, 삼목(cedar) 내지 이와 비슷한 목재들은 선으로부터 있는 것들을 의미한다. 예를 들면, 성전의 삼나무 목재, 나병환자를 위해 사용된 삼나무 등이다 (레. 14:4, 6, 7). 또한 마라에서 나무가 쓴 물들에 던져졌다, 이로부터 물들이 달게 되었다 (출. 15:25), 이에 관한 의미는 주님의 신성한 자비로부터 출애굽기편에서 취급된다. 그러나 귀중하지 않은 목재들, 새긴 우상을 만드는데 사용된 목재들, 사람을 태우기 위해 사용된 장작들은 탐욕들을 의미한다. 본문의 경우는 고페르 목재이다. 그것이 지닌 유황 성분 때문이다. 이사야서에서:
여호와께서 앙갚음하시는 날; 거기로부터의 시내는 역청으로 변할 것이다,
그리고 거기로부터의 먼지는 유황으로, 그리고 거기로부터의 토지는 불타는
역청이 될 것이다 (이. 34:9).
위에서 “역청(pitch)”은 끔찍한 공상들을; “유황”은 역겨운 탐욕들을 의미한다.

“대저택들”이 인간의 두 부분들, 즉 의지력과 이해력을 의미하는 것은 이미 상술했다:이 두 부분들, 의지력과 이해력은 서로가 정확히 구분되고 있다. 이런 이유로 인간의 두뇌는 두 부분들로 나뉘어 뇌반구(hemisphere)들이라 불린다. 왼쪽 뇌반구는 지적인 능력에 속하고, 오른쪽 뇌반구는 의지 쪽에 속한다. 이 구분은 최고로 일반적 구분이다. 이 외에도, 의지력과 이해력은 무수한 부분들로 구별되어진다. 그 이유가 인간의 지적 측면의 분활(division)들은 너무나 많고, 의지 측면도 그러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것들은 일반적 종들(genera)과 속들(species)만 가늠한다 해도 셀 수 없다. 인간은 최소한도에서의 천국이기 때문에 영들의 세계와 천국에 상응하고 있다. 인간 안의 의지력과 이해력으로부터의 종들과 속들은 주님에 의해 완전한 질서에서 구별되어져 있어 어느 것 하나도 구별되지 않는 것은 없다. 이에 관하여는 차 후 주님의 신성한 자비로부터 살필 기회를 가질 것이다. 천국에서 이런 분활은 사회(공동체, Society)들이라 불리우고, 말씀에서는 주거지(주소, habitation)라 불리는데, 주님에 의해서는 대저택이라 불린다 (요. 14:2 참조). 본문 역시 “대저택”이라 불린다, 그 이유는 그것들이 방주(ark)를 서술하기 때문, 이것은 교인을 의미한다.

“역청으로 안과 밖을 칠하는 것”은 탐욕들에 침수됨으로부터 보존함을 의미하는 것은 이미 설명했다. 그 이유가 이 교인의 첫 번째 일은 이해력에 관련된 것이 개혁되는(reform) 것이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우선 그는 탐욕들에 침수됨에서 보존되고 있어야 한다. 그 이유가 탐욕이 앞서면 개혁의 모든 일은 (시작도 있기 전에) 파괴되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원문에서는 “역청으로 역청을 칠하라”라고 실지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보호(protection)”를 표시하는 단어가 사용되어져 있다. 이 단어는 단어 “속죄하다(expiate)” 또는 “화해하다(propitiate)”로부터 파생되고 있다. 그러므로 이것은 같은 것을 포함하고 있다. 주님으로부터의 속죄, 화해함은 악에 침수됨으로부터의 보호이다.

15절. 이런 식으로 너는 방주를 만들어라. 방주의 길이는 삼백 큐빗이고, 넓이는 오십 큐빗이며, 높이는 삼십 큐빗이다.

이 구절의 세부 사항들, 즉 숫자들, “삼백”, “오십”, “삼십”은 리메인스를 의미하고, 그것들이 거의 없다를 의미한다; 그리고 “길이”, “넓이”, “높이”는 거룩함, 진리, 선을 의미하나, 이것이 모든 이에게 낯설게 나타날 수 밖에 없다. 그리고 글자의미로는 더욱 멀다. 이 장의 3절에서 일백 이십 년이 신앙으로부터의 리메인스를 의미한다는 것을 살필 때 말해진 것에 더 보태어 설명하면, 선한 영들이나 천사들은 아예 내적 의미 안에 있다. 다시 말해서 그들은 지상적인 것, 물질적인 것, 세상만에 속한 것들 너머에 있다. 그런고로 그들은 지상에서 사용하는 숫자나 치수 등등을 너머 있다. 그럼에도 그들에게는 주님에 의해 말씀을 충분하게 지각하는 것을 주신다는 사실을 생각해보면 거리가 먼 듯한 내적 의미에 대해 긍정적 사고를 지닐지 모른다. 이것이 진리일진대, 이 구절들의 세부 사항들은 글자에서는 나타날 수 없는, 글자 의미와는 너무나 거리가 먼 천적, 영적인 것들을 포함하고 있음이 분명해질 것이다. 더 나아가 천적, 영적인 사항들은 일반적, 세부적, 모두에 있다. 그리고 이로부터 더 알게되는 것은, 인간이 감각으로부터의 것들과 지식을 수단으로 신앙의 문제들인 이 구절 같은 말씀을 파헤치고 싶어하고, 자기들의 방법으로 납득되지 않으면 믿고 싶어하지 않는 것이 얼마나 미친 짓인지 이다.

말씀에서 숫자들과 치수들은 천적이고 영적인 것들을 의미한다는 것은 계시록과 에스겔서에 있는 새 예루살렘과 성전의 치수(measure)들로부터 매우 분명해진다. 그리고 “새 예루살렘” 그리고 “새 성전”이 천국들과 땅 위 주님의 왕국을 의미한다는 것, 그리고 천국들과 땅 위 주님의 왕국은 지상의 치수에 종속되지 않는다는 것 정도를 아는 것은 별로 힘들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길이, 넓이, 높이인 그것의 용적(dimension)이 숫자에 의해 나타내지고 있다. 이로부터 누군가는 숫자나 치수에 의해 거룩한 것들이 의미되어진다고 결론 내릴런지 모른다. 계시록서에서:
그리고 나에게 지팡이를 닮은 갈대가 주어졌다; 그리고 천사가 가까이 서서,
말하기를, 일어나라, 그리고 하느님의 성전과 제단, 그 안에서 숭배하는
그들을 측량해보라 (계. 11:1).
그리고 새 예루살렘에 관하여:
(이 성은 )크고 높은 벽을 가지고 있고, 열 두 문들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문 위에
열 두 천사들이 있고, 거기에 이름들이 쓰였는데, 그것은 이스라엘의 아들들의
열 두 지파의 것들 이다. 동쪽에 세 문들, 북쪽에 세 문들, 남쪽에 세 문들, 그리고
서쪽에 세 문들(이 있다). 그리고 도성의 벽은 열 두 기초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것들에 어린 양의 열 두 사도들의 이름들(이 있다). 그리고 나에게 말하고 있었던
그는 금빛의 갈대를 가졌는데, 도성과 그곳의 문들과 벽을 측량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도성은 정사각으로 놓여 있다, 그리고 길이는 넓이와 같다: 그리고 그가 갈대로
도성을 쟀더니 일만 이천 스타디아였다; 그리고 도성의 길이와 넓이와 높이는 같았다.
그리고 그가 도성의 벽을 쟀는데, 일백 사십 사 큐빗이었고,
(이는) 천사에 속하여 있는 사람의 측량이다 (계. 21:12-17).
숫자 “12”는 많은 곳에서 등장한다. 이 숫자는 매우 거룩한 숫자이다. 그 이유는 신앙의 거룩한 것들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 장의 3절처럼 29-30 장에서도 주님의 신성한 자비로부터 살필 예정이다). 그러므로 위 인용 구절에서도 마지막 첨가된 말은 “사람의 측량, 즉 천사의 측량”이다. 이는 에스겔에서의 새 예루살렘과 새 성전의 경우도 같다. 거기서도 측량함이 기술되어 있다 (40장 3, 5, 7, 9, 11, 13, 14, 22, 25, 30, 36, 42, 47; 41장 1-끝까지; 42장 5-15; 스가랴 2장1, 2). 여기서도 역시 숫자 자체만 주시하면 숫자들은 추상적으로 거룩한 천적이고 영적인 것 밖에 더 없다. 증거 궤의 용적에 관한 숫자(출. 25:10); 자비석에 관하여; 금빛의 탁자에 관하여; 성막에 관하여; 그리고 제단에 관하여(출. 25:10, 17, 23; 26장; 27:1); 그리고 성전의 모든 숫자들과 용적(왕상. 6:2. 3), 그 외 다른 숫자들.

여기서 방주에 관한 숫자나 치수들은 이 교인이 개혁되어질 때 이들과 더불어 있었던 리메인스, 그리고 이 리메인스는 거의 없었다는 것 밖에 더 의미하지 않는다. 이는 이 숫자들 안에서 뛰어난 숫자가 5 이다는 것과 5는 말씀에서 약간(some), 또는 조금(a little)을 의미한다는 사실로부터 분명해진다. 이사야서를 보자:
거기에 이삭 줍기 할 것이 남을 것이다, 마치 올리브 나무를 흔들 때 가지 꼭대기에
남는 두 세 개, 열매 풍성한 것의 가지들에 있는 네 다섯 개 남은 것과 같다 (이. 17:6),
위에서 “두 세 개” 그리고 “다섯”은 적음을 표시한다. 다시:
한 명의 꾸짖음에서 일천 명이; 다섯 명의 꾸짖음에서 너희는 달아날 것이다;
너희가 산 꼭대기 위에서 막대기 같이 남을 때까지 이다 (이. 30:17),
위에서 “다섯”은 적음을 표시한다. 반환 후에 최소한의 벌금이 오분의 일이 추가되었다 (레. 5;16; 6:5; 22:14; 민. 5:7). 그리고 그들이 짐승, 집, 들판, 또는 십일조를 되찾을 때, 최소한의 추가분이 “오분의 일”이었다 (레. 27:13, 15, 19, 31).

숫자에 의해 묘사되는 무엇이든, 거기에서 “길이”는 거룩함을, “넓이”는 진리를, “높이”는 선을 의미하는 것에 대한 말씀으로부터의 확증은 많지는 않다. 그 이유가 그것들은 그 대목의 주제나 취급되는 상황에 따라서 각각이든, 모두이든 서술되어가기 때문이다. 그런고로 시간에 적용될 경우 “길이”는 영구함, 그리고 영원함을 의미하고, 시편 23:6, 그리고 21:4에 있는 “날들의 길이”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공간에 적용될 경우, 거룩함을 표시한다. “넓이”나 “높이”의 적용도 이와 동일하다. 지상의 것 모두에는 3부로 된 치수들이 존재한다, 그렇다고 이 모든 것이 천적이고 영적인 것들을 서술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것들이보다 크든, 보다 작든, 완전함을 뜻하려고 (지상적) 치수들과 별개로 해서 서술될 때, 그래서 양과 질을 서술할 때가 있다; 여기서의 경우, 그것의 품질은 리메인스이고 그것의 양은 매우 적다를 뜻하고 있다.

16절. 너는 방주에 창문을 만들어라, 그리고 너는 창문을 위로부터 한 큐빗에서 마무리 하라. 그리고 너는 방주의 문을 옆쪽에 두어라. 너는 가장 낮은 층, 둘째 층, 셋째 층을 만들 것이다.

“창문”은 지적인 부분, 그리고 “문”은 들음(hearing)을 의미하는 데, 이 구절에서 인간의 지적 부분이 취급된다는 것은 앞서 서술된 것에서 분명해진다(641, 642항 참조). 특이한 것은, 지적 부분이 이 교회의 사람을 위한 개혁의 수단이라는 것이다. (오늘날에는) 인간은 두 종류의 생명을 가지고 있다는 것; 하나는 의지력이고, 다른 하나는 이해력이다. 그런데 인간에게 의지력은 없고, 그 대신 욕구(desire)가 의지 자리를 차지했을 경우, 그때 의지가 아닌 다른 쪽, 즉 지적 부분이 개혁되어질 때, 이 지적 부분을 통하여 새로운 의지가 주어질 수 있어 이 둘은 여전히 한 개의 생명, 즉 선행과 신앙을 구성한다. 그 이유는 인간은 지금 의지력은 없고, 의지력 대신 탐욕만 있기 때문에, 의지력에 속한 부분은 닫혀지고(14절), 다른 쪽 또는 지적 부분이 열리어졌기 때문이다; 이렇게 열린 다른 쪽이 이 절에서 취급되는 주제이다.

이 경우는 이러하다: 인간이 개혁되어질 때, 이 개혁은 전투들과 시험들을 수단으로 결과되는데, 이때 악령들은 인간과 제휴하여 그 인간의 지식과 이성 측면의 것만을 흥분시킬 수 있다.; 그리고 탐욕들을 흥분시킬 수 있는 악령들은 그 인간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다(접근할 수 없다). 그 이유가 두 종류의 악령들이 있기 때문인데, 하나는 인간의 이성 측면에서, 다른 하나는 인간의 탐욕들 측면에서 활동한다. 인간의 이성 부분을 흥분시키는 악령은 온갖 거짓들을 생산한다, 그리고 그 인간에게 그것이 진리이다고 설득해댄다. 인간은 시험 안에 있을 때, 먼저 이 거짓들과 싸워야 한다; 그러나 실지로 싸우는 것은 그 인간이 아니고 그 인간에게 인접된 천사들을 통한 주님의 싸우심이다. 그리하여 이 전투들을 수단으로 거짓들이 분리될 때, 흡사 사라져버린듯 될 때, 인간은 신앙의 진리들을 받을 준비를 갖춘 셈이다. 그 이유가 거짓들이 길을 막고 있는 상황이어서 거짓들이 득세하는 한, 인간은 신앙의 진리들을 결코 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가 이렇게 신앙의 진리들을 받을 준비가 완료되었을 때, 첫째로 천적 수준의 씨들이 그 사람 안에 심어질 수 있다. 이 씨들은 선행의 씨들이다. 선행의 씨들은 거짓들이 통치하는 바탕 위에는 심어질 수 없고, 오직 진리가 통치하는 바탕에만 심어질 수 있다. 이것이 영적 (평면의) 인간의 개혁, 또는 거듭남인데, “노아”로 불리는 이 교인도 동일하다. 이로부터 방주의 “창문”, “문”이 말해진다, 그리고 그 창문은 “가장 낮은, 둘째, 그리고 셋째 층들”로 말해진다. 이것 모두가 지적 인간 또는 영적 (평면의) 인간에 속하여 있다.

이것은 오늘날 교회에 알려져 있는 것, 즉 신앙(믿음)은 들음을 수단으로 생긴다고 하는 것과도 일맥 상통하는 점이 있다. 그러나 (유의할 점은) 신앙은 신앙으로부터 있는 것들, 또는 믿어지려고 있는 것에 관한 지식은 결코 아니다는 것이다. 이것은 단지 기억 속의 지식일 뿐이다. 이에 반해 신앙은 인정함(acknowledgement)이다. 그리고 이 인정함은 그 사람 안에 신앙의 원리가 있지 않으면 존재할 수조차 없다. 이 신앙의 원리는 선행, 즉 이웃을 향한 사랑과 자비이다. 선행이 있을 때, 인정함, 또는 신앙이 있는 것이다. 달리 납득하는 자는 땅과 하늘이 떨어진만큼 신앙의 지식으로부터 떨어져 있다. 신앙의 선함인 선행이 현존할 때, 그때 신앙의 진리인 인정함도 존재한다. 그러므로 인간이 지식, 이성, 이해함에 속한 것들에 따라 거듭나질 때, 그 끝은 바탕이 준비되는 것, 선행을 받기 위해 그의 마음을 준비하는 것일런지 모른다; 이후 그는 이로부터, 또는 이로부터의 생명으로부터 생각하고 행동한다. 이때 그는 개혁되고 거듭나져 이전의 그가 아니다.

“위로부터 한 큐빗에서 완성(마무리)하게” 되는 “창문”이 지적 부분을 의미하는 것은 지금 말해진 것으로부터, 그리고 방주의 건축이 취급될 때라는 사실로부터, 그리고 “방주”를 수단으로 교인이 의미된다는 사실로부터 알런지 모른다. 지적 부분이 “위로부터 있는 창문”에 비교할만한 다른 표현은 없을듯 싶다. 말씀의 다른 부분등에서도 이와 같다: 인간의 지적 부분, 즉 인간의 내적 시야, 그것이 이성이든, 단지 추론함이든, “창문”이라 불리운다. 이사야서에서:
오, 사나운 비바람에 요동치고 위로받지 못하는 너 고뇌하는 자여, 내가 홍보석으로
네 창문들(suns, windows)을, 네 대문을 석류석(carbuncle)으로, 모든 네 경계를
즐겁게 하는 돌(보석)들로 만들 것이다 (이. 54:11, 12).
여기서 “햇빛들(suns)”이 창문들을 위해 놓여져 있다. 이 햇빛은 (창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 오도록) 입장이 허가된 빛, 또는 전도(투과)된 빛으로부터 이다. 위 구절에서 창문, 또는 햇빛은 선행으로부터 온 지적인 것들이다. 그러므로 그것들이 홍보석(ruby)에 비교되어진다; “대문(gate)”은 이로부터 파생된 합리적인 것들이다; 그리고 “경계”는 지식과 감각들로부터 있는 것들이다. 주님의 교회가 여기서 취급되어진다.
예루살렘에서 성전의 모든 창문들은 같은 것을 표현했다: 즉 그것들의 가장 높은 것은 지적인 것들을; 중간은 합리적인 것들을; 가장 낮은 것은 지식과 감각들에 속한 것들을 표현했다; 그 이유가 삼층이었기 때문이다 (왕상. 6:4, 6, 8). 에스겔서에 있는 새 예루살렘의 창문들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40:16, 22, 25, 33, 36). 예레미야서에서:
죽음이 우리의 창문 안으로 올라와 있다, 그것은 우리의 궁전들 안으로 들어갔다;
우리의 어린 아이들을 거리로부터, 젊은 사람들을 거리들로부터 절멸한다 (예. 9:21).
중간 층의 창문이 위 구절에서 언급되어진다, 이는 진리로부터 있는 것, 이것이 소멸되어지는 것이다; “거리에 있는 어린 아이”란 시작하는 진리이다.
“창문들”이 진리로부터 있는 지적이고 합리적인 것들을 의미하기 때문에, 그것들은 거짓으로부터 있는 것 역시 의미한다. 그런고로 같은 예언서에서:
자기 집을 정의롭지 않게 짓는 자, 자기 골방들을 공정하지 않게 짓는 자에게
화가 있다; 누가 말한다, 나는 규모있는 집을 나에게 건축할 것이다, 그리고 널찍한
골방들을 지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창문을 잘라서 만들 것이다, 그리고 그 집은
삼나무로 마루를 깔 것이다, 그리고 주홍색으로 칠할 것이다 (예.22:13-14).
위에서 “창문들”은 거짓의 원리들을 표시한다. 스바냐서에서:
짐승들의 떼가 그녀의 한 가운데 드러눕고 있다, 모두 각각의 갖가지 야생 동물,
가마우지(cormonant)와 알락해오라기(bittern)가 거기로부터 석류나무에 숙박할 것이다;
목소리가 창문에서 노래할 것이다; 폐허됨이 문지방에 있을 것이다 (습. 2:14).
위 구절은 아수르(Assur)와 니느웨(Neneweh)에 관하여 말한 것이다. “아수르”는 이해함을 표시하는데, 여기서의 경우 황폐되었다; “창문들에서 노래하는 목소리”는 공상들로부터 추론함을 표시한다.

“옆쪽의 문”에 의해 들음이 의미되는 것은 이제 분명해졌는 바, 말씀으로부터의 더 확증해봄은 필요치 않을 것 같다. 그 이유가 귀와 감각의 내부 기관 사이의 관계되는 것은 옆쪽의 문과 위쪽의 창문의 관계와 비슷하기 때문, 다시 말해, 들음이 귀로부터 있듯, 지적 부분은 내적 감각으로부터 있다.

“가장 낮고, 둘째, 그리고 셋째 층들”에 의해 지식, 추론함, 이해함에 관한 것들이 의미되어지는 것은 이미 살핀 바를 뒤잇고 있다. 인간의 지적 측면에는 세 등급들이 있다; 가장 낮은 등급은 지식으로부터의 것이다; 중간 등급은 합리적인 것으로부터의 것이다; 가장 높은 것은 지적 측면으로부터의 것이다. 이것들은 서로로부터 아주 잘 구분되어 있어 그것들은 혼동되는 일이 결코 없다. 그러나 인간이 이를 알아채지 못하는 이유는, 그가 생명을 감각과 지식만에 속한 것에 존재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가 이것에 집착해 있는 동안에서는, 그는 그의 합리성의 부분이 앎에 관심을 가진 것들로부터 구분되어 있다는 것조차 알 수 없다; 더 나아가 그의 지적 부분은 더욱더 구분되어 있다는 것 역시 알 수 없다. 그럼에도 여전히 진리인 것은, 주님께서는 인간의 지적 부분을 통하여 그의 합리적 부분 안으로, 합리적 부분을 통하여 기억 속의 지식 안으로 흐른다는 것, 이로부터 봄과 들음의 감각에 생명이 와진다. 이것이 진정한 유입이다, 그리고 이것이 혼과 몸의 진정한 상호 작용이다. 주님의 생명이 인간 안의 이해력으로부터 있는 것들 안으로- 또는 오히려 의지력으로부터 있는 것들 안으로 그리고 이를 통하여 이해력으로부터의 것들 안으로-그리고 이해력으로부터의 것들을 통하여 합리적인 것들 안으로, 그리고 합리적인 것들을 통하여 기억 속에 있는 그의 지식들 안으로 유입되지 않으면, 인간에게 생명 있음은 불가능일 것이다. 설사 인간이 거짓들과 악들 안에 있다 해도, 주님의 생명은 그의 이해력과 의지력을 통하여 유입된다. 그러나 안으로 흐르는 것은 악과 거짓의 형체에 따라 그의 합리력 안으로 받아들여진다; 그리고 이 유입이 진리와 선이 무엇인지 인간에게 추론하는 능력(ability), 되씹어 보는 능력, 이해하는 능력을 준다. 이에 관하여는 차 후 주님의 자비로부터 살피는데, 그때 야수에게 속하는 생명과 더불어 있는 경우도 살필 것이다.

인간의 지적인 것들에 속한 세 등급은 일반적으로 이해력, 추론력, 기억 속의 지식인데, 앞서 말해진 것, 예루살렘의 성전의 삼층의 창문들에 의미된 것과 거의 같다 (왕상. 6:4, 6, 8). 또한 제2장 10-14절에서, 즉 동쪽 에덴으로부터 나간 강들에 의해서도 의미를 알 수 있다. “동쪽”은 주님을; “에덴”은 사랑을, 이는 의지로부터 이다; “동산”은 사랑에서 파생된 총명을; “강들”은 지혜, 추론, 기억 속의 지식을 의미한다.

17절. 그리고 나는, 내가 땅 위에 물들의 홍수를 가져와서 하늘들 아래로부터 있는 생명들의 호흡이 있는 모든 육체를 파괴하리라; 땅 위에 있는 모든 것도 종료되게 할 것이다.

“홍수”에 의해 악과 거짓의 범람이 의미된다는 것은 앞서 태고 교회의 후손에 관해 살핀 대목으로부터 분명해질 것이다: 즉 그들은 더러운 그리워함들을 소유했다는 것, 그리고 그들은 이 더러운 그리워함 안에 신앙에 관한 것들을 침수되게 했다는 것, 그 결과 모든 진리와 선을 소멸하는 거짓의 설득력들을 가졌다는 것, 동시에 리메인스를 위한 길은 차단되었다는 것, 그리하여 그들은 (주님의 손길이) 닿을 수 없게 되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자신을 파괴하는 방법 말고는 아무 것도 없게 되었다. 리메인스를 위한 길이 닫히면, 인간은 더 이상 인간이 아니다. 그 이유는 그는 더 이상 천사들의 보호를 받을 수 없어, 인간을 소멸하는 것에만 골몰하는 악령들에 의해 완전히 소유당해지고 만다. 이로부터 홍수 이전 사람의 죽음이 왔다. 이것이 홍수로, 또는 완전한 범람으로 묘사되어 있다. 악령들로부터의 공상들과 그리워함의 유입이 홍수와 거의 닮았다; 그러므로 말씀의 많은 곳에서 “홍수” 또는 범람함이라 불리운다. 이에 관한 것은 이어지는 장들에서 주님의 신성한 자비로부터 보여질 것이다.

하늘들 아래로부터 생명들의 숨이 있는 모든 육체를 파괴하는 것. 이것이 태고 교회의 후손 전체가 자신들을 파괴할 것이다를 의미하는 것은 위에서 말해졌던 바로부터, 그리고 이전에 주어진 그들에 관한 묘사로부터 분명해진다: 즉 그들은 유전에 의해 그들의 부모로부터 끔찍한 설득력들에 물든 천성을 계승하였다는 것, 특히 그들은 자기들의 그리워함들 안에 그들이 소유한 신앙의 교리적인 것들을 침수시켜버렸다. 그러나 신앙의 교리적인 것들을 가지지 않은 이들, 그래서 신앙에 완전히 무지한 채로 사는 이들의 경우는 이와는 아주 다르다 이들은 태고 교회인들 같이 행동할 수 없다. 따라서 거룩한 것들을 모독할 수 없다. 이러므로 해서 그들의 리메인스를 위한 길이 막혀 있을 뿐이다. 결과적으로 그들은 주님의 천사들을 자신들로부터 몰아낼 수 없다.
리메인스, 이미 말했던 바 같이, 순진으로부터의 모든 것들, 선행으로부터의 모든 것들, 자비로부터의 모든 것들, 신앙의 진리로부터의 모든 것들이고, 이것은 유아 때 인간이 주님으로부터 받은 것, 그리고 배운 것이다. 이런 것들의 모두와 각각은 저장되어 있다; 만일 인간이 이런 것들을 가지지 않았다면, 순진, 선행, 자비에 관한 어떤 것도 인간에게 있을 수 없고, 그리하여 그의 생각들과 행동들 안에도 선과 진리의 어떤 것도 있을 수 없어 그는 미개한 들짐승보다 더 열악할 것이다. 이와 동일한 것은, 만일 그가 리메인스를 가졌으나 더러운 그리워함들과 끔찍한 거짓의 설득력들을 수단으로 막아버렸다면 (주님의 생명의 유입이 있게되는) 주님의 역사하심은 있을 수 없다. 이런 상황이 자신들을 파괴한 홍수 이전 사람의 모습이다. 그들이 “하늘들 아래, 생명들의 숨이 있는 모든 육체”이다.
“육체(flesh),” 이미 살핀 바 같이, 일반적으로 모두 각각의 인간, 세부적으로는 물질적 인간을 의미한다. “생명들의 숨”은 일반적으로 모든 생명, 그러나 적절하게는 거듭나아져갔던 이들의 생명, 결과적으로 이 구절의 경우 같이 태고 교회의 마지막 후손을 의미한다. 비록 그들 사이에 남아있는 신앙의 생명은 없다 할지라도, 여전히 그들은 자기들의 부모로부터 자기들을 숨막히게 하는 씨의 어떤 것, 이 구절의 경우, “생명들의 숨”이라 불리는 것, 또는 (7:22에서) “콧구멍들 안에 생명들의 숨을 쉬고 있는”이라 불리는 어떤 것을 획득해 갔다. “하늘들 아래 육체”는 단지 물질적인 것을 의미한다; “하늘들”은 진리로부터 있는 이해성 속의 것들과 선으로부터 있는 의지 속의 것들이고, 이것들은 더 이상 인간과 더불어 있을 수 없어 물질적인 것으로부터 분리되는 것들이다. 인간을 유지지탱되게 하는 것은 천국과의 결합, 즉 천국을 통하여 주님과 결합하는 것 뿐이다.

땅에 있는 모든 것은 종료될 것이다. 이것은 이 교회로부터 있는 이들, 그리고 이 교회의 품질을 지닌 이들을 의미한다. 이미 말했던 바, “땅”은 전체 세상을 뜻하는것이 아니라, 교회 속에 있는 이들만을 뜻한다는 것이다. 그런고로 대홍수(deluge)가 여기서 뜻해지는 것이 아니다, 더욱이 보편적 대홍수는 아니다. 그러나 그들이 리메인스로부터 분리될 때, 또는 진리로부터 있는 이해성 속의 것들과 선으로부터 있는 의지 속의 것들로부터 분리될 때, 그러므로 천국들로부터 있는 것들과 분리될 때, 거기 존재했던 이들이 종료됨, 또는 질식함이다. “땅”은 교회가 있는 지역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거기 사는 이들을 의미함은 이미 인용했던 구절에 더 보태어 확증해 보자. 예레미야서에서: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말하신다, 온 땅이 황무해질 것이나, 나는 종말을 만들지
않을 것이다. 이것 때문에 땅은 슬퍼하고, 하늘들은 검어질 것이다 (예.4:27-28).
위에서 “땅”은 황폐해진 교회가 있는 곳에 거주하는 이들을 표시한다. 이사야서에서:
나는 하늘들을 이동할 것이다, 그리고 땅은 그녀의 장소로부터 흔들릴 것이다 (이. 13:13).
“땅”은 황폐해지게 되는 인간을 표시하고 거기에 교회가 있다. 예레미야서에서:
여호와의 죽인 자가 땅의 끝으로부터 땅의 끝까지조차 그 날에 있을 것이다 (예. 25:33).
여기서 “땅의 끝”은 온 세상을 의미하지 않고, 교회가 있던 지역만 의미했다, 결과적으로 교회 속에 있던 사람들이다. 다시:
나는 땅의 모든 거주민들 위에 검을 불러올 것이다; 야단법석 댐이 땅의 끝까지조차
올 것이다; 그 이유가 여호와께서 민족들과 논쟁하셨기 때문이다 (예25:29, 31).
이 구절 역시 온 세상이 뜻해지는 것이 아니라 교회가 있는 지역만 뜻한다, 그리고 교인, 또는 거주민만 뜻한다; “민족들”은 여기서 거짓들을 뜻한다. 이사야서에서:
잘 보라, 여호와께서 그분의 장소로부터 땅의 거주민에 물어볼 것이 있으시어
방문하신다 (이. 26:21).
여기서도 뜻하는 바는 같다. 다시:
너희는 듣지 않았느냐? 시작부터 너희에게 말해왔지 않느냐?
너희는 땅의 기초들을 이해 못하느냐? (이. 40:21).
여호와, 하늘들을 창조하셨다는 것, 하느님 자신이 땅을 만들어 내시고
그것을 만드신다는 것, 그분이 그것을 건립하셨다는 것 (이. 45:18).
“땅”은 교인을 표시한다. 스가랴서에서:
여호와의 말이다, 그분이 하늘들을 펼치셨다, 그리고 땅의 기초들을 놓으신다,
그리고 그분의 한 가운데에서 인간의 영을 만들어 내신다 (슥. 12:1),
위에서 “땅”은 교인을 확실히 표시한다. “땅”은 지면(ground)과 구별되는데, 마치 교인과 교회 자체인 것 같다, 또는 사랑과 신앙의 구별과 같다.

18절. 그리고 나는 너와 나의 언약을 세우겠다. 그리고 너는 방주로 들어 가되, 너, 그리고 너의 아들들, 너의 아내, 네 아들들의 아내들도 너와 함께 들어가라.

앞의 구절에서는 자신들을 파괴한 이들이 취급되었다. 여기서는 거듭나는 이들이 취급되는데, “노아”라 불리운다.

“언약을 세움”은 그가 거듭나짐을 의미한다. 이는 주님과 인간 사이의 언약은 사랑과 신앙을 수단으로 결합한다는 것 외에 다른 언약은 없다는 사실로부터 분명하다. 그러므로 “언약”은 결합을 의미한다. 그 이유가 가장 참다운 언약이 천국의 결혼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천국의 결혼, 또는 결합은 거듭나고 있는 이들과 더불어가 아니면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가장 넓은 의미에서 거듭남 자체가 “언약”에 의해 의미된다. 주님은 그분이 인간을 거듭나게 하실 때, 인간과 더불어 언약 안으로 진입하신다; 그러므로 고대인들 사이에서는 언약은 그 외 다른 것을 표현하지 않았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과의 언약, 그 외 후손들과의 언약이 각 개인에게 관계된 것 밖에 글자 의미로부터는 더 발견되는 것이 없다. 이에 반해 그들은 사실상 거듭나질 수 없는 상황 속에 있었다; 그 이유가 그들은 예배를 외적인 것에 존재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예배의 외적인 것들이 내적인 것과의 연결도 없이 거룩하다고 상상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과의 언약은 오직 거듭남을 표현하는 것 뿐이었다. 그들의 의식도 같은 처지였다. 그리고 아브라함, 이삭, 야곱과 더불어, 그들은 사랑과 신앙으로부터의 것들을 표현했다. 대 성직자들과 성직자들 역시 그들의 품성이 어떠하든, 그 중에는 사악한 자 까지도 마찬가지로 천국의 성직 직분과 가장 거룩한 성직도 표현했다. 표현성에서 인물은 주목하지 않는다. 그 대신 표현된 것에 주목한다. 그러므로 이스라엘과 유다의 모든 왕들, 사악한 왕까지 포함해서, 그리고 요셉을 이집트의 통치자로 세운 바로까지도 그들은 주님의 왕권을 표현했다; 야곱의 아들들과 자주 하신 언약이 표현성 있는 종교적 의식일 뿐이었다. 이에 관하여는 차 후 주님의 신성한 자비로부터 더 숙고해 본다.

“언약”이 거듭남과 거듭남에 속하는 것 외 다른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은 주님 자신이 “언약”이라 불리우신 말씀의 여러 구절로부터 확인된다. 그 이유는 거듭나게 하시고 거듭남을 돌보시고, 사랑과 신앙 속의 모든 것 안에서 모든 것이신 분이 주님이시기 때문이다. 주님이 언약 그 자체이시다는 것은 이사야서에서 분명하다:
나 여호와가 정의 안에서 너를 불렀다, 그리고 네 손을 잡았고, 너를 간수하고,
그리고 민족의 빛을 위해 백성에 대한 언약을 네게 줄 것이다 (이. 42:6),
위에서 “언약”은 주님을 표시한다; “민족들의 빛”은 신앙이다. 이사야 49:6, 8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말라기서에서:
잘보라 나는 나의 천사를 보낸다, 그리고 네가 찾는 주님이 갑자기 그분의 성전에
오시는데, 네가 바라는 언약의 천사이시기까지 이다; 잘보라 그분이 오신다;
누가 그분의 오심의 날에 머무르겠느냐? (말. 3:1-2),
위 구절에서 주님이 “언약의 천사”라 불려진다. 안식일은 “영구한 언약”이라 불려지는데(출. 32:16), 그 이유는 그것이 주님 자신을 의미하기 때문, 그리고 천적 인간이 그분을 수단으로 거듭나지기 때문이다.
주님은 참 언약 자체이신 바, 인간이 주님과 결합하는 모든 것은 언약으로부터 이다. – 마치 사랑과 신앙으로부터 인 것과 같다. 그리고 사랑과 신앙으로부터 있는 것은 무엇이든, 이것들은 주님으로부터 있기 때문에 주님은 그것들 안에 계시고, 언약 자체가 그것들 안에 있고, 거기서 그들은 받아진다. 이것들이 거듭나는 인간이 아니면 존재하지 않는 바, 거듭난 자로부터, 또는 주님으로부터 있는 것은 무엇이든 언약으로부터 있고 언약이다. 이사야서를 보자:
내 자비가 너희로부터 떠난 것이 아니다,
내 평화의 언약은 옮겨지지 않을 것이다 (이. 54:10),
위에서 “자비”, 그리고 “평화의 언약”은 주님을 표시하고, 그분에 속하는 것을 표시한다. 다시:
네 귀를 기울이고 나에게 오라, 들어라, 그리고 네 혼은 살 것이다, 그리고 나는
너와 영원한 언약을 만들 것이다, 다윗의 확실한 자비들을; 잘 보라,
나는 그에게 백성에 대한 증거를 줄 것이다, 민족들에게 지도자와 입법자를 (이. 55:3-4).
“다윗”은 여기서 주님을 표시한다; “영원한 언약”은 주님으로부터 있는 이런 것들 안에, 이런 것들을 수단으로 있다. 그리고 이것들이 그에게 감, 들음, 혼이 살 것임에 의해 뜻해진다.
예레미야서에서:
나는 그들에게 한 개의 심정, 그리고 한 개의 길을 줄 것이고, 그들은 모든 날 동안
나를 두려워할 것이다, 그리고 그들 뒤의 아들들도 (두려워 할 것이다).
그리고 나는 영원히 지속되는 언약을 그들과 만들 것이다. 나는 그들로부터
돌아서지 않을 것이고, 그들에게 선을 행할 것이다; 그리고 나는 내 경외함을
그들의 심정에 놓을 것이다 (예.32:39-40).
이것이 거듭나지는 이들에 관해서, 거듭나지는 이들에 속한 것들에 관해서 말해진다, 즉 “한 개의 심정과 한 개의 길,” 즉 선행과 신앙, 이것은 주님으로부터 있고, 마찬가지로 언약으로부터 있다. 다시:
잘보라 날들이 온다, 여호와께서 말하신다, 나는 새로운 언약을 이스라엘의 가문과
그리고 유다의 가문과 만들 것이다; 내가 그들의 조상들과 만든 언약에 따라서가
아니다. 그 이유가 그들은 내 언약을 헛된 것으로 돌려 만들어 버렸다; 그러나 이것은
내가 이 날들 후에 이스라엘의 가문과 만드는 언약이다; 나는 내 법들을 그들
한 가운데 놓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그들의 심정에 쓸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들의 하느님일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내 백성일 것이다 (예. 31:31-33).
여기서 “언약”의 의미가 확실하게 설명된다, 그것은 거듭나지고 있는 이들과 더불어 있는 사랑과 주님에 대한 신앙이다.
그리고 다시 예레미야서에서, 사랑은 “낮의 언약”, 그리고 신앙은 “밤의 언약”이라 불리운다 (예. 33:20). 에스겔서에서:
나, 여호와, 그들의 하느님일 것이다, 그리고 내 종 다윗 그들의 한 가운데에서
제1인자(일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들과 평화의 언약을 만들 것이다,
그리고 나는 악한 짐승이 그들의 토지로부터 중단되게 만들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광야에서 안전히 거주할 것이다,
그리고 숲들에서 잘 것이다 (겔. 34:24-25).
여기서 거듭남이 분명하게 취급되어진다. “다윗”은 주님을 표시한다. 다시:
다윗은 그들에게 영원히 제1인자 일 것이다; 나는 그들과 평화의 언약을 만들 것이다.
이것은 그들과 영원의 언약일 것이다;
나는 내 성소를 그들의 한 가운데 영원히 놓을 것이다 (겔. 37:25-26).
여기서도 마찬가지로 거듭남이 취급되어진다. “다윗”과 “성소”는 주님을 표시한다. 그리고 다시:
나는 너와 더불어 언약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너는 나의 것이었다;
그리고 나는 너를 물들로 씻었다, 그리고 네 위로부터 네 피들을 씻어내버렸다,
그리고 나는 기름으로 네게 기름부을 것이다 (겔. 16:8-9),
위 구절 역시 거듭남이 명백하게 뜻해진다. 호세아서에서:
그 날에 나는 들판의 들짐승과 더불어, 그리고 하늘들의 새와 더불어,
그리고 땅의 기는 것과 더불어 그들을 위해 언약을 만들 것이다 (호. 2:18),
거듭남을 뜻하고 있다; “들판의 들짐승”은 의지로부터 있는 것들을 표시한다; “하늘들의 새”는 이해력으로부터 있는 것들을 표시한다. 다윗서에서:
그의 백성들에게 되찾으심을 보낸 그분;
그분은 그분의 언약을 영원히 명령하셨다 (시. 111:9),
위 구절 역시 거듭남을 뜻한다. 이것이 “언약”이라 불려지는데, 그 이유는 그것이 주어지고 받아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거듭나지지 않는 이들, 같은 말로, 예배를 외적인 것에 있게 만드는 이들, 자신을 높이 평가하고 싶고, 자신을 예배하는 이들, 마치 신들이라도 된 듯, 자기가 생각하고 바라는 것을 높이 평가해대는 이들에 관해서, 그들은 언약을 헛되게 만든다 라고 말해진다. 그 이유는 그들이 자신들을 주님으로부터 분리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예레미야서에서:
그들은 그들의 하느님 여호와의 언약을 내던졌다,
그리고 자신들을 다른 신들에게 구부려 절했다, 그리고 그것들을 섬겼다 (예. 22:9).
모세의 책에서:
태양, 달, 하늘들의 군대 같은 다른 신들을 섬겨 언약을 위반한 자는
돌로 칠 것이다 (신. 17:2, 3).
“태양”은 자기를 사랑함; “달”은 거짓된 원리들; “하늘들의 군대”는 거짓들 자체를 표시한다. 이상의 모두로부터 이제 명백해지는 바, “언약의 궤”는 그 안에 “언약”이, “증거”가 있는 바, 그것은 주님 자신임을 의미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언약의 책” 역시 주님 자신을 의미했다 (출. 24:4-7; 34:27; 신. 4:13, 23); 그리고 마찬가지로, “언약의 피”(출. 24:6, 8)에 의해서도 주님 자신이 의미되고 그분만이 거듭나게 하는 자 되심이 의미되었다. 이로부터 ”언약“은 거듭남 자체를 표시한다.

너는 방주로 들어가라, 너와 네 아들들, 그리고 네 아내, 그리고 너와 더불어 네 아들들의 아내들도 (들어가라). 이것은 그가 구원되어짐을 의미하는 것은 앞서 살핀 내용과 이어지는 내용으로부터 분명하다: 그는 거듭났기 때문에 구원되어졌다.

“아들들”은 진리들을, “딸들”은 선들을 의미하는 것은 앞서 살폈다 (5:4 참조). 그러나 여기서는 “아들들”과 “아내들”이다, 그 이유는 “아내들”은 진리들에 인접된 선들이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선이 없으면, 또는 선으로부터의 즐거움이 없으면 진리는 생산되어질 수 없다. 생명은 선 안에, 선으로부터의 즐거움 안에 있다. 진리가 선과 선으로부터의 즐거움으로 생명을 가지지 않으면 생명은 없다. 선 또는 선으로부터의 진리는 만들어 내지고 태어나진다. 신앙 역시 마찬가지 질서이다. 진리로부터 있는 신앙은 선에 속하는 사랑을 수단으로 만들어내고 태어난다. 이는 빛이 있는 경우와 같다; 태양, 또는 불꽃으로부터가 아니면 빛은 없다; 불꽃이 빛을 만들어 낸다. 진리는 선의 형체일 뿐이다; 그리고 신앙은 사랑의 형체이다. 진리는 선의 품질에 따라 사랑으로부터 만들어 내진다. 이것이 “아내” 그리고 “아내들”이 언급된 이유이다, 이들이 진리들에 인접된 선들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다음 절에서 말해지는 것은 방주로 들어가는 것들은 쌍(pair)들, 숫컷과 암컷으로 말해진다; 그 이유가 진리들에 인접한 선들 없이 거듭남은 없기 때문이다.

19절. 그리고 모든 육체의 모두 각각의 살아 있는 것으로부터 모두의 한 쌍들을 너는 방주로 들어오게 해서 너와 더불어 생명이 보존되게 만들어라. 그들은 숫컷과 암컷일 것이다.

“살아 있는 혼”에 의해 이해력으로부터의 것들이 의미된다, 그리고 “모든 육체”에 의해서는 의지로부터의 것들이 의미됨은 앞서 말해진 것, 이어지는 것으로부터 분명해진다. 말씀에서 “살아 있는 혼”은 일반적으로 어느 종류이든, 살아 있는 모두 각각의 생물이 의미되어진다 (창. 1:2-24, 29 참조); 그러나 여기서의 경우, “모든 육체”와 즉각 연결되어져 있다. 그러므로 이는 이해력으로부터 있는 것들을 의미한다; 그 이유는 이 교인은 전진(진급, advance)하기에 앞서 지적인 것들의 측면이 거듭나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다음 절에서 “새”(이는 지적, 또는 합리적인 것들)가 먼저 언급되고, 후에 “짐승들”이 언급된다. 짐승들은 의지에 속한 것들이다. “육체”는 특별하게는 물질적인 것도 의미하는데, 이것은 의지 측면에 속한다.

모든 쌍들을 너는 방주 안으로 들어가게 만들어, 그것들이 살아 있게 보존하라. 이것이 거듭남을 의미하는 것은 앞 절과 연결됨으로부터 분명해진다; 진리들은 선들과 그것의 즐거움을 통하지 않고는 거듭나질 수 없다; 그러므로 신앙에 관한 것들도 선행으로부터 있는 것들을 통하지 않고는 거듭나질 수 없다. 그러므로 여기서 모두의 쌍들이라 말해진다. 즉 이해력에 속하는 진리들과 의지력에 속하는 선들, 모두로부터 이다는 말이다. 거듭나지 않은 인간은 이해력을 가진 것이 아니다. 또한 선한 의지를 가진 것도 아니고, 가진듯 하게 나타나는 것이고, 그저 가졌다 라고 편리하게 항간에서 말해지는 것일 뿐이다. 어쨌든 거듭나지 않은 자라 해도 그는 이성으로부터, 지식으로부터 진리들을 받을 수 있다. 그러나 그것들은 살아 있지 않다. 그는 의지 속에 어떤 종류의 선한 것을 가질런지 모른다. 마치 이방인들의 경우나 야수들의 경우 같은 것이다. 그러나 이것들은 살아 있지 않다; 그것들은 단지 유추된 것일 뿐이다. 인간 안에 있는 이런 선은 그가 거듭나질 때까지 살아 있지 않다. 그러므로 그것들은 주님에 의해 살아 있게 만들어진다. 다른 삶에서는 살아 있지 않은 것과 살아있는 것은 분명하게 지각되어진다. 살아 있지 않은 진리는 어떤 물질, 섬유질 같은 것으로 지각되어 닫혀진다; 살아 있지 않은 선은 어떤 나무 종류, 뼈들, 돌 같이 지각되어진다. 그러나 주님에 의해 살아 있게 만든 진리와 선은 열려있고, 활력있고, 영적, 천적인 것으로 가득차 있어, 주님으로부터 열리고 명백해진다; 그리고 이것은 모든 생각에서, 모든 행동에서, 그들의 어느 쪽 지극히 작은 것에서도 그러하다. 이것이 왜 살아 있게 보존하려고 쌍들이 방주 안으로 들어가야 하는 지를 말하고 있다.

숫컷은 진리를, 암컷은 선을 뜻하는 것은 앞서 설명했다. 인간의 지극히 작은 것 하나하나에도 일종의 결혼의 모습이 있다. 이해력으로부터 있는 것은 무엇이든 의지력으로부터 있는 것과 쌍이 되어 있다. 이런 쌍을 이룸, 또는 결혼 없이는 아무 것도 산출되지 않는다.

20절. 새는 각 종류대로, 짐승은 각 종류대로, 지면에서 기는 것도 각 종류대로, 모든 종류가 한 쌍씩 너에게로 들어와서 생명이 보존되게 하라.

“새(fowl)”가 지적인 것, 또는 합리적인 것을 의미한다는 것은 이미 말했다, 그리고 “짐승”이 의지에 속한 것들, 또는 애착들을 의미한다는 것도 살폈다. “지면의 기는 것들”은 위 모두를 의미한다, 그러나 그것들의 제일 낮은 수준의 것들을 의미한다는 것는 지면의 기는 것은 지면에서 가장 낮은 것이다는 간단한 사실로부터 분명해진다. “그것들이 살아 있게 보존하기 위해 모든 쌍들이 네게로 들어가라”는 그들의 거듭남을 의미한다.

“새는 각 종류대로,” 그리고 “짐승도 각 종류대로,” 그리고 “기는 것도 각 종류대로”라고 말해져 있다. 이는 모든 인간 안에는 이해력으로부터, 의지력으로부터 있는 종들(genera)과 속들(species)이 무수하게 많다는 것,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은 서로가 완벽히 구분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이런 것이 인간에게는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인간의 거듭남 동안, 주님께서는 그것들을 각각 그리고 모두를 그것들의 질서에 따라 끌어내시고, 그것들을 분리하시고 배치하시어 그것들이 진리들과 선 쪽으로 구부려지도록 하시고, 그것들이 결합되게도 하신다. 이 작업은 상태들에 따라 다양성을 가지고 진행된다. 또한 무수하다. 이 모든 것들은 각 종들로서, 각 속들로서, 그리고 각 상태에서 완전해짐은 영원까지조차 결코 있어질 수 없고, 각각으로 있을 때이든 병합될 때이든 그 숫자는 셀 수 없다는 것을 납득하고야 만다. 이것이 주님께서 거듭남에 관하여 니고데모에게 말하신 것이다:
바람은 그것이 바라고 싶은 곳으로 분다, 그리고 너는 그것으로부터 소리를 들으나,
그것이 어디에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를 말할 수 없다: (참) 영으로부터 태어나지는
모두 각각의 사람도 이와 같다 (요. 3:8).

21절. 너는 먹어야 하는 모든 식품을 너에게로 가져오라, 그리고 그것들을 너에게로 수집하라. 그리고 그것들은 너와 그들을 위한 식품일 것이다.

거듭나지게 되는 인간의 식품에 주목해보면 이러하다: 인간이 거듭나질 수 있기 앞서, 그의 거듭남을 섬기게 될 모든 것들, – 의지력을 위한 수단으로서 선들과 애착들로부터의 기쁨들, 또한 이해력을 위한 수단으로서 주님의 말씀으로부터의 진리들, 이 진리들을 확증해주는 다른 근원의 것들까지 공급되어질 필요가 있다. 인간은 이런 것들이 공급되어질 때까지 거듭나질 수 없다; 이것들은 식품을 위해 있다. 이것은 인간이 성년이 될 때까지 거듭나질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러나 각 인간은 그의 거듭남이 진행되기 앞서 주님에 의해 그를 위해 각 당사자만을 위한 특유의 식품이 설비되어진다.

“먹게 되는 모든 식품(food)을 그가 가져옴”이 선들과 기쁨들을 의미한다는 것은 위에서 말해진 바로부터 분명하다: 즉 진리가 아닌 선들과 기쁨들이 인간의 생명을 구성한다는 것; 그 이유가 진리들은 선들과 기쁨들로부터 그것의 생명을 받기 때문이다. 유아로부터 노년에 이르기까지 선인 것과 기뻐함들을 수단으로 하지 않고는 어떤 지식, 또는 이성도 결코 은근히 심어지지 않는다. 그리고 이와 같은 것들을 “식품”이라 부르는데, 그 이유는 이것들 없이 살 수 없기 때문인 바 이는 조금만 주의를 기울여도 쉽게 알아차려질 것이다.

“자신에게로 수집함”이 진리들을 뜻하는 것은 분명하다; 그 이유가 “수집함”은 인간의 기억 안에 있는 것들을 서술하기 때문이다. 기억 안에 진리들은 다 함께 모여져 있다. 그리고 이 표현에는 인간이 거듭나기 앞서 선들과 진리들 모두가 수집되어 있을 것임을 함축하고 있기도 하다; 그 이유가 함께 모아진 선들과 진리들이 없으면, 실상 주님께서는 모여진 이것들 가지고 작업을 진행하시는 바, 인간은 거듭나질 수 없기 때문이다. 이는 이미 말했다. 이로부터 “그것은 너를 위해 그리고 그것들을 위해 식품으로 있을 것이다”라고 말해지는 바, 선들과 진리들 모두를 의미하고 있음을 알게 해준다.

선들과 진리들이 인간의 진짜 식품임은 누구에게나 자명할 것이다. 그 이유가 그것들이 결여된 자는 생명이 없어 죽은 자이기 때문이다. 인간이 영적으로 죽어 있을 때, 그가 먹은 식품은 악들로부터의 기쁨들과 거짓들로부터의 쾌락들이다. 이것은 죽음의 식품들이다. 그리고 이것들은 육체적, 세상적, 자연적인 것들로부터 있는 것들이다. 더불어 그것들 안에는 생명의 어떤 것도 없다. 더 나아가 이런 종류의 사람은 말씀에서 “식품” 또는 “빵”이 언급될 때면 언제든지 그것은 육체의 식품을 뜻한다고 상상한다; 예를 들면, 주님의 기도에서, “우리에게 우리의 매일의 식품을 주옵소서”라는 간구를 놓고 그는 육체의 지탱을 위한 어떤 것을 뜻한다고 상상한다는 말이다. 여기에 한술 더 떠서, 이것은 식품 외에 의복, 자산, 등등도 넓혀 포함될 수 있다고 우긴다. 더욱이 그들은 이 기도문이 어떤 다른 식품을 뜻한다는 것을 날카롭게 부정한다; 어쨌든 그들도 본문의 앞 구절과 이어지는 구절들에 천적인 것들과 영적인 것들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 주님의 왕국이 이야기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리라; 그리고 이 외에도, 그들은 주님의 말씀이 천적이고 영적이다는 것을 알게 될런지 모른다.
이로부터와 이와 유사한 실예로부터 오늘날 인간이 얼마나 육적인지는 충분하게 분명하다; 그리고 유대인들 같은 경우, 그들은 말씀을 총체적이고 물질적 의미에서 말씀에서 말해진 것을 가지고 있도록 처방되어져 있다. 주님 자신 말씀에서 “식품”과 “빵”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명백하게 가르치신다. “식품”의 경우, 요한복음서에서:
예수께서 말하셨다, 멸해지는 음식[식품]을 위하여 애쓰지 말고
영원히 생명을 지탱하는 음식을 위하여 노동하라,
사람의 아들은 이 음식을 너희에게 줄 것이다 (요. 6:27).
그리고 “빵”에 관하여 말하신다. 요한복음서에서:
너의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다, 그리고 죽었다. 이것은 천국으로부터
내려오는 빵이다. 인간이 이것으로부터 먹으면 죽지 않는다. 나는 천국으로부터
내려온 살아있는 빵이다; 만일 누군가가 이 빵을 먹는다면,
그는 영원하게 살 것이다 (요. 6:49-51, 58).
그러나 주님의 말씀을 듣던 이들 같은 이가 오늘날에도 있어 말한다. “이것은 어려운 말이다; 누가 그것을 들을 수 있느냐?” 그리고 이들은 “물러가서 더 이상 그분과 걷지 않았다” (요. 6:60, 66). 이들에게 주님께서 말하셨다. “내가 너희에게 이야기하는 말들은 영이고, 그것들은 생명이다” (요. 6:63).
그리고 “물”에 관하여도 위와 마찬가지로 신앙의 영적인 것을 의미한다. 이에 관하여 주님께서 요한복음서에서 이야기하신다:
예수께서 말하셨다, 이 물로부터 마시는 사람은 누구든지 다시 목마를 것이다:
그러나 내가 그에게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누구든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내가 그에게 주게 되는 물은 그 사람 안에서 영구한 생명을 솟아나게 하는
물의 우물일 것이다 (요. 4:13-14).
그러나 주님께서 우물가에서 말하셨을 때 이 말씀을 들었던 여인 같은 이들이 오늘날에도 있어, 말한다. “주여, 우리에게 이 물을 주소서, 그리하여 제가 목마르지 않아, 여기로 물을 길으러 오지 않게 하십시오” (요. 4:15).
말씀에서 식품이 영적 식품과 천적 식품, 즉 주님에 대한 신앙, 그리고 사랑 외에 다른 식품을 뜻하지 않는다는 것은 말씀의 여러 구절로부터 분명해진다. 예레미야서를 보자:
적들이 그의 손을 예루살렘의 욕심낼만한 모든 것들에 뻗쳤다; 그 이유가
그녀는 민족들이 그녀의 성소 안으로 들어간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이들에 관하여
당신께서는 그들이 너희 회중 안으로 들어오게 말라고 명령하셨다. 모든 백성이
슬피운다, 그들을 빵을 찾고 있다; 그들은 혼을 기운나게 하려고 식품을 위해
자기들의 값진 것을 주었다 (애. 1:10-11).
위 구절에서, 영적 빵과 식품이 뜻해지는 것 외에 다른 것은 없다. 그 이유는 주제가 성소이기 때문이다. 다시:
나는 내 사랑하는 자를 위해 외쳤다, 그들은 나를 속였다; 성에 있는
내 성직자들과 원로들이 죽어버렸다, 그 이유는 그들이 자기들의 혼을
소성케하려고 자신들을 위해 식품을 찾았기 때문이다 (애. 1:19),
같은 의미에서, 다윗서에서:
이들 모두가 당신을 기다립니다, 당신께서는 때에 맞추어 그들의 식품을
그들에게 주십니다; 당신은 그들에게 줍니다, 그들은 모웁니다; 당신은 당신의 손을
여십니다, 그들은 선으로 만족해집니다 (시. 104:27, 28).
여기서 더 마찬가지로 영적, 천적 식품이 뜻해진다.
이사야서에서:
오, 목마른 모든 자여, 너희는 물들로 오라; 그리고 은을 가지지 않은 자;
너희는 오라, 사서 먹으라; 그렇다, 오라, 은 없이,
값 없이 포도주와 우유를 사라 (이. 55:1),
위에서 “포도주”와 “우유”는 영적 마심과 천적 마심을 표시한다. 다시:
처녀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다, 그리고 너희는 그분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부를 것이다; 그분은 버터와 꿀을 먹을 것이다, 그리하여 그분은 악한 자를 거절하고
선한 자를 선택할 것이다; 그리고 우유가 풍부해지는 때가 오고 그들은 버터를
먹을 것이다; 그 이유가 버터와 꿀을 그 토지 한 가운데에 남은 모든 이가
먹을 것이다 (이. 7:14-15, 22).
위에서 “꿀과 버터를 먹는 것”은 천적-영적인 것을 내 것 되게 하는 것이다; “남은 자들”은 리메인스를 표시한다. 이들에 관하여 말라기서에서:
너희는 보물집으로 모든 십일조들을 가져오라,
그리하여 내 집에 식품이 있을런지 모른다 (말3:10).
“십일조”는 리메인스를 표시한다.

천적인 식품과 영적인 식품의 본래의 모습은 다른 삶으로 가야만 가장 잘 알 수 있다. 천사들과 영들의 생명은 이 세상에서 같은 식품에 의해 지탱되지 않는다. 그러나 “주님의 입으로부터 진행되는 모두 각각의 말”에 의해서이다 (마. 4:4 참조). 진리는 이렇다: 즉 주님만이 모든 것의 생명이시다는 것, 그리고 그분으로부터 모든 것들은 일반적이든, 세부적이든 오고 있다는 것. 이렇게 천사와 영들은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한다 악령들 역시 천사들 같이 받는다. 그런데 그들이 악한 것을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이유는 그들이 주님으로부터 있는 모든 선들과 진리들을 받아서 뒤집기 때문이다. 받음과 애착은 그릇에 따라서 있다. 이는 태양의 빛을 받는 다양한 대상들에 비교해 볼 수 있다. 어떤 대상은 빛을 유쾌하지 않거나 불일치할 수 있는 색깔들로 변하게 하는 한편, 다른 대상은 빛을 유쾌하고 아름다운 색상으로 바뀌게 한다. 하여 그것들의 형체에 따라서, 결정함에 따라서, 그들의 부분들이 어떻게 처리되느냐에 따라서 바뀐다. 전체 천국과 영들의 전체 세계는 주님의 입으로부터 진행하는 모든 것을 수단으로 살고있다, 그리고 이로부터 각각의 개인은 생명을 가진다; 온 천국과 영들의 세계 뿐 아니라 온 인류 역시 위와 같게 생명을 가진다. 이런 사항들을 사람들이 믿지 않을 것이라 예상하지만, 수 년 동안의 계속적인 경험으로부터 나는 그것들이 최고로 진실이라고 주장할 수 있다. 악령들의 세계에 있는 악령들은 이것이 그러하다는 것을 기꺼이 믿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들에게는 종종 역설되어 왔었다. 그들이 이것이 진리임을 분노로 치달으며 인정하기까지 역설되었다. 만일 천사들, 영들, 인간들이 이 식품을 박탈하면, 그들은 그 순간 종료되고 말 것이다.

22절. 그리고 노아는 하느님께서 그에게 명령한 모든 것에 따라 했다. 그렇게 그는 했다.

“했다”가 두 번 반복한 것에 주목해 보자. 이는 양쪽, [선과 진리]를 포함한 표현이다. 이는 말씀에서, 특히 예언서들에서 알게 될 것이다. 하나의 것이 두 겹의 방식으로 묘사되고 있다. 이사야서에서:
그분은 평화 안에서 그분이 그의 발로 가지 않았던 길을 통과하셨다.
누가 이것을 작업하고 행하겠느냐? (이. 41:3-4).
위에서 하나의 표현은 선에 관련되고, 다른 하나의 표현은 진리에 관련되고 있다. 또는 하나는 의지에 속한 것에, 다른 하나는 이해함에 속한 것에 관련되고 있다; 즉 “그분은 평화 안에서 지나셨다”는 의지에 속한 것을, 그리고 “그분이 그분의 발로 가본 적이 없는 길”은 이해함에 속한 것을 포함한다; 그리고 이와 같이 작업했다와 행했다에서 포함되고 있다. 그런고로 의지력과 이해력에 속하는 것들, 또는 사랑과 신앙에 속하는 것들, 또는 천적인 것들과 영적인 것들에 속하는 것들이 말씀 안에서 함께 결합하여 각각과 모든 것 안에서 결혼의 모습이 있고, 천국의 결혼에 관련을 맺는다. 여기서 더 예외는 없는 바, 한 개의 말이 반복되어져 (천국의 결혼이) 표현되고 있다.
***************************************************

창세기 제 7 장

성경: 창세기 제 7 장

1. 그리고 여호와께서 노아에게 말하셨다, 너와 네 모든 집은 방주로 들어가라. 내가 이 세대에서 내 앞에서 너의 의로움을 보았었기 때문이다.
2. 너는 깨끗한 모든 짐승은 남자와 그의 아내 일곱을, 깨끗하지 않은 짐승은 남자와 그의 아내 둘을 너에게로 취하여라.
3. 하늘들의 새 역시 남성과 여성 일곱을 온 땅의 얼굴에서 씨가 살아 있게 보존하라.
4. 지금부터 칠 일 후 나는 사십 일 주야로 땅에 비가 오게 할 것이다. 그리고 내 가 만들었던 모든 물질을 지면에서 파괴하리라.
5. 노아는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명령하신 모든 것에 따라 했다.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6. 그리고 노아는 육백 세가 된 아들 이었다. 그리고 물들의 범람이 땅에 있었다.
7. 그리고 노아는 홍수의 물들이 있기 앞서 방주 안으로 그의 아들들과 그의 아내와 그의 아들들의 아내들과 함께 들어 갔다.
8. 하느님께서 노아에게 명령하신 대로 깨끗한 짐승, 깨끗하지 않은 짐승, 새와 지면 에서 기는 모든 것들이
9. 둘과 둘, 남성과 여성이 노아에게, 방주 안으로 들어 갔다.
10. 그리고 일곱 날이 지나자 홍수의 물들이 땅에 있었다.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11. 노아의 삶이 육백 년째 된 둘째 달, 십칠 일, 바로 그 날에 큰 깊음의 모든 샘들 이 깨어졌고, 하늘의 큰 폭포가 열렸다.
12. 그리고 비가 땅에 사십 일 주야로 내렸다.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13. 바로 그 날에 노아와 그의 아들들, 셈과 함, 그리고 야벳, 노아의 아내와 그의 아 들들의 아내가 방주로 들어 갔다
14. 그들, 그리고 각기 종류대로 모든 야생 동물, 그리고 각기 종류대로 모든 짐승, 그리고 각기 종류대로 땅에서 기는 모든 기는 것들, 각기 종류대로 모든 새들, 모 든 나는 것들, 모든 날개 달린 것들.
15. 그리고 그들은 노아에게 와서 둘과 둘, 생명들의 호흡이 있는 모든 육체가 방주로 들어 갔다.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16. 그리고 안에 들어간 그들, 하느님께서 그에게 명령하신 대로 모든 육체의 남성과 여성이 들어갔다. 그리고 여호와께서 그의 뒤에서 닫으셨다.
17. 홍수가 땅에 사십 일 동안 있었다, 그리고 물이 불어났고, 그리고 방주를 덮쳤다, 그리고 방주는 땅으로부터 떠올랐다.
18. 그리고 물은 더욱 거세졌고, 땅에 더욱 불어났다. 그리고 방주는 물의 얼굴에서 오가고 있었다.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19. 물이 땅에서 극도로 거세졌다, 그리고 온 하늘 아래 있던 모든 높은 산들을 덮었 다.
20. 물은 십오 큐빗 위쪽에서 압도하고 있었다, 그리고 산들을 덮었다.
21. 모든 육체, 즉 땅에서 기는 것, 새, 짐승, 그리고 야생 동물, 그리고 땅을 기는 모 든 기는 것들, 그리고 모든 사람이 죽었다.
22. 코로 생명들의 호흡을 하고 있는 모든 것, 마른 육지에 있었던 모든 것이 죽었다.
23. 그리고 그분은 지면에 있었던 모든 물질, 즉 사람으로부터 짐승, 기는 것까지, 하 늘의 새들까지 파괴하셨다. 그래서 그것들은 땅으로부터 파괴되었다. 그래서 노아 만이, 그와 함께 방주에 있었던 것들만이 남았다.
24. 그리고 물은 일백 오십 일 동안 거세어져 있었다.

각 절의 내적 의미

1절. 그리고 여호와께서 노아에게 말하셨다, 너와 네 모든 집은 방주로 들어가라. 내가 이 세대에서 내 앞에서 너의 의로움을 보았었기 때문이다.

1-5절까지는 앞 장의 구절과 거의 같음이 발견된다. 말씀의 내적 의미에 친숙하지 않은 사람의 경우, 이는 단지 반복에 불과하다 여길 수도 있다. 이와 비슷한 예들이 말씀의 따른 부분에서도 발생하는데, 특히 예언서의 경우이다. 거기에서 같은 것이 다른 말들로 표현되고 있다; 그리고 때로는 다시 그 단어들까지 채택되거나 두 번씩 서술되기도 한다. 그러나 이전에 말한 바 같이, 그 이유는 인간 안에는 서로가 구분되는 두 능력-의지력과 이해력-이 있기 때문이고, 말씀에서 이 두 능력들이 구분되어 취급되기 때문이다. 이것이 반복되는 이유이다. 여기서 뒤이어지는 구절로부터 분명해질 것이다.

여호와께서 노아에게 말하셨다. 이것이 그렇게 되어감을 의미한다는 것은 여호와를 두고 우리가 할 수 있는 말은 있으심(esse, 스스로 계심) 밖에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생각함으로 분명해진다: 그분이 말하시는 것이 때가 이르고 이루어지는 것; 앞 장 13절의 경우, 그 밖의 구절에서도, “여호와께서 말하셨다”라는 표현은 그것이 와지고 이루어졌음 이다.

이름 “여호와”가 여기서 사용되는데, 그 이유는 지금 선행이 취급되어지기 때문이다. 앞 장 9절에서 끝 절까지 “여호와”가 아닌 “하느님”이 말해진다, 그 이유는 거기서 취급된 주제는 “노아”를 준비하심(“노아”라 불리는 교회인을 준비하심) 이기 때문이다. 이는 이해력 측면에 관한 것들, 신앙에 관련되는 것들이다; 이에 반해 여기서 취급되는 주제는 의지력에 관한 것들, 사랑으로부터의 것들이 취급된다. 이해력에 관한 것, 신앙에 관계된 것이 주제로 취급될 때, “하느님”이라는 이름이 사용되나, 의지력에 속한 것, 사랑으로부터의 것들이 취급될 때, “여호와”라는 이름이 사용되어진다. 그 이유가 이해력, 신앙에 속한 것들이 교회를 구성하는 것이 아니라, 의지, 사랑에 속한 것들이 교회를 구성하기 때문이다. 여호와는 사랑과 선행 안에 계시고 신앙 안에는 계시지 않는다. 그러나 신앙이 사랑으로부터, 선행으로부터 있을 경우에는 그 신앙 안에도 계신다. 그러므로 말씀에서, 신앙은 “밤”에, 사랑은 “낮”에 비교되어진다; 창세기 1장의 경우, “큰 빛들”이 말해지고, “더 큰 빛”, 또는 태양, 이것은 사랑을 의미하고, 낮을 규율한다, 그리고 “덜 큰 빛”, 또는 달, 이것은 신앙을 의미하는데, 밤을 규율한다 (창. 1:14, 16); 그리고 예언서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예. 31:35; 33:20; 시. 136:8, 9; 계. 8:12).

너와 네 모든 집은 방주로 들어가라. 이것이 의지 속에 있는 것들을 의미하는 것은 분명하다. 이해력에 속한 것들이 있는 앞 장에서의 경우는 다르게 표현되고 있다. 즉: “너는 너와 네 아들들, 그리고 네 아내, 그리고 너와 더불어 네 아들들의 아내들(과 함께) 방주로 들어가라” (18절). “집”이 의지와 의지로부터 있는 것을 의미함은 말씀의 많은 구절들에서 분명해진다; 예레미야서의 경우:
그들의 집들이 타인의 것들로 변할 것이다, 그들의 들판들과 그들의 아내들도 (예6:12).
여기서 “집들”과 “들판들”과 “아내들”은 의지로부터 있는 것들과 관련이 있다. 다시:
너희는 집들을 짓고 그것들 안에 거주하라;
그리고 동산을 심고 그것들의 열매를 먹어라 (예. 29:5, 28).
위 구절에서 “집들을 짓고 그것 안에서 거주함”은 의지 측면에 관련되고 있다; “동산을 심는 것”은 이해 측면에 관련되고 있다; 그리고 이는 다른 구절에서도 같다. “여호와의 집”은 많은 장소에서 언급되는 말인데, 이는 사랑을 제 1의 원리로 삼는 교회를 의미한다; “유다의 집”은 천적 (왕국의) 교회를, “이스라엘의 집”은 영적 (평면의) 왕국을 의미한다. “집”이 교회를 의미하는 바, 교인의 마음(의지와 이해함에 속한 것들, 또는 사랑과 신앙에 속한 것들이 있는 마음) 역시 “집”에 의해 의미되어진다.

“방주로 들어가는 것”이 준비되어지는 것이다 함은 앞 장 18절에서 이미 서술했다. 그러나 거기서는 신앙으로부터의 진리들인 이해력에 속한 것들 측면에서의 구원을 위한 준비였다; 그러나 여기서는 의지 측면에 관한 것, 즉 선행으로부터의 선들이다. 인간이 준비되지 않으면, 즉 진리들과 선들을 공급받아 지참하지 않으면, 그는 결코 거듭나아질 수 없고, 시험받아질 수 없다. 그 이유가 인간과 더불은 악령들은 어떠한 때에 그의 거짓들과 악들을 흥분시킨다; 그런데 만일 진리들과 선들이 현존하지 않고 있다면, 주님께서는 인간을 그가 이미 지닌 진리들과 선들 쪽으로 구부려주시거나, 진리들과 선들을 수단으로 악들과 거짓들을 흐트시는데, 이것들이 가능하지 않는 바, 그는 (악과 거짓에) 굴복하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때에 주님께서 사용하시는 진리들과 선들이 이런 때의 사용을 위해 주님에 의해 보존된 리메인스들 이다.

그 이유가 나는 이 세대에서 의로움을 네게서 보았기 때문이다. 이는 그가 선을 가졌기 때문에 그것으로 말미암아 거듭나아지리라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은 이미 앞 장 9절에서 서술했고 보여주었다. 이 9절에서 “정의로운” 또는 “올바른”이 선행의 선을 의미한다; 그리고 “완전한”은 선행의 진리를 의미한다. “세대들”이라 하여 복수로 말해지는데, 그 이유는 이해력에 속한 것이 취급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세대”라 하여 단수인데, 그 이유는 의지력에 관한 것들이 취급되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의지 부분은 이해 측면의 것을 그 자체에서 납득하지만, 이해 부분은 의지 측면의 것을 그 자체로는 납득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2절. 너는 깨끗한 모든 짐승, 남자와 그의 아내를 일곱씩을, 깨끗하지 않은 짐승, 남자와 그의 아내를 둘씩을 너에게로 취하여라.

선에 대한 애착함들이 “모두 각각의 깨끗한 짐승”에 의해 의미되는 것은 짐승에 관해 살핀 내용으로부터 분명해질 것이다. 애착들이 이렇게 의미되는 이유는 인간 자체, 그리고 그의 자기 자신에 주목해보면, 짐승과 별반 차이가 없다. 그는 짐승이 지닌 감각들, 식욕, 욕구들과 매우 유사하다; 그의 선, 아니, 그의 최고의 사랑들도 매우 유사하다; 자기와 같은 종류의 동료를 사랑함, 제 새끼를 사랑함, 제 아내를 사랑함, 등등은 별반 차이가 없다. 그러나 인간이 인간인 것, 짐승보다 더 나은 것은 그가 내면의 생명을 지니는 까닭이다. 이것을 짐승들은 가질 수 없고 결코 가지지 못한다. 이 생명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신앙과 사랑의 생명이다. 그리고 만일 이 생명이 그가 가진 짐승과 공통되는 모든 것 안에 있지 않다면, 그는 짐승밖에 그 외 어떤 것일 수가 없다. 한 예로 동료들을 사랑함을 취해보자: 만일 그가 자신을 위해 동료들을 사랑한다면, 그의 사랑 안에는 천국으로부터, 또는 신성으로부터의 것은 하나도 없을 것인 바, 그는 이로부터서는 사람이라 불리울 수 없다. 그 이유는 그것이 짐승과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의 의지 안에 주님으로부터의 사랑의 생명과 그의 이해력 안에 주님으로부터의 신앙의 생명이 없다면, 그는 사람이 아닐 것이다. 그가 주님으로부터 가진 생명 덕택에 그는 사 후 살게 된다; 주님이 그를 그분 자신에게 인접되게 하시기 때문이다. 그런고로 그는 천사들과 더불어 그의 천국 안에 있을 수 있다, 그리고 영원히 산다. 그리고 비록 인간이 야생 짐승 같이 살고, 자신밖에, 자신을 중시하는 것밖에 사랑하는 것이 없다 할지라도, 여전히 주님의 자비는 위대해 있으시어-그 이유가 이 자비는 신성이고 무한이기 때문-그분은 그를 떠나지 않는다. 그러나 계속적으로 그 사람 안으로 천사들을 통하여 그분 자신의 생명을 불어 넣으신다; 그리고 그가 그것을 다른 방법 없이 받으리라 상상조차 하시는 바, 이것이 그 사람으로 하여금 어떤 것을 놓고 도덕적, 시민적, 세상적, 또는 물질적인 것에 관련하여 선인지, 악인지를 생각하고, 반성해보고, 이해해 볼 수 있게 한다. 그러므로 그것이 진리인지, 거짓인지도 가늠할 수 있게 한다.

태고인이 알았고 겸허하게 인정했던 것은, 자기들은 짐승이나 들짐승밖에 더 아니다는 것, 단지 자기들이 주님으로부터 가진 것 덕택에 사람 노릇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자신들에 속하는 것은 무엇이든 짐승 등등에 비교했을 뿐 아니라 짐승 등등의 이름으로 부르기조차 했다; 그래서 의지력으로부터의 것을 짐승에 비교했고, 그리고 짐승들로 불렀다; 그리고 이해력으로부터의 것은 새들에 비교했고 그렇게 불렀다. 그러나 그들은 선한 애착들과 악한 애착들을 구별했다. 선한 애착들을 그들은 어린 양들, 양, 염소 새끼들, 암염소들, 숫염소들, 숫양들, 어린 암소들, 황소들에 비교했는데, 그 이유는 이 짐승들이 선하고, 온화하고, 그들의 식품이 되어주고, 그것의 가죽과 털은 의복을 만들 수 있어 생활에 요긴하기 때문이다. 이 짐승들은 제1의 깨끗한 짐승들이다. 그러나 악하고 맹렬하여, 생활에 요긴하지 못한 짐승은 불결한 짐승들이다.

거룩한 것들이 “7”에 의해 의미된다는 것은 일곱 째 날, 또는 안식일에 관하여 말해진 것으로부터 분명해진다. 즉 주님은 일곱 째 날이시다는 것; 그리고 그분으로부터 모두 각각의 천적 (왕국의) 교회, 또는 천적 (왕국의) 인간이 일곱 째 날이다는 것, 그리고 참으로 천적 (왕국) 자체이다는 것, 이는 최고로 거룩하다는 것, 그 이유는 이것이 주님만으로부터 있기 때문이다는 것 등등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말씀에서, “일곱”은 거룩한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사실상, 여기서와 같이, 내적 의미에서는 “7”이 숫자라는 생각을 전혀 할 수 없게까지 하고 있다. 실지로 내적 의미에만 머무는 이들, 마치 천사나 천사 같은 영은 숫자가 무엇인지조차 모른다. 그러므로 7이 무엇인지 모른다. 그러므로 깨끗한 모든 짐승들의 일곱 쌍들이 취해졌다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또는 마치 일곱이 둘보다 더 많은 듯이 악한 짐승보다 선한 짐승이 더 많이 취해졌다는 것도 뜻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 교인의 의지 부분에 선들이 공급되었다는 것, 그 선들은 거룩하다는 것, 이것 때문에 그는 거듭나아질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앞서 말해졌기도 하다.
“일곱”이 거룩인 것, 또는 거룩한 것들을 의미하는 것은 표현 교회(the representative church)의 의식(ritual)들로부터 분명해진다. 이 의식에서 숫자 일곱은 자주 발생한다. 예를 들면, 그들은 피와 기름을 일곱 번 뿌렸는데, 레위기서를 보자:
그리고 모세는 기름붓는 기름을 가져왔다, 그리고 성막에 발랐다, 그리고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에도 발랐다, 그리하여 그것들을 신성하게 했다. 그리고 그는 제단
위에 그것을 일곱 번 뿌렸다, 그리고 제단과 그것의 모든 기구들, 그리고 물두멍과
그것의 받침에 발라서 그것들이 신성해지게 했다 (레. 8:10-11.
위 구절에서 “일곱 번”은 만일 그 숫자가 거룩인 것을 표현하지 않았다면 통째로 아무 의미 없이 있었을 것이다. 또다른 구절에서: 아론이 거룩한 장소 안으로 왔을 때 말해졌다:
그리고 그는 수소의 피를 가져 와라, 그리고
그것을 동쪽 자비석 위에 그의 손가락으로 뿌려라. 그리고 자비석 앞에서
그는 자기 손가락으로 피를 일곱 번 뿌려라 (레. 16:14).
그리고 제단에서도:
그리고 그는 자기 손가락을 가지고 일곱 번 그것 위에 피를 뿌려라, 그리고 그것을 깨끗해 지고 신성해지게 하라 (레. 16:19).
위 구절의 세부사항들, 각각 그리고 모두는 주님 자신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사랑의 거룩함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피”, “자비석,” 그리고 피가 뿌려진 방향인 “동쪽”, 그러므로 “일곱” 또한 주님 자신을 의미한다.
제물의 경우도 마찬가지인데, 레위기서를 보자:
만일 어떤 혼이 잘못을 통하여 죄짓는다면, 그리고 만일 기름부은 성직자가
죄를 지어 백성들에게 죄있게 하였다면, 그는 여호와 앞에서 거세한 수소를
죽일 것이다, 그리고 성직자는 피에 자기 손가락을 담글 것이다, 그리고 피를
성소의 베일을 향하여 여호와 앞에서 일곱 번 뿌릴 것이다 (레. 4:2-3, 6).
위 구절에서도 “일곱”은 거룩인 것을 의미한다; 그 이유는 취급된 주제가 죄를 씻음이고, 죄를 씻음은 주님만으로부터 있고, 그러므로 취급된 주제가 주님이기 때문이다. 비슷한 의식이 나환자에 관련하여 제정된 구절에 있다, 이에 관해 레위기서를 보자:
새의 피로부터, 삼목, 주홍색(실), 우슬초와 함께, 성직자는 나병환자임으로부터
깨끗해지게 되는 사람에게 일곱 번 뿌려, 그를 깨끗하게 만들어라. 같은 방식에서
그에게 그의 왼쪽 손바닥에 있는 기름을 여호와 앞에서 일곱 번 뿌려진다, 그리고
그렇게 나병환자가 있던 집에도 하는 바, 그는 삼목, 우슬초, 주홍색(실)을 가져오고,
그리고 새의 피를 가지고 일곱 번 뿌린다 (레. 14:6-7, 27, 51).
위 구절에서도 “삼목”, “주홍색(실)”, “기름”, “새의 피”, 그리고 “일곱” 등등이 거룩한 것에 대한 표현이다는 것을 제외하면, 그것들의 의미는 더 이상 없다고 생각될지 모른다. 그리하여 거룩하다는 것을 빼놓으면 남아있는 모든 글자는 죽은 듯, 또는 모독적인 우상을 섬기는 듯 하다. 그러나 위 구절이 신성한 예배를 담은 거룩한 것임을 의미한다면, 위 글자는 외면적인 것들에 의해서 내면적인 것들을 표현만 해줄 뿐이다. 위 글자를 그대로 사용한 유대인들은 자기들의 이런 의식이 무엇을 의미했는지 몰랐다; 물론 오늘날의 경우에도 “삼목”, “우슬초”, “주홍색(실)”, “새”에 의해 의미된 것을 모르기는 별반 차이가 없다. 그러나 그들이 자기들이 몰랐던 거룩한 것들 안에 포함된 것을 알고 싶어하고, 그렇게하여 주님을, 또는 오실 메시아를 예배했다면, 그리하여 자기들의 나병을 치료했다면, 즉 그들이 거룩한 것들을 모독함에서 벗어났다면, 그들은 구원되었을 것이다. 그 이유가 그렇게 생각하고 믿은 자들이 저쪽 삶에서 왔을 때 그들이 바란다면 위 구절이 표현한 모두, 그리고 각각의 의미들을 즉시 가르침을 받아 온전히 이해함을 가질 것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붉은 어린 암소에 관해 명령되어졌다:
성직자는 그녀의 피를 그의 손가락으로 가져다가 그녀의 피를 만남의 천막의
얼굴을 향하여 일곱 번 뿌릴 것이다 (민. 19:4).
“일곱째 날” 또는 “안식일”이 주님을, 그리고 주님으로부터의 천적 (왕국의) 인간, 그리고 천적 왕국 자체를 의미한 바, 유대 교회에서 일곱 째 날은 그들의 모든 종교적 준수 사항 중에서 가장 거룩한 준수 사항이었다; 이로부터 칠 년 마다 “안식일 중에서도 안식일”이 왔다 (레. 25:4), 그리고 “희년”이 년 수들의 일곱 안식일들, 또는 칠 년씩 일곱 번이 지난 후에 선포되어졌다 (25:8-9). 최고 의미에서 “7”은 주님, 이로부터 사랑의 거룩함을 의미함은 금빛의 촛대와 그것의 일곱 등불로부터 분명해진다 (이에 관하여는 출. 25:31-3, 37; 37:17-19, 23; 민. 8:2, 3; 슥. 4:2 참조) 그리고 이에 관해 요한에 의해 쓰여진 바:
일곱 금빛의 등잔들; 그리고 일곱 등잔들 한 가운데 사람의 아들 같은 분 (계. 1:12-13).
위 구절에서 “일곱 등불들을 가진 등잔”은 주님을 의미한다는 것, 그리고 “등불들”은 사랑의 거룩한 것들, 천적 수준의 것들이다; 그러므로 등불들은 “일곱”이다.
그리고 다시:
왕좌로부터 불로부터의 일곱 횃불들이 나와서, 왕좌 앞에서 타는데,
이것은 하느님의 일곱 영들이다 (계. 4:5).
위 구절에서 주님의 왕좌로부터 나온 “일곱 횃불들”은 일곱 빛들, 또는 등불들이다. 예언서에서 숫자 “7”이 발생하는 경우, 같은 의미를 지닌다. 이사야서에서:
달의 빛이 태양의 빛 같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태양의 빛은 일곱 날의 빛 만큼으로
일곱 배가 되어 있을 것이다. 이 날에 여호와께서 그분의 백성들의 명령 위반(breach)을
싸매주실 것이다 (이. 30:26).
위 구절에서 “일곱 배가 된 빛, 마치 일곱 날들의 빛”은 일곱 배를 의미하지 않고, 그러나 사랑이 거룩하다가 태양에 의해 의미되어졌다. 창세기 4장 15절에 보여준 숫자 “7”에 관한 것도 참조하라. 위 모든 구절로부터 다시 확인되는 바는 숫자 일곱이 단지 7을 의미하려고 사용된 것이 아니다는 것이다 (6:3도 참조).

여기서 취급된 주제가 인간의 의지 측면에 관한 것들이다는 것, 또는 의지 부분이라 단언되는 인간에 있는 선 또는 거룩한 것들임이 분명해진다. 그 이유가 그분께서 “깨끗한 짐승을 일곱씩을 가져와라”하고 말해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새”에 관하여도 다음 절에서 똑같이 말해진다. 그러나 6장 19-20절의 경우, “일곱”이라 말해지지 않고 “쌍, 또는 둘씩”이라 말해진다; 그 이유는 이해력에 관한 것들이 취급되기 때문이다; 이해력에 속한 것들은 그 자체로는 거룩하지 않으나, 의지력으로부터 있는 사랑으로부터 거룩하다.

“남자(vir)와 아내”는 진리들이 선들과 결합되어짐을 의미하는 것은 “남자”가 진리, 이해력에 속한 것, 그리고 “아내”는 의지력에 속한 것, 선이다는 의미로부터, 또한 남자가 생각이나 애착, 행동의 어느 것도 의미하지 않는다는 사실, 남자 단독으로는 그것 안에 의지력과 이해력의 어떤 종류의 결혼도 의미해지지 않는다는 것으로부터도 분명해진다. 인간의 각종 기관 형체, 그것이 합성되어 있든 하나만 가지고 관찰해 보든, 거기에는 최고로 단순한 조직에 이르기까지 비활성(passive, 수동적)과 활성(active, 능동적)이 있고, 이것들이 결혼 같은 식의 쌍, 즉 남자와 그의 아내라는 쌍을 이룬 관계에 있지 않다면, 거기에 존재조차 하지 않을 것이고, 어떤 것을 생산하는 것은 더 더욱 불가능하다. 이는 보편적 본성이다. 이것들의 끊임 없는 결혼들이 천국의 결혼에 그것의 근원을 가지고 도출되어진다. 주님의 왕국에 관한 생각, 즉 이 왕국은 결혼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이 생물이든 무생물이든 보편적 본성이 되어 모든 것 안에서 강하게 인상지워져 있다.

악한 애착들이 “깨끗하지 않은 짐승”에 의해 의미된다는 것은 깨끗한 짐승들에 관한 내용에서 미루어 짐작될 수 있을 것이다. 그것들이 “깨끗하다”라고 불린 이유는 그것들이 온순하고, 선하며, 쓸모있기 때문이다. 불결한 것-이것도 종들과 속들이 있는데-반대적인 것, 맹렬하고, 악하며, 쓸모가 없다. 말씀 안에서 이것들은 이리들, 곰들, 여우들, 돼지들, 이외 여러 가지로 묘사되고 있다; 이것들에 의해 다양한 그리워함들과 악한 기질들이 의미되고 있다. 그런데 불결한 짐승들 (즉 악한 애착들)도 방주 안으로 데리고 가라고 말하여지고 있다. 진실인 즉 이렇다: 여기서 이 교회의 교인의 품성 측면의 것들이 기술되고 있다. 즉 방주, 그리고 방주 안에 있는 것들, 또는 방주 안으로 데려간 것들을 수단으로 교인들의 품성이 기술된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 이 교회인이 거듭나기 전 이 교회인 안에 있던 것들이다는 말이다. 이들은 거듭나기 전 주님으로부터 선들과 진리들을 공급 받았다; 그 이유가 진리들과 선들 없이는 누구도 거듭나아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 안에 있는 악들이 말하여진다. 이것이 불결한 짐승들에 의해 의미되어 있다. 인간 안에는 거듭나는 동안 반드시 흐트러져야만 하는 악들이 있다. 다시 말해 인간 안의 악들은 거듭나는 동안 선들에 의해 느슨해지고 부드러워져야만 한다는 말이다. 그 이유가 인간에 있는 실제의 악과 유전적인 악은 완전히 파괴될 정도로까지는 사라지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은 여전히 심어진 채로 남아있다; 그리고 단지 상해를 주지 않을 정도로만큼 주님으로부터의 선들을 수단으로 느슨해지고 부드러워질 뿐이다. 그리하여 나타나 보이지 않고 있다. 이는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은 신비이다. 또한 느슨해지고 부드러워지는 악들은 실제의 악들이고 유전적 악들은 아니다; 이것 역시 알려져 있지 않은 것들이다.

“쌍들”이 상대적으로 모독인 것을 의미함은 숫자 2의 의미로부터 알게 된다. “쌍,” 또는 “둘”은 결혼, 특히 천국 결혼을 서술할 경우, 거룩한 숫자일 뿐아니라, 이것은 6과 같은 것을 의미한다. 즉 노동의 육 일은 쉼의 일곱째 날, 또는 거룩한 날과 관계되듯, 2는 3과 관계된다. 그러므로 말씀에서 셋째 날은 일곱 째 날을 위해 사용되기도한다, 그리고 이 두 숫자의 의미는 많이 비슷하다. 그 이유는 주님의 부활이 셋째 날에 있었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주님이 세상에 오심, 그리고 영광에 계심, 그리고 주님의 오심 모두와 각각이 “일곱째”와 셋째 날에 의해 동등하게 묘사되어진다. 이런 이유로 셋째 날에 앞서 있는 둘째 날은 상대적으로 모독적이다. 그러므로 호세아서에서:
오라 그리고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그 이유가 그분이 상처나게 하셨다,
그리고 그분이 우리를 치료하실 것이기 때문; 그분이 치셨으나 우리를 싸매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이틀 후에 그분은 우리를 살아나게 하실 것이다; 셋째 날에 그분은
우리를 일으키실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분 앞에서 살 것이다 (호. 6:1-2).
그리고 스가랴서에서:
모든 토지에서 있을 것이다, 여호와께서 말하신다, 그 토지 안에 있는 두 부분들(2/3)이
절멸할 것이고 죽을 것이다, 그리고 삼분의 일이 그 토지 안에 남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불을 통하여 삼분의 일 부분을 데려 올 것이다,
그리고 그들을 은을 정제하듯 정제할 것이다 (슥. 13:8-9).
그리고 은은 일곱 번 순수하게 했을 때 가장 순수했다고 시편 12:6에서 나타난다; 위구절로부터도 “일곱”은 숫자 7이 아니라 거룩한 것을 의미하듯, “쌍들”이 쌍들을 의미하지 않고 상대적으로 모독적인 것을 나타낸다; 그러므로 그 뜻은 깨끗한 짐승들, 또는 선한 애착들에 비교해 불결한 짐승, 또는 악한 애착들이 7대 2의 비율로 적었다는 뜻이 아니다. 그 이유가 (사실상) 인간 안에 있는 악들은 선들보다 훨씬 더 숫자가 많기 때문이다

“남자와 아내”에 의해 악들과 결합된 거짓들을 의미함은 깨끗한 짐승을 설명한 대목으로부터 알고 있을 것이므로 설명을 생략한다. 그 이유가 앞 구절 부분에서는 선들과 결합한 진리들이고, 여기서는 악들과 결합한 거짓들을 의미한다. 주제에 따라 서술도 일치해야 하기 때문이다.

3절. 하늘들의 새 역시 남성과 여성 일곱을 온 땅의 얼굴에서 씨가 살아있게 보존하라.

“하늘들의 새(fowl)”가 이해력에 속한 것들을 의미함은 이미 살핀 바 있으므로 설명을 생략한다.

“일곱”은 이미 설명한 것과 마찬가지로 거룩한 것들을 의미하는데, 이는 거룩한 진리들이고, 거룩한 이유는 그것들이 선들로부터 온다는 사실 때문이다. 어떤 진리도 그것이 선들로부터 오지 않으면 거룩하지 않다. 사람들이 말씀으로부터 많은 진리들을 발음할지 모른다. 그러므로 그의 기억으로부터 말할런지 모른다. 그러나 이것이 사랑 또는 선행으로부터 생산된 진리들이 아니면 어떤 거룩함도 그 진리들에 두고 서술되어질 수 없다. 그러나 만일 그가 사랑과 선행을 가지고 있다면, 그때 그는 위 설명을 인정하고 믿는다. 그리고 이것은 (기억으로부터가 아닌) 심정으로부터 온다. 신앙의 경우도 같다. 많은 이들이 신앙만이 구원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신앙이 사랑이나 선행으로부터 있지 않으면, 신앙이 아닌 것이다. 주님은 사랑과 선행 안에 계신다. 그러므로 신앙이 선행으로부터 분리되어 있다면 그 안에 주님은 계시지 않는다. 분리된 신앙은 인간 자신이고, 그 안에는 불결함 밖에 더 없다. 그 이유가 신앙이 사랑으로부터 분리될 때, 그의 심정에서 그를 움직이게 하는 원인은 그의 자만, 그에게 유리한 것 밖에 더 없다. 그는 이런 것들로부터 말한다. 이런 사항은 모든 이들이 자신의 체험으로부터 익히 아는 사실이다. 어떤 이에게 자기는 당신을 사랑한다, 다른 누구보다도 더 당신을 사랑한다 라고 말하는데, 그것이 입이 내뱉는 말일 뿐, 심정은 딴판일 경우도 있다. 이러면 이 자는 상대방을 조롱한 것이다. 신앙도 별반 다르지 않다. 이는 (저 세계에서의) 많은 경험으로 나로하여금 알게 해주셨다. 육체 속의 삶 동안 달변과 위장된 경건심까지 가세해 청중들의 감탄을 한 몸에 받을 정도로 주님과 신앙을 설파했으나 정작 자기 심정으로부터는 그렇게 하지 않은 자들이 저쪽 삶에서는 주님을 향한 증오함 안에 있고, 신실한 자들을 박해하는 이들 사이에 끼여 있었다.

“남성과 여성”에 의해 진리들과 선들이 의미되어지는 것은 앞서 살핀 것, 즉 “남자”와 “남성”은 진리를, “아내”와 “여성”은 선을 의미한다. 그러나 “남성과 여성”은 이해력으로부터의 것들을, “남자와 아내”는 의지력으로부터의 것들을 서술한다. 그 이유가 결혼을 표현함에서 남성과 여성의 결혼이라 말하기보다는 남자와 아내가 더 친근한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진리는 제 스스로 선과 더불은 결혼 관계에 들어갈 수 없으나, 선은 그렇게 할 수 있다; 그리하여 선으로부터 생산되지 않은 진리, 선과 짝을 이루지 않은 진리는 없다. 만일 당신이 진리로부터 선을 철수시킨다면, 단어들밖에 남아있는 것이 없을 것이다.

온 땅의 얼굴 위에서 씨가 살아 있게 보존하라. 이것이 신앙 속의 진리들을 의미한다는 것은 이 교회에 의해 씨가 살아있게 보존됨으로부터 분명해진다. “씨”에 의해 신앙이 뜻해진다. 태고 교회의 후손들의 나머지들은 더러운 그러워함들과 끔찍한 설득력들을 수단으로 그들 안에 있는 천적(왕국의) 씨들과 영적 (왕국의) 씨들을 파괴했다. 그러나 천적 (왕국의) 씨들은 멸해질 것이나 “노아”라 불린 이들은 영적 (왕국의) 씨들을 수단으로 거듭나졌다. 이것들이 의미되어지는 것들의 (요약이다). 이것들이 주님의 생명을 받아 “살아있게 보존되라”고 말해지는 이들이다. 그 이유가 생명은 주님으로부터 있는 것들에만 있기 때문이다. 이는 영원으로부터 있지 않은 것들 안에 생명이 없다는 사실로부터, 또는 영원한 생명을 주시하지 않는 것들 안에는 생명이 없다는 사실로부터 모든 이에게 분명해진다. 영원하지 않은 생명, 짧은 시간에서 멸해지는 생명은 생명이 아니다. 있음(being, esse)은 있음이 중단되는 것을 두고 있음이라 단정될 수 없다. 오로지 있음이 중단되지 않을 경우에만 해당되는 말이다. 그런고로 살아있음과 있음(living and being)은 주님, 또는 여호와로부터 있는 것들에 만 있다; 모든 있음과 살아 있음이 영원하기 위해서는 그분으로부터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영원한 생명을 수단으로 영원한 행복이 뜻해진다. 이에 관하여는 290항을 다시 찾아 보기 바란다.

4절. 지금부터 칠 일 이면 나는 사십 일 주야로 땅에 비가 오게 할 것이다. 그리고 내가 만들었던 모든 물질을 지면에서 파괴하리라.

“지금부터 칠 일”은 여기서의 경우 시험의 시작을 의미한다는 것은 이 절에 포함된 모든 내적 의미로부터 분명해진다. 이 구절에서는 “노아”라 불리는 사람의 시험이 취급되어진다. 일반적으로 이 장은 “노아”라는 사람의 시험, 그리고 태고 교회인들과 그들에 관련되어 서술되어 왔었던 내용들이 멸절되어짐을 취급한다. 그러므로 “지금부터 칠일”은 시험의 시작일 뿐아니라, 황폐되어짐의 끝장이기도 하다. 이런 것들이 “지금부터 칠 일”에 의해 의미된 이유는 “7”이 거룩한 숫자이기 때문이다. “칠 일”은 주님께서 세상에 오심, 그리고 그분의 오심은 영광되심에서, 그리고 세부 측면에서 주님의 모두 각각의 오심을 의미한다. 모두와 각 개인에게 따라붙는 주님의 오심은 거듭나아지려는 이들에게는 거듭남의 시작, 황폐되어져야만 하는 이들에게는 끝장의 시작에 해당된다. 그런고로 이 교회인에게 주님의 오심은 시험의 시작이었다; 그 이유가 인간이 유혹될 때, 그는 새로운 사람이 되기 시작하고 거듭나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동시에 그들이 절멸될 수 밖에 없었던 태고 교회인의 끝이었다. 주님이 세상에 오셨을 때 역시 이와 같았다. 그 당시 교회는 황폐함의 마지막 상태에 있었다, 그리고 그때 새로운 (교회가) 만들어졌다.
이와 같은 것들이 “지금부터 칠 일 후면”에 의해 의미되어 있다는 것이 다니엘 서에 분명해 있다:
칠십 주들이 네 백성 위에, 네 거룩한 성 위에, 위법을 끝장을 내라고, 죄들을
가두어버리라고, 불법을 깨끗하게 하라고, 그리고 대대로 의로운 자를 가져오도록,
환상과 예언을 가두라고, 그리고 지극히 거룩한 자에 기름을 부으라고 포고되었다.
그러므로 알고 지각할 것은, 예루살렘을 회복하고 건설하기 위해 이 말이
나감으로부터 제 1 인 자 메시아까지 칠 주일 것이다 (단. 9:24-25).
위 구절에서 “칠십 주들” 그리고 “칠 주들”은 “칠 일”과 같이 주님의 오심을 의미한다. 그러나 여기서의 경우 명백한 예언인 바, 숫자를 중복하는 방법, 즉 7개 한 벌(septenary)을 수단으로 시간들이 신성하게, 확실하게 더 한층 강화되도록 의도 되었다. 그런고로 시간들에 적용된 “일곱”은 주님의 오심 뿐 아니라 그 당시 새로운 교회의 시작 역시 “지극히 거룩한 자”, 그리고 “회복되고 건설되는” 예루살렘에 의해 의미되었다. 동시에 마지막 황폐되어짐이 “칠십 주들이 거룩함의 성 위에 죄들을 가두고, 위법에 끝장을 보라고 포고되었다”라는 말들에 의해 의미되었다.
말씀의 다른 구절, 에스겔서에서 에스겔이 자신에 관해 말하는데:
나는 델아빕에 포로된 그들에게 와서 그발 강 가에 앉았다, 그리고 나는 거기서
칠 일 동안 그들 사이에서 깜짝 놀란 상태로 있었다;
그리고 칠 일의 끝에서 여호와의 말씀이 나에게 왔다 (겔. 3:15-16).
위 구절 역시 “칠 일”은 방문의 시작을 표시한다; 그 이유가 칠 일 후, 그가 포로된 자들 사이에 앉아 있는 동안,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왔기 때문이다. 다시:
그들은 곡을 매장할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토지를 일곱 달 동안 깨끗해지게
할런지 모른다; 일곱 달의 끝에서 그들은 살필 것이다 (겔. 39:12, 14).
위 구절도 마찬가지로 “일곱”은 황폐시킴의 마지막 한계를, 그리고 방문의 처음을 표시한다. 다니엘서에서:
느부갓네살의 심정이 인간의 것으로부터 바뀔 것이다, 그리고 짐승의 심정이
그에게 주어질 것이다, 그리고 일곱 번 그를 지나갈 것이다 (단. 4:16, 25, 32),
위 구절도 마찬가지 방식에서 황폐됨의 끝, 그리고 새로운 사람의 시작을 표시하고 있다.
바빌론에 “칠십 년”을 포로화됨도 같은 것을 표현하였다. 숫자가 “칠십”이든, 또는 “칠”이든 같은 의미를 포함한다. 또한 칠 일 또는 칠 년, 또는 칠십 년을 만드는 일곱 세대들도 마찬가지의 의미를 포함한다. 황폐됨이 포로됨의 칠십 년에 의해 표현되어졌다; 자유해짐과 성전의 재 건축에 의해 새로운 교회의 시작이 표현되어졌다. 이와 비슷한 의미가 야곱이 라반을 섬김에 의해 표현되었다:
나는 라헬을 위해 칠 년을 봉사할 것입니다; 그리고 야곱은 라헬을 위해 칠 년을
섬겼다; 그리고 라반이 말했다, 이 주(week)를 채우라, 그리고 나는 네게 그녀 역시 줄 것 이다. 또 다른 칠 년을 너는 나에게 봉사해야 한다; 그리고 야곱은 그렇게 했다,
그리고 한 주를 채웠다 (창. 29:18, 20, 27-28).
위 구절에서 봉사함의 “칠 년”도 같은 의미이다. 칠 년이 지난 후, 결혼과 자유함이 왔다, 칠 년의 이 시기가 다니엘서에서 “주(week)”라 불리웠다.
같은 의미가 여리고 성을 “일곱 번” 돌라고 하는 명령에서도 표현되었고, 그리하여 성벽이 무너졌다;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일곱 째 날, 그들은 새벽에 일어나서 같은 방식에 따라 일곱 번을 돌았다,
그리고 일곱 번째 돌았을 때 일곱 성직자들이 일곱 나팔을 불었다.
그리고 성벽이 무너졌다 (여. 6:10-20).
위 구절 역시 우리가 위에서 살핀 의미를 가지지 않았다면, 성을 일곱 번 돌라는 명령, 일곱 성직자들과, 일곱 나팔이 주어지는 일은 결코 없었을 것이다. 이 외에 여러 구절들에서 더 살필 수도 있는 바, (욥. 2:13; 계. 15:1, 6-7; 21:9) “칠 일 후면”은 새로운 교회의 시작, 그리고 옛 교회의 끝을 의미한다. 본문 역시 “노아”라 불린 교인, 그리고 그의 시험, 그리고 자신을 파괴한 태고 교회의 마지막 후손을 취급하는 바, “지금부터 칠 일 후면”은 노아의 시험의 시작과 태고 교회의 끝 또는 마지막 황폐됨과 시효가 만료됨 외의 다른 의미는 없다.

“비가 옴”에 의해 시험이 의미된다는 것은 7장의 서문에서 말했기도 하다. 즉 “홍수” 또는 “물들의 범람”, 이 구절은 “비”를 수단으로 묘사되는데, 시험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황폐함 역시 의미한다. 그리고 이어지는 페이지(page)들에 등장하는 홍수에 관해 말해지는 것에서도 같은 의미가 나타난다.

“사십 일 낮과 밤”에 의해 시험의 기간이 의미됨은 주님의 말씀으로부터 명백하다. “사십”이 시험의 지속 기간(duration)을 의미함은 주님 자신 사십 일 동안 자신을 유혹받게 내버려두신 사실로부터 온다 (마. 4:1,2; 눅. 4:2; 막. 1:13). 그 외 주님께서 오시기 전, 유대 교회와 다른 표현 교회 안에 제정되어 있는 것들 모두와 각각이 그분에 관한 예징(type)들이듯, 그렇게 사십 일 낮과 밤도 일반적으로 모든 시험을 표현했고 의미했다. 또한 특별하게는 대상이 무엇이든 시험의 지속 기간을 의미했다. 그리고 인간은 시험 안에 있을 때 그의 자기 자신으로부터 있는 모든 것들, 그리고 육체로부터 있는 모든 것들에 관하여 황폐해짐 안에 있기 때문에 이런 이유에서 “사십일 낮과 밤”은 황폐해짐의 지속 기간도 의미한다 (그 이유가 그가 새로운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기 전, 또는 영적, 천적 인간으로 만들어지기 전, 그의 자기 자신으로부터의 모든 것들, 육체로부터의 모든 것들은 반드시 죽어야 하기 때문); 또한 여기서의 주제도 “노아”라는 새로운 교회의 시험과 홍수 이전 사람들의 황폐해짐 둘 다인 것과 맥락을 같이 한다.
숫자 “사십”이 규모가 크든, 작든 시험과 황폐해짐의 지속 기간을 의미한다는 것이 에스겔서에서 분명해진다:
너는 네 오른 쪽으로 누워있어라, 그리고 유다 가문의 불법을 사십 일 동안 짊어져라,
(오른 쪽으로 누운) 하루를 일년으로 쳐서 나는 네게 정해준 것이다 (겔. 4:6).
위 구절에서 “사십”이 유대 교회의 황폐해짐의 계속 기간을 표시하고, 주님의 시험 받으심도 표현한다. 그 이유가 그가 “유다 가문의 불법을 짊어져야 한다”고 말해지기 때문이다. 다시:
나는 이집트의 토지를 황폐해지게 만들 것이다, 황무함의 황폐이다, 인간의 어떤 발도
그것을 통과하지 못할 것이다, 짐승의 어떤 발도 그것을 통과하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사십 년 동안 거주되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나는 이집트의 토지를 황무한
토지들 한 가운데 있는 황무함으로 만들 것이다, 그리고 성들의 한 가운데에서
그녀의 성들은 황폐된 채로 놓여 쓸쓸한 사십 년을 있을 것이다 (겔. 29:10-12).
위 구절 역시 “사십”은 황폐해짐과 황무해짐의 지속 기간을 표시한다; 그리고 내적 의미에서 사십 년이 뜻해지지 않고, 일반적으로 신앙의 황무해짐만을, 그것이 시간 측면에서 규모가 크든 작든 그것만을 의미한다. 계시록서에서:
성전 밖인 뜰은 내쫓고 그것은 재지 마라; 그 이유가 그것은 이방인들에게 주어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은 거룩한 성을 마흔 두 달 동안 짓밟을 것이다 (계11:2).
그리고 다시:
그리고 거기서 그에게 큰 것들과 신성 모독을 말하는 입이 주어졌다;
그리고 거기서 그에게 마흔 두 달 동안 일할 권한이 주어졌다 (계. 13:5),
(위 구절은) 황폐해짐의 존속 기간을 표시하는데, 아마 누구도 시간의 마흔 두 달이 뜻해지지 않는다는 정도는 알고 있으리라 본다. 그러나 (숫자 “사십 이”가 “사십”과 같은 의미를 가지는 이유는) 이 인용 구절의 마흔 두 달은 “칠 일”이 황폐해짐, 그리고 새로운 시작을 의미한다는 것, 그리고 “여섯”은 노동의 육 일, 또는 전투함의 육 일로부터 노동을 의미함으로부터, 7에 6을 곱한 숫자가 42인 바, 이는 거룩함을 안에 지닌 거듭나지는 인간의 황폐해짐의 지속 기간과 시험의 지속 기간, 또는 노동과 전투를 의미한다. 사실 위 인용 구절에서 보여주듯, 대략적인(rounding) 숫자 40은 대략적이 아닌(not-so-round), 즉 정확한(exact) 숫자인 42를 위해 채용되어져 있다.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의 토지로 데려가지기 앞서, 사십 년을 광야에서 인도 되었는데, 이것 역시 시험의 지속 기간, 또한 황폐해짐의 지속 기간을 표현하고 의미했다. 시험의 지속 기간은 사십 년 후에 그들이 거룩한 토지 안으로 진입함에 의해 표현되고 의미되었고, 황폐해짐의 지속 기간은 이집트를 빠져나간 이십 세 이상의 모두가 여호수아와 갈렙만을 빼고 광야에서 죽었음에 의해 표현되고 의미되었다 (민. 14:33-35; 32:8-14). 이 백성들이 자주 불평했던 것들은 시험들을, 이 백성위에 닥친 재앙들과 파멸됨은 황폐해짐들을 의미했다. 이런 사항들이 시험과 황폐해짐을 의미한다는 것은 차후 각 해당하는 구절을 만날 때 설명한다. 이런 것들에 관해 모세의 책에 쓰인 바:
너희가 기억해야 하는 것은, 여호와 너희 하느님께서 너희를 사십 년 동안 광야에서
인도하신 모든 방법들, 너희를 괴롭히시고, 너희를 시험하시고, 너희 심정에 있는
것들을 알게 하시고, 너희가 그분의 명령들을 준수하는지, 아닌지를
(보신 것 등등이다) (신. 8:2-3, 16).
모세가 사십 일 낮과 밤을 시내산에서 있었다는 것 역시 시험의 지속 기간을 의미한다, 즉 모세가 백성을 진멸하시지 않도록 탄원하면서 먹지도 마시지도 않고 사십 일 주야를 산에 머문 것이 주님의 시험을 의미함은 분명하다. (신. 9:9, 11, 18, 25-29; 10:10).
“사십 일”이 시험의 지속 기간을 의미한 이유는 방금 말했듯이, 주님께서 사십 일 동안 악마의 유혹을 허용하신 것 때문이다. 그리고 모든 것들이 주님에 대한 표현인 바, 시험에 관한 생각(idea)이 천사들과 더불어 표출될 때, 이 생각은 이 세상에 있는 것과 같은 것들을 수단으로 영들의 세계에서 표현되어졌다. 이는 천사들이 영들의 세계 안으로 하강하는 동안 벌어지는 모든 천사 같은 생각들과 더불은 경우이다: 즉 그들이 표현적으로 표출되어짐 이다. 그리고 같은 방법에서 시험에 관한 생각이 주님께서 사십 일 동안 유혹되셨기 때문에 숫자 “40”에 의해 표현되어졌다. 주님과 더불어, 그 결과 천사 같은 천국과 더불어서도 어떤 것이 현재 있든지, 장차 있을 것이든지 모두 똑같다; 올 것이 현재 있고, 또는 이루어질 것이 이루어져 있다. 이로부터 표현(representative) 교회에서 “40”을 수단으로 시험에 관한 표현이 있다. 황폐해짐의 표현도 그러하다. 그러나 이런 것들이 아직은 잘 납득되지 않는다, 그 이유는 영들의 세계 안으로 천사 같은 천국의 유입이, 이런 유입의 본성이 알려져 있지 않기 때문이다.

내가 만든 물질(substance)을 나는 지면의 얼굴로부터 파괴할 것이다. 이는 인간이 생기있어질 때 마치 인간의 자기 자신(own)은 파괴된 것처럼 되어있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은 자기 자신에 관해 이미 설명한 바로부터 분명해진다 (154-155, 164항 참조). 인간의 자기 자신은 모든 악과 거짓이다. 이것에 계속 집착해 있는 한, 그는 죽어 있다; 그러나 그가 시험들 안으로 올 때, 그것은 흩어진다. 즉 주님으로부터 있는 진리들과 선들을 수단으로 느슨해지고 부드러워진다는 말이다. 그런고로 해서 인간은 생기 있어지고 마치 악들과 거짓들은 현존하지 않는듯, 사라진듯 나타난다. 이렇게 나타나 있지 않고 더 이상 해를 입히지 않는 것이 “파괴함”에 의해 의미되어지고 있다; 그럼에도 이것은 파괴되는 것이 아니라, 남아 있는다. 이것은 흑과 백의 색깔과 거의 같다. 이 둘이 빛의 광선에 의해 가감되어질 때, 이것은 아름다운 빛깔들, 푸른색, 노랑색, 보라색 등등과 같은 빛깔들로 바뀌는 것과 같다. 즉 그것들의 배열에 따라 사랑스럽고 호감이 가는 엷은 빛깔들, 마치 꽃들의 경우같이 표출되어진다. 그럼에도 근본적이고 필수적인 빛깔인 검은 색과 흰 색은 여전히 남아 있다. 그러나 여기서 태고 교회로부터 있는 이들의 황폐됨이 취급되는 바, “나는 지면의 얼굴로부터 내가 만든 존재하는 모두 각각의 것들을 파괴할 것이다”에 의해 절멸해지는 이들도 의미되고 있다 (이 절과 23절에도 있다). “내가 만든 물질”은 안에 천국의 씨, 또는 교회 속에 있는 모든 것, 모두 각각의 인간이다; 그러므로 이 구절과 다음 절 모두에서, “지면(ground)”이 언급되고 있고, 지면은 선과 진리가 심어져왔었던 교회인을 의미한다. “노아”라 불린 이들 안에서 이 씨는 이미 말했듯 악과 거짓이 흩어짐에 (비례해서) 점진적으로 성장했다; 그러나 절멸된 홍수 이전 사람들 안에 있던 이 씨는 가라지들을 수단으로 소멸되어졌다.

5절. 노아는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명령하신 모든 것에 따라 했다.
이는 이런 식으로 실현되었음을 의미하는데 앞에서의 구절과 같다. 앞장 22절과 비교해보면 노아가 두 번씩 “…했다”라고 기록되고 있으나 이 구절에서는 한 번 뿐이다. 22절에서는 하느님이 등장하나 여기서는 여호와이시다, 그 이유는 앞 절은 이해력으로부터의 것을 취급했고, 이 구절은 의지력으로부터의 것을 취급하기 때문이다. 이해력에 속한 것들은 의지에 속한 것을 생각할 때 자기들과 매우 다르고 구분된다고 여긴다; 그러나 의지력에 속한 것들은 이해력에 속한 것들을 자기들과 하나되는 것, 또는 하나로 간주하고 있다. 그 이유는 이해함은 의지로부터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런고로 앞 절에서는 두 번 “…했다”고 기록되고 이 절에서는 한 번만 “했다” 라고 기록되었다 또한 이는 왜 “하느님”이 명명되고, 왜 “여호와”가 명명되었는지에 대한 설명이기도 하다.

6절. 그리고 노아는 육백 세가 된 아들 이었다. 그리고 물들의 범람이 땅에 있었다. “노아는 육백 세가 된 아들 이었다”란 그의 시험의 첫 상태를 의미한다. “물들의 범람이 땅에 있었다”란 시험의 시작을 의미한다.

앞 장(창. 6:13-22)에서 이해력 측면인 진리들이 취급되었다. 거기에서 “노아”라 불리는 교인이 그가 거듭나기 전 주님에 의하여 가르침을 받았다; 그리고 이 장(1-5절)에서 의지 측면인 선들이 취급되어지는데, 그는 주님에 의해 선들을 증여받았다. 위와 같이 성경 두 부분에서 이를 취급하는 바, (글자로만 보면) 이것이 반복된 듯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지금 6-11절에서 그의 시험이 취급되고, 이 구절의 경우, 첫 상태와 시험의 시작이다; 그리고 모든 이도 알 수 있는 바, 반복이 다시 발생한다는 점이다. 그 이유가 이 절에서 “노아는 육백 세 된 아들이었다”라고 말해졌는데, 11절에서 홍수가 땅 위에 왔을 때, 이것은 “노아의 육백 년째, 둘째 달, 그 달의 십칠 일”에 있었다 라고 말해진다. 그리고 7절에서 노아는 그의 아들들과 그들의 아내들과 더불어 방주 안으로 갔다고 말해졌는데, 마찬가지로 13절에서도 언급되고 있다. 그리고 다시 짐승들이 노아에게로 (와서) 방주 안으로 들어갔다고 8, 9절에서 말해지는데, 14, 16절에서 다시 언급되고 있다. 이로부터 분명한 것은 여기서도 앞서 말한 것의 반복이 있다는 점이다. 글자 의미만에 머무는 이들은 그것은 반복된 역사적 문제일 뿐이라고 밖에 생각할 수 없다. 그러나 말씀은 (우리가 말씀 속의 신비를 다 알지 못해서 이지) 어느 단어 하나, 마침표에 이르기까지 헛되이 사용되지 않는다. 그 이유가 주님의 말씀이기 때문이다. 즉 주님은 반복되는 것 안에 또 다른 의미를 지니지 않으면 반복하시지 않는다. 앞서 말한 그대로 여기서도 이는 첫 번째 시험이다는 것, 이는 이해함 측면에서의 시험이고, 그 후에는 의지 측면에서의 시험이 있다. 시험은 거듭나는 이들에게 이 측면 뒤에도 다른 측면이 뒤를 이어 온다. 그 이유가 이해력 측면의 시험과 의지력 측면의 시험은 아주 다르다. 이해력에 속한 시험들은 가벼운 편이고, 의지력 측면의 시험들은 통렬하다.

이해력 측면에 관련된 시험, 또는 인간 안에 있는 거짓들에 관련된 시험이 가볍다라고 말한 이유는 인간이 감각들의 오류들 안에 있는 고로, 인간은 감각들의 오류들 안에 들어갈 수 밖에 없기 때문, 그리고 쉽게 떨쳐버릴 수도 있기 때문에서 이다. 그러므로 이해력 측면의 시험은 인간의 납득력에 따라, 또는 인간의 감각들의 오류들에 따라 말하는 말씀의 글자 의미 안에 머무는 모든 이들과 더불어 있다. 만일 주님의 말씀이기에 성경을 믿는다는 단순함에서 신앙을 가졌다면, 그들이 오류를 지녔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자신이 가르침을 받도록 쉽게 자신을 내어준다. 예를 들면, 주님은 성내시고 벌 주시고 사악한 자에게 악을 실행하신다고 믿을 때, 이런 신앙은 글자 의미로부터 도출된 것인 바, 이런 사람에게는 진정한 진리가 무엇인지를 쉽게 알려줄 수 있다. 또는 누군가가 자신 스스로 선을 행할 수 있다고 단순하게 믿는다면, 그리고 자기는 스스로부터 선하다고 단순히 믿고 있다가 저세상에 가면 거기서 그는 보상을 받을 것이고, 더불어 그가 행한 선이 주님으로부터 이다는 것도 쉽게 가르쳐질 수 있다. 그리고 그분의 자비에서 주님은 무료로 보상을 하신다. 그러므로 이해 측면의 문제로서 시험이 올 때, 또는 오류 측면에서 시험이 있을 때, 그들은 가볍게 유혹될 수 있을 뿐이다. 그리고 이것이 첫 시험이고, 이 시험은 거의 시험 같이 여겨지지도 않는다. 이것이 지금 취급되고 있다. 그러나 심정의 단순함 안에 있지 않은 이들과 더불어 말씀을 믿는 경우는 이와 다르다. 이들이 거짓들이나 오류들을 확증하는 이유는 그것들이 자기들의 그리워함을 지지하기 때문에서이다; 그리고 이런 동기를 수단으로 몰아채는 이들은 거짓인 것을 진리라고 하기 위해 자신들로부터, 그리고 기억 속의 지식들로부터 많은 추론들을 다함께 가져다놓고, 그것도 모자라면 말씀에서 확증하고, 자신들을 설득해 간다.

“노아”, 또는 이 새로운 교회의 사람에 초점을 모아보면, 그는 그가 태고 교회로부터 가졌던 것을 단순 소박하게 믿는 품성을 지녔다. 이는 교리 측면에 관련된 것들이고, 이것은 “에녹”이라 불리워진 이들에 의해 어떤 교리적 형태로 환원되어 수집되었었다. 그래서 (노아에 속하는) 이들은 멸종되는 홍수 이전 사람들, 즉 “네피림”이라 불린 이들, 즉 자기들의 더러운 그리워함들에 신앙의 교리적인 것들을 침수시켜 끔찍한 설득력을 임신하였고, 이로부터 제 아무리 누군가가 그들의 설득력의 잘못을 보여주고 수정하도록 가르쳐보려 해도 꿈쩍도 하지 않았던 이들과는 전혀 다른 천성(genius)으로부터 있었다. 오늘날의 경우도 이와 꼭 같지는 않지만, 이런 천성, 또는 본성을 지닌 이들이 있는가하면 그와 다른 천성이나 본성를 지니기도 한다. 그리하여 어떤 사람은 거듭남이 쉽게 진행되는 한편, 또 다른 이는 힘든 경우도 있다.

노아는 육백 세의 아들 이었다. 이것이 시험의 첫 상태를 의미하는 것은 분명하다. 그 이유는 여기 그리고 제 11장의 에벨에 이르기까지에서 등장하는 숫자들이나 년 수 기간과 이름들이 제 5장과 더불어 순수하게 상징적 의미만을 지니기 때문이다. “육백 년”이 여기서 시험의 첫 상태를 의미하는 것은 숫자 600을 지배하는 숫자가 10과 6이고, 10이 두 번 곱해졌음(6x10x10)에서 분명하다. 그리고 숫자가 커지든 작아지든 같은 약수(factor)에서 출발하면 그 의미는 바뀌지 않는다 (10과 100은 동일한 의미를 지닌다. 단지 100은 10이 강조된 것, 계시록의 666도 6의 뜻이 강조되고 또 강조를 한 것이다-역자의 의견임). 숫자 “10”에 주목해보면, 이는 이미 6:3에서 살폈는데, 리메인스(remains, 아껴두신 것들)를 의미한다; 그리고 “6”은 노동과 전투를 의미한다는 것은 말씀의 많은 구절로부터 분명해진다. 이 경우는 이렇다: 앞서 살핀 것에서, 주제는 시험을 위해 노아라 불리는 인간이 준비되는 것, 주님께서 그의 이해력에 진리를, 그의 의지력에 선들을 공급하심으로 시험을 위해 준비하신 것이다. 이 진리들과 선들이 리메인스이다. 이 아껴두신 것들은 인간이 거듭나질 때까지는 인식되도록 인간에게 가져다 놓이지 않는다. 시험을 통하여 거듭나지는 이들의 경우, 인간 안에 있는 이 리메인스는 그와 함께 있는 천사들을 위해 있고, 인간 안에 있는 거짓들을 흥분시키고 그를 맹렬히 습격하는 악령에 맞서 천사가 그를 위해 방어할 때 꺼내어 사용한다. 리메인스가 “10”에 의해 의미되고, “6”에 의해서는 전투들이 의미되는 바, 이런 이유 때문에 년 수들이 “육백”이라고 말해지고, 이 안에서 지배하는 숫자가 10과 6인 바, 시험의 상태를 의미한다.
“6”을 세부 측면에서 주시해보면, 이것이 전투를 의미한다는 것은 창세기 1장으로부터 분명하다. 그 장에서 육 일이 묘사되고, 이 안에서 인간이 천적 수준으로 되기 앞서 거듭나진다. 이 육 일 안에서 계속적인 전투가 있다. 그러나 일곱 째 날에 쉼이 있다. 이런 이유에서 노동의 육 일이 있고, 일곱 째 날은 쉼을 의미하는 안식일이다. 이로부터 히브리 종은 육 년을 봉사하고, 칠년 째에는 자유해졌다 (출. 21:2; 신. 15:12; 예. 34:14); 또한 그들은 육년 동안 토지에 씨를 뿌리고, 열매를 모아들였다, 그러나 칠년 째에는 씨뿌리지 않았다 (출. 23:10-12). 포도원 역시 같은 방식을 따랐다; 그리고 일곱 째 해는 토지에게 “안식일의 안식일, 여호와에게 안식일” 이었다 (레. 25:3, 4). “6”이 노동과 전투를 의미하는 바, 숫자 여섯은 거짓들의 분산(흩어짐)을 의미한다. 에스겔서에서:
잘 보니 여섯 사람들이 북쪽을 향하여 바라보는 위쪽 문의 길로부터 왔다,
그리고 모든 이가 자기 손에 분산(dispersion)시키는 자기 무기를 가졌다 (겔. 9:2).
그리고 다시, 곡을 향하여:
나는 다시 너를 돌아서게 만들 것이다, 그리고 너를 여섯 째로 만들 것이다,
그리고 너를 북의 측면으로부터 올라오게 만들 것이다 (겔 39:2).
위에서 “여섯” 그리고 “여섯 째로 줄임(reduce)”은 분산을 의미한다; “북”은 거짓들을; “곡”은 외적인 것들로부터 교리의 주제들을 이끌어내는 자들, 그럼으로 해서 그들은 내적인 예배를 파괴한다. 욥기서에서:
여섯 곤경들 안에 그는 너를 넘길 것이다, 그렇다, 일곱 째에서 어떤 악도 너를
건드리지 못할 것이다 (욥. 5:19),
위는 시험의 전투를 뜻하고 있다.
그러나 “여섯”이 노동, 전투, (거짓의 ) 분산을 의미하지 않는 경우도 발생한다. 즉 신앙의 거룩함을 의미하는 경우인데, 이는 “열 둘”에 관계될 경우이다. 열 둘은 한 복합체(one complex)에서 신앙과 신앙의 모든 것들을 의미한다; 그리고 “3”은 거룩을 의미한다. 이 “3”으로부터 숫자 “6”의 진짜 의미가 파생된다; 에스겔서(40:5)를 보자. 이 구절에서 사람의 갈대를 가지고 이스라엘의 거룩한 성을 측량했더니, “6” 큐빗들이었다; 그리고 다른 구절들에서도 예를 들어 볼 수도 있다. 이렇게 “6”의 의미가 있는 이유는 신앙의 거룩함은 시험의 전투들 안에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노동과 전투의 6 일은 거룩한 일곱 째 날을 주시하고 있다.

여기서 노아가 “육백 년의 아들” 라고 불리운다. 그 이유는 “아들”이 이해력 측면의 진리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는 이미 말했다. 그러나 11절에서 그는 “아들”이라 불리우지 않는데, 그 이유는 의지 측면에서의 그의 시험이 취급되기 때문이다.

“물들(waters)의 홍수”에 의해 시험의 시작이 의미되었다는 것은 여기서 이해력 측면의 것들에 관한 시험이 취급되는 것으로부터 분명해진다. 이 시험은 먼저 있어지는 시험, 그리하여 가벼운 시험인데, 이는 앞에서 말했다; 이런 이유에서 여기서의 홍수는 “물들의 홍수”라 불려지고 17절 같이 “홍수”라 단순히 불려지지 않고 있다. 그 이유가 “물들”은 인간의 영적인 것들, 신앙의 지적인 것들, 반대 의미에서는 신앙의 거짓들을 특별하게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는 말씀의 여러 구절로부터 확인해 볼 수 있을런지 모른다.
“홍수”, 또는 물들의 “범람”이 시험을 의미하는 것은 7장 서문에서 살폈다. 마찬가지가 에스겔서에 있다:
그러므로 주 여호비께서 말하신다, 나는 내 격노함을 헤치고 나가도록 폭풍의 바람을
만들 것이다, 그리고 범람하는 비가 내 성남의 (자리에) 있을 것이다, 그리고
우박들이 분노 안에 (있어), 종말을 (볼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너희가 부적당한
것을 가지고 칠해 놓은 벽을 파괴할런지 모른다 (겔. 13:13-14).
위 구절에서 “폭풍의 바람”과 “범람하는 비”는 거짓들의 황폐됨을 표시한다; “부적당한 것 가지고 칠한 벽”은 진리같이 나타나는 지어낸 이야기(fiction)이다. 이사야서에서:
여호와 하느님은 범람으로부터 방어되신다, 폭염(heat)으로부터 그늘이시다,
그 이유가 광폭한 자의 숨이 벽을 향하여 범람함 같이 있기 때문이다 (이. 25:4).
여기서 “범람함”은 이해력 측면에서의 시험을 표시한다, 그리고 “폭염”이라 불리는 의지 측면의 시험과 구별되어진다.
다시:
잘 보라 주님은 강력하고 힘센 자를 가지고 있으시다, 그리하여 우박의 범람같이,
파괴하는 폭풍같이, 강력한 물들의 범람함같이 넘쳐 흐르신다 (이. 28:2),
위에서는 시험의 등급들이 묘사되어 있다. 그리고 다시:
네가 물들을 통과할 때 나는 너와 함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강들을 통하여 (갈 때),
그것들이 네 위에서 넘쳐 흐르지 않을 것이다; 네가 불을 통과하여 걸을 때
너는 태워지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불꽃이 네 위에서 불붙지 않을 것이다 (이. 43:2).
위에서 “물들”과 “강들”은 거짓들과 공상들을 표시하고, “불”과 “불꽃”은 악들과 그리워함들을 표시한다. 다윗서에서:
이를 위해 거룩함이 있는 모든 이는 발견하심의 때에서 당신에게 기도합니다,
그리하여 많은 물들의 범람에서 그것들이 그에게 도달하지 않을 것입니다; 당신은
제가 숨는 장소입니다; 당신은 곤경으로부터 나를 보존되게 하십니다 (시. 32:6-7),
위에서 “물들의 범람함”은 “홍수”라 불리는 시험을 표시한다. 시편에서:
여호와께서는 홍수에 앉아 계신다;
그렇다, 여호와는 영원히 왕으로 앉아 계신다 (시. 29:10).
위 구절로부터, 그리고 7장의 시작에서 전제한 것으로부터, “홍수” 또는 물들의 “범람”이 비록 태고 교회를 묘사한 방식을 따라 역사적 (스타일)로 묘사되었을 지라도 시험들과 황폐됨만을 의미함은 분명하다.

7절. 그리고 노아는 홍수의 물들이 있기 앞서 방주 안으로 그의 아들들과 그의 아내와 그의 아들들의 아내들과 함께 들어 갔다.

노아는 홍수의 물들이 있기 앞서 방주 안으로 들어 갔다. 이것은 그가 보호받았음을 의미한다는 정도는 누구나 익히 알고 있을 것이다. 시험들은 인간과 더불어 있는 (두 세력), 즉 천사들과 악령들의 전투들이다. 악령들은 모든 잘못된 것들, 인간의 유아기 때부터 있던 악들과 거짓들, 그것이 행동되었던 것이든 생각만에 있던 것이든 모두 소집한다. 악령들에게는 이 짓을 하는 것 이상 더 큰 즐거움은 없다. 그 이유가 그들의 참 기쁨이 그것들 안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천사를 통하여 주님께서는 인간을 지키신다. 그래서 한계를 넘는 악령과 악귀(genii)들을 제지하시고, 인간 당사자가 감당할 수 있는 정도를 넘어선 인간이 침수 당함으로부터 지키신다.

“아들들”에 의해 진리들이, “아내”에 의해 선들이, 그리고 “아들들의 아내들”에 의해 선들과 결합한 진리들이 의미된다는 것은 6:18에서 살폈다. 비록 여기서 아들들과 아내들로 말해지는 진리들과 선들이지만 이것들은 “노아”라 불리는 사람 안에 있는 진리들과 선들을 뜻한다. 이런 문장체는 역사적 방식과 연결시켜 말하는 태고인들의 스타일이다. 그러나 천국의 비밀들을 포함하고 있다.

8, 9절. 하느님께서 노아에게 명령하신 대로 깨끗한 짐승, 깨끗하지 않은 짐승, 새와 지면에서 기는 모든 것들이 9 둘과 둘, 남성과 여성이 노아에게, 방주 안으로 들어 갔다.

선을 애착함들이 “깨끗한 짐승들”에 의해 의미되는 것은 이 장 2절에서 살폈으므로 생략한다. 그리워함들, 즉 악한 애착들은 “깨끗하지 않은 짐승”에 의해 의미됨도 이미 살폈다.

“가금류(fowl)” 또는 “새(bird)”에 의해 일반적으로 생각들이 의미되는 것은 새들에 관해 말해졌던 것으로부터 알런지 모른다. 즉 그것들은 이해력 측면의 것들, 또는 합리적 측면의 것들이 의미된다. 그러나 앞에서는 “하늘들의 새(fowl)들”이라 불리웠고, 여기서는 “새(fowl)”라고만 불릴 뿐이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일반적 측면에서의 생각들을 의미한다. 그 이유가 여러 종류의 새들, 깨끗한 새, 불결한 새가 있고, 14절에서는, “새”, “나는 것”, 그리고 “날개 달린 것”으로 구별되기도 한다. 깨끗한 새들은 진리를 생각함이다; 불결한 새는 악한 생각들이다; 이에 관하여는 차 후 주님의 신성한 자비로부터 더 살핀다.

지면 위에서 기는 모든 것. 이것이 감각적 부분과 그것의 모두 각각의 쾌락을 의미하는 것은 전에 살폈다. 태고인들은 인간의 감각적인 것들과 그것의 쾌락들을 파충류나 기는 것들에 비교하고 비유했다. 그리고 그것들을 그렇게 (직접적으로) 부르기조차 했다, 그 이유는 그것들이 가장 바깥 것 쪽에 해당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감각적 부분은 인간의 표면에서 마치 기는 듯하다, 그리고 그 부분들은 그 자체 더 높게 들어 올려지는 것이 허용되지 않아야만 한다.

“둘씩”이 상응하는 것들을 의미함은 그것이 쌍(pair)들 임으로부터 알런지 모른다; 쌍은 서로에게 상응하지 않으면 쌍일 수가 없다. 예를 들면, 진리와 선, 또는 거짓과 악 같은 형태이다. 모든 것들 안에는 결혼, 또는 짝지움(coupling)과 매우 유사함이 있다. 마치 진리들이 선들과, 악들이 거짓들과 같다. 그 이유는 이해력과 의지력의 결혼, 또는 의지력과 이해력의 결혼이 있기 때문에서 이다. 실로 모든 것은 그것들의 결혼, 또는 짝지움이 있다. 이것 없이는 살아가질 수 없다.

그들이 “방주 안으로 감”이란 그들이 보호되어졌음을 의미한다는 것은 노아와 그의 아들들과 그들의 아내들에 관해 말해진 구절, 7절에서 살폈다.

“남성과 여성”이 진리와 선을 의미하는 것은 2, 3절에서 살폈는데, 거기서 “남성과 여성”은 새들에 관련해서, “남자와 아내”는 짐승들에 관련해서 서술되었다. 그 이유 역시 서술하기를, 즉 그것들 자체를 주시해서 보면, 이해력 부분이 의지력 부분과 결혼한다고 말하기보다는 의지력 부분이 이해력 부분에게 결혼한다 말해야 할 것이다. 전자는 남성과 여성에 해당되고 후자는 남자와 아내에 해당된다. 이 구절의 주제는 이해력 측면에서 이 인간의 시험을 다루는 바, “남성과 여성”이라 말해진다, 그리고 이해력 측면의 시험, 또는 전투가 뜻해진다.

하느님께서 노아에게 명령하셨다. 그렇게 되어감을 의미하는데, 이는 6:22, 7:5에서 살폈다.

여기서의 주제는 “노아”라 불리는 새로운 교회인의 시험이고, 시험들의 본성을 아는 자가 별로 많지 않아 시험에 관해 간략한 설명이 추가되어야 할듯 싶다. 이미 말했듯, 시험의 때에 악령들은 인간의 거짓들과 악들을 소집한다. 사실상 인간의 유아 때로부터 그가 생각했고 행하기도 했던 것은 무엇이든 그의 기억으로부터 불러낸다. 악령들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악의와 노련함으로 실행에 옮기는데, 이때 인간과 더불은 천사들도 그의 선들과 진리들을 끌어내서 그를 방어한다. 이 전투가 인간에게 고통과 양심의 가책을 일으킴에 의해 느껴지고 지각된다.
두 종류의 시험들이 있다, 하나는 이해력 측면에서의 시험이고, 또 하나는 의지력 측면에서의 시험이다. 인간이 이해력 측면에서 유혹될 때, 악령들은 그가 죄라고 느끼고 있어왔던 악한 것들(여기서는 “불결한 짐승들”에 의해 의미되었다)을 소집할 뿐이다, 그리고 그를 기소하고 정죄한다; 악령들은 그 인간의 선한 행위들(여기서 “깨끗한 짐승들”)도 불러낸다. 그리고 수 천 가지 방법으로 뒤집는다. 동시에 악령들은 그 인간이 생각한 것(여기서는 “새”), 이와 비슷한 것인 여기서는 “지면 위에서 기는 모든 것”에 의해 의미된 것도 불러낸다.
그러나 이 시험은 가볍다, 그리고 어떤 흥분됨과 마음에 상기하는 방식에 의해서 지각되어진다. 그러나 인간이 의지 측면에서 유혹되어질 때, 그의 생각들과 행동들이 소집되기보다는 악귀들이 있어 이것들이 인간 당사자가 물들여져 있는 그의 그리워함들과 더러운 사랑들을 가지고 불을 지핀다. 그런고로 전투는 인간의 그리워함 자체들을 수단으로 벌어지는 것이고, 악귀들이 아주 악의있게, 아주 은밀하게 진행하므로 시험이 그리워함들로부터 있는지조차도 믿어지지 않는다. 게다가 악귀들은 인간 당사자의 그리워함의 생명 안으로 자신들을 한 순간에 주입시킨다, 그리하여 거의 순간적으로 선과 진리에 애착함을 악과 거짓에 애착하도록 뒤집고 바꾸어 놓는다, 이렇게 순식간에 있음으로 해서, 인간은 이렇게 뒤집히고 바뀐 것이 자기 자신으로부터 이루어졌다고, 그리고 자기 자신의 의지로부터 나온 것이라고만 알 뿐 이것이 악귀로부터인지를 아는 것은 가늠할 수 없다. 이 시험은 아주 통렬하고, 내향의 고통과 고문하는 불로서 지각되어진다. 이에 관하여는 더 언급이 있을 것이다. (주님께서는) 위와 같은 경우를 나로 하여금 알고 지각하도록 여러 번 경험하게 하셨다; 또한 악령들 또는 악귀들이 언제 어떻게 흘러들고 범람하는지에 관해서도, 그것들이 누구이며 어디서인지도, 이런 것들에 관한 경험들은 주님의 신성한 자비로부터 특별하고 세부적인 언급이 차 후 있을 것이다.

10절. 그리고 일곱 날이 지나자 홍수의 물들이 땅에 있었다.

“일곱 날들”에 의해 시험의 시작이 의미된다는 것은 4절에서 살폈다; 그리고 앞에서의 것을 참조하면, 이 시험은, 이해력 측면의 것에 관한 시험이고, 시험의 시작, 또는 첫 시험이다는 것이다; 사실상 이는 결말을 말한 것이기도 하다. 또한 이 첫 시험이 이해력 측면이기 때문에 7절에서 같이 “홍수의 물들”이라, 6절에서도 마찬가지로 묘사되어 있다. 이것 모두 설명한 바 같이 시험을 의미한다.

11절. 노아의 삶이 육백 년째 된 둘째 달, 십칠 일, 바로 그 날에 큰 깊음의 모든 샘들이 깨어졌고, 하늘의 큰 폭포가 열렸다.

“육백 년째 해, 둘째 달, 십칠 일”에 의해 시험의 두번 째 상태가 의미되어졌다는 것은 지금까지 말해진 것으로부터 미루어 알게 된다; 그 이유가 6절로부터 11절 까지에서 취급된 시험은 이해력 측면의 시험들이었다. 지금은 의지력 측면의 시험, 시험의 두번 째 상태가 취급되는데, 그 이유는 그의 나이가 다시 말해지기 때문에서이다. 앞 절에서 그의 나이는 “육백 년의 아들이었다”, 그리고 여기서는 홍수가 “그의 인생의 육백 년 째에, 둘째 달에, 그리고 십칠 일에” 왔다. 노아의 나이의 년 수들, 그 속의 달들, 날들에 의해 무엇이 특징지워져 있는지, 의지 측면의 시험의 상태가 뜻해지는지 아무도 상상조차 할 수 없다. 이미 말했듯이 이와 같은 표현은 태고 사람들의 언어구사 또는 작문 방식의 하나이다는 것이다; 그리고 특별하게 그들은 시간들이나 이름들을 일일이 열거함에서 기쁨을 발견하기도 했다. 그럼으로 해서 실제 역사와 비슷한 대화체를 조립한 것이다; 그리고 이것 안에 그들의 지혜가 있었다.
6절에서 살핀 바 같이 “육백 년”은 시험의 첫 상태를 의미하는데, 여기서도 같은 의미를 가질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시험의 둘째 상태가 의미되기 위하여 이 구절은 달과 날이 첨가되어 있다; 그리고 실로 두 달들(two months) 또는 “둘째 달에”는 전투 자체를 의미한다. 이 의미는 숫자 2에 관한 의미를 살핀 6:2절로부터 분명하다. 즉 2는 6과 같은 의미, 즉 노동과 전투, 또한 분산함을 의미한다. 그러나 17은 시험의 끝과 시작 둘 다를 의미한다. 그 이유는 17이 7+10으로 구성되기 때문이다. 이 숫자가 시험의 시작을 의미할 경우, 이것은 일곱 째 날까지를, 또는 일곱 날들의 한 주(week)를 함유한다; 그리고 이 시작함의 의미는 7;4에서 살폈다. 그러나 7이 시험의 끝을 의미할 경우, 이때의 “7”은 거룩하다; 이것에 “10”이 합쳐졌다. 그 이유가 리메인스 없이 인간은 거듭나질 수 없기 때문이다.
숫자 “17”이 시험의 시작을 의미하는 것은 예레미야서에서도 분명해진다, 예언자가 아스돗에 있는 그의 삼촌의 아들, 하나멜로부터 들판을 사도록 명령받았을 때; 그는 그에게 돈으로 은 17세겔을 달아주었다 (예. 32:9). 이 숫자가 바빌론에의 포로됨을 의미하고, 이것이 신실한 자의 시험과 불성실한 자의 황폐됨을 표현한다는 것, 그리고 시험의 시작과 동시에 시험의 끝을 의미한다는 것은 32장의 36절에서의 포로됨과 37절에서의 자유함, 그리고 뒤잇는 구절까지로부터 분명해진다. 이렇게 이 숫자가 의미를 가지지 않았다면 예언서에 나타날리도 없었을 것이고, 다른 말씀들의 경우도 감추인 의미를 포함했다.
“17”이 시험의 시작을 의미한다는 것은 요셉의 나이로부터, 즉 그가 “17세”였을 때, 그는 그의 형들에게 (심부름을 위해) 보내졌는데, 이집트로 팔려졌다 (창. 37:2). 그가 이집트로 팔림 역시 비슷한 의미를 가진다. 이는 주님의 자비로부터 그 장의 해설에서 살핀다. 역사적 큰 사건(event)들은 표현물(representative)이고, 이것은 묘사된 바 대로 실제로 거행되었다; 그러나 여기서의 경우 의미적(의미를 담기 위한) 역사적 작은 사건(incident)이 조립되었다(compose). 이것은 글자 의미에서 묘사된 바 대로 거행되지 않았다. 그리고 여전히 실제의 대 사건들은 천국의 비밀을 포함하고 있다. 사실상, 사건들의 모두 각각의 단어에 천국의 비밀을 포함한다. 정확히 만들어 낸 역사물들로서 천국의 비밀을 포함한다. 이 역사물들을 읽을 때 이상야릇할 수 밖에 없다. 그 이유는 마음(mind)은 어떤 역사적 사실 또는 서술이 표현되는 곳에서 글자 안에 붙잡혀지고 글자로부터 마음 자체를 풀어 놓을 수 없기 때문이다.
말씀의 생명이 주재하는 곳은 내적 의미 안이다 (글자 안이 아니다, 글자 의미는 내적 의미 없이는 죽어 있다). 이는 총명한 사람이면 누구나 수긍할 것이다. 내적 의미가 없다면, 말씀에 있는 어떤 역사적 서술이라도 어떤 모독된 작가에 의해 작성된 역사적 서술과 얼마나 달라질까? 그리고 본문의 경우, 홍수가 거행될 때인 노아의 나이, 달, 날을 아는 것이 만일 그 말에 천국의 비밀이 포함되지 않았다면 우리에게 무슨 쓸모가 있을 것인가? 그리고 이런 말, “큰 깊음의 샘들이 터지고, 하늘의 큰 폭포가 열려졌다”하는 말이 예언적인 말임을 누가 눈치채지 못할까? 더 많은 설명은 있지 않아도 될 듯 싶다.
“큰 깊음의 모든 샘들이 깨어졌다”는 것은 의지 측면의 시험의 극단(extreme)을 의미하는 것은 방금 앞에서 시험의 두 종류에 관한 설명으로부터 분명해진다, 즉 시험은 두 종류가 있다는 것, 하나는 이해력 측면에서이고, 또 하나는 의지 측면에서 이다는 것, 그리고 후자는 전자와 비교해서 상대적으로 더 맹렬하다는 것이다; 이 지점까지가 이해력 측면에서의 시험이 취급되었다. 앞서 살핀 것과 마찬가지임이 “깊음”, 즉 그리워함들과 이로부터 파생된 거짓들(18항 참조)의 의미로부터 분명하다. 그리고 이것은 말씀의 아래 구절들로부터도 분명해진다. 에스겔서에서:
그러므로 주 여호비께서 말하신다, 내가 마치 아무도 거주하지 않는 성들 같은
황무한 성을 네게 만들 때, 내가 네 위에 깊음을 가져올 때,
그리고 많은 물들이 너를 덮을 것이다 (겔.26:19),
위에서 “깊음”과 “많은 물들”은 시험의 극단을 표시한다. 요나서에서:
물들이 저를 휘감았습니다, 혼까지조차; 깊음이 저를 빙둘러 있었습니다 (욘. 2:5),
위 구절도 마찬가지로 “물들”과 “깊음”은 시험의 극단을 표시한다. 다윗서에서:
깊음이 물들이 솟구치는 시끄러움에 깊음을 부른다;
네 모든 부서지는 파도와 물결이 내 위에 있다 (시. 42:7),
위에서도 역시 시험의 극단이 명백하게 표시되고 있다. 다시:
그분은 홍해 역시 꾸짖으셨다, 그리고 그것은 말리워졌다; 그리고 그분은 그들을
광야에서 (통과함) 같이 깊음들을 통과하게 만드셨다, 그리고 그분은 그들을
미워한 자들의 손으로부터 그들을 구하셨다, 그리고 그들을 적의 손으로부터
되찾으셨다, 그리고 물들이 그들의 적들을 덮었다 (시. 106:9-11),
위에서 “깊음”은 광야에 있는 시험들을 표시한다.
고대 때에, 지옥이 “깊음”에 의해 뜻해졌다; 그리고 공상이나 거짓된 설득력은 물들과 강들에 비유했었다. 또한 깊음으로부터의 연기 같은 것에도 비유했다. 그래서 누군가의 지옥들은 그렇게 나타난다, 즉 깊음들과 바다들 같이 나타난다. 이에 관하여는 주님의 신성한 자비로부터 차 후 살핀다. 이런 지옥으로부터 황폐케하는 악령들이 온다, 또한 인간을 유혹하는 악령도 온다; 그리고 그것들이 쏟아붓는 공상들도 거기로부터 온다, 그리고 악령들이 인간을 불붙이는 그리워함도 그쪽에서 온다. 거기로부터 범람과 (분노 등의)폭발도 온다. 그 이유가 앞에서 말한 바 같이, 악령을 통하여 인간은 지옥과, 천사를 통하여 천국과 결합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깊음의 모든 샘들이 깨어졌다”라고 말해질 때, 이런 것들이 의미되는 것이다. 지옥이 깊음이라 불리는 것, 그리고 더러운 방사물들이 강들이라 불리움이 에스겔서에서 분명해진다:
그런고로 주 여호와께서 말하신다, 그가 지옥에 내려가던 날 나는 슬퍼해지게 했고,
나는 그 위에 깊음을 덮었다, 그리고 나는 거기로부터의 강들을 억제시켰다,
그리고 큰 물들이 머물렀다 (겔. 31:15).
지옥이 역시 “깊음”, 또는 “심연(abyss)”이라 불리운다. 계시록도 참조하라 (계. 9;1-2, 11; 11:7; 17:8; 20:1, 3).

하늘의 큰 폭포가 열려졌다. 이것이 이해력 측면의 시험의 극단을 의미하는 것은 이미 살핀 바로부터 분명하다. 의지력 측면의 시험, 또는 그리워함에 관한 시험은 이해력 측면의 시험과 분리되어 있을 수 없다; 그 이유는 만일 분리되어졌다면, 어떤 시험도 있지 않았을 것이고, 그러나 범람함이 있고, 이런 경우는 그리워함들의 불 속에서 사는 이들과 더불은 경우인 바, 마치 그들은 지옥의 영들같이 자기들의 생명의 즐거움을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하늘의 큰 폭포”라 불리운 것은 거짓들, 또는 추론함들의 범람으로부터 이다; 이에 관해 이사야서에서:
두려움의 시끄러움으로부터 도망하는 자는 구덩이로 떨어질 것이다; 그리고
구덩이의 한 가운데로부터 올라오는 자는 덫에 걸리고 말 것이다; 그 이유가
높은 데로부터 큰 폭포가 열려져 있고, 땅의 기초들이 흔들리기 때문이다 (이. 24:18).

12절. 그리고 비가 땅에 사십 일 주야로 내렸다.

“비”가 여기서 시험을 의미하는 것은 이미 말해진 것들로부터, 즉 “홍수” 그리고 “범람함”에 관한 내용들로부터 분명해진다; 그리고 “깊음의 샘들이 깨어졌다”와 “하늘의 큰 폭포가 열려졌다”가 시험인 바로 부터도 알게된다.

“사십 일 낮과 사십 일 밤”이 지속 기간을 의미함은 4절에서 살폈다. 즉 “40”은 시험이 크던 작던, 시험의 모두 각각의 지속 기간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 시험은 맹렬한 시험이고, 의지력 측면에서 있는 시험이다. 그 이유가 이어지는 쾌락들을 수단으로, 그리고 자기를 사랑함들과 세상을 사랑함들을 수단으로, 그 결과 이런 사랑들의 활동들과 연결된 그리워함들을 수단으로, 인간은 이런 사랑의 생명을 자신의 생명으로 획득해버렸기 때문이다. 이 생명은 천국의 생명과 일치됨은 불가능이다; 그 이유가 누구도 두 반대되는 사랑을 동시에 지닐 수 없기 때문이다. 세상적인 사랑은 아래쪽을 주시하고, 천국의 사랑은 위쪽을 주시한다. 우리는 자신을 아주 적게 사랑할 수 있고, 동시에 이웃을 적게 사랑할 수 있고, 그렇게 주님도 적게 사랑할 수 있다. 자신을 사랑하는 자는 자기를 섬기지 않는 자를 미워한다; 그리하여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은 자아를 사랑하기보다 이웃을, 무엇보다 먼저 주님을 사랑하는 천국의 사랑과 선행으로부터 아주 멀다. 이로부터 인간의 생명은 천국의 생명으로부터 얼마나 멀리 옮겨져 있는지 분명해진다. 그러므로 인간은 시험을 통하여 주님에 의해 거듭나진다, 그리고 (주님과) 일치됨 쪽으로 그를 데려다놓기 위해 (그를) 구부리신다. 이것이 시험이 맹렬하다 라고 말한 이유이다. 그 이유가 이 시험은 인간의 진짜 생명을 건드려야 하고, 그 생명을 공격하고, 파괴하고, 변형시키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것이 이런 말로 묘사되어지고 있다: “깊음의 샘들이 깨어졌다, 그리고 하늘의 큰 폭포가 열려졌다.”

인간 안에서 있게되는 영적 시험은 인간과 함께 있는 악령과 천사의 전투이다는 것, 이 전투는 그의 양심 안에서 흔히 느껴진다는 것은 이미 상술했다. 그리고 이 전투에 관하여 알고 있어야 하는 것은, 천사들이 계속적으로 방어한다는 것, 그리고 악령들이 그에게 가하려는 악들을 비키게 하고 있다는 것이다. 게다가 천사들은 인간에 있는 악하고 거짓인 것까지도 방어해주려 한다. 그 이유는 천사들은 인간의 거짓들과 악들이 어디로부터 인지를 잘 알기 때문이다. 즉 악령들과 악귀들로부터임을 진즉 알고 있다. 인간은 자신 스스로로부터 거짓과 악한 어떤 것을 생산할 수 없다, 그러나 그것을 생산하는 자는 그와 더불어 있는 악령이다. 악령은 생산함과 동시에 그것이 인간 스스로 생산한듯 인간을 믿게 만든다. 이런 것이 악령의 악의(malignity)이다. 더 나아가 악령은 생산한 악과 거짓을 인간에게 주입시키고 강제로 끌어들인 순간, 그 인간을 기소하고 정죄한다. 이에 관하여는 나의 많은 경험으로부터 확증할 수 있다. 주님에 대한 신앙을 가지지 않은 자는 그가 자신으로부터 악을 행한다고 믿지 않도록 (즉 악령 때문에 그 자신이 악을 행한다고) 납득하게 할 수 없다. 그 결과, 그는 악을 자기 것 되게 하고, 그와 더불어 있는 악령 같이 자기도 되어간다. 이와 같은 과정이 인간에게 있다. 천사들은 이를 알기 때문에 거듭남의 과정에서 인간의 거짓들과 악들 역시 방어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 그가 굴복당할 것은 당연지사 임을 알기 때문이다. 또한 인간에게는 악과 악에서 파생된 거짓 밖에 없어, 인간은 악들과 거짓들의 집단 또는 합성(체)에 불과하다.

그러나 영적 시험들은 오늘날 매우 적게 알려져 있다. 게다가 옛적에 있었던 영적 시험의 등급은 알도록 허용되어 있지도 않다. 그 이유는 인간이 신앙의 진리 안에 있지 않기 때문, 그러므로 굴복당할 것이 확실하기 때문이다. 이런 시험들 대신에 있는 시험과 유사하게 인간이 여기는 것은 불행, 슬픔, 걱정, 자연적, 육체적 원인으로부터 야기되는 것, 즉 병듦, 신체의 질병 등등인데 더 이상은 열거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이것들은 어느 정도까지에서 인간의 쾌락과 그리워함들의 생명을 복종시키고 깨뜨린다. 그리고 내면과 종교적 주제들을 생각하게 하여 위쪽을 향하게 하는 계기를 마련해준다. 그렇다고 이것들이 영적인 시험들은 아니다. 영적인 시험은 진리와 선에 관한 양심을 주님으로부터 받았던 이들에 의해서만 경험이 가능하다. 양심 자체가 시험의 평면(들판, plane, field) 이고, 이 안에서 그것들은 작업된다.

이제까지 시험들이 취급되어 왔다. 뒤이어지는 것은 시험의 끝, 또는 목적이다, 시험의 끝은 새로운 교회가 존재 안으로 와지는 것이다.

13절. 바로 그 날에 노아와 그의 아들들, 셈과 함, 그리고 야벳, 노아의 아내와 그의 아들들의 아내가 방주로 들어 갔다.

이제까지 “노아”로 불린 교인의 시험을 다루어 왔다. 먼저 이해력 측면의 시험이었다, 이는 신앙의 진리들이다 (6-10절). 그 다음 의지력 측면의 시험인데, 이는 선행의 선들이다. (11-12절). 시험들의 끝, 또는 목적은 태고 교회가 멸절됨을 바라보면서 시험을 수단으로 새로운 교회, 또는 (새로운 품성을 소유하는) 교인이 다시 출생하는 것이다. “노아”라 불린 이 교회, 이미 언급했듯이, 태고 교회와 아주 다른 품성, 즉 영적 (평면의) 교회, (또는 영적 종교) 였다. 이 교회 내지 이 종교의 특성은 (한마디로) 신앙 속의 교리적인 교훈들(precepts, 제재들, matters)을 수단으로 재 출생되는 것이다. (즉,) 이 교훈들이 심어진 후, 양심이 (거듭나는) 인간 안으로 서서히 주입되어지는데, (주입된 만큼에서) 인간 당사자는 신앙이 얼싸안고 있는 진리와 선에 거슬러 행동하지 못한다; 그리고 이렇게 진리와 선에 반대되는 행동을 하지 않음 가운데에 있는 그는 (주님으로부터) 선행(charity)이 증여되어지고, 이 선행이 양심을 통치하고, 통치된 양심으로부터 그는 행동하기를 시작한다. 이로부터 이제 영적 (평면의) 인간이 무엇인지 분명해있을 것이다; 이 인간은 선행없는 신앙이 (자기를) 구원하리라고 믿지 않고, 오히려 선행을 신앙의 본질로 삼고, 이로부터 행동하는 사람이 다. 이런 부류의 인간, 또는 교회가 일어나리라는 것이 예상되는 끝(end)이다. 그러므로 교회 자체가 다루어지고 있다. 교회가 지금 취급된다는 것은 같은 주제를 반복하는 것인냥 말해지는 대목에서 분명해진다; 즉, “바로 그 날에 노아와 그의 아들들, 셈, 그리고 함, 그리고 야벳, 그리고 노아의 아내, 그의 아들들의 세 아내들”이라고 말해졌다; 마찬가지로 7절에서, “그리고 노아는 들어 갔다, 그리고 그의 아들들, 그리고 그의 아내, 그리고 그의 아들들의 아내들, 방주 안으로 (들어 갔다).” 그러나 지금은 교회가 다루어지는 바, 아들들의 이름들, 셈, 함, 야벳이 라고 이름이 불려지고 있다. 세 이름이 명명될 경우, 이는 교회 속의 사람이 뜻해지고, 단지 아들들로만 명명될 경우, 이는 신앙 속의 진리를 뜻하게 된다. 이 외에도 방주 안으로 들어간 짐승들과 새들에 관한 8, 9절이 14, 16절에서 반복되어 말해지고 있으나 그 차이가 교회의 주제에 적용할 수 있고, 일치되고 있다.

그들은 방주 안으로 들어 갔다. 이것은 그들이 구원되었음(이 구원은 “노아”였던 교인, 그리고 여기서 말해진 이 사람들로부터 파생되고 이어지는 다른 교회들을 포함하여)을 의미하는것은 “방주로 들어감”에 관하여 이미 말해진 것으로부터 분명해진다.

“노아”에 의해서는 교회 속에 있는 것, “셈, 함, 야벳”에 의해서는 거기에서 파생된 교회에 속한 것을 의미하는 것은 여기서 7절 같이 아들들이라 말해지지 않고 그들의 이름들이 불러진 사실로부터 분명해진다. 그런고로 이름들이 불러질 때 그들은 교회의 사람을 의미한다. 교회의 사람은 교회 자체만이 아니라, 교회에 속하는 모든 것이다. 이는 교회에 속하는 것은 무엇이든 모두라고 납득하는 일반적 술어(통칭함)이다고 생각하면 된다. 이미 태고 교회에서 살폈듯, 이 교회는 “사람(man)” 이라 불리었다. 이는 이름으로 불러지는 다른 교회들도 마찬가지이다. 그런고로 “노아”에 의해, 그리고 “셈”, “함”, “야벳”에 의해 한 복합체에서 교회 속에 있는 무엇이든, 그리고 교회로부터 파생된 교회의 무엇이든, 모두가 의미되어진다.
위와 같은 것이 말씀에서 이야기되어지는 스타일이고 방식이다. 그런고로 예언서에서 “유다”라고 이름 불러지는 대목이 있으면, 거기서 천적 (평면의) 교회가 우선적으로 의미되고, 아울러 그 교회에 속하는 모든 것도 의미한다. 또는 “이스라엘”이 명명될 경우, 영적 (평면의) 교회가 우선적으로 의미되고, 아울러 이 교회 속에 있는 모든 것도 의미한다; 또는 “야곱”이 명명될 경우, 외적 교회가 의미되어진다; 그 이유가 교회의 모두 각각의 사람과 더불어서 교회의 내적 측면과 외적 측면이 있다. 진정한 교회는 내적 측면에 존재하고, 외적 교회는 내적 교회로부터 파생된 것인데, 후자가 “야곱”이다.
그러나 인간이 이름 불러지지 않을 경우는 상황이 달라진다. 그 이유가 이름이 불러질 경우, 그 불러진 이름이 주님의 왕국의 어떤 것을 표현하는 바, 불러진 이름을 듣는 이로 왕국의 어떤 것을 상기되게 하기 때문이다. 주님만이 사람이시고, 그분의 왕국의 모든 것 되신다; 그리고 교회가 땅 위에서 그분의 왕국인 바, 주님만이 교회의 모든 것 이시다. 교회의 모든 것은 사랑과 선행이다; 사람( 또는 이름에 의해 불러진 것)은 사랑 또는 선행, 즉 교회의 모든 것을 의미한다; 그 다음 그의 “아내”는 거기로부터 파생된 교회를 단순하게 의미한다. 여기서도 이와 같다. 그러나 “셈, 함, 야벳”에 의해 어떤 종류의 교회가 의미되는지는 차 후 주님의 신성한 자비로부터 말할 것이다.

“노아의 아들들”에 의해 교리적인 것들이 의미되는 것은 앞서 살핀 “아들”의 의미로부터 분명해진다; 그 이유가 교리적인 것들 없이 교회가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의 이름이 명명되고, 더불어 그의 “아들들”이라고 보태어 말하고 있다.

노아의 “아내”에 의해 교회 자체가 의미되고, “그들과 더불어 그의 아들들의 세 아내들”에 의해서는 이 교회로부터 파생된 교회 자체들이 의미되는 것은 방금 전에 말해진 것으로부터 분명해진다. 즉 교회의 사람이 이름 불러질 때, 교회의 모든 것이 뜻해진다는 것, 또는 이름은 교회의 머리인 것 같이 뜻해진다는 것이다; 그 다음 그의 “아내”가 교회 자체인 것은 앞에서 살폈다. “남자와 아내”, 또는 “남성과 여성”이 말씀에서 이름 불러질 때 다른 각도에서 불러진다는 말이다. 즉 “남자”와 “남성”은 이해력에 속한 것들을, 또는 신앙으로부터의 진리들을; “아내”와 “여성”은 의지력에 속한 것들을, 또는 신앙으로부터의 선들이 의미되어진다.

말씀에 있는 모두 각각의 표현은 주님으로부터 있기에, 표현 안에는 신성인 것을 가지고 있는 바, 각 단어, 내지 미소한 것(쉼표 등등)조차 어떤 것을 포함하거나 의미하지 않는 것은 없다. 여기서의 경우, 표현상 미소한 차이에 불과한 말들, 즉, “세 아내들”, 그리고 “그의 아들들의” 아내들, 또한 “그들과 더불어” 에도 차이가 있는 의미를 지닌다는 말이다. 그러나 우리가 이렇게 세세한 부분까지 짚고 넘어가기는 힘들 것 같다. 따라서 이런 말들이 지니는 일반적 취지만을 아는 것으로도 이 책의 역
할은 다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14, 15절. 그들, 그리고 각기 종류대로 모든 야생 동물, 그리고 각기 종류대로 모든 짐승, 그리고 각기 종류대로 땅에서 기는 모든 기는 것들, 각기 종류대로 모든 새들, 모든 나는 것들, 모든 날개 달린 것들. 그리고 그들은 노아에게 오고,15 둘과 둘, 생명들의 호흡이 있는 모든 육체가 방주로 들어 갔다.

“그들”에 의해 일반적으로 교회의 사람, 또는 이 교회 속에 있는 모든 것을 의미하는 것임은 방금 전에 언급한 사람들, 노아, 셈, 함, 야벳인 네 사람인데, 비록 넷이라 할지라도 다함께 하나를 구성한다는 것으로부터 분명해진다. “노아” 안에, 그를 수단으로 일반적 측면에서의 고대 교회가 뜻해지고, 마치 부모 또는 씨 같이 노아라는 교회로부터 파생된 교회들을 포함하였다; 이런 이유에서 “그들”에 의해 고대 교회가 의미되었다. “셈, 함, 야벳”이라 불리우는 모든 이런 교회들이 고대 교회라고 불리는 교회를 다함께 구성한다.

“각기 종류대로 야생 동물”에 의해 모두 각각의 영적 선이, “각기 종류대로 짐승”에 의해 모두 각각의 자연적 선이, 그리고 “땅 위를 기는 기는 것들”에 의해 감각적이고 물질적인 모두 각각의 선이 의미된다는 것은 앞서 서술되고 살핀 바 있다. 얼핏 읽고 판단할 경우, “야생 동물”이 영적 선을 의미할 수 없을듯 나타날런지 모른다; 그럼에도 이에 대한 진정한 의미는 표현의 시리즈로부터 나타나고 있다. 즉 첫 표현은 “그들”이고 이는 교회의 사람을 뜻한다; 다음은 “야생 동물”이고; 그 다음은 “짐승”; 마지막으로 “기는 것”으로 짜여져 있다. 이런 시리즈로 볼 때, “야생 동물”은 “짐승”보다 더 높은 가치와 특출한 것을 포함하게 된다. 또 하나 이유는 히브리어원에서 표현되는 “야생 동물”은 생 혼이 안에 있는 동물 또한 의미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기서 평범한 야생 동물이 뜻해지는 것이 아니라, 생 혼이 있는 모두 각각의 동물을 뜻한다. 그 이유가 단어가 같기 때문이다. “동물들”, “짐승들”, “땅위에서 기는 기는 것들”이 의지 부분에 속한다는 것은 이미 설명한 바 있고 이내 뒤잇는 곳, 즉 새들이 말해지는 곳에서 조금 더 살필 것이다.

본문에서 각각에 대해 “각 종류에 따라”라고 말해지는데, 그 이유는 모든 선들에는 종들(genera)과 속들(species)이, 영적 측면과 자연적 측면이, 파생되는 감각적이고 물질적인 선들이 있고, 영적 진리들도 마찬가지여서 그것들은 헤아릴 수 없기 때문에서 이다. 천국 안에, 모든 선들과 진리들, 천적 선들과 영적 선들은 그것들의 종들 안에서 아주 잘 구분되어 있고, 속들 안에서도 그러한 바, 그것들 중의 작은 것도 확실히 구분되고 있다; 그리고 그것들은 무수하여, 독특한 차이들을 말하려면 한도 끝도 없다. 이 정도로만 생각해도 인간의 지혜는 얼마나 하찮고 거의 존재하나마나 한지 모른다. 인간의 지혜는 어떤 것이 영적 선이고 영적 진리인지 모르고, 영적 선과 영적 진리가 무엇인지는 더 더욱 모른다. 천적, 영적 선들과 이로부터 파생된 진리들로부터 유출이 있어 자연적 선들과 진리들로 내려간다. 영적 선으로부터 흘러나가지 않은 자연적 선과 진리는 하나도 없다. 그리고 천적 선으로부터 흘러나가지 않은 영적 선은 하나도 없다. 그리고 모두는 같은 것으로부터 생명을 보존한다. 만일 영적인 것이 자연적인 것으로부터 철수한다면, 자연적인 것은 아무 것도 아닌 것이 되고 만다. 모든 것들의 근원은 이런 방식으로 존재한다; 모든 것들, 일반적이든, 세부적이든, 주님으로부터 있다; 그분으로 천적 평면(등급)이 존재한다; 그분으로부터 천적 평면을 통하여 영적 평면이 생겨난다; 영적 평면을 통하여 자연적 평면이 생겨난다; 자연적 평면을 통하여 물질적이고 감각적 평면이 생겨난다. 이것들 모두는 이런 방법을 통해서 그분으로부터 존재한다. 우리 모두 익히 아는 바, 생존(subsistence)은 존재 안으로 영구히 오고 있음을 말한다는 것이다. 존재 안으로 옴과 어떤 것이 생겨남에 관하여 위와 다른 개념을 가진 자들은 마치 자연을 예배하고 자연으로부터 어떤 것의 근원들을 연역하는 이들 같은 바, 그 원리는 확실히 죽은 원리이므로 숲의 들짐승의 공상들이 훨씬 더 제정신일지 모른다. 이러함에도 자기는 지혜에서 다른 이들보다 낫다고 착각하는 이들이 많은 것도 현실이다.

“각기 종류에 따라 모두 각각의 새”가 모두 각각의 영적 진리를, “날으는 것”은 자연적 진리를, “날개 있는 것”은 감각적 진리를 의미한다는 것은 새에 관해 설명한 40항으로부터 분명해진다. 태고인들은 인간의 생각들을 “새들”에 비유했다. 그 이유는 의지 측면에 상대적인 것인 생각들이 새들 같기 때문이다. 여기서의 언급은 “새” , “나는 것”, “날개 있는 것”으로 되어 있는데, 이는 인간에 있는 지적, 합리적, 감각적인 것과 같다. 이렇게 의미되는 이유를 성경의 다른 구절로부터 예증하여 의심이 없도록 해두는 것이 좋을듯 싶고, “새”가 등장하는 구절들에 방금 앞에서 살핀 “짐승”들도 등장하는 경우가 많으므로 다함께 살펴볼까 한다.
다윗서에서:
당신께서는 그분을 당신의 손들의 일들 위에서 지배권을 가지게 하십니다:
당신은 그분의 발 아래 모든 것들을 놓습니다; 모든 양과 수소들, 그렇습니다,
그리고 들판의 짐승들, 하늘의 새, 그리고 바다의 물고기 (시. 8:6-8).
위 구절은 주님을 두고 말해지고 있다. 그분의 다스림이 인간 위에, 인간에게 속하는 것 위에 있다는 것이 묘사되어 있다. 그렇지 않다면 “짐승들”과 “새들” 위에서 지배함이 뭐란 말인가? 다시:
열매 풍성한 나무들과 모든 삼나무들, 야생 동물과 모두 각각의 짐승,
기는 것들과 나는 새, 그것들이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하게 하자 (시. 148:9-10, 13).
“열매 풍성한 나무”는 천적 (평면의) 인간을 표시하고, “삼나무(cedar)”는 영적 (평면의) 인간을 의미한다. “야생 동물”, 그리고 “짐승”, 그리고 “기는 것”은 우리 앞에 있는 역사에서(본문에서) 같이 그들의 선들이다; “날으는 새”는 그들의 진리들이다; 이런 선들과 진리들로부터 그들은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할 수 있다. 야생 동물, 짐승, 기는 것들, 그리고 새들은 주님의 이름을 결코 찬양할 수 없다. (찬양할 수 있는 것은 새나 짐승이 아니라 사실상 인간, 인간 속의 것들이 아닐까?) 어떤 세속의 저작자라면 이런 표현을 과장법 문체로 이용할지 모르나, 주님의 말씀 안에는 과장법은 없고 오로지 표현해주고 의미하는 문체밖에 없다.
에스겔서에서:
바다의 물고기들, 그리고 하늘의 새들, 그리고 들판의 야생 동물,
그리고 땅 위에서 기는 모든 기는 것들, 그리고 땅의 얼굴 위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내 현존에서 흔들릴 것이다 (겔. 38:20).
위 구절에서 “짐승들”과 “새들”에 의해 이와 같은 것들(인간의 자연적 선과 영적 진리)이 의미되는 것이 분명하다. 그 이유는 물고기들, 새들, 그리고 짐승들이 흔들린다해서 어떻게 여호와의 영광을 기릴 수 있단 말인가? 이런 구절에 거룩한 것이 포함되고 있지 않다면 이런 표현이 거룩하다고 누가 상상할 수 있을까? 예레미야서에서:
나는 잘 보았다, 그리고 오, 거기에 사람이 없었다,
그리고 하늘들의 모든 새들이 달아났다 (예. 4:25),
위 구절은 모든 선과 진리를 표시하고 있다; “사람” 역시 사랑의 선을 표시하고 있다. 다시:
그것들이 불태워졌다, 그리하여 아무도 지나갈 수 없고, 사람들이 가축떼의 소리를
들을 수 없다; 하늘들의 새와 짐승이 달아났다, 그것이 가버렸다 (예. 9:10),
위 구절과 같은 방식에서 모든 진리와 선이 떠났음을 표시하고 있다.
그리고 다시:
얼마나 오랫동안 토지가 슬퍼하고, 모두 각각의 들판의 풀잎이 시들어야 합니까?
그 토지에 거주하는 자들의 사악함 때문에 그들이 말하기를, 그는 우리의 최후를
보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기 때문에 짐승과 새들이 다 없어졌습니다 (예. 12:4).
위에서 “짐승들”은 선들을, “새들”은 진리들을 표시하고, 이것이 멸해졌다. 스바냐서에서:
나는 사람과 짐승을 없앨 것이다, 나는 하늘의 새들과 바다의 물고기들을 없앨 것이다,
그리고 사악한 자와 더불은 장애물도 (없앨 것이다);
그리고 나는 지면의 얼굴로부터 사람을 멸절할 것이다 (습. 1:3).
위 구절에서 “사람과 짐승”은 사랑과 사랑의 선으로부터 있는 것들을; “하늘의 새들과 바다의 물고기들”이해력으로부터 있는 것들, 그런고로 진리로부터 있는 것들을 표시한다. 이것들이 장애물이라 불리우는 이유는 자연계의 짐승이나 새가 사악한 자에게 장애물이 되어서가 아니라 선들과 진리들이 사악한 자에게는 장애물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것들은 “사람”을 두고 말해진다는 말이다. 다윗서에서:
여호와의 나무들은 기대에 어긋나지 않는다, 레바논의 삼나무들은
(기대에 어긋나지 않는다), 거기에 새들이 자기들의 둥지들을 만든다 (시. 104:16-17).
“여호와의 나무들”과 “레바논의 삼나무들”은 영적 (평면의) 인간을 표시한다; “새들”은 영적 (평면의) 인간의 합리적, 또는 자연적 진리들을 표시한다, 이 진리들은 영적 (평면의) 인간에게 “둥지” 역할을 한다.
“새들이 가지들에 자기들의 둥지들을 만들 것이다”라는 흔히 사용하는 표현 형체가 있는데, 이 형체에서의 (둥지도) 진리들을 의미하고 있다. 에스겔서를 보자;
이스라엘의 높은 산 위에 나는 그것을 심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가지를
들어올릴 것이다, 그리고 열매를 맺는다, 그리고 훌륭한 삼나무이다; 그리고
그것 아래 모두 각각의 날개 있는 모두 각각의 새들이 거주할 것이다;
거기로부터의 가지들의 그늘에서 그들은 거주할 것이다 (겔. 17:23),
영적인 이방인들의 교회를 표시하고 있다. 이 교회는 “훌륭한 삼나무”이다; “모두 각각의 날개 있는 새”는 모두 각각의 종류로 있는 진리들을 표시한다. 다시:
하늘들의 모든 새들이 그의 굵은 가지들에 자기들의 둥지들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것의 가지들 아래 들판의 모든 야생 동물들이 새끼를 낳는다,
그리고 그것의 그늘 아래 모든 민족들이 거주할 것이다 (겔. 31:6).
이것은 아수르(Assur)를 두고 말해진다, 이는 영적 교회여서 “삼나무”라 불리운다; “하늘들의 새들”은 영적 교회의 진리들을 표시한다; “짐승들”은 영적 교회의 선들을 표시한다. 다니엘서에서:
거기로부터의 잎은 고왔다, 그리고 거기로부터의 열매는 많았다, 그리고 그것은
모두를 위한 음식 이었다; 들판의 모든 짐승들이 그것 아래 그늘을 가졌다,
그리고 하늘의 새들이 거기로부터의 가지들에 거주했다 (단. 4:12, 21).
위에서 “짐승들”은 선들을, “하늘들의 새들”은 진리들을 표시한 것은 모든 이들도 그렇다고 생각될 것이다. 그 이유가 인간을 위해 이런 의미를 전달하지 않으려면 새와 짐승이 거기에 산다고 말씀이 굳이 말해야 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이와 거의 비슷한 주님께서 말하신 대목이 있다.
하느님의 왕국은 누룩 씨의 한 알에 견주어 볼 수 있다. 사람이 이 씨를 가져다가
그의 동산에 던졌다, 그리고 그것은 자랐고, 그리고 나무가 되었다, 그리고
하늘의 새들이 거기로부터의 가지들에 숙박했다 (눅. 13:19; 마. 13:31; 막 4:31, 32).

“새”가 영적 진리를, “날으는 것”은 자연적 진리를, 그리고 “날개 있는 것”은 감각적 진리를 의미한다는 것; 그리고 진리들이 이런 식으로 구별된다는 것도 위에서 살핀 바에 따라 이미 분명해져 있을 것이다. 감각적 진리들, 이는 보는 것과 듣는 것에 속한 것들인데, “날개 있는 것들”이라 불리운다, 그 이유는 그것들이 가장 바깥 수준이기 때문이다; 또한 이것은 “날개”의 의미이기도 한데, 다른 것에 마찬가지로 응용된다.

지금 “하늘들의 새들”이 이해력에 속하는 진리들을 의미하는 바, 생각들도 의미한다. 그런고로 반대 의미일 경우, 공상들 또는 거짓들도 의미한다. 이것들은 인간의 생각 속에 있고 “새들”로 역시 의미되고 있다. 예를 들면, 사악한 자가 “하늘의 새들에게, 그리고 들짐승들에게 음식으로 주어질 것이다”라고 말해질 때, 공상들이나 그리워함들을 뜻한다는 말이다 (이. 18:6; 예. 7:33, 16;4, 19:7, 34:20; 겔. 29:5, 39:4). 주님 자신 역시 공상들이나 거짓 설득력들을 “새들”에 비교하신다:
길가에 떨어진 씨는 발 아래에서 뭉개졌다, 그리고 하늘의 새들이 와서
그것을 삼켰다 (마. 13:4; 눅. 8:5; 막. 4:4, 15),
위에서 “하늘의 새들”은 거짓들만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들은 노아에게 와서 방주 안으로 들어 갔다. 이는 그들이 구원되었음을 의미한다는 것은 이미 살폈다. “둘과 둘”이 쌍들을 의미하고 그것들이 무엇인지 창. 6:19에서 알 수 있을 것이다.

생명들의 숨이 있는 모든 육체. 이는 새로운 창조물을 , 또는 그들이 주님으로부터 새로운 생명을 받았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는 “육체(flesh)”가 일반적 측면에서 모든 인류이고, 특별한 측면에서 물질적 인간인 것으로부터 분명해진다. 이는 이미 말했다. 이로부터 “생명들의 숨이 있는 육체”는 거듭나는 인간을 의미한다, 그 이유가 거듭나는 인간 자신 안에 주님의 생명인, 선행과 신앙의 생명이 있기 때문이다. 모두 각각의 인간은 “육체”일 뿐이다; 그러나 선행과 신앙의 생명이 주님에 의해 그 사람 안으로 숨쉬어질 때, 육체는 살아있게 만들어진다, 그리고 영적 (평면의) 인간과 천적 (평면의) 인간이 되어간다. 그리고 새로이 창조되어 왔음으로부터 “새로운 창조물”이라 불리운다 (막. 16:15).

16절. 그리고 안에 들어간 그들, 하느님께서 그에게 명령하신 대로 모든 육체의 남성과 여성이 들어 갔다. 그리고 여호와께서 그의 뒤에서 닫으셨다.

15절의 “그들은…들어 갔다”로부터 16절의 “안에 들어간 그들…들어 갔다”까지를 (연결해보면), 교회가 “노아”라 불리운 이들 안에서 보존되어갔던 것으로 묘사되어 왔음이 엿보인다. 이제 이 교회의 상태가 뒤잇고 있다. 이 상태의 대략적인 것은 앞 구절로부터 살폈고, 지금은 세부적인 것, 이 교회의 상태의 품질이 묘사된다. 단 한 절, 단 하나의 단어도 이 교회의 특이함들을 포함한다는 것을 미리 염두하면 좋을듯 싶다. 그래서 지금 이 교회의 상태가 취급되었기 때문에 15절에서 말해진 것이 반복되는데, 여기서는 두 번 말해진다; 즉 “안에 들어간 그들, 모든 육체의 남성과 여성이 들어 갔다”라는 단어들에서 이다; 한편 15절의 경우, “그리고 그들은 노아에게로 와서 방주 안으로 모든 육체의 둘과 둘이 들어 갔다” 말씀에서 있는 이런 반복은 또 다른 상태를 취급함을 의미한다.

“안으로 들어간 그들”이 교회의 사람과 더불어 있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위 문단 항목을 통해 자연스럽게 명백해져 있을 것이다; 그리고 또한 이 말에 “모든 육체의 남성과 여성이 안으로 들어 갔다”가 뒤잇고 있다. 이는 거듭나는 인간과 더불어 모두 각각의 선들과 진리들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이유가 여러 번 말했듯이 “남성과 여성”은 진리들과 선들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하느님께서 그에게 명령하신 대로.” 이것은 그가(노아) 그것들(새 생명)을 받기 위해 준비되어 왔었음을 의미한다. 주님과 더불어, “명령”하는 것은 준비되는 것과 행하는 것이다.

그리고 여호와께서 그의 뒤에서 닫으셨다. 이는 천적 (평면에 있는) 교회의 사람이 누렸던 천국과의 교류 (방식)은 더 이상 없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아래 서술로부터 나타날 것이다. 태고 교회의 상태에서, 그들은 천국과 내적인 교류를 가졌다, 그리고 이런 교류로 천국을 통하여 주님과도 (연결되었다). 그들은 주님을 사랑함 안에 있었다. 주님을 사랑함 안에 있는 이들은 천사들과 같아서, 마치 각자가 다른 몸을 가졌으되 같은 옷을 입은 것이다. 그들의 내면들은 가리워져 있지 않았고, 주님으로부터조차 열리어져 있었다. 그러나 이 새로운 교회는 달랐다. 그들은 주님을 사랑함 안에 있지 않았다, 그러나 신앙 안에 있고, 신앙을 통하여 이웃을 향한 사랑 안에 있었다. 이런 상태는 태고인 같은 식의 내적 교류를 가질 수 없고, 외적 (교류는 가능하다). 내적 교류와 외적 교류의 본래의 모습은 설명하자면 너무나 길지 모른다. 모두 각각의 인간, 사악한 자까지도, 자기와 함께 있는 천사들을 통하여 천국과 교류를 가진다 (물론 교류 수준에는 차이가 있다). 그 이유가 이런 교류마저 없다면 인간은 존재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교류의 등급들의 차이는 끝이 없다. (하나 더 강조할 것은,) 영적 (수준의)인간은 천적 (수준의) 인간이 가진 교류는 할 수 없는데, 그 이유는 주님은 신앙 안에 계신다 라기보다는 사랑 안에 계신다 라고 말하는 편이 더 낫기 때문이다. 이것이 이 구절의 “여호와께서 그의 뒤에서 닫으셨다”에 의미되어 있다.
“여호와께서 닫으신” 이래 천국은 태고 교회의 사람에게 열려졌던 방식으로는 열린 적이 없다. 이에 대해 나는 모세와 아론, 그 외 다른 예언자들처럼 영들과 천사들과 많은 것을 이야기 했다. 물론 이 대화는 과거 예언자들과는 아주 다른 방법이고, 이는 차 후 언급할 기회를 주님의 신성한 자비로부터 가질 것이다. 이렇게 천국이 닫혀진 이유는 깊이 숨겨져 있다. 그리고 오늘날에도 그렇게 닫혀있는 이유로해서 사람들은 영들이 있다는 것을 모르고, 천사들이 자기와 더불어 있는 것은 더욱 모르고, 세상에서 동료가 없을 경우 자기는 홀로 있다 라고 , 자기는 스스로 생각하고 있다 라고 상상한다. 하지만 여전히 진리인 것은, 그는 영들의 집단 안에 계속적으로 있다는 것, 이 영들은 인간이 생각하는 것, 그가 의도하고 고안하는 것, 등등을 마치 세상에서 지켜본듯하게 충분하고 명백하게 주시하고 지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당사자는 천국이 닫힌 관계로 이런 것에 아주 무지해 있다. 이는 최고로 진리이다. 만일 그에게 천국이 열려있다고 가정하고, 그런데 그가 신앙이 없다면, 더욱이 신앙의 진리가 없다면, 그리고 선행 안에 있지 않다면, 열린 천국은 그 사람에게 지독하게 위험해질 것이다. 이것이 또한 아래 구절에 의미되어 있다:
여호와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쫓아내셨다, 그리고 그분은 에덴의 동산의 동쪽에서
그룹들을 놓아두셨다, 그리고 생명들의 나무의 길을 지키기 위하여 그 자체
회전하는 검의 불꽃(을 세워두셨다) (창 3:24, 301-303항 참조).

17, 18절. 홍수가 땅에 사십 일 동안 있었다, 그리고 물들이 불어났고, 그리고 방주를 덮쳤다, 그리고 방주는 땅으로부터 떠올랐다. 18 그리고 물들은 더욱 거세졌고, 땅에 더욱 불어났다. 그리고 방주는 물들의 얼굴 위에서 오가고 있었다.

“40”에 의해 “노아”라 불리는 교회의 존속 기간을 의미한다는 것은 4절에서 이미 살폈다. 그러나 17절에서는 “사십 일”이나, 4절에서는 “사십 일 낮들과 사십 일 밤들”이다; 그 이유가 4절의 경우 시험의 존속 기간이기 때문, 그리고 시험 안에 있는 “밤들”은 걱정, 불안들이기 때문.

“홍수”에 의해 교회를 침수시키려드는 거짓들을 의미한다는 것은 위에 보여준 것으로부터 이어진 의미이다. 그 이유가 “홍수” 또는 “범람”은 거짓들의 범람 밖에 더 없기 때문이다. 6절에서의 경우, “물들의 홍수”가 시험을 의미했다. 이 시험은 악령들이 인간 안에서 선동한 거짓의 범람이다. 여기서도 경우는 같으나 시험이 없는 상태에서이다. 그러므로 “물들의 홍수”가 아닌 “홍수”라고만 언급되고 있다.

물들이 불어났고 방주를 덮쳤다, 그리고 방주는 땅으로부터 떨어져 들어 올려졌다. 이는 이런 모습이 시험의 파동(fluctuation)이었음을 의미한다는 것. 그리고 “물들이 더욱 거세졌고 땅에서 크게 불어났고 방주는 물들의 얼굴 위에서 오가고 있었다”란 시험의 파동은 빈번히, 그리고 더 세차게 증가했음을 의미한다는 것은 “노아”라 불리는 이 교회의 상태가 무엇인지를 먼저 설명해두지 않으면 의미가 위와 같음을 분명히 할 수 없다. “노아”는 고대 교회는 아니었다. 그러나 고대 교회의 씨, 또는 부모격에 해당되는데 이미 말했다. “노아”는 “셈, 함, 야벳”과 더불어 고대 교회를 구성했다. 이는 태고 교회를 직접적으로 계승했다. “노아”라 불리는 교회의 모두 각각의 사람은 태고 교회의 후손으로부터 였다, 그리고 유전적인 악에 관련해서도 멸절된 후손의 것과 거의 같은 상태였다; 그리고 멸절된 후손과 거의 같은 상태의 인간은 (태고 교회 시절과 같은 방법으로는) 거듭나질 수 없었다. 그러므로 그런 품성을 상속받지 않은 이들의 거듭나는 방법으로는 영적 수준으로 되어야 한다. 그들의 유전적 품질이 무엇인지는 앞에서 서술되었다.
(주제가 더 명료하게 이해되도록) 예를 들면; 야곱의 씨로부터 있는 이들, 마치 유대인들 같은 이들은 이방인들이 거듭나지는 것 만큼 잘 거듭나질 수 없는데, 그 이유는 신앙에 반대되는 것을 선천적으로 가졌기 때문이다. 이는 원리들을 유아 때로부터 흡수해서 후에는 그것을 확증했기 때문 뿐 아니라 유전적 기질로부터도 있다. 이것이 유전적 기질로부터 타고났다는 것은 그들이 지닌 남다른 천성, 남다른 방식, 또한 남다른 모양새, 등등이 다른 사람들과 구별되는 것으로부터도 어느 정도는 감지된다. 이런 특질들을 그들은 상속으로부터 가지고 있다. 그리고 이것은 내면의 품질들과도 똑같다. 그 이유가 방식들이나 모양새들은 내면의 견본(type)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기독교 등으로) 전환된 유대인들은 진리와 거짓 사이에서 다른 사람보다 더 파동이 심하다. 위의 예는 고대 교회의 첫 사람들과도 같았다. 이들이 “노아”라 불리는 것은 그들이 태고 교회 사람들이라는 종족 또는 씨로부터 있기 때문이다. 이것들이 여기서 묘사된 파도의 넘실거림, 즉 파동(fluctations)들이다. 뒤이어지는 구절 안에 더 있다: 노아는 농부였다, 그리고 포도원을 창설했다; 그리고 그는 포도주를 마셨다, 취해졌다, 그리고 그의 천막 안에서 벌거벗은 채 누워있었다 (창. 9:20-21). 이들의 숫자가 아주 작았다는 것을 (주님께서) 나에게 분명하도록 해주셨는데, 그것은 그들이 좁은 면적의 방에 있고, 키가 크고 홀쭉한 모양새로 표현되어진 사실로부터 이다. 어쨌든 여전히 그들은 신앙의 교리적인 것들을 자기들 사이에서 가졌고 보존했다.

이 교회의 사람의 파동들이 여기서 묘사된다; 첫째로, “물들 (즉 거짓들)이 불어남”이 말해진다; 그 다음, 그것들이 “방주를 덮쳤다”, 그리고 방주는 “땅으로부터 떨어져 들어 올려졌다”; 이 후에 “물들이 거세졌다, 그리고 땅위에 더욱 불어났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방주는 물들의 얼굴 위에서 오가고 있었다.” 이 구절에 있는 파동의 각 등급을 설명하는 것은 너무 장황하고 지루해질런지 모르고 어쩌면 불필요할런지 모른다. 우리는 이 대목이 파동이 묘사되어 있다는 정도를 아는 것만으로 족할지 모른다. 따라서 우리는 방주가 땅으로부터 떨어져 들어 올려졌다, 그리고 물들의 얼굴 위에서 오갔다는 서술이 의미하는 것만을 언급할 것이다. 인간이 어떻게 악들과 거짓들에 (침수당함)으로부터 붙잡아 놓으시는(withhold)지를 알지 않으면 이 구절을 알 도리가 없다. 이것 역시 감추인 것들인 바, 간략히나마 설명이 필요할듯 싶다. 일반적으로 말하면, 거듭난 사람까지 포함해서 모두 각각의 인간은 만일 주님께서 그를 악들과 거짓들로부터 붙잡아 주시지 않으면 그는 자신을 지옥 안으로 곤두박질 할 것이다. 그야말로 그를 붙잡아 주심에서 한 순간만 놓여도, 그 순간 그는 지옥 안으로 돌진하고야 만다. 이것은 나로 하여금 (주님께서) 경험에 의해 알도록 해주셨는데, 그 일부가 말(horse)에 의해 표현되었음은 이미 소개했다. 이렇게 악들과 거짓들로부터 붙잡아 놓으심이 방주가 땅으로부터 떨어져 들어 올려짐, 그리고 물들의 얼굴 위에서 오감에 의해 의미되어진 승강(elevation)이다.

이 구절과 다음 절에 있는 “물들”이 거짓들을 의미함은 이 장의 시작에서 예증으로 제시한 말씀의 인용 구절로부터 분명해진다, 그리고 “홍수, 또는 물들의 범람함”이 취급된 6절에서도 분명해질 것이다. 이런 구절에서 물들이 범람함들이 황무해짐들과 시험들을 의미한다는 것은 이미 살폈다. 이것은 똑 같은 거짓들을 포함한다; 그 이유는 황무함들과 시험들은 악령이 선동한 거짓들의 범람해진 것 밖에 더 아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물들”이 거짓들을 의미하는 것은 말씀에서 “물들”은 일반적 측면에서 영적인 것, 이해력으로부터 있는 것, 추론으로부터 있는 것, 기억 속의 지식 속에 있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물들이 위와 같은 것들을 의미하기 때문에 물들은 또한 그 반대의 것들도 의미한다. 그 이유가 모든 거짓은 기억 속의 지식에 속해있는 어떤 것이고, 추론과 이해함으로부터의 것인듯 나타나기 때문이다. 또한 거짓들도 생각으로부터 있기 때문이다.
“물들”이 영적인 것들을 의미하는 것은 말씀에서 여러 구절로부터 분명해진다; 그리고 그것들이 거짓들 역시 의미하는 것도 분명해진다. 이미 인용한 구절에 더하여 아래에서 더 살피면 확증에 보탬이 될 것이다. 이사야서에서:
이 백성이 곱게 흐르는 실로아(Shiloah)의 물들을 거절했었다; 그러므로 잘 보라 주님께서
강하고 많은 강의 물들을 그들 위에 가져 온다, 그리고 그는 모든 그의 강둑들을
넘어갈 것이다 (이. 8:6-7).
위 구절에서 “곱게 흐르는 물들”은 영적인 것들을 표시하고, “강하고 많은 물들”은 거짓들을 표시한다. 다시:
날개들로 어둡게하는 토지에게 화가 있다, 이 토지는 에티오피아의 강들 저편에 있다;
이것이 바다위에 사절들을 보낸다, 그리고 물들 위에 파피루스로 만든 배들 안에
(태워 보낸다). 가라, 너희 민첩한 사절들이여, 이미 작정되었고(meted out)
짓밟은 민족에게로 (가라), 강들이 그들의 토지를 망쳐놓았다 (이. 18:1-2),
위 구절에서 거짓들이 “날개들로 어둡게 하는 토지”에서 표시되고 있다.
다시:
네가 물들을 지나갈 때 내가 너와 함께 있을 것이다, 네가 강들을 통과할 때에
그것들이 너를 침수시키지 못하리라 (이. 43:2).
위에서 “물들”, “강들”은 곤경들, 그리고 거짓들도 표시한다. 예레미야서에서:
너는 실로의 물을 마시려하여 이집트의 길에서 무엇을 하고 있으며,
네가 강들의 물들을 마시려고 아시리아의 길에서 무엇을 하느냐? (예.2:18),
위 구절 역시 “물들”이 추론으로부터의 거짓들을 표시한다.
에스겔서에서:
그런고로 주 여호비께서 말하신다, 내가 너를 마치 아무도 거주하지 않는 성들 같이
황무한 성을 만들 때, 내가 네 위에 깊음을 가져다 놓을 때, 그리고 큰 물들이
너를 덮을 때, 그 다음 나는 그것들과 더불어 너를 구덩이 아래로 가져다
놓을 것이다 (겔. 26:19-20).
위에서 “물들”은 거기로부터 있는 악들과 거짓들을 표시한다. 하박국서에서:
당신께서는 당신의 말들을 타고 바다를, 많은 물들의 습지를 밟으셨다 (합. 3:15),
위에서 “물들”은 거짓들을 표시한다. 계시록서에서:
그리고 뱀은 여인의 뒤에서 그의 입으로부터 강물 같은 물을 내뿜어 그녀를 시내를
수단으로 쓸어내버리려 하였다 (계. 12:15-16).
위에서 “물들”은 거짓들과 거짓말들을 표시한다. 다윗서에서:
위로부터 당신의 손을 보내시어, 저를 구출하여 큰 물들로부터, 외국인의 아들들의
손으로부터 해방되게 하소서, 그들의 입은 거짓을 말합니다,
그리고 그들의 오른손은 거짓의 오른손입니다 (시. 144:7-8).
“큰 물들”이 여기서 거짓들을 분명하게 표시한다; “외국인의 아들들” 역시 거짓들을 의미한다.

지금까지 “노아”, 또는 “노아”로 불린 거듭나는 사람을 다루어왔는데, 이들은 “방주” 안에 있었고, 물들 위에 “들어 올려져” 있었다. 지금부터의 주제는 물들 아래 있는, 즉 물들에 의해 가라앉혀진 태고 교회의 후손들일 것이다.

19, 20절. 물이 땅에서 극도로 거세졌다, 그리고 온 하늘 아래 있던 모든 높은 산들을 덮었다. 20 물은 십오 큐빗 위쪽에서 압도하고 있었다, 그리고 산들을 덮었다.
“그리고 물이 땅에서 극도로 거세졌다”란 거짓의 설득(persuasion)은 이런 식으로 불어남을, “온 하늘 아래 있던 모든 높은 산들을 덮었다”란 선행의 모든 선들이 소멸되었음을 의미한다. “십오 큐빗 위쪽에서 물들이 압도하였다, 그리고 산들을 덮었다”란 어떤 선행도 남아있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15”는 거의 어떤 것도 있지 않음을 의미한다.

지금부터 이 장의 끝까지에서 취급되는 주제가 절멸한 홍수 이전 사람들이다는 것은 묘사된 구절 속의 특이 사항들로부터 분명해진다. 이는 내적 의미 안에서 이 구절을 읽는 사람이라면 읽는 즉시 알 것이다. 이들은 실로 단어 하나만에서도, 또는 여러 단어들의 연결된 상황으로부터 금방 눈치챈다. 다른 주제들이 취해질 경우, 즉시 단어들이 달라진다, 또는 같은 단어들이라 해도 다른 연결을 짓는다. 그 이유는 단어들에도 영적 (평면의) 것에 잘 어울리는 것이 있는가하면, 어느 단어는 천적 (평면의) 것에 어울리기도 하기 때문이다. 또는 이해력 측면에, 잘 어울리거나, 어떤 단어는 의지력 측면에 잘 어울린다. 예를 들면: 단어 황무함(desolation)은 영적 (평면의) 것들을 서술하고, 황폐함(vastation)은 천적 (평면의) 것을 서술한다; “성(city)”은 영적 (평면의) 것을, “산(mouuntain)”은 천적 (평면의) 것들을 서술하는 등등이다. 그리고 (아주 특이한 사항은) 히브리 언어에서 단어들이 단어들의 소리를 수단으로 아주 흔히 구별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 이유가 영적 등급에 속하는 것들 안에서 첫 세 모음들이 지배적이다, 그리고 천적 등급에 속해 있는 단어들에서는 마지막 두 모음들이 지배적이기 때문이다. 이 구절에서 다른 주제들이 취급된다는 것은 이미 말한 바 있듯 (서술의) 반복됨으로부터도 알 수 있다. 즉 앞 절에서 말한 바 있는 “그리고 물들이 땅 위에서 극도로 거세어졌고…”가 여기서 다시 말해진다. 변경(switch)이 있다는 사실은 뒤잇는 모든 것으로부터 알아내질 것이다.

물들이 땅 위에서 극도로 거세어졌다. 이는 거짓의 설득력들이 (극도로) 불어났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는 “물”에 관해 말해진 것으로부터, 그리고 “물들”에 관한 것으로부터 분명해진다. 즉 홍수, 또는 범람함의 물들이 거짓들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거짓들, 또는 거짓인 것을 (진리라고) 설득해주려 함이 더욱 기승을 부리기에 “물들이 극도로 거세어졌다”라고 말해진다. 원어에서 이 표현은 최상급 표현이다. (여기서) 나는 거짓들을 가지고 거짓된 약속들과 거짓된 설득력들을 의미하려 하고 있다. 그리고 이것들이 홍수 이전 사람들 사이에 광대하게 불어났음은 앞서 말한 바로부터 분명해질 것이다. 인간들이 그리워함(yearning)들에 진리들을 뒤섞을 때, 또는 진리들이 자기를 사랑함과 세상을 사랑함을 편들게 만들 때, (거짓된) 설득력은 광대하게 불어난다; 그 이유가 이런 식의 수 천 가지 방법들로 인간들은 진리들을 악용하고, 자기 사랑과 물질주의에 진리를 강제로 동의하게 하려 들기 때문이다. 거짓 원리에 흠취되어 자신의 사상 기반이 되게 한 누군가가 있다면 자기가 배워 얻은 학식을 다 동원해서라도, 게다가 말씀으로부터도 근거 삼으려 하지 않을 자가 누가 있겠는가? 자신의 거짓 원리를 확증하려 어떤 것들을 말꼬리(lay hold)로 삼지 않을 이교가 있겠는가? 아마 일치하지 않는 것을 강제로라도, 별 수단을 다 동원해 설명하고 비틀고 하여 자기의 거짓 원리들은 불일치가 아니다 우기지 않는 이교를 당신은 본 적이 있는가?
예를 들면, 선행의 선들 없이도 신앙만으로 구원이 있다 라는 원리를 채택한 자가 있다고 하자; 그는 말씀(the Word)으로부터 신학의 전체 체계를 짜낼 수 있을까? 그리고 이런 구절, “나무는 그것의 열매로 알려진다”, “선한 열매를 맺지 않는 모두 각각의 나무는 찍혀서 불에 던져진다”에 관한 구절에는 하등 관심이 없어 생각해보려 하지도 않고 건너뛰는가? (마. 7:16-20; 12:33; 또는 3:10). 육체가 바라는 것에 따라 사는 것보다 더 자신에게 쾌락을 주는 무엇이 있을까? 이런 욕구에 눈꼽만치의 선행도 뒤따라 주지 않는 진리를 보태어 가지는 데도 구원은 여전히 가능할까? 인간이 (은근히) 막무가내로 편애하는 자기의 그리워함들이 그 인간의 의지력의 생명을 만들어 내고, 왜곡된 원리나 거짓된 설득력은 그 인간의 이해력의 생명을 만들어 낸다. 이 두 능력들이 하나를 만드는 때는 진리들, 또는 신앙의 교리물들이 그리워함들에 침수되는 때이다. 이리하여 모두 각각의 인간은 마치 혼이라도 되는 냥 그것들을 자신이 되게 만들어낸다. 이것은 사 후 그의 생명이 되어있게 된다. 그러므로 참된 것을 아는 것보다 인간에게 더 중요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우리가 참된 것을 알고, 알아낸 참된 것을 그대로 실행하는데 참된 것이 남용될 리 없다. 더구나 참된 것이 그리워함 안에 몽땅 침수되어 절멸하는 결과로 될 리가 없다. 영원히 사는 것에 심정의 초점을 맞추는 것 이상 우리가 무엇을 더 해야 한다는 말인가? 육체의 삶에서 자기 혼을 망가트리면, 그는 영원히 망가진 혼을 부여잡고 살아야 함을 누가 모를까?

전체 하늘 아래 있던 모든 산들이 덮혀졌다. 이는 선행의 모든 선들이 소멸되어졌음을 의미하는데, 이는 태고인들의 산들에 대한 의미로부터 분명해진다. 그들과 더불어 산들은 주님을 의미했다. 그 이유는 산들이 땅에서보다 더 높은 장소이기 때문이고 그들이 산들에서 그분을 예배했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산들”은 천적 (평면의) 것들 (또는 “지극히 높은 것”들이라 불리기도 함)을, 그 결과 사랑과 선행을, 이로부터 천적 (평면) 인 사랑과 선행으로부터의 선들을 의미했다. 그리고 반대 의미에서, 말씀은 자만심(conceit, vainglorious)이 강한 사람도 “산”이라 일컬었고, 그러므로 자기 사랑 그 자체를 나타내는데 사용하고 있다. 마치 어떤 것들의 시작이 땅 위 넘어 승강된 것들로부터인듯, 천국인듯, 말씀에서 태고 교회 역시 “산들”에 의해 의미되어지고 있다.
“산들”이 주님을 의미하고, 그분으로부터 있는 천적 (평면의) 모든 것들, 사랑과 선행으로부터의 선들을 의미하는 것은 말씀 속에서 인용한 아래 구절로부터 분명해진다. 인용 구절들은 세부적 측면에서 의미되는 사항들이다. 그 이유가 말씀에 있는 모든 것들은 일반적, 세부적 모두에서 각 구절이 의도하는 주제에 따라 의미를 가지기 때문이다. 다윗서에서:
정의 안에서 산들이 평화를 가져올 것이다, 언덕들도 (그리할 것이다) (시72:3).
위에서 “산들”은 주님을 사랑함을; “언덕들”은 이웃을 향한 사랑을 표시한다. 이는 태고 교회의 품질과 같다. 이 품성 때문에 태고 교회가 말씀에서 “산들”과 “언덕들”에 의해 의미되어진다. 에스겔서에서:
내 거룩함의 산에서, 이스라엘의 높음의 산에서, 주 여호비께서 말하신다,
거기서 전체 토지에 있는 이스라엘의 모든 가문들이 나를 섬길 것이다 (겔. 20:40).
위에서 “거룩함의 산”은 주님을 사랑함을; “이스라엘의 높음의 산”은 이웃을 향한 선행을 표시한다. 이사야서에서:
여호와의 집의 산이 산들의 꼭대기에 건립되고,
언덕 위 드높여있을 날이 나중에 있을 것이다 (이. 2:2),
위에서 “산들”은 주님을 표시하고, 이로부터 천적 (평면의) 모든 것이 있다. 다시:
이 산에서 여호와 체바욷은 모든 백성에게 살진 것들로부터의 축제를 만들 것이다,
그리고 그분은 이 산에서 덮음의 얼굴을 제거하실 것이다 (이. 25:6, 7).
위에서 “산”은 주님을 표시하고, 이로부터 천적 (평면의) 모든 것이 있다.
다시:
그리고 모두 각각의 드높은 산 위에 있을 것이다, 그리고 모든 언덕, 강들,
물들의 시내들 위에 (있을 것이다) (이. 30:25),
위에서 “산들”은 사랑의 선들을 표시한다; “언덕들”은 선행의 선들을 표시하고, 이로부터 “강들과 물들의 시내들”인 신앙의 진리들이 있다. 다시:
너희는 노래를 가질 것이다. 마치 거룩한 축제를 지킬 때의 밤에서와 같다;
그리고 심정의 즐거움을 (가질 것이다), 마치 누가 이스라엘의 바위 쪽으로,
여호와의 산으로 피리를 가지고 갈 때와 같다 (이. 30:29).
위에서 “여호와의 산”은 사랑의 선들에 관련하여 주님을 표시한다; “이스라엘의 바위”는 선행의 선들에 관련하여 주님을 표시한다. 다시:
여호와 체바욷께서 시온산 위에서, 그리고
그로부터의 언덕들 위에서 싸우기 위해 오실 것이다 (이. 31:4).
위에서와 다른 구절에서도 “시온산”은 주님, 그리고 천적 (평면의) 모든 것과 사랑이 있는 모든 것을 표시한다; 그리고 “언덕들”은 더 낮은 등급의 천적인 것, 즉 선행인 것을 표시한다.
다시:
오 시온아, (너는) 좋은 소식을 가져다 준다, 너는 높은 산으로 올라가라;
오 예루살렘아, (너는) 좋은 소식을 가져다 준다, 네 음성을 힘차게 들어올려라 (이. 40:9).
“높은 산으로 오르는 것과 좋은 소식을 가져다주는 것”은 사랑과 선행으로부터 주님을 예배하는 것이다. 이는 가장 안쪽이다. 그러므로 “가장 높다”고도 불리운다, 그 이유는 가장 안쪽의 상태는 가장 높은 상태라고 불리우기 때문이다. 다시:
바위의 거주민들이 노래하게 하자, 그들로 산들의 꼭대기로부터 외치게 하자 (이. 42:11).
“바위의 거주민들”은 선행 안에 있는 이들을 표시한다; “산들의 꼭대기로부터 외침”은 사랑으로부터 주님을 예배하는 것이다. 다시:
좋은 소식들을 가져다 주시고, 평화를 공표하시고, 선의 좋은 소식들을 가져다 주는
그분의 발이 산 위에 있음은 얼마나 아름다운지 (이. 52:7).
“산 위에서 좋은 소식들을 가져다 주는 것”은 사랑과 선행의 교리로부터 주님을 전파하는 것과 마찬가지 이다, 그리고 이것들로부터 그분을 예배하는 것이다. 다시:
산들과 언덕들이 당신 앞에서 노래를 일시에 쏟아낼 것이고,
들판의 모든 나무들이 손뼉을 칠 것이다 (이. 55:12).
위에서 “산들과 언덕들”은 사랑과 선행으로부터 주님을 예배함을; 그리고 거기로부터 파생된 신앙으로부터는 “들판의 나무들”이 표시한다.
다시:
나는 모든 나의 산들에 길들을 만들 것이다,
그리고 나의 큰 길들을 드높일 것이다 (이. 49:11);
위에서 “산들”은 사랑과 선행을 표시한다; 그리고 “길들과 큰 길들”은 거기로부터 파생된 신앙의 진리들을 표시하고, 그것들이 그들의 가장 깊은 안쪽과 같은 사랑과 선행으로부터일 때, 이것이 “드높여진다”라고 말해진다. 다시:
나에게 신뢰를 두는 자는 토지를 상속 재산으로 소유할 것이다,
그리고 내 거룩함의 산을 상속받을 것이다 (이. 57:13).
위는 주님의 왕국을 표시하고, 그 왕국 안에는 사랑과 선행밖에 없음을 표시한다. 다시:
나는 야곱으로부터 씨를 산출할 것이다, 그리고 유다로부터 내 산들의 상속자를
산출할 것이다, 그리고 내가 뽑은 (자)가 그것을 소유할 것이다 (이. 65:9).
위에서 “산들”은 주님의 왕국과 천적인 선들을 표시한다; 유다는 천적 (평면의) 교회를 표시한다. 다시:
그런고로 영원히 거주하는 높고 드높은 자들아, 이들의 이름은 거룩하다,
나는 높고 거룩한 장소에서 거주할 것이다 (이. 57:15).
위에서 “높은”은 거룩한 것을 표시한다; 그리고 이로부터 땅 위 너머 그들의 높이 때문에, 산들은 주님과 그분의 거룩한 천적인 것들을 의미한다. 이런 이유로 주님은 시내산으로부터 법을 선포하셨다. 아래 구절에서 사랑과 선행이 주님에 의해서도 뜻해지고, “산들”에 의해, (이 구절이 포함된 마태. 24, 25장에서) 시대의 종말에 관해 이야기하신다. 그분은 말하신다:
그때 유다에 있는 자들은 산들로 도망하라 (마. 24:16; 눅. 21:21; 막. 13:14),
위에서 “유다”는 황폐된 교회를 나타낸다.

태고 교회가 산들 위에서 거룩한 예배를 드렸기 때문에 고대 교회 역시 그렇게 했다. 이로부터 그 시절의 모든 표현적 예배에서, 그리고 모든 민족들에서 산들 위에서, 그리고 산과 비슷해지게 높은 장소를 건설하여 제물을 바치는 것이 유행했다. 이는 아브람에 관련된 역사로부터 분명하다 (창. 12:1; 22:2); 그리고 성전 건축 이전의 유대인들에 관련해서 (신. 27:4-7; 여. 8:30; 삼상. 9:12-14; 19; 10:5; 왕상. 3:2-4); 민족들에 관련하여 (신. 12:2; 왕하. 17:9-11); 그리고 우상숭배하는 유대인들에 관련하여 (이. 57:7; 왕상. 11:7; 14:23; 22:43; 왕하. 12:3; 14:4; 15:3, 4, 34, 35; 16:4; 17:9-11; 21:5; 23:5, 8-9, 13, 15).

위 모두로부터, “물들로 산들이 덮혀짐”에 의해 의미된 것이 분명해졌을 것이다. 즉 거짓된 설득들, 이것이 선행의 모든 선을 소멸했다.

물들은 십오 큐빗 위쪽에서 압도했고, 산들을 덮었다. 이는 남아있는 선행은 하나도 없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15”는 거의 어떤 것도 있지 않을 만큼 적다를 의미함은 창. 6:15에서 살핀 “5”의 의미로부터 분명해진다. “15”는 말씀의 스타일(style)에서, 내적 의미에서, 5와 10으로 구성되는데, “5”는 적음을 의미하고; “10”은 리메인스를 의미한다 (창. 6:3 참조). 이는 이 사람들과 더불어 어떤 리메인스도 남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그 이유가 거짓으로부터의 설득력들이 너무나 거세어져 그들은 모든 선을 소멸되게 했기 때문이다. 인간 안쪽에 저장된 리메인스에 관하여는 앞에서 살폈는데, 거짓된 원리들, 더 나아가 거짓으로부터의 설득력들이 홍수 이전 사람들과 더불어 창궐했기 때문에, 이들이 꺼낼 수 없도록 (영구히) 감추어두는 방법으로 (내적 통로를) 닫으셨다. 만일 그들이 꺼낸다면, 그들은 곧바로 왜곡되게 했을 것이다. 그 이유가 모든 진리를 거절하고, 모든 거짓은 흡입할 뿐아니라 가까이 접근하는 모든 진리를 악용하는 것이 설득력들의 생명이기 때문이다.

21, 22절 “모든 육체, 즉 땅에서 기는 것, 새, 짐승, 그리고 야생 동물, 그리고 땅을 기는 모든 기는 것들, 그리고 모든 사람이 죽었다. 22 코로 생명들의 호흡을 하고 있는 모든 것, 마른 육지에 있었던 모든 것이 죽었다.

그리고 땅 위에서 기는 모든 육체가 죽었다. 이는 태고 교회의 마지막 후손에 속하는 이들이 소멸되었음을 의미하는데, 이는 뒤잇는 말로부터 분명해진다. 거기서 그들의 설득력들과 그들의 그리워함들에 관하여 묘사되어진다. 우선 그들이 여기서 “땅 위를 기는 육체”라 불리우고 있다. 그 이유는 그들이 감각적이고 육체적(물질적인, corporeal) 수준으로 되어 갔기 때문이다. 감각적이고 육체적인 것들, 이미 말한 바 같이, 태고인들은 이것을 기는 것에 견주었다; 그러므로 “땅 위에서 움직이는 육체”가 말해질 때, 이는 오로지 감각적이고 물질적으로 치닫는 사람을 의미한다. “육체”는 일반적 측면에서 모든 인류, 그리고 특별한 측면에서는 감각적 인간을 의미한다는 것은 이미 살폈다.

여기서 주어진대로의, 홍수 이전 사람들에 대한 묘사로부터 태고인의 글쓰기 문체가 무엇이었는지, 예언적 문체는 무엇이었는지가 분명해진다. 여기로부터 이 장의 끝까지는 이 사람들을 묘사하고 있다. 이 구절에서는 그들의 설득력들에 관하여, 그리고 23절에서는 그들의 그리워함들에 관하여서 이다; 즉 그들은 먼저 그들의 이해력 에 속한 것들에 관하여, 그 다음 그들의 의지력에 속한 것들에 관하여 묘사된다. 물론 설득력이나 그리워함은 이해력과 의지력에 속한 것들은 실제로는 아니나 반대적 의미에서 이해력 측면과 의지력 측면이라 불릴 뿐이다. 다시 말해, 거짓으로부터의 설득력은 이해력에 속한 것은 결코 아니다. 그리워함도 의지력에 속한 것은 결코 아니다. 홍수 이전 사람들이 먼저 그들의 거짓 설득력에 관하여, 그 다음 그리워함들에 관하여 묘사되고 있다고 내가 말했는데, 그 이유는 21절에 포함된 것이 23절에서 반복되는데, 순서가 뒤바뀌었기 때문이다. 이것 또한 예언적 문체이다.
그 이유는 인간에게 두 생명들이 있기 때문이다; 하나, 이해력에 속한 것들; 다른 하나, 의지력에 속한 것들이다. 이 두 생명들은 서로로부터 완전히 구분된다. 인간은 이 둘 모두로부터 존재한다. 그리고 오늘날, 비록 그것들이 인간 안에서 분리된채로 있을지라도, 여전히 그것들은 이쪽에서 저쪽으로 흘러든다. 그리고 대부분을 위해서는 하나되어 있다. 그것들이 하나되는 것, 그리고 어떻게 그것들이 하나되는가가 많은 예증들에 의해 확고히 되고 명백히 만들어졌다. 인간이 이런 두 부분들, 즉 이해력과 의지력, 그리고 이쪽에서 저쪽 안으로 흘러듬에 의해 존재하기에, 인간이 말씀에서 묘사되어질 때, 인간은 이쪽 부분에 관하여, 그리고 다른 쪽 부분에 관하여 구분하여 묘사된다. 이런 이유로 같은 말이 다른 구절에서 반복된다. 반복됨이 없으면, 묘사는 불완전해진다. 여기서의 이해력과 의지력 측면의 경우는 다른 구절의 경우도 같다. 단지 그 문맥의 상황에 따라 그 주제로부터 발출되는 것에 일치하여 있을 뿐이다; 주제로부터, 즉 실지의 내용으로부터 분리된 어떤 것은 아무 것도 아니다는 말이다. 이런 이유에서 말씀 안에서도 각 구성하는 부분 안에도 전체와 비슷한 방법에서 묘사되고, 이 방법이야말로 묘사를 충만하게 한다.

설득력이 이 구절에서 먼저 취급되고, 23절에서 그리워함들이 취급된다는 것은 이 절에서 “새”가 먼저 언급되고 그 다음 “짐승”이 언급되는 것으로부터 분명해진다. 그 이유가 “새”는 이해력으로부터, 또는 추론으로부터 있는 것들을, “짐승”은 의지력으로부터 있는 것들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리워함들에 속하는 것들이 묘사될 경우, 23절 같이, “짐승”이 먼저 언급되고 그 다음 “새”가 언급된다; 그리고 말했던 대로, 이쪽 부분이 저쪽 부분으로 상호적으로 흐르고, 순서만을 뒤바꾸어 묘사하면두 부분에서 공히 충만한 묘사를 가진다.

새, 그리고 짐승, 그리고 야생 동물, 그리고 땅 위를 기는 모두 각각의 기는 것을 포함하여. 이것들은 그들의 설득력들을 의미하는데, “새”는 거짓인 것에 애착함을, “짐승”은 그리워함들을, “야생 동물”은 쾌락들을, “기는 것”은 육체적이고 지상적인 것을 의미하는 것은 “새”와 “짐승”을 다룰 때 이미 살폈다. “새들”이 이해력, 추론, 그리고 기억 속에 있는 지식에 속한 것을 의미하는 바, 그것의 반대되는 것 역시 의미한다. 즉 왜곡되고 악용된 추론, 거짓들, 거짓된 것에 애착함들을 의미한다. 홍수 이전 사람들로부터의 설득력들은 여기서 충분히 묘사되고 있다. 즉 그것들 안에 거짓된 것에 애착함, 그리워함들, 쾌락들, 육체적이고 지상적인 것들이 있다는 것이다. 이런 것들이 설득력들 내부에 있다는 것을 인간이 알아채지 못하는데, 그 이유는 거짓된 것을 원리라고, 거짓된 것으로부터의 설득력들을 믿으면서, 단순한 것, 하나의 일반적인 것만을 고집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실수를 많이 하고 있다. 그 이유는 사건의 경우마다 각각은 매우 다르다는 것을 간과했기 때문이다. 인간의 모두 각각의 애착도 모두 그의 이해력으로부터, 그리고 동시에 그의 의지력으로부터 그것의 본성과 존재를 끌어낸다. 다시 말해 인간 전체, 그의 이해력과 의지력 모두는 그의 각각의 애착 안에 있다는 말이다. 아주 사소한 애착의 범위까지도 그 안에 있다.
이것은 많은 경험을 수단으로 나에게 분명하게 만들어졌다. 한가지만을 예로 들면, 저세상에서는 영들의 품질을 그의 생각의 단 하나의 관념(idea)으로부터도 알 수 있다. 실로 천사들은 누구를 응시만 해도 즉시 그의 품성이 무엇인지를 어떤 실수도 없이 꼭집어 즉시 알아보는 능력을 주님으로부터 가지고 있다. 인간 속의 모두 각각의 생각, 애착, 그것이 아주 사소해도 그것 안에는 그 사람의 형상과 모습이 담겨 있다. 즉 그의 이해력, 그의 의지력으로부터의 어떤 것이 가깝게이든, 떨어져서이든 현존하고 있다는 말이다. 이런 방법에서 홍수 이전 사람들의 끔찍한 설득력들이 이 구절에서 묘사되었다: 즉 그들 안에 거짓인 것에 애착함들, 악한 것에 애착함들, 또는 그리워함들, 또한 쾌락들, 마지막으로 물질적이고 지상적인 것들을 묘사해놓고 있다. 이 모든 것들이 이런 설득력들 내부를 채우고 있다; 그리고 이렇게 일반적 측면에서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개인들, 설득력들의 지극히 작은 것에 이르기까지에서 물질적이고 지상적인 것들이 세력을 떨치고 있다. 만일 누군가 거짓된 것으로부터의 한가지 원리, 또는 설득력내에도 얼마나 많은 것들이 있는지 안다면, 금새 소스라치고 말리라. 이것은 지옥의 한 종류이다. 그러나 만일 그것이 순진으로부터, 또는 무지로부터 채용되고 있다면, 그 안의 거짓들은 쉽게 쫓아버려진다.

이 구절에 “모두 각각의 사람”이 첨가되어 있다, 이를 수단으로 위에 살핀 것들이 인간 안에 있음을 의미해주고 있다. 이는 앞서 진행하여 온 모두를 포함하는 일반적으로 결론내리는 구절이다. 이런 구절들은 자주 첨가되어진다.

코가 생명들의 숨의 호흡함이었던 모든 것. 이는 코가 생명들의 숨의 호흡함이었던 태고 교회로부터 있는 이들을 의미하고, 이 생명들이란 사랑과 사랑에서 파생된 신앙임은 전에 말했던 바로부터 분명해진다. 태고인들 사이에서, 생명은 “코 안에 있는 숨”, 또는 “호흡함”에 의해 의미되었다. 호흡이라는 육체의 생명은 영적 (평면의) 것들에 상응하고, 심정의 운동(motion)은 천적 (평면의) 것들과 상응한다.
여기서 “코가 생명들의 숨의 호흡함이었던…”라고 말해진다. 그 이유는 홍수 이전 사람들이 취급되기 때문에서이다. 이들에게는 유전적으로 그들의 선조들로부터 천적 (평면)으로부터의 씨를 가졌으나, 소멸, 또는 질식되고 말았다. 이 말들 안에는 감추여놓인 더 깊은 의미 또한 있다. 이에 관하여는 살폈다. 즉 태고 교회 사람은 내적 호흡을 가졌다는 것, 이 호흡은 천사들의 것과 일치한다는 것인데, 이에 관하여는 주님의 신성한 자비로 차 후 살핀다. 이 호흡은 내적 인간들의 모든 상태들에 일치되게 다양해졌다. 그러나 시간의 흐름에서 이 호흡은 그들의 후손들 안에서 바뀌어갔다. 결국 마지막 세대에서는 이 호흡이 지닌 천사 같은 것이 소멸되기까지 바뀐 것이다. 그러자 그들은 천사 같은 천국과 더 이상 호흡할 수 없었다. 이것이 그들이 절멸되는 진짜 원인이다; 그러므로 지금 말해지는 바, 그들의 “기한이 만료되었다(expired)”라고 말해진다. 그리고 코가 생명들의 숨의 호흡이었던 자들이 “죽었다”라고 말해진다.
이 때로부터 내적 호흡은 중단되었다, 그리고 천국과의 교류도 끊겼다. 그리고 이로 말미암아 천적 (수준의) 지각도 종료되었다. 그 대신 외적 호흡이 계승되었다. 천국과의 교류가 중지되었기 때문에, 고대 교회, 또는 새로운 교회의 사람은 더 이상 태고인 같은 천적 (평면의) 인간일 수는 없고, 영적 (평면의) 인간(은 되어질 수 있었다). 이에 관하여는 주님의 신성한 자비로부터 차 후 살핀다.

마른 [토지]에 있던 모든 것. 이것은 더 이상 생명이 없는 것, 그들의 죽어감은 그들이 기한이 다 찼다는 것을 의미함은 살펴 온 것으로부터 지금 뒤잇고 있다. 사랑과 신앙의 모든 생명이 소진되었기 때문에 “마른 [토지]”라고 말해진다. “마른 [토지]”란 거기에 물이 없다는 것, 즉 영적 (평면의) 것, 더욱이 천적 (평면의) 어떤 것도 없다는 말이다. 마치 영적, 천적 (평면의) 모든 것이 질식한 것과 같다. 이러한 상황의 이해는 조금만 주의를 기울이면 자신들의 많은 경험에서 알 수 있을 것이다. 최고로 거짓인 것 일지라도 그 견해들로 마음에 안착되어버린 것들에 기울어지기 시작하면, 고집 셈이 들러붙어 제아무리 거짓에 반대되는 것을 들이대도 꿈쩍하지 않고 듣는 것조차 불쾌해 한다; 그리하여 자기들 눈 앞에 진리가 버젓이 놓여도 자신들에게 그것들이 알려지게 내버려두지도 않는다. 한술 더 떠서 거짓된 것이 신성하다는 생각까지 얹어 숭배하기까지 한다. 그리하여 모든 진리는 퇴짜를 놓고, 자기들이 뒤집은 진리는 용인하는 바, 결국 공상들 안에 침수되는 것 뿐이다. 여기서 풀도, 물도 없는 “마른 [토지]”로 의미되고 있다. 에스겔서에서:
나는 강들을 마르게 만들 것이다, 그리고 토지를 악인들의 손에 팔 것이다;
그리고 나는 토지를 황무하게 만들 것이다, 그리고 거기로부터 있는 가득함도
황무하게 할 것이다 (겔. 30:12).
“강들을 마르게 만드는 것”은 영적인 어떤 것이 더 이상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예레미야서에서:
너의 토지는 마른 [토지]가 되어진다 (예. 44:22).
위에서 “마른 [토지]”는 황무해지고 쓸모 없어진 토지, 그리하여 진리와 선에 관한 어떤 것이 더 이상 없음을 표시한다.

23절. 그리고 그분은 지면에 있었던 모든 물질, 즉 사람으로부터 짐승까지, 기는 것까지, 하늘의 새들까지 파괴하셨다. 그래서 그것들은 땅으로부터 파괴되었다. 그래서 노아만이, 그와 함께 방주에 있었던 것들만이 남았다.

그리고 그분은 모든 물질을 파괴하셨다. 이는 자기를 사랑함 속에 있는 그리워함들을 의미하는데, 이는 뒤잇는 것으로부터 분명해진다. 거기서 그것들이 표현물들을 수단으로 묘사되고 있다. “물질(substance)”은 의지로부터 있는 것들을 서술하는데, 그 이유는 인간과 더불은 모든 것들은 의지로부터 일어나기 때문이다. 즉 의지로부터 존재 안으로 와져서 실존한다는 말이다. 의지력이 인간의 참 물질, 또는 인간 자체이다. 홍수 이전 사람들의 그리워함들은 자기를 사랑함 속에 있었다. 가장 보편적인 두 종류의 그리워함들이 있다. 하나는 자기를 사랑함에 속하는 종류와 세상을 사랑함에 속하는 종류이다. 인간은 자기가 사랑하는 것만을 바란다. 그러므로 그리워함들은 그의 사랑에 속한다. 이 사람들과 더불어 자기를 사랑함이 통치한다. 결과적으로 그리워함들이 통치한다. 그 이유가 그들은 자신들을 너무나 지독하게 사랑했는 바, 그들은 자신들이 신들이라고 믿게 되었고, 더 나아가 자신들보다 더 높은 신은 없다고까지 했다; 그리고 이것이 그들의 설득력이었다.

지면의 얼굴 위에 있는 것. 이는 태고 교회의 후손을 의미하는데, “지면”이 교회임으로부터, 그러므로 이 교회 속에 있는 것으로부터 분명해진다. 여기서 “지면의 얼굴 위에 있는 모든 물질”이 “파괴되었다”라고 말해졌을 때, 그 의미는 태고 교회에 속한 이들, 그리고 그들 품성 속에 있는 이들이 파괴되었다 이다. 여기서 “지면”이라 말해지는데, 21절의 경우 “땅”이라 말해진다. 그 이유는 교회는 이해력 측면에 속한 것으로는 결코 서술될 수 없고, 의지력에 속한 것이어야 서술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종교적 지식과 그것에 수반되는 합리적 설득력들은 의지력에 속하는 선행만이 교회, 또는 교회인을 구성한다. 필수적인 모든 것은 의지력으로부터 있다; 결과적으로 교리적인 것이 교회를 만들려면, 일반적으로, 세부적으로 반드시 선행을 주목하고 있어야 한다. 그 이유가 선행이 교리의 목적이기 때문이다. 이 목적으로부터 어떤 종류의 교리인지, 그리고 그것이 교회로부터 인지 아닌지도 분명해진다. 주님의 교회, 이는 마치 천국들에서 주님의 왕국같이 사랑과 선행으로만 구성된다.

사람과 짐승 모두, 그리고 기는 것, 그리고 하늘들의 새. 이 말들이 그들의 악의 본성을 의미하는 것; “인간”은 그 본성 자체; “짐승”은 그리워함들을; “기는 것”은 쾌락을; 그리고 “하늘들의 새”는 거기로부터 파생된 거짓들을 의미하는데 앞에서 설명이 있었으므로 세부적 설명은 생략한다.

그리고 그것들은 땅으로부터 파괴되었다. 이것이 결말이다는 것, 즉 태고 교회는 기한이 만료되었다는 것; 그리고 “노아만이 남았다, 그리고 방주 안에 그와 더불어 있던 것만이 남았다”는 새로운 교회를 구성한 그들은 보존되어졌다가 의미된다는 것; 그리고 “방주 안에 그와 더불어 있었던 것”에 의해서는 새로운 교회 속에 있던 모든 것들이 의미되는데, 더 긴 설명은 필요치 않을 것이다.

24절. 그리고 물은 일백 오십 일 동안 거세어져 있었다. 이는 태고 교회의 마지막 한계를 의미한다. “150일”은 마지막 한계, 그리고 처음을 의미한다.

이는 태고 교회의 마지막 한계를, 그리고 “150”은 마지막 한계, 그리고 처음을 의미한다는 것을 말씀 안에서의 경우, 자주 등장하는 단순한 숫자에 비해 적절히 확증하는 것이 쉬울 것 같지는 않다. 그럼에도 20절에서 살핀 “15”로부터 분명해진다. “15”의 경우, 거의 어떤 것도 있지 않을 만큼 적다를 의미한다; “150”의 경우, 15에 10을 곱해 얻는 방식으로 구성되고 있다. 10은 남아 있는 흔적(remaining trace, 또는 remains)을 의미한다. 적은 것을 곱하는 것(곱하여 적어지는 것), 예를 들면, 1/2을 곱하면(1/2×1/2) 1/4로 줄어가는… 1/10 하는 식으로 계속 줄어저 가게하는 곱하기이다. 그리하여 거의 아무 것도 있지 않게 되는 것, 결과적으로 끝장, 마지막 한계가 되는 것이다. 숫자 150은 8:3에서도 등장한다. 거기서, “물들이 150일의 끝에서 줄어들었다”라고 말해지는데, 같은 의미이다.
말씀에서 언급된 숫자들은 글자의 것으로부터 완전하게 (분리된 의미인) 추상적 측면에서 의미를 찾아서 이해되어야 한다. 숫자들은 글자 의미에 있는 역사적 시리즈를 함께 연결하기 위해서만 도입되어진다. 그런고로 “일곱”이 발생하는 곳에서 그것은 거룩한 것을 의미한다. 그리하여 숫자에 따라 자주 붙는 말들, 즉 치수나 시간들로부터서는 완전히 동떨어져 있다. 그 이유가 내적 의미를 지각하는 천사들은 치수나 시간 같은 것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없고, 숫자가 가리키는 것은 더 더욱 모른다; 그럼에도 천사들은 말씀이 인간에 의해 읽혀질 때, 그 말씀을 충분하게 이해하고 있다. 천사들은 말씀 어느 곳에서나 숫자가 읽혀질 때, 그들은 숫자라는 생각을 가질 수 없고, 숫자가 의미한 것에 대한 생각을 가진다. 천사들의 경우, 그들은 이 구절의 숫자에서도 그것이 태고 교회의 마지막 한계를 표시한다고 이해하고 있다; 그리고 다음 장 3절에서는 고대 교회, 또는 새로운 교회의 처음 한계를 표시한다고 이해한다.
***************************************************

창세기 제 8 장

성경: 창세기 제 8 장

1.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노아, 그리고 야생 동물 각각 모두, 그리고 방주에서 그와 함 께 있었던 짐승 각각 모두를 기억하셨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땅을 지나가도록 바람을 만드셨다, 그리고 물들은 줄었다.
2. 또한 깊음의 샘들과 하늘의 큰 폭포가 멈추었다, 그리고 하늘로부터의 비가 억눌렸 다.
3. 물들은 땅으로부터 가고 되돌아 오고 하면서 물러갔다. 그리고 일백 오십 일 이후 물들은 감소했다.
4. 그리고 방주는 일곱 째 달 십칠 일에 아라랏 산맥에서 휴식하였다.
5. 그리고 물들은 열째 달까지 가고 줄어들고 하였는데 열째 달, 첫 날에 산봉우리가 나타났다.
*********************************************************************
6. 그리고 사십 일의 끝이 왔을 때 노아는 그가 만든 방주의 창문을 열었다.
7. 그리고 그는 까마귀를 내보냈다, 까마귀는 나가서 물이 땅에서 마를 때까지 가고 되돌아 오곤 하였다.
8. 그리고 노아는 물들이 지면의 얼굴에서 줄어들었는지 여부를 보기 위해 자기로부 터 비둘기를 내보냈다.
9. 그리고 비둘기는 그녀의 발 바닥을 위한 쉼을 찾지 못하고, 노아에게 되돌아 왔다, 그 이유는 물들이 온 땅의 얼굴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노아는 그의 손을 내 밀어 비둘기를 잡았다, 그리고 자기에게, 방주 안으로 가져 왔다.
10. 그리고 그는 다른 칠 일을 더 머물렀다. 그리고 그는 다시 비둘기를 방주로부터 내어 보냈다.
11. 그리고 비둘기는 저녁 무렵 돌아 왔다. 보라, 비둘기 입에는 올리브 잎이 잡아뜯 겨 있었다. 그래서 노아는 물이 땅으로부터 줄어든 것을 알았다.
12. 그리고 그는 또 다른 칠 일을 머물렀다, 그리고 비둘기를 내보냈다, 그리고 비둘 기는 그에게로 다시 되돌아 오지 않았다.
13. 그리고 육백 년 그리고 첫 해, 시작에서, 달의 첫째에서 였다, 물은 땅으로부터 말랐다. 그리고 노아는 방주의 덮개를 벗겼다. 그리고 보았다, 그리고 보라, 지면은 말라 있었다.
14. 둘째 달, 이십 칠 일, 땅은 말랐다.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15. 그리고 하느님께서 노아에게 이야기하시어, 말하신다.
16. 너와 네 아내, 네 아들들, 너와 함께한 네 아들들의 아내들은 방주에서 나가거라.
17. 모든 육체로부터, 너와 함께있는 야생 동물 각각 모두, 즉 새와 짐승과 땅에서 기는 기는 것 각각 모두, 너와 함께 있도록 가져온 것들은 땅에서 자신들을 퍼져 나가고, 땅에서 열매를 많이 맺고, 번성하도록 하리라.
18. 그리고 노아는 나왔다, 그리고 그의 아들들, 그의 아내 그의 아들들의 아내들,
19. 야생 동물 각각 모두, 기는 것들 각각 모두, 새들 각각 모두, 땅에서 기는 것 각 각 모두, 그 가족들에 따라 방주에서 나왔다.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20. 그리고 노아는 여호와께 제단을 건축했다. 그리고 모두 각각의 깨끗한 짐승으로부 터, 그리고 모두 각각의 깨끗한 새로부터 가져왔다, 그리고 제단에서 태워바치는 제물들을 바쳤다.
21. 그리고 여호와께서는 휴식의 냄새를 맡으셨다. 그리고 여호와께서는 그분의 심정 에서 말하셨다. 나는 인간의 사건 때문에 더 이상 지면을 다시는 저주하지 않으 리라. 그 이유는 인간의 심정이 제조하는 것은 젊은 시절로부터 악하기 때문이다. 나는 내가 했던 것 같이 생명있는 모든 것을 더 이상 부수지 않으리라.
22. 땅의 모든 날 동안 파종기와 추수, 그리고 추위와 더위, 그리고 여름과 겨울, 그 리고 낮과 밤은 중단되지 않으리라.

각 절의 내적 의미

1절.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노아, 그리고 야생 동물 각각 모두, 그리고 방주에서 그와 함께 있었던 짐승 각각 모두를 기억하셨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땅을 지나가도록 바람을 만드셨다, 그리고 물들은 줄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기억하셨다. 이는 시험의 끝과 새롭게 함의 시작을 의미하는데, 이는 앞 뒤 문맥으로부터 분명해진다. “하느님께서 기억하셨다”는 특별히 그분은 자비하시다를 의미한다. 그 이유는 그분이 회상하심은 자비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시험 후에 특별히 서술된다. 그 이유는 이때 새로운 빛이 비추이기 때문이다. 시험이 계속되는 한, 인간의 입장에서는 그분이 안 계신듯 상상되는데, 그 이유는 그가 악귀로 말미암아서 이고, 심할 경우 자포자기함으로 까지 치닫는데, 이럴 경우 어떤 하느님도 있지 않다고 믿어질 뿐이다. 따라서 이 구절의 말, “하느님이 기억하셨다”라는 표현은 외관에 따른 표현인 바, 시험의 끝을 의미하고, 새롭게 함의 시작을 의미한다. 이 구절에서 “하느님”이 기억하신다고 말해지고, “여호와”가 기억하신다고로는 말해지지 않고 있다. 그 이유는 인간은 아직은 거듭남 이전의 상태에 머물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거듭나질 때, 이 장의 20, 21절에서 같이 “여호와”란 표현이 사용된다. 그 이유인즉, 신앙이 선행(charity)과 결합함이 아직 아니기 때문이다. 인간은 그가 선행으로부터 행동할 때, 처음으로 거듭나진다 라고 말해진다. 선행 안에 여호와께서는 현존하시지만, 신앙이 선행과 결합 이전일 경우, 신앙 안에도 완전히 현존하신다고 까지는 말해질 수 없다. 선행은 저세상에서 인간의 생명이고 그것만이 진짜 있음(being)이다; 그리고 있음 자체와 생명 자체가 여호와이신 바, 우리가 여호와를 받아들일 수 있는 삶을 만들기 이전일 경우, 우리와 함께 현존하신다고 말해지는 분은 “여호와”가 아닌 “하느님”일 수 밖에 없다.

“노아”에 의해 고대 교회의 사람이; 그리고 “방주 안에 그와 더불어 있는 모두 각각의 야생 동물, 그리고 모두 각각의 짐승”에 의해 고대 교회인에게 속한 모든 것이 의미된다는 것은 앞 장에서 “야생 동물”과 “짐승”을 말한 대목으로부터 분명해진다. 말씀에서 “야생 동물”은 두 가지 의미를 지닌다. 그 이유가 인간 안에 있는 죽은 것과 살아있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살아있는 것을 의미할 경우의 이유는 히브리어에서 살아있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태고인들이 자기들의 겸허함 안에서 자신들을 야생 동물들로서 인정했는데, 이 경우의 단어는 인간 안에 죽어있는 것의 유형(type)이 되었다. 본문에서일 경우, 두 가지 의미 모두가 한 복합체 안에있는 것으로 뜻해진다. 통상적으로 이는 시험 후 인간과 더불어 있는 것과 일치하는데, 이 상태 안에 살아있는 것과 죽은 것, 또는 주님에 속하는 것과 인간의 자기 자신에 속하는 것이 있다. 그리고 이 상태는 심하게 혼동된 상태여서 당사자는 무엇이 진리이고 선인지를 거의 알지 못한다. 그러나 주님께서 그것들을 질서 안으로 환원되게 해서 정리정돈해 주신다. 이는 이어지는 구절로부터 분명해진다. “야생 동물”이 인간 안에서 살아있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7:14로부터, 그리고 8:17, 19절로부터 알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죽은 것을 의미하는 것은 창 1-2장에서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땅을 지나가도록 바람을 만드셨다, 그리고 물들이 줄었다. 이는 모든 것이 각기 질서에 맞추어 배열됨을 의미한다는 것은 말씀에 있는 “바람”의 의미로부터 분명하다. 모든 영들, 선한 영이든, 악한 영이든, “바람들”에 비교되고 견주어지고 그렇게 불리워지기도 한다. 그리고 원어에서 “영들”은 “바람들”을 뜻하는 단어를 같이 사용하고 있다. 시험들 안에서 (이 구절의 경우 줄어든 물들), 악한 영들은 범람의 원인인데, 이 영들은 자기들의 공상들과 더불어 패거리지어 흘러들어 인간 안에 있는 자기들의 공상과 비슷한 공상들을 선동함으로 그 인간 자체를 침수시킨다; 그리고 이런 영들, 또는 그들의 공상들이 흩어질 때, 말씀에서 “바람”에 의해 행해진다고, 참으로 “동풍”에 의해 행해진다고 말해진다.
이것은 시험 동안 한 인간과 더불어서도 마찬가지 이다. 동요함, 또는 시험의 물들이 중단될 때, 이것은 일반적으로 인간과 더불은 경우인데, 나는 반복된 경험을 통해 이를 알게 되었다; 그 이유가 영들의 세계에서 악령들은 때로는 군대같이 단결하고, 이것 때문에 소동이 야기되는데, 그들이 다른 단결된 영들에 의해 흩어질 때까지 이어진다. 이 다른 영들은 오른쪽으로부터, 즉 동쪽 방위로부터 오고, 그들이 오면 악한 영들 안에 두려움과 공포가 엄습되어 도망가야만 한다는 생각 밖에 더 할 수 없게 한다. 이때 악한 영들과 제휴한 이들은 사방으로 흩어지고, 악한 목적을 위해 형성된 영들의 세계는 해체된다. 이렇게 흩어지게 한 영들의 군대가 (주님의) 동풍(the East Wind)이라 불리운다; 흩어지게 하는 방법들은 이 외에 무수하게 있는데, 역시 “동풍들”이라 불리운다. 이에 관하여 주님의 신성한 자비로부터 이후 살필 것이다. 악령들이 흩어질 때, 동요와 소동의 상태가 있으나 이 뒤에 고요함, 또는 침묵의 상태가 이어진다. 이는 시험에 있어온 인간과 더불어서도 같다; 그 이유가 시험에 있는 동안에서 그는 악령의 군대들 한 가운데 있으나, 그것들이 다 몰아내진 상태, 또는 흩어진 상태에서는 고요한듯 있기 때문이다. 이때 모든 것들이 질서 안으로 환원되어 배열됨의 시작이 있다.
어떤 것이 질서의 상태로 환원되기 앞서, 가장 통상적인 절차는 어떤 것들을 혼돈된 집단에로 되돌리는 것이다. 말하자면, 질서적인 것들과 함께 어울리지 못할 것들은 미리 떼어내는 것이다. 그 다음 주님께서 그 외의 모든 것을 질서 안으로 배열해 주신다. 이 과정은 자연에서 일어나는 것에 비교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자연에서도 전체적, 개별적으로 있는 모든 것들이 질서 안으로 환원되기 앞서 먼저 혼돈된 매체 안으로 환원하는 경우가 있다. 예를 들면, 잡다한(이질적인) 것이 무엇이든 흩뜨리는 폭풍이 대기에 있지 않으면, 공기는 결코 깨끗해 있지 못하고 해로운 것의 축적으로 치명적인 공기로 되어질 것이다. 인간 신체 안에서도 비슷한 경우가 있다. 피 안에 있는 모든 것들, 이질 성분이든 동질 성분이든, 모두 계속적으로, 연속적으로, 한 개의 심장 안으로 다 함께 뒤섞여 있기 위해 흐르지 않으면, 액체들이 치명적 교착 상태에 있을 것이고, 그래서 각각의 쓸모에 맞게 구분될 수 있는 방도는 없다. 인간의 거듭나는 과정 역시 이와 별반 차이가 없다.
“바람”, 특히 “동풍”은 거짓들과 악들의 흩어짐, 또는 악령들과 악귀들의 흩어짐 외에 더 아니다. 이후에 질서 안으로 배열됨인데, 말씀으로부터 알 수 있을 것이다. 이사야서에서:
네가 그들을 부채질 할 것이다, 그리고 바람이 그들을 운반해 갈 것이다,
그리고 회오리바람이 그들을 산산이 흐틀 것이다; 너희는 여호와 안에서
기뻐 환호할 것이다, 너희는 이스라엘의 거룩한 분 안에서 기뻐 할 것이다 (이. 41:16).
위에서 (떼지어 있던 것을) 흐트림(dispersion)이 “바람”에 비교되고 있다, 그리고 (모이지 못하게 산산히) 흩어버림(scatter)은 회오리바람에 비교된다. 이것은 악들에 관해서 이다. 그 다음 거듭나는 이들이 여호와 안에서 기뻐 환호할 것이다. 다윗서에서:
보라, 왕들이 자신들을 집합시켰다, 그들이 함께 지나갔다; 그들이 그것을 보았다,
그 다음 그들은 놀라워졌다; 그들은 낙담해졌다, 그들은 허겁지겁하였다;
떨림이 거기서 그들을 사로잡았다, 마치 해산하는 여인의 고통과 같다;
동풍으로 당신은 다르싯의 배를 부수십니다 (시. 48:4-7).
위에서 공포와 혼동이 동풍에 의해 발생했음을 묘사하고 있고, 이 묘사는 영들의 세계를 지나가는 것으로부터 취해지고 있다, 이는 말씀의 내적 의미에 포함되어 있다.
예레미야서에서:
그들의 토지를 놀람으로 만드는 것: 나는 적 앞에서 동풍으로 하듯이
그들을 산산히 흩어지게 할 것이다,
나는 그들이 평온함의 날에 얼굴이 아닌 목을 응시할 것이다 (예. 18:16, 17).
위에서도 마찬가지 방식에서 “동풍”은 거짓들의 흐트림을 표시하고 있다. 홍해가 말리워진 것, 그리하여 이스라엘의 아들들이 건너간 것 역시 비슷한 동풍의 표현이다. 출애굽기서에서:
여호와께서 밤새 내내 강한 동풍으로 바다를 뒤로 가게 하셨다,
그리고 바다를 마르게 만드셨다, 그리고 물들이 나뉘었다 (출. 14:21).
홍해에서의 물들의 의미는 본문의 홍수에서의 물들의 의미와 비슷하다. 사악한 자를 표현한 이집트인들이 익사한 것, 한편 여기서 “노아”로 표현된 거듭나는 자와 이스라엘의 아들들이 건너는 것도 의미 측면에서 비슷하다. “홍해”에 의해, “홍수”에 의해서와 같이 지옥에 떨어짐, 뿐만 아니라 시험이 표현되어지고 있다; 그런고로 “동풍”에 의해 물들의 흐트려짐, 즉 악한 자들이 지옥에 떨어짐, 또는 시험이 의미되고 있다. 이스라엘의 아들들이 홍해를 건넌 후 부른 모세의 노래로부터 분명해진다 (출. 15:1-19); 그리고 이사야서로부터:
여호와께서 이집트인의 바다의 혀를 파괴하실 것이다, 그리고 그분의 권능의 바람으로
그분은 그분의 손을 강 위에 흔드실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세게 쳐서 일곱 시내들이
되게 (하실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이 신발을 적시지 않고 행군하게 하실 것이다.
그리고 마치 그분이 이집트의 토지로부터 나오게 한 날에 이스라엘을 위해 있었던 것 같이, 아시리아로부터 남아있을 그분의 백성의 남은 자를 위해 큰 길이 있을 것이다
(이. 11:15, 16).
위에서 아시리아로부터 남아있을 그분의 백성의 남은 자를 위한 큰 길은 질서 안으로 배열하심을 의미한다.

2절. 또한 깊음의 샘들과 하늘의 큰 폭포가 멈추었다, 그리고 하늘로부터의 비가 억눌렸다.

여기로부터 6절까지는 시험 후, 이 교회인의 첫 상태가 취급되어진다. 이 구절에서는 시험의 중단이 의미된다. 그의 시험, 의지력과 이해력 모두에서의 시험은 이전에 다루었다. “깊음의 샘들이 멈춤”에 의해 의지력 측면의 시험의 중단이; “하늘의 큰 폭포가 멈춤”에 의해 이해력 측면의 시험의 중단이 뜻해지고 있다. 이 표현들이 이런 의미를 가진다는 것은 7:11에서 살폈다; 또한 “비”가 시험 자체를 의미하는 것도 7:12에서 살폈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생략된다.

“깊음의 샘들”이 의지 측면에서 있는 것에 관한 시험을, 그리고 “하늘의 큰 폭포”가 이해력 측면에서 있는 것에 관한 시험을 의미하는 이유는, 지옥에 의해 영향을 직접 받는 것이 의지 측면의 것들이기 때문이다. 이해력 측면의 것들은 이것이 의지로부터 있는 탐욕들에 침수되지 않고 있을 경우, 지옥의 영향을 직접 받지는 않는다. 의지력으로부터 있는 악들이 인간을 정죄하고 지옥으로 그를 내던진다, 그리고 거짓들의 경우, 그것이 악들과 결합되지 않은 이상 그렇게까지는 하지 못한다. 그 이유가 이해력은 의지력을 뒤잇기 때문이다. 이 서술이 진실인 이유는 거짓들 안에 있는데도 여전히 구원되어지는 아주 많은 사람들의 경우로부터 알 수 있을 것이다. 이런 경우는 자연적 수준의 선행과 자비 안에서 사는 이방인 사이에 많이 있다, 그리고 기독인들의 경우, 심정의 천진난만함 안에 신앙을 지닌 이들이 이런 경우에 포함된다. 그들의 무지함과 천진난만함은 그들을 너그럽게 봐주게 한다. 그 이유는 이것들 안에는 순진이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거짓들 안에서 자신들을 확증한 이들, 그리하여 거짓된 삶과 계약을 맺은 이들, 결국 모든 진리를 거절하고 내치는 이들의 경우는 위와 매우 다르다; 그 이유가 거짓으로부터의 이 삶은 진리와 선의 어떤 것이 수정되기 이전 반드시 황폐되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이보다 한 단계 더 나쁜 상황이 있다. 자신들의 탐욕들 아래 거짓들 안에서 확증한 경우이다. 이 경우는 거짓들과 탐욕들이 하나의 생명을 구성하기 때문이다; 이들은 자신들을 지옥에 풍덩 빠트린 자들이다. 의지 측면의 시험이 지옥들인 “깊음의 샘들”에 의해, 이해 측면의 시험들이 비를 오게하는 구름들인 “하늘의 큰 폭포”에 의해 의미되는 이유이다.

3절. 물은 땅으로부터 가고 되돌아 오고 하면서 물러갔다. 그리고 일백 오십 일 이후 물은 감소했다.

물은 땅으로부터 가고 되돌아 오고 하면서 물러갔다. 이는 참된 것과 거짓된 것 사이의 파동들을 의미함은 이미 말한 바로부터 분명하다: 즉 홍수의 물들, 또는 범람, 노아에 관련하여, 시험들을 의미했다; 그 이유가 주제가 여기서 시험 후 첫 상태를 의미하는 바, “물들이 가고 되돌아 오고 하면서 물러갔다”가 진리들과 거짓들 사이의 파동밖에 더 아니기 때문이다. 이 파동의 본래의 모습은 시험이 무엇인지 알지 않으면 알게 될 수 없다. 시험 후에 있는 것이 파동이기 때문이다. 시험이 천적 수준일 경우, 파동은 선과 악 사이에 있다; 시험이 영적 수준일 경우, 파동은 진리인 것과 거짓인 것 사이에 있다; 시험이 자연적 수준일 경우, 파동은 탐욕에 속한 것과 탐욕에 반대하는 것 사이에 있다.
시험들에는 많은 종류가 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즉. 크게 구분하면, 천적, 영적, 자연적 수준에서 이다. 천적 수준의 시험들은 주님을 사랑함 안에 있는 이들과 더불어서만 존재한다. 영적 수준의 시험들은 이웃을 향한 선행 안에 있는 이들과 더불어서만 존재한다. 자연적 수준의 시험은 위 두 수준의 시험들과는 구분된다. 이 시험은 엄밀히 말하면 시험이 아니고, 단지 세상에서의 불운, 질병, 또는 신체의 피나 다른 액체들이 악화된 조건들에 습격 당한 자연적 수준의 사랑들로부터 발생하는 근심 불안 일 뿐이다. 이것은 대단히 간략한 설명이지만 이로부터서도 시험이 무엇인지 짐작은 했으리라 본다. 따라서 (심신의) 고통과 걱정은 자신이 사랑하는 것에 반대하는 것은 무엇이든, 그것에 의해 야기되는 모든 시험의 수준에 공통되는 생산물이다. 그런고로 주님을 사랑함 안에 있는 이들과 더불어, 이 사랑이 습격 당하면, 가장 깊은 고통을 생산하고, 이는 천적 수준의 시험이다; 이웃을 향한 사랑, 또는 선행 안에 있는 이들과 더불어, 이 사랑이 습격 당하면, 양심의 고통이 생산된다. 이것은 영적 수준의 시험이다;
그러나 자연적 사랑 안에 있는 이들과 더불어, 이들이 시험들과 양심의 아픔(pang)들이라 부르는 것은 시험이 아니고, 그들의 사랑들이 습격 당함으로부터 일어나는 걱정들일 뿐이다. 이것들은 이 수준의 사람들이 자신의 명예, 재산, 명성, 쾌락, 신체적 생명, 등등 같은 것에 흠집이 나고 손실이 생기는 것이 예견되어 오는 느낌에서 발생되는 불안 걱정일 뿐이다; 그럼에도 이들의 곤경들은 선함 측면의 어떤 것을 쉽게 생산되어지게 해주는 특성이 있다. 더 나아가 자연적 수준의 선행 안에 있는 이들이 시험들을 체험하는 기회를 부여한다. 그 결과로 갖가지 종류의 이교도, 이방인, 그리고 우상숭배자들로 자기들이 흠모하는 자기들 신앙의 생명을 공격 당함으로부터 일어나는 곤경에 의해 시험을 맛볼 수 있다. 이것들은 영적 시험들을 흉내내는 비애(woe)들이다.

시험들이 끝났을 때, 흔들림(wavering)이 있다. 만일 시험이 영적 수준에서 였다면 진리와 거짓 사이에 흔들림이 있다. 이는 이렇게도 설명이 된다. 시험은 거듭남의 시작이다는 것; 그리고 모든 거듭남은 인간이 새로운 생명을 받는 것이 목적이다는 것, 또는 그가 생명을 받는다고 말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그리하여 사람 아님에서 사람이다로 되는 것, 또는 죽은 자로부터 살아있게 만드는 것, 그러므로 그의 이전 삶, 단지 동물적인 뿐인 삶이 시험들에 의해 파괴되는 것이기에, 그는 진리인 것과 거짓인 것 사이에서 흔들림을 경험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진리는 새로운 삶 속에 있고, 거짓은 옛 삶 속에 있다; 따라서 옛 삶이 파괴되지 않으면, 즉 이 흔들림이 거행되지 않으면, 어떤 영적인 씨도 뿌려지는 것이 불가능하다. 그 이유는 영적인 씨를 받을 지면(바탕)이 없기 때문이다.
어쨌든 이전의 삶이 파괴되고, 흔들림이 결과될 때, 인간은 진리와 선인 것을 거의 알지 못하고, 실로 진리인 것 같은 어떤 것도 거의 모른다. 예를 들면, 그가 선행의 선들을 곰곰이 되씹어 볼 때, 또는 사람들이 일컫는대로와 같이, 선한 일들에 관해서, 그리고 자기는 자신스스로로부터 그것들을 행할 수 없다 라고 하는 것이 맞는지 틀린지, 내가 행한 선한 일에 나 자신 공적이 있는지 없는지 등등에 대해 불명확함과 어두움 안에 있다는 말이다. 그리고 그의 자기 자신, 또는 자신 스스로로부터는 선을 행할 수 없음이 통보될 때, 나아가 누구도 공적을 소유하지 못한다는 것, 모든 선은 주님으로부터 있고, 모든 공적은 주님만에 속한다는 것을 통지받으면, 그는 놀라움에서 갈피를 잡지 못한다. 이 외에 신앙의 다른 문제들의 경우도 많다; 그러나 그의 마음의 불명확함과 어둠은 점진적으로, 분별적으로 계몽되어진다.
거듭남은 인간이 유아로 출생하는 것과도 같다. 유아 때의 그의 삶은 매우 희미하다; 그는 아는 것이 없다, 그러므로 먼저 유아는 사물의 일반적인 것들을 받는다, 이것은 점차 세부적으로 구분되어가서 일반적인 것들 안에 삽입되어진다. 그리고 구분된 세부적인 것들 안에 더 세세한 세부적인 것들이 있다. 세부사항들에 의해 예증된 일반적인 것들이 있다. 이런 식으로 아이들은 사물의 존재를 배울 뿐 아니라, 그것들의 본성과 품질까지 배운다. 영적 시험으로부터 빠져나온 이들의 경우도 이와 같다; 그리고 거짓들 안에서 있어온 이들의 저세상 삶과 황폐됨도 이와 비슷하다. 이 상태가 (영적) 흔들림(Fluctuation)이고, 이 구절에서 “물들이 가고 되돌아 오고 하면서 줄어들었다”에 의해 묘사되어 있다.

일백 오십 일 이후에 물들이 감소했다. 이는 시험이 중단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은 이 숫자가 끝남과 시작 점이라고 말해진 바로부터 분명해진다 (7:24 참조). 여기서는 흔들림의 종결(끝남, termination)과 새로운 삶의 시작을 의미한다.

4절. 그리고 방주는 일곱 째 달 십칠 일에 아라랏 산맥에서 휴식하였다.

“방주가 휴식하였다(rested)”가 거듭남을 의미하는 것은 이런 사실로부터 분명해진다. 즉 “방주”가 이 교회의 사람을 의미한다는 것; 방주 안에 포함된 모든 것은 거듭남의 사람 안에있는 모든 것들을 의미한다는 것은 이미 많이 살폈다. 그러므로 방주가 휴식한다 라고 말해질 때, 이는 이 사람이 거듭나있다를 뜻한다. 글자 의미의 연결로도 방주의 휴식함에 의해 시험 후 이어지는 흔들림들의 중단이 의미됨을 함축하는듯 엿보인다; 그러나 참되고 선한 것에 관하여 불명료함들과 의심들인 흔들림들이 쉽사리 중단되지 않고, 꽤 오래 존속한다. 이는 뒤잇는 구절들로부터 분명해진다. 이로부터 어떤 것의 계속성은 내적 의미에서는 다르다; 그리고 이 의미들은 신비적인 바, 이를 펼쳐 보이도록 내게 허락해 주셨다; 영적 (평면의) 인간도 천적 (평면의) 인간같이 시험을 견디어 낸 후 주님의 “휴식”이 있다; 영적 (평면의) 인간도 천적 (평면의) 인간같이 일곱 째 달이 되어간다 (천적 평면의 인간같이 일곱 째 날이 아님). 이렇게 천적 (평면의) 인간과 영적 (평면의) 인간 사이에 차이가 있는 바, 전자의 “휴식”은 원어에서도 안식일을 뜻하는 단어로 표현되고, 후자는 휴식을 뜻하는 또다른 단어를 사용해 표현하였다. 이 단어로부터 “노아”라고 이름지어졌다, 이는 “휴식”을 적절하게 뜻한다.

“일곱 째 달”이 거룩한 것을 의미함은 앞서 많은 설명이 있었다. 이 거룩함은 천적 (평면의) 인간에 관련되는 것에 상응한다 (2:3 참조): 즉 일곱 째 날은 신성하게 되어졌다는 것, 그 이유는 하느님께서 그 속에서 휴식하셨기 때문이다.

“열 일곱 째 날”이 새로이 있는 것을 의미함은 같은 숫자가 등장하는 7:11에서 말해진 것으로부터 분명해진다. 거기서 이 숫자는 시작을 의미한다; 그리고 모두 각각의 시작은 새로이 있다.

“아라랏 산맥”이 빛을 의미하는 것은 “산”이 사랑과 선행으로부터 오는 선을 의미함으로부터; 그리고 “아라랏”의 의미가 빛(light, 또는 a bit of light, lumen )임으로부터, 그리고 실로 거듭난 자가 향유하는 빛이다로부터도 분명해진다. 새로운 빛(lumen), 또는 거듭난 자의 처음의 빛(light, 또는 glimmer)은 신앙의 진리들에 관한 지식들로부터 그 빛의 존재를 가지는 일은 결코 없고, 오직 선행으로부터서만 가진다. 신앙의 진리들은 빛의 광선(rays, lucis) 같고, 사랑 또는 선행은 불꽃 같다; 거듭나있는 자의 빛(lumen)은 신앙의 진리들로부터가 아닌 선행으로부터 이고, 신앙의 진리들은 선행으로부터 파생된 빛의 광선이다. 그런고로 “아라랏 산맥”은 선행으로부터의 빛(lumen)을 의미한다. 이 빛이 시험 후 지각되어지는 처음의 빛이고, 처음인 바, 이 빛은 어둑하다. 그래서 충분한 빛(lux)이 아닌 빛의 조각(조금, lumen)이라 불리운다.

이상 살핀 바로 이 구절이 내적 의미에서 무엇을 의미하는지 분명해졌을 것이다. 즉 영적 (평면의) 인간은 선행으로부터 있는 새로운 지적인 빛(lumine)의 덕택으로 있는 거룩한 “휴식”이다는 것이다. 이 진리들은 천사들에 의해 다양함에서 아주 경이롭게, 그리고 질서에서 매우 기쁘게 지각되어지는데, 인간은 이를 천사 같은 생각에서는 단하나도 획득할 수 없지만, 거기에는 수천의 겹겹의 시리즈가 되어 천사와 인간에게 들어가 감화를 준다. 사실상 이와 같은 것들은 묘사가 가능할 수 없다. 주님의 말씀에서 이런 방식은 내적 의미 두루에 걸쳐 있다. 글자 의미에서 일지라도, 역사 그대로 안에서조차 그러한 바, 마치 본문, 즉 “방주는 일곱 째 달, 십칠 일, 아라랏 산맥에 휴식하였다”의 경우도 마찬가지 이다.

5절. 그리고 물은 열째 달까지 가고 줄어들고 하였는데 열째 달, 첫 날에 산봉우리가 나타났다.

그리고 물은 가고 줄어들고 하였다. 이것은 거짓들이 사라지기 시작하였음을 의미하는데, 이는 단어들 자체로부터, 뿐아니라 3절에서 살핀 바로부터 분명해진다. 3절의 경우, “물들이 가고 되돌아 오고 하면서 줄어들었다”인데, 이 구절에서는 “물들이 가고 줄어들고 하였다”라고 말해진다. 이 절도 앞 구절 같이 진리인 것과 거짓인 것 사이의 파동들이 의미되어진다. 그러나 여기서는 이 파동들이 감소하고 있다. 이미 말한대로 시험 후 파동들과 더불은 경우, 인간은 진리가 무엇인지 모른다는 것, 그러나 점차적으로 파동은 중단되어 간다는 것, 그리하여 진리의 빛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한 이유인즉, 인간이 이와 같은 상태 안에 있는 한, 내적 인간은 주님을 통하여 외적 인간 위에서 행동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내적 인간 안에 리메인스가 있는데, 이는 선한 것과 진리인 것에 대한 애착들이다. 이는 이미 살핀 바 있다; 외적 인간 안에는 그리워함들과 이로부터 파생되는 거짓들이 있다. 이 후자가 종속되거나 소멸되지 않는 한, 길은 내적 인간으로부터 선들과 진리들을 위해 열리지 않는다. 즉 주님으로부터 내적 인간을 통하는 길이 열리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시험들은 인간의 외적인 측면들이 종속되는 것, 그리고 그의 내적 측면들에 순종하게 하는 것에 목적을 두고 있을런지 모른다. 이는 이런 사실로부터 모든 이에게 분명해질지 모른다. 즉, 불행이나 병듦, 마음의 슬픔 같은 것에 의해 인간의 사랑들이 습격당하고 깨지고 한다면, 그의 그리워함들은 가라앉기 시작하고, 동시에 그는 경건하게 말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그가 이전 상태로 되돌아 오면, 그의 외적 인간은 우세하기 시작하고 내적 인간 따위는 거의 생각하지 못한다. 비슷한 상황은 육체의 것들이 소멸하기 시작하는 때인 죽음의 시간에서 발생한다; 그리고 이로부터 모든 사람은 내적 인간이 무엇인지, 그리고 외적 인간은 무엇인지; 또한 리메인스는 무엇인지, 그리고 어떻게 외적 인간 속에 있는 그리워함들과 쾌락들이 내적 인간을 통한 주님의 역사하심을 방해하는지도 알런지 모른다. 이로부터 또한 모든 이에게 명백해지는 바, 시험들, 또는 양심의 찌름이라 불리는 내적인 고통들이 외적 인간으로 하여금 내적 인간에 순종하게 하는 결과를 가져오는지에 대해서이다. 외적 인간이 순종한 결과란 이렇다: 선하고 참된 것에 애착함들이 그리워함들과 이로부터 파생되는 거짓들에 의해 방해받지 않고, 저항받지 않고, 질식되지 않는 것이다. 그리워함들과 거짓들의 중단됨이 여기서 “가고 줄어드는 물들”에 의해 묘사되어지고 있다.

“열째 달”은 리메인스 속에 있는 진리들을 의미하는 것은 “10”이 리메인스이다로부터 분명해진다; 그리고 위에서 말한 내적 인간에 있는 리메인스에 관한 것으로부터도 분명해진다.

“달의 첫째 날에 산들의 봉우리들이 나타났다”란 보이기 시작한 신앙의 진리들을 의미함은 “산들”의 의미가 사랑과 선행으로부터의 선들이다로부터 분명해진다. 인간이 거듭나질 때, 봉우리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그리고 양심을, 선행을 선물 받는다; 사랑과 선행의 선들로부터가 아닌 어떤 다른 바탕으로부터 신앙의 진리들을, 또는 산들의 봉우리들을 본다고 상상하는 자는 완전 잘못된 상상이다; 이것들 없이 유대인들과 모독된 이방인들도 완전 잘못된 상상으로부터 신앙의 진리들을 본다고 할런지 모른다. “산들의 봉우리들”은 나타나는 빛의 첫 여명이다.

이런 것들로부터 명백해지는 또 하나는, 모든 거듭남은 저녁으로부터 아침으로 진행한다는 것이다. 이는 창세기 첫 장, 인간의 거듭남이 취급되는 대목에서 여섯 번 서술된다. 2, 3절은 저녁을, 4, 5 절은 아침이 묘사되어 있다. 본문은 빛의 첫 여명, 또는 이 상태의 아침이 “산들의 봉우리가 나타남”에 의해 묘사되어지고 있다.

6절. 그리고 사십 일의 끝이 왔을 때 노아는 그가 만든 방주의 창문을 열었다.

그리고 사십 일의 끝이 왔다. 이것은 이전 상태의 존속 기간과 이어지는 상태의 시작을 의미한다는 것은 “40”의 의미로부터 분명해진다. 이 설명은 앞에서 있었다; 거기서, 주제는 시험이다. 그리고 “사십 일 낮들과 사십 일 밤들”이라 말해진다. 이는 시험의 존속 기간을 의미한다. 그러나 여기서의 주제는 시험 다음에 있는 상태이기 때문에, “사십 일 낮들”이라 말해지고 사십 일 밤은 아니다. 그 이유는 이렇다, 즉 선행, 이는 말씀 안에서 “낮”에 비교되어지고 “낮”이라 불리운다, 이 낮이 지금 나타나고 있다; 그리고 앞서 있는 신앙이 선행과 아직은 결합되어 있지 않은 상태는 “밤”에 비교되고 “밤”이라 불리운다 (창. 1:16에서와 다른 구절에서도). 달이 태양으로부터 빛을 받듯, 말씀에서 신앙은 선행으로부터 그것의 빛을 받기에 밤이라고도 불리운다; 그리고 이로부터 신앙은 “달”에 비교되고 “달”이라 불리운다. 그리고 사랑과 선행은 “태양”에 비교되고 “태양”이라 불리운다. “40일”, 또는 존속기간은 앞의 것과 뒤잇는 것 모두에 관계되는 바, “사십 일의 끝에서” 라고 말해진다; 그런고로 그것들은 이전 상태의 존속 기간과 지금 취급하는 이것의 시작을 의미한다. 여기서 시험 후 이 교회인의 두 번째 상태의 묘사가 개시된다.

노아는 그가 만든 방주의 창문을 열었다. 이는 신앙의 진리들이 나타나는 두 번째 상태를 의미한다. 이는 앞 절의 마지막 단어들로부터, 즉 “산들의 봉우리들이 나타났다”로부터 분명해진다; 이에 더하여 “창문”의 의미가 이해력, 또는 신앙의 진리임으로부터 더 알 수 있다; 그리고 앞 절과 마찬가지로 이로부터도 빛의 첫 여명이 있다. 이해함, 또는 신앙의 진리에 관하여가 “창문”에 의해 의미되는 것은 위에서도 관찰될런지 모른다. 즉 신앙의 진리는 사랑으로부터, 또는 선행으로부터가 아니면 가능하지 않다는 것, 마치 의지로부터 있지 않은 진정한 이해함은 없는 것과 같다. 만일 당신이 의지로부터 있는 것을 제거한다면, 이해함도 있지 않다; 그리고 만일 당신이 선행을 제거한다면, 신앙은 없다; 그러나 인간의 의지가 단지 탐욕일 때, 이 탐욕 안에 그의 이해력, 또는 신앙의 진리가 침수됨을 예방하기 위해, 주님께서는 경이로운 장치를 마련하셨는데, 그것은 양심이라는 매체를 수단으로 이해력 측면의 것과 의지력 측면의 것을 분리하는 것이다. 이 경이로운 섭리 없이 아무도 구원되어질 수 없었으리라.

7절. 그리고 그는 까마귀를 내보냈다, 까마귀는 나가서 물이 땅에서 마를 때까지 가고 되돌아 오곤 하였다.

그리고 그는 까마귀를 내보냈다, 까마귀는 나가서…가고 되돌아 오곤 하였다. 이는 거짓들이 여전히 혼란스러움을 만들었다를 의미하는데, 이는 “까마귀”와 “나가서…가고 되돌아오곤 하였다”의 의미로부터 분명해진다. 이에 관하여는 이후 더 말해질 것이다. 이 구절에서 거듭나지는 사람의 두 번째 상태가 묘사되는데, 이는 신앙의 진리가 마치 빛의 첫 여명과도 같이 나타나기 시작하는 때이다. 이 상태의 본성은 거짓들이 계속적으로 혼란함을 만들고 있음인데, 아침 해뜨기 직전의 어스름한 상태와 유사하다. 따라서 밤의 불명료함이 아직 남은 상태의 아침이다. 이것이 “까마귀”에 의해 묘사되어 있다.
영적 (평면의) 인간, 특히 거듭나기 이전일 경우, 그의 거짓들은 짙은 구름의 부분과 같다. 그 이유인즉, 그는 말씀에서 밝혀주는 것으로부터를 빼면 아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말씀의 대부분은 일반적 측면에서 서술하고 있다; 그리고 일반적인 사항(generals)은 구름의 한 부분 밖에 더 아니다. 그 이유가 모두 각각의 일반적 측면은 그것 안에서 수천의 세부 사항(partculars)들을 납득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각 세부사항들은 수천의 낱개들(singulars)에 속하는 사항들을 납득한다. 그리하여 모든 일반적인 사항들은 세부사항들로부터의 낱개 사항들에 의해 예증되어진다. 이런 것들은 인간에게 밝혀진 적이 없는데, 그 이유는 그것들은 어떻게 묘사하거나 마음에 품어 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것들은 (인간에 의해) 인정될 수도, 믿어질 수도 없다; 그 이유가 그것들은 인간 안에 존재하고 인간이 파괴되어지라고 쉽게 허용하지 않는 것인 감각의 오류들에 반대되기 때문이다.
천적 (평면의) 인간, 주님으로부터 지각을 소유하는 이 인간은 위 영적 인간과 아주 다르다; 그 이유가 이 인간 안에는 세부 사항들과 세부 사항으로부터의 낱개 사항들이 은근히 심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생각해 보자: 진정한 결혼은 한 남자와 한 아내와의 결혼이다; 그리고 이 결혼은 천국의 결혼을 표현한다. 그러므로 천국의 결혼은 이 결혼 안에 있을 수 있으나 한 남자와 여러 아내들과의 결혼 안에 있을 수 없다. 영적 (평면의) 인간은 이를 주님의 말씀으로부터 알고, 묵묵히 따른다, 그리고 여러 아내와의 결혼이 죄이다는 것을 양심의 차원에서 수용하고 있다; 그러나 더 이상은 아는 것이 없다. 그러나 천적 (평면의) 인간은 이 일반적 사항을 확증하는 수천의 것들을 지각한다. 그러므로 한 명 이상의 여러 아내와의 결혼은 생각만해도 혐오스러움을 느끼고 만다. 영적 (평면의) 인간은 일반적 사항들(지식들)만을 알고 있기에, 그의 양심 역시 일반적 사항들로부터 만들어내고 있다. 그리고 말씀의 일반적 사항들은 감각들의 오류들에 숙박하고 있기에, 하나 더 분명해지는 바는, 무수한 거짓들, 이것은 흩어질 수 없다는 것, 말씀의 일반적 사항들 자체가 무수한 거짓들에 인접해 있을 것이고 그것 안으로 은근히 불어 넣어지기까지 하고 있다. 이런 거짓들이 여기서 “나가서, 가고 되돌아오는 까마귀”에 의해 의미되어지고 있다.

“까마귀”가 거짓들을 의미함은 새들에 관해 말해진 것으로부터 일반적인 방법에서는 분명해진다. 즉, 새들은 이해력, 추론력, 기억 속의 지식으로부터의 것들, 또한 그 반대적 의미인 추론함들과 거짓들까지 의미한다. 이들 모두는 새들의 종류에 의해 말씀에서 묘사되고 있다; 온화하고, 아름답고, 깨끗한 새들에 의해서는 이해력으로부터의 진리들을; 그리고 게걸스럽게 먹고, 보기 싫고, 불결한 새들에 의해서는 거짓들이 묘사되어진다. 또한 진리와 거짓의 종류에 따라 다양하게 묘사된다. 조잡하고 짙은 거짓들이 올빼미들과 까마귀들로 묘사되어진다; 올빼미들은 그것들이 밤의 어두움에서 살기 때문이고, 까마귀는 그것의 색깔이 검기 때문에서 이다. 이사야서를 보자:
올빼미와 까마귀가 거기 안에 거주할 것이다 (이. 34:11),
위 구절은 유대 교회가 단지 거짓들 안에 거주함을 묘사하고 있다. 이 거짓들이 올빼미와 까마귀로 표현되었다.

“가고 되돌아 옴”이 그들의 상태였음을 의미하는데, 이 상태는 시험 후 인간의 첫째와 두 번째 상태 안에 있는 동안, 즉 거짓들이 주위를 나는 것, 가고 되돌아 오고 하는 것이 인간과 더불어 있는 거짓들임으로부터 분명해진다. 그 이유는 위에서 언급된 이유 때문, 즉 시험 후 첫, 둘째 상태의 인간은 가장 일반적인 것들에 관한 지식 안에만 있을 수 있기 때문에서 이다. 이런 일반적 지식 안으로 물질적, 감각적, 세상적인 것들로부터 일어나는 공상들이 흘러드는 바, 이것은 신앙의 진리와 일치하지 않는다.

물들이 땅에서 마를 때까지. 이는 외견상 거짓들의 흩어짐을 의미하는데, 이는 거듭나는 인간의 상태로부터 분명해진다. 오늘날 모든 이가 믿는 바는 이렇다: 인간 안에 있는 악들과 거짓들은 거듭나는 동안 완전히 분리되고 폐지되어진다는 것, 즉 인간이 거듭나게 될 때, 남아있는 악과 거짓은 없다는 것, 그는 물로 씻고 깨끗해지듯 정의롭고 깨끗하다는 것이다. 이 관념은 어쨌든 깡그리 거짓이다; 그 이유가 단 한 개의 악이든 거짓이든 폐지되어지듯 털어낼 수 없기 때문이다; 하여간 인간은 유아로부터 파생된 유전적인 것 모두, 행위와 행동에 의해 얻어진 모두가 남아 있는 바, 그가 거듭났다 해도 그에게는 여전히 악과 거짓밖에 더 없음은 사후 혼들의 삶에서 여실히 보여진다. 이렇게 숙고해보면 더 충분하게 이에 관한 진리를 파악할지 모른다. 즉 주님으로부터가 아니면 인간 안에는 선에 관한 것, 진리에 관한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것, 모든 악과 거짓은 인간의 자기 자신으로부터 이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인간, 그리고 영, 그리고 천사조차도 아주 작은 순간조차 라도 그 자신에 머물게 방치해두면, 즉각 지옥으로 돌진하고야 만다; 그러므로 말씀에서조차 천국은 순수하지 않다 라고 말해지고 있다 (욥. 15:15 참조). 이는 천사들에 의해 인정되는 바이고, 이를 인정하지 않는 천사는 천사들 사이에 있을 수 없다. 주님의 자비만이 그들을 자유하게 해준다. 그리고 그들을 지옥에서 끌어당기시어 그들이 그쪽으로 치닫는 것에서 보호하신다. 그들이 지옥 안으로 돌진함에서 주님에 의해 보호되는 것은 천사들에 의해 분명하게 지각되고 선한 영들도 조금은 지각한다. 악한 영들, 그들은 인간같이 이를 믿지 않는다. 이에 관한 설명은 차후 주님의 신성한 자비로부터 내 경험으로부터 말해질 것이다.
인간에게 잘 어울리는 생명은 악과 거짓 안에 존재하기 때문에 악과 거짓은 폐지시킬 정도로까지 털어내질 수 없기에, 주님께서는 신성한 자비로부터, 그분이 인간을 거듭나게 하시는 동안, 시험을 통하여 그의 악들과 거짓들을 굴복시킴으로 그것들은 죽은듯 하게 나타난다. 비록 죽은 것은 아니다해도 복종 상태이므로 그것들은 주님으로부터 있는 선들과 진리들에 맞서 싸울 수 없다. 또한 동시에 시험들을 통하여 주님께서는 선들과 진리들을 받는 새로운 능력을 주신다. 즉 주님께서는 선과 진리에 대한 애착들과 생각들을 그에게 선물함으로, 이것에 악들과 거짓들이 구부려질 수 있게 하신다, 그리고 인간의 일반 사항들 안에 세부 사항들을, 세부 사항들 안에 낱개 사항들을 삽입하시고, 이것들은 인간 안에 저장되나 인간은 이런 것을 아예 모른다. 그 이유는 그것들은 그의 납득력과 지각의 영역 쪽 내면에서 진행되기 때문이다. 이것들은 저장소, 또는 그릇의 역할을 담당하여 주님에 의해 선행이 은근히 심어질 수 있게 하고, 이 선행 안에는 순진이 담겨진다. 인간, 영들, 그리고 천사들과 더불은 이런 유연해짐에 의해 일종의 무지개가 표현될런지 모른다. 그리고 이런 이유 때문에 무지개는 언약의 표시로 만들어졌다 (창. 9:12-17 참조). 이 대목은 차후 살핀다. 인간이 이렇게 만들어내질 때, 그는 거듭나진다고 말하지만, 그의 모든 악들과 거짓들도 여전히 남아있다. 하지만 이제는 이와 동시에 그의 모든 선들과 진리들도 보존된다. 악한 인간과 더불은 그의 모든 악들과 거짓들은 그가 육체의 삶에서 그것들을 가졌던 것과 꼭같게 저세상에서도 되돌아와서 지옥의 공상들과 처벌로 바뀌어진다. 그러나 선한 인간과 더불어 그의 모든 선과 진리는 저세상에서 친구 관계 같이 선행으로부터, 순진으로부터 다시 불려나와 그것들의 즐거움들과 행복과 함께 강대하게 늘어나고 불어난다. 이런 것들이 물들의 마름에서 의미되어 있고, 이것이 거짓들의 외견상 흐트러짐이다.

8절. 그리고 노아는 물이 지면의 얼굴에서 줄어 들었는지 여부를 보기 위해 자기로부터 비둘기를 내보냈다.

“비둘기”는 거듭나지게 되는 인간과 더불어 있는 신앙으로부터의 진리들과 선들을 의미한다. 이는 말씀에서 “비둘기”의 의미로부터, 특별히 주님께서 세례 받으셨을 때 그분 위에 온 비둘기의 의미로부터 분명해진다. 마태복음서를 보자:
그리고 예수께서 세례 받으셨을 때, 그분은 물로부터 곧바로 올라오셨다,
그리고 보라, 천국들이 그분에게 열려졌다, 그리고 그는 하느님의 영이 비둘기
같이 내려오고, 그리고 그분 위에 오고 있다.
(마. 3:16; 요. 1:32; 눅. 3:21-22; 막. 1:10-11)
위 구절에서 “비둘기”는 신앙의 거룩함만을 의미한다; 그리고 “세례” 자체는 거듭남을 의미한다; 그런고로 일어날 새 교회에서 주님으로부터 거듭남을 수단으로 받아지는 진리와 선을 의미한다. 비슷한 것들이 유대 교회에서 태워바침과 제물로 바치는 어린 비둘기(young pigeon)들과 호도애(turtle dove)들에 의해 포함되고 표현되었다. 이에 관련된 성경 몇 구절로는 레. 1:14-17; 5:7-10; 12;6, 8; 14:21, 22; 15:14, 29, 30; 민. 6:10, 11; 눅. 2:22-24를 보면 명백해질 것이다. 이런 구절들이 어떤 것을 표현하지 않으면 성경 내에 있을 이유가 없다는 단 하나만의 숙고함으로도 이 구절이 지닌 의미에 긍정하리라 본다. 그렇지않을 경우 이 구절은 아무 의미도 없고, 신성에 관련된 것도 없게 된다. 교회의 외적인 것은 죽은 생명의 업무처리일 뿐이고 교회의 살아 있음은 내적인 것으로부터 이고, 이는 주님으로부터 있다.
“비둘기”는 일반적 측면에서 신앙의 지적인 것을 의미하는데, 이는 예언서에서 확인된다. 호세아서에서:
에브라임은 어리석은 비둘기 같고, 심정이 없다; 그들은 이집트라 불리운다,
그들은 아시리아로 갔다 (호. 7:11).
그리고 다시, 에브라임에 관하여:
그들은 이집트로부터의 새 같이 두려워져 있을 것이다, 그리고
아시리아의 토지로부터의 비둘기 같이 두려워져 있을 것이다 (호. 11:11).
위에서 “에브라임”은 총명한 자를, “이집트”는 지식을 가진 자를, “아시리아”는 합리적인 자를, “비둘기”는 신앙의 지적인 것들로부터 있는 것을 표시한다; 그리고 여기서 역시 주제는 영적 교회의 거듭남이다. 다시 다윗서에서:
오 여호와시여, 당신의 호도애의 혼을 들짐승에게 넘기시지 않습니다 (시. 74;19);
위에서 “들짐승”은 선행 없음으로부터 있는 이들을 표시한다; “호도애의 혼”은 신앙의 생명을 표시한다. 또한 새들에 관해 말해진 것도 참조하라. 즉 그것들은 지적인 것들을 의미하되, 온화하고, 아름답고, 유용한 새들은 지적인 진리들과 선들을; 그러나 맹렬하고, 보기 흉하고, 쓸모 없는 새들은 반대적 의미, 또는 거짓들을 의미하는데, 이 구절의 까마귀와 같고 여기서 비둘기에 반대되어 있다.

그리고 그는 보기 위해 자기로부터 비둘기를 내어 보냈다. 이는 신앙의 진리들과 선들을 받는 상태를 의미하는데, 이어지는 구절들로부터, 즉 시험 후 이 사람의 거듭남의 세 상태들을 취급하는 대목으로부터 분명해진다. 세 상태가 세 번 비둘기를 내어보냄에 의해 의미되어 있다. 여기서의 말들은 대략적으로 그가 탐구함을 포함하고 있다; 그 이유가 그가 “보려고 자기로부터 비둘기를 내어 보냈다”라고 말해지기 때문에서 이다. 즉 물들이 줄었는지; 즉, 선들과 진리들이 받아질 수 없을 정도로 거짓들이 아직도 널려있는지를 보려고 해서 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님의 경우, 탐구는 필요 없다, 그 이유가 그분은 일반적, 세부적, 모두를 알고 계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내적 의미에서의 단어들은 탐구가 아닌 상태를 의미한다, 그리고 여기서는 첫 상태, 거짓들이 아직도 방해하고 있는 때를 의미하는데, 이것이 “물들이 줄었는지 여부를 (보려고)”라는 말들에 의해 의미되어져 있다.

“지면의 얼굴들”이 교회인 안에 있는 여러 가지 것들을 뜻한다는 것, 그리고 “지면”이 언급된 이유는 이것이 인간이 교회가 되어가는 첫 상태이기 때문이다는 것은 “지면”이 교회인이다고 살핀 대목으로부터 분명해진다. 신앙의 선들과 진리들이 교회인 안에 뿌려질 때, 그는 “지면”이라 불리우나, 뿌려지기 이전의 경우에서는, 그는 “땅”이라 불리운다. 예를 들면, 창세기 첫 장에서 인간이 천적 수준의 품성을 획득하기 이전에서 그를 땅으로 묘사되나; 그가 천적 수준의 품성을 획득한 2장에서는 그를 “지면”과 “들판”으로 묘사한다. 본 장의 경우도 비슷한 바, 단어 “땅”과 “지면”으로부터는 내적 의미에서 의미되는 것이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이는 이 대목 뿐만 아니라 말씀 두루에 걸쳐 그러하다. “지면”에 의해 보편적 의미에서는 교회가 의미된다. 그리고 교회, 교회의 사람이 의미되는 바, 교회의 각 개인도 교회이다.

9절. 그리고 비둘기는 그녀의 발 바닥을 위한 쉼을 찾지 못하고, 노아에게 되돌아 왔다, 그 이유는 물들이 온 땅의 얼굴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노아는 그의 손을 내밀어 비둘기를 붙잡았다, 그리고 자기에게, 방주 안으로 가져 왔다.

여기서 시험 후 이 교회인의 거듭남의 첫 상태가 묘사되어 있다. 이 상태는 거듭나지는 모두에게 공통되는 상태이다; 즉, 그들은 자신들로부터 선인 것을 행하고 진리인 것을 생각한다고 상상한다; 그 이유는 그들이 아직은 큰 희미함 안에 있기 때문인데, 주님께서는 그들이 그렇게 상상하는 것을 내버려두신다. 그러나 이런 상상함에 있는 이상, 그들이 행한 선, 그들이 생각하는 진리는 신앙으로부터의 선과 진리가 아니다. 그 이유가 인간이 자신으로부터 생산하는 것은 무엇이든 선일 수 없다, 그 이유는 그것이 인간 자신으로부터 이기 때문, 즉 불순하고 가장 불결한 근원으로부터 이기 때문이다. 이 불순하고 불결한 원천으로부터 선은 나갈 수 없다. 그 이유가 인간은 언제나 자신의 공적과 정의만을 생각하기 때문이다; 어떤 이들은 자신과 비교해 타인을 경멸하기조차 한다 (주님께서 이를 눅. 18:9-14에서 가르치신다). 그 외 여러 방법들에서 인간은 실수 투성이이다. 인간 자신의 그리워함들은 그 자체를 뒤섞는 방식을 추가해서 바깥쪽에서 볼 때는 선 인듯 나타나게 하나, 내향적으로는 더러울 뿐이다. 이런 이유로 이 상태에서 행하는 선은 신앙으로부터의 선이 아니다. 그가 생각하는 진리 측면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그가 참된 것을 생각할지라도, 그가 자신의 것으로부터 일 경우, 실로 생각하는 것이 신앙의 진리라 할지라도, 신앙의 선은 그 안에 없다; 그래서 모든 진리, 신앙의 진리이기 위하여서는 반드시 그것 안에 주님으로부터 받는 신앙의 선을 지녀야만 한다. 이것이 처음으로 선과 진리가 되는 때이다.

그러나 비둘기는 그녀의 발바닥을 위한 쉼을 발견하지 못했다. 이는 신앙의 선과 진리가 아직 뿌리를 내릴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는 “비둘기”의 의미가 신앙의 진리를 의미함으로부터, “발 바닥을 위한 쉼”의 의미가 뿌리를 가짐이다로부터 분명해진다. 이것이 뿌리를 내릴 수 없다고 말해진 이유는 뒤잇는 것 안에서 말해지는데, 즉 거짓들이 여전히 넘쳐흐르고 있어서 이다. 그러나 뿌리를 내릴 수 없는 이유는 영적 (평면의) 인간의 거듭남이 어떻게 결과되는지를 알지 않으면 가능치 않다.
이 인간과 더불어 신앙의 지식들은 주님의 말씀으로부터 그의 기억 안에, 또는 말씀으로부터의 교리물로부터 그의 기억 안에 심어지게 된다 (고대 교회는 태고 교회에 밝히 알려진 것으로부터 신앙의 지식들을 가졌다). 따라서 영적 (평면의) 인간은 그의 마음의 지적 측면이 가르쳐지게 된다. 그러나 거짓들이 그 안에서 넘쳐흐르는 한, 신앙의 진리들이 씨뿌려져 보았자, 뿌리를 가질 수 없다. 이 진리들은 지면만에 남아있다. 즉 그의 기억 안에만 남아있다. 지면이 이 씨에 적합한 지면이 되어있지 않아서, 즉 그 안의 거짓들이 나타나지 않게 몰아내어지지 않아서 이다.
영적 (평면의) 인간과 더불은 진짜 지면은 그의 지적 마음(intellectual mind)에 준비되어진다. 이 지면이 준비되었을 때, 선행의 선이, 이로부터 양심이 주님에 의해 은밀히 심어지고, 이후에 이 인간은 양심으로부터 행동한다. 즉 양심을 통하여 주님께서는 신앙과 연결하여 선과 진리를 결과 안에 가져다 놓으신다. 그런고로 주님께서는 영적 (평면의) 인간의 지적인 것들을 그의 의지로부터의 것들과 구분되어 있게 장치해두셨다. 그리하여 그것들이 결코 하나로 있지 못하게 만들어 놓으셨다; 그 이유가 그것들이 하나로 있으면, 그는 영원히 멸해질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태고 교회의 사람과 더불어 의지로부터의 것들은 이해력으로부터의 것들과 하나되어 있었다. 마치 천적 천사들과 같다. 그러나 이 고대 교회의 사람과 더불어 그것들은 하나되지 않았고, 이는 어떤 영적 인간에게 있어서도 그러하다. 실로 그가 행하는 선행의 선은 마치 그의 의지로부터 인 것처럼 나타나나, 이것은 외관 상일 뿐이고 오류이다. 그가 행하는 선행의 선은 주님만으로부터 있고, 그의 의지를 통하여가 아닌 그의 양심을 통하여 있다. 만일 주님께서 잠간이라도 그의 의지로부터 행동하게 내버려둔다면, 그는 선 대신 악을 자기의 증오, 복수, 잔인함으로부터 행동한다.

위와 같은 경우는 영적 (평면의) 인간이 생각하고 말하는 진리 측면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그가 양심으로부터 생각하고 말하지 않으면, 또는 주님으로부터 있는 선으로부터 생각하고 말하지 않으면, 그는 빛의 천사를 덧 쓴 악마가 생각하고 말하는 것 밖에는 더 아니다. 이 모든 것은 다른 삶에서는 대단히 명백하다. 이런 설명들로부터 어떤 방식에서 거듭남이 결과되는지, 그리고 영적 (평면의) 인간의 거듭남이 무엇인지 분명해진다: 즉 사실상, 그의 지적 부분은 그의 의지 부분으로부터 분리되어 있다는 것, 이 분리 수단은 주님께서 그의 지적 부분에 만들어 놓은 양심을 수단으로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양심으로부터 행해지는 것은 무엇이든 그의 의지로부터인 듯 나타나나, 실지로는 주님에 의해 행해진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녀는 방주로 그에게로 되돌아 왔다. 이는 선과 진리가 마치 신앙으로부터인 것처럼 나타남을 의미하는데, 이는 말해진 것과 뒤잇는 것으로부터 분명해진다. 내적 의미에서, “방주로 돌아감”은 해방(liberation)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해방은 방주로부터 나가고 되돌아 오지 않음에 의해 의미되기 때문이다. 이는 이어지는 구절로부터 분명해진다, 즉 12절에서, 그는 비둘기를 내보냈다, 그리고 그녀는 더 이상 그에게로 다시 되돌아 오지 않았다; 그리고 더 나아가 15-16절로부터, 노아는 방주로부터 나가라고 명령받는다; 그리고 18절에서, 그는 나갔다. “방주”는 거듭나기 전 이 교회인의 상태를 의미하고, 이 상태 안에 그는 포로된 신세, 또는 감금된 신세같이 있었고, 악들과 거짓들에 의해, 또는 홍수에 의해 사방에서 에워싸여 있었다. 이런 상태인지라 비둘기는 방주로 그에게로 되돌아 온 것이고, 이는 비둘기에 의해 뜻해진 선과 진리가 인간에게 다시 되돌아 왔다가 의미되어진다. 그 이유가 인간이 자신으로부터 행했다고 상상하는 선은 무엇이든 그에게 되돌아가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그가 그것을 자신으로 간주하기 때문이다; 그가 선을 행할 때, 그는 이 선이 세상에서, 또는 천사들 앞에서 과시되기를, 그리고 천국의 한 자리가 그의 것이기를, 기왕이면 천국에서 큰 자이기를 욕심내기 때문이다. 이런 등등은 인간의 자기 자신 안에, 인간 생각의 도처에 스며있다. 단지 바깥쪽 형체에서만 선과 진리인듯 나타날 뿐이다. 신앙으로부터의 선과 진리는 가장 안쪽 측면의 세계로부터 있는 내향의 선과 진리이다; 즉 신앙으로부터의 모든 선과 진리는 주님으로부터 인간의 가장 안쪽 세계를 통하여 주님으로부터 흐르고 있다. 그러나 인간이 행하는 것이 그의 자기 자신으로부터, 또는 자기의 공적으로부터일 때, 내면들은 더러워지고, 외면들은 깨끗한듯 나타난다; 마치 곱다란 모양새를 풍기는 더러운 음녀와 같을지 모른다. 아마도 흰 수의로 둘둘 말아놓은 에티오피아와 이집트의 미이라일 것이다.

그 이유는 물들이 온 땅의 얼굴 위에 있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여전히 거짓들이 넘쳐흐르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는 홍수의 “물들”의 의미가 거짓들이다로부터 분명해진다. 또한 단어들 자체로부터도 명확해진다.

그리고 그는 자기 손을 내밀어 그녀를 잡았다, 그리고 그녀를 방주로 자기 안으로 가져 왔다. 이는 그의 자신의 힘을, 그리고 그는 자신으로부터 선인 것을 행했고, 진리인 것을 생각했음을 의미하는데, 이는 “손”의 의미가 힘(power)이다는 것으로부터 분명해진다. 여기서의 경우, 자신의 힘으로 그는 이런 것들을 했음을 의미한다. 그 이유가 “그의 손을 내밀어 비둘기를 붙잡아 그녀를 자신에게로 가져왔다”가 “비둘기”에 의해 뜻해지는 진리를 자신의 탓으로 여기는 것이기 때문이다. “손”에 의해 권위(authority), 그리고 자기 과신(self-confidence, 자기 만족, self-assurance)이 의미됨은 말씀의 여러 구절로부터 분명해진다. 이사야서에서:
나는 아시리아 왕의 위대하다 우쭐대는 심정의 열매를 방문할 것이다, 그 이유는
그가 말하기를, 내 손의 강함으로 나는 그것을 행했다, 그리고 내 지혜로
(그것을 행했는데), 내가 총명하기 때문이다 (이. 10;12-13),
위 구절에서 “손”은 그가 해낸 것이 그의 자신의 손 이었음을 분명하게 표시한다. 그리고 이것이 그를 방문하는 원인이 되었다. 다시:
모압은 자기 한 가운데에서 그의 손들을 펼 것인데, 마치 수영자가 헤엄치려
팔을 벌리는 것 같다. 그리고 [여호와께서는] 그의 교만을 그의 손들의
큰 폭포(cataract, 수문, floodgate)와 함께 낮게 놓이게 하실 것이다 (이. 25:11);
위에서 “손들”은 인간의 자기 자신의 힘을 표시한다. 그는 이 힘이 다른 사람의 힘보다 우월한 것으로 여기는 것, 고로 교만으로부터 이다.
다시:
그들의 거주민들은 손이 짧아 있었다, 그들은 낙담하였고 수치를 당하였다 (이. 37:27);
“손의 짧음”은 힘이 없음을 뜻한다. 다시:
진흙이 옹기장이에게, 너는 무엇을 만드느냐? 너는 무슨 일을 하느냐?
그는 손들을 가지고 있지 않다 라고 말하겠느냐? (이. 45:9).
여기서 “손들이 가지고 있지 않다”는 그가 힘을 가지고 있지 않다를 뜻한다. 에스겔서에서:
왕은 슬퍼할 것이다, 제 1 인 자들은 망연자실로 옷 입을 것이다, 그리고 토지의 사람들의
손들은 곤경을 당할 것이다 (겔. 7:27),
위에서 “손들”은 힘을 표시한다. 미가서에서:
불법을 고안하는 그들에게 화가 있다, 그들의 침대 위에서 악을 일하는 자는
(화가 있다); 아침이 빛이 있는 때, 그들은 그것을 실습한다, 그 이유는
그들의 손이 그들의 하느님이기 때문이다 (미. 2:1),
위에서 “손”은 그들이 자기들의 하느님으로 신뢰한 자신의 힘을 표시한다. 스가랴서에서:
양떼를 내버려두는 무가치한 목자에게 화가 있다; 검이 그의 팔 위에, 그의 오른쪽
눈에 있을 것이다; 그의 팔은 말리워 깨끗해질 것이다(오그라들 것이다, shirvel),
그리고 그의 오른쪽 눈은 지독하게 어두워질 것이다 (슥. 11:17)
“손들”이 힘들을 의미하기 때문에, 인간의 악들과 거짓들이 말씀에서 “그의 손들의 일”이라고 계속적으로 불리운다. 악들은 인간의 자기 자신의 의지력 측면에서 있고, 거짓들은 그의 이해력 측면에서 있다. 이것이 악들과 거짓들의 근원이다는 것은 악과 거짓 밖에 더 아닌 인간의 자기 자신의 본래의 모습으로부터 충분히 분명해진다. 일반적으로 “손들”이 힘을 의미하기에, “손들”은 말씀의 많은 곳에서 여호와, 또는 주님의 속성이 되어 있어, “손들”은 내적 의미에서 전능으로 이해된다. 이사야서에서:
여호와, 당신의 손이 들리우신다 (이. 26:11),
이는 신성한 힘을 표시한다. 다시:
여호와께서 그분의 손을 뻗치셨다, 모든 것이 살라졌다 (이. 31:3),
위에서 신성한 힘을 표시한다. 다시:
내 손들의 일에 관련하여 너는 나에게 명령하느냐?; 내 손들이 하늘들에 뻗쳤다,
그리고 하늘들의 모든 군대에게 내가 명령들을 주었다 (이. 45:11, 12),
위 구절 역시 신성한 힘을 표시한다. 거듭난 자가 말씀에서 “여호와의 손들의 일”이라 자주 불리운다. 이사야서에서:
나의 손이 땅의 기초를 놓았다, 그리고 나의 오른 손이 뼘으로 하늘들을 재었다
(이. 48:13),
위에서 “손”과 “오른 손”은 전능을 표시한다.
다시:
내 손이 되찾을 수 없을 정도로 짧더냐? 또는 내가 구원해줄 힘을
가지고 있지 않더냐? (이. 50:2).
위 또한 신성한 힘을 표시한다. 예레미야서에서:
당신께서는 당신의 위대한 힘을 수단으로, 그리고 당신의 내뻗은 팔을 수단으로
하늘과 땅을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표시들을 가지고, 경이로운 것들을 가지고,
강한 손을 가지고, 내뻗은 팔을 가지고 당신의 백성 이스라엘을 이집트의 토지로부터
데려왔습니다 (예. 32:17, 21),
위 구절도 신성한 힘을 표시하고 있다; 위 구절에서 “힘”은 17절에서, “손”은 21절에서 명명되고 있다. 이스라엘은 “강한 손과 내뻗은 팔”을 사용하여 이집트로부터 데려내왔다는 것은 자주 말해진다 (신. 4:34; 5:15; 7:19; 26:8; 시. 136:11-12 등등). 에스겔서에서:
그러므로 주 여호비께서 말하신다, 내가 이스라엘을 선택한 그 날에, 그리고 내 손을
야곱의 가문의 씨 쪽으로 들었다, 그리고 이집트의 토지에 있는 그들에게
나 자신을 알게 만들었다; 나는 내 손을 그들 쪽으로 들었다.
내가 이집트의 토지로부터 그들을 데려오기 위해서이다 (겔. 20:5-6, 23).
모세의 책에서:
이스라엘은 여호와께서 이집트 위에 집행한 위대한 손을 보았다 (출. 14:31).
“손”에 의해 힘이 의미되는 것은 이상 살핀 구절로부터서도 분명해진다. 실로 “손”은 힘에 대한 함축된 단어이기도 한 바, 표현적 의미 역시 지니게 되었다. 이는 이집트에서 행해진 기적들, 즉 모세가 자기 막대, 또는 손을 뻗치라고 명령받았을 때, 그것들이 그렇게 되었던 대목으로부터도 분명해진다. 출애굽기서에서:
모세가 그의 막대를 하늘을 향하여 내뻗었다, 그리고 여호와께서는 이집트의 토지에
우박을 비가 쏟아지게 하셨다 (출. 9:22, 23); 모세는 그의 손을 하늘을 향하여
내뻗었다, 거기에 짙은 어둠이 있었다 (출. 10:21, 22); 모세가 바다 위에 그의 손을
내뻗었다, 그리고 여호와께서는 바다를 마른 토지로 만드셨다;
그리고 모세가 바다 위에 그의 손을 내뻗었다, 그리고 바다는 되돌아왔다 (출. 14:21, 27).
논리에 맞추어 생각하려는 사람이라면 위 구절의 힘들이 모세의 손이나 막대에 있다고 믿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이 기적은 신성한 힘 때문이라 확신할 것이다. 그렇기는 유대 교회에서도 마찬가지였던 바, 손은 그 교회에서 힘의 표현물(representative)이 되었다.
여호수아가 창(javelin)을 내뻗었을 때도 비슷하다. 여호수아서에서:
그리고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말하셨다, 아이를 향하여 네 손에 있는 창을 내뻗어라;
그 이유는 내가 그것을 네 손에 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호수아는 그 성을
향하여 그의 손에 있던 창을 내뻗었다, 그리고 그들은 성 안으로 들어가서 그 성을
점령했다; 여호수아는 아이의 거주민을 진멸할 때까지
내뻗은 그의 손을 뒤로 끌어당기지 아니하였다 (여. 8:18, 26).
위 구절만 가지고도 어떻게 위 사건의 경우가 유대 교회의 외적인 것들인 표현적인 것으로 있게 되었는지, 그리고 어떻게 이런 경우가 말씀과 더불어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 즉 말씀의 외적 의미 안에 있는 것들은 주님과 그분의 왕국이 표현되도록 나타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우리의 마음이 글자의 역사적 세부사항들에 초점을 맞추는 한, 위 구절에서 손을 내뻗음이나 여타 다른 구절들에서나 표현이 주님과 그분의 왕국에 관한 것의 나타냄을 실어 날라다 주지 않는다는 말이다. 또한 유대인들이 모든 예배를 외적인 것들에만 초점을 맞추는 한, 위 인용 구절에서 같이 모세의 막대나 여호수아의 창은 일개 물건에 불과한데 그것에 권능(힘)이 있다고 하는 한, 말씀이나 그들의 교회 의식에 관한 진정한 이해로부터 얼마나 멀리 떨어져있을 것인지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그들이 손이나 막대를 내뻗을 때 표시들이나 기적들이 뒤따른 것은 주님의 권능이 막대나 손에 의해 의미되었기 때문이라고 천국에서는 이해한다.
이런 사건 역시 마찬가지 이다. 즉 모세가 자기 손들을 위로 들어올리고 있을 때, 여호수아가 승세를 잡았고; 모세가 그의 손을 내리자, 여호수아는 뒤로 밀렸다; 그래서 그들은 그의 손들을 위쪽에 머물게 했다 (출. 17:9-13). 그리하여 손들이 성별되어지는 이들 위에 놓이게 되었다(안수함). 마치 레위인들이 백성들에 의해서이듯 하다 (민. 8:9, 10, 12), 그리고 여호수아는 모세에 의해 안수되었는데, 그가 모세를 대신할 때였다 (민. 27:18, 23). 이는 권능이 그렇게 해서 주어지도록 하기 위함이다. 이로부터 즉위식이나 축복식에서도 손을 놓는 행위가 전수되어 왔다. 손이 힘을 의미하고 표현함이 어느 정도까지 인지는 웃사와 여로보암에 관련하여 말씀에서 말해진 것으로부터 쉽게 알 수 있다. 웃사에 관련하여 말해지는 바, 그가 하느님의 궤 쪽으로 (자기 손을) 내밀어 궤를 붙잡았을 때, 그러므로 그는 죽었다 (삼하. 6:6, 7). “궤”는 주님을 표현하였다, 그런고로 거룩한 모든 것과 천적인 모든 것도 표현했다. 웃사가 (자기 손을) 궤 쪽으로 내밈은 인간의 자기 자신의 힘, 또는 인간의 자기 자신인 것을 표현했다; 이 사건에서의 “손”은 모독으로 이해되는 바, 원어에서는 이 단어가 표현되지 않는다. 그 이유는 모독된 것이 거룩한 것에 접촉했다는 것이 천사들에 의해 지각되지 않도록 (주님께서 배려하신 것이다).
그리고 웃사가 그것을 내밀었기 때문에 그는 죽었다. 여로보암에 관련하여 이렇게 말해진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 왕은 제단을 향하여 외치는 하느님의 사람의 말함을 들었을 때,
여로보암은 자기 손을 제단으로부터 내밀어, 말하기를, 그를 붙잡으라; 그리고 그가
내민 그의 손은 오그라들었다(말려졌다). 그리하여 그는 자기 손을 뒤로 가져갈 수
없었다; 그리고 그는 하느님의 사람에게 말했다, 지금 여호와 네 하느님의 얼굴에
청원을 하라, 그리고 나를 위해 기도하라, 내 손이 다시 나에게 회복될런지 모른다;
그리고 하느님의 사람은 여호와의 얼굴에 청원하였다, 그리고 왕의 손은 다시
그에게 회복 되었다. 그리고 이전 같이 되었다 (왕상. 13:4-6).
위 구절 역시 “손을 내밈”에 의해 인간의 자기 자신의 힘, 또는 그의 자기 자신이 의되었다. 이는 모독이다, 그리고 하느님의 사람을 향하여 손을 내밈은 거룩한 것을 위반하기를 원했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손이 오그라졌다; 그러나 여로보암은 우상숭배자였고, 그래서 그는 모독을 할 수도 없는 바, 그의 손은 회복되어졌다. “손”이 힘을 의미하고 표현하는 것은 영들의 세계에 있는 표현물로부터도 분명해진다. 거기서 가려지지 않은 팔이 볼 수 있게 될 때가 있는데, 그 팔은 얼마나 힘이 세던지 사람의 뼈들을 분쇄하거나 비틀어 뼈골이 없게 할 정도여서, 심장을 녹일만큼 공포를 조장한다; 그리고 사실상 이 강함이 (공갈만 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그것 안에 있다.

10, 11절. 그리고 그는 다른 칠 일을 더 머물렀다. 그리고 그는 다시 비둘기를 방주로부터 내어 보냈다. 11 그리고 비둘기는 저녁 무렵 돌아 왔다. 보라, 비둘기 입에는 올리브 잎이 잡아 뜯겨 있었다. 그래서 노아는 물이 땅으로부터 줄어든 것을 알았다.

그리고 그는 다른 칠 일을 머물렀다. 이는 거듭남의 두 번째 상태의 시작을 의미하는데, 이는 시간의 간격으로부터, 즉 8절과 9절이 첫 상태이고, 10절과 11절은 두 번째 상태인데. 이 두 상태 사이의 간격으로부터 분명해질런지 모른다. 역사적 연결을 유지하기 위하여 시간 간격이 노아의 “머뭄”에 의해 표현되어지고 있다. 어떻게 이 경우가 거듭남의 두 번째 상태와 더불은 것 인지는 거듭남의 첫 상태에서 말해진 것을 염두해두고 생각해보자. 즉, 첫 상태는 신앙의 진리가 아직 뿌리를 내릴 수 없었던 상태, 그 이유가 거짓들이 방해하기 때문이다. 신앙의 진리가 첫 뿌리를 내릴 수 있는 것은 인간이 신앙의 진리를 인정하고 믿기를 시작할 때이지만, 이 신앙의 진리에는 뿌리는 없다. 그 이유가 인간이 말씀으로부터 듣고 그것을 기억 안에 붙잡는 것은 씨뿌림에만 해당되기 때문이다; 인간이 선행의 선을 환영하여 받아들일 때까지 뿌리내림은 결코 시작되지 않는다. 신앙의 모든 진리는 신앙의 선을 수단으로, 즉 선행의 선을 수단으로 뿌리를 내린다. 다시 설명하면, 이는 지면이 찬 겨울에 씨뿌려진 것과 같다는 말이다; 그것들은 겨울 동안 지면에 드러누워 있을 뿐, 뿌리를 내리지 않는다. 그러나 지상의 봄 시기에 태양의 열이 땅을 따뜻하게 하자마자, 씨는 먼저 그 내부 자체에서 그것의 뿌리를 밀어내기를 시작한다. 그 후에 그것을 지면으로 내보낸다. 이식되는 영적인 씨도 위의 예와 비슷하다; 이 씨는 선행으로부터의 선이 이 씨를 따뜻하게 할 때까지 결코 뿌리를 내리지 않는다; 이 씨도 첫 시기에 내부에서 밀어내기를 시작하고, 그 후에 그것을 내보낸다.
인간 안에는 의견이 서로 일치할 수 있고 결합할 수 있는 세 층(layer)의 평행물(parallel, 수준, level, 평면, plane)이 있다. 즉 자연적, 영적, 천적인 평행물(수준, 평면)이다. 자연적 수준은 영적 수준으로부터만 생명을 받는다, 그리고 영적 수준은 천적 수준으로부터만 생명을 받는다. 천적 수준은 생명 자체되시는 주님으로부터만 생명을 받는다. 이렇게 한 번 더 서술하면 더 나은 관념을 마음에 가질지 모른다: 자연적 수준은 영적 수준을 받아 담는 저장소(receptacle, reservoir), 또는 쏟아부어지는 영적 수준을 받는 그릇(vessel)이다; 그리고 영적 수준은 천적 수준을 받아 담는 저장소, 또는 그릇이다. 우리는 천적 수준을 통하여 주님으로부터 생명을 받는다. 이와 같음이 (추가 설명하면, 이와 같이 생명이 내려오는 질서가) 유입(influx)이다. 천적 양상(모습, 외관, aspect)은 신앙으로부터의 모든 선이고, 영적 인간 안에서 이 선은 선행으로부터의 선이다. 영적 양상은 진리인데, 이 진리는 그것 안에 신앙으로부터의 선, 즉 주님으로부터 생명 자체가 있는 선행으로부터의 선이 있지 않으면 신앙의 진리가 되지 않는다. 더 명료한 관념을 만들기 위해 한 번 더 생각해보자: 선행의 일은 인간의 자연적 차원(dimension)에서, 손이나 입 등등, 육체의 기관들을 수단으로 진행된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일 자체는 죽어 있다. 그리고 일 안에 영적 차원의 것이 담겨 있지 않으면 살아 있지를 않다; 영적 차원 역시 천적 차원의 것이 담겨야 살아 있다. 천적 차원은 주님으로부터 살아 있다. 이렇게 된 질서로부터의 일 이어야 만이 선이라 말해진다. 그 이유가 주님으로부터가 아니면 선은 없기 때문이다.
이럴진대, 모든 이에게 분명해지는 것은, 선행의 모든 일(work)에서 일 자체는 물질적인 업무 처리(affair) 수준밖에 더 아니다는 것, 그리고 살아 있는 일이 되는 것은 그것 안에 신앙의 진리가 있기 때문이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신앙의 진리는 그 안에 신앙의 선이 없으면 생명 없는 업무 처리 수준일 뿐이다는 것; 더 나아가 신앙의 선은 생명 자체, 선 자체이신 주님만으로부터가 아니면 살아 있지 않다. 이것은 왜 천적 수준의 천사들이 신앙에 관하여 듣는 것에 마음내켜하지 않는지, 일에 관하여 듣는 것은 더욱 마음내켜하지 않는지에 대한 설명의 일부도 된다. 이렇게 마음내켜하지 않는 이유가 그들은 신앙과 일 둘 다를 사랑의 탓으로 여기기 때문이고, 신앙을 사랑으로부터 있도록 만들고, 신앙의 일조차도 사랑으로부터이다고 만들므로, 천사들과 더불어서는 일과 신앙 둘 다 자취를 감춘다. 그리하여 사랑과 사랑에서 파생되는 선만이 남아 있다. 천사들의 사랑 내부에 주님이 계신다. 이런 관념의 결과, 천적 평면의 천사들은 영적 평면에 있는 천사들과 분리되어 있다. 천적 수준의 천사의 참 생각(그리고 이 생각으로부터 파생되는 말까지 포함해서)은 영적 천사들의 생각과 말보다 파악하기 더욱 어렵다.

“일곱”이 거룩한 것을 의미하는데, 그 이유는 현 주제가 선행을 취급하기 때문에서 이다. 이는 “7”의 의미로부터 분명해진다. 더 나아가 “일곱”이 여기에 삽입된 이유는 역사적으로 시종일관됨을 위해서이고, 내적 의미에서는 “7”과 “7 일들”이 거룩함을 추가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 두 번째 상태의 품질은 천적 양상으로부터 가진다. 즉 선행으로부터 이다.

그리고 다시 그는 방주로부터 비둘기를 내보냈다. 이는 신앙의 선들과 진리들을 받는 상태를 의미한다. 이는 이와 비슷한 단어가 있는 8절에서 말해졌다. 그러나 이런 차이는 있다. 8절의 경우, 그는 비둘기를 “자기로부터” 내보냈다라고 말해진다; 이에 대한 의미는 인간 거듭남의 첫 수준은 선한 것을 행하고 참된 것을 생각함이 자신의 공적으로부터 라고 여기는 수준이었다. 다시 말해 그는 그것들이 자신의 힘으로부터 라고 믿었다는 말이다. 이것이 단어, “자기로부터”에서 뜻해진다.

그리고 비둘기는 저녁 무렵 그에게 되돌아 왔다. 이는 신앙의 선들과 진리들이 조금씩 나타나기 시작했다는 것, 그리고 아침 이전 희미한 빛(박명, twilight)과 같은 것을 뜻하는 “저녁 무렵”은, 8절에서 말해진 것으로부터 분명해진다; 뿐만 아니라 저녁의 시간이 여기서 언급된 것으로부터도 분명해진다. “저녁”에 관련하여서는 창세기 1장을 참조하면 도움이 더 될 것이다. 거기서 “저녁이 있었고 아침이 있었다”가 여섯 번 말해진다. “저녁”은 거듭남의 용어이다. 거듭남에서의 저녁의 상태란 인간이 아직 그늘에 있는 상태, 또는 아직은 빛이 조금 그에게 나타나고 있는 때이다. 아침 자체는 이 장, 13절, 노아가 방주의 덮개를 제거하고 보는 것에 묘사되어 있다. “저녁”이 아침 이전 희미한 빛을, “저녁”은 유대 교회와 연결하여 많은 곳에서 언급되고 있다. 위와 똑 같은 이유에서 그들의 축제나 안식일들은 저녁에 시작했다. 그리고 아론은 저녁에 거룩한 등불로 빛이 있게 하라고 명령받았다(출. 27:20-21).

그리고 그녀의 입에 올리브 잎이 잡아 뜯겨 있었다. 이는 신앙의 진리의 조금을 의미한다; “잎”은 진리를, 그리고 “올리브”는 선행의 선을; “잡아 뜯겨짐”은 선행으로부터 있는 신앙의 진리를 뜻한다. 그리고 그것이 보여진 “그녀의 입에”는 올리브 나무의 의미로부터 분명해진다. 그리고 단어들 자체로부터도 반짝이고 있다. 그리고 조금만 있다는 것은 거기에 오직 잎 하나 이다로부터 나타난다.

“잎”이 진리를 의미하는 것은 말씀의 많은 구절로부터 분명해진다. 여러 구절에서 인간이 나무에 비교되거나 나무라고 불리우고, “열매”들은 선행으로부터의 선을 의미하고, “잎”은 선행으로부터의 진리를 의미한다 (선행과 진리와 열매와 잎은 기능면에서 비슷하다); 에스겔서에서:
그리고 강 가, 강 둑, 이쪽과 저쪽에, 식품을 위한 모두 각각의 나무가 올라오고 있다.
이들의 잎은 시들지 않고, 열매가 소진되는 일도 없고; 그것은 모두 각각의 달에
다시 태어난다. 그 이유는 물들이 성소로부터 유출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거기로부터의 열매는 식품을 위해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잎은 치료약을 위해 있을 것이다 (겔. 47:12; 계. 22:2).
위 구절에서 “나무”는 주님의 왕국을 안에 지닌 교회인을 표시한다; 그 나무의 “열매”는 사랑의 선과 선행의 선을 표시한다; 그 나무의 “잎”은 그 나무로부터 발달하는 진리를 표시하고, 인간 종족을 가르침과 그들의 거듭남을 위해 봉사한다. 이런 이유로 잎은 “치료약”을 위해 있다 라고 말해진다. 다시:
그가 거기로부터 뿌리를 잡아당기지 않겠느냐?, 그리고 열매를 잘라내고 그것이
시들지 않겠느냐? 그것의 싹을 잡아뜯겨 모두 시들지 않겠느냐? (겔. 17:9)
위 구절은 포도나무, 즉 황폐해짐에 있는 교회에 관해서 말해진다. 이 교회의 선은 이 포도나무의 “열매”이고, 이 교회의 진리는 싹의 잎인데 잡아뜯기고, 시들고 만다.
예레미야서에서:
여호와를 신뢰하는 자는 복있다; 그는 물가에 심은 나무같을 것이다;
그의 잎은 푸를 것이다; 그리고 그는 가뭄의 걱정을 하지 않을 것이고,
열매 열림이 중단되지 않을 것이다 (예. 17:7-8);
위 구절에서 “푸른 잎”은 신앙의 진리, 고로 선행으로부터 있는 참 신앙을 표시한다. 이와 아주 비슷한 의미를 지닌 구절이 시편 1:3절에도 있다; 다시 예레미야서에서:
포도나무에 포도가 없다, 무화과나무에 무화과가 없다, 그리고 잎이 떨어진다 (예. 8:13).
“포도나무에 포도”란 영적 수준의 선을 표시한다; “무화과 나무에 무화과”란 자연적 수준의 선을 표시한다; “잎”은 진리를 표시하는데, 이 경우에서는 그것이 “떨어지고” 있다. 이. 34:4에서도 이와 비슷하다. 또한 같은 의미에서, 예수께서 지나가시다가 무화과 나무를 보셨는데, 잎만 있고 열매를 발견 못하시자, 시들어지고 말았다는 대목도 있다 (마. 21:9, 20; 막. 11:13-14, 20). 특별하게 무화과 나무에 의해 유대 교회가 뜻해졌고, 이 교회 안에 자연적 선이 더 이상 있지 않았음이 뜻해졌다; 이 교회 안에 보존되었던 종교적 가르침 또는 진리는 “잎들”이다; 황폐된 교회는 진리를 알고 있으나 깨닫고 싶어하지 않는다. 이와 유사한 것이, 진리는 알지만 선행의 선은 없는 자이다; 이들은 잎만 가진 셈인데, 그것은 시들어진다.

“올리브나무”는 선행으로부터의 선을 의미하는데, 이는 “올리브나무” 뿐만 아니라 “기름”의 의미로부터 분명해진다. 향료와 함께한 올리브 기름이 있다. 이는 성직자들과 왕들에게 기름붓기 위하여서 이다, 그리고 등불의 연료로서 사용되었다 (출. 30:24; 27:20). 기름 부음과 등불을 위해 사용된 올리브 기름은 천적인 수준의 품질에 속하는 모든 것, 그러므로 사랑과 선행으로부터의 모든 선(선한 결과들)을 표현했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기름은 나무의 참 실체, 마치 나무의 혼 같다. 마치 천적 인 수준에 있는 것, 또는 사랑으로부터와 선행으로부터 있는 모든 선이 신앙의 참 혼에 해당되는 것 같다. 이로부터 “기름”은 그 표현성을 지닌다. “기름”이 천적 등급에 속한 것, 또는 사랑으로부터의 선과 선행으로부터의 선을 의미한다는 것은 말씀의 많은 구절에서 확증될 것이다; 여기서는 본문에 관련하여 몇 구절만으로 그 의미를 확증해보자. 예레미야서에서:
여호와께서 네 이름을 훌륭한 열매로 예쁜, 푸른 올리브 나무라고 불렀다 (예.11:16),
위 구절에서 태고 교회, 또는 천적 수준의 교회가 이렇게 불리운 것이다. 이 교회는 유대 교회의 기초 교회였다; 그리고 그러므로 유대 교회의 모든 표현물들은 천적인 것들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를 통하여 주님을 바라보았다.
호세아서에서:
그의 가지들은 펼칠 것이다, 그리고 그의 영예는 올리브 나무 같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의 냄새는 레바논으로부터 같이 있을 것이다 (호.14:6),
위 구절은 심어지게 되는 교회에 관해서 말해진다. 이들의 영예(honor)는 “올리브 나무”, 즉 사랑으로부터의 선과 선행으로부터의 선이다; “레바논으로부터 같은 냄새”는 사랑과 선행으로부터 있는 신앙의 진리에 애착함이다. “레바논”은 삼나무(cedars)들을 암시한다. 이 나무는 영적 실재물(entity)들, 또는 신앙의 진리들을 의미했다. 등불대(lampstand)에 관해서 말하는 스가랴서에서:
등불대 옆에 두 올리브나무들이 있는데, 하나는 사발의 오른쪽 측면에,
그리고 다른 하나는 사발의 왼쪽 측면에 있다;
이들은 온 땅의 주님에 의해 서 있는 순수한 기름으로부터의 두 아들들이다
(슥. 4:3, 11, 14).
위 구절에서 “두 올리브 나무들”은 천적인 것과 영적인 것을 표시한다. 그리하여 사랑은 천적 (왕국의) 교회의 특징을 나타내고, 선행은 영적 (왕국의) 교회의 특징을 나타낸다. 이 교회들은 주님의 “오른쪽”과 “왼쪽”에 서 있다. “등불대”는 여기서의 경우 유대 교회 안에서 이것이 표현되고 있는 바, 주님을 의미한다; 등불대의 “등불”은 영적 특성(attribute)을 산출하는 천적 특성(attribute)을 의미한다. 마치 불꽃(flame)으로부터 빛의 광선들, 또는 빛이 진행되는 것과 같다. 다윗서에서
네 아내는 네 집의 측면들에 있는 열매 풍성한 포도나무로서 있을 것이다;
네 아들들은 올리브 묘목들 같이 있을 것이다 (시 128:3);
위 구절에서 “포도나무로서의 아내”는 영적 (평면의) 교회를 표시한다; “아들들”은 신앙의 진리들을 표시하는데, “올리브 묘목들(sapling)”이라 불리우는데, 그 이유는 선행의 선으로부터 있기 때문이다. 이사야서에서:
아직 거기에 어렴풋한 빛이 남아 있을 것이다. 마치 올리브 나무로부터의 흔듦에서 같이,
가지 꼭대기에 두 세 개가 남는 것과 같다 (이. 17:6);
위 구절이 취급한 주제는 인간 안에 있는 리메인스(remains)이다; “올리브 나무로부터의”란 천적 등급의 리메인스를 표시한다. 미가서에서:
너는 올리브를 밟을 것이나, 그 기름을 바르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포도 수확이 있으나 포도주를 마시지 못할 것이다 (미. 6:15).
그리고 모세의 책에서:
너희는 포도원들을 세우고 그것들을 가꿀 것이나, 너희는 포도주를 마시지 못할 것이다;
너희는 네 모든 경계에 올리브 나무를 가질 것이나,
너희는 그 기름으로 네 자신을 바르지 못할 것이다 (신. 28:39-40),
위 구절의 주제는 신앙으로부터의 선들과 진리들에 관하여 교리적인 가르침들이 풍부했다 이다, 이것을 그들의 특별난 본성 때문에 그들은 거절했다. 어쨌든 위 인용구절로부터 명백해지는 것은, “잎”은 신앙의 진리를, “올리브 나무”는 선행으로부터의 선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본문에서 비둘기가 그녀의 입으로 가져 온 “올리브 잎”도 같은 것을 의미한다; 즉 고대 교회 안에 선행의 선으로부터 신앙의 진리가 약간 나타났다는 말이다.

물들이 땅으로부터 줄었다는 것. 이는 방해하던 거짓들이 이전보다는 덜 풍부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8절의 같은 단어들로부터 분명해진다. (이 절에서 언급하는 상태가) 거듭남의 두 번째 상태인데, 이것이 취급되고 있는 바, 상황은 이렇다; 인간이 획득해버린 모든 거짓들은 남아 있는다, 즉 아무도 자기의 거짓들을 철폐할 수 없다는 것은 이미 말한 적이 있다; 그런고로 인간이 거듭나질 때, 진리들은 주님에 의해 구부려진 거짓들에 이식되는 바, 거짓들은 마치 쫓아버린 것처럼 나타나 있는데, 이는 주님께서 선물로서 주신 선들을 수단으로 성취된다.

12절. 그리고 그는 또 다른 칠 일을 머물렀다, 그리고 비둘기를 내보냈다, 그리고 비둘기는 그에게로 다시 되돌아 오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또 다른 칠 일을 머물렀다. 이것은 세 번째 상태의 시작을 의미한다. 그리고 “일곱”은 거룩한 것을 의미함은 같은 단어가 등장하는 두 번째 상태에서 설명되었다.

그리고 비둘기를 내보냈다. 이는 신앙의 선들과 진리들을 받는 상태를 의미한다는 것은 같은 단어가 등장하고, 단지 차이는 두 번째 상태라는 점 뿐이고, 10절로부터 분명해진다. 세 번째 상태는 비둘기가 되돌아 오지 않음, 그리고 또한 노아가 방주의 덮개를 제거함, 그리고 마침내 그가 방주로부터 나감, 그 이유는 지면의 얼굴이 말랐고, 땅이 말랐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녀는 그에게 더 이상 다시 되돌아 오지 않았다. 이는 자유롭게 된 상태를 의미한다. 이 의미는 비둘기 (또는 신앙의 진리) 외에 다른 새들, 짐승, 노아까지도 홍수의 물들 때문에 방주에 더 이상 갇혀있지 않게 됨이 뒤잇는 것으로부터 알게 된다. 그가 방주 안에 있는 한, 그는 노예 같은 상태, 즉 속박된 상태, 감금된 상태에서 홍수의 물들, 또는 거짓들에 의해 이리저리 뒤흔들리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시험의 상태와 함께 있는 이 상태는 7:17에서 물들이 불어나고 이 물들이 방주를 떠메서 땅위로 들어 올려 묘사되었다; 또한 다음 절에서 물들이 거세어지고 방주는 물들의 얼굴에서 오가는 것으로 묘사되었다. 8:15-18 에서는, 인간의 자유롭게 된 상태가 노아가 방주에서 나감, 그리고 그와 더불어 있던 모두가 나감에 의해 묘사되는데, 그 첫 번째 나감이 비둘기, 즉 선으로부터의 신앙의 진리이다. 그 이유가 모든 자유해짐은 신앙의 선으로부터, 즉 선을 사랑함으로부터 있기 때문이다.

인간이 거듭나질 때, 처음 동안에서 그는 이전의 노예 같은 상태에서 자유한 상태로 온다. 탐욕들과 거짓들이 통치하는 것이 노예 상태이고, 선과 진리에 대한 애착이 통치할 때가 자유한 상태이다. 탐욕들과 거짓들이 통치하는 한, 인간은 지각을 하지 못하고, 오직 그가 자유한 상태 안으로 와 있어야 가능하다. 그가 노예 같은 상태에 있을 때, 즉 탐욕들과 거짓들이 통치하는 동안, 이것들에 복종하는 인간은 자기가 자유한 상태에 있다고 상상한다; 그러나 이는 완전 거짓이다. 그 이유가 그는 탐욕들로부터의 즐거움과 쾌락들에 의해, 즉 자기의 사랑들에 의해 끌려가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이 즐거움에 의해 실행되었기 때문에 그에게는 이것이 자유하다고 나타나는 것이다. 모두 각각의 인간, 그가 어떤 사랑에 의해 인도되는 동안, 그리고 그가 어디로이든지 끌려가는 동안에서는, 그 자신 자유하다고 상상한다. 하지만 그는 악마적 영들의 떼거리 안에서 급류에 휩쓸려 있는 모습일 뿐이다. 그러나 이 인간은 최고의 자유를 만끽하고 있다고 상상하여, 이 자유를 잃는 것은 극도로 불운해진다고, 생명이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 이다고 믿는다; 그가 이렇게 되는 이유는 그가 어떤 다른 삶의 존재를 알아채리지 못해서일 경우가 있고, 알아채고 있는 자일 경우, 천국은 고난이나 가난, 쾌락의 포기가 아니면 아무도 가지 못한다 하는 것 등등으로 마음에 강한 인상 자국을 가졌기 때문에서 이다. 그러나 이런 강한 인상 자국이 얼마나 거짓인지를 주님께서는 (영계에서의) 많은 경험을 통하여 나로 알게 해주셨다. 이에 관하여는 이 후 주님의 신성한 자비로부터 말해보겠다.
인간은 그가 거듭날 때까지, 그리고 선하고 참된 것을 사랑함을 통하여 주님에 의해 인도될 때까지 자유해진 상태에 와 있을 수 없다. 그가 거듭난 상태에 있을 때, 처음 동안, 그는 자유가 무엇인지를 알 수 있고 지각도 한다, 그리고 삶의 진정한 즐거움이 무엇인지, 그리고 행복이 무엇인지도 알고 지각한다. 거듭남 이전 일 경우, 그는 선이 무엇인지조차 모르는 바, 그는 가장 지독한 악을 가장 위대한 선이라 부르는 경우도 있다. 주님으로부터 자유해진 상태에 있는 이들은 탐욕들과 거짓들의 삶을 볼 때, 더 나아가 느낄 때, 그들은 마치 지옥이 자기들 눈 앞에 열려져 그 안의 인간이 하는 짓들 같이 느껴져 몹시 혐오하고 만다. 어쨌든 자유해진 삶이 무엇인지에 대하여 알려진 것이 거의 없는 바, 매우 간략하게라도 정의를 내려두어야 할 것 같다. 자유, 또는 자유한 삶은 주님의 인도하심에서만 온전히 있는 것이다. 이렇게 매우 간단한 몇 마디 인데도 이를 인간이 깨닫지 못하게 방해하는 것들은 수도 없이 많다. 그런 이유는 인간은 악마적 영들의 지배 아래로부터 자유해지기 위해 시험들을 거치기 때문; 그리고 인간은 자기를 사랑함과 세상을 사랑함으로부터 있는 탐욕들의 즐거움 외에 다른 즐거움은 없다고 알기 때문, 뿐만 아니라 천국의 삶에 관한 거짓된 견해를 마음에 품고 있어, 영의 세계에서의 살아 있는 (나의) 경험담과 영계에 관한 (나의) 서술들이 교육적 측면에서 덜 효과적이 되고 만다. 따라서 주님의 신성한 자비로부터 이후 이에 관해 더 보충 설명을 해 볼 것이다.

13절. 그리고 육백 년 그리고 첫 해, 시작에서, 달의 첫째에서 였다, 물은 땅으로부터 말랐다. 그리고 노아는 방주의 덮개를 제거했다. 그리고 보았다, 그리고 보라, 지면은 말라 있었다.

그리고 육백 년 그리고 첫 해 였다. 이것이 마지막 경계(선)을 의미하는데, 이는 숫자 600의 의미로부터, 이에 관해 설명한 7:6으로부터 알 수 있다. 7:6의 경우 시험의 시작을 의미하나, 여기서는 의도적으로 시험의 끝이 같은 숫자를 사용하여 되는 바, 본문의 600은 지나온 모든 햇수까지 포함됨을 암시하도록 하면서 (시작이) 거행된 것이 햇수의 끝에서 임이 강조되도록, 이어지는 말, “시작에서, 달의 첫째에서”가 추가되어 있다. 이를 수단으로 처음의 경계(선) (또는 다시 시작함)이 의미되었다. 어떤 전체 기간이 말씀에서는 비록 백년, 천년이다 할지라도 “날”. “주”, “달”, “해”로 의도되어 있다. 예를 들면, 창세기 첫 장에서는 “날들”에 의해 태고 교회인의 거듭남의 기간들이 뜻해진다; 그 이유가 “날”이나 “해”는 내적 의미에서 시간 외에 더 다른 의미는 없기 때문이다. 그것들이 시간을 의미하기 때문에 그것들은 상태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말씀에서 “해”는 시간과 상태의 의미로 계속적으로 사용되어진다. 이사야서를 보자:
여호와께서 받아들일 수 있는 해, 그리고 우리 하느님의 복수의 날을 선포하는 것;
슬퍼하는 모든 자를 위로하는 것 (이. 61:2),
위 구절은 주님의 오심이 취급된다. 다시:
그 이유가 복수의 날이 나의 심정 안에 있었다,
그리고 나의 되찾음의 해가 왔었다 (이. 63:4),
위 구절에서 “날”과 “해”는 시간과 상태를 표시한다. 하박국서에서:
오 여호와시여, 햇수들의 한 가운데에서 당신의 일이 되살아나소서,
햇수들의 한 가운데에서 알려지게 만드소서 (합. 3:2),
위 구절에서 “햇수”는 시간과 상태를 표시한다. 다윗서에서:
당신은 하느님 자신입니다, 그리고 햇수들이 소진되지 않았습니다 (시. 102:27),
위 구절에서 “햇수들”은 시간들을 나타내고, 하느님과 더불어서는 시간이 없다를 보여주고 있다. 이와 같이 본문에서 홍수의 해(year)는 특정한 년도(year)를 지목해서 언급된 것이 결코 아니다. 그러나 이 시간은 (우리가 달력으로 아는) 고정된 년도를 수단으로 결정된 것이 아니다는 것, 동시에 상태도 의미한다는 것이다.

시작에서, 달의 첫째에서. 이는 첫 경계(선) [또는 다시 시작함]을 의미한다는 것은 이미 살핀 것에서 분명해진다. 여기에 더 추가해서 알아둘 것이 있다. 이 구절에 포함된 것은 인간 거듭남이 완성되는 것, 그리하여 그가 “나는 지금 완전하다”라고 말할 수 있는 때까지, 시간으로 계산되는 명확한(정해진) 기간은 없다는 것 외에 더 묘사되어 깊게 감추인 것이 있음을 (암시한다); 그 이유가 모두 각각의 인간과 더불어 악들과 거짓들의 상태는 무한하다 말해야 되기 때문이다. 이 무한한 상태는 단순한 상태들로도 무한하지만 혼합되어서도 무한하기 때문에, (일일이 하나씩 집어내기는 인생 삶의 햇수에 비해 너무 많아 불가능할지 모르기에) 일단은 흔들어 터는 방식으로 해서 더 이상 나타나지 않게 하는 것이다. 이는 앞에서 말했다. 그런고로 육체의 삶에서 거듭나져왔던 이들, 그래서 주님에 대한 신앙과 이웃을 향한 선행 안에서 살아왔었던 이들은 저세계에서 계속적으로 완전해간다.

물들이 땅으로부터 말리워졌다. 이는 거짓들이 나타나지 않았음을 의미하는데, 말해졌던 바로부터 분명할 것이다. 이 구절이 뾰족하게 의미하는 것은, 이 교회인의 의지로부터 거짓들이 분리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땅(earth)”은 여기서 인간의 의지를 의미하는데, 인간의 의지에는 탐욕밖에 더 다른 것은 없다; 그러므로 “물들이 땅으로부터 말리워졌다”라고 말해진다. 그의 “지면(ground)”, 이미 말한 바 같이, 그의 지적 부분이다. 이 안에 진리들이 뿌리워진다. 그의 의지 부분에는 결코 뿌려지지 않는다. 영적 (평면의) 인간에서 의지력과 지력은 분리되어 있다. 그러므로 이 절 뒷 부분에서 “지면”의 얼굴이 말리워있다고 말해진다. 태고 교회인과 더불어 지면은 그의 의지력 안에 있었고, 이 안에 주님께서는 선들을 뿌리셨다. 그 다음 이 선들로부터 인간은 진리를 알고 지각할 수 있었다. 또는 사랑으로부터 신앙을 가질 수 있었다; 그러나 만일 이 방법이 지금 실행된다면, 인간은 영원히 멸절되어지고야 만다. 그 이유가 인간의 의지는 전체적으로 썩어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의지 부분에 씨뿌려짐의 방법, 그리고 인간의 지적 부분에 씨뿌려짐의 방법에 대하여는 이렇게 한 번 더 생각해봄으로 명료해지지 않을까 생각된다. 계시(밝히 앎)들이 태고 교회인에게서는 그의 유아 시절로부터 선들과 진리들에 관한 것이 지각을 수단으로 시작되어(initiate)졌다. 그러나 이런 계시들이 그의 의지 부분 안에 씨뿌림이 있었을 때, 그는 더 다른 가르침(instruction)의 추가됨 없이 무수한 것들을 지각했다; 즉 주님께서는 한 개의 원리를 주셨는데, 그는 한 개의 원리로부터 세부 사항들(particulars, particular ideas)을 알았고, 지금의 인간들이 배워서 알아야하는 낱개 사항들(singulars, individual details)들까지 섭렵해 버렸다는 말이다. 지금의 우리는 그들이 안 것의 수천 분의 일도 알지 못하고 있다.
씨뿌림의 후자를 생각해보자. 영적 (평면의) 교회인들은 자기가 배운 것들 밖에 아는 것이 더 없다, 그리고 자기가 안 것들을 기억해두고, 그것이 진리이다고 믿는다. 실로 그가 거짓인 것을 배웠을 때조차도, 이것이 진리로서 그의 마음에 강한 자국을 남기고, 그는 이것을 믿는다. 이렇게 믿는 이유는 그가 이것이 그러하다 라고 설득되어질 때, 이것이 그러하다는 것 외에 다른 지각을 가지지 못하기 때문이다. 양심을 가진 이들이 양심으로부터 어떤 지령(dictate, inner voice)을 가지기는 하나, 그들이 들었고 배웠던 것 때문에 있는 진리인 것 이상의 더 다른 지령은 가지지 못한다. 다시 말해 그들의 양심을 만들어내는 것은 그들이 들었고 배웠던 것들이 재료로 쓰인다는 말이다. 이는 잘못 인도된 양심을 지닌 이들로부터 분명해진다.

그리고 노아는 방주의 덮개를 벗기고 보았다. 이는 거짓들이 치워짐에서 그가 신앙의 진리들의 빛을 인정했고, 이 빛 안에서 그가 신앙을 가졌음을 의미한다. 이는 “덮개를 벗김”이 빛의 비추임을 차단한 장애물을 치워냄이다로부터 분명해진다. “방주”에 의해 거듭나지는 고대 교회인이 의미되어지는 바, 방주의 “덮개”는 하늘을 보는 것, 또는 빛을 보는 것을 방해하는 것밖에 더 다른 의미는 없다. 가로막은 것은 거짓이었다; 그러므로 그는 “보았다”라고 말해진다. 말씀에서 “보는 것”은 이해하는 것과 신앙을 가지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의 경우, “보았다”는 진리들을 인정했다는 것과 그 진리들 안에서 신앙을 가졌다는 것을 뜻한다. 진리들을 아는 것, 그 진리들을 인정하는 것, 그 진리들 안에서 신앙을 가지는 것, 이 세 가지는 별개의 것이다. 아는 것은 거듭남의 첫 번째의 것이고, 인정하는 것은 두 번째의 것이고, 신앙을 가지는 것은 세 번째의 것이다. 이 세 가지의 차이는 이렇게 살필 수도 있다. 아주 나쁜 인간들도 알고 있되 인정하지 않는다는 사실로부터 이다. 마치 유대인들 같이, 그리고 이상한 논쟁을 수단으로 교리적인 것들을 파괴하려 시도하는 이들의 경우이다; 그리고 불신앙자들도 인정할런지 모른다. 그리고 어떤 상태들(어떤 사회적 분위기)에서 일 경우, 이들도 전도하고, 확증하고, 열성으로 설득하러 나선다. 그러나 불신앙자가 신앙을 가질 수 있는 경우란 없다.
신앙을 가진 이들은 알고 인정하고, (그리고) 믿는다, 그들은 선행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양심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신앙은 누군가로부터 단정하여 말해질 수 없다. 다시 말해 아무도 자기가 신앙을 가지고 있다 라고 말해질 수 없으나, 위의 세 가지의 특징들을 소유한 자만이 가능할 것이다. 이 때에 비로소 거듭나아지는 것이다. 신앙으로부터 있는 것을 단지 알고만 있는 것은 그의 이성의 찬동 없이(합리적 마음의 동의(assent) 없이) 그냥 그의 기억으로부터 있는 것이다. 신앙으로부터 있는 것을 인정하는 것은 어떤 목적들을 위하여, 그리고 어떤 원인들에 의해 야기된 합리적 찬성이다. (다시 말해, 신앙의 것들을 인정함은 합리적 마음 부분의 어떤 동의가 요구됨이고, 이는 어떤 목적들을 바라보면서 어떤 심사숙고함에 의해 생산된 마음의 상태이기도 하다.) 신앙을 가지는 것은 양심으로부터, 즉 양심을 통하여 주님께서 일하심으로부터 있다. 이는 저세상 삶을 사는 이들로부터 분명해진다. 알고만 있던 이들의 많은 자들이 지옥 안에 있다. 인정한 이들 중 많은 자들이 지옥에 있다. 그 이유는 육체의 삶에서 그들이 인정함은 어떤 분위기에 발맞추어서만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른 삶에서 그들이 지상에서 자기들이 타인들에게 설교했고, 가르쳤고, 설득했던 것들이 진리라고 지각했을 때, 그들은 아주 기이하게 여겼다. 그러나 이것은 당신들이 지상에서 설교했던 것이라고 그의 기억에 상기시켜주면 이를 인정한다. 그러나 신앙을 가졌던 이들은 모두 천국 안에 있다.

이 본문의 주제가 거듭날 때의 고대 교회인인 바, “봄 (seeing)”에 의해 인정함과 신앙을 가짐이 의미되어진다. “봄”이 이런 의미를 가진다는 것을 말씀으로부터 찾아보자. 이사야서에서:
너희는 그것에 관하여 제조하신 분을 주목하지 않았다,
그리고 멀리로부터 그것에 관하여 만들어내신 분을 너희는 보지 않았다 (이. 22:11),
위 구절은 시온 성을 이야기하고 있다; “멀리로부터 만들어내신 분을 보지 않는 것”은 인정하지 않는 것, 더 나아가 신앙을 갖지 않는 것이다. 다시:
이 백성의 심장을 비대해지게 만들어라, 그리고 그들의 귀들은 무겁게,
그들의 눈들은 흐리게 하여, 그들이 자기들의 눈들로 보지 않도록, 자기들의
귀들로 듣지 않도록, 그리고 그들의 심정이 깨닫지 않도록, 그리고 다시 돌아서지 않도록 그리고 치료되지 않도록 (하라) (이. 6:10);
“자기들의 눈들로 보는 것”은 인정하고 신앙을 가짐을 표시한다. 다시:
어둠에서 걸었던 백성이 큰 빛을 보았었다 (이. 9:2),
위 구절은 신앙을 받았던 이방인들에 관해 말해졌다; 본문의 경우, “노아는 방주의 덮개를 벗기고 보았다”와 같은 경우이다. 다시:
그리고 그 날에 귀머거리가 거룩한 책(the Book)의 말들을 들을 것이고,
소경의 눈들이 흑암으로부터와 어둠으로부터 볼 것이다 (이. 29:18),
위 구절은 이방인들이 신앙(을 받음)쪽으로 전환할 것에 관하여 이야기하고 있다; 그리고 “보는 것”은 신앙을 받음을 표시한다. 다시:
들어라, 너희 귀머거리여; 그리고 바라보라 너희 소경이여,
너희는 볼런지 모른다 (이. 42:18).
위 구절 역시 의미는 비슷하다. 에스겔서에서:
볼 눈을 가진 자가 보지 못하고, 들을 귀를 가진 자가 듣지 못한다;
그 이유는 그들은 반역적인 가문이기 때문이다 (이. 12:2),
위 구절은 이해할 수 있고, 인정하고, 신앙을 가질 수 있는 이들, 그럼에도 그렇기를 원하지 않는 이들을 뜻한다. “본다”는 것은 신앙을 가진다는 것을 의미함은 주님께서 과거 광야에서 구리뱀을 본 자들은 모두 치료되었음을 가지고 표현하신 대목으로부터도 분명해진다; 모세의 책에서:
너희에게 불 같은 뱀을 만들어라, 그리고 그것을 지주(standard)로 세워라;
그리고 모든 자가 (뱀에게) 물리우는 때가 올 것인데, 그때 이 지주로 세운 뱀을 볼 때,
그는 살 것이다; 그리고 뱀이 누구를 물었을 때가 왔는데,
그가 구리 뱀을 쳐다보자, 그는 살았다 (민. 21:8, 9);
위 인용구절로부터 모든 이는 “보는” 것이 신앙을 의미함을 알 수 있다. 이 경우에서 주님에 대한 신앙의 표현말고 무엇이 소용에 닿을까? 또한 야곱의 장자 르우벤이 “보다”로부터 그렇게 이름지어졌는데, 르우벤은 내적 의미에서 신앙을 의미한다.

그리고 보라, 지면의 얼굴들이 말라졌다. 이것이 거듭남을 의미하는 것은 “지면”의 의미가 교회인 임으로부터 분명하다. 거짓들이 더 이상 나타나지 않을 때, 지면의 얼굴이 “말랐다”라고 말해진다.

14절. 둘째 달, 이십 칠 일, 땅은 말랐다. “둘째 달”은 거듭나기 전의 모든 상태를 뜻한다. “27일”이란 거룩한 것을, “땅이 말랐다”란 그가 거듭났음을 의미한다. 이 말들은 거듭나기 전에 진행되어 왔던 것의 결말을, 그리고 또 다른 거듭남의 시작을 말한다.

둘째 달. 이는 거듭나기 이전의 모든 상태를 의미하는데, 이는 말씀에서 “둘”의 의미로부터 분명해진다. “2”는 “6”과 같은 의미를 지닌다. 즉 거듭남이 진행하는 전투와 노동이다; 그런고로 여기서의 경우, 인간 거듭남의 완성에 앞서 있는 전체 상태이다. 말씀에서 큰 시간의 간격이든, 짧은 시간의 간격이든 “3” 또는 “7” 안에서 흐트려진다(spilt). 그리고 날들, 주들. 달들, 해들, 또는 “시대들”이라 불리운다. 3과 7은 거룩하다, 그러나 2와 6은 거룩하지는 않고, 상대적으로 모독적이다. 3과 7 모두는 마지막 심판을 서술한다는 추가적인 이유 때문에 모두 신성하다. 마지막 심판은 “셋째”, 또는 “일곱째” 날에 오고 있다. 마지막 심판은 전체적으로든, 세부적으로든, 주님이 오시는 때가 모든 이에게 온다. 예를 들면, 주님이 세상에 오셨을 때, 마지막 심판이 있었다, 그리고 그분이 영광 안에서 오실 때 마지막 심판이 있을 것이다; 세부적 측면이 무엇이든 주님이 어떤 사람에게 올 때, 마지막 심판이 있다; 각자가 죽을 때 마지막 심판이 있다. 각 개인의 마지막 심판이 “셋째 날”과 “일곱째 날”에 의해 뜻해지는데, 선한 생애를 꾸린 자는 거룩해지고, 악한 생애를 꾸린 자는 거룩하지 않다. 그런고로 “셋째 날”과 “일곱 째 날”은 영벌을 선고 받는 자, 영생을 선고 받는 자 모두를 각각 서술해준다; 그러므로 이 숫자들은 영벌을 선고 받는 자에게는 거룩하지 않은 숫자를 의미하게 되고, 영생을 선고 받는 자에게는 거룩한 숫자를 의미해준다. 3과 7에 앞서 있는 2와 6은 3과 7의 단계에 앞서 진행된 모든 상태와 일반적 측면에서는 관련이 있고 의미하고 있다. 이것은 어떤 주제를 가지고도, 이 숫자가 서술하는 어떤 문제들에서도 공히 2와 6의 의미인 바, 뒤이어 살피는 숫자, 27에서 분명해질 것이다.

“이십 칠 일, seven and twentieth day”이 거룩한 것을 의미한다는 것은 숫자 27이 3 만을 두 번 곱하여 완성되기 때문이다. 즉 3×3=9, 그리고 9×3=27이다. 그러므로 27을 지배하는 숫자는 3이다. 이런 식으로 태고인들은 숫자들을 계산했다, 그리고 그들은 어떤 품질을 나타내는지(뜻하는지)를 순수하게 이해했다. 3이 7과 똑 같은 의미를 가진다는 것은 바로 앞에서 말했다. 주님께서 셋째 날에 일어나신 데에 대한 감추인 이유가 있다. 주님의 부활 자체는 모든 거룩함을, 그리고 모든 자의 부활을 포함하고 있다. 이것이 왜 유대 교회에서 이 숫자가 표현적 방법으로 사용되어졌는가 와 왜 이 숫자가 말씀 안에서 거룩한 숫자가 되어있는가에 대한 이유이기도 하다. 이런 상황은 천국에서도 유사한데, 거기에는 숫자가 없는 바, 3과 7 대신 그들은 (3과 7을 읽거나, 듣거나 할 때) 그들은 부활과 주님의 오심에 관한 일반적 거룩한 생각만을 가질 뿐이다.
3과 7이 거룩한 것을 의미하는 것은 말씀의 아래 인용 구절들로부터도 분명해진다. 모세의 책에서:
죽은 자와 접촉한 자는 칠 일 동안 불결해 있을 것이다; 이 자는 그로부터
삼일 째 날에 속죄할 것이고, 일곱 째 날에 깨끗해질 것이다; 그러나 만일 그가
자신을 셋째 날에 속죄하지 않으면, 일곱 째 날에 그는 깨끗하지 않을 것이다.
검으로 죽임을 당한 자, 또는 죽은 몸, 또는 사람의 뼈, 또는 무덤에 접촉한 자는
칠 일 동안 불결할 것이다; 깨끗한 자가 셋째 날에, 그리고 일곱 째 날에
불결한 자 위에 [물을] 뿌릴 것이다; 그리고 일곱 째 날에 그는 자신을 속죄할 것이다,
그리고 그는 자기 의복들을 빨 것이다, 그리고 물로 자신을 목욕할 것이다,
그리고 저녁에 깨끗하다 (민. 19:11, 12, 16, 19).
위 구절 속의 것들이 표현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 즉 바깥쪽 것들이 안쪽 것들을 의미한다는 것은 아주 명료하다. 그 이유가 죽은 몸, 죽임을 당한 자, 사람의 뼈, 무덤에 접촉한 자가 불결할 것이라 생각되는 것은 누구에게나 자연스럽게 다가와 지기 때문이다. 더구나 이런 더럽게 하는 것들이 내적 의미에서 보면 인간에 어울리는 것들을 의미한다. 즉 인간 측면의 것들은 죽어 있고 모독적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물로 씻고 저녁에 깨끗해진다는 것도 표현성을 지닌다. 그리고 셋째 날과 일곱 째 날 역시 그렇다. 이 날은 거룩한 것을 의미하는데, 그 이유는 이 날에 그가 속죄하고(atonement) 깨끗해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위와 마찬가지 방식인데, 미디안족과의 전투로부터 돌아온 이들에 관해서이다:
너희는 진영 밖에서 칠 일 동안 진영을 꾸려라; 혼을 죽인 자는 누구든지,
그리고 살해된 자를 만진 자는 누구든지, 너희는 네 자신을 셋째 날과
일곱 째 날에 속죄 할 것이다 (민. 31:19).
위 구절의 말에 만일 의식을 치루는 수준의 의미밖에 없다면, 그래서 셋째 날과 일곱 째 날이 거룩함을 표현함도, 의미함도 없다고 한다면, 이는 죽은 것, 마치 원인 없는 것, 목적 없는 원인 같은 것, 또는 원인으로부터 분리된 어떤 것 같은 것, 목적으로부터 분리된 원인 같은 것, 그런고로 그 말씀에는 신성이 없다는 식으로 되어버리고 말 것이다. “셋째 날”이 거룩한 것에 대한 표현성을 지녔다는 것, 그런고로 거룩한 것을 의미했다는 것은 시내산 위에 주님께서 내려 오실 때, 이를 위해 명령하신 바로부터 분명해진다:
그리고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했다, 백성에게로 가라, 그리고 그들을 오늘과 내일
신성해 있게 하라, 그리고 그들이 자기들의 의복들을 빨아라, 그리고 셋째 날을
준비하게 하라; 그 이유가 셋째 날에 여호와께서 시내산 위에 모든 백성의 시야에서
내려오실 것이기 때문이다. (출. 19:10, 11, 14, 15).
똑 같은 이유로 여호수아가 셋째 날에 요단을 건넜다:
여호수아는 진영 한 가운데를 통과하며 명령했다, 그리고 백성들에게 명령했다,
말하기를, 너는 음식을 준비하라, 그 이유가 삼일 내에 너희는 토지를 상속받기 위해
이 요단을 건너야 한다 (여. 1:11; 3:2).
요단을 건넘은 이스라엘의 아들들의 입문, 즉 거듭나는 이들이 주님의 왕국 안으로 입문함이다; 그들을 이끈 여호수아는 주님을 표현했다; 그리고 이 건넘은 셋째 날에 실행되었다. 그 이유는 셋째 날이 거룩하였기 때문이고, 일곱 째 날도 마찬가지 이다, 십일조의 해가 제 삼년 째 해 이다는 것, 백성들은 선행의 일들을 해서 자신이 거룩함을 보여야 한다는 것을 제정해 주셨다 (신. 26:12-15); “십일조”는 리메인스를 표현했다. 이 십일조가 거룩한 것은 그것들이 주님만으로부터 있기 때문이다. 요나가 사흘 밤과 낮을 물고기의 뱃속에서 있었다는 것 (욘. 1:17)은 주님이 매장되심과 셋째 날 부활하심을 또렷하게 표현했다 (마. 12:40).
“3”이 거룩한 것을 의미하는 것은 예언서에서도 분명해진다. 호세아서에서:
이틀 후에 여호와께서 우리를 살리실 것이다; 셋째 날에 그분은 우리를 일으키실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그분 앞에서 살리라 (호. 6:2),
위 구절 역시 “셋째 날”은 주님의 오심과 그분의 부활하심을 명백하게 표시한다. 스가랴서에서:
모든 토지에서 삼분의 이는 떼어내고, 죽을 것이나, 그 안에 있는 삼분의 일은
남겨질 것이다, 그리고 나는 삼분의 일을 불을 통하여 데려올 것이다,
그리고 그들을 은이 정제되듯 정제할 것이다. 그리고
금을 제련하듯 그들을 시험해 볼 것이다 (슥. 13:8-9),
위의 “1/3”은 “3”과 같이 거룩한 것을 표시한다. 3에 의해 포함된 것과 같이 1/3에 의해서도 같은 의미를 포함한다. 또한 1/3의 1/3에 의해서도 같은 의미를 포함하는데, 본문의 경우가 이에 해당된다. 즉 27의 1/3의 1/3이 3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본문의 27도 3과 같이 거룩한 것을 의미하게 된다.)

땅이 “말랐음”이 인간이 거듭났음을 의미한다는 것은 이미 살핀 7절과 13절로부터, 즉 물들이 땅에서 말랐다와 지면의 얼굴이 말랐다로부터 분명해진다.

15, 16절. 그리고 하느님께서 노아에게 이야기하시어, 말하신다.16 너와 네 아내, 네 아들들, 너와 함께한 네 아들들의 아내들은 방주에서 나가거라.

그리고 하느님께서 노아에게 이야기하셨다. 이는 이 교회인과 더불은 주님의 현존하심을 의미하는 것은 말씀의 내적 의미로부터 분명해진다. 주님께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이야기하신다. 그 이유가 인간이 생각하고 뜻하는 선하고 참된 것은 무엇이든 주님으로부터 있기 때문이다. 모두 각각의 인간과 더불어 최소한 두 악령들과 두 천사들이 있다. 악령들은 자기의 악들을 선동하고, 천사들은 선하고 참된 것들을 불어넣는다. 천사들에 의해 불어넣어진 선하고 참된 모두 각각의 것은 주님으로부터 있다; 그러므로 주님은 인간과 더불어 계속 이야기하고 계신 셈이다. 그러나 모든 사람에게 일률적이 아니고 각각의 사람과 더불어 계심은 각각 다르다. 악령이 자신을 이끌도록 허용한 자에게는 주님이 안 계신듯, 또는 멀찍이 계신듯 한 바, 그분이 말을 하시지만 당사자에게는 거의 말하지 않는듯 여긴다. 그러나 주님의 인도를 받는 이들과 더불어, 주님께서는 더 가까이 현존하시어 (직접적으로) 말하신다; 이는 아무도 주님으로부터가 아니면 선하고 참된 어떤 것도 생각하지 못한다는 사실로부터 충분하게 분명해질런지 모른다.
주님의 현존은 인간이 지니는 신앙의 상태와 이웃을 향한 사랑의 상태에 따라 가깝든지, 멀든지, 또는 규모 등등이 결정되어진다. 이웃을 향한 사랑 안에 주님은 현존하신다. 그 이유는 그분은 모든 선 안에 계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랑이 결핍된 신앙 안에서의 경우는 그렇지 않다. 사랑과 선행 없는 신앙은 연결되어 있지 않은, 분리된 것, 또는 떼어내진 것이다. 결합이 있는 어디에서든지, 결합하게 하는 매체가 있음에 틀림 없고, 이 매체는 사랑과 선행밖에 더 없다. 이는 이런 사실, 즉 주님께서는 모든 이에게 자비하시다는 것, 모든 이를 사랑하신다는 것, 모든 이로 하여금 영원히행복해지도록 뜻하신다는 것으로부터 분명해짐에 틀림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타인에게 자비롭고, 타인을 사랑하고, 타인이 행복해지게 만들기를 뜻하는 이런 사랑 안에 있지 않으면, 우리는 주님과 결합될 수 없다. 그 이유는 우리가 그분 같지 않고 그분의 형상 안에 전혀 있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가 추측한 신앙의 렌즈(lens)를 통하여 주님을 응시하는 것, 동시에 이웃을 미워하는 것은 주님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서 있게 할 뿐아니라 우리 자신과 주님 사이에 심연(abyss, gulf)이 놓여지게 한다. 이런 우리가 만약 주님에게 가까이 접근하면, 그는 이 심연에 빠지고야 말 것이다. 그 이유가 이웃을 미워함이 양쪽 사이에 놓인 심연이기 때문이다.
주님의 현존이 처음 가능해지게 하는 것은 인간이 이웃을 사랑할 때이다. 주님은 사랑 안에 계신다; 그리고 인간이 사랑 안에 있는 만큼에서 주님도 현존하신다; 주님이 현존하는 만큼에서 그분은 인간과 이야기하신다. 인간은 자신 스스로로부터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 단 한 개의 생각, 아마 생각의 한 조각도 자신으로부터 있지 않다는 것을 알아채지 못한다; 즉 인간은 자기의 악한 것과 거짓된 것을 지옥으로부터의 악령들을 통하여 가진다는 것, 그리고 인간은 자기의 선하고 참된 것을 주님으로부터 천사를 통하여 가진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한다는 말이다. 이와 같은 것이 인간과 더불어 있는 유입(influx)이다. 이 유입으로부터 인간은 자기의 생명이 있고, 몸과 더불은 그의 혼의 상호 작용(interaction)이 있다. 위의 설명으로부터 “하느님께서 노아에게 이야기하셨다 (spake)”라는 말에 의해 뜻해지는 것이 분명해진다. 그분이 누구에게 “말하심(saying)” (예를 들면, 그분께서 창. 1:29, 3:13, 14, 17; 4:6, 9, 15;6:13; 7:1에서 말하심 같이)은 그분이 누구에게 이야기하심(speak)과는 다르다. 여기서의 경우, 그분이 노아에게 이야기하심은 현존하심을 표시한다. 그 이유는 지금의 주제가 선행을 선물받은 거듭난 인간이기 때문이다.

방주로부터 나가라. 이것이 자유를 의미한다는 것은 이미 말해진 것과 글의 문맥의 연결 자체로부터 분명해진다. 노아가 방주 안에 있고, 홍수의 물들에 둘러싸여 있는 한, 그는 포로 신세나 다를 바 없어, 그는 악들과 거짓들에 의해 이리저리 흔들려지고 있다. 다시 말해 악령에 의해 점화된 시험의 전투에 종사하는 중이었다. 그러므로 “방주로부터 나감”은 자유를 의미한다. 주님의 현존은 자유를 포함한다. 말하자면 시험을 이겨냄의 결과가 자유이다는 말이다. 더 주님의 현존이 있으면, 인간은 더 자유해진다는 말이다; 즉 인간이 선과 진리를 더 사랑하면, 그는 더 자유하게 행동한다. 이것이 천사들을 통하여 있는 주님의 유입 (주님의 영향력의 본성)이다. 한편, 악령을 통한 지옥의 유입은 강제적이고, 격렬하고, 지배하려 분투한다; 그 이유가 이런 영들은 인간을 완전 복종되게함 밖에, 그리하여 인간은 아무 것도 아닌 것, 악령이 모든 것이 되게 하는 것 외에 더 관심되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이 영들이 모든 것일 때, 인간은 그 모든 것 속의 하나, 아마 그 하나조차도 되지 못해 결국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전락될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그 영들의 지배로부터, 그들의 멍에로부터 자유해지게 하실 때, 전투는 필수적으로 수반된다; 그러나 인간이 자유해질 때, 즉 거듭났을 때, 이 인간은 천사의 섬김을 통하여 주님에 의한 인도가 있는데, 이는 아주 온유해서 거기에는 멍에나 지배함 따위는 무엇이든 없다; 그 이유가 그는 자기의 즐거움과 행복함을 수단으로 인도되고, 사랑받고, 존중받기 때문이다. 이것을 주님께서 마태복음서에서 가르치신다:
내 멍에는 쉽다, 그리고 내 짐은 가볍다 (마. 11:30),
위 구절의 반대되는 인간의 상태가 악령들의 멍에 아래 있어, 아무 것도 아닌 인간 취급을 당할 때의 경우이다. 게다가 악령들은 할 수만 있다면, 인간에게 매 순간이라도 고통을 안기려 골몰한다. 이에 관하여는 주님께서 많은 경험을 하게 하시어 나로 알게 해주셨는데, 차후 주님의 신성한 자비로부터 (말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너와 네 아내”가 교회를 의미하는 것은 마찬가지 방식인 (문맥의) 연결로부터 분명해진다. 또한 “너와 더불은 네 아들들과 네 아들들의 아내들”은 거듭난 자 안에 있는 진리들, 그리고 진리들과 결합된 선들을 의미한다. “너”가 교인을 의미하는 것은 분명하다. 그리고 그의 “아내”도 교회를 의미한다, 그리고 그의 “아들들”은 진리들을, 그리고 그의 “아들들의 아내들”은 진리들과 결합된 선들을 의미한다. 이에 대한 것은 이전에도 반복적으로 설명되어왔기에 설명은 생략할 것이다.

17절. 모든 육체로부터, 너와 함께 있는 야생 동물 각각 모두, 즉 새와 짐승과 땅에서 기는 기는 것 각각 모두, 너와 함께 있도록 가져 온 것들은 땅에서 자신들을 퍼져나가고, 땅에서 열매를 많이 맺고, 번성하도록 하리라.

모든 육체로부터 너와 함께 있는 모두 각각의 야생 동물. 이는 이 교회의 사람 안에서 살아 있게 만들어진 모든 것을 의미하는데, 이는 “야생 동물”이 지금 거듭난노아를 서술한다는 것, 그리고 이어지는 것들, 즉 새, 짐승, 기는 것과 관련된다는 것에서 분명해진다; 그 이유가 “모든 육체로부터 너와 함께 있는 모두 각각의 야생 동물”은 새에 관하여, 짐승에 관하여, 그리고 땅에서 기는 기는 것에 관하여 임이 명백하기 때문이다. 이 구절에서 “야생 동물”로 번역된 원어의 적절한 의미는 생명, 또는 살아 있는 것이다; 그러나 말씀에서 이 단어는 살아 있는 것을 위하여도, 살아 있지 않은 것을 위하여도, 또는 야생 동물을 위하여도 사용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내적 의미를 알지 않으면, 우리는 때로는 그 단어가 무엇을 뜻하는지를 볼 수 없는 경우가 발생한다. 이런 두 겹의 의미를 지닌 이유 때문에 태고 교회인은 주님 앞에 설 경우 그들의 본성은 면목 없음,무가치함에 불과한 바, 자신들은 살아 있지 않은 자로, 짐승 수준조차도 아닌 것 같아, 야생 동물로서 인정했다; 그 이유가 이 사람들은 자기 자신만에 주목해보았을 때, 또는 자기 자신 안에만 있을 때, 그런 수준밖에 안됨을 알았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단어 하나가 두 가지 뜻, 즉 살아 있는 것과 야생 동물을 뜻한다.
먼저 “살아 있는 것”을 뜻하는 구절을 찾아보자. 다윗서에서:
당신의 야생 동물이 거기 안에 거주할 것입니다 [즉, 하느님의 상속물 안에];
당신, 오 하느님, 당신의 선함으로 불쌍한 자를 굳세지게 할 것입니다 (시. 68:10).
위 구절에서 “야생 동물”이 하느님의 상속물 안에 거주하기 때문에, “야생 동물”은 거듭난 사람을 뜻한다; 위 인용구절처럼 본문도 이 사람 안에 있는 살아 있는 것을 뜻한다. 같은 시편서에서:
숲의 모두 각각의 야생 동물, 그리고 수많은 산들에 있는 짐승들도 나의 것이다;
나는 산들의 모든 새들,
그리고 내 들판의 야생 동물이 나와 함께 있다는 것을 안다 (시.50:10-11).
위 구절에서 “나와 더불은” 내 들판의 야생 동물, 즉 하느님과 더불은 내 들판의 야생 동물은 거듭난 인간을, 고로 거듭난 사람 안에 있는 살아있는 것을 표시한다. 에스겔서에서:
하늘들의 모든 새들이 그의 굵은 가지들에 그들의 둥지를 만들었다, 그리고
그의 가지들 아래 들판의 모든 야생 동물들이 새끼를 낳는다 (겔. 31:6).
위 구절에서는 심어진 영적 (평면의) 교회가 의미되고, 그 교회인 안에 있는 살아 있는 것을 표시하고 있다. 호세아서에서:
그 날에 나는 들판의 야생 동물과 더불어, 그리고 하늘들의 새와 더불어
그들을 위해 언약을 만들 것이다 (호. 2:18).
위 구절은 거듭나지는 이들, 이들과 더불어 언약이 만들어짐이 뜻해진다. 그러므로 야생 동물의 의미가 살아 있는 것임을 강력하게 시사한다. 에스겔에 의해 보여진 거룹들, 또는 천사들도 “네 야생 동물들”이라 불리운다 (겔. 1:5, 13-15, 19; 10:15).
야생 동물의 반대적 의미인 살아 있지 않은 것을 취한 말씀 역시 많은 구절에서 발견되지만 아래 몇 구절만을 확증을 위해 열거해 본다. 다윗서에서:
야생 동물에게 당신의 호도애(turtle dove)의 혼을 넘기지 마소서 (시. 74:19).
스바냐서에서:
어찌하여 성이 황무해져, 야생 동물이 드러눕는 장소가 되었는가 (습. 2:15).
에스겔서에서:
그리고 그들은 더 이상 민족들에게 전리품이 되지 않을 것이고,
땅의 야생 동물이 그들을 먹지 않을 것이다 (겔. 34:28).
그의 파멸 위에 하늘들의 모든 새가 거주할 것이다, 그리고
들판의 모든 야생 동물이 그의 가지들 위에 있을 것이다 (겔. 31:13).
호세아서에서:
나는 사자 같이 그들을 없애버릴 것이다;
들판의 야생 동물이 그들을 찢을 것이다 (호. 13:8).
에스겔서에서:
나는 너희를 땅의 야생 동물에게, 그리고 하늘의 새에게 음식으로 주었다 (겔. 29:5),
위 구절 같은 표현은 말씀에서 종종 있는 편이다. 그리고 유대인들은 글자 의미만에 완전히 달라붙어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야생 동물을 야생 동물로서만, 새는 새로서만 이해했다, 또한 말씀의 더 깊은 의미를 알고 싶지도 않았고, 배우려하지도 않았다. 그 결과로서 그들은 잔인했고 야생적이었는 바, 그들은 전투에서 죽인 적의 시체들을 묻는 것을 거절하고, 새들과 야생 동물들에 의해 먹히도록 방치함에서 쾌락을 발견했다; 이런 것도 인간 존재가 야생 동물인 것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새”가 그의 이해력에 속한 것들을, “짐승”은 그의 의지력에 속한 것들을 의미하고 이것들은 내적 인간 측면에 있다. 그리고 “땅에서 기는 기는 것”은 그의 외적 인간에서 상응하는 것들을 의미함은 앞서 살핀 새로부터, 그리고 “짐승”으로부터 분명해진다. “땅 위를 기는 기는 것”이 외적 인간에서 상응하는 것들을 의미함은 지금 분명해진다. 그 이유가 여기서의 기는 것들은 “새”(이해력 측면)와 “짐승”(의지력 측면) 양쪽과 관계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태고인들은 신체의 감각적인 것들과 쾌락들을 (땅을 )기는 기는 것이라 불렀다. 그 이유는 그것들이 땅위에서 기는 것과 똑같기 때문에서 였다. 태고인들은 인간의 신체를 땅, 또는 지면에 견주었고, 심지어는 땅, 또는 지면이라 부르기까지 했다. 본문에서도 “땅”은 외적 인간밖에 더 아니다.

“기는 기는 것”이 외적 인간에 있는 상응하는 것을 의미함에 관하여는 이러하다. 거듭난 인간에서 외적인 것들은 내적인 것들에 상응하고 있다. 즉 외적인 것들에 값을 매김, 다시 말해 외적인 것들이 내적인 것들에 얼마나 순종하느냐에 의거 외적인 것의 가치가 정해진다는 말이다. 인간이 거듭나질 때, 외적 인간은 순종함 쪽으로 환원되어진다. 그때 그는 천국의 형상이 된다. 그러나 인간이 거듭나지기 이전의 경우에서, 외적인 것이 내적인 것을 통치했는 바, 그 당시 그는 지옥의 형상이었을 것이다. 천적인 것이 영적인 것을 통치하고, 영적인 것이 자연적인 것을 통치하고, 마지막으로 위의 것들을 통하여 지상적인 것들을 통치해 내려가는 것이 질서이다; 그러나 물질적이고 자연적인 것들이 영적인 것들과 천적인 것들을 통치할 때, 질서는 파괴되어진다. 그리고 인간은 지옥의 형상이다; 그러므로 주님은 거듭남을 수단으로 질서를 회복하신다. 그리하여 주님께서는 인간을 지옥으로부터 끌어내시고, 그를 천국으로 들어올리신다.
외적 인간이 내적 인간에 상응하는 것에 관련하여 몇 마디 말하고 지나가야 할 것 같다. 모든 거듭나는 인간은 천국의 축소형이다. 즉 그는 전체 천국의 형상, 또는 모델(model)이다. 이런 이유에서 말씀에서 거듭나는 자의 내적 인간을 천국(하늘)이라 부르고 있다. 천국 안에서의 질서는 주님께서 천적인 것을 통하여 영적인 것을, 영적인 것을 통하여 자연적인 것을 통치하는 것이다. 이런 방법에서 그분께서는 전체 천국을 한 사람을 통치하듯 하신다. 그런 이유에서 천국은 웅대한 사람이라 불리운다; 또한 천국 안에 있는 모든 이에게도 똑 같은 질서가 응용된다. 인간 역시 이런 질서에서 있을 때, 그는 천국의 축소판, 주님의 왕국이기도 하다. 그 이유는 주님의 왕국은 인간 안에 있기 때문이다. 이 인간 안에서 외적인 것들은 내적인 것에 상응하고 있다. 즉 외적인 것들이 내적인 것에 순종하는 것, 이것이 천국 안에서 실행되고 있다. 세 천국들에서, 영들은 천국의 바깥쪽 자체를 형성하고, 천사 같은 영들은 중간 천국 자체를, 천사들은 안쪽 자체를 형성하고 있다. 천국의 도면은 이렇게 그려지지만, 이 세 차원은 한 개인의 형상을 표출한다.
위와 반대의 경우도 있다. 오로지 물질적인 것 만으로, 즉 그리워함들로, 쾌락들로, 욕구들로, 감각들의 탐익들로, 자아와 세상을 사랑함 말고는 즐거움을 지각하지 못함으로, 자기를 섬기지 않거나 좋아하지 않는 이들에 증오만을 가지는 것들로 자신의 생명을 만드는 이들이 위와 반대되는 이들이다. 이런 자들과 더불어, 물질적이고 자연적인 것들이 영적이고 천적인 것들을 통치하기 때문에, 거기에는 외적인 것의 순종이나 상응은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 이는 질서의 정반대, 고로 질서는 완전히 파괴되어 있다; 이렇게 파괴되었기 때문에 그들은 지옥의 형상 외에 달리 있을 수 없다.

너와 함께 있도록 가져온 것. 이것은 그들의 상태가 자유임을 의미한다는 것은 앞 15절, “방주에서 나감”의 의미가 자유해짐을 의미한다로부터 명백해진다.

그것들은 땅 위에서 자신들을 퍼져가게 하라. 이것은 내적 인간이 외적 인간 위에서 시행함을 의미한다는 것, 그리고 “열매를 많이 맺는 것”은 선이 증가함을, “번성하는 것”은 진리의 증가를, 그리고 “땅 위에서”는 외적 인간에서를 의미한다는 것은 각각의 것들의 연결로부터, 그리고 이미 살핀, “열매를 많이 맺음”과 “번성함”의 의미가 선의 증가와 진리의 증가를 의미함으로부터 분명해진다. “땅”이 외적 인간을 의미함은 이전에 여러 번 살핀 바 있어 여기서의 설명은 생략한다. 여기서의 주제는 인간이 거듭난 이후 내적 인간이 외적 인간에게 시행함인 바, 이 시행 처음에, 즉 외적 인간이 순종함, 또는 상응할 때, 보여주는 것은 선이 열매를 많이 맺는 것, 진리는 불어나는 것이다. 이 보여줌은 거듭나기 전에서는 결코 가능할 수 없었다. 그 이유는 물질적인 것이 선한 것에 반대하고, 감각적인 것이 참된 것에 반대하고 있기 때문이다. 전자는 선을 사랑함을 꺼지게하고, 후자는 진리를 사랑함을 소멸되게 한다. 선의 열매를 많이 맺음과 진리가 번성함은 외적 인간에서 거행된다; 그의 애착들에서 선의 열매맺음이, 그의 기억에서 진리가 불어남이 있다. 외적 인간이 여기서 “땅”이라 불리우고 있다. 이 위에 그들은 자신들을 퍼져나가게 하고, 이 위에서 그들은 열매를 많이 맺고 번성한다.

18, 19절. 그리고 노아는 나왔다, 그리고 그의 아들들, 그의 아내 그의 아들들의 아내들, 19 야생 동물 각각 모두, 기는 것들 각각 모두, 새들 각각 모두, 땅에서 기는 것 각각 모두, 그 가족들에 따라 방주에서 나왔다.

그의 “나감”은 그렇게 행해졌음을; “노아와 그의 아들들”은 고대 교회의 사람을; “그의 아내와 그의 아들들의 아내들”은 이 교회 자체를 의미한다는 것은 시리즈로 연결되어가는 사항들로부터 분명해진다. 이 구절은 고대 교회가 만들어진 것들을 포함하고 있다. 그 이유가 이것들은 앞서 간 것들에 대한 마지막 서술, 또는 마감하는 서술이기 때문이다. 말씀에서 교회가 묘사될 때, “남자(vir)와 그의 아내”, 또는 “사람(homo)과 그의 아내” 로 묘사되어진다; “남자와 그의 아내”로 묘사될 경우, “남자”는 이해력, 또는 진리를, “아내”는 의지력, 또는 선을 의미한다; “사람과 그의 아내”로 묘사될 경우, “사람”은 사랑의 선, 또는 사랑을, “그의 아내”는 신앙의 진리, 또는 신앙을 의미한다. 그리하여 “사람”은 교회의 본질(essential)되는 것, “아내”는 교회 자체를 의미한다. 이는 말씀을 통털어 그러하다. 위 내용을 본문과 연결하여 생각하면, 현 성경의 앞 뒤 큰 틀은 태고 교회의 멸망 시점에서 새로운 교회의 형성을 다루는 것인 바, “노아와 그의 아들”은 고대 교회의 사람에 해당되고, “그의 아내와 그의 아들들의 아내들”은 이 교회 자체이다. 그러므로 16절과 18절, 각 절에서 불러지는 이름들의 순서가 다르다. 16절에서의 경우, “방주에서 나가거라, 너와 네 아내, 그리고 너와 함께 있는 네 아들들과 네 아들들의 아내들”이라 말해진다. 이 구절의 경우, “너와 네 아내”는 함께 결합되어 있다. 그리고 “네 아들들과 네 아들들의 아내들”도 함께 결합되어 있다. 그런고로 “너”와 “네 아들들”은 진리를 의미하고, “네 아내”와 “네 아들들의 아내들”은 선을 의미한다. 그러나 18절의 경우, 우리는 순서가 다른 말씀을 생각하고 있다. 그 이유인즉, 이미 말했던 것, 즉 “너와 네 아들들”이 교회의 사람을 의미하고, “아내와 아들들의 아내들”은 교회 자체를 의미하는 바, 앞서 진행되어 온 것에 대한 결말이기 때문에서 이다. (역자가 한 번 더 위 글을 간단히 정리하면, 16절은 너와 네 아내, 아들과 아내라고 서술되어 남편과 아내임을 강조하듯 결합된 것을 강조하고, 18절은 6,7,8장을 아우르는 결말인지라, 노아와 아들(고대 교회의 실체), 그리고 아내들(고대 교회의 실재)을 구분하여 서술해서, 고대 교회의 출현 과정을 마무리지음을 암시하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사실상) 노아는 고대 교회를 구성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아들들, 셈, 함, 야벳이 이 교회를 구성하는데 이미 언급한 적이 있다. 말하자면, 이 세 인물, 즉 세 교회들이 이 고대 교회를 형성했다는 말인데, 차후 주님의 신성한 자비로부터 이에 관하여 언급할 것이다. 그리고 이 교회들은 “노아”라 불리는 한 개의 교회로부터 출생한듯 앞으로 나서고 있다; 그러므로 이 구절에서 “너와 네 아들들”, 그리고 또한 “네 아내와 네 아들들의 아내들”이라 말해진다.

“모두 각각의 야생 동물과 모두 각각의 기는 것”은 이 교회인의 선들을 의미한다; “야생 동물”은 내적 인간의 선들을; “기는 것”은 외적 인간의 선들을 의미한다; 그리고 “모두 각각의 새와 땅 위에서 기는 모든 것”은 진리들을 의미한다; “새”는 내적 인간의 진리들을; 그리고 “땅 위에서 기는 것”은 외적 인간의 진리들을 의미한다. 이에 대한 의미 파악은 창. 8:17에서 야생 동물, 새, 기는 것에 관해 말해진 것에서 분명해진다. 17절에서, “기는 기는 것”이라 말해진 이유는 외적 인간의 선과 진리가 의미되었기 때문에서 이다. 또한 여기서 말해진 까닭은 앞서 진행한 것에 대한 결말이기 때문에 여기에 이 교회 속에 있는 것들, 즉 선들과 진리들이 첨가된 것이다; 이것들을 수단으로 이 교회의 품질이 암시되게 하고 있다. 즉 이 품질은 영적 (평면의) 수준이다는 것, 따라서 선행 또는 선이 이 교회의 제 1의 순위에 있다는 것을 암시해놓고 있다; 그러므로 이 구절은 “야생 동물과 기는 것”을 먼저 언급하고, 그 뒤에 “새와 기는 것”을 언급하고 있다.
교회가 선행, 또는 선행의 선으로부터 행동할 때 그 교회는 영적 수준이라 말해진다. 교회가 선행없이 신앙을 가지고 있다라고는 결단코 말해지지 않는다. 그 이유는 이럴 경우, 교회라는 단어 자체를 사용할 자격조차 안되기 때문이다. 선행의 교리를 빼놓고 신앙의 교리를 거론한다면 그것이 무엇일까? 신앙이 가르치는 것을 인간이 실행해야 함을 빼놓고 말한다면 신앙의 교리는 무슨 목적으로 있는 것일까? 신앙이 가르치는 것을 알고 생각하는 것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신앙이 가르치는 것을 실행해져야 한다. (이는 지극히 평범한 논리 수준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영적 (평면의) 교회는 선행으로부터 행동할 때 교회라는 것이 시작된다. 그리고 선행은 신앙의 참 교리(실체)이다. 같은 말이지만 한번 더 말하면, 교인은 선행으로부터 행동할 때 축소판 교회가 되어 있는다. 이것도 생각해보라: (명령이란 무엇인가?) 명령이 무엇 때문에 주어져 있는가? 주님의 명령은 알고 있기만 하라고 준 것이 아니라 안 즉시 그것을 실행하라고 주어진 것이다. 이 실행 안에 있는 자는 자기 안에 주님의 왕국을 가진다. 그 이유는 주님의 왕국은 오로지 상호적인 사랑과 이로 인한 행복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선행으로부터 신앙을 분리하는 이들, 그리고 선행의 선한 일들 없는 신앙에 구원이 있다고 구원론을 펼치는 이들은 선행인 아우 아벨을 살해한 가인족이다. 그들은 시체 위에서 맴도는 새와 같다; 그 이유가 이런 신앙이 새이고, 선행없는 인간이 시체이기 때문이다. 그들 역시 자신들을 위한 가짜 양심을 만들어낸다. 그렇게 하여 그들은 악마들 같이 살고, 증오로 이웃을 붙잡아두고 그들을 핍박하면서, 간음질로 전 생애를 꾸려도 결국은 구원받고야 만다. (이는 극단적 서술일지 모르지만) 이와 비슷한 것이 기독교계에 알려져 있다. (17세기 선각자의 시절 전후는 너무나 문맹적 시기인지라 “신앙만으로” 의롭다함을 인정받는 식의 위의 논조도 대중에게 먹혔겠지만 현재의 대중에는 지적 수준이 여느 신학교의 지적 수준을 능가하는 자가 수없이 많이 포진된 관계로 스웨덴볽의 신학이 꼭 아니더라도 옛 교리의 주장에 절대적 지지를 보내지는 않을 것 같다고 역자는 생각된다) 자신이 소, 돼지만 못한 수준에서 살고 있다해도 구원된다고 하는 논리 만큼 인간 당사자에게 이보다 더 달콤한 언어적 접근은 없을 것이다. 제대로 된 이방인들은 이것이 가짜임을 즉각 알아챈다. 그래서 이들 중 많은 이들은 이런 기독인들이 사는 것을 주시할 때, 기독교의 교리를 몹시 싫어한다. 신앙의 이런 품질(가짜 양심)은 기독교에서만 발견되는 특이사항이다.

그것들의 가족들(families)에 따라. 이것이 쌍들을 의미하는 것은 이미 살핀 것, 즉 창. 7:2, 3, 15로부터, 거기서 말해진 바, “깨끗한 것은 일곱씩”, “불결한 것은 둘씩” 방주로 들어 갔다; 한편 여기서는 들어간 것들이 나오는 대목인데, 그들은 “그 가족들에 따라” 하고 말해지고 있다. 이렇게 말해진 이유는 모든 것들이 지금은 주님에 의해 질서에로 환원되었으므로 그것들은 가족들을 표현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거듭나는 인간에서 선들과 진리들, 또는 선행과 신앙에 관한 것들은 서로가 혈연 관계나 결혼 관계로서 같이 서로 관련되고 있다. 다시 말해 이것들은 천국에서 한 지주, 또는 부모로부터 있는 가족들 같이 있다. 선들과 진리들은 이런 질서 안으로 주님에 의해 가져와진다. 특별하게 여기서의 경우, 모든 선들은 일반적, 세부적 측면 모두에서 그것들 자신의 진리들을 중요시 하고 있다. 물론 그것들은 결혼으로 결합된 상태이기는 하다; 일반적 측면에서 선행이 신앙을 중시하는 것과 같이, 세부적 측면에서 선은 진리를 중시한다; 그 이유가 일반적인 것은 그것이 세부적 측면에서 존재하고 있지 않으면 일반적 차원이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일반적인 것은 그것의 존재를 가지게 하는 세부 사항에서 보여져야 한다는 말이다. 이는 모두 각각의 인간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인간 전체에 적용되는 규칙은 그의 애착이나 생각의 경미하게 여겨지는 세부 사항에서도 있어져야 한다. 이런 세부 사항이 모아져 한 인간의 전체가 구성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거듭나지고 있는 인간은 일반적 측면에서와 똑같게 아주 작은 세부 사항도 한 부모 아래의 가족들 같이 되어 있어야 한다.

방주에서 나갔다. 이는 자유의 상태를 포함한다는 것은 16절의 방주에서 나감으로부터 이미 말해진 바이다. 영적 (평면의) 인간의 품질은 그가 양심을 통하여 주님에 의해 규율되어짐 이다를 숙고해보면 알게 된다. 양심에 의해 규율되는 자, 또는 양심에 따라 행동하는 자는 자유하게 행동한다. 영적 (평면의) 인간에게 있어 양심에 거슬러 행동하는 것 이상 그의 비위를 거슬리게 하는 것은 없다. 양심에 거슬러 행동하는 것은 그에게는 지옥이고, 양심에 따라 행동하는 것은 그에게는 천국이다; 이로부터 양심에 따라 행동함이 자유임을 누구도 알 수 있다.
주님께서는 선하고 참된 것을 자신들에게 보여주는 양심을 통하여 영적 (평면의) 인간을 통치하신다; 이 양심은 인간의 이해력에서 만들어내진다. 이에 대하여는 이미 말했었다. 그런고로 그의 의지력에 속한 것과는 분리되어 있다. 그리고 이렇게 의지력에 속한 것으로부터 분리된 이유에서, 분명해지는 것은, 인간은 자신으로부터 선한 어떤 것을 결코 행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신앙의 모든 진리가 신앙의 선으로부터 있기 때문에, 명백해지는 것은, 인간은 자신으로부터 진정한 어떤 것을 결코 생각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오직 주님만으로부터 이다. 그가 자신으로부터 이런 것들을 행하고 생각하고 하는듯 여겨지는 것은 오로지 가상일 뿐이다; 이것이 그러하기에 영적 (평면의) 인간은 이를 인정하고 믿는다. 이로부터 분명해지는 바, 주님에 의해 영적 인간에게 주어진 양심은 마치 새 의지력과 같다. 이리하여 새로이 창조되는 인간은 새 의지력을 수여받고, 이로부터 새 이해력도 수여받는다.

20절. 그리고 노아는 여호와께 제단을 건축했다. 그리고 모두 각각의 깨끗한 짐승으로부터, 그리고 모두 각각의 깨끗한 새로부터 가져왔다, 그리고 제단에서 태워바치는 제물들을 바쳤다.

이 절에는 일반적 측면에서 고대 교회의 예배가 묘사되어져 있다. 이는 “제단”과 “태워바치는 제물”이다. 이 두 가지는 모든 표현적 예배에서 제 1 의 것이었다. 어쨌든 우선적으로 우리는 태고 교회에 존재했던 예배를 묘사해 볼 것이다. 그리하여 이로부터 표현적 방법 안에 주님을 예배함이 어떻게 근원되게 되었는가를 보일 것이다. 태고 교회인들은 내적 예배밖에 더 다른 예배는 없었다. 이는 천국에서 가지는 예배와 같은 예배이다. 이것 가지고 천국은 인간과 연락되었다. 그렇게 해서 이 둘은 하나를 만들었다; 그리고 이 전달 수단은 지각이었다. 이에 관하여는 우리가 이전에 종종 이야기 하곤 했다. 이 교회인들은 천사적이고 깊이를 지녔기 때문에, 비록 그들 역시 세상적인 것과 육체적인 것을 도외시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나, 이런 것들이 자신들의 삶의 중요도의 중심에 있게 하지 않았다. 그들은 감각으로부터 있는 갖가지 것들로부터 오히려 신성한 것, 천국의 어떤 것을 지각했다. 예를 들면, 그들이 높은 산을 보았을 때, 그들은 어떤 생각을 지각했는데, 그것은 산에 관한 것이 아니고, 승강함에 관해서, 이로부터 천국과 주님에 관해서 생각했다. 이리하여 세월이 흐르면서 주님은 가장 높은 곳에 거주하신다 라고 말해지게 되었다. 그분도 자신을 “최고 높고 드높은 분”이라 부르셨다; 그 후에 주님을 예배함이 산들에서 개최되었다. 다른 예를 생각해보자. 그들이 아침을 주목하였을 때, 그들은 하루 중의 아침이 아니라 천국인 것, 천국적인 것은 인간 마음들에서 아침과 새벽 같다는 것을 지각했다. 이로부터 주님은 “아침”, “동쪽”, “새벽”, “동틀녘”이라 불리셨다. 이런 식으로 그들은 나무와 그것의 잎과 그것의 열매를 보았을 때도, 그들은 그것들 안에서 나무는 인간을, 그것의 열매는 사랑과 선행을, 그것의 잎은 신앙을 보았다; 그리고 이로부터 교인을 나무에, 낙원에 비교했고, 그 사람 안에 있는 것은 잎들과 열매에 비교했다. 이렇게 해서 그들은 천국적 생각과 천사적 생각 안에 있었다.
모든 이가 아는 바, 일반적 생각이 모든 세부 사항들을 통치한다는 것이다. 그런고로 우리는 감각들의 모든 대상들, 보는 것 뿐만 아니라 듣는 것 등등에서도 그것들이 인간의 일반적 생각 안으로 흐른 것을 제외하고는 관심을 두지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의 심정에 기뻐함이 있을 경우, 우리는 보고 듣는 모든 것들이 미소짓고 기뻐하게 나타난다.; 그러나 심정에서 슬퍼함이 있을 경우, 그가 보고 듣는 모든 것은 슬퍼하고 애통함으로 나타난다. 이런 이유는 일반적 애착은 세부적인 모든 것에 나타나기 때문이다. 거꾸로 세부적인 것들이 일반적인 애착에서 보여지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그 반면, 모든 다른 것들이 나타나기조차 하지 않고, 마치 부재 중인 것처럼, 또는 별 소용 없는 것 인듯 되어있는 경우도 있다. 이런 양상이 태고 교회인과 더불어 있었다: 그들이 자기들 눈으로 본 것은 무엇이든 자기들을 위한 천국적인 특성을 지녔다. 그리하여 모든 것은 그들을 위해 절대적으로 살아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이것이 하느님에 대한 그들의 예배가 무엇 같았는지를 암시한다: 이 예배는 내적이었고 외적인 것은 결코 아니었다는 것이다.
이 교회가 기울어졌을 때, 즉 그의 후손에서의 경우인데, 그들은 지각 또는 천국과의 교류함을 잃게됨이 시작되면서, 또다른 상태의 것이 시작되었다. 그 다음 그들은 감각의 대상물 안에서 천국적인 어떤 것을 지각하는 과거 그들이 즐겨했던 것은 더 이상 있지 않았다. 그리고 오로지 세상의 것만 있게 되고, 자기들의 지각을 잃어가는 정도에 비례하여 세상적인 것에 대한 사랑은 증가했다. 마침내 홍수 직전의 이 교회를 마감하는 후손은 대상물 안에서 자기들에게 보이는 것은 세상적, 물질적, 지상적인 것 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천국은 인간으로부터 분리되었고, 그들은 아주 먼 방법 외에는 교류는 있지 않았다; 그리고 인간에게 지옥과의 교류함이 열려졌다. 거기로부터 인간의 일반적 생각이 왔다. 거기로부터 모든 세부 사항들에 대한 생각이 흘러들었다. 이는 이미 살펴 본 바이다 인간에게 어떤 천국적 생각이 표출될 때, 이것은 그들에게 대수롭지 않은 것으로 전락하였다. 결국 그들은 영적이고 천적인 것이 존재한다는 것조차도 인정하고 싶은 생각이 사라졌다. 이리하여 인간의 상태는 위 아래의 위치가 바뀌어지고 말았다.
주님께서 인간의 상태가 이러할 것 임을 예견하셨을 때 그분은 신앙의 교리적인 것들을 보존하시려 준비하셨다. 이 교리적인 것들은 인간으로 천적인 것과 영적인 것을 알게 해준다. 이 교리적인 것들은 “가인”이라 불리는 이들과 “에녹”이라 불린 이들을 수단으로 태고 교회의 사람들로부터 수집되었다, 이 두 사람에 관한 것은 앞에서 살핀 바 있다. 그러므로 가인에 관해 말해지기를, 누구도 그를 죽이지 못하도록 표가 가인 위에 놓여졌다 이다; 에녹의 경우는 하느님께서 데려갔다 이다 (창. 5:24 참조). 이 교리적인 것들은 의미(significative, 또는 상징적 언어) 안에만 존재했다. 그러므로 이 교리적인 것들은 (타락한 인간의 입장에서 보면) 마치 수수께끼를 이야기한 것들(인 듯 여겨지는 것들 안에), 즉 땅에서 발견되는 것을 수단으로 의미하고자 하는 것을 말함 안에 존재했다. 예를 들면, 산들은 천적 수준의 것들과 주님을 의미한다는 것; 아침과 동쪽도 이와 똑 같은 의미들을 가진다는 것; 다양한 종류의 나무들과 그것들의 열매들은 인간과 그의 천국적인 것들을 의미하는 등등이다. 이런 식의 것들 안에 교리적인 것들이 존재했는 바, 이것의 모두는 태고 교회의 의미들(표시물과 상징물)로부터 수집되었다; 결과적으로 그들의 저술(writing)들 역시 위와 똑 같은 본성으로부터 있었다. 그리고 (저술 안에 등장하는) 표현물을 두고 그들이 칭찬을 아끼지 않았던 바, (과분한 칭찬의 연속의 결과) 드디어 그 표현물로 해서 신성한 것과 천국의 것들을 보기조차 하는듯 여겨지기에 이르렀다. 자기들이 보는 표현물과 똑 같은 것이 태고적(antiquity)에도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태고적의 것과 비슷한 것들을 가지고 그들의 예배가 시작되어지고 허용되어졌다. 이것이 산 위에서, 숲에서, 나무들 한 가운데에서, 또한 야외에 설치한 상이나 기둥들에서, 그들의 예배가 있어진 근원이다. 드디어 제단들과 태워바치는 제물들이 등장했는데, 이후 이것은 예배의 제 1 의 항목이 되었다. 이 예배는 고대 교회에 의해 시작되었고, 이후 이 후손을 지나가면서 모든 민족들에 퍼졌다. 이외 다른 사항들은 주님의 신성한 자비로부터 차후 살핀다.

그리고 노아는 여호와께 제단을 건축했다. 이것이 주님을 표현함을 실행함을 의미하는 것은 앞서 말한 것에서 짐작했으리라 본다. 고대 교회의 모든 의식들은 주님에 관한 것을 표현했다. 유대 교회의 의식도 이 범주에 속한다. 그러나 후기 시대에 이르러서 제 1 의 표현물(representative)은 제단이었다. 동시에 태워바치는 제물 역시 제 1에 해당되는 항목이었다. 이 제물은 깨끗한 짐승들과 깨끗한 새들로 구성되고, 그것들이 의미한 바에 의거 그것들의 표현함도 있어졌다. 따라서 깨끗한 짐승들은 선행의 선들을, 깨끗한 새들은 신앙의 진리들을 의미했다. 고대 교회의 사람들은 이런 것들(표현물)을 바쳤을 때, 자기들은 주님에게 이런 선들과 진리들의 선물을 바친 것으로 간주해버렸다. 그분이 기뻐하시도록 주님에게 바쳐질 수 있는 것은 (사실상) 아무 것도 없다. 이들의 후손은 이방인들이나 유대인들 같이 그들의 실행함(practice)을 부패되게 했다. 그 이유는 자기들이 실행한 예배(제단이나 제물 등등의 표현물)가 어떤 상징적 의미를 가졌는지를 실감하지도 않으면서 실행(실습)만 되풀이 한 것, 그러므로 예배를 외적 수준에 머물게 한 것 때문이다.
제단이 주님을 표현하는 주요한 대상물이다는 사실은 제단들은 이방인들 사이에도, 다른 의식들이 조직되기 이전에도, 궤가 조립되기 이전에도, 성전이 건축되기 이전에도 이미 있었다는 사실들로부터 분명해진다. 이것은 아브람으로부터도 분명해진다. 그가 벧엘의 동쪽 산에 당도했을 때 그는 제단을 일으켜세우고,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 (창. 12:8); 그 후에 그는 제단에 태워바치는 제물로 이삭을 바치라는 명령을 받았다 (창.22:2, 9). 마찬가지로 야곱은 루즈, 또는 벧엘에 제단을 건축했다 (창. 35:6-7); 그리고 모세는 시내산 아래 제단을 건축했다, 그리고 제물을 바쳤다 (출. 24:4-6). 이런 모두는 [유대인들의] 제물 바침 이전에 조직되었다, 그리고 궤가 조립되기 앞서 있었고, 후에 광야에서 이런 예배가 수행되어진 것 뿐이다. 제단들이 이방인들 사이에도 있었다는 것은 발람이 발락에게 지시한 것, 즉 일곱 제단들을 건축하고, 일곱 거세한 수소들과 일곱 수양들을 제물로 준비시킨 것 등으로 미루어 보아도 분명해진다 (민. 23:1-7, 14-18, 29-30). 또한 민족들의 제단들을 파괴하라는 명령으로부터 분명해진다 (신. 7:5; 사. 2:2). 그런고로 제단과 제물을 수단으로 하는 신성한 예배는 유대인들과 더불어 조직된 새로운 것은 아니었다. 참으로 제단들은 인간들이 제단 위에서 소나 양을 잡아바친다라는 생각을 가지기 이전 기념물로서 건축되어졌었다.
제단이 주님을 표현함을 실행함이고, 태워바치는 제물이 그분을 예배함인 것은 예언서들 안에서, 또한 모세가 성직 직분을 수행하는 레위인들에 관련해 말한 것에서도 분명해진다:
그들은 야곱에게 당신의 정의들을, 이스라엘에게 당신의 법을 가르칠 것이다;
그들은 당신의 콧구멍에 향을 놓을 것이다, 그리고
당신의 제단 위에 온전한 태워바치는 제물을 바칠 것이다 (신. 33:10),
위 구절은 모든 예배를 뜻한다; 그 이유가 “야곱에게 정의를, 이스라엘에게 법을 가르치는 것”은 내적 예배를 표시하고; “당신의 콧구멍에 향을 놓는다와 당신의 제단에 온전한 태워바치는 제물을 바친다”란 내적 예배에 상응하는 외적 예배를 표시하기 때문이다. 이사야서에서:
그 날에 사람은 자기를 만든 분을 쳐다볼 것이고, 그의 눈이 이스라엘의 거룩한 분을
경외할 것이며, 자기가 만든 작품, 제단들을 쳐다보지 않을 것이다 (이. 17:7-8),
위 구절에서, “제단을 쳐다보는 것”은 일반적 측면에서의 표현적 예배를 표시하는데, 이것이 철폐되어졌다. 이사야서에서:
그 날에 이집트의 토지 한 가운데에 여호와에게 제단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거기로부터의 경계에 여호와께 대한 기둥이 있을 것이다 (이. 19:19),
위 구절 역시 “제단”은 외적 예배를 표시한다.
예레미야서에서:
주님께서 그분의 제단을 내치실 것이다, 그분은 그분의 성소를 몹시 싫어하셨다 (애. 2:7);
위 구절의 “제단”은 우상 예배로 변질된 표현적 예배를 표시한다. 호세아서에서:
에브라임은 제단들을 죄짓는 쪽에서 늘어났기 때문에
제단들이 그에게 죄짓게 하여 왔다 (호. 8:11);
위 구절의 “제단들”은 내적인 것에서 분리된 모든 표현적 예배를 표시한다. 고로 우상적 예배였다. 다시:
아웬의 높은 장소들, 이스라엘의 죄, 파괴될 것이다;
가시와 엉컹퀴가 그들의 제단들에서 올라올 것이다 (호. 10:8),
위에서 “제단들”은 우상적 예배를 표시한다. 아모스서에서:
그 날에 나는 그 자 위에서 이스라엘의 불법을 방문할 것이다, 또한
나는 벧엘의 제단들을 방문할 것이다, 그리고 제단의 뿔들을 잘라버릴 것이다 (암. 3:14),
위 구절에서 “제단들”은 표현적 예배가 우상적 예배로 전락했음을 표시한다.
다윗서에서;
그것들이 나를 당신의 거룩한 산과 성막으로 데려가게 하소서. 그리고
나는 하느님의 제단으로, 내 환희의 즐거움이신 하느님에게 갈 것입니다 (시. 4:3-4),
위 구절의 “제단”은 주님을 분명하게 표시한다. 그런고로 고대 교회와 유대 교회에서 제단을 건축함은 주님을 표현하기 위해서였다. 주님을 예배함이 태워바치는 제물과 제물들에 의해 우선적으로 실행되었고, 이런 것들이 표현 예배의 중요한 것들을 의미했는 바, 제단 자체는 이런 표현 예배 자체를 의미한다.

그리고 모두 각각의 깨끗한 짐승으로부터와 모두 각각의 깨끗한 새로부터 가져왔다. 이것은 선행의 선과 신앙의 진리들을 의미하는 것은 위에서 보여진 바 있다; 즉 “짐승”은 선행으로부터의 선들; 그리고 “새‘는 신앙의 진리들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태워바치는 제물은 수소들, 어린 양들, 염소들, 호도애와 어린 비둘기로 바쳐졌다 (레. 1:3-17; 민. 15:2-15; 28:1-31). 이들은 깨끗한 짐승들이고, 그것의 각각은 천국의 어떤 것을 의미했다. 그리고 이 동물들이 고대 교회에서 천국의 어떤 것을 의미했고, 뒤이어지는 교회에서도 같은 것을 표현했기 때문에, 태워바치는 제물과 제물들은 내적 예배의 표현물 외에 더 다른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그것들이 내적 예배로부터 분리되었을 때, 그것들은 우상 숭배가 되고 말았다. 건전한 이성의 소유자이다면 이런 내용 파악은 어렵지 않다. 의미를 담지 않은 자연물의 수준에서라면 돌더미밖에 더 아닌 것이 제단이고, 짐승을 죽이는 것밖에 더 아닌 태위바침이나 제물 바침인데 그것이 뭐 대수로울 것인가? 고로 이것이 신성한 예배가 되려면, 예배드리는 자가 알고 인정하는 천국의 어떤 것을 표현하고 있어야 하고, 그것들이 표현한 어떤 분을 그들은 예배해야 한다.
그가 주님에 관한 어떤 것을 이해할 마음이 있는 이상, 누구나 이런 사항들이 주님을 표현할 거라는 정도의 이해에 무지할 수는 없다. 표현되어진 그분이 보여지고, 인정되어지고, 믿어져야 하는 수단은 내적인 것들, 즉 선행과 선행으로부터의 신앙이다는 것이 예언서들에서 분명해진다, 예를 들면, 예레미야서에서:
그런고로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느님께서 말하신다, 네 제물들에 네 태워바친
제물을 추가하라, 그리고 너희는 고기를 먹으라; 그 이유가 내가 이집트의 토지로부터
그들을 데려내온 날에 나는 너희 조상에게 태워바치는 제물과 제물에 관하여 말하지
않았고, 명령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이것을 나는 그들에게 명령했다. 말하기를,
내 음성에 귀기울여라, 그리하면 나는 너희 하느님일 것이다 (예. 7:21-23).
“귀기울이는 것”, 또는 순종하는 것, “음성”은 법에 순종하는 것이다. 이 법 모두는 한 가지 명령, 즉 모든 것 위에서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자신같이 사랑하는 것과 관계된다. 그 이유가 이 안에 율법과 예언들이 있기 때문이다 (마. 22:35-40; 7:12). 다윗서에서:
오 여호와, 제물과 공물을 당신께서는 바라시지 않습니다, 태워바침과 속죄 제물을
요구하시지 않습니다; 나는 당신의 뜻을 행하기를 바랍니다; 그렇습니다,
당신의 법이 내 심정 안에 있습니다 (시. 40:6, 8).
사무엘서에서, 그가 사울에게 말했다,
여호와께서는 그분의 음성에 귀기울이는 것 만큼 태워바침이나 제물에서 큰 기쁨을
가지실 것인가? 잘 보시오, 순종하는 것이 제물보다 낫고,
귀기울임이 수양들의 지방보다 낫다. (삼상. 15:22).
“음성에 귀기울임”에 의해 뜻해진 것이 미가서에서 알런지 모른다:
제가 한 살된 암소를 태워바치는 제물로 하여 여호와 앞에 나오면 되겠습니까?
여호와께 수 천의 수양들을 가지고, 강물만한 수 만의 기름을 가지고
여호와 앞에 오면 되겠습니까? 그분께서는 너희에게 선한 것을 보이셨다,
오 사람아, 여호와께서 네게 요구하는 것은 이것이다. 공정을 행하는 것, 자비를
사랑하는 것, 네 하느님과 함께 걸음에서 네 자신을 겸허히 하는 것이다 (미. 6:6-8).
위 구절이 “깨끗한 짐승과 새들로부터의 태워바치는 제물과 제물”에 의해 의미되는 것이다. 아모스서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비록 네가 나에게 너의 태워바치는 제물과 선물을 바친다 할지라도 나는 그것들을
받지 않을 것이다. 공정을 물 같이 흐르게 하라, 정의를 힘차게 흐르는 강 같이 하라
(암. 5:22, 24).
“공정”은 진리이다, 그리고 “정의”는 선이다, 모두 선행으로부터 이다, 그리고 이것들이 내적 인간의 “태워바치는 제물과 제물”이다. 호세아서에서:
나는 자비를 바라지 제물이 아니다,
그리고 태워바치는 제물보다는 하느님에 관한 지식이다 (호.6:6).
이런 인용 구절들은 선행과 신앙이 있지 않을 경우 제물과 태워바치는 제물이 무슨 품질을 가지는지를 보여준다; 또한 깨끗한 짐승들과 새들이 선행으로부터의 선과 신앙으로부터의 선(진정한 생각들)을 의미했다는 것, 그러므로 그것을 표현도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제단에 태워바치는 제물을 바쳤다. 이는 거기로부터의 모든 예배를 의미하는데, 이는 이미 말해진 것으로부터 분명해진다. 태워바치는 제물은 표현 교회의 예배의 제 1의 항목이었다. 이를 이어 제물들도 중요 항목이었다. 이에 관하여는 차후 주님의 신성한 자비로부터 더 말할 것이다. “태워바치는 제물”을 총괄하여 취급하면, 모든 표현적 예배를 의미한다는 것은 예언서에서도 분명해진다, 또한 다윗서에서:
여호와께서는 성소로부터 도움을 네게 보낼 것이다, 그리고 시온으로부터 너를
강건해지게 하실 것이다; 그분은 네 모든 제물을 기억하실 것이다, 그리고
네 태워바치는 제물을 지방이 많아지게 만들 것이다 (시. 20:2-3).
이사야서에서:
안식일이 모독됨에서 그것을 지키는 자, 그들을 나는 내 거룩한 산으로 데려갈 것이다;
그들의 태워바치는 제물들과 그들의 제물들은 내 제단 위에서 열납될 것이다
(이. 56:6-7),
위에서 “태워바치는 제물들과 제물들”은 모든 예배를 표시한다; “태워바치는 제물들”은 사랑으로부터 있는 예배를, “제물들”은 사랑에서 파생되는 신앙으로부터 있는 예배를 표시한다. 여기서도 예언서의 평범한 표현법인, 내적인 것들이 외적인 것을 수단으로 묘사되어 있다.

21절. 그리고 여호와께서는 휴식의 냄새를 맡으셨다. 그리고 여호와께서는 그분의 심정에서 말하셨다. 나는 인간의 사건 때문에 더 이상 지면을 다시는 저주하지 않으리라. 그 이유는 인간의 심정이 제조하는 것은 젊은 시절로부터 악하기 때문이다. 나는 내가 했던 것 같이 생명 있는 모든 것을 더 이상 부수지 않으리라.

그리고 여호와께서는 휴식의 냄새를 맡으셨다. 이는 거기로부터의 예배가 주님을 기쁘시게 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선행과 선행으로부터의 신앙으로부터의 예배가 주님을 기쁘시게 했다는 말이다. 이것이 “태워바치는 제물”에 의해 의미되어져 있다. 이는 앞절에서 이미 서술했다. 말씀에서 종종 말해지는 것은 여호와께서 “휴식의 냄새를 맡으셨다”이다. 특별히 태워바치는 제물로부터 이다; 그리고 이것은 항상 기뻐하시는 것, 열납하실 수 있는 것을 뜻한다; 즉 그분은 태워바치는 제물로부터 “휴식의 냄새를 맡으셨다” (출. 29:18, 25, 41; 레. 1:9, 13, 17; 23:12-13, 18; 민. 28:6, 8, 13; 29:2, 6, 8, 13, 36), 그리고 다른 제물로부터의 경우도 있다 (레. 2:2, 9; 6:15, 21; 8:21, 28; 민. 15:3, 7, 13). 이것들은 또한 “여호와의 휴식의 냄새를 위해 불로 만듦”이라 불리운다. 이를 수단으로 그것들이 사랑과 선행으로부터 이다가 의미되어졌다. 말씀에서 “불”, 그리고 “불로 만듦”이 주님에 관련해서, 그리고 그분을 예배함에 관련해서 서술될 때, 사랑을 의미한다. “빵” 역시 마찬가지이다. 이런 이유에서 태워바치는 제물들과 제물들에 의한 표현 예배는 “휴식의 냄새를 위해 불로 만든 제물의 빵”이라 불리운다 (레. 3:11, 16).
“냄새(odor)”는 기뻐하시는(grateful, pleasing) 것과 열납하실 수 있는(acceptable, welcome) 것을 의미한다. 이런 결과 유대 교회에서 냄새는 기뻐하시는 것을 표현했다. 그리고 그들은 냄새를 여호와로부터 기인한 것으로 여겼는데, 그 이유는 선행의 선과 선행으로부터의 신앙의 진리가 달콤하고 상큼한 냄새(향기)에 상응하기 때문이다. 이 상응에 관한 사실과 냄새의 본성은 천국에서 영들과 천사들의 기운(영기, aura, sphere)들로부터 논증할 수 있다. (그 이유가) 거기는 명백하게 지각되는 사랑과 신앙으로부터의 기운들이 있(기 때문이)다. 이 기운은 이런 것이다. 주님이 기뻐하실 때면 언제든지 선한 영, 또는 천사, 또는 선한 영의 공동체, 또는 천사들의 공동체가 가까이 오고, 그것은 즉시 지각되어지는데, 더 가까이 접근함에서, 이 영, 천사, 공동체의 사랑과 신앙이 무슨 품질을 지녔는지를 더 뚜렷하게 지각한다. 이것은 거짓말 같지만, 완전한 진리이다. 이는 다른 삶에 있는 교류(communication)이고 지각이다. 그러므로 주님을 기쁘게 하면, 혼, 또는 영의 품질을 조사하려고 많은 방법을 동원할 필요가 없다; 그 이유가 접근되자 마자 알아버리기 때문이다. 이런 기운에 상응하는 지상의 냄새로부터의 기운이다. 주님이 기뻐하실 때, 영들의 세계에 있는 사랑과 신앙의 기운들은 달콤하고 기쁨을 주는 냄새들로 바뀌어지고, 명백하게 그것을 지각한다는 사실로부터 위와 같은 상응 관계가 분명해진다.
이런 사항들로부터 이제 명백해지는 바, “휴식의 냄새”가 어디서, 왜 기뻐하시는 것을 의미하는지, 그리고 냄새가 유대 교회에서 왜 표현물이 되었는지, 그리고 왜 “휴식의 냄새”가 여호와, 또는 주님에 기인하여 있는지에 대해서이다. 휴식의 냄새는 평화 속의 하나, 또는 평화 속의 깊이 감사하는 느낌이다. 평화를 전체로서 간주해보면, 평화는 주님의 왕국의 모든 것들을 일반적, 세부적 측면 모두에서 껴안고 있다. 그 이유가 주님의 왕국의 상태가 평화의 상태이고, 이 상태 안에서 사랑과 주님에 대한 신앙으로부터 결과하는 행복한 모든 상태들이 생겨나기 때문이다. 이상 살핀 바로부터 명백해지는 바, 어떻게 냄새가 표현물이 되고 있는지, 뿐만 아니라 왜 유대 교회에서 향이 사용되었는지, 왜 (성막의) 베일(veil)과 자비석(mercy seat) 앞에서 향이 사용되었는지에 대해서이다; 왜 제물에서 유향의 바침이 있었는지; 또한 왜 여러가지의 향신료들이 향 (제조)에, 유향 (제조)에서, 기름부음을 위한 기름 (제조)에서 사용되었는지에 대해서 이다; 그리하여 말씀에서 “휴식의 냄새”, “향”, 그리고 “향신료” 라는 말을 수단으로 의미되는 것은 사랑으로부터의 천적 (수준의) 것들과 사랑으로부터 파생되는 신앙의 영적 (수준의) 것들; 총괄해서 말하면, 사랑과 신앙으로부터 우러나는 깊은 감사의 모든 것이다.
에스겔서를 보자:
내 거룩함의 산에서, 이스라엘의 높은 산에서, 전체 토지에 있는 이스라엘의
모든 가문이 나를 섬길 것이다; 거기서 나는 그들을 받을 것이다, 그리고 거기서
나는 너의 봉헌물과 네 선물의 첫 열매들을 너의 거룩한 모든 것들과 더불어
찾을 것이다; 휴식의 냄새로서 나는 너를 받을 것이다 (겔. 20:40-41).
여기서 “휴식의 냄새”가 태워바치는 제물들과 선물들에 꼭 들어맞고 있다. 그 이유가 선행과 선행으로부터 있는 신앙의 예배가 태워바치는 제물과 선물에 의해 의미되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이 예배는 받으실 수 있다는 것, 이것이 “냄새”에 의해 뜻해지고 있다. 아모스서에서:
나는 미워한다, 나는 네 축제들을 거절했다, 나는 네 휴일의 냄새를 받지 않을 것이다,
그 이유가 너희가 나에게 너의 태워바침과 선물들을 바쳤어도 내가 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암. 5:21-22).
여기서 “냄새”는 기뻐하시는 것 또는 받으실 수 있는 것을 의미한다. 에서(Esau) 대신 야곱을 축복하는 이삭에 관한 대목을 읽어보자:
그리고 야곱이 가까이 왔다, 그리고 그는 야곱에게 키스했다; 그리고 그는 그의 의복의
냄새를 맡았다, 그리고 그를 축복했다, 그리고 말했다,
보라, 내 아들의 냄새는 여호와께서 복을 내린 들판의 냄새 같다 (창. 27:27).
“그의 의복의 냄새”는 자연적 선과 진리를 의미한다, 이 자연적 선과 진리는 천적, 영적 선과 진리에 일치하기 때문에 기뻐하시는 자연적 선과 진리이다. 기뻐하심의 이 품질이 “들판의 냄새”에 의해 묘사되고 있다.

여호와께서 그분의 심정에서 말하셨다. 이는 홍수로 파멸하는 사건은 더 이상 발생하지 않을 것임을 의미하는데, 이는 뒤이어지는 대목으로부터 분명해진다. 여호와를 두고 그분이 “말하신다”라고 서술되었을 경우, 그것에는 어떤 것이 이런저런 방법에서 발생하는지, 발생하지 않는지만을 뜻할 뿐이다. 그 이유가 그분을 놓고 말할 수 있는 것은 그분은 (스스로) 있으시다, He is 외에는 달리 말할 수 있는 것은 엄격히 보면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말씀의 많은 곳에서 여호와를 두고 표현된 말들은 인간의 납득력을 넘어 있는 것을 그 인간의 납득력에서 받을 수 있기 위하여, 또는 받으려고 그 인간을 위한 편의상의 방편으로 사용된 것일 뿐이다. 이것이 말씀 대부분에서 발견되는 글자 의미가 지닌 본래의 모습이다. 천진난만한(simple) 심정은 인간과 더불어 있는 외관으로부터 가르쳐질런지 모른다. 그 이유가 그들은 감각의 것들로부터 파생되는 지식들 너머로(악용하는 쪽으로) 거의 가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에게 말씀의 언어는 그들의 납득력에 순응되어진다; 예를 들면, 바로 이 구절의 “여호와께서 그의 심정에서 말하셨다”이다.

나는 인간의 사건으로 해서 지면을 더 이상 저주하는 일은 다시 없을 것이다. 이는 태고 교회의 후손들이 저질렀던 것 같이, 자신을 뒤틀어버리는 일이 인간에게 없을 것임을 의미하는데, 이는 이 후손에 대해 앞서 말해진 것으로부터 분명해진다.
이런 형세, 즉 인간은 태고 교회인 같게는 더 이상 자신을 비틀지 못할 것, 인간은 다시 그런 식으로 해서 자신을 파괴할 수 없으리라는 것에 대하여는 멸절된 태고 교회인에 관하여, 그리고 “노아”라 불리는 새로운 교회에 관하여 이미 말해진 것으로부터 분명해진다. 이미 살핀 바는 이렇다(310:1; 398; 640; 875:4항 참조). 태고 교회의 사람은 의지력과 이해력이 한 개의 마음을 형성하도록 설립되어졌다. 또는 사랑이 인간의 의지 부분에 심어짐과 동시에 신앙도 주어졌다. 그리고 이것이 그의 다른 부분, 또는 그의 마음의 지적 부분도 채웠다. 이로부터 이 후손들은 의지와 이해함이 하나를 만든 조건을 상속 받았다; 그러므로 자기를 사랑함, 이의 결과인 광적인 그리워함들이 주님을 사랑함과 이웃을 향한 선행이 있던 의지 부분을 꿰차고 들어 앉을 때, 의지와 이해가 하나된 결과로 이해 부분, 지적 부분 역시 깡그리 뒤집혀졌다. 태고 교회의 마지막 후손이 그들의 그리워함들 안에 있는 거짓들에 완전 침수된 모습이 “느빌림”이라 성경에서 이름 불러진다. 이들은 회복이 불가능했는데, 그 이유는 두 마음들이 한꺼번에 썪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렇게 될 줄을 주님께서는 예견하셨던 바, 인간의 개량(upbuild)을 설비하셨는데 이러하다. 인간은 마음의 두 번째 부분, 즉 지적 부분에서 개혁되고 거듭나져야 하리라는 것이다. 개혁되고, 거듭나진 지적 부분에 양심인 새로운 의지를 심는 것이다. 이 양심을 통하여 주님께서는 사랑(또는 선행)의 선과 신앙의 진리가 행동들에 놓여지게 하신다. 이 방법에서 인간은 주님의 신성한 자비로부터 회복되어지는 것이다. 이상의 것들의 이 구절의 말, “나는 인간의 사건 때문에 더 이상 지면을 다시는 저주하지 않으리라. 그 이유는 인간의 심정이 제조하는 것은 젊은 시절로부터 악하기 때문이다. 나는 내가 했던 것 같이 생명있는 모든 것을 더 이상 부수지 않으리라”에서 의미되어져 있다.

그 이유는 인간의 심정이 제조하는(fabricate) 것은 그의 젊은 시절로부터 악하기 때문이다. 이는 인간의 의지 부분은 완전히 악이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는 방금 말한 것만 가지고도 분명해진다. “심정이 제조하는 것”은 온통 악 밖에 없다를 의미한다. 인간은 자기가 선한 것을 위한 의지를 가지고 있다고 상상하나 이는 완전 실수이다. 그가 선을 행할 때, 이것은 그의 의지로부터가 아니고, 주님의 것인 새로운 의지로부터 이다; 그러므로 그는 주님으로부터 선을 행하는 것이다. 그가 참된 것을 생각하고 이야기할 때, 이는 새 의지력으로부터 있는 새로운 이해력으로부터 이다. 고로 참된 것을 생각하고 이야기함도 주님으로부터 이다. 거듭나는 인간의 모두는 주님에 의해 만들어내지는 새로운 인간이다. 이런 이유로 거듭나는 인간은 새로이 창조되어진다 라고 말해지는 것이다.

나는 내가 했던 것 같이 생명 있는 모든 것을 부수지 않으리라. 이는 인간이 자신을 이런 식으로는 더 이상 파괴할 수 없을 것임을 의미하는데, 지금 설명으로 분명해진다. 인간이 거듭나질 때, 당사자는 자기가 자기 안에 있는 악과 거짓으로부터 억제되어 있음을 보면서, 그는 자신으로부터 선한 것을 행하고, 참된 것을 생각하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은 없다고 지각한다. 어쨌든 이것은 그가 억제되어 있음, 아마 아주 센 억제되어 있음으로 야기된 외관, 또는 오류일 뿐이다. 악과 거짓으로부터 억제된 결과로 그는 자신을 파괴할 수 없다; 하지만 만일 억제됨이 조금만 느슨해지게 허용된다면, 그는 모든 악과 거짓 안으로 돌진할 것이다.

22절. 땅의 모든 날들 동안 파종기와 추수, 그리고 추위와 더위, 그리고 여름과 겨울, 그리고 낮과 밤은 중단되지 않으리라.

땅의 모든 날들 동안. 이는 모든 때를 의미하는데, 이는 “날”의 의미가 때인 바로부터 분명해진다; 그러므로 “땅의 날들”은 땅이 지속되고 있는 한에서의 모든 때, 말하자면 거주민이 (지구)행성(planet)에 남아 있는 한에서의 모든 때를 뜻한다. 거주민이 처음 끝이 나는 것은 더 이상 어떤 교회도 있지 않을 때이다. 그 이유가 교회가 없을 때, 천국과의 인간의 교류도 더 이상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교류가 중단될 때, 모든 거주민은 멸한다. 우리가 앞에서 살핀 바같이, 교회의 경우도 인간의 심장과 폐의 관계 같다; 심장과 폐들이 건전해 있는 한, 그만큼 오래 인간은 산다; 그리고 이것은 보편적 천국인 웅대한 사람의 경우도 그러하다. 교회가 살아 있는 한, 보편적 천국이 있다. 그러므로 여기서 말해진다, “땅의 모든 날들 동안, 씨뿌림과 수확, 그리고 추위와 더위, 그리고 여름과 겨울, 그리고 낮과 밤은 중단되지 않을 것이다.” 이로부터 땅은 영원히 지속되지는 않을 것, 그것 역시 그것의 끝을 가질 것이다가 나타날런지 모른다. 그 이유가 “땅의 모든 날들 동안”, 즉 땅이 지속되는 한 이라고 말해지기 때문이다.
땅의 끝장이 성경에서 미리 말한 최후 심판(the Last Judgment)과 똑 같은 것이라 믿는 자들이 있다. 성경에서 묘사된 심판은 시대의 종말, 방문의 날, 그리고 마지막 심판들인 바, 위와 같이 믿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그 이유가 교회가 황폐되었을 때 , 또는 어떤 신앙도 교회 안에 더 이상 있지 않았을 때, 모두 각각의 교회에 대한 마지막 심판이 있었다. 태고 교회에 대한 마지막 심판은 홍수 이전 마지막 후손에서와 같이 그들이 멸절 될 때 있었다. 유대 교회에 대한 마지막 심판은 주님이 세상에 오셨을 때 있었다. 또한 주님이 영광 안에서 오실 때 마지막 심판이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땅과 세상이 멸절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가 멸절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때 새로운 교회가 주님에 의해 언제나 일으켜진다; 예를 들면, 홍수의 때에 고대 교회가 있었고, 주님이 오셨을 때에는 비 유대인들에게서 소박한 [기독인의] 교회가 발생되었다.
주님이 영광 안으로 오시는 때 또한 새로운 교회가 있을 것이다. 이것이 새 하늘과 새 땅에 의해 뜻해져 있다 (이. 65:17; 66:22; 계. 21:1). 거듭나아가는 인간도 방식은 같다. 그는 교회의 사람, 또는 교회가 되는데, 그가 새로이 창조되었을 때, 그의 내적 인간은 새로운 천국, 그의 외적 인간은 새로운 땅이라 불리운다. 더 나아가 인간이 죽을 때, 모든 이 각각에게 마지막 심판이 있다. 그 이유가 그가 육체에서 행해진 것에 따라, 그는 죽음이든, 생명이든 결정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시대의 종말을 수단으로 해도, 날들의 끝장을 수단으로 해도, 또는 마지막 심판이라 말해진 대목을 살펴보아도 세상의 파멸이 뜻해진 곳은 없다는 말이다. 한번 더 짚어보고 가기 위해 주님의 말씀을 읽어보자. 누가복음서에서:
그 밤에 한 침대에 두 여인이 있을 것이다;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남을 것이다;
두 여인이 함께 맷돌질을 할 것이다; 하나는 데려가지고, 다른 하나는 남을 것이다
(눅. 17:34-36).
위에서 마지막 때가 “밤”이라 불리우는데, 그 이유는 신앙이, 즉 선행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가 “남아 있다”에 의해 세상은 멸절되지 않을 것임이 암시되어져 있다.

“씨뿌리는 때와 수확”은 거듭나지는 인간을, 고로 교회를 의미하는 것에 대한 말씀으로부터의 확증은 꼭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그 이유가 인간이 들판에 비교되고 견주어지는 것은 흔히 접하는 말들이고, 이에 따라 씨뿌림과 씨뿌리는 때 역시 친숙해진 언어 형체들이기 때문이다. 여기서의 경우, 모두 각각의 인간이 일반적으로 취급된다. 즉 주님으로부터의 씨뿌림이 없는 인간은 있지 않을 것이다는 것, 그가 교회내에 있든 그렇지 않든 모두에게 주님의 씨뿌림은 있다는 것; 즉 그가 말씀에 친숙해 있든, 그렇지 않든 모두에게 씨뿌림은 있다는 것이다. 주님에 의한 씨의 뿌림 없이 인간은 선을 행할 수 없다. 선행의 모든 선, 이방인의 경우라 해도 주님으로부터의 씨이다; 그리고 비 기독인이 행한 선이 진정한 신앙의 결과는 아니지만, 이 선도 교회내 사람들 사이에 있을 경우, 신앙의 선이 되어질 수 있다. 그 이유가 이 세상에서 선행을 늘 실행하며 살다가 저 세상에 온 이방인들이 천사들에 의해 교육받게 되면, 기독인들보다 더 쉽게 선행으로부터의 신앙과 진정한 신앙에 관한 교리를 껴안아 받기 때문이다. 이에 관하여는 주님의 신성한 자비로부터 차후 살핀다. 어쨌든 여기서 특별히 취급되는 것은 거듭나지는 사람과 교회가 땅 위 최소한 한 곳에라도 존재하는 것이 중단되는 일은 결코 없다는 것이다. 이것이 여기서 땅의 모든 날에서 파종과 수확은 있을 것임에 의해 의미되어져 있다. 파종과 수확, 또는 교회는 언제나 존재 안으로 오는 바, 이 절은 앞 절에서 말해진 것, 즉 인간은 태고 교회의 마지막 후손에 의해 저질러진 것 같은 것으로 더 이상 자신을 파괴할 수 없다의 의미와 연결을 이루고 있다.

“추위와 더위”는 거듭나질 때의 인간의 상태를 의미한다. 이는 신앙과 선행을 받음에 관련되고 있다. “추위”는 신앙과 선행이 없음을, “더위”는 선행을 의미한다. 이는 말씀으로부터 분명해진다. 말씀 안에서 이것들은 거듭나아질 이들, 거듭나지는 이들, 또는 교회의 사람에 관하여 서술되어진다. 이는 여기서도 앞 절과 뒷 절의 연결로부터 분명해진다; 그 이유가 주제가 교회인데, 앞 절의 경우, 인간은 그와 같이 자신을 다시 파괴할 수 없다 였고, 이 절의 경우, 어떤 교회가 존재 안으로 언제나 오고 있다 였다. 처음 것은 인간이 교회가 되기 위해서 거듭나아질 때, 존재 안으로 오는 방법에 관하여, 그 다음 거듭난 사람의 품질이 취급된다; 이리하여 주제의 취급 범위는 교회의 사람의 모든 상태를 아우르고 있다.
우리가 거듭나고 있을 때 우리는 추위와 더위라는 국면(phase), 즉 신앙과 선행이 없는 상태에서, 다시 신앙과 선행이 있는 상태를 통과하는데, 이에 대한 이해는 경험으로부터, 실로 경험을 곰곰이 되새겨 봄으로부터가 아니면 분명해지지 않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거듭나지는 자는 매우 적고, 거듭난 자 사이에서도 자기들의 거듭남의 상태를 되새기는 자, 또는 되새겨 볼 수 있는 자는 매우 적기 때문에 우리는 이 주제에 몇 마디 말을 해야 할 것 같다. 인간이 거듭나질 때, 그는 주님으로부터 생명을 받는다; 그 이유가 받기 이전일 경우, 그는 살아있었다고 말해질 수 없기 때문, 세상의 삶과 육체의 삶은 생명이 있지 않기 때문, 그러나 오직 천국적이고 영적인 것 만이 생명이 있기 때문이다. 거듭남을 통하여 인간은 주님으로부터 진짜 생명을 받는다; 그리고 그는 이전에 생명을 가지지 않았었기 때문에, 생명 없음에서 진짜 생명이 있음으로 교대(alteration)한다. 즉 신앙과 선행 없음으로부터와 얼마간의 신앙과 선행이 있음으로가 교대한다는 말이다. 이 구절의 경우, 선행과 신앙이 없다가 “추위”로, 얼마간의 선행과 신앙이 있다가 “더위”로 의미되고 있다.
이 주제에 관련된 상황은 이렇다: 인간이 그의 물질적이고 세상적인 것들 안에 있을 때는 언제든지, 신앙과 선행이 없다. 즉 “추위”가 있다. 그 이유는 물질적이고 세상적인 것들, 결과적으로 그의 자기 자신인 것들이 적극적으로 활동하기 때문이다. 인간이 이런 상태 안에 있는 한, 그는 신앙과 선행으로부터 멀리 있거나 그것들이 없는 상태에 있다. 그리하여 그는 천국의 것과 영적인 것에 관하여는 곰곰이 생각해보는 기회조차 없다. 이런 연유로 천국의 것과 물질적인 것은 인간 안에 함께 있을 수 없다. 그 이유가 인간의 의지 부분은 완전히 파멸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의 육체와 의지 속의 것들이 활동하지 않을 때, 즉 정지한 상태일 때, 그때 주님은 그의 내적 인간을 통하여 일하신다, 그때 그는 신앙과 선행 안에 있다, 이것이 “더위”라 불리운다. 그가 육체 안으로 되돌아 올 때, 그는 다시 추위 안에 있는다; 그리고 육체, 또는 육체에 속한 것이 정지할 때, 없는 듯 할 때, 그러면 그는 더위 안에 있다. 한마디로 (임무) 교대가 있는 셈이다. 이런 교대가 인간의 조건 일 수 밖에 없는 것은, 천국과 영적인 것들이 인간의 물질적이고 세상적인 것을 따라서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 교대는 거듭나아지는 모든 이 하나하나에게서 거행되고 있다. 그리고 그가 거듭남이 진행형에 있는 한 이런 교대함도 진행형이다; 그 이유가 이런 방법 외에 달리 인간은 거듭나질 수 있는 방법, 죽은 자로부터 산 자로 만들어지는 방법은 없기 때문이다. 이미 말했듯이, 인간의 의지는 완전하게 파멸되어졌다는 것, 그러므로 인간의 의지는 새로운 의지로부터 완전하게 분리되어 있다는 것, 이 새 의지는 인간의 것이 아닌, 주님의 것이고, 인간은 주님으로부터 받아야 한다. 이상 설명으로부터 “추위”와 “더위”에 의해 의미된 것은 분명해졌으리라 본다.
위와 같은 경우가 거듭나는 사람이라면 그의 경험으로부터 알런지 모른다. 즉 그가 물질적이고 세상적인 것들에 있을 때, 그는 내적인 것들로부터 멀어져 있는듯, 아마 그것은 없는 것인듯 하여 있다. 그리하여 그는 내적인 것들에 관한 생각은 가지지 않을 뿐 아니라, 설사 생각을 가질 기회가 있을 경우, 추위를 느낀다; 그러나 물질적이고 세상적인 것들이 정지되는 때, 그는 신앙과 선행 안에 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자기에게서 이런 교차됨이 있다는 것을 자신의 경험으로부터 어느 정도라도 감지하고 있을지 모른다. 그러므로 물질적이고 세상적인 것들이 초과 상태가 되어 규율될 필요가 대두될 때, 심통(distress)과 시험들이 온다. 이 위기는 외적 인간이 내적 인간에 고분고분하는 상태로 환원되어질 때까지 지속된다. 이런 고분고분해짐은 사실상 외적인 것들이 정지된듯, 아마 없는듯 하는 수준까지 이르지 않으면 오지 않는 상태이기도 하다. 태고 교회의 마지막 후손은 거듭나질 수 없었다. 그 이유는 여러 번 말했듯이, 그들과 더불은 이해력의 것들은 의지력의 것들로부터 분리되어질 수 없었기 때문이다. 즉 그들에게서는 교대함, 한 때는 천국과 영적인 것을 추구하다가, 다른 때는 물질적 세상적인 것을 추구하는 식의 앞으로, 뒤로 왔다 갔다하는 교차 방식이 없었다는 말이다. 그들은 천국적이고 영적인 것들을 향하여는 영구히 “춥다”함이었고, 그들의 그리워함(yearning, 욕구, desire)들을 향하여는 “따듯하다”함을 영구히 지닌 상태에 있었다. 한마디로 그들에게는 교대하는 상태가 없었다는 말이다.

“추위”는 사랑 없음, 또는 선행과 신앙 없음이고, “더위”, 또는 “불”은 사랑, 또는 선행과 신앙을 의미한다는 것은 아래의 말씀으로부터의 인용구절로부터도 분명해질 것이다. 계시록서에서 라오디게아 교회에게 말하셨다:
나는 네 행위들을 알고 있다, 너는 차지도 뜨겁지도 않았다;
나는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를 바랬다; 이렇게 너는 미지근하기 때문에,
차지도 뜨겁지도 않은 바, 나는 너를 내 입으로부터 토해낼 것이다 (계. 3:15-16);
위에서 “차다”란 선행 없음, “뜨겁다”는 선행 많음을 표시한다. 이사야서에서:
그런고로 여호와께서 나에게 말하셨다, 나는 잠잠히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내 장소에서 바라 볼 것이다. 마치 빛에 있는 열기의 빛남같이, 추수의 열기에서
이슬의 구름같이 이다 (이. 18:4),
위 구절의 주제는 심어지게 되는 새 교회이다; “빛에 있는 열기”와 “추수의 열기”는 사랑과 선행을 표시한다. 다시:
여호와의 불이 시온에 있고, 그분의 불가마가 예루살렘에 있다 (이. 31:9),
위에서 “불”은 사랑을 표시한다. 거룹들을 에스겔이 본 바, 말해진다:
살아 있는 창조물에 관하여, 그들의 외모는 불타고 있는 숯불 같고, 횃불(또는 등불)의
외모 같다; 이 불은 살아 있는 창조물 사이에서 (창조물을) 따라서 움직이고 있다;
그 불은 빛났다, 그리고 이 불로부터 번개가 나왔다 (겔. 1:13).
그리고 다시 같은 장에서 주님이 묘사된다:
거룹들의 머리 너머있는 광활한 공간 위에 사파이어 돌의 외모 같은 듯 여겨지는 것,
왕좌 같은 것이 있었다. 왕좌의 모습 위에 사람의 외모 같은 것이 위쪽 높이 있었다.
그리고 나는 불타는 숯불 같은 것, 그분의 내부와 빙둘러서 있는 불의 형체,
이는 그분의 허리 위쪽의 외모이고, 허리 아래쪽은 빙둘러 빛남을 지닌
불의 외모로서 보았다 (겔1:26,27; 8:2).
여기서 다시 “불”은 사랑을 표시한다. 다니엘서에서:
고대의 어떤 분이 앉아 있었다; 그분의 왕좌는 불 속의 불꽃들 이었다, 그리고
거기로부터의 바퀴들은 불타는 불이었다; 불타는 시내가 그분 앞으로부터 유출되어
나갔다, 천의 천(명의 사람)이 그분을 섬기고, 만의 만(명의 사람)이
그분 앞에 서 있었다 (단. 7:9-10).
여기서 다시 “불”은 주님의 사랑을 표시한다. 스가랴서에서:
여호와께서 말하신다, 나는 그녀에게 빙둘러 있는 불의 벽일 것이다 (슥. 2:5).
새 예루살렘이 취급되어지는 곳이다. 다윗서에서:
여호와께서는 영들을 그분의 천사들로, 불꽃이글거리는 불을 그분을 섬기는 자들로 만드신 다 (시. 104:4),
“불꽃이글거리는 불”은 영적인 천국의 어떤 것(the celestial spiritual, 역자가 조금 더 부연 설명하면, 영적 왕국에 있는 천적 왕국으로부터의 어떤 것… 불 안에 불꽃이 있듯 천적인 것은 영적 왕국의 핵심이다)을 표시한다.
“불”이 사랑을 의미하기 때문에, 불은 주님을 표현하게 되었다. 이는 결단코 꺼지지 않는 태워바침의 제단에 있는 불로부터 분명해진다 (레. 6:12-13). 이 불은 주님의 자비를 표현한다. 이런 근거에서, 아론은 자비석 쪽으로 안으로 가기 앞서, 그는 태워바침의 제단으로부터 불을 가져가서 향을 피웠다 (레. 16:12-14). 같은 이유 때문에, 주님에 의해 열납된 예배가 하늘로부터 불이 내려와 태워바침의 제물을 살라버림으로 의미되어 있다 (레. 9:24 참조). 또한 “불”은 말씀 안에서 자기 사랑과 이 사랑의 탐욕도 의미하는데, 이 사랑과 천국의 사랑은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 그러므로 아론의 두 아들들이 태워졌는데, 그 이유는 이상한 불을 가지고 향을 피웠기 때문이다 (레. 10:1-2). “이상한 불”은 자기를 사랑함과 세상을 사랑함의 모든 것, 그리고 이 사랑들로부터의 모든 탐욕들이다. 더욱이 천국의 사랑은 사악한 자에게는 태우는 불, 살라없애는 불로서 나타난다. 그러므로 말씀에서 살라버리는 불은, 마치 시내산에서의 불 같이 주님을 서술하고, 사실상 불은 주님의 사랑, 또는 자비를 표현하지만 시내산 아래 있는 백성들에게는 이 불이 살라 없애버리는 불로 보여졌다. 그러므로 백성들은 모세에게 자기들로 여호와 하느님의 음성을 듣지 않도록, 큰 불을 보지 않게 하여 자기들이 죽지 않게 해달라고 요구했다 (신. 18:16). 주님의 사랑, 또는 자비는 자아와 세상을 사랑함 안에 있는 이들에게는 위와 같은 외관을 가진다.

“여름”과 “겨울”은 거듭난 사람의 새로운 의지 측면에서의 상태를 의미한다는 것, 이 상태의 교대는 여름과 겨울 같다는 것, 이는 추위와 더위에 관해 말해진 사항으로부터 분명해진다. 거듭나져가는 사람에게 있는 교대함은 추위와 더위에 견주어지고, 거듭나져갔던 사람에게 있는 교대함은 여름과 겨울에 견주어진다. 전자의 경우는 거듭나아가는 사람이고, 후자는 거듭난 사람인 것은 언어의 순서로부터도 알게 된다. 즉 전자는 추위가 먼저 언급되나, 후자는 여름이 먼저이다. 그 이유가 거듭나지게 되는 사람은 추위로부터, 즉 신앙과 선행 없음으로부터 시작한다; 그러나 그가 거듭나져갔을 때, 그는 선행으로부터 시작한다.
거듭난 사람에게도 교대함이 있다는 것-지금 선행 없음, 그리고 지금은 선행이 조금 있음- 같은 교대함이 있는데, 그 이유는 모든 이, 설령 거듭났다 해도, 각자가 지닌 것은 실상 악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선한 모든 것은 주님만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자기 안에 악 밖에 없는 관계로, 그는 교대함을 수행할 수밖에 없다. 즉 여름인 선행 안에 있는 것, 한편 겨울인 선행 안에 없는 것을 교대해서 가질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이런 교대함이 있는 이유는 거듭난 자들이 더욱더 완전해지기 위해서, 더욱더 행복해지기 위해서이고, 이는 이 세상에서 뿐만 아니라 저세상에서도 그의 의지 측면의 여름과 겨울의 교대함 없이는 더 완전해지고, 더 행복해짐이 가능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른 삶에서 이런 교대함의 여름과 겨울은 지상의 온대 지방의 여름과 겨울 같고, 봄철에 있는 낮과 밤 같다.
이런 상태들이 예언서에서 “여름과 겨울”에서 묘사되어 있다; 스가랴서에서:
그리고 그 날에 살아 있는 물들이 예루살렘으로부터 나갈 것이다; 그 물들의 절반은
동쪽의 바다를 향하여, 그리고 그 물의 절반은 서쪽의 바다를 향할 것이다;
여름에서와 겨울에서도 그것은 (그렇게) 있을 것이다 (슥. 14:8),
위 구절은 새 예루살렘을 다루고 있다. 또는 천국과 땅에 있는 주님의 왕국, 그리고 새 예루살렘에 있는 두 종류의 상태, “여름과 겨울”이라 불리는 상태를 취급하고 있다. 다윗서에서:
낮은 당신의 것, 밤도 역시 당신의 것입니다; 당신은 빛과 태양을 준비하셨습니다,
당신은 땅의 모든 경계들을 놓으셨습니다,
당신은 여름과 겨울을 만드셨습니다 (시. 74:16-17),
아래 구절도 같은 것을 포함하였다. 예레미야서에서:
낮의 언약, 그리고 밤의 언약이 헛되이 있지 않아야 한다는 것,
낮과 밤은 그들의 때에 있어야 하리라는 것 (예. 33:20).

“낮과 밤”도 위에서 살핀 바대로 거듭난 사람에 관한 상태를 의미하되, 그의 이해력 측면에 관해서이다. 이 측면에서의 교대는 낮과 밤의 교대 같이 있다. 이는 방금 말해진 여름과 겨울이 추위와 더위로부더, 그의 의지력 측면에 있는 것을 서술함에서 분명해진다. 이렇게 의지쪽이 서술된 반면, “낮과 밤”은 빛과 어둠으로부터, 그의 이해력 측면에 있는 것을 서술한다. 이런 대비적인 내용은 자체 스스로 증거되기 때문에 말씀의 다른 구절 없이도 확증이 가능하다.

위 모두의 말씀으로부터 분명해지는 것은, 주님의 말씀의 본래의 모습은 내적 의미에 있다는 것이다. 글자 의미에서 주님의 말씀은 반드럽지 않은 것처럼 보일 뿐이다. 본문의 경우만 해도, 씨뿌림과 추수, 추위와 더위, 여름과 겨울, 낮과 밤이 비록 고대인의 교회, 또는 영적인 교회에 속한 것을 포함한다고 누군가가 짐작한다 해도 정작 어떤 힌트 하나도 없이 그에게 읽혀지기 때문이다. 실제로 문자로 표현된 (말씀의)말들은 이런 방법, 즉 힌트 없는 방법, 잘 닦아내지 않아 내부가 무엇인지 모르는 상태에서 행동하고 있다. 다시 말해 지극히 평범한 용기(container) 안의 아주 많고 아주 위대한 천국의 비밀들을 누군가가 탐구한다면 신비함의 백만 분의 일도 가늠하지 못할 정도로 지극히 중요함에서 정제된 세부 사항들을 담아두고 있다. 천사들이 지상의 지극히 평범한 단어들, 매일 사용하는 일상의 언어들에서 추출된 말씀들을 주님의 눈을 가지고 읽을 때, 그들은 거듭남의 전체 과정을 알 수 있다. 더불어 거듭나아가는 자와 거듭난 자들이 끝도 없는 다양함 안에 있지만 그들의 각각의 상태도 알 수 있다. 그 반면, 인간은 거의 어떤 것도 알 수 없다.
***************************************************

창세기 제 9 장

성경: 창세기 제 9 장

1. 그리고 하느님께서 노아와 그의 아들들을 축복하셨다, 그리고 그들에게 말하셨다, 열매를 많이 맺으라, 그리고 번성하라, 그리고 땅을 다시 채우라.
2. 너를 두려워하고 너를 무서워함이 땅의 짐승 각각 모두 위에, 하늘의 새 각각 모두 위에, 지면이 기어다니게 만든 모든 것조차도, 그리고 바다의 모든 물고기들에게 있게 하라. 이것들이 네 손에 주어져 있게 하라.
3. 살아 있어 기는 것 각각 모두가 너를 위한 식품일 것이다. 마치 야채 풀잎 같이 나는 너에게 이것 모두를 준다.
4. 너는 혼이 있는 살과 피를 먹지 말라.
5. 나는 네 혼을 지닌 네 피를 확실히 요구하리라. 나는 그것을 들짐승 각각 모두 로부터도 요구하리라. 그리고 사람의 손으로부터, 그 사람 형제의 손으로부터도 나 는 사람의 혼을 요구하리라.
6. 사람에게 있는 사람의 피를 흘리게 하는 누구든지 그의 피도 흘릴 것이다. 그 이유 는 그분께서는 사람을 하느님의 형상으로 만드셨기 때문이다.
7. 그리고 너는 열매를 많이 맺고 번성하라. 땅에서 풍성하게 산출하라, 그리고 너는 거기서 번성하라.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8. 그리고 하느님께서 노아에게, 그리고 그의 아들들에게 말하셨다.
9. 그리고 나, 보라, 나는 너와 네 후손들과 내 언약을 세운다.
10. 그리고 너와 함께 있는 생명 있는 혼 각각 모두와, 새, 짐승, 그리고 너와 더불은 땅의 야생 동물 각각 모두와, 방주에서 나온 모든 것, 땅의 야생 동물에 이르기까 지와 내 언약을 세운다.
11. 그리고 나는 너와 내 언약을 세우리라. 모든 육은 더 이상 홍수의 물로 잘라지지 않으리라. 홍수가 땅을 파괴하는 일은 더 이상 없으리라.
12. 그리고 하느님께서 말하셨다, 이것은 내가 나와 너와 함께 있는 생명 있는 혼 각 각 모두와, 대대손손을 위하여 만드는 언약의 표시이다.
13. 나는 구름에 내 활을 놓아 두었다, 그리고 이것은 나와 땅 사이에 있는 언약의 표 시를 위해 있을 것이다.
14. 그리고 장차 내가 땅 위에 구름을 가져 올 때, 활이 구름에서 보여질 때,
15. 나는 내가 너와 모든 육의 생명 있는 혼 각각 모두 사이에 세운 내 언약을 기억 하리라. 그리고 물들이 모든 육을 파괴하기 위하여 홍수가 되는 일은 더 이상 없 으리라.
16. 그리고 활이 구름에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것을 보고, 나는 하느님과 땅 위 에 있는 모든 육의 생명 있는 혼 각각 모두 사이에 있는 영원한 언약을 기억하리 라.
17. 그리고 하느님께서 노아에게 말하셨다, 이것은 내가 나와 땅 위에 있는 모든 육 사이에 세워진 언약의 표시이다.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18. 그리고 방주에서 나온 노아의 아들들은 셈, 그리고 함, 그리고 야벳이었다. 그리 고 함은 가나안의 아버지이다.
19. 이 세 명이 노아의 아들들이다. 그리고 이 셋으로부터 온 땅은 가득 찼다.
20. 그리고 노아는 지면의 사람이 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는 포도원을 설치했다.
21. 그리고 그는 포도주를 마셨고 술취했다. 그리고 그는 그의 천막 한 가운데에서 덮 혀있지 않은채 있었다.
22. 그리고 가나안의 아버지, 함은 자기 아버지의 벌거벗음을 보았다, 그리고 밖에 있는 자기 형제에게 말했다.
23. 그리고 셈과 야벳은 의복을 찾아들고, 그것을 두 사람의 어깨 위에 얹고, 뒷걸음 으로 가서 자기 아버지의 벌거벗음을 덮었다. 따라서 그들의 얼굴은 뒤쪽을 향했 는 바 그들은 자기 아버지의 벌거벗음을 보지 않았다.
24. 그리고 노아는 그의 포도주로부터 깨어났다, 그리고 자기의 작은 아들이 자기에게 했던 짓을 알았다.
25. 그리고 그는 말했다. 가나안은 저주된다. 자기 형제들에게 종들의 종일 것이다.
26. 그리고 그는 말했다, 복 있음이 셈의 하느님 여호와이시다; 그리고 가나안은 그의 종일 것이다.
27. 하느님께서 야벳을 번창시켜 주시기를 빕니다, 그리고 그가 셈의 천막에서 거주하 기를 빕니다. 그리고 가나안은 그의 종이 되리라.
28. 그리고 노아는 홍수 이후 삼백 오십 년을 살았다.
29. 따라서 노아의 모든 날들은 구백 오십 년이었다. 그리고 그는 죽었다.”

각 절의 내적 의미

1절. 그리고 하느님께서 노아와 그의 아들들을 축복하셨다, 그리고 그들에게 말하셨다, 열매를 많이 맺으라, 그리고 번성하라, 그리고 땅을 다시 채우라.

“하느님이…축복하셨다”란 주님의 현존하심과 은총을 의미함은 “축복하심”의 의미로부터 분명해진다. 말씀에서 “축복하심”의 외적 의미는 지상적, 물질적, 육체적 모든 좋은 것을 풍부해지게 함을 말한다. 이는 외적 의미에 거주하는 이들, 예를 들면 고대인과 유대인, 기독인, 특히 오늘날의 기독인이라 할 수 있는데 이들에 의해 설명되어진 바에 따른 축복의 의미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신성한 축복을 재물 안에, 모든 것들의 풍부해짐에, 그리고 자기 영광됨에 있게 만들었다. 그러나 내적 의미에서의 “축복하심”은 영적, 천적인 모든 선으로 풍요해짐이고, 이 축복은 주님 아니고는 존재할 수 없고 누구도 줄 수 없다. 이렇기에 이것은 그분의 현존과 은총을 의미한다. 그분의 현존과 은총은 인간들에게 영적인 선과 천적인 선을 필수적으로 가져다 준다. 여기서 현존이라 말해진 이유는 주님만이 선행 안에 계시기 때문이고, 여기서 취급된 주제가 선행으로부터 행동하는 거듭난 영적 인간이기 때문이다. 실로 주님은 모두 각각의 인간과 현존하신다. 그러나 인간이 선행으로부터 멀어진 것에 비례해서, 그만큼 주님의 현존도 있게 된다. 말하자면, 그만큼 더 부재하신 셈, 더 멀리 계신 셈이다. 여기서 자비가 아닌 은총이 언급된 이유는 천적 인간은 은총이 아닌 자비로부터 이야기한다. 한편 영적 인간은 자비로부터가 아닌 은총으로부터 이야기 한다. 이야기하는 방식은 여건에 바탕을 두는데, 천적 (평면의) 인간의 경우, 인간 종족은 불결, 추잡함 밖에 없다는 것, 그 자체가 배설물이나 지옥이다고 인정한다; 그러므로 그들은 주님의 자비를 애원한다. 그 이유가 이런 조건에서는 자비가 서술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에 비해 영적 (평면의) 인간일 경우, 이들 역시 인간 종족이 위와 같은 줄 알고는 있지만, 그들은 그것을 인정하지는 않는다, 그 이유는 그들은 그들의 자기 자신 안에 있고, 그들은 자기 자신을 아직 사랑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들은 자비로 이야기하는 것은 거북스럽고 은총이라 말해야 마음이 편하다. 언어상의 이런 표현 차이는 인간의 부끄러워함, 겸허함으로부터 결과된 산물이다. 누군가가 자신을 사랑하고 자신으로부터 선을 행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구원은 자신의 공적 덕분인 바, 당연히 구원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에 비례하여 그는 주님의 자비를 덜 애원한다. 누군가가 주님을 부를 때 은총을 덧붙여 부르는 동안 그는 자신 안에서 자비를 발견하기에, 그는 주님으로부터는 조금, 자기로부터는 많이 자비를 발견하므로 자비라 말하는 것은 부담되는 언어 수준인 바, 그 대신 은총이라는 표현이 자신의 영적 수준에 맞는 것 같아, 이것으로 간구하는 것이 관습으로 되어진 것이다.

“노아와 그의 아들”은 고대 교회를 의미한다는 것은 이미 살핀 바에서, 또한 이어지는 구절로부터도 분명해진다.

“열매를 많이 맺으라”는 선행의 선을 의미한다는 것, 그리고 “번성하라”는 신앙의 진리들을 의미한다는 것, 이것들이 지금 증가되어진다는 것이 말씀에 있는 두 고, “번성하는 것”은 신앙을 일관되게 서술한다. 이에 관한 말씀으로부터의 확증을 위해 아래에서 더 살핀다.:
돌아서라, 다시 잘못에 빠져드는 아들아; 나는 나의 심정에 따라 목자들을
네게 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너를 지식과 총명으로 먹일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네가 땅에서 번성하고 열매를 많이 맺게 해줄 것이다 (예. 3:14-16),
위 구절에서 “번성하는 것”은 지식과 총명이 자라남, 즉 신앙이 자라남을 표시한다. “열매를 많이 맺는 것”은 선행의 선들을 표시한다; 그 이유가 이것은 교회의 이식을 의미하는 바, 이때 신앙, 또는 “번성함”이 먼저 있기 때문이다. 다시:
나는 내가 몰아내쳤던 모든 토지들로부터 내 양떼를 모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을 그들의 양우리로 데려 올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열매를 많이 맺고, 번성할 것이다 (예. 2:3),
이미 심어진 교회를 이야기하고 있다. 그 결과 “열매를 많이 맺게 만듦”은 선행의 선들에 관련하여서 이고, “번성해짐”은 신앙의 진리들에 관련하여서 이다. 이와 같이 모세의 책에서:
더 나아가 나는 너희를 쳐다 볼 것이다, 그리고 너희로 열매를 많이 맺게 할 것이고, 나는 너희를 번성해지게 만들 것이고, 내 언약을 너희와 더불어 세울 것이다 (레. 26:9),
천적 (수준의) 교회를 내적 의미에서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므로 “열매를 많이 맺는 것”은 사랑과 선행의 선들을, “번성하는 것”은 신앙의 선들과 진리들을 서술한다. 스가랴서에서:
나는 그들을 되찾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그들이 번성해왔던 것 같이
번성해질 것이다 (슷. 10:8);
“번성해지는 것”이 위 구절에서 신앙의 진리를 서술한다는 것은 그들이 “되찾아 짐”으로부터 분명하다. 예레미야서에서:
성이 그녀 자신의 더미 위에 건설되어질 것이다 그리고 그들로부터 고백이
진행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음성은 흥겨움을 만들 것이다, 나는 그들로
번성해지도록 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줄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들의 아들들 역시 예전과 같이 있을 것이다 (예. 30:18-20),
위 구절에서는 진리에 애착함과 신앙의 진리들에 애착함에 관해서 이야기한다. 전자는 “고백함, 그리고 흥겨움을 만드는 그들의 음성”에 의해, 후자는 “번성해짐”에 의해 표시되고 있다; “아들들” 역시 여기서 진리들을 표시한다.

“땅을 계속 채우라”가 외적 인간에서를 의미하는 것은 이미 여러 번 살핀 바 있다. 거듭난 인간에 있는 선행의 선들과 신앙의 진리들에 관해서 이것들이 그의 양심에 심어졌는 바 조금 다시 살핀다: 그것들이 신앙을 수단으로, 또는 말씀을 들음으로 해서 심어졌기 때문에, 그것들은 처음에는 그의 기억 안에 심어지는데, 이 기억은 외적 인간에 속한다. 인간이 거듭나고 있을 때, 그리고 (거듭나져서) 내적 인간이 행동할 때, 모두 열매를 맺음과 번성함은 똑같이 거행되는 바, 선행의 선들이 외적 인간의 애착들 안에 놓여지고, 신앙의 진리들은 외적 인간의 기억 안에 놓여지고, 각각은 증가하고 번성한다. 이 번성해감은 거듭난 각 인물에게 잘 알려져 있을 것이라 생각된다. 그 이유가 확증한 것들이 말씀으로부터, 합리적 인간으로부터, 지식들로부터 (저축 예금에 이자가 붙어 불어나듯) 쉬지않고 불어나는 바, 더욱 확증이 있는 셈이다. 이것은 선행의 결과인데 주님 만이 선행을 통하여 이 결과를 빚어 주신다.

2절. 너를 두려워하고 너를 무서워함이 땅의 짐승 각각 모두 위에, 하늘의 새 각각 모두 위에, 지면이 기어다니게 만든 모든 것조차도, 그리고 바다의 모든 물고기들에게 있게 하라. 이것들이 네 손에 주어져 있게 하라.

너를 두려워하고 너를 무서워한다. 이는 내적 인간의 통치권을, “두려워함”은 악들에 관련한 통치권을, “무서워함”은 거짓들에 관련한 통치권을 의미한다. 이는 거듭난 인간의 상태로부터 분명하다. 거듭나기 전 인간의 상태는 그리워함(yearning, 또는 갈망, craving)들과 거짓들이고, 이것은 외적 인간 속에 있고, 계속적으로 지배권을 갖고 있다, 이로부터 전투가 발생한다; 그러나 거듭난 이후, 내적 인간이 외적 인간, 즉 그리워함들(갈망함)과 거짓들을 지배한다. 이때 인간은 악들을 두려워함과 거짓들을 무서워함 안에 있다. 이 둘은 양심에 반대된다. 양심에 반대하여 행동하는 바, 거듭난 자로 전율을 느끼게 한다. 그렇기는 하나 악을 두려워하고 거짓을 무서워하는 것은 내적 인간이 아니고 외적 인간이다. 그러므로 이 절에서 “너를 두려워하고 너를 무서워함이 땅의 모두 각각의 짐승 위에, 하늘의 모두 각각의 새 위에 있게 하라” 하고 말해지는 것이다. 즉 모든 그리워함 위에가 여기서 “짐승들”에 의해, 모든 거짓들 위에가 여기서 “하늘의 새”에 의해 뜻해지는 것이다. 여기서의 “두려워함”과 “무서워함”이 마치 인간의 자기 자신인 것처럼 나타난다. 그러나 그것들은 다음 원인으로부터 발생한다. 이미 서술했었던 바 같이, 모두 각각의 인간은 자기와 더불어서 최소한 두 명의 천사들과 두 명의 악령들이 있어, 천사를 통해 천국과 교류하고, 악령을 통해 지옥과 교류한다는 것이다. 거듭나는 인간의 경우같이 천사가 다스릴 때, 악령은 선하고 참된 것에 반대되는 어떤 것도 행하려 감히 시도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그들이 속박된 상태이기 때문이다; 악령이 악한 어떤 것을 행하고, 거짓된 어떤 것을 말하려 시도하면, 그것들은 즉시 어떤 종류의 지옥의 두려움과 무서움에 사로잡힌다. 이 두려움과 무서움이 양심에 반대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과 무서움으로 인간 안에서 지각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거듭난 자가 양심에 반대되는 어떤 것을 말하거나 행동할 때, 그는 시험에 들어가고, 양심의 격심한 아픔 안으로, 즉 일종의 지옥적 고통 안으로 들어간다. “두려움”이 악이고, “무서움”이 거짓들이라 말한 것의 경우는 이렇다: 인간과 더불은 영들은 악을 행하기를 두려워하기보다는 거짓을 말하기를 무서워한다. 그 이유는 인간은 다시 태어나 신앙의 진리를 통하여 양심을 받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영들은 거짓된 것들을 선동하는 것이 허용되지 않는다. 이 영들 각각은 악일 뿐이다. 고로 그들은 악에서 살고 있다; 그들의 본래의 모습 그리고 그들의 모든 노력은 악이다; 그들이 악 안에 있기 때문에, 그리고 인간에게 어울리는 생명은 악에 있기 때문에, 악이 어떤 쓸모 있음을 섬길 경우, 악행에 대해 관대해진다. 그러나 그들에게 거짓된 것을 말하는 것은 허용되지 않는다. 이런 질서에서 그는 참된 것을 배울런지 모른다. 그리고 가능한 만큼에서 수정될지도 모른다, 그리하면 그것들은 수준 낮은 쓸모 있음을 섬길런지 모른다; 이 주제를 두고 차후 주님의 신성한 자비로부터 더 말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이런 상황은 거듭나는 자와 더불어도 비슷하다. 그 이유가 그의 양심은 신앙에 의해 가르쳐진 진리들로 만들어내졌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의 양심은 올바르게 고침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들에게 있어서 누군가가 범한 악은 실제로는 거짓이다, 그 이유는 그 악은 종교적(신앙의) 진리를 위반했기 때문이다. 지각을 가졌던 태고 교회인의 경우는 달랐다. 이들은 누군가가 범한 악을 악으로, 누군가가 믿는 거짓을 거짓으로 지각했다.

땅의 모두 각각의 짐승 위에. 이것은보다 낮은 마음의 그리워함들 위에서를 의미한다는 것은 말씀에서 “짐승들”의 의미로부터 분명하다. 말씀에서 짐승들은 애착(열정)들, 또는 그리워함들(갈망함들, 열망함들)의 어느 쪽을 의미한다. 따라서 선에 대한 애착은 온화하고 쓸모있고 깨끗한 짐승들에 의해; 그리고 악에 애착함들, 또는 그리워함들은 맹렬하고, 쓸모없고, 불결한 짐승들에 의해 의미된다. 이 구절의 경우, 그리워함들을 의미하는 바, 짐승들은 들판의 짐승이 아닌 “땅의 짐승”이라 불리운다. 거듭난 자는 그리워함들을 통치할 수 있다든가, 거듭난 자는 그 스스로 악들을 통치할 수 있다고 아는 것은 매우 큰 실수이고 결단코 그렇지가 않다. 그 이유가 인간은 악밖에 더 가진 것이 없기 때문에; 모든 그의 의지력은 단지 악이다; 이를 두고 8:21에서 “인간의 심정의 상상은 그의 젊은 때로부터 악하다”라고 말해진 것이다. 살아있는 경험에 의해 내게 보여진 것이 있다. 인간과 영, 천사조차도 자신을 두고, 그의 자기 자신의 모든 것을 두고, 천박한 배설물밖에 더 아니다는 것, 자신 만을 떼어 놓아둔다면, 그는 증오, 복수, 대부분의 더러운 간음질 같은 것으로 숨쉰다는 것이다.
이런 것들이 인간의 자기 자신이다; 이런 것들이 인간의 의지이다; 만일 인간이 곰곰이 자신을, 단지 자기 자신의 것만 가지고 가늠한다면, 인간은 태어날 때 모든 야생 동물들과 짐승들 사이에서도 가장 수치스러운 살아 있는 창조물임에 틀림없다는 것이 분명해진다. 그리고 그가 성장하고, 자신의 주인이 될 때, 법 같은 외적 속박들, 그리고 이익과 영예, 재물의 목적 때문에 자신에게 짐지워주는 것이 없다면, 그는 모든 범죄 안으로 돌진하고, 그가 온 우주를 복종시키고, 온 우주의 재물을 다 긁어모을 때까지도 쉬지 않을 것이다; 그는 그의 겸손한 종들이기를 감내하는 이 외에는 어떤 나눔도 없다. 이런 상태가 인간의 본래의 모습이다. 이것을 알아채지 않고 있는 이유는 인간 당사자가 권력이 없어서 그가 이런 것을 시도할 엄두도 못내고 있기에, 또는 무언가를 달성하는데 따른 제약으로 인간 본래의 모습이 노골화되지 않아서 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에게 가능성, 능력, 제약도 느슨해지게 하면, 인간은 자기 본성의 그리워함의 충족을 향해 최대한 돌진할 것이다. 야생 동물이라 해도 이런 본성을 보여주는 일은 없다. 이것들은 자기들의 본성에 관한 어떤 질서 안에서 태어나진다. 맹렬하고 육식하는 동물들은 다른 창조물들에게 상처를 입힌다. 그러나 자기 방어에서일 뿐이다. 그들이 동물을 잡아먹는 것도 그들의 배고픔을 완화시키는 것에 한정되어 있다. 배고픔이 사라지면 그것들은 어떤 것도 잡아죽이지 않는다. 그러나 인간의 경우는 철저히 다르다. 이상 설명으로부터 인간의 자기 자신과 의지력의 본래의 모습이 무엇인지는 분명해졌으라 본다.
인간이 악하고 배설물에 불과하기에 인간은 자신 스스로로는 악을 통치할 수 없음이 분명하다. 이는 악이 악을 통치할 수 있다는 것, 악 뿐만 아니라 지옥도 통치할 수 있다는 것과 완전 대비된다; 그 이유가 모두 각각의 인간은 악령을 통하여 지옥과 교류된다. 이것에 의해서 인간에 있는 악은 선동되어진다. 이로부터 모든 이가 알런지 모르고, 건전한 마음이 결말낼런지 모르는 것은, 주님만이 인간 안에 있는 악을, 그와 더불은 지옥을 통치하신다는 것이다. 인간에 있는 악이 복종 상태에 있기 위해, 즉 인간 안에서 매 순간 기회만 되면 겨루겠다고 돌진하고, 인간을 영원히 파괴하려드는 지옥의 다스림이 성사되려면, 인간은 주님에 의해 거듭나서 양심인 새로운 의지력을 수여받아야 한다. 이를 통하여 주님만이 모든 선을 수행하신다. 신앙의 요점은 이렇다: 인간에게는 악밖에 없다는 것; 그리고 모든 선은 주님으로부터 있다는 것이다. 이 사항들을 인간은 알아야 할 뿐 아니라 인정하고 믿어야 한다; 그러나 그가 육체의 삶에서 인정하지 않고 믿지도 않았다면, 그는 장차의 삶으로부터 그에게 알려진다.

그리고 하늘의 모두 각각의 새 위에. 이것이 추론함으로부터의 거짓들을 의미함은 “새”의 의미로부터 분명해진다. 말씀에서 “새들”은 지성적인 것들을 의미한다. 유순하고 유용하고, 아름다운 새들은 지적 측면에서의 진리들을; 그리고 맹렬하고 쓸모 없고 추한 새들은 지적 측면에서의 거짓들을 의미한다. 이로부터 “새”는 추론함들과 그로부터의 거짓들을 의미함은 분명하다. 아래 인용 구절을 살펴서 이 의미를 확증하기 바란다. 예레미야서에서:
나는 그들을 네 가지 (방법으로) 방문할 것이다, 여호와께서 말하신다; 죽이는 검,
그리고 물어끌고가는 개들, 그리고 게걸스럽게 먹어치우고 파괴하는 하늘의 새와
땅의 짐승들 (이다) (예. 15:3).
에스겔서에서:
그의 파멸 위에 하늘의 모든 새들이 거주할 것이다, 그리고
들판의 야생 동물들이 그의 가지들 위에 있을 것이다 (겔. 31:13).
다니엘서에서:
결국 역겨움들의 새 위에 황폐함이 있을 것이다 (단. 9:27).
계시록서에서:
바빌론은 모두 각각의 불결하고 미워하는 새가 소유권을 쥐었다 (계. 18:2).
시체를 공중의 새와 들판의 짐승에게 먹이로 주어지는 대목이 예언서에서 많이 등장한다 (예. 7:33; 19:7; 34:20; 겔. 29:5; 39:4; 시. 79:2; 이. 18:6). 이 구절의 표현을 수단으로 의미되는 것은, 그들이 “하늘의 새들”인 거짓들에 의해, “땅의 짐승들”인 악들, 또는 그리워함들에 의해 파괴되리라는 것이다.

거짓을 지배함도 악을 지배함과 똑같다: 인간은 자신들로부터는 이것들에 대한 지배권을 조금도 가질 수 없다. 여기서의 주제는 거듭난 자가 그리워함들을, 또는 “땅의 짐승들”을, 그리고 거짓들을, 또는 “하늘의 새”를 통치함인 바, 알고 있어야 하는 것은, 그가 선행이 그의 신앙의 제일인 것을 인정하고 믿지 않으면, 또는 그가 이웃을 향한 사랑으로 감동되어, 이웃에게 자비를 가지고 있지 않으면 그는 거듭난다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의 새로운 의지는 선행으로부터 만들어내진다. 선행을 통하여 주님께서는 선을 가져오신다. 이로 인해 진리도 가져오신다. 그러나 선행 없는 신앙을 통하여는 아니다. (막연한) 순종만으로 선행의 일들을 수행하는 사람도 있다. 그 이유는 주님께서 명령하셨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 뿐이다. 그는 아직 거듭나지 않고 있다. 이들이 만일 자기들의 일들이 의롭다고 우기지 않는다면, 다른 삶에서 거듭나질 수 있다.

지면이 기어다니게 만든 모든 것조차도. 이 말이 선에 애착함을 의미하는 것은 앞에서 진행된 것과 “지면”, 지면으로부터 그것들이 생산되고 기어다녀진 것의 의미로부터 분명해진다; 먼저, 진행된 것의 경우, 그 대목에서 악들과 거짓들이 취급되었고, 악들과 거짓들을 거듭난 자가 통치하고, 그러므로 여기서는 선에 애착함이 등장하고, 이것이 거듭난 자의 손에 주어진다; 그리고 그 다음, “지면”의 의미로부터 이다. 지면으로부터 그것들이 생산되고 기어다녀진다. “지면”이 일반적 측면에서 교인, 그리고 교회 속에 있는 어떤 것이든 인 바, 여기서는 주님에 의해 내적 인간을 통하여 외적 인간 안에서 생산되는 어떤 것이든 이다. 지면 자체는 외적 인간 안에, 그의 애착들과 기억 안에 있다. 그런데 마치 인간이 선한 것을 생산하는 것처럼 이렇게 말해진다. “지면이 기어다니게 만드는 모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외관일 뿐이다; 선은 내적 인간을 통하여 주님에 의해 생산되어진다. 여러 번 말했듯이, 주님으로부터가 아니면 선과 진리는 없다.

그리고 바다의 모든 물고기들에게. 이 말이 기억 속의 지식들을 의미한다는 것은 물고기의 의미로부터 분명해진다. 말씀에서 “물고기들”은 기억 속의 지식들을 의미하는데, 이는 감각 속의 것들로부터 튀어나온다. 기억 속의 지식들에는 세 종류가 있는데, 지성적, 합리적, 감각적 측면에서의 지식들이다. 이 세 측면 모두는 기억들 안에 심어져 있고, 이 세 종류의 지식들은 거듭난 인간 안에서 내적인간을 통하여 주님께서 불러내신다. 감각 속의 것들로부터 있는 이 기억 속의 지식들은 인간이 육체에서 살 때, 그 인간의 감각(sensation)과 지각(perception)에 온다. 그 이유가 그가 이것들로부터 생각하기 때문이다. 내면인 것인 나머지 것은 인간이 육체를 벗고 다른 삶에 들어갈 때까지 지각에 그리 많이 오지 않는다. “물고기들”, 또는 물들이 생산한 기는 것들이 기억 속의 지식들을 의미하는 것은 창 1장 참조하면 더 알게 된다; “고래”, 또는 “바다 괴물”은 이런 지식들의 총체물(generals)을 의미한다. 이는 아래의 인용 구절로부터도 분명해진다. 스바냐서에서:
나는 인간과 짐승을 실패하게 만들 것이다;
나는 하늘들의 새들과 바다의 고기들을 실패하게 만들 것이다 (습. 1:3),
하박국서에서:
당신은 인간을 바다의 물고기들과 통치자가 없는 기는 것으로 만드십니다 (합. 1:14),
위 구절에서 “인간을 바다의 물고기들로서 만듦”은 그가 모두 감각적이다를 뜻한다. 호세아서에서:
그러므로 땅은 슬퍼할 것이다, 그리고 그 안에 거주하는 모든 이는
들판의 야생 동물과 하늘들의 새와 더불어 쇠약해질 것이다;
그렇다, 바다의 물고기들 역시 모아질 것이다 (호. 4:3),
위 구절에서 “바다의 물고기들”은 감각의 것들로부터 있는 기억 속의 지식을 표시한다. 다윗서에서:
당신께서는 당신의 발 아래 모든 것들을 놓으셨습니다; 모든 양과 수소들,
그렇습니다, 그리고 들판의 짐승들, 공중의 새, 그리고 바다의 물고기,
바다들의 길들을 통과하는 무엇이든 (시. 8:6-8),
위 구절은 인간 안에서의 주님의 통치권에 관련하여서 이다. “바다의 물고기”는 기억 속의 지식들을 표시한다. “바다들”은 지식들이 함께 모아져있음을 의미한다 (28항 참조). 이사야서에서:
어부들이 애통할 것이다. 그리고 강으로 갈고리를 던지는 모든 그들이 애통할 것이다,
그리고 물들의 얼굴 위에 그물을 펼치는 그들은 녹초가 될 것이다 (이. 19:8);
“어부들”은 감각 속의 것들로 있는 것만을 신뢰하는 이들을 표시한다, 그리고 이들로부터 거짓들이 부화되어 나온다; 주제는 이집트, 또는 기억 속의 지식의 영역이다.

네 손 안으로 그것들이 주어져 있게 하라. 이 말씀은 외적 인간으로부터 내적 인간이 소유권을 가짐을 의미한다. 이는 이미 말해진 것으로부터, 그리고 “손”의 의미로부터 분명해진다. 이렇게 말해진 이유는 이와 같은 표현이 말씀의 외관이기 때문이어서 이다.

3절. 살아 있어 기는 것 각각 모두가 너를 위한 식품일 것이다. 마치 야채 풀잎 같이 나는 너에게 이것 모두를 준다.

살아 있는 기는 것 모두 각각. 이는 살아 있는 선을 지닌 모든 기쁨들을 의미하는데, 이미 살핀 “기는 것”의 의미로부터 분명해진다. 여기서의 기는 것은 깨끗한 모든 짐승과 새를 뜻한다. 그 이유가 기는 것이 식품으로 주어지기 때문이다. 적절한 의미에서 기는 것은 모든 것 중에서 가장 멸시할 만한(천박한) 것, (예를 들면, 레. 11:23, 29, 30에서 명명하는 것들) 그리고 불결한 것이다. 그러나 넓은 의미에서, 여기서의 경우 같이, 식품을 위해 주어지는 동물들이다; 여기서 동물, 짐승 같은 단어도 있는데 굳이 기는 것이라 말해진 이유는 그것들이 수준 낮은 기쁨(lower pleasure)들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애착들이 말씀에서 깨끗한 짐승들에 의해 의미되어진다. 그러나 인간의 애착들은 수준 낮은 기쁨들에서만 지각되어지기에, 인간은 그의 애착을 실제로는 기쁨(pleasure)이라 부르고, 여기서 그것들이 “기는 것”이라 불리우고 있다.
수준 낮은 기쁨들은 두 종류가 있다. 의지력에 속하는 것과 이해력에 속하는 것들이다. 일반적으로 말하면, 토지나 재물을 소유함으로부터 오는 기쁨들, 명예나 고위직에서 오는 기쁨들, 결혼의 사랑과 유아나 어린이를 사랑함에서 오는 기쁨들, 우정이나 동료와의 대화에서 오는 기쁨들, 읽고, 쓰고, 알고, 슬기로워짐에서 오는 기쁨들, 그 외 많을 것이다. 감각의 기쁨도 있다: 청각의 기쁨, 이는 음악이나 노래의 달콤함으로부터 있는 일반적인 것이다; 시각의 기쁨, 이는 여러 가지 다양한 아름다움들로부터 있는 일반적인 것들; 후각의 기쁨이다, 이는 달콤한 냄새로부터 있다; 미각의 기쁨도 있다, 이는 식료품의 기분좋음과 건강에 좋음으로부터 이다; 촉각의 기쁨도 있다, 이는 자기에게 쾌적함을 주는 많은 감정들로부터 이다. 신체에서 있는 기쁨의 종류도 있다. 그러나 이것은 내면의 애착으로부터 존재하고 존속해가지 않으면, 그리고 내면의 애착은 사용과 목표가 들어 있는 한 단계 더 깊은 내면의 애착으로부터 존재하고 존속해가지 않으면 신체 안에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
이런 것들은 정규적인 질서에서는 가장 깊은 내면으로부터 시작하여 있는 내면들인데, 이것들은 육체 안에서 사는 동안 일 경우 인간에 의해 지각되지 않는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기쁨의 내면이라는 것이 있는지, 더구나 이것의 근원은 어디로부터인지 거의 알지 못한다; 또한 내면의 것들로부터가 아니면 외적인 것들은 결코 존재할 수 없다는 것 역시 모른다. 사실상 기쁨은 최말단에 있는 결과들일 뿐이다. 내면의 것들은 그것들을 곰곰이 되새겨보는 이들에게가 아니면, 육체에 사는 이상, 인간이 볼 수 있게 열려져 놓이지 않는다. 다른 삶에서의 처음에 기쁨의 내면들은 천국을 향하여 주님에 의해 승강되는 질서 안에서 시야에 전개된다. 내면의 애착들은 각기 그것의 즐거움과 함께 영들의 세계 안에서 그 자체를 분명히 나타낸다. 천사 같은 영들의 천국에서는 더 분명히 나타낸다. 천사들의 천국에서는 그것들의 행복과 더불어 한층 더 분명히 나타낸다. 그 이유가 세 천국들이 있기 때문이다. 첫째 천국보다 두 번째 천국이, 두 번째 천국보다 세 번째 천국이 더 완전하고 더 많은 행복과 더불어 그 자체를 나타내보인다. 이런 내면들은 다른 삶에서는 지각에 진열되어 있듯 확실히 보인다; 그러나 인간이 육체에 사는 한, 인간은 물질적인 것들에 관한 생각과 관념에 몰두되어 있기 때문에, 이런 내면의 것들은 마치 잠든 듯, 물질적인 것 안에 침수되어 있다. 그래도 곰곰이 되새겨보는 자에게 분명해질런지 모르는 것은, 모든 기쁨들은 질서상에서 더욱 더 내면인 애착들과 같다는 것, 기쁨들은 그것의 모든 실체와 품질을 더욱 더 내면인 애착으로부터 받는다는 것이다.
질서상에서 더욱 더 내면인 애착들은 가장 바깥쪽 것들, 즉, 신체 안에서, 기쁨으로 느껴지는 바, 이 기쁨들이 “기는 것들”이라 불려진다. 그러나 이 기쁨들은 내적인 것들로부터 영향을 받은 육체적인 것일 뿐이고, 이것이 모든 이에게 시각과 시각의 기쁨으로부터 분명해지고 있다. 내면의 시각이 있지 않으면, 어떤 눈도 볼 수 없다. 눈의 시각은 내면의 시각으로부터 존재한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죽은 이후에도 육체의 눈으로 볼 때나 마찬가지로 보고 있고, 오히려 육체의 눈으로 볼 때보다 더 잘 보기까지 한다. 육체의 삶에서 소경이었던 이들은 다른 삶에서 볼 뿐만 아니라 더불어 이들은 예리한 환상을 가졌다. 인간이 잠들었을 때, 그는 깨어있을 때 만큼이나 명료하게 본다. (아마 우리가 잠들어 꿈을 꾸었을 때, 깨어나 그 꿈을 생각해보면 지상에서 실지 본 것 만큼 명료하다고 생각든 적이 있는 경험을 되돌아 보면 납득될지 모른다.) 나는 다른 삶에서 내적 시력을 수단으로 세상에서 보는 것보다 더 명료하게 볼 수 있는 경험이 주어졌었다. 이 모든 사항으로부터 명백해지는 바, 외적 시각은 내면의 시각으로부터 나온다는 것, 내면의 시각은 더 내면의 시각으로부터, 더 내면의 시각은 더욱 더 내면의 시각으로부터 나온다는 것이다. 시각 외의 다른 감각과 다른 기쁨도 위의 설명과 같다.
기쁨들은 본 구절 외 다른 구절에서도 “기는 것들”이라 불리운다. 그러나 깨끗한 것과 불결한 것, 즉 살아 있는 것으로부터 즐기는 천국의 기쁨과 죽은 것으로부터 즐기는 지옥의 기쁨 사이에 구분은 있다. 호세아서에서:
그 날에 나는 그들을 위해 들판의 야생 동물과 더불어, 그리고 하늘들의 새와 더불어,
그리고 지면의 기는 것들과 더불어 언약을 만들 것이다 (호. 2:18).
여기서 들판의 야생 동물, 하늘들의 새, 그리고 기는 것은 이미 말한 바 같이 인간에 있는 여러 가지 것을 의미하는데, 주제가 새 교회이다로부터 분명해진다. 다윗서에서:
하늘들과 땅이 여호와를 찬양하게 하라, 바다들과 그 안에 기는 모든 것 (시. 69:34).
바다들과 그 안에서 기는 것들이 여호와를 찬양할 수 없다. 이것들에 의미되는 인간 안에 있는 것들, 그리고 살아 있는 것들이 찬양할 수 있다. 그런고로 그것들 안에 살아있는 것으로부터 이다. 다시:
여호와를 찬양하라, 너희 야생 동물과 모두 각각의 짐승,
기는 것과 날개달린 새들아 (시. 148:10),
위 구절도 앞 인용 구절과 비슷한 의미이다. 즉,
“기는 것”에 의해 선한 애착들로부터 있는 쾌락들임은 기는 것들이 이 백성들과 더불어 불결해 있음으로부터 분명해진다. 아래 구절로부터도 분명해진다. 다시:
오 여호와여, 땅이 당신의 부유함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이 바다, 크고 넓고,
그 안에 셀 수 없는 기는 것들이 있습니다; 이것들 모두는 당신께서 철에 맞추어
그들에게 식품으로 주실 때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당신은 그들에게 주시고, 그들은 모아
들입니다; 당신께서 당신의 손을 여시고, 그들은 선으로 만족해집니다 (시. 104:24-28).
위 구절의 내적 의미에서 “바다들”은 영적인 것들, “기는 것들”은 영적인 것들로부터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을 의미하고; 이를 즐김이 그것들을 철에 맞게 그들에게 식품으로 주심, 그리고 그들이 선으로 만족해짐에 의해 의미되고 있다. 에스겔서에서:
강들이 가는 모든 장소에서 기는 살아 있는 모두 각각의 혼이 살 것이다;
그리고 아주 많은 물고기가 있을 것이다, 그 이유는 물들이 그리로 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은 치료될 것이다, 강이 가는 어디든지 모든 것이 살 것이다 (겔. 47:9).
위 구절은 새 예루살렘의 물들이 뜻해지고 있다; 이 물들은 천적 근원으로부터 있는 영적인 것들을 표시한다; “기는 살아 있는 혼”은 선에 대한 애착들, 그리고 이 애착으로부터의 기쁨들, 이는 육체로부터와 감각들로부터 모두; 이것들이 “물들”로부터, 또는 천적 근원으로부터의 영적인 것들로부터 살고 있다가 뜻해져 있다.
더러운 기쁨들 또한 있는데, 이는 인간의 자기 자신에 근원이 있고, 거기로부터의 더러운 탐욕들 안에 근원이 있다. 이것 또한 “기는 것”이라 불리우는데, 에스겔서로부터 분명해진다:
그리하여 나는 들어가서 보았다; 그리고 보니, 기는 것과 짐승의 형체, 역겨운 (형체),
그리고 이스라엘 가문의 모든 우상들, 벽을 빙돌아가며 초상화해 놓았다 (겔. 8:10).
위 구절에서 “기는 것의 형체”는 내면들의 탐욕들인 불결한 기쁨들(pleasures)을 의미한다. 이들의 내면들은 증오함들, 복수들, 잔인함들, 간음들이다; 이런 것이 “기는 것들”, 또는 자기와 세상을 사랑함으로부터, 또는 인간의 자기 자신으로부터 있는 기쁨들을 즐김이다. 이것들이 그들의 “우상들”이다. 그 이유는 그들은 그런 것들에서 즐거움을 찾고, 그것들을 사랑하고, 그것들을 신들로 가지고, 그것들을 숭배하기 때문이다. 표현 교회(the representative church)에서 이런 기는 것들은 천박하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어서, 마치 불결한 것과 같이 취급하여 그것들을 만지지 못하게 했다; 그리고 그것들에 닿은 자는 불결해졌다 (레. 5:2; 11:31-33; 22:5, 6 참조).

너희를 위한 식품 일 것이다. 이것이 그들이 즐길 그것의 즐거움(delight)들을 의미하는 것은 이로부터 분명하다. 즉 어떤 기쁨이든, 그것은 그 인간에게 영향을 끼칠 뿐만 아니라 그를 지탱하게 한다. 마치 인간과 음식물의 관계와도 같다. 즐길 수 없는 기쁨들은 기쁨이 아니다. 이럴 경우, 그것은 생명 없는 어떤 것인 바, 육체적 기 쁨(pleasure)은 정신적 기쁨(joy)으로부터서만 존재하고, 또한 기쁨이라 불리운다. 다시 말해, 물질적이고 감각적인 것들은 그 자체로서는 물질일 뿐, 생명 없고, 죽은 것이다; 그러나 내면들로부터 질서 안에 오는 기쁨들로부터 육체적, 물질적 기쁨들은 생명을 가진다. 이로부터 분명한 바는, 내면의 생명들은 기쁨 안에서 즐거움을 주는 기기쁨으로 있다는 것이다. 그 이유가 기쁨들 안에 생명이 있기 때문이다. 주님으로부터의 선이 있는 기쁨만이 살아 있다. 그 이유는 이럴 때만이 기쁨은 선의 참 생명으로부터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이 구절에서, “살아 있는 기는 것 모두 각각이 너를 위한 식품 일 것이다” 하고 말해진다. 즉 즐김(enjoyment)을 위하여서 이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생각하기도 한다. 다른 삶에서 행복해지기를 원하는 자는 육체와 육체의 감각들로부터의 기쁨들 안에서 살아서는 안 된다는 것, 그것들은 물질적이고 세상적인 것이므로 우리를 영적이고 천국의 생명으로부터 떼어 놓는 바 포기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는 이들, 그래서 고생을 자초하는 이들은 세상 삶에서 제대로 된 정보나 지식을 얻지 못한 까닭이 클 것이라 생각된다. 누구에게도 신체나 그것의 감각들의 기쁨, 즉 토지나 재물을 소유함의 쾌락; 명예나 고위 직급을 지님의 기쁨; 결혼 사랑의 기쁨; 유아나 어린이를 사랑함의 기쁨; 우정이나 동료와의 교제로부터의 기쁨; 음악을 들음의 기쁨, 또는 노래함의 달콤함의 기쁨; 보는 것의 기쁨, 아름다움들, 멋진 옷을 입는 것, 좋은 가구를 지니고 좋은 집에서 사는 것, 아름다운 정원을 지니는 것, 등등 형체와 색깔의 하모니로부터 자아내지는 기쁨; 냄새로부터의 기쁨, 향기로움의 기쁨; 맛의 기쁨, 음식의 향미로부터의 기쁨; 접촉(touch)의 기쁨, 등등 이다. 이런 것들은 내면의 애착으로부터 발생하는 가장 외적, 또는 신체적 애착, 애정들이다. 이는 이미 설명했다.
내면의 애착들(interior affections), 이것은 살아 있다. 이 애착은 그것의 기쁨을 선과 진리로부터 끌어낸다; 그리고 선과 진리는 그것의 기쁨을 선행과 신앙으로부터 끌어낸다. 선행과 신앙은 주님으로부터, 고로 생명 자체로부터 끌어낸다; 그러기에 각각의 근원으로부터 애착들과 기쁨들은 살아 있다. 순수한 기쁨들은 이 근원으로부터 이기에, 그것들은 누구에게서도 금지되지 않는다. 실로 기쁨들이 이 근원으로 언제나 그것들의 즐김을 가질 경우, 비교적으로 불결한 기쁨, 즉 이 근원으로부터 있지 않은 기쁨을 언제나 능가한다. 결혼 사랑의 기쁨을 예를 들면, 이 기쁨이 그것의 진정한 결혼 사랑으로부터 가지게 되면, 이 근원으로부터 있지 않은 결혼 사랑의 기쁨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능가한다. 진정한 결혼 사랑은 천국으로부터 내려오기 때문에 진정한 결혼 사랑 안에 있는 이들은 천국의 기쁨과 행복 안에 (현재) 있다. 이것은 태고 교회의 사람들에 의해 인정되어졌다. 간음자들에 의해 느껴진 기쁨들은 태고인들에게는 너무나 역겨운지라, 그들은 이것을 생각만해도 덜덜 떨었다. 이상으로부터 우리는 두 기쁨, 즉 생명의 참 원천으로부터 흐르지 않는 경우와 주님으로부터 흐르는 경우를 생각해보았다.
위에 열거한 기쁨들은 누구에게도 금지되지 않는다는 것, 그것들이 그것의 진정한 근원으로부터 올 때, 금지된 것과는 먼 거리, 처음으로 실지의 기쁨들이 되어 있다는 것, 이는 세상에서 권력과 위엄과 부유함에서 살았던 이들, 육체와 감각 모두에서 풍요로운 쾌락을 가졌던 이들도 천국에서 복되고 행복한 이들 사이에 있다는 사실로부터 알게 된다. 지금 그들과 더불어 내면의 기쁨들과 행복들은 살아 있다. 그 이유는 그것들이 선행의 선과 주님에 대한 신앙으로부터의 진리들 안에 그것의 근원을 갖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기들의 모든 기쁨들이 선행과 주님에 대한 신앙으로부터 임을 중요시했기 때문에, 그들은 그것들의 쓸모 있게 함(use)도 중요시했다. 쓸모 있어짐이 그들의 목표이기 때문이다. 쓸모 있어짐(use) 자체가 그들에게 수준 높은 기쁨이 되어 있고, 이로부터 그들의 수준 낮은 기쁨도 왔다.

“야채 풀잎”이 가장 천한 수준의 기쁨을 의미하는 것은 이미 말한 것으로부터 분명해진다. 이 기쁨들이 세상적이고 물질적, 또는 외적 측면에서만 있기 때문에 야채 풀잎이라 불리운 것이다. 인간의 육체적, 또는 바깥쪽 것에 있는 기쁨들은 계속적으로 더욱 더 내면에 있는 기쁨들에 그것의 근원을 가진다. 가장 바깥쪽, 또는 육체적인 것들에서 지각되는 기쁨들은 상대적으로 수준이 낮다. 그 이유는 모든 기쁨들의 본성은 그것이 외적인 것들 쪽을 향하여 나아감에 비례하여 낮은 수준이 되어지고, 내적인 것들 쪽을 향하여 전진함에 비례하여 수준 높은 것, 즉 더 고귀(행복)해지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외적인 것들이 벗겨내짐에 비례하여 기쁨들은 더 즐겁고 행복한 기쁨이 된다. 이는 인간이 육체의 삶 이후, 영들의 세계에 와서 누리는 기쁨에 비해 지상에서 누렸던 기쁨은 얼마나 더 수준이 낮은지로부터 분명해진다. 그 차이가 얼마나 크던지 저 세계의 선한 영들은 육체의 기쁨들에는 콧방귀 뀌어 경멸한다. 그들은 온 세상 것을 다 준다해도 그 기쁨들에로 되돌아가지 않는다.
이 영들의 기쁨, 앞서 살핀 방식대로, 선한 영들이 주님에 의해 천사 같은 영들의 천국으로 들리워질 때, 그들이 지녔던 기쁨은 천사 같은 영들이 지닌 기쁨에 상대적으로 수준이 낮음으로 인하여 입장한 선한 영들은 자기들의 기쁨을 내던진다. 그 다음 주님에 의해 천사 같은 영들이 천사들의 천국, 또는 세 번째 천국에 들리워질 때 역시 같은 방식으로 있게 된다. 이 안에서 내적인 것들은 살아 있고 상호간의 사랑(mutual love)만 있는 바, 행복함은 말로 표현할 수 없다. 이상 살핀 바로부터, “내가 너희에게 이것 모두를 야채 풀잎으로 준다”에 의해 의미된 것이 분명해졌으리라 생각한다. 기는 것이 육체의 기쁨들과 감각을 즐김 모두를 의미한 까닭에, 이로부터 야채 풀잎도 (같은 뜻에서) 서술되고 있다. 원어에 있는 단어는 “야채(식용에 적합한 것)”와 “녹색인 것” 모두를 의미하는 단어이다. “야채(esculent)”는 의지 측면으로부터의 기쁨들, 또는 천적 (수준의) 애착들로부터의 기쁨들에, “녹색(green)”은 이해 측면으로부터의 기쁨들, 또는 영적 (수준의) 애착들에 관련된다.
“야채 풀잎”과 “녹색 풀잎”이 낮은 수준인 것을 의미하는 것은 말씀에서도 분명해진다. 이사야서에서:
니므림의 물들이 황폐해질 것이다; 그로 인해 풀이 말라졌다,
풀잎이 소진되었다, 녹색인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이. 15:6).
다시:
그들의 주민들은 손이 짧아졌다(힘이 약해졌다), 그들은 낙담해졌다,
그리고 수치함에 놓였다; 그들은 들판의 풀잎이, 그리고 녹색의 풀잎이,
지붕에 있는 풀이 되었다 (이. 37:27),
“녹색의 풀잎”이 가장 낮은 수준인 것을 표시하고 있다. 모세의 책에서:
너희가 소유하려고 가는 토지는 너희가 빠져 나온 이집트의 토지 같지 않다.
이집트에서 너희는 씨를 뿌리고 풀잎들의 동산 같이 네 발로 물을 대었다 (신. 11:10),
“풀잎들의 동산”은 낮은 수준인 것을 표시한다. 다윗서에서:
악한 자는 풀 같다, 그들은 갑자기 잘리운다,
그리고 녹색의 초본 같이 소진될 것이다 (시. 37:2),
“풀”과 “녹색의 초본”은 가장 낮은 수준인 것을 표시한다.

나는 그것 모두를 너희에게 준다. 이것은 쓸모 있기 때문에 있게 되는 즐김을 의미하는데, 그 이유는 그것이 “식품을 위해” 있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식품을 위해 있는 것은 무엇이든 쓸모가 있으려고 있기 때문이다. 쓸모 있음(use, 선용, 유용)을 주목해보자: 선행 안에, 즉 이웃을 사랑함(이로부터 수준 낮은 기쁨이 살아 있는 기쁨이 되어 있다)에 있는 이들은 쓸모 있음 때문을 제외하고는 기쁨의 즐김을 중요시하지 않는다. 그 이유가 선행의 일들을 별도의 문제로 하는 선행은 없기 때문이다; 선행이 존재하는 곳에는 선행이 실행 중이거나, 또는 쓸모 있음에 있기 때문이다. 이웃을 자신 같이 사랑하는 자는 선행이 실행 중에, 또는 쓸모 있음 안에 있지 않을 경우는 그로부터의 기쁨은 지각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선행의 생명은 쓸모 있는 것들의 생명이다. 전체 천국의 생명도 이와 같다; 주님의 왕국은, 그것이 상호간의 사랑의 왕국이기 때문에 쓸모 있음의 왕국이다. 그러므로 선행으로부터 있게 되는 모두 각각의 기쁨은 쓸모 있음으로부터 기쁨을 가진다. 쓸모 있음이 더 고상하면, 더 큰 기쁨이 있게된다. 결과적으로 천사들은 그들의 쓸모 있음의 실체와 품질에 따라 주님으로부터 행복을 가진다.
모두 각각의 기쁨의 경우도 같다. 쓸모 있음이 더 고상하면, 더 큰 그것의 기쁨이 있다. 예를 들어서 결혼의 사랑을 생각해보자: 이 사랑은 인간 공동체의 양성소(seminary), 그렇기 때문에 천국들에 있는 주님의 왕국의 양성소이다. 이것은 모든 쓸모 있음 중에서 가장 큰 쓸모 있음이다. 이 사랑은 아주 많은 기쁨을 가지고 있는 바, 이것은 천국의 참 행복이다. 여타 다른 기쁨들 또한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쓸모 있음의 특출함에 따른 차이는 있다. 쓸모 있음은 아주 다양하므로 종들(genera) 이나 속들(species)로 거의 분류할 수 없는데, 어떤 것은 주님의 왕국에, 또는 주님에 더 가깝게, 또는 더 직접적으로, 어떤 것은 더 멀게, 또는 더 간접적으로 있다. 결론적으로 말해보자. 모든 기쁨은 인간에게 수여되어 있다는 것, 그러나 쓸모 있음을 위하여서만 수여되어 있다는 것, 그러므로 쾌락은 그 안에 있는 쓸모 있음의 차이에 따라, 천국 행복의 몫을 받고 그것으로부터 산다는 것이다.

4절. 오직 그것의 혼과 더불은 살, 그것의 피를 너는 먹지 말라.

“살(flesh)”은 인간의 의지 부분을 의미한다. 이는 “살”의 의미로부터, 즉 인간이 죽어서 썩을 때를 상상해보면 쉽게 알아진다. “살”은 일반적으로는 전체 인간을 의미하고, 특별하게는 물질적(육체적, corporeal, 고기 덩어리) 인간을 의미함은 574항에서도 살핀 바 있다; 그리고 살이 전체 인간, 그리고 물질적 인간을 의미하므로, 살은 인간에게 어울리는 것, 결과적으로 그의 의지 부분을 의미한다. 인간의 의지 부분, 또는 의지력은 악 밖에 없다; 그러므로 “살”은 인간이라 단언된다, 그 이유가 인간이 이와 같기 때문에, 모든 탐욕, 또는 모든 현세에의 욕망을 의미한다. 그 이유가 인간의 의지력은 탐욕이기 때문인데, 이미 살핀 바 있다. “살”이 이 의미를 가졌기 때문에, 백성들이 사막에서 먹기를 갈망한 고기 덩어리의 의미 또한 위와 같다. 모세의 책에서:
그들 사이에 섞여 있는 무리가 갈구함에 빠졌다; 이 때로부터 백성들은 다시 울었고
말했다, “누가 우리에게 먹을 고기덩어리를 줄 것인가?” (민. 11:10).
위 구절에서 살은 갈망(욕망)이라 명백하게 불리우고 있다, 그 이유가 “누가 우리에게 고기덩어리를 줄 것인가?”라고 말하여, 갈망함에 빠졌기 때문이다. 아래 구절 역시 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
고기가 그들의 이빨 사이에 아직 있는 동안, 고기가 씹히기 전에, 여호와의 분노가
백성을 향하여 지펴졌다, 그리고 여호와께서는 매우 큰 재앙으로 백성을 치셨다;
그리고 이 장소의 이름은 욕망의 무덤들(the Graves of Lust)이라 불려졌다,
그 이유는 거기서 그들이 갈구했던 백성들을 묻었기 때문이다 (민. 11:33, 34).
모든 이가 분명히 해두어야 하는 점은, 이와 같은 재앙이 백성들 사이에 보내진 것은 그들이 고기를 쫓아 갈구함 때문이 결코 아니다는 것, 혹은 고기를 위하여 갈구함 때문이 아니다는 것이다. 그 이유가 인간이 고기를 먹고 살다가 오랫동안 먹지 못한채 있었을 경우, 즉 이 구절의 백성들이 광야에서 있던 모습 같을 경우, 고기를 먹고 싶어한 것은 당연히 있어지는 욕구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사건의 배경안에 더 깊은 이유가 감추여 놓여 있다. 즉 영적인 것이다. 이 때의 백성들은 만나에 의해 의미되고 표현된 것에 몹시 진저리를 내는 본성 속에 있었다. 이는 민. 11:6으로부터 분명해진다. 그리고 “고기”에 의해 의미되고 표현된 것, 즉 그들 자신의 의지 속의 것들, 즉 탐욕 속에 있는 것들, 그 자체 배설물적이고 모독적인 것들에 불과한 것만을 원했다는 것이다. 이 교회는 표현 교회에 속하기 때문에 그들이 하는 말이나 행동 같은 것의 표현으로부터 있기 때문에, (주님의) 교회가 배설물에 불과한 것으로 충족되려는 욕구에 상응하는 표현은 이런 큰 재앙을 자초한다; 이 백성들 사이에 있었던 것은 천국에서 영적으로 표현되어졌다. 즉 만나는 천국의 것을; 그리고 그들이 뒤쫓은 고기는 그들 자신의 의지 속의 불결한 것을 표현했다. 이런 이유 때문에, 그들이 이런 본성 속에 있기 때문에 그들에게 처벌이 따라온 것이다. 위 인용 구절, 다른 구절로부터도 분명해지는 것은, “살”에 의해 의지 속에 있는 것, 본문의 경우, 인간의 의지 속에 있는 것, 즉 불결함이 의미되어진다. 이 불결함은 9:2의 “땅의 짐승”이 취급된 대목에서도 살핀 바 있다.

“혼”이 생명을 의미하는 것은 말씀의 여러 장소에 있는 “혼”의 의미로부터 분명해진다. 말씀에서 “혼”은 일반적으로는 모든 생명, 즉 내적 측면에서, 또는 내적 인간의 것, 그리고 외적 측면, 또는 외적 인간의 것, 모두를 아울러 의미한다. 혼이 모든 생명을 의미하기 때문에, 혼은 그것이 서술되는 인간의 생명도 의미한다. 이 본문의 경우, 혼은 인간의 의지와 분리된 생명, 즉 거듭나는 인간의 생명을 서술하고 있다; 그 이유가, 이미 말한 바와 같이, 거듭난 영적 인간이 주님으로부터 받는 새로운 생명은 의지로부터, 또는 인간의 자기 자신으로부터, 즉 인간의 자기 자신의 생명으로부터 완전히 분리되어 있다. 인간의 자기 자신의 생명은 비록 생명이라 인간에 의해 불리고 있지만, 그것은 죽은 것이다. 그 이유는 그것이 지옥적 생명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그들이 먹지 않아야 하는 “그것의 혼과 더불은 살”은 그것의 혼과 더불은 살과 함께를 의미한다; 즉 그들은 주님의 것인 이 새로운 생명을 인간의 것인 배설물 같은 생명, 즉 그의 의지 또는 자기 자신과 뒤섞지 말아야 한다를 의미한다.

“피”가 선행(charity)을 의미하는 것은 많은 것들로부터 분명해진다. 선행은 거듭난 영적 인간이 주님으로부터 받은 새로운 의지 부분을 의미한다. 새로운 의지 부분은 선행과 동일한 것이다. 그 이유는 새로운 의지는 선행으로부터 만들어내지기 때문이다. 선행 또는 사랑은 실체(본질) 자체 또는 의지의 생명이다. 그 이유가 어떤 것을 선택함 없이, 또는 사랑함 없이, 그 어떤 것은 뜻해질 수 없기 때문이다. 선행으로부터 있는 이 새로운 의지가 여기서 “피”이다. 이 의지는 인간의 것이 아니라, 인간안에 있는 주님의 것이다. 이것이 주님의 것이기에 (비록 인간 안에 있어 자기 것인듯 착각할지 몰라도 어쨋든) 인간은 더러운 것, 즉 인간의 의지 속의 것들과 뒤섞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표현 교회에 명령된 것은, 그들은 그것의 피 또는 혼과 더불은 살을 먹어서는 안된다는 것, 즉 둘(살과 피)을 함께 뒤섞지 말라는 것이다.
“피”는 이것이 선행을 의미했기 때문에 거룩한 것을 의미했고; 그리고 “살”은 그것이 인간의 의지를 의미했기 때문에 모독된 것을 의미했다. 이 둘은 반대되고, 분리된 것인 바, 그들은 피를 먹는 것이 금하여졌다; 그 이유가 피와 함께 살을 먹는 것에 의해 천국에서는 모독, 또는 신성한 것에 모독된 것을 섞는 것을 표현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당시 이 표현은 천국에서 천사들로 전율을 느끼게 만들기도 했다; 그 이유가 그 당시 교회의 사람과 더불어 존재한 모든 것들은 천사들 사이에서 내적 의미에 있는 것의 의미와 일치하여 상응하는 영적 표현들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모든 것들의 본성은 그것들이 서술하는 인간의 것에 의해 결정되어지는 것과 마찬가지로 “피”에 관한 의미도 그러하다. 거듭난 영적 인간에 관련하여 “피”는 선행, 또는 이웃을 향한 사랑을 의미한다; 거듭난 천적 인간에 관련하여서는 주님을 사랑함을 의미한다; 그러나 주님에 관련하여서는 모든 그분의 인간 실체, 결과적으로 사랑 자체, 즉 인간 종족을 향한 그분의 자비를 의미한다. 이로부터 “피”는, 그것이 사랑 또는 사랑으로부터 있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천적인 것들, 주님만에 속하는 것들을 의미한다; 그리고 인간에 관련하여서는 인간이 주님으로부터 받은 천적인 것들을 의미한다. 거듭난 영적 인간이 주님으로 받은 천적인 것들은 천적인 것으로부터의 영적인 것(celestial spiritual, 영적 평면에 있는 천적인 것)이다. 이에 관하여는 주님의 신성한 자비로부터 그 밖의 장소에서 더 말해질 것이다.
“피”가 천적인 것, 최고 의미에서 주님의 인간 실체, 고로 사랑 자체, 또는 인간 종족을 향한 그분의 신성한 자비를 의미하는 것은 피가 유대인의 표현 교회에서 계속 신성함이 유지되도록 명령되어져 있음으로부터도 분명해진다. 이런 이유에서 피는 언약의 피라 불리워졌고, 백성들 위에, 아론과 그의 아들들이 기름부음을 받을 때 그들 위에 뿌려졌다; 그리고 태워바치는 제물과 제물의 피는 제단 위와 주위에 뿌려졌다 (출. 12:7, 13, 22, 23; 24:6, 8; 레. 1:5, 11, 15; 4:6, 7, 17, 18, 25, 30, 34; 5:9; 16:14, 15, 18, 19; 민. 18:17; 신. 12:27을 참조하라).
그리고 피는 아주 신성시되고 인간의 의지는 아주 모독적인 것으로 계속 붙들고 있어야 하기 때문에, 피를 먹는 것은 거룩한 것에 대한 모독이기 때문에 심각하게 금하여졌다. 모세의 책에서:
너희가 지방과 피를 먹지 않는 것은 너희 모든 거처에서
너희 대대로 영구한 규례일 것이다 (레. 3:17).
위 구절에서 “지방(fat)”은 천적인 생명을, “피”는 천적인 영적 생명(celestial spiritual life)이다. 천적인 영적인 것(the celestial spiritual)은 천적 (평면)으로부터 있는 영적 (평면의) 것이다; 태고 교회에서 주님을 사랑함이 그들의 천적인 것이었는데, 그 이유는 그들의 의지 안에 심어졌기 때문이다; 그들의 천적인 영적인 것은 거기로부터의 신앙이었다. 그러나 영적 인간과 더불어서는 천적인 것이 존재하지 않고 천적인 것으로부터의 영적인 것이 존재하는데, 그 이유는 선행이 그의 지적 부분 안에 심어졌기 때문이다. 다시 모세의 책에서:
이스라엘 가문의 누구이든, 그들 사이에 체류하는 누구이든, 어떤 방식으로라도
피를 먹지 말라, 나는 피를 먹는 혼에 맞서 내 얼굴을 놓을 것이고, 그를 그의 백성
사이로부터 자를 것이다; 그 이유가 육의 생명은 피에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그것을 너희 혼이 보상을 받게 만들려고 너희에게 제단 위에서 주었다; 그 이유가
혼을 위해 보상을 만드는 것이 피이기 때문이다. 모든 육의 혼은 그것의 피이다;
피를 먹는 자는 누구든지 잘리울 것이다 (레. 17:10-11, 14)
위 구절은 육의 혼이 피 안에 있다는 것, 그리고 육의 혼은 피이다는 것, 또는 천적인 것, 즉 거룩한 것, 주님의 것임을 명백히 보여준다
다시:
네가 피를 먹지 않는 것을 확실히 하라; 그 이유가 피가 혼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너는 살과 더불어 혼을 먹지 말 것이다 (신. 12:23-25).
위 인용 구절로부터 명백해지는 바는, 피가 혼, 즉 천적 생명, 또는 천적인 것이라 불린다는 것이다. 이것이 이 교회의 태워바치는 제물과 제물에 의해 표현되어져 있다. 그리고 같은 방법에서, 천적인 것, 주님의 자신인 것, 이것 만이 천적이고 거룩한 바, 이것에 인간 자신의 것, 이는 모독적인 것을 섞지 말라는 것이 그들은 누룩있는 것 위에 제물을 바치지 말 것, 또는 제물의 피를 바치지 말라고 명령되었다 (출. 23:18; 34:25 참조). 누룩 넣은 것은 부패된 것과 더럽힌 것을 의미했다. 피가 혼이라 불리고, 선행의 거룩함을 의미한 이유, 그리고 사랑의 거룩함이 유대 교회에서 피에 의해 표현된 이유는 육체의 생명이 피 안에 존재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육체의 최말단의 혼이다. 그러므로 피는 육체의 혼이라고 말해질런지 모른다, 또는 이 피 안에 인간의 육체적 생명이 있다 말해질런지 모른다; 그리고 표현 교회에서 내적인 것들이 외적인 것들에 의해 표현되는 만큼에서, 혼, 또는 천적 생명이 피에 의해 표현되어졌다.

너희는 먹지 말라. 이는 함께 섞지 말라를 의미하는데 이것이 방금 위에서 말한 것에 뒤이어진다. 고기를 먹는 것은 그 자체를 주목해서 보면, 모독의 어떤 것이다. 그 이유가 태고 시절에서 그들은 어떤 짐승이나 새를 결코 먹지 않았고, 오직 씨, 특히 밀로 만든 빵, 또한 과일, 야채, 여러 종류의 젖들, 이 젖으로 만든 제품들, 즉 여러 버터들, 등등을 먹었기 때문이다. 동물을 죽이고 그 고기를 먹는 것은 그들에게 사악함이고, 마치 들짐승 같은 것이었다. 그들은 짐승이나 새들로부터 오직 섬김과 쓸모 있음만을 위해 가져왔다. 이는 창. 1:29-30으로부터 분명해진다. 그러나 시간이 경과하면서, 인간들이 들짐승 만큼 사나워졌을 때, 아마 더 흉포해졌을 때, 그때 그들은 동물들을 죽여 그것들의 살을 먹기 시작했다; 사실상 인간의 본성이 이와 같기 때문에, 이런 행위를 하는 것이 인간들에게 허락되어졌다. 이는 오늘날도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그가 양심으로부터 이것을 행하는 한, 그 만큼에서 그것은 그 인간을 위해 적법하다. 그 이유가 그의 양심은 그가 진리이고 적법하다고 상상하는 모든 것으로부터 만들어져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고기를 먹는다고 해서 비난받지도, 비난하지도 않는다.

이런 사항으로부터 이제 분명해지는 바, “그것의 혼과 더불어 살을, 그것의 피를 먹지 않는 것”은 거룩한 것에 모독적인 것을 섞지 말라는 것이다. 피와 더불어 고기를 먹음을 수단으로 모독적인 것을 거룩한 것에 섞지 말라는 것에 대해 주님께서 마태복음서에서 이렇게 명료하게 가르치신다: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인간을 더럽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입으로부터 나오는 것,
이것이 인간을 더럽힌다; 그 이유가 입으로부터 진행하는 것들은 심정으로부터
나오기 때문이다 (마. 15:11, 18-20).
유대 교회에서도 피와 더불어 먹는 것이 금하여졌는데, 그 이유는 이미 말했듯이, 고기를 피와 더불어 먹음이 그때 당시 천국에서 모독을 표현했기 때문이다. 이 교회에서 행해진 모든 것들은 천국에서 상응하는 표현들로 바뀌었다. 즉 피는 거룩한 천적인 것으로; 살은 제물의 바깥쪽 측면인데, 그 이유는 살이 그리워함들을 의미했기 때문에 이것이 모독으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피와 고기를 같이 먹는 것은 거룩한 것을 모독적인 것과 섞는 것으로 바뀌었다. 그때 당시의 상황이 이러했기에 아주 격하게 금지하였다. 그러나 주님이 오신 이후, 외적 의식들이 폐지되었을 때, 그로부터의 표현이 중지되어 지상에서의 표현들이 더 이상 천국 안에서 상응하는 표현들로 바뀌지 않았다. 인간이 내적인 것들에 관하여 가르침을 받고, 내적으로 되어갈 때, 외적인 것들은 그에게 중요 사항이 아니다. 그때 그는 거룩한 것이 무엇인지, 즉 거룩함 자체로부터의 선행과 신앙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그는 자기가 아는 내적인 것들에 따라 그의 외적인 것들 역시 주목해서 본다. 다시 말해 선행과 주님에 대한 신앙에 따라 그는 외적인 것들 안에 있는다는 말이다. 주님이 오신 이래, 천국에서 인간의 외적인 것들이 중요시 되지 않고 그의 내적인 것들이 중요시 되었다. 만일 누군가에 대해 그의 외적인 것들을 중요함의 범주에 끼워넣었다면, 그는 필시 순박한(천진난만한) 사람이어서 이다. 그의 순박함 안에 순진과 선행이 있다. 이것이 그의 외적인 것들에 있는 것이다. 즉 그의 외적 예배 안에, 주님으로부터, 인간의 지식 없이 있는 경우이다.

5절. 나는 네 혼을 지닌 네 피를 확실히 요구하리라. 나는 그것을 들짐승 각각 모두로부터도 요구하리라. 그리고 사람의 손으로부터, 그 사람 형제의 손으로부터도 나는 사람의 혼을 요구하리라.

나는 네 혼을 지닌 네 피를 확실히 요구하리라. 선행을 괴롭힌 폭력은 스스로 처벌될 것을 의미하고, “피”는 폭력을, 그리고 “혼들”은 폭력을 휘두른 자들임은 진행되고, 이어져가는 구절로부터 분명해진다. 즉 “피”와 “혼”의 반대 의미로부터 이다. 진행되는 것으로부터인 이유는 진행되는 것들 안에 피를 먹음이 취급되고, 이것이 모독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어지는 구절로부터인 이유는 다음 절이 피를 흘림을 취급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여기서의 주제는 신성한 것에 모독인 것을 섞는 자의 상태와 그에 대한 처벌이다. “피”의 반대적 의미로부터인 이유는 피의 순수한 의미가 천적인 것, 그리고 거듭난 영적 인간에 관련해서는 그의 천적인 것인 선행을 의미하나; 반대적일 경우, 선행을 괴롭힌 폭력, 결과적으로 선행에 반대되는 것, 즉 증오함, 복수함, 잔인함, 특별히 모독이기 때문에서 이다. “혼”의 반대적 의미로부터인 이유는 말씀에서 “혼”이 일반적으로 생명, 고로 살고 있는 모두 각각의 인간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인간이 이러하고, 이러한 것이 그의 생명인 바, 폭력을 가져온 인간 또한 의미한다. 이는 말씀의 많은 구절로부터 확증되지만, 아래에 한 군데만 소개한다:
피를 먹는 자, 나는 피를 먹은 혼에 맞서 내 얼굴을 놓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의 백성 사이로부터 그것을 잘라낼 것이다; 그 이유가 살의 혼은 피 안에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 는 그것을 너희 혼들을 위해 보상을 받게 만들기 위해 너희에게 제단 위에서 주었다; 그 이유가 혼을 위해 보상을 받게 만드는 것이 피이기 때문이다 (레. 17:10-11, 14).
위 구절에서 “혼”은 세 겹의 의미에서의 생명을 표시한다. 선행을 괴롭힌 폭력은 그 스스로가 처벌될 것임은 뒤이어지는 구절로부터 분명해질 것이다.

모두 각각의 들짐승의 손으로부터. 이것은 인간에 있는 폭력적인 모든 것으로부터를 의미하는 것은 “들짐승”의 의미로부터 분명해진다. 말씀에서 “들짐승”은 살아 있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반대적인 의미에서 이것은 들짐승처럼 있는 것, 고로 인간에 있는 야성적인 것은 무엇이든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이것은 이와 같은 생명으로부터의 인간, 폭력적인 인간, 또는 선행에 폭력을 휘두르는 인간을 의미한다; 그 이유는 이런 본성이 들짐승 같기 때문이다. 인간은 사랑과 선행으로부터 인간인 것이지, 증오, 복수, 잔인함으로부터서는 들짐승이거나 그 이하이다.

사람[homo]의 손으로부터. 이것은 그의 의지력의 모두로부터인 것, 그리고 “형제 사람의 손으로부터”는 그의 지적 능력의 모두로부터인 것을 의미함은 “사람”의 의미로부터 분명하다. 그 이유가 사람의 실체와 생명이 그의 의지력인 바, 그의 의지가 이러하면, 그 사람도 이러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형제 사람”의 의미로부터, 인간 안의 지적 능력이 형제 사람이라 불리우는데, 이미 살핀 바 있다. 이 지적 능력이 진정한 지적 능력이든, 가짜 지적 능력이든, 거짓 지적 능력이든, 이것 모두는 여전히 “형제 사람”이라 불리운다; 그 이유가 이해력이 “남자[vir]”라 불리우고, “형제”는 의지로부터 이기 때문이다. “사람”과 “형제 사람”이 여기서 언급되어진다, 그리고 불결한 의지와 불결한 지성이 그렇게 불리운다, 그 이유는 여기서 모독이 취급되기 때문인데, 모독에 관련하여서는 천국에서 관대히 다루어 언급하거나 표현된 적이 없다. 오히려 즉시 거절되어진다. 이런 이유 때문에 여기서 온건한 용어들이 사용되고, 이 절의 단어들의 의미 역시 애매모호한 태도 안에 있는데, 그 이유가 모독의 것들이 이 구절 안에 포함된 것이 천국 안에서 알려지지 않게 의도적으로 그러한듯 추측된다.

내가 사람의 혼을 요구할 것이다. 이는 모독을 되갚는다를 뜻하는 것은 진행되는 구절과 이 구절에서 말해진 것으로부터 분명해진다. 그 이유가 주제가 피를 먹는 것, 이를 수단으로 모독인 것이 의미되기 때문이다. 모독이 무엇인지 아는 이가 거의 없다, 더욱이 그것의 처벌이 다른 삶에서 무엇인지 아는 자는 더 더욱 적다. 모독은 다양하다. 신앙의 진리들을 아주 부정하는 자는 신앙들을 모독하지 못한다. 마치 교회 밖이나 신앙 지식의 밖에 머문 자의 경우와 같다. 그러나 신앙의 진리들을 아는 자가 신앙을 모독한다. 특히 신앙의 진리들을 인정하고, 자기 입으로 증거하고, 설교하고, 그 진리들을 채택하도록 타인을 설득해댄 자, 그럼에도 증오나 복수, 잔인함이나 강도질, 간음질하는 자, 말씀으로부터 추출한 많은 것들로 자신을 확증한 자가 그것들을 뒤집고, 그것들을 더러운 악들에 침수시키는 자가 모독한다. 이는 대단히 간략히 살핀 모독이지만 어쨌든 인간에게 죽음을 가져다 준다. 이로부터 알게 되는 바는 저세상에서 모독인 것과 거룩한 것은 완전히 분리되어 하나는 지옥에, 하나는 천국에 있다는 것이다. 모독자가 육체의 삶에서와 같은 생각 속의 관념 안에서 다른 삶에 올 때, 거룩한 것에 모독적인 것이 꽉 달라붙어 있다. 거기서 그는 달라붙어 있는 모독된 것이 대낮에 보이듯 하게 보여짐이 없어 거룩한 것에 관한 단 한 조각의 관념도 산출할 수 없다. 다른 삶에서는 타인의 관념들을 대낮에 보듯 하는 지각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고로 거기서는 그가 (표현하지 않더라도) 생각만 하는 모든 것 안에 있는 모독이 명명백백하기 때문이다. 천국이 모독을 몹시 싫어하므로 모독자는 지옥 아래로 내던져질 수 밖에 없다.
생각(idea)들의 본성은 누구에게도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그것들은 단순한 어떤 것이라 상상되고 있다; 그러나 사고로부터의 각각의 생각은 무수하게 있고, 다양하게 결합되어 어떤 형체를 만든다, 이로부터 인간은 형상을 그린다, 이것이 다른 삶에서는 모두 지각되어지고 보여지기조차 한다. 예를 들어 한 가지만 생각해보자. 장소에 관한 생각이 떠올랐을 경우이다. 그 장소가 지방이나 성읍, 집이든지 착상되면, 그 다음 인간이 거기서 했었던 모든 것들의 생각과 형상이 도출되고, 그것들은 모두 천사나 영들에 의해 보여진다; 또는 그가 어떤 인물을 증오함에서 붙들고 있으면, 그 생각이 그가 그 인물을 향하여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했던 모든 것으로부터 도출되어진다. 이런 식으로 다른 모든 생각들에서도 있는다; 그것들이 떠올랐을 때, 그가 의문 속에서 주제에 관하여 인상지워지고 품고 있었던 일반적, 세부적 모든 것들이 시야에 보이도록 나열된다. 결혼에 대한 생각이 발생할 때, 만일 그가 간음자였다면, 간음에 관한 더럽고 외설적인 모든 것들이, 그것에 관해 생각했던 것조차도 나타난다; 이와 마찬가지로 그가 간음들에 관하여 확증해왔던 모든 것, 감각으로부터의 것이든, 이성으로부터의 것이든, 또는 말씀으로부터의 것이든, 모두가 나타난다. 그리고 그가 어떻게 말씀 속의 진리들을 간음질하고(섞음질하고), 남용했는지도 나타난다.
더욱이, 한 가지 것에 관한 생각이 또다른 것의 생각 안으로 흐르고, 그것에 색깔을 준다, 마치 검게하는 조금의 것이 물에 들어가 전체를 검게하는 것과 같다. 그런고로 영들은 그의 생각(idea)들로부터 알려진다, 그리고, 경이롭다 말해지는 바는, 그의 것 속의 모두 각각의 생각 안에 자신의 형상과 모습이 있다는 것, 모독자의 생각이 시야에 나타날 때, 너무나 이글어진 형태여서 보기만해도 소름끼친다. 이로부터 다른 삶에서 거룩한 것을 모독하는 이들의 상태, 외관이 어떠할지는 짐작되리라 본다. 그러나 천진난만한 이들이 외관에 따라 말씀 안에서 말해진 것을 믿었던 결과 진실되지 않았었다 해도 그들이 거룩한 것을 모독했다고는 결코 말해지지 않는다.

6절. 사람에게 있는 사람의 피를 흘리는 누구든지 그의 피도 흘릴 것이다. 그 이유는 그분께서는 사람을 하느님의 형상으로 만드셨기 때문이다.

사람 안에 있는 사람의 피를 흘리는 누구든지. 이는 선행을 소멸시킴을, 그리고 “사람 안에”는 사람과 더불어 있음이다를 의미하는 것은 이미 살핀 “피”의 의미가 선행의 거룩함이다로부터, 그리고 이것이 “사람 안에 있는 사람의 피”라고 말해진 것으로부터 분명해진다. 이것이 인간의 내적 생명을 의미하고, 이 생명은 인간 안에 있지 않고 그와 더불어 있다; 그 이유가 주님의 생명은 선행이기 때문이다. 이 선행은 인간 안에 있지 않은데, 그 이유는 인간은 더럽고 모독적이기 때문에 인간과 더불어 있는 것이다. “피를 흘림”이 선행에 폭력을 휘두름이다는 것은 인용된 말씀의 구절로부터 분명해지는데, 거기서 선행에 휘둘러진 폭력이 “피”라 불려짐이 보여지고 있다. “피를 흘림”은 글자 의미에서는 죽이는 것이다. 그러나 내적 의미에서는 이웃을 향하여 증오함을 갖는 것인데, 주님께서 마태복음에서 가르치신다:
너희는 옛 시대로부터의 그들에 의해 말해진 것, 즉 너희는 살인하지 말라; 그리고 살인하 는 자는 누구든지 재판의 위험에 있을 것임을 들었었다: 22 그러나 나는 네게 말한다, 이 유 없이 자기 형제에게 성 내는 자는 누구든지 재판의 위험에 있을 것이다 (마. 5:21, 22)
위에서 “성 내어 있음”은 선행으로부터 물러남을 의미한다. 결과적으로 증오이다.
증오함에 있는 자, 그는 선행을 가지지 않고 있을 뿐만 아니라, 선행에 폭력을 휘두른, 즉 “피를 흘린”자이다. 증오 안에 실제의 살인이 누워있다. 이로부터 명백해지는 바, 미워함에 있는 자는 자기가 미워한 자를 죽이는 것 밖에 바라는 게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가 외적 속박에서 풀려나 있다면, 그는 필시 그를 죽일 것이다. 이 이유 때문에 “형제를 죽임과 그의 피를 흘림”은 증오함이다; 그리고 이것이 증오함이기에, 이것은 그를 향한 그의 모든 생각 안에 있다. 이것은 모독과 더불어서도 같다. 말씀을 모독하는 자는 이미 말했듯이, 증오 안에 진리를 붙잡고 있을 뿐만 아니라, 진리를 소멸하고 죽인다. 이것은 다른 삶에서 모독을 범했던 이들로부터 분명해진다; 모독자들이 이 세상에서 외관상으로 제 아무리 곧바르고, 슬기롭고, 경건했다 해도 그들은 다른 삶에서 주님을 증오심 안에서 붙잡는 바, 죽은 주님을 붙잡고 있는 셈이다. 또한 사랑의 모든 선들과 신앙의 모든 진리들에 관련해도 마찬가지 인데, 그 이유는 그들의 내향의 것들, 증오, 강도질, 간음질 등등을 그들이 거룩함으로 포장해두고, 한편 그들은 자신들이 좋아하는 쪽으로 사랑과 신앙의 진리들을 섞음질하고 있다.
“피”가 모독을 뜻하는 것은 앞에서 인용한 구절 뿐만 아니라 아래 구절의 모세의 책으로부터도 분명해진다:
이스라엘의 집으로부터 있는 자는 누구든지, 진영 안에서 이든, 진영 밖에서 이든 소, 또는 어린 양, 또는 염소를 죽일 경우, 4 그리고 그것을 만남의 문으로 가져와 주님에게 봉 헌물로 그것을 바치지 않을 경우이다, 즉 피는 그 사람에게 귀속되어질 것이다. 그는 피를 흘렸다. 그리고 그는 자기 백성 사이로부터 잘리울 것이다 (레. 17:3-4).
성막 근처인 제단 외의 다른 장소에서 제물을 바치는 것은 모독을 표현했다; 그 이유가 제물을 바침은 거룩한 것이었으나, 진영 안에서이든, 진영 밖에서이든 모독이었다.

그의 피가 흘려질 것이다. 이것이 그의 죄있음을 의미하는 것은 이미 말해진 것으로부터 분명해진다. 피를 흘리는 사람, 또는 살해자는 죽음의 형벌에 처해진다는 것은 글자 의미에 따른 것이다. 그러나 내적 의미에서는 이웃을 향해 증오를 가진 자는 그것 때문에 죽음의 유죄 판결되어진다는 것, 즉 지옥에로 보내진다는 뜻이다. 주님께서 마태복음서에서 가르치신다:
그의 형제에게 너는 바보다 라고 말하는 자 누구든지
불의 지옥에 들어갈 위험에 처해진다 (마. 5:22)
그 이유가 선행이 소멸될 때, 인간은 자신에게, 그의 자기 자신에만 남아있고, 더 이상 양심으로부터 있는 내적 유대 관계를 통하여 주님에 의해 통치되지 않고, 외적 유대 관계들, 법들로부터 있는 것, 또는 자신에게 재물과 권력을 만드는데 필요한 유대 관계 같은 것들에 규율되어진다. 그리고 이런 묶음들이 느슨해진다면, 다른 삶의 경우 같으면, 그는 가장 큰 잔인함이나 추잡함, 고로 그의 자신의 유죄됨 안으로 돌진하고 만다. 피를 흘린 당사자가 피를 흘리게하여 처벌하는 것이 고대인들에게 잘 알려진 보복의 법이고, 이에 따라 그들은 범죄와 잘못들에 대해 판결되었는데, 말씀에서도 많은 장소에서 찾아 읽을 수 있다. 즉 이 법은 보편적인 법, 즉 다른 이가 내게 하기를 원치 않으면 나도 그에게 하기를 원치 않아야한다 (너는 사람들이 나에게 해주기를 바라는 것은 무엇이든, 너는 그들에게 똑같이 행하라) (마. 7:12)에 근원을 두고 있다; 이로부터 역시, 다른 삶에서도 보편적인 질서는, 악은 자체를 벌한다는 것, 거짓도 마찬가지로 벌한다는 것이다; 고로 악과 거짓 안에는 그것 자신의 벌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악이 자신을 벌하는 질서와 마찬가지로 악한 자는 그의 악에 응답하여 처벌 안으로 돌진하였기 때문에, 이로부터 고대인들은 그들의 보복의 법을 연역하였는 바, 여기서와 같이 피를 흘린 누구든지, 그의 피가 흘려질 것, 즉 그는 정죄됨으로 돌진한다는 것이다.

“사람 안에 있는 사람의 피를 흘린 누구든지, 그의 피가 흘려질 것이다”의 글자적 의미는 또다른 사람의 피를 흘리는 것이다; 그러나 내적 의미에서 이것은 또다른 사람의 피가 아니라 사람 안에 있는 선행이다. 이 이유 때문에 “사람 안에 있는 사람의 피”라고 말해진다. 때로 위와 같이 짧은 구절 안에서 같은 두 단어가 글자 의미에서 말해질 때, 오직 하나만이 내적 의미에서 뜻해진다. 내적 인간이 사람 안에 있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내적 인간으로부터 있는 선행을 소멸하는 자, 또는 내적 인간 자체를 소멸하는 자, 그의 피가 흘려질 것, 즉 그는 자신을 죄 있다고 판결한다.

그 이유가 하느님의 형상 안에서 그분은 인간을 만드셨기 때문이다. 이것이 “하느님의 형상”인 선행을 의미하는 것은 결과로서 뒤잇고 있다. 앞 절에서 선행이 취급되어졌고, 이것이 “피”에 의해 의미되었다는 것, 그리고 이것이 소멸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 “피를 흘리지 말라”에 의해 의미되어졌다. 여기서 지금 뒤잇는 것은, 그분이 인간을 하느님의 형상으로 만드셨다 이다; 이로부터 선행이 하느님의 형상임은 분명하다. 하느님의 형상이 무엇인지를 아는 자는 오늘날 매우 귀하다. 그들은 말한다. 하느님의 형상은 아담이라 부르는 첫 인간에서 잃어버렸다는 것, 그리고 첫 인간은 자기들도 모르지만 본성의 어떤 완전함이 있었다는 것이다. 실로 완전함은 있었다. 그 이유가 “아담”에 의해, 또는 “사람”에 의해 태고 교회가 뜻해지기 때문이다. 이 교인은 천적 인간이었다, 그리고 지각을 가졌다, 이와 같은 본성을 이 후 교회는 가지지 못했다; 이런 이유에서 이 교인은 주님의 모습(likeness)이었다. 주님의 모습은 그분을 사랑함이다.
시간의 과정에서 이 교회가 멸절된 후, 주님은 새로운 교회를 창조하셨는데, 이것은 천적 교회가 아닌 영적 교회였다. 이 교회는 주님의 모습이 아닌 주님의 형상이었다. “형상”은 영적 사랑, 즉 이웃을 사랑함, 또는 선행을 의미한다. 이 교회가 영적 사랑, 또는 선행으로부터 주님의 형상이었다는 것은 이 절로부터 분명해진다; 그리고 선행이 주님의 형상 자체인 것은 그것이 “하느님의 형상에서 그분은 인간을 만드셨다”라고 말해졌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선행 자체가 그를 그렇게 만들었다 라고 말해진 것으로부터 분명해진다는 말이다. 선행이 “하느님의 형상”이다는 것은 사랑의 참 실체, 또는 선행으로부터 가장 또렷하게 분명해진다. 사랑과 선행만이 누군가의 형상과 모습을 만들 수 있다. 사람의 실체와 선행은 둘을 만들고 있으나 마치 하나인 듯 하다. 어떤 자가 누구를 자신 같이 사랑할 때, 자신보다 더 사랑할 때, 그러면 그는 다른 사람을 자신 안에서 보고, 다른 사람 안에서 자신을 본다. 이것은 우리가 초점을 사랑에, 서로 사랑하는 이들에게만에 둔다면 알런지 모른다. 즉 이 사람의 뜻이 다른 사람의 뜻이 되어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내향적으로는 마치 함께 결합되어져 있다. 오직 육체로만이 서로가 구분되어 있는 것이다.
주님을 사랑하는 것은 인간을 주님과 하나로 만든다. 즉 그분의 모습을 만든다. 마찬가지로 선행, 또는 이웃을 향한 사랑도 인간을 주님과 하나로 만든다, 그리고 그분의 형상을 만든다. 형상은 모습은 아니나 모습에 따라 있다. 이 하나임은 주님을 사랑함으로부터 발생한다, 요한복음서가 이를 묘사하고 있다:
그들 모두 하나 되기를 바람니다; 당신, 아버지, 내 안에서 [계시듯], 그리고 내가 당신 안 에, 그들 역시 우리 안에서 하나 되게 하십시오: 당신이 나에게 준 영광을 나는 그들에게 주었습니다; 우리가 하나 인 것 같게 그들이 하나 이게 해주십시오: 나는 그들 안에, 당신 은 내 안에 (요. 17:21-23).
이 “하나로 있음”은 누군가가 곰곰이 생각하는 신비적 합일(union)이고 이것은 사랑만에 의해 있게 된다. 다시:
그 이유는 내가 살기 때문에 너희 역시 살 것이기 때문이다. 그 날에 너희는 내가 나의 아 버지 안에 [있고], 너희는 내 안에, 나는 너희 안에 있는 것을 알 것이다; 내 명령들을 가 진 자, 그리고 그것들을 지키는 자, 그가 나를 사랑하는 것이다; 만일 사람이 나를 사랑하 면, 그는 내 말들을 지킬 것이다: 그리고 나의 아버지는 그를 사랑하실 것이다, 그리고 우 리는 그에게 올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거처를 그와 더불어 만들 것이다 (요.14:19-23).
이로부터 분명한 바, 사랑이 결합하게 한다는 것, 주님은 그분을 사랑하는 자와 더불어 그의 거처를 가지신다는 것, 그리고 그의 이웃을 사랑하는 자와 더불어 그분의 거처를 가지신다는 것, 그 이유가 이것이 주님을 사랑함이기 때문이다.
이 합일, 모습과 형상을 만드는 합일은 인간 사이에서는 뚜렷이 보여질 수 없으나 모든 천사들이 상호간의 사랑으로부터 하나로 있는 천국에서는 보여진다. 각 공동체, 아주 다양하나, 마치 한 사람인 듯 구성되고 있다. 그리고 모든 공동체 함께-또는 전체 천국-은 한 사람을 구성한다. 이 한 사람을 웅대한 사람(the grand man)이라 불리운다. 전체(보편적인) 천국은 주님의 모습이다, 그 이유는 주님이 거기 안에 있는 모두 안에 있는 모두 되시기 때문이다. 그렇게 각 공동체 역시 모습이고, 각 천사도 역시 모습이다. 천적인 천사들은 모습들이고 영적인 천사들은 형상들이다. 고로 천국은 그 곳 천사들 같이 주님의 많은 모습들로 구성된다. 그리고 이것은 상호간의 사랑을 통하여서 만이-자신보다 타인을 더 사랑함만을 통하여 이루어진다 (548-549항 참조). 일반적, 또는 보편적 천국이 모습이기 위하여서는 부분들, 또는 개개인의 천사들도 모습이어야만 하고, 형상들은 모습들에 따라서 있어야만 한다. 일반적인 것이 그 자체와 같은 부분들로 구성되지 않으면, 하나를 만드는 일반적인 것은 없다. (천국에서) 하느님의 모습과 형상, 즉 주님을 사랑함과 이웃을 사랑함을 만드는 것은 원형(archetype, pattern)으로부터 어떤 제품을 생산하는 것과 비슷하다고 연상해도 될런지 모른다; 결과적으로 거듭난 영적 인간 모두 각각은 주님으로부터 있는 사랑, 또는 선행으로부터 그분의 형상이다. 그리고 주님으로부터의 선행 안에 있는 자는 “완전함” 안에 있다; 이 완전함에 관하여는 차 후 주님의 신성한 자비로부터 (더 살필 것이다).

7절. 그리고 너는 열매를 많이 맺고 번성하라. 땅에서 풍성하게 산출하라, 그리고 너는 거기서 번성하라.

너는 열매를 많이 맺고 번성하라. 이는 내면의 인간 안에서 선과 진리의 증가를 의미한다는 것, “열매를 많이 맺음”은 선들을 서술하고, “번성함”은 진리들을 서술한다는 것은 9:1절에서 이미 살핀 바와 같다. 내적 인간 안에서 증가가 있다는 것은 이어지는 것으로부터 분명해진다. 즉 “너는 거기서 번성하라”에서 이다. 이 말에 어떤 특별한 의미가 있어 앞의 부분으로부터의 구분이 없다면 불필요한 듯 중복된 것으로 느끼기 십상이다. 여기서와 앞서 말해진 것으로부터 분명해지는 바, 열매를 많이 맺고 번성함은 내면의 인간에 있는 선들과 진리들을 서술한다는 것이다. 내면의 인간이라 말해진 이유는 주님만에 속하는 천적인 것과 영적인 것에 관련하여서만이 인간은 내적 인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합리적인 것에 관련하여서 그는 내면 또는 중간적인 인간, 즉 내적 인간과 외적 인간 사이에 있는 중간(intermediate)에 해당하는 인간이다; 그리고 선에 대한 애착들과 기억 속의 지식들에 관련하여서는 그는 외적 인간이다. 그러나 육체 안에서 사는 동안 우리는 이것을 알지 못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우리가 육체에 관한 것 안에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내면의 것들이 있는지조차도 모른다. 게다가 내면의 것들이 분리된 질서에서 구분되어 놓여 있다는 것은 더 더욱 모른다. 하지만 사실들을 곰곰이 되새겨 본다면, 우리에게 분명해지는 것은 있다. 즉 우리가 육체로부터 물러난 사고함 안에 있다면, 그리고 자기 영 안에 있는 듯 하여 생각한다면 우리에게도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는 말이다. 열매를 많이 맺음과 번성함이 내면, 또는 합리적 인간을 서술하는 이유는 내적 인간의 일함은 내면의 인간 안에서 대단히 일반적 방식이 아니면 지각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내면의 인간 안에 있는 무수한 세부 사항들이 한 개의 일반적인 것으로 우리의 시야에 표출되기 때문이다; 아마 사실상 극도로 일반적인 것으로 우리에게 나타난다. 세부 사항의 무수함, 그것들의 본성인 것, 어떻게 그것들이 불명확한 일반적인 것의 전부인 듯 우리에게 표출되는 앞에서 이미 살핀 바 있다.

땅에서 풍성하게 산출하라, 그리고 너는 거기서 번성하라. 이것이 땅인 외적 인간에 있는 선과 진리의 증가를 의미한다는 것, “풍성하게 산출하는 것”은 선들을 서술하는 것, “번성하는 것”은 진리들을 서술한다는 것은 지금 말해진 것으로부터, 그리고 “땅”의 의미가 외적 인간이다는 것으로부터 분명해진다. “땅에서 풍성하게 산출하라, 그리고 너는 그 안에서 번성해져라”하고 말해진 것에 관련된 경우는 이렇다: 선행의 결과로서가 아니면, 거듭난 인간과 더불어 그의 외적 인간에서의 번성함은 없다. 즉 받은 선과 진리의 증가가 외적 인간 안에서 없다는 말이다. 선행은 봄철과 여름철의 열과 같다. 이 열이 풀과 식물과 나무들이 자라게 하는 원인이다. 선행 없이, 영적 열 없이, 아무 것도 자라지 못한다, 이런 이유 때문에 이 구절의 앞 부분에 “땅에서 풍성함을 산출하라”라고 말해진다. 이는 선행으로부터 있는 선들을 서술한다, 이를 수단으로 선과 진리의 번성이 있다. 어떤 애착함들이 없으면 인간 안에서도 증가함도 번성함도 없다. 뿌리를 내게 해주고 번성하게 하는 것들이 애착의 기쁨들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모든 것은 애착의 영향력에 의존된다. 인간은 자기가 사랑하는 것을 마음대로 배우고, 간직하고 흠모한다. 이것 모두는 어떤 애착을 지지하고 있다. 지지하지 않는 것들을 인간은 돌보지 않는다, 중요시함도 없다, 거절하기까지 한다. 그러나 애정이 있는 한, 그것의 번성함이 있다. 거듭난 자와 더불은 애착은 주님에 의해 주어진 선행으로부터의 선과 진리에 관한 것이다. 그러므로 선행의 이 애착을 좋아하는 무엇이든 그는 배우고 간직하고 흠모한다, 그리고 자신을 선과 진리 안에서 확증한다. 이것이 “땅에서 풍성하게 산출하라 그리고 너희는 그 안에서 번성해져라”에 의미되어 있다.

번성함이 애착 같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을 예를 들어 생각해보자. 선행의 일을 하지 않는다 해도 신앙만으로 구원된다는 원리를 받은 이들의 경우이다. 비록 그가 선행을 가지고 있지 않더라도, 그리고 선행으로부터 신앙을 분리한 자 이더라도, 그는 이 원리를 어린 시절로부터 받았기 때문, 뿐만 아니라, 그가 이렇게 상상했기에, 즉 만일 선행의 일들, 또는 선행 자체가 신앙의 실체라고 불러야한다면, 자기는 그 일들이 자신의 공적일 수 밖에 없다 하고 상상하는데, 이를 통하여 그는 잘못된 상상을 하고 있다. 그런고로 해서 어쨌든 그는 선행을 거절하고, 선행의 일들을 쓸모없게 만들고, 신앙의 실체, 즉 선행 없는 신앙 아닌 것의 신앙에 대한 생각 안에만 머무르고 있다. 이 원리를 자신 안에서 확증하면서도 그는 이 확증을 선에 대한 애착으로부터는 전혀 하지 않고, 기쁨에 대한 애착으로부터 하는 바, 그는 그의 그리워함의 탐닉 안에 살런지 모른다. 그리고 많은 것들을 동원해서 신앙만으로 구원됨을 확증하는 부류의 사람에 속하는 누구는 이것 마저 진리에 대한 애착으로부터 하지 않는다. 그러나 자신의 영광을 위한 애착으로부터 하는 바, 그는 타인보다 더 위대한 자인 듯, 더 학식자인 듯, 더 고상한 자인 듯처럼 여긴다. 그는 재물과 명예에 있는 이들 사이에서 더 높은 자리를 꿰차려 진력할지 모른다; 그런고로 그는 이것을 애착의 기쁨으로부터 실행한다. 그리고 이 기쁨은 확증하는 것들을 번성하게 한다. 일반적으로, 원리가 거짓일 때, 이 원리로부터 흐르는 것은 거짓들밖에 없다; 그 이유가 모든 것들은 그 자체를 첫 원리에 순응되게 한다. 참으로 나는 (영계에서의) 경험으로부터 알았는 바, 신앙만으로 구원됨이라는 원리 안에서 확증하고, 선행은 없는 이들, 선행에 관심도 없는 이들, 마치 주님께서 사랑과 선행에 관하여 말하신 수많은 구절에는 듣지 못한 듯, 읽지 않은 듯 있는 이들에 관하여 주님의 신성한 자비로부터 따로 살필 기회가 있을 것이다. 아래 인용 구절은 주님께서 사랑과 선행을 두고 하신 말씀이다. (마. 3:8, 9; 5:7, 43-48; 6:12, 15; 7:1-20; 9:13; 12:33; 13:8, 23; 18:21-23, 그리고 끝 절까지; 19:19; 22:34-39; 24:12, 13; 21:34, 40, 41, 43; 막. 4:18-20; 11:13, 14, 20; 12:28-35; 눅. 3:8, 9; 6:27-39, 43 로부터 끝 절까지; 7:47; 8:8,14,15; 10:25-28; 12:58, 59; 13:6-10; 요. 3:19, 21; 5:42; 13:34, 35; 14:14, 15, 20, 21, 23; 15:1-19; 21:15-17).

이 장의 1절에 있는 “너희는 열매를 많이 맺거라, 그리고 번성하라”가 이 구절에서 다시 말해진 이유는 여기서의 경우는 결말이다는 것, 인간이 피를 먹음과 피를 흘림에 의해 의미된 것을 금한다면, 즉 만일 그들이 증오함과 모독함에 의해 선행을 소멸시키지 않는다면 모든 것들은 잘 되어, 열매를 많이 맺고, 번성할 것이다는 것이 결론이다.

8절. 그리고 하느님께서 노아에게, 그리고 그의 아들들에게 말하셨다.

이런 것들이 의미되어져 있다는 것은 모든 것들, 즉 창세기 첫 장에서 11장의 에벨까지 역사적으로 기록된 것들은 글자에서 나타나는 것들과 아주 다르다는 것, 그리고 역사적 시리즈는 태고인들의 방식에따라 만들어낸 역사일 뿐이다는 것, 즉 태고인들은 어떤 것에 관해 진리임을 증명하려 할 경우, 그들은 그것을 “여호와께서 말하셨다”라고 선언했는데, 이와 같은 것도 그들의 방식 중의 하나였다는 사실로부터도 분명해진다. 이 구절의 경우는 “하느님”이 말하셨다 라고 말해졌는데, 그 이유는 취급된 주제가 영적 교회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진정한 어떤 것이 닥쳐오거나 그렇게 행해져버릴 때 이야기의 주제에 일치하는 형식을 사용했다. 그래서 여호와 대신 하느님이 사용된 것이다.

“노아와 그와 더불어 그의 아들”에 의해 고대 교회가 의미된 것은 앞서 살폈다. 그리고 이어지는 구절로부터 분명해질 것이다.

9, 10절. 그리고 나, 보라, 나는 너와 네 후손들과 내 언약을 세운다. 10 그리고 너와 함께 있는 생명 있는 혼 각각 모두와, 새, 짐승, 그리고 너와 더불은 땅의 야생 동물 각각 모두와, 방주에서 나온 모든 것, 땅의 야생 동물에 이르기까지와 내 언약을 세운다.

그리고 나, 보라, 나는 내 언약을 세울 것이다. 이는 선행 안에 주님이 현존하심을 의미하는데, 이는 “언약”의 의미로부터 분명해진다. “언약”은 거듭남, 그리고 실로 사랑을 수단으로 주님께서 거듭난 인간과 결합함을 의미한다; 그리고 천국의 결혼은 순전한 언약 자체이다는 것, 결과적으로 천국의 결혼은 거듭난 인간 각각 모두와 더불은 언약이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결혼, 또는 언약은 전에 취급하였다. 태고 교회의 사람과 더불어 천국의 결혼은 그의 자기 자신의 의지부분에서 있었다. 그러나 고대 교회의 사람과 더불어 천국의 결혼은 그의 지적 부분의 자기 자신에서 있었다. 이렇게 결혼의 대상이 바뀐 것은, 인간의 의지 부분이 완전히 썪었을 때, 주님은 인간의 부패된 의지 부분으로부터 그의 지적 부분을 기적적으로 떼어내셨기 때문인데, 그리하여 그의 지적 부분의 자기 자신 안에 그분은 새로운 의지를 만들어내셨다. 이것이 양심이다. 이 양심 안으로 선행을 은근히 심으셨다, 그리고 선행 안으로 순진을 심으시고, 그분 자신을 인간과 결합하셨다. 같은 말로 인간과 언약을 만드셨다. 자기 자신 중에서 인간의 의지 부분이 지적 부분과 분리되는 한에서는 주님은 인간과 더불어 현존하실 수 있다, 또는 그분 자신을 결합 하실 수 있다, 또는 인간과 언약을 하실 수 있다. 시험들과 거듭남의 시험 비슷한 수단들은 인간의 의지 부분의 자기 자신이 숨 죽이고 있도록, 마치 죽은 듯 고요해지게, 그 의지 부분이 없는 듯 하게 해준다. 이것이 실행되는 동안 주님께서는 인간의 지적 부분의 자기 자신 안에 심으신 양심을 통하여 선행 안에서 작업하실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이 여기서 “언약”이라 불리운다.

너와 함께. 이것은 거듭난 영적 인간을 의미하는 것은 전에 말해진 바로 분명해진다. 즉 노아와 그의 아들들은 태고 교회를 계승한 영적 교회를 의미한다는 것; 그리고 교회가 이렇게 의미되기 때문에 교회인 역시 마찬가지여서 거듭난 영적 인간을 의미하는 것이다.

너 이후의 네 씨(후손)와 더불어. 이것이 새로이 창조되고 있는 이들을 의미하는 것은 “씨”의 의미로부터와 그 뒤를 잇는 것으로부터 분명해진다. “씨”의 의미로부터서 분명해지는 것은, “씨”는 글자 의미에서 후손을 의미하지만, 내적 의미에서는 신앙을 의미한다; 그리고 자주 말했듯이, 선행이 있지 않은 신앙은 없다. 그러므로 “씨”에 의해 내적 의미에서 뜻해지는 것은 선행 자체이다. 뒤잇는 것으로부터 분명해지는 것은, 교회 안에 있는 사람을 뜻할 뿐 아니라 교회 밖의 사람, 고로 인류 전체를 뜻한다는 것이다. 선행이 있는 곳은 어디든지, 교회로부터 아주 멀리 있는 나라(민족)에서조차에도 “씨”는 있다. 그 이유가 천국의 씨가 선행이기 때문이다. 자신으로부터 선을 행하는 자는 아무도 없다. 모든 선은 주님으로부터 있다. 이방인이 행하는 선 역시 주님으로부터 있다. 이들에 관하여 주님으로부터의 신성한 자비로부터 차 후 살핀다. “하느님의 씨”가 신앙인 것은 이미 살핀 바 있다. 그리고 그밖의 장소에서도, 신앙은 선행으로부터 있는 신앙이 뜻해진다; 그 이유가 선행으로부터의 신앙 외에 다른 신앙은 없기 때문이다,
“씨”가 명명되는 말씀의 다른 장소에서도 위와 동일한 의미를 가지는데, 마치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씨”라 불려지는 대목 같은 경우이다. 이를 수단으로 사랑 또는 선행이 의미되어진다. 아브라함은 천적 사랑, 이삭은 영적 사랑을 표현했고, 이 두 사랑은 내적 인간으로부터 있다. 야곱은 자연적 사랑을 표현했고, 이는 외적 인간으로부터 있다. 이것은 예언서 뿐만 아니라 역사서에서도 그러하다. 말씀의 역사 줄거리는 천국에서 지각되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역사에 의해 의미되는 것을 지각한다. 말씀은 인간만을 위해 쓰여진 것이 아니라 천사들을 위해서도 쓰여진 책이다. 인간이 말씀을 읽을 때, 인간이 글자 의미 밖에 얻지 못할 때도 천사들은 글자 의미를 취하는 것이 아니라 내적 의미를 얻는다. 물질적, 세상적, 육체적 생각들을 가지고 인간이 말씀을 읽을 때, 천사들은 영적, 천국적인 생각을 지니고 말씀을 읽는다. 마치 인간이 아브라함, 이삭, 야곱에 관하여 읽을 때, 천사들은 그들을 생각하는 게 아니라 그들에 의해 표현되고 의미된 것을 생각한다는 말이다.
마찬가지로 노아, 셈, 함, 야벳과 더불어서도 천사들은 이 인물들을 아는 것이 아니라 고대 교회라는 것 외에 더 지각하지도 않는다; 내면의 천사들은 교회를 지각하는 것조차 하지 않고 이 교회의 신앙, 그리고 취급되는 것들의 상태에 따른 신앙 만을 지각한다. 그런고로 “씨”가 말씀에서 언급될 때, 여기서의 경우, 언약이 노아의 씨와 더불어, 그들 이후 그들의 씨와 더불어 만들어지지만, 천사들은 이와 같은 후손을 지각하지 않는다; 그 이유가 노아는 있지 않았고, 고대 교회가 그렇게 불렸기 때문이다; 그리고 “씨”에 의해 천사들은 이 교회의 신앙의 실체인 선행을 이해한다. 그리고 다시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역사에서 그들의 “씨”가 말하여질 때, 천사들은 이 세 사람들의 후손을 결코 생각해내지 않고, 교회 내에, 또는 교회 밖에, 천국의 씨, 즉 선행이 있는 우주의 모든 이를 생각해낸다; 그리고 내면의 천사들은 사랑 자체를 지각한다. 추상적으로 사랑 자체가 천국의 씨이다.
“씨”에 의해 사랑이 의미된다는 것, 또한 사랑이 있는 모든 이가 의미된다는 것은 창세기의 아래 인용 구절로부터 분명해진다:
그리고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셨다, 그리고 말하셨다,
네 씨에게 나는 이 토지를 줄 것이다 (창. 12:7);
네가 보는 모든 토지, 네게 나는 이것을 줄 것이다, 그리고 네 씨에게 영원히 줄 것이다;
그리고 나는 네 씨를 땅의 먼지 만큼같이 만들 것이다 (창. 13:15-16).
글자 의미의 범주에 있는 이들은 “씨”에 의해 아브람의 후손밖에 더 납득하지 못한다, 그리고 이 “토지”가 가나안의 토지라는 것, 이 토지가 그의 후손에게 주어졌다는 것 이상 납득하지 못한다. 그러나 내적 의미에서 있는 이들, 마치 전체 천국에서 같이, “아브람의 씨”는 사랑이다는 것; “가나안의 토지”는 천국들과 땅의 주님의 왕국이다고 지각한다; 그리고 그들에게 주어진 토지라는 말에서도 그들은 그것이 표현한 것 만을 지각한다. 주님의 신성한 자비로부터 차 후 더 언급할 것이다. 다시 아브람에게 말씀하셨다:
그리고 그분은 그를 밖으로 인도했다. 그리고 말하셨다, 지금 하늘을 쳐다보라,
그리고 네가 별들을 셀 수 있다면 그것들을 세어보아라, 그리고 그분은 그에게 말하셨다,
그렇게 네 씨도 있을 것이다 (창. 15:5).
위 구절 역시 아브람이 명명되는데, 그 이유는 그가 사랑, 또는 구원하는 신앙을 표현했기 때문이다.
다시:
그리고 나는 내 언약을 너와 네 대대 후손의 사이에 세워서 영원한 언약을 삼고 너와 네 후손의 하느님이 되리라; 나는 너에게, 그리고 네 후손에게 네가 머무른 이 땅, 가나안의 모든 땅을 주어 영원히 소유로 삼게 하리라. 그리고 나는 그들에게 하느님이 되리라; 이것 은 내 언약이다, 이는 나와 너, 그리고 네 후손 사이에서 지켜질 것이다, 모든 남자는 너에 게서 할례를 받아라 (창. 17:7-8, 10).
위 구절에서 “그분의 언약을 세우심” 역시 주님께서 사랑을 수단으로 우주를 망라하여 인간들과 결합하심을 의미한다. 이 사랑이 아브람에 의해 표현되어졌다. 이로부터 분명한 바, 그의 “씨”에 의해 의미된 것은 사랑을 가진 우주에서의 모두이다는 것이다. 여기서 취급된 언약은 할례였다, 이를 가지고도 천국에서는 육체의 할례가 아니고 심정의 할례, 즉 사랑을 가지는 이들의 할례로 납득한다. 할례는 사랑을 수단으로 거듭남에 대한 표현이다. 이는 모세의 책에서 명료하게 설명되고 있다:
그리고 여호와 네 하느님이 너희의 심정을, 네 후손의 심정을 할례할 것이다,
그리하여 너희는 네 모든 심정으로, 네 모든 혼으로,
네 여호와 하느님을 사랑하며 너는 살런지 모른다 (신. 30:6).
위 구절로부터 할례가 내적 의미에서 무엇인지 분명해진다; 그러므로 할례가 언급되는 어디에서든지, 할례는 사랑과 선행, 그리고 이로부터의 생명이 뜻해진다.
“아브라함의 씨”에 의해 사랑을 가진 우주에 있는 모두가 의미된다는 것은 주님께서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하신 말씀으로부터도 분명해진다. 아브라함이 주님께서 명령하신대로 이삭을 제물로 기꺼이 바친 후에 말하셨다:
나는 너를 확실히 복있게 할 것이다, 그리고 네 씨를 극히 번성하게 할 것이다, 마치 하늘 의 별들 만큼 같이, 해변의 모래 만큼 같으리라. 그리고 네 씨는 네 적들의 문을 상속받을 것이다; 그리고 네 씨 안에서 땅의 모든 나라들이 복있을 것이다 (창. 22:17-18),
위에서 “씨”가 사랑을 가진 우주에 있는 모든 이를 뜻한다는 것은 아주 분명하다.
이미 말한대로 아브라함이 천적 사랑을 표현했듯, 이삭은 영적 사랑을 표현했다; 그러므로 “이삭의 씨”에 의해 영적 사랑, 또는 선행에 있는 모두 각각의 사람을 의미했다. 이삭에 관해 이렇게 말해졌다:
이 토지에서 체류해라, 그리고 내가 너와 함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너를 축복할 것이다. 너에게, 네 씨에게, 나는 이 모든 토지를 줄 것이다, 그리고 나는 네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맹세했던 그 맹세를 세워둘 것이다; 그리고 나는 네 씨를 마치 하늘의 별들 같이 번성하게 할 것이다. 그리고 나는 네 씨에게 이 모든 토지를 줄 것이다, 그리고 네 씨 안에서 땅의 모든 민족들이 복 있을 것이다 (창. 26:3-4, 24),
위 구절에서 모든 민족(나라)들은 선행에 있는 이들을 뜻한다. 천적 사랑이 이삭에 의해 표현된 영적 사랑의 아버지로서 아브라함에 의해 표현되어졌다; 그 이유가 영적인 것은 천적인 것으로부터 출생되기 때문이다.
야곱은 교회의 외적 측면들을 표현했는데, 외적인 것들은 내적인 것들로부터 산출된다, 그런고로 사랑과 선행으로부터 외적 인간에서 튀어나오는 모든 것들을 표현한다. 그러므로 그의 “씨”에 의해서는 내적 예배를 안에 지닌 외적 예배, 주님으로부터의 선행이 안에 있는 선행의 일들이 의미된다. 이 “씨”에 관해 야곱이 꿈에서 사다리를 본 후 야곱에게 말해졌다:
나는 여호와, 네 조상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삭의 하느님이시다; 나는 네가 누워있는 토지 를 네게 줄 것이다; 그리고 네 씨는 땅의 먼지 만큼 같게 있을 것이다. 그리고 네 안에서와 네 씨 안에서 지면의 모든 족속들이 복있을 것이다 (창. 28:13-14; 32:12; 48:4).
이와 같은 씨의 의미는 이미 살핀 255항의 인용 구절로부터도 분명해지는 바 다시 참조하기 바란다; 그리고 이사야서에서:
그러나 너, 이스라엘, 내 종, 내가 선택한 야곱, 아브라함의 씨, 나의 친구 (이. 41:8),
위 구절의 주제는 인간의 거듭남이다, 이럴 경우 자주 나타나는 것은 이스라엘과 야곱 사이를 구분지음이다, 그리고 “이스라엘”에 의해서는 영적 교회의 내적 측면을, “야곱”에 의해서는 영적 교회의 외적 측면을 의미하게 된다. 이 둘 모두 “아브라함의 씨”, 즉 천적 교회의 씨라 불리운다. 그 이유는 천적, 영적, 자연적 측면은 서로가 계승되어지기 때문이다. 예레미야서에서:
나는 너를 순전하게 고귀한 포도나무, 진리의 씨로 심었다; 어찌하여 너는 나에게 이상한 포도나무의 타락한 것들로 변했느냐? (예.2:21).
위 구절은 영적 교회를 두고 말해졌다, 영적 교회가 “고상한 포도나무”이다. 이 교회의 선행, 또는 선행으로부터의 신앙이 “진리의 씨”라 불리운다.
다시:
하늘들의 군대가 세어질 수 없듯, 바다의 모래를 측량할 수 없듯, 그렇게 나는 내 종 다윗 의 씨를 불릴 것이다, 그리고 나를 섬기는 레위인들도 그렇게 불릴 것이다 (예. 33:22).
위 구절에서 “씨”는 천국의 씨를 분명하게 표시한다. 그 이유가 다윗이 주님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다윗의 씨가 하늘들의 군대를 셀 수 없었듯이 많이 있지 않았다는 것, 바다의 모래가 측량할 수 없듯이 많게 있지 않았다는 것은 모든 이에게 자명하기 때문이다. 다시:
보라, 날이 온다, 여호와께서 말하신다, 나는 다윗에게서 의로운 가지를 일으킬 것이다, 그 리고 그는 왕으로서 통치할 것이고 총명하게 행동할 것이다, 그리고 토지에서 공정과 정의 를 행할 것이다; 그의 날에 유다는 구원될 것이고, 이스라엘은 확신을 갖고 거주할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그분의 이름이 되어 불리울 것이다. 즉 여호와 우리의 정의이다; 그러므로 보라 날이 오고 있다, 여호와께서 말하신다, 그들이 더 이상, 이집트의 토지로부터 이스라 엘의 아들들을 데려내오신 여호와께서 사심 같이라 말하지 않고, 북쪽 지방으로부터 이스 라엘 가문의 씨를 인도하고 데려내오신 여호와의 사심으로 말할 것이다 (예. 23:5-8).
위 구절에서 글자에서 나타나는 것들과는 아주 다른 것들이 의미되고 있다. 다윗이 “다윗”에 의해 뜻해지지 않고, “유다”도, “이스라엘”도 그러하다; 그러나 “다윗”에 의해 주님이, “유다”에 의해 천적인 것이, “이스라엘”에 의해 영적인 것이 뜻해진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씨”에 의해 선행을 가진 이들, 또는 선행으로부터의 신앙이 뜻해지고 있다.
다윗서에서: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너희들아, 그분을 찬양하라; 너희 야곱의 모든 씨들아, 그분에게 영광 을 돌려라; 그리고 너희 이스라엘의 모든 씨들아, 그분을 경외하라 (시. 22:23),
위 구절의 “이스라엘의 씨”는 영적 교회를 뜻한다. 이사야서에서:
거룩함의 씨는 거기로부터의 지주이다 (이. 6:13),
이는 거룩함인 리메인스를 뜻하는데, 그 이유는 그것들이 주님의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나는 야곱으로부터 씨를 산출하고, 유다로부터 내 산의 소유자(를 산출할 것이다); 그리고 내가 뽑은 자가 그것을 소유하게 할 것이고, 내 종들이 거기에 거주할 것이다 (이. 65:9),
위 구절에서는 천적 교회의 외적, 내적 측면이 취급되고 있다. 다시:
그들은 곤경을 발생시키지 않을 것이다; 그 이유가 그들은 여호와의 복된 자의 씨이기 때 문이다, 그리고 그들과 더불은 그들의 자손(도 그러하다) (이. 65:23),
위 구절의 주제는 새 천국들과 새 땅이다, 또는 주님의 왕국이다. 그 안에 있는 이들은 사랑, 또는 거듭남이 “발생시킨” 이들인 바, “여호와의 복된 자의 씨”라 불리운다.

너와 함께 있는 살아 있는 모두 각각의 혼과 더불어. 이것은 거듭난 인간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을 일반적으로 의미한다는 것은 진행하는 것들로부터와 이어지는 것들로부터, 그리고 “살아 있는”의 의미로부터 분명해진다. 모든 것은 주님으로부터 생명을 받으면 “살아 있다”라고 불리운다, 그리고 거듭난 인간 안에서 살고 있는 모든 것은 “살아 있는 혼”이라 불리운다. 그 이유가 거듭난 인간이 받는 생명에 따라, 그 인간 안에 있는 모든 것은 살아 있다. 즉 그의 이성 뿐만 아니라 애착도 살아 있다; 그리고 이 생명은 천사들의 시야에서는 그의 생각과 말의 모든 것에서 나타난다. 인간들의 시야가 아니다.

새. 새는 거듭난 자의 이해력으로부터의 것들을 의미하는데 이는 이미 살핀 바 있으므로 그 항을 참조하기 바란다.

짐승. 이는 거듭난 자의 새로운 의지로부터의 것들을 의미한다.

그리고 땅의 야생 동물 모두 각각. 이는 거듭난 자의 이해력으로부터의보다 수준 낮은 것들과 거기로부터 그의 의지력으로부터의 것들을 의미하는 것은 이미 살핀 “야생 동물”의 의미에 관한 것으로부터 분명해진다. 모두 각각의 인간과 더불어 내면의 것들과 외면의 것들이 있다. 내면의 것들은 이성에 속한 것들인데, 여기서 “새”에 의해 의미되고 애착들은 “짐승”에 의해 의미되어져 있다. 외면의 것들은 지식들과 쾌락들에 관한 것들이다. 이것이 여기서 “땅의 야생 동물”에 의해 의미되어져 있다. “새, 짐승, 야생 동물”에 의해 새, 짐승, 야생 동물이 의미되는 것이 아니라, 거듭난 인간 안에 살아 있는 것이 의미된다. 하느님께서 사람도 아닌 들짐승 등등과 언약을 맺는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고 누구나 결말을 낼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내 언약을 너와 함께 있는 모두 각각의 살아 있는 혼, 새, 짐승, 너와 함께 있는 땅의 야생 동물과 세울 것이다”하고 말해져 있다. 따라서 그것들에 묘사된 내면들과 외면들 측면에 관련하여 인간과 더불어 언약을 세운다는 말이다.

방주에서 나온 모든 것. 이것이 교회의 사람들을 의미한다는 것, 그리고 “땅의 모두 각각의 야생 동물에 이르기까지”는 교회 바깥에 있는 사람을 의미하는 것은 내적 의미에 있는 것들의 시리즈로부터 분명해진다; 그 이유가 방주로부터 나간 모든 것은 앞서 명명되어졌기 때문, 즉 모두 각각의 살아 있는 혼, 새, 짐승, 그리고 땅의 야생 동물-그리고 다시, “방주로부터 나가는 모든 것, 땅의 야생 동물에 이르기까지”라고 말해진다. 고로 “땅의 야생 동물”은 확실히 두 번 명명되고 있다, 그리고 이 반복에 어떤 뜻이 있지 않을리 만무하다. 그리고 또한 뒤잇는 것, “나는 너와 더불어 내 언약을 세우겠다” 역시 앞서 말해진 것의 반복이기도 하다. 이로부터 분명해지는 바, “방주로부터 나가는 것들”에 의해 거듭난 자, 또는 교인이 의미되고, “땅의 야생 동물”에 의해서는 교회 밖에 있는 우주의 모두를 의미한다는 것이다.
“땅의 야생 동물”이 말씀에서, 살아 있는 것이 뜻해지지 않을 경우,보다 더 열등한 것, 그리고 많든 적든 야생적 본성이 참가된 어떤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것은 주제에 일치하여 서술되어진다. 이것이 인간 안에 있는 것을 서술할 경우, “땅의 야생 동물”은 외적 인간과 육체 속에 있는 더 수준 낮은 것들을 의미한다. 이 절에 있는 것들이다. 고로 더 열등한 것을 의미한다. 이것이 전체 공동체를 서술할 경우, 이것은 혼성의 사람, 또는 인물이라 불리울 경우, “땅의 야생 동물”은 교회 속에 있지 않은 이들을 의미한다, 그 이유는 그들이 더 천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주제에 따른 다른 경우가 이렇게 서술된다. 호세아서에서:
그 날에 나는 그들을 위해 들판의 야생 동물, 그리고 하늘들의 새,
그리고 땅의 기는 것들과 더불어 언약을 만들 것이다 (호. 2:18).
이사야서에서:
들판의 야생 동물이 나를 존경할 것이다,
그 이유는 내가 광야에 물을 주기 때문이다 (이. 43:20).
에스겔서에서:
하늘들의 모든 새들이 그의 굵은 가지들에 자기들의 둥지들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의 가지들에 들판의 모든 야생 동물들이 새끼를 낳았다, 그리고
그의 그늘 아래 모든 큰 민족들이 거주했다 (겔. 31:6).

11절. 그리고 나는 너와 내 언약을 세우리라. 모든 육은 더 이상 홍수의 물로 잘라지지 않으리라. 홍수가 땅을 파괴하는 일은 더 이상 없으리라.

그리고 나는 너와 더불어 내 언약을 세울 것이다. 이는 선행을 가지고 있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주님께서는 현존하신다를 의미한다. 이 현존은 방주에서 나온 것들과, 땅의 야생 동물 각각 모두, 즉 교회 내의 사람과 교회 밖의 사람에게도 관련되고 있다. 이는 방금 앞에서 말해진 것으로부터도 분명해진다. 즉, 주님께서는 교회 밖에 있는 이방인들과도 언약 안으로 들어가신다, 또는 선행을 수단으로 자신을 그들과 결합하신다는 것이 지금 보여질 것이다. 교회의 사람들은 교회 밖의 사람, 즉 이방인들이라 불리는 사람들은 구원되지 못할 것이라 상상한다. 그 이유는 그들은 신앙에 관한 지식들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그러므로 주님에 관해 통째로 무지하기 때문, 신앙 없이, 주님에 관한 지식 없이 구원은 없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그들은 교회 밖의 모든 사람들은 정죄되고 만다고 말한다. 그리하여 자기들과 같은 의견을 지니지 않은 자는 구원되어질 수 없을 것이라고까지 격해진다. 그러나 이런 비합리적 설득에 넘어가 그 대열에 동참하는 것도 문제이다. 어쨌든 이것이 전혀 그렇지 아니한 것은 굳이 깊이 생각 안 해도 금방 알아 차려지지 않을까? 주님께서는 특정한 어느 교파의 하느님이 아니시고 인간 종족 전체를 아우르는 하느님이시요 그들 모두를 향하여 자비를 가지시고, 우주에 있는 모두를 그분에게로 끌어당기신다.
주님의 자비가 무한하다는 것, 그리고 교회 내에 있는 소수에게 한정되도록 그 자체를 내버려두시지 않는다는 것, 오히려 그 자체를 온 세상에 있는 모두에게 넓히시고 있다. 교회 밖에서 태어나고 신앙에 무지한 것, 이런 것은 그들의 과오가 아니다; 그가 주님에 관하여 무지할 때, 주님에 대한 신앙을 가지지 않았다고 하여 정죄된 자는 아무도 없다. 그렇게도 많은 무지한 무리가 영원한 죽음에 이르기 위해 태어난다면 주님이 그대로 내버려두신다고 합리적인 자는 수긍할 수 있을까? 두말 할 것 없이 이는 신성에 반대된다. 그분의 자비에도 직반대 된다. 교회 밖에 있는 이들, 이방인들이라 불리는 이들이 교회 내에 있는 이들보다 더 놀라울 정도로 훨씬 더 도덕적 삶을 살고, 진정한 교리를 훨씬 더 쉽게 포옹한다. 모든 이 중에서 가장 열악한 자가 소위 기독교계로부터 온다, 그들은 증오로 이웃을 붙잡고, 주님에 대해서조차 그러하다. 전체 세상 누구보다 그들은 진리 측면에서 더 간음자들일 경우가 많다.
(기독교계가 아닌) 세상의 다른 부분들로부터 온 이들과 더불어서는 그렇지 않다. 우상들을 숭배해온 이들 중의 많은 자들이 증오함과 간음을 혐오하는 경향 속에 있었다. 그래서인지 그들은 자기들이 혐오하는 것을 지닌 기독인 때문에 그들을 두려워하기까지 한다. 실로 이방인들은 천사들이 신앙의 진리에 관하여 가르칠 때 이의없이 들으려는 경향을 보이고, 주님이 우주를 통치하신다는 가르침에도 심취되어 자기들의 우상들을 즉각 내던진다. 이런 이유 때문에, 도덕적 삶을 살았고, 상호간의 선행과 순진 안에서 살았던 이방인들은 다른 삶에서 거듭나진다. 이들이 세상에서 사는 동안, 주님은 그들과 함께 현존하셨다. 그 이유는 선행과 순진은 주님으로부터만 존재하기 때문이다. 주님께서는 그들에게도 그들의 종교에 따라 올바르고 선한 것에 대한 양심을 주셨다. 그리고 그들의 양심 안에 순진과 선행을 은근히 심으셨다; 그리고 순진과 선행이 양심 안에 있을 때, 그들은 선으로부터 있는 신앙의 진리에 쉽게 심취되어진다. 주님 자신 누가복음서에서 이렇게 가르치신다:
그리고 누구가 그분에게 말했다, 주여, 구원될 자가 아주 적습니까? 그리고 그분은 그들에 게 말하셨다, 너희는 아브라함, 이삭, 야곱, 그리고 모든 예언자들은 주님의 왕국에 있고, 네 자신은 밖에 있는 것을 볼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동쪽으로부터 서쪽까지, 그리고 북쪽 으로부터 남쪽까지에서 올 것이다, 그리고 하느님의 왕국에 앉을 것이다; 잘 보라, 첫 째라는 자가 꼴찌되어 있고, 꼴찌라는 자가 첫째되어 있을 것이다 (눅. 13:23, 28-30).
위 구절에서 “아브라함, 이삭, 야곱”에 의해 사랑을 가진 모든 이가 뜻해진다.

그들의 종교에 따라 이방인들에게 주어진 올바르고 선한 것에 대한 양심의 경우는 이렇다: 양심, 일반적으로, 참되거나, 가짜이거나, 거짓이거나 이다. 참된 양심은 신앙의 진리들로부터 주님에 의해 만들어내진 양심이다. 인간이 이것을 선물받았을 때, 그는 신앙의 진리들에 반대하여 행동하는 것을 두려워한다. 그 이유는 그가 양심에 반대하여 행동할 것이기 때문이다. 신앙의 진리들 안에 있지 않은 이들은 이 양심을 받을 수 없다, 그러므로 기독교계에의 많은 이들이 이 양심을 받지 못하고 있다. 그 이유는 각각의 교인이 자기 자신의 교조(독단적 주장, dogma)를 신앙의 진리라고 우기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거듭나지고 있는 이들은 선행과 더불어 함께 양심을 받는다. 그 이유는 양심의 참 바탕이 선행이기 때문이다. 가짜 양심은 자기들의 종교적 예배 안에서 태어나 교육된 이방인들에게 만들어진 양심이다. 이들은 자기들에게 있는 양심에 반대되어 행동하는 것은 양심에 반대되어 하는 것이라고 여기는 경우이다. 그들의 양심은 선행과 자비에, 그리고 순종에 기초를 두었을 때, 그들은 다른 삶에서 참된 양심을 받을 수 있는 상태에 있다. 그래서 그들 역시 참된 양심을 받는다. 그 이유가 그들은 이전에 아무 것도 사랑하지 않았고 신앙의 진리가 미치지 않는 곳에 있었기 때문이다. 거짓 양심은 내적으로부터가 아닌 외적인 것으로부터 만들어진 양심, 선행으로부터가 아닌 자기와 세상 사랑으로부터 만들어진 양심이다. 그들이 이웃에 적대하여 행동할 때, 그것이 양심에 반대되어 행동하는 것을 자신들도 안다. 그래서 내향적으로 고통도 느끼기도 한다. 그러나 반대되게 행동하지 않을 경우, 자신들의 명성, 이익, 등등이 위태로울 수 있다는 생각이 스치면 양심에 반대되더라도 멈추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들은 자신들의 양심에 상처를 입힌다. 어떤 이들은 심정의 유약함에서 이것을 상속 받아 있다, 어떤 이는 이것을 고의로 획득한다. 어쨌든 이것은 거짓 양심이다.

모든 육이 홍수의 물들에 의해 더 이상 멸절되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고대 교회인들은 태고 교회의 마지막 후손들이 멸해지듯 멸해지지 않을 것임을 의미한다. 이는 홍수 이전 사람에 관하여, 그리고 홍수의 물들로 멸해진 이들에 의해 의미된 것으로부터 분명해진다. 이 경우가 어떠한 것인지는 이미 살폈었다. 즉 태고 교회의 마지막 후손의 본성은 마음의 의지 부분과 지적 부분이 모두 썪어버린 상태여서 지적 부분이 의지 부분과 분리되고, 새로운 의지가 지적 부분에서 만들어내 질 수가 없었다. 그 이유가 마음의 두 부분들이 함께 밀착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이 예견되었었기 때문에, 또한 주님에 의해 설비된 것은, 지적 부분이 의지로부터 분리되어 있어 (지적 부분에서) 새로워지는 것이다. 이럴 경우, 홍수 이전의 인류는 홍수 이후 존재해서는 안된다는 것, 그러므로 여기서, “모든 육은 홍수의 물들로 더 이상 멸절되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해진다.

홍수가 땅을 파괴하는 것도 더 이상 없을 것이다. 이는 죽일 듯 하게 숨막히는 설득(persuasion)은 더 이상 출현하지 않을 것이다를 의미하는데, 이는 이미 살핀 멸절된 홍수 이전 사람들에 비교하여 홍수에 대한 의미로부터와 그들에게서 발생한 끔찍한 설득력들로부터 분명해진다; 또한 “노아”라 불리는 이어지는 교회에서 보여지는 것으로부터도 분명해진다; 그리고 무지개에 관한 이어지는 것으로부터도 분명해진다.

12, 13절. 그리고 하느님께서 말하셨다, 이것은 내가 나와 너와 함께 있는 생명 있는 혼 각각 모두와, 대대손손을 위하여 만드는 언약의 표시이다.13 나는 구름에 내 활을 놓아 두었다, 그리고 이것은 나와 땅 사이에 있는 언약의 표시이리라.

그리고 하느님께서 말하셨다. 이는 그와 같이 이루어졌다를 의미한다. 이에 대해서는 이미 설명한 바도 있다. “하느님의 말하심”, 또는 “여호와의 말하심”은 그렇게 이루어졌다가 의미되는 이유는 태고인들은 교회에 관한 것을 역사의 형체로 정리정돈해 두었는데, 이때 어떤 것이 그렇게 이루어졌다는 것을 확언하기를 원했을 때, 그들은 “하느님이 말하셨다”, 또는 “여호와께서 말하셨다”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이 표현이 태고인들의 단호한 주장과 확증의 한 가지 형태였다.

이것이 언약의 표시이다. 이것은 선행 안에 주님의 현존하심이 있을 것을 암시함을 의미한다. 이는 “언약”의 의미와 “언약의 표시”의 의미로부터 분명해진다. “언약”은 선행 안에 주님이 현존하심을 의미한다. 이에 대하여는 창. 6:18, 그리고 9:9에서 살핀 바 있다. “언약”이 사랑과 선행 안에 주님의 현존이 있다는 것은 언약의 본성으로부터 분명해진다. 모두 각각의 언약은 결합을 위해 존재한다. 즉 상호간의 우정 관계, 또는 사랑을 위하여서 이다. 결혼 역시 이런 이유 때문에 언약이라 불리운다. 주님과 인간과의 결합은 사랑과 선행을 빼면 없다; 그 이유가 주님은 사랑과 자비 자체이시기 때문이다. 그분은 모든 이를 구원하시어 그분의 권능의 힘으로 천국으로, 즉 그분 자신에게로 그들을 끌어 당기려 뜻하신다. 이로부터 모든 이가 쉽게 결말 지을 수 있는 것은 인간 자신이 그분과 결합하려면 그분의 본성과 비슷해지는 것, 즉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자신 같이 사랑하는 것 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것만이 결합이 결과되게 한다. 이것이 언약의 최고의 실체이다. 이로부터 결합이 있을 때, 주님이 현존하심은 당연지사임은 누구나 부인 못한다. 실로 거기에 만이 모두 각각의 인간과 더불은 주님의 참 현존이 있다. 물론 주님의 현존이 일률적인 것은 아니다.보다 가까이, 또는 먼 듯한 주님의 현존은 사랑에의 접근, 사랑으로부터의 거리에 따라 차이는 있기 마련이다.
“언약”이 사랑을 수단으로 인간과의 주님의 결합이기 때문에, 다시 말해서, 사랑과 선행 안에서 인간과 더불은 주님의 현존이기 때문에, 말씀에서 이를 두고, “평화의 언약”이라고도 불리운다; 그 이유가 “평화”가 주님의 왕국이기 때문이고, 주님의 왕국은 상호간의 사랑 안에 있기 때문이다. 상호간의 사랑 안에서 만이 평화는 존재한다. 이사야서에서:
그 이유가 산들이 떠날 것이고, 언덕들이 옮겨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의 자비는 너 희로부터 떠나지 않을 것이고, 내 평화의 언약은 옮겨지지 않은 것이다. 네게 자비를 가지 신 여호와께서 말하신다 (이. 54:10),
위에서, 자비, 이는 사랑으로부터 있고, “평화의 언약”이라 불리운다. 에스겔서에서:
나는 한 목자를 그들 위에 일으킬 것이다, 그리고 그가 그들을, 내 종 다윗까지도 먹일 것 이다; 그가 그들을 먹일 것이다, 그리고 그가 그들의 목자일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들과 평화의 언약을 만들 것이다 (겔. 34:23, 25),
위에서 “다윗”에 의해 주님이 뜻해짐은 분명하다; 그리고 거듭난 자와 더불은 그분의 현존이 그들을 “먹임”에 의해 묘사되어 있다.
다시:
내 종 다윗이 그들 위에서 왕일 것이다; 그리고 그들 모두에게 한 목자가 있을 것이다, 그 리고 나는 그들과 평화의 언약을 만들 것이다; 이것은 그들과 더불은 영원히 지속되는 언 약일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들을 자리잡아 앉히고 그들을 불어나게 할 것이다, 그리고 언 제까지나 그들의 한 가운데에 내 성소를 둘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들의 하느님일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내 백성일 것이다 (겔. 37:24, 26-27),
위 구절 역시 주님이 “다윗”에 의해 뜻해진다; 사랑은 “그들의 한 가운데 있는 그분의 성소”에 의해 뜻해진다; 사랑 안에서 주님의 결합과 현존이 “그분이 그들의 하느님이 되심”과 “영원히 지속되는 언약”에 의해 뜻해진다. 이것이 “평화의 언약”이라 불리고, “영원히 지속되는 언약”이라 불리운다. 말라기서에서:
너희가 아는 바, 내가 이 명령을 너희에게 보냈다는 것, 내 언약이 레위인들과 더불어 있다 는 것이다. 군대들의 여호와께서 말하신다; 나의 언약은 생명들과 평화로부터의 그와 더불 어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것들을 그에게 경외함 안에서 주었다, 그리고 그는 나를 경외할 것이다 (말. 2:4-5).
“레위”는 최고 의미에서 주님이시다, 그리고 이로부터 사랑과 선행을 가진 인간도 뜻한다. 그러므로 레위와 더불은 생명들과 평화의 언약은 사랑과 선행 안에 있다.
비느하스를 두고 말하는 모세의 책에서:
보라, 내가 그에게 평화의 언약을 준다; 그리고 이것은 그에게,
그의 뒤를 잇는 후손들에게, 영원한 성직에 대한 약속일 것이다 (민. 25:12-13),
위에서 “비느하스”에 의해 비느하스를 뜻하지 않고, 그에 의해 표현된 성직이 뜻해진다. 이는 사랑과 사랑으로부터 있는 것을 의미한다. 이 교회의 모든 성직 역시 같은 의미이다. 비느하스가 영원한 성직을 가진 것은 사실상 아니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안다. 다시:
여호와 네 하느님, 그분이 하느님이시다; 그분을 사랑하고 그분의 명령을 지키는
자들과 더불어 언약과 자비를 지키시는 신실하신 하느님이시다 (신. 7:9, 12),
“언약”은 사랑을 수단으로 주님이 인간과 더불은 결합이기에, 사랑에 속하는 모든 것들에 의해서도 역시 그러한 바, 이는 신앙의 진리들, 그리고 가르침들이라 부르는 것들이 이에 해당된다; 그 이유가 모든 가르침들, 실로 율법과 예언들은 한 개의 법, 즉 모든 것에 앞서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자신 같이 사랑하는 것에 기초를 두기 때문이다. 이는 마. 22:34-40; 막. 12:28-34에 있는 주님의 말씀들로부터 분명해진다. 그러므로 열 개의 명령들이 쓰여진 돌판(table)이 “언약의 돌판”이라 불리운다. 언약, 또는 결합이 사랑의 법들 또는 가르침들을 통하여 결과되기에, 유대 교회에 주님에 의해 주어진 공동체의 법들, 즉 “법도들(증언들, testimonies)”을 통하여서도; 또한 주님에 의해 명령된 교회 의식들, 즉 “율례들(ststutes)”을 통하여서도 결과된다. 이 모든 것들이 “언약”으로부터 있다고 말해진다. 그 이유는 그것들이 사랑과 선행을 중요시하기 때문이다. 요시아왕에 관한 대목을 읽어보자:
왕은 기둥 위에 섰다, 그리고 여호와 앞에서 언약을 만들었다, 여호와를 따라 걷는 것, 그 분의 명령들을 지키는 것, 그리고 그분의 법도들과 그분의 율례들을 모든 심정으로, 모든 혼으로, 이 언약의 말씀들을 세우기로 했다 (왕하. 23:3).
이것으로부터 지금 “언약”이 무엇인지, 언약은 내적이다는 것이 분명해진다. 그 이유가 인간과 더불은 주님의 결합은 내적인 것에 의해 거행되고, 내적인 것에 분리된 외적인 것만에서는 결단코 거행되지 않기 때문이다. 외적인 것들은 내적인 것들의 유형(type)과 표현(representative)들이다. 마치 인간의 행동이 그의 생각과 뜻을 유형화한 표현인 것과 같다; 그리고 마치 선행의 일이 내부, 즉 심정과 지성에 있는 선행을 유형화한 표현(a type representative)인 것과 같다. 유대 교회의 모든 의식들은 주님을 표현하는 예징물(types representative), 결과적으로 사랑과 선행, 그리고 이로부터의 모든 것들을 표현하는 예징물이었다. 그러므로 인간의 내적인 것들을 통하여 언약과 결합은 만들어지고, 외적인 것들은 언약의 표시일 뿐이다. 언약과 결합이 내적인 것을 통하여 만들어지는 것은 예레미야서에서도 분명해진다:
보라, 날이 온다, 여호와께서 말하신다, 나는 이스라엘의 가문과, 그리고 유다의 가문과 새 언약을 만들겠다; 내가 너희들의 조상들과 만든 언약에 따라서가 아니다. 그들은 내 언약을 무익하게 만든 까닭이다; 그러나 이것은 내가 이 날들 후에 이스라엘 가문과 만들 언약이 다, 여호와께서 말하신다; 나는 그들의 내향의 부분들에 내 법을 놓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 의 심정에 그것을 쓸 것이다 (예. 31:31-33),
위에서 새로운 교회가 취급된다. 최고의 언약은 내적인 것들을 통하여 있다고 명백하게 서술했다, 그리고 실로 양심 안에 법이 새겨진다는 것, 이로부터의 모두는 사랑으로부터 있다는 것. 이는 이미 말한 바 있다.
외적인 것들은 그것에 내적인 것들이 결합되어 있지 않으면 “언약”이 아니다, 그런고로 외적인 것은 내적인 것과 하나로서, 같은 원인에서 합일된 행동으로 있어야만 한다; 그리고 외적인 것들은 언약의 “표시들”일 뿐이다. 마치 주님을 기억 안에 간직하는데 있어 주님을 표현하는 예징물을 수단으로 기억하는데 사용될 뿐이다. 이는 안식일과 할례가 언약의 “표시들”이라 불리는 사실로부터도 분명해진다. 안식일이 그렇게 불리는 것을 모세의 책에서 읽는다:
이스라엘의 아들들은 안식일을 준수할 것이다, 그들 세대들을 망나하여 안식일을 준수하는 것이다. 그 이유가 항구적 언약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나와 이스라엘의 아들들 사이에 영원 하게 있는 표시이다. ( 출. 31:16-17).
그리고 할례 역시 그렇게 불리운다, 같은 책에서:
이것이 나의 언약이다, 너희는 이것을 지켜라, 이것은 나와 너, 그리고 네 후손 사이에 있 다; 모든 남성은 네게 할례를 받을 것이다; 그리고 너는 너의 포피의 살을 할례할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나와 너 사이에 언약의 표시를 위하여 있을 것이다 (창. 17:10-11).
이런 사실에서 피 역시 “언약의 피”라 불리운다 (출. 24:7-8).
외적인 의식들은 “언약의 표시들”이라 불리운다. 그 이유는 간단히 말해서, 내면의 것들이 외적인 것들을 수단으로 마음 안에 그것들에 의해 의미된 것들이 보존될런지 모르기 때문이다. 유대 교회의 모든 의식들은 이밖에 더 다른 것은 없다. 이런 이유 때문에 그들 역시 “표시들”이라 불리고, 백성들이 외적 표현들을 수단으로 내면의 것들을 기억하도록 했다. 예를 들면, 손과 머리에 중요한 명령을 묶어두는 것이다. 모세의 책에서:
너희는 모든 심정을 다하여, 네 모든 혼을 다하여, 그리고 네 모든 힘을 다하여 여호와 네 하느님을 사랑할 것이다; 그리고 이 말씀들을 너희는 표시를 위해 네 손 위에 묶고, 네 눈 사이에서 이마에 붙인 장식으로 있게 할 것이다 (신. 6:5, 8; 11:13, 18).
위에서 “손”은 의지를 의미한다. 그것이 힘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힘은 의지로부터 있기 때문이다; “눈 사이의 이마에 붙인 장식(frontlet)들”은 이해력을 의미한다; 고로 “표시”는 중요한 명령, 또는 총괄적인 법을 기억함을 의미한다. 그리하여 이것은 의지와 생각 안에서 계속적으로 있을런지 모른다. 즉 주님의 현존과 사랑의 현존이 모든 의지와 모든 생각 안에 있을런지 모른다. 이와 같이 주님의 현존과 그분으로부터의 상호적인 사랑의 현존이 천사들과 더불어 있다. 계속적인 현존은 주님의 신성한 자비로부터 차 후 더 살필 것이다. 마찬가지 방식에서, 현 구절에서, “이것은 내가 나와 너 사이에 만드는 언약이다; 나는 구름에 내 활을 장착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나와 땅 사이에 언약의 표시를 위해 있을 것이다”라고 말해짐은 선행 안에서 주님의 현존의 암시, 고로 인간 안에서 그분을 기억함 외에 더 다른 표시는 아니다. 그러나 어떻게 거기로부터, 또는 구름에 있는 활로부터 표시와 기억함이 있는지는 주님의 신성한 자비로부터 이어지는 대목에서 말해질 것이다.

내가 나와 너 사이에 만드는 것. 인간과 주님의 결합은 선행을 수단으로 함을 의미한다는 것은 지금 언약에 관해 말해진 것과 언약의 표시로부터 분명해진다. 그 이유가 “언약”은 선행 안에서의 주님의 현존이기 때문이다. “나와 너 사이에”란 거기로부터의 결합이다. “만듦”은 있게 하는 원인이다.

그리고 너와 더불어 있는 모두 각각의 살아 있는 혼. 이것은 거듭나지고 있는 인간에 있는 모든 것들을 의미함은 “살아 있는 혼”의 의미로부터 분명해진다. 이는 10절에서 보여졌다. 말씀에서 “혼”은 내적, 외적 모두에서 모든 인간의 생명을 의미하고, 더 넓게는 인간 안에 있는 것을 의미하는 동물들의 혼조차도 인간의 생명을 의미한다. 그러나 가장 적절한 “살아 있는 혼”의 의미는 주님으로부터 생명을 받는 것, 즉 거듭나는 것이다, 그 이유는 이것 만이 살아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혼”이 내적, 외적 모두에서 인간의 생명을 의미하기 때문에, “살아 있는 혼”은 한 복합체 안에 있는 거듭나아져 온 모든 것을 의미한다. 인간 안에는 의지 속의 것들과 이해함 속의 것들이 있고, 이 둘은 최고로 구분되어져 있다; 그리고 살아 있는 인간과 더불어 이 둘 모두, 일반적, 세부적 모두에서 역시 살아있다; 그 이유는 인간이 이러하면, 그 사람에 있는 모든 것, 일반적이든, 세부적이든 그러하기 때문이다 (우리 속담에 한 가지 하는 짓을 보면 그의 열 가지 할 짓을 짐작한다를 연상해 볼 수 있다); 그의 일반적 측면 자체는 모든 것 안에 있다.
그 이유가 모든 일반적인 것은 구성하고 있는 모든 항목들로부터 파생되어지기 때문이다. 마치 그것 자신의 세부 사항들로부터 같다; 어떤 일반적인 것이 존재 안으로 오는 데는 이 외 다른 방법은 없다. 그 이유가 일반적이라 불리는 것은 세부 사항들로부터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삶이 일반적으로 이러이러한 양상이다 하면, 그의 극히 작은 의도나 행동도 이러이러한 양상이다는 말이다. (말하자면 일반적 측면의 것과 세부적 측면의 것은 규모나 형태만 다를 뿐 품질에서의 차이는 별로 없다는 것이다) 오만한 자가 있다고 하자. 그는 그의 의지의 단 하나의 노력에도, 그의 생각의 단하나의 관념에도 오만함은 스며있다. 탐내는 자도 마찬가지 방식에서 있고, 그것이 결국 이웃을 미워하는 결과를 자초한다. 우둔한 자와 더불어 역시 그의 의지와 생각의 모든 것에서 우둔함이 있다. 사악한 자와 더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이것이 인간의 본래의 모습이기에, 다른 삶에서는 그의 품질이 그의 생각의 단 한 조각으로부터도 그의 모든 품질이 알려진다.
인간이 거듭나져가고 있을 때, 그때 그 사람 안에 있는 모든 것들, 일반적, 세부적 모두에서 역시 거듭나져간다. 즉 생명을 가진다는 말이다. 그리고 그가 가지는 생명은 그의 자기자신의 의지, 즉 더럽고 죽은 것은 그가 주님으로부터 받은 새로운 의지와 지적인 것으로 분리되는 정도에 정확히 비례해 있는다. 그러므로 여기서 취급된 주제는 거듭난 인간인 바, “생명 있는 혼”은 거듭나져온 인간에 있는 모든 것을 의미한다. 이는 일반적 측면에서 그의 이해력과 그의 의지력으로부터의 내, 외면의 모든 것들이다. 이것은 10절에서도 표현되어졌는데, “새, 짐승, 그리고 땅의 야생 동물”에 의해서이다; 그 이유가 “나는 너와 함께 있는 살아 있는 모두 각각의 혼, 즉 새, 짐승, 그리고 땅의 야생 동물”과 더불어 내 언약을 세우겠다“하고 말해지기 때문이다.

대대 손손을 위하여. 이는 끊임없이 새로이 창조되는 모든 것을 의미하는 것은 “대대 손손”의 의미로부터 분명해진다. “손손(generations)”은 앞서 있어 왔던 이들로부터의 후손들, 마치 부모로부터 있는 것과 같다. “대대, of an age)”란 끊임없는 것이다. 여기서의 주제는 거듭나져오는 것들이다, 그러므로 “대대 손손”은 끊임없이 거듭나지고 있는 이들, 즉 새로이 창조되고 있는 이들을 뜻한다. 내적 의미에서 모든 것들은 취급되어진 것에 의해 결정된 의미를 낳는다.

나는 구름에 내 활을 놓아두었다. 이는 거듭난 영적 인간의 상태를 의미한다,이 상태는 마치 무지개 같다. 누군가는 이런 의아함을 가질지 모른다. “구름에 있는 활”, 또는 무지개가 언약의 증거로서 주어진 표(token)를 위해 말씀에서 취해지고 있는데, 자신이 무지개를 생각해본다면, 이는 빗방울에 햇빛의 광선들이 굴절 반사됨으로부터 나타남밖에 더 아니다는 것, 고로 자연적 현상의 어떤 것일 뿐이다는 것, 차라리 방금 위에서 살폈듯 할례 같은 언약의 표시만도 못한 것 같다고 여길지 모른다. 그리고 “구름에 있는 활”이 거듭남을 표현한다는 것, 그리고 거듭난 영적 인간의 상태를 의미하는 것은 어떻게 이런 경우가 있는지를 보고 알도록 (주님으로부터) 주어지지 않으면 알 도리가 없다. 영적 천사들, 이들은 영적 교회의 거듭난 이들이다. 이들이 다른 삶에서 (누군가가) 보도록 나타나질 때, 머리 둘레에 무지개 같은 것과 더불어 나타난다. 그리고 보여진 무지개는 그들의 상태에 따라 있다. 그런고로 무지개에 따라 그들의 품질이 천국에서, 영들의 세계에서 알려진다. 무지개의 나타남이 보여진 이유는 그들의 영적인 것에 상응하는 그들의 자연적인 것이 이와 같은 외관을 표출하기 때문이다. 즉 그들의 자연적인 것 안에서 주님으로부터의 영적인 빛이 변경(굴절 반사)된다. 이 천사들은 “물과 거룩한 영”으로부터 거듭나진다고 말해지는 거듭남에 속하는 이들이다. 그러나 천적 천사들은 “불로” 거듭나진다고 말해진다.
자연적 색깔을 주목해보자. 색깔의 존재는 어둠과 밝음, 또는 검은 색과 흰 색 둘의 어떤 것을 요구한다. 햇빛의 광선들이 이 두 색에 떨어질 때, 어둠과 밝음, 또는 검은 색과 흰색의 다양한 정도에 따라 빛으로부터 유입되는 광선의 변경으로부터 색깔이 생산되어진다. 이것 중의 어떤 것은 어둠과 검은 색이보다 많이, 어떤 것은보다 적게 참가된다. 이로부터 다채로움이 있다. 비교해서 말하면, 영적인 것들에서도 똑같다. 영적인 경우 어둠은 인간의 지적 부분의 자기 자신, 또는 거짓이다; 그리고 검은 색은 인간의 의지 부분의 자기 자신, 또는 악이다; 이것은 빛의 광선들을 흡수해 소멸한다. 그러나 밝음과 흰색은 인간이 자신으로부터 행한다고 상상하는 진리와 선이다. 이것은 빛의 광선들을 자체로부터 반사하거나 되던진다. 이것들 위에 떨어지는 빛의 광선들은, 그리고 그것을 변경시키는 광선들은 주님으로부터 있다. 즉 지혜와 총명의 태양으로부터 이다; 그 이유가 영적인 빛의 광선들은 여타 다른 근원은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연적인 것들과 영적인 것들은 상응하고 있기 때문에 다른 삶에서 거듭난 영적 인간 주위에 있는 것이 보이도록 표출될 때, 이것은 구름에 있는 활 같이 나타난다, 이 활은 그의 자연적인 것들 안에서 그의 영적인 것들의 표현이다. 거듭난 영적 인간에서 그의 이해력의 자기 자신 안으로 주님께서는 순진, 선행, 자비를 은근히 심으신다. 인간이 이 선물을 받는 양상에 따라 그의 무지개의 외관의 아름다움은 눈에 보이도록 표출될 때 달라진다. 이 아름다움은 자기 의지력의 자기 자신이 얼마나 옮겨지고, 복종하고, 순종으로 되돌아서느냐에 달려있다.
예언자들에 의해서 역시, 그들이 하느님의 환상에서 있을 때, 구름에 있는 활 같은 활을 보았다. 에스겔에 의해:
거룹들의 머리 너머 광활한 공간 위쪽에 왕좌의 모습이 있었다, 이는 사파이어 돌의 외 관 같았다; 그리고 왕좌의 모습 위에는 위쪽 그것 위에 사람의 모습으로서의 모습이 있었 다; 그리고 나는 불타는 숯의 모습으로 보았는데, 마치 빙둘러 그것 안쪽에 불의 외관으로 있는데, 이는 그의 허리 위쪽의 외관으로부터 이고, 그의 허리 아래쪽의 외관으로부터는 나 는 마치 불의 외관 같이 보았다, 그리고 그분 주위는 밝게 빛남이었다; 비온 날 구름에 있 는 활의 외관이었다. 이렇게 빙둘러 빛남이 있었다; 이것은 여호와의 영광의 모습의 외관이 었다 (겔. 1:26-28).
모든 이에게 분명해짐이 틀림없는 것은, 보여진 분이 주님이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분에 의해 천국이 표현되어졌다. 그 이유가 그분이 천국이시기 때문이다. 즉 그분은 천국의 모든 것들에 있는 모두 되신다. 여기서 말해지는 “사람”은 그분이시다; “왕좌”는 천국이다; “허리 위쪽으로부터 불의 외관으로 숯의 불”은 사랑의 천적 평면이다; “허리 아래쪽으로부터 빙두른 마치 불의 빛남 같은, 구름에 있는 활로서”는 천적인 영적인 것(천적인 것으로부터 있는 영적인 것, celestial spiritual)이다. 그런고로 천적(평면의) 천국, 또는 천적 천사들의 천국은 허리 위쪽으로부터로 표현되어졌다, 그리고 영적 (평면의) 천국, 또는 영적 천사들의 천국은 허리 아래쪽으로부터로 표현되어졌다. 그 이유가 웅대한 사람에서, 아래쪽인 것, 즉 허리로부터 아래쪽으로 발을 통하여 발바닥까지는 자연적 (평면)의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또한 명백해지는 것은 인간의 자연적인 것은 주님으로부터의 영적인 빛에 의해 밝게된다는 것이다. 마치 구름에서 활이 나타나는 현상과 꼭같다. 위 환상과 비슷한 환상을 요한도 보았다 (계. 4:2-3; 10:1).

“구름”은 천적 인간에 비교해 볼 때의 영적 인간에 있는 희미한 빛을 의미한다는 것은 “활”에 관해 말해진 바로부터 분명해진다; 그 이유가 활, 또는 활의 색깔은 구름이 아니면 존재하지 못한다. 앞서 말한대로, 이것은 구름의 어둠이다, 이를 통하여 태양의 광선이 비추인다, 그리고 색깔들로 바뀌인다; 고로 색깔은 광선의 빛남이 접촉된 어둠과 같다. 영적 인간의 경우가 이와 같다. 영적 인간과 더불어, 여기서 “구름”이라 불리는 어둠은 거짓이다. 이는 그의 이해력의 자기 자신과 동일한 것이다. 순진, 선행, 그리고 자비가 주님에 의해 이 자기 자신 안으로 은근히 심어질 때, 이 구름은 더 이상 거짓으로 나타나지 않고, 주님으로부터의 진리와 함께 진리의 나타남 같이 나타난다. 그러므로 색깔 있는 활의 모습이다. 여기에는 결단코 묘사되어질 수 없는 어떤 영적 변경(modification)이 있다, 그리고 이것이 색깔과 그것들의 근원의 수단이 인간에 의해 지각되지 않으면, 나는 인간의 납득력에 설명될 수 있는 방법을 모른다.
이 “구름”의 본성은 거듭나는 인간과 더불어 거듭남 이전 그의 상태로부터 알런지 모른다. 인간은 그가 신앙의 진리들이다고 상상하는 것들을 통하여 거듭나진다. 모든 이들은 자기의 독단적 주장을 진리이다고 상상한다. 이로부터 그는 양심을 획득한다. 왜냐하면 그가 양심을 획득한 후, 신앙의 진리로서 그에게 인상지워져 왔던 것에 반대하여 행동하기 위해 추론하는 것은 그에게는 양심에 반대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모두 각각의 거듭난 사람도 이와 같다. 그 이유가 많은 이들이 모두 각각의 독단적 주장 안에서 주님에 의해 거듭나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이 거듭나져갔을 때, 그들은 어떤 직접적인 계시(밝히 알게 함)를 받지 않는다. 그러나 말씀을 통하여, 그리고 말씀에 관한 설교를 통하여 그들 안으로 은근히 심어지는 것만에 의해, 고로 매우 간접적인 계시를 통해 받을 뿐이다. 그러나 그들이 선행을 받기 때문에, 주님은 선행을 통하여 그들의 구름 위에 작업하신다. 이로부터 빛이 솟아오른다. 마치 태양이 구름을 두드리는 것과 같다. 이때 구름은 빛을 반사하고 색깔들로 다양해진다. 그런고로 활의 모습이 구름에서 발생한다. 구름이 더 엷으면, 즉 혼합된 신앙의 진리들이 더 많아지면, 활은 더 아름다워진다. 그러나 구름이 더 두터우면, 즉 신앙의 진리들이 더 적어지면, 활은 덜 아름다워진다. 순진은 활의 아름다움에 많은 것을 추가한다. 즉 색깔들에 생명 있는 빛남을 더한다는 말이다.
진리의 모든 외관(나타남, appearance)들은 구름들이다. 인간이 말씀의 글자 의미 안에 있을 때, 인간은 구름 안에 존재한다. 그 이유가 말씀의 언어는 외관에 의거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이 천진난만함(simplicity)으로 말씀을 믿을 때, 그리고 선행을 가지고 있을 때, 설사 그가 외관들 안에 머무르고 있다 해도, 이 구름(진리의 외관)은 상대적으로 엷다. 이 구름 안에서 양심은 교회 내에 있는 사람과 더불어 주님에 의해 만들어 내진다. 진리에 대한 모든 무지함들 역시 구름들이다. 인간이 이 구름 안에 있는 경우란 그가 신앙의 진리가 무엇인지 모를 때이다, 또한 일반적으로 말씀이 무엇인지 모를 때이다, 더 나아가 그가 주님에 관해 듣지 못한 경우이다. 이 구름 안에서 양심은 교회 밖에 있는 이들과 더불어 주님에 의해 만들어 내진다; 그 이유가 인간의 대단히 무지함에서도 순진은 있을런지 모르고, 선행 역시 있을런지 모르기 때문이다. 모든 거짓들 또한 구름들이다; 그리고 구름들은 어둠이다. 이 구름들은 거짓 양심을 지닌 이들이든가, 또는 아무 양심도 가지지 않은 이들이든가 이다. 위에서 살핀 여러 가지 구름들은 일반적 측면에서의 구름의 품질들이다. 구름의 덩어리에 주목해보면, 실상 인간과 더불은 구름 덩어리는 너무나 두껍고 밀도가 높아 만일 인간 당사자가 이것을 알았다면, 아마 그는 빛의 광선들이 주님으로부터 이 엄청난 구름을 통과하여 빛을 발해 무지개의 색깔을 내줄 수 있을지 의아해지고 만다. 또는 이 구름 덩어리의 두께로 보아서 과연 내가 거듭나질 수 있을지 의아해지고 말 것이다. 자신의 구름 덩어리는 과히 두껍지 않다고 자평하는 이가 때로는 아주 큰 구름 덩어리를 부등켜 안고 있다. 때로는 자신의 구름 덩어리가 매우 두껍다고 자평하고 근심했는데, 상대적으로 오히려 덜 두꺼울 수도 있다.
영적 인간의 경우는 위와 같을 수 있으나, 천적 인간의 경우는 위와 같지 않다. 그 이유는 그의 의지 부분에 심어진 주님을 사랑함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영적 인간 같이 양심을 통하여서가 아닌 주님으로부터 (직접적 계시로) 받는 방법, 즉 선을 지각함, 그리고 이로부터 진리를 지각함에 의해서 받는다. 인간의 의지 부분이 천적인 불꽃으로부터의 광선을 받을 수 있을 때, 그의 지적 부분은 그것을 수단으로 계발되어진다, 그리고 사랑으로부터 그는 신앙의 진리들인 모든 것들을 알고 지각한다. 이때 그의 의지 부분은 조그만 태양처럼 있다, 이로부터 광선들이 그의 지적 부분 안으로 빛을 발한다. 이런 상황이 태고 교회의 사람에게 있었다. 그러나 인간의 의지 부분이 통째로 썩어 지옥적이 되어, 양심이라는 새로운 의지가 그의 지적 부분에 만들어진다. 이것이 고대 교회의 사람과 더불은 경우이고, 영적 교회의 모두 각각의 거듭난 인간과 더불어서도 그러하다. 이때 그의 구름은 상당히 두껍다. 그 이유가 그는 선하고 참된 것을 배울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즉 그는 그것이 이러한지 아닌지에 대한 지각력이 없기 때문이다. 하여 거짓은 그의 검은 의지 부분으로부터, 즉 지옥으로부터 (두꺼운) 구름의 어둠을 통하여 계속적으로 흘러든다. 이런 이유로 천적 인간의 경우와 달리 영적 인간의 경우는 그의 지적 부분이 계발되어질 수 없다. 그러므로 영적 인간을 취급하는 이 대목의 “구름”은 희미한 빛을 의미한다. 이는 명료한 빛(계발된 지적 부분)을 지닌 천적인간에 비교해서 하는 말이다.

그리고 이것은 나와 땅 사이에 언약의 표시를 위해 있을 것이다. 이는 선행 안에 주님의 현존이 있음에 대한 표시를 의미한다. 그리고 “땅”은 여기서의 경우, 인간의 자기 자신을 표시한다. 이는 이미 살핀 바 있다. “땅”이 인간의 자기 자신을 의미하는 것은 땅의 내적 의미로부터, 그리고 여기서 발생하는 연결로부터도 분명해진다. 왜냐하면 앞에서, “이것은 내가 나와 너, 그리고 너와 함께 살아있는 모두 각각의 혼 사이에 만드는 언약의 표시이다”이고, 이를 수단으로 거듭나져왔던 것은 무엇이든이 의미되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서 말해진 바는 다르다. 즉 “이것은 나와 땅 사이에 언약의 표시를 위해 있을 것이다”이다. 이로부터 그리고 “언약의 표시”라는 말의 반복으로부터 여기서 어떤 것이 의미됨은 분명하다. 그리고 사실상 “땅”은 거듭나지 않는 것, 거듭나질 수 없는 것을 뜻한다. 이는 인간의 의지 부분의 자기 자신이다.
거듭날 때 인간은 그의 지적 부분은 주님의 것이나, 그의 의지 부분은 그의 자기 자신이다. 영적 인간 안에서 이 두 부분들은 반대되어 있다. 그러나 비록 인간의 의지 부분이 반대되어 있을지라도, 여전히 그것은 현존해 있을 수 밖에 없다; 그 이유는 그의 지적 부분에 있는 모든 희미함, 또는 그의 구름의 모든 빽빽함이 인간의 의지 부분으로부터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인간의 의지 부분으로부터 계속적으로 흘러서 그의 지적 부분에 있는 구름은 두터워진다; 그러나 이것이 제거됨에 비례하여, 구름은 엷어진다. 고로 “땅”은 여기서 인간의 자기 자신이 의미된다. “땅”이 인간의 육체적(물질적) 부분을 의미하는 것, 그 외 다른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앞서 살핀 바도 있다. 의지력과 이해력 사이에 있는 조건은 마치 우정의 언약에 의해 원래부터 결합되어 있는 것처럼 태고 교회인의 의지력과 이해력에서 있었으나. 이 우정 관계가 깨어지고, 불화가 발생했다. 이는 인간이 자기의 의지 부분을 통째로 썩게했을 때 발생된 것이다. 그리고 다시 언약이 있게 되자, 적대감 있는 부분은 마치 언약이 그것과 더불어 있는 것처럼 있었다, 즉 언약이 그것과 더불어 있다는 것은 아니다는 말이다. 그 이유는 이 두 부분들은 완전하게 반대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흘러든 것은 그것과 더불어, 즉 이해력의 자기 자신과 더불어 있다. 언약의 표(token), 또는 표시는 이것이다, 즉 주님의 현존이 이해력의 자기 자신 안에 있음에 비례하여 의지의 자기 자신도 똑같이 비례하여 제거될 것이다. 천국과 지옥의 경우가 이런 점에서 똑같다. 주님이 현존하는 선행으로부터 거듭난 인간의 지적 부분은 천국이다. 천국인 만큼 지옥은 멀어져 있다. 그 이유가 그 자신으로부터서는 인간은 지옥 안에 있다, 그리고 주님으로부터서는 천국 안에 있다. 그리고 인간은 지옥으로부터 천국으로 들리워진다, 그가 들리운 만큼, 그의 지옥은 제거되어 있다. 그러므로 주님이 현존하신다는 “표시” 또는 암시는 인간의 의지 부분이 제거된 것이다. 지옥의 제거됨의 가능성은 시험들을 수단으로, 그리고 거듭남의 많은 다른 수단들에 의해 결과되어진다.

이상 위에서 진행한 내용들은 거듭난 영적 인간, 또는 영적 교회에 주목한 것이다. 뒤잇는 내용들은 일반적으로 모든 사람들에 주목하여 있다; 그리고 그 후에, 특별하게는 거듭나질 수 있는 사람에도 주목하여 있다.

14, 15절. 그리고 장차 내가 땅 위에 구름을 가져 올 때, 활이 구름에서 보여질 때, 15 나는 내가 너와 모든 육의 생명 있는 혼 각각 모두 사이에 세운 내 언약을 기억하리라. 그리고 물들이 모든 육을 파괴하기 위하여 더 이상 홍수가 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장차 내가 땅 위에 구름을 가져올 때. 이는 선행의 신앙이 인간의 의지 부분의 자기 자신 때문에 나타나지 않을 때를 의미한다는 것은 방금 땅, 즉 인간의 의지 부분의 자기 자신에 관하여 위에서 말해진 것으로부터 분명해진다. 즉 이것 (인간의 의지 부분의 자기 자신)은 인간의 지적 부분 안으로 애매 모호한 것(희미해지게 하는 것, obscure), 또는 거짓을 계속적으로 쏟아부은다. 이 희미해지게 하는 것이 이 구절의 구름을 가져옴의 현상인 어두워짐(“clouding over”)이고, 이것(인간의 의지 부분의 자기 자신)은 모든 거짓의 근원이다. 이것은 인간의 의지로부터 있는 것, 즉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이 증오함 밖에 없다는 사실로부터 충분히 분명해진다. 그 이유가 누군가가 자신을 사랑하는 만큼 그는 이웃을 미워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사랑이 천국의 사랑에 반대되어 있기 때문에, 이웃을 증오함 같은 것들은 상호간의 사랑에 반대되는 어떤 것이 인간의 의지 부분의 자기 자신으로부터 계속적으로 흘러드는 것을 필요로 한다. (흘러든) 이 모든 것들은 지적 부분 안에서 거짓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의 지적 부분의 모든 어둠과 희미함이 온다. 거짓은 진리를 흐려지게, 애매모호해지게(becloud)한다. 마치 검은 구름이 태양의 빛을 가리는 격이다. 그 이유는 거짓과 진리는 함께 있을 수 없기 때문에, 즉 어둠과 밝음이 함께 할 수 없기 때문에, 명백한 귀결은 하나가 떠나면, 다른 하나가 온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교대할 때, 여기서 “내가 땅 위에 구름을 가져올 때”, 즉 의지 부분의 자기 자신을 통하여 선행의 신앙, 또는 진리로부터 파생되는 선과 더불은 진리가 나타나지 않을 때, 더욱이 선으로부터 파생하는 진리와 더불은 선이 나타나지 않을 때, 라고 말해진다.

활이 구름에서 보여질 때, 이는 인간이 여전히 거듭나질 수 있는 상태에 있을 때를 의미하는 것은 “구름에 있는 활”의 의미로부터 분명해진다. “구름에 있는 활”은 거듭남에 대한 표시, 또는 암시함인데, 앞에서 말했다. 구름에 있는 활을 주목해본다면, 이러하다. 인간의 품질, 또는 육체가 죽은 후 혼의 품질은 즉시 알려진다; 주님에 의해서는 이것은 영원으로부터 알려져 있다. 그리고 이것이 영원히 어떠할지도 알려져 있다. 천사들에 의해 그의 품질은 이 혼이 가까이 오는 순간 지각되어진다. 내뿜는 어떤 영역이 있다. 여기서는 자기의 본래의 모습으로부터, 또는 자기 안에 있는 모든 것으로부터 (그의 품질을) 내뿜는 영역이다; 이 영역이 말하기에 경이할 수 밖에 없는 것은, 이 영역에서 인간이 어떤 신앙을 가졌는지, 어떤 선행을 가졌는지가 지각된다는 것이다. 이 영역에서 주님이 흡족해 하실 때, 이 영역에서 (혼이 내뿜은 것이)활 같이 되어 눈에 보여진다. 이 영역에 관하여는 차후 주님의 신성한 자비로부터 설명할 것이다. 이로부터 분명해지는 바, 이 구절의 구름에서 보여질 때의 활에 의해 의미되는 것은, 인간이 거듭나질 수 있는 상태에 있을 때 이다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나와 너 사이에 있는 내 언약을 기억할 것이다. 이는 주님의 자비, 특히 거듭난 자와 거듭나질 수 있는 자에 대한 주님의 자비를 의미한다. 그 이유가 주님의 경우에서 “기억하신다”란 자비를 가지신다 이기 때문이다. 기억하심이란 표현이 주님을 서술할 수 있는 적절한 표현은 못된다. 그 이유는 영원으로부터 그분은 일반적이든, 세부적이든 모든 것들을 아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비를 가지신다는 것은 그분을 서술하는 적절한 표현이다. 그 이유는 그분은 인간의 품성이 이러한지를 아시기 때문이다. 즉 인간의 자기 자신은 지옥적이다는 것, 그것은 그 인간의 참 지옥이다는 것을 아신다는 말이다. 그 이유가 그의 의지를 수단으로 인간은 지옥과 교류한다. 그리고 인간은 지옥으로부터, 그리고 그의 자기 자신 자체로부터서는 지옥으로 던지기를 아주 많이, 아주 강하게 바라고 있다. 인간은 자신으로부터서는 이와 같은 악마이기에, 그리고 주님은 이를 아시기에, 뒤잇는 말씀은 그분께서 “언약을 기억하심”이고, 이는 인간 위에 신성을 가지심 밖에 더 다른 뜻은 없다. 그리고 신성한 수단에 의해 그를 거듭나게 하고, 권능의 힘에 의해 그를 천국으로 끌어당기신다. 그러나 이는 인간 당사자가 이 가능성에 자기 자신을 포기하고 양보하는 만큼에 비례해서 이다.

그리고 모든 육의 살아 있는 모두 각각의 혼. 이는 전체 인간 종족을 의미하는데, 이는 “모든 육의 살아 있는 혼”의 의미로부터 분명해진다. 모두 각각의 인간은 자기 안에 살아 있는 것으로부터 살아 있는 혼이라 불리운다. 만일 인간이 자기 안에 살아 있는 어떤 것을 가지지 않으면 그는 사람으로 사는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해 그가 순진의 어떤 것, 선행의 어떤 것, 그리고 자비의 어떤 것, 또는 이런 것과 비슷한 어떤 것, 그것에 필적하는 어떤 것을 가지지 않으면 살아 있는 혼이 될 수 없다는 말이다. 순진, 선행, 자비의 어떤 것을 인간은 주님으로부터 그의 유아와 어린 시절 동안 받는다. 이는 유아의 상태와 어린 시절의 상태로부터 분명해진다. 이때 인간이 받은 것은 각자 안에 보존되어진다. 보존되어 있는 것들이 말씀에서 “리메인스”라고 불러지고, 이것은 인간 안에 주님만으로부터 있다. 그런고로 보존된 것은 그가 성년이 될 때, 그 사람으로 인간되게, 인간으로 되어질 수 있게 한다.
인간이 유아 시절과 어린 아이 시절 동안 가졌던 순진, 선행, 자비가 그 당사자에게 사람일 수 있게 하는 원인이 된다는 것은 이런 사항을 살피면 분명해진다. 즉 인간은 훈련된 생활의 어떤 상태에서 태어나지지 않는다. 마치 야수들이 제각각의 생활 수단을 본능적으로 지니는 것 같지 않다는 말이다. 그러나 인간은 습득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고 이것으로 모든 것을 소유한다. 그리고 그가 배운 것을 계속 활용하여 몸에 배게 하는데, 얼마 뒤에는 배운 것이 마치 배우지 않고 자신에게 당연히 있는 듯한 정도까지에 이른다. 인간은 배울 때까지 걷지도, 말할 수도 없다. 이밖에 다른 것도 마찬가지이다. 배운 것을 사용함으로 해서 마치 자신에게 본능적으로 있기라도 한 듯 한 정도까지 이른다. 순진, 선행, 자비의 상태와 더불어서도 위와 같다. 인간은 이런 방식에서 유아때로부터 순진, 선행, 자비의 상태가 스며들게 된다. 그리고 이 상태들이 없으면, 그는 야수보다 더 천박할 것이다. 그럼에도 이 상태들은 실상 인간이 배우지 않는 상태들이고, 주님으로부터 선물로서 받는다. 그리고 이 선물을 주님은 각자 안에 보존하신다. 신앙의 진리들 역시 “리메인스”라 불리는 것들에 속하고 이것도 주님만으로부터 있다. 성년이 된 인간이 이 상태들을 소멸시키는 만큼에서, 그는 죽은 자이다. 인간이 거듭나질 때, 이 상태들은 거듭남의 시작 선상에 놓여있다. 그는 그것들 안으로 인도되어진다; 그 이유가 주님은 리메인스를 통하여 일하시기 때문이다.
모두 각각의 인간과 더불은 이러한 리메인스들이 이 구절에서 “모든 육의 살아있는 혼”이라 불리운다. “모든 육”이 모두 각각의 인간을 의미하는 것, 그런고로 전체 인간 종족을 의미하는 것은 말씀 여러 곳에 있는 “육”의 의미로부터 분명해진다. 마태복음서에서:
이 날들이 짧아지지 않으면, 어느 육도 구원되지 않을 것이다 (마. 24:22; 막 18:20).
요한복음서에서:
예수께서 말하셨다, 아버지께서 당신의 아들을 신성화 하소서, 마치 당신께서 그에게 모든 육을 다스리는 권능을 주셨듯이 (요. 17:2).
이사야서에서:
그리고 여호와의 영광이 밝히 알리실 것이다, 그리고 모든 육이 함께 그것을 볼 것이다
(이. 40:5).
그리고 다시:
그리고 모든 육이 나 여호와가 너희들의 구세주임을 알 것이다 (이. 49:26).

그리고 물들이 모든 육을 파괴하기 위해 홍수가 더 이상 되지 않을 것이다. 이는 인간의 지적 부분은 과거 태고 교회의 후손을 파멸로 유도한 것과 같은 설득력을 더 이상 옷입지 않을 것을 의미한다. 이 의미는 앞서 홍수의 물들, 멸절된 홍수 이전 사람들을 주목해서 본 대목에서 이미 살핀 바에서 분명해진다.; 즉 그들과 더불어 의지 부분, 뿐만 아니라 지적 부분도 파괴되어 지옥적이 되었다. 그런즉 그들은 거듭나질 수 없었는 바, 새로운 의지가 그들의 지적 부분에 형성되어진 것이다.

16절. 그리고 활이 구름에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것을 보고, 나는 하느님과 땅 위에 있는 모든 육의 생명 있는 혼 각각 모두 사이에 있는 영원한 언약을 기억하리라.

그리고 활이 구름에 있을 것이다. 이는 인간의 상태를 의미한다는 것, 이는 활에 관련하여 말해진 내용으로부터 분명해진다, 즉 다른 삶에서 인간, 또는 혼은 그가 있는 영역(sphere)으로부터 천사들 사이에 알려진다는 것, 이 영역은 주님이 흡족해하실 경우, 무지개 같이 색깔들에 의해 표현된다는 것, 즉 주님에 대한 신앙, 고로 신앙으로부터의 선들과 진리들에 비례해서 각 인물의 상태들에 따라 다양하게 나타난다는 것, 다른 삶에서의 색깔들은 지상에서 보여지는 색깔들의 아름다움을 측량할 수 없을 정도로 능가하는 빛남과 광휘로부터 보여지게 표출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각 색깔들은 천적이고 영적인 어떤 것을 표현한다. 이 색깔들은 천국의 빛으로부터 있고 영적인 빛의 다채로움으로부터 있다. 이는 이미 살핀 바 있다. 천사들이 사는 곳의 천국의 빛은 세상의 빛과 비교하건대, 태양의 정오 때의 빛과 촛불의 빛의 차이쯤 되고, 그나마 이런 빛은 태양의 떠오름에서 있으나마나한 정도의 빛이 되고 만다. 천국에는 천적인 빛과 영적인 빛 둘 다 있다. 이 두 빛을 비교해 말하면, 천적인 빛은 태양의 빛, 영적인 빛은 달의 빛이라 말할 수 있다. 어쨌든 이 빛은 빛을 받는 천사들의 상태에 따라 그 강도의 차이는 달라진다. 색깔들 역시 이와 같이 다양한데, 그 이유는 빛으로부터 있기 때문이다. 주님 자신이 천적 천사들에게는 태양이시고, 영적 천사들에게는 달이 되어 있으신다. 이런 사항들은 사 후 혼이 사는 것에 대한 개념을 갖지 못한 이들에게는 황당할 것이나, 이는 여전히 진리이다.

그리고 나는 그것을 볼 것이다. 이는 그가 거듭나질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누구를 “보는”것이 주님을 서술할 경우, 인간의 품질을 아는 것을 뜻함으로부터 분명해진다. 그 이유가 주님은 영원으로부터 모두를 아시기 때문에 누군가를 본다는 것 자체가 사실상 필요 없기 때문이다. 누군가가 거듭나질 수 있는 상태에 있을 때, 주님에 관하여 기록되는 표현은, 그분이 그를 “보신다”, 또는 그분의 모습을 그 사람에게 들어 올리신다 이다. 그러나 그가 거듭나질 수 없을 경우, 위 같은 표현은 없고, 그분이 그 사람으로부터 “그분의 눈을 돌리셨다”, 또는 “그분의 얼굴을 돌리셨다”라고 표현되어 기록되나, 사실상 돌아서는 것은 주님이 아니라 인간이다. (성경의 기록자 역시 인간이고 인간은 성경 기록 시대나 지금이나 자기 주의적이기에 이런 표현이 있었을 뿐 변함없는 사랑 자체이신 주님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9:14, 인류 전체가 취급되는 구절에서, 인류 안에 거듭나질 수 없는 인간이 많기에, “내”가 구름에 있는 활을 볼 때, 라고 말해지지 않고, 활이 구름에서 “보여질 때” 라고 표현되고 있다. 이를 주님에 주목해보면, “보시는 것”과 “기억하시는 것”은 동일하여 내적 의미에서 두 표현 모두 자비를 가지심을 의미한다.

나는 영원한 언약을 기억하리라. 이는 주님이 선행 안에서 그 인간과 더불어 현존하실 수 있다를 의미하는데, 이는 “언약”의 의미에 관하여 살핀 내용으로부터 분명해진다. 즉 “영원한 언약”은 주님을 사랑함과 이웃을 향한 사랑밖에 더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영원하다. 그 이유는 영원으로부터 (시작하여) 영원까지이기 때문이다. 천국 전체는 사랑에 기초를 두고 있다. 마찬가지로 전체 천국의 본성은 사랑이다; 그 이유가 이 본성 안에 있을 수 있는 것- 합일과 결합의 어떤 것- 활기를 띠고 있든 그렇지 않든 사랑으로부터 파생되지 않은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 이유가 자연적인 것은 영적인 것으로부터 존재 안으로 오고, 영적인 것은 천적인 것으로부터 존재 안으로 오기 때문이다. 이는 이미 말한 바 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 또는 사랑과 유사한 것은 일반적, 세부적 모두에서 모든 것들 안에 심어져 왔다; 인간에서만이 사랑이 없거나 그 반대의 상태에 있다. 그 이유는 인간이 (천국) 본성의 질서를 자신 안에서 파괴했기 때문이다. 어쨌든 인간이 거듭나질 수 있을 때, 또는 다시 회복되었을 때, 또는 질서의 궤도에 진입했을 때, 그래서 상호간의 사랑을 받을 때, “언약”이, 또는 선행을 수단으로 결합함이 있다. 이것이 이 대목에서 취급되었다.

하느님과 땅 위에 있는 모든 육의 살아 있는 모두 각각의 혼 사이에 이는 이것이 가능할 수 있는 모두 각각의 인간과 더불어가 의미되는데, 이는 이미 말해진 것으로부터 분명해진다. 즉 여기서 취급된 주제는 거듭나질 수 있는 인간이라는 것이다. 이외 다른 사람은 “모든 육의 살아 있는 모두 각각의 혼”일 수 없기 때문이다.

17절. 그리고 하느님께서 노아에게 말하셨다, 이것은 내가 나와 땅 위에 있는 모든 육(flesh) 사이에 세워진 언약의 표시이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노아에게 말하셨다. 이것이 교회는 이를 알아야 한다를 의미하는데, 이는 취급된 시리즈의 것들로부터 분명해진다. 이는 내적 의미로부터가 아니면 나타나지 않고, 내적 의미 안에서 시리즈의 연결로부터 이다: 첫째, 교회에 있는 거듭난 영적 인간이 취급된다는 것; 둘째, 모두 각각의 인간이 보편적으로 취급된다는 것; 셋째, 거듭나질 수 있는 모두 각각의 인간; 그리고 결말인 즉, 교회는 이것을 알아야 한다 이다. “노아”는 앞서 보여진 교회, 실로 일반적 측면에서 영적(평면의) 교회이다. 그 이유가 노아에게만 말하듯 이 구절이 표현되어 있기 때문이다. 교회가 알아야 하는 것이 뒤를 이어 있다.

이것은 내가 나와 땅 위에 있는 모든 육 사이에 세워진 언약이다. 이는 선행 안에서 주님이 현존하심에 대한 암시는 교회 내의 사람 뿐만 아니라 교회 밖의 사람에게도 있었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는 “모든 육”의 의미가 모두 각각의 사람, 그 결과 전체 인간 종족임으로부터 분명해진다. 전체 인간 종족은 교회 내와 교회 밖 둘 다를 뜻하는 것은 “모든 육”이라고 말해진 것, 뿐만 아니라, 16절의 “모든 육의 살아있는 모두 각각의 혼”이라고 말해지지 않고, 더 명백하게 “땅 위에 있는”의 표현을 추가한 대목으로부터 분명해진다. 교회 밖에 있는 이들, 이방인들이라 불리는 이들과 더불어서도 주님은 교회 내에 있는 이들과 마찬가지로 선행 안에 동등하게 현존하신다. 어쩌면 주님은 이방인들과 더 현존하실지 모른다. 그 이유가 이방인들이 어떤 측면에서는 기독교인들보다 지적 부분의 구름이 상대적으로 덜 두꺼울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이방인들은 말씀에 무지하다, 그들은 주님이 누구신지 모른다, 결과적으로 신앙의 진리가 무엇인지 모른다; 그러므로 그들은 주님에 맞서 있을 수 없고, (그들의 지적 부분은) 신앙의 진리에 반대된 상태일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의 “구름”은 주님에, 신앙의 진리에 맞서 있지 않는 바, 이 구름은 그들이 계발될 때 어렵지 않게 흩트러진다. 이에 비해 기독인의 구름은 주님에, 신앙의 진리에 맞서 있는 구름인 바, 아주 밀도가 높아 어둡고, 따라서 흩트러짐도 쉽지 않다. 어쨌든 선행 대신에 증오가 자리잡았을 때, 두꺼운 구름층이 되고 만다. 한층 더 두꺼운 구름층은 신앙의 진리를 모독할 경우이다. 이방인들의 경우 이를 할 수 없는데 그 이유는 그들이 신앙의 진리에 무지하기 때문이다. 당사자가 본성, 또는 존재 여부를 모를 경우, 누구도 모독할 수 없다. 이런 이유로 기독인들보다 이방인들이 더 많이 구원된다. 주님의 말씀도 참조하기 바란다 (눅. 13:23, 28-30). 이어서 주님의 왕국에 속하는 모든 어린 아이들에 관한 구절도 더 읽기 바란다 (마. 18:10, 14; 19:14; 눅. 18:16).

18절. 그리고 방주에서 나온 노아의 아들들은 셈, 그리고 함, 그리고 야벳이었다. 그리고 함은 가나안의 조상이다.

방주에서 나온 노아의 아들들. 이는 고대 교회를 구성한 이들이 의미된다는 것, “방주로부터 나간” 이들은 거듭나는 이들을 의미하는 것은 이 뒤를 잇는 모든 사항으로부터 분명해진다; 이로부터 이 경우가 어떠한지 분명해질 것이다.

“셈”은 내적 교회를, “함”은 부패된 교회를, “야벳”은 외적 교회를 의미한다는 것은 이어지는 것들, 즉 그들의 품질이 묘사되는 곳으로부터 분명해진다. 모든 교회에서와 같이 고대 교회에서도 내적이었던 인간들, 내적이었고 부패되었던 인간들, 외적 이었던 인간들이 있었다. 내적인 이들은 선행을 신앙의 제 1로 만드는 이들이다; 내적이고 부패된 이들은 선행 없는 신앙을 자기들 신앙의 제 1로 만드는 자들이다; 그리고 외적인 이들은 내적 인간에 관하여 생각함이 거의 없는 이들, 그러나 선행의 일을 수행하고, 교회의 의식들을 신성시하여 준수하는 이들이다. 영적 교회라 불리는 이들에게 이외 다른 종류는 없다; 그리고 그들이 교회의 모든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그들은 “방주로부터 나갔다”고 말해진다. 고대 교회에서 내적 인간들이었던 이들은, 즉 선행을 자기들 신앙의 제 1 순위에 두었던 이들이 “셈”이라 불리운다; 내적이고 부패된 이들, 선행 없는 신앙을 제 1로 만든 이들은 “함”이라 불리운다; 외적이었고 내적인 것은 거의 생각하지 않고, 그러나 선행의 일을 수행하며 교회 의식들을 신성시하여 준수하는 이들이 “야벳”이라 불리운다. 각 본성은 이어지는 세부 사항들로부터 보여질 것이다.

그리고 함은 가나안의 조상이다. 이는 부패된 교회로부터 내적인 것들 없는 외적인 것들에 있는 예배가 튀어나왔음을 의미하는데, 이 예배가 가나안에 의해 의미된다. 이것 역시 이어지는 구절로부터 분명해진다; 그 이유가 이 절에 포함된 것들은 이어지는 구절들에 대한 전체로서 말해지기 때문이다. “함”이 부패된 교회를, 즉 선행으로부터 분리된 신앙을 자기들 신앙의 제 1 순위로 만드는 이들을 의미하는 것은 다윗서로부터 분명해진다;
그분은 이집트의 첫 출생, 함의 천막들에서, 힘의 시작을 치셨다 (시. 78:51).
“이집트의 첫 출생”에 의해 선행 없는 신앙이 표현되어졌다. 그리고 첫 출생이기 때문에 신앙이 “힘의 시작”이라 불리는 것은 창. 49:3에서 알런지 모른다. 여기서 르우벤에 대해 말해진 내용에서 그는 야곱의 첫 출생이었기 때문에 신앙을 표현했다. 그리고 “힘의 시작”이라 불린다. “함의 천막들”은 거기로부터 있는 예배이다. 이 사실에서 이집트는 “함의 토지”라 불리운다 (시. 105:23, 27; 106:22). 고대 교회에서 “함”이라 불려진 이들은, 그들이 모든 탐욕들의 삶을 살았고, 자기들이 어떻게 살았든 구원받아질 수 있다고 떠벌였는 바, 고대의 사람들에게 검게 나타났다. 검은 이유는 그들이 지닌 탐욕의 열로부터이고, 이로부터 “함”이라 불리운다. 함이 “가나안의 조상”이라 불리는데, 그 이유는 이런 종류의 사람들은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는 도통 관심이 없고, 단지 신성시한 의식들을 자주 제공하면 된다고 했던 자들이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그들은 여전히 어떤 예배를 바라기 때문이다. 그러나 외적 예배는 그들을 위한 유일한 예배이다; 오로지 선행에 속하는 내적 예배를 그들은 거절한다. 그렇기 때문에 함은 “가나안의 조상”이라고 말해진다.

19절. 이 세 명이 노아의 아들들이었다. 그리고 이들로부터 온 땅이 그득 찼다.

이 세 명이 노아의 아들들이었다. 이들이 교리들의 세 종류들, 일반적으로 교회들 속에 있는 세 종류의 교리들을 의미하는 것은 방금 전에 보여주었다. 실로 덜 보편적인 교리의 종류는 셀 수 없이 많으나, 보편적인 종류는 이 세 종류의 범주에 있다. 선행과 신앙을 인정하지 않는 이들, 외적 예배조차 인정하지 않는 이들은 교회로부터 있지 않는 이들이다. 그들은 여기서 취급되지 않는다, 그 이유는 취급되는 것이 교회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들로부터 온 땅이 가득 찼다. 이는 그들로부터 참되든, 거짓되든 모든 교리들이 갈라져나갔음을 의미하는데, 이는 “땅”의 의미로부터 분명해진다. “땅”, 또는 “토지”, 말씀에서, 다양한 의미들을 가지고 사용되어진다. 보편적 의미에서, 이는 교회가 존재하는 장소, 지역, 또는 교회가 있었던 곳, 마치 가나안의 토지, 유다의 토지, 이스라엘의 토지 등을 표시한다. 그런고로 이것은 교회에 속해있는 모든 이들도 표시한다. 그 이유가 토지는 그 안에 있는 사람도 서술하는데, 우리 역시 일상 언어에서 이런 식의 표현은 자주 있는 편이다. 그러므로 고대 시대에서 사람들이 “온 땅”이라 이야기할 때, 그들은 온 지구를 뜻하지 않았고, 교회가 있었던 토지만을 뜻했을 뿐이다, 그런고로 교회 자체를 뜻하기도 했다; 이는 아래 인용한 말씀으로부터 분명해진다. 이사야서에서:
잘 보라, 여호와께서 땅을 텅비게 만드신다; 땅은 지독하게 텅비어질 것이다; 땅은 슬퍼할 것이고 혼동스러워질 것이다; 땅은 역시 거기로부터의 거주민들 아래 오염될 것이다; 그러 므로 저주가 땅을 삼킬 것이다; 그러므로 땅의 거주민들은 태워질 것이다, 인간은 유약해져 남을 것이다. 높은 데로부터의 큰 폭포가 열려지고, 땅의 원천들이 흔들린다; 땅은 깡그리 부셔진다; 땅은 깨끗이 녹여져 있다; 땅은 극도로 움직여진다; 비틀거리는 땅은 술취한 자 같이 비틀거릴 것이다, 그리고 오두막집 같이 이리저리 움직여질 것이다. 그리고 거기로부 터의 위법은 그것 위에 무거울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추락하고, 다시 일어나지 못할 것이 다 (이. 24:1-3, 3-6, 18-20).
위 구절에서 “땅”은 그것 안에 있는 사람들을 표시한다, 사실상 교회 사람들, 고로 교회 자체, 그리고 황폐된 교회를 표시한다. 그리고 교회가 황폐된 상태일 때, 그것들은 “텅 비었다”, “극도로 움직였다”, “술꾼 같이 비틀거린다”, “이리저리 움직인다”, 그리고 “추락하고, 다시 일어나지 못한다” 라고 말해진다.
“땅”, 또는 “토지”에 의해 인간이 의미되는 것, 그 결과 인간으로부터 있는 교회도 의미하는 것은 말라기서에서 볼 수 있을 것이다:
모든 민족들이 너더러 행복하다 말할 것이다;
그 이유는 너는 매우 유쾌한 토지이기 때문이다 (말. 3:12).
“땅”이 교회를 표시하는 것은 이사야서에서 보여진다:
너희는 땅의 기초들을 이해 못하느냐? (이. 40:21),
위에서 “땅의 기초들”은 교회의 기초들을 표시한다. 다시:
잘 보라, 나는 새 하늘들과 새 땅을 창조한다 (이. 65:17; 66:22; 계. 22:1).
위의 “새 하늘과 새 땅”은 주님의 왕국과 교회를 표시한다. 스가랴서에서:
여호와, 하늘들을 펼치시고, 땅의 기초를 놓으신 분,
그리고 그분과 더불어 인간의 영을 만들어내신 분 (슥. 12:1),
위는 교회를 뜻하고 있다. 또한 창세기서에서:
시작에서 하느님께서는 하늘들과 땅을 창조하셨다 (1:1).
그리고 하늘들과 땅이 마무리되어졌다 (2:1).
하늘들과 땅의 태생들이 이러하다 (2:4),
위 세 구절의 땅, 각각은 교회를 표시하고, 이것이 창조되었고, 형성되었고, 만들어진 것이다. 요엘서에서:
땅이 그분 앞에서 흔들렸다, 하늘들이 떨었다, 태양과 달이 어두워졌다 (욜. 2:10),
위는 교회와 교회에 있는 것들을 뜻한다; 이것들이 황폐해질 때, “하늘과 땅”이 흔들린다고, “태양과 달”이 어두워진다고, 즉 사랑과 신앙이 (식어진다고) 말해진다.
예레미야서에서:
나는 땅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보라 공허하고 텅빔을;
그리고 하늘들, 그리고 그것들은 빛을 가지고 있지 않다 (예. 4:23).
여기서 “땅”은 교회의 어떤 것이 있지 않은 인간을 명백하게 표시한다. 다시:
온 땅이 삭막해질 것이다; 여전히 나는 깡그리 살라지게 만들지는 않을 것이다;
그 이유는 땅이 슬퍼하고, 위의 하늘들이 검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예. 4:27, 28).
위에서도 역시 교회가 뜻해진다, 교회의 외면들이 “땅”이고, 내면들이 “하늘들”이다, 이에 관해 말해지는 바, 그것들이 그것들 안에 빛이 없어 검어질 것이다, 이는 교회 안에 선의 지혜와 진리의 총명이 더 이상 없기 때문이다. 그때 땅 역시 공허하고 텅빔이다; 그리고 교회이어야 할 교회의 인간도 마찬가지 방식이다. 다른 구절에서 “온 땅”이 교회만을 뜻하는 것을 다니엘서에서 보여질지 모른다:
넷째 짐승이 땅 위 넷째 왕국일 것이다. 이 왕국은 모든 왕국들과 다르게 있어,
온 땅을 삼킬 것이고, 밟아뭉개고, 조각낼 것이다 (단. 7:23);
“온 땅”은 교회와 교회 속에 있는 것을 표시한다; 그 이유가 말씀은 여느 모독된 저술같이 군주적 왕국들을 취급하지 않고, 거룩한 것들과 교회의 상태들을 취급하는 바, 이것이 여기서 “땅의 왕국들”에 의해 의미된다.
예레미야서에서:
큰 비바람이 땅의 맨끝 부분으로부터 일어날 것이다; 그리고 그 날에
여호와의 죽이심이 땅의 이쪽 끝으로부터 땅의 다른 쪽까지 있을 것이다 (예. 25:32, 33);
위에서 “땅의 이쪽 끝으로부터 땅의 다른 쪽까지”는 교회와 교회 속에 있는 모든 것을 뜻한다. 이사야서에서:
온 땅이 쉼에 있고 조용하다; 그들에게서 노래가 터져나온다 (이. 14:7),
위에서 “온 땅”은 교회를 표시한다. 에스겔서에서:
온 땅이 기뻐환호할 때(겔. 35:14),
위에서 “온 땅”은 교회를 표시한다. 이사야서에서:
나는 노아의 물들이 땅을 너머 더 이상 가지 않도록 맹세했었다 (이. 54:9),
위에서 “땅”은 교회를 표시한다, 그 이유는 거기서 교회가 다루어지기 때문이다.
말씀에서 “땅”, 또는 “토지”가 교회를 의미하기 때문에 교회이지 않은 것도 의미한다. 그 이유는 모든 단어들이 반대되는 뜻도 상황에 따라 뜻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이방인들의 여러 다양한 토지들의 경우; 일반적으로 이 토지는 가나안의 바깥쪽이다. 그러므로 해서 이 토지는 사람들을 지칭하기 위해 사용될 경우, 이는 교회 바깥쪽 사람들, 따라서 외적 인간, 외적 인간의 의지, 즉 인간의 자기 자신, 등을 의미한다. 온 인간 종족이 교회에서이든, 아니든 그들의 상태에 주목하는 것을 제외하면, 온 세계라는 말은 말씀에서 거의 사용되지 않는다. 땅은 지면을 포함하고, 지면은 들판을 포함하는 바, “땅”은 지면, 들판 등등을 다 포함하는 셈이어서 의미 또한 다양하고 많은 것들을 내포한다; 따라서 땅이 갖는 의미는 그 대목의 주제에 관련해서 판단되어진다. 이리하여 분명해지는 것, 노아의 아들들에 의해 가득 찼다는 “온 땅”은 온 세계, 세상, 또는 온 인간 종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교회들 속에 있었던 참되든, 거짓되든, 이 모든 교리들을 의미한다는 말이다.

20절. 그리고 노아는 지면(ground)의 사람이 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는 포도원을 설치했다.

그리고 노아는 지면의 사람이 되기를 시작했다. 이는 일반적으로 인간은 신앙의 교리적인 것들로부터 가르쳐짐을 의미한다 인데, 이는 “지면”의 의미가 교회의 사람, 또는 교회임으로부터 분명해진다. 교회가 “지면”이라 불리우는데, 그 이유는 교회가 신앙의 씨, 또는 신앙의 진리들과 선들을 받기 때문이다. “지면”은 “땅”으로부터 구별되어진다. 물론 땅도 교회 역시 의미한다. 그러나 그 다른 점은 신앙과 선행의 차이와 같다. 이는 선행이 신앙을 담고 있는 그릇이듯, 땅은 지면을 담고 있는 그릇의 관계이다. 그러므로 교회가 일반적으로 취급될 때, 이 교회는 “땅”이라 불리우고, 교회가 특별하게 취급될 경우, 이 구절 같은 경우, “지면”이라 불리운다. 그 이유가 일반적이다함은 파생되는 모든 것의 복합체라 말해야하기 때문이다. 고대 교회의 사람에 의해 소유된 교리물들은 태고 교회의 계시들과 지각물로부터 였고, 이것이 보존되어졌던 것이다. 이는 이미 살핀바 있다; 이것 안에서 그들은 신앙을 가졌는데, 오늘날 우리가 말씀을 가지고 신앙을 가진 것과 동일하다. 그들에게 이 교리적인 것들은 그들의 말씀이었다. 노아가 “지면의 사람” 되기를 시작함이란 인간이 신앙의 교리물들에서 가르쳐짐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는 포도원을 설치했다. 이것이 거기로부터의 교회, 포도원은 영적 (평면의) 교회이다는 것은 “포도원”의 의미로부터 분명해진다. 말씀에서 교회들이 “동산들”로, “동산의 나무들”로도 묘사되는 일은 자주 있다. 아예 그렇게 명명하는 경우까지도 있다. 이것은 사랑과 선행에 속하는 그것들의 열매들로부터 이다; 그러므로 해서 인간은 “그의 열매를 수단으로 알아진다”라고 성경에서 일컫고 있다. 교회들을 “동산들”, “나무들”, 그리고 “열매들”에 비교하는 것은 천국에서 있는 표현들로부터 유래된다. 거기서 표현할 수 없는 아름다운 동산들이 신앙의 영역에 일치하여 때로 시야에 표출되어진다. 이런 근원으로부터 천적 (평면의) 교회는 갖가지 종류의 나무들이 있는 낙원의 동산으로 묘사되고 있다; 그리고 이 동산의 “나무들”에 의해서는 이 교회의 지각함들이 의미되었다. 그리고 “열매들”에 의해서는 모두 각각의 종류의 사랑의 선들이 의미되었다. 그러나 고대 교회, 영적 (평면의) 교회는 “포도원”에 의해 묘사되었다. 그것의 열매들인 포도들은 선행의 일들을 표현하고 의미하였다.
이는 말씀의 많은 구절들로부터 분명해진다. 이사야서에서:
나는 내 사랑하는 자에게 그의 포도원을 어루만지는 내 사랑하는 자의 노래를 부를 것이 다; 내 사랑하는 자는 기름의 아들의 뿔에 포도원을 세웠다; 그리고 그는 그것 둘레에 울 타리를 만들었다. 그리고 그것을 돌들로 울타리를 했다, 그리고 가장 우량한 포도나무로 포 도원을 설치했다. 그리고 그것 한 가운데에 망대를 지었다, 또한 그 안에 포도즙틀을 설치 했다; 그리고 그는 포도들이 산출할 것이라고 바라보았다, 그리고 이 포도원은 들포도들을 산출했다; 그리고 지금, 오 예루살렘의 주민들과 유다의 사람들아, 나는 나와 내 포도원 사 이를 판결하기를 바란다; 만군의 여호와의 포도원이 이스라엘의 가문들이다
(이. 5:1-3, 7).
위에서 “포도원”은 고대 교회, 고로 영적 (평면의) 교회를 의미한다, 그리고 이것이 이스라엘의 가문이다고 명백하게 말해지고 있다; 그 이유가 말씀에서 “이스라엘”은 영적 (평면의) 교회를, “유다”에 의해서는 천적 (평면의) 교회가 의미되기 때문이다. 예레미야서에서:
다시 나는 너를 건설할 것이다, 그리고 너는 건설될 것이다, 오 이스라엘의 처녀여: 다시 너는 소고를 치고, 즐거움을 만드는 그들의 춤에서 나아갈 것이다; 다시 너는 사마리아 의 산들 위에 포도원을 창설할 것이다 (예. 31:4, 5),
위에서 “포도원들”은 영적 (평면의) 교회를 표시한다; 그리고 주제가 이스라엘인 바, 이를 수단으로 영적 교회가 의미되어진다.
에스겔서에서:
내가 사람들로부터 이스라엘의 가문을 그러모았을 때, 그들은 확신하여 토지에서 거주할 것이고, 집을 건축할 것이고, 포도원들을 세울 것이다 (겔. 28:25, 26).
위에서 “포도원”은 영적 교회, 또는 “이스라엘”이다; 그리고 “포도원을 세우는 것”은 신앙의 진리들과 선들로 가르쳐짐이다. 아모스서에서:
나는 시들어짐과 흰가루병으로 너희를 칠 것이다; 네 동산들의 많은 것과 네 포도원들과 네 무화과 나무들과 네 올리브나무들을 과수 해충이 삼킬 것이다; 이렇게 나는 네게 행할 것이다 (암. 4:9, 12).
위에서 “동산들”은 교회 속의 것들을 표시한다. “포도원들”은 교회의 영적인 것들을, “무화과 나무들”는 교회의 자연적인 것들을, “올리브나무들”은 교회의 천적인 것들을 표시한다; 그런고로 “포도원들”은 영적 교회, 또는 이스라엘 속의 것들을 표시한다. 다시 아모스서에서:
나는 포로된 내 백성 이스라엘을 다시 데려올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황폐된 성들을 건설 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거주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포도원들을 세울 것이다, 그리고 거기로부터 포도주를 마실 것이다; 그들은 동산 역시 만들 것이다, 그리고 그것들로부터의 열매를 먹을 것이다 (암. 9:14).
“포도원을 세우는 것”은 영적 교회를 세우는 것을 표시한다. 고로 “포도원”은 영적 교회, 또는 이스라엘을 뜻한다.
“포도원”이 영적 교회를 의미하듯, “포도나무” 또한 그렇다; 그 이유가 포도나무는 포도원의 일부분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것들은 교회와 교회 속의 사람도 의미한다. 이를 예레미야서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스라엘이 종이냐? 만일 그가 집안에서 태어났다면, 어째서 먹잇감이 되었느냐? 나는 너 를 진리의 씨, 완전히 훌륭한 포도나무로 심었다; 어찌하여 너는 나에게 이상한 포도나무의 뒤틀린 가지들로 변하였느냐? (예. 3:14, 21),
위에서 “포도나무”는 영적 교회를, 또는 이스라엘을 표시한다. 에스겔서에서:
너는 이스라엘의 제 1인자들을 위하여 애곡을 하여라; 네 어머니는 물가에 심어진 이유로 잎이 무성하고 열매가 많이 열리는 포도나무 같은 네 모습이었다 (겔. 19:1, 10).
“포도나무”는 고대의 영적 교회를 표시한다, 이것이 “어머니”이다; 고로 “이스라엘”이 “네 모습에서” 라고 말해진다. 호세아서에서:
이스라엘은 텅빈 포도나무이다, 이것은 자신을 닮은 열매를 내놓는다 (호. 10:1).
“포도나무”는 영적 교회, 또는 이스라엘을 표시한다. 그런데, 위 구절의 경우, 황폐해졌다. 다시:
오 이스라엘아, 네 하느님 여호와에게 돌아오라; 나는 이스라엘에게 이슬로서 있을 것이다; 그의 그림자 안에 거주하는 그들이 돌아올 것이다; 그들은 곡식을 되살릴 것이다, 그리고 포도나무로서 꽃피울 것이다; 그를 기억함은 레바논의 포도주로서 있을 것이다
(호. 14:1, 5, 7),
위에서 “포도나무”는 영적 교회, 또는 “이스라엘”을 표시한다. 모세의 책에서:
실로가 오시기까지; 그의 어린 나귀가 포도나무에 매여 있고, 그리고 그의 나귀의 새끼는 아름진 포도나무에 매여 있다 (창. 49:10, 11).
이는 주님에 관한 예언이다; “포도나무”와 “아름진 포도나무”는 영적 교회를 표시한다.
포도원의 일꾼들이라는 주님의 비유에서도 마찬가지로 영적 교회들이 의미되었다 (마. 20:1-16; 21:33-44; 막. 12:1-12; 눅. 20:9-16). “포도나무”가 영적 교회를 의미하고, 영적 교회의 제 1의 것이 선행이고, 그 안에 주님은 현존하신다, 그리고 선행을 수단으로 그분은 자신과 인간을 결합하시고, 그리고 그분 자신만이 모든 선을 작업하신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자신을 포도나무에 비교하시고, 교회의 인간, 또는 영적 교회를 묘사하신다, 이 말씀을 읽어보자, 요한복음서에서:
나는 진정한 포도나무이다, 그리고 나의 아버지는 농부이시다; 열매를 맺지 않는 내 안에 있는 모든 가지를 그분은 가져가신다; 그리고 열매를 맺는 모두 각각의 [가지], 그분은 그 것을 깨끗이 하신다, 그러면 그것은 더 많은 열매를 산출한다; 내 안에 머무르라, 그리고 나는 너희 안에; 가지가 포도나무에 머무르지 않으면, 그 자신으로부터 열매를 맺을 수 없 듯, 너희가 내 안에 머무르지 않으면 너희는 더 이상 (열매를 맺지 못한다); 나는 포도나무 이다, 너희는 가지들[이다]; 내 안에 머무르는 자, 그리고 내가 그 사람 안에 머무르는 자, 동일한 사람은 많은 열매를 산출한다; 그 이유가 나 없는 너희는 아무 것도 할 수 없기 때 문이다; 이것이 나의 명령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했듯,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요. 15:1-5, 12);
위 말씀으로부터 영적 교회가 무엇인지는 분명해진다.

21절. 그리고 그는 포도주를 마셨고 술취했다; 그리고 그는 그의 천막 한 가운데에서 덮혀있지 않은 채 있었다.

그리고 그는 포도주를 마셨다. 이는 그가 신앙 속의 것을 조사하고 싶었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는 “포도주”의 의미로부터 분명해진다. “포도원”, 또는 “포도나무”, 이미 살핀 바대로 영적 교회, 또는 영적 교회인 이다; “포도”, “포도송이”는 포도나무의 열매이다. 이는 선행, 또는 선행으로부터 있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포도주”는 선행으로부터 파생된 신앙을 의미한다. 그리고 신앙에 속하는 모든 것들도 의미한다. 그런고로 “포도”는 이 교회의 천적 측면이고, “포도주”는 이 교회의 영적 측면이다. 천적 측면은 의지력으로부터 이고, 영적 측면은 이해력으로부터 이다. 그가 “포도주를 마심”은 그가 신앙에 관한 것을 조사하고 싶었다는 것, 이 조사는 추론들을 수단으로 하였음이 그가 술취함, 즉 오류들에 빠짐으로부터 분명해진다. 그 이유가 이 교회의 사람은 태고 교회인들 같은 지각을 가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선하고 참된 것을 신앙의 교리적인 것들로부터 배워야만 했다. 이 교리적인 것들은 태고 교회의 지각으로부터 수집되고 보존된 신앙에 관한 것들, 한마디로 고대 교회의 말씀이다. 말씀 같이 신앙의 교리적인 것들도 지각 없이는 믿어질 수 없는 많은 경우들이 있었다; 그 이유가 영적인 것들과 천적인 것들은 인간의 납득력을 무한하게 넘어 있기 때문이다. 이러므로 추론이 발생한다. 그러나 자신이 그것들을 납득할 때까지 믿지 않는 자는 결코 믿어질 수 없다.
말씀에서 “포도들”은 선행과 선행으로부터 있는 것을 의미하는 것, 그리고 “포도주”는 선행으로부터 파생된 신앙, 그리고 그 신앙에 속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래 인용 구절로부터 분명해진다. 이사야서에서:
내 사랑하는 자는 기름의 아들의 뿔에 포도원을 가졌다, 그리고 그는 그것이 포도들을 산 출할 것이다고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것은 들포도를 산출했다 (이. 5:1, 2, 4),
위에서 “포도들”은 선행과 그것의 열매들을 표시한다. 예레미야서에서:
내가 정녕 그것들을 그러모을 것이다; 포도나무에 포도가 없다,
무화과 나무에 무화과가 없다 (예. 8:13),
위에서 “포도나무”는 영적 교회를; “포도들”은 선행을 표시한다. 호세아서에서:
나는 이스라엘이 광야에 있는 포도들 같음을 발견하였다; 나는 네 조상을 시작에서 무화과 나무에 있는 첫 익은 것으로 보았다 (호. 9:10).
“이스라엘”은 고대 교회를 표시한다; “포도들”은 고대 교회가 선행을 옷입었음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야곱의 아들들을 표시할 때 이 의미는 반대적이다. 미가서에서:
먹을 포도송이가 없다; 내 혼은 첫 익은 무화과를 바란다. 거룩한 사람은 땅으로부터 멸절 되어졌다, 그리고 인간들 사이에 직바른 자는 아무도 없다 (미. 7:1).
“포도송이”는 선행, 또는 거룩한 것을 표시한다; “첫 익은 무화과”는 신앙, 또는 올바른 것을 표시한다.
이사야서에서:
그런고로 여호와께서 말하신다, 포도송이에서 새로운 포도주가 발견되는 바, 누가 말한다, 그것을 파괴하지 말라, 그것 안에 복됨이 있다 (이. 65:8);
위에서 “포도송이”는 선행을 표시한다, 그리고 “새로운 포도주”는 선행의 선들과 이 선에서 파생된 진리들을 표시한다. 모세의 책에서:
그분은 그분의 의복을 포도주에서 빠셨다.
그분의 속옷을 포도들의 피에서 빠셨다 (창. 49:11);
이는 주님에 관련된 예언이다. “포도주”는 천적인 것으로부터의 영적인 것을 표시한다. “포도들의 피”는 영적인 교회들에 관련이 있는 천적인 것을 표시한다. 그런고로 “포도들”은 선행 자체, “포도주”는 신앙 자체를 표시한다. 계시록서에서:
천사가 말했다, 그대의 날카로운 낫을 보내라. 그리고 땅의 포도나무의 포도송이들을
그러모으라; 그 이유가 그녀의 포도들이 충분하게 익기 때문이다 (계. 14:8).
위 구절의 주제는 신앙이 없는 때, 즉 선행이 없는 때인 마지막 때이다; 그 이유가 신앙은 선행 외에 다른 것은 아니기 때문, 실체적으로는 선행 자체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어떤 신앙도 더 이상 없다고 말해지면, 이는 선행이 없다가 뜻해진다.
“포도들”이 선행을 의미하듯, “포도주” 역시 선행에서 파생된 신앙을 의미한다. 그 이유가 포도주는 포도로부터 있기 때문이다. 이는 이미 포도원과 포도나무에 관하여 인용한 구절들에서 분명해진다. 또한 아래 구절을 더 보자. 이사야서에서:
즐거움이, 갈멜로부터의 환희가 거두어 가버렸다; 그리고 포도원들에서 노래함이 있지 않을 것이다, 기뻐 떠듬도 있지 않을 것이다; 포도주틀에서 포도주를 밟는 자도 없다;
내가 포도수확의 외침을 그치게 만들었다 (이. 16:10),
“갈멜”인 영적 교회가 황폐해짐을 뜻하고 있다; “포도즙틀에서 포도주를 밟지 않는 것”은 신앙 안에 있는 자가 더 이상 있지 않음을 뜻한다. 다시:
땅의 주민들이 태워졌다, 그리고 사람은 유약하게 남을 것이다; 새로운 포도주가 슬퍼할 것 이다, 포도나무가 시들어질 것이다; 그들이 노래와 더불어 포도주를 마시지 못할 것이다; 독주가 그것을 마시는 그들에게 쓸 것이다; 포도주 때문에 거리들에서 울음이 있을 것이다 (이. 24:6-7, 9, 11).
위 주제는 황폐된 교회이다, 그리고 “포도주”는 신앙의 진리들을 표시한다. 그것을 무익하게 붙잡고 있다. 예레미야애가서에서:
그들이 자기들의 어머니에게 말할 것이다. 곡식과 포도주는 어디 있습니까? 이는 그들이 도성의 거리들에서 부상당한 자되어 혼미해질 때이다 (애. 2:12).
“곡식과 포도주가 어디있습니까?”란 사랑과 신앙이 어디있습니까? 를 의미한다; “도성의 거리들에서”는 진리들을 뜻한다; “그것들 안에서 부상당해짐”은 신앙의 진리들이 무엇인지 모름을 의미한다.
아모스서에서:
나는 포로된 내 백성 이스라엘을 다시 데려올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황폐된 도성들을 건 설하여 그것들에서 거주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포도원들을 세울 것이다,
그리고 거기로부터 포도주를 마실 것이다 (암. 9:14).
위 구절은 영적 교회, 또는 이스라엘을 두고 말함인데, 이 교회가 포도원을 창설하고, 거기로부터 포도주를 마심인데, 이는 선행으로부터 신앙을 가짐 같이 되어갈 때를 서술한다. 스바냐서에서:
그들은 집들을 지을 것이나, 그것들에서 거주 못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포도원들을 가꿀 것이나 거기로부터 포도주를 마시지 못할 것이다 (습. 1:13, 암. 5:11).
위 구절은 반대적 상황이 묘사되고 있다. 이는 영적 교회가 황폐될 때이다. 스가랴서에서:
그들은 힘센 에브라임 같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심정은 포도주를 통하여 기뻐 환 호할 것이다; 그렇다, 그들의 아들들이 그것을 보고 즐거워 하리라 (슥. 10:7);
위는 유다의 가문을 두고 말해진다, 이는 신앙의 선들과 진리들로부터 그렇게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계시록서에서:
그들은 기름과 포도주를 다치게 말아야 한다는 것 (계. 6:6),
천적인 것과 영적인 것을 다치게 해서는 안된다는 것, 또는 사랑과 신앙에 속하는 것에 상처입히는 행동은 있어져서는 안된다는 것을 뜻한다.
“포도주”가 주님에 대한 신앙을 의미하기에, 유대 교회에서 신앙은 포도주를 제물로 바침으로 표현되었다 (민. 15:2-15; 28:11-15, 18-끝 절까지; 레. 23:12, 13; 출. 29:40). 그러므로 호세아서에서:
타작마당과 포도즙틀이 그들을 먹이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새로운 포도주가 거기에서 속 일 것이다; 그들은 여호와의 토지에서 거주 못할 것이다; 그러나 에브리임은 이집트로 되돌 아 갈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아시리아에서 불결한 것을 먹을 것이다; 그들은 여호와께 포 도주를 붓지 못할 것이다, [그들의 헌주가] 그분을 흡족하게 못할 것이다 (호. 9:2-4).
위 대목의 주제는 이스라엘, 또는 영적 교회이다. 그리고 이 교회 안에 있는 이들이 지식들과 추론들을 수단으로 신앙의 거룩하고 참된 것을 조사하려들므로 해서 뒤집고 더럽혔다를 뜻한다. “이집트”는 사실에 입각한 지식(기억 속의 지식), “아시리아”는 궤변(비틀어 추론함)을, “에브라임”은 비틀어 추론하는 이들이다.

그리고 술취했다. 이는 그것에 의해서 오류들에 빠졌음을 의미한다는 것은 말씀에서 “술취함”의 의미로부터 분명해진다. 자기들이 납득한 것 외에는 믿지 않는 자가 술취한 자라 불리운다. 그리고 그는 납득하기 위해 그의 이성이 신앙의 비밀들을 수색한다. 그리고 이 수색을 위해 이성은 기억으로부터 이든, 철학이든, 감각적인 것들로부터 행해지기 때문에, 인간은 그것 때문에 오류들 안으로 빠질 수 밖에 없다. 그 이유가 인간의 사고는 단지 지상적, 육체적, 물질적이고, 이로부터 있는 바, 그것에로 꾸준히 기울려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간의 사고 속의 관념들 역시 이것들에 기초를 두고, 종결된다. 이런 것들로부터 신성한 것들에 관하여 생각하고 추론하는 것은 오류들과 곡해함 안으로 그의 자기 자신을 가져다 놓는다; 이런 방법에서 신앙을 포획하는 것은 낙타가 바늘 귀를 통과하는 것과 같다. 이 근원으로부터 있는 오류와 광기가 말씀에서 “술취함”이라 불리운다. 실로 다른 삶에서 신앙의 진리들을 추론하거나 신앙의 진리에 맞서 따지는 혼들, 또는 영들은 주정꾼이 되어 그들같이 행동한다; 이들에 관한 것은 차후 주님의 신성한 자비로부터 더 말하겠다.
영들은 그들 서로로부터 선행의 선 안에 있는지, 아닌지에 관하여 완전하게 구별되어진다. 선행의 신앙 안에 있는 이들은 신앙의 진리들에 관하여 추론하지 않는다, 그러나 어떤 것이 그렇다고 말하고, 가능하다면 감각과 기억을 수단으로, 그리고 이성의 분석을 수단으로 그렇다를 확증할 뿐이다; 그리고 그들이 지각 못한 진리가 자기들의 방식 안으로 들어오고 이에 대해 불명확해질 때 그들은 이것을 보류해놓을 뿐, 결코 그것을 의심 안으로 끌고 들어가지 않는다. 하여 그들은 자기들이 납득할 수 있는 것은 매우 조금이었다고 말한다. 그들은 자기들이 납득할 수 없다는 이유로 진리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은 미친짓이라고 여긴다. 선행 안에 있는 이들은 이런 방식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반대의 경우에 있는 이들, 즉 선행 안에 있지 않은 이들은 오로지 어떤 것이 그러한지를 추론하지 않고 어떻게 그것이 그러한지 따지기를 열망할 뿐이다. 그들은 이것이 어떻게 있는지를 알지 않으면, 이것이 그렇다를 믿을 수 없다고 말한다. 이것 만으로부터도 이들의 신앙 없음이 즉시 알려지고, 동시에 모든 것들을 의심할 뿐아니라, 자기의 심정에서 부정하기까지 한다는 표시이기도 하다; 설사 그들이 이것이 어떻게 그런지를 가르침을 받아도 여전히 불신앙에서 꿈적하지 않고 갖가지 반대될 것을 찾는데 골몰할 뿐, 묵묵히 따름은 영원히 없다. 이런 불순종에서 버티는 이들은 오류에 오류 더미를 쌓는다.
이들, 또는 이들과 비슷할 때, 이들을 두고 말씀에서 “포도주나 독주에 술취한 자”라 일컫는다. 이사야서에서:
이들은 포도주를 통하여 정도를 벗어나고, 독주를 통하여 엉뚱한 길로 가버린다; 성직자들 과 예언자들은 독주를 통하여 잘못한다. 그들은 포도주를 단 번에 꿀꺽들이키고, 그들은 독 주를 통하여 배회한다; 그들은 환상 안에서 실수한다; 모든 식탁들은 토한 것과 더러운 것 으로 차있다. 누구에게 그분은 지식을 가르칠 것인가? 그리고 누구에게 그분은 통보한 것 을 이해하게 만드실 것인가? 젖 떼어져 어미 품으로부터 끌어내진 이들에게 (이. 28:7-9).
위 구절이 뜻하는 것이 무엇인지 분명할 것이다. 다시:
너희는 바로에게 나는 지혜로운 자의 아들이다, 나는 고대의 왕들의 아들이다고 어떻게 말 하려느냐? 그때 네 슬기로운 자들은 어디 있느냐? 그들로 너에게 지금 말하게 하라; 여호 와께서 그녀의 한 가운데에 심술궂음의 영을 섞으셨다; 그리고 그들은 자기들의 일로부터 이집트로 잘못된 길로 접어들게 했다, 마치 술주정꾼이 토하면서 엉뚱한 데에서 헤매듯이 말이다 (이. 19:11, 12, 14).
위 구절에서, “술주정꾼”은 기억적 지식으로부터 천적이고 영적인 것들을 조사하기를 바라는 이들을 표시한다. “이집트”는 이런 지식들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그 자체를 “슬기로운 자의 아들”이라 불리운다. 예레미야서에서:
너는 마시라, 술취하라, 그리고 토하거라, 그리고 자빠져라,
그리고 더 이상 일어나지 마라 (예25:27).
위는 거짓들을 뜻하고 있다.
다윗서에서:
그들은 이리저리 술취한 자같이 비틀거린다,
그리고 모든 그들의 지혜는 다 삼켜져버렸다 (시. 107:27).
이사야서에서:
너희는 오라, 내가 포도주를 가져오겠다. 그리고 우리는 독주로 술취할 것이다;
그리고 오늘 풍부함 같이 내일도 그렇게 있을 것이다 (이. 56:12),
위는 신앙의 진리들에 반대되는 것을 두고 말해진다. 예레미야서에서:
모든 병이 포도주로 채워질 것이다; 예루살렘의 모든 주민들은 술취해질 것이다.
(예. 13:12, 13);
위에서 “포도주”는 거짓을 표시한다; “술취함”은 오류들을 표시한다. 요엘서에서:
깨어라, 너 술주정꾼아, 그리고 슬피 울라; 악쓰거라, 너 포도주를 마신 자들아, 새 포도주 때문이다, 그 이유가 그것이 네 입으로부터 잘리울 것이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어떤 민족 이 내 토지에 다가와 있기 때문이다; 그는 내 포도주를 황폐해지게 방치했다 (욜. 1:5-7),
위는 신앙의 진리 측면에서 황폐해질 때의 교회를 두고 말해졌다. 계시록에서:
바빌론은 모든 민족들을 그녀의 음행의 분노의 포도주를 마시게 했다; 땅에 거주하는 그들 은 그녀의 음행의 피로 술취하게 만들어졌다 (계. 14:8, 10; 16:19; 17:2; 18:3; 19:15).
“음행의 포도주”는 섞음질 된 신앙의 진리를 뜻한다, 이로부터 술취함이 서술된다. 예레미야서에서:
바빌론은 여호와의 손에 있는 금 잔을 가지고, 모든 땅을 술취하게 만들었다; 민족들이 그 녀의 포도주로 술취했다. 그러므로 민족들이 미쳐있다 (예51:7).
“술취함”이 신앙의 진리들에 대한 광기를 의미하기 때문에 이 의미를 표현하고 동시에 아론과 그의 아들들에게 금하여졌다, 그런고로:
네가 만남의 천막으로 갈 때, 네가 죽지 않도록 너는 포도주나 독주를 마시지 말라, 네 아 들들 역시 그러하다; (술취함이 없어야) 너희는 거룩한 것과 모독인 것 사이의 차이를, 깨 끗한 것과 불결한 것 사이의 차이를 구별할런지 모른다 (레. 10:8, 9, 10)
감각과 기억 속의 것들을 수단으로 납득되지 않으면 믿지 않는 이들이 “마시는 영웅들”이라 아래에서 말해진다. 이사야서에서:
자신의 눈에서 슬기롭다, 자신의 얼굴 앞에서만 총명하다 하는 자들에게 화가 있다! 포도주 를 마시기에 영웅들인 자들에게, 독주를 혼합하는 용사들에게 화가 있다! (이. 5:21, 22).
그들이 “자신들의 눈에서 슬기롭다, 자신들의 얼굴 앞에서 총명하다” 불리운다, 그 이유는 신앙의 진리들에 반대하여 추론하는 이들은 타인들보다 자신이 더 슬기롭다 생각하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말씀과 신앙의 진리들에 아무 관심도 없는 이들, 신앙에 관하여 알려들지 않는 이들, 신앙의 첫째되는 원리들을 부인하는 이들은 “포도주 없이 술취함”이라고 불리운다. 이사야서에서:
그들은 술취해 있다, 그러나 포도주가 아니다; 그들은 비틀거린다, 그러나 독주를 마셔서 가 아니다; 그 이유는 여호와께서 너희 위에 깊은 잠의 영을 부으시어, 너희 눈이 닫혀졌기 때문이다 (이. 29:9, 10).
이런 것이 그들의 품질임은 이 예언서의 앞 뒤 문맥으로부터 분명해진다. 이와 같은 “술취한 자들”은 자신들이 타인들보다 더 폭넓게 깨어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들은 깊은 잠에 빠져있다. 시작에서의 고대 교회는 이 절에서 묘사된 것 같았다.

그리고 그는 자기 천막의 한 가운데에서 덮혀져 있지 않았다. 이는 술취함에 의해서 곡해된 것을 의미하는데. 이는 “덮혀져 있지 않음”, 또는 “벌거벗음”의 의미로부터 분명해진다. 그 이유가 그는 포도주의 술취함으로부터 덮혀져있지 않음이라 불리우기 때문, 즉 노아에게 신앙의 진리들이 없기 때문, 더 나아가 노아 안에서 신앙의 진리들이 곡해되었기 때문이다. 신앙의 진리들이 그 자체만 생각하면 선행의 선들, 또는 선행 자체를 덮는 의복들에 비교된다; 그 이유가 선행은 몸 자체이기 때문, 그러므로 진리들은 몸의 의복이다; 또는 똑 같은 비교로, 선행은 혼 자체이고 신앙의 진리들은 몸과 같고, 이것이 혼을 옷입히고 있다. 신앙의 진리들은 말씀에서도 역시 “의복들”, 그리고 “덮개”라 불리운다. 그러므로 23절에서 셈과 야벳이 의복을 가져다가 자기 아버지의 벌거벗음을 덮었다. 천적인 것에 관련해 영적인 것들은 혼을 덮는 몸과 같고, 신체를 옷입히는 의복들과 같다; 그리고 천국에서 영적인 것들은 의복들에 의해 표현되어진다. 이 구절에서 그는 덮혀져있지 않고 누워있다 라고 말해지기 때문에, 그가 신앙의 진리들을 감각 속의 것들과 감각으로부터 추론함을 수단으로하여 신앙의 진리들을 조사하기를 바램으로 인해 오히려 자신으로부터 신앙의 진리들을 벗긴 것이다. 포도주로 술취함으로부터 벗은 채 누움을 수단으로 말씀에서 같은 것이 의미되어진다; 예레미야애가서에서:
우스 토지에 거주하는 에돔의 딸아, 기뻐환호하고 즐거워하라; 잔이 너를 통과해 갈 것이 다; 너는 술취할 것이다. 그리고 네 자신을 벌거벗게 만들 것이다 (애. 4:21).
그리고 하박국서에서:
동료의 벌거벗음을 쳐다보려고 자기 동료를 마시게해서
술취하게 하는 자들에게 화가 있다 (합. 2:15).

“천막의 한 가운데”는 신앙의 제 1의 것을 의미하는데, 이는 “한 가운데”와 “천막의 한 가운데”로부터의 의미로부터 분명해진다. 말씀에서 “한 가운데”는 가장 안쪽을 의미한다, 그리고 “천막”은 선행, 선행으로부터의 예배이다. 선행이 가장 안쪽이다, 즉 신앙과 예배의 제 1의 원리이다. 그런고로 “천막의 가장 한 가운데”이다.

22절. 그리고 가나안의 아버지, 함은 자기 아버지의 벌거벗음을 보았다, 그리고 밖에 (나가) 자기 두 형제에게 말했다.

“함”이 부패된 교회를 의미하는데, 이는 함에 관해 앞에서 말해진 바로부터 분명해진다. 교회가 말씀을 인정하고, 진정한 교회의 것과 비슷한 어떤 예배를 드리고 있으나, 여전히 선행으로부터 신앙을 분리하는 바, 신앙의 실체로부터와 신앙의 생명으로부터 떼어내는 바, 이로인해 신앙은 죽은 일상의 일 같은 수준으로 전락된다. 이에 따른 필연적 결과가 교회가 부패되는 것이다. 이때 교인이 되어가는 모습은 그들이 양심을 가지고 있지 않다 인데 이는 곰곰이 생각만해도 왜 그런지가 분명해진다; 그 이유가 진짜 양심인 양심은 선행으로부터가 아니면 존재가 가능할 수 없기 때문이다. 선행이 양심을 만든다. 즉 선행을 통하여 주님께서 양심을 만드신다. 간단히 말해서 양심은 누군가에게 악행을 하지 않는 것, 그가 잘되기를 바라는 것밖에 더 없지 않을까? 그런고로 양심은 선행에 속한다, 그리고 신앙이 선행으로부터 분리되는 상황에서 양심은 결코 없다. 이런 자가 양심을 가졌다고 우긴다면, 그것은 가짜 양심일 뿐이다; 그들이 양심 없이 있기 때문에, 그들은 바깥 제약 조건이 느슨해졌다 하면 모든 사악함 안으로 돌진해간다. 그들은 선행이 무엇인지 아는 것도 없다. 단지 뭔가를 의미하는 단어이겠지의 수준에서 아는 것 뿐이다. 그들이 선행 없이 있을 때, 그들은 신앙이 무엇인지 모른다. 설사 신앙이 무엇이냐고 질문 받을 경우, 그들은 그것은 일종의 생각함이다고, 어떤 이는 그것은 확신함이다고, 어떤 자는 신앙의 지식들이다고 답한다. 신앙에 관한 위의 진실이 그들에게 말해지고 곰곰이 생각해 볼 기회를 준다면, 그들은 모든 사랑은 자기로부터 이다고, 자신과 자기 가족을 돌보지 않는 자는 이교도보다 더 나쁘다고 말할 뿐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자신과 세상밖에 더 공부할 것은 없다. 그로부터 그들을 맞이하는 것은 자기 자신 안에서 사는 것이다. 이런 자들이 “함”이라 불리운다.

여기서 “함”, 그리고 “가나안”이라 불리는 자들, 즉 신앙을 선행으로부터 분리하는 자들, 예배를 외적인 것에 한정시키는 이들은 양심이 무엇이며, 어디로부터 있는지를 알 수 없는 바, 간략히 적어둘 필요가 있다. 양심은 신앙의 진리들을 수단으로 만들어진다. 그 이유가 그가 들었고, 인정했고, 믿었던 것이 양심을 만들기 때문이다. 그 후에 이런 것들에 반대되어 행동하는 것은 그에게 있어서는 양심에 반대되는 행동을 하는 것이 된다. 이는 설명하지 않아도 모든 자에게 자명하다; 이렇게 인간은 듣고, 인정하고, 믿는 신앙의 진리가 있지 않으면, 그에게 진정한 양심을 가지는 것도 가능할 수 없다. 그 이유가 주님이 선행 안에서 일하시는 신앙의 진리를 통하여 인간은 거듭나지기 때문, 그러므로 신앙의 진리들을 통하여 그는 양심을 받는다. 양심은 새로운 인간 자신이다. 이로부터 분명한 바, 신앙의 진리들은 수단이다는 것, 즉 인간은 신앙이 가르치는 것에 따라 산다는 것, 신앙의 제 1의 원리는 주님을 무엇보다 먼저 사랑하고, 그의 이웃을 자신 같이 사랑하는 것을 살아내는 것이다. 그가 이렇게 살지 않으면, 그의 신앙은 왁자지껄한 소리의 단어들의 나열에 불과한 텅빈 일상 업무 수준, 천국의 삶과는 무관해진, 하여 일말의 구원 가능성도 가지지 않은 신앙 밖에 더 무엇이겠는가?
인간이 어떻게 산다 할지라도, 그가 신앙을 가진 조건이라면 그는 여전히 구원될 것이라고 믿는 것, 이는 만일 그가 선행을 가지지 않은 상태, 따라서 양심이 없는 상태, 즉 그가 자기 삶을 증오와 복수, 강도 간음질, 한마디로 선행과 양심에 반대되어 죽음 직전까지도 살았다 해도, 그가 믿는다고 아멘 하는 말을 계속하는 한, 그는 구원될 수도 있다고 말하는 것이나 한 가지이다. 거짓 원리 안에 있는데, 거짓된 양심 아닌 진정한 양심을 만들어 줄 무슨 신앙의 진리들을 그가 지니고 있을까? 이런 자라해도 자기는 양심을 가지고 있다고 상상한다면, 이는 필시 외적인 속박에 의한 것, 법의 두려움, 명예 손실의 걱정, 등등의 속박 때문에 억제된 행동에서 비롯된 것일 뿐이다. 이것 가지고 그들은 양심이라 말한다. 이것은 이웃에게 피해를 입히지 않고 더 나아가 이웃에게 선을 행하도록 인도해주지 못한다. 단지 자기 명예나 얻고저 하는 것에 필요할 경우에서만 그를 선한 일로 인도하는 바, 그에게 선행은 겉치레 수준이다. 이것이 양심도, 선행도 아니기 때문에 그를 억누른 제약이 풀린다면, 그는 겉잡을 수 없는 사악함으로 즉각 매진한다. 그러나 이런 경우도 있을 수는 있다. 그가 신앙만으로 구원받는다고 선포는 했지만, 여전히 선행의 삶을 사는 이들의 경우이다; 그 이유가 그들의 신앙 안에는 주님으로부터의 선행을 가졌기 때문이다.

“가나안의 아버지”는 내적 예배 없는 외적인 것들만의 예배를 의미하는데 앞에서 이미 말했다. 선행으로부터 분리된 신앙으로부터서는 이와 다른 예배는 출현할 수 없다; 그 이유가 내적 인간이 선행인 바, 선행 없는 신앙은 결코 없다; 선행이 결여된 자는 내적인 것 없는 외적 예배 외의 다른 예배는 가질 수 없다. 그리고 이런 예배는 선행으로부터 분리된 신앙으로부터 출시되기 때문에, 함은 “가나안의 조상”이라 불리운다. 그리고 뒤잇는 것에서는 함이 취급되지 않고 가나안이 취급된다.

자기 아버지의 벌거벗음을 보았다. 이는 그가 오류들과 곡해된 것들을 관찰했다를 의미하는데, 이는 “벌거벗음”의 의미로부터 분명해진다. 벌거벗음은 악하고 곡해된 것(타락한 것, 뒤집힌 것)이다. 여기서 선행으로부터 분리된 신앙 안에 있는 이들이 “자기 아버지의 벌거벗음을 보는”, 즉 그의 오류들과 곡해됨들을 관찰하는 “함”에 의해 묘사되고 있다; 그 이유가 이 품성 속에 있는 이들은 인간 안에서 오류와 곡해된 것 외의 것들은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와는 정반대의 품성 속에 있는 이들, 즉 선행의 신앙 안에 있는 이들은 인간 안에 있는 선한 것을 주목하고, 그리고 만일 그들이 악하고 거짓된 어떤 것을 보면, 그것을 수정해주려 노력한다. 마치 본문의 셈과 야벳의 경우와 같다. 선행 없는 곳에는 자기를 사랑함이 있다. 그러므로 자기를 좋아하지 않는 자를 향해서는 증오만 끓어오른다. 결과적으로 이런 인물들은 이웃 안에서 악한 것만을 본다, 그리고 만일 그들이 선한 어떤 것을 본다면, 그들은 그것은 별 것 아닌 것으로 치부하든가, 그것에 나쁜 해석을 덧붙인다. 선행 안에 있는 이들의 방법은 이와 아주 다르다. 이 차이를 수단으로 인간들의 두 종류는 서로로부터 구별되고, 저세상에 오면 극명하게 구별된다. 그 이유가 선행 없는 자와 더불어 증오의 느낌은 그의 사사건건에 표를 내기 때문이다; 그들은 모든 이를 조사하고 싶어한다. 아예 판단하기조차 한다; 그들은 타인에게서 악한 것을 발견하고 싶은 것 외에 더 바라지 않는다. 그 이유는 그들은 타인을 단죄하고, 처벌하고, 고통을 안기는 것만을 꾸준히 하려는 경향이 강하다. 그러나 선행 안에 있는 이들은 타인의 악을 거의 보지 않는다, 그러나 타인에게 있는 모든 선들과 진리들에 주목하고, 그들의 악하고 거짓된 것에 선의의 해석을 주려 모색한다. 이런 경우가 모든 천사들이다. 그들은 이런 경향성을 모든 악을 선으로 구부리시려 하는 주님으로부터 가지고 있다.

그리고 밖에 있는 자기 두 형제에게 말했다. 이는 그가 비웃었음을 의미하는데, 이는 말해져왔던 것의 결말로서 뒤잇는다. 그 이유가 선행 없는 이들에게 따라붙어다니는 타인을 경멸함, 또는 조롱함은 타인에게서 오류들이 발생하면 그때마다 떠들어댐 같은 짓은 계속 하기 때문이다. 그들이 공개적으로 이런 짓을 즐기지 않는 경우란 그들에게 있는 외적 속박, 즉 법의 두려움, 생명의 손실, 명예나 이득의 손실, 등등 자신에게 불리할 경우 뿐이다; 그들이 이런 짓을 내향적으로 흠모하고, 외향적으로는 친구인 체 한다. 이 방법에서 그들은 두 영역을 획득하는데, 저세상에서는 분명하게 지각된다; 하나는 내면의 측면, 증오들로 차있다; 다른 하나는 외면의 측면, 선한 것을 흉내내는 것이다. 그런데 이 두 영역들은 완전 불일치하는 바, 그것들은 충돌할 수 밖에 없다. 그러므로 외면의 영역이 그들로부터 거두어지고, 그들은 내면의 증오들을 숨길 수 없게되어 그들은 모든 사악함으로 치닫는다; 이것이 거두어지지 않을 경우, 그들이 내뱉는 모든 말 하나하나는 증오함이 잠복하고 있다. 이것이 지각되는 바, 이로부터 그들의 처벌과 고통이 온다.

그들이 “자기 형제”라고 불리운 것은 그가 신앙을 고백했기 때문, 즉 선행은 신앙의 형제이다.

23절. 그리고 셈과 야벳은 의복을 찾아들고, 그것을 둘의 어깨 위에 얹고, 뒷걸음으로 가서 자기 아버지의 벌거벗음을 덮었다. 따라서 그들의 얼굴은 뒤쪽을 향했는 바 그들은 자기 아버지의 벌거벗음을 보지 않았다.

“셈”에 의해 내적 교회가, “야벳”에 의해 내적 교회와 상응하는 외적 교회가 의미되는 것은 이미 상술했다. 교회가 있는 곳에는 내적인 것과 외적인 것이 반드시 필요하다; 그 이유가 교회인 인간은 내적이고 외적이기 때문이다. 그가 교회가 되기 이전, 즉 그가 거듭나기 이전, 인간은 외적인 것들 안에 있다; 그가 거듭나질 때, 그는 외적인 것들로부터 인도된다. 즉 외적인 것들을 수단으로 내적인 것들 쪽으로 안내받는 격이다. 이것 역시 살핀 바 있다. 그가 거듭나졌을 때, 내적 인간의 모든 것들은 외적인 것들 안에 종결되어 있다. 그런고로 모두 각각의 교회는 이 둘이 반드시 있음에 틀림없고, 이는 고대 교회에서나 지금의 기독 교회에서나 공히 같은 이치이다.
고대 교회의 내적인 것들은 선행과 선행에서 파생된 신앙으로부터의 모든 것들이었다. 즉 그들의 모든 겸허함, 주님을 경배함은 선행으로부터, 이웃을 향한 모든 선한 애착, 그와 다른 것들 모두 선행으로부터 도래되었다. 고대 교회의 외적인 것들, 즉 제물이나 포도주를 바침, 그외 다른 외적인 것들도 이를 통한 표현을 수단으로 주님에 관계를 가졌고, 그 모든 것에서 주님은 중요시되었다. 이로부터 그들의 내적인 것들은 그들의 외적인 것들 하나하나에 들어 있다. 그래서 그것들은 하나의 교회를 만들었다. 기독 교회의 내적인 것들 역시 고대 교회의 내적인 것들과는 조금도 다르지 않고 외적인 것들만 다를 뿐이다. 즉 제물이 아닌, 예식이 주어진 것이다. 이 예식으로부터 주님은 중요시되어진다. 그런고로 기독 교회에서도 내적인 것들과 외적인 것들은 하나를 만든다.
고대 교회는 내적 측면에서 기독 교회와 한 조각도 다르지 않다. 단지 외적인 것들에서 다를 뿐이다. 선행으로부터 주님을 예배함은 외적인 것들이 어떻게 변하고 다양해진다 해도 결단코 다르지 않다. 여러 번 반복해 말했듯이 교회는 내적, 외적 모두 있어야 교회이다. 외적인 것 없는 내적인 것은 오리무중한(interminate) 어떤 것인바, 외적인 것에 종결되어야 한다. 그 이유가 인간은 대체로 내적 인간이 무엇인지, 무엇이 내적 인간에 속하는 것인지 알지 못하고 지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외적 예배가 있지 않으면, 그는 거룩한 것에 관한 무엇이든 알지 못한다. 선행과 이에서 파생된 신앙을 가질 때 그는 외적 예배 안에서 자신 안에 내적 예배를 가진다; 그 이유가 이들 안에서 주님께서는 선행과 양심 안에서 일하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의 모든 예배는 내적인 것의 분담자가 되어진다. 선행과 이에서 파생된 신앙을 가지지 않은 경우는 이와는 딴판이다. 그들도 외적 예배를 가지기는 마찬가지 일지 모르나, 내적 예배로부터 분리되어 있고, 마치 그들은 선행으로부터 분리된 신앙을 가진 셈이다. 이와 같은 예배가 “가나안”이라 불리고, 이런 신앙이 “함”이라 불리운다. 그리고 이 예배가 분리된 신앙으로부터 출시되기 때문에, 함은 “가나안의 아버지”라 불린다.

의복을 가져왔다. 그들이 선 쪽에서 해석했음을 의미하는데, 이는 이미 말해진 것으로부터 분명해진다. 누군가에게 “의복을 가져가고 벌거벗음을 덮는다”는 것은 “덮혀있지 않음”과 “벌거벗음”이 오류들과 곡해됨들 이다를 아는 이상 더 다른 의미는 가질 수 없다.

그리고 그것을 어깨 위에 얹었다. 그들이 이것, 즉, 자기들의 성의를 다해(힘닿는 대로) 선 쪽에서 해석하고 너그러이 봐 주었다를 의미하는 것은 “어깨”의 의미가 모든 힘이다로부터 분명해진다. 말씀에서 “손”은 힘(power)을 의미한다; 그리고 “팔”은 더 큰 힘을, “어깨”는 모든 힘(전력을 다함)을 의미한다. 아래 인용 구절에서 이를 확인해보자. 에스겔서에서:
너희가 옆구리와 어깨로 밀어뜨린다, 그리고 네 뿔들로 병든 모든 양들을 밀쳐내는데,
너희는 그것들이 뿔뿔이 흩어질 때까지이다. (겔. 34:21).
“옆구리와 어깨로”란 모든 혼과 힘을 다하여를, “네 뿔들로 밀어냄”은 모든 강함을 다하여를 뜻한다. 다시:
이집트의 모든 주민들은 내가 여호와인 줄을 알런지 모른다. 그 이유는 그들이 이스라엘 가문에게 갈대 지팡이 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너를 손으로 붙잡지만 너희는 부러뜨릴 것 이고, 그들은 모든 어깨를 찟길 것이다 (겔. 29:6, 7).
이는 영적 진리를 기억 속의 지식을 수단으로 탐구하기를 바라는 이들을 두고 말해진다. “갈대 지팡이”란 이런 힘을 표시한다; “손으로 붙잡음”이란 그 속에 신뢰를 둠을 뜻한다; “모든 어깨를 찢음”은 아무 것도 알지 못하게 모든 힘을 박탈함을 뜻한다.
스바냐서에서:
그들 모두는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한 어깨로 여호와를 섬길런지 모른다 (습. 3:9);
한 혼, 고로 한 힘으로를 뜻하고 있다. 스가랴서에서:
그러나 그들은 귀담아듣지 않고, 고집센 어깨를 돌려댔다 (슥. 7:11);
그들은 자기들의 온 힘을 다해 저항했다를 뜻한다. 이사야서에서:
그들이 대장장이를 고용한다. 그는 금과 은을 가지고 신으로 만든다;
그들이 숭배한다, 그렇다, 그들은 엎드려 절한다;
그들은 그것(우상)을 어께 위에 메고 다닌다, 그들은 그것을 운반한다 (이. 46:6, 7);
다시:
그 이유가 우리에게 한 어린 아이가 태어나지고. 우리에게 한 아들이 주어진다; 그리고 통 치함이 그분의 어깨 위에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분의 이름은 경이로우신 분, 위로하시는 분, 하느님, 영웅, 영원의 아버지, 평화의 제 1인 자라 불리실 것이다 (이. 9:6).
이는 주님을 두고 말해진 것, 그분의 권능, 그분의 힘에 관해 말해진다; 그러므로 말해진다. “그분의 어깨 위에.” 다시:
다윗의 가문의 열쇠를 나는 그분의 어깨 위에 놓는다; 그리고 그분은 여시고 아무도 닫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그분은 닫으실 것이다. 그리고 아무도 열지 못할 것이다 (이. 22:22).
이 구절도 앞 구절 같이 주님에 관련해 말하신다. 이 구절은 그분의 권능과 권위를 뜻한다.

그리고 뒷걸음으로 갔다. 이는 그들이 오류들과 곡해됨에 관심의 초점을 두지 않았다는 것은 “뒷걸음으로 감”의 의미가 눈을 비키게함과 보지 않음이다로부터 분명해진다; 이는 뒤이어지는 것으로부터 분명해진다. 거기서, 그들은 아버지의 벌거벗음을 보지 않았다고 말해진다. “보지 않음”은 내적 의미에서 관심을 두지 않음이다.

그리고 자기 아버지의 벌거벗음을 덮었다. 이는 그들이 오류와 곡해된 것들을 너그러이 봐 주었음을 의미하는데, 이는 연결 문맥으로부터, 그리고 “벌거벗음”의 의미가 곡해됨이다로부터 분명해진다.

그래서 그들의 얼굴은 뒤쪽을 향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자기 아버지의 벌거벗음을 보지 않았다. 추론함으로부터서는 오류와 실수가 있을 수 밖에 없는 바, 그것을 탓하기보다는 너그러이 봐 주어야 하지 않겠느냐를 의미하는데, 이는 말이 반복됨으로부터 분명해진다; 그 이유가 거의 같은 말이 여기서 반복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뒤쪽의 말은 결말을 만들고 있다. 그 이유가 고대 교회의 부모되는 교회, 또는 교인의 특성상 벌어진 사건일 뿐, 악의가 있는 것은 아니고, 천진난만함으로부터 발생된 일이다는 것은 이어지는 말, “노아는 포도주로부터 깨어났다”, 즉 더 나은 가르침을 받았다로부터 분명해진다. 어쨌든 이 구절만에 집중해보면, 우리는 이렇게 말할런지 모른다. 즉 선행 안에 있지 않은 이들은 이웃을 향해 악밖에 생각하는 것이 없고, 말하는 것마다 악 뿐이다; 만일 그들이 선한 어떤 것을 말한다면, 이는 필시 자신들을 위해서이고, 또는 친구인 체하며 자신의 이득을 염두에 두고 있다; 이에 반해, 선행 안에 있는 이들은 이웃을 향해 선만을, 이웃이 잘되기만을 바란다. 이들은 자기 위주가 아닌 선행 안에서 일하시는 주님으로부터 모든 것의 중요도를 가늠한다. 전자는 인간과 더불어 있는 악령들과 같고 후자는 천사들과 같다, 악령들은 인간 안에 있는 악하고 거짓된 것 만을 휘젖고 그를 단죄한다; 그러나 천사들은 인간 안에 있는 선하고 참된 것만을 흥분시키고, 악하고 거짓된 것은 너그러이 봐 준다. 이로부터 분명한 바, 선행 없는 이들과 더불어서는 악령들이 통치하고, 이를 통하여 지옥과 교류한다는 것, 선행 안에 있는 이들은 천사들이 통치하고, 이를 통하여 그는 천국과 교류한다는 것이다.

24절. 그리고 노아는 그의 포도주로부터 깨어났다, 그리고 자기의 작은 아들이 자기에게 했던 짓을 알았다.

그리고 노아는 그의 포도주로부터 깨어났다. 이는 그가 더 나은 가르침을 받아 쓸 때를 의미하는데, 이는 술취함으로부터 “깨어남”의 의미로부터 분명해진다. 즉 그가 “술취했을” 때(21절)는 그가 오류와 곡해된 것에 빠져 있을 때이고, 그가 “깨어남”은 그가 오류들로부터 빠져나옴이기 때문이다.

그의 작은 아들이 자기에게 했던 것. 이는 내적 예배로부터 분리된 외적 예배는 오류와 곡해함들을 비웃는다를 의미한다. 이것은 글자 의미 내지 역사적 의미로부터 마치 함이 노아의 작은 아들에 의해 뜻해진 것처럼 나타나나, 다음 절을 보면 가나안이 뜻해짐이 분명하다. 그 이유가 다음 절에서, “가나안은 저주 받으라”하고 말해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26, 27절도 참고할 수 있다. 그 이유가 가나안은 종이 되어라 하고 말해지기 때문이다. 함이 여기서 언급되지 않은 것은 다음 절에서 살핀다. 여기서는 사람의 이름이 셈, 함, 야벳, 그리고 가나안의 순서로 왜 언급되는지 만을 살핀다. 선행은 교회의 첫 번째, 또는 셈이다; 신앙은 두 번째이고, 함이다; 선행으로부터의 예배가 세 번째이고, 야벳이다. 그리고 신앙과 선행 없는 외적인 것만으로의 예배가 네 번째, 가나안이다. 선행은 신앙의 형제이다. 그러므로 선행으로부터의 예배도 형제이다; 그러나 선행 없는 외적인 것 만으로의 예배는 “종들의 종”이다.

25절. 그리고 그는 말했다. 가나안은 저주된다. 자기 형제들에게 종들의 종일 것이다.

가나안은 저주된다. 내적 예배에서 분리된 외적 예배는 그 자체를 주님으로부터 비켜서게 한다를 의미한다. 이는 “가나안”의 의미와 “저주됨”의 의미로부터 분명해진다. “가나안”이 내적 예배로부터 분리된 외적 예배를 의미하는 것은 가나안에 관하여 이미 살핀 내용으로부터, 그리고 그에게 “저주됨”이라 말해지고, “종들의 종이 됨”으로부터도 분명해진다. 더구나 셈과 야벳의 종인 자는 교회 자체로부터 분리된 어떤 것, 즉 외적인 것만에 국한된 어떤 것일 수 밖에 없다. 이는 “저주됨”의 의미가 자기를 비켜 세움이다로부터도 분명해진다. 그 이유가 주님은 누구든 결코 저주하시는 일이 없고, 성내시는 일도 없으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신을 주님으로부터 비켜 서게하여 저주하는 자는 정작 그 인간 자신이다. 하늘이 땅에서 떨어져있듯, 주님과 저주함, 성내심은 멀다. 전지전능이신 주님, 그분의 지혜로 우주를 통치하시는 주님, 모든 허약함은 추월해 계신 그분이 인간에게 있는 결함들, 자신이 무엇을 하는지도 알지 못하는 인간들, 악밖에 지닌 것이 없는 인간의 속성을 뻔히 아시는 주님이 인간의 허약한 것 때문에 성내시고 저주하신다 말하면, 누가 이를 믿을 수 있을까? 그러므로 주님에게 있어 성내심은 가당치않고 자비하심만이 가능하시다.
여기에 신비함이 내포되고 있다는 것은 이로부터서만 알런지 모른다. 비록 함이 아버지의 벌거벗음을 본 당사자이고 이를 자기 형제에게 말한 자이지만, 여전히 함은 저주되지 않고, 그러나 그의 아들 가나안이 저주 받는다는 대목이다. 가나안은 함의 하나 뿐인 아들도, 첫 출생도 아니고 단지 순서상 네 번째 일 뿐이다. 창. 10:6을 보면 이를 알게 된다. 이 구절에서 함의 아들들이 열거되는데, 그 순서는 구스, 미스라임, 붓, 가나안이다. 더구나 신성한 법에 의하면, 아들이 아버지의 죄를 짊어지지 않는다. 에스겔서를 보면:
죄짓는 혼, 그것이 죽을 것이다; 아들은 아비의 불법을 짊어지지 않는다, (반대로) 아비는 아들의 불법을 짊어지지 않는다. (겔. 18:20; 신. 24:16; 왕하 14:6).
위 인용 구절과 비슷한 대목은, 아비의 벌거벗음을 본 것, 그것을 형제에게 말한 불법이 경미한 듯 여겨져 전체 후손이 이것 때문에 저주 되어질 수 없는 듯 나타나고 있다는 점이다. 이런 정황으로부터 비밀함들(arcana)이 여기에 포함되어 있음은 분명해진다.
“함”이 여기서 명명되지 않고 “가나안”이 명명된 것은 “함”이 선행으로부터 분리된 신앙을 의미하지만 이 신앙도 영적 (수준의, 또는 평면에 있는) 교회이기 때문이다. 영적 (평면의) 교회는 (사랑은 아니지만) 진리가 있기에 신앙 안에 거룩함이 있는 교회이다. 그런고로 비록 선행이 없어 신앙이 없는 것이나 별 차이가 없는 (껍데기의) 신앙이지만 신앙에 관한 지식을 수단으로 거듭나아갈 수 있는 한가닥 희망은 있기에, 이 신앙도 어떤 측면에서는 형제이고, (내, 외적 의미 모두에서도) 형제가 될런지 모른다; 그러므로 함이 아닌 가나안이 저주되어졌다. 더욱이 가나안의 토지의 주민들, 유대인들 뿐 아니라 이방인들 모두가 대체로 이런 품성이 도두라져 그들의 모든 예배는 외적인 것들에만 존재하였다. 이런 비밀함들(arcana)이 있지 않으면, 함 대신 (이 본문과는 아무 관련도 없는) 가나안이 등장할리 만무했을 것이다. 내적 예배로부터 분리된 외적 예배가 주님으로부터 자체를 비켜 서게하여 스스로 저주한다는 것은 외적 예배에 있는 이들이 지상적, 육체적인 것을 중요시한다는 것만 숙고해도 분명해진다; 따라서 이들은 아래쪽만을 향해 자신의 마음들과 삶을 치닫게하는데, 이에 관하여는 이어지는 대목에서 더 언급될 것이다.

그는 자기 형제들에게 종들의 종일 것이다. 이는 교회에서 가장 천박한 것을 의미한다. 이는 내적 예배로부터 분리할 때 있는 외적 예배의 본성으로부터 분명해진다. 내적 예배가 외적 예배를 거룩해 있도록 해주지 않으면, 외적 예배 자체만을 떼놓고 생각하면, 이는 아무 것도 아닌 셈인데, 이는 모든 이도 금방 수긍될 것이다. 심정의 숭배함이 없는 외적 숭배함은 제스쳐(gesture)에 불과한 짓이 아닐까? 또는 마음에서의 기도를 동반하지 않는 입술의 기도는 더듬거리는 말에 불과한 것 아닌가? 또는 어떤 목적도 없이 어떤 일을 하고 있다면 쓸데없는 짓 아닌가? 외적인 것을 그 자체만 중요시하면 죽은 일거리에 불과한 바, 내적인 것이 그 안에 있어야 살아 있다.
다른 삶에 있는 많은 것들로부터 내적 예배로부터 분리될 때의 외적 예배의 본성을 나로하여금 알게 해주셨다. 세상에서 교회도 늘 출입하고 교회 예식도 제법 빠짐없이 참석했던 마술사들이 있었다. 이런 컽치레 덕분에 마술사가 아닌 듯 했지만, 그들은 (마술 때문인지) 여느 사기꾼을 능가했다. 또한 탐욕적인지라 강도짓으로 즐거움을 얻는 자였다. 그래서 거기서도 여전히 그들은 지옥적이었고, 주님과 이웃을 향하여 대단한 증오로 들끓고 있었다. 그들의 외적 예배 안에 있는 내적 예배라는 것은 그들이 세상을 수단으로 보여지는 것이든가, 자기들이 바랬던 세상적, 지상적, 육체적인 것을 획득하는 것, 신성한 듯한 겉치레로 사기치는 것, 이런 등등이다. 이런 인물들은 자기들이 바라는 것과 일치하는 어떤 신이나 우상들을 발견하면 즉시 그것을 숭배한다. 특히 외적인 것들을 매우 중요시한 유대인들의 경우가 이러하여 그들은 쉽게 우상숭배에 빠져들고 만 것이다.
가나안 토지에 있는 이방인들은 바알과 여타 다른 신을 숭배했는데 외적 예배만을 중요시함은 유대인들이나 동일하였다. 그 이유가 그들도 성전, 제단, 뿐만아니라 제물 바침을 가졌다; 그래서 유대인들과의 차이는 그들은 자기들의 신들을 바알, 아스다롯 등등으로 이름 불렀고, 유대인들은 여호와로 이름 부른 것이다. 이것이 지금까지도 여전한 것은 여호와라는 이름을 부르는 것만으로도 자기들을 거룩해지게, 뽑힌 자로 만든다고 상상하는 점이다. 이것이 그들로 다른 사람보다 더 정죄받는 쪽으로 기울게 했다. 그 이유가 이 방법에 있으면 거룩한 것을 모독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히려 이방인들은 모독을 할 수 있는 지경까지는 이르지 않았다. 이런 예배가 본문 대목에서 소위 “가나안”이라 불리우고, “종들의 종”이다고 말해진다. “종들의 종”은 교회에서 가장 천박한 것을 표시하는데, 다음 절에서 살핀다.

26절. 그리고 그는 말했다, 복 있음이 셈의 하느님 여호와이시다; 그리고 가나안은 그의 종일 것이다.

복 있음이 셈의 하느님 여호와이시다. 이는 내적인 것으로부터 주님을 예배하는 모든 이들을 위한 모두 각각의 선을 의미하는데, 이는 “복 있음”의 의미로부터 분명해진다. “복 있음”은 모두 각각의 선을 포함한다; 즉 천적, 영적, 자연적 선이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내적 의미에서 “복 있음”에 의해 의미되어진다. 외적 의미에서 “복 있음”에 의해 세상적, 육체적, 지상적 선 모두 각각을 의미한다; 그러나 외적 의미에서의 것들이 복 있음이다면, 그것들은 내적인 것으로부터 반드시 있었어야만 한다; 그 이유는 이것 만이 복되고, 영원이고, 더 없는 행복이며, 복된 것들의 실재 자체이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영원하지 않다면 실지로 무엇이 존재한다는 말일까?. 그렇지 않는 것은 있음을 중단한다. 고대인들 사이에서, “복 있음이 여호와이시다” 라고 하는 관습적 표현이 있었다; 이 표현을 수단으로 그분으로부터 모두 각각의 복 있음, 즉 모두 각각의 선이 있다는 것을 뜻했다; 이와 같은 표현이 주님이 복 주신다, 복 주셨다는 감사함의 관용 표현이 유행되었는데, 다윗서를 찾아 읽기 바란다. 시. 28:6; 31:21; 41:13; 66:20; 68:19, 35; 72:18, 19; 89:52; 119:12; 124:6; 135:21; 144:1.
“복 있음이 여호와이시다”가 여기서 말해지는 이유는 셈, 또는 내적 교회가 여기서 취급되는 주제이기 때문이고, 이 교회가 내적이라 불리는 이유는 선행으로부터 이기 때문이다. 선행 안에 주님이 현존하시고, 여기서 “여호와 하느님”이라 불리운다. 그러나 외적 교회 안에서는 비록 그분이 그 안에도 현존하시지만 이렇게 불리우시지 않는데, 그 이유는 그분이 내적 교회의 사람 안에서 같이 현존하시지 않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외적 교회의 사람은 자기로부터 선행의 선들을 행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외적 교회가 취급되는 주제일 경우, 주님은 “하느님”으로 불리우신다. 다음 절의 야벳이 취급되는 대목에서, “하느님께서 야벳을 번창하게 하실 것이다”가 이에 대한 실예도 된다. 모두 각각의 선은 내적인 것들로부터 주님을 예배하는 이들의 몫이다는 것은 뭔가가 존재하는 질서로부터 분명해진다; 질서는 이렇다: 주님으로부터 천적인 모든 것이 있다. 천적인 것으로부터 영적인 모든 것이 있다. 영적인 것으로부터 자연적인 모든 것이 있다. 이는 만물이 출시되어가는 질서이고, 또한 유입(influx)의 질서이다.
천적 (수준, 평면, 왕국)은 주님을 사랑함과 이웃을 향한 사랑이다. 사랑이 없는 곳에서는 천적 평면, 즉 사랑을 통하여서만 흐르는 주님의 흐름이 끊기는 바, 주님은 현존하시지 않는다. 천적인 것이 없을 때, 어떤 영적인 것(수준, 평면, 왕국)도 가능할 수 없다. 그 이유는 영적인 모든 것은 주님으로부터 천적 평면을 통하여 존재하기 때문이다. 영적 평면은 신앙이다. 그러므로 주님으로부터, 사랑, 선행을 통하지 않으면 신앙이 아니다. 자연적 평면 역시 흐름의 질서는 위와 비슷하다. 이와 동일한 질서에 의거 모든 선들은 (인간 안으로) 흘러 들고, 흘러 내려간다; 이로부터 내적인 것으로 주님을 예배하는 이들은 모두 각각의 선을 향유한다; 이에 반해 선행으로부터 주님을 예배하지 않는 이들은 모조품에 불과한 선 밖에 가질 수 없고 이들의 선은 모조품이라기보다는 그 자체가 악이라 말해야 지당할 것이다. 따라서 증오나 간음질 같은 것으로부터의 즐거움, 배설물로부터 얻는 즐거움인 바, 이런 자는 다른 삶에서 그런 것으로 바뀌어 있다.

그리고 가나안은 그의 종일 것이다. 이것이 예배를 오로지 외적인 것들에만 존재하게 만드는 이들은 비열한 섬김을 교회 사람에게 제공한다를 의미하는데, 이는 유대 교회에서 표현된 것들을 살핌으로부터 분명해진다. 유대 교회에서 내적 교회는 유다와 이스라엘을 수단으로 표현되어졌다; 유다에 의해서는 천적 교회가, 이스라엘에 의해서는 영적 교회가, 야곱에 의해서는 외적 교회가 표현되어졌다. 그러나 외적인 것들에서만 존재하는 예배를 만든 이들은 이방인들에 의해 표현되어졌다. 유대 교회에서 이들을 외국인(stranger, 모르는 사람)이라 불렀다. 그리고 외국인들은 그들의 종들이었다. 이들은 유대 교회에서 밑바닥 수준의 일을 맡아 했다. 이사야서에서:
외국인들이 서서 너희 양떼를 먹일 것이다, 외국인들의 아들들이 밭을 갈고 포도원지기를 할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여호와의 성직자로 불리울 것이다; 우리의 하느님의 섬기는 자라 너희는 불리울 것이다; 너희는 이방인들의 재물을 먹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영광 안에서 너희는 자신들을 자랑할 것이다 (이. 61:5, 6).
여기서 천적 인간들이 “여호와의 성직자들”이라 불리운다. 그리고 영적 인간들이 “여호와의 섬기는 자”라 불리운다. 외적인 것들에서만 예배를 만드는 이들이 “외국인들의 아들들”이고 이들이 천적, 영적 인간들의 들판들과 포도원들을 섬긴다.
다시:
외국인의 아들들이 네 성벽들을 건축할 것이다,
그들의 왕들이 너를 섬길 것이다 (이. 60:10),
위 인용 구절 같은 방식에서의 섬김이 기브온족에 관련하여 언급되어 있다. 여호수아서에서:
이제 너희는 저주되어진다, 그리고 너는 평생 종노릇해야 할 것이다. 너희는 내 하느님의 집을 위해 장작을 패고 물을 길어와야 할 것이다: 그리고 여호수아는 그 날 그들이 이스라 엘 회중을 위해, 특히 여호와의 제단을 위해 물을 긷고 장작을 패게 했다 (여. 9:23, 27).
위 인용 구절은 그들에게 속아서 사전에 맺은 약속 때문에 그들을 섬멸하지 못한 결과로 있어진 그들에 대한 형벌의 명령이다. 이리하여 외국인들에 대한 법이 전해 내려온 것은, 그들이 성문을 열고, 평화를 원하면, 그들로부터 조공을 받고 자기들을 섬기게 하는 것이다 (신. 22; 왕상. 9:21, 22). 유대 교회에 관련하여 말씀 안에 쓰여진 모든 것은 주님의 왕국에 있는 것을 표현하였다. 주님의 왕국은, 이 왕국 안에 누구이든, 무엇이든 어떤 쓸모 있음(use)을 수행해야만 한다. 주님의 왕국 안에서 주님에 의해 중요시되는 것은 쓸모 있음 밖에 더 없다. 지옥에 있는 자들조차 거기 나름대로의 어떤 쓸모 있음이 있으나, 그것은 최하위의 비열한 쓸모 있음, 악용이라 표현해야 마땅할 것이다. 다른 삶에 있는 이들 중에서 비천한 쓸모 있음을 수행하는 이들은 내적 예배에서 분리된 외적 예배에서만 있는 이들이다.
더 나아가 (다른 삶에서) 유대 교회에 있는 표현물들은 표현한 것이나 인물을 생각하지 않고 그 인물이 물건을 통해 표현된 의미만을 생각한다; 예를 들면, 유대인들의 경우, 그들은 결단코 천적 인간들은 아니었지만, 그들은 천적 인간을 표현했다; 이스라엘의 경우, 그가 영적 인간은 아니었지만, 그는 영적 인간을 표현했다; 야곱과 그의 아들들 역시 이런 식이다. 왕들과 성직자들 역시, 그들을 수단으로 주님의 왕권과 거룩함이 표현되었다. 이는 생명 없는 표현물(물건들)을 두고도 마찬가지이다. 즉 아론의 의복, 제단 자체, 빵을 위한 식탁, 등불, 빵과 포도주, 이 외에도 수소들, 거세된 수소들, 염소들, 양들, 염소 새끼들, 어린 양들, 산비둘기와 집비둘기(호도애). 그리고 유다 (왕국)과 이스라엘 (왕국)의 아들들은 주님의 교회의 내적, 외적 예배를 표현하였다. 이 두 예배보다 더 외적인 예배, 즉 외적인 것들에만 있는 예배(완전 외적 예배)가 이 본문의 의미에 따르면 “가나안”이라 불릴지 모른다.

“셈”에 의해, “야벳”에 의해 뜻해진 것, 하나는 내적 교회의 사람, 또 하나는 외적 교회의 삶이다; 이로부터 “가나안”에 의해 뜻해진 것은 이 두 교회의 사람의 의미와 차이점을 숙고해보아도 분명해진다. 내적 교회의 사람은 자기가 행하는 모든 선, 그가 생각하는 모든 진리의 공로를 주님께 돌린다; 그러나 외적 교회의 사람도 선인 것을 행하기는 하나 이 선의 원인과 결과를 모른다. 내적 교회의 사람은 선행으로부터 주님에 대한 예배를 만든다. 그런고로 내적 예배가 그들의 예배의 실체를 이루고 외적 예배는 이 예배에 부수적으로 따라 붙는다; 그러나 외적 교회의 사람은 외적 예배를 그들의 예배의 실체를 만든다. 그들은 설사 내적 예배를 가지고 있다 해도 그 예배가 무엇인지 모른다. 내적 교회의 사람은 만일 자기가 내적인 것으로부터 주님을 예배하지 않으면, 자기는 자기 양심에 거슬려 행동한다고 믿는다; 그 반면, 외적 교회의 사람은 만일 자기가 외적 의식을 신성시하게 준행하지 않으면, 자기는 자기 양심에 거슬려 행동한다고 믿는다. 내적 교회의 사람의 양심 안에는 많은 내용물이 있다. 그 이유는 그가 말씀의 내적 의미로부터 많은 것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외적 교회의 사람의 양심 안에는 아주 적은 내용물이 있을 뿐이다. 그 이유는 그는 말씀의 내적 의미로부터서 가진 것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내적 교회의 사람이 “셈”이라고, 외적 교회의 사람이 “야벳”이라 불리우고 있다. 그러나 외적인 것들만에서 (내적인 것은 흔적도 완전히 없는 상태)의 예배를 만드는 이들, 그래서 선행이 없고, 그 결과 양심이 없는 자들이 “가나안”이라 불리운다.

27절. 하느님께서 야벳을 확대시켜 주시기를 빕니다, 그리고 그가 셈의 천막에서 거주하기를 빕니다. 그리고 가나안은 그의 종이 되리라.

“야벳”에 의해 상응되는 교회가 의미되었다는 것은 이미 상술했다. 또한 외적 교회에 의해 뜻해지는 것, 즉 외적 예배에 있는 이들, 그런 고로 내적 인간에 속하는 어떤 것은 없으나 선행 안에서 살고 있는 이들이 뜻해진다. 이들과 더불어서도 주님은 (내적 예배에 있는 이들에게 현존 하시듯) 동등하게 현존하신다. 그 이유가 주님께서는 선행이 어디에 존재하든 선행이 있는 곳에서 선행을 통하여 역사하시기 때문이다. 이런 측면과 비슷한 예가 아마 어린 아이일 것이다. 이들은 선행이 무엇인지 모른다, 신앙이 무엇인지는 더욱 모른다. 그럼에도 주님은 그들과 현존하시고, 특히 그들이 선행 안에 함께 살 때 어른들이 선행 안에 살 때보다 더욱 강력하게 (더 친밀하게) 현존하신다. 이와 거의 맞먹는 수준일 경우라면, 순진, 선행, 자비를 가진 천진난만한 이들(the simple)과 더불은 주님의 현존일 것이다. 많은 것을 알고 있는데, 그것에 따라 살지 않는 이들의 경우는 이와 반대이고, (다른 삶에서도) 쓸모 없음(useless)이다. 그 이유가 알고 있는 것이 선이 되어가지 않는다면, 안다는 것의 목적은 사라진 셈이기 때문이다. 그가 지닌 앎이 적다해도 그것이 선이 되어갈 때, 그는 무수히 알고 선은 없는 자에 비해 훨씬 더 많이 알고 있는 셈이다; 그 이유가 후자의 경우는 많은 지식을 수단으로 추구하고 있는 중일지 모르지만, 전자의 경우는 이미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어쨌든 많은 진리들과 선들을 알고, 동시에 선행과 양심을 지닌 이들은 매우 다른 경우이다; 그 이유가 이런 인간이 내적 교회의 인간, 즉 “셈”이다. 적은 것을 알고, 그럼에도 양심을 가진 이들은 다른 삶에서 계발되고, 각자의 역량에 따라 천사가 되고, 표현할 수 없을 정도의 지혜와 총명을 소유해가는데, 이들이 “야벳”에 의해 의미된다.

하느님께서 야벳을 확대시켜 주시기를 빕니다 란 이 교회의 계발을 의미한다. 글자 의미에서 “확대하는 것”은 경계선을 넓히는 것, 그러나 내적 의미에서 “확대하는 것”은 계발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 이유가 계발됨은 지혜와 총명의 경계선들을 확대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사야서에서:
네 천막터를 확대하라, 그리고 너희 주택들의 커튼들을 넓게 펼쳐라 (이. 54:2).
영적인 것들에서 계발됨을 의미한다. 외적 교회의 사람은 신앙의 진리들과 선들에서 가르침을 받을 때, 그는 “확대되어진다”; 그가 선행 안에 있을 때, 이것 때문에 그는 더욱 더 확증되어진다; 이 외에도, 그가 가르침을 더 받으면, 더 그의 지적 부분의 구름은 흩어진다. 이 지적 부분으로부터, 즉 이 지적 부분 안에 선행과 양심이 있다.

그리고 그는 셈의 천막들에서 거주할 것이다. 이는 예배의 내적인 것이 외적인 것 안에 있을 수도 있는 질서에서를 의미한다. 이는 앞서 셈에 관한 모든 것으로부터 분명해진다. 즉 “셈”은 내적 교회, 또는 내적 예배이다. 그리고 외적 예배는 내적 예배가 살아있게, 또는 신성하게 해주지 않으면 사실상 죽은 일상적인 일 밖에, 또는 불결한 것의 수준 밖에 더 아니다. “천막들”은 사랑의 거룩한 것, 그리고 이로부터 파생되는 예배 밖에 더 다른 의미가 없다는 것은 “천막”의 의미로부터 분명해진다. “여행함”, “천막들에 거주함”이라 말하는 것은 고대인들의 관습적 표현에 해당되는 말인데, 이를 수단으로 거룩한 예배가 의미되었다. 그 이유는 태고인들은 천막들을 지니고 여행했을 뿐 아니라 천막 안에서 거주했고, 천막 안에서 거룩한 예배를 수행했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여행함”, “거주함”이 내적 의미에서 사는 것을 의미했다.
“천막들”이 거룩한 예배를 의미하는 것에 관한 인용 구절은 앞에서도 살핀바 있는데, 거기에 더하여 아래에 인용을 해본다 다윗서에서:
하느님께서 인간 안에 거주하셨던 천막,
즉 실로의 성막을 그분은 버리고 돌보지 않으셨다 (시. 78:60),
위에서 “천막”은 “성전”과 같은 것을 의미한다. 하느님께서 사랑 안에서 인간과 현존하실 때 이 성전에서 하느님께서는 거주하신다라고 말해진다. 거룩한 예배 안에서 사는 사람을 고대인들에 의해 천막으로 불리웠다. 그 후에 성전이라 불리웠다. 이사야서에서:
네 천막터를 확대하고, 네 주택들의 커튼들을 넓게 펼치라 (이. 54:2),
진정한 예배 속에 있는 사항들에 관한 것이 계발됨을 뜻한다. 예레미야서에서:
전체 토지가 황폐된다, 갑자기 내 천막들이 못쓰게 된다, 그리고
나의 커튼들이 한 순간에 못쓰게 된다 (예. 4:20),
위 구절에서 천막이 천막을 뜻하는 것이 아닌, 거룩한 예배를 뜻함이 분명하다. 스가랴서에서:
예루살렘은 본시 그녀의 장소에 다시 거주할 것이다.
여호와께서 유다의 천막들을 구원하실 것이다 (슥. 12:6-7),
위 구절에서, “유다의 천막들”은 사랑의 거룩함으로부터 주님을 예배함을 표시한다.
위 인용구절들로부터 명백해지는 바, “셈의 천막들에서 거주하는 것”, 즉 내적 예배가 외적 예배 안에 있음이 분명해진다. 그러나 인간 야벳, 또는 외적 교회의 사람이 내적 교회가 무엇인지 잘 알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이에 관해 간략히나마 살피고 지나가야할 것 같다. 인간은 자기가 주님에 관하여와 이웃에 관하여 선한 생각들을 가진다고 느끼거나 지각할 때, 그리고 주님과 이웃에게 친절한 직무를 수행하고, 이 수행이 자신의 이득이나 명예를 얻고저 함이 아니라고 느끼거나 지각할 때. 그리고 누군가가 곤경에 빠져있음에 동정심을 느낄 때, 더욱이 신앙의 교리에 관련하여 오류 속에 있는 누군가에게 뭔가 도울 것이 있다고 느낄 때, 그는 자기가 셈의 천막 안에 있음을 알런지 모른다. 즉 자기는 이런 것을 통하여 주님께서 역사하시는 내적인 것을 자기 안에 가지고 있음을 알런지 모른다는 말이다.

그리고 가나안은 그의 종일 것이다. 외적인 것들에서만 예배가 존재하게 만드는 이들은 천한 직무만을 수행할 수 있음을 의미하는 것은 위에서 말해진 것들로부터, 그리고 25, 26절 아래, 종이다고 말해지는 가나안에 관한 내용으로부터 분명해진다. 이와 같은 사람들은 실로 지상에서 주님의 교회의 종들은 아니다. 그 이유가 실지로 이런 부류의 사람들은 지상에서 더 높은 지위를 누리는 자가 허다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사람들, 즉 양심이나 선행이 없고, 예배도 내적인 것 없이 외적인 것들에서만 있게 만든 자들은 다른 삶의 주님의 왕국에서는 종들이다; 그 이유가 그들은 불행해져 있기 때문이다. 거기서 그들이 수행하는 것은 비천한 수준의 섬김들 뿐이다. 거기서 그들이 갖는 비천한 직무는 너무나 많아 여기서 열거하기 힘드나 차후 주님의 신성한 자비 덕분으로 말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어쨌든 다른 삶에서 인간은 누구나 예외없이 어떤 쓸모있음(use)을 수행해야만 한다. 그 이유는 인간은 자기가 세상에 사는 동안, 자기가 존재하는 사회(공동체)나 이웃에 쓸모 있도록 하려는 목적을 위해 태어나지기 때문이고, 다른 삶에서는 주님이 흡족해 하심에 따라 쓸모 있음을 수행해야만 한다. 이런 점은 인간 신체의 경우도 다를 바가 하나도 없다. 신체의 모두 각각의 부분은 제각각의 어떤 쓸모 있음을 수행하고 있다. 즉 마치 아무 가치도 없는 듯한 것들조차, 그 자체 분비물이나 배설물에 불과한 듯한 것조차, 침 같은 타액들, 담즙들, 여타 잘 알려지지 않은 대수롭지 않은 듯한 것에 이르기까지 각기 나름대로 신체의 유지를 위해 쓸모 있음을 수행하고 있다. 이런 것들은 신체 밖으로 버려야할 배설물을 분리하든가, 장을 청소하여 청결을 유지하는 등의 섬김을 반드시 수행하고 있다. 신체가 내버린 똥도 똥거름으로 들판이나 포도원에서는 나름대로 쓸모 있음이 수행된다. 이외 더 많은 실예는 각자 생각해도 많을 것이다.

28, 29절. 그리고 노아는 홍수 이후 삼백 오십 년을 살았다. 29 따라서 노아의 모든 날들은 구백 오십 년이었다. 그리고 그는 죽었다.”
위 구절은 첫 고대 교회의 존속 기간을 의미하고 동시에 그 교회의 상태도 의미한다.

***************************************************

창세기 제 10 장

성경: 창세기 10 장

1. 그리고 이것들은 노아의 아들들, 셈, 함, 야벳의 후예들이다. 그들에게 홍수 후에 아들들이 태어났다.
2. 야벳의 아들들은 고멜, 그리고 마곡, 그리고 마대, 그리고 야완, 두발 그리고 메섹, 그리고 디라스이다.
3. 그리고 고멜의 아들들은 아스그나스, 그리고 리밧, 그리고 도갈마이다.
4. 그리고 야완의 아들들은 엘리사아, 그리고 달시스, 깃딤, 그리고 도다님이다.
5. 이들로부터 그들의 땅에서 나라들의 섬들이, 모든 이들이 자기들의 혀에 따라, 그 들의 가문들에 따라, 그들의 나라들에 관련하여 흩뜨려졌다.
6. 그리고 함의 아들들은 구스, 그리고 미스라임, 그리고 붓, 그리고 가나안이다.
7. 구스의 아들들은 스바, 그리고 하윌라, 그리고 삽다, 그리고 라아마, 그리고 삽드가 이다. 그리고 라아마의 아들들은 세바와 드단이다.
8. 그리고 구스는 니므롯의 아버지이었다. 그는 땅에서 힘센 자가 되기 시작했다.
9. 그는 여호와 앞에서 사냥함에서 힘이 센 자였다. 그러므로 니므롯은 여호와 앞에서 사냥하는데 힘이 센 자였다고 말해져 왔다.
10. 그의 왕국의 시작은 시날 토지에 있는 바벨, 그리고 에렉, 그리고 악갓, 그리고 갈레에서 였다.
11. 그는 그 토지로부터 앗수르로 더 나아갔다. 그리고 니느웨를 건설했다, 그리고 르 호봇과 갈라,
12. 그리고 니느웨와 갈라 사이에 레센을 건설했는데 이 성은 큰 도성이다.
13. 그리고 미스라임은 루딤과 아나밈과 르하빔과 납두힘과
14. 바드루심과 가슬루힘, 그들로부터 불레셋이 나왔고, 그리고 갑도림도 낳았다.
15. 그리고 가나안은 장자 시돈과 헷의 아버지이었다.
16. 이어서 여부스 족속과 아모리 족속과 기르가스 족속과
17. 히위 족속과 알가 족속과 신 족속과
18. 아르왓 족속과 스말 족속과 하맛 족속의 조상을 낳았다 그 후 가나안의 후예들이 두루 퍼졌다.
19. 그리고 가나안의 경계는 시돈으로부터 그랄에 이르러 가사에까지, 소돔과 고모라, 그리고 아드마와 스보임에 이르러 라사까지 였다.
20. 이들은 함의 아들들인데 각기 그들의 족속에 따라, 각기 그들의 말에 따라, 각기 그들의 땅에서, 그들의 나라에서 이다.
21. 셈에게도 역시 출생이 있었다. 그는 에벨의 모든 아들들의 조상이고 야벳의 형이 다.
22. 셈의 아들들은 엘람, 그리고 앗수르, 그리고 아르박삿, 그리고 룯, 그리고 아람이 다.
23. 그리고 아람의 아들들은 우스, 그리고 훌, 그리고 게델, 그리고 마스이다.
24. 그리고 아르박삿은 셀라의 아버지였고, 셀라는 에벨의 아버지였다.
25. 그리고 에벨에게 두 아들이 출생했는데, 그 중 하나의 이름은 벨렉이고, 그의 시 절에 땅이 나뉘었다. 그리고 그의 형제의 이름은 욕단이었다.
26. 욕단은 알모닷과 셀렙과 하살마웻과 예라와
27. 하도람과 우살과 디글라와
28. 오발과 아비마엘과 스바와
29. 오빌과 하윌라와 요밥의 아버지였는데 이들은 다 욕단의 아들이었다.
30. 그들의 거주지는 메사에서부터 스발에 이르는 동쪽의 산이었다.
31. 이들은 셈의 아들들인데, 그들의 가문에 따라, 그들의 언어에 따라, 그들의 땅에 서, 그들의 나라에 따라서 이다.
32. 이들은 노아의 아들들의 족속들인데 그들의 출생지에 따라, 그들의 나라에 따라서 이다. 홍수 후에 이들로부터 땅에는 나라들이 두루 퍼졌다.

각 절의 내적 의미

1절. 그리고 이것들은 노아의 아들들의 태생들이다: 셈, 함, 야벳; 그들에게 홍수 후에 아들들이 태어났다.

이것들은 노아의 아들들의 태생들이다. 이것이 일반적으로 “노아”라 불리는 고대 교회의 예배들과 교리물들의 갈래들이 의미됨은 “태생들”의 의미로부터 분명해진다. 외적, 글자 의미에서 “태생들” 또는 “출생들”은 서로로부터 이어지는 세대들이다; 그러나 내적 의미에서의 모든 것들은 천적인 것과 영적인 것, 즉 사랑과 신앙에 관련되고 있다. 그런고로 여기서 “태생들”은 교회에 관한 것들, 결과적으로 교리적인 사항들인데, 이어지는 대목에서 더 분명해질 것이다.

셈, 함, 야벳. 이들은 여러 번 말한 바 같이 “셈”은 진정한 내적 예배를, “함”은 부패된 내적 예배를, “야벳”은 내적 예배에 상응하는 외적 예배를 의미하는 것은 이미 상술한 것으로부터 분명해진다 거기서 셈, 함, 야벳이 예배의 종류들을 의미한다는 것, 뿐만 아니라 진정한 예배, 또는 셈이 무엇을 뜻하는지, 또한 내적 예배에 상응하는 외적 예배, 야벳에 의해 뜻해지는 것도 상술했는 바, 여기서는 생략할 것이다.

그리고 그들에게 아들들이 태어났다. 이것들은 거기로부터 갈라져 나온 교리물들을 의미한다는 것은 “아들들”이 내적 의미에서 신앙의 진리, 또한 거짓들, 결과적으로 교리적인 사항들이다는 것으로부터 분명해진다; 아들들을 수단으로 진실된 것과 거짓된 것 모두를 의미하는 이유는 둘 모두 교회의 교리물들이기 때문이다.

홍수 후에. 이것은 이 새로운 교회가 일어났던 때로부터를 의미하는 것은 앞 장에서 말해진 사항으로부터 분명해진다; 그 이유가 태고 교회의 끝장이 홍수에 의해 묘사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한 고대 교회의 시작도 의미되기 때문이다. 홍수 이전의 교회가 태고 교회라고 불리운 한편, 홍수 이후 교회는 고대 교회라 불리웠다는 것, 이 두 교회의 이름은 마음에 잘 간직하기 바란다.

2절. 야벳의 아들들은 고멜, 그리고 마곡, 그리고 마대, 그리고 야완, 두발 그리고 메섹, 그리고 디라스이다.

야벳의 아들들. 이들은 내적 예배에 상응하는 외적 예배를 가진 이들을 의미한다는 것은 앞에서 설명한 바 있다. 예배의 실체인 것이 외적 예배 안에 있을 때, 이 외적 예배는 내적 예배와 상응한다고 말해진다. 이 실체는 심정으로부터 주님을 경배함이다; 이 경배함은 선행, 또는 이웃 사랑이 있지 않으면 결코 가능해질 수 없다. 선행, 또는 이웃을 향한 사랑 안에 주님이 현존하신다, 그리고 그때에야 그분은 심정으로부터 경배되어질 수 있다. 그런고로 경배함은 주님으로부터 있다. 그 이유가 주님께서 경배함 안에 모든 능력과 모든 있음을 주시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실상 인간 안에 선행이 있고, 경배함, 또는 예배도 있는 것이다. 모든 예배는 경배함이다, 그 이유는 주님을 경배함이 예배 안에 있어야 예배가 되어지기 때문이다. 야벳의 아들들, 또는 “야벳의 아들들”이라 불린 민족이나 사람들은 서로의 선행 안에서, 우정 관계에서, 예절 있음에서, 천진난만함에서 살았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그들의 예배 안에 현존하셨다. 그 이유가 주님께서 외적 예배 안에 현존하실 때, 외적 예배 안에 내적 예배가 있기 때문이다. 이전에는 이런 민족들이 아주 많았다. 그리고 오늘날 외적 예배를 잘 준수하기는 하나 내적 예배가 무엇인지 모르는 이들, 또는 내적 예배를 들었기는 했어도 이런 예배를 곰곰이 생각하지 않는 이들이 있다. 만일 이들이 주님을 인정하고 이웃을 사랑하고 있다면, 주님은 그들의 예배 안에 계시고 그들은 야벳의 아들들인 셈이다; 그러나 만일 그들이 주님을 부정하고 자신들만을 사랑하며, 이웃 사랑에 관심이 없고, 더 나아가 그들을 미워하고 있다면 그들의 예배는 내적 예배로부터 분리된 외적 예배요, 그들은 가나안의 아들들, 또는 가나안족인 셈이다.

고멜, 그리고 마곡, 그리고 마대, 그리고 야완, 두발 그리고 메섹, 그리고 디라스이다. 이들은 이런저런 예배가 존재한 아주 많은 나라(민족, 족속)이다는 것, 그리고 내적 의미에서 그들은 아주 많은 교리물들을, 그러나 의식들은 같았다는 것, 이 의식을 모두들은 경건하게 지켜왔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이 이름들이 등장하는 말씀의 많은 곳으로부터 분명해진다; 그 이유가 말씀의 각 대목에서 있는 그들은 외적 예배를 의미하는데, 때로는 내적 예배에 상응하는 외적 예배, 때로는 그 반대되는 예배도 의미한다. 때로 그들이 반대적 의미를 표현하는 이유는 모든 교회들이 시간의 흐름에서 변하는데, 심할 경우 반대적으로도 변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명명된 나라(민족)들이 외적 예배, 결과적으로 그들의 의식 절차에 관한 교리물들밖에 더 아니다는 것은 본문 외에도 말씀의 여러 곳에서 확인해 볼 수 있다. 특별히 예언서에서 이다.
그로, 마곡, 메섹, 두발, 그리고 고멜에 관해 이렇게 에스겔서에 쓰여 있다
사람의 아들아, 네 얼굴을 곡, 마곡의 토지, 제 1 인 자, 메섹과 두발의 우두머리를 향하여 있게 하라; 그리고 그를 향해 예언하여 말하기를, 그런고로 주 여호비께서 말하신다, 잘보 라, 나는 네게 맞서 있다, 곡이여, 제 1 인 자, 메섹과 두발의 우두머리야, 그리고 나는 네 게로 돌아서서, 그리고 네 턱에 갈고리를 놓고, 그리고 나는 너를 끌어갈 것이며, 그리고 모든 네 군대, 말들, 마병들, 완전 무장한 그들 모두, (즉) 큰 방패와 작은 방패를 갖춘 집 단들, 검을 휘두르는 그들 모두도 (끌어갈 것이다); 바사, 구스, 그리고 그들과 더불은 붓; 그리고 그들과 더불어 고멜과 모든 그의 무리들; 북쪽 측면에서 도갈마의 가문과 그의 모 든 무리들(을 끌어갈 것이다). 최후 년도에 너는 검으로부터 되돌려진 토지로 가라, 거기에 황무해지게 만들었던 곳, 이스라엘의 산 위에 많은 백성들로부터 모여질 것이다
(겔 3 8:2-6, 8).
위 에스겔 38장 전체는 교회를 취급하고 있다. 이 교회들은 뒤집힌 교회들이다. 더 나아가 모든 예배를 외적인 것들에서만, 또는 의식치례에만 두었던 교회들이다; “이스라엘의 산”에 의미된 선행은 소멸되어져 있다. 여기서 “곡, 그리고 마곡의 토지 제 1 인 자와 메섹과 두발의 우두머리”는 외적인 것들에서의 예배이다. 이 절을 읽는 자 누구라도 짐작되는 것은 이 대목의 곡과 마곡은 어느 인간 역사의 한 토막을 연재하는 것이 아니다는 것이다. 그 이유가 주님의 말씀은 여느 세상사를 취급하지 않고 대목 안에 신성한 것들을 포옹하고 있기 때문이다.
에스겔서에서:
곡 위에 예언하라, 그리고 말하라, 그런고로 주 여호비께서 말하신다, 잘 보라 나는 너에 맞서 있다, 곡이여, 제 1 인 자, 메섹과 두발의 우두머리여; 그리고 나는 네게 되돌아가서, 너의 육분의 일을 가져갈 것이다, 나는 너로 북쪽 측면으로부터 올라오도록 할 것이다, 그 리고 이스라엘의 산 위로 너를 데려올 것이다; 이스라엘의 산 위에서 너는 엎드러질 것이 다, 그리고 모든 네 무리들도, 너와 함께한 사람도 엎드려지고 말 것이다
(겔 39:1, 2, 4).
겔 39장 전체는 내적 예배와 분리된 외적 예배, 그리고 우상화한 교회, 이것이 곡, 메셀, 두발에 의해 여기서 의미되고, 이들을 수단으로 그들이 받은 교리물들 역시 뜻해진다, 그 후에 이 교리물들은 말씀의 글자 의미들을 가지고 확증하므로 진리가 거짓화되고 내적 예배는 파괴됨을 뜻해준다. 이는 같은 나라(민족)들에 의해 두 의미 측면 중 반대 의미를 갖는 경우이다.
계시록서에서:
그리고 천년이 끝날 때, 사탄은 그의 감옥에서 풀려날 것이다; 그리고 땅의 네 모퉁이들, 즉 곡과 마곡을 꾀어서 그들을 함께 모아서 전쟁을 하려고 나갈 것이다; 이들의 숫자는 바 다의 모래 같다; 그리고 그들은 땅의 평지(plain)에서 올라 갔다, 그리고 거룩한 사람들의 진영과 사랑되어진 도성을 에워쌌다; 그리고 불이 하느님으로부터 천국의 안에서 밖으로 내려왔고 그들을 태웠다 (계. 20:7-9);
위 구절에서 곡과 마곡은 같은 의미를 가진다. 내적 예배로부터 분리된 외적 예배, 즉 주님을 사랑함과 이웃을 향한 사랑에서 분리된 외적 예배는 우상 예배밖에 더 아닌바, 거룩한 사람들의 진영, 그리고 사랑되어진 성을 에워싸고 있다.
메섹과 두발에 관해서 에스겔서에서 말해진다:
메섹, 두발, 그리고 그녀의 모든 무리들이 있다; 그녀의 무덤들이 그녀 주변에 있다; 그들 의 모두가 할례받지 않았고, 검으로 살해되었다; 그 이유가 그들은 생명있는 토지에서 그들 의 공포의 원인이 되었다 (겔 32:26).
위 구절의 주제는 이집트이다, 또는 인간과 더불어 있는 기억 속의 지식들이 영적인 것들을 조사하고 싶어함이다. “메섹과 두발”은 의식들을 설명한 교리물들이다. 이것들이 사랑이 없을 때 “할례받지 않았다”라고 말해진다. 이로부터 교리물들은 검에 의해 죽임을 당하고, 생명있는 토지에서 공포의 교리물로 전락되고 만다.
[6] 야완에 관해서 요엘서에서 말해진다:
유다의 아들들과 예루살렘의 아들들은 너희가 그들의 경계선 멀리로 옮겨 놓은 야완족의 아들들에게 팔리워졌다 (욜. 3:6).
“유다의 아들들”은 신앙의 천적인 것들을; “예루살렘의 아들들”은 신앙의 영적인 것들을, 고로 모두 내적인 것들을 표시한다; 그리고 “야완족의 아들들”은 내적인 예배로부터 분리된 외적인 것에서의 예배를 표시한다. 이 예배가 내적인 것에서 아주 폭넓게 떨어졌기 때문에, 그들은 “그들의 경계선으로부터 멀리 그들을 옮겼다”라고 말해진다.
[7] 야완과 두발은 진정한 외적 예배 자체를 표시한다. 이사야서에서:
내가 모든 민족들과 혀들을 모을 때가 올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와서 내 영광을 볼 것이 다. 그리고 나는 그들 사이에 표시를 놓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들 중의 피신한 자를 나 라들에게 보낼 것인데, 즉 다르싯, 불(Pul), 룻(Lud), 이들은 활을 당긴다, 두발과 야완에 게, 멀리 떨어진 섬(들에 있는 민족들이다), 이들은 내 명성을 듣지 못했고, 내 영광을 보 지 못했던 (민족들이다); 그리고 그들은 민족들 사이에서 내 영광을 선포하리라
(이. 66:18, 19).
위 문장의 주제는 주님의 왕국과 그분의 오심이다. “두발과 야완”은 내적 예배에 상응하는 외적 예배 안에 있는 이들을 표시한다. 이들은 내적인 사항에 관하여 훈육되어진다.

3, 4절. 그리고 고멜의 아들들은 아스그나스, 그리고 리밧, 그리고 도갈마이다. 4 그리고 야완의 아들들은 엘리사아, 그리고 달시스, 깃딤, 그리고 도다님이다.

그리고 고멜의 아들들. 이들에 의해 고멜이라는 나라로부터 갈라져 나온 외적 예배를 가졌던 이들이 의미하는데, 이는 “아들들”에 대하여 살핀 내용으로부터 분명해진다; 그리고 고멜은 내적 예배에 상응하는 외적 예배를 가졌던 나라 중의 하나였다는 사실로부터도 분명해진다. 이와 같은 예배를 가졌던 여러 나라들이 앞의 구절들에서 명명되었다. 여기서 다시 일곱 나라들이 있다. 이 나라들이 “고멜의 아들들”과 “야완의 아들들”이라 불리운다; 그러나 고멜과 야완 사이의 차이점은 본문만 가지고는 말해질 수 없다. 그 이유는 이름들만 언급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언서들에서, 교회의 이것과 저것이 취급되면서, 특별하게 차이점이 구분되어질 수는 있는 것 같다. 일반적으로, 외적 예배 측면에서의 동일하지 않음은 내적 예배 측면에서의 동일하지 않음과 같은 바, 예배에 있는 주님을 경배함에 따라 있다. 그리고 경배함은 주님을 사랑함과 이웃을 향한 사랑에 의거 있다. 그 이유가 주님은 사랑 안에 현존하시고, 그렇기 때문에 예배 안에도 현존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언급된 나라들 사이의 예배에 관한 차이점은 위와 같은 속성으로부터 있다.
어떻게 예배의 동일하지 않음이 있었는지, 그리고 고대 교회에서 다양한 나라들과 더불어 이런 예배가 어떠했었는지를 좀 더 알 수 있는 방법은 우선 모든 진정한 예배는 주님을 경배함에, 주님을 경배하되 겸허함에서, 그리고 이 겸허함은 자신 안에 살아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는 것, 그리고 선은 하나도 없다는 것, 오로지 자기 안의 모든 것은 죽어있다는 것, 한마디로 송장에 불과함을 인정함을 바탕으로 깔고 있어야 한다는 것; 그리고 살아있는 모든 것과 선한 모든 것은 주님으로부터서만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인간이 위 사항을 입이 아닌 심정으로부터 더 인정할 수록, 더 그는 겸허 안에 머문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그는 더 경배함 안에, 즉 진정한 예배 안에 있고, 그리고 더 그가 사랑 안에 있으면, 그만큼 더 행복함 안에 있다. 이 두 가지는 이것이 저것 안에, 저것이 이것 안에 있는 바, 분리될 수 없는 관계이다. 이로부터 예배의 차이점이 무엇이고 무엇으로부터 있는지가 분명해질 것이다.
여기서 이야기되는 이들, 그리고 “고멜과 야완의 아들들”은 내적 예배에 상응하는 외적 예배를 가졌던 이들, 그러나 여하간 앞 절에서 명명되었던 이들보다 더 먼 외적 예배를 가졌다. 이 이유 때문에 그들은 “아들들”이라 불린다. 인간 세대들이 계속적으로 내려가고 갈라져나가는 동안 여기서의 경우 같이 내면으로부터 외면으로 진행하고 있다. 감각적 인간이 더 되어가면, 그의 예배는 더 외면적으로 되어간다. 결과적으로 주님의 진정한 예배로부터 더 멀어진다; 그 이유가 예배가 세상적인 것, 육체적인 것, 지상적인 것을 더 함께하려 하고, 영적인 것은 덜 함께하려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진정한 주님의) 예배는 더 멀리 있다. 이들, “고멜과 야완의 아들들”이라 불리는 이들, 더 감각적인 바, 그들은 부모나 친척들보다 그들이 가진 예배는 더 외적인 것들로 차 있다. 그러므로 여기서 그들이 두 번째 종류를 구성한다.

아스그나스, 리밧, 그리고 도갈마. 이들은 이와 같은 예배를 가진 많은 나라들이다는 것, 그리고 그들은 의식을 설명한 많은 교리물들을 의미한다는 것, 고멜의 외적 예배로부터 갈라져 나왔다는 것은 이 이름들이 등장하는 예언서들, 그리고 그들을 수단으로 각 처에 있는 교리물들이나 의식들을 의미한 바로부터 분명해진다. 이들이 등장하는 구절 역시 순수 의미와 반대 의미가 상황에 따라 뜻해지는 것은 같다. “아스그나스”에 관해 예레미야서에서:
너는 토지에 군기를 꽂거라, 나라들 사이에서 나팔을 불어라, 그녀에 맞서 나라들을 신성하 게 하라, 그녀에 맞서 아라랏, 민니, 아스그나스 왕국들로 귀기울이게 하라 (예. 51:27).
위 구절의 주제는 바벨의 파멸이다, 거기서 “아스그나스”는 내적 예배로부터 분리된 외적 예배, 또는 우상 예배를 표시한다. 특별하게는, 거짓 교리물들을 표시한다, 그러므로 반대 의미에서 언급되고 있다. “도갈마”에 관해 에스겔서에서:
야완, 두발, 그리고 메섹, 이들은 인간의 혼들을 사고파는 거래상이었고 너희 장사에서 놋 그릇을 공급했다. 도갈마 가문의 그들은 너를 도운 것들, 말들, 마병들, 그리고 노새들을 조 달했다 (겔. 27:13, 14).
위 구절은 두로에 관련하여 말해진다, 이를 수단으로 그들은 천적, 영적인 것들에 관한 지식을 소유한 이들을 표현했다 “야완, 두발, 그리고 메섹,”은 다양한 표현물, 의식들을 표시하는데 이미 언급한 바 있다. “도갈마의 가문”도 같은 것을 표시한다. 전자의 외적 의식들은 천적인 것들에, 후자는 영적인 것들에 관련된다. 또는 “도갈마의 가문”은 영적인 것들에 관련된다. 이는 그들이 거래한 내역으로부터 분명해진다. 여기서 그들은 진짜 의미에서 언급되고 있다.

그리고 야완의 아들들. 이들도 여전히 외적 예배를 가졌던 다른 이들, 야완의 나라에서 유행했던 예배로부터 갈라져 나온 다른 예배들을 의미하는데, 이는 앞 항목에서 같이 예언서들에서 언급된 대목으로부터 분명해진다. 거기서 이들은 실제의 것들 자체와 연결되어 명명되어지고 있는데, 그 안에서 예배 외의 다른 것은 의미하지 않는다. 2절의 일곱 명에서 고멜의 아들들과 야완의 아들들이 언급되고, 다른 아들들이 언급되지 않는 이유는 하나는 영적 범주에 속하는 것들에, 다른 하나는 천적 범주에 속하는 것들에 관련되기 때문이다. 고멜의 아들들은 영적인 것의 범주에 속하는 것은 방금 위에서 인용한 구절로부터 분명해진다; 그리고 야완의 아들들은 천적인 것들의 범주에 속한다는 것은 이어지는 것으로부터 나타난다. 영적인 것의 범주가 천적인 것의 범주와 구별되는 것은 이와 같다. 즉 전자는 신앙의 진리들에 관련되고, 후자는 신앙의 선들, 즉 선행의 선들에 관련된다. 비록 이런 구분들이 세상에는 통째로 알려진 바 없다 해도, 천국에서는 완전하게 알려져 있다. 이 구분은 일반적, 뿐만 아니라 세세한 점에서도 일일이 구분되고 있다; 그 이유가 천국에서는 최고의 완전한 질서에 따라 구분되지 않는 미세한 구분은 없기 때문이다. 세상에 알려진 것이라고는 세상의 예배는 매우 다양하다는 것, 예배의 외적 측면에서도 그들은 서로로부터 다르다 말하는 것밖에 없다. 그러나 천국에서의 예배가 서로 차이가 있는 것은 무수하고 그 예배 하나하나가 예배자의 생활에서 나타나고, 실로 내적 측면에서 있는 것도 마찬가지로 나타난다.

엘리사아, 그리고 다르싯, 깃딤, 그리고 도다님. 이들은 아주 많은 나라들이었다는 것, 이들과 더불어 외적 예배가 있었다는 것, 그리고 그들은 의식들을 설명한 아주 많은 교리물들을 가졌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는 예언서들의 아래 인용 구절로부터도 보여질지 모른다. “엘리사아”에 관해 에스겔서에서:
이집트로부터 수를 놓아 작업한 고운 아마옷은 네 펼쳐짐이었고, 이것은 (너희 배의) 깃발 로 네게 있을런지 모른다; 엘리사아의 섬으로부터 푸르고 심홍색 (천)이 네 덮개(차일, 돛) 였다 (겔. 27:7).
위 구절이 취급한 주제는 두로이다, 이를 수단으로 천적이고 영적인 재물, 또는 지식들을 소유한 이들이 의미되어진다; “이집트로부터의 수를 놓은 작업”은 기억 속의 지식들을 표시한다, 그런고로 영적인 것들을 표현하는 의식들을 표시한다; “엘리사아의 섬으로부터의 푸르고 심홍색 (천)”은 내적 예배에 상응하는 의식들, 고로 천적인 것들을 표현하는 의식들을 표시한다. 여기서 사용된 단어들은 진짜 의미 측면에서이다. “다르싯”에 관해 이사야서에서:
나는 그들 중의 피신한 자들을 나라들에, 다르싯과 불, 활을 당기는 룻에, 두발과 야완에, 멀리 떨어진 섬들에 보낼 것이다 (이. 66:19).
이사야서에서:
악쓰거라, 다르싯의 너희 배들아, 그 이유가 두로가 황폐해져, 들락거릴 집이 없기 때문이 다; 깃딤의 토지로부터 그들에게 밝히 알려질 것이다 (이. 23:1, 14).
이외 다르싯에 관한 더 많은 구절은 이. 60:9; 예. 10:9; 겔. 27:12; 시. 48:7를 읽으면 될 것이다. 거기서 두로가 의식들, 즉 교리물들을 표시하고 있다. “깃딤”에 관해서 예레미야서에서:
깃딤의 섬들을 통과하며 보라; 그리고 아라비아로, 그리고 열심히 숙고하라, 이와 같은 것 이 있었는지 여부를 (예. 2:10).
그리고 이사야서에서:
너는 더 이상 기뻐환호하지 않을 것이다, 오 너 압제받는 시돈의 딸 처녀여; 일어나라, 깃 딤을 통과하라; 거기조차 너는 쉴 곳을 가지지 못할 것이다 (이. 33:12).
위에서 “깃딤”은 의식들을 나타낸다. 에스겔서에서:
그들은 바산의 상수리나무로부터 네 노(oar)들을 만들었다; 그들은 깃딤의 섬들로부터 상 아의 네 넓은 판자(plank)들을, 층계(step)들의 딸을 만들었다 (겔. 27:6).
이것은 두로에 관해 말해진 것이다; “깃딤의 섬으로부터 배의 넓은 판자들”은 예배의 외적인 것들, 고로 의식들을 표시한다. 이는 천적인 것들의 범주에 관계되고 있다. 모세의 책에서:
배들이 깃딤의 해안으로부터 온다, 그리고 그들은 앗수르를 괴롭힐 것이다, 그리고 에벨을 괴롭힐 것이다 (민. 24:24),
위에서 “깃딤” 역시 외적인 예배, 또는 의식들을 표시한다. 이로부터 이런 모든 이름들에 의해 내적 의미에 있는 더 깊은 수준의 것들이 의미되어지는데, 이것들은 그것들 자신의 정규적인 질서와 연결하여 배열되어져 있다.

5절. 이들로부터 그들의 토지들에서 나라들의 섬들이, 모든 이들이 자기의 혀에 따라, 그들의 족속(가문)들에 따라, 그들의 나라들에 관련하여 흩뜨려졌다.

이들로부터 나라들의 섬들이 그들의 토지들에서 흩트려졌다. 이는 많은 나라들의 예배들이 이런 것들로부터 근원되었다는 것, 즉 “섬들”은 세부적인 지역들, 고로 훨씬 더 멀리 떨어진 세부적인 예배들이다는 것, 그리고 “토지들”은 그들의 일반적(전체적) 측면에서 훨씬 더 멀리 떨어진 예배들이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는 말씀에서 “섬들”의 의미로부터 분명해진다. 고로 내적 예배에 상응하는 외적 예배를 가진 멀리 있는 그들이 취급되었다는 말이다. 야벳의 일곱 아들들에 의해서는 진정한 내적 예배에 더 가까이 접근한 이들이 의미되어진다; 고멜과 야완의 일곱 아들들에 의해서는 진정한 내적 예배로부터 더 멀리 떨어진 이들이 의미되어진다. “나라들의 섬들”에 의해서는 진정한 내적 예배로부터 한참 더 멀리 떨어진 이들, 적당한 의미로는 서로의 상호적 선행 안에 살았던 이들, 그러나 아직은 무지함에 있어, 주님에 관해, 교회의 신앙의 교리물들에 관해 아무 것도 모르고 있는 이들이다; 그러나 그들은 종교적으로 준행하는 어떤 외적 예배를 가졌던 이들이다. 이런 이들이 말씀에서 “섬들”이라 불리운다, 그러므로 “섬들”은 내적 의미에서 내적 예배로부터 더 멀리 떨어진 예배를 의미한다.
천사들 같이 말씀의 내적 의미 안에 있는 그들은 (자연계의) 섬에 관한 지식들은 없다, 그 이유는 그들은 자연계에 관련해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섬들 대신 그들은 더 멀리 있는 예배, 즉 교회 안에서의 예배가 아닌 교회 밖 어떤 나라가 가지는 예배 같은 것을 생각한다. 마찬가지 방식에서 천사들은 “섬들”을 수단으로 선행으로부터 멀리 있는 교회 내의 어떤 것들, 즉 우정이나 정중함(civility) 같은 것을 생각한다. 우정은 선행이 아니다, 정중함은 더욱 더 선행이 아니다. 여하간 이것들은 선행 아래 수준이다; 어쨌든 이것들이 선행으로부터 파생될수록 더 진지함을 지닌다.
“섬들”에 관한 이런 내용들은 말씀으로부터 인용한 아래 구절로부터 더 살펴 볼 수 있다. 이사야서에서:
내 앞에서 침묵하라, 오 섬들아; 그리고 백성들이 그들의 힘을 새로이 하게 하자, 그들이 가까이 오게 하자. 섬들이 보았다, 그리고 두려웠다; 땅의 끝들이 전율했다; 그들은 가까이 당겨졌다, 그리고 왔다 (41:1, 5).
위에서 “섬들”은 종교적으로 자기들 나름대로의 외적 예배를 준행한 교회가 아닌 직바른 나라를 표시한다. 교회가 존재하는 지역 중에서 가장 먼 한계선이 “땅의 끝들”이라 불리운다. 이사야서에서:
그분은 어두움에 계시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조각으로 깨어지지 않으실 것인데, 그분이 땅 에 공정을 건립하실 때까지이다, 그리고 섬들이 그분의 법을 기다릴 것이다. 여호와에게 새로운 노래를 불러라, 땅의 끝으로부터 그분을 찬양하라, 바다로 내려가는 너희들과 바다 에 가득한 것들아, 섬들과 거기 있는 주민들아. 그들이 여호와께 영광을 드리게 하자, 그리 고 섬들에서 그분의 찬양을 선포하라 (이. 42:4, 10, 12).
여기서도 역시 “섬들”은 교회가 아닌 나라들을 표시한다. 이 나라들은 무지함에, 천진난만함에, 그리고 직바름에서 살았던 이들이다.
이사야서에서:
나에게서 듣거라, 오 섬들아, 그리고 귀 기울여라, 멀리 있는 너희 사람들아 (이. 49:1).
위 구절 역시 주님을 예배함과 신앙에 관한 지식들로부터 더 멀리 있는 나라들을 표시한다, 그러므로 “멀리 있는” 이라고 말해진다. 이사야서에서:
섬들이 내 안에 그들의 희망을 둘 것이다, 그리고 나의 팔에서 그들은 기다릴 것이다
(이. 51:5),
위의 “섬들”은 앞 구절과 같은 사람들을 표시한다. 그 이유는 그들이 직바름에서 살았기 때문인데, 그래서 말해지기를, “그들은 나에게 그들의 희망을 두고 있다, 그리고 나의 팔에서 그들은 기다릴 것이다.” 예레미야서에서:
여호와의 말씀을 들어라, 오 너희 나라들아, 그리고 그것을 저 멀리 있는 섬들에게 선포하 라 (예. 31:10),
이 구절도 앞 구절과 같은 사람들을 표시한다. 스바냐서에서: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두려워함을 주실 것이다, 그 이유가 굶주림으로 그분은 땅의 모든 신 들을 소멸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은 그분에게 자신들을 구부려 절할 것인데, 모 든 이가 자기 장소에서, 나라들의 모든 섬들까지도. (절할 것이다) (습. 2:11).
위의 “나라들의 섬들”은 신앙의 지식으로부터 더 멀리 떨어진 나라들을 표시한다.
다윗서에서:
여호와께서 다스리신다; 땅은 기뻐 환호하라; 수많은 섬들이 즐거울 것이다. 구름들과 어둠 들이 그분을 빙둘러 있다 (시. 97:1, 2),
위 구절의 사람들도 앞 구절과 동일한 사람들을 표시한다. 여기서 그들의 무지함이 “구름들과 어둠”을 수단으로 표현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이 천진난만함과 직바른 상태 안에 있기 때문에, “그분을 빙둘러 있다”라고 말해진다. “섬들”에 의해 멀리 떨어져 있는 이런 것들, 즉 다르싯, 불, 룻, 두발, 그리고 야완 역시 의미되기 때문에 이들을 수단으로 외적 예배가 의미되고, 이 외적 예배들이 “섬들”이라 불리운다 (이. 66:19 참조). 깃딤 (예.2:10; 겔. 27:6) 역시 이와 마찬가지이다. 섬들이 “토지들”, 또는 “산들”과 대비될 경우, “섬들”은 바다에 있는 바, 신앙의 진리들 역시 의미한다; 그런고로 그들은 의식들을 설명한 진리들을 의미한다.

자기의 혀(tongue, 언어)에 따라, 그들의 가문(족속)들에 따라, 그들의 나라들에 관련하여. 이것은 이들이 각각의 천성(genius, 정신력, mentality)에 따라서 있었다는 것을; “자기의 혀에 따라”란 각각의 견해에 따라서를; “그들의 족속들에 따라”란 그들의 직바름에 따라서를; 그리고 “그들의 나라들에 관련하여”란 일반적으로 언어와 족속보다 더 폭넓게 관련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혀”, “족속”, “나라”가 말씀에서 의미하는 것들로부터 분명해진다; 이에 관하여는 주님의 신성한 자비로부터 아래와 같이 그 의미가 보여진다. 내적 의미에서 “혀”, 또는 “언어”는 견해를, 고로 원리들과 설득함들을 의미하는데, 그 이유는 혀가 인간의 지적 부분, 또는 인간의 생각, 마치 원인과 결과 같이 상응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생각들은 이야기가운데 혀의 움직임 안으로 유입되고, 뿐만 아니라 천국의 유입이 있는데, 이에 관련하여 나로 경험하게 하신 바 있어, 주님의 신성한 자비에 의해 다른 장소에서 말해질 것이다.
“족속들”이 내적 의미에서 직바름, 또한 선행과 사랑을 의미한다는 것은 지상에서 결혼이나 혈연을 수단으로 족속을 이루 듯, 천국들에서는 상호간의 사랑으로부터 있는 모든 것이 족속 관계 같은 상황에 있다는 사실로부터 오고 있다 (685항 참조). 그러므로 말씀에서 사랑 또는 선행에 속하는 것들은 “집” 또는 “가족들”에 의해 표현되는데, 이에 관한 더 설명은 이 대목에서는 불필요한 바 생략하나 710항을 참조하면 도움이 될 것이다.
“나라들”이 여기서의 경우 양쪽 모두를 일반적 측면에서 의미하는 것은 말씀에서 나라, 또는 나라들의 의미로부터 분명해진다. 좋은 의미에서일 경우, “나라들”은 새로운 의지력과 이해력에 관한 것들, 결과적으로 사랑의 선들과 신앙의 진리들을 의미한다; 그러나 나쁜 의미일 경우, “나라들”은 악들과 거짓들을 의미한다; 그리고 마찬가지 방식에서, “집들”, “족속들”, 그리고 “혀들”의 의미 역시 말씀의 많은 구절로부터 확인해 볼 수 있다. 그 이유는 태고 교회가 집들, 족속들, 나라들로 구별되어졌었기 때문에서 이다. 자녀를 가진 결혼한 한 쌍과 그들의 남종, 여종은 한 집을 구성했다. 서로 과히 멀지 않은 거리에 모여 사는 여러 집들이 족속(가문)을 이루었고, 이 족속이 많이 뭉쳐 나라를 구성했다. 그런고로 “나라들”은 족속들이 모두 집합한 셈이다. 천국 안에서도 이와 흡사하다; 다만 모든 것의 관계가 주님을 향한 사랑과 선행에 따라 있다는 점이 다르다.
이로부터 내적 의미에서의 “나라들”의 의미는 의지력과 이해력 모두를 아우르는 일반적 용어로서, 또는 사랑과 신앙 모두를 아우르는 용어로서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나라를 구성하는 집들이나 족속들에 따른 상대적 의미에서 이다. 이런 숙고함으로부터 “나라들”은 양쪽 의미 (의지력과 이해력)을 일반적 측면에서 의미함이 분명해진다; 그리고 “자기의 혀에 따라, 그들의 족속들에 따라, 그들의 나라들에 관련하여”는 각 자의 천성(정신력), 족속, 나라에 따라서를 의미한다는 것, 이들에게 예배가 고대 교회로부터 갈라져 나아갔음을 의미한다.

6절. 그리고 함의 아들들은 구스, 그리고 미스라임, 그리고 붓, 그리고 가나안이다.

“함”에 의해 선행으로부터 분리된 신앙을 의미하는 것은 앞 장에서 말한 함에 관련된 사항으로부터 분명해진다.

“함의 아들들”에 의해 선행에서 분리된 신앙에 속하는 것들을 의미한다는 것은 다음과 같다. “함”에 의해 뜻해지는 것을 알기 위하여, 그러므로 “함의 아들들”에 의해 뜻해지는 것도 알기 위하여서는 선행으로부터 분리된 신앙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이 먼저 필요하다. 선행에서 분리된 신앙은 신앙이 아니다. 신앙이 있지 않는 곳에는 내적 예배도, 외적 예배도 없다. 굳이 어떤 예배가 있다고 우긴다면, 그것은 부패된 예배라 말해야 지당할 뿐이다. 그러므로 “함”에 의해서는 부패된 내적 예배가 의미되어진다. 즉 이들은 선행에서 분리된 채로 단지 기억 속에만 있는 영적, 천적인 어떤 것들을 두고 신앙이라 부르는 자들이다. 때로 최악의 인간은 이런 지식들을 자기들의 증오나 간음질, 복수심을 계속하기 위해 더 많이 지닌다. 그러므로 이는 지옥적이고, 이들은 죽은 뒤 악마들이 된다. 이를 가지고 짐작해도 기억 속의 지식들은 신앙이 아님을 알런지 모른다. 신앙은 신앙으로부터 있는 것들을 인정함이다. 그리고 이 인정함은 외적 수단들을 가지고는 결코 있지 않는다. 그러나 인간 안에서 선행을 통하여 주님께서 일해주심으로 가능하다. 그리고 이 인정함은 입술로는 있을 수 없고 생활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각자의 삶의 모습으로부터 우리는 그의 인정함이 무엇인지를 알수 있다. 선행은 가지지도 않은 채, 신앙의 (주관적)지식들을 기억 속의 지식들(객관적 지식들)로 지닌 이들이 “함의 아들들”이라 불리운다. 또는 말씀의 내면적 지식들, 그리고 말씀의 최고의 신비함들, 또는 말씀의 글자 의미 안에 있는 모든 것들에 관한 기억 속의 지식, 또는 여타 진리들에 관한 기억 속의 지식, 등등을 중요시하고, 그에 따른 외적 예배의 의식을 잘 준행한다 해도 선행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함의 아들들”이다. 이런 속성을 지닌 이들이 “함의 아들들”임은 이제 취급되는 나라들로부터 분명해진다.

“구스, 미스라임, 붓, 그리고 가나안”이 여러 많은 나라들이었다는 것, 이들을 수단으로 내적 의미에서 선행으로부터 분리된 신앙으로부터 있는 (주관적) 지식들, 기억 속의 지식들, 그리고 의식들을 의미하는 것은 위의 나라들이 자주 언급되는 말씀으로부터 알런지 모른다; 그 이유가 말씀에서 그것들이 위의 의미를 전달하기 때문이다; 즉 “구스”, 또는 “에티오피아(Ethiopia)”에 의해 말씀의 내면의 지식들이 의미된다. 이 지식을 가지고 그들은 거짓 원리들을 굳힌다; “붓”, 또는 “리비아(Lybia)”에 의해 말씀의 글자 의미로부터의 (주관적) 지식들이 의미되고, 이를 가지고 거짓 원리들을 굳힌다; 그리고 “가나안”, 또는 “가나안족”은 의식들, 또는 내적 예배로부터 분리된 외적 예배에 속한 것들을 의미한다. 이 모두는 선행으로부터 분리될 때, “함의 아들들”이라 불린다. 같은 나라들을 수단으로 단순히 (주관적) 지식들과 기억 속의 지식들이 의미되어지기도 한다; 즉 “구스”에 의해서는 말씀의 내면의 지식들; “이집트”에 의해서는 기억 속의 지식들; “붓”에 의해서는 말씀의 글자 의미로부터의 (주관적) 지식들이 의미된다. 이것들이 그들이 등장한 이유인데, 이것이 좋은 의미와 나쁜 의미 어느 쪽에서 이든 아래 인용 구절로부터 알게 될런지 모른다.

“구스(또는 에티오피아)”가 말씀의 내면적 지식들을 의미했다는 것, 이를 가지고 사람들이 거짓 원리들을 굳혔다는 것을 예레미야서를 보면 알 수 있을지 모른다:
이집트가 시냇물 같이 일어나고, 그것의 물들이 강물 같이 그 자체 넘실댄다, 그리고 그는 말했다, 나는 올라갈 것이다, 나는 땅을 덮을 것이다, 나는 도성과 그 속의 주민을 멸할 것 이다. 너희 말들아 올라가라, 그리고 너희 병거는 사납게 날뛰라; 그리고 용사는 앞으로 나 아가게 하라, 방패를 다루는 구스와 붓도 나아가라 (예. 46:8, 9).
위 구절에서 “이집트”는 기억 속의 지식들로부터 납득하지 못하면 아무 것도 믿지 않는 이들, 이로 인해 그들의 모든 것은 의심, 부정함, 그리고 거짓을 함유하고야 마는 이들을 표시한다. 이것이 “올라가라, 땅을 덮어라, 그리고 도성을 멸하라”이다. 여기서의 “구스”는 말씀에 관한 더 일반적 지식들과 더 내면의 지식들을, 이를 가지고 인간들은 자기가 받은 거짓 원리들을 굳힌다. “붓”은 감각으로부터 나타남에 의거한 말씀의 글자적 의미로부터 있는 (주관적) 지식들을 표시한다.
에스겔서에서:
검이 이집트를 덮칠 것이다, 그리고 살해된 자가 이집트에 나뒹굴 때 구스는 슬픔에 빠질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그녀의 무리들을 데려갈 것이다, 그리고 그녀의 기초들은 파괴될 것 이다. 구스, 붓, 그리고 룻, 그리고 모든 에렙(Ereb, 아라비아)과 굽(Cub), 그리고 언약을 맺은 토지들의 아들들은 검에 의해 그들(이집트)과 함께 쓰러질 것이다 (겔. 30:4, 5, 6).
위 구절은 내적 의미에서가 아니면 이 말들이 무엇을 뜻하는지 아무도 알 수 없다; 만일 이 말들이 내적 의미를 의미하지 않으면, 이 구절은 아무런 의미도 없다. 여기서 “이집트”는 기억 속의 지식들, 이를 수단으로 인간들은 신앙의 신비 안으로 들어가고 싶어한다. “구스와 붓”은 “거기로부터의 기초들”이라 불리우는데, 그 이유는 그들이 말씀으로부터의 (주관적) 지식들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에스겔서에서:
그 날에 특사가 내 앞으로부터 배를 타고 나가서, 자신만만한 구스를 두려워 떨게 만들 것 이다; 그리고 그들에게 이집트의 날들 같이 슬픔이 닥칠 것이다 (겔. 30:9).
위에서 “구스”는 기억 속의 지식들로부터 부화되어 나온 거짓들을 확증하는 말씀으로부터의 (주관적) 지식들을 표시한다. 에스겔서에서:
내가 수에네의 망루로부터 구스의 경계까지 이집트의 토지를 황폐하게 만들 것이다
(겔. 30:10).
위에서 “이집트”는 기억 속의 지식들을; 그리고 “구스”는 말씀의 내면의 것들에 관한 (주관적) 지식들을 표시한다, 이 지식은 기억 속의 지식들이 가는 한도까지가 경계선들이다.
이사야서에서:
아시리아왕이 이집트의 포로들과 구스의 포로들을, 소년들과 노인들을, 벗은 채로, 맨발로, 그리고 한쪽 엉덩이를 가리지 못한 채, 이집트의 벌거벗은 자를 끌고 갈 것이다; 그리고 그 들은 자기들의 희망을 구스에, 자기들의 영광을 이집트에 두었던 탓에 부끄러움을 당할 것 이다 (이. 20:4, 5).
위에서 “구스”는 말씀으로부터의 지식들을 표시하고, 이를 수단으로 기억 속의 지식들을 통해 획득한 거짓들이 확증되어진다; “앗수르”는 인간을 포로화되는 쪽으로 인도하는 추론이다. 나훔서에서:
구스와 이집트는 그녀의 힘이었고, 그 힘은 대단했다; 붓과 루딤은 그들을 돕는 자였다
(나. 3:9).
위 구절은 교회가 황폐해짐에 관하여서 이다, 그리고 여기서도 마찬가지로 이집트는 기억 속의 지식들을 표시하고 “구스”는 지식들을 표시한다.
“구스”와 “이집트”는 여기서의 경우, 단순히 지식들과 기억 속의 지식들을 표시하고, 이것들은 진리들이고, 선행으로부터의 신앙 안에 있는 이들에게 쓸모가 있다; 그런고로 구스와 이집트는 여기서 좋은 의미에서 사용되고 있다. 이사야서에서:
그런고로 여호와께서 말하셨다, 이집트의 수고함, 구스의 상품, 그리고 스바로부터 (상품), 키가 큰 자들이 네게로 건너올 것이다, 그리고 그것들은 네 것일 것이다; 그들은 족쇄를 채 운채 너를 따라 갈 것이다, 그들은 건너가 네게 절할 것이다; 그들은 네게 간구할 것이다; 하느님은 당신 안에만 있으신다, 그리고 이 외에 다른 신은 없다 (이. 45:14).
“이집트의 수고함”은 기억 속의 지식들을 표시한다; 그리고 “구스의 상품과 스바의 (상품)”은 주님을 인정하는 이들을 잘 섬길 영적인 것들에 관한 지식들을 표시한다; 그 이유가 모든 기억 속의 지식과 지식들이 그들을 위해 있기 때문이다.
다니엘서에서:
북쪽의 왕이 감추어 비축한 금과 은을, 그리고 이집트의 탐나는 것들을 지배할 것이다; 그 리고 루빔(붓)과 구심이 네 발판(step)들에 있을 것이다 (단. 11:43).
“붓과 구스”가 여기서는 말씀으로부터의 지식들을 표시한다; 그리고 “이집트”는 기억 속의 지식들을 표시한다. 스바냐서에서:
구스의 강들을 건넘으로부터, 내 예배자들 (습. 3:10).
위는 지식들이 없는 이들, 즉 이방인들을 표시한다. 다윗서에서:
큰 자가 이집트로부터 나올 것이다; 구스는 하느님에게 그의 손을 서두를 것이다
(시. 68:31).
“이집트”가 여기서는 기억 속의 지식들을, 그리고 “구스”는 지식들을 표시한다.
다윗서에서:
나는 라합과 바빌론을 나를 아는 이들 사이에 있는 자들이라 말할 것이다; 불레셋, 그리고 두로, 구스와 더불어 잘 보라; 이 자는 거기(하느님의 도성에서) 태어나 졌다 (시. 87:4).
“구스”는 말씀으로부터의 지식들을 표시한다; 그러므로 그는 “하느님의 도성에서 태어나 졌다”고 말해진다. 그 이유는 “구스”가 말씀의 내면의 지식들과 거기로부터 파생된 총명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에덴으로부터 흘러나온 두 번째 강이 구스 온 토지를 에워쌌다고 말해지기 때문이기도 하다.

“미스라임(이집트)”에 의해, 말씀에서, 기억 속의 지식들( 즉 기억 속의 다양한 사항들)이 의미되어진다. 인간들은 이를 가지고 신앙 속의 비밀들을 조사하고 싶어한다. 그리고 그 조사한 것을 빙자해서 자기들이 품었던 거짓 원리들을 확증하기를 욕망한다; 그리고 단순한 기억 속의 지식들, 말하자면 유용한 것들에 관한 지식들을 의미하는 것은 이미 첨가된 인용 구절, 그리고 많은 다른 구절로부터, 아마 이 구절을 다 여기에 기록하면 한 페이지를 넘길지 모르나 다음 몇 구절만 소개해 둔다. 즉, 이. 19:1- 끝절; 30:1-3; 31:1-3; 예2:18, 36; 42:14-끝절; 46:1-끝절; 겔. 16:26; 23:3, 8; 29:1-끝절; 30:1-끝절; 호. 7:11; 9:3, 6; 11:1, 5, 11; 미. 7:5; 슥. 10:10, 11; 시. 80:8과 이어지는 구절

“붓 (즉, 리비아)”, 말씀에서, 글자적 의미로부터의 지식들이 의미되는데, 이를 수단으로 거짓 원리들을 확증하는데 이용한다. 그리고 또한 단순한 지식들도 의미하는데, 위의 많은 인용 구절에서 구스와 함께 언급되므로 거기로부터 분명해진다. 붓을 수단으로 더 내면인 지식들을 의미하기 때문에, “붓”과 “구스”는 말씀에서 함께 등장하는 경우가 많은데, 예. 46:8, 9; 겔. 30:4, 5; 나. 3:9; 단. 11:43도 참고하면 될 것이다.

“가나안(가나안족)”이 말씀에서 말해질 때, 의식들, 즉 내적 예배와 분리된 외적 예배에 관련된 것들을 의미하는 것은 아주 많은 구절들, 특히 역사서로부터 분명해진다. 가나안족이 이런 품성을 지녔기 때문에 야곱의 아들들이 가나안족의 토지 안으로 입장하였을 당시, 가나안은 멸절되게 하라고 명령되어졌다. 어쨋든 말씀의 내적 의미에서 내적 예배로부터 분리된 외적 예배를 가지는 모든 이들이 “가나안족”에 의해 뜻해진다. 그리고 유대(왕국)인들과 이스라엘(왕국)인들이 여타 다른 족속보다 가나안의 품성 속에 더 가까웠는 바, 이 두 왕국 사람들이 예언서에서 “가나안족”에 의해 뽀족하게 의미되어진다. 아래 두 인용 문단만 가지고도 이를 이해하고도 남을 것이다. 즉:
그들은 순진한 피, 자기들의 아들과 딸의 피조차 뿌려, 그들을 가나안의 우상들에게 제물 로 바쳤다; 그래서 토지는 피들로 더럽혀졌다, 그리하여 그들은 자기들의 행위들로 더럽혀 졌고, 그들의 행함들은 음탕해졌다 (시. 106:38, 39).
“아들들과 딸들의 피를 뿌리는 것”은 이 구절의 경우, 내적 의미에서 그들이 신앙의 모든 진리들과 선행의 선들을 꺼지게 하는 것을 의미한다; “가나안의 우상들에게 아들들과 딸들을 제물로 바치는 것”은 내적 예배와 분리된 외적 예배를 수단으로 신앙과 선행으로부터 있는 것들을 모독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간단히 말해 우상 숭배밖에 더 아니다. 고로 그들은 자기들의 행위들로 더럽혀졌다, 그리고 그들의 행함은 음탕해졌다. 에스겔서에서:
그런고로 주 여호비께서 예루살렘에게 말하신다, 네 장사하는 것과 네 태생이 가나안의 토 지로부터 있다; 네 아비는 아모리족이었고, 네 어미는 헷족이었다 (겔. 16:3).
위 구절에서 그들(유대인과 이스라엘인들)이 가나안의 토지로부터 이다고 분명하게 말해진다.

7절. 구스의 아들들은 스바, 그리고 하윌라, 그리고 삽다, 그리고 라아마, 그리고 삽드가이다. 그리고 라아마의 아들들은 세바와 드단이다.

“구스의 아들들”에 의해 내적 예배를 가지지는 않았으나 신앙에 관한 지식들은 가졌기에 그들에게 종교가 있게 만든 이들을 의미하는 것은 “구스”, 그의 아들들로부터, 이들을 수단으로 영적 (평면의) 특성에 관한 내면의 지식들을 의미함으로부터 분명해지는데, 이미 살핀 바 있다. 뿐만아니라 말씀에서 이들 나라가 언급되는 곳에서도 분명해진다.

“스바, 그리고 하윌라, 그리고 삽다, 그리고 라아마, 그리고 삽드가”는 위와 같은 지식들을 가진 여러 나라들을 의미한다는 것, 그리고 내적 의미에서 지식들 자체를 의미한다는 것은 아래 추가되는 말씀의 인용 구절로부터 알 수 있을런지 모른다.

“라아마의 아들들”도 위와 마찬가지로 내적 예배는 가지지는 않았으나 신앙에 관한 지식들을 가진 바 있어 자기들에게 종교를 존재하게 한 이들이다; 그리고 “세바와 드단”은 이런 지식들을 가졌던 나라들이다; 그리고 내적 의미에서 그들은 지식들 자체를 의미한다는 것은 예언서들에 있는 아래 인용 구절에서 분명해진다. 스바, 시바, 그리고 라아마에 관하여는 이런 인용 구절로부터 이다. 다윗서에서:
다르싯과 섬들의 왕들이 공물들을 가져올 것이다; 시바와 스바의 왕들이 예물을 바칠 것이 다; 그렇다, 모든 왕들이 그분에게 자신들을 굽혀 절할 것이다 (시. 72:10, 11).
위 구절은 주님, 그분의 왕국, 그리고 천적 (평면의) 교회에 관해 말해진다. 이 구절의 “공물”과 “예물”이 예배들을 의미한다는 것을 누군가는 알런지 모른다; 그러나 이 예배들이 무엇인지, 어떤 특성인지는 “다르싯과 섬들”에 의해, 그리고 “시바와 스바”에 의해 뜻해지는 것을 이해하지 않으면 알 도리가 없다. “다르싯과 섬들”이 내적 예배에 상응하는 외적 예배들을 뜻한다는 것은 이미 말했다. 이로부터 “시바(Sheba) 와 스바(Seba)”에 의해 내적 예배들이 뜻해짐이 뒤잇는다. “시바”에 의해 예배의 천적 (평면의) 모습(aspect)이, “스바”에 의해 예배의 영적 (평면의) 모습이 뜻해진다.
이사야서에서:
나는 네 몸값을 위해 이집트를, 너를 위해 구스와 스바를 주었다 (이. 43:3).
“구스와 스바”는 이 구절에서의 경우 신앙의 영적 평면의 모습(aspect)들을 표시한다.
이집트의 수고함, 구스의 상품과 스바의 (상품), 키가 큰 자들이 네게 올 것이다
(이 45:14).
“이집트의 수고함”은 기억적 지식을, 그리고 “구스와 시바의 상품”은 영적인 것들에 관한 지식들을 표시한다. 이것들은 주님을 믿는 이들을 섬긴다.
이사야서에서:
수많은 낙타들, 미디안과 에바의 단봉 낙타들이 너를 덮을 것이다; 시바로부터 모든 자들 이 올 것이다; 그들은 금과 유향을 가져올 것이다, 그리고 여호와의 찬양을 선포할 것이다. 아라비아의 모든 양떼들이 네게로 함께 모아질 것이다 (이. 60:6, 7).
위 구절의 경우, “시바”에 의해 천적 (평면의) 특성들과 이 특성으로부터 파생되는 영적 (평면의) 특성 (“금과 유향”)이 뜻해진다; 그리고 이런 것들이 “여호와에 대한 찬양들”, 즉 그것들이 내적 예배이다고 설명되어진다.
에스겔서에서:
시바와 라아마의 무역상들, 이들은 네 중요한 향품, 모든 귀중한 돌들을 나르는 네 무역상 이었다, 그리고 그들이 너를 위해 금을 주었다 (겔. 27:22, 23).
이것은 두로에 관해서이다. 이 구절에서 “시바와 라아마”에 의해 의미된 것은 그들의 상품들로부터, 즉 향품, 보석, 그리고 금이라고 말해짐으로부터 분명해진다. “향품(spice)”은 내적 의미에서 선행이다; 귀중한 돌(보석)은 선행으로부터 있는 신앙이다; “금”은 주님을 사랑함, “시바”에 의해 의미되는 천적 평면의 모든 것들이다; “시바”에 대한 더 적절한 표현은 이런 것들에 관한 (주관적) 지식들이다. 그러므로 이것들(주관적 지식들)이 여기서 여러 종류의 무역 물품들로 묘사되고, 이 물품으로 교회인이 되어가는 이들은 양육된다. 그 이유가 이런 지식 없이 누구도 교회인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비슷한 것들이 시바 여왕에 의해서도 표현되어졌다. 그녀는 솔로몬에게 왔는데, 그에게 향품과 금, 보석들을 가져왔다 (왕상. 10:1-3); 그리고 주님의 탄생시에 예수를 방문한 동쪽으로부터의 현자들, 그들은 엎드려 경배하고, 그들의 보물 상자들을 열었고, 그분에게 예물로 금, 유향, 몰약을 바쳤다 (마. 2:1, 11)에서도 위와 비슷한 내용들이다. 이 예물을 수단으로 선들이, 즉 천적 선, 영적 선, 자연적 선들이 의미되었다. 예레미야서에서:
무슨 의도로 나에게 시바의 유향, 먼 나라의 달콤한 창포를 가져오느냐? 너희의 태워바침 은 열납하지 않는다 (예. 6:20).
위 구절 역시 “시바”에 의해 지식들과 숭배함이 의미된다. 이것이 “유향”과 “창포”이다; 그러나 위의 예에서는 지식들과 숭배함들에 선행이 결핍되어 있다. 그러므로 기뻐반기시지 않는다.

“드단”은 의식들에 있는 보다 낮은 수준의 천적 속성(attribute)들이다는 것은 아래 인용된 말씀으로부터 분명해진다. 에스겔서에서:
드단의 아들들은 네 무역상이었다; 많은 섬들이 네 손의 상점이었다; 그들이 네게 상아의 뿔들과 흑단(오목, ebony)을 공물로 가져왔다 (겔. 27:15).
“상아의 뿔들과 흑단”은 내적 의미에서 외면의 선들을 의미하는데, 이것은 예배로부터, 의식들로부터 있는 선들이다. 에스겔서에서:
드단은 병거가 자유롭게 움직이게 하는 천들을 거래하는 네 무역상이었다; 아라비아와 게달의 모든 제 1 인 자들 (겔. 27:20, 21).
위의 “병거가 자유롭게 움직이게 하는 천들”은 외면의 선들, 의식들로부터의 선들이다. 예레미야서에서:
그들의 지혜는 악취를 풍기게 되었다; 너희는 도망하라, 그들은 자신들을 돌아서게 해버렸 다, 그들은 깊은 데에서 거주하려고 자신들을 내려가게 한다, 오 드단의 주민들아
(예. 49:7, 8).
위 구절에서 드단의 적절한 의미는 내적 예배, 또는 심정으로부터 주님을 숭배함이 없는 상태에서의 의식들을 표시한다. 이에 관해 그들은 “자신들을 돌아서게 하고 깊은데에서 거주하기 위해 자신들을 내려가게 했다”고 말해진다. 이 인용 구절로부터 지금 명백해지는 바, 영적 (평면의) 특성들에 관한 지식들이 “구스의 아들들”에 의해 의미된다는 것; 천적(평면의) 특성에 관한 지식은 “라아마의 아들들”에 의해 의미된다는 것이다.

8, 9절. 그리고 구스는 니므롯의 아버지이었다. 그는 땅에서 힘센 자가 되기 시작했다. 9 그는 여호와 앞에서 사냥함에서 힘이 센 자였다. 그러므로 니므롯은 여호와 앞에서 사냥하는데 힘이 센 자였다고 말해져 왔다.

“구스”에 의해 영적 속성과 천적 속성들에 관한 내면의 지식이 의미되는 것은 구스에 관해 앞에서 보여진 바로부터 분명해진다.

“니므롯”에 의해 내적 예배를 외적 예배로 만든 이들이 의미된다는 것, 그런고로 “니므롯”은 이런 외적 예배를 의미한다는 것은 이 뒤를 잇는 것으로부터 알런지 모른다. 이에 앞서 미리 서술해야만 하는 것은 내적 예배를 외적 예배로 만듦에 의해 뜻해지는 것에 대해서이다. 내적 예배는 사랑과 선행으로부터 있는 바, 예배 자체이다; 그리고 이 내적 예배 없는 외적 예배는 예배가 아니다. 내적 예배를 외적 예배로 만드는 것은 외적 예배를 본질로 만든다는 말이다. 이는 전자가 거꾸로된 셈이다. 내적 예배 없는 외적 예배는 예배가 아님이 진리인데, 마치 외적 예배 없는 내적 예배는 예배가 아니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런 상황이 선행으로부터 신앙을 분리한 이들의 종교이다. 이 종교 안에 그들은 선행으로부터 있는 것들에 앞서 신앙으로부터 있는 것들을 배치한다, 또는 생활에 속하는 것들에 앞서 신앙의 지식들을 앉힌다. 고로 본질적인 것보다 형식적인 것을 우선시한다는 말이다. 모든 외적 예배는 내적 예배의 격식 절차에 해당된다. 그 이유가 내적 예배가 참 본질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예배를 만드는 것은 형식인 것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본질인 것이 없을 경우 내적 예배는 외적 예배로 전락되고 만다. 예를 들면, 만일 누군가가 교회가 없는 곳, 설교가 없는 곳, 성례식도 없는 곳, 성직자도 없는 곳에서 살고 있다면, 그는 구원되어질 수 없다, 또는 예배할 수 없다 하는 견해를 지닐 경우이다. 그럼에도 이런 상황의 사람도 내적 예배로 주님께 예배할 수 있다.
위의 예에 관련하여 외적 예배는 존재할 필요가 없다라는 결론을 맺을 생각은 없다. 하나 더 예를 들어 보자. 교회에 잘 참석하고 성례에도 빠지지 않고, 열심히 기도하고, 절기들을 준수하고, 설교를 경청하고, 교회의 여러 다른 행사들에도 열성적이고, 신앙을 이야기하고 등등의 행동들을 예배의 본질 자체로 간주하고, 이것이면 충분하다고 자신을 설득하는 이들의 경우이다. 이런 행동의 모든 것은 예배의 격식 행위들이다. 이들과 마찬가지로 실행하되 사랑과 선행으로부터 예배의 본질을 만드는 이들의 경우, 이들은 이런 격식 행위에 예배가 존재한다고 간주하지 않는다. 이들의 외적 예배 안에는 거룩하고 살아있는 것이 있다. 그 이유는 외적 예배 안에 내적 예배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자의 외적 예배에는 거룩한 것이 없고 살아있는 것도 없다. 그 이유가 참 본질 자체가 격식이나 예식을 거룩되게 하고 살아있게 해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선행으로부터 분리된 신앙은 예배를 거룩되게 하고 생명있게 하지 못한다. 그 이유는 본질과 생명이 빠져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예배가 “니므롯”이라 불리운다; 그리고 이것은 “구스”라는 (주관적) 지식들에서 태어나진다. 마치 이 지식들, 즉 “구스”가 “함”, 즉 선행으로부터 분리한 신앙으로부터 태어나는 것과 같다. “함”으로부터, 또는 분리된 신앙으로부터, 분리된 신앙에 속하는 (주관적) 지식들을 통하여서는 어떤 진정한 예배도 태어나는 것은 불가능이다. 이상의 내용들이 “니므롯”에 의해 의미된 사항들이다.

구스는 니므롯의 아버지이었다. 이는 내면의 것들에 관한 지식을 가진 이들이 이런 종류의 예배를 설립했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는 방금 위에서 살폈다. 내면의 것들에 관한 지식을 그들은 교리들이라 부른다. 또한 그들은 이 교리들을 의식들과 구별하고 있다. 예를 들면, 그들의 중요한 교리는 신앙만이 구원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주님을 사랑함과 이웃을 향한 사랑이 신앙 자체이다는 것을 모르고 있다; 그리고 그들이 신앙이라 부르는 지식들은 주님으로부터의 사랑, 즉 그분을 사랑함과 이웃을 향한 사랑을 받으려해서 필요할 뿐임을, 이것이 구원하는 신앙임을 아는데 실패하고 있다. 신앙을 지식들만에 존재하게 만드는 이들이 위에 상술한 바 같은 예배의 아버지이고 그것을 조직한 자들이다.

그는 땅에서 힘이 센 자였다. 이는 이런 종교가 교회에서 유행했다를 의미하는데, 곧 이어지는 구절로부터 알게 되리라 본다.

그는 여호와 앞에서 사냥함에서 힘이 센 자였다. 이는 그가 많은 자들을 설득했다를 의미하는데, 이는 그것이 선행으로부터 분리된 신앙과 더불어 그러했다는 것; 그리고 말씀에 있는 “사냥함”의 의미로부터도 분명해진다. 선행으로부터 분리된 신앙은 인간을 설득하는데 더 쉬워지게 하는 특성이 있다. 인류의 훨씬 큰 부분들은 내적인 것들이 무엇인지 모르고, 단지 외적인 것만 알고 있다; 그래서 그들 대부분은 감각으로부터의 것들에, 기쁨을 주는 것에, 그리고 탐욕들 안에, 그리고 자신과 세상만을 목표로 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들은 이런 종교에 쉽게 포로화된다. 말씀의 “사냥함”의 의미는 일반적 측면에서의 설득함을 의미하고 있다; 특별한 측면일 경우, 인간의 감각적인 경향성들, 기뻐함들, 그리고 탐욕들을 수단으로, 이에 더하여 그들은 자신들의 입맛과 다른 이의 입맛과도 일치하는 그들 자신의 쾌락에서, 자기들을 드높이고 자신을 부유해지게 하는 방향으로 꿰맞추어지게 교리들을 사용함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포로화함을 의미한다.
에스겔서를 보면 더 분명해질 것이다:
혼들을 사냥하려고 내 손의 관절에 방석을 꿰매고, 키가 큰 자의 머리에 휘장을 만드는 그 들에게 화있을 것이다. 너희는 내 백성을 위하여는 사냥을 하고, 네 자신을 위하여는 혼이 살아있게 만드느냐? 그리고 너희는 보리 한 웅큼과 빵 조각을 (얻기) 위해 거짓말에 귀기 울이는 내 백성에게 거짓말을 수단으로 죽지 않아야 할 혼을 죽게하고, 죽어야 할 혼은 살 아있게 하여 내 백성 사이에서 나를 모독했었다. 잘 보라, 나는 너희가 그들을 날아다니게 만든다고 하여 혼들을 사냥한 그 방석에 맞서, 나는 너희 팔로부터 그 방석들을 찢을 것이 고, 나는 너희가 날게 만든다고 사냥한 혼들, 그 혼들이 가게 할 것이고, 너희의 휘장 역시 나는 찢을 것이다, 그리고 내 백성을 너희 손으로부터 해방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사냥 당하도록 더 이상 너희 손 안에 있지 않을 것이다 (겔. 13:18-21).
“사냥함”에 의해 뜻해지는 것이 여기서 설명된다. 즉 그것은 설득력을 수단으로, 그리고 그들이 뒤집은 지식들을 수단으로, 그리고 자신들의 입맛에 맞게, 동시에 타인들의 입맛에도 맞추어지는 해석들을 고안해냄으로 포로화함이다.
미가서에서:
자비한 사람이 땅에서 멸하여졌다, 그리고 사람들 사이에 직바른 자가 없다; 그들 모두는 피를 위해 기다리며 거짓말을 한다; 그들은 모두 각각의 사람, 자기 형제를 그물로 사냥한 다. 이때 그들은 선을 행함 대신 자기 손으로 악을 행한다. 제 1 인 자들은 댓가를 묻고 재 판한다, 큰 자는 제 혼의 외고집을 말할 뿐이다, 그리고 그들은 그것을 비튼다
(미. 7:2, 3).
위 구절 역시 “사냥함”에 의해 뜻해지는 것이 설명되고 있다, 즉 이것은 자신을 위해 기다리며 거짓말하는 것, 또는 거짓을 진리라 부르는 것, 그리고 외고집을 말하는 것, 그리고 비트는 것, 이것을 수단으로 설득하고야 마는 것이다.
다윗서에서:
혀의 사람은 땅에서 세워지지 않을 것이다; 악이 그를 전복하려는 광포한 자를 사냥할 것 이다 (시. 140:11).
위 구절은 거짓들을 수단으로 설득하는 사악한 자들, 악한 쪽만 생각하고, 사기칠 요령만을 목적으로 입맛 돋구는 말만을 늘어놓는 사악한 자에 관해서이다; “혀”는 여기서 거짓됨을 표시한다.

그러므로 니므롯은 여호와 앞에서 사냥하는데 힘이 센 자였다고 말해져 왔다. 이것은 수많은 사람이 설득당했기 때문에 이런 언어의 형체가 속담화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 그리고 이런 종교는 인간의 마음들을 쉽게 포로화 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는 이미 말해진 것, 그리고 글자 자체의 의미로부터 알 수 있다. 고대 시대에서, 그들은 어떤 실지의 것들에 인물들의 이름들을 붙여놓았는데, 이렇게 그들은 이 예배에 이름을 붙였는 바, 이 예배를 “니므롯”이라 칭하고, 이 예배는 “사냥함에서 힘이 센 자”, 즉 사람들의 마음을 포로화했다는 것이다. 이것이 “여호와 앞에서”라고 말해지는 이유는 이런 예배 안에 있는 자들이 분리된 신앙을 “여호와”, 또는 “남자 여호와”라고 일컬었기 때문인데, 모두 선행으로부터 분리된 신앙을 의미한다. 그러나 “가인”과 “함”의 차이는 전자는 지각을 가졌던 천적 (평면의) 교회에서 였고, 후자는 지각이 없던 영적 (평면의) 교회에서 였다; 그러므로 전자가 후자보다 더 악질이다. 고대 때에 이와 같은 품성을 지닌 사람들이 “힘이 센 자(용사)”라 불리웠는데, 이사야서를 보자:
게달의 모든 영광은 쇠잔할 것이다, 그리고 남은 숫자, 게달의 아들들의 용사의 활들이 줄 어질 것이다 (이. 21:16, 17).
그리고 호세아서에서:
너희는 사악함을 경작했다, 너희는 불법을 거두어들였다, 너희는 거짓말의 열매를 먹었다, 그 이유는 네가 네 방법을, 네 용사의 수가 많음에 신뢰를 두었기 때문이다 (호. 10:13).
위 구절 외에도 여러 곳에 더 있다. 그들은 자신들을 신앙으로부터 “남자들”, 그리고 “힘이 센 자”라고 불렀다; 그 이유는 원어인 히브리어에서는 단어 하나를 가지고 힘이 셈, 그리고 남자를 각각 표현하는 동시에 모두를 표현하기도 했기 때문인데, 이 단어는 신앙을 서술하고 양쪽 측면의 의미, 즉 신앙에 관한 좋은 의미와 나쁜 의미 모두를 표현한다.

10절. 그의 왕국의 시작은 시날 토지에 있는 바벨, 그리고 에렉, 그리고 악갓, 그리고 갈레에서 였다. “그의 왕국의 시작”이란 이런 예배가 시작되었음을 의미한다; “시날 토지의 바벨, 에렉, 악갓, 갈레”란 그 종교 안에 이런 예배가 있었음을 의미한다; 동시에 그들은 그런 예배 자체, 즉 내면은 모독되어 있으나 외형상으로는 거룩한 듯 보여지는 예배를 의미한다.

그의 왕국의 시작. 이는 이와 같은 예배가 시작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는 “시날의 토지에 있는 바벨”로 분명해지는데, 이후 설명한다.

시날 토지에 있는 바벨, 그리고 에렉, 그리고 악갓, 그리고 갈레에서 였다. 이것들은 이 종교가 위치한 장소를 뜻하는데, 동시에 그 예배 자체도 뜻한다. 즉 이 예배의 외적 측면에서는 거룩하게 나타나는 반면, 내적 측면은 모독되어 있는 예배를 말한다. 이는 “바벨”과 “시날의 토지”의 의미로부터 분명해진다. 바벨은 말씀에서 아주 많이 다루어지고 있는데, 다루어지는 대목 마다에서 이런 예배가 그것에 의해 의미되어진다. 즉 외형상은 거룩하나 내용상으로는 모독된 예배이다. 다음 장에서는 바벨을 취급하는 바, 이와 같은 예배가 바벨에 의해 의미된다는 것이 보여질 것이다; 그리고 이 예배도 시작에서는 모독이 심각하지 않았으나 차츰 그렇게 되었다. 그 이유가 제 아무리 외적 예배라 해도 결국 내면의 예배에 일치되어 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즉 내면이 더 순진해지면, 외적 예배도 더 순진해진다; 내면이 더 더러워져가면 외적 예배 역시 더 더러워진다; 그리고 내면이 더 모독되면, 외적 예배 역시 더 모독되어진다. 한마디로, 이 외적 예배 안에 있는 사람에게 세상과 자기 사랑이 더 있는만큼, 그의 예배 안에 거룩하고 살아있는 것이 더 줄어든다는 말이다; 세상과 자기 사랑으로부터 있는 그의 사랑 안에 이웃을 향한 증오가 더 심해지면, 그의 예배는 더욱 모독적이 된다. 이 증오 안에 악의가 더 심해지면, 더욱 그의 외적 예배도 악해진다. 이 악의에 사기침이 더해지면, 여전히 그의 모독적 예배는 더 심각해진다. 이런 사랑들과 이런 악들이 “바벨”에 의해 의미되어지는 외적 예배의 내면들이다. 이에 관하여는 다음 장으로 미룬다.

“에렉, 악갓, 그리고 갈레, 시날의 토지에서”에 의해 세부적으로 의미되는 것은 흔쾌이 알 수 없다. 그 이유가 갈레가 아모스 6:2에 등장하는 것 말고는 전혀 언급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들은 이와 같은 예배들이 다양해진 것이라 사료된다. 그러나 이런 예배들이 있는 시날의 토지에 관하여는 가능한데, 거기에 있는 외적 예배들이 모독인 것이 말씀에 있는 시날을 수단으로 알게 된다. 이는 11장 2절로부터 분명해진다. 또한 스가랴 5장 11절로부터도 알 수 있다. 특별하게 다니엘서를 보자:
주님께서 유다왕 여호야킴을 바벨왕 느부갓네살의 손에 하느님의 집의 집기들과 더불어 주 셨다, 그리고 그는 그들을 시날의 토지로, 자기 신의 집으로 끌어갔다; 그리고 그는 자기 신의 집의 보물로 집기들을 가져왔다 (단. 1:2).
이를 수단으로 거룩한 것들이 모독되어졌음이 의미되었다: “하느님의 집의 집기들”은 거룩한 것들을; “시날의 토지에 있는 바벨의 신의 집”은 모독인 것들을 의미하는데, 이 안으로 거룩한 것들이 가져다 놓였다. 비록 이런 사건들이 역사적이지만, 여전히 이 말씀에도 신비들을 포함하고 있다. 이는 여느 역사적 말씀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이 집기들을 모독함이 다니엘 5:3-5에 더 있다. 만일 신성한 것들이 집기들에 의해 표현되지 않았다면, (벨사살이 죽는) 사건 같은 것이 발생되지 않았을런지 모른다.

11, 12절. 그는 그 토지로부터 앗수르로 더 나아갔다. 그리고 니느웨를 건설했다, 그리고 르호봇과 갈라, 12 그리고 니느웨와 갈라 사이에 레센을 건설했는데 이 성은 큰 도성이다.

이 토지로부터 앗수르로 더 나아갔다. 이는 이런 외적 예배에 있는 이들이 예배의 내용물에 관하여 추론하기를 시작했다를 의미하는데, 이 의미는 말씀에서 “앗수르”가 (진정한) 이성과 (비뚤어진) 추론 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는 아래에서 토의될 것이다. 이 말들, 즉 앗수르가 그 토지로부터 더 나아갔다와 니므롯이 그 토지로부터 앗수르, 앗시리아로 갔다 에는 두 겹의 의미가 있다. 전자의 표현은 영적인 것들과 천적인 것들에 관한 추론이 이와 같은 예배로부터 발생한다는 것을 의미하고, 후자의 표현은 이와 같은 예배는 영적인 것들과 천적인 것들에 관하여 추론한다를 의미한다.

“앗수르”가 추론이다는 것은 말씀에서 앗수르, 즉 앗시리아의 의미로부터 분명해진다. 말씀에서 앗수르는 이성에 속하는 것들을 (뜻하기 위해) 꾸준히 등장한다. 즉 합리적으로 생각함(rational thing)을 위해서, 그리고 합리화함 (rationalization)이라는 이성(reason)의 두 측면을 뜻하기 위해서이다. (이성과 합리적으로 생각함은 정당한 정신적 과정으로 필수적이나, 합리화함은 부정직한 것이다) “앗수르”가 이성과 합리화함, 이 둘을 의미하기 때문에, 기억 속의 지식 (memory-knowledge, 또는 세속의 지식, 또는 비종교적인 지식, secular knowledge)들을 의미하는 이집트와 자주 연결하여 언급된다; 그 이유가 이성과 합리화함 모두가 이 지식을 기반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앗수르”가 합리화함을 의미하는 경우를 이사야서로부터 읽어보자:
앗수르에게 화있을 것이다, 내 성냄의 막대기, 그는 올바르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의 심정 이 올바른 것을 묵상하지 않는다, 그는 말해왔다, 내 손의 힘을 수단으로 나는 그것을 했 었다, 그리고 내 지혜를 수단으로, 그 이유는 나는 총명하기 때문이다 (이. 10:5, 7, 13),
에스겔서에서:
두 여인들, 한 어미의 딸들인데, 이집트에서 매춘을 범했다; 그들은 자기들의 젊은 시절에 매춘을 범했다. 하나는 매춘을 범하고, 자기의 사랑하는 자들로 그의 이웃인 앗수르(아시라 아인들)에 방점을 찍었다. 앗시리아인들은 푸른 옷을 입었고, 대장들, 통치자들, 그들 모두 훤칠한 젊은이들, 말을 타는 마병들이었다. 바벨의 아들들이 그녀에게 왔다, 그리고 그들은 자기의 매춘으로 그녀를 더럽혔다 (겔. 23:2, 3, 5, 6, 17).
위 구절의 “이집트”는 기억 속의 지식들(비종교적 사실들)을 표시한다; “앗수르”는 합리화함을; 그리고 “바벨의 아들들”은 부패된 욕구로부터 발달하는 거짓 관념들을 표시한다.
에스겔서에서:
오 예루살렘아, 너는 이집트의 아들들과 매춘을 범했다, 너는 앗수르의 아들들과 매춘을 범 했다, 그리고 너는 네 매춘짓을 가나안의 토지로, 갈대아로 늘려갔다 (겔. 16:26, 28, 29).
위 구절에서 “이집트”는 기억 속의 지식을; “앗수르”는 합리화함을 표시한다. 영적인 것들과 천적인 것들에 관하여 기억 속의 지식들로부터 비뚤어지게 추론하는 것이 “매춘(whoredom)”이라 불리우는데, 말씀의 다른 대목에서도 거의 비슷하다. 이집트인들과 앗시리아인들과 더불은 (자연계의) 매춘을 이 구절이 뜻하지 않는 것은 누구나 짐작할 것이다.
예레미야서에서:
이스라엘아, 너는 시홀의 물을 마시려고 이집트의 길에서 무엇을 하느냐? 그리고 (유브라 데) 강물을 마시려고 앗수르의 길에서 무엇을 하느냐? (예. 2:18, 36).
위 구절에서 “이집트”는 기억속의 지식들을 표시한다; 그리고 “앗수르”는 (흠이 있는, flawed) 추론을 표시한다. 예레미야서에서:
이스라엘은 흩트러진 양이다, 사자가 이스라엘을 몰아냈다, 처음에 앗수르왕이 그를 먹어치 웠다, 그리고 그후 바벨왕이 그의 뼈들을 꺽었다 (예. 50:17, 18).
위에서 “앗수르”는 영적인 주제들에 관한 (흠이 있는) 추론을 표시한다.
미가서에서:
이것이 평화일 것이다, 앗수르가 우리의 토지로 올 때, 그리고 그가 우리의 궁전을 짓밟을 때, 우리는 일곱 목자들과 사람들로부터 일곱 제 1 인 자를 (세워) 그를 제압할 것이다, 그 리고 이들이 검으로 앗수르의 토지를 먹어 치울 것이다, 그리고 니므롯의 토지를 거기의 문에서 (먹어치울 것이다). 그리고 앗수르가 우리의 토지로 와서 우리의 토지를 짓밟을 때, 그가 앗수르로부터 건져낼 것이다 (미. 5:5, 6).
여기서의 주제는 이스라엘, 또는 영적 (평면의) 교회이다, 이에 관해 “앗수르는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하고 말해진다, 즉 (궤변적인) 추론은 (영적 평면의 교회에) 침공하지 못한다이다; “니므롯의 토지”는 니므롯에 의해 의미된 것, 즉 내면들이 악하고 거짓된 예배를 표시한다.
한편, “앗수르”는 말씀에서 교회의 사람들이 진리와 선을 식별하는 교인 안에 있는 (진정한) 이성도 의미한다. 이를 호세아서로부터 확인해보자:
그들은 이집트로부터의 새 같이, 그리고 앗수르로부터의 비둘기 같이 떨 것이다
(호. 10:11).
위 구절에서 “이집트”는 교회인의 기억 속의 지식을 표시한다; 그리고 “앗수르”는 교회인의 이성을 표시한다. “새”는 기억 속의 지적 평면(우리가 실지로 이해하는 사실에 입각한 지식)이다. “비둘기”는 합리적인 선(합리적 평면에 있는 선함)인데 이미 살핀 바 있다.
이사야서에서:
그 날에 이집트로부터 앗수르까지 길이 날 것이다, 그리고 앗수르는 이집트로 올 것이다, 그리고 이집트는 앗수르로 갈 것이다, 그리고 이집트가 앗수르를 섬길 것이다. 그 날에 이 스라엘은 이집트와 앗수르와 더불어 세 번째일 것이고, 토지 한 가운데 축복이 있을 것이 다, 여호와 체바욷께서 말하신다, 내 백성 이집트에게 복있을 것이다, 그리고 앗수르는 내 손의 일들이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나의 상속(자)이다 (이. 19:23-25).
위 구절의 주제는 “이스라엘”인 영적 (평면의) 교회이다. 이 교회인의 이성은 앗수르이고, 기억 속의 지식은 “이집트”이다. 이들 셋은 영적 (평면의) 교회인의 지적인 것들을 구성한다. 이 셋은 이런 질서에서 서로의 뒤를 잇는다. 앗수르가 명명되는 다른 장소들에서, 앗수르는 진정한, 또는 거짓 합리성을 의미한다. 이 의미를 지닌 성경 구절로는 이. 20:1-끝절; 23:13; 27:13; 30:31; 31:8; 36, 그리고 37장; 52:4;겔. 27:23, 24; 31:3-끝절; 32:22; 미. 7:12; 습. 2:13; 슥. 10:11; 시. 83:8. “앗수르”가 합리화를 표시하는 성경 구절로는 호. 5:13; 7:11; 10:6; 12:1; 14:3, 그리고 스가랴 10:10에서 인데, 여기서 에브라임이 말해지고, 그를 수단으로 지적 특성, 특히 거꾸로된 지적 특성이 의미되고 있다.

그는 니느웨를 건설했다, 그리고 르호봇, 그리고 갈라 성을 (건설했다). 이는 그들이 자신들을 위해 신앙의 교리들을 만들어냈음을 의미하는데, 이는 니느웨, 그리고 르호봇, 그리고 갈라의 의미로부터, 그리고 진정이든 이교적이든 교리를 말하는 말씀에서의 “성”의 의미로부터 분명해진다.

교리 속의 거짓 요소들이 “니느웨”에 의해, 그리고 다른 근원으로부터 있는 똑같은 교리 속의 거짓 요소들이 “르호봇”과 “갈라”에 의해 의미되는데, 이는 말씀에 있는 니느웨의 의미로부터 분명해진다. 이에 관하여 지금 살핀다. 이런 종류의 거짓들의 근원은 세 가지이다. 첫 번째 근원은 비 계발된 이해력의 불명료함에 있는 감각들의 오류로부터, 그리고 무지함으로부터 이다; 이로부터 “니느웨”인 거짓이 온다. 두 번째 근원은 첫째와 근원은 같으나 부패된 욕망이 혁신이나 탁월함 같은 것을 위해 주권을 행사하는 경우인데, 이런 근원으로부터의 거짓이 “르호봇”이다. 세 번째 근원은 의지로부터와 탐욕들로부터 인데, 이 안에서 인간들은 자신의 탐욕들이 좋아하지 않는 것은 어떤 진리라도 거절해버리는 경우인데, 이로부터 “갈라”라 불리우는 거짓이 온다. 위 세 거짓들 모두는 앗수르를 통하여, 또는 신앙으로부터의 진정한 생각들과 선한 결과들에 관하여 (궤변적인) 추론을 통하여 발생한다.
“니느웨”에 의해 비 계발된 이해력의 불명료함에 있는 감각들의 오류로부터, 그리고 무지로부터 발생하는 거짓들이 의미되는 것은 요나서로부터 분명해진다, 요나가 니느웨로 보내졌고, 그 도성의 사람은 위와 같은 근원의 거짓들에 있었는 바, 용서되어졌다, 그리고 니느웨에 관한 요나서의 세부 사항들에 관한 것은 차후 신성한 자비에 의해 다른 곳에서 언급될 것이다. 이 세부 사항들은 역사물이지만 예언적이어서 비밀함을 내포하고 표현도 되고 있다. 엄밀히 말해 역사적 말씀의 대부분의 경우도 대개 이 범주에 있다.
이사야서 37:37, 38절에서도 마찬가지인데, 그 대목에서, 앗수르왕이 니느웨에 머무는 동안, 그가 그의 신 니스록의 집에서 엎드려 절할 때, 그의 아들들이 그를 검으로 살해했다. 비록 이런 것들이 역사물 일지라도, 여전히 이 줄거리들은 예언적이어서 신비함을 내포하고 표현하고 있다; 그리고 여기서 “니느웨”에 의해 거짓들이 안에 들어있는 외적 예배가 의미된다; 그리고 이것이 우상숭배였기 때문에 그는 검으로 그의 아들들에 의해 죽고말았다. “아들들”은 거짓들을 뜻하는 것은 이미 살핀 바 있다; “검”은 거짓의 처벌을 뜻한다. 이는 말씀의 모든 곳에서 마찬가지 의미이다.
스바냐서에서도 위와 비슷하다:
여호와께서 그분의 손을 북쪽에 뻗으실 것이다, 그리고 앗수르를 멸하실 것이다, 그리고 광 야의 메마름 같이, 니느웨를 황무해지게 만드실 것이다, 그리고 양떼들이 그녀의 한 가운데 누울 것이다, 모두 각각 종류의 들짐승, 가마우지와 알락해오라기가 거기 석류나무에서 밤 을 보낼 것이다, 음성이 창문들에서 노래할 것이다, 문지방은 황폐해져 있을 것이다, 그 이유가 그것의 삼목이 벗겨졌기 때문이다 (습. 2:13, 14).
위 구절은 니느웨를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예언적 문체이다, 그리고 거짓 자체가 니느웨에 의해 의미되고 있다. 이 거짓, 이것이 예배되기 때문에 “북쪽, 갖가지 종류의 들짐승, 석류나무에 있는 가마우지와 알락해오라기”라 불리운다, 그리고 “창문에서 노래하는 음성”에 의해 묘사되어진다. 그리고 “삼목이 벗겨 놓였다”에 의해 지적인 진리들이 의미된다. 한마디로 이런 모든 표현들은 거짓을 의미하고 있다.

탐욕들로부터 근원하는 거짓들이 “갈라”에 의해 의미된다는 것은 예언서들로부터 확증되어질 수 없고, 말씀의 역사적 부분들에서만 가능하다, 즉 앗수르의 왕이 이스라엘의 아들들을 앗수르로 끌어가서, 갈라와 고산의 강변 하볼, 메대의 성읍들에 거주하게 했다 (왕하 17:6; 18:11). 이런 역사적 사실들은 위의 사항 외에 다른 의미는 없다. 말씀의 모든 역사물이 표현적이고 상징적(의미적)임은 이미 살핀 바 있다. 이리하여 (정리 요약하면) “이스라엘”은 뒤집혀진 영적 (평면의) 교회를; “앗수르”는 합리화를; 그리고 “갈라”는 (뒤집혀진 교회와 합리화로 발생한) 거짓이다.

그리고 레센, 니느웨와 갈라 사이에. 이는 그들이 자신들을 위해 생활의 교리들도 만들어냈음을 의미한다는 것; 그리고 거기로부터 파생된 거짓 교리들이 “레센”에 의해 의미되었다는 것은 니느웨와 갈라에서 살핀 것으로부터, 그리고 또한 연결됨으로부터, 즉 앞 절에서는 교리의 거짓들을, 이 구절에서는 생활의 교리들을 취급함으로부터 알런지 모른다. 그 이유가 말씀의 문체, 특히 예언서의 문체의 경우, 두 가지 측면, 이해력 측면과 의지 측면을 다루는 방식이 말씀의 문체에 있는 특징이기 때문이다. 앞 절에서는 이해력에 속한 것, 즉 교리로부터의 거짓들이다; 이 구절은 의지력에 속한 것, 즉 “레센”에 의해 의미되는 생활의 거짓들이다. 레센에 관한 더 많은 언급은 말씀에 없는 바, 이것이 니느웨와 갈라 사이에 건축되었다는 사실, 즉 결함 많은 추론과 욕망에서 비롯되는 거짓 사이에서 생활의 거짓이 생산된다는 것 외에는 더 많이는 확증되어질 수 없다; 이 성이 큰 성이라 불리는 이유는 이해력과 의지력 모두로부터의 거짓들이기 때문이다.

이 성은 큰 성이다. 이것이 교리들을 의미한다는 것, 그리고 이것들이 불어나고 크게 유행했다는 것은 “성”의 의미가 진정한 교리, 또는 거짓 교리를 의미함으로부터 분명해진다. 그리고 “큰 성”이라 불리운 이유는 교리의 모든 거짓들이 의미되는 바, 이 거짓으로부터 예배의 거짓들이 있고, 생활의 거짓을 파생하기 때문이다.

제 10절에서 예배에 있는 악이 “바벨, 에렉, 악갓, 그리고 갈레, 시날의 토지에서”에 의해 의미됨이 다루어졌다; 11, 12절에서는 예배에 있는 거짓들이 “니느웨, 르호봇, 갈라, 그리고 레센”에 의해 의미됨이 취급된다. 거짓들은 비뚤어진 추론으로부터의 원리들에 속하고; 악들은 세상을 사랑함(물질주의)과 자기 사랑(이기심)으로부터의 (강한) 욕망에 속한다.

13, 14절. 그리고 미스라임은 루딤과 아나밈과 르하빔과 납두힘과 14 바드루심과 가슬루힘, 그로부터 블레셋이 나왔고, 그리고 갑도림의 아버지이었다.

미스라임은 루딤과 아나밈과 르하빔과 납두힘의 아버지이었다. 이들이 아주 많은 나라들을, 이를 수단으로 많은 의식들이 의미되어진다는 것은 미스라임, 또는 이집트에 관해 살핀 10:6으로부터, 즉 이집트는 기억속의 지식(학식), 또는 기억 속의 재제들(사실에 입각한 지식)을 의미함으로부터 알런지 모른다. 미스라임을 아버지로 하는 그들은 의식 외의 더 다른 의미는 없다, 그리고 사실상 외적 예배 속의 의식 외에 더는 아니다. 그 이유가 깊은 측면에서, 즉 내적 의미에서 주님의 말씀은 그분의 왕국, 고로 교회에 속하는 것들 외에 다른 것은 다루지 않기 때문이다; 여기서의 경우같이 추론들을 수단으로 기억 속의 지식으로부터 태어나는 것들은 의식들 밖에는 없다.

“미스라임” 또는 “이집트”가 기억 속의 지식인 것은 10:6에서 살폈다. “루딤, 아나임, 르하빔, 그리고 납두힘”은 기억 속의 지식에 머문 여러 많은 의식들인 것은 방금 서술한 것으로부터 분명해진다. 의식들을 가지고 있다고 말해지는 이들은 영적인 것들과 천적인 것들을 추론함을 수단으로 조사하는 이들이다, 이 조사를 수단으로 자신들을 위한 예배를 고안해낸다. 추론들과 기억 속의 지식으로부터 있는 이 예배의 의식들이 기억 속의 지식으로부터의 의식들이라 불리운다. 이 의식 안에는 영적, 천적인 것은 하나도 없다. 그 이유는 그것들이 자신들로부터 있었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이집트의 우상과 마술이 나왔다. 그리고 그들의 의식들이 이 근원으로부터였기 때문에 그들은 고대 교회의 의례들을 통째로 거절하거나 몹시 혐오했다. 이는 창. 43:32; 46:34; 출. 8:22로부터 알 수 있다. 이런 것들이 의미되었기 때문에 그들은 미스라임(이집트)을, 즉 기억 속의 지식을 아버지로 하였다고 말해진다. 그리고 그들의 기억 속의 지식들은 다양했는 바, 파생되는 의식들 또한 다양했다. 이런 다양함들이 여러 나라들로 의미된다. 이와 같은 것이 루딤(루디안)에 의해 뜻해지는 것이 예레미야서에서 보여진다:
이집트가 강같이 일어난다, 그리고 강들 같이 물들이 출렁거린다; 그리고 그는 말한다, 나 는 땅을 덮을 것이다, 나는 성과 성의 주민을 멸할 것이다. 올라오라, 너희 말들아, 그리고 사납게 날뛰라, 병거여, 그리고 용사가 나아가게 하라, 방패를 다루는 구스와 붓이여, 그리 고 활을 구부리고 다루는 루디안들이여 (예. 46:8, 9).
위에서 “이집트의 강들”은 거짓들인 가지각색의 기억 속의 지식들이다; “올라가서 땅을 덮는 것”은 기억 속의 지식들을 수단으로 신앙에, 또는 교회에 속하는 것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성을 멸하는 것”은 진리들을 멸하는 것이다; “구스와 붓”은 지식들이다; “루디안들”은 방금 위에서 말한 바대로 기억 속의 지식으로부터의 의식들이다; “활을 구부리고 다루는 것”은 얄팍한 논법에 빠져있음 이다.

“바슬루심과 가슬루힘”은 이 이름들에 의해 불리우는 나라들, 그리고 그들은 비슷한 근원, 즉 기억 속의 세속적인 지식들로부터의 의식들에 관한 교리들을 의미한다는 것은 이미 서술한 것으로부터; 그리고 시리즈 안에서 이 방식으로 이어지는 것들로부터 분명해진다. 바슬루심에 관한 성경 구절로는 이. 11:11, 12; 겔. 29:13-15; 30:13, 14; 예. 44:1, 15를 보기 바란다.

그로부터(가슬루힘으로부터) 블레셋이 나왔다. 이것은 거기서부터 파생된 나라를 의미한다는 것, 이 나라를 수단으로 신앙과 선행에 관한 지식에 관한 기억 속의 지식에 불과한 것을 의미한다는 것은 블레셋이 자주 언급되는 말씀으로부터 분명해진다. 고대 교회에서, 신앙에 관하여 이야기는 많이 하고, 구원은 신앙 안에 있다고 선포하는데, 정작 신앙의 삶은 없는 모든 이들을 블레셋이라 불렀다. 그러므로 그들은 “할례받지 않은 자”라 칭하여 여느 민족보다 더 특이하게 언급되고 있다. 이런 자들은 선행이 결핍된 자들을 뜻한다. 그들이 “할례받지 않은 자”라 불리운 성경 구절로는, 삼상. 14:6; 17:26, 36; 31:4; 삼하 1:20, 이 외 많은 구절들이 있다. 이들이 위와 같기 때문에, 그들은 신앙의 지식들을 기억 속의 지식 수준에 있게 만들 수밖에 없었다. 그 이유가 영적이고 천적인 것들에 관한 지식과 신앙 자체의 참 신비함은 이를 지닌 당사자에게 선행이 결핍될 경우, 이것 모두는 기억 속의 별 것 아닌 사항 정도로 되어지고 만다. 기억 속의 것들은 당사자가 자기 양심으로부터 그것들에 따라 살지 않으면 죽어 있는 것과 같다. 그것들에 따라 살 때, 그것들은 기억 속의 것들이면서도 생명 속의 것도 되어 있다. 이렇게 될 때만이 기억 속의 것들은 사후 그의 사용과 구원을 위해 남아 있는다. 지식들이 그의 삶 속에서 어우러져 있지 않으면, 이 지식들은 다른 삶에서 무용지물이다. 설사 모든 신비를 다 알아챘다 해도 아무 쓸모가 없다는 말이다.
이상 상술한 내용들은 말씀의 예언적, 역사적 부분들 어느 곳에서이든 “블레셋”에 의해 의미되어진다. 예를 들면, 아브라함이 블레셋의 토지에 체류했을 때, 그리고 블레셋왕 아비멜렉과 계약을 만든 것 (창. 20:1-끝절; 21:22-끝절; 26:1-34). 신앙에 관한 지식들이 블레셋에 의미되기 때문에, 아브라함, 그가 신앙의 천적인 것들을 표현했기 때문에, 거기에 체류했고, 그들과 계약을 맺었다; 그리고 이삭도 마찬가지 상황이었는데, 그가 신앙의 영적인 것들을 표현했기 때문에서이다; 그러나 야곱의 경우는 아니다, 그 이유는 야곱에 의해 교회의 외적인 것들이 표현되었기 때문이다.
“블레셋”이 신앙의 지식들에 관한 단순한 기억 속의 지식에 불과한 상태를 일반적으로 의미하는 것, 특별하게는 신앙과 구원이 신앙에 관한 지식만 알면 되는 것에 있다고 만들어, 기억 속의 사항들 수준에 머물게 하는 이들을 의미한다. 이에 관해 이사야서를 보자:
너희를 치던 막대기가 부러졌다고 너 온 블레셋족이 기뻐환호하지 말라; 그 이유가 뱀의 뿌리로부터 독사가 나오고, 그의 열매는 날아다니는 불같은 뱀일 것이기 때문이다
(이. 14:29).
위에서 “뱀의 뿌리”는 기억 속의 지식들을 표시한다; “독사”는 파생된 거짓으로부터의 악을; 그리고 “날아다니는 불 같은 뱀”은 그들의 일들을 표시한다. “날아다니는 불 같은 뱀”이라 불리운 이유는 그것들이 탐욕들로부터 이기 때문이다.
요엘서에서:
너희가 나에게 무슨 상관이 있느냐? 오 두로야, 시돈아, 그리고 블레셋의 모든 변두리 지역 들아. 너희가 내게 되갚겠다는 것이냐? 아주 빠르게 내가 너희 머리 위에 네 되갚음을 돌 려줄 것이다. 이런 것이다. 너희는 내 은과 내 금을 가져갔고, 그리고 내 아끼는 귀한 것들 을 네 성전으로 옮겼다; 유다의 아들들과 예루살렘의 아들들 역시 너희는 야완족에게 팔아 서 그들이 자기들의 변경으로부터 멀어지게 한 것(과 똑같이 되돌릴 것이다) (욜.3:4-6).
위에서 블레셋에 의해 뜻해지는 것은 분명해 있다, 그리고 “모든 블레셋족”, 또는 블레셋의 “모든 변두리 지역”의 뜻도 분명하다. “은과 금”은 신앙의 영적인 것들과 천적인 것들이다; “아끼는 귀한 것들”은 그것들에 관한 지식들이다. 그들이 “그것들을 자기들의 성전으로 옮겼다”는 것은 그들이 소유하자 (자기들 것이라고) 선포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유다의 아들들과 예루살렘의 아들들을 팔았다”는 것은 그들은 사랑도 없고 신앙도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말씀에서 “유다”는 신앙의 천적인 것, 그리고 “예루살렘”은 거기서 파생된 신앙의 영적인 것인데, 이것들이 그들의 변두리 지역에서 멀리 옮겨진다는 것이다. 아래 성서 구절 역시 비슷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예. 25:20; 47:1-끝절; 겔. 16:27, 57; 25:15, 16; 암. 1:8; 옵. 19절; 습. 2:5; 시. 83:7; 87:4. 그리고 갑도림에 관하여는 신. 2:23; 예. 47:4; 암. 9:7을 살피기 바란다.

그들이 [가슬루힘으로부터] “나갔다(went forth)”는 것은 그들과 더불은 지식은 기억 속의 지식 수준으로만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이미 서술한 내용으로부터 분명해진다. 그들이 이집트로부터 있는 이들을 수단으로 (아버지로부터) 태어나졌다고 말해지지 않고, 그들로부터 “나갔다”고 말해지는 이유는 그들이 영적, 천적인 것들에 관한 자연적 기억 속의 지식들로부터 추론하고, 그것 가지고 자신들을 위한 교리들의 뼈대를 세운 것이 아니라, 그들은 다른 사람들로부터 신앙의 지식들을 배우고, 알고, 그것들을 기억 안에 잊지 않게 존속시켰는데, 이렇게 한 목적은 오로지 자신들의 명예 따위들을 보강하는 것 외에는 아무 관심도 없었다. 그러므로 신앙의 지식들에 관한 기억 속의 지식으로만 있는 것은 자연적인 것들에 관한 기억 속의 지식으로부터 구분되고 서로 공통되는 것은 거의 없다; 그러므로 누구로부터 “태어난다”라고 말하지 않고 그들이 그들로부터 “나왔다”라고 말해진 것이다. 블레셋의 특성이 이와 같은 바, 그들은 그것들로부터 추론함으로 신앙의 지식들조차도 뒤집을 수 밖에 없다. 이 뒤집음으로부터 그들은 자신들을 위해 거짓 교리들을 만들어낸다; 그러므로 그들은 선행을 받고 거듭나짐이 어려울 수 밖에 없는 이들 사이에 있는다. 그 이유는 그들은 심정이 할례받지 않았고, 그들의 이해력에서는 거짓 원리들이 주체이고, 그들의 재탄생을 방해하는 바, 심정과 지성 모두에서 거듭남을 반대하기 때문이다.

15절. 그리고 가나안은 장자 시돈과 헷의 아버지이었다.

“가나안”은 내용물이 하나도 없는 외적 예배를 의미함은 이미 살핀 바 있다. “가나안”이라 불리는 외적 예배는 주님이 오시기 전과 후 시대의 유대인의 예배와 같은 것이다. 그들은 외적 예배를 엄격히 준수해왔지만, 여전히 내용물에 관하여는 무지한 채 있었으므로 그들은 인간은 육체와 더불어서만 살고 있다고 상상했다. 혼의 본성, 신앙의 본성, 주님의 본성, 영적이고 천적인 생명의 본성, 사후 삶의 본성, 이런 등등에 그들은 완전 무지했다. 그러므로 주님의 시대 때에, 그들 중의 많은 이들이 부활을 부정했다. 이에 관한 성경은 마. 22:22-33; 막. 12:18-28, 눅. 20:27-41을 읽기 바란다. 인간이 사후 산다는 것을 믿지 않을 때, 그는 영적이고 천적인 내면의 어떤 것도 믿지 않는다; 그리고 그들은 오직 탐욕들에서만 사는데, 그 이유는 그들이 육체와 세상의 삶만에서 살기 때문이다; 특별히 지긋지긋한 탐욕 안에 침수된 채로 있다. 그럼에도 그들은 예배를 가지고, 회당에, 교회에 참석하고, 축절기를 준수하고, 어떤 이의 경우 나름대로 대단히 엄격하게 준수하기까지 한다; 그러나 그들이 사후 삶이 있음을 믿지 않을 때, 그들의 예배는 내용물이 하나도 없는 외적 예배일 수 밖에 없다. 마치 알맹이 없는 껍질, 열매 없는 나무, 아마 잎조차도 있지 않을 것이다. 앞서 취급된 다른 종류의 외적 예배는 안에 내용물을 가진 예배들이었다.

“시돈”은 영적 (평면의) 속성에 관한 외면적(피상적) 지식들을 의미하는 것은 시돈이 “가나안의 첫 출생”이라 불리운 사실로부터 분명해진다; 그 이유가 모두 각각의 교회의 첫 출생은 내적 의미에서 신앙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서의 경우, 내적인 것이 없기 때문에 신앙이 없고, 신앙 대신에 영적인 것들에 관한 외면의 지식들밖에 없다; 고로 이 지식들은 유대인들에게 존재한 지식과 같은 것들이다. 이 지식은 외적 예배의 의식에 관한 지식 뿐만 아니라 이 예배에 속하는 교리 같은 많은 것들에 관한 지식들이다. 이것이 “시돈”의 의미이다는 것은 두로와 시돈이 블레셋의 맨 끝 변두리 지역이었고, 더욱이 바다 가까이 위치했다는 사실로부터도 분명해진다; 그러므로 “두로”에 의해 내면의 지식들이 의미되고, 그리고 “시돈”에 의해 외면의 지식들, 즉 영적인 것들에 관한 외면의 지식들이 의미되어진다. 이에 관하여 말씀으로부터도 분명해진다. 예레미야서에서:
모든 블레셋을 황폐시키고, 남아있는 모든 도울 자를 두로와 시돈으로부터 잘라내시는 날 이 온다; 그 이유가 여호와께서는 블레셋을 황폐시키고, 갑돌 섬의 남은 자를 진멸하시기 때문이다 (예47:4).
위에서 “블레셋”은 신앙과 선행에 관한 지식들을 기억 속의 지식으로만 머물게하는 것을 표시한다; “두로”는 영적인 것들에 관한 내면의 지식들을, “시돈”은 외면의 지식들을 표시한다.
요엘서에서:
너희가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오 두로와 시돈아, 그리고 블레셋의 모든 변두리 지역아. 너희는 내 은과 금을 가져가고, 그리고 내 귀하게 여기는 것들을 너희 성전으로 옮겼던 만 큼…(욜. 3:4, 5).
위에서 “두로와 시돈”은 지식들을 분명하게 표시한다, 그리고 “블레셋의 변두리 지역들”이라 불리운다; “은과 금”, 그리고 “귀하게 여기는 것들”은 지식들이다. 에스겔서에서:
북쪽의 제 1 인 자들, 그들 모두, 그리고 모든 시돈 사람들은 살해당한 자들과 더불어 구덩 이로 내려간다. 그분이 할례받지 않은 자 사이에, 검으로 살해 당한 자와 더불어 눕게 하실 때; 바로와 그의 무리들 (겔. 32:30, 32).
위에서 “시돈 사람들”은 외면의 지식들, 이 지식들은 내적인 것이 없고, 기억 속의 지식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그들은 기억 속의 지식을 의미해주는 바로, 또는 이집트와 연결하여 명명되고 있다. 스가랴서에서:
하맛 역시 거기에 경계를 둘 것이다; 두로와 시돈, 그녀가 매우 지혜로왔기 때문에
(슥. 9:2).
여기서의 주제는 다마스커스이다; “두로와 시돈”은 지식들을 표시한다.
에스겔서에서:
시돈과 아르왓 주민들은 네 노젖는 자들 이었다; 네 슬기로운 자가, 오 두로야, 네 안에 있 다, 그들은 너의 수로 안내인이었다 (겔. 27:8).
위에서 “두로”는 내면의 지식들을 표시한다; 그러므로 그녀의 슬기로운 자가 “수로 안내인”이라 불리운다‘ 그리고 “시돈”은 외면의 지식들을 표시한다, 그러므로 그녀의 주민들은 “노젖는 자”라 불리운다; 그 이유가 이렇게 수로 안내인과 노젖는 자의 관계가 내면의 지식과 외면의 지식의 관계이기 때문이다. 이사야서에서:
섬 주민들은 잠잠하라, 바다를 건너는 시돈의 상인이 너희를 재충전 해주었다. 그리고 큰 물들에서 시홀의 씨, 강의 수확이 그녀의 수입원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나라들의 장터였다, 부끄러워 해라, 오 시돈아; 그 이유가 바다가 말했었다, 바다의 요새가 말하기를, 나는 산고 를 겪지 않았다, 낳지 않았다, 나는 젊은이들을 양육하지도 않았다, 처녀가 성장하게 해주 지도 않았다 (이. 23:2-4).
위에서 “시돈”은 외면의 지식들을 표시한다, 이 지식은, 그 안에 내용물이 없기 때문에 “시홀의 씨, 강의 수확이 그녀의 수입원, 나라들의 장터”, 그리고 “바다”, 그리고 “바다의 요새”라고 불리우고 있다; 그리고 그녀는 “산고도 낳지도 않았다”고 말해진다. 이런 내용은 글자 의미에서 납득되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내적 의미에서는 완전 명백하다; 예언서의 다른 구절들에서도 이는 마찬가지이다. “시돈”이 외면의 지식들을 의미하기 때문에 이스라엘, 즉 영적 (평면의) 교회를 빙둘러 라고 말해진다 (겔. 28:24, 26); 그 이유가 외면의 지식들은 빙두른 순회(circuit, 우리의 신체 부분에서 피부와 비슷할지 모른다)이기 때문이다.

시돈이 “가나안의 첫 출생”이라 불리운 것은 이 지식들이 안에 내용물이 없는 외적 예배의 맨 먼저의 것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이는 앞 문항에서 설명되었다.

“헷”은 천적인 속성들에 관한 외면적인(피상적인) 지식들을 의미하는 것은 논리적으로 뒤잇는다. 예언서에서 영적인 것과 천적인 것이 함께 연결되어 있는 것, 즉 영적인 것을 취급하는 곳에서 천적인 것 역시 취급되는 것은 관례적이다; 그 이유가 이것이 저것으로부터 있는 바, 그것들이 함께 연합되지 않으면 어떤 부족함이 발생하기 때문에서이다; 연합 내지 결합되어 있어야 말씀의 각각, 그리고 전체 안에 천국적 결혼의 형상이 있기 때문이다. 이 구절, 내지 말씀의 다른 구절로부터 분명한 것은 “시돈”은 영적인 것에 관한 외면의 지식들을, “헷”은 천적인 것에 관한 외면의 지식들을 의미하고, 이는 내적인 것 없는 상태와 있는 상태에서의 양쪽 모두에서 의미하고 있다. 그리고 단순히 외면의 지식들을 의미할 경우도 있다. 영적인 것들은 신앙으로부터 있는 것이다. 이는 이미 언급한 바 있다. 천적인 것들은 사랑으로부터 있는 것들이다; 그리고 다시 영적인 것들은 이해력으로부터 있는 것들이고, 천적인 것들은 의지로부터 있는 것들이다. “헷”이 내용물 없는 외면의 지식들을 의미하는 것은 에스겔서에서 분명해진다:
그런고로 주 여호비께서 예루살렘에게 말하신다, 네 장사하는 것과 네 태생은 가나안의 토지로부터 이다; 네 아비는 아모리족이었고, 네 어미는 헷족이었다. 너는 자기 남자와 자 기 아들들을 싫어한 네 어미의 딸이다; 그리고 자기들의 남편과 자기들의 아들들을 싫어한 네 자매들의 자매이다. 너의 어머니는 헷족이었고, 네 아비는 아모리족이었다
(겔. 16:3, 45).
위에서 내용물 없는 외적 예배가 “가나안”이다; “남편들과 아들들을 싫어한다”는 것은 선들과 진리들을 거절하는 것이다. 이로부터 그녀의 어미는 “헷족”이라 불리운다. 그러나 “헷족” 역시 말씀에서 천적인 것들에 관한 외면의 지식을 뜻하기 위해 등장하는바, 여기서의 경우 좋은 의미에서이다. 사실 말씀에 언급되는 나라, 인물, 도성, 민족 등도 마찬가지 범주에 있다. “헷”에 관한 이런 의미에 관하여는 주님의 신성한 자비로 차후 더 언급될 것이다. 영적인 것들에 관한 지식은 신앙을, 결과적으로 교리를 주시해서 보는 경우이다. 천적인 것들에 관한 지식은 사랑을, 고로 생명을 주시해서 보는 경우이다.

16-18절. 이어서 여부스 족속과 아모리 족속과 기르가스 족속과 17 히위 족속과 알가 족속과 신 족속과 18 아르왓 족속과 스말 족속과 하맛 족속의 조상을 낳았다 그 후 가나안의 후예들이 두루 퍼졌다.

“여부스족, 아모리족, 기르가스족, 히위족, 알가족, 신족, 아르왓족, 스말족, 하맛족”은 아주 많은 나라들을 말하는데 또한 그 나라들은 다양한 많은 우상들도 의미한다. 우상들이 이런 나라들에 의해 의미되어진다는 것은 말씀의 여러 구절로부터 분명해진다. 그 이유가 그들은 가나안의 토지의 거주민이었는데, 자기들의 우상들 때문에 내쫓겼거나 부분적으로는 절멸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말씀의 내적 의미에서는 이 나라들을 뜻하지 않고 우상들 자체가 일반적으로 그들이 누구이든, 어디서이든 우상들을 의미한다; 특별하게는 유대인들의 경우이다. 그 이유가 예배가 외적인 것들만에 존재하게 만드는 이들, 그리고 내적인 것들에 관심이 없어 알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이들, 따라서 내적인 것에 대한 가르침이 있어도 거절해버릴 때, 외적인 모든 것들은 우상화되기 십상이다. 이는 유대인들로부터 매우 분명해진다. 내적 예배만이 인간이 우상쪽으로 기울어짐으로부터 버티게 해준다; 그리고 이것이 중단될 때, 제제해주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내면의 우상들 뿐 아니라 외면의 우상들도 있다. 내적인 것 없는 외적 예배를 가진 이들은 외적 우상들로 돌진해버리고 만다; 내용물이 불순한 외적 예배를 가진 이들은 내면의 우상들로 돌진하고 만다; 이런 두 가지 종류의 우상들이 위의 나라들에 의해 의미되어진다. 내면의 우상들은 인간이 사랑하고 숭배하는 많은 거짓들과 탐욕들이다. 이것이 이방인들 사이에 존재한 신들과 우상들 안에 있다. 그러나 거짓들과 탐욕들의 세부적인 종류들은 위의 나라들에 의해 의미되고 숭배되는 것들이다. 이것들이 하나하나 열거해 설명하는 것은 너무 많은 바, 주님의 신성한 자비로부터 그 이름들이 발생하는 구절들에서 살피기로 한다.

그후 가나안의 후예들이 두루 퍼졌다. 이는 우상 예배의 다른 모든 형체들이 이것들로부터 파생되었다는 것인데, 이는 설명이 없어도 분명해질 것이다.

19절. 그리고 가나안의 경계는 시돈으로부터 그랄에 이르러 가사에까지, 소돔과 고모라, 그리고 아드마와 스보임에 이르러 라사까지 였다.

“시돈”에 의해 외면의 지식들이 의미되어진다는 것은 15절로부터 분명해질 것이다.

“그랄”에 의해 신앙에 관해 밝히 알아 왔던 것이 의미된다는 것은 그랄이 언급되는 구절, 창. 20:1; 26:1, 17로부터 분명해지는데, 이 의미에 관하여는 차후 주님의 신성한 자비로부터 살필 것이다. [2504, 4465, 3417항]

“가사”에 의해 선행에 관해 밝히 알아왔던 것들이 의미되는 것은 말씀에서 영적인 것들이 취급되는 대목에서는 천적인 것들 역시 취급된다는 사실로부터 분명해진다. 다시 말해 신앙에 관한 것들이 취급될 때, 선행 속의 것들 역시 취급된다는 말이다; 그리고 “가사”가 언급되는 구절로부터도 역시 분명해진다; 그리고 지식들은 신앙을 포함하려 확대되고, 지식들의 더 먼 한계선인 선행에까지 닿으려 펼쳐진다는 것 역시 숙고해 봄으로부터도 분명해진다.

가나안의 경계는 시돈으로부터 그랄에 이르러 가사에까지…였다. 이는 내용물 없는 외적 예배를 가진 이들의 지식들의 확장을 의미하는데, 이는 “그랄”과 “가사”의 의미로부터 분명해진다. 이는 예배가 외적이든 내적이든 예배에 관련된 모든 지식들의 경계선들이 멀리 확장된다는 말이다; 그러나 모든 예배는 신앙과 선행으로부터이다. 이로부터 있지 않은 것은 예배가 아니고, 우상이다. 가나안, 즉 외적 예배와 이로부터의 갈래들이 여기서 취급되는 바, 여기서의 확장과 경계선들은 예배에 관해서가 아닌 지식들에 관해서이다.

소돔과 고모라, 그리고 아드마와 스보임에 이르러 라사까지 였다. 이것들은 그들이 종결짓는 거짓들과 악들을 의미한다는 것, 이는 말씀의 역사적, 예언적 대목들에 등장하는 같은 이름들로부터 분명해진다. 일반적으로 거짓들에는 두 근원이 있다; 하나는 자기를 사랑함과 세상을 사랑함에 속하는 탐욕이다; 다른 하나는 보잘것 없는 추론을 통하여 생기는 지식들이다; 이렇게 근원된 거짓들이 진리를 압도할 때 “소돔, 고모라, 아드마, 스보임”에 의해 의미되어진다. 그것들로부터의 거짓들과 악들이 내용물 없는 외적 예배의 경계선들이다. 이런 예배는 죽은 예배이다; 이런 죽은 예배에 있는 이들은 어느 방법, 어느 방향으로 틀든지, 그는 거짓들에 침수되고 만다. 진리의 길로 인도하고 그 길을 지키는 내적 예배가 없고 외적 예배만 있으면 이 예배는 탐욕과 공상이 인도하는 어느 곳이든 그를 운반해버린다. 소돔, 고모라, 아드마, 스보임이 말씀의 예언적, 역사적 부분들에서 언급되는 바, 각각이 특별히 의미하는 것들은 주님의 신성한 자비로부터 설명될 것이다.

20절. 이들은 함의 아들들인데 그들의 족속들에 따라, 그들의 혀들에 따라, 그들의 토지들에서, 그들의 나라들에서 이다.

“함의 아들들”이란 “함”인 부패된 내적 예배로부터의 예배들과 교리들의 파생물들을 의미하는 것은 교리들인 “아들들”의 의미로부터 분명해진다; 그리고 부패된 내적 예배인 “함”의 의미로부터 분명해지는데 이는 앞서 살폈다.

그들의 족속들에 따라, 그들의 혀들에 따라, 그들의 토지들에서, 그들의 나라들에서. 이것은 일반적, 세부적으로 각각의 타고난 자질에 따라서를 의미한다는 것은 5절에서 설명되었다. 5절에서 같은 말들이지만 나열한 순서는 다르다. 5절의 주제는 야벳의 아들들이고, “이들로부터 나라들의 섬들로, 그들의 나라들에 관하여, 그들의 토지들에서, 그의 혀에 따라서 모든 이가, 그들의 족속들에 따라서 흩어졌다”라 언급되었는데, 이는 내용물이 있는 외적 예배였다. 그러므로 5절의 경우는 교리에 속하는 것들이 먼저 진행되나, 여기서는 도덕, 또는 생활에 속하는 것들이 먼저 진행된다.

“그들의 족속에 따라서”란 그들의 도덕 기준에 따라서를; “그들의 혀에 따라서”란 그들의 의견들에 따라서를; “그들의 토지들에서”란 일반적 측면에서의 그들의 의견들에 따라서를; “그들의 나라들에서”란 일반적 측면에서의 그들의 도덕 기준에 따라서를 말하는데, 이는 이 단어들, 즉 “족속(family)”, “혀”, “토지”, 그리고 “나라” 들이 등장하는 말씀 대목에서 알 수 있다. 이는 5절에서도 살핀 바 있다.

21절. 셈에게도 역시 출생이 있었다. 그는 에벨의 모든 아들들의 조상이고 야벳의 형이다.

여기서 “셈”에 의해 일반적 측면에서의 고대 교회가 의미되어진다는 것은 여기서 취급된 주제가 에벨이라는 것, 셈이 참고로 언급된다는 것; 그리고 셈이 야벳의 형이다는 것을 숙고해 봄으로부터 의미 파악이 분명해진다.

“셈에게 출생이 있었다”는 여기서 새로운 교회가 고대 교회로부터 솟구쳐나왔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는 이 구절의 내용들로부터, 즉 에벨이 취급되고, 에벨을 수단으로 새로운 교회가 의미됨으로부터 분명해진다. 이에 관해 아래에서 언급한다.

“에벨”에 의해 새로운 교회가 의미된다는 것, 이 새로운 교회가 두 번째 고대 교회라 불린다는 것은 에벨이 특별히 다루어지는 대목에서 분명해진다. 여기서 에벨이 언급된 것은 새로운 교회가 에벨로부터 있었기 때문이다. 이 경우가 어떻게 에벨과 더불어, 그리고 이 두 번째 교회와 더불어서인지는 이후 주님의 신성한 자비로부터 말해질 것이다.

그는 에벨의 모든 아들들의 아버지이다. 이는 이 두 번째 고대 교회, 그리고 이 교회에 속하는 것은 이 교회의 아버지격인 앞의 고대 교회로부터 솟구쳐나왔음을 의미한다는 것은 에벨에 관련해 이어지는 대목들로부터, 그리고 이 두 번째 교회에 관련되는 구절로부터 알 수 있을 것이다. 그 이유가 에벨이 10장의 24-30절, 11장의 11-끝절까지에서 취급되기 때문이다.

야벳의 형이다. 이는 그것의 예배가 외적이었다를 의미하는데, 이는 야벳의 의미가 외적 교회이다로부터 분명해진다. 이에 관하여는 앞 장 18절, 그리고 이어지는 이 장의 구절들, 이 장의 1-5절로부터도 알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셈, 야벳의 형”은 특별하게 내적 교회와 외적 교회는 형제간이다를 의미한다; 그 이유가 내적 예배와 내적 예배가 안에 있는 외적 예배의 관계가 형제들의 관계 같기 때문이다. 이것은 혈연 관계인데, 그 이유는 각각 안에서 선행이 제 1 원리로 되어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적 교회가 형인데, 그 이유는 선행이 1순위이고, 내면적이기 때문이다. “야벳의 형이다”는 말은 이런 의미, 즉 “에벨”이라 불리우는 두 번째 고대 교회는 첫 고대 교회의 형제 역시 된다를 의미한다. 그 이유가 교회가 무엇이든, “야벳”이 내적 의미에서 내적 예배가 들어있는 외적 예배 외의 다른 의미는 없기 때문이다. 고로 이 새로운 고대 교회의 예배 역시 거의 외적이었다. 말씀의 글자의 역사성이 수반되지 않는 것, 즉 말씀의 보편성이 중시될 때의 경우가 내적 의미에 해당된다; 그 이유가 우리가 역사물을 주시해서 볼 경우, 우리는 보편적 의미를 상실하고, 우리가 보편적 의미를 찾을 경우, 우리는 역사물을 보는 것에 관심을 두지 않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여기서의 “야벳의 형”은 내적 의미에서 새로운 교회를 의미하고, 그것은 외적이었다. 이런 의미가 없다면 본 절에서 그가 야벳의 형임을 (이미 앞 절에서 우리가 그가 형임을 알고 있는데 번복해서) 굳이 기록해둘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22절. 셈의 아들들은 엘람, 그리고 앗수르, 그리고 아르박삿, 그리고 룻, 그리고 아람이다.

이런 이름들이 내적 의미에서 의미하는 것은 고대 교회가 지혜, 총명, 기억 속의 지식, 그리고 진리와 선에 관한 지식들을 수여받았다는 것이다. 비록 글자의 의미로부터 나타나는 것은 이름 뿐인 바, 나타나는 의미는 나라들의 근원, 또는 조상들, 고로 교리적인 것은 없고, 영적이고 천적인 것은 더 더욱 없는 듯 해도, 내적 의미에서 위의 사항들이 내포되어 있다. 예언서들에서 이런 경우가 많다. 이름들의 시리즈가 발생할 때, 이것은 내적 의미에서는 (영계의) 실제적인 것들을 의미하는 바, 그것들은 서로 아름다운 질서로 이어지고 있다.

“셈”에 의해 내적 교회가 의미되는 것은 창. 9:18과 그 이후 잇는 구절들에서 서술했다.

“셈의 아들들”에 의해 지혜로부터 있는 것들이 의미된다는 것은 셈이 내적 교회이다 만을 가지고도 분명해진다. 내적 교회로부터의 아들들은 지혜로부터의 것들밖에 더 다른 것은 없다. 지혜는 선행을 아버지로 하여 태어나진다. 지혜는 모든 지혜되시는 주님으로부터 선행을 수단으로 오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그분이 지혜 자체이시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진정한 총명이 오고, 이로부터 진정한 기억 속의 지식이 오고, 이로부터 진정한 지식이 온다. 이것들은 선행의 모든 아들들, 즉 선행을 통하여 주님의 아들들이다. 그리고 그들이 선행을 통하여 주님의 아들들이기 때문에, 지혜는 그것들의 각각이라 단정된다. 그 이유가 지혜는 그것들의 각각 안에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들은 선행으로부터 자기들의 생명을 끌어낸다. 따라서 주님으로부터 있는 지혜, 선행으로부터 있는 지혜로부터 생명을 가지지 않으면, 어느 것도, 즉 어느 총명도, 어느 기억 속의 지식도, 지식이 아니다.

“엘람, 앗수르, 아르박삿, 그리고 아람”이 여러 많은 나라들이었다는 것은 이들의 이름이 언급되는 말씀에서 분명해진다. 그리고 그들이 지혜로부터 있는 것들을 의미한다는 것은 방금 말해진 것, 그리고 뒤잇는 것들로부터 분명해진다. 이런 나라들 사이에 내적 교회가 있었다는 것; 다른 나라들, 즉 야벳의 아들이라 불리는 다른 나라들은 외적 교회였다는 것; 함의 아들들이라 불리는 이들과 더불어 부패된 내적 교회가 있었다는 것; 가나안의 아들들과 더불어 부패된 외적 교회가 있었다는 것이다. 이는 그것이 내적 예배이든, 외적 예배이든, 또는 내적 교회이든, 외적 교회이든, 완전히 동일하다.

“엘람”에 의해 선행으로부터의 신앙이 의미된다는 것은 내적 교회의 실체로부터 분명해진다. 교회는 선행을 교회의 제 1 원리로 하여 생각하고 행동할 때 내적 교회이다. 그리고 선행의 첫 자식은 신앙 외에 다른 것은 없다; 그 이유가 신앙은 선행으로부터 있기 때문이고, 다른 근원은 없기 때문이다. “엘람”이 선행으로부터의 신앙이다는 것, 또는 내적 교회를 구성하는 신앙 자체이다는 것은 예레미야서에서 분명해진다:
엘람에 관하여 예언자 예레미야에게 온 여호와의 말씀이시다: 잘 보라, 나는 엘람의 힘의 주요한 것인 그들의 활을 부술 것이다. 그리고 엘람 위에 나는 하늘들의 네 끝들로부터 네 바람들을 가져올 것이다, 그리고 그들을 모든 이 바람들을 향하여 흩틀 것이다; 그리고 엘 람에서 내쫓긴 자들은 모든 나라들로 갈 것이다. 그리고 나는 엘람으로 그들의 적들 앞에 서, 자기들의 혼을 찾는 자들 앞에서 당황하게 할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들 위에 악을, 내 맹렬한 분노를 가져올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들이 진멸될 때까지 그들 뒤를 따라 검을 보낼 것이다. 그리고 나는 엘람에 내 왕좌를 놓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왕과 제 1 인 자를 거기로부터 멸할 것이다. 그러나 훗날에 나는 엘람의 포로를 되돌려 데려올 것이다
(예. 49:34-39).
위 구절에서 “엘람”은 신앙을 표시한다, 또는 같은 것으로 내적 교회를, 이 교회가 뒤집혀지고 부패되었음을; 그 다음 같은 교회가 회복되었다를 표시한다. 이와 같은 식으로 말씀에서 유다, 이스라엘, 그리고 야곱 역시 자주 말하여진다. 이들을 수단으로 교회가 의미되는데, “유다”에 의해 천적인 교회가, “이스라엘”에 의해 영적인 교회가; “야곱”에 의해 외적인 교회가 의미된다; 이런 교회 역시 뒤집혀지고 부패될 때, 같은 방식으로, 이 교회들도 흩트러지고, 적들에 의해 흩트려진다는 것, 그리고 그들은 다시 모아들여지는 바, 포로됨으로부터 되돌려진다. 하여 이를 수단으로 새로운 교회의 창조가 뜻해진다. 이런 과정이 여기서는 엘람, 또는 뒤집혀지고 부패된 내적 교회에 있는데, 이 교회가 흩트러지고, 후에 이 교회는 되돌려질 것이라 말해진다; 그 다음 여호와께서는 그분의 왕좌를 엘람에, 즉 내적 교회에 놓으신다. 이는 선행으로부터의 신앙 속의 것들 외 다른 것은 없다.
이사야서에서:
바다의 사막의 무거운 짐. 이것이 격렬한 토지로부터, 사막으로부터 온다. 슬픈 환상이 나 에게 선포되었다; 불충한 자는 불충한 짓을 하라, 그리고 황폐케하는 자는 황폐케하라. 올 라가라, 오 엘람이여, 에워싸라, 오 마대여; 거기로부터의 모든 슬피움을 나는 그치게 만들 것이다 (이. 21:1, 2).
위 구절은 바벨에 의해 교회가 황폐함에 놓임이 말해지고 있다; “엘람”은 내적 교회이다; “마대”는 외적 교회 또는 안에 내적 예배가 있는 외적 예배이다. 마대에 관한 이런 의미는 창. 10:2절을 살피면, 거기서 마대는 야벳의 아들이라고 말해진다.

“앗수르”에 의해 이성(reason, 추론력, power of reason)이 의미되는 것은 이미 살핀 창. 10:11을 보기 바란다.

“아르박삿”에 의해 기억 속의 지식이 의미되는 것은 말씀으로부터서는 잘 확증해 볼 수 없고, 문맥의 앞과 뒤로부터의 시리즈로부터 분명해진다.

“룻”에 의해 진리에 관한 지식들이 의미되는 것은 진리에 관한 지식들은 이 근원으로부터, 즉 주님으로부터 선행을 통하여, 그리고 신앙을 통하여 추론과 기억 속의 지식을 수단으로 있다는 사실로부터 분명해진다. 이를 에스겔서를 통해 보자:
바사와 룻과 붓이 네 군대 안에, 네 군사들 안에 있었다; 그들은 네 안에 방패와 투구를 걸 어두었다; 그들은 네 명예를 드러나게 했다 (겔. 27:10).
위 구절은 두로에 관해서이다. “룻과 붓”은 지식들을 표시한다. 이들이 그녀의 군대, 군사라고 말해지는데, 그 이유는 그들이 추론의 도움으로 진리를 방어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방패와 투구를 걸어 두는” 것이다. “붓”이 말씀에 관한 외면의 지식을 의미하는 것은 창. 10:6로부터 알 수 있다.

“아람”, 또는 시리아가 선에 관한 지식을 의미하는 것은 논리적으로 뒤잇는다; 그리고 말씀으로부터 알 수도 있다. 에스겔서에서:
네 제조품이 풍부함에서 아람은 너의 무역상이었다; 녹옥수, 심홍색 (천), 그리고 수공예품 그리고 고운 아마포, 그리고 산호, 홍옥; 그들은 너와의 무역에서 그것들을 주었다
(겔. 27:16),
위는 두로에 관하여, 또는 지식을 획득함에 관하여서이다; 그리고 제조품, 즉 “녹옥수, 심홍색 천, 수공예품, 고운 아마포, 산호, 홍옥”은 여기서 선에 관한 지식들을 의미한다. 호세아서에서:
야곱은 아람 들판으로 도망했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아내를 얻기 위해 봉사했다, 그리고 아 내를 위해 그는 (앙떼를) 지켰다; 그리고 예언자를 수단으로 여호와께서는 이집트로부터 이스라엘을 데려내왔고, 예언자를 수단으로 그는 지켜졌다. 에브라임은 지독한 분노를 일으 키게 했다 (호. 12:12-14).
위에서 “야곱”은 외적 교회를 표시한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내적, 영적 교회를; “아람”은 선에 관한 지식들을; “이집트”는 뒤집혀지는 기억 속의 지식을; “에브라임”은 뒤집힌 총명을 표시한다. 시리즈에서 의미되는 이런 내용들은 글자 의미로부터는 보여질 수 없다, 그러나 내적 의미로부터서만 가능하다. 이 이름들은 교회의 다양한 현상들을 의미한다는 것은 이미 언급했다. 이사야서에서:
잘 보라 다마스커스는 도성으로 있음이 거절되었다, 그리고 황폐된 더미가 되어진다. 요새 역시 에브라임으로부터 중단될 것이다, 그리고 다마스커스로부터의 왕국과 아람의 남은 자 는 이스라엘의 아들들의 영광으로 있을 것이다 (이. 17:1, 3).
“아람의 남은 자”는 선에 관한 지식들을 표시한다. 이것이 “이스라엘의 영광”이라 불리운다. “아람”, 또는 시리아는 반대 의미에서 뒤집힌 선에 관한 지식들을 표시한다; 그 이유가 말씀에서 표현들이 두 측면의 의미에서 사용되는 것은 흔하기 때문이다. 추가로 이. 7:4-6;9:11, 12; 신. 26:5도 참고해보라.

23절. 그리고 아람의 아들들은 우스, 그리고 훌, 그리고 게델, 그리고 마스이다.

“아람”이 선에 관한 지식들을 의미하는 것은 방금 위에서 살폈다. “아람의 아들들”은 파생된 지식들, 지식들로부터 있는 것들이다는 것은 논리상 뒤이어진다. 이런 파생된 지식들은 자연적 진리들이다; 그리고 지식들로부터 있는 것들은 그것들에 따라 행해진 것들이다. 이런 것들은 말씀으로부터 잘 확증되어질 수 없다, 그 이유는 이 이름들이 자주 언급되지 않기 때문에서이다. 우즈만이 예. 25:20; 애. 4:21에서 언급된다. 이로부터 여기서는 “우즈, 훌, 게델, 마스”가 이런 지식들의 많은 종류들, 그리고 이에 따른 행동들을 의미한다.

24절. 그리고 아르박삿은 셀라의 아버지였고, 셀라는 에벨의 아버지였다. “아

“아르박삿”은 소위 나라이었고, 이 나라에 의해 기억 속의 지식이 의미되었다. 이에 관하여는 22절에서 살폈다.

“셀라”도 마찬가지로 나라를 말하고, 이 나라에 의해 이 기억 속의 지식으로부터 파생된 것을 의미했다. 그이유는 아르박삿이 셀라의 아버지였다라고 말해지기 때문이다.

“에벨” 역시 나라를 의미하고, 선조 중의 하나가 에벨이라 불리웠는데, 이 경우는 이렇다: 지금까지 언급된 이들은 고대 교회가 존재한 것들 사이에 있었다, 그리고 모두는 셈, 함, 야벳, 가나안의 아들들이라 불리웠다. 그 이유가 셈, 함, 야벳, 가나안에 의해 교회의 다양한 예배들이 의미되었기 때문이다. 노아, 셈, 함, 야벳, 가나안은 인간으로 존재한 인물들이 아니었다; 그러나 특별하게는 고대 교회를, 일반적으로는 모두 각각의 교회에 있어지는 것들, 즉 진정한 내적 측면, 부패된 내적 측면, 진정한 외적 측면, 부패된 외적 측면을 의미하기 위해 명명된 이름들이다. 이리하여 여러 다른 차이들이 일반적으로 각기 그들의 족장들 아래 족장과 그 아들들의 이름을 가지고 분류해 놓아진 것이다. 더 나아가 명명된 나라들은 근원적으로 이런 예배를 가졌다; 그러므로 노아의 아들들의 하나 중의 아들들이라 불리운다. 똑같은 이유를 위해 이런 예배 자체 역시 말씀에서 이런 나라들의 이름들에 의해 의미되어진다.
이 첫 고대 교회가 노아와 그의 아들들에 의해 의미되었는데, 그들이 소수로만이 존재한 것이 아니라 많은 왕국들로 팽창되었다. 즉 언급된 많은 나라들, 즉 앗시리아, 메소포타미아, 시리아, 에티오피아, 아라비아, 리비아, 이집트, 블레셋, 두로와 시돈, 그리고 가나안의 온 토지, 이 토지 이쪽과 요단을 넘어까지 확장되었다. 이후에 시리아에서 어떤 종류의 외적 예배가 시작되었는데, 이로부터 이 예배는 주변 많은 지역으로까지 퍼졌고, 특히 가나안 지역까지 확대 되었다. 이 예배는 고대 교회의 예배와 다른 것이었다. 그리고 고대 교회로부터 분리된 교회의 어떤 것이었는 바, 말하자면 이는 새로운 교회로 솟구친 것이다. 그러므로 이 교회가 두 번째 고대 교회라 불리웠다. 이 교회의 첫 설립자가 에벨이었는 바, 이 교회는 에벨이라 불리웠다. 그 당시 이미 말했듯이, 가족, 가문, 그리고 나라들로 해서 구별되어졌다. 각 나라는 한 아버지를 인정했다, 이 아버지 이름으로부터 나라의 이름도 그렇게 불리웠다. 이는 말씀의 많은 장소들에서 발견된다. 나라의 아버지로서 에벨을 인정한 나라가 히브리 나라 라고 불리웠다.

“에벨”에 의해 이전의 첫 고대 교회와 분리된 두 번째 고대 교회가 의미되는 것은 22절에서 말했다.

25절. 그리고 에벨에게 두 아들이 출생되었는데, 그 중 하나의 이름은 벨렉이고, 그의 시절에 땅이 나뉘었다. 그리고 그의 형제의 이름은 욕단이었다.

두 번째 고대 교회의 첫 설립자인 에벨에 관하여, 그를 수단으로 이 교회가 의미되었는데, 이 경우는 이러하다. 첫 고대 교회는 아주 광범위하게 퍼졌다. 특히 시간이 흐르면서 아시아쪽 세계로 퍼지면서 퇴보되었다. 사실 이는 어느 곳에 있는 교회이든 그 형세는 비슷하다. 그리고 고안자에 의해 섞음질되었는데, 외적, 내적 예배 모두에서 섞음질 되어졌다. 이 섞음질은 사방에서 있었다. 고대 교회가 태고 교회의 입으로부터(구전으로부터) 가졌던 것, 특별히 주님과 그분의 왕국에 관한 것의 모든 의미와 표현의 전승적 지식(lore)이 우상화쪽으로 변하였고, 어떤 나라에서는 마술로도 변하였다. 모든 교회가 썪지 않도록, 의미적이고 표현적인 예배가 어느 곳에서든지 재 건립되는 것이 허용되어졌다. 이것이 에벨에 의해 행해진 것이다. 이 예배는 주로 외적인 것들에 존재했다. 외적인 것들은 성직과 성직에 속하는 것에 더하여 높은 장소(산당), 기름부음, 법규라 불리는 많은 다른 것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예배의 내적인 것들은 홍수 이전 시대로부터 전하여진 교리적인 것들이었는데, 특히 “에녹”이라 불린 이들로부터의 교리적인 것들이었다. 이들은 태고 교회가 지각으로부터 습득한 것들을 수집했고, 이로부터 교리들을 만들었다. 이것들은 그들의 말씀이었다; 그리고 이런 내적인 것들과 외적인 것으로부터 이 교회의 예배가 왔다. 이 예배가 에벨에 의해 정착되었으나 그대로가 아니고 추가되거나 바꿔치기조차 되었다. 두드러진 바뀜은 그들이 여느 다른 의식보다 제물을 바침에 관심이 컷다는 말이다. 진정한 고대 교회에서, 제물을 바침은 함과 가나안이 그들의 자식들을 제물로 바침을 방지하기 위해 허용된 것을 제외하면 알고 있지 않던 사항이었다. 이로부터 에벨에 의해 설립되고 그 후손에 의해 유지되어왔던 두 번째 고대 교회의 본성들이 히브리 나라로 불린 그의 후손 사이에서도 계속되었음이 분명하다.

에벨의 두 아들들, 벨렉과 욕단에 의해 이 교회의 두 종류의 예배, 즉 내적, 외적 예배가 의미되었다. 벨렉은 내적 예배를, 욕단은 외적 예배를 의미했다. 특별히 이로부터 분명한 것은 내적 의미에서 이 두 번째 고대 교회가 에벨과 히브리 나라에 의해 의미되었다는 것, 모두 각각의 교회에서 내적인 것과 외적인 것이 있다는 것이다. 그 이유가 내적인 것 없이 교회는 교회라 불리울 수 없고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간단히 말해 우상적일 뿐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아들들”이 교회라고 단언되는 것이고, 아들 하나는 내적 측면을, 또 하나는 외적 측면을 의미해준다. 이는 여기서 뿐만 아니라 많은 장소에서도 그렇다. 예를 들면 라멕의 두 아내들, 아다와 실라, [409항], 레아와 라헬, 야곱과 이스라엘, 등등이고, 이들은 이후 설명된다. 욕단의 후손이 이 장에서 취급되고, 벨렉의 후손은 다음 장에서 취급된다.

그의 시절에 땅이 나뉘었다. 이는 새로운 교회가 그때 일어났음을 의미하는데, 이는 결과적으로 분명하다; 그 이유가 “땅”은 교회가 의미되는 것 외의 다른 의미는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의 형제의 이름은 욕단이었다. 이것이 이 교회의 외적 예배를 의미한다는 것은 방금 설명했다. 외적 예배가 “형제”라 불리운데 대한 설명은 야벳의 형이 셈이라고 말하는 21절로부터 알 것이다. 이런 이유로 여기서도 “형제”가 첨가되어 있다.

26-29절. 욕단은 알모닷과 셀렙과 하살마웻과 예라와 27 하도람과 우살과 디글라와 28 오발과 아비마엘과 스바와 29 오빌과 하윌라와 요밥을 낳았는데 이들은 다 욕단의 아들이었다.

이들이 에벨의 가문으로부터의 많은 나라들이었다는 것은 그 시대 그들이 살았던 상태로부터 알런지 모른다. 태고 시대에서, 전에 말한 바 같이 나라들은 가문들로, 다시 가문들은 가족들로 구별되어졌다. 각 나라는 한 아버지를 인정했다. 이로부터 나라의 이름도 명명되었다. 그들이 많이 불어났을 때, 한 아버지의 아들들은 처음 아버지의 방식대로, 그들 각각이 가족, 가문, 나라를 구성해 나갔다. 이와 같은 경우가 욕단의 아들들의 경우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또한 야곱의 아들들의 경우도 이와 같다. 이들도 후에 많이 불어났을 때, 지파를 구성했고, 그들의 아버지의 이름을 따라 명명되어졌다; 그럼에도 이들 모두는 야곱으로부터 취해지고, 전체적으로는 야곱이라 불려진다. 마찬가지로 이 구절의 나라들도 에벨로부터 였고, 히브리인들이라 불려졌다.

이 나라들이 아주 많은 의식들에 의미되는 것은 말씀에서 이런 이름들이 실제적인 것 외에 어떤 것도 결코 의미하지 않는다는 사실로부터 분명해진다; 그 이유가 내적 의미에서 말씀은 주님에, 그분의 왕국에, 천국들과 땅에서, 결과적으로 교회와 교회에 속하는 것들과만 관련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상황이 이런 이름들에도 적용된다. 그리고 에벨의 아들, 욕단은 이 새로운 교회의 외적 예배를 의미한다. 욕단의 아들들은 외적 예배 속의 것들 외의 다른 것은 의미할 수 없다. 즉 의식들, 그리고 의식 속의 많은 것들을 의미한다. 그러나 무슨 종류의 의식들인지는 말하기가 불가능한데, 그 이유는 그것들이 예배 자체와의 관련 사항에 의해 결정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것이 알려질 때까지 무슨 의식인지 말해질 수 없다; 또한 그것들을 아는 것이 어떤 사용을 위해 있는지도 말해질 수 없다. 욕단의 아들들 중, 스바, 오빌, 하윌라를 제외하고는 말씀에서 언급되지 않는다; 이 세 이름들 역시 욕단의 지주(stock)로부터의 자식도 아니다; 그 이유가 이 장 7절에서 스바와 하윌라는 함의 아들이라 불리고도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상황은 오빌의 경우도 그러하다.

30절. 그들의 거주지는 메사에서부터 스발에 이르는 동쪽의 산이었다.

이 말들이 예배의 확장을, 신앙의 진리로부터 선행의 선으로까지의 확장을 의미한다는 것, “메사”는 진리를 의미하고, “세발”은 선을 의미한다는 것은 말씀으로부터서는 실로 확증할 수 없다. 그 이유는 예언서에서 메사와 세발이 언급되는 곳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말의 흐름, 즉 앞의 단어로부터 귀결되는 것으로부터 알 수 있는데, 특히 여기서는 앞에 언급한 단어의 마지막 것이 “동쪽의 산”이다는 사실로부터 알 수 있다. 말씀에서 “동쪽의 산”에 의해 주님으로부터의 선행이 의미되어진다는 것은 이어지는 아래 항목에서 보여질 것이다. 그리고 교회에 관한 모든 것은 교회의 마지막 목표로서 선행을 주시해서 본다는 사실로부터도 알아질 수 있다. 이상으로부터 논리적으로 알아지는 바, 메사는 진리, 즉 출발 지점을, 세발은 선함, 그러므로 마지막 지점, 즉 선행(동쪽의 산)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동쪽의 산”이 선행을 의미하는 것, 그리고 사실상 주님으로부터의 선행을 의미하는 것은 말씀에서 “산”의 의미가 주님을 사랑함과 이웃을 향한 사랑인 바로부터 분명해진다. 그리고 “동쪽”은 주님을, 그리고 그분으로부터 천적인 것들을 의미한다. 또한 아래 인용 구절로부터도 알 수 있다. 에스겔서에서:
거룹들이 자기들의 날개를 들어올렸다, 그리고 여호와의 영광이 성의 한 가운데로부터 올 라갔다, 그리고 성의 동쪽에 있는 산 위에 섰다 (겔.11:22, 23).
위에서 “동쪽에 있는 산”은 천적인 것, 즉 사랑과 선행으로부터 있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것은 주님으로부터 있다, 그 이유가 거기 위에 “여호와의 영광이 섰다”라고 말해지기 때문이다 다시:
그분이 나를 문쪽으로, 동쪽의 길이 쳐다보이는 문쪽으로까지 데려갔다; 그리고 잘 보니 이 스라엘의 하느님의 영광이 동쪽의 길로부터 왔다 (겔. 43:1, 2),
위에서 “동쪽”은 마찬가지 의미를 가진다.
다시 에스겔서에서:
그분은 동쪽이 쳐다보이는 성소의 바깥쪽 문의 길로 도로 데리고 왔다, 그리고 그것은 닫 혀져있었다. 그리고 여호와께서 나에게 말하셨다, 이 문은 닫혀있고 열리지 않을 것이다, 그것을 수단으로 어떤 인간도 들어오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하느님, 여호와께 서 그것을 수단으로 들어가실 것이다 (겔. 44:1, 2).
위에서도 “동쪽”은 천적인 것, 즉 사랑으로부터 있는 것, 주님만으로부터 있는 것을 표시한다. 그리고 다시 에스겔서에서:
제 1 인 자가 자발적인 제물로 태워바치는 제물을, 평화 제물을, 여호와께 자발적으로 바칠 때, 그를 위하여 동쪽을 향해 바라보는 문을 열 것이다, 그리고 그는 그의 태워바치는 제물 과 평화 제물을 그가 안식일에 하듯 바칠 것이다 (겔. 46:12).
위에서도 마찬가지로 천적인 것, 즉 주님을 사랑함으로부터 있는 것을 표시한다.
그리고 다시 에스겔서의 다른 장소에서:
그분은 나를 집의 문쪽으로 도로 데려왔다, 그리고 물들이 동쪽 방향의 집 문설주 아래로 부터 유출되는 것이 보였다, 그 이유는 집의 얼굴이 동쪽을 향하여 있었기 때문이다
(겔. 47:1, 8),
위는 새 예루살렘에 관하여 말해지고 있다: “동쪽”은 주님을, 고로 천적인 것, 즉 사랑으로부터 있는 것을 표시한다; “물들”은 영적인 것들이다. 이와 같은 것이 본문 구절, “동쪽의 산”에 의해 의미되어진다. 더욱이 시리아에 거주한 자들은 “동쪽의 아들들”이라 불리워졌는데, 차후 주님의 신성한 자비로부터 살필 것이다. [3249, 3762항]

31절. 이들은 셈의 아들들인데, 그들의 가문에 따라, 그들의 언어에 따라, 그들의 땅에서, 그들의 나라에 따라서이다.

이 구절이 의미하는 것의 설명은 필요 없을 것이다. 그 이유가 이 장 20절에서 말했기 때문이다. 여기서와 같이 “가문들, 혀들, 토지들, 나라들”의 의미들은 이 용어가 서술하는 주체에 따라 결정되어진다. 20절에서 이 용어들은 함, 또는 부패된 내적 교회를 서술한다; 그러나 여기서는 셈, 또는 진정한 내적 예배를 서술하고 있다; 그러므로 “가문들과 나라들”은 20절은 부패된 내적 교회의 도덕적 측면에 관련되고, “혀들과 토지들”은 부패된 내적 교회의 의견들에 관련된다; 이 절의 경우, “가문들과 나라들”은 진정한 내적 교회의 선행에; “혀들과 토지들”은 진정한 내적 교회의 신앙에 관련되고 있다. “나라들과 가문들”에 관하여는 이 장에서 살필 것이다.

32절. 이들은 노아의 아들들의 가문들인데 그들의 출생지들에 따라, 그들의 나라들에 따라서이다. 홍수 후에 이들로부터 땅에는 나라들이 두루 퍼졌다.

이들은 노아의 아들들의 가문(families)들이다. 이는 세부적 측면에서 고대 교회의 예배들을 의미하는데, 이는 “가문”, 그리고 “아들들의 가문”이 예배들, 사실상 예배들의 종류들이다로부터 분명해진다. 이 장의 앞 절에서 명명된 나라들은 고대 교회의 다양한 예배들밖에 더 다른 것은 의미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나라들이 존재하게 한 가문들 역시 같은 의미를 지녀야 한다. 내적 의미에서 가문들은 영적이고 천적인 것에 속한 것 외의 다른 것은 뜻해질 수 없다.

그의 출생지들에 따라. 이는 그들이 재구성되어질 수 있는 것에 비례하여를 의미하는데, “출생지”의 의미가 재구성이다로부터 분명해진다. 인간이 주님에 의해 다시 태어나는 동안, 또는 거듭나는 동안, 그가 새로이 받는 모든 것, 그 각각은 출생지, 또는 출생들이다. 여기서도 마찬가지인데, 여기의 주제는 고대 교회인 바, 출생지는 그들이 재구성되어질 수 있는 것에 비례하여를 의미한다. 나라들의 재구성에 주목해서 보면, 이 나라들 모두가 똑같은 예배 안에, 같은 교리 안에도 있지를 않다. 그 이유가 그들은 똑같은 천성(genius)으로부터 있지 않고, 유아 때로부터 훈육되고 가르쳐진 것 역시 같지 않기 때문이다. 인간이 유아 시절 흡수하는 원리들을 주님께서는 부러뜨리시지 않고 구부리시기만 하신다. 만일 어떤 원리들을 두고 그들이 거룩하다고 평가하고 있다면, 그리고 신성에 반대되지 않고, 자연의 순리에도 맞는다면, 그 자체는 무관심에 해당되는 사항인 바, 주님께서는 그것들을 홀로 있게 하신다. 그리고 인간이 그것들 안에 있는 것도 내버려두신다. 두 번째 고대 교회에서 많은 것들과 더불어 이와 같은데, 이에 관하여는 주님의 신성한 자비로부터 이후 살핀다.

그들의 나라들에서. 이 나라들은 일반적 측면에서 이 교회의 다양한 예배들을 의미하는데, 나라에 관하여 말해진 것들과 뒤이어지는 것으로부터 분명해진다.

그리고 홍수 후에 이들로부터 땅에는 나라들이 두루 퍼졌다. “이들로부터 땅에는 나라들이 두루 퍼졌다”란 그들로부터 “나라들”에 의해 의미된 것, 즉 선들과 악들에 관련하여 교회의 모든 예배들이 왔다를 의미한다; “땅”은 교회이다; “홍수 후에”는 고대 교회의 시작으로부터를 의미한다.

그리고 이들로부터 땅에는 나라들이 두루 퍼졌다. 이는 그들로부터 선들과 악들에 관련하여 교회의 모든 예배들이 왔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 그리고 이것들이 “나라들”에 의해 뜻해진다는 것은 “나라들”의 의미로부터 분명해진다. 나라란 앞서 설명한 바대로, 많은 가문들이 함께한 것이 뜻해진다. 태고 교회와 고대 교회에서 한 아버지를 인정한 많은 가문들이 하나의 나라를 구성했다. 그러나 내적 의미에서 “나라”는 교회에서 다양한 종류의 예배를 의미한다. 특별하게 예배의 좋은 국면과 나쁜 국면에 관련하여 다양한 예배를 의미한다. 이런 이유는 이러하다: 가문이나 나라들이 천사들에 의해 관조될 때, 그들은 나라에 관한 생각은 없고, 오직 그것 안의 예배에 관한 것만을 생각한다; 그 이유가 천사들은 모든 것에서 품질 자체로부터, 즉 그들이 무엇인지로부터를 가늠하기 때문이다. 인간이 천국에서 중요시되는 것인 그의 품질, 또는 특성은 그의 선행과 신앙이다. 만일 누군가가 어떤 사람, 가문, 나라 등을 쳐다볼 때, 그가 그것들이 무슨 품질인지에 관해 생각의 대부분을 할애하고 있다면, 그는 위의 천사의 경우를 납득할 것이다. 우리는 일상 생활에서 누군가를 평가해야 하는 경우가 많은데, 우리가 처음 만날 경우, 내 자신 안에서 그 사람에 대해 한꺼번에 우세해지는(기울어지는) 생각, 느낌이 있다. 상대방의 품질에 대한 생각이 마음에 순간적으로 착상된다, 그리고 자신 안에서 그는 착상된 그것으로부터 상대방을 평가한다. 이런 상황은 우리와 주님과의 관계에서, 그분으로부터 천사들의 관계에서 더욱 진리이다. 천사들은 인간, 가문, 나라 등을 생각하지 않고 곧바로 선행과 신앙 측면에서의 그들의 품질만을 중요시 한다. 이로부터 “나라들”은 내적 의미에서 교회의 예배, 이 예배의 품질, 예배 속의 선행의 선과 파생되는 신앙의 진리밖에 더 의미하지 않는다. 용어 “나라들”이 말씀에서 발생할 때, 천사들은 글자의 역사적 의미에 맞추어 나라에 관한 생각은 전혀 없고, 명명되는 나라 안에 있는 선과 진리에 관한 생각만에 머물고 있다.

나라들이 예배 안의 선들과 악들을 의미함을 더 생각하여 보면, 이러하다. 고대 시대에서 이미 말한 바대로, 인간들은 나라들, 가문들, 가족들로 구별하여 살았다. 이는 지상에 있는 교회가 주님의 왕국을 표현하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즉 그분의 왕국의 거주민은 공동체들로, 이 공동체들이 뭉쳐 큰 공동체들로, 큰 공동체가 더 큰 공동체들로, 일반적, 세부적 측면에서 각기 그들의 사랑과 신앙에 따라 구별되어진다. 이에 관하여는 684, 685항을 더 보기 바란다. 이런 구별의 방식은 가족들, 가문들, 나라들로 구별되는 것과 같다. 이로부터 말씀에서 “집들, 가문들, 그리고 나라들”은 사랑의 선들과 이에서 파생되는 신앙의 선들을 의미한다; 그리고 세밀한 구분이 “나라들”과 “사람들(people, 백성들)” 사이에도 있다. “나라들”은 선 또는 악, 그리고 “사람들”은 진리 또는 거짓을 의미하는데, 이 의미는 불변하다, 이를 아래 인용 구절로부터 확인해보자.
이사야서에서:
그 날에, 이새의 뿌리가 있을 것이다, 이것이 백성들의 기(깃발)를 위해 서 있을 것이다, 나라들이 그것을 찾아 올 것이다, 그리고 그분의 쉬는 곳은 영광이 있을 것이다. 그 날에 주님께서 그분의 손을 다시 놓아 두 번째로 그분의 백성의 남은 자를 돌아오게 하실 것이 다, 이는 앗시리아로부터, 그리고 이집트로부터, 그리고 바드로스로부터, 그리고 구스로부 터, 그리고 엘람으로부터, 그리고 시날로부터, 그리고 하맛으로부터, 그리고 바다의 섬들로 부터이다. 그리고 그분은 나라들을 위해 기(깃발)를 세울 것이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내쫓 긴 자들을 집합하게 하실 것이다, 그리고 유다의 흩트러진 자를 그러모우실 것이다
(이. 11:10-12).
위에서 “백성들”은 교회의 진리들을, 그리고 “나라들”은 교회의 선들을 표시한다; 그리고 이 둘은 서로 명백한 구분을 만든다. 취급되는 주제가 주님의 왕국과 교회, 그리고 보편적 의미에서는 모두 각각의 거듭나는 인간이다. 이름들의 의미는 위와 같다; 그리고 “이스라엘”에 의해 교회의 영적인 것이 의미되고, “유다”에 의해서는 교회의 천적인 것들이 의미된다. 다시 이사야서에서:
어둠에 걷는 백성들이 큰 빛을 보았었다; 당신은 나라를 불리셨다, 당신은 그것을 위해 즐 거움을 확대하셨다 (이. 9:2, 3).
“백성”이 여기서는 진리들을 표시한다, 그러므로 “어둠에 걷는다”라고 말해진다. 그리고 “빛을 보는 것”; “나라”는 선들을 표시한다. 그리고 다시
이사야서에서:
나라의 특사들에게 무슨 대답을 만들 것인가? 여호와께서 시온을 기초 하셨다는 것, 그리 고 그녀 안에서 그분의 백성들의 가엾은 자가 신뢰를 둘 것이다 (이 25:7).
위에서 새로운 교회가 말해진다, 또는 나라들의 교회가 말해진다; “백성들”은 그것의 진리들을, 그리고 “나라들”은 그것의 선들을 표시한다. 다시 이사야서에서:
너희 문들을 열어라, 신의를 지키는 정의로운 나라가 들어 가게하라 (이. 26:2),
위에서 “나라”는 선들을 분명하게 표시한다. 다시 이사야서에서:
모든 나라들이 함께 모아질 것이다, 그리고 백성들이 회합할 것이다 (이. 43:9).
위 구절 역시 나라들의 교회에 관해 말해진다; “나라들”은 그것의 선들을, 그리고 “백성들”은 그것의 진리들을 표시하고 있다. 그리고 그 둘은 서로 구분되기 때문에 이 둘이 취급되고 있다; 그렇지 않으면 공허한 반복일 것이다. 다시 이사야서에서:
주 여호비께서 말하신다, 잘 보라 나는 내 손을 나라들에 들어올렸다, 그리고 백성들에게 내 기를 드높일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자기들의 아들들을 그들의 품으로 데려올 것이다, 그리고 자기들의 딸을 자기들의 어깨 위에서 운반할 것이다 (이. 49:22).
위는 주님의 왕국에 관해 말해진다; 그리고 “나라들”은 선들을, 그리고 “백성들”은 진리들을 표시한다.
다시 이사야서에서:
너는 네 좌우로 펼쳐나갈 것이다, 그리고 네 씨가 나라들을 상속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삭막한 성들을 사람사는 곳이 되게 할 것이다 (이. 44:3);
위 구절은 주님의 왕국, 그리고 나라들의 교회라 불리는 교회를 다루고 있다. “나라들”은 선행의 선들, 또는 선행의 선들에 있는 이들이다는 것은 그것이 “씨”가- 신앙이 – 그것들을 “상속받을 것”이라 말해지는 것에서 분명해진다; “성들”은 진리들을 표시한다. 다시 이사야서에서:
잘 보라 나는 그를 백성을 위한 증거자로, 백성들에게 법률제정자와 제 1 인 자로 주었다. 잘 보라, 나는 네가 모르는 나라를 부를 것이다, 그리고 너희를 알지 못한 나라가 네게 달 려올 것이다 (이. 55:4, 5).
위는 주님의 왕국에 관해서 말해진다; “백성들”은 진리들을; “나라들”은 선들을 표시한다. 선행의 선을 수여받은 교회에 있는 이들이 “나라들”이다; 신앙의 진리들을 수여받은 이들이 “백성들”이다; 그 이유가 선들과 진리들은 그것들이 있는 주제들에 따라 서술되기 때문이다. 다시 이사야서에서:
나라들이 네 빛을 향하여, 왕들이 네 새벽의 광선을 향하여 걸을 것이다. 그때 너는 그들을 보고, 그들을 향하여 흐를 것이다. 네 심정은 놀라워하고 확장될 것이다; 그 이유는 바다의 많은 것이 네게로 돌아 올 것이다, 나라들의 군대가 네게로 올 것이다 (이. 60:3, 5);
위는 주님의 왕국에 관해서, 그리고 나라들의 교회에 관해서를 취급하고 있다. 여기서 “나라들”은 선들을 표시한다; “왕들”은 백성들에 속하는 바, 진리들을 표시한다.
스바냐서에서:
내 백성의 남은 자들이 그것들을 망쳐놓을 것이다, 그리고 내 나라의 남은 자가 그것들 을 상속받을 것이다 (습. 2:9).
스가랴서에서:
많은 사람들과 많은 나라들이 예루살렘에 계신 만군의 여호와를 찾아올 것이다
(슥. 8:22).
“예루살렘”은 주님의 왕국, 그리고 교회를 표시한다; “사람들”은 신앙의 진리들에 있는 이들이다; “나라들”은 선행의 선에 있는 이들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구분지어 언급된다. 다윗서에서:
당신께서는 나를 백성들의 다툼에서 건져내실 것이다; 당신께서는 나를 나라들의 머리로 세우실 것이다; 내가 알지 못했던 사람들이 나를 섬길 것이다 (시. 18:43).
위에서 “백성들”은 진리들에 있는 이들을 표시한다; 그리고 “나라들”은 선에 있는 이들을 표시한다; 그리고 그들 모두가 언급되는데, 그 이유는 그들이 교회의 사람을 구성하기 때문이다. 다시 다윗서에서:
백성들이 당신에게 고백할 것입니다, 오 하느님, 모든 사람들이 당신을 고백할 것입니다, 나라들이 즐거워하고 드높일 것입니다, 그 이유는 당신께서는 직바름에서 사람들을 판결 하시고, 토지로 나라들을 이끄시기 때문입니다 (시. 67:4, 5).
위에서 “백성들, 사람들”은 신앙의 진리들에 있는 이들을 표시한다; 그리고 “나라들”은 선행의 선 안에 있는 이들을 표시한다.
모세의 책에서:
영원의 날들을 기억하라, 수많은 세대의 햇수들을 깨달으라; 네 아비에게 물으라, 그리고 그가 네게 보여줄 것이다; 네 원로들, 그들이 네게 말할 것이다. 지극히 높으신 분이 그들 의 상속분을 나라들에게 주셨다, 그리고 사람의 아들들을 분리하셨을 때, 그분은 이스라엘 의 아들들의 수에 따라 백성들의 경계들을 놓으셨다 (신. 32:7, 8)
위는 태고 교회와 고대 교회에 관해서 말해지고 있다. “영원의 날들”은 태고 교회를, “수많은 세대의 햇수들”은 고대 교회를 말한다; 선행의 선에 있는 그들이 “나라들”이라 불리운다, 그들에게 상속분이 주어졌다; 그리고 파생된 신앙의 진리들에 있는 자들이 “사람의 아들”로 불리었다. 그 후에 “백성들”로 불리었다. 교회의 선들이 “나라들”에 의해, 그리고 교회의 진리들이 “백성들”에 의해 의미되었다. 이것은 에서와 야곱이 자궁에 있는 동안 그들에 관련해 말해지기도 한다. 즉,
두 나라가 네 자궁 안에 있다, 그리고 두 백성들이 네 뱃 속으로부터 분리될 것이다
(창. 25:23).
이 인용 구절로부터 이제는 나라들의 교회가 순수한 의미에서 무엇인지가 알려졌으리라 생각된다. 태고 교회는 나라의 진정한 교회였다. 그 후 고대 교회도 그러했다.
선행에 있는 이들이 “나라들”이라고, 신앙에 있는 이들이 “백성들, 사람들”이다고 불리우기 때문에, 주님의 성직자 측면이 나라들에 의해 서술되어졌다. 그 이유는 선들인 천적인 것 때문이다. 그리고 주님의 왕권적 측면이 백성들에 의해 서술되어졌는데, 진리들인 영적인 것들 때문이다. 이것이 유대 교회에서도 표현되었는데, 사람들이 왕을 가지기 전에는 그들은 나라였다, 그러나 왕을 가진 후 그들은 백성이 되었다.

태고 교회에서, 그리고 고대 교회에서 나라들은 선들, 또는 선한 사람들을 의미했고, 반대적 측면에서는 악들 또는 악한 사람들을 의미했다. 마찬 가지로 백성들(사람들)은 그들이 진리들을 의미했기 때문에, 반대적으로는 거짓들을 의미한다. 그 이유가 타락한 교회에서 선은 악으로, 진리는 거짓으로 변하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나라들”과 “백성들”의 반대적 의미가 말씀의 많은 구절들에서 나타난다. 예를 들면, 이. 13:4; 14:6; 18:2, 7; 30:28; 34:1, 2; 겔. 20:32 등이고, 이 외에도 많은 구절들이 있다.

나라들이 선들을 의미했기 때문에, 가문들 역시 선들을 의미한다. 그 이유는 나라들은 많은 가문들로 구성되기 때문이다; 가족도 마찬가지 논리이다. 한 가문은 많은 가족들로 구성된다. 어쨌든 “가문”이 나라들에 관련해 서술될 경우, 선들을 의미한다, 그리고 백성들을 서술할 경우, 진리들을 의미한다. 다윗서를 보자:
나라들의 모든 가문들이 당신 앞에 자신을 구부려 절할 것입니다; 그 이유가 이 왕국이 여 호와의 왕국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분이 나라들의 통치자이시기 때문입니다
(시. 22:27, 28).
다시 다윗서에서:
여호와에게 드려라, 너희 백성들의 가문들아, 여호와에게 영광과 힘을 드려라 (시. 96:7).
이 장의 32절, 그리고 앞의 절에서도 역시 “가문들”은 선들을 서술하고 있다, 그 이유는 그들이 나라들의 가문들이었기 때문이다.

이미 말해진 것으로부터 “땅”에 의해 교회가 의미되는 것은 알고 있을 것이다; 그 이유가 “땅, earth”, 또는 “토지, land”가 언급될 때, 그 토지의 사람이나 나라를 마음에 떠올린다. 그리고 나라나 사람들이 마음에 떠올릴 때, 마음에 오는 것은 그것의 특성이다. 이와 같이 “땅”에 의해 교회 외에 더 의미하는 것은 없다.

“홍수 후에”가 고대 교회의 시작으로부터를 의미한다는 것은 홍수가 태고 교회의 끝과 고대 교회의 시작이었다는 것으로부터 분명해진다.

이상 살핀 바로부터 알게되는 것은, 비록 이 장에서 나라들과 가문들의 이름만이 열거되고 있지만, 이 장은 고대 교회에 있는 선행의 선들과 신앙의 진리들을 중시하는 모든 차이들을 일반적으로 포함하고 있다는 것, 뿐만 아니라 여느 교회 안에 있는 모든 것도 포함하고 있다는 점이다; 사실상, 이 장은 여느 인간이 믿을 수 있는 그 이상의 수준의 것을 포함하고 있다. 이와 같은 것이 하느님의 말씀이다.
***************************************************

창세기 제 11 장

성경: 창세기 11 장

1. 그리고 온 땅은 한 입술로부터 있었고, 그들의 말들은 하나였다.
2. 그들이 동쪽으로부터 여행했을 때 이었는데, 그들은 시날의 토지에서 골짜기를 발 견했고, 그들은 거기에 거주했다.
3. 그리고 그들은 자기 동료들에게 말하기를, 오라, 우리들이 벽돌을 만들자, 그리고 그것들을 견고히 구워 내자. 그리고 그들은 돌 대신 벽돌을, 회반죽 대신 역청을 가졌다.
4. 그리고 그들이 말했다. 오라 우리가 도성과 탑을 건설하자. 그리고 그 탑의 머리가 하늘에 있게 하자. 그리고 우리가 온 땅의 얼굴에 흩어지지 않도록 이름을 만들자.
5. 그리고 여호와께서는 사람의 아들들이 건설해 오고 있는 도성과 탑을 보시기 위해 내려 오셨다.
6. 그리고 여호와께서 말하셨다, 보라, 이 무리들이 하나이다, 그리고 그들 모두 한 입 술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이것은 그들이 하기를 시작하는 것이다. 그리고 지금 그들이 하기를 생각한 것 중 어느 한 가지도 그들로부터 보류된 것이 없다.
7. 오라, 우리가 내려 가자, 그리고 그들의 입술을 혼동되게 하여 그들이 자기 동료 사람의 입술을 듣지 못하게 하자.
8. 그리고 여호와께서는 그들을 온 땅의 얼굴에 흩으셨다. 그리고 그들은 도성을 건설 하는 것을 그만 두었다.
9. 그러므로 그분은 그것의 이름을 바벨이라 부르셨는데, 그 이유는 여호와께서 거기 서 온 땅의 입술을 혼동되게 하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때로부터 여호와께서는 그들을 온 땅의 얼굴에 흩으셨다.
10. 이것들은 셈의 출생들이다. 셈은 일백 세의 아들이었고. 홍수 후에 2 년, 아 르박삿의 아버지이었다.
11. 그리고 셈은 그가 아르박삿의 아버지가 된 후에 오백 년을 살았고, 아들들과 딸 들의 아버지이었다.
12. 그리고 아르박삿은 오백 삼십 년을 살았고 셀라의 아버지이었다.
13. 그리고 아르박삿은 그가 셀라의 아버지가 된 후에 사백 삼십 년을 살았고, 아들 들과 딸들의 아버지이었다.
14. 그리고 셀라는 삼십 년을 살았고 에벨의 아버지이었다.
15. 그리고 셀라는 그가 에벨의 아버지가 된 후에 사백 삼십 년을 살았고, 아들들과 딸들의 아버지이었다.
16. 그리고 에벨은 삼십 사 년을 살았고, 벨렉의 아버지이었다.
17. 그리고 에벨은 그가 벨렉의 아버지가 된 후에 사백 삼십 년을 살았고, 아들들과 딸들의 아버지이었다.
18. 그리고 벨렉은 삼십 년을 살았고, 르우의 아버지이었다.
19. 그리고 벨렉은 그가 르우의 아버지가 된 후에 이백 구 년을 살았고, 아들들과 딸 들의 아버지이었다.
20. 그리고 르우는 삼십 이 년을 살고, 스룩의 아버지이었다.
21. 그리고 르우는 그가 스룩의 아버지가 된 후에 이백 칠 년을 살았고, 아들들과 딸 들의 아버지이었다.
22. 그리고 스룩은 삼십 년을 살았고 나홀의 아버지이었다.
23. 그리고 스룩은 그가 나홀의 아버지가 된 후에 이백 년을 살았고, 아들들과 딸들 의 아버지이었다.
24. 그리고 나홀은 이십 구 년을 살았고, 데라의 아버지이었다.
25. 그리고 나홀은 그가 데라의 아버지가 된 후에 일백 십구 년을 살았고, 아들들과 딸들의 아버지이었다.
26. 그리고 데라는 칠십 년을 살고, 아브람과 나홀과 하란의 아버지이었다.
27. 이것들은 데라로부터의 출생들이다. 데라는 아브람, 나홀, 하란의 아버지이었다. 그리고 하란은 롯의 아버지이었다.
28. 그리고 하란은 그의 출생지, 갈대아의 우르에서 자기 아버지 데라의 얼굴 앞에 서 죽었다.
29. 그리고 아브람과 나홀은 아내를 맞았는데, 아브람의 아내의 이름은 사래였고, 나 홀의 아내의 이름은 밀가인데, 하란의 딸이고, 하란은 밀가의 아버지이자 미스가 의 아버지였다.
30. 그리고 사래는 잉태하지 못했는 바 그녀는 자식이 없었다.
31. 그리고 데라는 그의 아들 아브람, 그리고 하란의 아들이요 그의 손자인 롯, 그리 고 그의 아들 아브람의 아내요 자기 며느리인 사래를 데리고 가나안의 땅으로 가기 위해 갈대아의 우르를 떠났다. 그리고 그들은 하란에까지 왔는데, 거기서 머 물렀다.
32. 그리고 데라의 날들은 이백 오 년이었다. 그리고 데라는 하란에서 죽었다.

각 절의 내적 의미

1절. 그리고 온 땅은 한 입술로부터 있었고, 그들의 말들은 하나였다.

온 땅은 한 입술로부터 있었다. 이는 일반적 측면에서 모든 곳에는 한 개의 교리가 있었다를 의미하는데, 말씀에 있는 “입술(lip, language)”의 의미로부터 분명해 진다. 이제 살펴보자. 이 절의 몇 단어들에 의해 고대 교회가 있어 온 상태를 묘사하는데, 그 상태는 일반적 측면에서 한 개의 교리를 가졌다로 묘사되고 있다; 그러나 다음 절에서 이 한 개의 교리가 어떻게 왜곡되고 섞음질되기를 시작했는지가 묘사되고 있다; 그리고 2절로부터 9절까지, 어떻게 이 교리가 온통 뒤집혀져(타락해져) 더 이상 어떤 내적 예배도 가지지 못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 다음 조금 더 읽으면, 취급된 주제는 두 번째 고대 교회이고, 이 교회가 에벨에 의해 시작되었음을 말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 고대 교회인데, 이 교회는 유대 교회의 시작이었다. 이렇게 홍수 이 후 세 교회들이 계속적으로 있어 왔다.
첫 고대 교회를 주목해서 보면, 이 교회가 비록 널리 퍼져나가긴 했지만 그래도 이 교회는 입술은 하나, 말들에서도 하나이었다. 즉 모든 곳에서의 이 교회의 내적, 외적 예배는 달랐지만 일반적으로나 세부적으로나 여전히 교리에서 하나였다는 말이다. 이는 앞 장에서 보여준 바와 같다. 즉 앞 장에서 명명된 각 나라는 다른 교리와 의식이 의미되어진 것과 같다는 말이다. 이 경우는 이러하다. 천국에는 무수한 사회(공동체)들이 있는데, 이들 모두는 각각 다르다. 그럼에도 이들 모두는 하나이다. 그 이유가 그들 모두는 주님에 의해 한 사람으로서 이끌어지기 때문이다. 이런 점은 인간 신체에서도 비슷함이 발견된다. 인간 신체의 내부에는 많은 내장들, 기관들, 수족들, 등등은 제각기 다른 길에서 활동하고 있는 셈인데, 그것들 각각과 모두는 하나로서, 하나의 혼에 의해 규율되고 있다; 또는 신체의 힘(force)과 동작(motion)은 다르지만 모두가 한 개의 심장과 한 개의 폐의 운동에 의해 규율되어 결국 하나를 만든다. 이렇게 이것들이 하나로서 행동할 수 있다는 것은 천국에는 단 한 개의 유입(influx, 또는 영향력의 흐름, stream of influence)이 있다는 사실로부터 이다. 이는 자기의 천성(genius, 또는 특성, character)에 일치하여 모두 각각에 의해 받아진다; 이런 유입은 주님으로부터, 그분의 자비로부터, 그리고 그분의 생명으로부터의 애정(애착)들의 유입이다; (비록 다른 각도에서 받아지는) 이 단 한 개의 유입임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들은 순종하여 통일된 전체의 모습을 산출한다. 이는 천국에 있는 주민들의 상호 사랑의 결과이다.
위와 같은 경우가 첫 고대 교회였다; 그 이유가 널리 퍼진 이 교회들에는 다른 많은 종류의 예배들, 즉 어떤 것은 내적 예배, 어떤 것은 외적 예배, 등등으로 같이 있었다. 마치 일반적으로 많은 나라들이 있고, 세부적으로는 그 나라 안에 많은 가문(족속)들이 있는 것 같이 교회인들이 있었지만, 그럼에도 그들 모두는 한 입술과 말들에서는 하나였다; 즉 그들 모두는 일반적, 세부적 측면 양쪽에서 한 개의 교리를 가졌다는 말이다. 모든 이가 상호적인 사랑 안에, 또는 선행 안에 있을 때 교리는 하나이다. 제 아무리 다양해도 상호적 사랑과 선행은 그들 모두를 하나이게 만든다. 그 이유가 상호적인 사랑과 선행은 다양함으로부터 하나를 창출하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들, 제아무리 많은 사람들이 있다 해도, 만일 그들이 선행 안에, 또는 상호적인 사랑 안에 있다면, 하나의 목적, 즉 공통의 선, 주님의 왕국, 그리고 주님 자신을 가진다. 교리나 예배의 다양함은 인간 신체 속의 다양함과 같다. 그러나 다양한 각각은 전체의 완전함을 이루는데 각기 기여한다. 그 이유가 주님께서는 선행을 통하여 각 인간의 천성에 맞추어 다양한 방법들에서 흘러드시고 작업하시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일반적, 세부적 측면 모두에서 모든 것은 천국에서 같이 지상에서도 질서 안으로 배열된다. 이를 주님께서 마. 6:10에서 가르치신다. 즉 주님의 뜻의 행해짐은 “천국들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있다.

“입술”이 교리를 의미하는 것은 말씀의 아래 구절로부터도 분명해진다. 이사야서에서:
스랍들이 외쳐 말했다, 거룩, 거룩, 거룩하시다, 만군의 여호와시여. 그리고 예언자가 말했 다, 나에게 화있을 진저! 그 이유가 나는 잘리워야 하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나는 더러운 입술을 지닌 인간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불결한 입술(lips)을 지닌 백성들 한 가 운데에 거주하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나의 눈이 만군의 여호와, 왕을 뵈었기 때문이다. 그 때 스랍들 중의 하나가 나에게 날아 왔다, 그리고 그는 내 입(mouth)을 만졌다, 그리고 말했다, 보라, 이것이 네 입술에 접촉되었다; 그리고 너의 불법은 거두어졌다, 그리고 네 죄 는 속죄되었다 (이. 6:3, 5-7).
위에서 “입술(lips)”은 인간의 내면의 것들, 고로 내적 예배를 표시하는데, 이 예배로부터 숭배함이 있는 바, 이것이 예언자와 더불어 여기서 표현되어지고 있다. 그의 입술(에 숯불)이 접촉되어졌고, 그의 불법은 거두어지고 그의 죄는 속죄되었다는 것은 선행으로부터의 것들과 그것의 교리로부터의 것들인 “입술(lips)”에 의해 의미되는 내면의 것들에 대한 표현인 것을 누군가는 알런지 모른다.
다시 이사야서에서:
여호와께서는 그분의 입(mouth)의 막대기를 가지고 처부실 것이다, 그리고 그분의 입술 의 숨을 가지고 그분은 사악한 자를 죽이실 것이다 (이. 11:4).
위 구절의 글자 의미 그대로가 내적 의미에서는 아니고, 사악한 자가 자신에게 이 짓을 실시한다는 것이다; “입술의 숨”은 교리이다, 사악한 자가 지닌 교리는 거짓이다. 다시 이사야서에서:
나는 입술의 증가를 창조한다, 멀리 있는 자에게, 가까이 있는 자에게 평화, 평화가 있다, 여호와께서 말하신다; 그리고 나는 그를 치료할 것이다 (이. 57:19).
“입술의 증가”는 교리를 표시한다.
에스겔서에서:
사람의 아들아, 너는 이스라엘의 가문에게 가거라, 그리고 그들에게 내 말들을 이야기하라. 그 이유가 너는 입술이 깊은 사람들, 그리고 혀가 무거운 사람들에게 보내지는 것이 아니 라 이스라엘의 가문에게 보내지기 때문이다; 네가 이해할 수 없는 입술이 깊고 혀가 무거 운 많은 사람들에게로가 아니다. 만일 내가 너를 그들에게 보내었다면, 그들은 네게 귀 기 울이지 않았을 것 같으냐? 그러나 이스라엘의 가문은 네게 귀 기울이지 않았을 것이다, 그 이유는 그들은 나에게 귀 기울이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이스라엘의 모든 가 문은 굳어지는 앞이마와 완악한 심정을 지녔기 때문이다 (겔. 3:4-7).
“입술의 깊음”은 아직 교리의 거짓 안에 있기는 해도 여전히 선행 안에 있는 나라들이라고 단정된다. 그런고로 그들은 귀 기울인다고 말해진다; 그러나 선행 안에 있지 않은 자들은 “굳어지는 앞이마와 완악한 심정”을 지녔다고 말해진다.
스바냐서에서:
그때 나는 깨끗한 입술을 가진 백성에게 돌아설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 모두는 한 어깨를 가지고 나를 섬기며, 여호와의 이름을 부를 것이다 (습. 3:9).
“깨끗한 입술”은 교리를 분명하게 표시한다. 말라기서에서:
진리의 법이 그의 입 안에 있었다, 그리고 외고집이 그의 입술에서 발견되지 않았다… 그 이유는 성직자의 입술은 지식을 간직해야 하고, 그들은 그의 입에서 법을 찾아야 하기 때 문이다; 그 이유가 그는 만군의 여호와의 천사이기 때문이다 (말. 2:6, 7).
위는 레위에 관해서인데, 그를 수단으로 주님이 표현되어지고 있다; “입술”은 선행으로부터의 교리를 표시한다. 다윗서에서:
누가 말한다, 우리의 혀를 가지고 우리는 이길 것이다; 우리의 입술은 우리와 함께 있다 (시. 12:4).
위에서 “입술”은 거짓들을 표시한다.
다시 다윗서에서:
내 혼은 뼈골과 지방으로 만족될 것입니다; 그리고 내 입은 노래들의 입술로 당신을 찬양 할 것입니다 (시. 63:5).
이사야서에서:
그 날에 가나안의 입술로 말하는 다섯 성이 이집트에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만군 의 여호와께 맹세한다 (이. 19:18).
위의 “입술”은 교리를 표시한다.

“땅”이 교회를 의미하는 것은 앞에서 살핀 바 있다.

그들의 말들은 하나였다. 이는 세부적 측면에서 한 교리가 있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앞서 말해진 바로부터 분명해진다; 즉 “입술”은 일반적 측면에서 교리를 의미한다; 그리고 “말들”은 세부적 측면에서의 교리를, 또는 교리의 세부 사항들을 의미한다. 앞에서 살폈듯이, 세부 사항들이 한 개의 목적, 주님을 사랑함과 이웃을 자신 같이 사랑함에 두고 있다면 불일치가 일어나지 않는다. 그 이유가 그것들은 일반성 속의 세부 사항들이기 때문이다.
“말(word)”이 선행, 그리고 선행에서 파생되는 신앙에 관련되는 모든 교리를 의미하는 것, 그리고 “말들(words)”이 교리로부터 있는 것들을 의미하는 것을 아래 말씀들에서 확인해 보자. 다윗서에서:
나는 당신의 정의의 판결을 배울 때 심정의 직바름을 가지고 당신에게 고백할 것입니다; 나는 당신의 규례를 지킬 것입니다. 어린 아이가 무엇 가지고 그의 길을 순수하게 만듭니 까? 당신의 말씀을 경청함으로 입니다. 제 온 심정을 다하여 나는 당신을 찾습니다; 저를 당신의 가르침으로부터 방황하지 않게 만드소서. 저는 당신의 말씀을 내 심정에 숨겨 두었 습니다. 하여 저는 당신에게 죄짓지 않을 것입니다. 복되심이 당신이십니다, 오 여호와여; 당신의 규례를 제게 가르치소서. 제 입술로 당신 입의 모든 판결들을 시연하였습니다. 저 는 당신 증거들의 길에서 기뻐 환호했습니다. 저는 당신의 명령들을 묵상합니다, 그리고 당 신의 길을 쳐다봅니다. 저는 당신의 규례들에 즐거워합니다; 저는 당신의 말씀을 잊지 않습 니다 (시. 119:7-16).
위에서 “말씀”은 일반적 측면에서 교리를 표시한다. 위에서 “가르침”, “판결”, “증거”, “명령”, “규례”, “길”, 그리고 “입술” 사이에 구분이 만들어지고 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말씀에, 또는 교리에 속해 있다는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그밖의 말씀에서도 위의 단어들은 똑같은 구분된 것을 의미하고 있다.
다시 다윗서에서:
사랑들의 노래: 제 심정은 좋은 말을 깊이 생각합니다. 제 혀는 빠른 필기자의 펜입니다. 인류의 어린이보다 당신은 더 아릅답습니다; 은총이 당신의 입술 위에 쏟아집니다. 진리의 말(word) 위에, 정의의 온화함 위에 타소서; 당신의 오른 손이 당신에게 기이한 일들을 가 르칠 것입니다 (시. 45:머릿글, 1, 2, 4).
“진리의 말과 정의의 온화함 위에 타는 것”은 진리의 교리와 선의 교리를 가르치는 것이다. 여기, 그리고 그 밖의 말씀에서, 용어 “말(word)”, “입술”, 그리고 “혀”는 구분된 것들을 의미한다; 이것들은 선행에 관한 교리 속의 것들인 것은 분명하다, 그 이유는 “사랑들(loves)의 노래”라고 불리우기 때문이다. 이 가르침(교리)들은 인류의 어린이 보다 더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고, 입술에 은총이, 오른 손은 기이한 것들을 가르친다고 초상화하고 있다.
이사야서에서:
여호와께서 야곱 안으로 말을 주셨다, 그리고 그 말은 이스라엘 위에 빛을 비추었다
(이. 10:8).
위의 “말”은 내적 예배와 외적 예배의 교리를 표시한다; “야곱”은 여기서 외적 예배를, “이스라엘”은 내적 예배를 표시한다. 마태복음서에서:
예수께서 말하셨다, 사람이 빵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입으로부터 진행되는 모 두 각각의 말에 의해서 산다 (마. 4:4).
다시 마태복음서에서:
누군가가 왕국에 관한 말씀을 들었는데, 경청하지 않을 때, 그 다음 악한 자가 와서 그 사 람의 심정에 뿌리운 것을 잡아 채 간다 (마. 13:19).
위 구절 외에 20, 23절도 더 읽기 바란다. 다시 마태복음서에서:
하늘과 땅은 사라질 것이나, 내 말들은 사라지지 않는다 (마. 24:35).
위의 구절들에서 “말씀”은 주님의 교리를 표시한다; 그리고 “말들”은 그분의 교리에 속하는 것들을 표시한다.
표현된 “말들”은 교리의 모든 것들을 표시한다; 십계명의 명령들은 “말들”이라 불리운다. 모세의 책에서:
여호와께서 언약의 말들을, 열 개의 말들을 (돌)판 위에 쓰셨다 (출 34:28).
다시 모세의 책에서:
그분은 너희에게 그분의 언약을 선포하셨다, 이는 그분이 너희가 이행하라는 열 말들이다; 그리고 그분은 그것들을 돌판 위에 쓰셨다 (신. 4:13; 10:4).
다시 모세의 책에서:
너는 네 눈이 보았었던 것들을 잊지 않도록 네 자신이 유념하고, 네 혼을 공들여 간직하라 (신. 4:9);
위 구절들 외에도 많은 구절들이 있다.

2절. 그들이 동쪽으로부터 여행했을 때 이었는데, 그들은 시날의 토지에서 골짜기를 발견했고, 그들은 거기에 거주했다.

그들이 동쪽으로부터 여행했을 때. 이는 그들이 선행으로부터 후퇴하였을 때를 의미한다는 것은 “여행함”과 “동쪽”의 의미로부터 분명해진다. 여기서 “여행함”은 후퇴하는 것(backed away)임은 그들이 여행을 시작한 동쪽이 선행을 의미함에 관련하여 말해진 것으로부터 분명해진다.

“동쪽”이 주님으로부터의 선행이다는 것은 앞에서 살핀 바 있다.

그들은 시날의 토지에서 골짜기를 발견했다. 이는 그들의 예배가 더욱 불결해지고 모독적이 되어갔다를 의미한다는 것인데, 이는 “골짜기”와 “시날의 토지”의 의미로부터 분명해진다. 말씀에서 “산들”은 사랑, 또는 선행을 의미한다, 그 이유는 이것들이 가장 높기 때문, 또는 예배에서 가장 깊기 때문인데, 앞에서 살핀 바 있다. 그러므로 “골짜기”는 산 아래 있는 것, 또는 예배에서 더 낮은 것, 즉 보다 더 외면적인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시날의 토지”는 모독인 것이 안에 있는 외적 예배를 의미하는데, 이미 살폈다. 그들이 시날의 토지에서 골짜기를 발견함은 그들의 예배가 더욱 더 불결해지고 모독되어 갔다를 의미한다.
1절에서, 교회가 하나의 입술로부터였고, 말들은 하나였다고 말해졌는데, 이는 일반적, 세부적 측면에서 하나의 교리를 가졌다를 뜻한다. 2절의 경우, 교회의 기울어짐이 다루어진다, 즉 그들은 동쪽으로부터 여행했다고, 즉 그들은 선행으로부터 후퇴하기를 시작했다 라고 말해진다; 교회, 또는 교인이 선행으로부터 후퇴하는 만큼, 그의 예배 역시 거룩한 것으로부터 후퇴한다. 다시 말해, 그의 예배는 후퇴한만큼 불순한 것과 모독적인 것에 접근한다는 말이다. 그들이 시날의 토지에서 골짜기를 발견한다는 것은 모독인 것 쪽으로 교회가 기울어짐, 또는 예배가 기울어짐을 의미하는 이유는 이미 말한 바 같이 산을 수단으로 사랑 또는 선행의 거룩한 것을 의미하는데, 계곡이 산들 사이에서 더 낮은 위치이기 때문이다. 이는 말씀에 있는 “골짜기”의 의미로부터서도 알 수 있다. 말씀의 원어에서 골짜기들은 몇 가지 다른 표현들을 사용해 골짜기의 의미를 표현하고 있다. (예를 들면, 창. 11:2, 이. 41:18. 겔. 37:1 이다) 이런 구절들의 골짜기에 대한 의미는 크든 작든 예배의 모독인 것을 의미한다.
“골짜기들”이 이 의미들을 지닌 것을 아래 구절들로부터 보자. 이사야서에서:
환상의 골짜기의 무거운 짐(걱정). 이는 환상의 골짜기에서 만군의 주 여호비에게 떠들썩 함의 날, 짓밟음의 날, 당혹케 함의 날이다 (이. 22:1, 5).
“환상의 골짜기”는 공상들과 비꼬는 추론을 표시한다. 이 추론을 수단으로 예배는 왜곡되어지고, 결국 모독되어진다. 예레미야서에서:
어떻게 네가 나는 더럽히지 않았다, 나는 바알들을 따라 걷지 않았다 말할 수 있느냐? 골 짜기에 있는 네 길을 보라 (예. 2:23).
“골짜기”는 불결한 예배를 표시한다. 다시:
그들은 힌놈의 아들의 골짜기에 도벳의 높은 장소들을 건축했다; 그러므로 잘 보라, 날들이 온다, 여호와께서 말하신다, 그것은 더 이상 도벳이라, 힌놈의 아들의 골짜기라 불리우지 않고, 그러나 살육의 골짜기라 불리울 것이다 (예. 7:31, 32; 19:6).
“힌놈의 골짜기”는 지옥을 표시한다, 그리고 진리와 선의 모독을 표시한다.
에스겔서에서:
고로 주 여호비께서 산들에, 언덕들에, 시내에, 골짜기에 말하신다. 나를 잘 보라, 내가 네 위에 검을 가져올 것이다, 그리고 나는 네 높은 장소들을 파괴할 것이다 (겔. 39:11, 15).
다시:
나는 곡에게 이스라엘에 있는 매장지를 위해 거기 장소, 바다의 동쪽을 향하여 통과하는 그들의 골짜기를 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그것을 곡의 무리들의 골짜기라 부를 것이다 (겔. 39:11, 15).
이는 형식에 불과한(무의미한) 예배에 관해서이다; “골짜기”는 이와 같은 예배를 표시한다. 그러나 예배가 아직은 완전하게 모독된 것은 아닐 때, 히브리어에서는 이 구절(창. 11:2)에서 사용된 골짜기라는 표현이 사용된다; 그리고 역시 이사야서에서:
나는 경사면에 강을 열고, 나는 골짜기의 한 가운데에 분수를 만들고, 광야에 물들의 못을 만들고, 마른 토지에 물들의 샘을 만들 것이다 (이. 41:18).
이는 신앙과 선행의 지식들에 접근해 보지도 못해 그것들에 무지한 채 사는 이들, 그럼에도 선행 안에 있는 이들에 관해 말해진다. 여기서 사용한 “골짜기”가 이들을 표시한다. 겔. 37:1의 구절도 마찬가지이다.
(참고. 겔. 6장과 39장에 있는 “골짜기”의 히브리어는 “낮은, low, 편편한 장소, flat place”를 뜻한다. 이에 비해 창. 11:2, 이. 4장, 겔37장에 있는 “골짜기”의 히 브리어는 산에 반대되는 골짜기로서, 평지, plain를 뜻한다.)

그리고 그들은 거기에 거주했다. 이것이 파생되는 생활을 의미하는 것은 말씀에 있는 “거주함, dwelling”의 의미가 살고 있는 것이다로부터 분명해진다. 단어 “거주하다”는 말씀의 예언적, 역사적 부분들에서 자주 등장한다. 그리고 내적 의미에서 이는 통상적으로 사는 것을 의미한다. 그 이유란, 태고인들은 천막에서 거주했고, 천막에서 거룩한 예배를 드렸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말씀에서 “천막들”은 예배에 있는 거룩한 것을 의미한다. 이는 이미 살핀 바도 있다. 천막이 예배의 거룩한 것을 의미하는 바, “거주하는 것” 역시 좋은 의미에서 사는 것, 생활을 의미한다. 마찬가지 방식에서 태고인들은 천막에 거주할 뿐 아니라 천막을 가지고 여행했는 바, 말씀의 내적 의미에서 “여행하는 것”은 생활의 풍습(custom)과 방식(pattern)을 의미한다.

3절. 그리고 그들은 자기 동료 사람에게 말하기를, 오라, 우리들이 벽돌을 만들자, 그리고 그것들을 견고히 구워 내자. 그리고 그들은 돌 대신 벽돌을, 회반죽 대신 역청을 가졌다.

사람이 그의 동료에게 말했다. 이는 이것이 시작되었다, 또는 이런 것들이 출발했다를 의미한다. 이 의미는 글의 전 후 관계로부터 알아진다. 이 절은 교회의 세 번째 상태, 거짓이, 사실상 탐욕으로부터의 거짓이 군림할 때가 취급된다. 거짓의 시작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진리에 무지함으로부터의 시작, 또 하나는 탐욕으로부터의 시작이다. 진리에 무지함에 따른 거짓은 탐욕으로부터의 거짓과는 다르게 그렇게 치명적이지는 않다. 그 이유가 무지로부터의 거짓은 어린 시절로부터 가르쳐진 바로부터, 또는 진리이다고 고백하는 것이 실지로 그런지를 검사해 보지 않은 다양한 직업들을 수단으로 전환함으로부터, 또는 진리인 것과 거짓인 것에 관한 판단력이 많지 않음으로부터 야기되기 때문이다. 이런 근원에서 비롯된 거짓들은 이 거짓으로 확증을 하지 않은 이상, 또는 자신을 설득해 대지 않은 이상, 또는 거짓들을 방어하겠다고 탐욕들을 끌어 붙여 부추키지 않았다면 치명적 상해를 가져다 주지는 않는다. 그 이유가 이런 것들이 무지의 구름을 더 두터워지게, 그리하여 더 어둡게 만들어 진리의 빛을 볼 수 없게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탐욕들로부터의 거짓들은 거짓의 근원이 탐욕, 또는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일 때 존재한다; 예를 들면, 누군가가 교리의 어떤 요점을 들여다보면서 이것 가지면 사람들의 마음들을 포로화하여 그들을 끌고가는데 효과적일 것 같다고 하여 그 어떤 교리를 움켜쥐면, 그는 그 교리가 자기를 옹호하는 쪽으로 설명하거나 뒤집는데, 그 수단으로 기억 속의 지식들을 비꼬아 추론하거나 말씀의 글자 의미를 수단으로 하는 경우이다. 이로부터 파생된 예배는 제아무리 예배 형식이 거룩할지라도 모독적이다. 그 이유가 이 예배는 내향적으로는 주님이 아닌 자기를 위한 예배이기 때문이다. 이런 예배자는 자기가 자신을 옹호해 주도록 설명되지 않는 것은 진리로서 인정하지 않는다. 이와 같은 예배가 “바벨”에 의해 의미되는 예배이다. 그러나 이런 예배 안에서 태어나고 양육되어 왔지만, 그것이 거짓인 줄 모르고, 선행 안에 있던 이들의 경우는 다르다. 이들의 무지함 안에 순진이 있다. 이들의 예배 안에 선행으로부터의 선이 있다. 그 이유가 예배에 있는 신성을 더럽힘은 엄밀히 보면 예배 자체에 있다기보다는 예배 안에 있는 인간의 품질로부터 이다고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오라, 우리가 벽돌들을 만들자. 이는 자기들을 위해 변화시킨 거짓들을 의미하는데, 이는 “벽돌, brick”의 의미로부터 분명해진다. 말씀에서 “돌”은 진리를 의미한다, 그러나 벽돌은 인간이 만들었기에 거짓을 의미한다; 그 이유가 벽돌은 인위적으로 만든 돌이기 때문이다. “벽돌”이 지닌 의미를 아래 구절에서 살피자. 이사야서에서:
나는 내 손을 말을 안 듣는 백성에게 온 종일 뻗었다. 그들은 자신의 생각에 따라 선이 아 닌 길에서 걸었다. 하여 그들은 동산에 제물을 바치고 벽돌 위에서 향을 태웠다
(이. 65:2, 3).
“벽돌 위에서 향을 태움”은 제조하고 왜곡한 것들로부터 예배함을 표시한다; 그러므로 그들은 자신들 생각에 따라 걷는다고 말해진다. 다시 이사야서에서:
에브라임과 사마리아 주민의 심정의 교만과 우쭐댐 때문에 말하기를, 벽돌들이 무너져 내 렸으나, 다듬은 돌로 건축하자 (이. 9:9, 10).
“에브라임”은 외고집으로 일관하는 총명하다는 인물을 표시하는데, 이 자는 거짓인 것을 진리로 만들고 진리이다고 부른다. 나훔서에서:
포위 공격을 대비해 물을 길어라, 네 요새를 튼튼히 하라, 진흙으로 가서 진흙을 밟아, 벽 돌 가마를 수리하라. 불이 너를 삼킬 것이고, 검이 너를 벨 것이다 (나. 3:14, 15).
위에서 “진흙을 밟는 것”은 거짓들을 표시한다; “벽돌 가마를 수리하는 것”은 파생되는 예배를 표시한다; “불”은 탐욕의 처벌; “검”은 거짓들의 처벌이다. 에스겔서에서:
너는 벽돌을 가져 오라, 그리고 그것을 네 앞에 놓아라, 그리고 그것 위에 성을 새겨 넣어 라, 그 성은 예루살렘 성이다 (겔. 4:1);
그리고 그 성이 포위된 상황을 연출하도록 명령되었다. 이 예언적 행동에 예배가 거짓화되어졌다는 생각이 포함되고 있다. “벽돌”이 거짓을 의미하는 것은 “돌”의 의미가 진리인 것으로부터 더 잘 알런지 모른다. 아래에서 더 살핀다.

그리고 그것들을 견고히 구워 내자. 이는 자기 사랑으로부터의 악들이 의미된다는 것은 말씀에 있는 “태우는 것, to burn, 굽는 것, baking”, “불, fire”, “유황, sulphur”, 그리고 “역청, bitumen” 등의 단어의 의미로부터 분명해진다. 이 단어들의 의미는 탐욕들이라 단언된다. 특히 자기 사랑에 속하는 이들로부터의 탐욕들이다. 이사야서에서:
우리의 조상들이 당신을 찬송하던 아름답고 거룩한 우리의 집이 불로 태워졌고, 우리의 소 중한 것들이 황폐해졌습니다 (이. 64:11).
다시 이사야서에서:
쭉정이를 임신하고 짚(stubble, 그루터기)을 낳을 것이다; 너희의 (불같은) 바람(wind, 호 흡)이 너를 살라버릴 것이다; 사람들은 불에 굽는 석회일 것이다; 그들은 불을 지피는 베어 진 가시덤불 일 것이다 (이. 33:11, 12).
위 구절 외에도 이와 비슷한 많은 구절들이 있으나 생략한다. “태우는 것”과 “불”은 탐욕들이라 단언된다. 그 이유는 태우는 것과 탐욕은 결과가 유사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은 돌 대신에 벽돌을 가졌다. 이는 그들이 진리 대신 거짓을 가졌음을 의미한다. 이는 방금 위에서 살핀 벽돌의 의미가 거짓이다로부터, 그리고 돌의 의미가 넓은 의미 측면에서 진리이다는 것으로부터 알게 된다. 이에 관하여는 앞에서 언급한 적이 있다. 돌(stone)이 진리를 의미한 이유는 이러하다. 태고인들은 그들의 영역을 돌로 표시했다. 그들은 이 경우는 이러이러했다, 또는 이것은 진리이다는 증거로 돌을 세웠다; 성경의 이런 구절들로부터도 분명해진다. 즉 야곱이 석상을 세운 것 (창. 28:22; 35:14), 라반과 야곱 사이에 약속의 표시로 쌓은 돌더미로부터 (창. 31:46, 47, 52), 그리고 증거로서 요단 근처에 르우벤, 갓, 므낫세의 아들들에 의해 건축된 제단으로부터 (여. 22:10, 28, 34) 등등이다. 이와 같이 말씀에서 진리들이 “돌”에 의해 의미되어진다; 제단의 돌 뿐만 아니라 아론의 에봇의 어깨 위에, 그리고 판단의 가슴 받이에 있는 귀중한 돌(보석)에 의해 진리들이 의미되는데, 특별히 이는 사랑으로부터 있는 거룩한 진리들을 의미했다.
제단에 관련된 돌에 주목해보면, 제단 위에서 제물을 바치는 예배가 시작했을 때, 제단은 주님에 대한 표현적 예배를 일반적으로 의미하였다; 그러나 돌 자체는 그 예배로부터의 거룩한 진리를 표현했다; 그러므로 제단의 돌은 다듬지 않은 온전한 돌로 건축하도록 명령되었다. 그리고 어떤 쇠(도구)도 돌 위에서 움직여서는 안 된다고 명령되었다 (신. 27:5-7; 여. 8:31); 다듬은 돌, 쇠를 사용한 돌은 인위적인 것, 고로 예배에 가짜가 있는 것을 의미했다; 즉 인간의 자기 자신인 것, 또는 인간의 생각과 심정의 조각들인 것을 의미한다는 말이다. 이것이 예배를 모독하는 것임을 출. 20:25에서 분명히 말하고 있다. 같은 이유에서 쇠는 성전 건축의 돌에 사용하지 않았다 (왕상. 6:7).
아론의 에봇의 어깨 위와 판단의 가슴 받이에 있는 귀중한 돌은 거룩한 진리들을 의미했는데, 이는 114항에서 살핀 바 있다. 마찬가지로 이사야서에서:
잘 보라 나는 네 돌을 홍옥(carbuncle, garnet)의 상태로 만들 것이다, 그리고 나는 네 기초 를 사파이어에 놓을 것이다, 그리고 네 창문을 위해 루비를 놓을 것이다, 문들에는 귀중한 돌을 놓을 것이다, 그리고 네 모든 변두리에 값진 돌을 놓을 것이다; 그리고 네 아들들은 여 호와로부터 가르침을 받을 것이다, 그리고 네 아들들의 평화는 클 것이다 (이. 54:11-13).
위에서 명명된 돌들은 거룩한 진리들을 표시한다, 그러므로 그것은 “모든 네 아들들은 여호와로부터 가르침을 받을 것이다”라고 말해진다. 계시록에서의 경우, 거룩한 예루살렘의 성벽의 기초들은 모두 각각의 귀중한 돌로 장식되어 있다 말하고 이 돌들이 명명되어 있다 (계. 21:19, 20). “거룩한 예루살렘”은 천국과 땅에서의 주님의 왕국을, 이 왕국의 기초는 거룩한 진리들임을 표시한다. 마찬가지 방식에서, 돌판, 이 위에 법의 명령들, 또는 열 말씀들이 쓰여있는데, 거룩한 진리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이것들은 돌로부터 이다, 또는 그 기초들이 돌이었다. 이에 관하여는 출. 24:12; 31:18; 34:1; 신. 5:22; 10:1을 더 참조하기 바란다. 이런 이유는 명령 자체에 신앙의 진리들외에 더 다른 의미는 없기 때문이다.
고대 때에 진리들이 돌에 의해 의미되었기 때문에, 그리고 후에 예배가 돌 기둥, 제단에서, 그리고 성전에서 시작되었을 때, 거룩한 진리들이 기둥들, 제단들, 성전에 의해 의미되었다, 그러므로 주님 역시 “돌”이라 불리우셨다; 모세의 책에서:
야곱의 권능 있으신 분, 이로부터 목자이시고, 이스라엘의 돌이시다 (창. 49:24).
이사야서에서:
고로 주 여호비께서 말하신다, 잘 보라, 나는 시온에 기초를 위해 돌을 놓는다, 모퉁이의, 값진, 확실한 기초인 연단된 돌을 놓는다 (이. 28:16).
다윗서에서:
건축자가 거절한 돌이 모퉁이의 머리가 되어졌다 (시. 118:22).
마찬가지로 다니엘서에서 느부갓네살의 (신)상을 부순 “바위로부터 잘라져 나온 돌”에 의해서도 의미되었다 (단. 2:34, 35, 45).
“돌”이 진리들을 의미하는 것은 이사야서에서 더 분명해진다:
이것에 의해 야곱의 불법이 속죄될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그의 죄를 거두어지기 위한 모 든 열매일 것이다; 그가 제단의 모든 돌들을 부수러진 횟돌 같이 놓을 때…(이. 27:9);
“제단의 돌들”은 예배에 있는 진리들을 표시한다, 이것이 흩트려졌다. 다시:
너는 백성의 (큰) 길을 평평하게 만들어라; 너희는 작은 길을 평평해지게 하라; 돌들을 거 두어 내라 (이. 62:10);
“길”과 “돌”은 진리들을 표시한다. 예레미야서에서:
나는 네게 맞서 있다, 오 파괴하는 산이여; 나는 바위로부터 너를 굴려내겠다, 그리고 너를 불타는 산으로 만들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모퉁이를 위해 너로부터 돌을 가져가지 않을 것이고, 기초의 돌을 위해서도 가져가지 않을 것이다 (예. 51:25, 26).
위 구절은 바벨에 관해서이다; “불타는 산”은 자기를 사랑함이다. “돌은 그것으로부터 가져와지지 않을 것”이란 진리가 없다를 뜻한다.

그리고 그들은 회반죽 대신 역청을 가졌다. 이는 그들이 선 대신 탐욕의 악을 가졌음을 의미하는 것은 말씀에 있는 “역청(bitumen)”과 “회반죽(motar)”의 의미로부터 분명해진다. 본문에서 취급된 주제는 바벨 탑의 건축이고, 위 재료는 이 건축에 사용하기 위한 것이다; 여기서, 역청, 이것이 유황 성분이고 인화되기 쉬운 물질이기 때문에, 말씀에서 이와 같은 것들에 의해 탐욕들이, 특히 자기를 사랑함에 속하는 탐욕이 의미되어진다. 여기서의 역청은 탐욕들로부터의 악과 이 악으로부터 파생되는 거짓들 둘 다를 의미한다; 이 악들을 가지고 탑이 건축되었는데 다음 절에서 묘사되고 있다. 이런 의미를 가진 이사야서를 보자:
여호와의 복수의 날: (시냇물의) 급류가 역청으로 변할 것이다, 그리고 그 원인으로 먼지가 유황으로, 그리고 토지는 불타는 역청일 것이다 (이. 34:8, 9).
“역청”과 “유황”은 탐욕들로부터의 거짓들과 악들을 표시한다. 이 외 다른 구절들도 더 있으나 생략한다.

“역청” (또는 찰흙, clay)은 교인, 또는 마음이 만들어지는 선을 의미한다. 이를 말씀으로부터 분명히 해보자. 이사야서에서:
이제, 오, 여호와시여, 당신은 우리의 아버지 이십니다; 우리는 찰흙이고 당신은 옹기장이 이십니다, 그리고 우리는 모두 당신 손의 작품입니다 (이. 64:8);
“찰흙”은 만들어지고 있는 교회의 인간 자신, 고로 선행의 선을 표시한다, 이를 수단으로 인간의 모든 만들어냄, 즉 그의 재구성과 거듭남이 온다. 예레미야서에서:
찰흙이 옹기장이의 손에 있듯, 우리 이스라엘의 가문은 당신의 손 안에 있습니다
(예. 18:6);
의미는 앞 인용 구절과 비슷하다. 찰흙을 수단으로 건축되는 것, 또는 만들어지는 것을 말하는 구절은 모두 같은 의미 아래 있다.

위에서 살핀 것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누구라 해도 지금은 알런지 모른다. 그는 이 절에 언급된 것들, 또는 그들이 사용한 돌과 역청에 관한 인용 구절로부터 알았으리라 본다; 이런 간단한 재료들 속에도 천국의 신비가 포함되어 있지 않으면 이런 것들의 언급은 하등 가치가 없을 것이다.

4절. 그리고 그들이 말했다. 오라 우리가 도성과 탑을 건설하자. 그리고 그 탑의 머리가 하늘에 있게 하자. 그리고 우리가 온 땅의 얼굴에 흩어지지 않도록 이름을 만들자.

그리고 그들이 말했다. 이는 앞 구절의 “그들은 그의 동료 사람에게 말했다”에 뒤이어지는 것으로 그것이 시작되었다를 의미한다; 그 이유가 바벨이 여기서 묘사되고, 바벨의 품질에 해당되는 것이 탑에 의해 의미되기 때문이다.

오라 우리가 도성과 탑을 건설하자. 이는 그들이 교리와 예배의 골격을 짜냈음을 의미하는데, 이는 “도성(city)”과 “탑(tower)”의 의미로부터 알게 된다. 이제 살펴 보자. 교회의 본성에 있는 이웃을 향한 선행이 사라질 때, 그리고 자기를 사랑함이 그 자리를 메울 때, 신앙의 교리는 그것이 자아 숭배로 바뀌어지지 않고는 하찮은 것으로 전락된다; 그리고 교리가 자아를 위해, 또는 자아 숭배를 위해 있지 않으면 예배의 거룩한 것이라 여겨지는 무엇이든 하찮은 것이 되고 만다. 한마디로 자기를 사랑함 만이 교리 안에 스며있게 된다는 말이다. 그 이유가 타인을 사랑함보다 더 자신을 사랑하는 자는 자기에게 종속되지 않는 모든 자를 미워하고, 그들이 자기 발 아래 들어올 경우가 아니면 어떤 호의도 내비치지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그가 어떤 강한 제약 아래 있지 않는 한, 어떻게든 돌진해서 자신이 하느님 위에 군림할 때까지 돌격은 멈추지 않는다. 이것이 자기 사랑에게 지배권이 주어질 때의 자기 사랑의 본성이다. 이것이 “도성과 탑”에 의해 의미된 것이다. 자기 사랑과 이 사랑에서 파생되는 모든 탐욕들은 모든 악 중에서도 최고로 더럽고, 최고로 모독적이다. 한마디로 최고로 지독한 지옥주의이다; 따라서 이로부터의 예배에는 절대적인 지옥주의가 함유되어 있을 것은 누구라도 짐작할 것이다.

순수하든, 이교적이든, “도성”이 교리, 또는 교리적인 것(교리적 관점)을 의미하는 것은 앞에서 살핀 바 있다.

“탑”이 자기를 예배함을 의미하는 것은 “탑”의 의미로부터 분명해진다. 자기를 예배함은 인간이 예배라는 관점에서조차 타인보다 자기를 높이려 묘수를 짜낼 때 꼼수를 드러낸다. 자기를 사랑함은 교만과 오만인 바, “높음”, “드높음, 치솟음”, 그리고 “드높여 있음”이라 불려진다; 그리고 높이 있는 모든 것들에 의해 묘사되어 진다. 이사야서에서:
인간의 교만함의 눈이 비천해 질 것이다, 그리고 인간들의 드높임이 낮은 위치로 가져다 놓일 것이다, 그리고 여호와 자신만이 그 날에 드높임을 받으실 것이다. 그 이유가 만군의 여호와의 날이 교만하고 높다는 모든 이들 위에와 드높여진 모든 이들 위에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높고 드높은 레바논의 삼목들 위에, 바산의 상수리 나무 위에; 그리고 모 든 높은 산 위에, 그리고 드높여진 언덕들에, 그리고 모든 드높인 탑 위에, 그리고 모든 요 새화한 (성)벽 위에 있기 때문이다 (이. 2:11-18);
위 구절은 자기 사랑에 관련되고 있다. 이것이 “삼나무들”, “상수리 나무들”, “산들”, “언덕들”, 그리고 “높고”, “드높은” “탑”에 의해 묘사되어 있다.
다시 이사야서에서:
큰 살육의 날, 탑들이 무너질 때, 강들이, 물 많은 시내들이 있을 것이다 (이. 30:25);
위 구절도 마찬가지 방식으로 자기를 사랑함, 그리고 예배에서 자기를 높임을 표시한다. 다시 이사야서에서:
갈대아인들의 토지를 잘 보라: 이 사람들이 있지 않았다; 앗수르는 그 토지가 들짐승(새, bird) 사이에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들은 자기들의 스파이 망루(spy towers)들을 세웠다, [갈대아인들이] 자기들의 궁전들을 지을 것이다, [앗수르인들이] 그것을 황폐하게 만들 것이다 (이. 23:13);
위는 두로와 그것의 황폐해짐에 관해 말해지고 있다; “스파이 망루들”은 거기로부터의 공상들을 표시한다. 에스겔서에서:
나는 많은 나라들이 너에 맞서라고 올라 오게 할 것이다, 오 두로야, 그리고 그들은 두로의 성벽을 훼파하고, 그리고 그녀의 탑(망루)들을 무너뜨릴 것이다; 나 또한 그녀의 먼지(흙) 를 그녀로부터 긁어낼 것이다, 그리고 그녀를 민낯 바위 같이 만들 것이다 (겔. 26:3, 4);
위 구절 역시 앞 구절과 의미가 비슷하다.
예배에서 자기를 사랑함, 또는 자기를 예배함이 “탑”이라 불리우는 이유는 “도성”이 교리를 의미하기 때문에서인데 앞에서 살핀 바 있다; 그리고 흔히 도성들은 경비병이 지키는 탑(망루)으로 요새화되어 있다; 이 탑은 성곽을 빙둘러 설치된다. 그래서 이 탑들은 “경비병의 탑”이라 부른다 (왕상. 9:17; 17:9; 18:8), 그리고 “스파이 탑” (이. 23:13)이라 불린다. 이 외에도, 주님의 교회가 “포도원”에 비교될 때, 예배와 예배의 보호에 속하는 것들이 “포도즙 틀”과 “포도원에 있는 탑”에 비교된다. 이. 5:1, 2; 마. 21:33; 막. 12:1을 더 찾아 읽기 바란다.

그리고 그 탑의 머리가 하늘(sky)에 있게 하자. 이는 자기들이 종국적으로는 천국(heaven)까지도 접수해서 지배하겠다는 의도를 의미한다. 이는 이어지는 사항들로부터 분명해진다. “자기들의 머리를 하늘에 가지는” 것은 그만큼 멀리 자기를 높이는 것임인데 바벨을 묘사한 다른 구절로부터도 분명해진다; 그리고 이미 말한 402항의 “머리를 들어 올림”에 관해 말해진 바로부터도 알 수 있다. 자기를 사랑함은 천국의 삶에 일치하지 않는 것이다; 그 이유가 모든 악들이 그것으로부터 오기 때문이다. 이 악은 증오, 뿐만 아니라 복수, 잔인함, 간음질 등등이다; 더욱이 자기를 사랑함이 예배 안으로 잠입할 때 (진정한 예배와) 일치하는 것이 아무 것도 없어, 오히려 예배를 모독한다. 그러므로 지옥들은 이런 인물들, 즉 자신을 사랑하는 자, 자기들의 머리를 천국 안으로 더 디밀어 더 높아지려 하면 할수록 자신들을 스스로 더 아래로 처박게 하고, 결국 스스로 더욱 거세게 자신들을 처벌하는 인물들로 구성되고 있다.

그리고 우리가 … 이름을 만들자. 이는 그들이 그것에 의해 권세를 잡아 유명해지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누군가의 자기에게 이름을 만듦”의 의미로부터 알런지 모른다. 그 이유가 그들은 모든 이가 어떤 예배에 있기를 바란다는 것, 이것은 모두에게 공통적이다는 것, 그리고 모든 나라들에 존재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우주를 바라보는 모든 이, 더욱이 우주의 질서를 곰곰이 생각해 보는 누군가라면 어떤 최고의 존재, 또는 존재자를 인정한다, 그리고 그가 자신의 번영을 바랄 때, 그는 이 존재자에 숭배함을 표한다. 더 나아가 내부 측면에서도 어떤 것, 이 생각을 명령하는 것이 있다. 그 이유가 이런 명령(dictate)은 주님으로부터 모든 사람과 더불어 있는 천국을 통하여 흘러 들기 때문이다. 이렇지 않은 인간, 그리고 하느님을 인정하지 않는 인간은 지옥적 영들의 지배 아래 있다. 바벨탑을 건설하는 그들이 안 것은 자기들이 교리들과 경건한 것들을 수단으로 자신들에게 이름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 그 이유가 이런 방법 외에는 딱이 자신들이 예배되어지게 할 수 없다는 것, 이것이 다음 절에서 그들이 온 땅의 얼굴에 흩어지지 않으려면, 즉 이와 달리는 그들이 인정되지 않으리라 하고 뒤잇는 대목에서 의미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로부터 뒤잇는 바, 이와같은 사람들이 천국에까지 자신의 머리를 들어 올려 더 높아질 수록 더욱 자신들을 위해 이름을 만들게 된다는 것이다. 그들의 지배는 어떤 양심을 가진 이들에게 극도로 강력하다. 그 이유가 그들은 자기들이 뜻하는 곳은 어디에라도 이들을 끌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양심이 없는 이들의 지배는 외적 제약 같은 것으로 통치한다.

온 땅의 얼굴에 흩어지지 않도록. 이는 그들이 이 외 달리는 인정되어지지 않을 것임을 의미하는 것은 방금 말해진 바로부터 분명해진다; 그 이유가 “온 땅의 얼굴에 널리 흩어지는 것”은 그들의 관점이 잃어지는 것이다, 고로 받아지고 인정되는데 실패하고 마는 것이다.

5절. 그리고 여호와께서는 사람의 아들들이 건설해 오고 있는 도성과 탑을 보시기 위해 내려 오셨다. “여호와께서 내려 오셨다”란 그들 위에 내려질 심판을 의미한다. “도성과 탑을 보려고…”란 그들이 교리를 뒤집고 예배를 모독했기 때문…을 의미한다. “사람의 아들들이 건설해 오고 있는…”이란 그들이 자기들을 위해 고안해냈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여호와께서는…내려 오셨다. 이는 그들 위에 있는 심판을 의미한다. 이 의미는 앞의 살핀 것과 뒤잇는 내용으로부터 분명해진다, 또한 “내려 옴”이 여호와를 서술할 때, 그것의 의미로부터도 알게 된다. 앞의 살핀 것으로부터는 주제가 도성과 바벨탑의 건설이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뒤잇는 주제로부터, 이것은 입술들의 혼돈과 흩트러짐 이다; “내려 옴”의 의미로부터, 이는 여호와에 관련해 말해질 경우인 바, 심판이 거행됨이다. 여호와, 또는 주님께서는 모든 곳에 현존하시고 영원으로부터 모든 것들을 아신다; 그러므로 그분이 보시기 위해 내려오신다고 말해질 수 없다. 이는 인간에게 나타남에 의거해 말해지는 의미인 글자적 의미에서이다. 그러나 내적 의미에서는 그렇지 않다. 그 이유가 내적 의미에서 주제가 그 자체 있는 그대로를 표출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은 외관에 일치하지 않는다; 하여, 이 구절에서의 “내려오심”은 심판을 의미한다.
심판, 또는 심판의 실시는 악이 최악이었을 때, 또는 말씀에서, 악이 극점(종말)에까지 다다랐을 때, 또는 “불법이 극점에 이를 때”이다. 악은 제각기 그것이 가지도록 허용된 한계를 가지고 있다. 그런데 악이 이 한계를 넘으려할 경우 악은 그 자체에 처벌을 자초한다. 이것은 일반적이든, 세부적, 특수적 상황이든 공히 같다. 이때 악의 처벌이 심판이라 불리운다. 처음의 경우, 마치 주님께서 악행이 저질러지는데도 보시지 못한 듯, 또는 주목하시지 않은 듯 나타나기 때문인데, 이렇게 인간이 간주하는 이유는 자기의 악행이 처벌받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런 처벌을 아직 받지 않은 악인은 주님께서 이런 문제를 대수롭지 않다고 여긴다고 상상하나, 그가 처벌을 받을 때, 그는 주님이 보신다고, 더욱이 주님이 자신에게 처벌을 가했다고까지 상상한다. 이런 식의 (악인에게) 있는 외관이 여호와께서 보시려고 내려 오셨다 이다.
“내려 오심”이 여호와를 서술하는 이유는 “가장 높다”가 그분을 서술하기 때문, 또는 그분은 가장 높은데 계신다고 말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는 외관에 근거한 표현이다. 그 이유가 그분은 가장 높은 것에 계신 것이 아니라 가장 안쪽에 있는 것들에 계시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말씀에서 가장 높은 것과 가장 안쪽의 것은 동일한 의미를 가진다. 그 반면, 심판, 또는 악의 처벌은 보다 낮은, 또는 가장 낮은 것에서 거행된다. 이것은 그분께서 “내려 오신다”라고 말해진 이유이기도 하다; 다윗서에서를 읽어 보자:
오 여호와여, 당신의 천국들의 배웅을 받고 내려 오소서; 산들을 만지시니 그것들이 연기를 냅니다; 번개를 내 보내시고, 그들을 흩으소서 (시. 144:5, 6).
위는 악의 처벌, 또는 심판이 의미되어진다. 이사야서에서:
만군의 여호와께서 시온 산 위에, 거기서부터 언덕 위에 싸우시기 위해 내려 오신다
(이. 31:4).
그리고 다시 이사야서에서:
당신이 내려오실 것입니다. 당신 앞에서 산들이 무너져 내릴 것입니다 (이. 64:1).
위에서 역시 “내려 오심”은 악의 처벌, 심판, 형벌을 가함을 표시한다. 미가서에서:
여호와께서 그분의 장소로부터 출현하신다, 그리고 내려오면서, 땅의 거룩한 장소들을 짓밟 으실 것이다, 그리고 산들은 그분 아래 녹아질 것이다 (미. 1:3, 4).

도성과 탑을 보시기 위해. 이 말들은 그들이 예배를 뒤집고 모독했기 때문을 의미하는 것은 앞서 살핀 “도성”과 “탑”의 의미로부터 분명해진다.

사람의 아들들이 건설해오고 있는 것. 이는 그들이 자신들을 위해 고안해냈음을 의미하는데, 이는 설명 없이도 명백해진다. 여기서 “사람의 아들들”은 교회의 아들들이다; 그 이유가 교회로부터 있지 않은 자, 신앙에 관한 지식들을 가지지 않은 자가 이런 것들을 고안할 수 없기 때문이다.

6절. 그리고 여호와께서 말하셨다, 보라, 이 무리들이 하나이다, 그리고 그들 모두 한 입술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이것은 그들이 하기를 시작하는 것이다. 그리고 지금 그들이 하려고 생각했던 것 중 어느 한 가지도 그들로부터 보류된 것이 없다.

그리고 여호와께서 말하셨다. 이는 이것이 이러이러하게 되어졌음을 의미하는 것은 이런 사실로부터 분명해진다. 즉 앞서 살핀 바대로, 우리는 사실적인 역사를 가진 것이 아니고, 만들어진 역사를 가졌다는 것; 그리고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말하셨다”라고 말해질 때, 이것은 그렇게 되었음을 의미하는 것 외의 다른 의미는 없다는 것이다. 이것 역시 이미 살폈다.

보라, 이 무리들이 하나이다, 그리고 그들 모두는 한 입술을 가지고 있다. 이는 그들 모두가 신앙과 교리에 관하여 한 개의 진리를 가졌다를 의미하는데, 이는 “무리”의 의미가 신앙의 진리이고, “입술”의 의미가 교리인 것으로부터 분명해진다. 이것도 앞에서 이미 살핀 바 있다. 즉 “무리(사람들, 백성들, peoples)”는 신앙의 진리, 즉 신앙의 진리에 있는 이들을 의미한다; 그리고 “입술”은 신앙의 교리를 의미하는 것은 11:1에서 말했다. 무리들이 “하나, one”이고, 입술이 “하나”라고 말해질 때란 그들 모두가 그들의 목적으로서 공동체의 공통의 선, 교회의 공통의 선, 그리고 주님의 왕국의 공통의 선을 가질 때이다; 그 이유가 이런 경우일 때, 주님은 그 목적 안에 계시기 때문이고, 모두는 그분으로부터 하나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의 목적으로 자기 자신의 선과 더불어서는 현존하심이 가능할 수 없다; 인간의 자기 자신 자체는 주님을 사랑함에 찬물을 끼엊는다. 인간의 자기 자신 자체는 공동체나 교회 자체, 주님의 왕국에 이르기까지 거기 있는 공통의 선을 마치 그것이 자신을 위해 존재한 것인냥 자신 쪽으로 비틀어 돌려 놓는다. 고로 주님의 것을 주님으로부터 가져가고, 그분의 자리에 자신을 앉힌다. 이런 상황이 인간을 통치할 때, 그가 지니는 단 한 조각의 생각마저도 그것을 빼닮고, 그의 생각들 속의 미세한 것마저도 닮지 않은 것은 하나도 없게 된다. 이런 상황은 어떤 인간 안에서 통치하든지 한결 같다.
이런 경우는 다른 삶에서의 경우와 달리 육체의 삶에서는 명백하게 나타나지 않는 경우가 많다. 그렇지만 다른 삶에서는 누군가를 지배하는 것은 무엇이든 그 사람을 빙 두른 모든 것을 수단으로 지각되는 그 사람만의 독특한 어떤 분위기(aura, sphere)에 의해 그 자체 명백해진다. 이 기운(분위기)는 그 사람의 아주 작은 단 한 가지 것으로부터도 내뿜어진다. 사사건건 자신만을 중시하는 자의 기운은 그곳에서도 (지상에서 했듯) 그 자체에 (사사건건에서 닥치는 대로 모두를) 사유(착복)한다, 결국, 그 자체에 호의를 보이는 모든 것을 흡수한다. 그러므로 자기 주변의 영들의 모든 즐거움을 흡수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모든 자유를 파괴한다. 그런고로 이런 자는 거기서도 공동체로부터 추방되어져야만 한다. 그러나 천국의 공동체에서 사람들이 하나일 때, 그리고 입술이 하나일 때란 모두의 공통의 선이 중시될 때, 한 인물이 다른 이의 즐거움을 자신에게로 사유하지 않을 때, 또는 다른 사람의 자유를 파괴하지 않을 때, 더 나아가 자신이 힘 닿는 한, 더욱 타인의 이것들을 증진하려 할 때이다. 이것은 천국 공동체들이 하나로 되어 있게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것은 오로지 주님으로부터 상호적 사랑을 통하여서만 이다; 그리고 이런 경우는 천국만이 아닌 지상의 교회도 똑같다.

그리고 이것은 그들이 하기를 시작하는 것이다. 이는 지금 그들은 달라지기를 시작했다를 의미한다. 이는 (문맥의) 연결로부터 분명해진다. 여기서의 “하기를 시작하는”것은 그들의 생각 또는 의도, 결과적으로 그들의 목적(end, goal)을 의미한다. 이 의미 역시 이어지는 다음의 말들, 즉, “지금 그들이 하기를 생각했던 것 중 어느 한 가지도 그들로부터 보류된 것이 없다”로부터 분명해진다. 내적 의미에서 그들의 목적이 의미된 이유는 주님께서 인간 안에서 중요시하는 것은 인간의 목적밖에 더 없기 때문이다. 인간의 생각들과 행위들은 무엇이든, 어쩌면 무수하게 다양해질 수밖에 없지만, 결국 그것들의 목적이 선을 만들었다면, 그것들 모두는 선인 것이다; 그 반대로 목적이 악하다면, 그것들 모두는 악이다. 결국 인간이 생각하고 행하는 모든 것을 통치하는 것은 목적인 셈이다. 인간과 더불은 천사들, 주님의 천사들인 바, 인간의 목적 외 어느 것도 통치하지 않는다; 그 이유가 천사들이 목적을 통치할 때, 결국 그들은 인간의 생각들과 행동들도 통치하기 때문이다. 즉 생각과 행동들 모두는 목적으로부터 있는 셈이다. 인간과 더불은 목적은 그의 참 생명이다; 그리고 그가 생각하고 행하는 모든 것들은 목적으로부터 생명을 가진다. 이미 말했 듯 그것들은 목적으로부터 있기 때문이다; 이러이러한 목적이 있다면, 그의 생명의 품질 또한 이러이러할 수 밖에 없다. 목적은 사랑일 수 밖에 없다; 그 이유가 인간은 자기가 사랑하는 것 만을 그의 목표(goal)로 삼기 때문이다. 어떤 인간이 이것을 생각하고는 저것을 행한다해도 그의 목적은 역시 그가 사랑하는 것일 뿐이다. 모르는 척 시치미뗌, 또는 사기적인 것 안에도 역시 목적은 있다. 단지 그것이 자기를 사랑함, 세상을 사랑함인 것, 그리고 그의 생명으로부터 파생되는 즐거움일 뿐이다. 위에서 살핀 결론으로 누군가는 인간의 사랑이 이러이러 할 경우, 그의 생명도 이러이러 할 것이다를 알런지 모른다. 이것들이 “하기를 시작함”에 의해 의미된 것들이다.

지금 그들이 하려고 생각했던 것 중 어느 한 가지도 그들로부터 보류된 것이 없다. 이는 그들의 상태가 바뀌어지지 않으면을 의미하는데, 이는 이어지는 것으로부터 알런지 모른다. 말씀은 비록 글자 의미에서는 나타나는 것이 없다 할지라도 내적 의미에서의 경우에서는 이어지는 것들과 결론 또한 꾸준히 보게 해주는 특성을 지니고 있다. 자기들의 상태가 바뀌지 않으면이라는 특성을 지닌 이들에 주목해보면, 그들이 행함을 생각했던 모든 것을 하려는 것으로부터 보류되어 질 수 없었다. 행함을 생각한 것은 그들의 의도, 즉 목적밖에 더 아니다. 인간과 더불어 있는 목적은 그의 상태가 바뀌지 않는 이상 결단코 보류(억제)되어 지지 않는다. 즉 바꾸지 않는다. 기어이 저질러지고야 만다는 말이다; 그 이유는 목적이 인간의 진짜 생명이기 때문이다. 상태가 바뀌어 질 때, 목적 역시 바뀐다; 그리고 목적과 더불은 생각도 바뀐다. 이 교회의 사람에게 거행된 상태의 변화의 본성은 주님의 신성한 자비로부터 아래 이어지는 사항들에서 보여질 것이다.

7절. 오라, 우리가 내려 가자, 그리고 그들의 입술을 혼동되게 하여 그들이 자기 동료 사람의 입술을 듣지 못하게 하자.

오라, 우리가 내려 가자. 이는 심판이 결과되었음을 의미하는데, 이는 5절에서 “내려 감”에 관해 말해진 사항으로부터 분명해진다. 그런데 이 구절에서는 “우리가 내려가서 그들의 입술을 혼동되게 하자”라고 하여 복수의 형태로 말해지는 이유는 이것이 심판의 집행이고, 이 집행이 영들을 수단으로, 실로 악령들을 수단으로 결과되기 때문에서이다.

그리고 그들의 입술을 혼동되게 하자. 이는 누구도 교리의 진리를 가지지 않았다를 의미하는데, 이를 “입술”이 교리이다고 말한 1절의 의미로부터 알런지 모른다. 1절에 이어지는 바, “입술들을 혼동하는” 것은 교리로부터 있는 것들을, 즉 교리의 진리들을 혼동하는(분간 못하는) 것이다. 내적 의미에서 “혼동하는” 것은 어둡게 되는 것, 뿐만 아니라 지워지고 사라지는 것, 하여 어떤 진리도 있지 않는 것이다. 자기를 예배함이 주님을 예배함을 대신할 때, 모든 진리는 뒤집혀질 뿐만 아니라 폐지되기조차 한다. 결국 거짓이 진리 대신에 인정받아지고, 악이 선의 자리를 꿰찬다. 그 이유가 진리의 모든 빛은 주님으로부터, 그리고 모든 어둠은 인간으로부터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예배에서 인간이 주님의 자리를 차지할 때, 진리의 빛은 짙은 어둠이 되어간다; 그리고 빛은 인간에 의해 짙은 어둠으로 보여진다, 그리고 짙은 어둠은 빛으로 보여진다.
이런 인물들의 생명은 사후에서는 정밀하게 나타난다; 거짓의 생명은 그들에게 마치 빛인 것처럼 있고, 진리의 빛은 마치 짙은 어둠처럼 있다. 그리고 그들이 천국을 향하여 접근할 때, 이와 같은 생명의 빛은 완전한 어둠으로 바뀌어진다. 그들이 이 세상에 있는 동안에서는 짐짓 열변과 열정과 더불어 진리를 이야기할 수도 있다. 게다가 이런 인물들도 자기 위에 꾸준한 되새겨봄은 지니는 바, 그들은 이런 되새김이 자신이 말한 것같이 생각도 그렇게 하는 듯 비칠 수 있을런지 모른다; 그러나 그들의 진짜 목적이 자기를 예배함일 경우, 그 생각들은 자아가 진리라 인정하지 않는 진리는 진리로서 인정하지 않는 자기만의 목적으로부터 파생되고 있다. 이런 품성으로부터 있는 인간의 입이 진리를 운반할진대, 그가 진리를 소유한 것이 아닌 것과 같다; 그리고 다른 삶에서의 경우, 이런 사실은 즉시 명백해진다; 그 이유가 이런 인간은 그가 육체의 삶에서 고백해왔던 진리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필시, 그것을 증오심에서 붙잡고 핍박하기까지 할 것이 분명하다; 자기들의 시치미뗌이나 자기를 예배함이 덜 해질수록 그들은 더욱 진리에 폭언을 가할 것이다.

그들이 자기 동료 사람의 입술을 듣지 못하게 하자. 이는 모두가 다양성에서 있다는 것, 또는 이 사람이 저 사람에 맞서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는 단어들 자체로부터 분명해진다. “서로의 입술을 듣지 못하는 것”은 다른 사람이 말하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 내적 의미에서는 다른 사람이 가르치는 것, 즉 다른 사람의 교리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그 이유가 “입술”이 교리이기 때문이다. 이는 1절에서 살폈다. 실로 그들은 입으로는 그것을 인정하지만 심정에서는 인정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심정이 비 동의함일 경우 입이 동의함은 아무 것도 아닌 것이 되고 만다. 이 점에서의 경우는 다른 삶에 있는 악령들의 상황과도 똑같고, 선한 자의 경우의 방식 같이 그들도 분리된 공동체로 구별되나, 그들은 환각이나 욕망을 수단으로 서로가 연결되어, 그들은 진리나 선들을 핍박함에서는 한 목소리를 낸다. 고로 그들은 어떤 공통의 흥미를 수단으로 서로가 함께하고 있다; 그러나 이 공통의 묶임이 해제되자마자, 그들은 서로에게 달려 든다, 그리고 그들의 즐거움은 자기들과 연합했던 자들을 괴롭히는 데에 있다. 이런 경우는 이 세상에서 예배나 교리와 더불어서도 비슷하다; 신봉자들은 교리나 의식에 속하는 것들을 서로 좋아하는 쪽으로 한 가지 것을 채택한다. 그러나 이들을 함께 붙드는 것은 자기를 예배함이다; 그래서 그들이 이 공통의 흥미를 서로 나눠갖는 한, 그들은 그들이 채택한 것도 인정한다; 그러나 이런 나눠가짐이 깨질 경우, 그들은 즉시 분열을 일으킨다; 그 이유는 위에서 말한 것과 같다. 결론적으로 이런 품성의 사람은 누구도 진리를 소유한 것이 아니고, 모든 이는 진리 대신 거짓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이것이 “그의 동료 사람의 입술을 듣지 못함”에 의해 의미된 것이다.

8절. 그리고 여호와께서는 그들을 온 땅의 얼굴에 흩으셨다. 그리고 그들은 도성을 건설하는 것을 그만 두었다.

그리고 여호와께서는 그들을 온 땅의 얼굴에 흩으셨다. 이는 그들이 인정되지 않았다를 의미하는데, 이는 앞서 같은 말이 등장한 4절에서 말해진 바로부터 분명해진다.
“그리고 그들은 도성을 건설하는 것을 그만두었다.” 이는 이런 교리는 받아지지 않았음을 의미하는데, 이는 도성의 의미가 교리이다고 살핀 바로부터; 그리고 4절과 5절에서 말해진 바, 즉 도성과 탑을 건설함에 관해 살핀 바로부터 분명해진다. 이 모두로부터 이와 같은 교리, 이런 예배는, 내면적으로 자기를 사랑함, 또는 자기를 예배함인 바, 고대 교회에서 허용되지 않았다, 그리고 이에 대한 이유는 이어지는 아래 에서 설명한다.

9절. 이런 이유로 그는 그것의 이름을 바벨이라 불렀는 바, 여호와께서 거기 서 온 땅의 입술을 혼동되게 하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때로부터 여호와께서는 그 들을 온 땅의 얼굴에 흩으셨다.

이런 이유로 그는 그것의 이름을 바벨이라 불렀다. 이는 이런 예배, 즉 “바벨”에 의해 의미된 종류의 예배를 의미한다. 이는 지금까지 살핀 바로부터 분명해진다; 다시 말하자면, 내면적으로 자기 사랑이 들어있는 예배, 그러므로 더럽고 모독적인 예배를 의미한다. 자기를 사랑함은 인간의 자기 자신밖에 더 아니다; 이 자기 자신이 얼마나 더럽고 모독적인 지는 인간의 자기 자신에 관한 앞 대목(1장)에서 알 수 있으리라 본다. 자아-사랑으로부터, 즉 자기를 사랑함으로부터, 또는 인간의 자기 자신으로부터 모든 악들은 흐른다, 즉, 증오, 복수, 잔인함, 간음질, 사기침, 위선, 불경함 등등이다; 그러므로 자기를 사랑함, 또는 인간의 자기 자신이 예배 안에 있을 때, 위와 같은 악들도 예배 안에 도사린다. 단지 이 사랑으로부터의 질과 양의 차이만 있을 뿐이다. 이로부터 예배의 모든 모독이 온다. 사실적 관점에서 보면, 자기를 사랑함, 또는 인간의 자기 자신으로부터의 어떤 것이 예배 안에 들어와 있는 것에 비례하여 내적인 예배는 떠난다. 즉 그것에 비례하여 내적인 예배는 없다는 말이다. 내적 예배는 선에 대한 애착과 진리를 인정함에 존재한다. 그리고 자기를 사랑함, 또는 인간의 자기 자신이 접근함, 또는 들어감에 비례하여 선에 대한 애착과 진리를 인정함은 떠난다, 또는 사라진다. 거룩함은 모독함과 결단코 공존할 수 없다. 마치 천국과 지옥이 뒤섞여 있을 수 없는 경우나 마찬가지 일 것이다. 이것이 들어오면 저것은 떠나야 한다는 말이다. 이와 같은 상황이 주님의 왕국에서의 상태와 질서이다. 이는 바벨이라 불리는 그들의 예배에 내적 예배가 없고, 죽은 예배인 이유이다, 그리고 사실상 내향적으로 시체와 같은데, 이것이 예배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외적 예배 안에는 내적 예배를 함유해야 외적 예배의 품질이 유지됨이 분명해진다.
이런 예배가 “바벨”인 것은 말씀의 많은 장소, 특히 다니엘서에서, 바빌론 왕 느부갓네살이 꿈에서 본 (신)상, 즉 이 상의 머리는 금으로, 가슴과 팔은 은으로, 배와 넓적다리는 놋쇠로, 다리는 쇠로, 발 부분은 쇠와 진흙으로 되었다는 묘사로부터 분명해진다. 이는 진정한 예배로부터 마지막 “바벨”이라 불리는 예배가 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바위로부터의 돌이 쇠, 놋쇠, 진흙, 은, 금을 가루되게 부수었다 (단. 2:31-33, 44, 45). 바빌론 왕 느부갓네살이 세운 금 (신)상, 그것에 백성들이 경배함도 모독된 예배 외에 더 다른 의미는 없다. 똑같은 의미가 예루살렘으로부터 갈취해 온 금잔으로 포도주를 마시며 금 신을 은 신을, 놋쇠 신을, 쇠 신을, 돌 신을 찬양해댄 벨사살 왕에 의해서, 그 때문에 벽에 글이 나타났던 것에도 담겨있다 (단. 5:1-끝절); 같은 의미가 메대 다리오 왕이 신으로 숭배해야 한다고 명령한 대목에서도 (단. 6:7-끝절); 꿈에서 다니엘에 의해 보여진 짐승들에 의해서도 (단. 7:1-끝절); 그리고 계시록에서 요한에 의해 묘사된 짐승들과 바빌론에 의해서도 의미되어 있다.
이런 예배가 표현되고 의미되는 것은 다니엘서와 계시록에 의해, 뿐만 아니라 다른 예언서들에서도 살필 수 있다. 이사야서에서:
그들의 얼굴들은 불꽃들의 얼굴들이다. 하늘들의 별들과 거기로부터의 별자리는 자기들의 빛을 발하지 않는다; 태양은 그의 나감에서 어둡게 될 것이고, 달은 그녀의 빛을 발하지 아 니할 것이다. 들짐승이 침상에 있고, 그들의 집들은 부르짖는 짐승으로 채워질 것이다; 그 리고 올빼미(night-owl, owl)의 딸들이 거기 거주할 것이다, 그리고 사티로스(반인반수, satyr)가 거기서 껑충 뛸 것이다, 그리고 시랑(hyena, iim, iyim)이 그녀의 궁전에서 대답 할 것이다, 그리고 뱀(용)이 기쁨의 건물들에서 (대답할 것이다) (이. 13:8, 10, 21, 22).
위는 바빌론에 관해 말하고 있다, 그리고 이런 예배의 내용물들이 묘사되고 있다. 즉 탐욕들이 “불꽃들의 얼굴들”에 의해; “별들”에 의해 신앙의 진리들이, “그들의 빛을 주지 않음”; “태양”에 의해, 이는 거룩한 사랑인데, “빛을 내지 않음”‘ “들짐승”, “부르짖는 짐승”, “올빼미의 딸”, “사타로스”, “시랑”, “용”에 의해 그들 예배의 내면들이 묘사되어 있다; 그 이유가 이와 같은 것들이 자기를 사랑함으로부터, 즉 인간의 자기 자신으로부터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계시록에서 바빌론은 “매춘과 가증함의 어머니”라 불리우고 있다 (계. 17:5); 그리고 또한 “용들의 처소, 그리고 모든 불결한 영이 소유권을 쥐고 있다, 그리고 모든 불결하고 지겨운 새가 소유권을 쥐고 있다” (계. 18:2); 위와 같은 것이 예배의 내부에 있는 이상, 그 예배에는 선에 속한 어떤 것, 신앙의 진리에 관한 어떤 한 조각도 있을 수 없다; 그리고 선에 대한 애착과 신앙의 진리가 떠나는 만큼 그 빈 자리는 위와 같은 더러운 것이 들어 앉는다. 같은 것이 “새겨 만든 바빌론의 신들의 상들”로도 불리우고 있다 (이. 21:9).
이런 예배 안에 자기를 사랑함, 또는 인간의 자기 자신이 있다는 것, 또는 이런 예배는 자기를 예배함이다는 것이 이사야서로부터 분명해진다:
바빌론 왕 위에 이 비유를 예언하라: 너는 네 심정에 말했다, 나는 하늘들 안으로 승강할 것이다, 나는 내 왕좌를 하느님의 별들 너머로 드높일 것이다; 그리고 나는 북쪽 측면들에 있는 회합의 산에 앉을 것이다; 나는 높은 구름의 너머로 승강할 것이다, 나는 최고 높은 자 같이 될 것이다. 그럼에도 너는 지옥 아래로 내던져질 것이다 (이. 14:4, 13-15).
위 구절에서 보면, “바빌론”은 자신을 신으로 받들어 예배하기를 바라는 이들을 표시한다; 즉 이것이 자기를 예배함이다.
다시 이사야서에서:
내려 와라, 그리고 먼지 위에 앉으라, 오 바빌론의 처녀 딸이여; 땅에 앉으라, 왕좌 없이, 갈대아인들의 딸아; 너는 네 사악함을 신뢰해 왔다; 너는 말했다, 나를 보는 자는 없다; 네 지혜와 네 지식이 너를 돌려서게 했다; 너는 네 심정에서 말했다, 나, 그리고 나 같은 자 아무도 없다 (이. 47:1, 10).
예레미야서에서:
잘 보라, 나는 네게 맞서 있다, 오 파괴하는 산이여, 모든 땅을 파괴한다; 그리고 나는 내 손을 네 위에 뻗을 것이다, 그리고 너를 바위들로부터 굴려 내릴 것이다, 그리고 너를 불타 는 산으로 만들 것이다. 비록 바빌론이 하늘들까지 오른다 해도, 그리고 그녀가 자기 강함 의 높이를 요새화한다 해도 여전히 나로부터 황폐하게 할 그들이 그녀에게 갈 것이다
(예. 51:25, 53).
위 구절로부터도 “바빌론”이 자기를 예배함임이 분명해진다.
이런 인물들은 진리의 빛을 가지지 않았고, 완전 어둠이다는 것; 즉 그들은 신앙의 진리를 가지지 않았다는 것이 예레미야서에서 묘사되고 있다:
여호와께서 바빌론을 향하여, 갈대아인들의 토지를 향하여 말하신 말이다. 북쪽으로부터 그 녀의 토지를 황폐하게 할 나라가 그녀 위에 올라 오고 있다. 아무도 거기서 거주하지 못할 것이다; 사람으로부터 짐승까지조차 그들은 산산이 흩어져 이동할 것이다, 그들은 가버릴 것이다 (예. 50:1, 3);
“북쪽”은 짙은 어둠, 또는 진리 없음을 표시한다; “사람 없음과 짐승 없음”은 선이 없음이다. 바빌론에 관하여는 28절, 갈대아를 취급하는 [1368항]을 더 참조하라.

여호와께서 거기서 온 땅의 입술을 혼동되게 하셨다. 이는 이 고대 교회의 상태, 즉 고대 교회의 내적 예배가 멸해지기 시작했다를 의미하는데, 이는 “온 땅의 입술”이라 말해지고, 7절, “도성과 탑을 건설하기를 시작한 이들의 입술”이 아니다는 것으로부터 분명해진다. “온 땅의 얼굴”에 의해 교회의 상태가 의미되는데, 그 이유는 “땅”이 교회이기 때문이다. 홍수 후에 교회들에 주목해 보면 이렇다: 말씀에서 특별하게 언급되는 교회들은 세 교회들이다; 즉 첫 고대 교회, 이는 노아라 불리운 교회이다; 두 번째 고대 교회, 에벨로부터 명명되었다; 세 번째 고대 교회, 이는 야곱으로부터 명명되었는데, 후에 유다와 이스라엘 교회로 명명되었다.
이 셋 중 첫 번째인 노아라 불린 교회는 그 후의 교회들의 부모격되는 교회로서 있었다. 그리고 여느 교회들의 시작에서 늘 그렇듯이, 이 교회 역시 이 교회를 계승한 교회들보다는 더 죄없음과 더 손상되지 않았음이었다. 이를 1절, “한 입술”, 즉 “한 교리”, 모든 교회인이 선행을 교회의 필수 요소로 간직했음으로부터 분명해진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다른 교회들 같이 이 첫 고대 교회는 타락하기를 시작했다, 그리고 타락의 주요한 원인은 그들 중의 많은 사람들이 자기를 숭배하게 만드는 쪽으로 타인의 예배 방향을 고쳐놓기를 열망한 것이다. 그렇게하여 그들은 타인 위에 군림하는 것이다. 이것이 4절, “우리가 도성과 탑을 건설하자, 그리고 그것의 머리가 하늘에 있게 하자”로 말해지고 있다. 교회 안에서 이런 사람들은 일종의 효소 같은 것, 큰 화재의 요인이 되는 관솔(fire-beand) 같은 것으로 존재하였다. 거룩한 것을 모독해 버리고마는 위험 수위를 넘으려는 찰나에 주님의 신성한 섭리로부터 이 교회의 상태는 바뀌어졌다. 그리하여 그것의 내적 예배는 사멸되어지고, 한편 그것의 외적 예배는 존속하였다. 이것이 여호와께서 온 땅의 입술을 혼동하게 하셨다는 서술에 의해 의미되어져 있다. 이로부터 “바벨”이라 불린 예배는 첫 고대 교회에서는 우세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 뒤를 이은 것은 그들은 신들로서 예배되어지기를 시작한 것, 특히 사 후 신들로서 있기를 원했던 것, 이로부터 이방인들의 많은 신들이 발생했다.
내적 예배가 멸해지고 외적 예배만 존속하게 허락된 이유는 거룩한 것이 모독되지 않도록 하시려 해서 이었다; 그 이유가 거룩한 것의 모독은 영원히 지옥에 떨어짐을 수반하기 때문이다. 신앙에 대한 지식을 소유한 자 외에는 누구도 거룩한 것을 모독할 수 없다. 신앙에 관한 지식들을 소유하지 않은 인물이 신앙에 관한 것들을 인정할 수 없고, 더욱이 모독할 수 없는 것은 자명한 이치이다. 모독되어질 수 있는 것은 내적인 것이다; 그 이유가 거룩한 것은 내적인 것 안에 체류하고, 외적인 것에 체류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점은 악인 것을 의도하지 않은 채 악인 것을 행한 사람의 경우와 비슷할런지 모른다. 이런 사람에게 그가 행한 악이 그의 탓으로 돌려질 수 없다. 즉 계획적 의도로 그것을 행하지 않은 자, 또는 이유가 결여된 자에게 전가되어질 수 없는 것과 같은 말이다. 사후 삶이 있다를 믿지 않는 사람, 그럼에도 외적 예배를 수행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에 속하는 것들을 모독할 수 없다. 그 이유는 그는 이와같은 어떤 생명도 믿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것들을 알고, 인정하는 이들의 경우는 아주 다르다.
내적인 것들을 알고 인정하고 모독하여 영원한 형벌을 받는 위험보다 차라리 내적인 것들을 그들로부터 제거된 상태에서의 기쁨들과 물욕들 안에서 사는 것이 낫기에 본문의 섭리가 있어진 것이다. 이런 이유로 해서 오늘날 유대인들은 탐욕 안에 자신들을 침수시키는 것이 허락되어 있다, 그리고 이 방법에서 그들은 자신들을 내적인 것들을 인정함으로부터 더 멀어지게 할런지 모른다; 그들이 내적인 것들을 인정하지 않았다면, 그들은 그것들을 모독할 수 없는 품성 속에 있는 셈이다. 인간을 내적인 것들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것으로는 단연 탐욕이 제일이다. 그 이유는 이것이 지상의 최고로 낮은 물욕이기 때문이다. 이는 교회 내에 있는 이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이고, 교회 밖 이방인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이 후자, 이방인들(비기독교인)은 모독을 범하는 상황에 덜 빠져들 수 있다. 이것이 여기서 여호와께서 온 땅의 입술을 혼동되게 하셨다고 말해진 이유이다, 그리고 이 말들이 교회의 상태가 바뀌어, 교회의 예배가 외적일 뿐이 되고, 내적인 것은 결핍된 것을 의미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와 같은 상황이 이스라엘족들, 후에 유다인들이 끌어간 바빌론 포로 신세에 의해 표현되고 의미되어져 있다. 이에 관하여 예레미야서에서:
그리고 이것이 올 것이다, 바빌론 왕을 섬기지 않는 나라와 왕국, 그리고 바빌론 왕의 멍 에 아래 자기 목을 놓지 않는 누구이든, 나는 검을 가지고, 기근으로, 염병으로 그 나라 위 에 방문할 것인데, 내가 그의 손으로 그들을 섬멸할 때까지이다 (예. 27:8).
“바빌론 왕을 섬기고, 그의 멍에 아래 자기 목을 놓는 것”은 선에, 그리고 진리에 관한 지식과 인정함, 그로부터 내적 예배에 관한 지식과 인정함이 깡그리 박탈되는 것이다.
이것을 같은 예언서에서 더 보여 준다:
그런고로 여호와께서 이 도성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너희와 더불어 포로로 가지 않은 너의 형제들에게 말하셨다, 여호와 체바욷께서 말하셨다, 잘 보라, 나는 그들에게 검 을, 기근을, 염병을 보낸다, 그리고 나는 그들을 잔혹한 무화과 같이 만들 것이다
(예. 29:16, 17).
“바빌론 왕에게 나아가지 않고 도성에 거주하는” 것은 내적인 것들에 관한 지식 안에 있는 이들, 또는 신앙의 진리들에 관한 지식을 지닌 이들, 그리고 그것들을 모독한 이들, 이들 위에 검, 기근, 염병이 보내진다고 말해진다. 이것은 모독에 대한 형벌들이다; 그리고 그들은 잔혹한 무화과들 같이 되어간다고 말해진다.
“바벨”이 진리에 관한 모든 지식과 인정함을 박탈하는 이들을 표현하고 의미한다는 것이 같은 예언서에서 아래와 같이 의미되고 표현되었다:
나는 모든 유다를 바빌론왕의 손에 줄 것이다, 그리고 그는 그것들을 바빌론으로 끌고 갈 것이다, 그리고 검으로 그들을 처죽일 것이다. 더 나아가 나는 이 도성의 모든 재물을, 모 든 수고한 것들을, 모든 귀한 것들을, 그리고 유다 왕들의 모든 보물들을 줄 것이다, 나는 그들의 적들의 손에 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그것들을 탈취하여 가져갈 것이다
(예. 20:4, 5).
위에서 “모든 재물들, 모든 수고한 것들, 모든 귀한 것들, 그리고 유다왕들의 모든 보물들”에 의해 신앙에 관한 지식들이 의미되어진다.
다시:
북쪽의 가문들과 더불어 나는 이 토지 위에, 거기 있는 거주민 위에, 그리고 빙둘러 있는 모든 나라들 위에 바빌론의 왕을 데려올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들을 근절 시킬 것이다, 그 리고 나는 그것들을 황무함으로, 경멸당함으로, 영원한 황폐됨으로 만들 것이다; 그리고 이 온 토지는 황폐해 있을 것이다 (예. 25:9, 11).
위에서 신앙의 내면의 것들, 또는 내적 예배의 황폐함이 “바빌론”에 의해 묘사되어 있다. 그 이유가 자기를 예배하는 사람은 신앙의 진리를 소유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는 이미 말했었다. 이런 자는 진리가 있는 모든 것을 파괴하고 황폐되게 방치하고, 포로로 끌고 간다. 그러므로 바빌론은 “파괴하는 바빌론”이라 불리운다 (예. 51:25).

그리고 그 때로부터 여호와께서는 그들을 온 땅의 얼굴에 흩으셨다. 이는 내적 예배가 절멸되어졌음을 의미한다. 이는 “흩으심”의 의미가 사라짐(dissipate)이다로부터 분명해진다. 대략적인 의미에서 온 땅의 얼굴에 흩으심은 바벨의 도성을 건설하기를 바라는 이들을 흩으심을 뜻한다. 그러나 이것들이 진리에 관한 모든 지식을 타인들로부터 박탈하는 이들인 바, 이미 말했듯, 이 말들은 내적 예배의 박탈도 동시에 의미한다. 그 이유가 이것은 저것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구절에서 우리는 결과를 가진다. 그 이유가 “온 땅의 얼굴에 흩으심”이라는 (4, 8절에 이어) 세 번째 서술되었기 때문이다. 첫 고대 교회에서 진리와 선에 관한 지식을 박탈하였다는 것은 고대 교회가 대부분 우상 숭배자가 된 나라들을 구성했다는 사실, 그리고 여전히 어떤 외적 예배를 가졌다는 사실로부터 분명해진다. 교회 밖에 있는 많은 우상 숭배자들이 교회 내에 있는 우상 숭배자들보다 더 나은 상태를 유지한 경우가 많다; 그 이유는 전자는 외적 우상 숭배자인 반면, 후자는 내적 우상 숭배자이기 때문이다. 이는 주님의 말씀, 눅. 13:23, 28-30; 마. 8:11, 12로부터도 분명해진다. 그러므로 이것들은 고대 교회의 상태가 바뀐 이유이기도 하다.

10절. 이것들은 셈으로부터의 출생들이다. 셈은 일백 세의 아들이었고. 홍수 후에 이 년, 아르박삿의 아버지가 되었다.

이것들은 셈으로부터의 출생들이다. 이는 두 번째 고대 교회의 갈래들을 의미한다는 것은 “출생들”의 의미가 교리적인 것과 예배들의 근원과 갈래들이다로부터 분명해진다. 이는 앞에서 말한 바 있다. 여기 그리고 말씀의 다른 구절에서도 “출생들, births”은 교회 속의 것들, 즉 교리적인 것들과 예배들에 관한 것들 외 더 다른 의미가 내적 의미에서 포개져 있는 것은 없다. 그러므로 어떤 교회가 출생할 때, “이것들이 출생들이다”라고 말해진다. 예를 들면, 태고 교회가 출생할 때, 창. 2:4에서 “이것들은 하늘들과 땅의 출생들이다”라고 말해졌다. 홍수 이전 뒤잇는 다른 교회들도 마찬가지이다. 창. 5:1에서 “이것은 출생들의 책이다”라고 말해졌다. 마찬가지로 홍수 후에 교회들의 경우, 여기서는 세 번 있었다: 첫째는 노아로 명명되었고, 둘째는 에벨이다, 셋째는 야곱인데, 후에 유다와 이스라엘이라 명명되었다. 이 세 교회들 중 첫 번째가 묘사될 때, 그 기록 역시 비슷한 방식에서 시작한다: “이것들은 노아의 아들들의 출생들이다” (창. 10:1). 그렇게 에벨로 명명된 두 번째 교회, 역시 이 구절에서 “이것들은 셈의 출생들이다”라고 말해진다. 그리고 세 번째 고대 교회 역시 이 장의 27절에서 “이것들은 데라의 출생들이다”라고 말해진다. 이와 같이 “출생들”은 묘사되는 교회의 교리적인 것들과 예배들의 근원들과 갈래들을 의미한다. 두 번째 고대 교회의 출생들이 (에벨이 아닌) 셈으로부터 파생되어지고, 이 교회의 시작이 “셈”에 의해 묘사된 이유는 “셈”이 내적 예배를 의미하기 때문, 특히 여기서의 경우, 이 교회의 내적 예배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이 교회의 내적 예배가 10장에서 셈에 의해 의미된 것과 똑같은 내적 예배의 수준은 아니고, 일반적 여느 교회의 내적 예배를 언급하는 수준일 뿐이다.

지금 말해졌던 바로부터 “셈”은 일반적으로 내적 예배를 표시함은 분명해진다. 이 교회의 내적 예배의 품질은 셈을 이어 명명되는 이름들로부터 특징지어져 있다. 그 특징을 더 설명하면, 그것은 그들이 조사하고 알아낸 다음 수많은 햇수들 동안에 걸쳐 확증된 바의 기억 속의 지식에 의해 특징화 되었다는 점이다.

“일백 년”은 이 교회의 일반적 측면에서의 상태를 의미한다는 것은 이미 서술했던 바로부터 분명해진다. 한마디로 숫자들과 햇수들은 때들과 상태들을 의미한다. 그러나 무슨 상태들인지, 또는 무슨 품질의 상태들인지는 “일 백”에 의해, 그리고 이어지는 이 장의 숫자들에 의해 의미된다. 아마 이를 더 설명하면 장황해지고 주제가 뒤엉켜질 염려도 있다.

아르박삿은 그렇게 이름된 나라였다는 것, 그것으로 기억 속의 지식이 의미되어진다는 것은 창. 10:24로부터 서술된 바 있다.

홍수 후에 이 년. 이는 홍수 후에 두 번째 고대 교회를 의미하는 것인데, 이는 말씀에서 크던 작던, 적든 많든 “년(year)”, “날”, “주”가 전체의 기간을 의미한다는 것으로부터 분명해질런지 모른다; 사실상 추상적 의미에서 기간인 것은 창 1장의 인용 구절로부터도 알런지 모른다. 여기서 “홍수 이후 이 년”에 의해 교회의 두 번째 기간(시대)이 의미된다, 이는 이 교회가 출발했을 때 시작되었다.

11절. 그리고 셈은 그가 아르박삿의 아버지가 된 후에 오백 년을 살았고, 아들들과 딸들의 아버지이었다.

이 구절이 의미하는 것에 대한 추가 확증은 필요하지 않을 듯 싶다. 그 이유는 앞에서 주어진 단어들의 의미로부터 분명해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간단한 서술로 그칠 것이다. 이 교회의 내적 예배에는 일종의 기억 속의 지식, 고로 막연히 진리를 사랑함이라고 불리울런지 모를 사랑 같은 종류 외에 더 다른 것은 없다. 그 이유가 이 교회가 시작했을 때, 어떤 선행도 거의 남아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어떤 신앙도 거의 남아있지 않았다. 그 이유가 진정한 신앙이라면, 절대적으로 선행으로부터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또한 바벨의 도성과 탑에 관해 살핀 바로부터, 즉 여호와께서 온 땅의 입술을 혼동하게 하셨다(9절)로부터도 분명해진다.

그리고 아들들과 딸들의 아버지이었다. 이것이 교리적 사항들을 의미한다는 것은 “아들들”의 의미로부터 분명해진다.

12절. 그리고 아르박삿은 오백 삼십 년을 살았고 셀라의 아버지이었다. “아르박삿은 오백 삼십 년을 살았다”란 이 교회의 두 번째 상태가 시작됨, 뿐만 아니라 그 상태 자체도 의미한다. “아르박삿”이 기억 속의 지식을 의미함은 앞 절과 같다. “셀라의 아버지이었다”란 이 교회로부터 파생됨을 의미한다. 셀라는 셀라로 불리는 나라이었다, 그것에 의해 이 기억 속의 지식의 결과가 의미되어진다.

1340. 이런 것들이 의미됨에 대해서는 확증함이 요구되지 않는다. “셀라”는 그렇게 불리운 나라였다는 것, 이것에 의해 기억 속의 지식(비종교적 지식)의 결과가 의미되는데, 창. 10:24에서 서술한 바 있다.

13절. 그리고 아르박삿은 그가 셀라의 아버지가 된 후에 사백 삼십 년을 살았고, 아들들과 딸들의 아버지이었다. “아르박삿은 그가 셀라의 아버지가 된 후에 사백 삼십 년을 살았다”란 기간과 상태를 의미한다. “아르박삿”은 앞 절 같이 기억 속의 지식(비종교적 학식)을 의미한다. “셀라”는 기억 속의 지식에 부속되는 것(이 학식의 결과)들이다. “아들들과 딸들의 아버지이었다”란 교리적인 사항들을 의미한다.

14절. 그리고 셀라는 삼십 년을 살았고 에벨의 아버지이었다. “셀라는 삼십 년을 살았다”란 세 번째 상태가 시작됨을 의미한다. “셀라”는 기억 속의 지식에 부속되는 것들을 의미함은 앞 절과 같다. “에벨의 아버지이었다”란 셀라로 의미된 교회의 상태로부터의 파생을 의미한다. “에벨”은 에벨이라 불려진 나라인데 히브리 나라는 이 에벨을 아버지로 한 나라이다. 히브리 나라는 두 번째 고대 교회의 예배를 일반적으로 의미한다.

“에벨”이 에벨을 아버지로 한 히브리 나라로 불리운 것, 이 나라에 의해 두 번째 고대 교회의 예배가 일반적으로 의미되어진다는 것은 말씀의 역사적 부분에서 이에 관해 말해진 바로부터 분명해진다. 이 나라로부터 새로운 예배가 개시되었기 때문에, 비슷한 예배를 드리는 자들은 모두 히브리인들이라 불리웠다. 이들의 예배는 한참 후에 야곱의 후손들 사이에서 복원되었다; 그리고 이 예배의 중요한 특징은 그들이 자기들의 하느님을 “여호와”라 부르고, 제물을 바친 것이다. 태고 교회는 만장일치로 주님을 인정했고, 그리고 그분을 여호와라 불렀다, 이는 창세기 1장으로부터, 그리고 그 외의 말씀으로부터도 분명해진다. 고대 교회, 즉 홍수 후의 교회는 주님을 인정했고, 그분을 여호와라 불렀다, 특별히 내적 예배를 가졌던 이들, 그리고 “셈의 아들들”이라 불린 이들에서 이다. 이 외 다른 사람들, 즉 외적 예배에 있던 이들 또한 여호와를 인정했고, 그분을 예배했다. 그러나 내적 예배가 외적 측면 쪽으로 기울면서, 더나아가 우상적인 예배가 되어갔을 때, 그리고 각각의 나라가 예배를 바치는 각각의 신들을 가지기를 시작했을 때, 히브리 나라 만이 이름 여호와를 붙들고 있었고, 자기들의 하느님으로 여호와를 불렀다; 이것에 의해 그들은 다른 나라들과 구별지어졌다.
이집트에 있던 야곱의 후손들은 (조상들이 가졌던) 외적 예배 뿐만 아니라 조상들이 자기들의 하느님으로 여호와를 불렀다는 것까지 잃어버렸다; 모세까지도 그러했다; 그러므로 그들에게는 히브리인들의 하느님, 그리고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하느님이 여호와이심이 우선 가르쳐져야 했다; 이는 아래 구절로부터 알런지 모른다:
모세의 책에서: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하셨다, 너는 안으로 가라, 너와 이스라엘의 장로들은 이집트의 왕 에게 갈 것이다. 그리고 너는 그에게 말할 것이다, 히브리인들의 하느님 여호와께서 우리를 만나셨다. 그리고 지금 우리로 삼일 동안 광야로 가서, 우리가 여호와 우리의 하느님께 희 생제를 지내게 허락하시오 (출. 3:18).
다시:
그리고 바로는 말했다, 여호와가 누구이기에 내가 그의 목소리를 듣고 이스라엘을 가게 하 느냐? 나는 여호와를 모른다, 그리고 또한 나는 이스라엘을 가라고 하지 않을 것이다; 그 리고 그들이 말했다, 히브리인들의 하느님이 우리를 만나셨다. 우리에게 광야 안으로 삼일 길을 가라 하셨다, 그리고 우리의 하느님 여호와에게 희생제를 올리라 하셨다. 그분이 우리 를 염병으로 치시든가, 아니면 칼로 치시든가 하지 않도록 해서 이요 (출. 5:2, 3).
야곱의 후손들이 이집트에서 예배함과 더불어 여호와라는 이름도 상실했다는 것은 아래 구절로부터 알런지 모른다:
그리고 모세는 하느님에게 말했다, 보라, 제가 이스라엘의 아들들에게 가서, 그리고 그들에 게 말하기를, 너희 조상의 하느님이 나를 너희에게 보냈다. 그리고 그들은 나에게 말할 것 입니다, 그분의 이름은 무엇이냐? 무엇이라고 나는 그들에게 말할 것입니까? 14 그리고 하 느님께서 모세에게 말하셨다, 나는 있는 나이다. 그리고 그분은 말하셨다, 그러므로 너는 이스라엘의 아들들에게 말할 것이다, 있는 나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냈다. 15 그리고 하느 님께서 모세에게 더 말하셨다, 그러므로 너는 이스라엘의 아들들에게 말할 것이다, 여호와, 네 조상의 하느님,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삭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냈다. 이것은 영원히 나의 이름이다 (출. 3:13-15).
이런 말들로부터 분명해지는 바, 모세는 여호와를 몰랐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히브리인들의 하느님 여호와의 이름에 의해 타인들과 구별되었다는 것이다. 다른 성경 구절로부터도 여호와가 히브리인들의 하느님이라 불리웠다. 즉:
너는 바로에게 말할 것이다, 히브리인들의 하느님 여호와께서 당신에게 보냈다 (출. 7:16).
바로에게 가라, 그리고 그에게 말하라, 그리하여 히브리인들의 하느님 여호와께서 말하신다 (출. 9:1, 13).
그리고 모세와 아론이 바로에게 갔다, 그리고 그에게 말했다, 그러므로 히브리인들의 하느 님 여호와께서 말하신다 (출. 10:3).
그리고 요나서에서:
나는 히브리인이다; 나는 하늘들의 하느님 여호와를 경외한다 (욘. 1:9).
그리고 사무엘서에서:
블레셋족들은 소리치는 함성을 들었다, 그리고 말했다 히브리인들의 진영에서 크게 외치는 함성은 무엇을 뜻하느냐? 그리고 그들은 여호와의 궤가 진영 안으로 왔음을 알았다. 그래 서 블레셋족들이 말했다, 우리에게 화가 있을진저! 누가 이 당당한 신들로부터 우리를 구해 줄 것이냐? 이 신들은 광야에서 온갖 재앙으로 이집트인들을 치신 신들이다. 오 블레셋족 이여, 너희는 히브리인들의 종이 되지 않으려면 남자 답게 싸우라. (삼상. 4:6, 8, 9).
위에서 역시 나라들은 자기들이 부른 신들에 의해 구별되었다는 것, 그리고 히브리 나라는 여호와에 의해 구별되었다는 것을 알게 해준다.
히브리 나라의 예배의 두 번째 필수 조건은 제물을 바침인데, 위에 인용된 구절, 출. 3:18; 5:2, 3으로부터 분명해진다; 뿐만 아니라 이집트인들이 이 제물바치는 예배 때문에 히브리 나라를 역겨워했다는 것을 아래 구절에서 분명해진다:
모세가 말했다, 그렇게 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그 이유가 우리는 우리의 하느님 여호와 께 이집트인들이 역겨워하는 제물을 바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집트인들이 보는 데에서 제물을 바친다면, 그들은 우리를 돌로 칠 것입니다 (출. 8:26).
이런 이유 때문에 이집트인들은 히브리 나라를 역겨워해서, 이들과 함께 빵을 먹지 않았다 (창. 43:32). 위 모두로부터 분명해지는 또 하나는, 야곱의 후손들에는 히브리 나라라고 불리운 나라 뿐만 아니라 이런 예배를 가진 모든 나라까지도 포함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요셉의 시절에 가나안의 토지는 히브리인들의 토지라고 불리웠다. 즉:
요셉이 말했다, 나는 히브리인들의 토지로부터 끌려 왔습니다 (창. 40:15).
가나안의 토지에 있는 우상 숭배자들 사이에 제물을 바침이 있었다는 것은 여러 구절들로부터 알 수 있을 것이다. 그 이유가 그들이 자기들의 신들에게, 즉 바알 등등의 신들에게 제물을 바쳤기 때문이다; 더욱이 발람, 에벨이 거주했고, 히브리 나라의 출발지이기도 한 시리아, 그곳의 출신이었던 그는 야곱의 후손들이 가나안 토지에 들어오기 이전에 제물을 바쳤을 뿐만 아니라 여호와를 자기 하느님으로 불렀다. 그가 시리아 출신인 것은 민. 23:7로부터; 그가 제물을 바친 것은 민. 22:39, 40; 23:1-3, 14, 29로부터; 그가 여호와를 자기 하느님으로 부른 것은 민. 22:18로부터 확인된다. 노아에 관해서 말해진 구절, 즉 창. 8:20의 경우, 즉 그가 태워바치는 제물을 바쳤다는 것은 진정한 역사는 아니고 작성된 역사인데, 거기서 태워바치는 제물이 등장한 이유는 이 제물이 예배의 거룩함을 의미하기 때문에서였다. 이는 919-923항을 다시 참조하면 될 것이다. 따라서 이 구절은 “에벨(Heber, Eber)”, 또는 히브리 나라를 수단으로 의미되는 것에 대해 주목한다는 것이 분명해진다.

15절. 그리고 셀라는 그가 에벨의 아버지가 된 후에 사백 삼십 년을 살았고, 아들들과 딸들의 아버지이었다. “셀라는 그가 에벨을 낳은 후 사백 삼십 년을 살았고”란 존속 기간과 그 상태를 의미한다. “셀라는 기억 속의 지식에 부속되는 것들(비종교적 지식의 결과)을 의미한다.” “에벨”은 일반적으로 이 교회의 예배를 의미한다. “그리고 아들과 딸들을 낳았다”란 교리적인 것들을 의미한다.

16절. 그리고 에벨은 삼십 사 년을 살았고, 벨렉의 아버지이었다. “에벨이 삼십 사 년을 살았다”란 이 교회의 네 번째 상태의 시작을 의미한다. 여기서 “에벨”은 일반적으로 이 교회의 예배를 의미한다. “벨렉”은 에벨로 의미된 교회로부터 파생되어진 교회를 의미한다. “벨렉”은 그가 조상이라는 차원에서는 소위 일종의 나라 이름인데, 이 이름은 외적 예배를 의미한다. 여기서 외적 예배를 의미한 “벨렉”의 뒤를 이어 이 예배로부터의 파생물이 등장하고 있다. 앞 장 25절에서 벨렉의 의미로부터 또 다른 뜻이 있다. 즉 “그의 시절에 땅이 갈라진” 것이다. 그 이유가 벨렉은 그의 형제 욕단과 함께 이 두 번째 교회를 표현했기 때문이다.

17절. 그리고 에벨은 그가 벨렉의 아버지가 된 후에 사백 삼십 년을 살았고, 아들들과 딸들의 아버지이었다. “에벨은 그가 벨렉을 낳은 후 사백 삼십 년을 살았다”란 존속 기간과 상태를 의미한다. “에벨”과 “벨렉”은 앞 절에서와 같은 의미이다. “아들들과 딸들을 낳았다”란 예배 의식들 속에 있는 교리적인 것들을 의미한다.

18절. 그리고 벨렉은 삼십 년을 살았고, 르우의 아버지이었다. “벨렉은 삼십 년을 살았다”란 이 교회의 다섯 번째 상태의 시작을 의미한다. “벨렉”의 의미는 앞 절에서와 같다. “그가 르우의 아버지이었다”란 거기로부터의 파생을 의미한다. 르우는 그를 시조로 삼은 나라의 이름으로 불렸다. 이로부터 르우는 한참 더 외적인 예배를 의미한다.

19절. “그리고 벨렉은 그가 르우의 아버지가 된 후에 이백 구 년을 살았다, 그리고 아들들과 딸들의 아버지이었다.” “벨렉은 그가 르우의 아버지가 된 후에 이백 구 년을 살았다”란 (존속) 기간과 상태를 의미한다; “벨렉”과 “르우”의 의미는 앞 절에서와 같다. “아들들과 딸들의 아버지이었다”란 의식들을 의미한다.

20절. 그리고 르우는 삼십 이 년을 살고, 스룩의 아버지이었다. “르우는 삼십 이 년을 살았다”란 이 교회의 여섯 번째 상태를 의미한다. “르우”의 의미는 앞 절과 같다. “스룩의 아버지이었다”란 거기로부터의 파생을 의미한다. 스룩은 그를 시조로 하는 나라의 이름이 되었는데, 그 이름은 외적인 것들에서의 예배를 의미한다.

21절. 그리고 르우는 그가 스룩의 아버지가 된 후에 이백 칠 년을 살았고, 아들들과 딸들의 아버지이었다. “르우는 스룩을 낳은 후 이백 칠 년을 살았다”란 존속 기간과 상태를 의미한다. “르우”와 “스룩”의 의미는 앞 절과 같다. “아들들과 딸들을 낳았다”란 이런 예배의 의식들을 의미한다.

22절. 그리고 스룩은 삼십 년을 살았고 나홀의 아버지이었다. “스룩은 삼십 년을 살았다”란 이 교회의 일곱 번째 상태의 시작을 의미한다. “스룩”의 의미는 앞 절과 같다. “나홀의 아버지이었다”란 거기로부터 파생됨을 의미한다. 나홀은 그를 시조로 하는 나라의 이름으로 불렸는데, 이 이름은 예배가 외적인 것에로 치중하다가 아예 우상 예배로 바뀐 예배를 의미한다.

23절. 그리고 스룩은 그가 나홀의 아버지가 된 후에 이백 년을 살았고, 아들들과 딸들의 아버지이었다. “스룩은 그가 나홀을 낳은 후 이백 년을 살았다”란 존속 기간과 상태를 의미한다. “스룩”과 “나홀”의 의미는 앞 절과 같다. “아들들과 딸들의 아버지이었다”란 이 예배의 의식들을 의미한다.

24절. 그리고 나홀은 이십 구 년을 살았고, 데라의 아버지이었다. “나홀은 이십 구 년을 살았다”란 이 교회의 여덟 번째 상태의 시작을 의미한다. “나홀”은 우상 예배에로 기울고 만 예배를 의미함은 앞 절과 같다. “데라의 아버지이었다”란 거기로부터 파생됨을 의미한다. 데라는 그를 시조로 하는 나라의 이름으로 불렸는데 이 이름은 우상 예배를 의미한다.

25절. 그리고 나홀은 그가 데라의 아버지가 된 후에 일백 십구 년을 살았고, 아들들과 딸들의 아버지이었다. “나홀은 그가 데라를 낳은 후 일백 십구 년을 살았다”란 존속 기간과 상태를 의미한다. “나홀”은 우상적인 것에 관심이 집중된 예배를 의미함은 앞 절과 같다. “데라”는 우상 예배를 의미한다. “아들들과 딸들의 아버지 이었다”란 우상 예배의 의식들을 의미한다.

26절. 그리고 데라는 칠십 년을 살고, 아브람과 나홀과 하란의 아버지이었다. “데라는 칠십 년을 살았다”란 이 교회의 아홉 번째 상태의 시작을 의미하는데, 이는 마지막 번째이다. “데라”는 우상 예배를 의미한다. “아브람과 나홀과 하란을 낳았다”란 거기로부터의 파생을 의미하는데 아브람, 나홀, 하란은 (실제의) 인물(person)들이고 이들로부터의 나라는 우상 숭배자들로 명명되었다.

“데라”에 의해 우상 숭배적 예배가 의미된다는 것은 20절로부터 여기까지 말해진 갈래들로부터 보여질런지 모른다. 이 두 번째 고대 교회는 내적 예배의 종류로부터 퇴보되었다, 그리고 섞음질 되다가 결국 우상적 예배로 전락하고 말았다; 이는 여느 교회들과 같은 맥락이다, 즉 내적인 것으로부터 외적인 것으로 나아가다가 결국 외적인 것만에 머무는 형국이다. 하여 내적인 것은 삭제되고 만 셈이다. 이 교회 역시 그들 대부분이 하느님으로 여호와를 인정하지 않았고, 다른 신들을 예배했는데, 여호수아서를 보면 분명해진다:
여호수아가 모든 백성들에게 말했다, 그런고로 이스라엘의 하느님 여호와께서 말하신다, 너 희의 조상들이 옛적에 강 건너, 아브라함의 아버지, 나홀의 아버지 데라에 이르기까지 살았 었다; 그리고 그들은 다른 신들을 섬겼다… 이제는 그러므로 여호와를 경외하고 그분을 성 실과 진심으로 섬겨라; 그리고 너희 조상들이 강 건너에서, 그리고 이집트에서 섬겼던 신들 을 멀리하라, 그리고 너희는 여호와를 섬겨라. 그리고 여호와를 섬김이 너희 눈에 악이다 면, 지금 너희가 섬길 (신을) 선택하라; 즉 너희 조상들이 강 건너에서 섬겼던 신이든지, 또는 아모리족의 신들이든 (선택하라) (여. 24:2, 14, 15).
위에서 명백해지는 바는, 데라, 아브람, 나홀이 우상 숭배자였다는 것이다.
[2] 나홀이 우상적인 예배가 있던 나라였다는 것은 시리아 사람 라반으로부터 분명해진다. 그는 나홀의 성에서 거주했다, 그리고 라헬이 훔쳐 가져간 드라빔, 또는 형상
을 예배했음이 분명하다. (창. 24:10; 31:19, 26, 32, 34). 그리고 아브라함의 하느님이 있었고, 나홀의 하느님이 있었고, 그들의 조상, 즉 데라의 하느님이 있었다. 이는 창. 31:53으로부터 알려진다. 모세의 책에서, 여호와는 아브람에게 알려지지 않았다고 서술되고 있다:
나 여호와가 아브라함에게, 이삭에게, 야곱에게, 전능한 하느님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내 이 름 여호와로서는 그들에게 알려지지 않았다 (출. 6:3).
위로부터 분명해지는 바, 이 나라들 안에 존재했던 교회들이 여기서 데라로 의미된 우상적인 예배를 가지는 옆길로 들어서버린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데라에 의해 의미되었기 때문에, 이 우상적 예배는 아브람, 나홀, 하란에 의해서도 의미되었다.

우상 숭배에는 크게 세 종류이다. 첫째는 자기를 사랑함으로부터, 둘째는 세상을 사랑함으로부터, 셋째는 관능적인 기쁨(sensual pleasure)을 사랑함으로부터 이다. 모든 우상적인 예배는 예배의 목적을 위해 위 세 종류 중 이것 하나, 또는 저것 하나를 가진다. 우상 숭배자들의 예배는 더 다른 목적들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 이유가 우상 숭배자들은 영원한 생명을 모르고 관심도 없다; 그들은 그것을 부정하기조차 한다. 이런 세 종류의 우상 숭배가 데라의 세 아들에 의해 의미되고 있다.

아브람, 나홀, 하란은 실지 존재한 인물들이고, 이들의 이름을 따라 나라가 명명되어졌는데, 여기에 속한 사람들은 우상 숭배자들이다. 이는 말씀의 역사 부분들로부터 분명해진다. 나홀에 관하여서는 이미 살핀 바 있다. ; 그 이유가 성읍이 나홀의 성이라 불리웠기 때문이다 (창. 24:10). 그 당시의 성읍은 자기 가문들에 속한 자들이 모여 사는 수준일 뿐이었다; 그리고 여러 가문들이 나라를 구성했다. 많은 나라들이 아브라함으로부터 출생했다는 것은 이스마엘의 후손, 또는 이스마엘족들로부터, 뿐만 아니라 아브라함의 둘째 아내 게투라에 의한 아들들로부터도 분명해지는데, 이 아들들은 창. 25:1-4를 읽기 바란다.

27절. 이것들은 데라로부터의 출생들이다. 데라는 아브람, 나홀, 하란의 아버지이었다. 그리고 하란은 롯의 아버지이었다.

그리고 이들은 데라의 출생들이다. 이는 우상 숭배의 근원들과 갈래들을 의미하는데, 이로부터 표현 (뿐인) 교회가 왔다. “출생들”이 근원들과 갈래들을 의미한다는 것은 이 장 10절, 1330항에서 살핀 바 있다. 이 대목에서 홍수 후에 세 번째 고대 교회가 다루어진다, 이 세 번째 고대 교회는 10절로부터 지금까지 취급한 두 번째 고대 교회가 데라에서 우상 숭배로 전락했을 때, 이 교회를 계승한 것이다. 이미 말한바 같이 데라, 아브람, 나홀, 하란은 우상 숭배자들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들로부터 나라들이 파생되었다, 마찬가지로 이스마엘족과 미디안족이 그러했고, 나홀로부터 파생된 시리아에 있는 다른 나라들도 있다; 또한 롯의 후손인 모압과 암몬족도 우상 숭배자들이다.

교회가 우상 숭배로부터 표현적으로 되었다는 것은 표현(representative)이 무엇인지를 알지 않으면 아무도 모른다. 유대 교회에서, 그리고 말씀에서 표현된 것들은 주님과 그분의 왕국, 결과적으로 사랑의 천적인 것들과 신앙의 영적인 것이다; 이것들이 표현되는 것들이고, 이 외에 이것들에 속하는 많은 것들, 즉 교회에 속하는 모든 것들도 표현된다. 표현하는 대상은 인물, 또는 세상, 또는 땅 위에 있는 것들이다; 한 마디로 감각들의 목적물인 모든 것들 인 바, 표현되지 못할 대상은 거의 없다. 그러나 표현에도 일반적 법칙이 있는데, 그것은 표현을 하는 어떤 것, 또는 어떤 인물 자체가 함축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고, 오로지 현상만을 표현한다는 말이다.
예를 들면, 모두 각각의 왕은, 그 왕이 유다 왕국에서 이든, 이스라엘 왕국에서이든, 이집트 이든, 주님을 표현할 수 있다. 각 왕의 왕권력 자체가 표현되는 것이다. 아주 사악한 왕이라 해도 주님에 대한 것을 표현할 수 있다. 말하자면, 이집트의 통치권을 요셉에게 내려준 바로 라든가, 바빌론의 느부갓네살(단. 2:37, 38), 사울, 그리고 유다와 이스라엘의 다른 왕들, 그 왕들의 품성이 어떠하든 (주님과 그분의 왕국의 어떤 것을) 표현할 수 있다. 실제의 기름 부음, 이로부터 그들은 여호와의 기름 부음이라 불리웠는 바, 이 표현을 포함했다. 마찬가지 방식에서 모든 성직자들, 그들이 누구이든 주님을 표현했다; (성직자 인물이 아닌) 성직 직능 자체가 표현되는 것이다; 설사 악하고 불순한 성직자였다 해도 마찬가지 방식에서 표현된다; 그 이유는 표현에서 등장하는 인물의 실제의 품성을 함축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람들이 표현할 뿐만 아니라 제물로 바쳐지는 모든 것으로도, 즉 어린 양이나 양은 천적인 것들을; 비둘기나 호도애는 영적인 것을; 수양, 염소, 거세한 수소, 수소는 보다 낮은 천적, 영적인 것들을 표현한다.
살아있는 것이 표현을 위해 사용될 뿐 아니라 살아있지 않은 것도 사용된다. 말하자면, 제단, 제단의 돌조차도, 방주, 그리고 성막, 그것들 안에 있는 모든 것, 즉 등불, 빵, 아론의 의복 등등이다. 이런 것 뿐 아니라 유대 교회의 모든 의식들도 표현적이었다. 고대 교회에서, 감각의 모든 대상들, 산과 언덕, 골짜기, 평야, 강, 시내, 샘, 못, 상수리나무 그리고 일반적으로 나무들, 그리고 특수적으로 나무들, 즉 한정된 의미를 가지는 각각의 나무들도 표현물로 사용되었다. 의미적인 교회가 끝장났을 때, 의미했던 모든 대상들은 표현적 대상물이 되었다. 이상 살핀 바로부터 표현이 무엇인지가 알게 되었으리라 생각한다.
이런 표현의 효력 때문에 주님께서 명령하여 실시되는 의식에 따른 모든 것들은 천사들과 영들 앞에서 거룩하게 나타난다. 예를 들면, 대 성직자가 물로 자신을 씻을 때, 그가 불타는 등불 앞에 섰을 때, 그가 어떤 인간이었든지 상관 없이, 최악의 불순한 자라 가정 해도, 그리고 그의 심정에서 우상 숭배자라 해도 (거룩하게 나타났다). 이런 경우는 여느 성직자라 해도 같다. 그 이유가 이미 말했 듯, 표현함에서 인물은 반영되지 않고 (말하자면 연극에서 단지 배우 역할을 한 것일 뿐), 단지 표현되는 품질 자체만을 함축하기 때문이다. 더 설명하면, 품질 자체란 실제의 등장 인물이 아닌 추상적 측면에서의 인물, 제물로 바쳐지는 수소나 어린 양, 또는 제단 주위에 뿌려지는 피로부터, 등등 모두는 추상적 측면만이 반영되는 셈이다.
이런 표현 (뿐인) 교회가 설립되었는데, 이는 모든 내적 예배가 상실된 이 후, 그리고 예배가 외적일 뿐인 예배가 되고, 우상 숭배가 되었을 때, 예배의 내적인 것을 수단으로 하는 결합이 멸절된 후라 하여도, 천국이 땅과의 어떤 결합이 있어지기 위해, 즉 주님이 천국을 통하여 인간과의 어떤 결합이 있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였다. 그러나 어떤 종류의 결합이 표현을 수단으로 있는지는 주님의 신성한 자비로부터 이어지는 구절에서 말해질 것이다. 다음 장까지 표현적 의미들은 시작하지 않는다. 그러나 각각의 세부 사항들은 일반적, 세부적 측면에서 순수하게 표현적이다; 취급되는 주제는 앞으로 표현적으로 되어질 이들과 그 후손들의 아버지의 상태이다; 이 아버지들은 우상적인 예배 속에 있었다는 것은 이미 살폈다.

데라는 나홀의 아들이었다, 또한 그의 이름에 따라 불려진 나라의 아버지였고, 그에 의해 우상적인 예배가 의미되었는데, 이미 살폈다. 데라가 민족(나라, nation)였다는 것은 그의 아들들로부터 근원한 나라들이 그를 아버지로 인정했다는 사실로부터 알런지 모른다. 마치 야곱의 아들들, 또는 유대인들과 이스라엘인들, 또한 이스마엘족, 미디안족, 다른 사람들이 아브라함을 자기들의 조상으로 인정한 것, 또한 모압족과 암몬족이 롯을 아버지로 인정한 것 등과 같다. 이런 나라들이 자기들의 아버지의 이름으로부터 나라 이름이 불려지지 않고 그들의 아들들의 이름들로부터 불려지긴 했지만, 여전히 그들 모두는 공통의 아버지로 인정하고, 자신들이 그의 아들들이라 부를 때, 마치 데라의 아들들, 아브라함의 아들들, 또는 롯의 아들들이라 부를 때, 일반적 의미에서 나라는 이들의 각각에 의해, 여기서의 경우, 데라에 의해, 아브람에 의해, 나홀에 의해, 그리고 롯에 의해 의미되어진다; 그 이유가 그들은 나라의 지주, 또는 뿌리이기 때문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야곱의 후손들도 그의 아들들의 각각의 이름이 나라의 이름들이 되었지만, 여전히 그들 모두는 야곱과 이스라엘이라 불리우고, 또한 아브라함의 아들들과 씨라 불리운다 (요. 8:33, 39).

아브람, 나홀, 그리고 하란이 데라의 아들들이었다는 것, 그리고 그들은 그들의 조상들 같이 그들로부터 이름지어진 나라였다는 것, 그리고 그들에 의해 여기서 우상 숭배적 예배가 의미된다는 것은 이미 주어진 설명으로부터 분명해진다; 그리고 우상 숭배가 데라에 의해(그의 자녀 역시) 의미된다는 사실로부터도 분명해진다. 그러나 우상숭배적인 예배들이 여기서 데라의 아들들에 의해, 후에 하란의 아들 롯에 의해 의미된다는 것은 우상 숭배적인 예배들이 그 종류에 따라 조사해 본다면 알런지 모른다. 일반적으로 네 종류의 우상 숭배적인 예배들이 있는데, 이것은 다른 것보다 더 내면적이다. 세 개의 더 내면적인 것은 한 부모의 아들로서 있다; 네 번째는 세 번째의 아들로서 있다. 우상 숭배적인 예배들은 내적 유형(type)과 외적 유형이 있다; 내적 유형은 인간을 정죄한다(죄있게 한다); 외적 유형은 정죄됨이 과히 심각하기까지 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우상 숭배적인 예배가 더 내면일 수록, 더 정죄된다; 그러나 더 외면일 수록 덜 정죄된다. 내적 우상 숭배자들은 하느님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자기와 세상 측면만을 인정한다, 그리고 자기들의 모든 탐욕들을 우상들로 만든다; 이에 비해, 외적 우상 숭배자들은 비록 그들이 우주의 하느님이 누구인지 모를지라도 하느님을 인정할 수 있다. 내적 우상 숭배자들은 그들이 획득한 생명으로부터 알려진다; 그리고 이 생명이 선행의 생명으로부터 떠남에 비례해서, 그들은 더 내면적 우상 숭배자가 되어진다. 외적 숭배자들은 그들의 예배로부터서 만 알려진다; 그리고 우상 숭배자라 할지라도, 그들은 여전히 선행의 생명을 가질 수 있다. 내면의 우상 숭배자들은 거룩한 것들을 모독할 수 있다, 그러나 외면의 우상 숭배자들은 모독할 수 없다; 그러므로 외적인 우상 숭배는 사람들이 거룩한 것을 모독함에서 예방해 주시려 관대히 다루어진다; 이에 관하여는 이미 말한 대목을 참조하기 바란다.

롯으로부터 우상 숭배자였던 두 나라가 솟아났다는 것은 그의 두 아들, 모압과 벤암미(Ben-Ammi, 또는 암미, Ammi)가 그의 두 딸들에 의해 출생했다는 것으로부터 분명해진다 (창. 19:37, 38). 이들로부터 모압족과 암몬족이 등장하고, 우상 숭배자들이다는 것은 말씀으로부터 분명해진다. 여기서 롯은 모압과 벤암미에 의해 의미된 우상 숭배적인 예배들의 아버지로서 언급되어진다.

28절. 그리고 하란은 그의 출생지, 갈대아의 우르에서 자기 아버지 데라의 얼굴 앞에서 죽었다.

그리고 하란은 그의 출생지, 갈대아의 우르에서 자기 아버지 데라의 얼굴 앞에서 죽었다. 이는 내면적인 예배가 삭제되고 단지 우상 숭배적으로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는 “하란”, “데라”, “출생지”, “갈대아의 우르”, 그리고 그가 “자기 아버지의 얼굴 앞에서 죽었다”고 말해진 것으로부터도 분명해진다. 내면의 예배가 삭제되어져 아무 것도 아니게 되었다는 사실에 주목해 보자. 이 경우는 이럴 것이다. 교회가 어떤 나라 사이에 출현하려면, 먼저 지독하게 황폐해져서 악과 거짓이 내적 예배 안에 하나도 없어야 한다. 내적 예배 안에 악과 거짓이 남아 있는 한, 내면적 예배를 구성하는 선과 진리는 방해를 받는다; 그 이유가 악과 거짓이 현존하는 한, 선과 진리는 받아질 수 없기 때문이다. 이는 어떤 이교 안에서 태어난 이들이 이교의 거짓들 안에서 거짓들을 확증해 왔었는데, 이 거짓들에 반대되는 진리들을 받는다면 어려움은 대단히 클 것이 당연히 예상된다는 사실로 미루어 짐작 될런지 모른다. 그러나 신앙의 진리인 것을 아예 모르는 이방인들, 그런데도 선행 안에 있는 그들의 경우는 아주 다르다. 이것은 주님의 교회가 유대인들 사이에서 회복되어질 수 없고, 신앙의 지식들을 가지지 않았던 이방인들 사이에서 건설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유대인들은 그들의 거짓들에 의해 완전히 어두워저 진리의 빛이 소멸되었던 반면, 이방인들은 그렇지 않았다. 그 이유는 그들이 신앙의 진리인 것을 몰랐기 때문에서이다; 그들이 몰랐는데, 그들이 어둡게하고 소멸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새로운 교회가 지금 회복되어지기 때문에, 선과 진리가 심어질 수 있는 이들과 더불어 이 새로운 교회는 모양을 갖추어야만 한다. 이들이란 과거 선에 관한 모든 지식과 신앙의 진리에 관한 모든 지식을 삭제해 버린 이들, 이방인들 같이 우상 숭배자가 된 이들이다. 데라와 아브람에 주목해 보면, 이들이 위에 살핀 부류에 속한다. 즉 그들은 다른 신들을 예배했다. 그리고 여호와에 관한 지식도 없었다, 그 결과 선인 것과 신앙의 진리인 것에 관한 지식도 없었다. 그런고로 그들은 여전히 어떤 것이 남아있는 시리아의 다른 이들보다 진리의 씨를 받는데 더 적합했다. 남아있는 시리아의 다른 이들에 관해서는 발람이 이에 대한 적절한 예증이 된다. 그는 시리아 출신이고, 여호와를 예배했을 뿐만 아니라 제물도 바쳤다, 동시에 예언도 했다. 그러므로 이 구절은 내적 예배가 삭제되어졌다는 것, 오직 우상 숭배만 있었다는 것을 포함하고 있다.

“하란”에 의해 내면의 우상 숭배적 예배가 의미되는 것, 그리고 “데라”에 의해 일반적 우상 숭배적인 예배가 의미되는 것은 앞서 서술했다. 근원이 “그의 출생지의 토지”에 의해;, 그리고 그들의 우상 숭배적인 예배가 거기로부터 파생되었다는 것은 “출생, 태생”의 의미가 근원과 갈래(파생, derivation)이다로부터 분명해진다. 이에 관하여는 10, 27절을 보기 바란다.

“갈대아의 우르”에 의해 거짓들이 들어있는 외적 예배를 의미한다. 이는 말씀에 있는 “갈대아”의 의미로부터 분명해진다. 9절에서 살핀 바, “바벨”에 의해 내면적으로 악들이 있는 예배가, “갈대아”에 의해 내면적으로 거짓들이 있는 예배가 의미된다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바벨”에 의해서는 내면에 선이 전혀 없는 예배가, “갈대아”에 의해서는 내면에 진리가 전혀 없는 예배가 의미되는 셈이다. 내향적으로 선과 진리가 하나도 없는 예배는 모독적이고 우상 숭배적인 예배이다. 이런 예배가 “갈대아”에 의해 말씀에서 의미되는 것이 아래 구절로부터 보일 것이다. 이사야서에서:
갈대아의 토지를 잘 보라; 이 사람들이 하나도 없다; 앗수르가 부르짖는 짐승에서 그것을 발견했다; 그들은 거기에 스파이 탑을 세울 것이다, 그들은 그녀의 궁전들을 일으킬 것이 다; 그는 그것을 황폐해지게 만들 것이다.(이. 23;13).
“사람들이 있지 않은 갈대아의 토지”란 거짓들을 표시한다; “앗수르가 그것을 발견했다”란 합리화함을 표시한다; “망루, 스파이 탑”은 공상, 망상을 표시한다. 다시:
그런고로 너희의 구속자,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 여호와께서 말하신다, 너희를 위하여 나 는 바빌론으로 (사람을 )보내었다, 그리고 빗장들을 내던졌다, 그들의 모두, 그리고 갈대아 인들의 배 안에서 함성이 있다 (이. 43:14).
“바빌론”은 내향적으로 악이 있는 예배를 표시한다; “갈대아”는 내향적으로 거짓이 있는 예배를 표시한다; “배”는 부패된 진리에 관한 지식들 이다.
다시:
너희는 침묵하여 앉아 있고 어둠으로 들어가 있으라, 오 갈대아의 딸아; 그 이유가 그들이 너를 왕국들의 숙녀라고 더 이상 부르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내 백성에게 분노했 을 때, 나는 내 상속분을 모독했다, 그리고 네 손에 그들을 주었다; 두 가지 것들이 한 날 에 갑자기 너에게 올 것이다, 아이를 상실함과 과부 신세가 함께 올 것이다. 그것들이 네 위에 확실히 임할 것이다, 네 마법들의 성행함과 네 마술들이 위대해졌기 때문이다
(이. 47:5, 6, 9).
여기서 “갈대아”는 진리의 모독, 그리고 “마술”, “마법”이라 불리움이 분명하다. 다시:
너희는 바빌론으로부터 나가고, 너희는 갈대아로부터 도망하라 (이. 48:20);
즉, 예배에서 선을 모독함으로부터와 진리를 모독함으로부터 이다. 에스겔서에서:
예루살렘으로 그녀의 역겨운 짓을 알게 하라; 네 조상들은 아모리족, 네 어미는 헷족이었 다; 너는 이집트의 아들들과 매춘짓을 범했다; 너는 앗수르의 아들들과 매춘을 범했다; 그 러므로 너는 갈대아의 온 토지에 까지 네 매춘을 늘려갔다 (겔. 16:2, 3, 26, 28, 29).
위는 유대 교회에 관해서 특별하게 말해진 것이다; “이집트의 아들들”은 기억 속의 지식들을 표시한다; “앗시리아의 아들들”은 추론들을; “그녀가 매춘을 늘려간 갈대아의 토지”는 진리의 모독을 표시한다. 누구도 위 구절에서 짐작하는 것은 위의 나라들이 실지의 나라를 언급하지 않을 것이다는 것, 위의 매춘이 자연계 수준의 매춘이 아니다는 것이다.
다시:
오홀라는 매춘을 범했다, 그리고 그녀의 이웃, 앗시리아인, 그녀의 애인에 점을 찍었다; 그 리고 그녀는 이집트로부터 그녀의 매춘들을 버리지 않았다; 그녀는 그녀의 매춘들을 더 보 탰다; 그녀는 남자들을 보았다, 그것은 벽에 초상화된 남자였는데, 주홍색으로 초상화한 갈대아인들 이고, 그들은 머리에 물들인 터번을 쓰고, 허리에 띠를 두르고 있다, 그들 모두 는 보기에 지도자 같고, 그들 태생지로부터 바빌론의 아들들의 모습, 갈대아의 아들들 같았 다. 그녀가 그것들을 보자마자, 그녀는 추잡하게 그들을 사랑했다, 그리고 갈대아로 그들 에게로 특사를 보냈다; 바빌론의 아들들이 그들의 매춘짓을 수단으로 그녀를 더럽혔다
(겔. 23:5, 8, 14-17).
위에서 갈대아인들이 “바빌론의 아들들”이라 불리운다, 그리고 예배에서 모독된 진리들을 표시한다. “오홀라”는 영적 (평면의) 교회, 이것이 겔. 23:4에서 사마리아라고 불리운다.
하박국서에서:
나는 용서할 줄 모르고 성급한 나라, 갈대아를 휘저을 것이다, 그들은 넓은 땅을 행군하며, 자기들 것이 아닌 거주지들을 소유해 버리는 무섭고 소름끼치는 자들이다. 그리고 그 자 체로부터 그것의 심판과 드높임이 나아간다; 이들의 말들은 표범보다 재빠르고, 저녁의 늑 대보다 더 빈틈 없다; 그리고 마병들이 자신들을 펼쳐나간다, 그렇다, 마병들은 멀리로부 터 온다; 그들은 성급히 삼키려는 독수리 같이 난다; 그것은 폭력을 위해 통째로 오고 있 다; 그것의 얼굴의 헐떡거리는 바램은 동쪽을 향하여 있다 (합. 1:6-9).
위에서는 갈대아 나라가 예배에서 진리를 모독함을 의미하는 많은 표현물들을 수단으로 묘사되고 있다.
더욱이, 바빌론과 갈대아가 예레미야 1장과 51장에서 전 장에 걸처 묘사되는데, 거기서 각각에 의해 의미되는 것이 명백해진다. 즉 바빌론에 의해서는 예배에서 천적인 것들의 모독, 갈대아에 의해서는 예배에서 영적인 것들의 모독이다. 이런 모두로부터 분명해지는 바, “갈대아의 우르”에 의해 의미되는 것은 내향적으로 모독된 우상 숭배가 있는 외적 예배이다는 것이다. 나는 그들 예배의 특성이 어떠한지에 대해 갈대아인들로부터 알 수 있도록 허락되어 졌었다.

29절. 그리고 아브람과 나홀은 아내를 맞았는데, 아브람의 아내의 이름은 사래였고, 나홀의 아내의 이름은 밀가인데, 하란의 딸이고, 하란은 밀가의 아버지이자 미스가의 아버지였다. “아브람과 나홀은 아내를 맞았고, 아브람의 아내의 이름은 사래이고 나홀의 아내의 이름은 밀가인데 하란의 딸이고, 하란은 밀가의 아버지이자 미스가의 아버지였다”란 우상 숭배적인 예배에서 악이 거짓과 결혼함들을 의미한다. 이 의미는 이들의 친척 관계가 가리키는 것에서 암시된다. 남편들은 악들을, 아내들은 거짓들을 의미한다.

이것들이 의미되는 이유를 설명하기에는 너무나 길지 않을까 싶다; 그 이유가 우상 숭배들의 각기 다른 종류들과 각 종류가 발달한 방법을 설명 과정에서 토의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것들은 모독들로부터 반대되는 것들로부터가 아니면 알아질 수 없다. 말하자면 사랑의 천적인 속성, 사랑의 영적인 속성; 이 속성으로부터 튀어나오는 합리적인 생각들, 마지막으로 사실들(기억 속의 지식들)로부터 이다. 이런 것들을 모독함들이 우상 숭배들의 일반적 범주와 특수한 유형을 구성한다; 그러나 우상들에 대한 예배는 이런 범주와 유형에 속하지는 않는데, 이는 (단순한) 외적 우상 숭배들이기 때문이고, 이런 우상들에 대한 예배에는 선과 진리에 대한 애착이, 고로 선행이 결합할 수도 있다. 이것이 상호적인 사랑 안에 사는 이방인들 사이에 거행되고 있다. 이것은 외적인 우상 숭배적인 예배들에 의해 말씀에서 의미되는 내면의 우상 숭배적인 예배들이다. 이런 우상 숭배들의 출생들, 세대들, 그리고 그것들의 결혼들이 (이 결혼은 악과 거짓의 결혼이다) 27절과 이 절에서 묘사된 친척 관계와 결혼들로 반사하고 있다.

30절. 그리고 사래는 잉태하지 못했는 바 그녀는 자식이 없었다. 이 단어들은 악과 거짓이었던 것이 더 이상 그 자체 재 생산이 없었음을 의미한다.

이것은 “불임, barren”에 관해 다른 구절을 살피면 알 것이라 본다. 그 이유가 아들과 딸은 진리와 선을 의미하고, [3286, 9325항] 그 반대 의미는 악과 거짓이기 때문이다. [264, 489-491, 568항] 그러므로 “애를 못 낳음”은 우상 숭배적인 예배로부터의 악과 거짓이 그 자체 더 이상 재생되지 않았다를 의미한다.

31절. 그리고 데라는 그의 아들 아브람, 그리고 하란의 아들이요 그의 손자인 롯, 그리고 그의 아들 아브람의 아내요 자기 며느리인 사래를 데리고 가나안의 땅으로 가기 위해 갈대아의 우르를 떠났다. 그리고 그들은 하란에까지 왔는데, 거기서 머물렀다. 이 단어들은 우상 숭배적인 예배를 지니고 있어 왔던 이들이 신앙의 천적, 영적인 것들을 근원으로 해서 표현(뿐인) 교회(representative church)가 출현하도록 신앙의 천적인 것과 영적인 것에 관하여 가르쳐졌음을 의미하고 있다.

31절은 이미 살핀 것으로부터, 그리고 다음 장에서 말해진 것으로부터 알 수 있을 것이다.

32절. 그리고 데라의 날들은 이백 오 년이었다. 그리고 데라는 하란에서 죽었다. “데라의 날들이 이백 오 년이었다”란 데라로 의미된 우상 숭배적인 예배의 존속 기간과 상태들을 의미한다. “그리고 데라는 하란에서 죽었다”란 우상을 숭배함이 끝났고, 아브람을 통해 표현 교회가 시작함을 의미하고 있다.

창세기 제 12 장

성경: 창세기 12장

1. 그리고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말하셨다, 너는 너의 토지로부터, 네 출생으로부터, 네 아버지의 집으로부터 내가 너에게 보여주게 될 토지로 가라.
2. 그리고 나는 너를 위대한 나라로 만들겠다. 그리고 나는 너를 축복할 것이고, 네 이름을 위대하게 만들겠고, 너는 축복이 되리라.
3. 그리고 나는 너를 축복하는 그들을 축복할 것이고, 너를 저주하는 그들을 저주하리 라. 지면의 모든 가문들이 네 안에서 축복되어질 것이다.
4. 그리고 아브람은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지시했던 그대로 갔다. 그리고 롯도 그와 함 께 갔다. 그리고 아브람은 그가 하란에서 떠났을 때 그는 칠십 오 년의 아들이었 다.
5. 그리고 아브람은 그의 아내 사래와 그의 형제의 아들, 롯, 그리고 그가 소유했던 모든 물질, 그리고 그들이 하란에서 획득한 혼(soul, 사람)을 챙겼다. 그리고 그들 은 가나안의 토지로 가기 위해 나갔다. 그리고 그들은 가나안의 토지에 왔다.
6. 그리고 아브람은 세겜 장소에까지, 모레의 상수리나무 숲에까지 그 토지를 통과 했 다. 그리고 가나안 족들이 그 토지에 있었다.
7. 그리고 여호와가 아브람에게 보여졌다, 그리고 말하셨다. 나는 네 자손에게 이 토 지를 주겠다. 그래서 그는 거기서 자기에게 보여진 여호와께 제단을 건립했다.
8. 그리고 그는 거기로부터 벧엘 동쪽에 있는 산으로 옮겨 갔다, 그리고 그의 천막을 펼쳤다. 그곳은 바다 쪽으로는 벧엘이, 동쪽에는 아이가 보이는 곳이다. 그리고 거 기서 그는 여호와께 제단을 건립했다, 그리고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
9. 그리고 아브람은 여행했고 갔는데 남쪽을 향하여 여행했다.
10. 그리고 그 토지에 기근이 있었다. 그래서 아브람은 이집트에서 머무르려고 거기로 내려 갔다. 그 이유는 기근이 그 토지에서 너무나 극심하였기 때문이다.
11. 아브람이 이집트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가 되자, 그는 아내 사래에게 말하기 를, 보라 나는 당신이 쳐다보기에 아름다운 여자이다 라고 알고 있다.
12. 그리고 한참 후 이집트인들이 당신을 보았을 때, 그들은 말하기를 이는 그의 아 내이다, 그리고 그들은 나를 죽일 것이다, 그리고 당신은 살려 둘 것이다.
13. 바라건대, 당신이 나의 누이이다 라고 말하면 그들은 자기들의 목적을 위하여 나 를 잘 대접할 것이고 내 혼도 당신 때문에 살 것이다.
14. 그리고 아브람이 이집트에 왔었을 때이다. 이집트인들은 여인을 보았는데, 그녀는 매우 아름다웠다.
15. 바로의 대신들이 그녀를 보고 바로에게 그녀를 칭찬했다. 그래서 여인은 바로의 집에로 데려가졌다.
16. 그래서 바로는 그녀 때문에 아브람에게 잘 대해 주었다. 그래서 아브람은 양떼와 목축, 그리고 수나귀와 남종, 그리고 여종과 암나귀, 그리고 낙타를 가졌다.
17. 그리고 여호와께서는 바로를 큰 재앙으로 치셨고, 그의 집도 치셨는데 그 이유는 아브람의 아내 사래에 관한 말 때문이다.
18. 그래서 바로는 아브람을 불렀다, 그리고 말했다, 네가 나에게 했던 이것은 무엇이 냐? 왜 너는 그녀가 네 아내라고 나에게 말하지 않았느냐?
19. 왜 너는 그녀가 네 누이라고 말했느냐? 그래서 나는 그녀를 나에게 여인으로 데 려왔었다. 그리고 지금 보라 네 아내이다. 그녀를 데리고 가라.
20. 그리고 바로는 아브람에 관하여 사람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그리고 그들은 그를 내어 보냈다, 그리고 그의 아내, 그리고 그가 가졌던 모든 것도 내어 보냈다.

각 절의 내적 의미

1절. 그리고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말하셨다, 너는 너의 토지로부터, 네 출생으로부터, 네 아버지의 집으로부터 내가 너에게 보여주게 될 토지로 가라. 이 구절로부터 이어지는 사건들은 쓰여진 그대로 역사적으로 실제로 있었다. 그러나 이 역사물은 표현적일 뿐이나 표현을 위해 사용된 각 단어는 의미를 지닌다. “아브람”은 내적 의미에서 주님을 의미하고 있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말하셨다”란 모든 것에 대한 첫 번째 정신적인 유의하심(advertence, 사실로 깨달으심, realization)을 의미한다. “너는 너의 토지로부터 나가라”란 그분께서 육체적이고 세상적인 것들로부터 물러나심을 의미한다. “네 출생으로부터”란 육체적이고 세상적인 것들의 보다 더 외면에 속하는 것들을 의미한다. “네 아버지의 집”이란 육체적이고 세상적인 것들의 보다 더 내면에 속하는 것들을 의미한다. “내가 너에게 보여주게 될 토지”란 시야에 펼쳐지게 될 영적 (평면)과 천적 (평면)의 특성(trait)들을 의미한다.

이 구절, 그리고 이어지는 구절들은 쓰여진 그대로 역사적으로 발생했다; 그러나 역사물은 표현일 뿐, 모든 단어들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런 경우는 말씀의 모든 역사물, 모세의 책, 뿐만 아니라, 여호수아서, 사사기서, 사무엘과 열왕기서도 마찬가지이다. 위 모든 책들은 역사물 외에 나타나는 것은 없다; 비록 글자 의미에서는 역사적이다 하더라도, 내적 의미 안에는 천국의 신비함들(arcana)이 감추여 저장되어 있어, 말씀을 읽는 눈과 더불어 마음도 역사물 안에 머무는 한, 이 비밀들은 결코 보여질 수 없다. 다시 말해 마음이 글자 의미로부터 옮겨질 때까지 그 비밀들은 밝히 알려지지 않는다는 말이다. 주님의 말씀은 살아 있는 혼을 담고 있는 신체와 같다; 혼이 있다는 것, 더욱이 혼은 사 후 살아간다는 것을 거의 믿지 않는 육체의 것에 마음이 고정되어 있는 한, 혼에 속하는 것들은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나 마음이 육적인 것들로부터 물러나자마자, 혼과 생명으로부터 있는 것들은 모습을 나타낸다. 그리고 이것은 왜 인간이 새로이 태어나기 전에, 또는 거듭나기 이전 먼저 육체의 것이 죽어야만 하는지, 뿐만 아니라 왜 육체 자체가 죽어야만 그가 천국 안으로 들어오고 천국의 것들을 볼런지 모른다는 이유이기도 하다.
주님의 말씀에 대해서도 위와 같다; 말씀의 육적인 것들은 말씀의 글자 의미로부터 있는 것들이다; 그리고 마음이 이 의미 안에서 머물을 때, 내적 의미는 전혀 보여지지 않는다; 그러나 전자가 마치 죽은 듯하여 있을 때, 그때 처음 후자는 보이도록 표출되어진다. 또한 글자 의미는 마음이 육체 안에 있는 동안 마음과 더불어 있는 것, 즉 감각들로부터 오는 기억 속의 지식들과도 비슷하다. 이 지식들은 내면을 함유하는 그릇, 그 안에 내면의 것들을 담고 있는 그릇과 유사하다. 이로부터도 위에서 말한 것, 즉 그릇과 그릇 속의 것들은 별개의 것들이다는 것, 즉 글자 의미와 내적 의미는 전혀 다르다는 것이 더 분명해질 것이다. 그릇은 자연적 (평면)이다. 그릇 안에 담긴 본질적인 것은 영적 (평면)과 천적 (평면)이다. 이 두 평면들은 내적 의미에 의하지 않고서는 결코 시야 안으로 와지지 않는다.
위의 사항은 이런 한가지 사실만으로도, 즉 말씀 속의 많은 것들이 외관(appearance), 즉 눈에 보이는 그대로에 따라 말해지고 있다는 것, 참으로 감각들의 오류에 따라 말해져 있다는 것, 예를 들면, 주님이 성내셨다, 그분은 처벌하신다, 저주하신다, 죽이신다, 등등 같은 표현들은 눈에 나타나는 그대로 말해진 것이다로부터도 분명해진다; 이런 사항들은 내적 의미에서는 대체로 반대의 뜻을 전달한다. 즉 주님은 결코 성내시거나 저주하시거나 죽이시거나 하시지 않는다고 의미를 전달한다. 천진난만한(단순한) 심정을 지닌 자가 말씀의 글자 의미대로 믿고 행할 경우, 그가 선행 안에 있다면, 그에게 어떤 피해도 오지 않는다. 그 이유는 말씀이 가르치는 요약된 점은 이웃과 더불어 선행 안에 살고, 주님을 모든 것 위에서 사랑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살고 행하는 이들은 자신들 안에 (말씀의) 내적인 것들을 가진 셈이다; 그러므로 이들이 말씀의 글자 의미로부터 취한 오류들은 쉽사리 추방되어진다.

역사물들은 표현일 (뿐)이나, 모든 단어들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것은 표현성과 의미함에 관하여 말하고 보여준 앞 장으로부터 분명해진다. 그렇다해도, 표현성이 여기서 시작된다는 점에서, 여기에 위 주제의 간략한 설명을 보태는 것이 나을 듯 싶다. 태고 교회, 이는 천적 (수준)이었다. 그런고로 이 교회는 지상적, 세상적 모든 것, 뿐만 아니라 감각의 대상물인 육체의 것은 어떤 것이든 죽은 것으로 간주했다; 그리고 세상에 있는 각각 그리고 모든 것들은 주님의 왕국에 관한, 결과적으로 천적인 것과 영적인 것에 관한 어떤 관념들을 보이고 있는 것으로 간주했다. 그들은 어느 감각을 수단으로 세상의 것들을 보았을 때, 그들은 세상의 것을 생각한 것이 아니라, 그들은 천적인 것들과 영적인 것들을 생각했다. 한마디로 세상의 것들은 수단에 불과했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그들과 더불어서 죽은 것들은 살아 있는 것이 되었다.
이렇게 의미된 것들이 그들의 입술로부터 그들의 후손들에 의해 수집되었고, 그들에 의해 교리물로 만들어내졌다. 이것이 홍수 이후 고대 교회의 말씀이었다. 고대 교회와 더불은 이 말씀들은 의미를 지녔다. 그 이유가 이 말씀을 통해 그들이 내적인 것들을 배웠기 때문이다, 그리고 배운 내적인 것들로부터 그들은 영적인 것들과 천적인 것들을 생각했다. 그러나 이 지식이 사멸하기 시작했을 때, 그리하여 그들이 이와같은 것들이 의미하는 것을 알지 못하게 되었을 때, 그리고 지상의 것과 세상적인 것들을 거룩한 것으로 여겨 중시하기 시작했을 때, 그리고 그것들로부터의 의미에 관한 어떤 생각함도 없이 그것들을 숭배하기 시작했을 때. 똑같은 것들이 그때 표현성을 만들었다. 그리하여 표현 (뿐인) 교회(Representative Church)가 일어났다. 이 교회의 시작이 아브람에서부터 였고, 후에 야곱의 후손들과 더불어 설립되었다. 이상으로부터 알게되는 바, 표현성은 고대 교회의 의미성으로부터 일어남이 있었고, 고대 교회의 의미성은 태고 교회의 천적인 관념들로부터 있었다는 것이다.

표현의 본성은 말씀의 역사들로부터 명백해질지 모른다. 즉 역사 안에 있는 열조들, 즉 아브람, 이삭, 야곱의 모든 행동들, 후에는 모세, 사사기, 그리고 유다와 이스라엘 왕국의 이모저모들은 표현성 외에 더 다른 것은 없다. 이미 말했 듯, 말씀에서 아브람은 주님을 표현한다; 그리고 그가 주님을 표현하기 때문에 천적 인간도 표현한다; 이삭 역시 주님을 표현한다, 그리고 영적 인간을 표현한다. 야곱 역시 주님을 표현하고 영적 수준에 상응하는 자연적 인간을 표현한다.
그러나 표현과 더불어 표현한 (실존) 인물의 품성을 표현하는 것은 아니고 그 인물이 표현한 모든 것을 표현한다; 예를 들면, 유다와 이스라엘의 모든 왕들은 주님의 왕권적 기능(function)을 표현했다; 그리고 어떤 품성을 지녔든 모든 성직자(제사장)는 주님의 성직 기능을 표현했다. 그러므로 선한 자 뿐만 아니라 악한 자도 주님, 그리고 그분의 왕국의 영적, 천적인 것을 표현했다. 이미 말한 바대로 표현성은 개인이라는 인물로부터 분리되어져 있다. 이로부터 말씀의 모든 역사들은 표현적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표현적이기 때문에, 말씀의 모든 단어들은 의미를 지닌다. 즉 말씀의 글자 의미와는 별도로 다른 의미를 갖는다는 말이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말하셨다. 이는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말하셨다”란 모든 것에 대한 첫 번째 정신적인 유의하심(advertence, 사실로 깨달으심, realization)을 의미한다. 그 상황은 이러하다: 기록된 사실은 표현적일 뿐이다는 것, 실제의 단어들은 의미를 지닌다는 것이다. 이 구절의 문체는 고대 교회의 문체인데, 어떤 것이 진실이었을 때, 그들은 “여호와께서 말하셨다”, 또는 “여호와께서 이야기하셨다”라고 표현하여, 그것이 그랬었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는 이미 살핀 바 있다. 그러나 의미함들이 표현함으로 바뀌어버린 뒤에, 그때 여호와, 또는 주님께서는 인간과 더불어 실제로 이야기하셨다. 이때 여호와께서 말하셨다, 또는 여호와께서 누군가와 더불어 이야기하셨다 라고 말해질 때, 이것도 이전과 같은 의미를 가진다; 그 이유가 진정한 역사들 안에 있는 주님의 말들은 과거 만들어낸 것들에 있는 그분의 말들과 똑같은 것을 포함하기 때문이다. 이런 차이는 있다. 후자는 진정한 역사인 것처럼 작성되었고, 전자는 그렇게 작성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말하셨다”란 첫 번째 정신적 측면에서의 유의하심( 또는 사실로 깨달으심) 밖에 더 다른 의미는 없다; 고대 교회에서 누군가가 양심에 의해, 또는 어떤 다른 지령(dictate), 또는 그들의 말씀에 의해, 어떤 것이 그러했었다고 훈계되어질 때, “여호와께서 말하셨다”라는 같은 방식으로 말해졌다.

너는 너의 토지로부터 나가라. 이는 육체적이고 세상적인 것으로부터 그분이 물러나시어(recede) 계셨음을 의미하는데, 이는 “토지, land”, 또는 “땅, earth”의 의미로부터 분명해진다, 이 토지, 땅은 서술되는 인물, 사물 등등에 채택되는 바, 다양하게 사용되는 단어이다. 예를 들면 창세기 1장에서 “땅”은 외적 인간을 의미한다. 여기서의 땅이 육체적, 세상적인 것을 의미하는 이유는 그것이 외적 인간에 속해 있기 때문에서 이다. “토지”, 이는 적절한 의미에서, 토지, 지역, 또는 왕국 자체이다; 또한 거기로부터의 주민이다; 또한 토지에 있는 사람들 자체와 나라(민족) 자체이다. 그런고로 단어 “토지”는 폭넓은 의미 측면에서 사람들 또는 나라 뿐만 아니라 한정된 의미에서 주민을 의미하기도 한다. 단어 “토지”가 주민에 관련하여 사용되어질 경우, 그것의 의미는 토지가 사용된 것에 일치하여 의미한다. 이 구절의 경우 토지는 육체적이고 세상적인 것들에 관련되는데, 그 이유는 자기 출생의 토지로부터 떠나기로 되어있었던 아브람의 출생의 토지는 우상 숭배적인 것들이기 때문이다. 이 구절의 역사적 의미는 아브람은 이 토지로부터 나가야만 할 것이다를 뜻하고, 표현적 의미에서는 그분께서 외적 인간으로부터 있는 것들로부터 물러나심을 뜻한다; 즉, 외적인 것들이 저항해서는 안 된다는 것, 또는 외적인 것들이 소동을 일으켜서는 안 된다는 것, 또는 다투려하거나 간섭하려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뜻한다; 그리고 이것은 주님에 관련해 있기 때문에, 그분의 외적 양상(aspect)들은 그분의 내적인 양상들과 실제로 조화를 이루어가야 한다를 의미한다.

네 출생으로부터. 이는 더 외면쪽에 있는 육체적이고 세상적인 것들을 의미하고, “네 아버지의 집으로부터”는 더 내면쪽에 있는 이와 같은 것들을 의미한다. 이는 “출생, birth”의 의미로부터, 그리고 “네 아버지의 집”의 의미로부터 분명해진다. 인간 안에는 보다 더 외면에, 보다 더 내면에 있는 육체적이고 세상적인 것들이 있다; 보다 더 외면적인 것들은 육체에 적절한 것들, 즉 기쁨들과 감각으로부터의 것들 같은 것이다; 보다 더 내면적인 것들은 애착들과 기억 속의 지식으로부터의 것들이다; 그리고 이것들이 “아브람의 출생”과 “그의 아버지의 집”에 의해 의미되어진다. 이런 의미를 가지는 것에 대하여는 말씀의 많은 구절들로부터 확증해볼 수도 있으나, 이는 연결로부터, 그리고 내적 의미를 쳐다봄으로부터 분명해지는 바, 확증을 위해 여기서 더 머물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내가 너에게 보여주게 될 토지로. 이는 시야에 펼쳐지게 될 영적 (평면)과 천적 (평면)의 특성(trait)들을 의미한다. 이 의미는 앞에서 살핀 바 “토지”의 의미로부터 분명해지는데, 특히 여기서는 가나안의 토지의 의미로부터 이다. 가나안의 토지에 의해 주님의 왕국이 표현되어지는데, 이는 말씀의 많은 구절에서 보여진다. 그러므로 가나안의 토지는 거룩한 토지로, 또한 천국의 가나안이라 불리운다. 그리고 이것이 주님의 왕국을 표현했기 때문에, 이것은 또한 그분의 왕국에 속하는 천적, 영적인 것들도 표현하였다; 여기서는 주님 자신에 속하는 천적, 영적 품질을 표현한다.

여기서 주님이 취급되는 바, 생각할 수 있는 것, 표현될 수 있는 것 그 이상의 깊은 비밀들(arcana)을 포함하고 있다. 그 이유가 이 구절의 내적 의미에서, 태어나실 때의 주님의 첫 상태가 뜻해지기 때문이다; 이 상태는 가장 깊게 감추여 놓인 바이기 때문에 납득력에 잘 설명되어질 수는 없다. 이렇게 말함으로도 충분할 것이다. 즉, 주님은 그분이 여호와로부터 임신되어, 처녀 어머니로부터 태어나신 것 외에는 여느 사람들 같이 있으셨다. 그리고 출생을 통해서 여느 사람들이 지닌 허약함(infirmity)들을 처녀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으셨다. 이 결점들은 육체적인 것들이고, 이 구절에서 그분을 위해 천적이고 영적인 실재(entity)들이 보이도록 표출되기 위하여 그분은 그것들로부터 물러나셔야 한다고 말해진다. 인간 안에는 타고난 두 개의 유전적 본성들이 있다. 하나는 아버지로부터 이고, 하나는 어머니로부터 이다. 아버지로부터의 주님의 유전성은 신성이셨다. 그러나 어머니로부터의 그분의 유전성은 허약한 인간이셨다. 인간이 어머니로부터 유전적으로 물려받는 허약한 본성은 그가 거듭나질 때 분해되어지는(흩으려지는) 육체의 어떤 것이고, 아버지로부터의 유전성은 영원히 남는다. 그러나 여호와로부터의 주님의 유전성은 이미 말한 대로 신성이셨다. 또다른 신비는 주님의 인간 역시 신성으로 만드셨다는 점이다. 그분 안에서 만이 신체의 모든 것들이 신성과 상응하였다. 이는 가장 완전한 상응이다. 이 상응은 무한하게 완전하고, 육체의 것들이 신성한 천적인 것들과 합일함의 근원이다, 그리고 감각적인 것들이 신성한 영적인 것들과 합일함의 근원이다; 그리하여 그분은 완전한 사람, 그리고 유일한 사람이셨다.

2절. 그리고 나는 너를 위대한 나라로 만들겠다. 그리고 나는 너를 축복할 것이고, 네 이름을 위대하게 만들겠고, 너는 축복이 되리라.

나는 너를 위대한 나라로 만들겠다 이는 천국들과 땅에 있는 왕국을 의미한다. 이 의미는 “나라, nation”의 의미가 내적 의미에서 사랑으로부터의 천적인 품질과 그것으로부터 오는 선, 그런고로 사랑과 선행의 천적 선물을 가지고 있는 모든 이, 모든 곳을 의미함으로부터 분명해진다; 그리고 여기서 주님이 취급되는 바, 모든 천적 품질과 이 품질에서 결과되는 모든 선을 뜻한다. 그런고로 이것은 자기들 안에 사랑과 선행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 존재하는 그분의 왕국이다. 최고 높은 의미에서 주님 자신이 “위대한 나라”이시다. 그 이유는 그분은 천국(heavenliness) 자체, 선 자체이시기 때문이다; 사랑의 선과 선행의 선 모두는 그분만으로부터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주님은 그분의 왕국 자체이시다, 즉 그분은 그분의 왕국의 모든 것 안의 모든 것이시다, 이것은 천국에 있는 모든 천사들에 의해 인정되어진다. 이로부터, “나는 너를 위대한 나라로 만들 것이다”는 천국들과 땅에 있는 주님의 왕국을 의미한다가 분명해진다.
내적 의미에서 주님과 사랑의 천적인 것들이 다루어지는 곳에서, “나라”는 주님과 천적인 모든 것들을 의미하는데, 이는 “나라”와 “나라들”을 살핀 바로부터 분명해진다. 이에 더하여 아래 인용 구절을 보면 더 확증될 것이다 아브라함에 관해 말해진다:
네 이름은 아브람이라 더 이상 부르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네 이름은 아브라함일 것이다, 그 이유가 많은 나라들의 아버지로 나는 너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창. 17:5);
“아브라함”에 있는 글자 “h”는 그가 여호와, 또는 주님을 표현했기 때문에 이름 여호와로부터 취해졌다. 사래 역시 마찬가지 방식에서이다:
너는 그녀의 이름을 사래라고 부르지 말 것이다, 그러나 사라가 그녀의 이름일 것이다. 그 리고 나는 그녀를 축복할 것이다, 그리고 또한 네게 그녀의 아들을 줄 것이다; 그렇게 나는 그녀를 축복할 것이다, 그리고 그녀는 나라들이 될 것이다; 벡성들의 왕들이 그녀로부터 있 을 것이다 (창17:15, 16);
위에서 “나라들”은 사랑의 천적인 것, 그리고 “백성들의 왕들”은 천적인 것에서 파생된 신앙의 영적인 것, 이것들은 주님만에 속한다.
야곱에 관해서도 마찬가지 이다.
네 이름은 더 이상 야곱이라 불러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네 이름일 것이다, 그리고 그분은 그의 이름을 이스라엘이라 부르셨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말하셨다, 나는 고 함(천둥)치는 사람 하느님이시다; 불어나고 증가할 것이다; 나라와 나라들의 회중이 너로부 터 있을 것이다, 그리고 왕들이 네 허리로부터 나갈 것이다 (창. 35:10, 11);
위에서 “이스라엘”은 주님을 표시한다,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그분 자신이 최고 의미에서 “이스라엘”이시다를 실감하고 있다; 그리고 그분이 “이스라엘”이실 때, “나라”와 “나라들의 회중”, 그리고 “그분의 허리로부터의 왕들”은 사랑의 천적, 영적인 것들임이 분명해진다. 그러므로 사랑의 천적, 영적인 것 안에 있는 이들이다. 하갈에 의한 아브람의 아들, 이스마엘에 관하여, 말해진다:
나는 몸종의 아들을 나라로 만들 것이다, 그 이유는 그가 네 씨이기 때문이다
(창. 21:13, 18).
이스마엘에 의해 표현된 것은 그 구절을 살피는 장소에서 보여질 것이다. 아브람의 “씨”는 사랑 자체이다, 그리고 이로부터 용어 “나라”가 이스마엘을 아버지로 하는 이들을 위해 사용되어진다.
“나라”가 사랑의 천적인 것들을 의미하는 것은 모세의 책에서 분명해진다:
만일 너희가 내 음성을 정녕 듣는다면, 내 언약을 지킬 것이다, 너희는 또한 나에게 모든 사람들로부터의 특이한 보물일 것이다, 그리고 너희는 나에게 성직자들의 왕국, 거룩한 나 라일 것이다 (출. 19:5, 6);
위에서 “성직자들의 왕국”, 이는 천국들과 지상에 있는 주님의 왕국이고, 사랑의 천적인 것들로부터 그렇게 이름불려지는 바, “거룩한 나라”라고 분명하게 불려진다; 이에 비해 그분의 왕권적 직능으로부터의 주님의 왕국은 사랑의 영적인 것들로부터 였고, “거룩한 백성”이라 불리운다; 그리고 이런 이유 때문에 위에서 인용한 구절에 있는 “허리로부터의 왕들”은 영적인 것들이다. 예레미야서에서:
만일 이 규정들이 내 앞에서 떠난다면, 여호와께서 말하신다, 이스라엘의 씨는 중단될 것이 다, 그리하여 모든 날에서 내 앞에서 나라로 있지 못할 것이다 (예31:36);
“이스라엘의 씨”는 선행의 천국적인 품질을 표시한다; 그리고 이것이 중단될 때, 주님 앞에서 더 이상 나라가 되지 못한다.
이사야서에서:
어둠에서 걷는 백성들이 큰 빛을 보았을 것이다; 너는 나라를 번성하게 했다 (이. 9:2, 3).
이는 나라들의 교회에 관해 특별하게 말해진다; 그러나 일반적 측면에서는 무지하나 선행 안에서 사는 이들에 관해 말해진다; 이들이 “나라”들이다, 그 이유는 그들이 주님의 왕국으로부터 있기 때문이다. 다윗서에서:
제가 당신의 선택한 백성의 선한 것을 볼 수 있게 하소서; 제가 당신의 나라의 즐거움 안 에서 즐거워 하게 하소서, 저는 당신의 상속분을 자랑으로 여길 것입니다 (시. 106:5);
위에서 “나라”는 주님의 왕국을 분명하게 표시한다. “나라”의 의미가 사랑의 천국적 품질과 이로부터의 선인 바, 이 의미는 태고 교회의 사람들이 집식구, 가문들, 그리고 나라들로 구별되었다는 사실로부터 근원되었고, 이것은 주님의 왕국의 모델(model)이었다. 이것이 주님의 왕국의 모델인 바, 천국 자체의 본성의 모델이었다. 이 관점을 지각함으로부터 의미함이 발생했고, 의미함으로부터 표현함이 발생했다.

“위대한 나라”는 천적인 것들과 선들로부터 그렇게 불리운다는 것은 방금 말해진 것으로부터 분명해진다. 이로부터 여러분은 (비 유대인의) “나라들” 사이에 있는 교회가 무엇인지도 알 수 있다.

그리고 나는 너를 축복할 것이다. 이는 천적인 것이 열매를 많이 맺음과 영적인 것들이 번성함을 의미하는데, 이는 말씀에서 “축복하다”의 의미로부터 분명해진다.

그리고 나는 네 이름을 위대하게 만들 것이다. 이는 영광을 의미한다. 이는 해설 없이도 이해될 것이다. 외적 의미에서, “이름을 만듦”에 의해, 그리고 “영광”에 의해 세상적인 어떤 것이 의미되어진다; 그러나 내적 의미에서, 천국적인 어떤 것이 의미된다. 이 천국적인 어떤 것은 최고로 위대해지려고(큰 자 되려고) 애쓰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이를 섬김으로 최대한도로 작은 자 되어지는데 있다; 주님 자신 마태복음서에서 말하셨다:
그러나 너희 사이에 그렇게 되어 있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러나 너희 사이에 위대해 있겠 다는 자는 누구든지, 자기로 하여금 섬기는 자가 되게 하라; 그리고 너희 사이에 최고 일 것이다는 자는 누구든지, 자기로 하여금 종이 되어 있게 하라. 사람의 아들도 그와 같이 섬김을 받으려 온 것이 아니라, 많은 사람을 위해 그들의 몸값을 치루어 자유롭게 하 는데 그분의 목숨을 주기 위해 왔다 (마. 20:26, 27, 28; 막.10:43, 44, 45).
천국적인 사랑을 만드는 것은 어떤 것을 자신을 위해 가지기를 바라는데 있지 않고 각자 모두와 나누기를 바라는 데에 있다. 그리하여 우리는 우리의 자신인 모든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주기를 바라고 있어야 한다. 이것이 천국적인 사랑의 본질(실체)이다. 주님은 사랑 자체이시기 때문에, 또는 천국에 있는 모든 이가 가지고 있는 살아 있는 힘과 본질이시기 때문에, 그분의 것인 모든 것을 인류에게 주시기를 뜻하신다. 이것이 사람의 아들이 많은 이의 몸값으로 그분의 목숨을 주기 위해 오셨다에 의미되어 있다. 이로부터 분명한 바, 내적 의미에서 “이름”과 “영광”은 그것들이 외적 의미에서 지니는 것과 매우 다르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천국에서는 위대해지기를 바라는 자, 그리고 가장 위대한 자는 거절되어진다; 그 이유는 이것은 주님으로부터 있는 천국의 사랑의 생명과 본질에 반대되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더 명백한 바는, 자기를 사랑함 보다 더 천국의 사랑에 반대되는 큰 것은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너는 축복일 것이다. 이는 일반적, 세부적 모두에서 모든 것들은 주님으로부터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는 “축복”의 의미로부터 분명해진다. “축복”은 갖가지 종류의 이익(benefit)이라 단언된다; 외적 의미에서의 경우, 개인적, 세상적, 그리고 지상적인 이득이다, 내적 의미에서 영적, 천국적인 이득이다. “축복이 되는 것”은 모든 선의 근원이 되는 것, 그리고 모든 선을 주는 자가 되는 것이다. 이 말은 개인 아브람을 두고서는 결단코 말해질 수 없다. 이로부터 분명해지는 것은, 아브람에 의해 주님이 표현되었다는 것, 주님만이 “축복이시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이후 아브라함에 관하여 말해진다:
아브라함은 위대하고 많은 나라가 정녕 될 것이다, 그리고 아브라함 안에서 땅의 모든 나 라들은 복될 것이다 (창. 18:18);
이삭에 관해서:
네 씨 안에서 땅의 모든 나라들이 복될 것이다 (창. 26:4);
그리고 야곱에 관해서:
네 안에서와 네 씨 안에서 땅의 모든 가문들은 복될 것이다 (창. 28:14).
아브라함, 이삭, 야곱 안에서, 그리고 그들의 씨 안에서 나라들이 복되어질 수 없고 복되지도 않는다는 것, 그러나 주님 안에서 복되어진다는 것은 누구나 수긍할 것이다. 이를 다윗서에서 명백하게 말한다:
그분의 이름은 영원히 지속될 것이다; 태양의 얼굴 앞에서 그분의 아들의 이름은 지속될 것이다; 그리고 모든 나라들이 그분 안에서 복될 것이다 (시. 72:17);
위에서는 주님이 취급되어진다. 다시:
당신은 영원한 복됨이도록 그를 임명하실 것이다 (시. 21:6);
위에서 주님이 취급되어진다. 예레미야서에서:
나라들이 그분 안에서 복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그분을 자랑할 것이다 (예. 4:2).
위의 여러 구절로부터 명백해지는 바, “축복”은 주님을 의미한다는 것, 그리고 그분이 “축복”이라 불리우실 때, 이것은 그분으로부터 모든 천적, 영적인 품질이 오고 이것들 만이 선한 것들이다는 것, 그것들만이 진정한 것들이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상적, 세상적, 그리고 개인적 이득 안에 천국적, 영적 이득을 포함한 것에 비례하여 그것은 실제로 이득이 되고, 실제로 “축복”이다는 말이다.

3절. 그리고 나는 너를 축복하는 그들을 축복할 것이고, 너를 저주하는 그를 저주하리라. 땅의 모든 가문들이 네 안에서 축복되어질 것이다.

나는 너를 축복하는 그를 축복할 것이다. 이는 심정으로부터 주님을 인정하는 모든 이들에게 모든 행복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축복”의 의미에는 주님으로부터 있는 각각, 그리고 모두를 포함한다는 것, 즉 선한 이들, 진정한 이들 모두가 포함된다는 것으로부터 분명해진다. 그런고로 천적, 영적, 자연적, 세상적, 육체적인 것들 모두가 포함된다는 말이다; 그리고 보편적 의미에서 “축복”은 이 모든 것을 포옹하기 때문에, “축복하는 것”에 의해 의미되는 것을 문장의 연결로부터 각 구절에서 알 수 있을 것이다; 그 이유가 이것은 서술되는 것으로부터의 것을 그 자체 채택하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분명해지는 바, “나는 너를 축복하는 그를 축복할 것이다”는 심정으로부터 주님을 인정하는 이들에게 모든 행복이 있다는 말이다; 그 이유가 내적 의미에서 이미 말한 바, 주님이 여기서 취급되기 때문이다.
고대인들 사이에서 “여호와, 또는 주님을 찬양하는 것”은 관습적 언어의 형체였다. 이는 말씀으로부터 분명하다. 다윗서에서:
회중에서 네 하느님을 찬양하라, 이스라엘의 근원으로부터 주님을 (찬양하라)
(시. 68:26).
다시:
여호와를 노래하라, 그분의 이름을 찬양하라, 영원히 그분의 구원하심을 선포하라
(시. 96:2).
다니엘서에서:
그때 비밀한 것이 밤에 환상으로부터 밝히 알려졌다; 그러므로 다니엘은 천국들의 하느님 을 찬양하였다; 그는 말했다, 복되심이 영원히 그분의 이름이시다, 그 이유가 지혜와 권능 이 그분의 것이기 때문이다 (단. 2:19, 20).
사가랴와 시므온에 관해, 우리가 읽는 바, 그들은 “여호와를 찬양했다”이다 (눅. 1:64; 2:28). 여기서 명백해지는 바, “주님을 찬양하는 것”은 그분을 노래하는 것, 그분이 구원하신다는 기쁜 소식을 선포하는 것, 그분의 지혜와 권능을 전파하는 것, 그런고로 심정으로부터 주님을 인정하고 고백하는 것이다. 이를 행하는 자들은 주님에 의해 축복되어질 수 밖에 없다. 즉 복됨에 속하는 것들, 즉 천적, 영적, 자연적, 세상적, 개인적(육체적) 선에 속하는 것들을 선물받는다는 말이다; 그들이 이 질서에서 서로에 뒤이을 때, 이 선들 안에 행복이 있다.
“여호와를 찬양하는” 것, 또는 “주님을 찬양하는” 것, 그리고 “여호와에 의해 축복되어지는” 것, 또는 “주님에 의해 축복되어지는” 것은 언어의 공통의 형체로 여호와를 찬양하라 하고 말해왔는데, 예를 들면, 다윗서에서:
여호와를 찬양하라, 그 이유는 그분께서 나의 탄원하는 음성을 들으셨기 때문이다
(시. 28:6).
다시:
여호와를 찬양하라, 그 이유는 그분께서 경이로운 그분의 자비를 내게 베푸셨기 때문이다 (시. 31:21).
다시:
하느님을 찬양하라, 그분은 내 기도를 외면하시지 않으셨고, 나로부터 그분의 자비를 물리 시지 아니하셨다 (시. 66:20).
다시:
여호와 하느님, 이스라엘의 하느님을 찬양하라, 이분만이 경이로운 것들을 행하신다; 그 분의 이름을 영원히 찬송하라, 그리고 온 땅이 그분의 영광으로 채워지게 하자
(시. 72:18, 19).
다시:
당신을 찬양합니다; 당신의 규례를 나에게 가르치소서 (시. 119:12).
다시:
여호와 나의 바위 찬양을 받으소서, 내 손을 가르치십니다 (시. 144:1).
누가복음에서:
사가랴가 성령으로 충만해져, 예언해서, 말하기를, 이스라엘의 하느님은 찬양받으소서, 그 이유가 그분이 방문하시어 그분의 백성을 위해 구원을 역사하셨습니다 (눅. 1:67, 68).

그리고 너를 저주하는 그를 저주할 것이다. 이는 주님을 인정하지 않는 이들은 불행하다를 의미한다. 이는 “저주됨”, “저주함”의 의미가 누군가의 자기가 주님으로부터 돌아섬이다로 부터 분명해진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그분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그 이유가 인정하지 않는 이들은 자신을 돌아서게 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저주하는” 것은 “축복함”에 포함된 이들에 반대되는 모든 것들을 포함한다.

그리고 네 안에서 지면의 모든 가문들이 축복될 것이다. 이는 모든 선들과 진리들이 주님으로부터 있음을 의미한다. 이는 “축복하는” 것의 의미로부터 분명해진다; 또한 “지면의 가문들”의 의미가 모든 선과 진리이다로부터 분명해진다; 그 이유가 말씀에서 “가문들”은 “나라들”과 “사람들(백성)”이 선과 진리 모두를 의미하는 것과 같은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것은 “나라들의 가문들”, 그리고 “백성의 가문들”이라고 말해진다. “나라들”은 이미 살핀 바 같이 선들을; “사람들(백성)”은 진리들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가문들”은 선들, 그리고 또한 진리들을 의미한다. 이들이 “지면의 가문들”이라 불리운 이유는 모든 선들과 진리들은 사랑의 신앙으로부터 있기 때문이고, 사랑의 신앙은 교회 속에 있기 때문이다. “지면”에 의해 교회가 의미되는 것, 결과적으로 교회의 신앙이 의미되는 것은 이미 살폈다.

4절. 그리고 아브람은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지시했던 그대로 갔다. 그리고 롯도 그와 함께 갔다. 그리고 아브람은 그가 하란에서 떠났을 때 그는 칠십 오 년의 아들이었다.

“아브람”에 의해 인간 본질 측면에서의 주님이 표현되어지는데, 이는 아브람에 관해 말해진 모든 것으로부터 분명해진다. 이후에 그는 인간 본질 측면과 신성 본질 측면 또한 표현한다, 그리고 그때 그는 아브라함이라 불리운다. 1절로부터 지금까지 말해왔던 것들은 주님의 첫 정신적인 유의하심, 즉 그분이 천국의 특성들로 자신을 옷입히셨다는 것, 그런고로 신성의 것들을 옷입고 계심을 유의하심(사실로 깨달으심, realization)을 의미한다. 여기로부터 그분의 인간 본질이 신성으로 되어감을 취하는 첫 발을 내딛으신다.

그리고 아브람은 자기에게 지시하신 그대로 갔다. 이는 신성한 것들을 향한 전진(진보)을 의미한다. 이는 방금 살폈다.

그리고 롯이 그와 함께 갔다. 이는 감각적인 것을 의미한다는 것, 그리고 “롯”에 의해 그분의 감각적이고 육체의 인간 측면의 주님이 의미된다는 것은 이어지는 롯의 표현으로부터, 즉 그가 아브람과 분리함으로 부터와 그가 천사들에 의해 구조되는 구절로부터 분명해진다; 그러나 그후에 그는 또 다른 표현을 입었다. 이에 관하여는 주님의 신성한 자비로부터 차후 기술한다. 이것은 분명해진다. 즉 주님께서는 여느 사람들 같이 태어나셨다는 것, 그러나 여느 사람들과 다른 점은 처녀 어머니로부터 이다는 것, 그리고 그분도 여느 사람들 같이 감각적이고 육체를 소유하셨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분은 자기의 감각적이고 육체의 인간을 천국적 속성(attribute)들과 하나이게 하시어 신성이 되게 하셨다는 사실이 여느 사람들과 다른 점이다. 주님의 감각적이고 육적인 그 자체, 또는 그분의 감각적이고 육체의 인간이 그분의 젊은(youth) 시절의 상태였다. 이는 천국의 속성들을 수단으로 신성과 결합되지 않은 때와 같은 말이다. 이 때가 롯에 의해 표현되어지고 있다.

아브람은 칠십 오 년의 아들이었다. 이는 현재로서는 신성 측면이 아주 많이 있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숫자 “5”가 적다를 의미함으로부터, 그리고 숫자 “70”이 거룩한 것을 의미함으로부터 분명해진다. 여기서 “70”이 주님을 서술하기 때문에, 이 숫자는 신성한 거룩함(divine holiness, the holy Divine)을 의미한다. 또한 내적 의미에서 아브람의 나이 숫자는 다른 것들도 의미하는데, 이는 숫자와 햇수에 관해 살핀 바로부터, 그리고 말씀에서는 음절이나 기호(mark)에 이르기까지에서도 내적 의미가 있지 않은 것은 없다는 것으로부터 분명해진다; 그리고 영적, 천적인 주제들이 포함되지 않는다면, 아브람의 나이가 칠십 오 세이다고 언급되지도 않았을런지 모르고, 아예 아브람의 삶의 이 단계가 언급해두어야 할 정도로 특별히 취급되지 않았을런지 모른다. 이와 마찬가지로 말씀에서 측량 도구나 햇수 등에 붙어 있는 모든 숫자 역시 같은 맥락임이 분명하다.

그가 하란으로부터 나갔을 때. 이는 마치 인간들의 젊은 시절 같은 주님의 어스레한 상태를 의미하는데, 이는 앞 장에 등장한 “하란”의 의미로부터 분명해진다. 즉 거기는 데라가 아브람과 더불어 처음 왔던 곳, 거기서 아브람의 아버지 데라가 죽었다는 것 (창. 11:31, 32); 또한 뒤에 이어지는 대목, 야곱이 라반이 거주하는 하란에 갔다는 것, (창. 27:43; 28:10; 29:4) 등으로부터 분명해진다. 하란은 예배가 외적일 뿐이었던 지역이다; 데라, 아브람, 그리고 라반에 주목해보면, 그들은 실로 우상 숭배자였다; 그렇지만 내적 의미에서는 외적 의미와 같은 것을 의미하지는 않고 어스레한(희미한, 불명료한) 어떤 것 만을 의미한다. 우리가 외적 의미로부터 내적 의미로 건너가면, 우상 숭배라는 관념은 남지 않고 삭제되는데, 예를 들면, 글자에서 산을 마주 대할 때, 거룩한 사랑이라는 관념이 일어나는 것과 같다 [795항 참조] ; 외적 의미로부터 내적 의미로 건너가면서, 산에 대한 관념은 사멸되고, 거기에 높다라는 관념이 남아있고, 높다에 의해 거룩함이 표현되어진다. 말씀의 내적 의미의 경우는 이와 모두 같다.

5절. 그리고 아브람은 그의 아내 사래와 그의 형제의 아들 롯, 그리고 그가 획득했던 모든 습득물, 그리고 그들이 하란에서 획득한 혼(soul)을 챙겼다. 그리고 그들은 가나안의 땅으로 가기 위해 나갔다. 그리고 그들은 가나안의 땅에 왔다.

그리고 아브람은 그의 아내 사래를 챙겼다. 이는 선에 진리가 인접해있어 왔음을 의미하는데, 이는 말씀에서 사람과 아내에 의해 의미되는 것을 살핀 바로부터 분명해진다; 그러므로 내적 의미에서 “사래”가 뜻하는 한가지 것은 진리이다. 인간의 모든 것 안에는 일반적, 세부적 측면 모두에서 결혼의 형상이 있다; 결혼의 형상은 인간 안에서 제 아무리 작다해도, 또는 외적 인간에서 이든, 내적 인간에서 이든 결혼의 형상 없이 가능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 이유는 이렇다: 일반적, 세부적으로 모든 것들은 주님으로부터, 그리고 마치 결혼 같이, 그분의 인간 본질이 그분의 신성 본질과 하나됨으로부터 생겨나고 존속해 가기 때문이다; 그리고 천국들과 땅의 주님의 왕국 양쪽의 결합, 또는 천국의 결혼으로부터 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구절에서 주님의 선에 인접한 진리가 있도록 표현되었다, 그리고 이 표현이 아브람에 관한 역사적 사실들을 수단으로 하는 바, “그의 아내”라는 말보다 더 적절한 표현은 없었을 것 같다.

“아브람”에 의해 주님이 뜻해지는 것, 이 구절의 경우 젊은 시절의 주님이 뜻해지는 것; 그리고 “그의 아내 사래”에 의해 진리가 뜻해지는 것은 이미 말한 바로부터 분명해졌을 것이다.

그리고 그의 형제의 아들 롯. 이는 감각적인 진리, 그러므로 주님의 젊은 시기에 처음 주입되어진 진리의 종류를 의미하는데, 이는 롯의 의미가 앞에서 설명한 바 대로 감각이다로부터, 그리고 “아들”의 의미가 진리이다로부터 분명해진다. 그리고 또한 “형제”의 의미가 신앙의 진리이다로 부터도 역시 분명해진다. 그런고로 감각적 진리가 여기서 의미되는 것인데, 그 이유는 내적 의미에서는 어떤 개인이나 단어들과 꼭닮은 것은 없고, 단지 의미만 부각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천국에서 그들은 롯이 누구인지 모르고, 단지 롯에 의해 표현된 품질만 알 뿐이다; 마찬가지로 그들은 아들이 무엇인지 모르고, 아들로서 관련되는 누군가에 의한 영적인 상태만 안다; 그들은 천국에 있는 형제관계를 제외하고는 형제가 무엇인지 모른다.
감각적 진리(감각을 통해 획득한 진리)에 주목해보면, 이것은 그 자체로 주입된 처음 종류의 진리이다; 그 이유가 판단하는 우리의 능력들은 젊은 시기에는 더 깊은 수준에 와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감각적 진리는 하느님의 창조로서 모든 지상적, 세상적 인 것을 봄(vision)이다; 그리고 각각 그리고 모두의 대상물(object)들을 목적을 가진 것으로 봄이다; 그리고 각각 모두의 대상물은 하느님의 왕국의 형상을 진열해 놓은 것으로 봄이다. 이 감각적 진리는 천국의 사람들에게 만이 주입된다. 그리고 주님만이 (이 지상에서 유일하게) 천국적 개인(person, 인물)이셨기 때문에 감각적 진리 내지 그 진리와 비슷한 다른 진리들이 그분의 젊은 시기 초기에 스며들었다(filtered). 이것이 천국의 진리를 받도록 그분을 준비되게 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가 획득했던 모든 습득물. 이것은 감각적 진리들인 모든 것들을 의미하는데, 이는 이미 말해진 바로부터 분명해진다. 인간이 생각하는데 그 기초가 되는 모든 사실들(기억 속의 지식)이 습득물(acquisition, gain, substance)이라 불리운다. 획득한 사실들(기억 속의 지식들) 없이 우리가 인간이라는 능력(capacity) 안에 생각의 어떤 한 조각도 마음에 품어볼 수 없다. 우리의 생각함을 구성하는 개념(conception, idea)은 감각들을 통하여 들어와 기억 안에 인상지워진 사실들에 기초하고 있다. 그러므로 기억 속의 지식들은 영적 (평면의) 재료(material)를 담는 그릇이고, 신체의 좋은 느낌들로부터 있는 애착(애정)들은 천적 (평면의) 재료를 담는 그릇이다. 이 모든 것이 “획득한 습득물”이라 불리운다. 그리고 하란에서 획득한 습득물이 어스레한 상태라고 말해진 이유는 이것이 유아기로부터 청년기까지에서 있게되는 상태와 같아서 이다.

그리고 그들이 하란에서 획득한 혼. 이는 어스레한 상태에서 가능했던 모두 각각의 생명 있는 본질을 의미하는데, 이는 “혼, soul”의 의미가 생명 있는 본질인 것이다로부터; 그리고 “하란”의 의미가 앞 절에서 살핀대로, 어스레한 상태이다로부터 분명해진다. 혼의 적절한 의미는 인간 안에 살아 있는 것, 고로 인간의 참 생명이다. 인간 안에서 살아 있는 것은 육체가 아니라 혼이다. 그리고 육체는 혼을 수단으로 살아있을 뿐이다. 인간의 생명 자체, 또는 그의 생명 있는 부분은 천국의 사랑으로부터 이다; 천국의 사랑에 생명의 근원을 두지 않는 생명 있는 어떤 것은 가능할 수 없다; 그러므로 여기서 “혼”에 의해 천국의 사랑으로부터 살고 있는 선이 의미되고, 이 선은 생명 있는 본질 자체이다. 글자 의미에서의 경우, “혼”은 모두 각각의 인간, 그리고 자신들을 위해 획득한 모두 각각의 살아 있는 짐승이 의미된다. 그러나 내적 의미의 경우, 생명 있는 본질인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들은 가나안의 토지로 가기 위해 나아갔다. 이것은 그분께서 사랑의 천국적 양상(aspect)들에로 그분의 모든 길을 재촉하셨음을 의미한다. 이는 “가나안의 토지”의 의미로부터 분명해진다. 가나안의 토지는 천국들과 땅에 있는 주님의 왕국을 표현한다. 이는 말씀에서 많은 것들로부터 분명해진다. 이런 이유는 거기에 표현 교회가 설립되었고, 그 교회 안에 일반적, 세부적 측면에서의 모든 것들이 주님과 그분의 왕국의 천적 (평면의) 것들과 영적 (평면의) 것들을 표현했기 때문이다. 즉 의식들, 의식들에 연결되는 모든 것, 뿐만 아니라 이런 의식을 섬기는 인물들, 그들이 섬긴 것들, 장소들 등등 예를 들기에는 너무 많을 것이다. 그리고 표현 교회가 그 곳에 있었기 때문에 그 곳은 거룩한 토지라고 불리운다. 물론 거룩한 어떤 것만에 국한해서 그렇게 불리운다고 말해야 하는데, 그 이유는 그 토지에는 우상숭배적이고 모독적인 자들이 거주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여기서와 이어지는 구절에서 “가나안의 토지”에 의해 사랑으로부터의 천국의 품질들을 의미하는 이유이다. 사랑으로부터의 천국의 품질들 만이 주님의 왕국 안에 있고, 그분의 왕국을 구성한다.

그리고 가나안의 토지 안으로 그들은 왔다. 이는 그분이 사랑으로부터의 천적인 양상들에 도달하셨음을 의미하는데, 이는 위의 가나안의 토지에 관해 말해진 바로부터 분명해진다. 여기에 주님의 첫 삶, 즉 출생으로부터 청년기까지의 삶이 묘사되었다. 즉 그분은 사랑으로부터의 천적인 양상(모습, aspect)들에 도달하셨다는 것이다. 사랑으로부터의 천국의 양상들이 진정한 본질들이다. 이 외의 것들은 이것들로부터 유래된다. 이것들이 주님 안에 주입된 가장 처음의 것들이다; 그 이유가 씨와도 같이 이것들로부터 이후 모든 것들이 열매를 맺었다. 그분 안에 있는 씨 자체는 천국이었다. 그 이유는 그분은 여호와로부터 출생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분은 자신 안에 이 씨를 가진 유일한 분이셨다. 모든 인간들은 자기 자신의 것으로부터 더럽고 지옥적인 어떤 것 밖에 안 되는 씨만을 가졌다; 그리고 이것은 아버지로부터 상속되어진 것들이다; 그러므로 모든 인간들은 주님으로부터 새로운 씨를, 새로운 자기 자신을 , 즉 새로운 의지력과 이해력을 받지 않으면, 지옥에로 떨어질 수 밖에 없다; 인간의 자기 자신의 본성 때문에 우리들, 영들, 천사들은 주님에 의해 (지옥에 빠지지 않게) 계속 끌어 당김과 억제되게 하심이 있어야만 한다.

6절. 그리고 아브람은 세겜 장소에까지, 모레의 상수리나무 숲에까지 그 토지를 통과 했다. 그리고 가나안 족들이 그 땅에 있었다.

아브람은 세겜 장소에까지… 토지를 통과 했다. 이는 주님의 두 번째 상태, 즉 사랑의 천국 양상들이 그분에게 나타나게 되었을 때의 상태를 의미하는 것인 앞 구절로부터와 모든 이런 사건들의 순서로부터 분명해진다. 앞 절로부터, 그분은 사랑의 천국 양상(aspect)들에로 그분의 모든 길을 재촉하셨다 인데, 이것이 “그들은 가나안의 토지로 가기 위해 나아갔다”에 의미되어져 있다는 것, 그리고 “그들은 가나안의 토지에 왔다”이다; 그리고 사건들의 순서로부터, 즉 그분은 천국 양상들에로 모든 길을 재촉하시고, 거기에 도달하셨다, 그때 그분에게 나타났다의 순서로 되어 있다. 천국 특성 안에 혼의 진정한 빛이 있다. 그 이유는 그것들 안에 신성 자체, 여호와 자체가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주님께서 인간 본질을 신성 본질에 결합하셨을 때가 그분이 천국 양상에 도착하셨을 때인 바, 여호와께서 그분에게 나타나셨다 라고 말할 수 밖에 다른 도리가 없다.

이런 것들이 “세겜”에 의해 의미되는 것은 그들이 시리아로부터, 또는 하란으로부터 여행함에서 마치 세겜이 가나안의 첫 도착 장소(정거장)이다는 사실로부터도 역시 분명해진다; 그리고 사랑의 천국 양상이 “가나안의 토지”에 의해 의미되어져 있는 바, 이것은 첫 나타남이 세겜에 의해 의미된 바로 분명해진다. 야곱이 하란으로부터 가나안의 토지로 되돌아 올 때, 이 구절 같은 식으로 그는 세겜에 왔다, 아래 구절로 분명하다:
그리고 야곱은 숙곳으로 여행했다, 그리고 자기를 위하여 집을 지었다, 그리고 그의 획득물(가축떼) 들을 위하여 우릿간을 만들었다. 그러므로 그는 그 장소의 이름을 숙곳이라 불렀다. 그리고 야곱은 세겜의 성, 살렘에 왔다, 이곳은 가나안의 토지 안에 있다, 그는 밧단-아람에서 이쪽으로 왔고 이 성의 얼굴 쪽을 향하여 진을 쳤다. 그리고 그는 거기에 제단을 세웠다 (창. 33:17-20).
위에서 “세겜”에 의해 첫 빛이 의미되어진다. 다윗서에서:
하느님께서 그분의 거룩함 안에서 이야기하셨다; 나는 크게 기뻐할 것이다, 나는 세겜을 나 눌 것이다, 그리고 숙곳의 골짜기를 할당 할 것이다; 길르앗은 나의 것이다, 그리고 므낫세 는 나의 것이다, 그리고 에브라임은 내 머리의 힘이다; 유다는 내 입법자이다; 모압은 내 씻는 통이다; 에돔 위에 나는 내 신발을 던질 것이다; 블레셋들에게 나는 승리를 외칠 것이 다 (시. 60:6, 7, 8; 108:7, 8, 9);
위에서 “세겜”의 의미 역시 본문의 의미와 비슷하다. 세겜과 더불어 여러 이름들도 (영적) 실제의 것, 즉 영적 의미 외에 더 다른 의미는 없다는 것이 다윗의 예언적 말함으로부터 분명히 보여질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위 구절은 이름이 열거된 무미건조함밖에 더 아닐지 모른다. 세겜이 도피의 성으로 만들어진 것 (여. 20:7), 또한 그 곳은 성직자들의 성이었다는 것 (여.21:21), 그리고 언약이 거기서 만들어진 것 (여. 24:1, 25), 등등의 이런 것들에도 비슷한 어떤 것을 포함하고 있다.

모레의 상수리나무 숲에까지. 이것이 첫 지각을 의미하는 것은 발전의 과정으로부터 분명해진다. 여호와께서 그분의 천국 양상들 안에서 주님에게 나타나자 마자, 주님께서는 지각을 획득하셨다. 모든 지각은 천국 특성들로부터 결과한다. 지각이 무엇인지는 이미 살폈다. 주님께서는 천국 특성에 도착하는 모든 이들에게 지각을 주신다. 태고 교회인들의 경우 같이 천적 (평면의) 인간이 된 이들은 모두 지각을 받았다. 이에 관하여는 이미 살폈다. 영적 (평면의) 인간이 된 이들, 즉 주님으로부터 선행을 선물받은 이들은 지각에 유추되는 어떤 것, 또는 더 정확히 말하면 그들이 선행의 천국 특성 안에 있음에 비례해서 명료함이 많든 적든, 양심의 지령(dictate)을 가진다. 선행이라는 천국 특성은 이것에 동반된다. 그 이유가 선행 안에 주님이 현존하시고, 그것들 안에서 그분이 인간에게 나타나시기 때문이다. 이것이 주님의 경우 훨씬 더 진정이었을 것이다고 우리는 추측해 볼 뿐이다. 그분은 유아로부터 여호와까지 발전해 가셨다, 그리고 주님과 여호와가 하나이도록 그분에게 인접하고 결합하시었다.

“모레의 상수리나무 숲”이 첫 지각임에 주목해보자. 이 경우는 이렇다. 인간과 더불어 세 능력, 즉 지적 능력(intellectual, 진정한 이해력, true, understanding), 합리력, 기억력(memory, 알고 있는 사실들, knowing facts)이 있다. 인간의 가장 깊은 측면(inmost, 또는 center)이 지적 능력이고, 그의 내면 측면(intrior, less center)들은 합리성, 그리고 그의 외적 측면(exterior)은 기억 속의 것들이다; 위 세 능력은 이런 배열로 있는데, 어쨌든 이 모두는 우리의 영적 유용한 자질(asset)들이라 불리운다. 천국 사람들에서, 지적 능력은 갖가지 종류의 나무들로 차 있는 동산에, 그의 합리성은 삼나무, 그리고 레바논에 있는 나무들에 비교되어진다; 그러나 그의 기억 속의 지식들은 상수리나무 숲, 그리고 가지들이 뒤엉킨 상수리나무에 비교되어진다. 나무들 자체에 의해 지각들이 의미되어진다; 동쪽을 향한 에덴의 동산의 나무들에 의해 가장 깊은 지각들, 또는 지적 능력들로부터의 것들이 의미되는데, 앞에서 살폈다; 레바논 숲의 나무들에 의해 내면의 지각들, 또는 합리적인 것들이 의미된다; 그러나 상수리나무 숲에 의해서는 외면의 지각들, 또는 기억 속의 지식들이 의미되고, 이것은 외적 인간에 속해 있다. 이로부터 “모레의 상수리나무”는 주님의 첫 지각을 의미한다; 그 이유는 그분이 아직까지는 어린이였고, 그분은 영적 유용한 자질들을 외적 측면 그 이상을 아직은 그분 안에 가지시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외에도 모레의 상수리나무 숲은 이스라엘의 아들들이 요단을 건너고 가나안의 토지를 보았을 때 처음 당도한 곳이었다. 모세의 책을 보자:
너희는 그리심 산에 축복을, 에발 산에 저주를 놓을 것이다. 너희는 요단 건너, 해가 내려 가는 길 뒤에, 모레의 상수리나무 옆, 길갈 맞은편 건너 평야에 거주하는 가나안 족의 토지 에 있지 않느냐 (신 11:29, 30);
위 구절에 의해서도 첫 지각이 의미된다. 그 이유는 이스라엘의 아들들의 입장은 주님의 왕국 안으로 신실한 자들의 입장을 표현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때 가나안족이 토지에 있었다. 이는 어머니로부터 세습된 악(유전적 악)을 의미하는데, 이는 이미 주님에게 상속된 것에 관해 말해진 바로부터 분명해진다; 그 이유가 그분은 여느 사람들 같이 태어나셨고, 어머니로부터 악들을 상속받았다는 것, 이 악들에 맞서 그분은 싸우셨고, 정복하셨기 때문이다. 주님께서 가장 비통한 시험들을 수행하시고 견뎌내셨다는 것, 아주 큰 시험들을 주님께서는 그분 자신의 힘으로 지옥 전체에 맞서 홀로 싸우셨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이에 관하여는 주님의 신성한 자비로 이후 말해진다. 악이 자신에게 붙어있지 않으면 누구도 시험을 수행할 수 없다; 악이 없는 자는 제아무리 작은 시험일지라도 가질 수 없다; 악은 지옥의 영들이 흥분하는 것이다.
주님 안에는 여느 사람들이 지니는 것 같은 실제였던 어떤 악도, 또는 그분의 자기 자신이었던 어떤 악도 있지 않았다. 그러나 어머니로부터의 세습된 악이 있었는데, 이것이 여기서 “그때 토지에 가나안족”이라 불리운다. 1절에 관해 말해진 것을 보면, 즉 인간에게는 타고난 두 개의 유전적 본성들이 있다; 아버지로부터 온 본성은 영원히 남는다, 그러나 어머니로부터의 본성은 인간이 거듭나지는 동안 주님에 의해 흩어진다. 아버지로부터의 주님의 유전적 본성은 신성이었다. 어머니로부터의 본성은 악이었다, 그리고 이것이 여기서 취급되고, 이 악을 통하여 주님께서는 시험들을 수행하셨다. 이를 위해 막. 1:12, 13; 마. 4:1; 눅. 4:1, 2를 읽어보라. 그러나 이미 말했듯, 그분에게는 그분이 저지르신 악, 실제의 악, 또는 그분의 자기 자신인 악은 없으셨다. 그리고 그분이 시험들을 수단으로 지옥을 정복하신 후에는 어머니로부터의 유전적 악도 없으셨다; 이런 이유 때문에 이 구절에서 “가나안족이 그때 토지에 있었다”라고 말해진다.
가나안족이 바다 근처와 요단 강가 근처에 거주했다는 것은 모세의 책에서 발견된다. 되돌아온 스파이들이 말했다:
우리는 당신이 우리를 보낸 토지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정녕 그곳은 젖과 꿀이 흐르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그것으로부터의 열매입니다. 그렇지만 토지에 거주하는 사람들은 힘센 자들 입니다, 그리고 성들은 아주 높은 울타리로 둘려져 있습니다; 더욱이 우리는 거 기서 아낙의 후손을 보았습니다; 아말렉이 남쪽에; 헷족과 여부스족과 아모리족이 산들에 거주합니다; 그리고 가나안 족이 바닷가에, 그리고 요단 강가에 거주합니다 (민13:27-29).
가나안족이 바닷가와 요단 강가에 거주한다는 것은 외적 인간에 있는 악을 의미했다. 이는 어머니로부터 유전되는 것과 같은 악이다; 그 이유가 바다와 요단은 경계선들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악이 “가나안족”에 의해 의미되는 것을 스가랴서에서 보자:
그 날에 여호와 체바욷의 집에는 가나안족이 더 이상 있지 않을 것이다 (슥. 14:21);
위 구절에서 주님의 왕국이 취급되어진다, 그리고 이것은 주님께서 가나안 족에 의해 뜻해진 악을 정복하실 것과 그분의 왕국으로부터 그 악을 추방하실 것을 의미하였다. 악들의 모든 종류가 가나안의 토지에 있는 우상 숭배하는 나라들에 의해 의미되었는데, 이 나라들 사이에 가나안족도 있었다. 이에 관하여는 창.15:18, 19, 21; 출. 3:8, 17; 23:23, 28; 33:2; 34;11; 신. 7:1; 20:17; 여. 3:10; 24:11; 사. 3:5을 더 읽어 두기 바란다. 각 나라에 의해 특별하게 의미되는 악에 관하여는 주님의 신성한 자비로 다른 곳에서 말해질 것이다.

7절. 그리고 여호와가 아브람에게 보여졌다, 그리고 말하셨다. 나는 네 씨(자손)에게 이 땅을 주겠다. 그래서 그는 거기서 자기에게 보여진 여호와께 제단을 건립했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보여졌다. 이는 여호와께서 주님이 아직 어린이이신 동안 주님에게 나타나셨다는 것은 앞 절의 것들로부터; 또한 아브람에 의해 주님이 표현되었다는 단순한 사실로부터도; 그리고 또한 발전 과정으로부터, 즉 그분은 천국 특성들에 도착하셨다, 그 다음 지각이 주어졌다, 이로부터 여호와께서 보여짐의 의미를 뒤잇는 순서로부터도 알 수 있다.

그리고 말하셨다, 네 씨에게 나는 이 토지를 줄 것이다. 이는 그분을 믿는 이들에게 천국의 선물들이 주어진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는 “씨”의 의미로부터, 그리고 “토지”의 의미로부터 분명해진다. “씨”가 주님에 대한 신앙을 의미하는 것은 이미 살폈다; 그리고 “토지”가 천국의 선물을 의미하는 것은 이 장의 1절에서 살폈다. 글자 의미에서, “아브람의 씨”는 야곱으로부터의 그의 후손을 뜻한다, 그리고 “토지”에 의해서는 가나안의 토지 자체가 뜻해진다, 이것이 소유하도록 그들에게 주어질 것이다는 것, 그리하여 그들은 주님의 왕국과 교회 속의 천적이고 영적인 것들을 표현한다는 것, 그리고 표현 교회가 그들 사이에서 설립된다는 것, 그 이유는 그분이 거기서 태어나셔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적 의미에서 씨에 의해서는 주님에 대한 신앙을, 토지에 의해서는 천국의 특성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이 구절에서 주님을 믿는 이들에게 천국의 선물들이 주어질 것임을 의미한다. 주님에 대한 신앙이 뜻하는 것에 대하여는 앞서 반복적으로 살핀 바 있다.

그리고 그는 자기에게 보이신 여호와께 제단을 건립했다. 이는 그분이 사랑의 천적 수준으로부터 그분의 아버지에게 처음 예배했음을 의미한다. 이는 예배의 제 일의 표현물인 “제단”의 의미로부터 분명해진다.

8절. 그리고 그는 거기로부터 벧엘 동쪽에 있는 산으로 옮겨 갔다, 그리고 그의 천막을 펼쳤다; 벧엘이 바다를 향하여 있고, 아이는 동쪽에 있다. 그리고 거기서 그는 여호와께 제단을 건립했다, 그리고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

그는 거기로부터 벧엘 동쪽에 있는 산으로 옮겨 갔다. 이는 어린 시절 주님의 네 번째 상태를 의미한다. 이는 앞 구절과 뒤이어지는 구절, 그리고 (나열되는 말의) 순서로부터 분명해진다. 그 순서는 이렇다. 주님께서는 사랑의 천적인 것(사랑의 천국 양상)들을 가지고 유아기에 우선적으로 빨아 들이셨다. 사랑의 천적인 것들은 여호와를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 그리고 이 두 사랑들의 특성인 순진 자체이다. 생명의 실제의 원천인 이 두 사랑으로부터 일반적, 세부적 모두에서 모든 다른 것들이 흐른다. 그 이유가 모든 다른 것들은 단지 파생물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이런 천적인 것들은 인간의 유아로부터 어린 시절까지에서 집중적으로 각 인간에게 슬며시 주입된다, 그리고 이 주입 때에는 사실상 지식이 필요 없다; 그 이유가 이것은 주님으로부터 흘러들어, 인간에게 영향을 주는데, 이는 각 인간이 사랑이 무엇인지, 애착이 무엇인지 알기 이전 진행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서는 유아들의 상태와 유아 이후 어린이 시절의 상태를 유심히 관찰한다면 조금은 가늠될지 모른다. 인간 안의 이런 것들이 리메인스(remains, remnant)인데, 이 리메인스는 우리 삶에서의 미래 사용을 위해 주님에 의해 은근히 주입되어 저장된다. 주님께서는 여느 인간들 같이 태어나시고, 질서를 따라 천적인 것들 안으로 들어 가셨다, 그리고 이는 사실상, 유아로부터 어린 시절까지 단계적으로, 그 후에는 지식 안으로 들어 가셨다; 이런 경우가 그분과 더불어 어떻게 있었는지가 이 절에서 묘사되어진다, 그리고 이어지는 구절인 아브람이 이집트에 체류하는 대목에 의해 표현되어진다.

“벧엘 동쪽에 있는 산으로 옮겨간” 것은 사랑의 천적 (평면의) 것(사랑의 천국 양상)들의 발전을 의미하는데, 이는 “산”의 의미가 천적 (평면의) 것이다로부터 분명해진다. 이 의미는 살핀 바 있다; 그리고 “동쪽”의 의미가 사랑 측면에서의 여호와이다로 부터서도 알게 된다; 그 이유가 그분은 동쪽 자체이시기 때문이다. 이는 101항을 살피면 유익하다; 또한 “벧엘”의 의미가 천적 (평면의) 것들에 관한 지식이다로 부터도 분명해진다. 천적 (평면의) 것들은 두 가지 방법, 즉 지식 없이와 지식과 더불어서도 주입된다. 지식 없이 주입되는 방법은 유아로부터 어린 시절(또는 청년 초기)까지에서 이루어지는데 이는 이미 말했다. 지식과 더불어 주입되는 방법은 청년기 이후 장년기(완전 성숙기)에서 이루어진다. 주님이 “벧엘”에 의해 의미된 천적 (평면의) 것들에 관한 지식 안으로 발전해 가셨을 때가 “아브람이 거기로부터 벧엘 동쪽의 산으로 건너갔다(옮겨갔다)로 말해졌다.

그리고 그의 천막을 펼쳤다. 이는 신앙의 거룩한 것들을 의미하는데, 이는 “천막”이 사랑의 거룩한 품질, 결과적으로 사랑으로부터 신앙의 거룩한 품질이다로부터 분명해진다. 이는 이미 살폈다. 아브람이 자기 천막을 “펼쳤다”는 것은 [신앙이] 지금 시작 선상에 있다를 의미한다.

벧엘은 바다를 향하여 있고, 아이는 동쪽에 있다. 이는 주님의 상태가 아직은 어스레한 상태이셨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상태는 주님의 천적 (평면의) 것들과 영적 (평면의) 것에 관한 지식에 관련하여 특별히 언급되고 있다; 그 이유가 천적인 것들안에 있는 것과 천적인 것들에 관한 지식 안에 있는 것, 이 둘은 같지만 별개의 것들이기 때문이다. 유아로부터 청년 이전에는 성년보다 더 천적인 것들 안에 있다. 그 이유는 그들이 자기들의 부모를 향한 사랑 안에, 그리고 상호간의 사랑 안에, 또한 순진 안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년들은 유아나 청년보다 더 천적인 것들에 관한 지식 안에 있다. 물론 이 지식을 붙들었다 해서 그들 모두가 천적인 것들 안에 있는 것은 아니다. 어쩌면 대단히 많은 이들이 사랑의 천적인 것들 안에 있지 않을런지 모른다. 인간이 사랑과 신앙에 관한 것들에 관한 가르침을 받기 이전일 경우, 인간은 이것들에 관하여 어스레한 상태에 있다. 이것이 벧엘이 바다를 향하여, 즉 서쪽을 향하여, 아이는 동쪽을 향하여 있다에 의해 묘사되어지고 있다. “벧엘”에 의하여는 이미 말했듯, 천적인 것들에 관한 지식이 의미되고 있다; 그러나 “아이”에 의해서는 세상적인 것들에 관한 지식들이 의미되고 있다. 천적인 것들에 관한 지식들이 어스레한 상태일 때가 벧엘이 “서쪽(바다쪽을 향하여)”에 있다고 말해진다. 그 이유가 말씀에서 “서쪽”은 어스레한 (불명료한, obscure) 상태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세상적인 지식들이 명료함에 있을 때가 아이가 “동쪽”에 있다고 말해진다. 그 이유가 서쪽에 비해 상대적으로 동쪽이 더 밝음을 암시하기 때문이다. 서쪽과 동쪽이 이런 의미를 가지는데 대하여는 확증은 필요 없다, 그 이유는 이 정도의 의미는 누구에게나 다 알려지고 익히 아는 사항이기 때문이다.
“벧엘”이 천적인 것들에 관한 지식을 의미하는 것을 벧엘이 명명되는 다음 장의 아래 구절에서 알런지 모른다:
아브람은 남쪽으로부터 벧엘까지, 즉 그의 천막을 펼침이 시작되었던 곳으로, 벧엘과 아이 사이로, 그가 제단을 건립했던 장소로 그의 여행을 계속했다 (창. 13:3, 4);
위에서 “남쪽으로부터 벧엘로의 그의 여행들”은 지식들의 빛 안으로 발전하심을 의미한다, 이렇기 때문에, 위 구절은 벧엘이 서쪽에, 아이는 동쪽에 있다라고 말해지지 않는다. 야곱이 사다리를 보았을 때, 그는 말했다:
여기야말로 하느님의 집이고, 여기는 천국의 문(gate)이다; 그리고 그는 이 장소의 이름을 벧엘이라 불렀다 (창. 28:17, 19);
위에서 천적인 것들에 관한 지식이 마찬가지로 “벧엘”에 의해 의미되어진다; 그 이유가 인간이 지식들로부터 천적인 것들 안에 있을 때, 그 인간은 벧엘, 하느님의 집, 또한 천국의 문이기 때문이다. 인간이 거듭나질 때, 그는 영적 (평면의) 것들과 천적 (평면의) 것들에 관한 지식들을 수단으로 그는 (천국 품질에 관하여) 소개받아진다(거듭나는 과정에 진입한다); 그러나 그가 거듭나아져 갔을 때, 또는 거듭남이 완성될 때, 그는 자기에게 거듭남을 소개하고 그쪽으로 인도해간 바로 그 천국 특성 안에 있는다. 즉 그 특성이 내 것이 되어 있다는 말이다. 그 후에:
하느님께서 야곱에게 말하셨다, 벧엘로 가라, 그리고 거기에 거주하라; 거기에 네게 나타났 던 하느님에게 제단을 만들어라 (창. 35:1, 6, 7);
위 구절의 “벧엘”도 마찬가지로 지식들을 의미한다.
여호와의 궤가 벧엘에 있었다는 것, 그리고 이스라엘의 아들들이 그리로 가서 여호와께 여쭈었다는 것(사. 20:18, 26, 27; 삼상. 7:16; 10:3) 등의 구절도 비슷한 의미를 지닌다; 또한 앗시리아왕이 그가 데려간 성직자들 중의 한 명을 사마리아로 보냈는데, 그는 벧엘에 거주하면서 여호와를 경외하는 방법을 가르쳤다 (왕하. 17:27, 28)에서도 비슷한 의미를 지닌다. 아모스서에서:
아마사가 아모스에게 말했다, 오, 너, 선견자여, 너는 유다의 토지로 도망가거라, 그리고 거 기서 빵을 먹어라, 그리고 너는 거기서 예언하라; 그러나 벧엘에서는 더 이상 다시 예언하 지 말라, 그 이유는 이곳은 왕의 성소이고, 이곳은 왕국의 집이기 때문이다 (암. 7:12, 13).
[4] 여로보암이 벧엘을 더럽힌 후(왕상. 12:32; 13:1-8; 왕하. 23:15), 그것은 반대적 표현을 가졌다 (호. 10:15; 암. 3:14, 15; 4:5-7 도 참조). 그러나 “아이”가 세상적인 지식들을 의미하는 것은 말씀의 역사물과 예언적 부분들로부터 알런지 모른다 (여. 7:2; 8:1-28; 예. 49:3, 4를 보라).

그리고 그는 여호와께 제단을 건설했다. 이는 이 상태로부터 그분의 아버지에 대한 외적 예배를 의미하는데, 이는 “제단”이 예배의 제 1의 표현물이다로부터 분명해진다.

그리고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 이는 이 상태로부터 그분의 아버지에 대한 내적 예배를 의미하는데, 이는 “여호와의 이름을 부름”의 의미로부터 분명해진다. 아마 모든 이가 여호와께 제단을 건설하는 것은 외적 예배이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내적 예배이다는 것 정도는 알 것이라 생각한다.

9절. 그리고 아브람은 여행했고 갔는데 남쪽을 향하여 여행했다.

그리고 아브람은 여행했고, 가고 여행했다. 이는 더 진보하심을 의미하는데, 이는 “가는 것”과 “여행하는 것”의 의미로부터 분명해진다. 고대인들 사이에서 여행, 여정, 체류 등등의 말에는 단어가 말하는 것 이 외의 뜻은 없다. 말씀에서도 그러하다. 여기서는 지식 안으로 주님이 발전하심이 개시됨이다. 주님 역시 여느 사람들 같이 가르쳐지셨음을 누가복음서를 통해 알 수 있을런지 모른다:
아이(요한)가 자랐고, 영에서 아주 강하게 증대되었다, 그리고 이스라엘에 그가 나타나는 날까지 광야에서 있었다 (눅. 1:80).
다시:
아이(주님)가 자랐고, 영에서 아주 강하게 증대하였고, 그리고 지혜로 채워졌고, 은총이 그 분 위에 있었다 (눅. 2:40)
다시:
그리고 삼일이 지나서야 요셉과 그의 어머니는 성전 안에서 그를 발견했는데, 그는 박사들 의 한 가운데에 앉아 있으면서, 그들의 것을 듣고 그들에게 질문들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에게서 들었던 모든 이들은 그의 이해함과 답변들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리고 그 들이 그를 보았을 때, 그들은 놀라워졌다; 그리고 그는 그들에게 말했다, 어찌하여 당신은 나를 찾습니까? 나는 내 아버지의 관심사에 관하여 있어야만 할 것임을 당신은 모르십니 까? (눅.2:46-49).
위 구절의 때에 주님이 열 두 살이셨다는 것이 42절에서 서술되어진다. 같은 장에서. 다시:
그때 예수께서는 지혜에서, 나이에서 더 발전하셨고, 그리고 하느님과 사람들로부터 은총 안에 계셨다 (눅. 2:52).

“남쪽을 향하여”는 선들과 진리들 안으로, 고로 내면들에 관련하여 빛의 상태 안으로를 의미한다는 것은 “남쪽”의 의미로부터 분명해진다. “남쪽”이 빛의 상태를 의미하는 것은 다른 삶에 방위나 시간이 없고, 오직 방위나 시간에 의해 의미되는 상태만이 있다는 사실로부터 근원한다. 지적인 것들(이해력)에 속하는 상태들은 날(day)들, 해(year)들인 시간의 상태와 또한 방위들의 상태와 같다. 날들의 상태는 저녁, 밤, 아침, 정오로부터 이다; 해의 상태는 가을, 겨울, 봄, 여름으로부터 이다; 방위들의 상태는 태양에 관련하여서 인데, 서쪽, 북쪽, 동쪽, 남쪽으로부터 이다. 이런 상태들과 비슷한 것이 지적인 것들의 상태들이다. 그리고 경이한 것은, 천국에서, 지혜와 총명 안에 있는 이들은 빛 안에 있다, 정확히 말하면 각자의 지혜와 총명에 비례하여 빛 안에 있다는 말이다; 가장 높은 지혜와 총명 안에 있는 이들은 가장 큰 빛 안에 있다; 그러나 지혜는 사랑과 선행으로부터 있고, 총명은 주님에 대한 신앙으로부터 이다. 다른 삶에는 세상의 어느 빛도 거의 비교가 안 되는 빛이 있다는 것은 많은 경험으로부터 나에게 확립된 사실이다. 이에 관하여는 차후 주님의 신성한 자비로 더 살핀다. 그리고 천국에서는 빛과 총명 사이에 이런 상응이 있기 때문에, 그러므로 말씀에서, 이곳, 그리고 다른 구절에서, 내적 의미에서의 “남쪽”의 의미는 더 다른 의미는 없다. 여기서 “남쪽”은 지식들을 수단으로 획득한 총명을 의미한다. 이런 지식들은 천적 (평면의) 진리들과 영적 (평면의) 진리들이고, 이 진리들은 천국에서 아주 많은 빛을 분출한다. 그리고 이 진리들은 이미 서술했듯 빛을 수단으로 보이게 표출된다. 주님께서 지금(유아와 청년기 이전 시절) 이런 지식들을 빨아들이시는 이유는 차후 그분이 인간 본질 측면에서도 역시 천국의 실제의 빛(actual Light, very Light)으로 계시기 위하여서 였다. 이것이 여기서 “아브람이 여행했다, 남쪽을 향하여 가고 여행했다”라고 말해지고 있다.
이것이 “남쪽”의 의미이다는 것을 말씀의 비슷한 구절로부터도 알런지 모른다, 이사야서에서:
나는 북쪽에게 말할 것이다, 주어라; 그리고 남쪽에게, 감추지 말라; 내 아들들을 멀리서 데려올 것이다, 그리고 내 딸들은 땅 끝으로부터 (데려올 것이다) (이. 43:6);
“북쪽”은 무지함에 있는 이들을 표시한다; “남쪽”은 지식들 안에 있는 이들; “아들들”은 진리들; 그리고 “딸들”은 선들을 표시한다. 다시:
만일 네가 네 혼을 주린 자에게 꺼내주고, 고뇌하는 혼을 만족하게 한다면, 그때 네 빛은 어둠에서 일어날 것이다, 그리고 네 짙은 어둠은 정오(남쪽) 같이 될 것이다 (이. 58:10);
“주린 자에게 네 혼을 꺼내주고 고뇌하는 혼을 만족하게 하는” 것은 일반적 측면에서 선행의 선들을 표시한다; “빛이 어둠에서 일어남”은 그들이 진리의 총명을 가질 것을 뜻한다; 그리고 “짙은 어둠이 정오 같이”는 그들이 선으로부터의 지혜를 가질 것을 뜻한다; “남쪽, 정오”는 그것의 열로부터 선을, 그것의 밝음으로부터 진리를 의미한다.
에스겔서에서:
하느님의 환상들에서 그분은 나를 이스라엘의 토지로 데리고 갔다, 그리고 나를 매우 높은 산에 앉혔다, 남쪽에 도성의 건물 같은 것이 있었다 (겔. 40:2);
새 예루살렘, 또는 주님의 왕국에 관하여서인데, 이는 지혜와 총명의 빛 안에 있기 때문에 “남쪽에”라고 말해진다. 다윗서에서:
여호와께서 네 정의를 빛 같이 가져올 것이다, 그리고 네 공의를 정오 같이 가져올 것이다 (시. 37:6).
다시:
너는 밤의 공포를, 낮에 날아다니는 화살을, 짙은 어둠에서 걷는 염병을, 정오에(남쪽에서) 황폐하게 하는 파멸을 두려워 않을 것이다 (시. 91:5, 6);
“남쪽에서 황폐하게 하는 파멸을 두려워 않는” 것이란 지식 안에 있고 그것들을 악용하는 그들 위에 오는 지옥에 떨어짐 때문에 두려워해지는 것은 아니다를 뜻한다. 에스겔서에서:
사람의 아들아, 네 얼굴을 남쪽을 향하여 두어라, 그리고 남쪽에 [네 말을] 떨어트려라, 그 리고 남쪽의 들판의 숲에 예언하라, 남쪽으로부터 북쪽까지 모든 얼굴들이 그녀 안에서 태워질 것이다 (겔. 20:46, 47);
“남쪽의 숲”은 진리들의 빛 안에 있는 이들, 그리고 그 빛을 소멸하는 이들을 표시한다, 그리고 고로 교회 내의 이런 품성을 지닌 이들을 표시한다.
다니엘서에서:
그것들 중의 하나로부터 작은 뿔이 나왔다, 그리고 그것은 남쪽을 향하여 극도로 자랐다, 그리고 동쪽을 향하여, 그리고 아름다움을 향하여 (자랐다), 그리고 그것은 하늘의 군대 에까지 닿게 자랐다 (단. 8:9, 10);
선들과 진리들에 맞서 싸우는 이들을 뜻하고 있다. 예레미야서에서:
그분이 그것을 어둠으로 자라게 만드시기 전, 그리고 너희 발이 황혼의 산에 걸려 넘어지 기 전 여호와 네 하느님에게 영광을 돌려라; 그리고 너희는 빛을 찾을 것이다, 그리고 그분 은 그것을 죽음의 그림자로 돌려놓으실 것이다, 그분은 그것을 짙은 어둠으로 만드실 것이 다; 남쪽의 성들이 닫힐 것이다, 그리고 아무도 열지 못할 것이다 (예. 13:16, 19);
“남쪽의 성들”은 진리와 선에 관한 지식을 표시한다. 오바디야서에서:
스바랏에 있는 예루살렘에서 포로된 자는 남쪽의 성들을 상속받을 것이다 (옵. 20절);
“남쪽의 성들”은 마찬가지로 진리들과 선들을, 그러므로 그들이 실제로 상속받는 진리와 선들을 표시한다; 주님의 왕국이 여기서 취급된다.
아브람이 여행하고, 남쪽을 향하여 가고 여행한 것은 이미 말한대로 선들과 진리들 안으로 주님이 발전하심, 그런고로 내면들에 관련하여 빛의 상태 안으로가 의미되는데, 이 경우는 이렇다: 지식들은 천적인 것들과 영적인 것들을 위해 길을 여는 것들이다; 지식을 수단으로 내적 인간이 외적 인간을 향하여 전진하는 길이 열려진다. 이 과정에서 후자는 받는 그릇들이다. 이것은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들이 있는 만큼 많다; 이 지식들 안으로, 그들의 그릇들 안으로와 같이, 천적인 것들은 흐른다.

10절. 그리고 그 토지에 기근이 있었다. 그래서 아브람은 이집트에서 머무르려고 거기로 내려 갔다. 그 이유는 기근이 그 토지에서 너무나 극심하였기 때문이다.

토지에 기근이 있었다. 이는 주님은 어린 시절 때에 지식이 부족하셨음을 의미하는데, 이는 이미 말해진 바로부터 분명해진다. 어린 시절 동안 인간에 있는 지식들은 내면인 것들로부터 오지 않는다. 그러나 감각의 대상들로부터, 특히 청각으로부터 온다. 그 이유는 이미 말한대로, 외적 인간 안에 받는 그릇들을 포함하고 있는데, 이것은 기억의 그릇들이라 불리운다. 누구나 알듯이, 지식들이 이 그릇 속의 것들을 만들어 내는데, 이 그릇(에 담는 것)은 내적 인간의 도움과 영향 아래 있다. 결과적으로 지식이 습득되되, 내적 인간의 영향력(유입)에 일치하여 기억 안에 심어진다는 말이다. 이와 같은 과정은 주님의 어린 시절도 비슷하셨다. 그분은 여느 사람 같이 태어남을 거치셨다. 그리고 교육받으셨다. 그러나 그분과 더불은 내면들은 천적 수준이셨다. 이 천적 수준이 지식들을 담는 그릇으로 개조되었다. 그리고 그 후에 지식들은 신성을 받기 위한 그릇이 되었다. 그분과 더불은 내면들은 여호와 아버지로부터 신성이셨다; 외면들은 어머니 마리아로부터 인간이셨다. 이로부터 주님의 경우도 다른 인간과 동등하게, 어린 시절 동안, 지식의 부족함에 계셨다는 것을 알런지 모른다.
“기근”이 지식의 부족을 의미하는 것은 본문 외의 말씀으로부터도 분명해진다. 이사야서에서:
그들은 여호와의 일을 찾아보지 않는다, 그분의 손이 행하신 것을 보려하지 않는다. 그러므 로 내 백성은 지식을 가지지 않았기 때문에 포로가 되었다, 그리고 그들의 영광은 기근으 로 죽을 수 밖에 없다, 그들의 무리들은 목마름으로 바싹 말라진다 (이. 5:12, 13);
“기근으로 죽을 수 밖에 없다”는 천적 (평면의) 것들에 관한 지식의 부족, “목마름으로 바싹 말리움”은 영적 (평면의) 것들에 관한 지식의 부족을 표시한다. 예레미야서에서:
그들은 여호와에 맞서 거짓말을 했다, 그리고 말했다, 그분은 계시지 않다; 악은 우리에게 오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검도, 기근도 보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예언자들은 바람이 될 것이다, 그리고 말씀이 그들 안에 있지 않다 (예. 5:12, 13);
“검과 기근”은 진리와 선에 관한 지식의 박탈을 표시한다; “예언자들”은 가르치는 이들, 그들 안에 말씀이 없다. “검과 기근에 의해 소멸되고 마는 것”은 진리와 선에 관한 지식이 박탈되는 것이다; 영적 (평면의) 것에 관련하여 황폐함이 “검”에 의해, 그리고 천적 (평면의) 것에 관련하여 황폐함이 “기근”에 의해 표시되어지는데, 이는 말씀의 많은 곳에서 분명해진다. 예를 들면, 예. 14:13-16, 18; 애. 4:9 등등이다.
마찬가지로 에스겔서에서:
그리고 나는 너희 위에 기근을 증가되게 할 것이다, 그리고 너희의 빵 재료를 끊기게 할 것이다; 그리고 나는 너희 위에 기근을 보낼 것이다, 그리고 악한 들짐승; 그리고 그것들은 너희로부터 빼앗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너희 위에 검을 가져올 것이다 (겔. 5:16, 17).
“기근”은 천적(평면의) 것들에 관한 지식들의 박탈, 또는 선에 관한 지식의 박탈을 표시한다, 이 박탈로부터 악과 거짓이 온다. 다윗서에서:
그리고 그분은 토지 위에 기근을 부르셨다, 그분은 모든 빵 재료를 끊으셨다
(시. 105:16);
“빵 재료를 끊는 것”은 천국적 식품이 박탈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 이유가 선한 영들과 천사들의 생명은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들, 그리고 선들과 진리들 자체 외에 다른 식품은 없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내적 의미에서 “기근”과 “빵”의 의미가 온다. 다시:
그분은 갈망하는 혼을 만족시키셨다, 그리고 선으로 굶주린 혼을 채우셨다 (시. 107:9);
위 구절은 지식들을 바라는 이들을 표시하고 있다. 예레미야서에서:
네 어린 아이들의 혼을 위해 네 손을 들어올려라, 이 아이들이 모든 거리들의 머리에서 굶 주려 실신하고 있다 (애. 2:19);
“굶주림”은 지식들의 결핍을 표시한다; “거리들”은 진리들이다. 에스겔서에서:
그들은 확신을 갖고 거주할 것이다, 그리고 아무도 두려워함을 만들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들을 위해 명성있는 식물을 일으킬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토지에서 기근으로 소멸 되지 않을 것이다 (겔. 34:28, 29),
위는 그들이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들의 결핍을 더 이상 만들지 않을 것이다를 표시하고 있다.
계시록서에서:
그들은 더 이상 배고프지도, 목마르지도 않을 것이다 (계. 7:16);
주님의 왕국에 관련하여서 인데, 거기서 모든 천적 (평면의) 지식들과 선들이 풍부하다는 것이 “배고프지 않다”이고, 모든 영적 (평면의) 지식들과 진리들이 풍부하다는 것이 “목마르지 않다”이다. 마찬가지로 요한복음서에서 주님께서 이야기하신다:
나는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자는 결코 배고프지 않고, 나를 믿는 자는 결코 목마르지 않다 (요. 6:35).
그리고 누가복음서에서:
지금 배고픈 자는 복 있다, 그 이유는 그가 채워질 것이기 때문이다 (눅. 6:21).
그리고 다시:
그분은 선한 것으로 배고픈 자를 채우셨다 (눅. 1:53);
위는 천적인 선들과 그것들에 관한 지식들이 취급된다. “기근”이 지식들의 부족을 의미하는 것은 아모스서로부터도 분명해진다:
잘 보라, 날들이 오고 있다, 내가 토지에 기근을 보낼 것이다; 빵 때문의 기근이 아니다, 물 때문의 목마름도 아니다, 그러나 여호와의 말씀을 듣는 것 때문의 기근이다
(이. 8:11, 12).

그리고 아브람은 체류하기 위해 이집트로 내려갔다. 이는 말씀으로부터의 지식들에 대해 가르쳐짐을 의미한다. 이는 “이집트”와 “체류함, sojourning”의 의미로부터 분명해진다. “이집트”는 지식들 중의 기억 속의 지식을 의미하고, “체류함”은 가르쳐짐을 의미하는 것을 이제 살핀다. 주님은 그분의 어린 시절에서 여느 사람들 같이 가르쳐졌음을 누가복음을 통해 알 수 있는데, 본문 9절을 살필 때 인용한 구절에서 살핀 바 있다. 그리고 방금 위에서 외적 인간에 관해 말해진 바로부터, 즉 외적 인간은 지식들을 수단으로 하지 않으면 내적 인간에 일치하여 상응하는 쪽으로 변형시킬 수 없다는 것이다. 외적 인간은 육체적이고 감각적인 바, 지식들이 외적 인간 안에 심어지지 않으면 천적, 영적 (평면의) 어떤 것들을 수용하지 못한다. 지식이 지면의 역할을 하는 셈일 것이다. 이 지식 안에서 천적, 영적인 것들은 그것들을 받을 그릇을 발견한다. 그러나 이 지식들은 말씀으로부터 있어야만 한다. 말씀으로부터의 지식들은 주님 자신의 접근을 위해 열려져 있다; 그 이유가 말씀 자체가 주님으로부터 천국을 통하여 있고, 주님 자신이 말씀의 일반적, 세부적 모든 것들 안에 계시기 때문이다. 물론 말씀의 외적 형체상에서는 이것이 드러나 있지 않다. 이로부터 알게 되는 바, 주님은 그분의 어린 시절 자신에게 말씀에 관한 지식 외의 다른 지식을 흡수하는 것을 원하지 않으셨다는 것, 이를 달리 말하면, 이 지식은 주님은 (장차) 자신이 결합하고 하나되기로 되어있는 그분의 아버지 여호와로부터 그분에게 열려있었다는 말이다. 여기에 더 보태어, 말씀은 주님을 중심으로 하여 말해지고 있다는 것, 그분으로 맨 먼저 와지지 않은 말씀은 하나도 없다는 것도 말씀의 지식만을 흡수하신 이유일 것이다; 그 이유가 주님의 인간 본질은 영원으로부터 있는 신성 본질에 첨가된 어떤 것일 뿐이기 때문이다.

주님에 관련하여 “이집트”는 지식들 중의 기억 속의 지식(기본적 생각들, 개념들로부터의 지식)이다, 그러나 주님 외의 모든 인간에게 관련하여서는 일반적 측면에서의 기억 속의 지식(사실에 입각한 지식)인데, 말씀에 있는 그것의 의미로부터 분명해진다. 고대 교회는 이집트에 있었을 뿐만 아니라 다른 많은 장소에도 있었다. 그리고 이 교회가 거기 있었을 때, 기억 속의 지식들은 다른 어떤 것들보다 더욱 번창했다; 이로부터 이집트에 의해 기억 속의 지식이 의미되었다. 그러나 사람들이 기억 속의 지식을 수단으로 신앙의 신비 안으로 들어가기를 원했을 때, 그리고 자신들의 힘으로 신성의 신비들의 진리를 탐사하고 싶었을 때, 이집트는 마술에 탐닉하였고, 왜곡된 기억 속의 지식 속의 것들을 의미했다. 이로부터 거짓들이 왔고, 이 거짓들이 악들을 오게 했다. 이것은 이. 19:11에서도 분명해진다.
유용한 기억 속의 지식들이 “이집트”에 의해 의미되는 것, 즉 본문에서의 지식들 중의 기억 속의 지식은 천적, 영적 (평면의) 것들을 위해 그릇으로 봉사할 수 있다는 것을 아래 구절로부터도 분명하다. 이사야서에서:
그들은 이집트를, 지파들의 모퉁이돌을 꼬드겼다 (이. 19:13),
위에서 이집트가 “지파들의 모퉁이돌”이라 불리운다. 이집트는 지파들로 의미되는 것인 신앙으로부터 있는 것들을 받쳐주는 섬김을 한다. 다시:
그 날에 이집트의 토지에 가나안의 입술로 말하는 다섯 성읍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여호 와 체바욷에게 맹세한다; 각각이 태양의 성이라 불리울 것이다. 그 날에 이집트 토지의 한 가운데 여호와에 대한 제단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거기로부터의 경계에 여호와께 대한 기 둥이 있을 것이다. 이것은 이집트의 토지에서 여호와 체바욷에게 증거와 표시일 것이다; 그 이유가 그들은 압제자 때문에 여호와께 외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분은 그들에게 구 세주와 왕자를 보낼 것이다, 그리고 그분은 그들을 구원할 것이다; 그리고 여호와께서는 이 집트에 알려질 것이다, 그리고 이집트인들은 그 날에 여호와를 알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제물과 식사 제물을 바칠 것이다, 그리고 여호와께 서원할 것이고, 그것을 수행할 것이다. 그리고 여호와께서 이집트를 치실 것이고 치료하실 것인 바, 그들은 여호와께로 되돌아오 고, 그리고 그분은 그들로부터 간청을 받으시고 그들을 치료하실 것이다 (이. 19:18-22).
위 구절은 이집트가 좋은 의미에서 말해진다, 그리고 기억 속의 지식들 안에 있는 이들을 표시한다, 즉 영적 진리들의 그릇인 자연적 진리들 안에 있는 이들을 표시한다.
다시:
그 날에 이집트로부터 앗시리아로 가는 길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앗시리아는 이집트로 올 것이다, 그리고 이집트는 앗시리아로 갈 것이다, 그리고 이집트인들이 앗시리아를 섬길 것 이다. 그 날에 이스라엘은 이집트 앗사리아와 더불어 세 번째 일 것이다, 그리고 토지의 한 가운데에서 축복될 것이다, 여호와 체바욷께서 복 주시는데, 말하시기를, 내 백성 이집 트여, 그리고 내 손의 일, 앗시리아여, 그리고 내 상속분 이스라엘아, 복 있으라
(이. 19:23-25).
위에서 “이집트”는 자연적 진리에 관한 기억 속의 지식; “앗시리아”에 의해서는 이성, 또는 합리적인 것들; “이스라엘”에 의해서는 영적인 것들이 의미되어진다; 이 셋은 각기 서로를 계승한다; 그러므로 “그 날에 이집트로부터 앗시리아로 가는 길이 있을 것이다”라고 말해진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이집트와 앗시리아와 더불어 세 번째 일 것이다”라고 말해진다.
에스겔서에서:
이집트의 수놓아 만든 고운 아마포가 너의 펼침(돛, expansion)이었다, 그리하여 그것을 너는 기(ensign)로 삼았다 (겔. 27:7);
위는 두로에 관하여서이다. 이를 수단으로 (종교적) 지식들의 소유가 의미되어 있다; “수놓아 만든 고운 아마포”는 섬김을 수행하는 기억 속의 지식들로부터의 진리들을 표시한다; 그 이유가 외적 인간 속에 있는 기억 속의 지식들은 내적 인간을 섬겨야 하기 때문이다. 다시:
그런고로 주 여호비께서 말하신다, 40년의 끝에서 나는 흩어져있었던 백성들로부터 이집트 를 모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이집트의 포로를 되돌릴 것이다 (겔, 29:13, 14);
위는 유다와 이스라엘에 관해 많은 장소에서 말해진 것들과 같은 대목이다, 즉 그들은 포로됨에서 되돌리고 백성들로부터 모아질 것이다는 말이다. 스가랴서에서:
왕 여호와 체바욷을 예배하러 예루살렘에 올라오지 않는 땅의 어떤 가문이든, 그들에게 비 가 오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만일 이집트의 가문이 가지 않고, 오지 않고 한다면…
(슥. 14:17, 18);
위 구절은 좋은 의미에서 이집트에 관하여서이다, 그리고 이를 수단으로 같은 것이 뜻해진다.
기억 속의 지식, 또는 인간의 지혜가 “이집트”에 의해 의미되는 것이 다니엘서에서도 의미되어진다, 거기서 천적, 영적 (평면의) 것들에 관한 기억 속의 지식들이 “금과 은의 감추인 것들”이라 불리운다, 또한 “이집트의 탐나는 것들”이라 불리운다 (단. 11:43). 그리고 솔로몬에 관해서, “그의 지혜는 동쪽의 모든 아들들의 지혜를, 이집트인들의 모든 지혜를 능가했다”라고 말해진다 (왕상. 4:30). 바로의 딸을 위해 솔로몬이 지은 집 역시 같은 것을 표현했다 (왕상. 7:8, 그 이하 구절).
주님이 유아이셨을 때 그분이 이집트에 데려가졌다는 것은 본문에서 아브람에 의해 의미되는 것과 같다; 그리고 이것은 그분이 그분에 관해 표현되어 왔던 모든 것을 완성하시기 위한 추가적인 이유를 위해 거행되었다. 가장 깊은 의미에서 야곱과 그의 아들들이 이집트로 이주함은 주님께서 말씀으로부터의 지식들로 첫 가르침을 받음을 표현했다. 이는 이어지는 구절로부터 분명해진다. 마태복음서에서 주님에 관해 이렇게 말해진다:
주의 천사가 꿈에서 요셉에게 나타났다, 말하기를, 일어나라, 그리고 어린 아기와 그의 어 머니를 챙겨라, 그리고 이집트로 피신하라, 그리고 너는 내가 말할 때까지 거기 있으라. 그 리고 밤중에 그는 일어나서 어린 아기와 그의 어머니를 챙겼다, 그리고 이집트로 떠났다, 그리고 헤롯이 죽을 때까지 거기 있었다; 이는 예언자에 의해 말해진 것, 말하기를, 이집트 로부터 나는 내 아들을 불렀었다 (마. 2:13-15, 19-21);
이것에 관해 호세아서에서 말해진다:
이스라엘이 아이였을 때 나는 그를 사랑했다, 그리고 이집트로부터 내 아들을 불렀다
(호. 11:1);
위로부터 분명한 바, “아이 이스라엘”이 주님을 뜻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분의 어린 시절, 그분이 가르침을 받으셨음이 “나는 이집트로부터 내 아들을 불렀다”에 의해 뜻해진다.
다시 호세아서에서:
예언자를 수단으로 주님은 이스라엘을 이집트로부터 올라가게 하셨고, 예언자를 수단으로 그는 보존되어졌다 (호. 12:13, 14);
위에서도 “이스라엘”에 의해 주님이 뜻해진다; “예언자”에 의해 가르치는 이가 뜻해진다, 그런고로 지식들 속의 교리를 의미한다. 다윗서에서:
우리에게 다시 돌아서소서, 오 하느님 체바욷이여, 당신의 얼굴로 빛을 내게 하소서, 그리 고 우리는 구원될 것입니다. 당신은 이집트로부터 포도나무를 가져오시고, 당신은 나라들을 몰아내십니다, 그리고 그것(포도나무)을 심으십니다 (시. 80:7, 8);
위에서도 주님이 취급되신다, 그분이 가르침을 받으셨던 지식들에 관련하여 “이집트로부터의 포도나무”라고 불리신다.

“체류하는(sojourn)” 것이 가르쳐지는 것을 뜻하는 것은 말씀에서 체류함의 단어가 가르쳐짐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체류함과 이주함, 또는 여기저기로 옮겨다님은 천국에서는 상태의 변화이기 때문이다. 이는 이미 살폈다; 그러므로 여행함, 체류함, 여기저기로 이사함이 말씀에 발생할 때는 언제든지, 천사들에게 암시되는 것은 자기들의 상태가 바뀌고있다 이다; 이 바뀜은 생각과 애착 모두에서 이다; 생각의 바뀜은 지식들이다, 그리고 영들의 세계에서 생각의 바뀜은 가르침들을 수단으로 표출되어진다; 이것은 또한 천사들의 천국과 교류했던 태고 교회인이 체류함을 수단으로 위와 같이 지각했던 이유였다. 우리 앞의 본문, 즉 아브람이 체류하러 이집트로 내려감은 주님의 가르치심을 의미했다.
비슷한 또 하나는, 야곱과 그의 아들들이 이집트로 내려감이다; 이사야서에서:
그러므로 주 여호비께서 말하셨다, 내 백성은 시작에서 이집트에 체류하려고 거기에 내려 갔다; 그리고 앗시리아는 원인 없이 그들을 압제했다 (이. 52:4);
위에서 앗시리아는 추론(또는 허울만 좋은 논리)을 의미한다. 이로부터 역시 유대인들의 교회에서, 가르침을 받는 이들을 “체류자, 그들 한 가운데 체류함”이라 불렀는데, 이들에 관해 그들을 본토박이로 대해주어라 라고 명령되었다 (출. 12:48, 49; 레. 24:22; 민. 15:13-16, 26, 29; 19:10). 그들에 관해 에스겔서에서 쓰여있는 바:
너희는 이 토지를 이스라엘의 지파들에 따라서 너희에게 나눌 것이다. 그리고 너희는 이것 을 제비로 뽑아 나눌 것이다, 그 이유가 너희와 너희 사이에 체류하는 체류자에게 상속되 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은 이스라엘의 아들들 사이에서 본토박이로서 너희에게 있을 것 이다; 너희와 더불어 그들은 이스라엘의 지파들의 사이에 있는 상속분을 위해 제비를 던질 것이다; 그리고 체류자가 체류하는 지파의 것에서 그에게 그의 상속분을 줄 것이다
(겔. 47:21-23).
위는 새 예루살렘, 또는 주님의 왕국에 관하여서 이다; “체류자가 체류함”에 의해 가르치지게 자신들을 허용하는 이들, 즉 이방인들이 뜻해진다; 가르쳐지는 이들이 뜻해지는 것은 그가 체류한 지파 안에서 그는 자기 상속분이 주어진다고 말해진 것에서 분명해진다; “지파들”은 신앙으로부터 있는 것들을 표시한다.
“체류함, sojourning”은 “여행함, journeying”과 “거주함, dwelling”과 같은 의미를 가진다. “여행함”에 의해서는 삶의 배열과 질서, 그리고 “거주함”에 의해서는 사는 것이 의미된다. 이렇기 때문에 가나안의 토지는 아브라함, 이삭, 야곱이 체류하는 토지라고 불리운다 (창. 28:4; 36:7; 37:1; 출. 6:4); 그리고 야곱이 바로에게 말했다:
내 체류함들의 햇수의 날들, 내 삶의 햇수들의 날들은 적고, (험)악했다, 그리고 그것들은 (나의 햇수의 날들은) 그것들의 체류함의 날에서 내 아버지의 삶의 햇수들에 도달하지 못 했다 (창. 47:9);
위에서 “체류함”은 삶과 가르쳐짐을 표시한다.

기근이 토지에 극도로 심했기 때문. 이는 그분이 외적 인간 측면에서 매우 부족함을 의미하는데, 이는 “기근”의 의미로부터 분명해지는데, 앞에서 살폈다 [1460항]. 이 대목에는 간략히 말하기에는 벅찬 너무나 많은 신비들(arcana)을 내포하고 있다. 주님은 여느 사람보다 월등히 뛰어난 학습력을 가지셨다; 그러나 여느 사람과 달리 그분은 영적 (평면의) 것들에 관해 가르쳐지기 앞서 천적 (평면의) 것들에 가르치쳐지셔야 했는데, 이것이 여기서 선포되고 있다; 그리고 또한 추가되는 이유는, 그분의 외적 인간에 있는 어머니로부터의 유전적 악 때문이었다. 또한 다른 이유들도 무수하다.

11절. 아브람이 이집트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가 되자, 그는 아내 사래에게 말하기를, 보라 나는 당신이 쳐다보기에 아름다운 여자이다 라고 알고 있다.

그리고 아브람이 이집트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가 되자. 이는 그분이 배우기를 시작하셨을 때를 의미하는 것은 “이집트”의 의미가 지식들 중의 기억 속의 지식이다로부터 분명해진다; 그리고 “가까이 이름”이라는 표현이 이것에 관련되어 사용되어질 때, 이외 더 다른 뜻은 없다.

“이집트”가 지식 중의 기억 속의 지식이다는 것은 앞 절에서 이집트에 관해 말하고 보여준 것으로부터 분명해진다.

그가 그의 아내 사래에게 말했다. 이는 진리들이 천적인 것들에 인접되어져야 하는 바, 그분께서도 그렇게 생각하셨음을 의미한다. 이는 그녀가 아내로서 불리울 때의 사래의 의미로부터 분명해진다. 말씀의 내적 의미에서 “아내”는 선과 결합한 진리 외에 더 다른 의미는 없다; 그 이유가 선과 진리의 결합은 결혼과 정확히 같은 상황이기 때문이다. 말씀에서, “남편”이 언급될 때, 남편은 선을 의미하고, 아내는 진리를 의미한다; 그러나 그가 남편이 아니고 “사람, man”이라 불리울 때, 그는 진리를 , 그의 아내는 선을 의미한다; 이것은 말씀에서 변동 없이 사용되고 있다. 이 장에서는 아브람이 이름으로 불리우는 바, 그의 아내 사래는 진리를 의미한다. 그런고로 사래, 그의 아내에게 말하는 것은 내적 의미에서 진리는 천적인 것들에 결합되어야 한다고 진리에 관해 생각하는 것이다. 이집트로 여행할 때, 아브람이 그의 아내에게 말했다는 것은 역사적으로도 진정한 사실이다; 그러나 앞서 말했듯이, 말씀의 모든 역사적 사건들은 표현적이다, 그리고 모든 말들은 의미를 지닌다. 말씀의 사건 기록들, 순서들, 말들 모두는 내적 의미에서 있는 이런 신비함들을 표현해놓기 위해 있다.

아내로서의 “사래”가 주님 안에 있었던 천적인 것들에 인접되어 있었던 진리이다는 것은 방금 말해진 바 같이 그의 아내 사래에 관한 의미로부터 분명해진다. “천적인 것에 인접되어 있었던 진리”라고 말해지는 이유는 주님께서는 그분의 가르치심이 있기 전에 모든 진리를 이미 가지셨기 때문이다. 천적인 것이 그것과 더불어 진리를 가지고 있다는 것, 이것이 저것과 분리할 수 없는 것은 마치 불과 불꽃의 관계와 같다; 그러나 이 진리는 주님의 내적 인간 안에 저장되어져 있고, 이것은 신성이었다. 그분이 배우신 지식들은 진리들이 아니고, 오직 받는 그릇일 따름이다; 인간의 기억 안에 있는 것은 무엇이든 비록 진리라고 불리울지라도 진리가 결코 아니다; 그러나 진리는 그릇에 담기듯 그 안에 있다. 이 그릇들은 말씀으로부터의 지식들로 가르쳐짐을 통하여 주님에 의해 만들어 내진다. 아마 열려진다고 하는 편이 더 나은 설명일지 모른다; 천적인 것들이 그것들 안으로 주입될 뿐만 아니라, 이 방법 안에서 천적인 것들이 신성으로 만들어진다; 그 이유가 주님은 그분의 인간의 것들도 신성과 마찬가지로 만들어지도록 하시기 위하여 신성 본질에 인간 본질을 결합하셨기 때문이다.

보라, 나는 당신이 쳐다보기에 아름다운 여자이다 라고 알고 있다. 이는 천적 근원으로부터의 진리는 기쁘다(delightful)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는 “쳐다보기에 아름다운 여인”의 의미로부터 분명해진다. 천적인 모든 진리, 또는 천적인 것으로부터 생산되는 것은 내적 인간 안에서 행복이고, 외적 인간 안에서 기쁘다, 그리고 천적 (평면의) 천사들도 그렇게 지각된다; 그러나 천적 근원으로부터 있지 않을 경우, 정반대이다. 내적 인간 안에는 두 종류의 행복함이 있다. 이것에 외적 인간에 있는 두 종류의 기쁨이 상응한다; 하나는 선으로부터 이다, 다른 하나는 진리로부터 이다; 천적(평면의) 행복과 기쁨은 선으로부터 있고, 영적 (평면의) 행복과 기쁨은 진리로부터 있다. 잘 알려진 사실은 진리 자체는 행복과 기쁨에 (당연히) 동행되어진다는 말이다. 그러나 이러려면 진리가 천적인 것으로부터 있어야함이 필수이다. 그 이유가 진리 자체가 천적 수준이 되어 천적인 진리라고 불리어야 하기 때문이다. 비교적으로 말하면, 진리는 봄철의 태양의 빛 같아서, 이 빛은 그 안에 열을 가지고 있어, 이로부터 지상 의 모든 것들은 생장하고 마치 동물들이 움직이듯 하게 한다. 이 천적 진리가 아름다움 자체이고, 이것이 본문에서 “쳐다보기에 아름다운 여인”이라 불리운 진리이다. 이 말들에 더 많은 신비함들(arcana)이 있음은 이어지는 것으로부터 명백해질 것이다.

12절. 그리고 한참 후 이집트인들이 당신을 보았을 때, 그들은 말하기를 이것은 그의 아내이다, 그리고 그들은 나를 죽일 것이다, 그리고 당신은 살려 둘 것이다.

한참 후 이집트인들이 당신을 보게 되었을 때. 이는 지식들 중의 기억 속의 지식을 의미하고, 이것이 천적인 지식들을 볼 때에 어떨 것인지에 관하여 묘사하고 있는데, 이는 “이집트”의 의미가 지식 중의 기억 속의 지식이다로부터 분명해진다. 이 의미는 이미 살폈다. 그리고 이로부터 “이집트인들이 볼 때” 라는 말에 의해 의미되는 것, 즉, 이 기억 속의 지식은 이 절에서 묘사되어지는 것과 같다는 것이 분명해진다. 지식들 중의 기억 속의 지식은 지상적인 요소와 동반하는데, 이는 이제 배우기를 시작한 어린이들을 연상하면 명백해진다. 즉, 그들은 더 (수준) 높은 것들이 있으면, 더 그것을 바란다; 그리고 더 나아가 그것들이 천적이고 신성이었다는 것을 들을 때 더욱 바란다. 그러나 이 기쁨은 지상적(자연적)인 바, 외적 인간으로부터 있는 욕구(dssire)로부터 발생될 뿐이다. 여느 사람들과 더불어 이 욕구는 당사자에게 어떤 더 이상의 목적 없이 단지 지식들 중의 기억 속의 지식에서만 기쁨을 느끼게 한다; 이럴 때에도 지식들 중의 기억 속의 지식은 그것의 목적을 위해 사용을 가지는 도구적인 매체밖에 더 아니다, 즉 지식들은 천적, 영적 (평면의) 것들을 위해 그릇이 되어 섬기는 것밖에 더 아니다; 그리고 그것들이 이런 섬김에 있을 때, 그것들은 처음동안 그것들의 사용됨에 있어 그 사용으로부터 그들의 기쁨을 받는다. 아마 조금 관심을 집중하면 누구나 아는 것은, 지식들 중의 기억 속의 지식 자체는 이를 수단으로 인간이 합리적, 영적, 결국 천적으로 되어가는 수단이다는 것; 그리고 이 지식을 수단으로 외적 인간이 내적 인간에 인접될런지 모른다; 그리고 이 인접(접촉)이 행하여질 때, 기억 속의 지식은 사용 자체 안에, 즉 그것의 진정한 목적을 섬기는 것이다. 내적 인간 자체가 중요시하는 것은 쓸모 있음의 여부이다. 이런 이유로 주님께서도 어린 시절과 청년기에 기억 속의 지식들에서 지각하는 기쁨을 주입하신다. 그러나 인간의 경우, 그가 기억 속의 지식들만에서 자기의 기쁨이 있는 것으로 만들기를 시작할 때, 그를 끌어가버리는 것은 육체적 욕구(desire, 탐욕, cupidity)이다. 그가 기억 속의 지식에만 자기의 기쁨이 있다고 하는 쪽으로 끌려가는 정도에 비례하여 그는 자신을 천적인 것으로부터 옮겨 놓는다, 그리고 똑같은 비례에서 기억 속의 지식은 (인간을) 주님으로부터서 멀어지게 하여 물질적 인간이 되어진다. 이와 다른 쪽, 기억 속의 지식이 쓸모 있음을 위해 사실들을 배우고 있다면, 말하자면, 인간 공동체를 위해, 주님의 교회를 위해, 천국들에 있는 주님의 왕국을 위해, 더 나아가 주님 자신을 위해서이다면, 그것들은 그분을 향하여 열려져 있다. 이렇기 때문에, 천사들 역시 기억 속의 지식(모든 종교적 지식)을 소유하는데, 이 지식은 아주 광범위해서 지상의 인간의 납득력으로는 거의 가능할 수 없는 정도이지만, 그런 지식들이라 해도 쓸모 있음과 견준다면 아무 것도 아닌 것이 되고 만다. 이상의 설명으로부터, 본문의 말, “이집트인들이 당신을 보게 될 때, 그들이 이것은 그의 아내이다라고 말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나는 죽일 것이다, 그리고 당신은 살려 놓을 것이다”에 의해 의미되는 것을 알런지 모른다. 이런 대목들이 말해진 이유는 주님이 어렸을 때 이것(위에 설명한 것)을 아셨고, 이 방법에서, 즉 만일 그분이 지식들 중의 기억 속의 지식 (자체)만을 바라심으로 해서 끌려가 버렸다면, 이 기억 속의 지식은 천적인 것들을 위한 그 이상의 것에는 관심이 없고, 오직 기억 속의 지식을 위한 욕구가 끌고 가버리는 지식들에만 관심을 두셨을 것이다. 이 주제들은 더 이어진다.

그리고 그들이 말할 것이다, 이것은 그의 아내이다. 이는 그들이 지식(개념)들을 천적이라 부를 것이다를 의미하는데, 이는 “아내”의 의미가 천적인 것들에 인접되어져 온 진리이다로부터 분명해진다; 이로부터 “이것은 그의 아내이다”는 천적인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들은 나를 죽일 것이다, 그리고 당신은 살게 만들 것이다. 이는 그들이 천적인 것들에 관심이 없고, 단지 지식들에만 관심이 있다를 의미하는데 이는 위에 설명된 바로부터 알 것이다.
13절. 바라건대, 당신이 나의 누이이다 라고 말하면 그들은 자기들의 목적을 위하여 나를 잘 대접할 것이고 내 혼도 당신 때문에 살 것이다. “바라건대 당신이 나의 누이이다 라고 말하라”란 “누이, sister”인 지적인(intelluctual, 또는 직관적인, intuitive) 진리를 의미한다. “자기들의 목적 때문에 나를 잘 대접할 것이다”란 그렇게 해서 천적인 것은 그것에 행해진 폭행(violence, 왜곡함)을 가질 수 없었다를 의미한다. “내 혼이 당신 때문에 살 것이다”란 그렇게 해서 천적인 것은 보존되어질 수 있었다를 의미한다.

라건대, 당신이 나의 누이이다 라고 말하라. 이는 “누이”인 지적인 진리를 의미하는 것은 천적인 진리가 “아내”일 때, “누이”는 지적인 진리를 의미함으로부터 분명해진다. 이를 더 살펴보자: 천적인 것들 안으로 자체를 이끌어 들이고 그것들을 탐구하는 것 외에 더 이상 바라지 않는 것이 기억 속의 지식의 본성이다; 그러나 이것은 질서에 반대이다, 그 이유가 천적인 것들에 폭행을 행하기 때문이다. 질서 자체는 천적인 것이 영적인 것을 수단으로 자체를 합리적인 것 안으로 이끌어 들이고, 그리고 기억 속의 지식 안으로 들어가는 것, 그리하여 천적인 것에 기억 속의 지식을 순응되게 하는 것이다. 이 질서가 준수되지 않으면, 어떤 지혜도 가능해질 수 없다. 이 구절에도 역시 신비함들(arcana)이 있다, 즉 어떻게 주님이 모든 질서에 따라 그분의 아버지에 의해 가르쳐지셨는가; 그리고 어떻게 그분의 외적 인간이 그분의 내적 인간과 결합되셨나, 즉 어떻게 그분의 외적 인간이 내적 인간 같은 신성으로 만들어지셨는가; 그런고로 어떻게 그분이 각 본질 측면에서 여호와가 되셨는가; 이는 수단들인 지식들을 수단으로 행해졌다는 것이다. 수단으로서 지식들 없으면 (각 개인의) 외적 인간 역시 인간조차 되어질 수 없다.

자기들의 목적을 위하여 나를 잘 대접할 것이다. 이는 그렇게 해서 천적인 것은 그것에 행해지는 폭력(왜곡, 남용)을 가질 수 없었다를 의미하는데, 이는 위에 말해진 바로부터 분명해진다; 그 이유가 반복적으로 말했듯이, 질서는 천적인 것이 영적인 것 안으로, 영적인 것이 합리성 안으로, 그리고 이것이 기억 속의 지식의 능력 안으로 내려가는 것이다. 이 질서에 있을 때, 영적인 것은 천적인 것에 적합해지고, 합리성은 영적인 것에 적합해지고, 기억 속의 지식은 합리성에 의해 적합해진다. 이때 기억 속의 지식은 대체로 최말단의 그릇이 된다; 또는 같은 말로, 기억 속의 지식들, 특별하게 그리고 세부적으로 합리적인 것들에 상응하는 최말단 그릇이 되고 합리적인 것들은 영적인 것에, 영적인 것들은 천적인 것에 상응하는 최말단 그릇이 된다. 이 질서에 있을 때, 천적인 것들은 어떤 폭행(왜곡, 남용)도 당하지 않는다. 이 질서가 아니면 천적인 것들은 (피해를) 입는다. 여기서의 내적 의미에서는 주님의 가르치심이 취급되는 바, 그분의 발전하시는 방법이 여기서 묘사되어 있다.

내 혼은 당신 때문에 살아있게 될 것이다. 이는 그런고로 천적인 것들이 보존될 수 있다를 의미하는데, 이는 “혼”의 의미가 천적인 것이다로부터 분명해진다; 그 이유가 천적인 것은 혼 자체, 생명 자체이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내 혼은 당신 때문에 살아있게 될 것이다”라는 말에 의해 의미되는 것이 분명해진다. 이는 이어지는 것에서 분명해지는데, 즉 천적, 또는 신성한 것들은 주님이 시험을 견뎌내시어서 어머니로부터의 유전된 악을 추방할 때까지 하나의 본질을 만들도록 주님에게 인접되어 있지 않았다는 것이다. 여기서와 다음 절에서 (그분이 시험을 견디고 악을 추방하시는) 그 동안에서 어떻게 (그분의) 천적인 것들이 해를 입지 않고 보존되었는지가 묘사되어 있다.

14절. 그리고 아브람이 이집트에 왔었을 때이다. 이집트인들은 여인을 보았는데, 그녀는 매우 아름다웠다. “아브람이 이집트에 왔었을 때이다”란 주님께서 가르침을 받기 시작하셨음을 의미한다. “이집트인들이 여인을 보았는데 그녀는 매우 아름다웠다”란 지식들 중에서 기억 속의 지식은 그 자체에 대단히 기뻐하는 본성이 있음을 의미한다.

아브람이 이집트에 왔었을 때이다. 이는 주님께서 가르침을 받기를 시작하셨음을 의미하는데, 이는 아브람이 주님의 어린 시절을 내적 의미에서 표현한다로부터 분명해진다; 그리고 “이집트”의 의미가 지식들 중의 기억 속의 지식이다로 부터도 분명해진다. 기억 속의 지식과 이집트는 10절에서 이미 살폈다. 이로부터 “이집트에 옴”이 가르쳐지는 것을 뜻함이 분명해진다.

그리고 이집트인들이 여인을 보았는데, 그녀는 매우 아름다웠다. 이는 지식들 중의 기억 속의 지식은 그 자체에 대단히 기뻐하는 본성이 있다는 것은 11절에서 이미 말한 바로부터, 즉 기억 속의 지식의 본성은 어린 시절과 같다는 것이다; 대단히 기뻐해지는 본성은 기억 속의 지식 안에 마치 선천적인 듯 하여 있다, 그 이유는 이것이 인간 안에 선천적으로 있기 때문인데, 그것의 처음 순간에 아는 것 외의 더 다른 목적은 없는 듯 하여 더 이상 바라는 것도 없는 듯 하여 있다. 이는 모든 인간의 경우도 마찬가지 이다; 그의 영은 아는 것에 크게 기뻐한다, 그리하여 더 이상 어떤 것도 바라지 않을 듯 하여 있다; 앎은 영의 식품이다, 이를 수단으로 유지 지탱하고 새로워진다, 마치 외적 인간이 지상적 식품을 수단으로 하는 것과 같다. 그의 영의 것에 속하는 자양물은 외적 인간과 교통되어지는데, 그 목적은 (외적 인간을) 내적 인간에 순응시키기 위해서이다. 다양한 식품들은 다음 질서로 서로에게 계속 된다: 천적인 식품은 주님으로부터의 사랑의 모든 선과 선행이다; 영적인 식품은 신앙으로부터의 모든 진리이다; 이 식품 가지고 천사들은 살고 있다; 그리고 그들로부터 천적, 영적 식품이 출시된다, 그러나 보다 낮은 천사들의 수준에 속하고 이것 가지고 천사 같은 영들이 살고 있다; 이로부터 다시 더 낮은 천적, 영적 식품이 온다, 이것은 이성에 속하는 것, 그리고 이로부터 기억 속의 지식에 속한 것이 오고, 이것 가지고 영들이 살고 있다; 마지막으로 육체의 식품이 온다 이것은 인간이 육체에서 사는 동안 적절한 식품이다. 위 식품들은 경이한 방법에서 서로에게 상응한다. 이로부터 또한 분명해지는 바는, 왜, 그리고 어떻게 기억 속의 지식은 그 자체에 매우 기뻐하는지 이다; 그 이유가 그것과 더불은 경우는 마치 식욕과 맛의 경우와 똑같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간과 더불은 먹는 것은 영들의 세계에서 기억 속의 지식에 상응한다; 그리고 식욕과 맛 자체는 이 지식을 바램과 상응한다; (나에게) 이것들은 경험으로부터 분명해졌는데, 이 후 주님의 신성한 자비로부터 이에 관해 말할 것이다.

15절. 바로의 대신들이 그녀를 보고 바로에게 그녀를 칭찬했다. 그래서 여인은 바로의 집에로 데려가졌다.

바로의 대신들이 그녀를 보았다. 이는 제일가는 지각들을 의미하고, 이것이 “바로의 대신들”이다는 것은 “대신들”과 “바로”의 의미로부터 분명해진다. 말씀의 역사적, 예언적 모두에서, “대신, prince, 제 1인자, 왕자”는 제일가는 것들을 의미한다; 그리고 “바로”는 “이집트”와 같은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여기서는 “이집트”, 또는 “바로”가 최상의 의미에서 사용되는데, 그 이유는 주님께서 어린 시절 처음 획득하신 지식들 중의 기억 속의 지식을 서술하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말씀으로부터의 제일가는 지각들이었다는 것은 내적 의미에서 이런 것들의 의미로부터 분명해진다. 일반적으로 말하면, 말씀에서 “바로”에 의해 “이집트”와 같은 것을 의미하는 것은 많은 구절들로부터 확증해볼 수 있다; 또한 다른 왕국의 왕의 경우도 그 왕국의 이름에 의한 의미와 같은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대신, 제 1인자”에 의해서는 그것들의 제일가는 것들이 의미되어진다. 이사야서를 보자:
소안의 제 1인자들, 바로의 슬기로운 조언자들; 어떻게 바로에게 나는 슬기로운 자의 아들, 옛 고대의 왕들의 슬기로운 아들이다 하고 말하겠느냐? 소안의 제 1인자들은 어리석어지 고, 놉의 제 1인자들은 현혹당했다 (이. 19:11, 13).
여기서 “소안의 제 1인자들”, 그리고 “바로의 슬기로운 조언자”은 제일가는 기억 속의 지식들을 표시한다; 그리고 지혜가 이집트에서 처음 융성해졌을 때, 앞에서 말했듯이, 그것은 “슬기로운 자의 아들”, 그리고 “고대의 왕들의 아들”이라 불리운다. 그렇게 “제 1 인 자들”은 말씀에서 제일가는 것들을 표시한다.

그리고 그들은 바로에게 그녀를 칭찬했다. 이는 그들이 기뻐해졌음 인데, 설명 없이도 알 것이다.

그리고 여인은 바로의 집으로 데려가졌다. 이는 그들이 더 낮은 마음에 매혹되었음을 의미하는데, 이는 “여인”, 그리고 “집”의 의미로부터 분명해진다. “여인”은 진리를 의미하는데, 여기서는 주님께서 어린 시절에 매혹되어 기뻐하신 기억 속의 지식들 안에 있었던 진리를 의미한다. 진리로부터의 기쁨들은 “누이”에 의해 의미되는 지적인 진리로부터 오는 것들이다. “집”은 인간 안에 있는 것들, 특별히 그의 의지로부터 있는 것들을 의미하는데, 이는 살폈다; 여기서는 그러므로 더 낮은 마음으로부터 있는 것들, 아는 것과 배우는 것에 대한 애착으로부터 있는 것들이다.

16절. 그래서 바로는 그녀 때문에 아브람에게 잘 대해 주었다. 그래서 아브람은 양떼와 목축, 그리고 수나귀들과 남종들, 그리고 여종들과 암나귀들, 그리고 낙타들을 가졌다.

그리고 바로는 그녀 때문에 아브람에게 잘 대해 주었다. 이는 기억 속의 지식들이 주님과 더불어 불어나졌음을 의미하는데, 이는 “잘 대해 줌”의 의미가 풍부해짐(enrich)이다로부터 분명해진다. 이는 바로에 의해 의미되어진 기억 속의 지식에 관해서, 이 지식이 아브람, 즉 어린 시절 주님에게 잘 대해 주었다 라고 말해진다; 그리고 이것이 그녀 때문에, 즉 그분이 바라셨던 지적인 진리 때문이었다. 진리를 바라심으로부터 풍부해짐이 왔다.

그래서 아브람은 양떼와 목축, 그리고 수나귀들과 남종들, 그리고 여종들과 암나귀들, 그리고 낙타들을 가졌다. 이 말들은 기억 속의 지식들에 속하는 일반적으로의 모든 것들을 의미하는데, 이는 말씀에서 모든 이런 것들의 의미로부터 분명해진다. 그러나 “양떼와 목축”, “수나귀들과 남종들”, “여종들과 암나귀들”, 그리고 “낙타들”을 개별적으로 의미를 파악하는 것은 여기서의 경우 너무 장황할 것이라 여겨진다. 어쨌든 각각은 각기 특유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일반적으로 그것들은 지식들 중의 기억 속의 지식에 속하는 모든 것들(종교적 지식들), 그리고 기억 속의 지식들에 속하는 모든 것들(비종교적 지식들)을 의미한다. 그것들 자체에만 관심을 두고 본다면, 기억 속의 지식들은 “수나귀들과 남종들”; 그것들의 기쁨들은 “여종들과 암나귀들”이다. “낙타들”은 섬김의 일반적인 것들이다; “양떼와 목축”은 소유물들이다; 그리고 이 의미는 말씀 두루에서도 그러하다. 외적 인간에 있는 모든 것, 무엇이든 섬김을 위한 것 밖에 더 아니다, 즉 그것들은 내적 인간을 섬기기 위해 존재할 뿐이다. 기억 속의 지식들도 이와 대동소이 하다. 기억 속의 지식들은 오로지 외적 인간에만 속해 있다; 그 이유가 그 지식들은 감각의 감명(느낌)을 수단으로 지상적, 세상적인 것들로부터 획득해지기 때문이다. 획득의 목적은 내면, 또는 합리적 인간을 보필하기 위하여, 합리적 인간은 영적 (평면의) 인간을 보필하기 위하여, 영적 인간은 천적 (평면의) 인간을 보필하기 위하여, 천적 인간은 주님을 섬기기 위하여서 이다. 그런고로 그것들은 서로에 줄이어져 있다. 즉 보다 외적인 것은 보다 내적인 것과 각기 그들의 질서에 따라 종속되어진다; 그러므로 일반적, 세부적 모두에서 모든 것들은 무엇이든 각기 그것들의 질서 안에서 있으면서, 주님에게 종속되어 있다. 그러므로 기억 속의 지식은 가장 낮고 가장 바깥쪽에 해당하는 지식들인데, 이 지식들은 더 내면에 있는 것들의 종점(terminal)이다; 그리고 이 지식들은 가장 낮고 가장 바깥에 있기 때문에 섬김을 수행함에서는 가장 뛰어나다. 이에 대해서는 각자가 자신에게 있는 지식을 놓고, 자신의 어떤 지식이 어떤 쓸모 있음을 위해 있는지를 반추해보면 더 이상 이에 대한 부연 설명은 필요 없을지 모른다. 기억 속의 지식 모두 각각은 어떤 사용을 위해 존재함에 틀림없다. 이것이 그것의 섬김이다.
17절. 그리고 여호와께서는 바로를 큰 재앙으로 치셨고, 그의 집도 치셨는데 그 이유는 아브람의 아내 사래에 관한 말 때문이다.

그리고 여호와께서는 큰 재앙으로 바로를 치셨다. 이는 기억 속의 지식들이 파괴되어졌음을 의미하는데, 이는 “바로”의 의미가 일반적인 기억 속의 지식, 결과적으로 이와 같은 지식들에 속하는 기억 속의 지식들이다로 부터; 그리고 “재앙으로 치심”의 의미가 파괴되어짐 이다로부터도 분명해진다. 기억 속의 지식들에 주목해보면 이렇다. 어린 시절 이 지식들은 궁금증 해소 수준(단순히 아는 것) 외의 목적 없이 획득된다; 주님의 경우, 이 지식은 진리에 대한 애착과 기쁨들로부터 획득되어졌다. 어린 시절에 획득된 기억 속의 지식들은 아주 많다. 그러나 이 지식들은 섬김에서의 사용을 위해 질서적으로 주님에 의해 배열되어진다; 첫째 생각하는 능력을 주기 위해서이다; 그때 그것들은 사고함을 수단으로 사용될런지 모른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것이 결과를 가져오는 것, 즉 참 생명(생명 자체)이 사용함 안에 있게 되는 것, 그리고 이것은 사용함의 생명이다. 이것들이 어린 시절 획득되어진 기억 속의 지식들에 의해 수행되는 것들이다; 그리고 그것들 없이 외적 인간은 내적 인간과 결합할 수 없다. 동시에 진정한 쓸모 있음이 되어갈 수도 없다. 인간이 선용 측면에 집중할 때, 즉 그가 쓸모 있음을 목적으로 모든 것들을 생각할 때, 그리고 쓸모 있음의 목적 때문에 모든 것들을 행할 때, 그는 합리적 인간이 되는 바, 이 지식의 처음 섬김 같은 역할은 더 이상 요구되지 않는 바 파괴되어진다; 이것들이 “여호와께서 바로를 재앙으로 치셨다”는 말에 의해 뜻해져 있다.

그의 집. 이것은 그분이 수집하셨던 것을 의미하는데, 이는 “집”의 의미가 수집된 기억 속의 지식들이 이 장소에 있다는 것으로부터 분명해진다. 기억 속의 지식들을 수집하는 것, 그리고 수집한 것을 수단으로 외적 인간의 골격이 짜여지는 것은 집을 건축함과 다를 것이 하나도 없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것들은 말씀에서도 “건축함”, “집을 건축함”에 의해 의미되어져 있다. 이사야서에서:
나는 새 천국들과 새로운 땅을 창조한다; 그들은 집들을 건축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거 주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포도원들을 창설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들의 열매를 먹을 것이 다; 그들은 건축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또다른 자가 거주할 것이다 (이. 65:17, 21, 22);
위에서 “집들”은 지혜와 총명이 있는 것을 뜻한다, 고로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들이 있는 곳도 뜻한다; 그 이유가 주님의 왕국이 여기서 취급되기 때문, 즉 새 천국들과 새 땅이 취급되기 때문이다. 예레미야서에서:
너희는 집들을 건축하고, 그 안에 거주하라; 그리고 동산을 창설하라, 그리고 그것의 열매 를 먹어라 (예. 29:5);
위 구절도 의미는 비슷하다. 다윗서에서:
여호와를 경외하고 그분의 명령들을 크게 반기는 사람은 복 있다; 재물과 부유함이 그의 집 안에 있다, 그리고 그의 정의가 영원히 지속할 것이다 (시. 112:1, 3);
위에서 “재물과 부유함”은 지혜와 총명에 관한 재물과 부유함, 고로 지식들을 표시한다; 이것이 “그의 집 안에”, 즉 그 사람 안에 있다.
반대적 의미에서 “집”이 사용되기도 한다. 스바냐서에서:
나는 자기들의 심정에서 말하는 자들을 방문할 것이다, 여호와께서 선을 행하시지 않을 것 이다, 그리고 악을 행하시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재물은 약탈품을 위해 있을 것이 다, 그리고 그들의 집은 황무해질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집들을 건축할 것이다, 그리고 거 기에 거주 못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포도원을 가꿀 것이나 포도주를 마시지 못할 것이 다 (습. 1:12, 13).
학개서에서:
산으로 올라가라, 그리고 나무를 가져오라, 그리고 집을 건축하라. 너희는 많은 것을 찾았 다, 그리고, 보라, 적은 것이 왔다; 그리고 너희는 그것을 집 안으로 가져왔다, 그리고 나는 그것을 불어버렸다. 왜? 여호와께서 말하신다. 내 집 때문이다, 내 집은 너희 각자가 자기 집을 짓느라 몰입하는 동안 황폐되어 있다; 그러므로 너희 위에서 하늘들이 이슬을 닫았다 (학. 1:8-10);
위에서 “집”은 기억 속의 지식을 표시한다. 이를 수단으로, 추론을 통하여 거짓들이 온다. 이사야서에서:
집과 집을 연대는 자들, (빈) 장소가 없을 때까지 들판을 들판에 가까이 당기는 자들에게 화있을 것이다, 그리고 너희는 토지 한 가운데에 홀로 거주할 것이다. 많은 집들이 크고 좋 지만 거주자들 없이 황무해져 있을 것 아니더냐? 여호와의 포도원이 이스라엘의 집이다
(이5. 8, 9, 7);
위 역시 기억 속의 지식들을 표시하고, 이를 수단으로 거짓들이 온다. 아모스서에서:
보라, 여호와께서 명령하신다, 그리고 큰 집을 치시어 깨뜨릴 것이다, 그리고 작은 집은 치 시어 갈라터지게 할 것이다. 말들이 바위 위에서 달리더냐? 누가 거기를 수소로 쟁기질 하 더냐? 너희는 공정을 담즙으로 바뀌게 했고, 정의의 열매를 쓴숙으로 바뀌게 했다
(암. 6:11, 12).
위에서 “집들”은 거짓들, 그리고 거짓들로부터의 악들을 표시한다; “말들”은 추론을; “공정”은 진리들을, 이것이 “담즙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정의의 열매”는 “쓴쑥으로 바뀐” 선들을 표시한다.
그런고로 말씀 두루에서, “집들”은 지혜와 총명이 있어야 하는 인간의 마음들을 표시한다. 본문의 “바로의 집”은 기억 속의 지식을 표시하고, 이를 수단으로 총명이 오고, 그로 말미암아 지혜가 온다. 바로의 딸을 위해 솔로몬이 지은 집 역시 마찬가지 의미이다 (왕상. 7:8. 등등). “집들”이 마음들을 표시하고, 그 안에 총명과 지혜가 있기 때문에, 그리고 그 안에 의지에 속하는 애착이 있기 때문에, 단어 “집”은 말씀에서 폭넓은 의미함을 지닌다; 그러나 각 구절의 집은 그 구절의 서술에 맞추어 특별한 의미에 있다. 인간 자신 역시 “집”이라 불리운다.

사래, 아브람의 아내 때문에. 이는 천적인 것에 인접해있기 위해 있었던 진리 때문에를 의미하는데, 이는 “아내”의 의미로부터, 그리고 결과적으로 “사래, 그의 아내”의 의미가 천적인 것에 인접해있기 위해 있는 진리이다로부터 분명해진다. 이에 관하여는 12절을 다시 살피기 바란다. 이 경우는 이렇다: 인간을 합리적으로 만드는데 사용한 어린 시절의 기억 속의 지식들은 파괴되어 아무 것도 아닌 것이 되지 않으면, 진리는 천적인 것에 결코 결합되어질 수 없다. 이 처음 기억 속의 지식은 대부분이 지상적, 육체적, 세상적이다. 제아무리 그가 어린 시절에 배운 것이 신성에 관해서이다 해도, 그는 그 지식으로부터 획득할 수 있는 것은 지식에 불과할 뿐 더 이상의 것에 관한 생각은 없다; 그러므로 이런 최고 낮은 수준의 지식들에 그가 기울고 있는 한, 이로부터 그의 관념들이 있는 한, 그의 마음은 승강될 수 없다. 주님의 경우도 같았다, 그 이유는 그분도 여느 사람같이 태어나시고 교육받으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성한 질서에 따라서였는데, 이는 이미 서술한 적이 있다. 이집트에 있는 아브람에 관해 말해진 이런 것들 안에 신성한 질서가 묘사되어져 있다. 즉 어떻게 주님 안에서 외적 인간이 내적 인간과 결합되어 결국 외적 인간마저 신성이 되셨는가 이다.

18절. 그래서 바로는 아브람을 불렀다, 그리고 말했다, 네가 나에게 했던 이것은 무엇이냐? 왜 너는 그녀가 너의 아내라고 나에게 말하지 않았느냐?

그리고 바로는 아브람을 불렀다. 이는 주님께서 자신을 숙고하셨다를 의미하는데, 이는 “바로”의 의미가 기억 속의 지식이다로부터 분명해진다. 기억 속의 지식 자체, 즉 기억 속의 사실들, 이는 주님께서 어린 시절 획득한 지식들인데, 이것이 “바로”라고 여기서 불리운다; 그런고로 이것은 지식 자체가 주님에게 말을 걸고 있는 것이다, 즉 이 지식을 수단으로 주님에게 말을 거는 여호와이신 셈이다. 이로부터 이런 것들은 주님이 자신을 숙고하셨음을 의미함이 분명해진다. 정신적 용의주도함이 기억 속의 지식을 수단으로, 즉 바로를 수단으로 오는 것이다.

그리고 말했다, 네가 나에게 했던 이것은 무엇이냐? 이는 그것이 그분을 슬프게 했다를 의미하는데, 이는 말의 저변에 깔린 (억울해서 오는 듯한) 분함 자체로부터 분명해진다: 그리하여 (억울한) 슬픔 자체가 표현되어졌다. 내적 의미는 말들 안에 감추여 놓인 애착 자체가 (억울함에 따른) 분함을 구성하는 것과 같다; 글자의 단어들이 이런 느낌을 (우리로) 인지하게 해주지는 않고 있다; 그것은 마치 그런 느낌들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있다. 이 말들에 있는 애착은 그것이 기억 속의 지식으로부터 있는 듯 하다, 그리고 주님의 슬픔이다; 그리고 사실상 이로부터의 슬픔, 즉 그분께서 기쁨과 즐거움으로 배워가셨던 기억 속의 진리들이 파괴되어져야 함으로부터 심히 서운해 하심(슬퍼하심)이다. 이런 경우를 우리 주변에서 찾아 빗대본다면, 아마 어린 아이가 자신을 매우 즐겁게하여 만지고 노는 어떤 것을 부모들이 보니, 그것이 아이를 다치게 할 수도 있어 빼앗는 바람에 야기되는 아이의 슬픔 같을지 모른다.

그녀는 네 아내였다. 이는 그분이 천적인 것과 결합되기 위해 있었던 것 외의 다른 진리를 가져서는 안된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는 “아내”가 천적인 것과 결합하기 위해 있었던 진리이다로부터 분명해지고, 이는 12절에서 살폈다. 여기에 질서가 묘사되어 있다. 즉 주님이 총명으로, 그리하여 지혜로 발전하신 질서이다; 그렇게 해서 그분은 그분의 신성 본질 측면에서 지혜 자체이셨듯, 마찬가지로 그분은 그분의 인간 본질 측면에서 지혜 자체이셨던 것이다.

19절. 왜 너는 그녀가 내 누이라고 말했느냐? 그리고 나는 그녀를 나에게 여인으로 삼았을런지 모른다. 그리고 지금 보라 네 아내이다. 그녀를 데리고 가라.

왜 너는 그녀가 내 누이라고 말했느냐? 이는 그분이 (주님의 어린 시절) 당시 그분은 지적인 진리 외에 달리는 아는 것이 없었음을 의미하는데, 이는 “누이”의 의미가 지적인 진리인 바로부터; 또한 13절로 미루어 보아 아브람이 그렇게 말했다는 것으로부터 분명해진다. 이리하여 천적인 것은 어떤 폭행을 당해서도 안되고, 오직 보존되어야 한다는 목적까지 이루어졌다. 이 모두로부터 분명해지는 바는, 어린 시절 주님께서 기억 속의 지식들을 배우셨을 때, 그분은 맨 처음에는 이런 지식들은 지적인 인간을 위하여서만, 즉 그분이 기억 속의 지식들로부터 진리를 알아가는 것을 위하여서만 있었다는 것 외에는 달리 알지 못하셨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후에 기억 속의 지식들은 그분이 천적인 것들에 도달할 수 있기 위해 존재했다는 것이 그분에게 알려졌다; 그리고 이렇게 알려지신 이유는 천적인 것들이 폭행 당함으로부터 방지되고, 보존되도록 하기 위한 이유로 거행되었다. 인간이 가르쳐질 때, 기억 속의 지식들로부터 합리적 진리들로의 발전이 있다; 더 나아가, 지적인 진리들에로; 마지막으로 천적인 진리들에로 인데, 이것이 여기서 “아내”를 수단으로 의미되어지고 있다. 만일 발전함이 기억 속의 지식들과 합리적인 진리들로부터 매체로서의 지적인 진리들 없이 천적 진리들로 있어진다면, 천적인 것들은 폭행을 당한다, 그 이유는 합리적인 진리들이 – 이 진리는 기억 속의 진리들을 수단으로 획득되어진다 -천적인 진리들과의 연결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연결은 매체인 지적인 진리들을 수단으로 해야 가능하다. 천적인 진리들이 무엇인지, 그리고 지적인 진리들이 무엇인지를 이제 살펴보자.
이것들이 어떻게 위치해 있는지를 알기 위해서는 질서에 관련해 뭔가를 말해야 할 것 같다. 질서는 천적인 것이 영적인 것 안으로 흘러들고, 영적인 것이 천적인 것에 순응되는 것; 그리하여 영적인 것은 합리적인 것 안으로 흘러들고 합리적인 것은 영적인 것에 순응된다; 그리고 합리적인 것은 기억속의 지식 안으로 흘러들고 기억 속의 지식은 합리적인 것에 순응되는 것이다. 그리고 인간이 아주 어린 시절에 교육받아질 때, 실로 질서는 위와 같다, 그러나 이 질서는 다르게 나타난다. 즉 그는 기억 속의 지식들로부터 합리적인 것들로, 이로부터 영적인 것들로, 이로부터 천적인 것들까지 발전한다. 이렇게 나타나는 이유는 길이 가장 깊은 쪽에 있는 천적인 것들에 열려있어야 만 하기 때문이다. 모든 가르쳐짐은 단순히 길을 열어준다; 그리고 길이 열릴 때, 또는 그릇이 열릴 때, 이미 말했듯 그것들의 질서에서 그릇 안으로 흘러드는데, 즉 천적, 영적인 것들로부터 있는 합리적인 것들이 흘러든다; 이 합리적인 것들 안으로 천적, 영적인 것들이 흘러든다, 이 안으로 천적인 것들이 흘러든다. (역자는 이를 여러 겹으로 된 양파를 연상하며 이해해보았다) 이 천적, 영적인 것들은 그 자체를 계속적으로 표출한다, 그리고 또한 자체들을 위해 열려진 그릇을 준비하고 만들어 낸다; 이것은 기억 속의 지식과 합리적인 것들이 그 자체로는 죽어있다는 사실, 그러나 안으로 흐르는 내면의 생명으로부터 그것들은 살아있는 것처럼 보여진다는 사실로부터 알런지 모른다.
아마 누구라도 생각하는 우리의 능력, 또는 판단을 만들어내는 것으로부터 위의 사항을 명백하게 볼 수도 있다. 생각함과 판단력 안에 분석적인 예술과 과학의 모든 신비함들이 감추여 놓여 있다, 이것은 하도 많아서 그것들은 수만 분의 일의 분량도 결코 탐구될 수 없다; 그리고 이것은 성인과 더불어서만이 아닌, 아이들과 더불어서, 이들의 모든 생각함과 이로부터 파생하는 언어의 표현은 그것들(천적, 영적인 것들의 흐름들)로 대부분 차 있다. 이는 학식이 제아무리 높아도 이를 감지하지 못한다. 내부에서 천적, 영적인 것들이 밖으로 나타나고, 흘러들고, 모든 이런 것을 생산하는 것이 없으면 우리는 이런 감추여 발휘되는 노련한 솜씨를 결코 갖지 못할 것이다.

나는 그녀를 나에게 여인으로 삼았을런지도 모른다. 이는 천적인 것에 결합하기 위해 있었던 진리가 폭력을 당했을런지 모른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는 방금 말해진 것으로부터; 또한 13절에서 말해진 바로부터 분명해진다. 천적인 것과 결합하는 진리에 주목해보면 이렇다: 그 자체만을 주시하면, 어린 시절로부터 배운 진리는 천적인 것을 받는 그릇 역할 밖에 더 없다는 것이다. 진리는 그 자체로는 생명이 없고 진리 안으로 흐르는 천적인 것으로부터서만 생명을 가진다. 천적인 것은 사랑과 선행이다; 모든 진리는 거기로부터 있다, 그리고 모든 진리가 거기로부터 있기 때문에 사실상 진리는 그릇 밖에 더 아니다; 진리가 이러하다는 것은 다른 삶에서는 여실히 표출되어 있다; 거기서 진리들은 그 자체로부터 진리로 중요시되지 않고 그것들 안에 있는 생명으로부터 중요시 된다; 즉 진리들 안에 있는 사랑과 선행으로부터 있는 천적인 것으로부터 이다는 말이다; 이로부터 진리들은 천적 (수준이) 되어가고, 천적인 진리들이라 불리운다. 아마 이제는 우리가 지적 진리가 무엇인지 알 수 있다. 주님과 더불어의 경우, 지적 진리는 천적인 것들에 길을 열어주었다. 기억에 있는 진리(truth in the memory, 또는 사실적인 진리, factual truth)는 또 하나의 것이다; 합리적 진리(rational truth)는 또 다른 것이다; 그리고 지적 진리(intelluctual truth, 또는 직관적인 진리, intuitive truth)는 또 다르다; 이것들은 서로를 계승한다. 기억에 있는 진리는 기억 속의 지식(또는 비종교적, 세속적인 진리)의 생산물(matter)이다. 합리적인 진리는 추론에(논리에) 의해 확증된 진리이다; 지적 진리는 이것이 그렇다 라는 내적 지각과 결합되어 있다. 이 지적 진리가 주님의 어린 시절에 그분에게 존재했었다, 그리고 그분 안에서 천적인 것에 길을 열어주었다.

그리고 지금 보라 네 아내이다; 그녀를 데리고 가라. 이는 진리가 천적인 것과 결합하기 위해 있었다를 의미하는데, 이는 “아내”의 의미가 천적인 것과 결합하기 위해 있는 진리이다로부터 분명해진다. 이는 11, 12절과 방금 위에서도 살폈다.

20절. 그리고 바로는 아브람에 관하여 사람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그리고 그들은 그를 내어 보냈다, 그리고 그의 아내, 그리고 그가 가졌던 모든 것도 내어 보냈다.

그리고 바로는 아브람에 관하여 사람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그리고 그들은 그를 내어 보냈다]. 이는 기억 속의 지식이 주님을 떠났다를 의미하는데, 이는 “바로”의 의미가 기억 속의 지식이다로부터; 또한 “사람들”의 의미가 지적인 것들이다로 분명해진다. 여기서의 “사람들”은 바로, 또는 기억 속의 지식의 속성에 일치되므로 거기에 순응된 지적인 것들을 의미한다. 기억 속의 지식들이 주님을 떠난다에 주목해보면, 이렇다. 천적인 것들이 지적 진리들과 결합되었을 때, 그리고 지적 진리들이 천적 품질이 되어갈 때, 텅빈 모든 것들은 그것 스스로 사라진다; 이것은 천적인 것에 있는 본래의 모습이다.

그리고 그의 아내. 이는 기억 속의 지식들이 천적인 것들과 결합된 진리들을 떠났다를 의미하는데, 이는 “아내”의 의미가 천적인 것과 결합한 진리이다로부터, 또한 방금 말해진 바로부터 분명해진다. 텅빈 기억 속의 지식들은 천적인 것들을 떠난다, 마치 무익한 것들이 늘상 지혜를 떠날 수밖에 없는 것과 같다; 그것들은 자진해서 자신들을 분리하는 껍데기나 (피부 등의) 비늘, 딱지 같이 있다.

그리고 그가 가진 모든 것. 이는 기억 속의 지식들이 천적 진리들에 속한 모든 것들을 떠났다를 의미하는데, 시리즈로 뒤잇는 형국이다.

이상 모두로부터 분명한 것은 이집트에 체류하는 아브람이 주님을 표현하고 의미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사실상 그분은 어린 시절에 가르침을 받으셨다. 이것 역시 호세아서에서 말해진 바로부터도 확인되어진다:
이집트로부터 나는 내 아들을 불렀다 (호. 11:1. 마; 2:15);
모세의 책에서 말해진 것을 읽어 보자:
이집트에 거주한 이스라엘의 아들들이 430년이었다; 그리고 430년이 지나는 끝 날과 같은 날에 여호와의 모든 군대들은 이집트의 토지로부터 나갔다 (출. 12:40, 41);
위의 햇수(430년)은 야곱이 이집트로 내려간 후의 햇수가 아닌 아브람이 이집트로 내려간 이후 세어진 햇수들이다. 그런고로 호세아서(11:1)의 “이집트로부터의 아들”은 내적 의미에서 주님을 의미했다. 이것이 더 확증되는 것은 말씀에서 “이집트”가 기억 속의 지식들을 의미한다는 사실로부터 이다.
이런 신비함들(arcana)이 포함되었다는 본문 말고도 아브람이 블레셋 (영역)에 체류하는 동안 그의 아내를 자기 누이라고 부른 사실로부터도 분명해진다 (창. 20:1-18); 그리고 이와 비슷한 사건으로, 이삭이 블레셋 영역에 거주했을 때, 그가 아내를 누이라고 부른 사건이다 (창. 26:6-13). 우리가 위에서 살핀 여러 내용들은 비슷한 신비함들이 감추여 놓였기에 위 세 사건은 비슷한 상황인 것 같지만 깊은 의미들을 그 안에 담고 있다. 더 나아가 이것은 주님의 말씀인 바, 그분에 관련된 내적 의미가 없으면 어떤 생명도 결단코 가지지 못한다.
블레셋에 있는 아브람과 이삭에 관해 말해진 경우 같이, 이런 대목들 안에 저장된 신비함들(arcana)은 이렇다. 즉 어떻게 주님의 인간 본질이 그분의 신성 본질과 결합되었는가, 또는 어떻게 주님께서는 그분의 인간 본질까지도 여호와가 되셨나; 그리고 그분이 어린 시절부터 이 작업을 개시하셨다는 것, 이것이 여기서 취급되고 있다. 더욱이 이런 사항들은 인간이 믿을 수 있는 것 보다 더 많은 신비함들을 포함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말해볼 수 있는 것은 극히 제한적이어서 아마 파악하는 것이 없다고 하는 편이 옳을지 모른다. 주님에 관한 심오한 신비함들 외에도 그것들은 인간으로 천적 수준에 이르도록 인간의 거듭남과 가르침에 관하여 신비함들을 포함하고 있다. 그리고 개인적 인간의 가르치심 뿐만 아니라 일반적으로 교회의 것에 관해서도 가르치심이 있다. 더 나아가 여기에는 천국에서 어린 아이의 교육에 관한 신비함들도 포함하고 있다; 한 마디로, 주님의 형상과 모습이 되어가는 모든 이들의 가르침이 있다는 말이다. 이런 사항들은 글자 의미에는 모두가 나타나지 않는다, 그 이유는 역사적 대화(줄거리, 이야기 자체, 세부사항)가 신비함들을 (강제로) 누르고 있고, 어둡게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들은 내적 의미에서 나타난다.

창세기 제 13 장

성경: 창세기 13 장

1. 그리고 아브람은 그와 그의 아내, 그리고 그가 가진 모든 것, 그리고 그와 더불은 롯과 함께 이집트를 나와 남쪽을 향하여 올라 갔다.
2. 그리고 아브람은 소떼에서, 은에서, 그리고 금에서 큰 부자였다.
3. 그리고 아브람은 그의 여정들을 따라, 남쪽으로부터 그리고 벧엘에까지, 그의 천막 이 처음 있었던 장소, 벧엘과 아이 사이에로 갔다.
4. 그가 시작에서 거기에 만들었던 제단이 있는 곳으로; 그리고 거기서 아브람이 여호 와의 이름을 불렀다.
5. 그리고 롯도 아브람과 함께 갔는데 양떼와 목축, 그리고 천막을 가졌다.
6. 그리고 그 토지는 그들로 하여금 함께 거주하도록 그들을 받쳐줄 수 없었는데, 그 이유는 그들의 물질이 많아서 그들이 함께 거주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7. 그리고 아브람의 소떼의 목부와 롯의 소떼의 목부 사이에 다툼이 있었다. 그리고 그 당시 가나안족과 브리스족이 그 땅에 거주하고 있었다.
8. 그리고 아브람은 롯에게 말했다, 너와 나 사이에, 그리고 네 목부와 내 목부 사이 에 싸움이 있어서는 안된다. 그 이유는 우리는 형제의 사람이기 때문이다.
9. 온 토지가 네 앞에 있지 않느냐? 바라건대 나로부터 분리하라. 만일 왼쪽으로 가면 나는 오른쪽으로 가리라. 그리고 만일 오른쪽으로 가면 나는 왼쪽으로 가리라.
10. 그래서 롯이 눈을 들었고, 요단의 모든 평지를 보았더니, 거기는 물이 넉넉하였는 데, 이는 여호와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기 전이고, 여호와의 동산 같고, 소 알에 이르는 이집트의 토지 같았다.
11. 그리고 롯은 요단의 모든 평지를 선택했다. 그리고 롯은 동쪽으로부터 여행했다. 그리고 그들은 분리되어졌는데, 그의 형제로부터의 사람과 분리되어졌다.
12. 아브람은 가나안의 토지에 거주하였고, 롯은 평지의 도성에 거주하였다. 그리고 그의 천막을 소돔 가까이에 단단히 고정시켰다.
13. 그리고 소돔의 남자들은 사악했고 여호와께 극도로 죄인이었다.
14. 그리고 롯이 그로부터 분리된 후 여호와께서는 아브람에게 말하시기를, 바라건대 네 눈을 들어라, 그리고 네가 있는 장소로부터 북쪽을 향하여, 남쪽을 향하여, 동 쪽을 향하여, 서쪽을 향하여 보아라.
15. 나는 네가 보는 모든 토지를 너에게 줄 것이고, 네 씨에게 영원히 줄 것이다.
16. 그리고 나는 네 씨를 땅의 먼지같이 만들겠다. 만일 사람이 땅의 먼지를 셀 수 있다면, 그렇다면 네 후손도 세어질 수 있을 것이다.
17. 일어나라, 이 토지를 두루 걸어라, 그것을 길이에서, 그것을 넓이에서 걸어라. 내 가 그것을 너에게 줄 것이기 때문이다.
18. 그리고 아브람은 그의 천막을 단단히 고정시켰다, 그리고 왔고, 헤브론에 있는 마 므레의 상수리 나무 숲들에서 거주하였다, 그리고 거기에 그는 여호와께 제단을 건설했다.

각 절의 내적 의미

1절. 그리고 아브람은 그와 그의 아내, 그리고 그가 가진 모든 것, 그리고 그와 더불은 롯과 함께 이집트를 나와 남쪽을 향하여 올라 갔다.

내적 의미에서 이 구절의 사항들, 그리고 이 장에 뒤잇는 것 역시 주님을 표현한다, 그리고 이것은 그분의 어린 시절로부터의 삶의 계속이다는 것은 앞 장에서 말해진 것, 이어지는 것들로 분명해진다; 이에 더하여, 이것들은 주님의 말씀이다는 것, 이 말씀은 주님으로부터 천국을 통하여 내려 와 있다는 것, 그러므로 쓰여진 단어 하나하나에도 천국의 신비함들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심각히 고려해야 더 분명해 질 것이다. 이런 근원으로부터 오는 것은 여느 다른 본성으로부터는 가능해질 수 없다. 주님의 어린 시절, 그분의 가르쳐지심에 관하여는 이미 다룬 바 있다. 우리가 천국적으로 되어감을 방해하는 두 가지 것들이 있다. 하나는 지적 측면에 속하고, 다른 하나는 의지 측면에 속한다: 지적 측면에 속하는 것은 우리가 어린 시절과 젊은이 시절에 배운 쓸데없는 기억 속의 지식(empty memory-knowledge, 또는 쓸모없는 사실들, useles facts)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고 의지 측면에 속하는 것은 최고로 흠모된 그의 열망하는 것 (craving, cupidity)을 기쁘게함(충족 시킴)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것들은 각자 천국적인 목표들에 도착하는 것을 방해한다. 이것들은 처음에는(어린 시절에는) 사라져 있다; 이때 처음동안 각 인간은 천적인 것들의 빛에 반사된 것에 들어 갈 수 있다. 그리고 드디어 천적인 빛 자체 안으로 들어 갈 수 있다.
주님께서 다른 사람들 같이 태어났을 때, 그리고 다른 사람들 같이 가르쳐지심이 필요하셨을 때, 그분은 기억 속의 지식(또는 사실들, facts)을 배우셔야만 했는데, 이 상황이 아브람이 이집트에 체류함에 의해 표현되고 의미된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 쓸데없는 기억 속의 지식이 그분을 떠났다는 것은 바로가 자기 사람들에게 아브람에 관하여 명령을 내려, 그를 내어 보냈다는 것, 그리고 그와 더불어 그의 아내, 그가 가진 것 모두를 내어 보냈다는 것에 의해 표현되어져 있다. (앞 장 20절 참조) 그러나 의지에 속하는 기쁨들, 그리고 감각적 인간을 구성하는 것, 그러나 그것의 가장 바깥쪽의 것, 역시 그분을 떠났다는 것은 이 장(chapter)의 롯에서 표현되는데, 즉 그가 자신을 아브람으로부터 분리하는 것에서 표현되어져 있다; 그 이유는 롯이 이런 인간을 표현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브람은 이집트로부터 올라 갔다. 이는 기억 속의 지식들로 부터를 의미하고, 이것이 주님을 떠났다를 의미하는데, 이는 “아브람”의 의미가 주님을 표현함이다로 부터; 그리고 “이집트”의 의미가 기억 속의 지식이다로; 그리고 “올라 감”의 표현으로, 그 이유가 이 표현은 보다 낮은 수준의 것으로부터 빠져서 나가는데 흔히 사용되기 때문이다. 즉 낮은 것인 기억 속의 지식으로 보다 높은 것, 즉 천적인 것들로 빠져서 나가는 것으로부터 분명해진다. 그러므로 말씀에서 “이집트로부터 가나안의 토지로 올라 감”은 -이는 자주 표현되고 있는데 – 본문과 같은 의미를 지닌다.

“아브람”이 내적 의미에서 어린 아이 시절의 주님, “이집트”는 기억 속의 지식이다는 것은 이미 살폈다.

그와 그의 아내. 이는 주님이 지상에 계실 당시 주님에 있는 천적인 진리들을 의미한다는 것인데, 이는 “그”, 즉 아브람의 의미가 주님이시다는 것, 결과적으로 그분 안에 있는 천적인 것을 의미함으로부터 알런지 모른다. 인간은 자기 안에 있는 것들(품질, 품성)로부터 인간이다; 주님의 인간성은 천적인 품질들로부터의 결과이다; 그 이유가 그분만이 지금까지 지상에서 살았던 모든 인간 중에서 유일하게 천국적 품성을 지닌 인물(person)이셨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분은 천국과 같음(천적 자체)이셨다; 이런 근거에서 천적인 것들이 “아브람”, 특히 “아브라함”에 의해 의미된다. 이것은 “아내”의 의미가 천적인 것에 인접한 진리이다로 더 알런지 모른다. 진리들이 천적인 진리들, 또는 천적인 것들로부터 있는 진리들이다는 것은 “그, he”가 먼저 명명되고, 그리고 “그의 아내”가 그 뒤를 잇는 사실로 분명해진다. 그 이유가 천적인 진리와 천적인 것으로부터 있는 진리는 구별되기 때문이다; 천적인 진리(celestial truth)는 천적인 것(품질)에서 시작한다(originate); 천적인 것으로부터의 진리(truth celestial)는 (종교적) 지식들을 수단으로 천적인 것에 이식된(implant, graft) 진리에서 시작한다(originate).

그리고 그가 가진 모든 것. 이는 천적인 것들로부터 있던 모든 것들을 의미하는데, 지금 말해진 사항으로부터 분명할 것이다.

그리고 그와 더불은 롯. 이는 감각적인 것을 의미하는데, 이는 앞에서 간략히 서술했다; 그러나 여기서 롯이 특별하게 취급되는 바, 그가 표현하는 주님 안에 있는 것을 반드시 알아야만 할 것이다. 바로는 결국 주님을 떠나 보낸 기억 속의 지식을 표현한다; 그러나 롯은 감각적인 것들을 표현하고, 이를 수단으로 외적 인간과 감각적인 것들에 속하는 외적 인간의 기쁨들이 뜻해진다, 그런고로 이것들은 (인간의)가장 바깥쪽 부분에 해당되고, 그래서 이것은 어린 시절의 인간을 늘 포로화해 버린다. 그리고 당사자를 선들로부터 멀어지게 한다. 그 이유가 인간이 (그의 본래적) 욕구(appetite, cupidity)로부터 시작한 기쁨들을 탐닉하는 만큼, 그는 사랑과 선행인 천적인 것들로부터 그의 몸을 떼어 놓는다. 그 이유가 이런 기쁨들 안에 자아로부터의 사랑, 세상으로부터의 사랑이 있고, 이 사랑은 천적인 사랑에 일치하지 않기 때문이다. 어쨌든 천적인 것들과 완전하게 일치하는 기쁨들이 있고, 외적 형체에서 일치한 듯하게 나타나는 기쁨들이 있다. 여하튼 우리의 욕망(craving, cupidity)으로부터 부상하는 기쁨들은 조절되어져야 하고 순수해져야 함에 틀림 없다. 그 이유는 그것들이 천국적인 것들로 가는 우리의 길에 놓인 장애물이기 때문이다. 이 장은 롯이 아브람에서 분리함이라는 형상 아래, 위의 두 종류의 기쁨들 중 전자가 아닌, 후자(외적 형체에서 일치한 듯 하게 나타나는 기쁨)를 취급하고 있다; 그리고 이 구절은 이 기쁨들이 현재 있다는 것을 “그와 더불은 롯”에 의해 의미되어지고 있다. 일반적 측면일 경우, “롯”은 외적 인간을 의미한다, 이는 이어지는 구절들로 분명해 질 것이다.

남쪽을 향하여. 이는 천적인 빛에로를 의미하는데, 이는 “남쪽”, 또는 정오의 빛의 의미가 내면들 측면에 관련한 빛의 상태이다로 분명해진다. 두 상태로부터 천국의 빛이 온다. 첫 번째는, 인간이 유아기 때에 이끌어 들이는 상태이다. 항간에도 알려진 사항이기도 한 것은 유아들은 순진 안에, 그리고 사랑의 선들 안에 있다는 것이다. 주님께서 이것들을 유아 안에 놓아 두셨다. 그리고 이것은 어린이 안에 저장되는데, 훗날의 그가 사용하기 위해, 그리고 저 세상에 올 때, 그의 사용을 위해서이다; 이것들이 첫 리메인스(remains, 아껴두신 것)라고 불리운다. 이는 앞서 여러 번 말했다. 두 번째는, 인간이 지식들을 배움으로 영적, 천적인 것들 안으로 들어 오는 상태이다. 이것은 유아로부터 주어진 천적인 것들 안에 이식되어야 함에 틀림없다. 주님과 더불어, 이것들은 그분의 천적인 것들 안에 이식되어졌다, 이로부터 그분은 여기서 “남쪽”, 또는 정오의 빛이라 불리는 빛을 가지셨다.

2절. 그리고 아브람은 소떼에서, 은에서, 그리고 금에서 큰 부자였다.

아브람은 소떼에서 큰 부자였다. 이는 선들을 의미하는데, 이는 “소떼”와 “양떼”의 의미가 선이다로 분명해진다.

은에서. 이는 진리들을 의미하는데, 이는 “은”이 진리이다로 분명해진다. 태고인들은 인간에 있는 선들과 진리들을 금속에 비교했다; 가장 안쪽, 또는 천적 (수준의) 선들, 이는 주님을 사랑함인데, 금에 비교했다; 이 선들로부터 있는 진리들은 은에 비교했다; 그러나 보다 수준 낮은 선, 또는 자연적 (수준의) 선들은 구리에 비교했다. 그리고 보다 낮은 진리(자연적 수준의 진리)는 철에 비교했다; 그들은 비교해본 것 뿐만 아니라 그렇게 불렀다. 이로부터 시간의 기간들 역시 같은 금속에 비유했다. 그래서 금, 은, 동, 철 시대라고 불렀다; 그 이유가 시대들이 이 순서에 따라 있기 때문이다. 금 시대는 태고 교회의 때였다. 이 교회인은 천적 인간이었다; 은 시대는 고대 교회의 때였다. 이 교회인은 영적 인간이었다; 동(구리) 시대는 은 시대에 이어 계속되는 시대, 철 시대는 동 시대에 이어 계속되는 시대였다. 이와 비슷한 것이 느브갓네살왕에 의해 꿈에서 보여진 (신)상(statue)에 의해 의미된 내용들이다. 즉 (신)상의 “머리는 금으로, 가슴과 팔은 은으로, 배와 넓적 다리는 놋쇠로, 다리는 철로”되었다 (단. 2:32, 33). 이것은 시리즈로 있어진 것, 또는 교회의 시기들이 서로에 이어 순서적으로 있는 것임은 다니엘서, 같은 장으로 분명해진다.
말씀의 내적 의미에서, “은”은 어디에서 명명되든, 진리를 의미하고, 반대 의미에서는 거짓을 의미하는데, 아래 인용 구절로 분명해진다. 이사야서에서:
나는 놋쇠를 위해 금을, 철을 위해 은을, 그리고 나무를 위해 놋쇠를, 그리고 돌을 위해 철 을 가져 올 것이다; 또한 나는 너희의 관리들을 평화로, 너희의 집행자를 정의로 만들 것이 다 (이. 60:17);
위 구절에서 각 금속이 뜻하는 것이 분명해진다. 여기서 주님의 오심, 그리고 그분의 천국의 왕국과 교회가 취급되어진다; “놋쇠를 위해 금”은 자연적 선 대신에 천적인 선을; “철을 위해 은”은 자연적 진리 대신에 영적인 진리를; “나무를 위해 놋쇠”는 육체의 선 대신 자연적 선을; “돌을 위해 철”은 감각적 진리 대신에 자연적 진리이다.
다시 이사야서에서:
오, 목마른 모든 이여, 너희는 물들로 가라; 그리고 은이 없는 자; 너희는 가라, 사서 먹어 라 (이. 65:1);
“은이 없는 자”란 진리에 무지한 자, 그럼에도 선행의 선 안에 있는 자이다. 이런 사람들은 교회 내에, 또한 교회 밖 나라들에도 많이 있다.
다시 이사야서에서:
섬들이 나를 위하여 기다릴 것이다, 그리고 다르싯의 배들이 시작에서 멀리로부터 네 아들 들을, 그들의 은과 그들의 금을 그들과 함께 여호와 네 하느님의 이름에로, 그리고 이스라 엘의 거룩한 분에로 가져 올 것이다 (이. 60:9).
여기서 새로운 교회, 이방인들의 새로운 교회가 특별히 취급되어진다, 그리고 보편적으로는 주님의 왕국이 취급된다; “다르싯의 배들”은 지식들을; “은”은 진리들을; “금”은 선들을 표시한다. 그 이유가 이것은 “여호와의 이름에로 가져 올 것들”이기 때문이다. 에스겔서에서:
너희는 내가 네게 준 내 금과 내 은으로 장식된 집기들을 가져가서, 남자 형상을 만들었다 (겔. 16:17).
위에서 “금”은 천적인 것들에 관한 지식을 표시한다; “은”은 영적인 것들에 관한 지식을 표현한다. 에스겔서에서:
너는 금과 은으로 장식했었다, 그리고 네 의복은 고운 아마포와 비단이었다, 그리고 수놓은 옷이었다 (겔. 16:13).
위는 예루살렘에 관해서 말해진다. 이를 수단으로 주님의 교회가 의미되어진다, 그리고 이 교회의 장식이 묘사되어 있다. 다시:
잘 보라, 너는 슬기롭다, 너는 너로부터 감추어 둔 비밀들이 없다; 네 지혜와 네 총명에서 너는 네 부유함을 얻었다, 그리고 금과 은을 네 보물 창고 안으로 얻었다 (겔. 28:3, 4).
이는 두로에 관해서 말해진다, 그리고 여기서 “금”은 지혜의 재물, “은”은 총명의 재물임이 분명하다.
요엘서에서:
너는 내 은과 내 금을 가져 갔었다, 그리고 네 신전으로 내 진기한 것들을 운반하였었다 (욜. 3:5).
이는 두로, 시돈, 블레셋들에 관해 말해진다; 이를 수단으로 지식들이 의미되어진다, 이것이 그들이 자기들의 신전으로 운반해 버린 “금과 은”이다. 학개서에서:
나라들에서 선발된 것이 올 것이다, 그리고 나는 이 집을 영광으로 채울 것이다; 은은 나의 것이다, 그리고 금은 나의 것이다; 이 후자의 집(성전)의 영광은 전자의 집(성전)보다 더 클 것이다 (학. 2:7-9);
위는 주님의 교회가 취급되어진다, 이에 관련하여 “금”과 “은”이 서술되어진다. 말라기서에서:
그분은 은의 제련자요 정화자로 앉으실 것이다, 그리고 레위의 아들들을 순수해지게 하실 것이다 (말. 3:3);
위에서 주님의 오심이 취급되어진다. 다윗서에서:
여호와의 강론(discourse)은 순수한 강론이다, 흙도가니에서 일곱 번 제련한 은이다
(시. 12:6);
“은이 일곱 번 순수해진다”란 신성한 진리를 표시한다. 이스라엘의 아들들이 이집트를 나갈 때, 그들에게 주어진 명령에 관련하여 아래 구절에서:
모두 각각의 여인이 그녀의 이웃으로부터, 그리고 그녀의 집에 있는 손님인 그녀로부터도, 은집기, 금집기, 그리고 의복들을 차용할 것이다; 그리고 너희는 그것들을 너희 아들들과 너희의 딸들 위에 놓을 것이다, 그리고 이집트인들을 약탈할 것이다
(출. 3:22; 11:2, 3; 12:25, 36);
위 구절에 어떤 신비함들이 표현되려 하지 않았다면, 이스라엘의 아들에게 훔치라고, 이집트인들을 약탈하라고 말해질 이유가 결단코 없다는 것은 누구나 금방 수긍이 갈 것이다. 이 신비함들은 “은”, “금”, “의복”, 그리고 “이집트” 로부터 보여질런지 모른다; 그리고 위 구절에서도 본문에서 아브람이 이집트에서 금과 은을 가진 부자였다에 의해 표현된 것이 마찬가지로 표현되어졌다.
“은”이 진리를 의미하듯, 반대적 의미에서는 거짓도 의미한다; 그 이유가 거짓 안에 있는 자들은 거짓이 진리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예언서들에서 이는 확인된다. 모세의 책에서:
너는 나라들의 은과 금을 탐내지 말라, 그것을 네게로 가져 오지 말라, 그것이 네 올가미가 되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그것은 네 하느님 여호와에게 역겹다; 너희는 정녕 그것을 몹시 혐오해야 한다 (신. 7:25, 26);
“나라들의 금”은 악들을, 그들의 “은”은 거짓들을 표시한다. 다시:
너희는 나와 더불어 (있게) 은으로 신들을 만들지 말 것이다, 그리고 금으로 된 신들을 너 희는 너희에게 만들지 말 것이다 (출. 20:23);
위 구절의 내적 의미에서 거짓들과 탐욕들을 의미한다; “은으로 된 신들”은 거짓들이다; 그리고 “금으로 된 신들”은 탐욕들이다. 이사야서에서:
그 날에 그들은 각자가 자기의 금 우상과 은 우상을 내던질 것이다, 이것을 너희 손들이 죄를 위해 너희에게 만들었었다 (이. 31:7);
“은 우상과 금 우상”은 비슷한 어떤 것을 표시한다; “너희의 손들이 그것들을 만들었다”란 그것들이 인간의 자기 자신으로부터 이다를 뜻한다. 예레미야서에서:
그들은 들짐승 같이 되고 어리석게 되었다; 덧없는 가르침이 그 지주이다; 두드려 편 은이 다르싯으로부터 가져 와진다, 그리고 금은 우바스로부터 인데, 기술공의 작품이고 주조자의 손의 작품이다; 푸르고 진홍색이 그들의 의복이다, 그것은 슬기있는 자의 모든 작품이다 (예. 10:8, 9);
위의 구절도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음이 분명하다.

그리고 금에서. 이는 진리들로부터의 선들을 의미하는데, 이는 “금”의 의미가 천적인 선, 또는 지혜의 선과 사랑의 선이다로 분명해진다; 이는 방금 살핀 바로부터 알 수 있다. 여기서의 선들은 진리들로부터 이다는 것은 앞 장에서 말해진 것, 즉 주님은 지적인 진리들을 천국의 진리들과 결합되게 하셨다는 것에 이어지고 있다.

3절. 그리고 아브람은 그의 여정들을 따라, 남쪽으로부터 그리고 벧엘에까지, 그의 천막이 처음 있었던 장소, 벧엘과 아이 사이에로 갔다.

그는 그의 여정들에 따라 갔다. 이는 질서에 따라서를 의미하는데, 이는 “여정들, journeys”의 의미가 더 발전함들이다는 것으로 분명해진다. 이에 관하여는 앞에서 살폈다; 그리고 이것들이 질서에 따라 만들어졌는 바, 여기서의 “여정들”은 이 외 더 다른 의미는 없다. 주님은 그분의 어린 시절로부터 신성한 질서에 따라 천국의 것들 쪽으로, 그리고 천국의 것들 안으로 발전해 가셨다; 그리고 내적 의미에서, 이 질서의 본성이 아브람에 관해 말해진 것에 의해 묘사되어져 있다. 또한 이와 같은 질서에 따라 주님에 의해 새로이 창조되는 모든 인간들이 인도된다; 그러나 이 질서는 인간과 더불어서 일 경우, 각 개인의 본성과 특질에 따라 다양해진다. 그러나 인간이 거듭나는 동안 각 개인을 인도하는 이 질서는 어느 인간, 어느 천사조차, 아주 희미한 수준 외에는 알려지지 않고, 오직 주님만이 아신다.

남쪽으로부터 그리고 벧엘에 이르기까지. 이는 총명의 빛으로부터 지혜의 빛으로까지를 의미하는데, 이는 “남쪽”의 의미가 총명의 빛, 같은 말로, 내면에서의 빛의 상태이다로; 그리고 “벧엘”의 의미가 지식들로부터 올라 오는 천국의 빛 [1453항]이다로 분명해진다. 총명의 빛이라 불리는 빛은 신앙의 진리들과 선들에 관한 지식들을 수단으로 획득되어진다. 그러나 지혜의 빛이라 불리는 빛은 삶으로부터 획득된 생명의 빛이다. 총명의 빛은 지적 부분, 또는 이해함을 중시한다; 그러나 지혜의 빛은 의지 부분, 또는 삶(생명)을 중시한다.
거의 없지만, 있다면 극히 소수만이 어떻게 인간이 진정한 지혜에 데려와지는지를 알고 있다. 총명은 지혜가 아니다, 그러나 지혜에로 이끈다; 그 이유가 참되고 선인 것을 이해하는 것이 참되고 선인 것은 아니다는 말이다. 그러나 지혜있는 것은 그렇게 있는 것이다. 우리가 사는 방법에 관해서 만을, 우리가 사는 지금의 상황이 실제로 슬기로운 것인지 만을 질문하는 것이 지혜이다. 비 종교적, 종교적 지식이 우리를 소개하는(이끌어 들이는) 것이 삶, 다른 말로 지혜이다. 모두 각각의 인간 안에 두 가지, 즉 의지력과 이해력이 있다; 의지는 첫째되는 능력이고, 이해함은 둘째되는 능력이다. 사후 인간의 삶은 그의 의지 부분에 따라 결정되고, 그의 이해 부분은 아니다. 의지는 주님에 의해 인간 안에서 그의 유아기로부터 어린 시절까지에서 만들어지고 있다. 이 작업은 은근히 심어진 순진을 수단으로, 그리고 부모나 유모, 그리고 같은 또래의 아이들을 향한 선행을 수단으로 결과되어진다; 그리고 많은 다른 것들을 수단으로 하지만 인간은 모른다. 그리고 이것들은 천국적이다. 이 천국의 것들이 유아나 어린 시절에 우선 은근히 주입되어져 있지 않으면, 인간은 결단코 인간이 되어갈 수 없다. 그리하여 첫 평면(plane, 또는 수준, level)이 만들어진다. (이 첫 평면은 의지 부분에서 이다).
그러나 인간은 그가 이해력을 수여받지 못하면 인간이 아니기 때문에, 의지력 만으로는 인간을 만들지 못하기 때문에 의지력에 이해력이 함께 있어야 함은 필수이다; 그리고 이해력은 비 종교적 지식과 종교적 지식들을 수단으로 해서만 획득이 가능하다; 그러므로 인간은 그의 어린 시절로부터 이런 지식들을 점진적으로 빨아 들인다. 이렇게 해서 두 번째 평면이 만들어진다. (이 두 번째 평면은 이해 측면이다). 지적 부분이 두 종류의 지식들로 가르쳐질 때, 꼬집어 말하면, 진리와 선에 관한 지식들로 가르쳐져 갔을 때, 그때 인간은 처음 거듭나 질 수 있다; 그리고 그가 거듭나지고 있을 때, 진리들과 선들은 그가 유아기 때로부터 주님에 의해 수여되었던 천적인 것들 안에 지식들을 수단으로 주님에 의해 이식되어진다. 이리하여 그의 지적인 것들은 그의 천국의 것들과 하나를 만든다; 그리고 주님이 이것들을 결합하셨을 때, 인간은 선행을 수여받고, 선행이 양심 속에 자리잡고, 이것으로부터 그는 행동한다. 이런 길에서 처음 동안 그는 새로운 생명(새로운 삶)을 받는데, 등차적으로 받는다. 이 생명(삶)의 빛이 지혜라 불리운다. 이 빛은 첫째의 자리에 놓이고, 총명 위에 장착된다, 즉 총명을 능가한다. 그리하여 세 번째 평면이 만들어진다. 인간이 육체의 삶 동안 이와 같이 되어가고 있다면, 그는 사후의 삶에서 덜 완전해진 자신의 부분을 계속 완전해짐 쪽을 향해 발전해 나간다.

전에 그의 천막이 있었던 처음 장소까지. 이는 그분이 지식들을 빨아 들이시기 이전에 계셨던 거룩한 특성들을 의미하는데, 이는 “천막”의 의미가 신앙의 거룩한 특성들이다로 분명해진다. 그러므로 이것은 주님께서 지식들을 빨아 들이시기 이전 가지셨던 천적인 것들 쪽으로 되돌아 가셨다를 의미하는데, 이는 앞 장 8절에서 말해진 바, 즉 “그리고 아브람은 거기서부터 벧엘의 동쪽 산으로 옮겨, 그의 천막을 고정했다”로부터 분명해진다; 그리고 이것(8절)은 아브람이 이집트로 떠나기 직전에, 즉 주님께서 사실적, 종교적 지식들을 빨아 들이시기 이전에 있었다.

벧엘과 아이 사이. 이는 지식들의 천적인 것들과 세상적인 것들을 의미하는데, 이는 “벧엘”의 의미가 지식들을 수단으로 한 지혜에의 빛이다로; 그리고 “아이”의 의미가 세상적인 것들로부터의 빛이다로 분명해진다. 거기서 말해진 바로부터 그때 당시 주님의 상태가 무엇이었는지 알런지 모른다; 즉 그것은 어린아이 같은 것 이었다는 것; 그리고 어린 아이의 상태는 세상적인 것들이 현존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 이유가 세상적인 것들은 진리와 선이 지식들을 수단으로 천국적인 것들에 이식될 때까지 사라질 수 없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인간은 그가 천적인 것이 무엇인지를 알 때까지, 그리고 세상적인 것이 무엇인지 알 때까지 천국과 세상의 것들을 구별할 수 없기 때문이다. 지식들은 일반적이고 불명료한 관념을 또렷한 관념으로 만든다. 관념이 지식을 수단으로 더 또렷해질 수록, 세상적인 것들은 더 분리되어진다.
그러나 여전히 어린이같은 상태는 거룩하다, 그 이유는 그것 안에 순진이 있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거룩함은 순진이 있는 무지함 안에 거주하기 때문이다. 주님을 제외한 모든 사람과 더불어, 거룩함은 무지함 안에 단독으로 거주할 수 있다. 가장 높은 총명과 지혜의 빛 안에 있는 천사 자신과 더불어서도, 거룩함은 무지함 안에 거주한다; 그 이유는 이 천사들은 자신들 스스로부터서는 아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것, 자기들이 아는 것은 주님이 알려주셨기 때문임을 인정하고 알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그들은 자기들의 모든 기억적 지식, 총명, 지혜는 무한한 지식에 비교해 아무것도 아니다는 것, 고로 자기들의 것은 무지한 수준 밖에 더 아니다는 것을 알고 인정한다. 자기에게 익숙해 있는 것을 넘어 자기에게 익숙해 있지 않은 것을 인정하지 않는 자는 천사들이 있는 무지함 안에 있어질 수 없다.
무지의 거룩함은 타인보다 자기가 무식할 때 있어지는 것이 아니라, 인간은 자신으로부터 아는 것은 아무것도 없음을 인정할 때, 그리고 그가 모르는 것들은 그가 아는 것에 비교하여 무한하다는 것을 인정함에 있다; 그리고 특별하게는 그가 지닌 기억 속의 것들과 이해함 속의 것들은 천국의 것들에 비교하건대 지극히 작은 순간밖에 더 아니다를 주목함에 있어진다; 즉 이해력에 있는 것들은 삶(생명)의 것들에 비교하면 한 줌밖에 안된다는 것이다. 주님에 주목해 보면, 그분은 인간적인 것들을 신성한 것들에 결합하여 가셨는데, 이것을 질서에 따라 발전해 가셨다; 그리고 지금 처음으로 그분은 그분이 어린 시절 때 가지셨던 것과 같은 천적인 상태에 도착하셨다; 이 상태 안에는 세상적인 것들이 현존해 있었다. 이로부터 한층 더 천적인 상태로 발전하심을 수단으로 그분은 마침내 유아의 천적 상태에 당도하셨다, 그리고 이 안에서 그분은 인간 본질을 신성 본질과 완전히 결합하셨다.

4절. 그가 시작에서 거기에 만들었던 제단이 있는 곳으로; 그리고 거기서 아브람이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

제단이 있는 곳으로. 이는 예배의 거룩한 것을 의미하는데, 이는 “제단”의 의미가 예배의 제 1의 표현물이다로 분명해진다 [921항도 참조].

그가 시작에서 만들었던. 이는 그분이 아이였을 때 가지셨던 것을 의미하는데, 이는 8절에서 말해진 바로 분명해진다. 그리고 이 구절에서는 “시작에서(in the beginning)”라고 말해지고 3절의 경우는 “처음에(at the first)”라고 표현하는데 그 이유는 주님께서 지식들을 흡입하시기 이전 이었기 때문이다. 인간이 가르쳐지기 이전 모든 상태는 “처음”이고, 인간이 가르쳐지기 시작하는 때는 “시작에서”이다.

그리고 아브람은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 이는 이 상태에서 있는 내적 예배를 의미하는데, 이 의미는 “여호와의 이름을 부름”의 의미로 분명해지고, 이에 관하여는 이미 설명되었다. 여기서 역시, 상태들의 비슷함 때문에, “제단”의 언급이 만들어지고 있다. 즉 이 구절은 그가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이고, 12:8의 경우도 같았다. 그러나 이런 차이는 있다. 앞 장과 비교해서 이 구절에서 묘사된 상태는 명료한 상태이다. 지식들이 위에 묘사된 상태 안에 이식될 때, 그것들은 상태를 명료하게 만든다; 그리고 진리와 선이 지식들을 수단으로 이전의 천적 상태에 결합되어질 때, 그 때 그것의 활동이 우리 앞에 지금 말로서 묘사되는 것이다; 그 이유가 예배 자체는 내부인 천적인 것으로부터 분출하는 어떤 활동밖에 아무 것도 없다. 천적 자체는 활동 없이 존재를 가능하게 할 수 없다. 예배는 그것의 첫 활동이다; 그 이유는 천적인 것은 자체를 이런 방법에서 내밀기 때문이고, 기쁨을 지각하기 때문이다. 사랑으로부터의 모든 선, 선행으로부터의 모든 선은 필수적인 활동 자체이다.

5절. 그리고 롯도 아브람과 함께 갔는데 양떼와 목축, 그리고 천막을 가졌다.

그리고 롯도, 아브람과 함께 갔다. 이는 주님에 있었던 외적 인간을 의미하는데, 이는 “롯”의 의미가 감각적 인간, 또는 같은 것으로 외적 인간이다에서 분명하다. 인간 안에는 내적 인간과 외적 인간이 있다, 또는 같은 말로, 인간은 내적이고 외적인 측면이 있다는 것은 교회 내에 모든 이에게 알려져 있다. 외적 인간은 그것의 생명을 대체로 내적 인간으로부터, 즉 영, 또는 혼으로부터 받는다. 거기로부터 외적 인간의 참 생명은 일반적으로 오고 있다; 그러나 이 생명은 그것의 세부 사항, 또는 구분된 하나씩으로는 외적 인간을 수단으로 하여서는 받아질 수 없다. 따라서 이렇게 내적 인간의 세부적, 낱개 측면에서의 그릇인 유기체의 그릇들이 열려야만 한다. 받는 그릇들이기 위해 있는 유기체의 그릇들은 감각들을 수단으로, 특히 시각과 청각에 속한 것을 수단으로 하여야 열리어진다; 그리고 그것들이 열릴 때, 내적 인간은 그것의 세부적 측면에서 하나씩이 흘러들 수 있다. 그 그릇들은 매개체로서의 감각들과 더불어, 비 종교적, 종교적 지식들을 수단으로, 그리고 기쁨들과 즐거움들을 수단으로 열리어진다; 이것들 중 지식을 수단으로 하는 것들은 이해력에 속하고, 기쁨이나 즐거움을 수단으로 하는 것은 의지에 속한다.
이런 것들로부터 알런지 모르는 것은, 영적 진리들과 일치하지 않는 지식들은 그 자체 외적 인간 안으로 은근히 심어진다는 것; 그리고 천국의 선들과 일치하지 않는 기쁨들과 즐거움들도 그 자체 외적 인간 안으로 은근히 심어진다는 것에 대해서 이다; 목적으로 세상적, 지상적, 육체적인 것을 중시하는 모든 것들 역시 그 자체 외적 인간 안으로 은근히 심어진다. 이런 것들이 목적으로 중시될 때 외적 인간은 아래쪽, 바깥쪽의 것에 끌리는 바, 이 끌림은 외적 인간을 내적 인간으로부터 옮겨 놓는다. 그러므로 이런 끌림들이 우선 사라지지 않으면, 내적 인간은 외적 인간과의 일치가 가능할 수 없다; 따라서 내적 인간이 외적 인간과 일치하기 이전, 이런 것들은 우선 제거되어야 한다. 주님과 더불어 이런 것들이 옮겨짐, 또는 분리됨이 롯이 아브람과 분리함에 의해 표현되고 의미되어지고 있다.

양떼와 목축, 그리고 천막들을 가졌다. 이는 외적 인간에 많이 있는 것들을 의미하는데, 이는 “양떼”, “목축”, 그리고 “천막들”의 의미로부터 분명해진다. 이를 살펴보자. 이것들이 여기서 외적 인간의 소유물들을 의미하고 있다; 그 이유가, 롯에 의해, 앞서 말한 대로, 주님의 외적 인간을 표현했다. 외적 인간에 있는 소유물에는 두 가지가 있다. 즉 내적 인간에 일치하는 것과 일치하지 않는 것의 두 가지이다. 여기서 “양떼, 목축”과 “천막들”에 의해서는 일치하지 않는 것들이 의미되는데, 이어지는 7절로부터, 즉 “그리고 아브람의 소떼의 목부와 롯의 소떼의 목부 사이에 다툼이 있었다”라고 언급된 것에서 분명해진다.

“양떼와 목축”이 외적 인간의 소유물들을 의미하는 것은 “양떼”와 “목축”의 의미가 선들이다로 분명해진다; 그러나 여기서 그것들은 분리되기 위해 있는 것들이므로 선이 아닌 것들을 의미한다. 그 이유는 그것들이 아브람에게서 분리되어지는 롯의 속성이기 때문이다. “양떼”와 “목축”이 선이 아닌 것들을 의미하는 것은 말씀의 아래 인용 구절로 분명해진다. 스바냐서에서:
나는 너를 파괴할 것인 즉, 거주민이 없을 것이다. 그리고 바다 해안은 목자들을 위해 거처 를, 양떼를 위해 양우리들을 파서 만들 것이다 (습. 2:5, 6).
예레미야서에서:
나는 너희에 있는 목자와 양떼를 흩으릴 것이다; 그리고 나는 너희에 있는 농부와 그의 멍 에를 흩으릴 것이다 (예. 51:23).
예레미야서에서;
너희는 아라비아로 올라 가라, 그리고 동쪽의 아들들을 황폐하게 하라; 그들의 천막들과 그 들의 양떼들을 너희는 가져갈 것이다 (예. 49:28, 29).

“천막들”은 내적인 것에서 그 자체 분리된 것으로부터의 예배를 의미한다. 이는 “천막”의 의미가 예배의 거룩한 것이다의 의미로부터; 그리고 “롯”의 표현이 외적 인간임, 이로부터 “천막들”, 또는 예배가 서술됨으로도 분명해진다. 반대적 의미에서 “천막들”은 거룩하지 않은 예배를 의미하는 것은 아래 구절로도 분명해진다. 호세아서에서:
쐐기풀이 그들을 상속할 것이다; 가시덤불이 그들의 천막들 안에 있을 것이다 (호. 9:6).
하박국서에서:
나는 구산의 천막들을 보았다; 미디안의 토지의 휘장들은 크게 요동하였다; 여호와께서 강 들에 화를 내셨다 (합. 3:7, 8).
예레미야서에서:
양떼를 가진 목자들이 시온의 딸에게 올 것이다; 그들은 그녀 주변에 천막들을 고정할 것 이다; 그들은 각자의 장소에서 (자기 양들을) 먹일 것이다 (예. 6:3).
다윗서에서:
그분은 이집트의 모든 첫 출생을, 함의 천막에서 기력의 시작을 치셨다 (시. 78:51).
다윗서에서:
나는 사악한 자의 천막 안에 머물기보다 오히려 내 하느님의 집의 문지방에 설 것입니다 (시. 84:10).

6절. 그리고 그 토지는 그들로 하여금 함께 거주하도록 그들을 받쳐줄 수 없었는데, 그 이유는 그들의 물질이 많아서 그들이 함께 거주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 토지는 그들이 함께 거주하도록 그들을 받쳐줄 수 없었다. 내적인 천적인 것에 속하는 것들은 다른 것들, 즉 롯에 의해 여기서 의미되는 것들과 함께 있을 수 없었다를 의미한다. 이미 말한대로 아브람은 주님, 여기서는 그분의 내적 인간을 표현한다; 그러나 롯은 그분의 외적 인간, 여기서는 내적인 것들이 거주할 수 없는 외적 인간, 즉 분리되어야 하는 외적 인간 속의 것들을 의미한다. 이와 달리 외적 인간에는 내적 인간과 함께 거주할 수 있는 많은 것들도 있다. 즉 선에 대한 애착, 이 책으로부터 근원하는 기쁨들과 즐거움들 등등인데, 그 이유가 이것들은 내적 인간의 선들로 부터의 결과, 그리고 그것의 기쁨들과 행복으로부터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그것들이 결과들일 때, 그것들은 함께 상응한다; 그때 그것들은 내적 인간으로부터 이고 외적 인간으로부터가 아니다. 그 이유가 아는 바대로, 결과는 결과로부터가 아니고 결과되는 원인으로부터 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얼굴로부터 빛나는 선행은 얼굴로부터가 아니라, 내부에 있는 선행으로부터 이다. 말하자면 선행이 얼굴을 그렇게 만들어내고 결과를 표출한다는 말이다; 또는 작은 어린이가 그들의 외모 자체, 몸짓들, 친구끼리 놀 때 등에서 보여 주는 순진은 그들의 용모, 몸짓으로부터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혼들을 통하여 안으로 흐르는 주님의 순진으로부터 이다; 이렇게 해서 순진의 명명백백은 결과들이다; 그리고 이것은 모든 다른 경우들과도 같다.
이로부터 분명한 바, 외적 인간에 있는 많은 것들이 내적 인간과 일치하고 함께 거주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일치하지 않는 경우 역시, 또는 내적 인간과 거주할 수 없는 경우 역시 아주 많다; 이것은 자기를 사랑함과 세상을 사랑함으로부터 튀어나오는 모든 것들과 더불은 경우이다. 그 이유가 이런 것들은 목적으로 자아와 세상을 중요시하기 때문이다. 이것들과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일치할 수 없다; 그 이유가 이런 것들은 목적으로 주님과 그분의 왕국과 거기에 속하는 모든 것을 중요시 하기 때문이다. 자아와 세상 사랑의 목적은 바깥쪽, 또는 아래쪽을 향하고,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안쪽과 위쪽을 향하고 있다; 이로부터 또 분명한 것은, 외적인 것들에는 일치하지 못해 함께 있을 수 없는 것이 아주 많다는 것이다.
내적 인간에 외적 인간이 상응하고 일치함을 무엇이 만드는지, 불일치는 무엇이 만드는지를 알려면 통치하는 목적들, 즉 통치하는 사랑들을 곰곰이 살펴보면 알게 된다. 그 이유가 사랑들이 목적들이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사랑되어지는 것을 목적으로 찾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고로 생명은 어떤 품질로부터 있는지, 그리고 사후 어떤 품질의 생명이 되어 있을지도 분명해진다; 그 이유가 목적들로부터, 같은 말로, 통치하는 사랑들로부터 생명은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모두 각각의 인간의 생명은 이외 달리 있지 않다. 영원한 생명과 불일치하는 것들, 즉 영원한 생명인 영적이고 천적인 것들과 불일치하는 것들이 만일 육체의 삶에서 제거되지 않는다면 다른 삶에서 제거됨에 틀림없다. 이렇지 않으면 인간은 영원한 불행 속에 있을 수밖에 없다.
위에 말한 것을 다시 정리해보자. 외적 인간 안에는 내적 인간과 일치하는 것들과 일치하지 않는 것들이 있다는 것; 그리고 일치하는 것이 일치하지 않는 것들과 함께 있을 수 없다는 것; 외적 인간에 있는 일치하는 것들은 내적 인간으로부터 있다는 것, 즉 주님으로부터 내적 인간을 통하여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마치 선행으로부터 빛을 발하는 얼굴, 또는 선행의 얼굴; 또는 작은 어린이의 몸짓이나 용모에서 풍기는 순진 같은 것이다. 그러나 불일치하는 것들은 인간으로부터 있고 그의 자기 자신으로부터 있다. 이상 말해진 바로부터 본문의 말, “토지는 그들이 함께 거주하도록 받쳐줄 수 없었다”의 의미를 알런지 모른다. 내적 의미에서 여기서는 주님이 취급되고 있다; 주님이 다루어지기 때문에 그분의 모든 모습과 형상 역시 취급되어진다. 즉 그분의 왕국, 그분의 교회, 그리고 그 왕국, 그 교회 속의 모든 사람도 취급된다. 이런 이유에서 인간에 있는 것들이 여기서 설명되어진다. 주님께서 그분 자신의 힘으로 악, 즉 악마와 지옥을 정복하시고, 동시에 그분의 인간 본질 측면이 천적이고, 신성이고, 여호와되시기 이전의 주님에 속하는 것들이 그때 당시 그분이 있으셨던 상태에 비교하여 심도있게 생각되고 있다.

그 이유는 그들의 물질이 많아서 그들은 함께 거주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는 내적 인간에 의하여 획득된 것이 외적 인간에 의하여 획득한 것과 일치할 수 없었다를 의미하는데, 위에서 말해진 바로부터 알 것이다.

7절. 그리고 아브람의 소떼의 목부와 롯의 소떼의 목부 사이에 다툼이 있었다. 그리고 그 당시 가나안족과 브리스족이 그 땅에 거주하고 있었다.

그리고 아브람의 소떼의 목부와 롯의 소떼의 목부 사이에 다툼이 있었다. 이는 내적 인간과 외적 인간이 일치하지 않았다를 의미하는데, 이는 “소떼의 목부”의 의미가 가르치는 이들, 그리고 예배 속에 있는 것들이다 에서 분명해지는 바, 모든 이가 알런지 모른다; 그러므로 말씀으로부터의 확증은 생략해도 될 것 같다. 이런 것들이 5절의 “천막”이라 불리우는 것과 관련되고 있다; 그리고 이것이 예배를 의미한다고 지적했다. 6절에서 말해지는 것, 천막에 즉시 이어서 “양떼와 목축”이라 불리는 것과 관련되고 있다. 그리고 7절에서는 이것들이 소유물, 또는 획득물을 나타냄을 지적하고 있다. 예배가 여기서 취급되는데, 즉 내적 인간의 예배와 외적 인간의 예배가 취급되고, 이것들이 아직 일치하지 않았다는 것이 “목부들 사이에 다툼이 있었다”라고 말해지고 있다; 그 이유가 아브람은 내적 인간을, 롯은 외적 인간을 표현하기 때문이다. 예배 안에서 내적 인간과 외적 인간의 사이의 불일치의 본성과 품질은 금방 식별할 수 있다. 게다가 예배의 아주 작은 것에서조차도 식별은 어렵지 않다. 그 이유가 예배에서 내적 인간은 하느님의 왕국에 속하는 목적들을 중시하고, 외적 인간은 세상에 속하는 목적들을 중시하기 때문이다. 그런고로 예배에서 불일치를 명백히 드러낸다. 그리고 천국에서도 불일치의 미미한 조각도 알아 챈다. 이것이 “아브람의 소떼의 목부와 롯의 소떼의 목부 사이에 다툼이 있었다”에 의해 의미되고 있다. 이 원인이 추가하는 것이, “가나안족과 브리스족이 토지에 거주하고 있었다”이다.

“아브람의 소떼의 목부”는 내적 인간으로부터 있는 천적인 것들, 그리고 “롯의 소떼의 목부”는 외적 인간으로부터 있는 감각적인 것들이다는 것은 이미 말했다. “아브람의 소떼의 목부”인 천적인 것들을 수단으로 내적 인간으로부터 있는 예배의 천적인 것들이 뜻해진다. “롯의 소떼의 목부”를 수단으로 예배에 있는 감각적인 것들이 뜻해지고, 이는 외적 인간으로부터 이고, 내적 인간의 예배 속의 천적인 것들과 일치하지 않는다. 이에 대한 것은 이미 살핀 바 있다.

그리고 그 당시 가나안족과 브리스족이 그 땅에 거주하고 있었다. 이는 외적 인간에 있는 악들과 거짓들을 의미하는 것은 “가나안족”의 의미가 외적 인간에 있는 어머니로부터의 유전적 악이다로 분명해진다; 그리고 “브리스족”의 의미가 파생된 거짓이다로도 분명해진다; 그리고 악으로부터 거짓이 있는 것은 필수적 결과이다로 분명해진다; 그 이유가 유전적 악이 있는 곳에 거짓 역시 있기 때문이다; 후자는 전자로부터 태어나진다. 그러나 악으로부터 있는 거짓은 인간이 비 종교적, 종교적 지식들을 흡입할 때까지 태어나질 수 없다. 악은 이런 지식들 안으로 흘러들고 작동한다. 그 이유가 이런 방법 안에서 의지 부분으로부터 있는 악이 지적 부분에 있는 거짓으로 바뀌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이 거짓 역시 유전적인 것(거짓)이 된다. 그 이유는 이것이 유전적이었던 것에서 출생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아직은 거짓의 원리들로부터 파생된 거짓은 아니다; 그러나 이것은 외적 인간에 있는 바, 내적 인간은 그것이 거짓이다고 본다.
주님이 지식들을 흡입하시기 전, 즉 아브람이 이집트에 체류하시기 전, 어머니로부터의 유전적 악이 있으셨기 때문에 앞 장 6절에서 “가나안족이 그 토지에 있었다”라고 말해지나, 브리스족은 말해지지 않는다; 그러나 그분이 지식들을 흡입하신 이후인 여기에서는 “가나안족과 브리스족이 토지에 살고 있다”고 말해진다. 이로부터 분명해지는 바, 가나안족은 악을, 브리스족은 거짓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로부터 명백해지는 바, 이 구절과 앞 장의 구절 모두에서 가나안족과 브리스족의 언급은 역사적 사건과 무관하게 (느닷없이) 등장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로부터 분명한 바 여기에는 내적 의미로만 알려지는 신비함들이 있다는 것이다.
어머니로 부터의 유전적 악이 주님과 더불어 있었다고 말해짐은 놀라움을 일으킬지 모른다. 그러나 여기서도 아주 명백하게 선포되고(가나안족이 있음으로), 그리고 주님이 내적 의미에서 취급되는 바, 이것이 그러하다는 것은 의심될 수 없다. 그 이유가 어느 인간 존재라 해도 악을 파생함 없이 다른 인간 존재를 출생되게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버지로부터의 유전적 악은 어머니로부터의 유전적 악과 다르다. 아버지로부터의 유전적 악은 내적인 악이고 영원히 남으며, 뿌리채 뽑히는 것은 가능할 수 없다; 그러나 주님은 이런 악은 가지지 않으셨다, 그 이유는 그분은 여호와 아버지로부터 태어나셨기 때문이다, 고로 내적 측면은 신성, 또는 여호와이셨다. 그러나 어머니로부터의 유전적 악은 외적 인간으로부터이다. 이것은 주님과 더불어 존재했다, 그리고 이것이 “토지에 있는 가나안족”이라 불리운다; 그리고 이것으로부터의 거짓이 “브리스족”이라 불리우고. 그런고로 주님은 다른 사람들 같이 태어나시고, 다른 사람들 같이 유약함을 지니셨다.
그분이 어머니로부터의 유전적 악을 가지신 것은 그분이 시험을 겪으셨다는 사실로부터 분명해진다; 악이 없는 인간이 시험을 받는 것은 어느 인간이라도 가능해 질 수 없다. 시험을 당하는 것은 인간 안에 있는 악이고 이 악을 통하여 인간은 시험되어진다. 주님이 시험받으신 것, 그분이 시험을 수행하신 것은 어느 인간이 겪은 시험보다 수천 배 더 비통했다; 그리고 그분은 그것들을 홀로 견뎌내셨고, 그분 자신의 힘을 수단으로 악마와 모든 지옥, 악을 정복하셨다. 이 시험들에 관하여 누가복음서에서:
예수께서는 영 안에서 광야로 인도되시고, 사십 일 동안 악마에 의해 시험되셨다, 그리하 여 그분은 이 날 동안에 잡수시지 않았다. 그러나 악마가 모든 시험들을 끝낸 후에, 얼마동 안 그분을 떠났다. 그분은 성령의 힘으로 갈릴리로 돌아오셨다 (눅. 4;1, 2, 13, 14).
그리고 마가복음서에서
성령은 예수를 재촉하시어 그분으로 광야로 나가시게 했다. 그리고 그분은 사십 일 동안 광야 안에 계시며, 시험받으시고, 들짐승들과 함께 계셨다 (막. 1:12, 13);
위에서 지옥이 “들짐승들”에 의해 의미되어진다. 더욱이 그분은 죽음에 이르기까지 시험받으셨다, 그리하여 그분의 땀방울은 핏방울이 되셨다:
그리고 고통의 절정에서, 그분은 더 열심히 기도하셨다; 그리고 그분의 땀방울은 핏방울이 되어 땅에 떨어졌다 (눅.22:44).
천사는 악마로부터 시험 받아진 적이 없다; 그 이유는 악령들이 공포와 전율로 사로잡힘 없이 천사에게 접근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는 먼 거리에서 즉시 그렇게 되어진다. 만일 주님이 어머니로부터 붙어진 악 없이 신성만으로 태어나셨다면 지옥은 아예 접근하려 들지도 않았을 것이다.
지상 설교자들에게 공통된 표현은 주님께서 인류의 불법과 악들을 짊어지셨다는 표현이다; 그러나 유전적 방법이 아니고는 불법들과 악들을 자신 안으로 끌어 들이는 것은 완전히 불가능하다. 그 이유는 신성은 악에 민감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분이 그분 자신의 힘으로 악을 정복하도록 하기 위하여, 이는 어느 인간도 행해질 수 없는 것, 그리고 그분만이 정의되시기 위하여 그분은 여느 사람같이 태어나시는 것이다. 만일 위 같은 설명이 아니라면, 그분은 인간같이 태어나실 필요가 없으시다. 그 이유가 주님이 태고 교회에서, 그리고 예언자들에 의해 보여질 때 같이, 출생 없이 인간 본질로 계신 체로 하실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악을 입는 추가적인 목적을 위하여, 그리고 이 악에 맞서 싸우시기 위하여, 그리고 정복하시기 위하여, 그리고 그분 자신 안에서 신성 본질과 인간 본질에 결합하시기 위하여, 그분은 세상에 오셨다.
그러나 주님은 실제적인 어떤 악, 또는 그분의 자기 자신으로부터의 악은 없으셨다. 그분 역시 요한복음서에서 말하신다:
너희 중 누가 나에게서 죄 있다 확신하느냐? (요.8:46)
이상 말해진 바로부터 “아브람의 목부들과 롯의 목부 사이에 다툼”에 의해 의미되는 것을 이해했을 것이다. 이 말은 “토지에 가나안족과 브리스족이 거주하고 있었던” 이유로 먼저 언급되었다.

“가나안”은 외적 인간에 있는 어머니로부터의 유전적 악이다는 것은 이미 말했다; 그러나 “브리스족”이 악으로부터 있는 거짓을 의미하는 것은 브리스족이 명명되는 말씀에서 분명해진다. 야곱에 관련한 다음 절에서:
야곱은 시므온과 레위에게 말했다. 너희는 나에게 화를 끼쳐 나로 하여금 이 토지의 주민, 가나안족과 브리스족에게 악취를 내게 하였다. 그리고 나는 숫자에서 죽을 수밖에 없는 운 명이다, 그리고 그들은 다함께 합세해 나를 칠 것이다. 그리고 나는 멸망할 것이다, 나와 내 가문도 말이다 (창. 34:30);
위와 마찬가지로 악이 가나안족에 의해 의미되어진다, 그리고 거짓은 브리스족에 의해 의미되어진다.
여호수아서에서:
여호수아가 요셉의 아들들에게 말했다, 만일 너희가 많은 백성이다면, 너희는 숲으로 올라 가거라, 그리고 브리스와 르바임의 토지에서 너희 자신을 위해 나무를 자르라, 만일 에브라 임 산이 너희를 위해 너무 좁다면. (여. 17:15);
위 구절에서 거짓의 원리가 “브리스”에 의해, 그리고 거짓의 설득이 “르바임”에 의해 의미되어지고, 그들이 근절시켜야 하는 것들이다; 영적 의미에서 “에브라임 산”은 총명이다.
사사기서에서:
여호수아가 죽은 후 이스라엘의 아들들이 여호와께 여쭈었다. 누가 가나안족에 맞서 우리 를 위하여 올라 갑니까?, 누가 그에 맞서 싸울 것입니까? 그리고 여호와께서 말하셨다, 유 다가 올라 갈 것이다; 보라 나는 그의 손 안으로 그 토지를 줄 것이다. 그리고 유다가 그의 형제 시므온에게 말했다, 나와 함께 내 구역 안으로 올라 가자, 그리고 우리가 가나안에 맞 서 싸우자; 그리고 마찬가지로 나는 너와 함께 네 구역으로 올라 갈 것이다. 그리고 시므온 은 그와 함께 갔다. 그리고 유다는 올라 갔다; 그리고 여호와께서는 가나안족과 브리스족을 그들의 손에 붙이셨다 (사. 1:1-4);
위에서 “유다”는 천적인 것들 측면에서 주님을 표현했다, 그리고 “시므온”에 의해서는 파생되는 영적인 것들 측면에서의 주님을 표현했다; “가나안족”은 악이다, 그리고 “브리스”는 거짓이다. 이것들이 정복되었다. 이것이 응답(response), 또는 신성한 신탁(oracle)이었다, 이 설명으로도 이해될 것이다.

8절. 그리고 아브람은 롯에게 말했다, 너와 나 사이에, 그리고 네 목부와 내 목부 사이에 싸움이 있어서는 안된다. 그 이유는 우리는 형제의 사람이기 때문이다.

아브람이 롯에게 말했다. 이는 내적 인간이 외적 인간에게 말한 것을 의미하는데, 이는 아브람의 의미가 여기서 내적 인간이고, 롯의 의미가 분리하기 위해 있었던 외적 인간임에서 분명해진다. 아브람이 내적 인간을 표현하는 것은 그가 분리하기 위해 있었던 외적 인간을 표현한 롯에 비교해서 말해지기 때문이다. 이미 말했듯, 외적 인간 안에는 일치하는 것과 일치하지 않는 것이 있다. 여기서는 “롯”에 의해 일치하지 않는 것이 뜻해진다; 그러므로 “아브람”에 의해서는 일치하는 것들, 이 일치함에는 외적인 것에 있는 일치하는 것들까지 포함된다. 그 이유가 내적 인간과 함께 일치를 이루고 있는 것은 한가지 것을 구성하고, 일치하는 외적인 것들도 내적인간에 속하기 때문이다.

너와 나 사이에…싸움이 있어서는 안된다. 이는 둘 사이에 불일치는 없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미 말해진 바로부터 분명해진다. 내적 인간과 외적 인간의 합일, 또는 일치함에 관련하여 이전에 말하지 않았던 신비함들이 더 있다. 어느 인간과 더불어서도 내적 인간과 외적 인간이 결합되어 있는 적은 없었다; 그것들은 결합될 수 없고, 결합된 채로 있지도 않으나 오직 주님만이 가능하셨다. 그 이유는 그분이 세상에 오시게 된 원인이었기 때문이다. 거듭나지고 있는 인간과 더불어, 둘은 마치 결합된 것 처럼 나타난다; 그러나 이것들은 주님에 속한다; 그 이유가 일치하는 것들은 주님의 것이고, 일치하지 않는 것들은 인간의 것이기 때문이다.
내적 인간 안에는 두 가지 것이 있다, 즉 천적 (평면)인 것과 영적 (평면)인 것이다. 이 둘은 영적인 것이 천적인 것으로부터 일 때, 하나를 구성한다; 이를 다른 말로 표현하면, 내적 인간 안에는 두 가지 것, 선과 진리가 있다라고 말해도 된다; 이 둘은 진리가 선으로부터 일 때, 하나를 구성한다; 이를 다른 말로 더 표현하면, 내적 인간 안에는 두 가지 것이 있다, 사랑과 신앙이다; 이 둘은 신앙이 사랑으로부터 있을 때, 하나를 구성한다; 이를 다시 다른 말로 표현하면, 내적 인간 안에는 두 가지 것이 있다, 의지력(의지, 뜻함)과 이해력(이해함) 이다. 이 둘은 이해함이 의지로부터 일 때 하나를 구성한다. 이를 더 납득하기 위해 실 예로서, 빛이 오는 태양을 가지고 생각해보자. 태양으로부터의 빛 안에 봄철의 경우같이 열과 발광력 둘을 가지고 있으면, 그로 말미암아 만물은 생성하고 살아 있는다; 그러나 태양으로부터의 빛 안에 열이 없다면, 마치 겨울철 같을 경우, 만물은 움직이지 않고 죽어 있다.
이로부터 분명한 바, 무엇이 내적 인간을 구성하는지; 그리고 무엇이 외적 인간을 구성하여 거기로부터 나타나는지에 대한 것이다. 외적 인간 안의 모든 것은 자연적 (평면)이다; 그 이유가 외적 인간 자체는 자연적 인간과 같기 때문이다. 내적 인간의 천적, 영적인 것이 외적 인간의 자연적인 것 안으로 흘러 들어, 그것들을 하나로서 행동하게 만들 때, 내적 인간은 외적 인간에 결합되어 있다라고 말해진다. 이 결과로서 자연적인 것 역시 천적이고 영적인 것이 된다. 그러나 완전히 같아진다는 말은 아니고, 보다 수준 낮은 천적, 영적인 것이 된다는 말이다; 다른 말로 하면, 외적 인간이 천적, 영적 인간이 되나, 한층 더 외적인 천적, 영적 인간이다는 말이다.
내적 인간과 외적 인간 모두 구분되어 있다, 그 이유는 천적, 영적인 것은 내적 인간에게 영향을 주는 것이고, 자연적인 것은 외적 인간에 영향을 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비록 구분은 될지라도, 그것들은 여전히 결합되어 있다, 즉 내적 인간의 천적, 영적인 것이 외적 인간의 자연적인 것 안으로 흘러서, 외적 인간을 자기 자신의 것으로 작정하고 싶을 때, 하나되어 있다. 주님 안에서 만은 내적 인간과 외적 인간이 결합되어져 있다; 이런 결합은 주님이 결합해주고 결합되어 있게 특별히 간섭하시지 않는 한, 누구도 결합되어 있는 경우는 없다. 사랑, 선행, 또는 선만이 결합을 만들어 준다. 그리고 어떤 사랑, 선행, 선도 주님으로부터가 아니면 존재하지 않는다. 이와 같은 것이 아브람의 말 안에 의도되어진 합일이다: “나와 너 사이에, 내 목부와 네 목부 사이에 싸움이 있어서는 안된다.”
“나와 너 사이에, 그리고 내 목부와 네 목부 사이에”라고 말해진 경우는 이렇다: 내적 인간 안에는 두 가지 것, 천적, 영적인 것이 있고, 이 둘은 하나를 만든다. 마찬가지로 외적 인간 안에는 외적 인간의 천적 (평면)이라 불리는 자연적 선. 외적 인간의 영적 (평면)이라 불리는 자연적 진리가 있다. “나와 너 사이에 싸움이 있어서는 안된다”라는 말은 선에 관계되는 바, 내적 인간의 선과 외적 인간의 선에 불일치가 있어서는 안된다를 뜻하고, “내 목부와 네 목부 사이에 싸움이 있어서는 안된다”라는 말은 진리에 관계되는 바, 내적 인간의 진리와 외적 인간의 진리에 불일치가 있어서는 안된다를 뜻하고 있다.

그 이유는 우리는 형제의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이는 그것들이 함께 결합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사람 형제”의 의미가 합일이다로부터, 사실상 진리와 선의 합일이다에서 알게 된다..

9절. 온 토지가 네 앞에 있지 않느냐? 바라건대 나로부터 분리하라. 만일 왼쪽으로 가면 나는 오른쪽으로 가리라. 그리고 만일 오른쪽으로 가면 나는 왼쪽으로 가리라.

온 토지가 네 앞에 있지 않느냐? 이는 모든 선을 의미하는데, 이는 좋은 측면에서의 토지의 의미, 특히 여기서는 가나안의 토지의 의미가 천적인 것, 고로 선이다에서 알려진다. 내적 인간이 외적 인간에게, 정확히 말하면 불일치한 외적 인간에 있는 것들에게 이야기를 하고 있다. 이는 마치 우리가 자신 안에 있는 어떤 악을 지각할 때 이 악을 떼어내기를 바랄 때 행해지는 경우 같고, 시험이나 악과의 전투에서 바라는 경우 같을 것이다. 그 이유가 악으로부터의 시험이나 전투들에 있는 이들이 자신들 안에서 불일치하는 것들을 보는 것은 많이 알려진 사실이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그들이 전투하고 있는 중이다면, 그것들은 분리되어질 수 없다; 그러나 여전히 그것들은 분리를 바란다, 그리고 때로 그것들은 악에 화를 내거나 그것을 추방하기까지의 수준에서 분리를 바란다. 이런 사항들이 여기서 의미된 것들이다.

바라건대 나로부터 분리하라. 이는 불일치한 것이 만들어내는 것이 하나라도 있으면 선은 나타날 수 없다를 의미하는데 방금 말해진 사항들로부터 분명해진다. 즉 내적 인간은 외적 인간에서 불일치한 것은 그 자체 분리해지기를 바란다는 것이다; 그 이유가 그것이 분리될 때까지, 내적 인간으로부터 계속적으로 안으로 흐르는 선, 즉 내적 인간을 통하여 주님으로부터 있는 선은 나타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분리에 주목하면, 이것은 분리가 아니라 무활동의 상태임을 알게 된다. 주님을 제외한 누구도 외적 인간에 있는 악을 분리되게 할 자는 없다. 인간은 한 때 획득해 버린 것은 무엇이든 남아있다. 그러나 그것이 무활동일 경우 그것은 분리된 것처럼 여겨진다. 하여 아무 것도 아닌 듯 하게 존재한다. 주님으로부터가 아니면 아무것도 아닌 듯 하게 있으려 무활동이 되어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주님으로부터 무활동이 되어 있으면, 그때 선은 흘러들고 외적 인간에게 영향을 미치게 된다. 이와 같은 상황이 천사들의 상태이다; 천사들은 악이 자기들로부터 분리되어 왔었다는 것 외에 달리는 알지 못한다; 이에 반해 악에서 보류됨, 그런고로 무활동, 이리하여 아무 것도 아닌 듯 하게 나타남이 있다. 이것은 결과적으로 나타남인데, 그 이유는 천사들이 되새겨 볼 경우 이를 알기 때문이다.

만일 왼쪽으로 (가면) 나는 오른쪽으로 가리라. 그리고 만일 오른쪽으로 (가면) 나는 왼쪽으로 가리라. 이는 분리함을 의미하는데, 이는 “오른쪽”과 “왼쪽”의 의미로부터 분명해진다. 오른쪽과 왼쪽은 상대적인 말투이다. 그것들은 고정된 방위, 또는 명확한 장소를 가리키는 것도 아니다; 그 이유가 우리가 어느 방향으로 서느냐에 따라, 어느 방향을 보느냐에 따라 동과 서, 남과 북은 달라지기 때문이다. 이는 장소를 놓고도 마찬가지이다. 가나안의 토지는 상대적인 것을 제외하면 그것이 왼쪽에 있다, 오른쪽에 있다라고 말해질 수 없다. 주님이 어디에 계시든지, 그곳이 중앙이다; 거기로부터 오른쪽과 왼쪽은 결정되어진다. 그런고로 아브람에 의해 주님이 표현되었는 바, 그가 이 방법으로 물러나든, 저 방법으로 물러나든, 표현함은 여전히 그와 함께 있고, 토지 역시 마찬가지이다. 따라서 아브람이 그 토지에 있든지 그밖의 토지에 있든지 마찬가지였다. 마치 위엄있는 자가 어디에 앉든 그 장소는 위엄있는 장소가 되고 그 장소가 오른쪽이냐, 왼쪽이냐 하는 것은 위엄있는 자로부터 판단되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오른쪽, 왼쪽으로 가는 것은 선택을 제공함의 형체이고, 이를 수단으로 분리가 의미되어진 것이다.

10절. 그래서 롯이 눈을 들었고, 요단의 모든 평지를 보았더니, 거기는 물이 넉넉하였는데, 이는 여호와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기 전이고, 여호와의 동산 같고, 소알에 이르는 이집트의 땅 같았다.

롯이 그의 눈을 들었다. 이는 외적 인간이 내적 인간에 의해 계몽되어짐을 의미하는데, 이는 “눈을 듦”의 의미가 보는 것, 내적 의미에서는 지각하는 것, 여기서는 계몽되어짐 이다로 알게 된다. 계몽됨인 이유는 이것이 롯, 또는 외적 인간을 서술하기 때문이다; 외적 인간이 무엇인지를 지각하는 때가 내적 인간과 결합되는 때, 또는 외적 인간이 그것의 아름다움에 있는 때이다, 그리고 그때 신성한 통찰력(vision)이 있는데, 이것이 지금 취급되고 있다. 주님이 어린 아이 시절, 그분의 외적 인간 측면에서 이런 신성한 보임(sight, vision))에서 자주 계셨다는 것은 의심할 바 없다. 그 이유는 그분만이 외적 인간을 내적 인간에 결합하셨기 때문이다. 외적 인간은 그분의 인간 본질이었고, 내적 인간은 신성 본질이었다.

그리고 요단의 모든 평야를 보았다. 이는 외적 인간에 있는 선들과 진리들을 의미하는데, 이는 “평야”와 “요단”의 의미로부터 분명해진다. 내적 의미에서 “요단의 평야”는 외적 인간의 모든 선들과 진리들에 관련한 외적 인간을 의미한다. “요단의 평야”가 이것을 의미하는 이유는 요단이 가나안의 경계였기 때문이다. 가나안의 토지, 이미 말했듯이, 주님의 왕국과 교회를 의미한다, 그리고 사실상 그로부터의 천적인 것들과 영적인 것들을 의미한다; 이렇기 때문에 이것은 거룩한 토지, 그리고 거룩한 가나안 이라고도 불리운다; 그리고 이것이 주님의 왕국과 교회를 의미하기 때문에, 주님의 왕국과 교회에 있는 모든 것의 모두이신 주님 자신도 의미한다.
이로부터 가나안의 토지에 있던 모든 것들은 표현물이었다. 토지의 한 가운데 있던 것들, 또는 가장 안쪽에 있던 것들은 주님의 내적 인간을 표현했다. 즉 시온산과 예루살렘인데, 전자는 천적인 것들, 후자는 영적인 것들이다. 중앙으로부터 더 멀리 있는 것들은 내적인 것으로부터 더 멀리 있는 것들을 표현했다. 최고로 멀리 있는 것, 또는 경계선에 있는 것들은 외적 인간을 표현했다. 가나안의 경계는 몇 개가 있다; 일반적으로 두 강들, 즉 유브라데와 요단, 그리고 바다이다. 이로부터 유브라데와 요단은 외적인 것들을 표현했다. 그러므로 여기서, “요단의 평야”가 의미하고 표현하는 것은 외적 인간에 있는 모든 것들이다. 이는 “가나안의 토지”라는 표현이 천국들에 있는주님의 왕국, 또는 지상의 주님의 교회, 또는 그분의 왕국, 또는 교회의 사람, 또는 추상적으로 사랑의 천적인 것들, 등등에 적용될 때와 같은 경우이다.
이로부터 가나안의 토지에 있는 모든 것들, 즉 모든 성읍들, 모든 산들과 언덕들, 골짜기, 강들, 이외 다른 것들 역시 표현물이다. 앞에서 보여준 바, 강 유브라데는 경계선인데, 외적 인간에 속하는 감각과 지식으로부터의 것들을 표현했다. 요단 강, 그리고 요단의 평야의 경우도 이와 비슷하고, 이는 아래 인용 구절로부터 보일런지 모른다. 다윗서에서:
오, 나의 하느님, 내 혼은 내 안에서 아래로 구부려졌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요단의 토지와 헤르몬, 작은 산으로부터 당신을 기억합니다 (시. 42:6);
위에서 “요단의 토지”는 낮은 것, 고로 천적인 것으로부터 먼 것, 마치 인간의 외적인 것들이 그의 내적인 것들로부터 있는 것 같이를 표시한다.
이스라엘의 아들들이 가나안의 토지를 진입할 때, 요단(강)을 건넜다, 그리고 가나안은 분할되었는데, 마찬가지로 이것도 외적 인간을 통하여 내적 인간에 접근함을 표현했다, 또한 인간이 주님의 왕국 안으로 진입함, 이 외에 다른 사항들도 있다 (여. 3:14-끝절; 4:1-끝절). 그리고 외적 인간은 내적 인간에 맞서 계속적으로 싸우고, 지배하기를 바라기 때문에, 요단의 “자랑함, pride”, 또는 “팽창됨, swelling”은 예언적 표현이 되었다. 예레미야서에서:
너는 어떻게 말과 네 자신을 경쟁시킬 수 있느냐? 그리고 평화의 토지에서 너는 자신만만 하다; 그러나 요단 강의 불어 오름(팽창됨)에서 너는 어찌할 것이냐? (예. 12:5).
“요단 강의 불어 오름”은 외적 인간에 속하는 것들을 표시한다, 이것이 일어나서 내적 인간을 지배하기를 바라고 있다. 마치 말이라는 추론함들이 자신만만하여 경쟁하려 대드는 것과 같다.
예레미야서에서:
에돔은 황무함을 위해 있을 것이다; 보라 그가 요단의 자랑함으로부터 에단의 거주지까지 사자 같이 올라 올 것이다 (예49:17, 19);
“요단의 자랑함”은 외적 인간이 내적 인간의 선들과 진리들에 맞서 부상함을 표시한다. 스가랴서에서:
오, 전나무여 울부짖어라, 삼나무가 쓰러졌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화려하던 것이 못쓰게 되었기 때문이다. 오, 바산의 상수리나무여 울부짖어라, 방어하던 숲이 내려 앉았기 때문이 다. 목자들의 울부짖는 소리가 남이여, 그들의 화려함이 못쓰게 되었기 때문이다; 어린 사 자의 으르렁 소리가 남이여, 요단의 자랑함이 못쓰게 되었기 때문이다 (슥. 11:2, 3).
요단은 가나안의 토지의 경계였다는 것은 민. 34:12로부터, 그리고 남쪽을 향한 유다의 토지의 경계는 여. 15:5로부터 분명해진다.

거기는 물이 넉넉하였다. 이것은 거기서 선들과 진리들이 자랄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는 “물이 넉넉함”의 의미에서 분명해진다.

여호와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기 이전. 이는 외적 인간이 악의 탐욕들과 거짓의 설득함들을 수단으로 파괴함을 의미하는데, 이는 “소돔”의 의미가 악의 탐욕들, 그리고 “고모라”의 의미는 거짓의 설득함들 임에서 알게 된다. 그 이유가 이 두 가지가 외적 인간을 파괴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적 인간으로부터 외적 인간을 분리시킨다. 그리고 이 둘이 홍수 이전 태고 교회를 멸해버렸다. 악의 탐욕들은 의지력으로부터 이고, 거짓의 설득함들은 이해력으로부터 이다; 이 둘이 지배할 때, 외적 인간은 완전히 파괴되어진다; 그리고 이것이 파괴될 때, 이것 또한 내적 인간으로부터 분리되어진다. 혼 또는 영이 육체로부터 분리하는 것이 아니라, 선과 진리가 인간의 혼 또는 영으로부터 분리되어지는 것이다. 그리하여 아주 멀리 떨어진 상태 외에는 흘러들지 않는다; 이런 유입에 관하여 주님의 신성한 자비로부터 이 밖의 장소에서 말할 것이다. 그리고 외적 인간이 인류 안에서 심히 파손되었기 때문에, 그리고 외적 인간과 내적 인간의 고리 역시, 즉 선과 진리와 더불은 고리 역시 부셔졌기 때문에, 그분께서 외적 인간을 내적 인간에, 즉 인간 본질을 신성에 결합하고 하나로 하시기 위하여 주님은 세상에 오셨다. 외적 인간이 내적 인간과 결합할 때, 그 외적 인간이 어떠한지가 여호와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기 이전, 그것은 “여호와의 동산 같고, 소알에 이르는 이집트의 토지 같다”라고 묘사되어 있다.

여호와의 동산 같다. 이는 외적 인간의 합리적인 것들을 의미하는데, 이는 “여호와의 동산”의 의미가 총명이다에서 알게 된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합리성, 이는 내적 인간과 외적 인간 사이의 매체임이다 에서도 알게 된다. 합리성은 외적 인간의 총명이다. “여호와의 동산”이라는 표현은 합리성이 천적 (수준)일 때, 즉 천적 근원으로부터 일 때, 마치 태고 교회 때에 있던 것 같을 때 사용된다. 이에 관하여 이사야서를 보자:
여호와께서 시온을 위로하실 것이다; 그분은 황폐된 그녀의 모든 장소들을 위로하실 것이 다, 그리고 그녀의 황무지를 에덴으로 만들 것이다, 그리고 그녀의 사막은 여호와의 동산으 로 만들 것이다; 기쁨과 즐거움이 그녀 안에서 발견될 것이다, 고백과 노래(가 그녀 안에서 발견될 것이다) (이. 61:3).
그러나 “하느님의 동산”이라는 표현은 합리성이 영적 (수준), 즉 영적 근원으로부터 일 때 사용된다. 이는 고대 교회의 것과 같다. 에스겔서에서 말하여진다:
지혜가 가득하고, 아름다움이 완전한 너는 하느님의 동산, 에덴에 있었다 (겔. 28:12, 13).
인간의 합리성이 천국에서 표출되는 표현물로부터 “동산”에 비교되어진다; 천적, 영적인 것들이 주님으로부터 인간의 합리성 안으로 흘러 들 때 인간의 합리성은 동산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낙원 조차도 이로부터 시야에 표출되어진다. 이는 화려함과 아름다움에서 인간의 상상을 초월한다, 이는 주님으로부터 천적, 영적인 빛의 유입의 결과이다. 이런 낙원들의 유쾌하고 아름다운 것들은 보는 사람에게 감동을 주려는 것이 아니라, 낙원 안에 살아있는 천적, 영적인 것들이다.

소알에 이르는 이집트의 토지 같이. 이는 선에 대한 애착으로부터의 기억 속의 지식들을 의미하는데, 이는 “이집트”의 의미가 좋은 의미에서 기억 속의 지식으로부터 이다는 것, 그리고 “소알”의 의미가 선에 대한 애착이다에서 분명해진다. 소알은 소돔으로부터 멀지 않은 성읍인데, 롯이 소돔이 불에 탐으로 인해 천사들에 의해 구출되어 피신한 곳이다 (창. 19:20, 22, 30). 소알은 다른 구절에서도 명명되고 있다 즉 창. 14;2, 8; 신. 34:3; 이. 15:5; 예. 48:34 등등이다. 이 구절들에서도 역시 애착을 의미한다; 그리고 소알이 선에 대한 애착을 의미하지만, 반대 의미일 경우, 악에 대한 애착을 의미한다.
외적 인간을 구성하는 세 능력들이 있다. 즉 합리력(합리성, rational), 기억 속의 지식의 능력, 외적 감각(external sensuous)이다. 합리력은 내면, 기억 속의 지식의 능력은 외면, 이 감각적인 것은 가장 바깥이다. 합리력을 수단으로 내적 인간은 외적 인간과 결합한다; 그리고 합리력 자체 역시 이와 같은 결합이 있다. 외적 감각은 여기서의 경우 시각과 청각이다. 그러나 합리력은 애착이 그 안으로 흘러들어 활동적이 되고, 살아 있지 않고, 그 자체로만 볼 경우 아무 것도 아니다. 이로부터 뒤잇는 것은, 합리성은 애착과 같은 부류에 속한다는 것이다. 선에 대한 애착이 흐를 때, 합리성 안에서 진리에 대한 애착이 되어간다. 이 반대 의미일 경우는 악에 대한 애착이다. 기억 속의 지식의 능력이 자체를 합리성에 응용할 때, 그리고 합리성을 위해 도구가 될 때, 애착은 역시 이것 안으로 흐르고, 그리고 그것을 적소에 배치한다.; 그 이유가 외적 인간 안의 것을 살아 있게 하는 것은 애착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선에 대한 애착은 천적 평면으로부터, 즉 천적인 사랑으로부터 내려오고, 이 사랑은 그것이 흘러드는 모든 것을 살아 있게 한다. 이것은 악에 대한 애착들, 또는 탐욕들까지도 살아있게 한다.
위와 같은 이유는 주님으로부터 사랑의 선이 내적 인간을 통하여 외적 인간 안으로 계속적으로 흐르기 때문이다; 단지 악에 대한 애착 안에, 또는 탐욕 안에 있는 자는 선을 뒤집고 남용하고 타락하게 할 뿐이다. 그렇다 해도 그것으로부터의 생명은 남아 있다. 이것은 태양의 광선을 받는 대상물로 비교해보면 쉽게 납득된다. 이 광선을 받는 것 중 가장 아름답게 받는 것이 있다. 이것은 받은 광선을 최고의 아름다운 색깔들로 바꾸어 내보낸다. 예를 들면, 다이아몬드, 루비, 풍신자석(jacinth, 적황색), 사파이어, 그리고 여타 귀중한 돌 등등이다. 그러나 광선을 받되, 불일치하는 색깔로 바뀌게하는 경우도 있다. 이와 같은 상황은 각기 다른 인간들의 각기 다른 천성으로부터 보일 것이다. 즉 모든 애착을 가지고 다른 각도에서 선들을 받는 이들이다; 그리고 선들을 악들로 바뀌게하는 이들이다. 이런 상황을 통해 알게 하는 바, 선에 대한 애착들로부터의 기억 속의 지식이 “소알에 이르는 이집트의 토지”에 의하여 의미된다는 것, 이때 합리성은 “여호와의 동산 같이” 이다.

이 구절의 사항들은 외적 인간이 내적 인간과 결합할 때, 외적 인간의 아름다움이 주님에게 나타났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를 내적 의미로부터 다시 조명해보면, 이 의미 안에서 주님의 내적 인간 측면이 아브람에 의하여, 외적 인간이 롯에 의해 표현된 것이다. 외적 인간이 내적 인간과 결합되어질 때, 외적 인간의 아름다움은 묘사되어질 수 없다. 그 이유는 이것이 어느 인간과도 존재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이는 오직 주님에게서만 존재했다. 인간과 천사에게 존재하는 것은 주님으로부터 이다. 이것은 오직 아주 낮은 등차에서, 주님의 외적 인간 측면의 형상으로부터 천국들에서 표출되어질 수는 있다. 세 천국들은 주님의 외적 인간의 형상들이다; 그러나 그것의 아름다움은 여느 인간의 납득력에 표출되어 그것이 어떠한지에 대한 관념을 갖도록 하는 어떤 방법으로도 묘사될 수 없다. 주님 안에서 모든 것은 무한이듯, 천국에서 모든 것은 무한이다( 또는 한계가 없다). 천국의 무한은 주님의 무한의 형상이다.

11절. 그리고 롯은 요단의 모든 평지를 선택했다. 그리고 롯은 동쪽으로부터 여행했다. 그리고 그들은 분리되어졌는데, 그의 형제로부터의 사람(과 분리되어졌다).

롯은 요단의 모든 평야를 선택했다. 이는 외적 인간을 의미하고, 그리고 이어지는 구절과 같았다 인데, 이는 앞 절에서 설명된 바로부터, 즉 “요단의 평야”가 외적 인간이다에서 분명해진다. 앞 절의 경우, 외적 인간이 내적 인간과 결합하고 있을 때의 외적 인간의 아름다움이 묘사되어지나, 이 구절과 이어지는 두 구절에서는 두 인간이 떼어질 때 그것의 모양은 흉함이 묘사되어진다.

그리고 롯은 동쪽으로부터 여행했다. 이는 천적 사랑으로부터 물러난 외적 인간에 있는 것들을 의미하는데, 이는 “동쪽”의 의미가 주님이다로부터, 그런고로 천적인 모든 것에서 분명해진다; 그리고 주님이 동쪽에 의해 의미되는 바, 여기서의 “동쪽”은 신성이었던 주님의 내적 인간임이 뒤잇는다. 외적 인간이 내적 인간으로부터 물러나는 것이 “롯이 동쪽으로부터 여행했다”에 의해 의미되어져 있다.

그리고 그들은 분리되어졌는데, 그의 형제로부터의 사람(과 분리되어졌다).
이것은 이런 것들이 분리함의 원인이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말해진 것으로부터 뒤를 잇는다. “사람, 형제”는 8절에 살폈 듯, 합일(union)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분리되는 것, 그의 형제로부터의 사람”은 분열(disunion)을 의미한다. 무엇이 외적 인간을 내적 인간으로부터 분리시키는 지는 알지 못하고 있다. 많은 이유들 때문이다. 한 두 개로 압축하면, 우리가 어떤 지식 정보도 없어 아예 모르고 있는 경우, 또 하나는 알려질 때, 믿지 않는 경우이다. 즉 내적 인간이 있다는 것, 자아 사랑과 그것을 열망함, 자아 사랑보다는 덜 하지만 세상 사랑과 그것을 열망함이 분열의 원인이다는 것을 알게 되어도 믿지 않는다는 말이다.
내적 인간이 있다는 것을 모르거나, 말해진다 해도 믿지 않는 이유는 그가 육체적이고 감각적인 상태에서 살기 때문이다. 이것들은 내면인 것을 볼 수 없게 하는 원인이다. 내면의 것들은 외면인 것을 볼 수 있으나 외면의 것은 내면의 것을 결코 볼 수 없다. 빛을 가지고 더 생각해보자: 내적 시야는 외적 시야가 무엇인지를 볼 수 있다. 그러나 외적 시야는 내적 시야가 무엇인지를 볼 수 없다; 다시 말해, 지적, 합리적인 것은 기억 속의 지식의 능력이 무엇인지를 지각할 수 있으나 거꾸로는 안된다. 보지 못하는 또 다른 원인 중 하나는 인간이 죽음에서 육체로부터 분리되어지는 영이 있다는 것을 믿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혼이라 불리는 내적 생명이 있다는 것은 거의 믿지 않는다. 그 이유가 감각적이고 육체적인 인간이 육체로부터 영의 분리라는 것을 곰곰이 생각하면, 이것은 불가능한 일이라는 결론 뿐이기 때문이다. 이 인간은 육체 안에 생명을 놓는다, 그리고 야수 동물 역시 살고 있으나 사후 살지 않는다는 결론적 생각으로 자신을 확증되게 한다; 이 외에도 많은 다른 예가 있을 것이다. 어쨌든 이런 모두는 인간이 육체와 감각적인 것들 안에서 살고 있는 결과이다; 이런 종류의 생명은 그 자체만 관조하면, 동물과 별반 다르지 않다, 다만 인간은 자기가 만나는 것들을 생각하고 추론한다는 점이 다르다.
사실상 위의 생각이 외적 인간을 내적 인간으로부터 분리하는 최고의 원인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 이유가 인류 대부분이 위와 같은 불신앙 안에 있고, 단순한 자들보다 학식자가 더 위와 같은 불신앙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분열시키는 것의 제 1의 원인은 자아를 사랑함, 두 번째로는 세상을 사랑함일 것이다. 이것이 원인인지를 모르는 이유는 그가 선행 없이 사는 것 때문, 그가 선행 없이 살 때, 자아 사랑과 이 사랑을 열망함이 천국의 사랑에 정반대된다는 것이 그에게 나타나질 수 없기 때문이다. 자아 사랑과 그것의 열망 안에서 달아오르는 어떤 것이 있다. 결과적으로 기뻐함들인데, 이것은 생명에 영향을 끼쳐 인간은 영원한 행복 자체가 있다는 것, 이 행복은 사후 더 커져간다는 것, 그리고 이 행복은 타인을 섬김에 존재한다는 것, 이는 천사들조차도 그러하다는 것 같은 것을 알지 못하게 하고 만다. 그 대신, 그들 자신들은 자신을 섬기게 하는 것 말고는 아무도 섬기고 싶지 않다. 주님을 섬기기를 바라고 있다는 그들의 말함은 거짓이다. 그 이유가 그들은 주님조차도 자기를 섬기기를 바라는 자기 사랑 안에 있기 때문이다. 이러는 만큼 그들은 퇴보된다. 그런고로 그들은 자기들의 심정에 자신이 주님이 되고 우주까지도 통치하고 싶은 열망을 언제나 품고 다닌다. 아마 모든 이가 이와같을 진대, 이것이 어떤 종류의 통치일 것인 가를 상상하는 것은 누구도 어렵지 않다. 이 통치의 열망이 자기를 사랑함 안에 감추여 놓여 있다. 이로부터 우리는 자기 사랑의 본성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 사랑 안에 자신에게 노예로 있지 않으려하는 모든 이를 증오하는 것이 감추여 있다는 것도 알 수 있다. 증오함이 있기 때문에, 거기에는 복수, 잔인함, 사기, 이외 사악한 많은 것들이 있다.
그러나 서로의 사랑(mutual love), 이것만이 천국적이다, 이것은 인간 안에 있으면서 자신에 관해서 말해줄 뿐 아니라 이런 것을 인정하고 믿는다, 즉 자기는 가치가 없다는 것, 자기는 천하고 깨긋하지 못한 어떤 것일 뿐이다는 것, 그리하여 지옥으로 떨어지려는 우리를 주님께서 무한하신 자비로부터 붙잡아 주신다는 것, 고로 우리도 지옥으로 자신을 빠뜨리지 않도록 갈망하고 노력해야 함을 인정하는 것이다. (어린 시절) 그분이 이것을 인정하고 믿으신 것은 이것이 진리이기 때문이다. 주님, 또는 어느 천사도 자기에게 복종시키려 위의 사항을 인정하고 믿으라고 바라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자신이 이러이러함을 직시하면서 자신을 찬양하려 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 이유가 이것은 마치 배설물을 놓고 순금이라 부르며 억지 부리는 것과 같다, 또는 똥거름에 있는 파리를 낙원의 새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자신의 참 본래의 모습을 실제로 인정하고 믿는 정도에서 그는 자기를 사랑함과 이것의 열망함으로부터 멀어지고, 자신을 몹시 싫어한다. 그가 이것을 행하는 만큼, 그는 주님으로부터 천국의 사랑을 받는다, 즉 모든 이를 섬기기를 바라는데 존재하는 서로의 사랑을 받는다. 이들이 “작은 자”가 되기를 바라는 이들이고 이들이 주님의 왕국에서 “큰 자”가 되어 있다 (마. 20:26-28; 눅. 9:46-48).
이상 말해진 바로부터 우리가 알게 된 것은, 외적 인간이 내적 인간으로부터 분열하는 제 1의 원인은 자기를 사랑함이다는 것; 그리고 그것들을 하나로 하여 주는 것은 서로의 사랑이다는 것이다. 서로의 사랑(mutual love)은 자아를 사랑함이 물러날 때까지 결코 가능해질 수 없다. 그 이유는 이것들은 서로에 직반대되기 때문이다. 내적 인간은 서로의 사랑 외에 더는 아니다. 인간의 영 자체 또는 혼은 사후 살아가는 내면의 인간이다; 그리고 그것은 유기체이다, 그 이유가 인간이 이 세상에 사는 동안 육체에 인접해 있기 때문이다. 이 내면의 인간, 즉 혼, 또는 영은 내적 인간은 아니다. 그러나 서로의 사랑이 내면의 인간 안에 있으면, 내적 인간 역시 그것 안에 있다. 내적 인간으로부터 있는 것들은 주님의 것들이다; 그래서 내적 인간은 주님이시다고도 말해지는 것이다. 그러나 천사나 인간이 서로의 사랑 안에서 사는 동안 그들에게 주님께서는 천국적인 자기 자신을 주시기 때문에, 천사나 인간은 자신의 선으로부터 선을 행하는 듯 나타나고, 내적 인간이 마치 그의 것인 듯 인간을 서술하여 나타난다. 그러나 서로의 사랑에 있는 자는 선하고 참된 모든 것은 자기 것이 아닌 주님의 것임을 인정하고 믿어야 한다; 그리고 타인을 자신같이 사랑하는 자기의 능력, 더 나아가 그가 천사같이 있는 능력, 즉 타인을 자신보다 더 사랑하는 능력은 주님이 자기에게 주신 선물임을 인정하고 믿는 것이다; 그가 이것이 주님의 것임을 인정하는 것으로부터 멀어진 만큼 그는 그분이 수여하시는 선물과 행복에서 멀어진다.

12절. 아브람은 가나안의 토지에 거주하였고, 롯은 평지의 도성들에 거주하였다. 그리고 그의 천막을 소돔 가까이에 단단히 고정시켰다.

아브람은 가나안의 토지에 거주하였다. 이는 내적 인간이 사랑의 천적인 것들 안에 있었음을 의미한다. 이는 “가나안의 토지”가 사랑의 천적인 것들이다에서 분명해지는데 이는 여러 번 이야기했다.

그리고 롯은 평지의 도성들에 거주하였다. 이는 외적 인간이 기억 속의 지식들 안에 있었음을 의미하는데, 이는 롯의 표현이 외적 인간이다에서; 그리고 “도성”, 또는 “도성들”의 의미가 교리적인 것들이다에서 확실해진다. 여기서 교리적인 것들이 외적 인간을 서술하고, 내적 인간과 분리되는 상태인 바, 교리적인 것 자체는 기억 속의 지식들밖에 더 아니다. “도성들”의 의미는 좋은 의미, 나쁜 의미 모두에서 교리적인 것들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의 천막을 소돔 가까이 단단히 고정시켰다. 탐욕들에로 뻗어감을 의미하는데, 이는 “소돔”의 의미가 탐욕이다에서 분명해진다. 이는 10절에서 말했다. 이것들이 앞 10절, 즉 “요단의 평야는 물이 넉넉하였고, 여호와의 동산 같고, 소알에 이르는 이집트의 토지 같았다”에 있는 것들에 상응하고 있다; 10절의 경우는 외적 인간이 내적 인간과 하나로 되어 있을 때의 경우를 취급하고 있다; 그리고 “소알에 이르는 이집트의 토지”에 의해 선에 대한 애착들로부터의 기억 속의 지식들이 의미되었다. 그러나 여기서 “롯은 평야의 도성들에 거주하였다, 그리고 소돔 가까이 그의 천막을 고정시켰다”란 외적 인간이 내적 인간과 하나로 되지 않은 때를 의미한다; 그리고 이런 것들에 의해 악에 대한 애착들, 또는 탐욕들로부터의 기억 속의 지식들이 의미되어진다. 그래서 10절은 내적 인간과 하나될 때의 외적 인간의 아름다움이 묘사되었다; 그러나 이 구절은 하나로 되지 않을 때의 외적 인간의 분열이 묘사되고, 이 분열에 대해 다음 절에서 더 말하고 있다. 즉 “소돔의 사람들은 사악했고 여호와께 극도로 죄인이었다” 이다. 내적 인간으로부터 분리될 때 외적 인간의 분열이 무엇인지는 원칙적으로 분열인 것, 즉 자기 사랑과 이 사랑을 열망함에 관해 말해진 바로부터 모든 이가 알런지 모른다. 내적 인간과 하나일 때의 외적 인간의 아름다움이 대단한 만큼, 내적 인간과 하나가 아닐 때의 외적 인간의 분열 역시 반대로 대단하다. 사실상 외적 인간 자체만을 생각해보면, 이것은 내적 인간의 종밖에 더 아니다; 그것은 일종의 도구에 불과하고, 이를 수단으로 목적들이 쓸모 있음(use)이 되어지고, 쓸모 있음이 결과 안에서 표출된다. 이렇게 해서 모든 것들이 마무리, 또는 완전해질런지 모른다. 이 반대의 경우 역시 발생된다. 즉 외적 인간이 내적 인간으로 자체를 분리할 때, 그리하여 (내적 인간을 섬김이 아닌) 외적 인간 자체만을 섬기기를 바랄 때의 경우이다; 더 나아가면, 외적 인간이 내적 인간을 통치하기를 바라는 것이다. 이 바램은 자기 사랑과 이 사랑을 열망함과 일치된다. 이에 관하여는 이미 살폈다.

13절. 그리고 소돔의 남자들은 사악했고 여호와께 극도로 죄인이었다.

소돔의 남자들은 사악했고 여호와께 극도로 죄인이었다. 이는 기억 속의 지식들이 그 자체 탐욕들에로 넓혀갔음을 의미하는데, 이는 “소돔”의 의미가 탐욕들이다에서 분명해진다. 이는 이미 말했다; 그리고 “남자들(viri)”의 의미가 지적이고 합리적인 것들, 고로 여기서는 기억 속의 지식들, 그 이유가 이것들이 내적 인간에서 분리된 외적 인간을 서술하기 때문, 등등으로부터도 확실해진다. “남자들”이 지적, 합리적인 것들을 의미하는 것은 이미 살폈다. 기억 속의 지식들이 그 자체 탐욕들에로 넓혀감이라고 말했는데 이는 인간이 높아지고 위대해지기 위해 지식을 기억에 쌓을 때이다; 즉 자기가 모아들인 기억 속의 지식이 타인을 위해 쓸모 있지 않음에, 그러므로 선을 목적으로 하지 않을 때이다. 사실 상 모든 기억 속의 지식들은 인간이 합리적이 되고, 그리하여 슬기로워지는 것; 그리하여 내적 인간을 섬기는 것이 그것의 존재의 목적이다.

14절. 그리고 롯이 아브람으로부터 분리된 후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말하시기를, 바라건대 네 눈을 들어라, 그리고 네가 있는 장소로부터 북쪽을 향하여, 남쪽을 향하여, 동쪽을 향하여, 서쪽을 향하여 보아라.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말하셨다. 이는 여호와께서 주님에게 이야기하셨다를 의미하는데, 이는 말씀의 내적 의미로부터 알런지 모른다. 이 의미에서 주님이 “아브람”에 의해 뜻해진다; 그리고 상태 자체로부터, 즉 그때 당시 주님의 상태, 여기서 이것이 묘사된다, 즉 방해되었던 외적인 것들이 제거된 것, 이것이 “롯이 아브람으로부터 분리된 후”라는 말에 의해 의미되어 있다. 내적 인간 측면에 관련하여, 주님은 신성이셨다, 그 이유는 여호와로부터 탄생하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외적 인간 측면의 방해가 없으시자, 그분은 장차 오게 되는 모든 것들을 보셨다; 그리고 이때 이 보심이 마치 여호와께서 이야기하신 것처럼 나타났다. 그 이유는 이 나타남이 외적 인간 앞에서 이었기 때문이다. 주님의 내적 인간 측면에 관련하여서 그분은 여호와와 더불어 하나이셨다. 이를 주님 자신 요한복음서에서 가르치신다.
빌립이 그분에게 말한다, 우리에게 아버지를 보여주십시오,… 예수께서 그에게 말하신다, 내 가 너희와 이렇게 오랜동안 있어 왔는데, 그럼에도 너는 나를 몰랐다는 말이냐, 빌립아? 나를 보았던 자는 아버지를 보았던 것이다; 그리고 우리에게 아버지를 보여 달라하고 네가 말함은 어찌된 일이냐?…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가 내 안에 계심을 너는 믿지 못하 느냐?…내가 아버지 안에 [있다]는 것,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시다는 것을 믿어라
(요. 14:6, 8-11).

롯이 아브람으로부터 분리된 후. 이는 외적 인간의 탐욕들이 제거되어 방해받지 않게 되었을 때를 의미하는데, 이는 외적 인간인 롯의 표현으로부터, 그리고 그가 분리되어짐에 앞서 있던 것, 즉 방해되는 것들로부터 분명해진다; 이런 것들이 제거되어 질 때, 내적 인간, 또는 여호와께서는 외적 인간과 하나로서, 또는 주님의 인간 본질과 하나로서 행동되어진다. 일치하지 않는 외적인 것이란 내적 인간이 외적 인간 안에서 그 자체를 외적 인간과 하나로 만들고, 활동하는 동안 이 하나됨을 방해하는 것들이다. 사실상 외적 인간은 도구 역할을 하는 것 밖에 더 없다, 또는 그 자체는 생명을 가지지 못하는 어떤 유기체밖에 더 아니다; 외적 인간은 내적 인간으로부터 생명을 받는다, 이때 외적 인간은 자체로부터 생명을 가진 것처럼 나타난다.
주님과 더불어, 그분이 유전적 악을 추방하시고, 그리고 그분의 인간 본질의 유기체적인 것들을 정화하신 후 이런 것들 역시 생명을 받았다, 그렇게 해서 이미 생명을 가진 내적 인간과 더불어 그분의 외적 인간 역시 생명이 되었다. 이것이 신성화 하심(glorification)에 의해 의미되어진다. 요한복음서를 보자:
예수께서 말하셨다, 이제 사람의 아들은 신성화되어 진다, 그리고 하느님은 그분 안에서 신 성화 되신다… 만일 하느님이 그분 안에서 신성화되신다면, 하느님 또한 그 자신 안에서 그분을 신성화하실 것이다, 그리고 곧바로 그분을 신성화 하실 것이다 (요. 13:31, 32).
다시 요한복음서에서:
아버지, 시각이 옵니다; 당신의 아들을 신성화 하소서, 하여 당신의 아들 역시 당신을 신성 화 할런지 모릅니다…지금, 그러므로 오, 아버지, 세상이 있기 전 내가 당신과 함께 가졌던 영광을 가지고 당신 자신의 자아와 함께 나를 신성화 하소서 (요. 17: 1, 5).
다시 요한복음서에서:
예수께서 말하셨다, 아버지, 당신의 이름을 신성되게 하소서, 그 때 천국으로부터의 음성 이 와서, [말하기를], 나는 [그것] 둘 다를 신성되게 했었고, 그리고 [그것을] 다시 신성되 게 할 것이다 (요. 12:28).

바라건대 네 눈을 들어라, 그리고 네가 있는 장소로부터…보아라. 이는 그때 당시 주님이 있으셨던 상태를 의미하는데, 이는 “눈을 들어 올림과 봄”의 의미가 계몽되어짐과 지각되어짐 이다에서 알게 된다. 10절 참조; 그리고 “장소”의 의미가 내적 의미에서 상태이다로부터 분명해진다.

북쪽을 향하여, 남쪽을 향하여, 동쪽을 향하여, 서쪽을 향하여. 이는 모든 사람들, 우주에 있는 만큼 많은 사람들을 의미하는데, 이는 방위의 의미로부터 분명해진다. 말씀에서 “북쪽”, “남쪽”, “동쪽”, “서쪽”은 각기 그것 자체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북쪽”은 교회 밖에 있는 이들, 즉 신앙의 진리들에 관련하여 어둠에 있는 이들을 의미한다; 그러나 “남쪽”은 교회 내에 있는 이들, 즉 지식들에 관련하여 빛 안에 있는 이들을 의미한다; “동쪽”은 전에 살았던 이들을 의미한다; 이것은 또한 천적인 사랑도 의미한다. 이는 앞서 말한 적이 있다. 그러나 “서쪽”은 오게 되는 이들, 마찬가지로 사랑 안에 있지 않은 이들을 의미한다. 이 말들의 영적 의미는 내적 의미에서 연결됨으로부터 보여진다. 그러나 방위들이 여기서와 같이 한꺼번에 언급되어질 경우 이는 지금 살고 있는 온 세계, 그리고 살아 왔었던 온 세계, 그리고 오기로 된 온 세계를 의미한다; 이 방위들은 또한 사랑과 신앙에 관련하여 온 인류의 상태도 의미한다.

15절. 나는 네가 보는 모든 토지를 너에게 줄 것이고, 네 씨에게 영원히 줄 것이다. “나는 네가 보는 모든 땅을 너에게 줄 것이다”란 천국의 왕국, 이 나라는 정녕 주님의 소유일 것임을 의미한다. “네 씨(자손)에게 영원히 줄 것이다”란 그분에 대한 신앙을 가질 이들을 의미한다.

나는 네가 보는 모든 토지를 네게 줄 것이다. 이는 천국의 왕국, 이 왕국이 주님의 것이다를 의미하는데, 이는 “토지”, 여기서는 “가나안의 토지”의 의미가 천국의 왕국이다로부터 분명해진다. 그 이유가 가나안의 토지에 의해 천국들에 있는 주님의 왕국, 즉 천국, 그리고 지상 위의 주님의 왕국, 즉 교회가 표현되어졌기 때문이다; “토지”, 또는 “땅”은 앞서 몇 번 취급했었다. 천국들과 땅 위 왕국이 주님에게 주어진다는 대목은 말씀의 여러 구절로부터도 분명해진다. 이사야서에서:
우리에게 아이가 탄생되신다, 우리에게 아들이 주어진다; 그리고 통치가(주권이) 그분의 어 깨 위에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분의 이름은 경이하신 분, 상담자, 하느님, 영웅, 영원하신 아버지, 평화의 제 1 인 자 라고 불리우실 것이다 (이. 9:6).
다니엘서에서:
나는 밤중에 환상들을 보았다, 그리고 사람의 아들 같으신 분이 하늘의 구름들을 사용하시 어 오셨다; 그리고 그분은 고대의 시대들에서 오셨다, 그리고 그들은 그분을 그분 앞 가까 이 데려 왔다. 그리고 그에게 주권, 영광, 왕국이 주어졌다; 그리고 모든 예언자들, 나라들, 언어들이 그분을 섬길 것이다. 그분의 통치는 영원히 지속되는 통치이다, 이 통치는 사라지 지 않는다, 그리고 그분의 왕국은 파멸되지 않을 것이다 (단. 7:13, 14).
주님 자신 또한 마태복음서에서 말하신다:
모든 것들이 내 아버지로부터 나에게 전달되어졌다 (마. 11:27);
또한 누가복음서 10:22에서, 그리고 다시 마태복음서에서:
모든 권능이 하늘과 땅에서 나에게 주어졌다 (마. 28:18).
요한복음서에서:
당신은 모든 육을 정복하는 힘을 아들에게 주십니다, 당신께서 아들에게 주신 것은 무엇이 든, 그들에게 그분은 영원한 생명을 줄 것입니다 (요. 17:2, 3).
같은 것이 그분의 “오른편에 앉으신”에 의해 의미되어진다. 이를 누가복음서에서 보자:
지금 이후로부터 사람의 아들은 하느님의 권능의 오른 편에 앉으신다 (눅. 22:69).
천국들과 땅 위에서 사람의 아들에게 주어진 모든 권능에 주목해보면, 주님께서는 그분이 세상에 오시기 전, 모든 것들을 다스리는 권능을 가지셨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 이유가 그분은 영원으로부터 하느님과 여호와이셨기 때문인데, 요한복음서에서 그분이 명백히 말하신다:
지금, 오, 아버지, 당신은 당신 자신의 자아와 더불어 나를 신성되게 하소서, 이 영광과 더 불어 나는 당신과 더불어 세상이 있었기 전 가졌습니다 (요. 17:5);
그리고 다시:
참으로, 참으로, 내가 네게 말한다, 아브라함이 있었기 전, 나는 있다 (요. 8:58);
그 이유가 그분은 홍수 이전 태고 교회에게 여호와 하느님이셨고, 그들에 의해 보여진 분이셨기 때문이다. 또한 그분은 홍수 이후 고대 교회에게 여호와 하느님이셨다. 그리고 유대 교회의 모든 의식들에 의해 표현되어진 그분이셨고, 유대 교회가 예배드린 그분이셨다. 이러한 그분이 (요한복음 등등에서) 천국과 땅의 모든 권능을 처음 가지신 것처럼 말해지는 이유는 “사람의 아들”에 의해 그분의 인간 본질이 뜻해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분의 인간 본질이 신성 본질과 하나되셨을 때, 인간 본질 역시 여호와이셨다, 그리고 동시에 권능도 가졌다; 그리고 이것은 그분이 신성화 하실 때까지, 즉 신성 본질과 인간 본질이 하나되심을 수단으로 그 자체 생명을 가지실 때까지 사실(case)이 되어질 수 없었다. 하여 요한복음서에서 그분이 말하신다:
아버지께서 자신 안에 생명을 가지셨듯이, 그분은 아들에게 아들 자신 안에 생명을 가지도 록 주셨다 (요. 5:26).
위에 인용한 다니엘서에서도 마찬가지로 그분의 인간 본질, 또는 외적 인간이 “사람의 아들”이라 불리우고. 그리고 위에 인용한 이사야서에서는 “아이가 태어나지고, 아들이 우리에게 주어진다”라고 말해진다. 천국의 왕국이 그분에게 주어질 것이다는 것, 그리고 천국들과 땅 위 모든 권능이 그분에게 주어질 것임을 그분이 지금 (이 구절, 창. 13:15에서) 보셨다. 그리고 지금 그분에게 약속되어졌다; 그리고 이것이 이런 말들, 즉 “네가 보는 모든 토지를 나는 네게 줄 것이다, 그리고 너 이후 네 씨에게 영원히 줄 것이다” 에 의해 의미되고 있다. 이것은 그분의 인간 본질이 그분의 신성 본질에 하나를 이루기 전, 즉 오로지 분열만을 일으키는 모든 악을 그분 자신과 힘으로 추방하시고, 악마와 지옥을 정복하시어 하나를 이루시기 전이었다.

그리고 네 씨에게 영원히. 이는 그분에 대한 신앙을 가질 이들을 의미하는데, 이는 “씨”의 의미가 신앙이다로부터, 실로 선행으로부터의 신앙이다에서 분명해진다. 이에 관하여 이미 살폈다. 천국의 왕국이 그분의 씨에게, 즉 그분에 대한 신앙을 가질 이들에게 주어질 것임은 주님 자신의 말들로부터 분명해진다. 요한복음서에서:
아버지는 아들을 사랑하신다, 그리고 모든 것을 아들의 손에 주셨다; 아들을 믿는 자는 영 원히 지속되는 생명을 가진다; 그러나 아들을 믿지 않는 자는 생명을 보지 못할 것이다 (요. 3:35, 36).
그리고 다시:
그분을 영접하는 많은 이들, 그들에게 그분은 하느님의 아들이 되는 권능을 주셨다, 그분의 이름을 믿는 이들에게; 그는 피들로부터 태어나지 않고, 육의 뜻으로부터 태어나지 않고, 인간의 의지로부터도 태어나지 않는다 (요. 1:12, 13).
위 구절의 말들로부터, 신앙이 무엇인지, 또는 그분을 믿는 것이 무엇인지가 분명해진다. 그것은 그분을 영접하고, 그분을 믿되, “육의 뜻으로 부터도” 아니고, “인간의 의지로부터도” 아니하는 이들과 더불어 있는 신앙이다. “육의 뜻으로부터”는 사랑과 선행에 반대되는 것이다, 그 이유는 이것이 “육”에 의해 의미되기 때문이다 [999항 참조]; 그리고 “인간의 의지”는 사랑과 선행으로부터 있는 신앙에 반대되는 것이다. 그 이유가 이것이 “인간”에 의해 의미되는 것이다. 그 이유가 육의 뜻과 인간의 의지는 분열을 일으키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랑과 사랑에서 파생된 신앙은 결합을 조장한다; 그러므로 사랑과 사랑에서 파생된 신앙 안에 있는 이들은 하느님으로부터 출생한 이들이다. 그리고 그들이 하느님으로부터 출생했기 때문에 그들은 “하느님의 아들”이라 불리우고, 그분의 “씨”라고 불리운다. 이들에게 천국의 왕국이 주어진다. 이런 사항들이 이 구절, “네가 보는 모든 토지, 너에게 나는 그것을 주고, 네 씨에게 영원히 준다”에 의해 의미되고 있다.
천국의 왕국은 선행 없이 신앙 안에 있는 이들에게 주어질 수 없다, 즉 자기들은 신앙자이다 말하는데, 이웃을 증오하는 마음을 품는 자들에게 주어질 수 없다는 말이고, 이는 설명 없이 누구나 납득할 것이다; 그 이유가 이런 신앙 안에는 생명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지옥은 증오로 구성된 곳이기 때문이다. 증오함은 인간이 유전적으로 받아진 악이 아니라 당사자가 실제로 획득한 악이다.

16절. 그리고 나는 네 씨를 땅의 먼지 같이 만들겠다. 만일 사람이 땅의 먼지를 셀 수 있다면 그와 같게 네 후손도 세어질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네 씨를 땅의 먼지 같이 만들겠다. 이는 무한 광대하게 번성함을 의미하는데, 설명이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그의 씨를 “땅의 먼지 같이 (많게) 만들겠다”라고 말해진다; 말씀의 다른 구절에서의 경우, “바다의 모래같이”, 또 다른 구절의 경우, “하늘의 별들 같이”이다. 이 표현들은 비슷한 듯 여겨지나 각기 의미를 지닌다. “땅의 먼지”는 천적 (평면)인 것들에 관련된다, 그 이유가 이미 살핀 대로, “땅”은 사랑의 천적 (수준)인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바다의 모래”는 영적 (평면)인 것에 관련된다. 그 이유는 “바다”가 이미 살핀 대로 사랑의 영적 (수준)인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하늘의 별들 같이”는 위 두 수준보다 더 높은 수준을 의미한다. 그 이유는 아무도 하늘의 별들을 셀 수 없기 때문이다. 위 세 표현 모두는 무한하게 번성하고 열매를 많이 맺는 것을 표현하는 관습적 언어이다.
그의 씨(즉, 사랑의 신앙, 또는 사랑)가 무한 광대하게 번성하리라는 것은 최고 의미에서 주님을 의미하고, 사실상 그분의 인간 본질을 의미한다; 그 이유가 그분의 인간 본질 측면에서 주님은 “여인의 씨(후손)”이라 불리우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주님의 인간 본질이 의미될 때, 무한 광대함에 의해 무한한 천적, 영적인 것들이 뜻해진다; 그러나 인류에 있는 선행으로부터의 신앙, 또는 선행이 “씨”에 의해 의미되어질 때, 선행 안에서 살고 있는 각 개인에 있는 이 씨가 무한 광대해짐이 뜻해진다. 더구나 이 무한 광대해짐은 선행 안에서 살다 저 세상에 간 이들에게는 계속 이어진다. 이와 같은 각 개인, 그의 선행과 선행으로부터의 신앙 모두와 더불어 행복 역시 그의 수준에 걸맞추어 증대하는데, 이에 대한 묘사는 구체적으로는 불가능한 바, 무한 광대하다 말할 수 밖에 없다. 이 “씨”를 인류 측면에서 말하면, 주님의 왕국에 있는 인류의 번성함, 이는 교회 내에 이들과 그들의 자녀 뿐만 아니라 교회 밖의 이들과 그들의 자녀들이 무한 광대해짐이 뜻해진다. 이러므로 주님의 왕국은, 또는 천국은 무한 광대하다. 이 무한 광대함에 관하여는 주님의 신성한 자비로부터 다른 곳에서 말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17절. 일어나라, 이 토지를 두루 걸어라, 그것을 길이에서, 그것을 넓이에서 걸어라. 내가 그것을 너에게 줄 것이기 때문이다.

일어나라, 이 토지를 두루 걸어라. 이는 그분이 천국의 왕국을 탐사하실 것을 의미하는데, 이는 “토지”의 의미가 천국의 왕국이다로부터 분명해진다. 이는 여러 번 말해었다. “일어나 토지를 두루 걷는 것”은 글자 의미에서는 탐사하는 것, 즉 그것이 무엇인지를 보는 것인 바, 여기서의 “토지”는 가나안의 토지이므로 천국에 있는 하느님의 왕국, 또는 천국 (자체), 그리고 땅 위의 하느님의 왕국, 또는 교회가 의미되고, 이것이 탐사되는 것, 또한 지각하는 것을 뜻한다.

그것의 길이에서와 그것의 넓이에서. 이는 천적 (평면)과 영적 (평면), 또는 선과 진리를 의미한다. [이는 “길이”와 “넓이”의 의미로부터 알런지 모른다]. “길이”는 선을, “넓이”는 진리를 의미하는 것은 설명한 바 있다. “토지”가 천국의 왕국, 또는 교회를 의미하는데, 이것의 길이나 넓이는 서술되어질 수 없는 이유인즉, 응용되고 상응될 수 있는 것이 오직 선들과 진리들 뿐이기 때문이다. 첫째로 천적인 것, 또는 선은 길이에 비교되어진다. 둘째로 영적인 것, 또는 진리는 넓이에 비교된다.
“넓이”가 진리인 것은 예언적 말씀에서 충분히 나타난다. 하박국서에서:
나는 갈대아인들을 일으킨다, 가차없고 날랜 나라여서, 토지를 넓이에서 걷는다 (합. 1:6);
“갈대아인”들은 거짓 안에 있는 이들을 표시한다; “토지를 넓이에서 걷는 것”은 진리들을 파괴하는 것을 표시한다, 그 이유가 이것이 갈대아인들을 서술하기 때문이다. 다윗서에서:
오, 여호와시여, 당신은 나로 적들의 손 안에서 꼼짝 못하게 하지 않으십니다; 당신은 내 발이 넓은 장소에 서게 만드십니다 (시. 31:8);
“넓은 장소에 서는 것”은 진리 안에서를 표시한다. 다시:
괴로움으로부터 나는 야(Jah)를 불렀다; 야께서는 넓은 장소에서 나에게 대답하셨다
(시. 118:5);
“넓은 장소에서 대답하는 것”은 진리 안에서를 표시한다. 호세아서에서:
여호와께서 넓은 장소에서 그들을 어린 양 같이 먹이실 것이다 (호. 4:16);
“넓은 장소에서 먹이는 것”은 진리를 가르치는 것을 의미한다.
이사야서에서:
앗수르가 유다를 통과하여 갈 것이다, 그는 넘쳐나고 직통할 것이다, 그는 목까지 도달할 것이다, 그리고 그의 날개들의 펼침은 네 토지의 넓이를 채울 것이다 (이. 8:8);
“앗수르”는 추론을 표시하고, 이것이 토지, 또는 교회를 범람하게 함을 표시한다; “날개들”은 추론으로부터 거짓이 일어남을; “넓이에서 채움”은 거짓으로 채움, 진리에 반대되는 것을 표시한다. 그 이유는 토지의 “길이”는 선을 의미하기 때문, 그리고 그것의 “넓이”는 진리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계. 21:16에서 새 예루살렘이 측량되었는데, 정사각으로 놓여 있고, 그것의 길이는 그것의 넓이 만큼이다고 말해진다. 이 구절로부터 모든 사람이 알 수 있는 바, 새 예루살렘은 천국들과 땅 위 주님의 왕국을 의미한다는 것, 그런고로 그 성의 길이와 넓이 역시 지상의 척도를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내적 의미에 있는 것들의 의미로부터, 우리에게 친숙해 있는 길이와 넓이 같은 지상의 것을 수단으로 천적, 영적 평면의 것들을 나타내는 방식이다. 오늘날의 대화에서도 지혜를 표시할 때 높이나 깊이를 사용하는 것은 흔한 일이다.

내가 그것을 네게 줄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이것이 그분의 것이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에 대한 설명 없이도 분명해진다. “토지” 또는 천국의 왕국이 주님만의 것이다는 것은 여러차례 살폈다. 즉 주님만이 천국의 주님이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분이 천국의 주님이시듯, 그분은 교회의 주님이시다. 이런 사실로부터 명백해지는 바, 모든 천적, 영적 (평면)인 것, 또는 선과 진리는 주님만으로부터 있다는 것, 그리고 이로부터 주님은 그분의 천국의 모든 것의 모두이시다는 것, 그리고 이것은 아주 완전하므로 주님으로부터 선과 진리에 대한 통각(apperception)을 가지지 않은 자는 천국 안에 더 이상 없다. 이것은 보편적 천국을 통치하는 기운(sphere)이다; 또한 이것은 천국의 혼이다; 그리고 이것은 선 안에 있는 모든 이 안으로 흐르는 생명이다.

18절. 그리고 아브람은 그의 천막을 단단히 고정시켰다, 그리고 왔고, 헤브론에 있는 마므레의 상수리 나무 숲에서 거주하였다, 그리고 거기에 그는 여호와께 제단을 건설했다.

그리고 아브람은 그의 천막을 단단히 고정시켰다, 그리고 왔고, 헤브론에 있는 마므레의 상수리 나무 숲들에서 거주하였다. 이는 주님께서 한층 더 내적으로 지각하심에 이르셨다를 의미하는데, 이는 “천막을 단단히 고정함”의 의미가 결합되어짐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 이유가 “천막”은 예배의 거룩함, 이를 수단으로 외적 인간이 내적 인간과 결합되어짐이; 그리고 “상수리나무 숲”의 의미가 지각이다 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숲은 “마므레의 상수리 나무 숲”이었다, 이는 첫 지각이다; 그러나 여기서, “마므레의 상수리 나무 숲들”, 복수로 표현되고 있는데, 이는 더 지각하심, 즉 더 내적으로 지각하심을 의미한다. 이 지각하심이 “헤브론에 있는 마므레의 상수리나무 숲들”이라 불리운다. 마므레는 여러 다른 구절에서도 언급되는데, 예를 들면, 창. 14:13; 18:1; 23:17-19; 35:27 등등이다. 그리고 헤브론 역시 마찬가지 인데, 창. 35:27; 37:14; 여. 10:36, 39; 14:13, 14, 15; 15:13, 54; 20:7; 21:11, 13; 사. 1:10 20 등등이다. 그러나 의미가 무엇인지에 관하여는 주님의 신성한 자비로부터 다른 구절이 설명되는 곳에서 함께 보여질 것이다.
“헤브론에 있는 마므레의 상수리나무 숲들”이 한층 더 지각하심인 바, 이를 더 살펴 보자. 외적 인간으로부터 있는 것들이 내적 인간의 천적인 것들과 결합되어 있을 때의 경우 같이 지각은 증가하는 바, 더 내적 수준이 되어간다. 천적인 것과의 결합이 지각을 준다. 그 이유가 여호와를 사랑함으로부터 있는 천적인 것들은 내적 인간의 참 생명(생명 자체)이기 때문이다. 다른 말로 더 말해보면, 천적인 사랑 안에 여호와께서는 현존하고, 이 현존은 결합이 결과될 때까지 외적 인간 안에서 지각되지 않는다. 고로 모든 지각함은 결합으로부터 있다는 말이다.
내적 의미로부터 여기서 명백해지는 바, 이런 경우가 주님과 더불어 어떻게 있었는가에 대한 것이다. 즉 그분의 외적 인간, 또는 인간 본질이 지식들의 증가와 열매 풍성해짐에 따라 등차적으로 신성 본질과 결합하셨는 지에 대한 것이다. 어떤 인간도 지식들을 수단으로 하지 않으면 주님, 또는 여호와와 결합함이 결코 있을 수 없다. 인간은 지식을 수단으로 사람이 되어가기 때문이다; 주님 역시 여느 인간같이 태어나셨는 바, 인간과 마찬가지로 교육받으셨고, 그릇으로서의 그분의 지식들 안으로 천적인 것들이 꾸준히 주입되셨다, 그리하여 지식들은 천적인 것들을 받는 그릇이 되었고, 이 그릇 역시 천적으로 된 것이다.
그분은 이 방법에서 유아의 천적인 것들을 발전되게 하셨다; 그 이유가 이미 말한 대로, 사랑으로부터 있는 천적인 것들은 아주 어린 유아로부터 어린 시절, 그리고 청소년 시절에 그때 당시 그분이셨던 인간이심으로부터 비 종교적, 종교적 지식들을 흡입하시고, 흡입된 것 안에 천적인 것들이 은근히 심어지셨다. 만일 인간이 이런 식으로 거듭나 질 수 있다면, 그의 이런 지식들은 사랑과 선행으로부터 있는 천적인 것들로 채워진다. 그리고 채워지는 이 지식들은 그가 유아로부터 청소년 시절까지에서 선물받아 왔던 천적인 것들 안에 이식되어진다. 이렇게 하여 그의 외적인 인간은 그의 내적 인간과 결합되는 것이다. 위의 채워진 지식들은 처음에는 청소년기에 선물된 천적인 것들 안에 이식되고, 두 번째로 어린 시절에 선물된 천적인 것 안에, 마지막으로 유아기에 선물된 천적인 것 안에 이식되어진다. 이때 그는 “어린 아이”이다, 이런 아이를 두고 주님께서 “하느님의 왕국은 이런 어린 아이와 같다”라고 말하셨다. 이 이식됨은 주님만에 의해 결과된다. 이런 이유로 천적 수준은 인간과 더불어 어떤 식으로도 가능할 수 없다, 주님의 것이 아닌 것은 천적이지 않다, 그것은 주님의 것이 아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분 자신의 힘으로 그분의 외적 인간을 내적 인간에 결합되게 하셨다, 그리고 그분의 지식들을 천적인 것들로 채우셨다, 그리고 채워진 그것들을 천적인 것들 안에 이식하셨다, 그리고 이것은 사실상 신성한 질서에 따라서이다; 즉 처음에 그분의 어린 시절의 천적인 것들 안에, 그 다음 어린 시절과 유아 시절 사이의 천적인 것들 안에, 마지막으로 그분의 유아 시절 안에 이식 하신 것이다. 이리하여 인간 본질 측면도 순진 자체와 사랑 자체가 되셨다, 이로부터 천국들과 땅 위에서 모든 순진과 모든 사랑이셨다. 이와 같은 순진이 참 순진(순진 자체)이다. 그 이유는 이것은 동시에 지혜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아의 순진은 지식들을 수단으로 그것이 지혜의 순진이 되지 않으면, 아무 유용함도 없다. 그러므로 저 세상의 유아들은 지식을 흡입한다. 주님께서 천적인 것들 안에 지식들을 이식하신 만큼 그분은 지각을 가지셨다. 그 이유가 이미 말한 그대로 모든 지각은 결합으로부터 있기 때문이다. 그분은 그분의 어린 시절의 기억 속의 지식에 이식하셨을 때 처음 지각을 가지셨다. 이 지각이 “마므레의 상수리나무 숲”에 의해 의미되어 있다; 그리고 그분의 두 번째 지각이 여기서 취급되는데, 그분이 지식들을 이식하셨을 때, 한층 더 내적으로 되신 지각이고, 이 지각이 헤브론에 있는 마므레의 상수리나무 숲들“에 의해 의미되어져 있다.

이것이 여섯 번째 상태이다는 것은 앞 장에 포함된 것들에서 분명해진다.

그리고 거기에 그는 여호와께 제단을 건설했다. 이것은 그 상태로부터 있는 예배를 의미하는데, 이는 “제단”의 의미가 일반적으로 모든 예배의 표현물이다로부터 분명해진다. 이는 설명했다. 예배를 수단으로, 내적 의미에서 사랑과 선행을 통하여 있는 모든 결합이 뜻해진다. 즉 인간이 사랑과 선행 안에 있을 때, 그는 계속적으로 (내적) 예배 안에 있는 셈이다. 사실상, 외적 예배는 내적 예배의 결과일 따름이다. 천사들이 이와 같은 예배 안에 있다; 그러므로 그들과 더불어, 항구적인 안식일이 있다; 이로부터 안식일, 내적 의미에서 주님의 왕국을 의미한다. 그러나 인간, 세상에 있는 동안, 외적 예배 안에 있을 수 밖에 다른 대안이 없다. 그 이유가 외적 예배를 수단으로 내적인 것들이 북돋아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외적 예배를 수단으로 외적인 것들은 거룩함 안에 간직되어진다. 그렇게 하면 내적인 것들이 외적인 것들 안으로 흐를 수 있다. 이 외에도 인간이 지식들을 빨아 들여, 천적인 것들을 받도록 준비되어지고, 또한 거룩함의 상태가 선물되어지나 정작 당사자는 이 선물을 알아차리지 못한다. 거룩함의 이 상태는 그의 훗날 영원한 삶에서 사용하기 위해 주님에 의해 그 사람 안에 보존되어진다. 그 이유가 다른 삶에서 그의 삶(생명)의 모든 상태들이 되돌아 오기 때문이다.
*************************************

창세기 제 14 장

성경: 창세기 14 장

1. 시날 왕 아므라벨과 엘라살 왕 아리옥과 엘람 왕 그돌라오멜과 고임 왕 디달의 시 절이 왔다,
2. 그들은 소돔 왕 베라와 고모라 왕 비르사와 아드마 왕 시납과 스보임 왕 세메벨과 벨라, 즉 소알 왕과 전쟁을 벌였다.
3. 이들 모두가 싯딤의 계곡에 집결하였는데, 이곳은 염해이다.
4. 그들은 십이 년 동안 그돌라오멜을 섬겼는데, 십삼 년째에 그들은 반역하였다.
5. 그리고 십사 년째에 그돌라오멜이 그와 함께 했던 왕들과 왔다, 그리고 아스다롯 가르나임에서 르바족을, 함에서 수스족을, 사웨기랴다임에서 엠족을 쳐부셨다.
6. 그리고 세일 산에서 호리족을 쳐부셨는데 광야에 있는 엘바란까지 이르렀다.
7. 그리고 그들은 되돌아서 엔미스밧 즉 가데스로 와서 아말렉족의 온 들판을 쳐부 셨고 또한 하사손다말에 사는 아모리족도 쳐부셨다.
8. 그러자 거기로 소돔 왕과 고모라 왕과 아드마 왕과 스보임 왕과 벨라 즉 소알 왕 이 나갔다, 그리고 그들은 싯딤계곡에서 전투 대형을 갖추어 놓았는데,
9. 엘람 왕 그돌라오멜과 고임 왕 디달과 시날 왕 아므라벨과 엘라살 왕 아리옥과 싸 우려해서 였다. 즉 다섯 왕이 네 왕과 싸웠다.
10. 그리고 싯딤 계곡은 역청 수렁, 수렁이었다. 그리고 소돔 왕과 고모라 왕은 도망 쳤다, 그리고 거기에 빠졌다, 그리고 남아있었던 자들은 산으로 도망쳤다.
11. 그리고 그들은 소돔과 고모라의 재물 모두와 그들의 식품 전부를 거두어 떠났다.
12. 그리고 그들은 아브람의 형제의 아들 롯, 그리고 그의 물질을 거두어 떠났다. 그 리고 롯은 소돔에서 거주하고 있었다.
13. 그리고 거기서 도망쳐 나온 한 사람이 왔다, 그리고 히브리인 아브람에게 말했다, 그리고 아브람은 에스골의 형제, 아넬의 형제인 아모리족 마므레의 상수리나무 숲에서 거주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들은 아브람과 계약을 맺은 사람들이었다.
14. 그리고 아브람은 그의 형제가 포로가 되었다는 것을 들었다. 그래서 그는 자기 집 에서 태어난 훈련된 사람 삼백 십팔 명을 재촉하여 단까지 추격했다.
15. 그래서 그는 그들과 맞서려고 밤을 틈타 그와 그의 종들을 나누었다, 그리고 그들 을 쳐부셨는데, 그들을 다메섹의 왼쪽에 있는 호바까지 추격했다.
16. 그리하여 그는 모든 물질을 되찾았다, 그리고 또한 그의 형제 롯과 그의 물질, 그 리고 여인들 역시, 그리고 사람들을 되찾았다.
17. 그리고 소돔 왕은 아브람이 그돌라오멜과 그를 따른 왕들을 쳐부수고 돌아 오자 그를 만나기 위해 왕의 계곡인 사웨 계곡에로 나왔다.
18. 그리고 살렘 왕 멜기세덱은 빵과 포도주를 가져 왔다. 그리고 그는 가장 높은 하 느님을 받드는 성직자였다.
19. 그가 아브람에게 복을 빌었다, 그리고 말했다, 아브람은 하늘과 땅의 소유자 되시 는 가장 높으신 하느님에게 복있음 이로다.
20. 그리고 가장 높으신 하느님에게 복있음 이여, 그분이 당신의 손에 그대의 적들을 넘겨 주었다. 그리고 아브람은 그에게 모든 것의 십분의 일을 주었다.
21. 그리고 소돔 왕이 아브람에게 말했다, 나에게 혼을 주시오, 그리고 물질은 당신에 게 돌리시오.
22. 그리고 아브람이 소돔 왕에게 말했다, 나는 하늘과 땅의 소유자이신 가장 높으신 여호와께 내 손을 들었다.
23. 나는 신의 실로부터 끈에 이르기까지 당신의 것에는 관심을 두지 않을 것이다, 그 이유는 나로 인해 아브람이 부자가 되었다고 당신이 말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이다.
24. 젊은 이들이 먹은 것만은 떼어 놓겠다. 그리고 나와 함께 갔던 사람들, 아넬과 에스골과 마므레의 몫은 떼어 놓아 그들의 몫은 차지하게 하겠다.

각 절의 내적 의미

1, 2절. 시날 왕 아므라벨과 엘라살 왕 아리옥과 엘람 왕 그돌라오멜과 고임 왕 디달의 시절이 왔다, 2 그들은 소돔 왕 베라와 고모라 왕 비르사와 아드마 왕 시납과 스보임왕 세메벨과 벨라, 즉 소알 왕과 전쟁을 벌였다.

시날 왕 아므라벨과 엘라살 왕 아리옥과 엘람 왕 그돌라오멜과 고임 왕 디달의 시절이 왔다. 이것들은 주님의 외적 인간 안에 있는 수많은 종류의 외견상의 선들과 진리들, 이것은 그 자체 선들과 진리들이 아닌데, 내적 의미에 있는 이것들에 대한 의미로부터, 그리고 이어지는 것으로부터 알런지 모른다. 그 이유가 악들과 거짓들에 맞서시는 주님의 전투가 취급되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그분의 첫 번째 전투인데, 이 전투는 그분의 청소년(adolescence)기와 청년(the dawn of his adulthood)기에 거행되어졌다. 즉 그분이 종교적, 비 종교적 지식들을 빨아 들여 가셨었을 때, 그분은 처음 전투에 임하시고 훌륭히 마무리 하셨다는 말인데, 여기서 “…시절이 왔다”라고 말해진다.
어느 누구도 그가 악들과 거짓들이 무엇인지 알도록 배워질 때까지 그는 악들과 거짓들에 맞서 싸울 수 없다. 그러므로 그가 가르침을 받아질 때까지 악과 거짓들과의 싸움은 없다. 인간은 자신이 직접 이해력과 판단을 충분히 사용할 때까지 악이 무엇인지, 거짓이 무엇인지는 더욱 모른다. 그래서 인간은 성년이 되어야 시험을 받게 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러나 주님은 그분의 청소년기에 이를 수행하셨다.
첫 번째로, 모두 각각의 인간은 그가 지식들을 통하여 받았던 선들과 진리들을 사용하여 전투한다; 이때 악들과 거짓들에 관하여 판단한 우리의 무기는 습득한 선들과 진리들이다. 또한 모두 각각의 사람은 그가 전투를 시작할 때, 그가 사용한 선과 진리는 자신의 것이라고 상상한다; 즉 그는 그것이 자신의 (잘난) 공로로 여긴다는 말이다. 동시에 전투를 버텨낸 힘 또한 그렇게 생각한다. 이것 역시 (주님에 의해 그렇게 여기는 것이) 허락되어져 있다. 그 이유가 그 수준의 그 인간에게 이외 달리는 알게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여하튼 인간이 거듭나질 때까지, 즉 당사자로 하여금, 자신으로부터 있는 선과 진리는 없다는 것, 모든 선과 진리는 주님으로부터 있다는 것; 또는 그는 자신의 힘으로부터서는 어떤 악과 거짓에도 버텨낼 수도 없다는 것; 더욱이 악령들을 수단으로 자기는 지옥과 교통하고 있다는 것; 바다가 제방에 압력을 가하는 것처럼 지옥이 우리를 압박한다는 것, 이를 자신의 힘으로 버텨낼 자는 없다는 것 등을 알고, 인정하고, 믿는 거듭남의 진행이 있기 전에는 누구도 아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 그가 거듭나질 때까지 자신이 본래 지닌 선함과 진리 덕택에 악과 거짓에 저항하고 있다고 상상하는 것 역시 주님께서는 허락하신다. 이렇게 해서 그는 전투들, 또는 시험들에 들어와진다. 그후 그는 더욱 더 계발되어 간다.
인간이 선과 진리를 놓고 자신 본래의 것이라고, 그의 저항력도 자신의 힘으로부터라고 상상하는 상태에 있을 때, 그가 악과 거짓들에 맞설 때의 무기인 선과 진리는 비록 선과 진리 같이 나타난다 할지라도 선과 진리가 아니다. 그 이유가 그것들 안에 그의 자기 자신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가 승리의 공적을 자아에 놓기 때문이다, 그리고 전투하시고 정복하신 이는 주님 뿐임에도 마치 자기가 다 해냈는 바, 자기가 주님인 것처럼 우쭐해대기 때문이다. 이것이 진짜 이렇다는 것은 시험들을 수단으로 거듭나진 이들 외에는 아는 자가 없다.
그리고 주님의 청소년 초기 그분께서는 악과 거짓들에 맞서는 가장 비통한 전투들 안으로 진입되셨는데, 이때 당시 그분 역시 위와 같은 여느 인간의 범주를 벗어나 상상하시지 않으셨다. 이런 이유는 신성한 질서에 따르시기 위함 때문, 즉 그분의 인간 본질이 신성 본질에 삽입되어야 한다는 것, 이렇게 하나로 되기 위해서는 계속적인 전투와 승리를 수단으로 해야만 한다는 것, 뿐만 아니라 그분 역시 선들과 진리들을 사용하시어 그분의 외적 인간 속에 있는 악들과 거짓들에 맞서 싸우셔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런 선들과 진리들은 신성과 함께 있지 않았기에, 그 선과 진리들은 선과 진리의 외관, 외견상 선과 진리인 것이라 부르는 것이다. 그분의 신성 본질이 이런 방식에서, 즉 그것 자신의 힘으로 이겨내심으로 그분의 인간 안으로 들어 가졌다. 그러나 이런 설명을 넘는 더 신비함이 있다. 한 마디로, 첫 전투들에서, 주님이 사용하신 선들과 진리들은 어머니로부터의 유전적인 것들과 더불어 빨아 들이신 선들과 진리들이었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그것들은 신성하지 않았다는 말이다; 그러나 그분이 악과 거짓을 점차로 정복해 가셨을 때, 그것들은 순수해져 신성으로 만들어졌다.

각각의 왕들과 각각의 나라들은 이와 같은 선과 진리의 다양함을 의미하는데, 이는 그것들의 내적 의미로부터의 것이 여기서 관련된다로부터 분명해진다; 그 이유가 모두 각각의 나라 또는 토지는 일반적 의미를 통하여 좋은 의미와 나쁜 의미 모두에서 어떤 명확함을 가지기 때문이다. 이 일반적 의미가 이 구절에도 적응시켜지고 있다. 외견상 선들이고 진리들인 것이 여기서의 왕들과 나라들에 의해 의미되어 지는데, 이는 많은 구절들로부터 확증해 볼 수 있다. 이런 왕과 나라에 관해서는 이미 살핀 바 있고, 여기서의 경우 여러 왕들과 나라들인 바 개별적으로 다루는 것은 지루한 설명이 될 것 같아 생략한다.

그들은 소돔 왕 베라와 고모라 왕 비르사와 아드마 왕 시납과 스보임왕 세메벨과 벨라, 즉 소알 왕과 전쟁을 벌였다. 이는 주님께서 싸우신 많은 종류의 악으로부터의 탐욕과 거짓의 설득력들을 의미한다. 이것도 앞의 왕들과 나라들과 같은 맥락에서 보여질런지 모른다. 악의 탐욕들과 거짓의 설득력은 각각의 왕과 나라들에 의해 의미되어 지는데 열거하기에는 지루할런지 모른다. 소돔과 고모라에 관해서. 아드마와 스보임에 관해서도, 소알에 관하여도 간략하지만 살핀 바 있다. 이것들은 악들과 거짓들의 가장 일반적, 보편적 종류들이다. 그리고 내적 의미에서 의미되는 이것들은 여기서 시리즈로 이어진다.
어느 누구도 시험을 수행하지 않은 가장 비통한 시험들을 수행하시고 이겨내신 것에 대하여는 말씀으로부터는 자세히 잘 알려지고 있지는 않다. 다만 그분이 광야에서 40일을 계셨고, 악마에 의해 시험되셨다는 언급 뿐이다. 그분이 겪으신 시험들 자체는 몇 마디로 묘사된 편이다. 그러나 이 몇 마디는 시험의 모두를 포함하고 있다. 막. 1:12, 13의 경우, 그분은 짐승들과 거기에 계셨다는 것이 말해지는데, 이를 수단으로 최고로 악질의 지옥 패거리가 의미되어진다; 그리고 마. 4:3-11, 눅. 4:3-13에서의 경우, 그분은 성전 꼭대기로 데려 가졌다는 것, 높은 산 위로 데려 가졌다는 것은 그분이 광야에서 가지신 가장 비통한 시험들을 표현하는 것 밖에 더 아니다. 이에 관하여 주님의 신성한 자비로부터 이후 더 말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여기서 언급되는 전쟁들은 내적 의미에서는 영적인 전쟁들, 또는 시험들을 의미하는데, 이 장 서두에서 잠간 언급했었다. 말씀에서 언급되는 전쟁, 특히 예언서들에서 언급되는 전쟁들은 이외 다른 의미는 없다; 그 이유가 자연계의 인간의 전쟁들은 말씀의 내적 의미 안에는 있을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즉 영적, 천적인 것만이 말씀에 속한 것이기 때문이다. 악마와의 전투, 또는 지옥과의 전투들이 말씀에 언급되는 전쟁들에 의해 의미되는 바, 이를 아래 인용 구절로부터 알런지 모른다. 계시록서에서:
그것들은 악마(demon)들의 영들이고, 표시(sign)들을 행하려고, 땅과 전체 세상의 왕들에 게 떠나 가, 그들을 전능이신 하느님의 이 큰 날의 전투에 모으고 있었다 (계. 16:14);
위에서 “전능이신 하느님의 이 큰 날”에서 (영적 전쟁이 아닌) 여타 다른 전쟁이 의미되지 않을 것임은 누구나 짐작 가능할 것이다.
다시:
끝없이 깊은 구렁으로부터 올라 온 짐승이 전쟁을 만들 것이다 (계11:7);
위의 “끝없이 깊은 구렁”은 지옥이다. 다시:
용은 여인에게 화가 나 있었다, 그리고 하느님의 계명들을 준수하고,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 의 증거들을 가지고 있는 그녀의 씨의 남은 자들과 전쟁을 만들려고 떠나 갔다
(계. 12:17).
다시:
그들에게 거룩한 사람들과 전쟁을 만드는 것이 주어졌다 (계. 13:7).
위 “전쟁들”에 관한 것은 시험들로부터 있는 전투들이다. 남쪽의 왕들과 북쪽의 왕들의 전쟁, 그리고 다른 전쟁들이 다니엘서에서 언급되고 있다 (10, 11장). 또한 미가엘에 관해 말해진 대목도 같은 것을 의미한다 (단. 1:13, 21; 12:1; 계. 12:7).
“전쟁”이 시험 외 다른 것을 의미하지 않는 것을 다른 예언서에서 분명해진다. 에스겔서에서:
너희는 여호와의 날에 전쟁에 임하려고 (성벽의) 깨진 틈에 올라 가 보지 아니하였고, 이 스라엘의 집을 위해 울타리를 건설하지도 않았다 (겔. 13:5).
위 구절은 예언자들에 관하여 말해졌다. 이사야서에서:
그들은 자기들의 검들을 두드려 쟁기들을 만들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창들은 낫을 만들 것이다. 나라가 나라에 맞서 검을 들지 않을 것이고, 그들은 더 이상 전쟁을 배우지 않을 것이다 (이. 2:4).
위 구절의 전쟁, 전쟁의 무기, 즉 검, 창, 방패 등에 의해서도 역시 영적 측면의 의미만을 의미한다는 것이 명백하다.
다시 이사야서에서:
데마의 토지의 주민들아, 너희는 목마른 자에게 물을 가져다 주어라; 너희는 배회하는 자에 게 그의 빵을 가지고 만나라; 그 이유가 그들은 검 앞에서, 빼어든 검 앞에서, 당긴 활 앞 에서, 전쟁의 비통함 앞에서 방황하기 때문이다 (이. 21:14, 15);
예레미야서에서:
목자들과 그들의 양떼들이 시온의 딸에게 올 것이다; 그들은 그녀를 빙둘러 천막을 칠 것이다; 그들은 각자 그의 장소에서 풀을 뜯길 것이다; 그녀와 맞서는 전쟁을 신성하게 하 라; 일어나라, 그리고 정오에 올라가자 (예. 6:3-5);
위 구절도 더 다른 전쟁이 뜻해지지 않는다. 그 이유는 전쟁이 시온의 딸에 맞서 있기 때문이다.
다시:
어찌 찬양의 도성, 내 기쁨의 도성이 버려지지 않겠느냐; 그러므로 도성의 젊은이들이 그 녀의 거리들에서 엎드려질 것이고, 전쟁의 모든 사람은 그 날에 멸절될 것이다
(예. 49:25, 26);
“찬양의 도성, 기쁨의 도성”은 교회 속에 있는 것들을 표시한다; “전쟁의 사람들”은 전투하는 이들을 표시한다.
호세아서에서:
그 날에 내가 그들을 위하여 들판의 들짐승들과, 하늘의 새들과, 지면의 기는 것들과 언약 을 만들 것이다; 그리고 나는 활, 검을 부러뜨릴 것이고 토지로부터 전쟁을 없애 그들을 안 심하고 눕게 할 것이다 (호. 2:18);
위 구절의 “전쟁”도 전투들을 표시하고, 전쟁의 무기는 영적 전투에 속하는 것들을 표시한다. 탐욕들과 거짓들이 중단될 때 이 무기들은 부수어지고 인간에게 평화의 고요함이 온다.
다윗서에서:
여호와의 일을 보라, 그분은 땅이 고독해지게 만드셨다, 땅의 끝까지에서 전쟁들이 중지되 게 만드신다; 그분은 활을 부러뜨리시고 창을 조각으로 자르신다; 그분은 불로 병거들을 태 우신다 (시. 46:8, 9);
위 구절 역시 뜻은 앞의 구절과 비슷하다. 다시:
살렘 안에 여호와의 주택이 있다, 그리고 그분이 거주하는 장소는 시온에 있다. 거기서 그 분은 활의 불같은 손잡이를, 방패와 검을, 그리고 전쟁 (무기들)을 부러뜨리신다
(시. 76:2, 3).
성직자들이 주님을 표현하고, 주님만이 인간을 위해 전투하시는 바, 성직자의 섬김은 “전쟁하고 있음, warfare”이라 불리운다 (민. 4:23, 35, 39, 43, 47).
여호와만이, 즉 주님만이 인간이 시험의 전투 안에 있을 때, 그 인간과 더불어 있는 악마와 전투하시어 정복하신다. 이는 인간 당사자에게 그렇게 나타나지 않을지라도, 변동 없는 진리이다. 그 이유가 제 아무리 작은 것일지라도 허용하심이 없으면 악령에 의해 인간에 가져다 놓여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제 아무리 작은 위험도 주님이 아니고서 천사에 의해 막아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고로 주님만이 모든 전투를 감당하시고 정복하신다; 이것은 이스라엘의 아들들이 나라들에 맞서 수행하는 전쟁들에 의해서도 어느 곳에서든 표현되고 있다. 이것이 주님만이시다는 것은 모세의 책 안에서 선포되고 있다:
여호와 네 하느님께서 네 앞에서 걸으신다, 그분은 너를 위해 싸우신다 (신. 1:30).
다시:
너와 함께 걸으시는 그분은 여호와 너의 하느님이시다, 그분은 너를 구하고자 네 적들에 맞서 너를 위해 싸우신다 (신. 20:4, 또는 여. 23:3,5).
가나안의 토지에 있는 우상 숭배하는 나라들과의 모든 전쟁들은 주님의 지옥과의 전투, 그러므로 교회의 지옥과의 전투, 또는 교인의 지옥과의 전투까지 표현했다. 이것 역시 이사야서의 아래 구절과도 일치한다:
사자나 젊은 사자가 먹이를 놓고 으르렁 거릴 때, 여러 목자들이 사자에 맞서 달려 와서 소리지름에도 당황하지 않고, 법석을 떨어도 고민하지 않듯, 여호와 체바욷께서는 시온 산 에, 그로부터의 언덕들에 내려 와 싸우실 것이다 (이. 31:4).
이런 이유로 역시 여호와, 또는 주님께서도 “전쟁의 사람(용사)”이라 불리우신다. 모세의 책에서:
여호와는 전쟁의 사람이시다, 여호와는 그분의 이름이시다 (출15:8).
그리고 이사야서에서:
여호와께서는 영웅으로 앞서 가실 것이다, 그분은 전쟁의 사람 같이 열정을 휘저을 것이다; 그분은 외치실 것이다, 그렇다, 크게 함성을 지를 것이다, 그분은 그분의 적들을 압도하 실 것이다 (43:13).
위 구절 역시 왜 전쟁에 속하는 많은 것들이 주님에게 귀속되어 있는지에 대한 이유를 말해 준다. 위 구절의 경우, “외치심,” “크게 함성을 지름” 등이다.
영들과 천사들 역시 그들이 표현을 만들어야 할 때, 전쟁의 사람으로 나타난다. 여호수아서에서:
여호수아는 눈을 들어 보았다, 그리고 거기에 자기에게 맞서 서있는 사람을 보았다, 그리고 그는 칼을 빼어 들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여호수아에게 말했다. 나는 여호와의 군대의 제 1 인 자이다. 그리고 여호수아는 엎드려 땅에 그의 얼굴을 대었다 (여. 5:13, 14).
위와 같이 보여진 이유는 그것들이 표현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같은 이유 때문에 야곱의 후손은 자기들의 전쟁을 여호와의 전쟁들이라 불렀다.
위와 같은 것이 고대 교회들에서의 경우였다; 그들 사이에는 여호와의 전쟁들이라 불리우는 책들이 있었다; 모세의 책에서 확인된다.
여호와의 전쟁들의 책에서 말해진다 (민. 21:14, 15).
위 전쟁들은 본문에서 언급되는 방식과 같은 방식으로 쓰여졌다; 그러나 교회의 전쟁들이 의미되었다. 이런 방식의 저술은 그 당시의 사람들에게는 친숙해 있었다; 그 이유가 그 당시 그들은 내면의 사람들이었고, 그들은 더 드높은 것들을 생각했기 때문이다.

3절. 이들 모두가 싯딤의 계곡에 집결하였는데, 이곳은 염해이다.

이들 모두가 싯딤의 계곡에 집결하였다. 이것은 그들이 탐욕들의 불결한 것들에 있었다를 의미하는데, 이는 “싯딤의 계곡”의 의미로부터 알런지 모른다. 이것에 관하여는 10절을 참조하면 된다. 즉 “싯딤의 계곡은 수렁, 역청의 수렁이었다”, 즉 그곳은 역청이 가득했다는 것, 이를 수단으로 탐욕들의 반칙적이고 불결한 것들이 의미되었다. 또한 소돔, 고모라, 아드마, 스보임이 악의 탐욕들과 거짓의 설득들을 의미한다는 것 역시 같은 의미의 맥락에 있다는 사실로부터도 알런지 모른다. 이것들은 자체가 불결함이기 때문이다. 그것들이 불결함이다는 것은 교인이면 다 아는 의미일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다른 삶에서도 실제로 보여지고 있다. 즉 이런 품성의 영들은 습지, 늪지, 분비물이 쌓인 장소 이상 더 좋아하는 곳이 없다, 하여 자기들의 본성과 그들이 좋아하는 장소는 걸맞는다. 이 영들이 선한 영들의 기운에 접근할 때 그들은 이런 불결한 것들을 그들로부터 민감하게 내뿜는다. 특히 그들이 선한 자에게 자기들의 것에 감염되어 지기를 바라고 그들을 공격하려 집합할 경우 더욱 그렇다. 이로부터 “싯딤의 계곡”이 무엇인지 분명해질 것이다.
“이곳은 염해이다”란 파생된 거짓들로부터의 더러운 것들이다는 것은 “염해”의 의미가 싯딤의 계곡과 같다는 것으로부터 알런지 모른다; 즉 “싯딤의 계곡, 이곳은 염해이다”라고 말해지기 때문이다. “염해이다”라는 말이 추가된 이유는 탐욕들로부터 터져나오는 것이 거짓들이기 때문이다. 거짓들을 생산하지 않는 탐욕은 없다. 탐욕들의 생명은 마치 석탄 불 같을지 모른다, 그리고 이 불로부터의 희미한 빛은 거짓일런지 모른다. 모든 탐욕은 반칙적인 어떤 사랑으로부터 있다. 우리가 사랑하는 것을 우리는 갈망한다. 갈망(craving)이 무리수를 둘 때, 즉 반칙을 서슴치 않을 때, 또는 분수를 모를 때 탐욕, 과욕이라 불리운다. 사실상 이 갈망은 우리의 사랑의 팔(arm)이다. 이 사랑, 또는 탐욕에 동의하고 박수치는 것은 무엇이든 거짓이라 불리운다. 이로부터 “염해”가 “싯딤의 계곡”이라는 말에 덧붙여진 이유를 알았으리라 생각된다.
탐욕들과 거짓들이 인간을 황폐해지게, 즉 선을 사랑함, 진리에 대한 애착의 모두를 인간으로부터 강탈하는 바, 이 황폐됨이 여러 구절에서 “소금 불모지”로 묘사되고 있다. 예레미야서에서:
육을 그의 팔로(권력으로) 만든 이들은 사막에 있는 벌거벗겨진 관목 같을 것이다, 그리고 좋은 것이 올 때 보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광야의 바싹 마른 장소에, 소금 토지에, 아무도 살지 않는 곳에 거주할 것이다 (예. 17:5, 6).
에스겔서에서:
거기로부터의 습지와 늪지는 치료되지 않을 것이다; 그것들은 소금 땅이 될 것이다
(겔. 47:11).
다윗서에서:
여호와께서는 강들을 광야로 바꾸신다. 그리고 원천을 마른 것(샘)으로 바꾸신다, 열매 풍 성한 토지를 소금 불모지의 하나로 바꾸신다, 그 이유는 그 안에 거주하는 자들의 사악함 때문이다 (시. 107:33, 34).
스바냐서에서:
모압이 소돔 같이, 암몬의 아들들이 고모라 같이, 쐐기풀이 자라는 곳, 소금 구렁, 영원히 황무한 장소 같이 있을 것이다 (습.2:9).
모세의 책에서:
온 토지는 유황, 그리고 소금, 태워짐이다; 그것은 뿌려지지도, 싹틈도 없을 것이고, 어 떤 풀잎도 그것에서 돋아나지 않을 것이다; 마치 소돔과 고모라, 아드마와 스보임이 망한 것 같이 이다 (신. 29:23).
“온 토지가 유황과 소금, 불태움”이다는 선들과 진리들이 황폐됨을 표시한다; “유황”은 선의 황폐를; “소금”은 진리의 황폐를 표시한다; 그 이유가 바싹마름과 소금을 침은 토지와 토지의 생산물을 황폐해지게 하는데, 이는 탐욕이 선들을, 거짓이 진리들을 파괴하는 것과 같다. “소금”이 황폐케함을 의미한 까닭에, 다시 건설되지 않아야함을 기원하여 황폐되게 파괴한 도성에 소금을 뿌리는 행동은 관습이 되었다. (여. 9:45 참조). 이와 반대되는 의미에서일 경우, “소금”은 거름을 주는 것과 같은 효과, 풍미(맛)을 주는 것을 뜻한다.
4절. 그들은 십이 년 동안 그돌라오멜을 섬겼는데, 십삼 년 째에 그들은 반역하였다.

그들은 12년 동안 그돌라오멜을 섬겼다. 이는 악과 거짓들이 청소년기 이전에는 나타나지 않았다는 것, 오히려 그것들은 외견상의 선과 진리를 섬겼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는 “그돌라오멜”의 의미와 표현으로부터, 또한 1절에서 설명한 바 같이 (그를) 섬겼던 이들의 의미와 표현으로부터, 또한 숫자 12의 의미로부터도 분명해진다. 2절에서 명명된 이들과 더불어 “그돌라오멜”은 주님 안에 있는 외견상의 선들과 진리들, 고로 이런 것들에 관련한 그분의 외적 인간을 의미한다. 이 구절의 “그돌라오멜”은 2절에 명명된 이들 모두를 대표하여 표시하고 있다. 이는 이어지는 대목으로부터, 그리고 그가 엘람 왕이었고, 그 의미는 이미 살핀 대로, 선행으로부터의 신앙이다로 분명해진다; 여기서의 경우 진리와 선을 의미하는데, 그 이유는 신앙과 신앙에 속한 것은 진리밖에 더 아니고, 선행과 선행에 속한 것은 선밖에 더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서의 선은 유아의 선들인 바, 비록 이 선도 선으로 나타나고 있다 해도 유전적인 악이 그것들을 오염시키는 한 그것은 선이 아니다. (유아의 선에) 태어날 때부터 가진 것, 꼭 달라 붙어 있는 것은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이다.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으로부터 있는 것은 무엇이든 유아 시절 당시의 경우 선 같이 나타난다. 그러나 선은 아니다; 그러나 이 선은 진실로 선이 무엇인지 모르는 유아나 아이들 안에 있는 시기에는 선이라 불리워진다. 그러나 무지가 변명을 하고 순진은 그 선이 선으로 나타나게 만든다. 그러나 인간이 교육받아졌을 때, 그래서 선과 악이 무엇인지 아는 때의 경우는 아주 다르다. 인간이 가르쳐지기 이전인 아이 안에 있는 선과 진리가 “그돌라오멜”에 의해 의미되어진다.
그들의 “12년을 섬김”은 이와 같은 선과 진리가 있는 모든 시기를 의미한다. 그 이유가 내적 의미에서 “12”는 선행의 진리에 속하는 모든 것, 또는 선행으로부터의 신앙에 속하는 모든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창. 10:22의 “엘람” 역시 같은 의미이다. 그리고 이와 같은 선과 진리가 아이 또는 더 많은 년령이다 해도 인간 안에 있는 한, 악과 거짓은 어떤 실력 행사도 할 수 없다. 즉 악령들이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어떤 것도 행할 수 없다는 것, 또는 어떤 악도 그들 안으로 이끌어 들일 수 없다는 것이다. 유아들, 마음씨 고운 아이들, 또는 심정이 천진난만한(단순한, simple) 이들에게 설사 악령, 또는 최악의 지옥의 패거리가 그들 속에 잠입해 있다 해도, 그들은 전혀 꼼짝할 수 없다는 말이다.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복종해 있는 상태 뿐이다. 이것이 여기서 12년 동안 그돌라오멜을 섬겼다에 의해 의미되어 있다;
복종과 섬김 상태에 그것들이 있었던 이유는 인간이 탐욕들과 거짓들의 기운(sphere)을 자신에게 아직 획득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악령들, 내지 악귀들은 인간이 태어날 때 지닌 유전적 악이 아닌, 자신의 의지가 선택한 행동들에 의해 획득한 악한 것들이 인간 안에 있게 될 때에야 그들의 작전 개시가 있는다. 다시 말해 인간이 악령이 원하는 기운을 자신에게 획득하기 전에는 악령들은 섬김 자세를 취하고 있다는 말이다. 그러나 인간이 이 기운을 휙득하자 마자, 악령들은 자신들을 그 사람 안에 쏟아부어 그를 지배하려 진력한다; 그 이유가 그때서야 악령들은 그것의 기운 자체에 있어 거기서 그들의 즐거움을 발견하고, 그들의 생명 자체도 있기 때문이다. 시체가 있는 곳에 독수리들이 있다 (마. 24:28; 눅. 17:37).

그리고 13년 째에 그들은 반역하였다. 이는 그분의 청소년기에 시험들이 시작되었다를 의미하는데, 이는 “13년 째”와 “반역함”의 의미로부터 분명해진다. 13년 째는 12년 째와 14년 째 사이에 낀 중간(intermediate) 햇수이다. 숫자 12에 대한 의미는 이미 서술한 바 있어, 아래에서는 14년을 살핀다. 시험 없음과 시험 있음의 중간이 13 이다. “반역함”이 의미하는 것은 인간 안에 있는 악들이 서술될 때, 또는 악령에 관해 서술될 때, 또는 그것들이 복종 상태와 섬김 상태에 있을 때, 그리고 고개를 들고 봉기하고 그 인간 전체를 악에 감염되게 하려 들 때를 생각해 보면 알 것이라 본다.
악들과 악령들은 선들과 진리들 안에 있기를 바라던 인간이 어떤 악들과 거짓들을 자신 안에서 확증함에 비례하여, 즉 탐욕들과 거짓들이 그의 선들과 진리들 안으로 자신들을 은근히 심는 정도에 비례하여 (복종과 섬김 상태를 걷어차고) 반역한다. 탐욕들과 거짓들 안에 악령들의 생명이 있고, 선들과 진리들 안에 천사들의 생명이 있다. 이로부터 씨끄러워짐(고민, trouble, 떼지어 달려 듬, infestation)과 다툼( conflict, 전투, combat)이 있다. 이것은 양심을 가진 모든 이와 더불은 경우이다; 더욱이 주님께서 [옳고 그름에 대한] 타고난 지각을 가지셨던 이래, 그분의 젊은 시절의 경우 더욱 그러하셨다. 양심을 가진 이들이 겪는 위의 씨끄러움과 다툼은 무딘 (격렬하지 않은) 고통이다. 그러나 지각을 가진 이들의 것은 날카롭게 찌르는 (격렬한) 고통이다. 지각함이 더 내면쪽일 수록 고통 역시 더욱 격렬해진다. 이로 미루어 보아도 인간의 시험과 주님의 시험의 강도는 어느 정도 차이가 있을지 짐작될 것이다. 그 이유가 주님께서는 내면적이고 가장 깊은 지각을 가지셨었기 때문이다.

5절. 그리고 십사 년 째에 그돌라오멜이 그와 함께 했던 왕들과 왔다, 그리고 아스다롯 가르나임에서 르바족을, 함에서 수스족을, 사웨기랴다임에서 엠족을 쳐부셨다.

14년 째에. 이는 첫 시험을 의미하는데, 이는 숫자 “14”의 의미로부터, 또는 두 번째 주의 끝의 의미로부터 알게 된다. 숫자 7에 관하여는 앞에서 살폈는데, 거기서 칠 일의 기간, 또는 한 주간은 시험의 시작을 의미하고 있다. “14”, 또는 2 주는 같은 의미를 가진다. 여기서 말해진 “14년 째에”는 앞서 있던 12년에 관련되고 있다. 이를 수단으로 그분의 청소년기가 의미되어진다.

그돌라오멜이 왔다. 이는 외적 인간에 있는 외견상의 선을 의미하는데, 이는 그돌라오멜의 의미가 앞 절에서 설명했듯, 외견상의 선과 진리이다로부터 분명해진다. 이 구절에서는 외견상의 선만을 의미하는데, 그 이유는 “…그리고 그와 더불어 왕들이…”라고 말해지고, 왕의 의미가 진리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와 함께 있었던 왕들. 이는 외견상의 선으로부터 있는 외견상의 진리를 의미하는데, 이는 말씀에 있는 “왕”의 의미로부터 분명해진다. 말씀의 역사적, 예언적 부분에 있는 “왕들”, “왕국들”, 그리고 “백성들(사람들)”은 진리들과 진리들로부터 있는 것들을 의미하는데, 이는 풍부하게 확증이 가능하다. 말씀에서 “백성, people”과 “나라, nation” 사이에는 정밀한 구분이 만들어져 있다; “백성”은 진리들을, 그리고 “나라”는 선들을 의미한다. 이는 이미 살핀 바 있다. “왕들”은 나라들을 서술해주기보다는 백성들을 서술해준다. 삼상. 8-22절을 참조하면, 이스라엘의 아들들은 왕들을 추구하기 이전에서, 그들은 (자기들 한 명 한 명이) 나라(인 셈이)였고, 따라서 그 시절의 그들은 선, 또는 천적 (평면)의 것을 표현했다; 그러나 그들이 왕을 요구하고, 왕을 영접한 이후, 그들은 백성이 되었다. 따라서 그들은 선, 천적인 것을 표현하지 않고 진리, 또는 영적 (평면)의 것을 표현하였다; 이것은 과실로서 그들에게 귀속되고 말았다. 이에 관하여는 주님의 신성한 자비로부터 더 말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그돌라오멜이 여기서 명명되고, 거기에 “그와 함께 있었던 왕들”이 첨가되었는 바, 선과 진리 모두가 의미된 것이다; 즉 “그돌라오멜”은 선을, “왕들”은 진리이다. 그러나 주님의 시험의 시작에서 있던 선과 진리의 품질이 무엇인지에 대하여는 이미 서술했다.

그리고 아스다롯 가르나임에서 르바족을, 함에서 수스족을, 사웨기랴다임에서 엠족을 쳐부셨다. 이는 주님께서 정복하신 것들인 거짓의 설득들, 또는 그와 같은 지옥들을 의미하는데, 이는 “르바족”, “수스족”, 그리고 “엠족”의 의미가 “네피림”과 같은 종류에 속하는 것이다로부터 분명해진다. “네피림”에 관하여 창. 6:4에서 상설했다. “네피림”에 의해 거짓의 설득들, 또는 자신의 특출함, 우쭐댐을 추구함으로부터 거룩하고 참된 모든 것을 무효화해 버리고, 자기들의 탐욕들 안으로 거짓들을 주입하는 이들이 의미되고 있는데, 다음 구절, 즉 민. 13:33; 신. 2:10; 이. 14:9; 26:14, 19; 시. 88:10을 읽으면 위 의미에 대한 더 충분한 확증을 가질 것이다. 여러 종류의 거짓의 설득들이 위 세 부족명과 “세일 산의 호리족”에 의해 의미되고 있다. 그 이유가 거짓의 설득들이 많은 종류인 이유는 거짓들의 종류가 많은 탓도 있지만, 거짓이 들러붙은 탐욕의 종류에 따라서 역으로 거짓들이 재생산되기 때문에서이다. 거짓의 이런 설득들의 본성은 어떤 인간에게도 결코 나타나질 수 없는 바, 우리들은 거짓의 설득들과 악의 탐욕들 같은 것이 있다는 정도만 알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다른 삶에서의 경우, 그것들의 구체적인 본성들이 정밀하게 구분되어 나열되어 있다.
거짓들 중에서도 가장 끔찍한 것은 홍수 이전 살았던 이들과 존재했다. 이들은 특별히 “네피림”이라 불리웠다. 다른 삶에 있는 이 네피림들의 특성은 자기들의 설득력들을 수단으로 다른 영들의 사고력을 갈취하여 그들의 참된 어떤 것도 거의 생각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런 설득력이 다른 영들 안으로 흘러들 때, 다른 영들의 사고력은 살해되어진 것이나 다를 바 없다. 이런 특성을 표현한 것이 위의 4 부족이고, 주님의 유년기에 그분이 맞서 싸우셨고 정복하신 시험들이다; 주님께서 세상 안으로 오심을 수단으로 이런 거짓들을 정복하시지 않았다면, 오늘날, 땅 위에 남은 인간은 없었을 것이다. 이와 거의 맞먹는 네피림이 오늘날 안개 낀 바위 같이 여겨지는 것을 수단으로, 그들의 공상을 수단으로 잘 봉해져 있으나, 그런데도 그것들은 계속적으로 힘겨루기를 하지만 봉기하는 것은 헛되고 있다. 이에 관하여는 1265-1272항을 되돌아가 읽으면 새삼스러워질 것이다. 이것들, 이와 비슷한 다른 것들이 이사야서에서 뜻해진다:
죽은 자는 살지 못할 것이다, 르바임은 일어나지 못할 것이다, 그 이유는 당신께서 그들을 방문하시어 파괴하셨기 때문, 그들의 모든 기억을 멸절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이. 26:14).
다윗서에서:
당신께서 죽은 자에게 경이함을 보여주시렵니까? 르바임이 일어나 당신을 찬양할 것입니 까? (시. 88:10);
위에서 “죽은 자”는 죽은 자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지옥에 떨어짐이 뜻해진다. 이런 자들은 오늘날에도, 특히 기독교계로부터도 있다. 그들은 마찬가지로 설득력을 가지기는 하나 네피림만큼 끔찍한 정도는 아니다. 거짓의 어떤 설득력의 경우는 의지 부분과 이해 부분 모두를 소유해 버린다. 이와 같은 것이 홍수 이전 있었고, 여기서 르바임, 수스, 엠에 의해 의미되고 있다. 그러나 여타 거짓의 설득력은 대체로 지적 부분만을 소유하고, 이는 자아 안에서 확증된 거짓의 원리로부터 발생한다. 이것들은 전자의 것같이 강력하지도, 죽어야 끝나는 정도의 것도 아니다. 그렇다 해도 이것은 다른 삶에서 영들을 많이 당황해지게 하는 원인이다, 그리고 생각하는 능력을 영들로부터 부분적이지만 가져가 버린다. 이런 종류의 영들은 인간 안에서 거짓인 것을 확증하게 하려는 것밖에 더 다른 관심은 없다. 이리하여 인간 당사자는 거짓이 진리라고, 악이 선이라고 보는 것밖에 더 알지 못한다. 이런 품성으로부터 그들의 기운이 있다. 그러나 진리의 어떤 것이 천사에 의해 불러 일으켜지자 마자 그것들은 숨막혀 질식한다.
인간은 자기가 말씀의 진리들을 거짓이다고 생각하는지 여부, 그렇게밖에 달리 확증할 수 없는지의 여부를 단순히 주목해보는 것만으로도 이런 거짓의 설득력에 의해 통치되는지를 지각할 수 있다. 이럴진대, 인간은 이런 영들이 자기와 함께 있다는 것, 그리고 그것들이 지배권을 갖고 있다는 것도 상당히 확신할 수 있을런지 모른다. 마찬가지 방식에서 그것들은 자기들의 개인적 유리함이 공동의 선에 있다는 것을 자신에게 설득한다. 그리고 자기들의 이득을 위한 것은 공동의 선 뿐이라고도 자신을 설득한다. 공동의 선이 자신에게 최상의 유리하다고 간주하는 이들, 또는 외견상 공동의 선인 것으로 베일로 하여 두른 이들은 다른 삶에서도 거기의 공동의 선에 관련하여 똑같게 처신한다. 인간과 더불은 영들의 유입의 본성이 이렇다는 것을 알도록 실감나는 경험이 나에게 주어졌다.

6절. 그리고 세일 산에서 호리족을 쳐부셨는데 광야에 있는 엘바란까지 이르렀다.

세일 산에서 호리족. 이는 자기를 사랑함으로부터 있는 거짓의 설득들(설득해 대는 거짓말들)을 의미하는데, 이는 “호리족”의 의미로부터, 그리고 “세일”의 의미로부터 분명해진다. 호리족에 주목해보면, 그들은 세일 산에 거주했던 자들이었다. 이것은 에돔이라 불리우기도 한 에서를 다루는 창. 36:8, 20으로부터 분명해진다. “에서”, 또는 “에돔”이 순수한 의미에서는 주님의 인간 본질 측면에서의 주님이 의미된다; 그분은 에서 또는 에돔에 의해서도 표현되었는데, 말씀의 역사적, 예언적 부분들의 많은 구절들에서 확인되어진다. 이에 관하여는 차 후 주님의 신성한 자비로부터 더 말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호리족이 거짓으로부터 자신들을 설득하는 이들을 표현했기 때문에, 그리고 그 당시 표현들은 실제의 사건이었기 때문에, 에서의 자손들에 의해 세일 산으로부터 호리족을 몰아냄도 이 구절과 비슷한 것을 표현한다.
이에 관해 모세의 책에서 말해진다:
이것 역시 르바임의 토지로 생각되어진다; 르바임이 거기서 전에 살았다; 그리고 암몬족이 그들을 삼숨민이라 불렀다; -(그들은) 아낙 후손 같이 키가 크고 숫자도 많았다; 그리고 여호와께서 [암몬족] 앞으로부터 [르바임]을 멸하셨다 – 그리고 암몬족이 그들의 소유권 을 취득하여 르바임을 대신하여 [거기에] 살았다 – 마치 그분께서 세일에 살고 있는 에서 의 자손들을 위해 하셨던 같이 이다. 즉 그분은 그들 앞으로부터 호리족을 멸하시어, 그들 은 그곳의 소유권을 획득하여 [거기서] 그들 대신에 살았다 (신. 2:20-22).
위 구절의 것들은 본문의 그돌라오멜에 관련된 것, 즉 그돌라오멜과 그와 함께 있었던 왕들은 세일 산에서 호리족을 쳐부수었다는 것과 동일한 것을 표현하고 의미한다; 그 이유가 이미 말한대로, 그돌라오멜에 의해 주님의 유년기에 있던 그분의 선과 진리, 고로 그때 당시 선과 진리 측면에서의 주님의 인간 본질, 이를 수단으로 그분께서는 거짓의 설득들을 멸하신 것, 즉 거짓의 설득들을 수단으로 영들의 세계를 멸하려고, 결과적으로 인류를 멸하려드는 악마의 패거리로 가득찬 지옥을 정복하신 것이 표현되였다.
그리고 에서 또는 에돔은 주님의 인간 본질 측면에서 주님을 표현하였는 바, 세일 산, 바란 (산)은 그분의 인간 본질에 속하는 것들, 즉 사랑의 천적인 것들을 표현하였다. 이것은 모세의 축복으로부터 분명해진다:
여호와께서 시내로부터 오셨다, 그리고 세일 (산)으로부터 일어나셨다; 그분은 바란 산으로 부터 비추셨다, 그리고 그분은 거룩함의 일만(명)으로부터 오셨다; 그분의 오른손으로부터 법의 불이 그들에게 있었다, 그렇다, 그분은 백성들을 사랑하신다 (신. 33:2, 3);
“여호와께서 세일 산으로부터 일어나셨다, 그리고 바란 산으로부터 비추셨다”란 주님의 인간 본질 외에 더 다른 의미는 없다. 세일 산으로부터 일어나심, 그리고 바란 산으로부터 비추심이 산이나 거주지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신성의 실재(reality), 즉 주님의 인간 본질 속의 천적인 것들, 거기로부터 여호와께서 일어나셨고 비추셨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은 모든 이가 알런지 모른다.
“세일”이 이 의미를 가진다는 것은 드보라와 바락의 노래로부터도 분명해진다. 사사기서에서:
오, 여호와시여, 당신께서 세일로부터 나오실 때, 당신께서 에돔의 들판을 떠나실 때, 땅은 진동하였고, 하늘은 물방울을 떨어뜨렸고, 구름 또한 물을 떨어 뜨렸습니다, 산들이 흘러 내렸고, 이 시내 산도 이스라엘의 하느님 여호와 앞에서 (흘러 내렸다) (사. 5:4, 5);
“세일로부터 나가시는 것”, “에돔의 들판을 떠나시는 것” 역시 주님의 인간 측면을 의미하는 것 외의 다른 의미는 없다.
이것은 고대 교회의 것이 잔류하는 시리아로부터 온 동쪽의 아들들 중의 하나였던 발람의 예언에서 더 분명해진다. 모세의 책에서:
나는 그분을 보고 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나는 그분을 바라보고 있다, 그러나 가까 이는 아니다; 야곱으로부터 별이 올라온다, 그리고 홀이 이스라엘로부터 일어날 것이다, 그리고 에돔은 상속분일 것이다, 세일 역시 상속분일 것이다, 그분의 적들에게 속하여 있 다 (민. 24:17, 18);
위에서 “그분을 보는 것,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그분을 바라보는 것, 가까이는 아니다”는 것은 주님께서 세상에 오심이다; 그분의 인간 본질이 “야곱으로부터의 별”이라 불리운다, 이것이 일어나는 것이다, 그리고 “에돔”, 그리고 “세일” 역시 마찬가지이다; 에돔과 세일이 상속분이지 아니했다는 것은 모든 이에게 명백한 것이다. “세일, 그분의 적들에게 속해있다”는 것, 또는 그분의 적들의 산이 상속분일 것이다도 많은 다른 장소에서도 같은 것을 뜻하는데, 즉 적들이 추방되기 위해 있었다는 것, 그들의 토지가 소유되었다는 것에 대한 뜻이 같다는 말이다.
바란 산, 또는 이 구절에서 명명되는 엘바란 역시 같은 것을 의미하는데, 하박국서에서:
하느님이 데만으로부터 오실 것이다, 그리고 바란 산으로부터 거룩한 이가 오신다. 셀라. 그분을 존경함이 하늘을 덮었다, 그리고 땅은 그분을 찬양함으로 채워졌다 (합. 3:9).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하는 것은, 산이나 토지들이 가지는 의미는 거기에 거주한 주민들로부터 가져와 졌다는 것이다. 즉 호리족이 그 산에 거주할 때는 호리족으로부터, 그들이 몰아내지고 에돔족이 거주할 때는 에돔족으로부터 의미가 취해진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한 개의 장소에 두 가지 측면의 의미, 좋은 의미, 나쁜 의미가 있다는 말이다. 고로 순수한 의미에서는 주님의 인간 본질, 반대 의미에서는 자기를 사랑함이다. 주님의 인간 본질은 천적 사랑 자체이다, 그리고 천적 사랑의 반대는 자기 사랑이다. 고로 여기서 호리족은 자기 사랑으로부터의 거짓의 설득들을 의미한다.
자기 사랑으로부터의 거짓의 설득들이 있고, 세상 사랑으로부터의 거짓의 설득들이 있다; 둘 중에서 자기 사랑으로부터의 거짓의 설득들이 최고로 반칙적이다. 그러나 세상 사랑으로부터의 거짓의 설득들은 전자보다 덜 반칙적이다. 자기를 사랑함으로부터의 거짓의 설득들은 사랑으로부터의 천적인 것들에 반대적이다; 그러나 세상 사랑으로 부터의 거짓의 설득들은 사랑으로부터의 영적인 것들에 반대된다. 자기를 사랑함으로부터의 설득들은 모든 것들 위에서 명령하기를 바라는 것을 그것들과 함께 지니고 있다. 그래서 그것들을 억제하는 수단이 느슨해거나 해제된다면 그 순간 돌진하여 우주를 넘어서라도 전진하기를 마다 하지 않는다. 하여 여호와 자신까지도 그 범주에 밀어 넣으려 한다. 이는 앞서 말했기도 한 대목이다. 그러므로 이런 종류의 설득들은 다른 삶에서 너그럽게 보아 주지 못한다. 그러나 세상 사랑으로부터의 설득들은 그 정도까지 돌진적이지는 않다. 그것은 각자의 몫을 넘는 것, 자기의 주제 파악을 못하고 불만족으로 미친 듯 흥분해대는 광기일 뿐이다. 그러나 이 둘 사이에 존재하는 차이는 무수하다.

광야에 있는 엘바란까지. 이는 그것들이 확장됨을 의미하는데, 이는 호리족들이 쳐부셔져 멀리까지 도망할 수 밖에 없다는 사실로부터 알게 된다. 바란의 광야는 창. 21:21; 민. 10:12; 12:16; 13:3, 26; 신. 1:1에서 언급되고 있다. “광야에 있는 엘바란”이 여기서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설명하는 것은 쉽지 않을 것 같다. 내가 말할 수 있는 것은, 본문의 나라들에 의해 의미된 지옥들에 대한 주님의 처음 승리하심이 한껏 멀리까지에 미치지 못하고 있다는 것, 그러나 얼마나 멀리 확장되었는지가 “광야에 있는 엘바란”에 의해 의미되었다는 정도이다.
천국의 신비를 배울 기회를 받지 못한 이들의 경우, 이들은 이렇게 상상할지 모른다. 즉 주님께서 지옥과 싸우시려고 세상에 오시고, 자신에게 시험이 들어오는 것을 용인하심을 수단으로 지옥들에 이기고 정복하실 필요가 없다는 것, 그 이유가 그분은 신성한 전능하심으로 지옥들 정도야말로 간단히 복종시켜 지옥을 닫아거실 수 있기 때문이다고 상상하는 식이다; 그러나 그분은 위의 과정이 필요하셨다는 것은 흔들 수 없는 진리이다. 신비함을 아주 일반적 측면에서만 털어놓는다 해도 온 책을 다 할애해도 부족할 것이다; 그리고 신성한 신비함들에 관하여 합리적 논쟁을 동원해도, 충분히 설명을 했다 한다 하더라도 인간의 마음들은 납득하지 못할 것이다. 어쩌면 납득을 원하지 않고 있을지 모른다.
그러므로 영원한 진리인 다음 사항만을 알고 믿는 것 만으로도 족하지 않나 싶다: 주님께서 세상에 오시고 그분 자신 안으로 시험이 들어오게 하시는 수단으로 지옥을 굴복시키고 정복하시지 않으면, 인류는 멸절되었으라는 것; 그리고 이 방법 말고는 태고 교회 때로부터 이 땅 위에 있어온 이들에게 구원되어짐은 가능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7절. 그리고 그들은 되돌아서 엔미스밧 즉 가데스로 와서 아말렉족의 온 들판을 쳐부수셨고 또한 하사손다말에 사는 아모리족도 쳐부셨다. “그들은 되돌아서 엔머스밧 즉 가데스로로 왔다”란 계속됨을 의미한다. “그리고 아말렉의 온 들판을 쳐부셨다”란 거짓들의 종류들을 의미한다. “또한 하사손다말에 사는 아모리족도 쳐부셨다”란 거짓들로부터 파생된 악의 종류들을 의미한다.

그들은 되돌아서 엔미스밧 즉 가데스로 왔다. 이는 계속됨을 의미하는데, 이는 앞 구절과 뒤이어지는 것으로부터 분명해진다. 여기서 지금 거짓들과 그것들로부터 파생된 악들이 취급된다. 거짓들은 “아말렉족”에 의해, 그리고 그것들로부터 파생된 악들은 “하다손다말에 있는 아모리족”에 의해 의미되어진다 “가데스”에 의해 진리들이 의미되고, 또한 진리들에 관한 논쟁들도 의미된다. 주님의 처음 전투에서 승리하신 거짓들과 거짓들로부터의 악들이 취급되기 때문에 여기서 “엔미스밧, 이것은 가데스이다”라고 말해진다. 그 이유는 거기에서 진리에 관한 논쟁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가데스”가 진리에 관하여 논쟁이 있음을 의미하는 것은 에스겔서에서, 즉 거룩한 토지의 경계선이 묘사되는 곳에서 분명해진다:
다말로부터 남향의 남쪽의 모퉁이 므리바(논쟁들)의 물 가데스까지, 큰 바다까지, 그리고 남향의 남쪽 모퉁이 (겔. 47:19; 48:28);
위 구절에서 “남쪽”은 진리의 빛을 표시한다; 그것의 경계선을 수단으로 진리들에 관한 논쟁이 의미되어진다, 이것이 “가데스”라 불리운다.
가데스 역시 모세가 바위를 쳐서 물이 나오게 한 곳이고, 이 물은 논쟁으로부터 므리바라 불리워졌다 (민. 20:1, 2 11, 13). “바위”에 의해 주님이 의미된다는 것은 널리 알려져 있다; 말씀의 내적 의미에서 “물”에 의해 영적 (평면의) 것들, 즉 진리들이 의미되어진다; 그것들이 “므리바의 물”이라 불리운 것은 진리들에 관해 논쟁하였기 때문이다. 또한 그것들은 “가데스의 논쟁의 물”이라고도 불리 우는데, 이것은 모세의 책에서 확인된다:
너희는 신 광야에서 회중의 논쟁에서 그들의 눈에서 물을 수단으로 나를 신성하게 하는데 있어 내 입에 맞서 반역하였다. 이것이 신 광야에서 가데스의 논쟁의 물이다
(민. 27:14; 신. 32:51).
또한 가데스는 가나안의 토지를 정탐한 스파이들이 되돌아 온 곳이고, 거기는 이스라엘족들이 가나안의 토지 안으로 들어가기를 원치 않아 불평하고 논쟁했던 곳이다 (민. 13:26).
위의 살핀 바로부터 분명해지는 것은, “엔미스밧”, “판단의 샘”, 또는 “미스밧-가데스의 샘”이 진리들에 관하여 논쟁함을 의미한다, 고로 그렇게 계속함을 뜻한다. 위의 구절들이 진정한 역사물들이고, 여기서 서술된 그대로 발생하였던 바, 이것은 마치 이런 사항들이 그돌라오멜이 온 장소, 그리고 그가 쳐부순 나라들에 의해 표현되고 의미하지 않는 것처럼 나타난다; 그러나 말씀에 있는 모든 역사물들은 표현적이고 의미적이다. 이는 장소이든, 나라이든, 사건이 벌어진 것이든 모두에 해당한다; 이는 말씀 속의 예언적, 역사적 구절들의 세부 사항에서도 분명해질 것이다.

그리고 아말렉족의 모든 들판을 쳐부수었다. 이는 거짓의 종류들을 의미하는데, 이는 아말렉 나라의 의미와 표현으로부터 분명해진다. 가나안의 토지에 있었던 모든 나라들을 수단으로 악들과 거짓들의 다른 종류들이 표현되어졌다. 이는 이어지는 것으로부터 주님의 신성한 자비로부터 분명해질 것이다. 거짓들이 “아말렉족”에 의해 의미되어진다, 그리고 거짓으로부터 파생된 악들이 “하사손다말의 아모리족”에 의해 의미되어진다. 이 거짓들에 의해 진리들이 공격받는 것이 아말렉족에 의해 의미되는데, 그들에 관련된 말씀의 구절에서 알런지 모른다. 즉 출. 17:13-끝절; 민. 13:29; 24:20; 신. 25:17-19; 사. 5:13, 14; 삼상. 15:1-끝절; 27:8; 시. 83:7, 8에서 이다.
본문 5, 6절에서 말하여진 르바임족, 수스족, 엠족, 그리고 호리족은 악의 탐욕들로부터, 즉 악들로부터 일어나는 거짓의 설득들을 의미하였다; 그러나 아말렉족과 하사손다말의 아모리족은 악들을 오게 하는 거짓들을 의미하였다. 악으로부터의 거짓이 있고, 거짓과 거짓으로부터 파생된 악은 또 다른 것이다. 거짓들은 의지로부터인 탐욕들로부터와 이해함으로부터 받아들인 원리들로부터 튀어 나온다. 의지의 탐욕들로부터의 거짓들은 끈질기게 비열해서, 그 자체를 뿌리뽑기가 쉽지가 않다. 그 이유는 그것들이 인간의 생명 자체에 밀착하였기 때문이다. 바라는 것, 즉 사랑하는 것이 인간의 생명 자체이다. 인간이 이 생명, 또는 탐욕, 또는 사랑을 자신 안에서 확증하는 동안, 확증하는 모든 것들은 거짓들이다, 그리고 이것은 그의 생명 안에 이식된다. 이런 상황이 홍수 이전 사람들에 있었다.
그러나 받아들인 원리들로부터 거짓들, 이것들은 이해력으로부터 있는 거짓들인데, 이것들은 인간의 의지 안에 뿌리내려 질 수 없다. 거짓된 교리, 또는 이교의 교리들, 예를 들면, 의지 바깥으로부터 근원을 가지고 있다. 즉 인간이 유아기로부터 흡입된 교리적인 것들로부터, 그 후에 성년기에 이 교리를 확증함으로부터 결과된 거짓들이다. 어쨌든 이것들도 거짓인 바, 그것들은 생활에서 악을 생산할 수 밖에 없다; 예를 들면, 행위들에 의해 구원을 받게 된다고 믿고 이를 확증한 이들의 경우, 이 신조로부터 오는 악들은 공적 자체, 자기 정당화, 독선적임(smugness) 같은 것들일 수 있다. 한편, 행위들에 공적을 놓지 않고서는 생활의 경건함을 가지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믿는 이들에게 예상되는 악은 그가 생활의 모든 경건심을 자신 안에서 소멸시키는 것, 그리고 탐욕들과 기쁨들에 자신을 내놓는 것이다. 이런 거짓들과 이 거짓들로부터 파생된 악들이 이 절에서 취급되어 있다.

그리고 또한 하사손다말에 거주한 아모리족. 이는 이런 거짓들로부터 파생된 악들의 종류를 의미한다는 것은 이미 위에서 살폈다. 그리고 다음 장 16절에서 말해진 아모리족의 의미로부터 분명해진다. 주님께서 전투하신 악들과 거짓들에 주목해 보면, 그분이 싸우신 대상은 악들과 거짓들 안에 있는 지옥의 영들이었다. 즉 지옥들은 이런 영들로 가득하고, 이 영들이 인류에게 계속적으로 지옥의 병을 감염시키고 있다. 지옥의 것들은 모든 이를 파멸하는 것밖에 바라는 것이 없다. 그들은 타인을 괴롭히는데서 즐거움을 얻는다.
다른 삶에 있는 모든 영들은 다음 방법에서 구별되어진다: 타인을 향하여 해악을 바라는 이들은 지옥적, 또는 악마적 영들이다; 그러나 타인이 잘됨을 바라는 이들은 선하고 천사같은 영들이다. 인간은 자기가 어느 쪽에 있는지, 그쪽이 지옥적인지, 천사같은지 알 수 있다: 만일 그가 이웃에 해악을 의도한다면, 그가 이웃에 관해 생각하는 것은 악밖에 없고, 기회가 주어지면 실제화 된다. 그리고 그 안에서 기쁨을 쟁취하는 바, 그는 지옥적 무리 틈에 있다. 하여 그는 다른 삶에서 지옥적이 된다; 이에 반해 자기 이웃에 선을 의도하는 사람은 여건이 생기면 실제로 그것을 실제화 한다. 하여 그는 천사같은 영들 사이에 있다. 고로 다른 삶에서 천사가 되어간다. 이는 두 대비적인 품성이다. 누구나 이런 간단한 원리를 바탕으로 자기가 어느 쪽인지 배우기 위해 자신을 검사할 수 있다.
인간이 악을 행할 기회가 아니어서 악을 행할 수 없는 것, 또는 악을 행함에 따른 두려움에서 악을 금하고 있는 것은 아무런 가치가 없다; 또는 인간이 자기를 위하는데 필요해서 선을 행할 때 마찬가지로 아무런 가치가 없다; 그 이유는 이런 것들은 다른 삶에서 제거되는 외적인 것들의 범주에 있기 때문이다. 그가 생각하고 의도하는 것이 바로 그 인간이다. 세상에서 만들어져 지닌 습관으로부터 잘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이 저 세상에서도 많이 있다. 그들의 마음, 또는 의도가 그가 섞인 공동체와 일치하는지 여부는 다른 영들에 의해 즉각 지각되어진다. 만일 일치하지 않으면, 그는 그의 천성에 걸맞는 지옥의 어디론가 보내진다.

8, 9절. 그러자 거기로 소돔 왕과 고모라 왕과 아드마 왕과 스보임 왕과 벨라 즉 소알 왕이 나갔다, 그리고 그들은 싯딤 계곡에서 전투 대형을 갖추어 놓았는데, 9 엘람 왕 그돌라오멜과 고임 왕 디달과 시날 왕 아므라벨과 엘라살 왕 아리옥과 싸우려해서 였다. 즉 다섯 왕이 네 왕과 싸웠다.

그러자 거기로 소돔 왕과 고모라 왕과 아드마 왕과 스보임 왕과 벨라 즉 소알 왕이 나갔다. 이들은 일반적으로 통치하는 악들과 거짓들을 의미하는데, 이는 앞의 2절에서 왕들에 관해 살핀 설명으로부터 분명해진다. 즉 그들은 악의 탐욕들과 거짓의 설득들이다. 2절에서 똑같은 왕들에 의해 일반적 측면에서의 모든 악들과 거짓들이 의미된다, 또는 악의 탐욕들과 거짓의 설득들이 의미된다. 그러므로 전쟁이 그들과 더불어 만들어졌다고 (우선) 말해진다. 그 후에 르바족, 수스족, 엠족, 그리고 호리족과 전쟁을 벌였다; 마지막으로 시작에서 명명한 왕들과 전쟁을 치룬다. 그러므로 여기서 똑같은 왕에 의해 통치하는 악들과 거짓들이 단순히 의미되는데, 이것들은 덜 심각한 편에 속한다.

그들은 전투 대형을 갖추어 놓았다. 이는 그들이 공격을 시작했다를 의미하는데, 이는 “전투 대형을 갖춤”이 맞서 싸움을 뜻한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 이유가 3절을 보면 그들이 반역했다고 말해졌기 때문이다. 즉 습격을 감행하는 자가 악령들이다는 사실도 반역했다와 같은 맥락이다. 그 이유가 주님께서는 어떤 지옥과도 먼저 전투를 시작하는 일이 결코 없기 때문, 그러나 지옥들이 그분을 공격했기 때문이다; 이는 시험 안에 있는 모든 이들, 또는 악령들과 전투하는 모든 이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인간의 경우, 인간과 더불은 천사들이 공격을 먼저 시작하는 일은 결코 없고, 악마, 또는 지옥의 영이 언제나, 그리고 계속적으로 그렇게 한다. 천사들은 언제나 격퇴하여 방어만 할 뿐이다. 이것은 주님으로부터 받은 특질이다. 즉 그분은 누구에게도 악을 가져오는 것을 바라시지 않는다, 또는 누구이든 지옥으로 내던져지기를 바라시지 않는다, 설사 그가 최악의 적이었다 해도 그렇다. 자신 위에 악을 가져오는 것은 인간 바로 그 자신이다. 인간 자신이 자신을 지옥으로 거꾸로 떨어뜨린다. 이것 역시 악의 본성으로, 그리고 선의 본성으로부터 온다. 모든 이를 닥치는대로 학대하고 싶어하는 것이 악의 본성이다; 그러나 아무도 학대하지 않는 것은 선의 본성이다. 악한 자는 그들이 해악을 감행할 때 그들의 생명 자체 안에 있다; 그 이유가 그들은 계속 파괴하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선한 자는 그들이 아무도 해악을 당하지 않기를 바랄 때, 그들이 악들로부터 타인을 방어해주는데 그들의 쓸모있음이 존재할 수 있게 될 때, 그들의 생명 자체 안에 있다.

싯딤 계곡 안에. 이는 불결함을 의미하는데, 이는 3절에서, 싯딤 계곡과 염해에 관해 말해진 바로부터 알게 된다.

엘람 왕 그돌라오멜과 고임 왕 디달과 시날 왕 아므라벨과 엘라살 왕 아리옥과 (싸우려해서 였다). 이는 외적 인간에 있는 진리들과 선들을 의미하는데, 이는 1절에서 이미 살폈다.
“엘람 왕 그돌라오멜”은 진리들을, 그리고 “고임 왕 디달”은 선들을, 그리고 이외 다른 왕들은 이들로부터 파생한 것들을 의미하는데, 이는 똑같은 왕들이 1절과는 다른 순서로 이 절에서 열거된다는 사실로부터 분명해진다. 1절에서는 “엘람 왕 그돌라오멜”이 세 번째에서 열거되는데, 여기서는 첫 번째에서 열거된다. 그리고 “고임 왕 디달”은 네 번째에서 여기서는 두 번째에서 열거된다. 전투에서 첫째되는 것은 진리이다. 그 이유가 전투는 진리로부터 있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진리로부터 거짓이 무엇인지, 악이 무엇인지가 알려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런 전투들은 인간이 진리와 선에 대한 (비 종교적, 종교적) 지식을 흡수할 때까지 결코 발생하지 않는다. 이로부터 여기서 첫 번째로 명명된 “그돌라오멜”에 의해 주님 안에 있었던 진리가 의미되어진다. 또한 10장 22절에서 “엘람”의 의미 역시 선행으로부터의 신앙인 바, 이는 진리 측면이어서 같은 의미를 보여준다. 이로부터 “고임 왕 디달” 또는 “나라”가 선을 의미하게 된다; 그리고 다른 왕들은 이들로부터 파생된 진리들과 선들을 의미한다.

네 왕들이 다섯 (왕)과. 네 왕은 선과 진리의 합일을, 다섯 왕은 악과 거짓의 분열을 의미하는데, 이는 “4”와 “5”의 의미로부터 알게 된다. 즉 4가 합일을 의미하는 이유는 4가 쌍을 말하는 2와 관련되고, 2는 결혼에 관련되기 때문인데, 앞에서 살핀 바 있다. 그러나 5는 분열을 의미하는데, 그 이유는 이 숫자가 적음(little)을 의미하기 때문인데, 앞에서 살폈다. 모든 것들의 의미는 그것들이 서술하는 주제와 일치한다.

10절. 그리고 싯딤 계곡은 역청 수렁, 수렁이었다. 그리고 소돔 왕과 고모라 왕은 도망쳤다, 그리고 거기에 빠졌다, 그리고 남아있었던 자들은 산으로 도망쳤다.

싯딤 계곡은 역청 수렁, 수렁이었다. 이는 거짓들과 탐욕들의 불결함을 의미하는데, 이는 “싯딤”의 의미가 불결함이다로부터 분명해진다. 이 의미는 3절에서 서술했다; 또한 수렁의 의미가 거짓들이다로부터; 그리고 “역청”의 의미가 탐욕들이다로부터도 분명해진다. 거짓들이 “수렁”으로 불리운 이유는 그곳은 불결한 물이 고여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탐욕들이 “역청”으로 불리운 이유는 이 물 안에 있는 더러운 유황 냄새 때문이다.

소돔 왕과 고모라 왕은 도망쳤다, 그리고 거기에 빠졌다. 이것은 이런 악들과 거짓들이 정복되었다를 의미하는데, 이는 “소돔”과 “고모라”의 의미가 탐욕들의 악과 설득들의 거짓들이다로부터 분명해진다. 여기서 “소돔과 고모라의 왕들”은 나머지 왕들에 의해 의미되는 것까지 포함된 악들과 거짓들을 표시한다; 그리고 “도망치고 빠짐”의 의미가 정복되었음을 뜻한다로부터도 알게 된다.

남았던 자들은 산으로 도망쳤다. 이는 모두를 정복한 것은 아니다를 의미하는데, 이는 도망친 나머지들이 있었다는 사실로부터인 바. 설명이 필요 없을 것 같다. 이 장의 내적 의미는 주님의 젊은 시절, 그분이 이겨내신 시험들을 취급하고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시험에 관련하여 신약 성경의 말씀에서 직접 언급되는 것은 없다. 단지 광야에서의 시험 받으셨다는 것, 좀 더 넓게 말하면 이 시험 직후까지, 마지막으로 겟세마네에서 시작된 그분의 마지막 시험 뿐일 것이다. 주님의 유년기로부터 세상에서의 그분의 마지막 시간까지 그분의 생애는 시험의 계속과 계속적인 승리이었다는 것은 구약 성경의 말씀에 있는 많은 대목들로부터 분명해진다; 그리고 그분의 시험받으심이 광야의 시험으로 끝난 것이 아님은 누가복음서에서도 확인된다:
그리고 악마가 모든 시험을 끝냈을 때, 그는 그분으로부터 얼마동안 떠났다 (눅. 4:13);
악마가 잠시 그분을 떠났을 뿐 계속 유혹하였음은 그분이 십자가에서의 죽음에 따른 시험, 고로 시험은 세상에서의 마지막 시간까지도 계속되었다는 사실로 미루어 생각해도 알게 된다. 그러므로 주님의 어린 시절을 포함해 그분의 전 생애는 계속적인 시험과 승리였음이 분명하다. 아마 이 시험의 마지막은 십자가에서 그분이 그분의 적들을 위해, 고로 온 세상 모두를 위해 기도하셨을 때 일 것이다.
주님이 받으신 시험에 관련하여 복음서에 있는 말씀으로는 광야에서 받으신 시험과 (악마의 유혹이 직접 등장하지 않지만) 생애 마지막 며칠 동안에 벌어진 사건 밖에 없다. 더욱이 시험에 관련하여 그분의 제자들에게도 알려진 것이 없다. 물론 알려주신 것이 글자 의미에서 굳이 찾아보려 들면 불가능은 아니지만 그렇게 해보아야 그것은 미미한 수준, 억지일 뿐이다. 그 이유가 그분의 시험은 어떤 인간의 마음에 의해서도 납득되어 믿어질 수 있는 것을 넘는 최고의 비통함이었는 바, 인간 차원에서는 그분의 시험은 두 번의 기록밖에 더 없는 듯 이야기하고 말아야 할 지 모른다. 한마디로 시험 안에 있어 보지 않은 자는 시험이 무엇인지 알 수 없다는 말이다. 우리에게 알려진 최상의 것은, 마. 4:1-11: 막. 1:12, 13: 눅. 4:1-13에 언급된 시험은 모든 시험들을 요약하여 포함한다는 것이다; 즉 인류 전체를 향한 사랑으로부터, 그분은 지옥들을 채운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 맞서 싸우신 것이다.
모든 시험은 우리가 지닌 사랑이 공격 대상이다. 시험은 우리가 지닌 사랑의 수준에 맞추어 발생한다. 만일 사랑이 공격받지 않고 있다면, 시험을 받는 상황도 아니다. 누군가의 사랑을 파괴하는 것은 그의 생명 자체를 파괴하는 것이다; 그 이유가 사랑은 생명이기 때문이다. 주님의 생명은 전 인류를 향한 사랑이었다, 그리고 이는 실로 위대하고, 그 품질은 순수한 사랑 외에 더 다른 할 말은 보탤 수 없을 것이다. 이런 그분의 생명에 시험이 들어가 짐이 계속 허용되었다. 이미 말한 바같이, 그분의 어린 시절로부터 마지막 세상에서의 시간까지 허용이 있었다는 말이다. 주님의 생명의 핵심(core, veriest)인 사랑이 그분께서 “배고프심”과 악마가 한 말에 의해 의미되어져 있다:
만일 네가 하느님의 아들이거든 이 돌에게 빵으로 만들어지라고 명령하라; 그리고 예수께 서는 사람은 빵만을 수단으로 살 것이 아니고, 하느님의 모든 말을 수단으로 살아야 한다 라고 대답하셨다 (눅. 4:2-4; 마. 4:2-4).
그분이 세상 사랑, 또는 세상 사랑으로부터 있는 모든 것들에 맞서 싸우신 것이 아래 구절에 의해 의미되고 있다:
그리고 악마는, 그분을 높은 산으로 데리고 가서, 그분에게 순간에 세상의 모든 왕국들을 보였다. 그리고 악마는 그분에게 말했다, 모든 이 권능을, 그것들로부터의 영광을 나는 네 게 줄 것이다: 그 이유가 이것은 나에게 넘겨져 있다; 그리고 내가 원하는 자 누구에게나 나는 그것을 줄 것이다. 만일 그러므로 당신이 나를 예배한다면, 모든 것은 당신의 것이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그에게 대답해 말하셨다, 너는 내 뒤로 물러 가라, 사탄아: 그 이유가 이렇게 쓰여 있다, 너는 주 네 하느님을 예배할 것이다, 그리고 그분만을 너는 섬길 것이다 (하였다). (눅. 4:5-8; 마. 4:8-10).
그분께서 자기 사랑, 그리고 자기 사랑에 속한 모든 것들에 맞서 싸우신 것이 아래 구절에 의해 의미되고 있다:
그리고 그는 그분을 예루살렘으로 데려가서, 그분을 성전의 작은 뾰족탑에 세우고, 그에게 말했다, 만일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거든, 네 자신을 여기로부터 던져라: 그 이유가 쓰여 있는 바, 그분은 그분의 천사들에게 당신을 보존하라고 명하실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손 안에서 그들은 당신을 데려가, 여하튼 당신의 발이 돌에 부딪치도록 당신이 돌진하지 않 도록 할 것이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그에게 대답하여 말하셨다, 이렇게 말해졌다, 너는 주 네 하느님을 시험치 말라 (하였다) (눅. 4:9-12; 마. 4:5-7).
시험들에 계속 승리하셨음이 시험 후에 “천사들이 와서 그분을 섬겼다” 라는 구절에 의미되고 있다 (마. 4:11; 막. 1:13).
(이미 살핀 위의 서술들은 중요하므로 암기하기 좋게) 간략히 다시 말해보자: 주님께서는 세상에서 그분의 어린 시절로부터 그분 생애의 마지막 시간에 이르기까지 모든 지옥들로부터 공격받으셨고, 그것들과 맞서 계속 싸우셨으며, 복종시키고 정복하셨다, 이것은 오로지 인류를 향한 사랑으로부터 였다. 이 사랑은 인간의 사랑이 아니고 신성의 사랑이었던 바, 이 사랑의 위대함의 수준에 비등한 시험에, 지옥의 광폭한 행동에 노출되셨는 바, 그분의 전투는 얼마나 비통했었을 것인지 우리는 단순히 추측만 가능할 뿐이다. 어쨌든 이것이 진실로 그러했다는 것을 나는 확실하게 알고 있다.

“산”이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을 뜻하는 것은 “산”의 의미로부터 알런지 모른다. 모든 악과 거짓은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으로부터 생겨난다; 그것들의 근원은 다른 데에 있지 않다; 그 이유가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은 천적 (평면의) 사랑과 영적 (평면의) 사랑에 반대되는 사랑들이다; 그리고 그것들이 반대에 있기 때문에, 그것들은 하느님의 왕국의 천적, 영적인 것들을 파괴하려 계속 골몰한다. 모든 증오함들은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으로부터 생산된다; 증오함들로부터 모든 복수함과 잔인함이; 이로부터 모든 사기침이 있다; 간단히 줄여 위 두 사랑으로부터 지옥들이 있다.
말씀에서 “산들”에 의해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이 의미된다는 것은 아래 구절에서도 알 수 있을런지 모른다. 이사야서에서:
인간의 거만한 눈들이 겸허해질 것이다; 그리고 인간들의 거드름핌이 비천해질 것이다. 여 호와 체바욷의 날이 거만하고 거드름피는 모든 자 위에, 모든 높은 산들 위에, 모든 치솟 아진 언덕들 위에, 치솟은 모든 탑 위에 있을 것이다 (이. 2:11, 12, 14, 15);
“높은 산들”은 자기 사랑을 표시한다; 그리고 “치솟아진 언덕들”은 세상 사랑이다.
다시:
모든 계곡이 드높여질 것이다, 그리고 모든 산과 언덕이 낮아질 것이다 (이. 40:4);
위 구절 역시 “산과 언덕”은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을 명백하게 표시한다. 다시:
나는 산들과 언덕들을 황폐해지게 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들의 모든 초본들을 말라지게 할 것이다 (이. 42:15).
위에서 “산들”은 자기 사랑을, 그리고 “언덕들”은 세상 사랑을 표시한다. 에스겔서에서:
산들이 무너져 내리고, 가파른 장소들이 추락할 것이다, 그리고 모든 성벽이 땅으로 추락할 것이다 (겔. 38:20).
예레미야서에서:
보라, 나는 너와 맞서 있다, 오, 파멸하는 산아, 이것은 모든 땅을 파멸한다; 그리고 나는 내 손을 너에 맞서 뻗을 것이다, 그리고 바위들로부터 너를 굴러 내릴 것이다, 그리고 너를 불타는 산으로 만들 것이다 (예. 51:25);
위에서 바벨과 갈대아가 이야기되고 있다. 이를 수단으로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이 의미된다. 모세의 노래에서:
불이 내 분노에서 당겨질 것이다, 그리고 가장 낮은 지옥을 태울 것이다, 그리고 땅과 그것 의 산물을 삼킬 것이다, 그리고 산들의 기초들에 불을 놓을 것이다 (신. 32:22);
“산들의 기초들”은 지옥들을 뜻한다. 지옥들이 산들의 기초들이라 불리우는 이유는 지옥들 안에서 통치하는 사랑이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이고, 이 두 사랑으로부터 지옥이 있기 때문이다.
요나서에서:
물들이 나를, 혼까지 휘감았다; 깊음이 나를 빙두르었다: 해초가 내 머리를 둘둘 말았다; 나는 산들의 절단된 것 아래로 내려 갔다; 땅의 빗장이 내 위에 영원히 쳐졌다; 그럼에도 당신께서는 내 생명들을 구덩이로부터 건져 올리셨다, 오, 여호와 나의 하느님
(욘. 2:5, 6);
요나가 큰 물고기의 뱃속에 있을 때, 요나에 의해 주님의 지옥들에 맞선 시험이 예언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이와 유사한 대목들을 말씀에서, 특히 다윗서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시험 안에 있는 자는 지옥들 안에 있다; 장소 측면에서 지옥 안에 있는 게 아니라 상태 측면에서 그러하다.
“산들”과 “탑들”이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을 의미하기에, 주님이 시험받으실 때, “높은 산 위에”와 “성전의 작은 뽀족탑 위에”로 악마에 의해 데려가졌다는 대목에서도 의미되는 것을 알 것이다. 즉 그분은 시험 안으로 인도되었으되 가장 격렬한 전투, 즉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과의 전투, 즉 지옥들과의 전투를 치루셨다는 말이다. 이와 반대되는 산의 의미는 천적, 영적 사랑인데 795, 796항에서 살핀 바 있다.

시험, 또는 시험의 전투가 성취하는 것을 알 수 있는 자는 거의 없다. 그것들은 악들과 거짓들을 깨지게 하고 흐트는 수단이다, 그리고 시험을 수단으로 악들과 거짓들에 대한 혐오가 유발된다; 시험 때문에 양심이 획득될 뿐만 아니라, 양심이 튼튼해진다. 그리하여 인간은 거듭나진다. 이런 이유로 거듭나지는 사람은 전투에 임해야 하고 시험들을 수행해야 한다; 그리고 육체의 삶에서 이 과정을 거치지 않은 인간인데 만일 그가 거듭나질 수 있는 경우라면, 저 세상에서 치러야 한다. 이런 이유로 주님의 교회는 전투하는 교회라 불리운다. 주님만이 그분 자신의 힘, 또는 그분 자신의 능력으로 최고로 잔혹한 시험의 전투들을 훌륭히 해 내셨다; 그 이유는 그분은 모든 지옥들에 포위된 상태이셨고 그것들을 계속적으로 정복하셨기 때문이다.
시험의 전투 안에 있는 인간 안에서 주님만이 싸우시고 정복하신다. 인간은 자신의 능력으로부터 악, 또는 악령들에 맞서 어떤 승리도 가능치 않다; 그 이유는 악령들은 지옥과 연대되어 있어, 하나가 정복되면 또 다른 하나가 달려들고, 이것은 끝이 없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방파제의 돌 하나하나를 두둘기는 바다의 파도와 같다. 만일 방파제에 작은 균열이 생긴다면 바다는 더 큰 균열을 위해 쉬지 않고 넘쳐 흘러, 방파제의 돌 하나도 제대로 서지 못하게 할 것이다. 주님께서 시험의 전투 중인 인간 안에서 버티게 해주시지 않으면 우리 인간은 잠간 사이에 지옥의 먹이가 될 것이다.

11절. 그리고 그들은 소돔과 고모라의 재물 모두와 그들의 식품 전부를 거두어 떠났다.

그들은 소돔과 고모라의 모든 재물을 거두었다. 이는 이들이 악을 행할 능력을 박탈당했음을 의미하는데, 이는 누군가의 재물을 거두어 버림의 의미로부터 분명해진다. 소돔과 고모라의 재물은 내적 의미에서 악과 거짓이 뜻해진다. 여기서 악은 “재물”에 의해, 거짓은 “식품”에 의해 의미되고 있다. 선에 주목해보면, 영적인 재물과 부유함은 주님에 의해 선물되고 풍부해진 선과 진리이다; 그러므로 악에 주목하면, 재물과 부유함은 그들이 자신들에게 획득한 악들과 거짓들이다. 이 의미는 말씀에서 “부유함”에 의해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이로부터 소돔과 고모라의 재물을 가져감은 악을 행할 능력을 박탈하는 것이 분명해진다.

그리고 모든 그들의 식품. 이는 그들이 거짓을 생각하는 능력을 박탈당했음을 의미하는데, “식품, food”의 의미로부터 분명해진다. 다른 삶에서 즐기는 천적, 영적, 자연적 식품이 무엇인지는 앞에서 살핀 바 있다. 이것들은 육체의 식품에 상응한다; 그리고 말씀에서 이것이 식품에 의해 표현되어져 있다, 그리고 “식품”이라 불리운다. 그러나 악과 악령들의 식품은 지혜, 총명, 진정한 지식에 반대되는 것인데, 모든 거짓이다; 그리고 경이롭다 말할 것은, 악령들은 이 식품으로 버텨나간다는 것이다. 그 이유가 버티게 하는 이것은 그들의 생명이기 때문이다. 실로 그들에게 진리를 헐뜯는 수단, 진리를 모독하는 수단이 주어지지 않으면, 그들은 살 수가 없다. 그들에게는 자신들의 악으로부터 있는 거짓만을 생각하고 말하는 것은 허가되어 있다. 그러나 악이 그것들 자신의 개별적 타잎(type)에 반대하여 놓인 거짓말을 하는 것은 허용되지 않는다. 이것은 허위 진술(misrepresentation, deceit)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그들이 자기들의 악으로부터 거짓을 말하는 만큼 안에서 그것은 그들의 생명으로부터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때 그것들은 용서된다, 그 이유는 그들의 본성이 이러한 바 이와 달리해서는 그들이 살 수 없기 때문이다.
그들이 악을 행하고 거짓을 생각하는 능력이 박탈됨에 관하여는 이렇다: 시험의 전투에서 악령들에게 허락된 것은 인간 안에 있는 모든 악과 거짓을 끌어내는 것, 그리고 인간의 악과 거짓으로부터 (이것을 무기로 해서) 싸우는 것이다; 그러나 이 영들이 이겨냈을 때라 해도, 그들은 그렇게 하는 것이 더 이상 허락되지 않는다, 그 이유는 그들은 선과 진리가 확증된 것을 인간 안에서 즉시 지각하기 때문이다. 영들은 인간들보다 더 이런 지각함이 선물되어져 있기 때문이다; 진리와 선을 확증한 인간의 참 기운으로부터 그들은 이런 경우가 어떻게 있는지, 어떤 대답을 그들이 가져야 할지 등등을 즉시 알고 있다. 이는 영적 거듭난 자나 비거듭난 자나 악령은 동등하게 존재하나, 그 차이는 한쪽은 악령들이 복종하고 섬긴다는 것이다. 이것이 (악령이) 악을 행하고 거짓을 생각하는 능력이 박탈된 상태인 것이다.

그리고 떠났다. 이는 [지옥들이] 뒤에 남겨졌다를 의미하는데 설명이 필요 없을 것이다.

12절. 그리고 그들은 아브람의 형제의 아들 롯, 그리고 그의 물질을 거두어 떠났다. 그리고 롯은 소돔에서 거주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아브람의 형제의 아들 롯, 그리고 그의 물질을 거두어 떠났다. 이는 그 자체 선과 진리가 아닌 외견상의 선들과 진리들이 외적 인간, 그리고 그 인간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점유해버림을 의미하는데, 이는 “롯”의 의미로부터 분명해진다. “롯”은 주님에 있는 감각적, 또는 외적 인간을 의미하는데 이는 이미 여러 번 살핀 바 있다. 그러나 여기서 “롯”은 외견상의 선들과 진리들에 관련되는 외적 인간을 의미한다. 이것이 롯의 “물질”이다. 주님의 유년기 초 이런 선들과 진리들은 선들과 진리들이라고 나타났다, 그러나 그 자체로 보면, 그렇지 않았다. 그러나 이것들은 점차로 순수해졌다, 그리고 순수해지는 방법은 사실상 시험들의 전투를 수단으로 해서 였는데, 이것 또한 이미 살폈다.

그리고 그는 소돔에 거주하고 있었다. 이는 외적 인간의 상태를 의미하는 것은 “소돔”의 의미로부터 분명해진다.

13절. 그리고 거기서 도망쳐 나온 한 사람이 왔다, 그리고 히브리인 아브람에게 말했다, 그리고 아브람은 에스골의 형제, 아넬의 형제인 아모리족 마므레의 상수리나무 숲에서 거주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들은 아브람과 계약을 맺은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거기서 도망쳐 나온 한 사람이 왔다, 그리고 히브리인 아브람에게 말했다. 이는 주님께서 그분의 내면의 인간으로부터 지각했다를 의미하는데, 이는 “아브람 히브리인”의 의미가 내적 인간과 결합된 내면의 인간이다로부터 분명하고, 이를 아래에서 살핀다. 내적 의미에서 이런 상황들이 주님을 서술할 때, 그리고 역사물들이 표현성일 때, 도망쳐 온 어떤 사람, 그가 말함은 주님이 지각하셨음 외에 다른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내면의 인간은 외적 인간에서 어떻게 되어가는지를 마치 누군가가 그것을 말하듯 지각한다. 일어나지고 있는 모든 것들을 지각하고 있으시는 주님께서는 그분 자신과 연결하여 일어나는 모든 것의 근원과 품질을 매우 명확하게 아셨다. 예를 들면, 만일 악의 어떤 것이 그분의 외적 인간, 또는 외적 인간의 생각들 속의 거짓된 어떤 것을 소유한다면, 그분은 그것이 무엇이었는지, 어디서였는지를 알 수 밖에 없으셨다는 것; 그리고 악령들이 악과 거짓을 흥분시키는 것도 아셨다는 것; 그리고 어떻게 악령들이 그것을 휘젖는지도,,,등등 다 아신다는 말이다; 그 이유가 이와 같은 것들, 이 외에 다른 것들도 숫자와 상관 없이 천사들로부터 감추여 있지 못한다, 그리고 천적 지각을 가진 사람들로부터도 거의 감추여 있지 않다. 주님의 경우는 더더욱 감추여 있지 못한다.

“아브람 히브리인”이란 내적 인간, 또는 신성한 인간이 인접되어 있었던 내면의 인간이다는 것, 이는 “아브람 히브리인”의 의미로부터, 또는 아브람의 별명으로부터, 여기서는 그의 별명이 “히브리인”이라 불리우는데 이로부터 알런지 모른다. 아브람은 이 장 앞쪽 부분에서 그가 히브리인이라 불리우지 않는다. 그는 이 구절에서 만 그렇게 불리운다; 그러므로 “아브람 히브리인”에서 주님 안에 있는 어떤 구분된 것이 표현되고 의미된다는 것이 내적 의미에서 알런지 모른다, 즉 내적 인간, 또는 신성한 인간에 인접한 내면의 인간이다는 것인데, 이는 내적 의미에 있는 시리즈(seris)로부터도 알런지 모른다. 도움을 주는 노동(subservient)의 어떤 것이 의미될 때 히브리인이 말씀에서 명명된다. 이는 이어지는 대목으로부터 알런지 모른다. 내면의 인간은 내적 인간, 또는 신성한 인간을 섬긴다; 그리고 이런 이유 때문에 내면의 인간이 여기서 “아브람 히브리인”이라 불리운다.
내면의 인간이 무엇인지는 아마 거의 아는 사람이 없을 것 같아 여기에 설명을 보탠다. 내면의 인간은 내적 인간과 외적 인간 사이의 중간물(intermediate)이다. 내면의 인간을 수단으로 내적 인간은 외적 인간과 교통한다; 이 매개물(medium) 없는 양쪽 인간의 교류는 불가능하다. 천적 인간은 자연적 인간과는 아주 다르다. 게다가 천적 인간은 육체적 인간과는 더욱 다르다. 내면의 인간이 합리적 인간이라 불리운다; 그리고 이 인간, 이것은 중간에 있는 특성상 선 자체와 진리 자체가 있는 내적 인간과 교류한다; 그리고 악과 거짓이 있는 외면의 인간과도 교류한다. 내적 인간과의 교류를 수단으로 인간은 천적, 영적인 것들을 생각할 수 있고, 위쪽을 바라볼 수 있다. 이는 짐승들이 할 수 없는 특성이다. 외면의 인간과의 교류를 수단으로 인간은 세상적이고 육체적(물질적)인 것들을 생각할 수 있고, 아래쪽을 내려다 볼 수 있다; 짐승과 별반 차이가 나지 않는 이것은 짐승과 같은 방식에서 지상의 것들에 대한 생각을 가진다. 줄여 말하면, 내면의, 또는 중간의 인간은 합리적 인간 그 자신인데, 이 인간이 위쪽을 쳐다볼 때는 천적, 영적 인간 수준일 수 있지만, 아래쪽을 응시할 때 그 인간은 동물 수준이다.
누구나 잘 아는 것은, 인간은 이것을 생각하면서 저것을 말하는 것, 이것을 마음에서 뜻하면서 저것을 실행하는 것; 허세부림(…체함)과 사기침이 존재한다는 것; 이성과 합리성이 있다는 것; 그리고 이성과 합리성은 (외면의 것과) 불일치할 수도 있기 때문에 보다 깊은 쪽(내면의 어떤 것)에 놓여있다는 것; 또한 거듭나지려 하고 있는 인간의 경우, 그의 내면의 어떤 것은 외면의 어떤 것과 전투를 치러야 하는 경우도 있다는 것이다. 내면인 이것, 외면과 다르게 생각하고 뜻하는 이것, 외면과의 전투도 마다하지 않는 이것이 내면의 인간이다. 이 내면의 인간 안에 영적 인간과 더불은 양심이 있고, 천적 인간과 더불은 지각이 있다. 이 내면의 인간은 주님 안에 있었던 신성한 내적 인간과 결합되어 있다. 이것이 “아브람 히브리인”이라 불리운다.

아래 구절들은 도움을 주는 어떤 형체로서 히브리인을 묘사한 것을 보여준다. 모세의 책에서:
네 형제, 히브리인, 또는 히브리 여인이 네게 팔리우고, 네게 6년을 섬기면, 7년 차에 너 는 그를 자유로이 가게 하라 (신. 15:12);
위 구절에서 “히브리 남자” 또는 “히브리 여자”가 말해지는데, 그 이유는 주제가 노예상태가 취급되기 때문이다. 예레미야서에서:
7년의 끝에서 모든 사람은 히브리인인 그의 형제를 가게 할 것이다. 그는 네게 팔리워졌고, 너를 6년을 섬겼다 (신 34:9, 14);
위 구절 역시 용어 “히브리인”이 사용되는데, 그 이유는 노예 상태가 취급되기 때문이다; 이렇지 않을 경우, 야곱의 아들들(후손들)은 예언서들에서 “히브리인”이라 불리지 않는다. 사무엘서에서:
블레셋이 말했다, 강해져라, 남자답게 하라, 그래야 너희는 그들이 네게 있었던 것 같이 (거꾸로) 히브리인들에게 종이 되지 않는다 (삼상. 4:9);
위 구절에서도 같은 의미에서 히브리인이라는 단어가 사용된다.
[2] 모세의 책에서: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하셨다, 바로에게 가라, 그리고 그에게 말하라, 고로 여호와, 히브리 인들의 하느님께서 말하신다, 내 백성을 가게 하라, 하여 그들이 나를 섬기게 하라
(출. 9:1, 13; 10:3);
위 구절에서 섬김으로부터 그들이 히브리인이라 불리운다. 보디발의 아내가 요셉을 두고 말한다:
사람들을 그녀의 집으로 불렀다, 그리고 그들에게 말했다, 보라, 그는 우리를 조롱하라고 우리에게 히브리인을 데려왔다 (창. 39;14).
요셉이 위 구절에서 “히브리인”이라 불리운다. 그 이유는 그가 거기서 종이었기 때문이다. 술 관원장이 바로에게 말했다:
경호 대장의 종, 히브리인, 젊은이가 있는데, 그가 우리의 꿈을 해석했습니다 (창. 41:12).
더욱이 이집트인들은 이스라엘의 후손들을 “히브리인들”이라 불렀는데, 그 이유는 그들이 종들, 또는 노예 상태에 있었기 때문이다. (출. 1:15, 16, 19 참조).

그리고 그는 아모리족 마므레의 상수리나무 숲에 거주하고 있었다. 이는 합리적 인간으로부터 지각의 상태를 의미하는데, 이는 “상수리나무”와 “아모리족 마므레의 상수리나무 숲”의 의미로부터 알게 되는데, 이는 살핀 바 있다.

에스골의 형제, 아넬의 형제, 그리고 이들은 아브람과 계약을 맺은 사람들이었다. 이들에 의해 외적 인간의 선들과 진리들의 품질에 주목하여 외적 인간에 관련된 합리적 인간의 상태를 의미한다. 이는 그들이 다시 명명되는 24절에서 알 수 있는데 간단히 살펴보자. 마므레, 에스골, 그리고 아넬에 의해 주님과 함께 있었던 천사들이 의미되었다. 이 천사들은 그분의 아주 어린 시절 싸우실 때, 그리고 그때 당시 주님께서 소유하신 선과 진리에 잘 어울리는 천사들이었다. 어떤 경우에도 천사들은 자기들의 이름을 가지지 않는다. 이런 이름들은 천사의 이름이 아니라 이 이름을 통해 특성을 알리는 것 뿐이다. 예를 들면 “미가엘”, 또는 여타 다른 이름들의 경우이다. 이 이름들은 그들의 직능을 말해 준다. 여기서의 마므레, 에스골, 아넬 역시 표현적일 뿐이다.

14절. 그리고 아브람은 그의 형제가 포로가 되었다는 것을 들었다. 그래서 그는 자기 집에서 태어난 훈련된 사람 삼백 십팔 명을 재촉하여 단까지 추격했다.

아브람은 자기 형제가 포로가 되었다는 것을 들었다. 이는 내면의 인간이 외적 인간의 상태가 무엇이었는지를 지각했다를 의미하는데, 이는 13절에서 살핀 아브람의 의미가 내적 인간, 또는 신성한 인간에 인접된 내면의 인간이다로부터, 그리고 롯의 의미가 앞에서 살핀 그대로, 외적 인간이다로부터 분명해진다; 또한 “그의 형제가 포로가 되었다를 들음”의 의미가 외적 인간이 무슨 상태였는지를 지각함이다로부터 분명해진다. 이 상태는 외견상의 선과 진리가 외적 인간을 점유했다 인데 12절에서 살폈다.
이 경우는 이렇다: (아브람 히브리인에 의해 뜻해지는) 내면의 인간이 전투에서 (무기로) 사용된 선과 진리가 외견만을 제외하고는 선과 진리가 아니다는 것, 그리고 그것이 (그의 형제의 아들, 롯에 의해 뜻해진) 외적 인간의 전부를 소유해 버렸다는 것을 지각했을 때 내면의 인간이 (또는 신성한 내적 인간이 내면의 인간을 통하여) 외견상 선과 진리인 것들을 순수해지게 했다. 이것이 어떻게 행해지는지는 그것을 밝히 알게 한 사람 외에는 알 수 없다; 그 이유가 내적 인간이 내면의 인간, 또는 중간의 인간을 통하여 외적 인간 안으로 유입됨은 신비함들이다. 특히 이 구절의 경우에서 내면의 인간이 무엇인지, 더욱이 내적 인간이 무엇인지는 더욱 힘들다. 이에 대하여는 13절에서 살핀 정도의 범주를 벗어나기는 힘들 것 같다. 여기서는 유입의 본성이 무엇인지 만을 간략히 살핀다.
모든 이 안에 있는 내적 인간은 주님만에 속한다; 그 이유가 거기에 주님께서 유아 때로부터 인간에게 선물한 선들과 진리들을 저장하시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들을 통하여 그분은 내면, 또는 합리적 인간 안으로, 그 다음 외면의 인간으로까지 흘러드신다; 이 방법 안에서 인간에게 생각하는 것이 주어지고 인간이 되어진다. 그러나 내적 인간으로부터 내면, 또는 중간의 인간 안으로, 그리고 외면의 인간 안으로의 유입은 두 겹이다; 이것은 천적인 것들을 수단으로, 또는 영적인 것들을 수단으로 이다. 이를 달리 말하면, 선들을 수단으로, 진리들을 수단으로 이다. 천적인 것들, 또는 선들을 수단으로 흘러드는 것은 거듭나는 사람들과 더불어, 즉 지각이든, 또는 양심이든 선물되어져 온 이들의 경우이다. 고로 이것은 지각, 또는 양심을 수단으로 흘러든다. 그 이유는 천적인 것들을 수단으로 하는 유입은 주님을 사랑함과 이웃을 향한 선행 안에 있는 이들 외에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적인 것들, 또는 진리들을 수단으로 주님께서는 모두 각각의 사람에게 흘러드신다; 그리고 이 유입이 없으면, 인간은 생각할 수 없고, 말할 수도 없다. 그런데 인간이 선들과 진리들을 남용, 왜곡할 때, 그리고 천적, 영적인 것들을 무관심, 돌보지 않을 때, 유입을 위한 길은 닫힌다; 그럼에도 영적인 것, 또는 진리들의 유입은 있다. 이것은 인간 당사자를 위해 계속적으로 열려있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내면, 또는 중간의 본성, 즉 합리적 인간의 본성이 무엇인지 알런지 모른다.
내면, 또는 중간의 인간 안에 있는 내적 인간이 여기서 “아브람”에 의해 의미되어지고 있다. 천적인 것들, 또는 선들이 내적 인간으로부터 내면의 인간 안으로 흘러들 때, 내적 인간은 내면, 또는 중간의 인간을 자체의 것으로 흡수해 버린다 (사유한다), 그리고 그것을 자기 자신으로 만든다; 그러나 내면, 또는 중간의 인간은 여전히 내적 인간으로부터 구분되어 있다. 이는 외면의 인간에서의 경우도 같아서, 내적 인간이 내면의 인간을 거처 외면의 인간을 사유하고, 그것을 자신으로 만든다. 그럼에도 외적 인간은 내적 인간과 구분되어 있다. 지금 이 구절의 경우, 내적 인간이 내면, 또는 중간의 인간 안에서 외적 인간의 상태가 어떠한지를, 즉 그것은 포로화되었다는 것, 즉 순수하지 않은 것, 외견상으로만 선과 진리인 것이 외적 인간을 소유해 버렸다는 것을 지각했다, 이로부터 내적 인간은 많은 적들과 싸운다, 그 다음 안으로 흘러든다, 그리고 모든 것을 질서로 되돌려 놓는다, 그리고 외적 인간을 감염시킨 것들로부터 자유하게 한다, 고로 외적 인간을 순수해지게 한다, 말하자면 외적 인간의 선과 진리는 외견상으로만 선과 진리인 것에서 순수한 선과 진리가 되어 내적, 또는 신성한 인간과 결합된다. 이 결합은 앞서 말한 그대로 내면의 인간, 또는 중간의 인간을 수단으로 한다.
이런 점에서의 경우, 주님은 여느 인간 같지는 않으셨다; 그 이유가 천적인 것들, 또는 선 측면에서의 그분의 내면의 인간은 신성이셨고, 출생 때로부터 내적 인간과 인접되어 있으셨기 때문이다. 그분의 내적 인간, 그분의 내면의 인간과 함께 여호와 그분 자신, 그분의 아버지이셨다. 그러나 이런 점에서의 경우, 주님은 여느 인간 같으셨다. 즉 영적인 것, 또는 진리들 측면에서의 그분의 내면의 인간은 그분의 외적 인간에 인접되어 있으셨는 바, 인간이셨다; 그러나 이것 역시 그분 자신의 힘으로 시험과의 계속적인 전투와 승리하심으로 신성, 즉 여호와로 만드셨다. 외적 인간이 “롯”이라 불리운다; 이전 상태(12절)에서는 이것이 “아브람의 형제의 아들”이라 불리운다; 그 이유는 외견상의 선과 진리에 의해 소유되어 있을 경우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절에서는 “아브람의 형제”라고 불리는데, 그 이유는 순수한 선과 진리에 의해 소유되는 경우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자기 집에서 태어난 훈련된 사람들을 재촉했다. 이는 노예 상태의 멍에로부터 지금 해방되어지는 외적 인간에 있는 이런 선들과 진리들을 의미하는데, 이는 “훈련된 사람”의 의미로부터, 이들이 “아브람의 집에서 태어난” 이들이다로부터 분명해진다. 아브람의 “훈련 중인 사람들”, 또는 “수련자”는 내적 의미에서 내면의 인간과 결합될 수 있는 외적 인간의 선들이다; “집에서 태어난” 이들은 내적 의미에서 내면의 인간에 어울리는 똑같은 선들과 진리들이다. 그러나 이렇게 말해질 수 있는 것 이상의 신비함들을 함유하고 있다. 즉 세부적으로 나누어 말하면, 시험의 전투들 이후, 어떻게 외견으로만 선인 것이 순수한 선들이 되어가는지, 그리고 이 선들이 내면의, 또는 중간의 선과 결합될 수 있는지, 그리고 이 결합을 통하여 내적 인간과도 결합하는지, 그리하여 마찬가지 방식에서 신성이 되는지 등등이다. 그 이유가 주님께서는 그분의 인간 본질을 그분의 신성 본질에 점차로 합해 가셨고, 이 수단은 시험들의 전투와 승리이었는데, 이는 이미 살폈다. 순수하게 만든 이 선들이 아브람의 “훈련된 사람들”, 또는 수련자(novitiate)들이라 불리우고 있다. 그 이유는 이 선들은 실로 새롭게 훈련된 것들, 따라서 신참내기들 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들은 그분 자신의 힘에 의해 획득되었기 때문에, 그것들은 “자기 집에서 태어난”이라고 불리운다.

삼백 십팔 명. 이는 그것들의 품질, 즉 그것들은 전투에 관한 거룩한 것들이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는 숫자 “18”과 “300”의 의미 안에 포함되어 있다. 이 숫자들은 3과 6으로 구성되고 있다. “3”은 거룩한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6”은 전투를 의미한다. 아브람이 재촉했다는 것은 역사적 진실이다; 그러나 여전히 그것도 표현적이고, 이 표현성은 모세의 다섯 책에서, 여호수아, 사사기, 사무엘, 열왕기, 다니엘, 요나서에서도 마찬가지로 있는데, 거기서 숫자들은 신비를 포함하고 있다; 그 이유가 이런 본성을 지니지 않고 쓰여진 말씀은 없기 때문, 그렇지 않으면 말씀일 리 없고, 그렇지 않으면 아브람이 318명을 재촉했다 든가; 그리고 이들이 훈련되었다 든가, 자기 집에서 태어났다 든가 하는 언급은 결코 없었을 것이다; 이 외에도 이 장에서 말해지는 많은 세부적인 것도 그러하다.

그리고 단까지 추격했다. 이는 순수해지는 상태를 의미하는데, 이는 내적 의미에서 연결되는 것으로부터 분명해진다. 여기서 “적들을 추격하는” 것은 선들과 진리들이다로만 나타나게 한 원인인 선들과 진리들과 더불어 있는 악들과 거짓들을 몰아내는 것, 그리하여 그것들을 자유하게 하고 순수해지게 하는 것이다. “단까지”란 가나안의 가장 먼 한계선을 의미하는데, 이는 사무엘서로부터도 알게 된다:
사울의 가문으로부터 왕국을 이동하는 것, 그리고 단으로부터 브엘세바까지 이스라엘과 유 다 위에 다윗의 왕좌를 앉히는 것 (삼하. 3:10).
다시:
집합함에서, 모든 이스라엘이 단으로부터 브엘세바까지 함께 모을 것이다
(삼하. 24:2, 15).
다시:
다윗이 요압에게 말했다, 지금 이스라엘의 모든 지파들에게 가라, 단으로부터 브엘세바까지 (삼하. 4:25).
열왕기서에서:
유다와 이스라엘은 안전하게 거주했다, 모두 각각의 사람이 자기 포도나무와 무화과 나무 아래, 단으로부터 브엘세바까지 (왕 상. 4:25).
위의 구절들로부터 보면, 단은 가나안의 가장 먼 경계선이었음이 분명하다. 단쪽으로 외적 인간의 선들과 진리들을 (악들과 거짓들을) 퍼트린 적들을 추격했다. 그러나 단이 가나안의 가장 먼 위치에 해당되지만, 그래도 가나안의 지역 내에 해당되므로 그들이 거기 머물지 않도록 다음 절을 보면, 그들은 더 멀리 “다마스커스 왼쪽에 있는 호바까지” 몰아내졌다. 이런 과정에서 순수해짐이 결과되었다. 전에 말했 듯 거룩한 의미에서 가나안의 토지는 주님의 왕국, 고로 사랑의 천적 (평면), 또는 선을 의미한다; 첫째로, 주님에 있는 선을 의미한다.

15절. 그래서 그는 그들과 맞서려고 밤을 틈타 그와 그의 종들을 나누었다, 그리고 그들을 쳐부셨는데, 그들을 다메섹의 왼쪽에 있는 호바까지 추격했다.

그는 그들과 맞서려고 밤 중에 자신을 나누었다. 이는 외견상의 선과 진리가 있던 그늘을 의미하는데, 이는 “밤”이 그늘의 상태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늘의 상태란 선과 진리가 외견상에서만 인지, 순수한 측면에서 인지를 모를 때를 두고 하는 말이다. 누군가가 외견상의 선과 진리 안에 있을 때, 그는 그것이 순수한 선과 진리라고 상상한다; 외견 상의 선과 진리 안에 있는 악과 거짓이 그늘의 원인이고, 이것들이 그것들을 순수한 듯 나타나게 한다. 무지함에 있는 이들은 자기들이 행하는 선이 자기 자신이라고 밖에 더 달리 알지 못한다. 하여 자기들이 행한 선은 자신의 본래가 선함이었던 탓이라고, 그래서 선행의 공로는 자기라고 간주한다. 이럴 경우, 비록 선으로 나타나지만 그것들이 선이 아니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그리고 그들이 선함들을 놓아두려는 자기 자신과 자아 공로는 희미하고 어둡게 하는 악들과 거짓들이다. 이 외에도 많은 다른 경우의 예도 있다.
그것들 안에 감추여 놓인 악과 거짓의 종류와 분량은 육체의 삶에서 잘 알기 힘들지만, 다른 삶에서는 명백한 빛에서 보이도록 표출되어진다. 그런데 만일 이것이 확증되지 않은 무지로부터 이다면, 경우는 달라진다, 그 이유는 이 경우라면, 악들과 거짓들은 쉽게 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신들 스스로의 힘으로 선을 행할 수 있고, 악에 저항할 수 있고, 구원받을 수 있는 공로는 자신에게 있다고 하는 신조를 굳힌 이들의 경우, 이 신조는 그들에 달라붙어 있어, 선을 악이다고, 진리를 거짓이다고 하게 만드는 원인이 된다. 그러나 인간이 자신으로부터 한다고 여기며 선을 행하는 것은 여전히 질서에 위배되는 것은 아니다. 그 이유가 선을 행함은 자신 스스로 행할 수 없다는 가르침에 따르겠다 하여 주님의 암시가 있을 때까지 마냥 주저앉아 있는 소극적 자세가 오히려 주님의 명령에 위배될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선을 행할 때 자신으로부터 하지만, 그후 자기가 행한 선은 자기 안의 주님이 행하신 것임을 생각하고 인정하고 믿는 것이 뒤따른다면 더할 나위 없다.
만일 위와 같이 소극적 태도로 생각하는 가운데, 그의 노력이 뒤쳐진다면, 주님은 우리 안에서 일하실 수 없다. 주님은 능력이 주입되어질 수 있는 모든 것을 자신으로부터 박탈해 버린 자 안으로 흘러드실 수 없다. 마치 자신에게 계시가 내려지지 않으면 어떤 것도 기꺼이 배우고 싶어하지 않는 이들도 위의 범주일 것이다. 또는 말 들이 자신에게 놓여지지 않으면 아무 것도 가르치지 않는 이들도 위의 범주일 것이다. 또는 할 마음이 내키지 않는 경우 어떤 것도 시도하지 않는 이들도 위의 범주일 것이다. 만일 이런 것들이 행동되어 진다면, 그는 생명 없는 것 같이 있음에서 여전히 더 분노할 것이다; 인간 안에서 주님에 의해 생명 있는 것이 마치 인간에게는 자신으로부터 생명 있는 것인 냥 나타나는 것이다. 그런고로 영원한 진리는 인간이 자신으로부터 사는 것이 아니다는 것, 그러나 만일 그가 자신으로부터 사는 것이 아니라고 나타난다면, 그는 필시 살 수 없었을 것이다는 것도 진리이다는 말이다.

그와 그의 종들. 이것이 합리적 인간을, 그리고 순종한 외적 인간에 있는 것들을 의미하는데, 이는 “그”, 즉 아브람의 의미가 내면의 인간이다로부터; 그리고 “종들”의 의미가 순종하는 것들이다로부터 분명해진다. 자유해지고 옹호되기 전의 외적 인간에 있는 모든 것들이 “종들”이라 불리운다. 그 이유가 그들은 내면의 인간에 순종으로 보답하기만 할 뿐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외면의 인간 안에는 애착들이 있고,기억 속의 지식들이 있다. 전자는 내면의 인간의 선들로부터 있다, 그리고 후자는 내면의 인간의 진리들로부터 있다. 이것들이 내면의 인간에 일치하도록 행동을 만들 때, 그것들은 섬기고 순종한다고 말해진다; 그러므로 여기서 “종들”에 의해 순종한 외적 인간에 있는 것들이 의미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을 쳐부셨다. 이는 원수를 갚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는 문맥의 연결로부터 알아지는 바, 설명은 필요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을 다마스커스의 왼쪽에 있는 호바까지 추격했다. 이는 이것이 확장된 범위를 의미하는데, 이는 “다마스커스의 왼쪽에 있는 호바”의 의미로부터 분명해진다. 호바가 어디에 위치했는지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말씀에서 더 이상의 언급이 없다. 그러나 다마스커스는 시리아의 수도였다. 이는 삼하 8:5, 6; 이. 7:8로부터 알게 된다; 그리고 이것은 창. 10:22에서 말해진 시리아의 의미와 거의 비슷하다. 단을 넘어 가나안의 가장 먼 경계선이 다마스커스이다로 묘사되어진다. 아모스서에서:
너희는 너의 왕 식굿, 그리고 너의 (우)상 기윤; 너희 자신을 위해 만든 네 신들의 별을 떠 멜 것이다, 그리고 나는 다마스커스 넘어 떠나 가게 만들 것이다 (암. 5:26, 27).
북쪽 방향에서 거룩한 토지의 경계, 또는 주님의 왕국 역시 “다마스커스의 경계”라 불리운다 (겔. 47:16-18; 48:1 참조). 여기서 그들이 쳐부숨을 당한 곳, 호바까지 내쫓긴 곳은 외견상의 선들과 진리들이 순수해진 범위를 의미한다. 그러나 외견상의 선들과 진리들의 특성이 무엇인지, 그리고 어떤 수단이 순수해지는데 사용되었는지를 알지 못하면, 여기서 “다마스커스의 왼쪽에 있는 호바”의 의미를 알지 못한다. 따라서 알 수 있는 한계는 아마 아주 대략적인 정도에 불과할 것 같다.

16절. 그리하여 그는 모든 물질을 되찾았다, 그리고 또한 그의 형제 롯과 그의 물질, 그리고 여인들 역시, 그리고 사람들을 되찾았다.

그리고 그는 모든 물질을 되찾았다. 이는 내면의 인간이 외면의 인간에 있는 모든 것을 (내면의 인간에) 순응하는 상태로 되돌려 놓았음을 의미하는데, 이는 “모든 물질을 되돌려 놓음”의 의미로부터 알런지 모른다. 여기서의 “물질”은 그돌라오멜과 그와 더불은 왕들이 적들로부터 가져 간 것들이다. 그돌라오멜과 그와 더불은 왕들에 의해 외면의 인간의 선들과 진리들이 의미된다. 그들이 적들로부터 가져 간 물질은 소돔과 고모라의 재물과 식품인 바 악을 행하는 능력과 거짓을 생각하는 것 밖에 더 아니다. 이것은 11절에서 살핀 바 있다.
이렇기에 이 구절은 몇 마디로 설명하기에는 너무 무리일 듯 싶다. 하여 이것에 대한 관념(notion)만이라도 얻는 것으로 만족해야 할 것 같다. 시험들의 전투에 임하고 극복하는 사람은 악령들, 또는 지옥의 패거리들을 제압하는 능력을 더욱 더 자신에게 획득한다. 이렇게 계속하여 가다 보면, 결국 악령들이 감히 어떤 시험도 들이대지 못하는 경지에 이를 수 있게 된다. 승리가 획득될 때마다, 주님께서는 이 전투에 참전한 선들과 진리들을 질서 안으로 환원하신다; (전투에 참전한 선들과 진리들은 우리가 자신의 것인듯 여겼던 선과 진리인지라 순수하지는 않다. 즉 천국에 가져 갈 것들이 못되는 수준이다는 말이다) 그리고 그것들은 (승리를 통해) 순수해져 있다; 순수해진 만큼에서 사랑의 천적인 것들이 외면의 인간 안으로 은근히 심어진다, 그리고 (두 인간은) 상응하는 결과에서 있게 된다. 이상의 내용들이 본문, 모든 물질을 되찾음에 의해 의미되어져 있다.
시험의 전투 없이 외적 인간이 (내적 인간과) 상응하는 상태로 환원될 수 있다고 상상하는 누군가가 있다면, 이는 크게 잘못 알고 있는 것이다. 그 이유가 시험들은 악과 거짓들을 사라지게 하고, 대신 선과 진리가 들어와지게 하는 수단이기 때문이다. 동시에 외적 인간 속에 있는 것들은 순종하는 상태가 되는 바, 내면, 또는 합리적 인간을 섬긴다. 이를 통하여 내적 인간까지 섬기게 된다. 마지막으로 내적 인간을 통하여 주님께서 일하신다. 이런 것들이 시험들에 의해 결과된다는 것은 시험을 통해 거듭나지 않으면 알 도리가 없다. 언제, 어떻게 이런 과정이 진행되는지 인간이 알아차림 없이 주님에 의해 전권적으로 이루어지는 사항인지라 이에 대한 것은 대충의 설명도 가능하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그 이유가 이는 주님의 신성한 역사하심의 범주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한 그의 형제 롯과 그의 물질도 되찾았다. 이는 외적 인간과 그것에 속하는 모든 물질을 의미하는데, 이는 “롯”의 의미가 외적 인간이다로부터 분명해지는데 여러 번 살핀 바 있다. 외적 인간이 무엇인지 오늘날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그 이유가 육체에 속하는 것만이 외적 인간을 구성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육체에 더하여 감각의 능력들, 즉 촉각, 미각, 후각, 청각, 시각, 그리고 식욕(appetite), 기쁨(pleasure) 같은 것이 외적 인간의 범주에 속한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들은 가장 바깥쪽 인간, 즉 (순수하게) 육체적 인간일 뿐이다. 인간은 자기가 빨아들인 기억에 속하는 지식들, 그리고 사랑으로부터 있는 애착들도 외적 인간을 구성한다; 또한 영(spirit)에 잘 어울리는 감각의 능력들, 이것과 더불어 영이 즐기는 기쁨들을 모두 합쳐야 온전한 외적 인간이라 할 수 있다. 이것들이 외적, 또는 외면의 인간을 구성하는 것은 저세상의 인간들, 즉 영들로부터 분명해진다. 이 영들 역시 외적 인간, 내면의 인간, 결과적으로 내적 인간까지 가지고 있다. 신체(body)는 덮개, 또는 외피일 뿐이다. 이것은 인간이 진실로 살도록, 인간에게 속한 모든 것들이 더 빼어나지도록(순수해지도록) 하기 위하여 용해되어진다.

여인들과 사람들. 이는 선들과 진리들 모두를 의미하는데, 이는 “아내들”과 “딸”의 의미가 선이다로부터 분명해진다. 이 구절의 단어 “여인들”은 아내들과 딸들 대신 사용되어진다; “사람들”의 의미는 진리인데, 이에 대한 설명은 이미 말했다.

17절. 그리고 소돔 왕은 아브람이 그돌라오멜과 그를 따른 왕들을 쳐부수고 돌아 오자 그를 만나기 위해 왕의 계곡인 사웨 계곡에로 나왔다.
소돔 왕이 그를 만나러 갔다. 이는 악과 거짓이 자신들을 복종시켰다를 의미하는데, 이는 “소돔 왕”의 의미가 전투에 있었던 악과 거짓이다로부터; 그리고 “만나러 나감”의 의미가 자기 자신을 복종시켰다로부터 분명해진다. 소돔 왕이 여기서 거론되고 있는데, 그 이유는 악과 거짓이 스스로 복종시켰다는 사실이 여기서 시리즈에서 발생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왕에 대한 특별한 측면은 21절에서 취급된다.

아브람이 그돌라오멜과 그와 함께 한 왕들을 쳐부수고 돌아 오자…이는 외견상의 선들과 진리들을 자유하게 하고 옹호함을 의미하는데, 이는 앞의 대목들로부터, 그리고 그돌라오멜과 그와 함께한 왕들에 관한 설명으로부터 분명해진다.

왕의 계곡이라 하는 사웨 계곡에서. 이는 그때 당시 (주님의) 외적 인간의 상태를 의미하는데, 이는 “사웨 계곡”과 “왕의 계곡”의 의미로부터 알런지 모른다. “사웨 계곡”은 외적 인간의 선들을; “왕의 계곡”은 외적 인간의 진리들을 의미한다. 외적 인간은 아래 있다는 사실로부터 “계곡”이라 불리운다. 더 외적이다는 것은 더 낮다는 것과 같은 말이다. 마찬가지로 더 내적이다는 더 높다는 말이다. “왕”이 진리를 의미하는 것은 1672항에서 살폈다.

18절. 그리고 살렘 왕 멜기세덱은 빵과 포도주를 가져 왔다. 그리고 그는 가장 높은 하느님을 받드는 성직자였다.

멜기세덱. 이는 주님의 내면의 인간 속에 있는 천적인 것들을 의미하는데, 이는 “멜기세덱”의 의미로부터 분명해지는데, 이제 살핀다; 그리고 구절의 앞과 뒤의 문맥에서도 알게 된다. 내적 인간이 무엇인지, 내면의 인간이 무엇인지, 그리고 외적 인간이 무엇인지는 이미 충분히 설명했다. 또한 내적 인간은 내면의 인간을 통하여 외적 인간 안으로 흐른다는 것; 또한 내적 인간은 천적인 것을 수단으로 하든가, 또는 영적인 것을 수단으로 하여 내면의 인간으로 흐른다. 이때 거듭나는 자와 더불어, 즉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 안에서 사는 이들과 더불어서는 천적인 것들을 수단으로 한다. 그 외의 사람들과 더불어, 즉 각자의 품성이 무엇이든 모두 각각의 사람과 더불어서는 영적인 것을 수단으로 한다. 이로부터 이들에게는 천국으로부터의 빛이 있어 각자는 생각하고 말하고 인간이 되는 능력을 지닌다.
내면의 인간의 천적인 것들, 또는 이런 천적인 것들 측면에서의 주님의 내면의 인간이 “멜기세덱”이라 불리운다. 주님에 있는 이런 천적인 것들은 여호와 자신이셨다. 시험의 전투 후 순수해질 때, 그분의 내적 인간은 신성과 여호와로 만들어졌다; 외적 인간도 마찬가지로 만들어졌다; 그러나 내면의 인간이 시험의 전투에 있을 때, 그리고 시험의 전투로 그다지 많이 순수해지지는 아니하셨을 때가 천적인 측면에서 “멜기세덱”, 즉 “거룩함과 정의로움의 왕”이라 불리우신다.
이것이 실제로 그렇다는 것이 다윗서에서 알런지 모른다. 즉 시편에서, 주님의 시험의 전투가 취급되고, 마지막에서 천적인 것 측면에서 그분의 내면이 “멜기세덱”이라 불리운다. 다윗서에서:
여호와께서 나의 주에게 말하셨다, 내가 네 적들을 네 발판으로 만들 때까지, 내 오른편에 앉으라. 여호와께서 시온으로부터 당신의 강함의 홀(주권)을 내 보내실 것이다; 당신께서는 당신의 적들의 한 가운데에서 다스리실 것이다. 당신의 백성들이 당신의 권능의 날에 기꺼 이 제물을 바칠 것이다; 거룩함의 영예에서; 아침의 자궁으로부터 당신은 당신의 출생의 이 슬을 가지신다. 당신은 맹세하셨었다, 그리고 후회 않으실 것은, “너는 내 말에 일치하는 영원한 성직자이다; [너는] 멜기세덱 [이다.]” 네 오른편에서 주께서 그분의 노염의 날에 왕들을 쳐부셨다 (시. 110:1,2, 3, 4, 5).
위 구절도 본문에서와 더불어 지옥들과 더불은 주님의 전투들이 단어 각각으로부터 취급되고 있다. 주님 자신 복음서에서 위 구절의 뜻한 바를 직접 가르치신다 (마. 22:23, 24, 25; 막. 12:36; 눅. 20:42-44 참조). “그분의 적들을 그분의 발판으로 마드시는” 것, “그분의 적들의 한 가운데에서 다스리시는” 것, “권능의 날”, “그분의 노염의 날에 왕들을 쳐부수는” 것, 등등의 말은 시험의 전투들, 그리고 승리함을 의미한다.

살렘 왕. 이는 내면, 또는 합리적인 것 측면에서의 평화의 상태를 의미하는데, 이는 “살렘”의 의미로부터 분명해진다. 원어에서 “살렘”은 “평화”, 또는 “완전함”을 뜻한다; 고로 이것은 평화의 상태, 완전함의 상태를 의미한다. 평화의 상태는 주님의 왕국의 상태이다. 이 상태에서 주님의 천적, 영적인 것들은 그것들의 아침 시각, 그리고 봄철 시기와 같이 있다. 그 이유가 평화는 매일 아침에 있는 새벽, 푸르게 만드는 한 해의 시작인 봄철과 같기 때문이다. 새벽과 봄은 감각들을 기쁨과 즐거움으로 가득해지게 하는 것을 만나게 하는 원인에 해당한다. 주님의 왕국에 있는 평화의 상태도 이와 같다. 평화의 상태에서 모든 천적인 것과 영적인 것들은 마치 그것들이 아침을 맞이해 있듯, 또는 봄철의 꽃과 그것들의 행복함 자체에 있는 웃음이다. 이와 같이 평화의 상태는 모든 것에 영향을 준다, 그 이유가 주님이 평화 자체이시기 때문이다. 이것이 다윗서에서 살렘에 의해 의미되어 있다:
유다 안에서 하느님이 알려지신다, 이스라엘 안에서 그분의 이름은 위대하시다, 살렘 안에 그분의 성막이 있다, 그리고 그분의 거처는 시온에 있다 (시. 76:1, 2).
인간이 시험의 전투들에 있을 때, 그는 주님으로부터 평화의 상태, 고로 새롭게 하심의 상태를 언제나 수여하신다. 여기서 평화의 상태가 “살렘”에 의해, 이어지는 “빵과 포도주”에 의해 의미되어진다. 이를 수단으로 천적, 영적인 것들이 의미된다. 이 상태 자체가 새롭게하심 자체이다.

빵과 포도주를 가져 왔다. “빵을 가져 오는 것”은 천적인 것, 그리고 이것들로부터 새로워지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는 “빵”의 의미가 천적인 것이다로부터 분명해진다; 그리고 “포도주”, 또는 “포도나무”와 “포도원”의 의미가 영적인 것이다로부터 분명해진다. “빵”이 천적인 것, “포도주”가 영적인 것을 의미하기에, 이 두 가지는 성찬 예식의 상징물로 만들어져 있다. 멜기세덱이 빵과 포도주를 가져오는 것 역시 비슷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 이유가 고대 교회에서 빵은 천적인 모든 것들에 대한 표현물이었고, 포도주는 영적인 모든 것들에 대한 표현물이었기 때문이다; 고로 여기서는 그것들이 주님 자신을 표현하고, 주님 자신으로부터서 천적, 영적인 모든 것이 근원이 있다를 의미한다.

그리고 그는 성직자였다. 이는 거룩한 사랑을 의미하는데, 이는 말씀에서 “성직자”의 의미로부터 분명해진다. 주님을 서술함에 두 가지 것들이 있다. 하나는 그분이 왕이시다는 것, 다른 하나는 그분이 성직자이시다는 것이다. 왕, 또는 왕권은 진리 측면에서의 거룩함(거룩한 진리)을, 성직자, 또는 성직 직분은 선 측면에서의 거룩함(거룩한 자비심)을 의미한다; 전자는 신성한 영적 (평면)이고 후자는 신성한 천적 (평면)이다. 왕으로서의 주님은 신성한 진리로부터 우주에 있는 모든 것, 그리고 각각을 통치하신다; 그리고 성직자로서의 주님은 신성한 선으로부터 그렇게 통치하신다. 신성한 진리는 그분의 보편적 왕국의 참 질서, 이 질서로부터의 모든 법들은 진리들, 또는 영원한 진실(진리)이다; 신성한 선은 질서의 참 본질이다. 이 본질로부터의 모든 것들은 자비로부터 있다. 이 두 가지가 주님에 관해 서술한다. 만일 신성한 진리 만이 그분의 것이었다면, 인간(mortal)은 구원될 수 없었을 것이다. 그 이유는 진리들은 죄짓는 모든 이를 지옥으로 정죄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성한 선, 자비 속에 있는 바, 지옥으로부터 천국으로 들어 올리신다. 이것들이 유대 교회에서 왕들과 성직자들이 표현한 의미들이다; 그리고 이와 마찬가지로 멜게세덱이 살렘 왕, 그리고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에 대한 성직자로서 표현하였다.

지극히 높은 하느님에게. 이는 여호와이신 내적 인간을 의미한데, 이는 이미 여러 번 주님의 내적 인간에 관해 말해진 바로부터, 즉 그분의 내적 인간은 여호와 자신이시다는 것으로부터 알게 된다. 그런고로 주님은 여호와 아버지와 같다는 것을 요한복음서에서 가르치신다:
나는 길이고, 진리, 그리고 생명이다: 빌립이 말한다, 우리에게 아버지를 보여 주십시오, 예 수께서 그에게 말하신다, 내가 너희와 이렇게 오랜 동안 있어 왔는데, 그럼에도 너는 나를 몰랐다는 말이냐, 빌립아? 나를 보았던 자는 아버지를 보았던 것이다; 그리고 우리에게 아 버지를 보여달라 하고 네가 말함은 어찌된 일이냐?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가 내 안에 계심을 너는 믿지 못하느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다]는 것,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시 다는 것을 믿어라 (요. 14:6, 8, 9, 10, 11).
위 구절에서 주님의 인간 본질이 “사람의 아들”이라 불리우신다. 이 본질 역시 시험들의 전투 후에 그분의 신성 본질에 하나가 되셨다. 그리하여 인간 본질도 여호와로 만드셨다; 그러므로 천국에서 그들은 주님 외에 더 다른 여호와 아버지를 모른다. 주님과 더불어 모든 것은 여호와이시다; 그분의 내적 인간, 내면의 인간 뿐만 아니라 외적 인간, 그리고 신체 자체까지 여호와이시다. 그러므로 천국에서 그분만이 육체와 더불어 일어나신 유일한 분이시다. 이는 복음서에서, 그분의 부활이 취급되는 대목에서 분명해지는데, 주님 자신께서 하신 말씀이다:
그분이 그들에게 말하셨다, 왜 너희는 당황해 하느냐? 그리고 왜 너희 심정에서 생각이 일 어 나느냐? 내 손과 내 발을 보라, 이것은 나 자신이다.: 나에게 손을 대라, 그리고 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나, 너희가 보는 바 같이 나는 가지고 있다. 그분이 이렇게 말하시는 한편, 그분은 그들에게 [그분의] 손과 [그분의] 발을 보이셨다 (눅 24:38-40).

19절. 그가 아브람에게 복을 빌었다, 그리고 말했다, 아브람은 하늘과 땅의 소유자 되시는 가장 높으신 하느님에게 복있음이로다.

그는 아브람에게 복을 빌었다. 이는 천적, 영적인 것들을 향유함을 의미하는데, “복됨, blessing”의 의미가 모든 선들을 향유함이다로부터 분명해진다. 천적, 영적 선들을 향유하는 이들은 모든 선들을 향유하는 셈이다. 그 이유는 이 두 선들로부터 모든 선들이 있기 때문이다. 이 구절에 포함되어진 것들은 주님의 인간 본질이 그분의 신성 본질과 결합되었음을 선포하고 있다; 축복 자체가 이것을 내포하고 있다.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에게 복있음이로다. 이는 주님의 내면의 인간이 그분의 내적 인간으로부터의 선을 향유함을 의미하는데, 이는 앞서와 마찬가지로 선들을 향유함이다로부터; 또한 “아브람”의 의미가 여기서는 내면, 또는 합리적 인간이다로부터 (13절 참조); 그리고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이 주님의 내적 인간이다로부터 분명해진다. “아브람”에 의해 이미 말한 그대로 내적 인간, 또는 여호와에 하나로 된 내면, 또는 합리적 인간이 의미되고, 이는 시험의 전투들과 승리함을 수단으로 이루어진다. 그 이유가 내면의 인간과 더불은 경우가 이러하기 때문이다: 내면의 인간, 이미 말한 그대로 내적 인간과 외적 인간 사이에 있어, 내적 인간이 외적 인간 안으로 흐르는 것을 가능하게 한다; 그 이유가 내면의 인간 없이 교류는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천적인 것과, 그리고 영적인 것과의 교통이 있다. 이 교통이 천적인 것들로부터 였을 때, 내면의 인간은 “멜기세덱”이라 불리우고, 영적인 것들로부터 였을 때는 “아브람 히브리인”이라 불리운다.

하늘과 땅의 소유자. 이는 내적 인간, 또는 여호와의 내면, 또는 외면의 인간과의 결합을 의미하는데, 이는 “하늘과 땅”의 의미로부터 나타난다. 인간 안에서 내면인 것은 “하늘”이라 불리우고, 외면인 것은 “땅”이라 불리운다. “하늘”이 인간 안의 내면의 것인 이유는 내면의 측면에서의 인간은 하늘의 형상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종의 작은 천국이다. 첫 순위로, 주님의 내면의 인간은 천국이다. 그 이유는 주님은 천국 안의 모든 것의 모두 되시기 때문, 고로 천국 자체이시다. 이로부터 외면의 인간은 땅이라 불리우신다. 같은 이유로 해서 예언서와 계시록에서 말하여진 “새 하늘”과 “새 땅”은 주님의 왕국, 또는 주님의 왕국의 특질을 보이는 모든 이, 또는 주님의 왕국을 자기 안에 담은 모든 이 외에 다른 뜻은 없다.
여기서,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 하늘과 땅의 소유자”는 주님 안에서 내적 인간과 내면과 외면의 인간의 결합을 의미하는 것은, 그분의 내적 인간에 관련하여 주님은 여호와 자신이셨다는 사실로부터 알런지 모른다; 그리고 내적 인간 또는 여호와께서 외적 인간을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로서 인도하고 가르치셨기 때문에, 그분의 외적 인간은 여호와와 관련하여서는 “하느님의 아들”이라 불리우시고, 어머니와 관련되어서는 “사람의 아들”이라 불리우신다. 여호와 자신인 주님의 내적 인간은 여기서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이라 불리우신다. 충분한 결합, 또는 합일이 결과되기 전일 경우, “하늘과 땅의 소유자”, 즉 내면에 있는 모든 것들과 외면에 있는 모든 것들의 소유자 라고 불리우신다; 그 이유가 이런 것들이 여기서 “하늘과 땅”에 의해 뜻해지기 때문이다.

20절. 그리고 가장 높으신 하느님에게 복있음이여, 그분이 당신의 손에 그대의 적들을 넘겨 주었다. 그리고 아브람은 그에게 모든 것의 십분의 일을 주었다.

가장 높으신 하느님에게 복있음이여. 이는 주님의 내적 인간을 의미하는데, 이는 방금 위에서 말한 내적 인간에 관한 내용으로부터 분명해진다. 고대 교회에서, 여호와는 “가장 높으신 하느님”으로 불리웠다. 그 이유는 “높이, height”가 내적인 것을 표현하고 의미했기 때문, 고로 “가장 높다‘는 가장 깊은 내적인 것을 의미하고 표현했다. 이로부터 고대 교회의 예배는 높은 장소, 산, 언덕 등에서 있어졌다. 가장 깊다는 가장 바깥쪽과 관련을 갖는데, 마치 가장 높다가 가장 낮은 것과 관련을 갖는 경우와 비슷하다. 가장 높음, 또는 가장 안쪽은 사랑의 천적 평면, 또는 사랑 자체이다. 여호와, 또는 주님의 내적 인간은 사랑의 천적 평면, 즉 사랑 자체이었다. 이 사랑에 걸맞는 특질이라면, 순수한 사랑, 즉 인류를 향한 순수한 자비밖에 없을 것이다; 이는 모든 인간을 구원하시기를 바라심, 그들이 영원히 행복하기만을 바라심과 같다. 그래서 그분이 가지신 모든 것을 우리들에게 수여하시기를 바라신다. 고로 사랑의 강력한 힘을 수단으로 순수한 자비로부터 모든 이를 천국으로 따라오게 끌어 당기신다. 이 사랑 자체가 여호와이시다.
있음(Am, Is)을 서술할 수 있는 것은 사랑밖에 없다. 이 사랑으로부터 모든 생명의 있음 자체, 즉 생명 자체가 있다; 그 이유는 여호와만이 생명의 있음, 또는 생명 자체이시기 때문이다. 마치 그분만이 사랑이시고, 모두 각각의 것들이 거기로부터 자기들의 존재와 생명을 가지는 것과 같다; 누구도 여호와로부터, 즉 주님으로부터가 아니고 자신으로부터 존재하고 살 수는 없다. 누구도 주님만으로 부터가 아니고 자신만으로 부터는 존재할 수 없고 살 수 없기에, 인간들이 자신으로부터 산다고 느끼는 것은 감각의 오류이다. 천사들은 자신들이 자신으로 부터서는 살 수 없고 주님만으로부터서만 살 수 있음을 명백하게 지각한다. 그 이유는 그들이 그분의 사랑 안에 있기 때문에 그분의 생명의 참 존재 안에서 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 천사들에게 자신들로 살고 있다는 나타남이 말로 다할 수 없는 행복과 더불어 그들에게 우선적으로 주어진다. 이것은 주님을 사랑함 안에서 있어지는 바, 이는 우리가 그분의 사랑 안에서, 즉 이웃을 향한 선행 안에서 살지 않으면 결코 가능할 수 없다.

주님이 여호와이시다는 것, 그분이 여기서 “가장 높으신 하느님”이라 불리신다는 것을 말씀에서도 명백히 분명해진다. 이사야서에서:
여호와 체바욷은 그분의 이름이시다, 그리고 나의 구속자,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 그분은 온 땅의 하느님이라 불리우신다 (이 54:5).
위에서 주님만이 구속자,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 “여호와 체바욷”, 그리고 “온 땅의 하느님”이심이 분명하다. 다시:
그로 여호와 네 구속자,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이 나는 네 하느님 여호와이다 하고 말하 셨다 (이. 48:17)
다시:
나는 너를 돕는다 하고 여호와, 네 구속자,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이 말하셨다
(이. 41:14).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 그리고 “이스라엘의 하느님”이라는 표현은 많이 등장하는 편이다. 주님이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이고 이스라엘의 하느님이신 것은 아래 구절에서도 분명하다:
그들은 이스라엘의 하느님을 보았다, 그리고 그분의 발 아래는 사파이어 돌로 작업된 듯 했다, 그리고 명료함에 관련하여서는 천국의 실체인 듯 했다 (출. 24:10)
유대 종교는 여호와로서 여타 다른 것을 인정하거나 부르지 않았다. 그 이유는 한분 하느님으로 여호와를 예배했기 때문이다. 이 종교는 주님에 초점을 맞추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의 종교 의식은 그분을 표현했고 말씀의 모든 것들은 내적 의미에서 그분을 의미했다. 이사야서를 보자:
그분은 죽음을 영원히 사라지게 하실 것이다; 그리고 주 여호비께서는 모든 얼굴로부터 눈 물을 닦으실 것이다. 그리고 그 날에 말할 것이다, 보라, 이분이 우리의 하느님이시다; 우리 는 그분을 기다렸다, 그리고 그분이 우리를 구원하실 것이다; 이분이 여호와이시다, 우리가 그분을 기다렸다; 그분의 구원하심에 크게 기뻐하고 즐거워 하자 (이. 25:8, 9).
위는 주님의 오심을 취급한다.
이사야서에서:
보라 주 여호비께서 강함 안에서 오실 것이다, 그리고 그분의 팔이 그분을 위해 통치하실 것이다. 그분은 그분의 양떼를 목자 같이 먹이실 것이다, 그분은 그분의 팔 안에 작은 어린 양들을 모으실 것이다, 그분은 그들을 그분의 팔 안에서 운반하실 것이다, 그분은 젖빨리는 것(암컷)들을 인도하실 것이다 (이 40:10, 11).
위에서 주님이 “주 여호비”라고 분명히 말해진다. 그분이 “강함에서 오실 것”, 그리고 “그분의 팔이 그를 위해 통치하실 것”은 그분이 그분 자신의 힘으로 지옥들을 정복하시는 것을 의미한다; “그분의 양떼를 먹이시는 것, 그분의 팔 안에 작은 어린 양들을 모으시는 것, 그것들을 그분의 품 안에서 운반하시는 것, 그리고 젖빨리는 것들을 인도하시는 것”은 그분의 사랑, 또는 자비를 서술한다.
다시:
고로 하늘을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말하셨다, 땅을 만들어 내고, 그것을 만든 하느님 자신, 그분이 그것을 건립하셨다, 그분은 그것을 텅비지 않게 창조하셨다, 그분은 그것을 거주하 도록 만들어 내셨다: 나는 여호와이다, 나 밖에 없다. 내가 여호와이고 나 외에 하느님이 없지 않느냐? 의로운 하느님, 그리고 구세주, 나 외에 아무도 없다. 나를 앙망하라, 땅의 모 든 끝이 구원되어진다; 그 이유가 나는 하느님이다, 그리고 아무도 있지 않다
(이. 45:18, 21, 22).
위 구절에서 주님이 한 분 여호와와 하느님이시다를 명백히 말하고 있다. “하늘을 창조하시고 땅을 만들어내신” 것은 거듭나는 것, 고로 하늘과 땅의 창조자는 거듭나게 하는 분이시다는 것은 앞에서 살핀 바로 알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은 창조자, 형성자, 그리고 제작자(조물주)라고 자주 불리우신다.
다시:
당신은 우리의 아버지 이십니다, 그 이유가 아브라함이 우리를 모르고, 이스라엘이 우리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여호와, 우리의 구속자, 당신의 이름은 예로부터 있으셨 습니다 (이. 63:16).
위에서도 주님만이 “구속자”이심을 명백히 하고 있다. 모세의 책에서:
그분의 얼굴에 주의를 기울여라, 그리고 그분의 음성을 들어라, 그분을 성나시게 말라, 그 이유가 그분은 너희의 위반을 참지 않으실 것이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내 이름이 그분의 한 가운데 있기 때문이다 (출. 23:21).
“이름”은 본질을 뜻한다. 그리고 “한 가운데”는 가장 깊음을 뜻한다.
이사야서에서:
우리에게 아이가 출생되었다, 우리에게 아들이 주어졌다; 그리고 통치함이 그분의 어깨 위 에 있을 것이다; 그분의 이름은 경이함, 상담자, 하느님, 영웅, 영원하신 아버지, 평화의 제 1인 자 라고 불리우실 것이다 (이. 9:6),
위는 주님에 관해 말해짐이 분명하다. 예레미야서에서:
보라 내가 다윗에게서 의로운 자손을 일으킬 것이다, 그는 왕으로서 통치할 것이다, 그리고 총명하게 행동할 것이다, 그리고 땅에서 공정과 정의를 행할 것이다; 그분의 날에 유다는 구원될 것이다, 이스라엘은 안전하게 거주할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그분의 이름인데, 그들 이 그분을 이로부터 부를 것이다, 즉 여호와 우리의 정의이다 (예. 23:5, 6),
위 구절은 주님을 뜻함이 분명하다. 스가랴서에서:
여호와께서 온 땅 위에서 왕일 것이다; 그 날에 한 분 여호와 (뿐)일 것이다, 그리고 그분 의 이름은 하나 (뿐일 것이다) (슥. 14:9),
주님에 관해서 말하고 있다. “이름”은 본질을 표시한다.

그분이 당신의 손에 그대의 적들을 넘겨 주었다. 이것이 승리를 뜻하는 것은 설명이 필요 없을 것이다. 인간 본질이 신성 본질과 결합함은 주님의 계속적인 시험의 전투와 승리를 수단으로 획득되고 결과되었다. 그리고 이것은 그분 자신의 힘만으로였다. 주님에 관련되는 결합과 합일의 위의 방식을 다른 방식으로 납득하는 자는 대단히 큰 실수를 하는 것이다. 이리하여 그분은 정의가 되셨다. 결합 또는 합일은 사랑의 천적 평면(천적인 사랑), 즉 사랑 자체, 여호와와 더불어 결과되어졌다. 인간이 주님과 결합함 역시 시험을 수단으로, 그리고 사랑 안에 있는 신앙을 이식함을 수단으로 결과되어진다. 신앙이 사랑 안에 이식되지 않으면, 즉 신앙 속에 있는 것들을 수단으로 신앙의 생명인 선행을 받지 않으면, 결합은 없다. 이것만이 그분의 방식을 따르는 것, 즉 주님과 결합되어지는 것인데, 이는 주님의 인간 본질이 여호와와 결합되는 방식과 같은 것이다. 이리하여 이렇게 결합된 이들은 하느님의 유일한 아들이셨던 주님으로부터 “하느님의 아들들”이라 불리운다. 하여 이들은 그분의 형상들이 된다.

그리고 아브람은 그에게 모든 것의 십분의 일을 주었다. 이는 승리로부터 파생되는 리메인스(remains)를 의미하는데, 이는 “십분의 일”이 리메인스를 의미함으로부터 분명해지는데, 이는 이미 말했었다. 즉 그것들은 사랑과 선행의 모든 상태들이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인간이 선물받은 순진과 평화의 모든 상태들이다. 이 상태들은 유아 때로부터 인간에게 주어지는데, 성년 쪽으로 갈수록 덜 주어진다. 그러나 인간이 거듭나질 때, 그는 이미 받은 리메인스 외에 새로운 리메인스, 고로 새로운 생명을 받는다. 인간이 인간이다 하는 것은 리메인스로부터, 리메인스를 수단으로 있는다. 인간으로 자기 생명에서 다른 생명의 상태 안에 은근히 심어지게 하는 것인 순진의 상태, 사랑과 선행의 상태가 없으면 인간은 인간이 아니고, 여느 들짐승만도 못해진다. 시험들의 전투들에서 획득되어지는 리메인스가 이 구절에서 뜻해진다. 이 리메인스가 아브람이 멜기세덱에게 주는 십분의 일에 의해 의미되어 있다. 이것들은 사랑의 모든 천적인 것들인데, 이것을 주님께서는 계속적인 전투와 승리를 수단으로 획득하셨고, 이를 수단으로 그분은 그분의 신성 본질에 계속적으로 하나되게 해 나가시어, 결국 그분의 인간 본질이 사랑, 또는 생명의 있음, 즉 여호와나 마찬가지 수준에 이르게 하셨다.

21절. 그리고 소돔 왕이 아브람에게 말했다, 나에게 혼을 주시오, 그리고 물질은 당신에게 돌리시오.

소돔 왕이 말했다. 이는 정복된 악과 거짓을 의미하는데, 이는 소돔의 의미가 악과 거짓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소돔에 대한 의미는 이 장 17절에서 살폈다. 즉 소돔 왕이 아브람을 마중나가는 것, 이것이 악과 거짓이 자신을 복종케하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이것에 본문의 것이 첨가되어진다. 즉 그것들의 간청이다.
악과 거짓들이 정복되는 것, 또는 악들과 거짓들이 시험의 전투에 의해 정복되는 것, 그러므로 해서 선들과 진리들이 입혀지는 것은 악들과 거짓들이 사라졌다는 사실로부터 온다; 그리고 이것들이 사라져버릴 때, 선들과 진리들이 그것들의 자리를 차지한다; 그리고 이것들은 이 후에 더욱 더 확증되어지는 바 강건해진다. 악령들을 수단으로 악들과 거짓들이 흥분되어진다; 이런 흥분되어짐이 없으면, 인간은 이것들이 악들과 거짓들인지도 알지 못한다. 흥분되어져야 그것들의 모습을 알아챌 수 있다. 그리고 시험 속의 전투가 길게 지속될 수록 악들과 거짓들은 더욱 명백히 드러나고 결국 혐오함으로 그것들을 바라 볼 때까지 이다.
그리고 악들과 거짓들이 사라질 때 선과 진리들이 대신 들어 앉는데, 악들과 거짓들을 혐오함이 더 커져가는 만큼, 더 많은 선들과 진리들을 사랑함이 주님에 의해 은근히 주입되어진다. 그리고 더 나아가, 악들과 거짓들에 대한 혐오가 증대할 수록, 악령들의 접근은 줄어 든다. 그 이유는 악령들의 생명이 존재하는 악들과 거짓들을 혐오하기에 이를 악령들이 버텨낼 수 없기 때문이다. 때로는 악령들의 처음 접근에서도 공포가 엄습되어진다. 선과 진리에 대한 사랑이 더해 질 수록 천사들은 그 사람과 함께 있기를 더 사랑하고, 천사들과 더불어 천국 역시 더욱 함께 한다. 그 이유가 사랑의 선들과 신앙의 진리들 안에 있을 때 그들은 그들 자신의 생명 안에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브람에게. 이는 주님의 합리성을 의미하는데, 이는 아브람의 표현으로부터 분명해진다. 12, 13장에 걸쳐 아브람은 주님, 또는 그분의 어린 시절 주님의 상태를 표현했다; 14장에서 그는 주님의 합리성을 표현한다. 이것이 13절에서 “아브람 히브리인”이라 불리우고 있다. 이 구절의 아브람도 같은 것을 표현한다; 그 이유가 이 장에서 아브람 히브리인 외의 다른 아브람은 없기 때문이다. 그분의 내적 인간에 인접된 주님의 영적 평면이 멜기세덱에 의해 표현되고 의미된다.

나에게 혼을 주시오, 그리고 물질은 당신에게 돌리시오. 이는 그분이 그들에게 생명을 주셔야 할 것이라는 것, 자기들은 다른 것들에는 관심을 두지 않을 것임을 의미하는데, 이는 “혼”의 의미가 생명이다로부터 분명해진다. 그리고 “물질”의 의미는 생명에 어울리지 않는 것들이다로부터도 분명해지는데, 이는 지금 살핀다.
악령이 가지는 생명, 악령들이 극도로 사랑하는 생명은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물질주의)으로 부터의 탐욕들 (강한 충동들, urges)의 생명이다. 이 생명으로부터 증오함, 복수함, 잔인함들의 생명이 있다; 그리고 그들은 이런 생명 외의 다른 생명에는 기쁨이 있을 수 없다고 상상한다. 그것들은 사람들 같이 있다. 그 이유가 그것들이 사람들 이었었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그것들이 사람이었을 때 지닌 생명으로부터 이 신조를 유지한다. 즉 그것들은 이런 탐욕들의 기쁨들 안에 모든 생명을 놓는 것이다. 그것들은 이런 탐욕들 외의 다른 생명은 알지도 못하고 있다, 그래서 그것을 잃을 때, 그것들은 깡그리 죽고 만다. 그러나 이들이 사랑하는 생명의 본성이 무엇인지는 다른 삶에서 이런 특성에 속한 것들로부터 분명해진다. 거기서 이것들은 악취나고 배설물 냄새가 나는 생명으로 변하여진다. 경이롭다 말해지는 것은, 그것들은 최고로 즐거울 수 있는 것으로 코를 찌르는 냄새를 지각한다는 것이다.
그것들은 막. 5:7-13절에서, 주님이 광기들린 자로부터 나오라고 했을 때 자기들 목숨이 두려워 돼지떼 속으로 가게 해달라고 간청한 악마들 같이 행동한다. 이 악마들은 육체의 삶 동안 심보가 더러운 수전노들 같이 살았던 자들이었다. 이는 그들이 다른 삶에서 자기의 생활을 돼지들 사이에서 보내는 사실로부터 분명해진다. 돼지의 생명은 탐욕(greed)과 상응한다. 이로부터 그들에게 기쁨이 있다.

22절. 그리고 아브람이 소돔 왕에게 말했다, 나는 하늘과 땅의 소유자이신 가장 높으신 여호와께 내 손을 들었다.

아브람이 소돔 왕에게 말했다. 이는 응답을 의미하는데, 설명이 필요 없을 것이다.

나는 내 손을 여호와에게 들어 올렸다. 이는 주님 안에서의 마음(mind)의 상태를 의미하는데, 이는 “손을 들어 올림”의 의미로부터 분명해진다. 여호와에게 손을 들어 올림은 마음의 애착에 상응하는 육체의 동작이다. 이는 누구나 아는 동작이다. 글자 의미에서 내면인 것들, 또는 마음 속의 것들이 상응하는 외적인 것들로부터 표현되어져 있다; 그러나 내적 의미에서 뜻해진 내적인 것들이 있다; 여기서 그러므로 손을 들어 올림은 마음, 또는 마음 속의 애착을 뜻한다.
주님께서 시험의 상태에 있으신 한, 그분은 여호와와 이야기하시되 또다른 사람과 이야기하시 듯 하셨다; 그러나 그분의 인간 본질이 그분의 신성 본질과 하나를 이루시는 만큼에서 그분은 여호와와 이야기하시되 여호와 자신으로부터 하는 것 같이 하셨다; 이는 복음서의 많은 구절로부터 분명해진다, 또한 예언서와 시편에서도 가능하다. 이 원인은 어머니로부터의 유전성에 관련해 앞서 말해진 바로부터도 분명해진다. 이 유전성이 남아 있는 한, 그분은 여호와로부터 아니 계신 듯 느끼셨다; 그러나 이 유전성이 근절되면서 그분은 여호와와 더불어 현존하셨고, 여호와 자신이셨다.
이것은 주님이 천사들과 결합됨을 가지고 예증해 볼 수 있을런지 모른다. 때때로 천사들은 자신으로부터 말하지 않고, 주님으로부터 말한다. 그때 그는 자기가 주님이다는 것밖에 아는 것이 없다; 이때 그의 외적 측면은 무활동 상태에 있다. 그의 외적 측면이 활동적일 경우는 이와 다르다. 그 이유인 즉, 천사의 내적 인간은 주님의 소유이기 때문이다; 그렇다해도 그들의 자기 자신의 방해가 없는 정도 만큼에서만 주님의 소유이다. 이는 지상 때의 주님의 경우도 그러하셨다, 그러나 (인간의 경우와 달리) 주님 안에서 여호와와의 충분한 결합, 또는 영원한 결합이 있으셨던 고로, 그분의 인간 본질 자체도 여호와이시다.

하늘과 땅의 소유자. 이는 결합을 의미하는데, 이는 19절에서 살폈다.

23절. 나는 실로부터 신발의 끈에 이르기까지 당신의 것에는 관심을 두지 않을 것이다, 그 이유는 나로 인해 아브람이 부자가 되었다고 당신이 말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신의 실로부터 끈에 이르기까지. 이는 불결한 모든 자연적, 육체적인 것들을 의미하는데, 이는 “신의 끈”의 의미로부터 분명해진다. 말씀에서 발바닥과 뒤꿈치는 최말단의 자연성을 의미한다. 신은 발바닥과 뒤꿈치를 덮어주는 물건이다; 그러므로 신은 자연적인 것 중에서도 더 바깥쪽의 것, 즉 육체적인 것 자체를 의미한다. “신”의 의미는 신을 신은 사람, 즉 주제에 따라 있어진다. 선 측면을 서술할 경우, 신은 좋은 의미에서; 악 측면을 서술할 경우, 나쁜 의미에서 의미를 지닌다; 여기서의 경우, 소돔 왕의 물질을 취급하는 바, 이 왕은 악과 거짓을 의미하는 바, “신의 끈”은 불결한 자연적, 육체적인 것을 의미한다. “신의 실”은 거짓을; “신의 끈”은 악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것들은 모든 것 중에서도 가장 가치 없는 것을 의미하는데, 그 이유는 단어 자체가 아주 작은(하찮은) 것을 표현하기 위해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것이 “신”에 의해 의미되는 것은 말씀의 다른 구절에서도 확인된다; 여호와께서 (가시)덤불 한 가운데에서 모세에게 나타나셨을 때, 모세에게 말하셨다:
이쪽으로 가까이 오지 마라; 네 발에서 네 신을 벗으라, 그 이유가 네가 서있는 곳은 거룩 한 지면이기 때문이다 (출. 3:5).
위와 마찬가지로 여호와의 군대의 제 1인자가 여호수아에게 말하였다:
네 발에서 네 신을 벗으라; 그 이유는 네가 서있는 장소는 거룩함이기 때문이다
(여. 5:15).
위 두 인용 구절에서 모든 이도 알 수 있는 것은, 만일 자신 안에 거룩함이 있다면, (내) 신이 (자신 안의) 거룩함을 손상시키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본문에서의 신은 결별할 필요가 있는 최말단의 자연적, 육체적인 것을 표현하려는 이유 때문에 말해졌다.
신이 불결한 자연적, 육체적인 것이다는 것은 다윗서에서도 분명해진다.
모압은 씻는 나의 항아리이다, 에돔 위에 나는 내 신을 던질 것이다 (시. 60:8).
제자들에게 하신 주님의 명령도 비슷한 것을 포함한다:
너희를 영접하지 않는 누구든지, 너의 말들을 듣지 않는 누구든지, 네가 그 집, 또는 그 성 을 나갈 때, 네 발의 먼지를 털어 내라 (마. 10:14; 막. 6:11; 눅. 9:5);
위 구절의 “발의 먼지”는 본문의 “신”과 같은 의미, 즉 악과 거짓으로부터 불결함이다. 그 이유는 발의 발바닥은 최말단의 자연성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제자들로 이것을 행하라고 하신 이유는 그때 당시 제자들은 표현성에 몰두되어 있었다. 즉, 그들은 이 표현성 안에, 천국의 비밀이 벗은(naked) 진리들 안에 있기보다는 오히려 표현(껍데기)에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몸과 옷의 관계에서 벗은 진리인 몸보다는 몸을 보호하는 옷을 더 중요하게 취급했다는 말이다.)
“신”이 최말단의 자연성을 의미했기 때문에, 신을 벗음, 또는 신을 풀음은 누군가가 자연의 최말단적인 것들을 제거하는 것을 의미했다; 형제간의 의무를 기꺼이 이행하지 않으려는 경우를 두고 모세의 책에서:
만일 어떤 사람이 남편의 형제의 의무를 기꺼이 완수하지 않으려 한다면, 그때 그의 형제 의 아내는 원로들의 눈에서 그 사람에게 올 것이다. 그리고 그의 신을 그의 발에서 벗길 것이다, 그리고 그의 얼굴에 침을 밷는다; 그리고 그녀는 대답해 말할 것이다, 자기 형제의 가문을 이어주지 않는 사람은 이런 대우를 받을 것이다. 그리고 그의 이름은 이스라엘에서, 자기 신을 벗기운 자의 집이라 불리울 것이다 (신. 25:5-10);
이는 모든 자연적 선행이 결핍된 것을 뜻한다.
“신”이 좋은 의미에서 최말단의 자연성을 의미한다는 것은 말씀으로부터 분명해진다; 아셀에 관하여 모세의 책에서:
아셀은 그의 아들들 때문에 복있다. 그를 형제들이 받아들일 수 있게 하고, 기름에 그의 발 을 담그게 하라; 쇠와 놋쇠가 그의 신일 것이다 (신. 33:24, 25);
위에서 “신”은 최말단의 자연성을 표시한다; “쇠 신”은 자연적인 진리을, “놋쇠 신”은 자연적 선이다. 그리고 “신”이 최말단의 자연적, 육체적인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지극히 작은 것, 가장 가치 없는 것의 상징물이 되었다; 그 이유는 최말단의 자연적, 육체적인 것은 인간에게 있는 모든 것 중에서 가장 가치가 적은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세례 요한이 말했을 때 뜻해졌다:
나보다 더 능력 있으신 분이 오신다, 나는 그분의 신의 끈을 풀어드릴 만한 가치도 없다 (눅. 3:16; 막. 1:7; 요. 1:27).

나는 당신의 것은 무엇이든 가져 가지 않을 것이다. 이는 천적인 사랑 안에 어떤 종류의 것도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는 아브람이 소돔 왕으로부터서는 아무 것도 가져 가지 않는다고 말해진 사실로부터 알런지 모른다. 아브람이 주님을 표현했고, 지금은 승리한 주님을 표현했다, 그리고 그분 자신에게 승리를 수단으로 획득하신 천국 사랑 속에 있는 것들을 표현했다; 그리고 소돔의 왕은 악과 거짓을 표현했다, 이로부터 승리자로서의 주님 안에, 고로 천적 사랑 안에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이런 사항들이 내적 의미에서 뜻해지는 것은 다른 삶에서 어떻게 이런 경우가 있는지를 말하지 않으면 분명하게 만들 수 없다. 악들과 지옥의 영들 사이에서는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이 최고의 자리에서 지배한다. 그런고로 그들은 지기들이 우주의 하느님들이라고 생각하고, 자기들은 많은 것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들이 정복당했을 때, 그래서 자기들은 어떤 것도 전혀 할 수 없다고 지각했다 해도 여전히 권력과 통치의 관념은 남아있다; 그리고 그들은 자기들이 주님의 권능과 통치에 많은 것을 기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그들은 선한 영들과 함께 통치하려고, 그들은 선한 영들에게 자기들의 용역을 제공한다. 그러나 그들이 어떤 것을 성취하는데 사용할 수 있는 유일한 자원은 악과 거짓 뿐이다. 이에 반해, 주님 안에서, 또는 천적 사랑 안에서 어떤 것을 성취하는데 사용되는 것은 선과 진리 뿐이다. 그러므로 주님 안에는 소돔 왕이 표현하는 것 같은 종류는 없다는 것, 즉 주님은 악과 거짓으로 부터서는 어떤 힘도 가지지 않는다고 대답되는 것이다.
악과 거짓으로부터 통치함은 선과 진리로부터 통치함에 정반대이다. 악과 거짓으로부터 통치함은 모든 것을 노예로 만들기를 바란다; 선과 진리로부터의 통치는 모든 이를 자유하게 한다; 악과 거짓으로부터의 통치는 모든 것을 파괴함에 있다; 그러나 선과 진리로부터의 통치는 모든 것을 구하려는데 있다. 이로부터 분명한 바, 악과 거짓으로부터의 통치는 악마 속에 있고; 선과 진리로 부터의 통치는 주님 속에 있다. 통치의 이런 두 종류가 반대인 것은 마. 12:24-30의 말씀에서; 또한 아무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 라고 말하신 마. 6:24와 눅. 16:13으로 부터도 확인된다.

나로 말미암아 아브람은 부자가 되었다 하고 당신이 말하지 않도록. 이는 주님께서 이런 것들로 부터서는 어떤 강하심도 파생되게 하시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는 “부자가 됨”의 의미가 능력과 강함을 획득하는 것이다로부터 알런지 모른다. 이런 것들이 어떠한 지는 바로 위의 설명으로 충분하리라 생각된다.

24절. 젊은이들이 먹은 것만은 떼어 놓겠다. 그리고 나와 함께 갔던 사람들, 아넬과 에스골과 마므레의 몫은 떼어 놓아 그들의 몫은 차지하게 하겠다.

젊은이들이 먹은 것만은 떼어 놓겠다. 이는 선한 영들을 의미하는데, 문맥의 전과 후로부터 분명해진다. 앞의 13절에서는 마므레, 에스골, 아넬이 아브람과 동맹 관계에 있다는 것이 언급되어 있는데, 이는 주님의 외적 인간 측면에서의 그분의 합리적 인간의 상태가 의미되어져 있다. 이는 그분의 외적 인간의 선과 진리의 상태에 관련되고 있다; 그런고로 그들에 의해서는 주님께서 전투하실 때 그분과 더불어 있었던 천사들이 의미되고 있다. 이는 앞 절에서 설명되었다. 이와 같은 것이 이어지는 문맥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여기서 아브람과 함께 갔던 이들이 “젊은이, lad”. 또는 “아이들, children”이라고 불리운다. 이들에 의해서는 선한 영들밖에 더 다른 의미는 있을 수가 없다.; 그러나 젊은이 뒤에 곧이어 말해지는 “사람들”에 의해서는 천사들이 뜻해진다. 주님이 지옥들과 싸우셨을 때 그분과 더불어 천사들이 있었다는 것은 말씀으로부터 분명해진다; 또한 그분이 시험의 전투들에 있으셨을 때, 천사들이 현존해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 이 천사들에게 주님께서 그분의 권능으로부터 능력을 주셨다는 것, 마치 그분과 더불어 싸우기 위해 능력이 주어졌다는 것도 조금 더 깊이 생각하면 납득하는데 별 무리가 없을 것이다. 어쨌든 천사가 지니는 모든 능력은 주님으로부터 이다.
천사들이 악에 맞서 싸우는 것에 대하여는 자주 말했다. 이 천사들은 인간을 보호하고 지옥의 영들에 의해 위협되는 악을 비키게 한다; 요약컨대 이 천사들의 모든 힘은 주님으로부터 이다. 선한(good) 영들 역시 천사들이기는 하나 보다 수준이 낮은 편이다. 그 이유가 그들은 첫 번째(1층) 천국에 있기 때문이다; 천사같은(angelic) 영들은 두 번째(2층) 천국에 있다; 천사들이라 불리우는 영들은 세 번째(3층) 천국에 있다. 선한 영들이 천사같은 영들에 종속되고, 천사같은 영들은 천사들에게 종속되는 질서가 다른 삶에 있는 통치의 형태이다. 이리하여 그들 모두는 단 한 개의 천사들의 공동체를 만들어 낸다. 선한 영들과 천사같은 영들이 본문에서 “젊은이”라 불리고, 실제의 천사들(진짜 천사들)은 “사람들”로 불리우고 있다.

그리고 나와 함께 갔던 사람들의 몫. 이는 천사들을 의미하는데, 위에서 살핀 바와 같다. 천사들이 인간들에게 나타날 때, 그들을 두고 말씀에서 “사람들”이라 불리운다.

아넬, 에스골, 그리고 마므레. 이는 그들에 속하는 것들을 의미하는데, 이는 13절에서 설명한 바로부터 분명해진다. 즉 그들의 이름들에 의해 전투를 수행한 선들과 진리들이고 천사 자체는 아닐 것이다. 천사들은 젊은이와 사람들에 의해 뜻해지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천사들에게는 어떤 방식으로든지 이름이 주어지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천사들은 이름으로 서로를 구별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지니는 선들과 진리들을 가지고 구별되기 때문이다; 이렇기 때문에 말씀에서 이름이 의미하는 것은 그것의 본질과 품질이다. 이에 대한 것은 이사야서에서 더 알 수 있을 것이다. 거기서 주님이 말하여진다:
그분의 이름은 경이로우신 자, 상담자, 하느님, 영웅, 영원하신 아버지, 평화의 제 1 인 자 라고 불리우실 것이다 (이. 9:6);
위에서 “이름”에 의해 그분이 어떤 품질이신지를, 즉 경이로우신 분, 상담자, 하느님, 영웅, 영원한 아버지, 평화의 제 1 인 자가 뜻해진다.
예레미야서에서, 주님이 말하여진다:
그들이 그분을 여호와 우리의 정의라고 부르는데, 이것이 그분의 이름이다 (예. 23:5, 6);
위에서 이름이 “정의”이다고 분명히 말해진다. 마찬가지로 모세의 책에서, 주님이 말하여진다:
그분은 너희의 위법을 참지 않으실 것이다, 그 이유가 내 이름이 그분의 한 가운데에 있기 때문이다 (출. 23:21);
위에서 “이름”은 본질을 표시한다, 즉 신성이다. 이렇게 말씀의 많은 구절들에서, “그들은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 “너희는 여호와의 이름을 헛되게 취해서는 안된다.” 그리고 주님의 기도에서, “당신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소서” 라고 말해진다. 이런 경우는 천사들의 이름들에서도 마찬가지 이다. 이 구절에서는 에스골, 아넬, 마므레의 이름들과 같다. 이들은 천사들을 표현하고, 천사들이 지니는 특성을 의미하고 있다.

그들에게 그들의 몫을 가져 가게 하겠다. 이는 그들에게 [악령들을 제압하는] 힘이 주어졌다를 의미하는데, 이는 21-23절에서 말해진 것들로부터 알게 된다. 즉 주님께서는 [악령들로부터] 어떤 것도 원하지 않으셨다는 것, 악령들은 그분에게 힘을 제공할 어떤 것도 가지지 않았다는 것으로부터 알게 된다. 천사들에게 [악령들을] 제압하는 능력이 주어진다는 점에 대해 나로 하여금 분명해지도록 많은 경험이 주어졌다.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일반적, 특수적 모든 측면에서 보시고 예견하시고, 모든 것을 절대적으로 설비하고 배열하신다; 그러나 이렇게 섭리하시되, 때로는 허용하심과 더불어, 때로는 묵인하심과 더불어, 때로는 수용하심과 더불어, 때로는 선한 가쁨과 더불어, 때로는 뜻하심과 더불어 행동하신다. (타인을) 지배하기를 바램(desire)은 그 자체로는 인간의 자기 자신의 어떤 것이어서 천사들이 주님으로부터 받는 어떤 것과는 다르다. 그러나 (인간 자아로부터의) 지배하려 드는 이 바램이 부재할 때, 모든 지배함은 사랑과 자비로부터 온다. 이런 사항들은 아주 깊은 신비함인 바, 몇 줄 써내려 간 것 가지고 납득하는 것은 불가능할지 모른다. 그러나 악과 악령들은 천사들의 능력 아래 놓여져 있다는 것, 주님께서는 아주 미세한 사항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통치하신다는 큰 원칙만 알아도 우리에게는 흡족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이에 관한 따로의 추가 설명은 차후 주님의 신성한 자비로부터 있을 것이다.

이상 살핀 내용들은 이 장의 내적 의미에서 포함된 일반적 측면에서 있는 사항들이다; 그러나 이 장 전체 측면에서의 시리즈나 구절들의 연결 자체, 그것의 아름다움은 각 절의 단어들을 분리하여 설명하는 동안 나타날 수 없다. 만일 세부적 설명들을 한 개의 생각이 아우르고 있다면, 가능할지 모른다. 그 이유가 각 세부 사항들이 한 개의 생각 아래 모두 납득될 때, 흐트러져 있던 것들이 시종일관을 이루어 아름다운 방법으로 연결될 것이라 생각되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은 우리가 누군가가 말하는 것을 듣는데 있어 단어들에 주의를 기울이는지 여부에 따라 달라지는 경우와 유사할지 모른다. 그가 단어들과 그것들의 의미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면, 그는 연설자의 생각을 잘 납득하지 못한다. 말씀의 내적 의미와 외적 또는 글자 의미의 관계는 연설과 연설의 단어들과 거의 비슷한 상황이다. 즉 연설자의 말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것, 더 심하게는 너무 관심을 두지 않아 들리는 것 같지도 않는 것, 이 반대의 상황으로, 마음이 연설자의 단어들이 의미하는 것에 집중적으로 따라가는 것이다.
태고적 저술 방식은 아주 다르게 있는 것들이라 해도 의미로서 이해한 단어들이나 인물들을 수단으로 표현했다. (즉 비유나 풍유적 방법일 것이다). 그 시대의 세속적 작가들은 그들의 역사물들을, 심지어 시민적, 도덕적 생활에 속하는 문제들까지 도 이런 방법으로 작성했다; 그래서 글자로 쓰여진 내용과 정확히 똑같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나 이런 작문 방식 아래 글자 의미 외의 어떤 것이 뜻해진 것이다. 그들은 모든 종류의 애착들을 신들과 여신들로서 표현하기조차 했다. 후에 이런 신들을 이교도들은 자기들의 신으로 삼고 거기에 예배하게 되었다. 지금도 고대의 책들이 존재하기 때문에 학식자라면 수긍이 가는 대목이다. 이런 작문 방식은 홍수이전에 살았던 태고인들로부터 파생된 것이다. 태고인들은 천국적이고 신성한 사항들을 자신들에게 땅과 세상에서 보여지는 것을 수단으로 표현했다, 그리고 그렇게 해서 자기들의 마음들과 혼들을 기쁨들과 즐거움들로 채웠다. 이런 식으로 그들은 우주의 대상물들을 붙들었던 바, 특히 이런 형체와 질서는 더 아름다웠다. 그러므로 그 시대들의 교회의 모든 책들은 이 방법에서 쓰여졌다. 그 중 일부가 욥기서이고, 이 책을 모방한 책이 솔로몬의 아가서이다. 이 두 책은 민. 21:14, 27에서 언급된다. 이 외의 책들은 사멸되었다.
후기 시대에서 이런 저술 방식은 옛적의 방식인지라 이방인들과 야곱의 후손들 사이 모두에서 받들어 모셔졌다. 그리하여 이들은 이런 방식으로 쓰여지지 않은 저술은 신성한 것으로 추앙받지 못했다. 따라서 그들이 예언적 영에 의해 움직일 때, 그들은 이런 방식으로 말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한 데에는 감추인 이유들이 더 있다. 즉 야곱의 경우는 창. 49:3-17 이다. 모세의 경우는 출. 15:1-21; 신. 33:2-29 이다; 고대 교회가 그 당시 잔존했던 시리아로부터의 동방의 아들이라 하던 발람의 경우는 민. 23:7-10, 19-24; 24:5-9, 17-24 이다; 드보라와 바락의 경우는 사. 5:2-31 이다; 한나와 더불은 경우는 삼상. 2:2-10 이다; 이 외에도 많다. 이들의 말들이 주님의 왕국과 교회 속의 천국의 것들을 의미하지만 이에 대한 우리의 이해가 적다해도 그 수준만 가지고도 여전히 감탄의 환성이 터져나오고 우리의 가슴을 뭉클거리게 하고야 만다. 그런 이유는 우리가 그 말씀들로부터 신성과 거룩함을 미미하더라도 느꼈기 때문이다.
말씀의 역사물도 이와 비슷하다. 즉 모든 이름과 모든 단어 측면에서 그것들은 주님의 왕국 속의 천적, 영적인 것을 표현하고 의미한다. 그런데, 학식자들의 세계에서도, 말씀의 마침표 하나에도 영감이 들어 있을 것이다는 것, 하여 모든 단어들 안에는 천국의 신비가 일반적, 특수적 모두에서 들어 있다는 정도를 제외하면 더 이상 알려진 것이 없는 듯 하다.

*************************************

창세기 제 15 장

성경: 창세기 15 장

1. 이 말들 이후, 여호와의 말씀이 환상 가운데에서 아브람에게 왔고, 말하시기를, 두 려워 말라, 아브람아, 나는 너에게 방패이고, 너의 지극히 큰 상금이다.
2. 그리고 아브람이 말했다, 주 여호비여, 당신은 나에게 무엇을 주시렵니까? 나는 자 식 없이 걷고 있습니다. 그리고 제 집의 청지기는 이 다메섹 엘리에셀이니 이다.
3. 그리고 아브람이 말했다, 보십시오, 나에게 당신께서는 씨를 주지 않았습니다, 그리 고 제 집의 아들이 나의 상속자입니다.
4. 그리고 보라,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와서, 말하기를, 이 자는 네 상속자가 아니 다. 그러나 네 배에서 나오는 사람이 너의 상속자이다.
5. 그리고 그분은 그를 밖으로 인도했다, 그리고 말했다, 지금 하늘을 쳐다 보라, 그리 고 만일 네가 별들을 셀 수 있다면 그것들을 세어라. 그리고 그분은 그에게 말했 다, 그렇게 네 씨도 있을 것이다.
6. 그리고 그는 여호와를 믿었다, 그리고 그분은 그것을 정의를 위해 그에게 전가 하 셨다.
7. 그리고 그분은 그에게 말하셨다, 나는 여호와, 이 토지를 상속 받아 너에게 주려고 갈대아 우르에서 너를 인도한 여호와이다.
8. 그리고 그는 말했다, 주 여호비여, 제가 그 토지를 상속 받으리 라는 것을 어떻게 알겠습니까?
9. 그리고 그분은 그에게 말하셨다, 너는 삼 년 된 암소, 그리고 삼 년 된 암염소, 그 리고 삼 년 된 수양, 호도애(산비둘기)와 어린 집비둘기를 가져 오라.
10. 그리고 그는 이 모든 것을 자기에게 가져 오고 그것들을 한 가운데에서 나누고 각 짝이 다른 짝을 마주 보게 놓았다. 그리고 새들은 나누지 않았다.
11. 새가 사체들 위에 내렸었고, 그리고 아브람은 그것들을 쫓았다.
12. 그리고 해가 저무는 때가 되었는데, 깊은 잠이 아브람 위에 떨어졌다, 그리고 큰 어둠의 공포가 그에게 떨어지고 있는 것이 보였다.
13. 그리고 그분은 아브람에게 말하셨다, 너는 확실히 알아라, 네 씨는 자기들의 것도 아닌 토지에서 객이 되어 있을 것이고, 그들을 섬길 것이고, 그리고 그들은 사백 년 동안 네 씨들을 괴롭힐 것이다.
14. 그리고 또한 나는 네 후손들이 섬겼던 자들을 심판할 것이다. 그 후 네 후손들은 큰 물질을 지니고 떠날 것이다.
15. 그리고 너는 네 조상에게로 평화로이 갈 것이다, 너는 장수하다가 묻힐 것이다.
16. 그리고 사 대에 가서 그들은 이쪽으로 돌아 오리니 그 이유는 아모리족의 불법이 아직은 극에 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17. 해가 내려 가자 짙은 어둠이 있었다. 그리고 연기 뿜는 용광로와 불 붙은 횃불이 쪼갠 고기 조각들 사이를 지나가는 것이 보였다.
18. 그 날 여호와께서 아브람과 언약을 하시고 말하시기를, 나는 네 씨에게 이 토지, 이집트의 강으로부터 큰 강 유브라데 강에 이르기까지를 줄 것이다;
19. 즉 겐족과 그니스족과 갓몬족과
20. 헷족과 브리스족과 르바족과
21. 아모리족과 가나안족과 기르가스족과 여부스족.

각 절의 내적 의미

1절. 이 말들 이후, 여호와의 말씀이 환상 가운데에서 아브람에게 왔고, 말하시기를, 두려워 말라, 아브람아, 나는 너에게 방패이고, 너의 지극히 큰 상금이다.

이 말들 이후, 여호와의 말씀이 환상 가운데에서 아브람에게 왔다. 이는 젊은 시절 치루신 전투 이후, 그분은 계시를 가지셨음을 의미한다. 이는 “말들”의 의미로부터, “여호와의 말씀이 아브람에게”로부터, 그리고 “환상”의 의미로부터 분명해진다. 히브리어에서 “말들”에 의해 실제의 것들이 의미된다; 여기서 달성하신 것, 이는 시험에서의 전투들인데, 앞 장에서 취급했다. “여호와의 말씀이 아브람에게”는 주님이 그분 자신에게 이다; 그분의 젊은 시절, 그리고 시험들 속의 전투들에서, 두 본질들이 아직 하나로 되지 않으셨을 때, 여호와의 말씀은 그분에게 계시로서 나타나실 수밖에 없으셨다. 계시는 내적인 것이 외적인 것에서 그 자체를 명백히 드러냄에서, 외적인 것이 국면과 순간에서 핵심(내적인 것)으로부터 아주 멀리 있을 경우 유일한 방법이다. 이 국면은 주님의 가장 낮은 겸허의 상태에 관련되고 있다.

“환상”은 지각을 통하여 받는 가장 깊은 계시를 표시하는데, 이는 환상들로부터 알게 된다. 환상들은 마음 속의 환영의 상태에 따라 다양해진다. 내면이 닫혀있는 이들과 열려있는 이들에게 환상은 완전히 다르다. 예를 들면: 주님께서 시내 산에서 나타나셨을 때, 그 환상을 본 백성, 아론, 모세는 각기 달랐다. 더욱이 예언자들의 환상은 모세의 환상과도 달랐다. 많은 종류의 환상들이 있는데, 이에 관하여는 주님의 신성한 자비로부터 차후 살핀다. 환상의 수준이 더 내면일수록 환상은 더 충만되어진다. 주님과 더불어 있는 환상은 모든 환상 중에서 가장 완전한 환상이다; 그 이유는 그 당시 주님은 영들의 세계 안에서, 천국들 안에서, 또한 여호와와의 직접적 교류에서 모든 것들에 대해 지각을 가지셨기 때문이다. 이 교류가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환상 가운데서 나타나셨다”에 의해 표현되고 내적 의미로 의미되고 있다.

두려워 말라, 아브람아, 나는 네게 방패이다. 이는 악들과 거짓들에 맞서 보호하심과 이 보호하심을 신뢰함을 의미한다. 이는 “방패”의 의미로부터 분명해지는데 아래에서 살핀다. 이 말들, 즉 여호와는 방패이고, 그분은 극도로 큰 상금이다 라는 말은 시험 후 주시는 위로하심이다. 모든 시험은 어떤 종류의 자포자기됨이 수반된다. 그렇지 않다면 어쩌면 시험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시험 후에 위로하심이 뒤따른다. 시험받게 되면 불안, 걱정이 야기되고, 특히 결과가 어떨지에 대한 극심한 불안이 자포자기의 상태까지 유발한다. 시험의 진짜 전투는 이밖에 더 다르지 않다. 애당초 승리가 보장되어 있다면 걱정, 불안은 없다, 고로 사실상 시험도 아니다.
주님 역시 가장 끔찍하고 잔인한 시험을 통과 하시느라 자포자기의 상태를 벗어나 예 외 이실 수는 없었으나 이것을 그분 자신의 힘으로 전복하고 승리하셨다; 게세마네에서 겪으신 그분의 시험에서 이를 알 수 있다. 누가복음서의 기록이다:
그분이 어떤 장소에 계셨을 때, 그분은 그들에게 말하셨다, 너희는 시험에 들어가지 않도 록 기도하라. 그리고 그분은 돌을 던지는 거리 만큼 그들로부터 물러가셨다, 그리고 무릎을 꿇으시고, 기도하시어, 말하시기를, 아버지, 만일 당신이 뜻하신다면, 이 잔을 나에게서 제 거하소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뜻대로 마옵시고 당신의 뜻대로 하시옵소서. 천국으로부터 그분에게 천사가 나타나서, 그분에게 힘을 돋구었다. 고뇌하심 속에서 그분은 더 진지하게 기도하셨다: 그래서 그분의 땀은 마치 큰 핏방울처럼 지면에 떨어지고 있었다
(눅. 22:40-45),
마태복음서에서:
그분은 슬퍼지시고 견디기 매우 어려워지기를 시작하셨다. 그때 그분이 그들에게 말하신 다, 내 혼은 죽음에 이를 것 같이 극도로 슬퍼져 있다: 그리고 그분은 조금 더 가셨다, 그 리고 그분의 얼굴을 떨어뜨리시고, 기도하셨다, 말하시기를, 오 나의 아버지, 만일 이것이 가능하다면, 이 잔으로 하여금 나를 지나가게 하십시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 뜻 대로 마 옵시고, 당신 뜻대로 (하시옵소서). 그분은 두 번째 다시 가셨다, 그리고 기도 하셨다, 말 하시기를, 오 나의 아버지, 만일 이 잔이 제가 그것을 마시지 않고는 나로부터 거두어 가지 지 않는다면, 당신의 (뜻이) 행해지소서. 그리고 세 번째 동일하게 말하시어 기도 하셨다
(마. 26:37-44).
마가복음서에서:
그리고 몹시 놀라시고 (마음이) 매우 무거워지게 되시기를 시작하셨다. 그리고 그들에게 말하신다, 내 혼이 죽기까지 극도로 슬퍼져 있다: 그리고 그분은 조금 더 앞으로 나가셨다, 그리고 지면에 엎드리셨다, 그리고 만일 가능하시면, 이 시각이 저로부터 지나가게 하십시 요 하고 기도하셨다. 그분은 말하셨다, 아바, 아버지, 모든 것들이 당신에게는 가능하십니 다; 이 잔을 저로부터 제거 하소서: 그럼에도 제 뜻대로 마시고, 당신의 뜻을 행하시옵소서. 그리고 두 번째, 세 번째 다시 그분은 가셔서, 기도하셨다, 그리고 같은 말씀을 이야기하셨 다. (막. 14. 33-41).
위 인용 구절로부터 주님의 시험의 본성이 무엇이었는 지를 알았을 것이다. 그것들은 모든 것 중에서도 가장 격렬하였다는 것; 그리고 그분은 가장 안쪽 자체로부터 심히 괴로워하셨다는 것, 피의 땀을 흘리실 정도로 심히 번민하셨다는 것; 그 당시 그분은 목표와 결과에 관하여 자포자기의 상태에까지 진입하셨다는 것; 또한 그분은 위로를 받으셨다는 것, 등이 알려진다. 본문의 말, “나는 여호와, 네 방패, 그리고 너의 극도로 큰 상금이다”는 앞 장에서 취급한 시험의 전투 후의 위로하심의 말씀이다.

“방패”가 악과 거짓에 맞선 보호, 이를 신뢰함을 뜻한다는 것은 설명 없이 분명해진다. 그 이유가 여호와는 (큰) 방패(shield)와 (작은) 방패(buckler) 이시다는 말은 매우 자주 사용하는 (관습적인) 문구가 되어 있기 때문이다. 방패를 특별한 측면에서 살핀다면, 주님에 관련하여서는 보호하심, 인간에 관련하여서는 주님의 보호하심을 신뢰함을 의미한다. 앞에서 살핀 바 대로 “전쟁”이 시험을 의미하듯, 전쟁의 모든 무기는 시험에 속하는 특별한 어떤 것, 그리고 악들과 거짓들에 맞선 방어, 즉 시험을 유발하고 시험하는 지옥의 패거리에 맞선 방어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각기 다른 전쟁 무기들, 즉 “방패”, “작은 방패”, “과녁”, “투구”, “창”, “투창”, “검”, “활과 화살”, “갑옷”, 등등에는 각기 특별한 의미를 담고 있다. 이에 관하여는 이후 주님의 신성한 자비로부터 더 살핀다.
“방패”가 주님에 관련하여서는 악과 거짓에 맞선 보호하심을, 인간에 관련해서는 주님을 신뢰함을 의미하는 이유는 방패가 가슴을 보호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가슴에 의해서는 선과 진리가 의미되는데, 심장과 폐가 가슴에 있고, 심장은 선을, 폐는 진리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방패”의 의미이다는 것은 다윗서에서도 분명해진다:
여호와 나의 반석을 찬송할지라, 그분은 전투(를 치루도록) 내 손을 가르치시고, 전쟁(을 감당하도록) 내 손가락을 가르치신다; 나의 자비와 요새, 내 견고한 성채와 내 구원자, 내 방패, 그리고 내가 신뢰하는 분이시다 (시. 144:1, 2),
위에서 “전투”와 “전쟁”은 시험에 관한 것들이다, 그리고 내적 의미에서, 주님의 시험들이다; “방패”, 주님에 관련하여서는 보호하심이다; 그리고 인간에 관련하여서는 신뢰함이다.
시편서에서:
오 이스라엘아, 너는 여호와를 신뢰하라; 그분은 그들의 도움과 그들의 방패이시다. 오 아 론의 가문아, 너희는 여호와를 신뢰하라; 그분은 그들의 도움과 그들의 방패이시다. 여호와 를 경외하는 너희는 여호와를 신뢰하라; 그분은 그들의 도움과 그들의 방패이시다
(시. 115:9-11),
위의 구절 역시 앞의 구절과 비슷한 뜻이다. 다시:
여호와는 나의 요새이다, 나는 내 하느님을 신뢰한다. 그분은 그분의 날개로 덮으실 것이 다; 그리고 그분의 날개 아래 너는 신뢰할 것이다; 그분의 진리가 (큰) 방패와 작은 방패이 시다 (시. 91:2, 4),
위에서 (큰)방패와 작은 방패 모두 거짓에 맞서 보호하심을 표시한다.
다시:
여호와는 나의 반석과 나의 요새와 나의 구원자이시다, 나의 하느님, 나의 강한 반석을 나 는 신뢰한다, 나의 방패, 그리고 내 구원의 뿔. 여호와는 그분을 의지하는 모두에게 방패이 시다 (시. 18:2, 30),
위 구절의 의미도 앞 구절과 비슷하다. 다시:
심장과 신장을 입증하시는 당신, 정의의 하느님; 내 방패는 심정이 곧바른 자를 구원하시는 하느님 위에 있다 (시. 18:35),
신뢰를 뜻한다. 다시:
당신은 당신의 구원의 방패를 나에게 주셨다, 그리고 당신의 오른 손이 나를 붙잡으실 것 이다 (시. 18:35),
앞 구절과 같이 신뢰를 뜻한다. 다시:
땅의 방패들이 하느님에게 속해 있다; 그분은 크게 드높여지신다 (시. 47:9),
이 구절도 신뢰를 뜻한다.
다시:
여호와 하느님은 태양과 방패이시다; 여호와는 은총과 영화를 주실 것이다; 선은 성실히 걷 는 자에게서 보류되어 있지 않을 것이다 (시. 84:11),
위 구절은 방어를 의미한다. 모세의 책에서:
너는 행복하다, 오 이스라엘아; 누가 너희 같이 있는지, 네 도움의 방패, 여호와 안에서 구 원되는 백성, 네 뛰어남의 검이신 분, 그리고 네 적들은 너에 관하여 실수할 것이다
(신. 33:29);
“방패”는 보호를 표시한다.
전쟁의 무기들이 시험의 전투 안에 있는 이들에 관하여 말해지듯, 마찬가지로 전쟁의 무기들은 시험하고 습격하는 적들에게도 응용되는데, 그 의미는 반대적이다; 고로 이 의미에서는 악들과 거짓들을 의미하고, 악한 자는 이것을 신뢰하고 이것 가지고 싸우고 방어도 한다. 예레미야서를 보자:
너희는 큰 방패와 작은 방패를 준비하라, 그리고 전투가 가까이 와있다. 말에 견인줄을 채 워라, 그리고 올라 가라, 너희 마병들아, 그리고 투구를 쓰고 나서라, 창에 날을 세워라, 갑 옷을 입어라 (예. 46:3, 4).
이 외에도 많은 구절들이 있다.

큰 상금. 이는 승리하심의 의도와 목적을 의미하는데, 이는 “상금, reward”의 의미가 시험의 전투 후의 상(prize)이다로부터 분명해진다. 이 구절에서는 승리들의 의도와 목적을 의미한다. 그 이유가 주님께서는 자신을 위해 승리의 어떤 상을 예상하셨던 것은 결코 아니기 때문이다. 그분에게 승리의 상은 온 인류가 구원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분이 싸우신 것은 전체 인류를 향한 사랑으로부터 이셨다. 이 사랑으로부터 싸우시는 그분은 자신을 위해 어떤 상도 요구하지 않으신다. 그 이유는 이 사랑은 이 사랑 자신을 모두에게 주는 것, 이동시키는 것, 그것 자체를 위한 것은 아무 것도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고로 여기서의 경우, “상금”은 온 인류를 구원함이다.

2절. 그리고 아브람이 말했다, 주 여호비여, 당신은 나에게 무엇을 주시렵니까? 나는 자식 없이 걷고 있습니다. 그리고 제 집의 청지기는 이 다메섹 엘리에셀이니 이다.

아브람이 말했다, 주 여호비여. 이는 주님의 지각을 의미하는데, 이는 주님만이 모든 것들에 대한 가장 내면적이고 완전한 지각을 가지신다는 사실로부터 알게 된다. 이 지각은, 이미 말했듯이, 천국에서 발생하는 모든 것을 지각함, 또는 지각으로 알아챔이다, 그리고 여호와와 계속적인 교통과 내적인 대화이다. 이것은 주님만이 가지셨다. 이것이 “아브람이 여호와에게 말했다”라는 것의 내적 의미에서 뜻해진다. 고로 아브람이 여호와와 더불어 이야기했을 때, 아브람에 의해 표현되어졌다; 그리고 “아브람이 여호와에게 말했다”라는 말씀이 어느 구절에서 표현되든지 위와 같은 의미가 담긴다.

“아브람”이 내면의 인간을 표시하는 것, 또는 아브람이 주님의 내면, 또는 합리적 인간을 표현한 것에 대한 내용은 이미 서술했다. 즉 주님의 내면의 인간이 무엇인지는 앞 장에서 살폈다.

“주 여호비”가 그분의 내면(중간)에 비교하여(관련하여) 내면의 인간이다는 것은 주님의 내적 인간에 관하여 말해진 사항으로부터 분명해진다. 즉 주님의 내적 인간은 여호와 자신이셨다는 것, 이 여호와로부터 주님은 임신되셨고, 그분은 여호와의 유일한 아들이셨다, 이 분에게 주님께서는 어머니로부터 파생된 것, 즉 어머니쪽의 인간을 시험의 전투를 수단으로 순수하게 하신 후에, 하나가 되셨다. 호칭, “주 여호비”는 말씀에서 “주 여호와” 못지 않게 자주 등장한다. 그분이 “주 여호와”라 불리우지 않고 “주 여호비”라 불리는 때는 주로 시험이 취급될 경우에 많다.
이사야서에서:
보라, 주 여호비께서 강하심에서 오신다, 그리고 그분의 팔이 그분을 위해 통치하신다; 보 라, 그분의 상금이 그분과 더불어 있다, 그리고 그분의 일이 그분 앞에 있다. 그분은 그분 의 양떼를 목자같이 먹이실 것이다, 그분은 그분의 팔 안에 어린 양들을 모으실 것이다, 그리고 그것들을 그분의 품 안에서 운반하실 것이다, 그리고 젖을 빨리는 이들(어미, 암컷) 을 인도하실 것이다 (이. 40:10, 11).
위 구절에서, “주 여호비께서 강하심에서 오신다”는 시험의 전투에서 그분이 승리하심에 관계되고 있다; “그분의 팔이 그분을 통치하실 것이다”는 시험의 전투에서의 승리는 그분 자신의 힘으로부터 이다를 뜻한다. 본문 1절에서 언급된 상금이 무슨 상금인지가 이사야서 이 구절에서 선포되어진다. 즉 그 상금은 온 인류의 구원이다는 것, 다시 말해, “그분의 양떼를 목자같이 먹이시는 것, 어린 양들을 그분의 팔 안에 모으는 것, 그것들을 그분의 품 안에서 운반하시는 것, 그리고 젖을 주는 이들을 인도하는 것”이 그분의 상금이다. 이것 모두는 가장 깊은 사랑, 또는 신성의 사랑에 속한다.
다시 같은 예언서에서:
주 여호비께서 나의 귀를 여셨다, 그리고 나는 거역하지 않았다; 나는 뒤쪽으로 돌아 서지 않았다. 나는 나를 강타하는 자들에게 내 몸을 주었다, 내 빰을 내 머리털을 잡아뽑는 자들 에게 내 주었다; 나는 내 얼굴을 욕보이고 침뱉는 자들로부터 숨기지 않았다; 그리고 주 여 호비께서 나를 도우실 것이다; 보라 주 여호비께서 나를 도우실 것이다 (이 50:5-7, 9),
위 구절에서 시험이 취급됨은 분명하다. 이 외에도 많은 구절들이 있다.

당신은 제게 무엇을 주시렵니까? 저는 아이 없이 걷고 있습니다. 이는 내적 교회가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는 “아이 없이 걸음”의 의미로부터 알게 된다. “걷는” 것은 내적 의미에서 사는 것이다. 아이 없음은 씨가 없는 것, 자기 자신의 후손이 없는 것이다. 이는 3-5절에서 취급하여 설명할 것이다.

그리고 내 집의 청지기. 이는 외적 교회를 의미하는데, 이는 내적 의미에서, 즉 교회와 관련된 점에서의 “집의 청지기”로부터 분명해진다. 집이 내적 교회, 가족의 아버지가 주님이실 경우, “집의 청지기”는 외적 교회라고 불리운다. 외적 교회가 이와 다른 사정에 있지 않은 이유는 모든 청지기는 외적 교회의 역할에 해당되기 때문이다. 모든 경영은 교회의 외적 국면에 속한다. 여기에는 교회 건물과 종교 자체, 즉 여호와의 집, 또는 주님의 집에 연계된 다른 활동들과 의식들의 집행을 포함한다.
내적 교회 없는 교회의 외적인 것들은 아무 것도 아니다; 교회들은 그것의 존재를 내적 교회로부터 가진다. 내적 교회가 있는 모습과 같다는 말이다. 이는 인간과도 같다; 인간의 외적인 것, 또는 육체에 속한 것은 그것에 혼과 생명을 주는 내적인 것이 없으면 아무 소용도 없다. 그러므로 내적인 것이 무엇인지가 외적인 것이 어떠할 것인지도 결국 결정한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 우리의 생각과 천성(instinct)들의 본성이 우리의 바깥쪽, 육체적 부분을 통하여 표현된 모든 것의 가치를 결정한다는 말이다. 심정을 붙들고 있는 것이 우리가 누구인지를 만드는 것이지, 말이나 몸짓 같은 것이 아니다. 이와 같은 경우가 교회의 내적인 것들과 같다. 종교의 외적 측면은 우리 자신의 외적 측면과 다를 바 없다. 외적 측면은 모든 경영과 행정 업무를 수행한다. 이를 달리 표현하면, 우리의 외적, 또는 육체적 측면은 마찬가지로 집이 우리의 내면을 뜻할 경우, 집의 경영자, 또는 청지기라 불리운다. 이상 살핀 바로부터 “아이 없음”이 뜻하는 것, 즉 교회 안에 내적인 것 없이 외적 교회만 있는 상태임이 분명해진다; 지상에서, 주님의 시기에 교회가 이러했기에 이를 한탄하신다.

이는 다메섹 엘리에셀이니 이다. 방금 위에서 말해진 바로부터 분명해지는 것은 이런 말들이 외적 교회를 표시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같은 의미가 “다메섹”의 의미로부터 나타난다. 다마스커스는 시리아의 수도였다. 거기에는 고대 교회의 예배가 남아 있었다, 그리고 거기로부터 에벨, 또는 히브리 나라가 왔는데, 이 나라와 더불어서는 교회의 외적인 것밖에 없었다, 고로 집의 청지기 역할만 수행하고 있었다. 본문의 이 말들에는 주님의 자포자기한 어떤 것, 결과적으로 주님의 시험의 어떤 것을 포함하는데, 이는 말 자체, 그리고 뒤이어지는 내적 교회에 관한 위로함으로부터 분명하다.

3절. 그리고 아브람이 말했다, 보십시오, 나에게 당신께서는 씨를 주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제 집의 아들이 나의 상속자입니다.

아브람이 말했다, 보십시오, 나에게 당신께서는 씨를 주지 않았습니다. 이는 교회의 내적인 것이 없었음을 의미하는데, 이는 “씨”의 의미가 사랑과 신앙이다로부터 분명해지는데 이미 살폈다. 그리고 상속자의 의미로부터도 더 알게 되는데, 이는 다음 항목에서 살핀다. 사랑과 신앙이 파생되는 것은 교회의 내적인 것으로부터 이다는 것은 여러 번 살핀 바 있다. 교회의 내적인 것으로부터의 신앙은 사랑, 또는 선행 속에 있는 신앙, 또는 사랑, 또는 선행으로부터 있는 신앙 외에 다른 신앙은 없다.
신앙은 일반적 의미에서 교회의 모든 교리적 가르침이다. 그러나 사랑, 또는 선행과 분리된 교리는 교회의 내적인 것을 결코 만들지 못한다. 그 이유가 교리는 기억 속에 있는 지식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교리는 최악의 인간들과도, 심지어 지옥의 패거리들과도 존재할 수 있다. 그러나 선행으로부터 있는 신앙, 또는 선행 속에 있는 신앙은 교회의 핵심(내적인 것)을 만든다. 그 이유는 이것이 생명 속에 있기 때문이다. 생명 자체는 모든 예배의 내적인 것이다; 모든 가르침이 선행의 생명으로부터 부상하고 있다면, 그 가르침은 여기서 뜻하는 종류의 가르침일 것이다. 신앙이 교회의 내적인 것으로부터 인지는 간단한 생각만으로도 알런지 모른다. 즉 이웃을 향한 사랑으로 살고 있는 누군가라면, 그는 신앙에 관하여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셈이다. 만일 당신이 원한다면, 당신은 많은 교리들로부터 각 교리들이 무엇을 가르치고 무엇을 향하고 있는지에 초점을 맞추어 보라. 그 교리가 우리의 이웃을 위한 사랑에 우리를 인도하지 않고 있는가? 그렇다면 그 교리는 이웃다운 사랑으로부터 나오지 않은 신앙에 속한다.
십계명의 교훈을 생각해보자. 이 계명의 첫째 교훈은 주 하느님을 예배하는 것이다. 사랑의 생명, 또는 선행의 생명을 가진 자는 주 하느님을 예배한다, 그 이유는 이것이 그의 생명이기 때문이다. 또 다른 교훈은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다. 사랑의 생명, 또는 선행 안에 있는 자는 안식일을 거룩히 지킨다. 그 이유는 그에게 있어 주님을 예배하고 날마다 그분을 찬양하는 것 이상 더 달콤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살인하지 말라”는 교훈도 선행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웃을 자신같이 사랑하는 사람은 내 이웃이 나로 말미암아 상처받기만 해도 소스라치게 놀라고, 이웃을 살인하는 것은 상상 속에도 없는 일이다. “훔치지 말라”는 교훈 역시 그러하다: 그 이유가 선행의 생명을 가진 자는 그의 이웃으로부터 뭔가를 가져오기는 커녕 그들에게 그의 자신을 오히려 주려고 한다. 그리고 “간음을 범하지 말라”는 교훈 역시 그렇다; 선행의 삶 안에 있는 자는 그의 이웃의 아내가 어떤 피해도 당하지 않도록 지켜준다. 그리고 그는 간음을 양심에 반대되는 범죄로 간주한다. 그리고 간음은 결혼의 사랑을, 이 사랑에 대한 의무들을 파괴한다고 확신한다. 이웃에 속한 것을 탐내는 것은 선행의 생명을 살아내는 삶을 그르치고 만다. 그 이유가 선행은 우리로부터, 우리의 소유물로부터 타인들이 유익함을 얻기를 원하는 것도 포함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은 누군가의 것을 결단코 탐내지 않는다.
위의 내용은 신앙의 외적인 교리 측면에 치중한 십계명의 가르침이다; 그리고 이 가르침들은 선행과 선행의 생명 안에 있는 이들에 의해 기억으로 알고 있을 뿐 아니라 그의 심정 안에서도 알고 있다; 그리고 그는 이 가르침들을 자신에게 새겨 놓았다, 그 이유는 그들이 자기의 선행 안에 있기 때문이다, 고로 그의 참 생명 안에 있기 때문이다; 그 밖에 이들은 교회가 가지는 공적인 교리들에 대해서도 같은 방식으로 접근한다. 그 이유가 그들은 올바른 것에 대한 양심에 따라 살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기들이 이해 못하고 탐구하지도 못하는 올바름, 또는 진리를 놓고도 주님께서 그렇게 말하셨기 때문에 라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그들은 심정의 천진 난만함(단순함)에서 단순하게 믿는다. 설사 그들이 대하는 진리가 진리 자체도 아닌 가상적 진리인 것조차에서도 그렇게 믿는다.
예를 들면, 만일 누군가가 주님이 성내시는 분, 벌하시는 분, 시험하시는 분 등등 이시다를 믿고 있는 경우, 또는 그가 성찬식에서의 빵과 포도주는 상징적이다; 그 밖에 살과 피가 그들이 그것을 설명하는 어떤 방식에서 현존한다는 것을 붙들고 있는 경우, 그는 교회들이 이것을 말하든, 저것을 말하든 대수롭지 않다. 교회들이 자기들 나름대로의 방식에서 (납득하려 해도 납득이 안되는 것을) 가르치지만 여전히 선행 안에 살고있는 것 만큼은 멈추지 않는 이들이 있다; 이들이 빵과 포도주는 내적 의미에서 주님의 온 인류를 향한 사랑, 이 사랑 속에 있는 것들, 그리고 주님과 이웃을 향한 인간의 상호간의 사랑을 의미한다는 것을 들을 때, 이들은 그것이 그렇구나 하며 기뻐하고 즉시 믿는다. 교리적인 것들 안에 있고 선행 안에 있지 않은 자들은 그렇지가 않다. 이들은 사사건건 다툰다. 그리고 자기들이 하는 짓 대로의 것을 믿는다 라고 말하지 않는 자는 누구든지 정죄한다. 이상으로부터 분명한 바, 주님을 사랑함과 이웃을 향한 선행은 교회의 핵심(내적인 것)임을 알 수 있다.

보십시오 제 집의 아들이 나의 상속자입니다. 이는 주님의 왕국 안에 외적인 것만 있을 것임을 의미한다. 이는 “상속자”와 “상속함”의 의미로부터 알게 된다. 상속자가 되는 것, 또는 상속받는 것은 주님의 왕국에서 영원한 생명을 의미한다. 주님의 왕국에 있는 모든 이는 상속자들이다; 그 이유가 그들은 주님의 생명으로부터 살기 때문이다. 이 생명은 서로의 사랑이다; 그리고 이로부터 그들은 아들들이라 불리운다. 주님의 아들들 또는 상속자들은 그분의 생명 안에 있는 모든 이들이다. 그 이유는 그들의 생명은 그분으로부터 있기 때문이고, 그들은 그분으로부터 태어나기 때문, 즉 거듭나기 때문이다. 누군가에서 태어난 이들은 누군가의 상속자이듯, 주님으로부터 다시 태어난 이들은 그분의 상속자이다. 그 이유는 이 경우에 그들이 그분의 생명을 받기 때문이다.
주님의 왕국에는 외적 측면에 있는 이들, 내면(중간)에 있는 이들, 내적 측면에 있는 이들이 있다. 첫 번째 천국에 있는 선한 영들은 외적 측면이다, 두 번째 천국에 있는 이들은 천사같은 영들은 내면적(중간) 측면이다. 세 번째 천국에 있는 이들은 내적 측면이다. 외적 측면 쪽에 있는 이들은 내면, 즉 중간에 있는 영들에 비해 주님에게 덜 가까웁다. 내면에 있는 이들은 내적 측면 쪽에 있는 이들에 비해 주님에게 덜 가까웁다. 주님께서는 그분의 신성한 사랑으로부터, 또는 자비로부터 위 세 측면의 사람들이 모두 그분 자신에게 가까이 있기를 원하신다. 그래서 그들은 천국의 문에, 즉 첫 번째 천국에서 멈추기를 원하시지 않는다. 하여 그들이 세 번째 천국에 있기를 바라신다. 가능만 하다면, 그분 자신과 더불어, 뿐만 아니라 그분 자신 안에 있기를 바라신다. 이것이 신성의 사랑, 또는 주님의 사랑이다. 그런데 주님의 지상 생활 당시, 교회가 외적 측면 만에 있었는 바, 그분이 “보십시오, 내 집의 상속자는 제 집의 아들입니다”라고 말하시어 불평하시었다. 이는 주님의 왕국 안에 외적인 것만이 있음을 의미하였다. 그러나 위로하심이 뒤이어지고, 내적인 것에 관한 약속이 이어지는 구절에서 있는다.
교회의 외적 측면이 무엇인지는 이미 설명되었다. 교리에 속하는 것이 그 자체 외적인 것을 만들지 않는다, 더구나 내적인 것은 더욱 그렇다. 주님께서는 교리를 수단으로 교회와 교회를 구별하시지 않는다. 그러나 구별되는 방법은 교리에 따른 삶이다. 모든 교리, 만일 그 교리가 진정한 교리이다면, 그것의 근본 원리로서 사랑의 생명, 즉 선행을 바라보고 있어야 한다. 어떻게 사람이 되어 있어야 하는지를 가르치는 것 말고 더 다른 목표가 교리에 있을까?
기독 세계에서, 교회들을 구별하는 교리적인 주제들이 있다; 그것들로부터 사람들은 자신들을 로마카토릭 사람, 루터파 사람, 칼빈주의파 사람, 또는 개혁 교회 사람, 복음주의파 사람 이라 부르는데, 이외 열거하기에도 너무나 많다. 이것은 교리적인 것 만으로부터 그렇게 불리운다. 만일 그들이 주님을 사랑함과 이웃을 향한 사랑을 신앙의 제 1로 만들었다면 위와 같이 분류됨은 결코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교리적인 주제들은 신앙의 신비들에 관하여 견해가 다양해진 것일 뿐이다. 이 신비들에 관한 견해를 진실한 기독인들은 모든 이가 각자의 양심에 일치하여 붙잡고 있기를 바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심정 안에서 말한다, 진정한 기독인은 그가 기독인으로 살 때, 즉 주님이 가르치는 대로 살 때 되어진다. 이럴 경우, 의견이 달라 있는 모든 교회들로부터 한 개의 교회가 만들어질 것이다; 교리만으로부터 오는 모든 의견 차이가 사라질 것이다; 그렇다, 서로를 향한 모든 증오가 한 순간에 흩어질 것이다. 그리고 주님의 왕국이 땅 위에 올 것이다.
홍수 후 곧 있게 된 고대 교회는 비록 많은 왕국들을 통하여 퍼졌을지라도 여전히 위와 같은 품성 속에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교리적 주제에서 서로들 달랐을지라도, 여전히 선행을 제 1로 만들었다; 그들은 예배를 신앙에 속하는 교리의 관점에서가 아닌, 삶(생명)에 속하는 선행에서 찾았다. 창. 11:1에서, “그들은 한 입술, 한 말을 가졌다”에 의해 초창기 고대 교회가 지닌 예배의 관점이 뜻해져 있다.

4절. 그리고 보라,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와서, 말하기를, 이 자는 네 상속자가 아니다. 그러나 네 배(bowels, belly)에서 나오는 사람이 너의 상속자이다.

보라,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왔다. 이는 대답을 의미한다, 즉 교회의 외적인 것이 아니라 내적인 것이라고 대답함인 것은 이어지는 것으로부터 분명해진다. “여호와의 말씀”, 또는 이 대답은 위로하심 이다.

말하기를, 이 자는 네 상속자가 아닐 것이다. 이는 외적인 것이 그분의 왕국의 상속자이지 않을 것을 의미하는데, 이는 상속자, 상속 받음의 의미로부터 분명해진다. 이는 방금 위에서도 말했다. 주님의 왕국의 상속자는 외적인 것이 아닌 내적인 것이다. 외적인 것이 상속자가 되는 것은 내적인 것을 통하여서는 가능하다. 그 이유는 그것들이 하나로서 행동하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가 어떻게 있어지는 지를 보기 위하여서 우리가 마음에 간직할 사항은, 천국에 있는 모든 이는 주님의 왕국의 상속자이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첫 천국, 둘째 천국, 셋째 천국에 있는 이들, 다른 말로 말하면, 외적인 것, 내면(중간)인 것, 내적인 것 모두가 상속자 된다는 것이다. 그 이유가 그들 모두가 하나의 천국을 만들기 때문이다. 주님의 천국들에서 내적 측면과 외적 측면의 상황은 그것들이 인간 안에서 있는 상황과 같다. 첫 번째 천국에 있는 천사들은 두 번째에 있는 천사들에게 종속된다. 두 번째 천국의 천사들은 세 번째 천국의 천사들에게 종속된다. 이 종속됨은 명령에 의거한 종속이 아니다. 이는 인간 안에서와 같이, 내적인 것들이 외적인 것들에로, 더 외적인 것들에로 유입됨으로 이루어진다; 즉 주님의 생명은 세 번째 천국을 통하여 두 번째 천국 안으로, 두 번째 천국을 통하여 첫 번째 천국 안으로 그것들의 연속적인 질서에서 흐른다. 뿐만 아니라 주님의 생명은 모든 천국들 안으로 직접적으로 흐르기도 한다. 하급, 또는 종속된 천사들은 이런 상황을 알도록 주님의 허락이 없으면 알 도리가 없다. 고로 명령으로부터의 종속 관계, 즉 하급, 중급, 상급 천사 같은 식의 계급 의식은 없다는 말이다.
세 번째 천국의 천사에게 있는 내적인 것에 비례하여 그는 주님의 왕국의 상속자이다. 두 번째 천국의 천사에게 있는 내적인 것에 비례하여 그는 주님의 왕국의 상속자이다. 첫 번째 천국의 천사에게 있는 내적인 것에 비례하여 그도 역시 주님의 왕국의 상속자이다. 누군가를 상속자이게 하는 것은 그가 지닌 내적인 것이다. 내면의 천사들과 더불어 있는 내적인 것은 외적인 천사들보다 더 많다. 그러므로 전자는 후자보다 주님에게 더 가까이 있다. 그리고 더 충실한 상속자이다. 여기서 말하는 내적인 것이란 주님을 사랑함과 이웃을 향한 선행이다; 그러므로 그들이 가진 사랑과 선행에 비례하여, 이와 똑같게 그들은 아들들이고 상속자들이다. 그 이유가 똑같은 비례함에서 그들은 주님의 생명의 분담자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첫 천국, 또는 외적 천국으로부터 두 번째 천국, 또는 내면의 천국으로 올라가는 것은 그가 사랑의 선들과 신앙의 진리들 안에서 교육받을 때까지 가능할 자는 아무도 없다. 그가 교육받은 정도에 따라, 그는 그 만큼만 들리워진다, 그리고 천사같은 영이 될 수 있다. 천사같은 영들이 세 번째 천국으로 들리워 천사들 사이에 끼는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교육을 수단으로 내면들이 형성되고 그로부터 내적인 것들이 형성되어 사랑의 선들과 신앙의 진리들을 받는데 적절해진다. 그리고 이로부터 선하고 참된 것의 지각도 있는다. 자기가 모르고 믿지도 않는데 지각할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다. 결과적으로 사랑의 선과 신앙의 진리가 무엇인지, 무슨 속성인지 알기 위해 지식들을 수단으로 하지 않으면 사랑의 선과 신앙의 진리를 지각하는 능력을 선물받아질 수 없다는 말이다. 이것은 유아들을 포함하여 주님의 왕국에서 교육받아지는 모든 이에게 해당되는 말이다. 이곳에서의 교육은 아주 쉬운데, 그 이유는 그들이 거짓의 원리를 흡입할 일이 없기 때문이다; 어쨌든 그들이 받는 교육은 일반적 사항만이다; 그리고 그들이 이것들을 받았을 때, 그들의 지각은 한정되지 않는다.
그들은 가장 중요한 원리(일반적 원리)를 확실히 쥔 이들을 빼닮았다. 이런 사람들은 일반적 생각을 받쳐주는 특수적인 생각을, 특수적인 생각을 받쳐주는 개별적인 생각을 빠르게 거의 본능적으로 습득해 버린다. 그 이유가 그는 일반적 진리(가장 중요한 원리)에 감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같은 진리의 특수적, 개별적인 사항들로 일반적 진리가 확증되어진다. 그 이유가 이 진리들은 즐거움과 유쾌함을 가지고 애착 안으로 들어가고, 일반적 진리를 끈임없이 완전해지게 한다. 이것이 주님의 왕국을 상속받게 하고, 상속자가 되도록 하는 내적인 것들이다. 그러나 그들이 상속자가 되기를, 상속받기를 처음 시작하는 것은 그가 선에 대한 애착 안에, 즉 서로의 사랑 안에 있을 때, 이 안으로 그들이 선과 진리에 대한 지식들을 수단으로, 그리고 그것들에 대한 애착들을 수단으로 들어와 질 때이다; 그리고 그들이 선에 대한 애착, 또는 서로의 사랑 안에 있는 만큼에 비례하여, 그들은 그 만큼에서 “상속자”, 또는 상속분을 가진다. 그 이유가 서로의 사랑(mutual love)은 그들이 주님의 본질, 즉 그들의 아버지로부터 받는 최고로 참 생명이기 때문이다. 이 사항들은 5절에서 더 보여질런지 모른다.

그러나 네 배로부터 나가는 사람. 이는 주님을 사랑함 안에, 이웃을 향한 사랑함 안에 있는 이들을 의미하는데, 이는 “배”의 의미로부터, 그리고 “배로부터 나감”의 의미가 태어남이다로부터 분명해진다. 이 구절에서의 태어남은 주님으로부터 태어남을 뜻한다. 주님으로부터 태어나지는 이들, 즉 거듭나는 이들은 주님의 생명을 받는다. 주님의 생명은 신성한 사랑, 온 인류를 향한 사랑이다; 또는 그분의 영원한 뜻은 가능만 하다면 모든 인간을 구원하시는 것이다. 주님의 사랑을 가지지 않은 이들, 즉 이웃을 자신같이 사랑하지 않는 이들은 주님의 생명을 결코 가지지 못한다. 그러므로 그분으로부터 태어나지 못한다. 즉 “그분의 배로부터 나오지” 못한다; 그는 그분의 왕국의 상속자 일 수 없다.
이상으로부터 분명한 바, “배로부터 나감”은 내적 의미에서 그분을 사랑함 안에, 이웃을 향한 사랑 안에 있는 이들이다. 이사야서에서:
그런고로 네 구속자, 이스라엘의 거룩한 분, 여호와께서 말하셨다; 나는 여호와 네 하느님, 네게 이익이 되게 가르치는 분, 너를 네가 걸어야만 할 길로 인도하는 분이다. 오 너는 내 명령에 귀 기울여라, 그리고 네 평화는 강 같이 흐르고, 네 정의는 바다의 큰 물결 같고, 네 씨는 모래 만큼일 것이고, 네 배로부터 나가는 이들은 자갈 만큼 일 것이다
(이. 48:17-19).
“씨가 모래 만큼”은 선을, “네 배로부터 나간 이들”은 진리를 표시한다; 고로 사랑을 가지는 이들이다. 그 이유가 이들만이 선과 진리의 사랑 안에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말씀에서 “배”는 자비인 사랑을 의미한다. 그 이유는 세대의 배(bowels), 특히 어머니의 배(자궁, womb)는 순결한 결혼의 사랑을, 그로부터 파생되는 자녀 사랑을 표현하고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사야서에서:
당신 창자(gut, bowels)의 움직임과 나를 향한 당신의 동정심의 움직임이 그 자체를 억눌 렀다 (이. 63:15).
예레미야서에서:
에브라임은 나에게 사랑하는 아들 아니더냐? 그는 즐거움의 아이 아니더냐? 그러므로 내 배가 그를 위하여 고생했다; 정녕 나는 그에게 자비를 가질 것이다 (예. 31:20).
주님의 사랑 자체, 또는 자비 자체, 그리고 인류를 향한 동정심이 “배”와 “배로부터 나감”에 의해 내적 의미에서 의미되어 있다; 결과적으로 “배로부터 나간 그들”에 의해 사랑을 가진 이들이 의미되어진다.

그가 네 상속자일 것이다. 이는 그들이 상속자가 된다는 것은 이미 살폈다.

5절. 그리고 그분은 그를 밖으로 인도했다, 그리고 말했다, 지금 하늘을 쳐다 보라, 그리고 만일 네가 별들을 셀 수 있다면 그것들을 세어라. 그리고 그분은 그에게 말했다, 그렇게 네 씨도 있을 것이다.

그분은 그를 밖으로 인도했다. 이는 외적인 것들로부터 내적인 것들을 보는 내면적 인간의 시력을 의미하는데, 이는 “밖으로 인도하심”의 의미를 뒤이어지는 문맥과의 연결로부터 알런지 모른다. 인간이 육체의 눈을 가지고 별 많은 하늘을 찬찬히 응시할 때, 그리고 거기서부터 주님의 왕국을 곰곰이 생각할 때, 내적인 것은 바깥쪽으로 인도된다. 인간이 자기 눈을 가지고 어떤 것을 볼 때, 그리고 그가 보지 않은 것처럼으로 여겨졌는데, 그것들로부터 교회 속에, 천국 속에 있는 이런저런 모습들을 보거나 생각하게 될 때는 언제든지, 그의 내면적 봄, 그의 영, 또는 혼의 봄이 “밖으로 인도되어지고 있다.” 눈 자체는 그의 영의 봄이 밖으로 나가게 한 역할밖에 더 없다. 밖으로 나가게 한 목적은 당사자로 하여금 외적인 것으로부터 내적인 것을 보는 것이다. 즉 세상에 있는 대상물로부터 다른 삶에 있는 것들을 계속적으로 되튀겨보는 것이다. 그 이유가 이 세상에서 사는 이유는 저 세상에 가서 살기 위해서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봄이 태고 교회에서의 봄(sight)이다; 이와 같은 봄이 인간과 더불어 있는 천사들의 봄이다; 이와 같은 봄이 주님의 봄이었다.

그리고 말했다, 지금 하늘을 쳐다보라. 이는 우주를 정신적으로 조망함에 있는 주님의 왕국에 대한 표현을 의미하는데, 이는 “하늘”의 의미로부터 알런지 모른다. 말씀에서, 내적 의미에서, “하늘”은 눈에 나타나는 하늘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보편적, 세부적 모두에서 주님의 왕국을 의미하고 있다. 외적 사물로부터 내적인 것을 고찰하는 사람이 하늘을 쳐다볼 때, 그는 별이 많은 하늘을 전혀 생각하지 않고, 천사의 천국을 생각한다; 그리고 이 사람이 태양을 볼 때, 그는 태양을 생각하지 않고 천국의 태양이신 주님을 생각한다. 그가 달을 보아도, 별을 보아도 마찬가지로 생각한다. 그가 하늘의 광대함을 볼 때 역시 그는 하늘의 크기를 생각하지 않고 주님의 측량할 수 없고 무한한 권능을 생각한다. 이러한 사람이 이외 다른 것을 두고도 마찬가지로 생각한다. 그 이유는 모든 것이 (영계의) 어떤 것을 표현하기 때문이다.
땅 위에 있는 사물을 두고도 마찬가지 방식이다; 예를 들면, 그가 하루가 밝아옴을 바라볼 때, 그는 새벽을 생각하지 않고, 주님의 모든 것들이 올라 옴을, 지혜의 날들 안으로 발전해 감을 생각한다. 이와 같이 그는 동산을, 숲을, 꽃밭을 볼 때도, 그의 눈은 어떤 나무, 그것의 꽃, 잎, 과일에 붙들려 있지 않고, 이것들이 표현하는 천국의 것들에서 고정된다; 다시 말해 어떤 꽃, 그것의 아름다움, 유쾌해짐이 아니라, 그것들이 다른 삶에서 표현하는 것 위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는 말이다. 그 이유가 주님의 왕국을 표현하지 않으면 땅 위에서, 하늘에서 아름답고 유쾌하게 할 수 있는 것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이 “하늘을 쳐다 봄”이다, 이는 누군가가 우주를 정신적으로 조망함에 있는 주님의 왕국의 표현을 의미한다.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것들이 표현적인 이유는 그것들은 천국을 통한 주님의 유입으로부터 생겨나고, 계속 산출되고, 살아가기 때문이다. 이는 인간 신체도 마찬가지이다. 이것들에서는 혼을 수단으로 생겨나고 살아간다. 이런 이유에서 신체의 모든 것들은 일반적, 특수적 모두에서 혼의 표현물이다. 혼은 의도(purpose)와 목적(goal)에 관심을 갖고 있다. 신체는 목적을 향해 의도를 집행한다. 모든 결과들, 종류가 무엇이든 원인인 의도를 마찬가지로 표현한다; 그리고 의도는 그것들의 근원을 형성하는 궁극의 목적을 표현한다.
신성의 생각들을 생각하는 사람은 외적 시야의 대상물에 멈추는 일이 결코 없다; 그는 그것들로부터, 그것들에서 내적인 것들을 본다. 최고로 참된 내적인 것 자체는 주님의 왕국 속에 있는 것들, 고로 최고로 참 목적 자체에 있는 것들이다. 이는 주님의 말씀을 예로 놓고 생각해도 마찬가지이다. 신성의 관심사에 관심을 두는 이들은 주님의 말씀을 글자에 주목해서 보는 일이 결코 없다. 글자 내지 글자 의미는 교회와 주님의 왕국 속에 있는 천적, 영적인 것을 표현하고 의미하고 있다고 본다. 이 사람은 글자 의미를 이것들을 생각하는 도구적인 수단으로 간주한다. 이와 같이 보는 것이 주님의 보심(sight)이었다.

그리고 별들을 세어 보라. 이는 별자리를 정신적으로 조망함에 있는 선하고 진정한 것을 표현함을 의미하는데, 이는 방금 말해진 사항들로부터, 그리고 “별들”이 선하고 진정한 것들이다로부터 분명해진다. “별들”은 말씀에서 자주 언급된 단어이다. 말씀 어디에서 이든 별들은 선하고 진정한 것들, 반대 의미로는 악하고 거짓인 것들을 의미한다; 이를 달리 말하면, 그것들은 천사들과 천사들의 공동체, 반대 의미로는 악령들과 그들의 집단을 의미한다; 그러나 악령과 그들의 집단들을 표시하는 별들은 방황한다. 이 별들은 [다른 세계에서] 매우 자주 나타난다.
하늘(skies, heavens)과 땅에 있는 모든 것들은 천적, 영적인 것들에 대한 표현물이다는 것은 이런 명백한 암시를 받아 증거되어졌다. 즉 하늘과 땅에 눈에 나타나는 것들과 비슷한 것들이 영들의 세계에서 보도록 표출되어진다는 것이다. 이것은 청명한 날 만큼이나 분명하다; 그리고 거기에는 표현된 것 밖에 없다. 예를 들면, 별이 많은 하늘이 나타날 때, 그리고 그 안의 별들이 고정되었을 때, 이것들이 선하고 진정한 것들을 의미함이 즉시 알려진다; 그리고 별들의 방황함이 나타날 때, 그것들은 악하고 거짓인 것들이 의미된다는 것이 즉시 알려진다. 별들의 빛남과 반짝임으로 부터 그것들이 어떤 종류인지 알게 된다; 이 외에도 수없이 많은 다른 것들이 있다. 이로부터, 누군가가 지혜롭게 생각하고 싶다면, 그는 땅에 있는 모든 것의 근원을 알런지 모른다, 즉 그 근원이 주님이시다는 것을 알런지 모른다; 그리고 그것들이 땅에서 추상적으로가 아니고 실제적으로 생겨나는 이유는 주님으로부터 있는 천적, 영적인 모든 것들은 살아있고 실재(real)이기 때문(또는 그것들은 “실체(substantial)”라 불리움)이다. 하여, 그것들은 최말단 본성(자연계)에서 자체들을 물질적으로 증명한다. [1632항도 참조하라].
별들이 선하고 진정한 것을 표현한다는 것을 아래 인용 구절로부터도 알게 된다. 이사야서에서:
하늘의 별들과 별자리들이 자기들의 빛을 비추지 않는다; 태양은 그것의 나감에서 어두워 질 것이다; 그리고 달은 그녀의 빛을 빛나게 하지 않는다. 나는 세상에 있는 악을, 사악한 자에게 있는 불법을 방문할 것이다 (이. 13:10, 11);
위 구절은 방문의 날을 다룬다. “별들과 별자리”가 여기서 별과 별자리를 뜻하지 않을 것은 누구나 짐작되는 대목이다. 이는 선하고 진정한 것을 뜻한다; 그리고 “태양”은 사랑을; 그리고 “달”은 신앙을 뜻한다; 악들과 거짓들이 어둠의 원인이다는 것이 취급되어진다.
에스겔서에서:
내가 너희를 절멸할 때, 나는 하늘을 덮을 것이다, 그리고 하늘의 별들을 검게 만든다; 나 는 태양을 구름으로 덮을 것이다, 그리고 달은 그녀의 빛을 발하지 않을 것이다; 모든 빛의 발광체들을 나는 네 위에서 검게 만들 것이다, 그리고 어둠을 네 토지 위에 둘 것이다
(이. 32:7, 8),
위도 의미는 비슷하다. 요엘서에서:
땅이 그분 앞에서 뒤흔들렸다, 하늘이 전율했다, 태양과 달이 검어졌다, 그리고 별들이 그 것의 빛남을 철수했다 (욜. 3:15),
위도 뜻함은 앞 인용 구절과 비슷하다. 다윗서에서:
여호와를 찬양하라, 태양과 달아; 그분을 찬양하라, 모든 너희 빛나는 별아; 그분을 찬양하 라, 너희 하늘의 하늘아 (시. 148:3, 4),
같은 의미를 담고 있다.
“별들”이 별을 뜻하지 않고, 선하고 진정인 것을 뜻한다는 것, 또는 다른 말로, 선하고 진정인 것들에 있는 이들, 즉 천사들을 뜻하는 것을 계시록서에서 볼 수 있다:
나는 사람의 아들을 보았다; 그리고 그분은 그분의 오른 손에 일곱 별들을 가지셨다. 네가 내 오른손에서 본 일곱 별들과 일곱 촛대들의 신비; 일곱 별들은 일곱 교회들의 천사들이 다, 그리고 네가 본 일곱 촛대들은 일곱 교회들이다 (계1:13, 16, 20),
다시:
네 번째 천사가 소리를 냈다, 그러자 태양의 삼분의 일이 강타 당했다, 그리고 달의 삼분의 일, 그리고 별들의 삼분의 일(이 강타 당했다); 그것들의 삼분의 일이 어두워졌다, 그리고 낮은 그것의 삼분을 일을 위하여 비추지 않았다, 그리고 밤도 마찬가지였다 (계. 8:12),
위 구절을 보면 선하고 진정한 것이 어두워졌음이 분명해진다. 다니엘서에서:
작은 뿔이 나왔다, 이것이 남쪽을 향하여와 동쪽을 향하여와 [이스라엘의] 장식품을 향하 여 한껏 자랐다; 그리고 그것은 하늘의 군대에까지 자랐다; 그리고 군대의 얼마, 별들의 얼 마를 땅에 내던졌다, 그리고 그것들을 짓밟았다 (단. 8:9, 10).
위 말들은 “하늘의 군대”와 “별들”이 선하고 진정인 것들이다를 명백히 보여 준다.
이 구절로부터, 마태복음서에 있는 주님의 말씀들에 의해 뜻해지는 것을 알 것이다:
시대의 종말에, 이 날들의 고뇌 후 즉시 태양은 어두워질 것이고, 달은 그녀의 빛을 주지 않을 것이고, 별은 하늘로부터 떨어질 것이다, 그리고 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릴 것이다
(마. 24:29).
그리고 누가복음서에서:
그리고 태양에, 달에, 별들에 표시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땅 위에서는 나라들이 괴롭힘을 당해 자포자기함에 있다; 바다와 파도가 날뛴다 (눅. 21:25);
위 구절에서, 태양이, 달이, 별이 태양과 달과 별을 전혀 뜻하지 않는다. 그것들이 표현하는 것은, 태양은 사랑의 천적인 것을, 달은 사랑의 영적인 것을, 별은 선하고 진정인 것을 표현한다, 이것들이 시대의 종말 가까이에서, 즉 신앙이 없고, 선행이 없는 때, 어두워진다는 것이다.

만일 네가 셀 수 있다면. 이는 사랑의 열매 풍성함과 신앙의 번성함을, 다른 말로, 선의 열매 풍성함과 진리의 번성함을 의미하는데, 이는 설명없이 납득될 것이다. 그 이유가 이 말들은 세어질 수 없다를 뜻함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네 씨가 있을 것이다. 이는 주님의 왕국의 상속자를 의미하는데, 이는 “씨”의 의미가 사랑과 이로부터 파생된 신앙, 다른 말로 하면, 천사와 인간 모두에서 사랑과 신앙에 있는 이들이다로부터 분명해진다. “씨”가 이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여러 대목에서 이미 말했다. 이 말들은 일반적으로는 주님의 왕국을 의미하고, 이 왕국은 아주 광대하고 무수한데, 이말을 누구도 믿은 적이 없다는 것; 그런고로 이 왕국은 광대함이라 표현만 할 수 있을 뿐이다. 이 광대함은 차후 주님의 신성한 자비로부터 더 취급할 것이다 이 광대함은 이 구절의 말, “지금 하늘을 향하여 보라, 그리고 네게 셀 수 있다면 별들을 세어 보아라; 그리고 그분이 그에게 말하셨다, 그렇게 네 씨가 있을 것이다”에 의해서도 의미되어 있다. 이 말들은 무수한 선들과 지혜와 총명의 진리들이 이에 수반되는 행복과 함께 모든 천사들 안에 있다를 의미한다.

6절. 그리고 그는 여호와를 믿었다, 그리고 그분은 그것을 정의를 위해 그에게 전가하셨다. “그는 여호와를 믿었다”란 그때 당시 주님의 신앙을 의미한다. “여호와께서는 그것을 정의를 위해 그에게 전가하셨다”란 이 시점에서 주님은 처음 정의가 되셨다는 것(만드셨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는 여호와를 믿었다. 이는 그때 당시 주님의 신앙을 의미하는데, 이는 말 자체와 내적 의미에서 말의 연결 상황으로부터 분명해진다; 즉 주님은 세상에서 사시는 동안, 계속적인 시험의 전투 안에 계셨다는 것, 그리고 계속적인 승리하심이 있었다는 것, 이 승리는 꾸준한 신뢰와 신앙으로부터, 즉 그분이 순수한 사랑으로부터 온 인류의 구원을 위해 싸우셨기 때문에, 그분은 정복할 수 밖에 없으셨다는 것이다; 이것이 “여호와를 믿음”에 의해 뜻해진다. 누군가가 사랑으로부터 싸운다면, 그의 신앙이 무엇인지는 사랑으로부터 알려진다. 누군가가 이웃을 향한 사랑과 주님의 왕국을 향한 사랑 외의 어떤 사랑으로부터 싸운다면, 이는 신앙으로부터 싸우는 것이 아니다, 즉 “여호와를 믿는” 것으로부터 싸우는 것이 아닌, 자기가 사랑하는 것 안에서 싸우는 것이다. 그 이유가 그가 싸우는 목적이 되는 사랑 자체가 그의 신앙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천국에서 가장 큰 자가 되기를 사랑함으로부터 싸우는 자는 여호와를 믿기 보다는 자신을 믿고 있다. 그 이유가 큰 자가 되기를 바램은 타인을 명령하기를 바램이기 때문이다; 고로 그는 명령함을 위해 싸우는 셈이다; 이런 예는 많다. 그리고 사랑 자체로부터 그가 싸울 때, 사랑 자체가 그의 신앙이 무엇인지 알려 준다.
그러나 그분의 시험의 모든 전투에서 주님은 자기를 사랑함, 또는 그분 자신을 위해 결코 싸우시지 않았다. 그러나 우주에 있는 모든 것을 위해서이고, 천국에서 가장 큰 자 이기 위해서도 아니었다, 그 이유가 큰 자 됨은 신성한 사랑에 반대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분은 작은 자가 되는 것조차도 거의 원하지 않으셨다. 그분이 원하신 전부는 모든 이가 자신들의 어떤 것을 만들고 구원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마가복음서에서 말하신다:
세배대의 두 아들이 말했다, 당신의 영광 안에서 하나는 당신의 오른쪽에, 다른 하나는 당 신의 왼쪽에 앉게 하여 주십시오. 예수께서 말하셨다, 너희 사이에 큰 자가 되려는 자는 누 구든지 너희의 섬기는 자일 것이다. 너희 중에 첫째되는 자는 누구든지 모두의 종일 것이 다. 그 이유가 사람의 아들은 섬김을 받으려고 온 것이 아니라, 섬기려고 왔고, 그분의 혼 을 많은 자를 위한 몸값으로 주기 위해 왔기 때문이다 (막. 10:37, 43-45).
이것이 사랑이다, 이것이 신앙이다, 이로부터 주님은 (지상에서 지옥의 패거리들과) 싸우셨다, 그리고 이것이 여기서 “여호와를 믿었다”에 의해 뜻해지고 있다.

그분은 그것을 정의를 위해 그에게 전가하셨다. 이는 이 시점에서 처음 정의 가 되셨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는 주님이 취급되는 의미인 내적 의미에 있는 것들의 연결로부터 알런지 모른다. 주님만이 온 인류를 위해 정의가 되셨다는 것은 그분만이 신성한 사랑으로부터 싸우셨다는 사실로부터, 즉 온 인류를 향한 사랑으로부터 인류의 구원만을 그분의 전투에서 바라신 유일한 것이다는 사실로부터 알런지 모른다. 그분의 인간 본질에 주목해보면, 그분은 정의로 태어나시지 않았고 시험의 전투와 승리를 통하여 정의가 되셨다. 이는 그분 자신의 힘으로부터 였다. 그분이 싸우시고 이겨내실 때마다 이 정의는 (총체적) 정의를 위해 그분에게 전가되었다, 즉 그것은 그분이 지닌 정의에 보태졌다, 그리하여 계속 보태져서 결국 순수한 정의가 되신 것이다.
인간 아버지로부터 태어난 자, 또는 인간 아버지의 씨로부터 태어난 자기 자신으로부터 싸울 때, 그는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 외의 다른 사랑으로부터 싸울 수 없다. 고로 천국의 사랑으로부터가 아닌 지옥의 사랑으로부터 이다. 그 이유가 이것은 자기 아버지로부터의 것에 그의 자신의 행동에 의해 획득된 자기 자신이 보태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자기는 악마에 맞서 자신(의 힘)으로부터 싸운다고 상상한다면 거대한 실수이다. 마찬가지로 자신의 힘으로 자신을 정의롭게 만들기를 바라는 자, 즉 선행의 선들과 신앙의 진리들이 자신으로부터 있다 라고, 결과적으로 이것들을 수단으로 천국에 갈 공적을 쌓았다고 상상하는 자는 오히려 신앙의 선과 진리에 맞서 생각하고 행동하는 셈이다. 그 이유가 신앙의 진리, 즉 진리 자체는 주님이 싸우신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가 신앙의 진리에 맞서 생각하고 행동하기 때문에 그는 주님으로부터 그분 자신의 것을 갈취하여, 주님의 것을 그의 자신이라고 만든다, 다시 말해, 그는 주님의 자리에 자신을 앉힌다, 그리하여 자신을 지옥의 것으로 입힌다. 이런 사람은 천국에서 큰 자, 가장 큰 자가 되기를 바라고 있다; 이로부터 그들은 주님께서 가장 큰 자가 되려고 지옥들과 싸우셨다고 거짓되게 믿는다. 이런 공상들과 수반한 인간의 자기 자신인 것은 마치 진리인듯 나타나나, 아주 정반대이다.
주님은 정의가 되시기 위해 세상에 오셨다는 것, 그리고 그분만이 정의 이시다는 것은 예언자들에 의해 미리 말해졌다. 그러므로 그분이 오시기 전 이는 알려지고 있었다; 또한 그분은 시험을 통해 모든 악들과 모든 지옥들을 제압하는 승리를 통하지 않고서는 정의가 되실 수 없었다. 예레미야서에서:
그분의 날에 유다는 구원될 것이고, 이스라엘은 안심하고 살 것이다. 여호와 우리의 정의가 그분의 이름이고, 우리는 그분을 그렇게 부를 것이다 (예. 23:6).
같은 예언서에서:
이 날, 그 시각에 나는 다윗에게서 정의의 가지가 자라게 할 것이다, 그리고 그는 토지에 공정과 정의를 행할 것이다. 이 날에 유다는 구원되고, 이스라엘은 편안히 거주할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그들은 그분을 부를 것이다. 여호와 우리의 정의 (예. 33:15, 16).
이사야서에서:
그분이 보셨다, 그리고 사람이 없었다; 그리고 그분은 중재자가 없음을 이상히 여기셨다; 그리고 그분의 팔이 그분에게 구원을 가져 왔다, 그리고 그분의 정의가 그분을 받치었다. 그리고 그분은 갑옷으로 정의를 입으셨다, 그리고 그분의 머리 위에 구원의 투구를 쓰셨다 (이. 59:16, 17; 그리고 63:3, 5도 참조).
“그분의 팔”은 그분 자신의 힘을 뜻한다. 주님만이 정의이시기 때문에, “정의의 주택” 역시 예. 31:23; 50: 7에서 언급되고 있다.

7절. 그리고 그분은 그에게 말하셨다, 나는 여호와, 이 토지를 상속받아 너에게 주려고 갈대아 우르에서 너를 인도한 여호와이다.

그분이 그에게 말했다, 나는 여호와이다. 이는 여호와이신 주님의 내적 인간, 이로부터 주님이 지각을 가지셨음을 의미하는데, 이는 이미 말해진 바로부터, 즉 주님의 내적 측면, 주님이 아버지로부터 받은 것은 무엇이든 그분 안에서 여호와이셨다. 그 이유가 그분은 여호와로부터 임신되셨기 때문이다. 인간은 자기 아버지로부터 받은 것이 있고, 그의 어머니로부터 받은 것이 있다. 자기 아버지로부터 그는 내적인 모든 것, 그의 혼 자체, 또는 자기 아버지로부터 있는 생명을 받는다; 그러나 어머니로부터 외적인 모든 것을 받는다. 다시 말해, 내면적 인간, 영 자체는 아버지로부터 이다; 그러나 바깥쪽 인간, 또는 신체 자체는 어머니로부터 이다; 이것을 모든 이가 쉽게 납득할 수 있는 방법은 이를 생각해보면 된다. 즉, 혼 자체는 아버지에 의해 이식되어진다, 그리고 이 혼은 난자 안에서, 또는 매우 작은 형체에서 옷입혀지기 시작한다. 이후에 난자 안에서 이든, 자궁 안에서 이든 추가되는 것은 무엇이든 어머니로부터 이다, 그 이유가 이외 다른 추가물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주님의 내적 측면은 여호와이셨음을 알런지 모른다. 그러나 어머니로부터 받았던 외적인 것이 신성, 또는 여호와와 하나되어야만 하셨는 바, 이를 시험의 전투와 승리를 통하여 성취하셨다. 이런 단계들에서 그분은 여호와와 이야기하시되 또 다른 사람과 이야기하시듯 하실 수 밖에 없으셨던 것이다. 그럼에도 그분은 결합이 결과된 만큼에서는 여호와와 이야기하셨다. 지상 위 어느 누구보다 더 완전한 지각을 그분은 가지셨는데, 이것은 그분의 내적 측면으로부터, 즉 여호와로부터 였다. 이것이 “여호와께서 그에게 말하셨다”라는 말에 의해 내적 의미에서 의미되어 있다.

갈대아 우르에서 너를 인도한. 이는 그분의 외적 인간의 첫 상태를 의미하는데, 이는 “갈대아 우르”의 의미로부터 알런지 모른다. 주님께서 출생으로부터 받으신 어머니쪽의 것, 또는 어머니로 유전된 것이 여기서 “갈대아 우르”에 의해 의미되고 있다. 이 본성은 앞에서 서술했다. 그분이 악들과 거짓들을, 즉 지옥들을 정복하실 때는 언제든지 그분을 인도되게 하신 것은 어머니쪽의 것이었다.

이 토지를 상속받아 네게 주기 위하여. 이는 주님의 왕국을, 이 왕국의 소유자는 그분 뿐이시다를 의미하는데, 이는 “토지”, 여기서는 거룩한 토지, 또는 가나안의 토지의 의미가 천국의 왕국이다로부터 분명해진다; 또한 “상속됨”의 의미로부터 알게 되는데 이는 몇 번 말했다. “토지를 상속받는다”가 천국의 왕국을 소유하는 것을 의미함이 여기서는 주님의 인간 본질이라 단정되어진다; 그 이유가 신성 본질에 관련하여 그분은 우주의 소유자, 결과적으로 영원으로부터는 천국의 왕국의 소유자이시기 때문이다.

8절. 그리고 그는 말했다, 주 여호비여, 제가 그 토지를 상속받으리 라는 것을 어떻게 알겠습니까?

그는 말했다, 주 여호비여. 이는 대화함, 말하자면, 내면의 인간이 내적 인간과 대화함을 의미하는데, 이는 앞 절, “여호와께서 그에게 말하셨다”의 말과의 연결에서 말해진 바로부터; 또한 이 장 2절에서 주 여호비에 관해, 이는 내면의 인간이 내적 인간, 또는 여호와, 특히 그분이 시험에 계실 때 말해진 바로부터 분명해진다.

제가 그것을 상속받는다는 것을 어떻게 제가 알겠습니까? 이는 주님의 사랑이 겪는 시험이 충분히 보증되기를 바라셨음을 의미하는데, 이는 단어 자체에 함축된 의구심으로부터 알아진다. 시험에 있는 그분이 기대하는 목표에 의심하며 있으시다. 기대하는 목표는 사랑인데, 이에 맞서 악령 내지 악귀들이 대든다. 그것 때문에 목표가 달성될지 의심 가운데 있어진다; 그리고 사랑이 더 커질 수록 의심함 역시 더 무겁게 놓인다. 만일 사랑된 목표가 의심 안에 있지 않고 자포자기로까지 주저 앉았다면 시험도 없었을 것이다. 결과에 대한 보증이 승리에 선행되고 승리에 속해 있다.
이런 경우가 어떻게 시험과 더불어 있는지 아는 이는 거의 없을 것 같아 간략히 설명을 보탠다. 악령들은 인간이 사랑하는 것들 외의 다른 것과는 결코 싸우지 않는다. 인간이 열렬하게 더 사랑하면, 더 맹렬한 전투가 수행된다. 선에 대한 애착에 속하는 것과 맞서는 것은 악귀들이고, 진리에 대한 애착에 속하는 것과 맞서는 것은 악령들이다. 이것들은 인간이 사랑한다는 것을 알아 채거나, 또는 인간이 친애하고 즐거워하는 것을 마치 냄새를 맡듯 알아 채는 때는 그것이 제 아무리 작더라도 즉각 맹습하여 파괴하려 골몰한다. 그리고 그것 때문에 전체 인간까지도 파괴한다. 그 이유가 인간의 생명은 그의 사랑들 안에 있기 때문이다. 이것들에게는 이렇게라도 인간을 파괴하는 것 이상 큰 쾌락이 없어 주님이 몰아내 주지 않으면 그만 두는 일은 영원까지도 없다. 악의적이고 교활한 이것들은 인간의 사랑 자체들 안으로 아첨하는 방식으로 은근히 빌붙는다. 그리하여 인간을 그들 사이에 데려다 놓는다. 그 즉시 그것들은 인간의 사랑들을 파괴하려 공격하고, 그것으로 인간을 살해한다. 이런 짓들은 인간이 납득할 수 없는 수 천 가지 방식으로 자행된다.
이것들은 단순히 선하고 진정한 것 가지고 논쟁하는 방식으로 전투를 수행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이런 방식이 효력이 약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선들과 진리들을 뒤집는다, 그리고 탐욕이나 설득들의 어떤 불을 가지고 불을 지른다. 이렇게 하면 인간은 자기가 (지닌 것과) 비슷한 탐욕과 설득 안에 있다는 것 외에 더 이상 알지 못 한다; 그리고 동시에 그것들은 자기들이 그 밖의 어떤 것에 있는 인간의 즐거움으로부터 낚아 챈 즐거움을 가지고 이 불들이 타오르게 한다. 이런 과정에서 그것들은 최고로 사기적으로 그에게 자기들의 것을 감염시키고 퍼뜨린다. 이 짓을 아주 노련하게 실행하므로 인간은 주님의 도움이 없다면 이런 것이 실제로 그런지를 결코 알지 못한다.
그것들은 양심을 만드는 진리에 대한 애착에도 비슷한 수법을 쓴다: 그것들은 양심의 어떤 것, 그것이 어떤 종류이든, 양심의 어떤 것인 줄을 알아 채면, 그 즉시 거짓들과 인간이 등한시한 것, 즉 그의 약점으로부터 자신들에게 애착을 만들어 낸다. 이를 수단으로 진리의 빛 위에 그늘을 드리우게 한다, 그리하여 양심을 뒤집는다; 또는 불안 걱정을 유발하거나 그를 괴롭게 한다. 그것들 역시 한 가지 것에 고집적으로 생각을 붙들고 있다. 그리고 그것을 공상으로 채운다; 동시에 공상과 더불어 남모르게 탐욕으로 옷 입힌다; 이 외에도 그것들의 기교는 너무나 많고, 납득되는 서술은 하기도 힘들다. 우리가 이렇게 열거한 것은 지극히 일반적인 한 가지 예일 뿐이다. 어쨌든 이런 방식으로 그것들은 인간의 양심에 자기들의 길을 만들 수 있다는 것, 이 길을 통해 인간을 파괴하는 것이 그것들의 가장 큰 즐거움인 것만은 틀림이 없다.
이상의 몇 가지 서술들, 비록 아주 적지만, 시험이 무엇인지, 시험은 일반적으로 우리의 사랑에 대등하여 있다는 것을 알런지 모른다. 이로부터 주님의 시험의 본성이 무엇인지 가늠될런지 모른다. 이 시험은 가장 격렬한 시험이다. 사랑의 위대함에 비례하여 시험의 끔직함도 비례한다. 주님의 사랑은 전체 인류의 구원이었고, 최고로 열렬했다; 결과적으로 최고 수준에서의 선에 대한 애착과 진리에 대한 애착의 총체였다. 이에 맞서 최고로 악의 있는 간계와 독극물을 가지고 지옥들이 전투를 수행했다; 그러나 주님은 여전히 그분 자신의 힘으로 그것들을 정복하셨다. 승리하심은 악령과 악귀가 더 이상 어떤 짓을 못하도록 하는 결과를 가져 왔다. 그 이유가 그들의 생명은 그것들이 파괴할 수 있음 안에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들이 인간이 저항할 수 있는 속성을 가진 것을 알아 챌 때, 그것들은 첫 출발지에서 도망한다. 이는 그것들이 천국의 첫 입구 가까이에 다가가 질 때 도망쳤을 때나 다름 없다. 그 이유가 그것들은 천국 입구에 다가가면 공포와 전율로 사로잡혀 자신들을 뒤쪽으로 내던지기 때문이다.

9절. 그리고 그분은 그에게 말하셨다, 너는 삼 년 된 암소, 그리고 삼 년 된 암염소, 그리고 삼 년 된 수양, 호도애(산비둘기)와 어린 (집)비둘기를 가져 오라.

그분은 그에게 말하셨다. 이는 지각을 의미하는데, 이는 2, 7절에서 이에 관해 이미 말해진 바로부터 분명해진다. 지각 자체는 일종의 내적인 말밖에 더 아니다, 내적 말은 지각을 수단으로 자체를 명백히 드러낸다. 양심을 포함해 모든 내면의 지령은 이밖에 더 아니다; 지각은 이보다 더 높은 형체, 또는 더 깊은 형체이다.

삼 년 된 암소, 그리고 삼 년 된 암염소, 그리고 삼 년 된 수양을 가져 오라
이는 교회의 천적인 것들에 대한 표현을 뜻하는데, 이는 같은 짐승이 제물에서 사용될 때의 의미로부터 알게 된다. 분별있는 사람이라면 제물에서 사용되는 다양한 동물들이 제물들이다는 것 밖에 더 다른 의미가 없다고 믿을 수 있는 자는 없다. 즉 수소와 거세된 수소, 또는 송아지가 양, 염소 새끼, 암염소와 똑같은 의미를 말하거나 어린 양이나 비둘기가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믿을 수 있는 자는 없다. 각각의 동물은 각각의 특수한 의미를 가진다. 이는 이 동물을 바치라고 명령되었는데 바치는 자 마음대로 다른 동물을 바치는 경우가 없다는 사실로부터 생각해도 분명해진다. 즉 매일 태워바치는 제물에서, 안식일과 축절들에서, 자유 의지에서 바치는 동물에서도, 서원을 할 때 바치는 제물에서도, 평화 제물에서도, 죄있음과 죄에 대한 보상으로 바치는 제물에서도, 깨끗해짐에 대한 제물에서도 각기 지정된 제물이 명명되어 있다. 이 동물들 각각이 어떤 특별한 것을 표현하고 의미하지 않는다면 이런 상세한 구별은 결코 있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각기 특별한 종류에 의해 의미되는 것을 여기서 설명하는 것은 너무 지루할지 모른다; 지금은 천적인 것들이 동물들에 의해, 영적인 것들이 새들에 의해 의미되어 있다는 것; 그리고 각 종류에 의해 어떤 특별한 천적, 또는 영적인 것이 의미되어 있다는 것만을 아는 것으로 충분할 듯 싶다. 유대 교회 자체, 그리고 이 교회에 관련된 모든 것은 주님의 왕국 속에 있는 것들, 즉 천적이고 영적인 것들, 또는 사랑과 신앙 속에 있는 것들을 표현한다. 이는 앞서 살핀 깨끗하고 유용한 짐승의 의미로부터 충분히 알았을 것이다. 태고 교회에서 이것들이 천국의 선들을 의미하였는데, 이후에 교회가 외적 측면 쪽으로 기울면서 그 기운 만큼 교회의 예배 역시 그 만큼 예배의 가치가 피상적(껍데기) 예배로 기울어 갔다. 급기야 (유대 교회 같이) 외적인 것만 남은 교회, 즉 표현뿐인 교회에서 바쳐지는 제물 역시 의미는 텅빈 표현물에 불과했다.
여기서 교회의 상태가 취급되고, 이 상태가 어떨 것인지를 미리 말해 주는 바, 이것이 아브람에게 교회의 미래 상태를 표현하는데 사용되는 똑같은 종류들을 가지고 보여지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내적 의미에서 이와 같은 것들이 의미하는 바가 있다, 실로 모든 이들도 그렇게 짐작하고 생각될 것이다; 그 이유가 만일 삼 년 된 암소, 삼 년 된 암염소, 삼 년 된 숫양, 호도애, 어린 비둘기를 가져 오라 하시고, 그것들을 둘로 갈라 놓으라 하신 것, 등등에 아무런 의미가 없다면 무엇 때문에 이런 명령이 있을 필요가 있을까? 그러나 이런 것들에 의미가 있다는 것을 아래에서 살핀다.

“암소”는 외면의 천적인 것들을, “암염소”는 내면의 천적인 것들을, 그리고 “숫양”은 영적-천적인 것들(중간의 천적인 것들)을 표현하는 표현물을 말하는데, 이는 제물들로부터 알런지 모른다. 이에 관하여는 주님의 신성한 자비로부터 제물이 취급되는 장소에서 살핀다. 여기에서 세 가지 천적인 특질이 열거되고 있다. 즉 외면의 천적인 것, 내면의 천적인 것, 영적-천적인 것이다. 외면의 천적인 것은 외적 인간 속에 있는 것들이고, 내면의 것들은 내적 인간 속에 있는 것들이고, 영적-천적인 것들은 이것들로부터 파생되는 것들(offshoots)이다. 천적인 것 자체는 주님을 사랑함과 이웃을 향한 사랑이다. 천적인 것들이 주님으로부터 흘러든다. 사실상 주님으로부터 내적 인간을 통하여 외적 인간으로 흐르는 것이다. 이 흐름이 내면의 인간 안에서는 내면의 천적인 특성이라고, 외적 인간 안에서는 외면의 천적인 특성이라고 불리운다. 외면의 천적인 특성은 선에 대한 모든 애착이다; 뿐만 아니라 선에 대한 애착으로부터 오는 모든 기쁨이다. 사랑의 선과 선행의 선이 이것들 안에, 즉 선에 대한 애착과 그것에서 파생된 기쁨에 있는 한, 그 만큼 천적 특성이 그것들 안에 있고, 행복 역시 그 안에 있다. 그러나 영적-천적인 것은 선에 대한 애착을 지닌 진리에 대한 모든 애착이다. 다시 말해 선에 대한 애착을 아버지로 하여 출생된 진리에 대한 모든 애착이다; 고로 선행을 담고 있는 신앙, 또는 선행을 아버지로 하여 출생한 신앙이다.

“삼 년 된”은 시간과 상태 측면에서 교회의 모든 것들을 포함하는데, 이는 말씀에서 “3”의 의미로부터 분명해진다. “3”이 교회의 시간이 가득함, 즉 교회의 태생(origin)으로부터 그것의 끝장(end)까지의 시간이, 고로 그것의 모든 상태가 의미되어진다. 그러므로 교회의 마지막 때가 셋째 날, 셋째 주, 셋째 달, 삼 년째, 세 번째 시대에 의해 똑같이 의미되고 있다. 교회의 상태가 숫자 3에 의해 의미되듯, (작은) 교회인 모든 이의 상태도 의미한다. 그리고 교회 속에 있는 모든 것도 의미한다.
“삼 년 된 암소”가 교회의 마지막까지, 즉 교회가 황폐해지는 때, 또는 황무해지는 때까지를 아우르는 시간과 상태를 의미하는데, 이사야서에서 알런지 모른다:
내 심장이 모압 위에서 소리친다; 소알로 도망친 그녀의 도망자는 삼 년 된 암소이다; 루힛 의 올라가는 길로, 울면서 그는 그것에서 갈 것이다; 호로나임 길에서 그들은 조각으로 부 스러지는 함성을 내질렀다 (이. 15:5).
예레미야서에서:
기쁨과 환희가 갈멜로부터와 모압으로부터 사라졌다. 나는 포도즙틀로부터 포도주가 중단 되게 만들 것이다; 즐거움에 소리지르며 틀을 밟는 자가 없을 것이다; 거기서의 환호함은 진짜 환호함이 아니다. 헤스본에서의 외침이 엘르알레까지, 야하스까지, 그들이 그들의 음 성을 소알로부터 호로나임-삼 년 된 암소까지 발음했다; 그 이유가 니므림의 물들이 황폐 해졌기 때문이다 (예. 48:33, 34).
“모압”에 의해, “소알루힛의 올라 감”, “헤스분의 외침이 엘르알레까지”에 의해, “아하스”에 의해, “호로나임”에 의해, “니므림의 물들”, 그리고 “삼 년 된 암소”에 의해 의미된 것을 알지 않으면 이것들이 무엇을 뜻하는지 지각할 자는 아무도 없다. 이것은 극도로 황폐함이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리고 산비둘기(호도애)와 어린 (집) 비둘기. 이는 교회의 영적인 것을 표현한 표현물이다는 것은 일반적으로의 새의 의미와 특별한 측면에서인 산비둘기와 집비둘기의 의미로부터 분명해진다. 새가 영적인 것을 의미하는 것, 이것이 신앙, 또는 진리에 속해 있는 것, 그러므로 지적이고 합리적인 것들이다는 것은 40, 745, 776, 991항에서 이미 살핀 바 있다; 또한 “비둘기(dove)”는 신앙의 선들과 진리들을 의미한다. 그것들이 제물에서 의미되는 것은 주님의 신성한 자비로부터 제물이 다루어지는 항목에서 설명할 것이다. 말씀에서, 특히 예언서에서, 천적인 것이 주제로 다루어지면, 영적인 것도 다루어지는 바, 이런 방법으로 그 둘은 결합되고 있다. 그 이유가 이것이 저것으로부터 있기 때문이고, 그렇게 해서 이것은 저것에 속해 있기 때문이다 이에 관하여 살핀 바 있다.

“산비둘기(호도애)”는 외면의 영적인 것들을 표현하고, “어린 집비둘기”는 내면의 영적인 것들을 표현하는데, 이는 천적인 것을 살필 때 말한 것으로부터, 즉 외면의 것은 “암소”가, 내면의 것은 “암염소”가, 중간의 것은 “숫양”이 의미한 대목에서 알 것이다.

10절. 그리고 그는 이 모든 것을 자기에게 가져오고 그것들을 한 가운데에서 나누고 각 짝이 다른 짝을 마주 보게 놓았다. 그리고 새들은 나누지 않았다.

그는 이 모든 것을 자기에게 가져 왔다. 이는 그렇게 되어졌음을 의미하는데, 설명이 필요 없을 것이다.

그것들을 한 가운데에서 나누었다. 이것이 교회와 주님을 의미하는 것은 이어지는 것으로부터 분명해진다; 그 이유가 천적인 것들이 암소, 암염소, 숫양에 의해 의미되고, 영적인 것들이 산비둘기와 집비둘기에 의해 의미되기 때문; 그리고 이것들을 나누어서 서로에게 마주 보게 놓았을 때, 이것들은 다른 의미를 가질 수 없다

그리고 각 짝이 다른 짝을 마주 보게 놓았다. 이는 천적인 것들에 있는 평행(유사함)과 상응을 의미하는데, 이는 이쪽에 있는 부분이 교회를 의미하고, 다른 쪽 부분은 주님을 의미한다고 생각해 봄으로부터 알런지 모른다. 그리고 이것들이 서로에게 마주 보게 놓일 때, 이는 평행과 상응밖에 더 다른 의미는 없다; 그리고 암소, 암염소, 숫양을 두 짝으로 나누어 놓았다, 그리고 이것들에 의해 천적인 것들이 의미되었는데(9절), 이는 천적인 것들에서는 평행과 상응이 있음이 분명해진다. 영적인 것들의 경우는 이와 다른데, 이제 설명할 것이다. 천적인 것들은 이미 설명한 대로 주님을 사랑함과 이웃을 향한 사랑에 속하는 모든 것이다. 사랑과 선행을 주는 것은 주님이시다; 이것을 받는 것은 교회이다. 둘을 하나로 하여 있는 것이 양심이고, 이 안에 사랑과 선행이 이식되어 있다; 그러므로 두 쪽의 중간 장소는 인간 안에서 지각, 내적 지령, 그리고 양심이라 불리운다. 지각, 지령, 양심 위에 있는 것이 주님의 것이다; 그 아래 있는 것은 인간 안에 있다. 양쪽이 나란히 서로를 주시하고 있기 때문에 평행(유사함)이 있다 라고 말해진다; 그리고 양쪽은 서로에 능동적 상태와 수동적 상태로서 서로 상응하기 때문에 상응이 있다 라고 말해진다.

그리고 새들은 나누지 않았다. 이것이 영적인 것들을 의미하는 것, 그것들 안에 유사함과 상응이 있지 않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는 “새들”이 (천적인 것들과 구별되는) 영적인 것을 의미함으로부터 분명해진다. 이는 9절에서 살핀 바도 있다; 그리고 아브람이 새를 나누지 않았다는 서술로부터도 분명해진다; 결과적으로 유사함과 상응이 없음을 말하는 것이다. 자주 말했던 바, 영적 (평면)의 것들에 의해서는 신앙의 모든 것들, 결과적으로 모든 교리적인 것들이 의미되어진다, 그 이유가 이것들이 비록 선행과 결합하지 않아 신앙에 속한다 라고 엄밀하게는 말할 수는 없을 지라도 신앙 쪽에 속한 것들이라 말해져야 하기 때문이다. 이것들과 주님 사이에 유사함과 상응이 있지 않다, 그 이유는 영적인 것들은 내적 지령, 양심을 수단으로 흘러 들지 않고, 내면이 아닌 외면인 가르침, 들음 같은 것을 수단으로 흘러 들기 때문이다. 이 방법에서 영적인 것들은 인간 안에서 자기들을 받는 그릇, 용기들을 만들어 낸다.
이것들의 더 큰 부분은 마치 진리들인 것처럼 나타나나, 진리들은 아니다. 대표적 예로, 말씀의 글자 의미 속에 있는 것들이다. 이것들은 진리를 표현하고, 진리를 의미하나, 그 자체가 진리는 아니다; 그것들의 어떤 것은 아예 거짓들일 경우도 있다. 그래도 그것들은 그릇의 역할은 한다. 그러나 주님 안에서 만큼은 본질적으로 진리들인 것밖에 없다. 이것들과 더불어서, 즉 외관의 진리(가상의 진리, apparent truth)쪽에서는 유사함과 상응이 없다. 그러나 사랑과 선행으로부터 있는 천적인 것들을 담아내는 섬김 역할에는 적절히 어울린다. 이 외관의 진리가 지적 부분이라는 구름을 구성한다. 이 구름에 주님께서는 선행을 서서히 주입하시어 양심을 만드신다.
예를 들면, 말씀의 글자 의미에 안주해 있는 이들의 경우, 그들은 주님이 인간을 시험쪽으로 인도하시고, 양심이 고통받게 한다 라고 상상한다. 그리고 그분은 악을 허용하시기 때문에 그분은 악의 원인이시다고도 상상한다, 그리고 그분은 악과 그것과 비슷한 것들을 지옥으로 내밀치신다고도 상상한다; 이것들은 외관의 진리들이고, 진리가 아니다; 그리고 그것들이 그 자체 진리가 아니기 때문에, 유사함도 상응도 없다. 주님께서는 진리가 아닌 외관의 진리를 인간 안에 본래 대로 놓아 두시고, 선행을 수단으로 그것들을 기적적으로 잘 사용되는 쪽으로 조절하시어 그것들이 천적인 것들을 위한 그릇을 담당하게 해주신다. 이런 것은 예배와 더불어서도, 종교적 가르침에서도, 도덕적 행동에서도, 마음씨 고운 이방인들의 우상들에서 조차도 섭리되어진다. 이는 고대 교회, 그 후에 유대 교회에서 수많은 의식 행위에 관련하여서도 같다. 의식 행위는 의식일 뿐 실상 그 자체가 진리는 아니다. 그래도 주님께서는 그것들에 대해 묵인하시고 허용하시고 방침까지 전달하여 명령하신다. 그 이유는 그 의식을 부모가 신성하게 붙잡고 있는 동안, 그들의 자녀들의 마음에 진리가 이식되고 유아 때로부터 진리가 인상지워지기 때문이다.
이런 내용들이 새들은 나누지 않았다는 서술에 의해 의미되어져 있다. 신성의 질서에 역행하지 않는 조건이라면, 한 때 인간의 견해가 된 것들, 그리고 인간이 거룩한 것으로 간주한 것들을 주님께서는 그 본래 대로 놓아 두신다. 그리고 유사함과 상응이 없을지라도 , 여전히 그분께서는 그것을 순응되게 하신다. 제물로 바친 새들을 나누지 않는 것은 유대 교회에서도 똑같이 실시되고 있다; 그 이유가 나누는 것은 그것들이 적당하게 상응하는 방식에서 서로 마주보는 것이기 때문이다. 위에서 말해진 것들은 적절하게 상응되지 않기 때문에 그것들은 다른 삶에서는 자신들을 교육받게 허용하는 이들과 더불어서는 말살되었고, 진리 자체가 선에 대한 애착 안에 이식되어진다. 유대 교회에서 새를 나누지 않는데 대한 이런 표현과 의미 때문에 새를 나누지 않은 것이 모세의 책에서 발견된다:
만일 여호와께 대한 그의 제물이 새를 태워 바침이다면, 그는 그의 제물로 호도애로부터, 또는 어린 집비둘기로부터 바쳐라. 그리고 그것을 날개들을 가지고 찢어라, 그러나 그것이 나누이게 하지 말라 (레. 1:14, 17)
그리고 죄를 위한 제물의 경우도 같다 (레. 5:7, 8).

11절. 새가 사체들 위에 내려 왔었고, 그리고 아브람은 그것들을 쫓았다.

새가 사체들 위에 내려 왔다. 이는 (천적, 영적인 것들을) 파괴하기를 바라는 악들과 거짓들을 의미한데, 이는 “새”의 의미가 거짓들이다로부터 분명해진다. 말씀에서 “새”는 진리를 의미한다 반대 의미일 경우, 거짓을 의미한다. 새가 거짓을 의미하는 경우에 관하여는 이미 살폈다. 이런 사항들이 신비에 속한다는 것은 모든 이들도 알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언급할 가치도 없었을 것이다. 신비함들이 무엇인지는 이미 서술했다. 그리고 교회에 관련된 의미, 즉 내적 의미의 연결로부터도 분명해진다.
주님께서 교회를 일으켜 세우셨을 때, 그 시작에서는 교회에 아무 흠도 없었다. 교인들은 다른 교인들을 형제라고 불렀다. 주님이 오신 후 일으켜 세워진 원시 기독 교회의 경우가 이러했다. 그때 당시 모든 교회의 어린이는 형제들로서 함께 살았다, 마찬가지로 서로를 형제라 부르며 서로 사랑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선행이 차가워져 가면서 사라져 버렸다; 선행이 자취를 감추자, 악이 선행의 자리를 계승했고, 이와 더불어 거짓이 슬며시 주입되었다. 이 거짓으로부터 종파나 이교, 이단이라는 말이 등장했다. 만일 선행이 그들을 주도하고 살아 있다 가정하면 비록 각 개인에게 교리적 차이는 있을지라도 종파나 이교 같은 단어가 돌출되지 않았을 것이다. 또한 첫째 가는 교리인, 주님, 영원한 삶, 말씀 같은 대목을 부정하지 않는다면, 또는 십계명 같은 신성한 질서에 따른다면, 각 자는 자기의 양심에 남아 있었을 것이다.
선행이 교회에서 사라질 때 그 자리를 계승한 악들과 거짓들이 여기서 아브람이 쫓은 “새들”로 뜻해진다. 다른 표현으로 말하면, 아브람으로 표현된 주님께서 이것들을 도망하게 놓아 두셨다. 아브람이 쫓은 것은 새였을 뿐이고 악과 거짓을 쫓은 것은 아니다; 천국에서 알고 있는 아브라함은 여느 사람으로서의 아브라함이다. 그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러나 주님만이 하실 수 있다; 이사야가 말한다:
당신은 우리의 아버지 이십니다, 그 이유가 아브라함은 우리를 모르고, 이스라엘은 우리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당신 오 여호와가 우리의 아버지, 우리의 구속자 이십니다; 당 신의 이름이 영원으로부터 있습니다 (이. 63:16).

그리고 아브람은 그것들을 쫓았다. 이는 주님께서 그것들을 도망하게 놓아 두셨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미 말한 바로부터 분명해진다. 또한 교회가 선행으로부터 물러나기 시작할 때의 경우와도 같다. 이때 악과 거짓은 도망하는데 더 쉽게 놓인다. 그 이유가 아직까지는 교회가 선행으로부터 아주 멀리 옮겨진 것은 아닌 상태에 있기 때문이다. 고로 인간의 마음들은 더 쉽게 구부려진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악과 거짓은 자체로부터 불어나고, 더 굳히고(확증하고), 강해진다; 이것이 이어지는 구절에서 취급된다.
주님께서는 가능한한 계속적으로 악들과 거짓들이 도망하게 놓아 두시는데, 그러나 양심을 통하여서이다. 그런데 우리의 양심을 제약한 것들이 느슨해질 경우, 주님께서 우리에게 흘러들게 해주는 매체가 사라지는 셈이 된다. 그 이유는 주님께서는 선행을 수단으로 그의 양심 안으로 흘러드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선행 대신에 새로운 매체가 이 선행을 계승하도록 만들어진다. 이것은 외적인 것, 즉 법의 두려움, 생명의 두려움, 명예나 재산에 대한 두려움이다. 그러나 이것들은 양심 속에 있는 것은 아니다; 이것들은 오로지 외적 제약들일 뿐이고, 이것들은 인간들로 타인과 어울려 공동체 안에서 사는 것을 가능하게 한다. 그리고 모두가 자기의 내향에 지닌 것이 무엇이든 개의치 않고 친구 같이 나타나게 해준다.
그러나 이 매체, 또는 이 제약(묶음)은 저쪽 삶에서는 아무 소용이 없다, 그 이유는 거기서는 외적인 것들이 제거되기 때문이고, 모든 이는 내향적으로 있는 것만 남아 있다. 도덕적, 시민적 생활에서 누구에게도 피해를 주지 않고, 성실한 친구 관계와 시민 관계의 행동을 수행했던 이들이 저쪽에 아주 많다. 뿐만 아니라 이들은 많은 이들에게 선을 베풀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모든 것이 자기를 위하여, 자기의 명예와 이득, 등등을 위하여서 일 뿐이다. 이들은 저세상에서 지옥들 사이에 있다. 그 이유는 그들이 자기 안쪽에 선과 진리를 지니지 못했기 때문이다. 오히려 악과 거짓, 증오, 복수, 잔인함, 간음질 같은 것을 내부에 지녔기 때문이다. 이것들이 이 세상에서는 그것들을 끄집어내 볼 수 없었을 뿐이다. 즉 외적 제약인 두려움이 존재하는 만큼에서 감추여 있는 것이다.

12절. 그리고 해가 저무는 때가 되었는데, 깊은 잠이 아브람 위에 떨어졌다, 그리고 큰 어둠의 공포가 그에게 떨어지고 있는 것이 보였다.

태양이 저물고 있었다. 이는 끝에 이르기 직전의 시간과 상태를 의미하는데, 이는 “태양”의 의미로부터 분명해진다. 내적 의미에서 “태양”은 주님을 의미한다. 그렇기 때문에 태양은 사랑과 선행으로부터 있는 천적인 것들을, 결과적으로 사랑 자체와 선행을 의미하는데, 앞에서 말한 적이 있다. 이로부터 “태양이 저뭄”은 교회의 마지막 상태, 이는 끝에 이름이라 불리우고, 이 상태는 더 이상 어떤 선행도 없는 상태를 표시함이 분명하다. 주님의 교회는 하루의 시간대에도 비교되어진다; 교회의 처음 시기는 태양이 떠오르는 시간대, 또는 새벽, 아침에; 교회의 마지막 시간대는 태양이 지는 시간대, 또는 저녁, 그리고 그늘이 강세를 가질 때, 그 이유가 이 두 가지 것은 비슷한 상황이기 때문이다. 교회는 일 년의 때로도 비교된다. 그것의 첫 시기는 봄철에, 모든 것들이 꽃 피울 때에; 모든 것이 비활성이 되는 시기 앞에 가을철이 있다. 또한 금속에도 비교된다; 교회의 첫 시기는 금 시대라 불리운다; 그것의 마지막 시기는 철과 진흙의 시대라 불리운다 (단. 2:31-33). 이상 모두로부터 “태양이 저뭄”이 의미하는 것은 태양이 아직은 보이는 시간대, 즉 끝에 이르기 직전의 시간과 상태임이 분명해진다. 이어지는 구절에서 태양이 저물었을 때 교회의 상태가 취급되어진다. 즉 짙은 어둠과 용광로의 연기가 있었고, 횃불이 쪼개진 조각 사이를 지나갔다.

깊은 잠이 아브람 위에 떨어졌다. 이는 주님의 지상 시대 당시 짙은 어둠 안에 있었다를 의미하는데, 이는 “깊은 잠”의 의미로부터 분명해진다. 자지 않고 있음에 비교하여 “깊은 잠”은 어두운 상태를 표시하다; 그리고 여기서는 이 상태가 아브람으로 표현된 주님의 탓으로 되어 있다; 깊은 잠 또는 어둠의 상태가 주님과 더불어 있던 적이 없다. 여기서의 경우는 다른 삶에서의 경우와 똑같다, 즉 거기서 주님은 언제나 태양, 그리고 빛 자체이시다; 그러나 악 앞에서 그분은 어둠으로 나타나신다; 그 이유는 주님은 각 사람의 상태에 따라 나타나시기 때문이다. 여기서도 마차가지로 교회가 어둠의 상태에 있을 때의 교회를 말하고 있다.
예를 하나 들어보자. 황폐함, 처벌함, 정죄함, 이것이 말씀의 많은 구절에서 주님이 그렇게 하신다고, 하여 그 원인이 주님 쪽에 있다; 그럼에도 황폐케하고, 처벌하고, 정죄하는 자는 교회의 사람이다. 사람들 앞에서 나타나기로는 주님께서 그렇게 하신다; 그 이유가 표현된 외관에 따라 말씀이 기록되었기 때문이다; 만일 인간이 외관에 의거 교육받지 않는다면, 그는 자신을 가르침을 받게 허용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가 거듭남의 후기에 접어 들어 공정과 선행의 신앙을 선물받아진 때 이후가 아니라면, 특히 거듭나는 자라 해도 초기일 경우 그는 외관에 반대되는 것을 납득하지도, 믿지도 않았을 것이다.
교회와 더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교회가 어둠의 상태 안에 있을 경우, 주님은 그 교회의 사람 앞에서 불명확한 채로 계신다, 그리하여 그분은 나타나시지 않는다, 즉 인정되시지 않는다; 설사 주님이 전혀 나타나시지 않는 정도로 불명료해도 주님은 인간 안에, 인간과 더불어 계신다. 희미해 있으심이 주님에 관련해 예견된다. 여기서는 “깊은 잠”과 더불어서 인데, 이것에 의해 교회의 어두운 상태가 의미된다.

큰 어둠의 공포가 그에게 떨어지고 있는 것이 보였다. 이는 어둠이 극심했다는 것, “어둠”은 거짓들을 의미하는데, 이는 “어둠”의 의미가 거짓들을 뜻한다는 것으로부터 분명해진다. 이제 살핀다. 태양이 “저물고 있는” 때인 교회가 끝에 오기 직전 교회의 상태가 “큰 어둠의 공포”로 묘사되어지고 있다; 그러나 태양이 “저물어 버린” 때인 교회의 상태는 “짙은 어둠”에 의해 묘사되어져 있다. 그리고 다른 것들이 17절에서 더 언급되었다.
이와 같은 것이 마태복음서에서 주님께서 말하신다:
태양이 어두워질 것이다. 달이 그녀의 빛을 주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별들이 하늘로부터 떨어질 것이다, 그리고 하늘의 힘들이 흔들릴 것이다 (마. 24:29).
위 구절은 세상의 태양이 어두워진다가 아니라 사랑과 선행에 속한 천적인 것들이; 달이 아닌 신앙으로부터 있는 영적인 것이; 별이 떨어진다가 아닌 교인과 더불은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들이 그렇게 된다는 것, 그 이유가 이것들은 “하늘의 힘들”이기 때문이다; 이것들이 하늘에서가 아닌 땅에서 거행된다; 그 이유가 하늘이 어두워지는 것은 결코 없기 때문이다.
“큰 어둠의 공포가 아브람 위에 떨어졌다”는 주님께서 이렇게 큰 황폐해짐에서 공포에 휩싸이셨음을 뜻한다. 누군가라 해도 그가 사랑의 천적인 것들 안에 있는 한, 그가 끝장에 이르러 있는 상황을 지각할 때, 공포를 느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주님의 경우는 여느 이런 사람보다 더 그러하셨다; 그 이유가 그분은 천적 수준과 신성 측면 모두에서 사랑 자체이셨기 때문이다.
“어둠”이 거짓들을 의미하는 것은 말씀의 많은 구절들에서 분명해진다. 이사야서에서:
빛을 위해 어둠을, 어둠을 위해 빛을 놓는 이들에게 화가 있다 (이. 5:20);
“어둠”은 거짓들을 표시한다, 그리고 “빛”은 진리들을 표시한다. 이사야서에서:
그분이 토지를 쳐다 보실 것이다, 그리고 어둠이, 곤궁이 보인다, 그리고 빛이 어두워져 있 다 (이. 5:30);
“어둠”은 거짓을, “빛이 어두워짐”은 진리가 나타나지 않음을 표시한다.
이사야서에서:
보라, 어둠이 땅을 덮는다, 짙은 어둠이 백성들을 (덮는다) (이. 60:2).
아모스서에서:
여호와의 날, 이 날은 어둠이고, 빛이 아니다… 여호와의 날이 어둠이 아닌 빛이 아니더냐? 어두워 빛남이 없음이 아니더냐? (아. 5:20).
스바냐서에서:
여호와의 큰 날이 가까이 있다; 그 날은 분노의 날이다, 곤경과 심통의 날이다, 쓸모없음과 황무해짐의 날이다, 어둠과 짙은 어둠의 날이다, 구름과 그늘의 날이다 (습. 1:14, 15).
위 구절에서 “여호와의 날”은 교회의 마지막 때와 상태를 표시한다; “어둠과 짙은 어둠”은 거짓들과 악들을 표시한다.
마찬가지로 주님께서도 거짓을 “어둠”으로 부르신다. 마태복음서에서:
만일 네 눈이 악이다면, 네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다, 그러므로 만일 네 안의 빛이 어둠이다 면, 이 어둠은 얼마나 심각할 것이냐? (마. 6:23).
위 구절의 “어둠”은 지식들 안에 있는 이들을 소유해버리는 거짓을 표시한다; 그리고 그 뜻은 지식을 가진 이들을 거짓이 소유할 경우 그의 어둠은 지식을 가지지 않은 이방인이나 여타 누구의 어둠보다 더 심각한 것 아니냐 이다.
다시 마태복음서에서:
왕국의 아들들이 바깥쪽 어둠으로 내던져질 것이다 (마. 8:12; 22:13).
“바깥쪽 어둠”은 교회 안에 있는 이들의 더 끔찍한 거짓들을 표시한다; 그 이유가 그들이 빛을 어둡게 하고, 진리들 대신 거짓들을 기르기(가르치기) 때문, 이것은 이방인도 할 수 없는 짓이다. 요한복음서에서:
그분 안에 생명이 있었다, 그리고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 그리고 빛이 어둠을 비춘다, 그러나 어둠은 그것을 납득하지 못했다 (요. 1:4, 5).
위의 “어둠”은 여기서 교회 내에 있는 거짓들을 표시한다.
교회 밖의 거짓들도 역시 “어둠”이라 불리운다. 그러나 이것들은 조명될 수 있다. 이를 마태복음서에서 말해진다:
어둠에 앉았던 사람들이 큰 빛을 보았다, 그리고 죽음과 그늘과 영역에 앉았던 그들에게 빛이 솟아올랐다 (마. 4:16);
위 구절의 “어둠”은 여기서 무지의 거짓들, 이방인들이 지닌 거짓과 같은 거짓들을 표시한다.
요한복음서에서:
그리고 이것이 심판이다, 즉 빛 (자체가) 세상에 왔으나, 사람들은 빛보다 어둠을 오히려 사랑한 것이다, 그 이유는 그들의 일들이 악하였기 때문이다 (요. 3:19).
“빛 (자체)”는 진리들을 , “어둠”은 거짓들을 표시한다; 그리고 “빛 (자체)”는 주님을 표시한다, 그 이유는 모든 진리가 그분으로부터 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둠”은 지옥들을 표시한다, 그 이유는 모든 거짓은 그것들로부터 있기 때문이다.
다시 요한복음서에서:
예수께서 말하셨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 안에서 걷지 않을 것이다 (요. 8:12).
그리고 다시 요한복음서에서:
어둠이 너를 붙잡지 않도록 네가 빛을 가지는 동안 걸으라, 그 이유가 어둠에서 걷는 자는 그가 어느 쪽으로 가는지를 모르기 때문이다. 나는 세상에 빛으로 왔다. 나를 믿는 자는 누 구든지 어둠에 거하지 않는다 (요. 12:35, 46).
위의 “빛”은 주님을 표시한다, 그분으로부터 모든 선과 진리가 있다; “어둠”은 거짓들이다, 이것은 주님만이 흩으실 수 있다.
마지막 때의 거짓들, 우리 앞의 구절에서 “어둠”이라 불리우고, 또는 이로부터 “큰 어둠의 공포”가 서술되고, (십자가 상에서) 제 6시부터 제 9시까지 온 땅을 덮은 어둠에 의해 표현되고 의미되었다. 그리고 태양이 어두워짐에 의해 더 이상 사랑과 선행이 그 당시 없었다가 의미되었다 (마. 27:45; 막. 15:33; 눅. 23:44, 45).

13절. 그리고 그분은 아브람에게 말하셨다, 너는 확실히 알아라, 네 씨는 자기들의 것도 아닌 토지에서 객이 되어 있을 것이고, 그들을 섬길 것이고, 그리고 그들은 사백 년 동안 네 씨들을 괴롭힐 것이다. “그분이 아브람에게 말하셨다”란 지각을 의미한다. “너는 확실히 알아라”란 그것은 반드시 일어남을 의미한다. “네 씨는 객이 되어 있을 것이다”란 선행과 신앙이 드물 것을 의미한다. “자기들의 땅이 아닌 땅에서”란 선행과 신앙으로 짜 맞추어지지 않은 교회가 있는 곳을 의미한다. “그들을 섬길 것이다”란 압제를 의미한다. “그들은 네 씨(후손)들을 괴롭힐 것이다”란 격렬한 시험을 의미한다. “사백 년”이란 기간과 상태를 의미한다.

그분이 아브람에게 말하셨다. 이는 지각을 의미하는데, 9절을 포함 여러 곳에서 말해진 바로부터 분명해진다. 거기서 같은 말이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

너는 확실히 알아라. 이는 이것이 확실하다를 의미하고 설명은 필요치 않다.

네 씨가 객일 것이다. 이는 사랑과 신앙이 드물 것을 의미하는데, 이는 “객”과 “씨”의 의미로부터 분명해진다. “객(strainger)”, 또는 “체류자(sojourner)”는 토지에서 태어나지 않은 자, 하여 토착민으로 인정되지 않는 자, 고로 외국인으로 간주되는 자를 뜻한다. “씨(seed)”는 선행과 선행으로부터의 신앙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 씨가 외국인으로 간주되는 “객”이라 불리우고, 외국인은 토지에서, 또는 토지로부터 있지 않은 자를 말하기 때문에, 드물다 라는 결과가 뒤따른다. 결과적으로 여기서 “씨”인 선행과 선행의 신앙이 드물 것을 뜻한다. 여기서 취급하는 때는 “큰 어둠”, 즉 거짓들이 있는 때인, 끝에 이르기 직전의 때이다; 그때 씨는 객일 것이다, 즉 그때 선행과 신앙은 드물 것이다.
마지막 때에 신앙이 드물 것이다는 것은 주님께서 시대의 끝을 말하실 때 예견되어졌다. 즉 마. 24:4-끝절; 막. 13:3-끝절; 눅. 21:7-끝절에서 이다. 이 구절들에서 말해진 모든 것은 그때에 선행과 신앙은 드물 것이다는 것, 그리고 결국 아무 것도 있지 않을 것을 함축하고 있다. 비슷한 것이 계시록에서도 말해진다, 그리고 예언서의 많은 구절에도 있다, 이 외에도 말씀의 역사적 부분에도 있다.
마지막 때에 멸해지는 신앙은 선행을 뜻한다. 그 이유가 신앙은 선행으로부터의 신앙이 아니면 가능할 수 없기 때문이다. 선행을 가지지 않은 자는 어떤 신앙도 가질 수 없다, 그 이유가 선행은 신앙이 이식될 수 있는 토양 자체이기 때문이다; 선행은 신앙의 심장이다. 신앙은 선행으로부터 살아 있고 존재한다. 그러므로 고대인들은 사랑과 선행을 심장에, 신앙은 폐에 비교했다. 이 둘은 가슴 부위에 있다. 이 비교함은 신체와 닮아 있다. 신앙이 선행 없이 있다면, 심장 없이 폐만 있는 꼴이기 때문에 이것이 불가능함은 누구나 알 것이다. 그러므로 고대인들은 선행에 속하는 모든 것들을 심장으로부터의 것들이라 불렀다, 그리고 선행 없는 신앙에 속하는 모든 것을 그들은 입만으로부터의 것들, 또는 호흡을 수단으로 말로 이어지는 폐로부터의 것들이라 말했다. 이로부터 선과 진리에 관한 고대인들의 말의 형체가 왔다: 즉 선과 진리에 관하여는 “심정으로부터 나가져야만 한다”는 것이다.

자기들의 것도 아닌 토지에서. 이는 선행과 신앙에 있는 것으로 짜 맞추어지지 않은 교회가 있는 곳을 의미하는데, 이는 “토지”의 의미가 교회이다로부터 분명해진다. 오늘날 인간들은 교회가 단지 신앙의 교리들로만 존재하는 곳으로 이야기하는 바, 주님의 교회들을 그들의 가르침으로 구별한다. 그들은 인간이, 좁혀 말해 교인이 무슨 생명으로 살아가야 하는지에, 그들이 내향으로 증오함이 있는지, 들짐승 같이 서로를 물고 뜯는지, 서로 도둑질하는지, 타인으로부터 명성, 영예, 재물을 강탈하는지, 심정에서는 거룩한 것이면 무엇이든 부정하는지, 이런 등등에는 관심을 두지 않는다. 여전히 교회는 이런 마음 자세를 지닌 이들과는 결코 존재할 수 없다. 그 대신 주님을 사랑하는 이들, 이웃을 자신 같이 사랑하는 이들, 양심을 가진 이들, 위에 언급한 것들에 반대된 이들과 더불어 존재한다. 따라서 교회가 존재할 수 없는 이들 사이에서 교회가 존재할 수 있는 이들은 객(외국인) 같이 있고, 그들 사이에서 기껏 가능할 수 있는 대접은 남용당함과 박해받음, 또는 숙맥 취급 받음(바보임) 뿐이다. 주님의 시절 때의 이것이 “네 씨는 토지에서 객일 것이다”에 의해 뜻해지고 있다.

그리고 네 씨가 그들을 섬길 것이다. 이는 압제를 의미하는데, 위의 설명 가운데에서 알았으리라 본다.

그리고 그들이 네 씨들을 괴롭힐 것이다. 이는 그들의 격렬한 시험들을 의미하는데, 이는 “괴롭힘, afflicting”, 또는 “고통, affliction”의 의미가 박해, 결과적으로 시험이다로부터 알 수 있다. 괴롭힘, 고통의 단어가 말씀에서 주님에 관련하여 의미되는 것은 이 외에 더 없다. 이사야서에서:
나는 너를 깨끗이 할 것이다, 그리고 은이 아니다; 나는 고통의 용광로에서 너를 선택할 것 이다 (이. 48:10).
위에서 “고통”은 시험을 표시한다. 모세의 책에서: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 네 하느님께서 너희를 인도한 모든 방법, 즉 그분은 너희를 시험 하시려 너희로 고통받게 하셨다는 것을 기억하라. 여호와께서는 네 조상들이 알지도 않은 만나로 너희를 먹이셨다. 그분은 너희가 고통받게, 시험당하게 하셨는데, 이는 결국 네게 선을 베푸시기 위해서 였다 (신. 8:2, 16);
“고통”이 시험을 표시함은 분명하다.
신명기서에서:
이집트인들이 우리에게 악을 행하고, 우리를 괴롭히며, 우리에게 중역을 부담지웠을 때이 다. 우리는 우리의 조상의 하느님, 여호와께 외쳤다, 그리고 여호와께서는 우리의 음성을 들으셨다, 그리고 우리의 고통을, 우리의 고생을, 압제받음을 보셨다 (신. 26:6, 7).
위 구절에서 우리는 본문에 있는 단어와 같은 것들, 즉 그들이 “섬겼다”, 그들은 “고통받았다”를 발견한다. 이 단어에 의해 신실한 자의 시험이 의미되어진다. 마찬가지로 광야에서의 그들의 고통은 주님의 시험들을 표현했다.
이사야서에서:
그분은 멸시당해 슬픔의 사람이셨다, 그리고 우리는 그분으로부터 우리의 얼굴을 숨어있게 했다; 그분은 멸시당하고 별것 아니라고 평가받으셨다. 그러나 진실인 것은, 그분은 우리의 질병을 짊어지셨고, 우리의 슬픔들을 운반하셨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분이 하느님에게서 두 드려 맞고, 얻어터지고, 괴롭힘을 당했다고 평가한다 (이. 53:3, 4).
위 말들은 주님의 시험을 의미한다; 그분의 “우리의 병고를 짊어짐, 우리의 슬픔을 운반하심”은 신실한 자는 어떤 격렬한 시험에도 결코 직면하지 않는다 라거나, 그분이 그들의 죄들을 그분 자신 위에 가져가서 그것들을 짊어지셨다 라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는 그분이 시험의 전투들과 승리를 통해 지옥들을 정복하셨다는 것, 그리고 이 정복하심에서 그분의 인간 본질까지 신실한 자의 시험들을 견뎌내셨다를 뜻한다.
주님께서도 시험을 “고통”이라 부르시고 있다. 마가복음서에서:
돌 많은 장소에 뿌려진 자들이 있다, 그들은 말씀을 들었을 때, 그들은 자신 안에 뿌리를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러나 잠간은 견딘다; 그 후에, 말씀 때문에 고통과 박해가 일어날 때, 곧바로 그들은 실족하고 만다 (막. 4:16, 17).
“고통”은 여기서 시험을 표시함이 분명하다; “자신 안에 뿌리를 가지고 있지 않다”란 선행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 이유가 신앙은 선행 안에 뿌리를 가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뿌리로 떠받침이 없는 자는 시험을 산출한다. 요한복음서에서:
세상에서 너희는 고통을 가진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라, 나는 세상을 이겼다 (요. 16:33).
위의 “고통”은 시험을 표시한다,
마태복음서에서:
나라들이 나라에 맞서, 왕국이 왕국에 맞서 휘저을 것이다; 모든 이것들은 슬픔들의 시작이 다. 그때 그들은 너를 고통 안으로 넘길 것이다. 그때 큰 고통이 있을 것이다. 이 고통은 세상 시작 이래 없던 고통이다. 이 날들의 고통 후에 즉시 태양이 어두워질 것이다
(마. 24:7-9, 21, 29).
위 구절은 시대의 끝, 또는 교회의 마지막 때가 취급되어진다; “고통”은 시험을 표시하는데, 외적 측면, 내적 측면 모두에서 이고, 외적 측면은 세상으로부터의 박해, 내적 측면은 악마로부터의 박해이다. 선행이 없을 것임이 “나라가 나라에 맞서, 왕국이 왕국에 맞서 휘젖는다”에 의해 의미되고 있다; 또한 이것이 “태양”(주님=사랑과 선행)이 어두워짐에서도 의미되어 있다.

400 년. 이는 시험들의 기간과 상태를 의미한다는 것, 이는 “400”의 의미로부터 분명해진다. 이 숫자는 “40”, 즉 시험들의 기간과 상태들과 같은 의미를 가진다. 시험의 기간들, 이 기간들이 짧던, 더 길던 말씀에서 “40”에 의해 묘사되어진다. 글자 의미에서 이 구절의 단어들은 이집트에서 야곱의 아들들의 체류 기간에 관련되고 있다; 즉 이 체류가 430 년이라고 출. 12:40에서 말하고 있다. 이 총 체류 기간은 야곱이 처음 이집트에 온 날로부터 계산된 것이 아니라 아브람이 이집트에 체류한 날로부터 계산된 햇수이다. 이는 이미 살핀 바 있다. 숫자 430이 아브람의 체류로부터 언급된 것은, 이 숫자가 시험을 포함하기 때문, 그것들이 이집트에서의 노예 신세, 그 후에 광야에서의 40년에 의해 시험이 표현되기 위한 이유 때문이다.

14절. 그리고 또한 나는 네 후손들이 섬겼던 그 나라를 심판할 것이다. 그 후 네 후손들은 큰 물질을 지니고 떠날 것이다.

그리고 또한 네 후손들이 섬겼던 그 나라. 이는 억압하는 악한 자를 의미하는데, 이는 “나라”와 “섬김”의 의미로부터 분명해진다. 순수한 의미에서 “나라”는 선들, 또는 선한 인물들을 의미한다; 선들이 추상적 의미에서 말하여질 경우, 이 선들은 주체에 따라서 있게 되는 바, 상황에 따라 사람, 영, 천사를 말하기도 한다. 반대적 의미일 경우, 나라는 악들, 또는 악한 자를 의미하는데, 이는 앞에서 말한 바 있다. “섬기는 것”, 또는 “노예 신세”는 억압을 의미하고 앞 절에서와 같다.

나는 심판할 것이다. 이는 방문과 심판을 의미하는데, 설명 없이도 알 것이다. “심판함”, 또는 “심판”은 많은 이들이 상상하는 것, 즉 (자연계의) 하늘(sky)과 땅이 멸해진다는 것, 또한 새 하늘과 새 땅이 창조된다는 것, 예언서와 계시록에서 말해지는 상황들 (이. 65:17; 66:22; 계21:1) 같은 마지막 심판을 뜻하지 않는다; 또한 세상 모든 것들이 멸망한다고 상상하는 것도 뜻하지 않는다. 이런 견해는 세상에 아주 드넓게 퍼져서 꽤 지식적으로 교육된 이들의 마음조차 점유해버렸다; 그리고 이에 보태어 죽은 자는 여하튼 그 심판 때까지는 (영이든 육이든 모두) 일어나지 않는다고 믿기도 한다. 이때라는 것, 몇 년도 몇 달 몇 칠 몇 시에 하는 식으로 예견해 말하기도 했다. 그후 사람들은 수 세기가 지나면서 이때는 오지 않는다, 당장은 더더욱 아니다는 것을 알았다. (예견자라는 이들이 사기친 것이다를 알았다). 그러므로 이런 종류의 일은 발생하지 않는다, 고로 죽은 자도 다시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라는 믿음을 굳건하게 했다. 어쨌든 알아야만 하는 중요한 것은 하늘과 땅의 말살됨이나 마지막 심판이 위 같은 식의 것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것이다. 글자 의미 대로 헤아리면 위와 같이 상상되어진다; 그러나 내적 의미에 따라서라면 전혀 다르다: 내적 의미에서, 마지막 심판은 교회의 마지막 때를 뜻한다; 멸해질 하늘과 땅은 교회의 내적 측면과 외적 측면에서, 교회에 선행이 없어 교회가 없음이 되는 것을 뜻한다.
모든 선행과 신앙이 사멸하였을 때, 그리고 홍수 직전의 상황 같이 지각이 사라졌을 때, 태고 교회의 마지막 심판(a last judgment)이 있었다. 이미 살폈듯이 홍수 자체가 이 교회의 마지막 심판이었다; 그때 하늘과 땅, 즉 교회가 멸해졌다; [창. 6-8 참조]. 그리고 새 하늘과 새 땅, 즉 새로운 교회가 창조 되었다, 이것이 고대 교회라 불리워졌다, 우리는 이것 역시 살폈다. 이 교회도 앞의 교회 같이 그것의 마지막 때를 가졌다, 즉 모든 선행이 차거워졌고, 모든 신앙이 어두워졌다, 이때는 대략 에벨의 출현 때이다. 이때 이 교회의 마지막 심판(a last judgment)이 있었다; 이때 하늘과 땅의 파괴됨이 있었다.
히브리 교회는 새 하늘과 새 땅이었다, 이것 역시 그것의 마지막 때를, 또는 마지막 심판(a last judgment)을 가졌다. 그때란 우상 숭배가 되어버렸을 때였다; 그리고 그때 새로운 교회가 야곱의 후손들 사이에서 일으켜졌다, 이것이 유대 교회라 불리워졌다. 그리고 이 교회는 선행과 신앙을 표현만 할 뿐인 교회였다. 이 교회 안에, 즉 야곱의 후손들 사이에서 선행도, 신앙도 없었다, 그러므로 교회도 없었다. 오직 교회라는 것을 표현만 할 따름이었다 (줄거리 내용과는 상관 없는 배우와 비슷하다). (이 교회는 선행도 신앙도 없어 교회도 아닌 관계로) 천국에 있는 주님의 왕국이 땅 위 진정한 교회와의 직접적인 교통은 불가능했기 때문에, 표현물을 수단으로 매체적 교통이 결과되었다. 이 (껍데기) 교회라 불리는 교회의 마지막 때, 또는 그것의 마지막 심판(a last judgment)의 때는 주님이 세상에 오셨을 때였다; 그 이유가 그 때 표현물로 표현함이, 즉 제물이나 의식이 중단되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중단되기 위하여 유대인들은 가나안의 토지로부터 내쫓겨졌다.
이후 새 하늘과 새 땅이, 즉 새로운 교회가 창조되었다. 이것이 원시 기독 교회라 불리운다, 이 교회는 주님에 의해 개시되어졌다, 그리고 그 후에 점짐적으로 세력이 강해져 갔다, 그리고 이 교회의 최초에는 선행과 신앙이 있었다. 이 교회의 파멸이 복음서들 안에서 주님에 의해, 그리고 계시록에서 요한에 의해 미리 말해졌다; 이 파멸이 최후 심판(the Last Judgment)이라 불리운다. 지금 하늘과 땅이 멸해지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지구촌 어디선가 구석에서 새로운 교회가 일으켜질 것이다, 유대 교회가 과거나 지금이나 자기들의 것들에 남아있듯, 즉 교회의 내용물인 선행과 신앙과는 관계 없이, (주님 편에서 보면) 교회 아님의 상태로, 현재의 교회도 외적 예배에서 남아있을 것이다. 이상 위에서는 마지막 심판에 대한 일반적 측면을 살핀 것이다.
이제 이 심판의 특별한(개별적) 측면을 살피자. 모든 이 하나하나는 그가 죽은 후 즉각적으로 그의 마지막 심판을 맞이한다; 그 이유가 그가 다른 삶 안으로 건너가고, 그 안에서, 그는 자기가 육체의 삶에서 가져왔었던 생명 안으로 올 때, 그는 죽음이든, 생명이든 선고되어진다. 또한 따로따로의 마지막 심판이 있다, 그 이유가 죽음을 선고받은 인간과 더불어서는 한 개 한 개의 것들이 그를 정죄하기 때문이다. 즉 그의 생각과 의지에 있는 한 개 한 개의 것들, 제 아무리 작은 것이다 해도 그의 마지막 심판의 내용과 닮지 않은 것은 하나도 없고, 또는 그를 죽음으로 끌려가게 하지 않는 것은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생명 쪽으로 판결 받은 인간의 경우도 마찬가지 방식에서 이다. 그의 생각과 의지의 모두 각각의 것들은 그의 마지막 심판의 형상이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그를 생명 쪽으로 운반한다. 한 인간 전체로서도 이러하고, 그의 생각과 애착의 하나하나도 그러하다. 이것들도 마지막 심판에 의해 뜻해진다.

그리고 그후 네 후손들은 큰 물질을 지니고 떠날 것이다. 이것이 해방을 의미한다는 것, 그리고 그들이 천적, 영적 선들을 가질 것을 의미하는데, 이는 “떠남”의 의미가 자유해지는 것, 그리고 “물질”의 의미가 천적, 영적 선들이다로부터 분명해진다. 그 이유가 이것은 박해받은 이들, 그리고 시험들, 억압당함, 고통받음, 또는 노예 신세를 당한 이들의 물질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여기서와 앞 절에서 취급되었다. 이 물질들은 야곱의 후손이 이집트를 떠날 때(출. 11:2; 12:36) 이집트인들로부터 강제로 차용한 물품들; 그리고 그후 가나안의 토지에서 나라들을 몰아낼 때 그들로부터 의 전리품들; 또는 예언서들에서, 그들이 적들로부터 획득한 전리품, 등에 의해 의미되었다. 이것들은 그들이 부유해지는데 일조 했다.

15절. 그리고 너는 네 조상에게로 평화로이 갈 것이다, 너는 장수하다가 묻힐 것이다.

너는 평화로이 네 조상에게로 갈 것이다. 이는 선들과 진리들은 하나도 해를입지 않을 것을 의미하는데, 이는 “조상”, “조상에게 감”, 그리고 “평화”의 의미로부터 알게 된다. 내적 의미에서, 여기서의 “조상”은 “딸들”과 “아들들”의 모두와 같은 것을 의미한다. “딸들”은 선들을, “아들들”은 진리들을 의미한다. 여기에서 “조상”은 아들들과 딸들 모두에 속하는 것들을 의미한다. “조상에게 감”은 육체의 삶으로부터 영의 삶으로 건너가는 것, 또는 세상으로부터 다른 삶으로 건너가는 것이다. “평화로이”는 그가 아무 것도 잃지 않는다는 것, 아무 것도 해를 입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는 그의 능력의 내면적 발휘함에 장애가 되어왔던 육체 외에는 그와 더불어 있던 모든 것을 유지하고 있다. 죽는다는 것, 또는 죽음으로 조상에게 가는 것도 여기서 뜻해지지 않는다는 것을 이어지는 다음에서 분명해질 것이다.

너는 장수하다가 묻힐 것이다. 이는 주님에 속한 이들이 선한 모든 것을 즐긴다를 의미하는데, 이는 죽어 묻히는 이들이 죽는 것이 아니라, 불명료한 삶으로부터 명료한 삶으로 건너가는 것이다는 사실로부터 분명해진다. 그 이유가 육체의 죽음은 삶의 계속일 뿐이고 삶의 완전해짐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주님에 속하는 이들은 첫째 모든 선들을 즐기게 된다. 이 즐김이 “장수하다가, 또는 고령에”에 의해 의미되어져 있다. 말씀에서 자주 대하는 표현, 그들이 “죽었다”, 그들이 “묻혔다”, “조상에게 돌아 갔다” 는 표현의 내적 의미는 글자 의미에서와 같은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내적 의미에서 이 표현은 사 후의 삶에 속한 것과 영원한 것에 관하여서 이고, 글자 의미에서는 세상에 속한 것과 시간에 속한 것에 관하여서 이다.
결과적으로 내적 의미 안에 있는 이들(천사가 이런 경우이다)이 위와 같은 표현을 만날 때, 그들은 죽음과 매장이라는 관념에 결코 머무르지 않는다, 그러나 삶의 계속에 관련되는 것을 생각한다. 그 이유가 그들은 죽음에 대해 그것은 최고로 조잡한 본성과 시간 개념을 벗어 던지고 진짜 삶에 속한 것으로 갈아 입는 것밖에 더 아니다고 간주한다; 사실상 그들은 죽음이 무엇인지 모른다, 그 이유가 그들은 그것에 관해 아무 것도 생각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은 인간의 나이를 두고도 마찬가지 방식에서 생각한다. 여기서의 경우인, “고령에”라고 말해질 때, 그들은 나이가 많다 라는 것은 전혀 지각하지 않는다. 그 이유가 그들은 청년의 삶과 초기 성년의 삶을 향하여 끊임없이 다가가는 중에 있기 때문이다 (지상의 시간적 차원으로 말하면 늙지 않는다는 말일지도 모른다). 이런 삶, 그리고 그 삶 속의 천적, 영적인 것들이 “장수하다가”, 이 외 말씀에서 이와 비슷한 표현이 발생할 때 뜻해지고 있다.

16절. 그리고 사 대에 가서 그들은 이쪽으로 돌아 오리니 그 이유는 아모리족의 불법이 아직은 극에 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사 대에 그들은 이쪽으로 돌아올 것이다. 이는 회복의 시간과 상태를 의미하는데, 이는 “4 대”의 의미로부터 분명해진다, “4 대”는 “40”, “400”년과 같은 의미, 즉 시험의 상태와 기간을 의미한다. 이는 13절에서 말했다; 숫자 4는 40이나 400의 축소형이라 생각해도 된다. 숫자가 크던, 작던, 같은 지주, 여기서의 숫자의 지주는 4인 바 모두 같은 의미의 범주 안에 있다. 이는 여러 번 말했었다. “4 대”는 아브람부터, 또는 이삭으로부터, 또는 야곱으로부터의 어떤 세대를 의미하는 것이 아님은 말씀의 역사물로부터도 분명해진다; 그 이유가 4 대보다 더 많은 세대가 그 사이에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 백성들은 그들이 되돌아 왔을 때는 아주 달라져 있었다. “4 대”는 다른 장소에서도 마찬가지로 발생하는 표현이다. 그럼에도 이것은 결코 어떤 세대를 의미하지 않는다; 그리고 여기서는 회복의 시간과 상태를 의미한다. 그 이유는 이것이 “40”, 또는 “400”년에 의해 의미되는 것들의 끝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아모리족의 불법이 극에 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것이 마지막 때, 즉 더 이상 어떤 선도 있지 않는 때를 의미하는데, 이는 “아모리 족”, “극에 달함, 끝에 이름, consummation”의 의미로부터 알게 된다. 말씀에서 “아모리족”은 일반적으로 악을 의미한다. 그 이유가 가나안의 토지가 아모리족의 토지라고 불리웠기 때문이다. 이에 관하여는 겔. 16:3, 4; 암. 2:9, 10로부터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이 구절에서의 “아모리족”은 가나안의 토지의 모든 나라들을 의미한다; 그리고 각각의 나라들에 의해, 이미 말한 바 같이, 각기 특별한 악들과 거짓들을 의미한다. 결과적으로 “아모리족”에 의해서는 일반적 측면에서의 모든 악들이 의미된다. “극에 이름”은 마지막 때를 의미한다. 즉 어떤 선도 더 이상 없을 때이다.
그러나 아모리족의 불법이 아직 극에 이르지 못했다는 사실에 의해 내적 의미에서 뜻해지는 것은 신비들이다. 그 이유가 다른 삶에서 악한 자들의 상태는 그들의 악들이 그것들의 최고 높이까지 도달할 때까지 처벌되지 않았다는 말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은 일반적, 특수적 모두에서 이다. 이런 이유가 다른 삶에는 평형 상태(equilibrium)가 있어서이다. 즉 악이 그 자체를 처벌하는데, 악한 자는 자기들의 악을 처벌하려 돌진하되, 그 악이 절정에 달할 때까지 극점을 향해 달려 가는데, 자기의 악과 평형을 이룰 때까지 돌진하여 처벌된다. 모든 악은 개별적으로 그것이 다양해지는 것에 그것의 한계점을 가지고 있어 그 한계를 넘어가지는 못한다. 악한 자가 이 한계를 넘어갈 때, (넘지 못하고 오히려 그 극점에서) 그는 자신을 처벌 안으로 갑자기 빠뜨린다, 그리고 이것은 모두 각각의 세부적 상황에서 있다.
일반적 경우에도 이것은 적용되고 있다. 사악한 자는 지옥 아래쪽으로 자신을 내던진다, 이는 한번만 하는 것이 아닌 계속적이다. 이런 상황은 모두 주님에 의해 설립된 질서의 보편적 법칙에 그 근원을 가지고 있다. 즉 주님께서는 누구라도 지옥 안으로 내던지시지 않는다; 그러나 악이 그 자체를 내던진다, 또는 악한 자가 자신을 내던진다, 그리고 악이 극점에 이르고, 어떤 선도 나타나지 않을 때까지 계속적이다. 어떤 선이 있는 한, 그는 지옥 위쪽으로 들려진다; 그러나 악 밖에 없을 때, 그 자신으로부터 그는 지옥 안으로 돌진한다. 선과 악은 서로로부터 분리되는 것이 첫째로 있어야만 한다. 그 이유가 그들은 반대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누구도 양쪽에 걸쳐 있는 것은 허용되지 않는다. 이것이 아모리족의 불법이 극에 도달해야 한다는 것에 의미되어 있다. 그러나 선과 더불어서는 다르다; 그들은 천국을 향하여 주님에 의해 계속적으로 들리워진다. 그리고 그들의 악은 계속적으로 씻기워진다.
이는 교회를 놓고도 마찬가지이다. 교회의 악이 극점에 이르기까지, 즉 선행의 어떤 선, 신앙의 어떤 진리도 더 이상 있지 않을 때까지, (주님의) 방문은 있지 않는다. 이 극점은 예언서들에서 자주 말하여진다. 이사야서에서:
나는 온 땅 위에 계신 주 여호비 체바욷께로부터 끝에 다다름과 마지막 결정을 들었다
(이. 28:22).
예레미야서에서:
오 많은 물 위에, 보물이 많은데서 거주하는 바벨이여, 네 끝이 와진다, 네 더러운 이득의 한도가 찼다 (예. 51:13).
다니엘서에서:
칠십 주가 네 백성과 네 거룩한 성에 선포되어졌다, 이는 위법이 끝에 이르기 위해, 네 죄 들을 봉인하기 위해, 사악함을 속죄하기 위해, 영원한 공정을 도입하기 위해, 환상과 예언 을 봉인하기 위해, 지극히 거룩한 자에게 기름을 붓기 위해서이다 (단. 9:24).
결국 역겨운 것들의 새 위에 황무해짐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끝에 이르고 마지막 결정에 이르기까지 조차 그것은 황폐해짐 위에 그 자체를 쏟을 것이다 (단. 9:27).
끝에 다다름은 주님에 의해 누가복음서에서도 이렇게 미리 말해졌다:
그들은 검의 날에 쓰러질 것이다, 모든 나라들에게로 포로로 끌려갈 것이다, 그리고 예루 살렘은 이방인들로부터 짓밟혀질 것이다, 이방인의 때가 성취되는 때까지이다
(눅. 21:24).
“검의 날에 쓰러진다”란 거짓에 의해 잘려져 나감을 의미한다. 그 이유가 말씀에서 “검”은 거짓의 처벌이기 때문이다; “예루살렘”은 주님의 왕국과 교회를 표시한다. “나라들”은 악들을 표시한다; 고로 교회가 악과 거짓들에게 소유당하여 그 자체 멸해지는 때가 끝에 다다름인 것이다.

17절. 해가 내려 가자 짙은 어둠이 있었다. 그리고 연기 뿜는 용광로와 불 붙은 횃불이 쪼갠 고기 조각들 사이를 지나가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태양이 내려 가자. 이는 마지막 때, 끝에 다다렀을 때를 의미하는데, 해가 저뭄과 그것의 의미에 관해 12절에서 말해진 바로부터 분명해진다. 즉 그것은 교회의 마지막 때이다 라는 것이다.

그리고 짙은 어둠이 있었다. 이는 증오함이 선행의 자리를 차지할 때를 의미하는데, 이는 “짙은 어둠”의 의미로부터 분명해진다. 말씀에서 “어둠”은 거짓들을 의미한다, 그리고 “짙은 어둠”은 악들을 의미한다. “어둠”은 거짓이 진리의 자리를 차지할 때이고, “짙은 어둠”은 악이 선의 자리를 차지할 때, 또는 더 정밀히 말하면, 증오함이 선행의 자리를 차지할 때이다. 증오가 선행의 자리에 있을 때, 짙은 어둠은 대단하므로 인간은 그것이 악인지를 알아채지 못하고, 더 나아가 다른 삶에 있는 이 악이 우리를 지옥으로 보낼만큼 대단하다는 것을 아예 눈치도 채지 못한다. 그렇게 되는 이유가, 사람들이 미워할 때, 그들은 미워함 안에서 어떤 기쁨과 일종의 에너지(energy)를 느낀다, 그리고 이 기쁨과 에너지가 당사자로 하여금 증오함이 선이다 라고 밖에 더 알지 못하게 하고 만다. 그 이유가 인간의 기쁨과 탐욕을 실어나르는 것은 무엇이든 당사자에게는 그것이 선이라고 보여지기 때문이다. 하여 누군가가 그 사람에게 이것은 지옥적인 것이다 라고 말해주면, 그는 그것을 거의 믿을 수 없다. 다른 삶에서 이런 경우, 이런 기쁨과 에너지는 배설물과 시체 썩는 냄새로 변해진다. 그리고 그는 이것으로 해서 자신이 악마가 되어가고 지옥의 어떤 형상이 되고 있다는 것을 더더욱 모르고 있다. 그 이유가 지옥은 증오함들과 악마적 모양새밖에 더 아니기 때문이다.
생각하는 어떤 능력을 유지하는 자는 이것을 볼 수 있다. 그래서 만일 그들 자신들이 증오함을 서술하든가, 또는 그것을 표현하든가, 또는 그림을 그리는 재능이 있어 그것을 그려낸다면, 그는 자신이 사후 변하여질 악마적 모양새를 피할 수 없이 그려내고 만다. 놀라운 것은, 그가 다른 삶에서 천국으로 간다고 굳건히 믿고 있다는 점이다. 이렇게 믿는 근거는 자기들이 믿음이 있다고 말하고 있다는 단순한 사실에 서이다. 그러나 사실상 천국에 있는 것은 선행의 형체밖에 없다. 이는 다른 삶에서 표출되는 광경으로 알 수 있는데, 553항을 참고하기 바란다. 미움과 사랑의 두 모양새가 어떻게 한 장소에서 함께 살 수 있는 지는 잘 생각할 필요가 있다.
“어둠”이 거짓을 의미하고, “짙은 어둠”이 악을 의미하는 것은 아래 인용된 말씀에서 알게 될 것이라 본다. 이사야서에서:
보라, 어둠이 땅을 덮는다, 그리고 짙은 어둠이 사람들을 (덮는다) (이. 60:2).
요엘서에서:
토지의 모든 주민들이 떨고 있다, 그 이유가 여호와의 날이 오기 때문이다, 어둠의 날과 짙 은 어둠의 날(이다). (욜. 2:1, 2).
스바냐서에서:
그 날은 분노의 날, 쓸모없음과 황무해짐의 날, 어둠과 짙은 어둠의 날 (습. 1:15).
아모스서에서:
여호와의 날이 어둠과 빛이 아니고, 짙은 어둠과 그 안에 빛남이 없음이 아니더냐?
(암. 5:20).
위 구절에서 “여호와의 날”은 교회의 마지막 때를 표시한다, 이것이 여기서 취급되어진다; “어둠”은 거짓들을 표시하고, “짙은 어둠”은 악들을 표시한다; 그러므로 둘 모두가 언급되었다; 같은 것이 반복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구절의 원어에서는 “짙은 어둠”이 거짓 뿐만 아니라 악도 포함한다. 즉 치밀한 거짓으로부터 있는 악이다, 또한 치밀한 악으로부터 있는 거짓이다.

그리고 연기 뿜는 용광로와 불붙은 횃불이 보였다. “연기 뿜는 용광로”가 치밀한 거짓을, “불붙은 횃불”은 탐욕들로부터의 태우는 뜨거움을 의미하는데, 이는 “연기 뿜는 용광로”가 치밀한 거짓이다로부터, 그리고 “불붙은 횃불”이 탐욕들로부터의 태우는 뜨거움이다로부터 분명해진다. “연기 뿜는 용광로”라고 말해진 이유는 인간, 특히 교인, 즉 진리에 관한 지식을 가졌는데, 그것을 인정하지 않고, 심정으로는 부인하고 있는 이들, 실로 자기들의 삶을 진리에 반대하여 있는 상태에서 보내는 이들은 연기 뿜는 용광로로서 나타날 수밖에 없다. 즉 그 자신은 용광로, 그의 증오함은 연기로서 나타날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탐욕들로부터의 거짓들은 이런 용광로로부터 불붙은 횃불로서 나타나는데 다른 삶에서의 표현물로부터 분명해진다. 증오, 복수, 잔인함, 간음질의 탐욕들이 있다. 더욱이 이것들이 사기침과 섞어질 때, 불붙은 횃불로서 나타나는 것이다.
“용광로”, “연기”, 그리고 “불”이 말씀에서 의미되는 것을 아래 인용 구절에서 알게 될 것이다. 이사야서에서:
모든 이가 위선적이고 사악한 자이다, 그리고 모두 각각의 입이 어리석음을 말한다. 그 이 유가 사악함이 불같이 타고 있다, 그것은 찔레와 엉컹퀴를 삼키고, 숲의 덤불에 불을 붙이 고 있다, 그리고 그것들은 올라 가는 연기 같이 쌓아 올린다. 여호와 체바욷의 분노에서 토 지는 어두워진다, 그리고 백성은 불을 위한 식품같이 되어 간다; 인간은 그의 형제를 소중 히 다루지 않는다 (이. 9:17-19).
위에서 “불”은 증오들을 표시한다; 그리고 그것으로부터 “연기가 올라 감”은 거짓들이다; 그 이유가 이런 사람을 천사들이 쳐다 볼 경우, 위 구절에서 묘사된 것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요엘서에서:
나는 하늘과 땅에서 경이함들을 보일 것이다. 피와 불, 연기 기둥들이다. 태양은 어둠으로 변할 것이다, 달은 피로 변할 것이다, 여호와의 크고 격렬한 날이 오기 이전이다.
(욜. 2:30, 31).
위에서 “불”은 증오를 표시한다; “연기 기둥들”은 거짓들을; “태양”은 선행을; “달”은 신앙을 표시한다.
[4] 이사야서에서:
토지는 불타는 역청이 될 것이다; 그것은 밤에도 낮에도 꺼지지 않을 것이다; 그로부터의 연기가 영원히 올라갈 것이다 (이. 34:9, 10).
“불타는 역청”은 끔직한 탐욕들을; “연기”는 거짓들을 표시한다.
말라기서에서:
보라, 용광로 같이 불타는 날이 온다. 그리고 모든 자만과 사악함을 저지르는 모든 자 는 그루터기일 것이다, 그것들을 불 위에 놓아 두는 날이 온다, 그것들은 뿌리도, 가지도 남아나지 못할 것이다 (이. 4:1).
“불타는 용광로”는 앞 구절과 같은 의미이다. “뿌리”는 선행을; “가지”는 진리를 표시하고, 이것들이 남아있지 않을 것이다.
호세아서에서:
에브라임은 바알로 인해 죄를 지었다, 그는 타작 마당으로부터 회오리 바람으로 흩날리는 겨 신세일 것이다, 그리고 굴뚝의 연기 같을 것이다 (호. 13:1, 3).
“에브라임”은 이와 같이 되는 총명한 자를 표시한다.
이사야서에서:
강한 자는 삼(아마) 부스러기 같고 그의 일은 (튀는) 불꽃 같다. 그것 모두 태우나 아무도 그것을 끄지 못할 것이다 (이. 1:31).
자기를 사랑함에 있는 이들, 같은 것으로 이웃을 향해 증오함에 있는 이들은 자신의 탐욕들에 의해 불붙여진다. 계시록에서:
바빌론은 악마들의 처소가 되었다. 그들은 그녀를 태우는 연기를 보았을 때 외쳤다. 그녀의 연기가 영원히 올라 간다 (계. 18:2, 18; 19:3).
계시록서에서:
그는 무저갱을 열었다, 그리고 구덩이로부터 용광로의 연기 같이 연기가 올라 갔다; 그리고 태양이 어두워졌다, 그리고 공기, 구덩이의 연기로부터 (계. 9:2).
다시 계시록서에서:
말들의 입으로부터 불과 연기와 유황이 나왔다. 이로 인해 사람의 삼분의 일이 죽임을 당 했다, 그들의 입으로부터 나온 불과 연기와 유황에 의해서 (계. 9:17, 18).
다시 계시록서에서:
짐승을 예배하는 자는 하느님의 분노의 포도주, 그분의 분노의 잔에 있는 섞이지 않은 포 도주를 마실 것이다. 그리고 그는 불과 유황으로 괴롭혀질 것이다 (계. 14:9, 10).
다시 계시록서에서:
넷째 천사가 태양 위에 쏟았다, 그리고 불로 사람을 그을리라고 그에게 주어졌다; 그리고 사람들은 큰 열기로 그을려졌다, 그리고 하느님의 이름을 모독하였다 (계. 16:8, 9).
위 구절과 비슷한 구절에서:
그들은 유황이 타고 있는 못에 던져졌다 (계. 19:20; 20:14, 15; 21:8).
위 구절들에서 “불”은 탐욕들을, 그리고 “연기”는 마지막 때를 통치하는 거짓들을 표시한다. 이런 것들이 요한의 내면들이 열릴 때 그것들이 다른 삶에서 나타나는 것과 같은 것이 그에게 보여졌다. 이와 비슷한 것들은 영들에 의해서, 사 후 혼들에 의해서도 보여진다. 이상으로부터 지옥불이 무엇인지, 그것은 증오, 복수, 잔인, 또는 자기 사랑, 등등밖에 더 아니다; 그 이유가 이런 것이 그렇게 되어지기 때문이다. 육체의 삶 동안, 이런 품질 속의 인간은 천사가 가까이 가서 보게 되면, 그의 중심은 불붙은 횃불로, 거짓들은 연기 뿜는 용광로 같이 나타난다.
이런 불에 관해 주님께서 마태복음서에서 말하신다:
선한 열매를 맺지 않는 모든 나무는 찍혀서 불에 던져진다 (마. 3:10; 눅. 3:9);
“선한 열매”란 선행을 뜻한다: 선행을 자신에게서 박탈한 자는 찍혀 불에 던져진다.
다시:
사람의 아들이 그분의 천사들을 보낼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그분의 왕국으로부터 걸려 넘 어지게 하는 장애물, 그리고 불법을 행하는 자들을 모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을 불타는 용 광로에 던질 것이다 (마. 13:41, 42, 50),
위 구절도 같은 의미를 가진다. 그리고 다시:
왕이 왼쪽에 있는 자들에게 말한다, 나로부터 떠나라, 너희는 저주되었는 바, 너희를 위해 준비된 영원한 불 안으로 (가라). (마. 25:41).
그들이 “영원한 불 안으로”, “불타는 게헤나(Gehenna)”로 보내져야 한다는 것, 그리고 “그것들의 벌레는 죽지 않는다는 것”, “그것들의 불은 꺼지지 않는다는 것”도 같은 의미의 범주에 있다 (마. 18:8, 9; 막. 9:43-49). 누가복음서에서:
나사로를 보내 주십시오, 하여 그가 자기 손가락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시원하게 해주십시 요; 그 이유는 나는 이 불꽃에서 고통받기 때문입니다 (눅. 16:24),
이 구절도 같은 의미에 있다.
주님의 왕국의 신비에 친숙하지 않은 이들은 주님께서 사악한 자를 지옥에 , 또는 위에서 말한 증오함으로부터 있는 불 속으로 내던진다고 상상한다. 그러나 상상한 바와는 경우가 다르다. 내던지는 장본인은 인간 자신, 악마적 영 자체이다. 그러나 말씀의 글자에서 나타나는 모습은 인간에게 비쳐진 것, 외관에 따른 기록일 뿐이다. 참으로 감각의 오류에 따른 것이다. 특별히 유대인들의 경우에서 이 외관적 기록은 더 필요했다. 그들은 감각의 오류에 상관 없이 감각에 일치하지 않으면 어떤 것도 기꺼이 응낙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글자 의미, 특히 예언서는 이런 외관에 의한 것들로 가득한 편이다.
예레미야서를 보자:
고로 여호와께서 말하신다, 너는 아침에 공정한 판결을 하라, 그리고 압제자의 손으로부터 약탈당한 자를 구하여라, 하여 내 격노함이 불같이 나가 태우지 않도록 하라, 이 불은 아무 도 끄지 못한다, 그들의 일들이 사악하기 때문이다 (예. 21:12).
“공정하게 판결하는 것”은 진리를 말하는 것이다; “압제자의 손으로부터 약탈당한 자를 구하라”는 선행의 선을 행하는 것이다; “불”은 이것들을 행하지 않는 이들, 즉 자기들의 일생을 증오의 거짓으로 보내는 이들에 대한 지옥의 형벌을 표시한다. 글자 의미에서 “불”과 “격노함”을 주님의 탓으로 돌리고 있으나, 이는 그 반대이다.
마찬가지로 요엘서에서:
여호와의 날: 불이 그것 앞에서 삼킨다, 그리고 그것 뒤에서 불꽃이 탄다 (욜. 2:1, 3).
다윗서에서:
연기가 그분의 콧구멍으로부터 나갔다, 그리고 불이 그분의 입으로부터의 모두를 삼켰다, 숯불이 그분으로부터 불꽃들을 보냈다, 짙은 어둠이 그분의 발 아래 있었다 (시. 18:8, 9).
모세의 책에서:
불이 내 노염에서 불켜진다, 그리고 그것은 가장 낮은 지옥을 태울 것이다, 그리고 땅과 그 녀의 소출을 삼킬 것이다, 그리고 산들의 기초들을 불 위에 놓을 것이다 (신. 32:22),
위에서 “불”은 증오함들을 표시한다, 그리고 “연기”는 인간들에 있는 거짓들을 표시하는데, 이것들이 여호와, 또는 주님의 탓으로 돌린다, 그 이유는 그분이 주셨기 때문이다. 지옥에서 역시 외관으로는 이것 역시 주님 또는 여호와께서 이를 행한다고 보인다. 그러나 실상은 그 반대이다; 그들이 그 자체 그것을 행한다, 그 이유는 그들이 증오함의 불 안에 있기 때문이다. 이로부터도 분명해지는 바, 만일 말씀의 내적 의미가 알려지지 않으면 인간은 쉽사리 공상에 빠지고 헤어나지 못할 것이다.
이는 법이 선포될 때, 시내 산에서 백성에 의해 보여진 “연기”와 “불”과도 비슷하다. 그 이유가 여호와, 또는 주님은 각 사람의 품질에 따라 모든 이에게 나타나기 때문이다. 즉 천적 (평면의) 천사들에게는 태양으로, 영적 (평면의) 천사들에게는 달로, 모든 선에는 다양해진 기쁨과 유쾌함의 참 빛으로 나타나신다. 그러나 악한 자에게는 연기와 태워 없애는 불로 나타나신다. 법이 선포될 당시 유대인에게는 선행은 없고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이 그들을 차지하고 있었다. 고로 악과 거짓밖에 없었던 바, 그분은 그들에게 연기와 불로서 나타나셨다. 이때 천사들에게는 천국에서 태양으로, 천국의 빛으로 나타나셨다.
유대인들이 그분이 나타나신 것과 같은 품성 속에 있었다는 것이 모세의 책에서 보여진다:
여호와의 영광이 시내 산 위에 거주했다, 그리고 여호와의 영광의 나타남이 이스라엘의 아 들들의 눈에서, 산 정상에서 삼키려는 불 같았다 (출. 24:16, 17).
다시 같은 책에서:
그리고 시내 산은 그 전체가 연기로 싸였다, 그 이유가 여호와께서 불 안에서 그것 위에 내려오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거기로부터의 연기가 용광로의 연기로서 올라갔다, 그리고 온 산이 크게 흔들렸다 (출. 19:18).
그리고 다른 책에서:
너희는 가까이 와서 산 아래 섰다, 그리고 산은 불로 태워졌다, 하늘의 심장까지 이다; 어 둠, 구름, 짙은 어둠; 그리고 여호와께서 불 한 가운데로부터 너희에게 말하셨다
(신. 4:11, 12; 5:22).
같은 책에서:
너희가 산이 불로 태워지는 동안, 어둠의 한 가운데로부터 음성을 듣게 되었다, 하여 너희 는 나에게 가까이 왔다, 그리고 너희는 말했다, 지금 그러므로 왜 우리가 죽어야 합니까? 그 이유가 이 큰 불이 우리를 사를 것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우리가 여호와 우리의 하느님 의 음성을 더 이상 듣는다면, 그때 우리는 죽을 것입니다 (신. 5:23-25).
증오함 안에서, 그리고 증오함의 더러운 것들 안에서 이 세상 삶을 보낸 자가주님을 보게 될 경우, 위의 인용 구절의 상황을 재연할 것이다. 그 이유가 그는 주님으로부터의 선과 진리를 광선을 받는 그릇들 대신, 그의 증오함과 그것의 더러움의 그릇들로부터 밖에 주님을 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주님의 이 광선들을 태워 없애는 불과 연기와 짙은 어둠으로 바뀌게 한다. 본문에 있는 “용광로의 연기”와 “불타는 횃불”에서 의미되는 것, 즉 최고로 치밀한 거짓과 최고로 더러운 악이다, 즉 교회의 마지막 때에 있는 것들이다.

이 (쪼갠 고기) 조각들 사이에서 지나갔다. 이는 주님으로부터 교회 속에 있는 것들이 분리되었음을 의미하는데, 이는 10절에서 말해진 바로부터, 즉 동물 한 가운데를 쪼개 나눔이 천적인 것들에 관한 평행과 상응을 의미한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리고 (쪼갠) 이쪽 부분과 저쪽 부분이 마주보게 놓여지는 것은 교회와 주님을 의미했다는 것; 그리고 중간 장소는 주님과 교회 사이에 있는 곳, 또는 주님과 교회 사이에 있는 장소인데, 이것이 양심이다는 것, 그리고 그 안에 선들과 진리들이 선행을 수단으로 이식되어 있다는 것, 등등으로부터 알게 된다. 그러나 증오함들이 선행의 자리를 차지할 때, 그래서 악들과 거짓들이 선들과 진리들 대신에 들어 앉을 때, 선하고 참된 것에 대한 양심은 없다; 하여 이 중간 장소(양심)는 연기 뿜는 용광로와 불붙는 횃불로 채워진 것이 나타난다. 즉 거짓의 설득과 증오함들로 채워진다는 말이다. 이것들은 교회로부터 주님을 분리되게 만드는 요소이다.
이것들이 조각들 사이로 지나가는 것으로 의미되어 있다; 즉 불붙은 횃불이다, 그 이유는 이것이 자기를 사랑함, 또는 같은 말로, 증오함의 악이다. 이를 예레미야서에서 알게 된다, 거기서 거의 비슷한 단어가 등장한다:
나는 내 언약을 어겨온 사람들을 줄 것이다, 그들은 자기들이 내 앞에서 만든 언약의 말들 을 건립하지 않았다, (이 언약은) 그들이 송아지를 둘로 쪼개고 그 사이를 지나며 (만든 언약이다); 유다의 제 1인 자, 예루살렘의 제 1인 자, 내시(환관), 성직자, 토지의 모든 백 성, (그들이) 송아지의 부분들 사이를 지나갔다; 나는 그들을 적들의 손에, 그리고 그들의 혼을 찾는 그들의 손에 주기까지 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시체는 하늘의 새와 땅의 짐 승에게 식품일 것이다 (예. 34:14, 18-20).

18절. 그 날 여호와께서 아브람과 언약을 하시고 말하시기를, 나는 네 씨에게 이 토지, 이집트의 강으로부터 큰 강 유브라데 강에 이르기까지를 줄 것이다.

그 날에 여호와께서 아브람과 언약을 만드셨다. 이는 주님의 내면의 인간(Lord’s interior man, intermediate self)이 그분의 내적 인간(His internal, inner self)과 결합함을 의미하는데, 이는 “언약”의 의미가 결합이다로부터 분명해진다, 이 의미에 관하여는 앞에서 말했었다. 그리고 여기서 내적 의미에서는 주님이 취급되는 바, 이는 내면에서의 결합을 의미한다. 그 이유가 주님께서는 더욱 더 결합하여 발전해 가셨기 때문, 즉 여호와 그분의 아버지와 합일을 계속해 가시어 그분이 하나를 만들 때까지, 즉 인간 본질 자체가 주님의 내적 자체인 여호와가 되실 때까지 계속 발전해 가셨다. 이런 사항들이 여호와께서 아브람과 만드신 언약에 의해 표현되어졌다. 누구나 알 수 있는 것은, 여호와께서는 인간과 언약을 결코 만드시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이유가 인간의 것은 신성에 반대되어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것은 천박하고 더러운 어떤 것, 생각하고 행하는 것이 악밖에 인간 자체 안에 (신성에 속한) 그 무엇이 있을까? 인간이 행하는 모든 선은 여호와로부터 이다; 이로부터 이 언약, 뿐만 아니라 아브람의 후손들과의 언약도 마찬가지로 신성의 표현, 또는 하느님의 왕국의 천적인 것의 표현밖에 더 아니다; 본문의 경우에서의 언약은 주님의 인간 본질이 신성 본질, 즉 여호와와 결합함의 표현이었다. 이것이 주님의 내면의 인간이 그분의 내적 인간, 즉 여호와와의 결합의 표현이다는 것은 앞서 말해진 바로부터, 즉 전투와 승리들을 통해 주님께서는 더욱 더 그분 자신을 결합되게 하시어 하나되어 가셨다는 것으로부터 분명해진다. 이미 살핀 바 있지만 그분의 내면의 인간은 내적 인간과 외적 인간 사이에 있는 중간의(중매하는) 인간을 말한다.

말하시기를, 네 씨에게 나는 이 토지를 줄 것이다. 이는 이 시험들과 공포들이 있은 후, 위로하심을 의미하고, 선행과 그분에 대한 신앙을 가진 이들이 상속자가 된다는 것은 “씨”와 “토지”의 의미로부터 분명해진다. 아브람의 “씨”는 사랑과 사랑으로부터 있는 신앙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선행 안에, 그리고 주님에 대한 신앙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의미한다. 가나안의 토지는 주님의 왕국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네 씨에게 토지를 준다는 것”은 천국의 왕국은 선행으로부터 주님에 대한 신앙을 가지는 이들에게 상속분으로 주어진다를 의미한다.
이런 사항들의 주님의 시험들과 공포들 이후, 주님의 위로받으심 이다는 것은 설명 없이도 알 것이다. 주님께서 가혹하고 (주님의 질서에) 역행하는 결말을 보신 이후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그분께서 악들과 거짓들과 싸움에 임하신 후, 이것이 11절에서, 고기 조각 위로 덤벼든 새와 아브람이 새를 쫓아낸 것으로 그려져 있다. 그리고 모든 치밀한 거짓들이 그 자체를 (그분에게) 주입하였다, 이때 그분은 덜덜 떠셨다, 이것이 12절에서, “큰 어둠의 공포”와 아브람이 깊은 잠에 빠졌다로 그려져 있다. 마지막 거짓들과 악들만이 인류를 소유해 버렸다, 이는 17절에서, “연기 뿜는 용광로”와 “불붙은 횃불”이 고기 조각 사이를 통과하는 것으로 그려져 있다. 하여 주님께서는 고민과 슬픔에 처하실 수밖에 없으셨다. 그러므로 이 구절에서 위로가 뒤잇는다. 이 위로는 4, 5절에서 주어진 바와 같은 것, 즉 그분의 씨가 토지를 상속받을 것, 즉 선행 안에서 그분에 대한 신앙을 가지는 이들이 그분의 왕국의 상속자이다는 것이다. 그분에게는 인류의 구원이 그분을 위로받게 한다. 그 이유가 그분은 신성과 천적인 사랑 안에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분의 인간 본질조차도 신성과 천적인 사랑 자체가 되셨는 바, 그분 안에서 이 사랑은 모든 이를 사랑하는 것이 유일한 목적이고 이를 실행하심만을 그분의 심정은 느끼시고 있다.
신성한 사랑이 이와 같다는 것을 자기 자녀에 대한 부모의 사랑으로부터도 짐작 할 수 있다. 이 사랑은 대를 내려갈수록, 즉 1대보다 2대, 3대로 더 멀어질수록 사랑이 증가한다. 원인과 근원 없이 존재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결과적으로 계속 내려 가는 후손에게 증가하는 사랑으로 특징화된 인류 안에 있는 위의 사랑도 원인과 근원이 없을 리가 없다. 이것의 원인과 근원은 주님일 수밖에 없다, 이분으로부터 모든 결혼의 사랑이 흐른다, 그리고 자기 자녀를 향한 부모들의 사랑 역시 그분으로부터 흐른다, 그리고 이 사랑의 근원은 모든 이를 위한 그분의 사랑이 자기 아들을 위한 아버지의 사랑과 같다에 있다. 즉 아들에게 모든 것을 물려 주고 싶은 아버지 같이 그분은 모두를 그분의 상속자로 만들기를 바라신다, 그리고 마치 태어나 있는 이들을 위해서 같이 태어나질 이들을 위한 상속분을 준비하고 계신다.

이집트의 강으로부터 큰 강, 유브라데 강까지. 이는 영적인 것들과 천적인 것들의 확장을 의미한다는 것, 즉 “이집트의 강”은 영적(평면)인 것들의 확장을, 그리고 “유브라데 강”은 천적 (평면)인 것들의 확장을 의미하는데, 이는 “이집트의 강”과 “유브라데 강”의 의미로부터 분명해진다. 이 “강들”이 영적인 것들과 천적인 것들을 의미하는 것은 가나안의 토지의 의미가 천국과 땅에 있는 주님의 왕국이다로부터 알 수 있다. 즉 주님의 왕국 안에는 신앙으로부터 있는 영적인 것들과 서로의 사랑으로부터 있는 천적인 것들밖에 없다. 그러므로 이런 것들의 확장이 가나안의 토지의 경계선에 의해 의미된다. 사실상 천국에 있는 이들은 가나안의 토지가 무엇인지, 이집트의 강이 무엇인지, 큰 강 유브라데가 무엇인지, 어떤 토지의 경계선이 무엇인지 전혀 모른다. 그러나 그들은 영적인 것들과 천적인 것들의 확장이 무엇인지, 그리고 이런 것들의 결정과 한계들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인간에 의해 이런 성서 대목들이 읽혀질 때 그들은 마음 안에 위와 같은 생각을 가지는 바, 성서 글자는 그것이 섬긴 역사적 의미와 더불어 사라진다.
“이집트의 강”이 영적인 것들의 확장을 의미하는데, 그 이유는 “이집트”가 기억 속의 지식들(memory-knowledges, 사실들, facts)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 지식은 인간의 합리성과 지적인 것들과 더불어 영적(평면)인 것들을 구성한다. 이에 관하여는 1443항과 그외 여러 장소에서 말했다. “이집트”의 내적 의미가 기억 속의 지식들(또는 사실들)이다는 것은 앞에서 살핀 바 있다. “유브라데 강”이 천적인 것들의 확장을 의미하는 것은 이 강이 가나안 토지의 경계를 이루어 다른 토지들에서 분리한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알게 된다. 마찬가지로 이런 토지들 역시 많은 다른 구절에서도 사실들과 천적인 것들에 관한 지식들이 의미되어진다; 그러나 여기서의 경우, “강”, 그리고 “큰 강”이라 불리우기 때문에, 천적인 것들과 이것들에 관한 지식만이 의미된다; 그 이유가 “큰 강”과 “큼, greatness”은 일반적으로 천국에 속한 것들을 수식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19, 20, 21절. 즉 겐족과 그니스족과 갓몬족과 20 헷족과 브리스족과 르바(임)족과 21 아모리족과 가나안족과 기르가스족과 여부스족.
“겐족, 그니스족, 갓몬족”은 주님의 왕국으로부터 추방되어진 거짓들을 의미한다. “헷족, 브리스족, 르바(임)족”은 거짓의 설득을 의미한다. “아모리족, 가나안족”은 악들을 의미한다. “기르가스족, 여부스족”은 악들로부터의 거짓들을 의미한다.

위의 의미들이 위의 나라(민족)들에 의해 의미되는 것을 말씀으로부터 확인해보는 것은 어쩌면 너무 지루할 것이라 여겨진다. 그리고 이 대목에서 확증해 볼 필요도 없을 것 같다. 그 이유는 단지 이름들만 열거되기 때문이다. 위 나라들 중 일부는 이미 살핀 바 있다 이 외의 나라들의 특별한 의미가 무엇인지는 그것이 등장하는 대목에서 주님의 신성한 자비로부터 말해 보겠다.
주님의 왕국으로부터 추방된 나라들에 주목해보면 이렇다. 다른 삶에서 악한 자들과 지옥의 영들은 영들의 세계로 올라와서 선한 영들에게 자기들의 것에 물들게 하고 싶은 바램밖에 없다. 그러나 그들이 그렇게 시도하자 마자, 그들은 내쳐진다. 마치 지상에서 거듭나는 이들 안에서 그를 점유했었던 악들과 거짓들이 복종당하고 사라져 버리고, 그 자리에 주님의 선들과 진리들이 이식되는 과정과 같다.
이런 과정들이 야곱의 아들들(후손들)에 의해 가나안의 토지로부터 추방되어지는 나라들에 의해 표현되어졌다; 그리고 이와 같은 것이 유대인들 자신들에 의해서도 표현되어졌다. 그 이유가 그들이 정착한 후 그들도 거기로부터 (바빌론 내지 북쪽으로) 쫓겨났기 때문이다. 이런 비슷한 것이 비슷한 것을 표현한 여러 나라들과도 있었다. 즉 에서의 후손에 의해 세일 산에서 몰아내진 호리족 같은 경우이다 (신. 2:12, 22). 그리고 아위족이 갑돌족에 의해 몰아내진 경우 (신. 2:23)도 있다; 또한 모압족에 의해 몰아내진 에밈족, 또는 르바임족의 경우도 있다 (신. 2:9-11). 또한 암몬족에 의해 추방된 삼숨민족의 경우도 있다 (신. 2:19-21). 이 외에도 예언서들에서도 말해진다.
*************************************

창세기 제 16 장

성경: 창세기 16 장

1. 그리고 사래, 아브람의 아내는 그에게 아이를 낳아 주지 못하였다. 그리고 그녀는 이집트 출신 여종이 있었는데 그녀의 이름은 하갈이었다.
2. 사래가 아브람에게 말했다, 보라, 원하건대 여호와께서는 나에게 아이 낳는 것을 닫으셨으니 내 하녀에게로 가시오. 어쩌면 나는 그녀를 수단으로 (가문을) 건설할 수 있을지 모릅니다. 그리고 아브람은 그녀의 음성에 귀를 기울였다.
3. 그리고 사래, 아브람의 아내가 그녀의 하녀 이집트 출신 하갈을 데려다가 자기의 남자 아브람에게 여인으로 그녀를 주었는데, 이는 아브람이 가나안 땅에 거주한지 십 년 후 이었다.
4. 그리고 아브람은 하갈에게 갔고, 그 여자는 임신하였다. 그리고 그녀는 자기가 임 신하였음을 알고, 자기의 여주인을 멸시했다.
5. 그래서 사래가 아브람에게 말하기를, 내가 받은 부당함은 당신 때문이다. 내가 내 여종을 당신 품에 넣었더니, 그녀는 자기가 임신한 것을 알고 나를 멸시하였는 바, 여호와께서 나와 당신 사이에서 판결하신다.
6. 그리고 아브람이 사래에게 말하기를, 보라, 당신의 여종은 당신의 손 안에 있으니, 당신의 눈에 좋을대로 그녀에게 행동하라. 그래서 사래가 그녀를 창피스럽게 했다. 그러자 그녀는 사래의 얼굴로부터 도망했다.
7. 여호와의 천사가 그녀를 광야에 있는 물들의 샘 근처, 수르로 가는 길에 있는 샘 근처에서 발견하였다.
8. 그리고 그는 말했다, 하갈, 사래의 여종아, 너는 어디에서 오느냐? 너는 어디로 가 고 있느냐? 그리고 그녀는 말했다. 저는 사래, 나의 여주인의 얼굴로부터 도망치고 있습니다.
9. 그리고 여호와의 천사가 그녀에게 말하기를, 네 여주인에게 돌아 가라, 그리고 사 래의 손 아래에서 네 자신을 겸허하게 하라.
10. 그리고 여호와의 천사가 그녀에게 말하기를, 나는 네 씨를 크게 번성하게 하리니, 번성한 수를 셀 수 없을 것이다.
11. 그리고 여호와의 천사가 그녀에게 말하기를, 보라, 너는 아이와 함께 있고, 아들 을 낳을 것이고, 너는 그의 이름을 이스마엘이라 부르리라. 그 이유는 여호와께 서 네 고뇌에 귀를 기울이셨기 때문이다.
12. 그리고 그는 들나귀 인간이리라. 그의 손은 모든 이와 맞서고, 모든 이의 손은 그 에게 맞서리라. 그리고 그는 그의 모든 형제의 얼굴에 거슬리며 거주하리라.
13. 그래서 그녀는 자기에게 말하신 여호와의 이름을 당신 하느님이 나를 보고 있으 시다 라고 불렀다. 그 이유가 나 또한 나를 보시는 그분을 따라서 여기서 보 았던고? 라고 그녀가 말했기 때문이다.
14. 그러므로 그녀는 그 샘을 나를 보시는 살아계신 분의 샘이라고 불렀다. 이것은 가데스와 베렛 사이에 있다.
15. 그리고 하갈은 아브람에게 아들을 낳아 주었다. 그리고 아브람은 하갈이 낳은 그 의 아들의 이름을 이스마엘이라 불렀다.
16. 하갈이 아브람에게 이스마엘을 낳았을 때, 아브람은 팔십 육세의 아들이었다”

각 절의 내적 의미

1절. 그리고 사래, 아브람의 아내는 그에게 아이를 낳아 주지 못하였다. 그리고 그녀는 이집트 출신 여종이 있었는데 그녀의 이름은 하갈이었다.

사래, 아브람의 아내는 그에게 아이를 낳아 주지 못하였다. 이는 합리적 인간이 아직은 있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는 이삭이 취급되는 대목으로부터 분명해질 것이다. 이미 말한 그대로, 모든 인간 안에는 내적 인간, 중간 위치에 있는 합리적 인간, 자연적 인간이라 불리우는 외적 인간이 있다. 주님과 더불어 이 세 인간은 아브라함, 이삭, 야곱에 의해 표현되어지고 있다; 즉 내적 인간은 아브라함, 합리적 인간은 이삭, 자연적 인간은 야곱에 의해 각기 표현되고 있다. 주님에서 내적 인간은 여호와 자신이시다, 그 이유가 주님이 여호와로부터 임신되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주님은 여호와를 그분의 “아버지”라고 자주 부르셨다, 그리고 말씀에서 “하느님의 독생자”, 그리고 유일한 “하느님의 아들”이라고도 불리우신다. 합리적 인간은 인간과 더불어 출생되지 않으나 합리성이 되는 (잠재) 능력을 가지고 태어난다. 이는 우리에게도 쉽게 관찰된다. 즉 갓 출생한 유아가 어떤 이성도 수여되어 있지 않다는 것, 그러나 이들이 (일반적) 지식들을 흡수하면서 내적, 외적인 감각들을 수단으로 시간이 경과하면서 합리력이 발달한다는 것에서 알 수 있다. 어린이 안에서는 실로 합리성의 나타남(외관)이 있다, 그렇지만 이것은 합리성 자체는 아니다. 그러나 일종의 합리성의 싹틈일 뿐이다. 이것은 이성이 성년의 사람에게 속한다고 사회적으로 인정한다는 사실로부터도 여러분은 금방 알 수 있다.
주님에게 있는 합리적 인간이 이 장에서 다루어진다. 신성한 합리성 자체는 이삭에 의해 표현되어진다; 그러나 합리성이 신성으로 만들어지기 전, 첫 합리성이 이스마엘에 의해 표현되어진다; 그러므로 이 구절에서 말해지는 것, “사래, 아브람의 아내는 그에게 낳아 주지 못했다”는 것은 지금까지 신성한 합리성은 없었다를 의미한다. 이미 말했듯이, 주님은 여느 사람처럼 태어나셨다, 그리고 어머니 마리아로부터 얻은 모든 것에 주목해보면, 그분은 다른 사람과 다를 바 없었다; 그리고 합리성이 (일반적) 지식들을 수단으로 만들어지고, 이 지식은 외적 감각들, 또는 외적 인간 속의 것들을 통하여 들어오는 바, 그분의 첫 합리성은 여느 사람과 똑같은 상태에서 태어나셨다; 그러나 그분 자신의 힘에 의해 그분에 속해 있는 모든 인간의 것들을 신성으로 만드셨듯이, 그분의 합리성도 신성으로 만드셨다. 그분의 첫 합리성이 이 장에서 묘사되어진다, 그리고 21장 9-21절에서 하갈과 이스마엘이 취급된다, 거기서 이삭이 성장했을 때, 이스마엘이 추방되었다고 말해진다. 이 구절의 이삭은 신성한 합리성을 표현하였다.

여호와인 주님의 내적 인간이 아브람일 때, 사래는 선에 인접한 진리이다는 것은 이미 말한 바 있다. 여호와이신 주님의 내적 인간은 사람(Man)이라 불리우신다. 그 이유는 여호와 외에 누구도 인간(man)인 자는 없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인간, 순수 의미에서 있음(Esse)으로부터 있는 인간을 의미한다. 인간을 있게 하는 있음 자체는 신성, 결과적으로 천적인 것과 영적인 것이다. 신성한 천적, 영적인 것 없이 인간 안에 사람다운 것은 없다. 그러나 동물적 본성만 있을 뿐이다. 마치 짐승이라 말해도 될 것이다. 여호와의 있음으로부터, 또는 주님의 있음으로부터 모든 인간은 인간이다; 그리고 이로부터 역시 그는 인간이라 불리운다. 인간을 만드는 천적인 것은 그가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다; 이 방법에서 그는 인간이다, 그 이유는 그가 주님의 형상이기 때문, 그리고 그가 이것을 주님으로부터 가지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는 들짐승이다.
여호와, 또는 주님이 유일한 사람이시다는 것, 그리고 인간은 인간됨을 그분으로부터 가진다; 또한 여호와, 또는 주님이 태고 교회의 조상들에게 사람으로 나타나셨다는 것, 그리고 후에 아브라함에게와 예언자들에게 나타나셨다는 것도 위 문항에서 알게 된다; 홍수 사건으로 땅 위에 인간이 더 이상 없게 된 후, 즉 더 이상 천적, 영적인 것이 인간들 사이에 있지 않게 된 후, 주님께서는 여느 인간의 출생방식을 통해 인간 본성을 입으시기로 하셨다, 그리하여 이 인간 본성을 신성으로 만드시는 것이다; 그리고 이 방법에서 그분은 유일한 사람이시다. 이 외에, 보편적 천국은 주님 앞에서 인간의 형상으로 표출된다, 그 이유는 그것이 그분 자신을 표출하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천국은 장대한 사람(Grand Man)이라 불리운다, 그리고 이는 주님은 모든 것에서 모두 되신다는 사실로부터 특별히 그러하다.

그리고 그녀는 이집트 출신 몸종을 가졌다. 이는 기억 속의 애착들에 관한 애착을 의미한다는 것은 “몸종”의 의미와 “이집트”의 의미로부터 분명해진다. 여주인, 또는 마님으로서의 사래는 선에 인접한 진리를 표현하고 의미한다. 이는 이미 말했다. 선에 인접한 진리는 순수 의미에서 지적 진리이다. 그러나 합리적 진리는 이 진리 아래에 있다. 그러므로 더 수준이 낮다; 그리고 이 합리적 진리는 지식들에 상응하는 애착에 의해 생기가 주어진 지식들로부터 태어나진다. 그리고 이 애착, 외면의 인간 속에 있는 바, 가장 깊은 인간에 속하는 지적인 진리를 섬겨야 한다. 마치 몸종이 마님을 섬기듯 해야 한다; 그러므로 이 애착이 “몸종 하갈”에 의해 표현되고 의미되는 것이다.
이런 관계가 어떻게 세워져 있는지를 우리의 납득력에 잘 서술할 수는 없을 것 같다. 그 이유가 우선 지적 진리가 순수 의미에서 무엇인지, 그리고 어떻게 합리성이 태어나는지, 즉 내적 인간을 아버지로 하여, 그리고 외면, 또는 자연적 인간을 어머니로 하여 태어나는지 먼저 알아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이 둘의 결합 없이 합리성의 출현은 가능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합리성은 지식들로부터 출생되는 것이 아니라 이런 지식들에 대한 애착으로부터 출생된다. 즉 누군가가 이런 지식들에 대한 애착, 즐거움이 지식을 열망하지 않으면 누구도 합리적으로 되어갈 수 없다는 사실만 생각해도 이해 될 것이다. 애착은 어머니 쪽의 생명 자체이다; 그리고 애착 안에 있는 천적, 영적인 것 자체는 아버지 쪽의 생명이다; 그러므로 애착에 비례하여, 그리고 애착의 품질에 일치하여, 그리고 똑같은 품질에서 인간은 합리적이 되어간다. 합리성 자체 안에서 이런 지식들은 죽은 것들밖에 더 아니다, 또는 도구적인 원인에 불과하다. 이것은 애착의 생명에 의해 생기를 받는다; 모든 이 안에서 합리적 인간의 임신은 이와 같다. 몸종이 이집트인인 이유, 그리고 이 사실이 서술되어진 이유는 “이집트”가 기억 속의 지식들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녀의 이름은 하갈이었다. 이것은 외면 또는 자연적 인간의 생명을 의미한다는 것은 이미 말해진 바로부터, 또한 “하갈”의 의미가 “외국인”, 또는 “체류자”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외국인들은 가르침을 받는 이들, 그리고 체류함은 가르침과 생명의 원리 또한 표현하였다. 어느 인간의 이름이 말씀에 서술될 때, 여기서의 경우, “그녀의 이름은 하갈이었다”와 같이 서술될 때, 이는 우리가 시선을 모아야 하는 어떤 것이 이름 안에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이유가 “이름 부른다”는 것은 인물의 품질을 아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말씀의 한 음절도 거기에 원인 없이, 실제적인 어떤 것에 대한 내적 의미에서의 의미 없이 있지를 않는다.

2절. 사래가 아브람에게 말했다, 보라 원하건대 여호와께서 나에게 아이 낳는 것을 닫으셨다. 내 하녀에게로 가시오. 어쩌면 나는 그녀를 수단으로 (가문을) 건설할 수 있을지 모릅니다. 그리고 아브람은 그녀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사래가 아브람에게 말했다. 이는 그와 같이 지각되었다를 의미하는데, 이는 “사래”와 “아브람”의 의미, 즉 “사래”는 선에 인접한 진리를, 그리고 “아브람”은 내적 인간이다로부터 분명해진다; 그러므로 “사래가 아브람에게 말했다”란 내적 의미에서의 경우 어떤 대화가 아닌 지각을 의미할 수밖에 없다. 그때 당시 주님의 지각은 선에 인접한 진리로부터 이셨다. 이 지각이 그분에게 이 경우가 어떻게 있었는지를 받아쓰게 한 것이다. 지각을 받는 천적 인간도 이와 비슷하다; 그 이유가 받아쓰는 선에 인접한 진리의 어떤 것이 있기 때문이다; 그 후에 선으로부터의 진리가, 또는 선을 통하여 진리가 지각되어진다.

보라 원하건대 여호와께서 나에게 아이 낳는 것을 닫으셨다. 이는 내면의 인간 또는 신성한 합리적 인간이 태어나기 전의 상태를 의미한다. 이는 합리적 인간의 임신과 출생에 관하여 이미 말해진 바로부터 분명해진다. 즉 주님의 신성한 합리적 인간이 이삭에 의해 표현되어 진다는 것, 그러나 그분의 첫 합리적 인간, 이 인간이 신성이 되어지는데, 이스마엘에 의해 표현되어진다로부터 분명해진다. 이런 것들이 표현되어지기 위해 사래는 오랫동안 불임 상태에 있어 왔고, 이스마엘이 소년이 될 때까지 그렇게 있었다. 이에 대해 본문에서 “여호와께서 그녀가 출산하는 것을 닫았다”라고 말해지고 있다.

내 하녀에게로 가시오. 이는 외면의 인간과 결합함을 의미하는데, 이는 앞서 말해진 것으로부터 분명해진다, 즉 합리성이 임신되고 출생하는 것은 내적 인간을 아버지로, 외적 인간을 어머니로 하여 되어진다로부터 알게 된다. 인간의 생명 자체는 내적 인간으로부터 있다. 아주 희미한 수준의 교류 정도 외에, 내적 인간은 외적 인간과 교류할 수 없다. 그래서 확실한 교류를 위해서는 기억으로부터 받는 그릇들이 만들어져야 하는데, 이것은 지식들을 수단으로 가능해진다.
내적 인간의 유입은 외면의 인간의 지식들 안으로 간다; 가는 수단은 애착이다. 이 지식들이 있기 전, 교류가 있다, 그러나 애착만을 통하여, 이를 수단으로 외적 인간이 통치되어진다; 그러나 이로부터는 가장 일반적인 동작만, 그리고 어떤 욕구들만 , 어떤 맹목적 경향성만 있을 뿐이다. 마치 유아들의 움직임 수준에 걸맞는 수준이다. 그러나 이 작은 움직임(생명 있음)은 점차로 더 분명히 구분되어져 가는데, 이는 지식을 수단으로 만들어내진 기억의 그릇들에 비례하여서 이고, 합리적인 것들을 수단으로 내면의 기억의 그릇들에 비례하여서 이다. 이런 그릇들이 형성되어지고 시리즈로 배열되는 바, 이것들은 상호적으로 서로를 중시한다. 마치 혈연 관계, 결혼 관계, 또는 사회 단체, 가문 같은 것으로 엮어져 서로 중시하는 모양새와 같다. 이러므로 해서 외적 인간은 내적 인간과 완전한 상응을 이룬다, 더우기 중간 매체인 합리적인 것들을 수단으로 더 나은 수준까지도 실행되어진다.
그러나 그릇들을 만들어낸 지식들이 진리들이지 않으면 적합성의 결핍이 있다. 그 이유가 내적 인간의 천적, 영적인 것들은 진리들 외에는 자기들을 위해 적합한 상응을 발견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진리들은 각 기억 속의 고유의 형체로 있는 순수한 그릇들이기 때문이다. 이것에 사랑의 천적인 것들과 신앙의 영적인 것들은 꼭 들어 맞는다; 그것들은 거기서 인간이 가장 작은 형체에서의 천국이 되는 만큼에 비례하여, 천국, 또는 그분의 왕국의 공동체들의 형상과 생각에 따라 주님에 의해 배열되어진다. 마치 사랑의 천적인 것들과 신앙의 영적인 것들 안에 있는 이들의 마음들이 말씀에서 불리우는 것과 같다. 그러나 이런 사항들은 더 깊게 생각하기를 사랑하는 이들이 말해왔었다.

어쩌면 나는 그녀를 수단으로 (가문을) 건설할 수 있을지 모릅니다. 이는 이런 방법에서 합리성이 태어날 수 있을 것이다를 의미하는데, 이는 “건설한다”가 자손의 대를 이음을 자연스레 예상하게 하는 바 별도 설명 없이 알 것이다. “사래”는 아내로서 선에 인접해 왔던 지적 진리를 의미한다. 가장 깊은 수준에 속하는 지적 진리는 이 진리가 (바깥쪽으로) 흐르게 할 수 있는 (매체인) 어떤 합리성도 아직 없는 바, 이 진리는 불임, 자녀 없음과 같은 상태에 머물고 있다. 그 이유가 매체 역할을 해주는 합리성이 없으면, 지적 진리는 어떤 진리와 더불어 외면의 인간 안으로 흘러들 수 없다. 이에 대한 이해는 어린 아이의 성숙되어감을 생각해보면 된다. 즉 아이는 그들이 지식들을 흡수할 때까지 어떤 진리에 관해서도 무지할 뿐이다. 그러나 시간이 경과하면서 흡수함의 정도에 비례하여 가장 깊은 것, 또는 선에 속하는 지적 진리에 걸맞게 그 만큼 완전해져 지적 진리와 교통을 이룰 수 있게 된다.
사래에 의해 표현된 지적 진리는 천국을 통하여 흘러드는 영적인 것 자체이다, 그리고 이 흐름은 내적 경로를 통해서이고, 모두 각각의 인간과 더불어 있다; 그리고 영적인 것 자체는 감각의 것들을 수단으로 주입된 지식들을 계속적으로 만난다, 그리고 기억 안에 이식되어진다. 인간은 지적 진리를 전혀 눈치채지 못하는데, 그 이유는 일반적 생각에 의해 지각되어지기에는 너무나 순수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지성(mind)을 밝게 비추는 일종의 빛과 같아서, 앎, 생각함, 이해함의 능력을 수여한다. 합리성은 사래에 의해 표현되는 지적 진리의 유입을 수단으로 하지 않으면 존재 안으로 와질 수 없는 바, 합리성은 지적 진리의 아들로서의 위치에서 관련되고 있다. 합리성이 선에 인접해왔던 진리들로부터 만들어내질 때, 더 나아가 진리들로부터 있는 선들로부터 만들어내질 때, 이 합리성은 진짜 아들이다. 이에 앞서 실로 아들로서 인정되는 아들이기는 하나 진짜 아들은 아닌, 하녀로부터의 아들이 있다. 이 아들은 양자로 삼는 수준에서의 아들이다. 이를 두고, 사래가 그녀를 수단으로 (가문이) 건설될 수 있을지 모른다고 말한 것이다.

그리고 아브람은 그녀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이는 여느 다른 방법에서는 행해질 수 없었다를 의미하는데, 이는 내적 의미의 연결로부터, 그리고 합리성이 이 방법에서 태어나지기 위해 존재하는 필요성으로부터 알게 된다. 만일 인간이 어떤 유전적 악에도 물들여져 있지 않다면, 합리성은 내적 인간의 천적인 것들과 영적인 것들의 결혼에서 즉각 태어나질 것이다. 그리고 아는 능력 역시 합리성을 통하여 태어나질 것이다. 그리하여 세상 안으로 옴에서 인간은 이성과 앎에 관한 모든 능력을 자신 안에 즉시 가질 것이다. 그 이유가 이것은 유입의 질서에 일치하기 때문이다. 마치 동물들이 태어나면서 동시에 먹이를 확보하는 능력, 안전을 확보하는 능력, 주거지, 자손을 번식, 보존하는 방법 등을 가지고 있는 것을 연상하면 이해 될 것이다. 동물이 이런 본능을 태어나며 지니는 이유는 그것들이 자기들의 질서에 일치하기 때문이다. 왜 인간은 이런 식으로 태어나지지 않는 것일까?
인간이 지식 없이 태어나지는 원인은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로부터 유전된 악때문이다. 이것 때문에 인간의 모든 능력들은 진리들과 선들에 주목해보면 이것들에 반대 방향으로 돌아서져 있다. 그러므로 주님으로부터의 천적, 영적인 것들의 직접적인 유입에 의해서는 상응하는 형체로 바꾸어 질 수 없다. 이것이 인간의 합리성은 (동물과는) 전적으로 다른 과정에 의해 형성되어야만 하는 이유이다. 다른 방법이란 감각을 통하여 도입된 지식들을 수단으로 하는 것, 따라서 외적 경로를 통해 흘러드는 방법, 하여 이 방법은 거꾸로 (진행하는) 질서이다. 고로 인간은 주님에 의해 기적적인 방식으로 합리성이 만들어진다. 이것이 본문에서 “하녀에게 감”에서 뜻해지고 있다. 이렇게 “감”에 의해 내적 인간이 외면의 인간과 결합함이 의미되어 있다; 그리고 또한 “아브람이 사래의 음성에 귀를 기울였다”에 의해서도 의미되어 있다. 이것은 여느 다른 방법으로는 실행될 수 없음도 의미한다.
여느 인간이나 마찬가지로 태어나신 주님, 그렇기 때문에 그분 역시 어머니로부터 유전된 본성을 가지셨다. 하여 지식들을 수단으로 합리성을 만들어내는 기적적인 방식 역시 여느 사람과 마찬가지였다. 하여 시험을 받고 승리하는 과정에 의해 그분은 모든 것들을 질서로 바꾸어 놓으셨다. 그러므로 그분의 합리성도 여느 인간 같이 임신되어지고 출생한 것이다. 그러나 다른 점 하나는 그분의 것들 중 가장 깊은 속은 신성, 또는 여호와이셨다는 것이다. 고로 인류를 향한 사랑의 생명이 있으셨다는 말이다. 하여 그분은 인류를 위해 인류의 구원을 위해 모든 그분의 시험들을 싸워가셨던 것이다.

3절. 그리고 사래, 아브람의 아내가 그녀의 하녀 이집트 출신 하갈을 데려다가 자기의 남자 아브람에게 그에게 대한 여인으로 주었는데, 이는 아브람이 가나안 땅에 거주한지 십 년 후 이었다.

사래, 아브람의 아내가…데려왔다. 이는 순수한 의미에서 “아내 사래”가 진리에 대한 애착이다를 의미하는데, 이는 “사래”가 선에 인접한 진리이다로부터, 그리고 “아내”의 의미가 애착이다로부터 분명해진다. 서로로부터 구분되는 두 애착들이 있다. 선에 대한 애착과 진리에 대한 애착이다. 인간이 거듭나지려 할 때 진리에 대한 애착이 선두에서 이끈다. 그 이유가 그는 선을 목적으로 진리에 감동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거듭나져갔었을 때, 선에 대한 애착이 선두에서 이끈다. 그 이유가 선으로부터 그는 진리에 감동되기 때문이다. 선에 대한 애착은 의지로부터 있다; 진리에 대한 애착은 이해력으로부터 있다. 태고인들은 이 두 애착들 사이를 결혼 관계로 설정해두었다. 즉 선, 또는 선을 사랑함을 그들은 남편되는 인간이라 불렀다; 진리, 또는 진리를 사랑함을 그들은 아내되는 인간이라 불렀다; 선과 진리를 결혼에 비교함의 근원은 천국의 결혼에 있다.
선과 진리, 그 자체만 떼어 놓고 주목한다면, 그것들에는 생명이 없다, 그러나 그것들은 사랑, 또는 애착으로부터 자기들의 생명을 이끌어낸다. 선과 진리는 생명의 도구들일 뿐, 선과 진리에 감동을 주는 사랑이 생명이다; 생명의 전체는 사랑 또는 애착이다. 그런고로 “아내 사라”는 순수 의미에서 진리에 대한 애착을 의미한다. 그리고 우리들 앞의 이 대목에서는 지적 측면이 자손으로서 합리성을 바라고 있기 때문에, 그리고 그녀가 말하는 것은 이 바램, 또는 애착으로부터 이기 때문에, 이 절에서, “사래, 아브람의 아내가 그녀의 남자 아브람에게 주었다”로 표현되어 말해지고 있다. 이 절에 내적 의미에서의 연결을 생각지 않는다면, 중복된 말의 표현일지 모른다. 사실 사래가 아브람에게 주었다 해도 글자상으로는 의사 전달이 충분함에도 위와 같이 표현된 것은 내적 의미에서의 연결 때문이다.
지적 진리는 합리적 진리로부터 구별되어진다, 그리고 합리적 진리는 기억 속의 지식의 형체에서 있는 진리와 구별된다. 마치 내적인 것, 중간인 것, 외적인 것과 같다. 지적 진리는 내적 수준, 합리적 진리는 중간 매체 수준, 기억 속의 지식의 진리는 외적 수준이다. 이 셋은 서로로부터 확실히 구분되어진다. 그 이유가 이것은 저것 보다 더 내적이기 때문이다. 어느 인간에서 이든, 내적인 것, 즉 가장 안쪽의 것인 지적 진리는 인간의 것이 아니고, 인간과 함께 있는 주님의 것이다. 이로부터 주님은 합리성 안으로 흐르시고, 거기서 진리는 인간에 속한 것으로 처음 나타난다; 그리고 합리성을 통하여 기억 속의 지식 안으로 흘러드신다; 이로부터 분명해지는 바, 인간은 지적 진리로부터 자신 스스로 생각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는 것, 그러나 합리적 진리와 기억 속의 진리로 부터서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 이유가 이 두 진리는 마치 그것들이 자신의 것인 듯 나타나기 때문이다.
주님만이, 그분이 세상에 살으셨을 때, 지적인 진리로부터 생각하셨다. 그 이유는 이 진리가 그분의 선 자체와 결합된 그분의 신성한 진리이었기 때문이다, 또는 신성한 천적인 것과 결합된 신성한 영적인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주님은 모든 인간들과 다르셨다. 자신으로부터 신성인 것을 생각하는 것은 인간에게, 인간 안에서 결코 가능하지 않다. 그러나 여호와로부터 임신된 그분에서 만이 가능했을 뿐이다. 그분이 지적 진리로부터, 또는 지적 진리에 대한 사랑, 또는 애착으로부터 생각하셨기 때문에, 이로부터 또한 그분은 합리성을 바라셨다. 그런 이유로 여기에서 “사래, 아브람의 아내(지적 진리에 대한 애착)”가 “이집트인 하갈을 데려다가, 그녀를 아브람 그녀의 남편에게, 그에게 대한 여인으로 주었다”라고 말해진다.
이 구절에 있는 신비의 나머지는 우리의 납득력에 밝혀지거나 설명될 수 없다, 그 이유는 인간은 최고로 큰 희미함 안에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실상 각 인간은 자기 안에 있는 내적인 것들에는 전혀 어떤 생각도 가진 것이 없다. 그 이유가 인간은 합리적 진리와 지적 진리 모두 기억 속의 지식이 되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진리들이 서로 구분된다는 것도 깨닫지 못한다. 참으로 지적 진리는 합리적 진리로부터 따로 존재하고, 지적 진리로부터 이끌어져 나온 합리적 진리는 기억 속의 지식으로부터 따로 존재한다는 것도 깨닫지 못한다. 이것은 기억 속의 지식에 있는 이들에게 역설적인 듯 비쳐지겠지만, 이는 진리이다. 주님께서 지적 진리로부터 흘러들고 이를 통하여 기억 속의 지식 안으로 흐르게 하는 합리적 진리 안에 있지 않으면, 그가 기억 속의 진리 안에 있는 것도 불가능하다. 이런 신비는 다른 삶이 아니면 열려지지 않는다.

그녀의 하녀, 이집트인 하갈. 이는 외면의 인간의 생명, 그리고 기억 속의 지식에 대한 애착을 의미한다는 것은 앞에서 살핀 “하갈”과 “하녀”의 의미로부터 분명해진다.

이는 아브람이 가나안 땅에 거주한지 십 년 후 이었다. 이는 주님께서 자신에게 획득하신 선에 관한 리메인스와 선에서 나와진 진리에 관한 리메인스를 의미하고, 이 리메인스를 수단으로 합리성이 임신되어졌다. 이는 “10”이 리메인스이다로 부터 분명해진다. 그것은 선과 진리에 대한 애착의 모든 상태들을 의미한다. 이 상태들은 인간이 유아 시절로부터 삶의 마지막까지에 이르기 조차에서 주님으로부터 선물 받은 것들이다; 이 상태들은 사후 그의 삶에서의 사용을 위해 비축되어진다; 그 이유가 다른 삶에서 그의 삶의 모든 상태들이 계속적으로 돌이켜 보여지도록 있게 될 때, 주님에 의해 선물된 선과 진리의 상태들에 의해 부드럽게 되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간이 육체의 삶에서 더 많은 리메인스를 비축할 수록, 즉 선과 진리를 더 많이 받을 수록, 그의 나머지 상태들이 되돌아 올 때, 그것들은 더 기쁘고 아름다운 상태가 된다. 각자 이를 좀 더 곰곰이 생각만 해도 납득하는 데는 하등 지장이 없을 것이다. 인간이 태어날 때, 그는 한 조각의 선도 자신 스스로 가지고 있지 않다. 오히려 유전적 악으로 통째로 더럽혀 있을 뿐이다. 그리고 선인 모든 것은 부모를 사랑함, 유모를 사랑함, 친구를 사랑함 같은 것을 통해 흘러든다; 그리고 이것은 순진으로부터 이다. 이와 같은 것은 가장 안쪽의 천국인 순진과 평화의 천국을 통하여 주님으로부터 흘러드는 것들이다. 인간은 그의 유아기 안에 그것들을 빨아 들인다.
그 후에, 그가 성장하면서, 유아의 이 선, 순진, 평화의 상태들은 점차로 물러난다; 그리고 그가 세상의 것을 도입하고, 세상의 기쁨들을 맛보고, 탐욕들 안으로 진입하고, 결국 악 안으로 빠져드는 만큼, 그의 유아 시대의 좋은 것, 또는 천적인 것들은 사라지기 시작한다; 그렇다고 그것들은 절멸하는 것이 아니라 남아 있다, 그리고 이 후에 인간이 입거나 획득하는 상태들은 그것들에 의해 부드러워진다. 그것들 없이 인간은 인간이 결코 되어 있을 수 없다. 그 이유가 인간의 탐욕들, 또는 악들의 상태는 만일 선에 대한 애착의 상태들에 의해 부드러워지지 않는다면, 여느 동물도 따라 오지 못하게 악독해져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선에 관한 이런 상태들이 리메인스라 불리우고, 이것이 주님에 의해 주어져, 인간의 자연적 성향 안에 이식되어 있다. 이 이식을 인간은 알아채지 못한다.
후기(어린 시절 후의) 삶에서 인간은 새로운 상태들을 선물 받는다; 이 상태들은 선 쪽에서의 상태이기 보다는 진리 쪽에서의 상태이다. 그 이유가 그가 성장함에 따라 그는 더욱 진리를 빨아 들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들은 마찬가지로 그의 내면의 인간 안에 비축되어진다. 진리로부터의 것들인 이 리메인스에 의해 주님으로부터 영적인 것들의 유입이 있어진다. 그리하여 인간은 생각하는 능력을 가지며, 또한 시민적, 도덕적 생활 속의 선과 진리가 무엇인지를 이해하는 능력을 가지며, 또한 영적 진리, 또는 신앙을 가진다; 그러나 그는 자기가 유아 시절에 받았던 선에 관한 리메인스를 수단으로 하지 않으면, 이를 행할 수 없다. 리메인스가 있다는 것, 그것들이 인간 안에, 그의 내면의 인간 안에 비축되어 있다는 것은 인간에게 알려진 바 전혀 없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자기 안으로 흘러드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고, 자기에게 있는 모든 것은 그에게 당연히 있어진 것이라고, 자기와 더불어 태어나진 것이라고, 고로 유아일 때 자기 안에 모두 있던 것이라고 상상될 뿐이다. 허나 실상은 아주 다르다. 리메인스는 말씀의 많은 구절들에 걸쳐 취급되고 있다. 이런 구절들에서 인간이 인간이 되는 상태들을 의미하고, 이것은 주님 만으로부터 임을 의미해 준다.
그러나 주님에 속하는 리메인스는 그분이 자신을 위해 획득하신 신성한 모든 상태들이다. 그리고 이를 가지고 그분은 인간 본질을 신성 본질에 하나되게 하셨다. 따라서 그분의 리메인스는 인간에 속하는 리메인스와 비교될 수 없다. 그 이유는 후자는 신성이 아니고 인성이기 때문이다. 주님에 속하는 리메인스가 “아브람이 가나안의 토지에 거주한 10 년”에 의해 의미되어 있다. 천사들이 말씀을 들을 경우, 그들은 숫자 10이 무엇인지 모르나, 인간에 의해 10이 발음되자 마자, 그들은 리메인스라는 생각을 떠올린다; 말씀에 있는 10, 1/10, 열 번째, 제 10의, (십일조) 등은 리메인스를 의미하는데, 이에 관하여는 576, 1738항을 참조하면 될 것이다; 또한 천사들이 아브람이 가나안의 토지에 거주한지 십 년의 끝이라는 말에 관해 지각하는 것은 우선 주님에 대한 생각이 오고, 동시에 그분이 세상에서 계셨던 때 동안에서 주님 안에 있는 리메인스에 의해 의미되는 무수한 것들을 떠올린다.

그리고 그녀를 자기의 남자 아브람에게 그에게 대한 여인으로 주었다. 이는 진리에 대한 애착을 부추킴을 통하여 결합함을 의미하는데, 이는 사래, 아브람의 아내가 순수 의미에서 진리에 대한 애착이다로부터, 그리고 합리성을 오게 하는 외면의 인간의 생명과 애착과 내적 인간의 결합에 관해 말해진 바로부터 분명해진다. 하갈은 아브람에게 아내로 주어지지 않고 여인으로 주어졌다; 이렇게 말해진 이유는 한 남자와 한 아내이지 않으면, 그것은 결혼이 아니다가 신성한 질서의 법칙이기 때문이다. 결혼의 사랑은 결코 분리되어질 수 없다. 여러 명에게 나뉜 결혼의 사랑은 결혼의 사랑이 아니고 음탕한 짓거리일 뿐이다. 이에 관해서는 차후 주님의 신성한 자비로부터 언급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4절. 그리고 아브람은 하갈에게 갔고, 그 여자는 임신하였다. 그리고 그녀는 자기가 임신하였음을 알고, 자기의 여주인을 멸시했다.

아브람은 하갈에게 갔다. 이는 내적 인간이 기억 속의 지식에 대한 애착의 생명과 결합함을 의미하는데, 이는 1절에서 살핀 바와 같이 “하갈”의 의미가 외면, 또는 자연적 인간의 생명이다로부터 분명해진다. 그리고 이 생명은 기억 속의 지식에 대한 애착의 생명인 것은 “이집트 출신 하녀”의 의미로부터 분명해진다. 외면의 인간에 속하는 많은 애착들이 있다. 이것 모두 그것들의 쓸모있음에 충당된다. 그 중에서 지식들에 대한 애착은 그것의 목적으로 진실로 합리성이 되는 것을 가질 때 많은 애착 중에서 가장 탁월해진다. 그 이유가 애착은 그것의 목적을 위하여 선과 진리를 가지기 때문이다. 내적 인간의 참 생명은 자연적 인간의 모든 애착들 안으로 흐른다. 그러나 목적들에 따라 거기서 다양해진다; 이것이 그것들의 목적을 위해 세상을 가지는 애착들 안으로 흐를 때, 이 목적은 이 생명에 의해 생기 있어진다. 그리고 세상적 삶이 결과된다; 그들의 목적으로 자아를 가지는 애착 안으로 흐를 경우, 이 목적은 이 생명에 의해 활기를 띠게 된다. 그러면 거기에는 육체상의 생명이 결과된다. 이런 식으로 다른 경우도 마찬가지 이다. 이로부터 탐욕들과 공상들이 살고 있다. 그러나 선과 진리에 대한 애착에 반대되는 생명에서 이다.
안으로 흐르는 생명은 목적 외에 다른 대상은 없다. 그 이유가 모든 이와 더불어 그의 목적은 그의 사랑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살아 있는 것은 사랑 뿐이다. 이외 다른 목적물은 사랑이 살아가는 과정에서 있는 파생물에 불과하다. 이것들 모두는 목적으로부터 그들의 생명을 끌어당긴다. 누구든지 자기의 목적이 무엇인지 파악된다면, 그는 자기가 어떤 종류의 생명을 가졌는지 확실히 알 수 있다. 이 목적은 최종 목적에 해당되는 것을 두고 하는 말이다. 그 이유가 최종 목적을 위해 셀 수 없이 많은 중간 목적이 존재할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그가 향해 가는 최종 목적 외의 목적은 그에게 하등 중요하지 않다는 말이다. 만일 그가 자신과 세상에 그의 목표를 두고 있다면, 그는 자기 생명이 지옥적임을 알게 된다; 그러나 그가 그의 목표를 이웃의 선에, 공동의 선에, 더 나아가 주님의 왕국에, 특히 주님 자신에 두고 있다면, 그의 생명이 천국적임을 알게 된다.

그리고 그녀는 임신했다. 이는 합리성의 첫 생명을 의미하는데, 이는 “임신”의 의미가 첫 생명이다로 분명해진다. 합리성에 주목해보면, 이미 말했듯이, 합리성은 그것의 생명을 외면의 인간에 있는 지식들에 대한 애착의 생명 안으로 흐르는 내적 인간의 생명으로부터 받는다. 이런 지식들에 대한 애착의 생명은 합리성에 일종의 몸을 주는 것, 또는 내적 인간의 생명에 옷을 준다. 마치 육체가 혼을 옷입히는 것과 비등하다. 이런 지식들과의 경우도 아마 정밀하게 같을 것이라 본다. 실로 인간에 속하는 모든 것 안에, 그의 애착과 생각의 모든 것 안에는 혼과 몸의 관계를 닮고 있다. 하여 단순히 나타난다든가 하는 일은 없고, 합성되지 않은 것은 없다.

그리고 그녀는 자기가 임신하였음을 알았다, 그리고 그녀의 여주인을 그녀의 눈에서 멸시하였다. 이는 이 합리성, 그것의 임신에서, 선에 인접해 있는 진리 자체를 낮게 평가했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는 “여주인”, 또는 사래가 선에 인접한 진리이다 로부터 분명해진다. 처음 임신된 합리성은 지적 진리, 또는 영적 진리를 진리로서 인정할 수 없다, 그 이유는 이 합리성에 세상과 자연에서 퍼담은 기억 속의 지식들로부터 많은 오류들이 들러 붙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말씀의 글자 의미로부터 취해진 지식들로부터의 많은 가상들이 들러 붙어 있기 때문이다. 이것들은 진리들이 아니다.
예를 들면: 모든 생명은 주님으로부터 있는 지적인 진리이다; 그러나 처음 임신된 합리성은 이를 납득하지 못한다, 그래서 만일 이 지적 진리가 그것 자체로부터 살고 있지 않다면 그것에는 생명이 없다고 상상한다; 뿐만 아니라 자기가 상상한 것의 반대가 진리이다고 말해진다면 분개하기까지 한다. 나는 감각의 오류에 여전히 기울고 있는 영들로부터 이런 성냄을 경험했었다.
모든 선과 진리는 주님으로부터 있다 가 지적인 진리이다; 그러나 처음 임신된 합리성은 이를 납득하지 못한다, 그 이유는 이것들이 자신으로부터 있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그래서 상상하는 바, 만일 선과 진리가 자신으로부터 있지 않다면, 선과 진리에 대한 생각을 가질 수 없었을 것이라 한다. 더욱이 선과 진리에 속한 어떤 것을 실행할 수 없을 것이다 한다; 그리고 만일 그것들이 또 다른 것으로부터 이다면, 그 자체를 놓아 두고, 대신 유입을 위해 언제나 기다려야 한다고 상상하는 것이다.
주님으로부터 있는 것은 오직 선일 뿐, 지극히 작은 악도 그분으로부터서는 있지 않다는 것이 지적 진리이다; 그러나 처음 임신된 합리성은 이를 믿지 않는 바, 상상하기를, 주님은 모든 것을 통치하시기 때문에 악 역시 그분으로부터 이다고 한다; 그리고 그분은 전지전능하시고, 선 자체이시고, 지옥에서의 악의 처벌을 거두어 들이지 않기 때문에, 그분은 악의 처벌을 뜻하신다고 상상한다; 진리인 즉, 그분은 누구에게도 악을 행하신 적이 없고, 누구도 처벌하신 적이 없으시다.
천적 인간은 선과 진리에 대한 지각을 주님으로부터 가진다가 지적 진리이다; 그러나 첫 합리성은 지각의 존재 자체를 통째로 부정하거나, 또는 상상하기를, 만일 인간이 지각을 또 다른 사람으로부터 받고 자신으로부터가 아니다면, 그는 마치 무생물 같은 것, 생명이 결핍된 것이나 마찬가지 라고 상상한다. 사실인 즉, 합리성이 감각적인 것들로부터와 철학적인 추론으로부터 근원하는 기억 속의 지식들로부터 더 생각할 수록, 위에 언급한 지적 진리, 내지 다른 지적 진리는 더욱 덜 납득될 뿐이다. 그 이유는 그것들로부터의 더 많은 오류가 더 어두운 그늘 아래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학식자가 단순한 자보다 덜 믿는 경우가 발생한다.
첫 임신한 합리성이 위와 같기에, 그것은 그것의 여주인을 멸시한다, 즉 첫 합리성은 지적 진리를 경시하여 평가한다. 오류나 가상들이 흩으려지지 않으면 지적 진리는 명백해지지 않는다, 즉 인정되지 않는다. 그리고 우리가 감각적인 것들로부터와 기억 속의 지식들로부터 진리 자체에 관하여 추론하는 한, 오류나 가상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러나 이 진리는 주님으로부터 말해졌기 때문에 진리이다 하는 단순한 심정으로부터 믿을 때에서야 지적 진리는 우리에게 명명백백해진다. 그때 오류들의 그늘은 사라지고, 우리가 지적 진리를 납득함으로부터 방해하는 것들은 하나도 없게 된다.
주님 안에서의 경우, 우리가 겪는 위와 같은 오류는 없으셨다. 그러나 그분의 합리성이 처음 임신되셨을 때, 그 자체 진리들이 아니었던 진리의 가상(appearance)은 있으셨다. 그런고로 그분의 합리성 역시 그것의 임신에서 지적 진리를 경시함이 있으셨다; 그러나 점차로 그분의 합리성이 신성으로 만들어지면서, 가상의 구름들은 사라졌다, 그리고 지적 진리들이 그것의 빛 안에서 그분에게 열린 채로 놓여졌다; 이것이 이삭이 성장하자 이스마엘이 추방됨에 의해 표현되고 의미되었다. 주님께서 지적 진리를 경시하여 평가하시지 않았다는 것, 그분은 그분의 새로운 합리성이 그렇게 했다는 것을 보고 지각했다는 것은 1914항에서 알게 된다.

5절. 그래서 사래가 아브람에게 말하기를, 내가 받은 부당함은 당신 때문이다. 내가 내 여종을 당신 품에 넣었더니, 그녀는 자기가 임신한 것을 알고, 나는 그녀의 눈에서 멸시되었는 바, 여호와께서 나와 당신 사이에서 판결하신다.

사래가 아브람에게 말했다. 이는 진리에 대한 애착이 그렇게 지각했다를 의미하는데, 이는 “사래”의 의미가 진리에 대한 애착으로부터 이다로 분명해진다. 그리고 “말하다”는 내적 의미에서 지각하다를 의미한다.

내가 받은 부당함은 당신 때문이다; 나는 내 여종을 당신 품에 넣었다. 이는 과실을 자신에게 돌리는 것을 원치 않음을 의미하는데, 이는 설명 없이도 납득될 것이다. 내적 의미에서 이 말들 안에 포함된 것은, 첫 합리성이 지적 진리를 경시하여 평가했음을 지각하셨다는 것, 그 이유로 그분은 그것을 견책했다는 것이다. 그 이유가 주님은 지적 진리로부터 생각하셨기 때문인데, 이는 앞에서 말했다; 그리고 지적 진리는 합리성 위에 있기 때문에 지적 진리는 첫 합리성의 품질, 즉 그것이 진리를 낮게 평가하여 붙잡고 있다는 것을 볼 수 있고 지각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내면의 인간으로부터 그분 자신 안에 있는 새로운 합리성의 품질이 무엇이었는지 보고 지각하실 수 있었다는 것은 내면의 인간은 외면이 하는 것을 볼 수 있다는 사실, 또는 더 높은 것은 더 낮은 것을 볼 수 있다는 사실을 생각해 보아도 이해될 것이다. 물론 그 반대의 경우라면 보지 못한다. 양심을 가진 자는 이런 식의 경우를 행할 수 있고, 사실상 이런 식에 익숙해져 있다. 양심 속의 진리에 반대되는 어떤 것이 생각 안으로, 또는 의지의 노력 안으로 들어와 질 때, 그들은 이것을 지각할 뿐 아니라, 그것의 과오까지도 발견한다; 그리고 그런 품성 속에 있는 것에 몹시 슬퍼하기 조차 한다. 더욱이 지각을 가진 이들은 이를 행하고, 더 한층 합리성 안에서 더 내면의 것을 지각해 간다. 인간도 이 정도까지 가능할진대, 그때 당시 신성한 천적 지각을 가지셨고, 합리성 위에 있는 지적 진리에 대한 애착으로부터 생각하셨던 주님의 경우는 그 얼마나 더 이렇게 하실 수밖에 없으셨을까! 우리는 짐작만 가능하다. 따라서 주님은 자신으로부터서는 악과 거짓의 어떤 것도 없으시다는 것을 아시는 바, 분노하실 수밖에 없으셨고, 지적 진리에 대한 애착으로부터 그분은 그분의 합리성이 순수해져야 할 것이라는 가장 큰 고통들을 받으셨다. 이것은 주님께서 지적 진리를 경시하여 평가한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그러나 그분은 그분 자신에 있는 첫 합리성이 지적 진리를 경시하여 생각하는 것을 지각하신 것이다.
지적 진리로부터 생각한다는 것이 무엇인지는 우리의 납득력에 설명되어질 수 없다, 그 이유는 단지 주님께서 이 애착으로부터와 이 진리로부터 생각하셨다는 정도밖에 아무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지적 진리로부터 생각하는 그분은 천사 같은 천국 너머에 계신다. 셋째 천국의 천사들조차 지적 진리로부터 생각하지 않고, 합리성의 내면으로부터 생각할 뿐이다. 주님께서는 그분의 인간 본질을 그분의 신성 본질에 하나되게 하신 만큼에서 그분은 신성한 선 자체, 즉 여호와로부터 생각하셨다.
지각을 가졌던 태고 교회의 창시자(fathers)는 내면적 합리성으로부터 생각했다. 고대 교회의 창시자는 지각이 아닌 양심을 가졌고, 외면적 합리성, 또는 자연적 합리성으로부터 생각했다. 그러나 양심 없는 모든 자는 합리성으로부터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 비록 그들이 합리성을 가진 듯 나타나도 그들이 합리성을 가진 것은 아니다. 그들은 감각적, 육체적, 물질적 자연 (자체)로부터 생각한다. 양심을 가지지 않은 이들이 합리성으로부터 생각할 수 없는 이유는 그들이 합리성을 가지지 않았기 때문인데, 이는 방금 말했다. 합리적 인간은 신앙의 선과 진리를 생각하는 자이다. 그리고 이 반대의 경우는 결단코 아니다. 악과 거짓을 생각하는 자들은 그들의 생각이 미쳐있다, 그러므로 합리적인 것이 그들 생각 속에 내포되어 있을 수 없다.

그리고 그녀는 자기가 임신한 것을 알았다. 이는 합리성의 첫 생명을 의미하는데, 이는 “임신”의 의미가 첫 생명이다로부터 분명해진다.

나는 그녀의 눈에서 멸시되었다. 이는 이 합리성이 그것의 첫 임신에서 선에 인접해있는 진리 자체를 경시하여 평가했다를 의미한다.

여호와께서 나와 당신 사이에서 판결하신다. 이는 주님의 분노하심을 의미하는데, 이는 위에서 살폈으므로 여기서의 설명은 생략한다. 이 사항들에 대한 생각은 시험들의 전투에 있어 왔던 이들 외의 다른 생각은 가져질 수 없다. 시험들에는 황폐해짐(vastation)과 황무해짐(desolation)이 있다, 그리고 자포자기의 상태들이 있다, 그 결과로 슬픔과 분노함이 있다, 이 외에 다른 내면적으로 고통하는 감정들이 있다; 그리고 이것들은 다양해지고 교차하는데, 악귀와 악령에 의해 흥분된 악과 거짓의 상태에 따라서이다. 그리고 이에 맞서 악과 거짓과의 전투가 치루어진다. 극악무도한 영들이 바라는 것은 어떤 거짓을 (우리 안에서) 발견해 가는 것이다. 사실상, 자기들로부터 거짓을 유발시키는 것이 공통적인 현상이다. 그런데 그 거짓을 빌미로 (우리의 양심에) 고발해댄다. 이로부터 주님의 분노하심은 매우 크셨다. 그 이유가 (그분의) 첫 합리성에는 거짓은 없었기 때문, 그러나 그 자체 진리는 아니나 진리의 가상이 있었다.

6절. 그리고 아브람이 사래에게 말하기를, 보라, 당신의 여종은 당신의 손 안에 있으니, 당신의 눈에 좋을대로 그녀에게 행동하라. 그래서 사래가 그녀를 창피스럽게 했다. 그러자 그녀는 사래의 얼굴로부터 도망했다.

아브람이 사래에게 말했다. 이는 지각을 의미하는데, 이는 앞에서 말해진 바로부터 분명해진다. 주님의 지각이 아브람이 사래에게 말했다에 의해 표현되고 의미되었다. 그러나 지각으로부터 그분이 생각하심은 사래가 아브람에게 말했다에 의해 표현되고 의미된다. 생각함이 지각으로부터 있었다. 지각 안에 있는 이들은 다른 근원으로부터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여전히 지각함과 생각함은 별개의 것들이다. 이에 대한 이해를 위해 양심을 예로 삼아 말해보자.
양심은 일종의 일반적 지령인데, 이는 주님으로부터 천국들을 통하여 흐르는 것들로부터 희미한 상태로 있다. 이 지령들은 합리적 인간의 내면에 흘러들어 있는데, 거기서 마치 구름 안에 있는듯 하여 있다. 이 구름은 신앙의 진리들과 선들에 관한 가상과 오류들로부터 발생한다. 생각함은 양심으로부터 구분된다. 그럼에도 생각함은 양심으로부터 흐른다; 양심을 가진 이들은 양심에 따라 생각하고 말한다. 생각함은 양심속에 있는 것들을 펼쳐 놓은 것밖에 더 아니다. 그리고 양심 속의 것들이 분할되어 생각 안으로, 그 다음 말들 안으로 이동하는 것이다. 그런고로 양심을 가진 이들은 이웃에 관해 좋은 생각들 안에, 악을 생각함은 저지되게 주님에 의해 지켜진다. 이 수준에서 더 발전되면, 우리는 양심과 생각함 사이에 무슨 차이가 있는지를 알게 된다; 이로부터 우리는 지각함과 생각함 사이에 무슨 차이가 있는지를 알게 된다.
주님의 지각하심은 여호와로부터, 고로 신성한 선으로부터 직접적으로 있었다. 그러나 그분의 생각하심은 지적 진리와 이에 대한 애착으로부터 있었다. 주님의 신성한 지각은 어떤 관념으로도 납득될 수 없다. 천사들의 수준에서도 그러한 바, 더 이상 서술될 수 없다. 이미 말한 바 대로 천사들의 지각은 주님이 가지셨던 지각에는 거의 비교조차 되지 않는다. 신성인 주님의 지각은 천국의 모든 것들에 대한 지각이었고, 따라서 지상의 모든 것들에 대한 지각이었다. 그 이유가 천국에 대한 것을 지각함 안에 있는 자는 지상에 있는 것 또한 지각함 안에 있는다는 것이 질서, 연결, 유입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님의 인간 본질이 그분의 신성 본질에 하나 되어, 동시에 여호와가 되신 후에, 그때 주님은 지각이라 불리운 것 위에 계셨다. 그 이유는 그분은 천국에 있는 질서, 고로 지상의 질서 위에 계셨기 때문이다. 여호와는 질서의 근원이시다. 이로부터 여호와는 질서 자체라고 말해진다. 그 이유가 그분은 자신으로부터 질서를 통치하시기 때문이다; 이는 보편성만에서가 아니라 지극히 작은 세부적 낱개에 이르기까지에서 이다. 그 이유가 보편성 역시 이것들로 부터이기 때문이다. 보편성을 말하는데, 그것을 개별성으로부터 분리하는 것은 부분들 없이 전체가 있다고 하는 것이나 다름 없다. 즉 아무 것도 들어 있지 않은 어떤 것을 말하는 것이나 다름 없게 된다. 주님의 섭리가 보편적일 뿐 개별적인 것은 아니다 라고 말한다면, 지독하게 거짓된 것이고, 상상의 부스러기에 불과하다. 그 이유가 보편적 차원에서 설비하고 통치하는데, 개별적인 것에서는 그렇지 않다는 것은 아무 것도 설비 안하고 통치 안한다는 말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철학적으로도 진정한 사실이다. 그럼에도 이상한 것은, 철학자 스스로, 최고의 지성으로 높이 날아오른다는 자들이 이 주제를 두고 다르게 납득하고 다르게 생각한다는 점이다.

보라 당신의 여종은 당신의 손 안에 있다. 이는 임신된 합리성은 선에 인접된 진리에 대한 애착의 힘 안에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는 “손”의 의미가 힘이다로부터 분명해진다. 그리고 “이집트인 하갈”의 의미가 기억 속의 지식들에 대한 애착이다로부터 분명해진다. 내적 인간의 이 외면의 인간의 기억 속의 지식들에 대한 애착의 생명 안으로 유입되어 합리성이 임신되어진 후에, 그때 “여종”에 의해서도 뜻해지는 것은, 자궁에 있는 미숙한 합리성, 그리고 후에 태어나고 성장하는 합리성까지 이다. 이것이 이스마엘에 의해 표현되는데, 뒤이어 살펴질 것이다. 주님께서는 그분 안에 있었던 합리성을 주권적으로 지배했다는 것, 그분은 그분 자신의 힘으로 복종되게 하셨다는 것은 누누이 설명했다.

당신 눈에 좋을대로 그녀에게 행하라. 이는 절대적인 지배를 의미하는데, 이는 설명 없이 이해될 것이다. 내적 의미에서 이 말이 표현하고 의미하는 것은, 주님께서는 그분 자신의 힘으로부터 그분의 유전적 본성으로부터 이 첫 합리성 안으로 그 자체 은근히 주입된 악을 정복하시고, 복종케하시고, 내쫓았다는 것이다. 그 이유가 이미 말해왔듯이, 합리성이 여호와이신 내적 인간을 아버지로 하여 임신되어, 외면의 인간을 어머니로 하여 출생되었기 때문이다. 외면의 인간으로부터 출생되는 것은 무엇이든 그것에는 유전적 속성을 지닌다. 그러므로 그것과 더불어 악을 가지셨다. 이것을 주님께서는 정복하시고, 복종되게 하시고, 내쫓기도 하신 것이다. 마지막에 그분께서는 그분 자신의 힘으로 [그분의 합리성을] 신성으로 만드셨다. 이 작업이 그분 자신의 힘에서 이루어졌다는 것은 이 구절의 모든 것으로부터 분명하나, 특히 “당신의 여종은 당신의 손 안에 있다”라는 말 속에 의미되어 있다. 이 말에 의해 그분의 주권적 힘 안에 있음도 의미된다; 그리고 지금, “당신 눈에 좋을대로 행하라”에 의해 그것에 대한 절대적 지배가 의미된다. 그때 “사래는 그녀를 창피스럽게 했다”에 의해 복종케 했다가 의미된다.
지금 살핀 구절은 사래에게 말해진 것들이다. 이 사래에 의해 주님 자신에게 속한 지적 진리가 의미되었고, 이 진리로부터 그분은 생각하셨다, 그리고 이로부터 그분은 합리성을 절대적으로 지배하셨다. 또한 외면의 인간에 속한 자연성도 절대적으로 지배하셨다. 그분은 지적 진리로부터 생각하시고 신성한 선으로부터 지각하신다. 이 선 역시 그분의 것이었다, 그 이유는 아버지의 것이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아버지는 그분의 혼이었기 때문이다. 그분은 여느 다른 근원은 없으신 바, 그분 자신의 힘으로만 하실 수밖에 없으셨다. 그러므로 그분 자신의 힘에 의해 그분은 그분의 유전적 속성의 악을 복종케하시고 내쫓으셨기 때문에, 또한 그분은 자신의 힘으로 인간 본질을 신성 본질에 하나되게 하셨다. 그 이유가 이것은 저것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여호와로부터 임신하신 그분은 여호와 외의 다른 내적 인간, 즉 다른 혼을 가지시지 않았다; 그러므로 생명 자체 측면에서의 주님은 여호와 자신이셨다. 여호와, 또는 신성 본질은 인간 아버지가 자손의 혼에서 분리될 수 없듯 나뉘어 질 수 없다. 인간의 경우, 자손이 아버지의 모습으로부터 물러나는 만큼에서 자손은 아버지로부터부터 물러나지는데, 나이를 먹어갈 수록 더욱 멀어진다. 주님의 경우는 그렇지 않으셨다. 그분은 나이가 더 차심에 따라 인간과 달리 그분의 인간 본질이 신성 본질에서 멀어지는 것이 아니라 계속적으로 더 가까워져 완전한 합일에까지 이루셨다. 이리하여 그분이 여호와 아버지와 똑 같으심이 요한복음 14:6, 8-11에서 가르치신다.

그리고 사래가 그녀를 창피스럽게 했다. 이는 복종케 함을 의미하는데 앞에서 말했다.

그래서 그녀는 사래의 눈에서 도망쳤다. 이는 첫 임신된 합리성이 분개함을 의미하는데, 설명 없이 이해될 것이다. 그 이유가 누군가의 얼굴로부터 도망친다는 것은 누군가의 현존을 견딜 수 없다는 것, 그리고 분개했다는 것밖에 더 없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지적 진리를 향하여 이 합리성이 분개했음이 서술되는데, 그 이유는 지적 진리, 또는 주님이 그것을 창피스럽게 하고 복종시켰기 때문이다. 합리성이 지적 진리에 맞서 봉기할 때, 내부적 전투가 일어나고, 동시에 복종당해져야 하는 쪽에는 분개함이 들끓게 된다. 시험의 경우가 통상 이러하다. 즉 내부적 전투란 주권적 힘과 지배력에 관하여 이쪽의 선과 저쪽의 악이 논쟁하고 경쟁하는 것밖에 더 아니기 때문이다.

7절. 여호와의 천사가 그녀를 광야에 있는 물들의 샘 근처, 수르로 가는 길에 있는 샘 근처에서 발견하였다.

여호와의 천사가 그녀를 발견하였다. 이는 내면의 인간의 생각, 즉 주님 안에서 내면의 인간의 생각을 의미하는데, 이는 “여호와의 천사”의 표현과 의미로부터 알게 된다. “여호와의 천사”는 말씀에서 때때로 언급되는데, 말씀의 모든 곳에서 좋은 의미에서 언급될 경우, 주님 안에, 그리고 주님으로부터 있는 어떤 필수적인 것을 표현하고 의미한다; 그러나 이 천사가 표현하고 의미하는 것은 문맥의 연결로부터 알려질 것이다. 인간들에게 보내지는 자들이 천사들이다, 그리고 그들은 예언자들을 통하여 이야기했다; 그럼에도 천사들이 말한 것은 천사들로부터가 아닌 천사들을 통하여 인 것 뿐이다. 그때 당시 이 후자의 상태는 천사들이 알지 못했고, 천사는 여호와, 즉 주님이셨다; 하여 천사들은 말하자 마자 그들은 이전 상태로 되돌아갔다. 그리고 자신들로부터 인 듯 이야기했다.
이것은 주님의 말씀(the Word)을 이야기한 천사들의 경우이다. 나 역시 다른 삶에서 이와 비슷한 경험을 가져보게 허락되었었다. 이 대목에 관해서는 주님의 신성한 자비로부터 따로 말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이런 이유로 간혹 천사들이 “여호와”라 불리기도 한다. 덤불에서 모세에게 나타난 천사의 경우로부터 위의 말은 더 분명해진다. 이렇게 쓰여져 있다:
여호와의 천사가 덤불의 한 가운데로부터 불의 불꽃에서 모세에게 나타났다, 여호와께서는 그가 보려고 이쪽으로 돌아선 것을 보셨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덤불의 한 가운데로부터 그 를 불렀다.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나는 있는 나이다 라고 말하셨다. 그리고 더 나아가 하느 님께서 모세에게 너는 이스라엘의 아들들에게 말하라 하고 말하셨다; 여호와, 너희 조상의 하느님이 나를 너희에게 보냈다. (출. 3:2, 4, 14, 15);
위 구절에서 분명해지는 것은, 덤불에 있는 불꽃으로 모세에게 나타난 것은 천사이다는 것, 그리고 주님, 또는 여호와께서 그를 통하여 말하시기 때문에 천사는 여호와로서 이야기 했다는 것이다.
말함이 최말단 본성에서, 자음 소리로 인간에게 와지기 위하여 주님께서는 천사들을 매체로 사용하신다. 하여 그들을 신성으로 채우시고 그들의 자기 자신인 것을 일시 멈추게 하신다; 그때 그들은 그런줄도 모르고 그들 자신 여호와가 되어 있는다. 이 방법에서 가장 높은 것인 여호와의 신성은 인간의 가장 낮은 것, 즉 듣고 보는 것 같은 자연 평면의 가장 낮은 데까지 건너 간다. 기드온에게 말한 천사의 경우도 이러했는 바, 사사기서를 보자:
여호와의 천사가 기드온에게 나타났다, 그리고 그에게 말했다,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신 다, 너 힘센 용사여. 그리고 기드온이 그에게 말했다, 내 안에 나의 주여; 그러면 왜 이 모 든 일이 우리에게 닥칩니까? 그리고 여호와께서 그를 쳐다보셨다, 그리고 말하셨다, 네 힘 안에서 가라; 그리고 여호와께서 그에게 말하셨다, 정녕 내가 너와 함께 있을 것이다
(사. 6:12, 14, 16);
그리고 그 후에 말하셨다:
그리고 기드온은 그가 여호와의 천사였음을 알았다, 그래서 기드온은 말했다, 오, 주 여호 비여, 제가 여호와의 천사를 마주 보았습니다. 그리고 여호와께서 그에게 말했다, 네게 평 화가 있다; 두려워 말라 (사. 6:22, 23).
위 경우에 천사였는데, 그는 천사가 여호와, 또는 주님이었다는 것 말고는 알지 못한 상태였다
또 다른 장소의 사사기서를 보자:
여호와의 천사가 길갈로부터 보김으로 올라 갔다, 그리고 그는 말했다, 나는 너희를 이집트 로부터 나오게 하여 올라 가게 해서, 내가 너희 조상에게 맹세한 토지로 너희를 데려 왔다, 그리고 말했다, 나는 너희와 맺은 언약을 공허해지게 영원히 만들지 않을 것이다
(사. 2:1);
위 구절에서 천사가 여호와의 이름으로 이야기한다, 말하기를 그가 그들을 이집트의 토지로부터 인도했다고 한다. 그러나 실상 그 당시 그들을 인도한 것은 천사가 아니라 여호와이셨음은 많은 장소에서도 선포되어 있다. 이 모두로부터 우리는 어떻게 천사가 예언자들을 통하여 이야기했는지, 즉 여호와 자신께서 이야기하셨으나 천사를 통하여서 이고, 천사들이 자신들로부터 이야기한 것은 없었다는 것이다. 말씀이 주님으로부터 이다는 것은 많은 구절들로부터 분명해진다. 마태복음서에서:
보라, 처녀가 아이와 더불어 있을(잉태) 것이고, 아들을 출산할 것이다, 라고 예언자를 통 하여 주님에 의해 말해진 것들을 성취하려 함이다 (마. 1:22, 23),
이 외에 다른 구절도 있다. 주님께서 사람들과 이야기하실 때 그분이 천사들을 통하여 이야기하셨는 바, 그러므로 말씀에서 주님은 “천사”라고 불리우셨다, 그때 “천사”에 의해 이미 말했듯이, 주님 안에, 그리고 주님으로부터 있는 필수적인 어떤 것이 의미되어지고 있다; 본문의 경우 주님의 내면의 생각이다; 그러므로 천사가 이 장에서 “여호와”, 그리고 13절에서 “하느님”이라 불리운다: 즉 “하갈은 자기에게 이야기하시는 여호와의 이름을 당신 하느님이 나를 보고 있다 하고 불렀다.”
다른 장소에서 마찬가지로 주님의 어떤 특별한 속성이 “천사들”에 의해 의미되어진다. 계시록서에서:
일곱 별들은 일곱 교회들의 천사들이다 (계. 1:20).
교회들의 천사들은 없고, “천사들”에 의해 교회로부터 있는 것, 고로 교회들에 관련하여 주님으로부터 있는 것이 의미되어진다. 그리고 다시:
나는 거룩한 예루살렘의 성벽을 보았다, (이 벽은) 크고 높고, 열 두 문을 가지고, 그리고 문 위에 열 두 천사들, 그리고 이스라엘의 열 두 지파들의 이름들이 쓰여 있다
(계. 21:12);
위에서 “열 두 천사들”에 의해, 마찬가지로 “열 두 지파들”에 의해 신앙의 모든 것들, 고로 주님, 이 분으로부터 신앙이 있고, 신앙 속에 있는 모든 것이 있다가 의미되고 있다. 그리고 다시:
그리고 나는 영원한 복음을 가지고 천국의 한 가운데에서 날고 있는 또 다른 천사를 보았 다 (계. 14:6).
위에서 “천사”에 의해 복음이 의미된다, 이는 주님 만이시다.
이사야서에서:
그분의 얼굴의 천사가 그들을 구원했다; 그분의 사랑과 불쌍히 여김에서 그분은 그들을 되 찾으셨다; 그리고 그분은 옛적 모든 날들에 그들을 떠메서 운반하셨다 (이. 63:9);
위에서 “그분의 얼굴의 천사”는 그들을 되찾는 온 인류를 향한 주님의 자비가 뜻해진다. 이와 같은 의미에서 야곱이 요셉의 아들들에게 축복할 때 말해진다:
나를 모든 악으로부터 되찾아 주신 천사가 소년들을 축복하소서 (창. 48:16);
위에서 되찾음, 주님이 해주신 것인데, “천사”에 의해 의미되어 있다. 말라기서에서:
너희가 찾는 주님이 그분의 성전에 갑자기 오실 것이다, 너희가 바라는 언약의 천사까지도. (말. 3:1);
위에서, 그분의 강림 때문에 그분은 “언약의 천사”라고 불리우시는 바, 주님이 “천사”에 의해 의미되어짐이 분명하다. 주님이 “천사”에 의해 더 분명하게 의미되는 곳도 있다. 출애굽기서에서:
보라, 나는 네 앞서 천사를 보내어, 그들의 길을 지켜주어, 내가 준비한 장소로 너희를 데 려오게 할 것이다. 그는 너희의 불법을 참지 않을 것이다, 그 이유가 그의 한 가운데에 나 의 이름이 있기 때문이다 (출. 23:20, 21).
이상으로부터 명백해지는 바, 말씀에서 “천사”는 주님을 뜻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주님의 무엇(속성)은 내적 의미 안에서 있는 연결과 시리즈에서 나타난다.

본문의 “여호와의 천사”는 주님의 내적 인간으로부터 온 내면의 생각을 표시한다는 것은 이미 말한 대로 문맥의 연결로부터 분명해진다. 여기서의 “내면”인 것은 주님 안에서 여호와, 또는 그분의 내적 인간에 하나된 것을 뜻한다. 그런데 유의할 점은, 이 하나됨은 단 번에 하나됨이 되었다는 것을 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즉 이는 그분의 어린 시절로부터 세상에서의 그분 삶의 마지막까지에서 시험과 승리하심을 수단으로 하나되심을 뜻하는 말이다. 각 시험과 승리가 합일을 결과했고, 그분이 그분 자신을 그분의 내적 인간, 또는 여호와와 하나됨에 비례하여 그분의 생각하심은 내면적 생각하심으로 되어 가셨다. 그리고 이에 비례하여 지적 진리는 신성한 선에 하나되셨다. 이것이 주님의 내적 인간으로부터 있던 내면의 생각에 의해 여기서 뜻해진 생각함이다, 그리고 이것이 이 구절에서 “여호와의 천사”에 의해 적당하고 특유하게 표현되고 의미되었다.

광야에 있는 물들의 샘 근처. 이는 아직은 생명이 되지 않은 자연적 진리를 의미하는데, 이는 “물들의 샘”의 의미가 진리이다로부터; 그리고 “광야”의 의미가 거의 생명력이 있지 않음이다로부터 분명해진다. 이 광야의 내적 의미와 동일한 대목이 누가복음서에서 찾아볼 수 있다. 거기서 주님이 취급되어진다:
아이[요한]가 자라서 영에서 강건해졌다; 그리고 이스라엘에 그의 모습을 보일 때까지 광 야에서 있었다 (누. 1:80).
“물들(많은 물, waters)의 샘”과 “광야”가 이런 것들을 의미하는 것은 말씀의 많은 구절로부터 확증이 가능하다; 이어지는 본문에서 “샘”, “광야”로 언급되는데, 의미는 이 부분과 같다. 하여 아래 항목에서 한꺼 번에 살핀다. 생명을 아직 가지지 못한 진리가 무엇인지도 아래에서 살핀다.

수르로 가는 길에 있는 샘 근처에서. 이는 이 진리가 기억 속의 지식들로부터 진행하는 것들로부터 있었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는 “샘”, “길”, “수르”의 의미로부터 분명해진다. 이미 말한 대로 “샘”은 진리를 의미한다. “길”은 앞에서 살핀 바 같이 진리로 인도하는 것과 진리로부터 진행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수르”는 광야에 아직 있는 기억 속의 지식들, 즉 생명을 얻지 못한 기억 속의 지식들을 의미한다. 기억 속의 지식들이 천적 사랑이 흐르는 진리들에 그 자체 결합, 또는 연합 될 때, 기억 속의 지식으로부터 있는 진리들은 생명에 이른다고 말해진다. 그 이유가 진리의 생명 자체가 거기로부터 오기 때문이다. 실제적인 것들의 결합들, 고로 진리들의 결합들이 있다, 이는 천국의 공동체들의 경우와 같다, 이것 역시 상응한다; 그 이유가 인간은 그의 내면의 측면에서는 일종의 작은 천국이기 때문이다. 천국의 공동체의 형체와 일치하여 결합하지 않은 진리들, 또는 실제적인 것들은 생명에 이르지 못했다; 그 이유가 이렇게 하기 전에는 주님으로부터 사랑의 천적인 것이 거기에 일치하여 흘러들 수 없다. 그것들이 생명을 처음 받는 경우는 양쪽이 형체상 비슷할 때, 또는 인간의 작은 천국이 장대한 천국의 형상에 상응할 때이다. 이렇게 상응되기 전에는 앞서 누구도 천국의 사람이라 불리울 수 없다.
하여 주님 역시 이를 준행하셨다. 즉 자신으로부터 보편적 천국을 통치하기로 예정된 주님께서는 세상에서 그분의 외적 인간에 있는 진리들과 선들, 또는 그분의 인간 본질을 위와 같은 천국 질서로 환원시키실 때 이를 실행하신 것이다; 그러나 그분은 처음 임신된 첫 합리성이 이런 품성 속에 있지 않음을 지각하셨다 (4, 5절 참조). 그분은 원인을 잘 생각해보셨다, 그리고 기억 속의 지식으로부터 튀어나온 자연적 진리들이 아직 생명에 도달되지 않았음을 지각했다. 즉 아직 이 천국의 질서 안으로 환원되지 않았음을 지각했다. 그리고 이 외에, 신앙의 진리들은 인간이 선행 안에 있지 않으면 전혀 생명을 가지지 못한다. 그 이유는 신앙의 모든 진리들은 선행으로부터 흘러나오고, 선행 안에 있기 때문이다. 진리들이 선행 안에, 선행으로부터 일 때, 그때 진리들은 생명을 가진다. 선행 안에 생명이 있다, 그러나 선행으로부터 떨어져서는 결코 생명을 가지지 못한다.
“수르”가 아직 생명에 이르지 않은 기억 속의 지식을 의미하는 것은 그것의 의미로부터 분명해진다. 그 이유가 수르는 이집트를 향한 홍해로부터 멀지 않은 위치에 있는 광야이기 때문이다. 모세의 책에서:
모세는 이스라엘을 홍해로부터 여행하게 했다, 그리고 그들은 수르 광야로 나갔다; 그리고 그들은 광야에서 삼 일 동안 갔다, 그리고 물을 발견하지 못했다 (출. 15:22).
수르 광야가 이집트를 향하여 있었다는 것은 모세의 책에서 분명해진다, 거기서 이스마엘의 후손이 말하여진다:
그들은 하윌라로부터 수르까지 거주했다, 수르는 이집트의 얼굴을 향하여 있다
(창. 25:18).
또한 사무엘서에서:
사울은 아말렉을 하윌라로부터 이집트의 얼굴을 향하여 있는 수르에 이르기까지에서 쳐부 셨다 (삼상. 15:7).
그리고 다시:
다윗은 그술족과 기르스족과 아말렉족을 습격하였다. 그들은 옛적부터 수르로부터 이집트 의 토지에 이르는 곳의 주민이었다 (삼상. 27:8).
위 구절로부터 “수르”는 첫 기억 속의 지식을 의미한다는 것, 이 지식은 광야에서 아직 있는 상태이다는 것, 또는 천국 연합의 질서에 일치하는 나머지와 아직 결합되지 않은 상태이다; 그 이유가 이집트는 모든 의미에서 기억 속의 지식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런 사항들이 광야에서 물들의 샘에서 하갈을 발견한 여호와의 천사에 의해 의미되는데, 이는 글자 의미로부터서는 발견할 수 없고, 역사적 의미에서는 더더욱 그렇다. 어쨋든 이런 의미가 우리의 상상에서 너무나 멀리 있는 듯 여겨질 수 있다. 그러나 이 의미는 인간에 의해 이 구절이 읽힐 때, 천사들의 생각에 와지는 의미이다. 천사들은 하갈이든, 광야이든, 샘이든, 수르이든, 자연물에 관한 생각은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자연물에 관한 생각은 천국의 문지방도 넘지 못한다. 그들은 “하갈”에 의해, “샘”에 의해, “광야”에 의해, “길”에 의해, “수르”에 의해 의미되는 것을 이해하고 그것에 의해 천국적 생각을 만들어내고 이 방법에서 주님의 말씀을 지각한다; 그 이유가 내적 의미가 그들에게 말씀이기 때문이다.

8절. 그리고 그는 말했다, 하갈, 사래의 여종아, 너는 어디에서 오느냐? 너는 어디로 가고 있느냐? 그리고 그녀는 말했다. 저는 사래, 나의 여주인의 얼굴로부터 도망치고 있습니다.

그는 말했다, 하갈아, 사래의 여종아. 이것이 정보를 의미하는 것은 시리즈로부터 분명해진다. 그 이유가 천사가 하갈에게 말을 걸었기 때문이다. 마치 천사는 그녀로부터 무슨 정보를 얻을 냥 말하고 있다. 이런 대화는 말씀에서 자주 있는 형체인데, 여호와께서 인간에게 질문을 하고 인간이 대답하는 것이다. 물론 주님께서는 이렇게 물어보지 아니해도 모두 아신다. 즉 행해진 것 뿐 아니라 원인과 목적, 그리하여 지극히 작은 일에서 가장 안쪽의 것에까지 아신다. 그러나 인간은 이를 알아채지 못한다. 하여 그는 믿는 것은 아무도 보지 않을 때 자기가 은밀히 하는 것은 아무도 알 수 없다고, 자기가 무엇을 생각하는지는 더더욱 누구도 모른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 방식에 따라 인간은 실상을 만들어간다. 그러나 여전히 진실인 것은, 지극히 평범한 영도 인간이 생각하는 것을 당사자보다 더 잘 안다는 것, 천사 같은 영은 내면의 생각까지 안다는 것, 즉 원인과 목적까지 안다는 것이다. 이에 관하여는 인간은 아는 것이 전무하다. 이를 알도록 나에게 수 년에 걸처 많이 계속적으로 경험하게 해주셨다. 영들과 천사들이 이런 것들을 지각하는 바, 이럴 필요가 있을 경우, 그들은 반드시 무한하시고, 자기들에 지각을 주시는 여호와, 주님과 더불어서만 행동한다.

어디서 너는 오고 있느냐? 그리고 어디로 가고 있느냐? 이는 상태에 관한 정보를 의미한다. 이는 문장 자체로부터 분명해진다.

그리고 그녀는 말했다. 저는 사래, 나의 여주인의 얼굴로부터 도망치고 있습니다. 이는 대답과 분개함을 의미하는데, 이미 말한 바로부터 분명해진다. 분개함에 관하여는 6절에서 살폈다. “얼굴”은 내면들을 의미하는 바, 마찬가지로 그것은 분노 내지 다른 것도 의미한다.

9절. 그리고 여호와의 천사가 그녀에게 말하기를, 네 여주인에게 돌아 가라, 그리고 사래의 손 아래에서 네 자신을 겸허하게 하라.

여호와의 천사가 말했다. 이는 주님의 내면의 인간의 응답을 의미하는데, 이는 “여호와의 천사”의 의미가 주님의 내면의 생각이다로부터 분명해진다. 그리고 이것이 생각이기 때문에, 이것은 또한 응답이다. 주님의 내면의 생각은 지적 진리에 대한 애착으로부터 였다, 그리고 이 애착은 신성한 선 자체였다. 이와 같은 생각, 전에 말한 바대로, 어느 인간 안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사실상 그렇게 존재할 수가 없다. 인간 안에서의 경우, 양심을 가진 이들과 더불어 주님으로부터 인간의 내적 인간을 통하여 내면의 합리성 안으로 흐르는 내면의 생각이 있다. 양심을 가진 자들은 자기의 내면의 인간에 있는 선과 진리가 외적 인간에 있는 악과 거짓과 다투는 것을 관찰할 수 있는데, 이를 통해 위의 말을 납득할런지 모른다. 어쨌든 양심을 가진 자가 소유하는 이런 생각 역시 지독히 낮은 수준이고, 또한 주님의 생각과는 여하튼 비교 자체가 불가능하다. 그 이유가 그분의 생각은 지적 진리에 대한 애착으로부터 이어서 그분에게 적절하고 특유하기 때문이다. 양심을 가지지 않은 이들은 내면의 생각을 가질 수 없다, 그러므로 다툼도 없다. 이런 이유로 그들의 합리성은 하나로서 행동하고 (그 결과는) 육체적, 물질적, 감각적인 것과 동일하다; 그리고 그들 안에도 주님으로부터 선과 진리의 계속적인 유입이 있을지라도, 그들은 그것에 대한 지각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 이유는 그들은 유입됨과 동시에 그것들을 소멸시켜 버리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그들은 신앙의 진리를 여하튼 믿지 않는다.

네 여주인에게 돌아 가라. 이는 그 자신을 신뢰하지 말고 내면의 진리와 이 진리에 대한 애착만을 신뢰해야 함이 관찰되었음을 의미한다. 이는 그녀의 “여주인”의 의미가 내면의 진리에 대한 애착이다로부터 분명해진다. 그러나 “사래”에 의해 특별히 의미되는 것, 즉 “아내”로서의 사래와 “여주인”으로서의 사래에 의해 의미되는 특별한 것은 서술할 수 없다. 그 이유가 이 의미는 생각에 잡혀질 수 없기 때문이다. 의미되는 것은 앞서 말했듯이 우리의 이해력 넘어서이고, 천사들의 이해력도 넘어서 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기서 제시할 수 있는 것은, 주님께서 그분의 첫 합리성의 태도에 관련하여 나타나는 것을 어떻게 생각하셨을까 하는 대목 뿐이다. 즉 이 합리성은 지적 진리를 신뢰하지 아니했다는 것, 그것의 눈에 비치는 신성한 진리들은 한결같이 신용할 수 없는 것 뿐이다는 것이다. 신성으로부터의 모든 진리의 경우도 이와 같다. 만일 합리성이 신성한 진리들로부터 조언을 구하려 한다면, 합리성에 믿어지는 것은 거의 없다. 그 이유가 신성한 진리는 합리성의 납득력을 초월해 있기 때문이다. 몇 가지 예를 들어 보자: 인간, 영, 천사의 생명은 그들 안에서 생명의 나타남일 뿐이다: 이것은 합리성의 입장에서 역겨웁다. 합리성은 이것은 오류로부터 라고 판단한다. 그러나 이것은 믿어져야만 하는데, 진리이기 때문이다.
신성으로부터의 진리인즉, 말씀의 모든 표현에서, 어떤 대목에서는 말씀이라 보기에는 너무 단순하고 조잡하기도 하고 상스러운 표현같이 인간에 여겨지게 나타난다. 그러나 거기에도 광대한 것들이 아마 보편적 천국보다 광대할지 모르는 내용이 함축되어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 안에 있는 신비함은 주님에 의해 영구히 다양해지며 영원히 천사들 앞에 표출된다. 이것은 합리성에게 믿기워지지 않는 바, 어떤 신뢰도 두고 싶어 하지 않으나, 여전히 이것은 진리이다.
이런 신성으로부터의 진리가 있다. 만일 누가 선한 행위를 실시하되 그것의 목적이 자신의 명예, 이득을 위해서이다면, 또는 그 행위가 자신의 본성의 잘남이라 여겨 그 공적을 자신에게로 돌린다면, 그는 다른 삶에서 받을 상은 없다는 것; 또는 진실로 선한 목적에서 출발한 행위가 도중 실수로 악이 발생한다면, 이것으로 인해 다른 삶에서 아무도 처벌되지 않는다. 그 이유가 목적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이것 역시 합리성은 납득이 어렵다. 그래서 믿어지지 않는 바 신뢰하지 않는다. 그렇게 되는 이유는 이런 결말은 내적 차원에서 인데, 합리성은 외적 차원에서 결말을 끌어내기 때문이다.
이런 신성으로부터 진리가 있다. 즉, 다른 삶에서 작은 자 되기를 열망하는 자는 주님으로부터 가장 큰 자 대접을 받는다는 것, 그리고 가장 큰 자이기를 열망하는 자는 가장 작은 자가 된다는 것, 또한 천국의 기쁨은 타인보다 빼어나다는 것과의 연결 자체가 없다는 것, 타인보다 자기가 더 우월하다는 자만심이 클수록 그에 비례하여 지옥만 있을 뿐이다; 또한 천국의 영광에는 세상의 어떤 영광도 있지 않다. 이런 대목들은 합리성에게는 지겨웁다. 허나 이것은 믿어져야 하는 것, 진리이기 때문이다.
이런 신성으로부터의 진리가 있다. 지혜가 자신으로부터서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고 더 믿을수록 그는 더 지혜로워진다; 그러나 지혜가 자신으로부터 있다고 더 믿을 수록, 하여 자신의 신중함은 자신의 잘난 본성 때문이라고 믿는 자는 미쳐있는 상태이다. 이것 역시 합리성은 부인한다, 그 이유는 자신으로부터 있지 않은 것은 아무 것도 아니라고 믿기 때문이다. 이외 더 무수하게 열거될 수 있겠지만 위의 몇 가지 사례에서 합리성이 신뢰하지 않는 것을 보았을 것이다; 그 이유가 합리성이 오류들과 가상(외관, 나타남, appearance) 안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오류와 가상으로 덮힌 진리에서 이를 벗겨낸 (순수한) 진리는 거절한다. 이 진리를 거절하면 할 수록 합리성은 자신과 세상 안에 있고, 신앙에 관하여 거짓 원리 안에 있을 수밖에 없다.

사래의 손 아래에서 네 자신을 겸허하게 하라. 이는 그 자신을 내면의 진리의 최고의 권능 아래 있도록 강요해야 함을 의미한다. 이는 이미 설명해 온 것 안에서 납득되었을 것이다. “자기 자신을 겸허하게 한다”는 말은 원어의 “괴롭게하다, afflict”에 의해 표현되어지고 있다. ”자신을 괴롭히는 것“의 내적 의미는 자신을 강요하는 것인데, 이는 말씀의 여러 구절로부터, 그리고 이어지는 대목에서도 취급된다. 인간이 자신에게 선인 것을 행하도록 강요하는 것은 주님에 의해 명령된 것들에 순종하는 것이고, 진리들을 말하는 것은 주님의 손 아래 자신을 겸허하게 하는 것, 또는 신성한 선과 진리의 최고의 권능에 자신을 따르게 하는 것이다. 이렇게 간단히 말했지만 실상은 엄청난 신비를 포함하고 있다.
세상에서의 삶 동안 이렇게 자신을 관리한 영들이 있다. 그들에게 모든 선은 주님으로부터 있다고 말해져 왔기 때문에, 그래서 인간은 자신으로부터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판단 아래 그는 어떤 것도 자신에게 강요하지 않는 것을 철칙으로 삼아 모든 수고를 중단해야 한다는 것, 고로 모든 수고는 해보아야 헛된 짓이다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그들은 자기들의 의지 안으로의 직접적인 유입만을 기다리고 선한 어떤 것을 자신에게 강요하지 않았다. 이렇다보니 악한 것이 자신 속을 기어다닐 때조차도 그들은 내부로부터 어떤 저항함도 느껴지지 아니했는 바, 그들은 그것도 허용할 수 있지 않는가 하고 상상하면서 악령에도 자신을 복종시킨다. 이 영은 마치 자신인 것이 결여된 듯 하여 있다. 하여 이 영은 어떤 결정도 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더 쓸모없는 상태이다 (미지근한 상태이다). 다시 말해 그들은 자신을 선이든 악이든 똑같이 허용하고 있다. 결국 악에 더 많은 것을 허용하는 지경까지에 이르고야 만다.
이런 영도 있다. 악하고 거짓된 것에 저항하도록 자신을 강요하는 영이다. 비록 이 영들이 처음에는 자신들로부터 저항하는 듯, 자신들의 힘으로부터 저항하는 듯 여겼다 해도, 후에 그들의 수고함이 주님으로부터 였다는 것, 노력의 미미한 것조차도 주님으로부터 였음을 보도록 계몽되어진다. 다른 삶에서 이런 영들은 악령의 꼬드김을 당할 리 없고 행복한 자 사이에 있다. 고로 우리는 선한 것은 행하도록, 진리인 것은 말하도록 자신을 강요해 나가야 한다. 이런 강요함의 실현에 포함된 신비함들인 것은 주님께서 천국의 그분 자신을 선물하신다는 것이다. 그 이유가 인간 속의 이 천국의 그분 자신은 그의 생각의 결과 안에서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만일 그가 자신을 강요함을 수단으로 이 선물의 간직을 유지하지 않으면 그 외의 방법, 즉 자신을 강요 하지 않음으로는 불가능하다.
우리가 위의 사항들이 어떻게 있는지를 알려면, 선한 것을 하도록 하는 모든 자기 강요함 안에는 어떤 자유가 있다는 것을 살필 필요가 잇다. 이 자유는 당사자가 자기 강요를 실행하는 동안 식별되지 않으나, 여전히 그의 내부에 있다. 예를 들면, 어떤 목적을 위해 죽음의 위험을 무릅쓰고 기꺼이 뭔가를 수행하는 이들 안에는, 또는 건강을 위하여 육체적 고통을 기꺼이 감내하는 자 안에는 그 인간을 행동하게 만든 기꺼이 함과 어떤 자유가 있는데, 비록 위험과 고통 안에 그가 있는 동안, 그것들이 기꺼이 함과 자유를 거두어 가버린 듯 해도 이것들은 당사자 안에 머무르고 있다; 이런 경우는 선인 것을 하도록 자신을 강요하는 이들과 더불어서도 비슷하다: 즉 그들 내부에 기꺼이 함이 있다. 고로 자유가 있다. 이로부터, 이를 위하여 그들은 자신을 강요한다, 즉 그들은 주님이 명령한 것을 순종하기 위하여 그렇게 행한다, 그리고 사후 그들의 혼의 구원을 위하여서 이다. 비록 자신의 내부적인 것을 눈치 못 챈다 해도 주님의 왕국을 위하여, 주님 자신을 위함조차 내면적으로 중요시함이 간직되어 있다.
이것은 시험 동안 대부분의 인간들의 경우이기도 할 것이다. 그 이유가 이들 안에서, 즉 인간이 악령의 침투와 감염시키는 악과 거짓에 저항하도록 자신을 강요할 때, 시험이 없던 상태 시절 때보다 더 기꺼이 함과 자유가 있다. 물론 시험 당시는 당사자가 모르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그 이유가 이것은 내면적 자유이기 때문이다. 이 자유로부터 인간은 악을 복종시키려 뜻하고, 이때의 힘과 강함은 악이 공격하는 힘과 강함과 균등해진다. 그렇지 않으면 그는 전투를 감행할 수 없을 것이다. 이런 자유는 주님으로부터 있다, 그분은 이것을 인간의 양심 안으로 모르게 주입하신다. 이러므로 당사자는 자신의 것으로부터 악을 물리치는 듯 여겨지게 한다. 이 자유를 통하여 인간은 주님께서 선인 것을 작업하실 수 있는 그분의 자신(Own)을 자기 안에 획득한다. 자유를 통하여 그분의 자신을 획득함, 또는 주님이 주신 그분의 자신 없이, 어느 인간도 개혁됨(reform)이 가능해질 수 없다. 그 이유는 그가 새로운 의지인 양심을 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고로 주어진 자유는 주님으로부터 선과 진리의 유입을 받는 순수한 평면(very plane)이다. 이로부터 그들은 자신의 의지로부터 저항하지 않는 시험 안에, 또는 자유 안에 길을 주신다.
모든 자유 안에 인간의 생명이 있다, 그 이유는 거기에 그의 사랑이 있기 때문이다. 인간이 사랑으로부터 행하는 것은 무엇이든 그에게 자유하게 나타난다. 그러나 인간이 이 자유 안에서 악하고 거짓인 것에 저항하고, 선인 것을 행하도록 자신을 강요할 때, 천국의 사랑이 있게 되는데, 주님께서는 이 사랑을 은근히 주입하신다, 이를 통하여 주님께서는 인간 속에 (그분의) 자신 (Own)을 창조하신다; 그리고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이것이 비록 인간의 것은 아니지만, 인간 자신의 것으로 인간에게 나타나게 뜻하신다. 인간이 육체의 삶 동안 외관적으로 자신을 강요당하게 함을 통하여 받은 (그분의) 자신(Own)은 다른 삶에서 주님에 의해 광대한 기쁨과 행복으로 채우신다. 이런 인물들은 또한 점차적으로 계발되어 진리를 보고 확증할 수 있게 된다. 즉 자신 스스로 자신을 강요한 것은 한 티끌도 없고 자기들 의지의 수고함으로부터의 모든 것들은 제아무리 미미해도 주님으로부터 가졌다는 것; 그리고 우리들의 것인냥 되어 있는 이유는 우리에게 새 의지를 주시되 우리들의 것으로 나타나게 하시려 해서 이다는 것; 그리고 이런 길에서 천국의 사랑의 생명은 그들에게 자기 것이 되게 하신다. 진리를 배우고 알고 확증도 가능해진다. 주님께서는 그분의 것이 모두에게 전달되기를 뜻하신다, 그러므로 그분은 천국의 것이 모두에게 전달되기를 뜻하신다. 그리하여 그것이 비록 인간의 것은 아니지만 인간의 것으로 그 사람 안에서 나타나기를 기대하신다. 천사들은 이와 같은 (그분의) 자신 안에 있다; 모든 선과 진리가 주님으로부터 있다 라는 진리 안에 자기들이 있는 정도에 비례하여 천사들은 이 (그분의) 자신으로부터의 기쁨과 행복 안에 있다.
그러나 모든 선과 진리를 경멸하고 거절하는 이들, 자신의 탐욕들과 합리화에 이의를 제기하는 것은 무엇이든 기꺼이 믿고 싶어 하지 않는 이들은 자신을 강요할 수 없다; 고로 양심 속의 (그분의) 자신, 또는 새 의지를 받을 수 없다. 이상 살핀 바로부터 분명해지는 것은, 누군가가 자신을 강요하는 것은 강요당해짐이 아니다는 것이다; 그 이유가 어떤 선도 강요함으로부터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는 마치 인간이 또 다른 사람에 의해 선을 행하도록 강제 당하는 모습과 비등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분명해지는 것은, 우리가 지금 생각해보는 경우에서, 자기 강요는 인간에게는 알려지지 않은 어떤 자유로부터, 주님으로부터의 어떤 강요함이 절대 아닌 어떤 자유로부터 온다는 것이다. 이로부터 보편적 법칙은, 선하고 참된 모든 것은 자유 안에 뿌려진다(inseminate)는 것이다. 그렇지 않을 경우, 지면(바탕, ground)은 선인 것을 흠모할 수 도 없고 받는 것도 가능할 수 없다. 그리고 사실상, 씨가 자랄 수 있는 지면은 없다.

10절. 그리고 여호와의 천사가 그녀에게 말하기를, 나는 네 씨를 크게 번성하게 하리니, 번성한 수를 셀 수 없을 것이다.

여호와의 천사가 말했다. 이는 내면의 인간이 생각함을 의미하는데, 앞에서 살폈다.

나는 네 씨를 크게 번성하게 할 것이다. 이는 선에 접하여 있는 지적 진리의 최고의 지배력에 그 자신을 복종시킬 때 합리적 인간이 열매를 많이 맺음을 의미하는데, 이는 “씨”의 의미가 사랑과 신앙이다로부터 분명해진다. 그러나 이 구절에서의 경우, 합리적 인간이 내면, 또는 신성한 진리에 그 자신을 복종시킬 때, “씨를 번성케 함”에 의해 합리성 안에서 사랑의 천적인 것들로부터의 많은 열매 맺음이 있다는 것이 의미되어지고 있다. “번성함”은 진리 측면을 서술하고, “열매를 맺음”은 선의 측면을 서술한다. 여기서는 주님이 취급되는 바, “번성함”은 열매가 되어감을 의미한다. 그 이유가 그분의 합리성에 있는 모든 진리는 선으로, 신성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그분에 관한 이것이 여기서 선포되는 듯 하다. 인간의 합리성의 경우는 주님에 의해 진리로부터, 진리에 대한 애착으로부터 만들어 내진다. 이 애착은 그의 선이고, 이 선으로부터 인간은 행동한다.
번성함과 열매를 맺음에 주목해 볼 때, 어떻게 이런 경우가 인간의 합리성과 더불어 있는지를 이해해 보려면 먼저 어떻게 이 경우가 유입과 더불어 있는지를 알아 보아야 한다. 이에 관하여는 일반적인 방법에서 말해 볼 수밖에 없다. 즉 모든 사람 안에는 세 가지 인간, 즉 내적 인간, 중간 매체인 합리적 인간, 외적 인간이 있다. 이는 여러 차례 살폈다. 인간의 가장 안쪽에 내적 인간이 있고, 이로부터 인간은 인간이 되고, 야수와 구별된다. 야수는 이 내적 인간이 없다; 그리고 이것에는 주님을 위해 마치 입구, 또는 문이 있다. 그 이유가 주님으로부터의 천적, 영적인 것이 이 인간 안으로 들어가기 때문이다. 이 내적 인간에서 되어가는 모든 것은 인간에 의해 납득되어질 수 없다. 그 이유는 이것은 인간이 생각하는 것인 합리성을 초월해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자신으로서 나타나는 합리성은 이 가장 안쪽에, 또는 내적 인간에 종속되어 있다. 주님으로부터 내적 인간을 통하여 합리적 인간 안으로 사랑과 신앙의 천국의 것들이 흐르고, 이것들이 외적 인간 안에 있는 기억 속의 지식들 안으로 흐른다. 그러나 흐르는 것들은 각 인물의 상태에 맞추어서 이다.
그런데 합리성이 그 자체를 주님의 선들과 진리들에 복종하게 하지 않으면, 그것은 합리성에 흘러드는 것들을 질식시키든지, 거절하든지, 뒤집든지, 악용하든지 해버린다; 더 심각해지는 경우는 그것들이 기억의 감각적 지식들 안으로 흐를 때이다. 이것이 씨뿌리는 비유에서, 길가에, 돌밭에, 가시덤불에 씨가 뿌려지는 경우에 해당된다. (마. 13:3-7; 막. 4:3-7; 눅. 8:5-7). 그러나 합리성이 그 자체를 주님에게 복종케하고 믿을 때, 즉 그분의 말씀을 믿을 때, 씨는 옥토에 떨어져 잘 자라고 많은 열매를 맺는다.

번성한 수를 셀 수 없을 것이다. 이는 측정을 넘어서는 번성함을 의미하는데, 설명이 따로 필요 없을 것이다. 이 말은 선으로부터 다수로 자라는 진리를 의미한다. 주님의 경우에서, 이것이 내적 의미로 취급되었지만 우리의 언어로 표현하기는 쉽지 않다. 그 이유가 그분 안에서 모든 것은 신성이고, 무한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선으로부터 진리의 번성함의 경우가 어떻게 되는지에 관해 우리의 생각을 만들어내려면, 필시 우리는 인간 측면에서 생각해볼 도리밖에 없다. 선 안에 있는 인간, 즉 사랑과 선행 안에 있는 인간과 더불어 주님으로부터 오는 씨는 셀 수 없이 번성하고 열매를 맺는다. 이는 그가 이 세상 뿐만 아니라 다른 삶에서 그와 같이 된다; 인간이 육체 안에서 사는 동안, 이 씨는 육체라는 지면에 있다. 그리고 밀림 숲과 덤불 안에 있다. 이것은 기억 속의 지식들과 기쁨(쾌락)들, 그리고 걱정, 불안 같은 것들이다; 그러나 이것들이 육체라는 옷을 벗을 때, 즉 그가 다른 삶으로 건너갈 때, 이 씨는 지상의 제약들로부터 자유가 되어 자라는 바, 나무의 씨는 지면으로부터 오르고 어린 나무가 성장하듯 하여 큰 나무로, 후에는 동산을 덮는 나무 숲 군락을 만든다. 모든 지식, 총명, 지혜는 그것들의 기쁨들과 행복과 더불어 번성하고 열매를 맺어간다. 이 증가는 영원하다. 그리고 이것은 작은 씨로부터 임을 주님께서 겨자씨의 비유에서 가르치신다 (마. 13:31). 이것이 천사들이 지상에서 인간으로 사는 동안 그들에게 있었던 씨로부터 있는 천사들의 지식과 총명, 지혜로부터 임은 아주 분명하다.

11절. 그리고 여호와의 천사가 그녀에게 말하기를, 보라, 너는 아이와 함께 있고, 아들을 낳을 것이고, 너는 그의 이름을 이스마엘이라 부르리라. 그 이유는 여호와께서 네 고뇌에 귀를 기울이셨기 때문이다.

여호와의 천사가 말했다. 이는 내면의 인간이 생각함을 의미하는데, 7, 9 10절에서 말했다.

보라, 너는 아이와 함께 있다. 이는 합리적 인간의 생명을 의미하는데, 이것의 임신에 관해 앞에서 말해진 것과 이스마엘에 관해 이어지는 사항으로부터 분명해진다. 즉 이스마엘에 의해 주님의 첫 합리성이 의미된다는 것이다. 세간에 알려진 일반적인 합리적 인간은 이렇다. 그것이 생명을 받고, 자궁 안에 있게 되고, 출생되는 것은, 인간이 자신 안에 있는 악과 거짓이 진리에 반대되고, 옳은 것이 아님을 반박할 때이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그가 자신 안의 악과 거짓을 복종시키고 제거할 때이다. 그가 이것을 지각하고 느낄 수 있지 않으면, 그가 제아무리 자기는 합리성을 가졌노라고 자부해도 그는 합리성을 가진 것이 아니다. 합리성은 내적 인간을 외적 인간과 하나로 하는 매체이다. 그렇기 때문에 외적 인간에서 되어가는 상황을 주님으로부터 지각하는 것이다. 그리고 외적 인간을 주님에게 순종하게 하는 쪽으로 환원시킨다. 더 나아가 외적 인간을 그 자체 침수되어 있는 육체적, 물질적, 지상적인 것들로부터 승강하게 하여 결국 인간을 사람답게 한다. 그리하여 그가 출생에 의해 속한 천국을 바라보게 한다; 그리고 야수는 지상적인 것만을 응시하고 있지만 지상은 일시 체류하는 곳일 뿐, 목표는 천국의 삶, 지옥은 더더욱 아니다. 이것들이 합리성의 직능들이다. 그러므로 인간이 이런 방식에서 생각할 수 있게 되어 있지 않으면, 그는 어떤 합리성을 가졌다 라고 말해질 수 없다. 그리고 합리성이 존재 안으로 오고 있는지 여부는 그가 자기 삶을 어디에 사용하여 효용을 추구하고 있는 지에서 알려진다.
선과 진리에 관해 귀로 들어서 알 뿐, 심정으로 부정하여, 결국 그것을 향해 추론하고 엉뚱한 쪽으로 합리화 하는 것은 합리성을 가진 것이 아니다. 어떤 제약받음도 없이 모든 사악함 쪽으로 노골적으로 돌진하는 이들을 우리는 주변 세상에서 흔히 접하지 않던가! 누군가를 놓고 그가 합리성을 가지고 있는지 그렇지 않은지 상상해보는 방법 중의 하나는, 누군가가 대화에서 예법을 잘 차려 말하고, 외양만의 존경받을 수 있음으로부터 행동하는 것, 그러나 그가 그것 안에서는 외적인 묶임에 의해 속박되어 있어, 법의 두려움, 재산의 손실, 명예의 추락 걱정, 목숨의 손실들에 시달리고 있다. 만일 이런 외적인 한계를 그 사람으로부터 거두어내면, 사악한 자가 제약 없이 돌진하는 것 이상으로 미친 듯 사납게 날뛸 것이다. 그러므로 누군가가 요령 있게 말하고, 추론한다고 그가 합리성을 가진 자라고 말할 수 없다. 주변 세상으로부터 사실인 즉, 합리성을 가지지 않은 자가 가진 자보다 더 민첩하고 숙련되게 감각으로부터의 것과 기억 속의 지식을 이용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다른 삶에서 악령들로부터 매우 확실하게 분명해진다. 육체의 삶에 있는 동안 남보다 더 걸출한 합리성을 지녔다할지라도, 그의 숙달된 예법과 외양의 존경스러운 태도를 보이게 한 외적 묶음들이 거두어질 때, (이는 다른 삶에서는 당연히 되어지는 방법이다) 세상에서 그렇게 노골적이었던 자들보다 더 미친 듯 날뛴다. 한마디로 억류된 감정이 제약이 없자 폭발하는 격이다. 그 이유가 자신의 내적인 것을 움츠리게 한 두려움, 수치심, 공포 따위를 거두어 버린 상태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 세상 삶 동안 합리적 인간이었던 것은 아니다. 그 이유가 자기들을 묶일 수 밖에 없게 했던 외적인 것들을 그들로부터 걷어내면 그들은 오히려 더 사악해지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그들은 내적인 속박, 즉 양심의 속박을 가졌었기 때문이다. 그나마 이를 수단으로 주님께서는 그들의 생각들을 선과 진리의 경계 내에 겨우 머물게 하신다. 이 정도에서가 그들의 합리적 원리들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아들을 낳을 것이다. 이는 진리를 의미하는데, 여기서는 합리성의 진리가 언급된다. 이것이 “이스마엘”에 의해 의미되는데, 이는 “아들”의 의미가 진리이다로부터 분명해진다. 이 진리는 다음 절에서 서술된다.

그리고 너는 그의 이름을 이스마엘이라 부를 것이다. 이는 생명의 상태를 의미한다. 고대 시절에서의 자식의 이름들은 부모가 가진 상태에 따라, 특히 어머니가 임신되는 때의 상태, 또는 아이를 가져서 지내는 동안에서의 상태, 또는 아이를 출산하는 때의 상태 등등을 의미하도록 아들과 딸에 이름으로 남겨 불렀다. 또는 유아가 출산 당시의 상태에 따라서 그것을 의미하도록 이름을 붙였다. 여기서도 역시 이스마엘이라는 이름을 가진 것이 설명되고 있다. 즉 그의 어머니의 상태를 언급하는 “여호와께서 고뇌에 귀를 기울이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스마엘이 표현하는 것이 이어지는 다음 절에서 묘사되어 있다.

그 이유는 여호와께서 네 고뇌에 귀를 기울이셨기 때문이다. 이것이 그녀 자신을 복종케 하는 것까지를 의미하는데, 그 이유는 9절에서 말해진 바로부터 분명해진다. 그 구절에서 “자신을 겸허해지고 괴롭힘을 당하게 하라”는 내적 인간의 주권적(최고의) 권능에 복종케 함을 표시하는 것이다. 이 복종함이 거기서 취급된다. 그리고 이 복종함은 자신을 강요함이다는 것임도 살폈다; 또한 자신을 강요함 안에, 자유가 있다는 것, 즉 자발성이 있다는 것, 이를 수단으로 자신을 강요함은 (타인, 내지 외적 요인으로부터) 강요당함과는 구별되는 강요 당함이다. 우리가 살핀 것은, 이 자유 없이, 즉 자발성, 기꺼이함 없이, 인간은 개혁이 가능할 수 없고, 어떠한 천국의 그분 자신을 받을 수 없다. 이 자유한 상태는 비록 반대 현상이 나타날지라도 시험의 상황에서 더욱 요긴하다. 그 이유가 자유함은 악과 거짓의 공격의 강도에 비례하여 그 당시 존재하고, 천국의 그분 자신이 인간에게 증여되도록 하기 위해 주님에 의해 자유함은 더 강건해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이유 때문에 주님은 우리의 시험 동안 더 우리와 현존하신다. 우리가 살핀 또 하나는 주님은 누구도 강요하시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이유가 선하고 참된 것을 생각하라고 강요당한 자는 개혁되지 않고, 오히려 거짓을 생각하고 악을 뜻함이 더 기승을 부리기 때문이다. 모든 강요함은 이런 효과를 가지고 있다. 이런 결과물은 누구나 삶으로부터 누누이 체험한다. 즉 누구나 익히 아는 사항이다는 말이다. 이로부터 우리는 두 가지 것들을 알게 된다: 양심들은 자체가 강요당해지게 내버려두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우리는 금해진 것을 얻으려고 애쓴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모든 이는 비 자유함으로부터 자유함으로 건너가기를 바란다, 이것이 인간의 생명이다.
이로부터 분명해지는 바, 자유로부터 있지 않은 어떤 것, 즉 자발적이지 않은 어떤 것은 주님께서 열납하시지 않는다는 것이다; 누군가가 자유하지 않음으로부터 주님을 예배할 때, 그는 그의 자신으로부터 아무 것도 없음으로부터 예배하는 셈이다. 이런 경우에서 그를 움직인 것은 외적인 것들, 즉 강요당함으로부터 이다. 이런 사람의 내적인 것은 진정한 예배에 무익해 있고, 저항적이고, 아예 반대적으로 놓여있기까지 하여 있다. 인간이 거듭나는 동안, 그는 주님이 선물한 자유로부터 자아 강요를 실행하고, 그의 합리성이 그 자체를 복종케하도록 하기 위해 겸허해지게 하고 고뇌를 달게 받는다. 그리하여 그는 천국의 그분 자신을 받는다. 이 후에 이것은 주님에 의해 더 완전해지고, 더욱 자유해지며, 선에 대한 애착과 이로부터 진리에 대한 애착이 되어가고, 기쁨을 향유한다. 그리고 지상과 천국 모두에서 자유함과 기쁨이 있고, 천사 들의 것과 같은 행복이 있다. 이 자유를 요한복음서에서 주님께서 말하신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하게 만들 것이다; 만일 아들이 너희를 자유하게 만든다면, 너희는 실로 자유해 있을 것이다 (요. 8:32, 36).
[3] 이 자유의 본성은 양심을 소유하지 않은 이들에게는 지독하게 알려져 있지 않다. 그 이유가 그들이 아는 자유가, 자기가 기뻐하는 대로 행하는 것이라고, 거짓인 것을 제멋대로 생각하고, 말하고 악인 것을 제멋대로 뜻하고 행하는 것이라고, 그리고 강요당함도 없고 겸허해질 필요도 없고, 더욱이 이런 것을 두고 고뇌할 일도 없다고 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진실된 합리성에 완전한 반대인 바. 주님께서 요한복음서에서 가르치신다:
죄를 범하는 모든 이는 죄의 종이다 (요. 8:34).
이런 노예적 자유를 그들은 자기들과 함께 있으면서 이것을 주입하는 악령들로부터 받는다. 그리고 그들이 이런 영들의 생명 안에 있을 때, 그들 역시 그것들의 사랑들과 탐욕들 안에 있다. 그리고 불순하고 악취나는 기쁨들이 그것들 위에서 숨쉬고 있다. 그리고 자기들이 급류에 실려 운반되는 것처럼 있을 때에도, 그들은 자신들이 자유 안에 있다고 상상한다. 그러나 이것은 지옥의 자유이다. 지옥의 자유와 천국의 자유의 차이란, 전자는 죽음의 것, 그래서 지옥 아래로 끌려 간다. 후자는 생명의 것, 그래서 그들을 천국으로 들어 올린다.
모든 진정한 내적 예배는 자유로부터 온다, 강요함으로부터 아무 것도 오지 않는다, 그리고 만일 예배가 자유로부터 있지 않다면, 그것은 내적 예배가 아니다. 이는 말씀으로부터 분명해지는데, 이는 자진해서 바치는 공물, 서약, 또는 평화 공물, 감사 공물 같은 경우로부터 이다; 이에 관련한 구절로는, 민. 15:3; 신. 12:6; 16:10, 11; 23:23, 24 를 읽기 바란다.
다윗서에서:
나는 자유 의지의 공물을 가지고 당신에게 바칠 것입니다; 나는 당신의 이름에 고백할 것 입니다, 오, 여호와시여, 그 이유가 그것이 선이기 때문입니다 (시. 54:6).
그들이 성막을 만드는데 필요한 물품을 기증받거나 수집함에서, 거룩함의 의복을 만들기 위하여 모세의 책에서 말해진다:
이스라엘의 아들들에게 이야기하라, 그리고 그들로 나에게 공물을 가져오게 하라; 자기 심 정이 기꺼이 발동하는 모든 사람으로부터 너희는 나에게 공물을 가져올 것이다 (출. 25:2).
그리고 다시:
심정에서 우러나서 여호와께 공물을 가져오고 싶은 자는 누구든지 그것을 가져오게 하라 (출. 35:2).
더 나아가 합리적 인간의 부끄러워함, 또는 그것의 고뇌(이미 말한 자유로부터)가 엄숙한 날에 혼의 고뇌함에 의해 표현되어졌다. 모세의 책에서:
이것은 너희에게 영원한 규례일 것이다; 일곱 째 달, 열흘 째에 너희는 네 혼들을 괴롭힐 것이다. (레. 16:29).
그리고 다시:
일곱 째 달의 열흘 째 날에, 이 날은 죄벗음의 날이다; 너희에게 거룩한 모임이 있을 것이 다, 그리고 너희는 네 혼을 괴롭힐 것이다; 그 자신을 괴롭히지 않는 혼은 그의 백성들로부 터 잘리울 것이다 (레. 23:27, 29)
이런 이유 때문에 신. 16:2, 3에서 누룩 넣지 않은 빵, 그 안에 발효가 없던 (빵)이 “고뇌의 빵”이라 불리운다.
“고뇌”가 다윗서에서 이렇게 말해진다:
여호와여, 누가 당신의 천막에서 체류할 것입니까? 누가 당신의 거룩함의 산에서 거주할 것입니까? 직바르게 걷는 자, 그리고 정의를 일삼는 자; 자신이 고뇌하겠다고 맹세하고, 변 경하지 않는 자 (시. 15:1, 2, 4).
“고뇌함(affliction)”은 외적 인간으로부터 합리적 인간 안으로 올라오는 악들과 거짓들을 복종시키고 지배함을 표시한다는 것은 이미 말해진 바로부터 알 것이다. 고로 고뇌함은 우리가 어떤 빈궁함, 열악함 안으로 자신을 빠트려 놓는 것, 또는 육체적 모든 즐거움들을 단념해야만 한다는 것을 뜻하는 말이 아니다, 그 이유가 이런 방식 가지고 악을 복종시키고 지배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다른 악이 부상할 수 있다. 예를 들면, 단념함에서 예상되는 공적의 악 같은 것이다; 그리고 이 외에, 인간의 자유가 선과 진리가 뿌려지는 지면 같은 것에서 견뎌내야 할 경우에도 예상되는 악도 있다. “고뇌함”은 시험과도 맥락을 같이 한다.

12절. 그리고 그는 들나귀 같은 인간일 것이다. 그의 손은 모든 이와 맞서고, 모든 이의 손은 그에게 맞서리라. 그리고 그는 그의 모든 형제의 얼굴에 거슬리며 거주하리라.

그는 들나귀(야생 당나귀) 같은 인간일 것이다. 이는 합리적 진리를 의미하는데, 이는 “들나귀”가 합리적 진리를 의미함으로부터 분명해진다. 말씀에서 말, 기수, 노새, 나귀(당나귀)의 등장은 많은 편이다; 그럼에도 이것들이 지성, 이성, 기억 속의 지식을 의미한다는 것을 아는 자는 없는 것 같다. 이 동물들과 그 승마자가 이런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것에 대한 설명은 주님의 신성한 자비로부터 적당한 장소에서 살필 기회가 있을 것이다. “야생 당나귀(onager)”는 광야의 노새, 또는 들나귀이다. 이 동물은 인간의 합리성을 의미한다; 전체적 복합체 측면에서의 합리성은 아니고, 합리적 진리만이다. 합리성은 선과 진리로 구성된다. 즉 선행에 속하는 것과 신앙에 속하는 것들로 구성된다. 이것이 “들나귀”에 의해 의미되는 합리적 진리이다. 이것이 지금 이스마엘에 의해 표현되고, 이 절에서 묘사되고 있다.
선으로부터 분리될 때의 합리적 진리가 이 구절이 묘사하는 식의 품성을 지닐 것임은 믿기 어려울지 모른다. 나에게 생생한 경험으로 가르침이 주어져 알게 해주시지 않았다면, 나 역시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당신이 합리적 진리를 말하든, 인간의 합리성이 이런 종류(선으로부터 분리된 진리의 종류)라고 말하든 마찬가지이다. 그가 진리 쪽에서만 있는 인간의 합리성, 설사 그 진리가 신앙의 진리이다 해도, 선행의 선 안에 있지 않을 경우, 들나귀 같은 진리의 품성 속에 있다. 즉 그는 까다로운 인간, 어떤 것도 참지 못하는 인간, 모든 것을 향하여 있는 인간, 모든 자를 거짓 안에 있는 자로 간주하는 인간, 누구라도 견책하고, 응징하고, 처벌할 준비가 된 인간이다; 그에게 동정이란 없다, 자신이 타인의 입장에 서 보려는 자세가 없다. 그 이유가 그는 진리로부터 모든 것을 쳐다보고, 선으로 부터서는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스마엘은 내쫓겼고, 후에 광야에서 거주했다, 그리고 그의 어머니는 그에게 이집트의 토지로부터 아내를 데려왔다 (창. 21:9-21); 이 구절 속의 모든 것은 이런 합리성에게 부여된 것에 대한 표현이다.
“들나귀”에 관한 언급이 말씀의 예언적 부분에도 있다. 이사야서에서:
궁전은 버려진 바 될 것이다, 많은 도성이 황무해 질 것이다; 높은 장소와 망루가 굴 같이 될 것이다, 영원히 들나귀의 기쁨, 양떼의 목초지 일 것이다 (이. 32:14);
위 구절은 지적인 것들의 황폐됨이 취급되어 있다. 진리들이 황폐해질 때, “들나귀의 기쁨”이라 불리우고, 선이 황폐될 때, “양떼의 목초지”라 불리운다; 이리하여 합리성은 없는 셈이다. 예레미야서에서:
들나귀들이 언덕 위에 섰다, 그것들은 고래 같이 바람을 들이마셨다, 그들의 눈이 멸해진 이유는 거기에 목초가 없었기 때문이다 (예. 14:6);
위 구절의 주제는 가믐, 즉 선하고 참된 것이 없음이다. 들나귀가 말해지는데, 그것들이 “바람을 들이 마신다. 텅빈 것을 진리들인 진짜 대신 붙잡을 때이다; ”그들의 눈이 멸하였다“란 진리가 무엇인지에 대한 납득력이 없음이다.
호세아서에서:
그들은 자기 혼자서만 있는 들나귀 같이 앗시리아로 갔다; 에브라임은 음녀의 삯을 가지고 사랑들을 얻으려고 했다 (호. 8:9).
위에서는 “이스라엘”, 또는 영적 진리가 취급되어진다; “에브라임”은 그것의 지적인 것을 표시한다; “앗시리아로 감”은 그것이 진리인지 아닌지, 라고 진리에 관하여 추론함; “고독한 들나귀”는 진리들이 결여된 합리성이다. 호세아서에서:
그는 자기 형제들 사이에서 들나귀 같이 있을 것이다; 동풍이 올 것이다, 여호와의 바람이 광야로부터 올라오고 있다; 그리고 그의 샘은 말라질 것이다, 그리고 그의 원천은 말리울 것이다; 그는 값진 모든 그릇들의 보물들을 전리품으로 만들 것이다 (호. 13:15),
위는 에브라임을 말하는데, 그를 수단으로 영적 교회의 지적인 것이 의미되어진다. 이들의 합리성은 “들나귀 같다”; 그리고 이것의 파멸이 취급되고 있다. 다윗서에서:
여호와 하느님이 샘들을 강으로 보내실 것이다. 그것들은 산들 사이에서 달릴 것이다; 그것 들은 들판의 모든 짐승들에게 마시게 할 것이다; 들나귀들이 자기들의 갈증을 해소할 것이 다 (시. 104:10, 11).
“샘들”은 지식들을 표시한다; “들판의 짐승들”은 선들을 표시한다; “들나귀”는 이성으로부터의 진리들을 표시한다.

그의 손은 모든 이와 맞서 있다. 이는 진실이지 않은 것은 무엇이든 전쟁을 치룰 것이다는 것, 그리고 “모든 이의 손이 그에 맞서 있다”는 거짓들이 싸우려 되돌아 섬을 의미하는데, 이는 이스마엘의 의미가 선으로부터 분리된 합리적 진리를 의미함으로부터 분명해진다; 그리고 이 진리를 두고, 그것의 손이 모든 이와, 모든 이의 손이 그것과 맞서있다고 말해지는 바, 이 서술이 이 합리적 진리의 의미임은 분명해진다. 앞서, 아브람은 주님의 내적 인간, 또는 그분의 신성한 천적, 영적 측면을 의미하고; 이삭은 주님의 내면의 인간, 또는 그분의 신성한 합리성을 의미하고; 야곱은 주님의 외면의 인간, 또는 그분의 신성한 자연 측면을 의미한다고 서술했다. 이 구절이 취급하는 합리성은 내적 인간, 신성한 천적, 영적인 것과 결합하지 않은 것으로 취급되고 있다. 그 이유는 이 합리성이 그것의 본성을 기억 속의 애착의 생명으로부터, 즉 사래의 여종, 이집트인 하갈로부터 가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생명은 외적 인간에 속해 있기 때문에, 이것은 주님께서 맞서 싸우시고 추방해야 하는 주님의 어머니로부터의 유전적 본성을 가졌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합리성이 여기서 합리적 선이 결여된 것으로 묘사되고 있다. 그러나 주님께서 겸허해진 후, 즉 그분께서 시험에서의 전투와 승리를 수단으로 이 유전적 본성을 괴롭게 하고 복종케 하신 후, 그리고 그분의 합리성 자체를 신성한 선으로 생명 있게 하셨을 때, 이 합리성은 “이삭”이 되었다. 즉 이삭에 의해 표현되었다; 동시에 이스마엘은 그의 어머니 하갈과 함께 집에서 쫓겨났다.
모든 순수한 합리성은 선과 진리, 즉 천적인 것과 영적인 것으로 구성되어 있다. 선, 또는 천적인 것은 합리성의 혼 자체, 또는 생명이다; 진리, 또는 영적인 것은 이 천적인 것으로부터 영적인 것의 생명을 받는다. 천적 선으로부터의 생명이 없으면 합리성은 이 구절이 묘사한 그대로, 모든 것에 맞서 싸우고, 모든 것은 그것에 맞서 싸운다. 합리적 선의 경우, 그것은 설사 공격을 당하더라도, 결코 싸우지 않는다. 그 이유는 이것은 온순하고, 인내심이 있고, 순종적이기 때문이다; 그것의 특성은 사랑과 자비로부터 있다. 비록 이것은 다투지 않아도, 모든 것을 정복한다, 동시에 그것은 전투를 생각하는 적이 없다, 승리를 자랑하는 것도 생각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것은 신성이기 때문에 그것만으로도 안전하다. 그 이유가 어떤 악도 선을 공격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악은 선이 있는 영역 안에서는 계속 존재할 수 없다. 그 이유는 선이 단지 접근하는 것만으로도 악은 철수하고, 그것 스스로 뒤로 넘어지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악은 지옥적이고, 선은 천국적이기 때문이다. 이런 선과 유사한 것은 천적-영적인 것 (the celestial spiritual), 즉 천적 근원으로부터의 진리, 또는 선으로부터 있는 진리의 경우이다. 그 이유가 이 진리는 선에 의해 만들어진 진리이기 때문이다. 고로 이 진리는 선의 형체라 불리운다.
그러나 선으로부터 분리된 진리, 이것이 여기서 이스마엘에 의해 표현되고, 이 절에서 묘사되었는데, 이것은 위의 진리와 아주 다르다. 이 진리는 마치 들나귀 같고, 모든 이와 맞서고, 모든 이는 이것에 맞선다; 사실상, 이것은 전투밖에 더 다른 어떤 것은 생각 속에 없고, 그것만으로 숨쉬고 살아 있다. 이것의 일반적 환희와 지배적인 애착은 정복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정복할 때, 그것은 승리를 자랑해댄다. 이렇기 때문에 “야생 당나귀(onager)”, 또는 광야의 노새, 즉 들나귀로서 묘사되고, 이것은 다른 이들과 더불어 있을 수 없다. 이와 같은 생명은 선이 없는 진리의 생명, 그렇다, 선행 없는 신앙의 생명이다, 그러므로 인간이 거듭나질 때, 거듭남은 실로 신앙의 진리를 수단으로 결과되어지나, 여전히 주님께서 신앙의 진리가 증가함에 일치하여 주입해주시는 선행의 생명을 수단으로 한다.

그는 그의 모든 형제들의 얼굴에 거슬리며 거주하리라. 이는 신앙의 문제들에서 계속적인 다툼이 있을 것, 그러나 그럼에도 정복자일 것임을 의미하는데, 이는 위에서 살핀 설명으로도 충분할 것이다; 이 대목을 더 보충해주는 구절이 있는데 이스마엘의 후손을 두고 말한 구절이다:
그들은 하윌라로부터 앗수르로 통하는 이집트 앞 술에까지 이르러 거주하였다. (그의 영역 은) 그의 모든 형제들의 얼굴에 마주치고 있었다 (창.25:18).
위 인용 구절의 내적 의미는 하윌라, 술, 이집트, 앗수르(앗시리아)의 의미로부터 분명해진다. “하윌라”는 지식으로부터 있는 것; “술”은 기억 속의 지식들로부터 진행하는 진리; “이집트”는 기억 속의 지식으로부터 있는 모든 것; 그리고 “앗시리아”는 추론에 속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상의 의미들을 한 개의 일반적 의미 안으로 환원해 볼 때, 이스마엘이 위에서 살핀 합리성을 표현함은 분명해진다. 이런 진리의 종류는 다른 삶에서 다양한 방법에서 표현되어지는데, 언제나 그것은 힘세고, 강력하고, 격렬하다. 이러하니까 이 진리는 격퇴당할 리 없다. 영들은 이 진리를 단지 생각만 해보아도, 공포의 어떤 것이 그들을 엄습한다, 그 이유는 그것은 본성 상 굴복하거나 물러서거나 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상으로부터 우리는 “모든 그의 형제들의 얼굴과 마주하며 거주함”에 의해 뜻해진 것을 알런지 모른다. 이런 묘사 속에 신비함들이 감추여 있을 것이다 추측해보는 정도는 누군가에 의해 가능할 것이나, 그 본성에 관해서는 아직 알려지지 않고 있다.

13, 14절. 그래서 그녀는 자기에게 말하신 여호와의 이름을 하느님이 나를 보고 있으시다 라고 불렀다. 그 이유가 나 또한 나를 보시는 그분을 따라서 여기서 보았던고? 라고 그녀가 말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녀는 그 샘을 나를 살펴 본 살아계신 분의 샘이라고 불렀다. 이것은 가데스와 베렛 사이에 있다.

그리고 그녀는 자기에게 말하신 여호와의 이름을…불렀다. 이는 이런 것들에 관하여 생각했을 때 있는 주님의 내면의 인간의 상태를 의미한다. 이는 앞서 진행된 것과 이어지는 것으로부터, 그리고 “이름을 부름”은 품질이 무엇인지 아는 것을 의미한다로부터 분명해진다. 이 상태는 그것의 품질에 관하여 묘사되고 있다, 또는 주님께서 합리성에 관하여 생각하셨을 때 있었던 상태에 관하여 묘사되어 있다. 합리성이 합리성에 관하여 생각할 수 없는 바, 합리성 보다 더 내적이거나 더 높은 인간이 합리성에 대해 생각(판단)해 볼 수 있다. 합리성은 자신의 품질에 관하여 결코 생각할 수 없다. 그 이유가 자체 안을 들여다 볼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기 때문이다. 그 자체를 들여다 볼 수 있는 것은 더 내적, 또는 더 높은 어떤 것임에 틀림없다. 예를 들어보자: 귀는 그 자체 안으로 받는 것을 알 수 없고 더욱이 지각할 수 없다; 알거나 지각하는 것은 더 내면의 들음에 의하여 이루어진다. 귀는 자음소리나 단어들을 식별할 뿐이다. 말해진 것을 납득하는 것은 내면의 들음이다. 그것을 지각하는 것은 내면의 시야나 정신적 조망(view)이다. 이 방법에서 들음을 통하여 말의 의미에 대한 지각이 있다. 시야(보는 것) 역시 이와 비슷하다: 보여진 대상물로부터의 첫 생각들은 그것들이 일컬어지는 그대로의 물질(체)이다. 그러나 대상물을 정신적으로 바라보는 더 내면에 속하는 시야가 있다, 이것 때문에 생각한다. 그리고 이와 같은 것이 인간의 합리성과 더불은 경우이다. 합리성은 자체를 결코 들여다 보지 못한다. 더욱이 자신의 픔질을 조사하지 못한다: 이것을 행하는 더 내적인 어떤 것이 있음에 틀림없다; 그러므로 인간이 이것을 행할 수 있을 때, 즉 그의 합리성에 거짓된 어떤 것을 지각할 때, 또는 거기서 빛을 내는 어떤 진리를 지각할 때, 특히 그가 싸우고 이겨내는 어떤 것을 지각할 때, 그는 이것을 행한 자신의 능력이 내적 인간을 통하여 있는 주님의 능력임을 알런지 모른다. 주님의 내면의 인간, 여기서 뜻해진 주님의 내면의 인간은 여호와이신 그분의 내적 인간과 결합된 것인 바, 합리성을 넘어서 있었다. 이 내면의 인간으로부터 천국의 빛에서와 같이, 만일 합리성이 선 안에 있지 않고 진리만에 있을 경우 어떻게 되어질지를 보셨고 지각하셨다.

당신 하느님이 나를 보고 있으시다. 이는 유입을 의미하는데, 이는 방금 말해진 바로부터 분명해진다. 더 높은 것으로부터 더 낮은 것을, 또는 내면으로부터 외면을 정신적으로 바라봄을 유입(influx)이라 불리우고 있다. 그 이유가 이것이 유입에 의해 거행되기 때문이다. 이것은 인간의 내면의 시야에서와 같은 경우이다: 이것이 그의 바깥쪽 시야로 계속 흐르지 않으면, 눈의 것인 바깥쪽 시야는 어떤 대상물을 식별하거나 납득하는 것이 가능하지 않다. 그 이유가 눈이 보는 것을 납득하는 것은 내면의 시야이기 때문이다. 비록 눈이 납득하는 듯 여겨진다 해도 결코 그렇지 않다. 영의 눈이 눈을 통하여 보는 것, 내면의 시야가 있는데도, 우리는 눈이 본다고 믿는 오류 속에 얼마나 많은 이가 있는 지를 이로부터도 알런지 모른다.
나와 더불어 있던 영들이 내 눈을 통하여 내가 한 것, 뿐만 아니라 세상에 있는 것들까지 보았었다; 그런데도 감각의 오류 속에 여전히 있는 그들 중 일부는 자기들이 눈을 통하여 보았었다고 상상했다; 그래서 내가 눈을 감아 버리자, 그들이 이 대기권의 세상에서 아무 것도 보지 못했다. 이를 수단으로 그들이 오류에 있었음을 알게 했다. 이것은 인간의 경우도 아주 똑같다: 보는 것은 영이지, 그의 눈이 아니다. 눈을 통하여 영이 보는 것이다. 이와 같은 것은 연극을 통하여도 보여질런지 모른다. 연극 안에서 인간은 때때로 낮에 보듯 보고 있다. 내면의 시야, 또는 영의 시야에 관련하여서도 매우 똑같다. 다시 말해 내면의 시야는 그 자체로부터 보지 않는다, 그러나 아직 더 내면의 사야로부터, 또는 인간의 합리성의 시야로부터 본다. 그렇다, 이것도 그 자체로부터 보지 않고, 더 내적인 시야로부터, 또는 내적 인간의 시야로부터 본다. 그리고 이것 마저도 그 자체로부터 보지 않는다. 그러나 내적 인간을 통하여 보시는 주님으로부터 본다. 그리고 그분은 보시는 유일한 분이시다. 그 이유는 그분만이 살아있는 유일한 분이시고, 인간에게 보는 능력을 주시는 유일한 분이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은 그 자신 스스로 보는 것처럼 그에게 나타난다. 이와 같은 경우가 유입이다.

그 이유가 나 또한 나를 보시는 그분을 따라서 여기서 보았던고? 라고 그녀가 말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매개하는 합리적 인간 없이 외면의 인간의 생명 안으로의 유입을 의미하는데, 이는 “보시는 그분을 따라서 보고 있다”의 의미로부터 분명해진다. “보시는 그분을 따라 본다”는 내면인 것, 또는 더 높은 것으로부터 보는 것인데, 그 이유는 내적 의미에서 내부에 있는 것, 또는 위에 있는 것이 글자 의미에서 “…에 따라서”라고 표현되어지기 때문이다. 이 구절에서 말하는 자는 하갈이다; 그리고 하갈에 의해 기억 속의 지식들의 생명이 의미되고 이 생명은 외적 인간에 속해 있다. 첫 합리성이 이 생명으로부터 근원되었는 바, 주님께서는 그것의 그렇게 행함에 대한 이유를 보셨다, 그리고 그분은 그것을 그분의 외면의 인간에 있는 그분의 내면의 인간으로부터 보셨다, 그리고 매개하는 합리성 없이 그렇게 하셨다. 우리들 앞의 이 말은 신비함을 내포하는데, 이는 이것만 생각해보아도 인정할 것이다. 즉 “나를 보시는 그분을 따라서 본다”의 의미는 내적 의미로부터가 아니면 아무도 알 수 없다는 것만으로도 그럴 것이다. 이 말씀 안에 인간의 납득력에 설명되어질 수 없는 어떤 것이 들어있다는 것, 이것은 천사들의 납득력에 와지는 생각이 들어 있다는 것, 즉 이 생각은 단어들에 나타나지 않고, 단어들의 의미 안에서만 나타난다는 것; 이것은 단어들의 의미가 와지는 물질적 생각과는 전혀 다르다는 것 등등이다. 우리들 앞의 단어들에 관하여서만을 가지고도 이것은 인간에게는 아주 희미하게 나타나나, 천사는 아주 명료하고 분명하고, 많은 표현들로 해서 풍요로워져 있다. 아마 책 한권 쯤은 채우고도 남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녀는 샘이라 불렀다. 이는 진리로부터의 파생된 상태를 의미하는 것은 이미 말해진 것으로부터; 또한 “샘”의 의미가 진리이다로부터도 분명해진다. 이 진리가 합리성 안에서 보여지지 않고, 합리성 아래서 보였던 바, 여기서 “샘, fountain”이라 번역된 원어의 단어는 위의 “샘”과는 다른 단어인데, 샘을 위한 보통의 단어이다.

나를 보시는 살아계신 분의 샘. 이는 명백하게 보여진 진리를 의미하는데, 이는 이미 말해진 바로부터, 즉 주님은 어떻게 이 경우가 이 합리성의 진리와 더불어 있었는지를 보셨다는 것, 즉 그것의 선이 아니었다는 것을 명백하게 보셨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을 보신 주님의 내면의 인간이 “보시는 살아계신 분”이라 불리운다. 그 이유는 그것이 내적 인간과 결합하셨기 때문인데, 살아계시어 보시는 분은 오직 한 분 여호와이시고 이 분이 내적 인간이시기 때문이다.

보라 그것은 가데스와 베렛 사이에 있었다. 이것은 품질을 의미한다, 즉 그분은 이 진리가 무슨 품질이었는지를 보셨다는 것, 고로 합리성의 품질이 무엇이었는지를 보셨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는 “가데스”와 “베렛”의 의미로부터 분명해진다. “가데스”는 진리를 , 또는 진리들에 관하여 논쟁함을 의미한다; 그러나 “바렛”은 아래 있는 것을 의미하는 바, 합리성이 와지는 기억 속의 지식의 형체(외적인 기억)에 있는 진리를 의미한다. 말씀에서 이름들은 실제의 것들을 의미한다.

15절. 그리고 하갈은 아브람에게 아들을 낳아 주었다. 그리고 아브람은 하갈이 낳은 그의 아들의 이름을 이스마엘이라 불렀다.

하갈은 아브람에게 아들을 낳아 주었다. 이는 합리적 인간이 이 임신과 결합으로부터 출생했다를 의미하는데, 이는 “하갈”, “아브람”, “아들”의 표현과 의미로부터 분명해진다. “하갈”은 외면의 인간에 있는 기억 속의 지식들에 대한 애착의 생명을 의미한다는 것; 그리고 “아브람”은 주님의 내적 인간을 의미한다는 것; 그리고 “아들”의 의미는 진리, 고로 이 합리성으로부터 있는 진리를 의미한다. 이로부터 “하갈이 아브람에게 아들을 낳아 주었다”는 것은 이 임신과 결합으로부터 태어나진 합리적 인간을 의미하게 된다. 이 말씀이 천사들 앞에, 또는 천사들에게 도달될 때, 이 글자의 의미는 위와 같이 바뀌어진다.

그리고 아브람은 하갈이 낳은 그의 아들의 이름을 이스마엘이라고 불렀다. 이는 합리성의 품질을 의미하는데, 이는 “이름을 부름”의 의미가 잘 알지 못하고 있는 어떤 것의 품질을 아는 것이다로부터; 그리고 “이스마엘”의 표현과 의미가 합리적 진리이다로부터 분명해진다. 이 진리에 대하여는 11, 12절에 묘사되어 있다: 즉 “너는 그의 이름을 이스마엘이라 부를 것이다, 그 이유는 여호와께서 네 고뇌를 들으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들나귀 인간일 것이다; 그의 손은 모든 이와 맞서 있고, 모든 이의 손이 그에 맞서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모든 그의 형제들의 얼굴에 거슬리며 거주할 것이다”; 그리고 이 말들의 의미는 그 구절이 포함된 항목을 보면 될 것이다. 이 합리성의 품질이 위 구절에 서술되고 있다.

16절. 하갈이 아브람에게 이스마엘을 낳았을 때, 아브람은 팔십 육 세의 아들이었다.”

아브람은 팔십 육 세의 아들이었다. 이는 시험을 수단으로 획득하신 천적 선에 관련되는 주님의 상태를 의미하는데, 이는 “80”의 의미로부터 분명해진다. 이 숫자 안에는 “40”과 같은 의미가 많이 포함되고 있다; 그리고 두 숫자들은 시험들을 의미하는데, 이는 이미 살핀 바 있다; 그리고 “여섯”의 의미가 전투이다로부터도; 더 나아가 “10”의 의미가 리메인스이다로 부터도 분명해진다. 주님의 경우에서 이 리메인스는 천적 선들을 소유하심 이었고, 이를 가지고 그분은 인간 본질을 신성 본질에 하나되게 하셨다. 위 세 숫자(40, 6, 10)은 숫자 86의 구성 요소가 되는 숫자이다. 이 숫자 안에 이와 같은 것들이 포함되어 있고, 이것은 시험들의 전투를 수단으로 획득된 천적 선에 관련한 주님의 상태를 의미한다; 그 이유가 말씀에 있는 모든 숫자들은 실제의 것들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 구절에서 언급된 숫자는 햇수(나이)에 관련한 숫자이고 이것이 아브람의 나이를 말하는 바, 마치 위와 같은 숫자의 의미가 없는 듯 나타날지 모른다. 그러나 이 말씀이 천사들에게 건너갈 때, 영적, 천적인 것 안으로 건너가지 않게 쓰여있는 말씀은 단 한 구절도 없다. 그 이유가 천사들은 영적, 천적인 생각들 밖에 더 하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말씀이 인간에 의해 읽혀지고 있을 때, 천사들은 “86”을 알거나 지각하지 않고, 하갈이 아브람에게 이스마엘을 낳아주었을 때가 팔십 육 세이다는 것에 관심이 없다; 그러나 이와 같은 숫자로부터, 읽을 때, 그 안에 포함된 것이 그들에게 와진다; 그리고 다른 구절의 표현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것들 역시 내적 의미에서 와질 뿐이다.

하갈이 이스마엘에게 아브람을 낳아 주었을 때. 이는 기억 속의 지식들에 대한 애착의 생명이 합리성을 생산했을 때를 의미하는데, 이는 “하갈”의 의미가 기억 속의 지식들에 대한 애착의 생명이다로부터; 그리고 “이스마엘”의 의미가 첫 임신된 합리성이다로부터 분명해진다. 이 16장에서 취급된 주제는 인간의 합리성이고, 합리성이 진리들만으로 구성될 경우, 그리고 또한 선들과 진리들에서 선을 축출할 경우의 합리성의 품질이 묘사되었는 바, 알게해 주는 것은 합리성은 지식들로부터 떨어져서는 임신하고, 출생하고, 만들어지고 하는 것이 가능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지식들은 그것들의 목적으로 선용(use)을 가지고 있어야만 한다. 그리고 그것들이 선용을 가질 때, 그것들은 그것들의 목적으로 생명을 가진다. 그 이유가 모든 생명은 선용들에 속해 있고, 선용은 목적에 속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지식들이 선용의 생명을 위하여 배워지지 않으면, 그것들은 한 순간도 존재하지 못한다. 그 이유는 쓸모없음에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선용의 삶 없이, 이런 지식들만으로 부터서의 합리성은 이 장에서 묘사한 대로 되어 간다. 즉 들나귀와 유사해지고, 까다로워지고, 싸움하기 좋아하고, 바싹 마른 생명으로 특징화 되어 지는데, 한마디로 자기 사랑으로 더럽혀진 어떤 종류의 진리의 사랑으로부터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지식들이 그들의 목적으로 선용을 가질 때, 그것들은 선용으로부터 생명을 받으나, 이 생명은 선용의 것과 같은 생명일 뿐이다. 그러나 진짜로 실재의 신앙은 주님을 사랑함과 이웃을 향한 사랑이기 때문에, 사랑의 신앙 안에서 완전해지기 위하여 지식들을 배우는 합리성은 모든 선용들 안의 선용 안에 있고, 주님으로부터 영적, 천적인 생명을 받는다; 그리고 합리성이 이 생명을 받을 때, 그것은 주님의 왕국에 있는 모든 것들을 지각하는 능력을 가진다. 이런 생명 안에 천사들은 있다; 그리고 그들이 이 생명 안에 있기 때문에 그들은 총명 자체와 지혜 자체 안에 있다.

지금까지 16장에서 살핀 것은 아브람, 하갈, 이스마엘에 관한 간략한 내적 의미이다. 그러나 이 의미가 얼마나 내용이 풍부한지, 즉 얼마나 광대한 사항들이 그것들에 포함되어 있는 지는 말씀에 있는 모든 것들이 내적 의미에서는 일반적, 특수적 측면 모두에서 주님에 관한 것이고, 주님을 취급한다는 것만을 생각해보아도 수긍이 될 것이라 본다. 그 이유가 말씀의 생명, 즉 말씀 자체가 이것(주님)으로부터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말씀은 내적 의미에서 천국들에 있는 그분의 왕국, 지상의 그분의 왕국인 교회도 동시에 취급하고 있다; 그리고 같은 방법에서 말씀은 주님의 왕국 안에 있는 모든 이도 취급한다; 그리고 이것 외에 말씀은 천적, 영적인 모든 것들을 일반적으로 취급한다. 그 이유가 이 모든 것이 주님으로부터 있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아브람은 천적 교회, 천적 인간, 그리고 천적 자체, 등등도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여기서 일일이 펼쳐보는 것은 너무나 장황할 것이다.

*************************************

창세기 제 17 장

성경: 창세기 17장

1. 아브람은 구십 구세의 아들이었다. 그리고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셨다, 그 리고 그에게 말하시기를, 나는 하느님 사다이 이다. 너는 내 앞에서 걸으라, 그리 고 너는 완전하라.
2. 그리고 나는 너와 나 사이에 내 언약을 줄 것이다, 그리고 나는 너를 극대하게 번 성하게 할 것이다.
3. 그리고 아브람은 그의 얼굴들을 땅에 대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그에게 말하셔서, 말하신다.
4. 나, 보라, 내 언약은 너와 함께 있다, 그리고 너는 수많은 나라들의 아버지가 되리 라.
5. 그리고 네 이름은 더 이상 아브람이라 불리우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네 이름은 아 브라함일 것인데, 그 이유는 내가 너를 수많은 나라들의 아버지로 만들었기 때문 이다.
6. 그리고 나는 너를 매우 대단하게 열매 맺게 하리라. 그리고 나는 너를 나라들로 만 들리라, 그래서 왕들이 너로부터 나오리라.
7. 그리고 나는 내 언약을 나와 너와 너 이후 네 씨 대대로까지에 사이에 세워서 영 원한 언약을 삼고 너와 너 이후 네 씨에게 하느님이 되리라.
8. 나는 너에게, 그리고 너 이후 네 씨에게 네가 머무르는 토지, 가나안의 모든 토지 를 주어 영원히 소유로 삼게 하리라. 그리고 나는 그들에게 하느님이 되리라.
9. 그리고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말하셨다. 너는 내 언약을 지키라, 그리고 너와 네 후손이 대대로 지키라.
10. 이것은 내 언약이다, 이것을 너는 나와 너, 그리고 너 이후 네 씨 사이에서 지킬 것이다, 모든 남자는 너에게 할례를 받아라.
11. 너는 너의 포피의 살을 할례를 받아라, 그리고 이것은 나와 너 사이에 언약의 표 시이리라.
12. 그리고 팔 일된 아들은 너에게 할례를 받을 것이다, 대대로 모든 남성, 그가 집에 서 태어났든, 네 씨로부터가 아닌 낯선 사람인 모든 아들로부터 은을 주고 산 자 이든 할례를 받아야 하리라.
13. 네 집에서 태어난 자, 그리고 은을 주고 산 자이든 할례를 꼭 받아야 하리라. 그 리고 내 언약은 너의 살에 있을 것이고, 영원한 언약을 위하여이다.
14. 그리고 할례를 받지 않은 남자, 자기 포피의 살을 할례하지 않은 자, 그 혼은 자 기 백성들로부터 잘리워질 것이다. 그는 내 언약을 헛되게 만들었다.
15. 그리고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말하시기를, 사래, 네 아내, 너는 그녀의 이름을 사래라 부르지 마라, 그 이유는 사라가 그녀의 이름이기 때문이다.
16. 그리고 나는 그녀에게 복을 줄 것이다, 그리고 또한 나는 너에게 그녀로부터 아들 을 줄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녀에게 복을 줄 것이다, 그리고 그녀는 나라들을 위 해 있을 것이다. 백성들의 왕들이 그녀로부터 있을 것이다.
17. 아브라함이 엎드렸다, 그리고 웃었다, 그리고 심중에서 말하기를, 백 세의 아들이 자식을 낳을 수 있을까? 구십 세의 딸인 사라가 자식을 낳을 수 있을까?
18. 그리고 아브라함이 하느님께 말했다, 이스마엘이 당신 앞에서 살도록 해주십시요!
19. 그리고 하느님께서 말하셨다, 진실로 네 아내 사라가 너에게 아들을 낳을 것이다, 그리고 너는 그의 이름을 이삭으로 부르라, 그리고 나는 내 언약을 그와 더불어 세울 것인데 이는 그의 후손에게 영원한 언약이 될 것이다.
20. 그리고 이스마엘에 관하여 나는 너에게서 들었다. 보라 나는 그에게 복을 내릴 것 이다, 그리고 그를 열매 있게 만들 것이고, 그를 극히 번창하게 할 것이다. 그를 아버지로 하여 열 두 왕자들이 출생할 것이다, 나는 그를 큰 나라로 만들 것이다.
21. 그리고 나는 내 언약을 내년 이맘 때 사라가 너에게 낳아 줄 이삭과 세울 것이다.
22. 그리고 그분은 그와 말하시고 떠나셨다. 그리고 하느님은 아브라함으로부터 아브 라함 너머로 올라 가셨다.
23. 그리고 아브라함은 그의 아들 이스마엘, 그리고 그의 집에서 태어난 모든 자들, 그리고 그의 은으로 산 모든 이들, 아브라함의 집의 사람들 사이에서 모든 남성 을 챙겼고, 하느님께서 자기에게 말하셨던 대로 바로 그날에 그들의 포피의 살에 할례를 베풀었다.
24. 그리고 아브라함이 그의 포피의 살에 할례를 베풀었을 때 그는 구십 구세의 아 들이었다.
25. 그리고 그의 아들 이스마엘이 그의 포피의 살에 할례를 받은 때 그는 십 삼세의 아들이었다.
26. 바로 그 날에 아브라함과 그의 아들 이스마엘은 할례를 받았다.
27. 그리고 그의 집의 모든 남자들, 그의 집에서 태어난 남자, 외국인인 아들로부터 그의 은으로 산 남자가 그에 의해 할례되어졌다.

각 절의 내적 의미

1절. 아브람은 구십 구 세의 아들이었다. 그리고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셨다, 그리고 그에게 말하시기를, 나는 전능한 하느님이다. 너는 내 앞에서 걸으라, 그리고 너는 완전하라.

아브람은 구십 구 세의 아들이었다. 이는 주님께서 내적 인간이 합리적 인간과 충분하게 결합하시기 전의 때를 의미하는데, 이는 숫자 “9”가 “10” 앞에 있는 숫자임에 주목해봄으로 분명해진다; 또는 “99”가 “100” 앞의 숫자임으로부터도 알게 된다. 그 이유가 이삭의 출생이 그가 100세 이었을 때이기 때문이다. 말씀의 내적 의미의 본성은 말씀에 발생하는 숫자나 이름만을 주목해도 알 수 있다. 그 이유가 말씀에 있는 숫자들은 이름과 마찬가지로 실제의 것들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신성인 것을 함유하지 않은 말씀이나 내적 의미를 함유하지 않은 말씀은 절대적으로 없다; 이 내적 의미가 글자 의미로부터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지는 이름이나 숫자들을 생각해보아도 곧 파악된다; 그 이유가 천국에서는 숫자 자체에는 관심이 전혀 없고 오직 숫자에 의해 의미되는 것들만이 알려지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숫자 “7”이 발생하면, 일곱 대신 천사들은 거룩한 것을 생각한다. 그 이유가 “7”이 거룩한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또는 천적 인간이 “일곱 째 날”, 또는 “안식일”, 고로 주님의 “쉼”에 의해 의미된다에서도 내적 의미와 글자 의미와의 관계가 어떤지를 짐작하게 한다. 다른 숫자의 경우도 마찬가지인데, 예를 더 들면, 12 같은 경우이다. 말씀에서의 이 숫자가 천사들 앞에서 나타나면, 그들에게는 신앙에 속한 모든 것들이라는 생각이 떠올려진다. 그 이유가 이것들이 “열 두 지파들”에 의해 의미되기 때문이다. 말씀에서 숫자들이 실제의 것들을 의미한다는 것은 제 1권에서도 많이 증명하여 왔다.
이 본문에 등장하는 숫자 “99”의 경우도 위와 같은 맥락이다; 그리고 이 숫자는 주님의 내적 인간과 합리적 인간이 충분히 결합되기 이전의 때를 의미한다. 이는 아브람에게 이삭이 태어나는 나이의 숫자가 “100”인 바, 이 숫자의 의미로부터 분명해진다. 그 이유가 이삭은 주님의 내적 인간, 즉 신성과 결합된 그분의 합리적 인간을 표현하기 때문이다. 말씀에서 “100”은 “10”과 같은 것을 의미한다. 그 이유가 100은 10에 10을 곱해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10”은 리메인스를 의미한다. 숫자에 관한 신비함은 더 이상 설명되기 어렵다. 모든 이는 리메인스가 무엇인지에 친숙해진 후에라야 이 주제를 두고도 결론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즉 주님의 경우에서의 리메인스는 그분께서 그분 자신의 힘으로 자신을 위해 획득하신 신성한 선들을 뜻한다는 정도는 알고 주제를 생각해야 된다는 말이다.
이런 모두로부터 우리가 알게 되는 바, 숫자 99가 100의 앞에 있기 때문에, 주님의 내적 인간이 합리적 인간과 충분히 결합되시기 전의 때를 의미한다는 것이다. 주님의 경우에서 첫 합리성은 이스마엘에 의해 표현되어졌다; 그리고 이 합리성의 본성은 16장에서 충분히 설명하였다. 그러나 이삭에 의하여 표현되는 합리성은 뒷 장에서 살필 것이다. 아브람은 그의 아내 사래로부터 아들을 얻지 못한 채 가나안의 토지에서 오래 살고 있다. 대체로 계산해보면 24년, 즉 가나안의 토지에 들어와 거주한지 10년 후에 이스마엘이 태어나고, 그 뒤 13년 후에 이삭이 출생한다. 이러한 오랜 기간에도 어떤 신비함들이 담겨 있을 것이라고 많은 이들이 추측은 한다. 그 신비함은 이렇다, 즉 그는 주님의 신성 본질이 그분의 인간 본질과 하나됨을 표현하도록 하시려는 섭리에서 이다; 그리고 사실상 (100세에 이삭이 출생함은) 여호와이신 그분의 내적 인간이 그분의 합리적 인간과 합일되는 것을 표현한 것이다.

“아브람”이 그 상태와 그 나이에서 계신 주님을 의미한다는 것은 이미 아브람에 관해 말해진 바로부터 분명해진다. 내적 의미에서 아브람은 주님을 표현한다. 그 이유가 말씀이 읽혀질 때, 천국에서는 다른 의미에서 아브람이 의미되지 않기 때문이다. 교회 안에서 출생되어 아브람에 관하여 들어 왔던 이들이, 다른 삶의 입구에서도 실로 아브람에 관한 지식을 가지고는 있다; 그러나 그가 여느 다른 사람 같고, 누구의 도움도 없으면, 그들은 아브람에 관하여 더 이상 마음을 쓰지 않는다; 그리고 그들이 배우는 바, 말씀에서의 “아브람”은 주님 외에 더 다른 사람을 뜻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천국적 생각 안에 있는 천사들, 그리고 아브람을 여느 인간의 부류에 고정시키지 않은 천사들은 아브람에 관해서 아무 것도 아는 것이 없다. 그러므로 인간에 의해 말씀이 읽혀지고, 아브람이 언급되어도, 주님 외에 다른 사람은 생각지 않는다. 즉 이 본문이 읽혀질 때, 그들은 그 상태와 그 나이에서의 주님을 지각한다; 그 이유가 여기서 여호와가 아브람, 즉 주님과 이야기하기 때문이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났다. 이는 명명백백함을 의미하는데, 별도 설명이 없어도 될 것이라 본다. 그 이유가 주님이 아브람에 의해 표현되었기 때문이다. 온 세계에 있는 어느 인간도 주님의 아버지, 여호와를 보지 못했다; 그러나 주님만이 그분을 보셨다. 이를 그분 자신께서 요한복음서에서 말하셨다:
어느 때에서 이든 하느님을 본 자는 없다; 아버지의 품 안에 계신 독생자, 그분이 그분을 선포하셨다 (요. 1:18).
다시:
너희는 언제였든 그분의 음성을 들은 적도, 그분의 모양을 본 적도 없다 (요. 5:37).
그리고 다시:
아버지와 더불어 있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보는 자는 아무도 없다; 그분이 아버지를 보아 왔다 (요. 6:46).
모든 천국들을 넘어있는 무한 자체, 인간에게 속하는 가장 안쪽의 것을 넘어있는 무한 자체는 주님만에 속하는 신성한 인간을 통하지 않고는 명백히 나타나 질 수 없다. 무한과 유한인 것들과의 교통은 여느 다른 근원에서는 가능할 수 없다. 이런 이유에서 여호와께서는 태고 교회의 사람들에게, 홍수 후의 고대 교회 사람들에게, 그 다음 아브라함과 예언자들에게 나타나셨을 때, 그분은 사람으로 그들에게 분명히 나타나셨다. 이분이 주님이셨다는 것을 그분께서 요한복음서에서 가르치신다:
너희의 아버지 아브라함은 내 날을 보기를 기뻐 즐거워했다, 그리고 그는 그것을 보았다, 그리고 즐거워했다; 참으로, 참으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아브라함이 있었기 전에 나는 있다 (요. 8:56, 58).
또한 예언서, 즉 다니엘서에서, 그분은 다니엘에 의해 사람의 아들로서 보여지셨다 (단. 7:13).
위와 같은 인용 구절로부터 보여지는 바, 무한한 있음(Esse), 즉 여호와께서는 인간 본질, 즉 주님을 통하지 않고는 그분 자신을 명백히 나타내실 수 없으셨다; 그러므로 주님 외에 누구도 그분을 나타낸 자는 없었다. 인간이 신성으로부터 자신들을 완전히 옮겨버린 후, 그리고 인간이 자신들을 더러운 탐욕들 안에 침수시킨 후, 그럼으로 해서 단지 지상적, 육체적인 것 만에 있게 된 후, 그분이 인간에게 나타나시고 결합하시기 위하여, 그분은 실제로 출생을 수단으로 인간 본질 자체를 입으셨다, 그리하여 그분은 무한한 신성이 신성과는 아주 멀어진 인간과 인접하실 수 있게 되셨다; 이렇지 않으셨다면 인간은 지옥에 떨어지는 영원한 죽음에 멸해졌었을 것이다. 주님이 창피스러운 상태 안에 있으셨을 때, 즉 그분이 인간 본질을 신성 본질에 완전히 하나가 되게 하시기 전의 상태에 계셨을 때, 다시 말해 그분의 인간 본질이 신성이 되시기 이전의 상태에 계셨을 때, 주님의 인간 안에서 여호와의 명백한 나타나심에 관한 다른 신비함은 주님의 신성한 자비로부터 이어지는 곳에서 납득이 가능한 만큼에서 설명해 볼 것이다.

그리고 그에게 말하셨다. 이것은 지각을 의미하는데, 이는 주님의 지각으로부터, 즉 그것이 여호와로부터 이다에서 분명해진다. 또한 내적 의미에서, “여호와의 말하심,” 또는 “하느님의 말하심”은 지각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나는 하느님 사다이 이다. 글자 의미에서 이것은 아브람의 하느님의 이름을 의미하고, 이 이름을 수단으로 주님께서는 그들 앞에 처음 표현되어졌다를 의미하는데, 이는 아브람에 관하여 말씀에 포함된 것들, 그리고 그의 아버지의 집에 관하여, 그 집에서 그들은 다른 신들을 숭배했다는 것으로부터 분명해진다. 아브람의 출신지 인 시리아에는 그 당시 고대 교회의 잔존물이 존재했었다, 그리고 그곳의 많은 가문들이 고대 교회의 예배를 지속하고 있었다. 이는 히브리 나라의 근원인 에벨로부터 분명해진다. 그리고 그들은 “여호와”라는 이름을 보유하고도 있었다. 이에 대하여는 창. 11:14에서 살핀 바 있다. 그리고 발람의 경우로부터, 그가 시리아 출신이다는 것, 그리고 제물을 바쳤고, 자기 하느님을 여호와라고 부른 것에서도 분명해진다 (민. 23:7; 22:39, 40; 23:1-3, 14, 29; 22:8, 13, 18, 31; 23:8, 12, 16 참조).
발람과 달리 데라의 집안, 즉 아브람과 나홀의 아버지의 집안도 시리아에서 나라 중의 하나에 해당되지만, 그들은 이름 “여호와”를 잃어버린 상황이었고, 여호와 대신 사다이(Shaddai)를 그들의 하느님으로 부르고 예배했다. 그들이 이름 “여호와”를 잃은 대목에 대하여는 창. 11:14에서 분명해질 것이다. 그들이 다른 신들을 섬겼다는 것은 여호수아서에서 공개적으로 서술되어 있다:
여호수아가 모든 백성에게 말하였다, 이스라엘의 하느님 여호와께서 말하셨다. 옛적 강 건 너 거주한 너희의 조상들, 이브라함의 아버지와 나홀의 아버지인 데라, 그리고 그들은 다 른 신들을 섬겼다; 이제는 여호와를 경외하라, 그리고 그분만을 온전히 진실로 섬겨라; 그 리고 너희 조상이 강건너에서 섬겼던 신들, 그리고 이집트에서 섬겼던 신들을 중단하라, 그리고 너희는 여호와를 섬겨라. 만일 너희 눈에 여호와를 섬김이 악이다면, 오늘 강건너에 서 너희 조상이 섬긴 신이든지, 아모리족의 신이든지 선택하라 (여. 24:2, 14, 15).
아브람의 형제, 나홀, 그리고 그로부터 내려온 나라 역시 다른 신들을 섬겼다는 것은 나홀의 성에 있던 시리아인 라반으로부터도 분명해진다. 그는 우상, 또는 드라빔을 예배했다. 이것을 라헬이 가져 갔다 (창 24:10; 31:19, 26, 32, 34). 여호와 대신 그들이 사다이를 예배한 것, 사다이라고 자기들의 하느님을 부른 것이 모세의 책에서 또렷하게 서술되고 있다:
나(여호와)는 아브라함, 이삭, 야곱에게 하느님 사다이로 나타났었다; 그리고 내 이름 여호 와에 의해서 나는 그들에게 알려지지 않았다 (출. 6:3).
위 살핀 바로부터 알게 되는 바, 아브람은 그의 초기 성인 시절에 여느 이방인 처럼 우상숭배자 였다는 것, 그리고 가나안의 토지에 거주하는 지금까지도 그는 하느님 사다이를 그의 마음으로부터 거절한 것은 아니다는 것이다. 이것이 글자 의미에서 아브람의 신을 뜻하나, 이를 수단으로 주님은 그들( 즉 아브람, 이삭, 야곱) 앞에서 처음 표현되어진 것이다. 이는 방금 인용한 구절에서 분명해진다.
주님께서 이름 “사다이”로 그들 앞에서 기꺼이 처음 표현하신 이유는 인간이 그의 유아 때로부터 심어진 예배를 갑작스럽게 파괴하기를 원치 않으심 때문이었다. 갑작스런 변화는 그 사람의 뿌리를 들어내게 하는 것, 즉 누군가에게 깊이 이식되었던 예배와 숭배함의 거룩한 상태를 파괴하는 격이기 때문이다. 그분께서는 이것들을 결코 부러뜨리지 않고 구부리신다. 유아로부터 뿌리내린 거룩의 상태는 유아 같아서 폭력에 견뎌내지 못한다. 오로지 온유하고 친절함에서 구부려질 뿐이다. 육체의 삶에서 우상들을 예배해왔으나 서로의 선행 안에서 살아온 이들의 경우도 이와 비슷하다. 이들 예배의 거룩한 상태는 유아 시절로부터 뿌리 내려온 것들인지라, 다른 삶에서도 그것은 한 순간에 거두어 내지지 못하고 점진적으로 이루어진다; 서로의 선행 안에 살았던 이들 안에 신앙의 선들과 진리들은 쉽게 뿌리 내려진다. 그리고 그들은 기쁨으로 그것들을 받는다. 그 이유가 선행은 옥토이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가 아브람, 이삭, 야곱의 경우인지라, 주님께서는 그들 안에 이름 “하느님 사다이”를 가지는 것을 내버려두셨다.
어떤 번역자는 사다이를 “전능한”으로 번역한다; 또 다른 이는 “호통치는 사람, the Thunderer”으로 번역하기도 하는 것 같다; 그러나 이것의 적절한 의미는 “시험자, the Tempter, 또는 Tester”, 그리고 “시험 후에 은혜를 베푸는 사람”, 또는 “시련”일 것이다. 욥이 시련, 또는 시험 가운데 있었기 때문에 자주 사다이라는 단어가 등장하는 욥기서로부터 위 의미는 분명해진다.
보라 하느님께서 치시는 자는 행복하다; 그리고 너는 치시는 사다이를 거절하지 말라 (5:17). 사다이의 화살이 나에게 박혀있다, 하느님의 공포가 나를 엄습하고 있다 (6:4). 그 는 사다이를 경외함을 버리고 돌보지 않을 것이다 (6:14). 나는 사다이에게 말할 것이다, 그리고 나는 하느님과 논쟁하기를 바란다 (13:3). 그는 하느님을 향하여 그의 손을 뻗쳤다, 그리고 사다이를 향하여 자신을 강하게 한다 (15:25). 자기의 눈이 자기의 멸망을 볼 것이 다, 그리고 그는 사다이의 격노함을 마실 것이다 (21:20). 사다이, 너는 그분을 파악하지 못한다; 그분은 권능에서 위대하시고, 그리고 심판에서 위대하시고, 그리고 정의의 위대함 에서 위대하시다. 그분은 괴롭히지 않을 것이다 (37:23).
또한 요엘서에서:
오호라 그 날이여! 여호와의 날이 가까이 있다, 그리고 사다이로부터의 황폐됨이 올 것이 다 (욜. 1:15).
위와 똑같은 상황이 단어 사다이 자체로부터도 보여지기도 한다. 이는 황폐시킴을 의미한다. 고로 시험도 의미한다. 그 이유는 시험이 일종의 황폐시킴 같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이름은 시리아에 있는 나라들로부터 부상되었기 때문에, 그분은 “엘로힘 사다이, Elohim Shaddai”라 불리우시지 않고, “엘 사다이, El Shaddai”라 불리우시고, 욥기서의 경우는 단순히 “사다이”라 말해지고, “엘”, 또는 “하느님”이 분리되어 명명되어진다.
시험 후에 위로함이 있을 때, 이 사람들은 시험으로부터 야기된 좋은 결과를 사다이 덕분이라고 그분에게 공로를 돌린다 (욥. 22:17, 23, 25, 26); 뿐만 아니라 진리를 이해함 역시 시험으로부터 결과하고 있다 (욥. 32:8; 33:4). 그리고 사다이가 진리의 하느님으로서 간주되었다. 그 이유는 황폐시킴, 시험, 치심, 견책하심 등이 선의 측면이 아니고 진리 측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주님이 아브라함, 이삭, 야곱 앞에서 사사다이에 의해 표현되었기 때문에 이 이름은 예언서들에서도 유지되었다; 그러나 예언서들 안에서의 “사다이”는 진리를 뜻한다. 에스겔서에서:
나는 거룹들의 날개 소리를 들었다, 그것들이 나아갔을 때, 마치 많은 물들의 소리 같고, 사다이의 음성 같았다; 떠들썩함, 마치 진지에서 (나는 소리 같았다) (겔. 1:24);
그리고 다시:
뜰이 여호와의 영광의 빛남으로 채워졌다; 그리고 거룹들의 날개의 음성은 바깥뜰에서 조 차 들리었다, 그분이 말하실 때 마치 사다이의 음성 (같았다) (겔. 10:4, 5);
위에서 “여호와”는 선을, “사다이”는 진리를 표시한다. 말씀의 내적 의미에서 “날개들”도 진리에 속하는 것들을 의미한다.
더욱이 이삭과 야곱 역시 비슷한 의미에서 하느님 사다이에 관한 언급을 만들고 있다, 즉 시험하는 분, 시험으로부터 구조하시는 분, 시험 후에는 은택을 베푸시는 분이다. 야곱이 에서 때문에 도망치게 되었을 때, 이삭이 그에게 말했다,
하느님 사다이가 네게 복주실 것이다, 그리고 너를 열매 풍성하게, 번성하게 만드실 것이다 (창. 28:3).
그리고 야곱의 아들들이 곡식을 사러 이집트로 떠날 때, 그리고 그들이 요셉을 크게 두려워했을 때, 야곱이 그들에게 말했다,
하느님 사다이께서 너희에게 그 사람 앞에서 자비를 베푸시어, 너에게 너의 다른 형제와 베냐민을 방면하리라 (창. 43:14).
야곱, 그때 당시 이스라엘로 불린 그가 요셉, 즉 그의 형제들보다 시련, 시험의 악 안에 더 있었고, 그것들로부터 구원되었던 요셉을 축복한다:
네 아버지의 하느님에 의해서, 그리고 그분이 너를 도울 것이다, 그리고 사다이와 더불어, 그리고 그가 네게 복주실 것이다 (창. 49:25).
위 모두로부터 보여주는 것은, 왜 주님께서는 아브람이 예배한 하느님 사다이에 의해 그에게 기꺼이 우선적으로 나타나셨는지, 그리고 왜 그분은 “나는 하느님 사다이 이다; 열매를 많이 맺고 번성하라”라고(창. 35:11) 말하셨는지에 대해서이다; 그리고 시험들이 내적 의미에서 취급된 이유에 대해서이다.
이 사람들 사이에서 사다이의 예배는 차후 주님의 신성한 자비로부터 말하여질 어느 나라의 경우 같이, 고대 교회 속에 있던 이들과 더불어서 발단이 되었다. (영계에서) 영들이 그들을 질책하는 것이 들려졌다. 질책한 후에 영들은 그들을 위로했다. 그들을 질책한 영들은 팔 아래, 왼쪽에서 지각되었다. 이와 같은 때에 천사들이 머리 위에서 나타나서 영들을 통치하고 질책하는 것을 부드럽게 했다. 그들이 신성으로 간주하지 않은 영들에 의해 말해진 것이 아무 것도 없는데, 그들은 질책하는 영을 “사다이”라고 명명했다; 그리고 후에 그 영이 위로를 베풀자, 그들은 그 영을 “하느님 사다이”라고 불렀다. 그 당시 사람들, 그들은 유대인들 같이 말씀의 내적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래서 모든 악, 모든 시험들은 모든 선과 모든 위로하심과 마찬가지로 하느님으로부터 온다는 종교적 신념에서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그렇지 않다. 이는 제 1권에서 많이 언급한 편이다.

너는 내 앞에서 걸으라. 이는 신앙의 진리를 의미하는데, 이는 “걷다”의 의미가 신앙의 진리에 따라서 사는 것임에서 분명해진다. 그리고 걷는 것과 관련되는 “길”의 의미가 진리이다에서 분명해진다.

그리고 너는 완전하라. 이는 선행의 선을 의미하는데, 이는 “완전해 있음, being perfect, integer”의 의미가 진리로 선인 것을 행하는 것, 또는 진리의 양심으로 선인 것을 행하는 것, 또는 선행(charity)으로부터 선인 것을 행하는 것이다에서 분명해진다. 그 이유가 선행이 양심을 만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적 의미에서는 주님이 취급되는 바, “완전한”에 의해서는 선행의 선이 의미되어진다. 그 이유가 선은 선행으로부터 진행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선행으로부터 파생되는 진리도 그 자체 선이다.

2절. 그리고 나는 너와 나 사이에 내 언약을 줄 것이다, 그리고 나는 너를 극대하게 번성하게 할 것이다.

나는 너와 나 사이에 내 언약을 줄 것이다. 이는 여호와이신 내적 인간이 내면의 인간과 하나가 됨을 의미하는데, 이는 “언약”의 의미가 결합이다에서 분명해진다; 그 이유가 말씀에서 여호와와 인간 사이의 언약이 언급되는 때는 언제든지, 내적 의미에서는 “언약”에 의해 주님과 인간의 결합이 의미되어지기 때문이다. 언약들은 여호와와 야곱의 후손들 사이에서 종종 만들어진 언약 역시 마찬가지이다. 이에 대한 설명은 제 1권에 있었으므로 여기서의 설명은 불필요할 것 같다. 주님의 내적 인간은 여호와이셨다, 그 이유는 주님은 여호와로부터 임신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서 내면의 인간이 아브람에 의해 표현되어진다; 그리고 그러므로 “나와 너 사이에 언약”은 내적 인간, 또는 여호와가 내면의 인간과 하나가 됨을 의미한다, 고로 주님의 인간 본질과 하나가 됨이다.

나는 너를 극대하게 번성하게 할 것이다. 이는 진리에 대한 애착의 열매를 맺음이 무한할 것을 의미하는데, 이는 “번성함”의 의미가 진리를 서술한다에서 분명해진다; 그리고 주님이 취급되는 바, 이는 선으로부터 있는 진리의 결실은 무한하다를 의미한다. 두 가지 애착들이 있다. 하나는 선에 대한 애착이고, 또 하나는 진리에 대한 애착이다. 선에 대한 애착은 선을 사랑함으로부터 선인 것을 행하는 것이다. 그리고 진리에 대한 애착은 진리를 사랑함으로부터 선인 것을 행하는 것이다. 얼핏 보기에는 이 둘은 똑같은 것 같이 나타난다; 그러나 실제로 이 둘은 본질과 근원 측면에서 서로가 아주 다르다. 선에 대한 애착, 즉 선을 사랑함으로 선인 것을 행하는 것은 의지로부터 있다; 그러나 진리에 대한 애착, 즉 진리를 사랑함으로 선인 것을 행하는 것은 이해력으로부터 있다. 이 두 애착들은 의지와 이해함이라는 서로 구분되는 길에 각기 있다. 선에 대한 애착은 천적 사랑으로부터 이나, 진리에 대한 애착은 영적 사랑으로부터 이다.
선에 대한 애착은 천적 인간만에 국한되어 서술할 수 있고, 진리에 대한 애착은 영적 인간만에 국한되어 서술할 수 있다. 천적인 것, 또는 천적 인간, 또는 영적인 것, 또는 영적 인간이 무엇인지는 제 1권에서 충분히 설명했다. 홍수 전에 존재했던 태고 교회는 선에 대한 애착 안에 있었다; 그러나 홍수 후에 존재한 고대 교회는 진리에 대한 애착 안에 있었다; 그 이유가 전자는 천적 교회이었고, 후자는 영적 교회 이었기 때문이다. 천국들에 있는 모든 천사들은 천적 천사들과 영적 천사들로 구별되어진다. 천적 천사들은 선에 대한 애착 안에 있는 천사들이고, 영적 천사들은 진리에 대한 애착 안에 있는 천사들이다. 전자에게 주님께서는 태양으로, 후자에게는 달로 나타나신다. 주님이 인간 본질을 신성 본질에 하나가 되게 하셨을 때, 주님께서는 이 후자의 애착, 즉 진리에 대한 애착을 선에 대한 애착, 선을 사랑함으로부터 선인 것을 행하는 애착에 하나가 되게 하셨다. 이로부터 “극대하게 번성함”이 선으로부터 있는 진리의 열매 맺음은 무한함을 의미하게 된다.

3절. 그리고 아브람은 그의 얼굴들을 땅에 대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그에게 말하셔서, 말하신다. “아브람이 그의 얼굴들을 땅에 대었다”란 경배를 의미한다. “하느님께서 그에게 말하셔서, 말한다”란 지각의 수준을 의미한다. 아브람이 숭배했던 하느님 사다이를 수단으로 주님이 표현되어졌기에 여기서 여호와가 아닌 하느님이란 표현이 사용되었다. 또한 여기서 진리가 취급되고, 이 진리가 선에 하나가 되어지는 것을 취급했다.

** 참조: 위 본문에서 아브람의 얼굴이 하나일텐데 “얼굴들”이라고 하여 복수로 말해지고 있다. 이는 히브리 원어나 라틴역에서도 공히 복수로 기록하고 있다. 그 이유는 인간의 애착이 많듯이 (내적인) 얼굴도 많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항간으로부터 들려지는 말, “…그는 두 얼굴을 가졌다, 두 얼굴의 사나이…” 등과 같은 말을 연상해보면 혼동 없는 이해에 도움이 될 것이다.

아브람은 그의 얼굴들을 땅에 대었다. 이것이 경배함을 의미하는 것은 설명없이 이해가 가능할 것이다. 얼굴을 땅에 대는 것은 태고 교회, 이로부터 고대 교회에 있었던 의식이었다. 그 이유가 얼굴은 내면들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의 겸허해짐의 상태가 얼굴을 땅에 댐으로 표현되었다; 이로부터 유대 표현 교회에서 이것은 관습적 예식의 하나가 되었다. 진정한 경배, 또는 심정의 겸허함은 주님 앞에서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림이 자연스럽게 제스츄어(gesture)로서 흘러나오는 것이다. 그 이유가 심정의 겸허함은 자신 안에 더러운 것밖에 없음을 인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동시에 이런 우리의 상태를 향해 주님의 자비가 무한하심을 인정하는 것이다; 마음이 이 두 가지를 인정할 때, 마음은 자아의 비천함에서 지옥을 향하여 수그릴 수밖에 없고 육체는 엎드러지고 말 수밖에 없다; 그리고 주님께서 그를 일으켜 주실 때까지 그는 위쪽으로 들어 올릴 수 없다. 이런 모든 진정한 겸허해짐은 주님의 자비로 일으켜짐이 있다는 지각과 더불어 거행된다. 이와 같은 겸허함이 태고 교회인들에게 있었다; 그러나 심정의 겸허해짐으로부터가 아니라면 아주 달라진다.
주님께서 그분의 아버지인 여호와를 경배하고, 그분에게 기도를 올렸다는 것은 복음서로부터 잘 알려져 있다; 그리고 그분이 이렇게 행하실 때, 비록 여호와께서 그분 안에 계셨지만 마치 두 사람이 존재하듯 행하셨다. 그러나 주님이 이 때에 있으셨던 상태는 겸허해지심의 상태였다, 이 상태의 본성은 제 1권에서 상술했었다. 즉 그 당시 주님은 어머니로부터 있었던 유약한 인간 안에 계셨다; 그러나 그분이 이것을 벗으시고 신성을 입으시는 만큼에서 그분은 또 다른 상태에 계셨다, 이것이 그분의 신성화하신(glorification) 상태라고 불리운다. 이전 상태에서 주님은 여호와를 비록 그분 안에 지니고 계셨을지라도 다른 한 분으로서 그분을 경배하셨다. 그 이유가 그분의 내적 인간이 여호와이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후자에서, 즉 신성이신 상태에서, 주님은 여호와를 자신으로서와 같이 여호와와 이야기하셨다. 그 이유가 그분이 여호와 자신이셨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가 어떻게 되는지를 납득하려면 내적 인간이 무엇인지를 알아야만 한다. 그리고 어떻게 내적 인간이 외적 인간에서 행동하는지를 알아야 한다. 더 나아가 어떤 방식에서 내적 인간과 외적 인간은 서로로부터 구분되고, 그럼에도 결합하는지를 알아야 한다. 이것은 비슷한 어떤 것을 가지고 예증해보는 도리밖에 없다. 즉 인간에 있는 내적 인간을 가지고, 그리고 이 내적 인간이 외적 인간 안으로 유입하고 외적 인간을 운전하는 것을 가지고 예증하는 것이다. 인간은 내적, 내면적, 또는 합리적, 외적 인간이 있다. 인간의 내적 측면, 이것이 인간을 사람되게 하고, 야수와 구별되게 한다. 이 내적인 것을 수단으로 그는 사후 살아 간다, 그리고 인간으로 영원히 살게 해준다. 그리고 내적 인간을 수단으로 주님에 의해 그는 천사들 사이에로 들어 올려 질 수 있다. 이 내적 인간은 인간이 사람되어 가고 사람이다로 말해주는 첫 번째 형체이고, 이를 수단으로 주님은 인간과 결합하신다. 주님에게 가장 가까운 천국 자체는 이런 인간의 내적인 것들로 구성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가장 안쪽의 천사의 천국 너머에 있다. 그러므로 이 내적인 것들은 주님 자신에 속해 있다. 이 수단에 의해 전체 인류는 주님의 눈 아래 최고로 표출되고 있다, 그 이유가 천국에는 거리가 없기 때문이고, 이와 같이 지상의 세계에서 나타난다. 천국 너머는 더더욱 거리감이 없다.
인간의 이런 내적인 것들은 그 자체로는 생명이 없고, 단지 주님의 생명을 받는 형체일 뿐이다. 그러므로 인간이 악 안에 있는 만큼, 그 악이 실제적이든, 유전적이든, 그만큼 그는 주님의 것인, 주님과 더불어 있게 되는 내적인 것에서 분리되어져 있는 것이다. 따라서 그 만큼 주님과 분리되어 있다; 비록 내적인 것이 인간에게 인접해 있어 분리할 수 없다 할지라도, 그럼에도 그는 주님으로부터 물러나 있고, 그 만큼에서 마치 자신이 내적인 것을 분리한 듯 하여 있다. 그러나 이 분리됨은 그것의 절대적 찢어짐은 아니다, 그 이유가 이럴 경우 그는 사후 더 이상 살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내적 인간 아래 있는 것, 즉 합리적 인간, 그리고 외적 인간과의 불일치이다. 불일치가 있는 만큼에서 주님으로부터의 분열이 있다; 그러나 불일치가 없는 만큼에서 인간은 내적 인간을 통하여 주님과 결합되어진다. 이것은 인간이 사랑과 선행 안에 있는 만큼에서 거행된다. 그 이유가 사랑과 선행은 결합하기 때문이다. 이상의 경우가 인간에 있는 경우이다.
그러나 주님의 내적 인간은 여호와 자신이셨다, 그 이유는 그분이 여호와로부터 임신되셨기 때문이다. 그분은 나뉜 것이 아니라 또 다른 사람이 되신 것, 마치 인간 아버지로부터 임신된 아들의 경우와 같다; 그 이유가 신성은 인간 같이 나뉠 수 없다, 그러나 하나이고 똑같은 것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 내적인 것에 주님께서는 인간 본질을 하나가 되게 하셨다; 그리고 주님의 내적 인간은 여호와이셨기 때문에 그것은 인간의 내적 인간 같이 생명을 담는 형체는 아니고 생명 자체였다. 그분의 인간 본질 역시 마찬가지로 하나가 됨을 수단으로 생명이 만들어졌다. 이런 이유에서 주님께서는 자신이 생명이시다고 자주 말하셨다. 요한복음서에서:
아버지께서 자신 안에 생명을 가지듯이, 그분은 자신 안의 생명을 가지도록 아들에게 주셨 다 (요. 5:26);
위 구절 외에 요. 1:4; 5:21; 6:33, 35, 48; 11:25에도 있다. 그러므로 그분은 어머니로부터 유전됨으로 받으신 인간 안에 있는 만큼에서, 그분은 여호와로부터 구분되어 나타나셨고, 그분 자신과 다른 분으로 여호와를 경배하셨다. 그러나 주님께서 이 인간을 벗으시는 만큼에서 그분은 여호와와 덜 분리되고, 그분과 하나이셨다. 이전의 상태는 주님의 겸허하심의 상태이다; 그러나 후자는 신성화 하신 그분의 상태이다.

그리고 하느님이 그에게 말하시어, 말하신다. 이것이 지각의 등차를 의미하는데, 이는 여호와의 “말하심”의 의미가 지각하는 것이다로부터 분명해진다. 여기서는 이것이 지각의 등차를 의미하는데, 그 이유는 그분이 겸허하심, 또는 경배함의 상태에 있기 때문이다. 이 안에서 그분은 겸허하심의 상태에 비례하여 여호와와 결합하시고 하나가 되셨다; 그 이유가 겸허해짐이 그것과 더불어 결합을 운반해 오기 때문이다.

이 구절에서는 “하느님”이라는 표현이 사용되는데, 그 이유는 주님이 아브람이 숭배한 하느님 사다이에 의해 표현되어서 이다. 또한 진리가 취급되고 이 진리가 선에 결합됨이 취급되는 때문에서 이다. 이는 전에 말했던 바로부터도 분명해진다. 말씀에서 주님이 “여호와”라고, 때로는 “여호와 하느님”이라고, 때로는 “주 여호비”라고, 때로는 “하느님”이라고 불리우신다. 여기에는 내적 의미에서 비밀한 이유가 있다. 사랑 또는 선, 그리고 천적 교회가 취급되는 대목에서는 그분은 “여호와”라 불리우신다; 그러나 신앙, 또는 진리, 그리고 영적 교회가 취급되는 때에는 그분은 “하느님”이라 불리우신다. 이렇게 불리움의 내적 의미는 변함이 없다; 그리고 이유인즉, 주님의 있음 자체는 사랑으로부터 이고, 사랑으로부터 파생된 있음은 신앙으로부터 이기 때문이다 (709, 732항 참조). 그러므로 이 구절에서의 경우 주님은 “하느님”이라 불리우신다. 그 이유는 선에 하나 되기로 되어 있는 진리가 취급되기 때문이다. 또 다른 이유는, 주님께서 아브람이 숭배했던 하느님 사다이에 의해 표현되시기를 뜻하셨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해서 이름 하느님이 이어지는 구절에서도 유지되고 있다; 그 이유가 이 장에서 그분은 오직 한 번 “여호와”라 불리우시고, ”하느님“이라 일곱 번 불리우시고 있기 때문이다 (7,8, 15, 18, 19, 22, 23절에서).

4절. 나, 보라, 내 언약은 너와 함께 있다, 그리고 너는 수많은 나라들의 아버지가 되리라. “나, 보라, 내 언약이 너와 함께 있다”란 신성의 본질이 인간의 본질과의 합일을 의미한다. “너는 수많은 나라들의 아버지가 되리라”란 인간의 본질이 신성의 본질과의 합일을 의미한다. “아버지”란 이런 합일이 주님 자신으로부터 있을 것을 의미한다. “수많은…”은 진리를 의미한다. “나라들…”은 진리로부터 파생된 선을 의미한다.

나, 보라, 내 언약이 너와 함께 있다. 이는 신성 본질이 인간 본질과의 합일을 의미하는데, 이는 “언약”의 의미가 결합이다로부터 분명해진다. 여기서의 “언약”은 신성 본질과 인간 본질의 합일을 의미하는데, 이는 위 의미에서와 “내 언약은 너와 함께 있다”라는 말 자체의 내적 의미에서 이다.

그리고 너는 수많은 나라들의 아버지가 되리라. 이는 인간 본질이 신성 본질과 합일함을 의미하는데, 이것은 이 의미를 표출하는 일종의 일반적인 생각을 관조하지 않으면 이 몇 단어들을 펼쳐놓는 것만 가지고는 잘 파악할 수 없다. 그 이유가 이런 것이 때로는 내적 의미의 본성이기 때문이다. 내적 의미가 그러할 때, 내적 의미는 더 보편적이라 불리울런지 모른다. 그 이유가 더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이다. 몇 단어들을 상설함으로부터 이 구절의 대략적인 의미가 파악될지 모른다; 즉 모든 진리와 모든 선은 주님으로부터 온다, 이 구절에서 보는 바 같이, “아버지”라는 표현이 그분으로부터를, 즉 주님으로부터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수많은”은 진리를 의미한다; 그리고 “나라들의”는 진리들로부터 파생된 선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것들, 즉 진리들과 선들이 수단들이고, 이를 통하여 주님께서 인간 본질을 신성 본질에 하나가 되게 하셨기 때문에, 이로부터 더 보편적이고 더 멀리 떨어진 의미가 발생된다. 천사들은 이런 방법에서 이 단어들을 지각한다, 그리고 동시에 상호적인 합일의 지각을 가진다. 즉 주님의 신성 본질이 인간 본질과, 그리고 주님의 인간 본질이 신성 본질과 합일함을 지각한다는 말이다; 이미 말한 대로, “나, 내 언약은 너와 함께 있다”는 신성 본질이 인간 본질과의 합일을 의미한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이 구절에서는 인간 본질이 신성 본질과 합일됨이 의미된다.
합일(union)이 상호적으로 결과되는 것은 아직까지 열려지지 않은 신비함들이다. 그리고 이 신비함들은 우리의 납득력에 거의 설명할 수 없는 수준이다; 그 이유가 아직까지는 유입(influx)이 무엇인지를 아는 자가 없기 때문이다. 이 유입에 관한 지식 없이 상호 합일에 관한 것에 관하여 어떤 생각을 만들어 낼 수 없다. 완전한 설명은 못되더라도, 인간에게 있는 유입의 한 종류를 예증해봄으로 설명을 시도해보자. 그 이유가 인간과 더불어서도 상호 결합이 있기 때문이다. 주님으로부터 인간의 내적인 것을 통하여, 계속적으로 생명은 인간의 합리성 안으로 흐르고, 이를 통하여 그의 외적인 것으로 흐른다. 그리고 사실상, 그의 지식들 안으로까지 흐른다. 그리고 이 생명은 생명을 받도록 그것들을 순응되게 하고 질서 안으로 그것들을 배열한다. 그리하여 인간은 생각함이 가능해지고 결국은 합리적이 되어간다. 이것은 주님이 인간과 결합하는 과정이다. 이것 없이 인간은 전혀 생각할 수 없고, 합리적 추론은 더더욱 할 수 없다. 이것은 인간의 생각 안에 과학과 분석적 기법의 신비가 수없이 있다는 것만 생각해도 대략 짐작은 가능하다. 이것은 감각을 통하여, 또는 외적 인간을 통하여 결코 흐르지 않고, 오직 내적 경로로만 흐른다. 인간은 자기 쪽에서는 지식들의 수단에 의해서 주님으로부터 있는 이 생명을 만나기 위해서 발전해 나간다, 그리고 이것 때문에 상호적으로 자신을 결합한다.
그러나 주님의 신성 본질이 그분의 인간 본질과 합일하심, 그리고 그분의 인간 본질이 그분의 신성 본질에 합일하심에 주목해보면, 이 합일하심은 인간과 주님 사이의 상호적 결합을 무한하게 초월해 있다. 그 이유가 주님의 내적인 것은 여호와 자신이었기 때문, 그러므로 생명 자체이었기 때문이다; 이에 비해, 인간의 내적인 것은 주님이 아니다, 고로 생명이 아니고 오직 생명을 받는 그릇일 따름이다. 주님과 여호와 사이에서는 합일(union)이 있었다, 그러나 인간과 주님 사이에서는 합일이 아닌 결합(conjunction)이 있다. 주님은 그분 자신의 힘으로 여호와와 자신을 하나가 되게 하셨다. 그러므로 그분은 정의가 되셨다; 이에 비해 인간은 자신의 힘으로 자신을 주님과 결코 결합되게 하지 못한다. 오직 주님의 힘을 수단으로 한다; 고로 언제나 주님께서 인간을 그분 자신에게 결합되게 하신다. 이 상호적인 합일이 주님에 의해 아래 인용구절에도 뜻해진다. 이 구절에서 그분의 것이 아버지에게, 아버지의 것이 그분 자신에게 라고 말하신다. 요한복음서에서:
예수께서 말하셨다, 나를 믿는 자, 나를 믿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그분을 믿는 것이 다: 나는 세상에 빛으로 와있다, 고로 나를 믿는 자는 어둠 안에 거하지 않을 것이다
(요. 12:44-46),
위 구절에는 아주 깊은 신비가 감추여 놓여 있다. 즉 선이 진리와 합일함, 그리고 진리가 선과의 합일에 관한 신비이다; 같은 것으로, 신성 본질이 인간 본질과의 합일, 그리고 인간 본질이 신성 본질과의 합일에 관한 신비이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말하신다, “나를 믿는 그는, 나를 믿는 것이 아닌, 나를 보내신 그분을 믿는 것이다”; 그리고 거의 즉각적으로 더 보태신 “나를 믿는 자”라는 말은 “나를 보는 자는 나를 보내신 그분을 보고 있다”에 관련되어지고 있다.
다시 요한복음서에서:
내가 너희에게 이야기 한 말들은 내가 나 자신으로부터 이야기한 것이 아니다; 내 안에 거 하시는 아버지, 그분이 일을 하신다. 나를 믿어 내가 아버지 안에, 아버지가 내 안에 있다 는 것을 믿어라. 참으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들을 그도 역 시 행할 것이다 (요. 14:10-12).
위 인용 구절도 같은 신비함을 포함했다, 즉 선이 진리와, 그리고 진리가 선과 합일됨에 관하여; 또는 주님의 신성 본질이 그분의 인간 본질과, 그리고 그분의 인간 본질이 그분의 신성 본질과 합일하심에 관하여서 이다; 그러므로 그분은 말하신다, “내가 너희에게 한 말들은 내가 나 자신으로부터 이야기한 말이 아니다; 내 안에 계신 아버지께서 일들을 하신다”; 그 다음 그분은 거의 즉각적으로 “내가 하는 일들”라는 말을 보태시고 있다; 그리고 여기서, 전과 같이, 합일에 관한 말들이 끼어 있다, 이것이다,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시다.” 이것은 많은 이들도 이야기하는 신비적 합일이다.
위 모두로부터 주님은 아버지 외의 또 다른 분이 아니다는 점이다. 비록 그분께서 또 다른 사람인 것 같이 아버지를 이야기하셨을지라도 그러하다, 그리고 이것은 상호적인 하나로 됨 때문에 결과가 있어지기로 되었고 결과된 것이다.; 그 이유가 그분께서는 많은 때에 공개적으로 말하신 대목이 그분은 아버지와 하나이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요. 12:45의 경우 역시 “나를 보는 자는 나를 보낸 그분을 보고 있다”도 그 한 예이다; 또한 요. 14:10, 11에서 “내 안에 거주하시는 아버지; 내가 아버지 안에, 아버지가 내 안에 있다는 것을 믿어라”도 있다; 그리고 요. 8:19에서 “만일 너희가 나를 알았다면, 너희는 내 아버지 역시 알았다”; 그리고 다시 요. 14:7-10에서, “만일 너희가 나를 알았었다면, 너희는 내 아버지 역시 알았다; 그리고 이제로부터 너희는 그분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분을 보아 오고 있다; 빌립이 그분에게 말한다, 주여, 우리에게 아버지를 보여 주십시요; 예수께서 그에게 말하신다, 내가 너희와 이렇게 오랫동안 있는데, 너는 나를 모르느냐, 빌립아? 나를 보았던 그는 아버지를 보았던 것이다. 그런데 어찌하여 너는 아버지를 보이라고 말하느냐?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가 내 안에 있다는 것을 너는 믿지 못하느냐?” 그리고 다시 요. 10:30에서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다.” 이로부터 천국에서 그들은 주님 외의 다른 아버지는 모른다. 그 이유는 그들이 그분을 볼 때, 그들은 아버지를 보기 때문이다. 이는 그분 자신이 말하신 바이다.

“아버지”는 그것이 주님으로부터 이다를 의미하는 것은 방금 설명한 아버지에 관한 것, 즉 아버지로부터 있는 것은 무엇이든 그분으로부터 있었다는 말로부터 분명해진다. 그 이유는 그들이 하나이기 때문이다. 모든 인간의 내적인 것은 자기 아버지로부터 이다, 그리고 그의 외적인 것은 자기 어머니로부터 이다; 같은 표현으로, 육체와 함께 있는 혼은 비록 둘 일지라도 하나를 만든다; 그 이유가 혼은 육체의 것이고, 육체는 혼의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것들은 분리할 수 없다. 주님의 내적인 것은 아버지로 있었다, 그러므로 아버지 자신이었다, 이로부터 주님께서, “아버지는 그분 안에 계신다” 라고 말하시고; 또한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있다” 고도 말하신다; 또한 “나를 보는 자는 아버지를 보고 있다;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다” 라고도 말하신다. 구약의 말씀에서 주님이 “아버지”라 불리우신다. 이사야서에서:
우리에게 아이가 태어나신다, 우리에게 아들이 주어진다; 그리고 통치권이 그분의 어깨 위 에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분의 이름은 경이로운 자, 상담자, 하느님, 영웅, 영원하신 아버 지, 평화의 제 1인 자라 불리우실 것이다 (이. 9:6).
아이가 우리에게 태어나신다는 것, 아들이 우리에게 주어진다는 것이 주님이시다는 것, 그분이 “영원하신 아버지”이시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항이다. 이사야서에서:
당신은 우리의 아버지이시다, 그 이유가 아브라함은 우리를 모르고, 이스라엘은 우리를 인 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당신, 오 여호와시여, 우리의 아버지, 우리를 되찾는 분, 당신의 이 름은 영원으로부터 있으십니다 (이. 63:16);
위 구절 역시 주님을 “여호와 우리의 아버지”라고 부른다. 그 이유가 “되찾는 분”은 주님 외에 다른 분은 없기 때문이다. 말라기서에서:
우리 모두는 한 분 아버지를 가지지 않습니까? 한 분 하느님이 우리를 창조하시지 않았습 니까? (말. 2:10).
“창조하는 것”은 거듭나는 것을 표시한다. 이 외에 구약 성경의 말씀의 모든 곳에서 “여호와”에 의해 주님이 뜻해진다. 그 이유는 교회의 모든 의식이 주님을 표현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적 의미에서 말씀에 있는 모든 것들이 주님을 중심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수많은”이 진리를 의미하는 것은 “수많은, multitude”의 의미가 진리이다로 부터 분명해진다; 그리고 “번성해짐, being multiplied”이 진리를 서술한다로부터도 분명해진다.

나라들의. 이는 거기로부터 파생된 선을 의미한다는 것, 이는 “나라들”이 선이다로부터 분명해진다.

5절. 그리고 네 이름은 더 이상 아브람이라 불리우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네 이름은 아브라함일 것인데, 그 이유는 내가 너를 수많은 나라들의 아버지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네 이름은 더 이상 아브람이라 불리우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네 이름은 아브라함일 것이다. “네 이름은 더 이상 아브람이라 불리우지 않을 것이다”란 그분은 인간을 벗으실 것을 의미하고; “네 이름은 아브라함일 것이다”란 그분은 신성을 입으실 것을 의미하는데, 이는 “이름”의 의미로부터; 또한 “아브람”의 의미로부터, 그리고 후에 “아브라함”의 의미로부터 분명해진다. “이것이 네 이름일 것이다”라는 표현이 말씀에서 사용될 때, 이는 품질을, 즉 인물이 이런 품질 속에 있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제 1권에서 설명했다. 그리고 “이름”이 품질을 의미하는 바, 이름은 한 복합체에 있는 모든 것, 즉 한 인간 안에 있는 무엇이든 모두를 의미한다. 그 이유가 천국에서는 누군가의 이름에는 관심이 없고, 누군가의 이름이 명명될 때, 또는 이름이라는 단어가 말해질 때, 그들은 어떤 인물의 품질에 대한 생각이 표출되어진다. 즉 그 사람의 모든 것들, 그 사람과 연결된 모든 것들이 표출된다는 말이다. 이로부터 말씀에 있는 “이름”은 품질을 의미한다. 이는 축복 기도문에서도 같다. 모세의 책에서:
여호와께서 네게 복을 주신다, 그리고 너를 지키신다; 여호와께서는 그분의 얼굴들을 네 위 에 비추이게 만드시고 너를 불쌍이 여기신다; 여호와께서는 그분의 얼굴들을 네 위에 들어 올리시고 네게 평화를 주신다. 이렇게 그들(아론과 그 아들들)은 이스라엘의 아들들 위에 내 이름을 놓을 것이다 (민. 6:24-27).
위로부터 “이름”에 의해 표시되는 것, 그리고 이스라엘의 아들들 위에 여호와의 “이름을 놓음”에 의해 표시되는 것이 분명해질 것이다. 즉 여호와는 복 주시는 분, 지켜 주시는 분, 계발해 주시는 분, 불쌍히여겨 주시는 분, 평화를 주시는 분이시다 이다; 고로 여호와 또는 주님이 이와 같다는 말이다.
십계명에서:
너는 네 하느님의 이름을 무익하게 하지 말라. 그 이유는 여호와는 그분의 이름을 무익하 게 간직하는 그를 죄 없음으로 간주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출. 20:7, 신. 5:11);
위에서 “하느님의 이름을 무익하게 함”은 이름을 의미하지 않고 그분으로부터 있는 일반적, 특수적 측면에서의 모든 것들, 그러므로 그분을 예배함에 속하는 일반적, 특수적 측면에서의 모든 것들을 의미하고, 이것들의 어느 것도 경멸되어져서는 안됨, 더러운 것으로 오염되게 해서는 안된다는 것, 모독되게 하지 말라는 것이다. 주님께서 가르치신 기도에서:
당신의 이름이 신성하여 있게 하소서; 당신의 왕국이 오게 하소서; 당신께서는 천국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행하실 것입니다 (눅. 11:2);
위에서 역시 “이름”에 의해 이름이 뜻해지지 않는다, 그러나 사랑과 신앙의 모든 것들이 뜻해지고 있다; 그 이유가 이것들이 하느님의 것, 또는 주님의 것이고, 그분으로부터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들이 거룩한 바, 그들이 이것들을 거룩히 붙들고 있을 때, 주님의 왕국이 오고, 그분의 뜻은 천국 안에서 같이 지상에서도 행하여질 것이다.
“이름”이 이와 같은 것들을 의미하는 것은 구, 신약 성경을 망라해서 분명해진다. 이사야서에서:
그 날에 너희는 말할 것이다, 여호와께 고백할 것이다, 그분의 이름을 부를 것이다, 백성 사이에서 그분의 일들을 알게 만들 것이다, 그분의 이름이 드높다 말할 것이다
(이. 12:4);
위에서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것”, 그리고 “그분의 이름이 드높다 말하는 것”은 예배에서 이름을 부르는 것, 또는 여호와께서 그분의 이름을 사용하시어 꾸짖으심을 믿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품질을 아는 것, 그리고 그분으로부터 있는 일반적, 특수적 측면에서의 모든 것들을 수단으로 하여 믿고 예배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사야서에서:
그러므로 너희는 우림(Urim)에서 여호와를 존경하라; 이스라엘의 하느님 여호와의 이름을 바다의 섬들에서 (존경하라) (이. 24:15);
위에서 “우림에서 여호와의 이름을 존경하는 것”은 사랑의 거룩한 것들로부터 그분을 존경하는 것이다; 그리고 “바다의 섬들에서 이스라엘의 하느님 여호와의 이름을 존경하는 것”은 신앙의 거룩한 것들로부터 존경하는 것이다.
이사야서에서:
오 여호와 우리의 하느님, 오직 당신 안에서만 우리는 당신의 이름을 부를 것입니다; 나는 북쪽으로부터 한 사람을 일으킬 것이다, 그가 올 것이다; 태양의 떠오름으로부터 그가 내 이름을 부를 것이다 (이. 26:13; 41:25);
위에서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것”, 그리고 “그분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사랑의 선들로부터와 신앙의 진리들로부터 예배함을 뜻한다. 북쪽으로부터 있는 자들은 교회 밖에 있는 이들과 여호와의 이름을 모르는 자들이다, 그럼에도 그들이 서로의 선행 안에서 살고, 우주의 창조자 신성한 분을 숭배할 때, 그들은 “그분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다”; 그 이유가 “여호와의 이름을 부름”은 이름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닌 이름의 품질과 예배 안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사야서에서:
나라들이 네 정의를 볼 것이다, 그리고 모든 왕들이 네 영광을 볼 것이다; 그리고 너는 여 호와의 입이 이름 지을 새 이름에 의해 불러질 것이다 (이. 62:2);
위에서 “너는 새 이름에 의해 불러질 것이다”는 또 다른 인물이 되는 것, 즉 새로이 창조되어지는 것, 거듭나는 것, 고로 그와 같이 되는 것을 표시한다. 미가서에서:
모든 사람들이 제각기 그의 하느님의 이름에서 걸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여호와 우리의 하느님의 이름에서 영원히, 영원까지 걸을 것이다 (미. 4:5);
“자기 하느님의 이름에서 걷는 것”은 모독한 예배를 분명하게 표시한다; 그리고 “여호와의 이름에서 걷는 것”은 진정한 예배를 표시한다. 말라기서에서:
태양이 떠오르는 곳에서 태양이 지는 곳에까지, 내 이름은 나라들 사이에서 위대해 있을 것이다; 그리고 모든 장소에서 향이 내 이름에 바쳐질 것이다, 그리고 깨끗한 공물이 바쳐 질 것이다; 그 이유가 내 이름은 나라들 사이에서 위대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말. 1:11);
위에서 “이름”은 이름을 의미하지 않는다, 예배이다; 여호와 또는 주님의 품질 때문에 그분이 숭배되어진다는 말이다.
모세의 책에서:
여호와 너의 하느님께서 그분의 이름을 거기에 두시려고 모든 지파들로부터 선택하신 장소, 그리고 그분의 이름이 거기에 거주하게 하라, 그쪽으로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져 오라 (신. 12:5, 11, 14; 16:2, 6, 11);
위에서 역시 “그분의 이름을 두심”, 그리고 “그분의 이름을 거기에 거주하게 만들음”은 이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예배, 고로 그분이 예배되어야 하는 이유인 여호와, 또는 주님의 품질을 의미한다. 그분의 품질은 사랑의 선과 신앙의 진리이다; 그리고 이것들 안에 거주하는 이들과 더불어 “여호와의 이름이 거주하신다.” 예레미야서에서:
너희는 실로에 있던 내 장소로 가라, 거기는 내가 시작에서 내 이름이 거주하게 한 곳이다 (예. 7:12);
위에서 “이름”은 예배를 표시한다, 그럼으로 해서 진정한 신앙의 교리를 표시한다. 모든 사람이 눈치채는 바, 여호와께서는 그분의 이름만을 알고 말하는 자와 더불어 거주하시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분에 대한 생각, 지식, 또는 그분의 품질에 관한 신앙 없는 단지 이름 뿐인 것은 오직 단어 자체에 불과할 것이다. 이로부터 분명한 바, “이름”은 품질이다는 것, 그리고 품질에 관한 지식이다는 것이다.
모세의 책에서:
그 때에 여호와께서는 레위 지파를 분리하시어 그분을 섬기게 하시고, 그리고 그분의 이름 에서 복을 빌게 하셨다 (신. 10:8);
위에서 “여호와의 이름에서 복을 비는 것”은 이름을 통하여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위에 상술한 여호와에 속하는 것들을 수단으로 그렇게 하는 것이다. 예레미야서에서:
이것은 그들이 그분을 부를 그분의 이름인 즉, 이것으로 그들은 여호와 우리의 정의라고 그분을 부를 것이다 (예. 23:6);
위에서 “이름”은 정의를 표시한다, 이것이 주님의 품질이다, 이 분으로부터 이 말들이 말해졌다. 이사야서에서:
여호와께서는 태중으로부터 나를 부르셨고, 내 어머니의 뱃속으로부터 내 이름을 부르셨 다 (이. 49:1);
위는 주님에 관해서 말해졌다; “그분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그분의 품질에 관하여 가르침을 받는 것이다.
“이름”이 품질이다는 것은 계시록서에서 더 분명해진다:
너는 사데에서 조차 몇 이름들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자기들의 의복들을 더럽히지 않았다; 그리고 그들은 흰(옷)을 입고 나와 함께 걸을 것이다; 그 이유는 그들은 가치 있기 때문이 다; 이겨내는 그는 흰 의복이 입혀 질 것이다; 그리고 나는 생명의 책에서 그의 이름을 삭 제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의 이름을 내 아버지 앞에서, 그리고 그분의 천사들 앞 에서 고백할 것이다; 이겨내는 그에게, 나는 내 하느님의 이름을 그 사람 위에 쓸 것이다; 그리고 내 하느님의 도성의 이름, 내 하느님으로부터 천국에서 내려 오는 새 예루살렘(을 쓸 것이다); 그리고 내 새로운 이름(을 쓸 것이다) (계. 3:4, 5, 12);
위에서 “이름”은 이름이 아니고, 품질이다는 것은 분명하다; “생명의 책에 있는 이름”은 그밖의 것은 없다; 그리고 품질이 또한 “아버지 앞에서 그의 이름을 고백함”에 의해 뜻해진다, 그리고 “그 사람 위에 하느님의 이름을 쓰는 것, 그리고 도성의 이름을 쓰는 것, 그리고 새로운 이름을 쓰는 것”에 의해서도 품질이 뜻해진다. 그 밖에 생명의 책에, 그리고 천국에 쓰여진다고 말해지는 구절들에서도 이름의 의미는 품질이다. (계. 8:8; 17:8; 눅 10:20).
천국에서 누군가가 또 다른 사람에게 알려질 때는 오로지 품질에 의해서만 이다; 품질이 글자 의미에서 이름에 의해 표현될 경우는 이런 우리의 경험을 참작하면 이해될 것이다. 즉 우리가 누군가의 이름이 대화에서 등장하면 듣는 자는 그 이름 자체가 아닌 그 사람의 이모저모를 떠올린다는 사실이다. 다른 삶에서 생각(관념, idea)들은 남아 있지만 이름은 멸해진다; 이것은 천사들 사이에서는 더욱 더 하다. 이로부터 내적 의미에서 “이름”은 품질(quality), 또는 품질을 아는 것이다. 다시 계시록서에서:
그분의 머리 위에는 많은 왕관들이 있었다; 그리고 이름이 쓰여 있는데, 그분 자신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그분은 피에 담근 옷으로 입혀져 있었다; 그리고 그분의 이름은 하느 님의 말씀이라 불리운다 (계. 19:12, 13);
위에서 “이름”은 하느님의 말씀이다, 고로 백마 위에 앉으신 그분의 품질이다 라고 명백한 말로 말해진다.
“여호와의 이름”은 그분의 품질을 아는 것, 즉 그분은 사랑의 모든 선과 신앙의 모든 진리이시다는 것이 주님의 이 말씀으로부터도 명백해진다:
오 정의로우신 아버지, 나는 당신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이들은 당신이 나를 보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 이유가 내가 그들에게 당신의 이름을 알게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것을 알게 만들 것입니다; 당신이 나를 사랑하셨던 그 사랑이 그들 안에 있게 하십시오, 그 리고 내가 그들 안에 (요. 17:25, 26).
그리고 “하느님의 이름 또는 주님의 이름”은 사랑과 선행에 관한 신앙의 모든 교리이다는 것, 이것이 “그분의 이름을 믿는 것”에 의해 의미되었다는 것이 요한복음서로부터 분명해진다:
그분을 영접한 많은 이들, 그분께서는 그들에게 하느님의 아들이 되는 힘을, 그분의 이름을 믿는 힘을 주셨다 (요. 1:12).
만일 너희가 내 이름으로 어떤 것을 묻는다면, 나는 그것을 행할 것이다. 만일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내 명령들을 지켜라 (요. 14:13-15).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버지에게 묻는 것은 무엇이든, 그분은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명령한다, 너희는 서로 사랑하라 (요. 15:16, 17).
마태복음서에서: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함께 모인 거기에 나는 그들 사이에서 있는다 (마. 18:20).
“주님의 이름으로 함께 모인” 이들에 의해 사랑과 선행에 관한 신앙의 교리에 있는 이들, 고로 사랑과 선행 안에 있는 이들이 의미된다.
다시 마태복음서에서:
너희는 내 이름을 위하여 모든 나라들로부터 미움당할 것이다
(마. 10:22; 24:9, 10; 막. 8:10).
위에서 “내 이름을 위해”는 그분의 교리를 위하여를 분명히 뜻한다.
이름 자체는 아무 것도 결과하지 않는다는 것, 그러나 모든 것은 이름이 포함하는 것에 의해 결과된다는 것, 즉 선행과 신앙의 모든 것에 의해 결과된다는 것은 마태복음서의 말씀으로 분명해진다:
우리가 당신의 이름으로 예언했고, 당신의 이름으로 마귀들을 내쫓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당신의 이름으로 권능 있는 많은 일들을 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그 때 나는 그들에게 고 백할 것이다, 나는 너를 결코 모른다; 나로부터 떠나라, 불법을 일삼는 자들아
(마. 7:22, 23);
위로부터 명백해지는 것은, 예배를 명목상 이름에 놓는 이들, 마치 여호와의 이름에서 있는 유대인들 같이, 그리고 주님의 이름으로 기독인들이 하듯, 이름 때문에 더 가치 있는 것이 아니다. 그 이유는 이름은 아무 소용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소용이 닿는 것은 주님이 명령했던 품성 속에 있는 것이다; 그 이유가 이것이 “그분의 이름을 믿는”것이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주님의 이름 외에 어떤 다른 이름으로는 구원은 없다라고 말해지는 것은 어떤 다른 교리에는 구원은 없다를 뜻한다. 다시 말해, 서로의 사랑이라는 교리 외에서는 구원이 없다는 것, 이것이 신앙의 진정한 교리이다는 것, 그리고 주님 외에 다른 사람으로부터서는 구원은 없다는 것, 그 이유는 모든 사랑과 파생되는 신앙은 그분만으로부터 있기 때문이다.

“이름”이 품질, 그리고 품질이 무엇인지 아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우리는 이 구절의 말, 즉 “네 이름은 더 이상 아브람이라 불러지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네 이름은 아브라함이라 부를 것이다”에 의해 의미되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그는 과거의 품성에 있지 않고 새로운 품성에 있는다는 말이다. 아브람은 다른 신들을 섬겼고, 하느님 사다이를 예배했다는 것은 이미 살폈다; 그러나 그가 주님을 표현하기 위해 있었기 때문에, 그리고 사실상 그분의 내적 인간, 고로 그분의 사랑의 천적 평면을 표현하기 위해 있었기 때문에, 그의 이전의 품질은 삭제되어졌다. 즉 이름 “아브람”은 이름에 의해 주님이 표현되어질 수 있는 품성으로 바뀌게 되었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글자 H가 여호와로부터 취해졌는데, 여호와의 글자 중에서 이 글자가 신성을 포함하는 글자이고, 이것은 나는 있다, 있음(Being, Esse)을 의미하는 글자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 글자가 그의 이름에 삽입되었다, 하여 그는 “아브라함”이라 불리운다. 이 경우는 사래의 경우도 마찬가지인데 뒷 구절에서 말해진다; 그녀의 이름에 똑같은 글자가 첨가되어 그녀는 “사라”라고 불리운다. 이로부터도 알게 되는 바, 말씀의 내적 의미에서 아브라함은 여호와, 또는 주님을 표현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한 가지 더 유념해둘 것은 표현적 차원에서는 표현하는 인물이나 사물이 전혀 중요하지 않다는 것, 즉 아브람 개인의 인물 됨됨이는 하등 관심 사항이 못 된다는 것, 그러나 그가 표현하는 것이 중요 사항이다. 그러므로 내적 의미에서 이 본문, 즉 아브람이 아니고 아브라함이라 부르겠다는 말의 내적 의미는 주님께서 인간을 벗으시고, 신성을 입으실 것을 의미한다; 이것 역시 이전의 시리즈에서, 이어지는 시리즈에서 의미되고 있다; 그 이유가 약속이 아들 이삭에 관하여 만들어지기 때문이고, 이삭에 의해 주님의 신성한 합리성이 표현되어졌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나는 너를 수많은 나라들의 아버지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이는 전과 같이, 모든 진리와 그로부터 파생된 선이 그분으로부터 온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아버지”가 그분으로부터 임에서; “수많은”의 의미가 진리 임에서; 그리고 또한 “나라들”이 거기로부터 파생된 선 임에서 의미 파악이 분명해진다. 더 보편적, 더 멀리 떨어진 의미에서 일 경우, 이 단어들은 주님의 인간 본질이 신성 본질과 합일됨을 의미한다; 그 이유가 주님의 인간 본질이 신성 본질과 합일됨은 진리가 선과 결합하는 상황과 비슷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분의 신성 본질이 인간 본질과 합일됨은 선이 진리와 결합됨과 비슷한 상황이다. 이것은 상호적이다. 그렇다, 주님 안에서 진리 자체는 선 자체에 하나가 되었다, 그리고 선 자체는 진리 자체에 하나가 되었다; 그 이유가 무한한 신성은 선 자체와 진리 자체이다는 말 외의 다른 방법으로는 우리가 말해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간 마음이 주님은 선 자체와 진리 자체이시다고 생각할 때 오류 없이 있게 된다.

6절. 그리고 나는 너를 매우 대단하게 열매 맺게 하리라. 그리고 나는 너를 나라들로 만들리라, 그래서 왕들이 너로부터 나오리라. “나는 너를 매우 대단하게 열매 맺게 하리라”란 선의 열매 맺음은 무한함을 의미한다. “나는 너를 나라들로 만들리라”란 모든 선은 그분으로부터 임을 의미한다. “왕들이 너로부터 나오리라”란 그분으로부터 모든 진리가 있음을 의미한다.

나는 너를 매우 대단하게 열매 맺게 하리라. 이는 선의 열매 맺음은 무한함을 의미하는데, 이는 “열매를 만듦”이 선을 서술한다에서 분명해진다; 그리고 이것이 “매우 대단하게”라고 말해지고, 주님을 취급하기 때문에, 이것은 무한하게 열매 맺음을 의미한다.

나는 너를 나라들로 만들리라. 이는 모든 선은 그분으로부터 있다를 의미하는데, 이는 “나라들”의 의미가 그것의 순수하고 원시적인 의미에서 선이다에서 분명해진다.

왕들이 너로부터 나오리라. 이는 모든 진리는 그분으로부터 이다를 의미하는데, 이는 “왕”의 의미가 역사적, 예언적 말씀 모두에서, 진리이다에서 분명해진다. “나라들”의 의미가 선들이다로 부터, 그리고 “왕들”의 의미가 진리들이다로 부터, 우리는 말씀의 내적 의미의 본성을, 그리고 이 의미가 글자 의미와는 얼마나 멀리 떨어진 의미인지를 다시 실감하게 된다. 말씀을 읽는 이들, 특히 말씀의 역사적 부분을 읽을 경우, 그들은 거기에 등장하는 나라들이 단어 그대로 나라들이고, 왕들은 왕들이다는 것 외의 다른 의미가 있다는 것에 대한 신념은 없다. 고로 말씀 속에 등장하는 나라나 왕은 여느 동화책에서 등장하는 나라나 왕과 별반 차이 없이 내용으로부터 교훈을 끌어낼 뿐이다. 그러나 천사들이 동일한 말씀을 받을 경우, 나라들, 뿐만 아니라 왕들에 관한 글자적 생각은 모두 사라지고, 그 말씀의 자리를 선과 진리가 차지한다. 이 말은 이상하고 역설적 주장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겠지만, 이는 진실로 그러하다, 그리고 이것이 진실인 이유는 간단한 생각 하나만을 끄집어내 찬찬히 다시 되씹으면 완전 부정함에서 상대적 부정함으로 까지라도 수긍될 것이다. 즉 만일 말씀에서 나라들이 나라들이고, 왕들이 왕들이다고 읽으면,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읽는 것이 아닌 여느 인간 역사서의 한 종류를, 어느 민족의 역사를 공부하는 셈이 되지 않겠는가? 우리가 말씀을 거룩한 말씀이라 하고 그 안에 신성이 담긴 책이라 하면서 신성에 관한 것, 천적, 영적인 것에 관심이 없다면 이는 도덕책에 불과하지 않을까?
이 구절에서 말해진 것을 실예로 생각해보자. 아브라함이 열매를 맺는다는 것, 나라들을 만든다는 것, 왕들이 그로부터 나온다는 것 같은 사항이 세상적 주제일 뿐 천국에 관련 사항은 없는 것일까? 이 대목에는 세상의 영광밖에 천국하고는 전혀 상관이 없는 것인가? 그러나 만일 이것이 주님의 말씀이라면, 그 말씀 안에 천국의 영광이 거론되어 있어야만 하고 세상의 영광은 아무 것도 없어야 지당하지 않을까? 그러므로 말씀이 천국으로 건너갈 때는 글자 의미는 모조리 지워진다; 그리하여 말씀은 아주 순수해져서 세상적인 어떤 것도 혼합되어 있지 않다. 따라서 “아브라함”은 아브라함을 뜻하지 않고 주님을 뜻한다; 그가 “열매를 맺는다”는 말은 그의 후손들이 극도로 증가한다는 말이 아니라, 주님의 인간 본질의 선이 무한히 증가할 것이다는 뜻이다; “나라들”에 의해서는 나라를 뜻하지 않고, 선들을 뜻한다; 그리고 “왕들”에 의해서는 왕들이 아닌 진리들을 뜻한다. 글자 의미에 따른 역사는 여전히 남아 있다; 그 이유가 아브라함에 말해진 것은 진실이기 때문이다; 또한 그가 열매를 맺는 것, 나라들과 왕들이 그로부터 있는 것 또한 그러하다.
“왕들”이 진리들을 의미하는 것을 이사야서로부터도 알 수 있다:
외국인들의 아들들이 네 성벽을 건축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왕들이 너를 섬길 것이다; 너는 나라들의 젖을 빨 것이다, 그리고 너는 왕들의 가슴을 빨 것이다 (이. 60:10, 16);
위에서 “나라들의 젖을 빠는 것”, 그리고 “왕들의 가슴”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글자로부터는 결코 분명하지 않다. 그러나 내적 의미일 경우, 분명해진다. 즉 그것은 선들이 선물되어지고, 진리들이 가르쳐질 것을 의미한다. 예레미야서에서:
다윗의 왕좌에 앉는 왕들과 제 1 인 자들이 병거와 말을 타고 이 도성의 문을 수단으로 들 어 올 것이다 (예18:25; 22:4);
“병거와 말을 타는 것”은 지적인 것들이 풍부함을 의미하는 예언적 말함이다. 이는 예언서들의 많은 구절에서 나타나는 표현이다; 그리고 “도성의 문을 수단으로 왕들이 들어옴”은 그들이 신앙의 진리들을 흡수할 것임을 내적 의미에서 의미한다. 이것은 말씀의 천국에서의 의미이고, 세상의 글자적 의미를 넘어 있는 의미이다.
다시, 예언서에서:
여호와께서는 왕들과 성직자를 그분의 노염의 분노에서 경멸하셨다; 시온의 문들이 땅으로 가라앉았다; 그분은 그녀의 빗장들을 파괴하고 부수셨다; 그녀의 왕과 그녀의 제 1 인 자 들은 나라들 사이에 있다; 법은 있지 않다 (애. 2:6, 9);
“왕”은 여기서 신앙의 진리를 표시한다; “성직자”는 선행의 선이다; “시온”은 파괴되어지고 있는 교회이다. 그리고 이것의 빗장들이 부수어졌다; 그러므로 “왕과 제 1 인 자들이 나라들 사이에 있다”, 즉 진리와 진리로부터 있는 것들이 법이 없는 만큼에서, 즉 신앙의 교리가 없는 만큼에서 사라질 것이다는 말이다. 이사야서에서:
아이들이 악한 것을 거절하고 선한 것을 선택하기 전에, 지면이 버려질 것이다, 너는 그녀 의 두 왕의 현존을 싫어한다 (이. 7:16);
위에서 주님의 오심이 취급되어진다; “버려질 지면”은 신앙을 표시한다, 이로부터 거기에는 아무 것도 있지 않다, 그리고 그 신앙 속의 진리들이 “싫어해질 왕들”이다.
이사야서에서:
나는 내 손을 나라들에 들어 올릴 것이다, 그리고 내 기호를 백성들에게 쳐들 것이다; 그리 고 그들은 네 아들들을 그들의 가슴에서 데려 올 것이다, 네 딸들을 어깨 위에서 운반할 것이다; 그리고 왕들이 너의 자양분을 주는 자가 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여왕들은 네게 젖을 주는 자들일 것이다 (이. 49:22, 23);
“나라들”과 “딸들”은 선들을 표시한다; 그리고 “백성들”과 “아들들”은 진리들을 표시한다. 그러므로 “왕들”은 일반적 측면에서의 진리들을 표시한다. 이를 가지고 그들에게 자양분이 공급된다, 그리고 그들의 “여왕들”은 선을 표시하고, 이로부터 그들은 젖을 먹게 될 것이다는 말이다. 여러분이 선들과 진리들을 말하든지, 선들과 진리들 안에 있는 이들이다 말하든지, 그것은 같은 말이다.
이사야서에서:
그가 나라들에 뿌릴 것이다, 그 위에서 왕들이 입을 닫을 것이다; 그 이유는 그들에게 말해 지지 않은 것이 그들에게 보여졌고, 그들이 듣지 못했던 것을 깨닫기 때문이다
(이. 62:15),
위 구절은 주님의 오심이 취급되고 있다; “나라들”이 선들에 의해 감명된 이들을 표시한다, 그리고 “왕들”은 진리들에 감명된 이들을 표시한다. 다윗서에서:
지금, 오 너 왕들아 총명해져라; 너 땅의 재판관들아 가르침을 받아라; 경외함으로 여호와 를 섬겨라, 그리고 떨면서 크게 기뻐하라. 그분이 화내지 않도록 아들에게 키스하라, 그리 고 너희는 길에서 망한다 (시. 2:10-12).
“왕들”은 진리들 안에 있는 이들을 표시한다; 그들은 자기들의 진리들로부터 “왕들의 아들들”이라고 종종 불리운다; 위 구절의 “아들”은 주님을 표시한다. 여기서 그분이 아들이라 불리우신 이유는 그분이 진리 자체이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모든 진리는 그분으로부터 있기 때문이다.
계시록서에서:
그들은 새로운 노래를 불렀다, 당신이 그 책을 가져가시고 그 책의 인들을 여심은 당연 합 니다; 당신은 우리를 우리의 하느님에게 왕들과 성직자들로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땅에서 통치할 것입니다 (계. 5:9, 10);
위에서 진리들 안에 있는 이들이 “왕들”이라 불리운다. 주님 역시 이와 같은 인물들을 마태복음서에서 “왕국의 아들들”이라 부르신다:
좋은 씨를 뿌리는 자는 사람의 아들이시다; 들판은 세상이다; 씨는 왕국의 아들들이다, 그 리고 가라지들은 악한 자의 아들들이다 (마. 13:37, 38).
계시록서에서:
여섯째 천사가 그의 대접을 큰 강 유브라데에 쏟았다, 그리고 그로 인해 물이 말리워져서, 태양의 떠오름으로부터 있는 왕들의 길이 준비되었다 (계. 16:12).
“유브라데”에 의해 유브라데가 뜻해지지 않는다, “태양의 떠오름으로부터 왕들”에 의해 거기로 부터의 어떤 왕들이 뜻해지지 않는다는 것은 분명할 것이다; 그리하여 “태양이 떠오름으로부터 있는 왕들의 길”은 사랑의 선들로부터 있는 신앙의 진리들을 뜻한다.
계시록서에서:
구원되는 나라들이 그것의 빛 안에서 걸을 것이다, 그리고 땅의 왕들이 그것 안으로 자기 들의 영광과 영예를 가져 올 것이다 (계. 21:24);
위에서 “나라들”은 선들 안에 있는 이들을 표시한다, 그리고 “땅의 왕들”은 진리들 안에 있는 이들을 표시한다. 이는 이 구절의 말들이 역사적 문장이 아닌 예언적 문장이다는 사실로 추론해도 수긍되리라 본다. 계시록서에서:
많은 물들 위에 앉아 있는 큰 매춘부와 더불어 땅의 왕들은 매춘짓을 범했다, 그리고 그녀 의 매춘의 포도주로 술취했다 (계. 17:1, 2).
그리고 다시 계시록서에서:
바빌론은 모든 나라들로 그녀의 매춘의 포도주를 마시게 했다, 그리고 땅의 왕들은 그녀와 매춘짓을 범했다 (계. 18:3, 9).
위 구절 역시 왕들이 “땅의 왕들”에 의해 뜻해지지 않는다; 신앙, 즉 진리의 왜곡과 섞음질이 뜻해진다. 이것이 “매춘”이다; “땅의 왕들”은 왜곡되어지고 섞음질 된 진리들을 표시한다.
계시록서에서:
네가 본 열 뿔은 열 왕들이고, 아직 왕국을 받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은 짐승과 더불어 한 시간 왕으로서 권위를 받는다. 이들은 한 (개의) 마음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들은 자기 들의 권능과 권위를 짐승에게 넘길 것이다 (계. 17:12, 13);
이 “왕들”은 왕들이 아니다는 것은 모든 이들에게 분명할 것이다; 그 이유가 한 시간 만 왕권을 받는다는 것은 평범하게 읽기에는 부담스럽기 때문이다. 마찬가지가 다른 구절에서:
나는 말 위에 앉으신 분, 그리고 그의 군대와 전쟁을 하려고 모인 짐승과 땅의 왕들과 그 의 군대들을 보았다 (계19:19);
“말 위에 앉으신 분”이 “하느님의 말씀”이다는 것은 13절에서 공개적으로 서술되어 있다; 그리고 이 분에 맞서 땅의 왕들이 다 함께 모였다고 말해진다. “짐승”은 사랑의 선들이 모독된 상태를 표시한다; 그리고 “왕들”은 신앙의 진리들이 섞음질되었음을 표시한다; 이것들이 “땅의 왕들”이라 불리우는 이유는 그것들이 교회 내에 있기 때문이다. “흰 말”은 진리를 이해함을 표시한다; 그리고 “말 위에 앉으신 분”은 말씀이다. 이 의미는 다니엘서 11장에서 한층 더 명백해 있다. 거기서 “남쪽의 왕들”과 “북쪽의 왕들” 사이의 전쟁이 취급되어 있다; 진리와 거짓이 싸우는 것이 “전쟁”이라는 역사적인 것을 수단으로 묘사되어져 있다.
왕이 진리를 의미하는 것을 알면, 주님이 왕과 성직자라 불리우시는 대목의 내적인 뜻이 무엇인지도 가늠되어진다; 그리고 주님 안에서 왕들에 의해 표현되는 것, 성직자들에 의해 표현되는 것이 무엇인지도 알게 된다. 왕들은 그분의 신성한 진리를 , 성직자들은 그분의 신성한 선을 표현했다. 그분께서 왕으로서 우주를 통치하시는 질서의 모든 법칙은 진리들이다; 그러나 성직자로서 그분이 우주를 통치하시는 질서의 모든 법칙을 수단으로 진리 자체 역시 규율하는 것은 선들이다; 그 이유가 진리들만으로 통치함은 모든 이를 정죄하여 지옥으로 보낼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선들로 통치함은 지옥으로 향할 수밖에 없는 모든 이를 끌어내서 천국으로 들어 올리려 하신다. 주님의 경우에서 이 둘은 결합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것들은 왕권과 성직을 겸함(결합함)에 의해 고대에서는 표현되어졌다; 창 14:18에서, 살렘의 왕, 멜기세덱의 경우가 그러한데, 그는 왕임과 동시에 지극히 높은 하느님에게 성직자였기도 했다. 이후에 유대인들 사이에서 표현 교회가 판관과 성직자에 의해, 후에 왕들에 의해 설립되어졌다.
왕이 진리들을 표현하고, 진리는 정죄함이 그 주된 직능인 바, 사무엘상 8장을 보면, 왕을 세워달라는 백성의 요청에 재판관이자 성직자인 사무엘이 심히 언짢아하는데, 그 이유가 왕과 왕의 권리 때문이고 이것이 11-18절에 서술되고 있다. 사무엘 시대보다 더 이른 시대인 모세 때에도 왕도에 관해 명령된 바가 이미 있었다 (신. 17:14-18). 이 명령들의 내적 의미인 즉, 그들은 가짜의 진리가 아닌 진리, 즉 진짜 진리인, 선으로부터 있는 순수한 진리를 선택해야 한다는 것; 그리고 그들은 추론함들과 기억 속의 진리들을 가지고 순수 진리를 더럽혀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왕도에 포함되어 있다. 이런 의미는 글자 의미로만 파악하려 들면 거의 감지할 수 없는 의미이다 이렇게 “왕”과 “왕의 신분”은 진리 외에 더 다른 것을 표현하거나 의미하지 않는다.

모든 선과 파생되는 진리는 주님으로부터 이다는 사실에 주목해 생각해보자: 우선 이는 변치 않는 진실이다. 천사들은 어떤 것이 선이고 참인지는 그것이 주님으로부터 있는 만큼에서 임을, 어떤 것이 악이고 거짓인지는 그것이 자신으로부터 있는 만큼에서 임을 지각하고 있다. 천사들은 신참내기 혼들에게, 그리고 이 진실을 의심하는 영들에게 고백한다. 자기들이 악과 거짓으로부터 보류되고, 선과 진리 안에 간직되는 것은 선과 진리가 주님으로부터 있다는 진실을 인정하는 만큼에서 만이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보류됨과 유입됨 자체를 그들은 지각할 수 있었다. 그들은 인간이 자신의 힘으로 선을 행하고 진리를 생각한다고 상상하는데, 이것은 가상이다고 말한다. 그 이유는 인간이 지각이 없는 상태에 있고, 유입됨에 관해서도 너무나 흐릿한 상태에 있기 때문이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나타난 것 만으로 진실을 가리는 바, 오류가 발생하는 것이다. 인간은 그가 감각들로부터 영적인 것을 추론하는 한, 그의 오류로부터의 주장은 철회되지 않아질 것이다. 그럼에도 인간은 자신으로부터 선을 행하고 진리를 생각해야 한다; 그 이유가 그가 개혁되고 거듭나는데 있어 다른 방법은 우선적으로 없기 때문이다.
본문은 신성 본질에 하나가 되어지는 주님의 인간 본질이 취급되고 있다; 그리고 모든 선과 진리는 그분의 인간 본질을 통하여 그분의 신성 본질로부터 인간에게 온다는 것이다. 이것은 거의 누구도 믿지 않는 신성한 신비들이다. 믿지 못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납득 불가능의 수준에 있기 때문이다. 납득 불가능인 이유는 사람들이 신성한 선은 신성에 하나가 된 주님의 인간 없이 인간에게 도달할 수 있다고 상상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렇지 않으면 도달할 수 없는 이유는 짧은 말이지만 설명은 있었다 . 즉 인간은 자신을 탐욕들 안에 침수시키고, 거짓들로 자신을 눈멀게 함으로 최고의 신성으로부터 멀어지게 했다는 것, 고로 주님이 자신 안에서 신성에 하나가 되게 한 인간을 통하여서가 아니면 인간의 마음의 합리적인 부분 안으로 신성의 어떤 유입도 가능해질 수 없었다는 것이다. 그분의 인간을 통하여 주님과 인간의 교통이 결과되었다; 그것 때문에 최고의 신성은 인간에 도달될 수 있으셨다. 이것을 주님께서는 많은 장소에서 공개적으로 말하신다, 즉 그분은 말하신다, 나는 “길”이다는 것, 그리고 “그분을 수단으로 하지 않고는 아버지에게 올 자는 없다.” 이로서 확언할 수 있는 것, 그분으로부터, 즉 신성에 하나가 된 인간으로부터 모든 선과 모든 진리가 있다는 것이다.

7절. 그리고 나는 내 언약을 나와 너와 너 이후 네 씨 대대로까지에 세워서 영원한 언약을 삼고 너와 너 이후 네 씨에게 하느님이 되리라.

나는 내 언약을 나와 너 사이에 세울 것이다. 이는 합일을 의미하는데, 이는 “언약”의 의미가 합일이다에서 분명해진다. 이에 대해서는 이미 상술하였다. 이 장과 앞서 취급된 합일에서 보여주는 것은, 여기서 이야기하는 여호와는 주님 안에 계셨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주님은 처음 임신으로부터와 출생으로부터 그분과 함께 계셨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주님은 여호와로부터 임신되셨고, 이것 때문에 그분의 내적 인간은 여호와이셨기 때문이다. 이것은 인간에 있는 이와 비슷한 것에 의해 더 예증되어진다. 즉 인간의 혼은 인간의 육체와 하나이다는 것, 또는 인간의 내적인 것은 그의 외적인 것과 비록 서로 구분된다 할지라도 하나로 있다는 것이다. 때로는 내적인 것과 외적인 것은 서로 싸우기조차 하는데, 시험에 있을 경우에서 이다. 시험에서 내적인 것은 외적인 것을 꾸짖고, 그것 안에 있는 악이 거절되기를 바란다; 그런데도 이 둘은 여전히 결합되고 있다, 또는 하나이다, 그 이유가 영혼과 몸은 동일한 인간 안에 있기 때문이다. 예를 하나 들어보면, 즉 인간의 생각은 그의 외모에서 나타나는 것, 그의 입으로 말하는 것, 그의 몸짓으로 행동하는 것 등등과 다른 경우가 있다는 것이다. 그 사람 안에는 그의 외적인 것과 더불어 다양해져 있는 내면이 있다; 그 이유가 생각은 외적인 외모들, 입, 몸짓이 있는 만큼 많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외모, 입술의 말, 몸짓이 생각과 일치할 때 합일이 있다. 이런 간단한 예증 외에 더 많은 예증도 있다.

그리고 너 이후 네 후손. 이는 그분을 믿는 이들과 결합함을 의미한다. 이는 “씨”가 신앙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또한 “너 이후”의 의미가 이어지고 있음에서도 알려진다. 누군가의 “뒤를 따라(after) 걷는 것”은 말씀에서 자주 사용되어지는 표현이다 (예. 7:6; 8:2; 겔. 20:16; 막. 8:34; 눅. 9:23; 14:27을 참조하라.) 그러므로 이 구절, “너 이후(after) 네 씨”, 또는 “네 뒤를 따른(after) 네 씨”는 그분을 믿고 그분의 뒤를 따르는 이들을 의미한다; 내적 의미에서 그분으로부터 태어나는 이들이다.

대대로까지에. 이것은 신앙으로부터 있는 것들을 의미한다. 이는 “대대로(generations)”의 의미가 선행으로부터 발생되고 낳는 것을 의미함에서 분명해진다. 즉 신앙의 모든 것들, 또는 주님에 의해 거듭나지는 모든 이들, 고로 선행의 신앙에 있는 이들이다; 이에 관하여는 주님의 신성한 자비로부터 이후 더 말할 것이다. 내적 의미에서 “(자손) 대대로”, 또한 “출생들”이 이와 같다는 것은 제 1권에서 살핀 바 있다.

영원한 언약을 삼는다. 이는 이들과 더불은 결합을 의미하는데, 이는 “언약”의 의미가 결합이다로부터 분명해진다; 이 언약이 그의 “씨”로 불리우는 이들과 더불어서 이다는 것은 이어지는 사항으로부터 알게 된다. 그리고 언약이라는 단어가 이 구절에서 두 번째 말해지기 때문이다. 처음 말해진 언약은 여호와께서 (주님의) 인간 본질과의 결합에 관련되고, 두 번째 말해진 언약은 씨(후손)인 이들과 더불은 결합에 관련되고 있다. 이를 더 분명하게 구분되게 생각해보면, 전자는 주님의 신성 본질이 그분의 인간 본질과 합일됨에 관하여서 이고, 후자는 주님께서 선행의 신앙을 통하여 인류와 결합함에 관한 것이다. 전자의 경우를 두고 우리는 합일(union)이라 말하고, 후자의 경우는 결합(conjuction)이라 말하고 있다. 주님의 신성 본질과 그분의 인간 본질 사이에는 합일이 있다; 그러나 주님과 인류 사이에는 선행의 신앙을 통하여 결합이 있다. 이는 여호와 또는 주님이 생명이시다는 사실, 그리고 그분의 인간 본질 역시 생명으로 만들어졌다는 사실로부터, 그리고 생명과 (만들어진) 생명 사이에 합일이 있다에서 분명해진다. 이에 반하여, 인간은 생명이 아니고 생명의 그릇이다; 그리고 생명이 생명의 그릇 안으로 흐를 때, 결합이 있다; 생명은 그릇에 순응되는데, 마치 능동이 수동에 적응시켜지는 것과 같다, 또는 그 자체 살아있는 것과 그 자체 죽어있는 것과의 관계 같이 후자가 전자로부터 살아있는 것과 같다. 도구를 쓰는 자와 도구는 마치 하나인 듯 함께 뭔가를 만들거나 해낸다. 그러나 이것들은 여전히 하나이지는 않다. 그 이유가 각 둘은 제각기 그것 만으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자신으로부터 살지 않는다. 그러나 자비하신 주님께서 인간을 자신에게 인접되게 하시고, 그로 말미암아 그가 영원히 사는 것이 발생된다; 그리고 이렇게 주님과 인간은 구분되기 때문에 그것은 결합에 해당된다.

하느님이 되리라. 이는 주님 자신에 있는 신성을 의미한다. 이는 주님의 신성본질이 그분 자신 안에 있었다는 앞의 설명으로 충분할 것이다.

그리고 너 이후 네 씨에게. 이는 그분을 믿는 이들에게 파생되는 신앙을 의미하는데, 이는 “씨”의 의미가 선행의 신앙인 것에서 알게 된다; 그리고 “너 이후”의 의미가 그분을 따르는 것임에서도 파악된다. 주님을 믿는 이들에게 있는 신성은 사랑과 선행이다. 이 중에서 “사랑”에 의해서는 주님을 사랑함이 뜻해진다; 선행에 의해서는 이웃을 향한 사랑이 뜻해진다. 주님을 사랑함은 이웃을 향한 사랑에서 분리될 수 없다; 그 이유가 주님의 사랑은 보편적 인류를 향하고 있고, 그분은 인류를 영원히 구하시려 뜻하시고, 그분 자신에게 전적으로 인접되게 하시려 뜻하시기 때문이다. 하여 인류 중의 한 명도 멸해지지 않게 하시려 뜻하신다. 그러므로 주님을 사랑하는 자는 주님의 사랑을 가지고 있고, 이 사랑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는 이웃을 사랑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웃을 향한 사랑에 있는 이들이 이 사랑 안에 있는 이유로 해서 주님을 사랑함에도 모두가 당연히 있다 라고는 말해질 수 없다. 예를 들면, 주님을 모르는 호의적인 이방인들, 그러나 이들과 더불어 주님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행 안에 현존하신다, 그리고 역시 교회 내에 (더 수준 높은) 다른 사람들도 있다; 그 이유가 주님을 사랑함은 더 높은 수준에 있기 때문이다. 주님을 사랑하는 이들은 천적 인간들이다, 그러나 이웃을 향한 사랑, 또는 선행에 있는 이들은 영적 인간들이다. 홍수 이전에 있었고, 천적 수준이었던 태고 교회는 주님을 사랑함 안에 있었다; 그러나 홍수 후에 있었고, 영적 인간이었던 고대 교회는 이웃을 사랑함, 또는 선행 안에 있었다. 사랑과 선행 사이의 이런 구분은 차후 언급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8절. 나는 너에게, 그리고 너 이후 네 씨에게 네가 머무르는 토지, 가나안의 모든 토지를 주어 영원히 소유로 삼게 하리라. 그리고 나는 그들에게 하느님이 되리라.

나는 너에게, 그리고 너 이후 네 씨에게 네가 머무르는 토지를 줄 것이다. 이는 주님께서 그분 자신의 힘, 또는 능력으로 “머무르는 토지”인 모든 것들을 획득하셨다를 의미한다. 이는 “머무름”이 가르쳐지고 있다를 의미하는 것에서 알게된다. 인간은 기억 속의 지식들, 교리적 주제들, 신앙에 관한 지식들, 소위 자기에게 “머무르고” 있는 것들을 수단으로 가르쳐짐에 의해 생명들을 자신에게 획득한다. 주님에게 이를 적용하면, 그분에게 “머무르는” 것은 그분이 지식들을 수단으로, 그리고 시험에서의 전투들, 이것에서 승리하심을 수단으로 자신에게 획득하신 생명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분이 자신의 힘으로 이 생명을 획득하셨을 때, 여기서 “머무르는 토지”에 의해 의미되어진다.
주님께서는 그분 자신의 힘으로 모든 것들을 획득하셨다는 것, 그리고 그분 자신의 힘을 수단으로 그분의 인간 본질을 신성 본질에, 그리고 신성 본질을 인간 본질에 하나가 되게 하셨다는 것; 그리하여 그분만이 정의가 되셨다는 것이 예언서들에서 분명해진다. 이사야서에서:
그분의 큰 능력에서 행군하시는 에돔에서 온 이 분은 누구신가? 나는 혼자서 포도즙 틀을 밟았는데, 백성들의 누구도 함께 하지 않았다; 내가 둘러 보았다, 그리고 아무도 도와 주는 자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놀라고 말았다, 그리고 아무도 받쳐 주지 않았다; 그러므로 나의 팔이 나에게 구원을 가져 왔다 (이. 63:1, 3, 5);
“에돔”은 주님의 인간 본질을 표시한다; “능력”, “팔”은 힘을 표시한다; 이것이 그분 자신의 것으로부터 였다는 것이 “아무도 돕는 자 없었다”, “아무도 받쳐 주지 않았다”, “그분 자신의 팔이 그분에게 구원을 가져 왔다”라고 말하여 분명히 하고 있다.
이사야서에서:
그분은 아무도 있지 않은 것을 보셨다, 그리고 중재하는 자가 아무도 없음에 놀라셨다; 그 분의 팔이 그분에게 구원을 성취하셨다, 그리고 그분의 정의가 그분을 받쳐 주었다; 그리고 그분은 정의를 쇠미늘 갑옷으로 입으셨다. 그리고 구원의 투구를 그분의 머리 위에 쓰셨다 (이. 59:16, 17);
앞 인용 구절과 같은 방식으로 그분 자신의 힘이 말해진다, 그리고 그것으로 해서 그분은 정의가 되셨다. 주님이 정의이시다는 것이 다니엘서에서 서술되고 있다:
불법이 속죄되고, 세세토록 정의를 가져오고, 환상과 예언을 봉하고, 거룩들의 거룩을 기 름 부으려고 칠십 주가 포고되었다 (단. 9:24).
그리고 예레미야서에서:
나는 다윗에게 정의로운 가지를 일으킬 것이다, 그리고 그는 왕으로 통치할 것이다, 그리고 총명하게 행동할 것이다, 그리고 토지에서 공정과 정의를 펼칠 것이다. 그분의 날에 유다는 구원될 것이고, 이스라엘은 안심하고 살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그분의 이름인 즉, 그들은 그분을 여호와, 우리의 정의라고 부를 것이다 (예. 23:5, 6; 33;15, 16).
이런 이유로 예. 23:1, 7에서 그분은 “정의의 주택”이라고도 불리우신다; 그리고 이. 9:6에서 “경이로우신 분”, “영웅”이라고도 불리우신다.
주님께서 그분의 자신인 것이 아버지의 덕분이라고 자주 말하셨다. 그 이유가 여호와께서 그분 안에 계셨는 바, 결과적으로 그분이었던 모든 것 안에 계셨다. 이는 비록 같지는 않을지라도 이와 유사한 것으로 예증해볼 수 있다. 인간의 혼은 그 인간 안에 있다; 그리고 혼이 인간 안에 있는 바, 이것은 그 사람에게만 있는 더할나위 없는 유일한 것, 즉 그의 생각과 행동 속의 유일한 것이다. 그의 혼이 가지지 않은 것은 무엇이든 그의 것이 아니다. 주님의 혼은 생명 자체, 또는 있음 자체이셨다. 이것은 여호와이시다. 그 이유가 주님은 여호와로부터 임신되어졌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여호와, 또는 생명 자체는 그분의 더할나위 없는 유일한 것들에서 있으셨다; 그리고 여호와이신 생명 자체, 또는 있음 자체가 그분의 더할 나위 없는 유일한 것 이셨다. 이것을 주님께서 말하신다: 즉 그분은 “아버지의 품 안에 계신다” (요. 1;18), 그리고 “아버지께서 가지신 것은 무엇이든 모든 것이 그분의 것이다” (요. 16:15; 17:10, 11).
여호와이신 선으로부터 그분은 신성 본질을 인간 본질에 하나가 되게 하셨다; 그리고 진리로부터 그분은 인간 본질을 신성 본질에 하나가 되게 하셨다; 고로 그분은 일반적, 특수적 모두에서 자신으로부터 모든 것들을 행하신 것이다; 사실상 그분의 인간 본질은 그 자체 그대로 남아 있으셨다. 그 이유는 그분이 자신으로부터 모든 지옥들에 맞서 싸우시고 정복하시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그분이 그분의 자신이었던 생명을 가진 것은 그분 자신의 능력과 힘을 수단으로 해서 였음을 이미 인용한 예언서들로부터 서술했었다. 결과적으로, 그분은 자신을 위해 모든 것들을 그분 자신의 능력으로 획득하셨는 바, 그분은 정의가 되셨고, 지옥의 악귀들과 악령들로부터 영들의 세계를 해방되게 하셨다, 그러므로 해서 파멸로부터 인류를 구원하셨다. 그 이유가 인간은 영들에 의해 통치되기 때문이다. 그렇게 해서 그것을 되찾으신 것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그분은 구약 성경의 말씀에서 구조자, 되찾으시는 분, 구세주라 자주 불리우신다. 구세주는 그분의 이름 예수의 뜻이다.

“내가 네게 줄 것이다”에 의해 천국들과 땅에 있는 것들이 그분의 것이다를 뜻하는데, 이는 이미 상술해 온 설명 속에서 파악된다. 글자의 의미에서, 이 말, 즉 “내가 네게 줄 것이다”란 하느님, 또는 여호와께서 주님에게 주실 것이다가 뜻해진다. 이는 방금 위에서 인용한 복음서의 말씀, 즉 아버지께서 천국과 땅에 있는 모든 것을 그분에게 주셨다와 같다. 그러나 내적 의미에서, 이 의미 안에는 진리 자체가 그것의 순수성을 표출해 놓고 있다. 즉 주님께서 자신을 위해 그것들을 획득하셨다를 뜻한다. 그 이유는 여호와께서 그분 안에, 그리고 그분에 속하는 모든 것 안에 계셨기 때문이다. 이는 이와 유사한 것 가지고 더 예증을 들어야 할 것 같다; 만일 내면의 인간, 또는 합리적 인간, 또는 생각함의 육체적 인간이 만일 이것, 저것을 행함을 중단한다면, 고요함, 또는 쉼을 가진다고 말할 것이다: 이 경우에 말하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이나 실상은 동일한 한 인간이다. 즉 합리적 인간이나 육체적 인간 모두 한 인간에 속하는 인간이다. 그런데 전자가 말해질 때, 후자가 이해되어진다.
더 나아가 천국들과 땅 위에 있는 것이 주님의 것이다는 것은 구약 성경의 말씀의 아주 많은 구절들로부터 분명해진다, 그리고 복음서들로부터 그러하다 (마. 11:27; 눅. 10:22; 요. 3;34, 35; 17:2; 마. 28:18 등등.); 그리고 제 1 권으로부터도 그러하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보편적 천국을 통치하시는 바, 그분은 땅 위 모든 것을 통치하신다; 천국과 땅의 것들은 아주 잘 연결되어져 있으므로 그분은 하나의 통치로 두 곳을 모두 통치하신다; 그 이유가 천사들의 천국에 천사같은 영들의 천국과 영들의 세계가 의존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시 인류가 여기에 의존된다. 마찬가지로 천국들에 세상과 자연에 있는 모든 것이 의존되고, 자연의 세 왕국( 즉 동물, 식물, 광물 왕국들)은 천국으로부터 생겨나고 유지되어진다.

“너 이후 네 씨에게”란 그분은 그분을 믿는 이들에게 이 모든 것들을 주시겠다를 의미한다. 이는 “씨”의 의미가 신앙이다에서 분명해진다. 그리고 사실상 선행의 신앙이다. 자기의 생활에 공적을 놓는 이들은 선행의 신앙을 가지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씨에 의해 뜻해지지 않는다; 그 이유가 자기들의 구원 받음이 주님의 정의가 아닌 자신의 정의라 여기기 때문이다. 그것들 안에 선행의 신앙이 없다는 것, 즉 선행이 없다는 것은 이런 사실로부터 분명해진다. 즉 그들은 다른 이들 앞에 자신을 놓는다, 고로 자신들을 중시하고 타인은 아니다. 타인을 중시하는 것은 그들이 자기에게 얼마나 봉사하느냐에 비례될 뿐이다. 따라서 자기를 기꺼이 섬기려 들지 않으면 그들을 경멸하거나 미워한다. 고로 자기를 사랑함에 의해 그들은 분리하고 결코 연합하지 않는다; 그리고 천국적인 것을 파괴한다. 즉 서로의 사랑을 파괴한다. 서로의 사랑이야말로 천국의 기반을 공고히 하게 한다. 그 이유가 천국 자체가 그 사랑 안에 있기 때문, 그리고 천국들의 제휴와 만장일치가 그것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다른 삶에서 만장일치를 파괴하는 것은 무엇이든 천국 자체의 질서에 반대되기 때문이다. 고로 전체의 파괴만을 작당한다. 이와 같은 것이 자기들의 생활에 공적을 두는 이들, 정의가 자신 스스로부터 라고 하는 이들이다.
그들은 때로는 그들의 얼굴에 작은 횃불 같은 것이 빛을 낸다, 그러나 자기를 정당화함으로부터 진행되는 환영의 불이고, 사실상 그것은 차다. 그들은 때로는 말씀의 글자 의미로부터 확증하느라 뛰어다닌다. 그 이유가 그들은 내적 의미로부터 있는 진리들을 미워하기 때문이다. 그들의 영역은 자기만을 중시함의 영역이다, 그리고 그들은 자기를 어떤 신으로 중시해 주지 않는 모든 것은 파괴해 버린다. 이런 종류가 모인 영역에는 싸움이 그칠 날이 없어 적개심 밖에 없다. 그 이유가 모든 이가 같은 것, 즉 섬김 받기만을 바라기에, 그들은 심정에서 살인을 저지른다.
그들 중의 얼마는 자기들이 주님의 포도원에서 일했다고 말한다. 그런데 그들은 동시에 계속적으로 자신들의 마음에 자기는 걸출하다고, 영광되다고, 명예가 높다고, 뿐만 아니라 이득까지 염두하고 있다. 그리고 천국에서 가장 큰 자가 되어 천사들의 섬김을 받으려 한다. 게다가 마음에서는 자신과 비교해서 타인을 경멸하고 있다, 고로 천국을 존재하게 하는 어떤 서로의 사랑도 그에게는 있지 않다. 그 대신 자기 사랑에 천국이 있다고 우기려 한다. 그 이유가 그들은 천국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이다. 이들은 첫째 이기를 바라나 마지막째 이다 (마. 19:30; 20:16;막. 10:31); 그리고 그들은 주님의 이름으로 예언했고 경이로운 많은 일들을 했다; 그러나 그들에게 말해진다, “나는 너를 모른다.” (마. 7:22, 23).
선행 안에 살고 있어 천국에 갈 만한 심정의 천진난만함으로 부터 있는 이들의 경우는 위와 매우 다르다; 이들은 천국에 갈 수 있는 것이 (주님께서) 약속하신 어떤 것 때문이라고 간주하고, 그것은 주님의 공적 때문임을 즉시 인정하고 있다; 그 이유가 선행의 삶이 이 인정함을 받치고 있기 때문이다. 진정한 선행은 모든 진리를 사랑한다.

가나안의 모든 토지. 이는 천국의 왕국을 의미하는데, “가나안의 토지”의 의미가 천국의 왕국이기 때문이다.

영원한 소유로. 이는 영원인 것을 의미하는데, 설명은 필요 없을 것이다. 그들이 “소유자”, 또는 “상속자”라 불리는데 이는 그들의 공적 때문이 아니라 주님의 자비로부터 이다.

그리고 나는 그들에게 하느님이 되리라. 이는 하느님이 한 분이시다를 의미한다. 이는 여기서의 주제가 신성 본질에 하나가 되어진 주님의 인간 본질 임에서 확실해진다. 그것 때문에 그 자체도 마찬가지로 하느님이 되어 있다. 고로 “나는 그들에게 하느님이 되리라”는 내적 의미에서 하느님이 한 분이시다를 의미한다.

9절. 그리고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말하셨다. 너는 내 언약을 지키라, 그리고 너와 네 후손이 대대로 지키라.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말하셨다. 이는 지각을 의미하는데, 역사적 말씀에서 “하느님께서 말하셨다”의 의미가 지각하는 것임에서 알게 된다.

너는 내 언약을 지켜라. 이는 한층 더 밀착된 합일을 의미하는데, “언약”의 의미가 합일과 결합임에서 분명해진다. 언약이 여기서 반복된 것은 (강조를 뜻하는 바) 한층 더 밀착된 합일을 표시한다. 역사적 의미에서 이것은 아브라함에 관련되고, 그가 언약을 지키는 것 만을 의미한다; 그러나 내적 의미에서는, 이 의미 안에서 주님이 취급되고, 아브라함 대신 주님을 서술하는 바, 이는 더 밀착된 합일을 의미한다. 주님의 인간 본질이 신성 본질과 하나가 되어짐은 단 번에 이루어진 결과물이 아니었다. 그 대신 이는 그분의 삶의 모든 과정을 통하여, 즉 유아로부터 세상에서의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를 아우른 과정에서 이루어진 결과물이다. 이런 식으로 그분은 주님의 인간 본질을 신성되게 하시었고, 합일에 이르러 가셨는데, 요한복음서에서 말해 준다:
예수께서 말했다, 아버지께서는 당신의 이름을 신성되게 하소서; 하늘로부터의 음성이 왔 다: 나는 둘 다를 신성되게 했었고, 그것을 다시 신성되게 할 것이다 (요. 12:28).

너와 너 이후 네 씨. 이는 그분으로부터 그분을 믿는 이들과 결합함이 있다를 의미한다. 이는 “씨”의 의미가 신앙임에서 알게 되는데 이미 여러 번 설명해 왔다; 그리고 “너 이후”의 의미가 그분을 따르는 것임으로부터도 분명해진다. 신성 본질이 인간 본질과, 그리고 인간 본질이 신성 본질과 합일됨은 이미 취급했었다; 그리고 여기서 취급되는 주제는 그분을 믿는 이들과의 주님의 결합이다, 그래서 “너”라는 단어의 반복이 있다; 즉 “너는 내 계명을 지켜라, 너와 네 씨”; 그리고 이 단어의 반복은 씨와 연결되어 말해지는데, 이는 내적 의미에서 결합이 의미되어진다. 그리고 사실상 씨인 이들과 더불은 결합이다, 이를 수단으로 선행의 신앙이 의미되어진다.
더욱이 아버지와의 그분의 합일을 말하실 때, 그분은 즉시, 그리고 인류와의 그분의 결합을 깨뜨림 없이 말하신다; 그 이유는 이것이 합일의 원인이기 때문이다. 요한복음서에서:
그들 모두 하나가 되기를 바랍니다; 당신 아버지가 내 안에 계시듯, 그리고 내가 당신 안 에, 그들 역시 우리 안에서 하나가 되게 하십시오: 당신이 나에게 준 영광을 나는 그들에게 주었습니다; 우리가 하나인 것 같이 그들이 하나이게 해 주십시오, 나는 그들 안에, 그리고 당신은 내 안에, 나는 당신의 이름을 그들에게 알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당신이 나를 사 랑하셨던 그 사랑이 그들 안에 있게 하십시오 (요. 17:21, 22, 26);
위 구절로부터 명백해지는 것은, 주님께서는 아버지와 그분 자신의 합일에서 그분 자신이 인류와 결합함을 보셨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분은 이것을 심정에서 가지셨다는 것, 그 이유는 이것이 그분의 사랑이었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모든 결합은 사랑을 수단으로 결과되기 때문, 사랑이 결합 그 자체이다.
다시 같은 복음서에서:
내가 살기 때문에 너희 역시 살 것이다; 그 날에 너희는 내가 아버지 안에 있다는 것을 알 것이다, 그리고 너희는 내 안에, 그리고 나는 너희 안에 있을 것이다; 내 명령들을 가지고 있고 그것을 지키는 자는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요. 14:19-21);
위 구절로부터 마찬가지로 분명해지는 것은, 그분의 인간 본질이 그분의 신성 본질과 합일됨에서 주님은 자신이 인류와 결합함이 실현됨을 보셨다는 것이다. 이것이 그분의 목적이다, 그리고 이것이 그분의 사랑이다, 그분 자신이 아버지와 합일됨에서 인류의 구원을 바라보시는 것이 그분의 가장 깊은 쪽에서의 기쁨이셨다. 그분과 하나가 되는 방법은 그분의 명령들을 간직하고 행하여 주님을 사랑하는 것임을 서술하셨다.
다시:
아버지 당신의 이름을 신성되게 하소서; 그로 말미암아 하늘로부터 음성이 왔다, 나는 둘 다를 신성되게 했다, 그리고 그것을 다시 신성되게 할 것이다. 예수께서 말하셨다, 이 음성 은 나를 위하여가 아니라 너희를 위하여서 이다. 그러나 나는, 내가 땅으로부터 들려질 때, 내 뒤를 따라 모두를 끌어당길 것이다 (요. 12:28, 30, 32);
“신성화 하심(신성이 되심, glorification)”에 의해 합일이 뜻해진다; 그리고 그분 자신이 아버지와 합일됨에서 그분은 자신이 인류와 결합함으로 간주하시어 공개적으로, “내가 들려질 때, 나는 내 뒤를 따라 모두를 끌어당길 것이다”하고 말하셨다.
무한 또는 최고의 신성이 인류와 결합함은 주님의 인간이 신성으로 만들어짐을 통하여 결과되었다. 그리고 이 결합이 주님으로 세상에 오시도록 한 원인이다는 것은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마음에 문의하는 신비함들 이다. 그리고 그들이 납득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들은 그것을 믿지 못한다; 그리고 그들이 그것을 납득 못한 이유로 해서 믿지 못하기 때문에, 이 신비함들은 그들에게 물의를 일으키고 장애물이 되고 있다. 이것이 그렇다는 것을 나는 다른 삶으로 오는 이들로부터의 많은 경험으로부터 배웠다. 이들의 많은 이들, 세상에서 재능있다는 이들의 대부분이 주님을 단지 인간이되셨다라고 생각하고, 외적 형체에서도 여느 사람들처럼 있으셨다고 생각할 때, 그분이 견디신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분이 우주를 통치하신다는 생각은 그들의 의문점이 되어 그들의 영역을 채우고 만다. 그 이유가 그들이 육체의 삶에서 이 생각이 그들에게 장애물로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육체의 삶 당시 장애물이 된 생각을 폭로하지 않으면서, 막연히 바깥쪽 신성함의 측면에서 그분을 숭배했었다. 그러나 다른 삶의 경우, 내면들이 열리어 있다. 그리하여 그들로부터 방산되는 기운에 의해 그들의 내면들은 명백해진다. 이러므로 나는 그들이 무슨 신앙에 있었는지를, 그들이 주님에 관하여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를 분명하게 지각했다.
이런 경우를 조금 더 보기 위하여 이런 주제를 생각해 보자. 인간에 있는 모든 천적인 것이 멸해진 후, 즉 하느님에 대한 모든 사랑이 없어진 후, 그리하여 더 이상 선한 의지가 있지 않은 후, 인류는 신성으로부터 분리되었다; 그 이유가 사랑 외에 결과 되게 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기 때문이다. 이것이 절멸되었을 때, 분단이 있었다; 그리고 분단이 있자, 근절됨과 절멸됨이 뒤따랐다. 그러므로 그 때 주님이 세상에 오신다는 것에 대한 약속, 즉 주님은 인간을 신성에 하나가 되게 하신다는 약속이 있었다. 이 합일됨이 그분 자신 안에서 결과됨을 수단으로, 그분 자신과 인류와의 결합이 사랑의 신앙과 선행의 신앙을 수단으로 결과되었다.
창. 3:15의 첫 약속의 때로부터 주님을 사랑함의 신앙은 결합을 결과되게 했다. 그러나 온 세상에 사랑의 어떤 신앙도 남은 것이 없었을 때, 그 때 주님께서 오시어 인간 본질을 신성 본질에 하나가 되게 하셨다. 그리하여 그것들은 하나이었다. 이에 대하여는 그분 자신이 명료하게 말하셨다; 그리고 동시에 그분은 진리의 길을 가르치셨다, 그분을 믿는 모든 이, 즉 그분과 그분의 것들을 사랑하는 모든 이, 그리고 보편적 인류를 향한 사랑인 그분의 사랑 안에 있는 이, 고로 이웃을 향한 사랑 안에 있는 모든 이는 그분과 결합되고 구원된다는 것이다.
주님 안에서 그분의 인간이 신성으로 만들어졌을 때, 그리고 신성한 인간이 되셨을 때, 그 결과는 무한 또는 최고의 신성의 유입이 인간에게 있게 되었는데, 이외 달리는 가능할 수 없었다; 그리고 이에 추가된 결과는 영들의 세계에서 넘실대는 거짓의 끔찍한 설득력과 악의 끔찍한 탐욕들을 이 세상으로부터 막 도착하는 혼들에게 감염시키려는 것이 사라져버렸음 이다; 동시에 설득력과 탐욕들 안에 있는 자들은 지옥으로 내던져짐으로 해서 분리되었다. 이것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인류는 멸해지고 말았을 것이다. 그 이유가 주님께서는 영들을 수단으로 인류를 통치하시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이외 다른 방법으로는 사라질 수 없었다. 그 이유가 신성이 인간의 합리적인 것들을 통하여 내적 의미 속의 것들 안으로 들어 가 역사하실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인간의 것들이 신성과 하나를 이루지 않을 경우, 인간은 최고의 신성과는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이다. 이 신비함보다 더 깊은 신비함은 지상 어디에도 없을 것이다.

대대로. 이것이 신앙으로부터 있는 것들을 의미한다는 것은 “대대로”와 “출생들”이 신앙으로부터 있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10절. 이것은 내 언약이다, 이것을 너는 나와 너, 그리고 너 이후 네 씨 사이에서 지킬 것이다, 모든 남성은 너에게 할례를 받아라.

이것은 내 언약이다, 이것을 너는 나와 너 사이에 지킬 것이다. 이것은 모든 이와 주님이 결합했다는 표이다. 이는 “언약”이 결합을 의미함에서 알게 되는데 이미 설명했었다. 이것이 여기서 결합의 표(token)이다는 것은 다음 절에서 확실해진다. 11절에서 “언약의 표시(sign)”라 불리우고 있다: “너는 너의 포피의 살을 할례를 받을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나와 너 사이에 언약의 표시로 있을 것이다.” 교회의 모든 외적 의식들은 언약의 표시들이다, 그리고 신성하게 준수되어지기로 되어 있다. 그 이유는 내적인 것들이 그것들에 의해 의미되어지기 때문이다. 여기서 취급되는 할례 역시 (내적인 것들을) 표현하고 의미하는 의식 외에 더 다르지 않다. 이는 이것이 이어지는 대목에서 설명될 것이다. 그런데, 말씀의 많은 구절들에서 이런 의식들이 “언약”이라 불리우는데, 그 이유는 외적인 것들이 내적인 것을 표현하여 의미되기 때문이다. 내적인 것은 언약에 속하는 것이다, 그 이유는 내적인 것들이 결합을 결과되게 하는데 효력이 있기 때문이다. 외적인 것들은 내적인 것을 수단으로 해야 결합을 결과되게 한다. 외적인 것들은 언약의 단순한 표시들, 또는 결합의 표이어서 그것들은 내적인 것을 마음에 상기하는데 유용하고, 이러므로 해서 결합이 촉진된다. 언약에 속하는 모든 내적인 것, 또는 결합을 결과하는 것은 사랑과 선행에 관련되고, 사랑과 선행으로부터 진행된다; 그 이유가 이 둘 위에, 즉 하느님을 자기보다 더 사랑하는 것, 그리고 이웃을 자기 같이 사랑하는 것에 “율법과 예언들이 달려 있기” 때문이다. 즉 사랑과 선행은 신앙의 보편적인 교리이기 때문이다 (마. 22:34-39; 막. 12:28-35).

그리고 너 이후 네 씨. 이는 그분을 믿는 이들을 의미한다. “씨”의 의미가 선행의 신앙이기 때문에서 이다.

모든 남성은 할례 받아질 것이다. 이는 깨끗함을 의미하는데, 이는 “할례 받음”의 내적 의미에서 표현되고 파생되는 의미에서 파악된다. 할례, 또는 포피를 잘라냄은 천적인 사랑을 방해하고 더럽히는 것들을 닦아 냄, 또는 제거함을 의미한다, 그리고 (자기 사랑의) 탐욕들의 악들과 이 악에서 파생되는 거짓들을 제거함, 닦아냄을 의미한다. 이런 의미를 지니는 이유는 남성, 여성 모두의 생식 기관은 천적 사랑을 표현하기 때문에서 이다. 주님의 왕국의 천적인 것들을 구성하는 세 부류의 사랑이 있다. 즉 결혼의 사랑, 유아들을 사랑함, 그리고 공동체를 사랑함, 또는 서로의 사랑이다. 결혼의 사랑은 이 셋 중 제 1이다. 그 이유는 이 사랑 내에 가장 큰 유용한 목적, 즉 인류의 번식, 그로 말미암은 주님의 왕국의 번식이 있는 바, 이것은 일종의 양성소이다. 유아들을 사랑함이 그 다음을 잇고, 이 뒤를 이어 공동체를 사랑함, 또는 서로의 사랑이 있다. 이 사랑들을 덮고 있고, 거리적 거리고, 더럽히는 것은 무엇이든 포피에 의해 의미된다; 그리고 이것을 잘라냄, 또는 할례, 그러므로 표현물이 되었다. 그 이유가 탐욕들의 악과 이 악에서 파생되는 거짓들이 제거되는 만큼에서 인간은 깨끗해지기 때문이다; 그 만큼에서 천적 사랑이 나타날 수 있다. 자기를 사랑함이 천적 사랑에 얼마나 반대되는지, 얼마나 더러운지는 누누이 말해 왔다. 이상 말해진 것에서도 할례가 내적 의미에서 깨끗함을 의미한다는 것은 잘 보여 주었을 것이다.
할례가 언약의 표시, 또는 결합의 표시이다는 것은 포피의 할례가 심정의 할례가 없을 경우 아무 것도 아닌 것이 되고 만다는 것을 숙고해보면 더 확실히 알게 된다. 포피의 할례가 더러운 사랑들로부터 깨끗케함, 또는 심정의 할례를 의미한다는 것은 아래 인용 구절로부터도 더 확실해진다, 모세의 책에서:
여호와 네 하느님이 너의 심정에, 네 씨의 심정에 할례를 베푸실 것이다, 그리하여 너희는 온 심정을 다하고, 온 혼을 다하여 여호와 하느님을 사랑하며, 너희가 살 것이다
(신. 30:6);
위 구절에서 “심정에 할례를 베푸는”것이 더러운 사랑들로부터 깨끗해지는 것, 그리하여 여호와 하느님, 또는 주님을 온 심정을 가지고, 온 혼을 가지고 사랑하는 것임이 분명해진다.
예레미야서에서:
너의 묵힌 지면을 갈아 엎어라, 그리고 가시나무들 사이에 씨를 뿌리지 말아라; 네 자신을 여호와에게 할례를 받아라, 그래서 네 심정의 포피를 제거하라, 오 유다의 사람과 예루살렘 의 주민들아 (예. 4:3, 4);
“여호와로부터 자아를 할례 받고, 심정의 포피를 제거하는”것은 천국적 사랑함을 방해하는 것들을 제거하는 것이다; 심정의 할례가 포피의 할례에 의해 의미되어지는 내면의 것들임을 위 구절이 보여준다. 모세의 책에서:
너희는 네 심정의 포피에 할례를 행할 것이다, 그리하여 네 목이 더 이상 굳어져 있게 하 지 말 것이다, 고아와 과부의 재판을 (공정하게) 실시하고, 외국인에게 빵과 의복을 주어 그를 사랑하라 (신. 10:16, 18);
위 구절 역시 “심정의 포피에 할례를 실시하는 것”이 더러운 사랑들의 악으로부터, 그리고 이 악에서 파생된 거짓으로부터 순수해지는 것임을 분명히 보여준다. 사랑의 천적인 것들이 선행의 이런 일들, 즉 “고아와 과부의 재판을 (공정하게) 실시하는 것”, 그리고 “외국인에게 빵과 의복을 주어 그를 사랑하는 것”에 의해 묘사되어 있다.
예레미야서에서:
보라 내가 포피에 할례를 받은 모든 이를 방문하는 날이 오고 있다, 즉 이집트를, 유다를, 에돔을, 암몬의 아들들을, 모압을, 광야에 거주하는 관자놀이를 깍는 모든 자를 (방문할 것 이다); 그 이유가 모든 나라들이 할례를 받지 않아서 이고, 이스라엘의 모든 가문이 심정에 할례를 받지 않아서 이다 (예. 9:25, 26);
위에서 분명해지는 바, 할례는 깨끗하게 함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그 이유가 그들이 “포피에 할례를 받은” 자라고 불리우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전히 할례를 받지 않은 나라들이라고, 유대인들까지 견책되고 있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심정을 할례 받지 않았다”라고 말해진다, 이는 모세의 책에서도 동일하다:
그 다음 만일 그들의 할례 받지 아니한 심정이 겸허해진다면 (레. 26:41).
“포피”에 의해, 그리고 “할례를 받지 않은 자”에 의해 불결함이 의미된다. 이사야서에서:
깨어라, 깨어라, 오 시온아, 네 강함을 입어라; 거룩함의 성, 오 예루살렘아 네 아름다움의 의복을 입어라; 이후로부터 할례를 받지 않은 자와 불결한 자가 네게로 오지 못할 것이다 (이. 52:1).
“시온”에 의해 천적 교회가, “예루살렘”에 의해 영적 교회가 의미되어진다. 이 교회들 안으로 “할례를 받지 않은 자”와 “불결한 자”는 들어가지 못한다.
할례가 언약의 표시, 또는 결합의 표이다는 것이 나무의 열매들을 수단으로, 이것 역시 할례 받아져야 한다고 하여 위 구절과 마찬가지의 의미가 표현되어지고 있다. 모세의 책에서:
너희가 토지에 들어가서, 그리고 식품을 위해 온갖 나무들을 심을 때, 너희는 그것의 열매 의 포피를 할례를 받게 할 것이다. 그것들은 삼 년을 할례 받지 아니한 것으로 너희에게 있을 것이다, 그것을 먹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사 년째에 그것의 모든 열매는 거룩할 것인 즉, 주님에게 드려 찬양할 것이다 (레. 19:23, 24);
“열매들”, “심정”처럼 선행을 표현하고 의미한다. 이는 말씀의 여러 구절로부터 알려지고 있다; 그로 그들의 “포피”는 선행을 오염되게 하고 방해하는 불결함을 의미한다.
경이롭다 말해지는 것은, 천국에 있는 천사들이 자연적 더럽힘으로부터 깨끗케함이라는 생각을 아주 빠르게 가질 때, 할례 비슷한 어떤 것이 영들의 세계에서 표현되어진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천사의 생각들이 영들의 세계로 건너 가 거기서 표현물이 되기 때문이다. 유대 교회에서 표현 의식들의 어떤 것은 이런 표현물에서 근원되었는데, 어떤 것은 그렇지는 않았다. 영들의 세계에서 할례를 빨리 받기를 표현한 이들은 천국 안으로 입장되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들이 입장이 승인 되기 전, 이런 표현이 있었다. 이것은 왜 여호수아가 그들이 요단을 건너 가나안의 토지에 진입했을 때, 백성들에게 할례를 받으라고 명령했었는지를 보여 준다. 그 이유가 가나안의 토지로의 진입은 천국 안으로 신실한 자의 입장 승인을 표현했기 때문이다.
이런 표현 때문에 할례는 두 번째로 명령되었다. 여호수아서에서: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말하셨다, 너는 바위검을 만들어라, 그리고 두 번째로 이스라엘의 아들들에게 할례를 베풀어라, 그리고 포피의 언덕에서 이스라엘의 아들들에게 할례를 베풀 었다; 그리고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말하셨다, 오늘, 나는 이집트의 수모를 너로부터 굴 려 없앴다; 그리고 그는 이 장소의 이름을 길갈(굴려 없앰)이라 불렀다 (여. 5:2, 3, 9);
“바위검”은 그들이 흡입한 진리들을 의미한다. 이것 가지고 그들은 더러운 사랑들을 징계하고 흐트리는 것이다; 진리에 관한 지식 없이 깨끗해짐은 가능하지 않다.

11절. 너는 너의 포피의 살에 할례를 받아라, 그리고 이것은 나와 너 사이에 언약의 표시(sign)이리라.

너는 너의 포피의 살에 할례를 받아라. 이는 자기 사랑함과 세상을 사랑함을 제거함을 의미한다. 이는 “할례”의 의미와 표현이 더러운 사랑들로부터 깨끗케 함이다에서 분명해진다; 그리고 “살”의 의미가 인간의 자기 자신이다로부터도 알게 된다. 인간의 자기 자신인 것은 자기를 사랑함과 세상을 사랑함밖에 없다는 것, 고로 이 사랑으로부터 파생되는 모든 탐욕들이다는 것, 이것들이 얼마나 더러운지는 제 1권에서 이미 살폈다. 제거되어야 하는 인간의 자기 자신을 의미하는데 “표피의 살”이라는 표현이 사용되고 있다.
주님으로부터 천국의 사랑의 흐름을 방해하는 두 개의 사랑과 탐욕들이 있다; 이 사랑들이 내면의 인간과 외적 인간을 통치하고 소유권을 쥐고 있을 때, 그것들은 안으로 흐르는 천국의 사랑을 왜곡하거나 오염시키거나 거절하거나 질식시킨다; 그 이유는 이 사랑들은 천국의 사랑에 반대되기 때문이다. 이에 관해서는 주님의 신성한 자비로부터 차 후 살필 것이다. 그러나 이 사랑들이 제거되는 만큼, 주님으로부터 흐르는 천국의 사랑은 나타나기 시작한다, 그렇다, 내면의 인간에게 빛을 주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만큼에서 그는 자기가 악과 거짓 안에 있다는 것을 보기를 시작한다; 그 다음, 그가 실제로도 불결함과 더러움에 있다는 것을 보기를 시작한다; 마지막으로 이것이 자기 자신이었다는 것을 보기 시작한다. 거듭나아지는 이들은 이런 사랑들이 제거되어지는 이들과 더불어 있다.
이 제거됨은 거듭나지 않은 이들에게서도 관찰이 가능하다. 그 이유가 이런 사랑들의 탐욕들이 그들 안에서 잠잠해 있을 때, 즉 때로 그들이 거룩한 명상을 할 때 발생되듯, 또는 탐욕들이 수그러져 있을 때, 즉 그들이 불행이나 죽게 아프거나, 죽음의 문턱에 있을 경우, 그 때 그들의 육체적, 세상적인 것들이 사라진 듯 수그러들어, 마치 죽은 듯 하여 있기 때문에 그들은 천국 빛의 어떤 것에 주목하고 그로 인해 위로를 받는다. 그러나 이런 인간과 더불어 탐욕이 제거되었는 지는 의문으로 남아 있다. 그 이유는 그들이 이전 상태로 되돌아 올 때, 그들은 즉시 똑같은 탐욕의 길로 빠져 들기 때문이다.
악한 자와 더불어도 역시 신체적, 세상적인 것들이 수그러들어 있을 수 있다, 그리고 그들도 마치 어떤 천국적 분위기 안으로 들려 있을 수 있다. 마치 다른 삶에서 거행되는 어떤 절차 비슷한 것이다. 거기서 이것은 막 도착한 혼들에게 주로 있는 절차인데, 그들이 주님의 영광을 보기를 강렬하게 바라기 때문이다. 그렇게 바라는 이유가 세상 삶에서 천국에 관하여 많이 들었던 것이 있어서이다. 위에 열거한 외적인 것들이 그들을 수구러들게 하면, 그들은 첫 천국으로 운반되어 자기들이 바란 것을 향유해본다. 그러나 그들은 거기에 오래 머물 수 없다. 그 이유는 그들이 육체적, 세상적인 것들의 수그러듦에만 있을 뿐 천사들 같이 제거된 상태가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가 명심할 사항은, 천국의 사랑은 주님으로부터 인간 안으로 계속적으로 흘러 들고 있다는 것, 이 흘러 듦을 방해하고 차단하여 인간에 의해 받아지기를 불가능해지게 하는 것은 위 두 사랑들로부터의 탐욕들과 거기서 비롯되는 거짓들밖에 없다는 것이다.

2042. 그리고 이것은 나와 너 사이에 표시가 될 것이다. 이는 깨끗함을 표현하고 의미한다는 것은 위에서 이미 살핀 바 있다; 즉 할례는 더러운 사랑들로부터 깨끗케하는 것밖에 더 아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내적인 어떤 것을 표현하고 의미하는 외적인 의식일 뿐이다는 것, 이것은 언약이 아니라, 언약의 표시이다.

12절. 그리고 팔 일된 아들은 너에게 할례를 받을 것이다, 대대로 모든 남성, 그가 집에서 태어났든, 네 씨로부터가 아닌 낯선 사람인 모든 아들로부터 은을 주고 산 자이든 할례를 받아야 하리라.

그리고 팔 일된 아들. 이는 무엇이든 께끗해짐의 어떤 시작을 의미하는 것은 “팔 일”의 의미에서 알 수 있다. 7 일로 이루어지는 “주”는 어떤 상태, 또는 시간의 전체 기간을 의미하는데, 그 기간이 거듭남에서 이든, 시험에서 이든, 특수적 측면인 인간에 관해서 이든, 일반적 측면인 교회에 관해서 이든 모두에 공통되는 의미이다; 고로 기간이 “주”라 불리우는 것은 그것이 천 년 속의 주 이든, 백 년, 십 년, 또는 많은 날들, 시간들, 분들 등등 속에서 이든 그렇게 불리운다. 그리고 팔 일째 날은 새로운 주의 첫째 날인 바, 이것은 무엇이든 어떤 시작을 의미한다. 또한 이것은 할례가 깨끗하게 함의 표현물 자체이듯, 깨끗함의 때가 팔 일째 날임을 보여 준다; 그때에 그들이 더 순수한 상태로 들어가서 그 기간에서 순수해지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이런 이유를 위해서, 즉 “할례”가 깨끗하게 함을 의미했듯, “팔 일째 날”이 깨끗해짐은 모든 때들에서 결과되어야 한다를 의미하기 위해서, 고로 새로운 시작으로부터 같이 언제나 결과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너에게 할례를 받을 것이다. 이것이 깨끗하게 함을 의미하는 것은 “할례”의 표현과 의미가 더러운 사랑들로부터 깨끗하게 함이다에서 분명해진다. 자기를 사랑함과 세상을 사랑함 안에 있는 이들이 자기들이 실제로 있는 더럽고 불결한 것들에 있다고 믿는 것은 가능할 수 없다. 그 이유가 달래주고, 호의를 보이고, 매혹시키는 어떤 기쁨과 즐거움이 있고, 그것들이 그 생명을 더 사랑하게 하고 여느 다른 생명보다 우선 좋아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것 때문에 더럽고 불결한 사랑 안에 악은 없다고 상상하게끔 한다. 그 이유가 누군가의 사랑과 거기서 파생되는 생명에 호의를 보일 경우, 자기의 사랑은 선이라고 상상해버리기 때문이다. 여기에 그의 합리성이 동의하고, 확증하는 거짓들을 넌지시 말하면, 그는 소경이 되어 천국의 사랑의 본성에 관해서는 아무 것도 보지 못하게 된다; 그리고 설사 그들이 천국 사랑의 본성을 본다 해도, 때는 이미 늦어, 그들은 자기들의 심정에서, 그것은 가엾은 관심사, 또는 무가치한 것, 또는 마음을 사로잡으려 드는 공상의 본성에서 나온 것, 병듦에서 발생하는 것이라 말한다.
어쨌든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의 생명, 그것들의 기쁨들과 즐거움과 더불어 더럽고 불결하다는 것은 합리적 능력을 선물 받은 이라면 잠깐 생각해 보아도 금방 식별될 것이다. 자기만을 사랑함은 시민 사회를 파괴하는 모든 악들의 근원이다. 이것으로부터, 불결한 구덩이로부터 같이 모든 증오함들, 모든 복수함들, 모든 잔인함들, 그렇다 모든 간음질들이 튀어나온다; 그 이유가 자기만을 사랑하는 자는 자기를 섬기지 않는 자, 자기를 좋아하지 않는 자, 자기를 존경하지 않는 자를 경멸하고, 호통치고, 미워한다; 그가 미워할 때 그는 앙갚음이나 잔인함밖에 궁리하는 것이 없다, 그리고 이런 것은 그가 자신을 사랑하는 정도에 비례해서 있게 된다. 이리하여 이 사랑은 사회와 인류를 파멸시킨다. 다른 삶에서 자기를 사랑함은 최고로 더럽다, 그리고 이것은 천국을 구성하는 서로의 사랑에 직반대 된다. 이에 관해서는 주님의 신성한 자비로부터 이어지는 것에서 더 말해질 것이다.
자기를 사랑함이 증오함들, 잔인함들, 간음질들의 근원이기에, 죄와 사악함, 역겨움, 모독함으로 불리우는 모든 것들의 근원이다. 그러므로 이 사랑이 인간의 합리적 부분 안에 있을 때, 그리고 그의 외적 인간의 공상과 탐욕 안에 있을 때, 주님으로부터 천국의 사랑의 유입은 쫓겨나거나, 악용되거나, 오염되거나 하고 만다. 이것은 흡사 냄새나는 배설물이 그것의 냄새로 주변의 향기나는 냄새를 오염되게 하는 것과 같다. 이것은 흘러드는 빛의 광선을 거절하여 어두운 색깔로 바뀌게 하는 물체와 같다. 이것은 호랑이나 뱀 같아서, 귀여움 받는 모든 것을 쫓아버리고, 물어 죽이거나 독을 내뿜어 죽게해서 양식으로 삼는 것과 같다. 이들은 타인의 최상의 의도와 친절함을 심술궂고 비난받아 마땅한 것으로 돌려 놓기조차 하는 사악한 인간 같다. 이상 살핀 바로부터도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의 이 두 사랑들은 잘라내어야만 하는 포피에 의해 의미되고 표현됨이 분명해진다.

모든 남성. 이는 신앙의 진리 안에 있는 이들이 의미되어진다. 이는 “남성”의 의미가 진리이기 때문이다. 신앙의 진리를 의미하는 “남성”이 여기서 명명되는 이유는 진리 안에 있는 자 외에는 아무도 더러운 사랑들로부터 순수해질 수 없기 때문이다. 진리로부터 인간은 순수한 것과 불순한 것, 그리고 거룩한 것과 불경한 것을 안다. 인간이 진리를 배우기 전 일 경우, 그에게는 주님으로부터 계속적으로 흐르는 천국의 사랑이 역사할 수 있는 매개체가 없는 셈이다. 그 이유가 천국의 사랑은 진리 외에는 받아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인간은 진리의 지식들을 수단으로 개혁되고 거듭나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가 진리의 지식들을 빨아들이기까지 개혁이든 거듭남이든 없다. 양심 자체도 신앙의 진리들을 수단으로 만들어진다; 그 이유가 거듭나는 인간에게 선물된 양심은 선한 것과 참된 것에 관한 양심이기 때문이다. 이것 역시 돌칼, 또는 “바위검”을 그들이 할례에서 사용하게 하신 이유이기도 하다.

대대로. 이는 신앙 속에 있는 것들(신앙으로부터 있는 것들)을 의미하는데, 이는 “대대로”와 “출생들”의 의미가 신앙으로부터 나와지는 것들을 의미하기 때문 이다.

“집에서 태어난 자”는 천적인 이들, 그리고 “은으로 산 자”는 영적인 이들, 고로 그들은 교회 내에 있는 이들을 의미하는데, 이는 “집에서 태어난 자”란 집 내부에 있는 이들을 의미함에서 알게 된다. 말씀에서 “집”은 천적인 것을 의미한다, 그 이유는 천적인 것은 가장 안쪽에 있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하느님의 집”이 보편적 의미에서는 주님의 왕국이라 불리운다; 덜 보편적 의미에서 그분의 교회라 불리운다; 그리고 특별한 의미에서 주님의 왕국, 또는 주님의 교회가 있는 인간 자신이라 불리운다. 인간이 “집”이라 불리울 때, 그 인간에 있는 신앙의 천적 평면이 의미되고, 그가 “성전”이라 불리울 때, 그 인간에 있는 신앙의 진리가 의미된다; 고로 여기서 “집에서 태어난 자”는 천적 수준에 있는 이들이 의미된다. 그러나 “은을 주고 산 자”는 영적 수준에 있는 이들인데, 이는 “은”의 의미가 진리이다에서 분명해진다. 고로 신앙의 영적 평면이 의미된다.
주님을 사랑함에 있는 이들이 천적 수준이라 불리운다. 홍수 이전 태고 교회는 이 사랑에 있었는 바. 이 교회는 천적 교회였다. 이웃을 향한 사랑에, 그로 말미암아 신앙의 진리에 있는 이들은 영적 수준이라 불리운다. 홍수 이후 고대 교회는 영적 교회였다. 영적 평면의 것과 천적 평면의 것의 구분은 제 1권에서 여러 번 다룬 바 있다. 여기서 말해진 것, 즉 집에서 태어난 이들은 할례를 받아야 한다는 것, 그리고 은을 주고 산 자도, 외국인들의 아들들도 할례를 받아야 한다는 것, 게다가 이 말은 13, 23, 27절에서 반복적으로 말해지는 바, 여기에 신비함이 있을 것이라고 누구나 추측이 될 것이다; 그러나 이 신비함은 내적 의미가 아니면 나타나지 않는다, 즉 집에서 태어난 자와 은을 주고 산 자는 천적, 영적 평면에 있는 이들, 고로 교회 내에 있는 이들을 의미한다는 것, 그리고 “네 씨로부터가 아닌 낯선 사람(외국인)인 아들”은 교회 밖에 있는 이들이 의미되고 있다.

네 씨로부터가 아닌 낯선 사람인 모든 아들로부터. 이는 교회 밖에 있는 이들을 의미하는데, 이는 “낯선 자인 아들”의 의미가 교회 내에서 태어나지 않은 이들, 고로 신앙의 선들과 진리들 안에 있지 않은 이들이다에서 알게 된다. 그 이유는 그들이 신앙의 선들과 진리들에 관한 지식들 안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낯선 자인 아들”은 외적 예배에 있는 이들을 의미한다. 창. 9:26에서의 이 의미는 교회 내에 있는 이들이 취급되면서 이다, 이에 비해, 여기서는 보편적 의미에서 주님의 교회가 취급되면서 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낯선 자인 아들”은 교회 내에서 태어나지 않은 이들, 곧 이방인들을 의미한다. 교회 밖에 있는 이방인들은 진리들 안에 있을 수는 있으나 신앙의 진리들 안에는 있지 않다. 그들의 진리들도, 십계명의 가르침 같이, 부모를 존경하라, 사람을 죽이지 말라, 훔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또는 타인에 속한 것을 탐내지 말라; 또한 신성이 예배되어지는 것 등등이 함유되어 있다. 그러나 신앙의 진리들은 영원한 삶, 주님의 왕국, 주님 자신에 관한 교리적인 모든 것들이다. 이것은 이방인들에게 알려질 수 없었는데, 그 이유는 그들이 말씀을 가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네 씨로부터가 아닌 낯선 자인 아들들”에 의해 의미되는 이들이 있다, 이들 역시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즉 깨끗해져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이는 그들도 교회 내에 있는 이들과 동등하게 순수해질 수 있다는 것이 그들이 할례를 받음에 의해 표현되고 있다. 그들이 더러운 사랑들을 거절할 때, 그리고 선행 안에서 서로가 살고 있을 때, 그들은 깨끗해진다. 그 이유가 이때 그들이 진리들 안에서 사는 것이고, 모든 진리들은 선행 속에 있기 때문이다. 육체의 삶이 아닌 다른 삶에서의 경우, 그들은 신앙의 진리들을 꾸준히 흡입한다. 그 이유는 신앙의 진리들이 선행의 내면의 진리들이기 때문이다. 이때 그들은 흡입한 선행의 내면의 진리들 외의 어떤 것도 사랑하지 않는다. 선행의 내면의 진리들 안에 주님의 왕국은 존재한다.
저쪽 삶에서는 신앙의 지식들에 관한 기억 속의 지식은 아무 쓸모가 없다. 가장 나쁘다. 그 이유가 지옥에 있는 자들도 천국에 있는 자들 못지 않게 이 지식 안에 있기 때문이다. 쓸모 있는 것은 지식들에 따른 생활이다. 그 이유가 지식을 지니는 목적은 생활에 응용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지식들이 삶을 위하여 배워지지 않으면, 배워진 지식들은 똑똑하다는 세상의 평판을 위해, 그로부터 이득을 챙기기 위해, 명성과 재물을 얻기 위한 것 말고는 유용함이 없게 된다. 이로부터 다시 분명해지는 것은, 신앙의 지식으로 부터의 삶은 선행의 삶과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율법과 예언들, 즉 신앙의 보편적 교리, 그것의 모든 지식과 더불어 이것들은 주님을 사랑함과 이웃을 향한 사랑 안에 존재한다; 이는 마. 22:34-39, 막. 12:28-35에 있는 주님의 말씀에서 발견된다.
그러나 여전히 교리적인 것들, 즉 신앙의 지식들은 선행의 생명을 만들어 내는데 가장 필요한 것이다. 선행의 생명은 신앙의 지식들 없이는 만들어질 수 없다. 선행의 생명은 사후 구원하는 생명이다. 신앙의 어떤 생명도 선행의 생명 없이는 결코 만들어지지 않는다. 그 이유가 선행의 생명 없이 신앙의 어떤 생명도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사랑과 선행의 생명 안에 있는 그들은 주님의 생명 안에 있다. 이 생명 외의 다른 생명을 가지고서는 누구도 주님과 결합할 수 없다. 이로부터 명백해지는 또 하나는, 신앙의 진리가 진리로서 결코 인정되어질 수 없는 경우에 대해서이다. 즉 그것들이 선행 안에 이식되지 않으면, 입술을 가지고 말을 많이 해서 있게 되는 신앙의 진리들에 대한 인정은 결코 인정이 안된다는 것이다. 신앙의 진리들은 그 각각이 선행을 목적으로 가지지 않으면 심정에서, 또는 내향적으로 이 진리들은 선행을 부정하고 있다. 선행이 진리와 함께 있지 않다면, 이 진리들은 선행을 거절하고 있는 것이다. 이럴 경우, 외면이 거두어질 때, 즉 다른 삶에서와 같을 때, 즉 내면들이 드러나 보일 때, 진정한 신앙의 진리들에 지독하게 반대되어 있다. 인간이 선행의 생명을, 즉 서로의 사랑을 가지고 있지 않은 채 저 세상으로 건너 오면, 그가 이 생명을 받는 것은 지독하게 불가능하다. 그 이유는 그들이 그것에 반대하거나 미워하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사후 인간은 지상에서 지녔던 똑같은 생명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이런 인물들이 서로의 사랑이 있는 공동체에 접근만 해도 그들은 전율하고, 덜덜 떨고, 고문 당함을 느낀다.
이런 인물들은 설사 그들이 교회 내에서 태어났다 해도 “심정이 할례를 받지 않은, 살에 할례를 받지 않은 낯선 사람들인 아들들”이라 불리우고, 그들은 거룩한 장소, 즉 주님의 왕국 안으로의 입장이 승인되지 않는 자이다. 에스겔서에서:
심정이 할례를 받지 않은 아들, 살에 할례를 받지 않은 아들은 내 성소에 들어 오지 못할 것이다 (겔. 44:7, 9),
다시:
너는 에덴의 나무 사이에서 영광과 위대함에서 누구 같이 될 것인가? 그리고 너는 더 낮은 땅 아래로 에덴의 나무들과 함께 가져다 놓아, 너는 검으로 살육 당한 자와 더불어 할례를 받지 않은 자 사이에서 누워있을 것이다 (겔. 31:18);
위에서 바로가 취급된다. 바로에 의해 일반적 측면에서의 기억 속의 지식들이 의미된다. (1164, 1165, 1186, 1462항 참조.); “에덴의 나무들”과 더불어 더 낮은 땅으로 내려가는 그들은 기억 속의 지식들 중 신앙에 관련한 지식들을 의미한다. 이 모두는 내적 의미에서 “할례를 받지 않은 자”가 무엇인지를, 즉 더러운 사랑들에 있는 자, 그들의 생명을 보여주고 있다.

13절. 네 집에서 태어난 자는 할례를 꼭 받아야 하리라, 그리고 은을 주고 산 자. 그리고 내 언약은 너의 살에 있을 것이고, 영원한 언약을 위하여 이다.

할례를 꼭 받아야 할 것이다. 이는 그들이 자신들로부터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을 완전히 제거해야 한다는 것, 이 실행은 교회 내에 있는 이들, “집에서 태어난 이들”, 그리고 “은을 주고 산 자들”에 의해 있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할례”의 표현이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으로부터 깨끗해지는 것에서 알 수 있다. 여기서 할례를 받으라는 말이 반복되고 있다. 즉 “꼭 받아야 한다, circumcising he shall be circumcised”라고 말해지고 있다. 반복된 말로 그것의 필요성을 표현하고 있다. 즉 이 사랑들로부터 완전히(wholly) 깨끗해짐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그리고 완전한 깨끗해짐이 교회 내에 있는 이들에게 필수이기 때문에 한 문장을 구성하고 있다. “낯선 자인 아들들”은 거기에 포함되고 있지는 않다. 그 이유가 이들은 교회 밖의 사람들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집에서 태어난 자와 은을 주고 산 자에 관한 앞 절에서 말한 것의 반복으로부터 모든 이가 눈치채는 것은 글자 의미로부터 보여지지 않는 신성한 신비함들이 이 반복에 있을 것이라는 점이다. 그 신비함들은 이렇다, 즉 이 두 더러운 사랑들로부터 깨끗해짐은 교회 내에 있는 대부분의 모든 이에게 필수 사항이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교회 내에 있는 이들은 자신들이 거룩한 것들을 불순한 것이 되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을 교회 밖의 사람, 즉 이방인들은 할 수 없다; 따라서 지옥에 떨어지는 위험성은 전자의 경우에 더 크다. 더 나아가 교회 내에 있는 이들은 신앙의 진리 자체에 반대되는 거짓 원리들을 만들어 낼 수 있다, 그리고 그것들을 빨아들여 간다. 이에 비해 교회 밖의 사람은 이것은 할 수 없다, 그 이유는 그들은 신앙의 진리들에 무지하기 때문이다. 고로 전자는 거룩한 진리들을 모독할 수 있으나, 후자는 그렇지 않다.

네 집에서 태어난 자, 그리고 네 은을 주고 산 자. 이는 두 부류의 교회 내에 있는 이들, 즉 천적 수준과 영적 수준에 있는 이들을 뜻한다.

내 언약이 네 살에 있을 것이다. 이는 불순한 상태에 있는 인간과 결합하심을 의미하는데, 이는 “언약”의 의미가 결합이다로부터, 그리고 “살”의 의미가 인간의 자기 자신이다로부터 분명해진다. “내 언약이 네 살에”가 주님께서 불순한 상태의 인간과 결합하심에 주목해보자: 인간과 더불어 순수한 지적 진리, 즉 신성으로부터의 진리(truth Divine)는 없다; 그 이유는 인간에 속해 있는 신앙의 진리들은 진리의 나타남(외관, 가상, appearance)이기 때문이다, 하여 이 껍질에 감각들의 오류들이 인접해 있다, 그리고 이것들에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의 탐욕들에 속하는 거짓들이 인접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 있는 것이 인간에 속해 있는 진리들이다. 이 진리들이 얼마나 불순할지는 그것들에 인접해 있는 것이 무엇인지 만을 보아도 짐작되고도 남는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여전히 이런 불순한 진리들에 있는 인간에게 자신을 결합하신다, 그 이유는 그분께서 순진과 선행을 가지고 그것들에게 생명을 불어넣어 생기 있게 하시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양심을 만들어 내신다. 양심의 진리들은 다양하다, 즉 그것들은 각 인물의 종교에 따라서 있게 된다; 그리고 이런 진리들, 그것들이 신앙의 선들에 반대되지 않는 조건이라면, 주님께서는 이것에 폭력을 받지 않게 하신다. 그 이유는 그들이 그 진리들을 흡입했고, 그것을 거룩한 것으로서 간주하여 왔었기 때문이다. 하여 주님은 그것들을 부러뜨리시지 않고 구부리신다. 이에 대한 실예로, 교회가 갖가지 교조를 지니고 있어도 그 안에는 양심을 선물 받은 이들이 있다는 점이다. 이 양심은 신앙의 순수한 진리들에 얼마나 더 가까이 접근하느냐에 비례하여 더 나은 양심이 되어 있다. 양심이 이런 종류의 신앙의 진리들로부터 만들어 내질 때, 이 형성은 인간의 지적 부분에서 실행됨이 분명하다. 그 이유는 이런 진리들을 받는 인간의 부분이 지적 부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의지 부분으로부터 이 지적 부분을 기적적으로 분리해 두셨다. 물론 이 신비는 알려져 있지 않다. 이에 관하여는 제 1권을 참조하기 바란다. “언약이 네 살에”가 의미하는 것, 즉 깨끗하게 함을 표시한다는 것은 할례에 관해 살핀 10절로부터 분명해진다.

영원한 언약으로. 이것이 결합을 의미하는 것은 이미 살폈다. 여기서 교회 내에 있는 이들이 취급되는 바, 언약이 다시 말해진다; 그리고 이것이 영원한 언약이라 말해진다. 그 이유는 할례를 받아야 함, 즉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으로부터 깨끗해짐이 교회 내에 있는 이들에게 더 특별하게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결합은 신앙의 진리들과 선들을 수단으로 하는 바, 그들과 더불어 주님과 그분의 천국의 가장 가까운 결합이 있기 때문이다. 주님의 왕국(천국)에서의 교회는 인간의 신체 구조에서 볼 때, 심장과 폐가 위치한 곳에 있다. 인간의 내면의 것들은 심장과 폐를 수단으로 그의 외적인 것들과 결합하고 있다. 이것들로부터 그것을 에워싼 기관들도 살아 있다. 인류와 더불은 상황은 이렇다: 주님과 그분의 천국은 교회와 가장 가까운 결합을 하고 있다, 그러나 교회 밖의 사람과는 더 멀리 떨어진 결합을 하고 있다, 이는 심장과 폐를 수단으로 살고 있는 기관들과 같은 상황이다. 천적인 인간은 심장 같고, 영적인 인간은 폐와 같다. 이 둘의 순수해짐의 필요성 때문에, 교회 내의 이들이 여기서 특별하게 취급되고 “언약”이 두 번 서술되고 있다.

14절. 그리고 할례를 받지 않은 남자, 자기 포피의 살을 할례하지 않은 자, 그 혼은 자기 백성들로부터 잘리워질 것이다. 그는 내 언약을 헛되게 만들었다.

그리고 할례를 받지 않은 남성. 이는 신앙의 진리 안에 있지 않은 자를 의미하는데, 이는 “남성”의 의미가 신앙의 진리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할례를 받지 않은 남성”은 신앙의 진리 안에 있지 않은 자, 그로 말미암아 거짓인 것 안에 있는 자가 의미되어진다. 더럽히고 방해하는 것이 “할례를 받지 않았음”이라는 것은 앞에서 말한 바 있다. 이것이 “남성”에 관련해 말해질 때, 이는 진리를 방해하고 더럽게 하는 것이다; 이것이 어떤 다른 주제를 놓고 말해질 때도 마찬가지 여서, 이것은 그 주제를 어둡게 하고 오염되게 함을 의미한다. 고로 “할례를 받지 않은 귀”가 예레미야서에서 언급된다:
내가 누구에게 말하고 증언할까? 그리고 그들이 들을까? 보라, 그들의 귀는 할례를 받지 않았다, 그리고 그들은 귀를 기울일 수 없다; 보라 여호와의 말씀이 그들에게 질책이 되어 왔다. 그들은 그것을 바라지 않는다 (예. 6:10).
그들의 “할례를 받지 않은 귀”는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는 것, 말씀이 그들에게는 질책의 말씀이었다를 뜻한다.
더욱이 본문은 교회 내에 있는 이들, 그런데 거짓 뿐만 아니라 자기와 세상 사랑의 불순함에 있는 이들을 취급하고 있다. 그 이유가 이 구절은 앞의 구절의 계속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말해진다, 즉 “할례를 받지 않은 남성, 그의 포피의 살에 할례를 받지 않은 자,” 고로 그 의미는 생활의 불순함과 결합한 거짓이다. 이들이 영원히 지옥에 떨어지는 위험에 부딛칠 확률이 얼마나 큰지는 앞서 말해진 사항으로부터 알런지 모른다. 이 말들은 신앙의 선들과 진리들을 모독하는 교회 내에 있는 이들을 특별히 염두에 두고 있는 말씀이다. 그래서, 말해지기를, “그 혼은 그의 백성들로부터 잘리울 것이다.” 그 이유가 모독을 범할 수 있는 자는 교회 밖에 있는 자가 아니라 교회 내에 있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그의 포피의 살에 할례를 받지 않은 자. 이는 자기를 사랑함에 있는 자를 의미하는데, 이는 “할례를 받음”과 “포피”의 의미에 관해 살핀 바로부터, 또한 “살”의 의미로부터 알게 된다. 여기서 “포피의 살”은 자기를 사랑함을 의미한다. 거짓 안에, 동시에 자기를 사랑함에 있는 교회 내의 사람들은 거룩한 것을 모독하는 가장 특별한 자들이다; 그러나 이외 어떤 다른 사랑, 무슨 사랑이든 자기 사랑보다는 덜 심각하다. 그 이유가 모든 것 중에서도 가장 심각한 반칙의 발생의 근원이 자기를 사랑함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공동체를 파괴하고 결국 인류를 파멸로 몰고 가는 사랑이다. 이것은 천국을 존재하게 하는 서로의 사랑에 직반대 된다, 고로 천국의 질서 자체를 파괴한다. 이는 다른 삶에 있는 악귀나 악령들로부터, 또한 지옥들로부터 알 수 있다. 지옥을 지배하는 사랑이 자기 사랑이다. 그렇기 때문에 거기에는 증오함, 잔인함, 복수함 같은 온갖 종류들이 있는 것이다.
천국에 있는 서로의 사랑은 그들이 이웃을 자기보다 더 사랑한다는 사실에 기초하고 있다. 이것의 결과는 온 천국을 한 사람으로 표출되게 한다; 그 이유가 서로의 사랑을 수단으로 모든 이는 자기를 주님과 연합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모든 이의 행복이 각각의 사람에게 전달되고 교통된다. 결과적으로 천국의 형체는 모두로부터 모든 이가 마치 일종의 중심이 된 듯, 고로 교류의 중심, 행복의 교류의 중심이 된 듯 하여 있다. 이 교류는 무수한 각 자의 서로의 사랑의 차이와 일치하여 이루어진다. 이 사랑에 있는 이들은 그들 안으로 흐르는 것을 타인과 교류할 수 있음에서 향유하는 최고로 높은 행복을 지각하고, 이 지각은 심정으로부터 이기 때문에, 교류는 영원하고 항구적이 되어 있다. 이 근거에서 주님의 왕국은 불어나고 각 천사의 행복도 증가한다. 천사들이 구분된 공동체와 거처에 있기 때문에, 그들은 위와 같은 사항을 생각하지 않으나, 주님께서 일반적, 특수적 측면에서 모든 것들을 배열하신다. 이와 같이 천국들에서 주님의 왕국은 있다.
이 형체와 이 질서를 파괴하려 골몰하는 것은 자기를 사랑함밖에 없다, 그러므로 자기를 사랑함에 있는 자들은 다른 자들보다 더 깊은 지옥에 그들의 거처가 마련되고 있다. 그 이유가 자기 사랑은 타인들과 교통하는 것이 없을 뿐더러 그들의 즐거움과 행복을 질식하게 하고 소멸되게 할 뿐이기 때문이다. 타인으로부터 그들에게 흐르는 즐거움은 무엇이든 그들은 자신 안으로 받아넣고 자신들 내부로 집중시키고, 그것을 자아의 더러움으로 바뀌게 하여, 그것이 더 이상 빠져나가지 못하게 하면서, 연합하고 만장일치하려는 그것들의 모든 경향성을 파괴한다. 이로부터 분리와 파멸이 초래된다. 이런 인물들은 한결같이 누군가가 자신을 환대하기를, 섬겨지기를, 숭배하기를 바라고, 자신 외에 사랑하는 자가 없기 때문에, 이로부터 분열을 자초하고, 통곡하는 상태로 그 자체가 내 몰린다, 하여 그들은 증오와 잔인함과 복수심으로부터 공상에 의거 끔직한 형식을 동원해 타인을 괴롭히는 것에서 즐거움을 발견한다. 이런 인물이 서로의 사랑이 상주하는 곳에 올 경우, 그들은 마치 순수하고 살아있는 기운 속에 불순하고 죽은 무게 있는 것이 있듯 순식간에 자기들에게 일치하는 아래쪽으로 내던져지듯 추락된다. 그들이 무게 있는 이유는 그들에게 흘러드는 것의 모든 종점이 자신 안에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아로부터의 반칙적인 생각만을 내뿜기 때문에 그들의 즐거움은 시체 썪는 냄새로 급변하고, 이를 수단으로 그들은 격렬한 고통을 끌어 안는 것 외에 자아의 지옥도 더불어 감지할 수 있게 만든다.
이상으로부터 인류 뿐만 아니라 천국의 질서까지 파괴하는 자기 사랑의 본성을 알았을 것이다. 고로 자기 사랑에는 불순함, 더러움, 모독함, 그리고 지옥 자체밖에 없다; 어쨌든 이런 상태에 있는 당사자들에게 그들의 상태는 그렇게 보여지지는 않을 것이다. 자기를 사랑함에 있는 이들은 타인을 자기와 비교해 경멸한다. 그들은 자기에게 박수치고 섬기고, 일종의 예배라도 바칠듯 하지 않는 이들을 미워한다; 그들은 복수함에서, 타인의 명예와 재물, 명성을 빼앗음에서 잔인한 즐거움을 발견한다. 자아를 사랑함에 있는 이들은 이런 악들 안에 있다; 이런 악들 안에 있는 자들은 자기를 사랑함에 있는 자들 임을 알 것이다.

그 혼은 그의 백성들로부터 잘리울 것이다. 이는 영원한 죽음을 의미한다는 것, 이는 “혼”이 생명이다로부터 알 수 있다; 그리고 “백성들”의 의미가 진리들이다로 부터도 분명해진다. “백성들”은 진리들 안에 있는 이들, 즉 천사들이다. 천사들로부터 “혼이 잘리운다”란 지옥에 떨어지는 것, 또는 영원한 죽음으로 멸망한다는 말이다.

그는 내 언약을 헛되이 만들었다. 이는 그가 결합되어질 수 없음을 의미한다는 것인데, 이는 “언약”이 결합을 의미한 바로부터 알려지는데, 이미 살폈다. “언약을 헛되이 만듦”은 그가 결합이 되어질 수 없는 정도로까지 자신을 분열하는 것이다.

15절. 그리고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말하시기를, 사래, 네 아내, 너는 그녀의 이름을 사래라 부르지 마라, 그 이유는 사라가 그녀의 이름이기 때문이다.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말하셨다. 이는 지각을 의미하는데, 역사적 의미에서인 “하느님께서 말하심”은 내적 의미에서는 지각을 뜻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또 다른 주제가 취급되기를 시작하고 있다. 즉 “사래”와 “사라”에 의해 의미되는 것, 그리고 “사라”로부터 아들을 주심에 대한 약속의 의미, 그리고 이스마엘이 “큰 나라”가 된다는 것에 대한 의미인데, 이것이 주님의 새로운 지각에 의해 (주님 안으로) 들어와지고 있다. 이것이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말하셨다”에 의해 표현되어졌다. 이것은 다른 장소에서도 같은 의미를 지닌다.

사래 네 아내. 이 말에 의해 선과 결합한 진리가 의미되는데, 이는 “사래”의 의미가 지적 진리이다에서 분명해진다; 그리고 여기에 “아내”가 첨가되었는 바, 이는 이 진리가 선과 결합된 상태이다는 말이다.

너는 그녀의 이름을 사래라 부르지 말라. 그 이유가 사라가 그녀의 이름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그분이 인간을 벗으시고 신성을 입으실 것을 의미한다. 이는 5절에서, “네 이름은 아브람이라 더 이상 불려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네 이름은 아브라함일 것이다”와 같은 상황이 여기서도 발생하고 있다. 따라서 마찬가지로 그분이 인간을 벗으시고, 신성을 입으실 것이 의미된다. 이름 “사라”에 더하여진 글자 “H”는 여호와의 이름으로부터 취해진 글자이다. 그리하여 사라도 아브라함 같이 주님의 신성을 표현한다; 그리고 주님 안에서 선과 진리의 신성한 결혼을 표현할 것이다는 말이다. 즉 주님 안에서 아브라함은 신성한 선, 사라는 신성한 진리를 표현하고, 이로부터 신성한 합리성, 즉 이삭이 출생한다는 말이다.
신성한 선, 이는 사랑이다, 그리고 이를 온 인류라는 관점에서 보면, 자비인데, 이는 주님의 내적 인간, 즉 신성한 선 자체이신 여호와이시다; 이것이 아브라함에 의해 표현되어졌다. 신성한 선과 결합되어지기 위해 있었던 진리는 사래에 의해 표현되어졌다. 이 진리가 신성으로 만들어졌을 때, 사라에 의해 표현되어졌다; 그 이유가 주님께서는 여호와와 합일을 만드심을 계속적으로 발전시켜 가셨기 때문이다. 아직 신성이지 않은 진리가 사래에 의해 표현되어졌는데, 이 진리는 선으로부터의 진리라 하기보다는 아직 선에 하나가 되지 않은 상태와 같다. 그러나 진리가 선으로부터 진행하기 위해 선에 하나가 된 상태일 때, 그때 그 진리는 신성이었다; 그리고 그때 진리 자체 역시 선이었다, 그 이유는 그것이 선으로부터의 진리였기 때문이다. 선으로 향하는 진리에는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선에 하나를 이루고자 하여 선으로 향하는 진리이다. 또 하나는 선으로부터 완전히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선으로 향한 것이다. 선으로 향하고 있는 진리에는 인간으로부터 파생되는 어떤 것이 아직은 있다. 그러나 선에 완전히 하나를 이룬 진리는 인간인 모든 것을 벗는다, 그리고 신성을 입는다.
이에 관하여 인간에서 비슷한 것을 가지고 전과 같이 예증해보자. 인간이 거듭나질 때, 즉 인간이 주님과 결합되어질 때, 그는 이것을 진리를 수단으로, 즉 신앙의 진리를 수단으로 진행하여 간다; 그 이유가 신앙의 지식들을 수단으로 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거듭나질 수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그가 결합을 진행해 가는 수단인 진리들이다. 주님께서는 선을 수단으로, 즉 선행을 수단으로 이 진리들을 만나러 가신다, 그리고 신앙의 지식들에, 즉 그것의 진리들에 선, 또는 선행을 조정하고 적합해지게 하신다; 그 이유가 모든 진리들은 선을 받는 그릇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진리들이 더 순수하면, 더 번성하고 있으면, 그것들은 더 큰 그릇으로 더 많은 선을 담아 질서에로 환원되어 마지막으로 그 자체 명백해진다. 드디어 선이 진리들을 통하여 빛나는 것 외에 진리들은 나타나지 않는다. 이 방법에서 진리는 영적인 것으로부터 천적 수준이 되어진다. 주님은 선행 속에 있는 선만에 현존하시는 바, 인간은 이 방법에서 주님과 결합되어진다. 그리고 선을 수단으로, 즉 선행을 수단으로 인간은 양심을 선물 받는다. 이 양심으로부터 인간은 참된 것을 생각하고 올바른 것을 실행한다; 그러나 이 양심은 선 또는 선행이 조정되고 적합해져 진리와 올바른 것들에 일치되어 있다.

16절. 그리고 나는 그녀에게 복을 줄 것이다, 그리고 또한 나는 너에게 그녀로부터 아들을 줄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녀에게 복을 줄 것이다, 그리고 그녀는 나라들을 위해 있을 것이다. 백성들의 왕들이 그녀로부터 있을 것이다.

나는 그녀에게 복을 줄 것이다. 이는 진리가 번창함을 의미하는데, 이는 “복 있음”의 의미가 모든 선과 진리로 풍부해지는 것이다에서 분명해진다. 하느님께서 그녀에게 복을 줄 것이다고 말한 사람이 사라인 바, 진리의 번창함, 또는 풍부해짐이 의미되어진다; 그 이유가 이미 살핀 바 같이, 사라에 의해 선으로부터의 진리, 즉 지적인 진리가 표현되고 의미되어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진리와 그것의 번창함이 여기서 취급되고 있다

그리고 나는 그녀로부터 너에게 아들을 줄 것이다. 이는 합리적 인간을 의미하는데, “아들”의 의미가 진리이다에서 알게 된다; 그리고 합리성이 진리로부터 시작하는 바, 합리적 인간이 여기서 “아들”에 의해 의미되어진다. 주님의 첫 합리성은 몸종, 이집트 여인, 하갈로부터 태어난 이스마엘에 의해 표현되고 의미되었다. 이는 16장에서 취급되었다. 두 번째 합리성이 여기서 취급되는데, 사라로부터 태어나는 이삭에 의해 표현되고 의미된다. 전자, 즉 이스마엘에 의해 표현된 합리성은 후에 이 집으로부터 추방되어진다; 그러나 이삭에 의해 표현된 두 번째 합리성은 이 집에 남았는데, 그 이유는 이것은 신성이었기 때문이다. 이 합리성에 관하여는 이삭이 취급되는 다음 장에서 주님의 신성한 자비로부터 살필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녀에게 복을 줄 것이다. 이는 그것의 번창함, 즉 “아들”에 의해 뜻해진 합리성이 번창함을 의미한다. 이는 “복 있음”의 의미가 모든 선과 진리로 풍요해짐이다에서 알게 된다. 이는 위에서 살폈다.

그리고 그녀는 나라들을 위해 있을 것이다. 이는 거기로부터 파생된 선들을 의미하는데, “나라들”의 의미가 선들이다에서 알아진다.

백성들의 왕들이 그녀로부터 있을 것이다. 이는 결합된 진리들과 선들로부터 있는 진리들, 이것이 “백성들의 왕들”을 의미하는데, 이는 “왕들”의 의미가 일반적 측면에서의 모든 진리들이고, “백성들”의 의미는 진리들, 그리고 영적인 모든 것들이다에서 알게 된다. 그 이유가 “왕들”이 백성들을 서술하기 때문, 그리고 나라들이 악을 의미할 때 외에는 “왕들”은 나라들을 서술하지 않는다. 예언적 말씀에서 “왕들”과 “백성들”의 언급은 상당히 많다. 그러나 이 말씀들에 의해 글자대로의 왕과 백성은 결코 뜻하지 않는다; 그 이유가 내적 의미의 말씀, 즉 참 말씀 자체는 왕들과 백성들을 취급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왕국에 속하는 천적, 영적인 것들을 취급하기 때문이다, 고로 선들과 진리들을 취급한다. 글자 의미는 단순히 객관적인 형체들(즉 인간의 말을 수단으로 행해지는 것)을 가지고 그것의 의미를 이해되게 하는 원인을 제공할 뿐이다.
여기서 사라에 관해, “백성들의 왕들이 그녀로부터 있을 것이다,” 라고 말해지고, 사라에 의해 주님이 가지셨던 신성한 진리가 의미되는 바, “백성들의 왕들”에 의해서는 결합된 진리들과 선들로부터의 진리들, 내적 교회의 모든 진리들, 또는 신앙의 내면의 진리들이 의미되어진다. 이 진리들, 주님으로부터 인 바, 말씀의 많은 구절에서 “왕들”, 또는 “왕의 아들들”이라 불리운다.
모든 사람들이 눈치채는 바는, 이 말씀, 즉 “백성들의 왕들이 그녀로부터 있을 것이다”에 감추여놓인 어떤 내적인 신성한 것이 있을 것 같다는 것이다. 그 이유가 이 절에서 이삭이 취급되고, 그에 관해 말해지기를, “나는 그녀에게 복을 줄 것이다, 그리고 그녀는 나라들을 위해 있을 것이다”; 그리고 또한 거의 똑같은 것이 아브라함에 관해 말해지기를 (6절), 너로부터 “왕들이 나올 것이다.” 그러나 사라에게 같이 그에게 말해지지 않고 있다. 즉 “백성들의 왕들”이 그로부터 나올 것이라 말해지지는 않고 있다. 이 안에 놓인 신비는 몇 마디 말들로 묘사할 수 없는 너무나 깊게 감추여 있다. 이 신비함은 이 정도에서만 분명해진다. 즉 아브라함의 표현과 의미가 신성한 선이다로부터, 그리고 사라의 표현과 의미가 신성한 진리이다로부터, 모든 천적 진리는 주님의 신성한 선으로부터 있고 진행된다는 것이 아브라함에 의해 뜻해지고, 모든 영적 진리는 주님의 신성한 진리로부터 있고 진행된다는 것은 사라에 의해 뜻해진다는 정도 뿐일 것 같다. 천적 진리는 천적 천사들과 더불어 있고, 모든 영적 진리는 영적 천사들과 더불어 있다; 이를 다른 표현으로 말해 보면, 천적 진리는 홍수 이전이었던 태고 교회의 사람들과, 영적 진리는 홍수 이후인 고대 교회의 사람과 더불어 있었다. 천사들, 뿐만 아니라 교인 역시 천적 수준과 영적 수준으로 구별되어진다. 주님을 사랑함에 의해 천적 수준은 영적 수준과 구별되어진다. 이웃을 향한 사랑에 의해 영적 수준은 천적 수준과 구별되어진다.
그러나 천적 진리와 영적 진리에 관한 것은 천적인 것과 영적인 것 사이에 무슨 구분이 있는지, 또는 천적 교회와 영적 교회 사이에 무슨 구분이 있는지를 알아야 말해질 수 있다.
이 생각만 가지고 신비를 헤아려 보는 것으로 족할지 모른다. 즉 6절에서 아브라함으로부터 나오는 “왕들”은 주님의 신성한 선으로부터 흐르는 천적인 진리들을 의미한다는 것, 그리고 이 구절에서, 사라로부터 있게 될 “백성들의 왕들은 주님의 신성한 진리로부터 흐르는 영적 진리들을 의미한다는 정도 뿐이다. 주님의 신성한 선은 천적 인간 외의 인간에게는 흐를 수 없다. 그 이유는 이것은 의지 부분으로 흐르기 때문이다. 태고 교회의 경우가 그러했다. 그러나 주님의 신성한 진리는 영적 인간과 더불어 흐른다. 그 이유는 이것은 지적 부분으로만 흐르기 때문이다. 인간의 지적 부분은 그의 의지 부분으로부터 분리되어 있다; 같은 것으로, 천적인 선은 천적 인간과 더불어 흐른다, 그리고 영적 선은 영적 인간과 더불어 흐른다; 이런 이유에서 주님은 천적 천사에게는 태양으로, 영적 천사에게는 달로 나타나신다.

17절. 아브라함이 엎드렸다, 그리고 웃었다, 그리고 심중에서 말하기를, 백 세의 아들이 자식을 낳을 수 있을까? 구십 세의 딸인 사라가 자식을 낳을 수 있을까?

아브라함이 엎드렸다. 이는 경배함을 의미하는데, 이는 “엎드림”이 경배하는 것이다에서 알 수 있다.

그리고 웃었다. 이는 진리에 애착함을 의미하는데, 이는 웃음의 근원과 실체로부터 알 수 있다. 그 이유가 그것의 근원이 진리에 애착함, 또는 거짓인 것에 애착함밖에 더 없고, 이로부터 웃음 자체가 얼굴에 진열하는 즐거움과 재미있음이 오기 때문이다. 얼굴은 신체의 한 부분인 바, 실로 웃음은 외적인 것이다; 마음의 내면의 애착들이 얼굴을 수단으로 표현되고 의미되는 것이다. 내면의 들음과 순종은 귀에 의해, 내면의 봄과 이해함은 눈에 의해. 힘과 강함은 팔에 의해, 마찬가지 방법에서 진리에 애착함은 웃음에 의해 의미되어진다.
인간의 합리성 안에 진리가 있다. 진리는 합리성의 주요한 특성이다. 그리고 선에 애착함도 있다. 그러나 이것은 진리에 애착함 자체의 혼이다. 합리성에 있는 선에 애착함은 웃음을 수단으로 그 자체를 진열하지 않는다. 그러나 어떤 환희(joy)를 수단으로, 결과적으로 웃지 않고도 기뻐할 수 있는 즐거움을 수단으로 한다; 그 이유가 웃음 안에는 선에 속하지 않는 것도 통상적으로 들어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합리성의 그 주요한 특성이 진리인 이유는 합리성은 진리에 관한 지식들을 수단으로 만들어내지기 때문이다. 그 외의 수단에 의해서는 어떤 것도 합리성이 되지 못한다.
“웃음”이 여기서 진리에 대한 애착을 의미하는 것은 아브라함이 웃었던 것과 관련된 것에서 알는지 모른다; 마찬가지로 사라, 이삭이 태어나기 전, 그리고 그 후에 관련하여서 알는지 모른다; 그리고 또한 이삭의 이름이 “웃음”으로부터 그렇게 불러졌다는 것에서도 알는지 모른다. “이삭”은 “웃음”을 뜻한다. 아브라함이 이삭에 관해 들었을 때, 그가 웃은 대목은 이 구절로부터 인데, 즉 그가 사라로부터 아들을 가진다는 것을 들었을 때 웃었다. 또한 이삭이 태어나기 전 사라가 웃은 것은 사라가 여호와로부터 그녀가 아들을 낳는다는 것을 들었을 때, 즉 “사라가 천막의 문에서 들었을 때, 사라는 마음으로 웃었다, 말하기를, 내가 이렇게 늙었는데 내가 기쁨을 가질 수 있을 까? 그리고 내 주인도 늙었는데?… 사라가 부인해서, 말하기를, 나는 웃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분은 말하셨다, 아니다, 그러나 너는 웃었다” (창. 18:12, 13, 15). 그리고 후에, 이삭이 출생하였을 때, “아브라함은 그의 아들의 이름을 이삭이라 불렀다.” 그리고 사라는 말했다, “하느님께서 나를 위하여 웃음을 만드셨다; 듣는 모든 이는 나와 더불어 웃을 것이다” (창. 21:3, 6). “웃었다”와 “웃음”을 뜻하는 이름 “이삭”이 이와 같은 것을 포함하지 않으면, 이 주제들은 결코 관련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의 심정에서 말했다. 이는 그가 그렇게 생각했다를 의미하는데, 설명은 필요 없을 것이다.

백 세 된 아들에게 태어나질까? 주님의 인간 본질의 합리성이 신성 본질에 (백 살이 되는) 그 때 하나가 되어질 것을 의미한다. 이는 “100”의 의미로부터 알 수 있다.

그리고 구십 세의 딸 인 사라가 낳을까? 이는 선과 결합된 진리, 즉 신성으로부터의 진리가 이것을 행할 것임을 의미하는데, “사라”의 표현과 의미가 선과 결합된 진리, 즉 신성으로부터의 진리인 것에서, 그리고 “90”의 의미가 “9”와 같은 의미임에서 알게 된다. 아브라함의 나이인 숫자 100이 주님의 인간 본질의 합리성이 그분의 신성 본질에 하나가 되는 것을 의미하고, 사라의 나이인 숫자 90이 선과 결합한 진리가 이것을 행할 것임을 의미한다는 것에 누군가는 의아해 할는지 모른다. 그러나 주님의 말씀에서 천국적이고 신성하지 않은 구절은 없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말씀 안에 포함된 숫자 역시 신성과 천국적인 것이 있어야 마땅하지 않을까? 말씀에서 모든 숫자들은 어느 숫자이든 이름과 더불어 실제의 것들을 의미한다는 것을 제 1권에서 이미 살폈다.
지금 숫자 “9”는 결합을 의미하고, 더 나아가 “90”은 9에 10을 곱하여 생산된 숫자이고, 10은 리메인스를 의미하는 바 이를 수단으로 결합이 결과되어진 것이 의미된다. 이제 뒤이어지는 표현들과 의미들에서 더 알게 된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명령된 바, 일곱째 달의 10일째 날은 보상의 날이다는 것, 그리고 이 날은 안식일의 안식일이다는 것; 그리고 일곱째 달의 9일째 날 저녁, 저녁으로부터 저녁까지 그들은 안식일을 경축하라는 것이다 (레. 23:27, 32).
내적 의미에서 이런 사항들은 리메인스를 수단으로 결합함을 의미한다. 즉 9는 결합을, 10은 리메인스를 의미한다. 신성한 신비가 이 숫자들에 감추여 놓여 있다는 것은 해의 달과 날을 거룩히 붙잡고 있어야 한다는 것으로부터도 분명해진다; 매 일곱째 날이 안식일이다는 것; 그리고 매 일곱째 달은 안식일의 안식일이어야 한다는 것; 일곱째 해도 마찬가지이다는 것; 일곱 해의 일곱 번째에 안식년이 시작된다는 것, 등등이다. 이런 경우는 말씀의 다른 숫자에서도 동일하다; “3”은 “7”과 거의 동일한 의미이다; 그리고 “12”는 신앙 속의 모든 것들을; “10”은 “1/10”과 같은 의미인 리메인스를 의미한다. 고로 레위기로부터 인용한 위의 구절에서, 숫자 “10”과 “9”가 신비를 함유하지 않으면, 안식일의 안식일 일곱째 달의 열흘째 날이 있는 바, 그들은 그것을 그 달의 아홉째 날에 경축해야 한다고 명령될 이유가 없는 것이다. 비록 역사적 의미에서는 위와 같은 내용이 나타나지 않는다 해도 내적 의미에서는 위와 같은 것이 주님의 말씀이다.
같은 방법에서 예루살렘에 관련된 사건이 있다. 즉 시드기야의 구 년째에 느부갓네살에 의해 포위되었다는 것, 11년째에 성의 뚫림이 달의 구 일째에 있었다; 이에 관해 열왕기하서에서:
시드기야왕 제 구년 열째 달 십일에 바빌로니아 느부갓네살왕이 예루살렘을 치러 왔다, 그 리고 도성은 시드기야의 11년째까지 포위되어 있었다; 달의 구일에 도성에서 기근이 극 심해져서, 그 토지의 백성을 위한 빵이 없었다, 그리고 성벽의 뚫림이 만들어졌다
(왕하. 25:1, 3, 4).
“구 년째”, 그리고 “열째 달”에 의해, 그리고 “십일 년째”와 “달의 구일”에 의해, 기근이 도성에 극심해졌고, 토지의 백성들을 위한 빵이 없었을 때란 내적 의미에서 신앙과 선행에 속하는 것들을 수단으로 결합함이 더 이상 없다를 의미한다; “도성에 기근과 토지의 백성을 위한 빵이 없음”은 신앙의 어떤 것도, 선행의 어떤 것도 남은 것이 전혀 없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이 위 구절의 내적 의미이나, 글자 의미에서는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그리고 이와 같은 것들은 예언적 말씀보다 역사적 말씀 부분에서 더 빛을 발한다. 그 이유는 역사 줄거리가 마음을 붙잡는 힘이 예언서보다 더 강해서 글자 안에 감추인 의미를 믿는 것이 더 힘들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모든 것들은 표현적이고, 단어들 자체에는 의미가 담겨 있다. 이런 말들은 믿어지기 힘들겠지만, 여전히 진리이다. (그렇지 않다면 말씀이 거룩하다, 신성하다 말할 이유가 없을지 모른다.)

18절. 그리고 아브라함이 하느님께 말했다, 이스마엘이 당신 앞에서 살도록 해주십시요!

아브라함이 하느님에게 말했다. 이는 주님께서 사랑으로부터 지각하심을 의미하는데, 이는 “하느님에게 말함”의 의미가 지각하는 것이다에서 알려지는데, 앞에서 설명한 바 있다. 여기서 “아브라함”은 이런 상태와 이런 나이에 계신 주님을 의미하는 것은 앞서 살핀 바 있다. 주님이 사랑으로부터 이것을 말하셨다는 것이 명백한 이유는, 사랑의 애착은 이 말, 즉 “이스마엘이 당신 앞에서 살게 해주십시요!” 라는 말 자체로부터 묻어나기 때문이다. 주님의 애착, 또는 사랑은 보편적 인류를 향한 신성이셨다. 이것을 그분은 인간 본질과 신성 본질의 합일하심을 수단으로 그분 자신에 인접해 있게 뜻하시고 영원히 추구하시게 뜻하시었다.
주님이 가지셨던 사랑은 모든 인간의 이해력을 초월해 있다, 그리고 이 사랑은 어떠한 천국적 사랑 안에 천사들이 있는지를 알지 못하는 이들에게는 믿기지 못하는 최고의 수준에서 있다. 죽음을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여기는 천사들에게 지옥으로부터 혼을 구해내는 것, 그들에게 가능하다면, 그들은 지옥까지 라도 내려가려는 것도 감수하려 했을 것이다. 죽은 자로부터 올라오는 이들을 천국으로 옮기는 것이 천사들의 가장 깊은 측면에서의 환희이다. 그럼에도 그들은 자기들이 지닌 이런 사랑의 한 조각도 자신들로부터서는 없다는 것, 오로지 주님으로부터 받아 가졌을 뿐이라고 고백한다. 만일 누군가가 달리 생각하는 것을 본다면 참지 못할지 모른다.

이스마엘이 당신 앞에서 살아가게 해주십시요! 이는 진리로부터 합리적인 다른 이들도 멸해지지 않을 것임을 의미하는데, 이는 “이스마엘”이 합리성을 의미하고 표현하는 것에서 분명해진다. (이에 관하여는 앞 장의 이스마엘을 다루면서 설명되었다.) 교회 내에 두 부류의 인간들이 있다. 영적 부류와 천적 부류이다. 영적 부류는 진리로부터 합리적 인간이 된다. 그러나 천적 부류는 선으로부터 합리적 인간이 된다. 진리를 수단으로 합리적이 되는 영적 인간이 여기서 “이스마엘”에 의해 뜻해진다; 그 이유가 “이스마엘”은 합리성의 순수한 의미에서 합리적 진리를 표시하기 때문이다. 이 합리적 진리가 선에 의해 채용되고 바래질 때, 여기서 아브라함에 의해 뜻해진 주님에 의해 채용되고 바라시는 바와 같이 되어, 이는 영적인 것, 고로 영적 인간, 또는 같은 것으로, 영적 교회, 신성한 사랑으로부터 주님에 의해 바래지는 구원함을 의미하게 된다. 이것이, 본문, “이스마엘이 당신 앞에서 살도록 해주십시요”에 의해 표현되어져 있다.

19절. 그리고 하느님께서 말하셨다, 진실로 네 아내 사라가 너에게 아들을 낳을 것이다, 그리고 너는 그의 이름을 이삭으로 부르라, 그리고 나는 내 언약을 그와 더불어 세울 것인데 이는 그의 후손에게 영원한 언약이 될 것이다.

하느님께서 말하셨다. 이는 대답이 지각되었다를 의미하는데, 이는 “말함”이 지각하는 것을 의미함에서 알 수 있다. 앞 절에서 우리는 “아브라함이 말했다”를 읽고, 이것은 지각을 의미했다, 그리고 이 구절에서 “하느님이 말하셨다” 또는 대답하셨다를 읽고, 이것은 대답이 지각됨, 또는 지각으로부터의 대답을 의미한다. 모든 지각, 즉 지각함이 무엇이든, 제의함과 응답함의 양쪽이 있다. 이 둘에 대한 지각함이 여기서 “아브라함이 말했다”와 “하느님께서 말하셨다”에 의해 역사적 의미에서 표현되어져 있다.

진실로 사라 네 아내. 이는 선과 결합한 신성한 진리를 의미하는데, 이는 “사라”의 표현과 의미가 선과 결합한 신성한 진리임에서 분명해진다.

네게 아들을 낳을 것이다. 이는 합리성이 신성한 진리와 신성한 선의 결합으로부터 있을 것임을 의미하는데, “아들”의 의미가 진리, 여기서는 합리적 진리임에서 분명해진다.

그리고 너는 그의 이름을 이삭이라 부를 것이다. 이는 신성한 합리성을 의미 하는데, 이는 “이삭”의 표현으로부터, 그리고 그의 “이름”의 내적 의미로부터 분명해진다. 첫째, 이삭의 표현을 살펴보자: 아브라함은 주님의 내적 인간을; 이삭은 주님의 합리적 인간을, 그리고 야곱은 주님의 자연적 인간을 표현한다. 주님의 내적 인간은 여호와 자신이셨다. 그분의 합리적 인간, 이는 내적 인간이 외적 인간에 있는 기억 속의 지식들 안으로 유입됨으로부터 임신되었기 때문에, 주님의 인간에 결합된 신성으로부터 이었다. 이로부터 이스마엘에 의해 표현된 첫 합리성은 인간 수준 이었다. 그러나 이 인간 수준이 주님에 의해 신성 수준으로 만들어졌을 때, 이삭에 의해 표현되었다. 둘째로, 그의 “이름”의 의미로부터 이다. 이삭은 “웃음”으로부터 명명되어졌다; 그리고 내적 의미에서 “웃음”은 진리에 대한 애착을 의미하고, 이 애착은 합리성에 속해 있다. 여기서 “웃음”은 신성한 합리성을 의미한다.
주님은 그분 자신의 힘으로부터 그분과 더불어 있던 인간이었던 모든 것을 신성으로 만드셨다; 고로 이는 합리성 뿐만 아니라 내면, 외면의 감각적 인간 모두, 그러므로 신체 자체까지 신성으로 만드셨던 것이다. 그분만이 죽은 신체로부터 일어나신 유일한 분이심 이다는 것, 그리고 신성과 인간 모든 측면에서 신성한 권능의 오른편에 앉으셨다는 것을 위 설명과 연결해 생각하면 이해에 더 도움이 될 것이다. 신성한 권능의 오른편에 앉으신다는 것은 천국과 땅에서 모든 주권적 권능을 가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나는 영원한 언약으로 그와 더불은 내 언약을 세울 것이다. 이는 합일을 의미하고, 사실상 영원한 합일을 의미한다. 이는 “언약”의 의미가 결합인 바로부터 알게 된다. 그리고 이것이 주님을 서술하는 바, 그분의 신성 본질이 그분의 인간 본질과, 그리고 인간 본질이 신성 본질과 합일함이다.

그의 후손에게. 이는 주님에 대한 신앙을 가질 이들을 의미하는데, 이는 “후손, seed”의 의미가 신앙임에서 분명해진다. 여기서 “후손(씨)”에 의해 의미되는 이들은 사랑의 신앙을 가진 이들, 즉 주님을 사랑함에 있는 이들이다. 결과적으로 천적 인간, 또는 천적 교회 안에 있는 이들이다; 그 이유가 이삭으로부터의 후손이 취급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선행의 신앙을 가진 이들, 즉 이웃을 향한 선행을 가진 이들, 또는 영적 교회 속에 있는 이들은 “이스마엘”에 의해 의미되고 이제 뒤이어지는 구절에서 취급된다.

20절. 그리고 이스마엘에 관하여 나는 너에게서 들었다. 보라 나는 그에게 복을 내릴 것이다, 그리고 그를 열매가 많이 열리게 만들 것이고, 그를 극히 번창하게 할 것이다. 그를 아버지로 하여 열 두 왕자들이 출생할 것이다, 나는 그를 큰 나라로 만들 것이다.

이스마엘에 관하여 나는 너에게 들었다. 이는 진리로부터 합리성을 지닌 이들, 그들이 구원될 것임을 의미하는데, 이는 이 구절에서의 이스마엘의 표현이 진리로부터의 합리성, 또는 영적 수준의 인간임에서 알게 된다; 그들이 구원될 것임은 “네게서 들음”의 의미로부터 이다. 이는 설명이 필요 없을 것이다.

보라 나는 그에게 복을 내릴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를 아주 극대하게 열매를 많이 열리게 할 것이다. 이는 그들이 신앙의 선들과 그로부터 파생한 진리들을 선물로 받고 감화됨이 측량할 수 없을 정도가 될 것임을 의미하는데, 이는 “복을 내림”으로부터, “열매가 많이 열림”으로부터, “번창함”으로부터 분명해진다. “복을 내림”은 모든 선들을 선물로 받는 것을 의미한다. “열매가 많이 열림”은 그들이 선물을 받는 신앙의 선들을 표시한다; 그리고 “번창함”은 이 선들로부터 파생되는 진리들을 표시한다.
천적 인간이 누구인지, 영적 인간이 누구인지에 관해서는 이미 여러 번 언급했는 바, 중복으로 지루해질지 몰라서 여기서는 생략한다. 일반적으로 천적 인간은 주님을 사랑하는 자들이다, 그리고 영적 인간은 이웃을 향하여 선행을 가진 이들이다. 천적 인간은 선으로부터 선에 대한 애착 안에 있는 이들이다. 그러나 영적 인간은 진리로부터 선에 대한 애착 안에 있는 이들이다. 시작에서 모든 것은 천적 수준이었다, 그 이유는 그들이 주님을 사랑함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사랑으로부터 그들은 지각을 가졌다, 이 지각으로 그들은 선을 지각했는데, 진리로부터가 아니고 선에 대한 애착으로부터 이었다.
그 후에 주님을 사랑함을 더 이상 가져질 수 없게 되었을 때, 영적 인간들이 그 뒤를 이었는데, 이들은 이웃을 향한 사랑 안에, 또는 선행 안에 있는 이들이었다. 그러나 이웃을 향한 사랑, 또는 선행은 진리를 수단으로 이식되었다; 이러므로 해서 그들은 양심을 받았다, 그리고 그것에 따라 행동했다. 이는 선에 대한 애착으로부터가 아니고 진리에 대한 애착으로부터 이다. 영적 인간과 더불어 있는 선행은 선에 대한 애착 같이 나타난다. 그러나 그것은 진리에 대한 애착이다. 이 외관으로부터 선행은 선이라 불리운다; 그러나 그것은 그들의 신앙으로부터의 선이다. 이들은 요한복음서에서 주님에 의해 뜻해진 이들이다:
나는 문이다; 나로 말미암아 그가 들어 온다면, 그는 구원될 것이다, 그리고 들어 오고 나 가고, 풀밭을 발견할 것이다; 나는 선한 목자이다; 그리고 나는 나 자신의 것(나의 양들)을 알고 있다, 그리고 (양에게) 나에 관해 알려져 있다. 그리고 나는 다른 양들을 가지고 있는 데, (이 양들은) 우리 속에 있지 않다; 그들 역시 나는 데려와야 한다. 그리고 그들은 내 음성을 들을 것이다, 그리고 한 우리 안에 있을 것이다, 그리고 한 목자.
(요. 10:9, 14, 16).

그를 아버지로 하여 열 두 왕자들이 출생할 것이다. 이는 선행 속에 있는 제일가는 가르침들을 의미하는데, 이는 “열 둘”의 의미가 신앙의 모든 것들이다 에서; 그리고 “왕자”의 의미가 제일가는 것들임에서 알게 된다. “왕”과 “왕자”는 말씀에서 많이 언급되는 편인데, 그들은 내적 의미에서는 왕과 왕자가 아닌 그들이 연결되는 주제에서 주제의 제일가는 것들을 의미한다. 이로부터 천사들, 사실상 영적(평면의) 천사들은 (왕자가 통치하는) 군주국이라 불리운다. 그 이유는 그들이 진리들 안에 있기 때문이다. 단어 “왕자, 또는 제 1 인 자”는 선행으로부터 있는 진리들로부터 서술되고 있다; 그 이유가 이미 말한 바대로, 그들에게 나타나는 진리들을 수단으로 그들은 주님으로부터 선행을 받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를 통하여 양심을 받는다.
“12”가 신앙의 모든 것들을 의미한다는 것은 지금까지도 알려져 있지 않다. 그렇다 해도 숫자 12가 말씀에서 발생하면, 그 말씀이 역사 부분이든, 예언서 부분이든, 이 외의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예를 들면, 야곱의 “열 두 아들들”, 이로부터 파생된 “열 두 지파들”은 같은 의미를 지니고, 또한 주님의 “열 두 제자들”도 마찬가지 의미이다. 야곱의 각 아들, 열 두 제자의 각 제자는 신앙의 필수인 것과 제일가는 것을 표현했다.(야곱의 각 아들, 그리고 각 지파에 관한 것은 차 후 창. 29-30장에서 주님의 신성한 자비로부터 취급될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를 큰 나라로 만들 것이다. 이는 선들의 결실과 그것의 증가함을 의미하는데, “나라들”의 의미가 선들이다로부터 분명해진다; 그러므로 “큰 나라로 만듦”은 여기서 선의 결실과 증가를 의미한다.

21절. 그리고 나는 내 언약을 내년 이맘 때 사라가 너에게 낳아 줄 이삭과 세울 것이다.

내 언약을 나는 이삭과 세울 것이다. 이는 신성한 합리성과 합일됨을 의미하는데, 이는 “언약”의 의미가 합일임에서; 그리고 “이삭”이 신성한 합리성을 표현함에서 알게 된다.

사라가 네게 낳을 것이다. 이는 신성한 선에 결합한 신성한 진리, 이로부터 그것이 나옴을 의미하는데, 이는 “사라”가 신성한 진리를 표현한다는 것; 그리고 “아브라함”이 신성한 선을 표현한다로부터 알게 된다.
주님의 첫 합리성이 어떻게 임신되고 출생했는지에 대하여는 앞 장에서, 이스마엘이 취급되고, 그가 이 합리성을 표현하는 대목에서 서술하였다. 그러나 이 구절과 다음 장에서는 주님께서 신성으로 만드신 합리성이 취급된다. 이 합리성은 신성한 선에 신성한 진리가 결합, 또는 결혼에 의해 만들어졌다. 첫 합리성은 내적 인간이 외적 인간에 있는 기억 속의 지식에 대한 애착 안으로 유입되는 방법 외의 방법으로는 임신되어질 수 없다; 이는 사라의 몸종 하갈에 의해 표현된 기억 속의 지식들로부터 출생되는 방법 외의 방법으로는 가능할 수 없다.
그러나 두 번째 합리성, 또는 신성한 합리성은 위 방법으로는 임신되고 출생되지 않는다. 그러나 내적 인간의 진리가 내적 인간의 선과 결합함을 수단으로 하고, 이로부터 유입이 파생된다. 주님과 더불어 이것은 신성 자체, 즉 여호와로부터 그분의 적당한 힘의 결과였다. 반복되는 말이기는 하지만, 그분의 내적 인간은 여호와이셨다; 그리고 아브라함에 의해 표현된 선 자체는 그분의 내적 인간에 속해 있다. 마치 진 리 자체가 사라에 의해 표현되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둘 다 신성이었다. 이 근원으로부터 주님의 신성한 합리성은 임신되고 출생되었다. 그리고 사실상 선이 진리 안으로 유입됨으로부터 였다. 고로 진리를 수단으로 하여서 였다. 그 이유가 합리성의 주요한 특성은 진리이기 때문이다. 이렇기 때문에, “사라가 네게 낳을 것이다”라고 말해지고 있다. 이는 신성한 진리가 신성한 선에 결합함으로부터 출시됨을 의미한다. 그리고 17절에서, 사라는 “구십 세의 딸”이었다고 말해지는데, 이는 선에 결합한 진리가 이를 행할 것임을 의미한다.
모든 인간은 하느님의 형상과 모습에서 창조되었다는 측면에서 볼 때 모든 사람 각각이 무엇이든 비슷해야 할 것 같으나 동등하지는 않다. 말하자면 그의 첫 합리성은 그의 내적 인간이 그의 외적 인간의 기억 속의 지식들의 애착의 생명 안으로 유입됨을 수단으로 임신되고 출생되는 것이 일률적이지는 않다는 말이다. 그러나 그의 두 번째 합리성은 그의 내적 인간을 통하여 주님으로부터의 선과 진리의 유입으로 있게 되는 바 (일률적이다.) 그가 거듭나질 때 그는 주님으로부터 이 두 번째 합리성을 받는다. 그 이유가 그때서야 그는 선과 진리가 무엇인지를 그의 합리성 안에서 지각하기 때문이다. 인간 안에서 내적 인간은 그의 합리성 너머에 있다. 그리고 그것은 주님의 것이다.

앞 장에서 지금에 이르기까지의 주제는 주님에 속하는 합리성의 임신과 출생이었다. 그러나 어떤 이가 상상하는 것은, 이런 것들을 아는 것, 즉 주님의 인간 본질이 신성으로 만들어졌다는 것, 그리고 주님은 인간 본질과 신성 본질 모두에서 하느님이시다는 것을 알게 된다 해도 그것이 신앙에 도움이 그다지 되지 않을 것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그렇다 라고 순박함에서 믿는 이들은 그것이 어떻게 결과된 것인지를 아는 것이 필요하지가 않다. 그 이유가 그것이 어떻게 되었는지를 앎은 이것이 그렇다 라고 믿는 목적을 위해 단순히 존재하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날 비록 그들이 이것이 신앙의 교리에 따라 있기 때문에 입술로 고백은 할지언정, 이것이 왜 그렇게 있는지 이유를 알지 않으면 아무 것도 사실상 믿지 않고 있는 이들이 많다. 그럼에도 그들이 여전히 이것이 그렇게 왜 있는지를 알았더라면, 믿을 수 있었을텐데 라고 서로들에게 말한다. 그들이 믿지 않는 이유와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주님께서 여느 다른 사람들 같이 출생하셨고, 외적 형체에서도 여는 사람과 같았기 때문이다. 위 인물들은 자기들에게 우선적으로 어떻게 이것이 그러했었는지를 어느 정도라도 납득되지 않으면 어떤 신앙도 받아들일 수 없다. 이것이 왜 우리가 이렇게 장황하게 설명을 반복해야 하는 가의 이유이다. 단순함, 순박함, 천진난만함에서 말씀을 믿는 이들은 이 모든 것들이 크게 필요치 않다. 그 이유는 그들은 다른 이들이 이와 같은 것들에 대한 지식의 도움이 없이는 도달하지 못하는 목적에 이미 와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이런 내용들은 내적 의미 안에 포함된 사항들이다, 그리고 내적 의미는 천국들에 있는 주님의 말씀이다, 그리고 거기 있는 이들에 의해서 지각된다. 인간이 진리 안에 있을 때, 즉 내적 의미 안에 있을 때, 그는 비록 아주 일반적이고 희미한 생각의 수준이라 해도 천사들과 하나를 만들 수 있다. 신앙 자체 안에 있는 천국의 천적 천사는 선으로부터 위와 같은 신앙의 교리를 쳐다보고 이것이 그렇다를 알고 있다. 그러나 영적 천사는 그것들을 진리로부터 쳐다보고, 또한 확증하고 내적 의미 안에 포함된 것에 의해 완전해진다. 그러나 수천가지의 내면의 추론들에 의해서도 인간의 생각 안으로 지각할 수 있게 흐를 수는 없다.

내년 이맘 때에. 이는 합일의 상태를 의미한다. 이는 이삭이 태어날 때, 아브라함의 나이에 관해서, 즉 그가 “백 세의 아들이었다”라고 말해진 것에서, 그리고 사라에 관해서, 그녀가 “구십 세의 딸이었다”에서 분명해진다. 이 말씀들에 의해 주님의 인간 본질의 합리성이 그분의 신성 본질에 하나가 되어짐이 의미되었다, 그리고 선에 결합된 진리가 이것을 결과되게 했다. 그렇게 하여 “내년”은 합일의 상태이다.

22절. 그리고 그분은 그와 말하시고 떠나셨다. 그리고 하느님은 아브라함으로부터 아브라함 너머로 올라 가셨다.

그분은 그와 말하시고 떠나셨다. 이런 지각하심이 끝났다를 의미한다. 이는 이야기함, 말함의 의미가 내적 의미에서 지각하는 것임에서 알게되고, “말하시고 떠나셨다”는 이런 지각함이 더 이상 있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하느님은 아브라함으로부터 아브라함 너머로 올라 가셨다. 이는 주님께서 이전의 상태로 진입하심을 의미하는데, 이는 이미 말해진 것으로부터 뒤잇는 바, 설명은 필요 없다. 세상에서의 그분의 삶에서, 주님은 두 상태들을 가지셨다. 하나는 굴욕의 상태, 또 하나는 신성화 되어 가심의 상태이다. 이는 이미 살폈다; 그리고 그분이 두 상태들을 가졌을 때, 그분은 지각하심에서도 두 상태를 가지셨음이 분명하다. 그분은 이 장의 내적 의미의 상태에 있는 것들을 지각하셨을 때 그분은 인간이 신성과 합일 하심으로 신성이 되어 가심의 상태에 계셨다. 그러나 그분이 이런 상태에 더 이상 계시지 않으셨음이 이 말에 의해, 즉 “그분은 그와 말하시고 떠나셨다, 그리고 하느님은 아브라함으로부터 아브라함 너머로 올라 가셨다”로 표현되어져 있다.

23절. 그리고 아브라함은 그의 아들 이스마엘, 그리고 그의 집에서 태어난 모든 자들, 그리고 그의 은으로 산 모든 이들, 아브라함의 집의 사람들 사이에서 모든 남성을 챙겼고, 하느님께서 자기에게 말하셨던 대로 바로 그 날에 그들의 포피의 살에 할례를 베풀었다.

아브라함은 그의 아들 이스마엘을 챙겼다. 이는 진실로 합리적인 이들을 의미한다. 이는 “이스마엘”의 의미가 진리로부터 합리적인 이들, 즉 영적 평면에 있는 이들 이다에서 알게 된다.

그의 집에서 태어난 모든 이들, 그리고 그의 은을 주고 산 모든 자들, 아브라함의 집의 사람들 사이에서 모든 남성. 이는 신앙의 진리들이 선들과 결합한 교회 내에 있는 이들을 의미한다. 이는 “집에서 태어난 이들”의 의미는 천적 수준에 있는 자임으로부터; “은을 주고 산 자”의 의미는 영적 수준에 있는 자 임으로부터; 그리고 교회 내에 있는 이들로부터 알게 된다. 이 모든 자로부터 교회 내에 있는 이들, 그리고 신앙의 진리들이 선들과 결합된 이들임을 알게 된다.

그리고 그들의 포피의 살에 할례를 받았다. 이는 주님으로부터 있는 그들의 순결함과 정의를 의미한다. 이는 “할례를 받음”의 의미가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으로부터 깨끗해짐이다는 것; 그리고 “포피의 살에 할례를 베품”의 의미가 이런 사랑들을 제거함이다는 것에서 알게 된다; 거기서 더 보여준 것은, 이런 사랑들은 주님으로부터의 선과 진리의 역사하심과 유입에 유일한 방해물이다는 것, 고로 주님의 정의가 실현되는데 방해물이다는 것이다.
이 전체의 장은 주님의 신성 본질과 그분의 인간 본질의 합일을 취급하였다; 그리고 그분의 인간 본질이 신성으로 만드셨음을 수단으로 주님과 인간의 결합에 관한 것이 취급되었다. 또한 할례에 관하여, 즉 인간 안의 더러운 것들로부터 순수해짐에 관하여서 였다. 이 모든 것들이 한 개의 시리즈 안에 있었다, 그리고 서로가 서로의 뒤를 잇고 있다; 그 이유가 신성 본질이 주님 안에서 인간 본질과 합일됨이 신성이 인간과 결합될 수 있도록 하시려는 목적으로 결과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신성이 인간과 결합함은 인간이 이런 더러운 사랑들로부터 순수해지지 않으면 결과될 수 없다. 그러나 인간이 그것들로부터 순수해지자 마자, 주님의 신성한 인간은 흘러들고, 인간은 그 자체와 결합한다. 이상의 내용을 본장의 말씀이 알려 주고 있다. 즉 내적 의미로 이해될 때, 말씀은 모두가 연결을 이루면서 어울리고 아름다운 시리즈에서 있다.

바로 그 날에. 이는 말해졌던 상태를 의미한다. “날”의 내적 의미가 상태이기 때문이다.

하느님께서 그와 더불어 말하시고. 이는 지각에 일치하여를 의미한다. “하느님이 말하심, saying” 그리고 “이야기 하심, speaking”이 지각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24-26절. 그리고 아브라함이 그의 포피의 살에 할례를 베풀었을 때 그는 구십 구세의 아들이었다. 25 그리고 그의 아들 이스마엘이 그의 포피의 살에 할례를 받은 때 그는 십 삼세의 아들이었다. 26 바로 그 날에 아브라함과 그의 아들 이스마엘은 할례를 받았다.

아브라함은 구십 구세의 아들이었다. 이는 주님의 신성 본질이 그분의 인간 본질과 합일되심 이전의 상태와 때를 의미한다는 것은 “구십 구세”의 의미가 주님께서 그분의 내적 인간을 합리적 인간과 충분히 결합되게 하시기 전의 때를 의미함으로부터 알게 된다. 주님의 내적 인간, 이미 보여진 바 대로, 여호와 자신, 즉 신성 자체이셨다. 신성이 주님의 인간과 하나이셨을 때, 주님의 내적 인간은 합리성에 하나가 되셨다; 그 이유가 인간은 합리성의 가장 깊은 쪽에서 시작하여, 인간의 외적 부분으로 확장하기 때문이다.

그가 그의 포피의 살에 할례를 받았을 때. 이는 그분께서 그분의 외적 인간 속의 악들을 철저하게 추방하셨을 때를 의미하는 것인데, 이는 “할례를 받음”의 의미가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으로부터, 같은 것으로 악들로부터 순수해짐이다 에서 알게 된다; 그 이유가 모든 악들이 이 사랑들로부터 오기 때문이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그분 자신의 힘으로 악들을 추방하신 것, 이리하여 그분의 인간 본질을 신성으로 만드셨다. 이는 아주 많이 상술해 왔다.

이스마엘 그의 아들. 이는 신앙의 진리들로부터 합리적 인간이 되는 이들을 의미하는데, 이는 이스마엘의 표현이 여기서는 진리로부터 합리적 인간이 되는 것, 즉 영적 인간이 되는 것임에서 알게 된다.

십 삼세의 아들. 이는 거룩한 리메인스를 의미하는데, 이는 “10”의 의미가 리메인스 임에서; 그리고 “3”의 의미가 거룩한 것임에서 알게 된다. 고로 숫자 “13”은 10과 3으로 구성되는 바, 거룩한 리메인스를 의미한다.

그가 그의 포피의 살에 할례를 받았을 때. 이는 순수해짐을 의미하는데, 이는 “할례를 받음”의 의미가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으로부터 순수해지는 것임에서; 그리고 “포피의 살을 할례를 받음”의 의미가 이런 사랑들을 제거함에서 알게 된다.

바로 그 날에. 이는 이것이 그 때 있었다를 의미하는데, “날”의 의미가 때와 상태이다에서 알 수 있다.

아브라함이 할례를 받았고, 이스마엘 그의 아들(도 할례를 받았다). 이는 주님께서 그분의 인간 본질을 그분의 신성 본질에 결합하셨을 때, 그분 역시 진리로부터 합리적이 되는 모든 다른 이들과 결합하시어 구원하셨다를 의미한다. 이는 이 장에서 아브라함이 그 상태와 그 년령에 계신 주님을 표현함에서; 그리고 여기서 이스마엘이 진리로부터 합리적이 되는 이들을 표현함에서; 그리고 또한 “할례를 받음”의 의미가 순수해짐이다 에서 알게 된다. 그리고 이 대목이 주님을 서술하는 때는 이는 신성해지시는 것, 고로 인간을 벗으시고 신성을 입으시는 것을 의미한다.

27절. 그리고 그의 집의 모든 남자들, 그의 집에서 태어난 남자, 외국인인 아들로부터 그의 은으로 산 남자가 그에 의해 할례되어 졌다.

그의 집의 모든 사람, 집에서 태어난 자, 은을 주고 산 자. 이는 교회 내에 있는 모든 이들을 의미하는데, 이는 “집에서 태어난 자”의 의미가 천적 인간임에서; “은을 주고 산 자”의 의미가 영적 인간임에서 알게 된다; 또한 이들은 교회 내에 있는 이들인 것도 알게 된다. 그 이유가 교회 내에 있는 모든 이들, 즉 교회를 구성하는 모든 이들, 천적 부류이든, 영적 부류이든 모두이다; 그러나 천적 인간이 누구인지, 영적 인간이 누구인지는 이미 살핀 바 있다. 이 장의 마지막 절은 이 장에서 말해진 모든 것의 요약이다. 즉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서 깨끗해진 이들, 그들이 교회 내에 있든 밖에 있든 주님에 의해 의롭게 된다. 이 양쪽의 부류들이 “집에 있는 모든 이들”이라 불리운다; 내적 의미에서 “집”은 주님의 왕국을 의미한다.

외국인인 아들로부터. 이는 교회 밖의 합리적인 모든 이들을 의미한다. 이는 “외국인”이 교회 밖의 사람들임에서, 고로 이들은 말씀을 지니지 못한 이방인, 고로 주님에 관해 배우지 못했던 이들; 그리고 이들이 합리적일 때 구원된다는 것, 즉 그들이 선행 또는 서로의 사랑 안에서 살 때 그들도 그들 나름의 종교에 일치되는 양심의 어떤 것을 획득하기 때문이다.

그들이 “그에 의하여 할례 되어졌다”는 것은 그들이 주님에 의해 의로워졌다를 의미한다. 이는 “할례를 받음”의 표현과 의미가 순수해짐이다에서 알게 된다. 그들이 “그에 의해 할례되어짐”, 즉 아브라함에 의해 할례되어짐 역시 표현적이다. 즉 그들은 순수해졌고, 그로 말미암아 주님에 의해 의로워졌다는 것이다. 그러나 의로워짐 (정당화 함, justification)에 주목해보면, 이는 세상에 퍼진 생각과는 다르다. 그들이 통상적으로 상상하는 바, 즉 모든 악들과 죄들은 인간이 믿을 때 완전히 씻겨져 삭제된다는 것이다. 설사 누군가가 모든 자기 인생을 악들과 악행에서 살아 왔다 하더라도 그가 죽는 마지막 시간에서 라도 믿음을 고백하면 그렇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내가 저 세상에서 배운 바, 인간이 육체의 삶 동안 생각에서 지니고 행동에서 드러낸 모든 악들은 제아무리 작아도 닦아서 완전히 없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히려 그것은 모두가 지독하게 작은 것도 남아있다.
진실인 즉, 증오함, 복수함, 잔인함, 간음질함 같은 악들을 중재하고 행동들로 실습한 이들, 그러므로 해서 선행 없이 살아온 이들과 더불어 그것으로부터 계약된 삶이 사후 그들을 마중나온다. 즉 그들 삶의 일반적 세부적 모두에서 계속적으로 되돌려진다; 그리고 이로부터 지옥 안에서 그들의 고통이 있다. 그러나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향한 선행 안에서 살아왔던 이들과 더불어, 그들 삶 속의 악들 역시 모두 남아 있다. 그러나 그들은 세상에서의 그들의 삶 동안 그들이 선행을 수단으로 주님으로부터 받았던 선들에 의해 부드럽게 되어 있다; 그러므로 해서 그들은 천국으로 들리워 올려진다. 뿐만 아니라, 자신들에게 속해 있는 악들은 억눌러져 있다. 이리하여 그것들은 일단 나타나지 않는다. 다른 삶에 있는 이들은 자기들이 거기서 자기들과 더불어 악들을 가지고 있는지를 의심한다. 그 이유는 그것들이 드러나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이 이 경우가 그러한지를 알 때까지 그것들을 허락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그 다음 다시 천국 안으로 들리워진다.
위의 내용이 의로워짐에 의해 뜻해지는 것이다; 이 방법에서 그들은 그들 자신이 정의이다고 인정하지 않고 정의는 주님의 것임을 인정한다. 신앙을 가진 자가 구원되어진다고 말하는 것은 진정 옳다; 그러나 말씀에서 “신앙, faith”에 의해 뜻해지는 것은 주님을 사랑함과 이웃을 향한 선행 외의 것을 두고 이르는 말이 아니다. 이 사랑들로부터 살아가는 것을 두고 이르는 말이 신앙인 것이다. 교리적인 것들과 신앙의 교조(독단적 주장)들은 신앙이 아니다. 그저 신앙에 속한 어떤 일부일 뿐이다; 이런 교리이든 주장들이든 모두는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함에 율법과 예언의 본 뜻이 달려 있음을 위해 존재해야 할 것이다. 이 두 사랑이 신앙의 보편적 교리이다 (마. 22:34-39; 막 12:28-35).

*************************************

창세기 제 18 장

성경: 창세기 18장

1. 그리고 여호와께서 마므레의 상수리나무 숲에서 그에게 나타나셨다, 그리고 날이 뜨거워져 가고 있는 때에 그는 천막의 문에 앉아 있었다.
2. 그리고 그는 그의 눈을 들었다, 그리고 보았다. 그리고 세 사람이 자기 앞에 서 있 는 것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는 그들을 보았다, 그리고 천막의 문으로부터 그들 을 만나러 달려 갔다, 그리고 땅 쪽으로 자신을 굽혔다.
3. 그리고 그는 말했다, 나의 주여, 만일 제가 당신의 눈에서 은총을 발견하여 왔다면, 부디 당신의 종을 지나쳐 가지 마옵소서.
4. 제가 물을 조금 가져오게 허락하여 주십시요, 그리고 당신께서는 발을 씻으십시요, 그리고 나무 아래 누워계십시오.
5. 그리고 저는 빵 조각을 가져오리니, 당신께서는 당신의 심정을 지탱하십시오, 그 후 당신께서는 지나가십시오. 그 이유는 당신께서 당신의 종을 지나치시기 때문입 니다. 그리고 그들이 말했다, 네가 말했던 대로 하라.
6. 그리고 아브라함은 급히 천막 쪽으로 사라에게 달려갔다, 그리고 말하기를, 고운 곡식 가루로 3 인의 식사 분량을 빨리 준비하여 반죽해서, 케이크를 만들어라.
7. 그리고 아브라함은 가축떼에로 달려갔다, 그리고 부드럽고 좋은 수소의 아들을 가 져왔다, 그리고 그것을 젊은이에게 주었다, 그리고 그는 서둘러 그것을 만들었다.
8. 그리고 그는 버터와 우유, 그가 만든 수소의 아들을 가져왔다, 그리고 그들 앞에 차려놓았다. 그리고 그는 나무 아래 그들 앞에 섰다, 그리고 그들은 먹었다.
9. 그리고 그들은 그에게 말했다, 네 아내 사라는 어디 있느냐? 그리고 그는 말했다, 바라보십시오, 천막에 있습니다.
10. 그리고 그는 말했다, 나는 삶의 이때 쯤 너에게 반드시 돌아오리라. 그리고 네 아 내 사라가 아들을 가진 것을 바라보리라. 그리고 사라는 천막의 문에서 들었다, 그리고 그것은 아브라함의 뒤 쪽이었다.
11. 그리고 아브라함과 사라는 늙었고, 날들 안으로 진입하고 있었다. 사라에게는 여 인의 생리가 중단되어 있었다.
12. 그리고 사라는 속으로 웃으며 말하기를, 내가 늙은 후인데 나에게 즐거움이 있을 까? 그리고 내 주인도 늙었는데?
13.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말하시기를, 왜 사라는 웃으며 말하기를, 참으로 내가 아이를 낳을까? 그리고 내가 늙어져 있는데? 하고 있다
14. 어떤 것이 여호와에게 놀라운 일일까? 지정한 때에 나는 너에게 돌아 올 것이다, 삶의 이맘 때 쯤, 그리고 사라는 아들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15. 그리고 사라는 두려워서 부인하여 말하기를, 저는 웃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말하였다. 아니다, 너는 웃었다.
16. 그리고 사람들은 거기로부터 일어났다, 그리고 소돔의 얼굴쪽을 향하여 쳐다보았 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그들을 전송하기 위해 그들과 함께 갔다.
17. 그리고 여호와께서 말하셨다, 내가 하는 것을 아브라함으로부터 숨겨야 할까?
18. 그리고 정녕 아브라함은 크고 번성하는 나라일 것이다. 그리고 땅의 모든 나라들 은 아브라함 안에서 복있을 것이다.
19. 내가 그를 아는 바, 그는 그의 아들들과 그의 가문에게 명령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은 정의와 공정을 실시하는 여호와의 길을 지켜갈 것이다. 그리고 여호와께서는 그분이 아브라함에 관해 말하셨던 것을 그에게 가져다 줄 것이다.
20. 그리고 여호와께서 말하셨다. 소돔과 고모라의 함성이 커졌기 때문이고, 그들의 죄는 매우 비통스럽게 되었기 때문이다.
21. 나는 아래로 갈 것이다, 바라건대, 그리고 나는 나에게 당도한 함성같이 그들이 극에 도달했는지 아닌지를 보고, 나는 알게 되리라.
22. 그리고 사람들은 거기서부터 앞을 바라보았고 소돔을 향하여 갔다. 그리고 아브라 함은 아직 여호와 앞에 서 있었다.
23. 아브라함이 가까이 나아가, 그리고 말했다, 당신께서는 악인과 더불어 의인도 멸 하시렵니까?
24. 뜻밖에도 의인 오십 명이 성 안에 있다면, 당신께서는 성 안에 있는 의인 오십 명 때문에 그곳을 유보하시지 않고 멸하시렵니까?
25. 의인을 악인과 함께 멸하게 하는 일들은 당신과는 거리가 먼 일이고, 의인을 악인 같이 취급하시는 것 역시 당신과는 거리가 먼 일입니다. 모든 땅의 심판자는 공 정을 실시하지 않겠습니까?
26. 그리고 여호와께서 말하셨다, 만일 내가 소돔에서 의인 오십 명을 성 안에서 발견 한다면, 나는 그들 때문에 모든 그곳을 유보하리라.
27. 아브라함이 대답하여 말하기를, 간절히 바라는 것이 있어 저는 내 주께 말하려 저 를 내세웁니다, 그리고 저는 먼지요 재 입니다.
28. 의인 오십 명에서 다섯이 모자랄 경우, 당신께서는 다섯 때문에 온 성을 멸하시렵 니까? 그리고 그분은 말하셨다, 내가 사십 오 명을 발견한다면 그것을 멸하지 않 으리라.
29. 그리고 그는 그분께 말을 더 보탰다, 그리고 말하기를, 사십 명이 거기서 발견된 다면; 그리고 그분은 말하셨다, 나는 그 사십 때문에 그것을 하지 않을 것이다.
30. 그리고 그는 말했다, 오 나의 주여 이렇게 말씀드린다고 노여워하지 마십시오.. 거기서 삼십 명이 발견된다면; 그리고 그분은 말하셨다, 내가 거기서 삼십을 발견 한다면 나는 그것을 하지 않으리라.
31. 그리고 그는 말했다, 간절히 바라와서 감히 내 주께 저를 내세워 말씀드립니다. 이십이 거기서 발견된다면; 그리고 그분은 말하셨다, 이십 때문에 나는 그것을 멸 하지 않으리라.
32. 그리고 그는 말했다, 오, 내 주여 또 말씀드린다고 노여워하지 마십시오, 그러나 이것 한 번 입니다. 열이 거기서 발견된다면; 그분은 말하셨다, 나는 그 열 때문 에 그것을 멸하지 않으리라.
33. 그리고 여호와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말하시는 것을 마무리지으신 후 가셨다. 그리 고 아브라함은 자기 처소로 돌아 갔다.

각 절의 내적 의미

1절. 그리고 여호와께서 마므레의 상수리나무 숲에서 그에게 나타나셨다, 그리고 날이 뜨거워져 가고 있는 때에 그는 천막의 문에 앉아 있었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나타나셨다. 이는 주님이 지각하심을 의미한다. 이는 말씀의 역사물들은 표현적일 뿐이다는 사실, 그 안에 의미를 지닌다는 사실, 이 의미가 내적 의미이다는 사실로부터 알게 된다. 우리 앞의 구절의 내적 의미로부터 취급된 주제는 주님과 그분의 지각하심이고, 이것이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심에 의해 표현되어졌다. 이와 같은 것이 말씀의 역사물의 모두 각각의 행위, 나타남, 대화들에 있는 표현적 본성이다. 그러나 그것들이 무엇을 표현하는지는 역사물들이 시각의 대상물 같이 대상물로 바라보지 않으면 나타나지 않는다. 이렇게 할 경우 우리는 더 드높은 것들에 관하여 생각할 기회와 때를 맞이한다. 예를 들면, 동산으로부터, 마치 우리가 동산을 바라보는 듯, 우리는 열매들, 그것의 사용, 그로부터 얻는 생활의 즐거움을 생각하고, 더 나아가 더 드높은 것, 낙원의 행복, 천국의 행복까지 생각해 본다. 이와 같이 생각되어지고, 실로 동산의 몇 개의 대상물이 보여지나 이것들은 관심의 대상에서 비껴 서 있는다. 말씀의 역사물들 역시 이와 같다. 이것들의 내적 의미 안에 있는 천적, 영적인 것들이 부각되어질 때. 역사물은 단어 자체와 더불어 뒷전으로 밀려난다.

마므레의 상수리나무 숲에서. 이는 지각의 품질을 의미하는데, 이는 “상수리나무 숲”의 의미로부터, 그리고 “마므레”의 표현과 의미로부터 분명해진다. “상수리나무 숲”이 일반적으로 의미하고 표현하는 것은 제1권에서 살핀 바 있다; 그리고 “마므레의 상수리나무 숲”이 특별하게 표현하고 지각하는 것은 (창. 13:18) 지각들, 그러나 이것은 기억 속의 지식들로부터, 그리고 이 지식들로부터 파생된 첫 합리성으로부터 있는 인간의 (첫) 지각이다.
지각이 무엇인지는 오늘날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그 이유는 오늘날 고대인들, 특히 태고인들이 지녔던 것과 같은 지각을 가진 자가 없기 때문이다; 태고인들은 지각으로부터 선한 것인지, 결과적으로 참된 것인지를 알았다. 태고인들은 자기들이 거룩한 것에 관하여 생각할 때, 그들에게는 천국을 통하여 주님으로부터 그들의 합리성 안으로 유입이 있었고, 이를 통하여 그들은 그것이 맞는지 안 맞는지를 즉시 지각했다. 이와 같은 지각은 그들이 천국적인 생각을 더 이상 하지 않고 지상적 세상적인 것들을 생각하기 시작했을 때 그들과 더불어 멸해졌다; 그리고 그것 대신에 양심이 이 지각을 계승했는데, 이것도 일종의 지각이다. 그 이유가 양심에 따리서, 또는 양심에 반대되게 행동하는 것은 그것이 그러한지, 안 그러한지, 또는 그렇게 행동해야 하는지, 아닌지를 지각하는 것밖에 더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양심의 지각은 안으로 흐르는 선으로부터가 아니다. 그것은 유아기로부터 자기들의 예배의 거룩함에 일치하여 인간의 합리성에 이식되어온 진리가 이 후에 확증됨으로부터 이다. 그 이유가 이것 만을 그들은 선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양심은 일종의 지각인 셈이나 그것은 진리로부터 있는 지각인 셈이다; 그리고 선행과 순진을 주님께서 이 진리 안에 은근히 심어주실 때, 이 양심의 선이 존재 안으로 들어 온다. 위와 같은 관찰로부터 우리는 지각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다. 그러나 지각과 양심 사이에 많은 차이가 있다.
주님에 주목하면, 그분이 세상에 계셨을 때, 그분의 모든 생각은 신성으로부터 있으셨다. 그 이유는 그분 만이 신성과 천적 사람되시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그분 만이 자신 안에서 여호와이셨고, 여호와로부터 지각을 가지신 분이기 때문이다. 그분의 지각들은 그분이 여호와에 더욱 가까이 합일되심에 비례하여 더욱 더 내면적으로 되어 가셨다. 그때 당시 주님께서 무슨 품질의 지각을 지니셨는지에 관하여는 창. 13:18의 마므레의 상수리나무 숲으로부터 알 수 있고, 그분이 이 장에 포함된 것들을 지각하셨을 때 지니신 지각의 품질은 이어지는 구절에 묘사되어 있다.

그가 천막의 문에 앉아 있었다. 이는 그때 당시 그분에게 속했던 거룩함을 의미한다. 즉 사랑의 거룩함인데, 즉 사랑이 뜨겁게 자라 오르는 낮에 의해 의미됨으로부터, 그리고 “천막”의 의미가 거룩한 것이다로부터 분명해진다. 주님께서 그때 당시에 마므레의 상수리나무 숲에 의해 의미되는 지각, 즉 보다 수준 낮은 합리적 지각에 계셨을 때, 그럼에도 이 지각은 창. 12:6에서 언급된 모레의 상수리나무 숲에 의해 의미된 지각보다는 더 내적이기는 하였는데, 이 지각하심이 그분이 천막의 문에 앉아 계심에 의해, 즉 거룩인 것의 입구에 앉아 계심에 의해 표현되고 의미되었다. 지각함들이 더 내면적, 또는 덜 내면적인 경우가 어떻게 있게 되는지는 태고인의 지각함을 가지고 예증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들로부터 내가 들었던 바, 자기들은 듣고 보는 대상물인 것들로부터 인 기억 속의 지식들 안에 더 있으면 있을수록, 자기들의 지각력은 더 낮은 수준에 머문다는 것이다. 그러나 자기들이 선행과 사랑의 천국적인 것들 쪽으로 기억 속의 지식 넘어로 더 들어 올리면 올릴수록, 자기들의 지각력은 더욱 더 내면적이 된다는 것, 그 이유는 이럴 경우 그들이 주님께 더 가까이 있기 때문이다.

날이 뜨거워져 가는 때에. 이는 사랑으로부터를 의미하는데, 이는 “뜨거움”이 내적 의미에서 사랑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리고 뜨거움이 날 수, 햇 수에 속하고 있기 때문에, 사랑이 날의 뜨거움, 또는 해의 뜨거움에 의해 역사물에서의 관련됨에 따라 표현되어지고 있다. “뜨거움, 열, heat”이 사랑을 의미하는 것은 사랑이 영적 열이다고 불리우는 것으로부터 알 수 있다. 그리고 자라 오르는 따뜻함은 모든 애착이라 단정되는데, 이는 우리의 평범한 언어 속에서도 늘 사용되고 있다. 더 나아가 인간의 내면에 있는 사랑과 사랑의 애착은 인간의 외면에서도 마찬가지로 있다는 사실로부터, 그리고 그의 육체적 측면에서 조차도 그것 자체를 뜨거움을 가장하여 명백하게 드러낸다는 사실로부터도 알게 된다. 사랑이 이러하듯 뜨거움도 그러하다. 천적인 사랑과 영적인 사랑은 순수한 뜨거움을 준다. 그 외 다른 열기, 즉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으로부터 있는 열기, 또한 다른 더러운 사랑들로부터 있는 열기는 불결하다. 그리고 다른 삶에서 이 열기들은 배설물들 안으로 가라앉는다. 더욱이 거룩함은 사랑과 선행으로부터가 아니고는 서술되어지지 않는다고 알려져 있다; 그리고 신앙으로부터가 아니고 사랑과 선행이 신앙의 진리들 안에 있는 만큼에서 거룩함은 있다. 이렇지 않다면, 신앙의 진리들은 거룩하지 않다.

2절. 그리고 그는 그의 눈을 들었다, 그리고 보았다. 그리고 세 사람이 자기 앞에 서 있는 것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는 그들을 보았다, 그리고 천막의 문으로부터 그들을 만나러 달려갔다, 그리고 땅 쪽으로 자신을 굽혔다.

그는 그의 눈을 들었다. 이는 그분이 그분 자신 안을 보셨음을 의미하는데, “눈을 들어 올림”의 의미로부터 알게 된다. 말씀에서 “눈”은 내면의 시각, 또는 이해함을 의미한다. 이로부터 “눈을 들어 올림”은 자아를 넘어 있는 것을 보고 지각하는 것을 뜻한다. 내면인 것들이 말씀에서 더 높이 있는 것들에 의해 표현되는데, 마치 “위쪽을 향하여 바라 봄”, “하늘 쪽으로 눈을 들어 올림”, “더 높은 것을 생각함” 같은 표현들이 그 예이다. 이런 이유에서 사람들은 천국이 더 높은데에 있다고, 또는 자신 넘어에 있다고 상상한다. 사실인즉 그것은 높은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적인 것들 안에 있다. 인간이 사랑의 천적인 것들 안에 있을 때, 그때 그의 천국은 그의 내부에 있다. 이로부터 “눈을 들어 올리는” 것은 자기 내부를 보는 것을 의미한다.

세 사람이 자기 앞에 서 있는 것을 바라보았다. 이는 신성 자체, the Divine Itself, 신성한 인간, the Divine Human, 그리고 거룩히 진행함, the Holy proceeding 을 의미하는데 이는 해설 없이도 알 것이라 본다. 그 이유는 모든 이에게 셋으로 된 것(Trine)이 있고, 이 셋은 하나이다는 것이 모든 이에게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셋이 하나이다는 것은 이 장에서 분명해지는데, 즉 3절에서, 말해진다, “그는 말했다, 나의 주여, 만일 제가 당신의 눈에서 은총을 발견하여 왔다면, 부디 당신의 종을 지나쳐 가지 마옵소서”라고 말해진다. 더 나아가 10절에서, “그리고 그는 말했다, 나는 네게 꼭 돌아 올 것이다.” 그리고 13절에서, “그리고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말하셨다.” 그리고 15절에서, “그는 말했다, 아니다 너는 웃었다.” 17절에서, “그리고 여호와께서 말하셨다, 내가 하는 것을 아브라함으로부터 숨겨야 할까?” 19절에서, “내가 그를 알아왔기 때문에.” 20절에서, “그리고 여호와께서 말하셨다.” 21절에서, “나는 아래로 갈 것이다, 그리고 나는 나에게 당도한 함성 같이 그들이 극에 도달했는지 아닌지를 보고, 나는 알 것이다.” 23절에서, 아브라함이 말했다, “당신께서는 악인과 더불어 의인도 멸하시렵니까?” 25절에서, “이 일은 당신과는 거리가 먼 일이고; 이것도 당신과는 거리가 먼 일입니다.” 26절에서, “그리고 여호와께서 말하셨다, 만일 내가 의인 오십 명을 발견한다면, 나는 그들을 위하여 그 곳을 유보할 것이다.” 27절에서, “저는 내 주께 말하려 저를 내세웁니다.” 28절에서, “당신께서는 다섯 때문에 온 성을 멸하실 것입니까? 그리고 그분은 말했다, 의인 마흔 다섯을 발견한다면 나는 그것을 멸하지 않을 것이다.” 30절에서, “오 나의 주여 노여워하지 마십시요; 그분은 말하셨다, 거기서 삼십 명을 발견한다면, 나는 그것을 멸하지 않을 것이다.” 31절에서, “그는 말했다, 감히 내 주께 저를 내세워 말씀드립니다; 그분은 말하셨다, 나는 이십 명을 위하여 그곳을 멸하지 않을 것이다.” 32절에서, “내 주여 또 말씀드린다고 노여워하지 마십시요; 그리고 그분은 말하셨다, 열 명을 위하여 나는 그것을 멸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33절에서, “그리고 여호와께서는 아브라함과 이야기하는 것을 마무리하시자 그분은 가셨다.” 위의 모든 구절로부터, 아브라함에게 나타난 세 명에 의해 의미되는 것은 신성 자체, 신성한 인간, 거룩히 진행됨 임을 알게 된다. 그리고 이 셋이 하나이다는 것 역시 알려준다. 내적 의미에서 여기서 취급된 주제는 여호와이시고, 그분이 주님에게 나타나신 것, 그리고 주님이 이것을 지각하셨다는 것이다. 그러나 실존 인물인 아브라함에게 이와 같이 있었다는 식의 나타남에 의하여서는 아니다. 물론 아브라함에게 세 사람이 보여졌었다는 것은 역사적으로 진실이다. 그러나 이것은 신성한 지각, 또는 주님이 인간 안에서 계실 때 그분이 가졌던 신성으로부터의 지각을 표현하고 있다. 이 지각이 이어지는 구절에서 취급되어진다.

그가 그들을 보았다. 이는 그분께서 이것을 주목하셨을 때를 의미하는데, 이는 내적 의미에서 “보는 것”의 의미가 이해하는 것, 주목하는 것, 또는 계발되는 것임에서 알게 된다. “본다”가 이 의미를 가지는 것 만큼 더 흔한 것은 없을 것이다. 여기서의 경우, 주님께서 신성으로부터의 지각이 표출되는 것을 주목하셨다는 뜻이다.

그들을 만나려고 달려갔다. 이는 그분께서는 지각하여 왔었던 것들에 더 가까이 접근했다를 의미하는데, 이는 내적 의미에서 있는 시리즈로부터 분명해진다. 그 이유가 앞 절에서 그분이 지상 생활 당시 가지신 주님의 지각을 취급하고, 이 절에서는 신성으로부터 있게 되는 지각을 그분이 주목하심을 취급하는데, 여기서는 지금 그것에 더 가까이 접근하심이 아브라함이 그들을 만나려 달려감에 의해 표현되고 의미되고 있기 때문이다.

천막의 문으로부터. 이는 지상 생활 당시 주님에게 속했던 거룩함으로부터를 의미하는데, 이는 “천막”의 의미가 거룩인 것으로부터, 그리고 “문, door”의 의미가 거룩한 것의 입구를 의미함에서 알게 된다.
땅 쪽으로 자신을 굽혔다. 이는 기쁨을 동반한 굴종(humiliation)의 결과를 의미한다는 것은 “자신을 구부림”의 의미가 겸손이다에서 알게 된다. 모든 내면의 애착들은 외향적으로, 또는 신체적으로 움직여서 그것들에 상응하는 몸짓을 가지는 것과 같이 자신의 자아를 겸손히 함에 애착하는 것은 굴종(수치스러워함)과 엎드림을 가진다. 이 엎드림이 기쁨으로부터 있었다는 것이 분명한 이유는 주님께서 지각하심이 신성으로부터 있다는 것에 주목하셨기 때문이다. 주님이 인간 안에 계셨을 때. 그분이 수치스러워 하시는 상태에 계셨다는 것은 많은 구절들에서 이미 취급한 바 있다. 이는 주님의 신성한 자비로부터 이 장에서 더 취급된다.

3절. 그리고 그는 말했다, 나의 주여, 만일 제가 당신의 눈에서 은총을 발견하여 왔다면, 부디 당신의 종을 지나쳐 가지 마옵소서.

그는 말했다. 이는 주님께서 그렇게 생각하셨음을 의미하는데, “말함, saying”의 의미가 역사적 의미에서 발견할 경우, 지각하는 것임에서 알게 된다.

나의 주여. 이는 하나 안에 있는 셋, 즉 신성 자체, 신성한 인간, 그리고 거룩히 진행함이라는 셋이 하나 안에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는 여기서 “주님”이라 말하여 단수로 취급된 바로부터 분명해진다. 이와 마찬가지로 단수로 취급되는 구절들이, 27, 31절에서, “저는 내 주께 말하려 저를 내세웁니다,” 그리고 30, 32절에서, “나의 주여 노여워하지 마십시오.” 세 명이 또한 “여호와”라 하여 한명으로 불리운다. 즉 13절에서,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말하셨다”; 14절에서. “어떤 것이 여호와에게 놀라운 것일까?” 22절에서, “아브라함이 여호와 앞에 아직 서 있었다.” 그리고 33절에서, “그리고 여호와께서는 아브라함과 이야기하시는 것을 마치시고 가셨다.” 이상으로부터 분명한 바, 세 명(즉 신성 자체, 신성한 인간, 거룩한 진행)은 주님과 동일하고, 주님은 여호와와 동일하다는 것이다. 사도 신경이라 불리는 기독교의 신앙서에서, 동일한 것이 인정되어진다. 거기서 명백한 단어들로 말해진다. 즉 “창조 안 된 세 분은 있지 않고, 무한한 세 분은 있지 않고, 영원한 세 분은 있지 않고, 전능한 세 분은 있지 않고, 세 분의 주님들은 있지 않고, 그러나 한 분이시다.” 하나 안에 있는 이 셋을 분리하는 자는 자기들이 우주의 창조자, 한 분 최고의 실체를 인정하는 자로 부터서는 아무도 없다; 이것은 교회밖에 있는 이들에게서는 용서되어진다. 그러나 교회 내에 있는 이들, 그리고 이것을 말하는 이들, 비록 그들이 그것을 말하고, 때때로 그것을 생각한다 해도 사실상 어떤 하느님도 인정하지 않고 있다; 그들은 주님을 인정하는 것은 더 더욱 아니다.

만일 제가 당신의 눈에서 은총을 발견하여 왔다면. 이는 주님께서 이 지각을 인지하셨을 때 주님께서 복종하신 상태를 의미하는데, 이는 이 단어들 자체에서 풍겨나오는 겸허에 대한 애착으로부터 알게 된다. 또한 이 뒤의 말, “부디 당신의 종을 지나쳐 가지 마옵소서”로부터도 겸허의 느낌이 우러나고 있다. 말씀의 세부적 특별한 측면에서는 두 가지 측면이 있다. 애착(애정) 측면과 제재(subject matter) 측면이다. 천적 천사들은 말씀을 애착 측면에서 내적 의미를 지각한다. 그러나 영적 천사는 제제 측면에서 말씀의 내적 의미를 지각한다. 애착 측면의 내적 의미에서 말씀을 지각하는 이들은 제재에 속하는 단어들에 별 관심이 없고, 자신들을 위해 애착과 애착의 시리즈로부터 생각들을 만들어 낸다, 그래서 이 생각들은 끝이 없는 다양성을 가지고 있다. 이 구절에 있는 말, 즉 “만일 제가 당신의 눈에서 은총을 발견한다면, 부디 당신의 종을 지나쳐 가지 마옵소서”를 예로 생각해 보자. 그들은 주님의 인간에서 있게 되는 주님의 굴종의 상태를 지각한다. 그러나 굴종(겸허)에 대한 애착이다. 이로부터의 방식에서, 다양성, 이는 표현할 수 없이 풍부하게, 그들은 자신들을 위해 천적인 생각들을 만들어낸다, 사실상, 이것을 두고 생각(idea)들이라 불리는 것은 타당치 않을 것 같고,애착과 지각의 아주 많은 빛들이라 말해야 될지 모른다. 이것은 계속되는 시리즈로 뒤잇는다. 이 시리즈는 읽혀지는 말씀 안에 포함된 것들의 애착의 시리즈에 일치한다.
이것이 보여주는 바, 천적 천사의 지각, 생각, 말은 영적 천사들의 것보다 더 말로 나타낼 수 없고 더 풍부하다는 것이다. 그 이유가 영적 천사들은 표현들의 시리즈에 일치하여 제재에 따라 단순하게 결정되어진다. (천적 천사들의 말이 이런 본성을 지닌다는 것은 1647항에서 살핀 바 있다.) 이로부터 본문, “만일 제가 당신의 눈에서 은총을 발견한다면”은 천적 의미에서는 주님이 이 지각을 인지하셨을 때, 있게 되는 주님의 상태 속의 굴종을 의미한다. 또한 “당신의 눈에서 은총을 발견”한다는 표현 방식은 관습화된 그 시대의 언어 표현임도 아래 구절로부터 더 찾아진다. 야곱에 대한 라반의 굴종이다:
라반이 그에게 말했다, 만일 내가 네 눈에서 은총을 발견한다면 (창. 30:27)
또한 에서에 대한 야곱의 굴종(경의를 표함)이다:
야곱이 말했다, 부디, 제가 당신의 눈에서 은총을 발견한다면 (창. 33:10)
이 외에도 말씀의 각 처에 있다.

부디 당신의 종을 지나쳐 가지 마옵소서. 이는 그분께서 매우 강도 높게 바라셨음을 의미하는 것이 방금 말한 것으로부터 나타난다. 이런 경우는 아주 많은데, 즉 여기서도 굴종이 있다는 것, 이 굴종이 이런 방식으로 표현되었다는 것, 동시에 그분이 지각하기를 시작한 때의 상태가 사라지지 않기를 바램에 대한 애착이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의 “종”은 주님에게 속했던 인간이 신성으로 만들어지기 전에서의 인간이다. 이는 예언서의 많은 구절들로부터 알는지 모른다. 이유는 이렇다. 이는 여러 차례 설명했었다. 즉 주님은 그분의 인간을 신성으로 만드시어, 인간을 벗으실 때까지 그분에 속했던 인간은 단지 종의 수준에 불과했다. 그분에게 속했던 인간은 어머니로부터 이었고, 그런고로 그 인간은 시험의 전투들을 수단으로 싸워 정복해서 완전하게 추방해야 하는 어머니로부터의 유전성을 가진 유약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어머니로부터의 유약하고 유전성인 것이 하나도 남아있지 않게 해 나가셔서, 마침내 어머니로부터의 것은 하나도 있지 않으셨다. 고로 그분은 어머니로부터 있었던 모든 것을 벗으셨다. 그러므로 더 이상 그녀의 아들이 아니었다, 하여 그분 자신 마가복음에서 말하신다:
그들이 그분에게 말했다, 보라, 당신의 어머니와 당신의 형제들이 밖에서 당신을 만나려 하 고 있다: 그리고 그분은 그들에게 대답하시어, 말하시기를, 누가 나의 어머니, 또는 나의 형 제인가? 그리고 그분 주위에 앉은 그들을 빙둘러 쳐다보시며, 그분은 말하셨다, 보라, 나의 어머니와 나의 형제들이다;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자는 누구든지, 나의 형제, 나의 자매, 나의 어머니와 동일하다. (막. 3:32-35; 마. 12:46-49; 눅. 8:20, 21).
그분이 어머니로부터의 인간을 벗으시고, 신성한 인간을 입으셨을 때, 이로부터 그분은 자신을 “사람의 아들”이라 부르셨다. 우리는 이를 신약 성경에서 많이 발견한다; 그리고 또한 “하느님의 아들”도 많이 등장한다; “사람의 아들”에 의해서는 그분이 진리 자체이심을 뜻했다, 그리고 “하느님의 아들”에 의해서는 그분이 선 자체이심을 뜻했다. 이것은 그분의 인간이 신성으로 만들어지셨을 때, 그분의 인간 본질 측면에 해당된다. 이전의 상태는 주님의 굴종의 상태이고, 이후의 상태는 신성화 하심의 상태이다.
이전의 상태, 즉 아직 유약한 인간이 그분에게 속해 있었던 때에, 그분은 여호와를 자신 외의 다른 사람으로 숭배하셨다. 실로 여호와에게 종의 신분 같으셨다. 그 이유가 신성에 비교해 볼 때, 인간은 그 외 달리 표현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말씀에서 용어 “종, servant”은 위와 같은 인간 수준을 서술한다. 이사야에서:
나는 나 자신을 위하여, 그리고 나의 종 다윗을 위하여 그것을 보존하기 위해 이 도성을 방어할 것이다 (이. 37:35).
위 구절에서 아시리아인이 취급되는데, 이들 진영에 있는 군사 185000명이 천사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다윗”은 주님을 표시한다, 즉 오시기로 되었던 분, 인간 측면에서 “종”이라 불리우신다. (다윗이라 불리우신 것에 대하여는 1888항을 참조.)
이사야서에서:
내가 기댈 내 종을 보라; 내가 뽑은 자, 나의 혼이 기뻐하는 자이다; 나는 그 위에 내 영을 둘 것이다; 그는 나라들에 심판을 가져올 것이다 (이. 42:1).
위 구절은 주님이 인간 안에 계셨을 때의 주님에 관해서임이 분명한 바, 용어 “종”과 “뽑은 자”가 서술되어진다. 다시 이사야서에서:
나의 종밖에 누가 소경이더냐? 그리고 내가 보낸 천사같이 귀머거리이더냐? 누가 완전한 자 같이 소경이더냐? 그리고 여호와의 종같이 소경이더냐? (이. 42:19)
위 구절 역시 주님에 관해서이다; 그리고 그분이 인간 안에 있으셨을 때를 두고 용어 “종”과 “천사”가 서술되어진다.
다시 이사야서에서:
너희는 나의 증인이다, 여호와께서 말하신다, 그리고 내가 선택한 나의 종이다; 너희는 나 를 알고, 나를 믿어라, 그리고 내가 그이다는 것을 깨달아라 (이. 43:10).
다시 이사야서에서:
여호와께서 말하신다, 태로부터 그분의 종이 되도록 내가 만들어낸 자; 야곱을 그분에게 다 시 데려오기 위하여서, 그리고 이스라엘을 그분에게 모우기 위해서; 그리고 그분은 말하셨 다, 네가 나의 종이 되고 야곱의 열 두 지파를 세우는 것은 내게는 경미한 것이다; 나는 땅 의 맨 끝까지 내 구원이 있도록 나라들의 빛을 위하여 너를 주었다 (이. 9:5, 6).
위 구절에서, 그분이 “나라들의 빛”, 그리고 “땅의 맨 끝까지 구원”을 만드셨기 이전의 주님과 그분의 인간이 분명하게 취급되고 있다. 다시 이사야서에서:
누가 너희 중에서 그분의 종의 음성을 듣고 여호와를 경외하느냐? 어둠에서 걷고 빛을 가 지지 못했어도 여호와의 이름 안에서 그분을 신뢰하고 그분의 하느님에게 기대라 (이. 50:10).
위의 “종”은 주님에 속했던 인간을 표시한다; 그리고 그분이 이 인간 안에 계셨고, 진리의 길을 가르치셨다는 것이 “여호와의 종의 음성”이다.
다시 이사야서에서:
여호와께서 네 앞에서 가신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하느님이 너희를 그러모으신다. 보라, 나 의 종은 신중하게 행할 것이다, 그는 들려질 것이고, 드높여질 것이다, 그리고 극도로 일으 켜질 것이다 (이. 52:12, 13).
다시 이사야서에서:
그는 모양도 없고 영예도 없다; 우리는 그를 보았다, 그러나 나타남이 없었다; 그는 경멸받 았다, 슬픔의 사람이었다, 질병에 시달렸다. 여호와께서는 그를 매질하기로 작정하셨다; 그 분은 그를 유약하게 만드셨다; 만일 그가 자기 혼을 죄있다고 만든다면, 그는 씨를 볼 것이 다, 그는 날들을 길게 할 것이다, 그리고 여호와의 뜻이 그의 손에 의해 번성할 것이다; 그 는 자기 혼의 수고함으로부터의 것을 볼 것이다, 그는 만족할 것이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그들의 불법들을 운반하였다 (이. 53:2, 3, 10, 11).
위 구절들은 이 장에서와 같이 주님의 굴종의 상태를 공개적으로 취급하고 있다; 말해지는 바, 그 당시 그분은 유약한 인간이셨다는 것이다, 즉 그분은 “슬픔의 사람, 질병에 시달리는 사람, 유약한 인간, 그분의 혼의 수고함에 있으셨다.” 이런 저런 많은 그분에 관한 서술들 중에서도 특별한 것은 그분이 “종”이라 불리신 대목일 것이다.

4절. 제가 물을 조금 가져오게 허락하여 주십시요, 그리고 당신께서는 발을 씻으십시요, 그리고 나무 아래 누워계십시오.

제가 물을 조금 가져오게 허락하십시오. 이는 그들(세 사람)은 더 가까이 끌어당겨져야 한다는 것, 그래서 그들 자신들이 신성으로부터의 것들로부터 주님의 지적인 것들에로 더 가까이 내려오게 허락되어야 하겠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것들이 물을 조금 가져오게 하십시오 라는 말만 가지고는 분명해질 수 없다. 그러나 이 구절에 있는 시리즈로부터, 그리고 이어지는 구절과의 연결로부터 분명해진다. 이 구절에서 말해지는 것으로부터, 즉 “제가 물을 조금 가져오게 하시고, 발을 씻으시고 나무 아래 누우십시요”가 신성이 그 자체 지상에 있으셨던 주님의 지각의 상태로 더 가까이 끌어당겨져야 하겠다는 것, 그리고 그분이 더 잘 지각하도록 하시기 위하여 자연으로부터의 어떤 것을 입으셔야 하겠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을 알 자는 아무도 없다; 그 이유가 이 비밀함들의 추적이 역사적으로 이해하는 측면에서는 명백해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내적 의미에서 있는 이런 내용이 이 구절의 의미이다는 것, 그리고 천사들은 이 의미들을 지각한다는 것, 나는 확실히 알고 있다.
이런 사항을 통해 말씀에는 얼마나 많고 깊은 비밀함이 감추여 있는지를 우리에게 알려주기도 한다. 더욱이 이와 같은 사항이 의미이다는 것은 몇 개의 단어들의 내적 의미에 있는 의미로부터도 알 수 있다. 즉 “물”의 의미는 지적인 것들이다는 것, 그리고 “발”의 의미는 자연적인 것들이다는 것, 그리고 “나무”의 의미는 지각이다는 것으로부터도 짐작이 가능할 수 있다. 이런 것들이 이해될 때, 내적 의미에 있는 의미(방금 서술한 것들)가 사물들의 시리즈로부터 보여질 수 있다, 그리고 앞의 말과 뒤의 말의 연결로부터도 알게 된다.

당신께서는 당신의 발을 씻으십시오. 이는 주님이 지상에 계셨던 당시의 상태에서 더 잘 지각하려면 [신성은] 자연으로부터의 어떤 것을 입어야 함을 의미하는데, 이는 “발”의 의미가 자연적인 것들이다에서, 그리고 사물의 연결 시리즈로부터 알게 된다. 여기에 비밀이 감추여 놓여있다는 것은 누구나 어느 정도는 짐작될 것이다. 즉 아브라함이 세 사람에게 물을 조금 가져와서 발을 씻고 나무 아래 누우시라고 말했다, 그럼에도 아브라함은 그들이 주님, 또는 여호와이셨다는 것을 알았다는 사실, 이런 방식으로 언급되었다는 사실로부터 비밀함이 이 대목에 있다는 말이다.
“발”이 자연적인 것들을 의미하는 것은 다른 삶에서의 표현물로부터, 그리고 이로부터 파생된 태고인들 사이에 있던 표현물, 그리하여 말씀에 있는 표현물로부터 분명해진다. 천적, 영적인 것들은 머리와 머리에 속한 것들에 의해 표현되고 있다; 합리적인 것과 그것에 속한 것들은 가슴과 가슴에 속하는 것들에 의해 표현되고 있다; 자연적인 것들과 그것에 속한 것들은 발과 그것에 속한 것들에 의해 표현되고 있다. 이로부터 “발바닥, sole”, 그리고 발의 “뒤꿈치, heel”는 가장 낮은 수준의 자연적인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신, shoe”은 모든 것 중에서 최고로 수준 낮은 것을 의미하고, 이것은 불결하다.
위와 비슷한 내용들이 꿈과 환상들에 있는 표현물로 예언서에서 보여지고 있다. 느부갓네살에 의해 보여진 (신)상을 읽어보자:
이것의 머리는 정금이었고, 가슴과 팔은 은이었고. 배와 넓적다리는 놋쇠였고, 발의 일부는 쇠로, 일부는 진흙이었다 (단. 2:32, 33).
위 구절에서, “머리”는 천적인 것들을 의미하고, 이것들은 가장 안쪽에 있다. 그리고 “금”이다 (금에 관하여는 113, 1551, 1552항 참조); “가슴과 팔”은 영적인 것, 또는 합리적인 것들을 의미하는데, 이것은 “은”이다 (은에 관하여는 1551항을 참조); 그러나 “발”은 더 수준 낮은 것들, 이는 자연인 것, 이 속의 진리는 “쇠”로, 이 속의 선은 “진흙”이다. “쇠”가 진리를 표시하는 것은 창. 4:22에서 살폈다; 또한 “진흙”은 선을 표시한다; 이 구절에서의 경우 모두 자연적인 것을 의미한다. 위와 같은 연속은 천국에 있는 주님의 왕국, 지상에 있는 그분의 교회, 그리고 주님의 왕국인 모든 이에 있는 연속의 질서이다.
다니엘이 본 환상에서도 비슷하다. 이렇게 말해진다:
나는 내 눈을 들었다, 그리고 보았다, 그리고 고운 모시옷을 입은 사람을 바라보았다, 그리 고 그의 허리는 우바스의 금으로 띠를 둘렀다; 그의 몸은 녹주석 같았다, 그리고 그의 얼굴 은 번개의 나타남 같고, 그의 눈은 등불 같았다, 그리고 그의 팔과 다리는 광을 낸 빛나 는 놋쇠 같았다 (단. 10:5, 6).
위 구절은 특별히 선과 진리 측면에 관련되는 말씀의 내면들을 의미하고 있다; “팔”과 “다리”는 말씀의 외면들이다. 이것은 글자의 외면들이다. 그 이유는 자연적인 것들이 그 안에 있기 때문이다. 말씀의 외면의 것들은 자연적인 것들에서 취해진 것들이다. 위에 언급된 신체 부분, 즉 허리, 몸, 얼굴, 눈 외에 다른 많은 부분들의 의미도 다른 삶에서 있는 표현물로부터 그 의미가 분명해진다. 이에 관하여는 주님의 신성한 자비로부터 우리가 주님의 천국인 웅대한 사람을 취급할 때, 그리고 이로부터 영들의 세계에 파생된 표현물에 관해 취급할 때 말해질 것이다.
우리는 출. 24:9-10에서 모세와 아론, 나답과 아비후, 그리고 칠십 원로들에 관하여 이렇게 읽는다. 즉 “그들은 이스라엘의 하느님을 보았다. 그리고 거기 그분의 발 아래는 사파이어 돌로 작업한 듯, 그리고 깨끗함에 관련하여서는 천국의 실체인 듯 했다.” 이는 그들이 자연적인 것들에서 표현된 교회의 외적인 것들 만을 보았음을 의미한다; 말씀의 글자 의미 또한 그 안에는 외적인 것들이 자연적인 것들에 의해 표현되어져 있다. 이것이 “발” 아래가 사파이어 돌로 작업한 듯, 마치 천국의 실체인듯 하다고 묘사되고 있다. 이것이 그들에 의해 보여진 주님이었는데, 이것 안에는 보다 낮은 것들, 또는 자연적인 것들만 있었음이 분명하다. 그 이유는 그분이 “이스라엘의 하느님”이라 불리우셨기 때문이다. 즉 이분을 교회의 모든 것들이 표현했고, 내적 의미에 있는 말씀의 모든 것들이 이분을 의미했다. 그 이유가 주님은 시간에서 의미되는 것들에 일치하여 눈에 보이게 표출되었기 때문이다. 즉 요한의 경우, 그분이 말씀을 의미할 때는 흰 말을 타신 사람으로서 표출되었다 (계. 19:11, 13).
에스겔에 의해 보여진 동물들, 이는 거룹들인데, 천적, 영적인 것들에 관련하여 묘사되었다. 다른 표현물 사이에서, 그들의 얼굴과 날개들에 의해 천적, 영적인 것들이 표현되었다. 그러나 자연적인 것들에 관련하여서는 아래와 같다:
그들의 발, 일직선의 발: 그리고 그들의 발 바닥은 송아지의 발 바닥 같다; 그리고 그것들 은 광을 낸 놋쇠의 빛남같이 반짝거렸다 (겔. 1:7).
발(즉 자연적인 것들)이 “광을 낸 놋쇠같이 반짝임”을 가지고 있다고 말해지는 이유는 “놋쇠”가 자연적 선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주님이 “사람의 아들”로서 요한에게 나타나셨을 때도 위와 매우 비슷하다:
그분의 눈은 불꽃이었고, 그리고 그분의 발은 광을 낸 놋쇠 같았다 (계. 1:14, 15; 2:18).
“발”이 자연적인 것들을 의미하는 것은 이어지는 아래 인용 구절로부터 더 분명해질 것이다. 계시록에서:
나는 구름에 에워싸여 천국으로부터 내려 오는 또 다른 힘 센 천사를 보았다; 그리고 무지 개가 그의 머리 둘레에 있었다, 그리고 그의 얼굴은 태양 같았다, 그리고 그의 발은 불 기둥 같았다; 그리고 그는 그의 손에 열린 작은 책을 가졌다. 그리고 그는 그의 오른 발을 바다 위에, 그리고 그의 왼발은 땅 위에 놓고 있었다 (계. 10:1. 2).
이 천사를 수단으로 마찬가지 방식에서 말씀이 의미되어지고 있다; 내적 의미에서 있는 말씀의 품질이 “그의 머리 둘레에 있는 무지개”, 그리고 “그의 얼굴은 태양 같다”에 의해 의미되고 있다; 그러나 말씀의 외적 의미, 즉 글자 의미는 “발”에 의해 의미된다. “바다”는 자연적 진리들을, “땅”은 자연적 선들을 의미하고, 이것들이 “그의 오른쪽 발이 바다 위에, 그리고 그의 왼쪽 발은 땅 위에” 놓음에 의해 의미된 것을 보여준다.
“발판”은 말씀의 다양한 구절들에서 언급되지만,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이사야서에서:
여호와께서 말하셨다, 하늘은 나의 왕좌이다, 그리고 땅은 나의 발판이다. 네가 나에게 짓 는 이 집이 어디 있느냐? 그리고 내 쉼의 장소가 어디 이냐? (이. 66:1)
“하늘”은 천국에 있는 주님의 왕국과 땅에 있는 주님의 왕국, 즉 주님의 교회, 또한 주님의 왕국인 모든 이 안에, 또는 (각 사람의) 교회 안에 있는 천적, 영적인 것들(고로 가장 안쪽의 것들)이다; 고로 천적, 영적인 것들을 그 자체에 주목하면, 이것들은 사랑과 선행, 이로부터 파생된 신앙이다; 고로 내적 예배 속에 있는 모든 것들, 마찬가지로 말씀의 내적 의미에 있는 모든 것들이다: 이것들이 “하늘”, “주님의 왕좌”라고 불리운다. 그러나 “땅”은 이것들에 상응하는 더 낮은 것들, 즉 더 낮은 합리적이고 자연적인 것이다. 이것들이 상응으로부터 천적, 영적인 것들을 서술해준다. 이와 같은 것들은 더 낮은 천국에 있는 것들, 또한 외적 예배와 교회 안에 있는 것들, 그리고 말씀의 글자 의미에 있는 것들이다; 한마디로, 내적인 것들로부터 진행하는 모든 것들이 외적인 것들에서 표출되는 것이다. 표출한 것들, 즉 자연적인 것들은 “땅”과 “주님의 발판”이라 불리운다.
마찬가지로 예레미야서에서:
주님께서는 그분의 성내심의 구름으로 시온의 딸을 덮으신다; 그분은 이스라엘의 아름다움 을 하늘로부터 땅으로 내던지셨다, 그리고 그분의 진노하심의 날에 그분의 발판을 기억하 지 않으셨다 (애. 2:1).
또한 다윗서에서:
너희는 여호와 우리의 하느님을 드높여라, 그리고 네 자신 그분의 발판에서 절하라
(시. 99:6).
그리고 다시:
우리는 그분의 성막으로 들어갈 것이다, 우리는 그분의 발판에서 절할 것이다 (시. 132:7)
유대인들 사이에 있던 표현 교회에서, 하느님의 집과 성전은 그분의 발판이었다고 상상했었다. 그 이유는 그들이 외적 표현 예배가 하느님의 집과 성전에 의해 의미된다는 것을 몰랐기 때문에서였다. 동시에 “하늘”과 “하느님의 왕좌”에 의해서는 교회의 내적인 것들이 의미된다는 것에 완전히 무지했었다.
다시: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하심: 내가 네 적들을 네 발판으로 만들 때까지, 너는 내 오른쪽에 앉으라 (시. 110:1; 마. 22:42-45; 막. 12:36; 눅. 20:42, 43).
위 구절도 마찬가지로 “발판”은 자연적인 것들, 즉 감각적인 것들과 기억 속의 것들, 이로부터 파생되는 인간의 합리적인 것들 모두를 의미한다. 이것들이 예배를 타락시킬 때, 그리고 말씀의 글자 의미로부터 이것을 실행할 때, 그리하여 예배가 오로지 외적인 것에만 몰입해 있을 때, 그리고 내적 예배는 없고 더러운 것만 있을 때, 이것들은 “적들”이라 불리운다. 자연적인 것들과 합리적인 것들이 남용되고 더럽혀질 때, 이것들은 “적들”이 되어 있으나, 이것들을 그 자체에 국한해 보면 이것들은 내적 예배에 관련되어 있는 바. 이것이 회복되면, 그것들은 (내적인 것들에게) “발판” 역할을 해준다. 즉 외적 예배이든, 말씀의 글자 의미이든 선용되는 것이다.
이사야서에서:
레바논의 영광이 네게로 올 것이다, 전나무, 소나무, 그리고 회양목이 내 성소를 아름답게 하려고 모두 네게로 올 것이다, 그리고 나는 내 발의 장소를 존경할 만하게 만들 것이다 (이. 60:13).
위 구절의 주제는 주님의 왕국과 교회이고, 이 속의 천적, 영적인 것들은 “레바논의 영광”(즉 삼나무, 백향목, cedar), 그리고 그것의 자연적인 것으로부터의 천적인 것들은 “전나무, 소나무, 회양목”이다. 고로 외적 예배 속에 있는 것들이다; 이로부터 “나는 내 발판을 존경할 만하게 만들 것이다”라고 말해진다. 사실상 이런 나무들이 존경할 만하게 만들어 질 수는 없다. 그러나 그것들이 의미하는 것들이 그렇게 되게 한다.
“발”이 이런 사항들을 의미하는 것은 유대 교회에 있는 표현물로부터도 분명해진다. 즉 출. 30:19, 20; 40:31, 32에서 아론과 그의 아들들이 자기들의 손과 발을 씻고 성막으로 들어가는 대목이다. 이런 대목에도 비밀함이 있다는 것은 누구라도 눈치채는데 실패하지 않을 것이다. 즉 내적인 것이 깨끗해지고 순수해지지 않으면 손과 발을 씻는 것은 외적 일상 업무밖에 아닌 쓸모 있음은 더 무엇이 있을까? 사실상 내적인 것은 이런 행위로 깨끗해지고 순수해지지 않는다. 그러나 교회의 모든 의식들이 내적인 것들, 즉 천적, 영적인 것들의 표현물인 바, 위 구절 역시 그러하다: 여기서 의미하는 것은 외적 예배의 깨끗함이다. 그리고 외적 예배는 그 안에 내적 예배가 있을 때 깨끗해진다. 그러므로 그들의 대야(laver)들은 놋쇠로 만들었고, 큰 대야는 놋쇠 바다라 불렀다. 그리고 솔로몬의 성전 주위에는 열 개의 작은 놋쇠로 된 대야가 있었다 (왕상. 7:23, 38); 그 이유는 “놋쇠”가 자연적 선과 같은 것인, 외적 예배의 선을 표현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 방식의 표현물이 있다:
아론의 씨의 사람 사이에서 망가진 발, 또는 망가진 손을 지닌 자는 여호와께 불로 만드는 공물을 바치려고 접근해서는 안된다 (레. 21:19, 21).
발이나 손이 망가진 이들에 의해 타락시킨 외적 예배에 있는 것이 표현되어졌다.
“발”이 자연적인 것들을 의미하는 것은 예언서들에서 더 분명해진다. 모세의 책에서:
아셀은 아들들보다 더 복있을지라; 그는 형제들이 반기는 자가 되라, 그리고 그의 발이 기름에 담그게 하라; 네 신은 쇠와 놋쇠이다 (신. 33:24, 25).
내적 의미에서 “기름”, “발”, “쇠”, “놋쇠”, “신”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알지 않으면 아무도 위 구절을 이해할 수 없다. “발”은 자연적인 것, 그리고 “신”은 더 낮은 자연적인 것, 즉 육체적 감각같은 것을 의미한다; 또한 “기름”은 천적인 것을, “쇠”는 자연적인 진리를, 그리고 “놋쇠”는 자연적인 선을 의미한다. 이런 의미들을 알면, 위 구절의 내용 파악이 가능해진다.
나흠서에서:
여호와의 길은 사나운 비바람과 폭풍 안에 있다, 그리고 구름들은 그분의 발의 먼지이다 (나. 1:3)
위 구절에서 “발의 먼지”는 인간과 더불은 자연적인 것과 육체적인 것들을 의미한다, 이로부터 “구름”이 온다. 같은 것이 다윗서의 이 말에 의해 의미되어 있다;
여호와께서 하늘을 밀어제치시고 내려오셨다, 그리고 짙은 구름이 그분의 발 아래 있었다 (시 18:9).
신앙의 선들과 진리들이 자연적인 빛을 수단으로 타락될 때, 이것이 “발”과 “발굽”에 의해 묘사되어지고 있다. 에스겔서에서:
너는 강에서 올라왔다, 그리고 네 발로 물들을 어지럽혔다. 그 원인으로 시내가 짓밟혔다. 나는 그 원인으로 해서 많은 물들로부터 모든 짐승을 파멸할 것이다; 사람의 발이, 짐승의 발굽도 더 이상 그것들을 어지럽게 하지 못할 것이다 (겔. 32:2, 13).
위 구절은 이집트를 취급하고 있다, 이를 수단으로 기억 속의 지식들이 의미되어진다. 시내와 물을 어지럽게 한 “발”과 “발굽”은 자연적이고 감각적인 것들로부터 파생된 기억 속의 지식들을 의미한다. 그들이 이것 가지고 신앙의 비밀을 추론한다; 그들은 이 비밀이 이런 지식들을 수단으로 납득될 때까지 믿지 않는다; 그리고 이것 가지고 추론하면 할수록 더욱 덜 믿어지는 바, 결국 전혀 믿지 않는다. 이상 살핀 바로 명백해지는 바, 말씀에서 “발”은 자연적인 것들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추가로 더 의미되는 것들은 구절에 흐르는 시리즈로부터 분명해진다.

나무 아래 누워계십시오, 이는 지상에 계실 당시 그분이 있으셨던 상태 속의 지각에 더 가까이를 의미하는데, 이는 “나무”의 의미가 지각함임에서 알게 된다. 사물들의 시리즈는 위의 내용들이 단어들의 진짜 의미이다는 것을 보여준다는 것을 마음에 불러 일으키게 한다. “나무들”이 지각들을 의미하는 것은 천적 인간이 낙원, 또는 에덴의 동산에 비교되고 비유된다는 사실로부터 근원되었다; 천적 인간과 더불은 천적인 것들의 지각이 동산 안의 나무들에 견주어지고 있다.

5절. 그리고 저는 빵 조각을 가져오리니, 당신께서는 당신의 심정을 지탱하십시오, 그 후 당신께서는 지나가십시오. 그 이유는 당신께서 당신의 종을 지나치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말했다, 네가 말했던 대로 하라.

제가 빵 조각을 가져오리다. 이는 천적인 어떤 것이 인접해 있음을 의미하는데, 이는 “빵”의 의미가 천적인 것이다로부터 분명해진다. “빵”이 천적인 것을 의미하는 이유는 “빵”은 일반적 측면일 경우, 모든 식품(food)을 뜻하기 때문이다. 고로 내적 의미에서는 모든 천국의 식품(양식)을 의미한다. 천국의 식품이 무엇인지는 제 1권에서 설명했다. “빵”이 일반적으로 모든 식품을 뜻하는 것은 말씀의 아래 인용 구절로부터도 알 수 있다. 우리는 요셉으로부터 이렇게 읽는다:
그가 자기 집을 다스리는 자에게 말했다. 너는 사람들- 그의 형제들-을 집으로 데려오라, 그리고 짐승을 잡고, (식사)를 준비하라; 그 후 그들이 준비를 다했을 때, 그리고 먹게 되 자, 그는 말했다, 빵을 놓아라 (창. 43:16, 31)
위는 그들이 식탁을 준비하는 것을 뜻하는 바, “빵”은 여러 종류의 식사 모두를 표시한다. 이드로에 관하여 이렇게 읽는다.
아론이 왔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모든 원로들이 하느님 앞에서 모세의 장인과 더불어 먹기 위해 왔다 (출. 18:12).
위 구절 역시 “빵”은 모든 종류의 음식을 표시한다. 사사기서에서 마노아에 관하여:
마노아가 여호와의 천사에게 말했다. 제가 간구하기로 당신을 붙들어 놓고, 염소 새끼를 당 신 앞에 준비하게 허락하십시오. 그리고 여호와의 천사가 마노아에게 말했다, 비록 네가 나 를 붙들지라도 나는 네 빵을 먹지 않을 것이다 (사. 13:15, 16).
위에서 “빵”이 염소 새끼를 표시하고 있다. 요나단이 벌집을 먹었을 때, 그들이 그에게, 사울이 백성에게 엄명을 내렸다고 말했다, 말하기를:
오늘 빵을 먹는 자는 저주가 있을 것이다 (삼상. 20:24, 27)
위에서 “빵”은 모든 식품을 표시하고 있다. 다시, 사울에 관하여:
사울이 빵을 먹기 위해 앉았을 때, 그가 요나단에게 말했다, 어찌하여 이새의 아들은 어제 도, 오늘도 빵을 먹으러 오지 않느냐? (삼상. 20: 24, 27)
위에서 빵은 모든 음식을 올려놓은 식탁을 뜻하고 있다. 다윗이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에게 말한 것을 읽는다:
너는 계속적으로 내 식탁에서 빵을 먹을 것이다 (삼하 9:7, 10)
에윌므로닥에 관하여도 역시, 그가 이렇게 말했다,
유다의 왕 여호야긴은 내 앞에서 그의 사는 날까지 계속적으로 빵을 먹을 것이다
(왕하. 25:29).
또한 솔로몬에 관하여:
솔로몬의 하루의 빵은 고운 곡식가루 삼십 섬, 거친 곡식가루 육십 섬, 기름진 소 열 마리, 목장 소 스무 마리, 양 백 마리, 그 밖에 수사슴, 들 암염소, 영양, 살찐 새들이었다
(왕상. 4: 22, 23).
위에서 “빵”은 위 모든 것을 분명하게 표시한다.
이제 “빵”이 일반적으로 모든 종류의 식품을 뜻하는 바, 그러므로 이것은 내적의미에서 천국의 식품들이라 불리우는 모든 것들을 의미한다. 이는 어린 양, 양, 암염소, 염소 새끼, 수염소, 수소로 만들어지는 제물과 태워 바침으로부터도 아직 더 분명해진다. 이런 것들을 통틀어 “여호와께 불로 만든 공물의 빵”으로 불리운다. 다양한 제물이 취급되는 레위기서의 아래 인용 구절로부터 분명해진다:
성직자는 제단 위에서 그것들을 태울 것이다. 쉼의 냄새를 위하여 여호와께 불로 만드는 공물의 빵이다 (레. 3:11, 16).
모든 이런 제물들과 태워바치는 공물이 “빵”이라고 불리운다. 다시:
아론의 아들들은 그들의 하느님에게 거룩히 있을 것이다. 그들은 자기들의 하느님의 이름 을 모독하지 말 것이다; 불로 만들어 여호와께 드리는 공물을, 그들의 하느님의 빵을, 그들 은 바칠 것이다. 너는 그를 신성하게 해야 한다. 그 이유는 그가 하느님의 빵을 바치기 때 문이다. 아론의 씨의 사람은 안에서 흠이 있는 자는 그의 하느님의 빵을 바치려고 가까이 오면 안된다 (레. 21:6, 8, 17, 21).
위 구절에서도 역시 제물과 태워 바침의 공물은 “빵”이라 말해진다. 이와 같은 것이 레. 22:25로부터도 진실이다. 다시:
이스라엘의 아들들에게 명령하라, 그리고 그들에게 말하라, 나의 봉헌물, 쉼의 냄새를 위한 불로 만든 공물을 위한 빵을 너희는 그것들의 지정한 시간에 나에게 바칠 것이다.
(민. 28:2).
여기서도 역시 “빵”은 열거되는 모든 제물을 표시한다. 말라기서에서:
오염된 빵을 내 제단 위에 바쳤다 (말. 1:7).
그들이 먹은 거룩해진 제물들도 역시 “빵”이라 불리웠다. 아래 구절에서 분명해진다. 모세의 책에서:
불결한 것들을 만진 자는 거룩해진 것들을 먹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의 살을 물에 서 씻을 것이다, 그리고 태양이 저물 때, 그는 깨끗할 것이다; 그 후에 그는 거룩해진 것들 을 먹을 것이다, 그 이유는 이것이 그의 빵이기 때문이다 (레. 22:6, 7).
유대 교회에서 태워바치는 공물과 제물은 천국에 있는 주님의 왕국, 땅의 주님의 왕국(즉 교회에서), 또한 각 사람과 더불은 주님의 왕국, 또는 그의 교회 속의 천적인 것들을 표현했다. 일반적으로 사랑과 선행 속에 있는 모든 것들을 표현했다. 그 이유가 이런 것들이 천적인 것들이기 때문이다. 제물의 각 종류는 특별하고 특이한 어떤 것을 표현했다. 이 모든 것이 그때 당시 빵이라 불렀다, 그러므로 외적 예배를 위해 제물 제도가 폐지되고, 다른 것들이 그것들의 자리를 계승했을 때, 빵과 포도주를 사용하도록 명령되었다.
이 모두로부터 우리가 알게 되는 바, [성찬식에서의] “빵”이 의미하는 것은 제물들에 의해 표현된 모든 것들, 고로 내적 의미에서 주님 자신을 의미한다. “빵”이 주님 자신을 의미하기 때문에, 그것은 보편적 인류를 향한 사랑 자체, 그리고 사랑에 속한 것을 의미한다. 고로 “빵”은 모든 천적인 것들을 의미하고, 같은 방식에서 “포도주”는 모든 영적인 것들을 의미한다. 이에 관해 주님께서 요한복음에서 명백한 말로 가르치신다: 그들이 말했다,
우리의 조상은 사막에서 만나를 먹었습니다; 성경에 쓰여진 바, 그분은 그들에게 먹으라고 하늘로부터 빵을 주셨습니다. 그러자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하셨다, 참으로, 참으로, 내가 네게 말한다, 모세가 하늘로부터 빵을 주었던 것이 아니다; 그러나 나의 아버지께서는 천 국으로부터 진정한 빵을 네게 주신다. 하느님의 빵은 천국으로부터 내려오는 그분이시다, 그분이 세상에 생명을 주신다. 그러자 그들이 그분에게 말했다, 주여 언제나 우리에게 이 빵을 주십시오.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하셨다, 나는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자는 결코 굶주리지 않을 것이다; 나에 관하여를 믿는 자는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요. 6:32-35).
그리고 다시:
참으로, 참으로 내가 네게 말한다, 나에 관해서를 믿는 자는 영구한 생명을 가진다. 나는 생명의 빵이다. 너의 조상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다, 그리고 죽었다. 이것이 천국으로부터 내려 오는 빵인 즉, 거기로 부터의 (빵을) 사람이 먹으면 죽지 않는다. 나는 천국으로부터 내려 온 살아있는 빵이다: 만일 어떤 사람이 이 빵을 먹는다면, 그는 언제까지나 살 것이 다: 그리고 내가 주는 이 빵은 나의 살이다, 이것을 나는 세상의 생명을 위하여 줄 것이다.
(요. 6:47-51).
지금 “빵”이 주님이시기 때문에 이것은 사랑 속에 있는 천적인 것들에 속한다. 이것은 주님의 것이다; 그 이유가 주님은 천적 (평면) 자체이시다, 그 이유는 그분은 사랑 자체이시기 때문이다. 즉 자비 자체이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이 그러하기 때문에, “빵”은 천적인 모든 것, 즉 인간과 더불은 사랑과 선행의 모든 것을 뜻한다, 그 이유가 이것들이 주님으로부터 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랑과 선행 안에 있지 않은 이들은 그들과 더불어 주님을 가지고 있지 않다. 고로 “빵”에 의해 내적으로 의미되는 선하고 행복한 것들을 선물 받지 못한다. 이런 바깥쪽 상징물이 명령된 이유는 인간의 대부분의 것이 외적 예배 안에 있기 때문에서 이다. 그러므로 어떤 바깥쪽 상징물 없이 인간은 자기들과 더불어 거룩한 어떤 것이 있어지기 힘들다. 그러므로 그들이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향한 선행 안에서 살 때, 그들이 비록 이 사랑과 선행이 예배의 최고로 내적인 것이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있다 해도 그것들에 속한 내적인 것을 가진다. 고로 그들의 외적 예배 안에서 그들은 “빵”에 의해 의미되는 선들을 확증하게 된다.
예언서들에서도 사랑의 천적인 것들이 “빵”에 의해 의미되어진다. 이를 위해 다음 구절들을 찾아 읽어 보라. 즉 이. 3:1, 7; 30:23; 33:15, 16; 55:2; 58:7, 8; 애. 5:9; 겔. 4:16, 17; 5:16; 14:13; 암. 4:6; 8:11; 시. 105:16 등등이다. 마찬가지로 식탁 위에 있는 “얼굴들의 빵”은 레. 24:5-9; 출. 25:30; 40:23; 나. 4:7; 왕상. 7:48에서 읽어 보라.

당신께서는 심정을 지탱하십시오. 이는 만나지는 만큼에서를 의미하는데, 이는 내적 의미에서 단어들의 대략적인 의미로부터 확연한 분명함은 있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사물의 시리즈로부터 분명해진다. 그 이유가 취급되는 주제가 선한 지각이기 때문이다. 즉 이것은 그때 당시 주님에 속했던 인간의 지각에 더 가까이 당겨져야 한다는 것, 신성 자체가 그분의 지적인 것들인 아래로 내려가야 한다는 것, 이렇기 위해서 자연적 어떤 것을 입어야 한다는 것, 그리고 그것에 천적인 어떤 것이 인접해야 한다는 것, 그 만큼에서 만나진다는 것, 이것이 “심정을 지탱하는” 것이다. 대략적 의미에서, “빵을 수단으로 심정을 지탱하는 것”은 새로이 되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만나는 천적인 어떤 것을 조금 향유하는 것이다. .

그 후 당신께서는 지나 가십시오. 이는 그분이 지각하는 것을 그만두어도 그분은 그것에 만족하실 것임을 의미한다. 이 의미 역시 위와 같은 방식인 시리즈로부터 분명해진다.

그 이유가 당신께서는 당신의 종을 지나치시기 때문입니다. 이는 그들이 이 목적 때문에 왔음을 의미하는데, 이는 설명 없이 분명해질 것이라 본다.

그들이 말했다, 네가 말했던 대로 하라. 이는 그렇게 행해질 것임을 의미하는데 이것 역시 설명 없이 알 것이다.

6절. 그리고 아브라함은 급히 천막 쪽으로 사라에게 달려갔다, 그리고 말하기를, 고운 곡식 가루로 3 인의 식사 분량을 빨리 준비하여 반죽해서, 케이크를 만들어라.

아브라함은 급히 천막 쪽으로 사라에게 달려갔다. 이는 주님의 합리적 선이 그분의 진리와 합쳐졌음을 의미하는데, 이는 “아브라함”과 “사라”의 표현으로부터, 그리고 “천막”의 의미로부터 분명해진다. 이제 하나씩 살펴 보자. 각각 그리고 모든 것들은 내적 의미에서 취급되는 주제와 관련된 것을 지니는 것 같이, 위 (세) 단어들은 주님께서 인간의 지각 안에 계셨을 당시 그분 안으로 온 신성한 지각에 관련되는 것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지각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이들은 이 경우가 지각과 더불어 어떻게 되어가는지를 알 수 없다. 더욱이 지각이 더욱 더 내면적으로 있다는 것, 즉 자연적 지각, 합리적 지각, 마지막으로 신성이고, 주님만이 가지셨던 지각인 내적인 지각에 대해서는 더욱 알 수 없다. 지각 안에 있는 이들, 천사들의 경우인데, 그들은 자기들이 지닌 지각을 매우 잘 알고 있다; 즉 자기들이 지닌 것이 자연적 지각이든, 합리적 지각이든, 그들에게 있는 신성인 더 내면의 지각이든 그들은 알고 있다. 그렇다면 주님의 경우는 어떨까? 그분은 최고이고 무한한 신성으로부터 지각을 가지셨다. 이 지각 안에는 어떤 천사도 있은 적이 없다. 그 이유가 지각은 주님의 최고의, 또는 무한의 신성으로부터 그분의 인간 본질을 통하여 천사들에게 흐르기 때문이다.
주님의 지각이 묘사된 이유는, 그분이 인간 안에 있으셨을 때, 어떻게 신성 자체, 신성한 인간, 거룩한 진행이 그분 안에서 하나로 있게 되는지를 그분으로 알게 만드려 해서 였다; 그 다음 그분의 합리성이 신성으로 어떻게 만들어지는 지를 알게 하시려 해서 였다; 마지막으로 주님 안에서 그분의 인간 본질과 신성 본질의 합일을 수단으로 구원되어야 하는 인류의 품질은 어떤 것이었는지 알게 만드시려 해서 였다; 이것들은 이 장에서 취급되는 주제이다. 이 주제를 풀어나감에서, 우선 주님의 지각하심이 묘사되는데, 마치 합일하심 자체 때문에 결과되어 지는 것과 같다.

“아브라함”이 이 장에서는 선 측면에서의 상태에 관련되는 주님이다는 것은 아브라함의 표현으로부터 분명해진다. 그가 여호와와 이야기할 때, 여기서와 같은 경우, 아브라함은 인간 안에 계신 주님을 표현한다. 다른 경우에서 아브라함은 주님의 신성한 선을, 사라는 그분의 신성한 진리를 표현하고 있다; 그러므로 지금 아브라함은 주님의 합리적 선을 표현하고 있다.

여기서의 “사라”가 진리 측면에서의 주님이다는 것은 사라의 표현이 선에 인접한 지적 진리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여기서의 경우는 합리적 진리인데, 그 이유는 방금 위에서 설명한 아브라함의 경우와 같기 때문이다. 말씀의 역사물에서 선과 진리는 결혼을 수단으로 하지 않고는 달리 표현될 수 없다. 그 이유는 결혼이 선과 진리에서 실제로 있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천적인 것과 영적인 것 사이에 신성한 결혼이 있기 때문이다. 이를 달리 말하면, 사랑 속에 있는 것들과 신앙 속에 있는 것들 사이에 , 또는 의지에 속한 것들과 이해성에 속한 것들 사이에 결혼이 있다는 말이다. 전자는 선 속에, 후자는 진리 속에 있다. 천국들에 있는 주님의 왕국에 이와 같은 결혼이 있다; 물론 땅 위의 주님의 왕국( 즉 교회)에도 마찬가지로 있다. 이런 결혼은 모든 이 각자에게도, 사물의 낱개에 이르기까지 에서도 있다. 이런 결혼 안에 있지 않은 것은 살아있지 않다(생명이 없다). 신성한 결혼으로부터 보편적 속성에서의 위와 같은 결혼이 있다. 그리고 보편적 속성의 것은 개별적, 특수적 속성에도 그대로 있다. 단지 형체나 외관이 다를 뿐이다. 이와 달리 존재하는 것은 무엇이든 없다. 모든 것에 이와 같은 결혼이 있기 때문에 예언서와 더불어 모든 주제는 두겹 방식에서 표현되어지고 있다. 특히 이사야의 경우이다. 거기서 천적인 것, 또는 선 측면에 관련하여 표현되고, 다른 한편은 영적인 것, 또는 진리 측면에 관련하여 표현된다. 모든 것 안에서 결혼을 닮은 것이 있다는 것은 이미 살핀 바 있다. 그러므로 주님의 선이 아브라함에 의해, 주님의 진리가 사라에 의해 표현되어 진다.

“천막”은 사랑의 거룩함 측면에서의 주님이다는 것은 “천막”의 의미가 거룩한 것이다에서 분명해 진다.

그리고 말했다. 이는 그때에 상관(비교)하여 있는 지각의 상태를 의미하는데, 이는 “말함”의 역사적 의미가 지각이다에서 알게 된다.

고운 곡식 가루로 3 인의 식사 분량을 빨리 준비하여, 반죽하고, 케이크를 만들어라. 이는 그 상태에서 있는 그분의 사랑의 천적인 것을 의미하는데, 이는 “식사”, “고운 곡식 가루”, “케이크”의 의미로부터 분명해진다. 이것은 아래에서 취급될 것이다. 이런 것들에 포함된 의미는 아마 글자 자체에만 그의 관심을 두는 이들, 아브라함이 손님 대접을 위해 식사를 준비하는 것에 따른 내용이겠거니 하는 생각에 멈추는 이들이라면, 그리고 아브라함에게 사람들이 방문했을 뿐, 그들에 관한 더 비밀한 것들에 관심이 없는 이들이라면 믿어질 수 없는 것들이다. 이렇게 관심이 덜 가는 이유 중 하나는 예언서의 경우는 예언적인 것이 있겠거니 하고 집념하나 역사서의 경우는 역사 이야기려니 단정하고 구절을 읽기 때문이다. 사실인즉, 역사서의 세부 사항도 예언서나 다름 없이 깊이 감추인 비밀함들이 각 장 마다, 각 구절 마다, 각 단어 마다에있다. 주님의 말씀은 인간을 위하여 쓰여 있기 앞서 천국을 위해서 쓰여 있다는 사실 하나만 생각해도 말씀의 깊이가, 높이가 어느 정도 일지 가늠될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역자 역시 이 책을 번역하면서 모르는 것이 너무 많아 혼란스러울 때가 페이지마다 있어 지상 생활에 별 도움 안될 듯한 이 책을 덮고 싶을 때가 많았지만 계속 붙드는 이유이다. 또한 이 책은 어쩌면 인간 구원보다 천국 설명에 대부분의 지면을 할애하고 있음도 이 책을 읽으면서 상념해야 할 것이다. 즉 우리가 지니고 있는 성경, the Word는 우리의 것이기에 앞서 천사의 것이다.) 역사서의 경우 그 이야기는 우리의 마음을 이야기 자체에 끌어 당기는데는 그 힘이 예언서보다 강하나 내면들을 상대적으로 더 어둡게 한다. 어쨌든 인간이 말씀을 읽을 때, 그로부터 천사들은 천국적 생각들을 가진다. 이런 방식에서 천국은 말씀을 수단으로 인류와 결합되어진다. “식사”, “고운 곡식 가루”, “케이크”의 내적 의미를 살펴보자.

“고운 곡식 가루”가 주님의 지상 생활 당시 그분과 더불어 있었던 천적, 영적인 것을 표시한다는 것, “케이크”는 이 두 가지가 결합한 것으로 동일한 것을 표시한다는 것은 표현 교회의 제물로부터, 그리고 식사 제물(meat-offering), 즉 기름을 섞은 고운 곡식 가루로 케이크를 만들어 바친 식사 제물로부터 알게 된다. 표현 예배의 주요한 부분은 태워 바침과 제물이었다. 이것들이 표현한 것은 빵이 취급된 앞 5절에서 상술했다. 즉 빵은 천국들에 있는 주님의 왕국, 땅 위에 있는 주님의 왕국(교회), 그리고 각 사람과 더불은 교회, 또는 주님의 왕국에 있는 천적인 것들을 표현한다는 것이다; 이를 일반적 측면에서 보면 사랑과 선행으로부터의 모든 것들이다. 그 이유가 이것들이 천적인 것들이기 때문이다. 모든 공물과 제물이 그때 당시 “빵”이라 불리웠다. 그리고 공물과 제물에 식사 제물 역시 인접되어 있었다. 이 제물은 이미 말한 대로 기름을 섞은 고운 곡식 가루, 이것에 유향이 첨가되었다, 더불어 제주로 포도주가 추가되었다.
식사 제물이 표현하는 것 역시 제물과 비슷하다, 그러나 수준이 상대적으로 낮다. 즉 영적 교회 속에 있는 것, 그리고 외적 교회 속에 있는 수준이다는 말이다. 아마 성경을 읽는 누구라도 짐작이 가능한 것은, 이런 공물이나 제물이 신성한 것들을 담고 있지 않다면 결코 명령되지도 않았고 성경에 기록될 이유도 없었을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또한 그것들이 신성한 것들을 표현하지 않았다면, 이방인들에게서도 이런 제물 바침은 있었는 바, 그것들과 하등 다를 바 없을 것이다. 이방인들에게 있는 것, 즉 식사 제물, 제주, 유향, 꺼지지 않게 유지한 불, 그 외 많은 사항들 역시 고대 교회로부터 파생되었기 때문이다. 특별하게는 히브리 교회로부터 였다. 그러나 내적인 것(즉 표현되어진 신성한 것들)들은 이방인의 의식들로부터 분리되었던 바, 이방인의 것은 단지 우상적으로 전락되었다. 이런 이유로 유대인의 것도 외양상으로는 별반 틀리지 않은 바. 유대인들이 갖가지 종류의 우상 숭배에 몰입되어버린 원인이기도 했다. 누누이 말해진 바로부터 모든 이가 짐작하는 것은 이런 모든 의식 안에, 특히 제물과 그 세부 사항에 천국의 비밀이 있다는 점이다.
식사 제물에 주목해 보면, 이것의 본성, 어떻게 케이크를 준비하여야 하는지를 모세의 책들에서 서술하고 있다 (레. 2장: 민. 15장, 등등). 레위기서에 있는 식사 제물에 관한 법이 이렇게 서술되어 있다:
불은 제단 위에서 계속 타고 있어야 한다. 이것은 꺼지지 않아야 한다. 그리고 이것은 식 사 제물의 법이다. 아론의 아들들이 제단 앞, 주님 앞에 그것을 바쳐라. 그리고 그는 거기 로부터 식사 제물의 고운 곡식 가루 한웅큼, 그것으로부터 기름, 그리고 식사 제물 위에 있는 모든 유향을 가져 가라, 그리고 그것을 주님께 달콤한 향기를 위해 그것으로부터의 기념물로 제단 위에서 태워라. 그리고 그것으로부터의 남은 것은 아론과 그의 아들이 먹 는다. 이것은 거룩한 장소에서 누룩 없이 먹어라. 만남의 천막의 뜰에서 그들은 그것을 먹어라. 누룩과 더불어 구워져서는 안된다. 나는 불로 만든 내 제물로부터 그들의 몫으로 그것을 주었다. 이것은 가장 거룩하다 (6:13-17).
제단에서 계속 타고 있어야하는 불은 사랑, 즉 영구하고 영원한 주님의 자비를 표현했다. 말씀에서 “불”은 사랑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쉼의 냄새를 위해 불로 만들어지는 공물”은 사랑과 선행으로부터 있는 것들로 주님이 기뻐하심을 의미한다. “한웅큼”을 가져감은 그들이 온 힘을 다해, 온 마음을 다해 사랑해야 한다를 표현했다; 그 이유가 손, 또는 손바닥은 힘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한웅큼”은 힘을 의미한다. 기름과 유향과 더불은 고운 곡식 가루는 선행의 모든 것들을 표현했다. 즉 고운 곡식 가루는 선행의 영적인 것, 기름은 선행의 천적인 것, 유향은 이 방식에서 만족해 하시는 것을 표현했다.
이 케이크가 누룩이 없어야, 또는 발효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은 신실해야 할 것이다를 의미한다, 고로 신실한 심정으로부터, 그리고 깨끗하지 않음에서 자유함으로부터를 의미한다. 아론과 그의 아들이 그 남은 것을 먹는다란 인간의 상호성과 인간이 자기 것 삼음, 고로 사랑과 선행을 통하여 결함함을 표현했다; 이런 이유 때문에 그들은 거룩한 장소에서 그것을 먹어야 한다고 명령되었다. 그러므로 그 장소는 거룩 중의 거룩이라 불리워진다. 이런 것들이 식사 제물에 의해 표현되는 것들이다; 그리고 이 표현물 자체가 위의 살핀 바와 같이 천국에서 지각되어진다; 그리고 교회의 사람이 이 구절들을 읽고 위와 같이 납득하였을 때, 그러면 그는 천사들의 지각과 비슷한 생각 안에 있는 셈이다. 그러면 그는 비록 지상에 있을지라도, 그는 천국들에 있는 주님의 왕국 자체 안에 있는 것이다.
위는 말씀의 한 곳 만을 들추어 낸 식사 제물에 관련한 간단한 의미 파악이다. 그러나 각 종류의 제물에 연결하여서, 그리고 케이크로 어떻게 구워야 하는지 라던가, 어떤 종류를 깨끗해 있는 자들에 의해 바쳐져야 하는지, 기타 다른 경우들은 무엇이 있는 지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을 여기서는 생략한다. 그러나 이 주제에 관련되는 구절들은 다음과 같다. 즉 출. 29:39-41; 레. 5:11-13; 6:14-23; 10:12, 13; 23:10-13, 16, 17; 민. 5:15, 등등; 6:15-17, 19, 20; 7장의 여러 구절; 28:5, 7, 9, 12, 13, 20, 21, 28, 29; 29:3, 4, 9, 10, 14, 15, 18, 21, 24, 27, 30, 33, 37.
케이크로 만들어진 고운 곡식 가루는 빵과 동일한 것, 즉 사랑의 천적인 것을 표현했다, 그리고 식사(meal)는 사랑의 영적인 것을 표현했다. 이는 위에 열거한 구절로부터 확인된다. “얼굴들의 빵, bread of faces”, 또는 “보여주는 빵, show bread”이라 불리우는 “빵들(또는 빵덩어리들)”은 고운 곡식 가루로 만들어졌고, 이것으로 케이크를 준비하여 식탁 위에 놓았는데, 사랑의 항구적인 표현을 위해서, 즉, 보편적 인류를 향한 주님의 자비, 그리고 인간의 상호성(받고 드림) 때문에서 였다. 이 빵덩어리에 관하여 모세의 책에서 이렇게 읽는다:
그리고 너는 고운 곡식 가루를 가져 와, 그리고 그것으로 열 두 케이크(cake)들을 구워라. 십분의 이 에바가 케이크 하나이다. 그리고 너는 그것들을 두 줄로, 각 줄에 여섯 개씩, 주님 앞 순수한 탁자 위에 차려놓아라. 그리고 너는 각 줄 위에 순수한 유향을 놓아라, 하 여, 이것은 기념물을 위한 빵들, 주님에게 불로 만든 제물이다. 안식일마다 그는 계속적 으로 주님 앞에 그것을 차려 놓아라. 이것은 이스라엘의 후손들을 위하여서 이고, 영원히 지속되는 언약이다. 그리고 이것은 아론과 그의 아들들을 위해 있다. 그리고 그들은 거룩한 장소에서 그것을 먹어라. 그 이유가 이것은 영원한 법령에 의해 불로 만든 제물인 바, 그에 게 최고로 거룩하기 때문이다 (레. 24:5-9).
위 구절에 있는 모두 각각의 세부 사항, 그리고 세부 사항 속의 가장 작은 것 모두는 사랑의 거룩한 것과 선행의 거룩한 것을 표현했다. “고운 곡식 가루”는 “고운 곡식 가루(로 차린) 식사”와 동일한 것, 즉 천적이고 영적인 것을, 그리고 “케이크”는 이 둘이 결합한 것을 표현했다.
그러므로 분명해지는 바, 천국의 생각 안에 있는 이들에 있는 말씀의 거룩함인 것, 어떤 거룩함이 이 표현적 의식 실시에 있는지에 관하여서 이고, 그렇기 때문에 거룩함 중에서도 거룩함, 즉 최고로 거룩하다 라고 말하시고 있다; 이와 반대되는 경우, 즉 이런 사항들은 과거 유대인에게 있던 낡은 예배 형식이라고 상상하여 이런 의식 안에 거룩함은 없다고 이 구절을 읽어 내려가거나 읽는 것의 필요성 조차 느끼지 않는 자에게는 얼마나 텅빈 거룩함이 있을 것인지는 자명하다; 또는 이 구절을 읽으면서, 식사를 단지 식사로, 고운 곡식 가루를 막연히 고운 곡식 가루로, 케이크를 케이크로 지각하는 이들은 각 세부 사항 안에 신성하심의 어떤 것도 없이 서술된 구절이라 상상할 것이다. 이들은 성찬의 빵과 포도주 역시 어떤 의식 외에 더 아닌 것, 그 안에 거룩한 것은 없다고 상상해 버린다; 이에 반해, 인간의 마음이 성찬 의식을 하여 천국의 마음과 결합을 이루는 거룩함이 있다. 이는 내적 애착으로부터 빵과 포도주는 주님의 사랑과 우리의 상호적 사랑을 의미한다는 것, 고로 이 성찬 의식은 내면의 생각과 느낌으로부터 거룩함이 있다고 생각할 때이다.
이와 비슷한 것으로 이스라엘의 아들들이 가나안의 토지 안으로 진입하면, 그들의 첫 반죽덩어리로 만든 케이크를 여호와께 높이 올려 바침(heave-offering)으로서 바치도록 명령되어 있었다 (민. 15:20). 이와 같은 것이 의미하는 것은 예언서로부터도 찾을 수 있는데, 여기서는 에스겔서 한 대목만 읽기로 한다:
너는 금과 은으로 치장했다; 그리고 네 의복은 고운 아마포와 비단이었다; 너는 고운 곡식 가루, 그리고 기름을 먹었다, 그래서 너는 극도로 아름다워졌다, 그리고 너는 왕국으로 번 성해졌다 (겔. 16:13)
위 구절의 주제는 예루살렘이다. 예루살렘에 의해 교회가 의미되고 있다. 교회는 가장 이른 때, 즉 고대 교회였을 때에서는 잘 차려 입었었다. 이것이 의복과 장신구에 의해 묘사되었다; 이 교회의 진리와 선은 고운 곡식 가루와 기름으로 묘사되었다. 아마 누구나 눈치채는 것은, 이런 의미 파악은 읽는 글자와는 매우 다르다는 것이다. 본문에서 아브라함이 사라에게 말한 말들 역시 그렇다: “고운 곡식 가루 3 인의 식사 분량을 빨리 준비하여, 반죽하여, 케이크를 만들라.”

7절. 그리고 아브라함은 가축떼에로 달려갔다, 그리고 부드럽고 좋은 수소의 아들을 가져왔다, 그리고 그것을 젊은이에게 주었다, 그리고 그는 서둘러 그것을 만들었다.

아브라함이 가축떼로 달려갔다. 이는 자연적 선을 의미하는데, 이는 가축떼의 수소와 거세한 수소의 의미로부터 알게 된다. 가축떼와 양떼의 짐승들은 인간 안에 있는 그와 같은 것들을 의미한다. 이는 제 1권으로부터 시작하여 많이 살펴오고 있다 그리고 제물로 사용된 짐승에 관해서 살핀 바로도 알게 된다. 동물들이 말씀에서 명명되고, 어떤 것은 제물로 바치는데. 이것들이 선들과 진리들을. 같은 말로, 천적, 영적인 것을 의미하는 것에 놀라울지 모른다. 이에 대한 이유를 간략히 살펴보자.
영들의 세계에서는 다양한 표현물들이 눈 앞에 표출되는데. 그 중에는 동물들이 영들의 눈 앞에 자주 표출되어진다. 즉 다양하게 장식된 말들, 수소들, 양들, 어린 양들, 이 외 다양한 동물들, 때로는 지상에서 결코 본 적이 없던 것도 있다. 그러나 이것은 오직 표현적일 뿐이다. 이런 동물들은 예언자들에게도 보여져 왔는 바, 이것이 말씀에 묘사되어 있다, 그 근원은 영들의 세계와 같다. 영들의 세계에서 나타나는 동물들은 선과 진리에 대한 애착, 또는 악과 거짓에 대한 애착이다. 선한 영들은 그것들이 의미하는 것을 완전하게 잘 알고 있다, 또한 천사들이 대화하는 것으로부터도 그 의미들을 수집한다; 그 이유가 천사들은 말이 영들의 세계를 지나칠 때, 때로 이런 방식에서 표출되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말이 나타날 때, 천사들의 말이 이해성에 속하는 것에 관하여 임을 그들은 알고 있다; 수소나 거세된 수소가 나타날 때, 이것은 자연적 선들에 관하여서이고; 양들이 나타날 때, 그것은 더 내적인 선들에 관하여서와 순진에 관하여서이다는 것을 안다.
태고 교회인들은 영들과 천사들과 교류하고 예언자들이 가졌던 것 같은 꿈들과 환상들을 꾸준히 가졌었다. 그 결과 그들이 짐승을 볼 때는 언제든지, 그것들이 의미한 것을 자기들에게 떠올렸다. 표현성과 의미성은 이런 방식에 근원을 두고 있다. 그리고 이것은 그들의 시대에서 오랫동안 잔존했었다; 그래서 마침내 태고적 그것들을 심히 존경한 탓에 사람들은 표현물만 가지고 (글을) 썼다; 그들이 쓴 책들 중 존경 없이 지녔던 책은 없었다. 그리고 신성함 없이 교회 내에서 쓰인 책은 없었다. 이것과 다른 원인들로부터, 주님의 신성한 자비로부터 말씀 속의 책들 역시 그렇게 쓰였다.

그리고 부드럽고 좋은 수소의 아들을 가져왔다. 이는 조화를 이루는 자연으로부터의 천적인 것, 즉 합리성이 신성으로부터의 지각과 그 자체가 합쳐질 수 있도록 그 자체에 연합시킨 자연 속의 천적인 것(the celestial natural)을 의미한다. 이는 “거세한 수소”와 “수소의 아들”에 대한 말씀에서의 의미가 자연적 선 임에서 알게 된다. 그리고 주님의 합리성이 취급되는 바, 이것은 천적인 것으로부터의 영적인 것 또는 선으로부터의 진리로 “부드럽고, tender”라고 불리운다; 그리고 “좋은, good”은 선 자체로부터, 또는 선 자체이다. 순수한 합리성에서 일 경우, 진리에 대한 애착과 선에 대한 애착이 있다; 그러나 합리성의 주요한 것은 진리에 대한 애착이다. 그러므로 “부드럽고”가 먼저 언급되는데, 그럼에도 “부드럽고 좋은”이라고 불리는데, 이는 말씀에서 선과 진리의 결혼을 암시하기 위하여 사용하는 통상적 문구이다.
“거세한 수소”, 또는 “수소의 아들”은 천적인 것으로부터의 자연 (평면), 같은 것으로 자연적 선을 의미하는 것은 히브리 교회, 후에는 유대 교회에서 예배의 주요한 표현물이었던 제물들로부터 확연히 알게 된다. 그들의 제물들은 가축떼, 또는 양떼로부터, 고로 깨끗한 다양한 종류들, 즉 수소, 거세한 어린 수소, 숫염소, 양, 숫양, 암염소, 염소 새끼, 어린 양 등이었다; 이 외에도 호도애(산비둘기), 집비둘기, 예배의 내적인 것들, 즉 천적, 영적인 것들을 의미하는 동물도 있다; 가축떼로부터 취해진 동물들은 천적으로부터의 자연적인 것들, 그리고 양떼로부터의 것들은 천적인 것으로부터의 합리적인 것들을 의미한다. 그리고 자연적인 것과 합리적인 것들 모두 한층 더 내면적이 되어가고 다양한 바, 여러 종류의 동물들을 제물로 사용하도록 명령되고 있다. 이런 동물에 관련된 규정들로부터도 분명해지는데, 즉 태워 바침에서; 다양한 종류의 제물 바침에서, 즉 날마다 바치는 것, 안식일과 축제일에 바치는 것, 자발적으로 바치는 것, 감사와 서약을 위해 바치는 것, 죄있음과 죄를 속죄함에서, 이들을 순수해지게 함과 깨끗해짐을 위해 바치는 것, 취임식을 위해 바치는 것 등이다. 또한 이것들이 명명될 때 인상깊어지게 표현하는 말에서, 그리고 제물의 각 종류는 얼마나 바쳐야 하는지에서 확인된다. 위의 각각의 하나에도 어떤 특수한 것을 의미하지 않았다면, 위의 어느 하나도 말씀에서 언급될 리 만무하다. 이런 인용 구절을 찾아 읽으면 위의 말에 더 실감을 줄 것이다. 즉 출. 29장; 레. 1, 3, 4, 9, 16, 23장; 민. 7, 8, 15, 29장. 그러나 위의 많은 장들이 의미하는 것을 진열할 장소는 없을 것 같다. 이런 동물이 명명된 예언서에도 비슷하다. 이 예언서로부터도 “거세된 수소”가 천적인 것으로부터의 자연적인 것을 의미하는 것은 분명하다.
에스겔에 의해 보여진 거룹들, 계시록의 요한이 본 왕좌 앞의 동물들 또한 천국의 것들 외 다른 것들을 의미하지 않을 것은 누가 그 부분을 읽어도 동감할 것이다. 거룹들에 관해 에스겔이 말한다:
그들의 얼굴은 사람의 얼굴 모습이었다. 그리고 그들 넷은 오른쪽에서는 사자의 얼굴, 그들 넷은 왼쪽에서는 수소의 얼굴을, 그들 넷은 독수리의 얼굴을 가졌다 (겔. 1:10).
왕좌 앞 네 동물들에 관해서 요한이 말한다:
왕좌 빙둘러 네 동물들이 있었다; 첫째 동물은 사자와 같았고, 둘째 동물은 어린 거세된 수 소와 같았고, 셋째 동물은 사람과 같은 얼굴 같았고, 넷째 동물은 나는 독수리와 같았다; 말하기를, 거룩, 거룩, 거룩, 주 하느님 전능하신 분이여, 계셨고, 계시고, 오실 분이시다
(계. 4:6-8).
거룩한 것들이 거룹들과 이런 동물들에 의해, 또한 제물로 바쳐지는 수소나 거세한 수소에 의해 표현되었다는 것을 누구나 짐작할 수 있다. 마찬가지 방식에서 모세의 예언에서, 요셉에 관해 말한다:
요셉의 머리에 오게 하라, 그의 형제들로부터 나지르인이었던 그의 머리의 왕관에 오게 하 라. 그의 수소의 첫배, (이) 영예는 그의 것이다; 그리고 그의 뿔들은 외뿔의 들소의 뿔들 이다, 그것 가지고 그는 땅의 끝까지 사람들 모두를 밀어 움직일 것이다 (신. 33:16, 17).
위 구절을 이해하려면 우선적으로 수소, 외뿔의 들소, 뿔들, 그리고 다른 사항들이 내적 의미에서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아야 한다.
일반적 측면에서 제물을 살펴 보면, 그것들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모세를 통하여 요구되어져 있었다. 그러나 태고 교회, 홍수 이전 존재했던 교회는 제물에 관하여는 무엇이든 몰랐었다; 그들은 동물을 죽여 주님을 예배한다는 생각 자체가 그들의 마음에서는 발상된 적이 없다. 홍수 이후 존재했던 교회, 고대 교회 역시 제물을 바침에는 거의 친숙해 있지 않았다. 그들은 실로 표현물을 통해 주님을 아는 방식 안에 있었기는 했으나 제물을 바치는 것은 하지 않았다. 제물을 바침이 시작된 것은 엄밀히 구분해보면 고대 교회에 이어지는 교회인 히브리 교회라 불리운 교회에서 였다. 이 교회로부터 나라들에 제물을 바치는 방식의 예배가 퍼졌고, (우리나라의 제사도 이 범주일지 모른다.) 이로부터 아브라함, 이삭, 야곱, 그리고 야곱의 자손에게 이어져 내려왔다. 나라들이 제물의 예배 안에 있었다는 것은 이미 살핀 바 있다. 그리고 야곱의 후손이 이집트에서 나와 제물에 관한 명령을 모세를 통해 시내 산에서 받기 이전에도 그들이 제물을 바치고 있었다는 것은 출애굽기(5:3; 10:25, 27; 18:12; 24:4, 5)서에서 말해진 바로부터도 분명해진다;
그리고 특별하게는 금 송아지상 앞에서 가진 우상 숭배로부터 분명해진다. 아래의 인용 구절을 읽어 보자.
아론은 송아지 앞에 제단을 지었다, 그리고 아론은 선포해서 말했다, 내일은 여호와의 축 제(일)이다. 그리고 그들은 내일 아침 일찍 일어났다, 그리고 태우는 공물을 바쳤다, 그리 고 평화 공물을 가져왔다; 그리고 백성들은 먹기 위해, 그리고 마시기 위해 앉았다, 그리고 놀기 위해 일어섰다 (출. 32:5, 6).
위 상황은 모세가 시내 산에 있는 동안 벌어졌다, 고로 제단과 제물에 관한 명령이 그들에게 내려지기 이전에 해당된다. 각종 명령은 이것 때문에, 즉 제물로부터의 예배가 그들과 더불어 여느 이방인들 같이, 우상 숭배가 되었다는 것, 그리고 이로부터 그들은 철수될 수 없었다는 것, 그 이유가 그들은 이것을 제 일의 거룩한 것으로 간주했기 때문이다. 유아 시절로부터 거룩한 것으로 여겨왔던 것, 특히 조상들로부터 내려오며 깊이 뿌리를 내렸다면, 그런데 질서 자체에 반대되고 있는 것이 아니라면, 주님께서는 그것들을 부수지 않고 구부리신다. 이런 이유에서 모세의 책에 묘사한대로 같은 제물로의 예배에 관한 지침이 시달된 것이다.
제물로의 예배는 여호와께서 반기신 예배가 결코 아니었고, 방금 서술한 그대로의 이유 때문에 허용하신 것, 또는 묵인하신 것일 뿐이다. 이는 예레미야서로부터 분명해진다:
고로 여호와 체바욷, 이스라엘의 하느님께서 말하신다, 너의 제물에 태워 바침의 공물을 추 가하라, 그리고 고기를 먹어라. (이를) 나는 너희 조상에게 말하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내 가 그들을 이집트의 토지로부터 데리고 오는 그 날에, 태워 바침이나 제물 바침에 관하여 명령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 말을 나는 명령했다, 말하기를, 내 음성에 귀를 기울여라, 그러 면 나는 너의 하느님일 것이다 (예. 7:21-23).
다윗서에서:
오 여호와시여 당신은 제물 바침과 공물을 반기지 않으셨습니다, 당신은 태워바침이나 죄 없앰의 공물을 요구하시지 않으셨습니다. 나는 당신의 뜻을 행하기를 바랬습니다. 오 나의 하느님 (시. 40:6, 8).
다윗서에서:
제가 제물을 드릴 것인데, 당신은 제물 바침을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당신은 태워 바침의 제물을 열납하시지 않습니다. 하느님께 바칠 제물은 부서진 영입니다 (시. 51:16, 17).
다윗서에서:
나는 네 집에서 거세된 수소를, 네 우리로부터 숫염소들을 가져오지 않을 것이다. 하느님에 게 제물 바침은 (너의) 고백이다 (시. 50:9, 13, 14; 107:21, 22; 신. 23:19).
호세아서에서:
나는 자비를 가질 것이다, 그리고 제물이 아니다, 그리고 태워바침의 제물보다 하느님에 관한 지식이다 (호. 6:6).
사무엘이 사울에게 말했다:
여호와께서 태워바침이나 제물 바침을 반기실까? 보라, 순종함이 제물 바침보다 낫고, (여 호와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낫다 (삼상. 15:22).
미가서에서:
무엇 가지고 제가 여호와에게 나아가서 높으신 하느님에게 절을 할까요? 제가 그분 앞에 태워 바칠 제물을 가지고, 한 살 된 송아지를 가지고 나아가면 될까요? 여호와께서는 수 천의 숫양들을, 수 천의 강같은 기름을 가지고 나아가면 기뻐하실까? 그분께서 선한 것을 네게 보이셨다, 이 사람아; 그리고 여호와께서 네게 요구하는 것은 공정을 실행하는 것, 자 비를 사랑하는 것, 네 하느님과 걸으면서 네 자신을 겸손히 하는 것이다 (미. 6:6-8).
위 모두로부터 지금 분명해지는 바, 제물을 바침이 명령된 것이 아닌 허용되었다는 것이다; 또한 제물에서 중시되는 것은 내적인 것 뿐이다는 것; 기뻐하시는 것은 외적인 것이 아닌 내적인 것이었다는 점이다. 이렇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다니엘서에 예견된 바와 같이 그것을 폐지하셨다:
주간의 한 가운데에서, 그분은 제물과 봉헌물을 중지되게 하실 것이다 (단. 9:27).
위 구절은 주님의 강림을 취급하신다.
아브라함이 세 분을 위해 “만든” 또는 준비한 “수소의 아들”에 집중해 보면, 이 경우는 제물을 바침에서 있는 동물과 같다. 이것이 같은 의미를 가졌다는 것은 그가 사라에게 고운 곡식 가루 3 인 분을 가져오라 말함에서 분명해진다. 고운 곡식 가루가 거세한 수소와 더불어 바쳐질 경우에 관하여 모세의 책에서:
너희가 토지에 들어갈 때; 너희가 수소의 아들을 태워바침 또는 제물로 만들고, 공적으로 서약을 선포하거나 여호와께 평화 제물을 바칠 때, 너희는 수소의 아들에 기름 (반 힌)을 섞은 고운 곡식 가루 십분의 삼 (에바)를 식사 제물로 바칠 것이다 (민. 15:8, 9)
위 구절의 “3”, 여기서는 “3/10”, 그리고 본문에서는 “3 인의 분량”인데 마찬가지 의미를 지닌다. 그러나 숫양일 경우는 십분의 이 에바, 어린 양일 경우는 십분의 일 에바이다 (민. 15:4-6).

그리고 그것을 젊은이에게 주었다, 그리고 그는 그것을 만드느라 급했다. 이 선이 합리적 선과 결합함을 의미하고, 여기서의 “젊은이”는 자연적 인간을 의미하는데, 이는 젊은이의 의미가 섬기고 집행하는 것이다에서 알게 된다. 그리고 섬기고 또는 집행하는 것은 뭔가를 만들어내는 것 즉 수소의 아들이고, 이를 수단으로 자연적 선이 의미되는데 이미 살핀 바 있다. 이 경우가 어떻게 되는지를 더 잘 지각하려면, 모든 인간과 더불어 내적, 중간에 있는 것인 합리적, 그리고 자연적 측면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한다; 또한 이 셋은 서로에서 구분되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것들이 하나를 만드는 것, 즉 합리적 선이 자연적 선과 하나를 만들기 위해 이 둘은 같은 속성을 지니도록 만들어져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순응됨과 그로 인해 결합함 없이 신성한 지각은 있을 수 없다. 이 말들에서 주님의 신성한 지각이 취급되는 바, 그것들은 내적 의미에서 이런 선의 두 종류가 같은 속성을 지고 결합함을 의미한다.

8절. 그리고 그는 버터와 젖, 그가 만든 수소의 아들을 가져왔다, 그리고 그들 앞에 차려놓았다. 그리고 그는 나무 아래 그들 앞에 섰다, 그리고 그들은 먹었다.

그는 버터와 젖, 그리고 그가 만든 수소의 아들을 가져왔다. 이는 이러한 모든 것들이 함께 결합했음을 의미하는데, 이는 “버터”, “젖”, 그리고 “수소의 아들”의 의미로부터 알게되는 바 이제 각각을 살핀다. 앞 7절의 주제는 천적인 것, 그리고 이에서 파생된 영적인 것에서 가르침을 받은 주님의 합리성이었다. 이것이 “고운 곡식 가루를 케이크로 만든 식사”에 의해 의미되었다; 이것은 천적인 것 속의 자연적인 것인데, 이것이 “수소의 아들”에 의해서도 의미되고 있다. 똑같은 것이 지금 다른 말들, 즉 “버터”, “젖”, 그리고 또한 “수소의 아들”에 의해 표현되고, (나란히 다함께 표현됨에 의해) 이를 수단으로 모든 것들이 다함께 결합됨을 의미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이 일상적인 이해력에 와 닿게 묘사되는 것은 힘들 수 있다. 그 이유가 모든 사람에게는 내적, 합리적, 자연적 측면이 있다는 것, 이 셋은 서로로부터 확실히 구분된다는 것, 그 구분이 얼마나 잘 되고 있는지 그들 중의 하나는 또 다른 하나와 의견을 달리하는 듯 여겨지기 까지 할 정도이다는 것 등등의 사항이 알려져 있지 않기 때문에서 이다. 합리적 인간이라 불리는 합리성은 자연적 인간이라 불리는 자연성에 불찬성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합리적 인간은 자연적 인간에 있는 악을 보기조차 하고 지각할 수 있다. 그리고 만일 합리적 인간이 순수할 경우, 그 악을 응징할는지 모른다. 이 두 인간이 결합되기 이전일 경우, 그 인간은 온전한(완전한) 인간일 수 없고, (마음이) 평화의 고요 안에 있을 수도 없다. 그 이유는 두 인간이 서로 삿대질 할 것이기 때문이다. 즉 인간과 더불어 있는 천사는 그의 합리성에, 그와 더불은 악령은 그의 자연적 인간에 있기 때문에 전투가 있기 마련이다.
만일 합리적 인간이 싸워 이긴다면, 자연적 인간은 예속되어 지고, 양심이 그 인간에게 선물된다; 그러나 만일 자연적 인간이 정복한다면, 그는 양심을 받을 수 없다. 이때의 경우, 즉 합리성이 자연성을 정복하는 때의 경우, 그의 자연성은 마치 그것이 합리성이었는 듯 되어 있다. 이와 반대로, 자연성이 정복하면, 합리성은 마치 자연성이었는 듯 하여 진다. 더 나아가 합리성이 정복하면, 천사들은 그 인간에게 더 가까이 끌리어 가고, 그에게 선행을 은근히 주입한다. (사실상 선행은 주님으로부터 천사들을 통하여 오는 천적인 것이다.) 그리고 악령들은 자신들을 멀리 이동한다. 이와 반대로, 자연성이 정복하면, 천사들은 자신들을 (인간의 더 깊은 내면 쪽으로) 멀리 이동한다. 한편 악령들은 합리성을 향하여 더 가까이 끌리어 온다. 그리고 계속적으로 합리성을 공격한다. 그리고 마음의 낮은 수준의 영역을 증오와 복수, 사기 같은 것으로 가득 채운다. 만일 합리성이 정복한다면, 그때 마음은 평화의 고요함에 진입하고, 다른 삶에서는 천국의 평화 안으로 들어가 있다; 그러나 만일 자연성이 정복한다면, 그때, 그 인간은 자연계에서는 고요 안에 있는 듯 나타날 수 있게 살는지 모르나, 다른 삶에서는 지옥의 쉼 없음과 고통 안으로 들어가 있다.
위 설명으로 미루어보아 인간의 합리성, 자연성의 측면의 품질이 무엇인지 가늠되었을 것이다. 즉 인간이 복되어지고 행복해지려 한다면, 그의 자연성이 그의 합리성에 순응하고, 둘이 함께 결합하는 도리밖에 더 없다는 것이다. 이는 선행을 수단으로 해서만이 결과되고, 이 선행은 오직 주님으로부터 만 받을 수 있다.

“버터”는 합리성 속의 천적인 것이다; “젖”은 파생되는 영적인 것이다; 그리고 “수소의 아들”은 상응하는 자연성이다는 것은 “버터”, “젖”, “수소의 아들”의 의미에서 알게 된다. 먼저 “버터”에 주목하여 보면, 이는 말씀에서 천적인 것을 의미하는데, 이 의미는 버터의 지방이 많음으로부터서 이다. (“지방, fat”이 천적인 것을 표시하는 것은 제 1권 창. 4:4에서 살폈고, “기름, oil”은 지방 때문에 천적 자체를 표시함은 창. 8:11에서 말했다.) “버터”가 천적인 것이다는 이사야서로부터도 분명해진다:
보라, 처녀가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부를 것이다. 그는 버터와 꿀을 먹을 것이고, 그는 악한 것을 거절하고, 선한 것을 선택한다 (이. 7:14, 15).
위에서 주님(“임마누엘”이신 분)이 취급된다; 그리고 누구라도 알 수 있는 바는 버터와 꿀이 “버터”와 “꿀”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 그러나 “버터”에 의해 그분의 천적 평면, 그리고 “꿀”에 의해서는 천적 평면으로부터 있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이사야서에서:
그리고 젖을 많이 만들기 때문에 그는 버터를 먹을 것이다; 그리고 그 땅 한 가운데에 남 은 모든 이는 버터와 꿀을 먹을 것이다 (이. 7:22).
위에서 주님의 왕국이 다루어진다, 그리고 땅 위에서 주님의 왕국에 있는 이들이 취급되고 있다. “젖”은 여기서 영적 선을, “버터”는 천적 선을, “꿀”은 그로부터 파생되는 행복을 표시한다.
모세의 책에서:
여호와 만이 그를(그들을) 인도하신다, 그리고 그분과 더불어 낯설은 신은 없다. 그분은 그 로 땅의 높은 장소 위에서 타게 하시고, 들판들의 산물을 먹게 하신다. 그리고 그분은 그를 바위로부터 꿀을 빨게 만드시고, 기름을 단단한 바위로부터 (빨게 만드신다); 목축떼의 버 터, 그리고 양떼의 젖, 어린 양들의 지방과 더불어, 그리고 바산의 숫양들, 그리고 숫염소 들, 밀 종류로 먹이실 것이다; 그리고 포도의 피로부터 너는 혼합하지 않은 포도주를 마시 게 하실 것이다 (신. 32:12-14).
우리는 위 구절의 각 단어들의 내적 의미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면, 위 구절의 이해는 불가능하다. 마치 위 구절은 세상의 달변력 있는 학식자에 의한 표현들인 듯 나타나 있다. 어쨌든 위 구절의 각 표현은 천적인 것과 그것에서 파생된 영적인 것, 또한 파생되는 복된 것, 행복, 그리고 모든 이것들이 잘 질서적으로 시리즈로 펼쳐져 있다. “목축떼의 버터”는 천적인 것 속의 자연적인 것, “양떼의 젖”은 합리성 속의 천적인 영적인 것이다.
젖에 주목해 보면, 이것은 이미 말했던 대로 천적인 것으로부터 있는 영적인 것, 또는 천적인 것 속의 영적인 것을 의미한다; “젖”이 천적인 것으로부터 있는 영적인 것이다는 것은 “물”이 영적인 것을 의미한다는 사실로부터 온다; 그러나 “젖”은 그 안에 지방이 있는 바, 천적인 것 속의 영적인 것, 다른 말로는 선의 진리(truth of good, 선 속의 진리, 선으로부터의 진리), 또 다른 표현으로는 사랑, 또는 선행의 신앙으로부터의 진리; 또 다른 표현으로는 의지의 선으로부터의 지적인 것; 또 다른 표현으로, 내향적으로 선에 애착함이 있는 진리에 애착함; 다시 또 다른 표현으로는, 이웃을 사랑하는 이들과 더불어 존재하는 것, 즉 이웃을 향한 선행에 애착함으로부터의 지식에 애착함이다. 그리고 이들은 신앙의 지식 안에서, 그리고 기억 속의 지식들로부터 이 사랑 안에서 자신을 확증한다. 위의 여러 가지 말의 표현을 집약하면 천적인 것 속의 영적인 것이다. 이것이 취급되는 주제에 따라 위의 여러 표현으로 조금씩 바뀌는 것이다.
이렇게 의미되는 것이 이사야서로부터 분명해진다:
목마른 모든 자, 너희는 물에로 나오라, 은을 가지지 않은 자, 너희가 오라, 사라, 그리고 먹으라; 그렇다, 오라, 은 없이, 값 없이 포도주와 젖을 사라. 어찌하여 너희는 빵이 아닌 것을 위하여 은을 다느냐? (이. 55:1, 2).
위에서 “포도주”는 신앙 속에 있는 영적인 것, “젖”은 사랑 속에 있는 영적인 것을 표시한다. 모세의 책에서:
그는 자기 의복을 포도주로 빨았다, 그리고 그의 의류를 포도주의 피에서 (빨았다); 그의 눈은 포도주보다 더 붉다, 그리고 그의 이는 젖보다 더 희다 (창. 49:11, 12).
이는 유다에 관한 야곱의 예언, 그때 당시는 이스라엘의 예언이다; 그리고 유다에 의해 주님이 묘사되어진다, 그리고 젖보다 더 흰 그의 “이”에 의해 그분의 자연 평면에 속해 있는 천적인 것으로부터의 자연적인 것이 의미되어져 있다.
요엘서에서:
그 날에 산들이 새로운 포도주를 떨어뜨릴 것이다, 그리고 언덕들이 젖으로 흐를 것이다; 그리고 유다의 시내들은 물이 흐를 것이다 (욜. 3:18).
위는 주님의 왕국에 관해 이야기 하고 있다; “젖”은 천적인 것 속의 영적인 것을 표시한다. 말씀에서 가나안의 토지 역시 “젖과 꿀이 흐르는 토지”라고 불리운다. (가나안의 토지를 수단으로 주님의 왕국이 표현되고 의미되었다.) (민. 13:27; 14:8; 신. 26:9, 15; 27:3; 예. 11:5; 32:22; 겔. 20:6, 15 참조) 위 인용 구절에서 “젖”은 천적인 것 속의 영적인 것들이 풍부함, “꿀”은 이로부터 파생되는 행복의 풍부함을 뜻한다; “토지”는 왕국의 천적 평면 자체이다, 이로부터 위의 것들이 온다.
“수소의 아들(어린 수소)”에 주목해 보면, 이는 방금 말한 대로 천적인 것으로부터의 자연을 의미한다. 천적인 것으로부터의 자연은 자연적 선, 또는 자연 평면에 있는 선과 동일한 표현이다. 인간의 자연 평면, 그의 합리성과 같이 그것의 선과 진리가 있다; 그 이유가 선과 진리의 결혼은 어디에나 있기 때문이다. 자연 속의 선은 선행으로부터 지각되어진 즐거움, 또는 선행 속에 있는 우정 관계로부터 있는 즐거움이다. 이 즐거움으로부터 육체로부터 있는 기쁨이 온다. 자연의 진리는 이 즐거움에 호의를 보이는 기억 속의 지식이다. 위의 설명을 가지고 천적인 것 속의 자연이 무엇인지 분명해질 것이다.

그리고 그들 앞에 차려 놓았다. 이는 그분이 받기 위해 자신을 준비했다를 의미하는데, 이는 “그들 앞에 차려 놓음”의 의미로부터 알게된다. 즉 취급되는 주제가 신성으로부터 지각을 받기 위해 합리성이 준비하는 때인 바, 이는 설명이 필요 없을 것 같다.

그리고 그는 나무 아래 있는 그들 앞에 섰다. 이는 파생되는 지각을 의미하는데, “나무”의 의미가 지각임에 뒤이어진다. 4절에서 이미 서술된 바, 즉 아브라함에게 온 세 사람이 나무 아래 누웠다는 대목이다. 이를 수단으로 신성이 주님 시절 당시 그분이 있으셨던 그 상태에 접근하셨음이 의미되었다. 여기서는 아브라함이 나무 아래 섰다고 말해진다. 이를 수단으로 이제는 주님께서 자신을 준비하신 후에 신성한 지각에 접근하셨다가 의미되어진다. 이는 주고 받음(상호성)이다. 아마 이 대목을 읽는 누구라도 세 사람에 관해서와 아브라함에 관해서 만들어진 언급이 그 안에 아무런 비밀함도 없이 말만 늘어 놓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먹었다. 이는 이 방식에서의 교통함(교류함)을 의미하는데, 이는 “먹는다”의 의미가 교통하는 것, 그리고 결합되는 것을 의미하는 데에서 알게 된다; 이는 말씀의 다른 대목으로부터도 분명해진다. 즉 레. 6:16 등등에서 보면, 아론, 그의 아들들, 레위인들, 또는 백성 역시 거룩한 장소에서 신에게 바쳐진(신성해진) 제물을 먹도록 명령 받았는데, 이는 교통함, 결합함, 자기 것이 되게 함을 의미했다. 그 이유가 그들이 먹은 신성해진 제물, 그들이 자기 것이 되게 한 신성해진 제물은 천적, 영적 식품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신성해진 것들은 제단에서 태워지지 않은 제물의 부분들이었다, 그리고 성직자이든, 제물을 만든 백성이든 그들이 먹었다; 이는 제물이 취급되는 많은 구절들로부터 분명해진다. 즉 성직자가 먹어야 한다는 대목은 출. 29:32, 33; 레. 6:9, 16, 18, 26; 7:6, 15, 16, 18; 8:31; 10:12, 13; 민. 18:9-11 이고, 백성이 먹는다는 대목은 레. 19:5, 6; 신. 12:27; 27:7, 외에 여러 구절이 더 있다. 그리고 불결한 자는 이 제물들을 먹지 못한다는 대목으로는 레. 7:19-21; 22:4-7 등등이다. 이 잔치는 제단 가까이, 문 쪽이든, 성막의 뜰이든, 거룩한 장소에서 치뤄졌다; 그리고 그것들은 교통함, 결합함, 천적 선들을 자기 것 되게 함을 의미했다; 그 이유가 그 제물들에 의해 천적 식품이 의미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들 모두는 “빵”이라 불리웠다. 빵에 대해서는 창. 18:4에서 이미 살폈다. 위와 같은 내용이 아론과 그의 아들들이 (여호와께) 진열한 빵(showbread), 또는 “얼굴의 빵”을 거룩한 장소에서 먹는 것에서도 의미되고 있다 (레. 24:9).
나지르인을 위한 법, 즉 누군가가 나지르인이 되는 그 날에 그는 포도주를 만드는 포도로부터의 어떤 것도, 씨로부터 피부(껍질)에 이르기까지 먹어서는 안 된다고 명령되었는데, 그 이유는 나지르인은 천적 인간을 표현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천적 인간은 영적인 것들을 언급함조차도 반기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포도주와 포도, 또는 포도로 만든 무엇이든, 그것들은 영적인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나지르인이 그것들을 먹는 것은 금지된 것이다; 즉 그들은 그것들과 교류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 자신을 그것들과 결합되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 그것들이 자신의 것이 되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마찬가지의 것이 이사야서에서 “먹는 것”에 의해 뜻해진다:
목마른 모든 이, 너희는 물에로 나아오라, 그리고 은을 가지지 않은 자, 너희는 오라, 사라, 그리고 먹어라; 그렇다, 와라, 은 없이, 값 없이 포도주와 젖을 사라. 어찌하여 너희는 빵이 아닌 것을 위하여 은을 다느냐? 그리고 만족하지 못할 것을 위해 너는 노동하느냐? 나에게 근면하게 귀를 기울여라, 그리고 너희는 선한 것을 먹어라, 그리고 너의 혼은 지방이 많 음에서 즐거워할 것이다 (이. 55:1, 2).
계시록에서도 역시:
극복하는 자에게 나는 하느님의 낙원의 한 가운데 있는 생명의 나무로부터 먹게 할 것이다 (계2:7).
“생명의 나무”는 천적 평면 자체이다, 그리고 최고 의미에서 주님 자신이시다, 그 이유는 그분으로부터 모든 천적 평면, 즉 모든 사랑과 선행이 있기 떼문이다. 고로 “생명의 나무로부터 먹는다”는 것은 주님을 먹는 것, 주님을 먹는 것은 사랑과 선행을 선물 받는 것과 같은 말이다. 고로 천국의 삶 속에 있는 이런 것들과 더불어 있는 것이다. 이것을 주님 자신 요한복음서에서 말하신다:
나는 천국으로부터 내려 온 살아있는 빵이다, 만일 어떤 자가 이 빵으로부터 먹는다면, 그 는 영원히 살 것이다; 나를 먹는 그는 나에 의해 살 것이다 (6:51, 57). 그러나 그들이 말 했다, 이것은 어려운 말씀이시다. 그리고 예수께서 말하셨다, 내가 너희에게 이야기하는 말 들은 영이고, 생명이다 (6:60, 63).
그러므로 성찬에서 먹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분명할 것이다 (마. 26:26-28; 막. 14:22, 23; 눅. 22:19, 20). 즉 그것은 교통하는 것, 결합하는 것, 그리고 자기 자신의 것이 되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역시 아래 주님이 말하신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도 명료해질 것이다:
많은 자들이 동쪽과 서쪽으로부터 올 것이다, 그리고 아브라함, 이삭, 야곱에게 기댈 것이 다 (마. 8:11)
위 구절은 많은 이들이 하느님의 왕국에서 그들과 먹는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은 이 세 사람에 의해 의미되는 것, 즉 사랑의 천적인 것을 향유한다는 말이다. 즉 “아브라함”인 가장 깊은 사랑의 천적인 것, 뿐만 아니라, 중간에 해당되는 보다 낮은 것, “이삭”인 합리성에 속한 것들, 그리고 더 낮은 것인 천국의 자연 평면, 첫 번째 천국, 이것은 야곱에 의해 뜻해진다. 이와 같은 것이 이런 말들에 의해 뜻해진다. 우리가 이런 천국의 것들을 향유한다고 이야기 하든지, 주님을 향유한다고 말하든지 같은 것이다; 그 이유가 이 모든 것들은 주님으로부터 있고, 주님은 그것들의 모든 것에서 모두 되시기 때문에서 이다.

9절. 그리고 그들은 그에게 말했다, 네 아내 사라는 어디 있느냐? 그리고 그는 말했다, 바라보십시오, 천막에 있습니다.

그들이 그에게 말했다, 네 아내 사라는 어디 있느냐? 이는 합리적 진리를 의미하는데, 이 진리가 그 당시 나타나지 않았다는 것, 그 이유는 그 진리가 합리적 선 안에 있었기 때문이다는 것인데, 이는 여기서 사라의 표현이 합리적 진리임에서 알게 된다. 이런 사항들과 더불어 어떻게 이런 경우가 있는지에 대하여서는 우선 일반적으로 선에 관한 측면과 진리에 관한 측면에서의 합리성의 상태가 무엇인지를 알지 않으면 이해성에 쉽게 와닿게 설명되어질 수 없다; 그리고 주님과 더불어의 경우, 그 당시 있으셨던 신성 측면과 인간 측면에 관련하여 주님과 더불은 상태의 설명은 쉽지는 않다.
인간과 더불은 합리성의 제일의 것들은 진리이다는 것, 결과적으로 그것은 진리에 대한 애착이다. 이 목적쪽으로 인간은 개혁된다, 그리고 그렇게 해서 거듭나짐도 뒤이어진다. 이것은 진리 측면에 속하는 것인 지식들을 수단으로 결과되어진다, 이것은 계속적으로 선 안에, 즉 선행 안에 이식되어진다. 그리하여 인간은 선행의 생명을 받아간다. 이렇기 때문에 인간에 있는 진리에 애착함은 그의 합리성에서 지배력을 발휘한다. 천국의 삶 자체이기도한 선행의 삶과 더불은 경우, 개혁되고 거듭나는 이들과 더불어서, 그것은 계속적으로 태어나지고, 자라나고, 증대해져 간다. 이때도 진리를 수단으로 하여서이다; 그러므로 진리가 더 은근히 주입되면 될수록 선행의 삶도 더 완전해진다; 그러므로 진리의 양과 질에 따라서 그렇게 인간과 더불은 선행도 있게 된다.
이상 살핀 바로부터 어떤 경우가 인간의 합리성과 더불은 경우인지 어느 정도 분명해졌으리라 본다. 어쨌든 진리 안에 생명은 없다. 그러나 생명은 선 속에 있다. 진리는 생명의 그릇, 즉 선의 그릇일 뿐이다. 진리는 선의 의류, 의복이다; 그러므로 말씀에서 진리는 “의류, clothing”, 그리고 “의복, garment”이라 불린다. 그러나 선이 합리성을 구성할 경우, 진리는 사라져서, 마치 선인 듯 되어 있다. 이때 선은 진리를 통하여 빛난다. 천사들이 빛나는 것도 이와 같은 방식에서 이다. 그 이유가 그들이 옷입은 듯 나타날 때, 의복의 나타남을 유발하는 것이 밝게 빛남이기 때문인데, 그들이 예언자 앞에 나타날 때 그러했다.
위의 진리의 경우는 합리적 진리의 경우도 마찬가지여서 합리적 선 안에 있을 때 나타남이 있지 않다. 이것이 본문에서 “네 아내 사라는 어디 있느냐?”라고 그들이 아브라함에게 말함에 의미되어 있다. 그러나 주님의 합리적 선이 그 당시 신성이었던바, 이는 천사들의 경우와 완전히 달라서 비슷한 어떤 것을 가지고 비교하고 예증하는 도리밖에 없다.

그리고 그는 말했다, 보십시요, 천막 안에 있습니다. 이는 이것이 거룩한 것 안에 있다를 의미하는데, 이는 천막의 의미가 거룩한 것임에서 알게 된다. 거룩한 것 안에라고 말해진 이유는 선 안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모든 선은 그것이 주님만으로부터 있는 사랑과 선행 속에 있다는 사실로부터 거룩하다 불린다. 선이 이러하듯, 거룩함도 그러하다. 선은 진리를 수단으로 만들어 내진다. 즉 선들은 신앙의 진리들을 수단으로 태어나고 성장한다, 그리고 선들의 질과 양은 선행 안에 이식된 신앙의 진리 속의 것들에 의해 결정되어진다. 이로부터 모든 이들 각자에게 있는 선들, 또는 거룩함은 다를 수밖에 없다; 그리고 비록 외적 형체에서 그들이 비슷하게 나타날지는 몰라도, 내적 형체에서는 그들은 똑같지 않다; 이는 교회 안에 있는 이들이든, 교회 밖에 있는 이들이든 경우는 마찬가지이다. 선행의 선 안에는 인간이 믿어질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이 있다. 그의 신앙으로부터의 모든 것들이 그것 안에 있다. 결과적으로 모든 것들이 그의 예배의 거룩함 안에 있다. 그의 예배의 거룩함의 품질은 맑은 날에서와 같이 천사에게 나타난다. 비록 그가 어떤 거룩한 상태에 있다 하고 막연히 아는 것밖에 없어도 그의 천사들에게는 맑은 날 같다는 말이다. 그가 선들과 신앙의 진리에 관하여 생각하는 수만 가지들, 이에서 파생하는 애착들로부터의 선들과 진리들에 관한 수만 가지 생각들은 그의 상태의 거룩함 안에 있다. 그러나 예배의 거룩함에 관련하여 일반적 측면은 차 후 주님의 신성한 자비로부터 다른 장소에서 다뤄질 것이다.

10절. 그리고 그는 말했다, 나는 삶의 이때 쯤 너에게 반드시 돌아오리라. 그리고 네 아내 사라가 아들을 가진 것을 바라보리라. 그리고 사라는 천막의 문에서 들었다, 그리고 그것은 아브라함의 뒤쪽이었다.

그리고 그는 말했다. 이는 지각을 의미한다. 이는 “말함”의 역사적 의미에서의 의미함이 지각함이다에서 알려진다.

나는 삶의 이때 쯤 반드시 네게 돌아오리라. 이는 신성이 인간과 결합함을 의미하는데, 이는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오심이 신성한 지각을 표현했다는 사실로부터 분명해진다. 그 이유가 (신성을) 받기 위해 주님이 자신을 준비하셨는 바, 결과적으로 이는 결합을 표현했기 때문이다; 고로 “반드시 네게 돌아오리라”에 의해서 똑같은 것, 즉 신성이 인간과 결합함을 의미했다. “삶의 이때 쯤”은 다음 해의 같은 시간에서를 뜻한다.

보라, 사라 네 아내는 아들을 가질 것이다. 이는 신성이기 위해 있었던 합리성을 의미하는데, 이는 “아들”, “사라”, 그리고 그녀에게서 태어날 “이삭”의 의미로부터 분명해진다. “아들”, “사라”, “이삭” 모두는 주님의 합리성 속에 있는 것을 의미한다. 모든 인간과 더불은 각자의 인간성은 그의 합리성의 가장 깊은 측면에서 시작한다, 그리고 주님의 인간성 역시 마찬가지 이다: 이 인간성을 넘어 계신 분이 여호와 자신이셨다는 것이 여느 인간과도 다른 점이다. 인간이 합리성의 가장 깊은 쪽에서 시작하듯, 주님도 모든 인간성을 처음 만드셨을 때, 마찬가지로 합리성의 가장 깊은 측면에서 시작하시어, 그것을 신성으로 만드셨을 때, 이것이 “이삭”에 의해 표현되고 의미되었다.

그리고 사라는 천막의 문에서 들었다. 이는 합리적 진리가 거룩한 것 가까이 있었다를 의미하는데, 이는 사라의 표현이 합리적 진리인 바로부터; 그리고 “천막”의 의미가 거룩인 것으로부터; 그리고 “천막의 문”이 거룩인 것 쪽으로의 입구로부터, 고로 거룩인 것 가까이 임을 알게 된다. 어떻게 이 경우가 이런 사항들과 더불어 있는지가 지금 뒤잇는다.

그리고 그것은 아브라함의 뒤 쪽이었다. 이것은 합리성이 그 당시 있으셨던 선 가까이, 그리고 그것은 인간성의 어떤 것이 그것 안에 있는 만큼에서는 분리되어 있었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는 사라가 있던 문이 “아브라함 뒤 쪽”이라 말해졌다는 사실로부터 알게 된다. “아브라함 뒤 쪽”이다는 것은 결합되어지지 않고, 그저 그의 등뒤에 있었다를 의미한다. 누군가로부터 분리되어지는 것이 마치 등을 들이대는 것처럼 하여 일종의 거절을 수단으로 표현되어진다. 이는 다른 삶에서의 표현물로부터도 분명해진다. 이 모습이 여기서는 사라가 있었던 문이 “그의 뒤쪽”이었다고 말해짐으로 표현되었다.
그분이 그 당시 신성과 결합하셨을 때, 그분에게서 분리되었던 인간적일 뿐인 합리적 진리에 주목해 보면, 이 경우는 이렇다. (그분의) 인간의 합리적 진리는 신성한 것들을 납득하지 못한다, 그 이유는 신성한 것들은 인간의 합리력 넘어에 있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인간의 합리적 진리는 그의 자연적 인간에 있는 기억 속의 지식들과 더불어 교통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합리력 자체 넘어 있는 것을 쳐다 보는 만큼, 그 만큼 오히려 그것들을 인정하지 못한다. 그 이유가 이 진리는 외관 안에 있는데다가 이 외관을 벗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외관들은 감각적인 것들로부터 태어나진다. 감각적인 것들(오각을 통해 아는 것들)이 그것의 필수적인 것인 외관을 쓰고 있어야 하는 의무에서 면제받기 전에는 그것들은 신성한 것들 자체가 마치 자연 속의 것들로부터 인 듯한 신조(믿음)를 유발한다. 따라서 그것들이 신성한 것들을 서술할 때, 합리적 진리는 신성한 것들을 믿을 수 없게 된다. 그 이유는 그것을 납득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보자. 인간이 주님으로부터 인 것 아니면 생명을 가지지 못한다 라는 서술에 대해, 합리성은 나타나는 것(외관)으로부터 상상하는 바, 이 경우에 인간은 자신 그대로는 살 수 없다고 생각한다; 이에 반해(외관으로부터가 아닐 경우) 그는 주님으로부터 그렇다는 것을 지각하게 되고 진실되게 산다.
합리성이 외관으로부터 상상한다. 즉 인간이 행하는 선은 자신으로부터 이다, 그럼에도 (외관이 아닐 경우) 그것은 자아로부터 있지 않고 모든 선은 주님으로부터 있다.
나타남으로부터 합리성은 상상한다. 즉 인간은 그가 선인 것을 행할 때 구원은 당연히 그의 몫이다; 이에 반하여 (나타남으로부터가 아닌 합리성의 경우) 인간은 자신으로부터서는 공적을 주장할 수 없다, 모든 공적은 주님의 것이다.
외관으로부터 합리성은 상상한다. 즉 인간은 주님에 의해 악한 것을 물러나게 하고 선인 것 안에 있는다. 그럴 경우 그에게는 선하고 올바른 것, 정녕 거룩한 것만 있는다; (외관으로부터가 아닐 경우) 이에 반해, 인간 안에는 (언제나) 악한 것, 부정한 것, 그리고 모독적인 것만 있다 이다.
외관으로부터 인간이 상상하는 바, 자기가 선행으로부터 선한 것을 행할 때, 나는 나의 의지로부터 그것을 행하고 있다고 한다; 이에 반해, (외관으로부터가 아닐 경우) 그것은 그의 의지 부분으로부터가 아니고, 선행이 이식된 그의 지적 부분으로부터 이다.
나타남으로부터 인간은 상상한다. 즉 세상의 영광이 아니라면 영광이라는 것은 없다; 이에 반해, 천국의 영광 안에는 세상의 영광의 티끌만큼도 없다가 진실이다.
외관으로부터 인간은 상상한다. 즉 아무도 자신보다 더 자기 이웃을 사랑할 수 없고, 모든 사랑은 자아로부터 시작된다; 이에 반해 천국의 사랑에는 자기를 사랑함은 전혀 없다는 것이 현실이다.
외관으로부터 인간은 상상한다. 세상의 빛 외에 빛은 없다 한다; 이에 반해, 천국의 빛에는 세상의 빛에 속한 것은 없다. 그럼에도 그 빛은 세상 정오의 빛을 수천 배나 능가한다.
나타남으로부터 인간은 상상한다. 즉 주님은 보편적 천국 앞에서 태양같이 비출 수 없다 한다; 그럼에도 천국의 모든 빛은 그분으로부터 있다.
나타남으로부터 인간이 납득할 수 없는 것은 다른 삶에서 앞쪽 방향으로의 운동이 있다는 것이다 한다; 이에 반해 그곳에 있는 이들은 자기들의 집에서, 뜰에서, 낙원에서, 지상에서와 같은 활동이 있다; 그리고 더욱 납득할 수 있는 것은 앞쪽으로의 운동이 상태의 변화들이다는 것, 이것이 그렇게 나타난다.
나타남으로부터 아무도 납득할 수 없는 것은, 우리의 눈에 보여지지 않는 영들과 천사들이 보여질 수 있다는 것; 그들이 인간과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그들이 내적 시각에 나타난다는 것, 영들의 시각에 나타난다는 것, 더욱이 지상에서보다 더 뚜렷하다는 것; 그들의 음성은 더 또렷하게 들린다는 것이다. 수천 수만의 이런 사항들 외에, 여전히 인간의 합리성은 그것 자신의 빛에서 감각의 것들로부터 출생되는 바, 그로 인해 어두워져 있어 믿을 수 없다. 그렇다, 합리성은 자연적인 것들에서 그 자신을 눈멀게 하고 있어, (저쪽 세계의 것에 대해) 납득될 수 있는 것이 없다. 예를 들면, 지구 반대쪽에 거주하는 이들이 어떻게 그들의 발로 서고 걸을 수 있는지를 납득하지 못한다는 말이다.
인간의 합리성이 이런 속성 속에 있는 바, 이 구절에서 주님이 신성한 지각 안에서 신성에 하나되셨을 때, 인간의 합리성은 분리되어져야 한다고 말해진다. 이것이 사라가 천막의 문에 서있고, 이것은 아브라함의 뒤쪽에 있다에 의해 의미되어지고 있다.

11절. 그리고 아브라함과 사라는 늙었고, 날들 안으로 진입하고 있었다. 사라에게는 여인의 생리가 중단되어 있었다.

아브라함과 사라는 늙었다. 이는 주님과 더불은 인간성은 벗어져야 할 것임을 의미하는데, 이는 아브라함과 사라의 표현으로부터 분명해진다; 또한 “늙다”, 또는 “고령”의 의미로부터 알게 된다. 여기서 아브라함은 합리적 선에 관한 주님을, 사라는 합리적 진리에 관한 주님을 표현한다. 이는 이 장에서 반복적으로 말해왔다. 고로 아브라함과 사라는 주님과 더불은 인간을 표현한다. 그 이유는 이미 말했듯이, 지금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시어 이야기 하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호와는 주님으로부터 분리되지 않은 그분의 신성 자체이셨기 때문이다. 비록 이야기의 줄거리인 역사적 표현물로서는 분리되어 있는듯 하여도 분리된 것은 아니다. 그 이유가 역사적 표현물을 수단으로 해서는 이 외 달리 표현될 수 없었을 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브라함과 사라가 늙었다”라는 말 만에 주목해 보면, 인간을 벗어내야 한다를 의미하고 있다. 즉 “고령”이란 마지막 때라는 말과 거의 같고, “고령”이라는 단어는 말씀의 많은 곳에서 언급되고 있는데, 마찬가지로 사람들이 죽었다는 식으로 쓰인다; 그러나 내적 의미에서 일 경우, 고령은 나이가 대단히 많다, 죽음 같은 육체에 속한 것은 지각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밖의 어떤 것임이 사물들의 시리즈로부터 분명해진다; 그 이유가 다른 삶에서 고령과 죽음은 모르는 단어이기 때문이다(즉 거기에는 이런 것이 없다). 여기서 고령에 의해 뜻해지는 것은 사물들의 시리즈로부터 분명해지는데, 그것은 주님께서 인간을 벗으시기로 되셨다는 것이다.

날들(수명) 안으로(다하는 쪽으로) 진입하고 있었다. 이는 때가 와 있었다를 의미하는데, 위에서 말해진 사항에 뒤를 잇는다. “날, day”은 말씀에서. “햇수, year”와 더불어, 그리고 실로 일반적으로 때(time)와 더불어 상태를 의미한다. 고로 여기서, “날들 안으로 진입함”은 내적 의미에서 그분이 인간을 벗으시는 상태로 진입하는 것이다; 고로 때가 와 있었다가 의미된다.

사라에게는 여인의 생리가 중단되어 있었다. 이는 인간의 것이 더 이상 남아 있을 수 없다는 지금 위에서 말해졌던 바로부터 분명해지는 바 설명은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12절. 그리고 사라는 속으로 웃으며 말하기를, 내가 늙은 후인데 나에게 즐거움이 있을까? 그리고 내 주인도 늙었는데?

사라는 속으로 웃었다. 이는 합리적 진리가 그와 같이 행해짐에 관하여 애착함을 의미하는데, 이는 “웃다”나 “웃음”의 의미가 진리에 애착함이다에서 알게 되는데, 이에 대한 것은 뒤잇는 대목에서도 말해진다.

말하기를, 내가 늙은 후인데 나에게 즐거움이 있을까? 이 상태를 바뀌게 하는 것은 이 진리에 애착함으로부터가 아니었다를 의미하는데, 이는 “늙어 감”이 인간을 벗는 것이다로부터, 그런고로 상태가 바뀜이다로부터; 그리고 “내가 즐거움을 가질까?”의 의미가 바램이 없다 임으로부터; 고로 이것은 그것의 애착이 없었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 경우가 어떻게 되는지는 위에 사라에 관해 말해진 것, 즉 그녀는 천막의 문에 서 있었다는 것, 그것은 아브라함의 뒤쪽이었다는 것; 즉 진리 측면에서의 인간의 합리성이 이런 속성 속에 있어 신성이 무엇인지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이 진리가 외관 안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믿어지지도 않는다; 그리고 믿어지지도 않는 것에는 애착함도 있어지지 않는다. 합리성이 들어 있는 외관은 그것에 애착함과 같은 것이다. 그 이유가 외관 자체 안에 즐거움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만일 외관이 결핍된다면, 상상되는 것은 즐거움이 남아있지 않다는 것이다; 이에 반해 천국의 애착은 외관 안에 있지 않고 선과 진리 자체에 있다. 합리적 진리가 이런 속성으로부터 있기 때문에 이것은 용서되어진다, 그리고 그것이 외관 안에 있는 것이 허용되어진다, 그리고 그것들 안에 즐거움을 가지는 것도 허용되어 있다. 외관 안에 있었던 이런 진리가 주님께서 자신을 신성에 결합하셨을 때, 사라에 의해 표현되어져 있다. 그러므로 그녀는 “문에 서 있었다”로, 그리고 “그녀는 웃었다, 말하기를, 내가 이렇게 늙었는데, 기쁨이 있을까?”라고 말해진 것이다. 이런 말을 수단으로 그것의 상태가 바뀌는 것은 그것의 애착으로부터 있지 않았다가 의미되어진다.

그리고 내 주인은 늙었는데? 이는 진리에 애착함이 이 진리가 인접한 합리적 선 역시 인간을 벗는 것에 놀라워했다를 의미하는데, 이는 여기서 아브라함의 표현, 여기서 “내 주인”이라는 표현이 합리적 선이다로부터; 그리고 “늙어 감”의 의미가 인간을 벗음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인간의 합리적 선은 세상적 즐거움으로부터 그 자체 안에 많은 것을 가지고 있다. 그 이유가 그것은 진리들로부터 만들어 내질 뿐만 아니라 감각적인 것들로부터의 즐거움으로부터, 그리고 세상에 있는 많은 즐거움들로부터도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인간이 개혁되고 거듭나질 때의 즐거움들 안으로 영적인 선이 주님에 의해 은근히 주입되어진다; 그러므로 해서 세상적인 것들은 그때 조화되기 쉽게 부드럽게 되어지는데, 그 후에 그것 안에 그것의 행복을 가진다. 그러나 주님의 경우에서는 합리성 모두로부터 세상적이었던 것은 완전히 추방하시고 그것 모두를 신성으로 만드셨다; 이것이 사라가 놀라워함에 의해 뜻해진 합리적 진리이다.

13절.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말하시기를, 왜 사라는 웃으며 말하기를, 참으로 내가 아이를 낳을까? 그리고 내가 늙어져 있는데? 하고 있다.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말하셨다. 이는 신성으로부터 주님이 지각하심을 의미하는데, 이는 “말하심”의 의미가 지각하는 것이다로부터; 그리고 “여호와께서 말하셨다”는 말은 신성으로부터 이다에서 알 수 있는데, 주님의 내적 자체가 여호와이셨다는 것은 이미 살핀 바 있다.

어찌하여 사라는 웃느냐? 이는 합리적 진리의 애착으로부터 합리적 진리가 생각함을 의미하는데, 이는 “웃다” 또는 “웃음”의 의미가 진리 속에 있는 애착이다로부터; 그리고 사라의 표현이 합리적 진리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 질문은 주님께서는 그분의 합리성에서 아직 인간이셨음을 지각하셨다를 내포하고 있다.

내가 참으로 아이를 낳을까? 이는 합리성이 신성이 된다는 것에 놀라워함을 의미하는데, 이는 여기서 “낳는다”의 내적 의미로부터 알게 된다. 즉 주님의 신성한 합리성이 이삭에 의해 표현되는데, 여기서 “낳는” 것은 이삭인 바, 의미는 합리성이 신성으로 만들어짐이 된다. 이것을 사라에 의해 표현된 합리적 진리가 납득할 수 없었다는 말이다.

그리고 나는 늙어져 있다. 이는 이 후 더 이상 이런 속성, 즉 신성이 아닌 인간성에 있지 않아야 한다는 것, 그리고 인간성은 벗어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는 “늙어져 있음”의 의미가 인간을 벗어 던짐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일반적 측면에서의 합리성에 주목해 보면, 합리성이 신성의 일들에 관하여 곰곰이 생각할 때, 특별히 그것 자신의 진리로부터 생각할 때, 아이를 낳는다는 것과 같은 일이 믿어지는 것은 가능할 수 없다는 것이다; 양쪽 측면, 즉 그것들을 납득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리고 그것에는 합리성이 생각함으로부터 의해서와 감각의 오류에 의한 외관이 달라붙어 있기 때문이다. 아래에 더 예를 들면서 생각해 보자.
만일 인간의 합리성이 충고를 받는다면, 말씀이 내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것, 이 의미는 글자 의미가 보여주는 것과 아주 거리가 멀다는 것을 믿을 수 있을까? 그리고 말씀은 천국이 지상과 결합되게 한다는 것, 즉 천국들에 있는 주님의 왕국과 땅에 있는 주님의 왕국을 결합되게 한다는 것을 믿을 수 있을까? 사후 영들은 서로 구분되는 상태로 서로 이야기한다는 것, 게다가 어떤 단어들을 사용함도 없이 대화한다는 것, 그럼에도 지상의 인간이 한 시간 동안 단어들을 나열해서 표현하는 것을 수 분에 완벽히 표현한다는 것을 믿을 수 있을까? 더욱이 천사들도 이러하되 혼들보다 더 완전해서 영들이 지각할 수 없는 것까지도 지각한다는 것을 믿을 수 있을까? 게다가 다른 삶으로 건너오는 혼들이 특별한 교육을 별도로 받음도 없이 어떻게 이런 의사 소통이 있다는 것을 믿을 수 있을까? 인간의 한 개의 애착 안에, 그렇다, 한 번의 한숨 쉼 안에 묘사하기도 힘들 만큼 많은 것들이 있다는 것, 그럼에도 천사들은 단 한 번에 지각한다는 것을 믿을 수 있을까? 인간의 모든 애착, 그렇다, 그의 생각함 속의 모든 관념은 그의 형상이다는 것, 그래서 그의 생명 속의 모든 것들이 경이로운 방법에서 그것 안에 함유되어 있다는 것을 믿을 수 있을까?
감각적인 것들로부터 슬기로워지고, 그들의 오류들에 물든 합리성이 위와 같은 것들을 생각할 때, 그것들이 그렇게 있을 수 있다고 믿지 못한다. 그 이유는 이것은 외적이든, 내적이든 어떤 의미를 수단으로 지각되는 것 외에는 어떤 생각도 그 자체에 형성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보다 더 높은 신성한 천적, 영적인 것들에 관하여 어떻게 생각할까? 그 이유가 합리성에게는 감각적인 것들로부터의 어떤 나타남들이 언제나 있어야만 하고, 이 위에 생각함이 기대고 있기 때문이다. 고로 (영계에서) 이 나타남들이 철회되는 바, 생각들이 사멸되고 만다. 나는 이것을 지상에서 외관들에서 가장 큰 즐거움들을 가졌던 신참내기 영들로부터 확인하였다. 즉 그들은 말하기를, 만일 이것들을 자기들로부터 거두어 버린다면, 그들은 어떻게 생각할지 조차 모른다는 것이다. 합리성 자체에만 주목한다면 위와 같은 것이다.

14절. 어떤 것이 여호와에게 놀라운 일일까? 지정한 때에 나는 너에게 돌아 올 것이다, 삶의 이맘 때 쯤, 그리고 사라는 아들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어떤 것이 여호와에게 놀라운 일일까? 이는 여호와에게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를 의미하는데, 설명이 필요 없을 것이다.

지정한 때에 나는 네게 돌아 올 것이다. 이는 오기로 되었던 상태를 의미하는데, 이는 “때”가 상태를 의미함에서 분명해진다. 여기서는 여호와께서 “지정한 때에 돌아 올 것이다”, 그리고 “삶의 이 맘 때에” 라고, 또는 같은 말로 내년 이 시간에 라고 말해진다. 각 표현은 특유한 어떤 것을 포함한다. 즉 “지정한 때”는 “삶의 이때 쯤”에 의해 의미된 그 상태의 일반성을 포함하고, 그 일반성은 오기로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어떻게 있어지는 지가 “삶의 이때 쯤”에 의해 묘사되어지고 있다. 어떤 상태를 비슷한 말로 두 번 표현하는 방식은 말씀에서, 특히 예언서에서 두드러진 표현 방식 중의 하나이다; 대체로 이쪽이 일반성을 포함하면, 다른쪽은 일반적인 것을 결정짓는 어떤 것을 내포한다.

삶의 이때 쯤, 그리고 사라는 아들을 가질 것이다. 이는 주님께서 인간의 합리성을 벗으시고, 신성한 합리성을 입으실 것임을 의미하는데, 이는 “삶의 이때 쯤”, 또는 내년 이때 쯤의 의미가 주님의 신성이 그분의 인간과 결합함이다로부터; 그리고 사라의 “아들”의 의미가 신성이 되는 합리성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삶의 이때, 또는 내년 이때란 아브라함이 백세가 되는 때를 말한다. 이 햇수를 수단으로 주님의 인간이 그분의 신성과, 그리고 그분의 신성이 그분의 인간과 하나로 됨이 의미되었다. 백세가 되기까지 1년이 끼어 있다. 말씀에서 년(year)은 시간상의 햇수가 아닌 전체의 시간, 고로 전체의 기간, 그 기간이 천 년이든, 백 년이든 또는 십 년, 또는 한 시간이든 어떤 기간의 전체를 의미한다.

15절. 그리고 사라는 두려워서 부인하여 말하기를, 저는 웃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말하였다. 아니다, 너는 웃었다.

사라는 두려워서 부인하여 말하기를, 저는 웃지 않았습니다. 이는 인간의 합리적 진리가 그 자체를 변명하기를 원했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그 이유는 그것이 그와 같이 있지 않아야 한다는 것에 주목했기 때문이다. 이는 설명이 더는 필요 없다.

그는 말했다, 아니다, 너는 웃었다. 이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와 같이 있었다를 의미하는데 설명 없이도 분명해질 것이다. 합리성의 애착, 참으로 합리성에 있는 진리, 또는 거짓에 대한 애착은 모든 웃음의 근원이다. 합리성에 있는 애착이 웃음에 그 자체를 진열하는 만큼 합리성에는 세상적, 육체적, 단지 인간적일 뿐인 것이 들어 있다. 천적 선과 영적 선은 웃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의 기쁨과 기분 좋음이 얼굴에서, 말에서, 몸짓에서, 그와 다른 방법들에서 표현된다; 그 이유가 웃음 안에는 많은 것들이 있기 때문인데, 대부분 경멸의 어떤 것이 담기는 수가 많기 때문이다. 어떤 경우는 나타나지 않는다 해도, 그럼에도 감추인 채로 있다; 그리고 웃음은 마음을 밝게 함과는 쉽게 구별되어진다. 주님과 더불은 인간 합리성의 상태가 사라의 “웃음”에 의해 묘사되어지고 있다; 그리고 그것에 의해서 어떤 종류의 애착과 더불어 그 당시 선과 분리된 합리적 진리가 의미되고 있다; 이런 합리적 진리는 벗어내야 하고 신성이 옷입혀져야 하는 것이다; 주님이 웃으신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분은 신성으로부터 합리성이 아직도 있는 상태, 이 합리성 안에 인간 쪽의 것이 얼마나 많은지, 그리고 이것은 추방되어야 하는 것을 지각하셨다는 말이다. 이것이 내적 의미에서 사라의 “웃음”에 의해 의미되어지고 있다.

16절. 그리고 사람들은 거기로부터 일어났다, 그리고 소돔의 얼굴 쪽을 향하여 쳐다보았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그들을 전송하기 위해 그들과 함께 갔다.

사람들은 일어났다. 이는 지각이 결말에 이르렀음을 의미하는데, 이는 “일어남”의 의미가 가버림이다 에서; 그리고 이미 상술한 “사람들”의 의미로부터 알게 된다. 아브라함에게 세 사람이, 또는 여호와께서 오심에 의해 주님의 신성한 지각이 표현되어졌다. 그 당시 신성으로부터 주님의 지각하심은 첫째로 삼위에 관한 것, 신성 자체, 신성한 인간, 거룩한 진행(Proceeding)이었다. 이 후에 이것은 그분의 인간에 관한 것이었다. 즉 그분의 인간은 신성을 옷입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제는 품질 측면에서 인류에 관한 신성으로부터의 지각이 이어지고 있다. 위 세 주제가 이 장에서 취급되고 있다. 그리고 이 주제는 순서대로 뒤잇고 있다. 즉 신성은 인간을 자기 것으로 삼아서, 인간을 신성으로 만들었다, 이는 인류를 구원하기 위하여서 이다. 세 가지 중 앞 둘에 관련하여 말해지는 것은, 이것은 결말에 이르렀다는 것, 이것이 “사람들이 일어남”에 의해 내적 의미에서 뜻해진다; 그러나 인류에 관한 지각, 특히 그것의 품질에 주목하여 있는 지각함이 “소돔의 얼굴을 향하여 쳐다 봄, 그리고 아브라함이 그들과 함께 감”에 의해 내적 의미에서 의미되어진다; 그리고 주님은 이 지각하심에 남아 있으시기를 뜻하지 않으셨다는 것은 “그들을 전송하기 위해 그들과 더불어 감”에 의해 의미되어진다. 이런 것들이 어떻게 되어지는 지에 대하여는 이 장의 내용편을 다시 읽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다. 물론 이어지는 아래 대목에서 알게 될 것이다.

그들은 소돔의 얼굴을 향하여 쳐다보았다. 이는 인류의 상태를 의미하는데, 이는 소돔의 얼굴들 쪽으로, 즉 “얼굴을 쳐다 봄”의 의미로부터 분명해진다. “얼굴”은 모든 인간의 내면들을 의미한다. 이는 선이든, 악이든 공히 의미한다. 이런 이유로 그들은 얼굴로부터 빛을 발했다. 그러므로 여기서의 “얼굴”은 소돔을 서술하는 관계로 내면의 악들을 의미한다. 이 악들은 자기를 사랑함 속의 것들이다. 이 악들이 일반적으로 “소돔”에 의해 뜻해지는데, 이어지는 사항으로부터 더 분명해질 것이다. 모든 악 중에서도 최악의 것이 자기를 사랑함에서 근원되어진다는 것은 자기를 사랑함이 인간 사회를 파멸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천국 공동체를 파멸한다; 그리고 인류의 외고집이 거기서부터 임이 알려져 있는 바, 여기서 “소돔의 얼굴”에 의해서는 인류의 상태가 의미되어진다.
더욱이 제 1권의 많은 곳에서 말했듯이 자기 사랑의 본성은 인간이 창조되었던 질서에 정반대 된다는 것이다. 인간이 짐승 위에 있는 것으로 구별되는 큰 이유는 그에게 주어진 합리성 때문이다. 그리고 이 합리성의 최종 목적은 타인에게 호의를 베푸는 것이다. 이것이 인간이 창조된 질서이다. 결과적으로 창조된 목적은 그의 생명인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향해 사랑하는 것, 동시에 이것으로 인간은 야수와 구별된다. 이것은 천국의 질서이고, 이 질서는 인간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도 있어야 하는 질서이다; 고로 이것은 주님의 왕국의 질서이다; 이 왕국 안으로 인간은 땅에서 그를 섬긴 육체를 벗을 때 건너가고, 거기서 다하지 못한 완전함을 발전시켜 가야 한다.
그러나 자기를 사랑함은 위 모든 것을 파괴하는 유일하고 첫째가는 것이다; 그리고 이보다 덜하기는 하지만 세상을 사랑함은 신앙의 영적인 것들에 직반대 된다. 그러나 자기를 사랑함은 사랑의 천적인 것들에 직반대 된다; 그 이유가 자신을 사랑하는 그는 타인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 그리고 자신을 받들지 않는 것은 그 무엇이든 파괴하려 골몰한다; 그는 자신의 일부가 된 자 외에는, 즉 자신의 일부로 포로화되는 자, 마치 그의 탐욕들과 공상들의 어떤 것 같이 된 자 외에는 누구에게라도 호의를 보이지 않는다. 그럴 필요를 느끼지도 않는다. 이로부터 분명한 것은, 자기 사랑으로부터 모든 증오함, 복수, 잔인함, 마찬가지인 악명 높은 흉내냄, 사기침, 고로 인간 공동체의 질서에 대한 모든 가증스런 것, 천국 공동체의 질서에 대한 악질적인 것들이 뿜어져 나온다.
아니, 아주 악질적인 것은 자기를 사랑함이다는 것, 이것의 속박한 것이 느슨해질 때, 그래서 자유스런 범위가 주어질 때, 최고로 낮은 조건에 있는 이들과 더불어서 조차, 그것은 돌진하여, 이웃과 가까운 주변부터 지배력을 잠식해 들어가고, 쉴 줄 모르고 전진을 계속하여 우주라도 삼킬 듯, 결국 최고의 신성 자체에까지도 도달하려 든다. 이런 것에 관해 인간은 실로 무지한데, 그 이유는 자기가 속박한 상태에 있어 그런 것이 자신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원인도 있다, 어쨌든 이 묶임이 느슨해지는 만큼 그는 돌진한다; 이런 상황을 나로 경험해 알도록 다른 삶에서 많은 것이 허락되었었다. 이런 것들이 자기 사랑 안에 감추여 있기에, 자기 사랑 안에 있는 자, 그리고 양심의 속박이 수여되지 않은 이들은 다른 이들보다 더 주님을 증오심에서 붙들고 있다. 결과적으로 신앙의 진리를 그렇게 붙들고 있는 셈이다. 그 이유가 신앙의 진리가 천국 질서의 법칙이기 때문인데, 이것들을 그들은 역겨운 것으로 거절한다. 이것은 지상과 달리 공개적으로 그 자체 드러나 있다. 이 사랑 역시 “뱀의 머리”이고, 이것을 “여인의 씨”(즉 주님)이 “짓밟는다”.
그러나 자기 사랑이 교만이나 오만 불손함 같은 바깥쪽 형체로만 있는 것은 아니다. 때로 자기 사랑을 지닌 자도 선행의 이웃 사랑 같은 것을 하고 있을 수 있다. 때로 어떤 이는 태어날 때부터 이웃 사랑 분위기에서 있어 자기 속의 자기 사랑을 잘 감지 못하고 있을 수도 있다. 어떤 이는 초기 삶에서부터 그런 선행의 생활 안에 본인 의지에 관계없이 있기도 한다. 이 후 자기 사랑이 그들을 정복해도 이런 외적인 선은 남아 있는다. (다시 말해 선, 선행은 주님께서 없애시지 않는다는 말일지 모른다) 타인을 경멸하고 자신과 비교해 그들을 업신여기는 이들의 자기 사랑은 자기를 존중하지 않거나, 섬기지 않으면, 그 즉시 상대방을 핍박하고 그들로부터 소유권, 명예를, 명성을, 때로는 생명까지 박탈하고 만다.

“소돔”은 자기 사랑으로부터의 모든 악이다는 것은 말씀에서 “소돔”의 의미로부터 분명해진다. 다음 장을 보면, 최악의 악이 간음자의 악인 것처럼 “소돔”에 의해 의미되는 듯 할지라도, 내적 의미에서 그것에 의해 의미되는 것은 자기 사랑으로부터의 악일 뿐이다. 말씀에서 자기 사랑으로부터 생겨나는 역겨움들이 다양한 종류들의 간음질들로 표현되기는 한다. “소돔”이 자기 사랑으로부터의 모든 악을 일반적으로 의미한다는 것, 그리고 “고모라”는 그 악으로부터의 모든 거짓을 의미한다는 것은 앞에서 많이 살폈었다. 이제 아래 인용 구절로부터 조금 더 살핀다. 예레미야서에서:
검이 갈대아인들 위에, 바벨의 주민들 위에, 마치 하느님께서 소돔과 고모라, 그리고 이웃 도성들을 뒤엎으실 때같이, (그리하여) 여호와께서 말하신다. 사람이 거기 거주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사람의 아들이 그 안에 체류하지 않을 것이다 (예. 50:35, 40).
위 구절은 갈대아인들에 의해 의미되는 이들, 즉 그들의 예배 안에 모독된 거짓을 가진 이들을 취급한다; 그리고 바벨에 의해 의미된 이들, 즉 그들의 예배에 모독된 악을 지닌 이들이 취급된다. 그들을 정죄함이 “소돔을 뒤엎음”에 의해, 즉 일반적인 악을 뒤엎음에 의해 묘사되고 있다. 그리고 “고모라를 뒤엎음”에 의해, 즉 일반적인 거짓을 뒤엎음에 의해 묘사되어 있다; 그 이유는 그들이 그들의 예배 안에 자기 사랑의 악, 그리고 파생된 거짓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아모스서에서:
나는 너를 뒤엎었다, 마치 하느님이 소돔과 고모라를 엎었을 때같이 말이다; 그리고 너희 는 타고 있는 나무를 꺼내 놓은 때의 나무토막으로 되었다 (암. 4:11).
위는 사마리아가 취급된다, 이를 수단으로 왜곡된 영적 교회가 의미되었다, 그리고 선행의 선들에 반대되는 일반적 측면의 악들에 관련되는 것이 “소돔”이라 불리고, 신앙의 진리들에 반대되는 일반 측면의 거짓들에 관계되는 것이 “고모라”로 불리고, 둘 모두는 “하느님이 뒤엎음”으로 불린다. 스바냐서에서:
모압은 소돔같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암몬의 아들들은 고모라같이 있을 것이다, 버려진 장 소는 쐐기풀밭이 되고, 그리고 소금 구덩이, 황무해짐이 영원할 것이다; 이것을 그들은 자 기들의 교만을 위해 지닐 것이다, 그 이유는 그들은 여호와 체바욷의 백성을 비난하고 침 입했기 때문이다 (습. 9, 10).
위에서 “소돔”은 자기 사랑으로부터의 악을 표시한다, 그리고 “고모라”는 파생된 거짓을, 이것 모두는 “황무함”이 표시하고 있다. 이전 구절에서는 “뒤엎음”이다. “교만”은 자기 사랑이다; “여호와 체바욷의 백성을 비난함”은 진리들 위에 악을 가져오는 것이다; 그리고 “백성들을 침입함”은 그것들 위에 거짓을 가져오는 것이다.
에스겔서에서:
네 손위의 여자 형제는 사마리아인데, 네 왼쪽에서 그녀와 그의 딸들이 거주한다; 그리고 네 손 아래의 여자 형제는 네 오른쪽에서 거주하는데, 소돔과 그녀의 딸들이다. 네 여자 형 제 소돔, 그녀와 그녀의 딸들은 네가 행한 것같이 행치는 아니했다. 보라, 이것이 네 여자 형제 소돔의 불법이다; 교만, 빵의 풍족함, 태평함이 그녀와 그녀의 딸들에게 있었다, 그리 고 그녀는 가난하고 궁핍한 자를 힘나게 해주지 않았다; 그리고 그들은 오만하게 되었다, 그리고 내 앞에서 역겨운 짓을 범했다 (겔. 16:46-50).
위는 예루살렘의 역겨움을 다루고 있다, 그리고 “사마리아”와 “소돔”에 의해 묘사되어진다; “사마리아”에 의해 “고모라” 대신 거짓 측면이 그리고 “소돔”에 의해 악의 측면이 묘사되어진다; 그리고 “소돔”에 의해 특별하게 의미되어지고 있다. 즉 자기 사랑인 것, 여기서 “교만”에 의해 의미되고 있다. 그들이 선행의 선들로부터 돌아선 것이 “빵의 풍족함”에 의해 의미된다; 그들이 이런 사항들을 묵묵히 따랐다는 것이 “태평함”에 의해 의미되었다. 그들이 자비를 가지지 않았음이 “가난하고 궁핍한 자를 힘내게 하지 않았다”에 의해 묘사되었다; 그리고 거기로부터 파생된 모든 탐욕들이 자기 사랑을 흡입했다는 것이 그들의 딸들이 “오만불손해 졌다”에 의해 의미되었다; “딸들”은 탐욕들이다.
이로부터 분명해지는 바, “소돔”이 무엇인지 이다. 고로 이것은 다음 장에서 같은 역사적 의미에서가 아니다. 그러나 여기 예언자에 의해 묘사된 것의 내적 의미에서 의미된 것, 즉 자기 사랑이 소돔의 의미이다. 위 인용 구절에서 소돔의 의미는 비교적 온화한 편이다. 그 이유는 이 구절은 소돔의 죄악상보다 예루살렘의 죄악상을 더 크게 다루기 때문에서 일 뿐이다. 아래 마태복음의 주님의 말씀에서도 분명해진다
참으로 내가 네게 말한다, 심판의 날에 이 성보다 소돔과 고모라의 토지가 더 견뎌내기 쉬 울 것이다 (마. 10:15; 막. 6:11; 눅. 10:12).
계시록에서:
그들의 시체들이 영적으로 소돔과 이집트라 불리는 큰 도성의 거리에 뉘여 있을 것이다 (계. 11:8).
위에서 “소돔”에 의해 소돔이 뜻해지지 않는다는 것, 이집트가 이집트를 뜻하지 않는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 이유는 이것이 “영적으로 소돔과 이집트”라 말해지기 때문이다; “소돔”은 자기 사랑으로부터의 모든 악을, 그리고 “이집트”(고모라 대신)는 파생되는 모든 거짓을 표시한다.

아브라함은 그들과 함께 갔다. 이는 주님이 지각 안에서 그들과 더불어 아직 남아있으셨다는 것, 그러나 인류에 관련하여 남아계셨다를 의미하는데, 이는 내적 의미에서 사물의 시리즈로부터 분명해진다; 그 이유가 “세 사람과 더불어 가는 것”(즉 여호와와 더불어 가는 것)이 아직 지각 안에 있으시다 이기 때문이다.

그들을 전송하기 위하여. 이는 그분이 이 지각함에서 철수하기를 뜻하셨다를 의미하는데, 설명 없이 분명할 것이다. 그 이유 역시 분명한데, 즉 신성으로부터의 지각, 그리고 거기로부터 인류의 품질이 어떠했는지에 관한 생각은 그분을 공포로 몸서리치게 했다. 그 이유가 인류를 향한 주님의 사랑은 위대하셨는 바, 그분은 그분의 인간 본질을 그분의 신성에 하나되게 하심으로 영원히 모두를 구원하시려 뜻하셨다. 이 때문에 그분이 인류가 이러이러하다를 지각하셨을 때, 그분은 지각과 파생된 생각을 철회하기로 뜻하셨다. 이것이 아브라함이 “세 사람을 전송하기를” 바라심에 의해 의미되어져 있다.

17절. 그리고 여호와께서 말하셨다, 내가 하는 것을 아브라함으로부터 숨겨야 할까?

여호와께서 말하셨다. 이는 지각을 의미하는데, “말함”의 의미가 지각함이다에서 알게 된다. 여기서 말하신 분은 여호와이신 바, 의미는 주님이 신성으로부터 지각하셨다 이다.

내가 하는 것을 아브라함으로부터 감출 수 있을까? 이는 주님 앞에서 감추여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를 의미하는데, 이는 아브라함의 표현이 이 상태에서의 주님이시다로부터 분명해진다 (이는 이 장에서 여러 번 설명했다). 이 경우, 글자 의미는 내적 의미에서의 것과 비슷하다. 이는 말씀에서 때때로 발생한다. 특히 구원에 필요한 것, 즉 신앙의 필수적인 것들이 취급되는 경우에서 발생한다, 다시 말해 이것들이 내적 의미에서 있는 것들과 같은 것이 글자에서 서술되어진다; 그 예를 모세의 책에서 발견할 수 있다:
여호와 우리의 하느님은 한 분 여호와이시다; 그리고 너는 여호와 네 하느님을, 네 모든 심 정을 가지고, 그리고 네 모든 혼과 더불어, 그리고 네 모든 힘을 가지고 사랑하라; 그리고 이 말들이 네 심정에 있게 하라 (신. 6:4-6).

18절. 그리고 정녕 아브라함은 크고 번성하는 나라 일 것이다. 그리고 땅의 모든 나라들은 아브라함 안에서 복있을 것이다.

아브라함은 정녕 크고 번성하는 나라 일 것이다. 이는 모든 선과 파생되는 모든 진리가 주님으로부터 있을 것이다를 의미하는데, 이는 아브라함의 표현이 주님이시다로부터, 또한 “나라”의 의미가 선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여기서의 나라는 “크고 번성하는 나라”인 바, 이를 수단으로 선과 파생되는 진리가 의미되어진다. “크다, great”란 선을 서술하고, “번성하다, numberous”는 진리를 서술한다는 것은 말씀의 다른 장소들로부터 나타난다, 그러나 여기서의 인용함은 생략할 것이다. 파생되는 진리, 즉 선으로부터의 진리는 순수한 의미에서 영적 선이다. 선에도 서로 구별되는 두 종류가 있는데, 그것은 천적 선과 영적 선이다. 천적 선은 주님을 사랑함으로부터의 선이고, 영적 선은 이웃을 향한 사랑으로부터의 선이다. 전자, 즉 천적 선으로부터 후자, 즉 영적 선이 나온다; 그 이유가 그가 자기 이웃을 사랑할 수 있지 않으면 주님을 사랑할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주님을 사랑함 안에 이웃을 향한 사랑이 있다; 그 이유가 주님을 사랑함은 주님으로부터 있고, 고로 보편적 인류를 향하여 사랑 자체로부터 있기 때문이다. 주님을 사랑함 안에 있는 것은 주님 안에 있는 것과 똑같다; 그리고 주님 안에 있는 자는 그분의 사랑 안에 있음 외에 달리는 있을 수 없다; 이것은 인류를 향하여, 고로 이웃을 향하여 있다; 고로 그는 선의 두 종류 안에, 즉 천적 선과 영적 선 안에 있다. 전자는 더할나위 없는 선 자체이다; 그러나 후자는 그것의 진리이다, 또는 거기로부터의 진리이다; 이 진리가 영적 선이다. 전자는 “크다”에 의해, 후자는 “번성한다”에 의해 의미되어져 있다.

땅의 모든 나라들은 아브라함 안에서 복될 것이다. 이는 선행에 있는 모든 이들이 그분에 의해 구원될 것임을 의미하는데, 이는 “복되다”의 의미가 천국의 근원으로부터 있는 모든 선들을 수여받는 것이다로부터 분명해진다. 천적 근원으로부터의 선들, 즉 천적 선들과 영적 선들을 수여받는 이들은 영원한 구원을 수여받는다, 즉 구원된다는 말이다. “땅의 모든 나라들”은 사랑과 선행의 선 안에 있는 이들을 내적 의미에서 뜻한다. 이는 “나라”의 의미가 선이다로부터 분명해진다. “땅의 모든 나라”가 지구 전체에 있는 사람들을 뜻한다고 생각되지 않을 것은 모든 이가 공감할 것이다. 그 이유는 그들 모두가 무조건 구원된다고 볼 수 없기 때문이다. 구원은 오로지 선행의 삶을 달성한 사람에게 해당되는 말이다.
아마 이 본문의 경우가 사망 후 인간들의 구원과 더불은 관계에 있는지를 눈치채지 못하는 자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이를 간략하게 서술해 보자. 인간은 신앙을 수단으로 구원된다고 말하는 이들이 많다. 다시 말해 만일 그가 신앙만 가지고 있다면 구원된다는 말이다. 그러나 이렇게 말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신앙이 무엇인지 모르고 있다. 어떤 이는 그것은 단지 생각 뿐이다고 상상한다; 어떤 이의 경우, 그것은 믿어지게 되는 어떤 것을 인정함이다고 상상한다; 어떤 이는 신앙은 전체 교리이고, 이것이 믿어지는 것이다라고 상상한다. 이 외 한참 더 있을 것이다. 신앙이 무엇인지에 관한 사실 그대로의 지식을 두고, 즉 인간이 구원되는 수단이 무엇인지에 대한 지식에서 그들은 오류 안에서 방황한다. 어쨌든, 신앙은 단지 생각뿐이지 않다, 또는 믿어지는 것을 인정함도 아니고, 신앙의 교리에 속하는 모든 것에 대한 지식도 아니다. 이런 것들을 가지고 인간은 구원되어질 수 없다. 그 이유가 그것들은 생각보다 더 깊게 뿌리를 가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생각함이 아무도 구원하지 않는다. 그러나 인간이 신앙의 지식들을 수단으로 세상에서 자신을 위해 포획한 생명이 그를 구원한다. 이 생명이 남아있는다; 이에 반해 생명과 일치하지 않는 모든 생각은 사라진다, 아마 없었던 걸로 될 것이다. 천국과 제휴함은 생활에 의거 있는다; 삶 속에 있지 않은 생각에 의거해서는 결코 아니다. 삶 속에 있지 않은 생각들은 위조품 수준인 바, 모조리 거절되어진다.
일반적으로 생명은 이중적이다. 한 쪽은 지옥인 것, 다른 쪽은 천국인 것이다. 지옥의 생명은 자기 사랑으로부터, 결과적으로 이웃을 증오함으로부터 흐르는 모든 목적들, 생각, 일들로부터 획득되어진다; 천국의 생명은 이웃을 향한 사랑으로부터 있는 모든 목적들, 생각들, 일들로부터 획득된다. 후자는 신앙이라 불리는 모든 것이 주목하는 생명이다, 그리고 이 생명은 신앙의 모든 것을 수단으로 포획되어진다. 이상의 모든 서술은 신앙이 무엇인지 보여준다. 그것은 선행이다는 것이다. 그 이유가 신앙 속에 있다라고 말해지는 모든 것들은 선행 쪽으로 인도하기 때문이다; 이것 안에 그것 모두는 함유되고 있다, 그리고 이것으로부터 그것들 모두는 파생되어진다. 혼, 육체의 삶 이후 그것의 사랑과 같다.

19절. 내가 그를 아는 바, 그는 그의 아들들과 그의 가문에게 명령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은 정의와 공정을 실시하는 여호와의 길을 지켜 갈 것이다. 그리고 여호와께서는 그분이 아브라함에 관해 말하셨던 것을 그에게 가져다 줄 것이다.

내가 그를 아는 바. 이는 그것이 진실임을 의미하는데, “알고 있다”의 의미로부터 분명해진다. 누구를 “안다는 것”은 그가 어떤 품성을 지녔는지를 아는 것이다; 이는 이 단어가 사람 외의 어떤 것이라 해도 같은 생각을 전달한다: 그것을 “안다”는 것은 이와 같은 것이 그것의 품질이다를 아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는 것은 서술되는 것에 관련되는 바 서술 내용의 시리즈에 일치하는 것을 의미하기에 그것은 진실임을 의미하게 된다.

그는 그의 아들들과 그의 가문에게 명령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은 정의와 공정을 실시하는 여호와의 길을 지켜 갈 것이다. 이는 선행과 신앙의 모든 교리가 그분으로부터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는 “아들”, “집”, “길”, “정의”, “공정”의 의미로부터 분명해진다; 이 단어들이 한 개의 의미 안에 모아지고, 축적될 때 전체의 이야기는 선행과 신앙의 모든 교리를 의미한다. 그 이유가 “아들들”에 의해 진리들에 있는 모든 이, “집”에 의해 선들에 있는 모든 이, “길”에 의해 그들이 가르쳐지는 수단인 교리가, 선 측면에서의 교리가 “정의”에 의해, 진리 측면에서의 교리는 “공정”에 의해 의미되기 때문이다. 선에 관한 교리는 선행의 교리이고, 진리에 관한 교리는 신앙의 교리이다.
일반적으로, 교리는 한 개, 즉 선행의 교리 뿐이다. 그 이유는 신앙의 모든 것들은 선행을 기대하고 있기 때문이다. 선행과 신앙 사이는 선한 것을 뜻하는 것과 선한 것을 생각하는 것 수준밖에 차이가 없다. 선인 것을 뜻하려는 사람은 선한 것을 생각해야 하는 것이 당연하기 때문이다. 고로 의지와 이해함 사이의 관계밖에 더 아니다. 곰곰이 되새겨 보는 사람은 의지는 이것이고, 이해함은 또 다른 것임을 알고 있다. 이것은 학식자에게는 알려져 있다, 그리고 이것은 혀는 생각으로부터 올바른 것을 외치면서, 악을 진행하는 이들에게서 분명히 나타난다. 고로 인간의 마음은 두 부분들로 구별된다. 이것은 하나를 만들지 않는다. 그럼에도 인간이 창조된 것은 이 두 부분들이 한 마음을 구성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비교하여 설명하는데 불꽃과 빛 만큼 좋은 예는 없을 것이다. 주님을 사랑함과 이웃을 향한 사랑은 불꽃에 해당되고 모든 지각과 생각의 범주에 속한 것은 불꽃으로부터의 빛에 해당된다고 생각해도 무방하다; 고로 사랑과 선행은 지각과 생각의 모든 것이다는 것, 이것은 그것들의 각각, 모두 안에 있다는 것이다. 사랑과 선행의 품질에 관한 지각, 또는 생각이 신앙이라 불리는 것들이다.
인류가 악한 것을 뜻하고, 이웃을 미워하고, 복수와 잔인함을 발휘해버림에 따라 그만큼 의지라 불리는 마음 부분은 완전히 망가져 갔으므로, 인간은 의지와 이해함 사이에 구분을 만들어야 했는데, 이때 자기들 종교 속에 있는 모든 주제들을 신앙쪽으로 돌려 놓고, 그것들을 단 한 개의 용어 신앙으로 불렀다; 그리고 마침내, 그들은 신앙만으로 구원될 수 있다고 말하기조차 해버리고 마는 지경까지 이르렀다. 더 나아가 그들이 어떻게 살든, 그들 교리 속의 것을 믿는다고 고백만 한다 해도 구원은 열린다고 설득해댔다. 마치 불꽃 없는 빛, 겨울철의 태양의 빛 같은 것이다. 이 빛은 차고 얼음덩어리 비슷한 것이다. 따라서 지상의 식물로 하여금 활기 없고 죽은듯하게 만든다; 이에 반해 선행으로부터의 신앙은 봄과 여름의 빛과 같다. 고로 모든 식물에 싹틈과 꽃피움, 성장을 가져온다.
그리하여 사랑과 선행이 천적 불꽃이고, 신앙은 거기로부터의 영적 빛임 역시 알았으리라 본다. 이 방식에서 사랑과 선행은 다른 삶에서 지각과 시각에 자체들을 표출한다; 그 이유가 주님의 천적 평면은 태양의 것 같이 불꽃 이는 광휘를 수단으로 천사들 앞에서 그 자체를 명백히 한다. 그리고 주님의 영적 평면은 이 광휘로부터의 빛에 의해 명백해진다. 이를 수단으로 천사들과 영들은 자기들에 속하는 사랑과 선행의 생명에 일치하여 자기들의 내면에 감동을 받는다. 이것이 다른 삶에서 모든 다양함들과 더불은 기쁨들과 행복함들의 근원이다 위 모든 것은 신앙 만이 구원한다는 서술과 더불은 경우가 어떤 것인지 가늠되었을 것이다.

“아들들”은 진리들 안에 있는 이들이다는 것은 말씀에서 “아들”의 의미가 진리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추상적 의미에서 “아들들”에 의해 진리들이 의미되지만, 인간에 응용될 경우, 이는 진리들 안에 있는 모든 이들을 표시한다.

“집”은 선들 안에 있는 이들을 표시한다. 이는 “집”의 의미가 선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집”에 의해, 그리고 집에서 태어난 이들에 의해 추상적 의미에서 선들이 의미되지만, 인간에 응용하면, 선 안에 있는 모든 이들을 표시한다.

“길”은 교리를 표시하는데, 이는 “길”의 의미로부터 알려진다. 말씀에서 “길”은 진리들을 서술한다, 그 이유는 진리들이 선 쪽으로 인도하고, 선으로부터 진행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길”은 진리들을 서술하는 바, 그것이 교리를 표시하는데, 그 이유는 교리는 선 쪽으로, 즉 선행 쪽으로 인도하는 모든 것들을 한 개의 틀 안에 함축하기 때문이다.

“정의”는 선 측면에 관련되고, “공정”은 진리 측면에 관련되는 것은 이 두 단어의 의미로부터 알게 된다. 말씀에서 “정의와 공정”은 더불어 언급되는 때가 꽤 많다. 그럼에도 그것들이 내적 의미에서 의미되는 것은 알려져 있지 않다. 대략적 의미에서, “정의, righteousness”는 올바른 것 또는 정당한(just) 것이라 단정되고, “공정, judgment”은 옳은(right) 것이라 단정된다. 어떤 것이 선으로부터 판단될 때, 그리고 이것이 양심에 따라 판단될 때 올바른 것이다; 그러나 어떤 것이 법으로부터 판단될 때, 고로 법의 정의로부터, 고로 또한 양심에 따라서 (그 이유가 양심도 그것의 규율을 위해 법을 가지기 때문에) 판단될 때, 옳은 것이다. 그러나 내적 의미에서, “정의”는 선으로부터 있는 것을 , “공정”은 진리로부터 있는 것을 표시한다. 선은 사랑과 선행에 속하는 모든 것이다; 진리는 선행에서 파생되는 신앙에 속하는 모든 것이다. 진리는 그것의 본질을 선으로부터 끌어낸다. 그리고 선으로부터 진리라 불린다, 신앙이 사랑으로부터 그것의 본질을 끌어내는 것과 같다. 그리고 같은 방법에서 공정도 정의로부터 그것의 본질을 끌어낸다.
이상 살핀 것이 “정의와 공정”의 의미인 것은 말씀의 인용 구절로부터도 분명해진다. 예레미야서에서:
고로 여호와께서 말하신다, 공정과 정의를 집행하라, 그리고 압제자로부터 탈취당한 자를 구출하라. 자기 집을 정의인 것으로 건축하지 않는 자에게, 자기 침실들을 공정 아닌 것으 로 짓는 자에게 화있을 것이다. 너희 조상이 공정과 정의를 먹고 마시며 행하지 아니하였 느냐? 그때 그는 선인 것을 가졌다 (예. 22:3, 13, 15).
위에서 “공정”은 진리 속에 있는 것들을, 그리고 “정의”는 선 속에 있는 것들을 표시한다. 에스겔서에서:
만일 사악한 자가 자기 죄로부터 되돌아 온다면, 그리고 공정과 정의를 행한다면, 그가 죄 지었던 모든 그의 죄들은 그에게 언급되지 않을 것이다; 그가 공정과 정의를 행한다: 그는 정녕 살 것이다. 사악한 자가 그의 사악함으로부터 자신을 돌아서게 할 때, 그리고 공정과 정의를 행한다, 이것 때문에 그는 살 것이다 (겔. 33:14, 16, 19).
위 구절도 같은 방식에서 “공정”은 진리를 표시하고, 이것은 신앙 속에 있다; 그리고 “정의”는 선을 표시하고 이것은 선행 속에 있다.
아모스서에서:
공정이 물같이 흐르게 하라, 정의가 힘센 강같이 흐르게 하라 (암. 5:24).
이사야서에서:
고로 여호와께서 말하신다, 너희는 공정을 지키고, 정의를 행하라, 그 이유가 나의 구원이 가까이 오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의 정의가 자체를 나타낸다 (이. 56:1).
이사야서에서:
공정과 정의를 가지고 다윗의 왕좌 위에, 그의 왕국 위에 평화가 있는 것이 끝이 없게 할 것이고, 그것을 건립하고, 그것을 떠받치기를 지금으로부터 영원까지 (이. 9:7).
위는 그들이 신앙의 진리들 안에, 선행의 선들 안에 있다는 것을 표시하고 있다. 이사야서에서:
여호와는 드높여지신다, 그 이유가 그분은 높은 곳에 거주하시기 때문이다; 그분은 시온을 공정과 정의로 채우셨다 (이. 33:5)
위에서 “공정”은 신앙을 표시한다, “정의”는 사랑을 표시한다, 그리고 “시온”은 교회를 표시한다. “공정”이 먼저 언급되는데, 그 이유는 사랑이 신앙을 통하여 오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의”가 먼저 언급될 경우, 이는 신앙이 사랑으로부터 있기 때문이다. 호세아서에서:
나는 너를 나에게 영원히 약혼시킬 것이다, 그리고 나는 너를 나에게 정의와 공정 안에서, 그리고 자비와 불쌍이 여김 안에서 약혼시킬 것이다. 그리고 나는 너를 나에게 신앙 안에 서 약혼 시킬 것이다, 그리고 너는 여호와를 알 것이다 (호. 2:19, 20).
위 구절에서, “정의”가 먼저 언급된다. 또한 자비가 먼저 언급된다. 이는 사랑 속에 있다; 그리고 “공정”은 뒤따른다, 또한 “불쌍이 여김”이 뒤따른다. 이는 사랑으로부터 신앙 속에 있다; 모두 “신앙” 또는 “충실함”이라고 불리운다.
다윗서에서:
오 여호와여, 당신의 자비는 하늘에 있고, 당신의 진리는 창공에 닿고 있습니다; 당신의 정 의는 하느님의 산들 같고, 당신의 공정들은 큰 깊음입니다 (시. 36:5, 6).
위에서 “자비”와 “정의”는 사랑 속에 있고, “진리‘와 ”공정들’은 신앙 속에 있다. 시편에서:
진리가 땅으로부터 솟구친다, 그리고 정의는 하늘로부터 앞을 보고 있다. 그렇다, 여호와는 선을 주실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토지는 그것의 소출을 낼 것이다 (시. 85:11, 12).
위에서 “진리”, 이는 신앙 속에 있고, “공정”을 표시한다. 그리고 “정의”는 사랑 또는 자비 속에 있다. 스가랴서에서:
내가 그들을 데려 올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예루살렘의 한 가운데에서 거주할 것이다, 그 리고 그들은 나의 백성일 것이다, 그리고 나는 진리 안에서와 정의 안에서 그들의 하느님 일 것이다 (슥. 8:8).
위로부터 분명한 바, “공정”은 진리를, “정의”는 선을 표시한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진리”가 여기서는 “공정” 대신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가 다윗서에서:
완전에서 걷는 자, 정의를 일구는 자, 그리고 진리를 말하는 자 (시. 15:2).
신앙이 선행으로부터 있고, 진리가 선으로부터 있는 바, 선으로부터의 진리들은 때때로 “정의로부터의 공정들”이라 불리운다; 고로 “공정들”은 “교훈”과 거의 동일하다. 이사야서에서:
그들은 날마다 나를 찾을 것이다, 그리고 내 길들을 알기를 바란다, 마치 정의를 행하고 자 기들 하느님의 공정을 버리지 않는 나라같이 이다; 그들은 정의로부터의 내 공정을 물을 것이다, 그들은 하느님께로 가까이 다가가기를 바랄 것이다 (이. 58:2).
“교훈들”은 마찬가지로 다윗에서 보여진다:
당신의 정의로부터의 공정 때문에 저는 하루에 일곱 번씩 당신을 찬양했습니다; 당신의 모든 교훈들이 정의입니다 (시. 119:164, 172).
주님이 새로이 인간을 창조하실 때, 그분은 “공정과 정의”를 행한다고 주님에 관해서 특별히 말해진다; 예레미야서애서:
이것으로 자랑을 늘어놓아라, 즉 땅에서 자비, 공정, 그리고 정의를 행하는 분이 여호와이 신 것, 이것을 기뻐하시는 분이 여호와이신 것을 내가 알고 깨달은 것에 대해서이다
(예. 9:24).
위는 자비, 이는 사랑 속에 있다는 것이 “공정과 정의”에 의해 묘사되어 있다. 예레미야서에서:
나는 다윗에게 의로운 가지를 일으킬 것이다, 그리고 그는 왕으로 통치할 것이다, 그리고 총명하게 행할 것이다, 그리고 땅에서 공정과 정의를 행할 것이다 (예. 23:5; 33:15).
요한복음에서 말해진다:
내가 떠나면, 나는 위안자를 너희에게 보낼 것이다; 그가 올 때, 그는 세상을 죄에 관해서, 정의에 관해서, 공정에 관해서 꾸짖을 것이다; 죄에 관해서, 그들이 나에 관해서 믿지 않기 때문이다; 정의에 관해서, 내가 나의 아버지에게 가기 때문에, 그리고 너희가 나를 더 이상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공정에 관해서, 이 세상의 제 1 인자가 심판되어지기 때문이다
(요. 16:7-11).
위 구절에서, “죄”는 모든 불성실을 표시한다. 그분이 “정의에 관련하여 꾸짖음”은 선에 반대하여 있는 모든 이에 관하여를 뜻한다. 주님께서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해 인간을 신성에 하나되게 하셨을 때, 이것이 “내가 나의 아버지에게 가고, 더 이상 나를 보지 못할 것이다”에 대한 뜻이다. 그분이 “공정에 관련하여 꾸짖으심”은 진리에 반대하여 있는 모든 이에 관하여를 뜻한다. 악들이 상해를 더 이상 입히지 못하게 그들의 지옥들로 내던지시는 것, 이것이 세상의 제 1 인 자들이 심판될 것임에 의해 뜻해지고 있다. 일반적으로, 그분이 “죄, 정의, 공정에 관하여 꾸짖으심”은 선과 진리에 불성실함에 있는 모든 이에 대해서이었다. 즉 선행과 신앙이 없는 것에 대해서였다; 그 이유가 고대 시대에서는 정의와 공정을 주님에 관련하여, 즉 모든 자비와 은총으로 이해했다; 그리고 인간에 관련하여서는 모든 선행과 신앙으로 이해했다.

여호와께서는 그분이 아브라함에 관해 말하셨던 것을 그에게 가져다 줄 것이다. 이는 이런 이유로 그분의 인간 본질이 신성 본질에 인접될 것임을 의미하지만, 이것이 단어들의 의미로부터는 분명해지지 않는다. 다시 말해 말씀의 모든 것들은 그분의 인간을 신성에 하나되게 하여 인류를 구원하시는 주님의 오심을 포함한다는 말이다. 이것들이 “그분께서는 그분이 아브라함에게 말했던 것을 그에게 가져옴”에 의해 내적 의미에서 의미되고 있다.

20절. 그리고 여호와께서 말하셨다. 소돔과 고모라의 함성이 커졌기 때문이고, 그들의 죄가 매우 비통스럽게 되었기 때문이다.

여호와께서 말하셨다. 이것이 지각을 의미한다는 것은 역사적 의미에서 “말함”의 의미가 지각함이다는 것으로부터 분명해지는데, 이미 여러 번 말했다. “여호와께서 말하셨다”는 표현은 말씀의 역사서에서 많이 등장하는 표현인데, 이는 이전 것과 계속 연결되지 않는 상태에서의 지각이다. 그러나 연속하는 것, 때로는 새로운 지각이다.

소돔과 고모라의 함성이 커졌기 때문이고, 그들의 죄는 매우 비통스럽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는 자기 사랑으로부터의 거짓과 악이 극점에까지 치달았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는 “소돔”이 자기 사랑으로부터의 악이다는 것; 그리고 “고모라”는 파생되는 거짓이다로부터; 그리고 “함성”의 의미는 거짓이다로부터; 그리고 “죄”의 의미는 악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리고 위 모두로부터 “함성이 크고 매우 비통하다”는 것은 거짓과 악이 그것의 높이에 왔다는 것, 극점에 치닫고 말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것은 이어지는 대목에서 더 잘 보여진다, 즉 도성에 의인 열 명이 있다면 그 성은 유보된다고 말해지는 32절이다; 이를 수단으로 의미되는 바, 만일 어떤 리메인스가 아직 있다면, 즉 선과 진리의 어떤 남음이 아직 있다면 이다; 이는 인간 안에 선과 진리의 어떤 것도 더 이상 남아 있지 않다는 것, 있는 것이라고는 황폐됨과 황무함 뿐이다는 것, 결과적으로 극점, 즉 종말 뿐이다는 말이다.

“함성, 외침, cry”이 거짓을, “죄”는 악을 표시하는 것은 “함성”에 관한 말씀의 의미들로부터 분명해진다. “함성”이 거짓을 의미하는 것은 말씀의 내적 의미를 알지 않을 경우 아무도 알지 못한다. 이 단어는 때때로 예언서에서 등장한다, 그리고 황폐함과 황무함이 거기서 취급될 때, 인간들이 “악쓰고 외쳐댄다”라고 말해진다. 이를 수단으로 선들과 진리들이 황폐되었다는 것이 의미된다; 그리고 거기서 이 용어는 내적 의미에서 거짓이 묘사되는 때에 사용되고 있다. 예레미야서에서:
목자들의 함성, 양떼의 힘센 자들의 악쓰는 함성은 여호와께서 그들의 풀밭을 황폐해지게 하셨기 때문이다 (예. 25:36).
위의 “목자들의 함성”은 그들이 거짓 안에 있다를 표시한다, 이로부터 황폐됨이 온다.
같은 예레미야서에서:
보라, 물이 북쪽으로부터 일어나고, 범람하는 시내가 될 것이다, 그리고 토지와 그 속의 가 득한 것, 도성과 그 안에 거주하는 모든 주민들에 범람할 것이다, 그리고 토지의 모든 주민 들이 악쓸 것인데, 그 이유는 멸해질 날 때문이다 (예. 47:2, 4).
위에서 신앙의 황무해짐이 취급된다. 이것이 거짓들을 수단으로 초래된다; “시내가 범람함”은 거짓이다.
스바냐서에서:
물고기 문으로부터 함성이, 그리고 두 번째 (구역)으로부터는 악쓰는 소리가, 그리고 언덕 들로부터는 크게 산산조각남이, 그리고 그들의 재물은 망쳐질 것이고, 그들의 집들은 황무 해질 것이다 (습. 1:10, 13).
위에서 “함성”은 황폐해지게 하는 거짓들을 서술하고 있다.
이사야서에서:
호로나임의 길에서 그들은 산산조각내는 함성을 일으킬 것이다, 그 이유는 니므림의 물이 황폐되었기 때문, 따라서 풀들이 말라지고, 풀잎은 살라지고, 푸른 것이 없기 때문이다 (이. 15:5, 6; 예48:3).
위는 신앙의 황무해짐과 그것의 종말이 “함성”에 의해 묘사되어지고 있다.
예레미야서에서:
유다는 통곡했다, 그리고 그녀의 문들은 활기를 잃었다. 그들은 땅 위에서 검게 되어버렸 다, 그리고 예루살렘의 함성은 사라졌다; 그리고 그들의 뛰어난 자들이 자기들의 젊은이들 을 물가로 보냈다; 그들이 웅덩이들에 왔다, 그들은 물을 발견하지 못했다, 그들은 텅빈 그 릇들을 가지고 되돌아갔다 (예. 14:2, 3).
위에서 “예루살렘의 함성”은 거짓들을 표시한다; “그들이 물을 발견하지 못함”은 “물”인 진리에 대한 지식들이 없음을 의미한다.
이사야서에서:
나는 예루살렘에서 드높여지고, 내 백성에서 즐거워할 것이다, 그리고 우는 자의 함성이 그 녀 안에서 더 이상 들리지 않을 것이다, 함성 소리도 들리지 않을 것이다 (이. 65:19).
위에서 “우는 자의 소리가 들려지지 않음”은 악이 있지 않을 것임을 표시한다; “함성 소리도 들리지 않을 것”이란 거짓이 있지 않을 것임을 표시한다. 이런 것들의 많은 부분들이 글자 의미로부터는 이해될 수 없다. 오직 내적 의미로서만 가능하다. 이것이 “함성”과 더불은 경우이다.
이사야서에서:
여호와께서 공정을 기대하셨으나, 보라, 인간 쓰레기다; 정의를 기대하셨으나, 보라 함성 이 다 (이. 5:7).
위 구절 역시 선과 진리의 황폐됨이 취급되고 있다. 이 구절에는 일종의 서로 주고 받음이 있다. 이는 때로 예언서에서 발견되는 표현이다. 진리 대신에 악이 발견되는 것이 “공정 대신 있는 인간 쓰레기”에 의해; 선 대신 있는 거짓이 “정의 대신 함성”에 의해 뜻해진다.
모세의 책에도 주고 받는 표현이 있다. 거기서 소돔과 고모라가 취급된다:
그들의 포도나무는 소돔의 포도나무로부터 이다, 그리고 고모라의 들판으로부터가 그들의 포도이다; 그들은 쓸개즙의 포도들이다, 쓴맛의 포도송이 이다 (신. 32:32).
위도 앞 구절과 비슷한 방식으로 말하고 있다; “포도나무”가 진리들과 거짓들을, 그리고 “들판들”과 “포도들”은 선들과 악들이다; 그리하여 “소돔의 포도나무”는 악들로부터의 거짓이다, 그리고 “고모라의 들판들과 포도들”은 거짓들로부터의 악들이다; 그 이유가 두 종류의 거짓이 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두 종류의 악이 있다. 악과 거짓의 두 종류 모두가 “소돔과 고모라의 함성이 커졌고, 그들의 죄는 극도로 슬퍼졌다”로 의미되고 있다. “함성”이 먼저 언급되고, 그 다음 “죄”가 명명되어진다는 사실로부터, “소돔”은 자기 사랑으로부터의 악인 바, 먼저 언급되고, 그리고 “고모라”, 이는 파생되는 거짓인 바 두 번째로 명명되고 있다.

21절. 나는 아래로 갈 것이다, 바라건대, 그리고 나는 나에게 당도한 함성 같이 그들이 극에 도달했는지 아닌지를 볼 것이다, 그리고 나는 알게 되리라.

나는 내려갈 것이다, 바라건대, 그리고 나는 볼 것이다. 이것이 방문을 의미한다는 것은 “보기 위해 내려감”의 의미가 심판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결과적으로 이것은 방문이다. 일반적으로 교회의 마지막 때, 그리고 세부적으로는 모든 이 각각의 마지막 때가 말씀에서 “방문”이라 불리운다. 이것은 심판에 앞서 있는 절차이다; 고로 “방문”은 품질에 관한 단순한 조사, 즉 일반적으로는 교회에 관하여, 특수적으로는 각 개인에 관한 조사이다; 그리고 이 조사함이 여호와께서 “내려가 보심”에 의해 글자 의미에서 표현되어 있다.
이 구절 역시 글자 의미의 본성이 무엇인지 보여주는 대목이기도 하다. 그 이유가 여호와께서는 내려가시지 않으신다. 그 이유가 그분은 가장 높은데 항상 계시기 때문이다. 따라서 내려감이라는 말 자체가 그분을 수식할 수 조차 없다; 여호와께서는 그것이 그러한지를 보시지 않는다. 그 이유는 그분은 일반적이든, 특수적이든 영원으로부터 모든 것을 알고 계시기 때문이다. 따라서 보시고 결정한다는 말은 그분에게 는 전혀 해당될 수 없다. 그럼에도 이렇게 표현된 이유는 이런 일이 인간에게는 그렇게 되는 듯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인간은 아래 있는 것들 안에서 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간은 어떤 것이 나타날 때, 위쪽에서 어떻게 되는지를 생각하지 않는다. 아는 것 조차 없다, 그리고 어떻게 흐르는지 모른다. 그 이유가 인간의 생각은 자기에게 가장 가까운 것 외에 더 먼 것까지에 가 닿지 않기 때문이다. 고로 그는 내려가서 본다라는 것 이상은 지각할 수 없다. 그리고 자기가 생각하는 것을 아무도 모른다고 알고 있다; 하여 하느님을 가장 높은데로부터 생각할 때, 높은데로부터 내려간다는 것 이상은 생각 속에 없는 것이다; 이에 반해, 사실상 이것은 가장 높은데로부터가 아니고 가장 깊은데로부터 이다.
이 대목은 글자 의미의 이런 본성도 보여준다. 즉 글자 의미는 외관에 의거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만일 글자 의미가 외관에 의거 있지 않으면, 아무도 말씀을 이해한다, 인정한다 말하지도 않을지 모른다; 결국 아무도 말씀을 받지 않을지 모른다. 그러나 천사들은 인간이 있는 외관 안에 있지를 않다. 그러므로 말씀이 글자 의미 측면에서 인간을 읽히는 동안, 말씀의 내적 의미는 천사들을 위하여 존재한다. 주님의 신성한 자비로부터 말씀은 인간이 세상에 사는 동안은 그들을 위하여 주어지고, 마찬가지로 같은 말씀이 다른 삶의 천사들에게도 주어진다.
“방문”은 말씀에서 다양한 장소에서 언급되어진다, 그리고 방문이 교회에 관련되든, 각 사람에게 관련되든, 또는 해방에 관련되든 언급된다. 고로 품질에 관한 조사이다. 이런 방문이 이사야서에서 나타난다:
너희는 방문의 날에 무엇을 하고 있느냐? 이것은 멀리로부터 오고 있을 것이다. 누구에게 너희는 도망가서 도움을 구하려느냐? 그리고 어디에서 너희는 너희의 영광을 놓아두려느 냐? (이. 10:3).
그리고 다시 이사야서에서:
하늘의 별들과 별자리가 그것들의 빛을 발하지 않는다, 태양은 그것의 나감에서 어둡게 될 것이다, 그리고 달은 그녀의 빛을 빛내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세상 위에 악을 방문할 것이다, 그리고 사악한 자 위에 그들의 불법을 방문할 것이다 (이. 13:10, 11).
빛나지 않는 별들과 별자리, 어둡게 된 태양, 빛을 내지 않는 달에 의해 사랑이 없음과 선행이 없음이 의미된다; 방문이 있을 때가 “방문의 날”이다.
예레미야서에서:
그들은 엎드려질 자들 사이에서 엎드려질 것이다, 그리고 그들을 방문하는 때에 그들은 걸 려 넘어질 것이다 (예. 8:12).
이는 그들이 방문 받았었던 때, 또는 선행과 신앙이 없었던 때를 뜻한다. 에스겔서에서:
도성을 방문함이 가까이 이르고 있다, 그리고 모든 이가 그의 손에 파멸의 도구를 (가지고 있다) (겔. 9:1).
여기서도 역시 방문이 취급된다; 이로부터 모든 사람이 파멸의 도구를 가지고 있다. 호세아서에서:
방문의 날이 온다, 응보의 날이 온다 (호. 9:7).
미가서에서:
너희 경비병들의 날, 너희의 방문이 오고 있다; 지금 그들은 혼란할 것이다 (미. 7:4).
또한 황폐된 선행을 표시하고 있다. 모세의 책에서:
내 방문의 날에, 그리고 나는 그들의 죄를 그들 위에서 방문할 것이다 (출. 32:34).
위 구절은 광야에 있는 백성이 자신들을 위해 금송아지를 만든 후를 취급하고 있다. 해방이 방문에 의해 의미되는데, 다음 구절을 참고하기 바란다. 즉 출. 3:16; 4:31; 예. 27:22; 29:10; 눅. 1:68, 78; 19:41, 42 등등이다.

나는 나에게 당도한 함성 같이 그들이 극에 도달했는지 아닌지를 (볼 것이다) 그리고 나는 알게 되리라. 이는 악이 그것의 높이에 도착했는지 아닌지를 의미하는데, 이는 “함성”의 의미가 거짓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앞에서 우리는 거짓에 두 종류가 있다고 말했다. 즉 악으로부터 있는 거짓, 그리고 악을 생산하는 거짓이다. 악으로부터 있는 거짓은 인간이 악 안에 있을 때 그가 생각하는 모든 것, 즉 그의 악을 옹호하는 모든 것이다; 예를 들면, 그가 간음 안에 있을 때, 그는 간음을 놓고 이리저리 생각한다. 그리고 이것은 허용될 수 있는 행위 아니냐 라든지, 이것은 삶의 쾌락 중 하나도 된다 라든지, 자손의 번식에 도움이 된다 라든지 자신의 간음질을 합리화할 것들을 궁리해 댄다. 이런 생각들은 악으로부터 거짓들이다.
그러나 악을 생산하는 거짓들은 그의 종교적 신념으로부터 인간이 어떤 원리를 마음에 품을 때 발생한다. 그리고 그 결과 그는 그것이 그 자체 악임에도, 그것이 선, 또는 거룩하다고 믿는다. 예를 들면, 자기를 구원할 수 있는 어떤 자를 찾았다고 그의 종교로부터 믿어버린 자의 경우, 그러므로 그는 그를 숭배하고 예배하는 바, 그런 거짓으로부터 악을 행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외 그 자체 거짓인 여타 종교로부터도 많은 예가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거짓이 악으로부터 있을 때, 그리고 거짓이 악을 생산 할 때, 이 두 종류 모두에 “함성”이라는 표현은 사용된다. 고로 함성은 일반적 표현인 셈이다. 이는 본문, 즉 “그들이 나에게 와진 그것의 함성에 따라 극점을 만들었는지”라고 말해진 바로부터도 분명해진다. 즉 여기서 “그것의 함성”은 단수로 표현되고, “그들이 극점을 만들었다”는 복수로 표현된다.
“극점, 종말, consummation”이 무엇인지는 앞 창. 15:16에서 이미 살폈다. 여기서 교회들로부터 조금 더 살펴보자. 태고 교회, 이는 “사람”이라 불리웠고, 모든 교회 중에서 가장 천적 수준이었다. 이 교회가 시간이 많이 흐르면서 사랑의 선으로부터 퇴보를 거듭하여, 마침내 천적 수준의 것은 아무 것도 남아있지를 않았다, 그때 그것의 극점이 있었고, 이것이 홍수 직전의 상태로 묘사되어졌다.
고대 교회, 홍수 직후 존재하기 시작했고, “노아”라 불렸는데, 덜 천적 수준이었다. 이 교회 역시 시간의 과정에서 선행의 선으로부터 떠나가서, 결국 남아있는 선행이 없게 되었다. 그 이유는 이것은 일부는 마술로 변질되었고, 일부는 우상숭배로, 일부는 선행과 분리된 궤변적인 체계 같은 것으로 변질되었기 때문이다; 이때 그것의 극점이 있었다.
또 다른 교회가 계승되었다, 이 교회는 히브리 교회라고 불리었다, 이 교회는 더욱 덜 천적, 영적 수준이었고, 여하튼 거룩한 예배의 중심을 외적 의식들에 놓고 있었다. 이 교회는 시간이 흐르면서 다양한 방법들로 비틀려졌다. 그리고 그들의 외적 예배는 우상 숭배로 변질되었다; 그리고 그때 극점이 있었다.
네 번째 교회가 야곱의 후손 사이에서 회복되었다, 이 교회는 천적 수준과 영적 수준에 속하는 것이 아예 없고, 천적, 영적인 것에 대한 표현만 존재했다. 그들은 그들의 의식들이 표현하고 의미했던 것을 몰랐던 까닭에 막연히 천적, 영적인 것을 표현하는 교회였다. 이 교회가 조직된 것은 인간과 천국 사이에, 마치 선과 진리의 표현물 사이에, 그리고 선과 진리 자체 같은 것과 어떤 연결이 여전히 있어지도록 하시려 해서였다. 마침내 이 교회도 거짓들과 악들 안으로 빠져 들어 모든 의식 행위는 우상 숭배가 되고 말았다. 그때 극점이 있었다. 그러므로 교회들이 계속적으로 하강함이 있은 이 후, 마지막 교회에서 인류와 천국 사이의 연결이 부셔진 후, 연결과 묶음의 수단인 교회가 없는 이유로 인류는 멸해져야만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때 주님께서 세상에 오셨다, 그리고 주님 자신 안에서 신성 본질이 인간 본질과 합일하심에 의해 천국과 땅이 결합되었다, 그리고 동시에 그분은 새로운 교회를 다시 세우셨다, 이것이 기독 교회라고 불리운다. 이 교회는 처음에는 신앙의 선 안에 있었다, 그리고 그 교인들은 서로가 형제 관계 수준으로 선행 안에서 살았다. 그러나 시간의 과정에서 이 교회는 가지각색의 방법들에서 이탈했다. 하여, 오늘날, 신앙의 근본이 주님을 사랑함과 이웃을 향한 선행이다는 것조차 알지 못하게 되었다; 비록 그들이 자기들의 교리로부터 주님이 인류의 구세주이시다는 것, 그들은 사 후 부활한다는 것, 천국과 지옥이 있다는 것을 말하지만, 그것을 믿는 자는 매우 적다. 이 교회가 이와 같을진대, 그것의 극점은 먼 장래에 있지는 않다.
이상 살핀 바가 보여주는 것은 “극점”이 무엇인지, 즉 그것은 악이 그것의 높이에 와지는 것이다. 이 경우는 모든 사람 각자에게서도 비슷하다; 그러나 어떻게 특수적 측면에서 각 개인에 맞추어 있는지는 이어지는 다음 어느 대목에서 주님의 신성한 자비로부터 살필 기회가 있을 것이다. 극점은 말씀의 다양한 장소에서 취급되는데, 진행되는 상태는 “황폐됨”, “황무해짐”에 의해 묘사되고, 이 뒤를 “방문”이 잇는다.

22절. 그리고 사람들은 거기서부터 앞을 바라보았고 소돔을 향하여 갔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아직 여호와 앞에 서 있었다.

사람들은 거기서부터 앞을 바라보았다. 이는 신성으로부터의 주님의 생각을 의미하는데, “앞을 바라봄”이 생각하는 것 (“보는”것이 내적 의미에서 보통의 대화에서 같이 이해하는 것이다. 이해함은 내적 시각이다, 그리고 같은 방법에서 “앞을 바라봄”은 생각하는 것, 이것은 내적 시각, 즉 이해함 속에 있다); 그리고 “사람들”의 의미가 신성이다로부터도 알게 된다. 이 장 두루에서 때로는 “사람들”이라는 단어가, 때로는, 사람들 대신 여호와라는 단어가 사용되고 있다. “사람들”이 언급될 경우, 삼위, 즉 신성 자체, 신성한 인간, 거룩한 진행이 의미되어진다. 이 신성으로부터의 주님의 생각이 “사람들이 거기서부터 앞을 바라보았다”에 의해 의미되었다. 이 장 시작에서 취급된 바 있는 이 생각함은 신성과 결합한 인간으로부터 였다. 그러나 생각을 있게 한 지각은 신성으로부터 였다. 그러므로 여호와라는 단어의 사용이 같은 절에서 지금 만들어지고 있다. 즉 “아브라함은 여호와 앞에 서 있었다”이다. 그리고 그분의 인간이 신성과 결합하여졌을 때, 그들과 더불은 거룩한 진행이 있었다.

그들은 소돔을 향하여 갔다. 이는 이와 같은 큰 악이 있는 인류에 관한 생각을 의미하는데, 이는 “소돔”의 의미가 자기 사랑으로부터의 악이다는 것; 그리고 “소돔의 얼굴들을 향하여 앞을 바라봄”이 인류의 상태를 향하여 임으로부터 알게 된다. “소돔”이 이와 같은 큰 악에 있는 인류의 상태를 의미하는 이유는 “소돔”이 소돔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사랑 안에 있는 보편적 세계에 있는 모든 이들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소돔에 관한 묘사는 이 악 안에 있는 모든 이의 상태가 표현되고 있다. 이는 이어지는 구절에서 분명해질 것이다. 자기 사랑은 모든 악의 원천이다, 고로 악 자체이다는 것은 이미 말해진 것에서 분명해진다. 그러므로 이 절에서 그들이 이와 같은 큰 악 안에 있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아브라함은 아직 여호와 앞에 서 있었다. 이는 위에서 서술된 방식에서 인접되었던 그분의 인간으로부터의 주님의 생각을 의미하는데, 이는 이 장에 있는 아브라함의 표현이 인간 측면의 주님이심에서 알게 된다; 그리고 그분이 “여호와 앞에 서 있음”으로부터도 알게 된다. 이 대목은 설명 없이 진행해도 될 것 같다. 즉 이것은 이 장 시작에서 서술된 방식에서 인접된 인간으로부터의 생각하심 이었다.

23절. 아브라함이 가까이 나아 가, 그리고 말했다, 당신께서는 악인과 더불어 의인도 멸하시렵니까? “아브라함이 가까이 나아 가, 그리고 말했다”란 신성에 조금 더 가까웁게 인접한 인간으로부터의 주님의 생각을 의미한다. “당신께서는 악인과 함께 의인도 멸하시렵니까?”란 인류를 향한 사랑으로부터의 주님의 슬픔, 그리고 그분의 중재(intercession), 즉 그들이 비록 악하다 해도 선한 어떤 것이 그들에게 남아 있을 수도 있지 않느냐고 역설하심을 의미한다.

그리고 아브라함이 가까이 나아 가, 그리고 말했다. 이는 인간으로부터의 주님의 생각, 이 생각은 신성에 그 자체를 더 가까웁게 인접되게 했다를 의미하는데, 이는 진행되는 사항들로부터 뒤이어 있고, 거기서 인류에 관한 주님의 생각이 취급되므로 여기서의 설명은 생략한다. 이 장에서 주님의 생각하심과 지각하심의 상태가 내적 의미에서 아주 충분하게 묘사되는 것, 그리고 이 장의 시작에서 주님의 인간이 신성과 결합한 상태에 관한 것은 우리 같은 인간의 경우 그다지 중요 사항이 아닐 듯 나타날 것이라는 것은 부인하기 어렵다.
그렇지만 이것은 가장 위대한 순간 속에 있다; 그 이유가 천사들에게 내적 의미는 그들의 말씀에 해당되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들이 그것들의 표현물과 더불어 가장 아름다운 형체에서 표출되고 있다; 이 외에 주님의 천국과의 결합, 그들의 인간 안에 그분의 신성을 받음에 관한 셀 수 없이 많은 것들이 그것들을 뒤잇고, 그것들의 닮은 것들을 낳고 있다; 그 이유가 천사들의 생각들은 무엇보다 이런 것을 즐기고, 가장 기쁜 것으로 그것들을 지각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은 주님의 인간 본질이 그분의 신성 본질과 하나가 됨에 관련하여 더욱 더 그것들을 수단으로 계발되고 확증한다.; 그 이유가 천사들이 사람이었었기 때문, 그리고 사람이었을 때, 그들은 주님에 관해 사람으로, 주님에 관해 하느님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마치 신성의 삼위 일체를 다양한 생각들을 가지고 자신들을 위해 정립했지만, 실상 자기들의 생각들이 무슨 품질이었는 지는 알지 못했던 것과 같다.
천국의 비밀이 이런 본성을 가졌기에 비록 그것들이 모든 납득력을 넘어 있다 할지라도, 그럼에도 모든 이는 자신을 위해 그것들에 관한 어떤 생각을 만들어 낸다. 어떤 생각이 이런 저런 방식에서 만들어내지 않는다면, 생각의 어떤 것으로 들어 간다든가, 기억에 계속 남아있는다 든가 하는 것은 가능할 수 없다. 또한 우리는 세상에 있는 어떤 것들로부터, 또는 세상에 있는 것들에서 유추함으로부터가 아니고서는 생각을 만들어 낼 수 없다. 그리고 이해되지 않은 것들로부터 자신에게 자신도 모르게 오류들의 주입을 당하기도 한다.
이런 것들이 주입되지 않고 흩으려지도록 하기 위해 많은 것이 이 장에서 내적 의미에서, 주님의 인성이 신성과 결합함에 관하여, 그분의 지각하심과 생각하심에 관하여 말해졌다. 말씀이 읽혀질 때, 말씀에 따라 이런 사항들이 천사들의 지각에 표출되는 바, 다른 근원으로부터 형성되었던 이전의 생각들, 다른 근원으로부터 쉽게 튀어나오는 도덕 관념으로부터의 다른 생각들은 점진적으로 흩어지고, 새로운 생각들이 천사들이 있는 진리의 빛에 일치하여 은근히 주입되어진다. 이것은 천적 천사들보다 영적 천사들과 더불어 더 거행된다; 그 이유가 그들의 생각들의 순수해짐에 따라 천적인 것을 받도록 그들이 완전해지기 때문이다. 천국이 주님 앞에서는 순수하지 않다는 것은 알려져 있다; 그리고 천사들이 계속적으로 완전해진다는 것도 진리이다.

당신께서는 악인과 더불어 의인도 멸하시렵니까? 이는 인류를 향한 사랑으로부터의 주님의 슬픔, 그리고 비록 그들이 악하였다 해도, 그들에게 인접해 있는 선한 것이 있는 것도 가능하지 않겠느냐고 역설하시는 그분의 중재하심을 의미하는데, 이는 여기서 빛을 내는 사랑의 열정으로부터 분명해진다, 그리고 더 강한 열정이 25절에서, 즉 “의인을 악인과 함께 멸하게 하는 일들은 당신과는 거리가 먼 일이고, 의인을 악인 같이 취급하시는 것 역시 당신과는 거리가 먼 일입니다. 모든 땅의 심판자는 공정을 실시하시지 않겠습니까?”로부터는 그분의 사랑의 열정이 더 분명해진다. 그리고 “의로운 자”가 선이다로부터, 그리고 “악인”의 의미가 “의인”에 반대됨이다로부터, 즉 선이 악에 반대됨으로부터도 알게 된다. 그리고 이 구절에 뒤이어지는 말들로부터 중재함이 있다는 것도 알게 된다. 주님의 중재하심은 그분이 세상에 계셨던 그 당시에 존재했다. 사실상 그분이 겸허의 상태에 계셨을 때 존재했다. 그 이유가 앞에서도 말했듯이, 그분은 그때 여호와와 또 다른 사람으로서 이야기를 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성화 하신 상태에 있으셨을 때, 즉 인간 본질이 신성 본질에 하나되셨을 때, 그래서 그 자체 역시 여호와이실 때, 그분은 중재하시지 않고 자비를 가지시고 그분의 신성으로부터 도움을 제공하시고 구원하신다. 즉 자비 자체가 중재하심이 된다는 말이다. 그 이유가 이것이 그것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24절. 뜻밖에도 의인 오십 명이 성 한 가운데에 있다면, 당신께서는 성 안에 있는 의인 오십 명 때문에 그곳을 유보하시지 않고 멸하시렵니까?

뜻밖에도 의인 오십 명이 성 한 가운데에 있다면. 이는 진리들이 선들로 가득해짐이 가능할 것이다를 의미하는데, 이는 “50”의 의미가 가득함이다에서; “의인”의 의미가 선이다에서; “한 가운데”의 의미가 내부이다로; “성”의 의미는 진리이다로 알게 된다. “의인 오십이 성 한가운데 있다”는 것은 진리들이 내부를 선들로 가득차게 하는 것은 가능하다를 내적 의미에서 뜻한다. 이 말에 있는 이 의미는 글자로부터 보여질 수 없다. 그 이유는 글자 의미의 역사물이 마음을 전혀 다른 방향으로, 즉 전혀 다른 생각으로 인도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 말들은 내적 의미 안에 있는 이들에 의해서는 위와 같이 지각되어진다. 나는 확실성을 가지고 이를 알고 있다. 숫자들 자체, 이 절에서의 경우, “50”이고, 이 뒤를 “45”, “40”, “30”, “20”, “10”의 숫자가 잇고 있는데, 내적 의미에 있는 이들은 이 숫자들을 숫자로는 결코 지각하지 않고, 실제의 것, 상태들로 지각한다.
고대인들은 자기들의 교회의 상태를 한 가지 방법, 즉 숫자로 표를 했다; 표를 실시함에서 그들의 평가의 본성은 방금 언급한 장소들에 있는 숫자들의 의미로부터 분명해진다. 그들은 영들의 세계에 있는 표현물로부터 숫자의 의미를 가졌다. 거기서 어떤 것이 숫자로서 나타날 때, 숫자에 의해 결정되는 어떤 것을 의미하지 않고, 어떤 것, 또는 상태 자체를 의미했다; “12”가 신앙의 모든 것들을 의미한다고 살핀 적이 있는데 이 장의 숫자도 이와 방법은 비슷하다. 이것은 내적 의미에서 말씀의 본성이 무엇인지도 보여주는 사례이기도 하다.
“50”이 가득찬 것을 의미하는 이유는 7X7의 생산물, 즉 49의 다음 숫자이다로부터 근원된다. 50은 49의 충만(채움) 상태이다. 이런 이유에서 표현 교회에서 일곱 안식일의 축제일이 50일째 였고, 안식년 역시 50년째 였다. 일곱 안식일의 축제에 관해 이렇게 읽는다:
너희는 안식일의 다음 날로부터, 너희가 흔들어 바침의 곡식단을 가져온 날로부터, 너희가 셀 것이다, 일곱 전체 안식일이 거기 있을 것이다, 일곱 안식일의 다음 날까지 세면, 너희는 50일을 세게 된다, 그리고 너희는 여호와께 새로운 공물을 바칠 것이다
(레. 23:15, 16).
그리고 안식년에 관하여:
너는 너를 위해 햇수들의 일곱 안식일을, 칠 년을 일곱 번 셀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햇수 들의 일곱 안식일을, 49년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너희는 50년째를 거룩히 할 것이다, 그리 고 토지에서 거기로부터의 모든 주민들에게 자유를 선포하라; 이것은 너희에게 안식년일 것이다 (레. 25:8, 10).
위 인용 구절은 50 번째가 안식일에 관련하여 가득한 것을 보여준다.
더욱이, “50”이 말씀에서 언급되는 어디에서든지, 이것은 가득한 것을 의미한다; 이렇게 말해진다:
레위인들은 서른 살로부터 오십 세까지 세어졌다 (민. 4:23, 35, 39, 43, 47; 8:25).
위는 성직 봉사 임무가 해제되는 (나이가) 충만된 상태, 또는 마지막 상태를 뜻한다.
처녀와 누운 사람은 처녀의 아버지에게 은 오십 조각을 주고, 그는 그녀를 아내로 삼아야 하고 그녀를 내버려서는 안된다 (신. 22:29).
위는 충분한 벌금과 충분한 지위 회복을 표시한다.
다윗이 여호와께 제단을 짓기 위한 타작 마당을 위해 은 오십 세겔을 아라우나에게 줌
(삼하. 24:24).
충분한 가격과 충분한 값으로 구매함을 표시한다.
압살롬이 자신을 위해 병거와 말을 준비함, 그리고 오십명이 그 앞에서 달림 (왕상 1:5).
위 구절과 마찬가지 표현이다:
아도니야가 병거와 마병을 거느림, 그리고 오십 명이 그 앞에서 달림 (삼하 15:1).
충분히 탁월함과 위대함을 표시한다. 위 인용 구절만 살펴도 그들은 숫자에 관련하여고대의 어떤 표현과 의미가 숫자들에 있다는 것을 알고 그 숫자를 그들의 의식 행사에서 엄수했지만, 정작 그 숫자가 의미하는 것은 알지 못했고, 아마 관심도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같은 방법에서, “50”은 충분한 것을 의미했고, 이 숫자가 표현적이었던 바, 청지기에 관한 주님의 비유에서도 기름을 빚진 자에 관련하여 말해지고 있다:
당신은 내 주인에게 얼마나 빚졌소? 그는 말했다, 기름 일백 분량이오. 그리고 그는 그에게 말했다, 당신의 증서를 가져 와라, 그리고 빠르게 앉아라, 그리고 오십이라 적어라
(눅 16:6).
위에서 “오십”은 충분한 지불을 표시하고 있다. “오십”이 숫자이기 때문에 이 숫자 넘어 어떤 의미는 없는 것 같이 나타난다; 이에 반해 내적 의미에서 충분한 것이라는 뜻이 이 숫자가 등장하는 말씀의 모든 곳에서 의미되고 있다. 학개서를 보자:
어떤 사람이 포도즙틀로부터 오십을 짜내려고 왔다; 이십 이었다 (학: 2:16).
즉 충분함 대신 많지 않았다는 말이다. 이와 같이 “오십”의 숫자는 예언서에서 의미를 지니고 사용되고 있다.

당신께서는 성 안에 있는 의인 오십 명 때문에 그곳을 유보하시지 않고 멸하시렵니까? 이는 사랑으로부터 중재함, 즉 그들은 멸해져서는 안된다고 중재함을 의미하는데, 이는 “오십”의 의미로부터, 그리고 “의인”, “성의 한 가운데”의 의미로부터 분명해진다. 이 모든 것들이 사랑으로부터의 중재, 그들은 멸해져서는 안된다는 중재를 포함하고 있다. 또한 이것이 사랑으로부터 이었다는 것이 명백하다. 주님이 세상에 계셨을 때, 그분과 더불어 있었던 생명은 보편적 인류를 향한 사랑의 생명 외의 다른 생명은 없으셨다. 주님은 그들을 영원하게 구원하시기 만을 열렬히 바라셨다. 이것은 최고로 참된 천적 생명이고, 이를 수단으로 그분은 자신을 신성에, 신성이 그분에게 하나되게 하셨다. 그 이유가 있음 자체, 또는 여호와는 자비밖에 더 아니시기 때문이다. 이는 보편적 인류에 대한 사랑으로부터 이다. 그리고 이 생명은 순수한 사랑의 하나이다. 이는 어느 누구에게도 가능하지 않은 사랑이다. 생명이 무엇인지 모르는 이들은 생명이 사랑 같다는 것을 납득하지 못한다. 이는 우리가 이웃을 사랑하는 만큼에서 주님의 생명의 분담자가 된다는 것을 알려준다.

25절. 의인을 악인과 함께 멸하게 하는 일들은 당신과는 거리가 먼 일이고, 의인을 악인같이 취급하시는 것 역시 당신과는 거리가 먼 일입니다. 모든 땅의 심판자는 공정을 실시하지 않겠습니까?

이런 일들은 당신과는 거리가 먼 일이다. 이는 주님께서 전율하심을 의미하는데, 설명은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의인을 악인과 함께 멸하게 하는 일들, 의인을 악인같이 취급하시는 것. 이는 선이 죽을 수 없다는 것, 그 이유는 악이 선으로부터 분리될 수 있기 때문이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의인”의 의미가 선이다로부터, “악인”의 의미가 악이다로부터 분명해진다. 그러므로 “의인을 악인과 함께 죽게 하는 것”은 선을 악과 더불어 죽게 만드는 것이다. 이것은 있어서는 안되는 것, 생각만 해도 전율을 일으키는 바. 이것은 내적 의미에서 제거되어야 하는 말들이기에 이렇게 내적 의미로는 표현된다: 선은 죽을 수 없다, 그 이유는 악이 그것으로부터 분리되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어떻게 이 주제가 서 있는지는 만일 알려져 있다 해도 극소수만 알련지 모른다. 따라서 우선 우리가 알아야 되는 것은, 인간이 유아로부터 그의 인생 마지막 때까지 생각했고 행했던 모든 선은 없어지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악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것들의 아주 작은 것도 멸해지는 일은 하나도 없다. 둘 모두 그의 생명의 책(즉, 그의 기억들 안에)에 새겨져 있다, 그리고 그의 본성(즉, 그의 타고난 성향, 천성)에 새겨져 있다. 이것들로부터 그는 자신을 위해 생명을, 말하자면 혼을 만든다. 그는 사 후 그것에 상응하는 품질 속에 있다. 그러나 선들이 악들과, 악이 선들과 뒤섞여 있을 수 없다; 그 이유가 만일 그것들이 뒤섞여 있다면, 인간은 영원하게 멸해지기 때문이다. 이에 관련하여, 주님께서는 그분의 섭리를 발휘하신다, 그리고 인간이 다른 삶에 올 때, 그가 시랑과 선행의 선 안에서 살았다면, 그때 주님은 그의 악들을 분리하신다, 그리고 그와 더불어 있는 그의 선이 그를 천국으로 승강되게 한다. 그러나 만일 그가 악 안에 살았다면, 즉 사랑과 선행의 선에 반대되는 것들 안에 있었다면, 그때 주님은 그로부터 선인 것을 분리하시고, 그의 악이 그를 지옥으로 데려 간다. 이것은 사 후 모든 이들이 맞이하는 것들이다. 그리고 선과 악은 분리될 뿐, 제거됨은 아니다.
더욱이 거듭나는 이들의 경우, 생명의 한쪽 부분인 의지 측면이 혹독하게 파괴되었다면, 주님께서는 그의 다른 쪽 부분인 지적 부분으로부터 파괴된 의지 부분을 분리하시고, 그의 지적 부분에 선행의 선을 이식하신다. 이를 통하여 새로운 의지가 생기고, 이것들이 그들이 가지는 양심이다. 고로 일반적으로 말하면, 주님은 악을 선으로부터 분리하신다. 이것들이 악은 선으로부터 분리될 수 있기 때문에 선은 죽을 수 없다라는 내적 의미의 서술에 의해 뜻해진 비밀이다.

당신과는 거리가 먼 일. 이는 전율하심이 더 큰 수준을 의미한다는 것은 이 말이 반복되었음에서 알게 된다.

모든 땅의 심판자들은 공정을 실시하시지 않겠습니까? 이는 신성한 선은 선으로부터 분리된 진리의 방식에 따라서 이를 행할 수 없다를 의미하는 것은 “모든 땅의 심판자”의 의미로부터, 또한 “공정”의 의미로부터 분명해진다. “모든 땅의 심판자”란 선 자체를 내적의미에서 의미하고, 이로부터 진리가 온다; 이것 역시 표현 교회에서 성직자(제사장)인 동시에 심판관(사사)이었던 이들에 의해 표현되었다; 그 이유가 그들은 성직자로서는 신성한 선을 표현했다, 그리고 심판관으로서는 신성한 진리를 표현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든 땅의 심판자”는 이 둘 모두를 뜻한다. 이는 땅의 의미로부터도 분명해지는데 앞 장들에서 살폈다. 따라서 이미 살핀 것을 번복하면 지루할 것인 바 생략하겠다. 어쨌든 “공정”은 진리를 의미한다. 이런 의미로부터, 그리고 내적 의미로 있는 것들의 시리즈로부터, “모든 땅의 심판자는 공정을 실시하지 않겠습니까?”가 신성한 선은 선으로부터 분리된 진리의 상태에 따라서는 이것을 실행할 수 없다를 의미함을 알게 된다.
이런 것들을 이해하기 위하여, 알아야 하는 것은 보편적 천국의 질서를 구성하는 두 가지 사항은 선과 진리이다는 것이다. 선은 질서의 본질이다. 이는 자비들이 속하는 모든 것들이다. 진리는 질서의 두 번째 본질이고, 진리에 속해 있는 모든 것들이다. 신성한 선은 모든 이를 천국으로 오도록 결정을 내린다. 그러나 신성한 진리는 모든 이를 정죄한다; 그러므로 선에 속한 주님의 자비가 있지 않으면, 모든 사람은 제 아무리 많더라도 영원히 정죄되고 말 것이다. 이것이 신성한 선은 선으로부터 분리된 진리에 따라 이를 실시할 수 없다는 서술이 의미하는 내용이다.
그럼에도 악인은 지옥으로 정죄되는데, 이는 신성한 선이 신성한 진리와 분리되기 때문에서가 아니라, 인간이 자신을 신성한 선으로부터 분리하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주님은 어떤 경우에도 인간을 지옥으로 보내시지 않는다. 그러나 인간이 자신을 보내는 것이다. 이는 여러 차례 반복 설명해온 대목이다. 이어지는 관련 사항은 신성한 선은 신성한 진리와 결합되어 있다는 것이다: 악인이 선한 자로부터 분리되지 않으면, 악한 자는 선한 자에게 상해를 가하고, 결국 질서를 파괴하려 골몰할 것이다: 고로 선한 자는 상해를 당해서는 안돤다는 것이 자비 속에 있다. 이것이 땅의 왕국들에서와 같은 상황이다. 만일 악한 자들이 처벌되지 않는다면, 전체 왕국은 악으로 감염되고 말 것이고, 결국 천국 전체는 멸해진다; 이런 이유를 위해 왕들과 심판자들은 그들에게 어울리지 않는 관대함을 베푸는 것보다 인간들의 죄지음을 사회로부터 추방함에, 악들을 처벌함에 더 자비를 진열해 놓는다.

26절. 그리고 여호와께서 말하셨다, 만일 내가 소돔에서 의인 오십 명을 성 의 한 가운데에서 발견한다면, 나는 그들 때문에 모든 그곳을 유보하리라.

여호와께서 말하셨다. 이는 지각을 의미하는데, 이는 역사적 말씀에 있는 “여호와의 말하심”이 신성으로부터 주님이 지각하심이다를 표현함에서 알게 된다, 그리고 거기로부터 이어지는 생각의 어떤 것, 그리고 어떤 응답도 표현한다는 것이다.

만일 제가 성의 한 가운데에서 의인 오십 명을 발견한다면. 이는 만일 진리들이 선들로 가득차 있다면을 의미하는데, 이는 “오십”의 의미가 가득한 것, 그리고 “성의 한 가운데”의 의미가 진리 안쪽에, 또는 진리 안에 있다 임으로부터 알게 된다. 만일 어떤 인간이 상상하기를 자신에게 있는 진리들은 선들로 가득한 바, 나야말로 구원될 수밖에 없지 않을까?라고 상상할 수 있다. 그러나 알아야 할 것은, 인간과 더불어 있는 진리는 실상 극히 적다는 점이다. 그리고 만일 조금의 진리라도 있다면, 그것들 안에 선이 없으면 그것들에는 생명이 없다; 그리고 만일 그것들 안에 선을 가지고 있다면, 그는 구원되어지나 그것은 주님의 자비로부터일 뿐이다. 그 이유가 인간과 더불은 진리는 매우 적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 안에 있는 선들은 진리에 일치하여, 그리고 인간의 생명에 일치하여 그것들의 품질을 가진다.
진리들 자체에만 주목하면, 진리는 생명을 주지 않는다. 생명을 주는 것은 선들이다. 진리는 생명을 받는 그릇, 즉 선을 받는 그릇일 뿐이다. 그러므로 신앙 속에 있는 진리들 안에 선이 있지 않은데도, 진리들을 수단으로 (요즘 사회에서 말하는 식이라면, 신앙 만으로…, 믿기만 하면… 같은 식의 표현) 구원될 수 있다고 말하는 자가 있다면 어불성설이다. 그리고 진리들 안에 있어야만 하는 이 선은 선행의 선이어야만 한다; 그러므로 신앙 자체는 내적 의미에서 보면 실상 선행 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진리를 인정함이 구원하는 신앙이다 라는 항간의 사람들의 말에 주목해 말해보면, 알아야할 것은, 선행에 반대되는 것 안에서 사는 이들과 더불어, 진리를 인정함이라는 것은 가능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들의 인정함이라는 것은 설득당함, 설득함 따위에 해당된다. 이런 설득에는 자기 사랑이나 세상 사랑의 생명이 들러붙어 있다. 모든 것 중에서 가장 나쁜 것은 자기를 사랑함 또는 세상을 사랑함으로부터, 즉 총명이나 지혜라 불리는 것에서 타인보다 더 걸출해지기 위해, 그리고 명예, 명성, 이익 창출을 위해서 골몰하는 이들도 신앙의 진리들을 배울 수 있고, 많은 것들을 수단으로 자기들의 진리들을 확증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과 더불은 진리들은 죽어 있다.
진리의 생명, 또는 신앙의 생명은 생명 자체이신 주님으로부터만 있다. 주님의 생명은 자비이다. 이는 보편적 인류를 향한 사랑의 생명이다. 주님의 생명 안에 있는 이들이라면, 자기가 신앙의 진리들을 고백하면서, 자신과 비교해 열등하다 싶은 자를 업신여기는 자세라든가,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의 생명이 움틀거려, 이웃을 미움 안에 붙들고 있거나 이웃의 재산의 손실, 명예의 실추, 목숨을 잃는 것에 내심 즐거워하는 따위의 자세는 결단코 가질 수 없다. 신앙의 진리들과 더불은 경우는 그 진리들을 수단으로 그가 거듭나지는 것, 그 이유는 그것들이 선의 참 그릇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진리들인 사람들, 그리고 진리들 안에 선들로 채운 사람들, 그리고 진리와 선이 결합된 사람들, 결과적으로 다 거듭나지 못한 부분을 다른 삶에서 완전해지게 할 수 있음에 있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은 사 후 복됨과 행복의 상태에 있다.

나는 그들을 위하여 모든 장소를 유보할 것이다. 이는 그들이 구원될 것이다를 의미하는데, 이는 시리즈의 결말로서 뒤잇기에 설명은 필요 없을 것 같다. “장소”는 상태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여기서 이 대목에서는 교리 측면을 의미하는 “성” 대신 상태를 의미하는 “장소”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이런 상태에 있는 이들은 구원된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27절. 아브라함이 대답하여 말하기를, 간절히 바라는 것이 있어 저는 내 주께 말하려 저를 내세웁니다, 그리고 저는 먼지요 재입니다.

아브라함이 대답하여 말했다. 이는 여느 인간으로부터 있는 식에서의 주님의 생각을 의미하는데, 이는 이 장에 있는 “아브라함”은 우리 같은 인간 측면에서의 주님이시다로부터 분명해진다. 이에 관하여는 몇 번 말했다.

간절히 바라는 것이 있어 저는 내 주께 말하려 저를 내세웁니다, 그리고 저는 먼지요 재입니다. 이는 그것의 관계적 품질 측면에서 인간의 수치스러움을 의미함이 분명하다. 인간에서의 주님의 상태(또는 수치스런 그분의 상태). 그리고 신성에서의 주님의 상태(또는 신성화되신 그분의 상태)에 관한 설명은 수 차례 반복되어 왔다; 그리고 주님의 수치스런 그분의 상태에서 또 다른 사람으로서의 여호와와 이야기 하셨다는 것; 그러나 그분 자신으로서는 신성화 하신 그분의 상태에서 이야기 하셨다. 이 구절에서 아브라함은 그분의 인간에 있는 주님을 표현하는 바, 신성에 비교해보건대, 인간은 먼지와 재이다고 말해지는 것이다; 이 줄거리에서 상태는 수치스러운 그분의 상태라 불리운다. 수치스러움은 누군가가 자기가 이런 품성 속에 있다고 자기 인정으로부터 결과된다. 이 대목에서의 주님의 인간 측면은 신성한 인간을 뜻하지 않고, 주님이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인간, 그분이 완전히 벗어내야 하는 인간, 그리하여 신성한 인간을 입어야 하는 인간이 뜻해진다. 그래서 어머니쪽의 인간이 이 구절에서 “먼지요 재이다”로 말해진다.

28절. 의인 오십 명에서 다섯이 모자랄 경우, 당신께서는 다섯 때문에 온 성을 멸하시렵니까? 그리고 그분은 말하셨다, 내가 사십 오 명을 발견한다면 그것을 멸하지 않으리라.

의인 오십 명에서 다섯이 모지랄 경우. 이는 만일 얼마간 덜할 경우가 있다면을 의미하는데, 이는 “다섯”이 조금 있다, 또는 덜하다를 의미함에서 알게 된다. “의인 오십”은 앞에서 살폈다.

당신은 다섯 때문에 온 성을 멸하시렵니까? 이는 부족한 조금 때문에 인간은 멸하여야 하나를 의미하는데, 이는 다섯이 적다를 의미함으로부터; 그리고 “성”이 진리를 의미함으로부터 알게 된다. 인간 마음은 그 안에 있는 진리 측면에 관련하여 “성”에 비교되고, 그렇게 불리운다; 그리고 진리들 안에 있는 선들에 관련하여서는 이것이 성의 주민들에 비교된다, 그리고 선들이 그렇게 불리운다; 이런 경우는 아주 똑같다. 예를 들면, 만일 인간의 기억들에 있는 진리들, 그리고 그의 마음의 생각 안에 있는 진리들에서 선들이 결핍하다면, 그들은 주민들 없는 성과 같다, 그리고 텅비고 공허한 성과 같다. 천사들 조차도 선포하는 것은, 인간이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고 있을 때, 그들은 마치 그의 진리들 안에 있는 것이고, 주님으로부터 선에 대한 애착이 주입된다는 것이다; 이때 천사들은 이런 인간들과 더불어 사는 것, 그들에게 거주하는 것에 즐거움을 갖는다. 그러나 어떤 진리들 안에 있으나 선행의 선들 안에 있지 않는 경우는 아주 딴판이다.

그리고 그분은 말했다, 만일 내가 마흔 다섯을 발견한다면 그것을 멸하지 않을 것이다. 이는 만일 선과 진리가 함께 결합되어질 수 있다면, 인간은 멸해지지 않을 것이다를 의미한다. 이는 숫자, 45의 의미가 결합이다로부터 분명해진다. 단순한 숫자가 지니는 의미, 그것들이 곱해질 때의 의미는 이미 살폈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더 큰 숫자들은 상대적으로 덜 큰 숫자의 의미와 유사하다; 이런 경우가 45의 경우이다. 이 숫자는 5×9로 이루어진다. 따라서 45는 “5”와 “9”가 가지는 의미와 같은 의미를 지닌다. “5”는 조금을 의미한다. 그리고 “9”는 결합, 또는 결합인 것을 의미한다. 고로 여기서의 의미는 이렇다: 만일 선들이 어느 분량에서라도 진리들과 결합되어 왔다면 이다. 말씀에서 숫자들은 실제적인 것, 또는 상태들을 의미한다는 것은 이미 살폈다; 또한 이 숫자를 설명한 대목에서 살폈다.
“5”가 적다를 의미하고, “45”는 결합을 의미하기 때문에, 이 숫자들로 발표되는 것도 이 숫자와 같은 본성 속에 있다. 즉 말해지기를 “만일 오십에서 다섯이 부족하다면”; 그리고 이것에 의해 의미되는 바, 만일 얼마간 덜한 것이 있다면 이다; 그리고 그때 말해지기를, “당신은 다섯 때문에 모든 성을 멸하시렵니까?” 이 말에 의해 만일 그들에게 부족한 조금 때문에 멸하실 것입니까?; 숫자 다섯은 적다를 의미하는 바, 이 숫자는 다시 사용되지 않고, 말해진다, “내가 45명을 발견한다면, 나는 그것을 멸하지 않을 것이다”; 이 말을 수단으로 만일 선과 진리가 함께 결합되어질 수 있다면, 그들은 멸해지지 않을 것이다가 의미된다. 여기서 “만일 오십에서 다섯이 부족하다 해도…”라고 말해지지 않고 “45”라고 말해진 이유는 “5”는 적다, 조금을 뜻할 뿐 아니라 분열도 의미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분열이 아닌 결합을 의미하려면 50-5=45가 아닌 45자체를 명명해야 했다; 그 이유가 45는 결합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나머지 각 숫자들도 아름다운 어떤 연속성 안에서 뒤잇고 있다.
선이 진리와 결합함에 주목해 보면, 이것도 통상의 납득력에 의해 움켜쥘 수 있도록 서술할 수 없는 비밀함들이 있다. 하여 잠간이나마 지면을 할애해 보자. 진리가 더 순수할수록 주님으로부터 있는 선은 그것의 그릇인 진리에 더 잘 담겨질 수 있다. 그 이유가 그 둘은 서로 상응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둘의 결합은 상응에 따라서 결과되어진다. 선은 거짓들 안으로 주입될 수 없다. 악은 진리들을 그것의 그릇으로 삼을 수 없다; 그 이유는 그것들이 반대되는 품성과 본성 속에 있기 때문이다. 이쪽은 저쪽을 적들 같이 내친다. 그것들이 자신을 함께 결합하려 든다면, 이쪽이 저쪽을 토해낸다. 말하자면, 선은 악을 마치 독을 마신 듯 토해낸다. 그리고 악은 선이 마치 구토제인 듯 토한다. 이와 같은 이 둘 사이의 적개심은 그것들의 혼합을 예방하시려 주님에 의해 섭리되어 있다. 그 이유가 만일 그것들이 섞인다면, 인간은 멸해지고 만다. 사기적이고 위선적인 것에서 그것들은 함께 결합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그러나 여전히 주님께서는 그것들이 결합되는 것을 방지하시려는 경계를 늦추시지 않는다. 이런 이유로 다른 삶에서 사기친 자와 위선적인 자가 여느 다른 지옥의 거주자보다 더 고통을 당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29절. 그리고 그는 그분께 말을 더 보탰다, 그리고 말하기를, 사십 명이 거기서 발견된다면; 그리고 그분은 말하셨다, 나는 그 사십 때문에 그것을 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그분에게 말을 더 보탰다. 이는 생각을 의미하는데, 이는 “말하다”의 내적 의미로부터 분명해진다. “이야기함, speak” 또는 “말함”은 생각으로부터 흐르는 것 외에 더 다른 것은 없다; 그리고 내적인 것들이 외적인 것들을 수단으로 의미되는 바, 마치 “본다”가 이해한다를, 이해한다가 눈에 의해서, 순종함이 “귀”에 의해서 뜻하듯 하는 것과 같다. 마찬가지로 그렇게 생각함은 “이야기함”에 의해 의미되어진다.

그리고 그는 말했다, 사십 명이 거기서 발견된다면. 이는 시험 안에 있어왔던 이들을 의미한다. 이는 숫자 40의 의미가 시험이다로부터 분명해진다. 이것이 어떻게 시리즈에서 뒤를 잇는지는 시험을 생각해 보면 알게 된다. 시험들은 인간이 진리들을 확증하게 할 뿐만 아니라 진리가 선과 더 가까웁게 결합하게 한다; 그 이유는 인간이 그때 진리들을 위하여 거짓들과 전투하기 때문, 그때 그는 내면의 시련과 고통에 있는 바, 탐욕들로부터의 즐거움, 그로부터 파생하는 쾌락들이 중지된다. 그때 선들이 주님으로부터 흘러든다. 이로 인해 악들은 역겨운 것으로 그에게 간주되고, 동시에 그 효과는 이전에 소유했었던 것에 반대되는 본성으로부터의 새로운 생각이다. 이 생각에서 인간은 악들로부터 선들 쪽으로 구부려진다. 그리고 이 선들이 진리들과 결합되어진다. 선이 진리와 결합함은 시험을 수단으로 하는 바, 앞 절에서 말한 숫자 45의 의미가 뜻하듯, 진리와 선이 결합 할 수 있는 자는 구원되기에, 여기서 도 말해진 사항이 앞 절을 뒤 따르고 있다. 다시 말해 선들과 진리들은 시험을 수단으로 결합할 수 있다는 말이다. 이는 내적 의미 안에 있는 이들이 이 주제와 연결되고 있다.

그리고 그는 말했다, 나는 사십 (명)을 위하여 그것을 행하지 않을 것이다. 이는 그들이 구원될 것임을 의미한다. 이는 별도의 설명 없이도 될 것 같다. “45”로 의미되는 앞 절의 사람들에 다시 주목해 보면, 거기서 “내가 45명을 발견한다면, 나는 그것을 멸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 의미는 만일 선들이 진리들과 결합될 수 있다면 그들은 멸망하지 않는다 이었다, 그리고 이 구절을 이어 40명에 관한 서술이 뒤잇고 있다: “나는 40을 위하여 그것을 행하지 않을 것이다”; 이 말을 수단으로 그들은 시험 때문에 구원되어질 것이다가 의미되지 않고 있다. 그 이유가 시험 도중에서 조차, 그리고 그들 안에서 산출될 수 있는 어떤 것들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들과 더불어서 선들은 결합되어 있지 않다. 내가 시험 때문에 인간이 구원되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하는 이유는 시험 중에도 인간은 자신에게 고통이나 시련을 이겨내는 공적을 자신에게 돌릴 수 있기 때문이다; 만일 이것을 행한다면, 이것은 자기 사랑으로부터 이고, 그는 자화자찬의 기회로 삼고, 결국 자기는 타인보다 천국에 갈 공적을 많이 저축했다고 자부한다. 이것이 심해지면 자신과 비교해 타인을 내리깔보는 우월감에 빠져들기도 한다. 이런 모든 것은 서로의 사랑, 천국의 복됨에 반대될 뿐이다.
인간이 극복하는 시험의 조건에는 자기는 타인보다 덜 가치있는 자이다, 나는 천국 쪽의 것보다 지옥 쪽의 자질이 더 많은 것 같다는 겸허함이 포함되어야 한다. 그리고 시험 도중 내내 이런 자세가 자신을 지배해야 한다. 그런데 시험이 끝나고 나서, 그가 이런 겸허의 자세가 사라지면, 그는 극복하지 못했다는 것의 표시가 된다. 그 이유가 인간은 시험에서 가졌던 생각이 시험 후에 가지는 생각으로 구부려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만일 시험 때의 겸허한 자세가 시험 후의 자세로 굳혀지지 않으면, 그는 다시 이전의 시험을 되풀이하는 경우가 발생하고, 이전보다 더 심한 고통을 겪어야 할지 모른다. 이는 (탕자의 비유에서 작은 아들이) 제정신이 들 때까지 같을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말하는 “40”은 시험을 수단으로 선들이 진리들과 결합해 가는 이들을 의미한다.

30절. 그리고 그는 말했다, 오 나의 주여 이렇게 말씀드린다고 노여워하지 마십시오. 거기서 삼십 명이 발견된다면; 그리고 그분은 말하셨다, 내가 거기서 삼십을 발견한다면 나는 그것을 하지 않으리라.

그리고 그는 말했다, 오, 나의 주여, 이렇게 말씀드린다고 노여워하지 마십시오. 이는 인류의 상태에 관하여 걱정함을 의미하는데, 이는 단어들의 의미로부터 보다는 그것들에 속하는 애착으로부터 알게 된다. 말씀의 내적 의미는 그것 안에 두 가지 것들을 포함한다. 즉 영적인 것과 천적인 것이다. 글자 의미가 실제의 것들을 대상물로 할 때, 이 글자로부터 추상적으로 납득되는 것 안에 영적인 것은 존재한다. 마치 눈이 어떤 것을 보고, 보는 것보다 더 높은 본성에 관한 것을 생각하는 것과 같다. 천적인 것들은 내적 의미 안에 있는 실제의 것들에 속하는 애착을 지각함에 존재한다. 영적 평면 안에 영적 천사들이, 천적 평면 안에 천적 천사들이 있다. 후자 안에, 즉 애착 안에 있는 이들은 인간에 의해 말씀이 읽혀질 때, 글자가 포함하는 것을 애착만으로부터 즉시 지각한다, 그리고 그곳으로부터 그들은 자신들을 위한 천적 생각들을 만들어낸다. 그리고 이것은 끝없이 다양하다, 그리고 이루 말할 수 없는 방식에서, 애착에서 있는 사랑의 천적인 것들의 흐르는 하모니에 일치하여 있다. 이로부터도 주님의 말씀은 그것의 먼 깊숙한 곳, 내부를 함유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그러므로 이 말씀을 읽을 때: “오, 내 주여, 이렇게 말한다고 노여워하지 마십시요”를 천적 천사들이 들으면, 그들은 이는 어떤 걱정함, 실로, 인류를 향한 걱정을 의미함을 즉시 지각한다. 동시에 그분이 인류의 상태에 관하여 걱정하셨을 때, 주님이 느끼셨던 사랑으로부터의 걱정하심에 관련하여 이루 다 말할 수 없는 것들이 그들 안으로 주입되어 진다.

만일 삼십이 발견된다면. 이는 얼마 정도의 전투를 의미하는데, 이는 숫자 30의 의미로부터 알려진다. “30”은 얼마 정도의 전투, 즉 조금의 전투를 의미하는 것은 이 숫자가 5X6으로부터 인데, 5는 조금을 의미하고, 6은 노동, 전투를 의미해서 이다.
그러므로 이 숫자가 말씀에서 등장할 때, 상대적으로 적은 어떤 것을 의미한다. 스가랴서에서:
내가 그들에게 말했다, 만일 너희 눈에서 선이다면, 나에게 내 삯을 주어라; 그리고 만일 그렇지 않다면 그만 두어라; 그리고 그들은 내 삯, 은 삼십을 달았다. 그리고 여호와께서 나에게 말하셨다, 그것을 옹기장이에게 던져라, 그것은 그들이 나를 평가해서 쳐준 값이다; 그리고 나는 은 삼십을 가져갔다, 그리고 그것을 여호와의 집에서 옹기장이에게 내던졌다 (슥. 11:12, 13).
위는 그들이 주님의 공적, 즉 그분이 그들을 되찾음과 구원하시는 공적을 적은 가치를 매겼음을 표시한다. “옹기장이”는 개혁과 거듭남을 표시한다.
그러므로 같은 은 삼십이 마태복음서에서 말해진다:
그들은 은 삼십 조각을 가져왔다, 그들이 이스라엘의 아들들로부터 샀던 그분의 가격, (이 다), 그리고 그것을 옹기장이의 들판을 위한 값으로 주었다, 이는 주님께서 나에게 명하신 대로 이다 (마. 27:9, 10).
위 구절 역시 “30”은 가치가 적다고 평가한 것을 표시한다. 작은 사건에 연루된 종의 (보상) 가격은 삼십 세겔이었다. 모세의 책에서이다:
만일 수소가 남종, 또는 여종을 쳤다면, 그는 그들의 주인에게 은 삼십 세겔을 주어야 한 다; 그리고 수소는 돌로 칠 것이다 (출. 21:32).
얼마나 작은 사건에 연루되었는 지에 관하여는 출. 21:20, 21에서 말해진다. 내적 의미에서 “종”은 노동을 표시한다.
레위인들이 성직 임무를 수행하는 것에 관련하여 이런 표현이 있다. “전투에 참가하는 (나이에 들어선) 자, 그리고 천막에서 일을 할 자는 삼십 년의 아들로부터 오십 년의 아들까지”이었다 (민. 4:3, 23, 30, 35, 39, 43). 그러므로 “삼십”은 (전투 임무 수행에) 막 진입한 이들, 그러므로 전투 수행은 조금만 있었던 이들이 영적 의미로 이해된다.
“삼십”에 관련되어 언급되는 다른 구절을 몇 개 더 간단히 살펴보자. 그들은 “수소의 아들 위에 십분의 삼 에바의 식사 제물을” 바쳤다 (민. 15:9); 이는 수소의 제물이 자연적 선을 표현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연적 선은 영적 선에 비교해 작은 것밖에 안된다는 것이 숫양의 제물에 의해 표현되어졌다. 더 나아가 영적 선은 천적 선에 비교해 작은 것밖에 안된다는 것이 어린 양의 제물에 의해 표현되어졌다. 이런 제물에 연결되어 식사 제물의 십분의 몇이라는 여러 비율이 민수기서 여러 곳에 있다 즉, 15:4-6; 28:12, 13, 20, 21, 28, 29; 29:3, 4, 9, 10, 14, 15 등등이다; 이런 비율들이 천국의 비밀들을 포함하지 않는다면 결코 명령되지도 않았을 것이다. 마가복음에서 “삼십”이 조금을 표시하고 있다:
옥토에 떨어진 씨가 자라고 증가하여 열매를 산출했는데, 어떤 것은 삼십 배, 어떤 것은 육 십 배, 어떤 것은 백배였다 (막. 4:8)
위에서 “30”은 작은 성장, 그리고 조금만 노동했음을 표시한다. 이 숫자들이 그것들이 의미하는 것을 그것들 안에 포함하고 있지 않으면, 이 숫자들은 아무런 유익함을 주지 않았을 것인 바, 말씀의 지면을 차지해야 할 이유가 없었을지 모른다.

그분은 말했다, 만일 내가 거기서 삼십을 발견하면, 나는 그것을 하지 않을 것이다. 이는 이들이 구원되어질 것임을 의미하는데, 이는 내적 의미의 사항들의 영결로부터 알아지는 바, 설명은 생략해도 될 것같다.

31절. 그리고 그는 말했다, 간절히 바라와서 감히 내 주께 저를 내세워 말씀드립니다. 이십이 거기서 발견된다면; 그리고 그분은 말하셨다, 이십 때문에 나는 그것을 멸하지 않으리라.

그리고 그는 말했다, 간절히 바라와서 감히 내 주께 저를 내새워 말씀드립니다. 이는 신성 앞에서 인간의 수치스러움을 의미하는데 이미 앞에서 설명한 바 있어 생략한다.

거기서 이십이 발견된다면. 이는 만일 전투의 어떤 것이지 않다면, 그러나 아직 선이 있다면을 의미하는데, 이는 “이십”의 의미로부터 분명해진다. 말씀에 있는 모든 숫자들이 실제의 것들과 상태들을 의미하듯, 마찬가지로 “20”도 의미를 지닌다. 이 숫자가 의미하는 것은 10X2 으로부터 이다. 말씀에서 “10”은 1/10과 마찬가지로 리메인스를 의미한다. 즉 우리의 유아기로부터 생애 마지막에 이르기까지에서 주님께서 우리 안에 주입해두셨던 선과 진리로부터의 모든 것을 뜻한다. 이 의미는 다음 절에서 살필 것이다. 2X10, 또는 2X1/10, 즉 20도 10과 같은 의미를 지니되 더 높은 수준, 즉 선의 측면에서의 리메인스를 의미한다.
세 종류의 선들이 리메인스에 의해 의미된다. 즉 유아의 선들, 무지의 선들, 그리고 총명의 선들이다. 유아의 선들은 우리의 출생 직후부터 우리가 교육되고 뭔가를 알아가는 나이라 판단되는 시점까지에서 주님이 우리 안에 주입해두신 선들이다. 무지의 선들은 우리가 교육받아가고, 뭔가를 알아가고 있는 시기에서 주입된 선들이다. 총명의 선들은 우리가 선인 것과 참된 것을 되씹어 볼 수 있는 때 주입되어진 선들이다. 대충 인간의 년령으로 보면, 유아의 선은 유아기에서 10세 정도까지에서 존재하고, 무지의 선은 그 이후 20세 정도까지에서 존재한다. 이십세 이후로부터 인간은 합리적 인간이 되기를 시작하고, 선과 진리를 곰곰이 생각하는(되씹어 보는, 반영해보는) 능력을 가진다. 그리고 이 능력 발휘로 자신을 위해 총명의 선을 획득한다.
무지의 선이 “20”에 의해 의미되는데, 그 이유는 무지의 선에 있는 이들은 어떤 시험에도 아직 노출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선의 진정한 값어치를 실감 못하고 있음). 그 이유가 선하고 참된 것을 되씹어볼 수 있기 이전, 그리고 자신의 방법에서 선과 진리의 본성을 지각하기 이전에는 누구도 시험에 노출되지 않기 때문이다. 시험을 수단으로 선을 받은 이들이 앞 두 절에서 취급되었다; 시험 안에 있지 않았던 이들, 그럼에도 선을 가진 이들이 지금 이 절에서 취급된다.
무지의 선이라 불리는 선에 의해 의미되는 이들이 “20”에 의해 의미되는 바, 이집트로부터 나온 모든 이들 중에서 “이십 세로부터 그 이상의 남자들”은 세어졌다, 또는 그들은 병적에 올랐다. 이를 수단으로 의미되는 것은 이십 세 이상인 자들은 더 이상 무지의 선에 속해 있지 않는다는 것을 뜻했다. 이 구절은 민. 1:20, 24, 26, 28, 30, 32, 34, 38, 40, 42, 45; 26:4를 읽으면 알 것이다. 또한 이십 세 이상인 모든 자들은 광야에서 죽었다 (민. 32:19, 11). 이십 세 이상의 그들이 죽어야 했던 이유가 그들은 자기들의 악에 책임을 져야 하는 년령에 해당되기 때문, 그리고 그들은 시험에 굴복한 이들을 표현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오 세로부터 이십 세까지”의 남성의 평가액수는 “이십 세겔”이었고(레. 27:5), “이십 세로부터 육십 세까지는 오십 세겔”이었다 (레. 27:5).
위에서 언급한 선들, 유아의 선, 무지의 선, 총명의 선을 다시 주목해보면, 총명의 선이 가장 우수한 선이다. 그 이유가 이 선은 지혜로부터의 선이기 때문이다. 이 선에 앞서 있는 선, 즉 무지의 선은 진실로 선이다. 그러나 총명이 매우 조금 밖에 없다. 따라서 이 선은 지혜의 선이라 불릴 수 없다; 유아의 선 역시 그 자체 진실로 선이나, 앞의 두 선에 비해 덜한 수준의 선이다. 그 이유가 아직은 그 선에 인접된 총명의 어떤 선도 있지 않기 때문이다. 고로 이 선은 지헤의 어떤 선이 되어 있는 것은 없다. 그러나 그것은 지혜의 선이 될 싹틈을 가지고만 있다. 그 이유가 이 선은 인간이 인간으로 슬기로워지게 하는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이기 때문이다. 유아 자체를 수단으로 순진이 의미되어지지만 순진은 유아에 속한 것이 아니고 지혜에 속한다; 이는 이 장 끝에서 다른 삶에서 어린 아이들에 관해 말해질 사항으로부터 알게 될 것이다.
이 절에 있는 “20”은 무지의 선 외의 다른 선은 의미하지 않는다; 이 선은 이십 세 이하에게 있다고 선포될 뿐만 아니라, 선행의 선 안에 있는 모든 이와 더불어, 동시에 진리의 무지함에 있는 이들과 더불어서도 있다. 마치 선행의 선 안에 있기는 하나 신앙의 진리가 무엇인지 모르며 교회 안에 있는 이들의 경우이다. 또한 이웃에 호의를 베풀며, 하느님에 관하여 경건하게 생각하는 이들도 같은 경우이다; 또한 이방인이라 불리는 교회밖에서도 이런 경우는 많다. 그리고 선행의 선 안에서 사는 이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이들 모두 신앙의 진리 안에 있지 않을지라도 선 안에는 있는 이들은 다른 삶에서 어린 아이와 동등하게 신앙의 진리를 받을 자격이 있다; 그 이유가 그들의 이해력은 거짓의 원리들로 덧칠해져 있지 않았기 때문, 그들의 의지는 악한 삶으로 확증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기들의 거짓과 악에 관해 무지해 있다. 그리고 선행의 삶에 이것에 동반되고 있다; 무지의 거짓과 악은 진리와 선 쪽으로 쉽게 구부려질 수 있다. 그러나 진리에 반대되는 것들에서 자신을 확증한 이들, 동시에 선에 반대되는 것들에서 삶을 살았던 이들은 아니다.
다른 경우로는 말씀에서 “십분의 이”에 의해 천적, 영적 선 모두가 의미되는 구절로는 얼굴들의 빵, 또는 보여드리는 모두 각각의 빵덩어리 십분의 이를 준비함에 의해 의미되고(레. 24:5), 영적 선이 숫양의 제물과 더불어 식사 제물의 십분의 이에 의해 의미된다 (민. 15:6; 28:12, 20, 28; 29:3, 9, 14). 이애 관하여 주님의 신성한 자비로부터 다른 곳에서 더 살피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분은 말하셨다, 나는 이십을 위하여 그것을 멸하지 않을 것이다. 이는 그들이 구원될 것임을 의미하는데, 내적 의미의 시리즈로부터 알게 되는 바, 의미를 밝힐 일은 없을 것 같다.

32절. 그리고 그는 말했다, 오, 내 주여 또 말씀드린다고 노여워하지 마십시오, 그러나 이것 한 번 입니다. 열이 거기서 발견된다면; 그분은 말하셨다, 나는 그 열 때문에 그것을 멸하지 않으리라.

그는 말했다, 오 내 주여, 또 말씀드린다고 노여워하지 마십시오, 그러나 이것 한 번 입니다. 이는 인류의 상태에 관하여 아직도 걱정하심을 의미한다. 이는 앞에서 살핀 바 있어 설명은 생략한다.

열이 거기서 발견된다면. 이는 거기에 아직 리메인스가 있다면을 의미하는데, 이는 “10”의 의미가 리메인스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리메인스가 무엇인지는 다양한 장소에서 이미 보여주고 서술했었다. 즉 그것들은 인간과 더불어 그의 기억들 안에, 그의 생명 안에 저장되어 있는 모든 선과 모든 진리이다.
잘 알려진 것은, 주님으로부터가 아니면, 선도 없고 진리도 없다는 것; 또한 선하고 참된 것은 주님으로부터 인간 안으로 계속적으로 흘러든다는 것, 그러나 인간은 다양한 방법들에서, 사실상 인간이 자신을 확증한 악한 삶과 거짓의 원리에 일치해서 이다. 이것들은 주님으로부터 계속적으로 흘러드는 선과 진리들을 왜곡하거나 소멸시키거나 다투거나 한다. 그러므로 선들이 악들과 섞이지 않도록, 그리고 진리들은 거짓들과 섞이지 않도록 주님께서는 그것들을 분리하신다. 그 이유가 만일 그것들이 섞일 경우, 인간은 영원히 멸해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인간이 받는 선들과 진리들을 그의 내면의 인간 안에 저장하신다. 그러므로 인간이 악과 거짓에 있는 한, 주님은 그것들이 공표되는 것을 결코 허용하시지 않고, 다만 인간이 거룩한 상태에 있을 때, 또는 어떤 걱정 근심, 병듦 같은 고난 속에 있을 때 일부 드러나게 허락하신다. 주님이 인간에게 저장해두신 이런 것들이 “리메인스” 라고 불리우는 것들이고, 이에 관한 말씀에서의 언급은 상당히 많은 편이다. 그러나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서는 아직 알려지지 않고 있다.
리메인스의 질과 양에 따라서, 즉 인간과 더불어 있는 선과 진리의 양과 질에 따라서 그는 다른 삶에서 복된 것과 행복을 즐긴다; 그 이유가 이 리메인스들은 그의 내면의 인간에 저장되어 있다가 그가 육체와 세상의 것들을 남겨둘 때 열려지기 때문이다. 주님만이 인간에 있는 리메인스의 양과 질을 아신다; 인간 자신이 이것을 알 수 없다. 그 이유는 오늘날, 인간에게는 악밖에 없고 선한 것을 위조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한 인간은 악이다고 나타나지만 내부적으로 선을 가지기도 한다. 이런 관계로, 인간에게는 타인의 영적 생명의 품질을 판단하는 것이 허용되지 않는다. 이는 주님만이 아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민적, 도덕적 차원의 생명의 품질의 판단은 가능하다.
신앙의 어떤 진리에 관하여 견해를 피력하는 이들에게 흔한 일은, 자기들이 믿는다는 신조대로 따르지 않는 이들을 두고, 그들은 구원되어질 수 없다 라고 판단하는 경우이다. 이에 대하여는 주님께서 말해두셨다 (마. 7:1, 2). 나는 모든 종교로부터의 사람들이 만일 선행의 삶을 수단으로 그들이 선으로부터와 외관의 진리로부터의 리메인스를 받았다면 그들도 구원되고 있음을 많은 경험으로부터 배웠었다. 이것이 만일 열이 발견된다면, 그들은 그 열을 위하여 멸해지지 않을 것이라 말해진 대목에 뜻해져 있다. 즉 만일 리메인스가 있다면 그들은 구원된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말이다.
선행의 삶(생명)은 타인을 이해심 많게 생각함에, 타인이 잘되기를 바람에 존재한다; 그리고 타인이 구원된다는 사실로부터 자기의 자아 안에서 기쁨을 지각하는데 있다. 자기들이 말하는 대로 믿지 않으면 누구도 구원되지 않기를 바라는 자에게 선행의 생명은 없다. 더욱이 이를 두고 분노하고 증오하는 이들의 경우는 선행의 생명은 한 조각도 남아 있지 않다. 이는 이방인들이 기독인들로부터 보다 더 많이 구원된다는 사실로부터도 알는지 모른다. 선행의 생명을 간직하고 그 삶을 살았던 이들은 그들이 지상에서 지니지 못했던 신앙의 진리를 다른 삶에서 받아 때로는 기독인이라 불리운 이들보다 더 나은 행복을 향유한다. 그 이유가 천사들은 지상으로부터 다른 삶으로 오는 이들을 가르치는 것이 가장 재미있고 복되고 즐거웁기 때문이다.

나는 열을 위하여 그것을 멸하지 않을 것이다. 이는 그들이 구원될 것임을 의미하는데, 내적 의미에서 있는 시리즈로부터 알게되는 바, 설명은 필요가 없다.

33절. 그리고 여호와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말하시는 것을 마무리지으신 후 가셨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자기 처소로 돌아갔다.

여호와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말하시는 것을 마무리지으신 후 가셨다. 그 당시 주님이 지니셨던 위와 같은 지각의 상태가 중단되었음을 의미한다. 이는 “말하심”의 의미로부터와 아브라함의 표현으로부터 알게 된다. 내적 의미에서 “말하다, speak”는 내적 의미에서 생각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여기서는 지각하는 것을 뜻한다. 그 이유는 그분은 아브라함에게 말하시는 것을 마무리지으신 후 라고 하여 여호와가 선포되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생각함이 지각으로부터 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지각은 여호와이신 주님의 내적 측면으로부터 이었다. 그러나 이 장에서 “아브라함”은 우리 같은 인간 상태에서의 주님을 표현한다. 이로부터 알게 되는 바. 위 본문은 주님이 지니셨던 지각의 상태를 의미하고, 그때 그것의 마감과 완성(마무리하심)이 왔다는 것이다. 주님의 지각과 생각하심이 이 장에서 이렇게 많이 취급되는 이유는 앞 23절에서 취급되었으므로 다시 읽기 바란다.

아브라함은 그의 처소로 되돌아 갔다. 이는 주님께서 그분이 이런 사항들을 지각하시기 이전, 계셨던 상태로 되돌아가심을 의미하는데, 이는 이 장에서의 아브라함이 주님의 우리 같은 인간 상태를 표현함에서 알게 된다; 고로 “자기 처소로 되돌아 감”의 내적 의미는 그분이 이전에 있으셨던 상태로 되돌아 가심이다. 그분이 이 세상에 계시는 동안, 그분은 두 상태들을 가지셨다는 것, 즉 수치스러운 상태와 신성화 되심의 상태이다. 수치스러움의 상태는 그분이 어머니로부터 상속받아 지닌 우리 같은 인간이셨을 때이다; 신성화 되심의 상태는 그분이 아버지이신 여호와로부터 지닌 신성 안에 있으실 때이다. 주님께서는 전자의 상태, 즉 어머니로부터의 인간의 것을 벗으시고, 신성한 인간을 입으셨다, 그리하여 그분이 세상으로부터 건너가시어 신성 자체로 되돌아가실 때, 즉 영원으로부터 있으셨던 신성 자체에 신성으로 만든 인간을 합일하셨다. (요. 17:5 참조). 이 둘로부터 보편적 천국을 채우는 거룩함이 오고, 진행하는 거룩함을 수단으로 그분께서는 우주를 지휘하신다.

*************************************

창세기 제 19 장

성경: 창세기 19 장

1. 두 천사가 저녁에 소돔에 왔다. 그리고 롯은 소돔의 성문에 앉아 있었다. 그리고 롯은 보았다, 그리고 그들을 만나려고 일어났다, 그리고 자신을 구부려 얼굴을 땅 에 대었다.
2. 그리고 그는 말했다, 나의 주님들에게 간절히 바랍니다, 당신의 종의 집에 들르시 어 밤을 보내고, 당신의 발을 씻으십시오. 그리고 아침에 일어나 길을 떠나십시오. 그리고 그들이 말했다, 아니다, 우리는 거리에서 밤을 보낼 것이다.
3. 그리고 그가 그들에게 간청했다, 그리고 그들은 그에게로 돌아섰다, 그리고 그의 집에 왔다. 그리고 그는 그들에게 식탁을 베풀었다, 그리고 누룩 안 든 (빵)을 구 웠다. 그리고 그들은 먹었다.
4. 그들이 막 누우려 할 때 도성의 사람들, 소돔의 사람들, 소년으로부터 노인에 이르 기까지, 외곽 지역으로부터 온 모든 백성들이 그 집을 에워쌌다.
5. 그리고 그들은 롯에게 소리쳤다, 그리고 그에게 말했다, 오늘 밤 너에게 온 사람들 은 어디 있느냐? 우리가 그들을 알도록 우리 앞으로 데려와라.
6. 그리고 롯은 문 쪽의 그들에게로 나갔다,
7. 그리고 자기 뒤에서 문을 잠궜다, 그리고 그는 말했다, 당신들에게 바라건대 내 형 제여 악을 행치 말라.
8. 간절히 바라건대, 나는 남자를 알지 않은 두 딸을 가지고 있다. 나는 당신들에게 그들을 데려다 주겠다, 그리고 당신들은 그들을 당신들 눈에 선인 그대로 행동하 라. 오직 이 사람들에게는 어떤 것도 행치 말라. 그 이유는 그들은 내 지붕의 그림 자 밑에 오셨기 때문이다.
9. 그리고 그들은 말했다, 뭐라고…그리고 그들이 말했다, 이 자는 떠돌다가 온 자, 그 가 참으로 재판하려 하는가? 지금 우리는 그들보다 더 너에게 피해를 주어야겠다. 그리고 그들은 사람을, 롯을 심하게 밀쳤다. 그리고 가까이 다가서 문을 부수어 열 고자 하였다.
10. 그리고 사람들은 그들의 손을 뻗쳤다, 그리고 롯을 집안으로 그들에게로 데려왔 다, 그리고 문을 닫았다.
11. 그리고 집의 문에 있었던 사람들, 작은 자로부터 큰 자에 이르기까지 그들은 눈이 멀어 버렸다. 그리고 그들은 문을 찾느라 애썼다.
12. 그리고 이 사람들이 롯에게 말했다, 너는 여기에 누군가를 아직 더 가지고 있느 냐? 며느리, 그리고 사위, 그리고 네 아들들, 그리고 네 딸들, 그리고 네가 이 성 안에서 데리고 있는 자는 누구든지, 그들을 이곳으로부터 밖으로 데려가라.
13. 우리가 이곳을 멸할 터인 즉, 그 이유는 그들의 외침이 여호와 앞에서 커졌기 때 문이다, 그리고 여호와께서는 그것을 멸하기 위해 우리를 보내셨다.
14. 그리고 롯은 나가서 그의 딸과 결혼하기로 되어 있었던 그의 사위에게 말했다, 그리고 말했다, 일어나라, 너는 이곳을 나가라, 그 이유가 여호와께서 이 성을 멸 하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농담하는 자로 그의 사위의 눈에 있었다.
15. 그리고 새벽이 일어날 때 천사들이 롯에게 서두르라고 밀어 붙여, 말하기를, 일어 나라, 너는 네 아내, 그리고 발견된 네 두 딸을 데리고 가서, 이 성의 불법 안에 서 살라지지 않도록 하라.
16. 그리고 그는 머뭇거렸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의 손과, 그리고 그의 아내의 손과, 그리고 그의 두 딸의 손을 그에게 내린 여호와의 관대하심 안에서 붙잡았다, 그 리고 그들은 그를 앞으로 이끌었다, 그리고 그를 도성 밖에 내놓았다.
17. 그들이 그들을 밖으로 이끌어 낸 후였다, 이렇게 그는 말했다, 네 목숨을 위해 달 아나라, 네 뒤를 뒤돌아보지 말라, 그리고 모든 평지에는 머물지 말라. 산으로 달아나라, 네가 불살라지지 않도록.
18. 그리고 롯이 그들에게 말했다, 내 주여 아닙니다,
19. 간절히 바라는 것은 당신의 종이 당신의 눈에서 은총을 발견해 가는 것이었습니 다, 그리고 당신은 자비를 크게 만드셔서 당신께서는 제 혼이 살아있게 만들고저 저와 함께 행동하셨습니다. 그리고 저는 악이 저를 쪼개는 일이 없도록, 그리고 제가 죽지 않도록 산으로 달아날 수 없습니다.
20. 간절히 바라옵기로, 이 성은 저쪽으로 도망하기에 가까웁니다, 그리고 이것은 작 은 것입니다. 제가 저쪽으로 달아나게 해주십시오- 그것은 작은 것 아닙니까? 그 리고 제 혼은 살 것입니다.
21. 그리고 그분이 그에게 말했다, 보라, 나는 너의 얼굴을 열납해 왔는 바 이 말에 관련해서도 또한 그러해서, 나는 네가 말한 이 성은 뒤엎지 않겠다.
22. 너는 서둘러라, 저쪽으로 달아나라, 그 이유는 나는 네가 저쪽에 당도할 때까지 어떤 것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는 이 성의 이름을 소알이라 불렀다.
23. 태양이 땅 위로 솟구쳤다, 그리고 롯은 소알에 왔다.
24. 그리고 여호와께서는 그분으로부터 하늘에서 불과 유황이 소돔 위에와 고모라 위 에 비내리게 하셨다.
25. 그리고 그분께서는 이 성들, 그리고 모든 평지, 이 성들의 모든 주민들, 그리고 지면의 생장물을 뒤엎으셨다.
26. 그리고 그의 아내는 그의 뒤를 뒤돌아 보았다, 그리고 그녀는 소금 기둥이 되 어졌다.
27. 그리고 아브라함은 아침에 일찍 일어나 그가 여호와 앞에 섰었던 그곳으로 갔다.
28. 그리고 그가 소돔과 고모라의 얼굴과 평야의 지면의 모든 얼굴들을 마주 보았다. 그리고 그는 그 지면으로부터 올라오는 연기를 보았고 바라보았는데 마치 용광로 의 연기 같았다.
29. 그리고 하느님께서 평지의 그 성들을 멸하실 때가 당도하자, 하느님께서는 아브라 함을 기억하셨다, 그리고 그분이 롯이 거주한 그 성들을 뒤엎으실 때, 그 뒤엎음 의 와중에서 롯은 내어 보냈다.
30. 그리고 롯은 소알로부터 나와 올라갔다, 그리고 산에 거주하였다, 그리고 그와 함 께 그의 두 딸도. 그 이유가 그는 소알에서 사는 것이 두려웠기 때문에서였다. 그 리고 그는 그와 그의 두 딸과 함께 동굴에서 살았다.
31. 그리고 언니가 동생에게 말했다, 우리의 아버지는 늙고 모든 땅의 방식에 따라 우 리에게 올 남자가 땅에 없다.
32. 이러한 바, 우리는 우리의 아버지에게 포도주를 마시우자, 그리고 우리는 그와 함 께 드러눕자, 그리고 우리는 아버지로부터 씨를 되살리자.
33. 그리고 그들은 그날 밤 그들의 아버지에게 포도주를 마시게 만들었다. 그리고 언 니가 안으로 갔다, 그리고 그녀의 아버지와 함께 누웠다. 그리고 그는 그녀가 드 러 누운 것, 일어나 나간 것을 알지 못했다.
34. 이튿날 언니가 동생에게 말했다, 보라, 나는 어젯밤 나의 아버지와 누웠다. 우리 가 오늘 밤 역시 그가 포도주를 마시게 만들자, 그리고 너는 들어가 그와 함께 누워라, 그리고 우리는 우리의 아버지로부터 씨를 되살리자.
35. 그리고 그들은 그들의 아버지가 그날 밤 역시 포도주를 마시게 만들었다. 그리고 동생은 일어나 그와 함께 누웠다. 그리고 그는 그녀가 누운 때와 일어나 나간 때 를 알지 못했다.
36. 그리고 롯의 두 딸은 그들의 아버지에 의해 임신되었다.
37. 그리고 언니가 아들을 낳았다, 그리고 그의 이름을 모압이라 불렀다. 그는 오늘날 모압의 아버지이다.
38. 그리고 동생, 그녀 역시 아들을 낳았다, 그리고 그의 이름을 벤암미라 불렀다. 그 는 오늘날 암몬의 아들들의 아버지이다.

각 절의 내적 의미

1절. 두 천사가 저녁에 소돔에 왔다. 그리고 롯은 소돔의 성문에 앉아 있었다. 그리고 롯은 보았다, 그리고 그들을 만나려고 일어났다, 그리고 자신을 구부려 얼굴을 땅에 대었다.

두 천사가 소돔에 왔다. 심판을 진행하는 방문을 의미한다. 이는 18장에서, 세 사람들, 또는 여호와에 의해 말해진 것들로부터; 그리고 이 장에서 이어지는 것들로부터도 알 수 있다. 마찬가지로 “저녁”의 의미로부터 알게 된다. 18장에서 여호와께서 말하셨다: “나는 내려가서, 소돔과 고모라의 주민들이 나에게 당도한 함성에 따라 극점을 만들었는지 여부를 보겠다; 그리고 만일 아니다면, 나는 알 것이다” (18:20, 21), 이 말들에 의해 심판에 앞서 진행하는 방문이 의미되어진다. 이 장에서 방문의 행동 자체가 묘사되어진다, 그리고 그 다음 심판이 묘사되어진다. “저녁”이 방문의 때(시간)를 의미한다는 것은 아래에서 보여질 것이다. 방문이 무엇인지, 그리고 심판에 앞서 있는 방문은 창. 18:21에서 이미 살핀 바 있다. 18장에서 인류의 타락된 상태, 주님의 슬픔, 악 안에 있는 이들, 그럼에도 선과 진리를 얼마간 지닌 이들을 위한 중재를 취급했다; 그러므로 19장에서, 계속되는 것은 얼마간의 선과 진리를 지닌 이들을 구원하심이다; 그리고 이것이 이 장에서 등장하는 “롯”에 의해 표현되어진다. 동시에 악과 거짓 모두에 있는 이들의 파멸이 취급되어진다; 이들이 “소돔과 고모라”에 의해 의미되어진다..

“두 천사들”. 이들은 주님의 신성한 인간, 그리고 심판에 속하는 거룩한 진행을 의미하는데, 이는 말씀에서 있는 “천사들”의 의미로부터, 그리고 이 천사들은 “둘”이었다는 말로부터 분명해진다. 말씀에서 “천사들”은 주님에 있는 어떤 신성한 본질을 의미한다는 것, 이것이 시리즈로부터 알 수 있다는 것은 앞서 살폈다. 그것들이 여기서 주님의 신성한 인간과 거룩한 진행을 의미한다는 것은 아브라함과 함께 있던 “세 사람”이 주님의 신성 자체, 신성한 인간, 그리고 거룩한 진행을 뜻했다는 사실로부터 분명해진다; 이로부터, 또한 천사들이 “여호와”라 불리운 사실로부터(19:24), 그리고 천사의 의미로부터 알게 되는 바, 여기서 “두 천사”는 주님의 신성한 인간과 거룩한 진행이 뜻해진다.

아브라함과 있던 천사는 세 명이었는데, 여기서는 두 명만이 있는 이유에 관한 것은 몇 마디 말만 가지고는 공표할 수 없는 비밀함들이다. 그러나 조금만은 이런 사항으로부터, 즉 이 장이 심판을 다룬다는 것, 그리하여 신실한 자는 구원하고. 비 신실한 자는 정죄한다는 것으로부터; 그리고 심판은 주님의 신성한 인간과 거룩한 진행에 속하는 말씀의 구절로부터, 등등이다. 심판이 신성한 인간에 속한다는 것을 요한복음에서 찾아 읽을 수 있다: “아버지께서는 누구도 심판하지 않으신다, 그러나 모든 심판은 아들에게 주어졌다”(5:22); “아들”에 의해 신성한 인간이 뜻해진다. 심판이 주님의 신성한 인간으로부터 진행하는 거룩함에 속한다는 것 역시 요한복음에서 읽어볼 수 있다: “만일 내가 떠나면, 나는 너희에게 위로자를 보내겠다; 그리고 그가 올 때, 그는 세상을 죄에 관해서, 정의에 관해서, 심판에 관해서 꾸짖을 것이다” (16:7, 8); 그리고 거룩함이 주님으로부터 진행한다는 것도 같은 16장에서 확인할 수 있다: 즉 “그는 자신으로부터 말하지 않을 것이다…그는 나의 것을 가져갈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선포할 것이다” (16:13, 15); 그리고 이것, 그분의 인간이 신성으로 만들어질 때, 즉 주님이 신성화하셨을 때가, 같은 요한복음에서 보여진다: “성령은 아직 있지 않았다, 그 이유는 예수께서 아직 신성화되시지 않았기 때문이다” (7:39).

심판이 주님의 신성한 인간과 거룩한 진행에 속한다는 사실에 주목해보면, 이 경우는 이렇다: 주님께서 세상에 오시어, 그분의 신성 본질이 인간 본질에 하나되시지 않았으면, 인류는 더 이상 구원되지 못했을 것이다; 그 이유가 주님의 인간이 신성을 만듦 없이, 구원은 인간에게 도달되지 않았을 것이다. 주님의 신성한 인간으로부터 진행하는 거룩함 자체는 악을 선으로부터 분리하는 것이다; 그 이유가 악은 그것들이 접근 할 수 없는 주님의 거룩함에서 심히 두려워하고 벌벌떨기 때문에, 악들은 어떻게든 거룩함을 피해 도망하여 숨고 싶어 그들에게 안전함을 주는 듯한 지옥들로 자기들이 지닌 모독함의 질과 양에 따라 알맞은 장소로 몰려든다.

“소돔”이 악한 자를 의미하는데, 특히 교회 내의 악한 자들을 의미하는 것은 “소돔”이 자기 사랑의 악인 것에서 분명해진다; 결과적으로 이 악 안에 있는 이들이다. 글자 의미만을 따라 말씀을 납득하려 고집하는 이들일 경우, “소돔”은 자연의 질서에 반대하는 불결함이 뜻해진다; 그러나 내적 의미에서 “소돔”은 자기 사랑으로부터의 악이 의미되어진다. 이 악으로부터 갖가지의 악들이 솟아오른다. 이로부터 솟아 오르는 모든 악들이 말씀에서 “간음자들”로 불리운다. 같은 것들이 이 장의 끝에 첨가될 말씀의 인용 구절로부터 분명해질 것이다.

“저녁”이 방문의 때를 의미하는 것은 “저녁”의 의미로부터 분명해진다. 교회의 상태들이 말씀에서 일 년 속의 계절과 하루 속의 때, 모두에서 비교되어진다. 한 해의 계절에 비교되는 이유는 그 안에 여름, 가을, 겨울, 봄이 있기 떼문이다; 하루의 때에 비교되는 이유는 그것 안에 정오, 저녁, 밤, 아침이 있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두 가지 것들이 유사하게 위치해 있기 때문에서이다. 저녁이라 불리는 교회의 상태는 교회에 선행이 더 이상 있지 않을 때, 그 결과 신앙이 없기를 시작하는 바, 고로 교회가 존재하기를 중단하는 때이다; 이것은 “밤”이 뒤를 잇는 “저녁”이다. 또한 선행이 빛나는 때의 “저녁”도 있다. 그 결과 신앙이 그렇게 빛을 내는 때, 고로 새로운 교회가 일어나는 때이다; 이 “저녁”은 아침 이전의 박명(황혼)이다. 고로 저녁은 두 의미를 가진다. 그 이유가 주님께서는 교회가 존재하기를 중단하는 때와 새로운 교회가 일어서는 때를 설비하시고, 이것이 동시에 있도록 설비해두시기 때문이다. 동시에 있어야 하는 이유가 지구 어느 곳이든 교회 없이 인류는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교회가 없으면 천국과 결합을 가지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본 장에서 교회의 두 상태 즉, 새로운 교회가 일어남이 “롯”에 의해 표현되고, 옛 교회의 파멸이 “소돔과 고모라”에 의해 의미되어진다; 이는 앞의 내용 편에서 알 수 있다. 이런 이유로 두 천사가 “저녁에” 소돔에 온 것이다; 그리고 1-3절에서는 저녁에 행해지는 것이, 4-14절에서는 밤에 행해지는 것이, 15-22절에서는 아침 또는 일어나는 새벽에 행해지는 것이, 23-26절에서는 태양이 가버린 후 행해지는 것이 말해진다.
“저녁”이 교회의 이런 상태들을 의미하기에, 저녁은 심판에 앞서 있는 방문도 의미한다; 그 이유가 심판이 매우 근접했을 때, 즉 신실한 자의 구원과 불성실한 자의 정죄가 가까운 때, 방문이 미리 있다. 또는 그들의 품질이 어떤지, 즉 선행과 신앙의 조사함이 있다는 말이다. 이 방문이 “저녁”에 실시된다. 그러므로 방문 자체가 “저녁”이라 불리운다. 스바냐서에서:
해변 지역의 주민, 그렛족의 나라에 화있을 것이다. 여호와의 말씀이 너를 향하여 있다, 불 레셋의 토지, 오 가나안아; 그리고 나는 너희가 파멸되게 할 것이다. 거기에 주민이 없을 때까지 이다. 유다의 가문의 남겨진 자들이 아스굴론의 집에서 먹을 것이고, 저녁에 그들은 누울 것이다; 그 이유가 그들의 하느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방문하시고, 그들이 포로된 것을 되돌릴 것이기 때문이다 (습. 2:5, 7).

그리고 롯은 소돔의 성문에 앉아 있었다. 이는 선행의 선 안에 있기는 하나, 외적 예배에 있는 이들을 의미하는데, 여기에서 “롯”으로 표현되고, 악 안에 있기는 하되 악과는 분리되어 있는 이들이 “소돔의 문에 앉아 있다”이다. 이는 “롯”이 표현하는 것과 “성문”의 의미, “소돔”의 의미로부터 알게 된다. “롯”이 표현하는 것으로부터: 롯이 아브라함과 함께 살고 있던 때의 롯은 주님의 감각적 부분, 즉 그분의 외적 인간을 표현했다. 그러나 여기서와 같이 아브라함과 분리되어 살 경우, 롯은 더 이상 주님을 표현하지 않고, 주님과 더불어 있는 것들, 즉 교회의 외적 인간, 즉 선행의 선 안에 있는 이들, 그러나 외적 예배 안에 있는 이들을 표현한다;
이 장에서는 더 많은 것을 표현하는데, 그는 교회의 외적 인간 뿐만 아니라 외적 교회의 시작, 그것의 발전, 그것의 끝장이 어떻게 되어가는지 까지 표현하고 있다. 외적 교회의 끝이 “모압”과 “암몬의 아들”에 의해 의미되는데, 이것은 주님의 신성한 자비로부터 그 구절을 다룰 때 설명한다. 말씀에서 공통되는 것 중 하나는 한 명의 인물이 서로에 연결되는 몇 개의 상태들을 표현한다는 것, 그리고 이것이 그의 삶이 계속되면서 있어지는 행동들에 의해 묘사되어진다는 것이다.
“성문, gate”의 의미로부터: 사람들은 성문을 통하여 도성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이를 통하여 나간다; 결과적으로 “성문에 앉아 있는” 것은 이 성이 소돔 성문인 바 실로 악과 더불어 있는 것, 그러나 그들과는 분리되어 있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선행의 선 안에 있는 교회의 사람들의 경우와 흡사하다. 이들은 비록 교회 내에서 사악한 자들과 함께 있을지라도 여전히 그들로부터서 분리되어 있는 이들이다. 이는 시민적 공동체라는 차원이 아니고 영적 생명(삶)의 차원에서 분리되어 있다는 말이다.

그리고 롯은 보았다. 이는 양심, 더 정확히 말하면, 선행의 선 안에 있으나 외적 예배 안에 있는 이들의 양심을 의미한다. 이는 “본다”의 의미로부터 알 것이다. 말씀에서 “본다, see”는 것은 이해한다를 의미한다; 내적 의미에서 이것은 신앙을 가진다를 의미한다. 이에 관하여는 주님의 신성한 자비로부터 창. 29:32에서 말할 것이다. “본다”가 여기서 양심을 의미하는 이유는 신앙을 가진 이들 역시 양심을 가지기 때문에서이다. 신앙을 양심에서 떼어 놓을 수 없듯, 당신이 신앙을 가지고 있냐고 묻든지, 당신은 양심을 가지고 있냐고 묻든지 그것은 같은 질문이다는 것 역시 떼어 놓을 수 없다. 신앙은 신앙을 수단으로 거기에 선행이 있다는 것을 뜻하고 있다. 그리고 신앙은 선행으로부터 있다는 것, 고로 선행 자체이다는 것까지 뜻하고 있다; 그 이유가 선행 없는 신앙은 신앙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신앙이 선행 없이 가능할 수 없듯, 양심도 그러하다.

그리고 그는 그들을 만나려고 일어났다. 이는 선행의 기질인 바, 인정함을 의미한다. 이런 이유는 그들이 왔을 때, 롯이 그들이 천사들이다는 것을 즉시 인정했다는 사실로 미루어보아 알게 된다; 그러나 롯과는 달리, 소돔 사람들은 이렇게 말했다: “그들이 롯에게 소리쳤다. 그리고 말했다, 오늘 밤 네게 온 사람들은 어디 있느냐? 우리가 그들을 알아보아야겠으니 그를 우리에게 데려와라.” 내적 의미에서 이 구절의 말은 교회 안에서 선행의 선 안에 있는 이들은 주님의 신성한 인간과 거룩한 진행(두 천사들)을 인정하나, 그렇지 않은 자들은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와 같은 식으로 같은 단어들이 선행의 기질(경향성)도 포함하고 있다는 것은 롯에 의해 표현된 선행의 선에 있는 이들은 롯이 두 사람들을 자기 집으로 초대함에 의해 의미된 선행 자체도 된다는 것에서 분명해진다.

그는 땅 쪽으로 그의 얼굴을 구부려 절하였다. 이는 수치스러움을 의미하는데, 설명은 필요 없을 것이다. 롯 시대 훨씬 앞의 시대에서 표현 교회들에서 그들이 땅 쪽으로 얼굴을 심히 낮게 떨구어서 절을 한 이유는 얼굴이 인간의 내면들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얼굴을 땅 쪽으로 수구리거나 아예 땅에 대고 절을 한 이유는 땅의 먼지(흙)이 모독한 것과 정죄(단죄, 죄있음)되어야 하는 것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땅에 얼굴을 대고 절을 한 자는 스스로 자신이 모독적이고 불경한 바 정죄되어야 마땅함을 인정하는 몸짓이다. 이런 이유로 그들은 얼굴을 땅에 짓누르거나, 먼지와 재에서 뒹굴거나, 머리를 재로 뒤집어 씌우거나 하며 엎드렸다. 이는 애. 2:10; 겔. 27:30; 미. 1:10; 여. 7:6; 계. 18:19 등등에서 읽어 볼 수 있다.
이런 모습을 수단으로 그들은 진정한 수치스러움의 상태들을 표현했다. 이런 행동은 그가 모독했고 정죄된 자 아니면 가능한 짓이 아닌 바, 이 짓에 해당하는 자는 신성과 거룩함 밖에 없으신 주님을 자신이 쳐다볼 수 없는 것이다; 이렇기 때문에 인간이 자아를 인정함의 상태에 있는 한, 그만큼 그는 진정한 수치스러움 안에 있을 수 있고, 더불어 예배에서 진정한 경배 안에도 있는 것이 가능하다. 그 이유가 모든 예배에는 자아가 수치스러운 상태임에 있어야 정상이기 때문이다. (성직자를 필두로 모든 예배자에게 해당된다.); 이것이 예배에서 빠져 있으면, 경배함도, 예배 자체도 없는 것이 된다.
수치스러움의 상태는 예배 자체의 필수적 상태이다는 것은 심정이 겸허해지는 만큼, 자기를 사랑함과 거기로부터의 모든 악이 중단된다는 사실로부터 온다; 그리고 이것이 중단되는 만큼, 선과 진리, 즉 선행과 신앙이 주님으로부터 흘러든다; 그 이유가 이런 주님으로부터의 것을 흘러드는 길목에 버티고 서서 방해하는 것의 제일가는 것이 자기 사랑이기 때문이다. 이 사랑으로부터 자기와 비교해 타인을 경멸하는 짓, 자신을 존경하지 않는 자를 두고 앙갚음질 하거나 증오하는 짓, 무자비함과 잔인함 등이 돌출하는 뿌리인 바, 모든 악 중에서 가장 악질이기 때문이다. 이것들이 심정을 채우는 한, 주님의 것이 주입될 수 없다. 그 이유는 서로가 정반대이기 때문이다.

2절. 그리고 그는 말했다, 나의 주님들에게 간절히 바랍니다, 당신의 종의 집에 들르시어 밤을 보내고, 당신의 발을 씻으십시오. 그리고 아침에 일어나 길을 떠나십시오. 그리고 그들이 말했다, 아니다, 우리는 거리에서 밤을 보낼 것이다.

그는 말했다, 나의 주님에게 간절히 바랍니다. 이는 주님의 신성한 인간과 거룩한 진행을 내면으로 인정하고 고백함을 의미하는데, 이는 방금 전에 말한 인정함과 수치스러움에 대한 설명으로부터 알게 된다; 여기서는 고백이 즉시 뒤잇는다. 그 이유가 롯이 “나의 주님들이여 간절히 바랍니다”에서 이것이 뜻해졌기 때문이다. 내면의 고백은 심정으로부터 이고, 수치스러움을 생산하고, 동시에 선에 대한 애착을 산출한다. 그러나 외면의 고백은 입술로부터의 고백이고, 이것은 꾸며진 고백과 거짓된 애착을 생산하는 것은 가능할런지 모른다. 이것은 주님을 고백하되, 자신의 영예를 위해서, 이득 때문에 같은 것 외에 더 다른 것은 없다. 입술로 고백한 것을 그들은 심정으로는 부정한다.
주님이 복수로 말해진다. 그 이유는 앞장에서 “세 분”을 설명했던 때와 같다. 거기서 “셋”은 신성 자체, 신성한 인간, 그리고 거룩한 진행을 의미하는데, 여기서의 “둘”은 주님의 신성한 인간과 거룩한 진행을 의미한다. 이 둘이 하나이다는 것은 교회 내 모든 사람에게 알려진 사항이다; 그리고 그들이 한 분이기 때문에 그 둘은 이어지는 17절에서는 단수로 명명되어진다: 즉 “그들이 그들을 밖으로 인도해 내었을 때, 그분이 말했다, 네 목숨을 위해 도망하라”; 19절에서, “보십시오, 간절히 바라는 것은 당신의 종이 당신의 눈에서 은총을 발견해 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당신은 자비를 크게 만드셔서 당신께서는 제 혼이 살아있게 만들고저 저와 함께 행동하셨습니다.” 21절에서, “그리고 그분이 그에게 말했다, 나는 너의 얼굴을 열납해왔는 바, 이 말에 관련해서도 또한 그러해서, 나는 네가 말한 이 성은 뒤엎지 않겠다.” 22절에서 “그 이유는 네가 저쪽에 당도할 때까지 어떤 것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신성 자체, 신성한 인간, 거룩한 진행이 여호와이시다는 것은 앞 장으로부터 분명하다, 거기서 세 사람이 여호와라고 불리운다, 즉 13절에서,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말하셨다”; 14절에서, “어떤 것이 여호와에게 놀라운 일일까?”: 22절에서, “그리고 아브라함은 아직 여호와 앞에 서 있었다.” 33절에서, “그리고 여호와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말하시는 것을 마므리지으신 후, 가셨다.” 결과적으로 신성한 인간과 거룩한 진행은 여호와이신 바. 이 장 24절에서, “여호와께서는 그분으로부터 하늘에서 불과 유황이 내리게 하셨다” 라고 여호와라는 이름이 명명되고 있다. 이 구절의 내적 의미는 그 구절에 당도할 때 설명한다. 주님이 여호와 자신이다는 것은 역사서나 예언서에서도 자주 언급되고 있다.
진실로 교인되는 자, 즉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향하여 선행 안에 있는 자는 삼위 일체를 인정하고, 그 말에 친숙해져 있다. 그러나 여전히 그들은 주님 앞에서 겸손해 있고, 그분만을 경배한다. 그 이유는 그들은 아들을 통하지 않고, “아버지”라 불리우는 신성 자체에의 접근은 불가능함을 알기 때문이다; 그리고 성령으로부터 있는 모든 거룩함은 그분으로부터 있다. 그들이 이런 생각 안에 있기에, 그들은 모든 것이 주님으로부터, 모든 것이 주님을 통하여 있어 하나이신 주님만을 경배한다;
이들은 자기들의 생각이 세 분, 즉 세 하느님, 아버지 하느님, 아들 하느님, 성령님의 셋으로 갈라져 생각하지 않도록 노력한다. 여느 많은 기독교인들이 많이 범하는 세 하느님의 호칭 사용에 자칫 자신도 습관화되지 않는다. 다른 삶에서 보면, 육체의 삶에서 여느 누구보다 신앙의 비밀을 소유했었다고 자부하는 학식자에서도 이런 호칭 사용은 쉽게 보여질 수 있다. 이들이 다른 삶에서 그들이 한 분 하느님에 관하여 어떤 생각을 가졌는지에 관하여 조사했을 때, 즉 세 창조자들 이든지, 세 무한하신 분들 이든지, 세 영원하신 분들 이든지, 세 전능하신 분들 이든지, 세 주님들 이든지, 그들은 셋이라는 생각을 가졌음이 분명하게 지각되는데, 그 이유는 그곳에서는 생각의 교환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그들이 신조를 고백할 때는 단어로 분명하게 말한다. 즉 세 창조자들은 아니고, 세 무한하신 분들이 아니고, 세 영원하신 분들이 아니고, 세 전능하신 분들이 아니고, 세 주님들이 아니다; 이것이 진리이다라고 한다. 그 결과는 그들은 입을 가지고는 한분 하느님이 계신다라고 고백하고 생각에서는 여전히 세 분이고, 어떤 이는 믿기까지 하고 있다. 이들은 세 분 이다는 것을 생각 속에서 분리할 수 없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신앙의 비밀이 무엇이든, 아주 깊은 것 까지도 이 생각은 따라 다닌다; 어쩌면 이것 없이 어떤 것도 생각되지 않는다. 실로 이것 없이는 기억 안에 어떤 것도 간직할 수 없는 지경이다.
그러므로 다른 삶에서는 어떤 생각, 그로부터 어떤 믿음을 청명한 날과 같이 가지고 있도록 각 자는 자신을 위해 한 분 하느님에 관하여 만들어 낸다. 실로, 다른 삶에서 유대인들은 주님이 여호와이시다, 한 분 하느님밖에 없다라고 들을 때, 어떤 말도 할 수가 없다. 그러나 그들은 기독교인들이 한 분 하느님이 셋으로 나뉘었다고 하는 말을 들을 때, 그들은 자신들이 한 분 하느님을 예배하는데, 기독교인들은 셋을 예배한다고 말한다. 더욱이 기독교인들은 선행의 신앙 안에 있는 이들을 제외하면 자기들의 생각에서 이 셋이라는 관념이 함께 결합되지 못하고 있다. 그 이유가 그들의 마음에서 주님이 별도의 하느님 (예수님)으로 정착되어 있기 때문이다.

당신의 종의 집에 들르시어 밤을 보내십시오. 이는 그분과 거처를 가지기 위해 신성한 인간과 거룩한 진행을 초대함을 의미한다. 이는 별도의 설명이 필요 없을 것 같다.

“종의 집으로”가 선행의 선을 표시하는 것은 “집”의 의미가 천적 선이다로부터, 즉 사랑과 선행만으로부터 임에서 분명해진다.

당신의 발을 씻으십시오. 이는 롯의 자연적 평면(수준)에 적용함을 의미하는데, 이는 같은 말이 등장한 창. 18:4에서 살핀 바로부터 분명해진다. 롯의 시대 훨씬 이전의 사람들의 경우, 그들이 여호와를 보았을 때, 그들은 곧 죽게된다고 믿었다. (출. 19:12, 21, 24; 20:19; 사. 6:22, 23; 13:22, 23 참조.) 그런 이유는 신성의 거룩함이 인간과 더불어 있는 모독적인 것 안으로 흐를 때, 그것의 훌륭한 점은 오히려 삼키고 살라버리는 불이 되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어떤 사람에게, 또는 어떤 천사에게 조차도 자신을 보이실 때, 그분은 그분으로부터 진행하는 거룩함을 기적적으로 온건하고 순화되게 하시어, 그들이 거룩함에 견뎌낼 수 있게 해주신다. 같은 방식으로 그분은 그들의 자연 평면에 그분 자신을 적용되게 하신다. 이것이 롯의 말, “당신께서는 발을 씻으십시요”에 내적으로 의미되어 있다. 그리고 이것은 내적 의미의 본성도 보여주고 있다. 이런 의미는 글자 의미로부터서는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그리고 아침에 일어나 길을 떠나십시오. 이는 선과 진리 안에서 확증함을 의미하는데, 이는 “아침에 일어남”과 “길을 떠남”의 의미로부터 알게 된다. 말씀에서, “아침”은 주님의 왕국과 주님의 왕국에 속하는 것은 무엇이든지를, 고로 사랑과 선행의 선에 속하는 것을 주로 의미한다. 이는 15절을 취급할 때 거기 있는 말씀으로부터 확증할 것이다; 그리고 “길”은 진리를 의미한다. 그 이유가 그들이 그의 집에 들어가 밤을 보냈다는 것은 이를 수단으로 그들이 롯과 함께 있는 선행의 선 안에 거처를 가졌다는 것을 의미하고, 그들이 “아침에 일어나 길을 떠남”에서는 이를 수단으로 선과 진리 안에서 확증함이 의미되기 때문이다.
다른 구절 같이, 이 구절로부터도 글자 의미와는 얼마나 간격이 큰지, 그 결과 글자에서는 얼마나 그 의미 파악이 안 될 수밖에 없는지, 특히 역사서의 경우 더욱 그렇다; 따라서 각 단어들이 말씀에서 지니는 변동 없는 의미에 일치하지 않으면 알아내기가 쉽지가 않다. 이렇기 때문에 생각들이 글자 의미에 집중할 경우, 내적 의미는 희미한 어떤 것, 어둠 속의 어떤 것일 수밖에 더 달리는 나타나지 않는다. 이와 반대로 생각들이 내적 의미에 집중해 있을 경우. 글자 의미는 희미해진다. 그렇다, 천사들에게서 이 의미는 아무 것도 아닌 것이 되어 있다. 그 이유가 천사들은 우리 인간 같이 세상적, 육체적 평면에 더 이상 속해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은 영적, 천적 평면에 속해 있기 때문이다. 이 안으로 글자 의미의 단어들이 말씀을 읽는 인간으로부터 천사들이 있는 영역으로, 즉 천국으로 승강할 때, 경이로운 바뀜이 있다; 그리고 이것은 세상적인 것이 영적인 것에, 육체적인 것이 천적인 것에 상응하는 방법으로 있어진다. 이 상응은 최고로 불변하나, 아직은 그것의 본성이 시원하게 열리지 않고 있다. 그러나 말씀의 이름들, 단어들, 숫자들이 내적 의미 측면에서 파악되는대로 전부는 아니다 해도 인간 거듭남을 위한 수준까지는 가능할 것이다.
상응의 본성이 무엇인지, 같은 말로, 세상적, 육체적인 것이 천국으로 승강할 때, 그것에 상응하는 영적인 것, 천적인 것으로 어떻게 건너가는지를 이 구절의 단어인 “아침”과 “길”을 예로 들어 살펴보자. “아침”이 읽혀질 때, 또는 본문과 정확하게, “아침에 일어날 때”가 읽혀지면, 천사들은 자연계 하루의 때인 아침을 생각하지 않고, 영적 의미에서 아침에 대한 생각을 한다. 이와 같은 생각이 사무엘서에 있다. 즉 “이스라엘의 바위… 그분은 구름 없는 아침, 태양이 떠오를 때, 아침의 빛으로 계신다” (삼하. 23 3, 4); 그리고 다니엘서에서: “거룩한 분께서 나에게 말하셨다, 저녁까지, 아침이 올 때, 이천 삼백” (단. 8:14, 26). 고로 아침 대신 천사들은 주님을, 그분의 왕국을, 또는 사랑과 선행의 천국에 속한 것들을 지각한다. 따라서 이 지각은 읽혀지는 말씀의 시리즈에 따라 다양해진다.
위와 마찬가지 방식에서, “길”, 여기서는 “길을 떠남”이 읽혀질 때, 그들은 길에 대한 생각은 전혀 없다. 그러나 또 다른 생각, 즉 영적이고 천적인 생각, 마치 요한 복음에서 주님이 말하신 것과 같은 생각, 즉 “나는 길이요, 진리이다”(요. 14:6), 또는 다니엘서에서 같이, 즉 “당신의 길을 나로 알게 만드소서, 진리 안에서 제 길을 인도하소서” (시. 25:4, 5); 그리고 이사야서에서, “그분은 그분에게 이해함의 길(방법)을 알게 만드셨다” (이. 40:14). 고로 “길” 대신 천사들은 진리를 지각한다, 그리고 이것은 역사서, 예언서 모두에서 그러하다. 천사들은 역사적인 것들이 그들에게는 부적당하기 때문에 그들은 (자연적 수준인) 역사적 사항은 더 이상 관심을 갖지 않는다; 그것들 대신에 그들은 주님과 그분의 왕국에 속한 사항들을 지각한다. 이 사항들은 내적 의미에서는 아름다운 질서와 더불어 잘 연결된 시리즈를 보여준다. 이런 이유 때문에, 또한 말씀이 천사들을 위하여 있도록 말씀 안의 역사적인 것들은 모두 표현적으로 있고, 단어들의 각각은 주님과 그분의 왕국에 관한 것들의 어떤 것을 의미하고 있다; 이런 특유함 때문에 말씀은 모든 다른 저작물과 완전히 다르고, 그것들 차원을 넘어 있다.

그리고 그들이 말했다, 아니다. 이는 시험이 따라붙기 쉬운 의심함을 의미하는데, 이는 그들이 롯의 제안을 정중히 사절함, 그럼에도 그의 집으로 감으로부터 알게 된다. 모든 시험에는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주님의 현존과 자비에 관해, 그리고 구원과 그것 비슷한 사항들에 관해 의심을 품음이 있다; 그 이유는 시험을 겪는 이들은 내면의 걱정근심 속에, 때로는 자포자기 속에 있기 때문이다; 이런 가운데서 그들이 있는 관계로, 결국 모든 것은 주님의 자비로부터 있다는 사실을, 그리고 자신의 구원은 주님만에 의해 있다는 사실을, 자신들이 지닌 것은 악밖에 없다는 사실을 확증하게 된다. 이를 위해 그들은 시험 가운데 있었던 것이다. 이런 사항들은 그들이 시험을 극복하는 전투에 승리함으로 확증된다. 시험 후에 시험으로부터 선과 진리의 많은 상태들이 남아 있는 쪽으로 그들의 생각들은 주님에 의해 구부려진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미쳐버리는 쪽으로 돌진하고, 참되고 선한 것에 반대되는 쪽으로 치닫고 만다.
여기서 “롯”에 의해 선과 진리 안에 있기는 하나 외적 예배에 있는 교회의 처음 상태가 취급되어진다. 인간이 이 상태 안으로 오기 전, 그는 개혁되어야 하는 바, 이 상태의 인간도 어떤 종류나 어떤 수준의 시험이든 거쳐야 한다. 그러나 외적 예배에 있는 이들의 시험은 매우 경미한 수준에서이다. 그러므로 시험의 어떤 것을 포함하는 것들이 이렇게 말해진다. 즉 첫째로 천사들은 자기들이 거리에서 밤을 지날 것이다고 말했고, 그 다음 롯이 간청하자, 그들은 그에게 돌아서서 그의 집으로 갔다.

우리는 거리에서 밤을 보낼 것이다. 이는 그가 진리로부터 심판하고 싶어하는듯 하였다를 의미하는데, 이는 “거리”와 “밤을 보냄”의 의미로부터 알게 된다. “거리”는 말씀에서 자주 등장하는 단어이다. 그리고 내적 의미에서 “길”과 같은 의미, 즉 진리를 의미한다. 그 이유가 거리는 도성에 있는 길이기 때문이다. 이는 바로 아래에서 다시 살핀다. “밤을 보냄”이 여기서 심판하는 것임은 “밤”의 의미로부터 알게 된다. 앞에서 살핀 바 같이, “저녁”은 신앙이 없기를 시작하는 때, 즉 마지막 이전 교회의 상태를 의미한다; 그리고 또한 심판에 앞서 있는 방문 역시 의미한다. 이로부터 계속되는 상태인 “밤”은 신앙이 없는 때, 즉 마지막 상태임이 분명하다; 또한 이것은 심판이다. 고로 “거리에서 밤을 보낸다”는 것은 내적 의미에서 진리로부터 심판함을 표시한다.
심판에 주목해보면, 두 겹이다. 즉 선으로부터와 진리로부터 이다. 신실한 자는 선으로부터 심판되나, 비 신실한 자는 진리로부터 심판된다. 신실한 자가 선으로부터 심판되는 것은 마. 25:34-40에서 분명해진다, 그리고 비 신실한 자가 진리로부터 심판되는 것은 마. 25:41-46에서 분명해진다. 선으로부터 심판되는 것은 구원되는 것인데, 그들이 그것을 받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리로부터 심판되는 것은 정죄되는 것인데, 그 이유는 그들이 선을 거절했기 때문이다. 선은 주님의 것이다, 그리고 삶과 신앙에서 이것을 인정한 이들은 주님의 것인 바, 그들은 구원되어진다; 그러나 삶에서 이것을 인정하지 않은 이들, 결과적으로 신앙에서 인정하지 않은 이들은 주님의 것일 수 없는 바, 그들은 구원되어질 수 없다. 그러므로 그들은 자기들의 삶의 행동들과 생각들과 목적들에 따라 심판되어진다; 그리고 그들이 이것들에 따라 심판될 때, 그들은 정죄될 수밖에 없다; 그 이유가 인간이 자신으로부터 행하고 생각하고 의도하는 것은 무엇이든 악밖에 없어, 주님께서 붙잡아 주시지 않는 한, 인간 스스로일 경우, 갈 곳은 지옥 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리로부터 심판에 주목한다면, 이렇다: 주님께서는 선으로부터가 아니면 누구도 심판하시지 않는다. 그 이유가 그분은 모든 이를 천국으로 올리기를 원하시기 때문, 아마 가능만하다면, 그분 자신에게로 까지도 올리우고 싶으신 분이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그분은 자비 자체와 선 자체이시기 때문이다. 자비 자체와 선 자체는 누구도 결코 정죄하지 않는다; 그러나 인간을 정죄하는 것은 본인 자신이다, 그 이유는 그가 선을 거절하기 때문에서 이다. 육체의 삶에서 선을 금했던 자는 다른 삶이라고 달라지지 않는다; 결과적으로 그는 주님과 천국을 금하는 것이다. 그 이유가 주님은 선이 아니면 계실 곳이 없기 때문이다. 그분은 진리 측면에서도 마찬가지 이다, 그러나 선으로부터 분리된 진리에서는 아니다. 주님은 누구도 정죄하시지 않고, 누구도 지옥으로 심판하시지 않는다는 것을 요한복음에서 말하신다:
하느님께서 그분의 아들을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해서가 아니고 그를 통하여 세상 이 구원 받게 하시려 해서 이다. 이것이 심판이다, 즉 빛이 세상에 왔으나, 사람들이 빛 보 다 어둠을 더 사랑한 것이다, 그 이유는 그들의 일들이 악하기 때문이다 (요. 3:17, 19).,
그리고 같은 요한복음서에서:
만일 누군가가 내 말을 듣는다면, 그리고 믿지 않는다면, 나는 그를 심판하지 않는다; 그 이유가 나는 세상을 심판하려고 오지 않았고, 세상을 구하려고 왔기 때문이다 (요. 12:47).
이 주제는 앞에서도 여러 번 다룬 바 있다.
앞에서 심판이 취급될 때, 모든 심판은 주님의 말씀에 따라 그분의 신성한 인간과 거룩한 진행에 속한다는 것은 이미 살폈다. 요한복음에서:
아버지는 누구도 심판하지 않으신다, 그러나 모든 심판은 아들에게 주어졌다 (요. 5:22).
위 인용 구절을 글자대로 읽으면 주님께서 심판하신다고 읽을 수밖에 없을지라도 내가 단언하는 것은 주님께서는 누구도 정죄하시지 않는다는 것이다. 위 구절만 보아도 글자로 있는 말씀의 본성이 어떠한지 가늠해보는 기회도 되어 준다: 말씀이 또 다른 의미로부터 이해되지 않으면, 즉 내적 의미로부터 이해되지 않으면, 납득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내적 의미로부터 만이 어떻게 이런 경우가 심판과 더불어 있는지를 명백히 설명한다.

“거리”가 진리를 의미하는 것은 말씀의 많은 구절로부터 알게되는 데, 먼저 계시록의 새 예루살렘이 취급되는 곳을 보자:
열 두 성문들은 열 두 진주들로, 각 성문마다 한 개의 진주로 되었다: 그리고 도성의 거리 는 투명한 유리 같은 순금으로 되었다 (계. 21:21)
“새 예루살렘”은 주님의 왕국이다, 이 왕국이 선과 진리에 관련하여 묘사되는 바, “벽들”, “성문들”, 그리고 “거리들”에 의해 묘사되어진다. “거리들”에 의해 선으로 인도하는 진리의 모든 것, 또는 사랑과 선행으로 인도하는 신앙의 모든 것들이 뜻해진다; 그리고 진리들이 선이 되어 가기 때문에, 고로 선으로부터 투명하기 때문에, 거리는 “투명한 유리 같은 금”이라고 말해진다. 다시:
(그 강은) 도성의 거리 한 가운데를 (흐르고), 강의 이쪽과 저쪽에는 생명의 나무가 있고, 열 두 (종류의) 열매를 맺고 있다 (계. 22:2).
위 구절 역시 새 예루살렘 또는 주님의 왕국이 취급된다. “거리의 한 가운데”는 신앙의 진리를 나타낸다, 이 진리를 수단으로 선이 온다, 그리고 이 진리가 선으로부터 온다; “열 두 열매들”은 소위 신앙의 열매들이다; 그 이유가 “열 둘”은 신앙의 모든 것들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다니엘서에서:
알고 지각할 것인 즉 예루살렘을 회복하고 건설하라는 말이 나감으로부터 지도자 메시아에 이르기까지, 칠 주, 그리고 육십 이 주 일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거리와 해자(성 외곽)와 더불어 회복되고 건설될 것이다 (단. 9:25).
위 구절은 주님의 강림을 취급한다; “그것은 거리와 해자와 더불어 회복될 것이다”란 (주님의 강림 때에) 진리와 선이 있을 것임을 표시한다. (역사적 차원에서) 위 구절 같이 예루살렘이 회복되고 건설되지 않은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리고 우리의 생각들을 세상의 왕국에 고정하지 않고, 내적 의미의 예루살렘에 의해 뜻해진 천국의 왕국에 두고 있다면 지상의 예루살렘이 회복되고 새로이 건설되지 않는 것에 대한 관심은 중대하지 않을 것이다.
누가복음에서:
집주인이 그의 종에게 말했다, 도성의 거리와 골목길로 빨리 가거라, 그리고 거기서 가난한 자, 불구자, 절뚝거리는 자, 소경을 데려와라 (눅. 14:21).
글자 의미에 멈추어 서 있는 이들은 위 구절로부터 이렇게 납득할지 모른다. 즉 종은 사방 각처로 가야한다는 것, 그리고 이것이 “거리들과 골목길들”에 의해 의미된다는 것; 그리고 종은 모든 이를 데려와야 한다는 것, 그리고 이것은 “가난한 자, 불구자, 절름발이, 소경”에 의해 의미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단어들의 각각은 그 안에 깊은 비밀들을 포함하고 있다. 그 이유는 이 말들이 주님의 말들이기 때문이다. 종이 “거리와 골목길로 간다”는 것은 그가 어떤 진짜 진리, 또는 선으로부터 빛을 발하는 진리, 또는 선을 빛나게 하는 진리를 위하여 모든 곳을 뒤지는 것을 의미한다. 그가 데리고 오는 “가난한 자, 불구자, 절음발이, 소경”은 소위 고대 교회에 있는 것과 같은 이, 신앙 측면에 있되 선을 자기 생명 속에 간직한 이, 고로, 주님의 왕국에 관한 지식을 전달받아야 하는 이, 고로 아직은 주님의 왕국에 관해 가르쳐지지 않은 나라들을 의미한다.
“거리들”이 진리들을 의미하는 바, 유대인들 사이에서 그들이 거리에서 가르치는 것은 표현적 의식이었다. 이는 마. 6:2, 5; 눅 13:26, 27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예언서들에서 “거리들”은 진리들, 또는 진리에 반대되는 것들을 의미한다. 이사야에서:
공정은 뒤쪽으로 내던지고, 정의는 멀찍이 서있다; 그 이유가 진리가 거리에서 걸려 넘어 지고, 직바름은 들어갈 수 없기 때문이다 (이. 59:14).
다시 이사야서에서:
네 아들들이 기진맥진하여 모든 거리들의 머리에 누웠다 (이. 51:20).
예레미야서에서:
죽음이 우리의 창문들 안으로 오고 있다, 그것은 우리의 궁전 안으로 들어와서 거리로부터 아이를 자르고, 길에서는 젊은 이들을 멸절한다 (예. 9:21).
에스겔서에서:
느부갓네살이 모든 너희 거리들을 그의 말발굽으로 짓밟을 것이다 (겔. 26:11).
위는 두로에 관하여 이야기하고 있다. 이를 수단으로 진리에 관한 지식들이 의미된다; “말발굽”은 진리를 타락시키는 기억 속의 지식들을 표시한다. 나훔서에서:
병거들이 거리들에서 소리친다, 그것들은 길에서 이리저리 달린다 (나. 2:4).
“병거들”은 진리의 교리를 표시하고, 이것이 “거리들에서 소리친다”고 말해지는데, 이는 거짓이 진리 대신 들어 앉을 때이다.
스가랴서에서:
아직 늙은 남자와 여자가 예루살렘의 거리들에 거주할 것이다, 그리고 도성의 거리들은 소 년, 소녀로 가득할 것이고, 거리에서 놀 것이다 (슥. 8:4, 5).
진리에 애착함에 관해 말하고 있다. 그 결과는 기쁨과 즐거움이다. 이 외에 이. 24:11; 예. 5:1; 7:34; 49:26; 애. 2:11, 19; 4:8, 14; 습. 3:6 도 더 읽어보기 바란다.

3절. 그리고 그가 그들에게 간청했다, 그리고 그들은 그에게로 돌아섰다, 그리고 그의 집에 왔다. 그리고 그는 그들에게 식탁을 베풀었다, 그리고 누룩 안 든 (빵)을 구웠다. 그리고 그들은 먹었다.

그가 그들에게 간청했다. 이는 누가 이겨낼 때의 시험의 상태를 의미하는 것은 시험에 있어왔던 이들이 아니면 알 수 없다. 앞서 말한 대로, 시험은 주님의 현존과 자비, 그리고 구원에 관하여 의심함이 동반되어진다. 시험 때에 당사자와 더불은 악령들은 부정적 측면이 강력히 부각되게 한다, 그러나 선한 영들과 천사들은 주님으로부터 모든 가능한 방법을 동원하여 의심의 상태를 내쫓고 희망의 상태에서 인간을 보존하고, 마지막으로 그 사람으로 긍정적 측면을 확증하도록 해준다. 이와 같이 인간은 시험에서 부정적 측면과 긍정적 측면 사이에 서 있다. 시험에 항복하는 자는 의심의 상태에 남고, 부정적인 것 안으로 빠지고 만다; 그러나 이겨내는 자도 실로 의심 안에 있기는 하나, 여전히 그는 희망에 의해 용기를 잃지 않도록 자신을 관리한다, 하여 그는 긍정적 측면 쪽에서 빠르게 서 있다. 이 다툼 동안, 인간은 주님을 재촉한다, 특히 기도에 의해, 그분이 현존하시도록, 자비를 가지시도록, 도움을 주시도록, 지옥에 떨어짐에서 건지시도록 재촉한다. 그러므로 참 교인이 되어 가는 이들의 시험이 여기서 취급된다. 즉 “아니다”라고 먼저 천사가 말하고, 이어서 우리는 거리에서 밤을 보낼 것이다. 그러자 롯이 그들에게 극도로 간청하자, 그들은 그에게로 돌아서고, 그의 집으로 가는 모습으로 묘사되고 있다.

그리고 그들은 그에게로 돌아섰다. 이는 거처(숙소)를 의미하는데 이는 2절에서 살핀 대로와 같다. 고로 설명은 생략한다.

그리고 그의 집에 왔다. 이는 선 안에서 확증함을 의미하는데, 이는 “집”의 의미가 천적 선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리고 내적 의미에 있는 시리즈에서도 알게 된다. 고로 이 말들이 선에서 확증함을 뜻하는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그는 그들에게 잔치를 베풀었다. 이는 함께 거주함을 의미한다. 이는 “잔치”의 의미로부터 알게 된다. 잔치(축제, feast)는 말씀에서 자주 언급되는 단어 중 하나이다; 그리고 내적 의미에서 그것은 함께 거주함을 의미한다. 예레미야서에서:
여호와의 말이 그에게 : 너는 잔치하는 집으로 가지 말라, 그들과 더불어 앉고, 먹고, 마시 지 말라 (예. 16:8).
위에서 예언자에게 몇 가지 사항들이 말해지는데, 이를 수단으로 선은 악과, 진리는 거짓과 서로 왕래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잔치하는 집으로 가지 말라란 선과 진리는 악과 거짓이 함께 거주해서는 안됨을 의미한다.
이사야서에서:
이 산에서 여호와 체바욷께서는 모든 백성에게 지방(fat, 동물 기름)의 잔치를, 달콤한 포 도주들의 잔치를, 뼈골이 가득한 지방으로부터, 잘 정제한 포도주들로부터 만들 것이다 (이. 25:6).
위에서 “산”은 주님을 사랑함을 표시한다. 이 사랑 안에 있는 이들은 “잔치”에 의해 의미되는 선과 진리 안에서 주님과 더불어 거주한다. “뼈골로 가득한 지방인 것들”은 선들이다; “달콤함, sweet”과 “정제한 포도주들”은 거기로부터의 진리들이다.
유대 교회에서 있었던 잔치들은 제물로 바쳐짐으로서 신성시된 것들을 가지고 진행했다. 이는 바쳐진 제물들에 의해 의미된 사랑의 거룩한 것들 안에서 주님께서 인간들과 거주하심을 의미했다. 이와 같은 내용이 이후에 원시 기독 교회에서 잔치라고 불려진 성만찬에 의해 표현되어졌다.
창. 21:8에서 아브라함은 이삭이 젖을 떼는 날, 성대한 잔치를 베풀었다. 이를 수단으로 표현되고 의미된 것은, 주님의 신성이 그분의 인간 (평면)의 합리성과 함께 거주함과 처음 결합하심이다. 내적 의미에서 같은 내용들이 다른 구절들에서도 의미되는데, 잔치는 사랑과 선행 안에 함께 있는 많은 이들의 집단에서 거행되고, 사랑과 선행의 분위기인 기쁜 느낌들을 서로 나누는 모습에서도 암시된다.

그리고 누룩 넣지 않고 [빵을] 구웠다. 이것은 순수해짐을 의미하는데, 이는 “누룩 안 넣음”과 “발효 안됨”의 의미로부터 분명해진다. 말씀에서 “빵”은 일반적으로 모든 천적, 영적 선, 고로 일반적 측면에서의 천적, 영적인 것들을 의미한다. 이것들이 불순한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는 것이 누룩 없는 빵에 의해 표현되어졌다; 그 이유가 “누룩”은 악하고 거짓인 것, 이를 수단으로 천적, 영적인 것들은 불순해지고 모독된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런 표현성 때문에 유대 교회인들은 발효 안된 빵, 누룩 넣지 않은 빵 외에 어떤 다른 빵을 그들의 식사 제물로 바쳐서는 안된다고 명령되어 있었다; 이는 모세의 책에서 분명해진다:
너희가 여호와께 가져 올 식사 제물은 누룩과 더불어 만들어져서는 안된다 (레. 2:11).
다시:
너희는 누룩 넣어진 것과 더불어 내 제물의 피를 바치지 말라 (출. 23:18; 34:25).
그러므로 명령되어졌던 바, 유월절의 칠 일 동안 그들은 발효되지 않은 빵, 또는 누룩 넣지 않은 빵 외에 다른 빵은 먹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모세의 책에서:
칠 일 동안 너희는 누룩 없는 [빵]을 먹을 것이다; 첫 날에서 조차 너희는 너희 집에서 누 룩이 없게 할 것이다; 그 이유가 첫 날로부터 칠 일까지 누룩 있는 것을 먹는 자는 누구든 지, 그 혼은 이스라엘로부터 잘리울 것이다… 첫 달에서, 그 달의 십 사일 째, 저녁에서, 너 희는 누룩 넣지 않은 [빵]을 그 달의 이십 일 일, 저녁까지 먹을 것이다; 칠 일 동안 너희 집에서 누룩이 발견되지 않아야 한다; 그 이유가 누룩 있는 것을 먹는 자는 누구든지, 그 혼이 체류자이든, 그 토지의 출생자이든, 이스라엘의 회중으로부터 절단되기 까지 할 것이 기 때문이다 (출. 12:15, 18-20; 그 밖에 출. 13:6, 7; 23:15; 34:18; 신. 16:3, 4).
그러므로 유월절은 “무교절, 누룩 없음의 축제”라고 불리운다 (레. 23:6; 민. 28:16, 17; 마. 26:17; 눅. 22:1, 7).
유월절이 주님의 신성화되심, 그러므로 신성과 인류의 결합을 표현했다는 것은 다른 장소에서 주님의 신성한 자비로부터 보여질 것이다; 그리고 주님의 인류와의 결합은 사랑과 선행, 이로부터의 신앙을 통하여 결과되는 바, 천적, 영적인 것들이 그들이 유월절 동안에 먹어야 하는 누룩 없는 빵에 의해 표현되어져 있다; 그리고 천적, 영적인 것들이 모독된 어떤 것에 의해 오염되지 않도록 누룩 있는 것은 심각하게 금지되었는 바, 이 명령을 위반하는 자는 잘리우도록 명령되었다. 그 이유가 천적, 영적인 것들을 모독하는 이들은 정녕 멸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런 비밀한 의미가 담김 없이 심각한 처벌을 당하게 할 수 있는 이 의식 행사가 명령되지 않을 것이리라는 것은 누구에게나 수긍이 갈 것이다.
이 교회에 명령된 모든 것, 요리 방법에 이르기까지 에서도 비밀한 어떤 것을 표현했다. 이스라엘의 아들들이 이집트로부터 나갈 때 특별히 지시된 요리 방법이다:
그들은 이 밤에 불로 구운 고기, 그리고 쓴 풀잎(나물)에 누룩 없는 빵을 먹어라; 그들은 고기를 생으로, 또는 삶아서 먹지 말라; 머리가 다리들에 (붙여) 있을 것이다; 그들은 아침 까지 그것을 남겨두지 말라, 그러나 남은 것은 불로 태우라 (출. 12:8-10).
이 특별 지시사항들, 즉 그들은 그것을 밤에 먹어야한다, 고기는 불로 구워라, 쓴 풀잎 위에 누룩 없는 빵, 머리는 다리들에 붙여라, 생으로, 물로 삶거나 하지 마라, 그들은 아침까지 그것을 남겨두지 말라, 그들은 남은 것을 불로 태워라는 사항들은 표현적이다. 그러나 표현된 비밀들은 내적 의미를 수단으로 열어보지 않으면 그 비밀은 알 길이 없다; 내적 의미 만으로부터 이런 모든 사항들의 신성함은 알려질 수 있다.
나지르인의 의식 행사에 관련해서도 위와 비슷하다:
나지르인이 삭발을 한 후, 성직자는 숫양의 삶은 어깨를, 그리고 바구니로부터 한 개의 누 룩 없는 케이크(cake)를, 한 개의 누룩 없는 웨이퍼(wafer)를, 그리고 그것들을 나지르인 의 손바닥 위에 놓을 것이다 (민 6:19).
나지르인이 천적 인간 자신을 표현한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자는 천적인 것들, 고로 글자에서 나타나지 않은 비밀함들이 이런 특이 사항들, 즉, 숫양의 삶은 어깨, 누룩 없는 케이크, 누룩 없는 웨이퍼, 그리고 삭발함 같은 사항 안에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이는 말씀 안에 내적 의미가 있다는 것을 믿지 않는 자가 이런 말씀에 관하여 어떤 종류의 견해를 지닐 지가 추측될 것이다. 내적 의미 없는 이런 의식 행사는 하등 중요성이 없기 때문이다. (한낱 옛날 사람들의 행사 수준에서 머물 것이다.) 이에 반해, 의식적, 예식적이 제거될 때, (천국에서 같이) 이런 구절의 말씀도 신성해지고 거룩해진다. 이와 비슷한 예를 한 가지 더 든다면, 누룩 없는 빵이 사랑의 거룩함, 또는 거룩들의 거룩을 표시하는데, 모세의 책에서:
남은 누룩 없는 빵은 아론과 그의 아들들에 의해 거룩함의 장소에서 먹을 것이다, 그 이유 가 거룩 중의 거룩이기 때문이다 (레. 6:16, 17).
그러므로 “누룩 없는 빵”은 순수한 사랑을 표시한다; 그리고 “누룩 있지 않은 것을 굽는 것”은 순수해짐을 표시한다.

그리고 그들은 먹었다. 이는 자기 것이 되게 함을 의미하는데, 이는 “먹음”의 의미가 서로 소통하는 것, 결합하는 것, 고로 자기 것이 되어진다로부터 알게 된다. (2187항 참조). 이미 말해지고 펼쳐보인 것으로부터, 앞 절과 이 절에 포함된 것들이 내적 의미에서 어떻게 위치하고 있는지, 그리고 어떻게 이 의미에서 그것들이 함께 밀착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다; “천사들”에 의해 주님의 신성한 인간과 거룩한 진행이 의미된다는 것; “그에게로 돌아섬”에 의해 거처를 가지는 것; “그의 집으로 감”에 의해 선에서 확증함이; “잔치를 베품”에 의해 함께 거주함이; “누룩 없는 빵을 굼”에 의해 순수해짐이; 그리고 “먹음”이 자기 것이 되게 함이 의미되고 있다. 이로부터 분명한 것은 이런 사항들이 역사적 의미에서는 중요성이 나타나지 않는다 할지라도 내적 의미에서는 시리즈로 잘 연결된 사항들이다는 것이다.
말씀 속 모든 것들은 일반적 측면으로나 특수적 측면으로나 이와 같은 질서와 시리즈에서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실제로 구절들의 몇 단어들의 설명만 가지고는 시리즈 자체를 설명하기란 쉽지 않다. 그 이유가 각 구절들의 말이 연결 안된 상태에서 나타나고 있어 시리즈의 연속성은 사라져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든 사항들이 한 개의 생각 안에서 다 함께 관조할 때, 또는 하나의 정신적 관점에 있을 때, 이는 내적 의미에서 살피는 이들의 경우이고, 동시에 주님으로부터 천국의 빛에서 생각하는 이들의 경우, 이런 구절들의 단어들에서 (진정한) 교인(여기서는 롯이다)이 되어가는 이들의 개혁과 거듭남의 전체 과정의 모습이 정신적 시야에 잡혀진다. 즉 처음에 그들은 시험의 어떤 것을 지각한다. 그러나 그들이 버티고 이겨낼 때, 주님은 그들 안에 거처를 가지신다, 즉 그들이 선 안에 있음을 확인하고, 그들을 그분의 왕국에서 그분 자신에게 소개하시고, 그들과 함께 거주하시며, 거기서 그들을 순수해지게 하여 완전해짐 쪽으로 인도하신다. 동시에 선을 그들의 것이 되게 하시고, 그들은 행복한 것을 소유하게 하신다, 그리고 이런 일련의 과정은 그분의 신성한 인간과 거룩한 진행을 수단으로 한다.
모든 거듭남, 새로운 삶, 고로 구원받음은 주님만으로부터 있다는 것은 교회에도 익히 알려진 사항이나, 실제 이를 믿는 자는 거의 없다. 그 이유는 선행의 선 안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선행의 선 안에 있지 않은 자가 이 신앙을 확증해 지닌다는 것은 낙타가 바늘귀(눈)를 통과하는 것 같이 불가능한 일이다; 그 이유가 선행의 선은 신앙의 씨앗을 위한 바탕(옥토)이기 때문이다. 진리와 선은 서로 일치하고 동의하나, 진리와 악은 결코 그렇지 못하다: 그것들은 반대되는 본성으로부터 있고, 이것은 저것의 반대 쪽을 향하고 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인간이 선 안에 있는 한, 그만큼 그는 진리 안에 있을 수 있다; 또는 그가 선 안에 있는 만큼, 그는 신앙 안에 있을 수 있다; 특히 모든 구원은 주님으로부터 있다는 신앙의 중요한 요점에서 더욱 그렇다. 이를 위해 요한복음을 읽어보자:
이렇게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사랑하시는 바, 그분은 그분의 독생자를 주셨고, 독생자를 믿 는 자는 누구든지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가진다 (요. 3:16).
다시: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을 가진다; 그러나 아들을 믿지 않는 자는 생명을 보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하느님의 분노가 그 사람 안에 머무른다 (요. 3:36).
다시:
이것이 하느님의 일인 즉, 너희로 아버지께서 보내신 그분을 믿는 것이다 (요. 6:29).
다시:
너희는 내가 [그분]이다는 것을 믿지 않으면, 너희는 너희의 죄들 안에서 죽을 것이다
(요. 8:24).
다시: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자는 비록 그가 죽을지라도 여전히 그는 살 것이다; 그리고 나를 믿고 살아가는 자는 결코 죽지 않을 것이다 (요. 11:25, 26).
그가 선 안에 있지 않으면 그는 주님을 믿을 수 없다, 즉 그가 선행 안에 있지 않으면 그는 신앙을 가질 수 없다는 것을 요한복음이 말한다:
그분을 영접한 많은 이들, 그들에게 그분은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능력을 주셨다, 그분의 이름을 믿는 그들에게도 (주셨다); 이들은 피들로부터가 아니고, 살(육)로부터도 아니고, 인간의 의지로부터도 아니고, 하느님의 뜻하심으로부터 태어나진다 (요. 1:12, 13).
위 구절로부터 알게되는 바, 주님을 사랑함과 이웃을 향한 선행이 신앙의 생명이다는 것이다. 그러나 악 안에 있는 자, 즉 악한 생활을 하는 자가 모든 구원은 주님으로부터 있다는 것을 믿는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은 다른 삶에서 기독교계로부터 올라온 이들로부터 나로 확신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물론 육체에서 살고있는 이들, 즉 신앙의 교리 강령에 따라 주님 없이 구원은 없다라고 입으로 고백하고 타인을 가르치기까지 하면서 생활은 악한 자들로부터도 위와 같은 사실은 확인된다. 다른 삶에서 이들이 단지 주님을 부르기만해도 즉시 그들의 영역은 끝없는 곤란함들로 가득채워진다. 그 이유가 거기서는 입으로가 아닌 생각 자체가 지각되는 곳이기 때문, 고로 그들이 있기만해도 그들의 신앙의 교의가 무엇인지는 그들에게 묻지 않아도 명명백백하기 때문이다.
이들 사이에 사랑과 선행이라는 말만해도, 그들로부터 지각되는 것은 어둠으로 꽉 찬 어떤 것, 동시에 더러운 사랑의 종류로부터 굳어져 버린다; 이런 것들은 주님을 사랑함과 이웃을 향한 선행을 타락시키고, 질식하게 하여 소멸하려는 본성을 지녔음을 여실히 드러낸 것이다.
이 사람들에게 무슨 신앙을 가졌느냐는 물음에, 그들은 자기들은 우주의 창조자 하느님을 믿노라고 말했다. 그래서 그들이 과연 그러한지를 조사했더니, 그들은 어떤 하느님도 믿지 않고 있음이 발견되었다. 그들은 막연히 모든 것들은 자연으로부터 있다는 것, 그리고 영원한 생명이나 삶은 공허한 것, 무가치한 것이라고 말했다. 이와 같은 것이 주님을 믿지 않고, 우주의 창조자 하느님을 믿는다고 말하는 교회 안에 있는 모든 이들의 신앙이다. 진리는 주님으로부터 있지 않은 근원으로 부터서는 흘러들 수 없다. 진리는 주님으로부터 있는 선이 아니면 뿌려질 수 없다.
주님의 신성한 인간과 거룩한 진행이 생명과 모든 구원의 수단이고 이로부터서만 있다는 것은 성만찬에 관련된 말로부터도 분명해진다: “이것은 나의 몸이다”; “이것의 나의 피이다”; 그리고 모든 거룩함이 그분으로부터 있다는 것이 분명해진다. 여러분이 그분의 신성한 인간이라 말하든, 그분의 몸, 그분의 살, 또는 빵, 또는 신성한 사랑이라 말하든 이는 모두 같은 의미이다; 그 이유가 주님의 신성한 인간이 순수한 사랑이고, 그리고 거룩함은 그분의 사랑으로부터 있고, 이로부터 신앙의 거룩함도 파생되기 때문이다.

4절. 그들이 막 누우려할 때 도성의 사람들, 소돔의 사람들, 소년으로부터 노인에 이르기까지, 외곽 지역으로부터 온 모든 백성들이 그 집을 에워쌌다.

그들이 막 누우려할 때. 이것은 방문의 첫 기간을 의미하는데, 이는 “저녁”과 “밤”에 관해 말해졌던 바로부터 알게 된다. 즉 말씀에서 저녁과 밤은 방문과 심판을 의미함에서 알게 된다. 사실상 글자 대로라면, 저녁과 밤이라는 단어는 없다. 그러나 “그들이 막 누우려할 때”라는 말이 저녁에서 밤으로 진행되는 사이의 시간대, 또는 밤이 시작되는 시간을 암시하는 말인 바, 악한 자를 방문하는 첫 시간대인 셈이다. 이는 이어지는 것에서 분명해진다, 여기서는 “소돔”에 의해 뜻해지는 교회 내에 있는 악한 자에 관하여 엄중한 조사가 개시된다.

도성의 사람들. 이는 거짓에 있는 이들을 의미한다; 그리고 “소돔의 사람들”은 악 안에 있는 이들을 의미한다. 이는 “도성”과 “소돔”의 의미로부터 알게 된다 “도성”은 진리들을 의미한다, 또한 거짓들, 또는 진리들에 반대되는 것들을 의미하는데 이미 살핀 바 있다; 그리고 “소돔”은 모든 종류의 악들을 의미한다. 거짓들과 악 모두에서의 엄중한 조사, 또는 방문이기에, 여기서 “도성의 사람들, 소돔의 사람들”이라고 말해지고 있다. 거짓과 악, 양쪽을 언급하지 않았다면, 아마 “소돔의 사람들”이라고 만 언급되었을지도 모른다.

그 집을 에워쌌다. 이는 그들이 선행의 선에 반대하여 있었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는 “집”의 의미가 천적인 선, 즉 사랑과 선행의 선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리고 “에워쌈”의 의미로부터, 즉 이것은 이 선에 반대되어 있음, 즉 적대적 의도에서 이 선을 공격하고 습격하려는 것에서 알게 된다.

소년으로부터 노인에 이르기까지. 이는 최근과 오래된(확증된) 거짓들과 악들을 의미하는데, 이는 거짓과 악들을 소년과 노인이 수식해 주는 바로부터 알게 된다; 즉 “소년들”은 아직 성숙되지 않았는 바, 고로 최근의 악과 거짓들; 그리고 “노인들”은 성숙된 나이를 넘긴 이들인 바, 확증된 악과 거짓들이다. “소년”과 “노인”이 이와 비슷한 의미에서 다른 구절에도 있다. 스가랴서에서:
남자 노인들과 여자 노인들이 여전히 예루살렘의 거리들에서 거주할 것이다; 그리고 도성 의 거리들은 거리들에서 노는 소년소녀들로 가득할 것이다 (슥. 8:4, 5).
위에서 “예루살렘”은 주님의 왕국과 교회를 표시한다; “거리들”은 그 왕국, 교회에 있는 진리들을 표시한다; 고로 “남자 노인”은 확증한 진리들을; 그리고 “여자 노인”은 확증한 선들을 표시한다; “거리에서 노는 소년들”은 최근의 진리들; 그리고 “소녀들”은 최근의 선들과 그것의 애착들, 그리고 파생되는 즐거움들을 표시한다. 이로부터 알게 되는 또 하나는, 어떻게 천적, 영적인 것들이 글자 의미의 세상적인 것 안으로 하강함에서 역사적인 것들 안으로 바뀌는지이다. 이 글자 의미에서는 노인들, 소년 소녀들, 여인들을 뜻하는 것 외에 거의 어떤 의미도 나타나지 않는다.
예레미야서에서:
예루살렘의 거리에 있는 아이 위에, 마찬가지로 젊은 이들의 회합 위에 쏟아라; 여인들과 더불은 남자, 날수가 다 찬 그와 더불어 있는 노인도 데려갈 것이기 때문이다
(예. 6:11).
위에서 “예루살렘의 거리”는 교회를 지배하는 거짓들을 표시한다, 이것의 최근의 거짓과 성숙하는 거짓이 “어린이”와 “젊은이”라 불리우고, 그리고 오래되고 확증된 거짓은 “노인”과 날수가 가득한 그 사람“이라 불리우고 있다.
다시:
나는 네게 있는 말과 기수를 흩어버릴 것이다, 그리고 나는 네게서 병거와 그것을 타는 자 를 흩어버릴 것이다, 그리고 나는 네게서 남자와 여인을 흐트릴 것이다, 그리고 나는 네게 서 젊은이와 소년을 흐틀 것이다 (예. 51:21, 22).
위에서 “노인”과 “소년”은 확증된 진리와 최근의 진리를 표시한다.
다시:
죽음이 우리의 창문들을 올라오고 있다, 죽음은 우리의 궁전 안으로 들어왔다, 하여 거리에 있는 아이를, 길에 있는 젊은이들을 멸절한다 (예. 9:21).
위에서 “아이”는 처음 출생한 진리들을 표시한다, 그리고 죽음이 창문과 궁전 안으로 올 때, 즉 지성과 의지 속의 것들 안으로 올 때 이것들이 멸절되어진다.

외곽으로부터 온 모든 백성. 이는 그들의 모두와 각각을 의미한다는 것은 앞서 설명한 “소년들”과 “노인들”에 의해 최근과 오래된(확증된) 거짓들과 악들이 의미된다는 것으로부터 분명해진다. 그리하여 “외곽으로부터의 백성”은 이들의 모두와 각각을 의미한다. 더욱이 용어 “백성”은 일반적으로 거짓들을 의미한다.
여기서 선행의 선에 반대되어 있는 교회 내의 사람들의 처음 상태가 묘사되어 있다, 결과적으로 주님에 반대된 쪽에 있는 자들이다. 그 이유가 선행의 선에 있지 않는 자는 주님과 결합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사랑은 영적인 결합 자체이다, 이는 사랑의 본질로부터 누구나 알 것이다; 그리고 그분과 결합할 수 없는 자는 누구든지 그분을 인정할 수도 없다. 선 안에 있지 않는 자는 주님을 인정할 수 없다, 즉 그분에 대한 신앙을 가질 수 없다. 이는 요한복음에서 분명해진다:
빛이 세상에 왔으나 사람들은 빛보다 어둠을 오히려 사랑했다, 그 이유는 그들의 일들이 악하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악을 행하는 자는 빛을 미워하고, 빛으로 오지 않기 때문인데, 그의 일들이 견책당하지 않도록 하려고 해서이다; 그러나 진리를 행하는 자는 자기 일을 명명백백하게 만드는데, 그 이유는 그들이 하느님 안에서 일했기 때문이다 (요. 3:19-21).
이로부터 분명한 바, 선행의 선에 반대하여 있는 자는 주님에 대하여도 그렇다는 것이다; 또는 같은 표현으로, 악 안에 있는 자는 빛을 미워한다; 그리고 빛으로 오지 않는다. “빛”은 주님에 대한 신앙이고, 주님 자신이다는 것은 요. 1:9, 10; 12:35, 36, 46에서도 분명해진다.
그 밖의 구절을 더 살펴보자:
세상은 너희를 미워할 수 없다, 그러나 그것은 나를 미워한다, 그 이유는 내가 세상의 일들 이 악하다고 증언하기 때문이다 (요. 7:7).
마태복음서는 한층 더 분명하다:
그분은 왼쪽에 있는 그들에게 말할 것이다, 나로부터 떠나라, 너희는 저주되었다; 그 이유 는 나는 굶주렸다, 그리고 너희는 나에게 먹을 것을 주지 않았다; 나는 목말랐다, 그리고 너희는 나에게 마실 것을 주지 않았다; 나는 낯선 자이었다, 그리고 너희는 나를 안으로 들 이지 않았다; 벌거벗어 있었다, 그리고 너는 나에게 옷을 입혀주지 않았다; 아팠다, 그리고 갇혀 있었다, 그리고 너는 방문하지 않았다. 참으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너희가 이들 의 작은 자의 하나에게 그것을 하지 않은 만큼, 너희는 나에게 그것을 하지 않은 셈이다 (마. 25:41-43, 45).
위 말씀들은 선행의 선에 반대하여 있는 자가 주님에게 어떤 방식으로 맞서 있는지를 보여준다; 그리고 모든 이는 선행의 선에 따라 심판되어진다는 것, 그리고 신앙의 진리가 선으로부터 분리 될 때는 신앙의 진리에 따라서가 아니다는 것, 마태복음서를 더 읽어보자:
사람의 아들은 그분의 천사들과 더불어 그분의 아버지의 영광 안에서 올 것이다; 그때 그 분은 모든 이를 그의 행위들에 따라 갚을 것이다 (마. 16:27).
“행위들”은 선행으로부터 진행하는 선들을 표시한다; 그리고 선행으로부터 있는 것들 역시 신앙의 열매라고 불리운다.

5절. 그리고 그들은 롯에게 소리쳐서, 그에게 말했다, 오늘 밤 너에게 온 사람들은 어디 있느냐? 우리가 그들을 알도록 우리 앞으로 데려와라.

그들은 롯에게 소리쳐서 그에게 말했다. 이는 악으로부터의 거짓이 선에 맞서 성을 돋구움을 의미하는데, 이는 “외침”과 “롯”의 의미와 표현되는 말의 느낌으로부터도 알게 된다. 용어 ”외침“이 거짓을 서술하는 것은 이미 살핀 바 있다; 그리고 ”롯“은 선 안에 있는 교인, 고로 선 자체를 표현한다. 이로부터, 그리고 성냄이라는 감정으로부터도, 그들이 선에 맞서 성을 돋구는 악으로부터의 거짓을 의미하는 것을 알 수 있다. 거짓에도 많은 종류가 있지만, 크게 일반적으로 두 가지가 있다, 즉 악으로부터 생산되어지는 거짓, 그리고 악을 생산하는 거짓이다.
교회 내에 있는 악으로부터의 거짓, 이것은 특별히 생활의 악들을 좋아하는 거짓이다. 이런 것을 애호한다. 즉 선, 선행이 교인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진리, 즉 신앙이 만든다; 그리고 인간은 비록 그가 삶의 전체가 악행으로 범벅이었어도, 죽기 전 하느님을 믿노라고 고백만 한다면, 그는 구원된다는 것, 이런 논리의 전개는 생활의 악이 별반 구원받는데 지장이 없다는 쪽으로 치닫는다. (이는 상식적으로도 수준 이하 이지만 그것이 필요한 사람에게는 이용할 절호의 찬스로 여긴다.) 이런 것이 선에 맞서 (되려) 성을 돋구는 거짓인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롯에게 소리침”에 의해 의미되어지고 있다. 성냄의 원인은 어떤 사랑의 즐거움을 파괴하려 골몰해대는 모든 것이다. 악이 선을 공격할 때는 “성냄”이나, 선이 악을 꾸짖을 때는 “열정”이다.

네게 온 사람들은 어디 있느냐? 이는 주님의 신성한 인간과 거룩한 진행을 부정함을 의미하는데, 이는 “두 사람”의 의미에서 알게 된다; 그리고 이 성냄을 표현하는 말에 잠복한 느낌으로부터도 알아진다; 그리고 이어지는 대목으로부터도 알게 된다. 이렇게 말하는 대목이다: “그들을 우리에게 데려와라, 우리가 그들을 알아야겠다.” 이 말의 표현 속에는 부정함이 잠복하고 있다. 선행의 선에 반대되어있는 이들은 주님에 맞서고 있고, 심정에서 그분을 부정한다. 그들은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을 위해 입으로 주님을 외쳐댈 뿐이다.

오늘 밤. 이는 마지막 때, 즉 인정함이 더 이상 있지 않은 때를 의미하는데, “밤”의 의미가 빛이 더 이상 보이지 않는 때인 어둠의 때임에서 분명해진다. 천사들은 밤에 오지 않고 저녁에 왔다. 그러나 소돔의 사람들이 소리쳐서 말한 때, 즉 거짓과 악이 말했을 때의 시각은 “저녁”이 아니라 “밤”이라고 말해졌다. 그 이유가 진리의 어떤 것도 더 이상 있지 않고, 단지 거짓과 악만이 있었기 때문이다;
고로 이는 심판이 오는 마지막 때이다. 이런 의미로 말해지는 구절은 자주 발견한다. 미가서에서:
백성을 타락의 길로 인도하는 예언자들에 대하여서이다: 너희가 환상을 보지 못하는 밤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너희가 점을 치지 못하는 어둠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태양이 예언자 들 위에서 내려 갈 것이다, 그리고 낮은 그들 위에서 검게 될 것이다 (미. 3:5, 6).
위 구절에서 “예언자들”은 거짓들을 가르치는 이들을 표시한다; “밤”, “어둠”이 있음, “태양이 내려 감”, “검게 되는 낮”은 거짓들과 악들을 표시한다.
요한복음서에서:
만일 어떤 이가 낮에 걷는다면, 그는 걸려 넘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만일 어떤 이가 밤에 걸으면, 그는 걸려 넘어진다, 그 이유는 빛이 그 사람 안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요. 11:9, 10).
위에서 “밤”은 악으로부터의 거짓을 표시한다; “빛”은 선으로부터의 진리이다; 그 이유가 진리의 모든 빛은 선으로부터 있기 때문이듯, 거짓으로부터의 모든 밤은 악으로부터 있기 때문이다.
다시:
나는 낮이 있는 동안 나를 보내신 그분의 일들을 해야만 한다; 아무도 일하지 못하는 밤이 온다 (요. 9:4).
위에서 “낮”은 선하고 참된 것이 있는 동안의 때와 상태를 표시한다; 그러나 “밤”은 악하고 거짓된 것이 있는 동안의 때와 상태를 표시한다.
누가복음서에서:
내가 네게 말한다, 이 밤에 한 침대에 두 사람이 있을 것이다, 하나는 받아지고, 다른 하나 는 포기될 것이다 (눅. 17:34).
위에서 “밤”은 마지막 때를 표시한다, 즉 신앙으로부터의 진리의 어떤 것도 있지 않은 때이다.
이스라엘의 아들들이 출애굽했을 때, 이집트는 교회 내에서 선과 진리의 황폐됨을 표현했으므로, 그리고 그 교회는 악과 거짓만이 지배하고 있는 까닭에, 명령된 것은, 그들이 밤에 출애굽하라는 것이었다 (출. 11:4); 그리고 한밤중에 이집트의 모든 첫 출생이 죽임을 당했다 (출. 12:12, 29, 30). 그리고 선과 진리인 것 안에 있는 그들, 이스라엘의 아들들에 의해 표현되었는 바, 비록 롯이 소돔 안에 있어도, 즉 거짓들과 악들 사이에 있어도 지켜주시고, 출애굽하는 이스라엘의 아들들도 그런 의미인 바, 출애굽의 밤도 “여호와께서 경계를 서시는 밤”이라 불리웠다 (출. 12:42).

그들을 우리에게로 데려와서, 우리가 그들을 알게 하라. 이는 그들이 이런 것들이 존재한다는 것, 즉 주님의 신성한 인간과 거룩한 진행(두 천사, 또는 두 사람)이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잘못된 것임을 보여 주기를 바랐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두 천사”들이 지닌 의미로부터 파악된 것이다; 또한 이들의 느낌에는 성냄이 있고, 이 성냄의 속에는 부정함이 깔려 있는 것에서도 감지된다.
여기에 황폐된 교회의 첫 상태가 묘사되어 있다; 즉 선행이 없기 때문에 신앙도 없어지기를 시작하는 때의 상태이다; 이 상태는 이미 말한 바 같이, 그들이 선행의 선에 반대되어 있기 때문에, 신앙 안에도 역시 있지 않은 것이다, 그리고 특히 주님의 신성한 인간과 거룩한 진행을 인정함이 없는 신앙이다. 이 신앙들은 생활의 악 안에 있는 이들에 의해 심정에서 부정되고 있다. 즉 자신과 비교해 타인을 경멸하는 자들, 자기를 존경하지 않는다고 상대방을 미워하는 이들, 앙갚음함으로 즐거움을 느끼는 자들, 잔인함에서 속내로는 미소를 머금지 않는 이들, 간음질(진리와 거짓의 섞음질)이 경우에 따라서는 잘못으로 보지 않는다고 우겨대는 자들, 이런 자들에 의해 본문의 두 사람(두 천사)의 존재와 인정함은 부정되고 있다. 노골적으로 주님의 신성을 부인했던 옛날 주님 시대의 바리새인들이 요즈음, 자기 드높여짐을 위해, 또는 심보 더러운 부유해짐을 감추려 입만 벌리면 거룩한 자이고, 아예 몸짓 자체에 거룩함이 풍겨나는데, 심보는 모독된 것에 안주하는 자들에 비교하면 차라리 더 낫다. 이들의 외향적 예배와 내향적 예배는 너무나 정반대이다. 이런 자들의 계속되는 (퇴행적) 발달과 운명이 소돔의 사람들에 있어지는 운명, 도성이 뒤엎어짐으로 그것의 마지막을 장식한다 (24, 25절).
인간과 더불어서 악령들도 있고, 동시에 천사들도 있다. 악령들을 통하여, 그는 지옥과 교통하고, 천사들을 통하여 천국과 교류한다. 그러므로 자신의 삶이 악한 것에 가까워지는 만큼, 그에게 지옥은 흘러든다; 그러나 자신의 삶이 선한 쪽에 가까운 만큼, 그에게 천국이 흘러든다. 이로부터 분명해지는 것은, 악한 생활에 있는 자는 주님을 인정할 수 없다는 것, 오히려 자신을 주님에 반대되는 무수한 논리로 짜맞추고 있을 뿐이다. 그 이유는 지옥으로부터의 공상들이 흘러들고, 그것을 받아 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선한 생활을 영위하는 이들은 주님을 인정한다, 그 이유는 천국이 흘러들고, 이 안의 중요한 목록은 사랑과 선행이기 때문이다. 또한 천국은 주님의 것이기 때문에, 그분으로부터 사랑과 선행의 모든 것이 오기 때문이다.

6, 7절. 그리고 롯은 문 쪽의 그들에게로 나갔다, 그리고 자기 뒤에서 문을 잠궜다, 그리고 그는 말했다, 당신들에게 바라건대 내 형제여 악을 행치 말라.

그리고 롯은 문 쪽의 그들에게로 나갔다. 이는 그가 신중하게 적용했음을 의미하는데, 이는 “문”과 “문을 넘어서 나감”의 표현의 내적 의미로부터 분명해진다. 말씀에서 “문”은 진리이든, 선이든, 또는 주님이시든 안으로 들어오게 승인한다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문”은 진리 자체, 선 자체, 또는 주님 자신까지도 의미한다; 그 이유가 진리가 선으로 인도하기 때문이다, 그 다음 선은 주님으로 인도한다. 이런 사항들이 성막의 문과 휘장, 그리고 성전의 문과 휘장에 의해 표현되고 있다.
이것이 “문”의 의미이다는 것은 요한복음서로부터 분명해진다:
양우리를 문을 통해 들어가지 않고, 다른 방법으로 넘어 들어가는 자는 도둑이며 강도와 같다; 그러나 문을 수단으로 들어가는 자는 양의 목자이다; 그에게 문지기는 (문을) 연다. 나는 양의 문이다; 만일 누군가가 나를 수단으로 들어간다면, 그는 구원된다
(요. 10:1-3, 7, 9).
위에서 “문”은 진리와 선을 표시한다, 그러므로 진리 자체이시고 선 자체이신 주님이시다. 이로부터 문을 통하여 천국으로의 입장이 승인되는 것이 의미하는 것, 문을 여는 열쇠에 의해 의미되는 것이 무엇인지 분명해졌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문에 의해 집을 에워싼 이들의 특성에 걸맞는 어떤 선이 의미된다. 그 이유가 이 문(janua)은 이 문(ostium)과 구별되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여기서의 문은 집 앞에 붙은 문이었다. 그리고 즉시 이어지는 것으로부터 이 문에 있는 선은 생명의 복됨이었고, 이를 수단으로 롯은 악과 거짓에 있는 이들을 설득하려고 했다. 그 이유가 그들이 최고의 선 자체에 의해 설득되도록 자신들을 허용하지 않을 것이고, 그것을 거절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정황으로부터 “문으로 나감”은 여기서는 그가 신중하게 자신을 적용했다가 의미되고 있다.

그리고 자기 뒤에서 문을 닫았다. 이는 그들이 선행의 선에 폭력을 행사하지 않도록, 또한 그들이 주님의 신성한 인간과 거룩한 진행을 부정하지 않도록을 의미하는데, 이는 이미 설명한 것으로부터 알아질 것이다. 현재의 경우, “문을 닫음”은 그들이 “집”에 의해 의미되는 선 안으로, 그러므로 주님의 신성과 거룩함 안으로 들어가지 않도록을 표시하고 있다.
이런 것들이 더 깊은 비밀들을 포함한다는 것은 이 말씀이 읽혀질 때 천사들에게 와지는 생각과 의미에서 있을 경우이다. 즉 악한 생활에 있는 자들에게는 선에 관한 지식, 주님에 관한 지식 그 이상의 것은 허락하시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이유가 악 가운데 있는 한 그가 선 안에도 동시에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누구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 인정하고 믿었던 인간이 악한 생활로 돌아설 때, 그는 선한 것과 거룩한 것을 모독한다. 그러나 아예 믿거나 인정하지 않을 경우, 모독까지는 아니다. 그러므로 주의함이 주님의 섭리에 의해 취해진다. 그리하여 그가 나중에 준수할 수 있는 것 이상의 것을 심정으로부터 인정하거나 믿지 않도록 하여 구원에 이르는 기회가 영영 없어짐을 예방해주신다. 그러므로 모독에 따른 처벌이 가장 비통한 처벌이다.
이러한 사랑과 선행의 선이 인간에게 있는 천국이다는 것, 모든 신성이 주님 안에 있다는 것을 심정으로부터 믿는 것이 오늘날 극소수에게만 허락된 이유이기도 하다; 그 이유가 오늘날 인간은 악의 생활 안에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롯이 자기 뒤에서 문을 닫음에 의해 더 내면적으로 의미되고 있다; 그 이유는 이 문은 안쪽의 문이었고, 이를 통하여 집 자체 안으로, 천사들이 있는 곳, 즉 주님이신 선 안으로 입장이 승인된다.

그리고 그가 말했다. 이는 권고함을 의미하는데, 이어져 말해지는 말로부터 자동적으로 설명되므로 여기서는 생략한다.

바라건대, 내 형제들에게 악을 행치 말라. 이는 그들이 두 사람들에게, 즉 선행의 선에게, 그리고 주님의 신성한 인간과 거룩한 진행에 폭력을 행사해서는 안됨을 의미하는데, 이는 “악을 행함”이 폭력을 행사함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분명한 바는 교회 내에 있는 이들이 취급된다는 것, 이들이 “소돔의 사람들”에 의해 뜻해진다는 것이다; 그 이유가 말씀을 소유한 자가 아니면 이런 거룩한 것에 폭력을 행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것들이 최고로 거룩하다는 것은 인간이 사랑과 선행의 선 안에 있지 않으면 주님의 왕국(천국)으로 들어오게 승인될 자 아무도 없다는 사실로부터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가 주님의 신성과 거룩함을 인정하지 않으면, 누구도 사랑과 선행의 선 안에 있을 자 아무도 없다; 그 이유가 이 선은 그분 만으로부터 흐르고, 실로 그분으로부터 있는 선 자체 안으로 흘러든다. 신성은 신성 안으로가 아니면 흐를 수 없고, 주님의 신성한 인간과 이로부터 파생되는 거룩함을 통하여서가 아니면 인간과 교통할 수도 없다. 이로부터 우리는 주님이 어떻게 주님의 왕국의 모든 것 안에서 모두가 되시는지를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또한 인간과 더불어 있는 선도 인간의 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임도 이해할 것이다.

롯은 두 사람들을 “형제들”이라고 부르는데, 그 이유는 그가 그들을 권면하는 것이 선으로부터 있기 때문이다. 말씀에서 “형제”는 이웃과 같은 말이다. 그 이유가 모든 이는 이웃을 자신으로서 사랑해야 하기 때문이다; 고로 형제들은 사랑으로부터 그렇게 불리는 것이다. 또는 같은 말로 선으로부터 그렇게 불린다. 이웃이라 말하고 부르는 이 방식은 천국에서 주님이 모든 이의 아버지가 되시어 모든 이를 그분의 자녀로서 사랑하신다는 사실로부터 오고 있다; 고로 이 사랑은 영적인 결합이다. 이로부터 전체 천국은 사랑과 선행으로부터 파생된 한 가족을 닮고 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모든 아들들은 주님의 천적 수준의 왕국, 즉 사랑과 선행의 왕국을 표현했다; 서로가 그들은 “형제들”, 또는 “동료들”이라고 불리운다, 그러나 “동료들”은 사랑의 선으로부터가 아니고, 신앙의 진리로부터 이다; 이사야서에서:
그들은 그의 동료 모든 각각의 사람을 돕는다, 그리고 그는 그의 형제에게 말한다. 선한 용 기를 내라 (이. 41:6).
예레미야서에서:
고로 너희는 모두 각각의 사람 그의 동료에게 말할 것이다, 그리고 모두 각각의 사람이 그 의 형제에게, 여호와께서 무엇이라 답하셨느냐? 그리고 무엇을 여호와께서 말하셨는가? (예. 23:35).
다윗서에서:
내 형제와 동료를 위하여, 나는 말할 것이다, 네 안에 평화가 있으라 (시. 122:8).
모세의 책에서:
그는 그의 동료 또는 그의 형제를 압제하지 말 것이다, 그 이유는 여호와의 해방이 선포되 었기 때문이다 (신. 15:2, 3).
이사야서에서:
나는 이집트가 이집트를 구별하지 못하게 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모두 각각의 사람이 그의 형제에 맞서 싸울 것이다, 그리고 모두 각각의 사람은 그의 동료에 맞서 (싸울 것이 다) (이. 19:2).
예레미야서에서:
모두 각각의 사람은 자기 동료를 경계하라, 그리고 너희는 어느 형제도 신뢰하지 말라; 그 이유가 모두 각각의 형제가 완전하게 속일 것이고, 모두 각각의 동료가 비방할 것이기 때 문이다 (예9:4).
이 교회로부터 있는 모두는 하나의 이름 “형제”라고 불리워진다. 이사야서에서:
그들은 여호와께 대한 공물을 위하여 모든 나라들로부터 모든 너의 형제들을 말 위에, 그 리고 병거 위에, 그리고 들것 위에, 그리고 단봉낙타 위에 (태워) 예루살렘, 내 거룩한 산 으로 데려 올 것이다 (이. 66:20).
글자 의미의 범주를 넘지 못하는 이들, 마치 유대인들의 경우같이, 위 구절은 야곱의 후손 외에 더 다른 의미는 없다고 믿는다; 고로 이 후손들은 그들이 이방인들이라고 부르는 이들을 수단으로 즉 말, 병거, 들것, 노새를 타고 예루살렘에 데려와진다는 것이다. 그러나 위 구절의 “형제”는 선 안에 있는 모든 자를 뜻한다; 그리고 “말”, “병거” “들것”에 의해서는 진리와 선으로부터 있는 것들이; 그리고 “예루살렘”에 의해서는 주님의 왕국이 뜻해진다.
모세의 책에서:
너희 사이에서 네 형제의 궁핍한 자가 네 성문의 하나에서 있을 때, 너는 네 심정을 굳어 져 있게 말고, 네 손이 궁핍한 형제로부터 닫히지 않게 하라 (신. 15:7, 11).
다시:
네 형제 사이로부터 너는 네 위에 왕을 앉힐 것이다; 너는 네 형제가 아닌 외국인을 네 위 에 앉히지 말라…그리고 (왕 위에 오른 형제가 이 율법서를 읽으면) 그의 심정이 자기 형 제 위로 치켜올려지지 않을 것이다 (신. 17:15, 20).
너희 한 가운데에서, 너희 형제 한 가운데에서, 나 같은 예언자를 여호와 너희 하느님께서 너희에게 일으키실 것이다; 그에게 너희는 순종할 것이다 (신. 18:15, 18).
위 모두로부터 분명한 바, 유대인들과 이스라엘족 모두는 서로 형제라 불리운다; 그러나 언약을 수단으로 하나가 된 이들을 그들은 동료들이라고 부른다. 사실 이들은 말씀의 역사적이고 세상적인 것을 넘어있는 것은 아무 것도 이해하지 못했으면서도 자기들끼리 형제들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그들이 한 아버지, 아브라함으로부터의 아들들이라고 불리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순수한 말씀 차원에서 보면, 이러한 인간 차원의 족보 관계로부터 그들이 말씀에서 “형제들”이라고 불리우지 않고, 그들이 표현한 선으로부터 그렇게 불리운다. “아브라함” 역시 내적 의미에서는 사랑 자체, 즉 주님을 표시한다. 이들의 아들들, 결과적으로 “형제”인 이들은 선 안에 있는 이들, 사실상 이웃이라 불리는 모든 이들이다; 마태복음서에서 주님께서 가르치신다:
너희의 스승은 한 분, 그리스도이시다; 너희 모두는 형제들이다 (마. 23:8).
다시:
이유 없이 자기 형제에게 성 내는 자는 누구든지 재판의 위험에 있을 것이다: 그리고 자기 형제에게 라가 라고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평의회(에 출석하는) 위험에 놓일 것이다: 너는 바보야 하고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지옥 불의 위험에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만일 네가 제 단에 선물을 가지고 올 경우, 거기서 네 형제가 너에 맞서 하려는 것을 기억해 보라; 제단 앞 거기에 네 선물을 남겨두고, 그리고 네 길을 가라; 먼저 네 형제와 재회되어 지게 하라, 그런 다음 와서 네 선물을 바쳐라 (마. 5:22-24).
다시:
왜 너는 네 형제의 눈 안에 있는 티끌은 잘 보느냐?…너는 네 형제에게 말하기를, 내가 네 눈에 있는 티끌을 빼내어 주겠다…(마. 7:2-4).
다시:
만일 네 형제가 네게 대하여 죄지었다면, 가서 단 둘이서만 그의 잘못을 지적해 주어라; 만 일 그가 네 말을 듣는다면, 너는 네 형제를 얻은 것이다 (마. 18:15).
다시:
베드로가 그분에게 와서 말했다, 주여, 내게 잘못한 형제를 몇 번이나 그를 용서합니까? (마. 18:2).
다시:
이와 같이 내 천국의 아버지께서 너희에게 행하실 것이다, 만일 너희가 심정으로부터 그의 형제 모든 이에게 그들의 위반을 용서하지 않는다면 이다 (마. 18:35).
위 가르침들로부터 명료해지는 바는, 이웃인 우주에 있는 모든 이는 “형제”라 불리운다는 것, 그리고 그 이유는 모든 이가 그의 이웃을 자신으로 여겨 사랑해야 한 다는 것, 고로 그들은 사랑 또는 선으로부터 그렇게 불리운다는 것이다. 그리고 주님이 선 자체이시고, 선으로부터 모든 이를 주목해서 보신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분 자신도 최고 높은 의미에서 이웃이신 바, 그분 역시 그들을 “형제들”이라고 부르신다. 요한복음서에서:
예수께서 마리아에게 말했다, 내 형제들에게 가라 (요. 20:17).
그리고 마태복음서에서:
대답하여 왕이 그들에게 말할 것이다. 참으로 내가 네게 말한다, 너희가 내 형제 중 지극히 작은 자에게 행한 만큼, 너희는 그것을 나에게 한 것이다 (마. 25:40).
고로 분명한 것은 단어 “형제”는 사랑의 용어이다는 것이다.

8절. 간절히 바라건대, 나는 남자를 알지 않은 두 딸을 가지고 있다. 나는 당신에게 그들을 데려다 주겠다, 그리고 당신들은 그들을 당신들 눈에 선인 그대로 행동하라. 오직 이 사람들에게는 어떤 것도 행치 말라. 그 이유는 그들은 내 지붕의 그림자 밑에 오셨기 때문이다.

간절히 바라건대, 나는 남자를 알지 않은 두 딸을 가지고 있다. 이는 선에 대한 애착과 진리에 대한 애착을 의미하는데, 이는 “딸”의 의미가 애착임에서 분명해진다. 그녀들이 “남자를 알지 않았다”란 거짓이 그 애착들을 오염시키지 않았다를 의미한다; 그 이유가 “남자”는 합리적 진리를 의미하나 여기서는 반대적 측면이므로 거짓을 의미한다. 애착에는 두 가지가 있다. 즉 선에 대한 애착과 진리에 대한 애착이다. 전자, 즉 선에 대한 애착은 천적 교회를 구성하고, 말씀에서 “시온의 딸”이라 불리운다, 또한 “시온의 처녀 딸”이라 불리운다; 그러나 후자, 진리에 대한 애착은 영적 교회를 구성하고, 말씀에서 “예루살렘의 딸”이라 불리운다.
이사야서에서:
시온의 처녀 딸이 너를 멸시하고 너를 조롱하였다; 이후 예루살렘의 딸이 그녀의 머리를 저었다 (이. 37:22; 왕하 19:21).
예레미야애가서에서:
내가 네게 무엇 같다고 해야 할까? 오 예루살렘의 딸아; 내가 네게 무엇과 동등하다 할까? 그리고 너를 위로할까? 오, 시온의 처녀 딸아 (애. 2:13).
미가서에서:
너, 양떼의 망대, 시온의 딸의 언덕, 너에게로 까지 그것이 올 것이다, 그리고 이전의 지배 력, 곧 예루살렘의 딸의 왕국이 올 것이다 (미. 4:8).
스바냐서에서:
외쳐라, 시온의 딸이여; 큰 소리를 만들어라; 네 모든 심정으로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오 예루살렘의 딸아 (습. 3:14).
스가랴서에서:
크게 환호하라, 오 시온의 딸아; 큰 소리를 만들어라, 오 예루살렘의 딸아; 보라, 왕이 네게 로 온다 (슥. 9:9; 마. 21:5; 요:12:15).
천적 교회, 또는 주님의 천적 왕국이 선에 대한 애착으로부터, 즉 주님 자신을 사랑함으로부터 “시온의 딸”이라 불리운다는 것은 다음 예언서의 구절을 읽어보면 더 이해될 것이다. 즉 이. 10:32; 16:1; 52:2; 62:11; 예. 4:31; 6:2, 23; 애. 1:6; 2:1, 4, 8, 10; 미. 4:10, 13; 슥. 2:14; 시. 9:14이다. 그리고 영적 교회, 또는 주님의 영적 왕국이 진리에 대한 애착으로부터, 고로 이웃을 향한 선행으로부터 “예루살렘의 딸”이라 불리우는 것은 애. 2:15에서 알 수 있다. 두 교회와 두 교회의 특성에 관하여는 제 1권에서 많은 지면을 할애했다.
천적 교회가 주님을 사랑함으로부터 이웃을 향한 사랑 안에 있다는 사실로부터 이것은 미혼의 딸, 또는 처녀에 특별히 비교되어진다, 그리고 참으로 “처녀”라고 불리우는데, 계시록에서:
이들은 여인과 더불어 더럽혀지지 않은 그들이다, 그 이유가 그들은 처녀들이기 때문이다; 이들은 그분이 가는 곳은 어디든지 어린 양을 따라가는 그들이다. 그 이유가 그들은 하느 님의 왕좌 앞에서 흠 없이 있기 때문이다 (계. 14:4, 5).
위 구절은 과거 유대 교회에 명령된 것, 즉 성직자는 자기 아내를 취할 때 과부로부터서는 안되고 오직 처녀에서만 데려오도록 한 대목을 연상하게 한다 (레. 21:13-15; 겔. 44:22).
이 구절에 포함된 것들로부터, 비록 글자에서는 그렇게 나타나지 않는다해도 내적 의미에서는 얼마나 순수한지 모른다: 그 이유가 이 구절의 이렇게, 즉 “간절히 바라건대, 나는 남자를 알지 않은 두 딸을 가지고 있다. 나는 당신에게 그들을 데려다 주겠다, 그리고 당신들은 그들을 당신들 눈에 좋은 대로 행동하라. 오직 이 사람들에게는 어떤 것도 행치 말라”가 읽혀질 때, 생각들 안으로 불순한 어떤 것이 들어가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특히 악한 생활에 있는 이들의 생각 안으로 조차 불순한 어떤 것이 들어가는 것은 하나도 없다. 이 말들이 내적 의미에서 얼마나 고결한지는 아래 설명으로부터 분명해진다, 이를 수단으로 보여지는 바, 선과 진리에 대한 애착, 그리고 주님의 신성과 거룩함에 폭력을 행사하지 않는 자들이 이 애착을 향유함으로 지각하는 복됨이 의미되어 있다는 것이다.

내가 그들을 당신에게 데려오겠다. 이는 거기로부터의 애착, 즉 선과 진리에 대한 애착으로부터의 복됨을 의미하는데, 이는 여기서 “딸들”에 의해 뜻해진 애착들을 이 단어들이 서술할 때의 단어들의 의미로부터 분명해진다. 어떤 것 자체, 즉 선과 진리에 대한 애착에는 복됨과 행복만이 있다는 것에 주목해 보면, 이것은 악과 그것의 즐거움 안에 있는 이들에게는 심각하게 알려져 있지 않다. 그들에게 선과 진리에 대한 애착에 있는 복됨과 행복이라는 것은 비 존재하는 어떤 것, 또는 슬프게하는 어떤 것으로 나타난다; 그들 중 어떤 이에게 그것은 고통스런 것, 심하게는 죽을 정도의 것으로 나타난다. 이것이 악귀와 악령들과 더불은 경우이다. 이들은 만일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의 기쁨, 결과적으로 악들로부터의 즐거움이 자기들로부터 거두어진다면, 그들에게 남은 생명이란 아무 것도 없다; 그리고 그들에게 선과 진리에 대한 애착의 복됨과 행복과 더불어 진정한 생명이 시작함을 보여줄 때, 그들은 그들 자신들의 기쁨의 손실로부터 유발되는 슬픔을 느낀다; 그들을 이런 생명 안에 있는 이들 사이에 데려다 놓자, 그들은 고통과 괴로움이 그들을 휘어감고 만다; 이 외에도 그들은 시체와 같고 끔찍하게 지옥적인 어떤 것을 자신들 안에서 느끼기 시작한다; 그리하여 그들은 천국을 그들의 지옥이라 부른다, 그리고 도망하여 가능한 주님의 얼굴로부터 자신들을 감추려 동분서주 한다.
그럼에도 모든 복됨과 행복은 사랑과 선행으로부터 있는 선에 대한 애착 안에 존재한다는 것, 그리고 또한 진리가 선으로 인도해 주는 만큼에서 진리에 대한 애착에 존재한다는 것은 천국은 이 복됨에 존재한다는 사실로부터, 그리고 복됨은 주님을 통하여 우리의 가장 깊은 곳 안으로 흐르기 때문에 그것을 받는 이들의 가장 깊은 곳이 영향을 받는다는 사실로부터 알 수 있다. 그 다음 지혜와 총명이 마음의 가장 깊은 방으로 들어가 거기를 채운다, 그리고 천국의 불꽃으로 불을 밝힌다, 그리고 천국의 빛과 더불어 진리도 불을 밝힌다; 그리고 이것은 말로 다할 수 없음이라는 표현밖에 이를 표현할 길이 없다. 이 상태에 있는 이들은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의 악들에 있는 이들의 삶이 얼마나 슬프고 통곡스러운 것이며 죽은 상태인지 절실히 지각하고 있다.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의 삶의 본성에 대한 명료한 생각을 얻기 위해, 즉 같은 말로, 자만심, 탐욕, 시기함, 증오함, 복수함, 무자비함, 간음같은 삶의 종류의 본성에 대한 명료한 생각을 얻기 위해, 재능이 있다는 어떤 자가 이런 악들의 어떤 것 하나를 자신을 위해 인격화하여 만들어 본 경우, 또는 그가 자신의 경험, 지식, 이성으로부터 악들 중 하나에 대한 생각을 품을 수 있는 만큼에서 자신의 눈 앞에 그려보았다고 하자, 그리고 그가 그것을 묘사하느라 애쓴 정력 만큼에 비례하여, 즉 더욱 열심히 그리거나 묘사했다면, 그 만큼 그 악들은 얼마나 혐오스러운지, 그것은 얼마나 지옥스러운지, 한마디로 그가 그려본 것은 인간적인 것은 하나도 없다는 것을 보게될 뿐이다. 이런 그림들로 악한 삶에서 자기들의 기쁨을 만끽한 이들은 사후 그렇게 되어간다. 그들의 기쁨이 더 클수록 그들의 형체들은 더욱 혐오스러워진다.
그 반면, 같은 인물이라 해도 그로 하여금 사랑과 선행으로부터의 인격화한 모습을 자신을 위해 묘사하게 하면, 또는 그가 그것을 자신의 눈 앞에서 어떤 형체 아래 표현한다면; 그래서 그가 그려보느라, 묘사해보느라 애쓴 정력에 비례하여 그는 이 형체들이 천사의 것, 축복과 아름다움으로 가득찬 천사의 것임을 볼 것이다, 그리고 그 그림 안에는 천국과 신성으로 가득 차 있음을 지각할 것이다. 이 두 반대되는 형체가 함께 거주할 수 있다고 믿는 자가 있을까? 또는 악마적인 형체가 벗어지고 선행의 형체로 전환될 수 있을까? 그리고 이것이 생명이 반대로 있는 쪽으로 신앙에 의해 가능해질까? 그 이유는 사후 모든 사람의 삶(생명)은 남아있기 때문이다; 또는 같은 말로 사후 그의 애착은 남아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에 일치해서 모든 그의 생각도, 결과적으로 그의 신앙도 남고, 이것은 그의 심정에서 있었던 그대로 그 자체 밝히 드러내놓고 있다. (즉 세상과 달리 감출 수 없다.)

그리고 당신들 눈에 선 인 그대로 그들에게 행하라. 이는 그들이 그것이 선으로부터이다고 지각하는 한도에서 즐김을 의미하는데, 이는 단어의 의미, 뿐만 아니라 이 말들이 “딸들”에 의해 의미되는 애착을 서술할 때 시리즈의 의미로부터도 알게 된다. 롯이 신중하게 자신을 적용했다는 것이 그가 “문쪽으로 그들에게 나감”에 의해 의미되고 있다. 이 신중함이 방금 인용한 말로부터, 그밖에 이 절에 포함된 것과 더불어서 분명해진다. 즉 그들은 이것이 선으로부터였던 한도에서 선과 진리에 대한 애착의 복됨을 즐겨야 한다는 말이다; 이것이 그들이 “자기들의 눈에서 선인 그대로 그들에게 행함”에 의해 의미되어지고 있다. 이것이 선으로부터였던 만큼에서 즐기는 것, 여기서 그들이 선이다고 그것을 알았던 만큼에서를 뜻한다. 이 만큼을 넘는 것을 주님께서는 아무에게도 요구하시지 않는다; 그 이유가 모든 이는 주님에 의해 그들의 신앙의 선을 통하여 생활의 선 쪽으로 구부려지기 때문이다. 고로 구부려지는 방식에서 이방인들은 기독교인과 다르다. 또는 단순 순박한 자와 학식자의 경우도 전혀 다르다, 또는 어른과 아이들의 경우도 다르다. 삶에서 악을 빨아들인 자라면, 그는 악을 금하고 선을 의도하되, 그의 납득력에 따라 행함에 의해서 그를 위한 구부려지는 섭리가 펼쳐진다. 이때 중시되는 것은 그들의 의도 내지 목적들이다; 그리고 비록 그들의 행동들이 그 자체 선에 미치지 못한다 해도, 그럼에도 그들은 선의 어떤 것을 목적으로 이끌어 낸다, 그리고 파생되는 삶으로부터 그들의 선한 목적은 그들의 복됨을 만든다.

오직 이 사람들에게 어떤 것도 하지 말라. 이는 그들이 주님의 신성한 인간과 거룩한 진행에 폭력을 행사해서는 안됨을 의미한다는 것, 이는 “사람들”과 “천사들”을 살핀 앞 대목으로부터 분명해진다.

그 이유가 그들은 내 지붕의 그림자 아래 오셨기 때문이다. 이는 그들이 선행의 선 안에 있음을 의미하는데, 이는 “집”의 의미가 선이다로부터 분명해진다, 이것이 여기서 “지붕의 그림자”라 불리우는데, 아래에서 설명한다.

“지붕의 그림자”가 희미한 일반적 [지각]을 표시하는 주제에 집중해보면 이렇다: 인간과 더불어, 거듭나는 때 조차도, 선과 진리에 관한 지각은 매우 희미하다(불명확하다). 게다가 외적 예배에 있는 이들, 여기서는 “롯이 이를 표현하는데, 이들의 경우는 더 희미하다. 인간이 육체의 것 안에 있는 동안, 즉 지상에 사는 동안, 애착들, 지각들 같이 매우 일반적 본성 속에 있고, 그 결과 아주 희미한데, 누군가가 나는 그렇지 않다라고 상상해도 그 말은 사실이 아니다. 모두 각각의 작은 애착 안에 수많은 세부 사항들이 있고, 그의 지각의 모두 각각의 생각 안에서 조차도 그러하다. 이것들 모두가 당사자에게서는 하나로서 나타난다. 주님의 신성한 자비로부터 애착들과 생각들을 취급할 때 더 알려질 것이다. 때로 인간이 자기 안에 있는 몇 가지 것들을 묘사하고 조사하도록 반추해보는 것은 가능하나, 몇 개를 뺀 무수한 것들은 당사자에게도 감추인 채로 놓여져 있다. 이것은 한마디로 끝도 없이 무수한 바, 인간의 지식으로의 파악은 가당치도 않다. 즉 그가 육체의 삶에 있는 한 불가능하다. 그러나 이것들은 육체적, 세상적 삶이 폐지된 이후, 명명백백해져 있다. 이는 충분히 앞의 대목에서 살핀 바 있다. 즉 사랑과 선행의 선 안에 있어왔던 자는 다른 삶으로 건너갈 때, 그는 희미한 삶으로부터 명료한 삶으로 건너간다. 그야말로 밤의 차원에서 낮의 차원으로 건너간다는 말이다; 그리고 그가 주님의 천국으로 건너감에 비례하여 그는 더욱 더 명료한 빛으로 건너가고, 이는 그가 천사들이 있는 빛에 도착할 때까지이다. 즉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지혜와 총명의 빛에 도착할 때까지이다. 이 빛에 지상의 인간이 있는 빛은 어둠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여기서 그들이 “그의 지붕의 그림자”에 왔다고 말해진다; 이를 수단으로 “롯”에 의해 의미된 이들은 그들의 희미한 일반적 [지각]에 있음이 의미되어진다; 즉 그들은 주님의 신성과 거룩함에 관해 아는 것이 매우 적다는 말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그들은 이 사항들을 믿고 인정한다, 그리고 이것들은 선행의 선 안에, 즉 이 선 안에 있는 이들과 더불어 현존한다는 것이다.

9절. 그리고 그들은 말했다, 뭐라고…그리고 그들이 말했다, 이 자는 떠돌다가 온 자, 그가 실로 재판하려 하는가? 지금 우리는 그들보다 더 너에게 피해를 주어야겠다. 그리고 그들은 사람을, 롯을 심하게 밀쳤다. 그리고 가까이 다가서 문을 부수어 열고자 하였다.

그리고 그들이 말했다. 이는 분노함으로부터의 응답을 의미하는데, 앞뒤 문맥으로부터도 자연스레 설명되므로 그 이상의 설명은 생략한다.

“뭐라고.” 이는 분노함으로 위협함을 의미한다. 즉 선행의 선에 맞서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롯”의 의미가 선행의 선이고, 이 선에 관하여 말해지는 바에서 알게 된다; 그리고 이 선들이 분노로부터의 위협을 당하고 있다는 것은 단어 자체로부터 알아진다. 또한 이어지는 말 역시 그들이 만일 자기들을 설득하려 든다거나 하면, 이 선 모두를 거절하려드는 기세가 “뭐라고”에 담겨 있다.

그리고 그들이 말했다, 이 자는 떠돌다가 온 자, 그가 실로 재판하려 하는가?
이는 또 다른 교리와 또 다른 삶에 있는 이들을 의미한다는 것이 “떠돌아 다님”의 의미로부터, 이것이 가르쳐지는 것과 살아가는 것, 고로 교리와 삶임이 분명해진다. 교회의 상태가 여기서 마지막 때에 가까이 있는 것을 묘사하고 있다. 이때란 선행이 없기 때문에 신앙도 없는 때, 즉 선행이 삶에서 퇴각했기 때문에 선행의 선이 교리로부터 거절당하는 것을 묘사하고 있다.
여기서 취급한 주제는 자신이 좋아하는 쪽으로 설명해가다 결국 선행의 선을 왜곡해버리고 마는 이들이 아니다. 이들이 좋아하는 것들이란 자기들이 가장 위대해지기 위해, 세상에서 좋다는 것들을 소유하기 위해 갖가지 술책과 기교와 기만하는 수단을 동원하다가 결국 선행의 선을 더럽히는 부류가 아니고, 선행의 선들, 또는 선한 일들에 관해서는 아예 아무 것도 듣고 싶어하지 않는 이들, 오직 그들이 원하는 것은 신앙을 선행과는 별개의 것으로 취급하려는 이들이다. 그들의 추론 방식은 이렇다: 인간 안에는 악밖에 없다는 것, 고로 인간으로부터 있는 선은 엄밀히 말하면 그 자체 악이다는 것, 그러므로 그 선이 악이기도 한 바, 어떤 구원도 가능하지 않다는 것; 그리고 어떠한 선을 수단으로 해서도 아무도 천국에 갈만한 자격을 갖출 수 없다는 것, 또는 그것을 수단으로 구원되어지지 않는다는 것, 그러나 주님의 공적(주님의 인류를 위한 피흘리심)을 인정하는 신앙만으로 구원되어진다는 것이다. 이것이 교회가 기한이 만료되기 시작하는 마지막 때에 번성하는 교리이다. 이것이 마지막에 가까울수록 더욱 열렬히 가르쳐지고, 한마디로 그들은 이것에 신앙의 전부를 걸고 있는듯 하다.
그러나 위의 교리로부터 인간은 악한 생활과 선한 신앙을 가질 수 있다고 추리하는 것은 거짓이다. 또는 선 안에서 주님을 가지고, 선 안에서 행복과 복됨을 가지지만, 인간 안에는 악밖에 없기 때문에, 인간은 천국을 갖게하는 주님으로부터의 선을 받을 수 없다고 추리해버리는 것은 거짓이다. 한 술 더 뜬 거짓은, 어떤 선을 수단으로 아무도 천국에 갈 자격을 갖지 못한다는 것, 그러므로 자아 공적은 흉측한 사악함이다에 주목해볼 때 주님으로부터 천국의 선을 받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추리해버리는 기발난 상상이다. 그러나 주님으로부터 받은 선 안에 모든 천사들이, 거듭나는 모든 이들이 있고, 주님으로부터 수여된 선을 받은 이들이 기쁨을, 복됨을, 선 자체, 선에 대한 애착을 향유하고 있다. 이 선에 관련하여, 즉 이 선행에 관련하여, 주님께서 마태복음서에서 이야기하신다:
너는 이렇게 말해온 것, 즉 너는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적을 미워하라라고 들었을 것이 다; 그러나 나는 네게 말한다, 네 적을 사랑하라,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 복을 빌어 주어라, 너를 미워하는 그들에게 선을 행하라, 그리고 네게 악담을 하고, 너를 박해하는 그들을 위 해 기도하라. 그리하면 너는 천국 안에 계신 네 아버지의 아들들 일지 모른다; 만일 너희가 너를 사랑하는 그들만을 사랑한다면, 네게 어떤 보상을 가지겠느냐? 그리고 만일 너희가 네 형제에게만 인사 한다면, [다른 사람] 보다 네가 더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이냐? 세리 조 차도 그렇게까지 하지 않더냐? (마. 5:43-48)
위 말씀에 추가되는 말씀이 누가복음서에 있다:
선을 행하라, 그리고 빌려주어라, 다시 [받는다는 것은] 아무 것도 희망하지 말라; 그리고 너에게 대한 보상은 클 것이다, 그리고 너희는 가장 높으신 분의 아들들일 것이다
(눅. 6:27-36)
위 구절에 주님으로부터 있는 선이 묘사되고 있다, 그리고 이것은 보답을 받는다는 의도에서 자유하다; 그렇기 때문에 이 선에 있는 이들은 “천국에 계신 아버지의 아들들”과 “가장 높으신 분의 아들들”이라 불리운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이 선 안에 계시기 때문에, 보상 역시 있다. 누가복음서에서:
너는 정찬이나 만찬을 만들 때, 네 친구들을, 네 형제들을, 네 친척들을, 네 부유한 이웃들 을 부르지 말라; 그들 역시 다시 당신을 초대해서, 초대했던 당신에게 보답을 만들지 않게 하라. 그러나 너는 잔치를 만들 때, 가난한 자, 불구자, 절음발이, 소경을 부르라; 그리고 너는 복되어 질 것이다; 그 이유는 그들은 네게 보답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너는 정의로운 자의 부활에서 보답 받아질 것이다 (눅. 14:12-14).
“정찬”, “만찬”, 또는 “잔치”는 선행의 선을 표시한다, 이 선행의 선에 인간과 더불은 주님의 거처가 있다; 위 인용 구절에서 묘사하고 분명하게 한 것은 보답은 선 자체이다는 것, 그 이유는 선 자체에 주님이 계시기 때문; 이렇게 말해지기 때문이다, “너는 의로운 자의 부활에서 보답 받을 것이다”라고 말해지기 때문이다.
선을 행하라는 것은 주님의 명령이기 때문에 자신으로부터 선을 행하려 노력했던 자도 결국 그 선을 (주님으로부터) 받는다. 그 후에 모든 선은 주님으로부터 있다는 교리의 가르침을 받게 되고 그 신앙을 인정한다. 이때 그들은 자아 공적에 아주 반대된 상태에 있는 바, 과거 그들이 지녔던 생각을 떠올리면 매우 슬퍼해 한다. 게다가 이런 과거의 생각 때문에 현재의 자기들의 복됨이 상대적으로 움추려지는 듯한 느낌마저 지각한다.
위와 같은 부류와 딴판인 자, 즉 선행이 없는 자, 악한 생활을 이끈 자, 구원의 필수 요건은 선행이 아니라 신앙이고, 따라서 신앙을 중시해야 한다고, 하여 신앙만이면 부족할 것 없다고 결론을 내고 가르치고 고백하는 자들이다. 이 특성의 사람들은 이 선이 가능하다는 것을 알아채지 못한다. 그런데 내가 다른 삶에서 경험한 바, 경이로운 것은, 이들도 다른 삶에서는 자기들의 선한 행위를 무엇이든 천국에 들어가는 자격을 갖추는데 요긴하다고 하여 그것을 재 수집하고 있는 점이다; 그 이유는 그때 처음 동안은 그들이 선행으로부터 분리된 신앙에서 구원은 없다는 것을 알아채지 못해서 자기들의 선한 행위를 무엇이든 다시 모아보려 하기 때문이다. 이들에 관해서 주님께서 마태복음에서 말하신다:
그들이 그 날에 나에게 말할 것이다, 주여, 주여, 당신의 이름으로 예언했고, 그리고 당신의 이름으로 악마들을 내쫓았고, 그리고 당신의 이름으로 권능의 일들을 하지 않았습니까? 그 러나 그때 나는 그들에게 고백할 것이다, 나는 너를 모른다; 나로부터 떠나라, 불법을 행한 너희들아 (마. 7:22, 23).
주님 자신께서 매우 자주 가르치신 사랑의 선과 선행의 선에 관한 것은 무엇이든 위 구절의 사람들은 관심을 갖지 않았다는 것이 저 세상에서는 적나나하게 나타난다; 그들에게 이 선들은 흘러가는 구름 정도, 밤중에 물체를 식별하는 정도밖에 더 알지 못하고 있다. 이런 자들에 대한 예를 다음 성경 구절에서 읽어보자. 즉, 마. 3:8, 9; 5:7-48; 6:1-20; 7:16-20, 24-27; 9:13; 12:33; 13:8, 23; 18:21-23, 끝부분; 19:19; 22:34-39; 24:12,13; 25:34-끝절; 막. 4:18-20; 11:13, 14, 20; 12:28-35; 눅. 3:8, 9; 6:27-39, 43-끝절; 7:47; 8:8, 14, 15; 10. 25-28; 12. 58, 59; 13:6-10; 요. 3:19-21; 5:42; 13:34, 35; 14:14, 15, 21, 23; 15:1-8, 9-19; 21:15-17. 이상의 구절에 있는 것들이 본문의 소돔의 사람들이 롯에게 한 말에서 의미되어 있다. 즉 “이 자들은 떠돌다가 온 자 아니냐? 그들이 실로 우리를 심판하려는가?”, 즉 또 다른 교리와 삶에 있는 자가 우리를 가르치려 하는가? 이다.

그리고 그가 실로 우리를 심판하려는가? 이는 그들이 우리를 가르칠 것인가?를 의미하는 것은 “심판함”이 가르치는 것이다를 의미함에서 알게 된다. “정의”는 선을 실행함을, “심판”은 진리를 가르침인 것은 이미 살핀 바 있다. 내적 의미에서 “심판함”은 훈육, 또는 가르침이다. 진리를 가르치는 것은 선인 것을 가르치는 것과 같다. 그 이유는 모든 진리는 선을 찾기 때문이다.

이제는 우리는 그들보다 너에게 더 피해를 주어야겠다. 이는 그들이 주님의 신성한 인간과 거룩한 진행보다 선행의 선을 더 거절할 것임을 의미하는데, 이는 “롯”이 선행의 선임에서 알게 된다; 롯은 선행의 선에 있는 이들을 표현한다; 그리고 “사람들”, 또는 “천사들”의 의미가 신성한 인간과 거룩한 진행 측면에 관련된 주님이시다로 부터도 알게 된다. 그러므로 “그들보다 너에게 더 피해를 입힌다”는 것이 위와 같은 의미를 가진다가 분명해진다. 교회 내에서 악 안에 있는 이들은 그들이 주님을 부정함보다 더 선행을 거절하는 이유는 그들이 종교라는 것을 수단으로, 거룩한 내적 예배 없는 거창하고 화려한 외적 예배를 수단으로 그들의 현세에의 욕망을 충족하려 들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이 이 외적 예배를 더 신성하고 거룩하게 만들수록 그들의 위엄과 재물은 더 불어난다. 이 외에도 감추여 있는 많은 원인들이 있으나 그래도 (저쪽에 가면) 명백히 드러내놓을 수밖에 없다. 진실인즉, 이들이 이쪽을 거절하면 저쪽도 거절한다는 것이 소돔의 사람들이 다가와서 문을 부수어 열겠다고 말함에 의해 표현되어진다. 이는 그들이 양쪽 다 파괴하려 노력하기에 이르렀다는 것이 의미되어진다. 그러나 행동으로 폭발하려는 이 노력을 막는 것은 결코 감추여 있지 않다.

그들은 사람을 밀쳤다. 이는 그들이 진리에 폭력을 행사하고 싶었다를 의미하는데, 이는 사람(vir, 남자)의 의미가 인간에 있는 지적, 합리적 측면인 바, 그 결과 진리임으로부터 알게 된다. 진리에 폭력을 행사한다는 것은 신앙의 것들을 타락시키는 것이다; 그리고 신앙들이 선행으로부터 분리될 때, 그리고 신앙은 생활의 선으로 인도한다는 것을 부정할 때, 신앙들은 타락된다.

롯을 심하게 (밀쳤다). 이는 그들이 선행의 선에 특별히 폭력을 행사하고 싶었음을 의미하는데, 이는 “롯”의 의미가 선행의 선임으로부터 알게 된다. 문장 표현 자체로부터, 즉 “그들은 사람을, 롯을 심하게 밀쳤다” 로 구분되게 표현하고 있다. 하여 사람과 롯은 각기 다른 표현이 되어 의미가 각기 다름을 암시한다.

그리고 가까이 다가서 문을 부수어 열고자 하였다. 이는 그들이 둘 모두를 파괴하려 노력함을 의미하는데, 이는 “가까이 다가감”의 의미가 노력함이다로부터, 그리고 “문”의 의미가 주님과 선을 받아들임, 또는 선 자체와 주님 자체이심으로부터 알려진다.

10절. 그리고 사람들은 그들의 손을 뻗쳤다, 그리고 롯을 집안으로 그들에게로 데려왔다, 그리고 문을 닫았다. “사람들이 그들의 손을 뻗쳤다”란 주님의 강력한 원조를 의미한다. “그리고 롯을 집안으로 그들에게로 데려왔다”란 주님은 선행의 선 가운데 있는 이들을 보호하심을 의미한다. “그리고 문을 닫았다”란 또한 그분은 선행의 선 가운데 있는 이들을 보호하시기 위해 그들에게의 모든 접근을 차단하심을 의미한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들의 손을 뻗쳤다. 이는 주님의 강력한 원조를 의미하는데, 이는 “사람들”의 의미가 주님이신 것, 그리고 “손”의 의미가 힘이다에서 알게 된다.

그리고 롯을 집안으로 그들에게로 데려왔다. 이는 주님께서는 선행의 선에 있는 이들을 보호하심을 의미하는데, 롯의 표현이 선행의 선 안에 있는 이들이다로부터; 그리고 “그들에게로 집안으로 데려옴”의 의미가 보호하심이다로 부터 알게 된다. “집안으로 데려옴”은 선 안으로 데려옴이다; 그리고 선 안으로 데려온 이들은 천국으로 데려와진다; 그리고 천국으로 데려와진 그들은 주님에게로 데려와진다; 그러므로 그들은 자기들의 혼이 악에 감염됨에서 보호되어진다. 선에 있는 이들은 (지상에 있더라도) 그의 혼은 천사들의 공동체 안에 있다, 다시 말해 선 안에 있는 이들은 육체 안에서 사는 동안에도 그는 천국 안에 있다는 말이다. 비록 당사자는 천국 입장을 위한 준비 단계에 있고, 육체적 삶이라는 한계 때문에 이를 눈치채지 못하고, 천사의 기쁨도 확연히 지각할 수 없을 뿐이다.

2380. 그리고 문을 닫았다. 이는 그분께서는 그들에의 모든 (악의) 접근도 차단하신다를 의미하는데, 이는 “문”의 의미가 안으로 들임, 고로 접근함이다로 부터 알게 된다. 그러므로 “문을 닫는다”란 접근함을 미리 막으심을 의미한다. 다른 삶에서는 선을 악으로부터 분리해두심으로 접근은 확실히 막아진다. 그리하여 선한 자들이 거짓의 끈질긴 설득력과 악의 탐욕들로부터 감염당하는 일이 생길 수 없다. (완전한 분리이어서) 지옥으로부터 내 뿜어지는 것들이 천국을 꿰뚫을 수 없다. (저 세계에서의 접근 차단은 분리해둠을 수단으로 하여서 이지만, 육체의 삶에서는 분리가 완전하게는 가능치 않은 바) 지상에서의 접근함은 거짓의 원리와 설득력들이 선한 이들에 맞설 때 그것들을 무기력해지게 만들므로 차단되어진다. 그 이유가 악으로부터의 거짓, 또는 거짓으로부터의 악이 선한 이들에게 주입될 때면 언제든지, 그 주입 방법이 악인에 의한 말에서이든, 악령이나 악마에 의한 생각에서이든, 천사들은 그것을 비켜서게 하고, 그리고 그것을 의문 가운데 있는 당사자가 확증했던 어떤 선과 진리 쪽으로 구부린다.
인간은 육체의 삶 동안, 그는 자기가 선행의 선에 있는지, 아닌지를 거의 알지못하는 수준에서 생각과 지각, 즉 지극히 일반적이고 희미한 생각과 지각을 가질 뿐이다; 그리고 또 하나의 이유는 그가 선행이 무엇인지, 이웃이 무엇인지를 모르기 때문에서이다. 어쨌든 위의 의문에 있는 인물이 누구인지 말해야 할 것 같다. 양심을 가지는 선행의 선에 있는 모든 이들, 그리고 양심을 가짐으로부터 이웃에 관해 선량하게 생각하고, 그의 복지를 바라고, 심지어는 그의 원수들에 이르기까지에서도 그렇게 되기를 바란다; 그리고 이런 선처함에 어떤 보상을 기대하지 않는다. 이들의 범주는 교회 내에서이든, 또는 교회 밖에서이든, 모두에서 선한 이들이다. 교회 내에 있는 이들이라면, 그들은 주님을 예배하고 그분이 가르치신 것을 기꺼이 듣고 행한다.
그 반면, 악에 있는 이들은 양심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 이유가 그들은 올바르고 공정한 것 따위에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그나마 그들이 이것에 관심을 가진 듯 타인에게 보이는 경우는 오로지 그러므로 얻어지는 명예나 이득 때문이다. 영적 생명에 영감을 주는 선과 진리에 관해서 그들은 모른다. 게다가 이것이 영적 생명의 골격된다는 것을 헛소리라고 일축한다. 이것보다 더 적극적인 경우이다: 즉 그들은 이웃을 악한 쪽에서 생각한다. 게다가 이웃에 상해를 입히고 싶어한다. 자기에게 호의를 보이지 않으면, 친구였다해도 상해를 입힌다. 이러므로 그는 즐거움을 얻는다. 그들이 선을 행하는 것은 보수가 있을 경우 뿐이다. 교회 내에 이런 자가 있다면, 그는 은밀히 주님을 부정한다; 그리고 자기의 명예나 이득에 손해가 없다면, 공개적으로 주님을 부정하는 것도 주저하지 않을 것이다.
어쨌든 두 부류가 있다. 즉 자기가 선 안에 있는데도 자기가 선 안에 있지 않다고 생각하는 자, 그 반면 자기가 선 안에 있지도 않은데, 선 안에 있다고 착각하는 자이다. 전자의 그렇게되는 이유는, 그가 자신에 있는 선을 곰곰이 반추할 때, 그가 속한 천국 공동체의 천사에 의해 즉시 그런 생각이 주입되어 그가 지닌 선이 자신의 공적 때문으로 돌아섬으로 자신이 타인보다 잘난 듯 여겨지는 것을 미리 막아주기 때문이다. 이런 지켜줌이 없으면 그들은 시험으로 즉시 빠져들고 만다.
후자에 속하는 인간의 경우, 그렇게되는 이유는 그들이 반추할 때, 그들을 동반하는 악귀나 악령에 의해 즉각 주입되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이런 악귀들은 악이 선이라고 착각하고 있다. 그래서 그들이 타인에게 행하는 선은 무엇이든 자신을 사랑하고 세상을 사랑함을 위해서, 다른 삶에서조차 보수 받아지기를 바라고 있다; 고로 그들은 공적이 자신으로부터임이 당연한 것, 자기가 타인보다 우월하고, 타인은 자기보다 덜 중요함이 당연한 귀결이다. 경이로운 것은, 이들이 이와 다르게 생각할 때, 그들도 시험에 빠지고, 시험에 그들은 항복한다는 것이다.

11절. 그리고 집의 문에 있었던 사람들, 작은 자로부터 큰 자에 이르기까지 그들은 눈이 멀어 버렸다. 그리고 그들은 문을 찾느라 애썼다.

그리고 집의 문에 있었던 사람들. 이는 합리적인 것들과 이로부터 파생되는 교리물들을 의미하고, 이것들을 수단으로 선행의 선에 폭력이 있어진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는 “사람(남자)”의 의미가 합리성이다로부터; “문”의 의미가 안으로 들임, 또는 접근, 즉 진리이든, 선이든 어디로 인도함, 그리고 고로 교리적인 것이다로부터; 그리고 “집”의 의미가 선행의 선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여기서 취급된 이들은 문을 부수려고 문 가까이 온 자들, 즉 선행의 선과 주님의 신성한 인간과 거룩한 진행 모두를 파괴하려 한 자들이다. 그러므로 악한 합리성과 그로부터 파생되는 거짓 원리들이 뜻해지고 이를 수단으로 폭력이 선행의 선에 가해지려는 것이다.

그들은 눈이 멀어 버렸다. 이는 그들이 거짓들로 채워졌다를 의미하는데, 이는 “눈이 멈”의 의미로부터 분명하다. 말씀에서, “눈이 멈”은 거짓에 있는 이들, 또한 진리에 무지한 가운데 있는 이들이라고 단정한다. 이 두 상태 모두 “소경”이라고 불리운다; 그러나 특별한 예에서 뜻해지는 것은 시리즈 또는 연결 문맥으로부터 알려질 수 있다. 특히 내적 의미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거짓에 있는 이들이 “소경”이라 불리는 것을 이사야서에서 찾아보자:
그의 경비병은 소경이다, 그들은 모두 무지하다, 그들은 모두 귀머거리 개들이다, 그들은 짖을 수 없다 (이. 66:10)
“눈이 먼 경비병”은 추론함으로부터 거짓 안에 있는 이들을 표시한다. 다시:
우리는 빛을 찾고 있는데, 어둠이 보인다; 빛남을 (찾는데), 그러나 우리는 짙은 어둠에서 걷는다; 우리는 소경 같이 벽을 더듬는다 (이. 59:9, 10).
예레미야애가서에서:
그들은 거리들에서 소경 같이 헤맸다; 그들은 자신들을 피로 더럽혔다; 그들이 더럽힐 수 없는 것을 그들은 자기들의 옷으로 만진다 (애. 4:14).
위 구절은 모든 진리들이 더럽혀져 있었다를 뜻하고 있다; “거리들”은 진리들을 표시하는데, 그 안에서 그들이 엉뚱한 길로 들어섰다를 뜻한다.
스가랴서에서:
그 날에 나는 말들을 깜짝 놀라게 해서 죽게하고, 기수들은 미치게 해서 죽게 할 것이다. 백성들의 모든 말들을 나는 소경되게 함으로 칠 것이다 (슥. 12:4).
여기서와 그 밖의 장소에서, “말”은 지성적인 것을 표시한다. 그러므로 “말이 깜짝 놀라서 죽고”, “백성의 말들이 소경되게 해서 죽게 함”은 (지성이) 거짓으로 채워질 것이다는 말이다.
요한복음서에서:
심판을 위해 나는 세상에 왔다. 즉 보는 자는 보지 못하도록, 보는 자가 소경이 되도록 하 는 것이다. 바리새인 중의 하나가 이 말을 듣고, 말하기를, 우리 역시 소경인가?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하셨다, 만일 너희가 소경이다면, 너희는 죄를 가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너 희는 말한다, 우리는 보고 있다, 그러므로 너희의 죄는 남아 있다 (요. 9:39-41).
위 구절에서 “눈이 멈”은 두 의미에서, 즉 거짓에 있는 이들, 그리고 진리에 무지한 이들에 관해서 말하고 있다. 교회 내에 있는 이들과 진리가 무엇인지 아는 이들과 더불어서, “소경”은 거짓이다; 그러나 진리가 무엇인지 모르는 이들 (예를 들면 교회 밖에 있는 이들)과 더불어, “소경”은 진리에 무지함이다, 그리고 이들은 죄 없음이다.
다시:
그분은 그들의 눈을 멀게 하셨다, 그리고 그들의 심정을 굳어지게 하셨다, 그리하여 그들은 그들의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그들의 심정으로 이해하지 못한다, 그리고 내가 그들을 치료하 지 않도록 하려 해서이다 (요. 12:40; 이. 6:9-11).
위 구절은 그들이 진리들에 있는 것보다 거짓들에 있는 것이 더 낫다는 것, 그 이유는 그들은 악한 생활 안에 있기 때문, 만일 그들이 진리에 관해 가르쳐진다면, 그들은 배운 진리들을 거짓으로 만들고, 생활하는 악들로 진리를 더럽힐 것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 이유에서 소돔의 사람들을 눈이 멀어버리게 하신 것이다. 즉 그들의 교리적인 것들은 거짓들로 차 있었다는 말이다.
소경인 것이 거짓인 것을 의미했기 때문에, 표현 교회에서, 눈이 먼 제물을 바치는 것이 금지되었다 (레. 22:22; 신. 15:21; 말. 1:8). 또한 소경된 성직자가 제단 위에 바치려고 가까이 오는 것을 금했다 (레. 21:18, 21).
“소경”이 진리에 무지함이라 단정되는 것, 이는 이방인들의 경우가 이에 해당되는데, 이사야서에서:
그 날에 소경이 책의 말들을 들을 것이다, 그리고 소경의 눈이 짙은 구름으로부터와 어둠 으로부터 볼 것이다 (이. 29:18).
위에서 “소경”은 진리에 무지한 자를 표시한다, 한마디로 교회 밖에 있는 이들이다. 다시:
눈을 가지고 있는 소경된 백성을 데려오라; 그리고 귀를 가진 귀머거리 백성(을 데려오라) (이. 43:8).
위는 이방인들의 교회에 관해 말해진 것이다. 다시:
나는 소경을 그들이 알지 못하는 방법으로 인도할 것이다; 나는 그들 앞의 어둠을 빛으로 만들 것이다 (이. 42:16).
그리고 다시:
나는 너를 백성의 빛을 위해 주어서, 소경된 눈을 열게하고, 토굴 감옥으로부터 사로잡힌 자를, 감옥으로부터 어둠에 앉은 그들을 데려오게 할 것이다 (이. 42:6, 7).
위는 주님의 강림이 취급된다. 그때에 진리에 무지한 이들이 가르쳐질 것이다; 그러나 거짓에 있는 이들은 자신들이 가르침을 받게 허용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그들은 진리에 친숙해있으나, 진리에 반대되게 확증했기 때문, 하여 빛을 어둠으로 돌려놓은 자들, 이는 쫓아내질 수 없는 (고쳐질 수 없는) 상태가 아니기 때문이다. 누가복음서에서:
집의 주인이 그의 종에게 말했다, 도성의 거리나 골목길로 빨리 나가라, 그리고 가난한 자, 그리고 불구자, 그리고 절음발이, 그리고 소경된 자를 데려오라 (눅. 14:21).
위에서 주님의 왕국이 취급되어진다. 그리고 가난한 자, 불구자, 절름발이, 소경이 뜻해지는 것이 아니라, 영적 의미에서 이런 상태들이 뜻해진다.
다시:
예수께서 말하셨다, 너희는 요한에게 소경이 보고, 절름발이가 걷고, 나병환자가 깨끗해지 고, 귀머거리가 듣고, 죽은 자가 일어나지고,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고 말하라
(눅. 7:22).
위에서, 글자 의미에 따라 “소경”, “절름발이”, “귀머거리”, “죽은 자”, “가나한 자”에 의해 실제의 그들이 뜻해진다. 그 이유는 그때 당시 소경이 빛을 받았고, 귀머거리가 들었고, 문둥병이 치료되었고, 죽은 자가 살아났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사야서에서 똑같은 말이 내적 의미에서 뜻해진다:
그때 소경의 눈이 열려질 것이다, 그리고 귀머거리의 귀가 막히지 않을 것이다, 절름발이가 숫사슴 같이 뛸 것이다, 그리고 벙어리의 혀가 노래할 것이다 (이. 35:5, 6).
위는 주님의 강림이 취급된다, 그리고 그때에 새로운 교회, 이것은 이방인들의 교회라고 불리운다. 이방인들이 교리와 삶의 측면에서 “소경”, “귀머거리”, “절름발이”, “벙어리”라고 불리운 것이다. 우리가 알고 있어야하는 것은, 주님에 의해 수행된 모든 기적들은 언제나 내적 의미를 포함하고 의미된다는 것, 고로 소경, 절름발이, 문둥병자, 귀머거리, 죽은 자를 치료하심, 그리고 가난한 자에 의해서도 내적 의미가 포함되었다는 것이다. 이렇기 때문에 주님의 기적들은 신성하다, 마찬가지로 구약 시대에서 이집트에서, 광야에서의 기적들, 뿐만 아니라 말씀에 기록된 모든 기적들도 마찬가지이다. 그야말로 한마디로 이것은 비밀함들이다.

작은 자로부터 큰 자에 이르기까지. 이는 세세한 것(특수적인 것)과 포괄적인 것(일반적인 것)을 의미하는데, 이는 집의 문에 있던 사람들인 합리적인 것과 이로부터 파생되는 교리적인 것을 서술 할 때의 내적 의미에서 분명해진다. 특수성과 일반성은 작은 것과 큰 것의 관계에서 연관되고 있다. 대체로 세세한 것은 작은 것, 포괄적인 것은 큰 것에 해당된다고 생각하면 된다.

그리고 그들은 문을 찾느라 애썼다. 이는 그들이 자기들을 선으로 인도하는 어떤 진리도 보지 못하도록 함을 의미하는데, 이는 “문”의 의미가 안으로 들임과 접근함, 그리고 진리 자체인 바, 고로 진리가 선으로 인도함으로부터 알게 된다. 그러나 여기서 “문”에 의해서는 진리를 소개하는 지식들이 의미되어진다; 그 이유가 “문”은 집의 앞에 있기 때문이다; 6절에서 말해진 바, “롯은 문쪽으로 밖으로 나갔고, 자기 뒤에서 문을 잠갔다”‘ 그러므로 “문을 찾느라 애를 먹었다”는 그들이 선으로 인도하는 어떤 진리도 보지 못하는 것을 표시한다.
소돔인 같이 되어가는 자들은 마지막 때에 특별히 더 두드러지는 현상이다. 이들은 추론력을 발휘해 교리적인 것들을 부화해 낸다. 그들은 교리적인 것들이 납득되지 않으면 전혀 믿지 않는다. 이런 경우에서 악의 생명이 그들의 합리성 안으로 계속 흘러든다. 그리고 일종의 오류적인 빛이 악의 애착들 안으로 쏟아부어 진다. 그리고 그것들이 거짓을 진리로 보게 한다. 마치 야간의 불빛에서 유령을 보는 것과 같다. 이런 것들이 다각적 방법에서 확증되어진다, 그리고 교리적 주제에 끼어든다. 하여 (애착으로부터 있는) 삶은 (구원받음에서) 효력이 없고, (생각으로부터 있는 ) 신앙만이 효력이 있다고 말하는 이들의 교의에 파고 들어 앉는다.
모든 원리들, 무엇이든, 거짓 자체조차도, 한 번 자리를 차지하면, 무수한 것들에 의해 확증되어질 수 있고, 마치 바깥쪽 형체상에서는 진리인듯 표출되어 모든 이에게 알려질는지 모른다. 여기에서 이교(이단)들이 유래한다. 이교로부터, 한 때 확증되었을 때, 인간은 결코 물러나지 않는다. 어쨌든 거짓 원리로부터 흐르는 것은 거짓 밖에 없다; 설사 그들 사이에 진리들이 끼어든다 해도, 그들은 거짓 원리를 확증하곤 할 때 진리들을 거짓화한다, 그 이유는 그들은 거짓의 본질로 해서 오염되어 있기 때문이다.
진리 자체가 원리로서 받아들여지는 때의 경우는 아주 다르다. 예를 들면, 이런 사항이 확증되어진다. 즉 주님을 사랑함과 이웃을 향한 선행에 온 율법과 예언이 걸려있다는 것, 그러므로 이 두 사랑은 모든 교리와 예배의 본질이다는 것을 확증한다. 이 경우에서 마음은 말씀에 있는 무수한 것들에 의해 계발되어지고, 거짓 원리의 불명료함에 감추여 있지 않는다. 그렇다, 이럴 경우 이교라는 말 자체도 사라진다. 그리고 한 개의 교회가 수많은 사람들로부터 발생할 것이다. 즉 차이가 나게 하는 교리나 의식의 차이에 상관 없이 한 개의 교회일 뿐이다.
이와 같은 상황이 고대 교회였다. 이 교회는 많은 왕국들로 퍼졌다. 즉 아시리라, 메소포타미아, 시리아, 에티오피아, 아라비아, 리비아, 이집트, 블레셋, 두로와 시돈까지, 그리고 요단 양쪽 가나안의 토지에 퍼졌다. 이들 사이에서 교리나 의식 절차 같은 것은 달랐으나, 여전히 교회는 하나였다, 그 이유는 그들에게 선행은 본질적인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때 천국에서 같이 지상에 주님의 왕국이 있었다. 만일 지금 그러하다면, 모두는 한 사람으로서 주님에 의해 통치되어질 것이다; 그 이유가 그들 각각은 한 몸 속의 기관이나 조직에 속해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각자의 기능과 역할은 같지 않지만 모두는 한 개의 심장과 관계되고, 거기에 모두와 각각의 형체들이 의존하고 있는다. 이때 각각의 인물들은 제각기 나름대로의 형편에 맞는 스타일의 예배와 교리를 지닐지라도 이것은 나의 형제요, 나는 그가 주님을 예배하며, 선한 사람이다는 것을 알고 있다.

12절. 그리고 이 사람들이 롯에게 말했다, 너는 여기에 누군가를 아직 더 가지고 있느냐? 며느리, 그리고 사위, 그리고 네 아들들, 그리고 네 딸들, 그리고 네가 이 성 안에서 데리고 있는 자는 누구든지, 그들을 이곳으로부터 밖으로 데려 가라.

그리고 사람들이 롯에게 말했다. 이는 주님께서 선행의 선 안에 있는 이들을 훈계하심을 의미하는데, 이는 “사람들”의 의미가 주님이시다로 부터; 그리고 “말하심”의 의미가 훈계하심이다로 부터; 그리고 롯의 의미가 선행의 선에 있는 이들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롯에게 말했다”는 주님께서 선행의 선에 있는 이들을 훈계하심을 의미한다.

너는 여기에 누군가를 아직 더 가지고 있느냐? 며느리, 그리고 사위, 그리고 네 아들들, 그리고 네 딸들, 그리고 네가 이 성 안에서 데리고 있는 자는 누구든지, 그들을 이곳으로부터 밖으로 데려 가라. 이는 선행의 선 가운데 있는 모든 이들, 그리고 그들에 딸린 모든 것들은 구원될 것이고, 그리고 신앙으로부터 진리 가운데 있는 이들, 그들이 악을 멀리하고 있다면 그들 역시 구원될 것이다를 의미하는데, 이는 “사위”, “아들들”, “딸들”, “도성”, “장소”의 의미들로부터 분명해지고 아래에서 이어진다.
신앙의 진리에 있는 이들이 악을 멀리하고 있는 경우, 그들은 구원됨에 주목해보면, 이렇다. 신앙의 진리들은 선을 받는 그릇 자체이다; 그리고 인간이 악을 멀리하고 있는 한, 그들은 선을 받는다; 그 이유가 선은 주님으로부터 계속적으로 흐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악한 생활은 인간이 지닌 기억, 또는 지식에 있는 진리에 선을 받는 것을 방해한다. 그러므로 인간이 악을 멀리하는 만큼, 그 만큼 선은 들어가고 그의 진리에 꼭 들어 맞추어진다. 그러면 그의 신앙의 진리들은 신앙의 선이 되어간다. 실로 인간은 진리를 알고 있을 수 있다. 또한 어떤 세상적 원인의 부추킴이 있어 그것이 진리이다고 고백하고, 타인도 설득하고 권유하기까지도 할는지 모른다; 그럼에도 그가 악한 삶에 있는 한 그가 떠벌리는 진리는 살아있지가 않다. 이런 나무는 잎만 무성할 뿐 열매가 없는 나무이다; 그리고 그의 진리는 열이 없는 빛, 아무 것도 자라게 하지 못하는 겨울의 빛일 뿐이다. 말씀에서 진리는 빛에 비교되고, “빛”이라 불리우고, 열은 사랑에 비교되고, 사랑은 영적인 열이라 불리운다. 다른 삶에서 진리는 빛을 수단으로 자체를 분명히 하고, 선은 열을 수단으로 자체를 명백히 한다; 그러나 사랑없는 진리는 차거운 빛이고, 사랑있는 진리는 봄철의 빛과 같다. 이것은 신앙의 진리가 선행의 선 없이 있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사위와 아들들, 이들을 수단으로 의미되는 진리들에 있는 이들은 구원되지 않고, 오직 롯과 그의 딸만이 구원되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신앙의 진리들에 있는 이들이 악을 멀리하고 있다면 그들은 구원된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바, 알려지는 것은, 신앙을 고백하는 이들이다 인데, 선행에 관해서는 아무 것도 생각하지 않는 이들에 관해서이다. 이들이 그런 이유가 그들이 선행이 무엇인지 배우지 못했기 때문에 선행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이다. 이들이 아는 선행이란 내 것을 타인에게 주는 것, 타인을 불쌍히 여기는 것이라 상상하고 있다. 그리고 그들은 선행이 실시되어져야 하는 이웃이 무엇인지도 모른다. 그들은 이웃이란 나 외에 모든 이라고 어떤 식별함도 없이 단순히 상상한다. 그럼에도 그들은 선으로부터의 삶 안에 있기 때문에 이웃을 향한 선행의 삶 안에서 살고 있다. 이와 같은 인물들은 여하한 교리에 따라 고백을 한다해도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다. 그 이유는 그들의 신앙 안에 선행이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일반적, 세부적 측면 모두에서 삶 속의 모든 선을 뜻하고 있다. 그러므로 선행이 무엇인지, 이웃이 무엇인지에 관하여 주님의 신성한 자비로부터 따로 살필 기회가 있을 것이다.

“사위”는 선에 대한 애착들과 진리에 대한 애착들과 연계되어 있는 진리들이다. 말씀에서 “사람”은 진리를 의미하고 “아내”는 선을 의미한다. 그 이유가 진리와 선 사이에는 결혼의 모습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위”는 (“딸”이 표시하는) 선에 대한 애착들과 연계된 진리에 관한 지식들을 의미한다. 그러나 여기서의 사위는 예비 사위일 뿐이다. 14절에서 롯이 결혼하기로 되어있는 자들에게 말하기 때문이다.

“아들들”이 진리들이다는 것, 같은 말로 진리들 안에 있는 이들이다는 것은 “아들들”의 의미가 진리들임으로 부터이다.

“딸들”이 선에 대한 애착들, 그리고 진리에 대한 애착들, 같은 말로 이런 애착들에 있는 이들이다는 것은, “딸”의 의미가 이런 애착들에서 이다.

“네가 이 성에서 데리고 있는 자는 누구든지”는 진리로부터 파생된 것은 무엇이든지를 표시하는데, 이는 “성”의 의미가 교리적인 것임으로부터, 고로 복합적으로 있는 교리 속의 진리를 의미함으로부터 알게 된다.

“장소”가 악의 상태이다는 것은 “장소”의 의미가 상태를 의미하고, 특별하게 여기서는 악의 상태를 의미하는데, 그 이유는 여기서의 장소는 소돔이기 때문, 이를 수단으로 일반적 측면에서의 악이 의미된다.

13절. 우리가 이곳을 멸할 터인 즉, 그 이유는 그들의 외침이 여호와 앞에서 커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호와께서는 그것을 멸하기 위해 우리를 보내셨다.

“우리가 이곳을 멸할 터인 즉.” 이는 악한 상태는 자기가 자기를 단죄함을 을 의미한다. 이는 “멸함”의 의미로부터 아는데, 이 단어가 주님을 서술하므로, 내적 의미에서 악을 수단으로 멸해짐, 즉 단죄되어짐 임을 알게 된다. 그리고 “이곳”의 의미가 악의 상태를 의미함에서도 분명해진다. 말씀에서 자주 등장하는 말투는 여호와께서 “멸하신다”이다. 그러나 내적 의미에서 이것은 인간이 자신을 멸한다를 뜻한다; 그 이유가 여호와, 또는 주님께서는 누구도 멸하시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분이 일반적, 특수적 측면 모두에서 만물을 보시고 규율하신다는 사실로부터 마치 파멸이 주님, 또는 여호와로부터 인듯 하게 나타나는 바, 말씀의 많은 장소에서 그와 같이 표현되어져 있다. 그렇게 표현되어야 하는 이유는 만물은 주님의 눈 아래에 있고, 모든 것들이 그분의 후원 아래 있다는 대단히 중요하고, 가장 큰 일반적 생각이 인간의 생각을 통솔해야 한다는 (주님의) 목적 때문이다. (이 생각을 잊지 않게 하고, 상념을 잘할 수 있는 방법은 언제나 인간의 눈에 들어오도록 글자 자체에 박아두는 것이 상책일 것이다); 그 이유가 만일 인간이 이 생각 안에 보존된다면, 그들은 나중에 보다 쉽게 훈육이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말씀을 내적 의미에서 설명하는 것은 일반적 생각을 명료하고 올바르게 이해하도록 하는 세부적인 생각들이기 때문이다.
그와 같이 표현되어야 하는 또 다른 이유는 사랑없는 이들은 두려움 안에서라도 보존되는 것이 당사자의 미래 구원을 위해 더 낫기 때문이다. 그러므로서 그는 최소한도 주님을 존경하는 두려움 속에 있음으로서 그가 곤경같은 막다른 골목을 만날 때, 그것으로부터의 탈출을 위해 주님에게로 도망해 올 수 있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을 보면, 우리가 글자 의미를 믿는 것 가지고 상해를 입지 않는다는 섭리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설사 당사자가 납득한 글자 의미가 내적 의미에 상반된다 해도, 단순한 심정, 즉 천진 난만한 심정의 상태에서 글자 의미를 지니고 있다면 아무런 해도 받지 않는다. 이 사항은 24절, 즉 여호와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고자 불과 유황이 비오듯 하게 하시는 대목에서 조금 더 살필 것이다. 내적 의미 만에 있는 천사들의 경우, 그들은 여호와께서 누구도 멸하시지 않으시는 분으로만 알고 있다. 그래서 위와 같은 글자 의미에 관한 이야기는 듣는 것도 거북스럽다; 그러므로 인간에 의해 말씀이 읽혀질 때, (그와 함께하는 천사는) 글자 의미는 마치 뒤로 내팽개치듯 되어지고, 심지어는 없는듯 하여지기까지 한다. 그리고 남는 결론은, 악 자체가 인간을 멸한다는 것, 그러나 주님은 누구도 멸하시지 않는다 이다.

그 이유는 그들의 외침이 여호와 앞에서 커졌기 때문이다. 이는 악으로부터의 거짓이 대단히 커졌기 때문에를 의미하는데, 이는 “외침”이 거짓이라 단정되고, 여기서의 경우는 악으로부터의 거짓을 특별히 단정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그리고 여호와께서 그것을 멸하려고 우리를 보내셨다. 이는 그들이 멸망할 수밖에 없음을 의미한다. 이는 방금 위에서 살핀 의미와 같은 방법으로부터 이해되어진다. “우리 (사람들, 또는 천사들)”이 주님의 신성한 인간과 거룩한 진행을 표시하는 것은 이미 살핀 바 있다. 이를 통하여 선한 자는 구원되고 악한 자는 파멸된다; 그럼에도 후자의 경우는 악 자체가 그들을 멸한다는 법칙에 따라서이다. 그들이 이런 방식에서 멸해지기 때문에, 그리고 이것은 세상 안으로의 주님의 강림을 통하여서 이기 때문에, 외관에 따라서 표현된 것은 그들이 “그들을 멸하기 위해 보내졌다”고 말해진 것이다.
말씀에서 때로 주님에 관해 등장하는 말은, 주님은 “아버지에 의해 보내졌다”인데, 여기서는 “여호와께서 우리를 보내셨다”이다; 그러나 내적 의미에서 “보내짐”은 나가는 것(go forth)을 모든 곳에서 의미하고 있다. 요한복음서에서:
그들은 받았습니다, 그리고 내가 당신으로부터 왔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당 신이 나를 보냈다는 것을 믿었습니다 (요. 17:8).
마찬가지이지만 다른 대목에서:
아들을 존경하지 않는 자는 나를 보내신 아버지도 존경하지 않는다 (요. 5:23).
위 구절 외에도 다음의 구절을 더 살펴보는 것도 유익할 것이다. 즉 마. 10:40; 15:24; 요. 3:34; 4:34; 5:30, 36-38; 6:29, 39, 40, 44, 57; 7:16, 18, 28, 29; 8:16, 18, 29, 42; 9:4; 10:36; 11:41, 42; 12:44, 45, 49; 13:20; 14:24; 17:18; 20:21; 눅. 4:43; 9:48; 10:16; 막. 9:37; 이. 61:1 이다.
성령에 관해서도 같은 방식에서 말해진다. 즉 성령을 “보낸다”, 즉 성령이 주님의 신성으로부터 나감이라고 말해진다. 요한복음서에서:
예수께서 말하셨다, 위로자가 올 것인데, 그를 나는 아버지로부터 너희에게 보낼 것이다, (이는) 아버지로부터 나가는 진리의 영 자체이시고, 그가 나에 관해서를 증언할 것이다 (요. 15:26)
다시:
만일 내가 떠나면, 나는 너희에게 위로자를 보낼 것이다 (요. 16:5, 7).
그러므로 예언자들이 “보내짐”이라고 말해지는 이유는 그들이 말하는 말들은 주님의 영 자체의 거룩함으로부터 나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모든 신성한 진리는 신성한 선으로부터 나오기 때문에 “보내지는 것”이라는 표현이 신성한 진리를 서술하고 있다. 그러나 “나가는 것”이 뜻하는 것은 나가는 분이 그분이시다는 것, 나가는 것은 그분으로부터임이 분명하다.

14절. 그리고 롯은 나가서 그의 딸과 결혼하기로 되어 있었던 그의 사위에게 말했다, 그리고 말했다, 일어나라, 너는 이곳을 나가라, 그 이유가 여호와께서 이 성을 멸하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농담하는 자로 그의 사위의 눈에 있었다.

그리고 롯은 나갔다. 이는 선행의 선에 있는 이들, 또한 선행의 선 자체를 의미하는데, 이는 이미 여러 번 설명했다. 그가 선 안에 있는 자를 표현하는 바, 그는 선 안에 있는 자가 지닌 선 자체도 표현한다.

그리고 그의 딸들과 결혼하기로 되어 있는 그의 사위에게 말했다. 이는 선에 대한 애착들이 결합되어질 수 있는 진리 안에 있는 이들을 의미한다. 이는 “사위”가 진리에 관한 지식들, 그 결과 진리들을 의미함에서; 그리고 “딸”의 의미가 선에 대한 애착임으로부터 알게 된다; 그리고 그가 그의 딸들과 결혼하려는 그의 사위에게 말했기 때문에, 선에 대한 애착에 결합할 수 있는 진리 안에 있는 이들이 의미된다. 그리고 이들이 결합될 수 있기 때문에 그들은 그의 “사위”라 불리웠을 뿐, 실제로는 그들이 아직 결합한 것은 아니기에, “그의 딸들이 결혼하기로 되어 있는”이라고 말해지고 있다.
여기서 취급된 주제는 교회 내에 있는 셋째 부류, 즉 진리를 알고 있기는 하나, 아직 악한 생활에 있는 이들이다. 교회 내에는 세 부류의 인간이 있다. 즉 첫 번째는 선행의 선 안에서 사는 이들이다; 이들이 “롯”에 의해 표현되어져 있다; 두 번째로, 거짓과 악 모두 안에 있는 이들이다, 이들은 진리와 선 모두를 거절한다; 이들은 “소돔 사람”에 의해 표현되고 있다. 세 번째로, 실로 진리들을 아는 사람, 그럼에도 악 안에 있는 이들이다; 이들이 여기서 “사위”에 의해 의미되어진다, 그리고 특별하게는 진리를 교회에서 가르치기는 하나 기억 속의 지식에서 더 깊이 뿌리를 내리도록 진리를 보내지 못하는 이들 (즉 배운 일반적 진리를 자기만의 특별한 상황에 응용하지 못하는 이들) 이다. 이들의 허점은 진리를 배운 것이 자신의 지식 자랑에 머물고 있다. 이렇게 된 더 깊은 원인은 진리의 씨가 뿌려진 바탕이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런 사랑들로부터 파생되는 설득력을 발휘하는데 진리를 사용하는 것 말고는 진리를 신뢰하지 않고 있다. 이들에 관하여는 주님의 신성한 자비로부터 다른 장소에서 더 살필 것이다. 어쨌든 위와 같은 이들이 본문에서 소돔이 절멸한다는 말에 신중함을 발휘하기는커녕 오히려 비웃고 있는 사위들에 의해 묘사되고 있다. 이와 같은 비웃음이 그들의 심정의 신앙이다.

그리고 말했다, 일어나라, 너희는 이 장소로부터 나가라. 이는 그들이 악의 상태에 남아 있어서는 안된다를 의미하는데, 이는 “일어남”과 “나감”, “장소”의 의미로부터 분명해진다. “일어남”은 말씀에서 자주 등장하는 단어임에도, 일어난다는 신체적 동작의 모습 외의 어떤 생각을 가져보아 의미를 찾는 일이 드문 것 같다. 아마 너무도 우리에게 흔한 동작 중 하나에 대한 표현이어서 일지 모른다. 내적 의미에서 이 표현은 여기서와 같은 승강, 즉 악으로부터 선으로의 승강을 포함한다; 그 이유가 마음이 악으로부터 물러날 때, 그것은 승강되기 때문이다. “나감”은 물러나는 것, 또는 머물러 있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장소”는 악의 상태이다. 고로 의미파악은 분명해진다.
진리의 지식들 안에 있는 이들, 그런데 악한 생활을 하는 이들의 품질은 이미 반복적으로 서술해왔다, 즉 악한 생활 안에 있는 한, 그들은 믿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 그 이유가 악을 뜻하고, 의지로부터 악을 행하고, 동시에 신앙에서 진리를 인정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보여주는 또 하나는, 인간은 참된 것을 생각하고 말하는 것에 의해, 설사 선인 것을 생각하고 말한다 해도, 그것이 그 이상의 어떤 실행의 조짐이 없으면, 그것 가지고 구원될 수 없다는 것이다. 좀 더 자세히 말하면, 그는 악밖에 뜻하는 것이 없는 셈이다는 말이다. 사 후 인간이 지니는 것은 그의 의지 부분이다. 그의 의지로부터 나온 생각은 남는다.
인간의 의지가 이와 같기에 인간은 자기가 배운 신앙의 진리, 또는 그가 가르치는 신앙의 진리가 자기를 규탄한다는 것을 보고 있다. 그가 그것들을 자기 생각들의 기초를 만드는 만큼 그는 그것들에 실제로는 반대함을 느낀다; 그렇다, 그가 그렇게 행하기를 허용하는 만큼에서, 악마의 패거리같이 신앙의 진리들을 모독한다. 사 후 삶에 관해 배우지 못한 이들이 상상하는 것은, 주님이 우주를 통치하신다는 것을 알게 될 때, 그들이 신앙을 가지는 것은 아주 쉬울 것이라고, 그리고 천국은 주님과 이웃을 사랑함에 존재한다고 들을 때 이해가 잘되어 명료한 신앙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 반대의 진실인즉, 악한 자가 신앙을 받을 수 있는 것, 즉 그의 의지로 신앙을 받을 수 있는 것은 지옥과 천국의 거리 만큼 멀다. 그 이유가 그들은 악 안에, 그로부터 거짓 안에 완전히 들어 앉았기 때문이다. 이런 인물들이 주님과 이웃을 향해 반대되어 있다는 것은 (다른 삶에서는) 단지 접근만 해도, 또는 모습만 멀리서 보아도 알게되고 지각되어진다. 이들의 의지와 생각으로부터는 혐오스런 기운을 내뿜기 때문이다.
만일 다른 삶에서 사람들을 가르침을 수단으로 믿어지고 선하게 되어짐이 가능하다면, 지옥에 남아 있을 인간은 아마 하나도 없을지 모른다; 그 이유가 주님은 천국 안으로 그분 자신에게로 예외 없이 모든 이를 올리기를 바라시기 때문이다. 그분의 자비는 무한하시다. 그 이유는 온 인류를 향하여 뻗어가려는 것이 신선한 자비 자체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선한 자 뿐만 아니라 악한 자도 포함된다는 말이다.

여호와께서 이 도성을 멸하시기 때문이다. 이는 그들이 멸해질 필요가 있어야만 함을 의미하는데, 거의 비슷한 대목을 앞에서 이미 살핀 바 있어 생략한다.

그리고 그는 농담하는 자로 그의 사위의 눈에 있었다. 이는 웃음거리를 의미하는데, 농담함이 장난치는 이야기, 하여 웃음을 만들어내는 바로부터 이다. 그리고 “그들의 눈에서”란 이 웃음거리가 그들의 합리성 앞에 있었다를 의미하는데, 이는 “눈”의 의미로부터 이다. 이는 신앙의 진리 안에 있지만 선한 생활에 있지 않은 이들의 품성을 여실히 보여준다.

15절. 그리고 새벽이 일어날 때 천사들이 롯에게 서두르라고 밀어붙여, 말하기를, 일어나라, 너는 네 아내, 그리고 발견된 네 두 딸을 데리고 가서, 이 성의 불법 안에서 살라지지 않도록 하라.

새벽이 일어날 때. 이는 주님의 왕국이 접근되고 있다를 의미하는데, 이는 말씀에서의 “새벽”, 또는 “아침”의 의미로부터 분명해진다. 이 장에서 취급된 주제는 교회의 계속되는 상태들, 즉 저녁 시간대에 행해지는 것이 먼저 취급되고, 그 다음 밤중에 행해지는 것, 그 다음이 지금에 해당되는 것, 아침 여명에 행해지는 것, 이것 모두가 태양이 가버린 후 있어지는 것들이다. 새벽(박명, 황혼, twilight)이 여기서는 “태양이 올라올 때”에 의해 표현되어져 있다. 그리고 이것은 직바른 사람이 악한 자로부터 분리되어지는 때를 표시한다. 이 분리함이 이 절로부터 롯과 그의 아내와 딸들이 인도되고 구원되는 22절 까지에서 취급되고 있다. 분리함이 심판에 앞서 진행됨이 마태복음서에도 기록되어 있다:
그분 앞에 모든 나라들을 모을 것이다, 그리고 그분은 그들을 서로로부터 분리할 것인데, 목자가 양을 염소로부터 분리하듯 하실 것이다 (마. 25:32).
이때와 상태가 말씀에서 “새벽”이라 불리운다, 그 이유는 주님이 오시기 때문, 또는 그분의 왕국이 접근하기 때문이다. 이 경우는 선한 자와 더불어 비슷한데, 그 이유는 이때에 아침 박명, 또는 새벽과 유사함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말씀에서 주님의 강림이 “아침”에 비교되고, 아침이라 불리운다. 호세아서에서:
이틀 후에 여호와께서 우리를 되살아나게 하실 것이다, 셋째 날에 그분은 우리를 일으키실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분 앞에 설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알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여 호와를 알고 따를 것이다; 그분의 나가심은 새벽 같이 있다 (호. 6:2, 3).
“이틀”은 앞서 있는 때와 상태를 표시한다; “셋째 날”은 심판, 또는 주님의 강림, 그러므로 그분의 왕국의 접근을 표시한다, 이 강림, 또는 접근이 “새벽”에 비교되어진다.
사무엘서에서:
이스라엘의 하느님은 아침의 빛 같으시고, 태양이 올라온다. 구름없는 아침에서 이다; 빛남 으로부터, 비가 내림으로부터 땅으로부터 자람이 있다 (삼하 23:4).
“이스라엘의 하느님”은 주님을 표시한다; 그 이유가 이스라엘의 다른 하느님은 이 교회에서 뜻해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분은 이 교회의 각각, 그리고 모든 것들에서 표현되어졌다. 요엘서에서:
여호와의 날이 오는데, 아주 가까이에 있다; 그 날은 어둠과 짙은 어둠의 날, 구름과 불명 료함의 날이다; 마치 새벽이 산 위에 퍼지는 것 같다 (욜. 2:1, 2).
여기서 주님의 강림과 그분의 왕국이 취급되어진다; 이것이 “어둠의 날과 짙은 어둠의 날”이다고 말해진다, 그 이유는 그때 선한 자가 악한 자로부터 분리되기 때문이다. 본문에서 롯이 소돔인으로부터 분리되는 것과 같다; 그리고 선한 자가 분리된 후에 악한 자는 멸해진다.
주님의 강림, 또는 그분의 왕국의 접근이 “아침”에 비교될 뿐 아니라 실제로 “아침”이라 불리운다. 다니엘서에서:
거룩한 분이 말했다, 환상과 계속적인 제물과 황폐를 만드는 죄지음이 얼마나 오래 있을 까? 그분이 나에게 말했다, 이천 삼백 저녁과 아침까지, 그때 거룩한 분이 의롭다 여겨질 것이다. 말해진 저녁과 아침의 환상은 진실이다 (단. 13, 14, 26).
위에서 “아침”은 주님의 강림을 표시함이 확실하다. 다윗서에서:
당신의 백성이 당신의 강하심의 날에, 거룩함의 명예들에서 자발적인 공물들이고, 새벽의 자궁으로부터 당신의 젊은이를 가진다 (시. 110:3)
위 110편 전체에서 취급된 주제는 주님이시다, 그리고 시험들에서의 그분의 승리하심들, 이것이 “그분의 강하심의 날”과 “그분의 거룩함의 명예들”이다; “새벽의 자궁으로부터”는 그분 자신, 고로 신성한 사랑, 이로부터 그분은 싸우셨음을 표시하고 있다.
스바냐서에서:
그녀의 한 가운데 계신 여호와는 정의로우시다, 그분은 심술궂게 행동하시지 않을 것이다; 아침에, 아침에 그분은 빛을 위해 공정을 주실 것이다 (습. 3:5).
“아침”은 심판의 때와 상태를 표시한다, 이것은 주님의 강림의 때와 상태와 똑같다; 그리고 이것은 그분의 왕국의 접근과 똑같다.
“아침”이 이런 것들을 의미하기 때문에, 똑같은 것이 표현되도록 하기 위하여, 이렇게 명령되었다. 즉:
아론과 그의 아들들은 등불을 밝힐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여호와 앞에서 저녁으로부터 아 침까지 배열할 것이다 (출.27:21).
위에서 “저녁”은 아침 앞의 황혼을 표시한다. 마찬가지로 명령된 것은 제단 위의 불은 매일 아침 지펴져야 한다는 것 (레. 6:5); 또한 유월절 어린 양과 제물로 바쳐 신성시된 것들은 아침까지 아무 것도 남겨두지 않도록 하셨다 (출. 12:10; 23:18; 34:25; 레. 22:29, 30; 민. 9:12); 이를 수단으로 주님이 오셨을 때, 제물 바침이 중지된 것이 의미되어졌다.
일반적 의미에서, 새벽이 나타날 때, 그리고 태양이 떠오를 때 모두가 “아침”이라 불리운다; 그리고 후자의 경우 “아침”은 선한 자와 악한 자 모두에 관련하여 있는 심판을 표시한다. 이 장의 23-24절에서와 같다:
태양이 땅 위로 솟구쳤다, 그리고 롯은 소알에 왔다. 그리고 여호와께서는 그분으로부터 하 늘에서 불과 유황이 비내리게 하셨다.
마찬 가지에서 악한 자 위에 있는 심판이 다윗서에서:
아침에 나는 토지의 모든 사악한 자를, 여호와의 성으로부터 불법으로 일한 모든 자를 절 멸하기 위하여 파괴할 것이다 (시. 101:8).
그리고 예레미야서에서:
인간이 여호와께서 전복하신 성들 같이 있게 하고 그리고 그분은 후회하시지 않는다, 그리 고 그로 하여금 아침에 외침을 듣게 하라 (예. 20:16).
적당한 의미에서 일 경우, “아침”은 주님, 그분의 강림, 고로 그분의 왕국의 접근을 의미하는데, 이 외에 더 의미되는 것은 새로운 교회의 일어남이다. 그 이유가 이 교회가 땅 위의 주님의 왕국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은 일반적, 세부적 모두에서, 지극히 작은 세세한 것에서 더 그러하다; 일반적으로는 지구 위의 어떤 교회가 새로이 이러날 때이다; 세부적으로는 인간이 거듭나아져서 새로운 인간이 될 때이다. 그 이유가 그때 주님의 왕국이 그 사람 안에서 일어나고, 그가 하나의 교회가 되어가기 때문이다. 더 세세한 측면으로는 사랑과 신앙의 선이 그 사람 안에서 일할 때는 언제든지 이다. 그 이유가 이때 주님의 강림이 거기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셋째날 아침에 거행된 주님의 부활은 (막. 16:2, 9; 눅. 24:1; 요. 20:1) 거듭난 자의 마음에서 날마다 다시 그분이 일어나심, 그리고 매 순간마다 일어나심에 관련하여 모든 것들, 즉 세부적, 지극히 세세한 것에 이르기에까지 모든 것들을 아우른다.

천사들이 롯에게 서두르라고 밀어붙였다. 이는 주님께서 그들에게 악의 접근을 허락하지 않으시며 선 가운데 보존하심을 의미하는데, 이는 “밀어붙임”과 “서두름”의 의미가 재촉함이다로부터 분명해진다; 그리고 이 말들에 의해 악의 접근을 허락하지 않음이 의미되는 것은 이 단어들의 내적 의미와 이어지는 말로부터 알게 된다. 내적 의미에서 살펴보자. 즉 교회가 선행의 선으로부터 타락해 가기를 시작할 때, 교인들은 시작 당시에는 교회가 선행의 선 안에 있을 때보다 더 강력하게 주님에 의해 악의 접근을 보류하신다. 이와 같은 것이 이어지는 구절로부터, 즉 천사들이 롯에게 서두르라고 밀어붙이자, 그는 여전히 머뭇거렸다; 그때 천사들은 롯과 그의 아내, 그의 딸들의 손을 붙잡고 이끌어내서 성 밖으로 내놓았다. 이 대목은 이 상태에 있는 인간의 특성을 잘 묘사하고 의미하고 있다; 이것은 여기서 취급되는 이 교회의 두 번째 상태이다. 첫 상태는 이 장의 1-3절에 묘사되어 있다; 첫 상태는 그들이 선행의 선 안에 있고, 주님을 인정하며, 그분을 수단으로 선을 확증하는 상태이다. 두 번째 상태가 여기서 묘사되는데, 이는 교인 자신들과 더불어 악들이 선들에 맞서 행동하기를 시작하는데, 이때 주님에 의해 강력하게 악이 저지되고 선이 보존되도록 하신다; 이 상태가 이 절에서 취급되어진다, 그리고 15-17절까지에서 계속된다.
이 사항에 주목해볼 때, 모든 인간들은 예외 없이 주님에 의해 악들의 접근이 보류되고 있다는 것, 그리고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것보다 더 강력한 힘에 의해 이 보류하심이 거행된다는 것을 아는 자는 없다, 아마 있다면 극소수일 것이다. 모두 각각의 인간의 노력은 계속적으로 악을 향하고 있다, 그리고 이것은 태어날 때 지닌 유전적 악으로부터, 그가 자신을 위해 획득한 실제의 악, 모두로부터의 노력이다; 그러므로 악을 향한 그의 노력이 주님에 의해 보류되지 않는다면, 그는 매 순간마다 최하위의 지옥을 향해 돌진하고 있는다. 그러나 주님의 자비는 심히 크신 바 매 순간, 아주 작은 사건에서조차, 인간이 고개를 위쪽으로 들게 하시고, 악을 억제되게 하시어 그가 지옥 쪽으로 돌진함을 예방해주신다. 이것은 선한 자와 더불은 경우이고, 각 자의 선행과 신앙의 차이에 따라 차이는 있다. 고로 주님께서 인간과 함께 계속적으로 전투하신다. 그리고 지옥과 더불은 인간을 위해서도 그러하지만, 인간에게 그렇게 외관으로 나타나지 않을 뿐이다. 이에 관하여 주님께서는 나에게 많은 경험을 허락하시어 나로 알게해 주셨는데, 차 후 주님의 신성한 자비로부터 더 말할 것이다.

말하기를, 일어나, 네 아내, 그리고 발견된 네 두 딸을 데리고 가라. 이는 신앙으로부터의 진리와 선과 진리에 대한 애착들을 의미한다. “발견함”은 그들이 [악으로부터] 분리되었음을 뜻한다. 이는 “일어남”이 악으로부터 승강됨이고; 여기서 “아내”의 의미는 신앙의 진리임으로부터(이는 26절, 소금 상(기둥)이 된 대목에서 더 살필 것이다); 그리고 “두 딸들”의 의미가 진리와 선에 대한 애착들임에서 알게 된다. “발견된” 이 악으로부터 분리됨을 표시하는 것도 분명한데, 그 이유는 그들이 자유해지기 때문이다. 이 몇 단어들에 의해 교회의 두 번째 상태가 여기서 묘사되는데, 즉 그들은 선으로부터 진리쪽으로 자신들이 인도해지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 상태, 그러나 진리를 통하여 선 쪽으로 이다; 그럼에도 그들은 선에 대한 희미한 애착 안에 있다; 그 이유가 진리를 지도자로 만듦에 비례하여 선은 희미해져 있고, 선을 지도자로 만듦에 비례하여 진리는 그것의 빛에서 명백하고 분명해 있기 때문이다.

너는 이 성의 불법 안에서 살라지지 않도록 하라. 이는 그들이 거짓으로부터의 악에 의해 멸해지지 않도록을 의미한다. 이는 “불법”의 의미가 악이다로부터; 그리고 “성”의 의미가 교리적인 것, 또는 거짓된 교리적이다로 부터 알게 된다. 거짓으로부터의 악은 앞서 살핀 바 있어 거기를 참조하기 바란다.

16절. 그리고 그는 머뭇거렸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의 손과, 그리고 그의 아내의 손과, 그리고 그의 두 딸의 손을 그에게 내린 여호와의 관대하심 안에서 붙잡았다, 그리고 그들은 그를 앞으로 이끌었다, 그리고 그를 도성 밖에 내놓았다.

그리고 그는 머뭇거렸다. 이는 악의 본성으로부터 올라오는 반대를 의미한다. 이는 앞에서 말했다; 그 이유가 인간에 있는 악은 주님으로부터 있는 선에 맞서 계속적으로 반작용하기 때문이다. 유전적인 것으로부터의 악과 실제의 악은 인간의 각각의 생각들에서, 심지어는 인간의 생각들의 사소한 것조차에서도 인간에게 점착되어 간섭한다. 이것이 인간 당사자를 아래쪽으로 질질 끌어당기고 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에게 조금씩 스며든 선을 수단으로 그를 보류하게 하고, 위쪽을 향하게 하시어 인간이 악과 선 사이에서 중지된 채로 (평형된 상태)에 있게 해주신다. 이렇게 인간이 아래쪽으로 향하려는 결과로 인해, 만일 그가 매 순간 악들로부터 보류되지 않으면, 그는 스스로 아래쪽으로 돌진하고야 만다. 롯의 이전 상태(앞 쪽의 구절)보다 지금 그가 표현한 상태의 교인들은 더욱 아래쪽으로 향하려든다. 이 상태란, 교인들이 선으로부터 보다는 진리로부터 더 생각하고 행동하기를 시작하는 상태이다; 고로 선으로부터는 거리가 멀어진 상태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의 손과, 그리고 그의 아내의 손과, 그리고 그의 두 딸의 손을 붙잡았다. 이는 주님께서 그들에게 악으로부터 오는 것을 강력히 허락하지 않으셨는 바, 그런고로 “롯”과 그의 “아내”, 그의 “딸들”로 의미되는 선과 진리들을 굳세지게 하셨음을 의미한다. 이는 “사람들”의 의미가 주님이심으로부터; 그리고 “손”의 의미가 힘이다로부터; “롯”의 의미가 선행의 선이다로부터; “아내”의 의미가 신앙의 진리이다로부터 (26절로부터); 그리고 “딸들”의 의미가 선과 진리에 대한 애착들로부터; 마지막으로 앞에서 말해진 것으로부터, 즉 선과 진리는 인간이 악을 중단되게 하는 만큼에 비례하여 주님으로부터 흐른다는 것; 결과적으로 “롯, 아내, 두 딸들”에 의해 의미되는 선들과 진리들은 같은 비례로 굳세진다는 것이다.
모두 각각의 인간은 자신의 경험으로부터 이를 알는지 모른다; 그가 육체적, 세상적인 것들로부터 옮기워져 있음에 비례하여 그는 영적인 생각 안에, 즉 천국 쪽으로 들리운 상태에 있음을 경험한 적이 있을 것이라는 말이다. 마치 그가 어떤 거룩한 예배 안에 있을 경우, 또는 시험 안에 있을 경우, 또는 죽도록 아플 경우나 너무나 억울하다 싶을 정도의 고생함 같은 것을 경험했을 때만 되돌아 보아도 될 것이다. 육체적이고 세상적인 것들, 즉 그것들을 사랑함이 멀어질 때, 주님으로부터 천국적이고 영적인 것은 계속적으로 흘러든다; 그러나 악과 그로부터 파생된 거짓, 그리고 거짓과 그로부터 파생된 악 역시 육체적이고 세상적인 것들로부터 흘러드는데, 이것이 주님으로부터 받는 것을 방해한다는 것은 누구나 익히 아는 잘 알려진 사항일 것이다.

그에게 내린 여호와의 관대하심 안에서. 이는 은총과 자비로부터를 의미한다. 이는 “여호와의 관대하심”의 의미가 은총과 자비밖에 더 달리 있을 수 없음에서 알게 된다. 인간이 주님에 의해 악의 접근에서는 보류되고 선 안에서 보존됨은 그분의 순수한 자비로부터이다는 것은 앞 항목에서 알았을 것이다. 여기서 은총과 자비 모두를 언급한 이유는, 진리 안에 있는 바, 진리로부터 선 안에 있는 이들은 주님의 은총만을 애원한다. 그 반면 선 안에 있어 선으로부터 진리 안에 있는 이들은 주님의 자비를 애원한다; 그리고 이는 수치스러워함과 경배함의 제 각각의 상태들에 존재하는 차이로부터 결과된다.

그리고 그들은 그를 앞으로 이끌었다, 그리고 그를 도성 밖에 내놓았다. 이는 그 당시 그의 상태를 의미하는데, “앞으로 이끌음”의 의미가 악의 접근이 보류됨이다로부터; 그리고 “성 밖에 내놓음”의 의미가 거짓으로부터 멀어짐이다로 부터 분명해진다; 그리하여 여기서의 상태는 그가 악으로부터 보류되어짐에 의해 주님으로부터의 선들과 진리들이 (상대적으로) 더 강화되어졌음을 언급한 것이다.

17절. 그들이 그들을 밖으로 이끌어낸 후였다. 이렇게 그는 말했다, 네 목숨을 위해 달아나라, 네 뒤를 돌아보지 말라, 그리고 모든 평지에는 머물지 말라, 산으로 달아나라, 네가 불살라지지 않도록

그리고 그들이 그들을 밖으로 이끌어낸 후였다. 이는 그들이 거짓과 악의 접근이 제지될 때의 상태를 의미하는데, 이는 방금 앞에서 설명했다.

이렇게 그는 말했다, 네 목숨을 위해 달아나라. 이는 그가 그의 영원한 생명을 위한 생각을 가져야 함을 의미한다. 이는 설명 없이 이해될 것이다. 그러나 아래에 있어지는 방법에서 그는 그의 생명을 위한 생각을 가져야할 것이다.

네 뒤를 뒤돌아 보지 말라. 이는 그가 교리적인 것들을 쳐다보아서는 안됨을 의미한다. 이는 그의 뒤쪽에 성이 있고, 그의 앞 쪽에 산이 있는 경우에서 “네 뒤를 뒤돌아 보지 말라” 일 때의 의미로부터임에서 분명해진다. 그 이유가 “성”은 교리적인 것을 의미하고; “산”에 의해서는 사랑과 선행이 의미되기 때문이다. 이것이 의미이다는 것은 26절, “자기 뒤를 뒤돌아보아” 소금 기둥이 된 그의 아내에 관한 설명에서 분명해질 것이다. 모든 사람이 예상하는 것은, 이 표현, 즉 “자기 뒤를 뒤돌아봄”의 표현에는 뭔가 신성한 비밀함이 있으리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 비밀은 너무나 깊이 놓여 있어 보여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이유가 자기 뒤를 뒤돌아보는 것에는 범죄적인 어떤 것도 나타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이는 중요사항 같이, 심히 중대한듯 여겨지게, 그가 달아나되, 그는 자기 뒤를 뒤돌아보지 않아야 한다는 조건이 따라 붙고, 이 두 명령을 수단으로 그는 그의 영원한 생명을 위한 생각을 가져야 할 것이다가 뜻해지고 있다. 그러나 교리적인 것을 쳐다보는 것은 이어지는 아래 대목에서 알게 되겠지만, 여기서는 이 교리적인 것들이 무엇인지만을 서술해보자.
교리는 두 겹이다. 사랑과 선행으로부터의 것과 신앙으로부터의 것이다. 교회의 처음 시기, 즉 어린 소녀, 또는 처녀인 동안 주님의 모두 각각의 교회는 다른 교리를 가지고 있지를 않다, 그리고 선행으로부터의 교리 외에 다른 교리는 사랑하고 있지 않았다; 그 이유가 선행은 생명에 속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교회는 계속적으로 이러한 교리로부터 그 자체 돌아서게 되는데, 이 교리 자체를 시시한 것으로 저등급해버릴 때까지이다. 그리고 결국 그것을 (무가치한 것으로 여겨) 거절한다. 이때 이 교회는 신앙의 교리라고 불리는 것 외에 다른 교리는 없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리고 신앙이 선행으로부터 분리되는 때, 이 교리는 악의 생명과 작당을 한다.
이와 같은 과정을 밟은 교회가 주님의 오심 이후 원시 기독 교회, 또는 이방인들의 교회에서 있었다. 이 교회의 시작에서 이 교회는 사랑과 선행 외에 다른 교리는 없었다. 그 이유가 주님께서 이것을 가르치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분의 공생애 시대 이후 사랑과 선행이 식어가기를 계속하면서, (뿔 같이) 자라난 것이 신앙에 관한 교리였다. 이 교리에 의견 차이와 이교(이단)의 생각들이 제 각각대로 중요 사항이라는 것을 독특하게 강조한 것이 불어났다.
이와 비슷한 모습은 홍수 이후 있었던 고대 교회에도 있었다, 그리고 많은 왕국들을 통하여 확장되었다: 이 교회 역시 처음 시작 당시에는 선행에 관한 교리 외의 다른 교리는 알지 못했다. 그 이유가 선행만을 생명으로 찾고 선행에서 감동되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행동함이 그들은 자기들의 영원한 복지에도 직접 연결된다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어느 때인가에서 신앙의 교리가 누군가와 더불어 배양되기 시작했다, 결국 선행으로부터 분리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이것을 행한 이들이 말씀에서 “함”이라 불리웠는데, 그들은 악한 삶 안에 있던 자들이다.
홍수 이전에 있었던 태고 교회, 이 교회에서 특출한 것은 “사람”이라 불리운 자들이다. 이들은 주님을 사랑함과 이웃을 향한 선행의 지각 자체 안에 있었다; 고로 이 교회는 자체에 사랑과 선행의 교리가 새겨져 있었다. 그러나 그때 조차에서도 신앙을 흠양한 자들은 존재했다. 그들이 신앙을 선행으로부터 분리했을 때, 그들은 “가인”이라 불리웠다; 그 이유가 “가인”에 의해 이런 신앙을 의미했고, 그가 살해한 “아벨”은 선행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제 4장 참조).
이상 살핀 줄거리는 두 개의 교리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하나는 선행에 관하여, 또 하나는 신앙에 관한 교리이다. 비록 이 두 교리는 그 자체 하나로 있어, 구분될 수 없을 정도이어야 이상적이지만, 우리는 둘로 구분해 볼 수 있다. 하나될 수 있는 경우는 선행의 교리가 신앙의 모든 것을 아우르고 있을 때이다. 그러나 교리는 신앙 속에 있는 것들로부터만 와 진다고 하게 될 때, 이때 교리는 두 겹이라 불리운다. 그 이유는 신앙이 선행으로부터 분리되기 때문에서이다. 오늘날 이 교리들이 분리되어 있다는 것은 선행이 무엇인지, 이웃이 무엇인지 모르고 있다는 사실로부터 알는지 모른다. 오로지 신앙의 교리에 안주하는 이들은 이웃을 향한 선행이 내 것을 다른 사람에게 주는 것, 궁핍한 자에게 동정심을 갖는 것 등등의 넘어에 어떤 것이 있다는 것을 아예 모르고 있다. 그 이유는 그들은 나 외에 모두를 어떤 구별 없이 이웃이라 부르기 때문이다; 허나 선행은 인간 안에 있는 모든 선이다: 이는 그의 애착 안에, 그리고 그의 열정 안에, 그리고 이로부터 그의 삶 안에 존재한다. 이웃은 타인들 안에 있는 모든 선이다. 이를 수단으로 우리는 감동을 받는다. 결과적으로 선 안에 있는 이들이다; 그리고 이것은 가능할 수 있는 모두 각각의 구별함과 더불어서이다.
예를 들어 생각해보자: 악한 자를 벌주고 선한 자에게 보상함으로 정의와 공정을 실행하는 이는 선행과 자비 안에 있다. 악을 처벌함 안에 선행이 있다. 그 이유가 악들을 수정하려는 우리의 열정이 밀어부쳤기 때문이다. 동시에 악의 손으로부터 선한 자가 상해받지 않도록 그들을 보호도 하는셈이 된다. 이런 방식에서 인간은 악 안에 있는 자, 또는 그의 적의 복지도 참작해본다, 그리고 그를 향하여, 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에게도 그의 선한 느낌을 표현한다, 그리고 공공의 복리 자체까지 참작한다; 그리고 이것은 이웃을 향한 선행으로부터 이다. 생활로부터의 모든 다른 선 역시 경우는 위와 대동소이하다. 그 이유가 생활 속의 선은 그것이 이웃을 향한 선행으로부터 오지 않으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모든 선은 선행을 바라보고 있고, 선행이 모든 선을 아우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선행의 진정한 본성과 이웃의 진정한 본성에 관하여 심히 불명료함에 있는 것을 알게 된다면, 이때 분명해지는 것은 신앙의 교리가 첫째 자리를 차지하고 있어 선행의 교리는 잃어진 것들 사이에 있었다는 것이다. 이것이 고대 교회에서 있었다. 신앙의 교리를 탐닉하면서 그들은 이웃을 향한 선행에 속하는 모든 선들을 하위 등급을 매겼고, 결과적으로 선 안에 있는 모든 이들도 그렇게 분류해 버렸다. 그들은 이렇게 구분짓는 바람에 하위 등급에 속한 선 안에 있는 모든 자들에게 이름을 붙여 불렀는데, 예를 들면, 가난한 자, 불쌍한 자, 압제받는 자, 병자, 벌거벗은 자, 배고픈 자, 목마른 자, 포로된 자, 또는 감옥에 있는 자들, 외국인, 고아, 과부; 어떤 자들을 두고는 절음발이, 소경, 귀머거리, 벙어리, 불구자 등등이다; 이 외에도 다양한 이름들이 있다. 구약 성경의 말씀에서 주님께서는 이 교리에 따라 이야기 되었다 (그렇게 해야 어쨌든 고대 교회인들이 이해했기 때문). 따라서 위와 같은 자들이 구약 성경에 자주 등장한다; 그분 자신도 다시 신약 성경에서 이런 교리(말투)에 따라 이야기 하셨다. 예를 들면, 마. 25:35, 36, 38, 39, 40, 42-45; 눅. 14:13, 21 이 외 많은 곳에서이다. 그러므로 내적 의미에서 이 이름들은 글자 의미와 아주 다른 의미를 가진다. 그러므로 선행의 교리가 회복되기 위하여 주님의 신성한 자비 속에서 이런 이름들에 의해 표시되는 이들이 누구인지, 선행이 무엇인지, 그리고 이웃이 무엇인지를 일반적, 특수적 모두에서 다음의 페이지에서 서술해둘 것이다.

모든 평지에는 머물지 말라. 이는 그가 이런 교리적인 주제들의 어떤 것 안에서 머뭇거려서는 안된다를 의미하는데, 이는 “평지”의 의미가 위와 같은 교리적 본성의 모든 것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 경우에서 이런 교리적 주제에서 머뭇거리지 않아야 한다는 의미를 말하는 것은 26절, 자기 뒤를 뒤돌아 보는 롯의 아내를 취급할 때 한꺼번에 서술할 것이다. 말씀에서, “평지”는 교리적 본성의 모든 것들을 의미하는 것은 예레미야서에서 분명해진다:
황폐케 하는 자가 모두 각각의 성에 올 것이다, 그리고 어느 성도 피하지 못할 것이다, 그 리고 계곡은 멸망할 것이다, 그리고 평지는 파괴될 것이다 (예. 48:8).
위에서 “성”은 거짓 교리를 표시한다; 그리고 “평지”는 이 교리에 속하는 모든 것들을 표시한다. 계시록에서:
그리고 천년이 끝날 때, 사탄은 그의 감옥에서 풀려날 것이다. 그리고 땅의 네 모퉁이들, 즉 곡과 마곡을 꾀어서 그들을 함께 모아서 전쟁을 하려고 나갈 것이다; 이들의 숫자는 바 다의 모래 같다. 그리고 그들은 땅의 폭(breadth)에서 올라 갔다, 그리고 거룩한 사람들의 진영과 사랑되어진 도성을 에워쌌다; 그리고 불이 하느님으로부터 천국의 안에서 밖으로 내려 왔고 그들을 태웠다 (계. 20:7-9).
위에서 “곡과 마곡”은 내적 예배 없이 외적 예배에 있는 이들을 표시한다, 고로 이 예배는 우상 숭배가 되었다; “땅의 평지(폭)”은 교회의 교리적인 것들, 그들은 이것을 황폐케 한다; “거룩한 사람들의 진영”은 사랑의 선들과 선행의 선들이다; “불이 하느님으로부터 천국의 안에서 밖으로 내려와서 그들을 태움”은 본문 24절, 소돔인과 고모라인에 관해 말해질 때와 같은 것을 뜻한다. 다시: 선행의 교리적인 것들이 “산들의 성들”이라 불리우고, 신앙의 교리적인 것들은 “평지의 성들”이라 불리운다. 예. 33:13을 읽어보라.

산으로 달아나라. 이는 사랑의 선과 선행의 선을 의미하는데, “산”의 의미가 사랑과 선행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네가 불살라지지 않도록. 이는 그렇지 않으면 그는 멸해질 것임을 의미하는데, 설명은 생략한다.

18, 19절. 그리고 롯이 그들에게 말했다, 내 주여 아닙니다, 간절히 바라는 것은 당신의 종이 당신의 눈에서 은총을 발견해 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당신은 자비를 크게 만드셔서 당신께서는 제 혼이 살아있게 만들고저 저와 함께 행동하셨습니다. 그리고 저는 악이 저를 쪼개는 일이 없도록, 그리고 제가 죽지 않도록 산으로 달아날 수 없습니다.

롯이 그들에게 말했다, 내 주여 아닙니다. 이는 약함을 의미하고, 그리하여 그는 할 수 없었다를 의미하는데, 이는 단어들 자체에 있는 애착으로부터 분명해진다. 이는 이어지는 것에서 알게 된다. 이 구절에서는 롯에 의해 표현되는 교회의 세 번째 상태가 취급된다. 즉 그들이 선에 대한 애착으로 부터서는 더 이상 생각하지도 행동하지도 못하고 진리에 대한 애착으로부터 가능한 상태이다. 선의 상태가 작아지기를 시작할 때, 급기야 퇴조한 듯할 때 진리의 상태가 이를 계승한다. 사실상 선은 현존하나, 더 내면쪽으로 그 자체 물러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보이지 않는 듯한 바, 인간의 측면에서는 희미함 안에 있는 셈이다. 그럼에도 이것은 그 자체를 어떤 애착 안에서 명백함을 지니고 있기는 한데, 진리에 대한 애착이라 불리우는 애착에서 이다. 이런 상태들은 실로 인간에게는 나타나지 않는데, 그것들의 본성은 더 더욱 드러나 있지 않으나, 천사들에게는 환한 빛에서와 같이 분명해 있다. 그이유가 천사들은 인간의 모든 선한 애착 안에 있기 때문에서 이다; 물론 인간이 다른 삶 안으로 올 때 그것들은 당사자에게 명백해진다. 그 이유가 그는 거기서 자기의 애착에 따라 있기 때문이다. 즉 그의 애착의 품질에 따라 그가 거주할 공동체가 결정된다는 말이다.

간절히 바라옵기로, 당신의 종은 당신의 눈에서 은총을 발견해 가는 것입니다. 이는 진리에 대한 애착으로부터 있는 자신을 비하함을 의미한다. 당신은 자비를 크게 만드셨다란 선에 대한 애착으로부터 있는 자신을 비하함과 닮은 어떤 것을 의미한다. 이는 앞에서 “은총”과 “자비”에 관해 살핀 바와 같다. 진리에 애착하는 이들은 모든 것들이 자비로부터 있다고 심정으로부터 인정하는 것에 관련해서는 자신을 겸허해지게 할 수 없다. 그러므로 그들은 “자비” 대신 “은총”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오히려, 진리에 대한 애착이 그들 안에 덜 할수록, 은총을 언급하는 그들 안에 자신을 수치스러워함(비하함)도 덜 있다고 말하는 편이 이해해보는데 있어서는 더 낫지 않을까 생각된다. 그 반면, 선에 대한 애착이 인간 안에 더 많아질수록, 자비를 언급하는 그 사람 안에서 수치스러워함도 더 있다. 이는 숭배함, 또는 예배함에서 진리의 애착에 있는 자와 선의 애착에 있는 자 사이에 얼마나 많은 차이가 있을지를 보여준다. 그 이유가 예배가 있기 위하여서 숭배함은 있어져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숭배함이 있기 위하여, 수치스러워함은 있어져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은 일반적, 특수적 측면 모두에서 예배의 모든 것들에서 있어져야만 함에 틀림 없다. 이상 위에서 간단히 말한 것들은 이 구절에서 왜 은총과 자비가 모두 언급되는지를 알게 하는데 도움을 줄 것이다.

당신께서는 제 혼을 살아있게 만들고저 저와 함께 행동하셨습니다. 이는 그분께서는 그를 구원하시기를 바라고 계심을 의미한다. 이는 설명이 필요 없을 것이다

그리고 저는 산으로 달아날 수 없습니다. 이는 그가 선행의 선을 가질 능력이 있는지에 관해, 즉 선행의 선을 생각하고 행할 수 있을지에 의심함을 의미하는데, 이는 “산”의 의미가 사랑과 선행이다로부터 확실해진다.
이 의심함에 주목해보면, 이렇다: 이 애착에 있는 이들의 진리에 대한 애착 안쪽에는 선에 대한 애착도 있다, 하지만 너무 희미해서 그들은 선에 애착함이 무엇인지, 그리고 순수한 선행이 무엇인지를 지각할 수 없고, 알지도 못한다. 그들은 자기들이 알고 있다고 상상한다, 그러나 그것은 진리로부터, 고로 기억 속의 지식에서 일 뿐 선 자체에서가 아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선행의 선을 행하는데, 이는 어떤 공적을 쌓기 위하여가 아니라 순종함 때문에서이다. 그들은 이것은 자기들이 진리라고 납득하는 한도에서 실행한다. 그 이유가 그들은 자기들에게 진리이다고 나타나는 진리를 수단으로 선에 대한 그들의 희미함으로부터 주님에 의해 인도되는 것을 허용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이웃이 무엇인지에 무지할 경우, 그는 그가 이웃이다고 상상하는 모든 이에게 선을 행한다; 세부적으로 생각해보면, 가난한 자를 향해서 일 경우, 세상적 재물의 궁핍함 때문에서; 고아나 과부들, 외국인을 향해서도 그들이 일컬어지는 그대로에서이다. 이렇게 생각할 수 밖에 없는 이유는 그가 고아, 과부 등등에 의해 의미되는 것에 무지해 있는 한 그 범주에서 머물 수밖에 없다. 그렇다해도 그들의 이런 외관적 차원의 진리에 대한 애착 안에도 선에 대한 애착이 들어 있기는 하나 인간으로서는 감지하기 힘든 수준인 희미한(불명료한) 수준에서이다. 그러나 이 선에 대한 애착을 발판으로 주님은 그 선들을 행동함 쪽으로 인도해가시어 그는 내면 측면에서도 동시에 선 안에 있는 셈이 된다. 그리고 이 선 안에서 천사는 그 사람과 함께 현존하는데, 이 사람이 내면의 선에 감동하는 순간이 있을 때 천사는 크게 기뻐한다.
위와 달리, 선행의 선 안에 있고, 이로부터 진리에 대한 애착 안에 있는 이들은 식별력을 발휘하며 모든 것을 행한다. 그 이유가 그들은 빛 안에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는 진리의 빛의 근원은 선밖에 없고, 주님 역시 선을 수단으로 흘러드시기 때문이다. 이 사람은 고아나 과부, 가난한 자나 외국인이 그렇게 불리운다 해서 선을 행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이들은 다른 누구보다, 가난하든 부자이든 선이 있는 이들이 자기들의 이웃이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선한 자에 의해 선은 타인에게 실행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사람이 선한 자에게 선을 행하는 만큼, 그는 그들을 통하여 타인에게 그것을 행하는 셈이다. 또한 그들은 선들 사이에 구분을 어떻게 만들어야 하는지를 알고 있다. 그런 식으로 선한 자들 사이도 구분을 만들 수 있다. 이들은 일반적 선 자체를 가장 큰 규모(가장 높은 수준)에서의 자기 이웃이라 부른다. 그 이유가 이 런 큰 범주를 생각함에는 그것보다 더 큰 이웃의 범주도 고려할 것이다는 것이 내포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선행이 실행되어져야 할 더 큰 이웃이 있는 바, 이는 지상에 있는 주님의 왕국, 주님의 교회임을 이들은 인정한다; 천국에 있는 주님의 왕국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이런 저런 모든 것 앞에 주님을 놓는 이들, 즉 그분만을 경배하고, 무엇보다 우선적으로 그분을 사랑하는 이들은 위와 같은 모든 등차나 규모에 있는 이웃들의 구분들을 그분으로부터 이끌어낸다; 그 이유가 주님만이 최고 큰 규모, 최고 높은 등급의 이웃이기 때문이다. 고로 그분으로부터 선이 있는 한 그 모든 선은 우리의 이웃이다.
이와 반대로 있는 이들은 자기들의 이웃의 등급을 자신들로부터 도출해낸다. 그리고 자기를 좋아하고 섬기려는 태도 여하에서 이웃이 결정된다. 그 외의 사람들은 형제라고, 친구라고 부르지 않는다. 이것이 그들에게 있는 이웃의 식별력이다. 위에서 두 대비되는 것들을 통해 이웃이 무엇인지를 보았다. 즉 인간은 그가 지닌 사랑에 따라서 우리의 이웃이다는 것, 주님을 사랑함에, 이웃을 향한 선행에 있는 이들이야말로 진실로 우리의 이웃이다. 물론 각 인물에 따라 차이는 있을 수 있다. 의문시 되는 점이 있을 경우라면 각 사람과 더불은 선 자체로 결정지으면 될 것이다.

악이 저를 쪼개는 일이 없도록, 그리고 제가 죽지 않도록. 이는 의심에 이어지는 바는 그가 악 가운데 동시에 있게 되는 때가 도래하고야 말 수밖에 없고 그로 인해 그는 정죄되고 말리라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별도의 설명이 필요 없는 대목이다. 이 말들이 포함하는 것은 앞에서 보여주었고 설명도 했었다. 즉 주님께서 꾸준히 설비하시는 것은, 악이 선과 섞이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이 악 안에 있는 한, 그는 선 안에서 옮겨져 있다; 그 이유는 인간이 악 안에 있는데 동시에 선 안에 있는 것보다 차라리 악 쪽이라도 어느 한편에 있는 것이 더 낫기 때문이다. 그가 악 안에 있고 동시에 선 안에도 있다면, 그는 영원히 지옥에 떨어져야만 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이런 위험에 가장 노출되는 자는 교회 내에서 사기치고 위선적인 자들이다. 이것이 “악이 저를 쪼개지 않도록, 제가 죽지 않도록”의 내적 의미이다.

20절. 간절히 바라옵기로, 이 성은 저쪽으로 도망하기에 가까웁니다, 그리고 이것은 작은 것입니다. 제가 저쪽으로 달아나게 해주십시오. 그것은 작은 것 아닙니까? 그리고 제 혼은 살 것입니다.

간절히 바라옵기로, 이 성은 저 쪽으로 도망하기에 가깝다. 이는 그가 신앙의 진리로부터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을 허용할 수도 있음을 의미한다. 이는 “성”의 의미가 교리로부터 있는 것, 고로 신앙의 진리이다에서 알게 된다. “가까웁다”라고 말해지는데, 그 이유는 진리는 선에 가까웁기 때문이다; 이렇기 때문에 “저쪽으로 도망하는 것”은 그가 선으로부터 행동할 수 없음을 알고 진리로부터 생각하고 행동함을 허용할 수밖에 없음을 의미한다.

“그것은 작은 것입니다”란 그가 가졌던 조금의 진리로부터를 의미한다. 이는 “성”의 의미가 진리이다로부터 아는데, 위에서 살폈다. 이것이 “작다”임은 조금의 진리가 있었다를 의미한다; 여기서는 그가 가진 조금으로부터 인데, 이는 앞의 내용과 이어지는 사항으로부터 분명해진다.
진리에 대해 애착하는 이들은 선에 애착하는 이들과 비교하면 상대적으로 조금의 진리를 가지고 있다. 진리를 (선 보다) 중시하는 이들에게 속한 선은 상대적으로 빈약하고 희미한 수준에서 있다. 인간 안에 있는 진리는 그 사람 안에 있는 선에 따라 정확하게 존재한다. 조금의 선이 있으면, 조금의 진리가 있다. 이것은 같은 비율로, 같은 등차에, 한마디로 한 걸음 떼어도 선과 진리는 동시에 한 걸음을 뗀다는 말이다. 이것이 역설적으로 보일지 모르나 진리이다. 선은 진리의 본질 자체이다, 그리고 본질 없는 진리는 진리인듯 나타나고 있어도 진리가 아니다; 텅빈 그릇에 불과한 것이다. 누군가가 자신 안에 진리를 가지려면, 그는 진리를 알아야 할 뿐 아니라, 그것을 인정하고 그것을 믿어야 한다. 이때 그는 처음으로 진리를 가진다, 그 이유는 진리가 그에게 감명을 주기 때문이고, 그에게 남아 있다. 이와 달리, 그가 진리를 알기는 했는데, 그것을 인정하지 않고, 그것을 믿지도 않는 경우이다. 이 경우는 사실상 그는 자신 안에 진리를 가진 것이 아니다. 이것은 악 안에 있는 많은 이들의 경우이다; 그들은 진리를 알 수 있고, 때로는 (두뇌가 뛰어나) 여느 사람보다 더 진리를 알고 있을 수 있다. 그래도 여전히 그는 진리를 가진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는 더욱 덜 가지고 있다, 그 이유는 심정에서 그가 진리를 부정하기 때문이다.
어느 누구도 그가 가진 선보다 진리를 더 가지는 (인정하고 믿는 것) 경우가 없도록 주님께서는 섭리해두시고 있다. 그러므로 진리를 의미하는 성에 관해 말해지는 수식어는 “작다”이고, 다시 “그것은 작지 않습니까?”, 그리고 22절에서, 그는 그 성을 “소알”성이라 이름 불렀다. 이는 원어에서 “작다”를 뜻하는 단어이다; 이런 이유로 여기서 취급되는 이들은 선에 대한 애착에 있다기보다는 진리애 대한 애착에 있는 이들이 취급되고 있다.

제가 저쪽으로 달아나게 해주십시오. 이는 진리의 이 적은 양으로부터도 선을 중요시함이 허용될 수 있으면 좋겠다를 의미한다. 이는 앞 뒤 문맥으로부터 파악된다. 그는 산으로 달아나라고 말해졌다. 그리하여 산에 의해 사랑과 선행이 의미되어졌다; 그러나 그의 대답인 즉, 자기는 그렇게 할 수 없고, 도성으로는 피할 수 있다고 했다. 이를 수단으로 신앙의 진리가 의미되어졌다; 고로 그는 진리로부터 선을 중요시할 수 있다는 것, 같은 말로, 신앙으로부터 선행을 중요시할 수 있다고 대답한 것이다. 더욱이 그 성은 산의 발(foot, 입구)에 위치하였다; 그리고 그는 그 후에 그 성으로부터 산으로 올라가서 거주했다; 그러나 동굴 안에 거주했다 (30절).

그것은 작은 것 아닙니까?” 이는 그는 진리가 거의 없다시피 해서는 안됨을 의미한다. 이는 앞에서 설명했다. 고로 설명은 생략한다. 이 질문이 있은 이유는 주님만이 진리 안에 얼마나 많은 선이 있는지, 고로 인간 안에 있는 얼마나 많은 진리가 있는지를 아시기 때문이다.

제 영혼이 살 수 있을 것입니다. 이는 뜻밖에도 그는 구원될 수도 있음을 의미한다. 이것 역시 설명이 없어도 이해는 어렵지 않다. 그가 구원되는 것은 그의 진리 안에 선이 있기 때문임은 이어지는 대목에서, 즉 “보라 나는 너의 얼굴을 열납해 왔는 바, 이 말에 관련해서도 또한 그러해서, 나는 네가 말한 이 성은 뒤엎지 않겠다”; 그 후에 “태양이 땅위로 솟구쳤다, 그리고 롯은 소알에 왔다”라고 응답되기 때문이다. 이 구절에 의해 뜻해지는 바, 진리의 애착에 있는 이들은, 즉 신앙 안에 있는 이들은 그 신앙이 선으로부터의 신앙일 경우 구원되어진다는 것이다.

21절. 그리고 그분이 그에게 말했다, 보라, 나는 너의 얼굴을 열납해 왔는 바 이 말에 관련해서도 또한 그러해서, 나는 네가 말한 이 성은 뒤엎지 않겠다.

그분이 그에게 말했다, 보라, 나는 너의 얼굴을 열납해 왔는 바 이 말에 관련해서도 또한 그러하다” 이는 진리에 있는 내면들이 선으로부터의 어떤 것을 끌어낸다면 동의하겠음을 의미한다. 이 대목의 의미는 얼굴로부터 파악된다. 단어 “얼굴”은 말씀에서 자주 등장하는 편이다. 이는 내면들을 의미하는데 여러 번 살핀 바 있다; 그리고 얼굴이 여호와, 또는 주님의 속성일 경우, 이는 자비, 평화, 선을 의미한다; 여기서는 진리 안에 내면적으로 있는 선이다; 그러므로 “얼굴을 열납함”은 동의함을 표시한다. 동의 조건은 진리에 있는 내면들이 선으로부터 어떤 것을 끌어낼 경우이다. “이 말에 관련하여”는 이 주제에 관련하여를 표시한다. 진리 안에 선이 없으면 진리는 있는 것이 아니다는 것은 앞서 많은 대목에서 말해왔다; 그리고 인간이 사후 누리는 복됨이나 행복함은 진리로부터 있지 않고 진리 안에 있는 선으로부터이다; 고로 그의 진리 안에 있는 선이 많을수록 복되어짐은 더 많아진다. 선이 진리 내부에 있다는 것, 선이 진리되게 하는 원인이 된다는 것은 세상적인 것에서 조차 존재하는 선들과 진리들에서도 분명해진다. 인간이 어떤 것이 선이다고 배우고 인정할 때, 그는 이 선을 좋아하는 것은 무엇이든, 그는 진리라고 부른다; 그러나 좋아하지 않으면, 그는 그것을 거절하고 거짓이라 일컫는다. 그는 선인지가 의문시되어 좋아하지 않는 것은 올바른 행동이다고 말하고, 그때 그는 겉치레로 좋아하는 척 하고 생각은 다르다. 이런 경우는 영적인 것들에서 마찬가지이다.

나는 네가 말한 이 성을 뒤엎지 않겠다. 이는 그렇게 되어 그가 멸망하지 않으리라를 의미한다. 즉 선이 들어 있는 진리를 지닌 자는 멸해지지 않을 것이다를 의미한다는 말이다. 이는 “성”의 의미가 진리임에서 파악된다. 태고 시대로부터 논쟁되어 온 것은 교회의 첫 출생(장자)이 선행이냐, 신앙이냐에 관한 것이다; 논쟁된 이유는, 인간이 거듭나지고 교회가 되어가는 것은 신앙의 진리들을 수단으로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앙을 맨 먼저에 둠으로 그것을 첫 출생으로 만든 이들은 한결같이 이교(이단)나 거짓들 안으로 모두 타락되었다, 그리고 결국은 함께 있는 선행을 소멸해버린다; 성서에서 일찍 접하는 사건인 가인의 경우가 이에 해당된다. 가인에 의해 신앙이 의미되었다. 결국에 그는 자기 아우 아벨을 살해했다. 아벨은 선행을 의미했다; 그리고 야곱의 장자 르우벤 역시 신앙을 의미했는데, 그는 아버지의 침상을 더럽혔고(창. 35:22), 결국 장자권이 요셉에게 주어지고 말았다 (창. 48:5; 고전. 5:1).
선행과 신앙에 관한 것은 모든 다툼, 논쟁의 원인이었고, 또한 말씀에서 언급되는 장자권에 관련한 모든 법들에서의 원인이 되었다. 그런데 이런 논쟁의 원인이 시원하게 알려지지 않았고 오늘날 조차도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은 것은, 우리는 신앙으로부터 많은 것을 지니려 노력하기 보다는 선행으로부터 많은 것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인간이 거듭나질 때, 선행이 신앙 쪽에서 그 자체를 표출하고, 신앙으로 선행이 주입되고, 모든 세세한 것에서조차 일일이 선행이 신앙에 그 자체를 적합되게 하여, 신앙이 신앙다워지는 원인이 되어야 한다. 고로 선행은 교회의 첫 출생 자체이다. 비록 당사자에게 달리 나타난다 해도 이는 절대 변함이 없다. 이 주제는 이후에도 자주 취급될 것이고, 주님의 신성한 자비로 때때로 더 말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22절. 너는 서둘러라, 저쪽으로 달아나라, 그 이유는 나는 네가 저쪽에 당도할 때까지 어떤 것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는 이 성의 이름을 소알이라 불렀다.

너는 서둘러라, 저 쪽으로 달아나라. 이것은 그가 신앙의 진리 안에, 그리고 신앙의 진리에 대한 애착 안에 남아있어야 한다는 것, 그 이유는 그는 더는 발전할 수 없었기에, 즉, 선행의 선 자체와 이 선 자체에 대한 애착 안에는 있을 수 없었기 때문에서이다. 이는 앞서 살핀 대목으로부터 분명해진다.

그 이유는 나는 네가 저 쪽에 당도할 때까지 어떤 것도 행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는 악한 자에 대한 심판에 앞서, 진리에 대한 애착 가운데 있던 이들을 먼저 구원하실 것임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그는 이 성을 소알이라 불렀다”란 진리에 대한 애착을 의미한다. 이 대목의 파악은 “나는 어떤 것도 할 수 없다”가 소돔과 고모라의 파멸로 묘사되는 악한 자에 대한 심판에 관계되는 말이다는 것; 그리고 “네가 저쪽에 당도할 때까지”가 여기서 롯에 의해 표현되는 이들, 즉 진리에 대한 애착 안에 있는 이들이 먼저 구원될 것임을 말함에서 알게 된다. 이 구원함은 롯이 소알에 옴(23절)에 의해서도 의미되고 있다.
심판에서 선한 자와 의로운 자가 악하고 불의한 자가 멸해지기 앞서 먼저 구원되는 대목은 말씀의 다른 장소, 특히 최후 심판을 취급한 마태복음서에도 있다. 거기서, 양과 염소를 분리하고, 염소에게 영원한 불로 들어가라고 말해지기 앞서 양들에게 주님의 왕국 안으로 들어가라고 말해진다 (마. 25:32, 34, 41). 이와 같은 모습은 이스라엘의 아들들의 출애굽에서도 표현되었다. 즉 이집트 군대가 홍해에 익사되기 전, 먼저 그들이 구원되었다.
같은 것이 예언자들의 선포에서도 의미되고 있다. 즉 신실한 자들이 포로로부터 귀환된 후에 그들의 적들은 처벌되고 멸해짐이 있게 된다고 예언한 것이다; 이것은 다른 삶에서도 계속된다. 즉 신실한 자들은 주님에 의해 천국으로 승강되고, 비 신실한 자들은 지옥으로 스스로 내던져진다. 이 두 가지 것이 한꺼번에 거행되지 않는 이유는 선한 자들이 악한 자들로부터 떼어내짐에서 매우 조심스럽게 진행되어야 하는 대목 때문이다. 그렇지 않으면 선한 자들 주위에 악한 자들이 독 같은 것을 흩뿌려 놓는 바, 악의 탐욕들과 거짓 설득에 선한 자들이 쉽게 멸망당하게 될지 염려스럽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반적으로는 악한 자가 선한 자로부터, 그리고 선한 자가 악한 자로부터 분리되어야 하도록 설비해두셨다. 그리하여 선한 자는 자기들의 선들을 수단으로 주님에 의해 천국으로 들려지고, 악한 자는 자기들의 악들을 수단으로 지옥 안으로 스스로 내던진다; 이 주제는 주님의 신성한 자비로부터 25절 쯤에서 다시 다룰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이 성의 이름을 소알이라 불렀다. 이는 “소알”의 의미가 선에애착함, 즉 지식으로부터의 선에 대한 애착, 고로 진리에 애착함 임에서; 그리고 “이름을 부름”의 의미가 품질을 아는 것이다에서도 알게 된다; 여기서는 적은 진리가 있다는 것, 그 이유가 “소알”은 원어에서 “적다”, “조금”을 뜻하기 때문이다. 선에 대한 애착에 있는 이들에 비교해, 진리에 대한 애착에 있는 자는 적은 진리를 가지고 있다. 그 이유는 그들이 선을 적게 가졌기 때문이다.
더욱이 진리들 그 자체는 이 인물과 더불어는 더 진리이고, 저 인물과 더불어는 덜 진리이고, 어떤 인물과는 진리가 아닌 거짓으로 조차 있는데, 이는 그 자체 진리인 모든 것으로부터 분명해진다. 이렇게 인간이 누구냐에 따라 진리가 다양해지는 이유는 진리는 그 인간의 애착에 따라서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선한 일을 행함, 또는 선행의 선을 행함을 놓고 생각해보자. 선은 실행되어야 한다는 것 자체를 놓고 어떤 이는 선행의 선이다. 그 이유는 그가 선행에서 선을 진행하기 때문이다; 어떤 이는 순종의 일이다. 그 이유는 그 선이 순종으로부터 진행되기 때문이다; 어떤 이와 더불어서는 이 선은 자기 공적 쌓기이다, 그 이유는 이 선을 수단으로 공적을 바라고 구원을 획득하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어떤 이와 더불어서는 이 선은 위선이다. 그 이유가 그는 자기가 자비로운 사람으로 보여지기 위해 선을 행했기 때문, 등등이다. 이는 신앙의 진리들이라 불리우는 모든 것들에서도 같은 이치이다. 이는 선에 애착함에 있는 이들과 더불어서는 많은 진리가 있고, 진리에 대한 애착에 있는 사람은 적은 진리를 가진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 이유가 후자는 자신들과 관계가 적은 상태에서 선을 중시하고, 전자는 그 자체 스스로 표출된 선을 중시하기 때문이다.

23절. 태양이 땅 위로 솟구쳤다, 그리고 롯은 소알에 왔다.

태양이 땅 위로 솟구쳤다. 여기서 최후 심판이라 불리우는 마지막 시기를 의미한다는 것은 취급되는 주제가 교회의 때와 상태들인 것과 더불은 “태양의 올라 옴”의 의미로부터 분명해진다. 내적 의미에서 (하루의) 날에 속하는 때들과 (일 년의) 해에 속하는 때는 연속되는 교회의 상태를 의미한다; 그래서 새벽 , 또는 아침은 주님의 강림, 즉 그분의 왕국의 접근을 의미한다; 이 구절의 경우, “태양이 올라 옴”, 즉 태양이 “땅 위로 솟구침”은 주님의 현존 자체를 의미한다; 그 이유는 “태양”과 “동쪽”이 주님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주님의 현존하심이 심판이라 불리는 마지막 시기와 같은 이유는 그분의 현존은 선한 자를 악한 자에게서 분리하고, 선한 자는 천국으로 승강하고, 악한 자는 지옥으로 자신을 내던지는 결과를 초래하기 때문이다; 다른 삶에서 주님은 보편적 천국에서 태양이시다. 그리고 주님은 천사의 눈 앞에서, 그리고 실제로 천국의 빛 자체를 만드시는 그분의 사랑으로부터의 신성한 천적 (평면) 자체이시다. 그러므로 영계의 거주민들은 천적인 사랑에 있는 만큼에서 그들은 주님으로부터 있는 천적인 빛 안으로 승강되어진다; 그러나 그들이 천적인 사랑으로부터 떨어져 있는 만큼에서, 그들은 이 빛으로부터 떨어져 급기야 지옥의 어둠 안으로 자신들을 내던진다.
이것이 여기서 “태양이 올라 옴”이 표현된 이유이다. 이 표현에 의해 주님의 현존이 의미되고, 선한 자의 구원과 악한 자의 지옥에 떨어짐의 둘 다가 포함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처음에 “롯이 소알에 왔다”, 즉 롯에 의해 표현된 이들은 구원되어졌다. 그 다음 “여호와께서는 소돔과 고모라 위에 불과 유황이 비내리게 하셨다”, 즉 악한 자들은 지옥으로 던져졌다.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 있는 이들에게, 즉 주님을 사랑함과 이웃을 향한 선행의 사랑에 있는 모든 것들을 증오하는 이들에게 천국의 빛은 실제로 짙은 어둠으로 나타난다; 그렇기 때문에 말씀에서 이를 “태양이 어두워졌다”라고 말해지는데, 이를 수단으로 그들은 사랑과 선행의 모든 것을 거절하고 그 대신 사랑과 선행에 반대되는 것을 받아들였다가 의미된다. 에스겔서에서:
내가 너를 소멸할 때, 나는 하늘을 덮어 거기 있는 별들을 검게 만들 것이다; 나는 구름 으로 태양을 덮을 것이다, 그리고 달은 그녀의 빛을 빛나게 만들지 않을 것이다; 하늘에서 빛의 모든 발광체를 나는 네 위에서 검게 만들 것이다, 그리고 네 토지 위에 어둠을 놓을 것이다 (겔. 32:7, 8).
누구나 알 수 있는 것은, “하늘을 덮음”, “별들을 검게 함”, “태양을 덮음”, “하늘의 발광체를 검게 함”이 글자대로의 것 외의 것을 의미할 것이라는 점이다.
마찬가지로 이사야서에서:
태양은 그것의 나감에서 어두워질 것이다, 그리고 달은 그녀의 빛이 빛나지 않게 할 것이 다 (이. 13:10)
그리고 요엘서에서:
태양과 달이 어두워질 것이다, 그리고 별들은 그것들의 빛남을 철회할 것이다
(욜. 2:2, 10).
그러므로 주님께서 마태복음에서 심판이라 불리우는 교회의 마지막 시기에 관해 말하신 구절들에 의해 의미된 것이 무엇인지 분명해진다:
이런 날들의 역경 후에 즉시로 태양은 어두워질 것이고, 달은 그녀의 빛을 주지 않을 것이 고, 별들은 하늘로부터 떨어질 것이다 (마. 24:29).
위에서 “태양”에 의해 (자연의) 태양이 뜻해지지 않는다; “달”, “별”도 그렇다; 그러나 “태양”에 의해 사랑과 선행이; “달”에 의해 이로부터 파생된 신앙이; “별”에 의해서는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이 각기 의미되어진다; 이것들이 “희미해진다”라고, “그녀의 빛을 잃는다”라고, 그리고 “하늘로부터 떨어진다”라고 말해진다. 이는 주님을 인정함이 , 그분을 사랑함이, 이웃을 향한 선행이 더 이상 없을 때이다; 그리고 이런 것들이 존재치 않을 때 자기 사랑이 그것의 거짓들과 합세해 인간을 점유해버린다; 그 이유가 이것은 저것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우리는 계시록에서:
네 번째 천사가 그의 대접을 태양에 쏟았다; 그리고 그것이 그에게 불로 사람들을 그을리 려고 주어졌다. 그리고 사람들은 큰 열로 그을리게 되었다. 그리고 하느님의 이름을 모독하 였다 (계. 16:8, 9)
위 구절은 모든 사랑과 선행이 소멸되어진 교회의 마지막 때를 취급하고 있다; 또는 흔히 말하는 방식이라면, 더 이상 어떤 신앙도 없는 때이다. 사랑과 선행의 소멸이 “태양 위에 대접을 쏟음”에 의해 뜻해진다; 그리하여 인간들이 “불로 그을려지고” 그리고 “큰 열로 그을려졌는데” 그 수단은 자기 사랑과 그로부터의 탐욕들이다. 이로부터 “하느님의 이름을 모독함”이 왔다.
고대 교회에서는 “태양”을 가지고 주님과 주님의 사랑의 천적인 것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해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들은 떠오르는 태양을 향하여 기도를 드리기도 했지만, 자연의 태양을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이 교회의 후손이 선조의 위와 같은 태도를 잃은 후, 즉 태양이 표현하는 것, 의미하는 것 모두를 잃은 후, 이 후손들은 태양, 달 자체를 예배하기에 이르렀다; 이런 예배가 많은 나라들에 두루 퍼졌다. 하여 그들은 태양과 달을 위한 신전도 지어 헌당했다. 기둥들도 세웠다; 그리고 그때 태양과 달은 반대적 의미를 지녔기 때문에, 그것들은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을 의미하게 되었다. 이 사랑은 천적 (평면의) 사랑과 영적 (평면의) 사랑에 직반대 된다. 그러므로 말씀에서 “태양과 달을 예배함”은 자기를 사랑함과 세상을 사랑함이 뜻해진다. 모세의 책에서:
너희는 너희 눈을 들어올리지 말도록, 그리고 태양과 달과 별들을 보지 않도록, 그리고 하 늘의 어떤 군대도 보지 않도록, 너희가 그것들에 절하려 들지 않도록, 그리고 그것들을 섬 기지 않도록 하라 (신.4:19).,
그리고 다시:
만일 그가 가서 다른 신들을 섬겼다면, 그리고 내가 명령하지 아니한 것, 즉 태양과 달과 또는 하늘의 어떤 군대를 섬긴다면, 너희는 돌로 그들을 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죽을 것 이다 (신. 17:3, 5).
고대인들이 교회의 의식에 의해 어떤 내적인 것도 의미되는 것은 없다고 하여 외적 의식에만 골몰해지면서 위와 같은 우상 숭배 안으로 그들의 예배는 돌아섰다.
위와 마찬가지로 예레미야서에서:
그때에 그들은 자기들이 사랑했고 섬겼던 태양과 달과 하늘의 모든 군대 앞에 유다의 왕 들의 뼈, 제 1인 자들의 뼈, 성직자들의 뼈, 예루살렘 거주민의 뼈를 펼쳐놓을 것이다
(예. 8:1, 2)
위에서 “태양”은 자기 사랑과 그것의 탐욕들; 그들이 “뼈들을 펼쳐놓음”은 이런 예배들에 속하는 지옥적인 것들을 의미한다. 다시:
그분은 이집트에 있는 태양의 집의 기둥들을 부수실 것이다, 그리고 이집트의 하느님의 집 들을 불로 태우실 것이다 (예. 43:13).
“집의 기둥들”이란 자기를 예배함을 표시한다.

그리고 롯은 소알에 왔다. 이는 진리의 애착에 있는 이들은 구원되어짐을 의미하는데, 이는 “소알”의 의미가 진리에 애착함임에서 알게 된다. 이는 그들의 신앙 안에 선이 있다면 신앙 안에 있는 자도 구원된다는 것을 알려준다; 다시 말해 선을 위하여 신앙의 진리에 감명되는 이들이라면, 이것이 선으로부터 이다면 구원된다는 말이다; 신앙의 모든 생명은 선 외에 다른 근원은 없다. 선행은 신앙의 본질이다는 것, 선행은 신앙 자체이다는 것의 설명은 이미 많은 곳에서 지면을 할애해 왔다.

24절. 그리고 여호와께서는 그분으로부터 하늘에서 불과 유황이 소돔 위에와 고모라 위에 비내리게 하셨다.

여호와께서는 불과 유황이 소돔 위에와 고모라 위에 비내리게 하셨다. 이것은 자아 사랑과 이 사랑에서 파생된 거짓의 지옥을 의미하는데, 이는 “내림”은 저주됨이다에서; “유황”은 자아 사랑의 지옥 임에서; “불”은 자아 사랑이 빚어낸 거짓의 지옥 임에서 알게 되는데, 아래에서 세부적으로 살핀다; 또한 “소돔”의 의미가 자기 사랑이다로부터; 그리고 “고모라”는 이 사랑에서 파생된 거짓들임에서도 알게 된다.
이 장이 진행되는 동안에서 소돔만 언급되다가 이 구절에서 처음으로 “고모라”가 언급된다. 그 이유는 “고모라”는 자기 사랑의 악으로부터 오는 거짓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취급되는 교회, 즉 마지막에 있는 교회 내의 악들은 집중적으로 선에 반대한다, 그리고 그것의 거짓 역시 진리에 그러하다. 이때의 이 둘은 결합되어 있어 이것과 저것의 비율이나 수준은 거의 같다. 지상에서는 그 비율이 다른듯 하나 다른 삶에서는 거의 같다. 이에 관하여는 이미 여러 번 말했었다.

“비내림”이 지옥에 떨어짐을 의미하는 것은 “비”의 의미로부터 알게 된다. 말씀에서 “비”는 순수한 의미이다면 축복함, 그러므로 구원이다; 그러나 반대적 의미에서라면, 저주됨, 그러므로 지옥에 떨어짐이다. 비가 축복함, 고로 구원됨인 구절은 많은 편이다. 그러나 반대적 의미일 경우는 이사야서에서 읽어진다:
낮 동안 열로부터 그림자가 있도록, 홍수로부터, 그리고 비로부터 피난처가 되도록, 덮개가 되어주도록 천막이 있을 것이다 (이. 4:6).
에스겔서에서:
조절되지 않은 것으로 칠하는 자들에게 말하라, 그것은 무너질 것이다; 범람하는 비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우박이 너희에게 떨어질 것이다; 범람하는 비가 내 분노함에서 있을 것이 다, 분노에 있는 우박이 파괴할 것이다 (겔. 13:11, 13).
다윗서에서:
그분은 그들의 비를 우박으로 만드셨다, 불꽃의 불이 그들의 토지에, 그리고 그분은 그들의 포도나무와 무화과 나무를 치셨다 (시. 105:32, 33).
이집트에 관하여 모세의 책에서:
여호와께서는 천둥과 우박을 주셨다, 그리고 불이 토지에서 진동했다; 그리고 여호와께서 비를 이집트의 토지 위에서 우박으로 만드셨다 (출. 9:23, 24).

“유황”이 자기 사랑의 악들의 지옥, 그리고 “불”은 이 악에서 파생된 거짓들의 지옥을 표시하는 것은 말씀에서의 “유황”과 그것의 “불”이 의미하는 바가 탐욕을 가진 자기 사랑과 그것의 거짓들 임에서 알려진다. 고로 지옥들이다. 그 이유가 지옥이 이런 것들로 구성되고 있기 때문이다. “유황”과 “불”이 이 의미를 지니는 구절을 다윗서에서 읽어보자:
여호와께서는 사악한 자 위에 그물, 불과 유황을 비오게 하실 것이다 (시. 11:6).
불과 유황이 위 구절에서 뜻해지지 않고 그것에 의해 그밖의 어떤 것을 의미할 것이다는 것은 여호와께서 “그물을 비오게 하신다”는 대목으로부터도 짐작이 될 것이다. 에스겔서에서:
나는 염병과 피를 가지고 그와 다툴 것이다, 그리고 나는 비를 범람하는 비로, 우박으로, 불과 유황으로 그 자 위에, 그의 군대 위에, 그와 더불은 많은 백성 위에 만들 것이다
(겔. 38:22).
위는 이스라엘의 토지를, 즉 교회를 황폐케 한 곡(Gog)이 취급되고 있다. 이 곡에 대한 의미는 앞에서 이미 살폈다. “불”은 거짓들을 표시한다, “유황”은 거짓의 악들을, 동시에 황폐해지게 하는 이들의 지옥들을 표시한다. 계시록에서:
짐승을 숭배한 그들은 유황으로 타고 있는 불의 못으로 던져졌다 (계. 19:20).
지옥을 뜻함이 분명하다. 다시:
역겨운 자들, 살인자들, 색골들, 마술사들, 우상숭배자들, 거짓말쟁이들이 불과 유황이 타고 있는 호수 안에 그들의 몫이 있을 것이다 (계21:8).
위에서 불과 유황은 지옥을 분명하게 표시하고 있다.
이것들이 자기 사랑의 악들과 그로부터의 거짓들을 표시하는 바, 이로부터 지옥들이 온다. 이사야서에서:
여호와의 복수하심의 날, 그리고 시온의 논쟁에서 응보의 해; 그리고 거기로부터의 시내가 역청으로 변할 것이다, 그리고 거기로부터의 먼지는 유황으로, 그리고 거기로부터의 토지는 타고 있는 역청일 것이다 (이. 34:8, 9).
위에서는 “불” 대신에 “불타는 역청”이 언급되는데, 극단적이고 끔찍한 거짓들을 표시한다; 그리고 “유황”은 자기 사랑으로부터의 악들을 표시한다. 다시:
거기의 쌓아 올린 것은 불과 많은 장작이다; 여호와의 숨이 그것에 불을 지피는 유황의 시 내 같다 (이. 30:33).
위는 도벳을 취급하고 있다; “유황을 지피는 시내”는 자기 사랑의 악들로부터의 거짓들을 표시한다. 누가복음서에서:
롯이 소돔을 빠져나간 그날에 불과 유황이 하늘로부터 비내려서 그것들 모두 멸했다; 사람 의 아들이 밝히 알려지는 날에도 그렇게 있을 것이다 (눅. 17:29, 30).
위 구절에서 그때 불과 유황이 비오지 않을 것은 명확하다; 그러나 뜻해지는 것은 거짓들과 자기 사랑의 탐욕들이다. 이것이 “불과 유황”에서 의미되고 있다, 그리고 이것이 지옥을 만들고, 지옥을 지배할 것이다.
말씀에서 “불”은 탐욕들을 의미한다는 것, 동시에 지옥들을 의미한다는 것, 이 경우에서 불로부터의 “연기”는 거기로부터 파생된 거짓이 의미된다는 것, 그리고 이것이 지옥들 안에 있다는 것이 위에서 보여진다; 그리고 계시록에서:
나는 환상에서 말들을 보았다, 그리고 그것 위에 앉은 그들, 불의 가슴 받이와 유황의 가슴 받이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말들의 머리는 사자의 머리 같았고, 그들의 입으로부터 불과 연기, 그리고 유황이 분출되었다; 이 셋으로 인해, 즉 불, 그리고 연기, 그리고 유황에 의해 사람의 삼분의 일이 죽임을 당했다 (계. 9:17, 18).
위의 “불, 연기, 유황”은 갖가지 종류의 거짓들과 악들을 표시하고, 지옥들은 이것들로 구성되어 있다.

여호와로부터 하늘에서. 이는 그들이 선으로부터 자신들을 분리했기 때문에 진리 측면에서의 질서의 법칙에서를 의미하는데, 이는 내적 의미가 아니면 전혀 알려질 수 없다, 이 구절을 통해 어떻게 이 경우가 처벌과 지옥에 떨어짐과 더불어서 있는지가 밝혀지고 있다: 이것들은 여호와로부터, 즉 주님으로부터서는 결코 오지 않는다. 오직 인간 자신으로부터, 악령, 악마로부터 온다; 그리고 이것은 진리 측면에서의 진리의 법칙으로부터 이다. 그 이유는 그들은 자신들을 선으로부터 분리하기 때문이다.
모든 질서는 여호와로부터, 즉 주님으로부터 이고, 그리고 이 질서에 따라 만물은 일반적, 특수적 모두에서 그분에 의해 방향지워진다, 그러나 많은 다른 방법들에서, 즉 (그분의) 의지로부터, (그분의) 선한 기쁨으로부터, (그분의) 놓아두심으로부터, (그분의) 허용하심으로부터, 등등으로부터도 방향지워진다. 그분의 의와 선한 기쁨으로부터 있는 것들은 선 측면에서의 질서의 법칙이다. 마찬가지로 놓아두심, 허용하심의 경우도 그러하다. 그러나 인간이 자신을 선으로부터 분리할 때, 그는 선에서 분리된 진리로부터의 질서의 규율 안으로 자신을 내던진다. 이것은 그들이 (자신을)정죄하는 것과 같다; 그 이유가 모든 진리는 인간을 정죄하여 지옥으로 내던지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주님은 선으로부터, 즉 자비로부터 인간을 구원하시고, 그를 천국으로 들어 올리신다. 이로부터 아는 바, 인간을 정죄하는 것은 본인이다는 것이다.
허용으로부터 행해지는 것들의 대부분은 위와 같은 속성을 지니고 있다. 예를 들면, 이 악마가 저 악마를 처벌하고 고통을 주는 것이다. 물론 이 외에도 무수하게 많은 예가 있다. 이것들은 선으로부터 분리된 진리만으로 된 질서의 법칙으로부터 이다; 모든 호의적인 선한 자에게 무작정 달려 들어 영원히 그들을 파괴하려드는 악마를 속박하고 제지하는 방법은 위와 같지 않으면 되지를 않는다. 이것은 선한 자를 보호하는 주님의 방법 중 하나이다. 이런 예를 들면 위의 주님과 비슷할지 모른다. 즉 지상에 선한 것 밖에 더 의도하는 것이 없는 온순하고 관대한 왕이라 해도 그는 악한 자와 사악한 자의 처벌을 허용해야만 할 필요가 있다, 비록 그가 아무도 처벌하지 않고, 오히려 그들의 악이 그들을 처벌하는 것에도 몹시 슬퍼하는 왕이라 할지라도 그렇게 허용하지 않으면 그의 왕국은 악한 자의 사냥감밖에 더 아니기 때문이다. 이것이 엄하고 무자비함의 높이를 가늠하는 척도일 것이다.
이것이 보여주는 바, 여호와께서는 불과 유황을 비내리게 하신 분이 결코 아니다는 것이다. 즉 그들을 지옥으로 정죄해 버린 것이 아니다는 말이다. 그러나 악 안에, 그로부터 거짓에 있는 인간 자신이 불과 유황을 비내리게 한 것, 그 이유는 그들이 자신들을 선으로부터 분리했기 때문, 그리하여 진리만의 법칙에 자신들이 있도록 했기 때문이다. 이것이 이 구절의 내적 의미이다.
말씀에서, “악”, “처벌”, “저주함”, “지옥에 떨어짐” 등등을 여호와, 또는 주님의 탓으로 여기는 것이 아래 구절들에서도 더 보여진다. 에스겔서에서:
나는 염병과 피를 가지고 그와 다툴 것이다; 그리고 나는 불과 유황을 그 자 위에 비내리 게 할 것이다 (겔. 38:22).
이사야서에서:
유황의 시내같은 여호와의 숨이 그것을 지필 것이다 (이. 30:33).
다윗서에서:
여호와께서 사악한 자 위에 올가미, 불과 유황을 비내리게 할 것이다 (시. 11:6).
다시:
그분의 콧구멍으로부터 연기가 올라갔다, 그리고 그분의 입으로부터 불이, 석탄이 그분으로 부터 탔다 (시. 18:8).
예레미야서에서:
내 노여움이 불같이 나가서 태우지 않도록 하라, 그리고 그것을 끌 자는 아무도 없다
(예. 21:12).
모세의 책에서:
불이 나의 분노를 지필 것이다, 그리고 가장 낮은 지옥을 태울 것이다 (신. 32:22).
이와 비슷한 구절들은 더 있다. 이와 같은 일들이 여호와의 탓으로 돌려지는 이유는 제 1권에서 설명되어 있다. 이런 일들을 주님이 실시하셨다고 하는 말은 선이 악으로부터 먼 것 만큼, 천국이 지옥으로부터 먼 만큼, 또는 신성과 악마가 먼 만큼이나 먼 말일 것이다. 악, 지옥, 악마가 이것을 실행한다; 강조하건대 자비 자체, 선 자체이신 주님으로부터서는 결단코 아니다. 그러나 위에 인용한 구절들에서도 보여지듯, 주님이 하신듯 나타나기 때문에 인간들은 그분이 그렇게 하셨다고 말하는 것일 뿐이다.
본문에서 여호와께서 여호와로부터 하늘에서 비내리게 하셨다고 말하여 글자적으로는 마치 여호와가 둘인듯 나타나고 있다. 즉 한 분은 지상에 계시고, 또 한 분은 하늘에 계신 듯 하다. 그러나 내적 의미에서는 어떻게 이를 이해해야 하는지를 알려준다. 즉 앞의 여호와에 의해서는 이 장 앞에 등장한 두 사람, 즉 신성한 인간과 거룩한 진행이고, 뒤의 여호와는 앞 장에 이야기 된 “아버지”라 불리는 신성 자체이시다; 그리고 이 삼위 일체가 주님 안에서 있다는 것, 그분 자신께서 요한복음에서 가르치신다: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 나를 믿어라, 나는 아버지 안에, 그리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다. (요. 14:9-11).
그리고 거룩한 진행에 관련하여, 같은 복음서에서:
위로자는 자신으로부터 말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나로부터 가져갈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너희에게 선포할 것이다 (요. 16:13-15).
고로 여호와는 한 분이시다, 비록 본문에서 둘로 비쳐질지라도 그렇다; 둘이 명명된 이유는 질서의 모든 법칙들은 주님의 신성 자체, 신성한 인간, 그리고 거룩한 진행으로부터 이기 때문에서이다.

25절. 그리고 그분께서는 이 성들, 그리고 모든 평지, 이 성들의 모든 주민들, 그리고 지면의 생장물을 뒤엎으셨다.

그분께서는 이 성들을 뒤엎으셨다. 이것은 그들이 거짓들만을 가지도록 하기 위하여 모든 진리들이 그들로부터 분리되어졌음을 의미하는데, 이는 “성”의 의미가 교리적인 것들, 고로 진리들로부터 알게 된다. 그 이유가 교리에 속한 것이 진리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진리들 대신 거짓들이 있을 때, 뒤엎어졌다라고 말해지는 바, 여기서는 모든 선들 뿐만 아니라 모든 진리들이 그들로부터 분리됨이다. 그 이유가 여기서 취급되는 주제는 거짓들과 악들에 있는 교회의 마지막 상태이기 때문이다. 이들이 와지는 이 상태에 관하여 조금 더 말을 보태고 넘어가야 할 것 같다.
다른 삶으로 들어오는 모든 이들은 그들이 육체에서 가졌던 것과 비슷한 삶에 다시 데려다 놓인다; 그리고 그 다음 선한 자와 더불어서는 그가 지닌 악과 거짓이 떼어져 나가는데, 이는 그가 지닌 선과 진리들을 수단으로 주님에 의해 천국으로 승강되기 위함이다; 그러나 악한 자와 더불어서는 선과 진리들이 떼어져 나가는데, 이는 그가 지닌 악과 거짓을 수단으로 지옥으로 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주님의 이 말씀과 꼭 같다. 마태복음서에서:
가진 자는 누구든지, 주어져서, 더 풍부해질 것이다; 그러나 가지지 않은 자는 누구든지, 그 로부터 가진 것 조차 가져갈 것이다 (마. 13:12).
다른 복음서에서:
가진 자가 풍부해지도록 그에게 주어질 것이다, 그러나 가지지 않은 자로부터는 가진 것조 차 가져갈 것이다 (마. 25:29; 눅. 8:18; 19:24-26; 막. 4:24, 25).
같은 것이 마태복음서에서 이 말들에 의해 의미되어진다:
수확 때까지 둘 다 함께 자라게 하라: 그리고 추수 때에 나는 추수자들에게 말할 것이다, 너희는 먼저 가라지들을 함께 모우라, 그리고 그것들을 태우기 위해 단들로 묶어라: 그러나 밀은 내 곳간 안으로 모우라. 추수는 시대(age)의 끝이다; 그러므로 가라지들이 모아져서 불에서 태워지듯; 그렇게 이 세대의 끝도 같다 (마. 13:30, 39, 40).
위 비유와 같은 비슷한 내용이 그물의 비유이다. 그물을 바다에 던져 갖가지의 고기들을 끌어올리고, 좋은 것은 그릇에 담고 나쁜 것은 버린다. 시대의 종말이 이와 같다 (마. 13:47-50). 악들과 거짓들이 선한 자로부터 분리되어야 하는 이유는 선한 자가 악들과 선들 사이에서 우물거려서는 안되기 때문에서이다; 그리고 선들과 진리들이 악한 자로부터 분리되어야 하는 이유는 악한 자들이 자기들에게 속한 어떤 선을 수단으로 직바른 자를 유혹해대지 않도록 그들을 지옥 그들의 위치로 가게 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것이 다른 삶에서 전개되기 때문에 모든 생각과 애착으로부터 선한 자는 선한 자들과 교통하고, 악한 자는 악한 자들과 서로 왕래한다. 이렇게 선한 자와 악한 자가 분리되지 않으면, 셀 수 없는 해악이 초래될 것이고, 더욱이 연합하는 것(끼리끼리 모여 삶)마저 불가능해진다; 더 나아가 선한 자가 사는 천국에서도 주님을 사랑함과 서로의 사랑에서, 그리고 이 사랑들로부터 파생된 신앙에서 있는 각자의 수준에 따라 최고로 절묘하게 연합하여 공동체를 만든다. 지옥 역시 각자의 탐욕과 공상의 수준에 따라 끼리끼리 모인다. 어쨌든 또 하나 우리가 알 것은 이 분리함이 완전히(100%) 이동된 것은 아니다는 것이다. 인간이 지녀왔었던 것을 당사자로부터 송두리째 제거하기는 힘들기 때문이다.

그리고 모든 평지. 이는 이 진리들에 속하는 모든 것들을 의미한다. 이는 “평지”의 의미가 교리적인 것의 모든 것, 고로 진리들에 속하는 모든 것임에서 알게 된다.

그리고 성들의 모든 주민들. 이는 그들로 부터서는 악밖에 남아있는 것이 없도록 하기 위하여 모든 선들이 그들로부터 제거되었음을 의미하는데, 이는 “주민들”이 성을 수식할 경우, 주민들은 선들을 의미함으로부터 알려진다; 이것은 말씀의 많은 구절들에서 확증되기도 한다. 또는 “성”이 진리(교리)를 의미할 때, (그 안의) 주민은 선들을 표시함에서도 파악된다. 그 이유가 진리는 선이 거주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그 반대로 선이 없는 진리는 텅빈 성, 주민 없는 성도 생각해볼 수 있다. 더 나아가 모든 선들이 악한 자로부터 분리되어 그들이 악밖에 가진 것이 없도록 되는 것은 텅빈 성보다 더 심한 경우이다.

그리고 지면의 생장물. 이는 교회 속에 있는 모든 것을 의미하는데, “생장물, growth”은 작물들, 또는 푸른 모든 것, 그리고 이것들에 의해 선들과 진리들이 말씀 두루에서 의미됨에서 알게 된다, 그리고 “지면, ground”의 의미가 교회이다로부터도 더 알려진다. 선들과 진리들이 교회 속의 모든 것들임은 누구나 익히 아는 사실일 것이다.

26절. 그리고 그의 아내는 그의 뒤를 뒤돌아 보았다, 그리고 그녀는 소금 기둥이 되어졌다.

그의 아내는 그(him)의 뒤를 뒤돌아 보았다. 이는 진리가 그 자체를 선으로부터 방향을 틀어 교리적인 것들을 보았다. 이 의미는 “자기 뒤를 뒤돌아 봄”과 “아내”의 의미로부터 찾아진다. 앞에서 이미 잠간 말했듯이, “자기 뒤를 뒤돌아 보는 것”은 선으로부터 있는 것인 교리적인 것들에 따른 삶을 보지 않고 진리로부터 있는 것인 교리적인 것들을 보는 것이다; 그 이유가 (시간상으로) 뒤의(posterior) 것이 (위치상으로) 그의 “뒤에, behind”라고 말해지는 것, 그리고 (시간상으로) 앞의(prior) 것은 (위치상으로) 그의 앞에(before)라고 말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진리는 뒤의 것이고 선은 앞의 것이라는 것은 (이 책에서) 자주 보여주기도 했다. 그 이유가 진리는 선 속에, 또는 선으로부터 있고, 선은 진리의 생명이고 본질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의 뒤를 뒤돌아 보는 것”은 교리 속에 있는 진리를 보는 것, 교리에 따른 삶 속에 있는 선을 보는 것이 아니다는 말이다. 이 의미 파악은 주님의 말씀, 즉 시대의 종말, 교회의 마지막 때에 관해 하신 말씀에서 가능해진다:
그 날에 집 위에 있는 자, 그는 집 안에 있는 그의 그릇들을 가져가려고 내려가지 말라; 그 리고 들판에 있는 자도 마찬가지로 자기 뒤쪽으로 뒤돌지 말라; 롯의 아내를 기억하라
(눅. 17:31, 32)
위 주님의 말씀은 내적 의미 없이는 전혀 이해할 수 없는 말씀이다. 즉 집 위에 있음, 집에 있는 그릇들, 그것들을 가지러 내려 감, 들판, 마지막으로 그의 뒤쪽으로 뒤돌음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알지 않으면 이해 불가능하다는 말이다. 내적 의미에 따르면, “집 위에” 있다는 것은 선 안에 있다는 것이다. “집에 있는 그릇들”은 선으로부터 있는 진리들을 표시한다. “그것들을 가지러 내려 감”은 선으로부터 자신의 자아로 방향을 틈을 표시한다. 이미 우리가 알듯이, 선은 앞의 것인 바, 선은 위의 것, 즉 더 높은 것이다. 그리고 진리는 뒤의 것인 바, 그것은 보다 아래쪽의 것이다. (따라서 집 “아래”가 아닌 집 “위에”라는 표현이 이에 해당될지 모른다, 따라서 내려가면 안된다는 말이다.) “들판”이 교회를 표현하는 이유는 씨라는 말씀을 (직접적으로) 받는 곳이 교회이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교리의 선 안에 있는 이들이 “들판”이다. 이는 말씀의 많은 구절로부터 여러분 스스로 확인이 가능하다. 이 “들판”의 의미를 좀더 심각하게 생각하면, “자기 뒤를 뒤돌아 보는 것”이 선으로부터 자신의 자아의 방향을 틀어 버리는 것, 그래서 교리적인 것을 보는 것임을 자연스레 알게 된다; 위 누가복음의 의미가 이렇게 파악되므로 추가된 주님의 말씀은 “롯의 아내를 기억하라”이었다. 본문에서 표현이 글자적으로 엇박자인듯한 대목은 롯의 아내가 그녀(herself) 뒤를 뒤돌아 보지 않고 그(him)의 뒤를 뒤돌아 보았다라고 기록된 대목이다. 그렇게 표현한 이유는 “롯”이 선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올바른 내적 의미의 시리즈를 위해 사용된 표현인 셈이다.) 그러므로 롯에게 그들이 하지 말아야 하는 것을 명령할 때 “네 뒤를 뒤돌아 보지 말라”이었다 (17절).
누가복음에서, “그의 뒤로 방향을 틀어 뒤돌지 마라”라고 말하시고, “그의 뒤에 있는 것들 쪽으로”라고는 말하시지 않은 이유는 천적 평면에서는 교리적인 본성들에 속한 어떤 것도 언급하는 것조차 싫어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단순하게 “그의 뒤”라고 표현한 것이다. 이와 같은 표현을 마태복음에서 읽을 수 있다:
그러므로 너희는 예언자 다니엘에 의해 말해진 것, 거룩한 장소에 서 있는 황폐함으로 부 터의 지겨운 것을 볼 때, (읽는 누구나, 자기로 하여금 이해하게 하라:) 그 때 유대 안에 있는 그들로 하여금 산들 안으로 도망하게 하자. 집 위에 있는 자로 하여금 자기 집으로부 터 어떤 것을 가지러 내려 오지 말게 하자; 그리고 들판에 있는 자는 자기 옷을 가지러 뒤돌아 가게 하지 말자 (마. 24:15-17).
위에서 “황폐함으로부터의 지겨운 것”은 사랑도, 선행도 없을 때 교회의 상태를 표시한다. 그 이유는 사랑과 선행에 관심이 없을 때, 지겨운 것들이 득세하기 때문이다. “유대”는 교회를 표시하고, 실로 천적 (평면의) 교회를 표현하는데, 이는 역사적, 예언적 말씀 모두에서, 구약 성경에서 확인된다. 그들이 도망해야 하는 “산들”은 주님을 사랑함, 결과적으로 이웃을 향한 선행을 표시하는데 지금까지 많이 말해왔다. “집 위에 있는 자”란 사랑의 선에 있는 자를 표시한다. “자기 집으로부터 어떤 것을 가져가려 내려 감”은 자신의 자아를 선으로부터 진리로 방향을 틈을 표시한다. “들판에 있는 자”란 영적 (평면의) 교회에 있는 자를 표시하는데, 이는 말씀에서 “들판”의 의미로부터 찾아진다. “자기 옷을 가지려고 되돌아 감”은 선으로부터 방향을 틀어 자신을 교리 속에 있는 진리에로 돌아서게 하지 말라는 것을 표시한다. 그 이유는 “옷, 의복, 겉옷, garment”은 진리들을 의미하는데, 진리는 선에 옷입힌 것같이 행동하기 때문이다. 누구나 알 수 있는 바는 아주 다른 사항들이 주님께서 말하신 시대의 종말에서 뜻해진다는 것, 거기에 그 내용은 비밀적이다는 것이다. 즉 유대에 있는 자는 산으로 도망하라든지, 집 위에 있는 자는 집에서 어떤 것을 가져가려 내려가지 말라든지가, 들판에 있는 자는 자기 옷을 가져가려 뒤돌아 가지 말라든지 하는 대목들이다; 이와 마찬가지의 대목이 본문 17절, 롯에게 네 자신 뒤를 뒤돌아 보지 말라는 것이다. 여기서 그의 아내는 그의 뒤를 뒤돌아 쳐다보았다. 이 대목의 이해는 아내의 의미가 진리이다로부터, 그리고 롯은 선이다로부터 한층 더 분명해진다. 그러므로 롯의 아내가 여자이니까, 여자 대명사 her, herself를 사용해야 하는데, 오히려 롯, 즉 남자 대명사 him이 사용되었다.
진리가 선으로부터 그 자체를 돌아서게 하여 교리적인 것을 쳐다 봄이라고 말해지는데, 그렇게 되는 때란, 교인이 자기의 생명이라 여기는 교리이다면 그것에 따라 살아야한다는 것을 심정에서 더 이상 가지지 않는 것, 고로 교리를 막연히 소유만 하고 있는 때를 말한다. 어찌됐든 교리에 따른 삶만이 어떤 종류의 교인일지라도 교인을 만들어 준다는 말이다. 따라서 생활과 분리된 교리는 무익할 뿐이다. 그 이유가 생활로부터 있는 선이 피폐한 상태이기 때문이다. 이 무익함, 아무 쓸모 없음, 즉 소금 기둥이다. 누구나 쉽게 인정하는 바, 교리만을 찾고 생활은 없을 경우, 비록 교리들이 그를 가르치고 있다 해도, 그래서 그가 이 교리들을 열심히 생각하고 있다 해도, 그가 부활을, 천국을, 주님까지도, 이 외 교리에 있는 사소한 것에 이르러서까지 믿고 있는지는 의심스럽다는 말이다.

그리고 그녀는 소금 기둥이 되었다. 이는 진리의 모든 선이 황폐해졌다를 의미하는데, 이는 “기둥”과 “소금”의 의미로부터 알려진다. 원어에서 “기둥, pillar”은 잠자코 있음, 정지하여 서있음, standing still를 의미하는 단어에 의해 표현되어져 있다, 이 단어는 예배를 위해, 어떤 표시를 위해, 또는 증거를 위해 직립한 기둥(벌떡 일어 섬)을 뜻하는 단어는 아니다. (다시 말해 뭔가 행동적 선이 없음, 무익한 인간 삶, 짠맛이 없는 소금일지 모른다.) 고로 여기서 의미되는 “소금 기둥”은 롯의 아내에 의해 의미된 진리가 황폐해져 있음 이다. 이렇게 황폐해진 진리란 그것 안에 선이 더 이상 없다는 말이다. 즉 황폐함 자체가 “소금”에 의해 의미된다.
말씀에 있는 대부분의 단어들은 양면의 의미, 즉 순수한 의미와 그 반대적 의미를 가지는 경우가 흔한데, 여기 등장하는 소금도 그러하다; 반대적 의미에서, 진리에 애착함의 황폐함, 즉 진리에 있는 선에 대한 애착의 황폐함을 의미한다. “소금”이 진리에 애착함을 의미하는 것은 출. 30:35; 레. 2:13; 마. 5:13; 막. 9;49, 50; 눅. 14:34, 35에서 찾아 확인해 볼 수 있다. 그리고 반대적 의미인 진리에 애착함의 황폐함은 다음 구절들로부터 분명해진다. 모세의 책에서:
온 토지가 유황과 소금일 것이고, 불에 탈 것이다; 씨뿌림도, 열매 맺음도, 어떤 풀잎도 거 기서 없을 것이다; 마치 소돔과 고모라, 아드마와 스보임의 뒤집어짐 같다 (신. 29:23).
위에서 “유황”은 선의 황폐함을 표시한다; 그리고 “소금”은 진리의 황폐함이다: 주제가 황폐함이다는 것은 구절 속의 세세한 사항에서 묻어나고 있다.
스바냐서에서:
모압이 소돔같이, 암몬의 아들들이 고모라같이 있을 것이다; 이 장소는 쐐기풀, 소금 구 덩이, 영원히 황량함으로 남을 것이다 (습. 2:9).
“쐐기풀만 남은 장소”는 황폐한 선, 그리고 “소금 기둥”은 황폐한 진리를 표시한다; 그 이유는 “쐐기풀만 있는 장소”가 소돔과 관계가 있고, 이 관계를 수단으로 악, 또는 황폐한 선이 의미된다. 그리고 “소금 구덩이”는 고모라와, 이를 수단으로 거짓, 또는 황폐한 진리가 의미된다. 이 구절의 주제가 황폐함인 것은 마지막 단어가 영원히 황량함인 것에서 분명해진다. 예레미야서에서:
살(혈육)으로 그의 팔을 만드는 자는 황량함에 있는 벗겨진 관목같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좋은 것(선)이 올 때 보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광야의 바싹 마른 곳에, 소금 토지에, 거주 못할 곳에 거주할 것이다 (예. 17:5, 6).
위에서 “바싹 마른 장소”는 황폐된 선들, “소금 토지”는 황폐된 진리들을 표시한다.
다윗서에서:
여호와께서는 강들을 광야로, 솟는 물을 마른 지면으로, 열매 맺는 토지를 소금 토지로 만 드신다, 그 이유는 그 안에 거주하는 그들의 사악함 때문이다. (시. 107:33, 34).
“열매 있는 토지를 소금 토지로 만드셨다”란 진리 안에 있는 선의 황폐함을 표시한다. 에스겔서에서:
거기의 진창 깊은 곳과 습지는 치료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소금 땅이 될 것이다
(겔. 47:11).
“소금 땅이 됨”은 진리 측면에서 깡그리 황폐함을 표시한다. “소금”이 황폐함을, “성”이 진리의 교리적인 것을 의미했기 때문에, 고대 시대 때에 성들을 파괴하고 소금을 뿌렸다. 이는 이 성이 재건되지 말라는 뜻이다 (사. 9:45). 26절 본문은 롯에 의해 표현된 교회의 네 번째 상태이고, 그 상태는 모든 진리가 선 측면에서 황폐해짐이다.

27-29절. 그리고 아브라함은 아침에 일찍 일어나 그가 여호와 앞에 섰었던 그곳으로 갔다. 28 그리고 그가 소돔과 고모라의 얼굴과 평야의 지면의 모든 얼굴들을 마주 보았다. 그리고 그는 그 지면으로부터 올라오는 연기를 보았고 바라보았는데 마치 용광로의 연기 같았다. 29 그리고 하느님께서 평지의 그 성들을 멸하실 때가 당도하자,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을 기억하셨다, 그리고 그분이 롯이 거주한 그 성들을 뒤엎으실 때, 그 뒤엎음의 와중에서 롯은 내어보냈다.

위 세 절의 경우, 세세한 설명은 필요하지 않을 것으로 여겨진다. 그 이유는 앞 장에서 대부분 설명되었고, 이 설명에 방금 앞의 간추린 요약 설명만 추가해도 충분한 이해가 가능할 것이라 여겨지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중복된듯 여겨지는 이 세 절이 추가된 목적은 이를 강조하시려 해서이다. 즉 선한 자는 악으로부터 분리되어졌다는 것, 전자는 구원되는 반면, 후자는 정죄되어졌다는 것, 이는 오직 주님의 신성 본질이 그분의 인간 본질과 하나됨을 통하여서만 되어졌다는 것; 만일 이것이 거행되어졌지 않으면, 여기서 롯에 의해 표현되는 모든 이들이 여타 나머지들과 함께 멸망했을 것이다; 이것이 이 말들에 의해 뜻해진다: “하느님께서 평지의 그 성들을 멸하실 때가 당도하자,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을 기억하셨다, 그리고 그분이 롯이 거주한 그 성들을 뒤엎으실 때, 그 뒤엎음의 와중에서 롯은 내어보냈다.” 이 대목이 내적 의미에서 표시하는 것은, 주님의 신성 본질이 인간 본질과 하나됨을 통하여 선 안에 있는 모든 이들이 구원되고, 또한 악들로부터의 거짓들에 있는 이들은 멸해지는 한편, 비록 거짓들과 악들 속에 있다 하더라도 구원되는 이들, 즉 여기서의 롯에 의해 표현된 이들, 선이 있는 진리에 있는 이들은 구원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방식에서 이 장은 앞 장에서 말해진 것과 결합되고 있다. 즉 18장의 경우, 아브라함( 이 상태에 계신 주님)이 소돔과 고모라 사람을 위해, 즉 그들 중의 50, 45, 40, 30, 20, 10에 의해 의미된 사람을 위해 중재함, 각기 질서에 따라 구원되는 선 안에 있는 이들이고, 또한 19 장은 선이 있는 진리에 있는 이들의 구원인 바, 구원되는 선과 진리 측면의 모든 이, 하여 구원되는 모든 이를 말해준다.

30절. 그리고 롯은 소알로부터 나와 올라갔다, 그리고 산에 거주하였다, 그리고 그와 함께 그의 두 딸도. 그 이유가 그는 소알에서 사는 것이 두려웠기 때문에서였다. 그리고 그는 그와 그의 두 딸과 함께 동굴에서 살았다.

롯은 소알로부터 나갔다. 이는 그들이 진리에 대한 애착을 더 이상 가지고 있지 않음을 의미하는데, 이는 “소알”이 진리에 대한 애착임에서 알게 된다; 그리고 이어지는 말인즉, “그는 소알에서 사는 것이 두려웠기 때문에 산에서 거주하였다”인 바, 이 의미는 “그들이 진리에 대한 애착 안에 더 이상 있지 않았을 때”이다. 그리고 이것은 모든 선과 진리가 황폐해졌기 때문인데 26절로부터 분명해진다. 그러므로 이 절에서는 롯에 의해 표현된 교회의 다섯 번째 상태가 묘사되어진다. 이 상태는 진리에 대한 애착마저 없어진 후 일종의 불순한 선, 또는 거짓의 선이 그 자체 주입된 상태이다.

그리고 산에 거주하였다. 이는 그들이 그때 일종의 어떤 선으로 자신을 향하게 했다를 의미하는데, 이는 “산”의 의미가 모든 의미에서의 사랑, 즉 천적, 영적 (평면의) 사랑 임에서 분명해진다; 그리고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 역시 의미한다. 그리고 모든 선은 어떤 사랑 속에, 사랑으로부터 있는 바. 여기서의 “산”의 의미는 선이다. 이 선이 어떤 종류의 선인지는 이어지는 대목에서 묘사되어진다, 즉 불명료한 선, 그래서 불순해지게 된 선이다. 그 이유가 곧 바로 하는 말은, 그는 “동굴에 거주하였다”이기 때문에서이다, 거기서 모독적인 것이 거행되었다.

그리고 그의 두 딸이 그와 함께. 이는 거기로부터 파생된 애착들도 그렇게 했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는 “딸들”의 의미가 애착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선이 이와 같으면, 거기서 파생된 애착 역시 그러하다. 가짜이고 불순한 선 조차도 그것 나름의 애착을 가지고 있다. 그 이유가 모든 것들은 어떤 종류이든 각기 선이라고 간주되는 것들에 의해 감명되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그 선이 그들 사랑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그는 소알에 사는 것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이는 그가 진리에 대한 애착으로부터 선을 더 이상 중시하지 않았기 때문에를 의미하는데, 이는 “소알”의 의미가 진리에 대한 애착이다에서 분명해진다; 이 애착이 황폐해질 때, 누구도 그것으로부터 선을 중시하는 것은 더 이상 있을 수 없음은 당연하다. 이때 모든 진리에 두려움이 있게 되는데, 그 이유는 어떤 진리라도 불순한 선에 반대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동굴에 거주하였다. 이는 거짓의 선을 의미하는데, 이는 “동굴”의 의미로부터 분명하다. 동굴은 산에 있는 일종의 거처이다. 그러나 어두운 거처이다. 모든 거주지, 집처럼 선을 의미한다. 그러나 거주지에 따라 각기 선의 종류는 다르다. 여기서의 거주지인 동굴은 어두운 바, 거짓의 선을 의미한다. “산의 동굴”은 말씀에서 자주 등장한다. 그리고 이사야서 2:19; 32:14에서도 같은 의미를 지닌다. 그리고 역사서에서, 엘리야가 이사벨을 피해 달아났을 때 같이:
호렙산에 있는 동굴에 왔다, 그리고 거기서 밤을 보냈다; 그리고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왔다, 그리고 그분은 그에게 말했다. 나가서 산에서 여호와 앞에 서라; 그래서 그는 자기 얼굴을 그의 망또로 감싸고, 그리고 나갔다, 그리고 동굴의 입구에 섰다 (왕상. 19:9, 13).
위의 내적 의미에서 “동굴”에 의해 희미한 선이 의미되고 이런 선은 시험 중에 존재한다; 그리고 이런 선은 신성 앞에서 견뎌낼 수 없는 바, 그는 그의 망또로 얼굴을 감쌌다. 그밖에 사. 6:2를 보면, 이스라엘의 아들들이 미디안족 때문에 산에서 굴을 만들었다; 삼상. 13:6에서는 불레셋족 때문에 그러했다. 이런 역사적 사실들, 지금 모세의 책같이, 내적 의미에서는 다른 의미를 가진다.

그리고 그의 두 딸들. 이는 거기로부터의 애착들, 어떤 선으로부터의 애착, 그리고 어떤 거짓으로부터의 애착을 의미하는데, 이는 “딸”의 의미가 애착이기 때문이다. 이 애착이 와진 선, 또는 이 딸들이 와진 아버지는 롯이었다; 그리고 이 애착이 와진 진리, 또는 이 애착이 와진 어머니는 롯의 아내였다; 그리고 그녀가 소금 기둥으로 만들어졌을 때, 즉 진리의 선이 황폐해졌을 때, “동굴에 있는 롯”에 의해 의미되는 어떤 선이 생겨났다, 그리고 거기로부터 파생된 어떤 애착들이 “딸들”에 의해 의미되었다.

31-36절. 그리고 언니가 동생에게 말했다, 우리의 아버지는 늙고 모든 땅의 방식에 따라 우리에게 올 남자가 땅에 없다. 32. 이러한 바, 우리는 우리의 아버지에게 포도주를 마시우자, 그리고 우리는 그와 함께 드러눕자, 그리고 우리는 아버지로부터 씨를 되살리자. 33. 그리고 그들은 그날 밤 그들의 아버지에게 포도주를 마시게 만들었다. 그리고 언니가 안으로 갔다, 그리고 그녀의 아버지와 함께 누웠다. 그리고 그는 그녀가 드러누운 것, 일어나 나간 것을 알지 못했다. 34. 이튿날 언니가 동생에게 말했다, 보라, 나는 어젯밤 나의 아버지와 누웠다. 우리가 오늘 밤 역시 그가 포도주를 마시게 만들자, 그리고 너는 들어가 그와 함께 누워라, 그리고 우리는 우리의 아버지로부터 씨를 되살리자. 35. 그리고 그들은 그들의 아버지가 그날 밤 역시 포도주를 마시게 만들었다. 그리고 동생은 일어나 그와 함께 누웠다. 그리고 그는 그녀가 누운 때와 일어나 나간 때를 알지 못했다. 36. 그리고 롯의 두 딸은 그들의 아버지에 의해 임신되었다. “언니가 동생에게 말했다”란 애착들을 의미함은 전과 같다. 그 중에서 언니는 어떤 선에 대한 애착을, 동생은 어떤 거짓에 대한 애착을 의미한다. “우리 아버지는 늙고 땅에는 남자가 없다”란 선이 무엇인지, 진리가 무엇인지 더 이상 알지 못함을 의미한다. “우리에게 올…”이란 그들이 결합해야 함을 의미한다. “모든 땅의 방식에 따라…”란 교리적인 것들에 따라를 의미한다. “땅”은 교회이다. “자, 우리는 우리의 아버지에게 포도주를 마시게 만들자”란 그들은 어떤 종류의 선을 포도주인 거짓들에 스며들게 할 것임을 의미한다. “그리고 우리가 그와 함께 눕자”란 선에 거짓이 스며드는 방법으로 그들은 결합될 것임을 의미한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의 아버지로부터 씨를 되살리자”란 이렇게 하여 또다른 교회 같은 것이 추가됨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들은 그들의 아버지가 포도주를 마시게 만들었다”란 그들은 어떤 선에 거짓이 스며들게 했음을 의미한다. “그날 밤”이란 모든 것들이 흐릿함 가운데 있었을 때를 의미한다. “언니가 들어갔다”란 어떤 종류의 선에 대한 애착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녀의 아버지와 누웠다”란 이리하여 그들은 일치함을 가져다 놓았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는 그녀가 눕고 일어나 나간 때를 알지 못했다”란 선에 대한 이와 같은 종류는 그렇게 있었던 것 외에 달리는 알지 못했음을 의미한다. “이튿날이 왔다”란 …후에를 의미한다. “언니가 동생에게 말했다”란 이와 같은 선에 대한 애착이 거짓을 설득했음을 의미한다. “보라, 나는 어젯 밤 내 아버지와 누웠다”란 그러므로 해서 그들은 결합되어졌음을 의미한다. “오늘 밤 역시 우리는 그가 포도주를 마시게 만들자”란 모든 것이 희미함 가운데 있을 때 그들은 어떤 종류의 선을 거짓으로 물들였음을 의미한다. “너는 들어가라, 그리고 그와 함께 누워라”란 이러한 것들 또한 결합되어질 것임을 의미한다. “우리가 우리 아버지로부터 씨를 되살리자”란 이렇게 하여 교회 같은 것이 생겨남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들은 그들의 아버지가 포도주를 그날 밤에도 마시게 만들었다”란 이 희미한 상태에서 그들은 어떤 선을 거짓으로 물들였음을 의미한다. “동생은 일어나서 그와 함께 누웠다”란 거짓에 대한 애착도 같은 방법, 즉 거짓이 진리처럼 나타나는 방법으로 하였음을 의미한다. 이런 방식으로 그들은 결합되어졌다. “그리고 그는 그녀가 누웠을 때, 일어나 나갔을 때를 알지 못했다”란 이와 같은 일반적인 선은 원래 있던 것 외의 것을 달리는 알지 못했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롯의 두 딸은 그들의 아버지로 말미암아 임신했다”란 이로부터 모압과 암몬의 아들로 의미되는 종교의 근원이 있었음을 의미한다.

위 구절에 내적 의미에서 놓여있는 것은 확증될 수 있고, 각 단어마다 실지로 그렇게 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들 대부분이 이미 앞에서 살핀 바 있어 어쩌면 반복으로 지루함을 줄이기 위해, 생략하되 위 요약 설명에서 보이듯 한 가지 의문되는 것, 즉 새로이 등장한 것은 “모압”과 “암몬의 아들들”에 의해 말씀에서 의미되는 것, 그들에 의한 어떤 종교의 근원이 묘사된 것에 관해서이다. 이 종교의 본성은 이후 그들이 취급되는 곳에서 말해질 것인데, 그것은 선에 섞음질함과 진리를 왜곡함 임은 분명하다. 선의 섞음질과 진리의 왜곡이 말씀에서 “간통과 매춘”에 의해 보통으로 묘사되어지고, 그렇게 불리는데, 그에 대한 이유는 선과 진리는 서로가 결혼을 만들어낸다는 사실에 기초되고 있기 때문이다; 아니, 대개의 사람들에게 믿을 수 없게 나타날는지 모른다. 순수한 근원으로부터와 같이 이 결혼으로부터 지상의 결혼들의 신성시 함(sanctity), 또한 말씀에서 주어진 결혼의 법칙들이 오고 있다.
이러하다: 천적, 영적인 것들이 천국으로부터 보다 낮은 영역으로 내려갈 때, 그 영역에서 이것들은 결혼들의 어떤 모습으로 최고로 완전한 방식으로 바뀌어진다, 그리고 이것은 상응으로부터 영적인 것들과 자연적인 것들 사이에 존재한다. 이 상응에 관한 것은 차후 주님의 신성한 자비로부터 더 살필 것이다. 그러나 그것들이 보다 낮은 영역에서 남용(타락)되어질 때, 즉 거기에 있는 악귀나 악령에 의해 이용당할 때 같을 경우, 천국으로부터 내려온 똑같은 것이지만, 그것은 간통들이나 매춘들에 속하는 것 등으로 바뀌어진다. 이로부터 선이 오염되고 진리의 타락이 말씀에서 간통(간음)과 매춘에 의해 묘사되어지고, 그렇게 불려지는데, 이에 대한 구절로 에스겔서를 보자:
너는 네 이름 때문에 매춘짓을 했다., 그리고 지나가는 모든 이에게 매춘짓을 쏟았다; 너는 네 옷을 가져다가 여러 색깔로 장식한 산당(높은 장소)을 만들었다; 너는 내가 네게 준 내 금과 내 은으로 장식한 그릇들을 가져다가, 남성의 형상을 만들고, 그것들과 더불어 매 춘짓을 범했다; 너는 나에게 태어난 네 아들들과 네 딸들을 데려다가, 그것들을 제물로 바쳤다. 너는 매춘을 하찮은 일로밖에 여기지 않았더냐? 너는 고깃덩이가 큰, 네 이웃들, 이집트의 아들들과 매춘짓을 했다; 그리고 네 매춘짓은 내 성남을 격노하게 했다; 너는 앗 수르의 아들들과 매춘을 범했다, 그리고 그들과 매춘짓을 범해왔다; 그리고 만족하지 못했 다; 그리고 너는 갈대아로 가는 교통의 토지에서 조차 네 매춘짓을 불어나게 했다; 그리고 그럼에도 너는 거기서 만족하지 않았다 (겔. 16:15-17, 20, 26, 28, 29 등등).
위는 예루살렘을 취급하고 있다. 이를 가지고 진리 측면에서 타락된 교회를 의미하고 있다. 위의 구절들이 기록된 거룩한 말씀인데, 인간의 지저분한 짓들을 지면만 늘리고자 기록한듯 되어있는 구절은 말씀 어느 구절에도 있지 않은 것은 누구나 인정할 것인 바, 위 구절 역시 표현된 글자와는 아주 다른 의미들을 내포할 것이라 누구나 예측될 것이다. 타락되어온 교회의 어떤 것이 “매춘”이라 불리우는 것이 아주 분명하다; 여기서 언급한 “옷”은 악용되고 있는 진리들을 표시한다; 그로부터 파생된 거짓들, 예배된 것들이 “여러 색깔들로 치장한 높은 장소들”이고, 이것과 더불어 매춘이 있었다; “내가 준 금과 은으로 장식한 그릇들”은 그들이 자기들의 거짓들을 확증하는데 악용한 말씀으로부터의 선들과 진리들이다; 그리고 이 거짓들이 진리들로서 나타날 때, 그것들은 “매춘을 범한 도구인 남성의 형상들”이라 불리운다. 그들이 끌어다가 그것들에게 제물로 바친 “아들들과 딸들”은 그들이 악용해 온 선들과 진리들을 표시하는 것은 “아들들과 딸들”의 의미로부터 분명해진다. “이집트의 아들들과 매춘짓을 범하는”것은 기억 속의 지식을 수단으로 이런 진리들과 선들을 악용함을 표시함은 이집트의 의미가 기억 속의 지식인 것에서 분명해진다. “앗수르의 아들과 매춘짓을 함”은 추론을 수단으로 말씀 속의 선들과 진리들을 타락케함을 의미하는데, 이는 앗수르의 의미가 추론함임에서 알려진다. “갈대아의 토지까지에서 매춘이 번성함”은 진리를 모독하는 수준으로까지 악용하고 타락케함인데, 진리를 모독함이 갈대아이다. 이상의 모든 것은 글자 자체 안에 있는 내적 의미이다.
마찬가지로 같은 예언서에서:
두 여인들, 한 어미의 딸들인데, 이집트에서 매춘짓을 범했다; 그들은 그들의 젊은 시절에 매춘을 했다; 사마리아는 오홀라이고, 예루살렘은 오홀리바이다. 오홀라는 내 아래에서 매 춘을 범했다, 그리고 그녀는 그녀의 이웃, 앗시리아인들, 그녀의 애인을 점지했다, 그녀는 그들에게, 즉 앗수르의 잘생긴 모든 아들에게 매춘을 들이댔다; 그녀는 이집트로부터 그녀 의 매춘을 내버리지 않았다, 그 이유는 그들이 그녀의 젊은 시절로부터 그녀와 누웠기 때 문이다. 오홀리바는 언니보다 그녀의 사랑을 더 부패시켰다. 그녀의 매춘은 언니의 매춘 보다 더 대단하였다. 그녀는 앗수르의 아들을 점지했다; 그녀는 그녀의 매춘들을 추가했다, 그리고 갈대인들의 형상을 보았다, 그녀는 자기 눈에서 보여지는 대로 그들에게 방점을 찍 었다; 바벨의 아들들이 연애하는 침상으로 그녀에게 왔다
(겔. 23:2-5, 7, 8, 11, 12, 14, 16 등등).
“사마리아”는 진리에 애착함에 있는 교회를, “예루살렘”은 선에 애착함에 있는 교회를 표시한다. 이들이 “이집트인들과 매춘함”과 “앗수르의 아들들”과 매춘함은 기억 속의 지식들과 추론을 수단으로 거짓들을 확증함에 의해 선과 진리를 타락하게 함을 표시한다. 이는 이집트의 의미와 “앗수르”의 의미로부터 분명해진다. 예배가 모독되기조차 했는데, 진리 측면에서 예배를 모독함이 갈대아에 의해, 선의 측면에서 예배를 모독함이 “바벨의 아들들”에 의해 표시되었다.
이사야서에서:
칠십 년의 끝이 오면 여호와께서 두로를 방문하실 것이다, 그리고 그녀는 자기에게 음행 삯을 되돌릴 것이다, 그리고 땅의 모든 왕국들과 매춘을 범할 것이다 (이. 23:17).
“음행 삯”과 두로의 “매춘”에 의해 의미된 것은 거짓인 것을 뽐냄이다. “두로”는 진리에 관한 지식을 표시한다; 또한 매춘이 범해진 “왕국들”은 진리들을 표시한다.
예레미야서에서:
너는 네 많은 동료들과 매춘을 범했다; 그리고 다시 나에게 돌아온다. 네 눈을 언덕들로 들 어 보라, 어디에 네가 타락시키지 않은 곳이 있느냐? 광야에 있는 아랍 사람같이 그들을 위해 네가 앉은 길 위에서, 그리고 너는 네 매춘들로, 네 사악함으로 토지를 모독했다. (예. 3:1, 2)
“매춘을 범하는 것”, 그리고 “매춘 가지고 토지를 모독하는 것”은 교회의 진리들을 악용하고 왜곡하는 것을 표시한다.
다시:
그녀의 매춘의 음성을 수단으로 그녀는 토지를 모독했다, 그녀는 돌과 나무를 가지고 간통 을 범했다 (예. 3:9).
“돌을 가지고, 나무를 가지고 간통을 범하는 것”은 외적 예배의 진리들과 선들을 남용하는 것을 표시한다.
다시:
그들이 어리석은 짓을 저질렀기 때문에, 그리고 그들의 동료들의 아내들과 간통을 범했기 때문에, 그리고 내가 명령하지 않은 것을 내 아름으로 거짓된 말을 밷었기 때문이다 (예. 29:23).
“자기들의 동료들의 아내와 간통을 범하는 것”은 그들로부터 함께 거짓을 가르치는 것이다.
다시:
예루살렘의 예언자들이 간통을 범하고, 거짓된 것에서 걷는 소름끼치는 것을 나는 보았 었다 (예. 23:14).
위에서 “간통을 범하는 것”은 선을 더럽힘이고, “거짓된 것”은 뒤집혀진 진리이다 다시:
나는 너희의 역겨운 짓들을 보았었다; 너희 간통들, 그리고 네 말 울음소리, 들판에서 언덕 위에서 네 매춘의 더러운 짓. 너희에게 화있을 것이다, 오 예루살렘아 너희는 깨끗함을 만 들지 않았다, 너는 얼마나 오래 그렇게 있을 것이냐? (예. 13:27)
호세아서에서:
매춘, 포도주, 새 포도주가 심정을 점유해버렸다. 내 백성은 나무에게 묻는다, 그리고 지팡 이가 그것을 선포한다; 그 이유가 매춘의 영이 그들을 엉뚱한 길로 끌고 갔다. 그리고 그들 은 그들의 하느님 아래로부터 매춘을 범했다; 그들은 산들의 꼭대기에서 재물을 바친다, 그 리고 언덕들 위에서, 상수리나무, 포플라나무, 테레빈나무 아래에서 향을 사른다; 그러므로 너의 딸들이 매춘을 범한다, 너의 며느리들이 간통을 범한다; 나는 너의 딸들을 방문하지 않을 것이냐?, 그 이유는 그들이 매춘을 범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너의 며느리를 방문하지 않을 것이냐? 그 이유는 그들이 간통을 범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매춘녀와 (수입을) 나누 었고, 몸을 판 수입을 제물로 바친다 (호. 4:11-14).
위의 단어들의 내적 의미를 살펴보자, “포도주”는 거짓; “새 포도주”는 그로부터 파생된 악; “문의 한 나무”는 어떤 탐욕의 즐거움의 선; “선포하는 지팡이”는 이해력의 상상력; “산”과 “언덕”은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 “상수리나무, 포플러나무, 테레벤 나무”는 그들이 신뢰한 것에서 파생되는 아주 많은 총체적 지각들이다; “딸들”, “며느리들”은 이런 애착들; 여기서 의미되어 보여주는 모든 것들이 “매춘”, “간통”, “매춘녀”에서 의미되고 있다.
호세아서에서:
오 이스라엘아, 너는 네 하느님 앞에서 매춘을 범했다, 너는 모든 타작 마당 위에서 매춘 삯을 사랑했다 (호. 9:1).
“매춘 삯”은 거짓인 것을 떠벌림을 표시한다. 모세의 책에서:
너는 토지의 주민들과 언약을 맺지 않도록 하라, 그들은 자기들의 하느님들에 따라 매 춘을 범한다, 그리고 그들의 하느님들에게 제물을 바친다; 누가 너를 부른다, 그리고 너는 그의 제물들을 먹는다, 그리고 너는 네 아들들을 위해 그의 딸들을 데려온다, 그리고 그의 딸들은 자기들의 하느님들에 따라 매춘을 범한다, 그리고 네 아들들이 그들의 하느님들에 따라 매춘을 범한다 (출. 34:15, 16).
모세의 책에서:
나는 백성들 사이에서 몰락을 따라 매춘을 범하는 자를 따라 매춘을 범하는 모든 자를 잘 라낼 것이다; 그리고 영들과 친밀하다는 자들에게, 그리고 마법을 부린다는 자들에게 돌아 서 그들을 따라 우상을 숭배한 혼, 나는 내 얼굴을 그 혼에 맞서게 둘 것이다, 그리고 겨레 로부터 자를 것이다 (레. 20:5, 6).
모세의 책에서:
네 아들들은 광야에서 40년 동안 목자일 것이다, 그리고 네 몸이 광야에서 스러질 때까지 너의 매춘들을 짊어질 것이다 (민. 14:33).
모세의 책에서:
여호와의 모든 교훈을 기억하라, 그리고 그것들을 행하라, 즉 너희는 네 심정을 따라, 네 자신의 눈을 따라 추구하지 말라, 그것에 따르면 너희는 매춘을 범한다 (민 15:39).
계시록에서:
그리고 일곱 대접을 가졌던 일곱 천사들 중의 하나가 와서 나에게 말했다, 나에게 말하기 를, 오너라; 내가 너에게 많은 물들 위에 앉은 큰 매춘부가 심판되는 것을 보여줄 것이다: 그들과 더불어 땅의 왕들은 매춘짓을 범하였다, 그리고 땅의 주민들도 그녀의 매춘짓의 포 도주를 마셨었다 (계. 17:1, 2).
“큰 매춘부”란 예배를 모독하는 이들을 표시한다; 그녀가 앉은 “많은 물들”은 지식들이다; 그녀와 매춘을 범한 “땅의 왕들”은 교회의 진리들이다; 그들이 취해지게 마신 “포도주”는 거짓이다. “포도주”와 “술취함”이 이런 것들을 의미하기 때문에, 롯의 딸들의 사건에서도 말해진다, 즉 그들은 자기 아버지를 포도주로 취하게 만들었다.
계시록서에서:
바빌론은 그녀의 매춘의 분노의 포도주로 모든 나라들을 취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땅의 왕 들은 그녀와 매춘을 범하였다 (계. 18:3).
“바빌론” 또는 “바벨”은 거룩하게 나타나는 외형물로 예배하는 한편, 내면들을 모독함을 표시한다; “그녀가 마시게 만든 나라들”은 모독되어진 선들이다; 그녀와 매춘을 범한 “왕들”은 진리들이다. 같은 책에서:
진실과 정의가 주 하느님의 심판들이다. 그 이유가 그분은 큰 매춘녀를 심판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그녀의 매춘으로 땅을 썪게 했다 (계. 19:2).
위에서 “땅”은 교회를 표시한다.
“매춘들”이 이런 것들을 의미하고, “딸들”은 애착들을 의미하기에, 그러므로 심각하게 금지된 것은 성직자의 딸이 매춘을 범함에 대해서이다. 모세의 책에서:
매춘을 범하기를 시작한 성직자의 딸, 그녀는 자기 아버지를 모독하고 있다, 그녀는 불로 태울 것이다 (레. 21:9)
또한 명령된 것은, 그들은 여호와의 집으로 매춘녀의 삯을 가져와서는 안된다, 그 이유는 그것은 역겨웁기 때문이다 (신. 23:18). 그리고 같은 이유 때문에 남편이 자기 아내가 간통했는지에 의심이 생겨 (성직자에게) 문의하는 과정(민. 5:12-31) 같은 구절들에 있는 각각, 그리고 전부는 선의 섞음질함과 연관이 있다. 더 나아가 말씀에서, 간통과 매춘의 많은 종류들이 말하여지고, 더 다양하기도 하다. 본문에서 롯의 딸들이 자기 아버지와 눕는 것으로 묘사된 이런 종류는 “모압”과 “암몬의 아들”이라 불리우는 것들이다. 이제 설명된다.

37, 38절. 그리고 언니가 아들을 낳았다, 그리고 그의 이름을 모압이라 불렀다. 그는 오늘날 모압의 아버지이다. 38. 그리고 동생, 그녀 역시 아들을 낳았다, 그리고 그의 이름을 벤암미라 불렀다. 그는 오늘날 암몬의 아들들의 아버지이다. “그리고 언니가 아들을 낳았다”란 선에 관련한 이 교회의 종파를 의미한다. “그리고 그의 이름을 모압이라 불렀다”란 이 종파의 품질을 의미한다. “그는 오늘날 모압의 아버지이다”란 이것이 이와 같은 인물들의 근원임을 의미한다. “그리고 동생 그녀 역시 아들을 낳았다”란 이 교회의 거짓화된 진리를 의미한다. “그리고 그의 이름을 벤암미라 불렀다”란 그것의 품질을 의미한다. “그는 오늘날 암몬의 아들들의 아버지이다”란 이것이 이런 인물들의 근원임을 의미한다.

위 구절의 간략한 설명을 다시 확증하는 과정은 필요하지 않을 것 같다. 그 이유가 추가 설명 없이 위 설명 자체와 앞과 뒤의 이어지는 문맥만으로도 이해에 부족함은 없을 것이라 본다. 그러나 “모압”과 “암몬의 아들들”에 의해 의미된 이 종교의 본성과 품질에 관해서는 여기서 묘사된 바대로 같은 그들의 근원으로부터 알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이들 나라가 언급되는 역사적, 예언적 말씀의 구절들로부터도 알 수 있다. 일반적으로 말하면, 그들은 내적 예배 측면은 거룩하지 않으나 태도적으로는 거룩하게 나타나는 외적 예배에 속하는 이들을 표시한다. 이들은 선과 진리에 관해 외적 예배에 속하는 것은 꾸준히 배우지만, 그것에 속하는 내적 예배에 관한 것은 경멸하고 거절하는 이들이다,
이와 같은 예배와 종교는 자연적 선에 있는 많은 이들이 빠져들기 쉬운 예배와 종교들이다. 그러나 자신들과 비교해 타인들을 경멸한다. 그들은 외적 형체는 먹음직스러운 과일 같은데, 막상 먹으려 보니까 속이 썪은 과일과 비슷하다; 그들은 안에 불순하고 더럽기까지 한 것을 담은 대리석 꽃병 같다; 또는 미모와 예법을 갖춘 여인인데, 속으로는 병을 앓고, 불순함들로 가득한 여인일 것이다. 한마디로 속이야 무엇으로 되었든 겉은 멀쩡한 일반적 선이다; 하여 안을 들여다보니 더러움이 가득한 선이다. 이 선이 애당초 그렇게되어 시작된 선은 아니고, 점진적으로 그렇게 되어간 것이다. 그 이유가 이렇게 된 사람들은 선이라 불리우는 것은 무엇이든 자신에게 들어오도록 허용한 이들이다. 동시에 외적인 것에서 파생되는 거짓이라 불리우는 것도 자신에게 허용한 이들이다. 하여 그들은 진리 대신 거짓을 확증한 관계로 그들은 거짓을 진리로 여기고 있는 이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예배의 내면의 것들을 경멸한다. 그 이유는 그들이 자기 사랑 안에 있는 이유 때문이다. 이들은 여기서 롯에 의해 표현된 외적 예배만에 있는 것들로부터 그들의 존재를 가지고, 그것에서 파생되어 나간다. 이들의 몇 단계가 말씀에서 묘사되고 있다. 즉 시작에서는 그렇게까지 그들의 선이 더럽다 단정되지 않은 때, 그리고 더럽혀지고 있는 때, 그리고 완전하게 더럽혀진 때; 그래서 예배와 교리의 내면적인 것들을 거절함을 보여준다.
첫 단계의 모습이 다니엘서에 묘사되어 있다:
마지막 때에 남쪽의 왕이 그와 틀어져 있을 것이다; 그리고 북쪽의 왕이 병거와 마병과 많 은 배를 거느리고 폭풍 같이 그에게 덤벼들 것이다, 그리고 토지로 올 것이다, 그리고 넘쳐 날 것이다, 휩쓸 것이다; 그리고 그는 아름다운 토지에 올 것이다, 그리고 많은 토지들이 황폐해질 것이다; 이들은 그의 손으로부터 구출될 것인데, 즉 에돔, 그리고 모압, 그리고 암 몬의 아들들의 맏배들이다 (단. 11:40, 41).
“남쪽의 왕”은 선들과 진리들 안에 있는 이들을 표시한다; “북쪽의 왕”은 악들과 거짓들에 있는 이들을 표시한다; “병거와 마병과 배들을 거느린 북쪽의 왕이 넘쳐나고, 휩쓴다”란 병거와 마병과 배들에 의해 표시된 악들과 거짓들이 우세를 떨침을 의미한다; “그의 손으로부터 구출된 에돔, 모압, 암몬의 아들들의 맏배들”은 거짓들에 의해 그렇게까지 더럽혀지지 않은 선을 표시한다; 이 때문에 그들은 “암몬의 아들들의 맏배들”이라 불리운다.
모세의 책에서:
우리가 광야의 길을 통과하였다, 그리고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하셨다, 모압을 괴롭히지 말라, 네 자신 그들과 전쟁하지 말라, 그 이유가 나는 유업을 위해 그의 토지를 네게 주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나는 유업으로 롯의 아들들에게 아르를 주었기 때문이다 (신. 2:8, 9).
그리고 암몬의 아들들에 관련하여: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야기하시어 말하시기를, 너는 오늘 모압의 경계인 아르를 지난다. 그리고 너는 암몬의 아들들의 맞은편 가까이 올 것이다; 그들을 괴롭게 하지 말라, 그들과 다투지 말라; 그 이유는 나는 유업으로 암몬의 아들들의 토지를 네게 주지 않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나는 유업으로 롯의 아들들에게 그것을 주었기 때문이다 (신. 2:17-19).
“아르”는 이와 같은 선을 표시한다; “모압”과 “암몬의 아들들”은 이와 같은 선의 시작 지점에 있는 이들을 표시한다; 이렇기 때문에 그들을 괴롭게 하지 말라고 명령되었다.
그러므로 모압이 엠족, 그리고 아낙족속 같은 르바임을 몰아냈다; 그리고 암몬의 아들들 역시 그들이 삼숨밈이라 불렀던 르바임을 몰아냈다 (신. 2:9-11, 18-21). 엠, 르바임, 아낙, 삼숨민에 의해 악과 거짓인 것의 유혹과 더불어 주입된 것들이 의미된다; 모압과 암몬의 아들들에 의해서는 여기서 아직은 크게 유혹되지 않은 이들이 뜻해진다. 어쨌든 이 나라들이 심하게 그들의 선이 거짓에 오염되었을 때, 내쫓겼다 (민. 21:21-31; 겔. 25:8-11).
그들의 특성, 그들의 선이 오염되어졌을 때가, 예레미야서에서 묘사되어진다.
모압에게 여호와께서 말하신다. 느보에게 슬픔이 있다, 그 이유가 황폐되기 때문이다. 기랴 다임이 수치를 당하여, 점령당했다; 미스갑은 수치를 당하여 허둥지둥하고 있다; 모압의 자 랑은 더 이상 없다; 모압에게 날개를 주어라, 그 이유가 날아서 그는 도망해야 하기 때문이 다. 그리고 그녀의 성들은 황무해질 것이다. 그 안에 아무도 살지 않을 것이다. 성들을 떠 나 바위에서 거주한다, 오 모압의 주민들아; 그리고 비둘기 같이 있어, 그는 구덩이 입 언 저리에 둥지를 만들어라. 나는 그의 노여움을 알고 있다, 여호와께서 말하신다, 그러나 그 것은 확고한 노여움은 아니다; 그의 거짓들, 그들은 정당하게 행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나 는 모압에 호통칠 것이다. 그리고 나는 모든 모압에 외칠 것이다. 야셀의 곡함으로부터 나 는 너를 위하여 곡할 것이다, 오 십마의 포도나무여; 네 가지들이 바다를 지나 야셀의 바다 까지 도달했다; 네 여름 과일 위에, 그리고 네 포도 수확 위에 약탈자가 당도했다. 그러므 로 내 심정이 마치 피리 같이 모압에게 움직여졌다. 네게 슬픔이 있다, 오 모압아, 그모스 의 백성이 파멸되었다; 그 이유가 네 아들들이 포로로 끌려갔기 때문이다, 그리고 네 딸들 이 포로가 되었기 때문이다. 훗날에 나는 모압의 포로된 자를 되돌릴 것이다
(예. 48:1, 9, 28, 30-32, 36, 46, 47).
위의 예. 48장에서 취급된 주제는 모압이다; 그러나 그를 통하여 이런 선 안에 있는 이들이 취급된 것이다, 즉 그들의 선들에 거짓들의 유입을 허용한 이들이다; 이것 때문에, 그들은 “모압에게 날개를 주어라, 그리하여 도망가게 하라, 그리고 그 성들은 황무해질 것이다”하고 말해진다; 그들은 “성을 떠나 바위에 거주하고 비둘기같이 구덩이 아구에 둥지를 만들어라”하고도 말해진다. 이런 표현들에 의해 그들은 자기들의 일반적 선들과 진리들에 남아있도록 권유됨이 의미되어지고 있다. 그리고 만일 그들이 무지의 거짓들로 말미암아 유혹되어진다면, 훗날에 그들은 포로됨으로부터 되돌릴 것이다고 말해진다; 그러나 이것이 행해지지 않는 그들에 관하여, “나는 모압 위에 호통을 치겠다, 그리고 나는 모든 모압을 위해 외칠 것이다, 그리고 내 심정이 모압 위에서 움직여졌다” 라고 말해진다. 그들이 주입되는 것을 허용한 거짓들이 느보, 기라다임, 십마, 야셀, 그모스, 그리고 이 장 외에서는 다른 이름들에 의해 의미되어 있다.
이사야서에서:
모압의 딸들은 멀리 보낸 둥지일 것이다. 조언을 내놓고, 공정을 집행하라; 네 그림자를 정오의 한낮에 밤같이 만들어라; 부랑자를 숨겨라, 방황자를 배반하지 말라, 나의 부랑자를 너와 함께 거주하게 하라. 오 모압아, 너는 약탈자로부터 그들에게 은신처가 되라. 우리는 모압의 건방짐, 그의 교만함, 그의 오만함, 그의 성냄을 들었다; 그의 이런 것은 그렇지는 않다; 그러므로 모압은 울부짖을 것이고, 그들 모두가 울부짖을 것이다. 그러므로 내 배가 모압에게 하프같이 휘저어질 것이다, 나의 내향의 부분이 (길)하렛의 성을 위하여 휘저어 진다. 그리고 모압이 보여질 때가 올 것이다, 그가 산당 위에서 녹초가 되어 있는 때가 올 것이다, 그의 성소로 기도하러 올 때가 올 것이다, 하여 그는 득세하지 않는 때가 올 것이 다. 삼 년 안에 마치 삯꾼의 해 같이, 그리고 모압의 칭송은 큰 무리 가운데에서 헛될 것이 다; 그리고 남은 것은 매우 작을 것이다, 그리고 강하지 않을 것이다
(이. 16:2-4, 6, 11, 12, 14).
모압이 이 장에서 더 취급되어진다, 그리고 그를 통하여 이와 같은 선 안에 있는 이들이 취급된다; 그리고 그들은 예. 48장과 비슷한 단어들로 묘사되어 있다; 그리고 비슷한 방식으로 자기들의 선들과 진리들에 남아있도록 권유되어진다. 그리고 거짓들의 유입을 허용하지 않도록 권고되고 있다. 이 일반적 선들과 진리들이 그들의 “조언을 줌”, “공정을 집행함”, “부랑자를 숨김”, 그리고 “약탈자로부터 부랑자에게 은신처가 됨”에 의해 의미되어 있다; 이 모든 것들이 예배의 외적인 것들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것들 자체에 거짓들의 유입을 허용하지 말라는 것, 이것이 “삼 년 내에 삯꾼의 해 같이, 모압의 칭송은 모든 큰 무리에서 헛될 것이다, 남은 자는 매우 작을 것이다, 그리고 강하지 않을 것이다”하고 말해진다.
이와 같은 인물들은 쉽사리 유린되어지는 바, 모압은 “블레셋의 손으로부터 내보내짐”이라고 불리우고, 그리고 암몬의 아들들은 그들의 “순정”이라 불리운다. 이사야서에서:
이새의 뿌리가 백성의 기(깃발)로 서있을 것이다, 그분을 나라들이 찾을 것이다, 그리고 그 분의 나머지 (백성)은 영화로울 것이다. 에브라임의 시기함은 떠날 것이다, 그리고 유다의 적들은 멸절될 것이다; 에브라임은 유다를 시기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유다는 에브라임 을 괴롭게 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바다를 향하여 블레셋의 어깨 위에서 날 것이 다; 그들은 함께 동쪽의 아들들, 에돔과 모압에게 그들의 손을 내보내어, 약탈할 것이다, 그 리고 암몬의 아들들을 그들에게 순종하게 할 것이다 (이. 11:10, 13, 14).
“이새의 뿌리”는 주님을 표시한다; “유다”는 천적인 선에 있는 이들을; “에브라임”은 영적인 진리에 있는 이들을; “블레셋”은 선행은 없고 진리의 지식들에 관한 단지 기억 속의 지식에 있는 이들을; “동쪽의 아들들”은 선행은 없고 단지 선에 관한 지식들에 관하여 단지 기억의 지식들에 있는 이들을 표시한다; 그리고 모압은 “그들의 손으로부터 보내짐”이라고 불리운다, 그리고 암몬의 아들들은 그들의 순종이라고 불리우는데, 그 이유는 그들에게 거짓이 유입되었기 때문이다.
모압과 암몬의 아들들의 선이 거짓들로 말미암아 더럽혀질 때, 그들이 어떤 품성인지가 다윗서에서 묘사되어 있다:
하느님께서 그분의 거룩함에서 말하셨다, 길르앗은 나의 것, 므낫세는 나의 것, 에브라임 역시 내 머리의 강함이고, 유다는 나의 법률가이고, 모압은 씻는 항아리이다
(시. 60:7-9; 또는 시. 108:8-10).
“씻는 항아리”는 거짓들에 의해 더럽혀진 선을 표시한다.
예레미야서에서:
모압을 찬양함은 더 이상 없다; 헤스본에서 그들은 그에 맞서는 궁리를 했다; 오라, 그를 나라가 있음으로부터 절단되게 하자. 모압은 그의 젊은이 때로부터 평화로이 있어 왔다, 그 리고 그는 그의 찌꺼기에서 정착했다, 그리고 그릇으로부터 그릇까지 텅 비지 않았다. 그리 고 추방된 적이 없다; 그러므로 그의 맛은 자기 안에 남아있다, 그리고 그의 냄새는 변해 지지 않고 있다. 모압의 모든 집꼭대기에서 통곡함이 모든 곳에 있을 것이다, 그 이유는 내 가 즐거움 없는 그릇 같이 모압을 부셨기 때문이다 (예. 48:2, 11, 38).
모압에 의해 표시된 선을 더럽힌 거짓들이 여기서 “맛과 냄새가 남아있는 찌꺼기”라고 불리운다, 만일 그가 개혁되지 않으면, 이것이 여기서 “이 그릇으로부터, 저 그릇까지 텅 빈”에 의해 표시되어진다. 이 선 자체가 “즐거움이 없는 그릇”이라 불리운다. 마치 다윗서에서 씻음이 행해지는 “씻는 항아리”와 같다. 이사야서에서:
이 산에서 여호와의 손이 쉬신다, 그리고 모압은 그것 아래에서 짓밟힐 것이다, 마치 겨가 똥언덕에서 짓밟히는 것과 같다 (이. 25:10).
이와 같은 선에 있는 이들이 외적인 것들만을 돌보고, 예배와 교리의 내적인 것들에 대해서는 경멸하고, 거절하고, 토해내기까지 하는 것, 결과적으로 그들은 진리들 대신 거짓들을 가진다는 것이 에스겔서에서:
사람의 아들아, 네 얼굴을 암몬의 아들들을 향하여 두어라, 그리고 그들을 향하여 예언하 라, 그리고 암몬의 아들들에게 말하라, 주 여호비의 말을 들어라. 고로 주 여호비께서 말하 신다, 네가 내 성소가 모독되었을 때, 그곳을 향하여, 그리고 이스라엘의 토지가 황무해지 게 만들어졌을 때, 그 토지를 향하여, 유다 가문들이 포로로 잡혀갔을 때, 그들을 향하여 ‘아하’라고 말했기 때문에, 나는 랍바를 낙타들의 거처로 만들 것이다, 그리고 암몬의 아들 들의 (토지를) 양떼를 위한 침상 장소로 만들 것이다. 고로 주 여호비가 말한다, 너는 이스 라엘의 토지를 향하여 박수치고, 발을 구르며, 네 혼의 모든 경멸로 즐거워했다, 그러므로 보라 내가 내 손을 네 위에 뻗친다, 그리고 너를 전리품으로 모든 나라들에 줄 것이다, 그 리고 나는 너를 백성들로부터 자를 것이다, 그리고 너를 토지로부터 파괴할 것이다
(겔. 25:2-11).
이 말들: “내 성소가 모독되었을 때, 내 성소에 대하여, 그리고 이스라엘의 토지가 황무해졌을 때, 그곳에 대하여, 그리고 유다의 가문이 포로가 되었을 때, 그들을 향하여, 아하” 라고 말한 것; “너는 이스라엘의 토지를 향하여 손뼉을 치고, 발을 구르며, 네 혼의 모든 경멸로 즐거워한” 것은 예배와 교리의 내적인 것들을 경멸하고, 조롱하고, 거절하는 것에 대한 표현이다; 그리고 이것들이 거절될 때, 외적인 것들은 무용지물인 바, 이런 인물들은 “나라들에게 전리품으로 주어진다.” 즉, 그들은 악들에 의해 점유되어진다는 것, 그리고 “백성들로부터 잘리운다”는 것, 즉 거짓들에 점유당하는 것, 그리고 “땅으로부터 파괴됨”, 즉 그들은 교회 없음으로 됨이다.
스바냐서에서:
나는 모압이 책망받는 것과 암몬의 아들들의 모독함을 들었었다, 그들은 내 백성을 책망했 다; 그들은 그들의 경계를 넓혔다; 그러므로 내가 사는 바, 모압은 소돔같이, 암몬의 아들 들은 고모라같이 될 것이다, 그들의 장소는 찔레 나무로 포기된 장소, 그리고 소금 구덩 이, 그리고 영원히 황무해진 곳이 될 것이다. 이것을 그들은 그들의 교만으로 인해 가지는 바, 그들이 여호와 체바욷의 백성을 향하여 책망하고 영토를 확장했기 때문이다
(습. 2:8-10).
다윗서에서:
당신의 적들이 당신의 백성을 향하여 은밀한 것을 교묘하게 묵상합니다, 그들은 당신의 감 추인 것들을 향하여 함께 상의하고 있습니다: 오라, 그들을 나라이다로부터 잘라버리자, 그 리고 이스라엘의 이름이 더 이상 기억되지 않게 하자; 그 이유가 그들은 한 심정으로 함께 상담한다; 그들이 당신에 맞서 언약을 만드는데, 곧 에돔의 천막들, 이스마엘족들, 하갈인 들, 그발과 암몬과 아말렉, 두로의 주민과 더불은 블레셋족(입니다); 앗수르 역시 그들과 연합하였는데, 그들은 롯의 아들들의 팔(뚝)입니다 (시. 83:2-8).
“감추인 것들을 향하여 다함께 상의하는 것”, “이스라엘의 이름이 더 이상 기억되지 않도록 그들이 나라이다 라는 것으로부터 잘라내자”는 것은 내적인 것을 완전하게 거절함을 표시한다; “에돔의 천막들, 이스마엘족, 모압, 하갈인들, 그발, 그리고 암몬”은 예배와 교리의 외적인 것들에 있는 이들을 표시한다; “두로와 더불은 불레셋”내적인 것들 안에 있지 않으면서 내적인 것들에 관해 말하는 이들을 표시한다; “앗수르, 그는 롯의 아들들의 팔이다”란 추론을 수단으로 그들이 외적인 것은 좋아하고, 내적인 것들에는 맞서 다툼을 표시한다.
모세의 책에서:
사람은 그의 아버지의 아내를 취하지 못한다, 그리고 자기 아버지의 소맷자락을 범하지 말 라. 치열하게 타박상을 가진 자, 또는 고환에 타박상을 입은 자는 여호와의 회합에 오지 못 한다; 모압족과 암몬족은 여호와의 회합에 오지 못한다; 십 세대까지, 그들은 여호와의 회 합에 영원히 오지 못한다 (신. 22:30; 23:1-3).
이 말들은 “날들의 끝”에서 모압과 암몬의 특성이 무엇인지 보여준다. 또는 그들이 거짓들의 유입을 허용했을 때, 즉 선이 섞음질되고 진리가 왜곡되게 했을 때, 그들이 모든 내면적인 것들을 경멸하고, 거절하고, 결국 깡그리 내몰아친다는 것이다. 이렇기 때문에 그들은 더러운 간음질을 만들었다고 언급함에 언급함을 보태 말하는 방식을 취한다. 즉 아버지의 아내를 취하고, 아버지의 소맷자락을 범한다는 것이다. 이 모습은 롯의 딸들을 연상되게 하고, 실지로 모압과 암몬은 그녀들로부터 왔다; 그리고 이 언급에 이어서, 치열하게 상처난 자, 불알이 터진 자의 언급이 있는데, 이는 사랑과 선행으로부터 있는 것은 무엇이든 모조리 거절하는 이들을 의미한다. “여호와의 회합”은 천국이다, 이 안으로 그들은 올 수 없다. 그 이유는 그들에게 리메인스가 없기 때문이다. 이 리메인스는 내면의 선들과 진리들로부터서 만 오기 때문이다. 이것이 “십 세대”의 “10”에 의해 의미되고 있다.
이들이 자기들의 아들들과 딸들을 몰록에게 제물로 바치는 나라들 사이에 있었다는 것은 그들이 진리들과 선들을 아예 소멸시켜버렸다는 것을 내적 의미에서 의미하고 있다; 그 이유가 모압의 신들은 그모스였고, 암몬의 아들들의 신은 몰록과 밀곰이었기 때문이다 (왕상. 11:7, 33; 왕하 23:13), 이것들에 그들은 제물을 바쳤다 (왕하 3:27). “아들과 딸”에 의해 진리와 선이 의미되는 것은 이미 살핀 바 있다.
위와 같은 것이 모압과 암몬의 의미이다; 다양한 거짓들을 가지고 그들은 선에 섞음질하고 진리들을 소멸시킨다, 이것들은 무수한데 예레미야서에서 다시 세어지고 단지 이름들만이 열거된다:
심판이 평지의 토지 위에 와진다, 즉 훌론과 아사와 메바앗과 디본과 느보와 밷디블라다임 과 기랴다임과 벧가물과 벧므온과 그리욧과 보스라와 멀거나 가까운 모압 토지의 모든 성 들 위에 와진다. 모압의 뿔은 잘리워진다, 그리고 그의 팔은 부러진다. 그를 술취하게 만들 어라, 그 이유는 그가 자신을 여호와에 맞서 크게 보이려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모압은 그 가 토한 것에 기뻐하게 하자 (예. 48:21-26).
위의 것들은 모압과 암몬이라 불리는 것들에서 함께 모아져 있는 거짓의 종류들이다; 이 다양한 거짓의 본성과 품질이 무엇인지는 내적 의미에서 몇 개의 이름들에서 알려질 수 있다. 말씀에서 이름들은 실제의 것들 만을 뜻한다는 것은 이미 살폈다.
*************************************

창세기 제 20 장

성경: 창세기 20장

1. 그리고 아브라함은 거기로부터 남쪽의 토지로 여행했다, 그리고 가데스와 술 사이에 거주하였다, 그리고 그는 그랄에 체류하였다.
2. 그리고 아브라함은 자기 아내 사라에 관해 말했다, 그녀는 내 누이이다. 그리고 그 랄왕 아비멜렉은 (사람을) 보내어 사라를 데려갔다.
3. 그리고 하느님께서 밤에 꿈에서 아비멜렉에게 오셨다, 그리고 그에게 말하셨다, 보 라, 너는 네가 데려간 여인 때문에 죽을 것이다, 그 이유가 그녀는 남편과 결혼되 어 있기 때문이다.
4. 그리고 아비멜렉은 그녀에게 가까이 오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말했다, 주여, 당신 께서는 의로운 나라 역시 살해하시렵니까?
5. 그는 스스로 그녀는 내 누이이다 라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그녀 자신 역시 그는 내 오라비이다 라고 말했습니다. 내 심정은 곧바랐고, 이 일을 한 제 손은 흠 이 없습니다.
6. 그리고 하느님께서 꿈에 그에게 말하시기를, 그렇다, 나는 네가 곧바른 심정에서 이 일을 했다고 알고 있다. 그리고 또한 나는 네가 나에게 죄짓지 않게 제지하였 다. 그런고로 나는 네가 그녀를 건드리게 방치하지 않았다.
7. 지금 남자의 아내로 복귀시켜라. 그 이유는 그가 예언자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너 를 위해 기도할 것이다. 그리고 너는 살 것이다. 그리고 만일 네가 그녀를 원래 지 위로 복귀시키지 않는다면, 너는 네가 반드시 죽을 것임을 알아라, 너와 네게 속한 모든 것도 죽으리라.
8. 그리고 아비멜렉은 아침에 일찍 일어나, 그의 모든 종들을 불렀다, 그리고 그들의 귀에 이 모든 말들을 말했다. 그리고 사람들은 크게 두려워했다.
9. 그리고 아비멜렉은 아브라함을 불렀고 그에게 말했다, 너는 우리에게 무엇을 했느 냐? 그리고 어떤 점에서 내가 너에게 죄를 지었기에 너는 나와 내 왕국에 큰 죄를 가져왔느냐? 너는 나에게 하지 않아야 할 행동을 했다.
10. 그리고 아비멜렉은 아브라함에게 말했다, 너는 무엇을 보았기에 이런 말을 했었느 냐?
11. 그리고 아브라함이 말했다, 이곳은 하느님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들은 내 아내라는 말 때문에 나를 죽일 것이다 라고 내가 말했기 때문이다.
12. 그리고 더구나 진실로 그녀는 나의 누이인데, 내 아버지의 딸이기는 하나 내 어머 니의 딸은 아니기에 그녀는 내 아내가 되었다.
13. 그리고 하느님께서 나로 하여금 내 아버지의 집을 떠나게 하시자, 나는 그녀에게 말하기를, 이것은 당신이 나에게 행할 선함이니, 우리가 당도하게 될 장소가 어디 이든 나에 관하여는 그는 내 오라비이다 라고 말하라.
14. 그리고 아비멜렉은 양떼와 목축, 그리고 남종과 여종을 데려왔다, 그리고 아브라 함에게 주었다. 그리고 그에게 사라를 그의 아내로 복귀시켰다.
15. 그리고 아비멜렉이 말했다, 보라, 내 땅이 당신 앞에 있다. 당신 눈에 좋은 곳에 가서 살라.
16. 그리고 사라에게 그는 말했다, 보라 나는 네 오라비에게 은 천을 주었다. 이것은 너에게, 너와 함께 있는 모든 이에게, 그리고 모든 것과 함께 눈의 덮개이다. 그 리고 그녀는 정당함이 입증되어졌다.
17. 그리고 아브라함은 하느님께 기도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아비멜렉, 그리고 그 의 아내, 그리고 그의 여종을 치료하셨다. 그래서 그들은 출산했다.
18. 여호와께서는 아비멜렉 집안의 모든 자궁을 확실히 닫아 놓으셨는데, 이는 아브라 함의 아내, 사라에 관한 말 때문이다.

각 절의 내적 의미

1절. 그리고 아브라함은 거기로부터 남쪽의 토지로 여행했다, 그리고 가데스와 술 사이에 거주하였다, 그리고 그는 그랄에 체류하였다.

아브라함은 거기로부터 남쪽의 토지로 여행했다. 이는 신앙의 선들과 진리들 측면에서 주님의 진보하심을 의미하는데, 이는 “여행함”이 진보함을 의미함에서, 그리고 “남쪽의 토지”가 신앙의 선과 진리임에서 알려진다. 이 구절과 비슷한 구절인 12: 9, 10, 즉 그가 이집트로 갔을 때, “그는 여행했고, 남쪽으로 가고 여행했다”는 구절에서 아브라함에 관해 서술한 적이 이미 있다; 이 구절에 의해 주님께서 어린 아이이셨을 때 기억 속의 지식에 관련하여 지식들 차원에서의 선과 진리 안으로 진보하심이 의미되었다; 이 구절의 경우, 그는 “남쪽의 토지를 향하여 여행했다”라고 말해진다. 이 구절에 의해 내면으로의 더 진보하심인 신앙의 교리 차원에서의 선과 진리 안으로 진보하심이 의미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여기서는 “남쪽의 토지”라고 말해진다. 그 이유가 “토지, land”의 적절한 의미는 교회, 교리인 것을 말하는 교회이기 때문이다.
일반적 측면에서 주님이 받으신 교육에 주목하면, 그것의 본성은 이 장의 내적 의미에서 아주 명확하다; 즉 그것은 계속적인 계시들을 수단으로 해서 였다, 고로 신성한 지각들과 그분 자신으로부터의 생각으로부터, 즉 그분의 신성으로부터 생각함에 의해서 였다; 이 지각들과 생각들을 그분은 신성한 총명과 지혜 안에 이식하셨다, 그리고 이것은 그분의 인간이 그분의 신성과 완전히 결합함에 이르게 하였다. 이런 방식의 슬기로움의 성장은 여느 인간에게도 가능하지 않다; 그 이유가 이것은 그분의 가장 깊은 측면, 즉 그분을 임신되게 한 아버지로부터인 신성 자체로부터 흘러들기 때문이다; 고로 신성한 사랑으로부터 였고, 이는 주님 만이 가지셨고, 이 사랑은 보편적 측면에서 인류의 구원을 그분께서 바라심에 존재하는 사랑으로부터 였다.
사랑 자체 내부에 지혜와 총명이 있다는 것은 아직 아무에게도 알려지지 않은 비밀함들이다; 이와 같이 있음이 사랑이다. 지혜와 총명이 사랑 내부에 있다는 것은 모든 유입이 사랑 안으로 있는다는 사실로부터, 즉 선 안으로, 고로 인간의 생명 자체 안으로 있는다는 사실로부터 근원된다. 이것은 천사들의 지혜와 총명의 근원이고, 말로 표현할 수 없다. 이것은 주님을 사랑함과 이웃을 향한 선행에 있는 인간의 지혜와 총명의 근원이다. 이들이 지상에서 이에 대한 지각을 자신 안에 가지지 못했다 해도, 사후 삶에서 그것 안으로 와진다, 그 이유는 지혜와 총명이 이 사랑 자체와 선행 안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아닌 주님의 경우에서의 사랑에 주목하면, 이 사랑은 천사들이 지닌 사랑 위 너머에서 무한하게 존재하셨다. 그 이유가 그 사랑은 신성 자체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분은 자신 안에 모든 지혜와 총명의 특출함을 가지셨다; 어쨌든 그분은 인간으로 태어나셨기 때문에, 신성한 질서에 따라 인간으로서 진보해가셔야 했기 때문에, 그분은 계속적인 단계들을 밟아 이 총명과 지혜를 자신 안으로 유입하셨다. 그 목적은 그분의 인간을 신성에 하나로 만들어, 인간을 신성으로 만드시는 것이고, 이 수단은 그분 자신의 힘에 의해서 이었다.

“아브라함”이 위와 같은 상태에 있는 주님이시다는 것은 아브라함의 표현이 주님이심으로부터 분명해진다; 여기서는 이 상태에 계신 주님이다.

그리고 가데스와 술 사이에서 거주하였다. 이는 특별한 측면에서 주님의 상태를 의미한다. 이는 “거주함”의 의미가 살아감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 구절 앞 대목이 이를 암시하는데, 즉 아브라함은 거기로부터 남쪽의 토지를 향하여 여행했다는 대목이다. 이를 수단으로 주님께서는 신앙의 선들과 진리들 쪽으로 진보하심이 의미되어졌고, 여기서 “그가 가데스와 술 사이에 거주했다”라고 말해지는 바, 이는 주님의 상태를 특별한 측면에서 의미되는 것을 묘사한다. 따라서 이제 “가데스와 술”을 살펴 보자.

“가데스”가 합리적인 것으로부터 진행하는 내면의 진리에 대한 애착이고, “술”은 기억 속의 지식들로부터 진행하는 외면의 진리에 대한 애착이다는 것은 “가데스와 술”의 의미로부터 분명해진다. “가데스”가 진리에 관하여 논쟁이 있음을 의미하는 것은 앞에서 이미 살폈다. 즉 진리의 근원에 초점을 맞추어, 그것이 합리성으로부터 인지 여부에 중점을 두고 진리에 관하여 다투는 것이다. 그러나 주님과 더불어서, 모든 진리는 천적 근원으로부터 였는 바, “가데스”는 진리에 대한 애착을 의미한다. 교인들과 더불어서는 합리적인 진리들과 단지 기억할 뿐인 진리들이 있다. 전자는 보다 내면 쪽이고, 후자는 보다 더 외면 쪽이다. 이 둘은 서로로부터 구분되고, 정밀하게 말한다면, 인간의 두 기억들이다. 이로부터 진리에 대한 두 애착들이 뒤잇는다. 하나는 더 내면적, 합리적 수준에 속한다. 또 하나는 더 외면적이고, 기억하고 있을 뿐인 진리들 수준에 속해 있다. 합리적인 것들로부터 진행하는 내면의 진리에 대한 애착이 여기서 “가데스”로 의미되고 있다. 기억할 뿐인 진리들로부터 진행하는 외면의 진리에 대한 애착은 “술”로 의미되고 있다.

그리고 그는 그랄에 체류하였다. 이는 거기로부터 신앙의 영적인 것들에 대해 가르쳐지심을 의미한다. 이는 “체류함”의 의미가 가르침을 받음 이다에서; 그리고 “그랄”의 의미가 신앙의 영적인 것임에서 알게 된다. 그랄은 창세기 몇 군데에서 명명되어진다; 그리고 이 구절에서 그것은 신앙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 이유가 그랄은 불레셋 영역 안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불레셋”에 의해 신앙의 지식들이 기억 속의 지식일 뿐으로만 있는 상태가 의미되어진다. 그러므로 신앙 자체가 “그랄”에 의해 의미되어진다; 그리고 “그랄의 왕”에 의해서는 신앙 속의 진리 자체가 의미된다; 그 이유가 “왕”은 내적 의미에서 진리이기 때문이다. 고로 “아비멜렉”은 신앙의 교리를 의미하게 된다. 이제 살핀다.
일반적으로, 신앙의 교리에는 신앙의 지적인 것, 신앙의 합리적인 것, 신앙의 기억적 지식인 것이 있다. 이것들은 내면들로부터 외면들로 그것들의 순서에서 진행된다. 이것들은 학식자의 언어를 빌리면, 앞의 것과 뒤의 것, 보다 높은 것과 보다 낮은 것, 즉 내면인 것과 외면인 것이다. 이것들이 인간에게 나타나는 순서는 마치 신앙의 기억적인 지식들이 첫 번째이고, 합리적인 것이 두 번째, 마지막이 지적인 것의 순서인 것처럼 실제로 나타난다. 이런 방식으로 인간의 신앙은 그의 어린 시절로부터 진보해 간다. 그럼에도 비록 인간이 알아차리지 못할 뿐, 신앙의 지적인 것이 그의 합리적인 것 안으로 계속적으로 흘러들고, 그 다음 앎의 능력 안으로 흘러든다; 그러나 어린 시절, 이에 대한 알아 차림은 매우 희미한 상태이고, 성년 시절에는 분명한 상태로 들어 앉고, 거듭 나질 때, 드디어 충분한 빛 안에서 있어진다. 이 순서가 지상에서는 가상적, 외관적 수준에 머물지만, 저 세상에서는 완전한 실제로 있다. 이 모든 것은 “영적인 것”이라 불리운다. 이것들은 등차적으로 위와같이 구분되어지나, 서로가 서로를 이어 계속된다. 신앙의 영적인 것들은 선으로부터 있는, 즉 천적인 근원으로 부터의 모든 진리들이다. 다시 말해, 천적 평면으로부터 파생되는 것은 무엇이든 신앙의 영적인 것이라는 말이다.

2절. 그리고 아브라함은 자기 아내 사라에 관해 말했다, 그녀는 내 누이이다. 그리고 그랄왕 아비멜렉은 (사람을) 보내어 사라를 데려갔다.

아브라함이 말했다. 이는 생각을 의미하는데, 역사적 말씀에서 “말함”의 의미가 지각하는 것, 뿐만 아니라 생각하는 것임에서 알려진다.

자기 아내 사라에 관해서. 이는 천적인 것과 결합한 영적 진리를 의미한다. 이는 아내로서의 “사라”가 신성한 선과 결합된 지적 진리, 같은 표현으로, 천적인 것과 결합한 영적 진리임에서 알려진다. 영적인 것이 무엇인지와 천적인 것이 무엇인지는 앞에서 서술한 바 있다. 천적이라 불리우는 것은 선으로부터 있는 것, 즉 주님을 사랑함과 이웃을 향한 선행으로부터 있는 것; 그리고 영적이라 불리우는 것은 진리로부터 있는 것, 즉 이 두 사랑들에서 파생된 신앙으로부터 있는 것이다.

그녀는 나의 누이이다. 이는 합리적 진리를 의미하는데, 이는 “누이, sister”의 의미가 합리적 지적인 진리임에서 알려진다. 합리적 진리가 “누이”이다는 것은 천국의 결혼으로부터서만 알려질 수 있다; 천국의 결혼으로부터 내려오는 것들은 마치 지상에서의 친척 관계 같이 그것들 사이에서 혈연 관계를 가지고 있다. 이에 더하여 무한하게 다양해짐이 있다. 천국의 결혼 자체는 신성한 선과 신성한 진리 사이에 만 존재한다. 이로부터 인간 안에 지적, 합리적, 앎의 능력으로 임신되어진다. 천국의 결혼으로부터의 임신 없이 인간에게 이해성으로, 이성으로, 지식으로 빨아들일 수 없다, 한마디로 인간일 수 없다. 고로 천국의 결혼으로부터 받는 만큼에 비례하여 그는 사람되어 있는 것이다. 천국의 결혼이 주님 자신 안에 있는 바, 주님이 이 결혼 자체이시다. 그 이유는 그분이 신성한 선 자체, 동시에 신성한 진리 자체 이시기 때문이다. 천사들과 인간들은 자기들이 주님을 사랑함과 이웃을 향한 선행에 있는 만큼에서, 그리고 이로부터 신앙 안에 있는 만큼에서 천국의 결혼 안에 있는다; 즉 그들이 주님의 선 안에, 그로부터 진리 안에 있는 만큼에서 천국의 결혼 안에 있다는 말이다; 그때 그들은 “딸들과 아들들”이라 불리우고, 그들의 관계는 “자매와 형제”이라 불리운다. 그러나 이것에 차이는 있다. 합리적 진리가 “누이”라고 불리우는 이유는 신성한 선의 유입이 합리적 진리들에 대한 애착 안으로 유입됨으로부터 임신되어져서 이다; 이때 합리성에 있는 선은 “(남자)형제”라고, 진리는 “(여자) 형제”라고 불리운다. 이에 대한 것은 이 장 12절에서 아브라함의 말로부터 더 잘 알게 된다; 즉 “더우기 진실로 그녀는 나의 누이이다; 그녀는 내 아버지의 딸, 그러나 내 어머니의 딸은 아니다; 그래서 그녀는 나의 아내가 되었다.”

그리고 그랄 왕 아비멜렉이 (사람을) 보냈다. 이는 신앙의 교리를 의미하는데, 앞 절에서 살폈다; 즉 “블레셋”이 기억 속의 지식에만 머무는 신앙에 관한 지식을 의미한다는 것; 블레셋 영토에 있는 “그랄”에 의해서는 신앙이; 그리고 “왕”에 의해서는 신앙의 진리 자체가 의미됨에 의해 알게 된다. 그러므로 “아비멜렉”에 의해서는 신앙의 교리가 의미되나, 이 신앙의 교리가 합리적인 것을 찾는 것을 의미하는데 아래에서 살핀다.

“아비멜렉”이 합리적인 것들을 찾는 신앙의 교리를 의미하는 것은 그가 사라를 쳐다보되 아브라함의 아내로서가 아닌, 그의 누이로서 였다는 사실로부터 분명해진다. 같은 것이 이어지는 구절로부터 역시 분명해진다; 그 이유가 거기서 신앙의 교리가 취급되기 때문, 즉 그것의 근원이 합리성으로부터인지, 천적인 것으로부터 인지에 관한 것을 취급하기 때문이다. 교리가 합리적인 것을 찾는다라고 말해질 때, 이것은 이성에 의해 납득되지 않으면 교리의 진리로서 아무것도 인정할 수 없다는 것, 고로 교리로부터 있는 모든 것들은 합리성으로부터이다고 말하는 셈이다. 그럼에도 신앙의 교리는 합리성으로부터가 아니고 천적인 근원으로부터임이 이어지는 사항들의 내적 의미에서 가르쳐진다.

그리고 사라를 데려갔다. 이는 합리성에 의견을 구하고 싶어함을 의미한다. 이는 “누이”로서의 사라의 의미가 합리적 진리임으로부터 알려진다; 그리고 그녀를 “데려감”의 의미가 그를 향하여 애정을 가짐이다로부터도 분명해진다; 고로 내적 의미는 합리성에 의견을 구하고 싶음이다. 이 절이 함유하는 것들은 신앙의 교리가 합리성에 의견을 구함이 잘하는 일인지 여부를 놓고 처음으로 주님께서 신앙의 교리를 생각하심을 포함하고 있다. 첫 생각하심이 위와 같은 특성 속에 있는 이유는 주님께서도 신성한 모든 질서에 따라 진보해가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분은 신성을 입으시기 위해 그분이 태어나신 인간으로부터의 것은 무엇이든, 특히 어머니로부터 파생된 것을 벗으셔야 했다; 고로 이런 인간의 생각, 즉 합리성이 신앙의 교리적인 것들에 관하여 의견을 개진해도 되는 것인지 여부에 관한 생각도 벗으셔야 했다는 말이다.
3절. 그리고 하느님께서 밤에 꿈에서 아비멜렉에게 오셨다, 그리고 그에게 말하셨다, 보라, 너는 네가 데려간 여인 때문에 죽을 것이다, 그 이유가 그녀는 남편과 결혼되어 있기 때문이다.

하느님께서 아비멜렉에게 오셨다. 이는 신앙의 교리에 관하여 주님께서 지각하심을 의미하는 것은 “하느님이 오심”과 “아비멜렉”의 의미로부터 분명해진다. “하느님이 오심”이 지각을 의미하는 것이 분명한 이유는 지각은 지적 능력 안으로 신성의 강림, 또는 유입밖에 더 아니기 때문이다.

밤에 꿈에서. 이것이 불명료한 수준에서의 지각을 의미하는 것은 “꿈”, 그리고 마찬가지로 “밤”의 의미로부터 분명해진다. “꿈”이 지각을 취급할 경우, 깨어 있음에 비교해서 희미한 어떤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더 (강조되어), “밤에 꿈에서”라고 말해진다는 점이다. 주님의 첫 지각하심이 희미한 수준이라 의미되는 표현으로 기록되게 한 이유는 이것이 그분이 벗으셔야 하는 인간 안에서의 지각하심, 그분이 흩뜨러지게 해야 하는 그늘인 인간 안에서의 지각하심이었기 때문이다. 주님의 지각하심, 비록 신성으로부터라 할지라도 그것은 인간 안에서 였는바, 이것은 빛 자체를 즉각적으로 받지 못한다. 그러나 점진적으로 흩뜨러지게 되는 그늘 안에서 받는다. 그분이 신앙의 교리에 관하여 덜 희미한 수준으로 자신을 가져다 놓으시는 것이 6절, “하느님께서 꿈에서 아비멜렉에게 오심”이다. 여기서는 “밤에 꿈에서”가 아닌 그냥 “꿈에서”라고 하여 밤은 빠져 있다. 그 후에 그분이 명료한 지각 안으로 오셨음이 8절에서 “아비멜렉은 아침에 일찍 일어났다”에 의해 의미되고 있다.

그리고 그에게 말했다. 이는 거기로부터의 생각, 즉 지각으로부터의 생각을 의미한다는 것은 “말함”이 지각을, 또한 생각함을 의미함에서 분명해진다. 여기서의 경우, 지각으로부터 생각이 있었다라고 말했는데, 이런 경우가 어떻게 되는지에 대하여 조금 더 말해보는 것이 도움이 될 것 같다. 생각함의 근원은 세 가지이다: 즉 지각으로부터, 양심으로부터, 양심 없음으로부터 이다. 지각으로부터의 생각들은 오직 천적 (평면)에 속한 것과 더불어서만 존재한다. 즉 주님을 사랑함 안에 있는 이들과 더불어서 만 존재한다; 이와 같은 생각은 최고로 내적 측면에서 인간과 더불어 존재한다. 그리고 이것은 천적 평면의 천사들과 더불어 존재한다. 그 이유가 이것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지각이고, 이로부터, 이를 수단으로 천적 평면의 천사의 생각은 존재한다. 그리고 지각에 반대되어 생각함은 불가능하다. 양심으로부터의 생각들은 보다 수준이 낮고, 그래서 영적 평면과 더불어, 즉 삶과 교리에 관하여 선행과 신앙의 선 안에 있는 이들과 더불어 존재한다. 이 수준에 있는 인물이 양심에 반대되게 생각함은 불가능하다. 그런 이유가 이 생각들은 양심을 통하여 주님으로부터 그들에게 지시된 선과 진리에 반대하여 생각하는 것이 되기 때문에 용납이 되어지지 않아서 이다.
그러나 양심 없음으로부터의 생각들은 선과 진리인 것을 수단으로 내향적으로 지시되어지도록 자신을 허용하지 않고 오직 악하고 거짓인 것 만으로, 고로 주님이 아닌 자신 스스로 지휘하는 이들과 더불어 존재한다. 이 부류의 인물들은 자신들도 양심과 지각으로부터 내향적으로 생각하고 있다고 굳건히 믿고 있다. 그 이유가 그들이 양심이 무엇인지, 더욱이 지각이 무엇인지 모르고 있는 이유에서 이다. 어쨌든 그 차이는 천국과 지옥의 간격이라 말해야 할 것이다. 양심 없이 생각하는 이들은 무엇을 생각하든 탐욕들과 공상들로부터 생각한다; 고로 지옥으로부터 이다; 그리고 당사자에게는 그렇지 않게 여겨지거나 타인이 흘낏 볼 때, 그는 그렇지 않게 느껴지는 이유는 그가 자신의 명예나 이득을 위해 예의 바름의 격식, 즉 외양에 철두철미해 있기 때문에서 일 따름이다. 그러나 양심으로부터 생각하는 사람은 선과 진리에 대한 애착들로부터 생각한다; 고로 천국으로부터이다. 그러나 주님의 생각하심에 주목해본다면, 이것은 모든 인간의 이해력을 초월해 있다. 그 이유가 이것은 신성으로부터 직접 있었기 때문이다.

보라, 너는 여인 때문에 죽을 것이다. 이는 신앙의 교리가 합리성에 신앙의 교리의 내용물에 관하여 상담한다면, 그것은 무익하고 공허해지게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는 여기서 이 말을 듣는 당사자가 신앙의 교리인 “아비멜렉”임에서; 그리고 “죽는다”가 무익하고 공허해지게 됨을 의미한다로부터 분명해진다. 또한 여기서 “여인”이라 말해지는 “누이”의 의미는 합리성임에서도 알려진다. 그러므로 지금 “여인 때문에 아비멜렉이 죽는다”에 의해서는 신앙의 교리가 만일 합리성에 의견을 구한다면 무익하고 공허해질 것임이 의미되어진다.
신앙의 교리가 합리성으로부터가 아님인 이유는 합리성은 선과 진리의 나타남이기 때문이다. 이 나타남은 그 자체로는 진리들이 아니다. 더욱이 합리성은 그것 아래 기억 속의 지식들로 확증한 외적 감각적인 것들로부터 있는 오류도 가지고 있다. 이 오류가 진리의 나타남에서 진리의 불명료해짐을 유발한다. 합리성의 대부분은 대체로 인간적 수준인데, 그것의 출생으로부터 분명하다. 이것은 신앙의 교리가 합리성으로부터 시작할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더욱이 그것으로 신앙의 교리는 세워질 수 없다. 다시 강조하건대, 신앙의 교리는 (인간을 발판으로 한 합리성이 아니고,) 주님의 신성 자체와 신성한 인간으로부터 있어야만 한다. 이것은 신앙의 교리의 근원, 참으로 주님이 교리 자체이시다에 100% 의존되고 있어야만 한다는 말이다. 이렇기 때문에 말씀 안에서 주님은 말씀, 진리, 길, 빛, 문이라 불리시는 것이다; 그리고 모든 교리는 신성한 선과 신성한 진리로부터 있고, 이 둘은 그 자체 천국의 결혼을 가지고 있다. 교리 안에 이것을 가지지 않는 교리는 진짜 신앙의 교리가 아니다. 그러므로 말씀의 세부 항목 마다 결혼의 형상이 있다.
말씀의 글자에서, 또는 외적 의미에서 신앙의 교리는 마치 합리성으로부터의 것을 아주 많이 소유한 듯, 또는 자연성으로부터 되어 있기라도 한 듯하게 실로 나타난다; 그러나 그런 나타남이 있는 이유는 말씀이 인간을 위해 있기 때문이고, 이렇게 인간의 수준에 잘 정박하여야 최저 수준의 인간의 사용도 가능하여 모두의 구원이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전한 것은 말씀 자체는 천적인 근원으로부터의 영적인 것, 즉 신성한 선과 결합한 신성한 진리로부터 이다. 만일 교리의 내용물에 관하여 합리성에 의견을 구한다면, 필시 무익하고 공허함만 초래할 것이다에 대하여는 추후 더 예증할 것이다.

그 이유가 그녀는 남편과 결혼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는 진정한 신앙의 교리는 영적이다는 것, 그리고 그것의 내용물은 천적 평면과 결합되어져야 함을 의미하는데, 이는 “남편에게 결혼됨”의 의미로부터 파악된다. “남편”, 이것이 말씀에서 언급할 경우, 선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때 “아내”는 진리를 의미한다. 이럴 경우도 있다 남편인데 “남자”라고 불리우는 경우이다. 이때 “남자”는 진리를 의미하고, “아내”는 선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여기서 그녀가 “남편과 결혼되어 있음”은 진리가 선과 결혼되어짐, 이럴 경우, 진리 역시 선을 의미한다. 이와 같은 것이 “아내로서의 사라”가 영적 진리, “아브라함”은 천적인 선, 그리하여 모두가 신성임을 의미하는 경우이다. 그리고 “사라”는 신성한 영적 진리를 의미하는 바, 진정한 신앙의 교리 자체 역시 “사라의 아내”에 의해 뜻해진다; 그 이유가 교리는 진리들로부터 있기 때문이다. 이상으로부터 분명한 바, 그녀가 “남편과 결혼되어 있음”은 진정한 신앙의 교리는 영적이다는 것, 그것의 내용물은 천적 평면과 결합된 영적인 것임을 뜻한다.

4절. 그리고 아비멜렉은 그녀에게 가까이 오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말했다, 주여, 당신께서는 의로운 나라 역시 살해하시렵니까?

아비멜렉은 그녀에게 가까이 오지 않았다. 이는 신앙의 교리에서 합리성이 어떤 방식으로이든 의견을 제시하지 않았음을 의미하는데, 이는 “아비멜렉”이 신앙의 교리를 의미함에서; 그리고 “그녀에게 가까이 옴”, 즉 누이로서의 사라에게 접촉함은 “누이”인 합리적 진리에 의견을 구함을 말하는 것에서 찾아진다. 합리성이 어떤 방식으로 이든 의견을 제시하지 않았다 인 이유는 이미 서술한 바대로, 신앙의 교리적인 것들은 인간 합리성을 무한하게 초월해 있는 신성에 그 전체를 의지해야 하기 때문이다. 합리성의 선과 진리도 신성으로부터이다. 신성은 합리성 안으로 들어갈 수 있으나, 그 반대로는 불가능하다. 말하자면 혼이 육체 안으로 들어가서, 그것의 모양을 만들어 낼 수 있으나 육체가 혼 안으로 들어갈 수 없다는 말이다. 또는 빛이 그늘 안으로 들어갈 수 있고, 다양한 색깔도 만들어낼 수 있지만, 그늘이 빛 안으로는 들어가지 못한다. 그러나 합리성이 현존해 있는 것처럼 먼저 나타나는 이유는 그것이 교리를 받는 실제의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생각의 첫 주제는 그것이 동시에 의견을 제시해서는 안된다 이었다. 주님이 자신에게 밝히시고 대답하신 것은 교리가 무익하고 공허해지게 되리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합리성에 의견을 구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여기서 “아비멜렉은 그녀에게 가까이 오지 않음”에 의해 의미되어지고 있다.

그리고 그는 말했다, 당신께서는 의로운 나라 역시 살해하시렵니까? 이는 선과 진리를 소멸시킬지 아닐지를 의미하는데, 이는 “나라”의 의미가 선이다 에서 알게 된다 . 그리고 이것은 아비멜렉의 나라에 관한 서술이고, 아비멜렉에 의해서는 신앙의 교리가, “의로운 나라”에 의해서는 선과 진리 모두가 의미되는 바, 이는 둘 다 교리에 속하고 있다. .
이 구절은 애착의 열정, 또는 전체 인류를 향한 사랑의 열정으로부터 말해진 것이 분명하다. 이 사랑은 주님께서 아직 어머니쪽의 인간 안에 계시는 동안에도 주님을 지휘하고 있다; 그리고 비록 그분이 신성으로부터 신앙의 교리는 천적인 근원으로부터서만 있었다고 지각하셨을 지라도, 그럼에도 인류에게 설비되어 있는 것은 인간은 합리성으로부터 어떤 생각을 하지 않으면 어떤 것도 받을 수 없다는 것, 그래서 말해지는 것, “당신께서는 의로운 나라 역시 멸하시렵니까?” 즉 교리 속의 선과 진리가 소멸 될지 아닐지 되물어진다는 것이다. 인간은 그의 합리성으로부터 어떤 생각을 가질 수 없으면 어떤 것도 받지 못하나, 한편 인간은 신성한 비밀들에 관한 것을 소중히 하는 것은 분명하다. 인간의 합리성에는 세상적인 것들로부터의 어떤 생각, 또는 그것에서 유추한 어떤 생각이 늘 접착제 같이 붙어 다닌다. 이로 말미암아 그것들은 기억 안에 유지존속되고, 생각에서 재생산 된다. 그러므로 만일 신성의 근원으로부터의 진리들이 벌거벗은채로 놓여져 있다면, 이 진리들을 인간은 결코 받지 못한다. 그 이유는 이 벌거벗은(순수한) 진리는 인간의 납득력을 초월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간의 믿음을 넘어서 있다. 특히 외적 예배를 중시하는 이들의 경우는 더더욱 그렇다.
이를 위해 예를 들어 생각해보자: 신성 자체는 신성 안에서만 있을 수 있다, 고로 주님의 신성한 인간 안에만 있을 수 있고, 이를 통해 인간과 더불어 있을 수 있다는 점에 대하여서 이다. 만일 합리성에 의견을 구한다면, 신성 자체는 모든 이의 인간 안에 있을 수 있다고 말할 것이다. 다시: 주님으로부터, 고로 신성으로부터 진행되지 않는 거룩함은 아무것도 없다. 이는 하나이다. 만일 합리성이 의견을 내놓는다면, 다른 근원으로부터 거룩한 것 역시 있을는지 모른다 라고 말할 것이다.
다시: 인간은 자신으로부터서는 살지 못하고, 선을 행하지도 못하고, 진리를 믿지도 못한다, 아마 자신으로부터서는 생각조차 하지 못한다; 그러나 선과 진리는 주님으로부터 있다, 그 반면 악과 거짓은 지옥으로부터 있다; 그리고 지옥, 즉 지옥에 있는 이들은 자신들로부터 생각하지 못한다, 그들은 가리킨 방식에서 주님의 선과 진리를 받는다. 만일 합리성이 의견을 내놓는다면, 이것을 거절할 것이다. 그 이유는 그것을 납득 못하기 때문이다. 또한 이것도 거절한다. 즉, 선을 행하고, 진리를 가르친 것 때문에 보상을 받는 자는 아무도 없다는 진리이다; 그리고 외적인 것은 아무것도 기여하지 못하고 내적인 것만 기여하는데, 선인 것을 행함에서 선에 대한 애착이 있는 만큼에서, 그리고 참된 것을 가르침에서 진리에 대한 애착이 있는 만큼에서, 그리고 이 애착이 자아로 있지 않은 만큼에서 이다. 이에 대한 예를 들자면 수 천 가지는 족할 것이다.
이런 속성 속에 인간의 합리성은 있기에 말씀은 인간의 납득력에 맞추어, 또한 그의 천성에 걸맞게 말해져왔다. 이것은 말씀의 내적 의미가 글자 의미와 다른 이유이기도 하다; 이것은 구약 성경의 말씀에서 분명해진다, 거기서 대부분의 것들은 그 당시 살았던 사람들의 천성과 납득력에 맞추어 쓰여졌다. 이렇기 때문에 사 후 삶, 구원, 내적 인간에 관하여 말해진 것은 하나도 없다. 그 당시 교회가 있었던 유대와 이스라엘 백성이 철저한 글자 의미(철저한 외적 인간)에 있는 특성 때문에, 만일 이들에게 위와 같은 진리를 내보였다면, 그들은 그것들을 이해 못했을 뿐만 아니라, 조롱까지 했을 것이다. 메시아, 또는 그리스도가 그들의 혼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오시려고 계셨다고 열어 보인다면 비웃음거리밖에 더 아니어서 단번에 거절되었을 것이다. 지금의 그들에게 내적, 영적인 것을 언급해본다면, 메시아는 지상의 최고의 왕이 되시지 않고 조롱만 당할 것이다.
이런 이유에서 주님 역시 때때로 예언자들 같이 이야기하셨고, 비유로 가르치셔야만 했다. 그분 스스로 마태복음서에서 선포하신다:
예수께서 말하셨다, 내가 비유로 그들에게 말하는 이유는 그들이 보고도 보지 못하고, 듣고 도 듣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다 (마. 13:13)..
위에서 보고 듣는 이들“이란 비록 듣고 보지만, 여전히 깨닫지 못하는 교인들이 뜻해진다. 요한복음서에서:
그분은 그들의 눈을 멀게 하셨다, 그들의 심정이 굳어지게 하셨다, 그리하여 그들이 자기들 의 눈으로 보지 않도록, 자기들의 심정으로 깨닫지 않도록, 그래서 전환되지 않도록, 그리 하여 내가 그들을 치료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이다 (요. 12:40).
그들이 “전환하고”, “치료받음”이 함축하는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이후에 거절하리라는 것, 그리고 모독하리라는 것, 이것은 영원히 정죄됨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는 많은 장소에서 말씀의 내면의 것들을 열어 보여주셨다. 물론 슬기로운 자들만을 위해서 이다.

5절. 그는 스스로 그녀는 내 누이이다 라고 말하지 않았읍니까?, 그리고 그녀 자신 역시 그는 내 오라비이다 라고 말했습니다. 내 심정은 곧바랐고, 이 일을 한 제 손은 흠이 없습니다.

그가 스스로 저에게…말하지 않았읍니까? 이는 그분이 그렇게 생각하신 것은 무죄임을 증명한다를 의미한다. 이는 이 구절의 세부 사항으로부터, “말함”의 의미가 생각함이다로부터 알려지고 있다.

그녀는 내 누이이다란 이는 합리성에 의견을 구해야 하리라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이 장에서 “누이”의 의미가 합리적 진리이다로부터 분명해진다. 말씀의 내적 의미에는 주님의 전 생애가 묘사되고 있다. 이는 그분의 지각하심과 생각하심에 이르기까지를 망라해서 이다. 그 이유는 이것들이 예견되고 설비된 것은 (전지전능의) 신성으로부터 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성경의 기록이 공표된 추가적인 이유는 말씀을 내적 의미에서 지각하는 천사들에게도 지상의 사람들과 동시에 이해되도록 배려하셨기 때문이다; 이렇게 주님은 그들 모두 앞에 있으시어, 어떻게 계속적인 단계들을 수단으로 그분은 인간을 벗으시고, 신성을 입으시는가를 보이셨다. 이런 것들이 말씀을 통하여 천사들에게 표출된 것처럼 있지 않았으면, 또한 유대 교회의 모든 의식들을 통하여 있지 않았다면, 주님께서는 사람 또는 아담이라 불리우는 태고 교회의 타락 이후 즉시 세상에 오실 수밖에 없었다 (창. 3:15). 더욱이, 인류는 구원되어질 수 없었다.
주님의 생애 자체에 주목해보면, 이 생애는 인간성이 신성으로의 계속적인 발전, 절대적인 합일로 계속적으로 진보하심이었다. 이렇게 하실 수밖에 없는 이유는 그분이 지옥들과의 전투를 승리로 이끄시어 지옥을 정복하시기 위한 필수 과정, 즉 그분은 인간이심으로부터 이것을 행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신성 차원에서는 지옥과의 전투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분은 또 다른 인간으로 기꺼이 되신 것, 하여 유아로부터 시작된 지식들의 자람이 있었다. 이것이 12장에서 아브람이 이집트에 체류하심으로 표현되어져 있다, 그리고 지금은 그랄에서 이다; 고로 그분은 또 다른 인간으로 기꺼이 합리성을 일구어가셨다, 그리고 합리성의 그늘짐을 추방하고, 빛을 가져다 놓으셨는데, 이것은 그분 자신의 능력으로부터 이었다. 인간으로부터 신성으로 주님의 진보하심이 이런 본성 속에 있다는 것은 그분에 관한 얼마 안되는 그분에 관한 기록, 말하시고 배우신 점 등을 연상하면 누구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우리와 다른 점은 분명히 있었다. 즉 신성 자체가 그분 안에 있었다는 것, 그분은 여호와로부터 수태되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녀 자신 또한 그는 내 오라버니이다고 말했습니다. 이는 합리성 스스로 천적인 선은 천적인 진리에 인접해 있어야 한다고 구술함을 의미한다. 이는 “누이”, 즉 “그녀 자신”의 의미가 합리성임에서 분명해진다; 그리고 “오라버니”가 진리의 선을 의미함에 의해서도 알려진다. 여기서의 경우 다음과 같다: 신성한 선과 신성한 진리는 마치 결혼에 의한 것처럼 서로에게 하나되어 있다; 이로부터 천국의 결혼이 온다, 그리고 결혼의 사랑이 오고 있다. 이는 더 낮은 수준의 본성으로까지 내려간다. 그러나 합리성으로부터의 선과 진리는 결혼에 의해 서로에게 결혼되어 있지 않고, 혈족 관계로, 즉 형제자매의 관계로 있다; 진리 측면에서의 합리성은 신성한 선의 유입으로부터 지식들에 대한 애착 안으로 임신되어진다; 그리고 합리성의 선은 신성한 선이 이 진리 안으로 유입됨을 통하여 이고, 이때 진리는 선행의 선 자체가 되어간다, 이것이 신앙의 “형제”, 또는 같은 말로, 진리의 “형제”이다.
그러나 합리성의 선과 진리에 주목해보면, 이것을 획득함은 합리성의 선은 신성한 선으로부터 이나, 그것의 진리는 신성한 진리로부터가 아니다; 그 이유가 합리성의 진리는 지식들을 수단으로 획득하기 때문이다. 이 지식들은 내적, 외적 감각들을 수단으로 하여 이식되는데, 외적 방법으로만 있어진다. 그러므로 합리성의 진리에는 감각들로부터 있는 많은 오류 역시 들러붙어 있어, 이것이 진리가 진리 아닌 것이 되어 있게 한다. 그럼에도 신성한 선은 그것들 안으로 흘러가서 그것들에 착상(임신)하는 바, 그때 그것들은 진리들로서 나타나고, 진리들로서 인정되어진다. 물론 이것은 진리의 외관밖에 더 아니다. 이때 선 자체가 거기 있는 그늘의 정도에 따라 이런 진리들에 잘 숙박할 수 있게 변경되어진다. 따라서 그 선은 진리와 같은 품질이 되어진다. 이상의 설명이 이 구절에 담겨 감추여 놓인 비밀함의 하나이다. 즉 합리성은 천적인 선이 그것에 결합될 것이라고 구술했다는 말이다.

제 심정의 곧바름에서. 이는 그렇게 생각하신 것은 순진과 단순한 선으로부터 이었음을 의미한다. 이는 “곧바름”과 “심정”의 의미로부터 파악된다. 원어에서 “곧바름, uprightness”은 성실함, 완전함, 또는 단순 순박함도 의미한다; 더욱이 “심정, heart”은 사랑과 선행을 의미하고, 이는 선으로부터 있음은 대체로 누구에게나 알려져 있다. 그러므로 ”심정의 곧바름으로부터“란 순진과 단순한 선으로부터를 뜻한다.

이 일을 했던 제 손은 흠이 없습니다. 이는 진리에 대한 애착으로부터, 그리고 모든 능력으로부터를 의미한다. 이는 “흠없음”과 “손”의 의미에서 찾아진다. 원어에서 “흠없음”은 깨끗함과 순수함 역시 뜻하는 단어에 의해 표현되어져 있다. “손”은 진리를 서술하고 힘, 즉 능력을 의미한다. “저는 심정의 곧바름과 손의 흠없음으로부터 이를 했다”는 것은 순진함과 단순한 선으로부터, 그리고 진리에 대한 애착, 고로 모든 능력으로부터 그렇게 생각했었다를 의미한다. 그 이유는 선은 순진으로부터의 선이고, 진리는 선으로부터의 진리이기 때문이다; 이것들이 그것들의 질서 안에 있을 때, 그러면 모든 능력이 있다. 이런 사항들이 이 말들 안에 포함되어져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 이유가 순진이 선 안에 있지 않으면, 곧바름, 건전함, 완전한 심정은 없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단순한 선이 되어간다. 생각이 이것들로부터 있을 때, 모든 능력, 또는 힘으로부터 있는다; 이것이 “손”에 의해서도 의미되고 있다.

6절. 그리고 하느님께서 꿈에 그에게 말하시기를, 그렇다, 나는 네가 곧바른 심정에서 이 일을 했다고 알고 있다. 그리고 또한 나는 네가 나에게 죄짓지 않게 제지하였다. 그런고로 나는 네가 그녀를 건드리게 방치하지 않았다.

하느님께서 꿈에 그에게 말하셨다. 이는 덜 불명료한 지각을 의미한다. 이는 앞의 3절에서 살폈다. 마지막 절에서는 “여호와”라는 이름이 사용되나, 여기서는 이름 “하느님”이 사용되는 이유는 영적 평면의 것들, 즉 신앙의 교리적인 것들이 취급되는 까닭에서이다. 영적인 것이 주제를 이룰 때, 그분은 “하느님”이라 불리신다; 그러나 천적 평면의 것들, 즉 사랑과 선행이 취급될 때, 그분은 “여호와”라 불리우신다.

그렇다, 나는 네가 곧바른 심정에서 이 일을 했다고 알고 있다. 이는 순진과 단순한 선으로부터 그렇게 생각하셨음을 의미하는데 4절에서 이미 살폈다. 앞 절처럼 “네 손의 흠없음에서”가 이 절에서는 말해지지 않는 이유는, “손의 흠없음”에 의해 의미되는 진리에 대한 애착에는 인간 수준의 어떤 것이 있었다는 감추인 이유 때문이다; 그 이유가 진리는 그분의 출생의 인간을 통하여 이식되나, 선은 신성만으로부터 이기 때문이다; 이는 선에 관하여, 진리에 관하여 합리성이 출시됨으로부터도 분명해진다.

나는 네가 나에게 죄짓지 않게 제지하였다. 이는 피해가 결과되지 않았다는 것, 즉 신앙의 교리에서 합리성이 의견을 제시하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그런고로 나는 네가 그녀를 건드리게 방치하지 않았다. 이는 합리성이 의견을 전혀 내놓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이는 “건드리게 방치함”이 의견을 제시함의 의미인 것에서 알게 된다; 그리고 “누이로서의 사라”가 여기서 합리성을 의미함에서도 알려진다.
천적 근원으로부터의 영적 수준인 신앙의 교리, 이것이 신성한 선으로부터의 신성한 진리인바, 이는 전적으로 신성한데, 어떻게 이련 경우가 있는지에 관해 더 말해야 할 것 같다. 신성인 것은 납득할 수 없다. 그 이유는 모든 이해력을 초월해 있기 때문이다. 천사의 이해력까지도 초월해 있다. 그러나 이렇게 납득 불가능한 신성은 주님의 신성한 인간을 통하여 인간의 합리성 안으로 흘러든다; 그리고 이것이 인간의 합리성 안으로 흐를 때, 거기 있는 진리들에 따라 받아들여진다; 고로 이는 매우 다양한 바, 이 인간의 것이 저 인간의 것과 같을 수가 없다. 그러므로 인간과 더불은 진리들이 더 순수한 만큼에서, 흘러든 신성 역시 더 완전하게 받아지고, 그만큼에서 인간의 이해성은 계발되어진다.
주님의 말씀에는 진리 자체들이 있다. 그러나 글자 의미 수준에서는 외적 예배에 있는 이들의 납득력에 잘 숙박할 수 있는 진리들이다; 이에 반해 내적 의미에서는 내적 인간들에게 숙박할 수 있는 진리들이다; 즉 교리 측면에서 이든, 삶의 측면에서 이든 천사들인 이들에게 잘 어울리는 진리들이다. 그들의 합리성은 그들의 계발됨이 별들과 태양의 빛남에 비교되는 것과 같은 수준에서 계발되어진다 (단. 12:3; 마. 13:43). 이로부터 자연히 알려지는 바는, 내면의 진리들이 알려지고 받아지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이다. 이 진리들이 알도록 우리 가까이 접근하여 있지만, 주님을 사랑함을 지닌 이들, 또는 그분에 대한 신앙을 가진 이들 외에는 받아지지 않는다; 그 이유는 주님은 신성한 선이신바, 그분은 신성한 진리이시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그분은 교리 자체이시다. 그 이유는 진정한 신앙의 교리 안에 있는 것은 무엇이든 주님을 바라보고, 천국의 왕국과 교회를, 그 안에 속한 모든 것을 찾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것은 그분의 것, 그리고 중간 목적들이고, 이를 통한 마지막 목적은 주님인바, 그분만이 중요시되어야 한다.
주님이 진리와 선에 관련하여 교리 자체이시다는 것, 그리고 교리에서 중요시되어야 하는 것이 주님만 이심을 요한복음서에서 가르치신다:
예수께서 말하셨다, 나는 길, 진리, 생명이다 (요. 14:6, 7).
위에서 “길”은 교리이다, “진리”는 교리 속에 있는 모든 것, 그리고 “생명”은 진리의 생명인 선 자체이다. 그리고 그분을 사랑하는 것, 또는 그분을 믿는 것은 (그분을) 받는 것임을 요한복음서에 가르치신다:
그분의 것이(자녀가) 그분을 받지 않았다. 그러나 그분을 받은 많은 이들에게 그분은 하느 님의 아들이 되는 능력을 주셨다, 그분의 이름을 믿는 이들에게 조차 (주셨다). 이는 피로 부터가 아니고, 인간의 의지로부터도 아니고 하느님으로부터 태어나진 것이다
(요. 1:11-13).
하느님을 사랑하고 그분을 믿는 이들이 “하느님으로부터 태어난” 이들이다.

7절. 지금 남자의 아내로 복귀시켜라. 그 이유는 그가 예언자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너를 위해 기도할 것이다. 그리고 너는 살 것이다. 그리고 만일 네가 그녀를 원래 지위로 복귀시키지 않는다면, 너는 네가 반드시 죽을 것임을 알라, 너와 네게 속한 모든 것도 죽으리라.

그리고 지금 남자의 아내로 복귀시켜라. 이는 그분께서는 합리성으로부터 오염 시키는 일 없이 교리로부터 영적 진리를 제공하실 것임을 의미한다. 이는 “아내”의 의미가 영적 진리 임에서; 그리고 “남자”의 의미가 교리 자체 임에서 파악된다. 그 이유가 아브라함이 “남자”라 `불리울 경우, 천적 진리를 의미하고, 이 진리는 천적 근원으로부터의 교리와 같기 때문이다; 내적 의미에서 “남자”는 지적 측면이다. 그러므로 “남자의 아내로 복귀시킴”은 오염 없이 교리의 영적 진리를 제공하시는 것임이 분명해진다. 이것이 합리성으로부터 오염시킴 없이를 뜻하는 것은 그녀를 원상태로 복귀시키는 아비멜렉이 합리성을 중요시하는 교리, 즉 교리의 합리적인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위에서 우리는 이렇게 말했다. 비록 신앙의 교리가 그 자체 신성하여, 인간과 천사의 납득력을 넘어 있다 해도, 그럼에도 인간의 납득력에 맞추어, 합리적 방식에서 말씀에서 구술되어왔다는 점이다. 이런 점은 부모가 어린 자녀를 가르치는 모습과 동일한 측면이 있다: 부모가 그들을 가르칠 때, 그는 자신 스스로는 더 높고 더 내면적인 것을 생각하고 있다해도, 자녀를 향해서는 그들의 천성에 모든 것을 맞추어, (즉 그들의 눈높이에 맞추어) 가르침은 진행된다. 그렇지 않으면, 배워짐 없이, 바위 위에 뿌려진 씨 같을 것이다. 이런 점은 저 세상에서 천사들이 심정이 단순한 이들을 지도할 때에도 같다: 비록 이 천사들이 천적, 영적 지혜 안에 있다 할지라도, 그들은 자기들이 가르치는 이들의 납득력을 넘는 것을 고집하지 않고, 그들과 단순함에서 이야기 하고, 가르침의 진도에 따라 점차로 등차를 올려간다. 그 이유가 만일 그들이 천사의 지혜로부터 이야기할 것 같으면, 단순한 자들은 아무것도 납득하지 못한다, 그 결과는 신앙의 진리와 선들에로 인도되지 못하고 만다. 주님께서도 합리적 방식에서 인간의 납득력에 맞추어 말씀에서 가르치시지 않으셨다면 천사의 지혜를 대뜸 가르치려했던 경우나 매한가지 였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씀의 내적 의미는 천사의 이해력쪽으로 승강되어진다. 그러나 제아무리 천사의 지혜가 승강된다 해도 이는 어디까지나 신성 아래 여전히 있다. 이로부터 분명해지는 바, 말씀은 그것의 근원 측면에서 있는 것, 고로 그 자체인 것에서도 전체 천국이 납득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말씀의 아주 작은 부분, 또는 무례한 듯 나타나는 구절에서도, 인간이 별로 대단치 않게 여기는 대목에서도 여전히 모든 이의 납득력을 초월한다는 점이다.
주님이 말씀이시다는 것은 말씀이 그분으로부터 있고, 그분이 말씀 안에 계시기 때문에서 이다. 요한복음서에서 분명해진다:
시작에서 말씀이 있었다, 그리고 말씀은 하느님과 더불어 있었다, 그리고 하느님은 말씀이 셨다; 그분 안에 생명이 있었다, 그리고 생명은 인간들의 빛이었다; 말씀이 육으로 만들어 졌다, 그리고 우리들 사이에 거주하셨다; 그리고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다, 이 영광은 아버지의 독생자에 관한 것, 은혜와 진리가 충만된 것(영광)이다
(요. 1:1, 4, 14; 계. 19:11, 13, 16).
그리고 주님이 말씀이신바, 그분은 또한 교리이시다; 그 이유가 자체가 신성인 다른 교리는 없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그는 예언자이기 때문이다. 이는 그러므로 그분은 가르치시어야 함을 의미한다. 이는 “예언자”의 의미로부터 파악된다. 말씀에서 우리는 “예언자”라는 단어는 자주 접하고 있다. 글자 의미에서 “예언자”는 계시가 만들어 지는 이들(계시를 받는 이들), 추상적으로 계시 자체를 의미한다. 그러나 내적 의미에서 “예언자는 가르치는 이를, 추상적으로는 교리 자체를 의미한다; 그리고 주님이 교리 자체이신 바, 즉 가르치는 말씀이신 바, 그분은 ”예언자“라 불리우신다. 모세의 책에서:
너희 한 가운데로부터 예언자, 너희 형제의 예언자, 나 같은 예언자를 너희 하느님 여호와 께서 일으켜 세우실 것이다; 그에게 너희는 순종하라 (신. 18:15, 18).
“나 같은”이라고 말해지는데, 그 이유는 주님이 모세에 의해 표현되었기 때문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아브라함, 이삭, 야곱, 그리고 그와 많은 이들에 의해 표현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이 그분을 그렇게 예상했었기 때문인데, 요한복음서에서 이렇게 말한다:
그들이 예수께서 행하신 기적을 보았을 때, 이 사람들은 이분이야말로 참으로 세상에 오실 것이라고 한 그 예언자이시다 라고 말했다 (요. 6:14)
주님이 가장 높은 의미에서 “예언자”이시고, “예수의 증거는 예언의 영”이기 때문에(계. 19:10), “예언자”는 가르치는 이, 또한 추상적으로는 교리를 의미한다; 이는 아래 구절에서 분명해진다. 누가복음서에서:
당신의 아이는 최고 높은 분의 예언자 라고 불리울 것이다 (요. 1:76).
이는 사가랴에 의해 말해졌고, 그의 아들 세례 요한에 관하여서이다. 세례 요한 자신이 자신을 두고, 자기는 예언자가 아니라, 주님의 오심에 관하여 전도하고 가르침에 의해 그분의 길을 준비하는 자이다고 말했다. 아래 구절에 있다:
그들이 그에게 물었다, 당신은 누구요? 당신은 엘리아스요? 그러나 그는 말했다, 나는 아 니다. 당신이 그 예언자요? 그는 대답했다, 아니다. 그들은 그러므로 그에게 말했다, 당신은 누구요? 그는 말했다, 나는 주님의 길을 곧바러지게 만드는 자,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음성 이다 (요. 1:21-23).
마태복음서에서:
많은 사람들이 그 날에 말할 것이다, 주여, 주여, 우리가 당신의 이름을 수단으로 예언하지 않았습니까? (마. 7:22).
위에서 분명한 바, “예언함”은 가르치는 것이다. 계시록에서:
너는 많은 백성, 그리고 나라들, 그리고 혀들, 그리고 왕들 앞에서 다시 예언해야 한다
(계. 10:11).
위에서 “예언함”은 가르치는 것을 표시한다; 그리고 “백성, 나라, 혀, 왕”에 관한 의미는 이미 살핀바 있어 여기서는 생략한다.
계시록에서:
나라들이 마흔 두 달 동안 거룩한 성을 짓밟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나의 두 목격자를 줄 것이다, 그리고 이들을 베옷을 입고, 일천 이백 육십일 동안 예언할 것이다 (계. 11:2, 3).
위 구절의 예언함 역시 가르침을 표시한다. 모세의 책에서: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하셨다, 보라, 나는 너를 바로에게 신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아론, 네 형제는 너의 예언자일 것이다 (출. 7:1).
위에서 “예언자”는 가르치는 이, 또는 모세가 말할 것을 말하는 이를 표시한다. 요엘서에서:
나는 내 영을 모든 육 위에 쏟을 것이다, 그리고 너의 아들들과 딸들은 예언할 것이다
(욜. 2:28).
“예언할 것”은 가르칠 것을 표시한다.
이사야서에서:
여호와께서 깊은 잠의 영을 너 위에 쏟아부으셨다, 그리고 너희의 눈을 닫았다; 예언자들과 너희의 머리들과 선견자들을 그분은 덮으셨다; 모든 이의 환상은 봉인된 책의 말 같이 되어졌다. 이것을 그들은 글자들을 아는 자에게 주고, 말하기를, 바라건대, 이것을 읽어라; 그리고 그는 말한다, 나는 할 수 없다, 그 이유는 그것이 봉인되었기 때문이다
(이. 29:10, 11).
위에서 “예언자”에 의해 진리를 가르치는 이들이 뜻해진다; 그리고 “선견자”에 의해 진리를 보는 이들이 뜻해진다; 이들이 “덮혀짐”이라고 말해지는데, 그들이 진리에 관해 아는 것도, 보는 것도 아무것도 없을 때를 말한다. 고대 시대 때에, 가르치는 이들이 “예언자들”이라 불리웠는 바, 그러므로 그들은 “선견자들”이라고도 불리웠다, 그 이유는 “보는” 것이 이해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삼상. 9:9; 삼하. 24:11). 그들은 또한 “하느님의 사람”이라고도 불리웠다, 이는 “사람”의 의미로부터이다 (왕하. 1:9-16; 4:7, 9, 16, 21, 22, 25, 27, 40, 42; 5:8, 14, 20; 13:19; 23:16, 17절도 참조).
내적 의미에서 “예언자들”에 의해 가르치는 이들이 의미되는 것은 예레미야서의 13장 전체에서, 그리고 에스겔서의 13장 전체에서 분명해지고, 거기서 “예언자들”이 특별하게 취급되고 있다; 또는 이 단어가 언급되는 많은 장소에서도 같은 의미를 지니다. 그러므로 “거짓 예언자들”에 의해서는 거짓들을 가르치는 이들이 의미되어진다; 마태복음서에서:
시대의 종말에 많은 거짓 예언자들이 많은 이들을 잘못 인도할 것이다.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예언자들이 일어날 것이다, 그리고 큰 징조들을 보일 것이다, 그리고 가능만하면 뽑힌 자도 잘못 인도할 것이다 (마. 24:11, 24)
위에서 “거짓 예언저들”에 의해서는 더 이상의 의미는 없다. 이와 마찬가지가 계. 16:13; 19:20; 20:10절에도 있다.
이는 말씀의 내적 의미가 유대 교회의 표현물로부터 만들어 낸 생각들에 의해 얼마나 크게 희미해졌는가를 잘 보여주고 있다; 그 이유가 “예언자”가 말씀에서 언급될 때면 언제든지, 그들의 그때 당시 있었던 같은 예언자에 대한 생각이 즉시 발생하기 때문이다; 이 생각은 예언자에 의해 의미된 것을 지각함에 큰 장애물이다. 그럼에도 누군가가 더 슬기로워지면, 더 쉽게 표현물로부터 수집된 생각을 제거한다; 예를 들면, “성전”이 언급되는 곳에서, 더 현명하게 생각하는 그들은 예루살렘에 있는 성전을 지각하지 않고, 주님의 성전을 지각한다; “시온 산”, 또는 “시온”이 언급되는 곳에서 그들은 예루살렘에 있는 산이 아니라 주님의 왕국을 지각한다; 예루살렘이 언급되는 곳에서, 그들은 베냐민과 유다 지파 안에 있던 성이 아니라 거룩하고 천국적인 예루살렘을 지각한다.

그가 너를 위해 기도할 것이다. 이는 이리하여 밝히 알려짐(계시)이 있을 것을 의미한다. 이는 “기도함”의 의미로부터 찾아진다. 기도, 그 자체에만 주목하면, 하느님과 대화함, 그리고 기도 속의 문제들의 얼마 정도를 내적으로 관조함이다. 이 문제들에 마음의 생각, 또는 지각 안으로 유입 같은 어떤 것으로 대답함이 있다. 그리하여 하느님을 향하여 인간의 내면들의 어떤 열림이 있다; 그러나 이것은 인간의 상태에 따라, 기도의 주제의 본질에 따라 많은 차이를 가진다. 만일 인간이 사랑과 선행으로부터, 그리고 오직 천적이고 영적인 것들만을 위하여 기도한다면, 기도자의 애착에서 명백해진 계시 같은 어떤 것이 희망, 위로, 또는 어떤 내향의 기쁨에 관하여 기도 안에서 공표된다. 이로부터 “기도”하는 것은 내적 의미에서 밝히 알게(계시) 해주심을 의미한다. 더욱이 기도함이 예언자를 서술할 경우, 예언자에 의해 주님이 뜻해지는데, 그분의 기도는 신성과의 내적 대화밖에 더 아니고, 동시에 계시이다. 계시가 있던 곳이 누가복음서에서: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그리고 기도하셨는데, 천국이 열려졌다 (눅. 3:21).
누가복음서에서 다시:
그분은 베드로, 야고보, 요한을 데리시고, 기도하시러 산으로 오르셨다; 그리고 그분이 기도 하셨을 때, 그분의 용모의 방식이 바뀌어졌다, 그리고 그분의 의복은 희었고, 반짝거렸다 (눅. 9:28, 29).
요한복음서에서:
그분이 기도하셨을 때, 말하시기를, 아버지 당신의 이름을 신성되게 하소서, 그때 천국으로 부터의 음성이 왔다; 나는 둘 다 신성되게 했고, 그리고 다시 신성되게 할 것이다
(요. 12:27, 28).
위에서 주님의 “기도하심”은 신성과의 대화였고, 동시에 계시였음이 분명해진다.

그리고 너는 살리라. 이는 이리하여 교리는 생명을 가질 것임을 의미한다.
이에 대하여 별도로 설명함은 필요치 않을 것이다.

그리고 만일 네가 그녀를 원래 지위로 복귀시키지 않는다면. 이는 만일 그분이 합리성으로부터 오염시킴 없이 교리로부터 영적 진리를 제공하시지 않는다면을 의미한다. 이 구절도 앞 절과 같은 단어의 반복이어서 중복 설명이 있게 되므로 앞 구절을 참조하기 바란다.

너는 네가 반드시 죽는다는 것을 알라. 이는 거기에는 선과 진리에 관한 교리는 없을 것임을 의미한다. 이는 3절에서 살핀 바로부터 분명해진다; 거기서와 비슷한 단어들이다. 마찬가지로 “그리고 네게 속한 모든 것”이란 그 교리에 소속되어 있는 일체의 것을 의미한다. 내적 의미에서 “모두”는 모든 것, 전부를 의미한다는 것은 말씀에서 인물들이 실제의 것들을 의미하기 때문에서이다; 고로 “아비멜렉에 속하는 모두”란 교리 속에 있는 모든 것을 의미한다. 이로부터 이 구절의 내적 의미인 것이 분명해진다; 즉 그분은 합리성으로부터 오염시킴 없이 교리의 영적인 것들을 제공하실 것이다는 것, 그리고 그것으로 가르침이 있을 것과 그분에게 밝히 알리심이 있다는 것, 그리하여 교리는 생명을 가진다는 것; 그러나 만일 그분이 합리성으로부터의 오염시킴 없이 영적 진리를 제공하시지 않는다면, 진리와 선의 교리는 교리의 각각 그리고 전부에서 무익하고 공허해지게 되리라는 것이다.
교리 측면에 주목하면 이렇다: 믿음의 바탕으로 인간적인 것이 있는 만큼에서, 즉 감각으로부터의 것, 기억 속의 지식으로부터의 것, 그리고 합리성으로부터의 것이 있는 만큼에서 교리는 무익하고 공허하다. 그 반면 이런 것들이 제거된 만큼에서 교리가 믿어진다면 그만큼 교리는 살아있다; 그 이유는 그만큼 신성이 흐르기 때문이다. 인간에게 잘 어울리는 것이 (신성의) 유입과 수용함을 방해한다. 그러나 합리성 속에 있는 것, 기억 속의 지식, 그리고 감각으로부터 믿는 것, 즉 믿기 위해 이런 것들에 의견을 구하는 것의 측면이 있는 한편, 아주 다른 측면은 믿어지도록 합리성, 기억 속의 지식, 감각을 수단으로 확증하는 것이다. 이 두 가지의 차이가 무엇인지는 이어지는 사항들에서 분명해질 것이다; 그 이유가 이것들이 내적 의미에서 이 장에서 취급되기 때문이다.

8절. 그리고 아비멜렉은 아침에 일찍 일어나, 그의 모든 종들을 불렀다, 그리고 그들의 귀에 이 모든 말들을 말했다. 그리고 사람들은 크게 두려워했다.

아비멜렉은 아침에 일찍 일어났다. 이는 명료한 지각, 그리고 천적 선으로부터의 확증의 빛을 의미한다. 이는 “아침에 일어남”, “아비멜렉”, “일찍”의 의미를 생각해봄으로 알려진다. “아침”이 의미하는 것은 창. 19:2, 15에서 살핀 바 있다. 여기서 명료한 지각이다는 것은 그 자체에서, 그리고 시리즈로부터; 즉 지각이 처음에 흐릿해 있었다는 것; 그리고 그 후에 덜 흐릿해 있었다로부터 분명해진다. “아비멜렉”이 합리적인 것을 찾는 신앙의 교리를 의미하는 것은 앞 2절에서 살폈다; “일찍”이 의미하는 것은 “아침”의 의미로부터 명백해진다. 그가 “아침에 일찍 일어났다”라고 말해지는 바, 이것은 명료한 지각을 의미할 뿐 아니라, 천적 선으로부터의 확증도 의미한다; 그 이유가 천적 선으로부터 진리의 확증하는 빛이 오기 때문이다.
주님이 인간 안에서 계실 때 가지셨던 지각, 그리고 신앙의 교리에서 합리적인 것들에 관한 그분의 생각이 내적 의미에서 많이 취급되는 이유는 천사들의 생각함 때문이다. 그들은 세상에서의 주님 생애에 관하여 아주 독특한 다양함으로 생각하고 있다. 그리고 어떻게 그분이 인간의 합리성을 벗으시고, 신성으로부터 합리성을 만드셨는지; 동시에 선행과 신앙의 교리에 관하여, 그것에 합리성이 혼합될 경우에 관하여, 이 외에도 이런 사항에 의존되는 많은 것들에 관하여, 인간과 교회의 내면의 것들에 관하여 독특한 생각을 가지기 때문이다. 심정과 지성이 세상적이고 육체적인 것들에 놓여진 인간에게, 위의 말들은 하나도 중요한 것이 없고, 아마 그에게 어떤 유익함도 주지 못할 수도 있다. (아마 왜 우리가 이런 것을 읽고 생각해야 하는지 그 자체부터 의심스러울 것이다. 아마 역자도 이런 인간의 범주를 크게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그럼에도 천사들에게, 즉 심정과 지성이 천적이고 영적인 평면에 놓인 이들에게, 이런 사항을 알고 배우고 가르치고, 전달하는 것은 그의 삶에서 매우 값진 것 (매우 값진 진주, 마. 13:46) 이다. 어쨌든 천사나 천사같은 심정과 지성의 소유자에게 이 지식들에 관하여 지각하고 생각함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벅차다. 두 대비되는 것이 있을 수밖에 없다. 즉 같은 말씀 구절을 두고 천사와 인간의 경우이다. 말씀의 내면의 것들은 인간의 납득력을 초월해 있기 때문에 인간에게는 중요하지 않은 듯 여겨지는 많은 구절들이 지혜의 빛 안으로 들어가는 천사들의 경우에서는 최고로 높은 평가를 받아 그들의 심정과 지성에 붙잡혀 있다. 그 반면, 인간에게 최고로 값나가게 여겨지는 것들, 그래서 인간의 심정과 지성을 꽉 메운 것들은 세상적 이어서 인간의 납득력에 와닿지만 천사들에게 중요하지 않은 바, 그들의 지혜의 빛을 지나쳐버린다. 이런 극명한 대비가 말씀의 내적 의미를 놓고 벌어진다.

그의 모든 종들을 불렀다. 이는 합리적인 것과 기억적 지식 속의 모든 것을 의미한다. 이는 “종”의 의미로부터 분명해지는데 이는 14절에서 더 자세히 살핀다. 주님의 왕국 안에 있는 인간, 또는 주님의 왕국인 인간 안에서는 천적인 것, 영적인 것, 합리적인 것, 기억 속의 지식들, 그리고 감각으로부터의 것들이 있다; 그리고 이들은 서로에게 종속 관계를 이루고 있다. 천적인 것과 영적인 것이 첫째 자리에, 그리고 주님의 것이다; 이것들에 합리적인 것들이 종속되고, 이것들을 추종한다; 다시 이것들에 기억 속의 지식들이 종속되고 추종한다; 마지막으로 감각으로부터의 것들이 기억 속의 지식들에 종속되고 추종한다. 추종하는 것들, 즉 섬기는 것들이 상대적으로 종들이고 말씀에서도 그렇게 불리운다. 이런 종속 관계가 있다는 것을 감각과 기억 속의 지식으로부터만 생각하는 이들에게는 무지한 사실일 뿐이다. 설사 이것들에 대한 어떤 것을 아는 자라해도 그는 대단히 희미한 생각들을 가진다. 그 이유는 그가 육체 안에 있기 때문이다. 인간에 있어서는 (내면의 것들을) 단 한 개를 생각만 해도 대단히 불명료하지만 천사들은 그것의 수 만 수 천 가지라 해도 하나하나 뚜렷하다. 예로 본문을 생각하면, 즉 아비멜렉이 종들을 부르고 모든 말을 하고 종들이 두려워 하는 대목이다. 천사들은 인간이 읽을 경우 납득이 불가능한 듯하고, 믿을 수 없기조차 한 더 깊은 비밀함을 지각한다. 즉 어떻게 그분이 합리적인 것들과 기억 속의 지식을 순종함쪽으로 격하시키셨는지; 그리고 실로 그분은 이렇게 격하시키는 방식에서 더 나아가, 교리 속의 천적인 것들과 영적인 것들을 향하여 애착들이 일어나게 하셨다는 것, 그 이유가 이들의 복종에서 합리적인 것들과 기억 속의 지식들이 순종쪽으로 되돌아오고, 동시에 질서적으로 되어지기 때문이다. 천사들에게 이런 사항들은 평범하고, 당연시 되는 사항들이다. 그러나 인간에게서는 가장 희미한 납득과 난해 사항이 되고 있다.

그리고 그들의 귀에 이러한 모든 말을 말했다. 그들이 순종적인데도 불구하고 그 확증을 도출한 것들에 간곡히 권고함을 의미한다. 이는 내적 의미에서의 시리즈와 “귀”의 의미로부터 알려진다. 시리즈로부터: 합리성이 인정하는 것은 무엇이든 확증하는 많은 것들이 있다. 그 이유가 이것은 그것의 인정함이 오는 이런 확증하는 것들로부터 정밀하게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합리적인 것들이 순종 쪽으로 환원될 때, 권고함이 확증하는 것들에 만들어진다; 그 이유가 이것들은 언제나 압박된 상태에 있어, 언제나 용수철 같이 솟으려하고 있기 때문이다. “귀”의 의미로부터: 말씀의 내적 의미에서 “귀”는 순종을 의미하는데, 들음과 순종함 사이의 상응 관계 때문이다; 더욱이 이 상응은 “들음”이라는 단어 자체 안에, 더 나아가 “귀를 기울임” 자체 안에 잠복하고 있다; 이 상응의 근원은 다른 삶으로부터 이다, 거기서 뜻하고 순종하는 이들은 귀의 영역에 소속하고, 들음 자체와 상응한다; 이것은 아직 알려지지 않은 비밀함이다. 그러나 주님의 신성한 자비로부터 상응을 취급하는 대목에서 한층 더 뚜렷하게 이해될 것이디. “귀”가 이 의미를 가지는 것은 말씀에 있는 많은 구절들로부터 분명해진다. 여기서는 한 구절만 살핀다. 이사야서로부터:
이 백성의 심정을 지방(fat)으로 만들어라, 그리고 그들의 귀를 무겁게 만들어라, 그리고 그들의 눈을 닫게 하라; 그들이 자기들의 눈으로 보지 않게, 자기들의 귀로 듣지 않게, 자 기들의 심정이 깨닫지 않게 하라 (이. 6:10).
위에서 “눈으로 보는 것”은 깨닫는 것이다; 그리고 “귀로 듣는 것”은 애착으로 지각하는 것, 결과적으로 순종하는 것이다. 그리고 주님께서 “듣는 귀를 가진 자, 자기로 하여금 듣게 하라”에 의해 의미된 것도 이와 같은 맥락이다 (마. 11:15; 13:9, 43; 눅. 8:8; 14:35).

그리고 사람들은 크게 두려워했다. 이는 그들이 혐오스러워 할 때까지를 의미한다. 이는 여기서의 “두려워 함”, 그리고 “사람들”의 의미로부터 찾아진다. “두려워 함”도 여느 감정 분위기 같이 외관상으로는 단순하다 할지라도 그 자체 안에 많은 것들을 포함하고 있다. 즉 세상적 주제들인 생명, 명성, 명예, 소득의 잃음 같은 것이다; 천국의 주제들일 경우, 선하고 참된 것, 이로부터 파생되는 생명의 잃음이다. 두려워 함이 이런 것들을 포함하는 바, 그것들을 파괴하려는 것들에 대하여는 무엇이든 혐오스러워 한다. 그리고 인간이 선하고 참된 것에 대한 애착 안에 있는 정도에 비례하여 더 혐오함이 있다. 이 애착 자체에 반대된 것이 혐오함인 바, 여기서의 의미가 혐오함을 의미하게 된다. 주님의 혐오하심이 얼마나 큰지는 다음 절에서 말해지는 것과 더불은 강렬한 바라심으로부터 분명해진다; 이 열정은 교리를 위하여였고, 교리는 반드시 합리적으로부터의 어떤 것, 또는 기억 속의 지식으로부터의 어떤 것에 의해 오염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9절. 그리고 아비멜렉은 아브라함을 불렀고 그에게 말했다, 너는 우리에게 무엇을 했느냐? 그리고 어떤 점에서 내가 너에게 죄를 지었기에 너는 나와 내 왕국에 큰 죄를 가져왔느냐? 너는 나에게 하지 않아야 할 행동을 했다.

아비멜렉이 아브라함을 불렀고 그에게 말했다. 이는 신앙의 교리로부터 주님께서 생각하심을 의미한다. 이는 아비멜렉과 아브라함의 표현으로부터, 그리고 “말함”의 의미로부터 파악되는데, 이 단어들은 여러 차례 설명해왔다. 이것이 신앙의 교리로부터 생각하는 것임은 우리의 납득력에 설명되어질 수 없다; 그 이유가 이에 대한 지각은 오로지 천사의 생각만에 와닿기 때문이다; 이들에게 이것은 아주 큰 빛에서 표출되고, 천국의 표현물이 동반되는 바, 이것을 어떻게든 묘사하려 시도하는 것은 가당치가 않다. 주님의 생각하심이 지적 진리로부터 이었다고 우리가 말할 때, 이것은 그분이 거기서부터 올려다 보신 합리성 너머 있었다; 그러나 지각으로부터 그분이 생각하심은 신성한 진리로부터 였다.

너는 우리에게 무엇을 했느냐? 그리고 어떤 점에서 내가 너에게 죄지었느냐? 이는 그렇게 생각했었음에 대해 스스로 유죄를 인정함을 의미한다. 이는 이 말들에 있는 감정 분위기와 열정으로부터 분명해진다. 즉 이성의 능력과 기억 속의 지식들이 일어나서 신성인 신앙의 교리로 들어가 거기에서 자기 몫을 가져려 하기 때문에 있는 감정과 열정이다.

너는 나와 내 왕국에 큰 죄를 가져왔다. 이는 그러므로 신앙의 교리와 모든 교리적인 것들은 위험함을 의미한다. 이는 “나와”에 의해 뜻해진 아비멜렉의 의미가 신앙의 교리인 것과, “왕국”의 의미가 교리인 것, 즉 교리 속의 진리임에서 알게 된다. 내적 의미에서 “왕국”은 교리 속의 진리를 의미하고, 반대적 의미에서는 교리의 거짓을 의미함은 말씀으로부터 분명한 바, 아래에서 살핀다. 예레미야서에서:
그분은 만물을 만드신 분, 그리고 그분의 유업의 홀(scepter)이시다; 여호와 체바욷이 그분 의 이름이다. 너는 내 망치, 전쟁의 무기이다; 그리고 나는 네 안에서 나라들을 흩트리겠다, 그리고 네 안에서 왕국들을 파괴하겠다 (예. 51:19, 20)
에스겔서에서:
보라, 나는 이스라엘의 아들들이 어디에 있든 나라들 사이로부터 그들을 데려올 것이다, 그 리고 그들을 각처에서 모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을 그들 자신의 토지로 데려갈 것이다; 나 는 이스라엘의 산에서 토지에서 하나의 나라로 그들을 만들 것이다, 그리고 하나의 왕이 그들 모두에게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더 이상 두 나라가 아니고, 두 왕국으로 더 이 상 나뉘어 있지 않는다 (겔. 37:21, 22).
위에서 “이스라엘”은 영적 교회를 표시한다; 그리고 “나라”는 교회의 선, 또는 교리의 선을 표시한다. “왕국”은 그것의 진리들을 표시한다; 나라들과 왕국들 외의 어떤 것이 여기서 그것들에 의해 의미되는 것은 분명하다. 그 이유가 이스라엘의 아들들, 또는 이스라엘족의 아들들을 “토지 안으로 모아서 데려온다”고 말해지기 때문인데, 그들이 나라들 사이에로 흩어졌을 때, 그들은 이방인들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이사야서에서:
나는 이집트끼리 혼동하게 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그의 형제와 맞서 모두가 싸울 것이 다, 그리고 모든 자가 그의 동료에 맞설 것이다, 성이 성에 맞서고, 왕국이 왕국에 맞설 것 이다. (이. 19:2).
위에서 “이집트”는 신앙의 진리들에 관한 기억 속의 지식들로부터 추론함을 표시한다; “성”은 교리, 여기서는 이교의 교리를 표시한다; 그리하여 “성이 성에, 왕국이 왕국에 맞선다”란 이교도들과 거짓들이 자신들에 맞서 싸울 것이다를 표시한다; 이와 비슷한 것이 시대의 종말에 관한 주님의 말씀에도 있다.
나라가 나라에 맞서 일어날 것이다, 그리고 왕국이 왕국에 맞설 것이다 (마. 24:7).
위는 악들이 악들에, 거짓들이 거짓들에 맞서는 것을 표시하고 있다.
다니엘이 네 왕국들에 관련하여 예언한 것 (단. 2:37-46; 7:17-끝절); 그리고 메대와 페르샤의 왕국에 관하여(8:20-끝절); 그리고 남쪽의 왕국과 북쪽의 왕국에 관하여 (11장); 그리고 요한이 계시록에서 왕들과 왕국에 관하여 예언한 것도 더 다른 의미는 없다: “왕국들”은 진리들과 거짓들에 관하여 교회의 상태들만을 뜻한다. 글자 의미에 있는 군주국의 상태들과 지상의 왕국들의 상태는 내적 의미에서는 주님의 왕국의 상태들과 교회의 상태들이다; 이 의미에서 천적, 영적 의미는 있다; 그 이유가 주님의 말씀을 그 자체에만 주목한다면, 이는 오로지 영적, 천적인 것 뿐이다; 그러나 모든 인간이 읽고 납득하는 방편까지 함유하도록 천국의 것들이 지상에서 있는 것 같은 식으로 장착되어 있을 뿐이다.

너는 나에게 하지 않아야 할 행동을 했다. 이는 소름이 끼침을 의미하는데, 이는 단어들의 분위기로부터 감지된다; 뿐만 아니라 시리즈로부터, 즉, 주님이 혐오하신 것 ; 그분이 열정으로부터 자신을 질책하신 것; 그리고 여기서는 그분이 소름이 끼치신 것이다..

10, 11절. 그리고 아비멜렉은 아브라함에게 말했다, 너는 무엇을 보았기에 너는 이런 말을 했었느냐? 11 그리고 아브라함이 말했다, 이곳은 하느님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들은 내 아내라는 말 때문에 나를 죽일 것이다 라고 내가 말했기 때문이다.

아비멜렉이 아브라함에게 말했다.” 이는 신앙의 교리로부터 더 생각하셨음을 의미한다. 이는 9절에서 말해진 바에서 분명해진다. 거기서 거의 같은 말이 있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반복되었는 바, 이는 더 생각하심을 의미한다, 그리고 실로 원인에 관하여서이다.

너는 무엇을 보았기에 너는 이런 말을 했었느냐? 이는 원인을 들여다 봄을 의미하는데, 별도의 설명 없이 이해될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어지는 말로부터 원인이 서술되고 있다. 이런 말들의 흐름에서 표출되는 것은, 어떻게 주님께서 신앙의 교리에 관하여, 의견을 구해야 할지에 따른 합리성에 관하여 지각하시고 생각하셨는지에 대한 생각인데, 이는 천사들의 생각 수준이다. 말씀의 내적 의미는 특별히 천사들을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의 지각과 생각들에 잘 숙박한다. 그들은 자기들이 주님에 관하여, 그리고 그분의 신성에 관하여, 그리고 그분의 인간에 관하여, 그리고 어떻게 인간이 신성으로 만드셨는지에 관하여 생각할 때, 참으로 복되고 행복하며 즐거움의 상태 안에 있다; 그 이유가 그들은 주님으로 가득한 천적, 영적 기운에 에워싸여 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그들은 주님 안에 있다. 그런고로 이 기운, 이로부터 파생되는 애정에 속한 것에 일치하는 것들을 생각하는 것보다 더 행복한 것은 없다.
동시에 그들은 가르침을 받고 더 완전해지는데, 특히 이런 사항에 관련해서 이다; 어떻게 주님께서는 등차적으로, 그리고 그분 자신의 힘에 의해 성장하셨고, 그분이 태어난 인간을 신성으로 만드셨는가; 그리고 어떻게 그분이 자신에게 밝히 알리신 지식들을 수단으로 합리성에 드리운 그늘을 추방하시고 신성의 빛 안으로 합리성을 끌어들여 그분의 합리성을 완전해지게 하셨는지에 대하여서 이다. 말씀이 읽혀질 때, 이것들과 무수한 다른 것들이 천적, 영적 방식에서, 수천 가지 표현물과 더불어, 생명의 빛에서 천사들 앞에 표출되어진다. 이런 사항들이 천사들에게는 너무나 귀중한 것들이지만 인간에게는 하등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는다. 이는 납득력의 상반된 수준 때문이다. 인간의 이해력은 그늘 아래 있기 때문이다. 한편 인간이 소중하다 여기는 것, 즉 세상적 문제들에 대한 것은 천사들에게는 중요치 않다. 그것들이 그들의 상태 아래, 지혜의 그늘에 있기 때문이다. 경이로운 것은 말씀의 내적 의미에서 있는 천사들에게서 인간과 더불어 그늘에 있는 것들은 그들의 빛을, 애정을 지나쳐 가버린다는 점이다.

“아브라함이 말했다.” 이는 대답인 지각을 의미한다. 이는 역사적 말씀에 있는 “말하다”의 의미로부터 알려지는데 수차례 이미 살핀 바 있다. “아비멜렉이 아브라함에게 말했다”에 의해서는 신앙의 교리로부터의 주님의 생각하심이 의미되고; “아브라함이 말했다”에 의해서는 대답이었던 지각이 뜻해지는데, 이 두 경우는 이렇다: 지각은 더 높은 것, 그리고 주님은 그것을 신성 자체로부터 가지셨다; 이에 비해 생각은 보다 낮은 것이다, 그리고 주님은 그것을 지성 자체로부터 가지셨다. 지각으로부터 그분은 생각을 가지셨듯, 생각 속의 대답도 지각으로부터 였다. 이것은 인간과 더불은 어떤 것에 의해 예증될는지 모른다. 천적 인간은 지각이 아니면 생각할 수 없고, 영적 인간은 양심으로부터가 아니면 생각할 수 없다. 전자의 지각, 후자의 양심 모두 주님으로부터 이다, 그리고 이것은 그것이 어디로부터인지 인간 자신에게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나 그의 생각은 합리성으로부터 있고, 그래서 그에게는 자신으로부터 같이 나타난다. 그래서 다시 인간이 합리성으로부터 어떤 주제에 관하여 생각할 때, 그때 생각의 결말, 또는 대답은 지각, 또는 양심의 둘 중 하나로부터 온다; 결과적으로 대답이 주님에 의해 그의 생명의 상태, 그의 애착, 그리고 이식된 교리의 진리 또는 그에게 있어진 감명에 일치하여 주어진다.

내가 이 곳에서는 하느님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이는 거기서부터 파생된 생각을 의미한다: 그들은 자기들이 있었던 그 상태에서는 영적 진리에 관하여 관심이 없었다는 것. 이는 “하느님을 두려워함”의 표현의 의미가 신성, 또는 영적 진리에 관심이 있음이다로부터; 그리고 “이곳”의 의미가 상태이다로부터 분명해진다. 이 경우는 이러하다: 인간은 순수하게 영적이고 천적인, 고로 신성인 어떤 교리도 납득할 수 없다, 그 이유는 그것은 무한하게 인간의 납득력을, 또한 그의 믿음(력)을 초월해 있기 때문이다. 모든 인간의 생각들은 그의 감각들과 연결된 자연적인 것들 안에 종결되어져 있다. 하여 자연적인 것에 따라서, 이것으로부터 말해지지 않는 것은 무엇이든 납득되지 않고 멸해진다. 마치 우리의 시각이 어떤 대양에서 이든, 우주에서 이든 제한되지 않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만일 교리적 주제들이 어떤 다른 방식에서 인간 앞에 놓여진다면, 그들은 전혀 받지 않을 것이고, 고로 어떤 관심도 받지 못할 것이다; 이는 말씀에 있는 모든 것만 생각해도 충분한 증거가 될지 모른다. 즉 이런 이유 때문에 순수하게 신성한 것 자체들이 자연적, 감각적 수준에서 놓여져 있다; 마치 여호와께서 귀, 눈, 얼굴을 가지고 있다고, 그분은 인간 같이 느낌을 가지신다고, 즉 성내심 등을 가지셨다고 말하는 것과 같을 것이다.
이런 것들이 더욱 요구된 때는 주님이 세상에 오셨을 때 였다, 그 이유가 그때 인간들은 천적, 영적인 것이 무엇인지, 내적인 것이 무엇인지 완전히 몰랐기 때문이다. 그들의 마음을 꽉채운 것은 오로지 지상적, 세상적인 것뿐이었다. 사도들 자신도 여기서 한 발자국도 더 벗어나지 않았다. 그들은 주님의 왕국이 이 세상의 왕국과 같은 것이라고 상상했다, 그래서 한 사람은 주님의 오른편에, 또 한 사람은 왼편에 앉게 해달라고 간청했다. 또한 그들은 자기들이 이스라엘의 열 두 지파를 심판하기 위해 열 두 왕좌에 앉을 것이라고 오랬동안 생각해왔다; 아직도 그들은 다른 삶에서 한 인간의 가장 사소한 것조차도 재판할 능력을 가지지 못한다는 것을 눈치 못채고 있다. 이런 인류의 상태를 그분이 내다보심이 합리성이 신앙의 교리에 의견을 내놓아도 될지 여부에 관한 주님의 생각하심의 첫 번째였다; 그리고 이것이 그분의 사랑으로부터, 즉 모든 이를 위한 구원이 설비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심, 그리고 말씀은 멸해져서는 안된다고 생각하셨다는 말이다.

그들은 내 아내라는 이유 때문에 나를 죽일 것이다. 이는 만일 그들이 영적 진리 만이 천적 선과 결합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신앙 속의 천적인 것 역시 멸망될 것임을 의미한다. 이는 “죽인다”의 의미가 멸해진다이다로부터; 그리고 “아내”의 의미가 천적 선과 결합한 영적 진리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것은 주님의 생각하심이 있는 또 하나의 이유이다. 다음과 같다. 신성한 선, 여기서 천적 선이라 불리는 선은 여기서 영적 진리라 불리는 신성한 진리에 결혼함에 의해 하나된다; 그리고 비록 신성한 선이 이 방식에서 신성한 진리만에 하나된다 할지라도, 그럼에도 그것은 더 수준 낮은 진리들 안으로 흐르고, 그 자체 그것들과 결합한다. 그러나 이것은 결혼의 수준은 아니다; 그 이유가 흘러든 진리가 진리의 외관(껍데기)에 불과한 합리적 진리이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영적) 진리는 오류가 대부분인 기억 속의 지식들과 감각으로부터의 진리 안으로도 흘러들고, 이것과도 그 자체를 결합해놓고 있다. 이렇게 되지 않는다면, 어느 누구도 구원은 불가능하고 만다. 신성한 선이 이성과 기억 속의 지식들의 진리들과 결합되어야 할 것, 그래야 인간은 구원되리라는 것은 주님이 세상에 오신 목적이었다; 주님의 인간이 신성으로 만드심 없이 어떤 결합도 가능할 수 없었기 때문, 또한 그분을 통하여서만 결합이 있기 때문이다.
이 비밀함 외에도, 다른 비밀함이 “그들은 (그녀가) 나의 아내라는 이유 때문에 나를 죽일 것이다”에 있다. 이 말을 수단으로 의미된 것은 만일 영적 진리 만이 천적 선에 결합되어야 한다고 그들이 생각한다면, 신앙의 천적인 것들은 멸해질 것이다 이다; 예를 들면, 만일 인간들이 영적 진리를 중시하지 않는다면, 그로 인해 천적인 선마저도 멸해지고 만다는 것이다; 그 이유가 전자가 거절 될 때, 후자는 멸해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시, 비록 요. 14:8-12에서 같이 아들을 통하지 않고는 아버지를 볼 자가 없고, 아들을 본 자는 아버지를 본 것이다 해도 여전히 아버지를 숭배하고 있다고 말해지지 않으면, 이것도, 저것도 받아지지 않는다는 말이다. 이외에도 다른 비밀함이 있다.

12, 13절. 그리고 더구나 진실로 그녀는 나의 누이인데, 내 아버지의 딸이기는 하나 내 어머니의 딸은 아니기에 그녀는 내 아내가 되었다. 13 그리고 하느님께서 나로 하여금 내 아버지의 집을 떠나게 하시자, 나는 그녀에게 말하기를, 이것은 당신이 나에게 행할 선함이니, 우리가 당도하게 될 장소가 어디이든 나에 관하여는 그는 내 오라비이다 라고 말하라.

더구나 진실로 그녀는 내 누이이다. 이는 합리적 진리는 이와 같은 동족 관계를 가졌음을 의미한다. 이는 누이로서의 사라의 표현이 합리적 진리이다로부터; 뿐만 아니라 합리성의 출생에 관해 이어지는 말에서, 그리고 그 결과가 동족 관계임에서 알려진다. 일반적으로 진실로 합리적인 것의 모든 것, 거듭나는 인간의 모든 것. 즉 그의 애착, 그의 지각, 그의 생각 속의 모든 것들은 마치 혈연관계, 또는 동족 관계처럼 서로가 결합되어 있다. 그것들은 아주 잘 배치되고 있어 한 집의 가족들이 하듯 서로에게 상호적으로 관심을 가지되 서로의 구분된 방식에서 이다. 이로부터 그들은 이 인척 관계에 따라 재생산한다. 그것들은 이것을 천국의 유입으로부터 파생한다. 즉 천국으로부터 주님을 통하여서 이다. 진실로 합리적인 인간과 더불어, 즉 거듭나는 인간과 더불어, 모든 것들은 천국에 존재하는 것과 같은 질서로 잘 배치되어 있다. 그리고 이것은 유입으로부터 이다. 이로부터 인간에게 사고력이, 결론을 내림이, 판단함이, 단지 인간적 수준인 지식과 지혜를 뛰어넘는 경이로운 되새겨봄이, 인간 산업체가 인간 지식과 지혜로부터 도출해내는 분석력을 무한하게 능가하는 능력들이 주어진다. 이런 것들이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은 이유는 애착, 지각들, 그리고 생각들의 모든 것들이 안으로 흘러든다는 것, 그리고 이런 것들이 그것들 없이 있는 것들과 연결을 가진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아서 였다. 여전히 진리인 것은, 인간은 그의 영이 자기 밖의 다른 영과 잘 결합되어있다는 것, 만일 그로부터 이런 연결을 박탈한다면 그는 단 한순간도 살지 못할 것이다; 아마 연결되지 않고 있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그리고 이것은 한 순간에 멸해지고 만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생각해보면 납득될지 모른다.

내 아버지의 딸이긴 하나 내 어머니의 딸은 아니다. 이는 합리성은 천적 선을 아버지로 하여 임신될 뿐 영적 진리를 어머니로 하지 않음을 의미한다. 이는 합리성의 임신으로부터 알게 된다, 즉 이 임신은 신성의 천적 선이 기억 속의 지식들의 애착 안으로 유입됨에 의해 결과되어진다. 여기에 두 비밀함이 있다; 하나는, 인간의 합리성이 신성한 천적 선을 아버지로 하여 임신된다는 것, 그리고 그와 달리 합리성은 존재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합리성은 영적 진리를 어머니로 하여 임신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첫 번째의 것은 이미 살핀 바 있다. 사실상 이 대목은 만일 누가 이를 곰곰이 반추해 생각한다면, 익히 알려질 사항이기도 하다.
그 이유가 이렇게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즉 모든 이는 지식 없이, 이성 없이, 오직 그것들을 받는 능력만을 지니고 태어난다는 것; 그 후에 그는 등차적으로 모든 것을 배우고 빨아들이는데, 특히 듣고 보는 감각적인 것들을 통하여서 이다. 그리하여 그는 합리적 능력을 배양한다. 이런 것들이 육체의 길을 수단으로, 즉 외적 경로를 통해 거행되는데, 그 이유는 듣고 보는 것을 통하여 명백해지기 때문에서이다. 그럼에도 인간이 이에 관해 친숙해있지 않은 이유는, 물론 인간이 이에 관해 곰곰이 되씹어 생각해보지 않은 이유도 있지만, 더 큰 이유는 인간 내부로 들어오거나, 밖으로부터 이식된 것들을 받아 처리하는 내부에 꾸준히 흘러드는 어떤 것이 있고, 이것이 질서 안으로 배열하는 탓이다. (한마디로 부지불식간에 이뤄지는 작용일 것 같다.) 이런 작동을 하는 것이 주님으로부터 있는 신성한 천적 선이다. 이로부터 갖가지 것들의 생명이 온다, 이로부터 그것들의 질서가 있다, 이로부터 그들 사이에 친척 관계와 동족 관계가 엮어진다. 이런 모두가 보여주는 한결같은 것은, 본문 같이 “그녀는 내 아버지의 딸이다”, 즉 아버지로서의 신성한 천적 선으로부터 이다는 것이다.
또 하나 비밀함에 주목해보자. 이는 어머니로 하는 영적 진리로부터 임신되지 않는 점이다; 이는 앞에서 말한 바(창. 16:2)로 부터도 분명해진다. 만일 영적 진리가 내부로부터 흘러든다면, 마치 선이 내부에서 위의 설명 같이 행한다면. 그때 인간에게는 이성의 모든 것, 동시에 지식의 모든 것도 태어나질 것이고, 그리하면 그는 어떤 것도 배울 필요가 없어진다. 그러나 인간은 유전적으로 모든 악 안에, 그로부터 모든 거짓 안에 있는 바, 만일 진리 자체가 그에게로 흘러든다면, 인간은 그것들을 섞음질하고 왜곡해버리고 만다. 그로 인한 결과는 영원히 죽는 것뿐이기에, 주님께서는 인간의 내적 경로를 통하여서는 진리가 흘러들지 못하고 오직 외적 경로를 통하도록 설비해두셨다. 이로부터 분명해지는 바, 인간의 합리성은 어머니로서의 영적 진리로부터가 아니다는 것, 이 구절의 말과 같이, “그녀는 내 어머니의 딸이 아니다” 이다. 주님의 기뻐하신 바램은, 그분의 합리성이 (인간의 것과) 같은 질서에 따라 만들어지는 것, 그분 자신의 힘으로부터 그분은 자신 안에서 인간이었던 것을 신성으로 만드시는 것, 그리고 신성한 영적 진리가 신성한 영적 선에 이식되고 하나되도록, 그리고 신성한 선이 신성한 영적 진리에 이식되고 하나되도록 하는 목적을 이루시는데 있다.

그리고 그녀는 내 아내가 되었다. 이는 영적 진리가 합리성의 매체 능력에 의해 천적인 것과 결합되어졌음을 의미한다. 이는 아브라함의 아내로서의 사라의 표현이 천적 선과 결합한 영적 진리이다에서 알려진다; 그리고 그의 누이로서의 표현은 합리적 진리임에서도 알려진다. 그러므로 그녀가 그의 누이였다가 그의 아내가 됨이 의미하는 것은 매체로서의 합리성을 수단으로 영적 진리가 천적인 것과 결합됨이다.

하느님께서 나로 내 아버지의 집을 떠나게 하실 때가 왔었다. 이는 그분이 이 구절에서 “아버지의 집”으로 의미된 것, 즉 기억 속의 지식인 것과 거기로부터 있는 외관, 이것들로 해서 있는 기쁨 모두를 떠나셨을 때를 의미한다. 이는 “떠남”이 남기고 감, 출발함이다로부터; “집”의 의미가 선이다로부터 파악된다. 이 선이 여기서는 특별하게 기억 속의 지식과 합리적인 것들로부터 오는 기쁨의 선이다. 그 이유가 모든 기쁨은 선 같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의 아버지의 집”에 의해 여기서 기억 속의 지식과 합리적인 것으로부터의 즐거움, 결과적으로 그것들의 외관으로부터의 즐거움을 의미하는 것은 그것들이 아브라함이 자기 아버지의 집을 떠날 때의 그를 서술한다는 사실에서 오고 있다; 그 이유가 아브라함이 자기 아버지와 함께 있었을 때 그는 다른 신들을 숭배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느님이 복수로 “하느님(Elohim)이 나로 떠나게 했다”로 말해진다. 원어로 직역할 경우 이는 “신들이 나를 떠돌게 했다”가 된다. 그러나 주님이 아브라함에 의해 표현되기에, 번역은 “하느님이 나를 떠나게 했다”로 되어야만 했다. 주님과 더불어 처음의 기억 속의 지식과 합리적인 것들이 어머니로부터 유전된 것과 더불어 빨아들이셨는 바, 그것들은 순수하게 신성인 것은 아니었다. 그러므로 그것들이 아브라함의 첫 상태에 의해 표현되어진 것이다.

내가 그녀에게 말했던 것. 이는 그때의 생각을 의미한다. 이는 “말하다”가 생각하다를 의미하기 때문인데, 이는 수 차례 반복 설명되고 있다.

이것은 당신이 나에게 행할 선함이다. 이는 그때 그것으로부터 그분이 위로받아지실 것임을 의미한다. 이는 문맥의 앞과 뒤 상황에 따라 알아진 것인 바. 설명은 필요 없다.

우리가 당도하는 어느 장소에서이건. 이는 그분이 이후에 합리적 진리에 관하여 결말을 내리실 모든 것을 의미한다. 이는 “장소”가 상태를 의미함에서 파악된다. 여기서 취급된 것의 상태는 합리적 진리에 관하여 결말을 보는 상태이다. 즉 합리적 진리는 천적 선에 인접되어야 할 것이다는 것. 아래와 같다.

나에 관하여는 그는 내 오라비이다 말하라. 이는 합리적 진리는 천적 선에 인접해왔었다고 말해질 것임을 의미한다. 이는 5절에서 살핀 바 있어 설명은 생략한다.

14절. 그리고 아비멜렉은 양떼와 목축, 그리고 남종들과 여종들을 데려왔다, 그리고 아브라함에게 주었다. 그리고 그에게 사라를 그의 아내로 복귀시켰다.

아비멜렉이…가져왔다. 이는 신앙의 교리를 의미한다. 이는 “아비멜렉”이 신앙의 교리를 의미함에서 비롯되고 있다.

이는 합리적 선들과 자연적 선들로 부유하게 만들어졌음을 의미한다. 이는 “양떼와 목축”의 의미로부터 알려진다. 교회 내에서 진실로 합리적인 사람은 “양떼”라고, 즉 내적 인간들이라고 불러진다; 그러므로 추상적으로는 합리성, 또는 내적 선들 자체가 “양떼”에 의해 의미되어진다. 그러나 교회 내에서 “목축”이라 불리는 이들은 자연적 인간, 즉 외적 인간들이다; 그러므로 추상적으로는 자연적, 또는 외적 선들 자체가 “목축”에 의해 의미되어진다. 고로 “아비멜렉이 가져와서 주었다”란 신앙의 교리가 부유하게 만들어졌음을 의미한다.

남종들과 여종들. 이는 합리적 진리와 자연적 진리, 뿐만 아니라 그 진리들에 대한 애착들에서도 부유하게 만들어졌음을 의미한다. 이는 “남종들과 여종들”의 의미로부터 알려진다. 이 두 단어는 말씀에서 자주 접하는 단어이다, 그리고 그들에 의해 내적 의미에서 상대적으로 보다 수준 낮고, 덜 가치가 있는 것들이 의미되어진다. 말하자면, 영적, 천적인 것들에 비교하여 합리적, 자연적인 것들이다. 자연적 진리들에 의해 모든 종류의 기억 속의 지식들이 뜻해진다, 그 이유가 이것들이 자연적 수준이기 때문이다. 말씀에서 이것들이 “남종들과 여종들”에 의해 의미되는 것은 그것들이 언급되는 말씀들의 내적 의미에서 분명해진다. 이사야서에서:
여호와께서 야곱을 불쌍히 여기실 것이다, 그리고 그럼에도 이스라엘을 뽑으실 것이다, 그 리고 그들을 그들 자신의 지면에 놓으실 것이다; 그리고 나그네 된 자들이 그에게 들러붙 을 것이다, 그리고 자신들을 야곱의 집과 연합할 것이다; 그리고 백성들이 그들을 데려갈 것이다, 그리고 그들을 그들 자신의 장소로 데려갈 것이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집은 자신들 을 위하여 그들을 여호와의 지면에서 남종들과 여종들로 소유할 것이다 (이. 14:1, 2).
위에서 “야곱”은 외적 교회를 표시한다; “이스라엘”은 내적 교회를 표시한다; “나그네 된 자”는 진리들과 선들에서 가르침을 받는 이들을 표시한다; “남종들과 여종들”은 자연적, 합리적 진리들, 더불어 그것에 대한 애착 또한 표시한다. 이것들이 “야곱과 이스라엘”에 의해 뜻해진 교회를 섬긴다. 여기서 야곱과 이스라엘이 야곱과 이스라엘 자신, 또는 유대인과 이스라엘족을 뜻하지 않음은 분명할 것이다. 그 이유가 그들이 이방인들 사이에로 흐트려졌을 때 이방인들이 되었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은 아직도 이 예언을 흠모하고 이 예언의 성취를 고대한다. 물론 글자대로를 말한다. 즉 나그네 된 자들이 자기들에게 기어들고, 자기들의 장소로 데려가고, 그들을 남종들과 여종들로 부리는 것이다; 그러나 유대인들과 이스라엘족들이 언급되는 말씀의 예언 어느 곳에서도, 제아무리 사소한 것조차도 그렇게 이해되는 곳은 없다; 오히려 유다와 공히 이스라엘족을 데려와야 한다고 말해지고 있다.
이사야서에서:
보라, 여호와께서 땅을 텅비게 만드신다, 그리고 그것은 완전히 텅빔이다, 그리고 그것의 얼굴을 볼꼴 사납게 할 것이다, 그리고 거기의 주민들을 흐트릴 것이다; 그리고 백성 같이 성직자도, (남)종 같이 주인도, 여종 같이 여주인도 (이. 24:1, 2).
위에서 “땅”은 교회를 표시한다, 이것이 텅빈다고, 완전히 비운다고, 그리고 그것의 얼굴은 보기 흉해진다고, 그것의 주님들을 흐트러진다고 말해지는데, 이런 때란 어떤 내면의 진리들과 선들도 더 이상 있지 않을 때이고, “백성들과 성직자”란 어떤 외면의 진리들과 선들도 없을 때를, “남종과 여종”은 외적인 것들이 내적인 것을 통치할 때이다.
이사야서에서:
나는 야곱으로부터 씨를 산출하고 유다로부터 내 산의 상속자를 산출할 것이다, 그리고 나 의 뽑은 자가 그것을 소유할 것이다, 그리고 나의 종들이 거기 거주할 것이다 (이. 65:9)
위에서 “야곱”은 외적 교회를 표시한다; “유다”는 내적 천적 교회를 표시한다; “뽑은 자”는 그것의 선들을; 그리고 “종들”은 그것의 진리들이다.
요엘서에서:
나는 내 영을 모든 육체 위에 쏟을 것이다, 그리고 너희의 아들들과 너희의 딸들이 예언할 것이다; 또한 남종들과 여종들 위에 나는 이 날들에서 내 영을 쏟을 것이다
(욜. 2:28, 29).
위에서 주님의 왕국이 취급되어진다; “예언하는 것”은 가르치는 것을 표시한다; “아들들”은 진리들 자체를; “딸들”은 선들 자체를; “남종들”과 “여종들”은 보다 낮은 진리들과 선들을, 이 위에 영들이 쏟아진다고 말해지는데, 그때란 그들이 동의하고 확증할 때이다. 이와 같은 것들이 “남종과 여종”에 의해 다른 구절에서도 의미되지만 그렇게 나타나 보여지지 않는 것은 이들에 대한 세상적 관념, 또는 외관상의 역사 줄거리 파악에 집중하기 때문이다.
계시록서에서:
그리고 나는 태양에 서있는 천사를 보았다; 그리고 그는 큰 음성으로 소리쳤다, 천국의 한 가운데에서 날고 있는 모든 새들에게 말하기를, 너희는 왕들의 살, 그리고 장군들의 살, 그 리고 용사들의 살, 그리고 말들의 살, 그리고 용사의 살, 그리고 그것 위에 앉으려 하는 그 들의 살, 그리고 자유인과 억류된 자, 그들이 큰 자이든, 작은 자 이든 모두의 살을 먹어라 (계. 19:17, 18).
위에서 왕들의 살, 장군들의 살, 용사들의 살, 말들의 살, 말 위에 앉는 그들의 살, 자유인, 억류인들의 살을 먹으라는 것이 아닐 것은 모두에게 분명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을 위해 “살”을 만드는 내적, 외적 모두에서의 교회의 진리들이다.
“남종들”이 진리들을, “여종들”이 선들을 의미하고, 이것들이 천적, 영적 진리들과 선들에 도움을 주고 섬김을 의미하는 것은 남종, 여종에 관련한 법이 선포된 표현 교회의 법들로부터 더 분명해진다; 이 법 모두는 교회의 상태와 주님의 왕국에 관하여 일반적, 세부적 모두에서 관련되고 있다. 이 안에서 보다 낮은 진리들과 선들이, 즉 자연적, 합리적 진리와 선들이 영적, 천적인 진리와 선들, 그러므로 신성인 것들을 섬긴다. 예를 들어보자: 히브리인 출신의 남종과 여종은 찰 년째에 자유할 것이고, 양떼, 타작마당, 포도즙틀로부터 기부금을 받아 나갈 것이다 (출. 21:2, 6; 신. 15:12-15; 예. 34:9-14): 만일 종의 아내가 그와 더불어 섬김 안으로 온다면 종의 아내는 자유해질 것이다; 그러나 만일 주인이 그에게 그의 아내를 주었다면, 아내와 어린이는 주인의 것이 되어 있을 것이다 (출. 21:3, 4): 사들인 가난한 형제는 억류된 종같이 섬기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고용한 종과 나그네 된 자같이 대우하라; 안식년에서 그는 그의 자녀와 더불어 나간다 (레. 25:39-43): 만일 형제가 나그네 된 외국인에 의해 사들여진 상태라면, 그는 되찾아 질 것이다, 그리고 안식년의 해에 나갈 것니다 (레. 25:47 등등): 남종과 여종을 나라 두루에서, 그리고 외국인의 나그네 된 자의 아들들로부터 사들여질런지 모른다. 그들은 영구적으로 너희의 소유물이다. 그들은 절대적으로 지배하나 이스라엘의 아들들은 아니다 (레. 25:44-46): 만일 남종이 섬김을 벗어나지 않겠다고 하면, 그의 귀를 송곳으로 문에서 뚫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영구히 종이 된다; 그리고 여종도 이와 같다 (출. 21:6; 신. 15:16, 17): 만일 누구가 그의 남종, 또는 여종을 막대로 쳤는데, 그가 죽었다면, 되갚음이 그 살에게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하루 이상 생존한다면, 그는 자유할 것이다, 그 이유는 그는 그의 돈이었기 때문이다 (출. 21:20, 21): 만일 그가 종의 눈을, 또는 이를 강타했다면, 그는 자유로이 나갈 것이다 (출. 21:26, 27): 만일 황소가 남종, 또는 여종을 받아서 그가 죽었다면, 소의 주인은 그의 주인에게 은 삼십 세겔을 지불하라, 그리고 황소는 돌로 치라 (출. 21:32): 그의 주인으로부터 도망한 종을 감금해놓지 마라, 그러나 그가 선택하는 장소에서 거주하게 하라, 그리고 괴롭게 하지 마라 (신. 23:15, 16): 은을 주고 샀고, 할례를 받았다면, 그는 유월절 음식을 먹는다 (출. 12:44): 사들인 누군가의 딸은 남종 같이 섬김을 하지 않는다; 만일 그녀가 악이었다면, 그의 주인은 외국인에게 그녀를 팔지 못한다; 만일 그녀가 그의 아들과 약혼한다면, 그녀는 딸 같이 있을 것이다; 만일 그가 또 다른 (여자)를 데려온다면, 그는 그녀의 음식, 의복을 줄이지 말고, 결혼에 따른 그녀에게 할 의무를 줄이지 말라 (출. 21:7-12).
이상의 모든 법들은 천국에 있는 진리와 선의 법칙으로부터 그것들의 근원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내적 의미에서 그것들과 관계되고 있다. 즉 부분적으로는 상응 관계로, 부분적으로는 표현 차원에서, 부분적으로는 의미함에서 이다. 그러나 최고로 낮고 외적인 예배를 가진 교회의 표현과 의미함이 폐지된 후, 이 법의 필요성 역시 중단되었다. 지금 만일 이런 법들이 진리와 선의 질서의 법칙으로부터, 그리고 표현물과 의미함들이 열려진다면(설명된다면), “남종들”에 의해 뜻해진 것은 합리적이고 기억적인 진리들이다는 것, 이 진리들은 보다 수준 낮은 진리들이고, 그러므로 영적 진리들을 섬겨야 한다는 것밖에 더 아님이 명백해진다; 그리고 “여종들”은 이런 진리들로부터의 선들이다는 것, 이 선들 역시 수준 낮은 선인지라 더 높은 선을 섬겨야 하고 섬기는 방식에서만 차이가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여종에 관련해 놓여진 법들의 어떤 것은 남종에 관련해 놓인 법들과 다르다; 그 이유가 그들 자체만에서 주목하면, 진리들이 그들의 선들보다 종의 위치를 더 충실히 수행하기 때문이다.
사무엘서에서 “왕의 권리”를 보면, “권리”는 내적 의미에서 진리의 권리인데, 그것이 진리와 선 위에서 통치할 때 이는 거짓의 권리가 되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이는 묘사된 단어들의 설명만으로도 분명해진다:
이것은 너희를 통치할 왕의 권리일 것이다: 그는 너의 아들들을 데려다가 그를 그의 병거 들을 몰게 하고, 마병으로 세워 자기 앞에서 달리게 할 것이다; 그는 너의 딸들을 데려다가 향품을 만들고, 요리를 하게 하고, 빵을 굽게 할 것이다; 너희의 남종들과 여종들과 잘생긴 젊은이들과 노새들을 그는 가져다가 그의 일을 하게 할 것이다; 그는 너희 양떼의 십분의 일을 가져갈 것이다; 그리고 너희는 종들로 있을 것이다. 그리고 너희는 그 날에 너희를 위 해 너희가 뽑은 너희의 왕 때문에 외칠 것이다, 그리고 여호와가 그 날에 너희에게 대답하 지 않을 것이다 (삼상. 8:11, 13, 16-18).
“왕”에 의해 진리들이 의미되는 것은 이미 살폈다. 반대적 측면일 경우 이는 진리 아니 것, 즉 거짓들을 의미한다. “왕이 자신의 병거와 말을 위해 임명한 아들들”은 교리로부터의 진리들이다, 이것이 “병거와 말”로 의미되는 거짓의 원리들에 도움을 주는 것이다. “향품과 요리와 빵굽기를 위해 데려온 딸들”에 의해서는 교리로부터의 선들이 의미되고, 이것들을 가지고 거짓들이 즐거움을 만끽한다. “남종과 여종, 젊은이들과 노새들, 이것 가지고 왕이 자기 일을 하게 부린다”에 의해 이성과 기억 속의 지식 속에 있는 것들이 의미되고, 이것으로 거짓들이 확증한다. “왕이 십분의 일을 취해온 양떼”에 의해 그가 폭력을 행사한 선의 리메인스가 의미된다. 그리고 그들이 “종들이 됨”에 의해서는 시간이 지나다보면 말씀 속의 천적, 영적인 것들, 그리고 교리 속의 천적, 영적인 것들이 통치하는 대신, 그의 원리들의 거짓들을, 그의 탐욕의 악들을 확증하는데 오히려 한몫하게 될 것이다는 말이다. 그 이유는 거짓의 원리들을 확증함에서 천적, 영적인 것들을 가져다 제 입맛에 맞추는 짓은 그 무엇이든 막을 길이 없다는 것, 예를 들면, 말씀의 해석에서, 남용함에서, 또는 자기 입맛에 맞지 않는 구절은 되도록 들추어내지 않는 방식으로 슬그머니 거절해버리는 식으로 이든 얼마든지 거짓의 확증이 가능하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마지막 첨가된 말씀: “만일 너희가 너희를 위하여 너희가 뽑아 세운 너희의 왕 때문에 그 날에 외쳐댄다면, 여호와께서는 그 날에 대답하지 않을 것이다.”

이 장 앞 구절(1-5절)에서 말해진 것은, 만일 합리성에 의견을 구한다면 교리는 무익하고 공허해질 것이다는 것; 그리고 상담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말해진 바, 신앙의 교리는 합리적, 자연적 모두의 측면에서 부유해졌다는 것이다. 얼핏 보건대, 위 두 서술은 서로가 상반되는 듯 나타난다; 그럼에도 그렇지 않다. 주님과 더불어 이 경우가 어떻게 되는 것인지 살펴왔다; 그러나 인간과 더불어서 어떻게 되는 것인지는 살피고 지나가야 할 것 같다.
인간 측면에 주목하면, 두 가지 것으로 나누어 생각된다. 하나는 합리적인 것들로부터 신앙의 교리를 주목해서 보는 것, 또 하나는 신앙의 교리로부터 합리적인 것들을 주목해서 보는 것이다. 합리적인 것들로부터 신앙의 교리를 주목하는 자의 경우, 합리적인 것으로부터 이것이 이러이러하다 하고 말씀에 대해 설득될 때까지, 말씀, 또는 말씀으로부터 파생된 교리를 믿지 않는다; 이에 반해 신앙의 교리로부터 합리적인 것에 주목하는 자는 먼저 말씀과 이로부터 파생되는 교리를 먼저 믿고, 합리적인 것들을 수단으로 같은 것을 확증한다. 전자는 뒤집힌 질서인 바, 믿음의 결과를 아무것도 초래하지 못한다; 이에 반해 후자는 진짜 질서이다, 그리고 인간에게 더 나은 믿음을 유발한다. 전자가 본문에서 아비멜렉이 여인 때문에 죽을 것이라고 말한 대목에서 뜻해졌다. 이를 수단으로 만일 합리성에 의견을 구한다면 신앙의 교리는 무익하고 공허해질 것임이 의미되어진다. 후자에서는 아비멜렉이 양떼와 목축, 남종과 여종을 주었다; 이를 수단으로 신앙의 교리는 합리적, 자연적 선들과 진리들로 부유해지게 만들어졌다가 의미된다.
위의 사항들은 말씀의 내적 의미에서 아주 많이 취급되는 편이고, 특히 앗수르와 이집트가 말해질 경우 더욱 그렇다; 그 이유는 신앙의 교리가 합리적인 것으로부터 주목해서 보는 동안, 그가 합리적인 것들로부터 그것이 이렇다는 것을 설득받을 때까지 도통 믿지 않기 때문이다. 그때 말씀은 그 사람에게 무익한 것, 쓸데 없는 짓 수준으로 격하되고, 심지어는 부정해버린다; 이에 반해 합리적인 것들이 신앙의 교리로부터 주목될 경우, 즉 인간이 말씀을 믿을 때, 그 후에 같은 것이 합리적인 것들로 확증될 때, 그때 교리는 살아있고 말씀 안에 포함된 모든 것이 확언된다.
그러므로 두 원리들이 있다; 하나는 어리석고 미친짓 쪽으로 인도하는 원리가 있고, 다른 하나는 총명과 지혜 쪽으로 인도하는 원리가 있다. 전자의 원리는 모든 것들을 부정하는 것, 또는 우리가 납득할 수 있는 것으로 확신이 설 때까지, 또는 감각들을 수단으로 지각할 수 있을 때까지 그것들을 믿을 수 없다고 말한다; 이것이 어리석고 미친짓 쪽으로 인도하는 원리이고, 거절하는 원리이다. 다른 하나는 교리 속에 있는 것들을 말씀으로부터 확언하는 것, 또는 말씀은 주님이 말하셨기 때문에 진실이다라고 믿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것은 총명과 지혜 쪽으로 인도한다, 그리고 긍정적 원리라고 불리운다.
부정적 원리로부터 생각하는 이들은 합리성에 더 상담하고, 기억 속의 지식들에, 철학들에 더 의존하는 바, 더욱 그들은 자신들을 어둠으로 내몰고 거꾸로 떨어트리고 결국 신앙으로부터의 교리의 모든 것을 부정하고야 만다. 이렇게 치닫는 원인은 이렇다: 더 높은 것을 더 낮은 것으로부터 납득할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즉 천적, 영적인 것들, 더욱이 신성한 것들을 더 낮은 것들, 즉 합리적, 자연적인 것들로 납득할 수 없는 이유 때문이다. 그 이유는 이것들은 모든 이해력을 초월해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모든 것이 이 원리로부터의 부정적 측면에 포함되어 있는다. 한편, 긍정적 원리로부터 생각하는 사람은 합리적인 것들의 무엇이든, 기억 속의 지식들의 무엇이든, 철학적 사고의 무엇이든 자기 마음대로 운용해서 자신의 신앙의 교리를 확증할 수 있다; 그 이유가 이런 보다 수준 낮은 것들은 신앙의 교리를 확실시하는 재료 역할을 해주기 때문이다. 결국 신앙의 교리를 더 충만되게 생각하도록, 부유해지도록 만든다는 말이다.
더욱이 그들이 부정하기 전에 의심하는 이들이 있고, 그들이 확언하기 전에 의심하는 이들이 있다. 부정하기 전에 의심에 있는 이들은 악의 생활로 기울기 십상인 이들이다; 그래서 이 생활이 그들을 끌고가 버릴 때, 그들이 의심 중인 주제들을 생각하는 한 그들은 그것들을 부정한다. 그러나 그들이 확언하기 전 의심에 있는 이들은 선의 생활 쪽으로 기울기 십상이다; 그리고 그들이 주님에 의해 이쪽으로 구부려질 때 이를 허용하고, 그들이 의심이 가는 주제들을 생각하는 만큼 더욱 그들은 확언하게 된다. 이 주제는 18절에서 더 취급하고, 거기서 주님의 신성한 자비로 더 많은 예증을 가져볼 것이다.

그리고 아브라함에게 주었다; 그리고 그에게로 사라를 그의 아내로 복귀시켰다. 그가 “아브라함에게 주었다”란 주님에게를 의미한다. 이는 아브라함이 주님을 표현하기 때문이다. 이는 여러번 설명했다. 그가 “그에게 사라를 그의 아내로 복귀시켰다”란 신성한 영적인 평면이 신성한 천적 평면에 인접해왔었을 때를 의미한다. 이는 “아내 사라”의 의미가 천적 선에 인접한 영적 진리임에서 파악된다. 이 구절의 단어의 내적 의미는 이미 말했던 것에서 분명해진다. 즉 주님의 인간이 신성에 하나되어졌을 때, 그리고 신성이 인간에 하나되어졌을 때, 그때 그분은 전지하심을 소유하셨는데, 이는 신성한 천적, 영적인 것들뿐만이 아닌 천적, 영적 아래쪽의 것들, 즉 합리적, 자연적인 것들에서도 전지하셨다는 말이다; 그 이유가 신성으로부터, 마치 모든 빛이 태양으로부터 같이 모든 것은 현재로서 보여지고 있다는 말이다.

15절. 그리고 아비멜렉이 말했다, 보라, 내 땅이 당신 앞에 있다. 당신 눈에 좋은 곳에 가서 살라.

아비멜렉이 말했다, 보라 내 땅이 당신 앞에 있다. 이는 사랑과 선행의 교리에 관하여 주님께서 지각하심을 의미한다. 이는 “말함”이 생각함을 의미함으로부터; 그리고 “토지”의 의미가 여기서는 사랑과 선행의 교리임으로부터 알려진다. “토지, land” (또는 땅, earth)는 내적 의미에서 다양한 것들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시리즈로부터 또는 연결 문맥으로부터 분명해진다. “하늘”이 교회의 내적 인간을 의미할 때, 토지, 땅은 교회의 외적 인간을 의미한다; 또한 토지는 교회가 있는 지역을 의미한다; 이것은 교회 자체를 의미한다; 또한 이것이 가나안의 토지, 또는 거룩한 토지에 의해 표현될 경우, 보편적 의미에서 천국들과 지상에서 주님의 왕국을 의미한다; 같은 의미에서 “새 하늘과 새 땅”에 의해서도 의미된다; 그리고 “토지”가 교인, 교회, 주님의 왕국을 의미하기 때문에, 이것은 또한 그것들의 본질인 것, 즉 주님을 사랑함과 이웃을 향한 선행도 의미한다. 그 이유가 이 두 사랑에 모든 것이 매달려 있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이것은 사랑과 선행의 교리를 의미하고, 이것에 교회가 속해 있고, 여기서 이것은 “아비멜렉의 토지”이다; 그 이유가 왕으로서의 아비멜렉은 신앙의 교리를 의미하기 때문인데, 이미 말했다. 그리고 그의 토지, 즉 그가 있고 그로부터 있는 토지란 사랑과 선행의 교리에서 신앙은 있고 그로부터 존재한다는 말이다. 지금까지 주님의 생각하심이 신앙의 교리에 관하여 있어왔는데, 지금부터는 사랑과 선행의 교리에 관하여 있게 된다는 것은 주님이 신앙 속에 있는 진리들을 수단으로 인간 측면을 신성에 인접되게 하시되 인간이 영적, 천적으로 되어가는 질서에 따라 하셨다는 사실로부터 와진다. 즉 신성으로부터가 아닌 것이다. 그러나 진리와 선, 그리고 선과 진리의 신성한 결혼이 주님 안에서 결과되었을 때, 이에 대한 본문의 표현은 사라를 아브라함의 아내로 복귀시킴이다. 이때 주님의 생각하심은 사랑과 선행의 교리에 관하여서 였다, 그리고 이것 역시 질서에 따라서 였다; 그 이유가 인간이 영적, 천적 평면으로 올라섰을 때, 그는 더 이상 진리로부터 생각하지 않고 선으로부터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주님의 경우 같이 신성한 진리와 하나된 신성한 선으로부터는 아니다. 이것이 사랑과 선행의 교리가 먼저 언급되어야 하는 이유이다. 비록 신앙의 교리도 결국은 같은 원리에서 근거하더라도 먼저 언급해야 하는 이유이다; 주님의 지각하심과 생각하심은 언제나 신성한 사랑으로부터 였다. 그러므로 사랑과 선행의 교리는 신성한 교리 자체이고, 그리고 태고 교회에서 장려되어온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신앙의 교리와 하나를 만들었기 때문에 그들은 그것들을 분리한 이들을 추방했다.

당신 눈에 좋은 곳에 가서 살라. 이는 그분은 선이 있는 모든 것 안에 있으심을, 대략적 의미에서는 그분은 교리의 선 안에 있으심을 의미한다. 이는 “눈”의 의미가 총명, 이는 교리 속에 있는 것임으로부터; 그리고 “살라”의 의미가 사는 것임으로부터 알려진다; 여기서의 “살라”는 있음(Esse, being)인데, 그 이유는 이것이 아브라함 즉 주님을 서술하기 때문이다. 선이 있는 모든 것에 있는 있음은 모든 신성의 전지 하심(omniscience), 즉 천적, 영적, 합리적, 자연적 측면의 신성의 전지 하심이다. 그리고 이것은 신성한 사랑으로부터 이다; 그 이유가 신성한 사랑 안에 모든 이런 것들의 전지 하심이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두 가지, 즉 교리의 선과 교리의 진리가 있다. 교리의 선은 사랑과 선행이고, 교리의 진리는 신앙이다. 교리의 선 안에 있는 이들, 즉 사랑과 선행 안에 있는 이들은 교리의 진리 안에, 즉 신앙 안에 있다. 그러나 두 가지 구별해볼 것이 있다. 선 안에 있는 것, 또는 사랑과 선행 안에 있는 것과 교리의 선 안에 있는 것이다. 자기의 부모를 사랑하고 자기 또래 친구를 향하여 선행 안에 있는 어린이들은 선 안에 있으나 교리의 선 안에 있는 것은 아니다. 결과적으로 교리의 진리, 또는 신앙의 진리 안에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신앙의 진리에 의해 거듭난 이들은 교리의 선 안에 있다. 이들이 선 안에 있는 한, 그들은 진리들 안에 있다; 즉, 그들이 사랑과 선행 안에 있는 한 , 신앙 안에, 결과적으로 지혜와 총명 안에 있다.
천사들, 주님을 사랑하고 서로의 사랑 안에 있는 천사들은 진리들 안에도, 고로 모든 지혜와 총명 안에도 있다. 그들은 영적, 천적인 것에 주목할 뿐만 아니라 합리적, 자연적인 것에도 주목하고 있다; 그 이유가 사랑으로부터, 주님으로부터 이기 때문에, 그들은 어떤 것의 원리 자체 안에 있다. 원리로부터 보는 것, 또는 목적들과 원인들로부터 보는 것은 천국으로부터 천국 아래 있는 모든 것들, 땅에 있는 것까지도 보는 것이다. 마치 높은 산의 망루에 있어 그 아래 드넓은 반경을 내려다 보는 것과 비슷하다. 한편 아래 있는 자들, 특히 계곡이나 숲에 있는 자들은 이와 정반대이다. 전자는 교리의 선 안에 있는 자들인 반면, 후자는 교리의 선에서 분리된 교리의 진리 안에 있는 자들이다. 때로는 후자가 전자 보다 더 멀리 까지 본다고 여겨져도 그것은 외형적일 뿐이다. 그들은 선으로부터는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실상 진리로부터서도 보는 것이 없다. 아마 본다고 주장한다면, 표면의 아주 조금, 그나마 거짓으로 얼룩진 표면의 조금만을 볼 뿐이다.
천사의 지혜와 총명이 대단하지만, 기껏해야 그것은 유한하다. 게다가 주님의 신성에 비교하려 든다면, 그것은 최고로 유한하다, 아마 거의 아무것도 아니다; 한마디로 무한과 유한은 글자대로 비교가 될 수 없다. 그럼에도 신성의 전능하심과 교통함이 있다. 즉 주님이 선 자체와 사랑 자체, 결과적으로 선의 있음(Esse) 자체와 천사들과 더불어 존재하는 사랑의 있음 자체, 고로 지혜와 총명의 있음 자체로부터 교통이 있다는 말이다. 이로부터 우리가 알 수 있는 바, 주님은 천국과 지상 모두에서 선이 있는 모든 것 안에 있으신다는 것이다. 주님이 선으로부터 분리된 진리 안에 계신다는 생각은 대단히 큰 실수 이다. 그분은 선 외의 어떤 것 안에도 계시지 않는다, 그리고 이 선으로부터 진리 안에 계신다; 즉 사랑과 선행 안에, 그리고 이로부터 신앙 안에 계신다.

16절. 그리고 사라에게 그는 말했다, 보라 나는 네 오라비에게 은 천을 주었다. 이것은 너에게, 너와 함께 있는 모든 이에게, 그리고 모든 것과 함께 눈의 덮개이다. 그리고 그녀는 정당함이 입증되어졌다.

그리고 사라에게 그는 말했다. 이는 영적 진리로부터의 지각을 의미한다. 이는 “아내 사라”의 의미가 신성한 영적 진리임에서; 그리고 “누이”의 의미가 합리적 진리임에서도; 그리고 “말함”의 의미가 지각함이다로부터도 파악된다. 이 구절에서 사라는 아내와 누이 양쪽의 위치에서 말이 진행되고 있다; 아내 측면에서 일 경우, 그녀는 아내이므로 그 지위로 복귀시켜졌다. 그리고 누이로서 일 경우, 그녀는 누이이므로 “나는 은 천을 네 오라비에게 주었다”라고 말해진다; 그리고 아비멜렉에 의해 말해진 이 말은 이전의 관계에서 사라에 의해 지각되어진 것이다; 그러므로 “사라에게 말함”에 의해서는 영적 진리로부터 지각하는 것이 의미된다.
위 사항들에는 우리의 납득력에 와닿는 것보다 더 깊은 비밀함이 포함되어 있다. 비밀함의 조금 만이라도 납득력에 와닿게 하려면 아직 알려지지 않은 여러 사항들을 먼저 설명하는 예비 과정이 필요하다; 즉 영적 진리가 무엇인지, 영적 진리로부터 지각함이 무엇인지; 주님 만이 영적 진리로부터 지각을 가지셨다는 것; 주님은 천적 선 안에 합리적 진리를 이식하시듯이, 그분은 천적 선 안에 영적 진리를 이식하셨다는 것, 그리하여 계속적으로 그분의 인간이 신성 안에 이식되게 하시고, 그럼으로 인간이 신성과, 신성이 인간과 결혼함을 모든 것 안에 있도록 하셨다. 이런 사항, 그 와 더 많은 사항들이 이 구절이 열려지기 앞서 먼저 마음 안에 당도하고 있어야 한다. 이런 사항들은 이런 것에 대한 이해력을 지닌 천사들의 마음 안에서는 제 1 순위에서 적용되고 있다. 고로 이들을 위해 말씀의 내적 의미가 있는 것이다. 그들에게 이런 사항들은 천국의 방식에서 표현되어져 있다; 이 장에 포함된 것들에 의해, 어떻게 주님께서 어머니로부터의 인간을 어떻게 등차적으로 축출해가셨는지, 마지막으로 그분은 더 이상 인간 어머니의 아들이 아니시게 되었는지가 천사들의 마음에 주입된다. 주님이 그녀를 그분의 어머니로서 인정하시지 않은 대목에 관해서는 마. 12:46-49; 막. 3:31-35; 눅. 7:20-21; 요. 2:4를 읽기 바란다; 또한 어떻게 그분이 자신의 힘으로 인간을 신성으로, 그분이 아버지와 하나됨에 이르기까지(요. 14:6, 8-11)로 하셨는지도 그들의 마음에 주입된다.
이런 사항들은 수많은 생각들과 표현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모든 것들을 수단으로 명료한 빛 안에서 주님에 의해 천사들에게 표현되어졌다. 이런 사항들이 앞서 말한대로 그들의 마음에 잘 정착되어 있기에 그들은 자기들의 총명의 복됨 안에, 그들의 지혜의 행복함 안에 있다. 게다가 지상에서 살 때에 주님의 인간을 여느 우리 비슷한 인간이셨다는 생각을 품고 있었던 천사들이 다른 삶에서 천적 천사들과 함께 있도록 하기 위하여 말씀의 영적 의미를 수단으로 흩뜨려지게 하신다. 이런 방법으로 그들은 완전해간다. 따라서 말씀의 내적 의미가 인간에게는 매우 적은 결과 밖에 나타나지 않고, 그나마 그것에 대해 어떤 생각도 가지기 힘들 정도의 흐릿한 생각만을 지닌다 해도 천사들에게는 그 안에 포함된 의미가 얼마나 귀중한지 모른다.

보라 나는 네 오라비에게 은 천을 주었다. 이는 천적 선에 인접한 합리적 진리가 무한히 풍부함을 의미한다. 이는 “1000”의 의미가 많고 셀 수 없음이다로부터; 여기서는 무한함, 또는 무한히 풍부함을 의미하는데, 그 이유는 이것이 주님을 서술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은”의 의미가 합리적 진리임으로부터; 그리고 “오라비, brother”의 의미가 형제 자매 관계에서 합리적 진리에 인접한 천적 선임으로부터 알려진다. 이 모두를 종합하면 알게 되는 바, “나는 네 오라비에게 은 천을 주었다”란 선에 인접한 합리적 진리는 무한하게 풍부함이다는 것이다. 이 합리적 진리가 진리가 아니고 “오라비”인 선에게 주었다고 말해지는 이유는 진리가 선으로부터 있고, 선이 진리로부터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서 이다.
말씀에서 “천”이 많고 셀 수 없음을 의미하는 것, 그리고 주님을 서술할 경우, 무한인 것을 의미함은 아래 구절들로부터 분명해진다. 모세의 책에서:
나 여호와 너희 하느님은 시기하는 하느님인지라, 아버지들(조상들)의 불법을 나를 미워한 아들들 위에, 삼 대 위에와 사 대 위에, 그리고 나를 사랑하고, 내 명령들을 준수한 그들의 수 천들에게 자비를 보일 것이다 (출. 20:5, 6; 34:7; 신. 5:9, 10).
그리고 예레미야서에서:
여호와께서는 자비를 수 천들에게 보이시고, 조상들의 불법을 그들 뒤의 그들의 아들들의 품에 대갚음하신다 (예. 32:18).
위 구절에서 “수 천들”에 의해 어떤 한정된 숫자를 의미하지 않고, 무한정의 것을 의미한다. 그 이유는 주님의 자비는 무한이시기 때문, 신성이시기 때문이다. 다윗서에서:
하느님의 병거들이 이 만, 수 천 위에 수천이시다; 주님이 그들 사이에 계시고, 시내(산)은 거룩함에 있다 (시. 68:17).
위의 “만”과 “천”은 셀 수 없는 것들을 표시한다.
다윗서에서:
천(명)이 네 옆쪽에서 쓰러질 것이고, 만(명)이 네 오른쪽에서 (쓰러질 것이다); 그것은 네 게 가까이 오지 못할 것이다 (시. 91:7).
위 구절의 “천”과 “만” 역시 셀 수 없는 것들을 표시한다; 그리고 이것이 시편서에서 다윗에 의해 표현되는 주님에 관하여서인 바, 그것들은 그분의 적들인 모든 것을 표시한다. 시편서에서:
우리의 곳간은 가득하여 온갖 음식을 만들 여유가 있다, 우리의 양떼는 우리의 거리에서 천과 열 천(10,000)을 산출하고 있다 (시. 144:13).
위에서 “천”과 “열 천” 즉 만은 셀 수 없는 것을 표시하고 있다. 시편서에서:
당신의 눈에서 천 년은 지나간 어제 같이 있다 (시. 90:4).
위의 “천 년”은 시간 없이 있는 것을 표시한다, 그러므로 영원, 이는 시간의 무한함이다. 이사야서에서:
한 (명)의 꾸짖음 앞으로부터 일 천 (명)이 (도망하고), 다섯 (명)의 견책함 앞으로부터 너희가 산 위의 깃발 같이 남을 때까지 도망할 것이다 (이. 30:17)
위에서 “일 천”은 어떤 한정된 숫자 없이 많은 것을 표시한다; 그리고 “다섯”은 “적음”을 표시한다. 모세의 책에서:
너희의 조상의 하느님 여호와께서 너희가 가진 만큼 보다 천 배나 많게 만드실 것이다, 그 리고 너를 축복하실 것이다 (신. 1:11).
위의 “천 배”는 세지 못함을 표시한다. 이는 우리가 일상 생활에서 사용하는 흔한 언어 방식이다. 즉 천을 가지고 많다를 표현할 때 사용하는 경우에 해당한다. 이것이 천 배, 또는 천 가지 방법에서 행해진다고 말해질 때와 같은데, 여호수아서에서:
너희의 한 명이 천 명을 쳐부술 것이다, 그 이유는 여호와 네 하느님이 너를 위해 싸우시 기 때문이다 (여. 23:10).
계산함에서 “천”은 한정된 숫자인 바, 이것이 예언들에서 나타날 경우, 특히 역사물과 연결된 구절에서 등장할 경우, 마치 “천”이 단순히 계산상의 천을 뜻한 듯 하지만, 이것은 계산이라는 단어와 동떨어진 많은 것, 셀 수 없는 것을 의미한다; 그 이유가 역사적 주제들은 생각들을 단어들의 가장 가까웁고 적당한 의미들 쪽으로 (들어가도록) 결정하기 때문이고, 이름들을 사용하는 경우도 같다. 그때 그럼에도 실재하는 것들이 말씀에서 숫자들 뿐만 아니라 이름들에 의해 의미되어진다. 그러므로 계시록(20:1-7)의 “천 년”이 천 년, 또는 천 시대(기간)을 뜻한다고 어떤 자에 의해 상상되기도 한다. 이런 착각이 발생하는 이유는 이미 말한 대로 예언적인 것들이 역사의 형체 아래 묘사되었기 때문에서이다; 이때의 “천 년”은 불확실한 큰 규모의 분량(amount), 다른 장소의 경우에서 있는 시간의 무한함, 또는 영원 밖에 더 의미하지 않는다.

보라 그것은 너에게, 너와 함께 있는 모든 이에게 눈의 덮개(covering)이다. 이는 합리적 진리는 영적 진리에게는 덮개 또는 옷의 역할을 함을 의미한다. 이는 “덮개”의 의미로부터; 그리고 “눈”의 의미가 지적인 것이다로부터; “보다”의 의미가 이해함이다로부터 알려진다. 아마 이 절에 있는 의미는 어떤 내면의 의미가 아니면 밝혀질 수 없는 비밀함이 있을 것 같다고 추측될 것이다. 즉 그가 은 천을 주었다는 것; 그 은 천을 그녀의 남편이 아닌 오라비에게 주었다는 것; 그것이 그녀에게, 그녀와 더불은 모든 이에게, 또는 모든 것과 더불어 눈의 덮개이다는 것; 그러므로해서 그녀의 정당함이 입증되었다는 것 등등에 대해서 이다. 실로 많은 역사적 추측들이 글자 의미 안에 어떤 영적 의미 없이, 더 나아가 신성 없이 글자 의미로부터 도출되는 것은 가능해 있을 런지 모른다; 그럼에도 이 대목이 말씀이 무엇인지를 말해줄 것이다.
영적 진리에 덮개, 또는 의복 같은 것인 합리적 진리들에 주목하면, 이렇다: 인간의 가장 안쪽의 것들은 그의 혼에 관한 것이고, 그의 바깥쪽의 것들은 그의 육체에 관한 것이다; 전자는 선들과 진리들이고, 이로부터 혼은 그것의 생명을 가진다. 그 이유가 이와 달리 혼은 혼일 수 없기 때문이다: 후자는 혼으로부터 그것들의 생명을 도출해낸다. 그리고 신체의 모두는 혼에게 덮개, 또는 의복 같이 있다. 이것은 다른 삶에서 나타나는 것들로부터 특별히 분명해진다; 마치 천사들에게 눈에 보이도록 표출되는 경우에서이다; 그 이유가 그들의 내면들이 그들의 얼굴로부터 빛나고, 그들의 외면들은 그들의 의복과 몸에서 빛나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 표출은 아주 완전하므로 누구도 상대방의 품질을 의복만 보아도 판단이 가능하다; 그 이유가 이것들은 실제의 본체이고 형체로 있는 본질이기 때문이다. 말씀에서 천사들이 보여져 그들의 얼굴과 의복들이 묘사된 것도 이와 같다. 예를 들면, 주님의 무덤에서 보여진 천사의 경우 (마. 28:3; 막. 16:5); 그리고 왕좌 둘레의 24 원로들 (계. 6:4) 등등이다. 또한 이는 천사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고 무생물에 이르기 까지 말씀에 있는 모두에 해당된다; 모든 경우에서 그들의 외면들은 덮개, 또는 의복이다; 예를 들면, 언약의 궤와 천막이다; 가장 안쪽에 위치한 궤는 주님 자신을 표현했다, 그 이유가 그 안에 (십계명의) 증거 돌판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천막의 바깥은 주님의 왕국을 표현했다. 의복, 즉, 베일들과 덮개들, 각각 그리고 모두는 그분의 왕국 안에 있는 더 외면적 천적인 것들과 영적인 것들, 즉 세 천국들에 있는 천적, 영적인 것들을 표현했다; 이는 천막의 형태가 시내산에서 모세에게 보여졌다는 사실로부터 분명해진다 (출. 25:9; 26:30). 이 상황만으로부터 천막은 그것 안에 있는 것, 즉 금이나 은, 조각물이 아닌 천막이 보여진 상황만으로부터 그것의 거룩함이 있다.
우리는 지금 합리적 진리들을 다루어오고 있는 중이고, 베일과 의복은 영적 진리들에 해당되고, 그리고 천막이 모세에게 그것의 의복, 또는 덮개에 관련하여 묘사되었기에, 또한 천막 입구 앞에 있는 베일(veil)들도 묘사되고 있다. 천막을 에워싼 덮개에 관련한 내용은 나중에 주님의 신성한 자비로부터 자세히 취급할 것이고, 여기서는 예증 차원에서 베일만에 국한해 다루어본다. 천막의 베일들은 셋이다: 첫 번째의 것은 지성소와 성소 사이에 있어 이 두 장소를 구분하고 있다; 두 번째의 것은 천막의 문으로 사용되기 위해 벽걸이(천)이라 불리운다; 세 번째의 것은 뜰의 문으로 사용되는 을 위해 벽걸이(천) 였다.
베일 자체에 주목하면, 이것은 첫 번째 궤 앞에 있었다. 모세의 책에서 이렇게 읽는다:
그리고 너는 푸른 색 (실), 심홍색 (실), 그리고 두 번 물들인 진홍색 (실), 그리고 꼬아 만든 고운 아마포로 베일을 만들 것이다. 디자이너(designer)의 일을 가지고 그는 그것을 거룹들과 더불어 만들 것이다. 그리고 너는 그것을 금으로 들씌운 싯딤의 네 기둥들에, 그 리고 금으로 된 그것들의 갈고리들에 베일을 걸어둘 것이다; 그리고 은의 네 받침 위에; 그 리고 너는 걸쇠 아래 베일을 걸어둘 것이다. 그리고 베일 안쪽으로부터 저쪽에 증거판의 궤를 가져 올 것이다; 그리고 베일은 너에게 거룩함과 거룩함들로부터의 거룩함 사이를 나 뉘게 해줄 것이다 (출. 26:31-34; 36:35, 36).
이 베일은 합리적 선과 진리의 가장 (주님에게) 가까운 것, 가장 안쪽의 외관들을 표현했다, 이 안에 세 번째 천국의 천사들이 있다; 이 외관이 푸른색, 심홍색, 두 번 물들인 진홍색, 그리고 꼬아 만든 고운 아마포에 의해 묘사되어 있다; 이 중에서 빨간 색은 사랑의 선들을, 흰색은 그것의 진리들을 표현했다. 같은 것이 기둥들을 덧씌운 금과 은으로도 묘사되었다. 그리고 갈고리와 받침들으로도 묘사되었다.
이상으로부터 우리는 성소의 베일이 두 폭으로 찢어진 것에 대한 의미를 알게 된다 (마. 27:51; 막. 15:38; 눅. 23:45). 즉 주님은 모든 외관들을 쫒아 버리심으로 신성 자체 안으로 들어가셨다는 뜻이다; 그리고 동시에 그분은 인간을 신성으로 만드심을 통하여 신성 자체로의 길을 여셨다.
두 번째 베일, 즉 천막의 문으로 사용하기 위한 벽걸이 천이다. 이렇게 읽는다:
너는 천막의 문을 위해 벽걸이 천을 푸른색(실), 심홍색 (실), 두 번 물들인 진홍색 (실), 수를 놓는 자의 일로 만들 것이다; 그리고 너는 걸이를 위해 싯딤목의 다섯 기둥들을 만들 고, 그것에 금으로 덧씌우고, 그리고 그것들에 갈고리들을 금으로 만들 것이다; 그리고 너 는 그들을 위해 다섯 놋쇠 받침을 주조할 것이다 (출. 26:36, 37; 36:37, 38).
이 벽걸이 (베일)은 세 번째 보다 낮은 천국, 더 외적인 천국인 선과 진리의 외관을 표현했다. 즉 이것은 합리적 선과 진리의 중간의 것들이다, 이 안에 두 번째 천국의 천사들이 있다; 이 외관들은 제 1의 천국(세 번째 천국)과 같은 방식으로 되기는 하나 차이점은 벽걸이를 위해 다섯 기둥들과 다섯 받침들이 있다는 것; 이 숫자 다섯을 수단으로 상대적으로 적다는 것이 의미되어 있다; 그 이유가 이것들의 외관들은 세 번째 천국, 또는 가장 안쪽의 천국의 외관과 비교컨대, 100% 들어 맞는다고 볼 수 없는 수준, 또는 완전히 세 번째 천국이라고 단정짓기 힘든 수준의 천국이다. 그리고 이 외관들은 자연적인 것들을 바라보기 때문에, 받침들이 놋쇠로 만들도록 명령되었다; 그 이유는 놋쇠는 자연적 선을 표현하고 의미하기 때문이다.
세 번째 베일, 또는 뜰의 문을 위한 벽걸이 (천)에 관하여 이렇게 읽는다:
뜰의 문을 위하여 이십 큐빗의 벽걸이(천)을 푸른색 (실), 심홍색 (실), 두 번 물들인 진홍 색 (실), 꼬아 만든 고운 아마포, 수를 놓는 자의 일로 만들 것이다; 그것들의 기둥들을 넷, 뜰의 모든 기둥들은 빙둘러 은으로 띠를 맬 것이다; 그리고 은으로 그것들의 갈고리들을 만들어라; 그러나 그것들의 받침들은 놋쇠로 만들어라 (출. 27:16, 17; 38:18, 19).
위 벽걸이 천은 더욱 낮은 천국, 더욱 더 외적인 선과 진리의 외관을 표현했다, 이것은 합리적 선과 진리의 가장 낮은 것, 즉 이 안에 첫 번째 천국의 천사들이 있다. 이 외관들이 내면의 것들과 상응하는 바, 이것들도 위 두 천국들과 같은 방식으로 묘사되고 있다. 차이점은 그것들은 금이 아닌 은으로 들씌웠다는 것, 그러나 은으로 띠를 두른 것, 갈고리들은 은으로 만들었다는 점이다. 이를 수단으로 기억 속의 지식들로부터 근원이 즉시 파생되는 합리적 진리들이 의미된다; 그리고 놋쇠로 받침을 만듬은 자연적 선들을 의미한다. 이상으로부터 보여주는 것은, 천막의 모든 것들은 주님의 왕국의 천적, 영적인 것들을 표현한다는 것, 또는 천막의 모든 것들은 세 천국들에 있는 천적, 영적인 것의 타입(type)에 따라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또한 베일을 침, 또는 덮음들은 가장 안쪽 것을 덮은 육체, 몸을 빙둘러 덮은 의복과 비슷하다.
더 나아가 “베일을 침”, 또는 “덮음”, “옷입음”, “의복”은 상대적으로 더 낮은 진리들을 의미한다는 것은 말씀의 많은 구절로부터도 분명해진다. 에스겔서에서:
이집트로부터의 수를 놓는 일로 만든 고운 아마포가 항해의 덫이었다; 엘리사 섬으로부터 의 푸른색 (실)과 심홍색 (실로 짠 천)은 네 덮개(차일, 기)였다 (겔. 27:7).
위에서 두로가 취급된다, 이를 수단으로 천적, 영적인 것들에 관한 내면의 지식들이 의미된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그것들 안에 있는 이들이 의미된다; “이집트로부터의 수를 놓은 일(수공예품)”은 기억 속의 지식으로부터 있는 것을 표시한다. “엘리사섬으로부터의 푸른색과 심홍색 실로 짠 천이 네 덮개였다”란 내적 예배에 상응하는 의식들을 표시한다.
에스겔서에서:
바다의 모든 왕자들이 그들의 왕좌로부터 내려올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그들의 관복을 옆 에 놓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수놓은 옷을 벗을 것이다; 그들은 떨림으로 옷입을 것이다, 그들은 땅 위에 앉을 것이다 (겔. 26:16).
위도 역시 두로에 관하여서이다; “관복”과 “수놓은 의복”은 기억의 내용들로부터 파생된 지식들을 표시한다, 고로 더 수준 낮은 진리들이다.
에스겔서에서:
나는 너를 수를 놓은 일(천)로 너를 입힐 것이다, 그리고 오소리 가죽으로 신길 것이다, 그 리고 고운 아마포로 띠를 두르게 할 것이다, 그리고 비단으로 덮을 것이다; 나는 너를 장신 구로 치장할 것이다. 네 손(목)에 팔찌를 끼울 것이다, 그리고 네 목에 목걸이를 두를 것이 다… 너는 네 의복을 가져왔다, 그리고 다채로운 색으로 네 산당들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 것들 위에서 매춘짓을 범했다… 너는 수를 놓은 너의 의복들을 가져온다, 그리고 그것들(우 상들)을 덮는다 (겔. 16:10, 11, 16, 18).
위는 예루살렘에 관해서이다, 이는 과거에는 영적 교회였는데, 그 후에 타락되었을 때의 교회이다: 그것의 수준 낮은 영적인 것들과 교리적 주제들이 “수를 놓은 일(천), 고운 아마포, 비단”이다.
이사야서에서:
주 여호비 체바욷께서 예루살렘으로부터 너희들이 의지하는 빵과 물을 거두어 가신다. 그 때 사람이 형제를, 그 아버지의 집으로부터 붙잡을 것이다 – 너는 의복을 가지고 있다, 너 는 우리의 제1인자가 되라. 그 날에 그는 자기 목청을 돋구어 말하기를, 나는 묶는 자로 있 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내 집에는 빵도 없고, 의복도 없다. 너희는 나를 백성의 제 1인자 로 만들지 말라. 주께서 시온의 딸들의 정수리를 옴부수러기(scab, 딱지)로 치실 것이다; 그리고 그 날에 주께서 그들의 발목의 치장한 것(발목 고리)와 그들의 (머리의) 망사, 초 생달 장식품, 목장식품, 목걸이, 판금(plate)를 가져가신다; 그리고 머리묶는 것, 그리고 발 목 사슬, 그리고 장식띠, 그리고 향합 (soul house), 그리고 귀고리를 가져가신다; 반지, 코 보석, 축제용 의복, 망토, 법복, 작은 가방, 거울, 그리고 고운 아마포, 그리고 두건, 그 리고 외투(를 가져가신다) (이. 3:1, 6, 7, 17-24).
“예루살렘”은 영적 교회를 표시하고; “유다”는 천적 교회를 표시한다; “옮기워질 것인 그들이 의지한 빵과 물”은 선과 진리를 표시한다; “제 1인자가 가져야 하는 의복”은 교리 속에 있는 진리들이다; 열거된 시온의 딸들의 의복과 장신구들은 다양한 선들과 진리들의 각각 그리고 모두의 종류들을 표시한다. 이것들을 그들은 박탈당할 것이다. 위에서 언급된 모든 물건들이 교회에 특이한 어떤 것을 의미하지 않으면, 그것들은 말씀 속에 있을리 만무이다. 즉 그것들이 신성인 것의 어떤 것을 표현한다는 말이다; 그러나 그것들은 시온의 딸들을 서술하고 있다, 그리고 이를 수단으로 교회의 것들이 의미되어진다. 이사야서에서:
깨어라! 깨어라! 네 강함을 입어라, 오 시온아; 네 아름다움의 의복을 입어라, 오 예루살렘 아, 거룩함의 성아; 그 이유가 이후로 더 이상 할례받지 않은 자, 불결한 자가 오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62:1, 2).
“시온”은 천적 교회를 표시한다; “예루살렘”은 영적 교회를 표시한다; 그리고 “아름다움의 의복”은 신앙의 거룩한 것들을 표시한다. 이사야서에서:
그들의 직물이 그들의 의복이 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그들의 일함으로 자신들을 덮지 못할 것이다; 그들의 일들은 불법의 일들이다 (이. 59:6).
“직물”은 허구적인 진리들을 표시하고 이것은 의복이 되지 못한다; “의복”은 교리로부터와 예배로부터의 외면의 진리들을 표시한다. 그러므로 말해지는 바, “그들을 그들의 일로부터 자신들을 덮지 못한다.”
이사야서에서:
나는 여호와로 크게 기뻐할 것이다, 내 혼은 나의 하느님을 드높일 것이다; 그 이유가 그분 이 나를 구원의 의복들로 입히셨고, 그분은 나를 정의의 법복으로 덮으셨기 때문이다
(이. 61:10).
“구원의 의복들”은 신앙의 진리들을 표시한다; 그리고 “정의의 법복”은 선행의 선을 표시한다. 계시록에서:
너는 자기들의 의복들을 더럽히지 않은 몇 이름들을 사데에서 조차 가지고 있다; 그들은 나와 더불어 흰 (옷)을 입고 걸을 것이다, 그 이유가 그들은 그럴만한 가치가 있기 때문이 다; 극복하는 자는 흰 의복으로 옷입힐 것이다 (계. 3:4, 5).
계시록에서:
깨어 있어 자기의 의복을 잘 간수하여 자기가 벌거벗은 채로 걷지 않도록 한 사람은 행복 하다 (계 16:15).
계시록에서:
왕좌 위에 나는 24 원로들이 흰 의복을 입고 앉은 것을 보았다 (계. 4:4).
위에서 “의복들”이 의복들이 아닌 것, 그러나 진리의 영적인 것들임은 분명하다.
그리하여 주님께서 시대의 종말에 관하여 말하신 구절에서, 그들은 자기들의 의복들을 가지러 되돌아 오지 말아야 한다고 하셨다 (마. 24:18; 막. 13:16), 여기서 “의복”은 진리들인데 이미 살핀 바 있다. 더불어 결혼 예복을 입지 않은 자에 관하여 (마. 22:11, 12). 그리고 요한에 관련하여:
너희는 무엇을 보려고 나갔느냐? 빛나는 의복을 입은 사람이냐? 보라 빛나는 의복을 입은 자들은 왕들의 집에 있다 (마. 11:8; 눅. 7:25).
그들이 교리와 예배의 외적인 것들 안에 있지 않고 내적인 것들 안에 있다는 것을 뜻함이다; 이 때문에 그분은 추가하신다:
너희는 무엇을 보러 나갔느냐? 예언자냐? 그렇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예언자 보다 더 큰 자가 (너희에게 말하고 있다) (마. 11:9).
“예언자”는 교리와 예배의 외적인 것들을 표시한다.
“의복들”이 갖가지 종류의 진리들을 의미하므로, 이집트를 떠나는 이스라엘의 아들들은 금과 은, 그리고 의복들을 차용하고, 그리고 그들의 아들들에게 그것들을 입도록 명령되었다 (출. 3:22; 12:35, 36); 또한 다양한 종류들을 (섞어) 의복을 짜지 말 것, 또는 다양한 천들을 섞어 옷을 짓지 말 것 (레. 19:19; 신. 22:11); 그리고 그들은 옷자락에 술을 자신들을 위해 달 것; 그리고 거기에 청색 실을 맬 것, 그리고 그들이 그것을 보았을 때, 그들은 명령들을 상기하여 준행하라고 명령되었다 (민. 15:38-40).
이전에는 그들은 자기들의 의복을 찢었다. 이는 여. 7:6; 사. 11:35; 삼상. 4:12; 삼하. 1:2, 11, 12; 3:31; 13:30, 31; 15:32; 왕상21:27; 왕하 5:7, 8; 6:30; 22:11, 14, 19; 이. 36:22; 37:1에서 찾아 읽을 수 있다. 조각으로 찢는 행동을 수단으로 교리와 진리를 위한 열정이 의미되었다; 그리고 심히 수치스러워 함, 그 이유는 의복으로 꾸밈에 의해 의미되는 것이 그들에게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것들이 “베일을 침”, “덮개”, “의류”, “의복”에 의해 의미된다는 것은 야곱, 그 당시 이스라엘의 예언의 말로부터도 분명해진다:
그는 그의 젊은 나귀를 포도나무에 맨다, 그리고 그의 나귀 새끼는 선발된 포도나무에 맨 다, 그는 자기 옷을 포도주로 씻는다, 그리고 그의 의류들은 포도들의 피로 (빤다)
(창. 49:11).
위 말들의 의미는 내적 의미로부터가 아니면 아무것도 알 수 없다; 즉 “포도나무”, “선발된 포도나무”, “젊은 나귀”, “나귀 새끼”, “포도주”, “포도들의 피”, “의복들”, “의류들”이다; 그리고 이 구절의 것들이 여기서 “실로”라고 불리우는 주님을 서술함이 분명하다. 말해지는 주제는 유다이다, 이를 수단으로 주님의 신성한 천적 (평면)이 서술되고 있다; 그리고 “그분이 포도주로 씻을 의복들”에 의해, 그리고 “그분이 포도들의 피로 빨 의류들”에 의해 주님의 합리적, 그리고 자연적 (평면)이 의미되어진다, 이것을 그분은 신성으로 만드셨다.
마찬가지가 이사야서에서:
보스라로부터 물든 의복들을 가지고 에돔으로부터 오는 이는 누구인가? 그의 의상에서 영 광스럽고, 그의 큰 강함에서 행군하는 분이 누구인가? 어찌하여 당신은 당신의 의상을 붉 게 하고, 포도즙틀에서 짓밟던 자 같이 당신의 의복이 되었는가? 나는 홀로 포도즙틀을 밟 아야 했다, 백성들의 누구도 나와 더불어 밟은 자가 없었다; 그들의 승리가 내 의류들에 뿌 려졌다, 그리고 나는 내 모든 의복을 더럽혔다 (이. 63:1-3).
위에서 “의복들”과 “의류들”은 그분 자신의 힘으로부터 시험과 전투하시고 승리하심으로 신성으로 만든 주님의 인간을 표시한다; 이렇기 때문에 말해진다, “나는 홀로 포도즙틀을 밟아야 했다, 백성들로부터 아무도 나와 함께 한 자가 없었다.” 이삭이 에서의 의복을 냄새 맡으면서 그를 축복한 것(창. 27:27) 역시 같은 의미이다.
주님의 신성한 인간의 거룩함 자체가 빛으로 나타난 의복이었다. 그래서 그분이 변모하셨을 때, 희고 반짝거리는 모습이었는데, 이렇게 읽는다:
예수께서 변모하셨을 때, 그분의 얼굴은 태양 같이 빛났다, 그리고 그분의 의복은 빛 같이 되었다 (마. 17:2).
누가복음서에서:
예수께서 기도하셨을 때, 그분의 생김새의 나타남은 바뀌었다, 그리고 그분의 의류는 희고 반짝거렸다 (눅. 9:29)
그리고 마가복음서에서:
예수께서 변모하셨을 때, 그분의 의복은 희고 눈 같이 극도로 빛났다. 이렇게 희게 빨 수 있는 빨래집은 땅 위에 하나도 없다 (막. 9:3)
위와 비슷한 의미를 지닌 대목으로는 아론이 베일 안쪽으로 들어갈 때 그를 입힌 거룩함의 의복이 있다, 그리고 이는 고운 아마포로 되었는데 비슷한 표현성을 지닌다 (레. 16:2, 4): 마찬가지로 영광과 아름다움을 위해 있었던 거룩함의 의복: 그리고 그의 성직 수행을 위한 거룩함의 의복 (출. 28:2-끝절, 그리고 39:1-끝절): 그 이유가 이것들 안에 표현성을 지니지 않은 것은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모든 것과 함께. 이는 파생된 진리들, 즉 기억 속으로부터와 감각들로부터의 진리들을 의미한다. 이는 이미 말했던 사항들로부터와 시리즈 자체로부터 분명해진다; 그 이유가 방금 말해진 바, “보라 이것은 너와 함께 있는 모두에게 눈의 베일일 것이다”; 이를 수단으로 합리적 진리가 의미되어진다, 이 진리는 영적 진리에 베일 역할을 한다. 그리고 다시 “모두와 함께”라고 말해진다; 이를 수단으로 합리적 진리로부터 파생된 더 낮은 진리들이 의미되는데, 이 진리들은 기억 속의 진리들과 감각적 진리들 외에 더 다른 진리들은 없다. 이 진리들이 합리적 진리들로부터 파생된다는 것은 유입의 질서로부터 분명하다. 내면의 것들이 외면의 것들 안으로 흐른다; 또는 같은 말로, 더 높은 것들이 더 낮은 것들 안으로 흐른다. 그러나 그 반대는 아니다. 그런데 실로 이것이 달리 나타난다. 즉 인간은 감각 속의 것들과 기억 속의 것들을 수단으로 합리적으로 되어간다, 그러나 이것은 오류이다. 주님으로부터의 선은 인간의 합리력을 통하여 안으로 흐른다, 그리고 이것은 기억에 있는 지식을 만나고 그것에 적합해진다; 이것을 얼마나 잘 배치하고 잘 적응하느냐에 의거 그는 그만큼 합리적 인간이 된다. 이는 신앙의 선과 진리들과 더불어서도 같은 경우이다: 주님으로부터의 선이 진리들 안으로 흐른다, 그리고 그것들에 적합해진다. 이것이 얼마나 잘 적응되느냐에 따라 인간은 영적 인간이 되어간다. 비록 이 선이 마치 진리들인 것처럼 나타난다 해도, 그래서 신앙의 진리들이라 불린다 해도 어쨌든 인간을 영적 인간으로 되게 한다. 이런 나타남 때문에 오늘날, 신앙의 진리는 신장을 해왔다(중요시 했다), 그러나 그것에 비해 선행의 선은 그리 중요시 되지 못하고 있다. (성령님만 오시라고 외쳐대는 설교들이 이런 이유 때문일지 모른다. 역자 주).

그녀는 정당함이 입증되어졌다. 이는 이리하여 어떤 피해도, 과오도 있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이는 이미 진행해 온 대목의 간략한 결론임이 분명하다.

17절. 그리고 아브라함은 하느님께 기도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아비멜렉, 그리고 그의 아내, 그리고 그의 여종을 치료하셨다. 그리고 그들은 출산했다.

아브라함이 하느님께 기도했다. 이는 계시를 의미한다. 기도함이 주님에 관련한 것을 서술할 경우, 이는 계시를 의미한다; 그리고 아브라함이 주님을 표현함으로부터도 이 의미는 파악된다. 이는 자주 언급해왔다. 여기서 글자 의미 안에 둘이 있다, 즉 하나는 기도하는 자, 그리고 또 하나는 기도가 향하는 또 다른 자이다; 그 이유가 말해지기를, “아브라함이 하느님에게 기도했다” 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적 의미에서 둘이 있지 않고, 하나이다; 그 이유가 계시를 만든 이는 주님 안에 계신 하느님 또는 여호와이시기 때문, 그리고 그분이 여호와를 잉태하게 한 것이기 때문인데, 그러므로 주님이 여호와에 관하여 어머니쪽의 인간을 가지는 만큼에서 그분은 또 다른 사람을 가지신다. 사실 이 대목은 이해하는데 매우 곤란스러울 수밖에 없을 것같다. 이 대목은 천국의 빛에서 표출되는 천사들의 생각에 접근되어 있어 지상의 언어와 생각으로 납득하려하는 우리들에게는 천국의 빛 속에 있는 모든 것은 짙은 어둠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아비멜렉을 치료하셨다. 이는 선에 관련을 맺는 교리는 건전함을 의미한다. 이는 “치료함”이 온전해지게, 건전해지게 만드는 것임으로부터 알게 된다; 그리고 아비멜렉의 표현이 합리적인 것들을 바라보는 신앙의 교리 이다에서도 알게 된다. 이것이 선에 관련을 맺고 있다는 것은 아비멜렉의 아내 역시 치료되어짐이라고 말해진 사실에서 확인된다, 이를 수단으로 진리 측면에서도 건전함이 뜻해진다; 그 이유가 말씀에서 남편이 “남편”이라 불리우면서도, 동시에 그가 그의 이름으로도 불리울 때, 이때 그는 선을 의미하고, 그의 아내는 진리를 의미한다; 그러나 남편이 “남자, man, vir”라 불리울 때, 이때 그는 진리를 의미하고, 그의 아내는 선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의 아내. 이는 진리에 관련하여를 의미하는데, 이는 “아내”의 의미가 진리이다에서 알려지는바 바로 윗 항에서 살폈다.

그리고 그의 여종. 이는 파생되는 교리적인 것에 대한 애착을 의미한다. 이는 여종의 의미가 기억과 이성 속의 것들에 애착함을 의미함에서 알게 된다; 여기서는 교리적인 것들에 애착함이다. 그 이유는 이것들이 신앙의 교리를 서술하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모든 것의 의미는 취급되는 주제에 따라서도 결정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은 출산했다. 이는 그들이 열매맺음을 의미하는데, 이는 “출산”, “출생”의 의미로부터 알려진다. 말씀의 내적 의미 안에서는 영적인 것과 천적인 것 외에 의미되는 것은 하나도 없다; 이런 이유 때문에, “임신”, “임신함”이 언급되는 것; “낳다”, “출산하다”가 언급될 때에도; “출생”, “태어나다”가 언급될 때에도; “세대”, “대를 이어 감”, 뿐만 아니라 아버지가 아이를 낳는다(beget)고 언급함, “아버지와 어머니”로서이다. 그리고 “아들들과 딸들”로서 아버지가 아이를 낳는다고 언급할 때에도, 등등 모든 이것들은 영적 의미 외에 뜻해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 이유가 말씀은 그 자체 영적이고 천적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와 같은 경우가 이 본문에서도 예외는 아니다. 고로 이는 교리의 것들에 관련하여 열매맺음이 의미된다.
말씀에서 “출생”이 이런 뜻을 가진다는 것을 아래 인용 구절로부터 확인 해보자: 사무엘서에서:
풍족하던 자가 자신들의 빵을 위해 품삯을 벌러 나서야 하고, 굶주린 자가 그 굶주림이 중 단되었다, 아이 못낳던 자가 일곱을 낳았다, 그리고 많은 자녀를 가진 그녀는 쇠약해졌다; 여호와께서는 죽이기도, 살아 있게 만드시기도 한다. 그분은 지옥으로 내려가게 하시고, 그 리고 올리어 데려가시기도 한다 (삼상. 2:5, 6).
예레미야서에서:
일곱 자식을 낳은 그녀는 쇠약해진다, 그녀는 내몰아 숨쉬어 자기 혼을 내보낸다; 그녀의 태양은 아직 낮인데도 저물었다 (예. 15:9).
이사야서에서:
노래하라, 불임녀들아, 낳지 못하는 것이여; 아이와 더불어 산고를 겪지 못했던 것들은 노 래와 큰 소리로 외쳐댐으로 산출하라; 그 이유가 결혼된 아내의 아들들 보다 황무한 자(불 임자)의 아들들이 더 많기 때문이다, 여호와께서 말하신다 (이. 54:1).
다윗서에서:
여호와의 음성이 암사슴으로 새끼를 낳게 만드신다, 그리고 숲이 벗겨지게 (하신다); 그리 고 그분의 성전에서 모두 각각의 사람들이 영광을 말한다 (시. 29:9).
이사야서에서:
얼굴을 붉혀라 오 시돈이여, 그 이유가 바다가 말해왔다, 바다의 요새가 말하기를, 나는 산 고를 겪지 않았다, 생산하지 않았다, 나는 젊은이들을 양육하지 않았다, 소녀가 성장하게 하지도 않았다; 이집트의 보고(report)와 더불어서 같이, 그들은 두로의 보고에 따라 산고 를 겪을 것이다 (이. 23:4, 5).
이사야서에서:
그녀는 산고를 겪기 전에 그녀는 출산할 것이다, 그리고 그녀의 고통이 오기 전에 그녀는 남자 아이를 건넬 것이다. 누가 이런 일을 들은 적이 있었는가? 누가 이와같은 일을 본 적 이 있는가? 땅이 하루 안에 산고를 겪는데, 내가 출산하지 못하게 하겠느냐? 여호와께서 말하신다; 내가 출산하게 할 것이고, 닫히게도 하지 않더냐? 네 하느님이 말하셨다
(이. 66:7-9).
예레미야서에서:
내가 바라노니 남자가 아이를 낳는지 여부를 물어보라; 그 점에서 나는 마치 아이를 낳는 자 같이, 각기 자기 손을 허리에 짚고 있는 모든 이를 보았었다 (예. 30:6).
에스겔서에서:
나는 이집트에서 불을 놓을 것이다, 그리고 신은 정녕 산고를 겪을 것이다, 그리고 아무 도… (겔. 30:16).
호세아서에서:
에브라임, 그들의 영광은 출생으로부터, 그리고 자궁으로부터, 그리고 임신으로부터 새 같 이 날아갈 것이다 (호. 9:11).
호세아서에서:
산고하는 자의 고통이 에브라임 위에 왔다; 그는 슬기롭지 못한 아들이다, 그 이유는 그때에 아들들의 쏟아져 나오는 장소에서 서있지 않아야 했었기 때문이다 (호. 13:13). (해산과정에서 양수를 터트리고 밖으로 밀고 나와주어야 하는데 멈추어 있는 순간일 것임: 역자 주)
계시록에서:
큰 표시가 천국에서 보여졌다; 한 여인이 태양을 옷입고 있었다, 그리고 달은 그의 발 아래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머리 위에는 열 두 별의 왕관(이 있었다). 그리고 아이와 더불어 있는, 그 여자가 소리질렀다, 산기가 돌고 있었다 그리고 해산하려 고통하였다. 그리고 용 은 이제 출산하려는 여인 앞에 섰는데, 그 여자가 출산하면, 그녀의 자식을 삼킬 작정이었 다. 그리고 그 여자는 아들, 남성을 출산했다, 이 아들은 쇠막대를 가지고 모든 국가들 을 돌보기로 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자식은 하느님과 그분의 왕좌에로 붙들려 올려졌 다 (계. 12:1-5).
위 구절들에서 임신과 출생들이 교회로부터 있는 것들을 의미한다는 것을 누가 알지 못할까? 그리고 본문에서 같은 의미들이 아비멜렉에 관하여 말해진 것, “하느님께서는 아비멜렉, 그리고 그의 아내, 그리고 그의 여종을 치료하셨다, 그리고 그들은 출산했다”에도 담겨 있다. 또한 “여호와께서는 아비멜렉의 집의 모든 자궁을 확실히 닫으셨는데, 이는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에 관한 말 때문이다”에도 담겨 있다. 이런 구절이 내적 의미에서 의미되는 것은 신앙의 교리가 신성한 진리들을 중요시할 때와 합리적 진리들을 중요시할 때의 각각에서 있는 신앙의 교리의 품질을 설명함으로 분명해진다: 신성한 진리들을 중요시 할 경우, 즉 말씀으로부터를 중요시 할 경우, 그때 이성과 기억으로부터의 각각 그리고 모든 것들이 이것을 확증한다; 그러나 인간의 것들부터를 중요시 할 경우, 즉 이성과 기억 속의 지식들로부터를 중요시 할 경우는 전혀 반대이다. 그 이유가 이는 선으로부터와 진리로부터서 임신됨이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말씀으로부터를 중요시함은 주님으로부터를 중요시함인 것에 반해서, 이성과 기억 속의 지식으로부터를 중요시함은 인간으로부터이기 때문이다. 전자는 모든 지혜와 총명이 오지만, 후자로부터서는 불경함과 어리석음 뿐이다.

18절. 여호와께서는 아비멜렉 집안의 모든 자궁을 확실히 닫아 놓으셨는데, 이는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에 관한 말 때문이다.

여호와께서는 아비멜렉 집안의 모든 자궁을 확실히 닫아 놓으셨다. 교리의 불모, 메마름(barrenness)을 의미한다. 이는 “자궁을 확실히 닫음”이 임신 자체를 예방하심이다로부터; 그리고 “아비멜렉 집안”의 의미가 신앙의 교리로부터의 선이다로부터, 이것이 메말랐음을 보여줌에서 알려진다. 이 장의 여기 까지에서 “하느님”이라는 이름이 언급되어 오다가 이 구절에서 처음 “여호와”라는 이름의 언급이 있다. 그 이유는 주제가 진리 측면을 다룰 경우, 하느님이라는 명칭이 사용되고, 주제가 선을 다룰 경우, 여호와라는 명칭이 사용되기 때문이다. 교리로부터의 모든 임신은 아버지인 선으로부터 있다, 그러나 그것의 출생은 어머니인 진리를 수단으로 한다. 이는 여러번 언급했다. 여기서 교리의 임신이 취급되고, 이 임신이 선으로부터 인 바, “여호와”가 언급되어진다; 이에 비해 앞에서는 그것의 출생이 취급되고 이것은 진리를 수단으로 하는 바, “하느님”의 언급이 있어, 앞 구절에서, “하느님께서는 아비멜렉, 그의 아내, 그의 여종을 치료하셨다, 그리고 그들은 출산했다”라고 말해졌다.
임신이 취급되는 말씀의 다른 구절을 살펴보자. 이사야서에서:
여호와께서는 나를 자궁으로부터 부르셨다. 고로 여호와께서 나를 자궁으로부터 만들어 내 셨다고 말하신다; 그때 나는 여호와에게 귀중해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나의 하느님이 나의 힘일 것이다 (이. 49:1, 5)
“강함”이 진리를 서술하고 있다, 그러므로 “하느님”이 언급된다. 이사야서에서:
고로 여호와, 너의 제조자, 태로부터 만들어 내신 분이 말하신다 (이. 44:2, 24, 그리고 다 른 구절에서).
위와 같은 이유에서 “아비멜렉의 집안”이 말해지고, 이를 수단으로 신앙의 교리의 선이 의미되어진다. 그들이 아이를 낳게 되었다, 아비멜렉의 집안의 자궁들이 사라 때문에 닫혀졌다는 사실 안에 신성한 비밀함이 있는 것은 분명하고 이는 내적 의미가 아니고서는 밝혀지지 않는다.

사라에 관한 말 때문에. 이는 만일 합리적인 것 때문에 그 자체를 결합 시켰다면을 의미한다. 이는 누이로서의 사라의 표현이 합리적 진리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사라에 관한 말”은 전체 줄거리, 즉 그녀는 누이라고 불리웠고, 아비멜렉이 그녀를 데려갔고, 그러나 그는 그녀 가까이 오지 않았다는 줄거리를 모두 의미한다. 이런 것들이 의미되는 것은 아래에서 더 살펴진다.

아브라함의 아내. 이는 영적 진리는 천적 선과 결합되어야 하는 것이 질서이다를 의미한다; 그리고 아브라함의 표현이 영적 진리와 결합한 천적 선이다로부터 알려진다. 우리가 “영적 진리와 천적 선”이라고 말하든지, 또는 “주님”이라고 말하든지 이는 똑같다; 그 이유는 주님은 진리 자체와 선 자체, 그리고 진리와 선, 그리고 선과 진리의 결혼 자체이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의 경우가 어떻게 되는 것인지는 해설을 통해 실로 보여질 수 있다; 그러나 이 주제들이 오늘날 불분명한 것 사이에 있기에, 우리는 그것들을 예증을 통해 말해야 할 수밖에 없다. 여기서 취급한 주제는 신앙의 교리이고, 이에 관하여 주님께서는 그분의 어린 시절에서 생각하셨다. 즉 합리적인 것들을 수단으로 신앙의 교리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허용될 수 있는 지 여부, 그리하여 신앙의 교리에 관하여 자아의 생각들을 위해 만드는 것이 허용될 수 있는지 여부를 생각하셨다는 말이다. 이렇게 그분이 생각하심은 그분의 사랑으로부터, 즉 합리적인 방식 안에서 납득하지 못하는 것은 믿지 않는 인류를 위해 생각하심으로부터 있어졌다. 그러나 그분이 신성으로부터 이것은 행해져서는 안된다고 지각하셨다; 그러므로 그분은 신성으로부터 자신에게 교리를 계시하셨다(밝히 알게 하셨다), 그리고 동시에 그로부터 종속시켜야 하는 우주의 모든 것들, 즉 합리적인 것들과 자연적인 것들에 속한 모든 것들을 계시하셨다.
이 경우가 인간 사이에 있는 신앙의 교리적인 것들과 더불어 있는 지는 앞에서 서술한 적이 있다, 즉, 인간이 생각하는 원리의 측면에는 두 측면에서 원리가 있다. 그것은 긍정적 측면과 부정적 측면이다; 그리고 부정적 원리 측면에서 생각하는 이들은 자기들이 기억 속의 지식과 이성으로부터, 뿐만 아니라 감각적인 것으로부터 확신되지 않으면 어느 것도 믿지 않는다; 그러나 어떤 것이 진실이다는 것을 긍정적 측면에서 생각하는 이들이 있다. 이들은 주님이 말씀 안에서 이러이러하게 말하셨기 때문에 믿는 이들, 즉 주님에 대한 신앙을 가진 이들이다. 말씀 안에 있기 때문에 진리이다는 점에 관하여 부정적 측면에 있는 이들은 이렇게 심정에서 말한다. 즉 자기들은 합리적이고 기억 속의 지식들로 납득될 때 믿을 것이다. 이 말의 실제의 결론은 그들이 영영 믿지 않는 것이다. 아마 이들은 자기들이 보고 듣고 만지는 신체적 감각들로 확신되어도 믿지 않을 것이다; 그 이유가 그들은 이와같은 것들에 반대되는 것을 언제나 새로이 고안해내기 때문이다. 그들의 주된 목적은 모든 신앙을 완전히 소멸해 버리는 것, 그리하여 동시에 합리성의 빛을 어둠으로 되돌려 놓는 것, 그 이유는 그들의 것이 거짓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긍정적 측면에 있는 이들, 즉 주님이 그렇게 말하셨기 때문에 그것이 그렇다라고 믿는 이들은 계속적으로 확증이 따라 붙고, 그들의 생각들은 계발되어가고 강화되어 간다. 이들에게 기억 속의 지식들과 이성은 이 계발과 확증과 힘을 강화하는 수단이다. 감각적인 것조차도 그들에게는 도움을 주는 수단이 된다; 그 이유가 인간은 기억과 이성 속의 것을 수단으로 하지 않고는 다른 근원이 없기 때문이다. 이들과 더불어 교리는 “정녕 살게 하는 생명들”이다; 그것들에 관해 말해지는 바, 그들은 “치료되었다”, “출산하였다” 이다; 이에 반해, 부정적 측면에서 있는 이들에게 교리는 “확실히 죽이는” 교리이다; 그러므로 “자궁이 닫혀졌다”라고 말해진다. 이는 합리적인 것들을 수단으로 신앙의 교리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신앙의 교리를 수단으로 합리적인 것들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무엇인지를 적나나하게 보여준다. 예를 들어 더 살피기로 하자.
말씀의 교리로부터, 교리의 첫째이고 근본되는 것은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향한 선행이다. 이 교리를 중요시하는 긍정적 측면의 사람들은 이성과 기억 속에 있는 무엇이든, 감각의 것들로부터 있는 무엇이든 그것들 안으로 들어가서 자기들의 타고난 재능에 따라, 지식들에 따라, 그의 경험에 비추어서 기쁨을 만끽한다. 뿐만 아니라, 더 안으로 들어가면 갈수록 더 많은 확증을 갖는다. 그 이유는 이 자연 세계는 확증할 것으로, 확증된 것으로 꽉 차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첫째가고 근본되는 교리를 부인하는 이들, 그리고 이성과 기억 속의 것들을 수단으로 진실된 어떤 것을 우선 확신해야겠다고 하는 이들은 사실상 자신들이 확신되도록 놔두지도 않는다. 그 이유는 그들이 부인함은 심정에서 출발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언제나 이 원리 아닌 다른 것이 본질이다고 믿기를 바라고 있다. 결국 그들이 원리들을 확증함으로 해서 오는 결과는 그들의 눈이 소경되는 것, 즉 주님을 사랑함과 이웃을 사랑함이 무엇인지에서도 깜깜해지는 것이다. 그들이 반대쪽에서 확증하는 바, 결국 그들은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 외의 어떤 다른 사랑도 자신들에 기쁨을 줄 수 없다는 관념에서 정착하고 만다. 이런 수준에 접근하는 만큼 그들은 천국의 사랑 대신 지옥의 사랑을 얼싸안는다. 그런데 부정쪽도 아니고, 그렇다고 긍정쪽도 아닌 어정쩡하게 서있는 이들, 즉 그들이 부정이나 긍정을 하기 앞서 의심 안에 있는 이들의 경우는 이미 살핀 바 있다. 즉 악한 생활 쪽으로 기울 경우는 부정적 측면에 있게 되고, 어떻게든 선한 생활을 꾸리려 노력하는 이들은 긍정적 측면에 있게 된다.
다른 예를 생각해보자: 신앙의 교리의 제일 가는 것들 사이에는, 모든 선은 주님으로부터 있고 모든 악은 인간, 즉 인간의 자아로부터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맞다고 하는 긍정적 측면의 사람은 이성과 기억 속의 지식들의 많은 것을 가지고 자신을 확증할 수 있다. 말하자면 이런 사항들, 어떤 선도 선 자체, 즉 선의 원천으로부터, 주님으로부터가 아니면 흘러드는 것이 가능하지 않다는 것; 그리고 선의 시작, 또는 선의 원리는 이외 다른 근원으로부터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에 대한 예증은 진실로 선인 모든 것들에서, 다른 것들에서, 공동체에서 또한 창조된 우주에서 발견한다. 그러나 부정적 측면의 사람, 즉 자기들이 생각하는 모든 것을 수단으로 반대적인 것들을 생각하는 사람은 그 만큼 결국 선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그들 사이에 최고 높은 선이 무엇인지에 관하여 논쟁이 많지만, 그 선이 주님으로부터 있는 천적, 영적 선이다는 사실, 이 선을 수단으로 보다 수준 낮은 선들이 살아있게 만들어지고, 거기로부터 즐거움은 진실된 기쁨이다는 것이다. 어떤 이는 이렇게도 생각한다, 선이 자신들로부터 있지 않으면, 그것은 그 외 다른 근원들로부터 가능하지 않다는 것이다.
다른 예를 생각해보자. 즉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향한 선행 안에 있는 이들은 교리로부터의 진리들을 받을 수 있고, 말씀 안에서 신앙을 가질 수 있으나 자아와 세상 사랑 안에 있는 이들은 그렇지 않다는 것; 또는 선 안에 있는 이들은 믿을 수 있으나, 악 안에 있는 이들은 믿을 수 없다는 것이다. 긍정적 측면의 사람은 이성과 기억 속의 수많은 사항들을 수단으로 이를 확증할 수 있다. 그들이 그것을 확증할 수 있는 이유는 진리와 선은 서로 동의가 가능하고 일치하나, 진리와 악은 그렇지 않다는 것; 그리고 모든 거짓이 악 안에 있듯, 모든 거짓은 악으로부터 있다는 것; 그럼에도 악 안에 있는 어떤 이가 진리를 가진다면, 그것은 입술 위에서의 진리일 뿐, 심정에서의 진리가 아니다는 것; 그리고 그들은 자기들의 기억 속의 지식으로부터 많은 것들에 의해, 그들은 진리들이 악들을 금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악들은 진리들을 토해낸다는 것을 확증할 수 있다. 그러나 부정적 측면에 있는 이들은 모든 이, 그들 각각의 품성이 어떠하든 다른 사람과 마찬가지로 믿어질 수 있다고 주장함으로 확증하려든다. 이 주장을 그들은 넓게 해석해서 증오심을 지녔든, 복수심에 불타든, 사기치려 생각 중인 자들이라 해도 믿을 수 있다고 말한다. 더욱이 그들은 자기들의 교리로부터 생활의 선을 통째로 거절하는 때조차도 자기들은 신앙을 지니고 있다고 주장하나, 결국은 믿지 않는 것이다.
이런 점에 더 분명한 생각을 가지도록 예를 더 생각해보자: 긍정적 측면에서 있는 이들의 경우이다. 그들은 말씀은 글자에서 나타나지 않는 내적 의미를 소유하도록 하기 위해서 씌어져있다는 것을 합리적 많은 생각들에 의해 확증할 수 있다; 말씀을 수단으로 천국과 연결할 수 있다는 것; (육체의 눈으로) 보이는 자연적인 것과 (육체의 눈으로 보이지 않지만) 영적인 것은 상응으로 연결되고 있다는 것; 내면의 생각들에 대한 관념들은 언어의 말들 안으로 떨어지는 물질적 관념들과 통째로 다르다는 것; 양쪽 세계의 삶을 위해 태어난 인간은 양쪽 세계를 위해 있는 말씀을 수단으로 지상에 사는 동안 천국 안에서도 있을 수 있다는 것; 말씀이 읽혀질 때, 어떤 인물들과 더불어서 신성한 빛은 그의 이해성의 것 안으로, 또한 애착 안으로 흐른다는 것; 당연한 즉, 말씀은 천국으로부터 내려온 어떤 것이 쓰여져 있다는 것, 그러므로 말씀은 글자에서 있는 것과 같은 근원에 있을 리 만무하다는 것; 그리고 말씀은 그것 안에서 가지는 거룩함으로부터만 거룩해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사람은 기억 속의 지식들을 수단으로 자신을 확증할 수 있다; 즉 인간들은 원래에는(옛날에는) 표현물 안에서 있었다는 것, 그리고 고대 교회의 저술들은 이런 본성 속에 있었다는 것; 또한 이방인들 사이에 있는 많은 저술들도 그 근원을 이런 것에 두고 있었다는 것; 이것 때문에 교회에서 그리고 학식 있는 이방인들에게서 이 고대 교회의 문체(style)가 거룩한 것으로 존경되어 왔다는 것; 이에 대한 예증으로 우리는 많은 책들을 언급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부정적 측면의 사람은 위의 사항들을 부정하지 못한다 해도 여전히 믿지는 않는다, 그 대신 자신들 스스로 자신을 이렇게 설득해댄다. 즉 말씀은 글자에서 있는 그대로와 똑같다는 것, 참으로 세상적으로 나타나는 것과 같다는 것, 그러면서도 그것 안에 영적인 것이 있다고 하지만 아이러니컬하게 별 관심이 없다. 그리고 이것을 그들은 다각적으로 확증할 수 있다.
이런 주제가 단순한 이들의 납득력에 표출되도록 지식에 관한 다음 문제를 예를 삼아 살펴보자. 긍정적 측면의 사람들은 시각이 눈으로부터 있는 것이 아니라 영으로부터 있다는 것, 그래서 영이 육체의 기관인 눈을 통하여 세상에 있는 것들을 본다는 것을 많은 것들로 해서 자신들에게 확증할 수 있다. 이는 다른 사람들에 의해 말해진 것을 듣는 것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이렇게 보는 것은 그 자체를 내면의 시각에 조회한다. 즉 내면적으로 바뀌어진다는 말이다. 고로 내면적 시각이 존재하지 않으면 이는 불가능할 것이다; 또한 생각 속에 있는 것은 무엇이든 내면의 시각에 의해 보여지고, 어떤 생각은 더 또렷하게, 어떤 다른 것은 오히려 더 불분명하게 보여진다. 그리고 다시 우리가 상상한 것은 그것과 꼭 닮아 있게 표출한다; 시각의 기관으로서 눈의 시야에 떨어진 대상물을 보는 것은 육체 안에 있는 영이 아니다 한다면, 다른 삶에서 영은 아무것도 보지 못한다는 말과 같이 되지만, 그곳에서 영은 육체의 눈으로 가능할 수 없는 무수한 것들을 보고 있다. 꿈에 보는 것, 특히 예언자들의 꿈의 경우, 그들은 육체의 눈은 아니지만 많은 것들을 보았다는 것도 주목해둘 일이다. 마지막으로 철학적으로 노련한 어떤 이의 경우, 그는 바깥쪽의 것들은 안쪽의 것들 안으로 들어갈 수 없다, 마치 합성물이 단순물 안으로 들어갈 수 없듯 그러하다는 것, 그러므로 육체의 것들은 영들 안으로 들어갈 수 없으나 그 반대는 가능하다는 것이다; 영이 시각을 가진다는 것, 영이 아니면 눈은 시각을 가지지 못한다는 것을 인간이 이해할 때까지 수많은 다른 증거들을 내세우지 않는다. 그러나 부정적 측면에 있는 이들은 이런 종류의 주제들에 대한 생각을 자연의 측면이거나 공상의 측면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그들이 인간이 육체 안에서 시각을 소유하고 즐기는 것보다 영은 더 완전하게 시각을 즐기고 소유한다는 말을 들을 때, 그들은 냉소한다, 그리고 그런 생각은 쓸데없는 잡담으로 간주하여 거절한다, 그리고 그들은 만일 육체의 눈을 빼앗긴다면 어둠에서 산다고 믿고 있다; 그 반대가 진짜이다. 그 이유가 그들은 빛 안에서 살기 때문이다.
위의 몇 가지 예들로부터 우리는 알게 되었는지 모른다, 즉 진리들로부터 이성과 기억 속의 지식들로 들어가는 것, 그리고 이성과 기억 속의 진리들로부터 진리들 안으로 들어가는 것; 그리고 전자는 질서에 따라 있는 것, 그러나 후자는 질서에 반대하여 있는 것; 그리고 우리가 질서에 따라서 행할 때, 우리는 계발된다는 것; 그러나 우리가 질서에 반대되게 행할 때, 우리는 눈멀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진리들이 알려지고 믿어져야 함이 얼마나 중대한 관심 속에 있어야 하는지. 그 이유가 인간은 진리들에 의해서는 계발되나 거짓들에 의해서는 소경으로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진리들에 의해서는 합리성이 무한하게 열려지지만, 거짓들에 의해서는 비교적으로 아마 전혀 열려지지 않는다, 물론 이것들이 외관상으로는 그렇게 나타나지 않는다. 천사들이 아주 큰 지혜를 향유하는 이유는 그들이 진리들 안에 있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진리는 천국의 빛이기 때문이다.
감각들에 의해 납득되지 않는 것은 기꺼이 납득하지 않으려 하여 자신을 눈멀게 하는 이들, 그리하여 결국 아무것도 믿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는 이들을 옛적에 “지식의 나무의 뱀들”이라 불렀다; 그 이유가 감각적인 것들과 그것들의 오류들로부터 많은 것을 추론할 경우, 그것들은 인간의 납득력과 믿음에 물들여지고, 그러므로해서 그것들은 많은 것을 부추킨다. 다른 삶에서 이와같은 부류의 영들은 신앙의 모든 것들에 관하여 그것이 과연 그러한지를 추론한다는 사실을 수단으로 쉽게 구별되어진다. 그들은 그것이 그러한지를 수천 번 보이고도 여전히 그들에게 제공된 모두 각각의 증거들에 맞서 부정적 의심들을 오히려 더욱 발전시킨다. 게다가 이 짓을 영원까지 계속 해댄다. 그들이 상식을 가지지 않은 이유 때문에 눈멀어 있어, 그들은 선과 진리가 무엇인지를 납득할 수 없다; 그럼에도 그들 각각은 자기들이 우주에서 제일 현명하다고 착각한다; 그리하여 지혜를 신성인 것을 무효화할 수 있는 데에 놓이게 하고, 신성인 것을 자연적인 것으로부터 연역한다. 이세상에서 (자신이) 현명하다고 간주한 많은 이들이 이런 품성 속에 빼어나게 있다; 그 이유가 어떤 이가 재능과 지식을 더 부여받았는데, 부정적 측면에 있을 경우, 그는 여느 누구보다 더욱 불경해지기 때문이다; 이와 반대로 누군가가 재능과 지식을 더 부여받고, 긍정적 측면에 있을 경우, 그는 더 슬기롭게 있을 수 있다. 인간이 기억 속의 지식들을 수단으로 합리력을 증진하는 것을 반대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러나 금해져야 하는 것은 말씀에 속하는 신앙의 진리들에 맞서 자신을 강퍅해지게 하는 점이다.
이런 사항들은 말씀의 내적 의미에서 아주 많이 취급되어진다, 특히 앗수르(아시리아)와 이집트를 다루는 예언적 말씀의 내적 의미에서 그러하다; 그 이유가 추론이 “앗수르”에 의해 의미되기 때문; 그리고 기억 속의 지식들이 “이집트”에 의해 의미되기 때문이다. 기억 속의 지식들과 합리적인 것들을 수단으로 신앙의 교리적인 것들과 신성한 것들 안으로 들어가기를 바라는 이들에 관하여 이사야서에서 이렇게 읽는다:
나는 이집트 안에서 이집트를 분간 못하게 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모두 각기 자기 형제 에 맞서고, 모두 각각이 자기 동료에 맞서, 도성이 도성에 맞서, 왕국이 왕국에 맞서 싸울 것이다; 그리고 이집트의 영은 그것의 한가운데를 텅비게 만들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것에 관한 조언을 그대로 받아들일 것이다; 물들이 바다로부터 실패할 것이다, 그리고 강은 말리 워질 것이데, 완전히 말라질 것이다; 그리고 개울은 사라질 것이다, 이집트의 강들은 줄어 들고 말라질 것이다; 갈대와 창포가 시들어질 것이다; 그리고 모든 이집트의 씨가 말라질 것이다. 여호와께서는 그녀의 한가운데 있는 외고집의 영을 혼합하실 것이다. 그리고 그것 들이 이집트로 하여금 그들의 일에서 방황하게 만들 것이다, 마치 술주정꾼이 토하면서 비 틀거리는 것 같을 것이다 (이. 19:2, 3, 5-7, 14).
이사야서에서 다시:
반역질 하는 아들들에게 화있을 것이다, 그들은 이집트로 내려가려고 걷고 있다, 그들은 자 신들을 바로의 강건함으로 강건해지게 하겠다고 하여, 그리고 이집트의 그늘을 신뢰하여 내 입에 (강건해지는 방법을) 물어보지 않는다. 고로 바로의 강함은 네 수치심이 되어 네게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집트의 그늘을 신뢰함은 치욕으로 네게 있을 것이다
(이. 30:1-3).
이사야서에서 다시:
도움을 청하려 이집트로 내려가고, 말 위에 머물고, 숫자가 많다고 병거를 신뢰하는 자들에 게 화있을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이스라엘의 거룩한 분을 바라보려 하지 않고, 찾지도 않 는다. 그래서 여호와께서 그분의 손을 뻗으실 때, 도와준 자는 걸려넘어지고, 도움받은 자 는 쓰러질 것이다, 그래서 그들 모두는 다함께 소멸할 것이다. 그리고 앗수르는 인간의 것 이 아닌 검에 의해 쓰러질 것이다, 그리고 인간으로부터가 아닌 검이 그를 삼킬 것이다 (이. 31: 1, 3, 8).
예레미야서에서:
내 백성은 두 가지 악을 범했다; 그들은 물을 붙잡을 수 없는 부서진 구덩이, 그 구덩이에 서 살아있는 물을 퍼내려고 나를, 생명수의 원천을 저버렸다. 이스라엘이 종이더냐? 만일 그가 집에서 태어나졌다면, 왜 그가 먹잇감이 되었느냐? 너희는 여호와 네 하느님이 길을 인도해주실 당시 그분을 저버림으로 이 짓을 했지 않았더냐? 그리고 지금 너희는 실로의 물을 마시겠다고 이집트로 가는 길에서 무슨 짓을 하고 있느냐? 또는 너희가 강의 물을 마 시려고 앗수르로 가는 길에서 무슨 짓을 하고 있느냐? 오 이 세대여, 너희는 여호와의 말 씀을 보라: 내가 이스라엘에게 광야가 되어 있느냐? 어둠의 토지가 되어 있었느냐? 어찌하 여 그들은 우리를 통치할 것이다, 우리는 당신에게 더 이상 오지 않을 것이다 하고 말하느 냐? 왜 너희는 네 길을 바꾸겠다고 아주 많이 가버렸느냐? 너희는 앗수르로부터 치욕을 당 했던 것 같이 이집트로부터도 역시 치욕을 당할 것이다 (예. 2:13, 14, 17, 18, 31, 36).
예레미야서에서:
너희는 여호와의 말씀을 들어라, 유다의 남은 자들아; 이스라엘의 하느님 여호와 체바욷께 서 이렇게 말하신다, 만일 너희가 이집트로 가려고 얼굴을 그 쪽으로 둔다면, 그리고 너희 가 거기 체류하려고 간다면; 그때 너희가 무서워 하던 검이 이집트의 토지에서 너희를 따 라붙을 것이다, 그리고 너희가 걱정하던 기근이 너희에게 꽉달라 붙을 것이다, 너희로 죽도 록 할 것이다. 그렇게 이집트에 체류하겠다고 이집트로 가려고 얼굴을 놓은 모든 자들에게 그런 일이 있을 것이다; 너희는 검으로, 기근으로, 염병으로 죽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 중 의 누구도 내가 너희에게 보낸 악을 피하여 남을 자가 없을 것이다 (예. 42: 15-17).
에스겔서에서:
그리고 이집트의 모든 주민은 내가 여호와 임을 알 것이다; 그 이유는 그들이 이스라엘의 집에 갈대 지팡이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너를 손으로 붙잡으면, 너는 부러질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모든 어깨를 째지게 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기대면 그들은 부서지고, 서 있게 하는 모든 허리도 부술 것이다; 그러므로 주 여호비께서 말하셨다, 잘 보라 나는 네 위에 검을 가져올 것이다, 그리고 너로부터 사람과 짐승을 절멸할 것이다, 그리고 이집트의 토지는 황무해져 쓸모 없어 질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내가 여호와 임을 알 것이다; 그 이 유는 그분이 강은 나의 것이고, 내가 그것을 만들었다고 말하셨기 때문이다 (겔. 29:6-9). 호세아서에서:
에브라임은 아둔한 비둘기 같았다; 그들이 이집트를 불렀다, 그들은 앗수르로 갔다; 그들이 갈 때, 나는 내 그물을 그들 위에 펼 것이다; 그들이 나로부터 떠나 배회하기 때문에 그들 에게 슬픔이 있다 (호. 7:11-13).
호세아서에서:
에브라임은 바람을 먹인다, 그리고 동풍을 따라간다; 날마다 그는 거짓말과 쓸모 없는 것을 불리고 있다, 그리고 그들은 앗수르와 계약을 만든다, 그리고 기름이 이집트로 운반되어진 다 (호. 12:1).
호세아서에서:
이스라엘이 그녀의 하느님 아래에서 매춘을 범했다; 너는 모든 곡식 마당에서 삯을 사랑했 다; 에브라임은 이집트로 되돌아 갈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앗수르에서 불결한 것을 먹을 것이다; 그 이유가 그들은 황폐해짐으로부터 떠나가고, 이집트가 그들을 모아들이고, 멤피 스가 그들을 매장할 것이고, 가시(나무)가 탐나는 은 (제품)을 소유할 것이고, 엉컹퀴가 그 들의 천막 안에 있을 것이다. 에브라임이 처죽임을 당하고, 그들의 뿌리는 말라질 것이고, 그들은 열매가 없을 것이다; 그렇다, 나의 하느님이 그들을 내던질 것이다, 그 이유는 그들 이 그분에게 귀기울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은 나라들 사이에서 배회자일 것이 다 (호. 9:1, 3, 6, 16, 17).
이사야서에서:
앗수르에게 화있을 것이다, 내 노여움의 막대기, 그리고 그는 그들의 손에 있는 내 노여움 의 지팡이 이다; 그는 올바르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의 심정은 올바른 것을 묵상하지 않는 다; 그 이유는 적지 않은 나라들을 파괴하고 절멸하려는 것이 그의 심정 안에 있기 때문이 다. 그 이유가 그가 말하기를, 그들의 제 1인자들은 왕들이 아니더냐? 나는 앗수르 왕의 심 정의 의기양양함의 열매를 방문할 것이다, 그 이유가 그가 말하기를, 나는 내 손의 강함으 로 그것을 해치웠다, 그리고 내 지혜로 그것을 했다, 그 이유는 내가 총명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민족들의 경계선을 옮길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보물을 빼앗을 것이다, 그리고 힘센 자가 던지듯 주민들을 내던질 것이다. 그러므로 주들 중의 주, 체바욷께서는 그의 살 찐 것 사이에 야윈 것을 보낼 것이다; 그리고 그의 영광 대신에 화염을 확실히 지피실 것 이다 (이. 10: 5, 7, 8, 12, 13, 16).
위 모든 인용 구절에서, 앞서 말한대로 “앗수르”에 의해 추론함이; 그리고 “이집트”와 “바로”에 의해 기억 속의 지식이; “에브라임”에 의해 지적인 것이 의미되어진다; 그리고 위 인용 구절, 그 외 많은 구절에서, 인간의 합리성이 부정적 원리로부터 신앙의 진리들에 관한 것을 추론할 때 어떤 품질이 되어가는지를 묘사하고 있다. 같은 내용이 이사야서 36-37장에도 있는데, 거기서도 우리가 읽는바, 앗수르 왕이 보낸 랍사게가 히즈기야 왕과 예루살렘을 향하여 말했을 때, 여호와의 천사가 앗수르왕의 진영에 있는 185,000명을 쳐죽였다. 이 사건은 인간이 신성한 것들에 맞서 추론할 때, 자신에게는 대단히 지혜롭다고 여겨져도 그 인간의 추론함은 뒤집어 엎힘이 거행된다는 것이다.
이 추론함은 다른 구절에서 “이집트의 아들들과 앗수르의 아들들과의 매춘짓”이라 불리우고 있다. 에스겔서에서:
너는 네 이웃, 큰 고깃덩어리, 이집트의 아들들과 매춘을 범했다; 그리고 앗수르의 아들들 과 매춘을 범했다, 그럼에도 아직 만족하지 못하고 있다
(겔. 16:26, 28; 23:3, 5-21; 2466항 참조).
신앙의 교리로부터 합리적인 것들과 기억 속의 지식들 안으로 들어가서, 슬기로운 이들에 관하여여서 이다. 이사야서에서:
그 날에 이집트의 토지 한가운데에 여호와를 향한 제단, 그리고 국경선에 여호와를 향한 기둥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이집트의 토지에서 여호와 체바욷를 향한 표시와 증거 로 있을 것이다; 그 이유가 그들은 박해자 때문에 여호와께 부르짖음이 있을 것이다, 그리 고 그분은 구원자와 제 1인자를 보낼 것이다, 그리고 그분은 그들을 구원하실 것이다; 그리 고 여호와는 이집트에 알려질 것이다, 그리고 이집트인들은 그 날에 여호와를 알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제물과 음식 예물을 바칠 것이다, 그리고 여호와께 서약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이행할 것이다
(이. 19:19-21).
이사야서에서:
그 날에 이집트로부터 앗수로 까지 큰 길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앗수르가 이집트에 올 것 이다, 그리고 이집트인들이 앗수르를 섬길 것이다. 그 날에 이스라엘은 이집트와 앗수르와 더불어 세 번째이고, 토지의 한가운데에서 복될 것이다, 여호와 체바욷께서 복주시어, 말하 시기를, 내 백성 이집트, 그리고 내 손의 일 앗수르, 그리고 내 유산 이스라엘이여 복되어 라 (이. 19:19-21).
위 구절에서 영적인 교회가 취급되어진다, 영적 측면이 “이스라엘”, 합리적 평면이 “앗수르”, 그리고 앎의 능력이 “이집트”이다; 이 세 평면이 이 교회의 지적인 것들을 구성한다. 그러므로 이 셋은 질서적으로 뒤이어진다; 그렇기 때문에 말해진다, “그 날에 이스라엘은 이집트와 앗수르와 더불어 세 번째 일 것이다,” 그리고 “내 백성 이집트, 그리고 내 손의 일 앗수르, 그리고 내 유산 이스라엘”라고 말해진다.
이사야서에서:
큰 나팔소리가 불어지는 날이 올 것이다, 그리고 앗수르의 토지에서 멸망할 준비가 된 그 들이, 이집트에서 버림받은 그들이 올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예루살렘의 거룩함의 산에서 여호와께 엎드려 절할 것이다 (이. 27:13).
이사야서에서:
그런고로 여호와께서 말하신다, 이집트의 노동자, 그리고 구스의 상인들, 세바의 장대한 자 들이 네게로 넘어 올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너의 것이 될 것이다; 그들은 네 뒤를 따를 것 이다, 그들은 네게 탄원할 것이다. 네 안에만 하느님은 계신다, 그리고 그밖에는 하느님은 없다 (이. 45:14).
“구스와 세바”는 지식들이다 (117, 1171항 참조). 스가랴서에서:
이집트가 왕 여호와 체바욷을 경배하러 예루살렘으로 올라 갈 것이다 (슥. 14:17, 18).
미가서에서:
나는 여호와를 바라본다, 나는 내 구원의 하느님을 기다린다; 내 하느님께서는 나의 말을 들어주신다; 네 성벽을 건축하는 날, 바로 이 날에, 그리고 그들은 앗수르로부터, 이집트의 성들로부터, 그리고 이집트로부터 강에 이르기까지 조차에서 올 것이다 (미. 7:7, 11, 12).
에스겔서에서:
그런고로 주 여호비께서 말하신다, 사십 년의 끝에서 나는 여기저기로 흐트러진 백성들로 부터 이집트를 모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이집트의 포로된 자를 다시 데려 올 것이다
(겔. 29:13, 14).
에스겔서에서:
잘 보라, 앗수르는 아름다운 가지들과 숲을 그늘지게 하고, 그리고 드높이 자란 레바논의 삼나무 였다, 그리고 그것의 가지는 뒤엉킨 큰 가지 였다; (강)물이 시내로 하여금 그것이 심긴 주변을 휘돌아 흐르게 하여 그것이 자라게 만들었다, 그리고 강물은 자기의 운하를 들판의 모든 나무들에게로 내보냈다; 그러므로 그것의 높이는 들판의 모든 나무들 보다 월 등히 컷다, 그리고 그것의 큰 가지들은 무성해졌다, 그리고 그것의 가지들은 많은 물로 인 해서 길게 뻩쳤다; 하늘의 모든 새들이 자기들의 둥지를 그것의 큰 가지들에 만들었다, 그 리고 그것의 가지들 아래에서 들판의 모든 짐승들이 새끼를 낳았다, 그리고 그것의 그늘 아래에서 모든 큰 나라들이 거주했다. 그리고 그것은 나무의 크기에서나 가지의 길이에서 나 공히 빼어났다, 그 이유는 그것의 뿌리가 물가에 있었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동산에 있 는 삼나무들도 그것을 보이지 못하게 할 수 없었다, 동산의 전나무도 그것의 큰 가지에 견 주지 못했다, 하느님의 동산에 있는 어떤 나무도 아름다움을 견줄 수 없었다. 나는 그것의 가지들을 무성하게 하여 그것으로 아름다웁게 만들었다, 그리고 하느님의 동산에 있던 에 덴의 모든 나무들이 그것을 부러워했다 (겔. 31:3-8).
천적 수준인 태고 교회가 여기서 묘사되는데, 특히 그 교회의 합리성, 그것에 의한 지혜와 총명의 품질에 관하여서 였다, 그 이유는 이 교회는 신성한 것들로부터, 고로 선 자체로부터의 진리들로부터 종속시키는 질서에서 아래를 둘러보았기 때문이다. “앗수르”와 “삼나무”는 합리성이다; “가지들 중에서 뒤엉킨 큰 가지”는 기억 속의 지식들이다; “강물과 물”은 영적인 선들이고, 이 선들 사이에 그것의 뿌리가 있었다; “그것의 가지들의 높이와 길이”는 그것의 확대됨이다; “하느님의 동산”은 영적인 교회이다; “에덴의 나무들”은 지각들이다. 이로부터와 이 앞에 있던 것으로부터 우리는 인간의 합리성의 품질과 앎의 능력을 신성한 진리들에 종속시키고, 신성한 진리들을 확증함으로 신성한 진리들을 섬길 때, 인간의 합리성과 아는 능력의 품질이 어떤 것인지 알 수 있다.
합리적인 것들과 기억 속의 지식들이 (신성한 것들을) 확증하는 수단이 되어 슬기로워짐을 섬겨야 한다는 것이 이스라엘의 아들들이 출애굽 할 때 이집트인들로부터 금, 은 집기들, 그리고 의복들을 차용하는 것에 의해 표현되고 의미되었다 (출. 3:22; 11:2; 12:35, 36). 이와 비슷한 내용들은 말씀의 다양한 구절들에서 그들은 물품, 집, 포도원, 올리브원, 그리고 나라로부터의 다른 것들을 소유해야 할 것이라고 말해짐에 의해 뜻해져 있다; 그리고 나라들로부터 취한 상급의 금과 은 역시 거룩히 되어가야 한다고 말해진다. 이사야서에서:
여호와께서 두로를 방문하실 것이다, 그리고 그녀(두로)는 그녀의 음행 삯을 되돌릴 것이 다, 그리고 지면의 얼굴 위에서 땅의 모든 왕국들과 매춘을 범할 것이다, 그리고 그녀의 상 품과 그녀의 음행 삯은 여호와에게 거룩함일 것이다; 그것은 쌓아두거나 따로 떼어두지 않 을 것이다, 그 이유가 여호와 앞에서 거주하는 그들에게 그녀의 상품은 배부를 때까지 먹 기 위해, 그리고 고대의 덮개를 위해 있을 것이다 (이. 23:17, 18).
“두로의 상품”은 지식들을 표시한다; 이것은 부정적 측면에 있는 이들에게는 음행 삯이다; 그러나 긍정적 측면에 있는 이들에게는 거룩한 것으로 있다. 이와 같은 것이 주님의 말씀에 의해서도 뜻해진다:
불의의 재물을 수단으로 네자신에게 친구를 만들어라, 그리하여 네가 실패할 때 그들이 영 원한 거처 안으로 너를 받아줄 것이다; 만일 네가 불의의 재물에서도 신실하지 않다면, 누 가 진정한 것을 네게 맡기겠느냐? (눅. 16:9, 11).

*************************************

창세기 제 21 장

성경: 창세기 21장

1. 그리고 여호와께서는 그분께서 말하셨던 그대로 사라를 방문하셨다. 그리고 그분께 서 이야기하셨던 바대로 사라에게 행하셨다.
2. 그리고 사라는 임신했고 하느님께서 그와 더불어 말씀하셨던 그대로 지정된 때, 그 의 노령에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낳았다.
3. 그리고 아브라함은 자기에게 태어난 그의 아들, 사라가 자기에게 낳은 아들의 이름 을 이삭이라 불렀다.
4. 그리고 아브라함은 그의 아들 이삭에게, 팔 일된 아들에게 하느님께서 그에게 명 령하셨던 대로 할례를 베풀었다.
5. 그리고 아브라함은 그의 아들 이삭이 그에게 태어났을 때 백 세된 아들이었다.
6. 그리고 사라가 말했다, 하느님께서 나를 위하여 웃음을 만드셨다. 듣는 모든 이 각 자가 나와 더불어 웃을 것이다.
7. 그리고 그녀가 말했다, 사라가 아브라함에게 아들들에게 젖을 빨릴 것이라고 누가 말했었을까? 왜냐하면 내가 그의 노령에 아들을 낳았기 때문이다.
8. 아이는 성장했다, 그리고 젖이 떼어졌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이삭에게 젖을 떼이는 그 날에 큰 잔치를 만들었다.
9. 그리고 사라는 이집트 출신 하갈의 아들, 그녀가 아브라함에게 낳아 준 아들이 조 롱하는 것을 보았다.
10. 그리고 그녀가 아브라함에게 말했다, 이 하녀와 그녀의 아들을 내쫓으라. 왜냐하 면 이 하녀의 아들이 내 아들과 더불어, 이삭과 함께 상속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11. 그리고 이 말은 아브라함의 눈에 깊은 낙담을 드리우게 했다. 그의 아들 때문이 다.
12. 그리고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말하셨다, 어린 아이 때문에, 네 하녀 때문에 네 눈에 낙담을 드리우지 마라. 사라가 너에게 한 모든 것, 그녀의 소리에 경청을 해 라. 그 이유가 이삭 안에서 네 씨라 불리울 것이기 때문이다.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13. 그리고 또한 나는 하녀의 아들도 나라로 만들 것이다. 그 이유는 그가 네 씨 이기 때문이다.
14. 그리고 아브라함은 아침에 일찍 일어났다. 그리고 빵과 물 한 병을 가지고 왔다, 그리고 하갈에게 주었다, 그리고 그것들을 그녀의 어깨에 놓고, 그리고 어린 아이 와 그녀를 내보냈다, 그리고 그녀는 나갔고, 브엘세바의 광야에서 배회하였다.
15. 그리고 물은 병으로부터 다 소비되었다, 그리고 그녀는 어린 아이를 덤불 중 하나 아래에 내던졌다.
16. 그녀는 자신 스스로 아이로부터 가서 그를 바라보고 스스로 있었는데, 화살이 미 치는 거리 만큼까지 물러 갔다. 그 이유가 그녀는 나는 아이가 죽는 것을 보고 싶지 않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녀는 그를 마주보고 앉았다. 그리고 그녀 는 목소리를 높혀서 울었다.
17.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아이의 소리를 들으셨다. 그리고 하느님의 천사가 하늘로부 터 하갈을 불렀다. 그리고 그녀에게 말했다, 하갈아 무엇이 너를 괴롭히느냐? 두 려워마라, 그 이유가 하느님께서는 저기 있는 아이의 소리를 들으셨기 때문이다.
18. 일어나라, 아이를 일으켜라, 그리고 그(him) 안에서 네 손이 강해져라. 그 이유가 나는 그를 큰 나라로 만들 것이기 때문이다.
19.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그녀의 눈을 여셨다, 그리고 그녀는 물 있는 우물을 보았다. 그리고 그녀는 가서, 병을 물로 채웠다, 그리고 아이에게 마시라고 주었다.
20.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아이와 함께 계셨다, 그리고 그는 성장했다, 그리고 그는 광 야에서 거주했다, 그리고 그는 활을 쏘는 자가 되었다.
21. 그리고 그는 바란의 광야에서 거주했다. 그리고 그의 어머니는 그에게 이집트로부 터 아내를 데려왔다.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22. 그리고 그 때가 당도했는 바, 아비멜렉, 그리고 그의 군대 장군 비솔이 아브라함 에게 말하기를, 하느님은 네가 하는 모든 것에서 너와 함께 있다.
23. 그리고 지금 당신은 나와 내 아들과 내 손자에게 거짓되지 않을 것임을 당신의 하느님을 두고 나에게 맹세해 달라. 내가 당신에게 했었던 친절함에 따라서 당신 은 나에게, 당신이 체류하는 토지에게 베풀어라.
24. 그리고 아브라함은 말했다, 맹세하리다.
25. 그리고 아브라함은 아비멜렉의 종들이 강취한 물 있는 샘 때문에 아비멜렉을 책 망했다.
26. 그리고 아비멜렉이 말했다. 나는 누가 이 말을 했었는지 모른다. 그리고 네가 나 에게 말하지도 않았고 나는 그 일에 대해 들은 적도 없으나 오늘에야 알게 되었다.
27. 그리고 아브라함은 양떼와 목축을 가져와서 아비멜렉에게 주었다, 그리고 그들 둘 은 언약을 세웠다.
28. 그리고 아브라함은 어린 암양 일곱 마리를 따로 놓았다.
29. 그리고 아비멜렉은 아브라함에게 말했다, 당신이 따로 떼어 놓은 이 어린 암양 일 곱 마리는 무엇이냐?
30. 그리고 그는 말했다, 이 어린 암양 일곱 마리를 내 손으로 가져다가 당신에게 주 는 이유는 이것이 내가 이 샘을 팟다는 증거이기 때문이오.
31. 그러므로 그는 이곳을 브엘-세바라 불렀는데, 그 이유는 그들 모두가 맹세했기 때문이다.
32. 그리고 그들은 브엘-세바에서 언약을 세웠다. 그리고 아비멜렉은 일어났다, 그리 고 그의 군대 장군 비솔도 일어났다. 그리고 그들은 불레셋 사람들의 땅으로 되 돌아 갔다.
33. 그리고 그는 브엘-세바에 작은 숲을 심었다. 그리고 그는 거기서 영원하신 하느 님의 이름을 불렀다.
34. 그리고 아브라함은 불레셋 사람의 토지에서 많은 날 동안 체류했다.

각 절의 내적 의미

1절. 그리고 여호와께서는 그분께서 말하셨던 그대로 사라를 방문하셨다. 그리고 그분께서 이야기하셨던 바대로 사라에게 행하셨다.

여호와께서 사라를 방문하셨다. 이는 신성의 영적 (평면) 안에 신성의 천적(평면)이 현존함을 의미하는데, 이는 “여호와”의 의미가 신성한 천적인 것, 즉 신성한 선, 또는 있음(Esse, Being) 자체이심으로부터 분명해진다. 이는 그것이 사랑과 자비로부터 있기 때문에 선 자체인 것이다; “방문하심”은 현존하심을 의미하고; “사라”의 의미가 신성의 영적 (평면), 즉 신성한 진리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분이 말하신 그대로. 이는 그분이 지각하신 그대로를 의미하는데, 말씀의 역사적 부분에서 “말하심”은 지각하는 것을 뜻함으로부터 분명해진다.

그리고 여호와께서 사라에게 행하셨다. 이는 주님의 신성한 천적 (평면) 안에서 그분의 영적 (평면)이 하나가 되는(unition) 상태를 의미하는데, 이는 “행하심”이 주님의 신성에 관련하여 서술될 경우, 결과의 총 합계, 즉 상태임으로부터; 그리고 “여호와”와 “사라”의 의미로부터 분명해진다. 주님의 천적 (평면) 안에서 그분의 영적 (평면)이 하나가 되는 상태에 주목해보면, 이는 선과 진리의 참 결혼 자체이고, 이로부터 천국의 결혼이 근원된다; 그리고 이 결혼은 천국들과 땅 위에 있는 주님의 왕국이다. 이런 이유로 해서 주님의 왕국은 말씀에서 “결혼”이라 아주 자주 불리우고 결혼에 비교한다. 모든 것은 주님 안에서 신성한 선과 진리의 결혼으로부터, 신성한 진리와 선의 결혼으로부터 근원되는데 이는 비밀하다. 한층 더 비밀함이 본문의 말씀, 즉 “여호와께서는 그분이 말하신 그대로 사라를 방문하셨다”, 그리고 “그분이 이야기하신 바 그대로 행하셨다”에 담겨 있지만 그것들이 말로 표현해질 수 없기에 우리는 그것을 공언할 수는 없다; 그 이유는 이 구절이 주님의 신성이 그분의 인간과 하나가 되심의 참 상태 자체를 함유하기 때문에서 이다. 이것의 외관은 천국의 빛들을 수단으로 천사들 앞에 표현되어지고, 말로 나타낼 수 없는 표현들을 수단으로 예증되어지고 있다; 이 표현들은 인간들 앞에는 표출되어질 수 없는데, 그 이유는 이 비밀함을 담을만한 세상의 빛에 속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 이 비밀함을 더 묘사하려들수록 우리는 더욱 희미한 수준에 빠져들고 만다.

그분이 이야기하신 그대로. 이는 그분이 생각하셨었던 그대로를 의미하는데, 이는 “이야기하심”의 의미가 생각하다임에서 분명해진다. “여호와께서 말하셨던 그대로”에 의해 의미된 지각은 신성한 천적 (평면)으로부터 였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이야기 하심”에 의해 의미된 생각하심은 신성한 영적 (평면)을 통하여 신성한 천적 (평면)으로부터 였다; 이는 글자 의미에서일 경우, “그분께서 말하셨던 그대로”와 “그분이 이야기하셨던 그대로”인 바, 외관상으로는 반복된 말인 듯 하다. 그러나 이것이 신성한 천적 (평면)으로부터 지각하시는 것과 신성한 영적 (평면)을 통하여 신성한 천적 (평면)으로부터 생각하시는 것임은 세상의 빛에 속하는 여하한 것들을 수단으로 하는 최고로 계발된 납득력에 조차 와닿지 못한다. 이런 대목은 이 구절 외의 말씀에 역시 얼마나 무한함 안에 있을 것인지 어림하게 해준다. 인간과 더불은 경우는 이렇다: 선으로부터서 인간은 지각하고, 진리부터서 인간은 생각한다. 선은 사랑과 그것의 애착들로부터 있다, 결과적으로 그것으로부터 지각이 있다; 그러나 진리는 신앙으로부터 있다, 결과적으로 그것은 생각으로부터 있다. 전자는 말씀의 역사적 부분들에서 “말함(saying)” 안에 의미되어져 있고, 후자는 “이야기하심(speaking)”에 의해 의미되어 있다. 그러나 “말함” 만이 발견될 경우, 때로는 지각함을, 때로는 생각함을 의미하는데, 그 이유는 “말함”은 이 둘을 모두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2절. 그리고 사라는 임신했고 하느님께서 그(him)와 더불어 이야기하셨던 그대로 지정된 때, 그(his)의 노령에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낳았다.

“임신하였고 낳았다”란 신성한 합리성은 주님의 신성한 영적 (평면)이 그분의 신성한 천적 (평면)과 하나가 됨으로부터 있으셨고(Was) 출시되었다(Came forth)를 의미하는데, 이는 “임신함과 낳음”의 의미로부터 분명해진다. 말씀의 내적 의미에서일 경우, 영적인 것들과 천적인 것들 외에 다른 의미를 지닌 임신과 낳음은 없다. 그러나 여기서 취급된 주제는 주님의 합리성이 신성으로 만들어지심이다; 그리고 그분, 즉 주님에 관련하여 있음과 출시됨이 집중적으로 서술되어지고 있다; 그 이유가 그분(주님) 만이 있음과 출시됨이시기 때문이다. 있음과 출시됨(밖으로 나옴)에 주목해보면, 이 둘은 마치 매한가지인 듯 비쳐질 수 있으나 똑같지는 않다. 모든 인물과 모든 것은 그것의 있음을 임신으로부터 가지고, 출생으로부터 그것의 출시됨을 가진다. 임신이 츨생에 앞서 있듯, 있음은 출시됨에 앞서 있다.
혼(soul)은 인간의 있음 자체이고, 감각적 능력, 또는 육체적 능력은 있음이 출시됨이다, 그 이유는 전자가 후자 안에서 밖으로 나오기 때문이다. 천적 (평면)의 사랑과 영적 (평면)의 사랑은 거듭나아져가는 인간 속의 있음 자체이다; 그리고 인간의 합리적 능력(합리성)과 감각적 능력(감성)이 이 두 사랑에 물들여질 때, 그분의 출시됨이 있다. 이리하여 그분의 있음과 출시됨은 우주에 있는 각각 그리고 모두와 더불어 있다. 그 이유가 있음을 지니지 않은 임신, 출시됨을 지니지 않은 출생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대목은 철학적 용어인 원인과 결과로도 말해볼 수 있다. 즉 모두 각각의 결과는 그것의 원인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모두 각각의 원인은 그것의 목적을 가지고 있다. 목적은 원인 속의 있음이고, 원인은 목적의 출시됨이다. 같은 방법에서, 원인은 결과의 있음, 그리고 결과는 원인이 출시됨이다.

사라가 아브라함에게. 이는 신성의 영적 (평면)이 신성의 천적 (평면)과 더불어 하나가 됨으로부터를 의미하는데, 이는 사라에 의해 표현됨이 신성의 영적 (평면), 또는 신성한 진리이다로부터 분명해진다; 그리고 아브라함에 의해 표현됨이 신성의 천적 (평면), 또는 신성한 선이다로부터도 분명해진다.

아들을. 이것이 신성한 합리성을 의미한다는 것은 “아들”의 의미로부터 알게된다. 말씀의 내적 의미에서, “아들”은 진리를 의미한다; 그리고 진리가 합리성의 제 1 순위에 해당하는 바, 합리성 역시 “아들”에 의해 의미되어진다; 그러나 여기서는 “아들”인 이삭이 표현하는 합리성 안에는 선이 중심적 지위에 있는 바, 신성한 합리성이 의미되어진다. 이 후 이 사항은 더 취급될 것이다.

그의 노령에. 이는 인간이 벗겨져야 하는 날들이 다 채워지는 때를 의미하는데, 이는 “노령”의 의미가 인간이 벗어지고 신성이 입혀지는 때의 상태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 그 이유가 사라가 아들을 낳을 당시 아브라함은 백 세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숫자 100에 의해 하나가 되기에 충분해진 상태가 의미되어진다. 이는 5절에서 더 설명된다.

지정된 때에. 이는 합리성을 받는 것이 이러하였다를 의미하는데, 이는 “때, 시간”의 의미에서 알게 된다. 인간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동안 필수적으로 있어져야 하는 두 가지 것이 있는데, 그것은 자연에 적절한 것, 즉 공간(space)과 시간(time)이다. 그러므로 공간과 시간 안에서 사는 것은 세상에서, 또는 자연 안에서 사는 것이다. 그러나 다른 삶에서는 하등 중요하지 않다. 실지로 영들의 세계에서는 그것들이 어느 정도 중요한 듯 나타나는데, 그 이유는 육체를 떠난지 얼마 안된 신참내기 영들이기에 그들에게는 자연적인 것들에 관한 것을 잊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이 거기에는 공간과 시간이 없다는 것, 그 대신 상태(state)가 있다는 것; 그리고 다른 삶에는 상태들이 자연에 있는 공간과 시간에 상응된다는 것; 즉 공간은 있음에 관한 것을, 시간은 출시됨에 관한 것을 말한다는 것을 지각하는데 그리 긴 시간이 요구되지 않는다.
이로부터 누구나 알 수 있는 것은 인간이 세상에 사는 동안 다른 삶 속의 것들과 신앙 속의 많은 비밀함들에 관하여 무슨 종류의 생각(idea)을 가지게 될 것인지에 대해서이다; 즉 그는 그것들에 관해서 세상에 있는 것들, 즉 감각적인 것들을 수단으로 납득할 때까지 기꺼이 믿으려 하지 않는다는 것; 그 이유는 그가 시간과 공간에 관한 생각을 벗어던진다면, 아예 시간과 공간 자체를 없다고 한다면, 필시 자기는 절대적으로 아무 것도 아니다고 상상하는 것이 대두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혼동적이고 납득할 수 없는 것 빼고는 그가 생각하고 느끼는 것에서 남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고 결론맺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이 경우는 정확히 그 거꾸로이다. 천사의 삶은 이런 본성 속에서 모든 것에서 가장 슬기롭고 최고로 행복해 있다.
이것은 말씀의 내적 의미에서 “년령(ages)”이 나이를 의미하지 않고 상태들을 의미하는 이유이다. 이 구절의 “노령” 역시 노령을 뜻하지 않는다. 마찬가지 방법에서 숫자들은 숫자들을 뜻하지 않고, 어떤 특수한 상태, 예를 들면, 100세라는 숫자인데, 이에 관한 설명은 뒤로 미루겠다. 이로부터 우리가 지금 알 수 있는 바, “지정된 때”에 의해서는 합리성이 받아지는 때의 상태가 의미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취급되는 특별한 주제에 주목하면, 즉 신성한 합리성은 주님의 신성한 영적 평면이 그분의 신성한 천적 평면과 하나가 됨으로부터 있었고 출시된다는 것, 이것은 인간이 벗어지도록 날들이 다 채워진 때, 그리고 합리성이 받아지는 때에서 있었다는 것에 대해서 이다. 이 사항은 이미 앞 절에서 살펴본 것, 즉 사라가 임신하고 아브라함의 노령에 지정된 때에 아들을 낳았다는 것의 내적 의미에서 의미된 것들이다. 이로 우리가 알게 되는 것은, 인간은 합리성의 가장 깊은 안쪽에서 시작한다는 것; 그리고 주님께서는 인간 본질을 신성 본질에, 그리고 신성 본질을 인간 본질에 합일하심으로 계속적으로 진보를 이루어가셨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것은 그분 자신의 능력에 의해서, 계속적인 시험과 싸우심과 승리하심에 의해서 이었다; 그리고 그분께서는 어머니쪽 인간의 모든 것을 완전히 몰아내실 때까지 이었다; 그리하여 그분은 이 구절에 포함된 바에 따라 합리성에 관하여 그분의 인간을 신성으로 만드셨다. 그러므로 벗으시어야 하는 인간을 위해 날들을 다 채우시고, 합리성에 의해 받으시는 대목에 관해 이해되었을 줄로 안다.
이런 사항을 거듭나는 이들 안에서 거행되는 것들로부터도 이해될 수 있다. 사랑으로부터인 천적인 것들과 신앙으로부터인 영적인 것들은 주님에 의해서도 일시에 이식되지 않고 점진적, 계속적으로 거듭나는 이들에게 이식되어진다; 그리고 그것들을 수단으로 인간의 합리성이 받을 수 있게 될 때, 처음으로 그는 거듭나아지는데, 대부분 그가 정복하는 시험들을 수단으로 한다. 이런 것들이 거행될 때, 그는 옛 인간을 벗어내고 새 인간을 입는 날들이 채워지는 것이다.

하느님께서 그에게 이야기 하셨던 그대로. 이는 그분이 뜻하셨던 그대로를 의미하는데, 이는 “이야기 하심”의 의미가 생각하심이다에서 알게 된다; 그러나 여기서는 이것이 뜻하신 것을 의미하는데, 그 이유는 “하느님께서 이야기하셨던 그대로”라고 말해져서 신성 차원에서 생각하는 것은 곧 뜻해짐이기 때문이다.

3절. 그리고 아브라함은 자기에게 태어난 그의 아들, 사라가 자기에게 낳은 아들의 이름을 이삭이라 불렀다.

아브라함은 그에게 태어난 그의 아들의 이름을 불렀다. 이는 합리성의 품질이 신성임을 의미하는데, 이는 아브라함이 주님의 신성한 천적 (평면)을, 즉 신성한 선을 표현한다에서 분명해진다. 이는 앞에서 여러번 언급했다; 그리고 “이름을 부름”의 의미가 품질이다로부터; 그리고 그의 “아들”의 의미가 합리성이다로부터; 또한 그가 “그에게 태어남”의 의미가 신성으로부터 출시됨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러므로 명백해지는 바, “아브라함이 자기에게 태어난 그의 아들의 이름을 불렀다”란 합리성의 품질이 신성이다는 것이다. 이 몇 안되는 단어들로부터 내적 의미 안에 있는 이들을 위해서는 세 가지 비밀함들이 빛을 내고 있다: 첫째, 주님의 신성한 인간은 신성 자체로부터 출시되었다는 것이다. 둘째로, 주님의 신성한 합리성은 여호와로부터 임신되었을 뿐만 아니라 태어나기도 했다는 것, 그런고로 주님의 신성한 인간 측면에서 그분은 “하느님의 아들”, 그리고 “독생자”라 불리우신다는 것이다 (요. 1:14, 18, 50; 3:16, 18, 35, 36; 5: 19-27; 6:69; 9:35; 10:36; 11:27; 14:13, 14; 17:1; 20:31; 이외 다른 복음서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셋째, 주님의 신성한 인간은 여호와의 “이름”, 즉 그분의 품질이시다는 것이다 (요. 17:28 참조).

사라가 자기에게 낳은 (자). 이는 신성의 천적 (평면)과 하나가 된 신성한 영적 (평면)으로부터 있음과 출시됨을 의미하는데, 이는 “낳음”의 의미가 출시됨이다로부터 분명해진다; 그리고 출생은 임신을 포함하는 말이고, 출생, 또는 출시됨은 신성한 영적 (평면)으로부터 있고, 이 둘이 지금 하나가 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서의 “낳음”은 있음과 출시됨 모두를 의미한다; 또한 사라가 신성한 천적 (평면)과 하나가 된 신성한 영적 (평면)을 표현한다로부터도 분명해진다. 이런 사항들은 이 세상의 것들 가지고 묘사하기에는 너무나 벅찬 깊이의 비밀함들일 뿐이다. 이런 사항들은 천사의 마음들을 위해 있는 사항아고, 그들에게 이런 사항들은 말로 나타낼 수 없는 것들을 가지고 천국의 빛 안에서 표출되어지고 있다.

이삭. 이는 신성한 합리성을 의미하는데, 이는 아브라함, 이삭, 야곱에 관해 앞에서 말해진 대목으로부터 분명해진다; 즉 아브라함은 최고인 신성, 이삭은 신성한 합리성, 야곱은 그분의 신성한 자연 (평면)을 표현한다; 이는 이삭이 다루어지는 대목에서 더 살필 것이다.

4절. 그리고 아브라함은 그의 아들 이삭에게, 팔 일 된 아들에게 하느님께서 그에게 명령하셨던 대로 할례를 베풀었다.

아브라함은 그의 아들 이삭에게 할례를 베풀었다. 이는 합리성의 순수해짐을 의미하는데, 이는 “할례가 베풀어짐”의 의미가 순수해지는 것이다로부터; 그리고 “이삭”이 신성한 합리성을 표현한다로부터 분명해진다.
주님의 첫 합리성은 여느 사람들처럼 지식들을 수단으로 태어나졌다는 것은 이 합리성을 표현한 이스마엘의 출생에서 이미 서술하였다. 이 합리성이 지식들, 고로 감각적 측면에 속하는 것인 외적 경로를 수단으로 태어나졌고, 여는 다른 사람과 다를 바 없기에, 그 자체로 볼 때 그 합리성은 바깥쪽 세계로부터 많은 것들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그 이유가 그 세계로부터 합리성 속의 생각들이 획득되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이것은 어머니로부터 그것의 유전성을 지니고 있다. 이런 세상적인 것들과 유전성을 그분은 그분의 합리성으로부터 계속적으로 축출해나셨고, 결국 신성을 받기에도 충분한 지경까지 축출해나가심을 계속하셨다. 그다음에 가서야 주님의 신성한 합리성이 태어나졌는데, 이것이 이삭에 의해 표현되고 있다; 그러나 어쨌든 이것은 첫 합리성의 경우 같이 외적 경로, 즉 감각적 측면에 의해서가 아니고, 내적인 경로, 즉 신성 자체로부터 였다. 이것은 일시에 행해지지 않고 계속적으로 있었는 바, 이것이 순수해졌다는 것, 그리고 연속적으로 순수해졌다는 것이 “아브라함이 팔 일 된 아들, 그의 아들 이삭에게 할례를 베풀었다”에 의해 의미되어지고 있다. 주님께서 그분의 합리성을 계속적인 단계들에 의해 신성으로 만드셨다는 것, 그리고 계속적으로 순수해지게 하셨다는 것은 요한 복음서에서도 분명해진다:
예수께서 말하셨다, 아버지, 당신의 이름을 신성되게 하소서. 그때 천국으로부터의 음성이 거기로 왔다: 나는 모두 신성되게 해왔고, 다시 신성화할 것이다 (요. 12:38).
신성화하는 것은 신성으로 만드는 것임은 이미 살폈다.
고대 교회에서, 할례에 의해 표현되고 의미된 것은 인간은 자기를 사랑함과 세상을 사랑함으로부터 순수해져야 하고, 이 순수해짐은 영속적 단계들을 수단으로 계속적으로 이루어져 간다는 것 이상의 다른 것은 없었다; 특별히 그가 새로운 인간으로 태어나졌을 때, 즉 그가 거듭나아져 가고 있었을 때가 이에 해당될 것이다; 그 이유가 주님께서는 내적인 경로를 수단으로, 즉 양심 속의 선을 수단으로 안으로 흘러드시고, 계속적으로, 유전적인 것과 실제의 악 모두로부터 달라붙은 것들을 분리하시기 때문이다.

팔일 된 아들. 이는 시작함과 계속함을 의미하는데, 이는 “팔 일째 날”에 그들이 할례를 베풀었는바, 이 날에 시작함, 고로 계속됨도 의미한다.

하느님께서 그에게 명령하신 그대로. 이것은 신성한 질서에 따라서를 의미하는데, 이는 “하느님이 명하심”, 또는 그분의 가르침들로부터의 의미로부터 분명해진다. 하느님의 가르침들, 또는 하느님이 명령하신 것들은 일반적, 특수적 모두에서 신성한 질서인 모든 것들이다; 그러므로 신성한 질서는 하느님의 영구적인 가르침밖에 더 아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가르침에 따라 산다는 것, 그리고 하느님의 가르침 안에서 사는 것은 신성한 질서에 따라 사는 것, 그리고 신성한 질서 안에서 사는 것이다. 모든 남성이 출생 후 팔 일째에 할례를 받는 것은 신성한 질서에 따라서 였다; 이 할례가 어떤 쓸모가 있다거나 할례받은 자가 할례받지 않은 자에 앞서 하느님의 왕국에 입장하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표현 교회에서 이와 같은 의식은 심정의 순수해짐과 상응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상응은 주님의 신성한 자비로부터 다른 장소에서 이야기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심정, 즉 인간의 내면들이 탐욕들의 악으로부터, 그리고 이 악에서 파생된 몽상들의 거짓들로부터 점진적, 계속적으로 순수해져야 하는 것은 신성한 질서로부터 이다. 심정의 순수해짐에 관련되는 가르침들은 일반적, 특수적 모두에서 신성한 질서로부터의 모든 것들이다. 그러므로 인간이 이런 가르침들 안에서 사는 만큼에서 그는 신성한 질서 안에서 사는 것이다; 그리고 그가 이 안에서 사는 만큼에서, 그의 이성과 기억의 모두에서 그는 천국들에 있는 그분으로부터 있는 질서에 따라 주님에 의해 배치되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로부터 인간은 가장 큰 천국에 상응하는 작은 천국이 되어 간다.

5절. 그리고 아브라함은 그의 아들 이삭이 그에게 태어났을 때 백 세된 아들이었다.

아브라함은 백 세 된 아들이었다. 이는 하나가 되심의 상태가 가득했음을 의미하는데, 이는 “100”의 의미가 충만한 것임에서; 그리고 “햇수”의 의미가 상태를 의미함에서 분명해진다; 여기서의 경우, 하나가 되심의 상태이다. 주님의 신성이 그분의 인간과 더불어, 또는 주님의 신성이 그분의 합리성과 더불어 하나가 되심의 충만된 상태가 무엇인지에 관하여는 우리의 납득력에 잘 와닿게 말해지기는 너무 힘들다. 그 이유가 인간은 합리성의 가장 깊은 안쪽에서 시작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의 경우, 그가 개혁되고 거듭나질 때, 충만된 상태라 불리우는 것을 가지고 예증해볼 수 있다.
인간은 성년의 나이가 찰 때까지 거듭나질 수 없다는 것은 대체로 수긍하는 대목이다; 그 이유는 성년이 되어야 처음으로 그의 이성과 판단력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어, 그는 주님으로부터 선과 진리를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가 이 상태 안으로 오기 이전, 그는 선과 진리의 씨를 받기 위한 지면(바탕)이 그를 섬길 수 있도록 그에게 은근히 주입되는 방식으로 주님에 의해 준비되어진다; 이 준비는 순진과 선행으로부터의 많은 상태들, 또한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들, 그리고 그것들로부터 파생되는 많은 생각들이다. 이 준비함은 그의 거듭남이 개시되기 이전 수년 동안 계속 되어진다. 인간이 이런 사항들을 흡수해가서 준비가 되어졌을 때, 이때의 그의 상태를 두고 충만되어 있다라고 말해진다; 그 이유가 그의 내면들이 그때서야 주님으로부터의 선과 진리를 받기 위해 잘 배열되어져 있기 때문이다. 거듭나기 이전 거듭남을 위해 주님에 의해 인간에게 수여되어 그의 거듭남의 수단이 되는 모든 것들이 “리메인스(remains)” 라고 불리우고, 이것이 말씀에서 숫자 10에 의해 의미되어져 있다; 그리고 “100”에 의해서는 거듭남을 위한 상태가 충만해진 때가 의미된다.
위의 설명이 주님 안에서 그분의 인간이 신성과 더불어 하나가 되심의 충만된 상태에 의해 의미되는 것에 관한 예증으로 적절했을지 모른다. 주님의 충만된 상태는 그분 자신의 힘으로부터, 시험들과의 전투와 승리하심을 수단으로, 그리고 신성한 지헤와 총명의 힘들에 의해 그분께서는 그분의 인간 안에, 즉 그분의 합리성 안에 신성 자체와 하나가 되실 수 있을 만큼 많은 신성을 휙득하셨다. 이런 상태가 표현되어지도록 하시기 위해 아브라함은 가나안의 토지에서 수년 동안 거주했을 지라도 그가 백세가 되기 까지 이삭이 그에게 태어나지 않은 채로 지나가게 하셨던 것이다. 이상의 내용들이 아브라함의 나이였던 숫자 “백 년” 안에 포함된 비밀함들이다.
숫자 “100”이 충만된 상태를 의미하는 것은 아래 인용 구절에서도 분명해질 것이다. 이사야서에서:
그 때부터 (며칠 동안 만 살다가 죽는) 날들의 유아는 더 이상 있지 않을 것이고, 자기 햇 수를 채우지 못한 채로 죽는 노인도 없을 것이다; 그 이유는 어린이는 백세의 아들로 죽을 것이고, 백세의 아들인 죄인은 저주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 65:20).
위에서 “100”은 충만한 것을 분명하게 표시하고 있다; 그 이유가 말해지기를, 날들의 유아, 자기 햇수를 채우지 않은 노인은 더 이상 있지 않다고, 그리고 백세된 어린이와 죄인이 말해지기 때문이다; 즉, 그의 상태가 충만해진 때이다.
마태복음서에서: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을 떠난 모두 각각의 사람, 또는 형제를, 또는 자매를, 또는 아버지를, 또는 어머니를, 또는 아내를, 또는 어린이를, 또는 토지들을 떠난 이들은 백 배로 받을 것 이고, 영원한 생명을 상속받을 것이다 (마. 19:29; 막. 10:29, 30).
위에서 “백 배”는 충분한 것을 표시한다; 또는 “선한(후한) 분량, 눌러서, 흔들어서, 넘치도록 (달아서 주는 분량)”(눅. 6:38)이다.
누가복음서에서:
그리고 다른 씨가 좋은 땅 위에 떨어졌다; 그리고 싹이 올랐을 때, 그것은 백 배의 결실을 가져왔다 (눅. 8:8; 마. 13:8, 23; 막. 4:20).
위에서도 “100”은 충분한 것을 표시하는데, 이것을 의미하지 않으면 아마 이 숫자가 언급되지도 않았을지 모른다. 같은 의미에서 주님께서 말하신 채무자에 관한 비유에서 이야기 하신다, 즉 “기름 백 말(baths)”, 그리고 “밀 백 석(cors)”을 빚졌다 이다 (눅. 16:5-7). 숫자 “1000”의 경우도 이와 비슷한데, 이 숫자에 관해서는 창. 20:16 을 참조하기 바란다.

이삭 그의 아들이 그에게 태어났을 때. 이것은 주님의 합리성이 신성으로 만들어진 때를 의미하는데, 이는 “태어남”의 의미가 출시됨이다로부터; 그리고 “이삭”의 표현이 신성한 합리성이다로부터 분명해진다. 신성으로 만들어진 때가 “아브라함에게 태어남”이라 말해진다; 3절에서도 역시 말해진다: “아브라함은 자기에게 태어난 그의 아들의 이름을 불렀다.”

6, 7절. 그리고 사라가 말했다, 하느님께서 나를 위하여 웃음을 만드셨다. 듣는 모든 이 각자가 나와 더불어 웃을 것이다. 7 그리고 그녀가 말했다, 누가 사라가 아들에게 젖을 빨릴 것이라고 아브라함에게 말했었을까? 왜냐하면 내가 그의 노령에 아들을 낳았기 때문이다.

사라가 말했다. 이는 신성의 영적 (평면)으로부터의 지각을 의미한다는 것, 이는 “말함”이 지각하다를 의미함으로부터; 그리고 사라가 신성의 영적 (평면), 또는 신성한 진리를 표현한다로부터 분명해진다.

하느님께서 나를 위하여 웃음을 만드셨다. 이는 천적 진리에 대한 애착을 의미하는데, 이는 “웃음”이 진리에 대한 애착임에서; 그리고 “하느님께서 만드심”이 그것이 천적 (평면)으로부터 있다라는 말씨로부터 알려진다.

듣는 모든 이 각자가 나와 더불어 웃을 것이다. 이는 진리에 대한 애착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은 천적 진리에 대한 애착을 가질 것이다를 의미하는데, 이는 “듣다”와 “웃다”의 의미로부터 분명해진다. 말씀에서 “듣는” 것은 애착으로부터 있는 것을 서술하나, “보는” 것은 생각으로부터 있는 것을 서술한다; 이는 말씀의 대단히 많은 구절들로부터 분명해지는데, 이것 역시 상응성으로부터이다. 천적 진리에 대한 애착이 여기서 다루어지는 바, “듣는 모든 이 각자”라고 말해지고, 이를 수단으로 애착으로부터 있는 모든 것들이 의미된다. “웃다”는 진리에 의해 감명받아지는 것, 즉 진리에 대해 애착을 가지는 것을 표시한다.

그리고 그는 말했다. 이것은 생각함을 의미하는데, “말하다”가 지각하는 것, 또한 생각하는 것을 의미함에서 알게 된다.

사라가 아브라함에게 아들들에게 젖을 빨릴 것이라고 누가 말했었을까? 이는 주님께서 그분 자신의 능력으로 신성에 인간을 심으셨음을 의미한다. 이는 아브라함, 그리고 사라가 표현하는 것으로부터, 그리고 “젖을 빨림”과 “아들들”의 의미로부터 알게 된다. 아브라함이 신성한 선을, 그리고 사라가 신성한 진리를 표현하는 것은 이미 살핀 바 있다. “젖”은 천적인 근원으로부터의 영적인 것, 또는 선으로부터의 진리를 표시한다; 그리고 “젖을 빨리는” 것은 그것을 심는 것이다. “아들들”이 진리들이다는 것, 여기서는 합리성 안에 있는 것들인데, 이는 “아들들”의 의미로부터 알려진다. 위의 사항들이 내적 의미에서 주님이 그분 자신의 능력에 의해 신성 안에 인간을 심으셨다를 의미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신성한 진리는 신성한 인간과 같은 말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브라함에게 아들들에게 젖을 빨린다”라고 말해질 때, 이 의미는 신성 안에 인간을 심으셨다이다; 그리고 이 인간은 주님의 인간이었던 바, 그분은 이것을 그분 자신의 능력으로 이루셨다. 이런 사항들은 우리의 이해력에 더 명료해지도록 설명을 하기는 어려운 점이 대두될 수밖에 없다. 아마 설명을 위해 많은 단어들을 사용한다면, 필시 더 불분명해질 것이라 사료된다; 그 이유가 이런 사항들은 신성한 것들이어서 천적이고 영적인 것들에 의해 천사들 앞에서만 표출되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만일 이것들이 보다 승강된 문체로 인간들 앞에 표출되어진다면, 그것들은 인간이 가진 육체적, 물질적인 것 안으로 추락될 것이 자명하다.
우리에게 더 알려지는 것은, 주님의 신성한 합리성이 처음 출생되셨을 때의 말들, 즉 “하느님께서 나를 위하여 웃음을 만드셨다; 듣는 모든 이 각자가 나와 더불어 웃을 것이다; 그리고 그녀는 말했다, 사라가 아들들에게 젖을 빨릴 것이라고 누가 아브라함에게 말했었을 것인가?”에 주님의 합리성의 품질에 관한 것이 묘사되어져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고대인의 관습에 따랐기 때문인데, 그들은 아이가 출생했을 때, 출생 때의 상태의 의미가 이름에 주어졌기 때문이다. 아브라함 당시에도 이런 상태로 묘사했었다; 이런 경우는 마치 가인이 이브와 아담에게 출생할 때 (창. 4:1); 셋이 그들에게 출생한 때 (창. 4:25); 노아가 라멕에게 출생한 때 (창. 5:29); 에서와 야곱이 이삭에게 출생한 때 (창. 25:25, 26); 열 두 아들들이 야곱에게 태어난 때 (창. 29:32-35; 30:6, 8, 11, 13, 18, 20, 24; 35:18); 베레스와 세라가 다말에게서 출생한 때 (창. 38:29, 30); 므낫세와 에브라임이 요셉에게 태어난 때 (창. 41:51, 52); 게르솜과 엘리에셀이 모세에게 출생한 때 (출. 2:22; 18:4)에도 있었다. 이 모두가 표현하는 것, 그들이 내적 의미에서 의미하는 것이 주어진 이름에 추가되어 묘사 안에 포함되어져 있다; 이삭이 표현하는 것도 마찬가지 경우이다. 이름에 포함된 것은 이런 간략한 설명으로부터 어느 (낮은) 수준에서는 분명해지나, 더 깊은 비밀들은 여전히 내부에 감추여 있다; 그 이유가 그것들은 신성한 것들이어서 이것은 어떤 표현 어구로도 시실상 나타내질 수 없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내가 그의 노령에 아들을 낳았기 때문이다. 이는 (이삭의) 출생이 날들이 충만해졌을 때 있어졌음을 의미하는데, 이는 2절과 거의 같은 단어가 반복되므로 2절을 참조하면 될 것이다.

8절. 아이는 성장했다, 그리고 젖이 떼어졌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이삭에게 젖을 떼이는 그 날에 큰 잔치를 만들었다.

아이는 성장했다. 이는 주님의 합리성이 더욱 완전해지심을 의미하는데, 이는 “성장함”의 의미가 완전해져 감으로부터; 그리고 “아이” 또는 “아들”의 의미가 주님의 신성한 합리성이다로부터 분명해진다.

그리고 젖이 떼어졌다. 이는 인간적 합리성일 뿐인 것과는 분리됨을 의미하는데, 이는 “젖을 뗌”이 분리되어지는 것, 마치 유아가 자기 어미의 가슴으로부터 분리되는 것 같기 때문이다. 인간적인 합리성이 분리되는 묘사는 하갈의 아들이 집에서 내쫒기는 대목에서 더 묘사되고 있다.

아브라함은 큰 잔치를 만들었다(베풀었다). 이는 함께 거주함과 합일을 의미하는데, 이는 “잔치”의 의미가 함께 거주함이다로부터; 여기서의 경우 합일 또한 의미함에서 분명해진다. 그 이유는 주님에 관해서, 즉 그분의 인간이 그분의 신성에 하나가 되심, 그리고 그분의 신성이 그분의 인간에 하나가 되심이 다루어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합일이 취급되기에 “큰 잔치”라고 말해지고 있다.

그가 이삭에게 젖을 떼게 한 그 날에. 이것이 분리함의 상태를 의미하는데, 이는 “날”이 상태를 의미함으로부터; 그리고 “젖을 떼임”이 분리시킴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 장의 1절로부터 여기까지 주님의 신성 본질이 그분의 인간 본질과 하나가 되심이 이런 순서에서 취급되어져 왔다: 하나가 되심을 위하여 인간 안에 신성이 현존함 (1절). 신성 안에 인간이 현존하심, 고로 상호적인 하나가 되심 (2절). 이런 하나가 되심으로부터 인간이 신성으로 만드셨다 (3절). 그리고 이런 하나가 되심은 주님이 세상에 사시는 동안 계속적, 연속적으로 수행하셨다 (4절). 그리고 이 하나가 되심은 합리성이 (신성을) 받을 수 있는 상태가 당도했을 때 개시되었다 (5절). 하나가 된 상태가 그것의 비밀함과 더불어 품질 측면에서 묘사되어 있다 (6, 7절). 이제 어머니쪽의 인간성의 분리가 뒤따르고 있다, 그리고 이것이 12절 까지 내려가며 이어진다; 이 분리가 이 구절에서는 이삭으로부터 젖을 뗌에 의해, 다음 절에서는 집에서 내보내는 하갈의 아들에 의해 표현되어진다. 그리고 주님의 신성이 그분의 인간과, 그리고 그분의 인간이 그분의 신성과 합일하심이 선과 진리의 결혼 자체이고, 이로부터 천국의 결혼이 있고, 이것은 주님의 왕국과 똑같은 바, 그러므로 아브라함이 이삭에게서 젖을 뗀 그 날 그가 베푼 큰 잔치가 언급되어지고 있다, 이를 수단으로 결혼의 시작 또는 첫 합일이 의미되어져 있다; 아마 이런 의미함이 없었더라면 잔치나 젖을 뗌의 언급은 없었을는지도 모른다.
주님이 어머니로부터 가지셨던 인간성의 첫 분리가 지금 뒤를 잇고, 그리하여 결국 그것의 완전 제거함에까지 그 제거는 점진적으로와 계속적으로, 그분이 신성화하시는 때인 그분의 삶의 마지막에까지 이르러 그것을 그분 자신으로부터 분리하셨다는 것, 그리하여 인간적일 뿐인 것을 벗어내셨다는 것, 즉 그분은 어머니로부터 파생된 것을 내던지셨는데, 더 이상 인간 어머니의 아들이 아닌, 그러나 하느님의 아들, 임신 때에만 하느님의 아들이시었으나 결국 출생 때에도 하느님의 아들이 되시도록 하시어서 아버지와 더불어 하나이셨고, 여호와 그분 자신이 되셨다. 그리하여 더 이상 그녀의 아들이 아니었음이 요한복음서에 있는 그분의 말씀으로부터 분명해진다:
포도주가 떨어졌을 때, 예수의 어머니가 그분에게 말했다, 그들이 포도주를 가지고 있지 않 다. 예수께서 그녀에게 말하신다, 여인이여, 무엇이 나에게 [속하고], 그리고 당신에게 [속 하는가]? (요. 2:3, 4).
마태복음서에서:
어떤 자가 말했다, 보라, 당신의 어머니와 당신의 형제들이 밖에 서서 당신에게 이야기하기 를 청하고 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분에게 말한 그 사람에게 대답하여 말하셨다, 누가 나의 어머니이냐? 그리고 누가 나의 형제들이냐? 그리고 그분의 손을 그분의 제자들을 향 하여 내뻗으시며, 그분은 말하셨다, 보라, 나의 어머니, 그리고 나의 형제들이다; 그 이유는 천국들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자는 누구든지 나의 형제, 그리고 자매, 그리고 어 머니와 같기 때문이다 (마. 12:47-50; 막. 3:32-35; 눅. 8:20, 21).
누가복음서에서:
군중으로부터 어떤 여인이 그녀의 목청을 돋구어서 그분에게 말했다, 당신을 낳은 자궁, 그 리고 당신에게 젖을 물린 가슴은 복 있다. 그러나 예수께서 말하셨다, 하느님의 말씀을 귀 담아 듣고, 그것을 준수하는 이들에게 복 있다 (눅. 11:27, 28).
위에서 여인이 그분의 어머니를 두고 이야기했을 때, 주님께서는 위에 기술된 이들, 즉 “내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자는 누구든지, 내 형제, 그리고 자매, 그리고 어머니와 같다”에 관해 이야기 하셨다; 이것은 “하느님의 말씀을 청종하고 준행하는 이들에게 복 있다”와 같은 맥락이다. 요한복음서에서:
예수께서 그분의 어머니와 그 옆에 서있는 그분이 사랑했던 제자를 보시면서 그분의 어머 니에게 말하셨다, 보라, 당신의 아들이다. 그다음 그분은 제자에게 말하셨다, 보라, 네 어머 니이다. 그러므로 그 시각으로부터 제자는 자기 자신의 집에서 그녀를 보살폈다
(요. 19:26, 27).
위의 말들로부터 분명해지는 것은, 그녀가 십자가에 계신 그분을 보았을 때, 그분은 그녀의 생각함에 따라서 그녀에게 이야기하셨다는 것, 그리고 그때 조차 그녀를 어머니로 부르지 않고, “여인”이라 부르신 것; 그리고 그분은 그녀의 이름을 제자에 의해 의미되는 이들에게 옮기셨다는 것; 이 사건에서 그분은 제자에게 “보라 네 어머니이다”라고 말하셨다는 점이다. 이 점이 주님 자신의 말씀으로부터 더욱 더 명백해진다. 마태복음서에서:
예수께서 바리새인들에게 물었다, 말하시기를, 너희는 그리스도에 관하여 무엇을 생각하느 냐? 그는 누구의 아들이냐? 그들이 그분에게 말한다, 다윗의 [아들]입니다. 그분이 그들에 게 말하신다, 그런데 영 안에서 다윗이 그분을 주라 부르며, 말하기를, 주님이 내 주에게 말하셨다, 너는 내 오른 편에 앉으라, 내가 너의 적들을 네 발판으로 만들 때까지 이다 라 고 말한 것은 어찌된 것이냐? 만일 다윗이 그 때 그분을 주님이라 부른다면, 그분이 그의 아들 임은 어찌된 것이냐? 그리고 아무도 그분에게 한 마디도 대답할 수 없었다.
(마. 22:41-46; 막. 12:35-37; 눅. 20:42-44).
즉, 그분은 육체적 측면에 관련하여 다윗의 아들이 더 이상 아니셨다.
그리고 더 나아가, 어머니쪽의 인간을 분리하시고 벗으심에 주목해보면, 이는 주님의 인간에 관련하여 단지 육체적인 생각들만을 지닌 이들, 그리하여 여느 다른 인간의 인간 같이 주님의 인간에 관해 생각해버리는 자들에게는 납득되지 않는 대목이다; 따라서 이런 사항은 이런 자들에게는 걸림돌이 되어 있을 뿐이다. 그들은 이런 삶이 있는 것, 이런 사람이 있는 것, 그리고 생명 속의 신성한 있음, 또는 여호와께서 임신으로부터 주님 안에 있으셨다는 것, 그리고 유사한 생명의 있음이 합일을 수단으로 그분의 인간 안에서 출시되었다는 것을 모르고 있다.

9절. 그리고 사라는 이집트 출신 하갈의 아들, 그녀가 아브라함에게 낳아 준 아들이 조롱하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사라는 보았다. 이는 신성한 영적 (평면)으로부터의 주님의 통찰력을 의미하는데, 이는 “보는 것”이 이해하는 것을 의미함에서, 이는 안을 들여다보는 것과 같은데, 마음의 시각으로부터이다; 또한 사라가 신성한 영적 (평면), 또는 신성한 진리를 표현함으로부터 알게 된다. “사라는 보았다”란 신성한 영적 (평면)이 통찰력을 가졌다는 것, 이와 동일한 말로는 주님이 통찰력을 신성한 영적 (평면)으로부터 가지셨다를 뜻한다.

이집트인 하갈의 아들. 이는 인간적일 뿐인 합리성 안으로를 의미한다는 것, 그리고 “이집트인 하갈”은 기억 속의 지식들에 대한 애착이다는 것, 이를 어머니로 하여 이 합리성은 출생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는 “아들‘, 즉 이스마엘이 주님이 가지셨던 첫 합리성을 의미함으로부터, 이는 16장, 하갈과 이스마엘이 주제로 다루어진 곳에서 살폈다, 또한 그의 표현으로부터, 그리고 이집트인 하갈, 그의 어머니에 관한 것도 16장 아래에서 설명되었다.

그녀가 아브라함에게 낳아준. 이는 이것이 아버지 되는 신성한 천적 (평면)으로부터 출시되었음을 의미하는데, 이는 “낳음”의 의미가 출시됨으로부터; 그리고 아브라함의 표현이 신성한 천적 (평면)임으로부터 분명해진다.

조롱함. 이는 신성한 합리성에 동의하지 않음 또는 좋아하지 않음을 의미하는데, 이는 “조롱함”이 자신을 좋아하지 않거나 동의하지 않는 것에 반대하는 애착으로부터 오는 것인 바에서 알게 된다. 앞 구절에서 말해진 바는, 아이가 성장했다, 그리고 젖이 떼어졌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그가 이삭으로 젖을 떼게 한 그날 큰 잔치를 베풀었다 이다; 이 말들을 수단으로 의미된 것은, 주님의 합리성이 신성으로 만드셨을 때, 이전의 합리성은 분리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 즉시 뒤잇는 것은, 이 합리성이 의미된 이집트인 하갈의 아들에 관심이 모아지는 것이다. 이 합리성은 이미 16장, 이스마엘과 하갈이 취급되면서 일차로 설명되었다. 이로부터 마찬가지로 분명해지는 것은, 내적 의미 안에 있는 것들은 계속적인 시리즈로 함께 뒤따른다는 것이다.
그러나 주님의 첫 합리성에 주목해본다면, 이는 여느 사람처럼 지식들을 수단으로 태어났음을 아는 바, 이는 진리의 가상(외관) 안에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 고로 이 합리성은 그 자체 진리가 아니다. 이는 이미 살핀 바 있다; 그리고 첫 합리성은 진리의 외관 안에 있기에 외관 없는 진리, 즉 신성한 진리 같을 경우, 그것을 좋아하지 않거나 동의할 수 없었다. 그 이유가 그것들을 납득하지 못하기 때문, 그리고 반대되기 때문에서이다. 예증으로 예를 들어 생각해보자.
인간의 합리성- 즉 이것은 세상적인 것들로부터 감각이 감명함을 통하여 그것의 출생이 있게 된다, 그리고 그 후에 지식들을 수단으로 세상적인 것들을 유추함으로부터 이 합리성의 골격은 짜여진다. 이 합리성에게 인간은 저절로 사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사는 듯 나타날 뿐이다고 말한다면, 이 합리성은 이 말을 비웃고 조롱할 준비가 되어 있다; 그리고 더 슬기롭고 총명하게, 그리고 더 복되고 행복하게 사는 자는 자신 스스로 산다는 것을 덜 믿는다는 것; 그리고 이것이 천사들의 삶이다는 것, 특히 천적 수준의 천사, 또는 가장 깊은 수준의 천사, 또는 주님에 가장 가까이 있는 천사에게는 더욱 이 점이 각별하다는 것; 그 이유가 이 천사들은 누구도 여호와만을 제외하고, 즉 주님만을 제외하고서는 자신 스스로 살 자는 없다는 것을 익히 알고 있지만 첫 합리성의 소유자는 이를 비웃는다.
인간 자신으로부터서 가질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라고, 그리고 자신으로부터 가진다는 것은 오류이고 외관일 뿐이다고 첫 합리성에 말하면 조롱 거리밖에 더 안된다; 그리고 자신으로부터 어떤 것을 가진다고 하는 오류 안에 더 빠질수록 그는 더욱 덜 가지게 된다고 첫 합리성에 말해지면 더욱 비웃는다; 자신인 것으로부터 생각하고 행하는 것은 무엇이든, 비록 그것이 선일지라도 악이다는 것; 그리고 모든 악은 지옥으로부터, 모든 선은 주님으로부터 있음을 지각하고 믿을 때까지 누구도 슬기롭지 않다고 첫 합리성에 말해주면 비웃음거리밖에 더 안된다. 모든 천사들은 이런 믿음 안에, 이렇게 지각함 안에 있다. 그럼에도 이들은 여느 다른 이들 보다 그들 자신의 것을 더 풍부하게 가진다; 그러나 이것들이 비록 자신의 것인 듯 나타날지라도그들은 이것이 주님으로부터 있음을 알고 지각하고 있다.
다시: 천국에서는 가장 크다하는 자가 가장 작은 자이는 것, 자신을 두고 가장 현명하다 하는 자가 가장 덜 현명한 자가 되어 있다는 것, 그리고 타인이 더 행복해지기를 바라는 자, 그리고 자신은 가장 덜 행복해도 된다고 하는 자가 가장 행복해 있다는 것, 그리고 천국에서는 모든 이가 타인 아래 있기를 바란다는 것, 지옥에서는 모두가 타인 위에 군림하려 한다는 것; 결과적으로 천국의 영광 안에는 세상의 영광에 있는 것과 같은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 이런 사항을 첫 합리성이 들으면 즉각 오는 반응은 조롱함이다.
다른 삶에는 시간과 공간이 없다는 것, 그러나 상태들이 있고, 이 상태에 따라서 시간과 공간의 외관이 있다는 것; 그리고 이곳의 삶은 시간과 공간이 있는 삶 보다 더 천국적이다는 것, 그리고 영원한 것에 더 가까이 있다는 것; 이 안에서, 즉 영원인 것 안에서, 시간과 공간으로부터 있는 것은 아무것도 있지 않다는 것, 그것들로부터서 유추되는 것조차 없다는 것, 등등을 첫 합리성이 들으면 조롱거리밖에 더 안된다.
인간적인 합리성이 위와 같다는 것, 이 합리성은 신성한 것들을 조롱한다는 것을 주님께서 보셨다, 참으로 신성한 영적 (평면)으로부터 보신 것이다. 이것이 사라가 이집트인 하갈의 아들을 봄에 의해 의미되었다. 인간은 보다 수준 아래에 있는 자신 안에 있는 것들을 내부로부터 들여다 볼 수 있다는 것은 지각 안에 있는 이들에게, 그리고 양심 안에 있는 이들조차에게도 잘 알려져 있다; 그 이유가 그들은 자기들의 참 생각들을 타이르기 위해 아주 멀리 내다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거듭난 자는 자기가 거듭나기 이전 가졌던 합리성의 품질이 어떤 것이었는지 알 수 있다. 거듭난 자와 더불은 지각은 주님으로부터 있다; 그러나 주님의 지각은 그분 자신으로부터 이었다.

10절. 그리고 그녀가 아브라함에게 말했다, 이 하녀와 그녀의 아들을 내쫓으라. 왜냐하면 이 하녀의 아들이 내 아들과 더불어, 이삭과 함께 상속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녀가 아브라함에게 말했다. 이는 신성으로부터 지각함을 의미하는데, 이는 “말하다”의 의미가 말씀의 역사적 부분에서는 지각하는 것임으로부터; 그리고 아브라함에 의해 표현된 것이 신성의 천적 (평면), 또는 신성한 선이다로부터 알려진다.

이 하녀와 아들을 내쫓으라. 이는 인간적 합리성으로부터의 것들은 근절되어야 할 것임을 의미하는데, 이는 “내쫓음”의 의미가 추방하는 것이다로부터; 그리고 “하녀”의 의미가 합리적인 것들과 기억 속의 지식들에 대한 애착, 고로 그것들로부터의 선 이다로부터; 그리고 그녀의 “아들”의 의미가 이 합리성 속의 진리이다로부터 알려진다. 그런데 이 첫 합리성, 또는 인간적 합리성에서 서술되는 것은 가상의 선과 진리이다. 그러므로 “이 하녀와 아들을 내쫒으라”에 의해서 의미되는 것은 인간적 합리성으로부터의 것은 추방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어떻게 있는지, 즉 신성한 합리성이 그것의 자리를 차지할 때, 첫 합리성은 추방되어졌다는 것은 이미 여러번 말해왔다; 그러나 이 대목이 여기서 특별하게 다루어지는 바, 얼마간의 말을 보태어 더 설명해보자.
모두 각각의 인간과 더불어 두 합리성들이 있다. 하나는 거듭나기 이전에, 다른 하나는 거듭난 이후에 존재한다. 처음 것인 거듭남 이전에서의 합리성은 감각들의 경험을 통하여 포획되어지는데, 시민적 생활과 도덕적 생활 속의 것들을 반추해봄을 수단으로, 그리고 이것들로부터 파생된 과학물과 추론함들을 수단으로, 또한 신앙의 교리 또는 말씀으로부터의 영적인 것들에 관한 지식들을 수단으로 포획된다. 그러나 이런 포획된 것들은 사실상 육체적 기억 속의 생각들을 매우 조금 넘을까 말까 하는 수준에서 더 진전되지 않는다, 따라서 이것들은 아주 물질적이라 단언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이 수준으로 생각하는 것은 무엇이든 위와 같은 것으로부터 있다; 또는, 그것이 생각하는 것이 내면적, 또는 지적인 시각에 의해 동시에 납득되도록 하기 위하여, 이런 것들에 대한 유사함들이 비교함, 또는 유추함을 수단으로 표출되어지기도 한다. 이런 종류에 속한 것이 첫 합리성, 또는 거듭나기 이전의 합리성이다.
그러나 거듭남 이후의 합리성은 주님에 의해 영적인 진리와 선에 대한 애착을 통하여 형성되어진다, 이 애착들은 주님에 의해 이전의 합리성의 진리들 안에 경이로운 방법 안에서 심어진다; 그러므로 일치함과 좋아함 안에 있는 이 안의 것들은 생기가 있다. 그러나 이외의 것들은 쓸모 없는 것으로 그것으로부터 분리되어진다; 결국 영적인 선들과 진리들이 마치 다발인 듯하게 수집될 때까지 생명이 주어질 수 없어 조화를 이루지 못하는 것들은 주변 경계선쪽으로 거절되어져 있고, 그리고 계속적인 단계들에 의해 영적인 선들과 진리들에 대한 애착들의 생명과 함께 그것들은 성장해간다. 이로부터 두 번째 합리성이 나타난다.
나무들의 열매로 어떻게 위와 같은 경우가 있어지는지를 비교해 생각해보자. 첫 합리성은 그것의 시작에서 익지 않은 과일 같고, 이 과일은 그것 자체 안에 씨를 가질 때까지 무르익어간다, 그리고 그 과일이 나무로부터 그 자체 분리되는 시기에 당도한 때, 그 과일의 상태는 그때 충만해 있다. 그러나 두 번째 합리성, 이것은 그가 거듭나졌을 때 주님에 의해 선물되어진다, 이것은 첫 과일과 같은 과일이 옥토에 있는 것과 같다. 옥토 안에서 씨에 붙은 것들은 부패되어지고, 씨는 그것의 가장 깊은 부분들로부터 (생명을) 밀쳐낸다, 그리고 뿌리를 내보내고, 그 다음 지면 위로 싹을 들어올리고, 이 싹은 새로운 나무로 성장한다, 그리고 그 자체를 펼쳐나가 결국 새로운 과일을 산출한다. 그리고 동산과 낙원으로, 그것이 받는 선과 진리에 대한 애착에 따라서 이다 (마. 13:31, 32; 요. 12:24 참조).
거듭나기 전과 후의 인간 자신의 것을 가지고 고찰해보자. 인간은 위에서 이미 상술한 수단들을 가지고 자신에게 포획한 것, 즉 첫 합리성으로부터, 그는 진리를 생각하고 자신으로부터 선을 행한다, 고로 그의 자신인 것으로부터 이다. 이 첫 합리성은 설사 그에게 사랑의 모든 선과 신앙의 모든 진리가 주님으로부터 있다 라고 가르친다 해도 납득할 수 없다. 그러나 성년의 나이에서 인간의 거듭남이 거행될 때, 그는 주님에 의해 선물된 다른 합리성으로부터 선과 진리는 자신으로 있는 것이 아니다는 것, 또는 선과 진리는 자신 것으로부터가 아닌 주님으로부터 임을 생각하기 시작한다. 그렇다 해도 초기 단계에서는 여전히 그는 진리가 자신으로부터인 듯 생각하고, 선 역시 그렇게 하면서 행한다. 그러나 그는 더욱 더 진리의 빛 안으로 인도되면서 결국 모든 선과 모든 진리는 주님으로부터 임을 믿기에 이르른다. 이전의 합리성에 속하는 자신은 계속적으로 분리되어가고, 그리고 인간에게 천국적 자신이 주님에 의해 선물되어진다. 이것은 그의 새로운 합리성으로부터의 것이 된다.
다른 예를 생각해보자. 첫 합리성은 시작에서 자기와 세상을 사랑함 외의 다른 사랑은 알지 못한다; 비록 천국적 사랑이 또다른 특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들어 알지만, 그럼에도 그는 그것을 납득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때 그가 어떤 선을 행할 때, 그는 타인에게 친절하다는 공덕을 쌓는 듯 자신에게 비쳐지는 것, 또는 자신이 기독인이라 불리우는 것, 또는 영원한 생명의 기쁨을 그것으로부터 획득하는 듯 여겨지는 것 외의 다른 기쁨을 그것으로부터 지각하지 못하고 있다. 어쩻든 두 번째 합리성이 거듭남을 통하여 주님에 의해 그에게 선물되어지면, 그는 선과 진리 자체 안에 있는 어떤 즐거움을 느끼기 시작하고, 이것에 의해 감명받아지는데, 그의 자신의 어떤 것을 위하여서가 아니고, 선과 진리를 위하여서 이다; 그리고 그가 이 즐거움에 의해 인도될 때, 그는 공적 주장을 포기하고, 결국 그는 공적 주의가 중대한 (영적) 범죄 행위 수준이라 인정하며 그것을 완벽히 거절하기에 이르른다. 이 즐거움은 그 사람과 더불어 조금씩 성장하고, 복있게 되어진다; 그리고 다른 삶에서 이 즐거움은 행복이 되어간다, 그리고 그 자체가 그의 천국이다. 중복된 위의 설명으로부터 거듭나아지는 인간 안에서 두 합리성이 어떻게 움직여가는지 분명해졌으라 사료된다.
그러나 더 알아야 할 것은, 비록 인간이 거듭나지고 있다 할지라도, 첫 합리성의 각각 그리고 모든 것은 그 인간과 더불어 남아 있다는 것, 그리고 단지 두 번째 합리성으로부터 분리되어 있을 뿐이다는 것, 그리고 이 분리는 주님에 의해 경이로운 방식에서 있을 뿐이다는 것이다. 그러나 주님만이 그분의 첫 합리성을 추방하시어 그것의 어떤 것도 남아있지 않게 하시었다; 그 이유는 단지 인간일 뿐인 것은 신성과 더불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분은 마리아의 아들이 더 이상 아니고, 각각의 본질 측면에서 여호와이셨다.

왜냐하면 이 하녀의 아들이 내 아들과 더불어, 이삭과 함께 상속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는 인간적 합리성은 진리 측면이든지, 또는 선의 측면이든지 신성한 합리성 자체와 공통되는 생명을 가질 수 없었다를 의미하는데, 이는 “상속받음”이 또다른 사람의 생명을 가지는 것임으로부터; “하녀의 아들”의 의미가 진리 측면 이든, 선의 측면이든 인간적일 뿐인 합리성이다로부터; “나의 아들 이삭”의 의미는 “나의 아들”인 진리 측면이든, “이삭”인 선의 측면이든 모두에서 신성한 합리성이다로부터 알려진다. “이삭”이 선의 측면에서 신성한 합리성인 것은 그의 이름이 비롯된 “웃음”의 의미가 진리에 대한 애착, 또는 진리로부터의 선로부터 분명해지고, 이는 이 장 6, 7절에서 언급되었다. 이로부터 분명한 바, “이 하녀의 아들이 내 아들과 더불어, 이삭과 함께 상속받지 못할 것이다”는 단지 인간적인 합리성은 신성한 합리성과 공통되는 생명을 진리 측면이든, 선의 측면이든 가질 수 없다를 표시하고 있다. 이것이 공통의 생명을 가질 수 없다는 말은 이런 당연한 사실, 즉 신성은 생명 자체, 고로 스스로 생명을 가진다는 것; 이에 반해 인간적일 뿐인 합리성은 생명의 기관(organ), 고로 스스로서는 생명을 가지지 못한다에서도 분명해진다.
주님의 인간이 신성으로 만들어졌을 때, 그것은 생명의 기관, 또는 생명의 그릇이 더 이상 아니었고, 여호와 자신의 것과 같은 생명 자체였다. 이것을 여호와로부터의 생명의 참 임신인 처음부터 가지셨던 바, 요한복음서의 주님의 말씀으로부터도 아주 분명해진다:
아버지께서 자신 안에 생명을 가지시듯, 마찬가지로 그분은 아들이 자신 안에 생명을 가지 도록 생명을 주셨다 (요. 5:26).
신성한 인간이 여기서 “아들”이라 불리운다. 요한 복음서에서:
그분 안에 생명이 있었다, 그리고 생명은 인간들의 빛이었다 (요. 1:4).
요한복음서에서:
예수께서 말하셨다, 나는 길이고, 진리이고, 그리고 생명이다 (요. 14:6).
요한복음서에서:
예수께서 말하셨다, 나는 부활이고 생명이다, 나를 믿는 자는 비록 그가 죽더라도, 그는 살 것이다 (요. 11:25).
요한복음서에서:
하느님의 빵은 천국으로부터 내려오는 그분이시고, 세상에 생명을 주신다 (요. 6:33).
그러나 인간은 생명이 아니고, 생명의 그릇, 또는 기관이다는 것은 여러 장소에서 언급한 바 있다. 위 모두로부터 분명해지는 바, 주님이 그분의 인간에까지 이르러 여호와로 만드셨을 때, 그 자체 생명이 있지 않은 것, 즉 단지 인간적인 것은 추방되어졌다. 이것이 하녀의 아들은 아들 이삭과 함께 상속받을 수 없다에서 의미되어 말해진다.
내적 의미에서 “상속받는” 것이 주님에 관련해 서술될 경우, 아버지의 생명을 가지는 것, 고로 그분 자신 안에 생명을 가지는 것이다; 그리고 인간들에 관련해 서술할 경우, 주님의 생명을 가지는 것, 즉 주님으로부터 생명을 받는 것임은 말씀에 있는 수많은 구절들로부터 분명해진다. 그분 자신 안에 생명을 가지는 것은 생명의 있음 자체, 즉 여호와이시다. 이에 반하여 주님의 생명을 가지는 것, 또는 주님으로부터 생명을 받는 것은 사랑과 신앙 안에서 주님을 받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그분을 받아들이는 이들은 주님 안에 있고, 주님의 것인 바, 그들은 그분의 “상속자들”, 그리고 그분의 “아들들”이라 불리운다.
구약 성경의 말씀에서 “상속하는” 것은 천적 (평면)의 것, 즉 선에 속한 것 뿐만 아니라 영적 (평면)의 것, 즉 진리에 속한 것에 관한 것도 서술하고 있어, 이쪽이 다른 단어에 의해 다른쪽으로부터 표현되어지고 있다: 선을 서술한다고 단정되는 단어는 “상속을 수단으로 소유함”이라고 번역 될는지 모른다; 그리고 진리를 서술한다고 단정되는 단어는 “상속한다”고 번역될는지 모른다. 전자의 단어는 원어에서 소유함 역시 포함하고 있다, 그러나 후자는 그밖의 어떤 것에서 파생된 바, 마치 천적인 것에 관계되는 영적인 것, 또는 선에 관련되는 진리와 더불은 것과 같다. 이 구절에서, 즉 주님의 신성한 합리성, 또는 그분의 신성한 인간이 이삭에 의해 표현되는 곳에서, 유전적 권리에 의해 소유함을 표시하는 단어가 사용되어진다, 그 이유는 주님의 신성한 인간이 유일한 상속자-소유자이시기 때문, 이를 그분께서도 비유에서 가르치신다 (마. 21:33, 37, 38; 막. 12:7; 눅. 20:14); 그리고 그분은 몇 장소에서 아버지의 모든 것들이 그분의 것임을 선포하신다.
“상속을 수단으로 소유함”과 “상속하는”것이 말씀에서 인간들을 서술할 경우, 주님으로부터 생명을 받는 것, 결과적으로 영원한 생명, 또는 천국을 받는 것이 의미되어진다. 그 이유가 주님의 생명을 받는 자만이 천국을 받기 때문, 이는 계시록에서 분명해진다:
이기는 자는 모든 것들을 상속받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의 하느님일 것이고, 그는 나의 아들일 것이다 (계. 21:7).
마태복음서에서: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을, 또는 형제들을, 또는 자매들을 버린 자 모두는 백배로 받을 것이 고, 영원한 생명을 상속받을 것이다 (마. 19:29; 25:34; 막. 10:17; 눅. 18:18).
위에서 천국이 “영원한 생명”, 그밖의 장소에서는 “생명”(마. 18:8, 9; 19:17; 요. 3:36; 5:24, 29)이라 불리운다. 그 이유가 주님이 생명 자체이시고, 그분의 생명을 받는 자는 천국 안에 있기 때문이다.
시편서에서:
하느님께서 시온을 구원하실 것이다, 그리고 유다의 성읍들을 건설하실 것이다, 그리고 상 속을 수단으로 그것을 소유할 것이다, 그분의 종들의 씨 역시 그것을 상속받을 것이다, 그 리고 그분의 이름을 사랑한 그들이 그 안에 거주할 것이다 (시. 69:35, 36).
위에서 “상속을 수단으로 소유한다”가 천적 (수준의) 사랑 안에 있는 이들을 서술하고, “상속받다”는 영적 (수준의) 사랑 안에 있는 이들을 서술한다. 이사야서에서:
내 안에 자기 신뢰를 두는 자는 토지를 상속받을 것이다, 그리고 내 거룩함의 산을 상속을 수단으로 소유할 것이다 (이. 57:13).
마찬가지로 모세의 책에서:
나는 너를 내가 아브라함, 이삭, 야곱에게 주리라고 내 손을 들었던 토지로 데려올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것을 너에게 유전적 소유함을 위해 줄 것이다 (출. 6:8).
글자 의미에서 위 말들은 가나안의 토지가 유전적 소유함을 위해 그들에게 주어질 것을 의미하고, 그렇게 실행되었다; 그러나 내적 의미에서는 그것들은 천국이 주님을 사랑하고 그분 안에서 신앙을 갖는 이들에게 주어질 것이다는 말이다; 그 이유가 주님이 아브라함, 이삭, 야곱에 의해 표현되는 바, 마찬가지로 사랑 자체와 신앙 자체가 의미되기 때문, 결과적으로 사랑과 신앙 안에 있는 이들, 고로 주님 안에 있는 이들이 의미되기 때문이다. 같은 의미가 아브라함, 이삭, 야곱에 의해서도 의미되고, 이들과 더불어 많은 이들이 천국들의 왕국에 앉을 것이라고 마. 8:11에서도 읽어지고 있다; 사실상 천국에서 아브라함, 이삭, 야곱으로는 전혀 알고 있지 않고 있다; 그들에 의해 표현되고 의미된 것만이 알려져 있을 뿐이다. 마찬가지로 그들과 함께 앉아 먹는다는 대목 역시 그러하다. 그 이유가 말씀의 모든 이름들은 실제적인 것들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또한 “가나안의 토지”는 천국적 가나안, 또는 천국이다, 가나안의 토지가 단순히 “토지”라고 불리운다. 마태복음서에서도 역시:
온유한 자는 복 있다, 그 이유가 그들은 땅을 상속받기 때문이다 (마. 5:5).

11절. 그리고 이 말은 아브라함의 눈에 깊은 낙담을 드리우게 했다. 그의 아들 때문이다.

이 말은 아브라함의 눈에 깊은 낙담을 드리우게 했다. 이는 주님께서 이 합리성이 자신으로부터 분리되는 것에 관해 처음으로 생각하셨을 때의 그분의 상태, 즉 이것은 사랑으로부터의 슬퍼하심의 상태를 의미하는데, 별도의 설명은 필요치 않을 것 같다.

그의 아들 때문에. 이는 그분이 이 합리성, 즉 첫 합리성을 사랑하셨기 때문에를 의미하는데, 이는 “아들”, 즉 하녀의 아들의 의미가 인간적일 뿐인 합리성, 또는 첫 합리성이다로부터 알게 되는 바, 이는 이미 상술했다. 비록 이 슬퍼함의 원인이 직접 말해진 것은 아니나 뒤잇는 대목으로부터 분명해진다. 원인이 사랑이다는 것은 충분히 명백하다, 그 이유는 “그의 아들 때문에”라고 말해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아들이 13-21절에서 취급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슬퍼함이 있었던 이유, 또는 그의 아들 때문에 아브라함의 눈에 낙담이 드리워졌다고 말해진 것에 대한 이유를 알 필요가 있다; 예증을 통해 몇 가지를 생각해보자.
주님께서는 천적 (수준의) 인간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오시지 않았다. 그러나 영적 (수준의) 인간 때문이다. “사람”이라 불리운 태고 교회는 천적 수준이었다; 그리고 만일 이 교회가 본래의 모습으로 남아 있었다면, 주님은 인간으로 태어나실 필요가 없으셨다. 그러나 이 교회가 기울기를 시작하자마자, 주님은 천적 (수준의) 교회는 세상으로부터 통째로 멸해지리라는 것을 예견하셨다; 그리고 이런 예견하심 때문에 그때 세상 안으로 주님의 오심에 관한 예언이 만들어졌다 (창. 3:15). 이 교회의 때 이후 천적 (수준의) 교회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고, 그러나 영적 (수준의) 교회가 존재했다; 그 이유가 홍수 이후 있었던 고대 교회가 영적 (수준의) 교회였기 때문이다. 이는 본 서 제 1권에서 상세히 다루어졌다; 그리고 이 교회, 즉 영적 (수준의) 교회로 있었던 이들은 주님께서 세상에 오시지 않으면 구원되어질 수 없었다. 이것이 마태복음서에서 주님의 말씀에 의해 뜻해져 있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필요 없으나, 병든 자에게는 의사가 필요하다; 나는 의인을 부르려 고 오지 않았다, 그러나 회개할 죄인을 부르러 왔다 (마. 9:12, 13).
요한복음서에서:
그리고 나는 이 우리 속에 있지 않은 다른 양들을 가지고 있다; 그들 역시 나는 데려와야 한다, 그리고 그들은 내 음성을 들을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는 한 양떼와 한 목자가 있을 것이다 (요. 10:16).
또한 마. 18:11-13의 일 백마리 양의 비유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지금 이삭에 의해 주님의 신성한 합리성이 표현되고, 그리고 그에 의해 “상속자들”이라 불리는 천적 수준의 인간 역시 표현되고 있다; 그리고 이스마엘에 의해 주님의 인간적일 뿐인 합리성이 표현되고, 그리고 그에 의해 “아들들”이라 부리는 영적 수준의 인간 역시 표현되어지고 있는 바, 이것은 이 구절이 보여준 바대로 왜 주님이 신성한 사랑으로부터 슬퍼하심을 느끼셨는가에 대한 이유이다; 또한 13-21에서 이어지는 사항에 대한 이유이기도 하다. 즉 하갈의 아들과 이 아들의 어머니가 영적 (수준의) 교회를 표현했고; 그리고 이 교회의 상태도 표현되었다, 즉 이 교회로부터 있는 이들의 상태이다. 이런 비밀들은 아직은 더 충분하게 공표될 수 없다; 단순하게 말할 수 있다면, 주님이 세상에 계실 때 교회의 모든 상태들이 표현되어졌다는 것, 그리고 또한 이 교회에 속한 이들이 어떤 방법에서 일런지는 몰라도 여하튼 그분에 의해 구원되어질 것이다는 정도뿐이다; 그리고 이런 이유 때문에 이 교회의 똑같은 상태들이 이것들의 동일한 이름들에 의해 마찬가지로 의미되어졌다는 점이다.

12절. 그리고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말하셨다, 어린 아이 때문에, 네 하녀 때문에 네 눈에 낙담을 드리우지 마라. 사라가 너에게 한 모든 것, 그녀의 소리에 경청을 해라. 그 이유가 이삭 안에서 네 씨라 불리울 것이기 때문이다.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말하셨다. 이는 주님께서 신성으로부터 지각하심을 의미하는데, 이는 “말하다”가 말씀의 역사서에서는 지각하다를 의미함에서 파악된다; 그리고 이것이 신성으로부터 있었기 때문에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말하셨다”라고 말해지고 있다 두 이름들, 즉 “하느님”과 “아브라함”에 의해 주님이 뜻해지고 있다; 이는 글자 의미에서 있는 역사적 서술들은 생각들을 나뉘게 함을 보여주는 실예이기도 하다; 그러나 내적 의미는 그것을 하나로 묶는다; 그 이유가 글자의 역사적 의미에서는 서로에게 이야기하는 사람이 둘, 즉 하느님과 아브라함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적 의미에서는 한 분이시다, 즉 신성 측면에서의 주님이시다. 이런 대목이 보여주는 또 하나는, 글자 의미에서 셋이 되어 있는 분들이 내적 의미에서는 한 분이시다는 것이다; 즉 아버지, 아들, 성령의 경우인데, 이는 세 하느님들이 아닌 한 분 하느님이시다; 그리고 모든 삼위는 주님 안에서 완전하다; 즉 주님 안에 아버지가 계신다고 그분은 말하신다; 그리고 주님으로부터 성령이 있다고 그분은 말하신다.

어린 아이 때문에, 네 하녀 때문에 네 눈에 낙담을 드리우지 마라. 이는 이 합리성을 향한 상태가 바뀜을 의미함이 분명하다. 내적 의미에 가장 가까운 말들로 바꾸면, 이 의미는, 그분은 그분 자신으로부터 인간적일 뿐인 합리성을 분리함에 슬퍼해서는 안된다는 것; 그리고 또한 그분은 슬퍼하시지 않았다 일 것이다; 그 이유가 분리의 필요성은 신성으로부터의 그분의 지각하심에 속하기 때문이다; 이외 다른 방도로는 인류가 구원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고로 여기서 의미된 것은 상태가 바뀜이다.

사라가 너에게 말한 모든 것, 그녀의 소리에 경청을 해라. 이는 그분이 영적 진리에 따라 행동해야 함을 의미하는데, 이는 사라의 표현이 신성의 영적 (평면), 또는 신성한 진리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소리에 경청을 함”이 그것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다로부터도 더 알려진다. 영적 진리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내적 의미 안에 있는 이들에 의해 지각되어질 수 있는 최대한도에서도 그들의 납득력에 펼쳐보일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들의 지각에 따라 그것이 무엇인지 서술하려든다면, 거의 인정되지 않으리라는 것이다; 게다가 더 비밀함들이 털어놓여져야 함이 먼저 순서이고, 정녕 표명된 비밀함들이 인간의 신조 안으로 들어갈 수 있을 때 이 주제에 앞서 확고히 믿어짐이 전제 되어야 할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아주 조그만 수준에서 대단히 일반적인 방법에서 그것이 의미하는 것, 즉, 주님은 그분의 인간 속의 신성 (신성으로부터의 인간, Human Divine)으로부터 결말을 만들어내셨다는 것; 그리고 그것에 따라 행동하셨다는 것, 고로 그분 자신의 힘으로부터 였다는 것만을 우리는 말해볼 수 있을 것 같다: 그 이유가 신성한 진리를 수단으로 그분은 인간을 신성에 하나가 되게 하셨고; 신성한 선을 수단으로 그분은 신성을 인간에 하나가 되게 하셨다; 이 하나가 됨은 상호적이다.

이삭 안에서 네 씨라 불리울 것이다. 이는 주님의 신성한 인간으로부터 선 안에 있는 이들에게 구원이 있다를 의미하는데, 이는 이삭의 표현이 신성한 합리성, 고로 신성한 인간이다로부터 (그 이유는 인간은 합리성의 가장 깊은 안쪽에서 시작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씨”의 의미로부터, 이것은 이삭을 서술하고, 천적 (수준의) 합리성, 또는 같은 말로 천적 (수준의) 인간들을 서술함으로부터 알게 된다. 고로 “네 씨라 불리울 것이다”란 그들이 상속자들일 것이다, 결과적으로 그들이 구원을 가질 것이다를 의미한다. 영적 (펑면) 역시 “씨”이나, 하녀의 아들로부터, 다음 절에서 말해지는바와 같다- “그리고 나는 하녀의 아들 역시 그를 타라로 만들 것이다, 그 이유는 그가 네 씨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영적 (평면) 역시 그들이 선 안에 있다면 구원을 가진다. 이는 이 말들의 내적 의미로부터 나타난다. 주님 역시 많은 장소에서 같은 내용을 가르치신다, 그리고 요한 복음서에서 명백해진다:
그분을 영접한 많은 이들, 그분의 이름을 믿는 그들에게, 그분은 그들에게 하느님의 아들이 되어가는 힘을 주셨다; 그들이 태어남은 피로부터도 아니고, 육의 뜻으로부터도 아니고, 인 간의 뜻으로부터도 아닌, 그러나 하느님으로부터 이었다 (요. 1:12, 13).

이 장의 1절로부터 7절까지 에서 주님의 인간이 그분의 신성과 하나가 되심, 그리고 그분의 신성이 그분의 인간과 하나가 되심이 취급되었다; 그리고 이 하나가 되심으로부터 주님의 인간은 신성으로 만들어졌다. 위 몇 절의 내용들은 앞에서 이미 말해두었다. 이 요점으로부터 인간적일 뿐인 합리성의 분리됨이 다루어졌다 (8절); 분리되는 이유는 인간 합리성이 신성한 합리성에 일치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9절); 그것은 그것과 더불어 공통되는 생명을 진리 측면이든, 선의 측면이든 가지고 있지 않다 (10절); 분리의 처음에는 주님에게 슬픔이었다 (11절); 그러나 주님은 인류는 이런 분리함의 방법 외의 여느 다른 방법에서는 구원하실 수 없다는 것을 신성으로부터 지각하셨다 (12절). 이제 영적 (수준의) 교회로부터 있는 이들에 관한 주제가 뒤잇는데, 그들이 떠나보낸 하갈의 아들에 의해 의미되어진다.

13절. 그리고 하녀의 아들 또한 나는 나라로 만들 것이다, 그 이유는 그가 네 씨이기 때문이다.

또한 하녀의 아들도 나는 나라를 만들 것이다. 이는 신앙의 선을 받은 영적 (평면의) 교회를 의미하는데, 이는 “하녀의 아들”과 “나라”의 의미로부터 알 수 있다. 하녀의 아들, 또는 이스마엘은 그가 아브라함의 집에 있었을 때, 또는 아브라함과 더불어 있는 때, 주님의 첫 합리성을 표현했다; 그러나 지금, 분리되었을 때, 그는 또 다른 표현성을 가지게 된다, 즉 영적 (평면의) 교회의 상태나 품질을 표현하게 된다; 이와 마찬가지가 롯의 경우에서 이미 있었다. 그가 아브라함과 함께 거주했을 때, 그는 주님의 외적 인간을 표현했다; 그러나 아브라함으로부터 분리되었을 때, 그는 외적 (수준의) 교회, 그리고 이 교회의 많은 상태들을 표현했다. “나라”가 선을 의미하는 것은 이미 살폈다; 여기서의 경우, 신앙의 선인데, 그 이유는 영적 교회를 서술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지금 “또한 하녀의 아들도 나는 나라를 만들 것이다”는 신앙의 선을 받은 영적 교회, 즉 선행을 의미한다.
천국들과 땅 위 주님의 왕국에는 천적 왕국과 영적 왕국이 있다; 그러므로 (이 왕국들에 딸리는) 천사들도 천적 천사들과 영적 천사들로 구분되어진다. 천적 천사들에게 주님은 태양으로서, 영적 천사들에게는 달로서 나타나신다. 마찬가지로 인간은 천적 인간과 영적 인간으로 구별되어진다. 홍수 이전 태고 교회인은 천적 (수준)이었다; 그러나 홍수 이후 고대 교회인은 영적 (수준)이었다. 이 두 교회의 차이가 무엇인지는 이미 살폈다; 또한 천적 수준과 영적 수준의 차이가 무엇인지도 이미 살폈다.
천적 인간이 누구인지를 주님께서 말하신다:
그분은 이름으로 그분의 양떼를 부르신다, 그리고 그들을 밖으로 인도하신다; 그리고 그가 그분 자신의 양떼를 인도해내셨을 때, 그분은 그들 앞에 가시고, 그리고 양떼는 그분을 뒤따른다, 그 이유가 그들은 그분의 음성을 알기 때문이다 (요. 10:3, 4).
영적 인간이 누구인지를 주님께서 말하신다:
그리고 나는 이 우리 속에 있지 않은 다른 양들을 가지고 있다; 그들을 나는 데려와야 한 다, 그리고 그들은 내 음성을 들을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는 한 양떼와 한 목자가 있을 것 이다 (요. 10:16).
사랑의 선이 천적 교회를 만든다, 그러나 신앙의 선은 영적 교회를 만든다. 신앙의 진리가 교회를 만드는 것은 아니고 소개할 뿐이다.

그 이유는 그가 네 씨이기 때문이다. 이는 그들 역시 주님의 신성한 인간으로부터 구원을 가진다를 의미하는데, 이는 이미 살폈다. “씨”가 신앙, 그러나 선행의 신앙이다는 것도 살핀 바 있다.

이 13절로부터 21절까지에서 주님의 영적 왕국이 일반적 측면에서 취급되어지고, 특별하게는 영적 (수준의) 인간으로 되어가는 이들이 다루어진다; 그리고 이는 그들의 개혁의 첫 상태로부터 마지막 상태까지 순서적으로 있다. 개혁 이전 그들의 상태는 신앙의 교리적인 것들에서 방황하는 것이다 (14절). 그들이 진리를 아무것도 알지 않는 정도인 무지함으로까지 떨어뜨려진다 (15절). 그들은 그것으로부터 슬픔을 가졌다는 것 (16절). 그 다음 위로와 도움이 주님으로부터 있다 (17절). 그리고 계발된다 (18절). 그리고 말씀으로부터 가르침이 있다 (19절). 개혁 이후 그들의 상태는 천적 인간에 비교해 희미한 수준이다 (20절). 그러나 그들은 기억 속의 지식들에 대한 애착과 진리들의 외관에 대한 애착에서 주님의 신성한 인간으로부터 빛을 가진다는 것 (21절).

14절. 그리고 아브라함은 아침에 일찍 일어났다. 그리고 빵과 물 한 병을 가지고 왔다, 그리고 하갈에게 주었다, 그리고 그것들을 그녀의 어깨에 놓고, 그리고 어린 아이와 그녀를 내보냈다, 그리고 그녀는 나갔고, 브엘세바의 광야에서 배회하였다.

아브라함은 아침에 일찍 일어났다. 이는 신성으로부터의 주님의 명료한 지각을 의미하는데, 이는 “빵”이 천적인 것, 또는 선이다로부터; 그리고 “물”의 의미가 영적인 것, 또는 진리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물 (한) 병”이라고 말해지는데, 그 이유는 그들 개혁의 시작에서 선물되는 진리가 아주 적은 진리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그들이 받을 수 있는 만큼의 진리이다는 것이 “그는 이것을 그녀의 어깨 위에 놓았다”에 의해 의미되어진다. 아마 모든 이들이 의아히 여기고 따라서 무엇인가 비밀함들이 이 구절에 있을 것이라고 추측할 것이다. 그 이유는 그 당시 아브라함은 많은 양떼와 가축때, 금과 은을 지닌 부자였다는 것, 또한 그가 이 하녀를 통해 아들을 가졌고, 그는 이 아들도 사랑했다는 것, 그런데 오직 빵과 [물] 만을 주어 내보냈다는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동시에 아브라함도 짐작했을 것은 그들이 어깨에 멜 정도 밖에 안되는 적은 식량과 물은 잠간이면 다 먹어치우고, 그러면 그들이 (광야에서) 죽으리라는 것이다. 정말로 그들은 천사의 도움이 없었다면 죽고야 말았을 것이다. 빵과 물, 어깨에 그것을 놓아줌 같은 사실은 대화 내용상 중요성이 별로일 것 같이 있다. 그러나 이 대목은 영적 수준으로 되어가는 이들의 처음 상태를 말해준다. 즉 이들이 시작에서 지니는 선에 관한 어떤 것, 진리에 관한 어떤 것은 실제로 매우 조금 나누어져 있다는 말이다. 그리고 물이 그들에게 떨어진 후에, 그들은 주님으로부터 도움을 받는다.

그리고 하갈에게 주었다. 이는 그것의 생명 안에 심어짐을 의미하는데, 이는 “하갈”이 외면의 인간의 생명을 의미함에서 분명해진다. 외면의 인간의 생명은 기억 속의 지식들에 대한 애착인데, 이것은 “이집트인 하갈”에 의해 더 특별히 의미된다. 영적 수준의 인간으로 되어가는 이들과 더불어, 선과 진리는 주님에 의해 기억 속의 지식들에 대한 애착 안에 심어진다; 이는 그들로 합리적으로, 영적으로 되어가기 위한 용도와 사용을 위해 선하고 참된 것을 배워 알기를 바라도록 하시기 위함이다; 그 이유가 기억 속의 지식들에 대한 애착은 어머니에 해당되는바, 이를 통하여 영적인 것을 지니는 합리성이 태어나기 때문이다. 실지로 이것은 주님으로부터 모든 이에게 흘러든다, 그러나 개혁되어질 수 있는 이들 외에 이런 목적과 사용을 위해 선하고 참된 것을 누구도 받지 못한다. 이들 외의 나머지 사람들은 다른 목적과 사용을 위해 그것을 행한다, 그들은 자신들과 세상을 중시하고 있다.

그것을 그녀의 어께 위에. 이는 그것을 받을 수 있는 만큼 많이를 의미하는데, 이는 “어께”의 의미가 모든 힘이다로부터 분명해진다; 고로 선과 진리를 받을 수 있는 만큼 많이를 의미한다.

그리고 아이. 이는 영적인 것을 의미하는데, 이는 “아이”의 의미가 여기서는 영적인 것이라 불리는 것임에서 알려진다; 이스마엘, 또는 하녀의 아들이 여기서는 영적 (수준의) 교회인을 표현한다; 그리고 그가 여기서 영적 교회인이 되어가는 시작을 표현하기 때문에 그는 “아이”라 불리운다.

그리고 그녀를 떠나보냈다. 이는 그분께서 그것을 그것들의 자신 안에 남겨두셨음을 의미하는데, 이는 “떠나보냄”이 아브라함에 의해 행해질 때, 그가 주님을 표현함으로부터; 또한 개혁되어 영적 수준으로 되어가는 이들의 처음 상태로부터 알게 된다. 그들의 첫 상태란 이렇다. 즉 그들은 자기들이 자신들로부터 진리를 생각하고 선을 행한다고, 고로 그들 자신의 것으로부터 행한다고 상상하고, 이외 달리는 알지 못하고 있다. 게다가 모든 선과 진리는 주님으로부터 있다라고 그들에게 말해질 때, 그들은 그것을 거절하지는 않지만, 심정에서 그것을 인정하지 못한다, 그리고 어떤 것이 자신 외의 다른 근원으로부터 흐르는 것을 내면적으로 지각하지 못한다. 개혁되는 모든 이가 처음에는 이런 상태에 있기 때문에, 그들은 그들 자신의 것 안에 남아있도록 주님에 의해 허용되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것을 앎도 없이 이것을 수단으로 인도되어진다.

그리고 그녀는 나갔고 브엘세바의 광야에서 배회하였다. 이는 신앙의 교리적인 것들 안에서 방황하는 상태를 의미하는데, 이는 “나가서, 광야에서 배회함”의 의미가 방황하는 상태이다로부터; 그리고 “브엘세바”의 의미가 신앙의 교리임으로부터 알려진다. 브엘세바는 이후 아브라함과 아비멜렉이 계약을 맺는 32절, 아브라함이 작은 숲을 심는 33절에서 더 취급된다. 이 구절에서는 개혁되는 이들의 품질의 상태가 시작에서 어떠한지가 묘사되고 있다. 즉 그들은 다양한 방황함 안으로 빠져들게 된다는 것이다; 그 이유가 그들에게는 주님에 의해 영원한 삶에 관해 많이 생각해보도록, 신앙의 진리들에 관해서도 많이 생각해보도록 하는 기회를 허용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생각함은 그들 자신의 것으로부터 인 바, 그들은 이리저리 방황할 수밖에 방도가 없다. 이 방황은 교리 측면이든 삶의 측면이든 모두에서 그러한데, 그대 그들은 유아 시절에 뿌려진 진리, 또는 다른 것들에 의해 자기들 위에 강한 감명을 준 것, 또는 자신들에 의해 안출된 것들을 꽉 붙든다. 이외에도 그들이 눈치채지 못하는 다양한 애착에 의해서도 인도되어진다. 한마디로 그들은 아직 익지 않은 과일 같다. 이 과일은 그것 특유의 모양, 아름다움, 풍미를 한 순간에 다 일궈낼 수 없다. 또는 연한 싹이 한 순간에 꽃이 피고 이삭을 만들어낼 수 없는 것과 같다. 그러나 이때 들어가는 것들은 비록 오점 투성이이긴 하지만 여전히 그의 개혁되는 쪽으로의 발전에 일익을 담당해준다; 이후 그가 개혁되었을 때, 그것들 중 일부는 분리되고 어떤 것은 영의 생명 유지에 자양분을 공급하는 역할을 한다. 이후에 어떤 것은 주님께서 선과 진리를 심는 쪽에로 순응되어질 수 있다. 또 어떤 것은 영적인 것의 그릇으로 최말단 평면을 담당하기도 한다. 고로 개혁의 계속적인 수단이 되어, 이 수단은 영구적인 연결과 질서 안에서 그의 개혁의 수단이 된다. 그 이유가 인간과 더불은 아주 작은 것조차도 주님에 의해 예견되고 당사자의 미래 상태를 위해 설비해두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가 주님에 의해 인도되도록 자신을 허용하는 한, 주님께서는 그의 선을 위해 모든 것을 예비하신다.

15절. 그리고 물은 병으로부터 다 소비되었다, 그리고 그녀는 어린 아이를 덤불 중 하나 아래에 내던졌다.

물이 병으로부터 다 소비되었다. 이는 진리가 황량해 있음을 의미하는데, 이는 “소비되었음”이 황량해졌음을 의미함으로부터; “물”의 의미가 진리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리고 그녀는 아이를 키 작은 나무 중의 하나 아래에 내던졌다. 이는 지각되어진 선과 진리가 하나도 없어 자포자기함을 의미하는데, 이는 “아이”의 의미가 영적 진리이다로부터, 그리고 나무가 지각을 의미하나, 여기서는 “키 작은 나무 (shrub, bush) 중의 하나에”라고 말해지는 바, 이는 낮은 수준에서의 지각, 고로 거의 어떤 것도 있지 않다 할 만큼 지각함을 의미함으로부터 알려진다. 또한 이것이 행동으로 있게 되면 이는 자포자기 중의 하나이다; 고로 그녀가 아이를 키 작은 나무 중의 하나 아래 던짐은 자포자기 할 만큼 선과 진리가 황량해있음을 표시한다. 욥기서를 보자:
궁핍과 굶주림 만 있다; 그들은 가믐 쪽으로 달아난다, 어젯밤 황량함과 황폐함; 그들은 키 작은 나무에서 껍질(mallow)을 잡아뜯는다; 계곡의 갈라진 틈에서, 먼지(흙)의 구멍에 서와 바위의 구멍에서 거주한다; 키 작은 나무 사이에서 신음하고 있다, 엉컹퀴 아래에 그 들은 함께 모여 있다 (욥. 30:3, 4, 6, 7).
위에서 진리의 황량해 있음이 취급되고 있다. 이것이 고대 교회의 흔히 사용되는 공통된 형체로 묘사되고 있다. 그 이유가 욥기서는 고대 교회의 책이기 때문이다. 이사야서 역시 비슷한 구절이 있다:
그들은 올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모두는 황량함들의 강들에서, 바위들의 갈라진 틈들에서, 그리고 모든 키 작은 나무에서, 그리고 모든 물의 흐름들에서 쉴 것이다 (이. 7:19).
위 구절도 황량함을 다루고, 앞 욥기서와 비슷한 표현 형체이다, 말하자면, 황량함들의 강들, 바위들의 갈라진 틈들, 키 작은 나무들에서 등등이다.
이 구절에서는 개혁되는 이들의 두 번째 상태가 취급되어진다. 즉 그들이 진리를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을 때까지인 무지함으로 떨어지는 상태이다, 그리고 이것은 자포자기하는 정도까지이다. 이런 무지함으로 그들이 떨어짐이 있는 원인은 설득하는 빛이 소멸될는지 몰라서 이다. 이 빛은 진리들 뿐만 아니라 거짓들 까지도 계발하는 속성을 지니고 있다. 그래서 진리들을 수단으로 거짓들을 신봉하도록, 그리고 거짓들을 수단으로 진리들을 믿도록 설득하여 내는데, 이 빛은 그 자체를 신뢰하는 본성 속에 있다; 또한 그들은 경험 자체에 의해 선에 관한 어떤 것, 진리에 관한 어떤 것도 자기로부터, 또는 인간 자신의 것으로부터 있는 것은 하나도 없고, 오직 주님으로부터 있다는 사실에 관해 알게 되는 쪽으로 인도될는지 모른다. 개혁되는 이들이 무지의 극치인 자포자기함으로까지 떨어지고, 그다음 주님으로부터 위로받고 계발해주심을 받는데 이어지는 구절로부터 분명해진다; 그 이유가 주님으로부터의 진리의 빛은 인간 자신의 것으로부터 있는 설득력 안으로는 흘러들 수 없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인간의 것으로부터 인 것은 주님으로부터의 빛을 소멸하는 속성을 지녔기 때문이다. 다른 삶에서 설득에 속하는 것들은 겨울철의 빛같이 나타난다. 이 빛은 천국의 빛의 접근이 있으면, 어둠이 되어 모든 진리에 무지함이 있는다. 개혁되는 이들과 더불어 이런 상태는 진리가 황량해진 상태라고 불리운다. 이 상태는 말씀의 내적 의미에서 많이 취급되는 상태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상태에 관한 지식을 가지는 자는 아주 드물다. 그 이유는 오늘날 거듭나는 자가 매우 적기 때문이다. 거듭나지 않고 있는 이들에게는 자기들이 진리를 알고 있는지, 또는 그렇지 않은지가 하등 차이가 없다. 그들은 자기들이 아는 것이 진리인지 아닌지를 상황에 따라 손바닥뒤집듯 속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거듭나는 이들은 교리에 삶에 관해 많이 생각한다. 그 이유는 그들이 영원한 구원을 많이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자기들에게 진리에 관해 모자람이 발견된다면, 진리는 자기들의 생각과 애착의 주제이기 때문에, (삶 속의 관심사가 늘 그것이기 때문에) 그들은 심정에서 슬퍼한다. 이 사람 저 사람의 상태를 이로부터 알는지 모른다: 인간이 육체 안에서 사는 동안, 그는 영의 측면에서는 천국에서 살아가고, 육체 측면에서는 세상에서 살아간다; 그 이유가 그가 양쪽 측면 안에 있을 수 있게 태어났기 때문이다. 그렇게 창조되었기에 그는 영의 측면에서는 실제로 천사들과 더불어 있을 수 있고, 동시에 육체에 속한 것을 수단으로 인간들과 더불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사 후 살아가는 영을 지니고 이 세상에서 살고 있다고 믿는 자가 거의 없기에 거듭나지는 자가 거의 없다고 말을 하는 것이다. 이것을 믿는 자에게 다른 삶은 그들의 생각과 애착의 전체이고, 이 세상의 삶은 다른 삶과 비교컨대 아무것도 아니다; 그러나 이것을 믿지 않는 이들에게 세상은 자기들 생각과 애착의 전부이고, 다른 삶은 이 세상 삶과 비교컨대 부산물 수준일 뿐이다. 전자는 거듭남이 가능할 수 있는 자이고 후자는 그럴 수 없는 자이다.

16절. 그녀는 자신 스스로 아이로부터 가서 그를 마주보고 스스로 앉았는데, 화살이 미치는 거리 만큼 까지 물러 갔다; 그 이유가 그녀는 나는 아이가 죽는 것을 보고 싶지 않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녀는 그를 마주보고 앉았다; 그리고 그녀는 목소리를 높혀서 울었다.

그녀는 아이로부터 가서 마주보고 스스로 앉았다. 이는 생각하는 상태를 의미한다. 이는 “가는 것”과 “스스로 앉음”의 의미로부터, 그리고 이 동작이 마주 보는 것인 바, 이것의 앞 뒤 문맥으로부터 분명해진다. 여기서 “가는 것”은 아이로부터 가는 것인 바, 이는 영적 진리로부터 옮겨짐을 의미한다; 이 옮겨짐은 화살이 미치는 거리 만큼 물러감이라는 말에 의해 더 극명하게 표현되고 있다. “자기 스스로 앉는 것”은 고독한 상태를 의미한다. 이는 마치 슬픔과 자포자기 안에서 가지는 생각 같은 것이다; “마주보고”란 그녀가 보지 못하도록, 그럼에도 보이도록을 의미하는데, “보이도록”은 생각하는 것을 뜻한다; 이것은 그녀의 말, 즉 “나로 아이의 죽음을 보지 않도록”에서 더 결정적으로 표현되고 있다. 고로 이 말에는 진리가 황량해진 상태에서, 결과적으로 자포자기에 있는 이들이 갖는 생각의 상태가 포함되어 있다.

화살이 미치는 거리 만큼 물러감. 이는 이 상태가 진리의 교리로부터 얼마나 먼지를 의미하는데, 이는 “뒤로 물러감”이 멀리 떨어짐을 의미함으로부터; 그리고 “활”이 여기서는 진리의 교리이다로부터; “쏨”은 가능한 한 멀리를 의미함으로부터 인데, 이는 화살이 활에 의해 보내지는 만큼이기 때문으로부터 알게 된다. 이 구절에서는 활(bow)과 쏨(shot)이 합쳐진 화살이 미치는 거리(bowshot)라고 말해지는데, 그 이유는 “활”이 영적 인간을 서술하고, 영적 인간이 활을 쏘는 자이기 때문이다. 이는 20절, “그는 광야에서 거주하였고, 활을 쏘는 자가 되었다”에서 더 취급된다.

여기서 “활”이 진리의 교리를 의미하는데, 이는 활의 의미 자체로부터 분명해진다. 말씀에서 전쟁이 다루어지는 곳, 그것이 언급되는 말씀의 어느 곳에서 이든, 전쟁은 영적인 전쟁 외의 다른 전쟁은 없다. 고대의 말씀에 있는 책들 중에 “여호와의 전쟁들”이라 표제를 붙인 책이 있는데, 이는 모세의 책에서도 알 수 있다 (민. 21:14-16); 이 책은 예언적 문체로 쓰여 있고, 내적 의미를 가졌고, 주님의 시험들과 전투들을, 또한 교회의 것들 속의 시험과 전투들, 교인의 시험들과 전투들을 취급하고 있다. 이것은 모세가 이 책들로부터 발췌했다는 사실로부터 분명해지고; 또한 고대 교회의 다른 책들인 “예언적 선언에 관한 책들”이라 불리우는 책이 있음으로 부터서도 분명해진다 (민. 21:27-30). 또한 민. 21:28과 예. 48:45를 비교하면, 거의 같은 단어들 임이 발견되는 바, 이로부터서도 분명해진다. 즉 고대 교회가 신성하고 영감있는 역사적, 예언적 저술들을 가졌다는 것, 그리고 그 저술들은 내적 의미로부터서 주님과 그분의 왕국을 취급했음이다; 그리고 이것들이 그들에게는 말씀이었다는 것이다. 마치 글자 의미에서 유대인들과 이스라엘 족들을 취급하되, 내적 의미에서는 주님과 그분에 속하는 사항들을 다루는 역사적, 예언적 말씀이 우리에게 있는 경우와 같다.
말씀 안에서, 그리고 고대 교회의 책들에서와 같이, “전쟁”은 영적인 전쟁이고, 그에 따른 것들, 즉 무기들, 즉 검, 창, 큰 방패, 작은 방패, 던지는 작은 창, 활, 그리고 화살 등등은 영적 의미에서 이해되는 바 그대로의 전쟁에 속하는 특별한 것들을 의미한다. 무기들 중 몇몇의 경우 무엇을 특별하게 의미하는지에 대하여는 주님의 신성한 자비로부터 차 후 말해질 것이다. 여기서는 단지 “활”이 진리의 교리를 의미한다는 정도만을 말할 것이다. 그리고 활과 유사한 것, 던지는 작은 창, 화살, 또는 다른 날아가는 무기(missile)도 있는데, 이런 무기들은 특별한 측면의 영적 싸움에 있는 이들을 표시하게 된다. 이로부터 본문과 연결된 것은 이스마엘이 “활을 가지고 쏘는 자”가 되었다 이다.
“활”이 진리의 교리를 의미하는 것을 아래 구절로부터도 분명해진다. 즉 이사야서에서:
여호와의 화살들은 날카롭다, 그리고 모든 그분의 활들은 구부려져 있고, 그분의 말들의 발 굽은 바위에 견줄만하고, 그분의 바퀴들은 회오리바람 같다 (이. 5:18).
위에서는 교리 속의 진리들이 취급되어진다; “화살들”은 영적인 진리들이다; “활들”은 교리이다; “말들의 발굽”은 자연적 진리들이다; “바퀴들”은 그들의 교리들이다; 그리고 이런 의미들을 지니기 때문에 그것들은 여호와의 속성을 나타내는 바, 이것들이 영적 의미에서가 아니면 그분의 속성이라 말해질 수도 없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이 말들은 텅빈 말들이요 부적절한 말들일 것이다. 예레미야서에서:
주님께서는 적들 같이 그분의 활을 구부리신다, 그분은 대항자 같이 그분의 오른 손과 더 불어 서셨다, 그리고 시온의 딸의 천막에서 눈을 기쁘게 하는 모든 것을 살육하셨다, 그분 은 불 같이 그분의 격노하심을 쏟아부으셨다 (애. 2:4).
위에서 “활”은 진리의 교리를 표시하는데, 이것이 거짓들 안에 있는 이들에게는 적으로서와 적대감 있게 나타난다; 이와 다른 활의 의미가 주님을 서술할 수는 없다. 하박국에서:
오 여호와시여, 당신은 당신의 말들을, 구원의 당신의 병거를 타십니다, 당신의 활이 완전히 적나나하게 만들실 것입니다 (합. 3:8,9).
위에서도 역시 “활”은 선과 진리의 교리이다. 모세의 책에서:
그들이 그를(요셉을) 슬프게 했다, 그리고 궁수가 그에게 쏘고, 그를 미워했다, (그러나) 그의 활은 강함 안에 있었다, 그리고 그의 손의 무기들은 야곱의 전능하신 분의 손에 의해 강하게 만들어졌다; 거기로부터 이스라엘의 반석, 목자가 있다 (창. 49:23, 24).
위 구절은 요셉에 관련해 말해진 대목의 일부이다. 그의 “활”은 선과 진리의 교리를 표시한다.
계시록서에서:
내가 보았더니 흰말이 보였다, 그리고 그 위에 앉으신 분은 활을 가지셨다, 그리고 그에게 왕관이 주어져 있었다 (계. 6:2).
위의 “흰말”은 지혜를 표시한다; “그 위에 앉으신 분”은 말씀이다. 이는 19:13에서, 흰말이 취급되면서 더 분명하게 말해진다; 그리고 그 위에 앉으신 분이 말씀이었기에, “활”은 진리의 교리임이 분명해진다. 이사야서에서:
누가 동쪽으로부터 정의로운 자를 일으키고, 그를 그분의 걸음걸이라고 불렀던가? 그분은 그 사람 앞에 나라들을 주셨다, 그리고 그로 왕들을 통치하게 만들었다; 그분은 그들을 그 의 검에 먼지 같이 주셨다, 마치 그의 활에 내몰리는 그루터기 같이 이다 (이. 41:2).
위에서 주님이 취급되어진다; “검”은 진리를 표시한다; “활”은 그분으로부터의 교리를 표시한다. 이사야서에서:
나는 그들 사이에 표시를 둘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들을 나라들로 도망하는 자와 같이 활 을 당기는 다르싯, 뿔(Pul)에게, 두발과 야완에게 보낼 것이다 (이. 66:19).
“활을 당기는” 그들은 교리를 가르치는 이들을 표시한다.
예레미야서에서:
승마자들과 활을 쏘는 자의 음성 때문에 온 도성이 달아나고 있다; 그들은 구름들 안으로 들어갔었다, 그리고 바위들 위로 기어올랐다, 전체 도성이 내버려졌다 (예. 4:29).
“승마자”는 진리를 선포하는 이들을 표시한다; “활”은 진리의 교리를, 표시하고, 거짓들에 있는 이들이 이 진리를 두려워하거나 두려워 도망하고 있다. 예레미야서에서:
바벨을 빙둘러 네 자신을 정렬시켜 두어라; 활을 구부린 너희 모두여, 화살을 남겨두지 말 아라, 그 이유가 그녀는 여호와에게 죄지었기 때문이다 (예. 50:14, 29; 51:2, 3).
위에서 “쏘는 이들, 활을 구부린 이들”은 진리를 가르치고 선포하는 이들을 표시한다.
스가리야서에서:
나는 에브라임으로부터 병거를, 그리고 예루살렘으로부터는 말을 근절되게 할 것이다, 그리 고 그는 나라들에게 평회를 이야기할 것이다 (슥. 9:10).
“에브라임”은 교회에서 있는 진리에 대한 이해를 표시한다; “활”은 교리를 표시한다. 사무엘서에서:
다윗은 사울을 두고, 그리고 그의 아들 요나단을 두고 통곡했다, 그리고 그는 유다의 아들 들에게 활을 가르치라고 말했다 (삼하. 1:17, 18).
위에서 “활”이 주제가 아니나, 신앙의 교리적인 것들이다. 에스겔서에서:
주 여호비께서 말하셨다, 이 날은 내가 이야기했었던 날이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도성에 거 주하는 자들이 나갈 것이다, 그리고 불을 지르고 무기들을, 큰 방패와 작은 방패들을, 활들 과 화살들을, 그리고 손 지팡이와 창을 태워버릴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칠 년을 그것들에 불을 놓을 것이다 (겔. 39:8, 9).
위에서 명명한 무기들은 영적 전쟁에 관한 모든 무기들이다; “화살들을 가진 활”은 교리와 그것의 진리들을 표시한다. 다른 삶에서 진리들 자체가 선으로부터 분리되어 시야에 표출될 때, 그 진리는 화살 같이 나타난다.
“활”이 진리의 교리를 의미하는 바, 반대적 의미에서는 거짓의 교리를 의미한다. 말씀에서는 동일한 것들이 통상적으로 반대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 예레미야서에서 이를 확인해 보자:
보아라 북쪽 나라로부터 사람들이 온다, 그리고 큰 나라가 땅의 측면으로부터 휘저을 것이 다; 그들은 활과 창을 붙잡고 있을 것이다; 그들은 잔인할 것이고 동정심이 없을 것이다; 그들의 음성은 바다같을 것이다, 그들은 너에 맞서 전투를 위해 준비된 사람으로 말을 타 고 있을 것이다, 오 시온의 딸아 (예. 6:22, 23).
위에서 “활”은 거짓의 교리를 표시한다. 예레미야서에서:
보라 사람들이 북쪽으로부터 온다, 그리고 큰 나라, 그리고 많은 왕들이 땅의 측면들로부터 휘저을 것이다, 그들은 활과 창을 붙잡고 있을 것이다, 그들은 잔인하다, 그들은 동정심이 없다 (예. 50:41, 42).
위 구절의 의미도 앞 구절과 비슷하다. 예레미야서에서:
그들은 자기들의 혀를 구부린다; 그들의 활은 거짓말이다, 그리고 진리를 위해서가 아니다, 그들은 토지에서 강하게 성장되었다; 그 이유는 그들은 악으로부터 악까지 가벼렸고, 나를 몰랐기 때문이다 (예. 9:3).
“활”이 거짓의 교리를 의미하는 것은 분명하게 명백하다, 그 이유는 말해지기를, “그들은 자기들의 혀를 구부린다; 그들의 활이 거짓말이다, 그리고 진리를 위하여서가 아니다”이기 때문. 예레미야서에서:
여호와 체바욷께서 말하셨다, 보라 나는 엘람의 활, 그의 으뜸가는 힘을 부러트릴 것이다 (예. 49:35).
다윗서에서:
오라, 여호와 일들을, 누가 땅을 황량하게 만들었는지를 보라; 그분은 전쟁들을 땅의 끝 쪽까지에서 중단하게 만드신다, 그분은 활을 부러뜨리신다, 그분은 산산조각으로 창을 부수 신다, 그분은 불로 병거들을 태우신다 (시. 46:9).
다윗서에서:
유다 안에서 하느님이 알려지신다, 그분의 이름은 이스라엘에서 위대하시다; 살렘에 또한 그분의 성막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시온에 그분의 거처가 있을 것이다; 거기서 그분은 활 의 불붙은 손잡이를, 작은 방패와 검을, 그리고 전쟁을 부술 것이다 (시. 76:1-3).
다윗서에서:
보라 사악한 자가 활을 구부린다, 그들은 심정이 곧바른 자를 쏘려고 시위에 그들의 화살 들을 놓을 준비를 하고 있다 (시. 11:2).
위에서 “활과 화살”은 거짓의 교리적인 것들을 분명히 표시한다.

그 이유가 그녀는 말하기를, 나는 아이의 죽음을 보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이는 그렇게 멸해져야 하는 것에 슬퍼함을 의미하는데, 이는 “죽음을 보는 것”의 의미가 멸해짐이다로부터; 그리고 “아이”의 의미가 영적 진리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로부터, 그리고 진리의 황량함 때문에 자포자기를 느끼는 것으로부터 이 말들 안에는 내면적 슬퍼함이 있다가 분명해진다.

그리고 그녀는 그녀의 음성을 높혀서 울었다. 이는 더욱 더 슬퍼함을 의미하는데, “음성을 돋구어 운다”는 것은 슬픔의 최고 한도에 이른 것을 의미함에서 알게 된다; 그 이유가 큰 소리내어 운다는 것은 그밖의 다른 의미는 없기 때문이다. 영적으로 되어가는 이들과 더불어 있는 진리의 황무한 상태, 또한 진리들로부터 옮겨지는 상태가 이 구절에서 묘사되어 있다. 이런 사항들이 어떻게 이해되어지는지에 대해 간략히나마 말해보겠다. 개혁되어질 수 없는 이들의 경우, 그들은 진리들의 결핍 때문에 슬퍼함이 있는지 조차 전혀 알지 못한다; 그 이유가 그들은 이런 것 때문에 근심을 조금이라도 느낄 이유가 없다고 상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이 걱정된다고 믿어지는 것은 육체와 세상에 속한 좋은 것의 결핍이다. 즉 건강, 영예, 명성, 부유함, 목숨 같은 것이다. 그러나 개혁될 수 있는 이들은 전혀 다르다: 이들은 선에 대한 애착과 진리에 대한 생각 안에 주님에 의해 간직되어 있다; 그러므로 이런 생각함과 애착에 결핍이 발생하면 걱정하게 된다.
모든 걱정과 슬퍼함은 우리를 감화되게 한 것, 또는 우리가 사랑하는 것들이 결핍될 때 발생한다고 알려져 있다. 육체적이고 세상적인 것들에서 감화된 이들은 그것들의 결핍이 그들에게 발생할 때 슬퍼한다; 그러나 영적인 선들과 진리들에 감화된 이들은 그것들이 결핍될 때 슬퍼한다. 모든 이의 생명은 애착, 또는 사랑 밖에 더 없다. 그러므로 분명해지는 것은 선들과 진리들에 감화된 이들, 또는 그것들을 사랑한 이들에게 그것들의 결핍이 발생할 때의 슬퍼하는 상태는 더 심각하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이것은 더 내적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선과 진리의 결핍에서 그들은 육체의 죽음을 중요시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그들이 관심을 두는 것은 영원한 죽음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여기서 묘사된 그들의 상태이다.
주님에 의해 선과 진리에 대한 애착 안에서 보존되고, 고로 개혁되고 영적 인간이 되어갈 수 있는 이들, 그리고 그렇게 할 수 없는 이들을 짚어보고 지나가야 할 것 같아 간략히나마 서술해보자. 선들과 진리들을 흡수하는 처음 시기인 어린 시절에서, 모든 이 각각은 자기의 부모나 스승들에 의해 자기에게 말해지고 가르쳐진 것이 진실이다는 것을 긍정적 측면에서 받아들이도록 주님에 의해 보존되어진다. 영적 인간이 되어질 수 있는 이들과 더불어 이 긍정적 측면은 지식들을 수단으로 확증되어진다; 그 이유가 그들이 그것에 인척 관계를 가진 것은 무엇이든 배워진 이후, 그 지식들은 긍정적 측면 안으로 은근히 심어지고, 긍정적 측면의 것이 진실임을 확인해주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작용은 애착의 수준으로까지 더욱 발전한다. 이들은 신앙을 지니고 시험들을 정복하는 진리의 본질에 일치하는 가운데 영적 인간이 되어가는 이들이다. 그러나 영적 인간이 되어갈 수 없는 이들과는 딴판이다. 비록 그들도 어린 시절 긍정적 측면에 있다 할지라도, 뒤이어지는 년령대에서 그들은 의심들을 용인하고 선과 진리에 대한 긍정적 측면에 흠집을 낸다; 그리고 그들이 성년의 나이에 접어들 때, 그들은 부정적 측면을 승인하고, 거짓을 애착함으로까지 진입한다. 만일 이들이 시험을 겪게 되면, 그들은 통째로 시험에 굴복하고 만다; 그리고 이 굴복 때문에 그들은 시험들로부터 면제되어진다.
그러나 그들이 의심들을 용인하는 진짜 원인, 그리고 그후에 그들이 부정적 측면에 있다는 것은 그들의 악한 삶에서 발견되어진다. 악한 생활에 있는 자들은 이와 달리는 가능할 방도가 없다; 그 이유가 이미 말했듯이 모든 이의 생명은 그의 애착, 또는 사랑이기 때문이다; 즉 애착, 또는 사랑이 이러이러하다면, 생각도 이러이러 하다는 말이다. 악에 애착함과 진리를 생각함은 사실상 함께 결합될 수 없다. 이 둘의 결합이 있는 듯 보이는 경우, 그것은 결합의 껍데기, 형식상의 결합이지, 진짜로 결합된 것은 아니고, 진리에 대한 애착 없이 진리에 대한 생각만 있는 형국이다; 그러므로 이런 인물과 더불어 있는 진리는 진리가 아니고, 소리의 어떤 것, 입으로부터의 어떤 것일 뿐, 심정으로부터의 것은 결석한 상황이다. 이런 껍데기의 진리를 내뱉는 자가 여느 진리를 지닌 평범한 이들 보다 더 잘 알고 더 번듯한 듯 비칠 때가 많다. 어떤 이들과 더불어서의 경우, 진리로 설득함이 발견되는데, 이것은 그 속성상 그것이 진짜인지(순수한지)를 아무도 알 수 없는 경우도 발생한다. 그럼에도 선으로부터의 생명, 즉 선한 생활의 이어짐이 없다면, 그 진리로 설득함은 가짜이다; 다시 말해 그것은 자기를 사랑함과 세상을 사랑함에 속한 애착일 뿐이다. 이것이 이런 설득력을 발휘한 것인 바, 그들은 그것을 외관상의 열정을 격렬하게 내비치기까지 시도해 방어하려든다, 게다가 그런 노력의 결과에 성과가 미미할 경우, 그들은 자기들의 진리적 설득을 받지 않거나, 자기들 방식으로 믿지 않는 자를 정죄하는 극점의 수단도 불사한다. 이런 인물과 더불은 진리가 이런 품질 속에 있는 바, 진리로 위장한 그들의 원리는 자기를 사랑함과 세상을 사랑함의 강도가 세질수록 더 극점으로 치닫는다. 실제로 진리가 악에 붙어 있는 셈이다. 그러나 실지로 진리가 악과 더불어 그 자체 결합되지는 못한다. 그래서 다른 삶에서는 결합한 듯 비치는 것마저 뿌리째 뽑혀진다. 그러나 선한 삶을 영위하는 이들의 경우는 아주 다르다. 그들에게 진리 자체는 그것 자체의 바탕과 심정을 가지고 있고, 주님으로부터 그것의 생명을 가진다.

17절.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아이의 소리를 들으셨다. 그리고 하느님의 천사가 천국으로부터 하갈을 불렀다. 그리고 그녀에게 말했다, 하갈아 무엇이 너를 괴롭히느냐? 두려워마라, 그 이유가 하느님께서 아이가 있는 곳에서 그의 소리를 들으셨기 때문이다.

하느님께서는 아이의 음성을 들으셨다. 이는 그때 있는 도움을 의미하는데, 이는 역사적 의미에서 말해진 “하느님이 음성을 들음”의 의미가 내적 의미에서는 도움을 가져오는 것이다로부터; 그리고 “아이”의 의미는 이미 설명한 대로 영적 진리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여기서는 영적 인간의 상태가 진리 측면에 있는 경우이다; 그 이유가 그분께서 아이의 소리를 들으셨다라고 말해지고, 다시 하느님께서는 아이가 있던 곳에서, 어떤 상태에서 그의 소리를 들으셨다 라고 말해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어떤 상태는 앞의 구절에서 보면 진리의 결핍 때문에 최고도의 슬픔의 상태에 있었음이 보여졌다. 하갈의 (목놓아 우는) 소리가 아닌, 아이의 소리가 들려졌다 라고 말해지는데, 그런 이유는 영적 인간의 상태가 취급됨을 암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이, 즉 이스마엘에 의해 영적 (평면의) 교회인이 표현되어지고 있다; 그의 어머니 하갈에 의해서는 진리의 지식들에 애착함이 표현되었는데, 이것에 슬픔을 가진 것이다. 인간 수준의 합리성은 기억 속의 지식에 대한 애착을 어머니로 하여 태어난다; 그러나 인간의 영적인 것은 교리로부터, 특히 말씀으로부터 있는 진리에 대한 애착으로부터 태어난다. 영적인 것 자체가 여기서는 “아이”이다; 그리고 진리에 관한 지식들에 애착함은 “하갈”이다.

그리고 하느님의 천사가 천국으로부터 하갈을 불렀다. 이는 위로함을 의미하는데, 이는 “천국으로부터 부름”과 “하느님의 천사”, 그리고 “하갈”의 의미로부터 분명해진다. “천국으로부터 부르는” 것은 유입을 의미하고; “하느님의 천사”는 주님을 의미하고; 그리고 “하갈”은 진리의 지식에 애착함을 의미한다. 진리의 지식에 대한 결핍 때문에 최고로 깊게 슬퍼함에 있을 때, 진리에 애착함 안으로 주님의 유입하심이 있는 것은 위로함이다. 주님으로부터 인간으로 흐르는 것이 “천국으로부터 부르는 것”이라고 말해지는데, 그 이유는 이것이 천국을 통하여 있고 거기서 명백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의 지각과 생각 안에서 이것은 희미하고, 그의 애착의 상태의 변화에 의해서만 자체를 명백히 한다; 여기서는 위로를 받는 것이다.

그리고 그녀에게 말했다, 하갈아, 무엇이 너를 괴롭하느냐? 이는 진리의 지식이 결핍한 상태에 관하여 지각함을 의미하는데, 이는 말씀의 역사적 부분에서 “말하다”는 지각하다를 의미함으로부터; 그리고 “무엇이 너를 괴롭히느냐? 하갈아”는 그것이 있었던 상태이다로부터: 이것이 여기서는 비록 그녀가 질문을 받아, “무엇이 너를 괴롭하느냐”라고 말해질지라도, 주님께서 그것을 통째로 알으셨음을 의미한다. 글자 의미에서 이것은 주님으로부터의 질문이지만, 내적 의미에서는 모든 것들을 무한히 지각하심이다. 우리는 말씀의 여기저기에서 인간들이 자기들의 상태에 관하여 질문 받아지는 대목을 읽는다; 그러나 그렇게 읽는 이유는 인간은 누구도 자기가 무엇을 생각하는지, 더구나 자기의 애착의 상태는 더더욱 모른다고 믿기 때문이다. 더 깊은 이유는 인간들은 자기들의 느낌들을 표현하는 것이 가능해질 수 있음으로부터 위로를 가진다는 것, 이것이 안심함을 증명하는 일이 종종 발생하기 때문이다.

두려워 말라, 그 이유가 하느님께서 아이가 있는 곳에서 그의 음성을 들으셨기 때문이다. 이는 도움의 희망이 있다를 의미하는데, “두려워 말라”가 자포자기하지 않다를 의미함에서 분명해진다; 그 이유가 두려움이 거두어질 때, 희망이 현존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이의 음성을 들음”이 도움이 있다를 의미함으로부터도 알게 된다. 앞의 구절에서는 개혁되어 영적으로 되어가는 이들의 황량한 상태가 취급되어졌고; 지금의 주제는 그들의 황량한 상태가 회복 단계에 들어서는 것, 그래서 여기서는 그들에게 위로받음과 도움의 희망이 주제가 되고 있다.
개혁되는 이들이 진리에 무지함, 또는 황량해짐의 상태로 떨어져 급기야는 슬픔과 자포자기하는 수준으로 내려가나, 그때 그들에게는 먼저 위로와 도움이 주님으로부터 있다는 것이 오늘날 알려져 있지 않은데, 그 이유는 개혁되는 이들이 적기 때문이다. 개혁될 수 있는 이들이 이 상태 안으로 가져와지는 것은 만일 육체의 삶에서가 아닌, 즉 다른 삶에서라면, 거기서는 이런 상태가 잘 알려져 있고, 이 상태는 황폐함, 또는 황량한 상태라고 불리운다. 이에 관한 언급은 제 1권에서 약간 있었다. 이런 황폐함, 또는 황량함에 있는 이들은 자포자기하는 수준으로조차 낙하된다; 그리고 그들이 이 상태에 있을 때, 그들은 주님으로부터 위로와 도움을 받고, 천국으로 결국은 데려가진다. 그리고 거기서 마치 신앙의 선과 진리를 아무것도 모르는 듯 새로이 천사들로부터 가르침을 받는다. 이런 황폐해짐과 황량해짐이 있는 주된 이유는 개혁되는 이들이 자신의 것으로부터 품고 있었던 설득력이 깨져야 한다는 것, 그리고 선과 진리에 관한 지각을 받아야 하기 때문, 그런데 이 선과 진리를 받는 것은 자신으로부터인 것인 설득력이 매우 부드러워 질 때까지 가능치 않다. 그러므로 자포자기에 이르기까지 하는 슬퍼함과 근심함이 초래되는 것이다. 인간은 선하지 않은 상태, 복되지 않은 상태, 행복하지 않은 상태 안에 있지 않으면, 선인 것, 복된 것, 행복한 것을 절묘한 수준에서 (즉 다시는 옛 것으로 되돌아 가는 일이 절대 없는 수준에서) 지각할 수 없다. 이로부터 그는 지각의 영역을 획득하고, 이 수준은 그의 옛 수준의 꼭 반대 수준이다고 말해도 될지 모른다. 즉 지각의 영역과 이 영역의 확장됨은 상대적이다는 말이다. 이것이 황폐해짐, 또는 황무해짐의 원인 인데, 사실상 이외에도 원인은 많다.
예를 들어 생각해보자. 만사는 자신의 신중함으로부터이지, 신성한 섭리로부터는 거의 없다고 하는 이들에게 수 천 가지 이유를 들어 신성한 섭리는 보편적이다는 것, 그리고 아주 미세한 각자의 사항에도 신성한 섭리의 일하심은 있다는 것을 입증해준다면; 그리고 머리털이 빠지는 것도 미리 예견되고 설비되지 않으면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해주었다 해도, 그들 스스로 이성을 수단으로 확신되는 참 순간 외에는 이런 증명해보임에 의해서 자신의 신중함에 관한 그들의 생각은 꿈쩍도 하지 않는다. 설사 생생한 경험에 의해 같은 것이 증언될 경우, 그들이 경험을 보는 그 순간, 그들은 그렇구나하고 고백한다; 그러나 잠간의 순간이 지나면 그들은 이전의 자신의 견해로 용수철 같이 되돌아가 있다. 즉 이와같은 증언은 그들의 생각에 찰나의 어떤 효과일지언정 그 낌새라도 있지만 그들의 애착 측면에는 그나마 전무하다; 따라서 애착이 산산조각나지 않으면, 그의 생각 역시 본래의 상태에 항상 머물고 있다; 그 이유가 생각은 그것의 신조와 생명을 애착으로 가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걱정과 슬픔이 자신 스스로는 무력하다는 사실에 의해 유발될 때, 그래서 자포자기할 때, 그들의 신념은 부셔지고, 그들의 상태에 변화가 감지된다; 그리고 그다음 그들은 자기 스스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 모든 힘, 신중함, 총명, 그리고 지혜는 주님으로부터 있다는 믿음 안으로 인도어질 수 있다.
예를 들어 더 생각해보자: 만일 어떤 이가 만일 자기 안에 어떤 어떤 악도 더 이상은 있지 않아서 자신은 의로운 자이다는 것, 자신들의 악은 씻어졌고 삭제되었다고 자신을 설득했다면, 그런 신조 안에 있는 이들에게, 수 천 가지 이유들로 들어 인간의 악은 씻어지거나 삭제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 의해 악으로부터 물러나져 선 안에 보존되는 것일 뿐이다고 말한다면, 더 나아가 그들에게 자신 스스로부터서는 언제나 악밖에 없다는 것, 실로 우리들은 악들의 불순한 더미에 불과하다는 것을 확신되게 한다해도, 그들은 결국 자기들의 견해로부터의 믿음에서 한발 자국도 물러서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자신 안에서 지옥을 지각하는 상태로 낙하되고, 이 낙하 수준이 구원 불가능이라는 자포자기하는 수준까지일 때, 그때 처음 그들의 신념(설득력)이, 그들의 자만심이, 자신과 비교해 타인을 경멸함이, 자신들만 구원되어질 수 있다는 건방진 착각도 부셔진다. 동시에 진정한 신앙의 고백 안으로, 즉 모든 선은 주님으로부터 있다는 것, 뿐만 아니라 모든 것은 주님의 자비하심으로부터 있다는 것, 이런 사항의 인정은 자아에 관한 진정한 속성을 인정함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것까지로 인도된다. 이로부터 개혁되는 이들, 영적 인간으로 되어가는 이들이 앞 절에서 언급한 황폐됨, 또는 황무해짐의 상태로 왜 떨어져야만 하는지가; 그리고 그들이 자포자기하는 상태에 있을 때, 그다음 처음에는 주님으로부터 위로와 도움을 받는지도 분명해질 것이다.

18절. 일어나라, 아이를 일으켜라, 그리고 아이 안에서 네 손이 강해져라. 그 이유가 나는 그를 큰 나라로 만들 것이기 때문이다.

일어나라. 이것이 마음의 승강을 의미하는데, 이는 “일어남”이 어떤 종류의 승강을 의미함에서 알게 된다; 여기서는 마음의 승강인데, 그 이유는 계발이기 때문, 그리고 이어지는 구절에서는 진리들 안에서의 가르침이다.

아이를 일으켜라. 이것이 진리 측면에서의 영적인 것을 의미하는데, 이는 “아이”의 의미가 진리 측면에서 특별히 영적인 것으로부터 분명해진다; 그 이유가 영적 교회인이 신앙의 진리들을 수단으로 거듭나지는 듯 보이고, 진리의 선을 수단으로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이것은 가상적이지 않고 진리에 대한 애착 안에서, 그다음 진리에 따른 삶 안에서 자체를 명백히 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진리 안에 선이 있는 때 외에 누구도 진리를 수단으로 거듭나질 수 없다; 그러므로 선으로부터 분리된 진리를 수단으로 어떤 새로운 삶은 오지 않는다; 어쨌든 인간은 이것을 거듭남에 의해 소유한다.

그(him) 안에서 네 손이 강해져라. 이는 그것으로부터 지원받음을 의미하는데, 이는 “강해짐”이 지원받음을 뜻함으로부터; 그리고 “손”이 힘을 의미함에서 알게 된다. “그(him) 안에서”, 즉 “아이 안에서”가 그것으로부터, 즉 진리 측면에서의 영적인 것으로부터를 뜻한다. 내적 슬퍼함에 있는 이들, 그리고 진리의 결핍으로 자포자기함에 있는 이들은 진리에 의해서만 승강되고 유지지탱된다, 그 이유는 그들이 슬픔과 자포자기에 있는 이유가 이것 때문에서이다. 선에 애착함에 있는 이들과 더불어, 그들의 선은 굶주린 자가 빵을 바라듯 선을 바란다. “그 안에서 손이 강해져라”가 뜻하는 것은 내적 의미로부터가 아니면 누구에 의해서도 이해되지 않을 것이다.

그 이유가 나는 그를 큰 나라로 만들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영적 (평면의) 교회를 의미하는데, 이는 “큰 나라”가 영적 (평면의) 교회, 즉 신앙의 선을 받게 될 교회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큰 나라“라고 말해지는 이유는 주님의 두 번째 왕국이기 때문이다. 영적 교회인이 이스마엘에 의해 표현되듯, 영적 (평면의) 교회 자체도 이스마엘에 의해 표현된다, 그리고 또한 천국들에 있는 주님의 두 번째 왕국도 표현한다; 그 이유가 이쪽의 형상과 모습이 다른 쪽에 있기 때문이다. 황량함 이후 첫 상태가 앞 절에서 묘사되었는데, 이는 위로와 도움이 있다는 희망이었다. 황량함 이후 둘째 상태가 이 절에서 묘사되는데, 이는 계발됨과 그로부터 원기회복하는 상태이다.
이런 상태들은 이 세상에는 잘 알려져 있지 않은데, 그 이유는 거듭나는 자가 드물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상태가 충분히 알려진 다른 삶에서의 거듭나는 이들의 상태를 묘사해보자. 황폐함에, 또는 황량함에 있어왔던 이들이 도움의 힘으로 위로를 받은 후, 천국으로 주님에 의해 승강되어진다, 고로 무지의 상태인 그늘의 상태로부터계발됨의 상태인 빛의 상태 안으로, 그로부터 원기회복하는 상태로, 고로 그들의 가장 깊은 안쪽에 영향을 미치는 환희의 상태 안으로 진입한다. 그들은 시각 뿐아니라 이해함 측면에도 동시에 오는 실제의 빛이다. 이 빛이 그들을 얼마나 많이 새롭게 하는지는 이와 반대되는 상태, 즉 그들의 과거 상태와 견주어 가늠된다. 유아다운 (천진스러운) 기지 속에 있는 이들과 단순 순박한 신앙 속에 있어왔던 이들은 그때 희고 빛나는 의복을 입고 나타난다; 어떤 이는 왕관을 쓰고 있다; 어떤 이는 다양한 천사들의 공동체에 빙둘려 있다, 그리고 그들은 형제로서의 선행과 더불어 모든 곳에서 받아진다; 그리고 그들의 새로운 삶을 만족하게 하는 선에 속한 것은 무엇이든 그들에게 보여진다; 이들에게는 천국의 광대함, 또는 주님의 왕국의 광대함을 보도록 주어진다, 그리고 동시에 거기 잇는 이들의 복됨을 지각하게 하신다; 이외에도 셀 수 없는 많은 것들이 더 있다. 이와같은 것이 계발됨의 첫 상태, 그리고 황량함으로부터 나와 원기회복된 이들의 첫 상태이다.

19절.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그녀의 눈을 여셨다, 그리고 그녀는 물 있는 우물을 보았다. 그리고 그녀는 가서, 병을 물로 채웠다, 그리고 아이에게 마시라고 주었다.

하느님께서 그녀의 눈을 여셨다. 이것이 총명을 의미하는 것은 “여심”, 즉 “하느님께서 여심”, 그리고 “눈”의 의미가 총명을 의미함에서 알게 된다. 하느님께서 내면의 시각, 또는 이해성을 여실 때, “하느님께서 눈을 여신다”라고 말해진다; 이 여심은 인간의 합리성 안으로, 오히려 그의 합리성의 영적 측면 안으로 유입하심에 의해 결과된다. 이것은 혼의 경로, 또는 내적인 경로에 의해 있어지나 인간에게 알려져 있지 않다. 이 유입이 그가 계발되는 상태이다, 이 상태에서 그가 듣거나 읽는 진리들은 그의 지적인 내부에서 내면적인 어떤 지각함을 수단으로 확증되어진다. 그런데 이것을 인간은 자기의 천부적인 성품에서라고, 또는 그의 지적 능력으로부터 라고 믿는다. 그러나 이런 믿음은 대단히 실수한 것이다; 그 이유가 이것은 희미한 것, 오류들, 인간과 더불은 거죽인 것 안으로 주님으로부터 천국을 통한 유입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선을 수단으로 그가 믿는 것들이 진리와 유사해지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영적인 자들만이 신앙의 영적인 것들 안에서 계발됨과 더불어 복되어 있다. 이것이 “하느님께서 눈을 여심”에 의해 의미되고 있다.
“눈”이 이해함을 의미하는 것은 육체의 시각이 육체 속의 영의 시각인 이해함에 상응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이 말씀에서 이해함과 상응하기 때문에 눈이 언급되는 거의 모든 곳에서 이해함은 눈과 상응하고 있다. 이는 그렇지 않을 것같다고 여겨지는 구절에서조차 그러하다; 마태복음에서 주님이 말하신다:
몸의 등불은 눈이다; 그러므로 만일 네 눈이 성하다면, 온 몸이 빛으로 가득할 것이다; 그 러나 만일 네 눈이 악이다면, 네 온 몸은 어둠으로 가득할 것이다; 그러므로 네 안에 있는 빛이 어둠이다면, 그 어둠은 얼마나 클 것이냐? (마. 5:22, 23; 눅. 11:34).
위에서 “눈”은 이해함, 영적 측면 속의 신앙이다는 이 구절, 즉 “그러므로 만일 네 안에 있는 빛이 어둠이다면, 그 어둠은 얼마나 클 것이냐?”로부터 분명해진다. 마태복음서에서:
만일 네 오른 눈이 네게 걸림돌이거든, 그것을 뽑아내라, 그리고 그것을 너로부터 내던져라 (마. 5:29; 18:9).
“왼쪽 눈”은 지적인 것, “오른쪽 눈”은 애착이다: 오른쪽 눈이 뽑혀진다는 것은 만일 애착이 걸려넘어지게 하는 원인이다면, 우리는 그것을 정복해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마태복음서에서:
너는 보기 때문에 네 눈은 복있다, 그리고 너는 듣기 때문에 네 귀는 복있다 (마. 13:16).
그리고 누가복음서에서: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말하셨다, 너희가 보는 것들을 보는 눈은 복되다 (눅. 10:23).
위에서 “보는 눈”에 의해 총명과 신앙이 의미되어진다; 그 이유가 그들이 주님을, 그분의 기적들을, 그분의 일하심을 보는 것이 그들로 복있게 만드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이해성으로 그것들을 납득하고 신앙을 가지는 것이 복있게 만들고, 이것이 “눈을 가지고 보는 것”이다; 그리고 순종함, 이것은 “귀를 가지고 듣는 것”이다; 그 이유가 이해함은 시각의 영적인 것, 그리고 신앙은 이해함의 영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눈의 시각은 세상의 빛으로부터이나, 신앙의 시각은 천국의 빛으로부터 있다. 그러므로 본다는 것을 이해성과 더불어 말하는 것, 신앙에 의해 본다고 말하는 것은 일반화된 대화체가 되어 있다.
마가복음서에서: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말하셨다, 너희는 아직도 지각하지도 못하고 이해하지도 못하느냐? 너희는 굳어진 심정을 가지고 있느냐? 너희는 보는 눈을 가지고 있지 않느냐? 그리고 너희 는 듣는 귀를 가지고 있지 않느냐? (막. 8:17, 18).
위에서 분명해지는 것은, 기꺼이 이해하지 않는 것과 믿지 않는 것이 “눈을 가지고 보지 못하는”이다. 누가복음서에서:
예수께서 도성에 관해 말하셨다, 만일 네가 너희 평화에 속한 것들을 알았다면; 그러나 지 금 이것은 너희 눈으로부터 감추여 있다 (눅. 19:41, 42).
그리고 마가복음서에서:
이것은 주님의 행하심이고, 이것은 우리의 눈에 놀라운 것이다 (막. 12:11).
위에서 “눈으로부터 감추여”있다는 것, 그리고 “눈에서 놀라운” 것이다는 것은 이해함에 그렇게 있는 것을 뜻한다는 것은 일상 대화체에서 사용하는 눈의 의미로부터도 알려져 있다.

그리고 그녀는 물 있는 우물을 보았다. 이는 진리들이 있는 주님의 말씀을 의미하는데, 이는 “물 있는 우물”, 그리고 “샘”이 말씀, 말씀으로부터의 교리, 고로 진리 자체도 의미함에서 알게 된다; 그리고 “물”의 의미가 진리임으로부터 알려진다. “안에 물이 있는 우물(well)”, 그리고 “샘(fountain)”이 주님의 말씀을, 또한 말씀으로부터의 교리, 결과적으로 진리 자체도 표시하는 것은 아주 많은 구절로부터 알려지고 있다. 이 구절에서 샘이 아닌 우물이 말하여지는데, 그 이유는 영적 교회가 취급되기 때문인데, 이 장의 25절에서도 분명해진다. 즉:
아브라함은 아비멜렉의 종들이 갈취한 우물 때문에 아비멜렉을 책망했다.
이와 비슷하게 26장에서:
이삭의 아버지의 종들이 그의 아버지 아브라함의 시절에 팟던 모든 우물들을 블레셋인들이 멈추게 해버렸다. 그리고 이삭은 되돌아 왔다, 그리고 그들은 그의 아버지 아브라함의 시절 에 파놓았고, 아브라함이 죽은 후 블레셋인들이 멈추게 한 물 있는 우물을 팟다. 그리고 이 삭의 종들은 계곡에서 팟다, 그리고 거기서 생명 있는 물을 가진 우물을 발견했다. 그리고 그들은 또 다른 우물을 팟다, 그리고 그것 때문에 그들은 다투지 않았다. 그리고 그 날이 지나 이삭의 종들이 이삭에게 와서 그들이 판 우물에 관하여 말했다, 그리고 그에게 말했 다, 우리는 물을 발견했습니다 (창. 26:15, 18, 19, 20, 21, 22, 25, 32).
위에서 “우물들”에 의해 교리적인 주제들이 의미되고, 이것에 관하여 그들은 다투고ㅡ 다투지 않고 한 것이다. 그런데 그들이 우물들을 파고 그것 가지고 다투는 것이 여러번 말씀에서 언급된 이유는 신성한 말씀에서 언급되어야 할 중요성이 있기 때문이다.
모세에 의해 이야기된 “우물”도 마찬가지로 말씀, 또는 교리를 의미한다:
그들은 브엘로 여행했다; 이곳에 우물이 있고, 거기서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백성을 모이 게 하라, 그리고 나는 그들에게 물을 줄 것이다 하고 말하셨던 곳이다. 그때 이스라엘은 이 노래를 불렀다: 솟아올라라, 오 우물이여; 너희는 그것으로부터 답하라. 제 1 인 자가 우물 을 팟다, 백성이 자진해서 입법가 안에서, 그들의 장대를 가지고 그것을 팟다
(민. 21:16-18).
“우물”이 이런 것을 의미했는 바, 그러므로 이스라엘에서 이 예언적 노래가 있었고, 이 노래 안에서 진리의 교리가 취급되는데, 이는 내적 의미에서의 세부 사항으로부터 분명해진다. 그로부터 이름 “브엘(Beer)”이 왔고, 이로부터 이름 “브엘세바”가 왔다, 그리고 내적 의미에서 그것의 의미는 교리 자체이다.
그러나 진리가 없는 교리는 “구덩이”, 또는 “물이 없는 우물”이라 불리우는데, 예레미야서에서:
귀인들이 아랫 사람에게 물을 길어오게 보냈다; 그들이 구덩이들에 왔고, 그들은 물을 발견 하지 못했다; 그들은 텅빈 그릇들을 가지고 되돌아갔다 (예. 14:3).
위에서 “물들”은 진리들을 표시한다; 그리고 “그들이 물을 발견 못한 구덩이”는 진리가 없는 교리이다. 예레미야서에서:
내 백성은 두 가지 악을 범했다: 그들은 나를, 생명 있는 물들의 샘을 버린 것, 그리고 구 덩이를, 물을 붙잡고 있을 수도 없는 부셔진 구덩이를 판 것이다 (예. 2:13).
위에서도 마찬가지로 “구덩이”는 진리가 있지 않은 교리들을 표시한다; 그리고 “부셔진 구덩이”는 제조된 교리들이다.
“샘”이 말씀, 또한 교리, 고로 진리이다는 것은 아래 이사야서에서 보여질런지 모른다:
고뇌하고 궁핍한 자가 물을 구하나 아무것도 없다; 그들의 혀는 목마름으로 실패하고 있다. 나 여호와가 그들에게서 들을 것이다, 이스라엘의 하느님은 그들을 버리지 않으실 것이다; 나는 언덕 측면에 강들을 열 것이다, 그리고 샘들은 계곡의 한 가운데서 (열 것이다); 나는 광야를 물 있는 못으로 만들 것이다, 그리고 마른 토지는 물의 분수들로 (만들 것이다) (이. 41:17, 18).
위에서는 진리의 황량함이 취급되어진다. 이것이 고뇌하고 궁핍한 자가 물을 구하되 물이 없을 때에 의해, 그리고 그들의 혀가 목마름으로 실패할 때에 의해 의미되고 있다; 그리고 그때 그들이 위로받음, 새로워짐, 그리고 황량함 이후 가르침이 있음이 취급되는데, 본문의 경우, 하갈에 관한 대목과 내적 의미에서 유사하다. 이것이 여호와께서 언덕 측면에 강물을 여신다, 계곡들 한 가운데 샘들을 만드신다, 그리고 광야는 물 있는 못으로 만드신다, 그리고 마른 토지는 물 있는 분수로 만드신다에 의해 의미된다. 이 모든 것은 진리의 교리에, 그로부터 파생된 애착에 관련을 가진다.
모세의 책에서:
이스라엘은 곡식과 새 포도주의 토지 안에서, 야곱의 샘에서 홀로 안전하게 거주했다; 그렇 다, 그의 천국들이 이슬을 떨어트린다 (신. 33:28).
“야곱의 샘”은 말씀, 그리고 말씀으로부터의 교리를 표시한다. 그 이유가 “야곱의 샘”이 말씀, 그로부터 진리의 교리를 의미했기 때문에, 주님께서 야곱의 샘에 오셨을 때, 그분은 사마리아 여인과 이야기를 하시고, “샘”, 그리고 “물”이 의미하는 것을 가르쳐주셨다. 요한복음서에서:
예수께서 수가라고 불리우는 사마리아의 성읍에 오셨다, 그리고 거기에 야곱의 샘이 있었 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그분의 여행으로 지치셔서, 샘 가에 앉으셨다. 거기로 사마리아 여인이 물을 길으려고 온다. 예수께서 그녀에게 말했다, 마시도록 나에게 주어라: 예수께서 말하셨다, 만일 네가 하느님의 선물을 알았다면, 그리고 네게 말하는 자가 누구인지 알았다 면, 너는 그분에게 물을 것이고, 그분은 생명 있는 물을 주실 것이다. 이 물을 마시는 모든 이들 마다 다시 목마를 것이다; 그러나 내가 그에게 주게 될 물을 마시는 누구이든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내가 그에게 주게 될 물은 그 사람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솟구치게 하는 물 있는 샘이 될 것이다 (요. 4:5, 6, 7, 10, 13, 14).
“야곱의 샘”은 말씀을, “물”은 진리를, 그리고 “사마리아”는 영적 교회를 의미하기에, 주님께서 사마리아 여인과 이야기를 하셨고, 진리의 교리가 그분으로 있다는 것을; 그리고 이것이 그분으로부터, 즉 그분의 말씀으로부터 있다는 것을 가르치셨다. 말씀이 영원한 생명으로 솟는 물 있는 샘이다는 것; 그리고 진리 자체가 생명 있는 물이다는 것을 가르치신 것이다.
다시:
예수께서 말하셨다, 만일 어떤 사람이 목마르다면, 그로 나에게 오게 하라, 그리고 마셔라; 나에 관해 서를 믿는 자는 누구든지, 성경이 말한 대로, 그의 배로부터 생명 있는 물의 강들이 흐를 것이다
(요. 7:37, 38).
그리고 계시록에서:
왕좌의 한 가운데 있는 어린 양이 그들을 먹일 것이다, 그리고 그들을 물들의 생명있는 샘 들로 인도할 것이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그들의 눈으로부터 모든 눈물을 씻으실 것이다 (계. 7:17).
계시록에서:
나는 목이 타는 (갈망하는) 그에게 생명의 샘으로부터 값없이 줄 것이다 (계. 21:6).
“생명 있는 물의 강들”, 그리고 “물들이 있는 생명 있는 샘들”은 주님으로부터 있는 진리들, 또는 그분의 말씀으로부터 있는 진리들을 표시한다. 사랑의 선과 선행의 선, 이것은 주님으로부터서만 있고, 진리의 생명이다. 그분은 사랑 안에, 진리에 애착함 안에 이들이 갈망하는 이들이라고 말하시고 있다; 다른 사람은 “목마를” 수 없다.
이런 진리들 역시 “구원의 샘들”이라 이사야서에서 불리운다:
기쁨으로 너희는 구원의 샘들로부터 물들을 길어올릴 것이다; 그리고 그 날에 너희는 말할 것이다, 여호와에게 고백하라, 그분의 이름을 불러라 (이. 12:3, 4).
“샘”이 말씀이다는 것, 또는 그것으로부터의 교리이다는 것은 요엘서에서도 분명하다:
산들이 새 포도주를 떨어트리고, 언덕들이 젖을 흐르게 하고, 유다의 모든 시내들이 물들을 가지고 흐를 것이고, 싯딤의 시내에 물이 있는 그 날이 올 것이다 (욜. 3:18).
위에서 “물들”은 진리들을 표시한다; 그리고 “유다의 가문으로부터의 샘”은 주님의 말씀이다.
예레미야서에서:
보라 나는 북쪽 지방으로부터 그들을 데려올 것이다, 그리고 그들을 땅의 측면들로부터 모 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 사이에 소경과 절음발이가 있을 것이다; 그들은 울면서, 그리고 탄 원하면서 올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들을 그들이 걸려넘어질 일이 없는 곧은 길에서 물들 의 샘들로 데려올 것이다 (예. 31:8, 9).
“곧은 길에 있는 물들의 샘들”은 진리의 교리적인 것들을 분명하게 표시한다; “북쪽 나라”는 무지함, 또는 진리가 황량함; “우는 것”과 “탄원함”은 슬퍼하며 자포자기한 그들의 상태; 그리고 “물들의 샘들로 데려오는 것”은 진리들 안에서 원기회복됨과 가르치심을 표시한다.
비슷한 묘사가 이사야서에 있다:
광야와 바싹 마른 토지가 그들을 위해 기뻐해질 것이다, 그리고 사막이 기뻐환호하고 장미 같이 꽃을 피울 것이다; 정녕 싹이 돋고, 환호하고 노래하기 까지 하여 기뻐할 것이다; 레 바논의 영광이 그것에게 주어졌다, 갈멜과 샤론의 영예가 그것에게 주어졌다; 그들은 여호 와의 영광을, 우리의 하느님의 영예를 볼 것이다. 너희는 쇠약해진 손을 굳건하게 만들어 라, 그리고 비틀거리는 무릎을 강해지게 하라. 소경의 눈이 열려질 것이고, 귀머거리의 귀 가 들릴 것이다; 광야에서 물들이 터져나올 것이다, 그리고 사막에서 시내들이 (흐를 것이 다); 그리고 마른 장소가 못이 될 것이다, 그리고 목마른 지면이 물 있는 분수일 것이다 (이. 35:1-3, 5-7).
위에서 “광야”는 진리의 황량함을 표시한다; “물들”, “시내들”, “호수들”, 그리고 “물들의 분수들”은 황폐함에 있는 이들에게 원기회복과 기쁨이 있는 진리들이고, 이들의 기쁨이 많은 단어들로 묘사되고 있다.
다윗서에서:
여호와께서 계곡들에서 샘들을 내보내신다, 그것들은 산들 사이에서 달릴 것이다; 그것들은 들판의 모두 각각의 야생 짐승에게 마시라고 줄 것이다, 들나귀가 그들의 갈증을 풀 것이 다. 그분은 그분의 안방으로부터 산들에 물을 대신다 (시. 104:10, 11, 13)
“샘들”은 진리들을 표시한다; “산들”은 선과 진리를 사랑함을; “마시라고 주는 것”은 가르침을; “들판의 들짐승”은 이로부터 사는 이들을; “들나귀들”은 합리적 진리들에만 있는 이들을 표시한다.
모세의 책에서:
요셉은 열매 풍성한 자의 아들, 샘가에 있는 열매 풍성한 자의 아들이다 (창. 49:22).
“샘”은 주님으로부터의 교리를 표시한다. 모세의 책에서:
여호와 너희 하느님이 너희를 좋은 토지, 강들이 있는 토지, 물이 있는 토지, 샘들이 있는 토지로 데려오신다, 그리고 이것들은 계곡과 산의 깊은 곳으로부터 나간다 (신. 8:7).
“토지”는 주님의 왕국과 교회를 표시한다; 이 토지가 사랑과 선행의 선으로부터 “좋은, good”이라 불리운다; “강들”, “물들”, “샘들”, “깊이들”은 그로부터 파생된 진리들을 표시한다. 모세의 책에서:
가나안의 토지, 산들과 계곡들의 토지, 하늘의 비로부터의 물을 마신다 (신. 11:11).
“물들”이 영적, 합리적 측면 모두에서 진리들이다는 것, 또한 기억 속의 지식으로부터의 것들이다는 것은 아래 이사야서로부터 분명해진다.
보라 주 여호비 체바욷께서 예루살렘으로부터와 유다로부터 빵에 속하는 모든 양식, 물에 속하는 모든 양식을 거두어버리신다 (이. 3:1).
이사야서에서:
너희는 목마른 자에게 물들을 가져오라; 도피하는 자를 그의 빵을 가지고 만나라
(이. 21:14).
이사야서에서:
모든 물들 쪽에 씨를 뿌리는 너희는 복되다 (이. 32:20).
이사야서에서:
정의에서 걷는 자는, 곧바르게 말하는 자는 높은 곳에 거주할 것이다; 그의 빵이 주어질 것 이다, 그의 물들이 신실해 있을 것이다 (이. 33:15, 16).
이사야서에서:
그때 그들은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그분은 그들을 사막에서 인도할 것이다, 그분은 그들을 위해 바위로부터 물이 흐르게 하실 것이다; 그분은 바위 역시 쪼개실 것이다, 그리고 물들 이 흘러나올 것이다 (이. 48:21; 출. 17:1-8; 민. 20:11, 13).
다윗서에서:
그분은 광야에서 바위를 쪼개셨다, 그리고 그들에게 깊음으로부터와 같이 풍부하게 마시도 록 주신다. 그분은 바위로부터 시내들을 가져오셨다, 그리고 물들이 강같이 달리게(흐르게) 하신다 (시. 78:15, 16).
위에서 “바위”는 주님을 표시한다; “물들”, “강들”, 그것으로부터 “깊음들”은 그분으로부터의 진리들을 표시한다. 다윗서에서:
여호와께서는 광야 안으로 강들을 만드신다, 그리고 마른 토지 안으로 물 솟는 샘을 만드 신다 (시. 107:33, 35).
다윗서에서:
여호와의 음성이 물들 위에 있다; 여호와께서는 많은 물들 위에 있으신다 (시. 29:3).
다윗서에서:
강, 거기로부터의 시내들이 하느님의 성을, 지극히 높은 분의 성막의 거룩한 장소를 기쁘게 만들 것이다 (시. 46:4).
다윗서에서:
여호와의 말씀에 의해 천국들이 만들어졌다, 그분의 입의 숨에 의해 천국들의 모든 군대가 만들어졌다; 그분은 더미 같이 바다의 물들을 함께 모으신다, 그분은 창고 안에 깊음들을 쌓아 놓으신다 (시. 33:6, 7).
다윗서에서:
당신은 땅을 방문하신다, 그리고 그것 안에서 크게 기뻐하신다; 당신은 그것을 풍요하게 하 신다, 하느님의 강이 물들로 가득하다 (시. 65:9).
다윗서에서:
물들이 당신을 보았다, 오, 하느님, 물들이 당신을 보았다, 깊음들이 전율했다; 구름들이 물 들을 쏟았다; 당신의 길이 바다 안에 있었다, 그리고 당신의 작은 길이 많은 물들 안에 있 다 (시. 77:16, 17, 19).
모든 이에게 분명한 것은, 여기서의 “물들”이 물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깊음들이 전율하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여호와의 길이 바다 안에, 그분의 작은 길이 물들 안에 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나 영적인 물들이 뜻해진다는 것, 즉, 진리로부터 있는 영적인 것들이다; 그렇지 않으면, 위 구절의 말들은 텅빈 말들일 것이다. 이사야서에서:
오 목마른 모든 이여, 너희는 물들로 오라; 그리고 은을 가지지 않은 자, 너희는 오라, 사라 (이. 55:1).
스가랴서에서:
생명 있는 물들이 예루살렘으로부터 나가는 그 날이 올 것이다, 그것들의 절반은 동쪽의 바다로 향하고, 그리고 그것들의 절반은 서쪽을 향해 나갈 것이다 (슥. 14:8).
더 나아가 말씀에서 교회가 취급되는 곳에서, 교회가 심어져왔고, 그리고 그것이 낙원, 동산, 작은 숲, 또는 나무들에 의해 묘사되고 있는 곳에서, 물을 대는 물들 또는 강들에 의해 묘사되는 것은 유용하다; 이를 수단으로 영적, 합리적, 또는 기억한 것들이 의미되어진다. 마치 낙원을 묘사한 창. 2:8, 9절의 경우도 같다; 이 낙원 역시 강들에 의해 10-14절에서 묘사되고 있다. 이 강들은 지혜와 총명 속의 것들을 의미한다. 같은 것이 말씀의 여러 장소에서도 비슷한 의미를 지닌다. 모세의 책에서:
그들은 계곡 같이, 강가의 동산 같이, 여호와께서 심으신 백단향나무(sandal-wood tree)같 이, 물들 가에 있는 삼나무들 같이 그들은 심어졌다; 물들이 그의 양동이로부터 흐를 것이 다, 그리고 그의 씨는 많은 물들에 있을 것이다 (민. 24:6, 7).
에스겔서에서:
그분은 토지로부터의 씨를 가져가셨다, 그리고 그것을 씨뿌림의 들판에 심으셨다, 그분은 그것을 많은 물들 가에 놓아두셨다; 그것은 싹을 내었다, 그리고 우람한 포도나무가 되었다 (겔. 17:5, 6).
“포도나무”와 “포도원”은 영적 교회를 의미한다. 에스겔서에서:
네 어머니는 네 모습에서 포도나무 같았다, 물들 가에 심었다; 그녀는 열매 풍성해지고 많 은 물들 때문에 가지들로 풍만했다 (겔. 19:10).
에스겔서에서:
보라 앗수르는 레바논에 있는 삼나무였다; 물들이 그에게 영양분을 공급했다, 깊음이 그를 높게 만들었고, 그의 심겨진 주변을 강들이 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그녀의 운하들을 들판의 모든 나무들로 보냈다 (겔. 31:4).
에스겔서에서:
보라 강둑 위 이쪽과 저쪽에 아주 많은 나무들이 있었다. 그분이 나에게 말하셨다, 이 물들 은 동쪽 경계를 향하여 발출되어 나온다, 그리고 평야로 내려갈 것이다, 그리고 바다를 향 하여 갈 것이다; 그리고 바다로 보내짐에서 물들이 치료되어진다. 그리고 기어다니는 모든 살아 있는 혼이 두 강이 오는 모든 장소에서 살 것이다; 그리고 아주 많은 물고기가 있을 것이다, 그 이유는 이 물들이 그 쪽으로 오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은 치료될 것이다. 강 이 오는 어느 쪽이든 모든 것은 살 것이다. 그로부터의 진창인 장소와 습지는 치료되지 않 을 것이다; 그들은 소금으로 포기될 것이다 (겔. 47:7, 8, 9, 11).
위에서는 새 예루살렘, 또는 주님의 영적 왕국이 묘사되어진다: “동쪽 경계 쪽으로 물들이 나감”은 천적인 것으로부터의 영적인 것들, 이는 천적인 근원으로부터의 진리들이다; 즉 사랑과 선행으로부터의 신앙, “평지로 내려감”은 합리성 속에 있는 교리적인 것들을 의미한다. “바다를 향하여 감”은 기억 속의 지식들을 의미한다; “바다”는 그것들의 집합이다. “기는 살아있는 혼”은 그것들의 기쁨들을 의미한다; 이것들은 “강의 물로부터 살 것이다”, 즉 천적 근원으로부터의 영적인 것으로부터이다. “많은 물고기”는 응용할 수 있는 기억 속의 지식들이 풍부함을 의미한다. “진창지와 습지”는 응용할수 없고 불순한 것들을 표시한다; “소금으로 포기됨”은 황폐된 것을 표시한다. 예레미야서에서:
여호와를 신뢰하는 사람은 복되다; 그는 물가에 심어진 나무 같을 것이다, 그리고 강가로 그것의 뿌리를 내보낸다 (예. 17:7, 8).
다윗서에서:
그는 물 있는 강가에 심어진 나무 같을 것이다, 그것의 때에 그것의 열매를 생산한다
(시. 1:3).
계시록에서:
그는 나에게 생명의 물의 순수한 강을 보여 주었다, 이 강은 수정 같이 빛나고, 하느님과 어린 양의 왕좌로부터 진행되고 있다; 그것의 거리 한 가운데에서, 그리고 강의 이 쪽과 저 쪽에는 열 두 과일들을 맺는 생명의 나무가 있었다 (계. 22:1, 2).
말씀의 내적 의미에서 “물들”이 진리들을 의미하는 것을 천사들은 알고 있는바, 이들이 영적으로 관조하도록, 유대 교회에서 의식으로 표현되었다. 고로 명령되기를, 성직자와 레위인들은 성막을 돌보기 위해 가까이 올 때, 자신들을 물로 씻도록 했다. 그들은 천막과 제단 사이에 있는 물두멍의 물을 사용해서 씻었다; 그리고 후에, 놋쇠바다와 성전 주위의 다른 물두멍으로부터 씻었는데, 이는 샘 있는 장소에 있었다. 민. 8:7의 경우, 죄의 물 또는 정화의 물을 레위인들 위에 뿌리도록; 또한 분리의 물로부터의 것, 붉은 암송아지의 재로부터 (민. 19:2-19); 그리고 미디안족으로부터의 전리품도 물로 깨끗해지게 할 것 (민. 31:19-25) 등도 표현을 위해 명령되었다.
바위로부터 주어진 물들 (출. 17:1-8; 민. 20:1-13; 신. 8:15)은 영적인 것들, 또는 주님으로부터 신앙의 진리들의 풍부함을 표현하고 의미했다. 나무에 의해 치료된 쓴물(출. 15:23-25)은 기쁨을 줄 것 같지 않은 진리들도 선으로부터, 즉 그것에 대한 애착으로부터는 기꺼이 받을 수 있고 감사히 여기는 진리가 된다는 것을 표현하고 의미했다. “나무”는 애착으로부터, 또는 의지로부터 있는 선을 의미한데 643항을 참고하기 바란다. 이상 모두로부터 알려지는 바, “물”이 말씀에서 표현하는 것에 대해서이다, 그리고 이로부터 세례에서 물이 표시하는 것도 알게 된다. 이에 관해 주님께서 말하신다:
사람이 물과 영으로 태어나지 않으면, 그는 하느님의 왕국에 들어갈 수 없다 (요. 3:5).
즉 “물”은 신앙의 영적인 것, 그리고 “영”은 신앙의 천적인 것이다; 고로 세례는 신앙의 진리들과 선들을 수단으로 주님에 의해 인간의 거듭남을 상징하고 있다. 거듭남이 세례를 수단으로 결괴되는 것이 아니고 삶에 의해 결과된다는 것이 세례 안에 의미되었다. 신앙의 진리를 가진 기독인들, 그들이 말씀을 가지기 때문에 반드시 이 삶 안으로 와야만 한다.

그리고 그녀는 병을 물로 채웠다. 이는 거기로부터의 진리들을 의미하는데, 이는 “물”이 진리를 의미함에서 알게 되고 이는 이미 위에서 살폈다.

그리고 아이가 마시라고 주었다. 이는 영적인 것들을 가르침을 의미하는데, 이는 “마시라고 주는 것”이 진리들을 가르침; 그리고 “아이”의 의미가 진리 측면에서의 영적인 것임으로부터 알게 된다. 가르침에 속한 상태가 이 구절에서 취급되는데, 이는 황폐됨 또는 황량함으로부터 나오는 이들의 셋째 상태이다; 그 이유가 그들이 계발되는 상태, 또는 천국의 빛의 상태 안으로 오게 될 때, 그때 그들은 앎에 애착함과 진리들을 배움에 애착함 안에 있는다; 그리고 그들이 이 애착 안에 있을 때, 그들은 쉽게, 아마도 동시적으로 진리들을 흡수한다: 땅 위의 사람들은 주님의 말씀, 또는 교리로부터이다; 그러나 천국에 있는 이들은 천사들로부터, 즉 신참내기 형제들을 가르치는 것 이상 더 복되고 행복한 것 없다고 하는 천사들에 의해 가르쳐지고, 천국의 질서 속에 있는 진리들과 선들로 감명받고, 주님께로 인도된다.

20절.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아이와 함께 계셨다, 그리고 그는 성장했다, 그리고 그는 광야에서 거주했다, 그리고 그는 활을 쏘는 자가 되었다.

하느님께서는 아이와 함께 계셨다. 이는 주님께서 영적 인간과 더불어 현존하심을 의미하는데, 이는 누군가와 “하느님이 계심”, “아이”의 의미로부터 분명해진다. “하느님께서 누군가와 더불어 계심”이 주님의 현존하심을 의미하는데, 이는 설명이 필요 없을 것이다. 실제로 주님께서는 모든 이와 더불어 현존하신다; 그 이유가 생명의 근원이 다른 데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분은 그것의 가장 미세한 것들 조차, 인간의 최악의 것 조차도, 그리고 지옥 자체까지 통치하신다; 그러나 이 통치는 셍명의 받음에 따라 다양한 방법들에서 이다. 잘못된 태도에서 그분의 선과 진리를 사랑함으로부터의 생명을 받는 이들과 더불어, 그리하여 그 생명을 악과 거짓을 사랑함들 안으로 타락시키는 이들과 더불어서도 주님은 현존하시고, 그리고 그들의 목적들을 선을 위하여 가능한 한 위압적으로 취소하신다; 그래서 그들과 더불은 그분의 현존은 부재하심이라 불리운다, 그리고 참으로 똑같은 수준에서 악은 선으로부터, 거짓은 진리로부터 멀어져 있다. 그러나 주님의 선과 진리를 사랑함의 생명을 받는 이들과 더불어 그분은 현존하신다고 말해지고, 참으로 받는 수준에 따라서 이다. 주님의 현존은 태양의 현존에 비교해 볼 수 있다. 태양은 식물이 받는 정도에 따라 그것의 열과 빛은 현존한다. “아이”가 진리 측면에서의 영적인 것을 의미하는 것은 이미 말했다; 그러나 여기서는 그가 영적인 이들을 의미하는데, 그 이유는 그가 영적 (평면의) 교회인을, 또는 영적 (평면의) 교회 자체를, 그리고 보편적 의미에서는 주님의 영적 왕국을 표현하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누구가 영적인 것을 의미한다고 말할 경우, 여기서 “아이”가 진리 측면에서의 영적인 것을 의미하듯, 그것은 영적인 이들이 의미됨을 포함하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주체자 없는 영적인 것은 말 자체가 안되기 때문이다. 사실 추상적 의미에서 말해지는 것들은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그는 성장했다. 이는 증가함을 의미하는데, 설명은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광야에서 거주했다. 이는 상대적으로 희미한 것을 의미하는데, 이는 “거주함”이 사는 것을 의미한다로부터; 그리고 “광야”의 의미가 거의 생명이 없음이다로부터; 여기서 희미한 것, 이는 상대적 측면에서 이다. 상대적으로 희미하다는 말은 영적 (평면의) 교회의 상태가 천적 (평면의) 교회의 상태에 비교해 희미한 수준이다를, 또는 천적 교회인에 비해 영적 교회인은 상대적으로 희미한 수준이다를 뜻한다. 천적 (평면의) 인간은 선에 애착함 안에 있고, 영적 (평면의) 인간은 진리에 애착함 안에 있다; 천적 인간은 지각을 가지고, 영적 인간은 양심의 지령을 지니고 있다; 주님은 천적 인간에게 태양으로 나타나시고, 영적 인간에게 달로 나타나신다. 전자는 주님으로부터 빛을 가지고, 태양으로부터의 낮의 빛 같이, 선과 진리에 관하여 시각과 지각 모두를 지닌다; 후자는 달로부터의 밤의 빛 같이, 고로 그들은 상대적으로 희미함 안에 있다. 천적 인간은 주님을 사랑함 안에 있는 바, 주님의 생명 자체 안에 있다; 그러나 영적 인간은 이웃을 향한 선행 안에와 신앙 안에 있는 바, 실로 이 인간도 주님의 생명 안에 있기는 하나, 더 희미할 뿐이다. 그러므로 천적 인간은 신앙과 그것의 진리들에 관하여 결코 추론하지 않는다. 그들은 선으로부터의 진리를 지각함 안에 있어, 이것은 그렇다라고 말하는 것밖에 없다; 이에 비해 영적 인간은 신앙의 진리들에 관하여 이야기하고 추론한다, 그 이유는 그들이 진리로부터의 선으로 양심을 지니기 때문이다; 또한 사랑으로부터의 선이 천적 인간과 더불어서는 그의 의지 부분에 심어져 그의 제일의 생명으로 있으나, 영적 인간과 더불어서는 그의 지적 부분에 심어져 그의 둘째가는 생명으로 있다; 이것이 왜 영적 인간이 상대적으로 희미한 수준이라 말한 이유이다.
비교에 의한 희미함이 여기서 “광야”라고 불리운다. 말씀에서, “광야”는 거주하거나 경작하는 지면이 매우 적은 것을 의미하고, 그리고 또한 거주나 경작이 불가능한 것도 의미하는데, 여기서는 양쪽 의미가 다 해당되고 있다. 거주나 경작 가능 지역이 매우 적은 것, 또는 거주나 경작, 양떼, 목초지, 그리고 물이 아예 없다는 것은 상대적으로 빛과 생명이 적은 것, 마치 영적 수준과 천적 수준을 비교함에 따른 차이와 비슷하다. 그러나 거주 또는 경작이 전연 불가능한 것, 또는 거주지, 양우리, 목초지, 또는 물이 없는 것은 선의 측면에서 황폐함과 진리 측면에서 황량함에 있는 이들을 의미한다.
“광야”가 상대적으로 거주나 경작 면적이 거의 없는 것, 또는 주택이나 양우리, 목초지, 그리고 물이 상대적으로 거의 없는 것을 의미하는 것을 아래 인용 구절로부터 분명해진다. 이사야서에서:
여호와에게 새 노래로 노래하라; 그리고 땅의 끝으로부터 그분을 찬양하라; 바다로 내려가 는 너희들, 바다로부터의 가득함, 그리고 바다로부터의 섬들과 주민들; 거기서부터의 광야 와 성읍들, 게달이 거주하는 마을들이 들어올리게 하라; 바위의 거주인이 노래하게 하라, 그들로 산꼭대기에서 소리치게 하라 (이. 42:10, 11).
에스겔서에서:
나는 그들과 평화의 언약을 만들 것이다, 그리고 악한 들짐승이 토지로부터 중단되게 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광야에서 확고하게 거주할 것이다, 그리고 숲에서 잠들 것이다; 그 리고 나는 그들과 내 언덕 주변을 복되게 만들 것이다; 들판의 나무가 그것의 열매를 산출 할 것이다, 그리고 땅은 그녀의 열매를 생산할 것이다 (겔. 34;25-27).
여기서 영적 수준의 것이 취급된다. 호세아서에서:
나는 그녀를 광야로 데려올 것이다, 그리고 그녀의 심정에 말할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녀 에게 거기로부터 그녀의 포도원들을 줄 것이다 (호. 2;14, 15).
위에서는 진리의 황량함, 그리고 그 후에 위로받음이 취급되고 있다. 다윗서에서:
광야의 양떼들에 떨어진다, 그리고 언덕들은 기뻐환호함으로 띠를 둘렀다; 초장은 양떼들로 덮혀있다, 계곡들은 곡식으로 덮혀있다 (시. 65:12, 13).
이사야서에서:
나는 광야를 물 있는 못으로 만들 것이다, 그리고 마른 토지는 물 있는 분수들로 만들 것 이다, 나는 광야에 싯딤의 삼나무를, 그리고 도금양(myrtle)을, 그리고 기름 나무를 심을 것이다; 나는 광야에 전나무를 둘 것이다; 그들이 보고, 알고, 잘 생각하고, 이해할는지 모 른다, 즉 여호와의 손이 이것을 행했다는 것,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가 그것을 창조했다는 것(에 대헤서이다) (이. 41:18-20).
위에서 진리에 무지한 이들, 또는 이방인들의 거듭남, 그리고 황량함에 있는 이들이 가르침을 받고 계발됨이 취급되어진다; “광야”가 이것들을 서술한다; “삼나무, 도금양, 기름 나무”는 내면의 인간의 진리들과 선들을 표시한다; “전나무”는 외면의 인간으로부터의 진리들과 선들을 표시한다. 다윗서에서:
여호와께서 광야 안에 강들을 만드신다, 그리고 마른 지면에 물-분수들을 (만드신다); 그 분은 광야를 물 있는 못으로 만드신다, 그리고 마른 토지를 물-분수로 (만드신다)
(시. 107:33, 35).
위 구절도 앞 구절과 의미는 같다. 이사야서에서:
광야와 사막이 그를 위해 기뻐할 것이다, 그리고 사막이 기뻐환호할 것이다, 그리고 장미 같이 꽃필 것이다; 싹틈이 확실할 것이다; 광야에서 물들이 터질 것이다, 그리고 쓸쓸한 곳 에 시내들이 (흐를 것이다) (이. 35:1, 2, 6)
이사야서에서:
너는 물을 대준 동산 같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물이 결코 마르지 않는 물 있는 분수 같을 것이다. 그리고 너로부터 있는 그들이 옛 것의 광야를 건설할 것이다 (이. 58:11, 12)
이사야서에서:
높은 데로부터 영이 부어질 때까지, 그리고 광야가 갈멜이 될 때까지, 그리고 갈멜이 숲으 로 간주될 때까지; 그리고 공정이 광야에, 그리고 정의가 갈멜에 거주할 것이다
(이. 32:15, 16).
위에서 비록 거주함과 경작함이 “광야”라고 상대적으로 불리울지라도 영적 (평면의) 교회가 취급된다; 그 이유는 “공정이 광야에, 정의가 갈멜에 거주할 것이다”라고 말해지기 때문이다. “광야”가 상대적으로 희미한 상태를 표시하는 것은 그것이 “광야”, 또는 “숲”이라 불리우는 위와 같은 구절로부터 분명해진다; 아래 예레미야에서는 더 분명하다:
오 세대여, 너희는 여호와의 말씀을 보라. 나는 이스라엘에게 광야되어 있어 왔느냐? 또는 어둠의 토지가 되어 있어 왔더냐? (예. 2:31).
“광야”가 거주나 경작함이 전혀 없는 것, 또는 주택이나 양우리, 목장, 그리고 물, 고로 선의 측면에서 황폐함, 진리 측면에서 황량함에 있는 이들을 의미한다는 것은 말씀으로부터 분명해진다. “광야”의 이런 종류는 두 가지 의미, 즉 후에 개혁되는 이들을, 후에도 개혁될 수 없는 이들을 서술한다. 본문의 하갈과 그의 아들의 경우 같이, 후에 개혁될 수 있는 이들에 관하여 예레미야서에서 읽는다:
고로 여호와께서 말하신다, 나는 너를 위해 네 젊음의 자비를, 씨뿌림이 없는 토지, 광야 로 나를 따라 네가 나간 것을 기억한다 (예. 2:2).
위에서는 진리에 황량함 안에 있으나 개혁되는 이들이 취급되어 있다. 에스겔서에서:
나는 너를 백성들의 광야로 데려올 것이다, 그리고 나는 거기서 너를 심판할 것이다, 마치 내가 이집트의 토지의 광야에서 네 조상들을 심판한 것같이 이다 (겔. 20:35, 36).
위에서도 마찬가지로 개혁되어지는 이들의 황폐함과 황량함이 취급된다.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서의 배회함과 여행함은 개혁 이전 신앙인들의 황폐함과 황량함을 표현한 것밖에 더 아니다; 결과적으로 신앙인들의 시험, 그들이 영적 시험들 안에 실지로 있을 때, 그들에게 있는 황폐함과 황량함을 취급하고 있다; 아래 모세의 책에서 이를 알는지 모른다.
여호와께서는 인간이 자기 아들을 데려가듯 광야에, 길에서, 이 장소로까지 그들을 데려가 셨다 (신. 1:31).
다시 신명기서에서:
너는 여호와 네 하느님이 너를 괴롭히기 위해, 너를 시험하기 위해, 그리고 네 심정에 있는 것을 알게 하시기 위해 광야애서 사십 년을 인도하셨다; 즉 네가 그분의 명령들을 준수 하는지, 아닌지를 (보기 위해서 이다). 그분은 너희를 괴롭히셨다, 그분은 너희가 배고픈 것을 내버려두셨다, 그분은 네게 너희가 모르고, 너희 조상도 몰랐던 만나를 먹게 만드셨 다; 너희는 인간이 빵만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의 입으로부터 진행되는 모든 것에 의해 살아야 한다를 알는지 모른다 (신. 8:2, 3).
다시 신명기서에서:
네가 잊지 않아야 하는 것은, 여호와께서 이 크고 두려운 광야에서, 뱀들이, 독사들이, 전갈 들이 있는 곳에서 너희를 인도하신 것; 물이 없는 목마른 토지에서 인도하신 것; 그분은 너 희를 단단한 바위로부터 물을 먹게 하셨다는 것; 그분은 너희를 광야에서 만나로 먹이신 것, 이것을 네 조상들은 알지도 못했다, 그분은 너희를 괴롭게하시고, 시험하시었는데 이후 너희에게 선을 베푸시기 위해서였다는 것을 잊지 말 것이다 (신. 8:15, 16).
위에서 “광야”는 황폐함과 황량함을 표시하는데, 시험 안에 있는 이들과 비슷하다. 그들이 사십 년간 배화하고 여행함에 의해서 전투하는 교회의 모든 상태, 즉 어떻게 그런 상태가 산출되는지, 그러나 주님으로부터 정복되는 것이 묘사되어 잇다.
계시록에서 광야로 피신한 여인에 의해서도 교회의 시험이 의미된다. 즉:
아들, 즉 남자 아이를 낳은 여인은 광야로 도망했는데, 거기는 하느님께서 준비한 장소였 다. 거기서 여인에게 큰 독수리의 두 날개들이 주어졌다, 하여 그녀는 광야 안으로, 그녀 의 장소로 날아가게 되었다; 그리고 뱀이 홍수 같은 물을 그녀의 뒤를 따라 내뱉었다, 하여 그는 그녀가 홍수에 휩쓸리도록 할 작정이었다. 그러나 땅이 그녀를 도왔다; 그 이유가 땅 이 자기 입을 열었고, 용이 그의 입에서 내뱉은 홍수를 삼켰기 때문이다
(계. 12:6, 14-16).
“광야”가 선과 진리 모두에서 황폐된 교회를, 그리고 선과 진리 모두에서 황폐된 이들, 그래서 개혁될 수 없는 이들을 묘사하기도 한다. 이사야서에서:
나는 강들을 광야로 만든다; 강들의 물고기는 물이 없어 목말라 죽기 때문에 고약한 냄새 를 풍긴다; 나는 하늘을 두꺼운 어둠으로 옷입힌다 (이. 50:2, 3).
이사야서에서:
거룩한 성들이 광야가 되어졌다, 시온이 광야가 되었다, 예루살렘이 황량해졌다
(이. 64:10).
예레미야서에서:
내가 보았는데, 오 갈멜이 광야이었다, 그리고 모든 그녀의 성들은 여호와의 현존에서 부셔 져내렸다 (예. 4:26).
예레미야서에서:
많은 목자들이 내 포도원을 파괴했다, 그들은 내 몫을 발 아래서 짓뭉개었다; 그들은 내 기 뻐하는 몫을 황량함의 광야로 만들었다, 그들은 그것을 황량함으로 만들었다, 황량해진 그 것이 나를 슬프게 했다; 온 토지가 황량함으로 만들어졌다, 그 이유는 그것을 심정에 놓아 두는 자가 없었기 때문이다. 약탈자들이 광야에 있는 모든 언덕쪽에서 올라오고 있다
(예. 12:10-12).
요엘서에서:
불이 광야의 (양)우리들을 삼켰다, 그리고 불꽃이 들판의 모든 나무들을 태웠다, 시냇물이 말랐다, 불은 광야의 (양)우리들을 삼켰다 (욜. 1:19, 20).
이사야서에서:
그는 세상을 광야 같이 만들었다, 그리고 거기로부터의 성읍들을 뒤엎었다 (이. 14:17).
위는 루시퍼(Lucifer)에 관해 말해진 구절의 일부이다. 이사야서에서:
바다의 광야에 관한 예언. 남쪽에서 회오리바람 같이, 그것은 광야로부터, 무서운 토지로부 터 온다 (이. 21:1)
“바다의 광야”란 기억속의 지식과 이 지식들로부터의 추론들에 의해 황폐된 진리를 표시한다.
이 모두로부터 알게되는 바, 아래 구절의 세례 요한에 관련한 것의 의미이다:
이사야에 의해 말해졌다,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음성이다, 너희는 주님을 위한 길을 준비하 라, 그분의 길을 곧게 만들어라 (마. 3:3; 막. 1:3; 눅. 3:4; 요. 1:23; 이. 40:3).
위 구절이 뜻하는 바, 교회의 선과 진리 모두가 황폐해졌다는 것, 고로 어떤 진리도 더 이상 있지 않았다는 것; 이는 이런 사실로부터 분명해진다. 즉 인간이 어떤 내적인 것을 가진다는 것을 아는 자가 없었다는 것, 말씀 안에 어떤 내적 의미가 있다는 것을 눈치챈 자도 없었다는 것, 고로 메시아, 또는 그리스도가 그들을 영원히 구원하기 위해 오시었다는 것도 아는 자가 없었다는 것이다. 이로부터 세례 요한이 그가 이스라엘에게 나타나기 이전에는 광야에서 왜 있었는지(눅. 1:80); 그리고 그가 왜 유다 광야에서 설교했는지 (마. 3:1 이하); 그리고 그가 왜 광야에서 세례를 베풀었는지(막. 1:4)에 따른 의미가 파악된다. 그 이유는 그에 의해 그 당시 교회의 상태 또한 표현되었기 때문이다. 이상 살핀 “광야”의 의미로부터, 더 알아지는 바, 왜 주님께서 광야 안으로 종종 물러가시어 머무셨는지 에 대한 것이다 (마. 4:1; 15:32-끝절; 막. 1:12, 13, 35-40, 45; 6:31-36; 눅. 4:1; 5;16; 9:10; 요11:54). “산”의 의미로부터 분명해지는 것은, 왜 주님께서 산으로 물러가셨는지 이다 (마. 14:23; 15:29-31; 17:1; 28:16, 17; 막. 3:13, 14; 6:46; 9:2-9; 눅. 6:12, 13; 9:28; 요. 6:15).

그리고 그는 활을 쏘는 자가 되었다. 이는 영적 교회인을 의미하는데, 이는 “던지는 창(shaft)”, “던지는 작은 창(dart)”, “화살”이 진리를 의미함으로부터; 그리고 “활”이 교리를 의미함에서; 영적 교회인이 옛적에는 “활을 쏘는 자”라고 부리웠는데, 그 이유는 그가 그 자신을 진리들을 수단으로 방어했고, 진리들에 관하여 논쟁했기 때문이다; 선으로 확고부동해지고, 진리에 관하여 논쟁하지 않는 천적 교회인과는 다르다. 영적 교회인이 진리들을 가지고 자신을 방어하고, 진리들에 관해 논쟁하는 것은 그가 인정한 교리로부터이다.
영적 인간이 옛날 시대에 “쏘는 자, 사수”, “궁수”라 불렀고, 교리는 “활”과 “화살통”이라 불리웠다, 그리고 교리 속의 진리들, 오히려 더 적절한 표현은 교리상의 주제들은 “던지는 작은 창”, “던지는 큰 창”, “화살”이라 불렀다. 이는 다윗서로부터 분명해진다:
에브라임의 아들들이 무장했는데, 활을 쏘는 자였는데, 전투하는 날에 되돌아갔다
(시. 78:9).
“에브라임”은 교회의 지적 측면을 의미한다. 사사기서에서:
생각해보라, 흰 나귀를 탄 너희, 양탄자 위에 앉은 너희, 그리고 길에서 걷는 너희; 물을 긷 는 그들 사이에 있는 궁수의 음성 때문에, 거기서 그들은 여호와의 정의를, 이스라엘에 있 는 그분의 마을들을 향하여 정의를 연습할 것이다 (사. 5:10, 11).
이사야서에서:
여호와께서 자궁으로부터, 그분이 내 이름의 언급을 한 내 어머니의 뱃속으로부터 나를 부 르셨다, 그리고 그분은 나의 입을 날카로운 검 같이 만드셨다; 그분의 손의 그늘에 그분은 나를 감추었다, 그리고 그분은 나에게 말하셨다, 너는 나의 종이다; 이스라엘, 그들 안에서 나는 영광될 것이다 (이. 49:1-3).
“이스라엘”은 영적 교회를 표시한다.
다윗서에서:
화살이 강한 자의 손에 있듯, 젊은 이의 아이도 그러하다; 그것으로 화살통을 채운 자는 복 있다 (시. 127:4).
“화살통”은 선과 진리에 관한 교리를 표시한다. 하박국에서:
태양과 달이 아직 그것들의 자리에 서 있었다; 당신의 화살의 빛 안에서 그들은 갈 것이다, 당신의 창의 번개의 번쩍임에서 (였다) (합. 3:11).
이스라엘의 요하스왕이 창문을 통하여 활로 화살을 쏘았다. 이는 엘리사의 명령에 따라서이다, 한편 엘리사가 말했다, “여호와의 구원의 화살이여, 시리아인에 맞서 있는 여호와의 구원의 화살이다”(왕하. 13:16-18). 이는 선과 진리에 관한 교리로부터의 비밀함들을 의미한다.
말씀에서 대부분의 것들은 반대적 의미도 가진다. 따라서 “던지는 창”, “던지는 작은 창”, “화살”, “활”, 그리고 “쏘는 자”도 반대적 의미도 지닌다; 그리고 그것들은 거짓들, 거짓으로부터의 교리, 그리고 거짓 안에 있는 이들을 의미한다. 고로 모세의 책에서:
요셉은 열매 풍성한 자의 아들, 샘 가에 있는 열매 풍성한 자의 아들이고, 벽 위에서 행진 하는 딸의 아들이다; 그들이 그를 슬프게 했고, 그리고 그에게 쏘고, 그리고 궁수들이 그를 미워했다 (창. 49: 22, 23).
예레미야서에서:
그들은 자기들의 혀를 쏘아댔다, 그들의 활은 거짓말이다, 그리고 진리를 위하여가 아니다; 그들의 혀는 길게 늘어진 화살이다, 그것은 사기침을 말한다 (예. 9:3, 8).
다윗서에서:
그들은 자기들의 혀를 검 같이 날카롭게 했었다, 그들은 자기들의 화살을, 쓴 말을 완전한 자에게 비밀한 장소에서 쏘려고 겨냥을 하였다; 갑자기 그들은 그에게 쏜다, 그리고 두려워 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을 위해 악한 말로 강하게 만들 것이다, 그들은 덫을 숨겨 놓는 것에 관해 말할 것이다 (시. 64:4-6).
다윗서에서:
오라, 사악한 자가 활을 구부린다, 그들은 심정이 곧바른 자에게 어둠에서 쏘려고 활줄 위 에서 자기들의 화살을 준비할 것이다 (시. 11:2).
다윗서에서:
그분의 큰 방패와 작은 방패이다; 너는 밤에 나는 화살, 낮에 나는 화살 때문에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다 (시. 91:4, 5).

우리 앞의 절에서 서술한 것은, 영적 교회의 상태는 천적 교회의 상태에 비교해 희미하다는 것, 그리고 호전적인 바, 그 이유가 영적 교회인은 천적 교회인 같이선 자체로부터가 아닌 교리로부터 진리를 알기 때문이다는 것이다.

21절. 그리고 그는 바란의 광야에서 거주했다. 그리고 그의 어머니는 그에게 이집트로부터 아내를 데려왔다.

그는 바란의 광야에서 거주했다. 이는 선 측면에서 영적 인간의 생명을 의미하는데, 이는 “거주함”의 의미가 진리로부터의 선, 또는 영적 선, 즉 영적 인간의 선이다로부터 확실해진다. 그것의 품질이 무엇인지는 그가 “바란의 광야에서 거주함”으로 서술되고 있다. 이것이 이제 아래에서 다루어진다. “거주한다”는 선에 관한 것, 애착에 관한 것, 진리에 관한 것을 서술하는 것은 성읍들이 다루어지는 말씀의 많은 장소들로부터 분명해진다. 성들을 수단으로 진리들이 의미되고, 그 안의 주민들은 선을 의미한다; 그 이유가 진리들은 선을 수단으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선이 없는 진리는 거주민 없는 성과 같다. 스바냐서에서:
나는 그들의 거리들을 아무도 지나가지 않는 황폐하게 만들었다; 그들의 성들은 황량해져 서, 주민이 없다 (습. 3:6).
예레미야서에서:
여호와께서는 우리를 광야를 통하여 인도하신다, 거기는 지나가는 사람이 없고 거주하는 사람도 없다; 그들은 그의 토지를 쓸모없게 만들었다, 그의 성들은 불태워졌다, 하여 주민 이 없다 (예. 2:6, 15).
예레미야서에서:
모든 성이 버려졌다, 그리고 그 안에 아무도 거주하지 않는다 (예. 4:29).
예레미야서에서:
황량하고, 사람 없고, 거주민 없고, 짐승 없는 예루살렘의 거리들 (예. 33:10).
“거리들”은 진리들을 표시한다; “사람 없음”은 천적인 선이 없음을; “주민 없음”은 영적 선이 없음을; 그리고 “짐승 없음”은 자연적 선이 없음을 표시한다. 예레미야서에서:
모압의 성들은 그 안에 아무도 거주함이 없게 황량해질 것이다 (예. 48:9).
예언서의 모두 각각의 표현에는 진리와 선의 결혼이 있다; 그러므로 성읍들이 황량해진다고 말해지는 곳에는 그 안에 주민이 없다는 말이 보태지고 있다; 그 이유가 성이 진리들을, 주민은 선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으면, 성이 황량해졌다고 말해질 때, 당연히 주민이 살지 못할 것은 뻔한데 굳이 주민을 거론하는 것은 불필요한 언어 표현밖에 더 아닐 수 있기 때문이다. 이와 마찬가지의 표현인 것은, 천적 선을 의미하는 것과 영적 선을 의미하는 것, 그리고 진리로부터의 것들에 대한 표현인데, 이사야서를 보자:
당신의 씨가 나라들을 소유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황량한 성들에서 거주할 것이다
(이. 54:3).
위에서 “소유한다”는 천적인 선을 서술하고; “거주한다”는 영적 선을 서술한다. 이사야서에서:
나의 뽑은 자가 그것을 소유할 것이다, 그리고 나의 종들이 거기에 거주할 것이다
(이. 65:9).
위 역시 의미는 앞의 구절과 같다.
다윗서에서:
하느님께서 시온을 구하실 것이다, 그리고 유다의 성들을 건설하실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거기 거주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소유할 것이다; 그분의 종들의 씨 역시 그것을 상속받 을 것이다, 그리고 그분의 이름을 사랑한 그들이 거기 안에 거주할 것이다
(시. 69:36, 37).
“거주함”과 동시에 “소유함”은 천적 선을 서술하나, “거주함”은 영적 선을 서술한다. 이사야서에서:
예루살렘에게 말하라, 너는 거주할 것이다, 그리고 유다의 성들에게 (말하라), 너는 건설할 것이다 (이. 44:26).
위에서 “거주함”은 “예루살렘”인 영적 교회의 선을 서술한다. 말씀의 표현들에 대한 위와 같은 상응의 윤곽만 가지고도 일반적 측면에서 어떤 주제를 취급하는지에 관해서 다른 구절에서도 어느 정도는 파악이 가능할 것이다.

여기서 “광야”가 상대적으로 희미함, 불명료함(obscure)을 의미하는 것은 천적 인간과 비교해 희미한 영적 인간을 서술할 때의 “광야”의 의미로부터 분명해진다.

“바란”이 주님의 신성한 인간으로부터 계발됨을 의미하는데, 이는 “바란”이 주님의 신성한 인간을 의미함에서 알게 되는 바, 이것은 바란이 명명되는 말씀의 구절로부터 분명하다. 하박국에서:
오 여호와여, 나는 당신의 명성을 들었었습니다, 나는 두려웠습니다; 오 여호와여, 당신의 일이 햇수들의 한 가운데에서 되살아나게 하시고, 햇수의 한가운데에서 알려지게 만드시오 소서, 자비를 기억하는 열정에서 입니다. 하느님은 데만으로부터, 그리고 거룩한 분은 바 란 산으로부터 오십니다; 셀라: 그분의 영예가 하늘을, 그리고 땅은 그분을 찬양함으로 가 득찼다; 그분의 빛남은 빛 같이 있을 것이다. 그분은 그분의 손으로부터 나가는 뿔들을 가 지셨다, 그리고 그분의 강하심을 감추어두셨다 (합. 3:2-4)
위 구절은 주님의 강림을 분명히 취급하고 있다. 이것이 “햇수들의 한 가운데서 되살아 나심”에 의해, 그리고 “햇수들의 한 가운데에서 알게 만드심”에 의해 의미되어진다. 그분의 신성한 인간이 “하느님께서 데만으로부터, 거룩한 분이 바란 산으로부터 오심”에 의해 묘사되어져 있다. 그분은 천적 사랑의 측면에서 “데만으로부터 오신다고”; 그리고 영적 사랑 측면에서는 “바란 산으로부터 오신다고” 말해진다. 그리고 계발됨과 능력이 이것들로부터 있다는 것이 “빛남과 빛”이 있을 것이다에 의해 말해짐에 의해, 그리고 그분은 “그분의 손으로부터 나가는 뿔들을 가지신다”에 의해 의미되어 있다; “빛남과 빛”은 계발됨, 그리고 “뿔들”은 능력이다.
모세의 책에서:
여호와께서 시내(산)으로부터 오셨다, 그리고 그들에게 세일로부터 일어나셨다; 그분은 바 란산으로부터 빛나셨다, 그리고 그분은 만 명의 거룩함으로부터 오셨다; 그분의 오른 손으 로부터 그들에게 법의 불이 있었다; 그렇다, 그분은 백성들을 사랑하신다; 모든 그분의 성 인들은 당신의 손 안에 있다, 그리고 그들은 당신의 발에 모여졌다, 그리고 그들은 당신의 말씀들을 받을 것이다 (신, 33:2, 3).
위 구절 역시 주님이 취급되고 있다, 그분의 신성한 인간이 그분은 “세일로부터 일어나시고, 바란 산으로부터 빛나셨다”에 의해 묘사되어 있다. “세일”로부터는 천적인 사랑이, 그리고 “바란 산”으로부터는 영적인 사랑이 묘사되고 있다. 영적 인간이 “그분이 사랑하시는 백성들”에 의해, 그리고 그들이 “그분의 발에 모아짐”애 의해 의미되어지고 있다. “발”은 주님의 왕국에서 보다 낮은 것, 보다 더 희미한 것을 의미한다.
모세의 책에서:
그돌라오멜과 그와 함께 한 왕들이 세일 산에 있는 호리족을 광야에 있는 엘-바란까지 (뒤쫓아) 쳐부셨다 (창. 14:5, 6).
주님의 신성한 인간이 여기서 “세일 산”에 의해, 그리고 “엘-바란”에 의해 의미된다. 모세의 책에서:
제 이 년, 둘째 달, 그 달의 이십 일, 구름이 증거의 성막 너머 위로 가져가졌다; 그리고 이 스라엘의 아들들은 그들의 여행들에 따라 시내 광야로부터 진군하였다; 그리고 구름이 바 란 광야에서 머물렀다 (민. 10:11, 12).
광야에서 백성들의 모든 여행은 인간이 굴복당할 수밖에 없으나 주님께서 그를 위하여 정복해주시는 교회의 전투와 시험들의 상태를, 고로 주님의 시험 자체와 승리 자체를 의미하는 바, 이것은 주님의 신성한 자비로부터 다른 곳에서 더 살필 것이다; 그리고 주님은 그분의 인간-신성으로부터 시험들을 완벽히 해내셨기 때문에, 주님의 인간-신성이 여기서도 “바란 광야”로 의미되어 있다. 그래서 다시 같은 말에 의해 표현된 구절이 아래 있다:
후에 백성들은 하세롯에서부터 여행했다, 그리고 바란 광야에 진영을 차렸다. 그리고 여호 와께서 모세에게 이야기하셔어, 말하시기를, 너는 사람들을 보내어, 그들로 내가 이스라엘 의 아들들에게 줄 가나안의 토지를 탐험하게 하라; 그리고 모세는 여호와의 명령에 따라 그들을 바란 광야로부터 파견했다. 그리고 그들은 되돌아 왔다, 그리고 모세에게, 아론에게, 그리고 이스라엘의 아들들의 회중에게, 가데스쪽으로, 바란 광야쪽으로 왔다; 그리고 그들 에게 (이런) 말을 되가지고 왔다, 그리고 그들에게 토지의 과일을 보였다
(민. 12:16; 13:1-3, 26).
그들이 진을 친 바란 광야로부터 나가 가나안의 토지를 탐험하는 것은 주님의 신성한 인간을 통하여 이스라엘의 아들들, 즉 영적 인간이 가나안의 토지에 의해 의미된 것인 천국의 왕국을 가지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때 당시 그들이 굴복되고 말았는데, 이것은 그들의 나약함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그분의 법 안에서 모든 것을 성취해가셨다, 그래서 시험들을 견뎌내셨고, 정복하셨다; 그리하여 선행의 신앙 안에 있는 이들, 주님이 정복하신 시험 안에 있는 이들 역시 그분의 신성한 인간으로부터 구원을 가진다. 이것 때문에 주님이 시험받으신 곳도 광야이었다 (마. 4:1; 막. 1:12, 13; 눅. 4:1; 2708항).

여기에 두 가지 비밀들이 있다, 하나는 영적 인간의 선은 상대적으로 불명료하다(obscure, 애매모호하다, 희미하다)는 것, 다른 하나는 이 불명료함이 주님의 신성한 인간에 의해 계발된다(명료해진다)는 것이다. 첫째 사항인, 영적 인간의 선은 상대적으로 불명료하다에 주목하면, 이는 천적 인간의 상태와 영적 인간의 상태를 비교해 말한 대목으로부터 분명해진다; 그 이유가 이 두 상태를 비교하면 명백해지기 때문이다. 천적 인간과 더불어 선 자체가 그들의 의지 부분에 심어진다, 그리고 의지 부분으로부터 빛이 그들의 지적 부분 안으로 드리워진다; 그러나 영적 인간과 더불어, 그의 의지 부분 모두는 파괴되어져 있다, 하여 그들은 의지 부분으로부터서는 선에 관한 어떤 것도 받지 못한다. 고로 선은 주님에 의해 그들의 지적 부분에 심어진다. 의지 부분은 인간의 생명 중 제 1 순위에 해당되고, 그 반면 지적 부분은 의지 부분으로부터 생명을 받아 산다. 영적 인간의 의지 부분이 깡그리 파괴되었기에 영적 인간에게는 악밖에 없고, 이 악은 끈질기게 항구적, 계속적으로 그의 지적 부분 안으로, 즉 그의 생각 안으로 흘러든다. 따라서 지적 부분에 있는 선이 상대적으로 불명료, 희미함에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영적 인간은 천적 인간 처럼 주님을 사랑함을 가지고 있지 않다, 결과적으로 그들은 모든 예배의 필수 조항, 주님이 그분의 선을 흘러들게 하실 수 있는 필수 여건인 주님께 면목 없음(또는 극도의 겸허, humiliation, 주님께 창피할 뿐인 나 자신을 인정함)을 지니고 있지 않다. 그 이유가 겸허한 심정 아닌 우쭐대는 심정은 주님의 선을 전혀 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영적 인간은 천적 인간이 이웃을 사랑하듯 사랑하지 못한다. 그 이유는 자기를 사랑함과 세상을 사랑함이 그들의 의지 부분으로부터 그의 지적 부분으로 흘러들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사랑의 선을 불명료해지게 한다. 우리가 선을 행할 때, 세상에 있는 목적을 위하여 실시되고 있는지를 곰곰이 생각하고 되돌아 본다면 누구에게나 왜 우리의 선이 불명료하다 말하는 지를 알게 된다; 그리고 비록 그가 일부러 세상의 목적 성취를 위하여 선을 꼭 행하지 않았다 할지라도, 여전히 그는 보답에 관한 것을 생각하고 있다. 그것이 자기가 베푼 선을 받은 자들로부터 이든, 다른 삶에서 주님으로부터 이든 어디로부터, 누군가로부터 보답받고 싶어하고 있다는 말이다. 고로 그의 선은 (자기) 공적(merit) (자랑)에 의해 더럽혀져 있다. 다시 말해, 그가 선을 행했을 때, 그 선이 타인으로 알 수 있게 만들고, 자신은 타인 보다 더 선한 자이다는 우쭐댐이라는 자기 생명의 기쁨 안에 있는다는 말이다. 그러나 천적 인간은 자신 보다 이웃을 더 사랑하고 있다. 이 인간은 보답 따위는 그들의 생각 속에 아예 존재하지 않고, 더구나 선한 일에서 자신이 타인 보다 낫다는 우월감 따위도 없다.
더욱이 영적 인간과 더불은 선은 자기를 사랑함과 세상을 사랑함으로부터 발생하는 다양한 원리들로부터의 신념(persuasion, 설득함, 종파)에 의해 불명료해져 있다. 신앙으로부터 있는 그것들의 설득함의 품질은 이미 살핀 바 있다 (2682, 2698항 참조); 마찬가지로 이것은 의지 부분으로부터의 악의 유입으로부터도 있다.
또한 영적 인간의 선이 상대적으로 불명료해 있는 것은 영적 인간은 천적 인간 같이 어떤 지각으로부터 참된 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도 있다. 그러나 그는 부모나 스승의 가르침으로부터, 또는 그가 태어날 때 몸을 담은 교리로부터 참된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리고 배워진 것에 그는 자신으로부터의 어떤 것, 자기 생각으로부터의 어떤 것을 덧붙인다. 이때 덧붙이는 대부분은 감각적이고 그로부터의 오류들이다. 그리고 합리성과 그것의 외관들이 우위를 점유하고 있어, 당사자로 하여금 천적 인정함 같은 것, 즉 어떤 순수한 진리를 인정하기 힘들어지게 한다. 그럼에도 주님께서는 이런 허울뿐인 진리들, 급기야 오류투성인 진리들, 진리의 외관들 안에 선을 심으신다; 주님이 심은 선이라 해도 그것의 품질은 그것과 결합하는 진리의 영향을 벗어날 수 없는 바, 그것들로 인해 상대적으로 불명료해져 간다. 이는 태양의 빛이 대상물 안으로 흘러드는 경우와 같을 것이다. 똑같은 태양으로부터의 빛과 열의 품질은 그것을 받는 대상물에 따라 다양한 색깔, 다양한 품질, 즉 때로는 아름다움을 창출하는 품질로, 때로는 아름답지 못한 품질이 되기도 한다. 한마디로 선이 진리에 따라 등급이 매겨지는 셈이다.
영적 인간은 악이 무엇인지를 모르고 있다는 사실로부터도 똑같은 것이 분명해진다. 그는 십계명의 가르침에 반대되는 악 외에 어떤 다른 것들이 악이다고 거의 믿지 않는다, 또한 애착과 생각 속의 무수히 있는 악은 눈치채지도 못한다; 하여 그는 그런 악들에 관하여는 되튀겨 생각해보는 일도 거의 없고, 그것들을 악이라고 부르지도 않는다. 그는 탐욕들로부터이든, 쾌락들로부터 이든, 모든 기쁨들을 좋은 것으로밖에 더 달리 간주하지 않는다; 그리고 자기 사랑으로부터의 기쁨 자체도 그는 얻으려고 애쓰는데, 그는 이런 것들이 그의 영에 영향을 미치고, 다른 삶에서 그렇게 되어 있는다는 것을 모르는채, 그것들을 승인하고 너그러이 봐주기도 한다.
이로부터 또하나 분명한 것은 말씀을 통털어 취급되는 것이 주님을 사랑함의 선과 이웃을 향한 사랑의 선이다는 것, 게다가 영적 인간은 선이 신앙의 본질이다는 것, 어떤 사랑과 선행이 신앙의 본질 안에 있는지 조차 모른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가 신앙에 관해 배운 것, 그가 본질로 만드는 것이 그의 삶의 많은 경험에 의해 확증되지 않으면, 그는 그것이 그러한지 여부를 토론한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마태복음서에서 말하신다:
너의 연설(speech)은 예, 예; 아니요, 아니요 만을 말하게 하라; 이 말 이상의 것은 악으로 부터 있다 (마. 5:37)..
그 이유가 천적 인간이 진리 자체 안에 있는 것에 관하여 영적 인간은 그것이 과연 그러한지를 논쟁한다; 허나 천적 인간은 진리 자체 안에 있는 바, 그들은 진리 자체로부터 이 진리에 속하는 무수한 것들을 볼 수 있다, 마치 빛으로부터 온 천국을 본다는 말이다. 그러나 영적 인간은 그것이 과연 그런지를 논쟁하기에, 그들이 계속 논쟁해대는 한, 그들은 천적 평면의 입구, 첫 경계선에 조차 다가올 수 없고, 더욱이 그들의 빛으로부터는 어떤 것도 관조할 수 없다.

둘째 비밀에 주목하면, 즉 영적 인간과 더불은 불명료함은 주님의 신성한 인간에 의해 계발된다는 것에 관해서인데, 이것은 납득력에 설명되어질 수 없다, 그 이유가 신성의 유입에 관하여 묘사할 방도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에 관해 아주 조금 생각될 수 있는 것이라면, 만일 최고의 신성 자체가 위에서 살펴왔던 선의 종류 안으로 흘러든다면, 아주 많은 악들과 거짓들로 해서 더럽혀지리라는 것, 따라서 그것은 받아들여질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만일 어떤 것이 위와 같은 선을 가진 사람에 의해 받아들여졌다면, 그는 지옥적 심한 고통을 느낄 것이고, 고로 멸망하고 말 것이다. 그러나 주님의 신성한 인간은 이런 인간 안으로 흘러들 수 있고, 영적 인간의 선을 계발할 수 있다. 이는 마치 태양이 두꺼운 구름층을 지나 빛을 발하고, 이른 아침에 새벽의 영광으로 변형시켜 놓는 것과 유사할 것이다; 그럼에도 주님은 그들 앞에 태양의 빛으로서 나타나실 수 없고 달의 빛의 수준으로서 이다. 그러므로 주님이 세상에 오심의 원인은 영적 인간에 구원이 이르도록 하는 길을 마련하시기 위해서임이 분명하다.

그리고 그의 어머니는 그에게…데려왔다. 이는 진리에 애착함을 의미하는데, 이는 “어머니”의 의미가 교회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리고 여기서 표현된 영적 교회가 진리에 애착함 안에 있기 때문에, 그리고 이 교회는 진리에 애착함 덕택에 교회라 말해지기 때문에, 이 애착이 “어머니”에 의해 여기서 의미되고 있다.

이집트의 토지로부터 아내를. 이는 영적 교회인에 속한 기억 속의 지식들에 대한 애착을 의미하는데, 이는 “아내”의 의미가 애착 또는 선이다로부터; 그리고 “이집트”의 의미가 기억 속의 지식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 절에서 영적 교회인이 선의 측면에 관한 품질에 관하여, 즉 그의 생명의 본질에 관하여, 즉 그와 더불은 선은 불명료하다는 것, 그러나 주님의 신성한 인간에 의하여 계발되어진다는 것이 묘사되어 있다; 이 계발됨으로부터 그의 합리성 안에 진리에 애착함이, 그의 자연적 평면에 기억 속의 지식들에 애착함이 공표된다. 선에 애착함이 천적 인간의 경우 같이 영적 인간과 더불어 공표될 수 없고, 그 대신 진리에 애착함이 공표되는 이유는 영적 인간에 있는 선은 그의 지적 부분에 심어져 상대적으로 불명료하기 때문이다. 고로 진리에 대한 애착 외의 다른 애착은 그의 합리성에 생산되거나 파생되어질 수 없고, 그러므로 그의 자연 평면에는 기억 속의 지식들에 대한 애착함이 있다. 여기서 우리가 말하는 진리는 당사자가 진리이다고 믿는 진리의 수준에서의 진리일 뿐이다; 그리고 기억 속의 지식들 역시 여느 학식자의 기억에 있는 것과 같은 지식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가 자신의 경험과 들음으로부터, 시민적 생활부터, 교리로부터, 그리고 말씀으로부터 흡수한 지식의 모든 것을 말한다. 영적 교회인은 이런 식의 애착을 가지고 있다.
진리에 애착함 안에 있다는 것과 선에 애착함 안에 있다는 것을 구분해 알아지도록 간단하게 나마 더 서술해보자. 진리에 대한 애착 안에 있는 이들은 어떤 것이 진리인지 아닌지, 또는 그것이 그러한지 아닌지를 생각하고, 수색하고, 토론한다; 그리고 그들이 이것이 진리이다, 또는 이것이 그러하다고 확증할 때, 그들은 그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고, 수색하고 토론한다, 고로 그들은 집안에 들어가는 가기는커녕 문지방에 꽉 달라붙어 있다; 그들은 의심으로부터 자유할 때까지 지혜 안으로의 입장을 승인하지 않는다. 그러나 선에 대한 애착 안에 있는 이들은 그들 안에 있는 선 자체로부터 어떤 것이 그러한지 여부를 알고 지각한다; 고로 그들은 문지방에 머물고 있는 것이 아닌 깊은 안방 안에 있고, 지혜 안으로의 진입이 이미 승인되어 있다.
선에 대한 애착, 또는 선으로부터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이 천적인 수준(평면)에 속한다는 점을 예로 들어 생각해보자: 진리에 애착하는 이들은 이것이 그렇다 하는 것, 그것이 가능한자 여부, 그리고 그것이 무엇인지를 두고 토론한다; 그리고 그것에 관하여 의심이 걷히지 않는 한, 그것들은 승인되어질 수 없다; 그러나 선에 애착함에 있는 이들은 토론하지 않는다, 의심들로 해서 자신을 번잡하게 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이 그렇다고 단언한다, 그러므로 승인되어 있다; 그 이유가 선에 애착하는 이들, 즉 천적 수준에 있는 이들은 영적 수준의 사람들이 도달 가능한 가장 먼 거리의 경계선이 그들의 출발점이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에서 그들에게는 선에 대한 애착은 무수하다는 것을 알도록, 인식하도록, 지각하도록 허락되고 있다; 그들은 한 사람을 구성하기 위해서 천국의 형체 안으로 주님에 의해 모두 결합되어 있다; 또한 애착의 각각의 종류나 다양함을 지각을 수단으로 구별하는 것도 주어져 있다.
이런 예도 생각해볼 수 있다: 모든 기쁨, 복됨, 행복은 오직 사랑으로부터만 있다는 것에 대하여 이다; 따라서 사랑이 이러하면, 기쁨도, 복됨도, 행복도 이러해진다는 것에 대하여서 이다. 영적 인간은 그의 자연적 마음을 그것이 그러한지에 대한 의문에 고정시켜 둔다. 그리고 행복이 다른 근원으로부터 있지를 않는지, 즉 사회적 교제, 대화, 명상, 배움, 또는 소유함과 명예, 명성, 그리고 그것들부터의 영광됨 같은 것으로부터도 있는 것이 아니냐고 되묻고, 이런 것들은 행복의 어떤 것도 결과하지 않는다는 것, 뿐만 아니라 인간 안에 있는 사랑의 애착만이 기쁨이나 행복을 결과되게 한다는 것에 대한 확증을 보류시켜 둔다. 그러나 천적 인간은 이런 예비적인 수준에 자신을 달라붙어있게 하지 않고, 그것이 그러하다를 확증한다, 그러므로 그는 목적 자체와 쓸모 있음 안에, 즉 사랑으로부터의 애착 자체 안에 있어, 각 애착들에 무수한 것, 다양한 것이 있음을 지각하는 바, 이것에 따른 다양한 기쁨, 복됨, 행복을 영원히 향유한다.
이웃은 자기 안에 있는 선이 사랑받아지는 것이다에 대해 생각해보자. 진리에 애착함에 있는 이들은 그것이 진리인지, 이웃이 무엇인지, 선이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하고 조사하고, 토론하나, 더 이상의 진전을 이루지 못하고 지혜로의 문을 닫고 만다. 그러나 선에 애착하는 이들은 이것이 그렇다고 단언하고, 자신들에게 있는 문을 닫아잠그지 않고, 안으로 들어가고, 알고, 인식하고, 선으로부터 무엇이 더 이웃인지를, 어느 수준에서 그가 이웃인지를, 모든 이는 각기 다른 수준에서 이웃이다는 것을 지각한다. 고로 그들은 진리에 애착함에 있는 이들을 훨씬 능가한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많은 것들을 지각하는 셈이다.
이 예를 더 생각해보자: 자기 안에 있는 선을 위해 이웃을 사랑하는 자는 주님을 사랑한다는 점에 대해서 이다. 진리에 애착하는 이들은 이것이 그러한지를 조심스럽게 검사한다; 그래서 만일 자기 안에 있는 선을 위해 이웃을 사랑하는 자는 선을 사랑하는 것, 그리고 모든 선이 주님으로부터 있고, 주님은 선 안에 계신 바, 누군가가 선을 사랑할 때, 그는 그분 또한 사랑하는 것이다고 그들에게 말해지면, 그들은 그것이 그러한지를 검사하고, 선이 무엇인지를, 주님이 진리 보다 선 안에 더 계시는지를 검사한다. 그리고 그들이 이런 탐구 달라붙어 있는 한그들은 먼거리에서 조차 지혜를 볼 수도 없다. 그러나 선에 애착하는 이들은 그것이 그렇다는 것을 지각으로부터 안다; 그들은 즉각적으로 지혜의 범주를 본다, 게다가 주님에게까지 인도된다.
이 모두로부터 진리에 애착함에 있는 이들, 즉 영적 인간은 선에 애착함에 있는 이들, 즉 천적 인간에 비교해 상대적으로 불명료함에 있는 이유를 우리는 알 수 있다. 그럼에도 영적 인간은 희미함으로부터 빛 안으로 올 수 있는데, 그 조건은 그들이 모든 선은 주님을 사랑함과 이웃을 향한 선행으로부터 있다는 것을 기꺼이 단언하는 것이다; 그리고 사랑과 선행이 영적 결합이다는 것; 모든 복됨과 행복은 이 결합으로부터 이다는 것; 천국의 생명은 주님으로부터의 사랑의 선 안에 있다는 것, 이 선으로부터 분리된 신앙의 진리 안에 있지 않다는 것을 단언해야 한다.

이 장에서 주님의 합리성이 먼저 취급되었다, 신성으로 만드신 합리성, 이 합리성이 “이삭”이다; 그다음 인간적일 뿐인 합리성이 분리되는데, 이 합리성은 “이집트인 하갈의 아들”이다; 그 후에 영적 교회, 이 교회가 주님의 신성한 인간에 의해 구원됨, 이 교회는 “하갈”과 그녀의 “아이”이다. 지금 신앙의 교리가 취급된다, 이 교리는 이 교회를 위해서는 실용적이다; 즉 기억 속의 지식들로부터의 인간의 추론들이 그것에 인접되어 있다, 이것이 “아비멜렉”과 “비솔”이다. 이 결합이 아브라함이 그들과 맺은 “계약”에 의해 의미되어 있다. 이 추론들은 외관들이고, 이는 신성으로부터가 아닌 인간 근원으로부터이다. 이것이 인접되어 있는 이유는 이것들 없이 영적 교회는 교리를 납득하지 못할 것이고, 따라서 교리를 받아들이지도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이미 상설한 바대로, 영적 교회는 상대적으로 희미함에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교리는 인간의 생각과 애착으로부터 있는 것으로 외관을 옷입히고 있어야 한다. 그리고 이 교리는 신성한 선이 그것들 안에서 선을 담는 어떤 종류의 그릇 같이 있는 것과 모순됨이 있지 않아야 한다. 아비멜렉은 차후 26장에서 다시 취급되는데, 거기서도 역시 계약이 있지만, 그것은 이삭과 더불어서이다; 그리고 내적 의미에서 추론함과 기억 속의 지식들이 신앙의 교리에 두 번째로 보태어지고 있다. 여기서의 경우, 내적 의미에 포함된 것들의 요약 만이 아래에서 주어질 것이다. 이는 이 장의 설명에 의해 더 명료하게 될 것이다.

2720. 22-32절. 그리고 그 때가 당도했는 바, 아비멜렉, 그리고 그의 군대 장군 비솔이 아브라함에게 말하기를, 하느님은 네가 하는 모든 것에서 너와 함께 있다. 23 그리고 지금 당신은 나와 내 아들과 내 손자에게 거짓되지 않을 것임을 당신의 하느님을 두고 나에게 맹세해 달라. 내가 당신에게 했었던 친절함에 따라서 당신은 나에게, 당신이 체류하는 토지에게 베풀어라. 24. 그리고 아브라함은 말했다, 맹세하리다. 25. 그리고 아브라함은 아비멜렉의 종들이 강취한 물 있는 샘 때문에 아비멜렉을 책망했다. 26. 그리고 아비멜렉이 말했다. 나는 누가 이 말을 했었는지 모른다. 그리고 네가 나에게 말하지도 않았고 나는 그 일에 대해 들은 적도 없으나 오늘에야 알게 되었다. 27. 그리고 아브라함은 양떼와 목축을 가져와서 아비멜렉에게 주었다, 그리고 그들 둘은 언약을 세웠다. 28. 그리고 아브라함은 어린 암양 일곱 마리를 따로 놓았다. 29. 그리고 아비멜렉은 아브라함에게 말했다, 당신이 따로 떼어 놓은 이 어린 암양 일곱 마리는 무엇이냐? 30. 그리고 그는 말했다, 이 어린 암양 일곱 마리를 내 손으로 가져다가 당신에게 주는 이유는 이것이 내가 이 샘을 팟다는 증거이기 때문이오. 31. 그러므로 그는 이곳을 브엘-세바라 불렀는데, 그 이유는 그들 모두가 맹세했기 때문이다. 32. 그리고 그들은 브엘-세바에서 언약을 세웠다. 그리고 아비멜렉은 일어났다, 그리고 그의 군대 장군 비솔도 일어났다. 그리고 그들은 불레셋 사람들의 땅으로 되돌아 갔다. “그 때가 당도하였다”란 주님의 합리성이 신성으로 만들어졌던 때 주님이 계셨던 상태를 의미한다; “그리고 아비멜렉, 그리고 그의 군대 장군 비솔이 아브라함에게 말했다”란 신앙으로부터의 교리에 인접해 있는 기억적 지식으로부터 오는 인간의 합리적인 것들은 본래대로라면 신성임을 의미한다;. “하느님은 당신이 하는 모든 일에서 당신과 함께 한다”란 총체적으로, 세부적으로 모든 것은 신성이였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지금 여기서 하느님을 두고 나에게 맹세하라”란 확언을 의미한다; “당신은 나에게 거짓되게 처신하지 않는다고…”란 의심함이 없이를 의미한다; “내 아들에게도, 내 손자에게도 (거짓되게 처신 않고)”란 신앙 속의 것들을 의미한다; “내가 당신에게 베푼 친절에 따라서”란 주님께서 예비적으로 이전에 훈육받으셨던 합리적인 것들을 의미한다; “당신은 나에게와 당신이 체류하는 이 토지에 베풀라”란 상호성을 의미한다.
“그리고 아브라함이 말했다, 맹세하리다”란 확언한 모든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아비멜렉을 책망했다”란 주님께서 분노하심을 의미한다; “그 이유는 아비멜렉의 종들이 가져 간 물 있는 샘 때문이다”란 기억적 지식은 신앙의 교리가 자신들로부터 근원된 것이기를 바랬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아비멜렉이 말했다”란 응답을 의미한다. “나는 누가 이 말을 했는지 모른다”란 합리성이 뭔가 다른 것을 받아 쓰게 했음을 의미한다. “네가 나에게 말하지도 않았다”란 그것이 신성으로부터가 아니었음을 의미한다; “나는 그 일에 관해 듣지 못했고, 오늘에야 들었다”란 지금 처음으로 들추어 내어졌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양떼와 목축을 가져왔다, 그리고 아비멜렉에게 주었다”란 신성한 선들이 “아비멜렉”으로 의미된 교리 속의 합리적인 것들 안에 심어졌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들 두 사람은 언약을 세웠다”란 그러므로 해서 결합함을 의미한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양떼 중에서 일곱 어린 암양을 가려내었다”란 순진은 거룩하다를 의미한다.
“그리고 아비멜렉은 아브라함에게 말했다, 당신이 가려낸 이 일곱 어린 암양은 무엇이냐?”란 그분은 훈육되실 것이고 인정하실 것임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는 말했다, 그 이유는 이 일곱 어린 암양을 당신이 내 손에서 가져 갈 것이기 때문에”란 순진의 거룩함은 신성으로부터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이 나에게 증거가 된다”란 확실함을 의미한다. “내가 이 샘을 팟다는 것”이란 교리는 신성으로부터 이었음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그는 그곳을 브엘-세바라 불렀다”란 교리의 상태와 품질을 의미한다; “그 이유가 거기서 그들이 둘 다 맹세했기 때문이다”란 결합으로부터를 의미한다.
“그리고 그들은 브엘-세바에서 언약을 세웠다”란 인간의 합리적인 것들이 신앙의 교리에 인접해졌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아비멜렉, 그리고 그의 군대 장군 비솔은 일어났다, 그리고 그들은 불레셋 사람의 토지로 되돌아 갔다”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것들은 교리와 아무런 관계도 없음을 의미한다.

33절. 그리고 그는 브엘-세바에 작은 숲을 심었다. 그리고 그는 거기서 영원하신 하느님의 이름을 불렀다.

그는 브엘-세바에 작은 숲을 심었다. 이는 그것의 품질과 지식들과 더불은 교리를 의미하는데, 이는 “작은 숲(grove)”, 그리고 “브엘-세바”의 의미로부터 알게 된다. 작은 숲에 주목해보자: 고대 교회에서 거룩한 예배는 산이나 작은 숲에서 거행되었다; 산에서의 경우, 산은 예배의 천적인 것들을 의미했기 때문이고; 작은 숲의 경우, 작은 숲은 예배의 영적인 것들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이 교회, 즉 고대 교회가 그것의 단순 순박함 안에 있는 한, 그 당시 그들의 산위에서나 작은 숲에서의 예배는 거룩했다; 그 이유가 천적인 것들, 즉 사랑과 선행 속의 것들이 높고 드높은 것들, 즉 산이나 언덕에 의해 표현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영적인 것들, 이는 천적인 것들로부터 인데, 잎이 무성하고 열매 픙성함에 의해, 마치 동산이나 작은 숲에 의해 표현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표현물이나 의미적인 것들이 우상적인 것으로 만들어지기 시작한 이후, 내적인 것이 없는 외적인 것들로 예배함에 의해, 거룩한 예배는 모독되고 말았다; 그러므로 그들이게 산이나 작은 숲에서 예배하는 것은 금지되어졌다.
고대인들이 산에서 거룩한 예배를 개최했었다는 것은 창. 12장의 구절로부터 분명해진다:
그는 벧엘의 동쪽에 있는 산으로 옮겨갔다, 그리고 그의 천막을 고정했다, 그곳은 바다쪽 (서쪽)으로는 벧엘이, 동쪽으로는 아이가 보이는 곳이다; 그리고 거기에 그는 제단을 건설 했다, 그리고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 (창. 12:8, 1449-1455항).
그리고 “산”의 의미가 천적인 사랑이다로부터 알게된다 (795, 796, 1430항). 그들은 작은 숲에서도 거룩한 예배를 개최했는데, 이는 여기 다음 구절, 즉 “아브라함은 브엘-세바에 작은 숲을 심었다, 그리고 거기서 영원하신 하느님의 이름을 불렀다”로부터 분명해진다; 그리고 “동산”의 의미가 총명이다로부터더 알려진다; 그리고 “나무”의 의미가 지각함이다로부터도 알려진다. 이것이 금지되었다는 것은 아래 구절로부터 분명해진다. 모세의 책에서:
너는 여호와 네 하느님의 제단 옆에 너희가 네게 만드는 어떤 나무의 작은 숲도 너에게 만 들지 말라, 그리고 너는 기둥을 네게 세우지 말라; 이것을 여호와 너희 하느님은 미워하신 다 (신. 16:21, 22).
모세의 책에서:
나라들의 제단들을 너는 부수어내려라, 그리고 그것들의 기둥들을 조각으로 내던져라, 그리 고 그들의 작은 숲들을 잘라내려라 (출. 34:13).
그리고 그들은 불로 나라들의 작은 숲들을 태우도록 명령받았다 (신. 12:3).
그리고 유대인들과 이스라엘족들에서 고대 교회의 표현적 의식이 도입되었는 바, 그것은 오직 외형물만이었고, 심정 측면에서는 우상물밖에 더 아니었다. 그들은 그 표현물 안에 내적인 어떤 것이 있다는 것을 알지도 못했고, 알기를 원하지도 않았다, 또한 사후의 삶에 관한 것도, 메사아의 왕국이 천국적인 왕국이란 것도 알고 싶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들이 자유함에 놓여지면, 언제든지 그들은 산이나 언덕, 또한 작은 숲이나 숲속에서 모독된 예배를 개최했다; 그리고 (평지일 경우) 산이나 언덕과 비슷한 것이 되도록 높은 장소(산당)를 자신들을 위해 만들었고, 작은 숲 대신에 작은 숲의 표현물을 조각했다. 이는 말씀의 많은 구절들로부터도 확인된다. 사사기에서:
이스라엘의 아들들은 바알들(Baalim)과 작은 숲들(groves)을 섬겼다 (사. 3:7).
열왕기서에서:
이스라엘은 여호와를 성나게 하는 작은 숲들을 만들었다 (왕상. 14:15).
열왕기서에서:
유다는 산당들을, 그리고 기둥들을, 그리고 작은 숲들을, 모든 높은 언덕 위에, 그리고 모든 푸른 나무 아래에 건설했다 (왕상. 14:23).
열왕기서에서:
이스라엘은 모든 성읍들에 산당을 건설했다, 그리고 기둥들을 세웠고, 모든 높은 언덕에 작 은 숲들을, 그리고 모든 푸른 나무 아래 (심었다) (왕하 17:9, 10).
열왕기서에서:
유다의 왕 므낫세는 바알을 위한 제단들을 일으켜세웠다, 그리고 작은 숲을 만들었다, 이는 이스라엘의 아합왕이 했던 짓이다, 그리고 그가 만든 작은 숲의 조각 상을 하느님의 집에 세웠다 (왕 하 21:3, 7).
위 구절부터도 알 수 있는 것은 그들 역시 작은 숲의 조각 상을 자신들을 위해 만들었다는 것이다. 이것들이 요시아왕에 의해 파괴되었다는 것도 같은 책에서 발견된다:
요시아왕은 바알을 위해, 작은 숲을 위해, 태양과 달을 위해, 그리고 하늘의 모든 군대를 위해 만들어진 모든 물품들을 여호와의 전으로부터 끌어내게 해서, 그것들을 예루살렘 밖 에서 태웠다, 그리고 여인들이 작은 숲을 위해 옷을 짜던 집도 (허물었다).
그는 또한 솔로몬이 만든 작은 숲들을 잘라내었다, 마찬가지로 여로보암이 만든 베델의 작은 숲도 베어내었다 (왕하. 23:4,6,7,13-15). 히즈키야왕도 이와같이 허물었다:
유다의 히즈키야왕은 산당들을 제거했다, 그리고 기둥들을 부셨다, 그리고 작은 숲을 베어 내었다, 그리고 모세가 만든 놋뱀을 조각으로 부수었다 (왕하. 18:4).
모세의 시대에 놋뱀이 거룩했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외적인 것이 예배되졌을 때, 그것은 모독되었다, 그리고 산과 작은 숲에서의 예배가 금해진 것과 같은 이유로 놋뱀도 조각으로 부셔졌다. 이런 것들은 예언서에서도 더 분명해진다. 이사야서에서:
모든 푸른 나무 아래 네 자신을 신들과 더불어 불을 붙인다; 험한 바위 아래 강들에서 아 이들을 제물로 바친다; 너는 강들에 제주를 쏟았다, 너는 예물을 바쳤다; 높은 산 위에 너 는 네 주택을 세웠다, 그리고 너는 제물을 바치려 그쪽으로 갔다 (이. 57:5-7).
미가서에서:
나는 네 새긴 상들과 네 기둥들을 네 한 가운데로부터 잘라낼 것이다, 너는 네 손의 작품 에 네 자신을 굽혀 절하는 일이 더 이상 있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네 한 가운데로부 터 네 작은 숲들을 뽑아버릴 것이다, 그리고 나는 네 성들을 파괴할 것이다
(미. 5:13, 14).
에스겔서에서:
그들의 살육당함이 그들의 우상들 사이에서, 그들의 제단을 빙둘러, 모든 높은 언덕들에, 산꼭대기에서, 그리고 모든 푸른 나무 아래에서, 그리고 우람진 상수리나무 아래에서, 그들 이 모든 그들의 우상들에게 쉼의 냄새를 바쳤던 장소에서 있을 것이다 (겔. 5:13).
이 모두로부터 어떤 근원에서 우상 예배가 왔는지가 분명해진다. 즉 표현적이고 의미적인 대상물을 예배함으로부터 이다. 홍수 이전인 태고인들은 각각 그리고 모든 것에서,-산, 언덕, 평야, 계곡, 동산, 작은 숲, 큰 숲, 강, 물, 들판, 재배지, 나무, 각 종류의 동물, 하늘의 발광체에서- 주님의 왕국을 표현하고 의미하는 어떤 것을 보았다; 그러나 그들은 자기들의 눈과 더불어서 결코 거주하지 않았고, 더욱이 그들의 마음들이 그런 대상물에 안주해있지 않았다; 그러나 이런 것들을 통해 주님의 왕국에 있는 어떤 것을 생각하기 위해 이용했을 뿐이다. 따라서 수단으로 사용되지 않는 때에는 그야말로 그들에게 아무 것도 아닌 것이 되어 있었다. 진짜 사실인즉, 자연에 있는 모든 것은 표현적이다는 것이다. 이는 오늘날에도 비밀들이고, 많은 이들에 의해서도 거의 믿어지지 않는 비밀한 것들이다. 그러나 주님을 사랑함 속에 있던 천적 인간이 멸해진 이후, 인류는 이 상태에서 더 이상 머물지 못했다. 즉 수단으로서의 대상물로부터 그들이 주님의 왕국 속의 천적, 영적인 것들을 볼 수 있었던 차원에 더 이상 있지 못했다는 말이다.
그럼에도 홍수 이후의 고대인들은 자연의 것들이 주님의 왕국의 천적, 영적인 것을 알 수 있다는 것을 전통들로부터, 그리고 어떤 인물들에 의해 수집된 것들로부터 알았다; 그리고 대상물들이 의미적이었을 때, 그들은 그것들을 거룩한 것으로 간주했다. 이로부터 고대 교회의 표현적 예배가 왔다; 이 교회, 영적인 바, 이것이 그렇다고 했던 지각 안에 있지 않았고, 사실에 관한 지식 안에 있었다; 그 이유가 이것은 상대적으로 희미함 안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들은 바깥쪽에 속한 것들을 예배하지 않았고, 바깥쪽 것들을 수단으로 해서 그들은 안쪽의 것들을 상기했다; 이로부터 그들이 표현적이고 의미적인 것들 안에 있었을 때, 그들은 예배의 거룩함 안에 있었다. 그들이 그렇게 되어 있을 수 있었던 이유는 그들이 영적 사랑 안에, 즉 선행 안에 있으면서 이것을 예배의 본질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주님으로부터의 거룩함이 그들의 예배 안으로 흘러들 수 있었다. 그러나 인류의 상태가 심히 변화되어 뒤집혀졌을 때 그들은 선행의 선으로부터 자신들을 옮겨버렸다. 그리고 어떤 천국의 왕국이 있다는 것, 사후 어떤 삶이 있다는 것도 더 이상 믿지 않았다, 하여 인간은 자신들이 생각하는 기능이 여느 동물 보다 더 높다는 정도를 제외하면 아마도 동물들과 비슷한 조건 안에 있는 셈이 된 것이다. 그다음 거룩한 표현적 예배는 우상으로 돌변했고, 바깥쪽의 것들이 예배되어졌다. 그당시 많은 이방인들, 또한 유대인들과 이스라엘족들 역시 예배가 표현적이지 않고, 표현물과 의미물 자체에 예배를 바친 셈이다. 즉 내향의 것 없이 외향의 것(껍질)이 예배의 목적이 된 것이다.
세부적 측면에서 작은 숲에 주목해보면, 고대인들 사이에서 그것들은 다양한 의미 속에서, 참으로 숲속의 각각의 나무가 의미를 지닐 정도였다. 올리브나무 숲은 예배의 천적인 것들을 의미했다; 무화과나무숲, 포풀러나무숲, 상수리나무숲 등등은 천적이거나 영적인 것에 관련되는 다양한 것들을 의미했다; 앞의 인용 구절들에서는 단순히 작은 숲 또는 나무 재배지라고만 언급하고 지나왔다. 그러나 이것들은 교리나 교리에 관한 지식들에 인접해 있는 이성 속의 것들을 의미한다; 그 이유가 일반적으로 나무들은 지각들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무들이 영적 교회를 서술할 경우, 그것들은 지식을 의미하는데, 그 이유는 영적 교회인은 교리나 말씀으로부터의 지식들을 통하여 있는 것들 외에 다른 지각은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이것이 그의 신앙이, 양심이 되어가고, 결국 이것으로부터 그는 지각을 가지기 때문이다.

브엘-세바에 주목할 차례이다- “브엘-세바”는 교리의 상태와 품질을 의미한다, 즉 교리가 신성이고, 신성에 인간 이성 속에 있는 것이 인접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22절로부터 이 절까지에서 취급된 것들의 시리즈로부터 분명해진다; 또한 원어에서 있는 단어 자체의 의미로부터, 이는 “맹세의 우물”이다로부터와 “일곱”의 의미로부터 이다. “우물”이 신앙의 교리이다는 것은 앞에서 살핀 바로부터 알는지 모른다; “맹세”가 결합이다는 것; 그리고 “언약이 맹세로 만들어짐”은 똑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것; 그리고 “일곱”은 거룩인 것, 고로 신성을 표시한다; 이상 모두로부터 “브엘-세바”는 인간 이성 속의 것들, 또는 인접한 외관과 함께 있는 그 자체로는 신성인 교리를 의미한다.
이름 브엘-세바가 모든 이것으로부터 온다는 것은 아브라함의 말들로부터도 분명해진다:
이 어린 암양 일곱 마리를 내 손으로 가져다가 당신에게 주는 이유는 이것이 내가 이 우물 을 팟다는 증거이기 때문이오; 그러므로 그는 이곳을 브엘-세바라 불렀는데, 그 이유는 그 들 모두가 맹세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은 브엘-세바에서 언약을 세웠다 (30-32절).
위와 마찬가지로 창. 26장의 이삭의 말에서도 분명해진다:
날들이 지나 이삭의 종들이 와서 자기들이 팟었던 우물에 관하여 그에게 말했다, 그리고 그에게 말했다, 우리는 물을 발견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것을 세바(“맹세”와 “일곱”)라고 불렀다. 그러므로 이 성의 이름은 이 날까지 브엘-세바이다 (창. 26:32, 33).
또한 아비멜렉과 우물에 관하여 다투었다고 말해진 우물도 있고, 그와 언약을 맺은 것도 취급되고 있다; 그리고 “브엘-세바”에 의하여 신앙의 교리에 다시 인접한 인간 이성 속의 것들이 의미되어진다; 그리고 그것들이 다시 인접했기 때문에, 고로 교리가 인간의 납득력에 적합해졌기 때문에, 이것은 “성”이라 불리운다 더욱이 브엘-세바가 내적 의미에서는 다른 구절에서도 비슷한 의미로 언급되고 있다 (창. 22:19; 26:22, 23; 28:10; 46:1, 5; 여. 15:28; 19:1, 2; 삼상. 8:2; 왕상. 19:3; 반대적 의미에서, 암. 5:5; 8:13, 14).
교리에 속하는 천적인 것들과 영적인 것들이 넓어짐이 내적 의미에서 의미되는데, 즉 가나안의 토지 넓이가 “단으로부터 브엘-세바까지”라는 표현으로 묘사되고 있다; 그 이유가 가나안의 토지에 의해 주님의 왕국, 또한 그분의 교회, 결과적으로 교리 속의 천적, 영적인 것들이 의미되기 때문이다; 사사기서에서:
이스라엘의 아들들 모두가 나갔다, 그리고 회중은 단으로부터 브렐-세바까지 한 사람 같이 모였다 (사. 20:1).
사무엘서에서:
단으로부터 브엘-세바까지 모든 이스라엘 (삼상. 3:20).
사무엘서에서:
사울의 가문에서 왕국을 옮기는 것, 그리고 다윗의 왕좌를 이스라엘 위에와 유다 위에, 단 으로부터 브엘-세바에 이르기조차에서 앉히는 것 (삼하. 3:10).
사무엘서에서:
후새가 압살롬에게 말했다, 모든 이스라엘을 단으로부터 브엘-세바까지 함께 모으십시오 (삼하. 17:11).
사무엘서에서:
다윗이 요압에게 단으로부터 브엘-세바까지 통과하여 가라고 말했다 (삼하. 24:2, 7)
사무엘서에서:
단으로부터 브엘-세바까지에서 백성의 칠 만명이 죽었다 (삼하. 24:15).
열왕기서에서:
유다는 그의 포도나무 아래와 그의 무화과 나무 아래에서, 단으로부터 브엘-세바까지, 솔 로문의 모든 날들에서 거주했다 (왕상. 4: 25).

거기서 영원하신 하느님의 이름을 불렀다. 이는 거기로부터의 예배를 의미하는데, 이는 “하느님의 이름을 부름”의 의미가 예배이다로부터 분명해진다. 고대 교회 속에 있던 이들은 이름에 의해 이름이 아닌 모든 품질을 이해했다; 고로 “하느님의 이름”은 하느님이 예배되는 수단인 한 복합체에 있는 모든 것, 결과적으로 사랑과 신앙의 모든 것이다; 그러나 예배의 내적인 것이 멸해지고 말았을 때, 그래서 오직 외적인 것만이 남게 되었을 때, 그들은 이름 자체만으로 하느님의 이름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하여 그들은 이름 자체를 예배하고, 그들이 사랑과 신앙으로부터 예배해야 함에는 아예 관심 대상에서 제외되고 말았다. 이렇기 때문에 나라들은 자기들의 하느님의 이름을 수단으로 나라 자체도 구별되기에 이를 정도가 되었다; 그 중의 하나가 유대인들과 이스라엘족이고, 그들도 자신들에게 하느님의 이름을 세웠는데, 그것이 여호와이고, 그들은 이 이름을 발음하고 이 이름에 소원을 비는 것을 예배의 본질로 하였다. 그러나 진리 안에서 볼 때, 이름만에 대한 예배는 예배가 아닌바, 이는 최악의 인간 사이에서 발견되어야 하는 것, 그들은 더욱 모독하는 수준에 와있는 셈이다.
어쨌든 “하느님의 이름”이 진리 안에서의 경우, 예배의 모든 것, 즉 그분을 예배하는 근간인 사랑과 신앙의 모든 것을 의미하는 바, 마. 6:9의 주님의 기도에 있는 대목, “당신의 이름이 거룩해 있으시옵소서”에 의해 뜻해지는 것도 분명해진다; 또한 주님께서 말하신 것: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미워함을 당할 것이다 (마. 10:22).
그들이 묻는 어떤 것에 관하여 만일 둘이 땅에서 동의한다면, 그들을 위해 천국에 게신 내 아버지에 의해 행해질 것이다; 그 이유가 두, 세 사람이 내 이름 안에서 모여지는 곳에, 나 도 그들 사이에 있기 때문이다 (마. 18:19, 20).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을, 형제를, 자매를, 아버지를, 어머니를, 아내를, 아이를, 토지를 떠난 모든 이는 백 배로 받을 것이다, 그리고 영원한 생명을 상속할 것이다 (마. 19:29).
다윗의 아들에게 호산나! 주님의 이름 안에서 오시는 그분은 복되다 (마. 21:9).
예수께서 말하셨다, 주님의 이름 안에서 오시는 분은 복되다 하고 너희가 말할 때까지 너 희는 이후로 나를 보지 못할 것이다 (마. 23:39).
너희는 모든 나라로부터 내 이름 때문에 미움을 당할 것이다; 그리고 그때에 그들은 법을 위반할 것이다, 그리고 서로가 배반할 것이다, 그리고 서로가 미워할 것이다, 그리고 모든 이것들은 내 이름을 위하여이다 (마. 24:9, 10).
많은 이들이 그분을 영접함에, 그분은 그들에게 하느님의 아들이 되는 힘, 그분의 이름을 믿는 능력을 주셨다 (요. 1:12).
믿지 않는 자는 이미 심판되었다, 그 이유는 그가 하느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요. 3:18).
예수께서 말하셨다, 너희가 내 이름 안에서 묻는 것은 무엇이든, 나는 행할 것이다
(요. 14:14, 15; 15:16; 16:23, 24, 26, 27).
예수께서 말하셨다, 저는 사람들에게 당신의 이름을 명백하게 했습니다 (요. 17:6).
거룩하신 아버지, 우리가 있듯, 그들이 하나이도록 당신께서 나에게 주신 이들을 당신의 이 름 안에서 지켜주시옵소서 (요. 17:11, 12).
저는 그들에게 당신의 이름을 알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알게 만들 것입니다; 당신 이 저를 사랑했던 사랑이 그들 안에 있도록, 그리고 제가 그들 안에 있게 하옵소서
(요. 17:26).
너희는 예수가 그리스도, 하느님의 아들임을 믿어라; 그리고 믿는 너희는 그분의 이름 안에 서 생명을 가진다 (요. 20:31).
위 신약 성경 구절 말고도 구약 성경의 많은 구절들에서, 여호와의 “이름”과 하느님의 “이름”에 의해 이름 자체를 뜻하지 않고 예배의 근간인 사랑과 신앙의 모든 것이 뜻해진다.
그러나 사랑과 신앙 없이, 이름 만으로 예배하는 이들이 마태복음서에서 이렇게 말해진다:
그 날에 많은 이들이 나에게 말하기를, 주여, 주여 우리가 당신의 이름으로 예언하고, 당신 의 이름으로 마귀들을 내쫓고, 그리고 당신의 이름 안에서 많은 일들을 행하지 않았읍니 까? 그러나 나는 그들에게 말할 것이다, 나는 너희를 모른다; 불법을 일하는 너희여 나로 떠나라 (마. 7:22, 23).
이미 말했듯이 교인들이 내적 상태인 것으로부터 외적 상태가 되엇을 때, 그리고 예배를 이름만에 놓기를 시작했을 때, 그때 그들은 더 이상 한 분 하느님을 인정하지 않고 이런저런 하느님을 인정했다. 고대인들에게 여호와의 이름에 어떤 것을 덧붙이는 것은 흔한 일이었다. 그럼으로해서 그들은 어떤 은택, 또는 그분의 특질을 상기했다. 이에 대한 예가 본문의 경우이다. 즉 “그는 영원하신 하느님의 이름을 불렀다”; 그리고 창. 22:14에서, “아브라함은 그 장소의 이름을 여호와-이레(Jehovah-jireh), 즉 여호와께서 볼 것이다 라고 불렀다.” “모세는 제단을 건설했다, 그리고 그것의 이름을 여호와-닛시, 즉 여호와는 나의 군기(깃발, banner)라고 불렀다”(출. 17:15); “기드온은 거기에서 여호와께 제단을 건설했다, 그리고 그것을 여호와-살롬, 즉 평화의 여호와 이라고 불렀다” (사. 6:24); 이외에도 많은 구절이 있다. 이름만을 예배하고, 더불어 많은 신들을 인정한 것은 더욱 나라들에 퍼져, 이방인들 역시, 특히 그리스인과 로마인의 경우 두드러졌고, 그들 사이에서 많은 신들이 인정되고 예배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반해 고대 교회, 이 교회로부터 별명들이 퍼지기는 했으나 그들은 한 분 하느님만을, 많은 이름들로 존경되는 한 분 하느님을 예배했다. 그 이유는 “이름”이 품질을 의미함을 그들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34절. 그리고 아브라함은 불레셋 사람의 토지에서 많은 날 동안 체류했다. “아브라함은 불레셋 사람의 토지에서 체류했다”란 주님은 인간적 지식들로부터의 기억 적 지식에서 아주 많은 것들을 신앙의 교리에 인접되게 하셨음을 의미한다. 이는 “체류함”이 가르쳐짐이다로부터; 아브라함의 표현이 주님이다로부터; “불레셋의 토지”, 또는 불레셋족의 의미가 지식들로부터의 기억적 지식이다로부터; 그리고 “날들”이 취급되는 것들이 상태이다로부터 알려진다; 여기서는 기억과 이성 속의 것으로부터의 지식들이 취급되고 있다, 그리고 “많은 날들”이라 말해지는데, 이는 상대적으로 아주 많은 것들을 의미한다. 고로 멀리, 즉 22절로부터 지금까지의 것, 인간 기억 속의 지식들로부터의 합리적인 것들이 신앙의 교리에 더하여짐이 취급되었다; 그리고 여기서는 그것들의 결말이다. 주제 자체에 주목해볼 때, 이는 매우 깊은 의미에 해당되어 26장에서 그것에 관해 더 말해진다. 따라서 더 많은 설명은 뒤로 미루겠다.

창세기 제 22 장

성경: 창세기 22장

1. 그리고 이 말들 이 후에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을 시험하시게 되었다, 그리고 그에게 아브라함아 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는 말했다, 제가 여기 있나이다.
2. 그리고 그분은 말하셨다, 네 아들, 네가 사랑하는 유일한 사람, 이삭조차 데려 오 라, 그리고 그를 모리아의 토지로 데리고 가라, 그리고 거기서 그를 내가 너에게 말해 줄 산들 중의 하나에서 태워바치는 제물로 바쳐라.
3. 그리고 아브라함은 아침에 일찍 일어났다, 그리고 그의 나귀에 안장을 얹었다, 그 리고 그와 함께 소년 둘, 그리고 그의 아들 이삭을 데려 왔다. 그리고 그는 태워바 침을 위한 나무를 쪼갰다, 그리고 일어 났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그에게 말하신 장 소로 갔다.
4. 셋째 날에, 그리고 아브라함이 그의 눈을 들었다, 그리고 그 장소가 저 멀리 있는 것을 보았다.
5. 그리고 아브라함은 그의 소년에게 말했다, 너희는 여기서 나귀와 함께 머물러라, 그리고 나와 이 소년은 저쪽으로 갈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경배할 것이다, 그리고 너희에게 다시 오마.
6. 그리고 아브라함은 태워바침의 장작을 가져 왔다, 그리고 그의 아들 이삭에게 지웠다. 그리고 그는 그의 손에 불과 칼을 들었다. 그리고 그들은 그들 모두 함께 갔다.
7. 그리고 이삭은 그의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말했다. 그리고 그는 말했다, 나의 아버 지여, 그리고 그는 말했다, 내 아들아 내가 여기 있다, 그리고 그는 말했다, 보십시 오, 불과 나무는 있습니다, 그리고 태워바칠 어린 양은 어디에 있습니까?
8. 그리고 아브라함은 말했다, 하느님께서 자신을 위해 태워바칠 어린 양을 보실 것이 다. 내 아들아, 그리고 그들은 그들 모두 함께 더 갔다.
9. 그리고 그들은 하느님께서 자기에게 말했던 곳으로 왔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거기 에 제단을 건설했다, 그리고 장작을 질서있게 쌓았다. 그리고 그의 아들 이삭을 묶 었다, 그리고 그를 제단의 장작 위에 놓았다.
10. 그리고 아브라함은 그의 손을 내밀었다, 그리고 그를 죽이려고 칼을 집었다.
11. 그리고 여호와의 천사가 그를 천국으로부터 불렀다, 그리고 말했다, 아브라함, 아 브라함. 그리고 그는 말했다, 여기 제가 있나이다.
12. 그리고 그는 말했다, 네 손을 소년 위에 내밀지 말라, 그리고 그에게 어떤 것도 행치 말라. 그 이유가 지금 나는 네가 하느님을 경외함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리 고 너는 네 아들, 네 유일한 것을 나로부터 보류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13. 그리고 아브라함은 그의 눈을 들었다, 그리고 보았다, 그리고 뒤쪽에 그의 뿔들로 인해 덤불에 잡혀 있는 숫양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갔다, 그리고 숫양 을 잡았다, 그리고 그의 아들 대신 태워바침을 위해 그를(him) 바쳤다.
14. 그리고 아브라함은 그 장소의 이름을 여호와가 보시리라(Jehovah-will-see)라고 불렀다. 오늘날까지도 산에서 여호와께서 보시리라고 말해지고 있다.
15. 여호와의 천사가 천국으로부터 두 번째 아브라함을 불렀다,
16. 그리고 말했다, 나 스스로 맹세하며 여호와께서 말하신다. 그 이유는 네가 이 일 을 했고 네 유일한 아들을 보류하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17. 나는 너를 확실히 복있게 할 것이다, 그리고 네 씨를 극히 번성하게 할 것인 바, 마치 하늘의 별들 만큼 같이, 해변의 모래 만큼 같으리라. 그리고 네 씨는 네 적 들의 문을 상속받을 것이다.
18. 그리고 네 씨 안에서 땅의 모든 나라들이 복있을 것이다. 그 이유는 네가 내 음성 을 경청했기 때문이다.
19. 그리고 아브라함은 그의 소년들에게 되돌아 왔다. 그리고 그들은 일어났다. 그리 고 브엘-세바로 함께 갔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브엘세바에 거주했다.
20. 이 말들 이후 아브라함에게 이렇게 전해 왔다. 보라 밀가, 그녀 역시 당신의 형제 나홀에게 아이를 낳아주었다.
21. 그의 첫 출생은 우즈, 그의 형제는 브스와 아람의 아비 그므엘과
22. 게셋과 하소와 빌다스와 이들랍과 브드엘이다.
23. 이 여덟 사람은 아브람의 형제 나홀의 처 밀가의 소생이며 브드엘은 리브가를 낳 았다.
24. 그리고 그의 소실, 그 이름은 르우마였다. 그녀 역시 데바, 그리고 가합, 그리고 다하스, 그리고 마아가를 낳았다.

각 절의 내적 의미

1절. 그리고 이 말들 이후에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을 시험하시게 되었다, 그리고 그에게 아브라함아 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는 말했다, 제가 여기 있나이다.

이 말들 이후에…하게 되었다. 이는 방금 성취한 것들 이후에를 의미하는데, 이는 설명 없이 이해될 것이다. 앞에서 취급된 것은 아비멜렉과 아브라함에 관한 것, 그들이 계약을 맺은 것, 마지막으로 아브라함이 브엘-세바에 작은 숲(grove)을 일으켜 세운 것(raise up), 이를 수단으로 인간적 합리성에 속한 것들이 그 자체에서는 신성인 신앙의 교리에 인접되었다는 것이 의미되었다. 여기서는 지금 이삭에 의해 의미되는 합리성에 관한 주님의 시험이 취급되어진다; 그 이유가 시험들을 수단으로 주님은 그분의 인간을 신성으로 만드셨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인간이 시작하는 곳인 그분의 합리성을 신성으로 만드신 것, 그 수단은 어머니쪽 인간, 또는 인간적일 뿐인 합리성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을 매질하고 쫓아내심으로 그분의 합리성은 신성으로 만들어졌다는 말이다. 이 내용이 앞 장의 것과 이 장의 것을 연결하고 있다; 이로부터 말해진다, “이런 것들 이후에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을 시험하셨다.”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을 시험하셨다. 이는 주님의 가장 비통하시고 가장 안쪽 측면에서의 시험들을 의미하는데 이는 이어지는 것으로부터 분명해진다. 내적 의미에서 “아브라함”에 의해 주님이 표현되고 뜻해진다는 것은 아브라함이 다루어지는 대목들 모두에서 분명해진다. 주님이 가장 깊고 비통한 시험들을 경험하셨다는 것, 이것이 이 장의 내적 의미에서 묘사된다는 것은 분명하게 알게 될 것이다. 여기서 말해지는 “하느님이 시험하셨다”라는 말은 글자 의미에 따라 있고, 이 장에서 있는 시험들과 그에 따른 많은 것들이 하느님의 탓으로 돌려지고 있다; 그러나 내적 의미에 따라서는 하느님은 누구도 시험하시는 일이 없다; 오히려 가능한 한 시험들의 시기에 시험으로부터 해방됨이 계속적으로 있다, 이 해방됨은 우리에게 상해를 주지 않는 한도 내에서이다. 동시에 시험 안에 있는 자가 선 쪽을 쳐다보도록 그분께서는 그를 인도해 가신다. 그 이유가 하느님께서 시험들에 참가하시는 일이 여하한 방식에서라도 결코 없기 때문이다; 비록 그분이 허가 하신다고 그분에 관해 서술할지라도, 여전히 그것은 인간이 허가로부터 가지는 생각의 범주에 따라 있지는 않다. 다시 말해 인간이 허가라는 생각을 가지게 되면, 거꾸로 그분이 시험을 받게 하셨음을 그분이 시인하시는 셈이기 때문이다. 허가하는 자가 또한 그것을 뜻하고 있다는 것에 대해 인간은 여하한 방법에서도 납득할 수 없다; 시험을 일으키는 원인은 인간 안에 있는 악이고, 이 악이 시험 안으로 인도한다. 시험의 원인은 하느님 안에 없다. 인간이 악을 행하고 처벌을 받을 때, 그 악이나 처벌의 원인이 재판관에게 있지 않는 것이나 비슷할 것이다. 선과 선으로부터의 진리의 모든 것이 있는 신성한 진리로부터 자신을 분리하는 모든 자는 신성한 진리에 반대되는 법칙, 즉 악과 거짓에 속한 것에 자신을 내던지기에, 그로부터 결과되는 처벌과 고통에도 자신을 노출시킬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에게 말하셨다, 아브라함아. 이는 주님께서 신성한 진리로부터 지각하심을 의미하는데, 이는 “말하다”가 말씀의 역사 부분에서 지각이다는 것으로부터; 그리고 아브라함의 표현이 주님이시다는 것으로부터 알게 된다. 지각이 신성한 진리로부터 이다는 것은 “여호와”가 아닌 “하느님”이 명명되고 있다는 사실로부터 알는지 모른다; 그 이유가 진리가 말씀에서 취급될 경우, “하느님”이 명명되고; 선이 말씀에서 취급될 경우, “여호와”가 명명되기 때문이다. 고로 이 절과 이어지는 11절까지에서 “하느님”이 말해지는데, 그 이유는 거기서 시험이 다루어지기 때문이다. 그것에 이어지는 구절들에서는 “여호와”로 말해진다. 그 이유는 그때 해방됨이 취급되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모든 시험과 정죄함은 진리로부터 있으나 모든 해방과 구원은 선으로부터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말했다, 여기 제가 있습니다. 이는 생각과 반성함을 의미하는데, 이는 “말하다”가 지각을 의미함에서, 그러나 여기서는 생각함과 반성함이다에서 알게 된다. 그 이유는 이것들이 대답의 말이기 때문이다; 또한 생각과 반성 모두는 지각이 그 근원되기 때문이다.

2절. 그리고 그분은 말하셨다, 네 아들, 네가 사랑하는 유일한 사람, 이삭조차 데려오라, 그리고 그를 모리아의 토지로 데리고 가라, 그리고 거기서 그를 내가 너에게 말해 줄 산들 중의 하나에서 태워바치는 제물로 바쳐라.

“그분은 말하셨다. 네 아들을 데려오라”. 이는 그분에 의해 태어난 신성한 합리성을 의미하는데, 이는 “아들”이 합리성을 의미함에서; 여기서의 아들은 이삭이므로 신성한 합리성을 뜻함에서 알게 된다: 그리고 그가 주님의 신성한 합리성을 표현하는 것은 이미 살폈다. 그리고 주님이 그분 자신의 힘으로 그분의 합리성을 신성으로 만드셨기에, 이미 여러 번 말했듯이, “네 아들”에 의해서는 그분에 의해 태어나진 것을 의미한다.

네가 사랑하는 유일한 사람. 이는 우주에서 유일한 사람, 인류를 구원하시는 유일한 분을 의미하는데, 이는 “유일한 사람”의 의미가 우주에서 단독으로 유일한 분, 즉 주님을 취급한다는 것, 그분 만이 그분의 인간을 하느님, 또는 신성으로 되게 하셨다는 측면에서의 “유일한 사람”이시다.

“이삭까지도.” 이는 합리성의 품질을 의미한다는 것, 즉 진리로부터의 선과 선으로부터의 진리, 즉 주님의 인간 측면에 관련되는 신성한 결혼인데, 이는 이삭의 의미로부터 알려진다 (창. 21:6, 7).

그리고 그를 모리아의 토지로 데려가라. 이는 시험되는 장소와 상태를 의미하는데, 이는 “모리아의 토지”의 의미로부터 알는지 모른다. “모리아의 토지”가 시험의 장소를 뜻하는 것은 아브라함이 거기로 가서 자기 아들을 태워바치는 제물로 바치라고 명령받는 것, 그리고 이는 극도로 깊은 시험이다로부터 알려진다. 모리아는 주님께서 극도로 깊은 시험을 견뎌내셨던 예루살렘과 동일한 토지이다는 것은 다윗에 의해 제단이 모리아 산에 건설된 것, 그후 솔로몬에 의해 성전이 건축된 곳이다는 사실로부터 명백해진다; 역대기서로부터:
솔로몬은 모리아 산에서, 예루살렘 안에 여호와의 집을 건축하기를 시작했다. 이곳은 그의 아버지 다윗에 의해 보여진 곳, 다윗이 여부스족 오난의 타작마당에 준비한 장소였다 (대 하. 3:1; 대상. 21:16-28, 삼하. 24:16-25).
이로부터 분명한 것은 이삭이 제물로 바쳐짐에 관한 대목이 주님에 관한 표현이다는 것이다; 하여 이곳은 아브라함이 잠시 체류했고; 그가 삼일의 여행을 하여서까지 거기로 가서 바치라고 명령된 것이다.

그리고 거기서 태워바치는 제물로 바쳐라. 이는 그분이 자신을 신성에 바쳐야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는 태워바침이 히브리 나라와 유대 교회에서 가장 거룩한 예배에 속한다는 것, 이것을 표현함에서 알게 된다. 그들의 예배 의식에는 태워서 바치는 제물이 있고, (그냥 잡아서 바치는) 제물이 있었다. 이들이 표현하는 것은 이미 살폈다. 그들의 성화됨은 이것들을 수단으로 만들어졌다, 고로 이 구절의 “태워바치는 제물로 바침”에 의해서는 신성에 바치지는 것이 의미된다, 그 이유는 주님 자신이 자신을 신성에 바치셨기 때문이다. 즉 그분의 인간이 시험들에서의 전투와 승리하심을 수단으로 그분의 신성에 하나가 되셨기 때문이다.
오늘날 일반화된 신조는 이것일 것이다: 태워바치는 제물과 제물은 주님의 수난(Passion)을 의미한다는 것, 그리고 이 수난 받으심을 수단으로 주님께서는 모든 이의 불법을 위한 속죄함을 만드셨다는 것; 실로 그분은 인간의 불법들을 자신 위에 가져가시고, 짊어지셨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를 믿는 자들은 이것을 생각하면, 설사 마지막 죽는 순간일지라도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수난을 받으셨음을 생각하고 믿는다면, 과거의 제아무리 많은 불법적인 삶이 있었다 해도 의로워짐을 입어 구원받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경우는 그렇지 않다: 십자가의 수난은 주님의 시험받으심 중에서 극도로 깊은 시험이었다는 것, 이를 수단으로 그분은 그분의 인간을 그분의 신성에, 그분의 신성을 그분의 인간에 완전하게 하나가 되게 하셨다는 것, 고로 자신을 신성화 하신 (glorified) 것이다. 이 합일 자체가 선행으로부터의 신앙(의 삶)인 그분에 대한 신앙을 지닌 이들을 구원할 수 있는 수단이다. 이렇게 하실 수밖에 없는 이유인즉, 최고의 신성 자체가 인류에게 더 이상 도달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는 것, 이 신성 자체는 그 자체 사랑의 천적인 것들로부터와 신앙의 영적인 것들로부터 아주 멀리 옮기워졌다는 것, 이렇게 된 이유는 인간이 신성을 더 이상 인정하지 않게 되어서, 더욱이 지각하지 못하게 되었기에 아주 멀어지는 결과가 빚어진 것이다. 그러므로 최고의 신성이 인간의 이런 상황에서 인간에게 내려오시기 위해서, 주님께서는 세상에 오시어 그분의 인간을 그분 자신 안의 신성에 하나가 되게 하신 것이다; 이 합일은 아주 비통한 시험들과의 전투와 승리함을 수단으로 하는 수밖에 다른 방도는 없었고, 그 마지막 최고도의 비통한 시험과 승리가 십자가 위에서 결과된 것이다.
이로부터 즉 그분의 신성한 인간으로부터 주님은 인간이 선행으로부터의 신앙 안에 있을 경우, 비록 그들이 사랑의 천적 수준에서는 아주 멀어졌다 해도 그들의 마음을 (단계적으로) 계발해 나가실 수 있게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삶에서 주님께서는 천적 천사들에게는 태양으로, 영적 천사들에게는 달로 나타나신다. 이로부터 다른 삶의 모든 빛은 있다. 천국의 빛이 이러하므로 이 빛이 영들과 천사들의 시각에 비추일 때, 그들의 이해력이 동시에 계발되는 것이다. 바꿔 말해 천국에서는 외적 빛(시각의 빛)을 가지는 만큼, 그는 내적 빛, 이해력도 가지게 된다는 말이다; 이 점에서 천국의 빛과 세상의 빛은 다르다. 영적 인간의 시각에 빛을 주고 이해력을 계발하는 모두는 주님의 신성한 인간으로부터 이다. 따라서 주님께서 그분의 인간 본질을 신성 본질에 하나되게 하시지 않았다면, 이것이 있었을 리 만무하다; 그리고 그분이 그것들을 하나되게 하시지 않았으면, 세상에 있는 인간은 선하고 참된 것에 대한 어떤 이해력도 지각력도 더 이상 갖지 못했을 것이고, 천국에 있는 영적 (왕국의) 천사도 어떤 이해력이나 지각력을 갖지 못했다. 따라서 그들의 복됨과 행복도 없었을 터이고, 구원함도 있었을 리 만무하다. 이로 우리가 알 수 있는 바, 주님께서 인간을 입으시고, 그 인간을 신성화 하지 않으셨다면, 인류는 구원되지 못했을 것이다는 점이다. .
그러므로 누군가는 어떤 진리가 마땅할지에 대해 일종의 내면적 분위기 수준에서만 생각해도 쉽게 추리할 수 있을 것이다: 즉 하나는, 주님께서 그들을 위해 고통을 받으시고, 우리가 어떻게 살았든 우리들의 죄들을 가져 가 버리셨다는 것; 이에 반해, 주님의 신성한 인간으로부터의 천국의 빛은 신앙으로부터의 선 안에서 사는 이들, 즉 선행의 삶을 사는 이들, 같은 말로 양심을 가진 이들이 아니면 도달될 수 없다는 것. 빛이 역사할 수 있는 평면 자체 (very plane), 또는 빛을 담는 그릇(receptacle)이 신앙으로부터의 선, 또는 선행, 고로 양심이다.

산들 중의 하나에서. 이는 신성한 사랑을 의미하는데, 이는 “산”이 사랑을 의미함으로부터 알게 된다; 여기서는 신성한 사랑이다. 그 이유는 주님을 서술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사랑의 품질은 이미 살핀 바 있다. 이 신성한 사랑으로부터 주님께서는 시험 안에서 싸우시고 그것을 정복하셨다, 그리고 이를 수단으로 그분은 자신을 정화 하시고 신성이 되게 하셨다. 이것이 본문에서, 모리아의 토지에 있는 산들 중의 하나에서 이삭을 태워바치는 제물로 바치라고 아브라함에게 말하신 대목 안에 담겨 있다. 이 구절의 표현은 다윗이 모리아 산에 제단을 건설했다는 사실, 그리고 솔로몬이 그곳에 성전을 건축했다는 사실에 의해 명료하게 되어진다; 그 이유가 태워바치는 제물이든, 여느 제물이든, 이것을 바치는 제단은, 이후 성전과 더불어 주님에 대한 제 1의 표현물이기 때문이다. 제단이 위와 같다는 것을 이미 살핀 바로부터 알는지 모른다. 그리고 다윗서로부터 분명해진다:
그들로 나를 당신의 거룩함의 산으로, 그리고 당신의 성막으로 데려가게 하소서; 그리고 나 는 하느님의 제단으로, 하느님에게로, 내 환희의 즐거움에로 갈 것입니다 (시. 43:3, 4).
성전 역시 그러하다는 것을 요한복음서에서 분명해진다:
예수께서 말하셨다, 이 성전을 파괴하라,, 그리고 삼일 안에 나는 그것을 일으켜 세울 것이 다. 그분께서는 그분의 몸의 성전에 관해 이야기하셨다 (요. 2:19, 21).

내가 네게 말해 줄… 이는 그분이 지각하심을 의미하는데, “말하다”가 지각이다로부터 알려진다.

3절. 그리고 아브라함은 아침에 일찍 일어났다, 그리고 그의 나귀에 안장을 얹었다, 그리고 그와 함께 소년 둘, 그리고 그의 아들 이삭을 데려 왔다. 그리고 그는 태워바침을 위한 나무를 쪼갰다, 그리고 일어 났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그에게 말하신 장소로 갔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아침에 일찍 일어났다. 이는 평화롭고 순진한 상태를 의미하는데, 이는 “아침”, 그리고 “일찍 일어남”의 의미로부터, 그리고 여기서 아브라함이 주님을 서술할 때 연결된 의미에서 알게 된다. “아침”은 보편적 의미에서 주님을, 이로부터 그분의 왕국도 의미한다; 결과적으로 전체적, 세부적으로 사랑의 천적 (평면)을 의미한다; 아침이 이런 것을 의미하는 바, 아침은 천적 평면, 천적 인간이 있는 곳의 상태 자체도 의미할 수밖에 없는데, 그 상태란 평화와 순진의 상태이다. 천국들에서 평화의 상태는 지상의 새벽(dawn)의 것과 같다. 천국들에 있는 평화의 상태 안에서 모든 천적, 영적 평면의 것들은 공표된다. 그리고 거기로부터 경사스럽고, 복되고, 행복한 모든 것이 파생되어 나온다, 마치 지상의 새벽 때에 모든 것들은 기쁨과 즐거움에 속한 것들이 인간 앞에 공표되는 것과 같다; 그 이유가 개별적인 모두는 전체적인(일반적인) 애착으로부터 그것들의 품질을 끌어내기 때문이다. 이 경우는 순진의 상태와 동일하다: 이 상태는 평화의 상태 안에서 공표된다, 그리고 이 상태는 사랑과 신앙에 영향을 미치는 일반적인 것이다. 사랑과 신앙이 그것들 안에 순진을 가지지 않으면, 그것들은 자기들의 본질이 결핍된 셈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순진의 어떤 것을 가지지 않으면, 누구도 천국 안으로 올 수 없다 (막. 10:15). 이로부터 내적 의미에서 “아침”이 의미하는 것이 명백해지고, 더욱이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 일어났다”라고 말해지는 바, 더욱 명백해진다; 그리고 가장 높은 의미에서 “아침”은 주님이시고, 그분의 왕국에 있는 모든 것들에 감동을 주고 결과를 있게 하는 상태는 주님으로부터 있는 바, “아침”과 “아침에 일찍 일어남”은 이 상태에서 공표되는 많은 다른 것들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 상태는 내적 의미에서 이어지는 것들과 연관되어진다.

그리고 그의 나귀에 안장을 얹었다. 이는 그분이 준비한 자연적 인간을 의미한다. 이는 이어지는 것에서 설명되는 대로의 “나귀”의 의미로부터 알려진다. 인간 안에는 의지에 속한 것과 이해력에 속한 것이 있다; 선에 속한 것은 의지 부분에, 진리에 속한 것은 이해력 부분에 속하고 있다. 다양한 종류의 짐승들에 의해 선에 속한 것, 또는 의지에 속한 것이 의미되어진다; 즉 어린 양, 양, 염소 새끼, 염소, 거세한 어린 수소, 수소; 마찬가지로 지적인 것들, 또는 진리에 속하는 것을 의미하는 짐승도 있다. 이 짐승으로는 말, 노새, 들나귀, 낙타, 나귀, 그리고 새가 있다. 지적 능력이 “말”에 의해 의미하는 것은 이미 살폈다. “들나귀”에 의해서는 선으로부터 분리된 진리가 의미되어진다. “낙타”에 의해서는 일반적 측면에서의 기억 속의 지식이, 그리고 “나귀”에 의해서는 세부적(개별적, 특수적) 측면에서의 기억 속의 지식이 의미되어진다.
인간과 더불어 자연적 평면을 구성하는 두 가지 것들, 또는 자연적 (수준의) 인간을 구성하는 두 가지 것들은 자연적 선과 자연적 진리이다. 자연적 선은 선행과 신앙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즐거움이다; 자연적 진리는 선행과 신앙에 관한 기억 속의 지식들이다. “나귀”에 의해 자연적 진리가 의미되고, “노새”에 의해 합리적 진리가 의미되는 것은 아래 인용 구절로부터 알는지 모른다. 이사야서에서:
남쪽의 짐승들에 관한 예언이다. 곤란함과 역경만 있는 토지에서; 사자와 늙은 사자, 그리 고 그것들로부터 독사와 날아다니는 뱀; 그들은 자기들의 재물을 젊은 나귀의 어깨 위에서 운반한다, 그리고 자기들을 보물들을 낙타들의 등 위에서, 이익도 주지 않는 사람들에게 운 반한다; 그리고 이집트인들은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다, 소용에 닿지 않는다 (이. 30:6, 7).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들을 지닌 이들, 그러나 이 지식을 삶에서 사용하여 생명으로 만들지 못하고 기억 속에만 머물게 하는 이들이 “남쪽의 짐승들”이라고 불리우고 있다; 이들에 관해서 말해지는 바, “그들은 자기들의 재물을 젊은 나귀들의 어깨 위에서, 그리고 그들의 보물들을 낙타들의 등 위에서 가져온다”; “이집트인들”이 기억 속의 지식이다는 이미 살폈다. 그들에 관해 말해지는 바, “그들은 헛되게 도울 것이다, 아무 소용도 닿지 않는다” 이다. 위 구절의 예언이 내적 의미를 가졌다는 것, 내적 의미를 알지 못하면 누구도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은 모든 이가 눈치 챌 것이다; 그 이유가 내적 의미 없이, 남쪽의 짐승들이 무엇인지, 사자와 젊은 사자, 독사와 날아다니는 뱀이 무엇인지; 그리고 이 남쪽의 짐승들이 그들의 재물을 젊은 나귀 위에서, 그리고 그들의 보물들을 낙타의 등 위에서 가져옴이 무엇을 뜻하는지, 그리고 이집트인들은 도움이 못되고 왜 아무 소용도 닿지 않는다고 즉각 뒤이어 말해지는가를 알 수 없다. 이스라엘이 잇사갈을 두고 한 예언에 있는 “나귀”의 뜻도 비슷하다. 모세의 책에서:
잇사갈은 뼈만 앙상한 나귀, 무거운 짐짝들 사이에 드러누워 있다 (창. 49:14).
스가랴서에서:
이것은 여호와께서 예루살렘과 맞서 싸운 모든 사람들을 치시는 재앙일 것이다; 말, 노새, 낙타, 그리고 나귀, 그리고 모든 짐승에 관한 재앙일 것이다 (슥. 14:12, 15).
“말”, “노새”, “낙타”, “나귀”에 의해 인간 안의 이해력에 속하는 것들, 이것들이 재앙의 영향을 받을 것이 의미되어지고 있다. 이는 이 대목의 앞 대목과 뒷 대목의 모두로부터 분명해진다; 그 이유가 마지막 심판, 또는 시대의 종말에 앞서 진행되는 재앙이 취급되기 때문이고, 이 주제는 계시록에서 많이 다루어지고, 여타 예언서에서도 많이 취급되어진다. 이 동물들을 수단으로 예루살렘에, 즉 주님의 영적 (왕국의) 교회와 그 교회의 진리들에 맞서 싸우는 이들, 그리고 이들이 그들의 이해력에 속한 것들에 이와 같은 재앙에 의해 영향받을 것이 뜻하여진다.
이사야서에서:
모든 물들 옆에 씨를 뿌리고, 수소와 나귀의 발을 파견하는 너희는 복있다 (이. 32:20).
“모든 물들 옆에 씨를 뿌리는 그들”은 영적인 것들로 자신이 교육되도록 허용하는 이들을 표시한다 “물들”이 영적인 것, 진리의 지적인 것에 대해서는 이미 살폈다. “수소와 나귀의 발을 파견함”은 섬김을 하게 되는 자연적인 것들을 표시한다. “수소”는 선 측면에서의 자연적인 것, “나귀”는 진리 측면에서의 자연적인 것이다.
모세의 책에서:
자기의 젊은 나귀를 포도나무에, 그리고 자기의 나귀 새끼를 우량한 포도나무에 맨다; 그는 포도주에 그의 겉옷들을 빨았다, 그리고 그의 속옷을 포도들의 피에서 빨았다
(창. 49:11).
위 구절은 야곱이 이스라엘로 바뀌고 난 이후 주님에 관한 예언이다; “포도나무”와 “우량한 포도나무”는 영적 (왕국의) 교회의 외적 측면과 내적 측면을 표시한다; “젊은 나귀”는 자연적 진리를; “나귀 새끼”는 합리적 진리를 표시한다. “나귀 새끼”가 합리적 진리를 표시하는 이유는 “암나귀”가 자연적 진리에 대한 애착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옛 시대에서 재판관(사사)은 암나귀를, 그의 아들은 젊은 나귀를 탓다. 그 이유는 재판관은 교회의 선들을, 그의 아들들은 그 선에서 파생되는 진리들을 표현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왕은 암노새를; 그의 아들들은 노새를 탓다. 그 이유는 왕들과 그의 아들들이 교회의 진리들을 표현했기 때문이다. 재판관(사사)이 암나귀를 탄 것을 사사기에서 읽을 수 있다:
내 심정이 백성들에게 기꺼이 자신을 제공한 이스라엘의 율법가를 향하여 있다; 너희는 여 호와를 찬양하라, 흰 암나귀를 탄 너희여, 카펫 위에 앉은 너희여 (사. 5:9, 10).
재판관의 아들들이 젊은 나귀를 탄 대목이다:
이스라엘의 재판관 야일은 아들 삼십 명을 가졌고 그들은 삼십 필의 젊은 나귀를 탓다 (사. 10:3, 4). 이스라엘의 재판관 압돈은 아들 40 명, 30 명의 손자를 두었다. 70 필의 젊 은 나귀들을 탓다 (사. 12:14).
왕이 암-노새를 탄 것에 대한 구절이다:
다윗이 그들에게 말했다, 너희 주의 종을 너희와 더불어 데려오라, 그리고 나의 아들 솔로 몬이 나의 암나귀를 타게 하라. 그리고 그들은 솔로몬에게 왕 다윗의 암나귀를 타게 했다, 그리고 성직자 사독과 예언자 나단이 그에게 기혼에서 왕으로 기름부웠다
(왕상. 1:33, 38, 44, 45).
왕의 아들들이 숫-노새를 탄 것에 대한 구절이다:
왕 다윗의 모든 아들들은 일어났다, 그리고 각기 그의 노새를 타고 도망했다, 압살롬 때문 이다 (삼하. 13:29).
이로부터 암-나귀를 타는 것은 재판관이라는 배지(badge) 이고, 암-노새를 타는 것은 왕이라는 배지였다; 그리고 어린 나귀를 타는 것은 재판관의 아들이다는 것, (숫)노새를 타는 것은 욍의 아들이다는 배지였다; 그 이유는 이미 말했듯이, 암나귀는 자연적 선과 진리를, 암-노새는 합리적 진리에 대한 애착을, 또는 어린 나귀는 자연적 진리 자체를, 그리고 노새와 또한 암나귀의 아들은 합리적 진리를 표현하고 의미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스가랴서에서 주님에 관련하여 예언된 것이 뜻하는 것도 분명해진다:
기뻐환호하라, 오 시온의 딸아; 소리쳐라, 오 예루살렘의 딸아; 잘 보라, 너희의 왕이 네게 로 오신다; 그리고 그분은 의로우시고 구원을 가지시고, 겸비하시어 나귀를, 암나귀의 아들 어린 나귀를 타신다. 그분의 주권은 바다로부터 바다까지, 강으로부터 땅의 끝들 까지에 있을 것이다 (슥. 9:9 10).
주님께서 예루살렘에 오셨을 때, 이 동물을 타시려고 뜻하신 것은 복음서로부터 알게 된다:
예수께서는 두 제자들을 보냈다, 그들에게 말하기를, 네 맞은편 너머 마을 안으로 가라, 그 리고 곧바로 너희는 매인 나귀, 그리고 어미와 더불은 나귀 새끼를 발견할 것이다; 그것들 을 풀어라, 그리고 그것들을 나에게 가져 오너라. 이 모두가 행해진 것은, 예언자에 의해 말해진 것의 완성이다, 말해지기를, 너희는 시온의 딸에게 말하라, 잘 보라, 네 왕이 네게 온순하게, 그리고 암나귀 위에, 그리고 망아지 나귀의 새끼 위에 앉으시고 오신다. 그리고 암나귀와 망아지를 끌어 왔다, 그리고 그들의 옷들을 그것들 위에 놓고, 그리고 그들은 그 위에 그분을 놓았다 (마. 21:1, 2, 4, 5, 7)
“나귀 위에 타는 것”은 자연 평면의 것을 하위에 두는 것, “암나귀의 아들 망아지를 타는 것”은 합리적 평면의 것을 종속시키는 것이다 (창 49:11도 참조). 이런 의미로부터, 그리고 가장 높은 재판관, 그리고 왕이 이 동물을 타게 되어있고 동시에 교회에 대한 표현들이 성취되도록 주님께서는 이 동물을 타시는 행위를 기꺼이 하셨다: 이를 위해 요한복음서를 보자:
다음 날, 축제에 온 많은 사람들은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오시고 있는 것을 들었을 때, 종려 나무의 가지들을 가져 와, 그분을 만나러 나갔다, 그리고 호산나 하고 외쳤다: 주의 이 름 안에서 오시는 이스라엘의 왕은 복 (되시다). 그리고 예수께서 어린 나귀를 발견하셨을 때, 그 위에 앉으셨다; (성경에) 쓰여있는 바, 두려워 말라, 시온의 딸아: 보라, 너희의 왕 이 나귀 새끼 위에 앉아서 오신다. 이런 것들을 그분의 제자들은 처음에는 이해하지 못했 다: 그러나 예수께서 신성화 하셨을 때, 그 때서야 이런 (성서 구절들이) 그분에 관련해 쓰 여져 있었다는 것, 그들이 그분에게 이런 것들을 실시한 것 (등등)을 기억했다
(요. 12:12-16; 막. 11:1-12; 눅. 19:28-41).
이 모두로부터 지금 분명해지는 것은, 그 시대의 교회의 모두와 모든 것은 주님에 관한 표현(물)이었다는 것, 그리고 그분의 왕국 안에 있는 천적인 것들과 영적인 것들을 표현했다는 것, 이 표현은 암나귀와 암나귀의 망아지에 이르기까지에서 표현하고 있었다는 것, 이 나귀들은 선과 진리 측면에서의 자연적 인간이 표현되었다는 것, 이런 나귀를 타신 이유는 자연적 인간은 합리적 인간을 반드시 섬겨야하고, 합리적 인간은 영적 인간을, 영적 인간은 천적 인간을, 천적 인간은 주님을 반드시 섬겨야함을; 이것이 완전한 종속되는 질서이다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함 때문이다.
“수소와 나귀”에 의해 선과 진리 측면에서 자연적 인간이 의미되기에, 여러 법들이 수소와 나귀에 관련되어 주어지고 있다. 이 법들은 얼핏 본다면 신성한 말씀 안에 포함되어 있다는 것 조차 의아해할지 모른다; 그러나 그것들의 내적 의미가 밝혀질 때, 그것들 안에 있는 영적 의미는 크나큰 순간으로 우리에게 바짝 다가 서 있는다. 모세의 책을 보자:
만일 사람이 구덩이를 열게 될 때, 또는 사람이 구덩이를 파고 그것을 덮지 않았을 때, 그 리고 수소나 나귀가 거기에 빠졌을 때, 구덩이의 주인은 갚아야 할 것이다, 그는 그것의 주 인에게 은을 지불할 것이다, 그리고 죽은 것은 그의 것이다 (출. 21:33, 34).
너는 길을 잃은 네 원수의 수소, 또는 그의 나귀를 만날 때, 너는 그것을 그에게로 돌아가 게 하라. 너는 너를 미워하는 자의 나귀가 그의 짐 아래 깔려 있는 것을 볼 때, 그리고 그 를 위하여 그것을 옮겨주는 것을 억제하고 있을 때, 너는 그와 함께 그것을 옮길 것이다 (출. 23:4, 5; 신. 22:1, 3).
너는 수소와 나귀를 함께 (부려) 밭을 갈지 말라. 너는 양털과 아마포를 함께 혼합해 깁은 천을 입지 말라 (신. 22:10, 11).
6일을 너는 일하고, 7일째에 너는 쉬어라, 네 수소와 네 나귀 또한 쉬어야 할 것이다, 그리 고 네 여종의 아들, 그리고 체류자도 (쉬어야 한다) (출. 23:12).
위 구절들에서 “수소”와 “나귀”는 자연적 선과 진리인 영적 의미 외에 더 다른 것은 의미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의 소년 둘을 데려 갔다. 이는 그분이 인접하셨던 이전의 합리성을 의미한다. 이는 “소년들”의 의미에 찾아진다. “소년”과 “소년들”은 말씀에서 다양한 것들을 의미한다; 그 이유는 이 단어들은 집(주인)의 아들들, 낯선 자의 아들들, 종들의 아들들 까지에서 응용되기 때문이다. 이 구절에서는 종의 아들들이다. 합리적인 것을 섬기는 인간의 자연적인 것들이 말씀에서 “종들”에 의해 의미됨은 이미 살폈다. 이 종들의 아들들이 여기서는 그렇게 불리우지 않고 “소년들”이라 불리우는 바, 신성한 합리성을 섬겼던 이전의 합리성, 또는 인간적일 뿐인 합리성이 의미된다; 이는 이 대목의 시리즈로부터도 알는지 모른다.

그리고 이삭 그의 아들. 이는 그분 자신에 의해 낳아진 신성한 합리성을 의미하는데, 이는 이삭의 표현이 주님의 신성한 합리성이다로부터 분명해지고 이에 대하여는 여러 번 말했다. 그분에 의해 태어났다는 것은 이삭이 그의 아들로 불리운 것에서 뜻해진다.

그리고 그는 태워바침을 위해 장작을 쪼갰다. 이는 정의로부터의 공적을 의미하는데, 이는 “장작”과 “장작을 쪼갬”의 의미로부터 분명해진다. “장작(wood)”은 일로부터 있는 선들, 그리고 정의로부터의 선들을 의미한다; 그리고 “장작을 쪼갬”은 일 로부터 있는 선들 안에 공적(merit)을 두는 것, 그러나 “태워바침을 위한 장작을 쪼개는 것”은 정의로부터의 공적을 의미하는데, 이는 계시 없이 알려지기에는 너무나 거리가 먼 의미에 해당된다, “장작을 쪼갬”이 일들로부터 있는 선들 안에 공적을 두는 것을 표시하는 것은 내게 보여진 것에 의해 나로 하여금 명료해지게 만들었는데, 제 1권에서 서술했다. 거기서 장작을 쪼깨는 자는 자신이 행한 선들에 의해 구원함의 공적을 쌓기를 바란 이들이 뜻해졌다. 더욱이 앞 위쪽, 약간 오른쪽, 어떤 세상으로부터의 이들은 (그들이 행한) 모든 선을 자신들에게 있어야 함을 주장했는데, 그들은 나무를 자르거나 쪼개는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 공적들이 자신들로 땀흘리게 한다고 비쳐질 때, 그들의 얼굴은 실체 없는 불(도깨비 불) 같은 것으로부터 빛나는 듯 하다. 이것이 자신의 탓이라고 주장하는 공적의 선이다. 이것이 그렇게 나타나는 이유는 나무(wood)가 선의 표현물이기 때문이다; 이는 궤와 성전에 있는 모든 목재에서도 같다. 또한 태워바침과 제물을 바침이 만들어질 때 제단 위의 모든 장작에서도 같은 표현이다. 그러나 선을 자신들에게 돌리는 자들, 그래서 그것을 자기 공적으로 만드는 이들이 말씀에서 “나무를 예배함”, 또는 나무에 “새겨 만든 (우)상”으로 말해진다.

그리고 일어났다. 이는 승강됨을 의미한다. 이는 말씀에서 어떤 승강됨이 발생할 때 “일어남”의 의미로부터 알려진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그에게 말하신 장소로 갔다. 이는 그 당시 지각에 따른 상태를 의미한다. 이는 “장소”가 상태를; 그리고 “하느님이 말하심”이 신성으로부터 지각하는 것을 의미함으로부터 알려진다. 우선 상태 자체만에 주목하면, 이 절에서 묘사하는 것은, 주님께서 시험을 수행하셨을 때, 주님이 입으신 상태, 그리고 여기서의 경우, 그분이 가장 비통하고 깊은 시험들을 수행하셨을 때 입으셨던 상태이다. 이 상태를 위한 첫 준비는 그분이 평화와 순진의 상태 안으로 들어가신 것, 그리고 그분은 자신 안에 자연적 인간을 준비하셨고, 이는 합리성과 마찬가지 수준에서이고, 이것이 신성한 합리성을 섬기게 하셨다는 것, 그리고 그분은 정의의 공적을 인접되게 하셨다, 이런 방법에서 그분 자신을 승강되게 하시었다. 이런 사항들은 이런 사람들에게, 즉 많은 상태들이 다함께 공존하면서도, 서로가 구분을 짓는 상태들을 알지 못하는 이들의 생각에 표출하는 것, 또는 그들의 납득력에 와닿도록 거의 설명될 수 없다. 그리고 평화와 순진의 상태가 무엇인지, 자연적 인간이 누구인지, 합리적 인간이 누구인지, 또한 정의의 공적이 무엇인지 알지 못할 경우 납득함은 불가능할 것이다; 그 이유가 그는 이 모두에 대해 구분된 생각을 가져야만 하고, 또한 주님은 그분이 원하시는 어떤 상태들이든 자신에게 그분의 신성으로부터 꾀할 수 있으셨다는 것, 그리고 그분은 많은 상태들을 유도함으로 시험들을 위해 자신을 준비되게 하실 수 있으셨다는 것을 알아야만 한다. 이런 대목들은 인간에게는 한밤에 물체를 보듯 불명확하지만, 천사들에게는 대낮의 명료함 같이 알려져 있다는 것, 그 이유가 그들은 주님으로부터의 천국의 빛 안에 있어 셀 수 없이 많은 사항들을 구분지어 파악하고, 동시에 안으로 흐르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환희를 지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4절. 셋째 날에, 그리고 아브라함이 그의 눈을 들었다, 그리고 그 장소가 저 멀리 있는 것을 보았다. “셋째 날에”란 완전, 그리고 신성화 함의 시작을 의미한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그의 눈을 들고 보았다”란 생각하심과 신성으로부터 바라보심을 의미한다. “저 멀리 있는 장소”란 그분께서 내다보셨던 상태를 의미한다.

셋째 날에. 이것이 완전(completeness), 그리고 신성화 함(sanctification)의 시작을 의미하는 것은 “셋째 날”의 의미로부터 분명해진다. 말씀에서 “날”은 상태를 의미한다; 또한 “년”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시간의 모든 기간들, 즉 “시간”, “날”, “주”, “달”, “시대” 등등이다; 또한 “아침”, “정오”, “저녁”, 그리고 “밤”도 마찬가지이고; “봄”, “여름”, “가을”, “겨울”도 그렇다; 그리고 이런 것들에 “셋째”가 추가될 경우, 그것들은 각 상태의 끝, 동시에 다음 상태의 시작을 의미한다. 주님의 신성화 함이 여기서 취급되고, 이 신성화 함은 시험들을 수단으로 결과되는 바, 여기서의 “셋째 날”은 완전, 그리고 이미 말해왔던 것들에 이어지는 다음 상태의 시작을 의미한다. 이 의미에 대한 이유로 그분께서는 모든 것들을 완료하셨을 때, 그분은 셋째 날에 일어나셨다. 세상에 계실 때, 주님에 의해 행해졌고, 행해지게 되는 모든 것들은 마치 다 행해진 듯 하게 교회의 표현들로 있었다. 이는 마치 말씀 안에서 내적 의미가 있는 경우와 같다; 그 이유가 하느님 안에서 있는 것과 있게 될 것들은 똑같기 때문이다; 참으로 모든 영원은 그분에게서는 현존하고 있다.
이로부터 숫자 “3”은 표현이었다. 이 표현은 고대 교회와 유대 교회에서 뿐 아니라 다양한 나라들에서도 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 숫자에 관하여는 취급되었으므로 다시 살피기 바란다. 이것이 “3”의 근원인 것을 호세아서로부터도 분명해진다:
여호와에게로 돌아가자, 그 이유가 그분이 상처입게 하셨다, 그리고 그분은 우리를 치료하 실 것이기 때문; 그분이 우리를 치셨다, 그리고 그분은 우리를 싸매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이틀 후에 그분은 우리를 소생하게 할 것이고, 삼 일 째에 그분은 우리를 일으키실 것이다, 하여 우리는 그분 앞에서 살는지 모른다 (호. 6:1, 2)
위에서 “삼 일째”란 주님의 오심, 그리고 그분의 부활하심을 표시한다. 그리고 요나로부터, 그는 “삼 일 주야 물고기의 뱃속에 있었다” (욘. 1:17); 이 대목에 관해 주님께서 마태복음서에서 이야기 하신다:
요나가 고래의 뱃속에서 삼 일 낮과 삼 일 밤을 있었듯, 그렇게 사람의 아들도 땅의 심장 에서 삼 일 낮과 삼 일 밤을 있을 것이다 (마. 12:40).
말씀의 내적 의미에서 “삼 일”과 “셋째 날”은 같은 의미를 지닌다는 것을 아래 인용 구절로부터 알 수 있다. 요한복음서에서:
예수께서 유대인들에게 말하셨다, 이 성전을 파괴하라, 그리고 삼 일 안에 나는 그것을 일 으켜 세우리라; 그분은 그분의 몸에 관한 성전을 이야기 하셨다
(요. 2:19-21; 마. 26:61; 막. 14:58; 15:29).
주님께서 삼 일째에 일어나신 것은 다 아는 사실이다. 같은 이유로 주님께서는 그분의 삶의 시기들을 셋으로 구분하셨다. 누가복음에서 서술되는 바와 같다:
너는 가서 저 여우에게 말하라, 잘 보라 나는 악마들을 내쫓고, 오늘 내일 치료하고, 그리 고 삼 일째에 나는 완전해진다 (눅. 13:32).
그분의 마지막 시험, 즉 십자가에서의 시험을 주님께서는 하루 중 “제 삼 시각”에 이겨내셨다 (막. 15:25); 그리고 세 시간 후에, 또는 “제 육 시각에” 어둠이 온 토지에 내려왔다 (눅. 23:44); 그리고 세 시간 후에, 또는 “제 구 시각에” 끝났다 (막. 15:33, 34, 37). 그러나 “셋째 날” 아침 그분은 다시 일어나셨다 (막. 16:1-4; 눅. 24:7; 또는 마. 16:21; 17:22, 23; 20:18, 19; 막. 8:31; 9:31; 10:33, 34; 눅18:33; 24:46도 참조). 이 모두로부터, 특히 셋째 날에서 주님이 부활하심으로부터, 숫자 “3”은 표현과 의미를 지녔는데, 아래 인용 구절로부터도 더 알는지 모른다:
여호와께서 시내 산에 내려 오셨을 때, 그분은 모세에게 오늘과 내일 백성들이 정화되어야 한다고 말하셨다, 그래서 그들은 의복들을 빨았다, 그리고 셋째 날을 향하여 준비했다. 그 이유가 셋째 날 여호와께서 내려오시기 때문이다 (출. 19:10, 11, 15, 16).
그들이 여호와의 산으로부터 삼 일 간의 여행을 시작했을 때, 여호와의 궤가 그들을 위해 쉴 곳을 찾으면서 삼 일의 여정을 그들 앞에서 갔다 (민. 10:33).
삼 일을 이집트의 모든 토지에 짙은 어둠이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삼 일 동안 서로를 보 지 못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아들들은 빛을 가졌다 (출. 10:22, 23).
서약, 자유 의지로부터 바치는 제물의 고기는 첫째 날과 둘째 날에 먹게 되어 있었다, 그러나 남은 것은 태워져야 했는데, 그 이유는 이것이 역겨움이었기 때문이다
(레. 7:16-18; 19:6, 7).
죽은 자와 접촉한 자는 셋째 날에 자신을 순수해지게 해야 했다, 그리고 일곱째 날에 그는 깨끗해질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 혼은 이스라엘로부터 잘리워야 한다; 그리고 깨끗해진 자가 불결한 자 위에 삼 일째 날과 일곱째 날에 물을 뿌려야 한다 (민. 19:12, 13, 19).
전쟁에서 살해한 자, 또는 살해된 자와 접촉한 자는 제 삼 일에, 그리고 제 칠 일에 자신 을 순수해지게 하라 (민. 31:19).
그들이 가나안의 토지로 왔을 때, 열매들은 삼 년 동안 할례받지 아니한 것으로 간주 되었다, 그리고 먹지 못하게 되어 있었다 (레. 19:23).
매 삼 년의 끝에서 그들은 그 해의 그들의 증가분의 십분의 일을 모두 가져와서 그들의 문 앞에 놓아, 레위인, 체류자, 고아, 그리고 과부가 먹도록 했다 (신. 14:28, 29; 24:12).
한 해에 세 번씩 여호와의 절기를 지키게 되어 있었다, 그리고 한 해에 세 번씩 모두 각각 의 남성은 주 여호비의 얼굴 앞에 나타나야 했다 (출. 23:14, 17; 신. 16:16).
여호수아가 백성들에게 말했다, 너희들은 삼 일 안에 요르단을 건너 토지를 상속받는다 (여. 1:11; 3:2).
여호와께서 사무엘을 세 번 부르셨다, 그리고 그는 세 번 대답했다 (삼상. 3:8).
사울이 다윗을 죽이기를 원했을 때, 다윗은 자신을 셋째 날 저녁까지 들판에 숨겼다. 요나 단이 다윗에게 말했다, 나는 셋째 날에 내 아버지의 의중을 살필 것이다. 요나단이 돌 쪽에 화살을 쐈다, 그리고 그 다음 다윗은 그의 얼굴을 요나단 앞에서 땅으로 떨구었다, 그리고 세 번 절하였다 (삼상. 20:5, 12, 19, 20, 35, 36, 41).
다윗은 세 가지 것들 중에서 선택하게 되었다: 토지에 칠 년의 가뭄이다: 또는 석 달 동안 자기 적들로부터 도망하는 것; 또는 토지에 염병이 삼 일 있는 것이다 (삼하. 24;12, 13).
다윗의 시대에 년이은 기근이 삼 년 있었다 (삼하. 21:1).
엘리야는 죽은 아이 위에 자신을 뻗쳐서 그가 생명을 가져왔다 (왕상. 17:21).
엘리야가 여호와께 제단을 건설했을 때, 그는 그들에게 태워바친 제물과 장작 위에 세 번 물을 부으라고 말했다 (왕상. 18:34).
엘리야가 보낸 불이 두 번 씩 오십 명과 그 대장을 살랐다, 그러나 세 번째 보낸 자에게는 그러하지 않았다 (왕하 1:13).
히즈키야왕에 표시가 있었다, 즉 그들은 그 해에 즉각적으로 솟은 것을 먹게 된다, 두 번째 해에는 2차 성장한 것을 먹는다는 것, 그러나 세 번째 해에 그들은 뿌리고, 거두고, 포도원 을 심고, 그리고 그것들로부터의 것을 먹을 것이다 (왕하. 19:29).
다니엘은 자기 집 안으로 들어가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있는 창문을 그의 골방에서 열 었다, 그리고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했다 (단. 6:11, 14).
다니엘은 날들의 삼 주를 슬퍼하며, 맛있는 빵을 먹지 않았고, 포도주를 마시지 않았으며, 기름을 바르지도 않으면서 날들의 삼 주가 다 차기까지 그러했다 (단. 10:2, 3).
이집트와 구스에게 표시와 경이로움을 (보여주기) 위해 이사야는 맨 발과 알몸으로 갔다 (이. 20: 3).
촛대로부터 각 측면에서 세 가지들이 나갔다, 그리고 세 알몬드 형태의 찻잔이 각 가지 위 에 있었다 (출. 25;32, 33).
우림과 둠밈에 세 보석들이 각 열 안에 있었다 (출. 28:17-19).
새 성전 안에 이쪽에서의 문에서 세 밀실, 저쪽 문에서 세 밀실이 있었다, 그리고 그 것들 셋은 한(같은) 치수를 가지고 있다; 집의 현관에서 문의 넓이는 이쪽에서 삼 큐빗과 저쪽에서 삼 큐빗이었다 (겔. 40:10, 21, 48).
새 예루살렘에는 북으로 세 문들이, 동으로 세 문들이, 남으로 셋, 그리고 서로 셋이 있었 다 (겔. 48:31-34; 계. 21:13).
이어지는 아래 인용 구절에서도 더 확인된다:
베드로는 예수를 세 번 부인했다 (마. 26:34, 60과 이어지는 구절에서).
주님께서 세 번 베드로에게 말하셨다,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요. 21:17).
또한 비유에서, 포도원을 심은 사람이 종들을 세 번 보냈다, 그리고 결국 그의 아들(을 보 냈다) (눅. 20:12; 막. 12:2, 4-6).
포도원에서 일을 한 자들은 제 삼 시각에, 제 육 시각에, 제 구 시각에, 제 십일 시각에 고 용되어졌다 (마. 20:1-17).
무화과 나무가 삼 년 동안 열매를 맺지 않았기 때문에 그것은 잘리워졌다 (눅. 13:6, 7).
세 배, 세 개 한쌍(trine)이나 삼분의 일이 표현적이듯, 삼분의 일 부분도 그러하였다; 즉 식사 제물에서 고운 곡식가루의 십분의 이는 기름 삼분의 일 힌(hin)과 혼합되었다; 제 주인 포도주는 삼분의 일 부분 힌이었다 (민. 15:6, 7; 겔. 46;14).
예언자 에스겔은 자기 머리 위에서, 그리고 그의 수염에서 면도날이 지나가게 했다, 그 다 음 머리털을 나누고, 삼분의 일 부분은 불에서 태우고, 그리고 삼분의 일은 그것(도성) 주 변에서 검으로 짓부수고, 그리고 삼분의 일은 바람에 흩날린다 (겔. 5:1, 2, 11).
온 토지에서, (삼분의) 이 부분은 멸절되어지고, 삼분의 일은 남아있게 된다; 그러나 삼분 의 일도 불을 통하여 증명하여 데려올 것이다 (슥. 13:8, 9).
그리고 첫 번째 천사가 소리 내었다, 그러자 거기서 피와 뒤범벅된 우박과 불이 되었 다; 그리고 그들은 땅에 내던져졌다; 그리고 나무들의 삼분의 일이 태워졌다, 그리고 모든 푸른 풀이 태워졌다. 그리고 두 번째 천사가 소리를 냈다, 그리고 마치 불로 태워지는 큰 산인 듯한 것이 바다에 내던져졌다: 그리고 바다의 삼분의 일이 피로 되었다. 그리고 혼들 을 가졌던, 바다에 있었던 창조물의 삼분의 일이 죽었다; 그리고 배들의 삼분의 일이 멸망 했다. 그리고 세 번째 천사가 소리를 내었다, 그러자 거기서 마치 등불처럼 타고 있는 큰 별이 천국으로부터 떨어졌다, 그리고 그것은 강들의 삼분의 일 위에, 물들의 샘들 위에 떨 어졌다. 그리고 별들의 이름은 쑥이라 불리우고 있다; 그리고 물들의 삼분의 일이 쑥이 되 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물들로 인해 죽었다, 그 이유는 그들이 쓰게 만들었기 때문이 다. 그리고 네 번째 천사가 소리를 내었다, 그러자 태양의 삼분의 일이 강타당했다, 그리고 달의 삼분의 일, 그리고 별들의 삼분의 일(이 강타당했다); 그렇게 해서 그들의 삼분의 일 이 어두워졌다, 그리고 낮은 그것의 삼분의 일을 위하여 비추지 않았다, 그리고 밤도 마찬 가지였다 (계. 8:7-12).
네 천사들이 사람들의 삼분의 일을 죽이기 위해 풀려났다 (계. 9:15).
이 세 가지 것들, 불에 의해, 그리고 연기에 의해, 그리고 유황에 의해 사람들의 삼분의 일 이 죽었는데, 이것은 말들의 입으로부터 나왔다 (계. 9:18).
용은 자기 꼬리로 하늘의 별들의 삼분의 일 부분을 끌어당겨 땅으로 그것들을 내던졌다 (계. 12:4).
“삼분의 일 부분”은 어떤 것을 의미하는데, 아직 완성되지 않은 어떤 것이다; 그러나 “삼분의 일”, 또는 “세개 한쌍”은 완성인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악한 자에게는 악한 측면에서, 선한 자에게는 선한 측면에서의 삼분의 일, 또는 삼분의 일 부분이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그의 눈을 들어 보았다. 이는 생각함과 신성으로부터의 정신적인 전망을 의미하는데, 이는 “눈”이 총명을 의미함에서 알게 된다; 이로부터 눈을 들어올리는 것은 총명을 승강되게 함을, 고로 생각함을 의미한다; 그리고 “봄”의 의미로부터는 신성으로부터의 전망인데, 그 이유는 이것이 주님을 서술하기 때문에서이다.

저 멀리 있는 장소. 이는 그분이 내다보신 상태 안으로를 의미하는데, 이는 장소가 상태이다로부터; 그리고 “저 멀리 봄”이 예견하심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5절. 그리고 아브라함은 그의 소년에게 말했다, 너희는 여기서 나귀와 함께 머물러라, 그리고 나와 이 소년은 저쪽으로 갈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경배할 것이다, 그리고 너희에게 다시 오마.

아브라함이 그의 소년에게 말했다, 너희는 여기서 나귀와 함께 머물러라. 이는 그 당시 자연적인 것과 함께 한 이전의 합리성이 분리됨을 의미한다. 이는 “여기에 머물음”이 꽤 오랫동안 분리됨을 의미함에서; “소년들”이 이전의 합리성을 의미함에서; 그리고 “나귀”가 자연적 인간을, 또는 자연적인 것을 의미함에서 알게 된다.

그리고 나와 이 소년은 저 쪽으로 갈 것이다. 이는 신성으로부터의 합리성이 (the rational Divine) 진리의 상태에서 가장 슬프고 가장 심도 깊은 시험에서의 전투를 위해 준비됨을 의미한다. “소년”은 이전 상태에 있는 신성으로부터의 합리성이다. 이는 이삭의 표현이 신성한 합리성이다로부터 분명하나, 여기서는 “이삭”이라, 또는 “나의 아들”이라고도 불러지지 않고, “소년”이라 불러진다. 이는 이어지는 구절에서의 상태에 있는 신성으로부터의 합리성이다.

그리고 우리는 경배드릴 것이다. 이는 복종함을 의미한다. 이에 관한 설명은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다시 너희에게 올 것이다. 이는 그후에 결합함을 의미하는데 설명은 필요 없을 것이다. 주님의 가장 비통하고 가장 깊은 시험들이 이 장에서 취급되는 바, 그분이 이 시험들을 수행하실 때 입으신 모든 상태들이 묘사되고 있다. 첫 상태가 3절에, 두 번째 상태가 이 절에, 세 번째 상태는 다음 절에, 그리고 나머지 상태는 그 후의 구절에 묘사되고 있다. 그러나 이 상태들은 평범한 납득력의 수준을 위해 상술되어지기는 힘들다. 그 이유는 많은 사항들을 먼저 알고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즉 여기서 아브라함에 의해 주님의 신성이 표현됨에 관하여, 이삭에 의해 표현된 그분의 신성한 인간에 관하여, 그리고 그분이 시험에 돌입하고 수행하실 때의 이 합리성(“소년”)에 관하여; 또한 이전의 합리성은 무엇이고 무슨 품질이었는 지에 관하여, 또한 이 합리성이 가졌던 자연적인 것에 관하여; 마찬가지로 합리성이 자연적인 것과 인접되었을 때의 상태는 무슨 상태였고, 어느 정도 분리되었을 때는 무슨 상태였는 지에 관하여 등등이다. 더 나아가 시험들에 관한 많은 것들, 외면과 내면의 시험들이 무엇인지, 그리고 이로부터 주님이 겪으신 가장 비통하고 가장 깊은 시험들이 무엇인지, 그리고 이것들이 이 장에서 취급된다는 것도 알아야 한다. 이런 것들이 알려지지 않는 한, 이 절에 포함된 것들은 납득력에 서술하는 것이 가능할 수 없다; 그리고 만일 이런 사항들이 서술된다면, 아주 명료하게 서술된다 해도 그것들은 여전히 불명료해 있을 뿐이다. 주님으로부터 천국의 빛 안에 있는 천사들에게 이 모든 것들은 명백하고 명료하다, 참으로 복되다, 그 이유는 이 사항들은 최고로 천국적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가 말할 수 있는 범위란, 주님께서는 그분이 신성 자체 안에 계셨을 경우 시험받음은 불가능하셨다는 것, 그 이유는 신성은 모든 시험을 넘어서 무한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분은 그분의 인간 측면에서는 시험받으실 수 있으셨다. 이렇기 때문에 그분은 가장 비통하고 가장 깊은 시험들을 수행하셨을 때 앞의 인간, 즉 인간의 합리적 평면과 자연 평면을 그분 자신에 인접되게 하신 것인데, 이것이 3절에서 묘사되어 있다; 그리고 그 후에 왜 그분께서는 이것들로부터 그분 자신을 분리되게 하셨는지가 이 절에서 말해진다; 그럼에도 그분이 시험되어질 수 있는 수단의 어떤 것은 남겨두시고 있다; 이것이 여기서 “이삭, 나의 아들”라고 말하지 않고 “소년”이라 말해진 이유이고, 이 소년을 수단으로 이와 같은 상태, 즉 진리의 상태, 가장 비통하고 가장 깊은 시험을 준비하는 상태에 있는 신성한 합리성이 뜻해진다. 신성 자체, 신성한 인간도 시험되어질 수 없다는 것은 간단한 사실 하나만으로도, 즉 천사들이 신성에 접근될 수 없다는 , 더구나 시험을 도출하는 영들, 더 나아가 지옥들의 접근은 불가능하다는 것 만으로도 모든 이에게 분명해진다. 이로부터 분명해지는 것은, 왜 주님께서는 세상에 오셨는가와 인간의 허약함 그대로를 지닌 인간을 왜 입으셨는지 이다; 그 이유는 이럴 경우에 그분은 인간 측면에서 시험되실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시험들을 수단으로 지옥들을 복종시킬 수 있으셨다, 그리고 각각 모든 것들을 순종함 쪽으로, 질서 안으로 환원하실 수 있어, 최고의 신성으로부터서 그 자체 멀리멀리 옮겨져야만 할 수밖에 없는 인류를 구원하시게 되었다.

여기서 취급되는 주님이 입으신 다양한 상태들에 관한 것은 인간에게 알려지지 못할 수밖에 없는데, 그 이유는 인간은 상태의 자기 변화에 관해 결코 반영(반추)해보지(reflect) 않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 변화는 그의 이해력이나 사고력 측면에서, 그리고 그의 의지나 애착 측면에서 쉬지 않고 이어가고 있다. 반영하지 않는 이유는 그가 자기 안의 모든 것들은 자연(계)의 질서를 따르고 있다고 믿고, 이외 더 높은 질서는 없다고 믿는데서 비롯된다; 이에 반대되는 경우는, 모든 것들은 그와 더불어 있는 영들과 천사들에 의해 좌지우지된다고 믿는 것; 그리고 그의 모든 상태들과 그 상태들의 변화들이 거기로부터 있다는 것, 그리고 주님만이 예견하시는 목적 쪽으로 주님에 의해 방향지워 영원히 있다는 것을 믿는 경우이다. 나는 이것이 정말 그렇다 하는 것을 많은 햇수 동안의 경험을 통해 지금은 충분히 알고 있게 되었다. 영들과 천사들이 나와 더불어 있다는 것, 그들이 도출하는 상태가 무엇인지를 알고 관찰하는 것이 나에게 주어져 왔었다; 그래서 내가 엄숙히 주장할 수 있는 것은, 모든 상태들, 아주 미세한 사항일지라도 이 근원으로부터 온다는 것, 그리고 이를 수단으로 주님에 의해 방향지워진다는 것이다. 또한 모두 각각의 상태 안에는 나타나지 않는 아주 많은 상태들이 있다는 것, 그리고 이것은 하나의 일반적 상태로서 함께 나타난다는 것; 그리고 이 상태들은 그것들의 시리즈에서 질서적으로 뒤잇는 상태들에 관련되어 배치된다는 것이다. 인간과 더불은 이런 사항들은 주님에 의해 실시되어진다; 그러나 주님 자신과 더불어 그분이 세상에서 살으셨을 때의 경우, 그것들은 그분 자신에 의해 실시되었다; 그 이유는 그분이 신성이셨고, 그분의 생명의 있음 자체가 여호와이셨기 때문이다.
인간과 더불은 상태의 변화들, 즉 그의 이해력 측면과 의지 측면에서의 상태 변화들, 그리고 그것이 뒤잇는 질서, 마치 시리즈로 이어가는 장면들 같이 계속되어지되 주님에 의해 어떻게 가능한한 선 쪽으로 구부리시는가를 아는 것은 (인간이 아닌) 천사들의 몫이다. 천사들의 지혜에서는 이 모든 것들의 아주 미세한 것도 지각된다. 주님과 더불은 상태의 변화들에 관하여 내적 의미에서 밝히 알려진 사항들은 천사들에 의해서는 명료하고 구분되게 지각되는데, 그 이유는 그들이 주님으로부터의 천국의 빛 안에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상태의 변화는 단순 순박한 선 안에서 살고 있는 인간의 경우라면 어느 정도까지는 감지될 수 있다; 그렇다 해도 그 감지되는 수준은 아주 희미하고, 악 안에 있는 자들의 경우는 전무하다, 그리고 지혜에 관해 헛소리하는 자들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 이유가 이들은 어둠을 유발하는 많은 것들에 의해 그들의 자연적, 합리적인 빛마저도 대단히 희미하거나 소멸되었다고 까지 추정되기 때문이다. 어쨌든 자기들은 탁월한 빛 안에서 있다고 헛소리 친다.

6절. 그리고 아브라함은 태워바침의 장작을 가져왔다, 그리고 그의 아들 이삭에게 지웠다. 그리고 그는 그의 손에 불과 칼을 들었다. 그리고 그들은 그들 모두 함께 갔다.

아브라함은 태워바침의 장작을 가져왔다. 그리고 그의 아들 이삭에게 그것을 지웠다. 이는 정의의 공적을 의미하는데, 이는 이미 말한 바와 위에서 보여준 바로부터 분명해진다. 고로 더 추가 설명은 필요 없을 것이다. 그가 “이삭에게 그것을 지웠다”란 정의의 공적이 신성한 합리성에 인접되어졌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는 이삭이 주님의 신성한 합리성을 표현함에서 분명해진다; 그리고 “이삭에게 지움”은 인접됨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삭이 그의 “아들”이라 불리우는데, 그 이유는 주님의 신성한 인간이 여호와로부터 임신되었을 뿐 아니라 그분으로부터 태어났기 때문이다. 주님이 여호와로부터 임신되셨다는 것은 주님의 말씀으로부터 충분하게 알려지고 있다; 이로부터 그분은 “지극히 높은 분의 아들”, “하느님의 아들”, 그리고 “아버지의 독생자”, 많은 장소에서 그렇게 불리우신다 (마. 2:15; 3:16, 17; 16:13-17; 17:5; 27:43, 54; 막. 1:10; 9:7, 9; 14:61, 62; 눅. 1:31, 32, 35; 3:21, 22; 9:35; 10:22; 요. 1:14, 18, 50; 3: 13, 16-18; 5:20-27; 6:69; 9:34, 35, 38; 10:35, 36; 20:30, 31), 그리고 많은 장소에서 그분은 여호와를 그분의 “아버지”로 부르시고 있다.
그분이 처녀 마리아로부터 태어나신 것을 놓고는 마치 또 다른 사람인냥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분이 다시 태어나셨을 때, 또는 신성이 되셨을 때, 이것은 그분 안에 계셨던 여호와로부터 였다, 그리고 여호와는 생명의 있음 자체 이셨다. 신성과 인간 본질의 하나가 되심은 상호적, 서로의 결과에서 였다, 고로 그분은 신성 본질을 인간 본질과, 인간 본질을 신성 본질과 하나되게 하신 것이다. 이로부터 분명한 것은, 주님은 그분 자신의 힘으로 자신 안에 있는 인간을 신성으로 만드신 것, 그리하여 정의가 되셨다. 정의의 공적은 그분이 가장 깊은 시험들을 수행하셨을 때, 그리고 그것으로부터 그분은 싸우셨고, 그리고 이 악귀들에 맞서 싸우신 것, 그리고 그분이 신성이 되실 때까지 싸워가셨을 때, 신성한 합리성에 인접한 것이다. 위 내용이 아브라함이 태워바침의 장작을 이삭 그의 아들에게 지움에 의해 내적 의미에서 뜻해진 것이고, 이상의 내용들은 이 구절의 말씀이 읽혀질 때, 천사들에 의해 지각된다.

그리고 그는 그의 손에 불과 칼을 들었다. 이는 사랑으로부터의 선과 신앙으로부터의 진리를 의미하는데, 이는 “불”의 의미가 사랑의 선이다로부터; 그리고 “칼”의 의미가 신앙의 진리임에서 알려진다. 칼(knife)이 제물을 희생시킬 때 사용되는 바, 이것이 신앙의 진리를 의미하는 것은 “검(sword)” 또는 “작은 검”이 말씀에서 의미하는 바로부터 알게 된다; 그 이유가 칼 대신 “작은 검”이라고도 말해지기 때문이다. 둘 다 같은 의미를 가지나, 차이점은, 칼이 제물 바침을 위해 사용될 경우 신앙의 진리를 의미하나, 검은 전투하는 진리를 의미한다; 그리고 칼은 말씀에서 드물게 언급되는 바, 이 구절에서 언급되는 비밀한 이유를 위해, “검”이 의미하는 것을 좀 더 살피기로 한다. “검”은 내적 의미에서 신앙의 진리가 전투하는 것, 또한 진리의 황폐해짐도 의미한다; 그리고 반대 의미에서는 거짓이 전투하는 것, 그리고 거짓이 처벌됨도 의미한다.
1. (이 숫자는 원서에서 사용되었다. 아마 검에 대한 설명이 길므로 크게 셋으로 구분되는 의미에서 설명하고자 분류시킴으로 독자의 이해를 돕고자 한 것 같다. 역자 주) “검”이 전투하는 신앙의 진리를 의미하는 것을 아래 구절로부터 보여질는지 모른다. 다윗서에서:
당신의 검을 당신의 넓적 다리에 차소서, 오 강력한 자시여, 당신의 영광과 당신의 위엄을 번영하게 하소서, 진리의 말씀을 타시옵소서, 그리고 당신의 오른 손이 당신에게 경이로운 것들을 가르치실 것입니다 (시. 45:3, 4).
위 구절은 주님이 취급되고 있다, “검”은 전투하는 진리를 표시한다. 다윗서에서:
자비한 자가 영광에서 드높여지게 하고, 그들이 자기들의 침대에서 노래하게 하라; 그들의 목(구멍)에서 하느님에 대한 높은 찬양들이 있게 하라, 그리고 그들의 손에 양날의 검이 (있다) (시. 149:5, 6).
이사야서에서:
여호와께서 자궁으로부터 나를 부르셨다; 내 어머니의 배(창자)로부터서 그분은 내 이름을 언급하셨다, 그리고 그분은 내 입을 날카로운 검같이 만드셨다, 그리고 나를 광택나는 화 살로 만드셨다 (이. 49:1, 2).
“날카로운 검”은 전투하는 진리를 표시한다; 그리고 “광택나는 화살”은 교리 속의 진리를 표시한다. 이사야서에서:
앗수르가 사람의 것이 아닌 검으로 엎드려질 것이다; 그리고 사람의 것이 아닌 검이 그를 삼킬 것이다; 그리고 그는 검 앞에서 도망할 것이다, 그리고 그의 젊은 이들은 조공을 바치 는 자가 될 것이다 (이. 31:8).
“앗수르”는 신성한 것들에서 추론함을 표시한다; “사람으로부터 것이 아닌 검, 그리고 사람으로부터가 아닌 것”은 거짓을 표시한다; “검 앞에서 그가 도망함”은 전투하는 진리를 표시한다.
스가랴서에서:
너는 요새 쪽으로 돌아서라 너희 희망의 죄수들아; 오늘에서 조차도 나는 내가 네게 두 배 로 갚을 것이라고 선포한다; 활같이 나를 위해 유다를 구부린 나, 나는 에브라임을 채웠 다, 그리고 오 시온아, 네 아들들을 오 야완아, 네 아들들에 맞서게 휘저었다, 그리고 나는 너를 용사의 검같이 만들 것이다, 그리고 여호와께서 그들 넘어 보셨을 것이다, 그리고 그 분의 화살이 번개같이 나갈 것이다 (슥. 9:12-14).
“용사의 검”은 전투하는 진리를 표시한다. 계시록에서:
일곱 촛대들 한 가운데 사람의 아들 같으신 분이 계셨다; 그분은 그분의 오른 손에 일곱 별들을 가지셨다; 그분의 입으로부터 날카로운 양날의 검이 나온다, 그리고 그분의 얼굴은 그분의 권능에서 빛나는 태양 같았다 (계. 1:13, 16)
계시록에서:
이런 것들을 날카로운 양날의 검을 가지신 그분이 말하신다; 나는 빠르게 올 것이다, 그리 고 내 입의 검을 가지고 그들에 맞서 싸울 것이다 (계. 2:12, 16).
“날카로운 양날의 검”은 전투하는 진리를 분명하게 표시한다, 그러므로 이것은 “입으로부터 나가는 검”으로 표현되어졌다.
흰말위에 앉으신 그분의 입으로부터 날카로운 검이 나갔다, 그것을 가지고 그분은 나 라들을 치셨다; 그리고 그들은 말 위에 앉으신 그분의 검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이 검은 그분의 입으로부터 나갔다 (계 19:15, 21).
위에서 “그분의 입으로부터의 검”은 전투하는 진리임이 분명하다. 흰말 위에 앉으신 분은 말씀, 고로 말씀이신 주님인데, 이에 관하여는 2760-2763항을 보라. 주님께서 마태복음서에서 말하신다:
내가 땅에 평화를 주려고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나는 평화를 보내려고 오지 않고 검을 주려고 왔다 (마. 10:34).
누가복음서에서:
지금 돈지갑을 가진 자, 그로 하여금 그것을 지니게 하라, 전대를 지닌 자도 마찬가지 이 다; 그리고 아무 것도 가지지 않은 자, 그로 하여금 옷을 팔게 하라, 그리고 검을 사게 하 라; 그들이 말했다, 주여, 보소서 여기 두 검이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께서 말하셨다, 충분 하다 (눅. 22:36-38).
위에서 “검”은 그들이 전투를 위하여, 전투로부터의 진리를 뜻하고 있다.
호세아서에서:
그 날에 나는 그들을 위해 들판의 들짐승과, 그리고 하늘들의 새와, 그리고 지면의 기는 것 들과 계약을 맺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활을, 검을, 그리고 토지로부터 전쟁을 부러뜨릴 것 이다; 그리고 그들로 하여금 안전하게 드러눕게 할 것이다 (호. 2:18).
위는 주님의 왕국이 취급되고 있다; “활을, 검을, 전쟁을 부러뜨림”은 교리와 진리에 관하여 거기에서 전투가 없을 것이 의미되어 있다. 여호수아서에서:
여호수아가 자기 눈을 들어 쳐다보았다, 잘 보니 거기에 자기를 마주하여 사람이 서있었다, 그리고 빼든 그의 검이 그의 손에 (있었다); 그리고 그가 여호수아에게 말했다, 나는 여호 와의 군대의 제 1 인 자이다; 그리고 여호수아는 그의 얼굴을 땅 쪽으로 대었다
(여. 5:13, 14).
위는 여호수아가 이스라엘의 아들들과 더불어 가나안의 토지에 들어갔을 때 있었던 사건이다. 이를 수단으로 신실한 자가 주님의 왕국 안으로 입장된다는 것이 뜻하여진다. 교회 속에 있는 전투하는 진리가 “자기 손에 빼든 검을 쥐고 있는 여호와의 군대 사령관”이다.
그러나 “작은 검” 또는 “칼”에 의해서는 신앙의 진리가 의미된다는 것은 칼이 제물을 바칠 때 사용하는 것 말고도 할례를 실시할 때도 사용된다는 점에서도 더 알게 될는지 모른다. 할례에서 사용된 것은 돌로부터 였는데, 그래서 “단단한 돌로 만든 작은 검들”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여호수아서에서: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말했다, 단단한 돌로 작은 검을 만들어라, 그리고 이스라엘의 아 들들에게 다시 두 번째 할례를 베풀어라. 그래서 여호수아는 자기에게 단단한 돌로 작은 검들을 만들었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아들들에게 포피의 언덕에서 할례를 베풀었다
(여. 5:2, 3).
할례가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으로부터 순수해짐에 대한 표현이다는 것은 이미 살핀 바 있다; 그리고 이 순수해짐은 신앙의 진리들에 의해 결과된다는 것, 그러므로 단단한 돌의 작은 검이 할례에서 사용되었다.
2. “검”이 진리의 황폐해짐을 의미하는 것에 대하여는 아래 구절들로부터 분명해진다. 이사야서에서:
이 두 가지 것들이 네게 닥쳤다; 누가 너에게 한탄할 것이냐? 황무함과 황폐함, 그리고 기 근과 검; 누가 너를 위로할 것이냐? 네 아들들은 무력해져 있다, 그들은 모든 거리들의 머 리에 누워 있다 (이. 51:19, 20).
“기근”은 선의 황폐함을 표시한다; 그리고 “검”은 진리의 황폐함을 표시한다; “모든 거리들의 머리에 눕는 것”은 모든 진리를 박탈하는 것이다. 이사야서에서:
나는 검에 너희 숫자를 세게 할 것이다, 그리고 너희 모두는 살육되어 땅에 엎드려져 있을 것이다; 그 이유는 내가 불렀다, 그리고 너는 대답하지 않았다; 나는 이야기했다, 그리고 너희는 듣지 않았다 (이. 65:12).
이사야서에서:
불과 검으로 여호와께서는 모든 육체를 심판하실 것이다, 그리고 여호와께 죽은 자는 많을 것이다 (이. 66:16).
“여호와께 죽은 자”는 황폐된 이들을 표시한다. 예레미야서에서:
약탈자들이 광야 모든 언덕 쪽에 와있다, 그 이유는 여호와의 검이 토지의 이쪽으로부터 저쪽까지를 삼켰기 때문이다; 어느 육체도 평화를 가지고 있지 않다; 그들은 밀을 뿌렸지만 거두는 것은 가시일 뿐이다 (예. 12:12, 13).
“여호와의 검”은 진리의 황폐함을 분명하게 표시한다. 예레미야서에서:
그들은 여호와를 향하여 거짓말을 했다, 그리고 말했다, 그는 계시지 않다, (고로) 해악이 우리에게 닥치지 않을 것이다, 우리에게는 검도, 기근도 (닥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예 언자는 바람이 되어갈 것이다, 그리고 말씀이 그들 안에 있지 않다 (예. 5:12, 13).
예레미야서에서:
그들이 태워바치는 제물과 식사 제물을 바칠 때, 나는 그것들을 열납하지 않을 것이다; 그 이유가 나는 그들을 검으로, 그리고 기근으로, 그리고 염병으로 사를 것이다. 그리고 나는 말했다, 아, 주 여호비여, 보시옵소서, 예언자가 그들에게 말하기를, 너희는 검을 보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너희는 기근을 가지지 않을 것이다 (예. 14:12, 13).
예레미야서에서:
검과 기근과 염병 때문에 도성은 도성에 맞서 싸우는 갈대아인들의 손에 주어졌다 (예. 32:24, 36).
예레미야서에서:
나는 검, 기근, 염병을 그들 사이에 보낼 것이다. 그들이 내가 그들에게, 그들의 조상에게 준 토지로부터 멸절할 때까지 이다 (예. 24:10).
이 구절에서 “검, 기근, 염병”에 의해 황폐됨이 묘사되고 있다; “검”에 의해 진리의 황폐됨이, “기근”에 의해 선의 황폐됨이 묘사된다, 그리고 “염병”에 의해서는 멸절될 때까지 피폐되어짐이다. 에스겔서에서:
사람의 아들아, 날카로운 검을 가져오라, 이발사의 면도날을 네게로 가져와서 그것이 네 머 리와 네 턱을 지나가게 하라; 그리고 너는 저울로 달아 그것들을 나누어라, 삼분의 일 부분 을 너는 도성의 한 가운데에서 불로 태울 것이다; 삼분의 일 부분을 너는 도성 주변에서 검으로 쳐라; 그리고 삼분의 일 부분은 바람에 흩날려라; 그리고 나는 그것 뒤를 따라 검을 뺄 것이다. 삼분의 일 부분은 염병으로 물들여질 것이다, 그리고 기근과 더불어 그것들은 너희 한 가운데에서 살라질 것이다; 그리고 삼분의 일 부분을 나는 모두 각각의 바람에 흩 날릴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것들 뒤를 따라가며 검을 뺄 것이다 (겔. 5:1, 2, 12, 17).
여기서 자연적 진리의 황폐함이 취급되어 묘사되고 있다. 에스겔서에서:
검이 밖에 있다, 그리고 염병과 기근은 안에 있다; 들판에 있는 자는 검에 의해 죽을 것이 다, 그리고 도성 안에 있는 자는 기근과 염병이 그를 삼킬 것이다 (겔. 7:15).
에스겔서에서:
이스라엘의 토지에 말하라, 고로 여호와께서 말하셨다, 잘 보라, 나는 네게 맞서 있다, 그리 고 내 검은 검집으로부터 빼어들고 있다, 그리고 너로부터 의로운 자와 사악한 자를 자를 것이다. 내가 너로부터 의로운 자와 사악한 자를 잘라야 할 것이기 때문에, 그러므로 내 검 은 그것의 검집으로부터 나가 더 이상 되돌아 오지 않을 것이다. 여호와의 말씀이 나에게 왔다, 말하시기를, 사람의 아들아, 예언하여 말하라, 고로 여호와께서 말하셨다, 검에게 말 하라, 검에게, 그것은 예리해졌고 마광되었다; 그것은 살육에 살육을 위해 날카로워져 있다; 그것은 번개 같기 위해 마광되었다. 사람의 아들아, 예언하여 말하라, 고로 주 여호비께서 암몬족의 아들들과 그들의 치욕거리를 두고 말하셨다; 그리고 너에게 말한다, 검이여, 검 이여, 살육을 위해 빼어내라, 그것은 번개이기 때문에 삼키려 마광되어 있다, 한편 그들은 너희에게 헛 것을 보게하고, 또 한편 그들은 너희에게 거짓 점을 쳐주고 있다
(겔. 21:3-5, 8-10, 28, 29).
위에서도 “검”이 황폐함을 의미하고 있다. 이는 내적 의미에 있는 세부사항들로부터서는 더 분명해진다.
에스겔서에서:
바벨의 왕이 자기 검들을 가지고 네 망루들을 부셔내렸다; 그의 말이 많은 관계로 그것들 의 먼지가 너를 덮을 것이다; 승마자와 바퀴와 병거의 시끄러움 때문에 너희 성벽이 흔들 릴 것이다; 그의 말들의 발굽을 가지고 그는 네 거리들을 짓밟을 것이다 (겔. 26: 9-11).
바벨이 무엇인지는 이미 살폈다; 그리고 그것이 황폐되는 것도 살폈다. 다윗서에서:
만일 그가 돌아서지 않으면, 하느님께서는 그분의 검을 (날카로워지게) 갈 것이다, 그분은 그분의 활을 구부리실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쏠 준비를 하실 것이다 (시. 7:12).
예레미야서에서:
나는 말했다, 아 주 여호비여 당신께서는 이 백성과 예루살렘을 확실히 속이셨습니다, 말하 기를, 너희는 평화를 가질 것이다; 그리고 검이 혼에게 조차 당도했습니다 (예. 4:10).
예레미야서에서:
너희는 이집트에서 선포하라, 그리고 그것을 믹돌에서 들려지게 하라, 너희를 나와 서게해 서 준비되게 하라, 그 이유가 검이 네 주변을 빙둘러 삼킬 것이기 때문이다 (예 46:14).
예레미야서에서:
검이 갈대아인들 위에 있다, 그리고 바벨의 주민들 위에, 그리고 그녀의 제 1 인 자들 위 에, 그리고 그녀의 현자들 위에 있다; 검이 그녀의 허풍선이 위에 있다, 그리고 그들은 어 리석어 있을 것이다; 검이 그녀의 용사들 위에 있다, 그리고 그들은 낙담해질 것이다; 검이 그녀의 말들 위에, 그녀의 병거들 위에, 그리고 그녀의 한 가운데 있는 혼합된 모든 무리들 위에 있다, 그리고 그들은 여인들 같이 되어갈 것이다; 검이 그녀의 보물들 위에 있을 것 이다, 그리고 그것들은 강탈당할 것이다; 가믐이 그녀의 물들 위에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물들은 말리워질 것이다 (예. 50:35-38).
“검”은 진리의 황폐케 함을 분명하게 표시한다, 그 이유가 “검이 현자들 위에, 허풍선이들 위에, 용사들 위에, 말들과 병거들과 보물들 위에 있다”는 것, 그리고 “가믐이 물들 위에, 그리고 그것들이 말라질 것이다”라고 말해지기 때문이다.
예레미야서에서:
우리가 이집트에게, 앗수르에게 빵을 배불리 먹고자하여 손을 내주었다. 종들이 우리를 지 배했었다, 그들의 손으로부터 우리를 해방할 자 아무도 없다; 우리는 목숨을 걸고 우리의 빵을 얻었다, 그 이유는 광야의 검 때문이다 (애. 5:6, 8, 9).
호세아서에서:
그는 이집트의 토지로 되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앗수르 그가 그의 왕일 것이다, 그 이유는 그들이 나에게 되돌아오기를 거절했기 때문이다, 검이 그의 도성들 위에 걸려 있다, 그리고 그의 빗장들을 사를 것이다, 그리고 그들을 삼킬터인데, 그들의 조언 때문이다.
(호. 11:5, 6).
아모스서에서:
나는 이집트에서의 방법같이 너희 사이에 염병을 보냈다, 나는 검으로 너희 젊은 이들을 살해했다, 너희 말들이 사로잡히게 했다 (암. 4:10).
“이집트(에서)의 방법같이”란 기억 속의 지식으로 신성한 것들을 추론할 때, 황폐케 되는 기억 속의 지식을 표시한다; “말들이 사로잡힘”은 본래의 직능을 이탈한 지적 능력을 표시한다.
3. 반대적 의미에서의 “검”은 전투하는 거짓을 의미하는데, 다윗서에서 알는지 모른다:
내 혼이 사자들 한 가운데 누워 있다, 사람들의 아들들이 불 안에 놓여 있다; 그들의 이빨 은 창과 화살이다, 그들의 혀는 날카로운 검이다 (시. 57:4).
다윗서에서:
보라 그들은 자기들의 입을 가지고 트림질을 한다, 검이 그들의 입술에 있다, 그런 이유가 누가 듣겠는가 (말하기) 때문이다 (시. 59:7).
이사야서에서:
너는 역겨운 가지마냥 네 무덤으로부터 내쫓겨났고, 살해된 자의 옷같이 검으로 밀어 젖 혀 (찢기웠고), 발 아래 짖밟힌 시체같이 구덩이의 돌 아래 내던져 있다 (이. 14:19).
위 구절은 루시퍼를 취급하고 있다. 예레미야서에서:
그들이 교정을 받지 않으니, 내가 너희 아들들을 친 것은 헛된 셈이다; 네 자신의 검이 파 괴하는 사자같이 네 예언자들을 삼켰다. 오 세대여, 너희는 여호와의 말씀을 보느냐?: 내 가 이스라엘에게 광야되어 왔었더냐? (예. 2:30, 31).
예레미야서에서:
들판으로 가지 마라, 그리고 길에서 걷지 마라, 그 이유가 적의 검이 있기 때문이다, 공포 가 사방에 있기 때문이다 (예. 6:25, 26).
예레미야서에서
격노의 포도주의 잔을 가져가라, 내가 너희에게 보낸 모든 나라들로 그것을 마시우게 하라; 그리고 그들은 마실 것이다, 그리고 비틀거릴 것이다, 그리고 내가 너희 사이에 보낸 검 때 문에 미칠 것이다… 너희는 마시라, 취하라, 그리고 토하고 엎드려지라, 그리고 검 때문에 더 이상 일어나지 말라 (예. 25:15, 16, 27).
예레미야서에서:
너희는 말 위로 가라; 그리고 너희는 병거를 사납게 휘몰아라; 용사들이 나가게 하라; 큰 방패를 다루는 구스와 붓, 그리고 활을 다루고 구부리는 루딤이여. 그 이유는 적들의 주 여 호비의 날, 복수의 날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검이 삼킬 것이다, 그리고 배불러질 것이다, 그 리고 그들의 피로 취할 것이기 때문이다 (예. 46:9, 10).
에스겔서에서:
그들은 네 옷을 벗길 것이다, 그리고 네 영화의 보석들을 가져갈 것이다, 그리고 너를 발가 벗겨 있게 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너에게 무리들을 데려올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너를 돌로 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검으로 밀쳐 던질 것이다 (겔. 16:39, 40).
위는 예루살렘의 역겨운 것들을 취급하고 있다. 스가랴서에서:
양떼를 떠난 무가치한 목자에게 화가 있다; 검이 그의 팔에, 그리고 그의 오른쪽 눈에 있을 것이다; 그의 팔이 깨긋히 말리울 것이다, 그리고 그의 오른쪽 눈은 지독하게 어두워 질 것이다 (슥. 11:17).
호세아서에서:
그들은 나를 향하여 악을 생각했다; 그들의 제 1 인 자들은 그들의 혀의 사나움 때문에 검 에 의해 쓰러질 것이다; 이것은 이집트의 토지에서 그들의 조롱거리 일 것이다
(호. 7:15, 16).
누가복음서에서:
토지에 큰 재난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 백성에게 화가 미칠 것이다; 그 이유는 그들이 검의 날에 쓰러질 것이고, 모든 나라들 사이에 포로로 끌려가기 때문이다; 그리고 결국 예 루살렘은 나라들에 의해 짓밟힐 것이다 (눅. 21:23, 24).
위는 시대의 종말을 두고 주님께서 이야기하신 것이다; 그리고 글자 의미에서, 유대인들은 흩어졌고, 예루살렘은 파괴되었다; 그러나 내적 의미에서, 교회의 마지막 상태이다. “검의 날에 쓰러짐”에 의해 더 이상 어떤 진리도 있지 않고 단지 거짓만 있는 것이 의미되고 있다; “모든 나라들”에 의해 모든 종류의 악들이 의미되고 , 이 악들 사이에 교인들은 포로로 끌려옴이 의미되어진다; “나라들”이 악들이다는 이미 살핀 바 있다; 또한 “예루살렘”이 교회이다는 것도 살핀 바 있다, 이것이 “짓밟히는” 것이다.
4. “검”이 거짓의 처벌을 의미하는 것은 이사야서로부터 분명해진다:
그 날에 여호와께서는 그분의 단단하고, 크고, 강한 검을 가지시고 긴 뱀 리워야단, 꾸불꾸 불한 뱀 리워야단을 방문하실 것이다, 그리고 바다에 있는 고래들을 죽이실 것이다
(이. 27:1).
위는 감각적인 것들과 기억 속의 지식들로부터 추론함에 의해 신앙의 비밀들 안으로 들어가는 이들을 취급하고 있다; “단단하고 크고 강한 검”은 거기로부터 있는 거짓의 처벌들을 표시한다.
위에서 우리는, 그들이 “검의 날에 주어진 바 되고 검에 의해 죽임을 당한다”
라고 읽고 있다, 때로는 남자와 여자가, 소년과 노인이, 수소와 가축떼가, 그리고 나귀가 죽임을 당하는 것도 읽게 되는데, 내적 의미에서 이는 거짓이 정죄되어 처벌됨이 의미된다. 이에 관련된 구절로는 여. 6:21; 8:24, 25; 10. 28, 30, 37, 39; 11. 10-12, 14; 13:22; 19:47; 사. 1:8, 25; 4:15, 16; 18:27; 20:37; 삼상. 15:8, 11; 왕하. 10:25, 이외 더 많은 구절이 있다. 그러므로 다른 신들을 예배하는 주민은 검으로 처부시고, 깡그리 파괴하라고, 그리고 불로 태워버리고, 그리고 돌더미로 영원히 있게 하라고 명령되었다 (신. 13:13, 15-17); “검”이 거짓의 처벌을 표시하고; 그리고 “불”은 악의 처벌을 표시한다. 발람이 가는 길을 막고 검을 빼어들고 있는 여호와의 천사(민. 22:31)는 발람이 몸담은 거짓에 저항하는 진리가 의미된 것이다; 같은 이유로 그는 검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민. 31:8).
순수한 의미에서 “검”은 전투하는 진리를, 반대 의미에서 전투하는 거짓을, 또한 진리의 황폐케 함, 그리고 거짓의 처벌이 의미되는 그 근원은 다른 삶에서의 표현들에 있다; 다른 삶에서의 경우, 누군가가 거짓임을 알면서도 그것을 이야기할 때, 그의 머리 위쪽에 작은 검들 같은 것이 즉각 내려와서 공포가 유발된다; 그리고 이것 외에, 전투하는 진리는 끝이 예리한 것들, 즉 검 같은 것에 의해 표현되어진다; 실로 선이 없는 진리는 이런 본성으로부터 있다. 그러나 선과 더불은 진리는 아름다움을 보이는 형체로 빙둘려 있다. 이 근원으로부터 “칼”, “창”, “작은 검”, “검”이 말씀에서 언급될 때, 천사들에게는 전투하는 진리가 암시되어진다.
그러나 “칼(knife)”의 언급이 말씀에서 많지 않은 이유는 “칼쟁이(knifer)”이라 불리는 악령들이 있기 때문이고, 그들 쪽에서 (보면) 칼이 걸려있는 것 같다; 그들은 이런 야수적 본성 때문에 그들은 칼로 모든 이의 목을 자르기를 원하고 있다. 그러므로 “칼”이 언급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 대신 “작은 검들” 또는 “검들”이 언급되는 경우가 많다. 이것들이 전투에서 흔히 사용되기에 그것들의 언급은 전쟁을 생각나게 하고, 전투하는 진리에 관한 생각을 떠올리게 해준다.
고대인들에게 작은 검, 작은 창, 그리고 칼이 진리를 의미한다는 것이 알려졌을 때, 많은 나라들에서 이 의미는 전통으로 내려갔던 바, 그들이 제물을 바칠 때, 피를 바칠 때, 자신들을 작은 검, 작은 창, 칼로 찌르거나 상처내는 것에 익숙해졌다. 이를 바알의 성직자들이 했던 모습을 말씀에서 읽어볼 수 있다:
바알의 성직자들이 큰 음성으로 외쳤다, 그리고 그들의 관습에 따라 검들과 작은 창으로 자신들을 자른다, 피가 분출하는 정도로까지 (잘랐다) (왕상. 18:28).
말씀에서 전쟁의 모든 무기는 영적 전투에 속하는 것들을 의미하고, 각 목록은 각 특수한 영적 전쟁에 관한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들은 그들 모두 함께 갔다. 이는 가능한한 하나가 됨(unition)을 의미하는데 설명은 필요치 않을 것 같다.

7절. 그리고 이삭은 그의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말했다. 그리고 그는 말했다, 나의 아버지여, 그리고 그는 말했다, 내 아들아 내가 여기 있다, 그리고 그는 말했다, 보십시오, 불과 나무는 있습니다, 그리고 태워바칠 어린 양은 어디에 있습니까?

이삭이 그의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말했다, 그리고 그는 말했다, 나의 아버지여, 그리고 그는 말했다, 내가 여기 있다, 내 아들아. 이는 사랑으로부터 주님께서 협의하심, 즉 신성한 진리가 신성한 선과 협의함을 의미한다. 이는 “이삭 아들”의 의미가 신성한 진리이다로부터; 그리고 “아브라함 아버지”의 의미는 신성한 선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에 관해 이제 취급되어진다; 그리고 이 대화들 안에 있는 애착이 두 인물 모두의 사랑으로부터 이다는 것에서도 알게 된다. 그러므로 이것은 주님이 그분의 아버지와 협의 하심이 분명해진다 이 대화들 안에는 인간의 지각력에 올 수 있는 것 보다 더 많은 비밀들이 놓여 있다는 것은 이 구절 안에 “그는(가) 말했다”가 네 번씩 발생되고 있다는 사실로부터도 분명해진다. 말씀에서 어떤 새로운 것이 시작할 때, “그리고 그는 말했다”라고 말하는 것이 통상적 방법이다. 또한 이 말들이 사랑의 단어들로부터 있다는 사실도 분명해진다; 그래서 (이 구절이 읽혀질 때) 가장 깊은 의미(사랑으로부터의 의미) 안에 있는 (천적 왕국의) 천적인 천사들이 들을 경우, 그들은 말씀에 있는 애착들로부터 빛을 내는 생각들을 자신들을 위해 만들어낸다, 이에 반해 (영적 왕국의) 영적인 천사들은 단어들이나 어떤 것들의 의미들로부터 그렇게 한다; 고로 “그가 말했다”고 하는 말들 안에는 사랑의 네 개의 구분된 시기와 애착들이 있다. 천적인 천사들은 이것을 인간의 납득력이나 인간이 지니는 어떤 단어로도 표현할 길 없는 것을 모양으로 만들어 낸다; 더구나 이 모양은 말로 형언할 수 없는 풍부함과 다양함 속에 있다. 이로부터 우리가 감지하는 또하나는 내적 의미에서의 말씀은 우리가 말씀을 읽을 때 별로 대단 할 것 같지 않은 대목들에서 조차 그 말들이 어떤 품질을 지닐 것인지에 대해서이다.

신성한 진리가 “아들”, 그리고 신성한 선은 “아버지”이다는 것은, “아들”이 진리이다로부터; 그리고 “아버지”는 선이다로부터 알려진다; 또한 진리의 임신과 출생은 선으로부터 이다에서도 알려진다. 진리는 선 외의 어떤 다른 근원으로부터 그것이 있어지고 공표될 수 없다. 이는 여러 번 말한 대목이다. “아들”이 여기서 신성한 진리이고, “아버지”는 신성한 선인 이유는 신성 본질이 (그분의) 인간과 합일, 그리고 인간 본질이 신성과 합일하심이 선이 진리와, 진리가 선과의 신성한 결혼이기 때문에서 이다; 그 이유가 여호와 또는 주님 안에는 무한한 것밖에 없기 때문이다; 무한하기에 그것은 어떤 생각을 수단으로 해도 납득되어질 수 없다. 오직 우리가 생각해볼 수 있는 것은, 모든 선과 진리의 있음과 공표됨이 있다는 것, 또는 선 자체와 진리 자체가 있다는 것 정도 뿐이다. 선 자체는 “아버지”, 그리고 진리 자체는 “아들”이다는 정도이다. 그러나 선과 진리의 신성한 결혼, 또는 진리와 선의 신성한 결혼이 있기에, 아버지는 아들 안에, 그리고 아들은 아버지 안에 있어 주님 자신께서 이를 가르치신다:
예수께서 필립에게 말하신다, 너는 내가 아버지 안에, 아버지는 내 안에 있다는 것을 믿지 못하느냐? 내가 아버지 안에, 아버지는 내 안에 있다는 것을 믿어라 (요. 14:19, 11).
그리고 다시 요한복음서에서:
예수께서 유대인들에게 말하셨다, 비록 너희가 나를 믿지 못할지라도 나의 일한 것은 믿어 라; 그러면 너희는 아버지는 내 안에, 그리고 나는 아버지 안에 있다는 것을 알고 믿을 런 지 모른다 (요. 10:36, 38).
그리고 다시:
나는 그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그 이유는 모든 나의 것이 당신의 것이고, 당신의 것은 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들 모두가 하나이기를, 마치 당신 아버지가 내 안에, 그리고 내가 당신 안에 있듯 하기를 (간구합니다) (요. 17:9, 10, 21).
그리고 다시:
지금 사람의 아들이 신성이 된다, 그리고 하느님은 그(사람의 아들) 안에서 신성되어 있으 시다; 만일 하느님이 그(사람의 아들) 안에서 신성되어 있다면, 하느님은 그분 자신 안에 서 그를 또한 신성으로 만드실 것이다. 아버지, 당신의 아들을 신성되게 하소서, 당신의 아 들이 당신을 신성되게 할지 모릅니다 (요. 13:31, 32; 17:1).
이로부터 우리는 주님 안에서 있는 신성과 인간의 합일의 본성을 보았을런지 모른다; 즉 이것은 서로적이고 교대적이며, 상호적이다; 이 합일은 신성한 결혼이라 불리운다, 이로부터 천국의 결혼이 내려오고, 이것이 천국들에 있는 주님의 왕국 자체이다. 고로 요한복음서에서 말해진다:
그 날에 너희는 내가 아버지 안에, 그리고 너희는 내 안에, 나는 너희 안에 있다는 것을 알 것이다 (요. 14:20).
그리고 다시:
나는 그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그들 모두가 하나되기를, 마치 당신 아버지가 내 안에, 그 리고 내가 당신 안에 있는 것 같이, 하여 그들 역시 우리 안에서, 내가 그들 안에서와 당신 이 내 안에서 하나이기를; 당신이 나를 사랑하신 그 사랑이 그들 안에 있기를, 그리고 내가 그들 안에 있기를 (기도합니다) (요. 17:21-23, 26).
이 천국의 결혼이 선과 진리, 그리고 진리와 선의 결혼이다는 것은 수차례 이미 말했다.
그리고 신성한 선은 신성한 진리 없이는 존재할 수 없고 공표될 수도 없기 때문에, 또는 신성한 진리는 신성한 선 없이 존재할 수 없고 공표될 수 없기 때문에, 고로 이것은 저것에, 저것은 이것에, 즉 서로 간에, 상호 간에 있기에, 명백한 또 하나는 신성한 결혼은 영원으로부터 있었다는 것이다; 즉 아들은 아버지 안에, 그리고 아버지는 아들 안에 있었다는 것, 주님 자신 요한복음서에서 가르치신다:
그리고 지금 오 아버지, 당신은 세상이 있었기 이전 내가 당신과 더불어 가졌던 영광을 가 지고 나를 당신 자신과 더불어 신성이 되게 하소서 (요. 17:5, 24).
그러나 영원으로부터 태어나셨던 신성한 인간이 시간 안에서 또한 태어나셨다; 그리고 시간 안에서 태어나졌고, 신성이 되신 그분이 영원으로부터 계셨던 신성한 인간과 똑같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자주 말하신 것은, 자기는 자기를 보낸 아버지에게로 간다는 것이다; 즉 그분은 아버지에게로 돌아간다는 말이다. 그리고 요한복음서에서:
시작에서 말씀이 있었다(“말씀”이 신성한 진리 자체이다), 그리고 말씀은 하느님과 더불어 있었다, 그리고 말씀은 하느님이었다; 똑같이 하느님과 더불어 시작에서 있었다. 모든 것들 이 그분에 의해 만들어졌다, 그리고 그분 없이 만들어져 있었던 모든 것은 만들어지지 않 았다. 그리고 말씀이 육체로 만들어졌다, 그리고 우리들 사이에서 거주했다, 그리고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다, 이 영광은 아버지의 독생자에 관한 것이고, 은총과 진리로 충만된 영광(이었다) (요. 1:1-3. 14, 또는 3:13; 6:62)..

그리고 그는 말했다, 보라, 불과 나무는 있습니다. 이는 사랑과 정의가 현재 있음을 의미한다. 이는 “불”의 의미가 사랑이다로부터; 그리고 태워바침을 위한 “장작”의 의미가 정의의 공적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태워바칠 어린 양(pecus)은 어디에 있습니까? 이는 신성시 될 인류 속의 그들은 어디에 있느냐?를 의미한다. 이는 제물의 표현, 특히 태워바칠 제물의 표현으로부터 분명해진다. 태워바침과 제물이 내적 예배의 표현이다는 것은 이미 말했다; 이 제물들이 양떼와 가축떼로부터 만들어진다는 것; 양떼로부터 만들어질 경우, 그것들은 어린 양들, 양, 숫염소들, 염소 새끼들이고, 가축떼로부터 일 경우, 그것들은 수소들, 거세한 어린 수소들, 또는 송아지들로부터 이다; 그리고 이것들이 다양한 천적인 것들과 영적인 것들을 의미한다는 것; 또한 이 제물들을 수단으로 신성시됨이 결과되어졌다. 이로부터 이삭의 질문, 즉 태워바칠 어린 양은 어디에 있습니까?가 의미하는 것이 신성시 될 인류 속의 그들은 어디에 있는가? 이다는 것을 알는지 모른다. 이것은 이어지는 아브라함 그의 아버지의 대답에서, 즉 “하느님께서 자신을 위해 태워바칠 어린 양을 보실 것이다”(8절)에서 더 분명하게 명백해진다; 이를 수단으로 신성한 인간이 신성시 될 이들을 공급할 것임이 의미되어진다. 이것이 또한 더 명백해지는 대목은 숫양이 그들의 뒤쪽에서 보여지고, 이 숫양은 덤불에 뿔이 걸려 붙잡힌 신세로 있는 사실, 이것이 태워바침을 위해 제공되었다는 사실 (13절)에서 이다. 이를 수단으로 인류로부터 주님의 영적 (왕국의) 교회 속에 있을 이들이 의미되었다, 그리고 같은 내용이 14-17절에 이어지는 대목에서 분명해진다.

8절. 그리고 아브라함은 말했다, 하느님께서 자신을 위해 태워바칠 어린 양을 보실 것이다. 내 아들아, 그리고 그들은 그들 모두 함께 더 갔다.

아브라함이 말했다, 하느님께서 태워바칠 어린 양을 보실 것이다. 이는 신성한 인간이 성화되어질 이들을 준비하실 것이다는 응답을 의미하는데, 이는 “자신을 위해 봄”의 의미가 하느님을 서술할 경우, 예견하고 준비하심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 이유가 “본다”의 대략적인 내적 의미는 이해하는 것이다; 더 내적 의미에서는 신앙을 가지는 것이다; 그러나 최고 의미에서는 예견하는 것과 준비하는 것이다; 그리고 “태워 바침을 위한 어린 양”의 의미가 성화되어질 인류로부터의 이들이다로부터도 알게 된다. 영적 (왕국의) 인간이 “태워바침을 위한 어린 양”에 의해 뜻해지는 것은 이어지는 구절로부터 분명해진다. 태워바침과 제물을 위한 짐승들은 다양한 것들을 의미한다: 어린 양은 이것을, 양은 저것을, 염소 새끼와 암염소, 숫양과 숫염소는 다른 것을; 마찬가지로 수소, 거세한 어린 수소, 그리고 송아지, 그리고 어린 (집)비둘기, 그리고 호도애도 각기 다른 것을 의미한다. 각 동물이 다른 사항을 의미하는 것은 각 절기에서와 어떤 종류가 며칠에 제물로 바쳐야하는 지를 일부러 표현해 놓은 상황만 가지고도 짐작이 되고 남는다; 즉 속죄제에서, 깨끗해짐, 취임식, 다른 특별한 때 등등이다. 이런 각각의 때에 아무런 의미가 없다면 굳이 자세하게 바치는 동물, 방법 등을 규정해놓을 리 만무하기 때문이다.
고대 교회, 그 후에 유대 교회에서 존재해왔던 예배의 외적인 것, 또는 모든 의식들은 주님을 표현했고, 따라서 특히 태워바침이나 제물들은 예배의 중요한 것들이었음은 분명하다. 이것들이 주님을 표현했기 때문에, 그것들은 동시에 인간과 더불은 주님의 것도, 즉 사랑으로부터인 천적인 것들과 신앙으로부터인 영적인 것들도 표현했다. 결과적으로 천적 수준이거나 영적 수준인 인간 자체, 그렇게 되어질 인간 자체도 표현했다. 그러므로 이 구절의 “어린 양”에 의해서는 영적 (왕국의) 인간, 즉 주님의 영적 (왕국의) 교회인이 의미되고 있다. “하느님께서 자신을 위해 태워바칠 어린 양을 보실 것이다, 내 아들아”에 의해서는 신성한 인간이 준비하실 것이다가 의미되는데, 이는 “하느님”이 보실 것이다에서 분명해진다. 이 장에서 같이 둘이 명명될 때, 즉 “여호와”가 “아버지”에 의해 똑같이 뜻해지고, “하느님”에 의해 “아들”과 똑같이 뜻해진다, 고로 여기서는 신성한 인간이다; 그리고 영적 인간이 취급되기 때문에 신성한 인간으로부터 구원되는 이들이 의미된다.

그리고 그들은 그들 모두 함께 더 갔다. 이는 하나가 됨이 가능한한 한층 더 밀착됨을 의미하는데, 이에 대한 별도의 설명은 생략해도 될 것 같다.

9절. 그리고 그들은 하느님께서 자기에게 말했던 곳으로 왔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거기에 제단을 건설했다, 그리고 장작을 질서있게 쌓았다. 그리고 그의 아들 이삭을 묶었다, 그리고 그를 제단의 장작 위에 놓았다.

그들은 하느님께서 그에게 말했던 장소에 왔다. 그 당시 신성한 진리로부터의 지각에 따른 상태를 의미한다. 이는 “장소”의 의미가 상태이다로부터; 그리고 “말하다”가 말씀의 역사적 부분에서는 지각하다를 의미함으로부터 알려진다. 여기서 “하느님이 말하다”는 신성한 진리로부터 지각함을 표시하는데, 그 이유는 “여호와”가 아닌 “하느님”이라 말해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거기에 제단을 건설했다. 이는 주님의 신성으로부터의 인간(Lord’s human Divine)을 준비함을 의미한다. 이는 “제단”과 “제단을 건설함”의 의미로부터 알게 된다. “제단들”은 일반적 측면에서 모든 예배를 의미했기에, 그것들은 주님의 신성한 인간을 의미했다, 그 이유는 주님의 신성한 인간이 모든 예배이고 모든 교리이기 때문이다; 아마 예배 자체와 교리 자체라고 말하는 것이 더 나을지 모른다; 제단들, 또는 태워바침과 제물을 계승한 성찬식으로부터도 이를 볼는지 모른다, 그리고 성찬식(성찬 예배)은 외적 예배에서 제일가는 예배인데, 그 이유는 주님의 신성한 인간이 거기서 (우리에게) 주어지기 때문이다. “제단을 건설하는” 것이 주님의 신성으로부터의 인간을 준비함이다는 것은 방금 위로부터 짐작되었을 것인 바, 설명은 생략한다. 시험의 마지막 등차를 수행함을 위해 주님의 신성으로부터의 인간을 마지막으로 준비함이 이 구절에서 취급되어지고 있다, 그리고 이것이 아브라함이 질서있게 장작을 쌓는 것, 이삭 그의 아들을 묶는 것, 그리고 그를 제단의 장작 위에 놓는 것에 의해 묘사되고 있다.

그리고 장작을 질서있게 쌓았다. 이는 신성으로부터의 인간(human Divine)에 인접되어졌던 정의를 의미한다. 이는 “태워바침의 장작”이 정의의 공적을 의미함으로부터; 그리고 “제단 위에 질서있게 쌓음”의 의미가 신성으로부터의 인간에 이 정의가 인접됨이다로부터 알려진다. 정의의 공적은 이것이 신성으로부터의 인간에 있을 때 인접되어진다, 그리고 진리로부터 신뢰가 있을 때 정의의 공적은 그분에 속해 있는다.

그리고 그의 아들 이삭을 묶었다. 이는 신성한 합리성이 진리 측면에서 시험의 마지막 수준을 막 수행하려는 찰나의 상태를 의미한다. 이는 “묶다”와 “이삭 그의 아들”의 의미로부터 분명해진다. “묶는” 것은 시험의 마지막 등차들을 수행함을 위한 상태를 입는 것이다는 것은 시험의 상태에 있는 이들이 사슬로 감긴 것, 옥조여 있는 것으로 밖에 딱히 표현할 방법이 없다는 사실로 미루어 알게 된다. “이삭 그의 아들”은 주님의 신성한 합리성이나 여기서는 진리 측면에서의 주님의 신성한 합리성인 것은 앞에서 말한 바 있다. 순수한 모든 합리성은 선과 진리로부터 존재한다. 선 측면에서의 주님의 신성한 합리성은 시험들에 노출될 수 없고 수행할 수도 없다; 그 이유가 시험을 유발하는 영 또는 악귀는 신성으로부터의 선에는 접근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시험들의 모든 공격 너머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묶인 신성으로부터의 (주님의) 진리 (Truth Divine)는 시험되어질 수 있는 것이었다; 그 이유가 오류들, 더 나아가 거짓들이 그것을 부수고 유혹하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신성으로부터의 진리에 관하여 어떤 생각이 만들어내질 수 있기 때문, 그러나 신성으로부터의 선에 관하여는 지각을 가진 이들, 즉 천적 천사들 외에는 어떤 생각도 만들어내질 수 없다. 주님이 세상에 오셨을 때, 신성으로부터의 진리는 더 이상 인정되지 않고 있었다, 그러므로 이 진리로부터 주님께서는 시험을 수행하시고 견뎌내셨다. 주님 안에 있는 신성으로부터의 진리가 “사람의 아들”이라 불리운다, 그러나 신성으로부터의 선은 “하느님의 아들”이라 불리운다. “사람의 아들” 측면에서 주님께서 (시험을) 견뎌내셨다고 여러 번 말하셨으나, “하느님의 아들” 측면에서는 그러했다고 말하신 적이 없다. 주님께서 사람의 아들, 또는 신성으로부터의 진리에 관해서 마태복음서에서 말하신다:
보라 우리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간다, 그리고 사람의 아들은 대 성직자들과 서기관들에 넘 겨질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그분을 유죄 판결을 할 것이다, 그리고 그분을 이방인들에게 조롱받고 채찍질 받고, 십자가에 못박게 내어줄 것이다 (마. 20:18, 19).
마태복음서에서:
예수께서 그분의 제자들에게 말하셨다, 보라 시간이 가까이 있다, 그리고 사람의 아들이 죄 인들의 수중에 넘겨질 것이다 (마. 26:45)
마가복음서에서: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사람의 아들은 많은 것들을 경험해야 한다는 것, 그리고 원로들, 그리 고 대 성직자들, 그리고 서기관들에게 거절당해질 것, 그리고 죽임을 받을 것, 그리고 삼 일 후에 다시 일어나실 것임을 가르치기 시작하셨다 (막.13:31).
마가복음서에서:
사람의 아들에 관해서 이렇게 쓰여 있다, 즉 그분은 많은 것들을 경험하실 것이다, 그리고 무시당하실 것이다. 그리고 사람의 아들은 인간의 손에 넘겨질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그분 을 죽일 것이다; 그러나 그분은 죽음을 당하셨을 때, 셋째 날에 다시 일어나실 것이다
(막. 9:12, 31).
마가복음서에서:
보라 우리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간다, 그리고 사람의 아들은 대 성직자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겨질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그분에게 사형 판결을 내릴 것이다, 그리고 그분을 이방인들 에게 넘길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그분을 조롱하고 그분에게 침을 뱉으며, 그리고 그분을 죽일 것이다, 그리고 셋째 날에 그분은 다시 일어나실 것이다 (막. 10:33, 34).
마가복음서에서:
시간이 와있다; 보라 사람의 아들은 죄인들의 손으로 배반당할 것이다 (막. 14:41).
누가복음서에서:
사람의 아들은 많은 것들을 경험해야만 한다, 그리고 원로들과 대 성직자들과 서기관들에 게 거절되어질 것이다, 그리고 죽여질 것이다, 그리고 셋째 날 다시 일어난다
(눅. 9:22, 44).
누가복음서에서:
우리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간다, 거기서 사람의 아들에 관하여 예언자에 의해 쓰여진 모든 것들이 완성될 것이다: 그분은 이방인들에게 넘겨질 것이다, 그리고 조롱당할 것이다, 치욕 적으로 간청될 것이다, 그리고 침뱉음을 당하고, 조롱하고 그분을 죽일 것이다, 그리고 셋 째 날 그분은 다시 일어나실 것이다 (눅. 18:31-33).
누가복음서에서:
천사가 여인들에게 말했다, 그분이 갈릴리에 계셨을 때 너희에게 이야기하신 것을 기억하 라, 말하시기를, 사람의 아들은 죄지은 인간들의 손 안으로 넘겨져야만 할 것이다, 그리고 십자가형을 받으실 것이다, 그리고 셋째 날 다시 일어나신다 (눅. 24:6, 7).
이 모든 구절들에서 “사람의 아들”에 의해 신성으로부터의 진리 측면에서의 주님이, 또는 내적 의미에 있는 말씀 측면에서의 주님이 뜻해지고 있다. 이것이 대 성직자들과 서기관들에 의해 거절되어졌고, 치욕적 탄원을 받고, 조롱되었고, 침뱉음을 당했고, 십자가형에 처해졌다는 것은 유대인들이 (성경) 글자에 따라 자신들에게 모든 것을 응용하고 사취했다는 사실로부터 분명해질는지 모른다. 그들은 말씀의 영적 의미에 관하여, 천국의 왕국에 관하여도 어떤 것도 기꺼이 알려하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메시아가 땅의 왕국들 위에 그들의 왕국을 일으키려고 장차 온다는 것은 믿고 있다. 오늘날도 이는 별 차이 없이 믿어지고 있다. 그러므로 분명한 바, 그들에 의해 거절되고, 치욕적 탄원을 당하고, 조롱받고, 십자가형을 받은 것은 신성으로부터의 진리였다는 것이다 우리가 신성으로부터의 진리라고 말하든 신성으로부터의 진리 측면의 주님이라 말하든 마찬가지이다; 그 이유가 주님은 진리 자체, 마치 주님이 말씀 자체이신 것과 같기 때문이다.
셋째 날 주님의 다시 일어나심 역시 신성으로부터의 진리, 또는 내적 의미로 있는 말씀, 고대 교회에 의해 이해되었었던 그대로의 말씀이 시대의 종말에서 소생된다는 것을 포함한다. 이것 역시 “셋째 날”이다; 이 사건에서 사람의 아들, 즉 신성으로부터의 진리는 나타날 것이다 (마. 24:30, 37, 39, 44; 막. 13:26; 눅. 17:22, 24-26, 30; 21:27, 36).
“사람의 아들”이 신성으로부터의 진리 측면의 주님이시다는 것은 아래 추가된 구절로부터 더 확인될 것이다. 마태복음서에서:
좋은 씨를 뿌리는 그분은 사람의 아들이고, 들판은 세상이다. 시대의 종말에 사람의 아들이 그분의 천사들을 보낼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그분의 왕국으로부터 불법적인 모든 것들을 그러모을 것이다 (마. 13:37, 41, 42).
위에서 “좋은 씨”는 진리이다; “세상”은 인간들이다; “씨를 뿌리는 그분”은 사람의 아들이다; 그리고 “불법적인 것들”은 거짓들이다. 요한복음서에서:
군중들이 말했다, 우리는 율법으로부터 그리스도는 영원히 산다고 들었었다; 그리고 사람의 아들이 들리워야 한다고 당신이 말함은 어찌된 것이냐? 누가 사람의 아들인가?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너희와 더불어 빛 자체가 있는 것은 잠시 뿐이다; 너희가 빛 자체를 가진 동안 걸어라, 하여 어둠이 너희를 덮치지 않게 하라; 그 이유가 어둠에서 걷는 자는 그가 어디로 가는지를 모르기 때문이다. 너희가 빛을 가지는 동안, 빛 자체를 믿어라, 하여 너희는 빛 자체의 아들이 되어갈지 모른다 (요. 12:34, 35).
위 구절에서, 그들이 사람의 아들이 누구인지 물었을 때, 예수께서는 진리인 빛 자체에 관해 대답하셨다, 그리고 그분이 그들이 믿어야 할 빛 자체 또는 진리이시다고 대답하신 것이다.
그러나 하느님의 아들, 또는 그분의 신성으로부터의 인간에 있는 선 측면에서의 주님은 시험받아질 수 없었다는 것은 이미 말했는데, 이것 또한 시험자에게 하신 주님의 대답으로부터 분명해진다, 복음서들에서:
시험자가 말했다, 만일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다면 네 자신을 아래로 던져라; 그 이유가 쓰여진 바, 그분은 그분의 천사들에게 당신에 관한 임무를 주실 것이다, 하여 당신의 발이 돌에 부딪치지 않도록 할 것이다. 예수께서 그에게 말하셨다, 쓰여진 바, 너는 주 네 하느 님을 시험치 말 것이다 (마. 4:6, 7; 눅. 4:9-12).

그리고 그를 제단의 장작 위에 놓았다. 이는 정의가 속해 있는 신성으로부터의 인간을 의미한다. 이는 “제단”의 의미가 주님의 신성한 인간임에서; 그리고 “태워바침의 장작”의 의미가 정의의 공적임에서 알려진다. 주님의 신성한 인간에 있는 신성으로부터의 진리가 시험들을 수행했고, 이것이 취급되었는데, 이것은 신성한 진리 자체가 아니다, 그 이유는 신성한 진리 자체도 모든 시험 너머에 있기 때문이다; 시험을 수행한 것은 합리적 진리, 즉 천사들이 가진 것과 같은 진리, 진리의 외관들 안에 존재하는 진리, 그리고 “사람의 아들”이라 불리우는 진리가 신성이 되기 이전 시험을 수행한 것이다. 그러나 주님의 신성이 된 신성한 인간 안에 있는 신성한 진리는 외관들 너머에 있다, 그것은 누구의 이해력에도 와지는 것이 가능치 않고, 인간의 어떤 납득력도 불가능하고, 천사의 것도 마찬가지이고, 고로 시험의 어떤 것도 공격이 가능치 않다. 이것은 주님으로부터 있는 빛으로 천국들 안에서 나타난다. 이 신성한 진리, 또는 신성이 된 사람의 아들에 관하여 요한복음서에서 이렇게 쓰여져 있다:
예수께서 말하셨다 지금 사람의 아들이 신성이 된다, 그리고 하느님이 그분 안에서 신성이 된다: 만일 하느님이 그분 안에서 신성이 된다면, 하느님 역시 그분 자신 안에서 그분을 신 성이 되게하실 것이다, 그리고 곧바로 그분을 신성이 되게 하실 것이다 (요.13:31, 32).
위 구절의 깊은 비밀로부터 뭔가 구분된 생각을 가졌을런지 모른다. 위에서 살폈듯,우리는 시험 받으실 수 있는 주님과 더불은 진리, 그래서 시험을 수행한 진리를 주님의 신성으로부터의 인간 안에 있는 신성으로부터의 진리라고 부르고 있다; 그러나 시험되어질 수 없었던 진리, 그래서 어떤 시험도 수행할 수 없었던 진리, 그 이유는 이 진리는 신성이 되었기 때문인데, 우리는 이를 주님의 신성한 인간 안에 있는 신성한 진리라고 부른다; 이 대목은 이미 많은 장소에서 간간이 주목해 왔었다.

10절. 그리고 아브라함은 그의 손을 내밀었다, 그리고 그를 죽이려고 칼을 집었다.

아브라함이 그의 손을 내밀었다. 이는 능력의 최대한도에서 까지의 시험을 의미하는데, 이는 시리즈로부터 분명해진다; 그 이유가 주님의 가장 비통하고 가장 깊은 시험들이 취급되기 때문이다. 앞 구절들은 시험을 용인하고 견뎌내시기 위해 신성으로부터의 인간을 준비하심을 취급했다; 여기서는 그 행동이 취급되고, 이것이 글자 의미에서, 즉 “아브라함은 그의 손을 내밀었다”에 의해 표현되어지고 있다. 이 능력이 “손”에 의해 의미된다; 여기서의 경우 능력의 최대한도인데, 그 이유는 행동에서 필요해지는 것이 아무 것도 없기 때문이다. 이 대목은 내적 의미에 따라 있다, 즉 주님의 신성이 그분의 인간을 가장 비통한 시험들로 인도하셨다. 그 이유는 “아브라함”에 의해 그분의 신성 측면에서의 주님이 뜻해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시험은 가능 능력의 최대한도까지에서 였다. 진리인즉, 주님께서는 자신 안으로 시험이 들어오게 용인하셨는데, 그 목적은 인간적인 모든 것을 시험을 극복함으로 몰아내고 신성만이 남아있게 하시기 위하여서였다.
주님께서 자신 안으로 시험들을 용인하신 것, 최대한도, 마지막까지, 이것이 십자가에서의 시험이었다는 것을 주님 자신의 말로부터 알는지 모른다. 마태복음서에서: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그분은 많은 것들을 경험해야 하고 죽임을 당할 것을 보여주기 시 작했다. 그 때 베드로가 그분을 붙잡았다, 그리고 그분을 비난하기 시작했다, 말하기를, 그 런 일은 당신으로부터 먼 것들이어야 합니다, 주여: 이것은 당신에게 있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분은 돌아 서셨다, 그리고 베드로에게 말하셨다, 내 뒤로 물러나라, 사탄아: 너는 나에게 화가 치밀게 하는 원인이다: 그 이유가 너는 하느님의 것들이 아닌 사람의 것들에 입맛을 다시기 때문이다 (마. 16:21-23).
그리고 요한복음서에서는 더 분명하다:
아무도 나로부터 내 목숨을 가져가지 못한다, 그러나 나는 그것을 나 자신 내려 놓는다. 나 는 그것을 내려 놓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나는 그것을 다시 가지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요. 10:18).
그리고 누가복음서에서:
그리스도는 이런 고통을 당하시고, 그분의 영광으로 들어가야 한다 하지 않더냐?
(눅. 24:26).

그리고 칼을 집었다. 이는 진리 측면에서를 의미한다. 이는 “칼”이 신앙의 진리이다로 분명해진다; 그리고 주님의 시험은 신성으로부터의 진리 측면이었다.

그의 아들을 죽이려고. 이는 인간으로부터서만 있었던 것은 무엇이든 죽여질 때까지를 의미한다. 이는 이 단어들의 내적 의미로부터 알게 된다; 그 이유가 그것들이 주님의 가장 비통하고 가장 깊은 시험들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 시험의 마지막이 십자가에서의 시험이었다. 이 시험에서도 인간적일 뿐인 것이 죽어졌음은 분명하다. 이 죽는 것의 표현을 위해 아브라함의 아들, 또는 이삭이 죽는 것으로 까지는 확장될 수 없었는데, 그 이유는 아들들을 제물로 바치는 것이 (여호와에게는) 역겨운 것이었기 때문이다. 하여 죽이려는 찰나까지만의 표현이 허용된 것이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이 그의 아들을 죽이기 위해 칼을 집어들었다”는 말에 의해 오로지 인간적인 것이 모두 죽어질 때까지가 의미된 것이다.
주님께서 세상에 오시리라는 것, 그리고 죽음을 허용하실 것이 태고 시대로부터 알려져 있었는데, 이는 그들에게서 아들들을 제물로 바치는 것이 유행했던 것, 이 바침으로 자기들은 하느님과 화해할 수 있고 깨끗해진다고 믿은 사실에서 감지 된다. 이 역겨운 관습에 그들은 자기들을 가장 중요한 종교적 의식 거행을 놓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하느님의 아들이 오시리라는 것, 이 아들이 제물이 된다는 것을 고대인들로부터 배웠기 때문이었는데, 이런 관습에 이스라엘의 아들들조차 기울었고, 아브라함 역시 그러했다; 모든 이는 자기가 신봉하는 어떤 것에서 시험되어진다 (우리 역시 이렇게 시험에 걸려든다. 역자 주). 야곱의 아들들의 마음이 기댄 신조가 무엇인지는 예언서들에서 분명해진다; 그러나 그들이 이 역겨운 관습에로 완전히 매진하지 않도록, 태워바침과 제물 바침이 허용된 것이다.

주님의 시험을 일반적 측면에서 주목해보면, 어떤 시험은 더 외적이고 어떤 시험은 더 내적이었다; 그리고 더 내적일수록, 더 비통했다. 가장 깊은 시험들이 복음서들에서 묘사되어 있다 (마. 26:37-39, 42, 44; 27: 46; 막. 14:33-36; 15:34; 눅. 22:42-44); 주님의 시험들에 관하여 앞에서 살폈던 것을 간추려 보자: 즉 주님께서는 먼저 선들과 진리들 같이 나타난 선들과 진리들로부터 먼저 다투셨다: 그분은 온 인류를 향한 신성한 사랑으로부터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이라는 악들과 다투셨다: 그분 만이 신성한 사랑으로부터 다투셨다: 모든 지옥들이 주님의 시랑에 맞서 싸웠다. 이 싸움의 원인은 온 인류를 구원하심 때문이다: 주님은 지상 모든 시험 중에서 가장 비통한 시험을 견뎌내셨다: 주님은 시험들과 승리하심들을 수단으로 그분 자신의 힘으로부터 정의가 되셨다: 시험들과 승리하심을 수단으로 그분의 인간 본질이 그분의 신성 본질에 합일함이 결과되었다: 선이든 악이든, 진리이든 거짓이든, 더 강한 것이 지배하기 위해 전투를 수행하는 것이 시험이다: 시험들 안에는 분노함들이 있고, 또 한편 많은 다양한 애정들도 있다: 시험들은 천적, 영적, 자연적 등차에서 있다: 시험에서 악귀와 악령들은 사랑에 속한 것들, 고로 인간의 생명 속의 것들을 맹공격한다: 시험들에서 결과되는 것: 시험은 육체의 것들이 종속되게 하는 목적을 위해 있다는 것: 거듭나는 인간에 있는 악들과 거짓들은 시험들을 통해 복종당해지는 것이지 그것 자체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시험에서의 전투에서 진리가 먼저 출전한다: 비록 자신들 안에 선들과 진리들이 있지 않다 할지라도 지식들로부터 획득한 선들과 진리들로부터 전투한다는 것: 악귀와 악령이 인간 안에 있는 악들과 거짓들을 선동한다는 것, 이로부터 시험이 온다: 시험 동안에 인간은 주님이 부재 중이신 듯 생각하나, 실상 주님은 그 사람에게 더 가까이 현존하신다: 인간은 자신 스스로 시험에서의 전투에서 결코 버텨낼 수 없다, 그 이유는 이 전투는 실상 모든 지옥들에 맞서 있는 셈이기 때문이다: 주님만이 인간 안에서 전투하신다; 시험들을 수단으로 악귀나 악령들은 인간 안에서 악을 행하고 거짓을 불어넣는 짓을 박탈당한다: 시험들은 양심을 가진 이들에게 닥치고, 지각을 가진 이들에게는 더 예리하게 닥쳐온다: 오늘날, 시험들은 드물게 존재한다, 그러나 시험의 자리에 걱정, 근심 불안 (anxiety)이 있고, 이것은 또 다른 특성으로부터 이고, 또 다른 근원으로터 이다: 영적으로 죽은 인간들은 시험들의 전투를 버텨낼 수 없다: 모든 시험들은 끝에 가서는 자포자기가 수반되어진다: 시험 후에는 파동(오르내림, fluctation)이 있다: 즉 선한 자는 시험을 수단으로 자기들에게는 악밖에 없다는 것, 모든 것들은 자비하심 속에 있다는 것을 배운다: 시험을 수단으로 선들은 진리들에 더 가까이 결합된다: 인간들은 만일 그가 시험에서 굴복(포기)한다면, 시험들을 수단으로 구원되지 않는다, 그리고 시험을 이겨낸 공로가 자기에게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면 이 또한 구원될 수 없다: 모든 시험에는 자유가 있다, 그리고 이 자유는 시험들로부터의 자유보다 더 강하다.

11절. 그리고 여호와의 천사가 그를 천국으로부터 불렀다, 그리고 말했다, 아브라함, 아브라함. 그리고 그는 말했다, 여기 제가 있나이다.

여호와의 천사가 그를 천국으로부터 불렀다. 이는 그 당시 신성 자체로부터의 위로(consolation)를 의미하는데, 이는 “천국으로부터 부름”이 위로하심이다로부터; 또한 앞뒤 문맥상으로부터 분명해진다; 또한 “여호와의 천사”의 의미로부터도 알게 된다. 천사가 말씀에서 언급될 경우, 그들에 의해 주님 안에 있는 어떤 것이 뜻하여진다, 그리고 어떤 주님의 속성이 뜻하여지는 지는 시리즈로부터 알려진다. 이에 관련한 구절로 주님께서 게세마네에서 최고로 비통한 시험을 견뎌내고 계실 당시인, 눅. 22:43을 읽어보자: 즉 “천국으로부터 그분에게 천사가 나타나서 힘을 돋구었다.” 이 두 구절 모두에서, “천국으로부터의 천사”는 내적 의미에서 그분 안에 있었던 신성을 뜻한다.

그리고 말했다, 아브라함, 아브라함, 그리고 그가 말했다, 여기 제가 있나이다. 이는 시험 후 합리성 속의 신성한 선 안에서 위로를 지각하심을 의미한다. 이는 “말하다”가 말씀의 역사적 부분에서는 지각하는 것을 의미함에서 알려진다. 이는 여러 번 설명했다. 여기서의 경우 합리성 속의 신성한 선 안에서 지각함인데, 그 이유는 합리성 속의 신성한 선, 또는 주님의 신성한 인간 속의 신성한 선이 아브라함에 의해 의미되기 때문이다. 합리성 속의 신성한 선 안에서 지각함이 무엇인지는 여하한 (인간의) 납득력에도 펼쳐 보일 수 없다. 그 이유가 펼쳐 보이기 전, 주님의 신성한 인간에 관한 생각이 많은 것들의 지식으로부터 만들어 내어져 있었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이 만들어 내어지기 이전, 설명에 속하는 모든 것들이 텅빈, 그리고 불명료한 상태로 추락하고, 그리하여 그 설명은 진리들을 뒤집거나 일치하지 않는 것들을 가져다놓고야 말기 때문이다. 이 구절에서 시험 후 주님의 첫 상태가 취급되는데, 이는 위로받으심의 상태이다; 이 구절 이후로부터 “하느님”이 말해지지 않고 “여호와”가 말해진다; 그 이유가 “하느님”이 명명될 경우, 이는 진리가 취급됨을 암시하나, “여호와”가 명명될 경우, 이는 선이 취급됨을 암시하고, 선으로부터 위로함이 온다. 시험 후 모든 위로받음은 선 안으로 은근히 주입되어진다, 그 이유가 선으로부터 모든 환희 (joy)가 있기 때문이다; 그 다음 선으로부터 진리 쪽으로 이 환희가 건너간다. 이 장의 사건, 또한 다른 장소에서 여호와가 명명될 때면 언제든지 아브라함에 의해 합리성 속의 신성한 선이 의미된다.

12절. 그리고 그는 말했다, 네 손을 소년 위에 내밀지 말라, 그리고 그에게 어떤 것도 행치 말라. 그 이유가 지금 나는 네가 하느님을 경외함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너는 네 아들, 네 유일한 것을 나로부터 보류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말했다, 네 손을 소년 위에 내밀지 말라. 이는 그분의 합리성에 속해 있는 신성으로부터의 진리(the Truth Divine)에는 더 이상 시험이 없음을 허가하심을 의미한다. 이는 “손을 내밈”이 능력의 최대한도에 이르기까지에서 시험이 있었음을 의미함에서 알게 되는 방금 앞에서 이미 설명했다; 그리고 “소년”, 즉 이삭의 의미가 신성으로부터의 진리 측면에서의 합리성, 이 안으로 시험들이 허가된다.

그리고 그에게 어떤 것도 행치 말라. 이것이 해방됨을 의미하는 것은 설명이 필요 없을 것이다; 그 이유가 그가 그에게 어떤 것도 행동하지 말라 라고 말해졌다는 것은 그가 자유해짐을 즉각 뜻하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지금 나는 네가 나를 경외하는 줄을 알았기 때문이다. 이는 신성한 사랑으로부터 신성이 되심(glorification)을 의미한다. 이는 “안다(know)”의 의미가 주님의 신성을 서술할 때, 이는 하나가 되어짐, 또는 같은 말로 신성이 되심밖에 더 다른 의미는 없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이것은 시험들을 수단으로 신성으로부터의 인간에 하나가 되어짐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느님을 경외하고 있음”, 또는 “하느님을 두려워함”이 여기서는 신성한 사랑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것이 진리 측면에서의 주님의 신성한 합리성을 서술하고 있기 때문에 여기서 “하느님을 두려워함”이라 말해지고 “여호와”가 등장하지 않고 있다; 그 이유가 진리가 취급될 때, “하느님”이, 선이 취급될 때, “여호와”가 등장하기 때문이다. 주님이 그분의 인간 본질을 그분의 신성 본질과 하나가 됨, 그리고 신성 본질이 인간 본질과 하나가 되심, 또는 같은 말로, 그분 자신을 신성이 되게 하심은 그분의 사랑을 수단으로 있어졌다. “하느님을 경외하고 있음”은 말씀이 내적 의미에서 이해되어질 때, 많은 구절들로부터 알았을는지 모른다. “하느님을 두려워함”이 예배를 의미하는데, 실로, 경외함으로부터 이든, 또는 신앙의 선으로부터 이든, 또는 사랑의 선으로부터 이든 예배를 의미한다; “하느님을 두려워함”으로부터의 예배는 거듭나지 않은 자였을 때, 신앙의 선으로부터의 예배는 영적 수준에서 거듭나질 때, 사랑의 선으로부터의 예배는 천적 수준에서 거듭나질 때가 취급될 경우이다.
“하느님을 두려워함”이 예배를 의미하는 것은 열왕기서에서 분명해진다:
이스라엘의 아들들이 다른 하느님들을 경외하고, 그 나라들의 규례에 따라 걸었다. 나라들 이 처음에는 여호와를 두려워하지 않은 채 사마리아 안으로 보냈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그들 사이에 사자들을 보냈다; 그리고 사마리아로부터 끌려간 성직자들 중의 하나가 와서 벧엘에 거주했다, 그리고 그들에게 어떻게 여호와를 경외해야 하는지를 가르쳤다. 여호와께 서 이스라엘의 아들들과 언약을 만드시고, 그들에게 명령하셨다, 너희는 다른 하느님을 두 려워하지 말라, 그것들에게 네 자신을 굽혀 절하지 말라,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그것들에 게 제물을 바치지 말라; 그러나 너희는 여호와를 두려워할 것이다, 그리고 네 자신을 그분 에게 굽혀 절할 것이다, 그리고 그분에게 제물을 바쳐라
(왕하. 17:7, 8, 24, 25, 28, 32, 33, 35-37, 41).
위에서 “경외하고 있음”이 예배하고 있음을 표시하고 있다. 이사야서에서:
이 백성은 그들의 입을 가지고 내게 가까이 와있고, 그들의 입술을 가지고 존경했고, 그들 의 심정은 나로부터 그 자체 멀리 옮기워져 있었고, 나에 대한 그들의 경외함은 인간의 명 령이 가르쳐왔었던 것이기 때문이다 (이. 29:13).
위에서 그들이 “나를 두려워함”은 일반적 측면에서 예배를 표시한다; 그 이유가 두려워함이 인간의 명령이었다고 말해지기 때문이다. 누가복음서에서:
도성 안에는 하느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인간을 중시하지도 않는 재판관이 있었다
(눅. 18:2).
“하느님을 경외하지 않음”이 그분을 예배하지 않음을 뜻하고 있다.
2. “하느님을 두려워함”이 거듭나지 않은 자가 취급될 경우, 두려워함으로부터 예배함을 의미하는 것은 아래 모세의 책으로부터 분명해진다:
법이 시내 산으로부터 선포되었을 때, 백성들은 모세에게 말했다, 당신이 우리에게 이야기 하라, 그리고 우리는 들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죽지 않도록 하느님이 우리에게 이야기하 게 하지 마시오. 그리고 모세는 백성에게 말했다, 하느님이 너희에게 입증하기 위해 오시어 진다, 그리고 그분을 두려워함이 너희 앞에 있을는지 모른다는 것, (그리하여) 너희가 죄짓 지 않도록 하시려는 것 (때문에 오시어지는 것이다) (출. 20:19, 20).
그리고 다시:
지금 왜 우리가 죽어야 합니까? 그 이유는 이 큰 불이 우리를 사르려하기 때문입니다; 만 일 우리가 여호와 우리 하느님의 음성을 더 이상 듣지 않는다면 우리는 죽어야 할 것입니 다. 당신에게 가까이 가서 여호와 우리의 하느님이 말하시는 모든 것을 듣겠습니다; 그리고 당신은 우리에게 여호와 우리의 하느님이 우리에게 말하시는 모두를 이야기 해주시오; 그 리고 우리는 그것을 들을 것이고, 그것을 행할 것입니다. 그리고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하 셨다, 나를 두려워하고, 내 명령들을 언제나 지키는 심정을 가지도록 누가 너희에게 주었는 가? (신. 5:25, 27-29).
위에서 너희가 죄짓지 않게 너희 앞에 하느님을 두려워함(을 놓는 것), 그리고 나를 두려워하고, 내 명령들을 지키는 것은 그것들에 관련하여 두려움으로부터 예배함을 의미한다. 그 이유는 이와 같은 수준이 그들의 품질이었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내적 예배 안에 있지 않고 외적 예배에 있는 이들은 법의 준수와 두려움을 수단으로 순종하는 쪽으로 운전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운전된다 해도 그들이 내적 예배로는 와지지 않는다. 내적 예배에 있을 수 있는 조건은 생활의 선 안에 있는 것, 그리고 내적인 것을 알고 그것을 믿는 것이다. 신명기서에서:
만일 너희가 이 책 안에 쓰여있는 이 법의 모든 말들을 준수해서, 이 영광스럽고 두려워해 야 할 이름, 여호와 너희 하느님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여호와께서는 너희 재앙들을 경이 롭게 만드실 것이고, 그리고 네 후손들의 재앙들도 크고 확실해지게 할 것이고, 심한 질병 들과 확실한 (재앙)으로 만드실 것이다, 그리고 그분은 너희가 두려워한 이집트의 모든 질 병을 다시 네게로 가져올 것이다, 이것이 너희에게 꽉 달라붙어 있을 것이다
(신. 28:58-60).
위에서 “영광스럽고 두려운 여호와의 이름을 두려워함”은 두려움으로부터 예배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특성을 지닌 이들은 저주되어야 하는 모든 악들조차도 그들은 여호와의 탓으로 돌려버리는 속성을 지니고 있다. 예레미야서에서:
네 자신의 사악함이 너를 바로잡을 것이고, 네 퇴보함이 너를 징계할 것이다; 네가 여호와 네 하느님을 저버리고, 나를 두려워함이 네 안에 있지 않음이 악한 것이고 쓰라린 것임을 알고 보아라 (예. 2:19).
누가복음서에서: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육체를 죽이는 그들을 두려워 말라, 그러나 육체가 죽은 후 그들은 더 이상 할 수 없다; 그러나 나는 너희가 두려워 할 자가 누구인지 경고한다; 죽은 후 지옥 으로 던지는 그분을 두려워하라; 그렇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분을 두려워하라
(눅. 12:4, 5; 마. 10:28).
위에서도 “하느님을 경외함”은 어떤 두려움으로부터 예배함을 포함한다, 그 이유는 두려움이 순종하도록 내몰기 때문이다.
3. 영적 수준으로 거듭나는 이들이 취급될 경우, “하느님을 두려워함” 또는 “여호와”는 신앙의 선으로부터 예배함을 의미한다는 것은 아래 구절로부터 분명해진다. 모세의 책에서:
왕은 자신을 위해 레위 지파의 성직자 앞에서 책에 있는 이 법의 사본을 쓸 것이다, 그리 고 그것을 자기와 더불어 있게 하고, 그는 일생 내내 그 안에 있는 것을 읽을 것이다, 그리 하여 그가 여호와 자기 하느님을 두려워하고, 이 법의 모든 말들을, 이 규례들을 행하여 지 킬 것이다 (신. 17:18, 19).
내적 의미에서 “왕”은 신앙의 진리를 표시한다; 그 이유가 왕권이 주님의 영적 왕국을 표현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여호와 자기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것은 신앙의 진리로부터 예배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선행의 선으로부터 분리될 수 없기 때문에, “법과 규례를 지켜 행한다”로 묘사되고 있다. 사무엘서에서:
보라 여호와께서 너희 위에 왕을 세웠다. 만일 너희가 여호와를 두려워하고 그분을 섬긴다 면, 그리고 그분의 음성에 귀기울인다면, 너희와 너희 위에 세운 왕은 여호와 너희 하느님 의 추종자일 것이다 (삼상. 12:13, 14).
위 구절 역시 내적 의미에서 “여호와를 두려워함”은 신앙의 선과 진리로부터 예배함을 표시한다, 그 이유는 왕 또는 왕권이 취급되기 때문에서이다.
여호수아서에서:
이제는 여호와를 경외하라, 그리고 성실과 진정으로 그분을 섬겨라, 그리고 너희 조상들이 섬겼던 신들을 멀리 내어버려라 (여. 24: 14).
위 구절 역시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선과 진리로부터 예배하는 것을 표시한다, 이것은 영적 인간으로부터 있다; 그 이유가 “성실”은 신앙의 선을, “진정”은 신앙의 진리를 서술하기 때문이다. 예레미야서에서:
그들은 내 백성일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들의 하느님일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들에게 하 나의 심정, 그리고 하나의 길을 줄 것인데, 그들은 영원히 나를 경외할는지 모른다, 그 이 유가 이것이 그들을 위해 선이고, 그들 뒤의 자녀에게도 선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그 들과 영원히 이어지는 언약을 맺어 나는 그들에게 선을 행함에서 그들로부터 돌아서는 일 이 없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들의 심정에 나를 경외함을 놓아둘 것이다, 하여 그들은 나 로부터 떠나지 않을 것이다 (예. 32:38-40).
위에서 “하느님을 경외함”이 신앙의 선과 진리로부터 예배함이다는 것은 시리즈로부터, 그리고 “백성”, “하느님”이라는 단어의 사용으로부터 알게 된다. 진리 측면에 있는 이들이 “백성”이라 불리는데 이사야서에서:
강한 백성이 당신을 존경할 것입니다. 강력한 나라의 도성이 당신을 경외할 것입니다
(이. 25:3).
위에서 “하느님을 경외함”은 영적 진리로부터 예배함을 표시한다, 그 이유는 “백성”과 “도성”이 서술되기 때문이다. “도성”이 교리적 측면에서 있는 진리이다.
다윗서에서:
어떤 인간이 여호와를 경외하는가? 그분은 그분이 선택할 자에게 길을 가르치신다
(시. 25:12).
위에서 “여호와를 경외하는 인간”은 그분을 예배하는 자를 표시한다; 그리고 이것이 영적 인간에 관해 말해지고 있다는 것은 “그분이 길을 가르치실 그 인간”이라고 말해진 것에서 분명해진다. “길”이 진리인데, 이와 비슷한 의미를 지닌 다른 구절에서: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분의 길들에서 걷는 자는 복되다 (시. 128:1).
시편서에서:
여호와를 경외하는 그들이 그분을 영광되게 한다; 야곱의 모든 씨가 그분을 영광되게 할 것이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모든 씨가 그분을 경외함 안에서 서있을 것이다 (시. 22:23).
위에서 “그분을 경외함 안에서 서있다”란 신앙의 진리로부터 예배하는 것을 뜻한다; 그 이유가 “이스라엘의 씨”가 교회의 영적인 것, 또는 신앙의 선과 진리이기 때문이다. 모세의 책에서:
지금 이스라엘아, 여호와 네 하느님이 무엇을 요구하느냐? 여호와 네 하느님을 경외하는 것, 그분의 길들에서 걷는 것, 그리고 그분을 사랑하는 것, 그리고 여호와 네 하느님을 모 든 심정으로, 그리고 네 모든 혼을 가지고 섬기는 것, 여호와의 명령들을, 그리고 그분의 규례들을 지키는 것이다 (신. 10:12, 13).
위는 영적 인간, 즉 “이스라엘”이 “하느님을 경외하는 것”이 묘사되고 있다; 즉 그것은 여호와의 길들에서 걷는 것, 그분을 사랑하는 것, 그분을 섬기는 것, 그리고 그분의 가르침들과 그분의 규례들을 지키는 것이다. 계시록에서:
나는 천국의 한 가운데에서 날고 있는 천사, 영원히 이어지는 복음을 가진 천사를 보았는 데, 큰 음성으로 말하기를, 하느님을 경외하라, 그리고 그분에게 영광을 드려라, 그 이유는 그분의 심판의 시간이 와있기 때문이다 (계. 14:6, 7).
위에서 “하느님을 경외하는 것”은 신앙의 선과 진리로부터의 거룩한 예배를 표시한다. 누가복음서에서:
예수께서 중풍병을 앓는 자에게 말하셨다, 일어나라, 네 침상을 짊어져라, 그리고 네 집으 로 가라; 그리고 놀람이 그들 모두를 휘감았다; 그리고 그들은 하느님을 찬양했다, 그리고 그들에게는 경외함이 가득했다 (눅. 5:24-26).
위의 “경외함”은 거룩한 경외함을 표시한다, 다시 말해 신앙의 진리를 수단으로 사랑의 선으로 진입하는 이들이 지니는 거룩한 경외함을 표시한다.
4. “하느님을 경외하는 것”, 또는 “여호와”는 천적 수준으로 거듭나는 이들이 취급될 때 사랑의 선으로부터 예배함을 의미한다. 말라기서에서:
내 언약은 레위인과 더불어 생명들과 평화로부터 였다; 그리고 나는 그들에게 그가 경외하 는 것을, 그가 나를 두려워하는 것을, 그리고 내 이름을 위하여 그가 부셔진 것을 주었다. 진리의 법이 그의 입 안에 있었고, 그리고 비정의가 그의 입술 안에 있지 않았다; 그는 평 화와 직바름 안에서 나와 더불어 걸었다 (말. 2:5, 6).
위 구절은 주님을 취급하고 있다, “레위인”은 내적 의미에서 주님이시다; “레위인”은 성직을 의미하고, 그리고 사랑을 의미한다; “경외함”은 신성한 사랑의 선을 표시한다; “진리의 법”은 진리를, “평화와 직바름”은 선과 진리 모두를 표시한다.
이사야서에서:
이새의 지주로부터 싹이 돋을 것이다, 그리고 가지가 그의 뿌리들로부터 자랄 것이다; 그리 고 여호와의 영이 그분 위에서 안주할 것이다, 지혜와 이해력의 영이다, 조언과 힘의 영이 다, 지식의 영이다, 그리고 여호와를 경외함의 영이다, 그리고 여호와를 경외함 안에서 그 분의 향기의 영이다 (이. 11:1-3).
다윗서에서:
여호와의 교훈들은 옳고 심정을 기뻐환호하게 한다; 여호와의 명령들은 순수하고, 눈을 밝 게 한다; 여호와를 경외함은 깨끗하고 영원히 서있다; 여호와의 판단들은 진리이다, 다함께 올바름을 만들었다 (시. 19:8, 9).
위에서 “여호와를 경외함”이 깨끗하다란 사랑을 표시한다; 그리고 “여호와의 판단들이 진리이다”란 신앙을 표시한다; 그리고 이것들이 다함께 올바름을 만들었다란 진리가 선이 될 때, 또는 신앙이 선행이 될 때이다.
다윗서에서:
보라 여호와의 눈이 그분을 경외하는 자들 위에, 그분의 자비를 기다리는 자들 위에 있다 (시. 33:18).
다윗서에서:
여호와는 말(horse)의 힘셈 안에서 즐거워하시지 않는다, 그분은 인간의 다리(leg)들 안에 서 기쁨을 취하지 않으신다. 여호와는 그분을 경외하는 자들, 그분의 자비를 기다리는 이들 안에서 기쁨을 취하신다 (시. 147:10, 11).
“말의 힘셈”은 진리를 생각하는 인간 자신의 능력을 표시한다; “인간의 다리들”은 선을 행하는 인간 자신의 능력을 표시한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는 진리를 사랑함으로부터 그분을 예배하는 이들을 표시한다; 그리고 “그분의 자비를 기다리는 자”는 선을 사랑함으로부터 예배하는 이들을 표시한다. 예언서에서 선이 말해지는 곳에서는 진리 역시 말해진다; 그리고 진리가 말해지는 곳에서 선도 말해진다. 그 이유는 선과 진리의 천국의 결혼은 모든 것 안에 있기 때문이다.
다윗서에서: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의 가문을 복되게 하실 것이다, 그분은 아론의 가문을 복있게 하실 것이다, 그분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들을 그가 큰 자이든 작은 자이든 복되게 하실 것이 다 (시. 115:12, 13).
위에서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들” 가운데 신앙의 선으로부터 예배하는 자들이 “이스라엘의 가문”이고, 사랑의 선으로부터 예배하는 자들이 “아론의 가문”이다; 그들은 천국의 결혼 때문에 둘 다가 함께 명명되고 있는데, 앞의 인용 구절과 같다. 물론 말씀의 모든 것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이사야서에서:
네 시대들의 진리가 구원, 지혜, 그리고 지식의 강함일 것이다; 여호와를 경외함 자체가 보 물이다 (이. 33:6).
위에서 “지혜와 지식”은 진리와 결합한 신앙의 선을 표시한다; 그리고 “여호와를 경외함”은 사랑의 선이다. 이사야서에서: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분의 종의 음성에 귀기울이는 자가 누구이냐? (이. 50:10).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는 사랑으로부터 예배하는 자를 표시한다; “그분의 종의 음성에 귀기울이는 자”는 신앙으로부터 예배하는 자를 표시한다. 이것이 저것 속에 있을 때, 천국의 결혼이 있다.
이상의 말씀으로부터 추가 인용한 구절들에서 분명해지는 바, “하느님을 경외함”은 그것이 두려움으로부터 이든, 신앙의 선으로부터 이든, 또는 사랑의 선으로부터 이든 예배이다는 것이다. 그러나 예배 안에서 두려움으로부터 더 있을수록, 그만큼 신앙 속에 덜 있게 되고, 사랑 속에는 더욱 덜 있게 된다; 한편 신앙 속에 있다면, 더욱이 사랑 속에 있다면, 두려움 속에는 더욱 덜 있게 된다. 실로 모든 예배 안에는 경외함이 있다, 그러나 각기 그 나타남이나 조건이 다 다르다, 그리고 이것은 거룩한 경외함이다. 그러나 거룩한 경외함은 지옥을 두려워함, 지옥에 떨어짐을 두려워함에서 라기보다는 주님과 이웃을 향하여 있는 생각함이나 행동함, 고로 사랑의 선과 신앙의 진리에서의 경우이다. 그러나 (거룩한 두려움의 반대의 경우로서) 혐오함(aversion)도 있는데, 이것은 사랑의 거룩함과 신앙의 거룩함의 이쪽 경계선 너머에 있다; 그 이유는 신앙의 선 안에 있는 이들은 지옥과 지옥에 떨어짐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지 않기 때문, 더욱이 사랑의 선 안에, 즉 주님을 사랑함에 있는 이들의 경우는 더욱 그러하다.
5. 그러므로 “두려움”이 신뢰 못하고 있는 것, 또는 신앙과 사랑을 가지지 않은 것도 의미한다. 이사야서에서:
그런고로 네 창조자가 말한다, 오 야곱아, 그리고 나를 만들어낸 분, 오 이스라엘아, 두려워 말라, 그 이유가 내가 너를 되찾았기 때문이다; 나는 네 이름을 수단으로 너를 불렀다, 너는 나의 것이다 (이. 43:1, 5; 44:8).
누가복음서에서:
그분이 우리의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맹세한 맹세, 즉 그분은 우리를 수여하시리라는 것, 우 리의 적들의 손으로부터 구해내져 우리가 두려움 없이, 그분 앞에서 거룩함과 정의함 안에 서 그분을 섬기도록 하신다는 것 (눅. 1:73, 74).
누가복음서에서:
두려워 말라, 작은 양떼들아, 그 이유가 네게 왕국을 주시는 것이 네 아버지의 선한 기쁨이 기 때문이다 (눅. 12:32).
마가복음서에서:
예수께서 회당의 통치자에게 말했다, 두려워 말라, 오직 믿으라 (막. 5:36; 눅. 8:49, 50).
마가복음서에서:
예수께서 말하셨다, 왜 너희는 그렇게 두려워하느냐? 이렇게 너희가 신앙을 가지지 않고 있다는 것이냐? (막. 4;40).
누가복음서에서:
네 머리의 털들이 모두 세어졌다; 그러므로 두려워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들보다 더 가치 가 있다 (눅. 12:7).
위 구절에서 “두려워하는 것”은 신뢰 못하고 있는 것, 신앙과 사랑을 가지지 않은 것이다.

그리고 네 아들, 네 유일한 것을 나로부터 보류하지 않았다. 이는 시험의 최대한도를 수단으로 주님의 인간이 그분의 신성과 하나로 되셨음을 의미한다. 이는 “네 아들”, 즉 이삭이 신성한 합리성을, 또는 신성한 인간을 의미함으로부터 분명해진다. 그 이유가 신성한 인간의 출발점이 합리성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유일한 것”이라 불리우는데, 그 이유는 (아버지로부터 낳아진) 독생자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로부터 보류하지 않음”은 그것이 하나로 되게 하는 원인, 즉 신성 자체에 하나 되는 원인이다. 하나가 됨은 시험의 최대한도에서를 수단으로 결과되어졌음은 지금까지 살핀 구절들로부터 분명해진다.

13절. 그리고 아브라함은 그의 눈을 들었다, 그리고 바라보았다, 그리고 뒤쪽에 그의 뿔들로 인해 덤불에 잡혀 있는 숫양을 보았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갔다, 그리고 숫양을 잡았다, 그리고 그의 아들 대신 태워바침을 위해 그를(him) 바쳤다.

아브라함이 그의 눈을 들었다, 그리고 보았다. 이는 주님의 생각과 신성으로부터의 정신적으로 전망하심(view)을 의미한다. 이는 앞에서 살핀 바 있다. 신성으로부터 생각하심과 정신적으로 전망하심은 신성한 섭리와 더불어, 영원히 거행될 것들의 각각 그리고 모두에 관하여를 의미한다.

그리고 숫양을 바라보았다. 이는 주님의 왕국에 있는 인류로부터의 영적 (왕국의) 인간을 의미한다. 이는 뒤이어 설명하는 “숫양”의 의미로부터 분명해진다. 표현 교회인 유대와 이스라엘 교회에 있는 태워바침과 제물이 주님의 신성한 인간을 의미했다는 것은 교회 내에 알려져 있다; 그러나 태워 바침과 제물에 사용되는 동물들이 의미하는 것은 어린 양의 경우는 이것, 또는 양의 경우는 저것, 또는 암염소, 그리고 염소 새끼와 숫양, 숫염소, 그리고 수소, 어린 수소, 송아지, 집비둘기와 호도애, 기타 다른 동물도 각기 다르다; 식사제물과 제주 역시 마찬가지이다. 일반적으로 그것들은 주님에 속하는 신성한 천적, 영적, 자연적 (평면의) 것들을 의미했다; 그리고 이어서 그것들은 그분의 왕국 안에서 그분으로부터 있는 천적, 영적, 자연적 (평면의) 것들도 의미했다, 결과적으로 주님의 왕국인 모두 각각의 인간에서도 마찬가지로 의미했다; 이는 태워바침과 제물을 계승한 성찬식에서도 보여질는지 모른다. 성찬식에서의 빵과 포도주는 주님의 신성한 인간을 의미한다; 빵은 그분의 신성한 천적 평면을, 포도주는 그분의 신성한 영적 평면을 의미한다; 결과적으로 이것들은 보편적 인류를 향한 그분의 사랑을 의미하고, 또 한편 주님을 향한 인류의 사랑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태워바침과 제물은 주님을 사랑함으로부터 있는 천적 (수준의) 예배, 그리고 이웃을 향한 선행과 이 선행으로부터 파생되는 주님에 대한 신앙으로부터 있는 영적 (수준의) 예배를 포함했다. 천적 (수준이)이 무엇인지, 영적 (수준이) 무엇인지, 주님의 왕국, 또는 그분의 교회에서 있는 천적 (평면)과 영적 (평면)이 무엇인지는 지금까지 누누이 설명된 바 있다.
그러므로 “숫양”은 주님의 신성한 영적 (평면), 인간과 더불은 영적 (평면), 같은 말로, 인류로부터의 영적 평면에 있는 이들을 의미한다. 이는 숫양들로부터 만들어지는 태워바침과 제물로부터 알는지 모른다; 아론과 그의 아들들이 성직 임무 수행을 위해 신성시 되었을 때, 즉 그들이 취임식을 가졌을 때, 그들은 죄를 위해 한 마리의 거세된 어린 수소를 바치고, 이 수소의 피를 제단의 뿔들에 뿌리고, 나머지는 제단 아래에 쏟았다; 또한 숫양 한 마리가 죽여졌고, 그것의 피가 제단을 빙둘러 뿌려졌다, 그리고 그 다음 숫양은 통재로 태워바침을 위해 살라졌다; 그리고 죽여진 다른 숫양의 피가 아론의 귓바퀴에 뿌려졌고, 그의 엄지에, 그리고 그의 발의 엄지에 뿌려졌다; 그리고 그것이 흔들어(wave)진 후에 태워바침 위에서 태우게 되어 있었다 (출. 29:1-35; 레. 8장; 9:2부터 끝까지). 이런 모든 의식들이 거룩한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것들은 그것들의 표현으로부터, 거룩한 사항들을 의미함으로부터 거룩한 것이다. 반복해 말하건대, 어린 수소를 살육하고, 그것의 피를 제단의 뿔들에 뿌리고 제단 기초에 쏟고, 그리고 숫양 한 마리를 살육해서 그것의 피를 제단 빙둘러 뿌리고 그를 태우는 것, 그리고 다른 숫양의 피를 아론의 귀와 그의 엄지와 그의 발의 엄지에 뿌리는 것, 또한 그것을 흔들고, 태워바침 위에서 그것을 태우는 것, 이 모든 것들이 거룩한 것을 표현하지 않으면 그것들 전부가 거룩할 리 없고, 예배라고 말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대목의 각 세부 사항들은 내적 의미에서가 아니면 누구에게도 (그것이 왜 거룩한지가) 분명해질 수 없다. 죄를 위해 있었던 어린 수소는 주님의 신성한 자연 평면을, 그리고 숫양은 그분의 신성한 영적 평면을 , 그리고 이것이 인류로부터의 영적 왕국에 속한 이들을 의미했다는 것은 말씀에 있는 “어린 수소”와 “숫양”의 의미로부터 알는지 모른다. 성직 임무를 위한 취임식은 영적 수준의 것들을 수단으로 만들어졌다, 그 이유가 영적 수준의 것들을 수단으로 천적 수준의 것들을 소개받기 때문이다. 또는 같은 말로, 신앙의 진리들을 수단으로 사랑의 선 안으로 진입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아론이 거룩한 장소 안으로 들어갔을 때, 그는 죄를 위해 어린 수소를 바치고, 숫양은 태워바침을 위해 (태워졌다) (레. 16:2, 3).
나지르인의 경우, 그의 나지르인의 법이 완료되었을 때, 일 년된 아들 숫양을 통째로 태워바침을 위해, 그리고 일 년된 딸 암컷 어린 양 전부를 죄를 위해, 그리고 평화-예물을 위해 숫양 한 마리 전부를 바쳤다 (민. 6:13-17). 이는 나지르인이 주님의 모습인 천적 인간을 표현했기 때문이다. 천적 인간은 천적 사랑 안에 있는 자, 즉 주님을 사랑함 안에 있는 자, 그리고 이 사랑으로부터 천적 진리 안에 있는 자이다; 그러므로 그는 어린 양과 암컷 어린 양을 제물로 바쳤다, 이를 수단으로 천적 평면이 의미되어졌다; 그리고 또한 숫양, 이를 수단으로 영적 평면이 의미되어졌다. 절기 행사에서, 어린 수소들, 숫양들, 어린 양들이 제물로 바쳐졌다. 즉 누룩 없는 빵을 먹는 절기의 첫 날에, 두 마리의 어린 수소, 한 마리 숫양, 그리고 일곱 마리 어린 양들이 그것들의 식사 제물과 더불어 태워 바침을 위해 바쳐졌다 (민. 28:18-20). 첫 열매의 날에, 두 마리의 어린 수소, 한 마리 숫양, 그리고 일곱 마리 어린 양이 그것들의 식사 제물과 더불어 태워바침을 위해 바쳐졌다 (민. 28:26-28). 새로운 달들(의 시작)에서, 두 마리 어린 수소들, 한 마리 숫양, 그리고 일곱 마리 어린 양들이 그것들의 식사 제물과 더불어 태워 바침을 위해 바쳐졌다 (민. 28:11, 12). 일곱 째 달, 달의 첫 날에, 한 마리 어린 수소, 한 마리 숫양, 그리고 일곱 마리 어린 양들을 그것들의 식사 제물과 더불어 바쳤다. 일곱 째 달의 십오 일째에 열세 마리 어린 수소들, 두 마리 숫양들, 그리고 열네 마리 어린 양들이 바쳐졌다 (민. 29:1, 2, 12-14, 17, 18, 20-22, 24, 26-36 참조). “어린 수소”와 “숫양”은 영적 (평면의) 것들을, “어린 양”은 천적 (평면의) 것들을 의미했다; 그 이유가 절기 행사에서 그것들은 영적인 것들에 의해 신성시되어지고 소개되어져야 했기 때문이다.
“숫양들”이 주님의 신성한 인간 속의 신성한 영적 (평면)을 의미했듯, 인간과 더불어서도 영적 평면의 것들을 의미했다. 그러므로 새 성전, 새 예루살렘, 즉 주님의 영적 왕국을 이야기하는 곳, 에스겔서에서 이렇게 말해진다. 즉 거기서 그들이 제단을 깨끗케 함의 끝을 만들었을 때, 그들은 죄-바침을 위해 어린 수소를, 태워바침을 위해 숫양을 바치게 되었고, 칠 일 동안 날마다 죄-바침을 위한 염소를, 그리고 어린 수소와 숫양을 바쳤다 (겔. 43:23-25); 그리고 이 날에 제 1 인 자는 모든 백성을 위한 죄-바침의 어린 수소를 준비해야 하고, 그리고 절기의 칠 일 동안 일곱 마리의 어린 수소들, 그리고 일곱 마리의 숫양들, 식사 제물과 더불어 태워바침을 위해 준비해야 했다 (겔. 45:22-24). 그리고 안식일에 그는 여섯 어린 양들과 숫양을 준비해야 했다 (겔. 46:4, 6).
새 성전과 새 예루살렘에 의해 보편적 의미에서는 주님의 왕국이 의미되었다는 것은 이미 살폈다; 특별한 의미에서는 새 교회(the New Church)가 의미되고 있다. 이 새 교회에서는 태워 바침과 제물 바침이 없다는 것은 모든 이에게 알려져 있을런지 모르고, 이것이 보여주는 바, 이것들을 수단으로 사랑의 천적인 것들과 신앙의 영적인 것들이 의미되었다는 것이다; 그 이유가 이것들이 주님의 왕국 속에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와 같은 것들이 여기서 “어린 수소들”, “숫양들”, 그리고 “어린 양들”에 의해 의미되어지고 있다. “어린 수소들”과 “숫양들”이 영적 평면의 것들을 의미하는 것은 내적 의미에서 있는 몇 개의 세부 사항들로부터 분명해진다; 일반적으로 이로부터, “새 성전”과 “새 예루살렘”에 의해 주님의 영적 왕국이 특별하게 의미되나, 천적 왕국은 “시온”에 의해 의미되어진다.
“숫양”이 영적 평면의 것, 같은 말로, 영적 (왕국)에 있는 이들을 의미하는 것은 다니엘서에서 분명해진다; 거기서 강 앞에 서있는 숫양이 다니엘에 의해 보여지고 있다. 이것은 두 뿔을 가졌다; 그 후에 염소들 중의 숫염소가 그를 강타했고, 그의 뿔을 부러뜨렸다, 그리고 그를 짓밟았다 (단. 8:3, 4, 그리고 그 이하 구절에서); 이 대목에서 “숫양”은 영적 (왕국의) 교회 밖에 더 다른 의미는 없다. 그리고 “염소들 중의 숫염소”에 의해서는 선행으로부터 분리된 신앙, 또는 선으로부터 분리된 진리 안에 있는 이들을 뜻한다, 이것들이 선을 향하여 자신들을 위쪽으로 계속적인 단계에 의해, 결국 주님에까지 (당도해 쳐부수겠다고 달려드는 것이다). 이것이 이렇게도 묘사되고 있다. 사무엘서에서:
사무엘이 사울에게 말했다, 여호와께서 여호와의 음성에 귀기울이는 것보다 태워바침이나 제물에 큰 기쁨을 가질 것 같소? 보라 귀기울이는 것이 제물을 바침보다 낫고, 순종함이 숫양들의 지방보다 더 낫다 (삼상. 15:22).
위에서 순종이 취급되기 때문에 진리 측면이 다루어지고, 이것은 영적 평면이다; 그리고 이 말들이 왕에게 말해지는 바, 이것 역시 진리 측면에서이다. 그러므로 “수소들의 지방보다 낫다”든가, “어린 양의 지방보다 낫다”든가 라고 말해지지 않고 “숫양들의 지방보다 낫다”라고 말해지는 것이다.
다윗서에서:
이스라엘이 이집트로부터, 야곱의 가문이 이상한 언어의 백성으로부터 나갔을 때, 유다는 그분의 성소가 되었고, 이스라엘은 그분의 주권 아래 있었다. 바다가 그것을 보았다, 그리 고 도망했다, 그리고 요단은 뒤로 밀렸다; 산들이 숫양들 같이 뛰었다, 언덕들이 양떼의 아 들들 같이 뛰놀았다. 오 바다야, 네가 도망함은 어찌된 것이냐? 오 요단아, 네가 뒤로 밀림 은 어찜이냐? 너희 산들아 숫양들 같이 뜀은 어찜이냐? 언덕들아, 양떼의 아들들 같이 뛰 놀음은 어찜이냐? 오 땅아, 너는 주님의 현존에서, 야곱의 하느님의 현존에서 산고를 겪고 있다; 누가 바위를 물들의 못으로, 부싯돌이 물들의 샘으로 바뀌게 했느냐? (시. 114편).
위 구절들이 내적 의미에서 취급된 주제는 거듭남 후에 있는 영적 선이다, 그리고 그것의 품질을 묘사하고 있다; 그것의 영적 평면으로부터의 천적인 것이 “산들이 숫양들 같이 뛰놀다”에 의해; 그리고 그것의 자연적 평면으로부터의 천적인 것이 “언덕들이 양떼의 아들들 같이 뛰논다”에 의해 묘사되어져 있다. 모든 이가 이 시편에서 알게 되는 바, 다윗의 나머지 말들에도 거룩한 것들이 있다는 것, 그러나 내적 의미에서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어떤 것이 산들이 숫양같이 뛰논다에 의해, 언덕들이 양떼의 아들들 같이 뛰논다에 의해, 땅이 주님의 현존에서 산고를 겪는다에 의해 의미되어져 있을 것이다고 예상할 것이다; 그 이유가 내적 의미가 없이는 이 구절은 아무 의미도 없는 말일 뿐이기 때문이다.
위 시편같이 모세의 책에서:
그분은 그로(야곱) 하여금 땅의 높은 장소를 타게 만드시고, 땅의 소출을 먹게 만드시고, 그분은 그를 바위로부터 꿀을 빨게 하시며, 단단한 바위로부터 기름을 빨게 하신다; 암소의 버터와 양떼의 젖, 어린 양들의 지방과 더불어, 그리고 바산의 아들들 숫양들의 지방들, 그 리고 밀 종류와 더불어 숫염소의 지방들; 그리고 포도의 피로부터 너는 혼합하지 않은 포 도주를 마실 것이다 (신. 32:1, 14).
“바산의 아들들 숫양”은 영적인 것들로부터의 천적인 것을 표시한다. 다윗서에서:
저는 숫양의 향과 더불어 살진 가축의 태워바침을 당신에게 바칠 것입니다, 저는 염소들과 더불어 어린 수소를 바칠 것입니다 (시. 66:15).
“살진 가축의 태워바침”은 사랑의 천적인 것들을 표시한다; 그리고 “숫양들의 향”은 신앙의 영적인 것들을 표시한다.
에스겔서에서:
아라비아와 게달의 모든 제 1 인 자들이 네 손의 상인들 이었다: 어린 양들에서, 숫양들에 서, 그리고 숫염소들에서 (겔. 27:21).
위는 두로를 취급하고 있다, 이들에 의해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들에 있는 이들이 의미된다; “아라비아”는 그들의 지혜를; “게달의 제 1 인 자들”은 그들의 총명을; “어린 양들”은 천적인 것들을; “숫양들”은 영적인 것들을; 그리고 “숫염소들”은 자연적인 것들을, 이것들이 질서적으로 뒤잇고 있다. 이사야서에서:
게달의 모든 양떼가 네게로 함께 모아진다, 나비욧의 숫양들이 너를 섬길 것이다; 그것들은 내 제단에 올라와서 열납될 것이다. 나는 내 장식된 집을 더 잘 장식할 것이다 (이. 60:7).
위는 주님의 신성한 인간이 취급되고 있다; “게달의 양떼”는 신성한 천적인 것들을; 그리고 “나비욧의 숫양들”은 신성한 영적인 것들을 표시한다. 이 모두로부터 지금 분명해지는 것은 내적 의미에서 “숫양”은 주님의 신성한 영적 평면, 그로부터 인간들의 영적 평면, 인류로부터의 영적 왕국에 있게 될 이들이 의미된다는 것이다.

뒤에, 덤불에 잡혀 있었다. 이는 자연적인 지식에 뒤엉켜 있음을 의미한다. 이는 “잡혀 있다”가 여기서는 뒤엉켜 있음을 의미한다로부터; 그리고 “덤불(thicket)” 또는 “엉킴(tangle)”이 기억 속의 지식이다로부터 알려진다. 이 기억 속의 지식은 뒤이어 설명한다. 영적인 것들이 신앙의 진리 측면에서 자연적 지식에 뒤엉켜 붙잡혀 있다는 것은 다음과 같다. 영적 수준은 선과 진리에 대하여 천적 수준같이 지각을 가지고 있지를 않고, 그것 대신 유아 시절 부모로부터, 그리고 스승으로부터, 그리고 후에는 그들이 출생한 신앙의 교리로부터 흡입한 신앙의 선들과 진리들로부터 만들어 내진 양심을 가지고 있다. 선과 진리에 관하여 지각을 가지지 못한 이들은 지식들을 수단으로 확증되어지는 순서를 거쳐야만 한다. 모든 이 각자는 자신을 위해 그가 배웠던 것들에 관하여, 또한 신앙의 선들과 진리들에 관하여 어떤 생각(관념, idea)을 만들어 낸다. 그 이유가 관념이 없다면 텅빈 것으로 밖에 기억 속에 남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확실히 하는 것들이 기억 속에 추가되어진다, 그리고 어떤 것에 관한 생각을 다른 지식들로부터, 기억 속의 지식들로부터 조차 (끌어내) 가득 채운다. 많은 것들을 수단으로 관념 자체를 확증할 경우, 이 확증물들은 기억 속에 들러붙고, 언제나 생각함에 불려나와질 수 있도록 (대기하고), 또한 신앙이 그 확증물 안으로 은근히 심어질 수 있게도 된다.
일반적 측면에서 지각에 주목하면, 지각이 무엇인지 아는 자는 거의 없기에 우선 이것이 먼저 선포되어야 할 것이다. 천적, 영적인 것들 안에 있는 선하고 참된 것에 관한 지각이 있다; 시민 생활에서 정당하고 공평한 것에 관한 지각이 있다; 그리고 도덕적 생활에서 존경할 수 있는 것에 관한 지각이 있다. 천적, 영적인 것들 안에 있는 선하고 참된 것에 관한 지각에 주목하면, 내면의 천사들이 주님으로부터 이 지각을 가진다, 태고 교회인들이 이 지각을 가졌다, 그리고 천적 (왕국의) 인간, 즉 주님을 사랑함에 있는 이들이 이것을 가지고 있다. 이들은 일종의 내면의 관찰로 그것이 선한 것인지, 그것이 참된 것인지를 즉시 알고 있다; 그 이유가 그들은 사랑을 수단으로 주님과 결합된 상태이기 때문에 지각이 주님에 의해 심어져 있다. 영적 (왕국의) 인간은 어쨌든 위와 같은 지각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러나 지각 대신 명령하는 양심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미 말한 바 같이, 이 양심은 그들이 부모로부터, 선생, 후에는 그들 스스로의 말씀이나 교리 공부로부터 흡입한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으로부터 만들어내진다; 그리고 이 양심 안에 설사 선하고 참되기는 하나 100%는 못된다 하는 때 조차에서도 그들은 자기들의 신앙의 뿌리를 내린다. 그러므로 인간들은 무슨 교리이든 그 교리로부터 양심을 가질 수 있다; 이방인들 조차 자기들의 종교로부터 그런 식의 양심을 가진다.
영적 (왕국의) 인간이 신앙의 선과 진리에 관해 지각을 가지지는 않았지만, 그들도 자기들이 배우고 납득한 것을 참되다고 말하고 믿는다. 이는 모든 이가 자신의 독단적 주장(dogma)이 참되다고, 아마 이교의 경우는 더 세게 참되다고 말한다는 사실로부터도 충분하게 분명해진다; 그리고 그들은 비록 수천 가지의 것들로 진리를 선포할지라도 자기들은 진리 자체를 볼 수 없고 인정할 수도 없다라고도 말한다는 사실로부터도 여실히 증명된다. 모든 이 각각으로 자신을 조사하게 하고 그가 어떤 다른 근원으로부터라도 어떤 것이 진리인지 아닌지 지각할 수 있는지를 보게 해보자; 그리고 만일 그에게 최고로 참된 어떤 것이 분명해진다면, 그런 때에도 그는 여전히 그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예를 들면, 어떤 이가 구원의 필수요소가 사랑이 아닌 신앙이다로 만들고 있다 해보자: 모두 그 사람 앞에서 주님께서 사랑과 선행에 관하여 이야기 하신 것을 읽는 때조차도; 그리고 모든 율법과 예언들이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향한 선행에 달려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도, 그럼에도 그는 여전히 신앙에 관한 그의 관념에 머문다, 그래서 말한다, 신앙만이 구원한다. 이는 천적, 영적인 것 안에 있는 이들과는 완전 딴판이다.
시민 생활에서 정당하고 공평한 것에 관한 지각에 주목하면, 어쨋든 합리성이 있는 이들이라면 이것을 가진다. 그리고 또한 도덕적 생활에서 존경할 수 있는 것에 관한 지각도 마찬가지 논리이다. 이 두 지각들은 서로를 구별되게 한다. 그렇지만 이 런 지각을 이유로 이와 같은 인간들이 신앙의 선하고 참된 것에 관한 지각을 결코 가지지는 못한다. 그 이유는 이는 더 높고 더 내적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가장 깊은 합리성을 통하여 주님으로부터 흘러들기 때문이다.
영적 (왕국의) 인간이 신앙의 선과 진리에 관한 지각을 가지지 못하는 이유는 선과 진리가 천적 (왕국의) 인간 같이 의지 부분에 심어지지 않고 지적 부분에 심어진 탓이다. 그러므로 영적 수준의 인간은 천적 수준의 인간이 도달하는 첫 번째 되는 등차의 빛의 수준에는 도달할 수 없는 바, 상대적으로 희미한 빛을 가진다. 이로부터 영적 수준의 인간이 신앙의 진리들에 관련하여 자연적 기억 속의 지식에 뒤엉켜져 있다.
“덤불” 또는 “엉켜짐”이 내적 의미에서 자연적 기억 속의 지식을 의미하는 것, 즉 외면의 기억에 꽉 달라붙은 이 지식을 의미한다는 것은 말씀의 다른 구절로부터도 알는지 모른다. 에스겔서에서:
보라, 앗수르는 아름다운 잎이 무성하고 그늘을 드리우는 숲을 이루고, 드높게 자라고, 그 리고 그의 가지는 뒤엉킨 굵은 가지들 사이에 있었던 레바논에 있는 삼나무였다
(겔. 31:3).
위에서 기억 속의 지식인 이집트가 취급되어진다; “앗수르”는 합리성을 표시한다; 이는 또한 “삼나무”, 그리고 또한 말씀에서 있는 “레바논”이다; “뒤엉킨 굵은 가지들 사이에”란 기억 속의 지식들 사이에를 뜻한다, 그 이유가 인간의 합리성은 인간의 기억 속의 지식에 기초하기 때문이다.
에스겔서에서:
고로 주 여호비께서 말하신다, 네가 키를 자랑했기 때문에, 그리고 그가 자기 가지를 뒤엉 킨 굵은 가지들 사이에 두었기 때문에, 그리고 그의 심정이 아주 드높혔기 때문에, 낯선 자 들, 광폭한 나라들이 그를 잘라내렸다, 그리고 그를 내던졌다 (겔. 31:10, 12).
이집트에 관하여; “뒤엉킨 굵은 가지들 사이에 둠”은 기억 속의 지식들에 꽉 붙어서 그것들로부터 영적, 천적, 신성한 것에 관하여 (추론하는 것을 표시한다). 에스겔서에서:
결국에 물가의 모든 나무들의 어느 것도 제 키를 자랑치 못하게, 뒤엉킨 굵은 가지들 사이 에 두지 못하게, 물을 마시는 모든 것이 그것들의 높이를 넘어가 서있지 못할 것이다, 그 이유는 그들 모두가 죽음으로 건네져서, 구덩이로 내려가는 자들에게, 인간의 아들들 한 가 운데에서 더 낮은 땅으로 보내질 것이기 때문이다 (겔. 31:14).
위는 기억 속의 지식들로부터 추론함을 수단으로 신앙의 비밀들 안으로 들어가기를 바라는 이들이 취급되고 있다. 기억 속의 지식으로부터 추론하는 것이 “뒤엉킨 굵은 가지들 사이에 가지를 두는 것”이다. 에스겔서에서:
그녀(포도나무)는 통치권을 쥔 자들의 홀을 만들만큼 견실한 가지(plant)들을 가졌고, 그리 고 그녀의 키는 뒤엉킨 굵은 가지들 사이에서 뛰어났다 (겔. 19:11).
이것도 위와 비슷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에스겔서에서:
이스라엘의 살육당한 자가 그들의 우상들 사이에, 그들의 제단들 빙둘러서, 그리고 모든 푸 른 나무 아래에, 모든 뒤엉킨 상수리나무 아래 있을 것이다 (겔. 6:13).
자신 스스로 신앙을 가진 이들이 자신들에게 만들어내는 예배, 즉 자신의 기억 속의 지식들로부터 부화해낸(창안한) 예배를 취급하고 있다; “뒤엉킨 상수리나무”는 이와 같은 상태에 있는 기억 속의 지식을 표시한다. “상수리나무(oak)”는 기억 속의 지식으로부터의 통각(統覺 apperception, 새 관념을 기득의 개념으로 이해 동화함 역자주)이다. 비슷한 것이 같은 예언서의 다른 구절에도 있다:
그들은 높은 언덕, 그리고 모든 뒤엉킨 나무를 보았다, 그리고 그들은 자기들의 제물들을 바쳤다 (겔. 20:28).
“뒤엉킨 나무”는 말씀에 의해 명령받지 않은 것들, 그러나 자기 고유의 기억 속의 지식에 의해 명령받은 것들을 표시한다.
이사야서에서:
사악함은 불같이 탄다; 그것은 엉컹퀴와 가시나무들을 삼킨다, 그리고 숲의 덤불들에 불을 붙인다 (이. 9:18).
이사야서에서:
여호와 체바욷께서 쇠를 가지고 숲의 덤불들을 잘라내실 것이다, 레바논은 강력한 자에 의 해 쓰러질 것이다 (이. 10:34).
“숲의 덤불들”은 기억 속의 지식들을 표시한다; 그리고 “레바논”은 합리성으로부터의 것들을 표시한다. 예레미야서에서:
시온을 향하여 표준(standard, 또는 군기)을 세워두어라, 그 이유가 내가 북으로부터 악을 데려오고, 큰 파멸이 있기 때문이다; 사자가 그의 덤불로부터 올라온다, 그리고 나라들의 파괴자(가 올라온다); 그가 길을 가고 있다, 그는 네 토지를 황폐하게 만들려고 그의 궁전 을 떠나 있다; 네 도성들은 주민이 없이 되게 파괴될 것이다 (예. 4:6. 7).
“그의 덤불로부터”란 기억 속의 지식으로부터를 표시한다; 그리고 이 지식이 신성한 비밀 안으로 올라가서 “토지를 황폐하게”, 즉 교회를 황폐한 상태에 놓이게 만든다.
말씀에서 기억 속의 지식들이 “덤불들”이라 불리우는 이유는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의 탐욕들, 그리고 거짓의 원리들이 자기들을 위한 것을 찾으려 할 때 기억 속의 지식들이 비교적으로 뒤엉켜있는 덤불같은 속성을 지니기 때문이다. 천적 (수준의) 사랑과 영적 (수준의) 사랑은 외면의 기억 속에 있는 지식들을 질서있게 배열해놓고 있다. 한마디로 가닥이 잡혀 있다, 말의 앞뒤가 맞고 있다는 말이다. 이에 반해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은 정렬된 질서를 악용, 뒤집고, 혼동된, 뒤엉킨 상태로 만든다. 이런 것을 인간은 알아채지 못한다, 그 이유는 당사자가 거꾸로된 질서 안에 바로된 질서를 꾸겨넣기 때문, 즉 진리를 거짓 안에, 선을 악 안에 놓기 때문이다. 이렇기에 뒤엉켜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이런 지식들이 있는 외면의 기억 속의 것들이 합리성이 있는 내면의 기억 속에 있는 것에 비교해 볼 때, 덤불 안에, 어두운 숲속에 있는 것과 같다는 말이다. 이것이 얼마나 그늘졌으며, 불투명하며, 어두운지는 인간이 육체 안에 사는 한, 알 길이 없다; 알 수 없는 이유는 인간 당사자의 생각에 모든 지혜와 총명은 이런 근원, 즉 뒤엉킨 덤불에 근원된다고 상상하며 살기 때문이다. 그러나 외면을 벗은 상태, 즉 다른 삶에서, 내면의 기억만이 존재하는 그곳에서는 알게 되는 것이 어렵지 않다. 인간이 이 세상 삶에 적절한 것인 외면의 기억 안에 있는 이상, 자기는 지혜와 총명이 발견해내는 것보다 더 잘 하고 있다고 확정하고 있다; 그러나 그의 모든 것은 상대적으로 어둡고, 비질서적이고, 그래서 뒤엉키어 있는데 이에 대하여는 이미 말하기도 했다.

그의 뿔들로 인해. 이는 신앙의 진리들 측면에서의 모든 힘(power)을 의미한다. 이는 “뿔들”의 의미로부터 분명해진다. “뿔들”은 말씀의 많은 구절들에서 언급되는 편이다; 그리고 그런 구절들에서 선으로부터 있는 진리의 힘을 의미한다; 그리고 반대적 의미에서는 악으로부터 있는 거짓의 힘을 의미한다; 여기서의 의미는 이렇다. 즉 “숫양”에 의해 의미되는 영적 (왕국의) 인간들이 진리 측면에서 그들의 모든 실력(might)과 더불어 자연적 기억 속의 지식에 뒤엉켜 있다는 것, 이로 인해 진리들을 인지하는 힘이 박탈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 이유가 누군가가 자연적 기억 속의 지식에 상담하면 할수록, 신앙의 진리들인 것들에 관련한 그의 심정(animus, 의도)과 지성(mind)이 오히려 기억 속의 지식에 꽉 달라붙는 바, 그는 더욱 진리의 빛을 상실하고, 이 빛과 더불은 진리의 생명도 잃고마는 지경에 이른다. 아마 자신의 감각적인 것, 또는 기억 속의 지식을 수단으로 납득되지 않으면 아무 것도 믿을 수 없다고 말하는 경우를 되새겨 보면 어느 정도 위의 말을 이해할 것이다. 이런 사람의 품질을 당신이 조사한다면, 그들은 실상 아무 것도 믿지 않고 있는 셈임을 발견할 것이다. 더욱이 모든 것을 자연의 탓으로 돌리는 것 이상 더 슬기로움은 없다고 말할 정도이다. 어떤 이의 경우는 자기는 납득하지 못한다고 해도 믿는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자신만의 은밀한 상태에서는 그들도 공히 감각과 기억 속의 지식으로 신앙의 진리들에 관해 그것이 과연 그러한지를 추론하고 있다. 이것들은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서 불어 넣어진 자아 설득, 확신이든지, 또는 전혀 믿지 않음이든지 하는 둘 중의 하나일 것이다. 그들의 품질은 그들의 생명(삶)으로부터 분명해진다. 이 계층들이 실로 주님의 영적 (왕국의) 교회 안에 있다, 그러나 그들은 교회로부터 있는 것은 아니다. 교회로부터 있는 이들은 선으로부터의 생명 안에, 그리고 진리들 안에서 신앙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영적 (왕국의) 인간은 유아 때로부터 인상지워 왔었던 것들 외에, 그리고 그후 교리로부터 또는 어떤 다른 근원으로부터 자신들을 확증한 것들 외에 다른 진리들 안에서 신앙을 가지고 있다. 이런 상태가 영적 (왕국의) 상태인 바, 이것이 “숫양이 자기 뿔들로 인해 덤불에 잡혀 있다”로 묘사되어 있다.
“뿔”이 선으로부터 있는 진리의 힘을 의미하는 것은 아래 구절로부터 분명해진다. 다윗서에서:
당신은 그들의 강함의 영광이시다, 그리고 당신의 선한 기쁨 안에서 당신은 우리의 뿔을 드높여주실 것이다; 그 이유가 우리의 큰 방패가 여호와께 속하였고, 우리의 왕은 이스라엘 의 거룩한 분에게 속했기 때문이다. 내 진리와 내 자비가 그와 더불어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내 이름 안에서 그의 뿔은 드높여질 것이다; 또한 나는 그의 손을 바다 위에, 그리고 그들 이 오른손을 강들 위에 둘 것이다 (시. 89:17, 18, 24, 25).
위에서 “우리의 뿔”과 “그의 뿔”은 진리의 힘을 명백하게 표시한다. 주님의 영적 왕국이 위에서 다루어지고 있다; “우리의 왕이 이스라엘의 거룩한 분에게 속해 있다”란 신성한 진리는 주님에 속해 있다를 표시한다; “그의 손을 바다 위에, 그의 오른손을 강들에”란 강함이 기억 속의 지식들 안에 있고, 진리에 관한 지식들이다. 시편서에서:
나는 당신을 사랑할 것입니다, 오 여호와, 나의 힘이시여; 여호와는 나의 반석, 그리고 나의 요새, 그리고 나의 해방자, 나의 하느님, 내가 신뢰하는 내 강한 바위, 나의 큰 방패, 그리 고 내 구원의 뿔 (시. 18:1, 2; 삼하 22:2, 3).
“구원의 뿔”은 힘 측면에서의 진리를 표시한다; 이 구절에 있는 말, 즉 “힘”, “반석”, “요새”, “하느님”, “강한 반석”, 그리고 “큰 방패” 등의 모두는 진리의 힘을 의미하고 있다.
시편서에서:
시온에서 나는 다윗에게 뿔이 돋아나게 만들 것이다, 나는 내 기름부은 자를 위해 등을 준 비할 것이다; 그의 적들에게 나는 수치함으로 옷입힐 것이다 (시. 132:17, 18).
위는 주님을 취급하고 있다, 주님이 “다윗”이다. “뿔”은 진리의 힘을 표시한다; “등”은 진리의 빛을 표시한다. 사무엘서에서:
제 심정이 여호와 안에서 기뻐날뜁니다, 내 뿔이 여호와 안에서 기뻐환호합니다, 제 입이 나의 적들에 맞서 확장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제가 당신의 구원을 기뻐했기 때문입니다. 여 호와는 그분의 왕에게 힘을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의 기름부은 자의 뿔을 드높일 것 입니다 (삼상. 2:1, 10).
위 구절은 한나의 예언이다; “뿔”은 진리의 힘을 표시한다.
모세의 책에서:
그의 수소의 첫 배 새끼, 영예는 그의 것이다, 그리고 그의 뿔들은 외뿔소의 뿔(들)이다; 그것들을 가지고 그는 백성들 그들의 모두를 땅의 맨 끝 까지에로 밀어붙일 것이다
(신. 33:17).
이것은 요셉에 관한 모세의 예언이다, 거기서 “외뿔소의 뿔(들)”은 진리의 위대한 힘을 표시한다, 이는 그가 “땅의 맨 끝까지로 밀어붙일 것이다”라고 말해짐으로부터 분명해진다. 다윗서에 이와 마찬가지 구절이 있다:
내 뿔이 당신을 외뿔소의 뿔같이 드높일 것입니다 (시. 92:10).
그리고 시편서에서:
오 여호와여, 나를 사자의 입으로부터 구해주소서, 그리고 저에게 외뿔소의 뿔(들)로부터 대답하소서 (시. 22:21).
신성한 진리들, 그것들의 높이로부터, “외뿔소의 뿔(들)”이라 불리운다; 이로부터 “뿔”이 “높인다, 찬양한다, exalted”라고 종종 말해진다. 그 이유가 높임은 내면으로부터의 힘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예레미야서에서:
주님께서는 맹렬한 불 안에서 이스라엘의 모든 뿔을 잘라내셨다, 그분은 그분의 오른손을 적들 앞에서 뒤로 당기셨다 (애. 2:3).
“이스라엘의 모든 뿔을 잘라내신 것”은 힘을 가진 진리를 박탈하는 것을 표시한다, 이것이 또한 “적 앞에서 오른손을 뒤로 당기는 것”이다. 에스겔서에서:
그 날에 나는 이스라엘의 가문을 위해 뿔이 자라나게 할 것이다, 그리고 나는 네게 그들의 한 가운데에서 입을 열게 해줄 것이다 (겔. 29:21).
“이스라엘의 가문을 위해 뿔이 자라게 함”은 “이스라엘”인 영적 (왕국의) 교회의 진리들이 불어나는 것을 표시한다; “입을 염(opening)”은 진리들을 고백함이다.
하박국서에서:
하느님이 데만으로부터 오실 것이다, 그리고 거룩한 분이 바란 산으로부터 (오실 것이다); 그분의 영예가 천국들을 덮었다, 그리고 땅은 그분을 찬양함으로 가득찼다; 그리고 그분의 빛나심은 빛같이 있을 것이다; 그분은 그의 손으로부터 뿔들을 가지셨다, 그리고 그분의 강 하심을 (그 뿔에) 숨겨두셨다 (합. 3:3, 4).
위는 주님이 취급되고 있다; “그분은 그분의 손으로부터 뿔들을 가지셨다, 그리고 그분의 강하심을 거기에 숨겨두셨다”는 진리의 힘을 분명하게 표시한다; “바란 산”은 신성의 영적 (평면), 또는 주님의 인간의 신성한 진리이다, 이것은 또한 “빛남”, 그리고 “빛”이다.
그러므로 주님의 인간의 신성한 진리가 계시록에서 이렇게 묘사되어 있다:
내가 보았고 바라보았는데, 왕좌의 한 가운데, 그리고 네 동물들의 한 가운데에, 마치 죽임 을 당한 것같은 어린 양이 서 있었는데, 일곱 뿔들을 가지고 있고, 이것은 모든 땅으로 내 보내는 일곱 영들이다 (계. 5:6).
“일곱 뿔들”은 거룩한 진리들, 또는 신성한 진리들을 표시한다. “모든 땅으로 내보내는 일곱 영들”은 신성한 진리들로부터의 거룩한 설교이다.
“제단들의 뿔들”은 힘이 있는 진리를 의미한다. 이에 관해 모세의 책에서 말해진다:
너는 제단의 네 모퉁이들에 뿔들을 만들 것이다; 그것으로부터 그것의 뿔들이 있을 것이다 (출. 27:2; 38:2).
분향 제단 역시 뿔들이 있게 했다 (출. 30:2; 37:25). 제단은 그분의 신성한 선에 대한 표현물이었다; (제단의) 뿔들은 그분의 신성한 진리에 대한 표현물이었다; 진리가 선으로부터 나와 있는 것이 제단으로부터 나온 뿔들에 의해 표현되어졌다. 진짜(순수) 의미에서 “뿔들”은 선으로부터 있는 진리의 힘을 의미한다.
아론과 그의 아들들이 성직 임무 수행을 시작할 때, 그들은 어린 수소의 피를 가져다가 그의 손가락으로 제단의 뿔들에 놓았다 (출. 29:12); 그리고 아론은 일 년에 한 번 제단의 뿔들 위에 속죄를 만들었다 (출. 30:10); 그리고 성직자가 죄를 지었을 때, 그는 어린 수소를 바쳤다, 그리고 그 피를 분향 제단의 뿔들에 놓았다 (레. 4:3, 7); 또한 제 1인 자가 죄를 지었을 때, 그는 태워바침의 제물을 바쳤다, 그리고 그 피는 태워바침의 제단의 뿔들 위에 뿌렸다 (레. 4:22, 25); 그리고 혼(일반 백성)이 죄를 지었을 때 역시 비슷했다 (레. 4:27, 30, 34); 또한 제단이 속죄되었을 때도 같다 (레. 16:18, 19). 이런 모든 사항들은 선으로부터의 진리를 의미했다; 그 이유가 모든 신성시됨들, 취임식들, 그리고 속죄함들이 진리를 수단으로 만들어졌고, 진리들이 선을 소개하기 때문이다. “제단의 뿔들”이 선으로부터 있는 진리들을 의미하는 것은 계시록으로부터 알런지 모른다:
여섯 째 천사가 소리를 내었다, 그리고 나는 하느님 앞에 있는 금빛의 제단의 네 뿔들로부 터 음성을 들었다 (계. 9:13).
“금빛의 제단의 뿔들”은 선으로부터의 진리들을 분명하게 표시한다, 그 이유는 이로부터 음성이 왔기 때문이다.
아모스서에서:
그 날에 나는 그 자 위에 이스라엘의 위법들을 방문할 것이다, 나는 벧엘의 제단들 위를 방문할 것이다, 그리고 제단의 뿔들이 잘라질 것이고, 땅으로 떨어질 것이다 (암. 3:14).
“제단의 뿔들이 잘라지는 것”은 거기서 선으로부터의 진리가 더 이상 표현되지 않기 때문이다; “벧엘”은 신성한 선이다, 그리고 그러므로 “왕의 성소”, 그리고 “왕국의 집”이라 불리운다 (암. 7:13). “뿔에 담은 기름을 가지고 기름부워진” 왕들은 선으로부터의 진리를 마찬가지로 표현했다 (삼상. 16:1, 13; 왕상. 1:39).
“뿔”이 반대 의미에서 일 경우, 악으로부터 있는 거짓의 힘을 의미하는데, 아래 구절에서 살필 수 있다. 아모스서에서:
무가치한 것 안에서 기뻐환호하는 너희들이여, 누군가 말한다, 우리는 자신의 힘으로 뿔들 을 우리에게 가져오지 아니하였더냐? (암. 6:13).
위에서 “뿔들”은 거짓의 힘을 표시한다. 스가랴서에서:
나는 내 눈을 들어올렸다, 그리고 네 뿔들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나는 나와 말하는 천사에 게 말했다, 이것들이 무엇입니까? 그리고 그가 나에게 말했다, 이것들은 유다, 이스라엘, 그 리고 예루살렘을 흐트린 뿔들이다. 그리고 여호와께서 네 대장장이들을 내게 보이셨다; 그 래서 나는 말했다, 이들이 무엇을 하려 옵니까? 그리고 그는 말했다, 말하기를, 이들은 유 다를 흐트린 뿔들이다, 하여 어떤 자도 자기 머리를 들지 못하게 하였다; 그리고 이들은 그 들로 간담을 서늘해지게 하려고, 나라들의 뿔들을 내던지려고 왔다. 이것은 유다의 토지에 맞서는 나라들의 뿔들을 흐트리기 위해 들어올렸다 (슥. 1:18-21).
“뿔들”은 거짓의 힘을 표시한다, 이것이 교회를 황폐하게 한다. 에스겔서에서:
너희는 옆구리와 어깨로 밀어붙인다, 그리고 네 뿔들을 가지고 병든 모든 자를 밀고 있다, 하여 너희가 그들을 외국으로 흐트릴 때까지이다 (겔. 34:21).
위는 거짓들을 수단으로 꼬드기는 목자들이 취급되고 있다; “뿔들”은 거짓의 힘이다; “어깨”는 모든 힘이다. 예레미야애가서에서:
여호와께서 파괴하셨다, 그리고 동정을 베풀지 않으셨다, 그리고 그분은 적들이 네 위에서 기뻐날뛰게 하셨다; 그분은 네 상대방의 뿔들을 칭찬하셨다 (애. 2:17)
예레미야서에서:
모압의 뿔이 잘리워진다, 그리고 그의 팔이 부러진다 (예. 48:25).
“뿔”은 여기서 강력한 거짓을 표시한다.
다윗서에서:
나는 으쓱거리는 그들에게 말했다, 너희는 으쓱대지 말라, 그리고 사악한 자에게, 뿔을 들 어올리지 말라; 네 뿔을 높이 들어올리지 말라, 뻣뻣한 목을 가지고 이야기하지 말라. 사악 한 자의 모든 뿔들을 나는 잘라낼 것이다, 의로운 자의 뿔들은 들어올려질 것이다
(시. 75:4, 5, 10).
“사악한 자의 뿔들”은 악으로부터의 거짓의 힘을 표시한다; “의로운 자의 뿔들”은 선으로부터의 진리의 힘을 표시한다.
다니엘서에서:
넷째 짐승이 보여졌는데, 격렬하고 강력하며 극도로 힘세었다, 그리고 그것은 철 이빨을 지 녔다; 그것은 삼키고 조각으로 부수고, 그리고 나머지는 자기 발로 짓이겼다, 그리고 그것 은 열 뿔들을 가졌다. 나는 뿔들을 집중적으로 생각하였다, 그리고 바라보니 또 다른 작은 뿔이 그것들 사이에서 나왔다, 그리고 첫 뿔들의 셋은 그것 앞에서 뿌리가 뽑혀졌다; 그리 고 바라보니 이 뿔 안에 사람의 눈 같은 눈이 있고, 큰 것들을 이야기하는 입이 있었다. 뿔 이 이야기한 큰 말들의 음성 때문에 나는 그때 바라보았다; 나는 확실함이 주어지기를 바 랐다, 즉 넷째 짐승에 관한 것, 그리고 그의 머리에 있는 열 뿔에 관한 것, 그리고 올라온 다른 뿔에 관한 것, 그리고 그것 앞에서 셋이 떨어진 것; 그리고 눈을 가진 동일한 뿔에 관 한 것, 그리고 큰 것들을 이야기하는 입에 관한 것; 나는 바라보았다, 그리고 동일한 뿔이 거룩한 사람들과 전쟁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는 말했다, 넷째 짐승에 관하여, 그것은 땅 위 의 넷째 왕국이다는 것, 이것은 모든 왕국들로부터 가지각색이다는 것, 그리고 온 땅을 삼 킨다는 것, 그리고 그것을 짓밟는다는 것, 그리고 그것을 조각으로 부순다는 것이다. 그리 고 열 뿔들에 관하여서, 이 왕국으로부터 열 왕들이 일어날 것이다, 그리고 또 다른 왕이 그것들의 뒤를 이어 일어날 것이다, 그리고 그는 이전 것들로부터 가지각색일 것이다, 그리 고 그는 세 왕들의 오만한 콧대를 꺽을 것이다; 그는 지극히 높은 분에 맞서는 말들을 이 야기 할 것이다, 그리고 성인들을 닳아 없어지게 할 것이다; 그 후에 심판이 좌정할 것이다
(단. 7:7, 8, 11, 19-26).
위 구절은 교회가 뒤집혀진 상태가 취급되었다. 여기서 다니엘에 의해 보여진 것들, 즉 짐승, 철 이빨, 눈이 있는 뿔, 그리고 이야기하는 뿔, 그리고 거룩한 사람들과 전쟁을 만드는 이들, 그리고 지극히 높으신 분에 맞서 이야기하는 것, 등등은 교회 내에 있는 거짓과 이교들(이단, heresies)의 상태를 의미한다. “뿔들”은 강력하고 유행하는 거짓을 의미함은 눈이 그것에서 기인된다는 것, 즉 이해함이 그것들에서 기인한다는 단 하나의 사실만으로도 분명해진다; 그리고 그들이 지극히 높은 분에 맞서 이야기했다는 사실로도 분명해진다. “왕국들”과 “왕들”에 의해서는 왕국과 왕이 의미되는 것이 아니라, 거짓의 교리물들이 의미되고 있다; 이는 진리의 교리물과 그 반대인 거짓의 교리물에 관하여 말씀에서의 그것들의 의미로부터 이미 살핀 바 있다. 다시 다니엘서에서:
다니엘에 의해 강가에 서있는 숫양이 보여졌다, 이것은 두 뿔들을 가졌다; 그리고 뿔들이 높았다, 그러나 하나가 다른 하나보다 더 높았다. 더 높은 것은 마지막에서 (즉 두번째 올 라온 뿔에서) 올라왔다. 내가 보니, 숫양은 자기 뿔을 가지고 서쪽으로, 그리고 북쪽으로, 그리고 남쪽으로 돌진하고 있었는데, 어떤 짐승들도 그것 앞에 설 수 없었고, 그것의 손으 로부터 구해낼 자는 아무 것도 없었다; 그것은 제 의지에 따라 행동했고, 자신을 극대화 했 다. 내가 잘 생각해보고 있을 때, 바라보니 염소들 중의 숫염소가 온 땅의 얼굴 너머 서쪽 으로부터 왔다; 이 숫염소는 그의 두 눈 사이에 뿔을 가졌다; 그것이 뿔들의 주(lord) 숫양 에게 왔다, 그리고 그의 힘의 격노함으로 그(숫양)에게 달려갔다, 그리고 그를 쳐부셨다, 그리고 그의 뿔들을 부러뜨렸다; 그리고 그 (숫염소) 앞에서 서있을 힘이 없었다. 그 후에 염소들 중의 숫염소는 자신을 극도로 극대화했다; 그리고 그가 강했을 때, 그의 큰 뿔은 부 러졌다, 그리고 그것 대신에 네 뿔이 올라왔다. 머지않아 네 뿔 중의 하나로부터 작은 뿔이 나왔다, 그리고 남쪽을 향하여, 그리고 동쪽을 향하여, 그리고 아름다움을 향하여 극도로 자랐다; 그리고 그것은 땅의 군대로까지 조차 자랐다, 그리고 군대의 얼마와 별들의 얼마가 땅으로 내던져졌다, 그리고 그것 위에서 짓밟았다. 두 뿔을 가진 숫양은 메대와 페르샤이 다; 숫염소는 그리스의 왕이다; 하나를 대신한 네 뿔들은 나라로부터의 네 왕국들이다
(단. 8장).
위는 영적 의미에서 영적 교회의 상태가 취급되고 있다, 이것이 “숫양”이다; 그리고 이 교회의 상태가 묘사되었다, 즉 어떻게 이 교회가 점진적으로 하강하고 타락되는지 이다. “염소들 중의 숫염소”는 선행으로부터 분리된 신앙 안에 있는 이들을, 또는 선으로부터 분리된 진리들 안에 있는 이들을 표시한다. 이들은 선에 맞서려고 자신들을 위쪽으로 올리기를 시작한다, 그리고 결국에 가서는 주님에 맞서려는 것이다. “숫양의 뿔들”은 내적, 외적 모두에서의 영적 교회의 진리들이다; “염소들 중의 숫염소의 뿔들”은 거짓 쪽으로 점진적으로 퇴보해간 진리들이다; 그리고 “왕국들”과 “왕들”을 수단으로 여기서 왕국과 왕이 아니라 진리들과 거짓들이 의미되는데 이미 말했다; 그 이유가 주님의 말씀은 그것의 본질 측면에서 세상의 것과 지상의 것을 취급하지 않는다, 그러나 영적인 것과 천국의 것을 취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계시록에서:
그리고 천국에는 또 다른 표시가 보여졌다; 그리고 바라보니 큰 붉은 용, 일곱 머리들을, 그리고 열 뿔들을, 그리고 그의 머리들 위에 일곱 왕관(diadem)들을 가졌다; 그의 꼬리가 천국의 별들의 삼분의 일 부분을 끌어당겼다, 그리고 그것들을 땅으로 내던졌다
(계. 12:3, 4).
그리고 다시:
나는 바다로부터 올라오는 짐승을 보았는데, 일곱 머리들과 열 뿔들을 가졌고, 그의 뿔들 위에 열 왕관(diadem)이, 그리고 그의 머리들 위에 (성령) 모독의 이름들을 가졌다. 그에 게 거룩한 사람들과 전쟁을 만드는 것이, 그들을 정복하는 것이 주어졌다, 그리고 그때 나 는 땅으로부터 올라오는 또 다른 짐승을 보았다, 그리고 그는 어린 양같이 두 뿔을 가졌다
(계. 13:1, 2, 7, 11).
“뿔들”에 의해 다니엘서와 마찬가지로 거짓의 힘이 의미되는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갔다, 그리고 수양을 잡았다. 이는 주님의 신성한 인간에 의해 영적 왕국이 해방됨을 의미한다. 이는 아브라함의 표현이 여기서는 주님의 신성한 인간 측면에서의 주님을 표현한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 이유가 여호와, 또는 여호와의 천사가 아브라함과 이야기할 경우, 그때 “여호와”, 또는 “여호와의 천사”는 신성 자체이고, “아브라함”은 신성한 인간이기 때문; 또한 “숫양”이 영적 왕국을 의미함으로부터도 알게 된다. 이로부터 분명한 바, 아브라함이 가서 자기 뿔에 의해 덤불에 붙잡혀 있는 숫양을 가져옴이 주님의 신성한 인간에 의해 영적 왕국이 해방됨(자유해짐, liberation)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의 아들 대신 태워바침을 위해 그를 바쳤다. 이는 영적 왕국의 것들이 신성시되고 양자(adoption)로 삼으셨다를 의미한다. 이는 “태워바침을 위해 바침”이 신성시됨이다로부터; 그리고 “그의 아들 대신에”가 양자(adoption)로 삼아짐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즉 여기서 “아브라함”인 주님의 신성한 인간에 의해 양자로 삼아짐이다. 영적 왕국의 교회인이 양자가 됨은 요한복음서에서 묘사되어 있다:
예수께서 말하셨다, 나는 포도나무이고, 너희는 가지들이다; 내 안에 거주하는 자, 그리고 내가 거주하게 되는 자, 동일하게 많은 열매를 산출한다; 그 이유가 나 없이 너희는 아무 것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요. 15:5).
위의 “포도나무”는 영적 (왕국의) 교회이다.

14절. 그리고 아브라함은 그 장소의 이름을 여호와가 보시리라 라고 불렀다. 오늘날까지도 산에서 여호와께서 보시리라고 말해지고 있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이 장소의 이름을…불렀다. 이는 주님의 신성한 인간으로부터 있는 그들 (즉 영적 왕국)의 상태의 품질을 의미한다. 이는 “이름을 부름”의 의미가 어떤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 즉 그것의 품질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장소”의 의미가 상태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리고 아브라함이 주님의 신성한 인간 측면의 주님을 표현함으로부터 알려진다. 이를 종합하면, “아브라함이 이 장소의 이름을 불렀다”란 주님의 신성한 인간으로부터 있는 영적 왕국의 상태의 품질을 의미한다. 영적 왕국은 주님이 세상에 오심으로 구원되었다는 것은 이미 살폈다; 그리고 그들이 주님의 신성한 인간으로부터 계발되었다는 것; 그리고 선행의 신앙 안에, 즉 선행 안에 있는 이들이 구원되도록 설비하셨다는 것이 이 절에서 뒤잇고 있다. 이것이 이 말들에 의해 의미되어진 상태이다.

여호와께서 보시리라 (Jehovah-will-see). 이는 주님의 섭리를 의미한다.
이는 “본다”가 주님, 또는 여호와를 서술하고 있을 경우, 예견하시다와 설비하시다를 의미함에서 알려진다. 글자 의미에서 이 말은 장소를 명명하고 있으나 내적 의미에서는 묘사된 상태의 품질이다; 그 이유가 시간과 공간은 자연에만 속한 것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말씀의 글자 의미가 자연을 지나서 천국으로 건너갈 때, 이런 사항들 속의 자연적인 것들은 소멸되고, 그것들에 상응하는 영적인 것이 되어진다.

오늘날까지도…말해진다. 이는 영구적이다를 의미한다. 이는 말씀에서의 “오늘”의 의미로부터 알게 되는데, 아래에서 살핀다. 우리가 말씀의 몇 군데에서, “이 날까지조차”, 또는 “오늘에까지”라고 읽어진다; 이미 지나온 성경에서, “그는 이 날에까지조차 모압의 조상이다; 그리고 이 날에까지조차 암몬의 조상이다” (창. 19:37, 38); 그리고 창. 26:33에서, “도성의 이름이 오늘에까지조차 브엘-세바이다.” 또한 창, 35:20에서, “이것은 이 날에까지조차 라헬의 무덤의 기둥이다.” 창. 47:26에서, “요셉은 이 날에까지조차 그것을 규례로 만들었다.” 역사적 의미일 경우 이런 말은 모세가 살았던 때를 주시하고 있다. 그러나 내적 의미에서 “이 날”, 또는 “오늘”에 의해 상태의 영구함, 또는 영원함이 의미된다. 고로 오늘은 시간이 현재인 것이다. 세상에서 시간 속에 있는 것은 천국에서는 영원하다. 이것이 의미되도록 “오늘”, “오늘에까지”가 첨가된 것은 비록 역사적 의미에 있는 이들에게는 마치 더 이상 어떤 것을 포함하지 않는 듯 나타난다. 비슷한 것이 말씀의 여러 군데에 있다. 즉 여. 4:9; 6:25; 7:26; 사. 1:21, 26, 등등이다.
“오늘”이 영구함과 영원함을 의미하는 것을 다윗서로부터 알는지 모른다:
나는 법령을 말할 것이다: 여호와께서 나에게 말하셨다, 너는 나의 아들이다, 이 날 나는 너를 낳았다 (시. 2:7).
위에서 “이 날”은 영원인 것을 분명하게 표시한다. 시편서에서:
오 여호와여 당신의 말씀은 천국들 안에서 영원히 자리잡았습니다, 당신의 진리는 세세토 록 있습니다; 당신은 땅을 설립하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머무르고 있습니다; 그것들은 당 신의 공정함들에 따라 이 날 머무르고 있습니다 (시. 119:89-91).
위에서도 “ 이 날”은 영원인 것을 분명하게 표시한다. 예레미야서에서:
나는 너를 뱃속에서 만들어내기 이전, 나는 너를 알았다; 그리고 네가 자궁으로부터 나오 기 전, 나는 너를 신성시 했다; 나는 너에게 나라들을 향한 예언을 주었다; 나는 너를 이 날 나라들 너머에, 왕국들 너머에 앉혔다, 그리고 나는 너를 수비가 튼튼한 도성으로, 그리 고 철 기둥, 그리고 놋쇠로 된 성벽으로 만들었다 (예. 1:5, 10, 18).
위는 글자 의미에서는 예레미야가 취급되고 있으나, 내적 의미에서는 주님이 뜻해진다; “나는 너를 이 날, 또는 오늘, 나라들 너머에와 왕국들 너머에, 그리고 나는 너를 오늘 방어가 튼튼한 도성으로 만들었다”란 이것이 영원으로부터 있었음을 뜻한다. 주님에 관련해서는 영원인 것밖에 더 서술될 것은 없다.
모세의 책에서:
너희는 여호와 너희 하느님의 언약 안으로, 그리고 그분의 맹세하심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 여호와 너희 하느님 앞에 너의 모든 것을 이 날 세워두고 있다, 이 날 여호와 네 하느님께 서 너희와 함께 만드는 것, 그분이 이 날 백성을 위하여 자신에게 너희를 설립하시려는 것; 그리고 그분은 너에게 하느님이실 것이다; 그리고 너희 뿐만 아니라 이 날 우리와 함께 여 호와 우리의 하느님 앞에 여기 서있는 그들과 더불어, 그리고 이 날 우리와 함께 있지 않 은 그들과도 더불어서이다 (신. 29:10, 12-14).
위의 글자 의미에서 “이 날”은 모세가 백성에게 이야기한 그때 현재의 시간이다; 그럼에도 이 구절은 장차 오는 시간과 영구한 것을 포함하고 있음은 분명하다; 그 이유가 언약은 누군가와 만드는 것, 그리고 언약을 만드는 자리에 함께 있던 이들과 더불어, 그리고 거기 있지 않았던 이들과 더불어서도, 영구함을 포함하고, 아마 영구함 자체가 내적 의미에서 뜻하여진 것이다.
“날마다(daily)”와 “이 날(this day)”이 영구한 것을 의미하는 것은 매일 만들어진 제물을 바침으로부터도 분명해진다. 제물 바침은 “날”, “날마다”, 그리고 “이 날”의 의미 때문에 계속적, 영구한 제물 바침이라 불리웠다 (민. 28:3, 23; 신. 8:13; 11:31; 12:11). 이것은 하늘로부터 비오듯 내려진 만나로부터 한층 더 분명해진다, 이에 관해 모세의 책에서 말해진다:
보라 나는 하늘로부터 빵을 비오게 할 것이다; 그리고 백성은 나가 날마다 몫(하루 식사 분량)을 모을 것이다; 누구도 그것을 아침까지 남아있지 않게 하라. 그들이 아침까지 남아 있게 한 것은 안식일 이전 날 외에는 벌레들이 번식해서 썩을 것이다
(출. 16:4, 19, 20, 23).
이것은 만나가 주님의 신성한 인간을 의미했기 때문이었다 (요. 6:31, 32, 49, 50, 58). 그리고 이것이 주님의 신성한 인간을 의미했기 때문에, 이것은 천국의 식품을 의미했다. 이 식품은 신앙의 선들과 진리들과 더불어 함께 사랑과 선행 밖에 더 아니다. 이 식품은 천국들에서 천사들에게 매 순간마다 주님에 의해 주어지고 있다, 고로 영구적이고 영원하다. 이 의미가 주님이 가르치신 기도, 즉 “이 날 우리의 매일의 빵을 우리에게 주시옵소서”에서도 뜻하여져 있다 (마. 6:11; 눅. 11:3); 즉, 모두 각각의 찰나가 영원 쪽으로 (이어져 있다)는 말이다.

산에서 여호와께서 보시리라. 이는 그들이 구원되도록 주님께서 설비해두신 수단이 선행(charity)임을 의미한다. (그들은 영적 왕국에 있는 인간들, 또는 영적 왕국에 들어갈 인간들이다 역자 주.) 이는 “산”이 사랑과 선행을 의미함으로부터 분명해진다. “여호와께서 보시리라”가 주님의 섭리, 또는 주님에 의해 설비되는 것을 표시한다는 것은 방금 앞에서 말했다. 이 구절에서 사랑이 아닌 선행(charity)이 말해지는데, 그 이유는 사랑과 선행에는 차이점이 있기 때문이다. 영적 수준 (영적 왕국)의 인간은 선행에 의해 구원되어진다. 강조해서 말하면, 선행으로부터 분리된 신앙에 의해서가 아니다는 말이다. 이는 말씀의 많은 구절들로부터 분명해진다. 선행과 더불은 경우와 신앙과 더불은 경우는 이렇다: 신앙이 없는 선행은 진짜 선행 (100%의 선행)은 못된다, 그리고 선행 없는 신앙은 신앙이 아니다. 선행이 있을런지 모른다고 생각된다면 거기에 반드시 신앙이 있어야 한다. 신앙이 있을런지 모른다고 판단된다면 거기에 선행이 (먼저) 존재해야만 한다. 어쨌든 본질 자체는 선행이다; 그 이유가 신앙이라는 씨가 심어질 수 있는 지면은 선행 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 둘이 서로적으로, 상호적으로 결합함으로부터 천국의 결혼, 즉 주님의 왕국이 있다. 신앙이 선행 안에 심어지지 않으면, 그 신앙은 단지 기억 속의 지식일 뿐이다. 그 이유가 기억에서 한발자국도 더 진전되지 않은 꼴이기 때문이다; 거기에 신앙을 받는 심정 속의 애착이 없다; 그러나 신앙이 선행 안에 심어질 때, 즉 생활 안에 심어질 때, 신앙은 총명과 지혜가 되어간다. 신앙이 없는 선행은 마치 어린이나 직바른 이방인들과 같은 경우에 해당되고, 이 선행은 신앙이 심어지는 유일한 지면(바탕)이다. 육체의 삶 안에 있지 않은 경우, 즉 다른 삶에서는 선행과 신앙의 관계는 더더욱 역력하다.

15, 16절 여호와의 천사가 천국으로부터 두 번째 아브라함을 불렀다, 16절 그리고 말했다, 나 스스로 맹세하며 여호와께서 말하신다. 그 이유는 네가 이 일을 했고 네 유일한 아들을 보류하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여호와의 천사가 아브라함을 두 번째 천국으로부터 불렀다. 이는 신성으로부터 주님의 더 큰 위로가 있음을 의미한다. 이는 “천국으로부터 부름”의 의미가 위로하는 것임인 바로부터; 그리고 “여호와의 천사”가 주님의 신성 자체이심으로부터 알게 된다. 이 부름이 두 번째라고 말해지는 이유는 처음보다 더 큰 위로이기 때문이다. 첫 위로하심은 12, 13절, 그리고 14절에 포함되는데, 거기서의 주제는 인류로부터 영적 왕국의 인간이라 불리울 이들을 양자로 삼으시는 주님의 섭리이었다. 처음의 위로보다 더 큰 두 번째 위로하심은 이어지는 구절들 (17, 18, 등등 끝 절까지)에서 포함되어 있다. 즉 영적 왕국은 하늘의 별들만큼 번성해질 것, 해안가의 모래만큼 번성해질 것; 그리고 그들이 구원될 뿐 아니라, 선 안에 있는 모든 이도 구원된다는 것이다. 이것들은 주님의 사랑 속의 것들이고, 그러므로 그분은 그것들로부터 위로함을 가지셨다. 그분만이 아니라, 자기의 사랑 속에 있는 것으로부터가 아니면 누구도 위로함을 갖지 못한다.

그리고 말했다, 나 스스로 맹세하며, 여호와께서 말하신다. 이는 이어지는 사항들에 관하여 신성으로부터의 취소할 수 없는 확증을 의미한다. 이는 “나 스스로 맹세하며” 그리고 “여호와께서 말하신다”의 의미로부터 알게 된다; 이는 확증을 포함하는 모두, 실로 신성으로부터의 모두, 즉 그분 자신으로부터의 확증이다. 신성은 그 자체로밖에 어떤 다른 근원으로부터서는 확증할 수 없다; 그리고 신성이 확증하는 것은 취소될 수 없다, 그 이유는 그것은 영원한 진리이기 때문이다. 여호와 또는 주님이 이야기하시는 것은 무엇이든 영원한 진리이다 (마. 24:35), 그 이유가 이것은 진리의 있음 자체로부터 오기 때문이다. 이 구절, 그리고 여타 구절의 경우에서도, 그분이 마치 맹세를 수단으로 하여 그것을 확증하시는 듯 말하여지는 이유는 이렇게 해야 더 진리이다는 이유 때문이 아니라, 그렇게 확증하지 않으면 신성으로부터의 진리를 받지 않는 식으로 말해지는 이유 때문이다; 그 이유가 인간들은 대체로 여호와 또는 주님을 한낱 인간이라는 생각의 범주를 넘기 힘들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간들은 주님에 관해서 이렇게 말할 수 있고 저렇게 주님을 바뀌게 할 수도 있다. 아마 이에 관해서는 말씀을 읽어보면 자주 접하는 대목이다; 그러나 내적 의미에서일 경우, 이 경우는 완전히 다르다. 모든 이 각자 알는지 모르는 것은, 여호와 또는 주님이 맹세를 수단으로 어떤 것을 확증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신성한 진리 자체, 그리고 이 진리의 확증이 위와 같은 본성을 지닌 이들에게로 건너갈 때, 이 진리는 맹세함 비슷한 것으로 바뀌어진다. 이런 점에서의 경우를 말씀에서 보면, 여호와 또는 주님이 내려 오셨을 때, 시내 산 백성들의 눈 앞에서 삼키려드는 불과 연기같이 나타나는 경우이다 (출. 19:18; 신. 4:11, 12; 5:19-21): 천국에서 그분의 영광, 자비 자체조차 거기 백성들의 눈 앞에서의 경우, 또는 악과 거짓 안에 있는 이들에서는 이런 식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이런 경우는 말씀에서 이야기되는 여호와의 말하심들과 행동하심들이라 불리는 것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이상으로부터 알는지 모른 것은, 본문의 표현, 즉 “나 스스로 맹세하며, 여호와께서 말하신다”가 신성으로부터의 취소할 수 없는 확증을 의미함이다.
“맹세하는” 것, 이것이 여호와를 서술할 경우, (악과 거짓에 있는) 인간 속성과 더불어서는 확증을 의미할 수밖에 없는 것을 다른 구절들로부터도 보여질지 모른다; 다윗서에서:
여호와께서 그분의 언약을 영원히 기억하셨다, 그분이 수 천 세대들에게 명령하신 말이다; 이것을 그분은 아브라함과 더불어 만드셨고, 그분의 맹세를 이삭에게 만드셨다
(시. 105:8, 9).
위의 구절에서는 언약과 더불은 경우가 맹세와 더불은 경우와 똑같다. (사실 상) 여호와, 또는 주님께서는 인간과 더불어 언약을 만드시지 않는다, 그러나 사랑과 선행에 의한 결합이 취급될 경우, 이것이 언약같이 행동 안에 장착되어 있다. 시편서에서:
여호와께서 맹세하셨다, 그리고 돌이키시지 않을 것이다, 너는 영원히 성직자이다, 멜게세 댁의 방식에 따라서이다 (시. 110:4).
이것은 주님에 관하여 말해졌다, 그리고 “여호와께서 맹세하셨다”란 신성으로부터의 취소할 수 없는 확증을 표시한다, 즉 그것은 영원한 진리이다를 표시한다.
시편서에서:
나는 내 뽑은 자와 언약을 만들었다, 나는 내 종 다윗에게 맹세했다, 네 씨를 나는 영원히 건립할 것이다, 그리고 대대로 네 왕좌를 건설할 것이다 (시. 89:3, 4).
위 구절은 주님에 관하여서이다: “뽑은 자와 언약을 만드는” 것, 그리고 “다윗에게 맹세하는” 것은 취소할 수 없는 확증, 또는 영원한 진리를 표시한다; “언약을 만드는” 것은 신성한 선 측면에서의 경우이고; “맹세하는”것은 신성한 진리 측면에서 이다 시편서에서:
나는 내 언약을 모독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내 입술로부터 나간 것을 변경하지 않을 것이 다; 내가 내 거룩함에 의해 맹세된 것인 즉, 나는 다윗에게 거짓말하지 않을 것이다
(시. 89:34, 35).
위에서 “다윗”은 주님을 표시한다; 여기서 “언약”은 신성한 선 측면에서이다; 그리고 “내 입술로부터 나간 것”은 신성한 진리 측면에서이다. 이런 이유는 말씀 안에 있는 모든 것은 선과 진리의 결혼 속에 있기 때문이다.
시편서에서:
여호와께서는 진리 안에서 다윗에게 맹세하셨다, 그분은 그것으로부터 돌아서시지 않을 것 이다, 네 몸의 열매로부터 나는 네 왕좌 위에 앉힐 것이다. 그 조건은 네 아들들이 내 언 약, 내가 그들에게 가르칠 내 증거를 지키는 것이다 (시. 132:11, 12).
“여호와께서 진리 안에서 다윗에게 맹세하셨다”란 영원한 진리의 확증을 분명하게 표시한다; 그러므로 “그분은 그것으로 돌아서시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해진다. 다윗이 주님을 뜻한다는 것은 이미 상술했다; 맹세가 여전히 “다윗에게” 있었다고 말해지는 이유는 확증이 자신과 자기의 후손에 관하여 있었다고 그가 믿는 본성 속에 있었기 때문이다; 다윗 역시 자신을 사랑함과 그의 후손을 사랑함 안에 있었고, 이로부터 이말이 자기에 관하여 있은 것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즉, 앞에 말한 대로, 그의 씨가 영원히 건립되어질 것이다는 것, 그의 왕좌는 대대로 이어질 것이라는 것에 관하여서 이다; 그러나 이것은 주님에 관해서 말해진 것이었다,
이사야서에서:
이것은 나에게 노아의 물들(홍수)같이 있다; 그 이유가 내가 노아의 홍수가 땅 위를 더 이 상 지나가지 않도록 맹세했던 대로 같이, 마찬가지로 나는 너에게 분노하지 않을 것이라 맹세했다 (이. 54:9).
위에서 “맹세하는 ”것은 언약을 만드는 것, 그리고 맹세를 수단으로 언약을 확증하는 것을 표시한다. 이것이 언약이었고 맹세가 아니다는 것은 창. 9:11에서 알는지 모른다. 이사야서에서:
여호와께서 맹세하시어 말하기를, 내가 생각한 대로 같이 그것이 꼭 이루어진다
(이. 14:24).
이사야서에서:
여호와께서는 그분의 오른손을 두고, 그리고 그분의 힘의 팔을 두고 맹세하셨다
(이. 62:8).
예레미야서에서:
너희는 여호와의 말을 들어라, 모든 유다야, 이집트의 토지에 거주하는 (모든 유다들이여); 보라 나는 내 위대한 이름을 두고 맹세하였었다, 여호와께서 말하시는 바, 나의 이름은 유 다의 어떤 자의 입에서도 더 이상 명명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이) 말하기를, 이집트의 모 든 토지에서, 주 여호비가 사는 바와 같이 (라고 하며 맹세하지 못할 것이다)
(예. 44:26).
예레미야서에서:
나 스스로를 두고 내가 맹세하여 여호와가 말한다, 보스라는 황무해질 것이다 (예. 49:13)
예레미야서에서:
여호와 체바욷께서 그분의 혼을 두고 맹세하셨다, 정녕 나는 너를 메뚜기만큼 인간들로 채울 것이다 (예. 51:14).
아모스서에서:
주 여호비께서 그분의 거룩함을 두고 맹세하셨다, 보라 날들이 올 것이다 (암. 4:2).
아모스서에서:
여호와께서 야곱의 탁월함을 두고 맹세하셨다, 정녕 나는 그들의 행위들의 어떤 것도 잊지 않을 것이다 (암. 8:7).
위 구절들에서, “여호와께서 그분의 오른 손을 두고 맹세하심”, 그분의 “위대한 이름”을 두고, “그분 자신”을 두고, 그분의 “혼”을 두고, 그분의 “거룩함”을 두고, “야곱의 탁월함”을 두고 등등은 여호와 또는 주님 안에 있는 확증을 의미한다. “여호와의 오른 손”, “여호와의 위대한 이름”, “여호와의 혼”, “여호와의 거룩함”, “야곱의 탁월함”은 주님의 신성한 인간을 의미한다: 그것에 의해서 “맹세함”은 확증함 이었다.
여호와 또는 주님께서 토지를 아브라함, 이삭, 야곱, 또는 그의 후손에게 주신다고 “맹세함”은 내적 의미에서 그분이 천국의 왕국을 그분을 사랑하고 그분에 대한 신앙을 가진 자에게 주신다는 확증을 의미한다. 이들이 말씀에서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아들들, 후손들, 또는 조상들에 의해 뜻해진다; 이것은 가나안의 토지가 그들의 후손에게 주어졌다는 사실에 의해 실제로 표현되었고, 그때 당시 그들과 더불은 교회가 토지 자체 같이 주님의 천국의 왕국을 표현했다. 이로부터 모세의 책에서 말해진다:
너희는 여호와께서 너희의 아버지들에게 맹세하여 그들에게 준다고, 그들의 씨에게 준다고, 젖과 꿀이 흐르는 토지, 지면 위에서 너희의 날들이 길어질지 모른다; 너희의 날들이, 그리 고 너희의 어린이들의 날들이 여호와께서 너희의 아버지들에게 맹세하신 토지 위에서 천국 들의 날들이 땅 위에서 같이 번성할는지 모른다 (신. 11: 9, 21).
이런 구절들로부터 지금 분명해져야만 하는 것은, 여호와의 “맹세하심”은 확증의 표현, 그리고 실로 취소할 수 없는 확증의 표현이다는 것이다. 이것은 이사야서에서 아직 더 분명해진다:
나 자신을 두고 나는 맹세했다, 정의의 말이 내 입으로부터 나가졌고, 되돌아 오지 않을 것 이다, 즉 나에게 모든 무릎이 절하고, 모든 혀가 맹세할 것이다 (이. 45:23).
더욱이 이것은 표현적 유대 교회 속에 있었던 이들에 강요되어 있었기도 했다, 즉 그들이 맹세하여 언약들을 확증할 때, 마찬가지로 서약할 때, 또한 약속할 때, 그리고 보증을 설 때 같은 경우, 그들은 “여호와의 이름을 두고 맹세”해야 했다. 이것이 그들에게 명하여진 이유는, 사실은 그것이 허용된 것이지만, 이렇게 해서 내적 인간의 확증함이 표현되어 있을 수 있도록 해두신 것이다; 하여 그때 당시 여호와의 이름으로 맹세함은 말씀의 여타 사항들 같이 표현적인 것이다. 이것 강요된 것, 즉 허락되어진 것은 모세의 책에서 분명해진다:
너는 여호와 네 하느님을 두려워할 것이다, 그리고 그분을 섬길 것이다, 그리고 그분의 이 름을 두고 맹세할 것이다; 너희는 다른 신들을 쫓아가지 말 것이다 (신. 6:13, 14).
신명기서에서:
너는 여호와 네 하느님을 경외할 것이다, 그분을 너희는 섬기고, 그분에게 너희는 꼭붙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분의 이름을 두고 맹세할 것이다 (신. 10:20).
이사야서에서:
땅에서 자신에게 은총을 비는 자는 진리의 하느님에게 자신의 은총을 빌 것이다, 그리고 땅에서 맹세하는 자는 진리의 하느님을 두고 맹세할 것이다 (이. 65:16).
예레미야서에서:
만일 너희가 되돌아 온다면, 오 이스라엘아, 여호와께서 말하신다, 나에게 너희는 되돌아 올 것이다; 그리고 만일 네가 내 앞으로부터 너의 역겨운 짓을 중단한다면, 흔들리지 말라; 그리고 너희는 맹세할 것이다, 여호와께서 살아계시다, 진리 안에서, 공정 안에서, 그리고 정의 안에서 (맹세할 것이다) (예. 4:1, 2).
예레미야서에서:
만일 그들이 네 이름을 두고 맹세하는 내 백성의 방법들을 확실히 배운다면, 그때 그들은 내 백성의 한 가운데에서 건설되어질 것이다 (예. 12:16).
그들 역시 “여호와의 이름을 두고” 맹세했거나, 또는 “여호와에게” 맹세했다는 것을 이사야서로부터 알런지 모른다:
너희는 이것을 들어라, 오 야곱의 가문아, 이스라엘의 이름에 의해 불리우는 자여, 그리고 유다의 물들(샘)로부터 생겨난 이들아, 여호와의 이름을 두고 맹세하는 이들아, 그리고 진 리 안에서가 아니고, 정의 안에서가 아니면서 이스라엘의 하느님을 들먹이는 자들아
(이. 48:1).
이사야서에서:
그 날에 가나안의 언어를 이야기하고, 여호와 체바욷에게 맹세하는 다섯 성읍이 이집트의 토지에 있을 것이다 (이. 19:18).
여호수아서에서:
회중의 제 1 인 자가 이스라엘의 하느님 여호와를 두고 기브온족에게 맹세했다
(여. 9:18, 19).
이로부터 분명해지는 것은, 그들에게 여호와의 이름을 두고, 또는 여호와에게 맹세하는 것이 허용되었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분명한 것은, 이것은 내적 인간의 확증함을 표현한 것밖에 더 아니다는 점이다. 그러나 알려진 바, 내적 인간, 즉 양심을 가진 이들은 맹세를 수단으로 어떤 것을 확증할 필요가 없다는 것; 고로 그들은 확증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들에게 맹세는 수치스러움의 원인이다. 그들은 실로 어떤 것이 이렇다 하는 어떤 확언을 가지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추론들을 수단으로 진리를 확증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이 그렇다를 맹세하는 것을 그들은 할 수 없다. 그들은 내적으로 속박하는 것을 가지고 있는데, 이를 수단으로 그들은 묶인 상태에 있다. 이것은 양심 속의 것들이다. 이것에 외적 속박을 덧붙이는 것이 맹세이고, 이는 마치 자기가 심정에서 직바르지 않은 것을 그들에게 전가하는 모습이다. 내적 인간 또한 이런 특성 속에 있으므로 그들은 자유함에서 말하고 행동하기를 사랑한다. 그러나 강제적으로는 아니다. 그 이유가 그들과 더불어서는 내적 측면이 외적 측면에 강요할 뿐, 그 반대는 없기 때문이다. 이렇기 때문에 양심을 가진 이들은 맹세하지 않는다; 선과 진리에 대한 지각을 가진 경우, 즉 천적 수준의 인간은 더 더욱 맹세하지 않는다. 이들은 자신에게, 또는 추론들을 수단으로 서로에게 확증조차 하지 않는다, 그러나 오직 이것이 그렇다, 또는 그렇지 않다 하고 말할 뿐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맹세라는 것으로부터 더욱 멀리 떨어져 있다.
이런 이유들 때문에, 그리고 맹세들이 폐지되어져야 하는 표현물의 하나였던 이유로,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도무지 맹세하지 말라고 가르치셨는데, 아래에 그 구절이 있다. 마태복음서에서:
옛적의 그들에 의해 말해진 것, 즉 너희는 거짓 맹세를 말라, 그러나 네 맹세들을 주님에게 이행하라 하고 들었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맹세하지 말라; 천국을 두고도 안 된다; 그 이유는 그것은 하느님의 왕좌이기 때문이다; 땅을 두고도 안 된다; 그 이유가 그 것은 그분의 발판이기 때문이다; 예루살렘을 두고도 안 된다; 그 이유가 그것은 위대한 왕 의 성이기 때문이다; 네 머리를 두고도 맹세하지 말라, 그 이유는 너는 머리카락 하나도 희 게나 검게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너의 의사 전달은 예, 예, 아니오, 아니오 이도록 해라; 이 외에 더 있는 것은 무엇이든 악으로부터 나온다 (마. 5:33-37).
위 말들에 의해 뜻해진 바, 우리는 여호와를 두고, 여호와, 또는 주님 속에 있는 어떤 것을 두고도 맹세함은 절대 하지 말라이다.

네가 이 일을 했기 때문에. 이는 어떤 것이 성취되었음을 의미한다. 이는 설명이 필요 없을 것이다.

그리고 네 유일한 아들을 보류하려 하지 않았다. 이는 최대한도의 시험을 수단으로 (그분의) 인간이 (그분의) 신성과 하나로 되심을 의미한다. 이는 12절에서 설명한 바로부터 분명해진다. 두 구절에서 거의 비슷한 말들이 나열되는데, 여기서는 “나로부터”라는 말은 읽지 않는다. 이 말은 아직 더 하나가 됨이 있을 것이 의미된다 (즉 이 구절쯤에서는 하나가 되심이 끝난 상태이라 “나로부터”라는 말이 없을지 모른다 역자 주) 어쨌든 주님의 인간 본질과 그분의 신성 본질의 하나가 되심은 언제나 더 진전되는 하나가 되심만이, 더 충분한 하나이심만이 있을 뿐임은 우리가 눈치채고는 있어야 할지 모른다.

17절. 나는 너를 확실히 복있게 할 것이다, 그리고 네 씨를 극히 번성하게 할 것인 바, 마치 하늘의 별들 만큼 같이, 해변의 모래 만큼 같으리라. 그리고 네 씨는 네 적들의 문을 상속받을 것이다.

나는 너를 확실히 복 있게 할 것이다. 이는 진리에 대한 애착으로부터 열매 맺게 됨을 의미한다. 이는 “복있음”이 천적, 영적 선으로 풍요해짐을 의미한다로부터; 여기서의 경우, 신앙의 선으로부터, 같은 말로 진리에 대한 애착으로부터 열매있게 만들어지는 것인데, 그 이유는 영적 (왕국의) 인간이 취급되기 때문이다. 여기서 여호와에 의해 아브라함에게, “나는 확실히 너를 복있게 할 것이다”라고 말해지고, 아브라함에 의해 주님의 신성한 인간 측면이 표현되고 있다; 그럼에도 주님을 복있게 할 수는 없다, 그 이유는 그분은 복 자체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분이 복있게 된다 라고 말해지는 것은 구원되는 이들이 그분의 사랑에 일치하는 때에 발생된다. 그러므로 내적 의미에서 여기서 이 말들이 의미하는 것은 이 뒤를 잇는 대목에서 분명해진다. 열매를 맺게 됨이 여기서 말하여지는 이유는 이것이 애착을 서술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음에 뒤잇는 번성함은 거기로부터 있는 진리들을 서술한다.

그리고 나는 극히 번성하게 할 것이다. 이는 진리에 대한 애착으로부터 진리들이 파생됨을 의미한다. 이는 “번성함”이 진리 측면에 관련해 있다로부터 알려진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애착으로부터 있는 진리가 파생됨(갈라져 나옴)을 뜻하는데 방금 설명했다.

네 씨. 이는 신앙의 선 안에 있어 주님의 신성한 인간에 의해 구원되는 영적 (왕국의) 인간을 의미한다. 이는 “씨”의 의미가 선행의 신앙인 바로부터; 또는 같은 말로, 선행의 신앙 안에 있어 인류로부터 구원되는 이들, 즉 영적 (왕국의) 인간들이다. 그들은 주님에 의해 “씨”, 그리고 “왕국의 아들들”이라 불리우는데, 마태복음서에서:
선한 씨를 뿌리는 분은 사람의 아들이시다, 그러나 씨는 왕국의 아들들이다
(마. 13:37, 38).

하늘의 별들 같이. 이는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이 번성함을 의미한다. 이는 “별들”이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들이다로부터 분명해진다. 영적 (왕국의) 인간들이 말씀의 다양한 장소에서 별들에 비교되어진다. 그 이유는 그들이 가진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들 때문이다; 천적 (왕국의) 인간은 지식들을 가지지 않고 지각들을 가지고 있다; 더욱이 별들은 밤에 빛을 낸다, 그리고 영적 왕국의 인간은 달과 별들로부터 같이 밤의 빛을 가지나, 천적 인간은 낮의 빛을 가진다.

그리고 바닷가의 모래 같이. 이는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이 번성함에 상응하여 기억적 지식도 번성함을 의미한다. 이는 바다의 의미가 일반적 측면에서 기억 속의 지식, 또는 그 지식들이 모여짐이다로부터; 그리고 “모래”의 의미는 특별한 측면에서, 또는 세부적 측면에서의 기억 속의 지식이다로부터 알 수 있다. 기억 속의 지식들이 “모래”에 비교되는 이유는 모래는 매우 작은 돌로 만들어져 있기 때문, 하여 내적 의미에서 기억 속의 지식들을 의미하게 된다. 그것들이 “하늘의 별들 만큼”, 그리고 “바닷가의 모래 만큼” 번성할 것이라고 말해지는데, 그 이유는 별들 또는 지식들이 합리성에 관계되고, 바닷가의 모래와 기억 속의 지식들은 자연 (평면)에 관계되기 때문이다. 합리적 인간 속의 것들, 즉 지식들 속의 선과 진리들이 자연적 인간 속의 것들, 기억 속의 지식들과 일치할 때, 그리하여 그것들이 하나를 만들 때. 또는 서로가 상호 확증할 때, 그때 그것들은 상응한다. 인간 당사자가 자신을 거듭나게 할 때 또는 그를 영적으로 만들 때, 주님은 이 상응 쪽으로 인간의 합리적인 것들과 자연적인 것들을 부득이 격하시키신다. 이런 원인으로 해서 본문에서 하늘의 별들과 바닷가의 모래가 언급되어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주님이 보시기에 거듭남의 최소한의 요구 수준 일지라도) 충분하다는 수준에 이를 자는 아무도 존재할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네 씨는 네 적들의 성문을 상속받을 것이다. 이는 선행과 신앙이 이전에 악과 거짓이 있었던 장소를 계승할 것임을 의미한다. 이는 “상속받음”이 주님의 생명을 받는 것임이다로부터; 여기서는 장소를 계승하는 것이다. 그 이유는 선행과 신앙이 이전에 악과 거짓이 있던 장소들 안에 있을 때, 주님의 생명이 거기를 계승할 것이기 때문이다; “씨”의 의미가 선행과 신앙이다로부터; “문(gate)”의 의미로부터, 이는 아래에서 설명한다; 그리고 “적들”의 의미가 악들과 거짓들, 같은 말로 악과 거짓 안에 있는 이들, 이들이 내적 의미에서 “적들, 원수들” 이다로부터 알려진다.
문(성문, 대문)의 의미에 주목해보면, 이 문은 모두 각각의 인간과 더불어 일반적으로 두 문들이 있다; 하나는 지옥을 향하여 열리므로 거기로부터 악들과 거짓들에게 열리어진다; 이 문에 지옥의 악귀들(genii)과 영들(spirits)이 있다; 다른 문은 천국을 향하여 열리는데, 거기로부터 선과 진리들에게 열리어진다; 이 문에 천사들이 있다. 고로 지옥으로 인도하는 문과 천국으로 인도하는 문이 있는 셈이다. 지옥의 문은 악과 거짓 안에 있는 이들에게 열리어진다, 그리고 이들이 있는 곳의 윗부분을 빙둘러 있는 갈라진 틈새를 통하여서만 천국으로부터의 빛이 새어드는데, 이 빛을 수단으로 그들은 생각할 수 있고 추론할 수도 있다; 그러나 천국의 문은 거기로부터 선과 진리 안에 있는 이들에게 열리어진다.
인간의 합리적 마음 안으로 인도하는 두 길들(ways, 방법들)이 있다 – 더 높은 합리적 마음, 또는 내적인 합리적 마음, 이 마음을 통하여 주님으로부터의 선과 진리가 들어간다, 그리고 더 낮은 합리적 마음, 또는 외적인 합리적 마음, 이 마음을 통하여 악과 거짓이 지옥으로부터 올라온다. 합리적 마음 자체는 (천국 쪽과 지옥 쪽의) 중간에 위치한다, 그래서 이 마음에 두 길들이 접하고, 향하고, 관련을 맺고 있다. 합리적 마음 안에 있는 선들과 진리들로부터, 이 마음은 말씀에서 성에 비교되고, 그래서 “성(city)”이라 불리운다. 이것이 성에 비교되기 때문에, 그리고 “성”이라 불리우기 때문에, 문들이 당연히 성에 부착되어 있다. 그래서 성문이 적들 (즉 악귀나 영들)에 의해 포위 공격되고 강습당한다고 자주 (말씀에서) 묘사되기도 한다; 그리고 주님으로부터의 천사들, 즉 주님에 의해 방어된다고 묘사되기도 한다. 지옥의 악귀들이나 영들, 그것들의 악들과 거짓들 일체는 더 낮은 쪽의 문, 또는 바깥쪽의 문 그 이상인 더 (안쪽, 더 위쪽으로)는 갈 수 없다, 여하튼 성 안으로 올 수 없다. 만일 그것들이 성 안으로, 즉 합리적 마음 안으로 진입할 수 있다면, (주님편에서 본다면) 그 인간과 더불은 만사(구원의 섭리)는 끝장이다. 그러나 그것들이 맹습격을 감행해서 성을 차지한 듯 여겨지는 때일 경우, 그 성문은 닫혀진다. 그리하여 아주 조그만 틈새로 극소량이 아닌 이상 천국으로부터의 선과 진리는 합리적 마음 안으로 흘러들지 않는다. 이로부터 이런 합리적 마음의 소유자는 선행의 어떤 것, 또는 신앙의 어떤 것을 더 이상 가지지 못한다, 그 대신 선이 악 안에 존재하게 만들고, 진리가 거짓 안에 존재하게 만들고 만다. 이로부터 이런 인물의 경우, 자기들은 합리적 인간이라 떠벌린다 해도 실상 그는 진실로의 합리적 인간은 아니다. 이로부터 이런 인물은 죽은 자라 불리우는데, 자신 스스로는 남들보다 더 살아있다 말할 것이다. 이렇게 되고 마는 주된 원인은 그들에게 천국의 문이 닫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닫힌 모습이 다른 삶에서는 아주 선명하게 나타나 지각되어진다; 한편 선과 진리 안에 있는 이들에게는 천국의 문이 열리어 있다.
이 절에서 언급되는 특별한 측면에서 다루어지는 “적들의 문”에 주목해보자. 이 문이 인간과 더불어서는 그의 자연적 마음 안에 있다. 인간이 통째로 자연적 수준에 있을 때, 또는 전혀 거듭나지 않고 있을 때, 악들과 거짓들이 문을 점령하고 있다; 또는 같은 말로, 악귀들과 영들이 악들의 탐욕들과 거짓의 설득력(신념)을 가지고 문 안으로 흘러든다; 그러나 인간이 영적으로 되어갈 때, 또는 거듭나질 때, 악들과 거짓들, 같은 말로, 악귀들이나 영들은 문으로부터, 또는 마음으로부터 내몰려진다; 이때 선들과 진리들, 또는 선행과 신앙이 그것들의 장소를 차지한다; 이것이 “네 씨가 네 적들의 문을 상속 받을 것이다”라고 말해진 것에 대한 의미이다. 이것은 인간이 거듭날 경우, 특별한 측면에서 당사자와 더불어 거행된다; 그리고 다른 삶에서도 주님의 왕국으로 들어가는 이들의 경우도 동일하다; 이는 일반적 측면에서의 몸, 즉 교회에서도 거행되는데, 이것은 많은 것들로 구성된다.
위 상황은 말씀에서 이스라엘의 아들들이 가나안의 나라들을 몰아내는 것으로 표현되어지고 있다. 글자 의미 측면에서 이 몰아냄이 “네 씨가 네 적들의 문을 상속받을 것이다”에 의해 뜻해진다; 그러나 내적 의미에서 위에 상술한 것이 의미되어져 있다. 그러므로 고대 시대 때에 이 구절의 말은 결혼에 들어가는 이들에게 복을 비는 관습적 말이 되어버렸다; 라반이 자기 여동생 리브가를 이삭에게 약혼하여 떠나 보낼 때 동생에게 했던 축복의 말로부터도 확인된다:
우리의 누이야, 너는 천 만인의 어미가 되라, 그리고 네 씨가 너를 미워하는 자들의 문을 상속받으라 (창24:60).
이와 같은 것들이 말씀에서 “적들의 문” 또는 “미워하는 자들”에 의해 의미되는 것은 아래 구절에서 알는지 모른다. 이사야서에서:
나는 기근으로 네 뿌리를 죽일 것이다, 그리고 나는 너로부터의 남은 것들을 살육할 것이 다. 울부짖거라, 오 (성)문이여; 아우성쳐라, 오 성이여; 너는 녹아스러질 것이다, 오 블레 셋 너희 모두여, 그 이유가 북으로부터 연기가 오기 때문이다 (이. 14:30, 31).
“기근으로 뿌리를 죽이는 것, 그리고 남은 그들을 살륙하는 것”은 주님에 의해 내면적으로 저장되어 왔었던 선들과 진리들을 거두어 가버리심을 표시한다. “남은 그들”이 이런 것을 뜻하는 것은 이미 살핀 대목들에서 알런지 모른다. “문”은 내면의 것들, 또는 합리적 마음에 접근함을 표시한다; “성”은 합리적 마음, 같은 말로, 그것 안에 있는 선들과 진리들을 표시한다; “불레셋”은 신앙의 지식들에 관한 기억 속의 지식을, 같은 말로 신앙의 지식들에 관한 기억 속의 지식에 있는 이들, 그러나 신앙의 선들에 있지는 않은 이들을 표시한다; “북으로부터의 연기”는 지옥으로부터 거짓이 있다를 의미한다.
이사야서에서:
텅빈 성은 부셔져 내려질 것이다, 모든 집은 아무도 들어가지 못하도록 잠궈질 것이다; 포 도주 때문에 거리들에서 아우성이 있다; 모든 즐거움은 황무해질 것이고, 토지의 환희는 추 방될 것이다, 그리하여 도성 안에 남은 것은 황폐될 것이고, 그리고 성문은 황폐함으로 부 셔져 있을 것이다, 그 이유는 그것이 땅의 한 가운데에, 백성 사이에 있기 때문이다
(이. 24:10-13).
“부셔져 내릴 텅빈 성”은 진리가 박탈된 인간 마음을 표시한다; “모든 집이 잠궈질 것이다”란 선이 없음을 표시한다. “포도주 때문에 거리들에서의 아우성”은 거짓의 상태를 표시한다. “황무해진 즐거움”은 진리를 서술한다; “추방되는 토지의 환희”는 선을 서술한다; 이로부터 분명해지는 것은, “도성에 남아있는 것이 황무해질 것이다”에 의해, 그리고 “문이 황폐함으로 부셔질 것이다”에 의해 의미되는 것에 관해서이다; 악과 거짓이 지배하는 것밖에 없을 때, 문이 황무해진다고 말해진다.
예레미야애가서에서:
시온의 길들이 슬퍼한다, 그 이유는 정해진 절기에 아무도 오지 않기 때문이다; 그녀의 모 든 문들이 황무하다, 그녀의 성직자들이 한숨 쉰다, 그녀의 처녀들이 괴로워한다, 그리고 그녀 자신이 쓴맛 안에 있다; 그녀의 대항자들이 머리가 되었다, 그녀의 적들은 안전하다, 그 이유는 여호와께서 그녀의 많은 불법 때문에 괴로워하시기 때문이다; 그녀의 자녀들이 대항자 앞에서 포로되어 가버렸다 (애. 1:4, 5).
“슬퍼하는 시온의 길”은 선으로부터의 진리들이 더 이상 있지 않음을 표시한다. “모든 문들이 황무해짐”은 접근 가능한 모든 방법들이 거짓들에 점령되었다를 표시한다; “적들이 머리가 됨”은 악들이 통치함을 표시한다.
예레미야애가서에서
여호와께서 방어벽과 시온의 딸의 성벽을 슬퍼하게 만드셨다; 그들은 다함께 시들어진다; 그녀의 문들은 땅으로 가라앉았다; 그분은 그녀의 빗장들을 파괴하고 부수셨다; 그녀의 왕 과 그녀의 제 1 인 자들은 나라들 사이에 있다; 법이 없다; 그렇다 그녀의 예언자들이 여 호와로부터 환상을 발견하지 못한다; 모든 그들의 적들이 나를 향하여 입을 벌리고 있다; 그들이 이빨을 갈아 소리를 내고 있다; 그들이 말했다, 우리가 그녀를 삼켰다; 이것이 정녕 우리가 기다린 날이었다; 우리는 발견했었고, 우리는 그것을 보았었다 (애. 2:8, 9, 16).
“땅으로 가라앉은 문들”은 악들과 거짓들에 의해 점령된 자연적 마음을 표시한다; “그녀의 왕과 그녀의 제 1 인자들이 나라들 사이에 있음”은 진리들이 악들 안에 침수당해 있음을 표시한다.
모세의 책에서:
먼데로부터, 땅의 끝으로부터 나라가 너희 모든 문들에서, 네 모든 토지에서 너희를 처부술 것이다; 고로 네 적이 너희를 괴롭게 할 것이다 (신. 28:49, 52, 53).
이것은 모세가 백성에게 그들이 가르침과 규례에 남아있지 않을 경우, 그들에게 있을 저주들을 미리 말한 것들 중의 하나이다. 즉 “땅의 끝으로부터, 먼데로부터의 나라”는 내적 의미에서 악들과 거짓들을 표시한다, 또는 악과 거짓 안에 있는 이들을 표시한다; “모든 문들에서 포위공격함”은 선과 진리에의 모든 접근을 차단함을 표시한다.
나훔서에서:
보라, 너희 한 가운데 있는 네 사람들(군인들)은 여인들이다, 네 토지의 문들이 네 적들에 게 활짝 열려져 있다, 불이 네 빗장들을 삼켰다; 포위됨을 위해 물을 길어 놓아라; 네 성곽 을 튼튼히 하라; 진흙을 밟아 회반죽을 만들어 강한 벽돌 굽는 가마를 만들어라
(나. 3:13, 14).
“네 토지의 문들이 네 적들에게 활짝 열리어 있다”는 악들이 선이 있어야할 장소를 점령하는 것을 표시한다. 사사기서에서:
대로(고속도로)가 차단되었다, 그래서 그들은 샛길을 통하여 걸었다, 그들은 구부러진 길들 을 통하여 갔다, 마을들이 이스라엘에서 중지되었다. 그는 새로운 신들을 선택했다; 그때 문들에 맞서 전쟁이 있었다; 이스라엘 사만 명 안에 방패나 창이 있더냐?
(사. 5:6-8).
위는 드보라와 바락의 예언의 한 대목이다; “문들에 맞선 전쟁”은 선들과 진리들에 맞섬을 표시한다.
다윗서에서:
문에 거주하는 자들이 나를 향하여 작당을 한다, 독주를 마시는 그들이 노래들을 부른다 (시. 69:12).
“문에 거주하는 그들”은 악들과 거짓들, 또한 지옥의 것들을 표시한다. 에스겔서에서:
하느님의 환상 안에서 그는 북쪽을 바라보는 안쪽의 문의 입구 쪽으로 나를 데려왔다. (거 기서도 그는 역겨운 것들을 보았다) (겔. 8:6, 14, 15).
“북쪽을 바라보는 안쪽의 문의 입구”는 내면의 거짓들이 있는 장소를 표시한다; “북쪽을 향하는 여호와의 집의 문”은 내면의 악들이 있는 장소를 표시한다. (2121-2124항도 참조하라).
다윗서에서:
보라, 아들들은 여호와의 소유물이다, 그리고 자궁의 열매는 그분의 상급이다; 용사의 손에 있는 화살처럼, 젊은 이의 아들들은 그러하다. 자기 화살통을 이것들로 채우는 자에게 복이 있다; 그들은 수치를 당하지 않을 것이다, 그 이유는 그들이 문에서 적들과 이야기할 것이 기 때문이다 (시. 127:3-5).
“문에서 적들과 이야기하는 것”은 악들과 거짓들, 지옥들을 두려워하지 않음을 표시한다. 이사야서에서:
그 날에 여호와 체바욷께서 재판석에 앉은 자에게 공정의 영을 위하여 계실 것이고, 문쪽 으로 전투로 되돌아가는 자들에게 강함을 위하여 계실 것이다; 그리고 또한 이들은 포도주 를 통하여 미친 짓을 하고, 독주를 통하여 옆길로 빠진다 (이. 28:5-7).
이사야서에서:
그들은 말을 가지고 사람을 죄짓게 만드는 짓을 끊을 것이다, 그리고 문에서 타이르는 자 를 위해 올무를 놓는 짓을 중단할 것이다; 그리고 의로운 자가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비 켜 있게 만드는 짓도 중단할 것이다 (이. 29:20, 21).
이사야서에서:
엘람은 사람의 병거, 그리고 마병 안에서 화살통을 짊어졌다; 기르인은 방패를 벗었다; 그 리고 네 아름다운 골짜기들은 병거들과 마병들로 가득찼다; 정녕 그들은 자신들을 문에 두 었다, 그리고 그는 그 날에 숲의 집의 무기들을 바라보았다 (이. 22:6-8).
예레미야서에서:
유다는 슬피 울었다, 그리고 거기로부터의 문들이 슬퍼했다; 그들은 땅에 대고 애통했다, 그리고 예루살렘의 외침이 가버렸다; 그들의 귀족들이 자기의 아랫 사람을 물들(우물)쪽으 로 보냈다; 그들이 구덩이들에 왔으나, 그들은 물들을 찾지 못했다 (예. 14:2, 3).
예레미야애가서에서:
원로들이 문으로부터 중지되었다, 젊은 이들은 그들의 음악으로부터 중지되었다
(애. 5:14).
위 인용 구절로부터 알게 되는 것은 “적들의 문”이 의미하는 것이 지옥, 또는 지옥의 영들, 계속적으로 선들과 진리들을 공격하는 지옥의 영들이다는 것이다. 이미 말한 대로 그것들이 인간들과 더불어 앉은 자리는 인간의 자연적 마음이다. 그러나 인간이 선들과 진리들을 받으려 할 경우, 그때 지옥의 영들은 주님에 의해 그것들의 자리로부터 내쫓긴다; 그리고 그것들이 몰아내짐에서, 천국의 문, 또는 천국 자체가 열리어진다. 이 문 역시 말씀의 다양한 장소에서 언급되고 있다. 이사야서에서:
유다의 토지에서 노래하라: 우리는 강한 성을 가지고 있다. 그분은 성벽들과 누벽들을 의해 구원함을 지정하셨다; 너희는 문들을 열어라, 그리고 성실을 지키는 의로운 나라가 들어갈 것이다 (이. 26:1, 2).
이사야서에서:
고로 여호와께서 그의 기름부은 자, 고레스에게 말한다, 나는 그의 오른 손을 붙잡아 그 앞 에 나라들이 복종케 할 것이다; 그리고 나는 왕들의 허리를 풀게하여 그 앞에서 문들을 열어놓게 할 것이다, 그리고 성문들이 닫히지 않을 것이다; 나는 네 앞에서 갈 것이다, 그 리고 구부러진 길을 곧은 길로 만들 것이다, 그리고 나는 놋쇠의 문들을 조각으로 부술 것 이다, 그리고 철 빗장을 분리되게 자를 것이다 (이. 45:1, 2).
이사야서에서:
낯선 자의 아들들이 네 성벽들을 건설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왕들이 너희를 섬길 것이 다; 그들은 네 문들을 계속적으로 열 것이다, 그것들은 낮에도 밤에도 닫혀있지 않을 것이 다; 폭력이 네 토지에서 더 이상 들려오지 않을 것이다, 네 경계선 안쪽에서는 황폐해짐과 파괴함이 없을 것이다; 그리고 너는 네 성벽들을 구원이라 부를 것이다, 그리고 네 문이 찬 양한다 (이 60:. 10, 11, 18).
이사야서에서:
문들을 통하여 가라, 통하여 가라; 너는 백성들을 위하여 길을 준비하라, 평평하게 하라, 큰 길을 평평하게 만들어라; 너는 시온의 딸에게 말하라, 보라 구원이 온다 (이. 62:10-12).
미가서에서:
그들은 문들을 통하여 지날 것이다, 그리고 그런 까닭에 밖으로 나갈 것이다, 그리고 그 들의 왕이 그들 앞에서 지날 것이다, 그리고 여호와가 그들의 (지나감의) 시작에서 (먼저) 지나실 것이다 (미. 2:13).
다윗서에서:
너희 머리들을 들어 올려라, 오 너희 문들아; 그리고 너희는 들어 올려졌다, 너희 영원히 지속되는 문들아; 그리고 영광의 왕이 오실 것이다. 영광의 왕은 누구신가? 강하시고 용사 이신 여호와, 전투에 능하신 여호와이시다. 너희 머리들을 들라, 오 너희 문들아; 그것들을 들어 올려라, 너희 영원히 지속되는 문들아 (시. 24:7-10).
시편서에서:
여호와를 찬양하라, 오 예루살렘아; 네 하느님을 찬양하라, 오 시온아: 그 이유가 그분은 네 문들의 빗장들을 튼튼해지게 하셨다, 그분은 네 안의 네 자녀들에게 복을 주셨다
(시. 147:12, 13).
위 인용 구절로부터 분명해지는 바, “천국의 문”은 천사들이 인간과 더불어 있는 곳이다는 것, 즉 주님으로부터 선과 진리의 유입이 있는 곳이다; 고로 이미 말했듯, 두 문들이 있다. 이 두 문들에 관해 주님께서 마태복음서에서 말하신다:
너희는 좁은 문을 수단으로 안으로 들어가라; 그 이유가 폭넓은 문과 넓은 길은 파멸로 인 도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많은 이들이 거기로 가고 있다; 그 이유는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 이 좁고 협소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을 발견하는 자는 매우 적다
(마. 7:12-14; 눅. 13:23, 24).
더욱이 새 예루살렘에 대한 문들과 새 성전에 대한 문들은 에스겔서에서 많이 취급되고 있다, 그리고 계시록에서 요한에 의해 많이 다루어진다. 이 문은 천국으로의 입구들을 의미한다. (에스겔. 40:6-19; 43:1, 2, 4; 44:1-3; 46:1-9, 12; 48:31-34; 계. 21:12, 13, 21, 25; 22:14; 이. 54:11, 12). 이로부터 예루살렘은 “벡성들의 문”이라 불리운다 (미. 1:9; 옵 13절).

18절. 그리고 네 씨 안에서 땅의 모든 나라들이 복있을 것이다. 그 이유는 네가 내 음성을 경청했기 때문이다.

네 씨 안에서 땅의 모든 나라들이 복있을 것이다. 이는 선 가운데 있는 모든 이의 구원을 의미한다. 이는 복있음이 천적, 영적 선으로 풍요로워짐을 의미함에서; 여기서는 구원되는 것을 뜻한다고 말한 이유는 구원되는 이들에 관해 말하기 때문이다. (“복있다”는 말은 포괄적인 의미를 가진다는 것은 널리 알려져 있다); “씨”의 의미가 선행으로부터의 신앙이다로부터; 그리고 “땅의 나라들”의 의미가 선 안에 있는 이들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더욱이 위 말들에는 아래와 같은 비밀들이 포함되어 있다: (여기서 “땅”인) 교회를 통하여 교회로부터 있는 이들의 구원이 있다; 방금 서술했듯, “네 씨”가 선행으로부터의 신앙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교회 내에 있는 이들보다 선행으로부터의 신앙 안에 있는 다른 사람은 없다, 그 이유가 선행으로부터의 신앙은 생활의 선에 인접한 교리의 진리이기 때문이다. 땅 위에 있는 주님의 왕국은 선 안에 있는 모든 이들에 존재한다. 이들이 땅위 어디에 흐트러져 있든 여전히 주님의 교회로 존재하고, 이는 마치 우리의 신체 기관들이 하나의 몸체를 구성해가듯 하는 경우와 같다. 이와 꼭같게 천국들 안에 주님의 왕국이 있다, 거기서 전체 천국은 한 사람을 표현하는 바, 웅대한 사람 (the grand man)이라 불리운다; 그리고 경이로운 이것이 지금까지 알려져 있지 않은 것은, 인간의 신체의 모든 부분들이 천국에 있는 사회들에 상응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때때로 말해지는 바, 어떤 사회는 머리 영역에, 어떤 사회는 눈의 영역에, 또는 가슴 등등에 속한다는 것이다. 이 상응에 관하여는 단독으로 주님의 신성한 자비로부터 말할 것이다.

땅 위 주님의 교회와 더불은 경우도 위 웅대한 사람과 같다. 주님의 교회는 신체의 심장과 폐와 같다; 한편 교회 밖의 사람들은 심장과 폐들로부터 지탱하고 사는 몸의 부분들에 응답하고 있다. 그러므로 땅 위 어딘가에라도 교회 없이 인류는 존속할 수 없었음은 분명하다. 마치 몸이 심장과 폐들 없이 존속할 수 없는 경우와 비슷하다. 이 원인으로부터 어떤 교회가 종말을 고하면, 즉 어떤 선행도 교회 안에 없게 되어 교회 아님이 되어갔을 때, 새로운 교회가 주님의 섭리적 차원에서 항상 일으켜졌던 것이다; 마치 “사람”으로 불리운 태고 교회가 멸해지자, “노아”라 불리운 새로운 교회가 주님에 의해 창조되었다, 이것이 홍수 이후 고대 교회였다; 그리고 이 교회가 퇴보되어, 무용지물 수준으로 전락되었을 때, 유대인과 이스라엘족에게 표현 교회가 조직되었다; 그리고 이 교회 또한 무효력이 되었을 때, 그때 주님께서 세상에 오셨고, 다시 새로운 교회가 설립되었다. 이는 이 교회를 통하여 천국이 인류와 결합되도록 하시려는 목적을 위하여서 였다. 이것이 또한 “네 씨 안에서 땅의 모든 나라들이 복있을 것이다”에 의해 의미되는 것이다.

그 이유는 네가 내 음성을 경청했기 때문이다. 이는 주님의 인간 본질이 그분의 신성 본질과 합일하심을 수단으로를 의미한다. 이는 진행된 모두로부터 분명해지고, 이로부터 이것이 결말이기도 하다. “음성을 경청함”은 그분이 최대 한도의 시험을 수행하셨음을 의미한다, 고로 그분의 인간 본질이 그분의 신성 본질에 하나가 되신 것이다. 주님의 인간 본질이 그분의 신성 본질과, 그분의 신성 본질이 그분의 인간 본질과 하나가 되심은 계속적인 시험과의 전투와 승리하심에 의해서였다에 대하여는 이미 살폈다; 그리고 이 합일을 수단으로 그분은 인류를 구원하셨다. 이로부터 인류는 구원의 모든 사항들을 가진다.

널리 퍼트려진 견해는, 아버지께서 가장 고된 것, 십자가의 죽음을 포함하는 어려운 것들을 당해내도록 아들을 보내셨다는 것; 고로 아들의 수난과 공적을 방관하심(구경만 하심, looking upon)으로 그분은 인류 위에 자비를 가지셨다는 것이다. 그러나 조금만 차분히 생각해보려는 사람이라면 금방 와닿는 것은, 여호와는 아들의 당하는 꼴을 구경만 하심으로 자비를 가지시지 않을 것이란 추정이다, 그 이유가 그분은 자비 자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님이 세상에 오심 속의 비밀들은 이렇다: 그분은 자신 안에서 신성을 인간에, 그리고 인간을 신성에 하나가 되신 것; 이것은 최고로 비통한 시험들을 통하지 않고는 끝장을 낼 수 없는 것이었다; 고로 이 합일을 수단으로 천적 선도, 영적 선도, 자연적 선 마저도 남아있지 않은 인류에게조차 구원의 섭리는 닿게 되었다; 선행의 선 안에 있는 이들을 구원하는 것이 위 주님의 합일이다. 자비를 보이시는 분은 주님 자신이다.

19절. 그리고 아브라함은 그의 소년들에게 되돌아 왔다. 그리고 그들은 일어났다. 그리고 브엘세바로 함께 갔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브엘세바에 거주했다.

아브라함은 그의 소년들에게 되돌아 갔다. 이는 그분의 이전의 합리성과 다시 결합함을 의미한다. 이는 “소년들”의 의미가 이전의 합리성, 또는 인간적일뿐인 합리성이다로부터, 이것이 신성한 합리성을 섬긴다; 그리고 “그들에게 되돌아 옴”의 의미가 결합하는 것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주님은 단지 인간적일 뿐인 합리성을 그분께서 가장 비통한 시험들을 수행하셨을 때 분리하셨다는 것은 5절에서 설명하였다; 그리고 시험 후에 그분은 자신에게 다시 이 합리성을 결합되게 하셨는데, 앞서 설명했다, 그리고 이런 사항들이 이 절 안에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일어났다. 이는 등차의 더 큰 수준에서 승강됨을 의미한다. 이는 “일어남”이 말씀에서 언급될 때, 의미된 것의 어떤 승강됨을 의미함에서 알게 된다; 여기서, 시험 후에 합리성의 승강이다; 그 이유가 시험들 후에 합리성은 언제나 승강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은 인간과 더불어서도 역시 거행된다. 인간이 이겨내는 모두 각각의 시험은 당사자의 마음, 그리고 그 마음에 속하는 것들을 승강되게 한다; 그 이유가 그는 그의 선들과 진리들을 확증하고, 새로운 것을 보태기 때문이다.

그리고 브엘세바로 함께 갔다. 이는 신앙과 선행의 교리 안에서 발전함, 이 교리는 신성이다, 그리고 이것에 인간의 합리적인 것들이 인접되는 발전을 의미한다. 이는 “브엘세바”의 의미가 신성인 선행과 신앙의 교리, 이 교리에 인간의 합리적인 것들이 인접되는 것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인간의 합리적인 것들이 “소년들”에 의해 의미되는 것; 그리고 그것들이 인접한 교리가 신성이었다는 것이 그들이 아브라함과 함께 가고 있음에 의해 의미되고 있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브엘세바에 거주했다. 이는 주님이 이 교리 자체이심을 의미한다. 이는 “거주함”의 의미로부터; 아브라함의 표현으로부터; 이미 설명한 “브엘세바”의 의미로부터; 그리고 동시에 진행되는 사항들로부터 분명해진다. “브엘세바에 거주하는 것”은 교리 안에 있는 것이다, 그러나 주님을 서술할 경우, 이것은 교리이다는 것; 천국 안에 거주하신다는 말 역시 주님에 관해서 말해질 경우, 그분은 천국 안에 계실 뿐 아니라, 그분 자신이 천국이시다; 그 이유가 그분은 천국의 모든 것이시기 때문이다. 주님이 말씀이시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므로 주님은 교리 이시다. 그 이유가 모든 교리는 주님으로부터 있기 때문이다. 말씀에 있는 교리의 모든 것은 주님으로부터 있고 주님에 관해서이다. 말씀의 내적 의미에서 취급되는 것은 주님과 그분의 왕국밖에 없다. 이는 수 차례 설명해오고 있다. 말씀의 내적 의미에서 특별하게 취급되는 것은 주님의 신성한 인간이다; 그리고 인간에 관련되는 말씀 안에 있는 교리의 모든 것은 그분을 예배하고 그분을 사랑하는 것이다.

20, 21, 22, 23절. 이 말들 이후 아브라함에게 이렇게 전해왔다, 말하기를, 보라 밀가, 그녀 역시 당신의 형제 나홀에게 아이를 낳아주었다. 21 그의 첫 출생은 우즈, 그의 형제는 브스와 아람의 아비 그므엘과 22 게셋과 하소와 빌다스와 이들랍과 브드엘이다. 23 이 여덟 사람은 아브람의 형제 나홀의 처 밀가의 소생이며 브드엘은 리브가를 낳았다.

이 말들 후에. 이는 교회 내에 있는 이들에 관련하여 행해진 것들을 의미하는데, 이는 “말들”의 의미가 실제적인 것들이다로부터 분명해진다. 근원적 언어에서 어떤 것들(things)이 “말들(words)”이라 불리운다; 고로 “이 말들 후에”는 어떤 것들이 행해진 것을 뜻한다. 13절로부터 이 구절까지의 진행에서, 주님의 신성한 인간에 의해 영적 왕국의 인간의 구원이 취급된다, 그리고 참으로 교회 내에 선 안에 있는 이들의 구원이다. 이들이야말로 진실로 영적 왕국의 인간에 속할 이들이다, 모든 영적 왕국의 품질은 이로부터 있다. 그러나 말씀을 가지지 않았기 때문에 교회가 없는 나라들, 고로 신앙의 진리들 안에 있지 못한 이들은 그들이 신앙의 진리들 안에서 가르침을 받을 때까지 진실로 영적 왕국의 인간이 되지는 못한다. 그래서 세상에서 신앙의 진리들에 관해 가르침을 받지 못해왔던 나라들의 인간들 중 서로의 선행과 순종함 안에서 살아왔었던 이들은 주님의 섭리로부터 다른 삶에서 훈육되어진다. 이때 그들은 신앙의 진리들을 쉽게 받고, 영적 왕국의 인간이 된다.

주님의 신성한 인간에 의해 구원되어지는 교회 내에 있는 이들이 진행해 온 것들 안에서 취급되었는 바, 이 장의 끝에로 이어지는 것들에서 구원되는 교회로부터 있는 이들이 취급되어진다, 그리고 이들이 나홀의 아내 밀가로부터 아브라함의 형제 나홀과 그의 소실 르우마에게 출생한 이들에 의해 의미되었다: 이것 역시 시리즈로 이어진다. 말씀의 내적 의미에 친숙해있지 않은 이들은 이런 사람들이 데라의 족보와 관련될 뿐이고, 이것들은 이삭의 아내인 리브가, 그리고 또한 브드엘 때문에 있게 되는 그의 손녀 레아와 라헬, 야곱의 아내들을 언급하기 위한 부속물 수준이다고 상상할 수 있다. 그러나 여러 번 증명하고 말했던 것 중 하나는, 말씀에 있는 모든 이름들은 실제적인 것들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실제적인 것들을 의미하지 않으면, 말씀이 신성할리 만무하고, 그저 세상의 널려진 책 중의 하나일지 모른다. 그러므로 분명한 것은, 뒤따르는 이런 이름들의 나열은 주님의 영적 (왕국의) 교회와 시리즈(series) 측면에서 관련된다는 것, 이 관련된 것이 이방인들 사이에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아브라함의 형제 나홀의 언급을 통하여 이방인들 중 선으로부터 형제다운 사랑 안에 있는 이들이 의미될는지 모른다.

아브라함에게 이런 말이 들려왔다, 말하기를. 이는 주님께서 지각하심을 의미한다. 이는 “말이 들려옴(tell)”이 생각하고 반추해봄이다로부터; 그리고 “말한다 (saying)”가 지각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주님이 반추하시고 지각하심이 내적 의미에서 취급되는데, 이것이 역사적 형체에서는 “말이 들려오고 말하고”라는 표현으로밖에 더 기록할 길이 없다. 반추해봄과 지각함 자체가 내적으로 말이 들려옴과 말함이다.

보라, 밀가, 그녀 역시 당신의 형제 나홀에게 자녀를 낳아주었다. 이는 선으로부터 형제다운 사랑 가운데 있는 교회로부터의 사람들을 의미한다. 이는 밀가와 나홀을 취급한 창. 11:27에서 말했다. 그 이유가 데라는 세 아들을 두었다. 아브라함, 나홀, 하란이다; 그들이 다른 신들을 예배했었기 때문이다. 밀가는 하란의 딸이었고, 나홀의 아내가 되었다. 그리고 하란은 갈대아의 우르에서 데라 앞에서 죽었다. 이로부터 “밀가”와 “나홀”에 의해 의미되는 것, 즉 “밀가”에 의해서는 이 나라들의 진리가, 그리고 “나홀”에 의해서는 그들의 선이 의미되고 있다.

이방인들 사이에도 진리들이 있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 이유가 원래 이방인의 나라들 사이에도 지혜와 총명이 있어왔다고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즉 그들은 한분 하느님을 인정했고, 거룩한 방식에 따라 그분에 관한 것을 기록했다; 또한 그들은 혼은 불멸하다는 것, 사후 삶이 있다는 것, 또한 선한 자에게 행복이, 악한 자에게 불행이 있다는 것을 알고 인정했다; 더 나아가, 그들은 십계명과 같은 법을 자기들의 법으로 가졌다는 것, 즉 하느님이 예배되어져야 한다는 것, 부모는 존경되어야 한다, 살인해서는 안된다, 도적질 말라, 간음하지 말라, 타인의 재산을 시기하지 말라 등등이다; 그들은 이 계명의 외적 측면들에 만족하지 않고 더 나아가 내적 측면에서도 만족하고 있었다.

위 사항은 오늘날의 경우도 똑같다; 땅의 각 처로부터 더 예절바른 이방인들은 위 주제들을 놓고도 기독인들보다 더 나은 것을 이야기한다; 그들은 더 낫게 말할 뿐아니라 그렇게 살고 있다. 위 진리들과 여타 다른 진리들이 이방인들 사이에 있고, 그들이 주님으로부터 가지는 선들과 그 진리들을 결합하고 있다, 이런 결합으로부터 그들은 한층 더 많은 진리들을 받을 수 있는 상태에도 있다, 그 이유는 진리 간에는 서로의 상관 관계가 있어 이 진리는 저 진리를 인식하여, 양쪽의 진리가 쉽게 제휴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세상에서 선 안에서 있어왔었던 이들은 다른 삶에서 진리들을 쉽게 받는다. 그들과 더불어 있는 거짓들은 그들의 선과 결합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들을 분리할 수 있는 방법만 궁리할 뿐이다. 결합되어왔었던 거짓들은 남아 있으나 응용되었던 거짓들이 분리될 뿐이다; 그리고 거짓들은 인간들이 신앙의 진리를 배워 자신에게 주입할 때 분리되어진다. 신앙의 진리 모두 각각은 거짓인 것을 옮겨놓아 분리되어 있게 한다, 하여 결국 인간이 그것에 반대하고 금하도록 한다. 이런 모두로부터 우리는 어떤 종류의 인물이 밀가가 아브라함의 형제, 나홀에게 낳은 아들들에 의해 의미되는지, 즉 선으로부터 형제다운 사랑 안에 있는 이들로부터 있는 이들에 의해 의미되는지 이다.

우즈는 첫 출생, 그리고 브스는 그의 형제, 그리고 아람의 아비 그므엘과 게셋과 하소와 빌다스와 이들랍과 브드엘, 이는 다양한 종교들과 예배 양식을 의미한다. 이는 앞에서 말했던 것, 즉 이름들이 실제적인 것들을 의미한다. 이런 이름들이 의미하는 것들은 종교들과 그 종교 예배의 양식들이다, 마치 창. 5장과 11장에서 발견되는 이름에 의해 의미되는 것과 같다. 그러나 여기서 말해지는 각 이름과 각 아들에 관해서는 자세히 말해질 수 없다. 그 이유는 단지 이름뿐이어서 이다. 우즈와 브스는 예. 25:20, 23에서도 명명되고 있다. 그러나 그나마 다른 이름들은 이렇지도 않다. 우즈는 애가서 4:2; 욥. 1:1에서도 찾아진다.

브드엘이 리브가를 낳았다. 이는 선으로부터의 진리에 대한 그들의 애착을 의미한다. 이는 뒤잇게 되는 창. 24장에서 브드엘과 리브가의 표현으로부터 분명해질 것이다.

이 여덟을 밀가가 아브라함의 형제 브드엘에게 낳았다. 이는 구원되는 이들의 두 번째 계층(class)을 의미한다. 이는 여덟의 의미로부터; 그리고 “밀가가 아브람의 형제, 나홀에게 낳았다”라고 다시 말해짐으로부터 분명해진다. 여덟 째 날이 이어지는 주(간)의 첫 날이기 때문에, “8”은 이전에 지나가버렸던 것과 구분되는 어떤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그러므로 이것은 또 다른 계층을 표시하고, 이 의미의 표현을 위해 숫자 8이 첨가되었다. 밀가가 “아브라함의 형제, 나홀에게 낳았다”란 선으로 형제다운 사랑 안에 있는 교회로부터의 이들을 의미한다 (2863, 2865항). 여기는 결말인 바, 같은 것을 의미하고, 다시 그들이 구원된다는 사실이 보태어져 있다.

24절. 그리고 그의 소실, 그 이름은 르우마였다. 그녀 역시 데바, 그리고 가합, 그리고 다하스, 그리고 마아가를 낳았다.

그의 소실의 이름은 르우마였다. 이는 선 가운데 있고 우상 예배 안에 있는 이방인들을 의미한다. 이는 이미 진행되어온 대목들로부터 분명해진다; 그 이유가 이전의 장소에서 나홀의 아내로부터 그에게 출생한 아들들에 의해 의미된 이방인들었고, 이 장소에서는 그의 소실로부터 태어난 이들에 의해 의미된 이방인들이기 때문이다. 아내로부터의 이들에 의해서는 선으로부터 형제다운 사랑 안에 있는 교회를 벗어나 있는 이방인들; 이 구절에서 의미된 이들은 선 안에 있고 우상 예배 안에 있는 교회에서 벗어나 있는 이방인들이다. 고로 이들은 앞의 이들처럼 적법한 지주로부터가 아니다. 그럼에도 그들이 적법한 듯 있다; 그 이유는 그때 당시 여종들로부터 태어난 아이들이 합법적으로 양자로 채택되었기 때문이다. 이는 야곱의 빌하와 질바, 즉 창. 30:4-12에서도 발견된다. 이들로부터의 자녀도 레아와 라헬의 자녀와 동등한 대우를 받았다. 그러나 차이점이 완전히 없는 것은 아니다. 이것이 창. 33:1, 2, 6, 7에서 분명해진다. 그때 당시 자손을 낳을 목적으로 아내에 의해 남편에게 주어진 여종들은 그의 소실(첩)이라 불리웠다; 이는 창. 35:22에서 발견된다.

인간들이 여종들, 또는 소실로부터 자손을 낳는 것은 묵인되어 왔다. 이를 통해 교회를 벗어나 있는 이들, 또한 교회 내에서 보다 낮은 계층의 사람들이 표현되었다. “르우마”라고 불리는 이 소실의 이름이 그녀의 품질을 내포하고 있다; 여기서는 그 품질은 올려짐, 승진, 칭찬 (exaltation)인데, 이것은 단어 르우마에 대한 뜻이다.

그녀 역시 데바, 가합, 다하스, 마아가를 낳았다. 이는 그들의 각양각색의 종교들을 의미한다. 이들은 구원되어지는 영적 인간의 세 번째 계층이다.

*************************************

창세기 제 23 장

성경: 창세기 23 장

1. 그리고 사라의 생명들은 일백 이십 칠 년, 사라의 생명들의 햇수들이었다.
2. 그리고 사라는 가나안의 토지 헤브론과 같은 곳인 기럇아르바에서 죽었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사라를 위해 애통했다, 그리고 그녀를 위해 슬피 울었다.
3. 그리고 아브라함은 그의 죽은 자의 얼굴 위로부터 일어났다, 그리고 헷의 아들들에 게 이야기했다, 말하기를,
4. 나는 나그네이고, 당신들과 더불은 거주자이다. 내가 당신들과 더불어 있는 매장소 를 소유하게 해달라. 그리고 나는 내 앞으로부터 내 죽은 자를 매장할 것이다.
5. 그리고 헷의 아들들이 아브라함에게 대답했다,
6. 그리고 그에게 말하기를, 내 주여 들어 보시오, 당신은 우리의 한 가운데에서 하느 님의 제 일인 자이다, 우리의 매장소 중에서 선택하여 당신의 죽은 자를 매장하라. 우리 중의 누구도 당신의 죽은 자를 자기 매장소에 매장한다고 당신을 저지하려 드 는 자는 없을 것이다.
7. 그리고 아브라함은 일어났다, 그리고 그 토지의 사람들에게, 헷의 아들들에게 절했 다.
8. 그리고 그는 그들과 이야기했다, 말하기를, 만일 내가 내 앞으로부터 내 죽은 자를 묻으라는 것이 당신들의 혼과 함께 있다면, 나에게 들어보라, 그리고 나를 소알의 아들 에브론에게 중재하라.
9. 그가 가지고 있는 것, 그의 밭의 끝에 있는 막벨라 동굴을 줄 수 있게 하시오. 나는 그에게 당신의 한 가운데에서, 동굴을 소유하기 위해 은을 충분히 주리다.
10. 그리고 에브론은 헷의 아들 사이에서 앉아 있었다. 그리고 헷족, 에브론은 헷족의 아들들, 성문에 들어온 모든 자들의 귀에서 아브라함에게 말했다, 말하기를.
11. 아니오, 나의 주여, 나에게 귀를 기울여 주시오, 나는 당신에게 이 들판을 드립니 다, 그리고 그 안에 있는 동굴을 나는 당신에게 드립니다. 내 백성의 아들들의 눈 앞에서 나는 당신에게 드리니, 당신의 죽은 자를 매장하시오.
12. 그리고 아브라함은 그 땅의 백성 앞에서 절을 했다.
13. 그리고 그는 그 토지의 백성들의 귀에서, 에브론에게 이야기했다. 말하기를, 그러나 만일 당신의 뜻이 그러하다면, 바라건대, 나에게 귀를 기울여 주시오. 나는 이 들판 을 위해 은을 줄 것이오. 그것을 나에게서 가져가시오, 그리고 나는 내 죽은 자를 거기에 매장할 것이오.
14. 그리고 에브론이 아브라함에게 대답했다,
15. 그에게 말하기를, 나의 주여, 나에게 귀를 기울여 주시오, 이 토지는 은 사백 세겔 이고, 나와 당신 사이에 그것이 무슨 문제 거리가 됩니까? 그러므로 당신의 죽은 자를 매장하시오.
16. 그리고 아브라함은 에브론에게 경청했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에브론에게 그가 헷 의 아들들의 귀에 이야기했던 은을 상인들이 통용하는 방식으로 사백 세겔을 달아 주었다.
17. 그리고 에브론의 들판, 이는 막벨라에 있었고, 마므레 앞에 있었다. 이 들판과 그 안에 있는 동굴, 그리고 들판에 있었던 모든 나무, 거기서부터 모든 경계선 주변에 있는 것,
18. 헷의 아들들의 눈에서, 그의 성의 문에서 안으로 갔던 모든 자들에게 아브라함의 소유임을 확실히 해두었다.
19. 그리고 이후 아브라함은 그의 아내 사라를 가나안의 토지에 있는 헤브론과 똑같 은 곳, 마므레의 얼굴 위에, 막벨라의 들판의 동굴에 매장했다.
20. 그리고 들판과 그 안에 있는 동굴은 헷의 아들들로부터 아브라함에게 매장소의 소 유자로 확실히 만들어졌다.

각 절의 내적 의미

1절. 그리고 사라의 생명들은 일백 이십 칠 년, 사라의 생명들의 햇수들이었다.

사라의 생명들은…이었다. 이는 앞서 진행된 신성으로부터의 진리들(the truths Divine)에 관련되어 있는 교회의 시간들과 상태들을 의미한다. 이는 여기서 말하는 “생명들”과 “사라”의 의미로부터 분명해진다. “생명들”, 여기서는 이것들이 나이와 시기들, 즉 유아기, 젊은 시기, 성년기, 그리고 노년기를 주목하고 있기 때문에 이를 다합쳐 말할 경우, 즉 일반적으로 말해야하므로 상태들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어지는 구절들이 교회를 취급하므로 “생명들”은 교회의 때들과 상태들을 의미한다. “사라”가 신성으로부터의 진리(truth Divine)이다에 관하여는 이미 살핀 바 있다; 이상으로부터 뒤잇는 “사라의 생명들은 있었다”에 대한 여기서의 내적 의미는 진행하여 온 신성으로부터의 진리 측면에서 교회의 때들과 상태들이다는 것이다.
사라, 아브라함의 아내로서 살아 있는 동안에서는 그분의 선과 결합한 주님의 신성한 진리를 표현했다는 것은 앞서 살펴졌다; 그리고 주님의 신성한 진리가 그녀에 의해 표현되어졌기 때문에, 마찬가지로 교회의 신성으로부터의 진리도 의미하였다; 그 이유가 교회 안에 주님의 진리인 것 외의 다른 진리는 없기 때문이다. 그분으로부터 있지 않은 진리는 진리가 아니다; 이는 말씀으로부터, 그리고 말씀으로부터 파생된 신앙의 교리로부터도 분명해진다. 요한복음서에서:
인간은 천국으로부터 그에게 주어지지 않으면 아무 것도 받을 수 없다 (요. 3:27).
그리고:
나 없이 너희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요. 15:5).
마찬가지로 신앙의 교리로부터도 역시 분명해지는데, 그 이유는 신앙의 모든 것, 즉 모든 진리는 주님으로부터 있기 때문이다.
말씀에 있는 표현과 의미의 각각 그리고 모두는 가장 높은 측면에서 주님을 주목해서 보고 있다; 그러므로 주님은 말씀의 생명 자체이시다; 그것들이 주님을 주목해서 보는 바, 그것들은 그분의 왕국 역시 주목해서 보는데, 그 이유는 주님이 그분의 왕국에 있는 모두이시기 때문이다; 그분의 왕국에 있는 주님으로부터 있는 신성한 것들이 왕국을 만든다. 그러므로 천사, 영, 또는 인간은 주님으로부터의 선과 진리를 받는 만큼에서, 그리고 이것이 주님으로부터 임을 믿는 만큼에서 그는 그만큼 그분의 왕국 안에 있게 된다. 고로 주님으로부터 있는 신성한 것들이 그분의 왕국 또는 천국을 만든다; 그리고 이것은 주님이 그분의 왕국에 있는 모든 것임에 의해 뜻해진다.

일백 이십 칠 년. 이는 때들과 상태들이 충만되었음을 의미한다. “100”은 충분한 것 을; “20” 또는 “10×2” 역시 충분한 것을; 그리고 “7”은 거룩한 것을; 고로 이것은 여기서 의미되는 교회에 속하는 거룩한 것이 충만됨 또는 끝이다.
그것들의 가득함, 즉 교회의 때들과 상태들이 충만함은 그것들의 끝을 의미한다; 그 이유가 교회의 경우 역시 인간의 일생과 비슷해서, 처음에 어린 시절, 두 번째는 젊은이, 세 번째는 성년기, 네 번째는 노년기를 가지기 때문이다; 마지막 때, 또는 노년 시기가 충만함, 끝이라 불리운다. 이것은 일 년의 때들과 상태와도 비슷하다; 첫째는 봄, 둘째는 여름, 셋째는 가을, 넷째는 겨울; 그리고 이 마지막째가 일 년의 끝이다. 이것은 하루의 때들과 상태들과도 비슷하다; 첫째는 새벽, 둘째는 정오, 셋째는 저녁, 넷째는 밤이다; 그리고 밤이 올 때 하루의 충분함, 끝이 있다. 이런 모든 것이 말씀에서 교회의 상태들에 비교된다, 그리고 그 상태들이 때들에 의해 의미된다; 그 이유가 때들이 상태들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교회 속에 있는 이들과 더불은 선과 진리는 이런 방식에서 늘 감소해왔다; 어떤 선과 진리도 더 이상 있지 않을 때 (또는 더 이상 신앙, 또는 선행이 있지 않을 때), 그때 교회는 그것의 노년 시기, 그것의 겨울, 그것의 밤에 진입한다; 그리고 이것의 때와 상태가 “결정(decision)”, “종말(consummation”, 그리고 “가득참(fulfillment)”이라 불리운다. 주님이 세상에 오신 것도 때들의 충만함에서, 또는 충만함이 있었을 때였다고 말해진다; 그 이유가 그때 당시 더 이상 어떤 선도, 자연적 선조차도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진리도 없었다. 이것들은 이 절에서 말해지는 특별한 측면에서의 사항으로 의미되고 있다.

사라의 생명들의 햇수들. 이는 신성으로부터의 어떤 진리가 지상에 남아 있었는 동안을 의미한다. 이는 “햇수(year)”의 의미가 교회의 처음부터 마지막까지의 전체 시기임으로부터; 고로 “햇수들”은 시기들임으로부터; 그리고 “사라의 생명들”은 신성으로부터의 진리 측면에서의 상태들을 의미함으로부터; 고로 이는 남아 있는 신성으로부터의 어떤 진리도 있지 않은 한계를 표시한다; 이는 또한 즉각 진행하는 것으로부터 뒤잇는다.
“햇수”가 처음부터 끝까지 교회 상태의 전체 시간, 또는 전체 시기를 의미하는 것; 결과적으로 “햇수들”이 일반적 시기 내에서 때들과 시기들을 의미하는 것은 말씀의 아래 구절로부터 알는지 모른다. 이사야서에서:
여호와께서는 고통하는 자에게 좋은 소식을 전하도록 나에게 기름부으셨다; 그분은 부셔진 심정을 묶도록, 포로된 자들에게 자유를 선포하도록, 갇힌 자에게 열어주도록, 여호와의 선 한 기쁨의 해, 그리고 우리의 하느님에게 복수하심의 해를 선포하도록 나를 보내셨다
(이. 61:1, 2);
위는 주님의 강림에 관해서 말했다; “여호와의 선한 기쁨의 해”는 새로운 교회의 때를 표시한다. 이사야서에서:
복수하심의 날이 내 심정 안에 있다, 그리고 내 되찾음의 해가 와있다 (이. 63:4);
이 구절에서도 역시 주님의 강림에 관해 말해지고 있다; “되찾으심의 해”는 새로운 교회의 때를 표시한다. 이사야서에서:
이는 여호와에게 복수하심의 날이다; 시온의 논쟁을 위해 응보의 해이다 (이 34:8);.
위 구절도 앞의 구절의 의미와 비슷하다.
같은 때가 “방문의 해”라 불리운다 예레미야서에서:
내가 아나돗 사람들을 방문하는 해에 그들에게 악을 가져올 것이다 (예. 11:23).
예레미야서에서:
내가 모압을 방문하는 해를 그들에게 가져올 것이다 (예. 48:44).
에스겔서에서 더 분명해진다:
많은 날들 후에 너희는 방문받을 것이다; 햇수들의 미래에서 너희는 검으로부터 되돌린 토지 안으로 올 것이다, 계속적으로 황폐함으로 놓였던 이스라엘의 산 위에 많은 백성들로 부터 모을 것이다 (겔. 38:8).
“햇수들의 미래”는 교회의 마지막 때를 표시한다. 이 때란 교회가 없는 것과 매 한가지인 때, 이전에 교회 속에 있던 이들이 거절되는 때, 그리고 다른 이들이 그밖의 장소로부터 교회를 받는 때이다. 이사야서에서:
고로 주님께서 나에게 말하셨다, 한 해 이내에, 품삯의 햇수에 따라서, 그리고 게달의 모든 영광은 사라질 것이다 (이. 21:16).
위 구절 역시 마지막 때가 뜻해진다.
에스겔서에서:
너는 네가 흘린 네 피로 죄를 지었다, 그리고 네가 만든 네 우상들로 더럽혀졌다; 그리고 너는 네 날들을 가까이 당겼다, 그리고 네 햇수들까지 와있다; 그러므로 나는 너희를 나라 들에게 치욕거리로 만들었다, 그리고 모든 토지들이 조롱당하게 만들었다 (겔. 22:4);
“햇수들조차 오는 것”은 주님께서 교회로부터 철수하실 때, 그 교회의 끝을 표시한다. 이사야서에서:
지금 여호와께서 이야기하시어 말하기를, “삼 년 이내에, 품삯의 햇수에 따라, 그리고 모압 의 영광은 경멸로 가져와질 것이다. 그의 모든 큰 무리들과 더불어, 그리고 나머지는 아주 작을 것이다 (이. 16:14);
“삼 년 이내에”란 이전 교회의 끝을 표시한다. “3”이란 완성인 것, 그리고 시작함을 표시한다. 이는 이미 살폈다.
숫자 3과 비슷한 의미를 가지는 것이 “7”과 “70”이다; 그러므로 이사야서에서 이렇게 말해진다:
그리고 두로는 한 왕의 날들에 따라서, 70 년을 잊혀져 있을 그 날이 올 것이다; 70 년의 끝 이 후에 음녀의 노래에서 같이 두로에게 있을 것이다. 그리고 칠십 년의 끝 이 후가 오 게 되면 여호와께서 두로를 방문하실 것이다, 그리고 그녀는 음녀로 채용되는 쪽으로 되돌 아 갈 것이다 (이. 23:15-17).
“70 년”은 교회가 시작한 때로부터 그것의 기한이 만료되는 때까지의 교회의 전체 기간을 표시한다; 이것은 또한 “한 왕의 날들에 따라서”에 의해서도 뜻해진다, 그 이유가 “왕”은 교회의 진리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유대인이 겪은 포로 신세의 “70 년” 또한 위와 비슷한 의미를 가진다, 예레미야서에서:
이 나라들은 바벨의 왕을 70 년을 섬길 것이다; 칠십 년이 지난 후에 나는 바벨의 왕 위에, 그리고 이 나라 위에 (놓인) 그들의 불법을 방문할 것이다, 여호와께서 말하신다
(예. 25:11, 12; 29:10).
“해”, “햇수”가 교회의 전체 기간, 또는 교회의 존속 기간의 시간을 표시하는 것이 말라기서에서 더 확인된다:
보라 나는 내 천사를 보낸다, 그리고 그는 내 앞서 길을 준비할 것이다; 그리고 너희가 찾 는 주는 그분의 성전에 갑자기 오실 것이다, 너희가 바라는 언약의 천사조차도; 보라 그분 은 오신다, 여호와 체바욷께서 말하셨다; 그리고 누가 그분의 오심의 날을 버텨낼까? 그때 유다와 예루살렘의 공물 바침은 시대의 날들에 따라서, 고대의 햇수들에 따라서 여호와에 게 기쁨이 될 것이다 (말. 3:1, 2, 4).
위는 주님의 강림이 취급되고 있다; “시대의 날들”은 태고 교회를; “고대의 날들”은 고대 교회를; “유다의 바침”은 천적 (수준의) 사랑으로부터 예배함을; 그리고 “예루살렘의 바침”은 영적 (수준의) 사랑으로부터 예배함을 표시한다. 여기서 유다와 예루살렘이 (자연계의) 것을 뜻하지 않음은 분명하다. 다윗서에서:
나는 옛 것의 날들을, 그리고 시대들의 햇수들을 곰곰이 생각했었다 (시. 77:5).
위에서 “옛 것의 날들”, 그리고 “시대들의 햇수들”은 똑같은 교회들을 표시한다. 이는 모세의 책에서 더 분명해진다:
시대의 날들을 상기하라, 대대로의 햇수들을 이해하라; 네 아버지에게 물어보아라, 그리고 그는 네게 보여줄 것이다; 네 원로들, 그리고 그들이 네게 말할 것이다. 가장 높으신 분이 나라들에게 그들의 상속분을 주었을 때, 그분이 인간의 아들들을 분리하셨을 때
(신. 32:7, 8).
“해”, “햇수”가 교회의 때의 가득함을 표시한다는 것이 하박국서에서:
오 여호와여, 나는 당신의 명성을 들었었습니다, 나는 두려워졌습니다; 오 여호와여, 햇수들 의 한 가운데에서 일을 수단으로 소생하시고, 햇수들의 한 가운데에서 알려지게 만드십시 오. 노여우심 안에서 자비를 기억하십시오. 하느님께서 데만으로부터 오실 것입니다, 그리 고 바란 산으로부터 거룩한 분이 (오실 것입니다). (합. 3:2, 3);
위는 주님의 강림에 관해서 말해진다; “햇수들의 한 가운데에서”는 시간들이 가득참에서를 표시한다; 그리고 이는 이미 방금 앞에서 살핀 바 있다.
“해”와 “햇수”는 두 한계점들 사이에 있는 것이 가득차짐을 의미한다, 즉 땅 위의 주님의 왕국을 서술할 경우는 시작과 끝을; 천국에 있는 주님의 왕국(교회)을 서술할 경우는 영원한 것을 의미한다. 다윗서에서:
오 하느님, 당신의 햇수들은 세세토록 입니다; 그리고 당신이 그분이십니다, 그리고 당신의 햇수들은 끝을 가져오지 않을 것입니다. 당신의 종의 아들들은 계속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들의 씨가 당신 앞에서 세워질 것입니다 (시. 102:24, 27, 28).
다윗서에서:
당신은 왕의 날들에 날들을 더하실 것입니다, 그의 햇수들은 세세토록 있을 것입니다; 그는 하느님 앞에서 영원히 거주할 것입니다 (시. 61:6, 7);
위에서 “햇수들”은 영원인 것을 표시하는데, 그 이유는 주님과 그분의 왕국을 다루기 때문이다.
“그들의 해의 아들들”로 태워바침과 제물로서 바쳐진 어린 양 (레. 12:6; 14:10; 민. 6:12; 7:15, 21, 27, 33, 39, 45, 51, 57, 63, 69, 75, 81 외 여러 장소에서)은 주님의 왕국에 있는 순진으로부터의 천적 (왕국의) 것들을 의미했는데, 이는 영원한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해의 아들들”이었던 송아지의 태워바침은 가장 기뻐하심으로 언급되고 있다 (미. 6:6).
“해”가 내적 의미에서 해를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은 말씀의 내적 안에 있는 천사들이 해 라는 단어를 듣게 될 때 해를 생각할 수 없다는 사실로부터도 분명해진다; 해는 자연계에서의 시간의 충만된 기간으로 세상에 속한 것이기 때문에 천사들은 해 대신 교회의 상태들에 관하여 충만된 것에 대한 생각, 그리고 천국의 상태에 관련해서는 영원인 것에 대한 생각을 가진다; 천사들과 더불은 시간들은 상태들이다.

2절. 그리고 사라는 가나안의 토지 헤브론과 같은 곳인 기럇아르바에서 죽었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사라를 위해 애통했다, 그리고 그녀를 위해 슬피 울었다.

사라가 죽었다. 이는 신앙으로부터의 진리 측면에서의 (교회의) 밤을 의미한다. 이는 “죽어가는”, “죽은”, “죽음”의 의미로부터 알게 되는데, 이것이 교회를 서술할 경우, 교회의 마지막 때를, 마지막 때란 모든 신앙, 즉 선행이 기한이 만료될 때를 표시한다; 만료되는 때, 말씀 두루에서 “밤”이라 불리운다; “죽어 가는”은 이와 같은 것이 중단되는 것인데 이미 살핀 바 있다. 같은 것이 신성으로부터의 진리인 사라의 표현으로부터 더 분명해진다; 이 의미는 이미 말한 바 있다.

가나안의 토지에 있는 헤브론과 같은 곳인 기럈아르바에서. 이는 교회에서를 의미한다. 이는 “기럇아르바”의 의미가 진리 측면에서의 교회임에서 알게 된다; 그리고 “가나안의 토지에 있는 헤브론”의 의미는 선 측면에서의 교회임에서 알려진다. 말씀에서, 특히 예언적 말씀 부분들에서 두드러지는 모습은 진리가 취급되면 선 역시 취급된다는 점이다. 그 이유가 천국의 결혼은 말씀의 모든 것 안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기럇아르바가 언급될 때, “가나안의 토지에 있는 헤브론” 또한 말해진다.
헤브론인 기럇아르바에 주목하면, 이곳은 아브라함, 이삭, 야곱이 거주했던 지역이었다. 아브라함이 거기에 거주했다는 것은 창. 13:18에서 확인된다: 즉 “아브라함이 와서 마므레에 거주했는데, 이곳은 헤브론에 있다.” 이삭이 거기에 거주했다는 것은 창. 35:27에서 나타난다. 즉 “야곱은 이삭, 그의 아버지에게 마므레로, 기럇아르바로 왔는데, 이곳은 헤브론이고, 거기서 아브라함과 이삭이 체류했다.” 야곱이 거기에 거주했다는 것은 창. 37:14에서 인데, 야곱이 요셉을 그의 형제에게 (안부를 물으러) 보낼 때, 헤브론의 골짜기로부터 라고 말해지는 대목에서 이다. 위 셋의 표현으로부터 분명해지는 바, 헤브론인 기럇아르바는 예루살렘이 있기 앞서 있던 교회를 표현했다는 것이다.
시간의 흐름에서 모두 각각의 교회는 교회의 신앙과 선행이 하나도 남아있지 않을 때까지 선행과 신앙이 감소되어간다, 그리고 그 다음 파멸에 이르는데, 이 파멸 역시 헤브론인 기럇아르바에 의해 표현되고 있다. 이것이 아나킴에 소유당함으로 표현되고, 아나킴은 거짓의 끔찍한 설득력들을 의미한다. 아나킴에게 소유당한 구절은 민. 13:21, 22; 여. 11:21; 14:15; 15:13, 14; 사사기. 1:10에서 읽어진다; 그리고 아나킴이 종말을 맞는 것, 그것 안의 모든 것이 여호수아의 저주에 의해 파괴됨은 여. 10:36, 37; 11:21에서 읽어진다; 그리고 아나킴이 유다와 갈렙에 의해 쳐부셔짐은 사. 1:10; 여. 14:13-15; 15:13, 14에서 발견된다; 그리고 거기에 새로운 교회가 다시 있는 것이 헤브론의 들판과 마을이 갈렙에게 상속분으로 할당됨에 의해 표현되어졌다 (여. 21:12); 그러나 성읍 자체는 피난처의 성으로 만들어지고 (여. 20:7; 21:13), 아론의 아들들을 위한 성직자의 성이 되었다 (여. 21:10, 11); 유다의 상속분에 관하여는 여. 15:54에 있다.
이로부터 분명해지는 바, 헤브론은 가나안의 토지에서 주님의 영적 (왕국의) 교회를 표현했다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다윗은 여호와의 명령을 받아 헤브론으로 갔고, 거기서 유다 가문의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아 7.5년을 다스렸다. 그후 그는 예루살렘으로 가서 시온을 차지했다 (삼하. 2:1-11; 5:5; 왕상. 2:11); 그때 처음으로 주님의 영적 (왕국의) 교회가 예루살렘에 의해, 주님의 천적 (왕국의) 교회가 시온에 의해 표현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사라 때문에 애통했다. 그리고 그녀 때문에 슬피 울었다. 이는 교회 안에 있는 신앙의 진리들 측면에서 (맞이 한) 밤 때문에 슬퍼하시는 주님의 상태를 의미한다. 이는 아브라함의 표현이 주님이신 바에서 알게 된다. “애통하고” “슬피 우는” 것이 슬픔의 상태를 의미한다는 것은 설명이 필요 없을 것이다. “애통함(mourn)”은 선의 측면에서, “슬피 움 (weep)”은 진리 측면에서 있는 교회의 밤의 상태에 관련된다. 이 두 구절은 교회의 끝을 취급하고 있다; 교회의 끝은 선행이 더 이상 없는 때이다. 이 상태는 말씀의 많은 장소들에서, 특히 예언서들에서, 그리고 계시록에서 취급되고 있다; 주님 또한 복음서들에서 여러 가지 말씀들을 수단으로 이 끝을 묘사하시고, 그것을 “시대의 종말”, 또한 “밤”이라 부르신다.
교회들과 더불은 경우는 이렇다: 시작에서 선행은 교회들에게 필수적이고 근본이다; 즉 교인들은 형제로서 서로를 사랑하는 것, 그리고 선으로부터 감동되어 있는 것, 자신을 위함이 아닌 이웃을, 공동체를, 주님의 왕국을, 주님의 목적을 위한 모든 것이 그들의 근본이 되어 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선행은 차거워지기 시작하고 무가치(naught)한 것이 되고 만다. 이후 서로를 미워함이 온다; 이 증오함은 시민적 법의 제약과 바깥쪽 경건한 체함 같은 것으로 존경받음을 유지코자 하여 비록 외관상 드러나 있지 않다 할지라도, 여전히 내향적으로 들끓고, 성장을 멈추지 않는다. 제약의 바깥쪽 속박은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으로부터 온다; 그들은 영예와 특출함을, 이득을, 권력을, 고로 명성을 사랑한다. 이런 사랑 아래 증오함이 자체를 감추이고 있다. 이런 본성은 모든 이에게 명령하기를, 타인의 모든 것을 소유하기를 바라고 있다; 그리고 이 바램들이 반대에 부딛칠 때. 그들은 자신의 심정 안에 이웃을 경멸함을 쌓아놓으며, 앙갚음의 기회를 엿보고, 자기에게 대립한 이웃의 파멸에서 기쁨을 취한다. 가능만 하면 이웃에 잔인함의 실력 행사도 마다하지 않는다. 교회의 하강 국면도 여기서 크게 빗나가지 않는 모습이다. 교회의 마지막 기울음, 끝은 더 이상 신앙이 없는 것, 더 이상 선행이 없는 것이다. 이는 누누이 살펴왔다.
말씀으로부터 우리에게 알려진 교회들에는 몇 가지가 있고, 그 교회들이 위와 같은 끝을 가졌다. 태고 교회는 홍수에서 종료되었다; 홍수 후에 고대 교회가 있었다; 또한 두 번째 고대 교회가 있었다, 이것은 히브리 교회라고 불리웠다; 그리고 고대 교회의 마지막이 유대 교회였다. 이 교회는 선행으로부터 시작한 교회는 결코 아니다. 단지 교회라는 껍데기만을 표현한 교회이고, 이 교회가 설립된 의도는 주님이 세상에 오시기까지 천국과의 표현적 교통이 잔존하도록 하시기 위함이었다. 이후에 새로운 교회가 주님에 의해 일으켜졌는데, 이방인들의 교회라고 불리우고, 이 교회는 (앞의 유대 교회에 비교해서) 내적 교회였다, 그 이유가 내면의 진리들이 주님에 의해 밝히 알려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교회가 지금 그것의 끝에 있다, 그 이유는 지금 선행이 없기 때문, 선행 대신 미움만 있기 때문이다; 이 증오심은 바깥쪽에서 나타나지 않으나 내부적으로 있다. 그리고 누군가에게 기회만 잡히면, 즉 외적 속박이 풀린 듯 싶으면 즉각 내부에서 외부로 터져 돌출한다.
위 교회들 외에도 충분히 서술되지 못해서 일 뿐 아주 많은 다른 것들도 있어왔다, 이것들도 하강되다가 자체를 파괴함은 위 교회들과 같은 모양새이다. 이런 하강과 자기 파멸로 가는 원인 중 하나는 부모들이 악들을 축적한 것이다. 즉 새로운 작은 악이 실습되고 이것이 습관으로 이어지고 이 습관이 오랜 세월 속에 자기들의 본성 속에 자리매김 하는 것이다. 이것이 후손들에 유산처럼 대를 물려가며 퇴적된다. 그래서 이 후손이 개혁되고 거듭나지 않으면, 이 악들은 대를 물리고 증가해갈 수밖에 없다; 급기야는 의지가 자칫 악들과 거짓들이 되어버리기가 십상이다. 그러나 교회가 극에 달하고 멸해질 때, 주님께서는 어딘가에 새로운 교회를 언제나 일으키시고 있다. 이 일으킴은 드물기는 하지만 이전 교회인으로부터 있기도 하지만, 주로 무지함에 있었던 나라들로부터 이다. 이 점이 아래 구절들에서 이어지고 있다.

3절. 그리고 아브라함은 그의 죽은 자의 얼굴 위로부터 일어났다, 그리고 헷의 아들들에게 이야기했다, 말하기를,

아브라함이 일어났다. 이는 승강(elevation)을 의미한다. 이는 “일어남”이 어떤 승강을 함축함에서 알게 된다; 여기서는 슬픔으로부터 승강함, 새로운 교회가 멸해진 이전 것 대신 막 일어서려 하는 것이다.
그의 죽은 자의 얼굴 위로부터. 이는 그 밤(night)에서를 의미한다. 이는 “죽고 있는”, “죽음”, “죽은”의 의미가 교회의 상태에 주목하여서는 밤을 표시하는 것에서 알게 된다.

그리고 헷의 아들들에게 이야기했다, 말하기를. 이는 새로운 영적 (왕국의) 교회가 되어진 이들과 더불어를 의미한다. 이는 “헷”과 “헷족”의 의미로부터 알려진다. 가나안의 토지에는 많은 거주민들이 살고 있었다. 이들은 말씀의 여러 장소에서 열거되고 있는데, 그들 중의 하나가 헷족이다 (창. 15:20; 출. 3:8, 17; 13:5; 23:23; 신. 7:1; 20:17; 여. 3:10; 11:1, 3; 12:8; 24:11; 왕상. 9:20 이외 더 있다). 이들 대부분은 고대 교회로부터 였다. 이 교회로부터 있었던 이들은 선행을 제 1의 원리로 삼았고, 그들의 교리적인 것들은 선행 속에, 또는 삶 속에 있었다. 신앙의 교리적인 것들을 교묘하게 고친 이들이 “가나안족”이라 불리웠고, 이들은 가나안의 토지의 다른 주민들과 분리되어 있었다 (민. 13:29 참조).
가나안의 토지의 보다 나은 주민들이 헷족이었다. 이는 아브라함이 그들 사이에 거주했고, 후에는 이삭과 야곱이 거주했고, 거기에 그들의 매장소를 가졌다는 것에서도 이를 뒷받침한다; 또한 그들이 아브라함을 정중하게 대우했다는 것에서도 분명한데, 이는 이 장에서 나타난다 (5, 6, 10, 11, 14, 15절). 하여 헷족 같은 호의적인 나라에 의해 영적 (왕국의) 교회, 또는 교회의 진리가 표현되고 의미된다. 그러나 이들과 더불어서도 고대 교회의 잔류민 같이 시간이 흐르면서 선행으로부터, 또는 신앙의 선으로부터 하강했는데, 결과적으로 교회의 거짓이 후에는 그들에 의해 의미되는 것이 성경에서도 확인된다 (겔. 16:3, 45, 그리고 다른 장소에서). 그렇다 해도 그들이 여전히 다른 이들보다는 더 호의적이었던 것은 다윗과 더불어 등장하는 아비메렉(삼상. 26:6)과 우리야(삼하 11:3, 6, 17, 21)가 헷족 출신인 것에서 분명해진다. 우리야의 아내가 바쎄바였고, 후에 다윗에게 솔로몬을 낳았다 (삼하. 12:24).
이 구절은 이전 교회가 만료되었을 때 주님께서 새로이 세운 새로운 교회를 취급하고 있다; 그리고 뒤이어지는 구절들은 그들이 신앙을 받음을 다루고 있다. 헷의 아들들 사이에 있게 되는 교회가 취급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전 것이 중단, 또는 극에 달했을 때, 주님에 의한 영적 (왕국의) 교회가 일으켜짐이다; 헷의 아들들은 이 교회를 표현하거나 의미만 할 뿐이다. 위에서 교회에 관해 말해진 것을 다시 살펴보자: 즉 시간의 흐름에서 교회는 퇴색되고 오염되어진다: 이것은 선행으로부터 퇴조한다, 그리고 악들과 거짓들을 생산한다: 그때 교회는 황폐되고 황무해졌다고 말해진다: 교회가 이방인들과 더불어 세워지는 것, 그리고 왜: 황폐되어진 교회에서, 핵심 부분이 되는 어떤 것은 보존되어진다: 땅 위에 교회가 없으면 인류는 멸망할 것이다: 교회는 웅대한 몸에서, 즉 인류 안에서 심장과 폐들로서 존재한다: 영적 (왕국의) 교회의 품질: 선행이 교회를 구성하고, 분리된 신앙이 아니다는 것: 만일 모두가 선행을 가졌다면, 비록 서로에서 다른 교리와 예배를 가졌다 할지라도 교회는 하나일 것: 주님의 교회 안에 있는 땅 위 모든 인간들은 비록 흩어져 있다 할지라도, 여전히 그들은 천국들 같이 하나로서 있을 것이다: 모든 교회는 내적, 외적이다는 것, 이 둘은 함께 하나의 교회를 만든다는 것: 외적 교회는 만일 내적 교회가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다는 것: 교회는 마치 태양이 떠오름과 짐에, 일 년속의 계절들에, 그리고 하루 속의 때들에 비교된다는 것: 최후 심판(the Last Judgment)이 교회의 마지막 때이다는 것.

4절. 나는 나그네이고, 당신들과 더불은 거주자이다. 내가 당신들과 더불어 있는 매장소를 소유하게 해달라. 그리고 나는 내 앞으로부터 내 죽은 자를 매장할 것이다.

나는 나그네이고 당신들과 더불은 거주자이다. 이는 그들의 첫 상태 즉 비록 주님이 그들에게 알려져 있지 않았을지라도 여전히 그들과 함께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아브라함이 주님을 표현한다는 것으로부터 (이는 누누이 설명했다); 그리고 “당신들과 더불은 거주자이다”의 의미가 그들이 모르고 있지만 여전히 그들과 더불어 있다 임으로부터 분명해진다. 이것이 내적 의미인 것은 앞서 진행된 것과 뒤잇는 것들로부터 명백하다; 그 이유가 여기서 새로운 교회가 취급되고, 이 절에서 그 교회의 첫 상태, 이 상태는 우선 주님이 그들에게 알려져 있지 않다 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럼에도 그들은 선행의 선 안에서, 그리고 시민 생활에서 공정하고 공평함 안에서, 그리고 도덕 생활에서 수치를 알고(honorable) 적절한(becoming) 범주 안에 서 살기 때문이다. 주님은 이런 자들과 더불어 계실 수 있다; 그 이유가 인간과 더불은 주님의 현존은 선 안에서 있기 때문, 그러므로 공정하고 공평한 것 안에, 더욱이 수치를 알고 적절한 범주를 넘지 않고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 삶은 질서에서 이어져 내려가는 하위권이지만 어쨌든 선들 안에 종속된 상태이기 때문이다. 이 인간 삶의 평면 위에서 양심이 주님에 의해 발견되어진다. 결과적으로 총명과 지혜가 발견되어진다. 그러나 (심정, 또는 애착으로부터 말해지는) 선들 안에 있지 않은 이들과 더불어서 천국에 관한 것은 아무 것도 뿌려질 수 없다; 그 이유가 (씨를 받을) 평면( 지면, 그릇)이 없기 때문, 고로 천국의 어떤 것도 뿌려질 수 없고, 따라서 거기에 주님은 그들과 현존해 계실 수 없다. 주님의 현존은 선에 따라서, 즉 선의 품질에 따라서 서술되어진다; 선의 품질은 순진의 상태에 따라서, 사랑의 상태에 따라서, 그리고 선행의 상태에 따라서 이다; 이 상태(지면, 바탕, 그릇) 안에 신앙의 진리들이 심어질 수 있고 심어져 왔다.

내가 당신들과 더불어 있는 매장소를 소유하게 해달라. 이는 그들이 거듭나질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매장소”의 의미로부터 분명해진다. 말씀의 내적 의미에서 매장소는 생명, 천국을, 반대 의미에서는 지옥, 죽음을 의미한다. 이것이 생명, 천국을 의미하는 이유는 말씀의 내적 의미에서 있는 천사들이 매장소를 두고 죽음이라는 것을 전혀 생각지 않고, 죽음 대신 생명의 계속, 고로 부활밖에 더 지각하지 못하기 때문에서 이다. 그 이유가 인간은 그의 영의 측면에서 다시 일어나고 그의 육체 측면에서는 매장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매장”이 부활을 의미하기 때문에 매장은 거듭남도 의미하게 된다. 그 이유가 거듭남은 이전 사람 측면에서는 죽고, 새로운 사람 측면에서 다시 일어나기 때문이다. 인간은 거듭남을 수단으로 죽은 자로부터 살아 있는 자가 되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매장소”의 내적 의미가 오고 있다. 매장소에 관한 생각이 표출될 때 거듭남에 관한 생각이 천사들에게 발생하는 것은 어린 아이에 관하여 앞에서 말한 바로부터 분명해진다.
“매장소”가 반대적 의미에서 지옥, 죽음을 의미하는 것은 악이 생명으로 다시 일어나지 못하기 때문에서 이다; 그리고 그러므로 악한 자가 취급되면서, 매장소가 언급될 때, 지옥의 것 외의 다른 생각이 천사들에게 와닿지 않는다; 이것은 말씀에서 지옥이 “매장소”라 불리우는 이유이기도 하다.
“매장소”가 부활을, 또한 거듭남을 의미하는 것이 에스겔서에서 분명해진다:
그러므로 예언하라, 그리고 그들에게 말하라, 고로 주 여호비께서 말하신다, 보라 나는 너 의 매장소를 열 것이다, 그리고 너를 네 매장소로부터 올라오게 할 것이다, 오 나의 백성 아; 그리고 나는 나를 이스라엘의 지면으로 데려올 것이다. 그리고 너는 내가 네 매장소를 열고 너를 네 매장소로부터 올라오게 할 때, 너는 내가 너의 여호와이시다는 것을 알 것이 다, 오 나의 백성아; 그리고 네 안에 내 영을 놓을 것이다, 그리고 너는 살 것이다, 그리고 나는 네 자신의 지면에 둘 것이다 (겔. 37:12-14);
위에서 예언자는 살아 있게 만들어지는 뼈들을 취급하고 있다, 그리고 내적 의미에서 거듭남을 의미하고 있다. 그가 거듭남을 취급한다는 것은 아주 분명하다, 그 이유는 “나는 내 영을 네 안에 놓을 것이다, 그리고 너는 살 것이다, 나는 네 자신의 지면에 너를 둘 것이다”하고 말해지기 때문이다. “매장소”는 여기서 이전 사람, 그의 악들과 거짓들을 표시하고, 열고 거기로부터 올라오게 하는 것은 거듭나지는 것이다. 고로 거듭남, 또는 새로운 생명에 관한 생각이 들어와질 때 매장소에 관한 생각은 멸해지고, 마치 벗어던진 것처럼 있는다.
주님의 부활 후에 매장소들이 열어지고, 잠들어 있던 성인들의 많은 신체들이 일어나 매장소로부터 나가고, 거룩한 성으로 들어가고, 많은 이에게 나타났다 (마. 27:52, 53)는 것도 위 에스겔서와 비슷한 것, 즉 주님의 부활 때문에 부활을 포함한다, 그리고 더 내적 의미에서는 모두 각각의 부활을 포함하고 있다. 주님이 나사로를 죽은 자로부터 일으키심 (요. 11:1과 이어지는 구절들에서) 역시 이방인들로부터 새로운 교회를 일으키심을 포함한다; 그 이유가 주님에 의해 일어난 모든 기적들은 신성하기 때문에 그분의 교회의 상태들을 포함한다. 이 의미와 유사한 대목으로는 엘리사의 매장소에 시체를 던졌을 때, 그 시체가 엘리사의 뼈에 닿자 되살아났다는 구절(왕하. 13:20, 21)에서 이다. 그 이유가 엘리사에 의해 주님이 표현되었기 때문이다.
“매장”이 일반적 측면에서 부활을, 그리고 모두 각각의 부활을 의미했기에, 고대인들은 자기들의 매장과 매장소에 관하여 걱정이 컷다(관심이 많았다). 하여 아브라함은 가나안의 토지에 있는 헤브론에 매장되어져야 할 것, 또한 이삭과 야곱, 그들의 아내들과 더불어도 매장되어야 했다 (창. 47:29-31; 49:30-32); 그리고 요셉의 경우, 그의 뼈는 이집트로부터 가나안의 토지 안으로 운반하였다 (창. 50:25; 출. 13;19; 여. 24:32); 다윗, 그리고 그의 뒤를 이은 왕들은 시온에 매장되어야 했다 (왕상. 2:10; 11:43; 14:31; 15:8, 24; 22:50; 왕하. 8:24; 12:21; 14:29; 15:7, 38; 16:20). 이런 이유는 가나안의 토지와 시온은 주님의 왕국을 표현했고 의미했기 때문, 그리고 매장이 부활을 표현했고 의미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장소 자체, 즉 그 장소에 묻힌 시체가 부활된 경우는 없었다는 것도 모든 이는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다.
“매장”이 생명으로 부활함을 의미하는 것은 다른 표현들로부터도 알 수 있는데, 즉 사악한 자가 죽을 경우 그를 위해서는 소리내어 울어서는 안되고, 그를 매장해서도 안되고 내던지도록 한 것이다 (예. 8:2; 14:16; 16:4, 6; 20:6; 22:19; 25:33; 왕하. 9:10; 계. 11:9); 그리고 매장된 사악한 인물이 매장되었을 때는 그를 매장소에서 꺼내 내던졌다 (예. 8:1, 2; 왕하. 23:16-18). 반대적 의미에서 “매장소”는 죽음, 지옥을 의미하는 구절은 다음과 같다. 즉 이. 14:19-21; 겔. 32:21-23, 25, 27; 시. 88:5, 6, 11, 12; 민. 19:16, 18, 19.

그리고 나는 내 앞으로부터 내 죽은 자를 매장할 것이다. 이는 그분은 그들과 더불어 있는 밤으로부터 다시 일어나시고 세상에 널리 알리실 것임을 의미한다. 이는 “매장함”이 다시 일어남이다로부터; 그리고 “죽은 자”란 그늘, 또는 밤의 상태를, 즉 무지함의 상태를 의미함으로부터 알게 된다. 이 무지함으로부터 주님이 인정될 때 그분은 인간과 더불어 일어나시어 세상에 널리 알리신다. 이전에서는, 주님이 밤 안에 계시는데, 그 이유는 그분이 나타나시지 않기 때문이다; 그분은 거듭나아지는 모든 이들과 다시 일어나신다.

5, 6절. 그리고 헷의 아들들이 아브라함에게 대답했다, 6. 그리고 그에게 말하기를, 내 주여 들어 보시오, 당신은 우리 가운데 있는 하느님의 제 1 인 자이다, 우리의 무덤 중에서 선택하여 당신의 죽은 자를 매장하라. 우리 중의 누구도 당신의 죽은 자를 자기 무덤에 매장한다고 당신을 저지하려 드는 자는 없을 것이다.

헷의 아들들이 아브라함에게 대답했다, 그에게 말하기를… 이는 새로운 교회 속에 있는 이들과의 상호적인 상태를 의미한다. 이는 대답함이 동의함이 물었던 자에게 주어질 때, 상호적인 것인 바로부터: “헷의 아들들”의 의미가 새로운 영적 (왕국의) 교회에 있을 이들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들어보시오(hear). 이는 수용함을 의미한다. 이는 대답함의 모양새가 동의를 표현할 때, 수용함을 의미함에서 알게 된다.

내 주여, 당신은 우리의 한 가운데에서 하느님의 제 일인 자이다. 이는 그들과 더불은 신성으로부터의 선과 진리에 관련되는 주님을 의미한다. 이는 “주(lord)”의 의미로부터, 그리고 “하느님의 제 일인 자”의 의미로부터; 그리고 “우리의 한 가운데에서”의 의미로부터 알려진다. 선이 다루어지는 곳에서 “주”라고 말해지는데, 이는 구약 성경의 말씀으로부터 분명해진다; 그 이유가 거기서 어떤 때는 여호와, 어떤 때는 하느님, 어떤 때는 주, 어떤 때는 여호와 하느님, 어떤 때는 주 여호비, 어떤 때는 여호와 체바욷이라 불리운다; 이는 내적 의미로부터서만 알려질 수 있는 감추인 원인으로부터 이다. 일반적으로 주제가 사랑의 천적(수준)인 것들, 또는 선일 때, “여호와”로 말해진다; 그러나 신앙의 영적 (수준)인 것들, 또는 진리일 때, “하느님”이라 말해진다; 이 둘이 취급될 때, “여호와 하느님”이라 말해진다; 그러나 선으로부터의 신성한 힘, 또는 전능하심이 취급될 때, “여호와 체바욷”, 즉 “군대들의 여호와, 만군의 여호와”라 말해진다. “주(Lord)”도 같은 의미이다, 고로 “여호와 체바욷”과 “주”는 같은 의미로부터 있고 의미도 같다. 이로부터, 즉 선의 힘으로부터 인간들과 천사들 역시 “주들(lords)”이라 불리운다. 그리고 반대적 의미에서 이들은 “종들”이라 불리운다. 이 종들 안에는 힘이 없다, 또는 (거듭나기) 이전으로부터 힘을 가진 자이다. 이로부터 알게 되는 본문의 “나의 주여”는 선 측면에서의 주님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이어지는 아래 인용 구절들에서 예증될 것이다. “하느님의 제 일인 자(왕자)”는 진리의 힘, 또는 진리 측면에서의 주님을 의미한다; 이는 “제 일인 자” 또는 “제 일인 자들”의 의미가 제일가는 진리들이다로부터 분명해진다. 그 이유가 진리가 있는 곳에서는 “하느님”이, 선이 있는 곳에서는 “여호와”가 취급되기 때문이다. “우리의 한 가운데에서”란 그들 사이에서, 또는 그들과 더불어를 뜻하는 것은 설명 없이 이해될 것이다.
구약 성경의 말씀에서 “여호와 체바욷”과 “주님”은 같은 의미로부터와 의미함에 있다. 이사야서에서:
여호와 체바욷의 열정이 이를 수행하실 것이다; 주님이 야곱에게 말(word)을 보내셨다, 그 리고 그것이 이스라엘 위에 떨어졌다 (이. 9:7, 8).
이사야서에서:
힘센 왕이 그들 위에서 통치할 것이다, 주, 여호와 체바욷께서 말하신다 (이. 19:4).
말라기서에서:
보라 너희가 찾는 주님께서는 그분의 성전에 갑자기 오실 것이다, 너희가 바라는 언약의 천사들 조차도; 보라 그분은 오신다, 여호와 체바욷께서 말하신다 (말. 3:1).
이사야서에서:
나는 높이 들리워진 왕좌 위에 앉으신 주님을 보았다; 그분 위쪽에 스랍들이 서있었다; 여 섯 날개들과 각각을 위해 여섯 날개들; 누구 하나가 다른 하나에게 외쳤다, 거룩, 거룩, 거 룩, 여호와 체바욷. 나에게 화있을 것이다, 그 이유는 나는 파멸되기 때문에, 그 이유가 나 의 눈이 왕, 여호와 체바욷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주님의 음성을 들었다
(이. 6:1, 3, 5, 8);
위로부터 분명한 바, “여호와 체바욷”과 “주”는 같은 의미를 가진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름 “주 여호와”는 특별한 경우, 즉 전능하심의 도움이 절실한 때에 특별하게 사용되어진다. 이사야서에서:
유다의 성들에게 말하라, 보라 너희 하느님. 보라 주 여호비께서 강한 자로 오실 것이다, 그리고 그분의 팔이 그분을 위해 통치하실 것이다; 보라 그분의 보상이 그분 앞의 그분의 일들과 그분과 더불어 있다. 그분은 목자 같이 그분의 양떼를 먹이실 것이다
(이. 40:9-11).
이와 같이 도움이 절실할 때 “주 여호비”라는 이름이 사용된 구절은 다음과 같다: 즉 이. 25:8; 40:10; 48:16; 50:4, 5, 7, 9; 61:1; 예. 2:22; 겔. 8:1; 11:13, 17, 21; 12:10, 19, 28; 13:8, 13, 16, 18, 20; 14:4, 6, 11, 18, 20, 21; 미. 1:2; 시. 71:5, 16; 이 외에도 더 있으나 생략한다.
그리고 구약 성경의 말씀에서, 이름 “주”가 “여호와”를 포함하는 경우, 즉 선이 취급되어 “주”라고 말해지는 경우도 있다; 그러므로 “하느님”과 “여호와”가 구별되듯 마찬가지로 “주”와 “하느님”이 구별된다. 모세의 책에서:
여호와 너희 하느님, 그분은 신들의 하느님이시고, 주들의 주님이시다 (신. 10:17).
다윗서에서:
신들의 하느님에게 감사를 드려라, 그 이유가 그분의 자비는 영원하시기 때문이다; 주들의 주님에게 감사를 드려라, 그 이유가 그분의 자비가 영원하시기 때문이다 (시. 136:1-3).
그러나 신약 성경의 말씀에서, 즉 복음서들과 계시록에서, “여호와”는 어느 곳에서도 불려지지 않는다. 이 이름 대신 “주님”이 말해진다. 이는 아래에서 살피게 될 감추인 원인으로부터 이다. 신약 성경의 말씀에서 “여호와” 대신 “주”라 말해진 대목은 마가복음서에서: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모든 명령들 중에서 첫째이다, 들어라 오 이스라엘아, 주 우리의 하 느님은 한 분 주님이시다; 그러므로 너는 네 모든 심정으로부터, 그리고 네 모든 혼으로부 터, 그리고 네 모든 생각으로부터 , 그리고 네 모든 힘으로부터 주 네 하느님을 사랑할 것 이다 (막. 12:29, 30);
위와 같은 것이 모세의 책에서 쓰여 있다:
들어라 오 이스라엘아, 여호와 우리의 하느님은 한 분 여호와이시다; 그리고 너는 네 모든 심정으로부터, 그리고 네 모든 혼으로부터, 그리고 모든 네 힘으로부터, 여호와 네 하느님 을 사랑할 것이다 (신. 6:4, 5);
위에서 “여호와” 대신 “주님”이 말해짐이 분명하다. 계시록서에서:
내가 보았는데, 천국에 왕좌가 놓여 있는 것이 바라보았다, 그리고 어떤 분이 왕좌 위에 앉 아 계셨다; 그리고 왕좌를 빙둘러 앞과 뒤에 눈이 가득한 네 동물들이 있었다; 그들 각각은 여섯 날개들을 빙둘러 가졌고 안쪽에 눈이 가득했다; 그리고 그들이 말했다, 거룩, 거룩, 거룩, 주 하느님 전능하신 분 (계. 4:2, 6, 8).
그러나 이사야서에서:
나는 높이 들린 왕좌 위에 앉은 주를 보았다. 그분 위쪽에 스랍들이 서있다; 여섯 날개들과 각각을 위해 여섯 날개들; 누구 하나가 다른 하나에게 소리쳤다, 거룩, 거룩, 거룩, 여호와 체바욷 (이. 6:1, 3, 5, 8).
여기서 “여호와” 대신 “주님”이 말해진다; 또는 “여호와 체바욷” 대신 “주 하느님 전능하신 분”이 말해진다. (“네 동물들”이 스랍, 또는 거룹임은 겔. 1:5, 13-15; 10:5로부터 분명하다.) 신약 성경에 있는 “주님”이 “여호와”인 것은 여러 구절로부터 분명해진다. 누가복음서에서:
주님의 천사가 사가랴에게 나타났다 (눅. 1:11);
“주님의 천사”는 “여호와의 천사”를 뜻한다. 누가복음서에서:
천사가 그의 아들에 관하여 사가랴에게 말했다, 그는 이스라엘의 많은 아들들을 주 그들의 하느님에게로 돌아오게 할 것이다 (눅. 1:16);
“주 그들의 하느님에게로”는 “여호와 하느님에게로”를 뜻한다. 누가복음서에서:
천사가 예수에 관하여 마리아에게 말했다, 그분은 위대하실 것이다, 그리고 지극히 높은 분 의 아들이라 불리실 것이다, 그리고 주 하느님이 그에게 다윗의 왕좌를 주실 것이다
(눅. 1:32);
위 구절에서는 “주 하느님”이 “여호와 하느님” 대신에 있다. 누가복음서에서:
마리아가 말했다, 내 혼이 주님을 확대하고 있다, 그리고 내 영이 하느님 나의 구세주 위에 자체를 드높였다 (눅. 1:46, 47);
위 구절 역시 “주님”이 “여호와”를 대신하고 있다. 누가복음서에서:
사가랴가 예언했다, 말하기를, 주 이스라엘의 하느님을 찬양하라 (눅. 1:68);
“주 하느님”은 “여호와 하느님” 대신이다. 누가복음서에서:
주의 천사가 목자들 옆에 섰다, 그리고 주의 영광이 그들을 빙둘러 빛났다 (눅. 2:9);
“주”의 천사, 그리고 “주”의 영광은 “여호와”의 천사, 그리고 “여호와”의 영광이다.
주의 이름 안에서 오시는 자에게 복있다 (마. 21:9; 23:39; 눅. 13:35; 요. 12:13);
위에서 “주의 이름 안에서”가 “여호와의 이름 안에서”를 대신하고 있다. 이 외의 구절로, 눅. 1:28; 2:15, 22-24, 29, 38, 39; 5:17; 막. 12:10, 11이 있다.
그들이 여호와를 “주”라고 부름에 대한 감추인 원인들 사이에는 아래와 같은 것이 있었다. 만일 옛날 당시인 구약 성경 시대에서 주가 여호와이셨다고 자주 명명해졌다면, 인간들은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았을 것이다, 그 이유가 그들이 그것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더욱이 주님은 그분이 신성 본질을 인간 본질에, 인간 본질을 신성 본질에 완전하게 하나가 되실 때까지 인간 측면에서의 여호와는 되시지 못했기 때문이다. 충만되게 하나를 이루심은 십자가 위에서 이겨내신 마지막 시험 이후 성취되었다; 그리고 이 이유 때문에, 부활 후에, 제자들은 그분을 언제나 “주님”이라 불렀다 (요. 20:2, 13, 15, 18, 20, 25; 21:7, 12, 15-17, 20; 막. 16:19, 20); 그리고 도마가 말했다,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 (요. 20:28). 그리고 주님이 구약 성경에서 자주 여호와로 명명되셨기 때문에, 그러므로 그분은 제자들에게도 역시 이렇게 말하셨다:
너희는 나를 스승과 주라고 부른다, 그리고 너희는 옳게 말하고 있다, 그 이유가 나는 있다 이기 때문이다 (요. 13:13);
위 단어들은 그분이 여호와 하느님이셨다를 의미한다; 그 이유가 그분이 여기서 선 측면에서 “주”라고, 진리 측면에서는 “스승”이라고 불리우시기 때문이다. 주님이 여호와이셨다는 것은 천사가 목자들에게 한 말에 의해서 뜻해진다:
오늘 너희에게 그리스도 주이신 구세주 (눅. 2:11);
그분은 메시아, 기름부은 왕으로서 “그리스도”라고 불리우신다; 그리고 여호와로서는 “주”라고 불리우신다; “그리스도”는 진리 측면에서, 그리고 “주”는 선 측면에서 이다. 말씀을 세밀하게 공부하지 않은 사람의 경우 이를 알 수 없었다, 그 이유는 그는 우리의 구세주가 주라고 불리운 것은 존경의 표시로서 그렇게 불리웠다고 생각해버리기 때문이다; 그분이 여호와이셨기에 그분은 그렇게 불리우셨다는 것을 이제는 여러분이라도 알고 주님이라 부르기를 바란다.

우리 매장소들 중에서 고르시오. 이는 거듭남에 관련해서 있는 선한 기쁨들을 의미한다. 이는 “뽑는(choosing) 것”, “뽑음”, 그리고 “뽑힌”은 어떤 것을 원하는 것, 또는 선한 기쁨(만족함, 흔쾌히 응낙함)으로부터 이다에서; 그리고 “매장소”의 의미는 부활, 거듭남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당신의 죽은 자를 매장하라. 이는 그와 같이 그들은 밤으로부터 공표되고 생명에로 일어나리라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매장함”의 의미가 다시 일어나는 것, 또는 생명쪽으로 일어나지는 것이다로부터; 그리고 “죽은” 자의 의미가 신앙의 선들과 진리들 측면에서 밤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우리 중의 누구도 자기 무덤에 매장한다고 당신을 저지하려 드는 자는 없을 것이다. 이는 그들은 거듭남을 받을 준비가 다 되었음을 의미한다. 이는 “매장소”의 의미가 거듭남이다로부터; 그리고 “저지하지 않음”의 의미는 기꺼이 받는다 로부터 알려진다.

당신의 죽은 자를 묻는 것… 이는 그리하여 그들에게는 밤으로부터 세상에 널리 알리심이 있고 일어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매장함”, 그리고 “죽은”이 신앙의 선들과 진리들 측면에서 밤으로부터 일어남이다로 알게 된다.

7, 8절. 그리고 아브라함은 일어났다, 그리고 그 땅의 사람들에게, 헷의 아들들에게 절했다. 8. 그리고 그는 그들과 이야기했다, 말하기를, 만일 내가 내 앞으로부터 내 죽은 자를 묻으라는 것이 당신들의 혼과 함께 있다면, 나에게 들어보라, 그리고 나를 소알의 아들 에브론에게 중재하라.

아브라함이 일어났다, 그리고 절했다. 이는 정성어린 수용함 때문에 있는 주님의 기쁨을 의미한다. 이는 “일어남”이 승강의 어떤 것을 포함한 행동이다로부터(2401, 2785항); (그 이유가 마음은 기쁨과 즐거움을 수단으로 승강되기 때문, 그러므로 여기서 그는 “일어났다”고 말해진다.); 또한 아브라함이 주님을 표현한다로부터; 그리고 “자신을 굽혀 절함”이 기뻐 환호함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절함은 겸허와 기뻐함 모두를 표현하는 몸짓이다, 그리고 절함은 정성어린 수용함 때문이다. 이는 진행되고 이어지는 대목들에서 분명해진다.

그 토지의 사람들에게, 헷의 아들들에게. 이는 새로운 영적 (왕국의) 교회 속에 있게 되는 이들에 의해서를 의미한다. 이는 “사람들”의 의미가 진리들 안에 있는 이들, 고로 영적 왕국에 있는 이들이다로부터; “토지”의 의미가 교회이다로부터; 그리고 “헷의 아들들”의 의미가 새로운 영적 (왕국의) 교회 속에 있는 이들이다로부터 알려진다. “토지의 사람들”은 이스라엘과 예루살렘을 취급하는 말씀에서 때때로 언급되는 단어이다, 그리고 그들에 의해 내적 의미에서 영적 (왕국의) 교회, 또는 영적 교회 속에 있는 이들이 의미된다; 그 이유가 “이스라엘”에 의해서와 “예루살렘”에 의해서 이 교회가 뜻해지기 때문이다. 유다와 시온이 취급될 때, 단어 “나라”가 사용된다, 그 이유는 “나라(nation)”에 의해 천적 (왕국의) 교회가 의미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교회는 “유다”와 “시온”에 의해서 뜻해진다.
이스라엘과 예루살렘이 취급될 때, “토지의 백성”이 말해지는 대목을 아래 말씀에서 확인해보자:
토지의 백성에게 말하라, 고로 주 여호비께서 예루살렘의 주민들에게, 이스라엘의 지면에게 말하신다, 그들은 슬픔 안에서 자기들의 빵을 먹을 것이다, 그리고 황폐함에서 자기들의 물 들을 마실 것이다; 그녀의 토지는 쓸모 없는 채 있을런지 모른다; 주민이 거주한 성들은 황 폐되어 있을 것이다, 그리고 토지는 황무해질 것이다 (겔. 12:19, 20);
위의 내적 의미에서 예루살렘과 이스라엘의 지면은 영적 (왕국의) 교회를 표시한다; “빵”과 “물들”은 선행과 신앙, 또는 선과 진리를 표시한다; “토지”는 교회 자체, 이것이 선 측면에서는 “황폐됨”, 진리 측면에서는 “황무함”이라고 말해진다.
에스겔서에서:
곡과 그의 무리들을 이스라엘의 가문이 매장할 것이다, 하여 그들은 토지를 일곱 달을 깨 끗해지게 할는지 모른다; 그리고 토지의 백성이 그들을 매장할 것이다 (겔. 39:11-13);
“곡”은 내적 예배로부터 분리된 외적 예배를 표시한다, 이것이 우상 예배인 것이다; “이스라엘의 가문”은 선 측면에서의 영적 (왕국의) 교회; “토지의 백성”은 진리 측면에서의 영적 (왕국의 ) 교회; “토지”는 이 교회 자체를 표시한다. “토지”가 교회 자체를 표시하는 이유는 가나안의 토지가 주님의 왕국, 고로 교회를 표현했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지상에서의 주님의 왕국은 교회이기 때문이다.
에스겔서에서:
토지의 모든 백성은 이스라엘에 있는 제 일인 자를 위하여 공물(봉헌물)을 바칠 것이다; 그리고 이 날에서 제 일인 자는 자신을 위해, 토지의 모든 백성을 위해 죄-바침을 위한 어 린 수소를 준비할 것이다. 토지의 백성은 안식일에서, 그리고 새 달들에서 문의 입구에서 자신들을 굽혀 절할 것이다; 그리고 토지의 백성은 지정된 절기들 안에로 들어갈 것이다 (겔. 45:16, 22; 46:3, 9);
위는 새 예루살렘, 즉 주님의 영적 왕국이 취급되어진다; 그 안에 있는 이들이 “토지의 백성”이다; “제 일인 자”는 주님으로부터 있는 신성으로부터의 진리이다.
헷의 아들들이 그렇게 불리우는 이유는 “아들들”이 진리들을 의미해서 이다. 진리들이 영적 (평면)으로 서술되는 이유는 영적 평면은 진리들을 수단으로 선쪽으로 가는 시작이기 때문이다. 즉 신앙을 수단으로 선행 안으로 감이 개시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이 진리에 대한 애착으로부터 선을 행하기 때문에, 그들은 그렇게 가르쳐지는 방법 외의 어떤 것으로부터 그것이 선이다를 알지 못한다. 그들의 양심 또한 신앙의 이런 진리들에 기초하고 있다.

그리고 그가 그들과 이야기했다, 말하기를. 이는 그들에 관한 생각과 지각을 의미한다. 이는 “이야기함과 말함”이 생각하는 것과 지각하는 것임에서 알려진다.

만일…당신들의 혼과 함께 있다면… 이는 만일 심정으로부터 있는 진리에 대한 애착으로부터 이라면을 의미한다. 이는 “혼(soul)”의 내적 의미로부터 분명해진다. 말씀의 많은 구절에서 “심정으로부터와 혼으로부터”라고, 또는 “온 심정으로부터와 온 혼으로부터”라고도 말해지는데, 이를 수단으로 모든 의지와 모든 이해력으로부터 이다가 의미되어진다. 인간이 두 능력, 즉 뜻함(의지)과 이해함(이해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또한 의지는 이해력으로부터 분리된 능력이라는 것도 알려져 있다. 그 이유가 우리는 선과 진리를 이해할 수 있어 이해했음에도 여전히 악과 거짓을 뜻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애당초 인간은 의지와 이해력을 하나로 만들도록 창조되어져 있었다, 따라서 이것을 생각하지 않는데 저것을 뜻하는 것, 또는 이것을 뜻하지 않는데 저것을 생각하지 않게 되어 있었다는 말이다. 이와 같은 상태가 천적 인간의 상태, 이와 같은 것이 천적 (왕국의) 교회 안에 있었고, 이것이 “사람(Man)”, 또는 “아담”이라 불리워졌다. 그러나 영적 인간과 더불어, 즉 영적 (왕국의) 교회와 더불어, 이쪽 능력이 저쪽 능력과, 즉 이해력이 의지로부터 분리되었다는 말이다; 그리고 인간은 지적 측면에 관하여서 주님에 의해 개혁되어진다(reform), 그리고 이 개혁 과정에서 새로운 의지와 새로운 이해력이 만들어내진다. 주님으로부터 있는 새 의지, 이 부분이 “심정(heart)”이라 불리운다, 그리고 새 이해력은 “혼(soul)”이라 불리운다; 그리고 “모든 심정으로부터와 모든 혼으로부터”라고 말해질 때, 이를 수단으로 모든 의지로부터와 모든 이해력으로부터가 뜻해진다.
이렇게 “심정과 혼”이 뜻해지는 것이 모세의 책에서:
너희는 여호와 네 하느님을 네 모든 심정을 다하여, 그리고 네 모든 혼을 다하여, 그리고 네 모든 힘을 다하여 사랑할 것이다 (신. 6:5).
그리고 다시:
지금, 오 이스라엘아, 여호와 네 하느님이 너희에게 무엇을 요구하느냐? 그것은 여호와 네 하느님을 경외하는 것, 그분의 모든 길들을 걷는 것, 그리고 그분을 사랑하는 것, 그리고 여호와 네 하느님을 네 모든 심정을 다하여, 네 모든 힘을 다하여 섬기는 것이다
(신. 10:12; 11:13).
다시:
이 날 여호와 네 하느님이 너희에게 이 규례들과 공정들을 행하라고 명령하신다; 그리고 너희는 그것들을 네 모든 심정을 다하여, 그리고 네 모든 혼을 다하여 지키고 행하라
(신. 26:10).
열왕기서에서:
다윗이 솔로몬에게 말했다, 여호와께서는 그분이 나에게 말하셨던 모든 말을 준행하실 것 이다, 말하시기를, 만일 네 아들들이 내 앞에서 진리 안에서 그들의 모든 심정을 가지고, 그들의 모든 혼을 가지고 걷는데 집중한다면; 이스라엘의 왕좌 위에서 너로부터의 사람이 중단되지 않을 것이다 (왕상. 2:4).
마태복음서에서:
너는 주 네 하느님을 네 모든 심정으로, 그리고 네 모든 혼으로 사랑할 것이다
(마. 22:37; 막. 12:29, 30).
여호와 또는 주님을 서술할 때도 위 구절들에서와 마찬가지인데, 그 이유는 거기로부터도 의지로부터 있는 선에 대한 애착이, 이해력으로부터 있는 진리에 대한 애착이 교인들과 더불어 오기 때문이다, 사무엘서에서:
나는 나를 신실한 성직자 위에, 내 심정 안에 있는 것과 내 혼 안에 있는 것에 따라서 일 으켜 세울 것이다 (삼상. 2:35).
그리고 예레미야서에서:
나는 그들 위에서 기뻐 환호하여 그들에게 선을 베풀 것이다, 그리고 나는 진리 안에서 이 토지에 그들을 내 모든 심정을 가지고, 그리고 내 모든 혼을 가지고 심을 것이다
(예. 324:41).
그리고 많은 다른 구절들에서도, “혼”은 진리에 대한 애착을 의미한다. 이사야서에서:
내 혼을 다하여 나는 밤에 당신을 바랬습니다; 그렇습니다, 내 한 가운데에서 내 영을 다하 여 나는 당신을 일찍 찾았습니다; 그 이유가 땅에 대한 당신의 공정함들에 따라서 세상의 주민들이 정의를 배우기 때문입니다 (이. 26:9);
위에서 “혼”은 진리에 대한 애착을; “영”은 선에 대한 애착을 표시한다.
이사야서에서:
어리석은 자는 우둔하게 말하여 배고픈 혼을 텅비게 만들고, 목마른 자로 목이 타게 한다 (이. 32:6);
“배고픈 혼”은 선을 바램을 표시하는데, 이것을 어리석은 자는 텅비게 한다; “목마른 혼”은 진리를 바램을 표시하는데, 이것을 어리석은 자는 목타게 한다. 예레미야서에서:
그들의 혼은 물을 댄 동산 같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지쳐있는 혼에게 물을 줄 것이 다, 그리고 모두 각각의 슬퍼하는 혼을 나는 채워줄 것이다 (예. 31:12, 25);
위에서 “혼”은 선에 대한 애착과 진리에 대한 애착을 표시한다.
다시 예레미야애가서에서:
모든 그녀의 백성이 슬퍼한다, 그들은 빵을 찾고 있다, 그들은 자기를 기쁘게 하는 것들(보 물)을 혼을 회복할 식품을 위해 주고 있다, 내 혼을 회복할 위로자는 나로부터 멀리 있으 시다; 나의 아들들은 황무해 있다. 그들이 자신들을 위해, 그들의 혼을 회복시키려고 식품 을 찾았다 (애. 2;1:11, 16, 19);
“혼”은 선과 진리에 대한 애착 속의 생명을 표시한다; “식품”은 지혜와 총명이다.
“혼”이 심정으로부터의 진리에 대한 애착을 의미한다고 말하는데, 그 이유는 진리에 대한 애착은 심정으로부터가 아니면 안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자기를 사랑함으로, 우쭐댐을 사랑함으로부터, 세상을 사랑함으로부터, 이득을 사랑함으로부터, 공적을 사랑함으로부터의 것들로부터도 진리에 대한 애착이 생겨나기는 하나 그것들은 순수하지 못하다; 이것은 육에 속한 의지로부터 이지, 심정으로부터가 아니다; 심정으로부터 인 것이 주님으로부터 있다. 더욱이 말씀에서 “혼”은 보편적 의미에서 모든 생명을 의미한다; 그 이유가 보편적 의미에서 혼은 또 다른 것을 존재하게 하고 살게 하는 것을 말한다. 예를 들면, 육체의 혼은 육체의 영(spirit)이다, 그 이유가 영으로부터 육체가 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의 혼은 더 내적인 생명이다, 이로부터 영은 지혜와 이해력을 가진다.

…내가 내 앞으로부터 내 죽은 자를 매장하도록… 이는 밤으로부터 세상에 널리 알리시고 다시 일어나기를 바랬음을 의미한다. 이는 “매장한다”가 다시 일어난다를; “죽은”이 신앙의 선들과 진리들 측면에서 밤이다를 표시함에서 알려진다.

나에게 귀를 기울여라. 이는 그들이 승낙할 것임을 의미하는데, “들음”의 의미가 순종함, 승낙함이다에서 알아진다.

나를 소알의 아들 에브론에게 중재하라. 이는 신앙으로부터의 선과 진리가 받아질 수 있던 이들을 의미한다. 이는 사라가 매장될 곳이 있는 들판과 동굴이 에브론에게 속해 있다는 사실로부터; 그리고 “매장”이 거듭남을 표현함으로부터 알려진다. 이를 종합하면 에브론에 의해서 신앙의 선과 진리를 받을 수 있는 이들이 의미됨을 알게 된다. 헷의 아들들 역시 같은 것을 표현한다, 이들 역시 에브론의 성의 주민이기 때문이다. “중재함”은 여기서 받을 준비가 된 것을 의미한다.

9절. 그가 가지고 있는 것, 그의 밭의 끝에 있는 막벨라 동굴을 줄 수 있게 하시오. 나는 그에게 당신의 한 가운데에서, 동굴을 소유하기 위해 은을 충분히 주리다.

그가 가진 막벨라 동굴을 나에게 주도록… 이것이 신앙의 희미함을 의미하는 것은 “동굴”의 의미가 희미함이다로부터; 그리고 “막벨라”의 의미가 희미함에 있는 신앙이다로부터 알려진다. “동굴”이 희미함을 의미하는 이유는 그것이 어두운 장소이기 때문이다. “산의 동굴”이 말해질 경우, 이는 선의 희미함을 뜻하나, “막벨라의 들판의 동굴”을 말할 경우, 이는 진리의 희미함을 뜻한다. 여기서는 “막벨라의 동굴”이라 말해진다, 그리고 막벨라는 들판이었고, 이 들판의 끝에 동굴이 있었다. 이는 진리의 희미함, 같은 말로 신앙의 희미함이 뜻해진다. 고로 “막벨라”는 희미함에 있는 신앙을 뜻한다.
거듭나지고 있는 이들과 영적으로 만들어지는 이들은 진리 측면에서 가장 큰 희미함 안에 있다. 실로 선은 주님으로부터 그들과 더불어 안으로 흘러들고 있다. 그러나 진리의 경우는 그렇지 않다; 그러므로 주님과 인간과 더불은 선 사이에 평행(parallelism)과 상응이 존재한다. 그러나 진리와 더불어서는 아니다. 이에 대한 제 일의 원인은 여기서 취급되는 이들이 선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은 선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는 것조차도 심정으로부터 믿지 않고 있다; 그리고 선이 그들과 더불어 희미함 안에 있는 한, 그들은 진리 역시 희미함에 있을 수밖에 없다. 그 이유는 진리가 선으로부터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좀 더 살펴보자: 그들은 주님이 선 자체이시다는 것, 그리고 주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향한 선행이 선이다는 것, 이를 뒷받침하고 확증하는 모든 것이 진리이다는 것을 아주 희미하게 알고 있다; 더구나 그들은 위의 내용에 의심함을 흠모하기까지 하고, 그 의심들을 추론하는 것도 용인하고 있다. 그들이 이런 상태에 있는 한, 주님으로부터의 진리의 빛이 흘러들 수 없다; 그들은 주님을 하느님이 아닌 자기와 같은 사람으로 생각하기까지 한다; 그들은 세상적 사랑으로부터 그분을 사랑함에 관해 생각한다; 이웃을 향한 선행에 대한 순수한 애착이 무엇인지를 그들은 거의 모르고 있다. 실로 선행이 무엇인지, 이웃이 무엇인지를, 이것들이 본질에 해당되는지를 모른다. 이로부터 분명한 것은 그들이 얼마나 영적인 것에서 희미함 안에 있는지 이다. 그들이 거듭나기 이전에서는 이렇게 있었다는 것, 그 상태가 아래에서 취급된다.

그의 밭의 끝에 있는… 이는 교회가 거의 없는 곳을 의미한다. 이는 “끝” 또는 맨끝은 거의 없다를 의미한다로부터; 그리고 “들판(밭)”이 교회, 또한 교회 속에 있는 교리를 의미한다로부터 알게 된다; “끝”, 또는 맨끝은 거의 없음이다는 것은 말씀에서 토지의 묘사, 즉 지면, 들판에 대한 묘사로부터 알는지 모른다; 그것들의 중간 부분은 많은 것을 의미하나, 맨끝은 거의 없는 것을 의미한다. 이 맨끝은 빙둘러 있는 부분이라고도 불리운다. 그 이유는 표현이 맨끝에서 중단되기 때문이다. 고로 여기서의 “들판의 끝”은 교회가 거의 없음을 의미한다.

은을 충분히… 이는 진리를 통하여 되찾아짐(redemption, 구속함)을 의미한다. 이는 은의 의미가 진리이다로부터; 그리고 “그가 나에게 은 안에서(은을 받고) 주게 하라”, 또는 “은을 위하여”의 의미가 사는(buy) 것이다, 영적 의미에서는 되찾는 것이다로부터 알려진다. 영적인 것이 “은으로 샀다”라고 말해지는 것은 이미 살핀 것에서 알는지 모른다. 즉 진리를 수단으로 되찾아지는 것이다. 이런 이유는 그들이 거듭나진다는 것, 즉 신앙의 진리를 통하여 선에 소개되어지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영적 (평면의) 인간은 천적 (평면의) 인간 같이 선을 지각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은 진리를 수단으로 선이 있음을 알고, 진리로부터 선이 있음을 인정한다; 그래서 그가 인정하고 믿을 때, 이 선은 그에게 선이 되어간다, 그리고 그는 그것에 의해 선으로 감동되어진다. 고로 그가 가지는 선은 그가 가진 진리의 품질 만큼에서 이다. 그러므로 영적 (평면의) 인간은 진리를 수단으로 되찾아졌다고 말해진다. 그러나 선의 품질은 진리로부터 태어나지거나 생산되거나 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가 가진 진리의 품질 안으로 선이 주님으로부터 유입됨으로 태어나고 생산된다.

동굴의 소유를 위해 너희 한 가운데에서, 그로 하여금 그 동굴을 나에게 주게 하라. 이는 그러므로 (구원, 또는 천국을) 소유함은 거듭남을 통하여 임을 의미한다. 이는 설명이 따로 필요 없을 것이다. 그 이유가 “매장소”가 거듭남임을 이미 살폈기 때문이다.

10절. 그리고 에브론은 헷의 아들 사이에서 앉아 있었다. 그리고 헷족, 에브론은 헷족의 아들들, 성문에 들어온 모든 자들의 귀에서 아브라함에게 말했다, 말하기를.

에브론은 헷의 아들들의 사이에서 앉아 있었다. 이는 신앙으로부터의 선과 진리를 제일 가는 것으로서 받아질 수 있는 이들을 의미한다. 이는 “에브론”이 표현한 것으로부터, 또한 “헷의 아들들”의 의미가 신앙의 선과 진리를 받을 수 있는 이들이다로부터, 그리고 이들과 더불어 새로운 교회는 있을 수 있다; 그리고 “한 가운데”, 또는 “한 가운데에서”의 의미는 제일 가는 것, 제 1의 것, 또는 가장 깊은 것이다로부터. “한 가운데, 중앙, midst”의 내적 의미가 제일 가는 것, 제 1의 것, 가장 깊은 것이다는 것은 다른 삶에 있는 표현들로부터 이다; 그 이유가 어떤 선이 영적 생각들에 의해 표현될 때, 가장 좋은 것이 한 가운데에서 표출되기 때문, 그리고 덜 좋은 선과 덜한 선 계속적으로 중앙으로부터 바깥쪽으로 표출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주변에서는 선이 있지 않은 것들이 있다; 이로부터 “한 가운데에서”는 제일 가는 것, 제 1의 것, 또는 가장 깊은 것 모두를 표시한다. 이 방식에서 생각으로부터의 관념들, 또한 애착들, 그리고 상태의 모든 변화들이 표현되어진다; 다양한 선들과 악들 역시 중앙에 관련하여 그들의 상황에 따라서 있다. 이것의 근원은 영적, 천적 왕국의 것들의 형체로부터 이다.

그리고 헷족 에브론이…아브라함에게 대답했다. 이는 수용하는 그들의 상태를 의미한다. 이는 “대답함”이 동의함이 있을 경우, 수용(응낙)함이다로부터; 또한 이어지는 것으로부터도 분명해진다. 에브론이 여기서 “헷족”이라 불리워진다. 이는 영적 교회가 머리요 우두머리임을 표현하기 위해서 이다.

헷의 아들들의 귀에. 이는 순종을 의미한다. 이는 “귀”가 순종을 의미함에서 알려진다.

그의 성 문 안에로 갔던 모든 이들에게, 말하기를. 이는 교리적인 것들을 통하여 신앙이 있음에 관하여를 의미한다. 이는 “성 문(gate)”의 의미가 들어감, 입구, 고로 소개됨, 안으로 들임이다로부터; 그리고 “성”의 의미가 신앙의 진리이다로부터 알려진다. 고대 교회 시절에 있던 성들은 후기 시대, 또는 요즈음 우리가 생각하는 성 같이 규모가 크고 튼튼한 성벽의 성은 아니었다. 단지 분가한 한 개인의 가족들이 다함께 사는 정도의 성이다. 즉 한 부모 아래의 구성원이 성의 주민을 구성했다고 생각하면 족할 것이다. 예를 들면, 아브라함의 종이 이삭의 약혼녀를 구하러 갔던 성의 경우인데, 이는 나홀의 성이라 불리운다 (창. 24. 10). 거기에는 나홀의 가족들이 있었다; 야곱이 밧단 아람으로부터 여행하여 당도했던 곳인 살렘(Shalem), 즉 세겜의 성은 하몰의 가족과 세겜이 살고 있었다 (창. 33:18, 34장). 이외 다른 성들도 비슷하다.
그리고 그들은 태고 사람들로부터 나라들이나 가족들이 천국의 사회들, 고로 사랑과 선행으로부터의 것들을 표현한다는 것을 배웠을 때 같이, 마찬가지로 “성”이 가족 대신, 언급될 때, 그리고 나라 대신 “백성, 사람들”이 언급될 때, 신앙으로부터 있는 진리가 의미되었다. 이로부터 또한 “하느님의 성”과 “거룩한 성”도 순수한 의미에서 주님에 대한 신앙을 의미한다; 그리고 벽이 둘려진 마을이나 성은 신앙을 의미했기에, 성의 “문”은 교리적인 것들을 의미했다, 그 이유는 이것들이 신앙을 소개하고 신앙 안으로 들어가게 하기 때문이다. 유대 교회 즉 표현 교회에서 이것은 성 문에 앉아서 재판하는 원로들과 재판관들에 의해 의미되었다; 이는 말씀의 역사 부분에서 확인된다; 스가랴서에서:
이것들은 너희가 해야 할 말들이다; 너희는 모든 사람은 자기 동료에게 진리를 이야기하라, 너희 문들에서 진솔하게 판결하고 평화로이 재판하라 (슥. 8:16).
아모스서에서:
악한 자를 미워하고 선한 자를 사랑하라, 그리고 문에서 공정을 건립하라 (암. 5:15).

11절. 아니오, 나의 주여, 나에게 귀를 기울여 주시오, 나는 당신에게 이 들판을 드립니다, 그리고 그 안에 있는 동굴을 나는 당신에게 드립니다. 내 백성의 아들들의 눈 앞에서 나는 당신에게 드리니, 당신의 죽은 자를 매장하시오.

아니오, 나의 주여, 나에게 귀를 기울여 주시오. 이는 앞 절에서 서술했듯이 첫 번째 상태를 의미한다. 즉 그들은 신앙의 희미함에 있었다를 의미하는데, 이는 그의 거절함으로부터. 즉 그들은 아브라함의 제안인 은을 충분히 주겠다는 것(이는 9절의 내적 의미에서 그들은 주님에 의해 되찾아지는 것을 뜻한다)을 기꺼이 경청하려 하지 않았다로부터 분명해진다. 그러나 그들은 신앙과 교회 속의 것들에 관하여 자신들을 준비하기를 바랬다는 것, 즉 자신들을 개혁하기를 바랬다는 것이다. 이 말들, “아니오, 나의 주여, 나에게 귀를 기울여 주시오”가 그들의 상태를 포함하고 있다. 즉 되찾음과 개혁에 관하여 생각하는 그들의 상태이다; 그 이유가 그들의 제안이 이 뒤를 즉각 잇기 때문이다.

이 들판을 나는 당신에게 드립니다, 그리고 그 안에 있는 동굴을 나는 당신에게 드립니다. 이는 교회 속에 있는 것들과 신앙 속의 것들에 관련하여 스스로 준비함을 의미한다. 이는 들판이 교회를 의미함에서; 들판에 있는 “동굴”이 신앙의 희미함이다로부터; 그리고 “들판을 줌”과 “동굴을 줌”, 같은 것으로 아브라함으로부터 은을 받지 않음이 주님에 의해 되찾아지기를 바라지 않음, 그러나 스스로 되찾기를 바램, 고로 이런 것들에 관하여 스스로 준비하기를 바램을 의미함에서 알려진다. 이와 같은 상태는 개혁되어 영적으로 만들어지는 모든 이들의 처음 상태이다. 다시 말해 그들은 자신스스로가 아니고 주님에 의해 개혁됨을 믿지 않는다. 즉 그들은 선으로부터의 의지와 진리로부터의 생각의 모든 것은 자신으로부터 있다고 믿는다는 말이다; 또한 그들은 주님에 의해 그런 상태에 남아 있다, 그 이유가 그와 달리해서는 그들이 개혁될 방도가 없기 때문이다. 만일 그들이 거듭나기 이전, 이것이 그들에게 말해졌다면, 즉 그들은 자신들로부터서 선의 어떤 것도 행할 수 없다, 또는 자신들로부터 진리의 어떤 것도 생각할 수 없다고 말해진다면, 자기들은 의지 안으로 유입됨을, 생각 안으로 유입이 있음을 기다려야만 하느냐, 따라서 아무 것도 시도할 수 없지 않느냐고 하여 그들은 생각의 오류에 빠져들고 말 것이다. 또는 선과 진리의 근원이 자신들로부터가 아니다면, 정의를 자신에게 귀속되게 할 수 없지 않느냐는 생각의 오류, 또는 자신들은 기계에 불과한 것 아니냐는 오류, 또는 자신을 좌지우지하는 것이 나자신이 아니다는 말인가 하는 식의 오류 같은 것에 빠져든다는 말이다. 아마 이 외에도 더 많은 오류에서 허덕일지 모른다. 그러므로 개혁 이전 첫 상태에서 선과 진리는 자신으로부터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허용되는 것이다.
그러나 거듭나진 후에, 등차적으로 이 경우는 이러하다는 지식이 그들 안으로은근히 심어진다, 하여 모든 선과 진리는 주님만으로부터 있다는 것도; 더 나아가 그들이 수준 높은 거듭남에 이를 때, 즉 보다 더 완전해질 때, 주님으로부터 있지 않은 것은 무엇이든 악이고 거짓이다는 지식도 심어진다. 거듭난 자에게 그가 육체의 삶 안에서가 아닌 다른 삶이다면, 그에게는 이 지식을 아는 정도가 아니라 지각하게 해주신다. 그 이유가 모든 천사들은 이것이 그렇다는 지각 안에 있기 때문이다

내 백성의 아들들의 눈 앞에서 나는 그것을 당신에게 드립니다. 이는 모든 것을 이해함에 의거해서를 의미한다. 이는 “눈”의 의미가 이해함이다로부터; 그리고 “백성의 아들들”의 의미가 모든 것이다로부터; “백성의 아들들”은 진리로 처음 시작하는 이들이다, 그 이유가 “백성”은 진리들 안에 있는 이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내 백성의 눈에서”라 말해지지 않고 “내 백성의 아들들의 눈에서”라고 말해진다.

당신의 죽은 자를 매장하시오. 이는 그들은 밤으로부터 세상에 널리 알리심이 있어 일으켜질 것임을 의미한다. 이는 “매장함”이 다시 일어나짐, 또는 다시 일어남이다로부터; 그리고 “죽은”의 의미가 신앙의 선들과 진리들 측면에서 밤이다로부터 알려진다.

12, 13절. 그리고 아브라함은 그 토지의 백성 앞에서 절을 했다. 13. 그리고 그는 그 토지의 백성들의 귀에서, 에브론에게 말했다. 말하기를, 그러나 만일 당신의 뜻이 그러하다면, 바라건대, 나에게 귀를 기울여 주시오. 나는 이 들판을 위해 은을 줄 것이오. 그것을 나에게서 가져가시오, 그리고 나는 내 죽은 자를 거기에 매장할 것이오.

아브라함이 그 토지의 백성들 앞에서 절을 했다. 이는 새로운 영적 (왕국의) 교회 속에 있는 이들의 선한 의지 때문에 주님께서 기뻐하심을 의미한다. 이는 “절함”이 기뻐 환영함이다로부터; 아브라함의 표현이 주님이시다로부터; 그리고 “토지의 백성”의 의미는 영적 (왕국의) 교회이다로부터; 그러나 7절의 경우, “그는 토지의 백성에게, 헷의 아들들에게 절을 했다”라고 말해진다. 헷의 아들들이 더 언급된 이유는 이 구절에서는 개시하려는 시작점에 있는 교인들을 말하고, 이 구절의 경우는 (거듭남의) 시작 초기는 지나서 진행되어가고 있는 교인들이 언급되기에 개시함이라는 폭넓은 측면에서 같은 뜻을 가진 토지의 백성만을 언급했기 때문이다. 7절의 경우에서는 진리들 측면에서 (주님을) 수용한 이들이기 때문에 주님의 기뻐하심이 있으나, 이 구절은 (거듭남이 보다 발전하여) 선한 의지 측면에서 (주님을) 수용하는 이들이기 때문에 주님의 기뻐하심이 있다. (진리를) 수용함(받아들임)이 처음에 있다; 그 이유는 이것은 이해함으로부터 있기 때문이다. 그 후에 선한 의지가 온다, 그 이유는 이것은 의지에 속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가 에브론에게 이야기했다. 이는 받을 수 있는 이들에게 유입(influx)이 있음을 의미한다. 이는 “이야기함”이 생각하는 것, 마찬가지로 뜻하는 것, 고로 흘러드는 것, 그 이유는 생각함과 뜻함 때문에 결과되는 것이 유입이기 때문이다로부터; 에브론이 신앙의 진리와 선을 받을 수 있는 이들을 표현함으로부터 알려진다.

그 토지의 백성들의 귀에서. 이는 교회 속의 진리에 관련하여 순종하기까지 조차를 의미한다. 이는 “귀”의 의미가 순종함이다로부터; 그리고 “토지의 백성”이 영적 (왕국의) 교회 속에 있는 이들, 또한 이 교회로부터의 진리들을 의미함으로부터 알게 된다.

그러나 만일 당신의 뜻이 그러하다면, 바라건대, 나에게 귀를 기울여 주시오. 이는 더 내면적으로 유입이 있음을 의미한다. 이는 대화의 시리즈(seris)로부터 분명해진다. 에브론에게 아브라함이 이야기함이 유입이 있음을 의미하는 것은 방금 앞에서 설명했다; 그리고 여기서는 대화가 이어지고, 경청함이 이렇게 말함에서 “만일 당신의 뜻이 그러하다면, 바라건대, 나에게 귀를 기울여 주시오”에 놓여 있다; 고로 유입이 있음이 의미된다. 내적 의미에서 표현과 단어들은 거의 아무 것도 아니다; 그러나 시리즈로부터 흐르는 그것들의 의미가 관념을 표출한다, 그리고 실로 천사들 앞에서는 영적인 관념이다, 이 관념을 외적 의미, 또는 글자 의미가 목적물로서 섬기는 것이다. 그 이유가 인간의 생각 속의 관념들은 천사들에게는 영적인 생각들의 목적물과 같기 때문이다; 그리고 인간과 더불은 생각 속의 제일 가는 관념은 결국은 말씀으로부터 있다. 그 이유가 말씀에 있는 모든 것들은 표현적이고, 말씀 안의 일반적, 특수적 모두에서 있는 단어들은 의미적이기 때문이다. 한때 나는 그것들이 말씀으로부터 이다는 것을 주목한 적이 있었다. 그 이유는 말씀 안에 있는 영적 평면의 것들과 천적 평면의 것들이 그것들의 질서에 따라 정규적 방법에서 흐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두 평면 수준에서의 의미는 주님과 그분의 왕국만을 취급하는 가장 깊은 의미로부터 거룩해 있었다.

나는 이 들판을 위해 은을 줄 것이오. 그것을 나에게서 가져가시오. 이는 주님으로부터 있는 교회의 진리들 측면에서 되찾음(되삼, redemption)을 의미한다. 이는 “은을 줌”이 진리를 수단으로 되찾아지는 것을 의미한다로부터; 그 이유가 “은”은 진리이기 때문이다; “들판”의 의미가 교회, 또한 진리로부터의 교리이다로부터; 그리고 “나에게서 가져감”이 교회 속에 있는 이들과 더불은 상호적인 것이다로부터; 상호적인 것이란 되찾아짐은 주님만으로부터 있다는 신앙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되찾으심에 주목하면, 이것은 개혁과 거듭남과 같고, 결과적으로 지옥으로부터의 해방과 구원됨이다. 영적 (왕국의) 교인의 개혁, 거듭남, 되찾아짐은 진리를 통하여 결과되어진다; 그러나 이것이 천적 (왕국의 ) 교인의 경우는 선을 통하여 결과되어진다. 이에 대한 이유들은 반복적으로 많이 말한 편이다. 즉 영적 (왕국의) 교인은 선으로부터의 의지에 속한 것은 아무 것도 가지고 있지 않다, 그 대신 그들은 선한 것을 이해하는 능력이 선물되어져 있다. 선을 이해함이 진리라고 우선적으로 불리우고, 실로 신앙의 진리이다; 그러나 진리를 뜻하고 행하는 것이 선으로 불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영적 (왕국의) 사람들은 선을 이해함을 통하여, 같은 말로, 진리를 통하여 선으로부터의 의지에 소개되고, 같은 말로 선 안으로 받아들여진다; 여기서 유의할 점은 선으로부터의 의지에 속하는 어떤 것일지라도 자기 자신들로부터 있지 않다는 점이다. 그 이유가 그들과 더불어 있던 선으로부터의 모든 의지는 상실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은 주님으로부터 새 의지를 받는다; 그리고 그들이 이 의지를 받을 때, 그때 특별하게 그들은 되찾아졌음 이라 불리운다.

나는 내 죽은 자를 매장할 것이다. 이는 고로 그들은 밤으로부터 공표할 것이고 생기가 있어질 것이다를 의미한다. 이는 “매장함”과 “죽은”의 의미가 다시 일어남이다로부터 분명해진다. 그들이 여기서 생기 있어진다고 말했는데, 그 이유는 그들이 신앙을 받아가는 과정에 있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신앙으로부터, 즉 그것의 선으로부터 그들이 생명을 받기 때문이다; 그들의 생명은 다른 근원으로부터는 있지 않다. “나는 내 죽은 자를 매장할 것이다”는 영적인 밤에서 나와 생기 있게 됨을 의미하는 이유는 이전의 교회는 죽고, 새로운 교회가 옛 것의 자리에 주님에 의해 일으켜 세워지기 때문이다; 고로 생명이 죽음 대신에 주어지고, 밤 대신에 아침이 온다; 또한 개혁되고 영적 인간이 되어가는 이들과 더불어, 그의 “죽은 자”는 마치 매장된듯하여 지고, 새로운 것, 살아 있는 것이 다시 일어난다; 고로 그 사람과 더불어 밤 대신에, 어둠과 차거운 것 대신에, 열과 빛을 가진 아침이 부상한다. 이로부터 주님의 생명 안에 있는 천사들은 죽은 자를 매장함에 따른 인간적 생각 대신에 부활과 생명을 생각한다. 이것은 땅 위 몇몇 교회에서 언제나 있었다; 옛 것들이 만료될 때, 밤이 오고, 그다음 새로운 교회가 어딘가에서 일어나고, 거기에 아침이 오고 있다.

14, 15절. 그리고 에브론이 아브라함에게 대답했다, 15. 그에게 말하기를, 나의 주여, 나에게 귀를 기울여 주시오, 이 땅은 은 사백 세겔이고, 나와 당신 사이에 그것이 무슨 문제 거리가 됩니까? 그러므로 당신의 죽은 자를 매장하시오.

에브론이 아브라함에게 말했다, 그에게 말하기를. 이는 수용하는 상태를 의미한다. 이는 “대답함”에서 동의함이 주어질 경우, 받는 것을 뜻한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것이 여기서 수용하는 상태임은 “대답하여 말하는”에 이어지는 구절로부터 파악된다.

나의 주여, 나에게 귀를 기울여 주시오. 이는 수용함의 첫 상태를 의미하는데, 이어지는 문맥으로부터, 또한 이미 말해진 사항들로부터 알려진다; 여기서 부정적 표현을 하여 비록 아직도 의심의 상태일지라도 확언하고 있다. 그 이유가 이어지는 말, “당신과 나 사이에 그것이 무슨 문제가 되는가?”라고 바로 말하기 때문이다. 이를 수단으로 그가 동의했음을 암시해주고, 여전히 그 동의가 자신으로부터 이기를 바라고 있다. 이 외에도, “나의 주여, 나에게 귀기울여 주시오”는 타인이 되새겨 생각하도록 부추키기 위해 의도하는 관습적 말투일 뿐이다, 그럼에도 거기에 (매장소를) 제공하겠다는 마음의 상태는 담겨 있다.

이 땅은 은 사백 세겔이다. 이는 진리를 수단으로 되찾는(구속) 가격(값)을 의미한다. 이는 “사백 세겔”의 의미로부터 (아래에서 살핀다); “은”의 의미가 진리이다로부터. “사백 세겔”은 되찾는 가격을 의미하는 이유는 “400”이 황폐됨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세겔”은 가격(price)을 의미한다. 황폐됨(vastation)에 대한 것은 이미 살폈기에 알고 있을 것이다. 이것은 두 의미를 지녔다; 하나는 교회가 완전히 멸해질 때, 그래서 이것이 황폐된 채, 무용지물된 채 있다 라고 말해진다; 또 하나는 교회 속에 있는 이들과 더불은 악들과 거짓들이 분리되어 마치 사라져버린듯 하기 위하여 그들이 무지의 상태로 환원되는 것, 또한 시험의 상태로 떨어뜨려지는 것이다. 이런 종류의 황폐됨에서 빠져나오는 이들이 되찾아진다 라고 특별하게 불려진다, 그 이유가 그때에 그들은 신앙의 선들과 진리들 안에서 가르쳐지고, 주님에 의해 개혁되고 거듭나기 때문이다. “400”이 시간에 관련하여 서술될 경우, 이는 황폐됨의 기간과 상태를 의미하지만, “400”이 세겔에 관련해 서술되면 되찾는 값이 의미되어진다; 그리고 사백 세겔이 은과 더불어 동시에 언급될 경우, 이는 진리를 수단으로 되찾아지는 값을 의미하게 된다.
“400년”이 황폐함의 기간과 상태를 의미함에 관하여는 아래 구절로부터도 알게 될 것이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말하셨다, 네가 확실히 알아야 하는 것은 네 씨는 자기들의 것이 아닌 토지에서 나그네로 있고, 그들을 섬길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그들(네 후손들)을 사백 년을 괴롭힐 것이다 (창. 15:13).
위는 “사백 년”이 이스라엘의 아들들이 이집트에 머뭄을 뜻한 듯 여겨지게 한다. 그러나 이집트에 그들이 머뭄이 의미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밖의 어떤 것을 의미하는데, 이는 내적 의미로부터가 아니면 누구도 분명해지지 않을 것이다. 그 이유가 그들이 이집트에 머문 기간은 200여 년 이기 때문이다. 이는 야곱으로부터 모세에 이르는 세월을 계산하면 쉽게 파악된다; 즉 야곱으로부터 레위가; 레위로부터 고핫; 고핫으로부터 아므람이; 아므람으로부터 아론과 모세로 이어졌다 (출. 6:16-20). 레위와 고핫이 야곱과 더불어 이집트에로 왔다 (창. 46:11); 모세는 이후 두 번째 세대에 속했다, 그리고 그가 80세 되었을 때 바로에게 이야기했다 (출. 7:7); 이 모두로부터 계산해보면, 야곱이 이집트에 오고 그의 아들들이 나간 사이의 햇수는 대충 215년이다.
아직 더 분명한 것은, 말씀에서 “사백 년”은 숫자 자체에 의해 역사적 의미에서 뜻해지는 것 외의 다른 것도 의미한다는 점이다:
이스라엘의 아들들이 이집트에 거주한 햇수는 사백 삼십 년이었다; 그리고 사백 삼십 년의 끝이 왔다, 꼭 같은 이 날이었다, 여호와의 모든 군대들은 이집트의 토지로부터 나갔다 (출. 12:40, 41).
위와 같이 말해졌음에도 그들이 이집트에 머문 것은 430년의 절반인 215년이었다. 이 430년은 아브라함이 이집트에 들어갔던 해로부터 계산된 햇수이다; 이렇게 숫자가 말해진 이유는 말들에 감추여놓인 내적 의미를 위하여서 이다. 내적 의미에서, 이집트에 야곱의 아들들이 체류함은 교회의 황폐함을 표현하고 의미하였다; 이 황폐됨의 기간과 상태가 숫자 “430년”으로 묘사되고 있다; “30”은 야곱의 아들들의 황폐된 상태인데, 이는 전혀 아무 것도 아니었는 바, 그들은 황폐함의 어떤 상태를 수단으로 해도 개혁될 수 없었다; 그리고 “400년”은 교회 속에 있는 이들이 황폐해 있는 일반적 상태이다.
그러므로 이 황폐됨의 상태로부터 나가는 이들이 “되찾아진다”라고 불리우는 이들이다. 모세에게 말해진 바로부터: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아들들에게 말하라, 나는 여호와이다, 그리고 나는 너희를 이집트의 무거운 짐 아래로부터 데려내어 갈 것이다, 그리고 나는 너희를 그들의 속박함으로부터 해 방할 것이다, 그리고 나는 너희를 내뻗친 팔로, 큰 심판들로 되찾을 것이다 (출. 6:6).
신명기서에서:
여호와께서는 강력한 손으로 너희를 데려내왔다, 그리고 너희를 종들의 집으로부터, 이집트 의 왕 바로의 손으로부터 되찾으셨다 (신. 15:15; 24:18).
사무엘서에서:
당신께서 이집트로부터 당신에게로 되찾으신 당신의 백성 (삼하. 7:23).
황폐됨의 상태로부터 빠져나온 이들이 “되찾아진” 이들이라 불리우기 때문에, “사백 세겔”은 되찾는 가격이다.
“세겔”이 가격, 값, 추정치를 의미하는 것은 모세의 책에서 분명해진다:
그리고 모든 네 추정치는 거룩함의 세겔에서 있을 것이다 (레. 27:25).
레위기서에서:
혼이 위반했을 때, 그리고 여호와 거룩한 것으로부터 잘못으로 죄지었을 때, 그는 여호와에 게 죄있음의 제물을 가져오는데, 양떼로부터 흠없는 숫양, 네 추정치에 따라, 세겔의 은에 서, 거룩함의 세겔에 따라서이다 (레. 5:15).
위 구절로부터 “세겔”이 값, 추정치를 의미한다는 것은 분명해진다. “거룩함의 세겔”이라 말해지는 이유는 값, 추정치가 주님으로부터의 진리와 선에 관련하여서 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주님으로부터의 진리와 선은 교회에서 거룩 자체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거룩함의 세겔”이라 불리운 것은 다른 구절에도 있다. 즉 출. 30:24; 레. 27:3; 민. 3:47, 50; 7:13, 19, 25, 31, 37, 43, 49, 55, 61, 67, 73; 18:16 이다.
“세겔”이 거룩한 것의 값을 표시하는 것은 거룩한 토지, 거룩한 성이 취급되는 에스겔서로부터 분명해진다:
세겔은 이십 게라이다; 이십 세겔, 이십 오 세겔, 십 오 세겔이 너희의 마네(maneh, pound)일 것이다 (겔. 45:12);
“세겔”, “파운드”, “숫자들에 의해 거룩한 것들, 즉 선과 진리가 의미되는 것은 누구나 쉽게 파악될 것이다; 그 이유가 거룩한 토지, 그리고 그 토지에 있는 거룩한 성 (또는 새 예루살렘)은 주님의 왕국 외에 다른 의미가 있을 수 없고, 이 왕국에는 자연적 의미에서의 세겔, 게라, 파운드, 그것들로 계산함, 숫자 자체는 없고 그것들의 내적 의미로부터만, 즉 선한 것과 진리인 것의 추정치, 값만이 있기 때문이다.
모세의 책에서:
그들은 모두 각각의 사람에게 재앙이 있지 않도록 그의 혼을 위한 죄씻음(속죄함)을 줄 것 인데, 거룩함의 세겔에 따라 반 세겔이다: 세겔은 이십 게라이다; 반 세겔은 여호와에게 대 한 봉헌물(들어 바침)이다 (출. 30:12, 13);
위에서 반 세겔인 십 게라는 주님으로부터 있는 리메인스(remains)를 표시한다. 그러므로 이것이 여호와께 바치는 봉헌물이라 불리운다, 그리고 이것을 수단으로 혼을 위한 죄씻음이 있을 것이다고 말해진다. 한 세겔이 이십 게라 라고 자주 말해지는(레. 27:25; 민. 3:47; 18:16, 이외 더 있다) 이유는 “이십 게라인 세겔”은 리메인스 속의 선에 대한 추정치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세겔은 무게를 재는 치수이기도 하다. 하여 세겔로 금이나 은의 값이 추정되었다 (창. 24:22; 출. 38:24; 겔. 4:10; 45:12). 금의 값, “금”은 선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은의 값, “은”은 진리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 모두로부터 분명해지는 바, “은으로 사백 세겔의 값인 토지”는 진리를 수단으로 되찾음의 값이 의미된다. “토지”라 불리우는 이유는 주제가 영적 (왕국의) 교회이기 때문이다. 이 교회는 주님으로부터의 진리를 수단으로 개혁되고 거듭나진다.

그것이 나와 당신 사이에 무슨 문제 거리가 됩니까? 이는 그가 자기의 동의를 주었다는 것, 그러나 아직도 그것이 자신으로부터 이기를 바라고 있음을 의미한다. 즉 그의 준비함, 또는 개혁됨은 개혁을 취급하는 내적 의미에 적용할 때 글자 의미로부터 분명해진다. 11절에서 에브론에 의해, “들판을 나는 당신에게 준다, 거기에 있는 동굴을 나는 당신에게 준다” 라고 말해졌다, 이를 수단으로 그들은 교회와 신앙 속에서 자신들을 준비하기를, 즉 자신을 개혁하기를 바랐음이 의미되었다. 이것은 개혁되는 이들의 첫 상태임은 위에서 살폈다. 그러나 그들이 진리에 관한 지식, 또는 신앙에 관한 지식이 더 발전함에 따라 그들의 둘째 상태가 온다. 이는 실로 동의함을 주는 것, 그럼에도 아직 그것이 자신들로부터 이기를 바라고 있다; 이것이 이 구절에서 취급되는 상태이다; 그러나 셋째 상태가 곧 묘사되어진다, 즉 그들이 주님에 의해 개혁됨을 믿는 상태이다. 그들의 개혁에 따른 시작점에서 개혁 원인에 대하여는 이미 상술했다 . 그러나 그들이 진리 또는 신앙의 지식들이 발전했을 때, 실로 그들은 자기들이 개혁됨은 주님으로부터 이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러나 여전히 그것이 자신들로부터 이기를 바라고 있는 이유는 무지의 구름은 점진적으로 걷혀지기 때문, 동시에 진리의 확증이 시간이 지나면서 강화되고, 선은 진리의 지식들을 빨아들여 완전해져 간다. 진리가 심어진 선 자체는 개혁이 주님으로부터 임을 인정하게 할 뿐만아니라 믿게 한다. 이것이 셋째 상태이다; 그리고 이것은 넷째 상태를 뒤따르게 한다, 즉 이 상태는 개혁이 주님으로부터 임을 지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육체의 삶에서 이 상태에 오는 자는 거의 없다, 그 이유는 이 상태는 천사의 상태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거듭나는 이들은 다른 삶에서 (거듭남을 계속하는 바) 이 상태 안에 온다. 이로부터 분명한 바, 여기서의 내적 의미에서 영적 (왕국의) 교회인이 묘사되었다는 것, 그리고 그가 아직 미숙한 편에 있다는 것이다; 또한 그가 성숙해지기 시작할 때가 있다는 것, 그리고 결국 성숙해지고야 만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당신의 죽은 자를 매장하라. 이는 밤으로부터 빠져나오는 것, 그 결과 소생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죽은”의 의미가 신앙의 진리 측면에서 밤이다로부터; 그리고 “매장함”이 일어나지는 것을 의미한다로부터. 이 말들이 이 장에서 여러 번씩 등장하는 이유는 주제가 영적 (왕국의) 교인이 신앙의 진리들 측면에서 밤으로부터 빠져나옴, 그리고 소생함 (즉 개혁과 거듭남)이기 때문이다.

16절. 그리고 아브라함은 에브론에게 경청했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에브론에게 그가 헷의 아들들의 귀에 말했던 은을 상인들이 통용하는 방식으로 사백 세겔을 달아 주었다.

아브라함은 에브론에게 경청하였다. 이는 순종이 확인됨을 의미한다. 즉 신앙의 선과 진리가 받아질 수 있는 이들에 의한 순종이 확인됨을 의미한다. 이는 “경청함”이 순종함이다로부터; 그리고 “에브론”은 선과 진리가 받아질 수 있는 이들을 표현하다로부터 알려진다. 확인됨이 그들과 더불어 있다는 것, 그리고 그들에 의해 있다는 것은 말 자체로부터 분명하다; 그 이유가 아브라함이 “그에게 경청했다”라고 말해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에브론에게 은을 달아 주었다. 이는 되찾음(구속)을 의미한다. 이는 “은을 달아서 줌”이 구매한다를 의미함으로부터, 그리고 영적 의미에서는 되찾는 것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를 수단으로 되찾음의 값이 의미되고 있다.

그가 헷의 아들들의 귀에 이야기했던 것… 이는 새로운 교회 속에 있는 이들의 수용량(capacity)을 의미한다. 이는 “귀에 이야기했다”와 “헷의 아들들”의 의미로부터 분명해진다. 내적 의미에서 “이야기하는”것은 지각하는 것과 뜻하는 것 둘 다를 의미한다. “귀”는 순종을 의미한다; 이러므로 “귀에 이야기함”은 수용량에 따라서 (그 이유가 수용량은 수용함에 의존되기 때문, 고로 누군가가 지각하고 뜻할 때 그에 따른 순종에 의존되기 때문), 그리고 “헷의 아들들”이 새로운 영적 (왕국의) 교회인을 의미한다로부터 알려진다.

은 사백 세겔. 이는 되찾음의 값을 의미한다. 이는 이미 살폈다; 그러나 되찾음의 값(가격)은 지금 말할 것이다. 되찾음은 주님만으로부터 있다, 그리고 구속의 값 역시 주님만으로부터 있다; 그리고 이 값은 인간에 의해 수용됨을 서술해준다. 이들과 더불어 값은 수용함에 따라 커진다. 되찾음의 값은 주님께서 가장 비통한 시험들을 통하여 그분의 인간 본질이 신성 본질과, 신성 본질이 인간 본질과 하나를 이루심, 그리고 이것이 그분 자신의 힘에 의해서 있었는 바 그분의 공적과 정의이다; 이 하나로 되심을 수단으로 인류를 구원하셨다, 특별하게는 영적 (왕국의) 교인들을 구원하셨다. 이런 것들이 “되찾음의 값”에 의해 의미되는 것들이다.
이 값이 인간이 수용함도 서술한다는 것, 그의 수용량에 비례하여 커진다는 것은 주님의 신성이 인간과 더불어 교회를 만든다는 사실로부터 분명해진다; 그 이유가 주님 자신의 것이 아닌 것을 두고 교회라 불리울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선은 사랑과 선행으로부터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신앙 속에 있는 진리가 교회라고 불리우는 것을 만든다. 모든 선이 주님으로부터 있다는 것, 모든 진리가 그분으로부터 있다는 것을 모르는 자 아마도 없을 것이다; 인간으로부터 있는 선과 진리는 선과 진리가 아니다; 그리고 이로부터 분명한 바, 인간과 더불은 되찾음의 값은 그의 수용함에 비례하여 커진다는 점이다.
유대인들과 더불어 주님의 되찾으심은 너무나 적게 평가되어 거의 없다고 말해야 할 정도인데 스가랴서에서:
나는 그들에게 말했다, 만일 너희 눈에 좋게 여기거든, 나에게 내 삯을 주라, 그리고 만일 아니다면 주지 말라. 그래서 그들은 내 삯을 달았는데, 은 삼십이었다. 그리고 여호와께서 나에게 말하셨다, 그것을 토기장이에게 던져라, 내가 그들로부터 매겨진 상당한 값이다 (슥. 11:12, 13).
마태복음서에서:
그들이 은 삼십을 가져왔는데, 그분에게 매겨진 값이었다, 그분을 그들은 이스라엘의 아들 들로부터 샀던 것이다, 그리고 옹기장이의 들판을 위해 그들에게 주었다, 이는 주님께서 나 에게 명하신대로 였다 (마. 27:9, 10).
“삼십”은 어떤 것이라 말하기가 불편할 정도로 매우 적은 것을 표시한다. 고로 위 인용 구절은 유대인들이 주님의 공적과 되찾으심에 가치를 하나도 놓지 않았다를 표시한다. 그러나 모든 선과 모든 진리가 주님으로부터 이다고 믿는 이들과 더불어 되찾음의 값은 “40”에 의해 의미되어지고, 더 높은 값은 “400”에 의해 의미되어진다.

상인들이 통용하는 방식으로.. 이는 그들의 상태에 적응함(adapt)을 의미한다. 이는 “상인”, 그리고 “상인들의 통용하는 방식”의 의미로부터 분명해진다. 말씀에서 “상인”은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을 가진 이들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들의 “상품”은 지식들 자체를 의미한다; 이로부터 “상인들의 은 통화”는 받아질 수 있는 만큼에서의 진리를 의미한다; 같은 말로 각자의 수용량과 상태에 적응됨을 의미한다. 이것이 단어들에 첨가되어 있는 것에는 어떤 비밀함이 있을 것 같이 여겨질 것이다.
“상인”과 “상품”에 관하여 뭔가 살피고 넘어가야 할 것 같다; 그러나 그것 자체에 주목하면 이렇다. 개혁되고 거듭나는 모든 이들에게는 주님에 의해 선행과 신앙이 선물되어져 있다, 그러나 당사자의 수용력과 상태에 따라서이다; 그 이유가 인간은 유아기 때로부터 자신에게 흡입한 악들과 거짓들이 있기 때문, 이것이 똑같은 주님의 선물일지라도 이 사람, 저 사람의 수용량을 다르게 결정짓게 한다; 이런 악들과 거짓들은 그가 거듭날 수 있기 이전 반드시 황폐해져야만 한다; 그리고 황폐해짐 이후 천국적이고 영적인 생명이 잔류된 만큼에서 이것이 진리와 더불어 계발되고 선으로 풍요로워질 수 있다. 이것이 리메인스이고, 이것은 주님으로부터의 선과 진리가 인간에게 저장된 것, 이것이 생명을 받는다. 이 선들과 진리들은 유아기로부터 개혁의 시기까지에서 획득되는데, 이는 각자에 따라 많기도 하고 적기도 한다. 이것은 그의 내적 인간 안에 보존되어진다. 이것은 외적 인간이 시험들을 수단으로, 또는 많은 종류의 황폐해짐을 수단으로 상응쪽으로 환산되는 때까지 (세월을) 앞당겨 세상에 널리 알리시지 않는다; 그 이유가 내적인 것들에 반대되는 육체의 것들(즉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 속의 것들)이 정지해지는 때까지, 천적 (평면의) 것들과 영적 (평면의) 것들, 선과 진리에 대한 애착 속의 것들은 흘러들 수 없기 때문이다; 이것이 왜 모든 이가 각자의 수용량과 상태에 따라 개혁되어야 하는 이유이다. 이를 주님께서 멀리 떠난 사람에 관한 비유에서 가르치신다:
어떤 사람이 자기 종들을 불러서 그의 상품들을 인계했다; 그래서 한 사람에게는 다섯 달 란트를, 또 한 사람에게는 두 달란트를, 또 한 사람에게는 한 달란트를 주었다; 각자의 능 력에 따라서이다. 다섯 달란트를 받은 자는 거래해서 다른 다섯 달란트를 만들었다; 마찬 가지로 두 달란트를 받은 자도 다른 두 달란트를 벌었다 (마. 25:14-17).
마찬가지로 열 종들에 관하여, 그들에게 열 므나가 주어졌고, 그들은 그것 가지고 장사했다 (눅. 19:12, 13).
“상인”은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들을 가진 이들을 의미하는 것; 그리고 “상품”은 지식 자체를 의미하는 것이 위 두 인용구절 말고 아래 구절에서도 분명해진다. 에스겔서에서:
두로에게 말하라, 오 바다의 입구에 거주하는 너희여, 많은 섬들의 사람들에게 무역상이다, 다시스는 각종 재물들의 풍부함 때문에 네 상인이었다; 은, 철, 주석, 그리고 납을 그들은 네 장터들에 공급하였다. 야완, 두발, 그리고 메섹, 이들이 네 거래상이었다; 사람의 혼과 놋 그릇을 그들은 네 시장에 공급하였다. 드단의 아들들은 네 거래상이었다; 많은 섬들이 네 손의 상점이었다. 시리아는 많은 수공예에서 네 거래상이었다. 유다와 이스라엘의 토지, 그들은 네 거래상이었다; 밀, 민닛, 과자, 꿀, 기름, 유향을 그들은 네 시장에 공급했다. 다 마스커스는 많은 수공예품으로 네 상인이었다, 온갖 재물의 풍부함 때문이다, 헬본의 포도 주와 자알(Zahar)의 양털로 거래하였다. 단과 야완은 네 장터에 길쌈하는 실을 공급하였다. 드단은 말 위에 까는 천으로 너의 거래자이었다. 아라비안과 게달의 모든 제 일인 자, 그들 은 어린 양들, 숫양들, 염소들에서 네 손의 상인들이었다. 스바와 라아마의 무역상들, 그들 은 모든 향료품에서 최우수 등급을 가지고 너의 거래자였다. 하란과 간네와 에덴과 스바와 앗수르와 길맛의 무역상도 네 거래자였다. 이들은 최우수 등급의 상품을 가지고 네 무역상 들이었다 (겔. 27:3, 12, 15-24).
위의 것들은 두로를 두고 말하여졌다; 그리고 “두로”에 의해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들이 의미되어진다, 이는 몇 특별한 것들로부터 분명해진다. “물품”, “상품”, 여기서 언급되는 상품들이 이런 지식들을 의미한다; 이런 이유로 두로는 “바다의 입구에(해안가) 사는 자”라고 불리운 것이다; 그리고 또한 “많은 섬들의 사람들에게 무역상”이라고 불리운다. 즉 예배에서 아주 멀리 떨어진 이들에게 조차 무역상이었다는 말이다. “은, 철, 주석, 납”은 질서의 차례에서 있는 진리들, 마지막째는 감각적 진리이다. “사람의 혼”과 “놋 그릇”은 자연적 생명으로부터 있는 것들을 “유다와 이스라엘의 토지”가 “밀, 민닛, 과자, 꿀, 기름, 유향에서 거래자”였다란 말씀으로부터의 천적인 것들과 영적인 것들을 의미한다. 언급된 다른 나라들과 상품들은 진리와 선의 다양한 종류와 종속이다. 고로 두로에 의해 의미된 이들과 더불어 있는 지식들이다. 그것들이 지혜와 총명을 오게 하는 지식들이다는 것이 에스겔서에서 분명하다:
사람의 아들아, 두로의 제 일인 자에게 말하라, 네 지혜로 해서, 그리고 네 총명으로 해서 너는 네 재물을 벌어들였다, 그리고 네 보물 안으로 금과 은을 가져왔다; 많은 네 지혜에 의해, 네 거래함에 의해, 너는 네 부유함이 불어나게 했다, 그리고 네 심정이 네 재물 때문 에 들어 올려졌다; 그러므로 보라 나는 네 위에 낯선 자를 데려와서 나라들을 참혹하게 할 것이다 (겔. 28:2, 4-7);
위 구절에서, 그들이 거래한 상품들은 선과 진리에 대한 지식임이 확실하다; 그 이유가 이것으로부터, 그리고 다른 근원 없이 지혜와 총명이 오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말해진다, “네 지혜와 네 총명으로 너는 네 재물을 벌어들였다, 그리고 너는 네 보물 안으로 금과 은을 가져왔다.” 그러나 지식들이 자기를 위하여 있을 때, 자기의 드높임과 유명해짐을, 또는 부자됨을 얻기 위해 있을 때, 그것들은 생명을 가지지 못한다, 그리고 그것들을 획득한 자들 모두는 그것을 강탈 당한다; 그들은 진리를 위해 거짓들을, 선을 위해 악들을 껴안으면서 육체의 삶에서 그것들을 강탈 당한다; 그리고 다른 삶에서 그들은 자기들이 지닌 진정한 것마저 송두리째 거두어내진다; 그러므로 말해진다, “네 심정이 네 재물로 해서 우쭐되었기 때문에, 보라 나는 네 위에 낯선 자를 데려올 것이다” (즉 거짓들); 그리고 “나라들은 참혹해진다” (즉 악들).
에스겔서에서:
두로는 바다 한 가운데에서 잘리운 자 같다; 그들의 물품이 바다를 통하여 나갔을 때, 너는 많은 사람을 만족시켰다; 너는 많은 네 재물과 네 상품을 가지고 땅의 왕들을 풍요하게 헸 다. 지금 너는 깊은 물에서 바다에 의해 부셔진다; 네 물품과 사람들이 네 한 가운데에서 침몰되었다; 사람들 사이에 있는 상인들은 쉿 소리를 내어 너를 꾸짖는다
(겔. 27:32-34, 36).
이사야서에서:
두로에 관해 예언하라. 섬의 주민들로 하여금 잠잠해 있게 하라; 바다를 지나가는 시돈의 상인들이 너를 재 충전하였다; 그리고 [큰]물에서 시홀의 [씨], 강의 수확은 그녀의 총소득 이었다, 그리고 너는 나라들의 장터였다. 그녀 자신에 왕관을 씌우는 두로에 맞서 누가 이 것을 의도했는가? 누구의 상인들이 제 일인 자이더냐? (이. 23:2, 3, 8);
위는 두로의 황폐됨이 취급되고 있다.
바빌론에 관해서도 마찬가지로 “무역”과 “상품”을 서술한다, 이것은 섞음질 된 선에 관한 지식들, 그리고 왜곡된 진리에 관한 지식들이다. 계시록서에서:
바빌론은 모든 나라들에게 그녀의 매춘의 분노의 포도주를 마시게 했다, 그리고 땅의 왕들 은 그녀와 매춘을 범했다, 그리고 땅의 상인들은 풍부한 그녀의 섬세함을 수단으로 부를 만들었다. 땅의 상인들은 그녀를 두고 울고 통곡한다, 그 이유가 아무도 그녀의 상품을 더 이상 사지 않기 때문이다; 금, 은, 보석, 그리고 진주, 그리고 고운 아마포, 그리고 진홍색 (실), 그리고 비단, 그리고 심홍색 (천)의 상품들이다. 그녀를 수단으로 부자가 된 이런 것 들의 상인들은 그녀의 괴로워함 때문에 두려워하며 멀찍이 떨어져 서서 울고 통곡한다
(계. 18:3, 11, 15).
“바빌론”은 내면들이 모독되는 한편 외면은 거룩하게 나타나는 예배이다는 것은 이미 살핀 바 있다; 그리고 이로부터 “무역”과 “상품”이 무엇인지는 분명해진다.
“상인”은 진리와 선에 관한 지식들, 그리하여 총명과 지혜도 자신을 위해 포획하는 자이다는 것은 주님의 말씀으로부터 분명해진다. 마태복음서에서:
천국들의 왕국은 훌륭한 진주들을 찾는 상인에 견주어진다; 그가 큰 값을 지닌 한 개 의 진주를 발견했을 때, 그는 가서 그가 가졌던 모든 것을 팔고 그것을 샀다
(마. 13:45, 46);
“훌륭한 진주”는 선행, 또는 신앙의 선이다.
선과 진리에 관한 모든 지식들이 주님으로부터 있다는 것을 이사야서에서 가르쳐진다:
고로 여호와께서 말하셨다, 이집트의 수고함, 구스의 상품, 스바의 키가 큰 사람들이 너에 게로 건너올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네 것일 것이다; 그들은 너를 따라갈 것이다, 사슬 안 에서 그들은 건너갈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네게 굽혀 절할 것이다, 그들이 네게 간구할 것 이다. 정녕 하느님이 네 안에 있다, 그리고 그밖에 하느님은 계시지 않다 (이. 45:14);
위는 주님의 신성한 인간을 취급하고 있다.
이 모두로부터 “무역”에 의해, 즉 사고 팜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알았을 것이다; 즉 자신의 자아를 위해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들을 포획하는 것, 그리고 그것들을 수단으로 선 자체를 휙득하는 것이다. 이것이 주님만으로부터 이다는 것이 이사야서에서 가르쳐진다:
목마른 모든 자여, 너희는 물들쪽으로 오라, 그리고 은을 가지지 않은 자; 너희는 오라, 사 서 먹으라; 그렇다 오라, 은 없이 그리고 값 없이 포도주와 젖을 사라 (이. 45:1, 2);
위에서 “사는 것”은 자기를 위해 포획함을 표시한다; “포도주”는 영적 진리를 표시한다; “젖”은 영적 선이다. 모든 이가 눈치챌 수밖에 없는 것은, 이 구절에서 “물들쪽으로 오라”는 것이 실지로 물들쪽으로 오라가 아니다는 것, “사는 것”도 사는 것이 아니다는 것, “은”이 은이 아니다는 것, 그리고 “포도주와 젖” 역시 포도주와 젖이 아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들은 내적 의미에서 있는 것들과 상응하고 있다; 그 이유가 말씀은 신성하고, 자연계와 인간의 감각적인 것들로부터 있어지는 표현들이 신성의 영적인 것들과 천적인 것들에 상응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방법에서만 말씀은 신성하게 영감되고 있다.

17, 18절. 그리고 에브론의 들판, 이는 막벨라에 있었고, 마므레 앞에 있었다. 이 들판과 그 안에 있는 동굴, 그리고 들판에 있었던 모든 나무, 거기서부터 모든 경계선 주변에 있는 것, 18. 헷의 아들들의 눈에서, 그의 성의 문에서 안으로 갔던 모든 자들에게 아브라함의 소유임을 확실히 해 두었다.

에브론의 들판. 이는 교회에 속해 있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들판”의 의미가 교회, 또한 교리이다로부터; 그리고 “에브론”이 교회에 속하는 것, 즉 신앙으로부터의 선과 진리가 받아질 수 있는 이들을 표현함으로부터; 이로부터 “에브론의 들판”은 교회에 속하는 것을 의미한다.

막벨라에 있었고, 마므레 앞에 있었다. 이는 거듭남의 질과 양을 의미한다. 이는 “막벨라”가 신앙 속에 있는 진리를 수단으로 거듭남을 의미한다로부터; 그리고 “마므레”의 의미가 거듭남의 질과 양이다로부터 알려진다. “막벨라”에 단어 “동굴”이 인접될 때, 또는 “막벨라의 동굴”이라 말해질 때, 이는 희미함에 있는 신앙이 의미된다 (2935항); 그러나 “막벨라”가 단어 “동굴” 없이 말해질 때, 그리고 그 뒤에서 “동굴과 더불은 들판”이라 말해질 때, 이는 거듭남이 뜻해진다; 그 이유가 “들판”과 “동굴”에 의해 거듭남이 있게 하는 수단인 신앙의 선과 진리가 의미되기 때문이다; 이 외에도, 막벨라는 매장소가 있는 넓은 토지였다, 이를 수단으로 거듭남이 마지막으로 의미된다. 그러나 “마므레”, 이것은 헤브론이었기 때문에(19절에서 말해진다), 그리고 헤브론에 있었는 바 (창. 13:18), 여기서 “막벨라”에 인접할 경우 거듭남의 질과 양을 의미한다. 그러나 “헤브론”에 인접될 경우 교회의 질과 양을 의미한다; 또한 “상수리나무 숲”과 인접할 경우 지각의 질과 양을 의미한다. 고로 “마므레”는 어떤 것의 상태를 단순히 결정해준다; 그 이유가 이것은 아브라함이 거주한 장소였기 때문이다 (창. 13:18); 그리고 거기서 이삭이 거주했고, 거기로 야곱이 왔다 (창. 35:27).

들판과 그 안에 있는 동굴. 이는 신앙으로부터의 진리와 선에 관하여를 의미한다. 이는 “들판”이 교회, 또한 교회의 선 자체를 의미함으로부터 알게 된다. 주님을 사랑함과 이웃을 향한 선행으로부터 있는 천적 평면, 또는 선이 “지면(ground)”, “들판”에 비교되어진다; 이것이 또한 지면, 들판이라 불리우는 이유는 천적 평면, 또는 선이 “씨”나 “씨들”에 비교되는 신앙의 진리들을 받기 때문이다. “동굴” 역시 신앙의 진리를 의미하나 희미함에 있는 진리이다; 그것이 희미함에 있다고 말한 이유는 그것이 영적 평면과 더불어서 있기 때문이다.

들판에 있는 모든 나무. 이는 교회의 내면적 지식들을 의미한다. 이는 “나무”의 의미가 천적 (왕국의) 교회가 취급될 경우 지각을 의미함으로부터 알려진다. 그러나 영적 (왕국의) 교회가 취급될 경우에서는 지식들을 의미한다; 여기서는 내면적 지식들이다, 그 이유는 “들판에 있는 모든 나무”라고 말해지기 때문이다. 그다음 이어지는 말, “빙둘러 모든 경계 안에 있는 것”인데, 이는 외면적 지식들이다; 또한 “들판”이 교회 역시 의미함에서도 파악된다. 들판에 있는 모든 나무, 그 주변 경계 안에 있는 것이라는 언급에 이런 내적 의미가 없다면, 신성인 말씀 안에서 그것이 말해질 가치도 없었을 것이다.

거기서부터 모든 경계 주변에 있는 것. 이는 외면적 지식들을 의미한다. 이는 “경계들”과 “주변, 빙둘러”의 의미가 외면인 것들을 의미함에서 분명해진다; 고로 “빙둘러 경계 안에 있는 것”은 외면적 지식들을 의미한다. 외면적 지식들이란 교회의 외용물인 의식 행위와 교리적인 것들이다; 그러나 내면적 지식들은 교회의 내용물인 교리적 사항 속의 것들이다. 이는 여러 번 서술한 바 있다.
말씀의 다양한 곳에서 “한 가운데”, 그리고 “빙둘러”라고 언급될 때가 자주 있는 편이다. 즉 가나안의 토지를 두고 이야기할 때, “성”과 “예루살렘”은 그 토지의 “한 가운데”로, “빙두른” 지방은 둘러 싼 나라들이 있는 것으로 말해진다. “가나안의 토지”가 주님의 왕국을 표현했는 바, 이 왕국의 천적 평면은 “시온”에 의해, 영적 평면은 “예루살렘”에 의해 표현되었다. 거기는 여호와 또는 주님의 거주 장소이었다. “빙둘러” 있는 나라, 경계선에 이르러 있는 나라조차도 그것들의 질서에 따라 흘러내려가는 천적인 것들과 영적인 것들을 표현했다; 그리고 가장 먼 경계선들은 천적, 영적인 것들이 중단되는 것을 표현했다. 이런 표현들은 천국들에 있는 주님의 왕국 안에 있는 것들로부터 근원을 가진다; 태양으로서 주님은 천국의 한 가운데 계신다; 이로부터 모든 천적인 불꽃과 영적인 빛이 있다; 가장 가까이 있는 이들은 가장 높은 빛 안에 있다, 그러나 더 멀리 떨어져 있는 이들은 빛이 덜한 가운데 있다. 아주 멀리 떨어진 이들은 약한 빛 안에 있다; 그리고 경계선들이 있다, 그리고 지옥이 시작된다, 이는 천국의 바깥쪽이다.
천적 불꽃과 영적 빛의 경우는 이렇다: 순진과 사랑의 천적인 것들, 그리고 선행과 신앙의 영적인 것들은 천사들이 가지는 열과 빛의 같은 비율에서 있다. 그 이유가 천국들에 있는 모든 열과 빛이 태양이신 주님으로부터 있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그러므로 “한 가운데”는 가장 안쪽을 의미하고, 주변은 가장 바깥을 의미한다, 그리고 가장 안쪽으로부터 가장 바깥쪽으로 까지 순서대로 진행되는 것들은 순진, 사랑, 그리고 선행이 등차적으로 중앙으로부터 그것들의 거리에서 있다. 그리고 모두 각각의 천국의 공동체(사회)에서도 이와 같은 질서 속에 있다; 한 가운데 있는 것들은 그 종류 속의 가장 최선의 것이다, 그리고 이 종류의 사랑과 선행은 중앙으로부터 멀어져감에 따라 감소되어진다; 즉 사랑과 선행은 중앙으로부터 거리에 비례하여 있는 이들과 더불어 감소되어 있다는 말이다.
이 경우는 인간과 더불어서도 같다; 그의 가장 안쪽은 그와 더불어 주님이 거주하시는 곳이다. 그리고 이 가장 안쪽이 빙둘러있는 것들을 통치한다. 주님께서 가장 안쪽의 것들에 상응되도록 주변의 것을 배치하실 때 이를 인간이 허용하면, 그 인간은 천국 안으로 받아질 수 있다; 그리고 그때 가장 안쪽, 내면, 그리고 외적인 것들이 하나로서 행동한다; 그러나 인간이 주님께서 하시고자 하는 위의 일을 간섭하고 허용하지 않을 때, 그는 그렇게 못하게 한 만큼에서 천국으로부터 퇴조한다. 인간의 혼이 한 가운데, 또는 그의 가장 안쪽에, 그리고 육체는 빙둘러서, 또는 가장 바깥쪽에 있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그 이유가 그의 혼, 또는 그의 영을 에워싸고 입히고 있는 것이 육체이기 때문이다.
천적이고 영적인 사랑 안에 있는 이들과 더불어, 주님으로부터의 선은 혼을 통하여 육체 안으로 흘러든다, 그리하여 육체는 빛으로 충만되어 있다; 그러나 육체적이고 세상적인 사랑 안에 있는 이들과 더불어, 주님으로부터의 선은 혼을 통하여 육체 안으로 흘러들 수 없다, 고로 그들의 내면들은 어둠에 있다; 이로부터 역시 육체도 어둠으로 꽉 차 있다, 주님께서 이를 가르치신다. 마태복음서에서:
몸의 등불은 눈이다; 만일 눈이 성하다면, 온 몸이 빛으로 가득할 것이다; 그러나 만일 눈 이 악이다면, 온 몸은 어둠으로 가득할 것이다. 그러므로 만일 빛이 어둠이다면, 그 어둠은 얼마나 크겠느냐 (마. 6:22, 23);
“눈”에 의해 혼에 속하는 지적 측면이 의미되어진다.
더욱 나쁜 것은 내면들이 어둠인데, 외면은 충만된 빛으로 나타나는 경우이다. 이들은 바깥쪽에서는 천사이고 안쪽에서는 악마인 경우인데, 이들이 “바벨”이라 불리운다; 그리고 이런 인물과 더불어 “빙둘러” 있는 것들은 파괴되어져 있고, 그들은 지옥쪽으로 곤두박질하여 운반되어진다. 이런 것들이 여리고 성에 의해 표현되어졌다, 그 성벽과 성은 성직자들이 그 성을 빙둘러 일곱 번 돌고 나팔들이 소리를 낼 때 저주가 주어졌다 (여. 6:1-17). 그들이 예레미야서에서 뜻해진다:
네 자신을 바벨을 빙둘러 전열을 갖추어 있게 하라, 활을 구부리는 너희 모두여; 그녀를 향 하여 빙둘러 나팔을 소리내라; 그녀는 자기 손을 주었다; 그녀의 기초들은 붕괴되었다; 그 녀의 성벽들은 무너져 내렸다 (예. 50:14, 15).
“빙둘러”가 무엇을 뜻하는지가 분명할 것이다. 말씀에서 “빙둘러”가 언급되는 경우가 꽤 많다 (예. 21:14; 32:44; 46:14; 49:5; 겔. 36:3, 4, 7; 암. 3:11; 등등.), 그리고 “빙둘러” 있는 것들에 의해 외면적인 이들이 의미된다
아브라함의 소유임을 확실히 했다. 이는 그들이 (개혁과 거듭남의 공적은) 주님만에 속하는 것으로 생각했음을 의미한다. 즉 거듭남의 모든 것, 질과 양의 모두에서, 신앙의 선과 진리에 관하여, 그러므로 내면과 외면의 모든 지식들에 관하여서 이다, 이는 “아브라함”이 주님을 표현함에서; 그리고 “소유물”의 의미가 그분의 것임이다로부터, 고로 그분만에 속한 것이다에서 분명해진다. 누군가가 이것을 내면적으로 더 인정할수록, 그는 더 내면적으로 천국 안에 있다; 그 이유가 천국 안에서 그렇게 지각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거기에는 이것이 그렇다 하는 지각의 영역이 있어서 이다; 그 이유가 그들은 주님만으로부터 있는 선 안에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이 소위 주님 안에 있다 라고 불리우는 것이다. 이 지각의 등차는 한 가운데로부터 주변으로까지 감소되어져 간다.

헷의 아들들의 눈에서. 이는 그들의 이해함쪽에서를 의미한다. 다시 말해, 새로운 영적 (왕국의) 교회 속에 있는 이들의 이해함쪽에서를 의미한다. 이는 “눈”이 이해함이다로부터; 그리고 “헷의 아들들”이 새로운 영적 (왕국의) 교회 속에 있는 이들이다로부터 분명해진다. 16절에서 말해진 바, 아브라함은 헷의 아들들의 “귀에서” 이야기 했다, 이를 수단으로 그들의 수용량에 따라서 였다가 의미되어졌다; 여기서는 헷의 아들들의 눈에서 라고 말해진다, 이를 수단으로 그들의 이해함쪽에서가 의미되어졌다. 앞에서 말해진 것은 그들의 의지 측면을 포함하고, 여기서는 그들의 이해력쪽이 포함된다. 그 이유가 인간은 두 부분 모두에서 개혁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만일 의지와 이해함이 일치하지 않으면, 인간은 거듭나지지 못한다; 즉 만일 선과 진리, 또는 선행과 신앙이 하나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 이유가 선행은 의지 속에, 신앙은 이해력 속에 있기 때문이다. 이러므로 앞 절에서는 “귀에서”라고, 이 절에서는 “눈에서”라고 말한 것이다.

그의 성의 문에서 안으로 갔던 모든 자들에게. 이는 모든 교리적인 것들에 관련하여를 의미한다. 이는 앞에서 설명한 바 있어 생략한다.

19절. 그리고 이후 아브라함은 그의 아내 사라를 가나안의 토지에 있는 헤브론과 똑같은 곳, 마므레의 얼굴 위에, 막벨라의 들판의 동굴에 매장했다.

이후. 이는 그렇게 있었음을 의미한다. 이는 시리즈로부터 분명해진다, 그 이유가 여기서는 결말 부분이기 때문, 즉 그들이 거듭나졌다는 것, 고로 새로운 영적 (왕국의) 교회가 다시 건립되었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은 그의 아내 사라를 매장했다. 이는 그들은 주님으로부터 선과 결합된 진리를 받았음을 의미한다. 이는 “매장하다”가 거듭나다를 의미함으로부터; 아브라함이 주님을 표현함으로부터; 그리고 “아내로서의 사라”는 선과 결합된 진리임으로부터 알게 된다.
영적 인간의 거듭남의 경우는 이렇다. 그는 먼저 신앙의 진리들로 가르쳐진다, 그다음 그는 진리의 애착 안에서 주님에 의해 붙들려 있다. 이웃을 향한 선행인 신앙의 선이 그에게 동시에 은근히 심어진다, 그러나 이것을 그는 거의 알아채지 못한다; 그 이유가 이것은 진리에 대한 애착 안에 감추여 놓여 있기 때문이다, 마지막에 신앙 속에 있는 진리가 선행 속에 있는 선과 결합되어진다. 시간이 가면서, 신앙 속에 있는 진리에 대한 애착이 증가한다, 그리고 진리는 그것의 목적, 즉 선을 위하여, 같은 말로, 생활을 위하여 중요시되어진다, 그리고 이것은 더욱 더 증가해간다. 그리하여 진리가 선 안으로 심어진다, 그리고 이것이 거행될 때, 인간은 심어져왔었던 진리들에 따라 생활의 선으로 자신이 물들어지게 한다; 그렇게 그는 행동한다, 또는 선으로부터 행동하는 듯 자신에게 여겨진다. 이전에는 신앙의 진리가 제일이었으나, 지금부터는 생활의 선이 제일이 된다.
이럴 경우, 인간은 거듭난다; 그러나 그는 선 안에 심어져왔었던 진리의 질과 양에 따라 거듭난다; 그리고 진리와 선이 하나로서 행동할 때, 그는 선의 질과 양에 따라 거듭난다: 이와 같은 경우가 모든 거듭남이다. 인간이 천국 안으로 받아지는 것이 거듭남의 최종 목적이다. 천국은 진리와 선, 선과 진리의 결혼밖에 더 아니다; 그리고 만일 진리와 선의 결혼이 인간과 더불어 만들어내지지 않는다면, 그는 천국의 결혼 안에 있을 수 없다, 즉 천국 안에 있지 못한다.

마므레의 얼굴 위에, 막벨라의 들판의 동굴. 이는 그들은 자기들이 될 수 있는 만큼에서 거듭나졌음을 의미한다. 이는 “동굴”의 의미가 희미함에 있는 신앙의 진리이다로부터; “들판”이 신앙의 선이다로부터; “마므레의 얼굴 위에 막벨라(또는 마므레의 얼굴 앞 막벨라)”의 의미가 거듭남의 양과 질이다로부터 알려진다; 고로 의미인즉, 그들은 자기들이 할 수 있는 만큼에서 신앙의 선과 진리를 수단으로 거듭나진 것이다, 즉 그들의 수용량과 이해력의 양과 질에 따라 거듭나졌다는 말이다.

헤브론과 같은… 이는 이것이 새로운 교회이다를 의미한다. 이는 “헤브론”이 영적 (왕국의) 교회임으로부터 분명해진다. 2절에서, “헤브론과 같은 곳, 기럇아르바”라고 말해지고 있다. 그 이유는 “기럇아르바”에 의해서는 진리 측면에서의 교회가, “헤브론”에 의해서는 선 측면에서의 교회가 의미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구절에서는 기럇아르바는 언급되지 않고 헤브론만 말해진다, 그 이유는 거듭난 인간이 취급되기 때문에서 이다. 그는 진리 측면에서 더 이상 행동하지 않고 선으로부터 행동하기 때문이다.

가나안의 땅에서. 이는 주님의 왕국에서 교회는 하나이다를 의미한다. 이는 “가나안의 토지”가 주님의 왕국을 표현함으로부터 알게 된다. 주님의 교회들과 더불은 경우는 이렇다: 고대 시대에서 교회들은 동시에 많이 존재했다; 그리고 오늘날에서 같이 교리적 사항들에 관련하여 그들 사이에 구분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여전히 그들은 하나를 만들고 있었는데, 그 이유는 그들은 주님을 사랑함과 이웃을 향한 선행을 제일의 교리이자 본질 자체로서 인정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교리가 존재하는 목적은 어떻게 생각하는 가를 가르치는데 있지 않고 어떻게 살 것인가를 가르치는 것이다. 그래서 각각 그리고 모두와 더불어, 주님을 사랑함과 이웃을 향한 선행, 즉 생활의 선이 필수적인 것이었는 바, 교회가 제아무리 숫자적으로 많아도 그들은 한 교회를 만들고 주님의 왕국 안에서도 모두가 하나이다. 이와 꼭같게 천국도 있다; 거기에 무수한 공동체, 사회가 존재하지만, 모두 안에 주님을 사랑함과 이웃을 향한 선행이 있다.
그러나 위와 아주 다른 경우도 있다. 즉 신앙을 교회의 본질로 부르는 교회들의 경우에서 이다; 그들은 신앙이 구원의 제일가는 필수요소 라고 생각하고 알고 있기만 하면, 삶이야 어찌됐든 자기는 구원된 것이라고 상상한다. 이런 경우에 있는 몇몇 교회들은 하나를 만들지 못한다, 엄밀히 말해 교회가 아니다. 신앙의 선, 즉 신앙 속의 것에 따라 있는 사랑과 선행의 생명 자체가 교회를 만든다. 교리적 사항들은 삶을 위하여 있다. 모든 이가 이런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즉 목적을 위하여가 아니면 교리적 사항들은 뭐란 말인가? 그리고 삶 외에 목적으로 무엇이 있는가? 또는 이런 교리적인 것을 가르쳐서 인간이 무엇이 되어갈 것인가? 실로 구원하는 신앙 자체의 핵심은 확신이다고 말해졌다; 그러나 이 확신은 생활의 선에서가 아니면 완전히 불가능하다. 생활의 선 없이 받아들임은 없다, 그리고 받아들임이 없는 곳에 확신도 없다. 아마 이런 경우, 즉 마음 또는 육체가 고통받는 조건에서,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의 탐욕들이 쉬고 있을 때, 외관상의 확신은 가능할지 모른다. 생활의 악 안에 있는 이들과 더불어 그의 고통의 위기가 지나가거나 조건이 바뀌면, 이런 가짜 확신은 자취를 감춘다; 그 이유가 확신이라는 것은 사악한 자에게 조차서도 발견되기 때문이다. 자기의 확신의 품질을 알기를 바라는 자는 누구든지 자신 안에 있는 그의 애착들과 목적들, 뿐만아니라 그의 삶에서의 실행에서 검사하면 된다.

20절. 그리고 들판과 그 안에 있는 동굴은 헷의 아들들로부터 아브라함에게 매장소의 소유자로 확실히 만들어졌다.

그리고 들판과 그 안에 있는 동굴. 이는 교회와 그것의 신앙을 의미한다 이는 “들판”이 교회를 의미함으로부터; 그리고 “동굴”의 의미가 신앙이다로부터 분명해진다. 이 의미가 교회와 그것의 신앙이라 말한 이유는 교회는 선행의 선, 고로 생활의 선으로부터 교회라 불리우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의 신앙은 이 선에 인접한 진리로부터 교회라 불리우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에게 매장소의 소유자로 확실히 만들어졌다. 이는 새로운 교회 내지 그 교인은 거듭남을 통하여 주님만으로부터 였음을 의미한다. 이는 아브라함의 표현이 주님인 것으로부터; 그리고 “소유자”의 의미가 그분의 것, 고로 그분만에 속한다로부터 ; 그리고 “매장소”는 거듭남을 의미함으로부터 알려진다.

헷의 아들로부터. 이는 교회가 이방인들로부터 있었음을 의미한다. 이는 헷의 아들들의 의미로부터 분명해진다. 헷의 아들들과 더불어 교회가 새로이 건립된 것이 아니고 단지 그들을 수단으로 교회가 표현된 것이다; 그 이유가 말씀에 있는 모든 것들은 표현적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말씀에서 이름이 말해질 때, 실제 역사 속의 인물들을 의미하지 않고, 주님은 그들을 통하여 그분의 왕국과 교회 속의 것을 표현하시고 있다. 마찬가지로 “헷의 아들들”에 의해 새로운 교회, 같은 말로, 새로운 교회 속에 있는 이들이 의미되어진다. 이는 여러 번 말해왔다. 그러나 이 교회는 이방인 속에 있는 교회, 또는 이방인들로부터 있는 교회인데, 이는 아브라함이 헷의 아들들에게 한 이 말, 즉 “나는 나그네이고 당신들과 더불은 거주자이다”(4절)에서 분명해진다; 이 구절을 통해 알게 되는 것은 주님이 그들에게 알려지지 않았다는 것, 그러나 여전히 그분은 그들과 함께 계실 수 있다는 것이다. 이로부터 헷의 아들들에 의해 이방인들로부터의 교회가 의미됨이 분명해진다. 그 이유가 주님이 그들에게 알려지지 않았다는 것을 이와 달리 해서 말해질 수 없기 때문이다.
이 대목 쯤해서 우리가 하나 더 짚어보고 가야할 것은, 어떤 교회가 교회 아님이 되어갈 때, 즉 선행이 멸해지고 다시 주님에 의해 새로운 교회가 건립될 때, 멸해지는 옛 교회 기반 위에 새로운 교회를 건립하시는 일은 거의 없었다는 점이다; 그러나 이전에 교회가 아예 없었던 이들과 더불어, 즉 이방인들과 더불어 새로운 교회는 건립되었다는 말이다. 예를 들면, 태고 교회가 멸해진 홍수 이후, “노아”라 불리는 새로운 교회, 고대 교회도 이방인들 사이에서, 즉 교회가 없던 이들 사이에서 세우셨다. 이 교회가 멸해질 때도 마찬가지로 그러했다; 고대 교회를 닮은 교회가 아브라함의 후손, 야곱으로부터 설립되었다, 고로 이것도 이방인들 사이에서와 비슷한 경우이다. 그 이유가 아브라함이 부르심을 받을 때 그는 이방인이었기 때문; 그리고 이집트에 있었던 야곱의 후손은 어쩌면 아브라함보다 더 이방인이었을지 모른다. 그들은 여호와에 대해 완전히 무지했기 때문, 결과적으로 신성한 모든 예배에 철저히 무지했기 때문이다. 이 교회가 극점에 달한 후, 원시 교회가 기존 유대인들의 거절 속에서 이방인들로부터 세워졌다; 이 교회가 기독교라 불리운다.
주님에 의해 세워지는 새로운 교회가 이방인들로부터인 이유는 이방인들은 신앙의 진리들에 반대되는 거짓의 원리를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서 이다. 그 이유가 그들은 이런 진리들에 무지했기 때문이다. 유아기로부터 빨아 들여지고, 후에 확증된 거짓의 원리들은 인간이 거듭나서 교회가 되어질 수 있기 전에 흔들어 털어버려야 한다. 사실상 이방인들은 생활의 악을 가지고 거룩한 것들을 모독할 수 없다, 그 이유가 거룩한 것이 무엇인지 아예 모르는 경우 그것이 모독될 수도 없기 때문이다. 이방인들이 무지함 안에 있어 (거룩한 것을 모독한) 장애물에서 자유한 상태인 바, 그들이 교회 속에 있는 이들보다 진리들을 받아들임이 더 나은 조건인 셈이다; 그리고 생활의 선 안에 있는 이들의 경우, 그들은 진리들을 접하기만 하면 쉽게 받는다.
*************************************

창세기 제 24 장

성경: 창세기 24장

1. 그리고 나이 많아진 아브라함은 날(days)들에 들어 갔다. 그리고 여호와께서는 모 든 것에서 아브라함을 축복하셨다.
2. 그리고 아브라함은 그가 가진 모든 것을 집행하는 그의 집의 원로인 그의 종에게 말했다, 바라건대 네 손을 내 허벅지에 놓아라.
3. 나는 너로 여호와 하늘의 하느님과 땅의 하느님을 두고 맹세를 만들 것이다, 너는 내가 이곳 사람들 가운데에서, 가나안족의 딸들 중에서 내 아들을 위한 여인을 데 려오지 마라.
4. 그러나 너는 내 토지 내 출생지로 가라. 그리고 내 아들을 위해 이삭을 위해 여인 을 데려와라.
5. 그리고 그 종은 그에게 말했다, 만일 여인이 저를 따라 이 토지로 오지 않으려 한 다면. 당신이 나왔던 그 토지에로 당신의 아들을 데려다 주어도 됩니까?
6. 그리고 아브라함은 그에게 말했다, 네가 조심해야 할 것은 너는 내 아들을 거기로 데려가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7. 하늘의 하느님 여호와께서 나를 내 아버지의 집으로부터, 그리고 내가 출생한 토 지로부터 데려왔다, 그리고 나에게 말하셨다, 그리고 나에게 맹세하셨다, 말하시기 를, 네 씨에게 나는 이 토지를 주리라, 그분께서는 너보다 앞서 그분의 천사를 보 내실 것이다, 그리고 너는 거기에서 내 아들을 위한 여인을 데려 올 것이다.
8. 그리고 만일 여인이 너를 기꺼이 따라오지 않는다면, 그러면 너는 이 맹세와는 상 관이 없다. 오로지 너는 내 아들을 거기로 데려가지만 않으면 된다.
9. 그리고 그 종은 자기 손을 그의 주인 아브라함의 허벅지 아래에 놓았다, 그리고 이 말에 관하여 그에게 맹세했다.
10. 그리고 그 종은 낙타 열 마리를 챙겼는데, 그의 주인의 낙타들로부터 이다, 그리 고 떠났다, 그리고 그의 손에는 자기 주인의 모두 각각의 좋은 것이 있었다. 그리 고 그는 일어났고 아람-나하라임에, 나홀의 성쪽으로 갔다.
11. 그리고 그는 낙타들을 무릎꿇게 했는데, 성 밖이고, 물 있는 우물 근처, 저녁 때 쯤 물을 길으는 이들이 나오는 때 쯤이었다.
12. 그리고 그는 말했다, 오 제 주인의 하느님 여호와여 바라옵건대 오늘 제 앞에서 만나게 해주시옵소서. 그리고 제 주인, 아브라함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시옵소서.
13. 보십시오, 저는 물 있는 샘 근처에 서 있습니다. 그리고 성의 사람들의 딸들이 물 을 길으려고 나올 것입니다.
14. 그리고 제가 처녀(젊은 여인)에게 말할 것입니다, 바라건대 네 물동이를 내려 놓 고 나로 마시게 하라, 그리고 그녀는 말할 것입니다, 마시세요, 그리고 나는 당신 의 낙타들에게 또한 마시게하리이다, 당신께서는 그녀를 당신의 종 이삭을 위하 여 지정해 놓으셨습니다. 그리고 이로 미루어 저는 당신께서 저의 주인에게 자비 를 베푸셨음을 알 것입니다.
15. 그가 말을 막 마치려 하는데, 그때, 보라, 리브가가 나왔다, 그녀는 아브라함의 형 제, 나홀의 아내, 밀가의 아들 브드엘에게서 태어났는데, 그녀의 어깨에 그녀의 물동이를 메고 있었다.
16. 그리고 이 소녀는 쳐다보기에 심히 좋았고, 처녀이고, 어떤 남자도 그녀를 알지 않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샘으로 내려 갔다, 그리고 그녀의 물동이를 채웠다, 그리고 올라 왔다.
17. 그리고 그 종은 그녀를 만나려고 달려갔다, 그리고 말했다, 바라건대 나에게 당신 의 물동이로부터 물 한 모금 마실 수 있게 해주구려.
18. 그리고 그녀는 말했다, 마시세요, 나의 주여. 그리고 그녀는 급히 서둘렀다, 그리 고 그녀의 물동이를 그녀의 손 위에 내려 놓았다, 그리고 그가 마시게 해주었다.
19. 그리고 그녀는 그가 마시기를 끝내자, 그리고 그녀가 말했다, 제가 당신의 낙타들 을 위하여도 물을 길어 올리겠습니다, 그들이 모두 마실 때까지 입니다.
20. 그리고 그녀는 급히 서둘렀다, 그리고 그녀의 물동이를 여물통에로 비웠다, 그리 고 다시 물을 길으려고 우물로 달려 갔다, 그리고 낙타 모두를 위해 물을 길었다.
21. 그리고 그 사람은 이런 그녀를 보고 놀라웠지만 그런 자신을 자제하면서 과연 여 호와께서 그의 길을 번영하게 하셨는지 여부를 알고자 하였다.
22. 그리고 낙타들이 마시기를 마치게 되자 이 남자는 반 세겔 무게가 되는 금 장신 구, 그리고 그녀의 손을 위해 그들의 무게로 열이 나가는 두 개의 금 팔찌를 가 져 왔다.
23. 그리고 그는 말했다, 당신은 누구의 딸입니까? 바라건대 우리가 오늘 밤을 지날 수 있게 당신의 아버지의 집에 방이 있는지? 를 말해 주시오.
24. 그리고 그녀가 그에게 말했다, 저는 밀가가 나홀에게 낳은 아들 브드엘의 딸입니 다.
25. 그리고 그녀는 그에게 말했다, 우리는 짚과 많은 여물을 가지고 있습니다, 또한 이 밤을 지나게 할 방도 있습니다.
26. 그리고 이 사람은 자신을 구부렸다, 그리고 자신을 굽혀 여호와를 경배했다.
27. 그리고 그는 말했다, 나의 주인 아브라함의 하느님 여호와를 찬송합니다, 당신께 서는 내 주인으로부터 당신의 자비와 당신의 진리를 단념하지 않으셨습니다. 제 가 길을 가는 동안 여호와께서는 저를 내 주인의 형제의 집으로 인도하셨습니다.
28. 이 소녀는 달려갔다, 그리고 그녀의 어머니 집에 이 말들에 따라 말하였다.
29. 그리고 리브가에게는 형제가 있었는데, 그의 이름은 라반이었다. 그리고 라반은 문으로부터 이 사람에게로, 샘으로 달려갔다.
30. 그리고 그는 장신구를 보았고, 그의 누이 동생의 손에 있는 팔찌도 보았다, 그리 고 그는 그의 누이 동생 리브가에게서 이 사람이 자기에게 이같이 말한 것을 듣 고, 그는 그 사람에게 왔다. 그리고 보라 이 사람이 샘에서 낙타 옆에 서있었다.
31. 그리고 그는 말했다, 오소서, 당신은 여호와께로부터 복받은 자입니다, 어찌하여 당신은 밖에 서계십니까? 그 이유는 제가 집을 청소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낙 타를 위한 방도 있습니다.
32. 그리고 그 사람은 집 안으로 왔다, 그리고 낙타들을 풀어 놓았다, 그리고 그는 낙 타를 위해 짚과 여물을 주었다, 그리고 그의 발과 그와 함께 온 사람들의 발도 씻도록 물을 주었다.
33. 그리고 그들 앞에 먹을 것이 놓여졌다. 그리고 그는 말했다, 나는 내 말을 마칠 때까지 먹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말했다, 말해보시오.
34. 그리고 그는 말했다, 나는 아브라함의 종입니다.
35. 그리고 여호와께서는 제 주인에게 큰 복을 내리셨습니다, 그리고 그를 위대해지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양떼와 목축, 그리고 은과 금, 그리고 남종과 여종, 그 리고 낙타와 나귀를 주셨습니다.
36. 그리고 제 주인의 아내 사라는 그녀가 늙은 후에 제 주인에게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그에게 주었습니다.
37. 그리고 제 주인은 나에게 맹세하게 하여 말하기를, 너는 내가 거주하는 토지에 있 는 가나안의 딸들로부터 내 아들을 위한 여인을 데려오지 마라.
38. 그러나 너는 내 아버지의 집으로, 그리고 내 가족에게로 가라, 그리고 내 아들을 위한 여인을 데려 와라.
39. 그리고 저는 내 주인에게 만일 여인이 나를 따라 오지 않으려 한다면…라고 말했 습니다.
40. 그리고 그분은 나에게 말했습니다, 여호와께서는 네가 걸어갈 때 네 앞에 너와 함께하도록 그분의 천사를 보내실 것이다, 그리고 네 길을 순탄하게 하실 것이다. 그리고 너는 내 가족으로부터, 그리고 내 아버지의 집으로부터 내 아들을 위한 여인을 데려 오라.
41. 그리고 네가 내 가족의 집에 당도하면 너는 내 맹세를 지킨 것이다. 그리고 만일 그들이 너에게 주지 않는다면, 너는 내 맹세에서 자유로울 것이다.
42. 이리하여 오늘 저는 샘에 도착하였습니다, 그리고 말했습니다, 오 내 주인 아브라 함의 하느님 여호와께서는 제 가는 길을 순탄하게 해주셨습니다.
43. 보십시오 저는 물 있는 샘 가에 서있습니다, 그리고 때가 이르러 소녀가 물을 길 으러 나오면 저는 그녀에게 말할 것입니다, 바라건대 네 물항아리로부터 물을 조 금 마시게 해줄 수 있겠소.
44. 그리고 그녀가 나에게 말하기를, 당신도 마시고, 당신의 낙타도 마실 수 있게 나 는 물을 길으겠습니다. 그러면 이 여자는 여호와께서 제 주인의 아들을 위하여 정해진 자입니다.
45. 제가 내 심정에서 말하기를 끝내기도 전에 보라 리브가가 왔는데, 그녀는 어깨에 물동이를 메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샘으로 내려 갔고 물을 길었습니다. 그 리고 나는 그녀에게 말했습니다, 바라건대 내가 마실 수 있게 해주겠소.
46. 그리고 그녀는 서둘렀고 그녀 위로부터 그녀의 물동이를 내려놓고, 그리고 말했 습니다, 마시세요, 그리고 나는 당신의 낙타들도 마시게 물을 주겠습니다. 그리고 저는 마셨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낙타들도 마시게 주었습니다.
47. 그리고 저는 그녀에게 물었습니다, 그리고 말했습니다, 당신은 뉘댁 따님이시오? 그리고 그녀는 말했습니다, 저는 밀가가 나홀에게 낳아준 나홀의 아들 브드엘의 딸입니다. 그리고 저는 그녀의 코에 장신구를 달고 그녀의 손에는 팔찌를 끼웠습 니다.
48. 그리고 저는 몸을 구부려 나 스스로 여호와께 경배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저를 그 의 아들을 위해 제 주인의 형제의 딸을 데려가도록 진리의 길에로 인도해주신 나 의 주인 아브라함의 하느님 여호와를 찬송했습니다.
49. 그리고 이제 당신께서 제 주인에게 은총과 진실을 행할 것인지 나에게 말해주시 오. 그리고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인지도 나에게 말해주시오. 그리고 나는 오른쪽이 든 왼쪽이든 바라볼 것이오.
50. 그리고 라반과 브드엘은 대답했다, 그리고 말했다, 이 말은 여호와께로부터 나왔 다. 우리는 당신에게 악이냐 선이냐를 말할 수 없소이다.
51. 보라 리브가가 당신 앞에 있으니 그녀를 데리고 가시오, 그리고 여호와께서 말하 셨던 바 대로 당신의 주인의 아들의 여인이 되게 하시오.
52. 아브라함의 종이 이 말을 듣자, 그는 자신을 땅쪽으로 구부려 여호와를 경배했 다.
53. 그리고 그 종은 은 그릇과 금 그릇, 그리고 의복을 가져와서 리브가에게 주었다. 그리고 그는 그녀의 오라비와 그녀의 어머니에게도 귀중한 것들을 주었다.
54. 그리고 그들은 먹고 마셨다, 그와 함께 온 사람들도 먹고 마셨다. 그리고 그들은 밤을 보냈다. 그리고 그들은 아침에 일어났다, 그리고 그는 말했다, 저를 제 주인 에게 보내주십시오.
55. 그리고 그녀의 오라버니와 그녀의 어머니가 말했다, 이 소녀가 날들, 적어도 열흘 동안 우리와 남아 있게 해 주시오. 그 후에 당신은 가시오.
56. 그리고 그는 그들에게 말했다, 저로 하여금 지체하지 않게 하소서, 그리고 여호와 께서 제 길을 순탄하게 하셨습니다. 나를 보내주십시오, 그리고 저는 내 주인에게 돌아갈 것입니다.
57. 그리고 그들은 말했다, 이 소녀를 불러서 그녀의 입에 문의합시다.
58. 그리고 그들은 리브가를 불렀다, 그리고 그녀에게 말했다, 너는 이 사람들과 함께 갈 것이냐? 그리고 그녀가 말했다, 나는 갈 것입니다.
59. 그리고 그들은 그들의 누이 리브가, 그리고 그녀의 유모, 그리고 아브라함의 종과 그의 사람들을 떠나 보냈다.
60. 그리고 그들은 리브가에게 복을 빌어 주었다, 그리고 그녀에게 말했다, 우리의 누 이야, 너는 천 만 인의 어미가 되라, 그리고 네 씨가 너를 미워하는 자들의 문을 상속 받으라.
61. 그리고 리브가는 일어났다, 그리고 그녀의 소녀들, 그리고 그들은 낙타를 탔다, 그리고 이 사람을 따라갔다, 그리고 그 종은 리브가를 데리고 갔다.
62. 그리고 이삭은 브엘-라해-로이로부터 오고 있는 곳으로부터 왔다. 그리고 그는 남쪽의 토지에 거주하였다.
63. 그리고 이삭은 저물 때에 들판에서 묵상하려고 나갔다. 그리고 그는 자기 눈을 들 어 올렸고 보았다, 그리고 보라 낙타들이 오고 있었다.
64. 리브가가 눈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이삭을 보았다, 그리고 그녀는 낙타에서 내렸 다.
65. 그리고 그녀는 종에게 물었다, 우리를 만나려고 들판을 걸어 오는 저 사람은 누구 인가? 그리고 종이 대답했다, 나의 주인이십니다. 그리고 그녀는 너울을 가져다가 자신을 가렸다.
66. 그리고 그 종은 이삭에게 그가 했었던 모든 말들을 말했다.
67. 그리고 이삭은 그녀를 그의 어머니 사라의 천막으로 데리고 왔다. 그리고 그는 리 브가를 데리고 갔다, 그리고 그녀는 그에게 여인으로 있었다, 그리고 그는 그녀를 사랑했다. 그리고 이삭은 그의 어머니의 뒤를 이어 위로되어졌다.

각 절의 내적 의미

1절. 그리고 나이 많아진 아브라함은 날(days)들에 들어 갔다. 그리고 여호와께서는 모든 것에서 아브라함을 축복하셨다.

나이 많아진 아브라함은 날들에 들어 갔다. 이는 주님의 인간이 신성으로 만들어지는 때가 다가왔음을 의미한다. 이는 아브라함이 주님을 표현한다로부터; 그리고 “나이 많은” “노령”은 인간적인 것을 벗고 천국의 것을 입는 것을 의미함으로부터; 그리고 이것이 주님을 서술할 경우, 신성을 입는 것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마찬가지로 “날들”이 상태를 의미함으로부터; 이로부터 “날들이 오고 있음”은 상태가 가까워졌음을 의미함에서도 알려진다. 이와 같은 것들이 “나이 많은”과 “날들이 오고 있음”에 의해 의미되는 이유는 천사들의 경우, 그들은 노령에 대한 생각, 또는 “날들이 오고 있다”에 의해 뜻해지는 나이가 먹음에 대한 생각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이 지닌 생명에 관련되는 상태에 관한 생각을 가진다; 그러므로 말씀에서 나이를 먹는다라든가, 노령이라는 언급이 있을 경우, 인간과 더불어 있는 천사들은 그 인물이 지닌 생명(삶)의 상태, 그리고 그 인물이 자기의 나이들을 통과하여 마지막에까지 가는 동안 그 인물의 생명의 상태밖에 더 생각하지 않는다; 즉 그 인물이 인간인 것을 벗어가고 천국의 것을 입어가는 것만을 생각할 뿐이다. 그 이유가 인간의 삶은 그의 유아기로부터 노령에까지 세상으로부터 천국에로의 발전해감밖에 더 아무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최후인 죽음은 변이(變移, transition)자체일 뿐이다. 그러므로 매장은 부활이다, 그 이유는 육체를 완전히 벗는 것이기 때문이다. 천사들이 이와 같은 생각 안에 있기 때문에, 그리고 말씀의 내적 의미는 우선적으로 천사들을 위한 것, 그 다음 천사 같은 마음을 지닌 이들을 위해 있는 의미이므로 “노령”이나 “날들이 오고 있다”에 의해 이와 달리 뜻해질 수 없다.

여호와께서는 모든 것에서 아브라함을 축복하셨다. 이는 모든 것들이 신성한 질서 안으로 주님에 의해 배치되어졌을 때를, 같은 말로, 주님께서 모든 것들을 신성한 질서 안으로 배치하셨을 때를 의미한다. 이는 “여호와”가 신성 자체 측면에서의 주님이시다는 것으로부터; 그리고 이 구절의 경우, 아브라함이 신성한 인간 측면에서의 주님을 표현한다는 것;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모든 것에서 아브라함을 축복하셨다”라고 말해질 때, 내적 의미에서 뜻해지는 것은, 주님은 그분의 인간 안에 있는 신성 자체로부터 모든 것들을 신성한 질서 안으로 배치하셨다 이다; 그 이유가 “축복하는 것”이 인간을 서술할 경우, 영적, 천적인 선에서 풍요해진다를 뜻한다; 그 사람 안에 있는 것들이 주님에 의해 영적, 천적 질서 안으로, 고로 신성한 질서의 형상과 모습 안으로 배치되어질 때, 그는 영적, 천적 선으로 풍요해진다. 인간의 거듭남은 이밖에 더 아니다. 모든 것들이 그분의 인간 안에서 신성한 질서 안으로 주님에 의해 배치되어졌다고 말해질 때 뜻해지는 것은 이 장에서 뒤이어지는 것으로부터 분명해진다, 즉 이삭에 의해 표현된 그분의 신성한 합리성은 아브라함에 의해 표현된 신성한 선으로부터 임신되었다, 그리고 사라로 표현된 신성한 진리에서 출생되었는데, 이것이 인간 자체로부터의 신성한 진리들이 신성 자체와 결합될 수 있는 신성한 질서 안으로 배치되는 것이다. 이 사항들은 이 장에서 내적 의미 안에 포함된 비밀들이다. 이에 관하여 천사들은 주님으로부터 명료한 빛을 가지고 있다. 그 이유가 천국의 빛 안에서 이런 사항들은 맑은 날 같이 열려 있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인간 안에 있는 세상의 빛 안에서는, 거의 어떤 것도 보여지지 않고, 흐릿한 빛이나마 가능한 것은 거듭나는 인간에게서 이다, 그 이유가 거듭나는 인간은 어떤 수준의 천국의 빛 안에 있기 때문이다.

2절. 그리고 아브라함은 그가 가진 모든 것을 집행하는 그의 집의 원로인 그의 종에게 말했다, 바라건대 네 손을 내 허벅지에 놓아라.

아브라함이 그의 집의 원로인 그의 종에게 말했다. 이는 질서대로의 배열과 주님의 자연(His natural) (평면)에서 그분에게 유입이 있음을 의미한다. 본문의 “그의 집의 원로인 그의 종”이 그분의 자연 (평면)에 해당된다. 이는 여기서의 “말함”은 종에게 하는 말인 바, 명령임으로부터; 그리고 여기서 취급되는 주제는 자연 인간에 있는 것들을 신성에 의해 배열하는 것인 바, “말하는 것”은 질서 안에 배열하고 흘러드는 것을 표시한다; 그 이유가 자연 안에서, 또는 외적 인간 안에서 행해지는 모든 것은 내적 인간, 또는 합리적 인간에 의해 질서 안에서 배열되는 것이기 때문, 또한 이는 내적 인간이 유입에 의해 외적 인간 안에 흘러듦에 의해 결과되기 때문이다. “집의 원로 종”이 자연 인간, 또는 외적 인간이다는 것은 “종”이 더 높은 것을 섬기는 더 낮은 수준에 있는 것을 의미함으로부터; 다른 말로 말하면 바깥쪽의 것이 안쪽의 것을 섬기는 것이다로부터 분명해진다. 자연 (평면)으로부터 있는 모든 것들, 말하자면, 어떤 종류이든 기억 속의 지식들 같은 것은 섬기는 것들밖에 더 아무 것도 아니다; 그 이유가 그것들은 합리적 인간이 생각하는 것 같이 공평하게 생각하고 공정하게 뜻함을 가능하게 함으로 합리적 인간을 섬기기 때문이다. “집의 원로”가 자연적 인간이다는 것은 이어지는 구절로부터 알 것이다.

그가 가진 모든 것을 집행하는… 이는 자연적 인간의 직책들(offices)을 의미한다. 이는 “집행하는”, 실지로 “모든 것들을 집행하는” 것이 직책들, 또는 의무들을 이행하는 것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인간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은 이런 측면에서 한 식구(가족)가 되어 있다. 즉 집 주인의 직책들을 채우는 자들, 그리고 종들의 직책을 채우는 것이다. 합리적 마음은 집의 주인으로서 모든 것들을 배치하는 것이 이 마음의 직책이다. 그리고 유입을 수단으로 자연적 마음 안으로 질서에서 그것들을 배열한다; 그러나 배열된 것들을 섬기고 관리하는 것은 자연적 마음이다.
자연적 마음은 합리적 마음과 구별되고, 수준 측면에서 합리적 마음 아래 있지만, 합리적 마음인 것처럼 자신으로부터 행동하는 바, 상대적으로 “집의 원로”라고 불리우는데, 그것에 속하는 모든 것들을 스스로 집행한다고 말해지기 때문이다. 자연적 마음이 합리적 마음과 구별되고 더 낮은 수준에서 있다는 것, 그리고 마치 자신의 것인듯 집행한다는 것은 그것 내에 있는 것으로부터와 그것의 직책들로부터 알런지 모른다. 자연적 인간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은 모든 기억 속의 지식들이다, 고로 갖가지 종류의 모든 지식들이다; 한마디로 그것들은 바깥쪽, 또는 외적인 기억에 속하는 일반적이고 특수적인 양쪽에서의 모든 것들을 망나해서 이다. 자연적 마음에 상상하는 능력(상상력)이 속해 있는데, 이 능력은 인간과 더불은 내면의 감각적인 것이다, 그리고 이 능력은 어린이들, 그리고 청춘기(남자는 14-25살, 여자는 12-21살)의 첫 시기에서 그것의 최대한의 규모에서 활기에 넘쳐나고 있다; 동시에 인간의 자연적 마음은 짐승도 가진 것과 같은 자연적 애착을 지니고 있다. 이런 모든 것이 자연적 마음의 직책이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그러나 합리적 마음은 더 내면적이다. 합리적 마음 안에 있는 지식들은 인간 앞에 열려 있지 않다, 그렇다고 완전히 닫힌 것은 아니다, 단지 인간이 육체 안에 사는 동안, 그 인간이 알아채릴 수 없는 만큼에서 열려진다; 그 이유가 그것들은 내면의 기억에 속하는 일반적, 특수적 측면에 있는 모든 것들이기 때문이다. 이 마음에는 공평하고 공정한 것, 참되고 선한 것에 관해 지각할 수 있는 모든 사고력도 속해 있다; 또한 인간에게 잘 어울릴 수 있고, 동시에 짐승과 구별될 수 있게 하는 모든 영적 애착들도 있다. 이런 것들로부터 합리적 마음은 자연적 마음 안으로 흘러들고, 이 마음 안에 있는 것들을 흥분시킨다. 그리고 어떤 종류의 시각을 가지고 자연적 마음들 속의 것들을 바라보고(관찰하고), 이런 방식에서 판단하고 결론들을 만들어낸다. 이런 두 마음들이 구분되어 있다는 것은 이런 사실들로부터 분명해진다. 즉 수많은 각 인물들과 더불어 자연적 마음이 합리적 마음을 지배하게 한다는 것, 또는 외적 인간이 내적 인간을 통치하게 하고 있다는 것; 그러나 자연적 마음이 합리적 마음을 통치하지 않고 섬기기만 하는 것은 오직 선행의 선 안에 있는 이들, 또는 자신들을 주님이 인도하시도록 허용하는 이들에게서만 발견된다는 사실이다.

바라건대 네 손을 내 허벅지에 놓으라. 이는 결혼의 사랑으로부터의 선쪽이 지닌 힘에 의거 결혼에 관련된 뭔가를 서약함을 의미한다. 이는 “손”이 힘(power)을 의미함으로부터; 그리고 “허벅지(thigh)”의 의미가 결혼의 사랑으로부터의 선이다로부터(이는 아래에서 설명한다) 알려진다. 이것이 결혼의 사랑의 선쪽의 힘 정도까지에서 서약한다고 말한 이유는 고대인들이 결혼에 관련한 어떤 것을 서약할 경우, 서약받을 자의 손을 자기 허벅지 아래에 놓고 맹세를 하게 하는 관습이 있었다는 사실 때문이다. 그 이유는 “허벅지”가 결혼의 사랑을 의미했고, “손”은 힘을, 또는 가능한한 만큼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신체의 모든 부분들은 천국인 웅대한 사람(the Grand Man)에서 있는 영적 수준과 천적 수준의 것들과 상응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에 관하여는 차후 주님의 신성한 자비로부터 더 상세하게 보여질 것이다. 허리와 함께 허벅지 자체는 결혼의 사랑에 상응한다. 이런 사항들은 태고 시대인들에게 아주 잘 알려져 있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상응에 기초한 많은 의식들을 가졌는데, 그것 중의 하나가 그들이 결혼의 사랑의 어떤 선에 서약되어져야 할 때 허벅지 아래에 손을 놓는 것이었다. 이런 상응에 기초한 지식을 고대인들은 수준 높게 평가했다. 따라서 그들에게 중요한 지식이고 총명에 속한 것이었는데, 오늘날 상실되었다; 아예 상응이라는 것이 있는지조차 사라졌다. 그러므로 이 책을 읽는 어떤 이들의 경우, 여기서 등장하는 이런 의식 행위에 의해 위와 같은 의미들이 있다는 것에 의아해 할는지 모른다. 이 의식이 여기서 등장한 이유는 이삭이 아브라함의 가족의 누군가와 약혼함이 취급되고, 의무의 수행이 원로 종에게 맡겨지기 때문에서 였다.
상응으로부터 “허벅지”가 결혼의 사랑을 의미한다는 것은 다른 말씀의 구절에서도 분명해질는지 모른다; 즉 여인이 간통 문제로 그녀의 남편에 의해 고소되는 때에 이어지는 절차로부터 이다. 모세의 책에서:
성직자는 여인에게 저주함의 맹세를 하게 할 것이다; 그리고 성직자는 여인에게 말할 것이 다, 여호와께서 네 허벅지를 떨어져나가게 만들고, 그리고 네 배는 부풀 때, 여호와께서는 너에게 저주를 만들고, 벡성들 한 가운데에서 맹세를 만들 것이다. 그리고 그가 그녀에게 물을 마시도록 주었을 때, 만일 그녀가 더럽혀졌다면, 그녀의 남편에 법을 위반한 것이 있 다면, 그녀가 마신 물이 그녀 안으로 들어가서 쓰게될 것이고, 그녀의 배는 부풀 것이다, 그리고 그녀의 허벅지는 떨어져 나갈 것이다, 그리고 여인은 그녀의 백성 사이에서 저주될 것이다 (민. 5:21, 27).
“허벅지가 떨어져나감”은 결혼의 사랑에 관련한 악을, 즉 간통이 의미되었다. 위 사건 과정에 있는 특수 사항들은 그 주제에 속하는 특별한 어떤 것들 각각을 의미하여, 어떤 특수한 것도 의미하지 않고 넘어가는 항목이 없도록 하고 있다. 이는 말씀이 신성하다는 것에 대한 어떤 생각도 없이 말씀을 읽는 사람에게는 놀라운 일에 해당한다. “허벅지”가 결혼의 사랑의 선이기 때문에 “허벅지로부터 나옴”이라는 언급도 만들어지고 있다. 야곱에 관해서 말해진다:
열매를 많이 맺고 번성하라; 나라와 나라들의 단체가 너로부터 있을 것이다, 그리고 왕들이 네 허벅지로부터 나올 것이다. (창. 35:11)
그리고 다른 구절에서:
이집트 안으로 야곱과 더불어 온 모두 각각의 혼, 그의 허벅지로부터 나온 모두 각각의 혼 (창. 46:26; 출 1:5).
그리고 기드온에 관해서:
기드온은 자기 허벅지로부터 나온 칠십 명의 아들들을 가졌다 (사. 8:330).
그리고 “허벅지”와 “허리”가 결혼의 사랑에 속하는 것들을 의미하는 바, 그것들은 사랑과 선행 또한 의미한다, 그런 이유는 결혼의 사랑은 모든 사랑들의 근본되는 사랑이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모든 사랑들은 똑같은 근원으로부터, 즉 천국의 근원, 즉 선과 진리의 결혼의 사랑으로부터 이기 때문이다. “허벅지”가 천적 사랑의 선과 영적 사랑의 선을 의미하는 것은 아래 구절에서 분명해진다. 계시록서에서:
흰말 위에 앉으신 분은 그분의 옷에, 그리고 그분의 허벅지에 이렇게 쓰여진 이름을 가지 셨다: 왕들 중의 왕, 그리고 주들 중의 주 (계. 19:16).
흰말 위에 앉으신 분은 말씀, 고로 말씀이신 주님이시다. 이는 이미 살폈다; 또한 그분의 옷은 신성한 진리이다; 그러므로 그분은 “왕들 중의 왕”이라 불리신다. 이로부터 분명한 바, “허벅지”가 무엇인지 이다, 즉 그분의 신성한 사랑으로부터의 신성한 선이다; 이로부터 그분은 “주들 중의 주”라 불리우신다. 그리고 이것이 주님의 품질 측면이기 때문에, 그분은 “그 위에 쓰여진 이름을 가지셨다”라고 말해진다; 그 이유는 “이름”이 품질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다윗서에서:
당신의 검을 당신의 허벅지에 차셨습니다, 오 전능하신 분, 당신의 영광과 영예에서 (계신 분) (시. 45:3).
위는 주님에 관련해 말해지고 있다; “검”은 전투하는 진리를 표시한다; 그리고 “허벅지”는 사랑의 선을 표시한다; “허벅지에 검을 차신다”는 그분이 진리로부터 싸우시는데, 이 진리가 사랑의 선으로부터 있을 것임을 의미한다. 이사야서에서:
정의는 그분의 허리에 띠일 것이다, 그리고 진리는 그분의 허벅지에 띠일 것이다 (이. 11:5).
위 구절 역시 주님을 두고 말해지고 있다; 그리고 “정의”가 사랑의 선을 두고 서술되기 때문에, 이것은 “허리의 띠”라 불려지고, 진리는 선으로부터 있기 때문에, “허벅지의 띠”라 불려진다; 고로 “허리”는 선 측면의 사랑, 그리고 “허벅지”는 진리측면의 사랑을 서술한다.
이사야서에서:
그분 안에서는 누구도 녹초가 되거나 걸려넘어지는 일이 없다, 그분은 졸지도 잠드시지도 않는다, 그분의 허벅지의 띠를 풀어놓으시거나, 신발끈이 부서져 느슨해지신 적도 없으시다 (이. 5:27).
위 구절 역시 주님에 관해서이다, 그리고 “그분의 허벅지의 띠”는 진리로부터의 사랑을 표시한다. 예레미야서에서: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에게 말하셨다, 너는 아마포 띠를 사서 네 허리에 매고 있어라, 그러나 그것이 물에 적시어져서는 안된다; 그리고 그는 유브라데로 가서 그것을 바위의 구멍에 감 추었다; 그리고 이렇게 한 후에 (며칠이 지나서) 그가 가서 그 장소로부터 그것을 가져 왔을 때, 그것은 쓸모없게 되어 있었다 (예. 13:1-6).
“아마포 띠”는 진리를 표시한다, 그리고 “그것을 허리에 맴”은 진리가 선으로부터 있었다는 표현이었다. 위의 행동이 (무엇인가를) 표현하였다는 것을 모든 이들은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상응으로부터가 아니면, 그 의미는 알아질 수 없다. 이 상응에 관하여는 어떤 장의 끝에서 주님의 신성한 자비로부터 말해질 것이다.
마찬가지로 에스겔에 의해 보여진 것, 다니엘에 의해 보여진 것, 그리고 느부갓네살에 의해 보여진 것도 그러하다. 에스겔서에서:
그룹들의 머리 너머 광활한 공간 위쪽에 왕좌를 닮은 것이 있었는데, 마치 사파이어 돌의 나타남 같았다; 그리고 왕좌를 닮은 것 위에 사람의 나타남 같이 닮은 것이 있었다. 그리 고 나는 불타는 석탄으로서, 빙둘러 그것 안쪽에 불의 나타남으로서 보았다; 그의 허리와 그 위쪽의 나타남으로부터, 그리고 그의 허리와 아래쪽의 나타남으로부터 나는 불의 나타 남인 것처럼 보았다, 그리고 그분을 빙둘러 빛남이 있었다; 비오는 날 구름에 있는 활의 나 타남 같이, 그렇게 빙둘러 빛남의 나타남이 있었다, 이렇게 여호와의 영광의 모습의 나타남 이 있었다 (겔. 1:26-28).
위는 주님과 그분의 왕국을 표현했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리고 허리의 위쪽과 허리의 아래쪽의 나타남은 그분의 사랑에 관련되고 있다. 이는 “불”의 의미가 사랑이다로부터; 그리고 “빛남”과 “무지개”는 사랑에서 파생되는 지혜와 총명이다로부터 분명해진다.
다니엘에서 이렇게 말해진다:
사람이 고운 아마포를 입고, 그의 허리에 우바스의 순금으로 띠를 매고 나타났다; 그의 몸 은 다르싯(tharshish)의 돌(beryl, 녹주석) 같았다, 그리고 그의 얼굴은 번개의 나타남 같 이, 그의 눈은 불켜진 등불 같이, 그리고 그의 팔과 발은 잘 광을 낸 구리가 빛나는 것 같 았다 (단. 10:5, 6).
위 구절 속의 세부 사항들에 의해 의미되는 것, 즉 “허리”, “몸”, “얼굴”, “눈”, “팔”, 그리고 “발”에 의해 의미되는 것은 표현들과 그것의 상응들로부터가 아니면 누구도 알아낼 수 없다. 위 구절은 주님의 천적 왕국이 표현되고 있고, 그 왕국에서 “허리”는 그분의 신성한 사랑이다; 그리고 “우바스의 금”으로 띠를 매었다는 것은 사랑으로부터 있는 지혜의 선이다.
느부갓네살에 의해 보여진 것에 관하여 다니엘서에서:
상의 머리는 순금이었다; 그것의 가슴과 팔은 은이었다; 그것의 배와 허벅지는 놋쇠였다; 발은 일부는 철이고 일부는 진흙이었다 (단. 2:32, 33).
이 상에 의해 교회의 연속적인 상태가 표현되었다; “금이었던 머리”는 처음의 교회의 상태, 이는 천적 수준의 상태인데, 주님을 사랑함의 상태였기 때문이다; “은이었던 가슴과 팔”은 교회의 두 번째 상태, 이는 영적 수준의 상태이고, 이는 이웃을 향한 선행의 상태이다; “놋쇠였던 배와 허벅지”는 교회의 세 번째 상태인데, 자연적 수준의 선의 상태이다. 자연적 선은 영적 선 아래의 수준으로 이웃을 향한사랑, 또는 선행으로부터 있다. “철과 진흙으로 된 발”은 교회의 네 번째 상태이고, 이는 자연적 수준의 진리 중의 하나인데, 이것은 선(“진흙”)과 응집하지 못하는 상태였다. 이상으로부터 “허벅지”와 “허리”에 의해 의미되는 것이 무엇인지, 즉 첫째는 결혼의 사랑을, 이로부터 모든 순수한 사랑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이외 더 인용 구절을 찾아 읽을 수 있다. 즉 창. 32:25, 32; 이. 20:2-4; 나. 2:1. 시. 69:23; 출. 12:11; 눅. 12:35, 36 등등이다. 이와 반대적 의미도 있는데, 이는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의 사랑들로부터 이고, 인용구절로는 왕상. 2;5; 이. 32:10, 11; 예. 48:37; 겔. 29:7; 암. 8:10 등이 있다.

3, 4절. 나는 너로 여호와 하늘의 하느님과 땅의 하느님을 두고 맹세를 만들것이다, 너는 내가 이곳 사람들 가운데에서, 가나안족의 딸들 중에서 내 아들을 위한 여인을 데려오지 마라. 4 그러나 너는 내 토지 내 출생지로 가라. 그리고 내 아들을 위해 이삭을 위해 여인을 데려와라.

그리고 나는 너에게 여호와 하늘의 하느님과 땅의 하느님을 두고 맹세를 만들 것이다. 이는 가장 높음 안에, 그로부터 있는 것들 안에 계신 신성에 대한 가장 거룩한 서약을 의미한다. 이는 “맹세하게 함”의 의미가 맹세를 수단으로 서약을 함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 이유가 맹세하게 함은 서약하는 것밖에 더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이 천국의 하느님 여호와와 땅의 하느님 여호와, 즉 위쪽에 있는 신성과 아래쪽에 있는 신성, 같은 말로 가장 높음에 계신 신성과 거기로부터 있는 신성에 의해 서약이 있을 때, 최고로 거룩하다. “하늘의 하느님 여호와”가 주님을 두고 말해질 경우, 아버지라 불리는 여호와 자신을 표시한다, 이 분으로부터 주님은 임신되셨고, 고로 이 분이 주님의 신성 본질이셨다; 그 이유가 임신 자체가 그분이시었던 본질 자체를 주었기 때문이다. “땅의 하느님 여호와”가 이 경우에서는 아들이라 불리는 여호와를 뜻한다, 고로 그분의 인간 본질이다; 이것은 주님이 인간 본질을 신성으로 만드셨을 때, 신성 본질로부터 나타났다. 고로 “하늘의 하느님 여호와”에 의해 가장 높으심에 있는 신성이 의미되고; 그리고 “땅의 하느님 여호와”에 의해서는 거기로부터 안에 있는 신성이 의미된다. 그러나 주님은 천국들에 있는 그분의 신성으로부터 “하늘의 하느님 여호와”라 불리우신다; 그리고 그분은 땅 위에 있는 신성으로부터 “땅의 하느님 여호와”라고 불리우신다. 천국들에 있는 신성은 인간의 내적 측면에서 인간들과 더불어 있다; 땅에 있는 신성은 인간의 외적 측면에서 인간들과 더불은 신성이다; 그 이유가 인간의 내적인 것들이 그의 천국이고, 이것들을 수단으로 천사들과 결합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외적인 것들은 그의 땅인데, 이것들을 수단으로 그는 인간들과 결합된다. 인간이 거듭날 때, 내적인 것들이 외적인 것들 안으로 흘러든다, 그리고 외적인 것들은 그의 내적인 것들로부터 있는다. 이로부터 역시 교회의 내적인 것들, 외적인 것들이 무엇인지도 알게 될는지 모른다.

너는 가나안 족의 딸들로부터 내 아들을 위한 여인을 데려오지 마라. 이는 신성한 합리성은 진리에 일치되지 않는 어떤 애착과도 결합해서는 않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여인을 데려 옴”이 결혼의 약속에 의해 결합됨을 의미함으로부터; “나의 아들”, 즉 “이삭”의 의미가 주님의 신성한 합리성이다로부터; 그리고 “딸들”의 의미가 애착들이다로부터; 그리고 “가나안족”의 의미가 악이다로부터; 이로부터 “가나안족의 딸들”은 진리에 일치하지 않는 애착들이다로부터 분명해진다. 여기서 취급되는 주제는 주님의 합리성 속의 신성한 선에 결합되어져야 하는 신성한 진리이다. 이는 24장의 내용편에서 알 수 있을 것이다. 결혼의 약속에 의해 연합시켜지는 “여인”에 의해 이 진리 자체가 뜻해지는데, 이 진리는 보통의 방법에 의해 자연적 인간으로부터 불러내어진 진리이다. 이로부터 알려지는 바, “가나안족의 딸들로부터 여인을 데려오지 마라”에 의해 이 합리성은 진리에 일치하지 않는 어떤 애착과도 결합되어서는 안됨이 의미된다. 진리가 선과 결합함은 어느 때나 애착을 수단으로 결과되어진다; 그 이유가 어떤 진리도 애착을 수단으로 하지 않고서는 인간의 합리성 안으로 들어가 결합하는 것은 가능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애착 안에 사랑의 선이 있기 때문, 이것만이 결합한다; 이는 곰곰이 반추해보는 자에게는 납득이 될는지 모른다.
“가나안의 딸들”이 진리에 일치하지 않는 애착들, 즉 거짓된 것에 대한 애착들을 의미하는 것은 “딸들”의 의미로부터 분명해진다; 그 이유가 딸들이 말씀에서 많이 언급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마 모든 이들이 실제의 딸들이 의미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 것이라 본다. 그 이유는 “시온의 딸”, “예루살렘의 딸”, “다르싯의 딸”, “내 백성의 딸” 등과 같이 말해지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이들에 의해 선과 진리에 대한 애착들이 뜻해진다는 것은 위의 딸들을 인용한 구절들로부터 이미 설명되었었다. 그들이 선과 진리에 대한 애착들이기 때문에, 그들은 또한 교회들이다, 그 이유가 교회들은 이런 애착들로부터 교회이기 때문이다. 고로 “시온의 딸”에 의해서는 천적 (평면의) 교회가 의미되고, 이 교회는 선에 대한 애착으로부터 이다; 그러나 “예루살렘의 딸”에 의한 교회는 영적 (평면의) 교회이고, 이 교회는 진리에 대한 애착으로부터 이다 (2362항); 이 교회는 또한 “내 백성의 딸”에 의해 의미되고 있다 (이. 22;4; 예. 6:14, 26; 8:19, 21-23; 14:17; 애. 2:11; 4:6; 겔. 8:17).
이로부터 나라들의 “딸들”에 의해 의미되는 것도 분명해진다; “불레셋의 딸들”, “이집트의 딸들”, “두로와 시돈의 딸들”, “에돔의 딸들”, “모압의 딸들”, “갈대아의 딸들”, 그리고 “바벨의 딸들”, 그리고 “소돔의 딸들”, 즉 악과 거짓에 대한 애착으로부터 자기들의 종교적 체계들이 있는 것, 그리고 종교적 체계들 자체가 의미된다. 이와 같은 것이 “딸들”의 의미인 바, 아래 구절로부터 더 알게 될런지 모른다. 에스겔서에서:
나라들의 딸들이 이집트를 위해 통곡할 것이다. 이집트의 무리들을 위해 소리내어 울어라, 그리고 그녀를 아래로 가게 하라, 그녀와 유명한 나라들의 딸들이 아래 지역의 땅으로 , 구 덩이 안으로 내려가는 그들과 더불어 (겔, 32:16, 18).
“유명한 나라들의 딸”은 악에 대한 애착들을 표시한다. 사무엘서에서:
그것을 가드에 말하지 말라, 그것을 아스글론의 거리들에서 공포하지 말라; 불레셋의 딸들 이 기뻐 환호하지 않도록, 할례받지 않은 자들의 딸들이 의기양양하지 않도록
(삼하. 1:20).
에스겔서에서:
너는 이집트의 아들들과 매춘을 범했다; 나는 너를 미워한 그들의 의지에, 불레셋의 딸들에게 넘겼다, 이는 네 사악함이 발견되기 전이다, 마치 시리아의 딸들을 질책하는 때 와도 같다, 그리고 그녀 주변의 모든 이를 질책하던 때 같이, 빙둘러 너를 경멸한 불레셋의 딸들 (겔. 16:26, 27, 57).
위에서 딸들이 뜻해지는 것은 아닐 것이라는 것은 누구나 알 수 있다; 그러나 광적인 신앙 같은 것이 불레셋에 의해 뜻해진다, 즉 신앙에 관해 할 말은 많고 말도 꽤 잘하는 것 같은데, 정작 중요한 신앙으로부터의 생활은 없는 자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그들은 “할례받지 않은 자”라 불리우는데, 선행이 결여된 신앙이다.
예레미야서에서:
길르앗으로 올라가라, 그리고 유향을 가져와라, 오 처녀 이집트의 딸들아. 오 이집트에서 거주하는 너희 딸아, 망명(생활)의 그릇을 만들어라. 이집트의 딸은 수치심에 놓일 것이다, 그녀는 북쪽의 백성의 손에 넘겨질 것이다 (예. 46:11, 19, 24).
“이집트의 딸”은 신앙의 진리가 과연 그러한지 측면에 관하여 기억 속의 지식들로부터 추론함에 애착하는 것을 표시한다; 고로 그녀는 이런 추론으로부터 발생하는 어떤 종류의 종교를 표시한다. 이는 감각들에 의해 납득되지 않는다면 어떤 신앙의 진리도 아니다고 믿는 것이다.
이사야서에서:
그분이 말했다, 너는 더 이상 기뻐날뛸 일이 없을 것이다, 오 너 압제받는 시돈의 딸아 (이. 23:12).
그리고 다윗서에서:
두로의 딸이 선물을 가지고, 백성 사이에 부자가 네 얼굴에 간청할 것이다 (시. 45:12).
“시돈의 딸”과 “두로의 딸”에 의해 뜻해진 것은 시돈과 두로의 의미로부터 분명해진다 (1201항). 예레미야애가서에서:
기뻐 환호하고 즐거워하라 오 에돔의 딸아. 네 불법은 다 살라졌다, 오 시돈의 딸아. 그분 은 너로 이주하는 일이 없게 하실 것이다; 너희 불법이 방문될 것이다, 오 에돔의 딸아
(애. 4:21, 22).
이사야서에서:
모압의 딸들은 둥지에서 내보내져 방황하는 새 같이 있을 것이다 (이. 16:2).
다시:
내려와 먼지에 앉아라, 오 처녀 바벨의 딸아; 왕좌 없이 땅위에 앉거라, 오 갈대아의 딸들 아. 너는 잠잠히 앉으라, 그리고 어둠으로 들어가라, 오 갈대아의 딸아, 그 이유가 너는 더 이상 왕국의 숙녀라고 불리지 않을 것이다 (이. 47:1, 5).
예레미야서에서:
북으로부터 오는 사람들이 너에 맞서 전투의 용사들 같이 전열을 갖추고 있다, 오 바벨의 딸아 (예. 50:41, 42).
다시:
바벨의 딸은 타작 마당 같다, 그녀를 타작할 때이다 (예. 51:33).
스가랴서에서:
슬프도다 오 시온아, 도망하라, 바벨의 딸과 더불어 거주하는 너희여 (슥. 2:7).
다윗서에서:
바벨의 딸이 황폐되어 있다 (시. 137:8).
에스겔서에서:
네 자매들, 소돔과 그녀의 딸들, 그들의 고대의 신분(estate, 토지, 재산)으로 되돌아 올 것 이다, 그리고 사마리아와 그녀의 딸들은 그들의 고대의 신분으로 되돌아 올 것이다
(겔. 16:55).
누구나 알 수 있는 바, 위 구절들에서 “딸들”에 의해 딸들이 뜻해지지 않을 것이다는 것이다. 위의 딸들은 진리와 일치하지 않는 애착들, 고로 이 근원으로부터 오는 광적 신앙들이다; 그러나 이 광적 신앙이 무엇인지는 사람들의 이름이 명명되는 것으로부터 분명해진다 -즉 에돔, 모압, 갈대아, 바벨, 소돔, 사마리아, 등등 인데, 이들은 이미 지나온 장들에서 취급된 바 있다. 이로부터 지금 여기서 “가나안족의 딸들”에 의해 뜻해진 것이 분명해진다.
이스라엘족들은 가나안족의 딸들과 결혼 계약을 하지않도록 한 것은 영적인 법들, 즉 선과 거짓, 그리고 악과 진리가 결합해서는 안됨을 중요시하여야 해서였다; 그 이유가 이런 결합이 있을 경우 모독함이 오기 때문이다. 이 금지함을 어긴 사건이 말씀에 표현된 곳이 있는데, 신. 7:3과 말. 2:11이다: 즉
유다는 여호와의 거룩함을 모독했다, 그는 낯선 신의 딸을 사랑하고 결혼했기 때문이다 (말. 2:11).

내가 거주하는 이 곳 사람들 가운데에서… 이는 주님을 에워싼 것, 즉 어머니 쪽의 인간 안에 있는 신성에 불일치되는 것들을 의미한다. 이는 “이곳 사람들 가운데”의 의미가 가나안족이다는 것, 이들이 에워싼듯, 또는 빙둘러 있다; 그리고 이것들이 진리에 불일치하고 있다는 것은 “가나안족의 딸들”의 의미에서 살폈다. 이것들은 주님께서 어머니로부터 유전적으로 받은 것들이고, 그분이 인간을 신성으로 만드실 때, 축출하셨는데, 앞에서 살폈다.

그러나 너는 내 토지, 내 출생지로 가라. 이는 주님께서 그분 자신에게 획득하셨던 신성한 천적인 것과 영적인 것을 의미한다. 이는 “토지”의 의미가 사랑의 천적인 것이다로부터, 그리고 “출생지”의 의미가 사랑의 영적인 것이다로부터; 여기서는 신성한 천적인 것과 영적인 것이다, 그 이유는 주님이 취급되기 때문에서 이다; 그리고 그분은 이것들을 그분 자신의 힘에 의해 획득하셨다.

그리고 내 아들을 위한 이삭을 위한 여인을 데려와라. 이는 합리성의 선에 대한 애착이 결합되어져야 하는 것은 진리에 대한 애착 뿐임을 의미하는데 방금 앞에서 살폈다.

5, 6절. 그리고 그 종은 그에게 말했다, 만일 여인이 저를 따라 이 토지로 오지 않으려 한다면. 당신이 나왔던 그 토지에로 당신의 아들을 데려다 주어도 됩니까?
6 그리고 아브라함은 그에게 말했다, 네가 조심해야 할 것은 너는 내 아들을 거기로 데려가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 종이 그에게 말했다. 이는 주님께서 자연적 인간에 관하여 지각하심을 의미한다. 이는 “말함”의 의미가 지각함이다로부터 분명해진다; 그리고 “종”의 의미가 여기서는 자연적 인간이다로부터 알려진다. 자연적 인간 안에서 행해지는 것, 자연적 인간의 품질이 무엇인지는 합리성 안에서 지각되어진다; 그 이유가 인간 안의 보다 낮은 수준의 것은 보다 높은 수준의 것에 의해 지각되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종이 그에게 말함”은 자연적 인간에 관한 주님의 지각이 의미된다.

만일 여인이 이 토지에로 나를 따라 오려 하지 않는다면… 이는 그 애착이 분리될 수 있을지 그렇지 않을지에 관하여 자연적 인간이 의심함을 의미한다. 이는 “여인”의 의미가 진리인데, 여기서는 합리성의 신성한 선에 결합되어야 하는 자연 평면으로부터의 진리이다로부터 분명해진다. 그리고 모든 결합이 애착을 수단으로 결과되는 바, 여기서 “여인”에 의해서는 진리에 대한 애착이 의미되어진다; 그리고 또한 “…따라 감” 또는 “이 토지로 나를 따라 옴”의 의미가 자연 평면으로부터 분리되고 합리성과 결합함 이다로부터 알려진다; 그 이유가 여기서 “토지”는 합리성으로부터 있는 사랑의 선이기 때문이다. 의구심이 있는 것이 “그녀가 (따라 오려) 뜻하지 않는다면”이라는 말 흐름에서 보여진다.
이 말들 안에 포함된 것에 관하여는 앞의 구절과 이어질 8절 내지 그 이후의 구절들에서 분명해진다; 이 말을 좀 더 명료하게 이해하기 위하여 말을 좀 더 보태어 생각해보자. 순수한 합리성은 선으로부터 있음이고(is) 진리로부터 세상에 널리 알린다(공표된다, existit). 선은 내적인 길을 수단으로 흘러든다; 그러나 진리는 외적인 길을 수단으로 한다. 고로 선은 합리성 안에서 진리와 그 자체 결합한다, 그리고 그것들이 합리성으로 되어 있게 한다. 그 안에서 합리성이 진리와 더불어 결합하지 않으면, 합리성은 없다; 그가 합리성에 관해 추론할 수 있기 때문에 있다 라고 나타날는지 모르나 그것은 착각이다. 위의 방법은 합리성이 인간에 만들어지는 공통된 방법이다.
주님이 여느 인간 같이 태어나시고, 가르침을 받기를 뜻하셨던 바, 마찬가지로 그분은 그분의 합리성을 신성으로 만드심에서도 여느 인간이 합리성을 만드는 공통의 방법으로 하시었다. 즉 선 측면에서는 내적 경로인 그분의 신성으로부터의 유입을 수단으로, 그리고 진리 측면에서는 외적 경로를 통한 유입을 수단으로 하시었다. 그러므로 선 측면에서의 합리성이 진리를 받기 위한 상태로 있을 만큼 만들어졌을 때, 이것이 1절에서, “나이 많아진 아브라함은 날들에 들어 갔다, 그리고 여호와께서는 모든 것에서 아브라함을 축복하셨다”에서 뜻해진 것, 즉 이를 수단으로 주님의 인간이 신성으로 만드시는 때가 가까워졌다는 것, 하여 모든 것들이 신성한 질서 안으로 배치되었을 때가 의미되었다. 이 1절 상태의 다음 단계는 진리가 합리성 속의 선과 결합되는 것이다. 이것이 여기서 말해지는 바, 공통의 방법(경로), 즉 자연적 인간으로부터의 기억 속의 지식들과 지식들을 수단으로 진행하는 것이다.
합리성의 선 자체, 이는 내적 경로에 의해 만들어내지는데, 이것은 지면(바탕) 자체이다; 그러나 진리는 이 지면에 뿌려져야 하는 씨이다. 순수한 합리성은 어떤 다른 방법에서도 결코 태어나지 않는다. 이 방법에 의해 주님과 더불어서도 나타나도록 하시기 위해, 그리고 그분 자신의 힘으로 신성을 만드시기 위해 주님은 세상 안으로 오셨고, 여느 인간 같이 태어나시려고 뜻하신 것이다. 이렇지 않고 인간을 입으셨던 경우는 고대 때에 그분이 인간들에게 나타나실 때의 경우인데, 그때는 출생 없이 인간을 입으시고 나타나셨다.
이 장 안에는 이런 사항들이 함유되어 있다. 즉 진리가 자연적 인간으로부터 부름을 받아 합리성 속의 선과 어떻게 결합하는지; 그리고 거기 있는 선이 신성이었을 때, 거기 있는 진리 역시 어떻게 신성으로 만들어지는지 이다. 이런 사항들은 인간에게서는 아주 불명료하다. 특히 합리성이 자연 평면으로부터 구분되는 어떤 것임을 알지 못하는 경우, 그러므로 합리성은 계속적으로 만들어내져 간다는 것, 이 만듦의 수단이 지식들이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경우에 있는 인간에게는 더 더욱 희미한 수준에서 허우적거릴 수밖에 없다. 결국 그들은 이해하지 못하고 만다; 그러나 합리성과 자연적 인간에 관해 어떤 지식을 지닌 이들, 한마디로 계발되는 중의 인간에게는 쉽게 이해되는 대목이다. 천사들은 이에 관해 청명한 날과 같은 수준에서 있다.
이것들에 관한 어떤 생각을 이미 앞에서 말했던 여러 사항에서 획득했을는지 모른다; 즉 진리 측면에서의 합리성은 기억 속의 지식들(주관적 지식들)과 지식들(객관적 지식들) 안으로의 유입을 수단으로 만들어내진다는 것: 이것은 위 두 종류의 지식들로부터 태어나지는 것이 아니라 그것에 대한 애착으로부터 태어나진다는 것: 이 두 종류의 지식들은 선을 위한 그릇 자체이다는 것: 텅빈 기억 속의 지식들은 파괴되고 만다는 것: 합리성 안에서, 선에 대한 애착은 진리에 대한 애착에 있는 혼으로서 있다는 것: 합리적 진리에 대한 애착은 무엇인지, 그리고 기억되고 있을 뿐인 진리에 대한 애착은 무엇인지에 관한 것: 지식들을 수단으로 외적 인간은 내적 인간과 결합된다는 것, 즉 합리성이 자연적 평면과 결합한다는 것, 이는 지식들이 천적 평면으로부터의 것들, 즉 사랑과 선행 속의 것들 안에 심어질 때이다는 것.

…제가 당신의 아들을 당신이 나왔던 그 토지에로 데려다 주어도 됩니까? 이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애착이 합리성의 신성한 선과 결합될 수 있겠는가 하는 질문을 의미한다. 이는 아브라함에 관해 앞에서 말한 바로부터, 그리고 그가 출생한 토지에 관하여로 부터; 그가 출생한 토지는 시리아였고, 거기에는 두 번째 고대 교회가 있었는데, 이 교회는 그 교회를 건설한 에벨로부터 히브리 교회라고 불리웠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시절쯤 해서 이 교회는 진리로부터 떨어져 나갔다, 그리고 이들 중의 얼마 정도의 가구는 여호와에 관해 완전히 무지해져 있었고, 다른 신들을 예배했다. 이것이 여기서 뜻해진 “토지”이다. 이 사항에 관련해 종은 아브라함에게 자기가 그의 아들을 그가 빠져나온 토지로 되돌려 놓아도 되는지를 물은 것이다; 그리고 이로부터 여기서의 “토지”는 진리와 일치하지 않는 애착이 의미되고 있다. 그리고 이 의미 때문에, 아들을 되돌려 거기로 데려가는 것, 즉 거기서 여인과 그가 결혼하는 것, 그리고 그녀와 거기에 남아있는 것에 의해 진리와 일치하지 않는 애착에 합리성 속의 신성한 선이 결합하는 것이 의미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이 행해질 수 없음이 이어지는 대목에서 아브라함의 대답에서 선언되고 있다.

아브라함이 그에게 말했다. 이는 주님께서 신성으로부터 지각하심을 의미한다. 이는 “말하다”의 의미가 지각이다로부터; 그리고 아브라함이 신성한 인간 측면에서의 주님을 표현함으로부터 알려진다. 이 지각은 신성한 인간으로부터 오고 있다.

네가 조심해야 할 것은 너는 내 아들을 거기로 데려가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이는 진리와 일치하지 않는 애착은 합리성의 선과 결합되어질 수 없음을 의미한다. 이는 방금 앞에서 설명되었다. 즉 아브라함이 빠져나왔던 토지로 자기 아들을 되돌려 놓는 것이 내적 의미에서 무엇인지에 대하여서이다. 진리와 일치하지 않는 애착은 합리성 속의 선과 결합되어질 수 없다는 것은 이미 말한 대목, 선과 진리의 결합, 또는 천국의 결혼에 관하여 살핀 대목에서 분명해진다.
거짓이 선과, 진리가 악과의 결합은 있을 수 없고, 오직 거짓은 악과, 진리는 선과 결합한다는 것을 두고 나로 하여금 생명에 관해 지각해보는 것이 주어졌다. 내가 지각한 경우는 다음과 같다: 인간이 선에 관해 애착을 가질 때, 즉 그가 심정으로부터 선을 뜻할 때, 그 다음 어떤 것이 뜻해지고 행해야겠다고 생각될 때는 언제든지, 그의 선은 그의 생각함 안으로 흐른다, 그리고 거기서 그것은 거기 있는 지식에 자체를 응용한다, 그리고 선을 받는 그릇으로 삼아 자체를 그것들과 결합한다, 그리고 이 결합을 수단으로 그가 그렇게 생각하고, 뜻하고, 행동하도록 재촉한다. 이는 마치 선이 진리에 또는 진리에 관한 지식에 접목하는 것과 같다. 그러나 인간이 선에 대한 애착이 없고, 악에 대한 애착이 있을 때, 즉 그가 악을 뜻할 때 (마치 그는 자기를 위하여 있는 모든 것은 선이라고 믿을 때의 경우와 같은데, 이리하여 그는 위대해지고, 부자가 되고 명예와 재물도 손에 넣을지 모른다, 이것이 그의 목적이기 때문이다), 그 다음, 어떤 것이 뜻해지고 행동해야겠다고 생각될 때, 그의 뜻함이 그의 생각함 안으로 동등하게 흘러든다, 그리고 거기서 진리의 유사함을 보이는 지식들을 흥분시킨다; 그렇게 해서 그것은 인간을 생각하고, 뜻하고, 행하도록 재촉한다. 이것은 지식들에 대한 잘못된 응용을 수단으로, 그리고 그가 말씀의 글자 의미로부터, 또는 다른 지식들로부터 끌어낸 어떤 일반적 진리들을 모든 측면에서 다 적용할 수 있는 것으로 간주해버림에서 발생된다: 이런 경로에서 악은 거짓과 짝을 이루는데, 그 이유가 이런 경우, 거기 안에 있는 진리는 그것의 본질을 박탈당하기 때문이다.
다른 삶에서 본인 스스로는 타인보다 훨씬 잘 교육된 자라 치부하는 인물이 실상 타인보다 어리석어 있었다; 그리고 자기가 진리 안에 있다는 확신(설득력) 속에 있는 만큼 그는 타인들 위에 짙은 어둠을 드리우게 한다. 그가 나와 한참을 같이 있어 보았다; 그러나 그는 진리로부터의 선에 대한 어떤 애착을 느낄 수도 없었다, 하여 그가 육체의 삶 동안 알았다고 하는 진리들을 그들의 마음에 상기해주어도 마찬가지일 뿐이었다; 그 이유가 악이 그들과 더불어 있어, 진리가 그들과 결합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이런 인물은 선의 단체에는 결코 있어질 수 없다; 그러나 만일 그에게 자연적 선이 남아 있다면, 그가 어떤 진리도 알지 못할 때까지 그는 황폐해진다; 그 다음 남은 작은 선이 받을 수 있는 만큼에서 진리의 어떤 것이 남은 선 안으로 은근히 주입되어진다. 그러나 심정으로부터 선에 대한 애착 안에 있는 이들은 그와 더불은 선의 양과 질에 일치하여 모든 진리를 받을 수 있다.

7절. 하늘의 하느님 여호와께서 나를 내 아버지의 집으로부터, 그리고 내가 출생한 토지로부터 데려왔다, 그리고 나에게 이야기하셨다, 그리고 나에게 맹세하셨다, 말하시기를, 네 씨에게 나는 이 토지를 주리라, 그분께서는 너보다 앞서 그분의 천사를 보내실 것이다, 그리고 너는 거기에서 내 아들을 위한 여인을 데려 올 것이다.

하늘의 하느님 여호와. 이는 주님의 신성 자체를 의미한다. 이는 방금 앞에서 말한 바로부터 분명해진다. 즉 “하늘의 하느님 여호와”는 주님의 신성 자체이다는 것; 그 이유가 구약 성경에서 자주 명명되는 “여호와”에 의해서 주님만이 뜻해지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구약 성경의 말씀에 있는 모든 것은 내적 의미에서 일반적 특수적 모두에서 그분만을 취급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교회의 의식들의 각각 그리고 모두는 그분을 표현했다; 그리고 태고 교회인들, 천적인 교회에 있던 그들은 여호와에 의해 주님 외에 다른 분으로는 이해하지 않았다. 이 구절, 그리고 그밖의 구절의 글자 의미에서의 나타나는 것은 또 다른 분, 즉 보다 더 높으신 어떤 분이 “여호와”에 의해 뜻해진다; 그러나 글자 의미는 내적 의미가 하나로 있게 한 것을 분리되어 있게 한다; 이런 이유로 글자 의미에서 교육된 이들은 하나 그 이상을 먼저 생각하지 않으면, 그나마 하나에 대한 생각도 가질 수 없다. (다시말해 무의식적 수준에서 한 분 하느님을 가지기 힘든 까닭에 의식적으로 한분 하나님이라 불러야 그나마 하나에 대한 의식이 가져지기에, 그래서 많은 기독 교파들이 하느님보다 하나님을 표방하는지 모른다. 역자주) 그 이유가 인간과 더불은 하나는 많은 것으로부터 만들어내지기 때문이다; 또는 같은 것으로, 계속되는 것들로부터 동시적인 것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주님 안에 많은 것들이 있다, 그리고 모두는 여호와이시다. 이것이 글자 의미가 구분을 만들어내는 이유이나 천국은 결단코 그렇게 하지 않는다; 그들은 단순한 생각에서 한 분 하느님을, 그 하느님이 주님이시다고 인정한다.

…나를 내 아버지의 집으로부터, 그리고 내가 출생한 토지로부터 데려왔다. 이는 주님께서는 그분 자신의 힘으로 어머니로부터 온 악과 거짓을 추방하시어 자신을 자유롭게 하셨음을 의미한다. 이는 “아버지의 집”과 “출생의 토지”의 의미가 어머니쪽으로부터 이다는 것, 또는 어머니로부터의 유전적인 것이다로부터 분명해진다. 주님의 악과 거짓은 이로부터 왔고, 이것에 맞서 싸우셨고, 이것을 추방하셨다, 그리하여 그분 자신의 힘으로 그분의 인간을 신성으로 만드셨다. 어머니로부터의 이 유전성이 내적 의미에서 이 구절의 “아버지의 집”과 “출생한 토지”에 의해 의미되어져 있다; “아버지의 집”에 의해서는 악 측면에서의 어머니로부터의 유전적인 것이; “출생한 토지”에 의해서는 거짓 측면에서의 어머니로부터의 유전적인 것이 의미되고 있다; 그 이유가 악이 있는 곳에 거짓도 있기 때문, 그들은 서로에게 결합하기 때문이다. 이것들을 그분은 자신의 힘으로 축출하셨다.

…나에게 이야기하셨고, 그리고 나에게 맹세하셨고, 말하시기를… 이는 그분의 신성이 기꺼이 하심과 이해력에 의해서를 의미한다. 이는 “이야기하심”이 지각하심을 , 그리고 뜻하시는 것을 의미한다로부터; 그리고 “맹세함”이 신성으로부터 확증함을 의미한다로부터 알려진다. 그리고 이 맹세가 진리를 서술할 경우, 이는 이해력에 속한다. 그분이 “이야기하신다”가 여호와를 두고 하는 말인 바, 이것은 그분이 뜻하신다가 의미된다. 그 이유가 여호와께서 이야기하시는 것은 무엇이든 그분이 뜻하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분이 “맹세하신다”가 여호와를 두고 한 말인 즉, 이는 내적 의미에서 그것이 진리이다고 이해함이 뜻해진다; 고로 “맹세함”이 여호와에 관련해 서술될 경우 이해함이 의미된다.

네 씨에게 나는 이 토지를 줄 것이다. 이는 주님의 인간에 속해 있는 신성한 진리를 의미한다. 이는 “씨”의 의미가 선행으로부터의 신앙, 또한 선행으로부터의 신앙 안에 있는 자 이다로부터; 그리고 신앙의 모든 선과 진리는 주님으로부터 이기 때문에, 최고 의미에서 “씨”에 의해 신성한 진리 자체가 뜻해진다; 그리고 “이 토지”의 의미가 가나안, 천국, 또는 주님의 왕국이다로부터도 알려진다; 그리고 이것이 천국, 또는 주님의 왕국이기 때문에 최고 의미에서 “가나안의 토지”에 의해 신성한 인간 자체가 뜻해진다; 그 이유가 신성 자체는 주님의 신성한 인간을 통하지 않고는 천국 안으로 흐를 수 없기 때문이다; 이것을 주님께서 마태복음서에서 분명하게 보이셨다:
모든 것들이 내 아버지로부터 나에게 넘겨졌다; 그리고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는 아무도 없고, 아들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도 아무도 없다, 그리고 그분은 아들에게 그분 을 기꺼이 밝히 알리신다 (마. 11:27).
그리고 요한복음서에서:
여하튼 하느님을 본 사람은 없다; 독생자 아들, 아버지의 품 안에 계신 분, 그분이 그분을 선포하셨다 (요. 1:18).
“아들”은 주님의 신성한 인간이다. 주님 외에 어느 다른 아버지가 천국에서 경배되어진다고 믿는 자는 큰 실수를 하고 있다.

그분께서는 너보다 앞서 그분의 천사를 보낼 것이다. 이는 신성한 섭리를 의미한다. 이는 말씀에서 “천사”의 의미가 주님이시다는 것으로부터 알게 된다; 그러나 주님의 무엇을 뜻하는지는 시리즈로부터 나타난다; 그리고 신성한 섭리가 뜻해지는 것은 분명하다. 주님이 말씀에서 “천사들”에 의해 뜻해지는 이유는 천사들의 지령 아래 예언자나 다른 사람들에 의해 말씀에서 말해지는 모든 것들은 주님으로부터 이고, 실상 주님 자신에 속하는 것들 이기 때문이다. 천국에 있는 천사들 역시 자신들로부터 있는 선과 진리는 없고, 오직 주님으로부터 모두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지각한다; 그들에게 이것은 너무나 분명한 바, 이외 다른 생각을 도출하게 하는 모든 것들에 대해서는 혐오를 느낀다. 이로부터 “천사들”에 의해, 즉 “선한 천사들”에 의해 주님이 뜻해지고, 그분의 어떠한 것에 대하여는 시리즈, 또는 연결 대목에서 나타나게 된다.

그리고 너는 거기로부터 내 아들을 위한 여인을 데려 올 것이다. 이는 실로 진리에 대한 애착은 거기 (내 아버지의 집, 내가 출생한 토지)에 있었다는 것, 그러나 새로운 근원으로부터 임을 의미한다. 이는 “여인”의 의미가 진리에 대한 애착임으로부터 알게 된다; 그 이유가 이 장이 취급하는 리브가에 의해 “이삭”인 합리성 속의 신성한 선과 결합되어지게 되는 신성한 진리가 표현되었기 때문이다. 진리에 대한 애착이 거기로부터, 즉 “아버지의 집”과 “출생된 토지”에 의해 의미된 것으로부터, 그러나 새로운 근원으로부터 이다는 것은 아직은 설명될 수 없고, 이어지는 많은 것들 안에서 다루어진다. 어쨌든 간략히 서술해보겠다. 자연적 인간에 있는 진리에 대한 모든 애착은 합리성으로부터의 선에 대한 애착으로부터 유입을 수단으로, 또는 신성으로부터 합리성을 통하여 나타난다(공표된다). 이 유입을 통하여 자연적 인간 안에서 나타나는(공표되는) 진리에 대한 애착은 시작에서부터 순수한 진리에 대한 애착이었던 것은 아니다; 그 이유가 순수한 진리는 연속적인 단계들에 의해 오기 때문, 또한 연속적인 단계들에 의해 그 자체 진리들이 아닌 이전의 것들을 대체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직 순수한 진리쪽으로 인도한 수단일 뿐이다. 이 몇마디 말로부터 진리에 대한 애착이 거기로부터 있다는 것, 그러나 새로운 근원으로부터 이다고 말해진 것의 뜻한 것을 (여러분은) 알았으리라 본다.

8, 9절. 그리고 만일 여인이 너를 기꺼이 따라오지 않는다면, 그러면 너는 이 맹세와는 상관이 없다. 오로지 너는 내 아들을 거기로 데려가지만 않으면 된다. 9 그리고 그 종은 자기 손을 그의 주인 아브라함의 허벅지 아래에 놓았다, 그리고 이 말에 관하여 그에게 맹세했다.

만일 여인이 너를 기꺼이 따라오지 않는다면. 이는 앞 절에서와 같이 여기서도 만일 진리에 대한 애착이 분리되지 않는다면을 의미한다. 이는 “여인”이 진리에 대한 애착을 의미함에서; 그리고 “따라 감” 또는 “이 토지로 너를 따라 옴”이 자연 평면으로부터 분리되고, 합리성과 결합하는 것을 의미함에서 알려지는데, 이는 앞의 같은 표현에서 살핀 바 있다.

그러면 너는 이 나의 맹세와는 상관이 없다. 이는 자연적 인간에 속한 자유를 의미한다. 이는 이런 말들이 말해지는 종의 의미가 자연적 인간이다로부터; 그리고 “만일 여인이 기꺼이 따라오지 않으면 상관이 없다”의 대략적 의미는, 만일 진리에 대한 애착이 분리되지 않는다면 그는 서약 없음 아래 있을 것이다는 말이다. 이 말이 자연적 인간에 속하는 자유를 포함하는 것은 분명하다; 그 이유가 여기서 진리에 대한 애착이 취급되기 때문, 그리고 또한 자연적 인간으로부터의 분리가 내적 의미에서 서술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역사적 의미에서는 또다른 연결이 있다, 그러나 내적 의미에서는 이와 같이 서술되었다.
인간의 자유에 관해서는 이미 말해졌다; 이로부터 어떻게 자유와 더불어 있는지는 분명해진다. 자유가 자연적 인간에 관해 서술된다, 그러나 같은 방법에서 자유가 합리성에 관해 서술되지 않는다; 그 이유가 선은 주님으로부터 천국의 자유 안에서 합리성을 통하여 자연 평면 안으로 흐르기 때문이다. 이 선을 받는 것이 자연적 인간이다; 그리고 이것이 받아지도록 하기 위하여, 합리성을 통하여 흐르는 천국의 자유와도 결합하는 바, 자연적 인간은 자유 안에 있게 된다. 그 이유가 자유는 사랑 또는 애착 속에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연적 인간이 안쪽에서 흐르는 선에 대한 애착으로부터 진리에 대한 애착을 받지 않으면, 그것이 합리성과 결합함은 가능해질 수 없다. 이상의 것은 인간과 더불은 경우이다; 그리고 그가 자유를 통하여 주님으로부터 개혁되는 것은 이미 살폈다.
주님에 주목하면, 그분이 진리 측면에서 그분의 인간을 신성으로 만드셨을 때,그분도 위 인간과 마찬가지로 자유 안에서 자연 평면 안에 남겨지셨다; 즉 그분이 합리성의 신성한 선에 신성한 진리를 인접되게 하셨을 때이다; 그 이유가 주님은 그분의 인간을 신성으로 만드시되 보통의 방법, 즉 인간이 개혁되고 거듭나는 방법에서 해내시기를 기꺼이 선택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개혁과 거듭남 자체는 일종의 (그분이 신성이 되시어가는 것의) 형상이다. 인간 역시 개혁과 거듭남에 의해 새로이 만들어진다, 이로부터 새로이 출생한다고, 새로이 창조되었다 라고 말해진다; 그리고 그가 개혁되는 만큼에서 그는 자기 안에 신성인 것을 가진다. 그러나 이런 차이는 있다, 즉 주님은 자신을 자신의 힘으로 신성으로 만드셨다, 한편 인간은 자신의 힘으로는 제 아무리 작은 개혁이라 할지라도 가능할 수 없고, 오직 주님으로부터서만 이다. 따라서 기껏 말해본다면 “마치 신성인듯 처럼”라고가 최대한도 이다, 그 이유는 인간은 생명을 담는 그릇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주님은 각 본질 측면에서 생명 자체이시다.

오로지 너는 내 아들을 거기로 데려가지만 않으면 된다. 이는 거기로부터서는 결합이 없음을 의미함은 앞 절에서와 같다. 이는 앞에서 살폈다.

그리고 그 종은 자기 손을 그의 주인 아브라함의 허벅지에 놓았다. 이는 자연적 인간이 결혼에 있는 사랑의 선에, 능력에 따라 서약함을 의미한다. 이것도 앞에서 이미 살폈다.

그리고 이 말에 관하여 그에게 맹세했다. 이는 신성한 책임을 의미한다. 이는 “맹세함”이 서약으로 묶임을 의미함으로부터; 그리고 실로 최고로 거룩한 것, 그 이유는 그가 하늘의 하느님과 땅의 하느님 여호와에 의해 맹세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신성한 책임인데, 그 이유는 신성한 책임은 서약으로 묶임 외에 더 다른 것이 없기 때문이다.

10절. 그리고 그 종은 낙타 열 마리를 챙겼는데, 그의 주인의 낙타들로부터 이다, 그리고 떠났다, 그리고 그의 손에는 자기 주인의 모두 각각의 좋은 것이 있었다. 그리고 그는 일어났고 아람-나하라임에, 나홀의 성으로 갔다.

그 종은 열 마리 낙타들을 챙겼는데, 그의 주인의 낙타들로부터 이다, 그리고 떠났다. 이는 자연적인 인간 안에 있는 신성한 기억 속의 일반적인 지식들을 의미한다. 이는 “종”의 의미가 여기서는 자연적인 인간이다로부터; 그리고 “열”의 의미가 리메인스이다로부터; 그리고 “낙타들”의 의미는 일반적인 기억 속의 지식들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리고 이것들이 신성이었기 때문에, 또는 주님에 의해 획득되었기 때문에, 낙타들이 “열”마리 라고 말해지고, 또한 “낙타들, 그의 주인의 낙타들로부터 이다”라고 말해졌다. 그가 “떠났다”는 것은 이 장에서 취급되는 것이 개시됨을 의미한다.
여기서의 주제는 주님의 신성한 합리성 안에 있는 선에 진리가 결합하는 과정이다; 첫째, 개시하는 과정이다, 이 개시됨의 본성은 시리즈에서 묘사되고 있다; 여기서, 주님께서는 자연적 인간 안에서 자신으로부터 있는 것들, 즉 신성한 것들을 어머니쪽으로부터 있는 것들로부터 분리하셨다. 자신으로부터 있는 것, 즉 신성인 것들이 개시함을 있게 해주고 있다; 그리고 그것들이 여기서 “낙타 열 마리, 그의 주인의 낙타들로부터”이다. 그리고 여기로부터 이어지는 많은 구절들에서 “낙타들”에 관한 언급이 있다. 즉 성 밖에서 낙타들을 무릎 꿇게 한 것 (11절); 리브가 역시 낙타들에게 마시게 했다는 것 (14, 19, 20절); 낙타들을 집으로 데리고 갔다는 것, 그리고 짚과 식량을 낙타들에게 주었다는 것 (31, 32절); 그리고 더 나아가 리브가와 그녀의 하녀가 낙타 위에 탓다는 것 (61절); 그리고 이삭은 낙타들이 오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리브가가 이삭을 보았을 때, 그녀는 그녀의 낙타로부터 내렸다는 것 (63, 64절) 등이다. 낙타는 그것의 내적 의미 때문에 자주 언급되고 있다. 여기서 낙타는 자연적 인간에 있는 일반적인 기억 속의 지식을 의미한다. 이 지식으로부터 합리성에 있는 선에 대한 애착 안으로 개시되어지는 진리에 대한 애착이 온다, 그리고 이것은 (거듭나는 인간의 누구에게나 적용되는) 통상적인 방법이다; 그 이유가 진리 측면에서의 합리성은 기억 속의 지식들(주관적 지식들)과 지식들(객관적 지식들) 없이 태어나고 완전해질 수도 없기 때문이다.
“낙타들”이 일반적 기억 속의 지식들을 의미하는 것은 말씀의 다른 구절로부터도 분명해진다, 이사야서에서:
남쪽의 짐승들에게 예언하라: 궁핍과 고난의 토지에서; 거기로부터 젊은 사자와 늙은 사자 가, 독사와 날아다니는 불뱀이 온다; 그것들이 자기들의 재물을 젊은 나귀의 어깨 위에서 운반하고, 그들의 보물들을 낙타들의 혹 위에서 이윤도 내주지 않을 백성들에게 운반한다; 그 이유가 이집트는 헛되게 도울 것이고 아무 효용도 없기 때문이다 (이. 30:6, 7).
“남쪽의 짐승들”은 지식의 빛에 있는 이들, 또는 지식 안에 있는 이들, 그러나 악한 생활을 하는 이들이다; “젊은 나귀의 어깨 위에 있는 그들의 재물”은 그들의 합리성에 속한 지식들을 표시한다; “낙타들의 혹 위에 있는 그들의 보물들”은 그들의 자연 평면에 속하는 지식들을 표시한다; 낙타들의 “혹”은 자연 (평면)에 있는 것이다; “낙타들” 자신은 거기 있는 일반적 기억 속의 지식들이다; “보물들”은 그것들이 귀하게 여겨 간직한 지식들이다; “이집트는 헛되이 도울 것, 아무 효용이 없을 것”이란 기억 속의 지식들이 그들에게 유용하지 않다를 표시한다; 이집트가 기억 속의 지식임은 이미 살핀 바 있다. “낙타들”이 여기서 실제의 낙타가 아님은 분명하다; 그 이유가 “젊은 사자와 늙은 사자가 낙타들의 혹에서 그들의 보물들을 운반한다”고 말해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교회의 어떤 비밀들이 이를 수단으로 의미될 것임을 누구나 알 수 있다.
다시:
바다의 광야에게 예언하라: 고로 주님께서 말하셨다, 가라, 경비병을 세워라; 그가 보는 것 을 그로 하여금 선포하게 하라; 그리고 그는 병거를, 한쌍의 마부, 나귀의 병거를, 낙타의 병거를 보았다, 그리고 그는 열심히 귀를 기울였다. 그리고 그는 대답했다 그리고 말했다, 바벨이 함락되었다, 무너졌다 (이. 21:1, 6, 7, 9).
“바다의 광야”란 유용함이 없는 기억 속의 지식들의 텅빔과 같은 상태를 표시한다; “나귀의 병거”란 자연적 인간 안에 특별한 기억 속의 지식이 모아져 있는 것; “낙타의 병거”는 자연적 인간 안에 일반적 기억 속의 지식이 모아져 있는 것을 표시한다. “바벨”에 의해 의미된 그들의 쓸데 없는 추론들(텅빔의 추론들)이 이렇게 묘사되고 있다. 다시:
너의 심장은 바다의 무리들이 네게로 개심될 것이기 때문에, 나라들의 재산이 네게로 올 것이기 때문에 확대될 것이다. 많은 낙타들이, 미디안과 에바의 단봉 낙타가 너를 덮을 것 이다; 세바로부터의 그들 모두가 올 것이다; 그들은 금과 향을 가져올 것이다, 그리고 그들 은 여호와의 찬양을 외칠 것이다 (이. 60:5, 6).
이는 주님에 관해서이다, 그리고 그분의 자연 평면에 있는 신성한 천적, 영적인 것들에 관하여서이다: “바다의 무리”는 광대하게 공급되는 자연적 진리를 표시한다; “나라들의 재산”은 광대하게 공급되는 자연적 선을 표시한다; “많은 낙타들”은 풍부하게 공급되는 일반적 기억 속의 지식들을 표시한다; “금과 유향”은 선들과 진리들, 이것들이 “여호와의 찬양들”이다; “세바로부터”란 사랑과 신앙 속의 천적인 것들을 표시한다. 다시:
세바의 여왕이 넘치는 재물을 가지고, 향품을 실은 낙타들과 더불어, 아주 많은 금과 보석 들을 (가지고) 예루살렘으로 솔로몬에게 왔다 (왕상. 10:1, 2),
위는 주님에게 와진 지혜와 총명을 표현했다. 위의 “솔로몬”은 내적 의미에서 주님이시다. 향품, 금과 보석을 짊어지고 있는 “낙타들”은 자연적 인간에 있는 지혜와 총명에 속한 것들이다.
예레미야서에서:
바벨의 왕 느부갓네살이 쳐부순 아라비아에게, 하솔의 왕국들에게 (말하라): 너희는 일어나 라, 아라비아로 올라가라, 그리고 동쪽의 아들들이 황폐해 있다. 그들의 천막들을 그들은 가져갈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들을 위해 자기들의 휘장들을 운반해갈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모든 집기들도, 그리고 그들의 낙타들도 (운반해갈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낙타들 은 전리품일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들을 모든 바람쪽으로 흐트릴 것이다
(예. 49:28, 29, 32).
위에서 “아라비아와 하솔의 왕국들”은 반대적 의미에서 인데, 천적, 영적인 것들에 관한 지식 안에 있는 이들, 그러나 그것들을 가지고 자신이 잘남을 추켜세우는 용도 외에는 다른 선용의 목적이 없는 자들을 표시한다; “그들로부터 운반해갈 그들의 낙타들, 전리품이 될 낙타들, 그리고 모든 바람쪽으로 흐트릴 낙타들”이란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들과 일반적 기억 속의 지식들이 그들이 반대되는 것들을 믿는 것을 수단으로 육체의 삶에서 그들로부터 거두어내지고, 다른 삶에서는 통째로 거두어낼 것임을 표표시한다.
스가랴서에서:
그리고 이것은 여호와께서 예루살렘에 맞서 싸우는 모든 사람들을 치실 재앙이다; 고로 말, 노새, 낙타, 나귀, 그리고 모든 짐승에 대한 재앙일 것이다 (슥. 14:12, 15).
위에서 “말, 노새, 낙타, 그리고 나귀에 대한 재앙”은 지적인 것들의 결핍을 표시한다, 이 결핍은 질서대로 합리적인 것들로부터 자연적인 것들까지 계속되어 가는 결핍이다; “낙타들”은 자연적 인간에 있는 일반적인 기억 속의 지식들을 표시한다. 위 구절 비슷한 것이 이집트에서 있었던 역병의 재앙이다. 이것이 “들판에 있는 가축떼에, 말 에, 노새에, 낙타들에, 목축떼에, 그리고 양떼에” 있었다 (출. 9:2, 3).
이런 구절들로부터 “낙타들”에 의해 말씀의 내적 의미에서 자연적 인간 속의 일반적인 기억 속의 지식이 의미되었음이 분명해진다. 일반적 기억 속의 지식들은 자체 안에 많은 세부 사항들, 특별 사항들을 포함하는 지식들이다. 그리고 그것들을 지적 측면에서 자연적 인간을 일반적으로 만들어 낸다.

그의 주인의 모두 각각의 좋은 것이 그의 손 안에 있었다. 이는 자연적 인간과 더불은 이런 지식들 속의 선들과 진리들을 의미한다. 이는 “그의 주인의 모두 각각의 좋은 것”이 선과 진리 모두를 의미함으로부터 알려진다. 그 이유가 진리는 선으로부터 있기 때문에 그 자체에서(본질 측면에서) 선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진리는 선의 형체이다, 즉 선이 지적으로 지각되기 위해 입혀지는 것이 진리이다는 말이다. 이 때 선은 진리라고 불리운다; 또한 “손”의 의미가 힘이다로부터도 알게 된다; “그의 손 안에”란 그가 가졌다는 것이다. 일반적인 기억 속의 지식들은 그 자체에서만 일 경우 선들이 아니고, 살아 있지도 않다; 그것들로 선들로, 살아 있다로 되어지게 하는 것은 그것들에 대한 애착이다; 그 이유가 이 애착이 있을 때, 그것들은 어떤 사용을 위하여 존재하게 된다; 어떤 사용을 위해서가 아니다면 누구도 기억 속의 지식, 진리에 의해서도 감동되지 않는다. 선용이 어떤 선을 만든다; 선용이 있는 곳에 선도 있다는 말이다.

그는 일어났다. 이는 승강을 의미한다. 이는 “일어남”의 의미가 그것이 언급되는 어디서이든 승강함의 어떤 것을 의미함으로부터 분명해진다; 여기서, 기억 속의 지식들로부터 신성한 진리가 합리성의 신성한 선 안쪽으로 개시됨이 있기에 이는 승강을 당연히 내포하고 있다.

그리고 아람-나하라임으로 갔다. 이는 거기로부터 나온 진리에 관한 지식들을 의미한다. 이는 “아람” 또는 “시리아”가 선에 관한 지식들을 의미함으로부터; 그러나 “아람-나하라임(Aram-naharaim)”, 또는 “강들-로부터의-시리아”는 “나하라임” 또는 “강들”로부터 진리에 관한 지식들을 의미한다. 이는 이미 인용한 말씀으로부터 알는지 모른다; 그리고 이에 관하여는 주님의 신성한 자비로부터 다른 곳에서 살펴진다.

나홀의 성쪽으로. 이는 친척 관계의 교리적인 것들을 의미한다. 이는 “성”의 의미가 교리이다로부터; 그리고 “나홀”이 혈족인 것을 표현함으로부터 알려진다; 그 이유가 나홀은 아브람의 형제이고, 그로부터 브두엘이, 브드엘로부터 리브가가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기억 속의 지식들과 교리적인 것들은 이 방법에서 서로로부터 구분된다: 즉 교리적인 것들은 기억 속의 지식들로부터 온다, 그 이유가 그 지식들이 사용을 찾기 때문, 그리고 반추해봄을 수단으로 기억 속의 지식들로부터 포획되어진다. 그것들이 여기서 신성으로부터 그들이 갈라져 나옴을 이유로 “친척 관계”라고 말해지는 것이다.

11절. 그리고 그는 낙타들을 무릎꿇게 했는데, 성 밖이고, 물 있는 우물(well) 근처, 저녁 때 쯤 물을 길으는 이들이 나오는 때 쯤이었다. “그가 낙타들을 무릎꿇게 했다”란 일반적인 기억 속의 지식들을 거룩하게 배치함을 의미한다. “성 밖”이란 교리적인 것들로부터 이동함(removal)을 의미한다. “물 있는 우물 근처”란 신앙으로부터 진리를 받기 위하여를 의미한다. “저녁 때 쯤”이란 주님의 지상 시절 더욱 희미했던 상태를 의미한다. “물을 길으는 이들이 나오는…”이란 교육되는 상태를 의미한다.

그가 낙타들을 무릎꿇게 했다. 이는 일반적인 기억 속의 지식들을 거룩하게 배치함을 의미한다. 이는 “무릎꿇게 만듦”이 거룩한 것 쪽으로 자신을 배치함을 의미함으로부터; 그리고 “낙타들”의 의미가 일반적인 기억 속의 지식들이다로부터 알려진다.

성 밖. 이는 교리적인 것들로부터 이동함(removal)을 의미한다. 이는 “성”의 의미가 교리이다로부터; 고로 “성 밖”은 교리적인 것들의 밖을 뜻한다; 고로 그것들로부터 이동함을 뜻한다.
(** 물 있는 우물 근처. 이는 신앙으로부터 진리를 받기 위하여를 의미한다. 이에 대한 설명은 없음 역자 주)

저녁 때 쯤. 이는 주님의 지상 시절 더욱 희미했던 상태를 의미한다. 이는 “때”의 의미가 상태이다로부터; 그리고 “저녁”의 의미가 희미한 것이다로부터 알려진다; 그 이유가 말씀에서 “저녁”은 마감이 오고 있는 교회의 마지막 상태로 진행하는 상태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마지막 상태가 “밤”이라 불리운다; 그리고 교회가 막 일어나는 첫 상태, 아침이라 불리우는 상태 역시 저녁 같이 희미한 상태라 불리운다. 그러나 여기서의 상태는 아침으로 진행하는 희미함을 표시한다.

물을 길으는 사람이 나오는… 이는 교육되는 상태를 의미한다. 이는 “때”가 상태이다로부터; 그리고 “물을 길으는 자”의 의미가 교육되어짐 이다로부터 알려진다. 이제 아래에서 “물을 길음”을 살펴본다. 지금 말해온 것은 이 절에서 역사적으로 관계되는 것들을 수단으로 내적 의미에서 의미된 것이다; 그러나 이 특별 사항들이 시리즈에서 무엇을 포함하는지에 대하여는 자연적 인간에 관하여, 기억 속의 지식들과 그 안의 교리적인 것들에 관하여, 진리들이 자연적 평면으로부터 합리성 안으로 어떻게 승강하는지, 그리하여 합리성이 되어가는지에 관하여 교육받지 못한 이들에게 명백해지게 만드는 것은 쉽지 않다; 더욱이 자연적 평면에 비교하여 합리성의 품질은 어떠한지를 알지 못하면 더욱 쉽지 않다.
합리성 안에 있는 것들은 인간이 육체 안에 사는 동안 그에게 나타나지 않는다; 그 이유가 그의 지각에 오는 것은 자연 평면에 있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합리성에 있는 것들이 그의 지각에 오는 경우는 자연에 있는 것들을 계발하는 어떤 종류의 빛을 수단으로, 또는 생각 속의 관념을 질서 안으로 배치하는 유입하는 능력; 그리고 마음이 숙고하는 것을 지각하는 능력 같은 것을 수단으로 하는 경우 외에는 좀처럼 나타나지 않는다. 이런 사항들, 그외 다른 사항들을 알지 않으면, 이 절에서 포함한 것은 납득력에 설명하기는 힘들 수밖에 없다. 즉 일반적 기억 속의 지식들을 거룩히 배치함, 그 다음 신앙의 진리들을 받기 위해 교리적인 것들로부터 이동함; 그리고 이것이 거행될 때, 희미한 상태가 있다는 것, 그리고 교육하는 상태가 있다는 것 등이다. 어쨌든 납득될 수 있는 한도에서 간략히 서술해보자. 그리고 여기서 어떻게 이 경우가 인간이 주님에 의해 개혁될 때 인간과 더불어 있는지를 살피는 것이다; 그 이유가 인간의 개혁은 주님이 세상에 계셨을 때 그분이 실행하셨던 것에 대한 일종의 형상이다.
인간이 거듭나질 때, 그의 자연 평면에 있는 일반적인 것들은 천국에 있는 것과 상응되게 주님에 의해 배치되어진다. 일반적인 것들이 첫째로 배치되어 특별 사항들이 주님에 의해 일반적 사항들 안으로 계속적으로 심어질는지 모른다, 그리고 개별 사항들이 특별 사항 안으로 심어져 간다; 그 이유가 만일 일반적인 것들이 질서 안에 있지 않다면, 특별 사항들 안에서 질서가 나타나질 수 없다, 그 이유는 특별 사항들이 일반 사항들 안으로 들어가고, 일반 사항이 확증되기 때문이다; 더욱이 개별 사항들에서도 질서가 있을 수 있다, 그 이유는 이것들이 특별 사항이 일반 사항으로 들어가 확증하듯 특별 사항으로 들어가 특별 사항들을 예증하기 때문이다. 이상의 내용들은 일반적 기억 속의 지식의 거룩한 배치에 의해 뜻해진 것들이다; 이것이 “낙타들을 무릎꿇게 만듦”에 의해 내적 의미에서 의미되고 있다; 그 이유가 이 지식들이 유입을 받기 위하여는 자신들을 복종한 자세에 먼저 놓여야하기 때문이다.
일반적 기억 속의 지식들이 이 방법에서 배치될 때, 교리적인 것들의 결말은 이 지식들로부터 있기에 교리적인 것들은 이동되어진다; 그 이유가 이것은 마치 진리이다, 이것은 진리가 아니다는 식의 지령을 받기라도 하듯 합리성으로부터 결말이 흐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방법에서-즉 일반적 기억 속의 지식들의 질서적 배치와 일치하기 때문에 이것은 진리이다; 그리고 불일치하기 때문에 진리가 아니다 하는 식이다; 진리들 측면에서 이외 더 다른 유입은 없다. 실로 교리적인 것들이 앞서 거기에 있다, 그러나 그것들은 그것들이 믿어지기 전까지는 교리물이 아니고, 단지 기억 속의 지식들일 뿐이다; 그러므로 인간이 그것들에 관하여 생각할 때, 그것들로부터 결말이 끌어내지지 않는다, 오직 그것들에 관하여 다른 것들로부터만 (끌어내질런지 모른다.) 이것이 교리적인 것들로부터 이동함에 의해 뜻해진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성 밖”의 내적 의미에서 의미되고 있다. 이것이 희미한 상태라고 불리우는 상태인데, 이것은 “저녁 때”에 의해 의미되어 있다; 이에 반해 교리적인 것들이 확증되어 믿어졌다면, “아침”이 오는 상태, 빛의 상태일 것이다. 이외 다른 사항들은 이미 서술된 것 가지고 분명해질 것이다.

“물들을 길으는 것”이 교육을, 마찬가지로 교육으로부터 계발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물들”의 내적 의미가 신앙으로부터의 진리들을 의미한다는 사실로부터 와진다; 그러므로 “물들을 길으는 것”은 신앙의 진리들 안에서 교육되는 것, 그럼으로 해서 계발되는 것이다; 이는 말씀의 다른 구절로부터도 보여진다. 이사야서에서:
기쁨으로 너희는 구원의 원천들로부터 물들을 길을 것이다. 그 날에 너희는 여호와께 고백 할 것이다 (이. 12:3, 4).
“물들을 길으는 것”은 교육되는 것, 이해하는 것, 그리고 슬기로와지는 것이다. 다시:
너희는 목마른 자를 만나기 위하여 물들을 가져와라, 너희 데마의 토지의 주민들아
(이. 21:14).
“목마른 자에게 물들을 가져오는 것”은 교육됨을 뜻한다. 다시:
고뇌하고 궁핍한 자가 물들을 구할 것이다, 그리고 아무 것도 없다, 그리고 그들의 혀는 목 마름에 허덕인다 (이. 41:17).
“물들을 구하는 그들”은 진리들 안에서 교육되기를 바라는 이들이다. “아무 것도 없다”란 아무도 진리들을 가지고 있지 않다를 의미한다. 더욱이 “물을 길으는 자”에 의해 유대 교회에서 표현된 것은 진리들을 알기를 계속 바라는 이들, 그러나 그것들을 아는 것만에 만족하고 그것들의 유용함에는 관심이 없는 자들을 의미하고 있다. 이런 자들은 최하위 등급에 속한다, 그리고 이것이 기브온족에 의해 표현되어졌다 (여. 9:21, 23, 27).

12-14절. 그리고 그는 말했다, 오 제 주인의 하느님 여호와여 바라옵건대 오늘 제 앞에서 만나게 해 주시옵소서. 그리고 제 주인, 아브라함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시옵소서. 13 보십시오, 저는 물 있는 샘(fountain) 근처에 섰습니다. 그리고 성의 사람들의 딸들이 물을 길으려고 나올 것입니다. 14 그리고 제가 처녀(젊은 여인)에게 말할 것입니다, 바라건대 네 물동이를 내려 놓고 나로 마시게 하라, 그리고 그녀는 말할 것입니다, 마시세요, 그리고 나는 당신의 낙타들에게 또한 마시게 하리이다, 당신께서는 그녀를 당신의 종 이삭을 위하여 지정해놓아 두셨습니다. 그리고 이로 미루어 저는 당신께서 저의 주인에게 자비를 베푸셨음을 알 것입니다.

그는 말했다. 이는 교통함(communication)을 의미한다. 이는 “말하다”가 말씀의 역사 부분에서 지각하는 것과 뜻하는 것을 의미함으로부터; 그리고 이렇게 의미되기에 교통함도 의미한다. 그 이유는 지각과 뜻함으로부터 교통함도 오기 때문이다.

여호와 제 주인의 하느님. 이는 아들인(즉 교통함) 신성한 인간과 더불은 아버지인 신성 자체에 관하여를 의미한다. 이는 여러 번 말해왔듯이, “여호와 하느님”은 주님의 신성 자체인데, “아버지”라 불리우신다, 그리고 아브라함에 의해 그분의 신성한 인간이 표현되었다. 앞에서 이해했을 것이라 생각되는 것은, 구약 성경의 말씀에서 “여호와”는 주님 자신이시다; 그리고 홍수 이전 태고 교회와 홍수 이후 고대 교회는 여호와를 주님 외에 다른 분으로는 이해하지 않았다. 또한 주님 안에 삼위 일체가 있다-즉 신성 자체, 신성한 인간, 신성한 거룩함으로부터의 진행이다- 그리고 이것들은 하나이다. 주님에 있는 모든 삼위 일체는 여호와이시다; 그리고 주님에 있는 각각 그리고 모든 것들은 여호와이시다. 주님이 아버지와 더불어 하나이시다는 것, 그리고 천국에서는 아버지에 의해 이외 다르게 이해함은 없다. 주님이 보편적 천국이시다는 것, 그 이유는 그분은 거기에 있는 모두이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분으로부터 순진의 모두, 평화의 모두, 사랑의 모두, 선행의 모두, 자비의 모두, 결혼의 사랑의 모두가 있다; 그리고 모든 선과 진리도 그분으로부터 이다. 모세와 예언자, 고로 말씀은 모두 각각의 특별 사항에서 그분에 관하여서 이다; 그리고 교회의 모든 의식들은 그분을 표현했다. 신성한 인간 측면에서의 주님이 “아들”이라 불리우신다. 주님의 신성한 인간은 여호와이신 그분의 신성 본질로부터 임신되셨을 뿐 아니라 태어나셨다; 그리고 그럼으로 해서 인간 측면에서의 주님이 여호와로, 생명 자체로 만들어졌다.
주님이 영원으로부터 계셨다는 것, 비록 그분이 후에 시간 안에서 태어나셨다 할지라도 그러하시다는 것은 말씀으로부터 분명해진다; 마찬가지로 그분은 많은 이에게 나타나셨다는 것, 그리고 거기서 그분이 여호와이셨다고 말해진다. 그러나 이 가장 깊은 비밀들은 신성한 지각 안에 있는 이들 외에는, 고로 천적 수준이어서 신성한 지각 안에 있던 태고 교회인 외에는 거의 누구에게도 밝히 알려질 수 없었다. 이로부터 내가 배운 바, 여호와 자신이 천국으로 내려오시어 천국 안에 흘러드실 때 그분은 신성한 인간 측면에서의 주님이셨다는 것이다; 그 이유가 천국은 천사 모두가 천국의 일원(member)이 된다는 점에서 한(one) 사람을 표현하기 때문, 그러므로 또한 웅대한 사람(the Grand Man)이라 불리우기 때문이다. 천국에 있는 신성 자체, 즉 웅대한 사람에 있는 신성 자체는 신성한 인간, 그리고 인간을 옷입었던 여호와 자신이셨다.
그러나 신성한 인간을 옷입은 신성 자체가 더 이상 인류에게 감동을 줄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인간들이 와있게 되었을 때 (즉 인간이 자신을 여호와로부터 멀리 이동시켰기 때문에 여호와께서는 인간에게 더 이상 올 수 없었기 때문에), 그때 여호와, 즉 신성 본질 측면에서의 주님이신 여호와께서는 내려오시어(인간들이 생각할 때의 언어 표현이다 역자 주) 자신(신성)에게 인간을 입히셨는데, 그 방법은 신성으로부터 처녀에게 임신되어 출생하시는 것이다. 이는 또 하나의 다른 인간이고, 여느 평범한 인간의 수준이었다. 이 인간을 그분은 내치셨다. 내치시는 과정이 이 인간을 신성으로 만드신 과정이다. 하여 그 이후 모든 거룩함은 이 분으로부터 진행된다. 고로 (합일한) 신성한 인간은 그것만으로 보편적 본질을 채우는 본질이 되셨다. 그리고 이것은 이전에 구원되지 못했던 이들을 구원되게 해주셨다. 이 신성한 인간 측면에서의 주님만이 홀로 사람(Man)이시다, 그리고 이 분으로부터 인간도 사람(man)이다.

오늘 제가 만나질 수 있기를 바라옵니다. 이는 영원으로부터의 섭리를 의미한다. 이는 “만나질 수 있는 것”의 의미가 설비되어지는 것이다로부터; 그리고 “오늘”의 의미가 영원으로부터 이다로 알려진다; 더욱이 여기서 취급되는 것, 이를 위해 간구함이 만들어진 것, 모두는 섭리 속에 있는 것들임은 분명하다.

그리고 자비를 베푸소서. 이는 사랑으로부터의 유입을 의미한다. 이는 자비의 본질이 사랑인 바로부터 분명해진다. 사랑은 자체가 자비로 바뀌어진다. 도움을 필요로 하는 누군가가 사랑, 또는 선행으로부터 중시될 때 자비가 되는 것이다. 이러므로 자비는 궁핍하고 빈약한 자를 향한 사랑의 결과이다. 그러나 여기서의 “자비”는 내적 의미에서 사랑을 뜻한다; 그리고 “자비를 베품”에 의해 사랑의 유입이 뜻해진다, 그 이유는 이것이 주님의 신성 자체로부터 그분의 신성한 인간 안으로 이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그분이 그분의 인간을 신성으로 만드신 것도 주님의 신성한 사랑을 통하여서 이었다. 그 이유가 사랑은 생명의 있음 자체이고, 주님 외에 신성한 사랑을 가진 자는 없다.

제 주인, 아브라함에게. 이는 신성한 인간을 의미한다. 이는 여기서의 아브라함의 표현이 주님의 신성한 인간이다에서 분명해진다.

보십시오 저는 물 있는 샘 근처에 섰습니다. 이는 그분의 인간 안에서 신성으로부터의 진리가 결합하는 상태를 의미한다. 이는 샘(fountain, 원천)의 의미가 진리이다로부터; 여기서는 신성으로부터의 진리인데, 그 이유는 주님이 취급되기 때문이다. 결합 자체의 상태가 “샘 가에 서있다”로 의미되고 있다; 이 결합이 (지상의 그분의) 인간 안에서 이었다는 것은 시리즈로부터 분명해진다.

그리고 성의 사람들의 딸들이 물을 길으러 나올 것입니다. 이는 진리에 대한 애착, 그리고 그 애착을 통하여 교육되심을 의미한다. 이는 “딸들”의 의미가 애착들이다로부터; 그리고 “성의 사람들”의 의미가 진리들이다로부터 알려진다. 위 말들의 의미는 “물을 길음”의 의미가 교육받는 것이다로부터 분명해진다. 이로부터 분명한 바, “물을 길으러 나오는 성의 사람들의 딸들”에 의해 진리에 대한 애착들, 그리고 그것들을 통하여 교육됨이 의미된다는 것이다. 진리들을 수단으로 교육된 자는 아무도 없다, 오직 진리에 대한 애착을 수단으로 교육될 뿐이다; 그 이유는 애착과 떨어져 있는 진리들이 귓전에 오면 소리일 뿐, 기억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기 때문이다. 진리들로 기억 안으로 들어가게 해주고, 기억 안에서 거주하게 하는 것은 애착이다. 그 이유가 선에 대한 애착은 토양과 같고, 그 안에 진리가 씨로서 뿌려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토양(애착)이 어떠하느냐는 뿌려진 것의 생산물이 어떠하느냐 이기도 하다. 어떤 목적(end) 또는 어떤 사용(use)은 토양의 품질, 또는 애착의 품질을 결정하고, 고로 뿌려진 것의 생산물의 품질도 결정한다; 또는 사랑 자체가 그것을 결정한다 라고 말해도 동일하다; 그 이유가 모든 것들에서 사랑은 목적과 사용이기 때문, 사랑되어지는 것이 아니면 목적으로, 또는 사용함이 중요시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처녀에게 말할 것입니다. 이는 순진을 담고 있는 애착을 의미한다. 이는 처녀(damsel)의 의미로부터 분명해진다. 말씀에서 선과 진리에 대한 애착들이 “작은 어린이들”, “처녀들”, “소녀들”, 그리고 “딸들”로 불리운다; 그러나 상태 측면의 차이에 따라 조금씩 의미의 차이도 있다: 즉 “딸”이 명명될 때, 일반적 측면에서의 애착이 의미된다; “소녀”가 명명될 때, 그 안에 선행이 있는 애착이 의미된다; 그러나 “처녀(damsel)들”이 말해질 때, 그 안에 순진이 있는 애착이 의미된다. 그 이유는 소녀임(girlhood)의 나이는 유아기의 나이 다음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유아기는 내적 의미에서 순진이다. 소녀의 경우는 “소년”, 또는 “작은 소년”의 경우도 같은데, 이를 수단으로 순진이 안에 있는 상태가 의미된다.

내가 너에게 바라건대 네 물동이를 내려 놓아다오. 이는 기억 속의 지식들이 복종함을 의미한다. 이는 “내려 놓음”의 의미가 복종함이다로부터; 그리고 “물동이”의 의미가 기억 속의 지식들이다로부터 알려진다. “물-항아리”. “물동이”가 기억 속의 지식들을 의미하는 것은 “물”이 진리를 의미한다는 사실로부터 오고 있다; 그리고 물동이는 물을 담는 그릇이다. 진리를 담는 그릇은 기억 속의 지식이다; 그 이유가 진리는 선을 위한 그릇이기 때문이다. 진리 없는 기억 속의 지식은 텅빈 그릇이다. 선이 없는 진리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진리가 있는 기억 속의 지식, 그리고 선을 가진 진리는 충만된 그릇들이다. 사랑으로부터 있는 애착이 그것들이 질서 안에서 내부에서 있도록 결합해 있게 하는 것이다; 그 이유가 사랑은 영적인 결합이기 때문이다.

내가 마실 수 있게… 이는 기억 속의 지식이 복종함에 따라 진리 안에서 교육됨을 의미한다. 이는 “마심”의 의미가 교육됨이다로부터 알려진다. 말씀에서 “마신다”는 말의 언급은 많은 편이다. 그리고 신앙의 선과 진리가 취급되는 곳에서 “마심”은 그것들 안에서 교육됨, 그리고 그것들을 받음을 의미한다. 이사야서에서:
새로운 포도주가 슬퍼할 것이다, 포도주가 통곡할 것이다, 심정의 모든 기쁨이 한숨 쉴 것 이다; 그들은 노래하며 포도주를 마시지 못할 것이다, 독주는 그것을 마시는 이들에게 쓸 것이다 (이. 24:7, 9);
“노래부르며 포도주를 마시지 못함”은 진리에 대한 애착으로부터 교육되지 않음, 그렇기 때문에 즐겁지도 않음을 표시한다; “독주가 그것을 마시기에는 그들에게 쓸 것이다”란 혐오함을 의미한다. 이사야서에서:
목마른 자가 꿈을 꿀 때 같이 있을 것이다, 보라 그는 마신다; 그러나 그는 깨어난다, 보라 그는 녹초가 되어 있다, 그리고 그의 혼은 욕구를 가지고 있다 (이. 29:8);
“목마른 자”는 교육되기를 바라는 자를 표시한다; “마심”은 교육됨, 그러나 헛된 것들 안에서 교육됨이다.
예레미야애가서에서:
우리는 은을 가지고 우리의 물을 마셨다; 우리의 장작은 값을 치루고 온다 (애. 5:4);
“은을 주고 물을 마심”은 값을 치루고 교육됨, 그리고 진리를 자신의 공로로 여기는 것을 표시한다. 비용에서 자유하여 자신의 자아로부터가 아닌 주님으로부터 주어짐이 이사야서에서 이렇게 가르치고 있다:
목마른 모든 자, 너희는 물들로 오라, 그리고 은을 가지지 않은 자; 너희는 오라, 사라
(이. 55:1).
요한복음서에서:
예수께서 말하셨다, 만일 누가 목마르다면, 그로 하여금 나에게 오게 해서 마시게 하라; 나 를 믿는 자는 누구든지 그의 배로부터 생명 있는 물의 강들이 흐를 것이다 (요. 7:37, 38);
위에서 “마심”은 교육되어짐, 그리고 받음이 의미된다. 누가복음서에서:
그들은 말할 것이다, 우리는 당신의 현존에서 먹고 마셨읍니다, 그리고 당신은 우리의 거리 들에서 가르치셨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말하신다, 나는 네가 어디로부터 인지를 알지 못 한다; 나로부터 떠나라, 불법의 일꾼인 너희들아 (눅. 13:26, 27);
위에서 “주님의 현존에서 먹고 마심”은 “당신은 우리의 거리들에 가르치셨다”의 말에 의해 뜻해진 것, 즉 말씀으로부터 있는 지식들로부터 신앙의 선과 진리를 전하고 교육하심을 표시한다. 그러나 그들이 이것을 자신들로부터 했을 때, 즉 자신의 명예와 이득을 위해, 그리고 선과 진리에 대한 어떤 애착도 없을 때, 고로 진리에 대한 지식들만 지녔을 뿐, 악한 생활에 있을 때, 말하시는 바, “나는 네가 어디로부터 인지를 모른다; 나로부터 떠나라, 불법의 일꾼인 너희들아” 이다.
누가복음서에서: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야기를 하시면서 말하셨다, 너희는 내 왕국에 있는 내 식탁에서 먹고 마실는지 모른다 (눅 22:30).
그들이 주님의 왕국에서 먹고 마시지 않는다는 것, 거기에 식탁이 있지 않다는 것은 누구나 알 것이다; 하여 “주님의 왕국에서 그분의 식탁에서 먹고 마심”에 의해서는 어떤 다른 의미가 있을 것이다. 즉 선과 진리에 대한 지각을 즐긴다는 말이다. 주님께서 마태복음서에서 말하시는 것 역시 같다: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이 후로 내가 내 아버지의 왕국에서 너희와 더불어 포도의 생 산물을 마시는 그날까지 그것을 마시지 않을 것이다 (마. 26:29);
위에서 “마심”은 진리들에 관한 생활을 교육하심, 그리고 선과 진리에 대한 지각을 주심을 의미한다. 주님의 이런 말씀:
너의 목숨을 위하여(anima), 네가 먹을 것, 또는 마실 것을 위해 근심하지 말라, 네 육체를 위하여, 네가 입을 것도 걱정하지 말라 (마. 6:25, 31; 눅 12:29);
위는 영적인 것들을 의미하고 있다, 즉 선과 진리 측면에서 신앙의 모든 것은 주님에 의해 주어진다는 것이다. 요한복음서에서:
예수께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말하셨다, 이 물을 마시는 모두 각각의 사람은 다시 목마를 것이다; 그러나 내가 그에게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누구든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내가 그에게 주는 물은 영원한 생명으로 솟아오르는 물의 원천으로 그 사람 안에서 될 것 이다 (요. 4:7-14);
위에서 “마심”은 선과 진리에서 교육됨, 그리고 그것들을 받음을 명백하게 표시한다.

그리고 그녀는 말하기를, 마시세요. 이는 거기에 상호성(reciprocal)이 있음을 의미한다. 이는 응답, 그리고 확실히 함, 결과적으로 상호적인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저는 당신의 낙타들도 마시게 할 것입니다. 이는 그와 동시에 자연적 인간 안에 있는 모든 기억 속의 지식들이 계발됨을 의미한다. 이는 “낙타들”의 의미가 일반적인 기억 속의 지식들, 고로 일반적 측면에서의 이런 지식들, 또는 모든 지식들이다로부터; 그리고 “마시도록 준다”의 의미가 계발됨이다로부터 알려진다. “물을 길음”이 교육하는 것이다는 앞에서 살폈다; 고로 “마시도록 줌”은 계발을 표시하게 된다; 그 이유는 계발은 교육됨으로부터 오기 때문이다.

그녀를 당신께서는 당신의 종 이삭을 위하여 지정해 놓으셨습니다. 이는 합리성 안에서 신성으로부터의 진리가 신성한 선과 결합함을 의미한다. 이는 “지정해 놓으심”의 의미가 말하자면 아내를 위해, 결혼의 약속에 의해 결합하는 것을 위해서 이다로부터; 그리고 “이삭”의 표현이 합리성의 신성한 선이다로부터 알려진다. “그녀”, 또는 리브가는 합리성의 신성한 선과 결합되어질 신성으로부터의 진리(the truth Divine)를 표현한다. 이에 대하여는 여러 번 설명되었다; 또한 같은 의미가 이 장의 특별 사항들의 내적 의미로부터도 분명해지는 바 여기서는 이 정도로 만족하고 넘어갈 것이다.

이를 통해 저는 당신께서 저의 주인에게 자비를 베푸셨음을 알 것입니다. 이는 결혼이 신성한 사랑으로부터 있다를 의미한다. 이는 여기서 “자비”의 의미가 내적 의미에서 신성한 사랑이다로부터 알려진다. 그리고 취급된 주제가 이삭에게 리브가가 약혼함이기 때문에, 즉 신성한 진리가 합리성의 신성한 선과 결합함에 관해서이기 때문이다; “내 주인에게 자비를 베푸심”에 의해 결혼, 고로 신성한 사랑으로부터 결혼밖에 더 다른 의미는 없다. 이것 역시 그의 간청함의 결말이고 바라보이는 목적이다.

이상 세 절에 내적 의미에서 포함된 것이 위 설명들로부터 어느 정도는 보여졌으리라 여겨진다. 그러나 이런 사항들이 연결되지 않을 때, 즉 그것들이 시리즈에서 포함하는 것은 그것들이 단 하나의 생각(idea) 안으로 함께 수집되지 않으면, 그리고 정신적으로 바라봄이 글자 의미로부터 물러나 있지 않으면 나타나지 않는다; 그 이유가 시선을 거기에(글자 의미에) 두는 한, 생각(idea)은 혼동되고, 뿐만아니라 마음은 의심에 붙잡혀 있다; 그리고 의심 안에 있는 만큼 불명료함에 있는다. 요약된 서술로 정리해두자. 즉 진리가 기억 속의 지식들을 수단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그 지식들로부터인 자연적 인간으로부터 합리성 안으로 승강되어진다, 하여 합리적 진리가 되어간다 (주님 안에서, 신성으로); 즉 이것은 그분의 인간 안으로 신성한 사랑의 유입을 수단으로 결과되어진다, 이로부터 순진이 들어 있는 진리에 대한 애착이 온다. 이 유입 덕택에 자연적 인간에 있는 기억 속의 지식은 계발되어지고, 그래서 진리들이 합리성 안으로 승강되어진 그들의 외관을 만들고, 거기서 신성한 사랑의 선과 결합되어진다. 이와 같은 것들이 이어지는 것 안에서 더 자세하게 묘사되어진다. 어쨌든 일반적, 세부적 측면의 모든 것들이 자연적 인간에서 조차 사랑의 유입을 수단으로 순진이 있는 애착으로부터 배치된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위에 열거한 설명의 어떤 것에도 아주 희미한 관념밖에 가질 수 없을 것이다. (역자 역시 이 범주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것 같다 그래도 습득해감은 멈추어지지 않는다 역자 주.)

15, 16절. 그가 말을 막 마치려 하는데, 그때, 보라, 리브가가 나왔다, 그녀는 아브라함의 형제, 나홀의 아내, 밀가의 아들 브드엘에게서 태어났는데, 그녀의 어깨에 그녀의 물동이를 메고 있었다. 16 그리고 이 소녀는 쳐다보기에 심히 좋았고, 처녀이고, 어떤 남자도 그녀를 알지 않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샘으로 내려 갔다, 그리고 그녀의 물동이를 채웠다, 그리고 올라 왔다.

그가 말을 막 마치려 하는데… 의지의 결과를 의미한다. 이는 즉각 뒤이어지는 것, 즉 일반적, 특수적 측면 모두에서 그의 기도에 따라서 와졌다는 것, 또는 그가 원했던 바대로 성취됨에 따라 있게 되었다는 것으로부터 분명해진다. “말을 함”이 “뜻함”을 의미한다는 것은 이미 살폈다.

보라, 리브가가 나왔다. 이는 교리적인 것들로부터 있는 진리에 대한 애착을 의미한다. 이는 리브가의 표현이 합리성의 신성한 선과 결합되어질 신성으로부터의 진리이다로부터 알려진다; 그러나 여기서는 그녀가 약혼되기 이전인 바, 그녀는 교리적인 것들로부터 진리에 대한 애착을 옷입고 있다; 그 이유가 이 애착으로부터 진리가 오고, 진리가 그것의 생명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 진리가 아니고, 진리의 생명은 사랑으로부터 있는 애착이기 때문이다. 리브가가 합리성의 신성한 선에 결합되어지는 신성으로부터의 진리를 표현한다는 것은 이 장의 내적 의미에서 포함된 몇 가지 것들로부터, 그리고 이삭이 주님의 신성한 합리성을 표현한다로부터 분명해진다; 고로, 이삭의 아내가 된 리브가는 합리성에서 남편에 아내로 결합된 것, 이것은 신성한 진리로서 보여질는지 모른다. 이와 같은 방식에서의 경우를 이미 언급했던 것은, 아브라함이 신성한 선 자체를, 사라는 신성한 진리 자체를 표현한 것, 그리고 사라, 아브라함의 아내는 신성한 선과 결합된 신성한 진리 자체였다; 그리고 이것은 이삭과 리브가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주님의 신성한 인간에서 이다, 일반적으로 말씀에서 남편은 선이, 아내에 의해서는 선으로부터의 진리가 의미된다. 더욱이 모든 결혼의 본질(즉, 부부의 사랑)은 주님 안에 있는 선과 진리, 그리고 진리와 선의 신성한 결혼으로부터 이다. 진리에 대한 애착이 교리적인 것들로부터 이다고 말한 이유는 그녀가 성으로부터 “나왔다”고 말해졌기 때문, 그리고 “성”이 교리적인 것들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더욱이 진리들은 교리적인 것들로부터 이다.

그녀는 아브라함의 형제, 나홀의 아내, 밀가의 아들 브드엘에게서 태어났다. 이는 이 애착의 모든 근원을 의미한다. 이는 위 네 인물들로부터 분명해진다. 각 인물이 특별하게 표현하는 것은 인간의 납득력에 나타내 보일 수 없는데, 그 이유는 진리에 대한 첫 애착의 근원은 실로 자연적 인간에 있는 주님에 의해 획득된 신성한 것들에 있고 이로부터 갈라져 나오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님의 그 신성한 것들 안에는 어머니로부터의 것들이 여전히 존재하고, 이것은 한 번에 분리되어질 수 없는데, 애착은 그것들로부터 역시 있었기 때문이다. 근원적 측면에 있는 이 애착의 본질은 “아브라함의 형제, 나홀의 아내, 밀가의 아들, 브드엘에게서 태어난”이라고 말해진 것의 내적 의미 안에 묘사되어 있다.
모든 애착, 비록 이것이 단순하게 나타나고, 단 하나인 것으로 나타날지라도, 그럼에도 애착은 어떤 생각에 의해 납득되어질 수 없고, 더욱이 글자로 묘사할 수 없는 수많은 것들을 그 내부에 포함하고 있다; 그 이유가 모든 애착 안에는 유아기로부터 이 애착을 갖기 바로 이전까지의 삶에서 획득되어온 그 인간의 전체 생명이 있기 때문이다; 이 외에도 아버지와 어머니로부터, 할아버지와 할머니로부터, 그 이상의 선조로부터 유전된 것도 우리가 의식하지 못할 뿐 들어 있다. 따라서 현재의 그의 애착은 그의 지금까지의 인간의 전부인 것이다. 다른 삶에서 때때로 애착이 명백히 드러내짐에 의해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을 얼마나 지니고 있는지도 타인의 눈에 보이게 표출되기도 한다. 또는 원리들에 대한 사랑이 얼마큼 있는지도, 얼마나 그 원리가 목적과 사용을 위해 있는지도 표출된다. 또한 선과 진리가 얼마나 잘 배열되는지도, 얼마나 멀리 결합이 되고 있는지, 또는 분리되고 있는지도, 그것들이 천국의 질서에 얼마나 일치하는지, 불일치하는지도 적나나하게 표현된다. 그 이유가 방금 말했듯이, 모든 이런 것들이 애착이 명백히 드러나짐에 의해 눈에 보이게 표출되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애착은 전체 인간이기 때문이다. 이런 사항들이 인간에게는 믿기지 않게 나타난다, 그럼에도 진정 사실이다.

그녀의 어깨에 그녀의 물동이를 메고 있었다. 이는 진리를 받고 노력함을 의미한다. 이는 “물동이”가 기억 속의 지식, 고로 진리를 담는 그릇이다로부터; 그리고 “어깨”가 힘을, 고로 노력함을 의미한다로부터 알려진다. “물동이”, 또는 “물-항아리”, 또는 일반적 그릇들은 내적 의미에서 담는 용도에 있는 것들, 예를 들면, 기억 속의 지식들, 진리들에 관련되는 지식들, 또는 선에 관련되는 지식들 자체를 말한다. 이는 말씀에 있는 많은 대목들에서 분명해진다. 성전과 제단의 “집기들” 역시 마찬가지이다. 단지 그것들은 거룩한 어떤 것들, 또는 다른 근원으로부터 있지 않은 거룩함을 의미할 뿐이다.
벨사살이 그의 신하들과 아내들과 더불어 그의 아버지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의 성전으로부터 강취한 금과 은 집기들을 가지고 포도주를 마셨을 때, 그러면서 금, 은, 놋쇠, 철, 나무, 돌 신들을 찬양했을 때, 이 집기들이 의미한 것 때문에 그의 궁전의 벽에 글씨가 나타났다 (단. 5:2). “금과 은 집기들”은 선과 진리에 대한 지식들을 표시하고, 이것은 모독된 것이다; 그 이유가 갈대아인들은 이런 지식들 안에 있는 이들, 그러나 자기들 안에 있는 거짓들을 가지고 그 지식들을 모독한 것이다; 그리하여 이 지식들이 금과 은의 신들을 예배하려고 그들을 섬겼다; 그 이유가 벨사살은 갈대아인들의 왕이라 불리웠기 때문이다 (단. 5:30).
“그릇들, 집기들”이 영적인 것들의 외적 측면들을 의미한다는 것은 말씀의 다른 구절에서도 명백해진다. 이사야서에서:
이스라엘의 아들들이 그들의 봉헌들을 여호와의 집 안으로 깨끗한 그릇에 담아 가져올 것 이다 (이. 66:20);
위 구절은 주님의 왕국을 취급한다. “깨끗한 그릇에 담은 봉헌물”은 내적 인간에 비교해 외적 인간을 표현한다; 외적 인간이 가져오는 선물은 내적 인간이다; “깨끗한 그릇”은 내적 인간에 일치하여 있는 외적 인간이다. 고로 이것은 외적 인간에 있는 것들, 즉 기억 속의 지식들, 지식들, 그리고 교리적인 것들을 표시한다.
예레미야서에서:
예루살렘의 외침이 위로 가버렸다, 그들의 귀족들이 자기들의 작은 것들(종들)을 물들쪽으 로 보냈다; 그들이 구덩이들에 왔고, 그들은 물들을 발견하지 못했다, 그들은 텅빈 그릇들 을 가지고 되돌아갔다, 그들은 부끄러워졌다 (예. 14:2, 3);
“텅빈 그릇들”은 진리가 담겨있지 않은 지식들, 또한 선이 담겨있지 않은 지식들도 의미한다. 다시:
바벨의 느브갓네살 왕이 나를 삼켰다, 그는 나에게 고통을 주었다, 그는 나를 텅빈 그릇으 로 만들었다 (예2:34);
위의 “텅빈 ”그릇은 앞의 구절의 의미와 비슷하다. 모세의 책에서:
계곡들은 그들이 심은 것 같이, 동산들은 강가에 있는 것 같이; 물들이 그의 통으로부터 흐 를 것이다, 그의 씨가 많은 물들에서 있을 것이다 (민. 24:6, 7).
위 구절은 야곱과 이스라엘에 관련하여 말한 발람의 비유이다; “그의 통으로부터 흐르는 물들”은 지식들로부터 흐르는 진리들을 의미한다.
열 처녀들의 비유에서, 다섯은 그릇과 등불과 더불어 그들의 그릇에 기름을 가졌으나, 어리석은 다섯은 그렇지 않았다 (마. 25:4);
위의 “처녀들”은 애착들을 의미한다. 슬기로운 자는 “자기 그릇 안에 기름을 가졌다”는 것은 진리들 안에 선이 있었다는 것, 고로 신앙 안에 선행이 있다는 것을 표시한다. “기름”이 선을 표시하는 것은 886항을 참조하면 될 것이다; “등불”은 사랑을 표시한다.

그리고 그 소녀는 쳐다보기에 심히 좋았다. 이는 진리에 대한 애착은 아름답다를 의미한다. 이는 소녀(damsel)가 순진이 안에 있는 애착이다로부터 분명해진다. “쳐다보기에 심히 좋다”는 것은 아름다움(여기서는 소녀에 관해 말하기 때문에 진리에 대한 애착의 아름다움이다)을 의미하는 이유는 모든 아름다움은 순진이 안에 들어 있는 선으로부터 오기 때문이다. 선은 내적 인간으로부터 외적 인간으로 흐를 때, 그 자체가 아름다움을 만든다. 이로부터 인간의 모든 아름다움은 있다. 아마 누구나 경험한 것은, 누군가로부터 감동을 받는 것은 쳐다본 그 사람의 얼굴 자체가 아니라 그 사람의 얼굴을 통하여 빛을 발하는 애착 때문이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선 안에 있는 이들은 거기 있는 선에 대한 애착에 의해, 선 안에 있는 순진 만큼에서 감동되어진다. 마찬가지로 자연에서 우리를 감동되게 하는 것은 영적인 것 없는 자연이 아니라, 자연 안에 있는 영적인 것들이다. 마찬가지로 선 안에 있는 이들은 작은 어린이들을 수단으로 감동되기도 하는데, 그 이유는 선행의 순진에 비례하는 아름다움이 그들의 얼굴이나 제스추어, 말 같은 것에서 나타나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쳐다보기에 심히 좋았다”란 선이 안에 있는 진리에 대한 애착을 의미한다.

처녀, 어떤 남자도 그녀를 알지 않고 있었다. 이는 모든 거짓으로부터 순수함을 의미한다. “처녀(virgin)”는 말씀에서 자주 언급되고, 주님의 왕국을 의미한다, 마찬가지로 교회, 결과적으로 주님의 왕국인 모든 이, 교회인 모두 각각의 인간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 주님의 왕국, 교회는 부부의 사랑으로부터 순결한 처녀들 안에 있다. 영적 의미에서 부부의 사랑(conjugial love)은 진리 안에 있는 선에 대한 애착, 그리고 선으로부터 있는 진리에 대한 애착이다, 이 애착들로부터 마치 결혼하여 있듯 결합하여 부부의 사랑이 온다. 그리고 앞에서 말한 바같이, 주님의 왕국은 쳐녀로 보여지고, 이 왕국은 결혼에 비교되고, 결혼이라 불리기도 하는 바, (말씀에서) “처녀”라고 불리운다. “남자가 그녀를 알지 못했다”에 의해 모든 거짓으로부터 순수하다가 의미되었는데, 그 이유는 말씀에서 “남자”는 합리적 진리를 의미할 뿐만 아니라 반대적 의미일 경우, 거짓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고로 “남자에 의해 알려지게 됨”은 거짓으로 오염됨이고, “남자에 의해 알려지지 않고 있음”은 거짓으로부터 순수해 있음이다: 여기서의 “남자”는 남편을 뜻하지 않는다.
말씀에서 “처녀”에 의해 주님의 왕국에 있는 이들, 같은 말로 주님의 왕국을 지닌 이들이 의미된다는 것이 계시록서에서 분명해진다.
이들은 여인들로 해서 더럽혀지지 않은 자들이다, 그 이유는 그들이 처녀들이기 때문이다; 이들은 어린 양이 가는 곳은 어디든지 따라가는 이들이다, 그 이유는 그들은 하느님의 왕 좌 앞에서 얼룩 없이 있기 때문이다 (계. 14:4, 5).
위에서 이들은 어린 양을 뒤따르는 이들이다고 명백히 불리운다, 즉 주님의 왕국 안에 있는 이들이다; 그리고 그들은 “얼룩 없이”라고 말해진다.
적당한 의미에서, 이들은 주님을 사랑함에 있는 “처녀들”, 즉 천적 (수준에) 있는 “처녀들”, 고로 선에 대한 애착 안에 있는 이들이다. 이웃을 향하여 선행 안에 있는 이들, 즉 영적 (수준)에 있는 이들, 고로 진리에 대한 애착 안에 있는 이들 역시 “처녀들”로 불리우는 것을 말씀에서 확인해 볼 수 있다. 이사야서에서:
시온의 처녀 딸이 너를 멸시했다, 그리고 너를 조롱했다; 예루살렘의 딸이 네 뒤에서 그녀 의 머리를 흔들었다 (이. 37:22).
위는 앗수르왕을 두고 말해진다; “시온의 처녀 딸”은 천적 (평면의) 교회를; “예루살렘의 딸”은 영적 (평면의) 교회를 표시한다.
예레미야서에서:
다시 나는 너를 건축할 것이다, 그리고 너는 건축될 것이다, 오 이스라엘의 처녀여; 다시 네 소고를 들어 장식하고, 즐거움을 만드는 춤을 추러 나갈 것이다. 그들의 혼은 물을 댄 동산으로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더 이상 슬퍼하지 않을 것이다. 그때 처녀들이 춤추 며 기뻐할 것이고, 젊은 남자들과 노인도 함께 그러할 것이다 (예. 31:4, 12, 13).
“이스라엘의 처녀”는 영적 (평면의) 교회를 표시한다; 이 교회에 있는 선으로부터의 진리에 대한 애착이 여기서 묘사되어 있다. 다른 구절에서도 “소고와 춤”에 의해 같은 의미가 묘사되기도 한다. 예레미야애가서에서:
시온의 길들이 통곡할 것이다, 그녀의 성직자들이 슬픔에 잠길 것이다. 처녀들이 슬퍼하고 있다. 주님은 포도즙틀을 밟으셨다, 그 이유가 유다의 처녀 딸을 위해서이다. 내 슬픔을 잘 보라; 내 처녀들과 내 젊은 남자들이 포로로 가버렸다 (애. 1:4, 5, 15, 18).
“처녀들”은 선에 대한 애착들과 진리에 대한 애착들을 표시한다. 그리고 다시 예레미야애가서에서:
시온의 여인들이 강탈 당했다, 유다의 성들에 있는 처녀들 (애. 5:11).
위의 “처녀들”은 선에 대한 애착들을 표시한다.
아모스서에서:
그들은 여호와 말씀들을 찾으려 이리저리 달려다닐 것이다. 그 날에 목이 말라 아릿따운 처녀들과 젊은 남자들이 녹초가 될 것이다 (암. 8:12, 13).
“아릿따운 처녀들”은 진리에 대한 애착들을 표시한다; “젊음 남자들”은 진리들을; 같은 말로 진리들 안에 있는 이들을 표시한다; 이들에 관해 말해지는 바, “그들은 여호와 말씀을 찾으려 이리저리 달려다닐 것이나, 찾지 못할 것이다”, 결과적으로 “녹초가 될 것이다”라고 말해진다.
스가랴서에서:
여호와 그들의 하느님께서 그 날에 그들을 그분의 양떼로서 보존하실 것이다; 그 이유가 그분의 선하심이 크시고, 그분의 아름다우심이 대단하시기 때문이다; 곡식이 젊은 이들을 자라나게 만들 것이다, 그리고 새로운 포도주가 처녀들을 자라게 만들 것이다
(슥. 9:16, 17).
“젊은 이들”은 진리들을 표시한다, “처녀들”은 애착들을 표시한다. 다윗서에서:
왕들의 딸이 안에서 영화로울 것이다; 그녀의 의복은 금을 넣어 짜깁었다. 그녀는 수를 놓 아 만든 옷을 입고 왕에게 인도될 것이다; 처녀들, 그녀를 뒤따르는 그녀의 동료들(수행 원들)이 당신(왕)에게로 데려와진다 (시. 45:13, 14).
“왕들의 딸”은 주님의 영적 왕국을 표시한다; “처녀들, 그녀의 동료들, 그녀를 뒤따르는데, 진리에 대한 애착들을 표시한다.
시편서에서:
그들은 당신의 행차하심을 보았습니다, 오 하느님, 성소에서 나의 하느님의 행차하심(입니 다). 가수들이 앞에서 갔고, 하프 연주자들이 뒤를 따르고, 그 한 가운데에서는 소고치는 소녀들이 (갔다) (시. 68: 24, 25).
“소고치는 소녀들”은 진리에 대한 애착들을 표시하고, “처녀”가 “소녀”로부터 구분하여 사용되는데, 이는 순진을 표현하기 위해서였다. “처녀들”은 부부의 사랑으로부터 그렇게 불리운다, 고로 순진 안에 있는 이들을 표시한다; 그 이유가 부부의 사랑은 순진 자체이기 때문이다. 앞의 인용 구절인 계시록서에서 처녀들은 “어린 양이 가시는 곳은 어디든지 따라간다”고 말해진다; 그 이유가 “어린 양”에 의해 순진 측면에서의 주님이 뜻해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천국에 있는 모두는 그들의 선 안에 있는 순진으로부터 “처녀들”이라 불리운다. 선 안에 있는 양과 질에 따라, 그들은 “어린 양을 따라간다.”

그리고 그녀는 샘으로 갔다. 이는 신성으로부터의 진리(truth Divine)를 의미한다. 이는 “샘(fountain)”의 의미가 신성한 진리이다로부터 분명해진다.

그리고 그녀의 물동이를 채웠다. 이는 받는 그릇들을 의미한다. 이는 “물동이”의 의미가 물을 담기 위한 그릇이다로부터 이고, 내적 의미에서 진리에 대한 지식들의 그릇, 그리고 “물”에 의해 의미되는 진리 자체를 담는 그릇으로부터 알려진다

그리고 올라 왔다. 이는 승강(elevation)을 의미한다. 이는 “올라 감”이 승강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보다 낮은 것들로부터 그것을 지나 보다 높은 것쪽으로, 또한 외면의 것으로부터 그것을 지나 내면의 것쪽으로 가는 것이 승강된다고 말해진다. 인간의 생각에서 낮은 것, 높은 것은 천사의 생각에서는 외면인 것, 내면인 것이다; 예를 들면, 천국이 인간의 생각에서는 높다인데, 천사의 생각에서는 내면이라고 생각한다; 인간과 더불은 자연은 그의 영적 측면에 비교해 외면인데; 다시 영적 측면은 천적 측면에게는 상대적으로 외면이다. 마찬가지로 자연적 인간 속에 있는 기억 속의 지식은 진리에 비교하면 외면이다, 그리고 진리는 선에 비교하면 외면이다. 그러므로 기억 속의 지식은 진리에 비교해 베일(veil), 또는 의복이라 불리운다, 마찬가지로 진리는 선에 비교하면 그러하다; 이런 식으로 누군가가 “예루살렘으로 올라 간다”, 또는 “예루살렘으로부터 내려 간다”고 말해진다; 또한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온으로 올라 간다”, 그리고 “시온으로부터 예루살렘으로 내려 간다”고 말해진다. 예루살렘을 빙둘러 주변은 교회의 외면의 것들을, 그러나 예루살렘에 의해서는 내면의 것들을, 그리고 “시온”에 의해서는 가장 깊은 것들을 의미한다. 우리들 앞의 구절의 내적 의미에서 자연적 인간으로부터 떠나 합리성으로의 진리의 첫 승강이 묘사되어 있는 바, 리브가에 의해 표현된 진리에 대한 애착이 처음에는 “샘으로 내려 갔다”, 그 다음 그녀는 “올라 갔다”라고 말해지는 것이다; 그 이유가 이미 말한 바대로, 신성한 사랑은 선에 대한 애착 안으로 흐르고, 이로부터 진리에 대한 애착 안으로 흘러서, 자연적 인간 안에 있는 것들을 생기있게 하고, 계발해 주기 때문이다. 그 다음 그것들을 질서 안에 배열한다 (이것이 “내려 감”에 의해 의미된다); 그리고 이것 덕택에, 진리들은 자연적 인간으로부터 합리성 안으로 올려진다, 그리고 거기서 선과 결합되어진다 (이것이 “올라 감”에 의해 의미되고 있다.)

위 본문 두 절에서 진리에 대한 애착이 근원 측면에서, 품질 측면에서, 그리고 첫 개시됨에 관한 측면에서 묘사되어 있다; 근원 측면에서의 말인 즉, “그녀는 아브라함의 형제, 나홀의 아내, 밀가의 아들, 브드엘에게서 태어났다”이다. 이를 수단으로 내적 측면에서 이 애착의 근원이 발표되고 있다; 품질 측면에서 “그녀의 물동이가 그녀의 어깨 위에 있었다”; 그리고 “소녀는 쳐다보기에 심히 좋았다” 이다. 이를 수단으로 품질이 묘사되어 있다; 첫 개시됨에 관한 측면은 “그녀는 샘으로 내려 갔고, 그녀의 물동이를 채우고, 그리고 올라 왔다”이다.
그러나 앞서 말한 바, 이런 사항들은 보통의 납득력을 능가해 있을 뿐만 아니라 보통을 넘는 배운 자의 납득력도 넘어서 있다. 즉 이 장에 내적 의미에서 포함된 것들, 그리고 이어지는 대목의 어떤 사항들이 그렇다는 말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내적 인간을 통하여 외적 인간으로 계속적인 신성한 유입이 있는 어떤 사람의 마음에도 거의 들어가지 않는다; 즉 천적이고 영적인 것들이 합리성을 통하여 자연적 인간 안으로, 또는 외적 인간의 자연적인 것들 안으로의 유입이 거의 없다는 말이다; 그리고 이 유입을 수단으로 진리들이 계속적으로 자연적 인간으로부터 불러 일으켜진다, 그리고 승강되어진다, 그리고 합리성 안에 있는 선 안에 심어진다. 이것이 거행되는 것에 관하여는 알려진 바 없어 어떻게 모든 과정이 알려지는지, 무슨 방식에서 그것이 결과되는지도 알려지지 않고 있다; 지혜의 과정은 아주 위대하므로 (그 이유는 신성으로부터 이기 때문) 그것의 만분의 일도 거의 탐구되어질 수 없다; 아마 대단히 일반적인 것에서만 조금 알아질 수 있을성 싶지 않을까?
상황이 이럴진대, 이런 구절을 다루는 이들이 내적 의미에서 포함된 것들이 납득력에 서술될 수 없는 것, 또는 서술된 것이 납득력을 초월해 있는 것에 아무도 토를 달지 못하게 분위기를 이끌어 간다. 그 이유가 가르치는 자가 실상 자기도 모르지만 다 아는듯 교인들에게 비쳐지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어쨌든 내적 의미는 우선적으로 천사들을 위한 것이다. 그리고 질서에 따라 이것은 말씀을 통하여 천사와 인간 사이에 교통이 있게 해줄런지 모른다; 그리고 천사들에 의해 이와 같은 사항들은 위쪽 너머에 해당되는 바, 그들에게는 최고의 기쁨을 주는 것으로 계산되어진다, 그 이유는 천국의 식품은 총명과 지혜 속에 있는 것 외 다른 것은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에게 지혜와 총명 속의 최고의 복된 내적 의미 파악은 주님에 관해 더 알아가는 것이다.

비록 최고로 일반적인 생각일지라도, 하여간 여기서 포함하는 내적 의미로부터 어떤 생각을 만들어낼 수 있지 않을까 여겨진다. 우선 알아야 하는 것은 이 24장 전체가 신성한 선과 결합되어지는 신성으로부터의 진리를 취급한다는 것이다; 즉 신성한 선이 자연적 인간 안으로, 즉 기억 속의 지식들, 지식들, 그리고 그 안에 있는 교리적인 것들 안으로 흘렀다는 것, 그 이유가 이런 것들은 그것들이 기억 속에 있는 만큼에서 자연적 인간 속에 있다; 그리고 이 유입을 수단으로 계발되어지고, 생기있어지고, 그 안에서 모든 것들이 질서대로 배치된다; 그 이유가 모든 빛, 생명, 그리고 자연적 인간에 있는 질서는 신성으로부터, 유입으로부터 이다. 이는 누구나 그것에 관심을 모아 생각하면 별 어려운 문제는 아니다. 이 유입을 수단으로 애착이 나온다; 첫째, 진리에 대한 일반적 애착이 그것의 근원 측면에서 이 두 절에 취급되어 있다; 그것의 품질; 그리고 첫 개시가 있음; 그러나 이 절에서 즉각 뒤이어지는 것, 과정이 내적 의미에서 더 묘사된 것, 즉 이 진리의 탐사, 또한 어머니로부터의 것들의 분리, 이것이 먼저 그것에 인접되어 있다, 등등이다.
어쨌든 내가 아는 바, 이것들은 납득력에 와 닿기에는 너무나 깊은 비밀들이다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이것들은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내적 의미에서, 내적 의미의 주변의 것들에 관하여 제아무리 납득력 너머라 할지라도 그것들은 어느 정도 말해져야 할 필요는 있다. 아주 작은 납득이다 해도 이 큰 비밀들이 내적 의미에 있다는 정도는 알아야 할 필요는 있다는 말이다. 또한 육체의 삶 동안인 세상의 빛에서는 이 비밀들은 거의 보여지지 않는다는 것; 세상의 빛으로부터 천국의 빛으로 오는 만큼에 비례하여 나타나진다는 것; 고로 이 빛 안으로 들어가는 혼은 복되고 행복하다, 즉 천사들 같이 말이다.

17-20절. 그리고 그 종은 그녀를 만나려고 달려 갔다, 그리고 말했다, 바라건대 나에게 당신의 물동이로부터 물 한모금 마실 수 있게 해주구려. 18. 그리고 그녀는 말했다, 마시세요, 나의 주여. 그리고 그녀는 급히 서둘렀다, 그리고 그녀의 물동이를 그녀의 손 위에 내려 놓았다, 그리고 그가 마시게 해주었다. 19. 그리고 그녀는 그가 마시기를 끝내자, 그리고 그녀가 말했다, 제가 당신의 낙타들을 위하여도 물을 길어 올리겠습니다, 그들이 모두 마실 때까지 입니다. 20. 그리고 그녀는 급히 서둘렀다, 그리고 그녀의 물동이를 여물통에로 비웠다, 그리고 다시 물을 길으려고 우물로 달려 갔다, 그리고 낙타 모두를 위해 물을 길었다.

그리고 그 종은 그녀를 만나려고 달려 갔다, 그리고 말했다. 이는 신성한 선으로부터의 탐사(exploration)를 의미한다. 이는 “그녀를 만나려고 달려 감”은 그가 자기 심정으로부터 이야기했던 것(내적 의미에서 그렇게 명령받는 것)이 이 경우에 있는 것인지를 탐사하는 것이다로부터; 또한 “말함”의 의미가 지각하다 이다로부터, 고로 탐사하다가 “말했다”로부터 알려진다. 이것이 신성한 선으로부터 였다는 것은 여기서 그가 주인, 즉 아브라함, 그리고 이삭을 대신해 행동하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보내진 자는 보낸 자의 인물됨을 입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는 말씀에서 자주 있는 편인데, 천사가 처음에는 천사라고 말해지면서 이야기를 하다가, 후에 “여호와”로 불리우는 경우이다 (덤불에서 모세에게 나타나실 때, 출. 3:2, 4; 그리고 기드온에게 나타난 천사의 경우, 사. 6:11, 12, 14 등이다.) 같은 이유에서 리브가가 그에게 이야기를 할 때, “나의 주여”라고 다음 절에서 말해진다.

바라건대 나에게 당신의 물동이로부터 물 한모금 마실 수 있게 해주구려. 이는 이 근원으로부터의 진리의 어떤 것이 결합되어질 수 있을지 문의함을 의미한다. 이는 “한모금 마심”의 의미가 “마심”의 의미와 유사하다는 것, 그러나 양이 적은 것, 그 이유는 탐사함이 거기에 함축되어 있기 때문이다. 내적 의미에서 “마시는 것”은 교통함과 결합됨도 표시하고, 영적 (평면의 )것을 서술하고, “먹는 것”은 천적 (평면의) 것을 서술한다. 같은 것이 물의 의미가 진리임으로부터 더 분명해진다. 이로부터 “나로 당신의 물동이로부터 한모금 마실 수 있게 해주시오”는 이 근원으로부터의 진리의 어떤 것이 결합될 수 있는지를 탐사함을 의미한다. “물동이”가 그릇이다는 것, 그 안에, 그것으로부터 있는 것은 진리이다. 탐사함이 있는 이유는 처음의 진리에 대한 애착은 분리되어져야 하는 것인 어머니쪽으로부터의 어떤 것을 동반한 진리에 대한 애착이기 때문이다. 거듭나는 인간과 더불어 그의 처음 진리에 대한 애착은 매우 불순하다; 그 이유가 그 안에 자신을 위한, 세상을 위한, 그리고 천국 안에서 영광되기 위한 목적과 사용함에 대한 애착이 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이런 목적들은 자신을 중요시할 뿐, 공동체, 주님의 왕국이 아니고, 주님을 위하여는 더 더욱 아니다. 어쩌면 이런 애착은 앞서 진행됨이 필수적일 것이다; 어쨌든 이것은 주님에 의해 계속적으로 순수해져 간다, 그리하여 거짓들과 악들이 거의 옮겨질 때까지, 마치 주변으로 그것들을 내 던져질 때까지 이다. 그럼에도 그 애착들은 수단들로서 섬김 속에 있어 왔다.

그리고 그녀는 말했다, 마시세요, 나의 주여. 이는 상호적임(주고 받음)을 의미한다. 이는 동의, 찬성함으로부터 분명해진다. 진리의 상호적임은 선과 결합되어져 있을 때이다는 것은 결혼들로부터 나타나진다; 그 이유가 결혼은 양쪽에서 동의한다는 사실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선과 진리의 결혼으로부터 그것의 근원을 가진다; 선의 측면에서 의지가 있다, 그리고 진리의 측면에서 동의함이 있다, 그리고 이로부터 결합이 온다. 비록 이 상호적임이 비록 그가 거듭나지고 있을 때, 또는 그가 천국의 결혼 안으로 들어갈 때, 그와 더불어 나타나 보여지지 않는다 해도, 이것은 거행되고 있다. 이와 같은 것이 인간이 거듭나질 때, 거기에는 의지와 이해함의 결혼의 모습이 결과된다는 사실로부터 더 분명해진다. 선은 의지로부터, 진리는 이해함으로부터 이다. 그러므로 고대인들은 의지와 이해함 사이에 결혼이 있다는 것, 그리고 의지의 몇 가지 것들과 이해함의 것들 사이에 결혼이 있다고 제정해두었다.

그리고 그녀는 성급했다, 그리고 그녀의 물동이를 그녀의 손 위에 내려 놓았다. 이는 전력을 다하여 복종하여 받아들임을 의미한다. 이는 “내려놓음”의 의미가 항복함이다로부터; “물동이”가 담는 그릇이다로부터; “손”의 의미가 힘이다로부터 알려진다; 그리고 전력을 다하여 복종하여 받는 것은 교리적인 것들에서, (주관적) 지식들에서, 그리고 (객관적) 기억 속의 지식들에서 있고, 자체들이 적용되는 것이다. 생명의 첫째로부터, 또는 주님으로부터 종속되어 내려가는 고리, 적용함의 고리, 결과적으로 복종함의 고리가 있다. 보다 하위에 있는 것이 보다 상위에 있는 것들을 섬겨야 한다. 그것들은 복종함에 있어야만 한다는 말이다; 그 이유가 그것들의 복종함 없이 결합은 없기 때문이다. 여기서 말해진 “힘”은 진리로부터 이다; 이것은 아래쪽의 것으로 복종하게 한다. 말씀에서 힘은 진리의 행위라고 특별하게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손”, “팔”, “어깨” (이것들을 수단으로 내적 의미에서 힘이 의미된다)는 진리들을 서술한다; 그리고 진리로부터 있다고 나타나는 힘은 그 자체 선으로부터 진리를 통하여 있다.

그리고 그로 하여금 마시게 했다. 이는 개시함을 의미한다. 이는 “마실 것을 줌”의 의미와 “마심”의 의미는 거의 같다로부터; 그러나 여기서는 “마심”이 마시는 자의 행위 부분에서 더 활동적인 것을 포함한다는 것 뿐이다. “마심”은 받음이다, 또한 결합하는 것이다; 고로 “그로 마시게 함”은 받는 기회를 줌을 표시한다. 이것은 개시함의 첫 번째 이다.

그리고 그가 마시기를 끝냈다. 이는 개시함이 연속됨을 의미한다. 이는 “끝냈다”, 또는 “끝내는 것”이 앞서 진행하던 것의 끝, 그리고 이어지는 행동의 시작을 포함한다는 것, 따라서 연속적이다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마시게 만듦”의 의미가 개시함이다로부터도 알게 된다.

그리고 그녀는 말했다, 저는 낙타들을 위해 물을 길어 올리겠습니다, 그들이 충분히 마실 때까지 입니다. 이는 자연적 인간에서 모든 기억 속의 지식이 계발됨에 관하여 주고 받음을 의미한다. 이는 “낙타들”의 의미가 자연적 인간에 있는 일반적 기억 속의 지식들이다로부터; 그리고 “길어 올림”, 즉 “물을 길어 올림”이 가르치는 것, 또한 계발하는 것을 의미한다로부터 알려진다. 이것이 상호적이다 라고 말한 이유는 그녀가 이것을 행할 것이고, 그리고 그것을 했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즉 낙타들을 위해 물을 길어 올리는 일이다. 여기서 취급된 계발은 비록 이것이 진리를 통하여 선으로부터 있다 해도, 진리의 부분에서 있다. 자연적 인간에 있는 기억 속의 지식의 계발에 주목해보면, 이렇다: 모든 계발은 선으로부터 이다; 그 이유가 선은 사랑 속에 있고, 선은 열과 빛을 발하는 태양의 불꽃에 필적된다. 그러나 진리는 대상물(objective, 객체, 목적물)인데, 이 대상물을 통해 불꽃은 빛을 나타낸다. 이리하여 빛으로부터 계발됨이 있다.
선을 받는 것은 진리밖에 없다. 그래서 진리가 이러이러하다면, 받음 역시 이러이러할 수밖에 없고 계발 역시 이러이러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진리를 수단으로 계발됨이 있을 때, 계발됨은 진리로부터 이다고 나타나는데, 이는 마치 진리 자신인 것처럼 이다; 비록 이것이 선으로부터 있고, 진리를 통하여 빛을 준다 해도 진리이다고 나타난다는 말이다. 더 나아가 진리를 수단으로 하는 선의 계발은 더욱 꿰뚫는 바, 더 깊게 감동을 주고, 진리의 더 수준 낮은 애착을 생산하는데, 이는 아래에서 말해진다. 천국의 빛은 그분의 신성한 진리를 통하여 주님의 신성한 선으로부터 있다; 그리고 이것은 그분의 신성한 인간 안에서 신성한 진리를 통하여 있기 때문에, 이것은 천적 수준에 있는 이들 뿐만 아니라 영적 수준에 있는 이들까지도 관통하고, 천국에 있는 모든 이를 지혜와 총명으로 계발한다. 그리고 이것이 지혜와 총명으로부터 근원이 있기 때문에, 주님의 인간에 있는 신성한 선과 신성한 진리가 말씀의 내적 의미에서 아주 많이 취급되어진다; 그리고 현재의 구절에서 이 의미는 선으로부터의 진리, 그리고 진리를 통하여 선의 첫 계발이 취급되어진다.

그리고 그녀는 급히 서둘렀다, 그리고 그녀의 물동이를 여물통에 비웠다. 이는 신성한 선쪽으로 향해 개시되었었던 진리에 대한 애착이 분리됨을 의미한다. 이는 “물동이를 비움”의 의미가 진리를 분리하는 것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 이유가 “물동이”는 담는 그릇인 바, 이는 진리인 기억 속의 지식 뿐만 아니라 선이 안에 있는 지식도 의미한다; 그리고 여기서, 개시함이 취급되기 때문에, 이것은 신성한 선쪽으로 개시됨이 있었던 진리를 의미한다. 그리고 진리 자체는 그것의 애착을 통하여서가 아니고서는 선과 결합되어지는 것은 가능할 수 없기 때문에, 여기서 진리에 대한 애착이 뜻해지고 있다. 이 한 절의 의미는 “여물통”, 또는 “물을 붓는 장소”의 의미가 진리의 선이다로부터 분명해진다; 그리고 여물통 자체는 목재(wood)와 같은 의미, 즉 선을 의미한다. 진리의 선은 진리를 수단으로 선으로부터 생산된다. 이는 어머니를 진리로, 아버지를 선으로 하여 태어나는 후손의 경우와 같다. 자연적 인간에 있는 순수한 모든 선은 이로부터, 즉 합리성 안에서 선과 진리의 결혼으로부터 있게 된다. 이 선이 진리의 선이라 불리우는 것이고, 말씀에서 “여물통”, “물을 붓는 곳”에 의해 의미되어 있다.

그리고 다시 우물로 달려 갔다. 이는 진리에 대한 보다 수준 낮은 애착을 의미한다. 이는 “우물(well)”의 의미가 진리이다로부터, 그러나 보다 수준 낮은 진리이다로부터; 그리고 진리의 개시됨이 여기서 취급되는 바, 진리의 보다 수준 낮은 애착이 취급되는데 방금 말했다. 내적 의미에서 “샘(fountain)”과 “우물(well)”사이의 의미상의 차이점은 앞서 말한 대목에서 알았을는지 모르는데, 단어 “샘”은 진리가 더 순수할 경우, 또는 더 높을 경우를 취급할 때 사용되고, “우물”은 진리가 감탄할 정도의 순수함이 아닌 경우, 즉 낮은 수준의 순수한 진리인 경우를 취급할 때 사용되어진다. 이 24장의 경우가 이에 대한 좋은 예증에 해당될지 모른다. 여기서 때로는 “샘”이, 때로는 “우물”이란 단어가 사용되기 때문이다. (샘의 다른 단어로 spring이 사용되는 경우도 있는데 여기서 원저자가 취급하지 않으므로 독자 스스로 의미상의 차이점을 해결하는 것도 보람될지 모른다. 역자 주.) 자연적 진리는 보다 낮은 수준의 진리이다; 그리고 자연적 진리에 대한 애착은 진리에 대한 보다 낮은 수준의 애착이다; 이 애착으로부터, 대략적으로, 일반적 기억 속의 지식들은 계발되어진다; 그리고 이 계발됨이 더욱 관통하고 더 깊게 감동되게 하는 것은 앞에서 말했다.

그리고 모든 그의 낙타들을 위해 물을 길었다. 이는 어떻게 하여 일반적인 기억 속의 지식들이 계발되어지는 가를 의미한다. 이는 “길어 올림”이 가르치다를 위미함으로부터, 또한 계발하다를 의미함으로부터; 그리고 “낙타”의 의미가 일반적 기억 속의 지식이다로부터 알려진다.

17절로부터 여기까지에 포함된 것은 인간의 내적인 것들에 관하여 교육받은 이들, 그리고 진리들 안에 있는 이들에 의해서만 납득될 수 있는 구절일지 모른다; 그 이유가 진리를 통하여, 진리에 따라서, 계발함이 오기 때문이다. 여기서의 주제는 선쪽으로 진리가 첫 개시됨이다; 그 이유가 이미 말한대로 선 자체는 합리성을 통하여 자연 평면으로 흐른다, 고로 내적인 경로에 해당된다, 그러면서 그 안에 있는 것들을 계발한다; 이에 반해 진리 자체는 감각적 부분들, 즉 들음, 봄 같은 것을 통해, 고로 외적 경로로 해서 자연 평면으로 흐른다. 진리는 이 근원으로부터 그것의 일어남을 가진다. 이에 대해서는 자신 스스로 자기의 경험을 반추하면 자동으로 알 것이다; 그러나 거기에 선과 진리의 결합은 있지 않고, 결합은 합리성 안에서 있다; 그러므로 진리는 자연 평면을 떠나 영적 평면 안으로 합리성에서 불러 일으켜진다. 이 경우의 첫 일으켜짐이 어떠한지가 17-19절에서 취급되었다.

21, 22절. 그리고 그 사람은 이런 그녀를 보고 놀라웠지만 그런 자신을 자제하면서 과연 여호와께서 그의 길을 번영하게 하셨는지 여부를 알고자 하였다. 22 그리고 낙타들이 마시기를 마치게 되자 이 남자는 반 세겔 무게가 되는 금 장신구, 그리고 그녀의 손을 위해 그들의 무게로 열이 나가는 두 개의 금 팔찌를 가져왔다.

그리고 이 사람은 이런 그녀를 보고 놀라웠지만 그런 자신을 억누르면서…. 이는 이런 저런 것들에 관하여 지각하는 상태를 의미한다. 이는 “놀라워함”과 “자신을 억누름”의 의미가 여하튼 자신이 잠깐 전에 심정으로부터 간구했던 말을 순간적으로 인정함을 의미함에서 파악된다. 하여 그는 오히려 이것이 자기가 간구한 것이 아닌지를 보려했기 때문에 자신 속에서 나온 인정함을 억누른 것이다. 이것은 지각의 상태를 의미한다.

여호와께서 그의 길을 번영하게 하셨는지 여부를 알고자 하였다. 이는 신성한 진리에 관하여 그것이 무엇이었는지를 문의함을 의미한다. 이는 “길”의 의미가 진리임으로부터 분명해진다; 그것이 신성이었는지 여부는 “여호와께서 그것을 반영하게 하셨는지 여부”라고 말해짐에서 의미되었다. 이는 그것이 여호와로부터였는지를, 또는 신성으로부터 였는지를 문의함과 같은 말이다; 그 이유가 자연적 인간으로부터 합리성 안으로 불러 일으켜지는 진리들은 아예 받아지지 않는다; 그러나 거기 있는 선과 일치하는 진리들만이 받아진다. 고로 삽입함과 파종함을 수단으로 그것과 하나로서 행동한다. 나머지 진리들, 비록 이전에 진리들로서 나타났다 할지라도 여전히 받아지지 않는다, 그 이유는 그것들이 인정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선이 그것 자신의 진리라고 인정한다. 진리가 그것이 무엇이었는지를 인정하는 것, 고로 그것이 받아지는 것이 이제 이어지는 구절로부터 명료해진다.

그리고 낙타들이 마시기를 마치게 되자. 이는 일반적인 기억 속의 지식들에서 계발됨으로부터 인정함을 의미한다. 이는 두 표현, 즉 “…되자”와 “마치자”가 연속적인 것, 그리고 앞서 진행된 행동의 끝남과 뒤이어지는 행동의 시작을 포함한다는 사실로부터 알려진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이 행동들은 인정함을 의미한다. 같은 의미가 낙타의 의미가 일반적인 기억 속의 지식들이다로부터도 분명해진다; 그리고 “마심”의 의미로부터 여기서는 “물들을 길어 올림”과 같다; 또한 “마시도록 줌”, 즉 계발됨으로부터도 알려진다. 이로부터 분명한 것은 이 말들에 의해, 즉 “낙타들이 마시기를 끝냈을 때”가 일반적인 기억 속의 지식들에서 계발됨으로부터 신성으로부터의 진리를 인정함이 의미된다.
이 경우의 실제는 이렇다: 자연적 인간으로부터, 즉 기억 속의 진리로부터(또는 지식들과 교리적인 것들로부터, 그 이유가 이런 것들 모두가 자연적 인간 속에 있기 때문) 합리성 안으로 승강되고, 거기서 받아지는 모두 각각의 진리는 첫째로 그것이 무엇인지를 인정받아야만 하고, 그것이 합리성에 있는 선과 일치하는지 여부, 만일 일치하면 그것은 받아진다. 만일 일치하지 않으면 거절되어진다. 단 하나의 동아리 안에도 많은 외관적인 진리들이 있다; 그러나 오직 거기에 있는 선을 인정하는 것들만 결합된다, 고로 거기에는 서로의 사랑이 각각에게 있다. 어쨌든 그것들이 이와 같이 있음을 인정하기 위하여는 자연적 인간에서 계발이 있어야만 하고, 이를 수단으로 일반적, 특수적 모두에서 한 눈에 들어오게 보일는지 모른다, 하여 선택될지 모른다. 자연적 인간 안에서의 이 계발 역시 선으로부터 이고, 선이 진리를 수단으로 해서이다. 이런 계발이 리브가가 낙타들을 위해 물을 길어 올림, 그것들을 마시게 함, 또는 그것들을 마시도록 줌에 의해 의미되어 있다.

그 남자는 금 장신구를 가져 왔다. 이는 신성한 선을 의미한다. 이는 “금 장신구”가 선이다로부터 알게된다; 여기서는 주님이 내적 의미에서 취급되기 때문에, 신성한 선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것이 합리성으로부터 있기 때문에 단어는 “남자(vir)”가 사용되었다. 고대 시대에서, 교회들의 예배 형체들이 표현적이었을 때, 그들이 (결혼이) 의미하는 바를 알았던 터에, 그들은 결혼식에 앞서 신부에게 금 장신구와 팔찌들을 주는 것이 관습화되었는데, 그 이유는 신부에 의해 교회가 표현되고, 교회의 선은 장신구가, 교회의 진리는 팔찌가 의미하였다; 그리고 신부와 아내와 더불은 부부의 사랑은 주님의 신성한 선과 신성한 진리의 결혼으로부터 내려온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24장 47절에서 같이 금 장신구를 코에 걸었는데, 그 이유는 코가 거기로부터 있는 호흡 때문에 선으로부터의 생명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호흡은 내적 의미에서 생명이다, 또한 향기로부터, 사랑에 감사하는 것, 이 감사함으로부터 선도 의미한다.
“장신구(jewel)”가 선 측면에서 결혼의 배지 (badge)였다는 것은 말씀의 다른 구절에서도 분명해진다. 에스겔서에서:
나는 너를 장신구(ornament)들로 치장했다, 그리고 나는 네 손에 팔찌를 , 네 목에 목걸이 를, 네 코에 장신구(보석, jewel)를 놓았다 (겔. 16:11, 12).
고대 교회에 관하여 위 구절에서는 “예루살렘”이라 불리운다, 이것이 신부로 묘시하고 있다, 그녀에게 팔찌와 목걸이, 보석이 주어졌다. “손에 있는 팔찌”는 진리를 표현하는 배지이고, “코에 걸친 보석”은 선을 표현하는 배지이다.
이사야서에서:
시온의 딸들의 오만함 때문에, 주님께서는 그들의 머리 위의 왕관을 벗길 것이다, 그리고 반지들을, 코보석들을, 바꿔입는 의복(예복)들을, 망토들을 거두어 가실 것이다
(이. 3:16-18, 21, 22).
“오만한 시온의 딸들”은 교회 내에 있는 악에 대한 애착을 표시한다; “제거하게 될 반지들과 코보석들”은 선과 그것의 배지들을 표시한다; “바꿔 입는 의복들과 망토들”은 진리와 그것의 배지들이다.
호세아서에서:
나는 그녀가 향을 태운 바알들의 날들에 그녀를 방문할 것이다; 그리고 그녀는 그녀의 코 보석을 끼고 그녀의 패물들을 걸치고 자기의 애인들을 따라갔다 (호. 2:13);
타락된 교회, 그 후에 이어지는 새로운 교회를 취급한다. 여기서도 “코보석”은 교회의 선에 대한 배지를 표시한다. 이 보석들이 귀에 잘 어울릴 때, 그것들 역시 선을 의미했다, 그러나 행동에 있는 선이다; 그리고 반대 의미에서는 행동에 있는 악이다 (창. 35:4; 출. 32:2, 3).

반 세겔 무게. 이는 개시함을 위해서 충분함을 의미한다. 이는 “세겔”, “반 세겔”, “무게”의 의미로부터 분명해진다. “세겔”은 선과 진리의 가격, 또는 평가이다는 것, “반 세겔”은 그것의 결정된 분량이다는 것 이미 살핀 바 있다. “무게”가 선 측면에서 어떤 것의 상태를 의미한다는 것은 이제 살핀다; 고로 “반 세겔되는 무게”는 금 장신구에 의해 뜻해지는 선에 관련되는 양을 의미하고 포함한다. 이것이 개시함을 위하여이다는 것은 앞뒤 문맥으로부터 뒤따르고 있다.
“무게”가 선 측면에서 어떤 것의 상태이다는 것은 말씀의 아래 구절에서 분명해진다. 에스겔서에서:
예언자는 무게를 달아 식품을 먹어라, 하루에 이십 세겔이다; 그리고 마실 물도 재어서 마 셔라, 한 힌의 육분의 일 부분이다; 그 이유가 보라 나는 예루살렘에 있는 빵 막대기를 부 러트릴 것, 그리고 그들은 무게로 달아 걱정과 더불어 빵을 먹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놀 람과 함께 재서 물을 마실 것이다, 하여 그들은 빵과 물이 궁핍할 것이다 (겔. 4:10, 11).위에서 선과 진리의 황폐함이 취급된다, 그것에 대한 표현이 예언자에 의해 표현되었다. 황폐된 선의 상태가 그들의 “식품을 먹는 것, 그리고 무게로 달아 빵을 먹는 것”에 의해 의미되어져 있다; 그리고 황폐된 진리의 상태는 그들의 “재서 마시는 물”에 의해 의미되어지고 있다; 이로부터 “무게”는 선을 서술하고, “재는 것”은 진리를 서술함이 분명하다.
다시:
거기에 공정한 저울이, 그리고 공정한 에바가, 그리고 공정한 밧이 있을 것이다
(겔 14:10).
위는 거룩한 토지에 관해서이다, 이를 수단으로 천국들에 있는 주님의 왕국이 의미되는데, 예언자에 의해 거기서 언급된 몇 개의 세부 사항들로부터 알는지 모른다; 주님의 왕국에는 저울, 에바, 밧도 없고, 단지 무게를 담과 자로 잼에 의해 의미되는 선과 진리만 있다. 이사야서에서:
누가 자기 손의 우묵한 것으로 물들(바다)을 척량하였으며, 그리고 그의 손바닥으로 천국 들(하늘)을 준비되게 만들었는가, 그리고 땅의 먼지를 자로 잼으로 납득했으며, 산들을 명 칭(큰 천칭)으로, 언덕들을 간칭(작은 천칭)으로 달았는가? (이. 40:12).
“명칭으로 산들을, 간칭으로 언덕들을 달았다”란 사랑과 선행의 천적인 것들은 주님으로부터 있고, 그분만이 그것들의 상태들을 배치하신다는 것을 표시한다.
다니엘서에서:
벨사살의 궁전의 벽에 쓰인 글씨는 므네, 므네, 드겔, 브라신이었다, 번역하면 이렇다: 므네 는 하느님께서 당신의 왕국을 세셨다(numbered), 그리고 그것을 끝내셨다; 드겔은 너를 무 게를 달아 보았더니 부족함이 발견되었다; 베레스는 당신의 왕국은 나뉘어서 메데와 바사 사람들(페르샤)에게 주어진다 (단. 5:25-28);
위에서 므네, 또는 “수를 세었다”란 진리를 서술하고 있다; 반면 드겔, 또는 “저울에 달았다”는 선을 서술한다; 내적 의미에서 극점에 이르렀음(종말)이 취급되고 있다.

그리고 두 팔찌. 이는 신성한 진리를 의미한다. 이는 “팔찌”의 의미가 진리인바로부터 알게 되고, 여기서는 신성한 진리인데, 그 이유는 주님이 내적 의미에서 취급되기 때문이다; 그것들이 “둘”이었다는 것은 충분함을 표시한다. 팔찌가 신부의 손에 놓여지는 이유는 신부가 교회를 의미하고, 그녀의 손은 진리로부터의 힘들이 의미되기 때문이다. 팔찌는 신부를 위해서 뿐만 아니라 왕을 위해서도 그의 팔에 끼웠는데 (삼하. 1:10), 이를 수단으로 왕권이 주님에 속하는 신성한 진리를 표현하고 의미했다; 그리고 “팔”은 힘을 의미한다.

그녀의 손을 위해. 이는 진리에 대한 애착으로부터의 힘을 의미한다. 이는 “손”이 힘을 의미함으로부터; 리브가의 표현이 진리에 대한 애착임에서 알려진다.

그들의 무게로 금 열. 이는 개시하기 위해서 충분한 것을 의미한다. 이는 “10”이 충분한 상태, “100”도 마찬가지 의미이다; 그리고 “금”의 의미로부터, 여기서는 일종의 돈 역할을 하는데, 무게로 값을 매기고(평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게”의 의미가 선 측면에서의 상태이다로부터 알려진다. 이로부터 “그들의 무게로 금 열”이란 선 측면을 평가하건대 충분한 상태임을 의미한다. 이것이 개시함을 위해 있다는 것은 이 장에 있는 몇 개의 특별 사항들로부터 분명해진다, 이 사항에서 개시함, 즉 약혼(betrothal)이 취급되어진다.

이 두 절은 진리가 선쪽으로 개시됨을 취급한다; 그러나 이 개시됨의 본성인 것은 세상의 빛으로만 계발되어온 이들, 이와 더불어 세상의 빛에 속한 것을 계발해줄 천국의 빛 속에 있지 않은 이들의 생각의 관념 안으로 쉽게 와닿지 못한다. 또한 선 안에 있지 않은 이들, 고로 신앙 안에도 있지 않은 이들도 세상의 빛으로부터의 대상물로부터 만들어내지는 생각의 관념 외에 다른 관념은 가지지 못한다. 이들은 영적 세계로부터의 어떤 것이 있음을 알지 못한다, 또한 순수한 의미에서 합리성이 무엇인지도 실로 알지 못한다, 오직 그들은 자기들이 근원이라 말하는 자연 세계 그 이상을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이 두 절은 내적 의미에서 선쪽으로 진리가 개시함이다는 말은 위 인간에게 어떤 것으로 되어 있기까지에 이르는데 비해 너무나 멀리 있다; 하지만 천국의 빛 안에 있는 이들은 그들에게 귀한 보석들로 소중히 간직되고 있다. 진리가 선쪽으로 개시함에 주목하면 이렇다: 진리는 개시되어 올바르게 결합이 있기 이전, 그것은 인간과 더불어 있다, 그러나 그것은 마치 그 인간으로부터 인 것처럼, 또는 그 인간 자신인 것처럼 만들어져 있지는 않다; 그러나 진리가 그의 선 안에 입문되자 마자, 진리는 그의 것으로 삼아져 있는다; 그리고 진리는 그의 외적 기억으로부터 사라지고, 내적 기억으로 건너간다; 또는 진리는 자연 평면, 또는 외적 인간으로부터 사라지고, 합리적, 또는 내적 인간으로 건너간다, 그리고 인간 자체를 입는다, 그리고 그의 인간을 만든다. 즉 인간 측면에 관한 그의 품질을 만든다는 말이다. 이런 경우는 인간의 선과 결합한 모든 진리에게 다같이 적용된다; 거짓의 경우, 그가 선이라 부르는 악과 결합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그러나 차이는 있다. 즉 전자는 합리성이 열리고, 그를 합리적 인간으로 만드나, 후자는 합리성이 닫히는 바 비합리적 인간으로 만든다. 물론 비합리적 인간 당사자 스스로는 걸출한 합리적 인간일 것이다. 그러나 (영적) 어둠 안에서 이다.

23-25절. 그리고 그는 말했다, 당신은 누구의 딸입니까? 바라건대 우리가 오늘 밤을 지날 수 있게 당신의 아버지의 집에 방이 있는지를 말해 주시오. 24 그리고 그녀가 그에게 말했다, 저는 밀가가 나홀에게 낳은 아들 브드엘의 딸입니다. 25 그리고 그녀는 그에게 말했다, 우리는 짚과 많은 여물을 가지고 있습니다, 또한 이 밤을 지나게 할 방도 있습니다.

그는 말했다, 당신은 누구의 딸입니까? 이는 순진에 관하여 더 탐사함을 의미한다. 이는 “누구의 딸입니까?”라는 질문이 탐사를 함축한 말임으로부터 알려진다; 하여 더 탐사함이라고 말하나 이유는 앞에서 말한 것에서 분명해진다. 이것이 순진에 관한 탐사이다는 것은 소녀(damsel)의 의미가 순진이 있는 애착을 의미함에서 분명해진다. 실로 이 절에서 단어 “소녀”라는 말은 발견되지 않는다; 그러나 14, 16절에서 리브가가 소녀라고 불리우고, 이 질문은 14, 16절의 그녀에게 하는 것으로 여겨지는 바, 여기서의 “당신”은 소녀밖에 더 다른 사람은 뜻하지 않는다.
여기서 취급된 것 자체에 주목하면, 즉, 진리가 선 안으로 입장되기를 개시하고, 선과 결합되기 이전, 그 진리가 가졌던 순진이 무엇인지, 선행은 무엇이었는지 탐사된다는 것이다. 이 대목은 이런 주제에 지식을 가지지 않은 이들에게 의아한 것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모두 각각의 인간 안에서 진리가 선 안으로 입장을 개시하고, 진리가 선과 결합에 관하여는 아주 절묘한 탐사가 있다는 것 만큼은 알고 넘어가야 할 것이다. 이것은 모든 믿음을 능가해 있다. 최고로 선이 있으면, 그것에는 최고로 진리인 것 외에 입장이 승인되지 않는다. 진리이지 않은 어떤 것이 접근할 때, 그것은 선 자체와 그것 자체가 결합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 자체 선이 아닌, 그런데 선 같이 나타나는 어떤 선과 결합할 뿐이다; 만일 거짓이 접근하면, 선은 안쪽으로 자체를 철수한다, 그리고 거짓은 선이라고 믿겨지는 바깥쪽의 어떤 악과 그 자체 결합한다.
이 신성한 배치는 주님에 의해 결과되고, 영이나 천사는 그 매체들이다; 이것이 이 세상에서는 아주 비밀한 것이나, 저 세상에서는 널리 알려진 평범한 것들이다. 더욱이 건전한 이성을 지닌 이들이라면 이것을 알 수 있다, 또는 적어도 그것에 대해 어느 정도까지 납득할 수는 있다. 그 이유가 악과 거짓 모두는 지옥이고, 지옥으로부터 흘러들기 때문; 이에 반해 선과 진리 모두는 천국이고, 주님으로부터 천국을 통해 흘러들기 때문이다; 이러하기에, 악과 진리는 지옥과 천국이 하나될 수 없는 수준만큼에서 함께 결합할 수 없다; 그러므로 이에 대해서는 누군가가 믿는 것 이상의 절묘한 균형이 존재한다; 그리고 이것이 탐사함에 의해 의미되어진다.

바라건대 우리들이 이 밤을 지나갈 수 있게 당신의 아버지의 집에 방이 있는지를 말해 주시오. 이는 선행의 선에 관한 탐사를 의미한다. 이는 “바라건대 있는지를 말해주시오”의 의미가 탐사함이다로부터; “집”의 의미가 선이다로부터; 그리고 여기서의 아버지는 브드엘인 바, “아버지”의 의미는 더 나은 이방인들과 더불어 있는 선행의 선이다로부터- 진리에 대한 애착의 참 근원이 이와 같은 선으로부터 있는 리브가에 의해 표현되었다-; 그리고 “밤을 지날 방”은 “머무름”의 상태이다로부터 파악된다.
내적 의미에서 순진과 선행의 선 측면에서 진리에 대한 애착의 근원에 관하여 탐사함의 묘사가 있는 이유는 선으로의 입장함을 개시하고, 선과 결합하는 진리는 그것의 첫 근원은 다른 곳에서 파생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는 진리를 받고 그 진리가 선에 결혼한(wedded) 이들이라면 알 수 있을 것이다. 교회 내에서, 순진과 이웃을 향한 선행을 어느 만큼이라도 지니지 않은 이들의 경우, 그렇다 해도 그들은 타인보다 더 많은 진리의 지식을 지니고 입술로 고백할 수 있겠지만 심정으로부터의 인정은 결코 아니다. 교회 밖, 신앙의 진리에로 불리워진 이방인들 사이에서, 또는 다른 삶에서 신앙의 진리에 관하여 교육되어진 이들 사이에서도 순진 안에 있거나, 서로의 선행 안에서 함께 사는 이들이 아니다면 진리를 받을 수 없다. 그 이유가 순진과 선행은 신앙의 씨들이 뿌리를 내리고 자랄 수 있는 바탕(ground, 지면)을 생산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녀가 그에게 말했다, 저는 밀가가 나홀에게 낳은 아들 브드엘의 딸입니다. 이는 진리에 대한 애착의 근원 전체를 의미한다. 이는 브드엘, 그리고 밀가, 나홀이 표현하는 것이 진리에 대한 애착의 근원에 해당됨에서, 그리고 이것이 리브가에 의해 표현된 것이다.

그리고 그녀는 그에게 말했다. 이는 지각을 의미한다. 이는 “말하다”가 말씀의 역사 부분의 내적 의미에서 지각하는 것을 의미함에서 알려지고 이미 살폈다.

우리는 짚과 많은 여물을 가지고 있습니다. “짚”은 기억 속의 지식의 형체로 있는 진리들을, 그리고 “많은 여물”은 그것들의 선들을 의미한다. 이는 “짚”과 “여물”의 의미로부터 알게 된다. “짚”이 기억 속의 지식의 형체로 있는 진리들을 의미하는 이유는 짚이 낙타들을 위한 식품으로 여기서 말해지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낙타”에 의해 일반적 기억 속의 지식 측면에서의 자연적 인간을 의미할 때, 낙타들의 식품, 즉 짚에 의해서는 기억 속의 지식의 형체로 있는 진리들 외의 다른 의미는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자연적 인간은 그것의 생명의 식품, 즉 그의 자양분을 이런 진리들로부터 보는 것 그 이상의 진리로부터 그의 식품은 가질 수 없기 때문이다; 하여 이런 식품이 떨어진다면, 즉 앎이 없으면, 그것의 존재는 계속되지 못할 것이다. 이 경우는 사후 삶으로부터 더욱 분명한데, 그 이유는 이런 것들이 영들에게 (자연계의) 식품 대신 있기 때문이다. 자연적 인간 안에서, 마치 합리성에서와 같이 그것의 본질을 구성하는 두 요소가 있다. 그것은 의지에 속한 것과 이해력에 속한 것이다. 진리들은 이해력 측면에 속한다; 선들은 의지 측면에 속한다. 자연적 인간의 진리들은 기억 속의 지식의 형체로 있는 진리들이다, 즉 이 진리들 모두는 그의 외적 기억 속에 있다; 이것들은 낙타, 말, 노새, 나귀들이 취급될 경우, “짚”에 의해 의미된다. 그러나 자연적 인간의 선들은 기쁨들, 꼬집어 말하면, 이와 같은 진리들에 대한 애착 속의 것들이다.

또한 이 밤을 지나게 할 방도 있습니다. 이는 상태를 의미한다. 이는 “방”의 의미가 상태이다로부터; 그리고 “밤을 지나게 함”의 의미가 머무름, 또는 거주함이다로부터 알려진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근원 측면에서 진리에 대한 애착의 상태가 의미된다. 그것의 근원은 브드엘, 밀가, 나홀에 의해 표현되는 것에 의해 묘사되고 있다; 그리고 이 애착과 친척 관계인 라반이 이 뒤에 이어진다. 그리고 이 근원은 불명료한 바, 그것의 상태가 “밤을 지나게 할 방”으로 의미되고 있다.

위 세 구절은 선으로 입문함이 개시되고, 고로 선과 결합하는 진리에 대한 탐사를 취급하고 있다; 실로 이것은 그것의 근원 측면을 중시하여 특별하게 취급되는데, 그 이유는 일반적, 세부적 모든 것이 근원에 의존되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파생된 것들은 마치 식물이 뿌리로부터, 씨로부터 가지듯, 그것의 근원으로부터 그것의 형체를 가진다. 이런 진리들을 주님께서는 신성으로부터 자신 안에서 보셨고 탐사하셨다, 그리고 그분 자신의 지혜와 총명으로부터 합리성의 선 안으로 진리들의 입문함을 개시하셨다. 탐사하심 자체가 여기서의 내적 의미에서 묘사되어 있다. 그러나 그 안에 포함되는 시항들은 오로지 대단히 간략하게만 설명이 가능할 수밖에 없다. 탐사함은 개혁되는 이들, 또한 리메인스를 받는 모두 각각의 사람들과 더불어서도 거행되고 있다; 그러나 이 탐사에 관하여는 인간은 전혀 알지 못한다; 이 탐사는 각 인간과 더불어 있지만 이는 대단히 희미한 상태여서 당사자로서는 그런 어떤 것이 있는지조차 믿지 못할 지경이다. 그럼에도 이 탐사는 매 순간 거행되는데, 오직 인간의 상태를 보시는 주님, 그의 현 상태 뿐만아니라 미래의 상태까지, 영원한 상태까지 보시는 주님에 의해서만 거행된다. 이 탐사는 극도로 절묘한 균형을 취하고 있어, 지극히 작은 거짓이라도 선과 결합하는 것, 또는 지극히 작은 진리가 악과 결합하는 것을 예방한다; 그 이유가 만일 이런 것이 있다면, 그 인간은 영원하게 멸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즉 다른 삶에서 지옥과 천국 사이에 매달려진 형국이기 때문이다. 다시말해 그의 선 때문에 그는 지옥으로부터 토해내지고, 그의 악 때문에 그는 천국으로부터 토해지기 때문이다.

26, 27절. 그리고 이 사람은 자신을 구부렸다, 그리고 자신을 굽혀 여호와를 경배했다. 27 그리고 그는 말했다, 나의 주인 아브라함의 하느님 여호와를 찬송합니다, 당신께서는 내 주인으로부터 당신의 자비와 당신의 진리를 단념하지 않으셨습니다. 제가 길을 가는 동안 여호와께서는 저를 내 주인의 형제의 집으로 인도하셨습니다.

이 사람은 자신을 구부렸다, 그리고 자신을 굽혀 여호와를 경배했다. 이는 즐거움과 기뻐함을 의미한다. 이는 “구부림”과 “굽혀 경배함”의 의미가 즐거움과 기뻐 환호함을 표시한다로부터 알려진다. 구부림과 굽혀 경배한다란 겸허함, 굴종의 자세, 즉 행동상에서의 겸손이다. 이것이 슬픔의 상태일 경우, 뭔가가 닥치지 않기를 원할 때이고, 기쁨의 상태일 경우, 기대한 뭔가가 당도했을 때이다. 본문의 경우, 그의 심정의 서약에 따라 리브가가 그녀의 물동이로부터 그에게 마시도록 주었다, 그리고 그의 낙타들 역시 마시게 해주었다. 용어 “즐거움(gladness)”과 “기쁨(joy)”이 사용되었는데, 그 이유는 말씀에서 “즐거움”은 진리 측면을, “기쁨”은 선 측면을 서술하기 때문이다. 더욱이 즐거움은 표정으로부터, 기쁨은 심정으로부터 있다. 같은 말로, 즐거움(gladness)은 영적 애착으로부터, 또는 진리로부터 있고, 기쁨(joy)은 천적 애착으로부터, 또는 선으로부터 있다; 고로 즐거움은 기쁨보다 수준에서 덜하다. 마치 구부림과 굽혀 인사함의 차이와 비슷할 것이다. 또는 영적 교회인은 주님 앞에서 단지 구부리기만 하고, 은총을 간구한다; 이에 비해 천적 교회인은 주님 앞에서 자신을 굽혀 경배하며 자비를 청원한다. 두 용어 모두 말씀의 단 하나의 것 안에서 진리와 선의 결혼 때문에 같이 사용된다.

그리고 그는 말했다, 내 주인 아브라함의 하느님 여호와를 찬송합니다. 이는 신성 자체로부터와 신성한 인간으로부터를 의미하는데, 앞에서 말한 바와 같다. 같은 말이 반복되나 여기서는 “찬송합니다”가 첨가되어 있다. “여호와를 찬송함”은 감사함의 형체, 고로 기쁨과 즐거움의 형체, 이는 바랬던 사건이 거행되었을 때의 형체이다.

당신께서는 당신의 자비를 단념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이는 사랑이 유입됨을 지각함을 의미한다. 이는 “자비”의 의미가 사랑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당신의 자비를 단념하시지 않음”이 사랑이 유입됨을 지각함인 것은 이것이 인정함과 고백함의 말들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모든 인정과 고백은 유입되는 것을 지각함으로부터 이다.

그리고 내 주인으로부터 당신의 진리를… 이는 거기로부터 선행의 유입이 있음을 의미한다. 이는 “진리”의 의미가 선행이다로부터 분명해진다. “진리”는 적절한 의미에서 “신앙”과 동일한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히브리어에서 신앙은 같은 단어에 의해 표현되기도 한다. 그래서 구약 성경의 말씀에서 “진리”라고 불리운 것이 신약 성경의 말씀에서 “신앙”이라 불리우기도 한다; 이런 이유 때문에 진리는 신앙 속에 있고, 선은 사랑 속에 있다고 말했기도 하다. 내적 의미에서 신앙은 선행밖에 더 아닌데, 이는 많은 장소들에서 말해지고 보여지기도 하였다. 즉 사랑을 제외하고는 신앙도 없다: 선행이 있지 않으면 신앙은 가능할 수 없다: 신앙은 선행으로부터의 신앙이다는 것 : 선행이 교회를 만들고, 선행에서 분리된 신앙은 아니다. 이 모두로부터 분명한 것은, 내적 의미에서 진리, 또는 신앙은 선행과 동일하다는 것이다; 그 이유가 모든 신앙은 선행으로부터 있기 때문이다; 선행으로부터 있지 않은 신앙은 신앙이다가 아니다; 같은 말로, 내적 의미에서 모든 진리는 선이다; 그 이유가 모든 진리는 선으로부터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선으로부터 있지 않은 진리는 진리가 아니다, 진리는 선의 형체밖에 더 아니다; 진리의 출생은 다른 근원으로부터 없다, 그것의 생명은 다른 근원에서 오지 않는다.

더욱이 선행을 의미하는 진리에 주목하면 이렇다: 천적 수준인 태고인들은 주님으로부터의 자비와 진리를 수단으로 주님에 대한 사랑의 유입을 받아들임, 그리고 이로부터 이웃을 향한 선행이 파생된다는 것만을 이해했다. 그러나 영적 수준인 고대인들은 주님으로부터의 자비와 진리를 수단으로 선행과 신앙을 이해했다; 그래서 천적 인간은 신앙 또는 진리로부터 있는 것들에 관해서는 생각하지 않고, 사랑 또는 선으로부터 있는 것에 관하여 생각했다. 천적 인간에 관하여는 이미 살핀 바 있다. 더욱이 천적 (수준의) 인간들이 개혁되고 거듭나질 때, 그들은 이웃을 향한 선행을 통하여 주님을 사랑함 안으로 들어 갔다. 그러므로 분명한 것은, “주님으로부터의 자비”는 그분을 사랑함의 유입을 지각함을 의미하고, 주님으로부터의 진리는 이웃을 향한 선행의 유입을 지각함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영적 (수준의) 인간의 경우는 다르다; 이들은 신앙 속의 것들에 관하여 생각한다; 그리고 그들이 개혁되고 거듭날 때, 그들은 신앙 속의 것들을 수단으로 이웃을 향한 선행 안으로 받아들여진다. 그러므로 영적 (수준의) 인간이 취급될 때, “주님으로부터의 자비”에 의해서 이웃을 향한 선행의 유입이 뜻해지고; “진리”에 의해서는 신앙의 유입이 뜻해진다. 그러나 영적 인간이 거듭났을 때, 이 신앙은 선행이 된다; 그 이유가 그때 그는 선행으로부터 행동하기 때문이다; 인간이 선행으로부터 행동하지 않는 만큼에서 그는 거듭나지 않는다, 그러나 선행으로부터 행동하는 자는 거듭나 있다; 그리고 이 경지의 인간은 신앙 또는 진리를 놓고 갈망하고 걱정하는 따위가 없다, 그 이유는 그가 신앙의 선으로부터 살기 때문이다. 그는 신앙의 진리로부터서는 더 이상 살지 않는다; 그 이유가 진리가 선과 그 자체 결합하고 있어 선행의 형체로서가 아니면 나타나지 않기 때문이다.
이상으로부터 태고인들과 고대인들이 똑같은 말, 즉 “자비와 진리”를 두고 무엇을 이해했는지를 알았을 것이다. 이 단어는 말씀에서도 자주 언급되는 편이다. 다윗서에서:
왕은 하느님 앞에서 영원히 거주할 것입니다; 오 그들이 그를 보존하도록 자비와 진리를 예배하소서 (시. 61:7).
다시:
오 주여 당신은 자비와 진리에서 위대하신 하느님이십니다 (시. 86:15).
다시:
나의 진리와 나의 자비는 그분과 더불어 있을 것이다 (시. 89:24).
다시: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의 가문을 향하여 그분의 자비와 그분의 진리를 기억하셨다
(시. 98:3).
다시:
오 여호와여, 우리에게 아닌, 당신의 이름에게 영광을 주소서, 당신의 자비를 위하여와 당 신의 진리를 위하여 (시. 115:1).
미가서에서:
여호와 하느님이 야곱에게 진리를, 아브라함에게 자비를 주실 것이다, 이것을 당신께서는 옛날 우리의 조상들에게 맹세하셨다 (미. 7:20).
위에서 “야곱”은 주님의 외적 인간을, “아브라함”은 그분의 내적 인간을 표시한다. 호세아서에서:
여호와께서는 토지의 주민들과 논쟁을 하셨다, 그 이유는 진리가 없고, 자비가 없고, 하느 님에 대한 지식도 없기 때문이다 (호. 4:1).
“진리가 없다”는 선행이 유입됨을 받음이 없음을 표시한다; “자비가 없다”는 사랑이 유입됨을 받음이 없다는 것; “하느님에 대한 지식이 없다”는 신앙의 진리의 유입을 받음이 없다는 말이다.

제가 길을 가는 동안… 이는 합리성 안에서 진리가 선과 결합하는 상태를 의미한다. 이는 “길”의 의미가 진리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길을 가는 동안”은 합리성 안에서 진리가 선과 결합함을 표시하는데, 그 이유는 이것이 이 장이 취급하는 주제이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누군가가 길을 가고 있다고 말해질 때, 이는 그가 가기로 작정한 장소로 발전해감을 만드는 중이기 때문이다.

여호와께서는 저를 내 주인의 형제의 집으로 인도하셨습니다. 이는 진리의 선쪽으로를 의미한다. 이는 “형제의 집”의 의미로부터 분명해진다. 이 집은 이 집으로부터 리브가가 있게 되었는 바, 진리를 있게 한 선이 의미된다. “집”의 의미는 선이다 ; 그리고 “형제”는 리브가에 의해 표현된 진리를 있게 한 선의 근원이다.

앞에 있는 구절은 합리성 안에서 선과 결합되어지는 진리, 특히 그것의 순진, 선행, 그리고 근원에 관한 탐사가 취급되었다. 주님도 그분 자신의 힘에 의해 그분의 합리성을 신성으로 만드셨는데, 이는 진리 측면 뿐만 아니라 선 측면에서도 신성으로만드셨기에, 그분은 선과 결합되게 한 진리를 탐사하신 것이다. 그러나 인간과 더불어 진리는 자신의 힘에 의해 선과 결코 결합되지 못하고, 오직 주님의 힘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이는 모든 선과 진리는 주님으로부터 흐른다는 것, 모든 개혁과 거듭남은 주님으로부터 있다는 것, 그리고 인간은 자기가 어떻게 거듭나는지를 한오라기도 알 수 없다는 사실 등등을 반추해보면 어느 정도는 수긍되리라 본다. 오늘날, 인간은 자기가 진리를 수단으로 거듭나는지 조차 모르는 실정이다, 더욱이 진리가 선 안으로 입문함이 개시되고, 선과 결합하는 것, 이것이 탐사에 의해 결과되는 것, 즉 아주 정확하게 이루어짐이 결과되는 것은 더 더욱 까맣게 모른다. 이 두 구절은 진리의 품질에 관하여 지각함, 그리고 그것이 어디로부터 였는지를 지각함을 취급하고 있다; 그리고 동시에 그것 때문에 있는 기쁨도 다루고 있다. 그러므로 이어지는 구절에서는 개시함이 취급됨을 우선 알아야겠다.

28-30절. 이 소녀는 달려갔다, 그리고 그녀의 어머니 집에 이 말들에 따라 말하였다. 29 그리고 리브가에게는 형제(오라버니)가 있었는데, 그의 이름은 라반이었다. 그리고 라반은 문으로부터 이 사람에게로, 샘으로 달려갔다. 30 그리고 그는 장신구를 보았고, 그의 누이 동생의 손에 있는 팔찌도 보았다, 그리고 그는 그의 누이 동생 리브가에게서 이 사람이 자기에게 이같이 말한 것을 듣고, 그는 그 사람에게 왔다. 그리고 보라 이 사람이 샘에서 낙타 옆에 서있었다.

이 소녀는 달려갔다. 이는 이 애착의 바램을 의미한다. 이는 “달려 감”이 의향 속에 있는 것, 또는 바램 속에 있는 것을 뜻한다는 것으로부터; 그리고 “소녀”는 순진이 안에 있는 애착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리고 그녀의 어머니의 집에 이 말들에 따라 말하였다. 이는 자연적인 선이라 해도 계발이 가능하다면 그 종류가 어떠하든을 의미한다. 이는 “어머니의 집”의 의미가 외적 인간의 선, 즉 자연적 선이다로부터; 인간과 더불은 선은 말씀에서 “집”에 비교된다, 그리고 이 때문에 선 안에 있는 인간은 “하느님의 집”이라 불리우고, 그러나 내적인 선은 “아버지의 집”이라 불리우고, 같은 수준에서 있는 선이 “형제의 집”이라 불리운다; 그러나 자연적 선과 동일한 외적인 선은 “어머니의 집”이라 불리운다. 더욱이 선과 진리는 이런 방식, 즉 아버지에 해당하는 내적인 선이 어머니에 해당하는 외적인 선 안으로 유입됨으로 태어나진다.
이 구절은 합리성에서 선과 결합되는 진리의 근원을 취급하는 바, (이 진리를 표현한) 리브가가 그녀의 어머니의 집으로 달려갔다고 말해졌다. 그 이유가 이것이 이 진리의 근원이었기 때문이다. 앞에서 말하고 보여준 것은, 모든 선은 내적 경로로해서 (즉 혼의 길로 해서) 인간의 합리성 안으로 흘러든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를 통하여 그의 앎의 능력 안으로 흘러든다, 또한 그의 감각 속에 있는 능력에까지도 흘러든다. 이 감각에까지 흘러들면, 이 진리는 우리에게도 보여지게 나타난다. 이때 진리들은 불러 일으켜지는데, 불러 일으켜진 진리는 그것들의 자연적인 형체를 벗고, 중간 경로, 즉 합리성에서 선과 결합하고, 동시에 그 인간을 합리적 인간으로 만들어주고 마지막으로 영적 인간으로까지 만든다. 그러나 어떻게 이 사항들이 완성되는지에 대한 것은 인간에게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그 이유는 오늘날 선이 무엇인지 거의 모르고, 또한 그것이 진리로부터 구분된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이다; 더욱이 인간은 선이 진리 안으로 유입됨으로, 하여 이 둘의 결합으로 개혁된다는 것을 거의 모른다; 또한 합리성은 자연적 평면과 구분된다는 것도 모르고 있다. 이런 사항들, 지극히 일반적인 사항들마저 모를 경우, 어떻게 진리의 선 안으로의 입문함의 개시가 이루어지는지, 그리고 이 둘의 결합이 결과되는지를 아는 것은 가능할 수 없다. 어쨌든 이 사항들이 이 장에서 취급되는 주제인 것만은 알아야겠다. 이럼에도 사실상 이 비밀들은 선 안에 있는 이들, 천사의 마음을 지닌 이들에게는 밝히 알려지고 뚜렸하게 모습을 드러낸다; 이런 사항들이 제 아무리 희미한 수준에서 나타나는 비밀 수준이다 하고 타인이 말해도 그들에게는 이미 널리 알려진 사항일 뿐이다. 그 이유는 그들은 내적 의미 안에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어머니의 집”이라 말한 것, 즉 자연적 인간 안에서 진리를 통하여 선으로부터 계발됨에 관하여는 이렇다: 인간과 더불은 신성한 선은 그의 합리성 안으로 흐른다, 그리고 합리성을 통하여 그의 자연 평면으로, 실로 그의 기억 속의 지식들(주관적 지식들) 안으로, 지식들(객관적 지식들) 안으로, 그리고 그 안의 교리적인 것들 안으로 흐른다. 이는 앞에서 여러 번 말했다; 그리고 거기서 그것에 어울리게 자체를 만든다, 이렇기 위해 그것은 자체를 위한 진리들을 만들어낸다, 이때 이를 통하여 자연적 인간에 있는 모든 것들이 계발되어진다. 그러나 만일 자연적 인간의 삶(생명)이 신성한 선을 받지 못하는 상황일 경우, 즉 신성한 선을 추방하든지, 그것을 악용하든지, 그것을 질식시키든지 하는 상황에서는 신성한 선은 그 자연적 인간에 어울려질 수 없고, 고로 자체를 위한 진리들을 만들어낼 수도 없다; 결과적으로 자연적 인간은 더 이상 계발되지 못한다는 말이다; 그 이유가 자연적 인간에서의 계발은 진리들을 통하여 선으로부터 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계발이 더 이상 없을 때, 개혁됨도 더 이상 없다. 이런 이유 때문에 내적 의미에서 임에도 불구하고 자연적 인간을 그것의 품질을 중시하여 아주 많이 취급할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고로 진리가 어디로부터 있는지, 그것은 선으로부터 거기(자연적 인간)에 있다. (제아무리 천적, 영적, 합리적, 자연적, 내지 선, 진리를 공부하고 외친다한들 최말단의 것들, 즉 도덕적 생활, 검소한 시민 생활, 세상적 가치관, 한마디로 글자대로의 수준, 상식적 수준, 자연적 수준의 십계명에 충실치 못하면 신성을 담을 자신의 그릇은 깨진 옹기 그릇이다. 역자 주.)

그리고 리브가에게는 형제가 있었다. 이는 자연적 인간에 있는 선에 대한 애착을 의미한다. 이는 말씀에서 “형제”, “자매”의 의미로부터 분명해진다. 즉 “형제”는 선에 대한 애착, “자매”는 진리에 대한 애착이다; 그 이유가 자연적 인간에서도 합리적 인간에서와 같이 그 안에 있는 모든 것들 사이에서 피와 결혼을 수단으로 친척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이로부터 마음들, 합리적, 자연적 마음 모두 “집”이라 불리운다. 그 안에는 부모, 형제, 자매, 혈연자, 등등이 질서적으로 존재한다.

그리고 그의 이름은 라반이었다. 이는 이 애착의 품질을 의미한다. 이는 “이름”의 의미가 누군가의 품질이다로부터 분명해진다. 그러므로 “라반”은 여기서 취급되는 애착의 품질이다.

그리고 라반은 문으로부터 그 사람에게, 샘쪽으로 달려갔다. 이는 그것의 바램, 즉 신성으로부터의 진리로 입문되기를 개시하는 진리를 향한 선에 대한 애착의 바램을 의미한다. “달려감”은 본인의 의향, 또는 바램을 분명히 드러내는 동작이다; 라반은 선에 대한 애착을 표현한다; 그리고 “사람”은 진리를 의미한다; 또한 “샘”의 의미가 진리, 여기서는 신성으로부터의 진리이다.
이상 구분해 살핀 바로부터, 그외 다른 것들로부터, 다시 한 번 실감케하는 것은, 말씀의 내적 의미의 품질인 것, 어떤 비밀들이 그 의미 안에 있는지에 대해서이다. 말씀의 내적 의미를 찾아보는 노력 없이, 동시에 밝히 알려주심(계시) 없이, 이 말씀, 즉 “라반은 문으로부터 그 사람에게, 샘쪽으로 달려갔다”가 신성으로부터의 진리 안으로 입문을 개시하는 진리를 향하여 선에 대한 애착의 바램이다를 누가 알 수 있을 것인가? 그럼에도 이 말들이 인간에 의해 읽혀질 때, 천사들은 당연히 지각한다; 그 이유가 인간의 생각과 천사의 생각 사이에 상응 관계가 있어 인간이 글자 의미를 따라 가는 동안, 즉 라반이 문으로부터 그 사람에게, 샘쪽으로 달려갔다 라고 읽는 한편, 천사는 신성으로부터의 진리 안으로 입문을 개시하는 진리를 향한 선에 대한 애착의 바램을 지각한다. 그 이유가 천사는 라반이라는 인물, 달려감이라는 동작, 샘에 대한 생각은 없고, 이것들에 상응하는 영적인 것만을 생각하기 때문이다.
실제적인 것 자체에 주목하면, 즉 진리가 신성으로부터의 진리 안으로 입문을 개시하는 것에 대하여는 이러하다: 자연적 인간에 있는 처음의 진리는 신성으로부터의 진리가 아니고, 마치 신성으로부터 인 것처럼 나타난 진리였다; 그 이유가 그것의 첫 유아기 안에서 진리 없음이 진리인 바, 즉 외관상의 진리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간의 과정에서 이 진리는 외관을 벗어던진다, 그리고 진리의 본질을 입는다. 이것이 납득되도록 예를 들어 생각하자, 그리고 이 구절만에 국한되는 예만을 지금은 생각해보자. 이런 신성으로부터의 진리가 있다; 즉 그분은 결코 화내시지 않는다, 그분은 누구도 처벌하시지 않는다, 더욱이 누군가에게 악을 행치 않으신다, 주님으로부터는 선 외에 다른 것은 오지 않는다는 진리이다; 그럼에도 첫 유아기에서 이런 진리도 누군가가 죄를 지을 경우, 주님은 성내신다, 고로 죄지은 자를 벌하신다는 형체를 취하고 있다; 누군가의 경우 심지어는 악이 주님으로부터 온다고까지의 형체를 취하기도 한다. 그러나 인간이 어린 시절로부터 발전해서, 성장하고 판단력이 성숙해짐에 따라, 그는 애당초 그에게 나타난 진리로 자신이 지녔던 것을 벗는다, 그리고 점차로 진짜 진리를 옷입는다, 즉 주님은 결코 성내시지 않는다, 벌하시지 않는다, 악을 행치 않으신다 등등의 진리를 입는다는 말이다. 고로 이전의 진리를 수단으로 그는 진짜 진리 안으로 입문되기를 개시하는 것이다. 이때도 처음에 입문한 것은 일반적 진리인 바, 그 자체가 매우 희미한 수준인 바, 그가 특별한 진리, 또는 세부적 진리에 의해 계발될 때까지 거의 어떤 것도 나타나지 않는다. 이것이 계발되면, 내면의 것들이 또렷해진다. 고로 무지함(희미함)의 시기에 진리인듯 했던 오류나 외관상의 진리들은 흔들어 털어 버리듯, 흩어져 버린다.

그는 장신구를 보았다, 그리고 그의 누이 동생의 손에 있는 팔찌도 보았다. 이는 신성한 선과 신성한 진리가 “누이 동생, sister”인 진리에 대한 애착의 능력 안에 있음이 관찰되었을 때(주목하였을 때)를 의미한다. 이는 “보다”가 관찰, 또는 주목하다를 의미함으로부터; “장신구”의 의미는 신성한 선이다로부터; “팔찌”의 의미는 신성한 진리이다로부터; “손”의 의미는 힘이다로부터; 그리고 “누이(sister)”의 의미가 진리에 대한 애착임으로부터; 이상으로부터 “장신구와 그녀의 손에 있는 팔찌를 보는” 것은 신성한 선과 신성한 진리가 진리에 대한 애착의 힘 안에 있었다가 관찰됨임을 알게 된다.
위의 경우는 이러하다: 주님 안에서 신성한 선과 신성한 진리의 결합은 천국의 결혼이 있게 하는 신성한 결혼 자체, 선과 진리의 결혼이 있게 하는 신성한 결혼 자체이다; 또한 이로부터 부부 사랑이 오고 있다. 이 결혼이 말씀의 내적 의미에서 취급되는 결혼, 천국의 결혼이 의미되고, 이는 선과 진리의 결혼이다; 그리고 최고의 의미에서 신성한 결혼이다, 즉 주님 안에서 있는 결혼이다; 그러므로 이삭과 리브가 사이의 결혼에 의해 뜻해지는 것도 이 범주에 있다. 선과 진리의 결합이 결혼 자체이다, 그러나 그것의 개시됨이 약혼이고, 또는 결혼에 앞서 진행되는 상태이다. 그러나 약혼에 앞서 있는 상태가 여기서 묘사되고 있다. 이 상태에서 약혼하는 것, 그 후에 아내로서 남편과 결합하는 것이 소녀의 손(힘) 안에 있듯, 신성한 진리 안으로 입문함이 개시되는 것, 그리고 이 방식에서 신성한 선과 결합하는 것이 진리에 대한 애착의 힘 안에 있다. 그리고 더욱 더 주님과 더불어서의 경우 첫 진리에 대한 애착 안에, 그후 이 애착의 모두 각각 안에 아주 깊게 신성한 선 자체와 신성한 진리 자체가 있다, 그 이유는 이것이 여호와 자신이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여기서 취급되는 힘이 왔다.

그리고 그가 그의 누이 동생 리브가의 말들을 들었을 때. 이는 이 애착에 마음이 쏠림을 의미한다. 이는 이 말들 안에 있는 애착으로부터; 또한 앞에 진행된 애착으로부터도 분명해진다; 그 이유가 그것들이 누이 동생 리브가에 의해 여기서 표현된 진리에 대한 애착의 부분에 마음이 쏠렸다는 증거를 낳기 때문이다.

이 사람이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는 자연적 인간에 있는 진리에 마음이 쏠림(inclination)을 의미한다. 이 대목 역시 앞의 대목같이 말들에 있는 애착으로부터 의미 파악이 분명해진다; 또한 사람, 즉 아브라함의 종이 리브가에게 말한 것으로부터도 알려진다; 이로부터 분명해지는 것은 그것이 의미하는 것은 마음이 쏠림이다; 또한 “사람”의 의미가 진리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여기서의 진리는 신성으로부터 자연적 인간에 있는 진리이다. 그 이유는 이 사람은 아브라함의 원로 종이고 그를 수단으로 여기서 자연적 인간이 의미되기 때문이다. 말씀, 특히 예언서에서, 단어 “사람 (남자, vir)”는 자주 등장한다; 즉 “사람(남자)과 아내”, “사람(남자)과 여인”, “사람과 주민”, “남자(vir)와 사람(homo)” 등등이다; 이런 구절에서 “사람(남자, vir)”에 의해서 이해함 속에 있는 것, 즉 진리가 의미되어진다. 그리고 “아내”, “여인”, “주민”, “사람(homo)”에 의해서는 의지 속에 있는 것, 즉 선이 의미되어진다. 이사야서에서:
내가 보니, 사람이 없다; 그들 사이에서 조차 상담자가 없다 (이. 41:28);
“사람이 없다”는 총명한 자가 없다, 고로 진리가 없다를 표시한다. 다시:
내가 왔다, 그리고 사람이 없었다; 나는 불렀다, 그리고 응답하는 사람이 없었다 (이. 50:2);
위도 앞 구절과 의미는 같다.
다시:
진리가 거리에서 곱드러지고, 직바름이 들어갈 수 없다; 그리고 진리는 데려가졌다; 그리고 악을 떠난 자가 미친다. 그리고 여호와께서 보셨다, 그리고 공정이 없는 것, 사람이 없는 것, 이것은 그분의 눈에서 악이었다, 그리고 그분은 의아해하셨다 (이. 59:14-16).
“사람이 없다”는 총명한 자가 없다, 보편적 의미에서 진리가 없다를 뜻한다. 여기서 교회의 마지막 때, 즉 어떤 진리도 더 이상 있지 않은 때를 취급하고 있다; 그래서 “진리가 거리에서 곱드러진다, 직바른 자가 들어갈 수 없다, 진리는 데려가졌다”고 말해지는 것이다. 예레미야서에서:
너희는 예루살렘 거리를 이리저리 달려다니고, 그리고 보고, 그리고 알아 보아라, 그리고 넓은 장소에서 찾아 보아라, 만일 너희가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을 발견할 수 있는지를, 만 일 너희가 진리를 추구하는 공정을 실시하는 누가 있는지를 (예. 5:1).
위에서 “사람”은 총명한 자를 분명하게 표시한다; 진리도 표시한다. 스바냐서에서:
나는 그들의 거리들을 황무하게 만들 것이다, 하여 지나가는 자가 아무도 있지 않을 것이 다; 그들의 성들은 황폐할 것이다, 하여 거기에 사람이 없을 것이다; 거기에 주민이 없을 것이다 (습. 3:6).
“사람 없음”은 진리 없음을 표시한다; “주민 없음”은 선이 없음이다.

그가 이 사람에게 왔다. 이는 선에 대한 애착(라반)이 자연적 인간에 있는 진리(이 사람)에 근접했음을 의미한다. 이 둘 모두는 자연적 인간 안에서 이다.

보라 그는 낙타 옆에 서있었다. 이는 일반적인 기억 속의 지식 안에 현존함을 의미한다. 이는 “서있다”가 현재 있다를 의미함으로부터; “낙타”는 일반적 기억 속의 지식임으로부터 알게 된다.

샘에서. 이는 신성한 진리로부터 그것들이 계발됨을 의미한다. 이는 “샘”이 진리이다로부터, 여기서는 신성한 진리이다에서 알려진다. 말씀이 신성한 진리이기에, 말씀은 “샘”이라 불리운다. 내적 의미에서 “샘에 서있다”가 여기에서는 자연적 인간에 있는 것들을 계발함을 포함하는데, 이는 시리즈로부터 뒤이어진다; 그 이유가 신성한 진리가 있는 곳에서 계발도 있기 때문이다.

위 세 구절은 진리가 합리성에 있는 선과 결합되기 위하여 불러 일으켜지도록 자연적 인간의 계발과 준비함을 다루고 있다. 이 준비함과 계발함의 경우는 이렇다: 인간의 지적 측면을 만들어내는 두 빛이 있다; 천국의 빛과 세상의 빛이다; 천국의 빛은 주님으로부터 있고, 주님은 다른 삶에서 천사들에게 태양과 달이시다; 세상의 빛은 육체적 시각 앞에 나타나는 태양과 달이다. 내적 인간은 천국의 빛으로부터 그것의 시각과 그것의 이해력을 가진다; 그러나 외적 인간은 세상의 빛으로부터 그것의 시각과 그것의 이해력을 가진다. 세상의 빛 속에 있는 것들 안으로 천국의 빛의 유입은 계발을 결과되게 하고, 동시에 지켜야할 계율(규칙, observance)을 만든다. 만일 상응이 있다면 진리로부터의 계율이 만들어지고, 만일 상응이 없다면 진리 대신 거짓으로부터의 계율이 만들어진다. 그러나 만일 거기에 애착 또는 사랑이 없다면, 즉 영적인 열, 즉 빛에 의해 계발된 것에 생명을 주는 사랑, 애착 등이 없다면 계발이든, 계율이든 불가능하다; 비슷한 예로, 태양의 빛은 식물 왕국의 것들에 생명을 주지 못한다, 그러나 빛 안에 있는 열이 생명을 준다. 이는 누구나 익히 아는 자연계의 진리이다.
뒤이어지는 절에서 준비함이 더 묘사되고 있다, 즉 주님의 신성한 빛인 천국의 빛은 그분의 자연적 인간에서 세상의 빛 속에 있는 것들 안으로 흐른다, 그리하여 그분은 합리성에서 선과 결합될 진리를 꺼내신다. 이는 통상적인 경로이다. 그러므로 그분은 인간을 신성으로 만드심에서 통상적인 경로를 수단으로 하시기 위해 그분은 세상에 오셨다; 즉, 인간으로 태어나시고, 인간으로 교육받으시고, 인간으로 재출생하시는 것이 그분의 뜻이었다는 말이다. 물론 차이는 있다. 인간은 주님으로부터 재출생해야 하는 점이다; 이에 반해 그분은 그분 스스로 자신을 거듭나게 하셨을 뿐아니라 자신을 신성화 하셨다, 즉 신성으로 만드셨다; 더욱이 인간은 선행과 신앙이 유입됨을 수단으로 새로이 만들어지지만, 주님은 그분 안에 있고, 그분이신 신성한 사랑에 의해 자신을 신성으로 만드셨다. 이로부터 알게 되는 바, 인간의 거듭남은 주님의 신성이 되심의 형상(image)이다는 것; 같은 말로, 인간의 거듭남의 과정 안에서 비록 아주 멀리서, 아주 희미할지라도 우리는 주님께서 신성이 되심(Lord’s glorification)을 볼 수 있을런지 모른다.

31-33절. 그리고 그는 말했다, 오소서, 당신은 여호와께로부터 복받은 자입니다, 어찌하여 당신은 밖에 서계십니까? 그 이유는 제가 집을 청소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낙타를 위한 방도 있습니다. 32 그리고 그 사람은 집 안으로 왔다, 그리고 낙타들을 풀어 놓았다, 그리고 그는 낙타를 위해 짚과 여물을 주었다, 그리고 그의 발과 그와 함께 온 사람들의 발도 씻도록 물을 주었다. 33 그리고 그들 앞에 먹을 것이 놓여졌다. 그리고 그는 말했다, 나는 내 말을 마칠 때까지 먹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말했다, 말해보시오.

그는 말했다, 오소서, 당신은 여호와께로부터 복받은 자입니다. 이는 그분의 안쪽에 신성을 초대함을 의미한다. 이는 “오소서”의 의미가 초대함이다로부터; 그리고 “여호와로부터의 복됨”은 신성을 의미함으로부터; 고로 “여호와로부터의 복받음”은 신성 자체로부터의 신성이다. 선은 신성 자체, 그러나 진리는 거기서 파생되는 신성이다. 여기서 아브라함에 의해 보내진 “사람”은 자연적 인간 안에서 신성으로부터 있는 진리를 의미한다; 이것이 “여호와께로부터 복받은 자”라 불리우는 신성한 진리이고, 초대되고 있다.

어찌하여 당신은 밖에 서계십니까? 이는 거기로부터 얼마 간…을 의미한다. 이는 설명은 필요치 않을 것 같다. 여기서의 경우는 다음과 같다: 주님의 신성한 합리성은 신성한 선과 결합된 신성한 진리 자체로부터 태어나진다. 신성한 합리성은 이삭이다. 그는 신성한 진리인 사라로부터 신성한 선인 아브라함에게서 태어났다. 고로 주님의 합리성만이 신성으로 태어나신 것, 실로 그분 자신으로부터 이다; 그리고 이로부터 주님의 있음 자체는 여호와로부터 이었고, 또는 신성한 진리 자체이었다. 합리성에 있는 신성한 선, 이는 “이삭”인데, 이 선은 태어나진 선이었다; 그리고 이 선은 진리로부터 분리된 선이 아니었고, 신성한 진리와 더불은 신성한 선이었다, 그럼에도 모두 함께 합리성에서 선이라 불리우고, 자연적 인간으로부터의 진리와 결합되었다. 이 진리가 “리브가”이다. 주님께서 그분의 인간을 선과 진리 모두에서 신성으로 만드시기 위하여, 그리고 이 만드심을 통상적인 경로로 만드시기 위해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으셨다; 그 이유가 통상적인 경로가 신성한 질서, 모든 거듭남이 진행되는 경로이기 때문이다. 고로 이 경로를 따라 주님의 신성이 되심이 있어진 것이다.
이 신성한 선은 합리성 안에서 신성한 진리를 통하여 자연적 인간 안으로 흐르고, 그 안의 모든 것을 계발한다. 과정 자체가 여기서 묘사되고 있다, 즉 첫 번째로 얼마 정도 떨어진 상태에서 흐른다; 이것이 여기서 “거기로부터 얼마 만큼”에 의해 의미되었다; 그리고 이 흐름은 교육이 있기 전에는 더 충분하게 흐르지는 않는다. 그 이유는 통상적인 절차가 교육함이 먼저 진행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 다음 교육의 수준에 따라 유입됨이 거행된다; 그리고 이로부터 진리가 계속적으로 존재 안으로 온다, 이것이 입문을 개시함이다, 이 후에 합리성의 선과 결합하여진다. 이상으로부터 말씀의 내적 의미에 포함된 비밀의 본성이 무엇인지 감지되었을 줄로 본다; 이런 비밀들은 제아무리 일반적 사항에 속한다 해도 인간에 의해 거의 납득되지 않고 있다. 그럼에도 천사들에게서는 말로 표현을 다할 수 없는 수많은 특별 사항으로 다가와 있다.

그 이유가 저는 집을 청소했기 때문입니다. 이는 모든 것들이 준비되어졌고 선들로 가득 차 있음을 의미한다. 이는 “청소함”의 의미가 준비하고 채우는 것; 그리고 “집”의 의미가 선이다로부터 알려진다. “청소함”이 준비하고 채우는 것을 의미하는 이유는 사실상 집을 청소하는 것밖에 인간에게 요구되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즉 악의 탐욕과 이 탐욕에서 파생되는 거짓의 확신을 거절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그는 선들로 채워진다, 그 이유는 선은 주님으로부터 계속적으로 흘러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입을 방해하는 것들, 즉 안으로 흐르는 선에 손상을 입히는 것, 악용하는 것, 질식시키는 것 따위들로부터 순수해진 사람(집) 안으로만 흐른다. 이러므로 고대인들에게 집을 깨끗이함, 청소함이라 말하는 것, 그리고 길을 청소함, 준비함이라 말하는 것이 위 의미를 내포하는 상식적 말투로 자리잡았다; 집을 청소한다는 것은 악들로부터 자아를 순수해지게 하는 것, 그러므로 해서 선이 들어오게 자아를 준비하는 것을 뜻하였다; 그러나 길을 청소하는 것은 자아를 준비하여 진리가 받아지도록 하는 것을 뜻했다 이사야서에서: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음성이다, 너희는 여호와의 길을 청소(준비)하라; 우리의 하느님을 위하여 사막에 큰 도로를 만들어라 (이. 40:3).
이사야서에서:
던져올려라, 던져올려라, 길을 청소(준비)하라, 내 백성의 길로부터 걸림돌을 치워내라
(이. 57: 14).
이사야서에서:
관통하여 가라, 문을 관통하여 가라, 백성의 길을 청소(준비)하라; 던져올려라, 던져올려라, (하여) 큰 길을 (만들어라), 돌들을 거두어 내라 (이. 62:10).
말라기서에서:
보라 나는 내 천사를 보낸다, 그리고 그는 내 앞에서 길을 청소 (준비)할 것이다; 그리고 너희가 찾는 주님은 그분의 성전에 갑자기 오실 것이다 (말. 3:1).
위 구절에서 “길을 청소하는 것”은 자신들을 준비하게 만들어 진리를 받도록 준비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 구절에서 취급된 주제는 주님의 강림이다. 그 이유가 그들이 신앙의 진리를 받기 위해 자신들을 준비하는 것, 그리하여 선행의 선을 받고 이를 수단으로 영원히 구원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윗서에서:
당신께서는 이집트로부터 포도나무를 가져오셨다, 당신은 나라들을 몰아내시고 그것을 심 으셨다; 당신께서 그것 앞에서 청소하셨는 바, 그것의 뿌리는 깊이 뿌리내렸고, 그것은 토 지를 채웠다 (시. 80:8, 9).
위는 최고 의미에서 주님이 취급되어진다; “이집트로부터의 포도나무”는 기억 속의 지식들로부터의 진리이다; “나라들을 몰아내심”은 악들로부터 순수해짐이다; “그것 앞에서 청소하심”은 선이 채워지도록 준비됨이다. 반대 의미에서 “집을 청소함”이 자신으로부터 모든 선들과 진리들을 박탈해버린 사람, 고로 악들과 거짓들로 채운 사람에 관한 것이 아래 구절에 있다; 누가복음서에서:
불결한 영이 쉴 곳을 찾다가 말한다, 나는 내가 나왔던 집으로 돌아가야겠다; 그리고 그가 왔을 때, 그는 집이 청소되고 잘 꾸며진 것을 발견하고 가서 자기보다 더 악한 일곱 영들 을 데리고 와서 들어가 거기 거주한다 (눅. 11:24-26; 미. 12:43-45).

그리고 낙타를 위한 방도 있습니다. 이는 그분을 섬길 수 있는 모든 것들의 상태를 의미한다. 이는 “방”이 상태를 의미함으로부터; 그리고 “낙타들”의 의미가 일반적 기억 속의 지식들이다로부터 알려진다. 이런 것들이 섬김을 위한 것들임은 이미 살핀 바 있다; 그 이유가 자연적 인간에 속하는 모든 것들은 영적인 것들을 섬기는 용도 외에 다른 것은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남종, 여종, 낙타들, 나귀들 등등은 내적 의미에서 자연적 인간에 속하는 것들을 주로 의미한다.

그리고 이 사람은 집에 왔다. 이는 그 속에서 선 안으로 유입됨을 의미한다. 이는 “오다”의 의미가 여기서는 흘러들다로부터; 그리고 “집”의 의미가 선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리고 낙타들을 풀어 놓았다. 이는 섬기는 것들을 자유롭게 함을 의미한다. 이는 “풀어줌”의 의미가 자유하게 만듦이다로부터; 그리고 낙타의 의미가 일반적 기억 속의 지식들, 고로 섬기는 것들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 경우에서는 이러하다: 자유 없이 자연적 인간 안에서 진리의 생산은 가능하지 않다, 또한 거기로부터 일으켜세워 합리성 안으로 입문시키는 것도 가능하지 않다, 또한 합리성 안에서 선과 결합함도 가능하지 않다. 이 모든 것들은 자유한 상태에서 거행된다. 그 이유가 선으로부터 진리에 대한 애착은 자유를 생산하기 때문이다. 진리가 애착으로부터 배우지 않으면, 고로 자유 안에 있지 않으면, 그것은 심어지지 않는다; 더욱이 내면들을 향하여 향상됨이 덜해지거나 신앙을 만들지도 못한다. 모든 개혁은 자유 안에서 결과되어진다, 그리고 모든 자유는 애착 속에 있고, 주님은 인간을 자유 안에 간직하신다, 그리하여 그 자신 스스로 진리와 선에 감동하도록, 그러므로 거듭나지도록 하신다. 이것이 “낙타들을 풀어 놓음”에 의해 의미되어 있다; 만일 이런 의미들이 그것들로부터 있지 않다면, 이 세부적인 말들은 시시하고 지루한 하찮은 말일지 모른다.

그리고 그는 낙타들을 위해 짚과 여물을 주었다. 이는 진리들과 선들 속에서 가르쳐짐을 의미한다. 이는 “짚”의 의미가 자연적 인간의 진리들이다로부터, 그리고 “여물”의 의미가 그 속에 있는 선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런 것들이 “짚과 여물”에 의해 의미되기 때문에, “짚과 여물을 주는 것”은 진리들과 선들 안에서 가르치는 것이 뒤따르는 것이다. 자유가 이런 것들을 위하여 있다는 것, 즉 인간은 애착 안에서와 진리에 대한 애착으로부터 가르쳐질는지 모른다는 것, 그리하여 진리들이 영적 인간까지 조차에서 은근히 심어지고, 또는 혼까지에서도 심어지고, 선과 더불어 결합되어진다. 이와 같은 것이 신앙의 뿌리내림, 또는 신앙으로부터 있는 진리가 정착됨이다. 이것이 합리성에 있는 선과 짝을 이루지 않으면, 신앙의 진리는 어떤 생명도 결코 받지 못하고, 어떤 열매의 생산도 없다; 그 이유가 신앙의 열매라고 불리우는 모든 것은 신앙의 진리를 통한 사랑과 선행의 선의 열매이기 때문이다. 사랑의 선인, 영적 열이 신앙의 진리인 영적인 빛을 수단으로 운전되지 않으면, 인간은 겨울철 꽁꽁 얼어버린 지면에 씨를 뿌리는 격인 바, 아무런 성장도, 열매맺음도 없다. 열 없는 빛이 아무 것도 생산 못 하듯, 사랑 없는 신앙도 그러하다.

그리고 그의 발을 씻을 물을 주었다. 이는 자연적 인간에 있는 것을 깨끗이 함을 의미한다. 이는 “씻을 물”, 또는 물로 씻는 것의 의미가 순수해지는 것이다로부터; 그리고 “발”의 의미가 자연적인 것들, 또는 자연적 인간 안에 있는 것들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표현 교회에서 발을 물로 씻는 것은 관습화되어 있었는데, 이를 수단으로 자연적 인간의 불결한 것들을 씻어버리는 것을 의미했다. 자연적 인간 속의 불결한 것들이란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으로부터 있는 모든 것들이다. 이런 불결한 것들이 씻어져나간 다음, 선들과 진리들이 흘러든다, 그 이유가 주님으로부터의 선과 진리의 유입을 방해하는 것이 이런 불결한 것들이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선은 주님으로부터 안으로 계속적으로 흘러들고, 그것이 내적, 또는 영적 인간을 통하여 그의 외적, 또는 자연적 인간에게 올 때, 거기서 그것은 악용되든지, 되돌려지든지, 질식되어지든지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이 제거될 때, 그 다음 선이 받아지고 열매 풍성해진다; 그 이유가 그때서야 인간은 선행의 일들을 실제화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여러 가지 우리 주변의 상황을 빗대어도 이해된다; 즉 불행, 곤경, 궁핍, 병듦, 등등 같은 것 안에 있게 될 때, 외적, 또는 자연적 인간에 속하는 것들은 단지 잠잠해지는 바, 인간은 즉시 경건하게 생각하기를 시작하고, 선한 것을 뜻하려 들고, 할 수만 있으면 동정심의 일들을 실제화 하려 든다; 그러나 그의 주변 상황이 바뀔 때, 그의 생각, 태도도 바뀌는 경우이다.
이런 것들이 고대 교회에서 씻음에 의해 의미되었고, 같은 것이 유대 교회에서 표현되었다, 그것들이 고대 교회에서는 의미되었고, 유대 교회에서는 표현된 이유는 고대 교회인은 의식 행위를 예배에 있는 외적인 어떤 것으로 중시하였으나, 씻는 의식 행위 때문에 자기가 순수해졌다고는 믿지 않았다. 그러나 자연적 인간의 불순함들, 즉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으로부터 있는 것들을 씻어내버림에 의해 자기는 순수해진다고 믿었다. 그러나 유대 교회인들은 씻는 의식 행위에 의해 순수해진다고 믿었다; 따라서 그들은 내면들의 순수해짐이 의미되는 것에 관해서는 알지 못했고 알기를 바라지도 않았다.
“씻음”에 의해 불순함으로부터 깨끗해짐이 의미된다는 것에 주목한 대목이 말씀에 있다. 이사야서에서:
너는 씻어라, 너를 깨끗하게 만들어라, 네 행위들의 악을 나의 눈 앞으로부터 내던져라, 악 행을 중단하라 (이. 1:16);
위에서 “자신을 씻는 것”은 자신을 순수하게 만드는 것, 그리고 악들을 중단하는 것을 뜻한다. 다시:
주님께서 시온의 딸들의 더러움을 씻어내시게 될 때, 그리고 공정의 영 안에서와 정화함의 영 안에서 예루살렘 한 가운데로부터 예루살렘의 피를 걸러내시게 될 때 (이. 4:4).
위에서 “시온의 딸들의 더러움을 씻어내심”과 “예루살렘의 피를 걸러내심”은 악들과 거짓들로부터 순수해짐을 표시한다. 예레미야서에서:
오 예루살렘아, 네 심정을 사악함으로부터 씻어라, 하여 너는 구원될는지 모른다. 얼마나 오랫동안 네 불법에 관한 생각들이 네 안쪽에 유숙할 것이냐? (예. 4:14)
에스겔서에서:
나는 너를 물을 가지고 씻었다, 나는 네 피들을 네 위로부터 씻어버렸다, 그리고 기름을 가 지고 너를 기름부었다 (겔. 16:9);
예루살렘에 관하여, 이를 수단으로 고대 교회가 뜻해진다; “물들로 씻는 것”은 거짓들로부터 순수해짐을 표시한다; “피들을 씻어내는 것”은 악들을 걸러내는 것을 표시한다; “기름으로 부음”은 선으로 채움을 표시한다. 다윗서에서:
저를 제 불법으로부터 씻으소서, 그리고 저를 제 죄로부터 깨끗케 하소서. 당신은 우슬초로 저를 정화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나는 깨끗해질 것입니다; 당신은 저를 씻을 것입니다, 그 리고 나는 눈보다 더 희어질 것입니다 (시. 51:2, 7).
위에서 “씻어지는 것”은 악들과 악들의 거짓들로부터 순수해지는 것을 분명하게 표시한다.
이것들은 표현 교회에서 있는 “씻는 것”에 의해 의미된 것들이다; 그리고 (의미를 담을) 표현을 위하여 그들에게는 그들이 불결해졌을 때, 피부를 씻거나 의복을 빨거나 하는 등으로 씻는 행위를 하도록 명령되었다. 이런 모든 것들에 의해 자연적 인간 속에 있는 것이 의미되었다. 놋쇠로 만든 놋대야가 성전 바깥에 놓여졌다, 즉 놋바다(breazen sea)와 열 개의 놋대야(breazen laver)가 있었다 (왕상. 7:23-39); 그리고 아론과 그의 아들들이 씻는 놋대야는 만남의 천막과 제단 사이에 놓여졌다, 고로 천막 바깥이다 (출. 30:18, 19, 21); 이를 수단으로 의미된 바, 외적 또는 자연적인 것들만이 순수해지게 된다는 것이다; 그 이유가 이것들이 순수해지지 않으면, 즉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의 것들이 제거되지 않으면, 주님을 사랑함과 이웃을 향한 사랑에 속한 내적인 것들이 흘러들 수 없기 때문이다.
외적인 것들이 순수해지는 것에 관한 입장이 어떻게 놓여지는 가에 대해 더 나은 이해를 위해 선한 일을 예증으로 삼아 생각해보자. 선한 일들은 이것들이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으로부터 있는 것을 제거하지 않으면 악한 일들이다; 그 이유가 이것들이 제거되지 않은 채, 일들이 행해질 때, 겉으로는 선하게 나타나나, 내향으로는 악하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선한 일도 자신의 명성과 영예를 위해, 하나를 내놓고 둘을 갖는 식의 이득을 위해 행해지기도 하기 때문이다, 고로 이것은 위선적 선한 행위, 또는 자아 공적(self-meritorious)이기도 한 것이다. 그 이유가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으로부터 있는 자기 속의 원리가 선한 일들을 부추켰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악들이 제거된다면, 그 일들은 선이 된다; 그리고 그 일들은 선행의 선이다; 즉 그 일들 안에서 최소한 자기나 세상, 명예, 보답 등이 중요시되지 않고 있다면 선행의 선의 한 종류일 것이다; 다시 말해 그 일들은 자아 공적이나 위선 따위가 아니다는 말이다. 그 이유가 그때 천적 사랑과 영적 사랑이 주님으로부터 그 일들 안에 흘러들고 그것이 행동상에 있는 사랑과 선행으로 되게 하기 때문이다; 그때 주님께서는 이 사랑을 통하여 자연적, 또는 외적 인간을 순수해지게 하신다, 그리고 질서 안에 배치하시어 그것이 상응되는 천적, 영적인 것들을 받게 해주신다.
이는 주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으실 때 가르치신 구절에서 분명해진다. 요한 복음서에서:
그 다음 그분은 시몬 베드로에게 오신다; 그리고 베드로가 그분에게 말한다, 주여, 당신께 서 제 발을 씻으십니까? 예수께서 대답하시어 그에게 말하셨다, 내가 무엇을 하는지 너는 모르고 있다, 그러나 이후 너는 알 것이다. 베드로가 그분에게 말한다, 당신이 제 발을 결 코 씻길 수 없습니다. 예수께서 그에게 말하신다, 만일 내가 너를 씻지 않으면, 너는 나와 더불은 부분(내 편)이 아니다(나와 상관이 없는 사람이다). 시몬 베드로가 그분에게 말한 다, 주여, 제 발 뿐만 아니라, 제 손과 제 머리도 씻어 주십시오. 예수께서 그에게 말하신 다, 씻었었던 자는 어떤 점에서는 깨끗한 바, 그의 발 외에는 씻을 필요가 없다; 너희는 이 미 깨끗하다, 그러나 모두는 아니다 (요. 13:4-17).
“씻었었던 자, 그의 발 외에는 씻을 필요가 없다”란 개혁되었던 이들은 자연적인 것들 만을 깨끗이 하면 된다는 것, 즉 악들과 거짓들이 자기들로부터 제거하는 것만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 제거가 있을 때, 주님으로부터 영적인 것들의 유입을 수단으로 그의 모든 것들이 질서 안에서 배치되어진다. 더욱이 발을 씻는 것은 이런 선행의 임무로서, 타인의 악들을 헐뜯지 않는 것, 겸손의 임무로서, 타인의 악이 불순한 것인 바 깨끗케 하는 것을 뜻하고 있다; 이에 대한 것은 위 인용한 주님의 말씀 가운데서, 그 외 여러 구절에서 분명해진다 (요. 13:12-17, 눅 7:37, 38, 44, 46; 요. 11:2; 삼상 25:41).
누구나 상식 수준에서도 아는 바, 자신을 씻음이 악들과 거짓들로부터 누군가를 순수해지게 할 수 없다는 것, 그러나 당사자에게 들러 붙은 불순한 것들로부터 순수해지게 하는 것이라는 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씻음이 교회에 명령된 의식 사이에 있었는 바, 이에는 어떤 특별한 씻음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 즉 영적인 씻음, 즉 인간에게 내향적으로 부착된 불결함으로부터 순수해짐이 포함되어 있다. 그러므로 이 교회 안에서도 이런 영적 측면을 알았던 이들, 하여 이런 의식은 심정의 순수해짐, 또는 자연적 인간으로부터 있는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 속의 악들을 제거함이다고 생각했고, 그렇게 하려고 전심을 다하며 명령된 외적 의식 절차도 준수했었다. 그러나 자기들의 옷을 빨고, 피부와 손과 발을 씻고 하는 외적 의식행위만 이행하면 자기들은 순수해졌다고 생각했던 이들, 하여 이런 의식 후에 그들은 탐심과 증오, 복수, 무자비, 잔인함, 등의 영적 불순한 것 안에서 살았다. 더 나아가 이런 불순한 것을 우상 숭배를 수단으로 의식으로 실제화하기까지 이르렀다. 그럼에도 그들은 그것을 수단으로 표현은 할 수 있었다, 그리고 표현을 수단으로 교회의 어떤 것을 진열해줄 수는 있었다. 이런 여리고 가느다란 실오라기 끈으로 주님이 세상에 오시기 이전 천국과 인간은 어떤 결합을 유지했을는지 모른다. 그렇지만 이런 결합이 교인에게 감명을 준 것은 거의 없거나 전혀 없다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유대인들과 이스라엘족들은 내적 인간에 관하여는 생각하지 않았다, 또한 알고 싶은 의지도 없었다; 고로 천적인 것, 영적인 것, 즉 사후 삶에 관한 것은 전혀 아는 바 없었다. 그렇다 해도 천국과의 교통, 주님과의 교통이 두절되지 않도록, 그들은 내적인 것들이 의미되는 외적 의식들에 단단히 묶여져 있었다. 그들의 포로 생활 내지 재앙들은 (내적 의미를 담아야 하는) 표현을 위하여 외적 의식들이 엄격하게 준수되도록 하려는 목적을 위하여 넓은 측면에서 있어진 것들이다. 한 예로, 모세는 아론과 그의 아들들을 천막의 문에서 물로 씻었다, 하여 그들이 신성시되어지게(sanctified) 했다 (출. 29:4; 40:12; 레. 8:6); 그리고 아론과 그의 아들들은 그들이 만남의 천막으로 들어가서 섬기기 위해 제단 가까이 오기 전에 자기의 손과 발을 씻어야 그들은 죽지 않았다; 이것은 그들에게 영원한 규례이었다 (출. 30:18-21; 40:30, 31); 아론은 그가 섬김의 옷들을 입기 전 그의 몸을 씻었다 (레. 16:4, 24); 레위인들은 속죄의 물을 뿌림으로 순수해졌다; 그들은 면도날이 그들의 몸을 지나가게 했고, 그들의 의복을 빨았다, 그리하여 순수해진다 (민. 8:6, 7); 자연사했든지, 찟기워 죽었든지 사체를 먹은 자는 자기 의복을 빨아야 하고 몸을 물로 씻어야 했다 (레. 17:15, 16); 유출(병)을 가진 자의 침대를 만진 자, 또는 그가 앉은 기구에 앉았던 자, 그의 몸에 접촉된 자는 누구나 옷을 빨고 물로 목욕해야 하고 저녁까지 그는 불결해 있다 (레. 15:5-7, 10-12); 속죄의 염소로 수염소를 가게 한 자는 누구든지 자기 몸을 씻는다 (레. 16:26); 나병 환자가 깨끗해졌을 때, 그는 그의 의복을 빨고, 모든 그의 머리털을 밀고, 자신을 물로 씻고, 그리고 그는 깨끗하다 (레. 14:8, 9); 불결한 것의 접촉으로 불결하게 만들어진 그릇은 물을 통과하여야 하고 저녁 때까지 불결하다 (레. 11:32). 이상의 구절들로부터 알게 되는 바, 위의 의식을 통하여 내적인 것의 측면에서 깨끗해지게, 또는 순수해지게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는 것, 그러나 위에서 말한 이유 때문에 영적으로 깨끗해지는 것을 표현했다는 것이다. 이것이 그렇다는 것을 주님께서 마. 15:1, 2, 20과 막. 7:1-23에서 가르치신다.

그리고 그와 함께 온 사람들의 발… 이는 자연적인 인간 안에서, 그에게 속해 있는 모든 것들을 깨끗이 함을 의미한다. 이는 “발”의 의미가 자연적 인간 속의 것들이다로부터; “그와 함께 온 사람들”은 자연적 인간의 모든 것들이다로부터 알려진다. 여행자가 어떤 집에 왔을 때, 발을 씻는 것은 그 당시의 관습이었다. 요셉의 형제가 그의 집에 들어갔을 때 (창. 43:24); 그리고 레위인과 그의 종이 노인의 집에서 유숙하게 되었을 때 (사. 19:21); 그리고 자기 집에 되돌아 온 우리야에게 그의 집에 내려가서 그의 발을 씻으라고 다윗이 명령하였을 때 (삼하. 11:8). 그 이유가 여행이 교육에 관계되는 것과 그로부터 생활하는 것을 의미했기 때문; 그리고 자연적인 것들이 순수해지는 것은 이미 살폈다. 더욱이 영적 의미에서 이해된 불순함이 부착되지 않도록, 그리고 집, 즉 인간을 더럽히지 않도록을 의미했다; 이는 또한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만일 성이나 집이 평화를 받지 못한다면, 발의 먼지를 털어내라고 명령하신 대목에서도 알 수 있다 (마. 10:14).

그리고 그 사람 앞에는 먹을 것이 차려져 있었다. 이는 자연적 인간 안에 있는 선에 대한 애착의 의지는 신성한 것들이 자기 것으로 삼아지기를 바란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먹을 것을 차려놓은 라반이 자연적 인간에 있는 선에 대한 애착을 표현함으로부터; 그리고 “먹다”의 의미가 여기서 취급되는 신성한 것들과 교통되는 것과 그것을 자기 것 삼는 것을 의미한다로부터 알려진다.

그리고 그는 말했다, 나는 먹지 않을 것이오. 이는 거절을 의미한다. 즉 그것들이 자기 것 삼아지는 것은 아직 아니다를 의미하는데, 설명은 필요 없을 것이다.

…제가 내 말을 마칠 때까지…. 이는 가르침이 주어질 때까지를 의미한다. 이는 “말을 함”의 의미가 가르쳐진다로부터 알게 된다. 더욱이 그가 말한 것들, 그리고 시리즈에서 이어지는 것은 가르침에 속한다. 신성한 것들은 가르침에 따라서, 그 결과 과정을 밟아 자연적인 것들 안으로 흘러드는데 이미 살폈다.

그는 말했다, 이야기 해 보시오. 이는 간절한 바램을 의미한다. 이는 “말을 함”이 가르침이다로부터 알게 되는데, 여기서는 절대 필요하다는 느낌을 지닌 말투에서 의 가르침이다. 고로 이 말은 간절히 바램을 포함한다.

내적 의미에서 이 세 절에 포함된 것은 설명으로부터 실로 분명해진다, 즉 자연적 인간 속의 것들은 신성인 것들을 받기 위해 준비된다는 것, 리브가에 의해 의미된 진리들도 그러하다는 것, 하여 이 진리가 합리성 속의 선과 결합하기 위해 입문을 개시하여 신성으로 만들어지는데, 이것은 유입을 수단으로 해서이다. 그러나 여기서 내적 의미에서 있는 것들은 만일 그것들이 생각의 어떤 바라봄이 보여지지 않는다면, 그것들은 납득을 위해 너무나 불분명하다는 것, 그 이유는 그것들이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인간이 거듭날 때, 어떻게 진리들이 자연적 인간 안에서 일으켜 세워지는지, 그리고 합리성 안에서 선 안으로 입문을 개시하는지에 대해서이다. 오늘날 대부분의 각 개인에게 이런 것들이 거행되고 있다는 것조차 모를 정도로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런 이유의 주된 이유는 오늘날 거듭난 자들이 희박하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것은, 선행의 선 안으로 신앙의 진리들이 입문을 개시하고 결합되는데, 이것이 합리성으로부터 이다는 것, 이것이 인간의 상태를 완전히 바꾸어 놓는데, 즉 더 이상 신앙의 진리로부터 선행의 선을 생각하지 않고, 대신 이 선으로부터 진리를 생각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인간에게서는 거듭남이라는 말로 뜻하지만 주님의 경우는 신성이 되심(glorification)이다; 즉 모든 것들이 그분에 의해 신성으로 만들어짐, 이는 합리성에서, 자연적 평면에서 모두에서 그러하셨다.

34-48절. 그리고 그는 말했다, 나는 아브라함의 종입니다. 35 그리고 여호와께서는 제 주인에게 큰 복을 내리셨습니다, 그리고 그를 위대해지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양떼와 목축, 그리고 은과 금, 그리고 남종과 여종, 그리고 낙타와 나귀를 주셨습니다. 36 그리고 제 주인의 아내 사라는 그녀가 늙은 후에 제 주인에게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그에게 주었습니다. 37 그리고 제 주인은 나에게 맹세하게 하여 말하기를, 너는 내가 거주하는 토지에 있는 가나안의 딸들로부터 내 아들을 위한 여인을 데려오지 마라. 38 그러나 너는 내 아버지의 집으로, 그리고 내 가족에게로 가라, 그리고 내 아들을 위한 여인을 데려 와라. 39 그리고 저는 내 주인에게 만일 여인이 나를 따라 오지 않으려 한다면…라고 말했습니다. 40 그리고 그분은 나에게 말했습니다, 여호와께서는 네가 걸어갈 때 네 앞에 너와 함께 하도록 그분의 천사를 보내실 것이다, 그리고 네 길을 순탄하게 하실 것이다. 그리고 너는 내 가족으로부터, 그리고 내 아버지의 집으로부터 내 아들을 위한 여인을 데려 오라. 41 그리고 네가 내 가족의 집에 당도하면 너는 내 맹세를 지킨 것이다. 그리고 만일 그들이 너에게 주지 않는다면, 너는 내 맹세에서 자유로울 것이다. 42 이리하여 오늘 저는 샘에 도착하였습니다, 그리고 말했습니다, 오 내 주인 아브라함의 하느님 여호와께서는 제 가는 길을 순탄하게 해 주셨습니다. 43 보십시오 저는 물 있는 샘 가에 서있습니다, 그리고 때가 이르러 소녀가 물을 길으러 나오면 저는 그녀에게 말할 것입니다, 바라건대 네 물항아리로부터 물을 조금 마시게 해줄 수 있겠소. 44 그리고 그녀가 나에게 말하기를, 당신도 마시고, 당신의 낙타도 마실 수 있게 나는 물을 길으겠습니다. 그러면 이 여자는 여호와께서 제 주인의 아들을 위하여 정해진 자입니다. 45 제가 내 심정에서 말하기를 끝내기도 전에 보라 리브가가 왔는데, 그녀는 어깨에 물동이를 메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샘으로 내려 갔고 물을 길었습니다. 그리고 나는 그녀에게 말했습니다, 바라건대 내가 마실 수 있게 해주겠소. 46 그리고 그녀는 서둘렀고 그녀 위로부터 그녀의 물동이를 내려 놓고, 그리고 말했습니다, 마시세요, 그리고 나는 당신의 낙타들도 마시게 물을 주겠습니다. 그리고 저는 마셨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낙타들도 마시게 주었습니다. 47 그리고 저는 그녀에게 물었습니다, 그리고 말했습니다, 당신은 뉘댁 따님이시오? 그리고 그녀는 말했습니다, 저는 밀가가 나홀에게 낳아준 나홀의 아들 브드엘의 딸입니다. 그리고 저는 그녀의 코에 장신구를 달고 그녀의 손에는 팔찌를 끼웠습니다. 48 그리고 저는 몸을 구부려 나 스스로 여호와께 경배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저를 그의 아들을 위해 제 주인의 형제의 딸을 데려가도록 진리의 길에로 인도해주신 나의 주인 아브라함의 하느님 여호와를 찬송했습니다. “그는 말했다, 저는 아브라함의 종입니다”란 이것은 신성한 선으로부터 이었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여호와께서는 제 주인에게 크게 복을 내리셨습니다, 그리고 그를 위대해지게 하셨읍니다”란 선에 관한 신성한 인간과 진리에 관한 신성한 인간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에게 양떼와 목축을 주셨읍니다”란 일반적인 측면에서의 선들을 의미한다. “그리고 은과 금”이란 일반적 측면에서의 진리들을 의미한다. “그리고 남종들과 여종들, 그리고 낙타들과 나귀들”이란 특별한 진리들을 의미한다. “그리고 사라, 제 주인의 아내께서는 제 주인에게 아들을 낳아 주었읍니다”란 신성한 진리로부터 온 신성한 합리성을 의미한다. “그녀가 늙은 후에”란 그 상태였을 때를 의미한다. “그리고 그는 자기가 가진 것을 이 아들에게 주었습니다”란 신성한 합리성에 신성한 모든 것이 속해 있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제 주인은 저에게 맹세하게 했읍니다”란 서로를 묶는 서약, 그리고 신성시된 책무를 의미한다. “말하시기를, 너는 가나안족의 딸로부터 내 아들을 위한 여인을 데려오지 말라”란 신성한 합리성은 진리와 일치되지 않는 애착과는 결합되어지지 않음을 의미한다. “내가 거주하는 이 토지에서”란 불일치되는 것들 안에 신성한 선이 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너는 내 아버지의 집으로 가야 하리라”란 선은 신성으로부터 있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내 가족에게로…”란 진리는 신성으로부터 있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내 아들을 위한 여인을 데려오라”란 거기로부터 결합이 있어야 함을 의미한다. “그리고 저는 제 주인에게 말했습니다, 만일 여인이 저를 따라오지 않으려 한다면…”이란 이 애착함이 분리될 수 있었을지에 관하여 자연적 마음이 의심함을 의미한다. “그러자 그는 말했습니다”란 가르침을 의미한다. “여호와께서는 네가 걸어갈 때 네 앞에 그분의 천사를 보내실 것이다”란 신성한 섭리를 의미한다. “그리고 네 길을 순탄하게 하실 것이다”란 진리 측면에서의 신성한 섭리를 의미한다. “그리고 너는 내 아들을 위한 여인을 데려올 것이다”란 거기에 결합이 있어야 함을 의미한다. “내 가족으로부터, 그리고 내 아버지의 집으로부터”란 신성으로부터 거기에 있는 선과 진리로부터를 의미한다. “그러면 너는 내 맹세로부터 해제될 것이다”란 자연적 인간이 가지는 자유를 의미한다. “네가 내 가족에게 왔을 때, 그리고 만일 그들이 너에게 주지 않는다면…”이란 분리됨에 관하여를 의미한다. “너는 내 맹세에서 자유로울 것이다”란 그러면 자연적 인간에게 아무런 책임도 없음을 의미한다.

이 세부 사항들의 설명은 생략된다, 그 이유는 이미 앞에서 설명되었기 때문이다. 같은 말들이 반복된 것은 자연적 인간의 교육을 위하여서 이다. 진리가 선에게 입문함을 개시하고 결합하는 것은 처녀가 약혼하고 후에 남편과 결합하는 것과 경우가 비슷하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그녀는 승낙하기 이전 모든 것들에서 교육되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비록 이런 사항들이 당사자에게 나타나지 않을지라도, 그가 개혁될 때, 진리의 입문의 개시와 선과의 결합은 여전히 거행된다; 즉 진리에 관하여 선으로부터, 그리고 선에 관하여 진리로부터 진행하는 교육이 있다는 것, 이 후에 양쪽에서 동의함이 있는데, 이것이 아래 구절들에서 보여진다.

49-51절. 그리고 이제 당신께서 제 주인에게 자비와 진실을 행할 것인지 나에게 말해 주시오. 그리고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인지도 나에게 말해 주시오. 그리고 나는 오른쪽이든 왼쪽이든 바라 볼 것이오. 50 그리고 라반과 브드엘은 대답했다, 그리고 말했다, 이 말은 여호와께로부터 나왔다. 우리는 당신에게 악이냐 선이냐를 말할 수 없소이다. 51 보라 리브가가 당신 앞에 있으니 그녀를 데리고 가시오, 그리고 여호와께서 말하셨던 바 대로 당신의 주인의 아들의 여인이 되게 하시오.

이제 당신께서 제 주인에게 자비와 진실을 행할 것인지… 이는 그들의 두 자질, 즉 의지와 이해함으로부터 동의함이 있을 것인지 탐색함을 의미한다. 이는 자비가 선에 속한 것, 또는 사랑에 속한 것을 의미한다로부터; 그리고 “진실”이 진리로부터, 또는 신앙으로부터 있는 것을 의미한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리고 사랑 속에 있는 선은 의지 속에 있기 때문에, 그리고 신앙 속에 있는 진리는 이해함 속에 있기 때문에, 그리고 이런 것들이 라반과 브드엘에 의해 사람(아브라함의 원로 종)에게 자비와 진실을 베풀어야 하는 바, 이것은 두 사람의 능력, 즉 의지와 이해함으로부터 인 것을 의미하게 된다. 그리고 이것이 동의에 관한 탐색인 것은 이 말, 즉 “만일 당신이 행할 것이다면”, 그리고 이어지는 말, “나에게 말해 주시오”; 그리고 “만일 아니다면, 나에게 말해 주시오”에서 분명해진다. 거듭나는 인간에서, 이는 주님의 신성이 되심의 형상인 바, 이 경우란, 신앙의 진리가 능력의 각각으로부터, 즉 의지와 이해함으로부터 동의함이 있지 않으면, 그것은 실로 배워졌으나, 인정되어지지 않는 것, 더욱이 선을 수단으로 받아짐이 없다는 것이다. 동의함은 인정함 자체이다; 이를 수단으로 받아들임이 결과되고, 실로 의지로부터 있는데, 그 이유는 선이 거기에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신앙의 진리가 의지에 의해 받아졌을 때, 같은 말로 선에 의해 받아졌을 때, 그때 인간은 거듭난다; 그 이유가 진리가 선으로부터, 신앙이 선행으로부터, 생명 측면에서는 선행 자체이기 때문이다.

나에게 말해 주시오, 그리고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인지도 나에게 말해 주시오. 이는 그들이 자유로운 상태에서 숙고해봄을 의미한다. 이는 말들의 의미로부터 분명해진다. 진행되는 모두로부터 분명한 것은, 이 장의 글자 의미에서 있는 말들은 리브가가 이삭과 약혼하고 결혼함이 취급되고, 내적 의미에서는 진리가 선 안으로의 입문이 개시되고, 선과 진리의 결합이 영적 약혼과 영적 결혼이기 때문이다. 이것의 각각에는 숙고하되 자유함의 상태이어야 한다. 이것이 약혼과 결혼에서 필요하다는 것은 누구나 익히 아는 바이지만, 말을 바꿔 내적 의미에서 말해지면, 즉 진리가 선 안으로 입문함이 개시되고 선과 결합함에서도 요구된다는 것은 너무나 알려져 있지 않다. 그 이유는 이 과정이 자연적 인간에게 나타나지 않고, 이 개시됨과 결합은 인간이 그것들을 곰곰이 되생각해 봄 없이 완성되어지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개혁과 거듭남에서 진리가 선과 결합하는 매 순간 마다에서 자유한 상태는 꼭 있다.
모든 이가 알는지 모르는 것은, 의지 속에 있지 않은 것은 인간의 것이라고 말할 수 없다; 이해력 속에 있는 것은 그것이 의지 속에도 있어질 때까지 그의 것이 되지 않는다는 대목이다. 그 이유가 의지 속에 있는 것이 인간의 생명의 있음(being, esse)을 구성하고; 그러나 이해력으로부터 있는 것은 있음으로부터 파생된 세상에 알려짐(공표됨, coming forth, existere)을 구성하기 때문이다. 이해력 만으로부터의 동의함은 동의함이 아니다, 그러나 모든 동의함은 의지로부터 있다; 그러므로 이해력 속에 있는 신앙의 진리는 의지 속에 있는 사랑의 선에 의해 받아지지 않으면, 그것은 인정된 진리가 아니고, 신앙도 아니다. 그러나 진리가 의지 속에 있는 선에 의해 받아지기 위하여, 자유한 상태가 필수이다. 의지 속에 있는 모두는 자유하게 나타난다; 그 이유가 내가 뜻하는 것, 내가 선택하는 것, 내가 갈망하는 것은 자유한 상태에서가 전제 조건이고, 그것들은 내가 사랑하고, 선으로서 인정하기 때문이다. 이 모두가 보여주는 바, 신앙으로부터 있는 진리는 그것이 의지에 의해 받아질 때까지, 즉 진리가 선 안으로 입문을 개시하고 선과 결합할 때까지 인간의 것이 되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이것은 자유한 상태에서 결과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오른쪽이든, 왼쪽이든 바라 볼 것입니다. 이는 상호간의 자유를 의미한다. 이는 설명 없이도 분명해진다. 이 경우는 이렇다: 주님으로부터의 선은 내적 인간을 통하여 외적 인간 안으로 계속적으로 흐르는데, 인생의 아주 이른 시기에는 진리에 대한 애착의 형태 아래 외적 인간에서 나타난다. 인간이 목적으로서 천적인 선과 영적인 선을 바라보는 만큼에서, 진리는 선 안으로의 입문을 개시하고 선에 대한 애착과 결합되어진다. 그러나 인간이 선이 자신이라고, 고로 자신이나 세상에 목적을 둘 경우, 그만큼 천적인 선과 영적인 선은 물러난다. 이것이 “오른쪽이든, 왼쪽이든 쳐다본다”에 의해 의미된 상호간의 자유이다.

그리고 라반과 브드엘은 대답하여 말하기를, 이 말은 여호와께로부터 나왔다. 우리는 악이냐 혹은 선이냐를 말할 수 없소이다. 이는 그것은 주님만에 속한 것임을 인정함을 의미한다. 이는 몇 말들을 내적 측면에서 설명하면 알게 된다; 그러나 결말에 해당하는 것은 설명 없이도 분명하다. 즉 “이 말은 여호와로부터 나왔다”가 주님으로부터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여호와”에 의해 구약 성경에서 명명되는 이름은 주님 외에 다른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이런 사항들이 비밀들을 포함하는 것은 아버지와 어머니가 아닌 오빠인 라반과 아버지인 브드엘이 대답을 만들었다는 사실로부터 분명해진다; 그리고 처녀는 이후까지 대답하지 않았다로부터도 더 분명해진다. 이에 대한 이유인 즉, 오라버니로서의 라반은 자연적 인간에 있는 선에 대한 애착을 표현했다; 그리고 브드엘에 의해서는 선에 대한 애착의 근원이 표현되었기 때문이다. 자연적 인간에 있는 선에 대한 애착과 진리에 대한 애착은 형제와 자매이다; 그리고 진리에 대한 애착은 자연적 인간으로부터 일으켜져서 합리성 안으로 가고, 거기서 선과 결혼하여 결혼한 여인으로 있는다.
라반과 브드엘이 대답했는데, 오라버니가 먼저, 그 다음 아버지의 순서로 있는 비밀한 이유는, 합리성으로부터의 선이 자연적 인간 안으로 흐르는 동안, 이 선은 거기 있는 진리 안으로 직접 흐르지 않고, 거기 있는 선 안으로, 그리고 이 선을 통하여 진리 안으로 흐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유입이 있지 않으면, 진리에 대한 애착은 실제의 것 안으로 와질 수 없다. 다시 말해 자연적 인간에 있는 선이 인정하고, 동의함이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 이유가 합리적인 선과 자연적인 선 사이에서는 직접적인 교통이 있으나 합리적인 선과 자연적인 진리 사이에서는 그렇지 않다. 이 고대 언어의 관용적 표현이 여기서 발견된다, 즉, “여호와로부터 나온 말”인데, 이것은 여호와께서 하신 것을 뜻한다; 그리고 “우리는 선이든 악이든 말할 수 없다”는 그들은 부정도 긍정도 감히 할 수 없다를 뜻한다. 주님만으로부터 이 일이 거행된다는 인정이 지금 이어진다.

보라 리브가가 네 앞에 있다. 그녀를 데리고 가서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당신의 주인의 아들의 여인이 되게 하시오. 이는 동의함이 주님으로부터 영감되었음을 의미한다. 여기서도 몇 단어들의 설명으로 알려진다. 이는 내적 의미에서 일반적 결말이다. 이 경우는 이렇다: 주님께서 세상에서 살으셨을 때, 그분은 자신의 힘으로 자신 안의 인간을 신성으로 만드셨다. 인간은 가장 깊은 합리성에서 시작한다; 그리고 여기서 어떻게 그분이 이 신성을 만드셨는지를 기술하고 있다; 즉 이것은 선 측면에서 먼저 행해지고, 그 다음 진리 측면에서도 행해진다; 그 이유가 합리성은 선과 진리로 구성되기 때문이다. 거기 있는 선은 그분의 신성 자체로부터, 즉 그분을 임신시킨 여호와 아버지로부터 였다; 그러나 진리는 여느 인간의 경우같이 통상적인 경로에서 획득되어진다.
잘 알려진 바, 인간은 합리성에서 태어나지지 않는다는 것, 그러나 합리적 인간이 되어가는 수용 능력만을 가지고 태어난다는 것; 그리고 그는 기억 속의 지식들을 통하여, 즉 많은 종류의 지식들을 통하여 합리적 인간이 되는데, 첫 번째의 것이 그 다음의 것에 이어저 가서 마지막으로 주님의 왕국 속의 영적인 것들에 관한 지식들까지, 즉 교리적인 것이라 불리는 것에 까지 이르른다. 이것들은 일부는 신앙의 교리로부터, 다른 일부는 말씀으로부터, 또는 인간 스스로의 연구로부터 배워진다. 이는 누구나 포함되는 바, 익히 알 것이다. 이 교리적인 것들이 기억에서만 있는 한, 그것들은 기억 속의 지식의 형체로 있는 진리들일 뿐이다; 또한 그것들은 인간 당사자에게 자기 것이 되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그가 삶을 위해 그것들을 사랑하기 시작할 때, 특히 삶에 응용할 때, 그것들은 처음 동안은 그의 것이 되어 있다. 이것이 실행되었을 때, 진리들은 자연적 기억으로부터 일으켜져서 합리성 안으로 입문하고, 거기서 선과 결합되어진다; 그리고 그것들이 결합되었을 때, 그것은 더 이상 기억 속의 지식이 아니고, 생명의 진리이다. 그 이유가 그때 인간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진리로부터 배우지 않는다, 그는 그것들로부터 살고 있다, 그러므로 진리들은 그에게 어울리고 자기 것이 되어 의지 속에 있다. 고로 인간은 천국의 결혼에 들어 간다. 그 이유가 천국의 결혼은 합리성 안에서 선과 진리의 결합이기 때문이다. 이런 사항들을 주님께서는 인간들에게 펼치신다.
그러나 주님은 자신 안에서 이 모든 것을 그분 스스로 하셨다; 그리고 신성 자체로부터 그분은 선 측면에서의 합리성을 태어나게 하셨을 뿐만 아니라 이를 통하여 진리 측면의 합리성도 태어나게 하셨다. 이 진리를 그분은 선과 결합되게 하셨다. 그 이유가 선은 그 자체를 위해 진리를 선택하여 선을 위한 형체를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선은 진리에게 동의함밖에 더 이상 요구하지 않는다. 이 방식에서 주님이신 신성한 선은 그 자체를 위해 진리를 만드신다; 그리고 그분으로부터 인 신성과 일치하지 않는 진리는 인정하지 않으신다. 고로 그분은 일반적, 특수적 모든 측면에서 모든 것을 그분 자신의 힘으로 이루셨다. 이런 모든 것이 이것은 주님만에 속하고, 주님으로부터 영감되어 동의함을 수단으로 있었다에 의미되어 있다.

52-54절. 아브라함의 종이 이 말을 듣자, 그는 자신을 땅 쪽으로 구부려 여호와를 경배했다. 53 그리고 그 종은 은 그릇과 금 그릇, 그리고 의복을 가져와서 리브가에게 주었다. 그리고 그는 그녀의 오라비와 그녀의 어머니에게도 귀중한 것들을 주었다. 54 그리고 그들은 먹고 마셨다, 그와 함께 온 사람들도 먹고 마셨다. 그리고 그들은 밤을 보냈다. 그리고 그들은 아침에 일어났다, 그리고 그는 말했다, 저를 제 주인에게 보내주십시오.

아브라함의 종이 이 말을 듣자, 그는 자신을 굽혀 여호와를 경배했다. 이는 자연적 인간 안에서 기쁨(joy)을 지각함을 의미한다. 이는 “말들을 들음”의 의미가 지각하는 것이다로부터; 그리고 아브라함의 종이 합리성을 섬기는 만큼에서(여기서는 신성임) 일반적인 자연적 인간을 표현한다로부터; 그리고 “자신을 굽혀 여호와를 경배함”이 기뻐 환호함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리고 그는 은 그릇과 금 그릇, 그리고 의복을 가져와서… 이는 진리와 선, 그리고 그것들을 꾸며주는 것들을 의미한다. 이는 “은 그릇, 금 그릇, 의복들”의 내적 의미로부터; “은 그릇”과 “금 그릇”이 여기서 언급되는데, 그 이유는 그것들이 “리브가”인 진리에 대한 애착을 서술하기 때문; 그 이유가 진리 자체만에 주목한다면, 그것은 선을 담는 그릇이다; 특별히 “은 그릇”은 기억 속의 지식이다. 그 이유는 이것들이 진리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특별히 “금 그릇”은 진리들이다, 그 이유는 진리들은 선을 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의복들”은 꾸미는 것들을 표시한다. 이는 설명 없어도 이해가 무난할 것이다. 고대 시대 때에 이와 같은 것들은 처녀가 약혼할 때 처녀에게 주어졌다; 그리고 약혼한 처녀가 선과 결합되는 교회의 진리를 표현하고 의미했기 때문에 선물되었다. 고대 교회의 처음 시기가 이렇게 묘사되어 있다. 에스겔서에서:
사랑스러운 때이었을 때, 나는 너를 수놓은 옷을 입혔다, 나는 고운 아마포로 허리를 둘러 주었다, 그리고 비단으로 덮었다, 나는 너를 장신구로 꾸며주었다, 그리고 나는 네 손에 팔 찌를 끼우고, 네 목에는 목걸이를, 귀에는 귀고리를, 네 머리에는 장식한 관을 씌웠다. 그리 하여 너는 금과 은으로 치장하였다, 그리고 네 의복은 고운 아마포와 비단과 수 놓아 짠 천이었다. (겔. 16:8-13).
위와 동일한 교회가 진리와 선에서 타락했을 때, 같은 장에서 이렇게 묘사된다:
너는 네 의복을 가져가서, 너를 위해 다채로운 색깔로 산당들을 만들었다; 너는 내가 네게 준 내 금과 은으로 된 장식품의 그릇들을 가져다가 남자의 형상을 너를 위해 만들었다; 그 리고 너는 수놓아 만든 네 의복들을 가져다가 그것들을 입혔다 (겔. 16: 16-18).
이 구절로부터 분명하게 나타나는 것은, “은, 금, 그리고 의복들”은 교회 속에 있는 것을 표시한다는 것, 즉 진리와 선, 그리고 진리와 선으로부터 있는 것들을 표시한다.

…리브가에게 주었다. 이는 이것들은 진리에 대한 애착 속에 있었음을 의미한다. 이는 리브가의 표현이 진리에 대한 애착이다로부터 분명해진다. 방금 앞에서 서술한 은 그릇, 금 그릇, 의복들이 신부로서의 진리에 대한 애착을 묘사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 말들에 의해 그 당시 진리에 대한 애착이 있었음이 의미된다; 또는 같은 말로 진리에 대한 애착 속에 있었던 것들을 의미한다.

그는 귀중한 것을 그녀의 오라버니에게 주었다. 이는 거기로부터 있는 자연적 선을 위한 영적인 것들을 의미한다. 이는 “귀중한 것”의 의미가 영적인 것이다로부터 알게 되는데, 이에 관해 아래에서 살핀다. 그녀의 “오라버니”는 자연적 선을 의미함으로부터; 그리고 여기서 오라버니인 라반 역시 자연적 인간에 있는 선에 대한 애착을 의미함으로부터 알려진다. “귀중한 것”이 영적인 것을 의미한다는 것은 말씀으로부터 분명해진다, 요셉을 취급하는 곳인 모세의 책에서:
그의 토지는 여호와께로부터 복받아 있을 것이다, 그 이유는 하늘의 귀한 것 때문에, 이슬 때문에, 그리고 아래 놓인 깊음 때문이다; 그리고 태양의 생산의 귀한 것들 때문에, 그리고 매 달 성장하는 귀한 것 때문에, 그리고 영원한 언덕들의 귀한 것 때문에, 그리고 땅의 귀 한 것 때문에, 그리고 그로부터의 충만함 때문에이다 (신. 33:13-16);
위에서 “하늘의 귀한 것, 태양의 생산의 귀한 것, 매 달 성장하는 귀한 것, 영원한 언덕들의 귀한 것, 그리고 땅의 귀한 것”에 의해 영적인 것들의 다양한 종류들이 의미되었다. 더 나아가 귀중하다 불리운 것들인 보석, 진주, 유향, 향료, 등등 같은 것도 모두 영적인 것들을 의미한다.
영적인 것들이 무엇인지는 이미 여러 번 말해 왔다. 즉 주님의 왕국 안에 있는 천적인 것들과 영적인 것들인데, 천적인 것들은 선에 속한 것, 영적인 것들은 선에서 파생되는 진리에 속한 것이다. 선과 진리에 관련되지 않는 것은 우주에 없다; 사용함 속에 있는 무엇이든, 생명 속에 있는 무엇이든 선에 관련된다; 그러나 교리 속에, 기억 속의 지식 속에 있는 것은 특히 삶과 사용됨에 관련하여 진리에 관련된다; 또는 같은 것으로, 의지 속에 있는 무엇이든 선, 또는 악이라 불리운다; 이해력 속에 있는 무엇이든 진리 또는 거짓이라 불리운다; 그러므로 선은 사랑과 선행 속에만 있다, 그리고 이것은 주님으로부터 흐르는 바, 천적 수준이다; 이에 비해 거기로 있는 진리는 영적 수준이다. 신부가 되어 가는 그녀 위에 은 그릇, 금 그릇, 의복들이 자매에게 주어지는 한편, 귀한 것들이 형제에게 주어진 이유는 자연적 인간에 있는 선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선은 진리가 선 안으로 입문을 개시하고 합리성에서 결합될 때 계발되어진다; 그 이유가 자연적 인간에 있는 진리와 선의 계발은 합리성으로부터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녀의 어머니에게도.. 이는 자연적 진리를 위한 영적인 것들을 의미한다. 이는 “어머니”의 의미가 교회임에서, 여기서는 진리로부터 “어머니”라 불리운다. 진리가 선 안으로 입문을 개시하고 합리성에서 선과 결합하는 사실로부터 자연적 선과 자연적 진리가 어떻게 영적인 것들을 가지는 지에 대해서 살펴보자. 모든 인간은 내적 인간과 외적 인간을 가지고 있다; 그의 내적 측면은 내적 인간이라 불리우고, 그리고 그의 외적 측면은 외적 인간이라 불리운다; 그러나 내적 인간이 무엇인지, 외적 인간이 무엇인지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내적 인간은 영적 인간과 같은 말이다, 그리고 외적 인간은 자연적 인간과 같은 말이다; 영적 인간은 천국의 빛으로부터 있는 것들로부터 이해하고 슬기로워져 있다. 자연적 인간은 세상의 빛으로부터 있는 것들로부터 이해하고 슬기롭다. 그 이유가 천국에는 영적인 것밖에 없고, 세상에는 자연적인 것밖에 없기 때문이다. 인간은 자신 안에 영적인 것들과 자연적인 것들을 지니도록, 즉 영적 인간과 자연적 인간을 가지도록 창조되었기 때문에, 그는 하나로 동의하거나 만들어야 한다; 그러나 이 경우에서 영적 인간은 자연적 인간에 모든 것들을 배치해야 한다, 그리고 자연적 인간은 종과 주인의 관계 같이 순종해야 한다.
그러나 타락으로 자연적 인간이 영적 인간 위에 올라섰다, 고로 신성한 질서 자체가 거꾸로된 것이다; 이로부터 자연적 인간은 자체를 영적 인간으로부터 분리했다, 그리고 갈라진 틈새를 통하여 들어오는 수준 정도 외에는 어떤 영적인 것들도 소유하지 않았다, 또는 생각하고 말함을 번드러지게 하기 위해 필요한 약간만을 빌려다 쓰는 수준 정도에서만 영적인 것을 지녔다. 그러나 영적인 것들이 다시 자연적인 것들을 통하여 흐르게 하려면, 자연적 인간은 주님에 의해 거듭나져야 했다; 즉 자연적 으로부터의 진리가 입문을 개시하여 합리성에 있는 선과 결합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결과될 때, 영적인 것들은 자연적인 것들에 오고, 이때 천국의 빛들이 흘러들어 자연적 인간에 있는 것들을 계발한다; 그리고 그것들이 빛을 받게 한다; 합리성에 있는 선은 빛의 열, 즉 사랑과 선행이다; 그리고 진리는 빛의 광선, 즉 신앙이다; 이 경로에서 자연적 선과 자연적 진리는 영적인 것들을 받는다. 이런 모든 경우에서 자연적 선은 영적인 것을 섬기는 것을, 이웃에 선행을, 공공의 복지를, 주님의 왕국을, 무엇보다 주님에 속한 것을 목적으로 삼음으로부터 모든 기쁨과 즐거움을 향유한다; 그리고 자연적 진리는 이런 일들을 행함에 슬기로워지는 것을 목적으로 가지는 모든 기억 속의 지식과 교리이다.

그리고 그들은 먹고 마셨다. 이는 입문한(초보적인) 선과 진리를 자기 것이 되게 함을 의미한다. 이는 “먹다”의 의미가 교통하고 결합함, 고로 자기 것이 되어짐이다로부터; 그리고 이것이 빵을 서술할 때, “빵”에 의해 선을 자기것이 되게 함이 의미된다. 선을 자기 것이 되게 함이 “먹다”에 의해 의미된다; 그리고 “마시다”의 의미 역시 교통하고 결합하는 것이다, 고로 자기 것이 되게 함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것이 포도주를 서술할 때, “포도주”에 의해 진리가 의미되는 바, 진리를 내 것 되게 함이 “마시다”에 의해 의미된다. 여기서의 경우는 이미 말했다, 즉 진리가 선 안으로 입문을 개시하고 더 나아가 합리성에서 선과 결합될 때 영적 인간의 선과 진리, 즉 영적인 것들은 자연적 인간에게 어울려져 자기 것이 되어진다.

그와 함께 온 사람들. 이는 이 말들이 자연적 인간 안에 있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여기서 “그”인 종이 자연적 인간을 표현하는 것으로부터; 그리고 “그와 함께 온 사람들”이 자연적 인간에 있는 모든 것들이다로부터 알려진다.

그들이 밤을 보냈다. 이는 그 원인으로부터의 평화를 의미한다. 이는 “밤을 보냄”의 의미가 쉬는 것인 바, 내적 의미에서는 평화를 의미한다. 이 경우는 이렇다: 영적인 것들이 자연적인 것들에 어울려질 때, 불안하게 한 것인 악의 탐욕과 거짓의 확신에 속하는 것들은 물러간다; 그리고 선과 진리에 속하는 것들, 즉 평화를 주는 것들이 접근되어진다; 그 이유가 모든 불안은 악과 거짓으로부터, 모든 평화는 선과 진리로부터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아침에 일어났다. 이는 등차가 승강됨을 의미한다. 이는 “일어남”의 의미가 승강함을 포함하는 바로부터; 그리고 “아침”의 의미가 주님, 또한 그분의 왕국임으로부터, 또한 거기로부터 파생되는 평화의 상태를 의미함으로부터 알게 된다. 영적인 것들이 자연적인 것들에 어울려질 때, 자연적인 것들이 “승강된다”라고 말해진다; 그 이유가 모든 승강함은 영적, 천적인 것들로부터 이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이것들을 수단으로 인간은 천국을 향하여, 주님께로 더 가까이 승강되어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말했다, 저를 제 주인에게 보내 주십시오. 이는 결합하고 싶은 마음(결합에 대한 애착)을 의미한다. 이는 이 말의 내적 의미로부터 결과되는 일반적 의미로부터 분명해진다; 그 이유가 자기 주인에게 보내지기를 그가 바램은 리브가인 진리에 대한 애착이 결합되도록 하기 위하여서 이다; 그 이유가 입문이 개시됨인 약혼은 이미 성취되었기 때문이다; 고로 결합에 대한 애착이 여기서 의미된다.

55-58절. 그리고 그녀의 오라버니와 그녀의 어머니가 말했다, 이 소녀가 날들, 적어도 열흘 동안 우리와 남아 있게 해 주시오. 그 후에 당신은 가시오. 56 그리고 그는 그들에게 말했다, 저로 하여금 지체하지 않게 하소서, 그리고 여호와께서 제 길을 순탄하게 하셨습니다. 나를 보내 주십시오, 그리고 저는 내 주인에게 돌아 갈 것입니다. 57 그리고 그들은 말했다, 이 소녀를 불러서 그녀의 입(mouth) 에 문의합시다. 58 그리고 그들은 리브가를 불렀다, 그리고 그녀에게 말했다, 너는 이 사람들과 함께 갈 것이냐? 그리고 그녀가 말했다, 나는 갈 것입니다.

그녀의 오라버니와 그녀의 어머니가 말했다. 이는 자연적 인간이 의심함을 의미한다. 이는 오라버니(형제)의 의미가 자연적 인간에 있는 선이다로부터; 그리고 “어머니”의 의미가 거기 있는 진리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결과적으로 “형제”와 “어머니”는 자연적 인간을 의미한다; 그 이유는 자연적 인간도 선과 진리로 구성되기 때문이다; 거기에 의심이 있는 것, 즉 소녀가 며칠 더 있을 것인지, 또는 즉각 그들과 떠날 것인지에 대하여 의심이 있는 것은 분명하다.

이 소녀가 우리들과 함께 남아 있게 해 달라. 이는 자연적 인간이 붙듦을 의미한다. 이는 “남아 있게 하라”가 여기서는 붙드는 것을 뜻하는데, 내적 의미의 시리즈로부터도 분명해진다. 이 경우는 이렇다: 인간은 어떤 진리 안에서도, 자연적 진리 안에서조차 태어나지 않는다. 즉 훔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등등의 자연적 진리 수준에서도, 더욱이 영적 진리 수준, 즉 하느님은 계신다, 인간은 사후 살게 되는 내적 인간을 가지고 있다는 등등의 영적 진리를 지니고는 더 더욱 태어나지 않는다. 고로 자신으로부터서 영원한 삶에 관련되는 것을 아는 것은 하나도 없다. 인간은 두 종류의 진리를 배운다, 그렇지 않다면 들짐승보다 상황이 더 안 좋을 것이다; 그 이유가 그의 유전적 본성으로부터 그는 무엇보다 자신을 사랑하고, 세상에 있는 전부를 소유하려 들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가 시민법들에 의해, 명예의 손실에 대한 걱정, 목숨을 잃는 것에 대한 걱정을 수단으로 억류되지(붙들려 있지) 않으면, 그는 양심의 어떤 지각 없이도 훔치고, 살인하고 간음질을 서슴치 않을 것이다. 이에 대해 누구도 반박하지 않을 것이다; 그 이유가 인간은 교육된 상태에서 조차 양심 없이 위의 범죄를 저지르기 때문이다. 게다가 교육의 부산물인 지식의 향상을 가지고 자신의 범죄를 방어하고 여건만 되면 둘러댄 증거로 합리화해 버린다. 교육되고도 그럴진대, 만일 교육이 없었다면, 과연 인간은 무슨 짓을 할까? 이런 경우는 영적인 것들에서도 동일하다; 그 이유가 교회 내에서 태어나지고, 말씀을 가지고 있고, 교육도 받은 이들인데도, 여전히 많은 사실을 두고 하느님께로 보다는 자연의 탓이라고 하는 경우도 많기 때문이다. 이들은 어떤 하느님이 존재한다에 대해 심정에서 믿지 않는다, 고로 사후 삶을 믿지 않는다. 그러므로 영원한 삶에 관한 어떤 것을 배우기를 원하지 않는다.
이상으로부터 분명해지는 바, 인간은 진리 없음에서 태어난다는 것, 그러나 그는 배워서 모든 것을 가진다는 것, 그리고 이 배움은 외적 경로를 수단으로, 즉 듣고 보고 하여서 이다는 것이다. 이 방식을 수단으로 진리는 은근히 주입되어 그의 기억 안에 심어진다; 그러나 진리가 기억에만 있는 한, 그것은 기억 속의 지식일 뿐이다; 진리가 널리 퍼지기 위하여서는 진리는 기억 속의 지식에서 일으켜져서 내면쪽으로 운반되어야 한다. 그 이유가 인간은 그의 합리적 측면에서 더 내적이기 때문이다; 또한 그가 합리적이지 않으면, 그는 인간이 아니다; 그러므로 그의 합리성의 품질과 분량에 따라 인간의 품질과 분량도 결정되는 셈이다. 인간은 그가 선을 소유하지 않으면 합리적 인간이 가능할 수 없다. 선 때문에 인간은 동물들을 능가하여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한다; 인간의 모든 선은 이 두 사랑으로부터 존재한다. 이 선 안으로 진리는 입문하여 결합되어야 하고, 이것은 합리성에서 거행된다. 인간이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할 때, 그의 진리는 이 선 안으로 입문하여 그 선과 결합한다; 그 이유가 진리가 선 안으로 들어가는 그때, 선과 진리가 서로를 인정하는 만큼에서, 모든 진리는 선으로부터 있고, 선을 진리의 목적으로, 진리의 혼으로, 진리의 근원으로 여겨 중요시한다.
그러나 진리가 자연적 인간으로부터 합리성쪽으로 승강을 위해 분리됨에서 곤경이 뒤따르지 않을 수 없다; 그 이유가 자연적 인간 안에는 오류들, 그리고 악의 탐욕들, 거짓의 설득력과 확신들 같은 것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들이 거기에 있고, 거기 있는 진리와 인접되어 있는 한, 그만큼 자연적 인간은 진리를 자신과 더불어 있게 붙든다. 즉 진리가 합리성쪽으로 승강함을 내버려두지 않는다는 말이다. 이런 의미가 “소녀가 우리와 더불어, 날들, 적어도 열흘을 남아 있게 하라, 그후 가게 하라”에 담겨 있다. 위와 같은 이유로 자연적 인간은 진리를 의심 속에 놓아두고, 그것이 그런지 여부를 따져보려 한다; 그러나 악의 탐욕들과 거짓의 설득력, 그로부터 파생되는 오류들이 주님에 의해 분리되자 마자, 그리고 인간이 진리가 추론당하는 것을 선으로부터 싫어하기를 시작할 때, 자연적 인간의 의심을 넘어서고, 진리는 자연적 인간을 떠나 합리성 안으로 승강할 상태에 진입해 있다; 이때 진리는 선이 되어가고 생명을 가지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더 나은 납득을 위해 예를 들어보자. 모든 선은 주님으로부터 이고, 모든 악은 지옥으로부터 이다는 영적 진리를 놓고 생각해보자: 이 진리가 자연적 인간으로부터 합리성 안으로 승강될 수 있기 전, 이 진리는 많은 방법들에서 확증되고 예증되어야만 하고, 인간이 하느님을 사랑함 안에 있을 때까지, 이 진리는 합리성 안으로 승강되지 못한다; 그 이유가 이전에 이 진리가 인정되지 않으면, 믿어지는 것도 없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는 다른 진리들에서 비슷하다, 즉 신성한 섭리는 아주 단순한 사항들에서도 존재한다고 하는 영적 진리에 주목해도 마찬가지이다. 즉 단순한 사항들 안에 신성한 섭리가 있지 않으면, 누구나 생각하는 보편적(넓은 측면의) 섭리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다시: 이 세상에서의 삶이 삶의 전부이다고 믿는 것이 멸해질 때, 그는 최초로 (진짜로) 살기를 시작한다는 진리; 그리고 그때 그가 받는 삶은 말로 표현할 수 없고 무한정한 세상이다는 진리에 주목해보라; 그러나 악 안에 있는 한, 그는 이런 진리에 통째로 무지해 있는다. 그 이유는 그가 선 안에 있지 않는 한, 이런 진리, 이와 유사한 진리는 결단코 믿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당사자로 하여금 이런 진리를 납득하게 하는 것은 선이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주님께서는 선을 통하여 지혜와 함께 흘러드시기 때문이다.

날들, 적어도 열흘, 그 후에 당신은 가시오. 이는 자연적 인간에게 충분히 나타나는 떠남을 위한 상태를 의미한다. 이는 “날들”의 의미가 상태이다로부터; 그리고 “10”의 의미가 충분한 것이다로부터; 여기서는 자연적 인간에게 충분히 나타남이다; 그리고 “가다”의 의미가 떠남이다로부터 알려진다. 이로부터 분명한 바, “날들, 적어도 열흘, 그 후에 당신은 가시오”는 그들에게 충분히 나타나는 떠남을 위한 상태를 의미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어진다, “그가 그들에게 말했다, 나는 지체할 수 없습니다”, 이를 수단으로 선에 대한 애착의 뜻이 의미되어진다.

그리고 여호와께서 내 길을 순탄하게 하셨다. 이는 모든 것들이 이제 설비되었음을 의미한다. 이는 설명이 필요치 않을 것이다; 그 이유가 “여호와께서 길을 순탄하게 하다”는 그분이 설비하심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선에 결합될 진리 측면에 관하여서 이다; 그 이유가 “길”에 의해 진리가 의미되기 때문이다.

나로 떠나 보내소서, 그리고 나는 내 주인에게 가리이다. 이는 선 안으로의 입문이 개시됨의 상태에 관련하여를 의미한다. 이는 이 말들의 내적 의미로부터 결과된다. 이 말은 결합에 대한 애착도 의미한다. 그 이유는 이 애착이 입문이 개시됨에 속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이 말했다, 우리가 소녀를 불러서 그녀의 입에 물어보자. 이는 진리에 대한 애착만으로부터의 동의를 의미한다. 이는 “소녀”의 의미가 순진이 안에 있는 애착이다로부터; 여기서는 진리에 대한 애착이다, 그 이유는 소녀가 리브가이기 때문인데, 그녀는 동의함이 있기 전, 소녀라 불리우고, 동의함이 있자, 리브가라 불리운다; 그리고 “그녀의 입에 물어 봄‘의 의미가 여기서 의미되는 진리에 대한 애착만의 동의함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 경우는 이렇다: 진리 자체, 이것이 선 안으로 입문을 개시하는 바, 그것 자신의 선을 인정하고 있다; 그 이유는 선이 그것 자신의 진리를 인정하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동의함이 오고 있다, 그러나 선으로부터 진리에 영감된 동의이다. 인간에게 진리가 선 안으로 입문을 개시하고 선과 결합될 때(즉 거듭날 때), 진리쪽의 어떤 동의함도 나타나지 않는다, 또한 선쪽이 그것 자신의 진리를 아는 것도, 그리고 그 자체에 진리를 입문시키고 결합하는 것도 나타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이런 과정들은 이 경로에서 정밀하게 결과된다; 그 이유가 인간이 거듭나는 동안 거행되는 것들은 인간에게 통째로 알려져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가 설사 미세한 것 하나라도 알았다 하면, 너무나 놀랄 것이다. 이 경로는 무수하고, 진실로 무수하게 비밀한 것들인 바, 인간이 주님의 인도하심으로 거듭나는 때에, 오직 말씀의 내적 의미의 극히 일부가 당사자에게 빛을 내고 있을 뿐이다.
고대 교회는 결혼들로부터 여러 가지 생각들을 자체를 위해 만들어 냈다; 즉 약혼 이전 처녀의 상태로부터, 약혼 후의 그녀의 상태로부터, 그녀가 결혼식을 올리게되었을 때 그녀의 상태로부터, 그녀가 결혼식을 끝낸 후의 그녀의 상태로부터, 마지막으로 그녀가 남편에게 자손을 낳았을 때 그녀의 상태로부터 이다; 그들은 선으로부터 진리의 열매들, 또는 선행으로부터 신앙의 열매들을 자녀로 불렀다, 등등의 생각이다. 이와 같은 생각이 고대 교회의 지혜였다; 그들의 책들은 이런 방식에서 쓰여졌다; 그리고 이런 저술하는 방법이 그들로부터 이방인들에게도 전하여졌다; 그 이유가 그들의 바램이 천국에 있는 것들을 세상에 있는 것들을 가지고 표현하는 것, 그리고 실로 자연적인 것들로부터 영적인 것들을 보는 것이었다; 그러나 오늘날 이 지혜는 모두 잃어졌다.

그리고 그들이 리브가를 불렀다, 그리고 그녀에게 말했다, 너는 이 사람과 함께 갈 것이냐? 그리고 그녀가 말했다, 가겠나이다. 이는 동의가 충분함을 의미한다. 이는 말들의 내적 의미로부터 결과되는 것으로부터 분명해진다; 그 이유가 질문에 그녀가 (단호하게) “나는 갈 것이다”라고 대답했을 때, 이것은 그녀가 충분하게 동의함을 표시하기 때문이다. 진리의 충분한 동의는 진리가 선의 형상을 본질적으로 지각할 때 주어지고, 이 동의함은 진리를 있게 한 선 안에서의 그것만으로 있는 초상화(肖像畵, 인형, effigy) 자체이다.

59-61절. 그리고 그들은 그들의 누이 리브가, 그리고 그녀의 유모, 그리고 아브라함의 종과 그의 사람들을 떠나 보냈다. 60 그리고 그들은 리브가에게 복을 빌어 주었다, 그리고 그녀에게 말했다, 우리의 누이야, 너는 천만 인의 어미가 되라, 그리고 네 씨가 너를 미워하는 자들의 문을 상속받으라. 61 그리고 리브가는 일어났다 그리고 그녀의 소녀들, 그리고 그들은 낙타를 탔다, 그리고 이 사람을 따라갔다, 그리고 그 종은 리브가를 데리고 갔다.

그들은 그들의 누이 리브가를 떠나 보냈다. 이는 신성한 진리에 대한 애착으로부터 분리됨을 의미한다. 이는 “보냄”의 의미가 분리됨이다로부터; 그리고 누이 리브가의 표현이 신성한 진리에 대한 애착이다로부터 알려진다. 이 경우가 어떤 경우일지는 앞 구절들에서 반복해 말해왔다. 그러나 이 장의 주제를 더 명백히 해 보자는 취지에서 몇마디 말을 보탤 것이다. 선 안으로 입문함을 개시하고 선과 결합하는 진리가 자연 평면으로부터 승강하였을 때, 이 진리는 자연 평면으로부터 분리되어진다; 그리고 이 분리됨이 그들의 누이 리브가를 떠나보냄에 의해 의미되어 있다. 인간이 진리로부터 더 이상 선을 중요시하지 않고, 선으로부터 진리를 중요시할 때, 같은 말로, 인간이 교리로부터 생활을 더 이상 중요시하지 않고 생활로부터 교리를 중요시할 때 진리는 분리되어진다. 예를 들면: 교리가 우리는 누구를 증오해서는 안된다는 진리를 가르친다; 그 이유는 누군가를 증오하고 있으면, 그는 매 순간 그를 죽이는 셈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초기 삶에서 인간은 이런 교리를 거의 인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가 나이가 들고 개혁되어 가면서, 그는 이 교리를 그것에 따라 살아야할 교리로 간주한다. 그는 그것에 따라 살아간다. 그때 그는 교리로부터 더 이상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생명으로부터 행동하고 있다. 이런 단계에 접어들면, 교리 속의 이 진리는 자연 평면의 수준으로부터 승강되고, 실로 자연적인 것들과 분리되어지고 합리성에 있는 선 안에 심어진다; 그리고 이런 결과 그는 그 진리에 의구심을 품도록 궤변적 논법을 동원하는 자연적 인간을 내버려두지 않는다; 그렇다, 그는 자연적 인간이 이 진리를 추론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녀의 유모. 이는 이 애착에 속하는 순진으로부터를 의미한다. (리브가에 딸린 식솔들, 유모, 소녀들 등도 리브가를 떠나보내는 것과 같은 방식에서 였다.) 이는 “유모”, 즉 젖을 빨리는 자의 의미가 순진인 바로부터 알게 된다. 젖은 빠는 이들, 그리고 젖을 주는 이들에 관해서 반복된 언급이 말씀에서 만들어져 있다. 전자에 의해서는 유아들의 처음 상태가 의미되는 바, 이 상태는 순진의 상태임에 틀림 없다; 그 이유가 첫 출생에서 인간은 순진의 상태 안으로 들여진다, 이는 이 상태가 계속되는 모든 상태들을 위한 평면(바탕)이 되도록 하기 위하여서 이다. 그리고 상태들 중에서 가장 깊은 곳에 위치한다; 이 상태가 “젖을 빰”에 의해 말씀에서 의미되어 있다. 그 다음 그는 천적 선에 대한 애착의 상태, 이 상태가 유아들과 더불어서는 자기 부모를 사랑하는 상태이고 이 상태 안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이 상태가 “유아들”로 말씀에서 의미되고 있다. 후에 그는 영적 선에 대한 애착의 상태, 또는 서로의 사랑에 대한 애착, 즉 이웃을 향한 선행에 대한 애착의 상태 안으로 들여진다. 이 상태는 “소년들”에 의해 의미되고 있다. 그가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그는 진리에 대한 애착의 상태 안으로 들어가진다, 이 상태는 “젊은 이들”로 의미되고 있다; 그리고 이어지는 상태는 “사람들”, 마지막으로 “노인들”인데, 이 상태는 지혜의 상태이고, 이 상태 안에 유아의 순진이 있다; 고로 처음 상태와 마지막 상태는 하나가 되어 있다; 그리고 인간은 늙을 때, 다시 어린 아이가 된다, 그러나 슬기롭고 주님의 왕국 안으로 이끌어 들여진다.
이상으로부터 분명한 바, 순진이 처음 상태이고, 이는 젖을 빠는 아이의 상태이다는 것이다. 이로부터 아이에게 젖을 주는 여인도 순진을 의미해준다; 그 이유가 이 둘은 주는 자와 받는 자의 관계, 둘 다 행동자이고 이쪽이 행동하면 저쪽도 비슷하게 행동한다. 여기서 유모 역시 보내졌다고 말해진다. 이는 진리에 대한 애착이 순진으로부터 였다가 묘사되게 하려는 의도가 엿보인다. 그 이유가 진리에 대한 애착은 그것 안에 순진이 있지 않으면, 엄밀히 말해서 진리에 대한 애착이 아니다; 그 이유는 순진을 수단으로 주님은 이 애착 안으로 흘러들고, 실로 지혜와 더불어 흘러드시기 때문이다. 진정한 순진은 지혜 자체이다; 그리고 천사들의 눈에서 순진에 있는 이들은 유아들로서 나타난다.
말씀에서 “젖을 빠는 아이”가 순진을 의미하는 것을 읽어볼 수 있다. 다윗서에서:
아기들과 젖먹이들의 입으로부터 당신께서는 강함을 발견하셨습니다 (시. 8:2; 마. 21:16);
위에서 “아기들”은 천적인 사랑을, “젖먹이”는 순진을 표시한다. 예레미야서에서:
어찌하여 너희는 너희 혼들을 거슬려 큰 악을 범하여, 유다 가운데에서 유아와 젖먹이, 너 희로부터 남자와 여인을 멸절하여, 내가 너희에게 아무 것도 남기지 않게 하려드느냐? (예. 44:7);
위에서 “유아와 젖먹이”는 앞 구절과 같이 천적인 사랑과 순진을 표시한다; 그리고 이것들이 하나도 없게 될 때, 거기에는 어떤 “리메인스”도 더 이상 있지 않다는 것, 즉 내적 인간 안에 주님에 의해 저장된 어떤 선과 진리도 있지 않다는 말이다; 그 이유가 모든 선들과 진리들은 순진과 더불어 멸해지기 때문이다. 순진은 신성 자체로부터 직접적으로 있는 바. 그것들 모두 안에서 본질 자체이다.
다시:
유아와 젖먹이가 성의 거리에서 실신하고 있다 (애. 2:11);
위 구절도 의미는 같다. 다시:
고래들이 가슴을 꺼낸다, 그것들은 자기들의 어린 것들에 젖을 먹인다; 내 백성의 딸이 잔 인하게 되었다; 젖먹이의 혀가 목이 타서 그의 입의 지붕에 들러붙었다; 어린 아이들이 빵 을 찾고 있다, 그리고 아무도 그들에게 그것을 가져다 주지 않는다 (애. 4:3, 4);
“젖을 먹음”은 순진을 표시한다; “어린 아이들”은 선에 대한 애착을 표시한다. 모세의 책에서:
밖에서는 검이, 골방에서는 공포가 젊은 이, 그리고 처녀, 젖먹이, 노인까지 (쓰러지게 할 것이다) (신. 32:25);
“젊은, 처녀, 젖먹이, 노인을 쓰러지게 히는 검”은 거짓이 진리에 대한 애착, 선에 대한 애착을 파괴할 것, 또한 지혜와 더불은 순진도 파괴할 것을 의미한다. 이사야서에서:
그들은 자기들의 품 안에서 네 아들들을 데려올 것이다, 그리고 네 딸들은 어깨로 운반할 것이다, 왕들은 네 자양분을 공급하는 자일 것이다, 그들의 여왕들은 네게 젖을 줄 것이다
(이. 49:22, 23);
위에서 “왕들이 네 자양분을 공급하는 자”란 총명을 표시하고; “여왕은 젖을 줄 것이다”란 순진을 표시한다.

아브라함의 종과 그의 사람들. 이는 자연적 인간 안에 있는 신성한 것들로부터를 의미한다. 이는 “아브라함의 종”의 의미가 자연적 인간이다로부터; 그리고 “그의 사람들”의 의미가 자연적 인간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이다로부터 알려진다; 자연적 인간에 있는 신성한 것들이 의미되는 이유는 종들이 아브라함에 의해 보내졌고, 아브라함은 주님의 신성을 표현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은 리브가에게 복을 빌어주었다, 그리고 그녀에게 말했다. 이는 신성한 계발로부터의 경건한 소원을 의미한다. 이는 여기서의 “복을 빔”은 떠나는 자에게 작별 인사로서 말하는 가운데 있는 성공과 행복을 기원함이다; 여기서 이것들이 신성한 계발로부터 였다는 것은 이어지는 사항들로부터 분명해진다; 또한 “이삭”인 (합리성의) 선 안으로 “리브가”인 진리에 대한 애착이 입문을 개시하고 그 선과 결합할 때, 계발이 자연적 인간 안으로 흐르기 때문이다.

우리의 누이, 너는 천만 인의 어미가 되라. 이는 진리에 대한 애착이 맺는 결실은 무한량임을 의미한다. 이는 리브가인 “누이”가 진리에 대한 애착임으로부터; 그리고 “천만 인을 위해서 임”은 무한량으로 결실이 있음이다로부터; 그 이유는 여기서의 주제가 주님이고, 이 분 안에서 모든 것은 일반적, 세부적 모두에서 무한이기 때문이다. 이 경우가 인간과 더불어서는 이렇다: 인간은 그의 합리성 안에서 진리와 선이 결합할 때까지, 즉 그가 거듭날 때까지 선들은 열매 풍성해지지 않고, 진리는 번성해지지 않는다; 그 이유가 열매들, 자손들은 적법한 결혼, 또는 천국의 결혼으로부터, 즉 선과 진리의 결혼으로부터 세상에 알려지기(출시되기) 때문이다. 이 적법한 천국의 결혼 이전에서는 그들의 선들이 선인 듯, 그들의 진리가 진리인 듯 나타나지만, 실로 그것은 혼 자체를 위한 진짜는 아니다. 즉 그것들은 주님으로부터의 순진이 안에 있는 선이 이전의 선들과 진리들 안에 있지 않았다는 말이다; 고로 그것들은 인간에게 감동을 주지 못하고, 그를 행복하게 만들지도 못한다. 그의 혼에 해당하는 사랑과 선행에 대한 애착, 그로부터의 행복 모두는 그가 거듭날 때,주님으로부터 주어진다.
“천, 1000”은 많은 것, 그리고 무한정인 것을 의미하는데 이미 살핀 바 있다; 그리고 “만, 10000”, 이보다 더 많은 숫자, 즉 “천만, 10,000,000”도 무한정을 의미하는데, 모세의 책에서:
궤가 쉴 때, 모세는 말했다, 여호와시여 이스라엘의 천만 인에게로 돌아오소서
(민. 10:36);
위에서도 “천만”은 무한인 것을 의미하는데, 위에서 “여호와”이신 주님을 서술하기 때문에서이다. 다시: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세일 산으로부터 일어나셨다; 그분은 바란 산으로부터 빛나셨다, 그리 고 천만의 거룩함으로부터 오셨다 (신. 33:2);
위의 “천만” 역시 무한인 것을 표시한다. 다윗서에서:
하느님의 병거들은 천만의 평화를 좋아하는 것들이다 (시. 68:17).
위에서 “하느님의 병거들”은 말씀 속에 있는 것들, 그리고 말씀으로부터 파생된 교리 속에 있는 것들을 표시한다; “천만”은 그 안에 있는 무한히 있는 것들을 표시한다. 계시록서에서:
나는 보았다, 그리고 나는 왕좌를 빙둘러 있는 많은 천사들의 음성을 들었다; 그들의 숫자 는 만의 만, 그리고 만의 천이었다 (계. 5:11);
위는 그들은 셀 수 없이 많다를 표시하고 있다.

그리고 네 씨가 너를 미워하는 자들의 문을 상속 받으리라. 이는 신성한 인간 안에서 있는 선과 진리의 결혼으로부터 주님의 영적 왕국, 이 왕국에서 이전에 악과 거짓이 있던 장소가 선행과 신앙의 장소가 됨을 의미한다. 이는 이미 설명했던 바로부터 알고 있을지 모른다. “씨”는 영적 (인간)이라 불리우는 이들, 보편적 의미에서 주님의 영적 왕국을 구성하는 모든 것들, 또는 같은 말로, 이 왕국 자체를 표시하는데, 이는 “씨”의 의미가 사랑과 선행이다로부터 분명해진다, 따라서 신앙을 통하여 선행 안에 있는 이들이다; 이들이 주님의 신성한 인간 안에서 있는 선과 진리의 결혼으로부터 선행과 신앙을 가진다는 것, 이로부터 그들은 구원을 받는다..
고대 교회에서 약혼한 처녀가 결혼하러 갈 때, 그녀에게 본문 같이 소원을 경건히 비는 것은 관습적이 되었다: 즉 “너는 천만 인을 위해 있어라, 네 씨가 네 원수들의 문을 상속받을 것이다”. 또는 “너를 미워한 자들의…”; 그러나 이 고대 교회의 슬기로운 자들은 위 말들을 수단으로 영적인 것들을 이해했다; 즉 그들이 선과 진리의 결혼으로 들어갔을 때, 같은 말로 그들이 거듭났을 때, 그때 선들과 진리들은 천만의 결실을, 고로 무한하게 결실을 가진다는 것; 그리고 선행과 신앙은 이전에 악과 거짓이 있던 장소를 계승할 것이라고 이해했다; 그러나 고대 교회의 지혜가 종료되었을 때, 그들은 이 경건한 소원으로부터 어떤 영적 의미도 더 이상 받지 못했다, 그 대신 전적으로 세상적 의미만을, 즉 그녀의 자손은 셀 수 없이 많아지라는 것, 이방인들의 토지를 점유하고 상속받으라는 소원 사항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위 소원의 말을 이런 식으로(글자 의미 그대로) 확실히 이해하고 전수받은 자는 아마 야곱의 후손들일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그렇게 실행함으로, 즉 무한정으로 인구를 늘리고, 그들에게 원수들의 문인 토지를 상속받음으로 자신들에게 위의 말을 확인했다; 그들은 위의 말을 포함하여 모든 사항들이 주님의 천적 왕국과 영적 왕국에 관한 표현이다는 것, 이 왕국을 차지했던 악과 거짓들을 축출하고 선과 진리가 들어앉아야 한다는 것을 표현한다는 것을 모르고 있다. 이에 관한 보다 더 자세한 뜻은 차후 주님의 신성한 자비로부터 이런 표현들이 열려질 때 나타날 것이다.
특별한 측면에서, 즉 주님의 왕국이 되어가는 모두 각각의 인간과 더불어서의 경우는 이렇다: 인간은 그가 주님의 왕국이 되기 이전, 즉 거듭나기 이전, 인간 자체로서의 그의 내향적 측면은 악과 거짓밖에 없다; 그리고 지옥적이고 악마적인 영들“문”이라 불리우는 것을 점유하고 있다; 그러나 그가 주님의 왕국이 되어갈 때, 즉 그가 거듭날 때, 악들과 거짓들, 같은 말로, 지옥적인 것과 악마적인 영들이 내몰려지고, 선과 진리가 들어가서 그것들이 있던 자리를 점유한다; 그때 그 사람 안에는 선과 진리의 양심이 있다. 이 경우는 인간 거듭남에 관련된 특별한 측면(일부 사항)에 해당하지만, 일반적 (보편적) 측면에서도 그러하다. 이런 설명을 보탠다면 아마 이 구절의 말들이 이해되었으리라 본다.

그리고 리브가는 일어났다. 이는 진리에 대한 애착의 승강, 그 결과 분리됨, 즉 합리성으로의 승강, 그리고 자연적 평면으로부터 분리됨(떠남)을 의미한다. 이는 “일어남”이 승강함을 함축하고 있음으로부터 알아진다; 또한 승강함은 분리됨을 함축한다. 그리고 리브가의 표현이 진리에 대한 애착이다로부터도 알려진다. 이로부터 “리브가가 일어남”은 진리에 대한 애착이 승강함, 그리고 자연적인 것(평면)으로부터 분리됨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녀의 소녀들. 이는 종속되는 애착들을 의미한다. 이는 리브가가 “소녀(damsel)”로 불리웠을 때, 순진이 안에 있는 진리에 대한 애착을 의미했는데, 이때의 애착의 의미로부터 분명해진다; 그러나 이들 모두는 그녀를 섬기기 위해 그녀를 따라가는 이들인 바, 종속되는 애착을 의미하는 것이다. 모든 애착은 단순한 어떤 것, 또는 하나만 있는 듯 여겨지게 나타나나, 실상 하나의 애착은 무수한 것들을 내포하고 있다. 하나로 나타난 애착 안의 무수한 것들은 납득할 수 없는 형체 안에서 서로 연합하고 연계되어 있다; 그것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종속되어 있기도 하다, 그 이유가 어떤 애착은 섬기고, 섬김을 받은 것은 다시 섬기고 하여 섬기는 고리는 무한히 이어진다고 말하는 편이 나을지 모른다. 천국의 사회들(공동체들“은 이런 모양새로 있고, 전체 천국 역시 마찬가지로 그분 자신 안에 있는 신성한 형체에 따라 주님에 의해 질서적으로 배열, 배치되고 있다. 주님의 영적 왕국의 형체는 그분의 신성한 인간에 있는 애착들의 질서적 배열에 일치하여 나타나고, 세상에도 널리 알려지고 있다. 이 질서적 배열이 이 장과 이어지는 장에서 취급되고 있다. 여기서는 천사들의 지각에서 납득되는 수준 중에서 아주, 아주 적은 것들만이 제시된다고 생각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낙타 위에 올라 탔다. 이는 자연적 기억 속의 지식 위로 승강된 지적 부분을 의미한다. 이는 “탄다”의 의미가 지적 부분에서 승강되는 것이다로부터 ; 그리고 “낙타”의 의미가 일반적 기억 속의 지식이다로부터, 고로 자연적 기억 속의 지식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여기서의 경우는 이렇다: 진리가 합리성 안으로 자연적인 수준으로부터 승강될 때, 이것은 세상의 빛의 영역으로부터 천국의 빛의 영역으로 데려가지는 것이다. 그래서 이것은 밤의 불분명함으로부터 대낮의 명료함에 있는 것과 같다; 그 이유가 모든 자연적인 것들이 있는 세상의 빛은 상대적으로 밤 안에 있는 셈이나, 영적인 것들이 있는 천국의 빛은 상대적으로 대낮에 있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진리가 자연적 수준으로부터 합리성으로 승강할 때, 이와 동시에 인간은 총명과 지혜 안으로도 승강한다. 더욱이 인간과 더불은 모든 총명과 지혜는 이런 근원으로부터 이다. 그래서 자연적 기억 속의 지식 위로 지적 부분이 승강된다고 말한 것이다.

그리고 이 사람을 따라갔다. 이는 자연적 평면에 있는 신성한 진리의 후원 하에를 의미한다. 이는 “뒤쫓아 감”, 또는 “따라 감”이 여기서는 내적 의미에서 “안내”, 또는 “후원” 하에 있다를 의미함에서 알게 된다; 그리고 “사람”의 의미가 진리이다로부터도 알려진다. 여기서는 (주님을 서술하므로) 자연적 평면의 신성한 진리를 의미한다.

그리고 그 종은 리브가를 데리고 갔다. 이는 자연 평면에 있는 신성한 선이 합리성 안의 진리에 입문함을 개시하였음을 의미한다. 이는 “종”의 의미가 자연 평면에 있는 신성한 선이다로부터; 그리고 “리브가를 데리고 갔다”의 의미가 개시되는 것, 즉 이삭에게 소개하는 것, 이삭 안으로 받아들이는 것; 즉 합리성 안에 있는 신성한 선 안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함축하고 있다. 이는 많이 설명되었기에 설명은 생략한다. 여기서의 경우는 이렇다; 자연 평면으로부터의 진리는 자연 평면에 있는 신성한 선과 진리를 통하여서가 아니면 합리성에 있는 선쪽으로 승강될 수 없다; 자연 평면의 신성한 진리가 여기서 “사람”이라 불리는데 이 사람이 길을 보여주고 안내해야 한다; 자연 평면의 신성한 선, 이는 여기서 “종”이라 불리우는데, 합리성의 선에게 소개하고 그 선과 결합을 개시하게 해야 한다. 비교적으로 말해서, 이 둘은 위로 비행하게 하는 두 날개들이다. 그러나 이런 사항들은 아직까지는 납득력에 충분히 열어지지 않고 있다; 그 이유가 자연 평면에 있는 신성한 진리가 무엇인지, 자연 평면의 신성한 선이 무엇인지가 먼저 알려져야 하기 때문이다. 이 주제는 요셉을 취급하는 이 후의 장에서 다루어질 것이다.

62, 63절. 그리고 이삭은 브엘라해로이로부터 오고 있는 곳으로부터 왔다. 그리고 그는 남쪽의 토지에 거주하였다. 63 그리고 이삭은 저물 때에 들판에서 묵상하려고 나갔다. 그리고 그는 자기 눈을 들어 올렸고 보았다, 그리고 보라 낙타들이 오고 있었다.

이삭은 브엘-라해-로이로부터 오고 있는 곳으로부터 왔다. 이는 합리성에 있는 신성한 선은 신성한 진리 자체로부터 태어남을 의미한다. 이는 이삭의 표현이 주님의 신성한 합리성이다로부터; 여기서는 합리성 안에 있는 신성한 선에 관련해서 인데, 그 이유는 엄밀히 말해서는 자연 평면으로부터 일으켜진 신성한 진리(리브가)가 신성한 선과 결합이 아직 안된 상태이기 때문이다; 이 결합은 이어지는 구절들에서 다루어진다; 그리고 “브엘-라해-로이로부터 오는 곳으로부터 오는” 것의 의미가 신성한 진리로부터 태어나지는 것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원어에서 브엘-라해-로이는 “나를 보시는 살아계신 분의 샘”을 의미한다 (창. 16:13, 14) 즉:
하갈이 그녀에게 이야기하시는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 “당신은 나를 보시는 하느님이시 다;” 그 이유가 그녀는, “내가 여기서 나를 보시는 그분의 뒤를 따라 보았던가?” 하고 말했 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녀는 샘을 브엘-라해-로이 (나를 보시는 살아계신 분의 샘) 라 고 불렀다.
위 구절은 16장에서 이미 살폈다; 거기서 “샘”은 신성한 진리임이 분명하다; 그리고 “나를 보시는 살아계신 분”은 합리성에 있는 신성한 선이다, 이것이 합리성에서 신성한 진리로부터 주님의 내면의 인간이라 불리운다. 이 깊은 비밀들에 관련하여서는 이렇다: 신성 자체는 선과 진리를 가지고 있다; 신성한 인간 측면에서의 주님은 신성한 선으로부터 세상에 널리 알리셨다(공표, coming forth), 그리고 신성한 진리로부터 출생되어졌다; 같은 말로 주님의 있음 자체 (the very esse, being)는 신성한 선이었다; 그리고 명백히 표현하심 자체(the very existere, manifestation)는 신성한 진리이었다; 그리고 이것은 합리성에 있는 주님의 신성한 선의 근원이었다. 그분은 이 선에 그분의 인간으로부터의 신성한 진리를 결합하셨다.

그리고 그는 남쪽의 토지에 거주하였다. 이는 신성한 빛에서를 의미한다. 이는 “거주함”이 사는 것이다로부터; 그리고 선을 서술하고 있다; 그리고 “남쪽의 토지”의 의미가 신성한 빛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 이유가 “남쪽”이 빛을 의미하기 때문, 실로, 지혜인 총명의 빛이다; 그러나 “남쪽의 토지”는 이 빛이 있는 장소와 상태를 의미한다; 여기서 “이삭은 브엘-라해-로이로부터 오는 데로부터 왔다, 그리고 그는 남쪽의 토지에 거주하였다”는 것은 합리성에 있는 신성한 선, 신성한 진리로부터 태어났기 때문에 신성한 빛에 있었다를 의미한다.
말씀에서 “빛”의 언급은 많은 편인데, 이를 수단으로 내적 의미에서 선으로부터 있는 진리가 의미된다; 그러나 최고 의미에서 주님 자신을 의미하는데, 그 이유는 그분은 선과 진리 자체이시기 때문이다. 더욱이 실제로 천국에서 빛이시다, 더욱이 땅 위의 빛보다 더 무한하게 더 밝다; 그리고 이 빛에서 영들과 천사들은 서로를 본다, 그리고 이 빛을 수단으로 천국에 있는 모든 영광이 진열되어진다. 빛의 밝음에 주목하면, 이 빛은 세상에 있는 빛 같이 실로 나타난다; 그러나 여전히 그것은 세상의 것 같지 않다, 그 이유는 그것은 자연적인 것이 아니고 영적인 것이고, 그것 안에 지혜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하여 천사들 앞에서 빛을 내는 것은 지혜밖에 더 아니다; 그러므로 더 지혜로운 천사는 그들이 있는 곳이 더 밝다. 더욱이 이 빛은 인간의 이해력을 계발한다, 특히 거듭나는 인간의 것을 계발한다; 그러나 인간이 육체의 삶 안에 있는 한 세상의 빛이 육체에게는 우세하기 때문에, 이 빛은 세상에 있는 인간에 의해 지각되지 않는다; 더욱이 다른 삶에 있는 악령들도 서로를 본다, 그리고 영들의 세계에 있는 많은 표현들을 보고 있다, 그리고 실로 그들도 천국의 빛으로부터 보고 있다; 그러나 그들의 광도는 석탄불빛 수준인데, 그 이유가 천국의 빛이 그들에게 올 때, 그들 수준에 맞게 그들의 광도로 바뀌기 때문이다.
빛의 근원 자체에 주목하면, 이는 주님만으로부터 영원으로부터 있어 왔다; 그 이유가 신성한 선 자체와 신성한 진리, 이로부터 빛이 오고, 주님이시다. 신성한 인간, 이 인간은 영원으로부터 있으셨고 빛 자체이셨다 (요. 17:5). 이에 반해 이 빛은 인류에게 더 이상 영향을 끼칠 수 없었다, 즉 인류는 그 자체 선과 진리로부터, 즉 빛으로부터 아주 멀리 옮겨져, 그 자체를 어둠 안으로 던져놓고 있었기에, 주님은 출생을 수단으로 인간 자체를 입으시기로 뜻하셨다; 그 이유가 그리하면 그분은 합리성을 계몽하실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인간의 자연적 수준의 것들도 계발하실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그분은 자신 안에서 합리성과 자연 평면 모두를 신성으로 만드시어 총체적으로 어둠 안에 있는 이들에게 빛을 주시는 것이다.
주님이 빛이시다는 것, 즉 선 자체와 진리 자체이신 것, 고로 그분으로부터 총명과 지혜이시다는 것, 결과적으로 모든 구원함이시다는 것은 말씀의 많은 구절들로부터 분명해지는데, 우선 요한 복음서를 보자:
시작에서 말씀이 있었다, 그리고 말씀은 하느님과 더불어 있었다, 그리고 하느님이 말씀이 셨다; 그분 안에 생명이 있었다, 그리고 생명은 인간들의 빛이었다. 요한은 이 빛의 증거를 낳기 위해 왔다; 그는 이 빛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가 이 빛을 증거하도록 왔다. 이 빛은 세상에 오는 모두 각각의 인간을 계발하는 진정한 빛이었다 (요. 1:1, 4, 7-9).
“말씀”은 신성한 진리, 고로 신성한 인간 측면에서 주님 자신이셨다, 이에 관하여, “말씀은 하느님과 더불어 있었다, 그리고 하느님이 말씀이셨다”라고 말해진다.
같은 복음서에서:
이것이 심판이다, 즉 빛이 세상 안으로 와 있는데, 인간은 빛보다 오히려 어둠을 사랑한 것 이다 (요. 3:19);
위에서 “빛”은 신성한 진리를 표시한다. 다시:
예수께서 말하셨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서 걷지 않을 것이고, 생 명의 빛을 가질 것이다 (요. 8:12).
다시:
빛이 너희와 더불어 있는 동안, 어둠이 너희를 붙잡지 않도록, 빛을 가지는 동안 걸어라; 너희가 빛을 가지는 동안, 빛을 믿어라, 하여 너희는 빛의 아들일 것이다
(요. 12:35, 36).
다시:
나를 본 자는 나를 보내신 그분을 본다; 나는 세상 안으로 빛으로 와있다, 하여 나를 믿는 자는 누구든지 어둠 안에 거주하지 않을 것이다 (요. 12:45, 46).
누가복음서에서:
나의 눈이 당신의 구원하심을 보았습니다, 이것을 당신은 모든 사람들 앞에 준비해 두셨습 니다, 이방인들에게는 계시를 위한 빛을, 당신의 백성 이스라엘에게는 영광을
(눅. 2:30-32).
위는 그분이 태어나셨을 때 주님에 관한 시므온의 예언이다.
마태복음서에서:
어둠에 앉은 사람이 큰 빛을 보았다, 그리고 죽음의 그늘과 영역에 앉은 그들에게 빛이 솟 아올랐다 (마. 4:16; 이. 9:2);
위 인용 구절들로부터 명백해지는 것은, 신성한 인간에서 신성한 선과 진리 측면에서의 주님이 “빛”이라 불리우신다는 것이다. 또한 구약 성서의 예언들, 이사야서에서:
이스라엘의 빛이 불을 위해 있을 것이고, 그의 거룩한 분이 불꽃을 위해 계실 것이다
(이. 10:17).
다시:
나 여호와가 너를 정의 안에서 불렀다, 그리고 나는 네게 백성의 언약을 위해, 이방인들의 빛을 위해 줄 것이다 (이. 49:6).
다시:
일어나라, 빛을 비추라, 그 이유는 네 빛이 와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호와의 영광이 너 위에 일어나 있기 때문이다. 이방인들이 네 빛에서 걸을 것이다, 왕들이 네 일어나 있음의 밝음에서 걸을 것이다 (이. 60:1, 3).
천국의 모든 빛, 결과적으로 지혜와 총명은 주님으로부터 있다는 것을 계시록에서 가르친다:
새 예루살렘의 거룩한 성, 천국으로부터 하느님으로부터 내려오는데, 신부가 그녀의 남편을 위해 단장한 것 같았다, 이 성은 이 성을 비추기 위하여 태양이 필요 없고, 달도 필요 없 다, 그 이유는 주 하느님이 그들에게 빛을 주시기 때문이다 (계. 22:5).
다시 이사야서에서:
태양이 낮에 네 빛을 더 이상 주지 않을 것이다, 달이 밝음을 위해 네게 빛을 주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네게 영원히 지속되는 빛을 주실 것이다, 그리고 네 하느님 네 영광; 네 태양은 더 이상 저물지 않을 것이다, 네 달은 그 자체를 철수하지 않을 것이다, 그 이유는 여호와께서 너에게 영원히 지속되는 빛이시기 때문이다 (이. 60:19, 20).
“태양이 낮에 네 빛을 더 이상 주지 않을 것이다, 밝음을 위해 달이 네게 빛을 주지 않을 것이다”에서 이 빛은 자연계의 빛이 아니고 영적인 빛이다는 것이 분명한데, 그 이유는 이것이 “여호와께서 영원히 지속되는 빛이시다”에 의해 의미되기 때문이다. 여기서와 그밖의 장소에서도 마찬가지로 “여호와”는 주님이시다는 것은 이미 언급한 적이 있다.
그리고 그분이 천국의 빛이시다는 것을 그분은 그분의 변모하심에서 세 제자, 베드로, 야고보, 요한에게 명백히 나타내 보이셨다: 즉,
그분의 얼굴은 태양 같이 빛나셨다, 그리고 그분의 의복은 빛같이 되었다 (마. 17:2).
그분의 “태양 같은 얼굴”은 신성한 선이었다; 그분의 “빛 같은 의복”은 신성한 진리이었다. 그러므로 축복 기도의 표현에 의해 뜻해진 것은 알는지 모른다:
여호와께서는 그분의 얼굴을 네 위에서 빛나게 만드신다, 그리고 네게 자비를 베푸신다 (민. 6:25);
“여호와의 얼굴”은 자비, 평화, 선이다는 것은 이미 살폈다; 그리고 “태양”이 신성한 사랑이다는 것; 고로 천사들의 천국에서 태양으로 나타나는 것은 주님의 신성한 사랑이다.

그리고 이삭은 들판에 묵상하기 위해 나갔다. 이는 합리성이 선 안에 있는 상태를 의미한다. 이는 이삭의 표현이 신성한 합리성이다로부터; 그리고 “들판에서 묵상함”은 선 안에 있는 합리성의 상태를 의미함으로부터 알아진다; 그 이유가 묵상함은 그것이 마음에 의도적으로 응용할 경우, 합리성의 상태이기 때문; 그러나 “들판”은 교리, 그리고 교리에 속한 것들이다; 고로 선 측면에서의 교회 속의 것들이다; 이로부터 “들판에서 묵상함”이라는 고대 교회의 표현이 왔는데, 이는 선 안에서 숙고함(묵상함)을 표시한다; 이는 아내에 관하여 생각할 때, 결혼하지 않은 남자의 행동이다.

저물 때에. 이는 상대적으로 아래쪽에 있는 것들에를 의미한다. 이는 “저녁”의 의미가 희미한 것이다로부터 알려진다; 그리고 이것이 인간과 더불어서의 경우, 위쪽인 것은 합리성에 있는 것들이고, 아래쪽인 것은 자연적 마음 속의 것들인데, 이것은 상대적으로 희미함 속에 있어, 이것이 “저녁 때”로 의미되어진다. 이는 내적 의미의 시리즈로부터 분명해진다; 그 이유가 여기서 취급되는 주제가 자연적 평면의 진리가 거기를 떠나 합리성 안에 있는 선과 결합하는 것, 이런 까닭에 이 결합이 다루어지고, 자연적 인간의 계발이 의미되는 바, “저녁 때에 들판에서 묵상함”에 의해 아래 있는 것들에 비교하여 선 안에 있는 합리성의 상태가 의미되어진다; 선 안에 상태가 “남쪽의 토지에 거주함”으로, 즉 신성한 빛 안에 거주함으로 묘사되어 있다
이에 비교해 상대적으로 아래 있는 것들은 “저녁 때”에 있다. 즉 진리와 선의 결합이 있기 전, 그리고 자연적인 것이 신성으로 만들어지기 이전의 때를 말한다.

그리고 그는 자기 눈을 들어 올렸고 보았다. 이는 주목함을 의미한다. 이는 “눈을 들어 올림”이 생각하는 것을 의미한다로부터, 여기서는 주목함을 의미한다. 그 이유는 “그는 눈을 들어 올렸고 보았다”라고 말해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이 아직은 자연적 진리와 결합하지 않은 합리적 선을 서술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보라 낙타가 오고 있었다. 이는 자연적 인간에 있는 일반적인 기억적 지식에 초점을 맞추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낙타”의 의미가 자연적 인간에 있는 일반적 기억 속의 지식이다로부터; 주목함이 이런 것들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 이유는 진리가 그것들로 온다는 것이 예상되기 때문인데, 이는 본 장에서 여러 번 설명했다.

이 두 절은 신부인 진리가 남편에게 결합되는 것이 예상되는 때에 있는 합리적 선의 상태를 묘사하고 있다. 이 두 절에 즉각 뒤잇는 것은 결합되어질 선에 가까울 때 진리의 상태가 묘사되고 결합될 선을 지각하는 것이다. 우리가 알고 있어야 하는 것은 이런 상태가 단 번에 있었던 것이 아니다는 것이다. 그러나 주님의 생애 동안 계속적으로 있어 왔다는 것이다. 즉 그분이 신성이 되시는 때까지 라고 말함이 정확할 것이다. 이런 과정은 거듭나는 이들도 마찬가지이다; 그 이유가 그들은 단 번에 거듭나지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의 생애를 망나해 계속적으로, 다른 삶에 가서까지조차 이다; 그 이유가 인간은 결코 완전해질 수는 없기 때문이다.

64, 65절. 리브가가 눈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이삭을 보았다, 그리고 그녀는 낙타에서 내렸다. 65 그리고 그녀는 종에게 물었다, 우리를 만나려고 들판을 걸어 오는 저 사람은 누구인가? 그리고 종이 대답했다, 나의 주인이십니다. 그리고 그녀는 너울을 가져다가 자신을 가렸다.

리브가는 눈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이삭을 보았다. 이는 진리에 대한 애착의 상호간의 주목을 의미한다. 이는 “눈을 들어 올려 봄”의 의미가 주목함을 의미함에서; 여기서는 상호간의 주목인데, 그 이유는 앞에서 이삭에 관해서도 그는 “눈을 들어올려 보았다” 라고 말해졌기 때문이다. 리브가가 진리에 대한 애착을 표현함은 앞에서 많이 설명했으므로 생략한다.

그리고 그녀는 낙타로부터 내렸다. 이는 합리적 선을 지각하자 자연적 인간에 있는 기억적 지식으로부터서 분리함을 의미한다. 이는 “내리다”가 분리되어진다를 의미함으로부터; 그리고 “낙타”의 의미가 자연적 인간에 있는 기억 속의 지식이다로부터 알려진다. 이것이 이삭에 의해 표현된 합리적 선을 지각함에서 있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자연적 인간으로부터 분리되어지는 것은 앞에서 많이 설명했다, 즉 진리에 대한 애착은 이 애착의 관심이 기억 속의 지식에 더 이상 있지 않고, 삶(생명)에 관한 쪽으로 이동될 때, 그것은 자연적 평면으로부터 분리되어진다. 그 이유가 진리에 대한 애착이 삶에 관심이 있어 그의 생활 속에 있게 될 때, 계속적 삶, 즉 습관에 의해 그것은 마치 당연히 자기가 가지고 있는 듯, 그의 성향, 또는 본성 같이 스며든다. 이것은 거의 동시적으로 행동 안에도 있는다. 즉 그는 진리를 기억 속의 지식으로부터 곰곰히 생각해보지 않아도 즉각 실행하고 있다는 말이다. 이렇게 삶 속에 진리가 있게 되면, 이 진리는 기억 속의 지식으로 출발된 것이지만, 이제는 기억 속의 지식 위에서 그 지식에게 명령을 한다. 그리고 그 지식들로부터 확증하는 무수한 것들을 끌어내기까지 한다. 이 과정은 모두 하나하나의 진리에 있다; 진리는 인간의 초기 시기에서는 기억 속의 지식이 그의 주된 관심이나, 나이들어 가면서 생활에의 응용이 주된 관심사가 된다. 쉬운 예로, 어린 아이가 초기에는 걷는 것, 말하는 것, 생각하는 것, 또한 이해력으로부터 보는 것, 그리고 판단으로부터 결말을 끌어내는 것 등을 놓고 어떻게 대응하는지를 관찰하면 된다; 이런 사항들, 습관에 의해 그는 자발적이 되어간다, 고로 동시적인 바, 기억 속의 지식으로부터 사라져버린 듯한 정도이고 아마 자기 자신인 듯 되게 움직인다.
위의 경우는 자연계 수준에서 이나 이는 거듭나는 인간, 새로 출생한 인간이 주님으로부터 영적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들을 받은 경우에서도 위의 어린이들의 과정과 하등 차이가 없다; 처음에 영적 진리들은 그들에게 단지 기억 속의 지식들일 뿐이다; 그 이유가 교리적인 것들이 배워져 기억 속에 삽입될 때, 이는 기억 속의 지식 수준 그 이상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들은 주님에 의해 거기로부터 계속적으로 불러 일으켜진다, 그리고 생명(삶)에 심어진다, 즉 선 안에 심어진다. 그 이유가 선이 생명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심어지고 있노라면 마치 한바퀴 회전하듯 생각하는(일변하는) 때를 맞는다. 즉 그가 선으로부터, 즉 생명으로부터 행동하는 것이다. 이 진리는 이전 같이 기억 속의 지식의 수준에 있지 않다. 이렇게 새로 태어난 이들은 이런 관점에서 어린 아이들이다. 결론적으로, 그가 교리적인 것, 또는 진리로부터 행동하지 않을 때, 그러나 선행, 또는 선으로부터 행동될 때 , 그는 처음으로 축복된 상태안에 있고, 동시에 지혜 안에 있다.
위 모두는 자연적 인간 안에 있는 기억 속의 지식으로부터 분리되어지는 것을 보여준다. 이것이 리브가가 낙타로부터 내려옴에 의해 의미되어 있다. 그리고 이 내려옴은 그가 이삭을 알아보기 이전의 행동이다; 이런 상황을 두고도 우리가 대수롭지 않게 읽어갈 수 있는 말씀의 한 대목에도 거듭남의 비밀들을 그분께서는 어떻게 담아놓으셨는지 짐작은 가능할 것이다.

그리고 그녀는 종에게 말했다. 이는 신성한 자연 평면으로부터 있는 탐색을 의미한다. 이는 “말하다”가 여기서는 탐색하다를 표시함에서 나타난다; 그 이유가 그녀가 “우리를 만나려고 들판을 걸어오는 사람은 누구인가?”하고 물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종”의 의미가 신성한 자연 평면이다로부터 알려진다.

우리를 만나려고 들판을 걸어 오는 저 사람은 누구인가? 이는 선쪽에만 있었던 합리성에 관하여를 의미한다. 이는 앞의 구절에서, “이삭은 묵상하기 위해 들판으로 나갔다”고 이삭에 관하여 말해진 바로부터 알게 된다; 이는 선 안에 있는 합리성의 상태를 의미했다; 여기서, 합리성이 “저 사람”에 의해 의미되고 있다; 그리고 그 합리성이 선 안에 있음이 “들판에서” “걸음”(명상함)에 의해 의미되어 있다. “우리를 만나려고”란 결합을 위하여를 표시한다.

종이 말했다, 나의 주인이십니다. 이는 인정함, 즉 여기서 “종”에 의해 표현되는 신성한 자연 평면에 의해 인정됨을 의미한다. 이는 설명 없이 지나가도 될 것 같다. 입문함이 개시된 것이 신성한 자연 평면에 의해 결과되고 있다. 이는 이미 말했다; 또한 선이 그것 자신의 진리를 인식하는 것이다; 그리고 진리는 그것 자신의 선을 인식하고 있다.

그리고 그녀는 너울을 가져다가 자신을 가렸다. 이는 진리의 외관들(나타남들, appearances)을 의미한다. 이는 신부가 신랑을 보기 직전 얼굴을 가린 너울(veil)의 의미가 진리의 외관들이다로부터 분명해진다; 그 이유가 고대인들 사이에서 진리에 대한 애착은 신부로, 주님으로부터 있는 선에 대한 애착은 신랑으로 표현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말씀 모두를 망라하여 주님 자신이 “신랑”이라 불리운다. 신부들은 신랑에게 처음 옴에서 자기 얼굴을 너울로 가렸다. 이는 그 행동이 진리의 외관들을 표현하기 위하여서 이었다. 진리의 외관들은 그 자체 진리들은 아니고, 그것들이 진리들 같이 나타나는 것이다; 이에 관해 살펴보자. 진리에 대한 애착은 진리의 외관들을 통하지 않고서는 선에 대한 애착에 접근할 수 없다, 게다가 결합이 있을 때까지 외관들은 벗겨지지 않는다; 그 이유가 결합할 때에서야 진리는 선으로부터의 진리가 되고, 선이 순수한 만큼에서 진리도 순수해 있기 때문이다.
선 자체는 거룩하다, 그 이유는 이것이 주님으로부터 진행되는 신성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인간 안에서 더 높은 경로, 또는 위쪽의 문을 통하여 안으로 흘러든다; 그러나 진리의 경우, 그 자체의 근원에 집중해 생각하면 거룩하지 않다; 그 이유는 이것은 더 낮은 경우, 또는 문을 통하여 흘러들기 때문, 하여 그것은 처음에는 자연적 인간 속에 있다; 그러나 거기로부터 합리적 인간을 향하여 승강될 때, 그것은 점차적으로 순수해진다; 그리고 선에 대한 애착을 보자 마자 (처음 대견하자 마자) 그것은 기억 속의 지식으로부터 분리되어진다, 그리고 진리의 외관들을 입는다, 그리하여 선에 가까이 온다; 진리의 근원 측면이 암시하는 바, 진리는 신랑의 방(선의 성소)으로 들어가고 결합할 때까지 신성한 선을 처음 본 것에 대해 참아내야 할 수밖에 없다(너울을 벗는 것을 스스로 해서는 안되기에 참을 수밖에 없다); 그 이유가 진리는 외관들로부터, 또는 외관들을 통하여 더 이상 선을 쳐다보지 않고, 그것들과 따로 떼어진 선으로부터 쳐다보기 때문이다.
이쯤에서 우리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외관이 전혀 없었던 순수한 어떤 진리들을 지닌 자는 인간에서도, 천사에서도 없었다는 점이다; 그 이유는 인간, 천사 모두는 일반적, 특수적 측면 양 측면에서 진리의 외관들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것들은 진리의 외관들 안에 선이 있다면, 주님에 의해 진리들로서 수락되어진다. (외관 없는) 순수한 진리들은 주님만에 속해 있다, 그 이유는 신성이기 때문이다. 그분은 선 자체이시고, 진리 자체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리들과 진리들의 외관들에 관하여 말해왔던 것들을 뒤돌아 보자: 즉 천막의 덮개들과 베일(veil)들이 진리의 외관들을 의미했다는 것: 인간과 더불은 진리들은 오류들로 얼룩져 있다는 것: 인간의 합리적인 것들이 진리의 외관들이다는 것: 진리들은 외관 안에 있다는 것: 신성한 선은 외관들로 흐른다는 것, 오류들에게조차 흐른다는 것: 진리의 외관들은 마치 그것들이 진리들인 듯 하게 주님에 의해 적합해지게(개조, adapt)되어 있다는 것: 말씀은 외관들에 의거 쓰였다는 것.
그러나 외관들이 무엇인지는 외관에 따라 말해지는 말씀의 여러 구절들로부터 더 분명해질 것이라 생각한다. 어쨌든 진리의 외관들에도 등차(수준)가 존재한다. 진리의 외관의 자연적 등차는 대체로 오류들이다. 그러나 선 안에 있는 이들과 더불어서는 그것들은 오류들이라고 불리우지 않고 진리의 외관들, 심지어는 진리들이라고 까지 불리우기도 한다. 그런 이유는 그것들 안에 있는 선, 그리고 그것들에 있는 신성이 또 다른 본질이 그것들 안에 있게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리의 외관의 합리적 등차는 더욱 더 내면적이다; 그것들 안에 천국들이 있다, 즉 천국들 안에 있는 천사들이 있다는 말이다.
진리의 외관이 무엇인지에 대해 어떤 생각을 만들어내도록 예를 들어보자. 1. 인간은 그가 신앙의 진리를 통하여 개혁되고 거듭난다는 것을 믿는다; 그러나 이것은 외관이다; 그는 신앙의 선, 즉 이웃을 향한 선행과 주님을 사랑함을 통하여 개혁되고 거듭난다는 것이다. 2. 인간은 진리가 우리로 선이 무엇인지를 지각하는 것을 가능하게 한다고 믿는다, 그 이유는 그것이 가르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외관이다; 진리가 지각하는 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선이다, 그 이유는 선이 진리의 혼, 또는 생명이기 때문이다. 3. 인간은 그가 배웠던 진리에 따라 살 때, 진리가 선쪽으로 이끌어 들인다고 믿는다; 그러나 진리 안으로 흐르는 선이 그 자체에 진리를 이끌어 들인다. 4. 인간은 진리가 선을 완전하게 한다고 믿으나, 선이 진리를 완전하게 한다. 5. 생활 속의 선들이 신앙의 열매들이다고 인간에게 나타난다; 그러나 그것들은 선행의 열매들이다. 위 간결한 예들로부터 진리의 외관들이 무엇인지 어느 정도 짐작되었을 것이다. 이런 외관들은 위의 몇 가지가 아닌 무수하다.

66, 67절. 그리고 그 종은 이삭에게 그가 했었던 모든 말들을 말했다. 67 그리고 이삭은 그녀를 그의 어머니 사라의 천막으로 데리고 왔다. 그리고 그는 리브가를 데리고 갔다, 그리고 그녀는 그에게 여인으로 있었다, 그리고 그는 그녀를 사랑했다. 그리고 이삭은 그의 어머니의 뒤를 이어 위로되어졌다.

종은 이삭에게 그가 했었던 모든 말들을 말했다. 이는 이런 경우가 어떻게 있었는지에 관하여 신성한 자연 평면으로부터 지각함을 의미한다. 이는 “말하다”가 지각함이다로부터; 그 이유가 지각함은 내적 말함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말씀의 역사 부분에서 지각하는 것이 “말함 (tell, say)”에 의해 표현되어진다; 또한 여기서의 “종”의 의미가 신성한 자연 평면임으로부터도 알려지는데 이는 아래에서 설명한다; 그리고 “말들”이 실제의 것들이다로부터 알게 되어 이런 생각을 종합하건대, “종은 그가 했었던 모든 말들을 말했다”는 합리적 인간의 신성한 선이 이 경우가 어떤 경우였는지를 신성한 자연 평면으로부터 지각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의 경우는 이렇다: 합리성은 자연 평면 위에 있다, 그리고 주님 안에 있는 합리성은 신성이었다; 그러나 자연 평면으로부터 승강되어지는 진리는 그것이 합리성 속의 신성한 선과 결합할 때까지는 신성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합리성의 선이 자연 평면으로 흐르기 위하여는 매체가 있어야만 한다; 이 매체는 신성의 몫을 받는 자연으로부터의 어떤 것일 수밖에 없다; 이것이 “아브라함이 가진 모든 것을 집행하는 그의 원로 종”에 의해 의미되어 있다; 그리고 이 “종”이 신성한 자연 평면을 의미하고 있다.

그리고 이삭은 그녀를 그의 어머니 사라의 천막으로 데리고 왔다. 이는 신성한 인간 안에서 진리의 거룩한 장소를 의미한다. 이는 “천막”이 거룩한 것을 의미함으로부터; 고로 거룩한 장소이다는 것; 그리고 “어머니 사라”의 의미가 신성한 진리이다로부터; 이 진리로부터 신성한 인간이 태어났고, 이 인간 속의 합리성이 아들 이삭에 의해 표현되었다; 이로부터 분명한 바, “이삭은 그녀를 어머니 사라의 천막으로 데리고 왔다”란 합리적 선은 리브가에 의해 표현된 진리를 진리의 거룩한 장소로 데리고 왔다를 의미한다는 것이다.
진리의 거룩한 곳(성소)은 주님의 신성한 인간에 관해 살피는 가운데 이미 말했다 . 즉 신성 자체는 선과 진리를 가지고 있다는 것; 그리고 주님은 신성한 인간 측면에서 신성한 선으로부터 세상에 널리 알리셨고(공표), 신성한 진리로부터 태어나셨다는 것이다; 같은 말로, 주님의 있음 자체는 신성한 선이셨다는 것, 그리고 명백히 나타내심은 신성한 진리로부터 였다는 것이다; 이로부터 합리성의 신성한 선이었고, 이 선에 그분은 그분의 인간으로부터인 진리를 결합되게 하셨다. 깊은 비밀들에 있는 이 이상은 말해질 수 없다. 우리가 첨가해볼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주님의 신성한 인간에 있는 신성한 선과 진리 자체에 그분의 인간으로부터인 진리가 결합되었다는 것, 이것이 거룩한 장소, 성막과 성전에 있는 지성소에 의해 의미되었다는 것, 그것의 품질은 그 안에 있는 것들, 즉 금 제단에 의해, 진열하는 빵을 놓는 탁자에 의해, 촛대에 의해, 더욱 내적으로 속죄판에 의해, 그리고 궤에 의해, 그리고 가장 깊게는 시내산에서 선포된 증거판에 의해, 그리고 이것은 지성소 자체였다는 것, 또는 진리의 거룩한 장소였다는 정도 뿐이다.

그리고 그는 리브가를 데리고 갔다, 그리고 그녀는 여인으로 그에게 있었다, 그리고 그는 그녀를 사랑했다. 이는 결합, 즉 선과 진리의 결합을 의미한다. 이는 설명 없이 알 것이다. 그러나 리브가가 그에게 아내가 아니고 “여인”으로 있었다고 말해진 이유는 합리적 선과 자연 평면으로부터 일으켜 신성으로 만든 사이에는 엄격히 말해서 결혼이 거행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혼 약속을 닮은 약속이 있는 것이다. 주님에서의 신성한 결혼은 신성 본질과 인간 본질이, 인간 본질이 신성 본질과의 합일이다. 이것이 리브가가 아내가 아닌 “여인”이라 불리운 이유이다.

그리고 그녀는 그의 어머니의 뒤를 이어 위로되어졌다. 이는 새로운 상태를 의미한다. 이는 “위로되어짐”이 새로운 상태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 이유가 위로됨의 상태는 새롭기 때문이다; 그리고 앞의 것을 계승한 것이 “어머니의 뒤를 이어”에 의해 의미되어지고 있다. 이 새로운 상태는 합리성의 신성이 되심의 상태이다; 이 앞에서는 선 측면에, 지금은 진리 측면에서 신성이 되신 것이다.
인간 측면의 주님이 새로이 만들어진 것, 즉 신성이 되신 것 (신성으로 만드신 것)에 대한 생각은 세상적이고 육체적인 사랑들 안에 있는 자는 누구도 품어질 수 없다; 그 이유가 그는 영적, 천적인 것이 무엇인지 통째로 모르기 때문이다; 아마 알려고도, 알고 싶은 의지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와 반대인 사람의 경우, 그는 이를 지각할 수도 있다, 그 이유는 그가 주님은 아버지와 더불은 하나이신 것을 믿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분으로 거룩한 모든 것이 진행됨을 믿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그분은 인간 측면에서조차 신성이시다는 것을 믿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를 믿는 자는 누구든지 당사자 자신의 방법에서 지각한다.
주님의 신성이 되심의 상태는 어느 정도라도 인간의 거듭남의 상태로부터 품어질 수 있다, 그 이유가 인간의 거듭남은 주님의 신성이 되심의 형상이기 때문이다. 인간이 거듭나질 때, 그는 통째로 또 다른 인간이 되어간다, 그리고 새로이 만들어진다; 그러므로 그가 거듭났을 때, 그는 “다시 태어났음”, 또는 “새로이 창조됐음”이라 불러진다. 이때, 비록 그가 비슷한 얼굴, 비슷한 대화를 하고 있을지라도, 그의 마음은 비슷하지 않다; 그의 마음, 그가 거듭날 때, 천국을 향하여 열려 있고, 거기서 신앙과 더불어 주님을 사랑함과 이웃을 향한 선행 안에 거주한다. 이 마음은 인간을 또 다른 인간, 새로운 인간으로 만든다. 상태의 이런 변화는 인간의 육체 안에서 지각될 수 없고, 그의 영 안에서 가능하다. 육체는 영의 덮개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육체가 벗겨질 때, 그의 영이 나타난다. 거듭났다면, 그의 영은 또 다른 형체이다, 그 이유가 그것은 이전에 미움과 잔인함 같은 어그러진 형체로 뒤범벅된 것 대신,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아름다움에 있는 사랑과 선행의 형체를 가지기 때문이다. 이것은 거듭난 인간, 또는 다시 태어난 인간, 또는 새로이 창조된 인간이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즉 그는 통째로 또 다른 사람이다는 것, 새로운 인간이다는 것이다.
이런 생각들로부터 우리는 주님의 신성이 되심이 무엇인지 조금은 알아졌을지 모른다. 그분은 여느 인간 같이 거듭난 것이 아니라, 신성이 되시었다, 그리고 이 신성이 되심은 그분의 사랑 바로 그 자체로부터 이었다, 그 이유가 그분은 신성한 사랑 자체로 만들어지셨기 때문이다. 이때 그분의 형체는 이를 보도록 세 제자에게 나타나게 만들었을 때이다. 게다가 이는 육체의 눈이 아닌 영의 눈에서 였다. 즉 그분의 생김새는 태양 같이 빛났다 (마. 17:2); 그리고 이것이 그분의 신성한 인간이었다는 것은 그때 구름으로부터 온 음성이,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라고 말하심으로부터 분명해진다(마. 17:5). “아들”이 신성한 인간이시다.
*************************************

창세기 제 25 장

성경: 창세기 25장

1. 그리고 아브라함은 덧붙였다, 그리고 여인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그녀의 이름은 그 두라이었다.
2. 그리고 그녀는 시므란, 그리고 욕산, 그리고 므단, 그리고 미디안, 그리고 이스박, 그리고 수아를 낳았다.
3. 그리고 욕산은 스바와 드단을 낳았다. 그리고 드단의 아들들은 앗수르 족속과 르두 시 족속과 르움미 족속이었다.
4. 그리고 미디안의 아들들은 에바, 그리고 에벨, 그리고 하녹, 그리고 아비다, 그리고 엘다아이었다. 이 모든 이들이 그두라의 아들들이었다.
5. 그리고 아브라함은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이삭에게 주었다.
6. 그리고 아브라함이 거느렸던 소실들의 아들들에게, 아브라함은 선물을 주었다. 그 리고 그는 그들을 자기가 아직 살아 있는 동안에 동쪽 방향인 동쪽의 토지에로 그 의 아들 이삭으로부터 떠나 보냈다.
7. 그리고 이것들은 아브라함의 생명들의 햇수들의 날들이다, 이것을 그는 살았다. 일 백 년, 그리고 칠십 년, 그리고 오 년.
8. 그리고 아브라함은 아주 늙은 나이에, 노인 그리고 충분할 만큼 살아, 기간이 다 차서, 죽어 그의 백성들에게로 거두어 들여졌다.
9. 그리고 그의 아들들인 이삭과 이스마엘은 그를 마므레 앞 헷 족속 소할의 아들 에 브론의 들판에 있는 막벨라 굴에 매장했다.
10. 이 들판은 아브라함이 헷 아들로부터 매입했다. 거기에 아브라함과 그의 아내 사 라가 매장되었다.
11. 그리고 아브라함이 죽은 후에 하느님께서는 그의 아들 이삭을 축복하셨다. 그리고 이삭은 브엘-라해-로이에서 거주하였다.
* * * * * * * * * * * * * * * * * *
12. 그리고 이것들은 사라의 여종 이집트 출신 하갈이 아브라함에게 낳아 준 이스마 엘로부터의 출생들이다.
13. 이것들은 그 이름에서, 그들의 출생들에 따른 이스마엘의 아들들의 이름들이다. 이스마엘의 첫 출생은 느바욧이다. 그리고 게달, 그리고 앗브엘, 그리고 밉삼.
14. 그리고 미스마, 그리고 두마, 그리고 맛사.
15. 하닷, 그리고 데마, 여둘, 나비스, 그리고 게드마이다.
16. 이들이 이스마엘의 아들들이다, 그리고 이것들은 그들의 성읍에서, 그들의 마을에 서 있는 그들의 이름들이다. 이들은 그들의 백성들의 열 두 제 1 인 자들이다.
17. 그리고 이것은 이스마엘의 생애의 햇수인데 일백 년, 그리고 삼십년, 그리고 칠 년이었다. 그리고 그는 기한이 다 차서 죽어, 그의 백성들에게로 거두어졌다.
18. 그리고 그들은 하윌라로부터 앗수르로 통하는 이집트 앞, 술에까지에 이르러 거주 하였다. 그는 그의 모든 형제들의 얼굴과 마주치고 있었다.
* * * * * * * * * * * * * * * * * * *
19. 그리고 이것은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의 출생들이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았다.
20. 그리고 이삭은 사십 세의 아들이었을 때, 그는 밧단 아람의 아람 족속, 브드엘의 딸, 라반의 누이인 리브가를 여인으로 자신에게 데리고 갔다.
21. 그리고 이삭은 그의 여인을 위하여 여호와께 탄원했다, 그 이유는 그녀가 불임이 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호와께서는 그의 탄원을 들어 주셨다, 그리고 리브가는 임신되었다.
22. 그리고 그 아들들이 그녀 안에서 서로 다투었다. 그리고 그녀는 말했다, 이럴진대 나는 어이할꼬? 그리고 그녀는 여호와께 물어보려고 갔다.
23. 그리고 여호와께서는 그녀에게 말하셨다, 두 나라가 네 자궁 안에 있다, 그리고 두 백성들이 네 창자들로부터서 분리될 것이다, 그리고 한쪽 백성이 다른쪽보다 우세할 것이다, 그리고 형이 아우를 섬길 것이다.
24. 그녀의 날들이 다 차서 출산하게 되었다, 그리고 보라 쌍둥이가 그녀의 자궁에 있 었다.
25. 그리고 첫째는 온 몸이 붉고 털도 많아 털많은 의복으로 덮은 듯 하여 나왔다, 그 리고 그들은 그의 이름을 에서라 불렀다.
26. 그리고 첫째 뒤를 이어 동생이 나왔다, 그리고 그의 손은 에서의 발꿈치를 붙잡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그의 이름을 야곱이라 불렀다. 그리고 이삭은 그녀가 이들을 낳았을 때 육십 년의 아들이었다.
* * * * * * * * * * * * * * * * * * *
27. 그리고 이 소년들은 젊은 성인이 되었다. 그리고 에서는 사냥하는데 숙련된 사람 이어서, 들판의 사람이었다. 그리고 야곱은 완전한 사람이어서, 천막에서 거주하 고 있었다.
28. 그리고 이삭은 에서를 사랑하였다, 그 이유는 그의 사냥함이 그의 입 안에 있었 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리브가는 야곱을 사랑하였다.
29. 그리고 야곱은 죽을 끓였다, 그리고 에서가 들판으로부터 왔다, 그리고 그는 대단 히 피로해 있었다.
30. 그리고 에서가 야곱에게 말했다, 바라건대 나로 붉은 것, 이 붉음을 떠먹게 해 다오, 그 이유는 내가 너무 지쳐서이다. 그러므로 그는 그의 이름을 에돔이라 불 렀다.
31. 그리고 야곱은 말했다, 오늘 때문에 네 생득권을 나에게 팔아라.
32. 그리고 에서가 말했다, 보라 내가 죽으려 한다, 그러니 이 생득권이 나에게 무슨 소용이 있느뇨?
33. 그리고 야곱은 말했다, 오늘 때문에 나에게 맹세하라. 그리고 그는 그에게 맹세했 다, 그리고 그는 야곱에게 그의 생득권을 팔았다.
34. 그리고 야곱은 에서에게 빵과 렌즈콩 죽을 주었다. 그리고 그는 먹고 마셨다, 그 리고 일어나 나갔다. 그리고 에서는 생득권을 얕보았다.

각 절의 내적 의미

1절. 그리고 아브라함은 덧붙였다, 그리고 여인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그녀의 이름은 그두라이었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덧붙였다, 그리고 여인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그녀의 이름은 그두라이었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덧붙였다, 그리고 여인을 받아들였다”란 아브라함으로 표현되는 주님의 또 다른 상태를 의미한다. 아브라함과 사라는 신성한 천적 평면에 관련되는 주님을 표현했다. 그리고 아브라함과 그두라는 신성한 영적 평면에 관련되는 주님을 표현했다. 그러므로 여기서의 아브라함은 영적 평면에 있는 신성한 선에 관련되는 주님을 표현하고, 그의 여인은 이 선에 인접한 신성한 진리에 관련되는 주님을 표현한다. 이는 지금까지 아브라함과 그의 아내 사라에 관한 것으로부터, 그리고 아브라함과 그두라에 관련된 것으로부터 알게된다. 그러나 여기서 아브라함은 주님의 또 다른 상태를 표현한다고 말했고, 아브라함과 사라는 신성한 천적 평면에 관련되는 주님을 표현했으나, 지금 아브라함과 그두라는 신성한 영적 평면에서의 주님을 표현하고 있다고 위에서 말했는데, 이렇게 말한 이유를 알기 위해서는 신성한 천적 평면이 무엇인지와 신성한 영적 평면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할 것이다.
신성한 천적 평면과 신성한 영적 평면은 주님의 신성을 받는 이들 측면에 중심을 두고 하는 말이다. 그 이유가 주님은 (신성을) 받는 자의 본성에 따라 모두 각각의 인간에게 나타나신다. 이는 이미 살폈다; 또한 주님은 이 사람에게는 천적 평면에서, 저 사람에게는 영적 평면에서, 각 인물의 형편에 따라 나타나신다는 사실로부터도 알게 된다; 즉 천적 평면에서는 주님은 해로서, 영적 평면에서는 달로서 나타나신다. 주님이 해로서 천적 인간에게 나타나시는 이유는 그가 천적 수준의 사랑 안에 있기 때문, 즉 주님을 사랑함 안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적 수준의 사랑, 영적 인간에게는 달로서 나타나신다. 그 이유는 그들이 이웃을 향한 선행(善行, charity) 안에 있기 때문이다. 이 두 사랑의 수준 차이는 낮 동안의 태양 빛과 밤 동안의 달 빛을 견주면 정확히 이해된다. 또한 태양의 열기와 달의 열기를 생각해도 무방하다. 즉 이쪽의 열기는 식물을 솟아나게 하는 힘이 있다. 이것이 창. 1:16에서 이런 말들에 의해 뜻해져 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두 큰 빛들을 만드셨다, 보다 큰 빛은 낮을, 그리고 보다 작은 빛은 밤을 다스리게 하셨다 (창. 1:16).
일반적으로 (즉 아주 넓은 측면에서) 이야기하자면, 주님의 왕국은 천적 왕국과 영적 왕국이다; 즉 천적 수준의 인간으로 구성된 천국과 영적 수준의 인간으로 구성된 천국이다. 그런 이유는 주님의 신성이 천적 수준의 인간에게는 천적 수준(평면)에서, 영적 수준의 인간에게는 영적 수준(평면)에서 나타나시기 때문이다. 하여 이 구절에서 아브라함과 사라는 신성한 천적 평면에 관련되는 주님을, 아브라함과 그두라는 신성한 영적 평면에 관련되는 주님을 표현했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 두 가지, 신성한 천적 평면, 신성한 영적 평면이 무엇인지, 또는 천적 인간, 영적 인간이 누구인지 아는 자는 거의 없는 것 같다. 어쨋든 이에 관하여는 여러 차례 말했기에 그 항목을 다시 읽기 바란다. 간추려보자면, 천적 인간은 주님의 모습(likeness)이고, 그는 사랑으로부터 선을 행한다, 그리고 영적 인간은 주님의 형상(image)이고, 그는 신앙으로부터 선을 행한다: 천적 인간은 선으로부터 진리를 지각하는 바, 그는 진리에 관해 결코 추론하지 않는다: 천적 인간 안에서 선은 그의 의지 부분에 심어지고, 영적 인간 안에서는 그의 지적 부분에 심어지고, 이 부분에서 영적 인간에게 새로운 의지가 창조되어진다: 선 자체로부터 천적 인간은 무한한 것을 보나, 영적 인간은 이것이 그런지, 않은지를 따져보아야(추론)하기 때문에 천적 평면의 경계선에까지 도달하는 것도 가능하지 않다: 영적 수준은 상대적으로 희미하다 (불분명한 상태이다); 주님은 영적 인간(영적 평면, 영적 천국)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세상에 오셨다.

이 구절에서 아브라함이 영적 평면에서의 신성한 선에 관련되는 주님을, 그의 여인은 이 선에 인접된 신성한 진리에 관련한 주님을 표현한다는 것은 남편과 아내에 관해 앞서 말해진 사항으로부터 알게 된다, 즉 남편은 선을, 아내는 진리를 표현한다는 것이다. 남편이 선을, 아내가 진리를 표현하는 이유는 교회는 결혼에 비교되고, 선과 진리의 결혼이기 때문이다. 선을 남편이 표현하는 이유는 선이 첫 장소에, 진리를 아내가 표현하는 이유는 두 번째 장소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말씀에서 주님은 “신랑”, “남자”, “남편”이라 불리우고; 교회는 “신부”, “여인”, “아내”라고 불리운다.
영적 선이 무엇인지, 그리고 이 선에 인접된 영적 진리가 무엇이지는 이 장 서두에서 살핀 것에서 어느 정도 알았으리라 본다. 인간 안에 있는 영적 선은 일반적으로 신앙의 선이라 불리우는 것, 이것은 이웃을 향한 선행밖에 더 아니다; 그러나 이 선행은 주님께서 영적 인간에게 선물하신 새 의지로부터 와져야만 한다. 이 선에 인접한 영적 진리가 신앙의 진리라고 불리운다. 이 진리는 그것이 존재하는 이유의 첫 번째를 선행에 두고 있는 진리이다. 이런 목적 하에 영적 진리는 실제에 놓여 간다. 그러나 신앙의 진리가 영적 인간에게, 또는 신앙의 측면에서도 뿌리를 내리려면 이 진리는 주님에 의해 그에게 선물되는 새로운 이해력으로부터 와져야 한다; 그리고 새로운 이해력은 새로운 의지로부터 빛을 가져야만 한다.

그리고 그녀의 이름은 그두라이었다. 이는 신성한 진리의 본질을 의미한다. 이는 “이름”이 품질을 의미함에서, “이름에 의해 불려짐”은 누군가가 어떤 품질 속에 있는지를 아는 것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러나 품질이 아닌 존재를 봄이 신성을 서술할 경우, “이름”은 본질을, 여기서의 경우, “그녀”, 즉 여인에 의해 의미된 신성한 진리의 본질이 의미된다. 이로부터 그두라가 일반적으로 포함하는 것이 분명해진다.

2-4절. 그리고 그녀는 시므란, 그리고 욕산, 그리고 므단, 그리고 미디안, 그리고 이스박, 그리고 수아를 낳았다. 3. 그리고 욕산은 스바와 드단을 낳았다. 그리고 드단의 아들들은 앗수르 족속과 르두시 족속과 르움미 족속이었다. 4. 그리고 미디안의 아들들은 에바, 그리고 에벨, 그리고 하녹, 그리고 아비다, 그리고 엘다아이었다. 이 모든 이들이 그두라의 아들들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시므란, 그리고 욕산, 그리고 므단, 그리고 미디안, 그리고 이스박, 그리고 수아를 낳았다. 이는 천국과 땅 위에 있는 주님의 영적 왕국의 일반적인 계층을 표현하는데, 이는 말씀으로부터서는 그들에 관련한 지식을 얻기가 매우 힘들다, 그 이유는 그 이름들이 미디안을 제외하면 다른 곳에 없기 때문이다. 미디안은 이 장 6절에서 살핀다. 그렇지만, 이런 사실로부터, 즉 말씀에서 명명되는 모든 이름들은 어떤 것을 표현한다는 것으로부터 이다. 이는 창세기 첫 장으로부터 지금까지 설명한 모두로부터 분명해진다. 미디안을 제외한 나머지 이름들이 말씀에서 언급되지 않는 이유는 그들이 말씀에서 간혹 언급되는 동쪽의 아들들 속에 있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동쪽의 아들들”이 주님의 영적 왕국 속에 있는 이들을 의미하는 것은 6절에서 살핀다.)
그두라에 의한 아브라함의 아들들이 이런 표현들을 가지는 것은 아브라함과 그두라가 신성한 영적 평면에 관련되는 주님을 표현한다는 사실로부터, 즉 아브라함은 영적 평면에서의 신성한 선에 관련되는 주님을, 그두라는 이 선에 인접한 영적 평면에서의 신성한 진리를 표현한다는 사실로부터 분명해진다. (이에 관하여는 3235, 3236항에서 언급했다.) 이로부터 그들의 아들들은 주님의 신성한 영적 평면으로부터 있는 왕국의 어느 구역들, 또는 일반적 계층(class)들을 표현한다. 그것들이 일반적 계층들, 또는 어느 구역이라 말해진 이유는 주님의 왕국이 토지(land)에 의해 표현되었고, 이 토지가 상속분으로 소유하도록 주어지는 이들 사이에서 배분되었기 때문인데, 마치 가나안의 토지가 이스라엘의 아들들에게 할당된 것과 같다. 일반적으로 열 두 계층들이 있다, 그 이유가 “열 둘”에 의해 주님의 왕국 속의 선행과 선행에서 파생된 신앙의 모든 것이 의미되기 때문이다. (이에 관하여는 16절에서 살핀다.) 그러나 여기서는 여섯, 고로 열 둘의 절반이다. 그러나 숫자의 절반도 본질적 측면에서는 같은 바, 전체와 같은 것을 포함한다. 단지 전체가 불어나거나 나뉨 뿐이다.

그리고 욕산은 스바와 드단을 낳았다. 이는 첫 계층으로부터의 갈래들을 의미한다. 이는 욕산과 그의 아들 스바와 드단이 표현하는 것으로부터 알게 된다. 고로 아래에서 이들에 관해 조금 더 살펴보자. 여기서는 오직 이름들만 나열되었을 뿐이지만, 그들에 의해 주님의 영적 교회 속의 상태들과 갈래들이 의미되는 바, 이와 같은 상태들과 일반적 측면에서의 갈래들은 선언한다는 수준에서 말해져야 할 것 같다. 천적 교회는 이런 점에서 영적 교회와 다르다: 천적 교회 속에 있는 이들, 그리고 천적 수준, 천적 평면에 속하는 것은 사랑 안에서 있다, 즉 그들은 사랑으로부터의 선과 진리 안에 있다는 말이다; 한편 영적 교회 속에 있는 이들, 영적 수준, 영적 평면에 속하는 것들은 신앙 안에 있다, 즉 그들은 신앙으로부터의 선과 진리 안에 있다는 말이다. 천적 인간이 가지는 선은 주님을 사랑함으로부터의 선이고, 그들의 진리는 이웃을 사랑함으로부터의 진리이다. 이에 비해 영적 인간이 가지는 선은 이웃을 향한 선행으로부터의 선이고, 그들의 진리는 신앙으로부터의 진리이다. 특히 신앙으로부터의 진리는 교리가 선행에 관련된 만큼에서 진리일 뿐이다. 이상 살핀 것은 주님의 천적 왕국, 뿐만 아니라 그분의 영적 왕국은 모두 선과 진리를 가진다는 것, 그러나 그 수준은 차가 크다는 것이다.
더욱이 각 왕국 안에 있는 이들 사이에서도 각 인간은 자기들이 지니는 선과 진리를 수단으로 구별된다, 그 이유가 어떤 이는 선쪽에, 또는 진리쪽에 좀 더 있어서이다. 이로부터 갈래들(derivations)이 나오는 것이다; 즉 선의 갈래들과 진리의 갈래들이다. 주님의 영적 왕국에서 선의 갈래들이 이 구절에서 호명하는 욕산의 아들들의 이름들에 의해 표현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왕국의 진리의 갈래들은 다음 절에서 호명하는 미디안의 아들들의 이름들에 의해 표현되고 있다. 영적 왕국의 이 두 계층은 두 종류의 교리물을 가진다, 즉 선행으로부터의 것과 신앙으로부터의 것이다; 신앙의 선 안에 있는 이들을 위한 선행으로부터의 교리물들은 욕산의 아들들에 의해 의미되고; 신앙의 진리 안에 있는 이들을 위한 신앙으로부터의 교리물들은 미디안의 아들들에 의해 의미되어진다.
스바와 드단은 주님의 영적 왕국에서 신앙의 선 안에 있고, 선행으로부터의 교리물들을 가진 이들로 구성되는 첫 계층에 있는 이들이다. 이로부터 따라오는 것은, “스바와 드단”에 의해 천적인 것들에 관한 지식들이 의미된다는 것, 또는 같은 말로 이런 지식들 안에 있는 이들, 즉 선행으로부터의 교리물 안에 있는 이들이 의미된다; 그 이유가 교리물들은 지식들이고, 영적 인간의 천적인 것은 선행 속의 것이기 때문이다. “스바와 드단”이 이런 의미들을 가진다는 것에 대해서는 제 1권에서(원저자의 출판에서는 제 1권, 영역과 한역의 출판에서는 제 2권 이다. 역자 주.) (창. 10:7) 말한 적이 있다; 그러나 거기서의 스바와 드단은 함의 증손자, 라아마의 아들들이라고 불리운다; 그러나 알아야 할 것은, 함, 야벳, 셈 같은 인물이 존재한 것이 아니고, 홍수 후에 “노아”라고 불리우는 교회에 속한 이들이 선들과 진리들 측면에 관련하여 세 계층들로 구별되었다는 것, 그리고 이 세 계층들에 주어진 이름이 함, 야벳, 셈이다. 그럼에도 그렇게 불리우는 나라(nation)들이 있다, 그러나 이 나라들은 다른 것들으로부터 내려와졌는데, 여기서 말해지는 바, 스바와 드단은 그두라에 의한 아브라함의 아들, 욕산으로부터 내려와졌다는 것이다.
“스바”는 천적인 것들에 관한 지식들 안에 있는 이들, 고로 신앙의 선 안에 있는 이들이다는 것은 앞서 인용한 구절로부터 분명하다; 그리고 “드단”도 이와 비슷한 의미를 가진다는 것은 앞서 인용한 구절과 아래 구절에서 분명해진다. 이사야서에서:
아라비아에 관하여 예언하라: 아라비아에 있는 숲에서 너희는 밤을 보낼 것이다, 너 드단의 동료들아; 너희는 목마른 그를 만나려고 물을 가져올 것이다, 너희 데마의 토지의 주민들 아, 방황하는 자를 만나려고 빵을 가지고 (올 것이다), 그 이유는 그들이 검 앞에서, 빼든 검 앞에서 방황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 21:13-15).
“숲에서 밤을 보냄”은 선 측면에서 황무해짐을 의미한다; 그 이유가 “아라비아”에 의해 천적인 것들 안에, 즉 신앙의 선 안에 있는 이들이 뜻해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숲에서 밤을 보냄”은 선들이 더 이상 없음, 고로 황무함, 이는 또한 “검 앞에서, 빼든 검 앞에서 방황함”에 의해서도 묘사되고 있다. 천적인 것들, 즉 신앙의 선들, 같은 말로, 그들이 하는 선행의 일들이 “목마른 그를 만나려고 물을 가져옴, 그리고 방황하는 그를 빵과 더불어 만남”에 의해 의미되어 있다.
예레미야서에서:
나는 여호와의 손으로부터 잔을 가져왔다, 그리고 여호와께서 나를 보낸 모든 나라들로 마 시게 만들었다: 예루살렘, 그리고 유다의 성들, 그리고 그녀의 왕들과 왕자들, 그들에게 황 무함에 이르는 것이 주어졌다; 바로, 이집트의 왕, 그리고 그의 종들, 그리고 그의 왕자들, 그리고 그의 백성; 그리고 두로의 모든 왕들, 그리고 시돈의 모든 왕들; 드단과 데마, 그리 고 부스와 (턱수염의) 모퉁이를 오려내 깍은 자; 시므리의 모든 왕들, 그리고 엘람의 모든 왕들, 그리고 메대의 모든 왕들, 그리고 북쪽의 모든 왕들
(예. 25:17-19, 22, 23, 25, 26).
위는 영적 교회의 황무해짐이 취급되어진다, 이 교회의 각기 다른 계층들이 순서대로 나열되고 있다, 그리고 “예루살렘”, “유다의 성들”, “이집트”, “두로”, “시돈”, “드단”, “데마”, “부스”, “시므리”, “엘람”, “메대”에 의해 의미되어 있다.
에스겔서에서:
스바와 드단과 다르싯의 상인들과 거기로부터의 모든 젊은 사자(lion)들이 네게 말할 것이 다, 너는 전리품을 가져가려 하느냐? 너는 너희 회중을 모아 약탈하려 하느냐? 은과 금을 가져가기 위해서, 가축과 물품을 가져가기 위해서, 전리품을 가져가기 위해서 (겔. 38:13);
위는 곡을 취급하는데, 이들에 의해 내적 예배에서 분리된 외적 예배, 하여 우상 예배가 된 외적 예배를 의미하고 있다; “스바와 드단”은 예배의 내적인 것들, 즉 신앙의 선들; “다르싯”은 내적인 것에 상응하는 외적 예배를; “은과 금”은 곡, 또는 예배의 내적인 것에서 분리된 예배의 외적인 것들이 가져가기를 바라는 것들인데, 이는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들이다. 이것 때문에 그들은 싸운다. 이를 방어하는 이들이 “스바와 드단”에 의해 의미된다; 그러므로 이들은 “젊은 사자들”이라 불리운다. “스바”는 선에 관한 지식들 안에 있는 이들을; “드단”은 선으로부터 진리에 관한 지식들 안에 있는 이들을 표시한다.

그리고 드단의 아들들은 앗수르 족속과 르두시 족속과 르움미 족속이었다. 이는 둘째 계층으로부터의 갈래들을 의미한다. 이는 드단의 의미가 신앙의 선 안에, 더 적절하게는 선으로부터 신앙의 진리 안에 있는 이들이 의미됨에서 분명해진다. 갈래들이 둘째 계층으로부터 이다는 것은 분명하다. 드단의 이 세 아들들에 의해 선으로부터의 신앙의 진리들이 의미된다; 그러나 각 아들에 의해 의미되는 것은 말해질 수 있으나 말씀의 다른 구절들로부터 확증되지 않는데, 그 이유는 성경의 다른 곳에 등장하지 않기 때문이다.
주님의 왕국에는 선과 진리들에 관련하여 무수한 다양함들이 있다, 그럼에도 이 다양함들이 하나의 천국을 구성하고 있다; 그 이유가 다양함들은 아주 많아서 어느 하나도 똑같은 것이 없다, 즉 어느 선과 진리도 같은 것이 없다는 말이다. 하나의 천국은 많은 다양함들로 구성되되 주님에 의해 배치되는 바, 그것들은 일치하고, 많은 것들로부터의 일치, 또는 조화됨을 주님께서 나누어 주시는 바, 그들 자신에 관계되는 모든 것을 수단으로 그분과 관계를 맺는다. 여기서의 경우는 신체의 기관들, 조직들, 내장의 경우와 같아서 이쪽의 것이 저쪽의 것과 정확히 하나 같이 활동하는 것과 같다. 그들은 모두 다르나, 하나를 만드는데, 그 이유는 자신들에 관계되는 모든 것이 하나의 혼을 만들기 때문이고, 이를 통하여 천국에, 주님에 관계를 맺기 때문이다; 거기서는 무엇이든 주님과 연결되지 않은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이로부터 분명한 바, 진리와 선의 차이들은 종류에서 무수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무수한 것의 일반적인 것들, 그중에서 가장 일반적인 것들, 이것이 영적 교회인데, 아브라함의 아들들과 손자들에 의해 의미된다.
영적 교회 속에 있는 그들은 천적 교회 속에 있는 이들이 지니는 지각을 가지고 있지 않다, 대신 그들은 자기들이 배운 것을 진리들로서 인정한다; 이것 때문에 그들은 배운 진리들에 관하여 토론하고, 그것이 맞는지를 추론한다. 각 인물은 그의 자신의 교회 속에 있는 자신이 맞다고 인정한 그 교리 안에 머무르고 있다. 이것이 아주 많은 차이들의 근원이다. 더욱이 외관과 오류들로부터 선과 진리에 관한 그들의 결말을 아주 많이 만들어 낸다. 이 사람은 이 방법에서, 저 사람은 저런 방법에서 만들어 내는데, 누구도 지각으로부터서는 아니다; 그들은 지각이 무엇인지를 모르고 있다; 따라서 그들의 이해력은 불분명한 바, 의견의 차이가 신앙의 가장 본질적인 것, 즉 신성, 그분의 인간, 주님의 거룩한 진행에서도 있다는 것은 당연할지 모른다. 천적 인간은 이 셋이 셋 따로가 아닌 하나임을 지각한다; 그러나 영적 인간은 셋이라는 생각 안에 머무르고 있다. 비록 그들이 그곳이 한 분이시기를 바라고 있을지라도 여전히 그들의 생각은 셋에서 한발자국도 더 떼지 못하고 있다. 의견 차이가 발생하는 가장 근본 원인은 역시 무수히 많은 다양함들과 교리적인 것들의 차이점이다. 이로부터 모든 이는 여기서 호명되는 이름들에 의해 의미된 갈래들이 어디로부터 일지를 대충 짐작하고 있을 것이다. 위에서 살핀 바로부터도 알게 되는 것은 교리적인 것들이 아주 많고 다양해짐의 존재는 주님이 수여하신 것이다, 그럼에도 이 모두가 선행이 교회의 본질 (필수)이다는 것을 인정할 때, 이 모두는 하나의 교회를 만들어 낸다; 같은 말로, 그들이 삶을 교리의 목적으로 중요시할 때; 즉 그들이 교인이 어떻게 사는 지를 문의할 때; 그의 감정, 생각이 무엇인지가 아닌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물어보는 것에서 교회라는 것의 결말을 보아야 한다는 말이다. 그 이유가 다른 삶에서 모든 이는 살아 온 것으로부터의 그의 선에 따라서 주님께서 살 곳(lot)을 정해주시기 때문이다, 다시 강조하건대, 생활의 선으로부터 분리된 교리로부터의 그의 진리에 따라서가 아니다는 말이다.

미디안의 아들들은 에바와 에벨과 하녹과 아비다와 엘다아이었다. 이는 셋째 계층으로부터의 갈래들을 의미한다. 이는 미디안의 신앙의 진리 안에 있는 이들이다로부터 알게 되는데 아래에서 살핀다; 그리고 신앙의 진리 안에 있는 이들이 “미디안”인 바, 이로부터 따라오는 것은 거기로부터의 갈래들이 그의 “아들들”이다는 것이다. 신앙의 진리들 안에 있는 이들의 경우는 이렇다: 신앙의 선 안에 있지 않은 이들은 누구도 주님의 왕국 안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그 이유가 신앙의 선은 삶 속에 있기 때문이다, 신앙의 삶이 남아 있는다, 따라서 교리는 삶과 하나된 것만이 받아진다. 그럼에도 자기가 그렇게 배웠기에 배운 것을 본질이다고 여겨, 신앙을 고백하는 이들, 한마디로 신앙의 진리 안에 있는 이들, 동시에 신앙의 선 안에서도 있는 이들(입술로의 기독인이 아닌 심정에서의 기독교인들)은 주님의 영적 천국 안에 있다. 그 이유가 어떤 이들은 자기들의 선생에 의해 가르쳐질 때, 특히 그의 어린 시절에 스며든 그들의 의견들에 쉽사리 설득되기 때문이다. 특히 성인이라 해도, 꽤 유명해져 그를 따르는 교인의 숫자가 많아 유명해진 어느 설교자나 교회의 우두머리격인 자가 말하기 때문에, 그들이 주창하는 교리에 선뜻 자신의 생각이 더 타당하다는 것에 대한 추론을 자신스스로 접어버리지 않았으면 그들 무리에서 왕따당하는 두려움을 과감히 떨치지 못하여 가만히 자신 스스로 생활의 선을 지속할 뿐인 여린 마음의 소유자들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신앙에 속하는 (타당치 않은) 것들이 지각적으로 흘러들려 하지만 선행에 속한 것들은 그렇지 않다고 거부하고 있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신앙의 진리 안에 있고, 신앙의 선 안에 있는 이들이 “미디안”이라 불리운다. 그들의 생활에 있는 진리들이 “미디안의 아들들”이다; 또한 신앙의 선에 결합된 진리 안에 있는 이들이 “미디안”들인데, 반대 의미에서의 미디안도 있다. 즉 거짓 안에 있고, 생활의 선을 가지지 않는 자이다. 이사야서에서:
수많은 낙타들이 너를 덮을 것이다, 미디안과 에바의 단봉 낙타들, 이것들 모두는 스바로부 터 올 것이다; 그들은 금과 유향을 가져올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여호와의 찬양들을 포고 할 것이다 (이. 60:6);
위는 주님의 영적 왕국이 취급된다. “미디안과 에바의 단봉 낙타들”은 교리적인 것들을 표시한다. 선에 관한 것들은 “금”이고; 진리에 관한 것들은 “유향”이다; 둘 다 “여호와의 찬양들”이다; 그러므로 이것을 “에바”가 의미함이 분명하다. (“미디안 족들”이 요셉을 구덩이에서 끌어냈고, 그를 이스마엘족들에게 팔았고, 하여 이집트 보디발에게 까지 넘겨졌는데, 이때의 미디안은 단순한 선의 진리 안에 있는 이들을 의미하는데, 이는 그 장에서 살핀다. 창. 37:28, 36.)
생활의 선을 가지지 않았기 때문에 거짓 안에 있는 이들이 미디안에 의해 의미되는 대목은 모세의 책에서 확인된다:
모압의 원로들과 미디안의 원로들은 그들의 손에 복채를 가지고 발람에게 가서, 그에게 발 락의 말을 전했다 (민. 22:4, 7, 등등).
좋은 의미에서 “모압”은 자연적 선 안에 있고, 타인의 꼬드김에 쉽사리 넘어가는 이들을 표시한다; 그러나 반대 의미에서 선들을 섞음질하는 이들을 표시한다 (2468항). 좋은 의미에서 “미디안”은 단순한 선의 진리 안에 있는 이들, 그러나 자신들을 설득당해지게 내버려두는 이들을 표시한다; 반대적 의미에서는 위 인용 구절 같이 진리들을 거짓화하는 이들을 표시한다. 거짓화함이 “자기들의 손에 든 복채”에 의해 의미되고 있다; 그리고 이 거짓들로부터의 행위들이 발람을 신앙의 선들과 진리들을 표시하는 이스라엘에게 맞서도록(악으로 저주하도록) 보냄이다.
발람이 발락에게 귀뜸해준 것, 이스라엘의 아들들이 미디안의 여인들과 놀아나게 해서 재앙을 당하게 한 것, 이 재앙은 비느하스가 이스라엘 남자와 미디안 여인을 창으로 찌름에 의해 멈춘 것 (민. 25:6-8), 등도 위와 같은 범주에서 이다; 그 이유가 매춘들에 의해 진리의 거짓들이 의미되기 때문이다. 진리의 거짓화함이 내적 의미에서 매춘에 의해 의미되었기 때문에, (여호와의) 명령에 의해 이스라엘의 일만 이천 명이 미디안을 쳐부수고, 그들의 왕들과 모든 남성들, 포로로 끌고 간 남자를 알았던 여인들은 살육하고, 전리품은 그들 사이에서 나누었다 (민. 25:16, 17; 31장). 일만 이천인 이유는 “12”가 신앙의 모든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것에 의해 거짓들은 파괴되어진다; 그들이 죽인 “왕들”과 “모든 남성들”은 거짓들이다. “남자를 알았던 여인들”은 거짓에 대한 애착들이다; “(금, 은, 가축떼 등등의) 전리품”은 거짓화된 진리들이다. 위 모두를 종합하면, 위 인용 구절은 진리들을 수단으로 거짓인 것을 처벌하고 파멸함에 대한 표현이다.
사사기서에, 이스라엘의 아들들이 악행을 일삼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이 미디안족의 손에 7년을 붙여둔 기록이 있다; 즉 이스라엘의 아들들은 미디안 때문에 산 속의 동굴, 굴, 성곽을 두른 장소 같은 것을 자신들을 위해 만들었다; 이스라엘이 씨를 뿌렸을 때, 미디안과 아말렉과 동쪽의 아들들이 올라와서 그들의 토지의 생산물을 약탈해 갔다; 그 후에 이스라엘들은 개 같이 혀로 물을 튕겨 먹은 기드온의 삼백 명의 군인들로 해서 구원되었다, 그리고 무릎을 꿇고 허리를 굽혀 마신 군인들은 돌려 보냈다, 이 외에도 특이 사항들은 더 있다 (사. 6-8장). 이 대목 역시 언급되는 각각, 그리고 모든 것들은 진리의 거짓화, 이 때문에 있은 처벌, 심지어 개 같이 물을 튕겨 먹은 자에 의해서까지 의미되는데 이에 대한 내적 의미의 세세한 것에 대하여는 여기서 지면을 할애할 수는 없다. 그러나 주님의 신성한 자비로부터 필요한 부분에서 말해질 것이다. 하박국서에서:
그분이 바라보시고 나라들을 흩으셨다; 그리고 영원한 (시간의) 산들이 흩어지고, 영원히 있는 언덕들이 절했다. 나는 아웬 아래 구산의 천막들을 보았다, 미디안의 토지의 커텐 (curtain)들이 떨었다 (합. 3:6, 7);
위는 주님의 강림이 취급된다. “구산의 천막들”은 악으로부터의 광적 신앙심이다; “미디안의 토지의 커텐들”은 거짓으로부터의 것 중 하나이다.

이 모든 이들은 그두라의 아들들이었다. 이는 이로부터 파생되어져 나온 각종 교리적인 것들과 예배들을 의미한다. 이는 “아들들”의 의미가 진리들과 교리적인 것들이다로부터; 그리고 그두라가 영적 평면의 신성한 선과 결합된 영적 평면의 신성한 진리이다로부터 알려진다; 고로 주님의 영적 왕국 속에 있는 것들이다; 그 이유는 이 왕국의 예배는 교리적인 것들에 따라 있기 때문에 “그두라의 아들들”이 이런 것들을, 또는 이로부터 파생되는 예배들을 표현함이 자연스럽게 뒤이어지기 때문이다.

5, 6절. 그리고 아브라함은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이삭에게 주었다. 6. 그리고 아브라함이 거느렸던 소실들의 아들들에게, 아브라함은 선물을 주었다. 그리고 그는 그들을 자기가 아직 살아 있는 동안에 동쪽 방향인 동쪽의 토지에로 그의 아들 이삭으로부터 떠나 보냈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이삭에게 주었다. 이는 최고로 높은 의미일 경우 신성한 합리성에 있는 모든 신성한 것들을 의미하고, 관계적 의미일 경우 주님의 천적 왕국에 있는 사랑의 천적인 것들을 의미한다. 이는 아브라함이 신성 자체 측면에서의 주님을 표현함으로부터; 그리고 이삭이 신성한 합리성 측면에서의 주님을 표현함으로부터; 그리고 내적 의미에서 주님은 “아브라함”과 “이삭”이고, 주님은 그분 자신의 신성으로부터 그분의 합리성을 신성으로 만드셨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아브라함은 그가 가진 모든 것을 이삭에게 주었다”에 의해 신성한 합리성 안에 있는 신성한 모든 것들이 의미된다고 말하는 것이다. 앞서 진행되고 이어지는 절에 있는 것도 이 내용에 중점을 두고 있다. 즉 주님의 합리성에 있는 모든 것들은 신성으로 만들어졌다 이다. 그 이유가 내적 의미에서, 아브라함, 이삭, 야곱이 취급되는 곳에서의 주제는 주님의 인간, 그 인간이 어떻게 신성으로 만들어졌는가 이기 때문이다.
주님의 인간을 구성하는 것은 두 가지, 즉 합리성과 자연적 평면이다. 주님의 합리성은 이삭에 의해, 그분의 자연 평면은 야곱에 의해 표현되어졌다; 주님은 그것 둘을 모두 신성으로 만드셨다; 그분이 그분의 합리성을 어떻게 신성으로 만드셨는지가 이삭에 관해 말해지는 것 안에 포함되어 있다; 그리고 그분이 그분의 자연 평면에 해당되는 것들을 어떻게 신성으로 만드셨는지가 이후 이어질 야곱에 관련된 것에 포함되어 있다. 이 후자(자연에 해당되는 것들)는 합리성이 신성으로 만들어질 때까지 신성으로 만들어질 수 없었다. 그 이유는 합리성을 수단으로 자연 평면에 해당되는 것들이 신성으로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대목의 말에 의해 신성한 합리성에 있는 신성한 모든 것들이 의미되는 것이다.
더욱이 내적 의미에서 주님이 다루어지는 모두, 그리고 각각에서는 그분의 왕국과 그분의 교회 역시 취급된다, 그 이유는 주님의 신성이 그분의 왕국을 만들기 때문에서이다. 그러므로 주님이 취급되면, 의례 그분의 왕국도 다루어진다 (1965항). 그러나 주님에 관한 내적 의미는 최고의 의미에서이다, 한편 그분의 왕국에 관한 내적 의미는 관계적 수준에서의 의미이다. 아브라함이 이삭에게 모든 것을 주었다 라는 말의 관계적 의미는 사랑의 천적인 것들이 주님의 천적 왕국에 주어진다는 것이다. 그 이유가 관계적 의미에서 “이삭”에 의해 천적 왕국이 의미되기 때문이다. 한편 그두라에 의해 아브라함에게 태어난 그의 아들들은 주님의 영적 왕국을 의미한다. 똑같은 방식에서 이후 있을 이스마엘에 관련해서도 의미되어진다.

그리고 아브라함이 거느렸던 소실들의 아들들에게, 아브라함은 선물을 주었다. 이는 주님의 신성한 인간에 의해 양자로 삼아진 영적인 이들, 그들이 그분의 영적 왕국에서 장소들을 할당받았음을 의미한다. 이는 “소실들의 아들들로부터”의 의미가 영적 평면(왕국)에 있는 이들을 표시함으로부터 알게 되는데, 아래에서 살핀다; 여기서의 아브라함의 표현이 주님의 신성한 인간이다로부터; 하여 “아브라함이 거느린”의 말에 의해 영적인 이들이 주님의 신성한 인간에 의해 양자로 되었음이 의미된다.
주님의 영적 왕국과 영적 (평면의) 인간이라 불리우는 이들을 구성하는 것들에 관해 앞의 여러 장소에서 살핀 바로부터 우리가 알 수 있는 바는, 영적 평면(왕국)에 속하는 것들은 선과 진리의 결혼 자체로부터 태어난 아들들이 아니다는 것, 그러나 부부 관계로 인정하는 어떤 계약으로부터 태어난 아들들이다는 것이다; 실로 그들 모두 역시 같은 아버지이나 어머니만 다른 것이다; 즉 같은 신성한 선으로부터 이나 같은 신성한 진리로부터는 아니다는 말이다. 그 이유가 천적 평면(왕국)은 선과 진리의 결혼 자체로부터인 바, 그들은 선과 이 선으로부터의 진리를 가진다; 그러므로 그들은 진리인지 여부를 묻지를 않고, 진리를 선으로부터 지각한다; 그래서 그들은 그것이 그렇다 라고 확언하는 것을 넘어 진리에 관하여는 대화하지 않는다는 것을 주님께서 마태복음서에서 가르치신다:
너희의 말은 예, 예; 아니오, 아니오 이게 하라; 그 이유는 이 외의 말은 무엇이든 악으로 부터 오기 때문이다 (마. 5:37);
이에 반해, 영적 평면의 인간들, 그들은 부부 관계 자체가 아닌 계약으로부터의 부부 관계이기 때문에 진리가 무엇인지를 지각으로부터 알지 못하는 바, 그들은 그들이 말해온 진리를 자기들의 부모나 스승이 진리라고 말해 왔다고 말한다; 그들 안에는 선과 진리의 결혼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들이 믿는 진리도 그들이 생활의 선 안에 있을 경우, (이 선의) 진리를 위하여 주님에 의해 진리로 채택된다(양자로 삼으신다). 그러므로 영적 평면의 것들이 여기서 “소실들의 아들들”이라 불리운다. 이는 지금까지 앞 구절에서 열거한 그두라의 아들들 모두를 뜻한다, 또한 이 범주에 하갈의 아들, 이스마엘에 관련된 아들들도 해당되는 바, 아래 12-18절에 열거되고 있다.
오래 전, 천적, 영적 측면들이 표현되도록 하기 위하여 남자가 아내에 추가하여 소실을 거느리는 것을 허용할 수 있었다; 이런 소실은 아내에 의해 남편에게 주어졌는데, 그때 그녀는 그의 “여인”이라 불렸다, 또는 “여인으로 그에게 주어진… ”라고 일컬었다. 마치 이집트인 하갈이 사라에 의해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경우 같다 (창. 16:3); 하녀 빌하가 야곱에게 라헬에 의해 주어질 때 (창. 30:4); 그리고 하녀 질바가 레아에 의해 야곱에게 주어질 때 (창 30:9) 같은 경우가 그 예이다. 거기서 그들은 “여인”이라 불리운다. 그러나 이 장과 다른 장소에서 (창. 35:22; 역상 1:32) “소실”이라 불리우기도 한다.
이 고대인들이 아내 외에 소실을 거느렸다는 기록은 아브라함과 야곱 뿐만 아니라, 기드온 (사. 8:31), 사울 (삼하. 3:7), 다윗 (삼하. 5:13; 15:16), 그리고 솔로몬 (왕상. 11:3)에 있는데, 이는 모두 아내에 의해서는 천적 평면의 것이; 소실에 의해서는 영적 평면의 것이 표현되도록 하기 위하여 허용된 것이다. 이것이 허용으로부터 인 것은 그들이 부부의 사랑이 없고, 단지 자손을 증대시킬 목적으로 육체적 짝짓기 (coupling)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행위가 부부의 사랑에 흠집을 내지 않고 계약적 수준에서의 결혼이 가능할는지 모르나, 어쨌든 거기에는 선과 진리 안에 있는 이들에게, 또는 내적 인간이거나 내적 인간이 되어 가는 이들에게는 결코 이런 계약적 결혼 따위도 없다; 그 이유가 인간이 선과 진리 안에 있자 마자, 그래서 내적 차원의 것들 안에 있자 마자, 이런 것들은 중지되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기독교인들, 마찬가지로 유대인들도 아내와 더불어 소실을 자신들에게 취하는 것은 허용될 수 없었다. 그 이유는 이것이 간통이기 때문이다. 영적 평면의 모든 것들이 주님의 신성한 인간에 의해 양자로 삼아졌다는 내용에 대해서는 앞에서도 간간히 말했던 바 있다.

그리고 그는 그들을 그의 아들 이삭으로부터 떠나보냈다. 이는 천적 왕국에 있는 이들(것들)과 영적 왕국에 있는 것들(이들)을 분리하시고 구분하심을 의미한다. 이는 방금 말해진 사항들로부터 분명해진다; 즉 “소실”이라 불리우는 그두라와 이집트인 하갈에 의한 아브라함의 아들들이 영적 평면의 인간을 표현한다는 것; 그리고 이삭은 관계적 의미에서 천적 평면의 인간을 표현한다는 것; 따라서 이 두 계층은 분리되어 있다

그가 아직 살아 있는 동안. 이는 주님의 신성한 인간이 영적 평면의 인간에게 생명을 줄 수 있었던 동안에를 의미한다. 이는 “아직 그가 살아 있는 동안”이 생명을 주는 것을 의미함에서 알게 된다; 그 이유가 아브라함에 의해 여기서 신성한 인간 측면에서의 주님이 표현되었기 때문이다. 영적 인간은 주님의 신성한 인간으로부터 생명을 가진다는 것은 이미 살폈다. 그들의 생명이 이 근원으로부터 일 때, 주님은 그들과 더불어 “산다”고 공통의 말에서 조차 말해진다. 이로부터 내적 의미에서 “아브라함이 아직 살고 있는 동안”에 의하여 생명을 주는 것이 의미된다. 생명은 신앙의 선을 수단으로 영적인 이들에게 주어지는데, 이것이 이어지는 단어들에서 뜻해진다.

동쪽 방향인 동쪽의 토지로 이는 신앙으로부터의 선쪽으로를 의미한다. 이는 “동쪽”과 “동쪽의 토지”의 의미로부터 분명해지는 바 아래에서 살핀다. “동쪽의 토지”에 의해 의미된 신앙의 선은 이웃을 향한 선행이라 말씀에서 불리우는 것 외에 다른 것은 없다; 그리고 이웃을 향한 선행은 주님의 명령들에 따라서 사는 것밖에 더 이상 없다. 이것이 “동쪽의 토지”에 의해 의미되는 것; 그러므로 신앙의 선에 대한 지식들 안에서 있었던 이들이 “동쪽의 아들들”이라 불리워진다. 동쪽의 아들들의 토지는 아람 또는 시리아였다. 그리고 “시리아인들” 또는 “동쪽의 아들들”에 의해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들에 있었던 이들이 의미되었기에, 그들은 열왕기서에서 “현자, 박사”라고 불리운다. 열왕기상서에서:
솔로몬의 지혜는 동쪽의 모든 아들들의 지혜보다 더 번성하였다 (왕상. 4:30);
그리고 마태복음서에서:
현자들이 동쪽으로부터 예루살렘에 왔다, 말하기를, 유대의 왕으로 태어나신 그분은 어디 계신가? 그 이유는 우리는 동쪽에서 그분의 별을 보았기 때문이다, 하여 우리는 그분을 경배하러 왔다 (마. 2:1, 2).
이런 이유가 시리아 안에는 고대 교회의 마지막 잔존자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 토지 안에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들이 아직 남아있었다는 것을 발람의 기록으로 알게 된다, 그는 여호와를 숭배했을 뿐만 아니라 주님에 관하여 예언도 했다, 그래서 그는 그분을 “야곱으로부터의 별, 이스라엘로부터의 홀”이라 불렀다 (민. 24:17). 발람이 시리아에 있는 동쪽의 아들들로부터 이었다는 것은 분명한데, 그 스스로 말했기 때문이다:
시리아로부터 모압의 왕 발락이 나를 동쪽의 산들로부터 데려왔다 (민. 23:7).
동쪽의 아들들이 거주한 곳이 아람 또는 시리아이었다는 것은 야곱이 시리아로 갔을 때, 그가 “동쪽의 아들들의 토지로” 갔었다고 말한 것에서도 분명해진다 (창 29:1).

7-10절. 그리고 이것들은 아브라함의 생명들의 햇수들의 날들이다, 이것을 그는 살았다. 일백 년, 그리고 칠십 년, 그리고 오 년. 8. 그리고 아브라함은 아주 늙은 나이에, 노인 그리고 충분할 만큼 살아, 기간이 다 차서, 죽어 그의 백성들에게로 거두어 들여졌다. 9. 그리고 그의 아들들인 이삭과 이스마엘은 그를 마므레 앞 헷 족속 소할의 아들 에브론의 들판에 있는 막벨라 굴에 매장했다. 10. 이 들판은 아브라함이 헷 아들로부터 매입했다. 거기에 아브라함과 그의 아내 사라가 매장되었다.

그리고 이것들은 아브라함의 생명들의 햇수들의 날들이다, 이것을 그는 살았다. 이는 신성 자체 측면의 주님을 아브라함이 표현한 상태를 의미한다. 이는 “날들”과 “햇수들”의 의미가 상태들이다로부터; 그리고 “생명들”이 여기서는 상태들을 의미함에서, 여기서는 아브라함에 의해 표현된 상태들이다; 그 이유가 모든 그의 삶은 말씀에서 묘사된 바와 같고, 지금 그 삶의 끝인데, 이것도 표현적이다. 아브라함이 신성 자체 측면의 주님을 표현하였다는 것은 지금까지 많이 설명해왔다. 그가 이를 표현하기 위하여, 그의 이름은 여호와의 “h”가 삽입되어 불리워졌다. 아브라함은 “아버지”라 불리운 신성 자체와 “아들”이라 불리운 신성한 인간 모두를 표현하였다; 고로 그는 신성 자체와 신성한 인간 양쪽에서의 주님 모두를 표현하였으나, 신성한 인간의 경우는 영원으로부터 계신 신성한 인간을 표현하였다; 이 신성한 인간으로부터 시간 안에 계신 그분의 인간이 출시되었고, 이 인간이 신성이 되시었을 때, 영원으로부터 계신 (본래의) 인간쪽으로 옮기시었다(데려가시었다). 이것이 아브라함에 의한 주님의 표현이다.

일백 년, 그리고 칠십 년, 그리고 오 년. 이는 이 상태에 속한 것들을 의미한다. 이는 말씀에 있는 모든 숫자들은 (어떤) 것(thing)들을 의미한다로부터 알려진다; 그러므로 이 숫자 역시 그러한 바, 지금 취급하는 상태 속에 있는 것들을 의미한다. 마음이 말씀의 역사적 부분에, 이야기 줄거리로서의 말씀에 한정되어 있다면, 이 숫자들은 마냥 평범한 숫자들, 즉 아브라함이 살아온 햇수, 나이에 불과할 것이다, 하여 어떤 내적 의미도 포함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그것들이 이런 의미를 포함한다는 것은 숫자들에 관해 설명한 것들로부터 이미 알고 있을 것이다. 숫자가 숫자로만 있을 경우, 거기에 거룩함은 없다, 그러나 말씀의 미세한 부분도 거룩함의 비중은 같다는 것을 염두하면 숫자에 내적 의미가 있을 것은 당연하다 생각될 것이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기간이 다 차서, 죽어…” 이는 아브라함에 의한 표현이 끝났음을 의미한다. 이는 “기한이 만료됨”, 그리고 “죽는 것”의 의미가 (효력이) 중지됨, 또는 끝에 이르는 것이다로부터; 그리고 여기서는 표현함의 끝이다. 그 이유가 아브라함에 관련되는 것은 역사적 의미가 아니면 그 인물 당사자와 관련되는 것은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말씀에서의 그의 일생은 주님과 그분의 왕국과 모두 관련되고 있다. 그러므로 그가 “기간이 차서 죽었다”라고 아브라함에 관해 말해질 때, 이것은 말씀에서 (즉, 순수한 의미에서) 아브라함에 의해 주님을 표현하는 상태가 끝에 이르렀다를 의미할 수밖에 없다.

…아주 늙은 나이에, 노인, 그리고 충분할 만큼 살아… 이는 표현함에 있어 새로운 어떤 것을 의미한다. 이는 “늙은 나이”가 내적 의미에서 옛 것을 벗고, 새 것을 입는 것을 의미함으로부터 알게 된다 새로운 것, 또는 새로운 상태가 “늙은 나이”에 의해 내적 의미에서 의미되는 이유는 말씀의 내적 의미는 일차적으로 천사들을 위한 의미이고, 천사들에게는 시간에 대한 생각, 또는 시간에 관련되는 것, 나이, 유아, 어린 시절, 젊은 이, 성년, 늙은 나이 등에 대한 생각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 대신 그들은 상태들에 대한 생각을 가진다, 고로 유아 시기 대신 그들은 순진의 상태를; 어린 시절과 청년 대신 선에 대한 애착의 상태에 관한 생각을; 성년 대신 총명의 상태를; 늙은 나이 대신 지혜의 상태에 관한 생각을 가진다; 그리고 충분히 산 시기에 시간에 속한 것으로부터 시간 없는 삶에 속한 것들 안으로 건너가는 바, 이는 새로운 상태를 입는 것이기에, “늙은 나이”에 의해 새로운 것이 의미되고, 이 구절의 경우, 새로운 표현이 있게 됨을 의미한다. 그 이유는 이것이 아브라함을 두고 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또한 그가 “노인이고 충분할 만큼 살았다”고 말해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의 백성들에게로 거두어 들여졌다. 이는 이러한 것들(지금까지의 역사물)이 아브라함에 관하여 이었음을 의미한다. 이는 “그의 백성들에게로 거두어 들여짐”은 이 주제에 대하여는 더 이상 있지 않다를 의미함으로부터 알려진다; 그 이유가 그의 백성에게로 거두어 들여진다는 것은 그가 지금까지 함께 있어왔던 이들에게서 떠나는 것, 그리고 그의 본래 자신에게로 건너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고로 이 구절 이후 그는 (주님과 그분의 왕국에 관한 것을) 표현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누군가가 죽을 때, 그가 그의 아버지들(조상들), 또는 그의 백성들에게로 거두어 들여졌다고 말하는 것은 고대인들의 관습적인 말투에 해당된다, 그리고 그들은 이런 언어 표현 형체를 수단으로 그가 실제로 다른 삶에 있는 그의 부모들에게로, 친척들에게로, 동족에게로 갔다고 이해했다. 고대인들은 이런 말투의 언어를 천적 인간이었던 태고인들로부터 끌어냈다. 그 이유가 태고인들은 지상에 살면서도 천국에 있는 천사들과 더불어 있었기 때문이다, 고로 그들은 이 경우가 어떤 경우인지를, 즉 같은 종류, 같은 등급의 선 안에 있는 모두, 고로 이로부터 파생한 똑같은 진리 안에 있는 모두는 다른 삶에서 만나고 함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태고인들은 “그의 아버지들(조상들)에게로 갔다”라고 말하고, 고대인들은 “그의 백성들(사람들)에게로 갔다”라고 말한다. 그 이유는 그들과 더불어 아버지는 선의 측면을, 백성은 진리 측면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태고 교회인들은 비슷한 선 안에 모두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천국에서 함께 있다; 그리고 이런 경우는 고대 교회의 많은 이들의 경우도 그러한데, 단지 그들은 비슷한 진리 안에 있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인간이 육체 안에서 사는 동안, 그의 혼은 그것의 품질과 비슷한 다른 삶에 있는 영들의 어떤 사회 안에서 항상 있다; 악한 자는 지옥의 영들의 사회 안에; 선한 자는 천사들의 사회 안에 있다. 따라서 모든 이 각자는 선과 진리 측면이든, 악과 거짓 측면이든, 자신에 일치하는 다른 삶의 영들의 공동체 안에 있다; 그리고 각자는 그가 죽을 때, 함께 있던 그 공동체 안으로 온다. 이것이 고대인들 사이에서 “그들의 아버지들에게로”, 또는 “그의 백성들에게로” 모아들여졌다에 의해 의미되어 있다. 이는 아브라함만을 두고 말해진 것은 아니다. 이는 이스마엘 (창. 25:17); 이삭 (창. 35:29); 야곱 (창. 49:29, 33); 아론 (민. 20:24, 26); 모세 (민. 27:13; 31:2; 신. 32:50); 그리고 가나안의 토지에 들어간 첫 세대 (사. 2:10)를 두고도 위와 같이 말해지고 있다. 그러나 말씀의 내적 의미에서, 어떤 누군가의 일생이 표현적 차원에서 취급되어질 때, “그의 백성에게로 거두어 들임”에 의해서는 그가 더 이상 어떤 주제를 표현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의 아들인 이삭과 이스마엘은 그를 매장했다. 이는 주님을 표현함이 이삭과 이스마엘을 수단으로 지금 시작되었음을 의미한다. 이는 “매장함”의 의미로부터 알려진다. 아브라함에 의한 주님을 표현함이 끝에 이르렀고, 이제 이삭과 이스마엘에 의한 주님을 표현함이 시작된다는 것에 주목해보면, 여기서의 “매장했다”는 말은 (표현하는) 상태가 소생함을 의미하게 된다. 그 이유가 의미는 그것들이 서술되는 것에 일치하도록 응용함에서 결정되기 때문이다. 말씀에서 표현들은 비록 표현자가 죽음으로 해서 끊기는 듯 나타난다 해도 그것들은 계속된다; 하여 그들의 죽음은 어떤 끊김을 의미하는 것이 아닌 계속됨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표현자의 매장은 표현이 소생하는 것, 또는 그밖의 누군가에 의해 계속되는 것을 의미한다.

막벨라 굴에. 이는 진리에 관련된 부활을 의미하고, 마므레 앞 헷족 소알의 아들 에브론의 들판에 있는 이란 선에 관련된 부활을 의미한다. 또한 이 말은 주님의 신성한 인간으로부터 선과 진리를 받고 구원된 영적 왕국의 사람들도 의미한다. 이는 앞서 서술한 적이 있다; 또한 이 들판은 아브라함이 헷의 아들로부터 매입했다 란 거기로부터 파생된 주님의 영적 왕국을 의미한다; 그리고 거기에 아브라함이 매장되었고, 그의 아내 사라가 (매장되었다) 란 소생함을 의미한다. 이는 이미 서술한 것과 23장 에서 표현된 모든 것들로부터; 그리고 “매장되어짐”의 의미로부터 이 의미는 분명해진다.

11절. 그리고 아브라함이 죽은 후에 하느님께서는 그의 아들 이삭을 축복하셨다. 그리고 이삭은 브엘-라해-로이에서 거주하였다.

아브라함이 죽은 후에 이는 아브라함을 수단으로 주님이 표현되었던 때와 상태 이후를 의미한다. 이는 누군가의 표현하는 생명이 취급될 때, 그가 죽는다는 말은 표현이 종료됨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이 죽은 후에”의 경우에서는 아브라함에 의해 주님이 표현되는 때와 상태 이후를 의미하게 된다.

하느님께서는 그의 아들 이삭을 축복하셨다. 이는 이삭을 수단으로 하는 주님의 표현이 시작됨을 의미한다. 이는 “하느님이 축복하셨다”라는 표현의 의미로부터 알는지 모른다, 고대인들 사이에서, 어떤 작업이 개시되어질 때, 관습적인 말투가 “하느님께서 이 일을 축복하시기를 빈다”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은 “그것이 번창하고 행복하기를 소원한다”라는 말과 같기 때문이다. 이 두 말투는 모두 어떤 것의 시작에서 있는 말투인 바, 여기서의 경우는 이삭에 의한 표현의 시작을 의미하는데, 그 이유가 아브라함이 죽는 대목에 바로 이어 서술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삭은 브엘-라해-로이에서 거주하였다. 이는 주님의 신성한 합리성이 신성한 빛 안에 있음을 의미한다. 이는 “거주한다”가 “살아간다”를 의미함으로부터; 그리고 “브엘-라해-로이”의 의미가 신성한 진리 자체로부터 태어난 합리성으로부터의 신성한 선이다에서 알려진다. 고로 대략적인 의미는 신성한 합리성은 신성한 진리 자체로부터 태어나진 신성한 선 안에 살았다는 것, 또는 신성한 선 안에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그것 안에 있지 않았다; 그러므로 “브엘-라해-로이 안에서(in)”가 아닌, “브엘-라해-로이에서(at, cum)”라고 말해지고 있다. 하여 이를 번역하면, “살아계시어 나를 보시는 그분의 샘에서”이고, 이는 이 신성한 선과 더불어를 표시한다. 그 이유가 이삭은 남쪽의 토지에서 거주한다고 24:62에서, “그리고 이삭은 브엘-라해-로이 쪽으로 오는 곳으로부터 왔다, 그리고 그는 남쪽의 토지에 거주했다”라고 읽기 때문이다; 그리고 남쪽의 토지는 신성한 빛을 의미한다. 여기서도 이외 더 이상의 의미는 없다.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12절. 그리고 이것들은 사라의 여종 이집트 출신 하갈이 아브라함에게 낳아 준 이스마엘로부터의 출생들이다.

그리고 이것들은 아브라함의 아들 이스마엘로부터의 출생들이다. 이는 이스마엘로 표현되는 영적 교회의 갈래(derivation, 파생)들을 의미한다. 이는 “출생들”의 의미가 신앙의 갈래들, 고로 교회의 갈래들이다로부터; 그리고 이스마엘에 의해 합리성이 있고 주님의 영적 교회 속에 있는 이들이 표현됨으로부터; 그리고 “아브라함의 아들들”의 의미가 주님으로부터의 진리 안에 있는 이들이다로부터; 그 이유가 “아들들”에 의해 진리들이 의미되기 때문, 그리고 아브라함에 의해 신성한 인간 측면에서의 주님도 표현되기 때문, 신성한 인간으로부터 영적 평면의 인간은 진리와 선을 가진다.
주님의 영적 (평면의) 교회에 주목한다면, 이 교회는 온 세상 두루에 존재한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그 이유가 이 교회는 말씀을 가진 이들, 이로부터 주님을 알고 신앙의 진리들의 얼마를 지닌 이들에 국한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이 교회는 말씀을 가지지 않은 이들, 그러므로 주님에 관해 무지한 이들, 결과적으로 신앙의 진리들을 지니지 못한 이들과 더불어서도 존재한다; 줄여 말해 이 교회는 교회로부터 멀리 떨어진 이방인들 사이에도 존재한다는 말이다; 그 이유가 그들 사이에도 합리적 빛으로부터 하느님은 한 분이시다는 것; 이분이 모든 것을 창조하셨고 모든 것들을 보존되게 하신다는 것; 그리고 그분으로부터 모든 선이, 모든 진리가 존재한다는 것; 그리고 그분을 닮는 것이 인간을 복되게 만든다는 것; 더 나아가 그들은 자기들의 종교에 따라 그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향한 사랑 안에서 살고 있다는 것; 그리고 선에 대한 애착으로부터 그들은 선행의 일들을 행하고, 진리에 대한 애착으로부터 그들은 최고의 존재를 예배하는 이들이 많기 때문이다. 이런 특성 속에 있는 이방인들은 주님의 영적 교회에 속하는 이들이다; 그리고 비록 그들이 이세상에서 주님을 모르고 있다 해도, 그들이 선 안에 있을 때, 그들 내부에는 그분을 인정함과 예배가 암묵적으로 자리잡고 있는 셈이다; 그 이유가 모든 선 안에 주님은 현존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다른 삶에서 그분을 쉽게 인정하고, 선 안에 있지 않았던 기독인들보다 오히려 더 빨리, 더 쉽게 그분에 대한 신앙의 진리들을 받는다; 이에 관한 나의 경험은 이미 말한 적이 있다. 그들이 가진 자연적 수준의 빛은 그것 안에 영적인 것을 가지고 있다; 그 이유는 주님으로부터 오는 영적인 빛 없이 위 사항들에 대한 것을 인정함은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이제 “이스마엘”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대충 짐작했으리라 본다. 즉, 표현적 측면에서 “이스마엘족들”이란 주님의 영적 교회 속에 있는 이들, 생활 측면에서 단순한 선 안에 있는 이들, 그러므로 교리 측면에서는 자연적 수준의 진리 안에 있는 이들이다. 그러므로 아래 구절에서도 요셉에 관련하여 이스마엘이 위와 같은 것을 의미하고 있다:
보라, 여행하는 이스마엘족의 한 무리가 길르앗으로부터 오는데, 그들의 낙타는 밀초 (wax)와 수지(resin)와 소합향(stacte)을 이집트로 운반하려고 싣고 있었다 (창. 37:25);
위에서 이스마엘족들은 단순한 선 안에 있는 이들, 즉 호의적인 이방인들 같은 경우를 표현한다; “낙타들에 실려 있는 밀초와 수지와 소합향”은 이런 사람들의 내면의 선들을 표시한다. 마찬가지로 창. 37:28 에서, 39:1 에서도 의미되고 있다. 또한 사사기서에서 기드온이 백성들에게 요구한 대목에도 있다:
너희는 각자의 전리품 속의 귀고리들을 나에게 줄 것이다. 그 이유가 금귀고리들을 가진 자들이 이스마엘족이었기 때문이다 (사. 8:24);
“금귀고리”는 단순한 선으로부터의 것들을 의미한다.

사라의 여종, 이집트 출신 하갈이 아브라함에게 낳아 주었다. 이는 기억적 지식에 대한 애착 안으로 신성이 유입됨으로부터 있게 되는 영적 인간의 출생들을 의미한다. 이는 “낳다”가 존재 안으로 오는 것을 의미함에서; “이집트인 하갈”의 의미가 외면의 인간의 생명; 그리고 “하녀”의 의미가 외면의 인간 속에 있는 기억 속의 지식들(객관적 지식들)과 지식들(주관적 지식들)에 대한 애착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여기서는 “사라의 하녀”라고 말해지는데, 그 이유는 사라에 의해 주님의 신성한 진리가 표현되어졌기 때문, 그리고 이 진리에 기억 속의 지식들과 지식들이 종속되기 때문이다. 이스마엘이 영적 인간을 표현하는 바, “사라의 하녀, 이집트인 하갈이 아브라함에게 낳았다”란 기억 속의 지식들에 대한 애착들 안으로 신성의 유입이 있음으로부터 영적 (평면의) 인간이 출생한다는 것이 분명해진다.
인간의 합리성도 위 방식에서 태어나진다; 결과적으로 영적 (평면의) 인간도 위 방식에서 태어나는데, 그 이유는 영적 인간의 출생은 합리성에서가 아니면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영적 (평면의) 인간과 합리적 인간은 거의 같다. 이들의 차이는 단지 이성의 품질과 각기 집중하는 생활 영역(직업)의 차이만 다를 뿐이다. 그들의 출생, 거듭남이 지식들에 대한 애착 안으로 신성의 유입으로부터 있다는 것은 이미 많은 곳에서 살핀 바 있다. 그리고 이스마엘 관해 이미 서술한 것도 되짚어 보기 바란다; 즉 그에 의해 주님의 첫 합리성이 표현되었다는 것, 이것은 아직 신성이 아니다는 것; 그 후에 진실로 합리성 또는 영적 인간이 표현되었다는 것, 그리고 주님의 영적 (평면의) 교회를 표현했다는 것 등등이다.

13-16절. 이것들은 그 이름에서, 그들의 출생들에 따른 이스마엘의 아들들의 이름들이다. 이스마엘의 첫 출생은 느바욧이다. 그리고 게달, 그리고 앗브엘, 그리고 밉삼. 14. 그리고 미스마, 그리고 두마, 그리고 맛사. 15. 하닷, 그리고 데마, 여둘, 나비스, 그리고 게드마이다. 16. 이들이 이스마엘의 아들들이다, 그리고 이것들은 그들의 성읍에서, 그들의 마을에서 있는 그들의 이름들이다. 이들은 그들의 백성들의 열 두 우두머리들이다.

이것들은 이스마엘의 아들들의 이름들이다. 이는 그들의 교리적인 것들의 품질들, 즉 영적 평면에 있는 것들을 의미한다. 이는 “이름”이 품질을 의미한다로부터; “아들들”이 진리들을, 또한 교리적인 것들을 의미함으로부터; 그리고 이스마엘이 영적 평면에 있는 이들을 표현함으로부터 알려진다.

그들의 출생들에 따라, 그들의 이름들에서. 이는 신앙의 갈래들에 따른 내면의 품질들을 의미하는데, 이는 “이름”의 의미가 품질을 의미함으로부터, 이 경우에는 내면의 품질을 의미하는데, 그 이유는 “이것들은 그들의 이름들에서 이스마엘의 아들들의 이름들이다”라고 말해져서, 처음의 “이름들”은 일반적인 품질을; 두 번째 “이름들”은 일반적 품질 내에 있는 품질, 또는 일반적 품질에 관련되는 품질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 품질들은 “그들의 출생들에 따라”에 의해 의미된 신앙의 갈래들에 따라 있다.
주님의 영적 (평면의) 교회와 더불어서의 경우는 이렇다: 이것은 온 세상 두루에 걸쳐 흩어져 있다, 그리고 모두 각각의 장소에 있는 이 교회는 믿음의 품목들, 또는 신앙의 진리들 측면에서 다양해 있다; 그리고 이 다양함들이 “출생들”에 의해 의미되는 갈래들이다, 그리고 이 갈래들은 하나와 동시에서, 하나에 이어 또 하나가 생겨난다. 이것은 천국들에 있는 주님의 영적 (평면의) 왕국과 더불은 경우와 거의 같다. 즉 이 왕국은 신앙의 것들 측면에서 다양해 있다, 게다가 이 공동체와 저 공동체, 또한 한 공동체 안의 각각의 인물도 신앙의 수준에서 꼭같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한 개의 생각에서는 모두가 서로에서 일치함을 가지고 있다; 이 다양함에도 불구하고 천국들에 있는 주님의 영적 왕국은 하나이다; 그 이유가 선행(chatity)이 영적 (평면의) 교회를 만들기 때문이다; 하여, 만일 (당신이) 선행을 신앙이라고 부르지 않으면 (당신의) 신앙은 신앙이 아닌 것이다.
선행 안에 있는 이들은 그의 이웃을 사랑한다, 그리고 믿음 (belief, 확신, 신념) 차원에서 자기 이웃이 자기와 견해를 달리 해도 그 이웃이 선과 진리 안에서 살고 있다면 우리는 그 이웃을 너그러이 봐주어야(excuse) 한다; 또한 우리는 내 이웃이 비록 주님을 알지 못한다 해서, 또는 정확히 알지 못한다 해서, 더 나아가 신앙의 어떤 것들을 모른다 해서 그를 비난해서는 안된다. 그 이유가 선행 안에 있는 이들, 즉 선 안에서 사는 이들은 자기 선에 일치하는 진리를 주님으로부터 언젠가는(다른 삶에 가서라도) 받기 때문이다. 그러나 선행 안에 있지 않은 이들, 즉 선 안에서 살지 않는 이들은 결단코 어떤 진리도 받지 못한다; 실로 그는 진리를 알고 있을런지 모르나, 그는 자기 삶 안에 심어두지 않고 있다; 고로 그는 자기 입 안에서 진리를 가졌을 뿐 심정 안에서는 가지지 않은 셈이다. 그 이유가 진리는 악과 결합될 수 없기 때문, 그러므로 진리를 신앙의 한 품목으로 여기는 이들, 그런데, 선행 안에서, 또는 선 안에서 살지 않는 이들은 비록 그들이 교회 안에서 출생했다 해도 아직 교회 속에 있는 것은 아니다, 그 이유가 진리가 결합하려면 선이 필요한데, 이 선이 그들 안에 없기에 진리가 없고, 진리가 없기에 신앙도 전무한 셈이기 때문이다.

이스마엘의 첫 출생은 느바욧이다; 그리고 게달, 그리고 앗브엘, 그리고 밉삼; 그리고 미스마, 그리고 두마, 그리고 맛사; 하닷, 그리고 데마, 여둘, 나비스, 그리고 게드마이다. 영적 (평면의) 교회의 모든 것들, 특히 이방인들의 영적 (평면의) 교회(the spiritual church)의 모든 것을 의미하는데, 이는 여기서 명명된 이름이 표현하는 것으로부터, 특히 일부는 예언서들에서도 언급된다, 즉 나비욧, 게달, 두마, 그리고 데마의 경우이고, 이들은 영적 교회에 속하는 것들, 특히 이방인의 영적 교회에 속하는 것들을 의미한다; 더욱이 똑같은 것이 이 이름들이 열 둘임으로부터도 분명해진다, 그 이유가 “12”는 신앙의 모든 것들, 고로 교회의 모든 것들을 의미하기 때문인데 아래에서 살핀다; 그리고 이런 이유 때문에 16절에서 그들은 “그들의 백성들의 열 두 우두머리들이다”라고 말해지도 한다.
나비욧과 게달에 의해 영적 교회에 속하는 것들, 특히 이방인들의 영적 교회에 속하는 것들, 즉 그것의 선들과 그 선에서 파생되는 진리들이 표현되었다는 것이 이사야서에서 보여진다:
낙타들의 풍부함이 너를 덮을 것이다, 미디안과 에바의 단봉 낙타들 (이다); 스바로부터의 그들 모두가 올 것이다; 그들은 금과 유향을 가져올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여호와 찬양들 을 선포할 것이다. 게달의 모든 양떼들이 네게로 다 모여들 것이다, 느바욧의 숫양들이 너 를 섬길 것이다; 그들은 내 제단에 열납됨과 더불어 올라올 것이다 (이. 60:6, 7);
위는 최고의 의미에서 주님이, 관계적 의미에서 그분의 왕국이 취급되고 있다. “게달의 양떼들”은 영적 선을 표시한다; “느바욧의 숫양들”은 영적 진리를 표시한다.
“게달”이 아라비아이다는 것은 이어지는 아래 인용 구절로부터 분명해진다, 그리고 아라비아가 이스마엘의 아들로부터 “게달”이라 불리워졌다는 것은 양쪽 구절 (2-4절, 13-15절)에서 미디안, 에바, 스바 등과 같이 아브라함의 아들들과 손자들의 이름들을 열거하여 나라 또는 토지들이 명명되고 있다는 사실로부터도 분명해진다. 그리고 여기서 마찬가지로 게달과 느바욧이 열거된다.
에스겔서에서:
아라비아, 그리고 게달의 모든 제 일인 자들, 이들은 네 손의 상인들이었다; 어린 양들, 그 리고 숫양들에서, 그리고 수염소들에서, 이것들에서 그들은 네 상인들이었다 (겔. 27:21);
위 구절은 두로, 즉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 안에 있는 이들을 취급하고 있다. “아라비아”는 영적 선을; “게달의 제 일인 자”는 영적 진리들을; “어린 양들, 숫양들, 숫염소들”은 영적 선들과 진리들을 표시한다.
예레미야서에서:
너희는 일어나라, 게달로 올라가라, 그리고 동쪽의 아들을 황폐하게 하라. 그들의 천막들과 그들의 양떼들을 너희는 가져갈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을 위하여 그들의 휘장들을, 모든 그 들의 집기들을, 그리고 그들의 낙타들을 끌어갈 것이다 (예. 49:28, 29);
위 구절의 주제는 “게달과 동쪽의 아들들”에 의해 뜻해진 영적 교회의 황폐함이다. “천막들과 양떼들”은 이 교회의 선들을; “휘장들과 집기들”은 이 교회의 진리들을 표시한다; 예배의 거룩한 것들이 “천막들과 양떼들”, 그리고 “휘장들과 집기들”에 의해 의미되고 있다; 그리고 예배의 모든 거룩한 것들은 선과 진리에 관련되고 있다.
그러나 (반대적 측면에서) 선 안에 있지 않기에 진리 안에도 있지 않은 이들이 “광야에 있는 아라비아인들과 게달족”에 의해 표현되는 경우도 있는데, 이사야서에서:
바빌론은 영원히 거주 못할 것이다, 아라비아인은 거기에 천막을 치지 않을 것이다
(이. 13:19, 20).
이사야서에서:
광야와 거기로부터의 성들이 [그들의 음성]을 높이게 하자, 게달이 거주하는 마을들
(이. 42:11).
예레미야서에서:
너는 그들을 위해 길가에 앉았다, 이는 마치 아라비아인이 광야에 앉은 것 같다
(예. 3:2).
다윗서에서:
메섹 안에 체류하고, 게달의 천막들과 더불어 거주하는 자에게 화가 있다 (시. 120:5).
이사야서에서:
너희는 아라비아의 숲에서 유숙할 것이다, 오 너희 여행하는 드단의 집단들(대상들)아. 너 희는 목마른 그를 만나러 물들을 가지고 오라; 너희 데마의 토지 주민은 그의 빵을 가지고 도망하는 자를 앞지르라. 그 이유가 그들이 검 앞에서, 빼어든 검 앞으로부터, 구부린 활 앞으로부터, 그리고 전쟁의 비참함 앞으로부터 방황하기 때문이다. 고로 주님께서 나에게 말하셨다, 아직 일 년 내에, 삯꾼의 년 수들에 따라서, 그리고 게달의 모든 영광은 쇠잔할 것이다; 그리고 게달의 아들들의 용사의 많은 활들의 나머지(도 사라질 것이다)
(이. 21:13-17).
“아라비아의 숲에서 유숙하는” 것은 진리 측면에서 황폐해짐을; “드단의 여행하는 집단들”은 지식들 안에 있는 이들을; “데마의 토지의 주민들”은 단순한 선 안에 있는 이들, 마치 호의적인 이방인들 같은 이들을 표시한다. 이들이 이스마엘의 아들로부터 데라 라고 불러졌음이 분명하다. “게달”은 단순한 진리 안에 있는 이들을 표시한다; 이들에 관해서 말해지는 바, 그들은 “검들 앞에서, 그리고 전쟁의 비참함 앞으로부터 방황할 것이다.” 이것에 의해 그들은 시험과의 전투를 견뎌내지 못할 것이 의미된다, 그 이유는 그들이 선 안에 더 이상 있지 않기 때문이다.
예레미야서에서:
깃딤의 섬들을 지나가라, 그리고 보라; 그리고 게달에게 보내라, 그리고 부지런히 생각하라, 그리고 이와 같은 것이 행해졌는지를 보라, 어느 나라가 신들이 아닌 신과 바꾸었는지 (보 라) (예. 2:10, 11);
“깃딤의 섬들”은 예배로부터 더 멀리 떨어진 이들, 즉 단순한 선 안에, 그 선으로부터 단순한 진리들 안에 있는 이방인들을 표시한다; “게달” 역시 이와 같은 것을 표시함이 분명하다.
예레미야서에서:
그 다음 나는 여호와의 손으로부터 잔을 가져갔다, 그리고 모든 나라들이 마시게 만들었다, 여호와께서 나를 보낸 나라들이다; 드단, 그리고 데마, 그리고 부스, 그리고 (턱수염)의 모 퉁이를 깍은 모든 이들; 그리고 광야에 거주하는 아라비아의 모든 왕들, 그리고 서쪽의 모 든 왕들 (예. 25:17, 23, 24);
위에서 영적 교회의 황폐함이 다루어진다, 그리고 데마와 아라비아가 다른 몇 나라들에 이어 명명되고 있다, 이로부터 분명한 바, “데마”와 “아라비아”에 의해 영적 교회 속에 있는 이들이 의미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왕들과 성들은 아라비아에게 그 탓을 돌리고, 한편 마을들과 제 일인 자들은 게달에게 그 탓을 돌리고 있다.
이것들 외에, 데마 역시 이사야서 21:11에서 언급되고 있다. 이 나라들에 의해 영적 교회에 속하는 것들이 의미되는 이유는 영적 (수준)이었던 고대 교회가 그들 사이에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들의 교리물, 의식들은 다르기는 했으나 그들은 여전히 하나의 교회를 이룬 것은 그들이 신앙을 만들지 않고 선행을 필수로 여기고 있었기 때문이다. 시간이 경과하는 가운데, 선행이 중단되어 갔는데, 급기야 그들과 더불은 교회 속에서조차 잃어졌다; 그럼에도 그들 사이에서 그들 교회속에 있었던 다양한 것들에 따라 표현적 수준에서는 여전히 남아 있었다. 따라서 말씀에서 그들의 이름이 명명되는 곳에서는 어느 구절에서든지 그들 자체가 아닌 거기에 남았던 교회가 일반적 측면에서 의미되고 있다.

이들은 이스마엘의 아들들이다, 그리고 이것들은 그들의 이름들이다. 이는 교리적인 것들과 그것들의 품질을 의미하는데, 이는 “아들들”의 의미가 진리들, 또한 교리적인 것들이다로부터; 그리고 “이름”의 의미가 품질이다로부터 알려진다.

그들의 마을들에서. 이는 교회의 외적인 것들을 의미하는데, 이는 “마을들”이 신앙의 외적인 것들, 고로 교회의 외적인 것들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교회의 외적인 것들은 의식들이다, 그리고 교리적인 것들이 기억 속의 지식에 머물지 않고 생활 측면에 있다면, 교리적인 것들은 내적인 것들이다, 외적인 것들이 마을들에 의해 표현되는 이유는 마을들은 성의 외곽에 위치하기 때문에서이다; 그러나 성 자체에 의해서는 내적인 것들이 의미된다. “성”이 교리적인 것들이다에 대하여는 이미 살폈다.

그리고 그들의 성읍(castles)들에서. 이는 내적인 것들을 의미하는데, 이는 성읍(castle)의 의미가 신앙의 내적인 것들; 여기서는 교회의 내적인 것들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 이유는 성읍들이 이방인들을, 즉 신앙으로부터 진리를 가지지 않고 오직 합리적이고 자연적 진리를 지닌 이들을 특별히 서술하기 때문이다. 이런 진리들이 “성읍(castle)”들이라 불리우고, 신앙의 진리들은 “도성(city)”들이라 불리운다. 원어에서는 마을과 성읍이 (궁전) 뜰(court)과 궁전(palace) 역시 의미하고 있다; 그리고 “뜰”은 외적인 것을; “궁전”은 내적인 것을 의미한다.

그들의 백성들의 열 두 우두머리들이다. 이는 이 영적 (왕국의) 교회(this Spiritual Church) 속의 제일 가는 모든 것들을 의미한다. 이는 “12”의 의미가 신앙의 모든 것들 또는 교회의 모든 것들이다로부터; “우두머리”의 의미는 제일 가는 것들이다로부터; 그리고 “백성”의 의미가 진리 안에 있는 이들, 고로 영적 (왕국의) 교회 속에 있는 이들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 이유가 영적 왕국의 교인들은 (사랑 안에가 아닌) 진리들 안에 있는 이들이라고 말해지기 때문이다. 말씀에 있는 모든 숫자들이 실제의 것들을 의미한다는 것은 숫자 12를 가지고도 명백해질 것이다. 이 12라는 숫자가 말씀의 어디에서 등장하든 그것은 모든 것(all)을 의미한다. 예를 들면, 구약 성경의 “열 두 지파”와 신약 성경의 “열 두 사도”는 신앙의 모든 것, 그리고 교회의 모든 것을 의미한다. 마찬가지로 “열 두 우두머리”는 이 교회의 제일 가는 모든 것들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것들이 이스마엘의 여러 아들들에 의해 표현되고 있다.
“12”가 이런 의미를 가지는 것을 아래 인용 구절에서도 더 확인될 것이다. 계시록서에서:
나는 이스라엘의 모두 각각의 지파로부터 날인된 이들의 숫자를 들었다. 유다 지파로부터 12,000명; 르우벤 지파로부터 12,000명; 갓 지파로부터 12,000명이 날인되어졌다
(계. 7:4, 5);
위에서 “모두 각각의 지파로부터 날인된 12,000명”은 신앙 안에 있는 모든 이, 즉 신앙의 선 안에 있는 모든 이들을 의미하고 이들이 구원된다는 말이다. 다시:
태양을 휘감고, 달은 그녀의 발 아래, 그리고 그녀의 머리 위에 열 두 별의 왕관을 쓴 여인 (계. 12:1);
위에서 “여인”은 교회를; “태양”은 천적인 사랑을; 그리고 “달”은 영적인 사랑을; “열 두 별”은 신앙의 모든 것들을 표시한다 다시: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 열 두 문들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문 위에 열 두 천사들이 있고, 거기에 이름들이 쓰였는데, 그것은 이스라엘의 아들들의 열 두 지파의 것들 이다. 그리고 도성의 벽은 열 두 기초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것들에 어린 양의 열 두 사도들의 이름 들(이 있다). 그리고 그가 갈대로 도성을 쟀는데 12,000 펄롱(furlong)이었고, 그가 도성의 벽을 쟀는데, 일백 사십 사 큐빗이었고, (이는) 사람의 척량, 즉 천사의 척량이다. 그리고 열 두 문들은 열 두 진주들이었다 (계. 21:2, 12, 14, 16, 17, 21).
위에서 “거룩한 성”은 주님의 영적 왕국을 의미한다; 그리고 “문들”, “성벽”, “기초들”에 의해 선행과 신앙 속의 것들이 의미된다; 그리고 자주 언급된 “열 둘”은 이런 것들의 모두를 의미한다; 하여, 열 두 지파이든, 열 두 사도이든 실제의 그들을 의미하는 것이 아님을 모든 이는 확실히 짚어두길 바란다. 다시:
도성의 거리 한 가운데에서 흐르는 강의 이쪽과 저쪽에는 생명의 나무가 있고, 열 두 열매 들을 매 달마다 산출하고 있다 (계. 22:2);
위의 “열 두 열매들”이란 선행의 모든 것들이다.
마태복음서에서:
예수께서 말하셨다, 참으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거듭남에서 나를 따르는 너희는 사람의 아들이 그분의 영광의 왕좌에 앉을 때, 너희 역시 이스라엘의 열 두 지파들을 심판하는 열 두 왕좌에 앉을 것이다 (마. 19:28);
위에서 사도들은 실제의 “사도들”이 아니고, “왕좌”, “지파” 역시 그러하다. 그러나 신앙 속의 모든 것들을 뜻한다. 더욱이, 구약 성경의 말씀에서, “열 두 지파들”이 언급되는 곳에서, 그것은 교회의 모든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우림과 둠밈에 있는 “이스라엘의 열 두 지파들의 이름들에 따른 열 두 돌들(보석들)”도 마찬가지 이다; 그리고 탁자 위에 정돈하여 진열하는 빵의 “열 두 빵덩어리” (레. 24:5, 6)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이외 더 있다. 신앙의 모든 것들이 야곱, 또는 이스라엘의 열 두 아들들의 이름들 자체에도 포함되어 있다는 것은 이후 29, 30장에서 주님의 신성한 자비로부터 알려질 것이다.

17, 18절. 그리고 이것은 이스마엘의 생애의 햇수인데 일백 년, 그리고 삼십년, 그리고 칠 년이었다. 그리고 그는 기한이 다 차서 죽어, 그의 백성들에게로 거두어졌다. 18 그리고 그들은 하윌라로부터 앗수르로 통하는 이집트 앞, 술에까지 이르러 거주하였다. 그는 그의 모든 형제들의 얼굴과 마주치고 있었다. “그리고 이것은 이스마엘의 생애의 햇수이다”란 이스마엘에 의해 주님의 영적 왕국이 표현된 상태를 의미한다. “일백 년, 그리고 삼십 년, 그리고 칠 년”이란 이 상태 속의 것들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는 기한이 다 차서 죽었다”란 이스마엘에 의한 표현이 끝났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의 백성들에게로 거두어졌다”란 이러한 것들은 이스마엘에 관하여이다를 의미한다. “그리고 그들은 하윌라에서부터 앗수르로 가는 이집트 앞 술에 까지에 걸처 거주했다”란 총명이 확장됨을 의미한다. “그는 그의 모든 형제의 얼굴과 마주치고 있었다”란 진리에 관한 논쟁들에서 그가 우위에 있다를 의미한다.

그리고 이것은 이스마엘의 생애의 햇수이다. 이는 이스마엘에 의해 주님의 영적 왕국이 표현된 상태를 의미한다. 이는 “햇수”와 “삶”들의 의미가 여기서는 표현하는 상태들이다로부터; 그리고 이스마엘이 주님의 영적 왕국을 표현함으로부터 알게 된다.

일백 년, 그리고 삼십 년, 그리고 칠 년. 이는 이 상태 속의 것들을 의미하는데 아브라함의 햇수에서 설명한 바 있다.

그리고 그는 기한이 다 차서 죽었다. 이는 이스마엘에 의한 표현이 끝났음을 의미한다. 이것도 아브라함의 햇수에서 이미 설명했다. 마찬가지로 그는 그의 백성들에게로 거두어졌다란 이러한 것들은 이스마엘에 관하여이다를 의미한다.

그리고 그들은 하윌라에서부터 앗수르로 가는 이집트 앞 술에 까지에 걸처 거주했다. 이는 총명이 확장됨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는 그의 모든 형제의 얼굴과 마주치고 있었다 란 진리에 관한 논쟁들에서 그가 우위에 있었다를 의미한다.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19, 20절. 그리고 이것은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의 출생들이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았다. 20 그리고 이삭은 사십 세의 아들이었을 때, 그는 밧단 아람의 아람 족속, 브드엘의 딸, 라반의 누이인 리브가를 여인으로 자신에게 데리고 갔다.

그리고 이것은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의 출생들이다. 이는 주님의 신성한 합리성을 의미하고 이로부터 신성한 자연 (평면)이 있다. 이는 “출생들”의 의미가 갈래(derivation)들이다로부터; 즉 신앙이 취급될 때는 신앙의 갈래들, 교회가 취급될 때는 교회의 갈래들, 앞 항목에서 같이 이스마엘의 “출생들”에 의해서는 영적 교회의 갈래들이 의미된다. 그러나 여기서의 “출생들”은 주님을 취급하므로 이 출생들은 신성한 출생들이고, 아브라함에 의해 태어난 이삭에 의해 서는 신성 자체로부터 신성한 합리성이 태어남이 뜻해지고; 그리고 이삭으로부터 있는 에서와 야곱에 의해서는 신성한 자연 (평면)이 뜻해진다; 그 이유가 에서와 야곱에 의해 주님의 신성한 자연 (평면)이 표현되기 때문이다; 즉 에서에 의해서는 선의 측면에서, 야곱에 의해서는 진리 측면에서 주님의 자연 (평면)을 표현한다. 이는 곧 이어 보여질 것이다. 여기서는 “출생들”이라는 단어만에 집중한 것이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았다. 이는 신성 자체로부터의 신성한 합리성을 의미한다. 이는 아브라함이 신성 자체를 표현하고; 그리고 이삭은 신성한 합리성을 표현함에서 알 수 있는데 이미 여러 번 상술했다.

이삭은 사십 년의 아들이었다. 이는 그분 자신의 능력으로부터 시험을 수단으로 하는 전투(combat)들을 의미한다. 이는 이삭의 표현이 신성한 합리성이다로부터; “40”의 의미가 시험들이다로부터; 그리고 “햇수”의 의미가 상태들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런고로 이 말들의 내적 의미는 주님께서는 그분의 합리성을 진리 측면에서도 신성으로 만드셨다는 것, 이 만드심의 방법은 시험을 수단으로 하는 전투들에 의해, 즉 그분 자신의 능력을 수단으로해서 였다.

그가 리브가를 데리고 갔을 때… 이는 신성한 진리의 결합을 의미한다. 이는 리브가가 신성한 합리성 안에서 신성한 선에 결합한 신성한 진리이다와 이 진리의 출생은 자연적 수준의 인간으로부터 이었는데, 24장에서 이미 취급한 바 있다.

자신에게 여인이 되도록 라반의 누이, 밧단 아람의 아람 족속 브드엘의 딸. 이는 그 진리의 품질과 상태를 의미한다. 이는 브드엘과 라반의 표현으로부터, 그리고 “아람”과 “밧단-아람”의 표현은 리브가에 의해 표현되는 신성한 진리의 품질과 상태 측면의 근원을 포함하고 있다로부터 알게 된다; 우리는 이들 각각, 즉 브드엘, 라반, “아람”, 또는 시리아가 의미하는 것은 앞에서 이미 살핀바 있다. 그런데 여기서 다시 언급이 있는 이유는 이어지는 항목들에서 주님의 자연 (평면)이 다루어지기 때문에서 이다. 주님의 자연 (평면)은 진리가 그분의 합리성에 결합할 때까지, 그리고 이 진리가 신성으로 만들어질 때까지 신성으로 만들어질 수 없었다. 그 이유는 자연 안으로의 신성의 유입은 합리성 속의 신성한 선으로부터 있지만, 합리성 안에 있는 신성한 진리를 통하여서만 가능한 바, 이 진리가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이다; 자연적 수준의 인간의 모든 생명은 합리성으로부터 있다는 것은 아는 것과 총명하게 행동함이 어디로부터 인지에 잠깐 주목해보아도 (여러분은) 눈치채게 될 것이다; 합리성은 자연에 있는 모든 것들을 정돈 분류해놓고, 그 분류된 것에 따라 간편하게 자연 속의 것들을 관조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방식은 합리성이 더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는 시야를 갖게 한다, 하여 높은 곳에서 들판을 내려다보듯 자연적 인간 속의 기억 속의 지식들을 찬찬히 내려다본다. 이 시야 속의 빛은 진리의 빛, 그러나 이 빛의 근원은 합리성 안의 선으로부터 인데, 이후 살필 것이다.

21-23절. 그리고 이삭은 그의 여인을 위하여 여호와께 탄원했다, 그 이유는 그녀가 불임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호와께서는 그의 탄원을 들어 주셨다, 그리고 리브가는 임신되었다. 22 그리고 그 아들들이 그녀 안에서 서로 다투었다. 그리고 그녀는 말했다, 이럴진대 나는 어이할꼬? 그리고 그녀는 여호와께 물어 보려고 갔다. 23 그리고 여호와께서는 그녀에게 말하셨다, 두 나라가 네 자궁 안에 있다, 그리고 두 백성들이 네 창자들로부터서 분리될 것이다, 그리고 한쪽 백성이 다른쪽보다 우세할 것이다, 그리고 형이 아우를 섬길 것이다.

그리고 이삭은 여호와께 탄원했다. 이는 아버지인 신성과 아들인 신성 간의 교신(communication)을 의미한다. 이는 탄원함이 상호 전달, 교신함을 뜻하기 때문; 그 이유는 탄원, 간구함은 교신함밖에 더 아니기 때문; 그리고 이삭이 신성한 합리성을 표현한다로부터; 진리가 신성과 결합할 때의 합리성, 즉 아들인 이삭; 그러나 여기서는 아버지인 신성이 “여호와”이시다. 이 교신이 주님 안에서 있었다, 그 이유는 아버지는 아들 안에, 아들은 아버지 안에 계셨기 때문이다 (요. 14:10, 11).

그의 여인을 위하여, 그녀가 불임이었기 때문에. 이는 신성한 자연 (평면) (the Divine natural)은 아직 있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이는 “여인”이 합리성의 선과 결합한 신성한 진리를 의미한다로부터(이는 리브가에 의해 표현되어졌음을 24장에서 이미 살폈다); “불임”의 의미는 아직 신성한 자연 (평면)이 있지 않았다 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여기서의 경우는 이렇다: 신성한 자연 (평면)은 그것의 근원을 아버지로서는 합리성의 신성한 선에, 그리고 어머니로서는 합리성의 진리에 두고 있다; 그리고 신성한 자연 (평면)이 아직 있지 않았을 때, 이때 합리성의 진리는 “불임”이다고, 여기서는 “불임하는 여인”이다고 말해진다.
이를 인간 측면에서 주목하면, 이렇다: 그가 거듭나고 있을 때, 선(이웃을 향한 선한 의지)은 그의 합리성 안으로 주님에 의해 은근히 주입되고, 이 선에 자연적 인간으로부터의 진리가 결합되어야 한다; 그러나 주님의 작업이 있어졌을 때, 자연적 인간은 거듭나지 못하고 있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그 이유는 내적 인간, 또는 합리성이 외적 인간, 또는 자연적 인간과 다투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툼이 있는 한, 자연적 인간(우리들)은 거듭나지 않는다; 그리고 자연적 인간이 거듭나지 못하는 한, 합리성은 진리 측면에서 불임 상태에 있다. 이것은 일반적 측면에서의 경우이다; 그리고 모두 각각의 특별한 측면(세부적 측면)에서도 마찬가지여서, 합리성이 자연적 인간으로부터 불찬성되고 있을 때, 합리성은 세부적으로도 진리 측면에서 불임하고 있다고 말해진다.
거듭남은 합리적 인간쪽으로 자연적 인간이 상응되어 있는 것에 집중적으로 관심을 두고 일하고 있다고 말해도 무방할 것이다. 이는 일반적 측면 뿐만아니라 세부적, 특수적 측면 모두에서 이다; 주님께서는 선을 합리성에 은근히 주입하고 이 합리리성을 통하여 자연적 인간이 상응하고 있게 하신다, 즉 이 선을 옥토로 하여 여기에 진리를 심으시는 것이다. 이때 합리적 진리들을 수단으로 자연 (평면)은 (합리성에)(온전히) 순종함쪽으로 돌아서 있는다; 그것이 순종할 때, 상응 관계 역시 있다; 그리고 상응 관계 아래 있는 한, 인간은 거듭나고 있다.

그리고 여호와께서는 그의 탄원을 들어 주셨다. 이는 그 결과(효과)를 의미한다. 아마 이 대목은 설명 없어도 될 것이다. 즉 여호와께서 탄원에 응하신 것, 이는 간구함에 대한 어떤 결과가 있다 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의 여인 리브가는 임신했다. 이는 신성한 자연 (평면)은 어머니 되는 신성한 진리로부터 였음을 의미한다. 이는 리브가가 합리성 속의 신성한 진리를 의미한다로부터 (앞장에서 살폈다); 그리고 “임신함”은 어머니로부터 있는 신성한 자연 (평면)의 처음 시작을 의미한다로부터; 그 이유는 방금 말한 바대로, 신성한 자연 (평면)은 합리성 속의 신성한 선을 아버지로, 그리고 합리성 속의 신성한 진리를 어머니로 하여 근원되기 때문이다. 이는 거의 누구에게도 알려져 있지 않다, 그리고 이에 대해 무지한 이유는 합리성과 자연 (평면)은 별도의 것, 서로 완전히 다르다는 것을 알아채린 자가 너무나 적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진실로 합리적인 자만이 이를 구분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만이 주님에 의해 거듭나지는 진실로 합리적 인간이다; 이에 반해 거듭나지 않는 이들은 이를 납득하지 못한다, 그들은 합리성이 자연적 인간 안에 있는 바, 자연적 인간과 똑같다고 여긴다.

그리고 그 아들들은 그녀 안에서 서로 다투었다. 이는 어느 사안을 두고서 벌어지는 싸움을 의미한다. 이는 “다툼”의 의미가 싸움이다로부터; 그리고 여기서의 “아들”의 의미는 선 측면과 진리 측면에서의 자연 (평면)이다로부터; 그 이유가 그녀의 아들들인 에서와 야곱이 주님의 신성한 자연 (평면), 에서는 선 측면에서의 신성한 자연 (평면)을, 야곱은 진리 측면에서의 신성한 자연 (평면)을 표현하기 때문인데, 이어지는 구절들에서 살필 것이다. 여기서 취급되는 다툼, 또는 싸움은 선 또는 진리 중의 어느 것이 우위인지에 관하여, 마찬가지로 선으로부터 있는 선행과 신앙으로부터 있는 진리 중의 어느 것이 우위인지 (어느 것이 순서상, 시간상에서 먼저 실시되어야 하는지)에 관하여서 있는 다툼이다. 최고로 이른 시대로부터 영적 (평면의) 교회는 이 의문을 두고 아주 많은 논쟁이 있었었다. 이 우위성에 관한 것이 다음 절에서 이어지기 때문에 이 구절에서 “아들들이 그녀 내부에서 다투고 있었다”라고 말해지는 바, 이 말에 의해 어느 사안을 두고 싸움함이 의미되고 있다.

그리고 그녀가 말했다, 이럴진대, 나는 어이할꼬? 이는 곤란함(straitness)을 의미하는데, 이는 “어이할꼬”라는 말투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선택하기 힘들 때 등장하는 표현인 바로부터 알게 된다. 실로 형제들 사이의 다툼인 바 어머니로서는 곤란한 지경; “이럴진대”란 만일 그들이 이 문제를 두고 싸웠다면을 의미한다; 고로 “왜(어이)”라는 말투 안에는 이것 때문에 싸움질해서는 안된다가 숨겨 암시되고 있는 셈이다. 또한 “어이할꼬?”에는 만일 이 문제를 놓고 다툰다면, 그들은 합리적 진리로부터의 유입을 받지 않을 것이다도 의미되고 있다; 그런 바 남는 것은 곤란함 뿐이다.

그리고 그녀는 여호와께 물어보려고 갔다. 이는 서로 교신하는 상태를 의미한다. “물어 봄”이 주님에 관련해 말해질 경우에서는 교신함을 의미한다. 그 이유가 물어 본 여호와가 그분 자신 안에 있기 때문이다; 역사적 의미에서 이 교신함은 “기도함(간구함, praying)”에 의해 표현되고 있다; 그리고 “문의 함”에 의해서는 교신의 상태가 표현되어 있다.

그리고 여호와께서 그녀에게 말했다. 이는 신성으로부터 있는 지각을 의미한다. 이는 “말함”의 의미가 지각하는 것이다로부터; 고로 “여호와께서 말하심”은 신성으로부터 지각하는 것을 의미한다.

두 나라가 네 자궁 안에 있다. 이는 내면의 선과 외면의 선에 관련되는 자연적인 것, 이것이 임신되어 있다를 의미한다. 이는 “나라들”의 의미가 선들이다로부터, 특히 교회의 선들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리고 여기서는 자연 (평면)에 있는 선들이 의미된다; 그 이유는 태 안에 있는 에서와 야곱은 주님의 신성한 자연 (평면)을 표현하기 때문인데, 이는 그들이 취급되는 아래 구절들에서 분명해질 것이다. 자연 (평면)도 합리성 같이 선과 진리로 구성된다; 자연 (평면)에 있는 선은 자연적 (수준의) 애착 속에 있는 모두이고, 즐거움(delight)이라 불리운다; 그러나 진리는 기억 속에 있는 모두이고, 이는 기억 속의 지식이라 불리운다. 이 둘은 자연 (평면)이 존재하기 위하여 반드시 필요하다. 애착 속에 있는 즐거움으로부터 추상적으로 있는 기억 속의 지식은 그것만으로는 어떤 것으로 존재하지 못한다; 그 이유가 자연 평면은 그것 안에 즐거움으로부터 그것의 생명을 가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생명으로부터 어떤 것을 아는 그것의 능력이 파생된다; 이에 반해 즐거움, 이것은 자연 평면 속의 선인 바, 기억 속의 지식 없이도 어떤 것으로 존재한다; 그러나 그 어떤 것의 생명력은 기억 속의 지식이 없을 경우 마치 유아의 것 같은 수준일 뿐이다. 그러므로 자연 평면이 인간으로 존재하기 위하여 이 둘은 공존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래야 이쪽이 저쪽을 서로 보완해서 온전해진다; 그러나 그것의 생명은 선으로부터 가진다.
이 구절에서 취급하는 이 선은 두 겹, 즉 내면의 선과 외면의 선이다; 내면의 선은 내면의 인간, 즉 합리성과 교통한다(communicate); 한편 외면의 선은 외적 인간, 즉 육체와 교통한다, 그리고 외적 감각들 안에, 또한 행동들에 생명을 만든다. 이 두 겹이 교통하고 있지 않다면, 인간은 이성 측면에서 이든 또는 육체 측면에서 이든 살아 있을 수 없다. 사후 인간과 더불어 머무르는 것은 내면의 교통함이고, 이것이 그의 자연 평면의 생명을 만든다, 그 이유가 영이 결국 안주하는 최말단 평면(plane)이 자연 평면인 바, 자연 평면에서의 생명 또한 가져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후 인간은 육체가 죽었다고 해서 즉각적으로 (완전히) 영적으로 생각할 수 없고 자연 평면에 속한 것들에 (일시적으로) 의존해야 한다. 어쨌든 인간이 육체 안에서 사는 이상, 외면의 교통을 가지나, 육체가 죽음으로 이것은 중단된다. 이 모든 것은 “자궁 안에 있는 두 나라(nation)”, 즉 내면의 선과 외면의 선 측면에서의 자연 평면에 의해 의미된 것들을 보여준다. “자궁 안에”라는 말은 내적 의미에서 “임신”을 의미하는 바, 여기서 (리브가는) “임신하였다”라고 말해진 것이다.

두 백성(people)이 네 창자(bowel, 내부)로부터 분리될 것이다. 이는 진리는 창자(내부)에서부터 갈라져 있다를 의미한다. 이는 “백성(사람들, 민족)”의 의미가 진리이다로부터; 그리고 “창자로부터 분리됨”은 거기서부터 근원됨이 있다를 의미한다로부터 알게 된다. 말씀에서, 어떤 출생이 취급될 때, 이것이 어머니로부터일 때, “자궁으로부터 생겨 남” 또는 “배(belly)로부터 출시됨” 이라고 표현한다; 그러나 출생이 아버지로부터 일 경우, “창자로부터 분리됨”이라 표현한다. 그런 이유는 자궁과 허리(loin)는 사랑에 속하는 것들, 즉 선에 속하는 것들을 말하기 때문; 그 반면 “창자로부터 분리됨”이라는 표현이 사용될 경우, 이는 진리의 근원이 의미된다; 그러므로 이 구절에서 두 선을 취급할 경우에서는 “두 나라가 네 자궁으로부터(안에) 있다”라고 말해지나; 진리가 취급될 경우, “두 백성이 네 창자로부터 분리될 것이다”라고 표현되고, 이렇기 때문에 내적 의미에서는 선으로부터 있는 진리의 근원이 의미된다. “두 백성”인 이유는 선의 경우도 내면과 외면이 있듯, 진리의 경우도 그렇기 때문이다. 자연 평면에 있는 내면의 진리는 자연 평면의 내면의 선과 결합하고 있다. 그러나 외면의 진리는 자연 평면의 외면의 선과 결합하고 있다. 내면의 진리는 자연적 진리라고 불리우나, 외면의 진리는 (그냥) 감각적(senseous)이라 불리운다. 어떻게 하여 이런 두 진리가 있는지에 대하여는 주님의 신성한 자비로부터 야곱이 등장하는 구절에서 살핀다. 그 이유가 야곱이 이 두 진리 측면을 표현하기 때문이다.

이쪽 백성이 저쪽 백성보다 우세하리라. 이는 첫 번째에서 진리는 진리로부터의 선보다 우위에 있을 것임을 의미한다. 이는 “백성”이 진리이다로부터; 그리고 “우세하다”란 우위에 있을 것(뛰어날 것)을 말함으로부터 알려진다. “백성”이 첫째 자리에 관련하여서는 진리를 의미하나, 두 번째 자리에 관련해서는 진리의 선을 의미한다; 그 이유가 진리의 선(진리로부터의 선)은 진리에서 출시되기 때문이다. 이것이 선이라 일컫는 이유는 이것이 선 같이 나타나기 때문에서 이다. “백성”에 의해 이 선은 의미되는 바, 이 선의 처음 출시에서는 진리로부터의 선이라 불리운다. 이 선에 대한 어떤 생각을 정리해보려면,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 하는 것은, 거듭남의 전과 후에 대해서이다; 즉, 인간이 거듭나기 전에서는 진리로부터 선을 행한다; 그러나 거듭난 후 그는 선으로부터 선을 행한다; 다른 말로 다시 말해보면, 거듭나기 전, 인간은 이해력으로부터 선을 행하나, 거듭난 후에는 의지력으로부터 선을 행한다. 하여 이해력으로부터 있는 선은 그 자체에 국한해서 말하면 선이 아니고 진리일 뿐이나, 의지로부터 있는 선은 선이다. 예를 들면: 부모를 공경하지 않고 있는 어떤 이가 있을 경우, 그가 계명들로부터 부모를 공경하라는 것을 배운다. 하여 그는 계명으로부터 부모를 공경한다; 이때의 공경함(첫 번째의 공경함)은 계명으로부터 인 바, 이는 그 자체로는 선이 아니다, 그 이유는 이 공경함이 부모를 사랑함으로 부터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 공경함은 법에의 순종으로부터, 또는 법의 두려움(계명을 안지키면 지옥 간다고 설득되었기 때문. 역자 주)으로부터 이든지 였기 때문이다. 어쨌든 이것은 진리로부터의 선이라 불리운다, 그러나 (선의) 처음 출시됨에서 그것은 진리이다; 그 이유가 이때의 인간은 선을 행한 것이 아니고 진리를 실천해본 것이기 때문이다; 그 반면 언제인가 그가 자기 부모를 사랑하여 공경할 때, 그 공경함은 선이다. 이는 다른 실예에서도 공히 같다.

그리고 형이 아우를 섬길 것이다. 이는 한 때 동안 진리의 선은 하위에 있을 것임을 의미한다. “형(elder)”이 선을 의미함으로부터; 그리고 “섬김”이 하위에 있다를 의미함으로부터; “아우(younger)”가 진리를 의미함으로부터 알게 된다. 여기서 어떻게 이런 경우가 되는지는 에서와 야곱에 의해 표현되는 것을 묘사하는 곳에서 알게 될 것이다; 그 이유가 이미 말한 바대로, 에서에 의해 선이, 야곱에 의해 진리가 표현되고, 이것들 중 어느 것이 (시간적으로) 앞서야 하는지(priority), 또는 지배해야 하는지 (dominion)를 놓고 다툼, 또는 싸우는 것이 야곱이 생득권과 생득권의 축복을 가져가버림에 의해 내적 의미에서 묘사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것이 한 때에 한정되고 있다는 것이 에서에 관한 이삭의 예언으로부터 분명해진다. 즉:
네 검에 근거하여 너는 살 것이다, 그리고 네 아우를 섬길 것이다; 그리고 장차 네가 지배 할 때가 올 것인데, 그때 너는 네 목으로부터 그의 멍에를 부술 것이다 (창. 27:40).
위 구절들이 내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 구절들이 의미하는 것은 내적 의미 없이는 (즉, 두 나라가 자궁 안에 있다는 것, 두 백성이 창자로부터 갈라져 있다는 것, 이쪽이 저쪽보다 우세할 것이다는 것, 그리고 형이 아우를 섬긴다는 것 등등) 알려질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하다. 이것들이 위에서 살핀 것들을 의미한다는 것은 아래 이어지는 구절들에서 더욱 분명해질 것이다. 더욱이 이런 표현들이 믿어지는 수준에 당도하려면 어떤 경우가 선과 진리와 더불어서 있어지는지, 선이 진리로부터 출생함에 관하여, 그리고 인간이 거듭날 때, 당사자의 상태의 변화에서 어떻게 적용되는지를 이해해두어야 한다. 실로 내적 의미에서 이 대목 역시 주님이 취급되고 있다는 것, 하여 그분이 그분의 자연 평면의 것들을 신성으로 만드셨는가에 관해서도 묘사되고 있다. 이와 더불어 표현적 의미에서는 인간의 거듭남에 관한 것을 알게 해준다; 그 이유가 인간의 거듭남은 주님의 신성이 되심(glorification)에 대한 형상(image)이기 때문이다. 뒤집어 말해 보면, 거듭남에서 주님께서 그분의 인간을 어떻게 신성화 하셨는지, 또는 그것을 신성으로 만드셨는지가 어떤 형상 안에 놓여 있다는 말이다. 주님께서 그분의 인간적 상태를 신성한 상태로 완전히 바꾸셨듯이, 주님이 인간을 거듭나게 해 주실 때, 마찬가지로, 그분은 인간 안에 있는 것을 모조리 바꾸신다, 그 이유는 그분은 옛 인간을 새로이 만드시기 때문이다.

24-26절. 그녀의 날들이 다 차서 출산하게 되었다, 그리고 보라 쌍둥이가 그녀의 자궁에 있었다. 25. 그리고 첫째는 온 몸이 붉고 털도 많아 털많은 의복으로 덮은 듯 하여 나왔다, 그리고 그들은 그의 이름을 에서라 불렀다. 26. 그리고 첫째 뒤를 이어 동생이 나왔다, 그리고 그의 손은 에서의 발꿈치를 붙잡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그의 이름을 야곱이라 불렀다. 그리고 이삭은 그녀가 이들을 낳았을 때 육십 년의 아들이었다.

그리고 그녀의 날들이 다 차서 출산하게 되었다. 이는 결과로부터의 첫 상태를 의미한다. 이는 “날들(days)”의 의미가 상태들이다로부터 분명해진다; 그리고 날들이 “다 채워져 출산함”은 결과 속의 처음 상태를 의미한다; 그 이유가 영적 의미에서 “출산하는 것”은 선과 진리의 출산을 말하고, 이는 선과 진리가 실존 안으로 옴을 뜻하기 때문이다. 선과 진리와 자손은 그 과정과 결과 모두에서 똑같다, 즉 임신되고, 자궁 안에 있고, 태어나고, 후에 오래 걸려 성숙된다. 임신 후에 효율성(efficient, 임신한 씨)은 효과(결과, effect)를 생산하기를 시작하는데, 이것이 자궁 안에서 거행된다; 이 상태들이 충만되었을 때, 그리고 산출할 때가 가까울 때, 그때 결과가 개시된다, 그리고 이것이 첫 결과라 불리운다, 그 이유가 자식이 (어머니와 분리되어) (미약하지만 어쨌든) 독자적으로 행동하여 결과의 상태라고 불리우는 이 상태 자체에 도달하려고 노력하기를 시작하기 때문이다

보라 쌍둥이가 그녀의 자궁에 있었다. 이는 둘 다 함께 임신되어졌음을 의미한다. 이는 “쌍둥이”의 의미가 둘 다, 즉 에서에 의해 표현되는 선, 야곱에 의해 표현되는 진리 모두를 의미함으로부터; 그리고 “자궁 안에”의 의미는 임신됨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자연 평면의 선과 진리 모두가 함께 임신되었음에 주목하면 이렇다: 태어나는 것은 무엇이든 그것의 있음(being)은 아버지로부터 파생되고, 어머니로부터 (있음이) 명시(明示, manifestation)된다. 어떤 것이 됨에 있어서 이 둘은 필수이다. 자연 평면의 선은 합리성의 선을 아버지로 임신되고, 자연 평면의 진리는 합리성의 진리를 어머니로 임신되어진다. 생명을 주는 것은 선이다, 그러나 진리를 통하여서만 줄 수 있다. 이 둘 모두는 혼(soul)이라 불리운다, 그러나 여전히 선이 혼의 제 1의 순위(중심)에 해당한다, 그리고 진리는 잘 배려된 그릇, 또는 신체 같이 선을 옷입히고 있다, 하여 선은 진리 안에 있다. 이것이 “그녀의 자궁 안에 있는 쌍둥이”에 의해 의미되고 있다.

첫째는 온 몸이 붉고 털이 많아 털 많은 의복을 덮은 듯 하여 나왔다. 이는 진리의 생명이 되는 자연적 선을 의미한다. 이는 “나옴(공표됨, 세상에 존재가 알려짐, coming forth)”의 의미가 태어나는 것이다로부터: “붉다(red)”의 의미가 생명 속의 선이다로부터, (아래에서 살핀다); 그리고 “털 많은 의복(hairy garment)”의 의미가 자연 평면의 진리이다로부터 (이것 역시 아래에서 살핀다 ) 알려진다. “첫째”란 본질 측면에서 선이 (시간상으로) 앞서(prior) 있다를 의미하는데 이미 말했다 (3299항); 그리고 선이 “털이 많은 의복 같이”라고 말해진 이유는 잘 배려된 그릇, 또는 육체의 경우 같은 진리가 선을 옷입히고 있음을 의미하기 위한 때문인데, 이것 역시 이미 말했다. 말씀의 내적 의미에서 “의복(겉옷, garment, tunica)”은 어떤 것에게 수여하는 것, 또는 어떤 것에 입히는 것만을 의미하는 바, 진리 또한 의복에 비교(비유)된다.
“붉은(red)”, 또는 “불그스름한(ruddy)”은 생명 속의 선 (삶 속의 선)을 의미하는데, 그 이유는 모든 선은 사랑으로부터 있기 때문에서이고, 사랑 자체는 천적이고 영적인 불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랑은 불에 비교되고 “불”이라 불리운다 (933-936항). 또한 사랑은 피에 비교되고, “피”라 불리운다 (1001항); 그리고 그것들 모두가 붉기 때문에 사랑으로부터 있는 선은 “붉다”, 또는 “불그스름하다”라고 말해진다. 이는 본문 외에 아래 인용 구절에서도 확인된다, 이스라엘로 바뀌어 불리운 야곱의 예언에서:
그는 포도주로 그의 의복(겉옷, raiment)을 빨고, 그의 의류(몸의 가리개, 속옷, vesture)를 포도들의 피로 빤다; 그의 눈은 포도주보다 붉고, 그리고 그의 이는 젖보다 더 희다
(창. 49:11, 12);
위는 유다를 취급하고 있다, 그를 수단으로 주님이 의미되어진다는 것은 모든 이에게 분명해 있다. “의복”과 “의류”는 주님의 신성한 자연 평면을 의미한다; “포도주”와 “포도들의 피”는 자연 평면 속의 신성한 선과 신성한 진리를 의미한다. 신성한 선으로부터 “그의 눈은 포도주보다 붉다”라고; 신성한 진리로부터 “그의 이는 젖보다 희다”라고 말해진다; 하여 자연 평면에서 선과 진리의 결합이 묘사되고 있다.
이사야서에서:
누가 에돔으로부터 오는가? 어찌하여 당신의 의상이 붉어 있고, 당신의 의복은 포도즙틀을 짓밟는 자의 (의복) 같은가? (이. 63:1, 2);
위에서 “에돔”은 주님의 신성한 자연 평면 속의 신성한 선을 표시하는데, 단어 에돔 에 이어지는 말로부터 나타난다; “당신의 의상이 붉다”는 진리로부터의 선을 표시한다; “포도즙틀을 밟는 자의 의복 같다”는 선으로부터의 진리를 표시한다. 예레미야애가서에서:
그녀의 나지르인됨은 눈보다 더 순수했다, 그들은 젖보다 더 희었다; 그들의 뼈는 루비 보 다 더 불그스름하다, 그들의 광택은 사파이어로부터 이었다 (애. 4:7).
“나지르인”에 의해 신성한 인간 측면에서의 주님, 특별하게는 신성한 자연 평면 측면에서의 주님이 표현되어졌다; 고로 그 안에 있는 선은 “뼈는 루비보다 더 불그스름하다”
“붉다”가 선을, 특별하게는 자연 평면 속의 선을 의미했고, 유대 교회 안에 있는 각각, 그리고 모든 것들이 주님, 그분의 왕국을 표현하기에 (결과적으로 선과 진리를 표현함, 그 이유는 주님의 왕국이 선과 진리로부터 있기 때문), 천막의 덮개는 붉은 숫양의 가죽으로 만들도록 (출. 25:5; 26:14; 35:7; 36:19); 또한 속죄의 물은 붉은 암송아지를 태워 나온 재로 만들도록 (민. 19:2, 9) 명령되었다. 붉은 색이 주님의 왕국에 있는 천적 평면으로부터의 어떤 것을 의미하지 않았다면, 위와 같이 붉은 숫양, 붉은 암송아지가 명령될 일은 없었을 것이다. 이리하여 거룩한 것들이 표현되었기에 이 말씀의 내적 의미를 알든지 모르든지 이 말씀을 읽는 자들은 (거룩함이 느껴오기에) 그 말씀을 거룩하다고 인정하여 붙들고 있는 것이다. 붉은 색이 이런 의미를 가지는 까닭에 천막의 덮개는 심홍색, 진홍색, 푸른 것(실)을 섞어 짜도록 명령되었다 (출. 36:6).
붉음의 반대적 의미도 말씀에는 많이 등장한다. 즉 “붉다”가 자기를 사랑함으로부터 있는 악을 의미하는 경우이다, 그리고 붉다는 자기 사랑으로부터의 탐욕들 때문에 불에 비교되고, “불”이라 불리운다; 그리고 이 자기 사랑은 피에도 비교되고 “피”라 불리운다. “붉다”의 반대적 의미를 말씀에서 찾아보면, 이사야서에서:
여호와께서 말하셨다, 네 죄들이 진홍색 같이 붉을지라도, 그것들은 눈만큼 희게 있을 것 이다; 그것들이 심홍색 같이 붉을지라도, 그것들은 양털 같이 있을 것이다 (이. 1:18).
나훔서에서:
(바알의) 용사들의 큰 방패가 붉게 만들어지고, 용감한 자들이 진홍으로 만들어지고, 병거 들이 (그) 날에 횃불 안에서 있다 (나. 2:3).
계시록서에서:
천국에서 또다른 표시가 보여졌다; 그리고 큰 붉은 용이 바라보였는데, 일곱 머리들과 열 뿔들을 가지고, 그의 머리에는 일곱 왕관(diadem)들을 (쓰고 있었다) (계. 12:2).
계시록서에서:
그리고 내가 보았더니 흰말이 바라보였다, 그리고 그 위에 앉으신 분은 활을 가지셨다; 그 리고 그분에게는 왕관(crown)이 주어졌다; 그리고 그분은 정복하며 정복하려고 나아갔다. 그리고 또다른 말이 나왔는데 붉었다; 그리고 그 위에 앉은 자에게 땅으로부터 평화를 가 져가는 것이 주어졌다. 그리고 그들은 서로를 죽여야 한다는 것; 그리고 그에게 큰 검이 주 어졌다. 그 후에 검은 말이 나왔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창백한 말이 나왔는데, 그것의 이름 은 죽음이었다 (계. 6:2, 4, 5, 8).

“털많은 의복(tunica)”은 자연 (평면)의 진리를 의미하는데, 이는 의복의 의미가 어떤 다른 것을 싸고 있는(invest) 것이다로부터, 그리고 진리가 선을 싸고 있는 형국이므로 여기서는 의복이 진리를 의미함이 분명해진다; 그 이유가 진리는 감싸는 것, 가리개, 속옷, 의류(vesture) 같이 선에게 (옷을) 입히고 있기 때문이다 (이 의류는 팬티, 브라자, 내복 등과 같이 신체에 달라 붙어 있는 의류일지 모른다. 역자 주.); 거의 똑같은 것으로서, 진리는 선을 받아 담고 있는 일종의 그릇(vessel)이다; 그리고 “털이 많은”의 의미가 진리 측면에서의 자연 (평면)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털” 또는 “머리의 털”은 말씀에 자주 언급되는 단어인데, 이는 자연 (평면)을 의미한다. 그 이유는 털은 인간의 바깥쪽 부분들 중에서 가장 멀리에 있는 생성물 (excrescence)이기 때문, 이는 인간의 자연 평면이 그의 합리성, 그리고 그의 내적인 것에 비교해서 볼 경우 멀리 떨어져 있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이 자연 평면은 인간이 육체 안에서 사는 동안 그의 모든 것인 듯 늘 나타나고 있으나, 자연물은 오히려 그의 내적인 것들로부터의 생성물(파생물)인 바 , 마치 머리털이 육체로부터 멀 듯 진실과는 거리가 멀다. 이 둘 또한 거의 같은 방식으로 내적인 것들로부터 진행한다. 그러므로 자연 (평면)에서만 살아왔던 이들이 다른 삶에서 그들 상태에 일치하여 표출될 때, 마치 거의 얼굴 전체까지 털로 덮힌 것처럼 나타난다. 더욱이 인간의 자연 (평면)은 머리의 털에 의해 표현되어진다; 이것이 선으로부터 일 때, 이것은 당사자에게 꼭 어울리게 조심스럽게 다듬어진(빗질한) 머리털에 의해 표현되어진다; 그러나 선으로부터가 아닐 때, 아무렇게나 내버려두어 헝클어진 머리털에 의해 표현되어진다.
이 표현으로부터 말씀에서 “머리털”은 자연 (평면)을, 특별하게는 진리 측면에서의 자연 (평면)을 의미한다. 스가랴서에서:
이런 날이 올 것이다, 즉 예언자들이 부끄러워하는 날이다, 그는 그의 환상 때문이고, 그가 예언할 때, 그들은 현혹하기 위한 털 많은 의류를 걸치지 아니하는 날이다 (슥. 13:4).
“예언자들”이란 진리를 가르치는 이들, 여기서는 거짓들을 가르치는 이들을 표시한다; “환상(vision)”은 진리를, 여기서는 거짓들을 표시한다; “털 많은 의류”란 진리 측면에서의 자연 (평면)을 표시한다; 그리고 진리가 없고 오히려 거짓이 있기 때문에, “현혹하기 위해”라고 말해진다. 이 진리가 외적이기 때문에 이런 진리를 표현하도록 예언자들은 이런 의복으로 옷입혀졌다. 그러므로 디셉 출신 엘리야 역시 이렇게 옷을 입고 있음으로부터 그는 털이 많은 사람“이라 불리워지고 있다 (왕하. 1:8); 그리고 마지막 예언자였던 (세례) 요한은 ”낙타의 털로 만든 의복“을 입었다. (마. 3:4).
“머리의 털”은 진리 측면에서의 자연 (평면)을 의미한다는 것은 나실인으로부터 분명해지는데, 이들에게는 그들의 나실인의 시절 동안, 즉 그가 자신을 여호와께로 분리한 상태가 충만될 때까지 자기 머리 위로 면도날이 지나가게 해서는 안된다고 명령되어졌다; 또한 머리털은 길게 자라서 내려가게 해야 한다는 것; 그리고 (나실인이 끝나면) 그들의 머리털은 만남의 천막 문에서 삭도하고, 그 머리털은 거룩히 성별한(eucharistic) 제물 아래 있었던 불 위에 놓아야 했다 (민. 6:5, 18). 나실인은 신성한 인간 측면에서의 주님을, 그러므로 주님의 모습(likeness)인 천적 (평면의) 교회도 표현했다 (51항); 그리고 이 인간(나실인, 천적 인간)의 자연 (평면)이 털에 의해 표현되어진다; 그러므로 나실인으로 거룩히 바쳐질(성별될) 때, 그는 이전의 인간, 또는 옛 인간을 벗고, 새로이 태어남, 또는 새로운 사람을 입는다; 이것이 이 명령에 의해 의미되었는데, 즉 나실인됨의 날들이 다 찰 때까지 삭도를 하지 않되, 날들이 다 차면, 그의 머리털은 만남의 천막 문에서 밀고, 그 머리털은 거룩한 제물 아래 있는 불에 놓도록 한 것이다. 그 이유가 천적 인간의 상태는 인간이 선 안에 있는 상태와 같기 때문, 이 상태란 선으로부터 모든 진리를 아는 상태이고, 하여 그는 선에 관하여 진리들로부터 생각하거나 이야기하는 일이 결코 없다, 더구나 기억 속의 지식들로부터서는 결단코 생각하거나 말하지 않는다. 더구나 천적 (수준의) 인간이 지니는 자연 평면에서의 진리는 엄청나게 강력한 바, 그들은 (자연 평면에서 사는 육체의 삷 동안에도, 역자 주) 지옥들과의 전투를 치를 수 있다; 그 이유가 싸우는 것은 진리이고 선은 결코 싸우지 않기 때문이다. 마치 지옥들이 선쪽으로는 아주 먼 거리까지 라도 접근을 시도조차 할 수 없는 것과 같다.
이를 누구나 익히 아는 대목인 삼손의 힘이 자기 머리털에서 근원하였다에서 극명하게 그려내고 있다. 이렇게 말해진다:
여호와의 천사가 여인에게 나타나서 말하기를, 보라 너는 임신할 것이고, 아들을 낳을 것인 데, 면도날이 그의 머리 위를 지나가게 해서는 안될 것이다; 그 이유가 아이는 자궁으로부 터 하느님에게 나실인이기 때문이다 (사. 13:3, 5);
위 구절 이후 세월이 지나 삼손이 들릴라에게 자기 머리를 삭도하면 자기는 무력해질 것임을 말해주었던 바, 그가 잠든 사이 머리털이 베어져 그는 불레셋 사람들에 붙잡히고 말았는데, 한참 후 그의 머리털이 다시 자라나자 그의 힘은 되돌아 와서 그는 불레셋인들의 집 큰 기둥을 무너Em릴 수 있었다 (사. 16장). 이런 줄거리에 천국의 비밀들이 있다는 것, 이 줄거리 속의 표현들의 의미를 배우지 못하면 영영 조금이라도 맛볼 수 없다는 것, 누가 알지 못할까? 즉 나실인은 천적 인간을 표현한다는 것, 그리고 그가 머리털을 가진 상태에 있는 한 이란, 그가 천적 인간의 자연 (평면)을 표현하는 한, 위에서 말한 바 같이 자연 평면에 있는 천적 인간은 진리 측면에서 아주 강력하고 힘이 세다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이때 당시(삼손 시절) 주님에 의해 명령된 모든 표현들은 이런 힘과 효과를 가졌던 바, 이런 것이 삼손의 힘의 근원도 되어진 것이다. 그러나 삼손은 엄밀히 말해서 위에 서술한 바와 같은 나실인, 즉 진리 대신 선의 상태를 옷입은 100% 나실인, 성별된 나실인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힘의 근원이 그의 머리털에 있다는 것으로 인하여 그가 주님을 표현하였는데, 좀더 설명하면, 삼손은 주님께서 진리 측면에서의 자연적 인간으로부터 (땅 위에서) 지옥과 싸우시고, 지옥을 정복하신 것, 그리고 그분이 자연적 인간에서 조차 신성한 선과 진리를 옷입으시기 전(신성이 되시기 전) 이 작업이 거행되었다는 것의 일부라도 표현되었는 말이다.
이상 설명으로부터 아는 바 같이, 마찬가지에서 높은 성직자에게 명령된 것은, 그의 머리 위에 기름부음의 기름을 쏟을 것, 그리고 그의 손은 의복들을 입기 위하여 신성해지게 했고, 그의 머리를 밀거나 그의 옷들을 찢어서는 안되었던 것이다 (레. 21:10); 그리고 비슷하게 (새로운 성전이 취급되는 대목에서) 성직자 역할을 한 레위인들도 자기들의 머리털을 밀어서는 안되고, 길게 내려오게 해서도 안되었다 (겔. 44:20); 이리하여 그들은 선으로부터 있는 진리에서의 주님의 신성한 자연 (평면), 고로 선으로부터의 진리라 불리우는 것을 표현하였다. “털” 또는 “머리의 털”이 진리 측면에서의 자연 (평면)을 의미하는 것은 말씀의 예언들로부터 분명해진다. 에스겔서에서:
나는 너희를 들판의 싹 같이 놓아 두었다, 거기로부터 너는 자라고, 극히 아름다웁게 성장 했다; 가슴들이 견실해졌다, 그리고 네 머리털이 자라올랐다 (겔. 16:7);
위는 예루살렘이 취급되어진다, 여기서는 고대 교회가 취급되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이 교회가 타락한 것이다. “가슴들이 견실해졌음”이란 자연적 선을; “자라오른 머리털”은 자연적 진리를 표시한다.
다니엘서에서:
나는 왕좌들이 내던져질 때까지 바라보았다, 그리고 날들의 옛 분이 앉으셨다. 그분의 의복 은 눈 같이 희었다, 그리고 그분의 머리의 털은 순수한 양털 같았다; 그분의 왕좌는 불타는 불꽃이었다 (단. 7:9).
그리고 계시록서에서:
등불들의 한 가운데 사람의 아들 같은 분이 계셨는데, 발까지 내려오는 의복을 입으셨고, 그리고 가슴 주위에 금빛의 띠를 두르셨다. 그리고 그분의 머리와 머리털은 흰 양털 같이, 눈 같이 희었다; 그리고 그분의 눈은 불 속의 불꽃 같이 있었다 (계. 1:13, 14);
“순수한 양털 같은 흰 머리털”은 진리 측면에서의 신성한 자연 (평면)을 표시한다. 말씀에서, 그리고 유대 교회의 의식에서, 진리 자체가 흰색에 의해 표현되어졌다. 이것이 선으로부터 있는 바, “순수한 양털”이라 불리운다. 흰색이 진리를 표현하고 붉은 색이 선을 표현한 이유는 진리는 빛에 속하고, 선은 빛이 나오게하는 불을 표현하기 때문에서이다.
말씀의 다른 표현들 같이, “머리털” 역시 반대 의미도 지닌다, 그리고 악용된 진리 측면에서의 자연 (평면)을 의미한다. 이사야서에서:
그 날에 주님께서는 강 건너편에서, 앗수르왕과 더불어, 고용한 면도날로 머리와 발의 털을 미실 것이다; 그리고 수염도 없어지게 할 것이다 (이. 7:20).
에스겔서에서:
사람의 아들아, 너는 날카로운 검을 가져오라, 이발사의 면도날을 네게 가져오게 하라, 그 리고 그것이 네 머리 위를, 그리고 네 수염을 지나게 하라; 그리고 머리털을 저울에 달아 삼등분 하여라. 너는 삼분의 일을 도성의 한 가운데에서 불로 태워라; 너는 삼분의 일을 가 져오고 도성을 빙둘러 검으로 짓부수어라; 그리고 삼분의 일을 너는 바람에 흩날려라; 그리 고 너는 숫자적으로 조금을 거기로부터 가져와라, 그리고 네 옷에 매달아라; 그리고 이것 을 다시 가져가라, 그리고 그것들을 불 한 가운데 던져라, 그리고 그것들을 불에서 태워라; 거기로부터 불이 이스라엘의 모든 집에 생길 것이다 (겔. 5:1-4).
위 구절은 (비유) 방식에서 자연적 진리로부터의 어떤 내면과 어떤 외면의 것도 더 이상 있지 않다는 것을 표현적으로 묘사하였는데, 이것이 (밀어버려진) “머리털과 수염”에 의해 표현되었다. 현세에의 욕망이 그것을 파괴하였다는 것이 “불로 태워짐”에 의해; 추론들이 그것을 파괴하였다는 것이 “도성을 빙둘러 검으로 짓부숨”에 의해; 거짓 원리들이 그것을 파괴했다는 것이 “바람에 흩날림”에 의해 의미되어졌다. 이 인용구절의 의미는 주님께서 마태복음의 비유에서 가르치는 것과 비슷하다, 즉 진리인 씨에 관한 것이다, 어떤 것은 가시덤불에, 어떤 것은 돌밭에, 어떤 것은 길에 떨어진 경우이다 (마. 13:1-9).
“머리의 털”이 자연적 인간 속에 있는 불결한 진리들과 거짓들을 의미하는 것은 이런 주님의 명령에 담겨있다, 즉 적으로부터 포로로 사로잡아 집으로 데려 온 여인과 결혼하겠다면, 그녀는 포로될 당시 입었던 옷을 벗어야 하고, 그의 머리는 삭발하고, 그녀의 손발톱을 잘라내야 하는 것이다 (신. 21:12, 13); 또한 레위인들이 신성시 되어질 때, 속죄의 물이 그들 위에 뿌려져야 하고, 그들의 전신을 삭도하고, 그들의 옷들을 빨아서 그들은 깨끗해져야 했다(민. 8:7); 또한 느부갓네살이 사람들로부터 내몰려 수소들 같이 풀을 먹고, 그의 몸이 하늘의 이슬로 적시워졌는데, 이는 그의 머리털이 독수리의 깃털 같이, 그의 발톱이 독수리의 발톱 같이 자랄 때까지였다 (단 4:33). 나병환자에서 머리털과 수염의 색깔을 관찰하고, 그것이 흰색인지, 붉그스름한지, 검은지, 또한 의복에서도 관찰할 것, 그리고 나병으로부터 깨끗해진 자는 머리와 수염, 눈섶까지 삭도해야 했는데, 이것들에 의해 모독인 것으로부터 있는 불결한 거짓들이 의미되었다 (레. 13장; 14:8, 9). 이것이 내적 의미에서의 “나병”이다.
대머리는 진리가 없는 자연 (평면)이 의미되었는데, 이사야서에서:
그는 바잇과 디본으로, 높은 장소쪽으로 올라가서 느보를 위해 흐느끼고, 모압은 메드바를 위해 울부짓을 것이다; 모든 그들의 머리들이 대머리가 되었고, 모든 그들의 수염이 깍였 다 (이. 15:2).
이사야서에서:
머리를 곱게 따는 대신 대머리가, 그리고 낙인찍은 얼굴이 곱다란 얼굴을 대신할 날이 올 것이다 (이. 3:24).
엘리사에게 “대머리야 꺼져라”라고 놀려댄 어린이들이 숲으로부터 나온 곰들에 의해 찢기웠다(왕하. 2:23, 24)에서 어린이들은 말씀을 (영적으로) 모독한 이들, 즉 말씀 안에 진리는 하나도 없다고 떠벌리는 이들을 표현하였다; 그 이유가 엘리사는 말씀 측면에서의 주님을 표현했기 때문이다. 이런 사항들로부터 미루어 짐작하는 바, 그때 당시 표현들로부터도 얼마나 많은 권능이 발휘됐는지 까지 엿보게 한다.

그리고 그들은 그의 이름을 에서라 불렀다. 이는 그것의 품질을 의미한다. 즉 선 측면에서의 자연 (평면)의 품질을 의미한다. 이는 “이름을 부름”, 또는 “이름을 지어 부름”의 의미가 어떤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함, 즉 그것의 품질을 알게 함이다로부터 분명해진다; 그리고 말씀에서 모든 이름들은 무엇이든 내적 의미에서 실제의 것들을 표시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와 같은 경우가 이름 에서와 더불어서 이다. “에서”는 처음 임신했을 때, 신성한 선 측면에서의 주님의 신성한 자연 (평면)을 의미한다는 것은 이미 말한 바 있다, 그리고 에서에 관한 말씀의 다른 부분들로부터도 마찬가지가 의미되고 있다; 그러나 에서와 에돔은 거의 같은 의미를 가졌으나, 그 차이는 조금은 있다, 즉 “에돔”은 진리의 교리적 측면에 인접한 선 측면에서의 신성한 자연 (평면)인 바, 30절 아래에서, 에서가 “에돔”이라 불리우기도 하는데, 이는 주님의 신성한 자비로부터 말씀으로부터의 인용 구절들에서 확증될 것이다.

그 뒤를 이어 그의 동생(brother)이 나왔다. 이는 진리를 의미한다. 이는 형제(brother)의 의미가 선, 또한 진리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 이유가 이 둘은 “형제들(brothers)”이라 불리우기 때문이다. 선행은 신앙의 “형제”이고, 선은 진리의 “형제”인데 이미 살폈다. 한편 신앙은 선행의 “형제”, 또는 진리는 선의 “형제”이다; 또한 자연 (평면)에서, 선에 대한 애착은 “형제”라 불리우고, 진리에 대한 애착은 “자매”라 불리운다; 이와 비슷한 경우가 “남편과 아내”, 그리고 “남자와 여인”이 있다; 그러나 이것들은 취급되는 상태에 관련해서 이다.

그리고 그의 손은 에서의 발꿈치를 붙잡고 있었다. 이는 진리가 어떤 능력을 가지고 자연 평면의 가장 낮은 선에 들러붙어 있음(adhere,부착)을 의미한다. 이는 “손”의 의미가 어떤 능력을 의미함으로부터; “붙잡고 있음”은 들러붙어 있음이다로부터; “발꿈치”의 의미가 가장 낮은 자연 (평면)이다로부터; 그리고 에서의 표현이 자연 (평면)의 선이다로부터 분명해진다. 하여 분명해지는 바. 이는 진리가 자연 평면의 가장 낮은 선에 들러붙어 있다를 의미함이다.
진리가 자연 평면의 가장 낮은 선에 들러붙어 있다에 주목해보면 이렇다: 자연 (평면), 또는 자연적 인간이 거듭나질 때, 합리성으로부터, 또는 영적 (평면)으로부터 합리성을 통하여; 천적 (평면)으로부터 영적 (평면)을 통하고 합리성을 통하여; 그리고 신성으로부터 천적 (평면)을 통과해, 영적 (평면)을 통하고 합리성을 통하여 선과 진리에 관련된 임신을 하게 된다; 한마디로 유입됨이 연속되어 뒤를 잇는다는 말이다. 하여 유입은 신성으로부터 시작하여 자연 (평면)의 최말단에서, 즉 세상적, 육체적 평면(plane)에서 종결될 때까지 내려간다는 말이다. 가장 낮은 자연 평면이 어머니로부터 오는 유전적인 것에 의한 과오들과 더불어 감동될 경우, 진리는 선에 하나가 되어질 수 없고, 단지 어떤 능력(힘)을 가지고 선에 들러붙어 있기만 할 뿐이다. 하여 이 과오들이 몰아내질 때까지 진리는 선에 결합되지 못한다. 이런 이유는 비록 선이 인간과 더불어 태어나질지라도 진리는 인간과 더불어 태어나지지 않기 때문이다. 이는 유아들이 진리가 하나도 없는 상태에서 태어난다는 것을 생각해보아도 이해가 될 것이다; 그리고 유아들은 진리들을 배워가야만 하고, 배워진 후 선과 결합한다. 또한 그들이 “그녀의 한 가운데에서 서로 다투었다”라고 말해졌었다, 즉 서로 싸움질했다는 말이다. 이로부터 이어지는 것은, 임신 초기에서부터 진리는 선을 밀어내고 대신 그 자리를 꿰차고 있다는 것, 이는 야곱이 에서에 관련해 말해진 아래 구절로부터도 분명해진다:
그는 야곱이라 불러졌지 않았던가? 그 이유는 그가 두 번씩 나를 밀어냈기 때문이다
(창. 27:36).
그리고 호세아서에서:
야곱을 그의 길들에서 방문하시고, 그의 행위들에 따라 그에게 응보하실 것이다; 그는 자궁 에서 그의 형제를 책략했다 (호. 12:2, 3).
말씀의 역사적 측면에만 마음을 집중하고, 그것들로부터 마음을 물러나 있게 하지 않으려 고집하는 이들은 위 인용 구절, 이전의 인용 구절이 에서와 야곱 사이에 닥친 사건들을 말한다는 것밖에, 이후 이어지는 구절 역시 그렇다고만 알 수밖에 없다. 그러나 주님의 말씀의 속성은 두 방법에서 있다. 하나는 역사물들이 그것 자체의 시리즈로 엮어나가지는 한편, 또하나는 내적 의미의 영적인 것들이 그 시리즈들 안에 펼쳐져 있는 것이다. 하여 전자는 외적 인간에 의해 관조되는 것 (비록 도덕적 수준, 내지 자연적 수준일지라도 가르침을 얻도록 배려하신 것), 그리고 후자는 내적 인간에 의해 관조되는 것 (주님과 그분의 왕국에 관해 배우는 것)이다, 그리고 이 두 방법에서, 이 둘 사이, 또는 외적 인간과 내적 인간 사이에는 상응이 있을는지 모른다. 이것은 말씀을 수단으로 하는데, 그 이유는 말씀이 땅과 천국의 합일이기 때문이다. 이는 자주 언급한 대목이다. 고로 거룩한 상태 안에 있는 모든 이 안에서, 그가 말씀을 읽는 동안, 땅 위에 있는 그의 외적 인간과 천국 안에 있는 그의 내적 인간과 더불은 합일이 있다.

그리고 그는 그의 이름을 야곱이라 불렀다. 이는 자연 평면 속의 진리에 관한 교리를 의미한다. 이는 “이름을 부름”, 또는 “이름을 수단으로 부름”이 품질을 의미한다로부터 알려진다. 야곱에 의해 표현된 품질은 자연 (평면) 속의 진리에 관한 교리인데, 이는 에서의 표현이 자연 (평면) 속의 진리로부터의 생활의 선이다로부터 알는지 모른다. 그리고 그가 명명되는 말씀의 여러 구절로부터도 알는지 모른다. 자연 (평면)을 구성하는 것에는 두 가지가 있다. 마치 합리성을 구성하는 것이 두 가지인 것과 비슷하다. 이것은 전체 인간을 구성하는 것인데, 하나는 생활로부터 있는 것, 다른 하나는 교리로부터 있는 것이다. 전자는 의지력에 속하고, 후자는 이해력에 속한다. 전자는 선이라 불리우고, 후자는 진리라고 불리운다. 이 선이 에서에 의해 표현되고, 진리는 야곱에 의해 표현된다; 또는 같은 것으로, 자연 (평면) 속의 진리로부터의 생활의 선은 에서에 의해, 그리고 자연 (평면) 속의 진리에 관한 교리는 야곱에 의해 표현되고 있다. 여러분이 자연 (평면) 속의 진리로부터의 생활의 선이라고 말하든, 자연 (평면) 속의 진리에 관한 교리라고 말하든, 또는 이것들 중 어는 것 안에 있다고 말하든 모두 결론은 똑같은 지점에 도달한다. 그 이유가 이 둘은 어찌됐든 어떤 주제(subject, 실제의 문제)로 놓고 서로가 떨어져서는 존재할 수(완성될 수) 없기 때문이다. 만일 그것들이 어떤 주제를 갖지 않고 있다면, 그것들은 인간이 중요시하는 추상적인 일 같은 것으로 존재할 뿐이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이 책을 통해 얻는 모든 지식은 현재의 생활에서 사용되어 추상적(상상속의) 일 안에 있지 않아야 한다 역자 주) 그러므로 여기서 야곱에 의해 자연 (평면) 속의 진리에 관한 교리 안에 있는 이들이 의미되고 있다.
글자 의미만에 머물고 있는 이들은 이렇게 믿는 것 같다: 말씀에서 “야곱”에 의해 뜻해지는 것은 야곱으로부터 이어져 내려온 모든 사람들이다는 것, 따라서 야곱에 관하여 예언적으로, 역사적으로 있는 모든 사항들은 그의 후손에 적용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말씀은 이 점에서 주로 신성하다: 일반적, 세부적으로 말씀에 있는 모든 것들은 한 나라, 한 백성을 중요시하고 있지 않다는 것, 그러나 보편적 인류를 향해 말씀이 존재한다는 것; 즉 있어왔던 나라나 사람들, 또한 있게 될 모든 나라와 사람들을 향해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더욱 더 보편적인 대목은 천국들에 있는 주님의 왕국, 있어왔던 왕국, 있게 될 왕국을 위해 말씀은 존재한다는 것이다. 더 더욱 보편적인 대목, 즉 최고의 의미에서 말씀은 주님 자신을 두고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런 세 가지 대목 때문에 말씀은 신성한 것이다. (우리가 이 책을 통해 공부하는 모두는 이 세 가지에 집중하고 있음을 염두하면 공부에 도움이 될지 모른다 역자 주) 만일 말씀 속의 역사 줄거리가 한낱 어느 나라, 백성, 민족에 얽힌 이야기를 가지고 도덕적, 자연적 교훈을 주고 있다는 정도이다면, 말씀은 한낱 인간적일 뿐이고 하나의 나라와 더불어 있던 거룩한 예배 그 이상의 신성은 없는 셈일 것이다; 그리고 모든 이가 눈치채고 있는 것은, 사람들이 “야곱”이라 불리는 사람들과 더불은 실제의 역사를 말씀이 기록하여 놓고 인류에게 그들의 역사 공부나 시키려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로부터 분명한 것은, 말씀에서 “야곱”에 의해서 야곱이 의미되지 않는다는 것, 또한 “이스라엘”에 의해 이스라엘이 뜻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이유가 역사서가 아닌 예언서에서 명명되는 “야곱”이나 “이스라엘”의 경우는 글자 대로 읽으면 역사 공부, 도덕적 교훈, 자연적 가르침 등등 마저도 끌어낼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말씀은 글자 내부에 천국의 비밀들이 깊이 감추여놓여 있는 바, 특별한 도구(상응학)를 사용하지 않으면 그 의미를 제대로 헤아리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깊이 감추어놓아 두신 이유는 인류 누군가가 말씀 모독을 범하여 지옥으로 가는 것을 예방해주시려는 신성한 사랑 때문일지 모른다 역자주)
그러므로 말씀의 내적 의미에서 “야곱”에 의해 자연 (평면) 속의 진리에 관한 교리; 또는 같은 말로 어느 나라, 어느 민족, 어느 사람들이든 이 교리 안에 있는 이들이 의미된다는 것; 그리고 최고의 의미에서 주님이 뜻해진다는 것을 아래 인용 구절로부터도 확실해질 것이다. 누가복음서에서:
천사가 그녀에게 말했다, 두려워 말라, 마리아야; 그 이유는 너는 네 자궁 안에 아들을 임 신하여 나오게 할 것이니, 그의 이름을 예수라고 불러라. 그분은 위대하시고, 지극히 높은 분의 아들이라 불리실 것이다; 그리고 주 하느님께서 그분에게 그의 아버지 다윗의 왕좌를 주실 것이다; 그리고 그분은 야곱의 가문을 영원히 지배하실 것이다; 그리고 그분의 왕국에 는 끝이 없을 것이다 (눅. 1:30-33).
위에서 “야곱의 가문”은 유대 나라, 유대 백성을 뜻하지 않을 것임은 누구나 익히 알 것이다; 그 이유가 주님의 왕국이 이 백성만을 두고 있지 않고 그분을 믿는 이들, 신앙으로부터 선행 안에 있는 우주의 모든 이를 두고 말해졌을 것이 자명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천사에 의해 여기서 명명된 “야곱”에 의해서도 야곱의 사람들을 뜻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또한 말씀의 다른 장소에서 있는 “야곱의 씨(후손)”, “야곱의 아들들”, “야곱의 토지”, “야곱의 상속분”, “야곱의 왕”, 그리고 “야곱의 하느님”, 이런 표현들은 구약 성경에서 흔히 등장하는 말들로서 이것들은 의도적으로 내적 의미를 포함시켜 놓고 있다.
“이스라엘”에 관하여도 위와 마찬가지인데, 마태복음서에서:
주님의 천사가 꿈에서 요셉에게 나타나서, 말하기를, 일어나서 어린 아이와 그의 어머니를 데려가라, 그리고 이집트로 피신하라; 이것은 예언자를 통해 주님에 의해 말해진 것, 즉 이 집트로부터 나는 나의 아들을 불렀다는 예언을 성취하시려는 것이다 (마. 2:13, 15);
그리고 예언서에서 말해진다:
이스라엘이 아이었을 때, 그때 나는 그를 사랑했다, 그리고 이집트로부터 나의 아들을 불렀 다 (호. 10:1).
위 구절에서 “이스라엘”은 주님이심이 분명하다; 그럼에도 글자 의미에서는 그것이 알려질 수 없고, “아이 이스라엘”이 야곱의 가장 이른 후손들, 즉 이집트로 갔고, 후에 거기로부터 불려내진 이들을 뜻한다고만 알고 있다. “야곱”과 “이스라엘”이 등장하는 다른 구절들에서도 마찬가지인데, 글자 의미에서는 나타나는 것이 없다. 이사야서에서:
들어라, 오, 야곱, 나의 종아; 그리고 이스라엘, 그를 나는 선택했었다; 고로 너를 만드신 여호와, 그리고 자궁으로부터 너에게 모양을 생기게 하신 여호와, 그분이 너를 도울 것이 다; 두려워말라, 오, 야곱, 나의 종아, 그리고 너 내가 선택한 여수룬아; 그 이유가 나는 목 마른 그에게 물을 쏟아부었고, 그리고 마른 지면에 시내물이 흐르게 했기 때문이다; 나는 네 씨 위에 내 영을 쏟아부을 것이다, 그리고 네 후손 위에 내 축복을 쏟아부을 것이다; 혹 자는 말하기를, 나는 여호와께 속한 자라 할 것이다; 그리고 어떤 자는 자신을 야곱의 이름으로 부를 것이다; 그리고 어떤 자는 자기 손으로 여호와에게 쓸 것이다, 그리고 이스 라엘의 이름으로 자신에게 별명을 붙일 것이다 (이. 44;1-3, 5);
위에서 “야곱”과 “이스라엘”은 주님을 분명하게 표시하고 있다; 그리고 “씨”, “야곱의 후손”은 그분을 믿는 이들을 표시하고 있다.
이스라엘의 아들들에 관한 예언인데, 모세의 책에서이다:
요셉은 그의 활의 강함 안에서 앉을 것이다, 그리고 그의 손의 팔은 야곱의 전능하신 분의 손에 의해 강력하게 만들 것이다; 거기로부터 목자, 이스라엘의 돌이 있다 (창. 49:24);
위에서 “야곱의 전능하신 분”과 “이스라엘의 돌”은 주님을 명백하게 표시한다. 이사야서에서:
나의 영광을 나는 또 다른 자에게 주지 않을 것이다; 나를 섬기어라, 오 야곱아, 그리고 내 가 부른 이스라엘아, 내가 그분이다; 나는 처음이고, 나는 마지막이다 (이. 48:11, 12);
위에서도 역시 “야곱”과 “이스라엘”은 주님을 의미한다. 에스겔서에서:
나는 요셉의 막대기를 가져갈 것이다, 이것은 에브라임의 손에, 그리고 그의 동료들인 이스 라엘의 지파들 안에 있다, 그리고 나는 그것들을 유다의 막대기와 더불어 그 자 위에 더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들을 하나의 막대기로 만들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내 손에서 하나일 것이다. 나는 이스라엘의 아들들을 나라들 사이로부터 데려올 것이다, 그리고 그들을 사방 으로부터 모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을 그들 자신의 토지로 데려갈 것이다; 그리고 나는 이 스라엘의 산 위에서, 토지에서 한 나라를 만들 것이다; 그리고 한 왕이 그들에게 왕으로 있 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더 이상 두 나라가 아닐 것이다, 그리고 두 왕국으로 나뉘어 있 지 않을 것이다. 내 종 다윗이 그들 위에서 통치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한 목자를 가질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너희 조상이 거주했던 곳, 내 종 야곱에게 주었던 토지에서 거주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거기 안에서 그들과 그들의 아들들, 그리고 그들의 손자들이 영원히 거주할 것이다; 그리고 내 종 다윗이 그들 위에서 영원히 제 일인 자가 될 것이다; 나는 그들과 평화의 언약을 만들 것이다, 이 언약은 그들과 더불은 영원히 지속되는 언약이다; 그리고 나는 그들을 거기에 놓아두고, 그들이 번성하게 하고, 영원히 그들의 한 가운데에 내 성소를 둘 것이다. 내 성막이 그들과 더불어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들의 하느님일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나의 백성일 것이다. 그리고 내 성소가 영원히 그들의 한 가운데 있 는 때, 나라들은 나 여호와가 이스라엘을 신성해지게 하고 있음을 알 것이다
(겔. 37:19, 21, 22, 24-28);
위 구절에서도 다시 분명해지는 것은, “요셉”, “에브라임”, “유다”, “이스라엘”, “야곱”, 그리고 “다윗”에 의해 실제의 인물들을 뜻하지 않고 있다는 것, 그러나 최고의 의미에서 주님 안에 있는 신성한 영적인 것들, 그분의 왕국과 교회 안에서 주님의 것인 것들을 뜻한다는 것이다. 다윗이 그들의 왕과 제 일인 자로서 죽지 않고 영원히 있지도 않을 것은 누구도 아는 사항이다; 그러나 “다윗”에 의해 주님이 뜻해짐은 이미 살핀 바도 있다. 또한 이스라엘이 흩어진 사방으로부터 모두가 모아지지 않을 것도, 그들이 신성시 되어지지도 않을 것, 성소가 그들 한 가운데 영원히 있지 않을 것도 누구나 짐작되는 사항들이다; 그러나 위 인물들은 모두 표현적 의미에서 등장한 인물들이다는 것, “이스라엘”에 의해서는 신실한 모든 자가 뜻해진다.
미가서에서:
나는 너희 모두를 확실히 집합하게 할 것이다, 오 야곱아; 나는 이스라엘의 남은 자를 확실 히 모을 것이다; 나는 그들을 보스라의 양떼 같이 놓아둘 것이다 (미. 2:12);
위도 앞 구절과 의미는 비슷하다. 이사야서에서:
야곱은 장차 올 이들로 뿌리를 내리게 할 것이다; 이스라엘은 꽃피우고 싹이 돋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생산물로 세상의 얼굴을 채울 것이다 (이. 27:6).
위 구절도 앞 구절에서와 의미는 비슷하다. 이사야서에서:
고로 아브라함을 되찾으신 여호와께서 야곱의 가문에 말하신다; 이제 야곱은 부끄러워하지 않을 것이다, 이제 그의 얼굴은 지금 창백해 있지 않을 것이다; 그 이유는 그가 내 손의 일, 그의 자녀들을 그의 한 가운데에서 볼 때, 그들은 내 이름을 거룩히 받들 것이기 때문 이다; 그렇다, 그들은 야곱의 거룩한 분을 신성하게 받들 것이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하느 님을 경외하며 있을 것이다. 제 길을 벗어난 영을 지닌 그들 또한 총명을 알 것이다
(이. 29:22-24).
이사야서에서:
고로 여호와께서 그분이 기름부은 고레스에게 말한다, 그의 오른 손을 나는 붙잡고 그 앞 에 모든 나라들을 복종시키고 왕들의 허리를 풀게 할 것이며; 그 앞에서 문들이 열려 있고; 대문이 닫아지지 않게 할 것이다; 내가 그 앞에서 가면서 구부러진 길을 곧게 만들 것이다; 나는 놋쇠로 된 문들을 조각으로 부수고, 쇠빗장을 산산이 부술 것이다; 나는 네게 어둠의 보물들, 그리고 비밀한 장소의 감추어둔 재물을 줄 것이다. 하여 너는 네 이름을 불러낸 내 가 여호와인 줄을, 이스라엘의 하느님인 것을 알 것이다. 야곱 나의 종, 내가 뽑은 이스라 엘을 위하여 (너를 부른 것을 알 것이다). 내가 네 이름을 불렀고, 나는 네가 나를 알지 못 한 때에 네게 별명을 붙여두었다 (이. 45:1-4).
위 구절도 주님이 취급됨이 분명하다. 미가서에서:
마지막 날에 여호와의 집의 산이 산들의 머리로서 건립되는 날이 올 것이다; 그리고 많은 나라들이 갈 것이다, 그리고 말한다, 너희는 오라, 그리고 여호와의 산으로 올라가자, 그리 고 야곱의 하느님의 집으로 가자; 그리고 그분은 그분의 방법들에서 우리를 가르치실 것이 다, 그리고 우리는 그분의 길들에서 걸을 것이다; 그 이유가 시온으로부터 교리가 나갈 것 이고, 여호와의 말씀이 예루살렘으로부터 나갈 것이기 때문이다 (미. 4:1, 2).
다윗서에서:
여호와께서는 야곱의 모든 거주지들보다 시온의 문들을 더 사랑하신다; 영화로운 것들이 네 안에서 전파될 것이다, 오 하느님의 도성이여 (시. 87:2, 3).
예레미야서에서:
그들은 여호와 그들의 하느님을 섬길 것이다, 그리고 다윗 그들의 왕을 나는 그들에 일으 켜 세울 것이다. 그리고 너는 두려워 말라, 오 야곱 나의 종아, 여호와께서 말하신다; 낙담 하지 말라, 오 이스라엘아; 그 이유는 내가 멀리로부터 너를 구할 것이기 때문이다.
(예. 30:9, 10).
이사야서에서:
나에게서 듣거라 오 섬들아; 그리고 멀리 있는 너희 백성들아 귀 기울여라; 여호와께서는 자궁으로부터 나를 부르셨다; 내 어머니의 뱃속으로부터 그분은 내 이름을 들먹거리셨다; 그리고 그분이 나에게 말하셨다, 너는 내 종 이스라엘이다, 네 안에서 나는 영화로울 것이 다 (이. 49:1, 3).
다시:
그때 너는 네 자신 여호와 안에서 즐거워할 것이다, 그리고 나는 너를 땅의 높은 장소들을 타고 다니게 만들 것이다, 그리고 나는 너를 야곱의 유산으로 먹일 것이다 (이. 58:14).
위 인용 구절들의 최고 의미에서 “야곱”과 “이스라엘”에 의해 주님이 뜻해진다; 그리고 표현적 의미에서 주님의 영적 왕국, 진리로부터의 교리와 선의 생명이 있는 교회가 뜻해진다. “야곱”에 의해 이 교회의 외적인 것들에 있는 이들이; “이스라엘”에 의해서는 이 교회의 내적인 것들에 있는 이들이 뜻해진다. 이로부터, 그리고 많은 인용 구절로부터 분명해지는 것은, “야곱”이 실제의 인물 야곱이 아니다는 것; “이스라엘”이 실제의 인물 이스라엘이 아니다는 점이다; 같은 방식에서 “이삭”, “아브라함”의 경우도 그러하다. 이 셋이 명명되는 곳인 마태복음서에서:
많은 이들이 동과 서로부터 올 것이다, 그리고 천국들의 왕국에서 아브라함, 이삭, 야곱에 게 기댈 것이다 (마. 8:11).
누가복음서에서:
너희는 하느님의 왕국에서 아브라함, 이삭, 야곱, 그리고 모든 예언자들을 볼 것이다
(눅. 13:28);
그리고 다시:
나사로가 아브라함의 품 안으로 천사들에 의해 운반되어졌다 (눅. 16:20, 22).
사실상 천국에 있는 이들은 아브라함, 이삭, 야곱에 관해 아무 것도 아는 바가 없다; 그리고 이 이름들이 인간에 의해 읽혀질 때, 천사들은 신성과 신성한 인간 측면에서의 주님밖에 아는 것이 없다; 그리고 “아브라함, 이삭, 야곱에게 기대어 있음”에 의해 그들이 지각하는 것은 주님과 더불어 있음이다; 그리고 “아브라함의 품에 있음”에 의해서도 주님 안에 있음이다 라고밖에 더 아는 것이 없다. 고로 천사들이 말하는 것은 그때 당시 인간은 내적인 것들로부터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었던 터에 말씀에 있는 모든 것들이 글자에 따라 있다는 것 외에 달리 아는 것이 없었던 이유 때문이다는 것이다; 그리고 주님이 인간과 더불어 글자에 따라 이야기하셨을 때, 그렇게 말하신 이유는 그들이 그런 수준에서라도 신앙을 가져보도록 배려하심, 동시에 그 글자가 내적 의미를 실어나르게 함으로 그분 자신과 더불어 인간의 결합이 있을 수 있게 섭리하심 때문이었다. 이런 경우를 좀 더 살피고자 한다면, “야곱의 하느님”,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이 주님 자신이라고 구약 성경의 말씀에서 의미되는 것에서 알는지 모른다. (“야곱의 하느님”이 주님이시다에 관하여는 삼하 23:1; 이. 2:3; 41:21; 미가. 4:2; 시. 20:1; 46:7; 75:9; 76:6; 81:1, 4; 84:8; 94:7; 114:7; 132:2; 146:5. “이스라엘의 거룩한 분”이 주님이시다에 관하여는 이. 1:4; 5:19, 24; 10:20; 12:6; 17:7; 29:19; 30:11, 12, 15; 31:1; 37:23; 41:14, 16, 20; 43:3, 14; 45:11; 47:4; 48:17; 49:7; 54:5; 55:5; 60:14; 예. 50:29; 겔. 39:7; 시. 71:22; 78:41; 89:18.)

그리고 이삭은 그녀가 그들을 낳았을 때 육십 년의 아들이었다. 이는 주님의 지상 시절, 신성한 합리성의 상태를 의미한다. 이 숫자 자체는 이미 살핀 바 있다. 그러나 숫자 “60”이 포함하는 것은 이 60을 구성하는 단순한 숫자로부터 알게 될는지 모른다, 즉 5와 12, 즉 5×12가 60이기 때문이다. “5”가 의미하는 것은 이미 살폈다; 그리고 “12”도 살폈다. 또한 60은 6×10으로도 구성된다. 숫자 “6”은 이미 살폈다; 그리고 “10”도 살폈다. 또한 60은 2×30 으로도 구성된다. “2” 역시 이미 살폈다; 그리고 “30”도 살폈다. 숫자 “60”이 위에 열거한 여러 방식에서 조합을 이루는데, 그것의 순서 대로 그것들에 의해 어떤 것이 의미된다, 즉 그것 속의 모두는 주님의 지상 시절 당시 주님의 신성한 합리성 안에 있었던 상태를 포함하고 있다. 이런 것들은 주님으로부터의 명료한 빛 안에 있는 천사들 앞에서는 명명백백하다; 그러나 인간들, 특히 말씀 안의 숫자가 계수일 뿐, 거기에 어떤 비밀한 의미도 있지 않다고 주장하는 이들의 경우, 그들에게는 그 의미들이 열려질 수 없다; 이 비밀스런 의미들이 열려질 수 없는 이유의 첫째는 그런 의미가 있다고 믿지 못하겠음 때문이고, 둘째는 이 비밀들의 의미는 너무나 심오해 인간의 납득력에 숙박하기에 한계가 드리워져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천국에 가면 가능하므로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역자 주.)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27, 28절. 그리고 이 소년들은 성장했다. 그리고 에서는 사냥하는데 숙련된 사람이어서, 들판의 사람이었다. 그리고 야곱은 완전한 사람이어서, 천막에서 거주하고 있었다. 28 그리고 이삭은 에서를 사랑하였다, 그 이유는 그의 사냥함이 그의 입 안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리브가는 야곱을 사랑하였다.

그리고 소년들은 성장했다. 이는 선과 진리의 결합에 관한 첫 상태를 의미한다. 이는 “성장함”이 선과 진리의 근원과 발달 측면에서 선과 진리를 서술할 경우, 후자, 즉 발달 측면의 첫 상태를 의미한다로부터 알게 되는데 이는 이후 설명할 것이다; 그리고 “소년들”의 의 의미가 선과 진리이다로부터; 그 이유가 선은 “소년 에서”에 의해, 진리는 “소년 야곱”에 의해 표현되었기 때문이다. 이는 이미 살폈다. 선과 진리의 경우는 자손의 경우와 아주 흡사한 바, 그것들도 임신되어져 자궁 안에 있고, 태어나고, 성장하고, 마지막으로까지 발달해간다. 그들이 자궁 안에 임신된 것, 그리고 태어나는 것까지는 근원적 상태에 해당된다; 그러나 그것들이 성장하고, 마지막 때까지 발달하는 것은 발달의 상태에 속한다. 발달의 상태는 출생으로부터 연속되고 선과 진리가 결합하는 상태이다. 이 상태의 처음이 여기서 “성장함”에 의해 의미되어 있다. 이 상태는 출생 후 즉각적으로 개시되어 삶의 마지막 때까지 계속된다. 그리고 만일 선 안에서의 삶을 계속한 인간이라면, 육체의 삶 이후 영원히 계속된다. 고로 천사들은 계속적으로 완전해져가는 상태에 있는 셈이다.

그리고 에서는 사냥하는데 숙련된 사람이었다. 이는 감각으로부터의 진리들과 기억 속의 지식으로부터의 진리들로부터 있는 삶 속의 선을 의미한다. 이는 “에서”가 삶 속의 선(생활의 선)을 표현함으로부터; 그리고 “사냥에서 숙련된 사람”의 의미가 진리에 대한 애착 안에 있는 이들이다로부터 알려진다. “숙련된 사람”은 진리에 대한 애착, 또는 진리에 대한 애착 안에 있는 이들이라 단언된다; 이에 반해 “사냥함”은 진리들 자체를 의미한다, 그러나 선들은 자연적 인간 속에 있는 진리로부터 있는다. 그리고 자연적 인간 속의 진리들은 기억 속의 지식들이라 불리우는 것들이다; 그리고 이것들은 크게 두 종류, 또는 두 등급(수준)으로 있는데, 즉 감각으로부터의 진리들과 기억 속의 지식들이라는 틀(모양, form) 안에 있는 진리이다; 여기서는 이 둘 모두가 “사냥함”에 의해 의미되고 있다. 감각으로부터의 진리들은 어린이들에게 있는 진리들이다, 그리고 기억 속의 지식들이라는 틀 안에 있는 진리들은 어린이들이 성장하면서 얻어지는 진리들이다. 어떤 인간도 그가 감각으로부터의 진리 안에 먼저 있지 않으면 기억 속의 지식들이라는 틀 안에 있을 수 없다. 다시 말해 전자속의 생각(관념, idea)들은 후자로부터 획득된다는 말이다; 그리고 이후에 이것들로부터 그는 진리들을 배우고 납득해가서 내면적 측면으로까지, 즉 교리적 진리들이라 불리우는 것까지 획득하기에 이른다(성장한다), 하여 이 등급에 본문에서 “들판의 사람”에 의해 의미되는데 이제 살핀다.
“사냥함”에 의해 감각으로부터의 진리들과 기억 속의 지식 속의 진리들이 의미된다는 것, 이 진리들 안에서 인간은 배우고, 이 진리들 안에서 생활의 선 안에 있는 이들이 감동되어진다. 그 이유가 “사냥함”의 폭넓은 의미에는 사냥해서 획득한 것, 즉 숫양들, 염소새끼들, 암염소들 등등까지 포함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들은 영적 선들이다; 그리고 사냥에서 사용한 무기들, 즉 화살통, 활, 그리고 표창들은 진리로부터의 교리물을 의미한다. “사냥함”에 의해 의미되는 것은 그의 아버지에 의해 에서에게 말한 구절로부터도 더 알려진다. 즉:
네 무기들을, 네 화살통과 네 활을 가지고, 들판으로 나가라, 그리고 나를 위해 사냥하라, 그리고 내가 사랑하였던 것과 같은 맛좋은 음식을 만들어라 (창. 27:3, 4);
그리고 에서를 대신한 야곱에게,
내가 내 아들의 사냥 고기를 먹고, 내 혼이 너에게 복을 빌도록 (음식을 )나에게 가져오라 (창. 27:25);
위 두 구절로부터 “사냥함”에 의해 의미된 것을 알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사냥”하는 것은 가르치는 것과 설득하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 의미는 양쪽 측면, 즉 진리에 대한 애착으로부터, 그리고 거짓에 대한 애착으로부터의 측면들이 있다; 진리에 대한 애착으로부터의 경우, 예레미야서에서:
나는 그들을 내가 그들의 조상들에게 주었던 그들의 토지로 되돌려 데려올 것이다; 보라 나는 많은 어부들을 보낼 것이다, 여호와께서 말하신다, 그리고 어부들이 그들을 잡을 것이 다; 그리고 이후 나는 많은 사냥꾼들을 보낼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모든 산과 언덕, 바위 틈새로부터 그들을 사냥할 것이다 (예. 16:15, 16);
위에서 “어부들”은 감각으로부터의 진리들로 가르치는 이들을 표시한다; 그리고 “사냥꾼들”은 기억 속의 지식으로부터의 진리들로, 또한 교리적인 것들로부터 가르치는 이들을 표시한다. “모든 산과 언덕으로부터”란 선에 대한 애착 안에 있는 이들과 진리에 대한 애착 안에 있는 이들을 가르침을 의미한다. “산과 언덕”이 이 의미를 가지는 것은 이미 살폈다. 마찬가지 의미가 “들판에서 사냥함”에 포함되어 있다 (창. 27:3 참조). “사냥함”이 거짓에 대한 애착으로부터 설득함을 의미하는 구절은 에스겔서에서 나타난다:
보라 나는 너의 팔베개(pillow)들과 맞서고 있다, 그것 가지고 너희는 혼들을 사냥하여 그 것들이 날아가버리게 만든다, 그래서 나는 너의 덮개들을 찢을 것이다, 그리고 내 백성을 너희 손으로부터 구해낼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사냥당하게 너희 손 안에 더 이상 있게 하 지 않을 것이다 (겔. 13:20, 21).
위 구절의 “사냥함”의 의미는 이미 살폈는 바 그곳을 참조하기 바란다; 그러나 위 구절의 사냥의 종류에는 “그물들”의 속성이 들어 있다.

“들판의 사람”이 교리물로부터의 생활의 선을 의미하는 것은 “들판”의 의미로부터 분명해진다. 말씀에서 자주 사용되는 단어들 중에는 “땅, earth”, “토지, land”, “지면, ground”, 그리고 “들판, field”이 있다. 단어, 땅과 토지는 좋은 의미에서 사용될 경우, 천국들과 땅 위에 있는 주님의 왕국이 의미되어진다. 고로 교회도 의미된다, 그 이유가 땅 위 주님의 왕국이 교회이기 때문이다. 똑같은 것이 지면에 의해서도 의미되기는 하나 보다 더 제한된 수준에서 의미되어진다. 같은 의미로 들판도 사용되지만 위보다 더 제한된 수준이다; 그리고 교회의 교리적인 것들의 목적이 생활의 선에 있지 않다면 그 교회는 교회가 아니다; 같은 말로 교리적인 것들이 생활의 선과 결합되어 있지 않다면 그 교리는 무용지물인 바, “들판”의 첫째가는 의미는 생활의 선이다; 그리고 이것이 교회 속에 있기 위하여 교리는 반드시 이 선 안에 심어져온 말씀으로부터의 교리적인 것들이어야 한다. 교리적인 것 없이 생활의 선이 실로 있을 수 있으나 교회의 선은 아직은 아니다. 다시 말해 진실로 이 선은 영적인 선은 아니고 단지 영적인 선이 될 수 있는 가능성만 지니고 있다는 말이다. 마치 말씀을 가지지 않아서 동시에 주님에 관해서도 무지한 이들인 이방인들이 선 안에 있는 경우이다.
“들판”이 신앙 속에 있는 것들이 심어져야 하는 삶(생활)의 선이다는 것, 즉 교회로부터 있는 영적 진리이다는 것이 주님의 비유로부터 분명해진다. 마태복음서에서:
파종자가 씨를 뿌리러 나갔다, 그리고 그가 씨뿌렸을 때, 얼마의 [씨들은] 길쪽에 떨어졌 다, 그리고 새들이 와서 그것들을 먹어 치웠다; 얼마의 씨들은 돌이 많은 장소들에 떨어졌 다, 거기서 그것들은 많은 땅을 가지지 않았다: 그리고 곧바로 그것들이 싹을 틔웠다, 그 이유는 그것들이 땅의 깊음을 가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태양이 위로 올랐을 때, 그 들은 시들어졌다, 그리고 그것들은 뿌리가 없었기 때문에 그들은 말라 죽었다; 그리고 얼마 의 씨들은 가시덤불들에 떨어졌다; 그리고 가시나무들이 솟아오르자, 그것들을 질식시켰다; 그러나 다른 씨들은 좋은 지면에 떨어졌다, 그리고 열매를 산출했는데, 얼마는 백 배, 얼 마는 육십 배, 얼마는 삽십 배 였다: 들을 귀를 가진 자, 그는 자기로 하여금 듣게 하라
(마. 13:3-9; 막. 4:3-9; 눅. 8:5-8).
위 비유는 땅의 4 종류, 또는 들판에 있는 지면의 4 종류, 즉 교회 안에 있는 4 종류가 취급된다. “씨”는 주님의 말씀, 고로 진리, 꼼꼼히 말해서 신앙 속에 있는 진리임이 분명한데, 그 이유는 말씀을 받는 것이 인간 안에 있는 선이기 때문이다; “단단한 길”은 거짓이다; “돌이 많은 장소”란 선 안에 뿌리를 내리지 않은 진리이다; “가시덤불들”은 악들이다.
“들판의 사람”에 의해 의미되는 교리적인 것들로부터의 생활의 선에 주목하면, 이렇다: 거듭나고 있는 이들은 처음에는 교리적인 것들로부터 선인 것을 행한다, 그 이유는 자신 스스로 그들은 선인 것을 몰랐고, 단지 사랑과 선행에 관한 교리적인 것들로부터 선인 것을 배웠기 때문이다; 하여 그들은 주님이 누구이신지를, 이웃이 누구인지를, 사랑이 무엇인지를, 선행이 무엇인지를, 선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다. 그들이 이 상태 안에 있을 때, 그들은 진리에 대한 애착 안에 있다, 이때 그들은 “들판의 남자들(viri)” 이라 불리워진다; 그러나 후에 그가 한참 거듭나져 갔을 때, 그들은 교리적인 것들로부터 선을 행하지 않고, 사랑과 선행으로부터 선을 행한다, 그 이유는 그들이 교리적인 것들을 통하여 배워왔던 선 자체 안에 있기 때문이다; 이때 그들은 “들판의 사람(homines)” 이라 불리운다. 여기서의 경우 주목한 인간은 간음질, 도둑질, 살인 등과 같은 자연적 수준의 경향성에 온전히 움직인 이들의 경우인데, 이들이 십계명의 명령들로부터 배우고, 자기의 생활이 지옥 속에 해당하는 것을 알게 된다. 하여 그것들을 철폐하는 경우이다. 이 상태에서 그는 십계명의 명령들에 감동되어지기는 했으나 그로 감동되게 한 것은 실상 지옥에 떨어지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어쨌든 그는 이것 외에 말씀에 있는 많은 것들로부터 어떻게 자기 생활을 엮어야 하는지를 배운다. 하여 그가 선을 행할 때, 이때 그는 명령들로부터 그것을 행하고 있다. 그러나 (언제인가) 그가 선 안에 있을 때, 그는 과거 자신이 빠져있던 간음질이나 도둑질 같은 것을 혐오하기를 시작한다; 그가 이 상태 안에 있을 때, 그는 더 이상 명령들로부터 선인 것을 행하지 않고, 자신 안에 있는 선으로부터 선인 것을 행한다.
위의 명령들 수준보다 더 내면의 명령들인 교리적인 것들이라 불리우는 영적 진리들의 경우도 같은 이치에서 있다; 그 이유가 교리적인 것들은 자연적 인간에 속하는 내면의 진리들이기 때문이다. 처음의 진리들은 감각 속에, 그 다음 기억 속의 지식 안에, 내면의 것들은 교리 속에 있다. 이런 교리적인 진리들은 기억 속의 지식의 진리들을 기반으로 한다. 그 이유가 어떤 인간도 기억 속의 지식들 없이 생각이든, 관념이든, 개념이든 만들어낼 수 없고, 유지해갈 수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억 속의 지식들로부터의 진리들은 감각들로부터의 진리들을 기반으로한다, 그 이유가 감각적인 것들 없이 기억 속의 지식들이 인간에 의해 납득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진리들, 즉 기억 속의 지식들로부터, 감각으로부터 있는 진리들이 “사냥에서 숙련된 사람”에 의해 의미되어져 있다; 그러나 교리적 진리들은 “들판의 사람”에 의해 의미된다. 이런 방법에서 이런 진리들은 인간과 더불어 줄지어 당사자의 (성장기의) 삶에서 줄잇고 있다; 하여 그가 성년에 진입할 때까지, 그리고 감각 속의 진리들과 기억 속의 지식 속의 진리들을 통과하는데 교리적인 진리들 안에 있을 때까지이다; 그 이유가 이렇지 않으면 그가 거듭나질 수 없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교리적인 진리들은 감각과 기억 속의 지식으로부터 파생되는 것이 아니면 확증될 수 없기 때문에서 이다. 더욱이 신앙의 가장 깊은 비밀들 같은 경우 인간의 생각에서 가능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다시 말해 자연적, 감각적 수준의 생각으로 파헤쳐 알아질 수 있는 수준에 있지 않다는 말이다. 그러나 다른 삶에서의 경우, 설사 당사자가 이런 것들의 무엇이든지에 무지하다 해도 그가 원하면 그의 이해력 앞에 보여지고, 더 원하면 그의 시각 앞에 표출되어진다; 그 이유가 이를 믿든 믿지 못하든, 다른 삶에서는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야곱은 완전한 사람이었다. 이는 진리를 의미한다. 이는 야곱이 자연 (평면) 속의 교리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리고 “완전, perfect”의 의미가 진리 안에, 또는 진리로부터 있는 이들이라 단언됨으로부터 알려진다.

천막들에서 거주하였다. 이는 파생되어진 예배를 의미한다. 이는 “천막들”의 의미가 사랑의 거룩함, 그리고 이로부터 있는 예배의 거룩함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천막들”이 예배의 거룩함이다 말한 이유는 태고 시대 때에 주님을 사랑함 안에 있고, 이 사랑으로부터 거룩한 예배 안에 있었던 교회 속의 사람들이 천막에서 거주했고, 그 안에서 거룩한 예배를 수행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때 당시에 사랑의 거룩함과 이로부터 있는 예배의 거룩함이 천막에 의해 표현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에게도 시내산에서 모세에게 보여준 모형에 따라 (주님의) 천막을 만들도록 명령되었다, 그리고 그 천막 안에 그들의 신성한 예배를 설립하도록 명령된 것이다. 그리하여 성막의 절기가 있었고, 그들 역시 천막 안에서 거주했는데, 이는 천적 (평면의) 교회인에 속한 거룩한 예배를 표현하였다. 이상의 내용이 본문 “천막에서 거주했다”에 의한 의미를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이삭은 에서를 사랑하였는데, 그 이유는 그의 사냥함이 그의 입 안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는 주님의 신성한 합리성 속에 있는 신성한 선은 진리로부터의 선을 사랑하였음을 의미한다. 이는 이삭이 신성한 선 측면에서의 주님의 신성한 합리성을 표현한다로부터; 그리고 에서가 자연 평면에 있는 선 측면에서의 주님의 신성한 자연 (평면)을 표현한다로부터; 그리고 에돔에 관해 이어지는 구절로부터; 그리고 “사냥함”이 자연적 진리들로부터의 생활의 선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의 입 안에”란 그분의 자연적 수준의 애착에서 였다를 의미한다; 그 이유가 말씀에서 “심정에서”라고 말해지면 이는 보다 내면인 것으로부터, 그리고 선으로부터 진행됨을; “입에서”라고 말해지면 이는 보다 외면인 것으로부터, 그리고 진리로부터 진행됨을 뜻하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에서에 의해 진리의 선이 표현되는 바, “사냥함”에 의해서는 외면의 선이 의미된다, 즉 자연적 수준의 애착 안에 있고 진리로부터 진행됨인 바, 여기서 “이삭의 입에서”라고 말해진다.

그리고 리브가는 야곱을 사랑하였다. 이는 신성한 합리성 속의 신성한 진리는 진리로부터의 교리를 사랑하였음을 의미한다. 이는 리브가가 신성한 합리성 속의신성한 진리이다로부터; 그리고 야곱이 자연적 (수준의) 진리로부터의 교리를 표현한다로부터, 그리고 최고 의미에서 진리 측면에서의 주님의 신성한 자연 (평면)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신성한 합리성 속의 신성한 선이 자연 평면에 있는 선을 사랑하였다, 그리고 신성한 합리성 속의 신성한 진리가 자연 평면에 있는 진리를 사랑하였다 라는 말은 (우리들 앞에) 이렇게 멈춰 서있다: 선과 진리가 합리성을 구성하고 있다; 합리성의 선은 진리 없이 자연 평면의 선 안으로, 고로 직접적으로 흘러든다; 또한 진리를 통하는 간접적 방식으로도 흘러든다; 이에 반해 합리성의 선은 자연 평면의 진리 안으로 합리성의 진리를 통하여 흘러든다, 고로 간접적 방식이다; 또한 자연 평면의 선을 통하여 자연 평면에 있는 진리 안으로 흘러든다, 고로 이는 간접적 방식이다. 줄여 말하면, 합리성의 선은 자연 평면의 진리보다는 자연 평면의 선과 더 밀접하게 결합한다는 말이다; 이 결합이 “이삭은 에서를 사랑했다”에 의해 의미되어 있다; 그리고 합리성의 진리는 자연 평면의 선보다 자연 평면의 진리와 더 밀접하게 결합하는데, 이것이 “리브가가 야곱을 사랑했다”에 의해 의미되고 있다.
위의 말들이 납득되기 힘든 말로 우리 앞에 서 있는 이유는 이 세상, 특히 학식의 세계조차도 이런 주제들 위에 놓인 지극히 일반적인 진리들조차 모르기 때문에서이다, 즉 합리성은 자연 평면과 구분된다는 것, 그러나 합리성, 자연 평면 모두 선과 진리로 구성된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이다, 이보다 더욱 덜 알려진 것은 합리성은 인간으로 생각할 수 있도록, 그리고 그가 생각한 대로 뜻할 수 있기 위하여 자연 평면 안으로 흘러들지 않으면 안된다는 점이다. 이런 지극히 일반적인 진리들이 알려지지 않았기에, 지금까지 거듭 반복되어 등장한 단어, 유입(influx) 역시 납득하기에 곤란할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이런 사항들은 천사들이 빛을 가지게 하는 재료들에 해당되고, (이 재료들로 해서) 그들은 무수한 것들을 지각하는데, 가장 두드러진 대목은 (주님의 지상 생활 때의) 인간 측면에 관련되어 있는 주님의 신성에 관해 생각하는 동시에 즐거움을 만끽하는 것이다. (만일 당신이) 선 안에 있다면, 또는 천사적인 것 안에 있다면, 육체 안에서 사는 동안일지라도 주님으로부터의 빛을 선물받아 전부는 아니지만 일부는 맛볼 수 있게 배려하신다; 그러나 선 안에 있지 않는 자가 위의 사항을 생각한다면, 그는 금방 진저리를 낼 것이고, 기껏 생각해본다는 것 마저도 자신들로부터 고안해낸 것들일 뿐이다. 그러므로 이런 자들은 위와 같은 사항들, 주님의 인간, 신성 등과 같은 말들로부터 멀리 떨어져 사는 것이 상책일지 모른다. 그 이유가 그들에게 이런 지식, 가르침, 교리 등등 무엇이든 권유해보아야 납득되는 것이 없어, 결국 하는 말, “이것이 나와 어떤 관계가 있다는 말이냐”, “이것이 내게 명예도 이익도 창출하지 않는데, 시간 낭비 아닌가?” 뿐일지 모른다. (하여 들을 귀를 가진 자, 그는 자기로 하여금 듣게하라고 신약 성경에서 주님이 말하셨을지 모른다 역자 주.)

29, 30절. 그리고 야곱은 죽을 끓였다, 그리고 에서가 들판으로부터 왔다, 그리고 그는 대단히 피로해 있었다. 30 그리고 에서가 야곱에게 말했다, 바라건대 나로 붉은 것, 이 붉음을 떠먹게 해다오, 그 이유는 내가 너무 지쳐서이다. 그러므로 그는 그의 이름을 에돔이라 불렀다.

그리고 야곱은 죽을 쑤었다. 이는 교리적인 것들로부터 무질서하게 많은 것들(chaotic mass)을 의미한다. 이는 야곱이 자연적 수준의 진리로부터의 교리를 표현한다로부터, 고로 자연적 인간 안에 있는 교리적인 것들도 표현한다로부터; 그리고 “죽(pottage)”이 교리적인 것들이 혼돈된 상태로 많은 것을 의미함으로부터 알려진다. “그것을 쑴(끓임, boil)”은 축적하는(amass) 것을 의미하는데, 그 이유는 원어에서 혀(tongue)라는 표현이 죽(pottage, 야채와 고기 등등 이것 저것을 함께 넣어 끓이는 진한 수프)에 어울리고 있기 때문인데, 마치 위 본문을 다르게 더 직역하면 그는 “진한 죽을 쑤었다, pottaged pottage”라고 말해질 수도 있는 바, 그는 이것 저것을 한 군데에 모았다(축적했다)가 의미된다. 다시 상기해둘 일은 선과 진리의 결합에서 처음의 상태가 이 구절, 이어지는 구절, 이 장의 끝에 이르기까지 계속되고 있음을 염두하면 이해에 도움이 될 것이다는 점이다.
거듭나고 있는 인간, 또는 이 인간에서 진리가 선과 결합해가고 있는 처음 상태는 그의 자연적 인간 안에서 우선적으로 존재한다, 또는 기억이라 불리는 선과 진리의 창고에서 이 결합의 상태는 제일 먼저 존재한다. 이 기억에서는 어떤 고정된 질서 없이 (마치 잡동사니를 언제인가 필요할 것 같아 창고에 던져 놓은 듯) 진리의 교리적인 것들이 축적되어 있다. 이런 상태로 있는 교리적인 것들은 미처 소화되지 않은 상태(충분히 이해되지 않은 상태)와 하나로 조립되지 않고 널려져(uncompound) 많이 있는 것, 따라서 일종의 무질서한(혼동된) 상태에 비교될 수 있다. 그러나 언제인가 쓰임을 목적에 둔 무질서일 뿐이다. 그 이유가 질서로 환원되는 모든 것의 처음의 상황(모습)이 이러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야곱이 끓인 진한 죽, 이것 저것 집어넣어(amass) 끓인 죽이다. 이 교리적인 것들은 그 스스로 질서 안으로 환원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들 안으로 흐르는 선에 의해 가능해진다, 그래서 흘러든 선은 선이 실행된 것의 양과 질에 꼭맞는 비율에서 교리물들을 정확히 질서 안으로 환원시켜 놓는다. 선은 처음에 교리물들을 갈망하고 바라는데, 그 이유는 자체에 그것들을 결합하게 하는데 있기 때문이다, 하여 선은 진리의 애착의 외관 아래에서 그 자신을 명백히 드러낸다. 이것이 에서가 야곱에게 한 말, “나로 이 붉은 수프, 붉은 것을 먹게 해다오” 안에 의미되어 있다.
이런 사항들은 진실로 글자 의미로부터 멀리 있는 듯 나타난다. 그럼에도 이런 말씀들이 인간에 의해 읽혀질 때, 읽는 인간이 글자 의미에 따라 납득하고 있을 때, 그와 함께 있는 천사들은 죽, 야곱, 에서, 붉은 것, 붉은 것을 먹는 것 등에 관한 생각을 전혀 하지 않는다; 그대신 그들은 자연적인 생각들과 멀고 아주 다른 영적인 생각들을, 자연적인 말씀들을 영적인 말씀들로 즉각적으로 바꾸어 납득한다. 이 구절 뿐만아니라 다른 말씀도 마찬가지이다: 예를 들면, 인간이 빵을 읽을 때, 천사들은 빵을 지각하지 않고, 빵 대신 즉시 천적인 사랑, 즉 주님을 사랑함에 속하는 모든 것을 지각한다; 그리고 포도주가 말씀에서 읽혀질 때, 그들은 포도주 대신 영적인 사랑, 즉 이웃을 향한 사랑으로부터의 모든 것을 지각한다. 마찬가지로 죽(pottage, 또는 pulse, 콩죽, 팥죽)이 읽혀질 때, 그들은 죽이나 팥죽이 아닌, 아직 선과 결합하지 않은 교리적인 것들, 고로 비정리된 교리물들을 지각한다. 이런 사항들은 천사들의 생각과 지각함의 본성과 품질이 무엇인지 알게 해준다, 그리고 그것이 인간의 생각과 지각함으로부터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지도 알게 해준다. 만일 어떤 인간이 거룩한 상태에서 있을 때, 위의 천사 같이 생각했다면, 즉 그가 성찬 예식에 참석하고 있을 때, 빵 대신 주님을 사랑함을 지각하고, 포도주 대신 이웃을 향한 사랑을 지각했다면, 그는 필시 천사들과 거의 비슷한 생각과 지각 안에 있었던 바, 천사들에게 더욱 가까이 접근한 셈이다. 하여 천사와 연합되는 데까지, 뿐만 아니라 그만큼 그는 선 안에 있다.
“죽” 또는 팥죽(콩죽, pulse)이 무질서한 많은 것을 의미하는 대목을 열왕기서로부터 읽어볼 수 있다:
엘리사가 길갈로 되돌아 왔다, 그리고 그 토지에 기근이 있었다; 그리고 예언자들의 아들들 이 그 앞에 앉아 있었다; 그리고 그는 그의 소년에게 말했다, 큰 솥을 걸고 예언자들을 위 해 죽을 쑤어라; 누가 밖으로 나가 들판으로 풀잎을 모으러 나갔다, 그리고 그는 들판의 포 도나무를 발견했다, 그리고 그것으로부터 그의 겉옷에 한 가득되게 들판의 덩굴을 모아 담 았다, 그리고 와서 그것들을 잘게 썰어 죽 솥 안으로 넣었다, 그 이유는 그들이 몰랐기 때 문이다; 그리고 그들은 먹으라고 사람들에게 퍼내었다; 그리고 죽을 먹게 되었는데, 그들이 소리쳐서 말했다, 오 하느님의 사람이시여, 솥 안에 죽음이 있나이다! 그리고 그들은 먹을 수 없었다; 그리고 그는 말했다, 너희는 곡식 가루를 가져오라; 그리고 그는 그것을 솥 안 에 부었다, 그리고 말했다, 사람들을 위해 퍼내라; 그리고 그들은 먹었다, 그리고 솥 안에 악한 말(word)이 없었다 (왕하 4:38-41).
내적 의미에서 이 말들은 글자 의미에서 의미하는 것과 완전히 다른 의미를 전달하고 있다. “토지에 있는 기근”은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들이 부족함을 의미한다; “예언자들의 아들들”은 가르치는 이들을 의미한다; “죽(pottage)”은 기억 속의 지식들 속에 있는 서로 어울리지 않는 많은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곡식 가루”는 선으로부터 있는 진리, 또는 천적 평면으로부터 있는 영적인 것; 고로 엘리사가 솥 안에 곡식 가루를 넣었고, 솥 안에 악이 없었다란 이 혼돈된 많은 것이 주님의 말씀으로부터의 영적 진리를 수단으로 수정되었다를 의미한다; 그 이유가 엘리사는 말씀 측면에서의 주님을 표현했기 때문이다. 이런 영적 의미를 떼어낸다면, 솥과 곡식 가루에 관한 위의 이야기가 지극히 거룩한 말씀의 차원에 있다 말할 수 있을까? 위의 기적 사건은 이 외의 기적 사건과 더불어 모두 그것 내부에 신성한 사항들이 감추여있어 지도록 역사되어 표현된 것이다.

그리고 에서가 들판으로부터 왔다. 이는 생활의 선을 추구함을 의미한다. 이는 에서가 자연 평면의 생활의 선을 표현한다로부터; 그리고 “들판으로부터 옴”이 선을 추구함이다로부터 알려진다; 그 이유가 “들판에서 명상함”이 선을 깊이 생각함을 표시하기 때문인데, “들판(밭, field)”은 교회의 선을 표시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대단히 지쳐 있었다. 이는 전투의 상태를 의미한다. 이는 “지친, weary”, 또는 “지침, weariness”이 전투 후에 오는 상태이다로부터; 여기서의 경우, 이는 전투의 상태인데, 그 이유가 이 장의 주제가 자연적 인간의 진리와 더불은 선의 결합이기 때문이다. “지쳐 있음”이 여기서 전투의 상태를 의미한다는 것은 내적 의미에서의 시리즈로부터가 아니면 나타날 수 없다, 특히 선은 전투를 치름 없이, 또는 시험을 치룸 없이 자연적 인간에 있는 진리와 결합되어질 수 없다는 명제를 고려하면 더 더욱 내적 의미 없이는 밝히 알려지지 않는다. 이를 인간에 관련해 말해본다면 이 의미가 왜 이런지를 납득하는데 도움이 될지 모른다. 즉:
인간은 주님으로부터 생명을 받는 기관, 또는 그릇밖에 더 아니다는 것이다; 그 이유가 인간은 자신으로부터 살지 못하기 때문이다. 주님으로부터 인간에게 흐르는 생명은 그분의 신성한 사랑으로부터 이다. 이 사랑, 또는 거기서 파생된 생명은 인간의 합리성 안에 있는 그릇에 흘러들고 그 그릇에 꼭들어 맞게 있으려하는데, 마찬가지로 그 인간의 자연 평면에서도 그러하려 한다. 그러나 인간은 유전적인 악과 더불어 태어나지고, 더욱이 그가 획득한 실제의 악이 보태진 결과, 이 그릇은 내면으로 흐르는 생명에 비교해서 반대의 위치에 놓여 있다. 그럼에도 안으로 흐른 생명은 생명을 받을 수 있게 반대적 위치를 할 수 있는 한 적절히 조정해본다. 합리적 인간과 자연적 인간에 있는 이 그릇들은 진리들이라 불리운다, 그러나 본시 그것들은 이런 그릇들의 다양한 형체를 지각함들일 뿐이다, 그리고 이런 다양한 형체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다양한 방법을 수단으로 지극히 미묘한 실체 안에로 결과되어지는데, 이 다양함에 따른 상태의 바뀜을 지각하는 것에 불과하다. 선 자체, 이는 주님으로부터 생명을 가진다, 또는 생명인데, 흘어들어 (합리적 인간과 자연적 인간과) 잘 어울리려 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 그릇들, 형체들에서 다양해진 이 그릇들은 위에서 말한대로 생명측면과는 반대되는 위치, 또는 반대 방향으로 놓여져 있는 바, 분명한 것은, 그것들이 생명의 흐름에 일치하는 방향이나 위치에 있도록, 또는 생명에 고분고분해지는 상태로 떨어뜨려야만 한다는 것이다. 이런 위치나 방향의 바뀜은 인간이 태어난 상태 그대로에서 인 한, 또는 인간 스스로 그 바뀜을 실행하라고 맡겨 있는 한 그 결과는 가능해질 수 없다; 그 이유가 이 그릇들은 본시 순종적이지 않기 때문, 오히려 완강히 저항하는 자세에 있기 때문이고, 그 자체는 생명이 행동하는 질서인 천국 질서에 맞서 딱딱해져 있다; 그 이유가 이 그릇들을 움직이는 선, 이 그릇들이 따르는 선이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 속에 있기 때문이다; 이 선은 그것 안에 있는 두 사랑의 열기(heat) 모두로부터 어떤 품질 속에 있게 하고 있다; 그러므로 딱딱한 이 그릇들이 고분고분해지는 쪽으로 놓여지는 것, 즉 주님의 사랑으로부터의 생명의 어떤 것을 받기에 걸맞는 쪽으로 놓여지기 전, 그것들은 부들부들해져야 하는 것이다. 이 부드러워짐은 시험들 외에 적절한 방법은 하나도 없다; 그 이유가 시험들이 자기를 사랑함으로부터 있는 모든 것, 자기와 비교해 타인을 경멸함으로부터 있는 모든 것, 결과적으로 자기 찬양을 부추키는 모든 것, 더불어 증오함이나 증오함의 결과 복수함 같은 것까지 모두를 싹쓸어 (중심 위치에서 외곽으로) 멀리 이동하게끔 하기 때문이다. 이 딱딱한 그릇들이 여하한 정도라도 시험들을 통과하면서 유연해지고 복종적이 될 때, 그것들은 주님의 사랑의 생명에 고분고분하는 태도를 보이기 시작한다. 이때 주님의 사랑으로부터의 생명은 그 인간에게 계속적으로 흘러든다.
이때 선은 진리들과 결합하기를 시작한다; 먼저 합리적 인간 안에서, 그 후에 자연적 인간 안에서 있는다; 그 이유가 이미 말한대로 진리들은 계속적으로 바뀌는 상태들에 따른 다양한 형체를 지각하는 것밖에 더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지각함들은 안으로 흐르는 생명으로부터 있다. 이것이 인간이 시험에 의해, 즉 영적 전투들에 의해 거듭나지는 이유, 즉 새로이 만들어진다고 말하는 이유이고, 이 후에 인간은 새로운 본성을 선물받는다; 이 본성은 온유함, 겸손함, 단순소박함, 심정에서 깊이 뉘우친 상태에 있다. 이상 살핀 바로부터 이제 알게 되는 바, 시험이 어떤 용도에서 충당되는지, 즉 시험은 주님으로부터의 선이 흐를 수 있게 할 뿐만아니라 그릇들을 순종하는 위치에 있게 하고, 선이 그것들과 결합하게 해준다는 것이다. 진리들이 선을 받는 그릇이다는 것은 여러 번 살폈다. 여기서의 주제가 자연적 인간 안에서 선과 진리의 결합이기 때문에, 그리고 결합의 처음은 전투들을 수단으로 하기 때문에, 이 전투는 시험 속에 있기 때문에, 본문 “그는 지쳐 있었다”에 의해 전투하는 상태가 의미됨이 분명한 것이다.
그러나 주님, 즉 최고 의미 측면에 주목하면, (지상 시절) 그분은 지극히 비통한 시험에서의 전투를 수단으로 그분 인간 자신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을 신성한 질서 안으로 떨어뜨려지게 하셨다, 하여 어머니쪽으로 부터의 인간의 모든 것이 하나도 그대로 남아 있지 않게 하셨다. 따라서 그분은 여느 인간들 같이 새로운 본성을 선물받아 갖는 것이 아니라 가지셨던 모든 인간의 것을 신성이 되게 하셨다. (인간의 거듭남이 주님의 인간이 신성이 되어가심과 거의 비슷하지만 유일한 차이는) 인간은 거듭남을 수단으로 새로이 만들어졌다 해도 인간은 악에 기우는 경향성 내지 악 자체까지 자신 안에 존속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단지 주님의 사랑으로부터의 생명의 유입에 따라 악으로부터 보류된 상태일 뿐이다. (거듭난 인간을 위한) 이 보류하심은 극도로 센 (영적) 힘(force) 아래 펼쳐지고 있다; 이에 반해 주님은 어머니로부터 그분에게 유전된 모든 악을 철저히 내치시어, 그분 자신을 신성으로 만드셨다, 이는 그릇들까지, 즉 진리들 측면까지 신성으로 만드셨다. 이것이 말씀에서 “신성이 되심, 신성화 하심, glorification”이라 불리우고 있다.

그리고 에서가 야곱에게 말했다. 이는 주님께서 자연 (평면)의 선으로부터 지각하심을 의미한다. 이는 “말하다”가 지각하다를 의미함으로부터; 그리고 에서가 자연 평면의 선 측면에서의 주님을 표현한다로부터; 그리고 야곱이 자연 평면 속의 진리이다로부터 알게 되는데, 이 진리에 관해 지각함이 지금 있는다.

바라건대 나로 붉은 것, 이 붉음을 떠먹게 해다오. 이는 교리적인 것들을 갈망함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 붉음(this red)이 외관상의 선을 의미하는데, 이는 홀짝임(supping, 숟가락으로 조금씩 떠먹는 것)이 교통하는 것과 결합하는 것을 의미한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러므로 “바라건대 나로 떠먹게(sup) 해다오”란 진리가, 또는 교리적인 것들이 자신과 결합하기를 갈망함을 의미하게 된다; 그리고 “붉다”의 의미가 선이다로부터; 여기서는 외관상으로 선인 것을 의미하는데, 그 이유는 교리적인 것들이 내적으로는 여전히 혼동된 많은 것에 불과해도, 잘 배열하면 외관상으로는 선인 듯 나타나기 때문이다. 이런 것들이 언급되는 이유는 이로부터 에서가 에돔이라는 이름을 가졌기 때문이다. 원어에서 “붉다”가 “에돔”이다; 그리고 이런 사항들은 선이 진리의 교리적인 것들에 인접된 것을 의미하기 위해 언급이 있게 된 점도 있다.

그 이유는 내가 너무 지쳐서이다. 이는 전투의 상태를 의미한다. 이는 “지친”, 또는 “지침”의 의미가 전투의 상태이다로부터 알려진다. 이 언급은 다시 있어 반복되는 듯 한데, 그 이유는 선이 자연 평면에서 진리와 결합하는 것은 영적인 전투들, 즉 시험들을 수단으로 하여 결과된다는 것을 (우리에게) 각인시켜 주시려는 때문에서 이다. 선이 자연 평면에서 진리와 결합함에 주목한다면, 이 경우의 일반적 측면은 이렇다: 인간의 합리성은 그의 자연 평면에 앞서 진리들을 받는다; 먼저 받는 이유는 사랑 속에 있는 주님의 생명은 합리성을 통하여 자연 평면으로까지 흘러들어 자연 평면이 순종하도록 이 평면을 배열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합리성은 보다 더 순수하고, 자연 평면은 보다 더 조잡하기 때문; 또는 합리성은 내면적이고, 자연 평면은 외면적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면, 또는 보다 더 순수한 쪽이 외면, 또는 보다 더 조잡한 쪽으로 흘러갈 뿐, 그러나 이 반대는 절대로 있지 않은 것이 질서적인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합리성은 진리들에 편의를 제공할 수 있다(숙박할 수 있다, accmmodate), 그의 자연 평면에 앞서 진리들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은 아마 거듭나는 사람과 더불어 합리성은 그의 자연 평면과 사사건건 많은 다툼을 늘 하고 있다는 사실로부터 알려질런지 모른다. 다른 말로 내적 인간과 외적 인간 사이에도 그러하다. 아마 많은 이가 알고 있는 것은, 내적 인간은 진리들을 볼 수 있고, 진리들을 행하려 한다는 것, 그러나 외적 인간은 동의함을 거절하고, 저항하기까지 한다는 것이다. 그러해지는 이유는, 자연적 인간 안에 감각들의 오류들로부터 파생되는 아주 많은 양의 기억 속의 지식들이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인간은 그것들이 거짓임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이 진리라고 믿기 때문이다; 또 하나, 자연적 인간 안에는 당사자도 납득하지 못하고 있는 무수한 것들이 있다는 것이다; 납득하지 않은 채 있는 이유는 당사자가 상대적으로 그늘과 어둠 안에 있기 때문이다, 그는 자기가 납득 못하는 것을 두고 존재하지 않는다 라고, 또는 그렇게 있지 않다 라고 믿어버린다. 마찬가지로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으로부터의 탐욕들도 자연적 인간 안에 있는데, 이것들을 좋아하는 모든 것을 그는 진리들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그가 이런 것들에 주도권을 쥐게할 때, 결과하는 모든 것은 영적 진리들에 반대되는 것 뿐이다. 또한 자연적 인간 안에는 유아 시절로부터 각인되어져 온 거짓들에 바탕을 둔 추론들이 있다. 더욱이 인간은 그의 자연적 인간 안에 있는 것을 명백한 감각을 수단으로 납득하나, 그가 육체를 벗을 때까지 그의 합리적 측면에서는 그렇지 못하고 있다. 이것이 당사자로 하여금 육체에 속한 것이 만사에 해당된다고 믿어버리게 하는 요인이다; 덧붙여 자연적 감각의 범주에 들지 않는 것은 어떤 것이라도 거의 믿지 않는다.
이상의 원인과 그외 많은 요인들로부터, 결과되는 바, 자연적 인간은 진리들을 아주 나중에 받는다는 것, 그리고 합리적 인간이 진리를 받는데 따른 어려움보다 훨씬 더 큰 곤경을 겪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늘 상 전투는 존재한다, 게다가 이 전투는 한 건만 가지고도 쉽게 끝나는 적이 없다, 하여 이 전투는 자연적 인간 안에서 선을 받는 그릇이 시험들에 의해 부드러워질 때까지 계속된다; 그 이유가 진리들은 선을 받는 그릇밖에 더 아니기 때문이다. 이 그릇들은 위에서 열거한 것들에 관해 더 굳은 힘을 쓸수록 더욱 단단한 그릇이 되어 있는다; 그런데 만일 이 그릇의 인간이 거듭나지려 한다면, 상대적으로 더 단단한 그릇 때문에 그의 전투 역시 상대적으로 더 비통할 수밖에 없다. 자연적 인간과 더불은 진리와 선의 결합은 시험 속의 전투를 통하여 결과되기에 여기서 두 번씩 “내가 지쳐 있다”고 말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그의 이름을 에돔이라 불렀다. 이는 거기로부터 선에 관한 그의 품질을 의미하고, 이 품질에 진리의 교리적인 것들이 인접되어져 있다. 이는 “이름을 부름”, 또는 “이름을 수단으로 하여 부름”이 품질인 바로부터; 그리고 에돔의 표현으로부터 알게 된다. 말씀에서 에돔의 언급은 많은 편이다; 그리고 “에서”에 의해서는 진리의 교리적인 것들이 이 선에 결합되기 전, 자연 평면 속의 선이 의미되고, 또한 합리성으로부터 유입됨에 따른 생활의 선도 의미한다; 그리고 “에돔”에 의해 진리의 교리적인 것들이 인접해왔던 자연 평면 속의 선이 의미되어진다. 그러나 반대적 의미에서, “에서”는 거짓들이 자기 사랑에 인접되어 있기 전, 이 사랑으로부터의 악을 의미한다; 그리고 “에돔”은 거짓이 이것에 인접하였을 때, 이 사랑의 악을 의미한다. 이미 자주 말했던 사항은, 말씀에서 대부분의 이름들은 반대적 의미도 지닌다는 것, 그 이유는 교회에서 선과 진리이었던 것들이 시간이 흐르면서 (자기 사랑의 탐욕에서 유발하는) 기발난 섞음질 탓에 악과 거짓으로 타락하고 말기 때문이다.
이런 사항들이 “에서”와 “에돔”에 의해 의미되는 것을 아래 인용 구절에서 살펴볼 수 있다. 이사야서에서:
에돔으로부터, 보스라로부터 물들인 의복을 입은 이 자는 누구인가? 그의 의상에서 영화로 운 이것, 수많은 그의 강력함에서 행진하는 이것. 어찌하여 당신은 당신의 의상에서 붉고, 당신의 의복들은 포도즙틀을 밟은 자 같은가? 나는 홀로 포도즙틀을 밟아야 했다, 그리고 백성들로부터 나와 더불은 자는 아무도 없었다. 나는 쳐다보았다, 그러나 아무도 돕지 않았 다, 위를 올려보는 자가 아무도 없는 것에 나는 놀랐다, 그리고 나 자신의 팔이 나에게 구 원을 가져왔다 (이. 63:1, 3, 5);
위 구절에서 “에돔”이 주님이신 것은 명료하다; 그리고 신성한 자연 평면 속의 신성한 측면에서의 주님이신 것도 명백하다, 그 이유는 주제가 주님의 인간에서 선과 진리의 결합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시험 속의 전투들을 수단으로 그분은 그것들을 결합하셨음도 분명하다. “의복들”은 자연적 인간 속의 진리들, 또는 상대적으로 하급 수준의 진리들이다; 그리고 “붉다”는 자연 평면의 선이다. 주님께서는 그분 자신의 힘으로 시험 속의 전투들을 수행하시어 자연 평면에 있는 진리들을 선과 결합시키셨는데, 이것이 “나는 홀로 포도즙틀을 밟았다, 백성들 중에서 나와 더불은 자는 아무도 없었다, 나는 위를 올려다 보는 자가 아무도 없는 것에 놀랐다, 그리고 나 자신의 팔이 나에게 구원을 가져왔다”에 의해 묘사되어져 있다.
사사기서에서:
오 여호와시여 당신이 세일 산으로부터 나가셨을 때, 당신이 에돔의 들판으로부터 행진하 셨을 때, 땅은 전율했고, 하늘은 (물을) 떨어뜨렸고, 구름 역시 물을 떨어뜨렸습니다; 산들 이 흘러 내렸습니다 (사. 5:4, 5);
“에돔의 들판으로부터 행진함”은 앞의 인용 구절에서 “에돔으로부터 옴”과 거의 같은 것을 의미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모세의 책에서:
여호와께서 시내 (산)으로부터 오셨다, 그리고 세일 (산)으로부터 그들에게 일어나셨다 (신. 33:2).
다시 모세의 책에서:
나는 그분을 보고 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나는 그분을 바라보고 있다, 그러나 가까이 는 아니다; 야곱으로부터 별이 나올 것이다, 그리고 홀이 이스라엘로부터 일어날 것이다; 그리고 에돔이 소유될 것이다, 세일 (산)을 그의 적들이 소유할 것이다, 한편 이스라엘은 용감하게 행한다. 그리고 그는 야곱을 지배할 것이다, 그리고 도성으로부터 남은 자들을 파 괴할 것이다 (민. 24:17-19);
위 구절은 주님이 세상 안으로 오심을 취급하고 있다, 이 분의 인간 본질이 “야곱으로부터의 별”, 그리고 “이스라엘로부터의 홀”이라 불리운다. “에돔”과 “세일”을 소유할 것이다란 주님의 신성한 자연 평면 속의 신성한 선을 의미한다; 그것들을 “그의 적들이 소유함”은 이것이 자연 평면에서 이전에 있었던 것들 대신에 이어질 것을 의미한다; 그때 거기 안에서 진리들 위에서 지배함이 “야곱 위에서 지배함, 그리고 도성으로부터 남은 자들을 파괴함”에 의해 뜻해진다. 자연 평면 속의 진리들이 선에 종속될 때, 지배함이 이것들 위에 있다 라고 말해진다; 그 이유가 이렇기 이전, 이 진리들이 계속 저항하기에 “적들”이라 불리우기 때문이다.
아모스서에서:
그 날에 나는 무너진 다윗의 성막을 일으켜 세울 것이다, 그리고 거기로부터의 터진 곳을 막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의 파멸들을 일으켜 세울 것이다, 그리고 나는 영원의 날들에 서 같이 그것을 건설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에돔의 남은 자를, 그리고 내 이름에 의해 불리워진 모든 나라들을 소유할는지 모른다 (암. 9:11, 12);
“다윗의 성막”은 교회와 주님을 예배함을 표시한다; “에돔의 남은 자”란 교회 내에 선 안에 있는 이들을; “그분의 이름에 의해 불리운 나라들”은 교회로부터의 선 안에 있는 이들을 표시한다. 다윗서에서:
에돔 위에 나는 내 신발을 던질 것이다. 나에게 요새화된 성을 가져올 자 누구인가? 누가 나를 에돔으로 인도할 것인가? 당신 아닙니까, 오 하느님? (시. 60:8, 10);
위에서 “에돔”은 자연 평면 속의 선을 표시하는데, 이는 “신발, shoe”이 가장 낮은 자연 평면을 의미한다로부터 분명해진다.
다니엘서에서:
끝의 때에서 남쪽의 왕이 그에게 돌진할 것이다; 그리고 북쪽의 왕이 병거와 더불어 회오 리바람 같이 그에게 돌진할 것이다, 그리고 뒤엎으며 통과해 갈 것이다; 그리고 그가 황홀 할 정도로 아름다운 토지 안으로 왔을 때; 그러나 이들은 그의 손으로부터 구조될 것이다, (이들은) 에돔과 모압, 그리고 암몬의 아들들의 첫 열매들이다 (단. 11:40, 41);
위는 교회의 마지막 상태가 취급되고 있다; “북쪽의 왕”은 거짓들, 또는 거짓들에 있는 이들을 표시한다; “에돔”은 단순한 선 안에 있는 이들을 표시하고, 이들이 주님의 외적 교회를 구성하는 이들이다; “모압”과 “암몬의 아들들” 역시 에돔과 같다. 그래서 많은 구절들에서 이들이 함께 언급된다; 그러나 차이는 있다; 즉 “에돔”은 진리의 교리적인 것들에 인접한 자연 평면의 선을; 한편 “모압”은 결합되지 않고 있는 자연 평면의 선이다; 양쪽 모두 외적 형체에서는 똑같게 나타난다, 그러나 내적 형체에서는 차이가 있다.
아래로부터 지금 왜 이것이 말해졌는지 분명해진다:
너는 에돔족을 몹시 싫어하지는 말라, 그 이유는 그는 네 형제이기 때문이다; 너는 이집트 인들을 몹시 싫어하지는 말라, 그 이유는 너희가 그의 토지에서 체류하였기 때문이다
(신. 23:7).
“에돔족”에 의해 자연 평면의 선이 의미되고; “이집트인”에 의해서는 기억 속의 지식들로부터인 자연 평면의 진리가 의미된다, 그러므로 두 민족 모두 좋은 의미를 의미하고 있다. 이것은 왜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야곱의 아들들이 에서의 아들들과 다투지 말 것, 그리고 그들의 토지의 한발자국도 야곱의 아들들에게 주어지지 않을 것인지를 보여준다 (신. 2:4-6).
그러나 반대적 의미에서 “에서”와 “에돔”에 의해서는 자기 사랑 때문에 진리를 경멸하고, 신앙의 어떤 진리와도 결합할 의사가 없음을 내비침으로 선으로부터 비껴선 이들을 표현한다; 그러므로 반대적 의미에서 이런 인물들이 “에서”와 “에돔”에 의해 표현되었는데, 마치 민수기 20:14-22에서 같이, 에돔의 왕이 수많은 백성과 강력한 손과 더불어 나아와서 그들의 경계를 지나려는 이스라엘을 그렇게 못하게 거절하는 대목에서 엿볼 수 있다. 자기 사랑으로부터의 이 악은 신앙의 진리들을 허용하지 않는 속성을 지녔는 바, 마찬가지로 진리의 교리적인 것들도 허용하지 않기에, 말씀의 많은 구절에서, “에서”와 “에돔”에 의해 묘사되어져 있고, 이런 품질로 되어가는 교회 역시 묘사하고 있다; 즉 예레미야서에서:
에돔에 대하여. 지혜가 데만에서 더 이상 있지 않더냐? 총명으로부터 오는 조언이 멸해졌 더냐? 그들의 지혜가 나쁜 평판이 받는 쪽으로 되어가느냐? 너희는 도망하라; 그들은 자신 들을 돌아서게 했다, 그들은 거주하려고 깊은 곳으로 가버렸다, 드단의 주민들아; 그 이유 가 내가 그 자 위에 에서의 재난을 가져올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에서를 발가벗게 만들 것이다, 나는 그의 감춘 것들을 드러나게 할 것이다, 그리고 그는 자신을 숨길 수 없을 것 이다; 그의 씨는 황폐해져 있다, 그리고 그의 형제, 그의 이웃들. 너희 아버지 없는 아이들 을 남겨두어라, 내가 그들을 살아 있게 보존할 것이다; 그리고 너희 과부들이 나를 신뢰하 게 하라. 에돔은 폐물이 될 것이다, 그 옆을 통과하는 모든 이가 놀라워할 것이다, 그리고 거기로부터의 모든 재앙들에서 쉿소리를 내며 비난할 것이다 (예. 49:7, 8, 10, 11, 17).
다윗서에서:
그들이 말한다, 이스라엘의 이름이 기억함에서 더 이상 있지 않게 하자; 그들은 서로 한 마 음되어 모삭을 꾸밉니다; 당신에 맞서 그들은 (자기들끼리) 계약을 만드는데, (그들이란) 에돔의 천막들과 이스마엘족들, 모압, 그리고 하갈인 (입니다) (시. 83:4-6).
오바디야서에서:
고로 주 여호비께서 에돔에 관하여 말하신다, 보라 나는 너를 나라들 사이에서 작게 만들 것이다; 너는 대단히 멸시당해진다. 네 심정의 교만이 너에게 사기쳤다, 오 바위의 틈새에 서, 네 주택의 높은 데에서 거주하는 너희여; 네 심정에서 말한다, 누가 나를 끌어내려 땅 으로 데려갈 것이냐? 비록 네가 독수리 같이 높은 곳에 올라 있다 해도, 비록 네가 별들 사이에 네 둥지를 틀었다 해도, 나는 너를 거기로부터 끌어내려 데려올 것이다, 에서로부 터의 그들이 어떻게 샅샅이 수색되었는지! 그들이 감추어둔 것들이 어떻게 발견되었는지! 그 날에 내가 에돔으로부터의 지혜로운 자들을, 그리고 에서의 산으로부터 총명한 자들을 멸하지 않겠느냐? 네 형제 야곱의 폭력 때문에 (야기된) 살육으로부터 수치스러움이 너를 덮을 것이다, 그리고 너는 영원히 멸절할 것이다. 야곱의 가문은 불일 것이다, 그리고 요 셉의 가문은 불꽃일 것이다, 그리고 에서의 가문은 그루터기를 위해 (있을 것이다); 그리 고 그들은 그것들에 불을 붙일 것이다, 그리고 그것들을 삼킬 것이다; 그리고 에서의 가문 쪽에는 어떤 찌꺼기도 남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남쪽의 그들이 에서의 산을 소유할 것이 다 (1:1-10, 18, 19).
위 구절들에서 “에서”와 “에돔”은 자기 사랑으로부터 근원하는 자연적 수준의 인간의 악을 표시한다. 이 인간은 모든 진리를 경멸하고 거절한다, 이로부터 그것의 황폐해짐이 온다.
에스겔서에서:
사람의 아들아, 네 얼굴을 세일산을 마주보게 하여라, 그리고 그것을 마주보고 예언하라, 그리고 그것에 말하라, 고로 주 여호비께서 말하신다, 나는 너와 맞서 있다, 오 세일산아, 그리고 나는 네게 맞서 나의 손을 뻗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너희를 폐물과 황폐됨으로 만 들 것이다. 그 이유는 네가 영원으로부터 증오를 가졌기 때문, 그리고 이스라엘의 아들들을 그들의 재난의 때에, 마지막으로부터의 불법의 때에, 검의 손에 넘겨주었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네가 말했기 때문, 이 두 나라들, 그리고 이 두 토지들, 나의 것일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그것을 소유할 것이다, 그리고 여호와가 거기에 계시다. 그리고 너희는 나 여호와가 그들의 모든 모독함들을 들었다는 것, 이 모독함을 너는 이스라엘의 산을 마주보고 말했 었다. 너는 폐물일 것이다, 오 세일 산과 모든 에돔, 그것으로부터의 모든 것
(겔. 35:2, 3, 5, 10, 12, 15);
위 구절들에서 “에돔”은 반대적 의미에서 경멸하고, 거절하는 이들, 그리고 “이스라엘의 산들”인 영적 선들과 진리들을 비방하는 이들을 표시한다.
다시 에스겔서에서:
고로 주 여호비께서 말하신다, 만일 내가 나라들의 남은 것에 대하여, 내 토지를 소유하라 고 그들 자신들에게 준 모든 에돔을 마주보고, 내 시기함의 불 안에서 모든 그들의 심정의 기쁨과 더불어, 혼의 원한과 더불어 말하지 않았다면 (겔. 36:5);
위에서도 의미는 앞 인용 구절과 같다; “소유하라고 자신들에게 토지를 주는 것”은 교회를, 즉 교회의 선과 진리를 황폐하게 함을 표시한다.
말라기서에서:
이스라엘을 향한 여호와의 말씀이다. 나는 너를 사랑해 왔다, 여호와께서 말하신다; 그럼에 도 너희는 말한다, 어떤 점을 두고 당신이 우리를 사랑하셨습니까? 야곱의 형제 에서가 아 닙니까? 그럼에도 나는 야곱을 사랑했다, 그러나 에서를 나는 미워했다, 그리고 나는 그의 산을 폐물로 만든다 (말. 1:1-3).
위에서 “에서”는 “이스라엘”인 영적 진리와 “야곱”인 진리로부터의 교리적인 것을 승인하지 않는 자연 평면의 악을 표시한다; 그리고 이것 때문에 그는 황폐해진다, 이것이 “미워했다”이다; 그러나 진리가 선에 인접하기를 그 자체 허용하지 않을 때, 그때 다른 한편에서 악이 야곱이라 단언되어진다, 호세아서에서:
야곱이 가는 길에 따라 그를 방문하시기 위하여; 그의 일들에 따라 그분은 그에게 보답하 실 것이다; 자궁 안에서 그는 그의 형제를 밀쳐내고 대신 자리를 꿰찾었다 (호. 12:2, 3).

31-33절. 그리고 야곱은 말했다, 오늘 때문에 네 생득권을 나에게 팔아라. 32. 그리고 에서가 말했다, 보라 내가 죽으려 한다, 그러니 이 생득권이 나에게 무슨 소용이 있느뇨? 33. 그리고 야곱은 말했다, 오늘 때문에 나에게 맹세하라. 그리고 그는 그에게 맹세했다, 그리고 그는 야곱에게 그의 생득권을 팔았다.

그리고 야곱이 말했다. 이것은 진리로부터의 교리를 의미한다. 이는 야곱이 자연적 (수준의) 진리로부터의 교리이다로; 또는 같은 말로, 진리의 교리 안에 있는 이들이다로부터 분명해진다. 이 구절로부터 이 장의 끝까지에서 취급되는 주제는 앞 섬(priority)의 권리가 진리쪽에 있는지, 선쪽에 있는지에 관하여서 이다; 같은 말로 앞 섬이 진리의 교리쪽에 있는지와 선의 생활쪽에 있는지에 관하여서 이다. 다시 다른 말로 표현하면, 신앙이 교리의 진리인 한, 앞 섬이 신앙쪽에 있는지, 그리고 선행이 생활의 선인 한, 앞 섬이 선행쪽에 있는지에 관하여서 이다. 인간이 자연적 수준의 지각함으로부터 결론을 끌어낼 때, 그가 믿는 것은, 신앙, 그것이 교리의 진리 안에 있는 한, 선행, 그것이 생활의 선 안에 있는 한, 신앙이 선행에 앞선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그가 어떻게 교리 속의 진리가 (자기 안에) 들어오는 지를 지각할 수 있지만 생활의 선이 어떻게 (자기 안에) 들어오는 지는 지각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전자는 외적 경로를 통하여 들어오지만, 후자는 내적 경로를 통하여 들어오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한 그는 진리가 선인 것을 가르치는 바 진리가 선에 앞선다는 것밖에 더 달리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인간의 개혁은 진리에 따라, 진리를 통하여 결과되어지고, 선에 결합되는 진리의 양에 비례하여 선 또한 완전해질 수 있기에, 결과적으로 선은 진리를 통하여 완전해지기 때문이다; 더욱이, 인간은 진리 안에 있을 수 있고, 생각할 수 있고, 진리로부터 말할 수 있고, 그리고 이런 것이 외관상의 열정과 더불어 있기에, 설사 당사자가 선 안에 있지 않더라도 가능해 있기 때문에 진리가 선보다 앞서 있다고 결론 맺고 이 결론의 끝에서 자기의 구원은 진리로부터 이다고 확신하기까지 해버린다. 감각적 수준의 인간, 자연적 수준의 인간에게 나타나는 것(외관, appearance)에 기초할 때, 위의 생각들, 이외 많은 생각들이 인간으로 하여금 상상하게 이끄는 것은, 신앙 속에 있는 진리가 선행 속에 있는 선에 앞선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감각적 수준, 자연적 수준의 인간에게 나타난 것에 기초를 둔 것, 즉 오류들로부터의 추론들이다.
생명 속에 있는 선 자체가 앞선다; 생명 속에 있는 선은 진리가 뿌려져야 하는 지면(ground) 자체이다. 지면이 이러하듯 씨를 받음, 즉 신앙의 진리들을 받음 또한 그러하다. 실로 진리들은 기억 안에 먼저 저장되어진다. 마치 이는 곡물 창고에 있는 씨들, 또는 수확기의 농작물에서 새들과 더불은 씨들 같다; 그러나 그것들이 기억 안에 있다지만 사실상 씨들은 지면이 준비되지 않으면 인간에 속한 것이 아니다. 지면이 이렇듯, 선 또한 그렇고, 씨들의 싹틈과 열매 맺음 또한 그렇다. 그러나 이 주제를 놓고 이미 많은 장소들에서 살펴왔던 사항들을 재점검하는 식으로 해서 선이 무엇인지, 진리가 무엇인지, 그리고 앞 섬이 선에 속하고 진리가 아니다는 것을 살피는 것도 도움이 될 것 같다: 즉,
선과 진리를 구분해서 생각하지 않는 이유. 선은 인간에게 알려지지 않은 내적인 경로를 통해서 흐르고, 한편, 진리는 인간에게 알려진 외적인 경로에 의해 획득된다는 것. 진리들은 선을 담는 그릇들이다는 것. 선이 결합하기 위하여 그것의 진리를 인정한다는 것; 그리고 거짓이 선과, 진리가 악과 결합되는 일이 없기 위해 최고로 절묘한 탐사가 진행되고 최고로 주의 깊음이 취해진다는 것. 선은 그 자체를 위해 선과 결합될 진리를 만든다는 것, 그 이유는 선과 일치하지 않는 진리는 어떤 것도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는 것. 진리는 선으로부터 있는 것밖에 더 아니다는 것.
진리는 선의 형체이다는 것. 진리는 본질적으로 선의 형상을 지니고 있다는 것; 그리고 선 안에는 그 스스로부터 상(effigy, 초상)을 지니고, 이로부터 선은 존재한다는 것. 진리인 씨가 선행 속에 있는 선 안에 뿌리내린다는 것. 신앙은 그것의 생명 안에, 즉 사랑과 선행 안에 있지 않으면 불가능하다는 것. 사랑과 선행으로부터 인간은 신앙의 교리적인 것들에 속하는 진리들을 쳐다볼 수 있으나 그 거꾸로는 아니다는 것; 그리고 사랑과 선행으로부터가 아니고 신앙으로부터 쳐다볼 때, 그는 자신의 자아인 뒤쪽을 쳐다보는 것이며 자기쪽으로 되돌아 가는 것이다. 진리는 각 인물의 선에 일치하여 살아 있게 만들어진다는 것, 고로 인간에 있는 순진과 선행의 상태와 일치함에서 살아 있게 만들어진다는 것. 신앙의 진리들은 선 안에 있는 이들에 의해서만 받아질 수 있다는 것. 선행 없음에 있는 이들은 주님을 인정할 수 없다는 것, 고로 신앙의 어떤 진리도 인정할 수 없다는 것; 그리고 만일 그들이 이런 인정함을 고백한다면, 이 고백은 내적인 고백 없는 외적 고백일 뿐이다는 것, 또는 위선으로부터 이다는 것. 선행 없는 곳에 신앙도 없다는 것. 지혜, 총명, 그리고 기억 속의 지식은 선행의 아들들이다는 것. 천사들은 그들이 사랑 안에 있기 때문에 총명과 지혜 안에 있다는 것.
천사의 생명은 선행의 선들 안에 있다는 것, 그리고 천사들은 선행의 형체들이다는 것. 주님을 사랑함은 그분의 “모습(likeness)”이고, 이웃을 향한 선행은 그분의 “형상(image)”이다는 것. 주님을 사랑함을 통하여 천사들은 신앙 속의 무엇이든지를 받는다는 것. 사랑과 애착 외에 살아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것. 서로의 사랑, 또는 선행 안에 있는 이들은 주님의 생명을 가진다는 것. 주님과 이웃을 사랑함이 천국 자체이다는 것. 주님의 현존은 사랑과 선행의 상태에 따라 있다는 것. 십계명 속의 모든 명령들, 그리고 신앙의 모든 것들은 선행 안에 있다는 것. 신앙의 교리적인 것들에 관한 지식은 인간이 선행을 가지지 않으면 아무 결과도 가져오지 못한다는 것, 그 이유는 교리적인 것들은 그것의 목적으로 선행을 찾기 때문이다는 것. 인간이 선 안에 있지 않으면, 진리를 인정함, 또는 신앙을 인정함도 가능하지 않다는 것. 예배의 거룩함은 선행 안에 심어진 신앙의 진리의 양과 질에 따라 있다는 것.
신앙에 의한 구원은 없고 신앙의 생명, 즉 선행에 의해 구원은 있다는 것. 천국의 왕국은 선행으로부터의 신앙을 가진 자에게 주어진다는 것. 천국 안에서의 모든 이는 그들의 선행과 선행에서 파생된 신앙을 중요시하고 있다는 것. 심정으로부터 선을 뜻하지 않고 천국 안으로의 입장이 허락된 자는 아무도 없다는 것. 신앙 안에 있는 이들이 구원됨은 그들의 신앙 안에 선이 있는 조건에서 이다는 것. 삶으로부터의 선 안에 심어지지 않았었던 신앙은 다른 삶에서는 멸절된다는 것. 만일 생각 속의 신앙이 구원된다면, 그 모두가 천국 안으로 가져와지리라는 것; 그러나 생명에 반대되기 때문에 그것들은 가져와질 수 없다는 것. 신앙만이 구원한다는 원리를 고집하는 이들은 이 원리의 거짓으로 말미암아 진리를 오염시킨다는 것. 신앙의 열매는 선한 일이다는 것, 선한 일은 선행이다는 것, 선행은 주님을 사랑함이다는 것, 주님을 사랑함이 주님이시다는 것. 신앙의 열매들은 사랑과 선행으로부터 있는 선의 열매들이다는 것.
구원하는 신앙이다고 말해지는 신뢰함, 또는 확신함은 생활로부터 선 안에 있는 자 외에는 가능하지 않다는 것, 선이 진리의 생명이다는 것. 생명을 획득하는 것이 진리들이다고 말해질 때, 주님으로부터의 선은 모든 종류의 진리들 안으로 흘러든다는 것,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순수한 진리들이어야 한다는 것. 주님으로부터의 선과 진리는 악과 거짓이 옮겨진 만큼에 꼭맞게 비례해서 흐른다는 것. 인간이 악 안에 있을 경우, 선은 진리 안으로 흐를 수 없다는 것. 진리는 선에 의해 받아질 때까지 진리가 아니다는 것. 모든 것, 그리고 각각 안에서 선과 진리의 결혼이 있다는 것. 선에 대한 애착은 생명 속에 있다는 것, 그리고 진리에 대한 애착은 생명을 위하여 있다는 것. 진리는 선을 향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선으로부터 전진한다는 것.
유입을 수단으로 진리들은 자연적 인간으로부터 불려내지고, 승강하여 합리적 인간 안에서 선 안에 심어진다. 진리가 인간과 더불어 결합될 때, 그것은 그 당사자에게 어우러진다(그의 것이 된다). 진리가 선과 더불어 결합하기 위하여 이해력과 의지력의 동의가 필수적이고, 그 다음 의지에 의해 결합은 거행된다는 것. 진리 측면의 합리성은 지식들을 수단으로 획득된다는 것; 그리고 진리들은 선과 결합할 때, 그 인간의 것이 되고, 그의 의지 속에 있게 되어 그 인간의 생명을 위하여 있는다는 것. 진리는 개시되어 단번에 선과의 결합을 종결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상 전 삶을 통과하며 결합하여 가고 다른 삶에서까지도 이 결합은 계속된다는 것. 열이 있어야 빛의 생산이 있듯, 신앙의 진리도 사랑의 선이 있어야 (신앙의) 열매가 있다는 것. 선이 없는 진리로부터의 생각은 무엇인지; 그리고 다른 삶에서 진리의 빛은 무엇인지. 선행으로부터 분리된 신앙은 겨울의 빛과 같다는 것; 선행으로부터의 신앙은 봄철의 빛과 같다는 것. 행동에서 신앙인 진리를 선행과 분리하는 이들은 양심을 가질 수 없다는 것. 인간들이 신앙을 선행으로부터 분리하고 신앙이 구원한다고 선포하는 이유.
인간이 거듭나는 동안, 주님은 선을 그 인간에 있는 진리들 안으로 심으신다는 것. 인간은 진리를 수단으로 거듭나지지 않고 선을 수단으로 거듭나진다는 것. 인간의 거듭남 동안 주님은 그 인간 안에 있는 진리를 만나러 가시고 선행의 선으로 채우신다는 것. 삶으로부터의 선 안에 있기는 하나 신앙의 진리를 가지지 못한 자, 마치 유아나 이방인들 같을 경우, 그들은 다른 삶에서 그들의 선에 걸맞는 진리를 받아 거듭나진다는 것; 이방인들에 관하여; 유아들에 관하여. 인간은 진리에 대한 애착을 수단으로 거듭나진다는 것; 그리고 그가 거듭나졌을 때, 그는 선에 대한 애착으로부터 행동한다는 것. 거듭나지는 자 안에서 씨는 선 안에서만 오직 뿌리를 내릴 수 있다는 것. 거듭나는 사람의 빛은 선행으로부터 있다는 것. 똑같은 진리들이다해도 이 인물에서는 진리이고, 저 인물에서는 덜 진리이고, 다른 어떤 인물에서는 거짓일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이것은 삶 속에 있는 선에 따라 그렇게 있게 된다는 것. 유아의 선, 무지의 선, 총명의 선의 차이는 무엇인지. 누가 진리의 지식 안으로, 신앙 안으로 올 수 있고, 올 수 없는지.
교리의 진리들이 생활 속의 선 안에 심어지지 않으면, 교회는 교회가 아니다는 것. 교리적인 것이 교회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선행이 교회를 만든다는 것. 교회의 교리적인 것들은 그 교인이 그것에 따라 살지 않으면 아무 것도 아니다는 것. 신앙의 교리가 선행의 교리이다는 것. 교회는 선행으로부터 있지 선행과 분리된 신앙으로부터는 아니다는 것. 그가 예배의 내적 측면의 것을 가졌는지 여부는 그의 선행의 여부로부터 알려진다는 것. 세상 두루에서 주님의 교회는 진리들 측면에서는 다양하지만 선행을 통하여서는 하나이다는 것. 교회는 만일 모두가 선행을 가졌다면, 예배 의식이 제아무리 다양하고, 인간 종족이 아무리 다양해도 하나이다는 것. 만일 모두가 교회의 본질을 선행으로부터 어림잡고, 선행과 분리된 신앙으로부터 계산하지 않는다면 많은 이로부터 다양하게 시작되어도 결국 하나로 만들어진다는 것. 교리물에는 두 종류가 있다는 것, 하나는 선행으로부터의 교리물, 또 하나는 신앙으로부터의 교리물이다는 것; 그리고 고대 교회에서 선행으로부터의 교리물이 있었다는 것, 이것은 오늘날 잃어졌다는 것.
진리에 무지한 탓에 선행의 교리적인 것들 안에 있지 않은 이들. 그리고 이에 반해 오늘날 사랑과 선행에 관해 주님이 말하신 구절들로부터 진리를 배운 자들이 이런 구절은 슬그머니 비껴가고, 신앙이 교회의 본질로 굳은 힘을 친다는 것. 주님을 사랑함과 이웃을 향한 선행 속에 있는 선은 신앙 속에 있는 진리보다 우위(superior)이거나 앞선다(prior)는 것; 그 반대의 경우는 아니다는 것.

오늘 때문에 네 생득권을 나에게 팔라. 이는 시간 안에서는 진리로부터의 교리가 외관상으로 앞섰다(prior)를 의미한다. 이는 “팔라”의 의미가 자기를 위해 (권리로) 요구하려 함이다로부터; 그리고 “오늘”의 의미가 시간 측면에서를 의미한다는 것으로부터, 그 이유가 말씀의 내적 의미에서 “오늘 (this day)”이 항구적이고 영원한 것을 의미한다는 것; 그리고 이 구절의 경우에서는 (형, 동생의 위치가 바뀌는 것이) 항구적이고 영원히 있지 않도록 (즉 한시적임이 암시되도록) 하기위하여 “오늘 때문에 (as this day)”라고 말해져, “… 때문에(as)”가 (형, 동생의 위치가 바뀜이) 그렇게 외관상으로만 되어 있을 뿐임을 내비치게 하고 있다; 그리고 “생득권”이 앞서 있다, 즉 야곱에 의해 의미된 진리로부터의 교리가 그렇게 (앞서) 있다를 의미한다로부터 알게 된다.
“생득권”에 의해 의미되는 것, 즉 “앞의(prior)”, 또는 “앞 임(priority)”이 시간에서의 앞 임 뿐만아니라 등급에서도 앞 임이 뜻해진다; 즉 선 또는 진리의 어느 것이 지배권을 가지느냐를 두고서 진리가 앞 임이 뜻해진다는 말이다. 진리가 선과 결합이 있기 전에서는 언제나 이와 같이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인간이 거듭나기 이전 진리 안에 있는 이들에게는 언제나 이러한데, 하여 이들은 선보다 진리가 우위, 또는 앞선다 라고 믿고 있고, 실로 그렇게 나타나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그들 안에서 진리가 선과 결합하였을 때, 즉 그들이 거듭났을 때, 그때 그들은 진리가 하위이고 저급이다는 것을 보게되고 지각한다; 그리고 그때 그들 안에서 선은 진리에 지배권을 가진다; 이것이 에서의 아버지 이삭이 에서에게 말한 것에 의미되어 있다:
보라 땅의 기름진 것들 속에 네 거처가 있을 것이고, 위로부터 하늘의 이슬 속에 네 거처 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네 검에 근거하여 너는 살 것이다, 그리고 네 아우를 섬길 것이다, 그리고 너는 네 목으로부터 그의 멍에를 부수어 네가 지배권을 가지는 때가 올 것이다 (창. 27:39-40).
그러나 교회 내에서 거듭나지 않은 이들이 거듭나는 자들보다 더 많기에, 그리고 거듭나지 않은 자들이 외관으로 결론을 끌어내기에, 고대 시대 때로부터 작금에 이르기까지에서 앞 임이 진리이냐, 선이냐를 놓고 열띤 논쟁은 이어지고 있다. 거듭나지 않은 이들, 또한 충분히 거듭나지 않은 이들과 더불어 진리가 앞(먼저) 이다는 견해가 득세를 한다, 그 이유는 그들이 아직까지 선을 지각함이 없기 때문이다. 선을 지각하지 않는 한, 그는 위의 사항, 즉 진리와 선의 우위 다툼에 관하여 그늘 안에, 또는 무지함에 있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거듭난 이들, 즉 선 자체 안에 있는 이들은 총명과 지혜 안에도 동시에 있기에 그들은 선이 무엇인지, 선은 주님으로부터이다는 것, 그리고 선은 내적 인간을 통하여 흘러들고 외적 인간으로까지 흘러간다는 것, 그리고 이 흐름은 인간이 의식치 못한 상태이더라도 계속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다; 그리고 선은 그 자체를 기억에 있는 교리적인 것들의 진리들에 인접해놓고 있다는 것; 결과적으로 비록 선이 앞서 있지 않게 나타날지라도 자체에서 선이 앞서 있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다. 이것이 저것보다 우위, 또는 앞 섬인지에 관한 논쟁이 에서와 야곱에 의해 표현되어진 것이다; 그리고 또한 다말에 의한 유다의 아들 베레스와 제라 (창. 38:28-30); 후에 요셉의 아들 에브라임과 므낫세 (창. 48:13, 14, 17-20)에 의해서도 표현되고 있다; 그리고 이런 논쟁 거리가 발생하는 또 하나는, 영적 (수준의) 교회의 경우, 그들은 진리를 통하여 선 안으로 이끌어 들여지는 속성 속에 있는 바, 이때 선은 진리에 대한 애착 안에 감추여 놓여 있지만 이 선을 지각함이 결핍되어 있어, 이때 발생하는 것은, 선이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으로부터의 즐거움과 차별되어지기 힘들다는 것, 하여, 이 두 사랑으로부터의 애착 안에 선 마저 있게되어 이 두 사랑이 선이라고 당사자는 믿고 만다.
그러나 이 선 (즉, 주님을 사랑함의 선, 그리고 이웃을 향한 사랑의 선, 이 두 선 외에 다른 선은 없다)이 첫 출생이다는 것은 선 안에 생명이 있다는 사실, 진리는 선으로부터 생명을 받지 않으면 생명이 없다는 사실로부터 분명해진다; 그리고 선은 진리들 안으로 흐른다는 것, 하여 진리로 하여금 살아 있게 해준다는 것은 선과 진리에 관한 많은 설명들로부터 알고 있으리라 본다. 그러므로 주님을 사랑함 안에 있고, 이웃을 향한 선행 안에 있는 모든 이는 “첫 출생”이라 불리우고, 이것들이 유대 교회에서 첫 출생인 것에 의해 표현되어진다; 그리고 첫 출생은 관계적 의미에서 뜻해지는데, 그 이유는 주님이 첫 출생 자체되시고, 첫 출생인 모든 것은 그분의 모습과 형상이기 때문이다.
신성한 인간 측면에서의 주님이 첫 출생이심은 다윗서로부터 분명해진다:
그분께서 나를 부르시기를, 너는 나의 아버지, 나의 하느님, 그리고 내 구원의 바위이시 다. 나 또한 그를 첫 출생, 땅의 왕들 위의 높은 (자로) 만들 것이다, 내 자비를 나는 그를 위하여 영구히 간직할 것이고, 내 언약은 그와 더불어 충실히 지켜질 것이다. 그의 씨 역시 나는 영원히 지속되게 만들 것이다, 그리고 그의 왕좌는 천국의 날들로서 (만들 것이다) (시. 89:26-29);
위에서 주님이 취급되어진다. 그리고 계시록서에서:
신실한 증인, 죽은 자의 첫 출생, 땅의 왕들 중의 제 일인 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계. 1:5).
그분에 관하여 쓰여졌고 표현되어진 모든 것이 완성되기 위하여 그분 역시 출생을 수단으로 첫 출생이셨다 (눅. 2:7, 22, 23).
그들, 즉 그분의 형상과 모습되는 이들, 즉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향한 선행 안에 있던 그들 역시 “첫 출생”이라 계시록서에서 부르고 있다:
땅으로부터 매입한 십 사만 사천 명: 이들은 여인들과 더럽혀지지 않은 자들이다, 그 이유 는 그들이 처녀들이기 때문이다; 이들은 그분이 가는 곳은 어디든지 어린 양을 뒤따른 자 들이다; 이들은 사람들 사이로부터 사들인 하느님과 어린 양에게 첫 열매들(출생들)이었다. 그리고 그들의 입에서는 어떤 속임도 발견되지 않았다; 그 이유는 그들은 하느님의 왕좌 앞에서 흠없기 때문이다 (계. 14:3-5).
“144”, 또는 12×12는 선행으로부터의 신앙 안에 있는 이들을 표시한다; 1000은 무수하게 많은 이들을 표시한다; “처녀들”은 주님을 사랑함의 선과 이웃을 향한 선행의 선을 표시한다, 고로 순진에 있는 이들, 이들은 “어린 양을 뒤 따르는 이들”에 의해 의미되어 있다; 그 이유가 주님이 순진으로부터 어린 양이라 불리우시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그들은 “첫 열매들” 또는 첫 출생들이라 말해진다.
위 인용 구절로부터 명백해지는 바, 신성한 인간 측면에서의 주님이 유대 교회에서 첫 출생인 것에 의해 표현되었다는 것이다; 또한 그분을 사랑함에 있는 이들도 표현하였는데, 그 이유는 그들이 주님 안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첫 출생인 것은 말씀 안에서 두 겹의 표현을 지닌다, 즉 신성한 천적 사랑 측면에서의 주님과 신성한 영적 사랑 측면에서의 주님을 표현함이다. 주님의 신성한 천적 사랑은 천적 (평면의) 교회, 또는 이 교회 속에 있는 이들, 그리고 주님을 사랑함으로부터 천적 인간이라 불리우는 이들에 관련되어 있다. 주님의 신성한 영적 사랑은 영적 (평면의) 교회, 또는 이 교회 속에 있는 이들, 즉 이웃을 향한 사랑으로부터 영적 인간에 관련되어 있다. 주님의 신성한 사랑은 모든 이를 향하고 있다, 그러나 이 사랑을 받는 사람들에 따라 다양하게 존재한다, 즉 천적 인간은 이런 방식으로, 영적 인간은 저런 방식으로 받는다는 말이다, 따라서 우리는 상대적, 관계적이라 말해야 할 것이다.
신성한 천적 사랑 측면의 주님을 표현한 첫 출생, 그리고 천적 교회 속에 있는 이들에 관하여 모세의 책에 이렇게 쓰여있다:
너희는 네 아들들의 첫 출생을 나에게 줄 것이다. 마찬가지로 너희는 네 수소들과 양떼들 에게도 실시해야 한다; 칠일 동안 그것은 어미와 함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너희는 나에 게 거룩함의 사람들일 것이다 (출. 22:29-31);
어미와 칠일 동안 있는다는 것은, “칠일”이 천적 인간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로부터 “7”이 거룩한 것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팔일 째에 여호와께 드린다는 것은, “팔일”이 새로운 시작으로부터 계속 있는 것, 즉 사랑의 계속적인 것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다시:
짐승들 사이에서 첫 배 새끼는 여호와께 첫 배 새끼로 만들어진다, 하여 누구도 그것을 신 성시되게 하지 못한다; 그것이 황소이든 양이든 그것은 여호와의 것이다 (레. 27:16).
민수기서에서:
그들의 토지에 있는 모든 것의 처음 익은 열매들, 이것을 그들은 여호와께로 가져올 것이 다, 이것은 너를(아론을) 위하여 있을 것이다. 모든 육의 자궁을 여는 모든 것을 너희는 여 호와께 바칠 것이다, 그것은 사람이든 짐승이든 네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첫 출생은 네게 정녕 되찾아질 것이다; 부정한 짐승들의 첫배 새끼도 되찾아질 것이다. 수소의 첫배 새끼, 또는 양의 첫배 새끼, 또는 염소의 첫배 새끼를 너는 되찾지 못한다; 그것들은 거룩하다; 너는 제단 위에 그것들의 피를 뿌려라, 그리고 그것들의 지방을 태워 여호와께 쉼의 냄새를 위해 불로 만드는 제물로 바쳐라 (민. 18:13, 15, 17).
신명기서에서:
네 가축떼로부터, 네 양떼로부터 태어나는 모든 첫배의 수컷을 너는 여호와 네 하느님에게 신성시되게 할 것이다; 너는 네 수소의 첫배는 일을 부리지 말고, 네 양의 첫 배는 털을 깍 지 마라, 만일 이것이 어떤 흠을 가지고 있다면, 마치 절뚝거리거나 눈이 멀었거나, 그리고 악한 흠은 무엇이든지 너는 그것을 여호와 네 하느님에게 제물로 바치지 못한다
(신. 15:19, 21).
첫 출생이 주님을 표현하므로, 그리고 그분을 사랑한 덕택에 주님의 것인 이들, 그러므로 레위 지파는 사랑 측면에서의 주님을 표현했다. “레위” 역시 사랑을 의미한다, 그 이유가 “레위”는 “접착”, 그리고 “결합”이기 때문, 그리고 내적 의미에서 접착, 결합은 사랑인데, 이 주제에 관해서는 주님의 신성한 자비로부터 이후 살핀다 (창. 29:34). 레위인에 관해 모세의 책에서: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하셨다, 말하시기를, 그리고 나 보라 나는 이스라엘의 아들들 사이 에 자궁을 연 모든 첫 출생 대신 이스라엘의 아들들의 한 가운데로부터 레위인들을 취할 것이다, 그리고 레위인들은 나의 것이다; 그 이유는 모든 첫 출생은 나의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이집트의 토지에 있는 모든 첫 출생을 친 날에 나는 이스라엘에서 모든 첫 출생을 사 람으로부터 짐승까지 나에게 거룩히 구별하였다; 그들은 나의 것이다 (민. 3:11-13).
다시: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하셨다, 이스라엘의 아들들의 일 개월 그 이상되는 첫 출생의 수컷 을 세어라, 그리고 그들의 이름들의 수를 가져와라. 그리고 너는 나를 위하여 이스라엘의 아들들 사이에 모든 첫 출생 대신 레위인을 취할 것이다 (나는 여호와이다), 그리고 레위 인의 짐승을 이스라엘의 아들들의 짐승들 사이에 모든 첫 배를 대신하여 취할 것이다
(민. 3:40, 41; 또한 8:14, 16-18);
그리고 말해지기를(민. 8:19), 레위인들은 아론에게 주어진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아론은 성직 측면에서, 즉 신성한 사랑 측면에서 주님을 표현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성한 영적 사랑 측면에서 주님을 표현한 첫 출생, 그리고 관계적으로 영적 (평면의) 교회 속에 있는 이들에 관하여 예레미야서에서 이렇게 쓰여있다:
그들은 흐느끼며 올 것이다, 그리고 기도와 더불어 나는 그들을 인도할 것이다; 나는 그들 을 물들의 샘으로, 곧은 길로 해서 데려갈 것이다, 거기에서 그들은 걸려 넘어지지 않을 것 이다; 그리고 나는 아버지로 이스라엘을 위하여 있을 것이다, 그리고 에브라임은 나의 첫 출생일 것이다 (예. 31:9);
위 구절은 새로운 영적 교회가 취급되어진다, “이스라엘”은 영적 선을 표시한다; “에브라임”은 영적 진리를, 그가 첫 출생이라 불리우는 이유는 이제 막 심어지는 교회가 취급되기 때문, 이 교회에서 진리로부터 있는 지적 평면이 외관상 첫 출생이다; 그 이유가 에브라임이 르우벤의 자리를 계승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첫 출생으로 만들어진다 (창. 48:5, 20; 대상 5:1); 그리고 이는 요셉에 의한 두 아들, 에브라임과 므낫세였기 때문에 신성한 영적 사랑 측면에서의 주님이 표현되어졌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본질적으로 “첫 출생”이다는 것, 즉 영적 선을 표시한다는 것이 모세의 책에서 분명해진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하셨다, 너는 바로에게 말하라, 고로 여호와께서 말하신다, 이스라 엘은 나의 아들이다, 나의 첫 출생이다, 그리고 나는 네게 말했었다, 내 아들을 가게 하라, 하여 그가 나를 섬기게 하라; 그리고 너는 그를 가게 하기를 거절했다; 보라 나는 네 아들, 네 첫 출생을 죽일 것이다 (출. 4:21-23);
“이스라엘”은 최고 의미에서 신성한 영적 사랑 측면에서의 주님을 의미한다, 그러나 관계적 의미에서 영적 사랑에 있는 이들, 즉 이웃을 향한 선행 안에 있는 이들을 의미한다.
영적 (평면의) 교회에서, 그 시작, 또는 이제 막 심어지려는 때에서 진리로부터의 교리는 외적인 교회와 더불어 첫 출생이다; 또는 같은 말로, 신앙의 교리는 외적 교회와 더불어 첫 출생이다, 그리고 신앙 자체는 내적 교회와 더불어 첫 출생이다. 그러나 교회가 심어졌을 때, 즉 이들과 더불어 생명과 실제 안에 존재할 때, 선행의 선은 외적 교회와 더불어 첫 출생이고, 선행 자체는 내적 교회와 더불어 첫 출생이다. 그러나 교회가 그 자체 심어지기를 허용하지 않을 때, 마치 교회의 인간이 더 이상 거듭나지 않을 때, 교회는 계속적인 단계들로 선행으로부터 퇴조하고, 신앙쪽으로 돌아간다, 하여 더 이상 삶에서의 선행을 하고 싶어하려는 열정은 식고 교리쪽으로 안주하려든다. 이럴 경우, 그것은 자신을 그늘 안으로 들여 보내고, 거짓들과 악들 쪽으로 타락한다, 고로 교회 없음이 되어가고, 그리고 스스로 절멸되어진다. 이것이 그의 아우 아벨을 살해한 가인에 의해 표현되어져 있다. 이 후에 같은 것이 자기 아버지 노아를 조롱한 함과 그의 아들 가나안에 의해 표현되어져 있다; 그 후에 자기 아버지의 침상을 더럽힌 야곱의 첫 출생 르우벤에 의해 (창. 35:22);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스라엘의 아들들을 잘못 대우한 바로와 이집트인들에 의해서, 위의 모든 것들이 저주된 것이 말씀으로부터 분명해진다. 그 중에서 가인에 관해 말해진 것이다:
여호와께서 말하셨다, 너는 무엇을 했느냐? 네 아우의 피의 음성이 지면으로부터 나에게 소리친다; 그리고 지금 너는 지면으로부터 저주 되었다, 지면이 네 손으로부터 네 아우의 피들을 받으려고 그녀의 입을 열었다 (창. 4:10, 11).
함과 가나안에 관하여서이다:
가나안의 아버지 함은 자기 아버지의 벌거벗은 것을 보았다, 그리고 그의 두 형제들에게 말했다. 그리고 노아는 그의 포도주로부터 깨어났다, 그리고 그는 말했다, 가나안에게 저주 가 있으라; 그는 그의 형제들에게 종들의 종일 것이다 (창. 9:22, 24, 25).
그리고 르우벤에 관하여:
르우벤, 너는 내 첫 출생, 내 강함, 그리고 내 정력의 시작, 영예에서 특출하고, 힘에서 특 출하다; 물 같이 불안정하다, 너는 탁월하지 않을 것이다; 그 이유는 네가 네 아버지의 침 대에 올라갔기 때문이다, 그때 너는 내 침상을 더럽혔다 (창. 49:3, 4);
이때 르우벤으로부터 생득권이 박탈되어졌다 (대상. 5:1).
같은 것이 바로와 이집트인들에 의해 표현되어졌다, 그러므로 그들의 첫 출생과 첫 출생의 짐승들이 살육되어졌음이 그들이 기억 속의 지식들을 표현함으로부터 분명해진다, 이를 수단으로, 즉 인간이 신앙의 비밀들 안으로 들어갈 때, 그리고 감각에 의해서와 기억 속의 지식에 일치하는 것 외에는 더 이상 믿고 싶지 않을 때, 그는 신앙의 교리로부터의 것들을 악용하고 절멸되게 한다, 특별히 선행으로부터의 것들을 소멸되게 한다. 이것이 이집트에서 인간들의 첫 출생과 짐승들의 첫 출생이 살육됨에 의해 표현되어 이렇게 쓰여있다. 모세의 책에서:
나는 그 밤에 이집트의 토지를 관통하여 갈 것이다, 그리고 이집트의 토지의 모든 첫 출생, 인간들로부터 짐승에조차; 그리고 이집트의 모든 신들에 맞서 나는 심판들을 집행할 것이 다; 나는 여호와이다. 그리고 피는 너에게 네가 있는 집 위에 표시를 위해 있을 것이다, 그 리고 내가 피를 볼 때, 나는 너를 건너가리라, 그리고 거기에는 파괴자를 위한 재앙이 네 위에는 없을 것이다, 이는 내가 이집트의 토지를 칠 때이다 (출. 12:12, 13).
“이집트의 첫 출생”은 기억 속의 지식들을 수단으로 타락된 신앙의 교리와 선행의 교리를 표시한다; 심판이 집행되는 “이집트의 신들”은 거짓들이다; “피가 집 위에 있는 곳은 파괴자로서의 재앙이 없다”는 최고 의미에서 신성한 영적 사랑 측면에서 주님이 계신 곳, 그리고 관계적 측면에서 영적 사랑이 있는 곳, 즉 이웃을 향한 선행이 있는 곳을 의미한다.
더욱이 바로와 이집트에 관하여 쓰여진 바:
모세가 말했다, 고로 여호와께서 말하신다, 한밤중에 나는 이집트의 한 가운데를 갈 것이 다; 그리고 이집트의 토지에 있는 모든 첫 출생은 왕좌에 앉은 바로의 첫 출생으로부터, 방 앗간 뒤에 있는 하녀의 첫 출생까지 죽일 것이다; 그리고 짐승의 첫 출생도 죽을 것이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아들들의 누구를 향해서도, 인간으로부터 짐승에게까지, 개가 그 혀를 움직이지 못할 것이다 (출. 11:4-7).
그리고 다시:
밤중에 여호와께서 왕좌에 앉은 바로의 첫 출생으로부터 구덩이의 집에 있는 포로된 자의 첫 출생까지에 이르러 이집트의 토지에 있는 모든 첫 출생을 치실 것이다; 그리고 짐승의 첫 출생도 치실 것이다 (출. 12:29);
이것이 한 밤중에 실행되었는 바, 이는 “밤”이 선행이 없기에 신앙도 더 이상 없는 교회의 마지막 상태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다윗서에서:
그분이 이집트에 있는 모든 첫 출생을 치실 것이다, 함의 천막들에서 강함의 시작
(시. 78:51).
다시:
이스라엘 역시 이집트로 왔다, 그리고 야곱은 함의 토지에서 체류했다, 하느님께서 그들의 토지에 있는 모든 첫 출생을 치셨다, 모든 그들의 강함의 시작에서 (시. 105:23, 36).
선으로부터 분리된 진리로부터 근원한 거짓된 것으로부터 있는 이집트인들의 예배, 또는 선행으로부터 분리된 신앙으로부터의 그들의 예배가 “함의 천막들”이라 불리운다.
이집트의 첫 출생을 치심에 의해 의미된 것이 아래 구절에서 더 확증된다; 그리고 모든 첫 출생이 죽여졌기 때문에, 그럼에도 첫 출생은 신성한 영적 사랑 측면의 주님을, 동시에 이 사랑 안에 있는 이들을 표현하기 위하여 이집트를 떠날 당시 모든 첫 출생은 신성시되어야 한다고 명령되어졌는데, 이에 관해 모세의 책에서 읽는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하셨다, 말하시기를, 모든 첫 출생은 나에게 신성시되어야 한다, 이스라엘의 아들들 사이에 자궁을 연 것은 무엇이든, 사람이든 짐승이든, 그것은 나의 것 이다. 너는 여호와에게 자궁을 연 모든 것, 그리고 네가 가진 모든 첫배들, 짐승의 새끼들, 수컷들은 여호와의 것이다. 그리고 나귀의 모두 각각의 첫배를 너는 양과 더불어 되찾을 것이다; 그리고 만일 네가 그것을 되찾지 않을 것이다면, 너는 그것의 목을 부러뜨릴 것이 다; 그리고 네 아들들 사이에 사람의 모든 첫 출생을 너는 되찾을 것이다. 그리고 네 아들 이 네게 물어보는 때가 장차 있어, 말하기를, 이것이 무엇입니까? 한다면 너는 그에게 말하 라, 강한 손으로 여호와께서는 이집트로부터, 속박 당한 집으로부터 데려 내 오셨다는 것; 그리고 바로가 우리로 가게 하는 것을 두고 자신을 강팍해지게 했을 때, 여호와께서 이집 트의 토지에서 모든 첫 출생, 사람으로부터 짐승의 첫 출생에 이르기까지 치셨다는 것을 (말해주어라). 그러므로 나는(아론은) 여호와께 자궁을 연 모든 것, 수컷들을 제물로 바칠 것이다, 그러나 네 아들들의 모든 첫 출생을 나는 되찾을 것이다
(출. 13:1, 2, 12-15; 34:19, 20; 민 8:17).
이상으로부터 영적 의미에서 “생득권”에 의해 의미되는 것이 분명해졌을 것이다.

그리고 에서가 말했다, 보라 내가 죽을 듯 하다. 이는 그가 이 후에 다시 일어남을 의미한다. 이는 에서가 자연 평면의 선을 표현한다로부터; 그리고 “죽는다”의 의미가 어떤 것이 존재함을 중단할 때 상태의 마지막이다로부터; 그리고 이전의 상태의 끝은 이 후의 것의 시작이기 때문에, “죽으려 한다(죽을 듯 하다)”는 여기서의 경우 후에 다시 일어나는 것이 의미된다, 마찬가지가 “매장함”에 의해서도 의미된다. 그가 후에 다시 일어난다는 것은 시간 차원에서 진리가 외관적으로 앞 섬의 위치에 있은 후, 선이 앞 섬, 또는 진리를 지배함을 획득할 것임을 표시한다.

그리고 이 생득권이 나에게 무슨 소용이 있느뇨? 이는 이런 경우 (시간적으로) 앞 설 필요가 없을 것이다를 의미한다. 이는 설명이 필요치 않을 것이다.

그리고 야곱이 말했다. 이는 진리로부터의 교리를 의미한다. 이는 야곱이 진리로부터의 교리를 표현함에서 분명해진다.

오늘 때문에 나에게 맹세하라, 그리고 그는 그에게 맹세했다. 이는 확증을 의미한다. 이는 “맹세함”의 의미가 확증하는 것이다로부터 분명해진다; 그리고 확증함이 시간 차원에서 있었기에, “오늘(this day)”이라 말해지지 않고 “오늘 때문에(as this day)”라고 말해지고 있다. (“오늘 때문에”로 번역된 성경은 선견자의 것이 유일한 듯하다, 역자가 지닌 개역, 표준 새번역, 개역개정, 공동 번역, 내지 옥스퍼드 영문판, 1611년 킹 제임스 영역본 등에서 선견자의 번역과 같은 것은 발견되지 않는다 역자 주.)

그리고 그는 그의 생득권을 야곱에게 팔았다. 이는 한 때 동안 앞 섬이 증여되었음을 의미한다. 이는 “생득권”의 의미가 앞 섬이다로부터; 그리고 이것이 한 때 동안 증여되었다는 것은 이미 말해지고 살핀 바로부터 분명하다. 주로 시작에 있는 영적 인간 안에서는 진리가 지배권을 가지는데, 그 이유는 그의 처음 상태에서의 경우,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으로부터의 즐거움이 진리라고 믿어버리고, 그 자체를 그의 진리들에도 응용하여 진리에 대한 애착의 대부분이 생산되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그때 그는 진리들은 영예를 위해, 소득을 위해, 세상의 명성을 위해, 심지어 다른 삶에다가 공적을 쌓기 위해 자기를 섬길 수 있다고 착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처음 상태의 모든 것들은 진리에 대한 애착을 흥분시키고 그것에 점화한다; 그런데 그들은 선 안에 있지 않고 악 안에 있다. 그럼에도 주님께서는 이런 초기의 상태가 당사자에게 영향을 끼치는 것을 허용하신다, 그 이유는 이외 달리 그가 거듭나질 수 없기 때문이다. 총명과 지혜는 시간 안에 온다; 한편 비록 이런 진리들을 통하여 인간은 선에, 즉 선행에 소개되고, 그 안으로 입장한다; 그리고 그가 이런 상태에 있을 때, 처음 동안에서 그는 선인 것을 지각하고, 선으로부터 행동하고, 진리에 관하여 이 선으로부터 판단하고 결론을 도출한다; 그리고 이 선에 일치하지 않는 것들을 그는 거짓이라 부르고 거절한다. 고로 그는 종 위의 주인되는 자격으로 진리들을 통치한다.

34절. 그리고 야곱은 에서에게 빵과 렌즈콩 죽을 주었다. 그리고 그는 먹고 마셨다, 그리고 일어나 나갔다. 그리고 에서는 생득권을 얕보았다.

야곱은 에서에게 빵과 렌즈콩(lentils) 죽을 주었다. 이는 생활의 선이 진리의 선과 교리의 선과 더불어 선물되었음을 의미한다. 이는 에서가 생활의 선을 표현함으로부터; 그리고 “빵”의 의미가 천적, 영적 평면에 있는 일반적 측면에서의 사랑의 선이다로부터, 고로 또한 진리의 선이다로부터, 그 이유가 이것이 영적 평면의 선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렌즈콩 죽”의 의미가 교리적인 것들로부터의 선이다로부터; 그 이유가 “죽(pottage)”은 교리적인 것들이 이것 저것 뒤섞여 많은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렌즈콩(lentils)”은 거기로부터의 선을 의미한다. 야곱이 그것들을 에서에게 주었다는 것은 내적 의미에서 이 선들은 야곱에 의해 표현된 진리의 교리를 통하여 온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마지막 절에서, 위의 말과 그 뒤의 말들에 의해 영적 (평면의) 인간의 진리와 선 측면에서의 발전이 묘사되고 있다: 즉 인간이 거듭날 때, 그가 처음에는 진리에 관한 교리적인 것들을 배우고, 그 다음 그것들에(즉 교리적인 것들로부터의 선에) 감동되고, 그때 그는 그것들(즉 진리로부터의 선)에서 감동되었던 이런 교리적인 것들을 정신적으로 관조하게 된다. 마지막으로 그는 그것들에 따라 살기로 뜻한다. (즉 생활로부터의 선을 생산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제 그가 생활의 선 안에 있을 때, 위 거듭나던 순서가 바뀌어 (거듭남이 이어진다), 즉 생활의 선으로부터 그는 진리의 선을, 진리의 선으로부터 교리적인 것들의 선을, 그리고 교리적인 것의 선으로부터 교리적인 것들의 진리를 바라보면서 거듭남을 이어가는 바, 이전의 거듭남과는 차원이 전혀 다르다. 하여 이 거듭남의 수준에 있을 경우, 그는 인간이 감각적인 것으로만 있음으로부터 어떻게 영적 수준의 인간으로 되어가는지를, 그리고 자기가 영적 평면에 있을 때 자기는 무슨 품질이어야 하는지를 알는지 모른다.
이 선들, 즉, 생활의 선, 진리의 선, 그리고 교리적인 것들의 선은 서로로부터 구분된다는 것은 이를 조심스럽게 찬찬히 깊이 생각하는 이들에 의해서는 알려질 수 있다. 생활의 선은 의지력으로부터 흐르는 선이다; 진리의 선은 이해력으로부터 흐르는 선이다; 그리고 교리적인 것들의 선은 기억 속의 지식으로부터 흐르는 선이다. 기억 속의 지식의 선에는 여러 가지 선들이 뒤섞여 있다.
“렌즈콩 죽”이 교리적인 것들의 선이다는 것은 밀, 보리, 콩, 렌즈콩, 귀리 등이 빵과 같은 뜻을 지니기는 하나 각 품종에 따라 차이를 지닌다는 사실로부터 알게 된다; 일반적 측면에서의 “빵”은 대체로 밀로부터 분명해지는데, 이는 이미 살핀 바 있다; 고로 찾아 헤아려보아야 하는 선의 다른 종류들은 곡물(cereal)들에 의해 의미된다. 대체로 보다 품격 있는 선은 밀과 보리로, 덜 품격 있는 선은 “콩과 렌즈콩”에 의해 의미되어진다; 이를 에스겔서에서 읽어볼 수 있다;
너는 밀, 보리, 콩, 렌즈콩, 귀리를 네게로 가져오라, 그리고 그것들을 한 그릇 안에 담아라, 그리고 그것으로부터 빵을 만들어라 (겔. 4:9).

그리고 그는 먹고 마셨다. 이는 자기 것 되게 함을 의미한다. 이는 “먹다”가 선을 자기 것이 되게 함을 의미한다로부터; 그리고 “마시다”의 의미가 진리를 자기 것이 되게 함이다로부터 분명해진다.

그리고 일어났다. 이는 그 때로부터 있는 승강(elevation)을 의미한다. 이는 일어남이 언급되는 어느 구절의 말씀에서도 승강이 한결 같이 의미된다; 그리고 또한 인간이 영적, 천적 사항들에서 완전해질 때 그는 “들어올려짐”이라 말해진다는 사실로부터도 알게 된다; 다시 말해 신앙으로부터 있는 진리 측면에 관하여, 그리고 사랑과 선행으로부터 있는 선 측면에 관하여 완전해질 때이다.

그리고 나갔다. 이는 생활을 의미한다. 이는 “나감”의 의미가 선에 속한 것들 쪽으로, 즉 생활 속의 것들 쪽으로 발전함을 의미한다로부터 알려진다, 그 이유가 모든 선은 삶(생활)으로부터 있기 때문이다; “나감(going out)”과 “떠남(departing)”, “체류함(sojourning)”, 그리고 “발전함(advance)” 등의 말은 거의 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리고 에서는 생득권을 얕보았다. 이는 한 때 동안 생활의 선은 앞 섬(우선 순위, 선취권, priority)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이는 “얕보다, 경시하다”가 중요하게 여기지 않음을 뜻한다로부터; 에서의 표현이 생활의 선이다로부터; 그리고 “생득권”의 의미가 앞 섬이다로부터 분명해진다. 이것이 이럭저럭하는 동안에서이다는 것, 또는 잠시 동안에서 이다는 것은 앞에서 살핀 항목을 보기 바란다. 이상으로부터 “에서가 생득권을 얕보았다”가 한 때 동안 생활의 선은 앞 섬을 중요 사항으로 여기지 않음이 의미됨이 분명해진다. 이 25장에서 에서와 야곱에 의해 의미되는 것을 내적 측면에 중심을 두어 의미를 파악해 납득하려면, 우리의 생각 체계가 에서와 야곱이라는 (실존했던) 인물을 머리에 상상하려 드는 습관을 완전히 배제해야만 함이 전제 조건이다. (마치 많은 이들이 예수님의 얼굴을 달력 같은 그림들에서 어릴적부터 보아왔던 터에 기도를 할 때 그 그림 속 예수라는 인물을 상상하게 되는데, 이로 인해 우리는 자연적 수준을 기도에서마저 넘어보지 못하는 경우가 있을지 모르는 것도 위와 비슷할지 모른다. 사실 우리는 기도할 때, 계시록 1장의 주님을 상상 속에 놓는 연습이 요구될지 모른다. 역자 주.); 그 이유가 말씀의 내적 의미에서 이름들은 실제의 것들 외에 다른 것은 의미하지 않기 때문이다. 인물, 에서와 야곱 대신 자연 평면의 선과 진리가 생각 속에 있을 때, 이때서야 우리는 진리와 선을 수단으로 인간 거듭남이 어떻게 발전해가는 지를, 즉 거듭남 자체에서 비록 선이 앞 섬이고 우위에 있는 것이 분명하지만, 거듭남의 시작에서는 진리가 외관적으로 당사자와 더불어 앞 섬과 우위를 가진다는 것을 알게 된다는 말이다.
본문이 취급하는 앞 섬과 우위에 관한 생각이 조금 더 명료해지도록 더 말해보겠다. 인간의 기억 안으로 들어가는 것, 그리고 기억 안에 남아 있는 것은 당사자가 그것을 기억에 소개하고 받아들여지게 하는 어떤 애착, 또는 사랑함 같은 것이 있지 않으면 가능치 않다는 것은 누구나 쉽게 간파될 것이다. 다시 말해 만일 어떤 것을 두고 그것에 애착하거나 사랑하고 있다거나 하지 않는다면, 관찰하려 한다거나 주목해보려 하지 않을 것이다는 말이다. 따라서 받아들여진 것들은 그 자체를 이 애착, 사랑과 연결지어 놓고 있다. 그리고 연결되어 있음이 남아 있는다. 이로부터 또 하나 분명해지는 바, 비슷한 애착, 또는 사랑이 되돌아 올 때, 그 자체인 것이 상기된다, 그리고 비슷한 애착, 또는 사랑 덕택에 앞서 들어왔던 다른 것들에 따라서 관조되어 표출된다; 한마디로 시리즈로 있는다는 말이다. 이렇게 하여 인간의 생각은 오고 있다; 그리고 이 생각으로부터 그의 언어(말함, speech, 연설)도 있는다. 또 하나 마찬가지인 것은, 그 자체의 어떤 것이 되돌아 옴에서, 만일 이것이 감각들의 물건(object)에 의해 결과될 때, 또는 생각의 대상(object)이 됨으로 해서 결과될 때, 또는 어떤 사람의 강연(discourse)에 의해 결과 될 때, 애착은 이미 들어왔던 것과 더불어 재생산을 한다. 이런 사항은 (말로 설명해 늘어 놓아야 하기에 복잡한 듯 보일 뿐,) 누구나 자신의 경험을 되돌아 찬찬히 뜯어보면 금새 알 수 있는 것들이다.
진리의 교리적인 것들 역시 마찬가지로 기억 안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처음에 기억들 안으로 받아진 것들은 다양한 사랑들로부터의 애착들이다. 선행의 선 속에 있는 진짜의 애착은 처음에서는 (당사자의 의식 세계에서) 관찰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여전히 그 애착은 현존하고 있다; 그리고 이것이 현존되고 있는 한, 그것은 진리의 교리적인 것들에 주님에 의해 인접되어진다; 또한 그것이 남아 있는 한 인접되고 있는다. 그리하여 인간이 거듭나질 수 있는 때가 올 때, 주님께서는 선에 대한 애착에 영감을 불러 일으키시고, 이 애착을 통하여 이 애착에 그분에 의해 인접되어오고 있었던 것들을 자극하신다. (자극받는) 이것들이 말씀에서 “리메인스(remains)”라고 불리운다; 그리고 그때 이 애착 (즉 선에 대한 애착)을 수단으로, 연속적인 단계들로 해서 주님께서는 다른 사랑들로부터의 애착들을, 결과적으로 이런 애착들과 더불어 그것과 관련된 모든 것들을 제거하신다. 그리하여 선에 대한 애착, 같은 말로 생활의 선이 지배력을 발휘한다. 만일 이 지배력이 첫째에서 나타났다면, 당사자는 그것을 볼 수 없었을 것이다. (좀 늦더라도 선차적인 거듭남인 개혁 이후의 단계에서 나타나면 인간이 볼 수 있어 확증되어 천국에 가지고 갈 수 있을지 모른다는 뜻도 덧붙일 수 있을 것같다. 역자 주); 그 이유가 인간이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 안에 있는 한, 순수한 사랑으로부터 있는 선은 나타나지 않기 때문이다. 이상으로 에서와 야곱에 관련되어 역사적으로 있는 것들에 의해 내적 의미에 있는 것들을 알았으리라 사료된다.
*************************************

창세기 제 26 장

성경: 창세기 26장

1. 그리고 그 토지에 흉년이 들었다, 이 흉년 말고도 이전인 아브라함의 시절에도 흉 년이 들었었다. 그래서 이삭은 불레셋 왕 아비멜렉에게로, 그랄에로 갔다.
2. 그리고 여호와께서 그에게 나타나셨다, 그리고 말하셨다, 이집트로 내려가지 마라. 내가 너에게 말하는 토지에서 거주하여라.
3. 이 토지에서 체류해라, 그리고 내가 너와 함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너를 축복할 것이다. 너에게, 네 씨에게, 나는 이 모든 토지들을 줄 것이다, 그리고 나는 네 아 버지 아브라함에게 맹세했던 그 맹세를 세워 둘 것이다.
4. 그리고 나는 네 씨를 마치 하늘의 별들 같이 번성하게 할 것이다, 그리고 나는 네 씨에게 이 모든 토지들을 줄 것이다. 그리고 네 씨 안에서 땅의 모든 나라들이 복 있을 것이다.
5. 그 이유는 아브라함은 내 음성에 귀기울였고, 그리고 내가 지워준 책임, 내 명령, 내 규례, 그리고 내 법을 지켰기 때문이다.
6. 그리고 이삭은 그랄에 거주하였다.
7. 그리고 그 곳의 사람이 그에게 그의 여인에 관하여 물었다. 그리고 그는 말했다, 그 여자는 나의 누이이다, 그 이유는 그녀가 나의 여인이다 라고 말하는 것이 두 려웠기 때문이다. 그 곳의 사람들이 리브가로 인해 자기를 죽이지 않도록 하려 해 서 때문이었다. 그 이유는 그녀는 바라보기에 아름다웠기 때문이다.
8. 날들이 거기서 그를 오래 끌고 가던 참에 불레셋의 왕 아비멜렉이 창문을 통하여 밖을 보았다, 그리고 보았다, 그리고 보라 이삭이 그의 여인 리브가와 더불어 웃고 있었다.
9. 그리고 아비멜렉은 이삭을 불렀다. 그리고 말했다, 확실한 바, 보라 이 여자는 네 여인이다, 그리고 어떻게 너는 그녀가 자기 누이라고 말하느냐? 그리고 이삭이 그 에게 말했다, 내가 말했던 이유는 내가 그녀 때문에 죽지않도록 하려 해서 이오.
10. 그리고 아비멜렉은 말했다, 네가 우리에게 이렇게 행동하다니 어찌됨이냐, 백성 중 하나가 네 여인과 쉽사리 드러누울 뻔 했지 않느냐, 그리고 너는 우리에게 죄 를 짓게 할 뻔 했지 않느냐?
11. 그리고 아비멜렉은 모든 백성에게 명령하여, 말하기를, 이 사람과 그의 여인을 건 드리는 자는 정녕 죽을 것이다.
12. 그리고 이삭은 그 토지에 씨를 뿌렸다, 그리고 그 해에 일 백의 분량을 발견하였 다, 그리고 여호와께서 그를 축복하셨다.
13. 그리고 사람이 불어났고, 그리고 계속해서 불어나 그는 심히 위대해졌다.
14. 그리고 그는 양떼를 많이 획득했고, 목축떼도 많이 획득했다, 그리고 많은 노복도 거느렸다. 그리고 불레셋 사람들은 그를 부러워했다.
15. 그리고 그의 아버지 아브라함의 시절에 그의 종들이 팟던 모든 우물들을 불레셋 사람들은 멈추게했고, 그리고 먼지로 채웠다.
16. 그리고 아비멜렉은 이삭에게 말했다, 우리로부터 떠나라. 그 이유는 네가 우리보 다 세력이 더 커졌기 때문이다.
17. 그리고 이삭은 거기로부터 떠났다, 그리고 그랄의 계곡에 천막을 쳤다, 그리고 거 기에 거주했다.
18. 그리고 되돌아 왔다, 그리고 그들이 아브라함의 시절에 팟었던 물들의 우물들을 다시 팟다. 그리고 불레셋이 아브라함이 죽은 후에 그것들을 틀어 막았다. 그리고 그는 그 우물들의 이름을 그의 아버지가 불렀던 이름에 따라 불렀다.
19. 그리고 이삭의 종들이 계곡에서 팟다, 그리고 살아 있는 물들의 우물을 거기서 발 견했다.
20. 그리고 그랄의 목자들이 이삭의 목자들과 다투어, 말하기를, 이 물들은 우리 것이 다. 그리고 그는 이 우물의 이름을 에섹이라 불렀다, 그 이유는 그들이 그와 다투 었기 때문이다.
21. 그리고 그들은 또 다른 우물을 팟다, 그리고 그들은 또한 다투었다, 그리고 그는 그것의 이름을 싯나 라고 불렀다.
22. 그리고 그는 거기에서 이동했다, 그리고 또 다른 우물을 팟다, 그리고 이 우물로 인하여서는 다툼이 없었다. 그리고 그는 그것의 이름을 르호봇이라 불렀다. 그리 고 그는 말했다, 이제는 여호와께서 우리를 더 확장되게 하셨다, 그리고 우리는 이 토지에서 열매를 많이 맺을 것이다.
23. 그리고 그는 거기로부터 브엘-세바로 올라 갔다.
24. 그리고 여호와께서 그 밤에 그에게 나타나셨다, 그리고 말하셨다, 나는 네 아버지 아브라함의 하느님이다.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 는 너를 복되게 할 것이다, 그리고 네 씨를 나의 종 아브라함 때문에 번성하게 할 것이다.
25. 그리고 그는 거기에 제단을 건축했다, 그리고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 그리고 그 의 천막을 거기에 단단히 고정시켰다, 그리고 거기서 이삭의 종들은 우물을 팟다
26. 그리고 아비멜렉은 그의 동료 아훗삿과, 군대 장군 비골과 함께 그랄로부터 그에 게 왔다.
27. 그리고 이삭은 그에게 말했다, 무슨 일로 당신은 나에게 왔습니까? 그리고 당신은 나를 미워했다, 그리고 나를 당신으로부터 떠나게 했다.
28. 그리고 그들이 말했다, 우리는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있었던 것을 보아 왔었다. 그리고 우리는 말했다, 이제 우리 사이에, 우리와 너 사이에 맹세를 해 놓자, 그 리고 우리는 너와 언약을 세워 놓고 싶다.
29. 너는 우리에게 악을 행치 말라, 마치 우리가 너를 건드리지 않은 것 같이, 그리고 우리가 너에게 선한 것 외에는 아무 것도 하지 않했 듯, 그리고 너를 평화롭게 내어 보낸 것 같이 이다, 이제 너는 여호와로부터 복을 받은 자이다.
30. 그리고 그는 그들에게 잔치를 베풀어 주었다, 그리고 그들은 먹고 마셨다.
31. 그리고 그들은 아침에 일찍 일어났다, 그리고 사람이 그의 형제에게 맹세했다. 그 리고 이삭은 그를 떠나 보냈다, 그리고 그들은 그로부터 평화로이 떠났다.
32. 그 날에 이삭의 종들이 그에게 와서 자기들이 팟던 우물에 관하여 보여 주었다. 그리고 그들이 그에게 말했다, 우리는 물들을 발견했습니다.
33. 그리고 그는 그것을 세바라 불렀다. 그러므로 그 성의 이름은 오늘 날까지 브엘 -세바이다.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34. 에서는 사십 년의 아들이었다, 그리고 그는 헷 족속 브에리의 딸 유딧과 헷 족속 엘론의 딸 바스맛을 여인으로 데려 왔다.
35. 그리고 그들은 이삭과 리브가에게 영의 괴로움이었다.

각 절의 내적 의미

1절. 그리고 그 토지에 흉년이 들었다, 이 흉년 말고도 이전인 아브라함의 시절에도 흉년이 들었었다. 그래서 이삭은 불레셋 왕 아비멜렉에게로, 그랄에로 갔다.

그리고 그 토지에 흉년이 들었다, 이 흉년 말고도 이전인 아브라함의 시절에도 흉년이 들었었다”란 신앙에 관한 지식의 결핍을 의미한다. 이는 “흉년”의 의미가 지식들의 결핍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는 아래 이어지는 항목으로부터, 즉 아비멜렉의 표현으로부터, 그리고 “그랄”의 의미가 신앙 속에 있는 것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아브라함의 시절에 있던 “흉년”은 창. 12:10에서 언급되었다. 이 흉년은 자연적 인간에 있는 지식들의 결핍을 표시했다; 그러나 이 장의 “흉년”은 합리적 인간에 있는 지식의 결핍을 표시한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의 시절에 있던 흉년 말고 토지에 흉년이 있었다”라고 말해지고 있는 것이다. 내적 의미에서 여기서 취급되는 주제는 주님이시고, 주님 안에 그분의 신성으로부터 신앙의 모든 교리적인 것들이 있다는 것에 관해서이다; 그 이유가 어떤 교리적인 것, 또는 교리의 아주 작은 것도 주님으로부터 있지 않은 것은 하나도 없기 때문, 그 이유는 주님이 교리 자체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해서 주님은 “말씀”이라 불리우시는데, 그 이유는 “말씀”이 교리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님 안에 있는 모든 것은 신성이고, 신성은 어떤 창조된 존재들에 의해 납득되어질 수 없는 바, 신성에 속한 것들이 창조된 존재들 앞에 나타나는 한, 주님으로부터 있는 교리적인 것들은 순수하게 신성으로부터의 진리들은 아니고, 단순히 진리의 나타남(appearance)들이다; 그럼에도 이런 나타남 내부에 신성으로부터의 진리들이 있다; 그리고 나타남들은 그 내부에 이런 진리들을 가지기 때문에, 엄밀히 말하면 나타남들 또한 진리들이라 불려야 마땅하다; 그리고 이것들이 이 장에서 지금 취급된다.

그리고 이삭은 불레셋 왕 아비멜렉에게로, 그랄에로 갔다. 이는 신앙 속의 교리적인 것들을 의미한다. 이는 이삭이 신성한 합리성 측면에서의 주님을 표현함으로부터; 여기서 이삭에 의해서는 합리성의 신성한 선과 결합된 신성한 진리 측면에서의 주님을 표현했다; 그 이유가 리브가는 이삭과 더불어 있었고, 그리고 “누이”라고 불리웠기 때문이다; 아비멜렉이 합리적인 것들을 찾는 신앙의 교리를 표현함으로부터; 그리고 “불레셋 왕”이 교리적인 것들을 표현함으로부터; 그리고 “그랄”의 의미가 신앙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상의 각각의 의미들은 이삭이 불레셋 왕에게로 그랄로 감에 의해 의미된 것을 보여준다, 즉 주님으로부터 합리적인 것들에 주의하는(의지하는) 신앙의 교리가 온다는 것; 또는 같은 것으로, 신앙의 교리적인 것들이 온다는 것이다. 이런 모든 것들이 교리 속에 있는 교리물이라 불리운다, 그리고 이것들이 천국에서는 천사에 의해, 땅에서는 인간에 의해 받아지고 인정될 수 있는 만큼에서 이것들은 합리적인 것들에 기댄다고 말해진다, 그 이유가 교리물들을 받고 인정하는 것은 합리성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합리성은 신성한 것들을 납득하는 것이 가능할 수 없는데, 그 이유는 합리성은 유한하고, 유한은 무한인 것을 납득할 수 없기 때문; 결과적으로 주님으로부터 있는 신성으로부터의 진리들은 외관(나타남)들을 수단으로 합리성 앞에 표출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교리적인 것들은 신성으로부터의 진리의 외관밖에 더 아니다, 다시 말해 신성인 것을 안에 담고 있는 천적, 영적인 것의 그릇밖에 더 아니다; 그리고 신성, 즉 주님이 그것들 안에 있기 때문에, 그것들은 우리에게 영향을 미치고, 이 때로부터 천사와 인간의 주님과의 결합함이 온다.

2, 3절. 그리고 여호와께서 그에게 나타나셨다, 그리고 말하셨다, 이집트로 내려 가지 마라. 내가 너에게 말하는 토지에서 거주하여라. 3 이 토지에서 체류해라, 그리고 내가 너와 함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너를 축복할 것이다. 너에게, 네 씨에게, 나는 이 모든 토지들을 줄 것이다, 그리고 나는 네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맹세했던 그 맹세를 세워 둘 것이다.

그리고 여호와께서 그에게 나타나셨다, 그리고 말하셨다. 이는 신성으로부터 생각함을 의미한다. 이는 “나타나심”의 의미가 여호와이신 주님에 관해서 말해질 때 그분 안에 있는 신성 자체이다로부터; 그리고 여호와가 주님 안에 계신 것, 그리고 주님 자신이 여호와이신 것은 많은 곳에서 말해 왔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인간 본질을 신성 본질과 하나가 되게 하신 만큼에서 그분은 자신과 더불은 여호와와 이야기하셨다; 고로 “여호와께서 그에게 나타나심”은 내적 의미에서 신성으로부터를 의미한다: 생각함이 의미되는 것은 “말하다”가 지각하다와 또한 생각하다 인데 이는 많이 살폈다.

이집트로 내려 가지 마라. 그리고 내가 너에게 말하는 토지에서 거주하여라. 이는 그분은 기억 속의 지식들에로 내려가서는 안되고, 신성에 의해 계발된 합리성인 진리의 외관에로 내려가야 함을 의미한다. 이는 “이집트”의 의미가 기억 속의 지식이다로부터; 그리고 “토지”의 의미가 여기서의 경우 신성에 의해 계발될 때, 진리의 외관들인 합리적인 것들이다로부터; 그 이유가 여기서 뜻해지는 토지가 그랄이고, 거기에 불레셋 왕 아비멜렉이 있었고, “그랄”에 의해 신앙이 의미되기 때문이다; “아비멜렉”에 의해서는 합리적인 것에 주의를 기울이는(기대려는) 신앙의 교리를; “불레셋 왕”에 의해서는 교리적인 것들이 의미된다; “토지”, 즉 아비멜렉이 있는 그랄은 내적 의미에서 위와 같은 것을 의미한다.
“토지(land)”의 의미는 다양하나, 토지는 서술되는 나라의 품질을 표시해준다. 그러나 적당한 의미에서 “토지는 교회를 의미한다; 그리고 이것이 교회를 의미하기 때문에 교회 속에 있는 것들 역시 선행과 신앙의 교리적인 것들도 의미한다; 고로 신성에 의해 계발된 합리적인 것들이 진리의 외관들(appearances of truth) 이다; 이 외관들이 교회의 진리들, 고로 교회의 교리적인 것들인데 이미 살핀 적도 있다. 여러분이 신성에 의해 계발된 합리적인 것들이라 말하든가, 또는 진리의 외관들이라 말하든가, 또는 천적, 영적 (수준의) 진리들이라 말하든가, 이것들 모두는 천국들에 있는 주님의 왕국 안에서, 또는 천국 안에서, 그리고 마찬가지로 땅들 위의 그분의 왕국 안에서, 또는 교회 안에서 같은 뜻을 말하고 있다; 그리고 같은 것이 교리적인 것들이라 말해지나, 그것은 교리들 안에 있는 진리들로부터 이다. 천사와 인간의 합리성은 신성에 의해 계발된 진리의 외관으로부터 합리성이고, 합리성이라 불리운다, 그리고 이렇지 않다면 그것은 합리성이 아니다; 고로 합리적인 것들이 진리의 외관들이다,
그분이 이집트로, 즉 기억 속의 지식들에로 내려가지 않아야 한다 라고 말해진 이유를 살펴보자. 이 기억 속의 지식들은 이미 취급했었다; 즉 아브라함이 이집트에 체류함은 주님의 어린 시절 그분이 기억 속의 지식들에서 교육받으셨음을 표현했다 . 이제 그분이 이집트로 내려가지 말고 그랄에 체류해야 한다는 것, 즉 그분을 기억 속의 지식쪽에서 찾지 말고 합리적인 것에 의거 찾아야 한다고 말해진 이유는 이렇다: 신성인 것들을 자체 안에 지닌 진리의 모든 나타남들은 합리성에 속한다, 그러므로 합리적인 진리들과 진리의 나타남들은 똑같다; 이에 반해 기억 속의 지식들은 자연 평면에 속한다, 고로 자연적 (등차의) 진리들과 기억 속의 지식들은 같다. 합리적 진리들, 또는 진리의 나타남들은 합리성 안으로의 신성의 유입이 아니고서는 세상 밖으로 나타나거나 존재함이 가능해질 수 없다, 그리고 (신성은) 합리성을 통하여 자연 평면 속의 기억 속의 지식들 (안으로도 유입된다). 합리성 안에서 거행되는 것들은 자연 평면에서 나타난다; 하여 이는 많은 것들의 형상이 한 개의 거울에서 모두가 한꺼번에 나타나는 것과 같다; 이렇기 때문에 신성으로부터의 것들은 인간 앞에, 그리고 천사들 앞에 표출되어 있다. 천사들 앞에서의 표출과 영들의 세계로부터인 자연 평면의 영들 앞에서의 표출은 진리의 표현물로서 자연 평면에서는 완전히 같다고 말할 수는 없다.
이런 경우는 모두 각각의 인간과도 유사하다. 그 이유가 이미 말했듯이 인간은 작은 규모의 천국, 같은 말로 큰 규모의 천국의 형상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신성한 진리는 자연적 인간 속에 있는 기억 속의 지식들 안으로 직접적으로 흘러들 수 없어 합리적인 것들을 통하여서만 흘러들 수 있기 때문에, 본문에서 이삭은 이집트로 내려가지 말고 그랄의 토지에서 살라고 말해진 것이다. 그러나 유입의 본성, 또한 생각들의 본성이 알려지지 않으면 위 살핀 것에 대한 생각 또한 명료해지지 않는다, 하여 이 장의 끝에서 주님의 신성한 자비로부터 나의 경험을 곁들여 더 취급될 것이다.

이 토지에서 체류하여라. 이는 교육받으심을 의미한다. 이는 “체류함(임시 머뭄)”의 의미가 교육받는 것이다로부터; 그리고 “토지” 중의 이 장소의 의미는 신성에 의해 계발될 때 진리의 나타남들인 합리적인 것들이다로부터 알려진다; 고로 “이 토지에 체류함”은 이런 것들에 관해 교육받으심을 의미한다.

그리고 나는 너와 함께 있을 것이다. 이는 신성을 의미한다. 이는 이야기하시는 분이 여호와, 즉 신성 자체이시다로부터 알려진다; 그리고 이것이 그분에 의해 “나는 너와 함께 있을 것이다”라고 말해질 때, 신성이 합리성 속의 것들과 있을 것이다가 이 연결에서 의미되고 있다.

그리고 너를 축복할 것이다. 이는 그러므로 증가함이 있을 것임을 의미한다. 이는 “축복함”의 의미가 선들 측면에서 열매를 만들고, 진리들 측면에서 번성함이다로부터; 고로 증가함이 의미되고 있다.

너를 위하여… 이는 선을 의미한다. 이는 “너”가 이삭을 말하고, 이삭은 신성한 합리성 측면에서의 주님을 표현하고, 주님의 신성한 합리성은 선밖에 더 아니고, 거기 있는 진리조차도 신성인 바 선이기 때문이다.

네 씨를 위하여… 이는 진리를 의미한다. 이는 “씨”의 의미가 진리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고로 이 진리는 주님의 신성으로부터의 진리를 의미하는데, 이 진리가 “네 씨”이다. 말씀을 글자 의미로만 납득하려 고집하는 이들은 “씨”는 후손을 표시한다고, 하여 이삭의 후손, 에서와 야곱, 주요하게는 야곱의 후손을 표시한다고 납득하고 있다, 그 이유는 말씀이 이 후손의 나라 안에 있었고, 그들에 관한 역사물들을 대량으로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적 의미에서 “씨”는 이삭으로부터의 어떤 후손을 뜻하는 것이 아니고, 주님으로부터 선과 진리 안에 있는 이들, 주님의 아들들인 모든 이들, 그분의 왕국 안에 있는 모든 이들을 뜻한다; 이것들이 “씨”이기 때문에, 주님으로부터의 선과 진리 자체가 “씨”이다, 그 이유가 이로부터 아들들이 와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주님으로부터의 진리들 자체가 “왕국의 아들들”이라 불리운다. 마태복음서에서:
좋은 씨를 뿌리는 분은 사람의 아들이시다; 들판은 세상이다. 좋은 씨는 왕국의 아들들이다 (마. 13:37, 38).
그러므로 일반적 측면에서 “아들들”은 진리들을 의미한다.
여하간 말씀을 좀 더 깊이, 남들보다 더 내면적으로 본다는 이들이라면, 신성한 말씀에서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씨”가 축복받아질 것이라고, 그리고 세상 모든 나라와 백성 위에 있을 것이라고 자주 언급되지만, 이들의 씨라는 것이 그들의 후손을 뜻할 수 없다는 것을 알는지 모른다. 그 이유가 그 후손들이야말로 주님을 사랑함 안에, 이웃을 향한 선행 안에, 신앙의 어떤 진리 안에 있지 않았고, 그들은 주님이 누구신지, 그분의 왕국이 무엇인지, 천국이 무엇인지, 사후 삶이 무엇인지에 깡그리 무지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런 사항들을 알기를 원하지 않았고, 만일 배웠더라면 심정으로 부정했을 것이고, 하여 그들이 외면의 선과 진리를 노골적인 우상숭배자들이 됨으로 모독했 듯, 내면의 선들과 진리들까지도 모독하고야 말았을 것이 자명하기 때문이다; 이런 연유로 구약 성경의 말씀의 내적 의미는 글자 의미에서 눈으로 읽지 못하게 대부분 감추여 놓여있다. 이런 속성 때문에 주님은 그들에 관해 이사야서에서 말하셨다:
그분은 그들의 눈을 소경되게 하셨다, 그리고 그들의 심정이 굳어지게 하셨다, 하여 그들이 자기들의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그들의 심정으로 깨닫지 않도록, 그리고 전환되지 않도록, 그리고 내가 그들을 치료하지 않도록 이다 (요. 12:40);
그리고 이 후손들이 (예수에게) 말했을 때:
우리는 아브라함의 씨입니다; 아브라함이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하 셨다, 만일 너희가 아브라함의 아들들이다면, 너희는 아브라함의 일들을 하여야 할 것이다; 너희는 너희의 아버지 악마로부터 이다, 그리고 너희의 아버지의 바램들을 너희는 행할 것 이다 (요. 8:33, 39, 44);
위에서 “아브라함”에 의해 주님이 뜻해진다, 이는 말씀의 모든 곳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유대인들은 그분의 씨가 아니고 악마의 씨임을 분명히 서술하셨다. 이런 사항들이 명백히 보여주는 바, 역사적, 예언적 말씀에서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씨”라는 말은 그들의 후손을 결코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 그러나 주님의 “씨”인 모든 이들, 즉 그분에 대한 신앙으로부터의 선과 진리 안에 있는 이들을 뜻한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말씀은 통털어서 신성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 모든 토지들을 줄 것이다. 이는 영적인 것들을 의미한다. 이는 “토지들”의 의미가 여기서 합리적인 것들, 즉 신성에 의해 계발될 때 진리의 나타남들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 나타남들이 진리들이다는 것은 이미 상술했다; 결과적으로 여기서 “토지들”에 의해 영적인 것들이 뜻해진다, 그 이유가 영적인 것들은 신성으로부터 있는 진리들밖에 더 아니기 때문이다. 이는 영적인 것들에 관련해 이미 많이 말해왔던 편이다. 순수한(genuine) 의미에서 영적인 평면은 주님으로부터 있는 진리의 빛(light) 자체인데, 이에 비해 천적인 평면은 주님으로부터 있는 선의 모든 불꽃(flame)이 뜻해진다. 이로부터 알게 되는 바, 이 빛이 주님으로부터 인간의 합리성과 자연 평면으로 흘러든다는 것, 그리고 영적 평면은 이 둘 모두 라고 단정된다는 것, 그리고 이것은 흘러든 진리 측면에서 신성이다는 것이다. 이는 순수한 의미에서 영적 수준이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그리고 영적인 합리성과 영적인 자연성이 있다는 것도 보여준다.

그리고 나는 내가 네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맹세한 맹세를 세워 둘 것이다. 이는 그러므로 해서 있는 확증을 의미한다. 이는 “맹세” 또는 “맹세함”의 의미가 확증함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 구절에서 아브라함과 세워둔 “언약”이라 말해지지 않고, “맹세”라고 말해졌는데, 그 이유는 “언약”은 천적 수준, 또는 선 측면의 수준에서이다 라고 단정되나 “맹세”는 영적 수준, 진리 측면의 수준에서이다 라고 단정되기 때문이다. 이 영적 수준이 본문의 주제의 수준이다. 그래서 26장 후반부에 이어지는 말은, 이삭이 아비멜렉과 언약을 만들었다고 말해지지 않고 “그는 그의 형제 사람에게 맹세했다”라고 말해지고 있다 (31절); 이에 반해 아브라함에 관련해서는 그와 아비멜렉은 “언약을 만들었다”라고 말해진다 (창. 21:32. 또는 시. 105:8-10도 보라). 여기서의 경우 확증함이 “맹세”에 의해 의미된 것과 관련되고, 주님께서 그분의 왕국에 있는 이들과 결합함이 뜻해지고 있다; 그 이유가 “맹세”는 언약의 확증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언약”에 의해서는 결합이 의미된다.

이 두 절의 내적 의미는 이렇다, 즉 신성한 진리가 합리적인 것들을 수단으로 흘러들 때, 합리적인 것들은 진리의 나타남들을 표출한다는 것이다, 고로 선과 진리 측면에서 그 자체는 열매가 풍성해지고 번성한다는 것, 이를 통하여 주님께서는 천사와 인간과 더불어 자신을 결합하신다는 것이다. 이것이 의미이다는 것이 처음 설명에서는 보여질 수 없었는데, 그 이유는 여러 사항들을 흩으려놓고 설명했기 때문이다. 즉 신성으로부터의 생각은 기억 속의 지식들로 내려가지 말고 신성으로부터 계발될 때, 진리의 나타남이 있는 합리적인 것들에로 가라는 것, 이런 것들로부터 신성으로부터의 가르침이 온다는 것, 그리고 선과 진리가 증가한다는 것, 이는 영적 수준이다는 것, 이로 말미암아 그분의 말씀에 있는 것들과 더불은 주님의 결합이 있다는 것, 이런 사항들은 인간 앞에서는 흩으려 있게 나타나지만, 내적 의미에서는 여전히 질서 정연한 방식에서 다함께 결합되어 있고, 그리고 천사들 앞에서, 천국 안에서는 가장 아름다운 시리즈와 연결됨 안에서 나타나고 지각된다는 것이다; 그렇다, 이는 천국의 형체에서 천사의 표현들의 시중을 받고 있다; 이것은 표현할 수 없을 만큼 다양하다. 이와 같은 상황이 말씀이 내적 의미로 있을 때이다.

4, 5절. 그리고 나는 네 씨를 마치 하늘의 별들 같이 번성하게 할 것이다, 그리고 나는 네 씨에게 이 모든 토지들을 줄 것이다. 그리고 네 씨 안에서 땅의 모든 나라들이 복 있을 것이다. 5 그 이유는 아브라함은 내 음성에 귀기울였고, 그리고 내가 지워준 책임, 내 명령, 내 규례, 그리고 내 법을 지켰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네 씨를 하늘의 별들 같이 번성하게 할 것이다. 이는 진리들과 신앙에 관한 지식들을 의미한다. 이는 “씨”의 의미가 진리들이다로부터; 그리고 “별들”의 의미가 신앙에 관한 지식들이다로부터 알아진다.

그리고 나는 네 씨에게 이 모든 토지들을 줄 것이다. 이는 거기로부터 교회들을 끌어내심을 의미한다. 이는 씨의 의미가 진리들이다로부터, 범위를 넓혀 생각하면, 진리들 안에 있는 이들, “왕국의 아들들”이라고 불리우는 이들이다로부터; 그리고 “토지들”의 의미가 신성에 의해 계발될 때, 진리의 나타남들이 있는 합리적인 것들이다로부터; 고로 신성에 의해 계발된 합리적인 것들 안에 있는 이들; 또는 같은 말로 천국의 빛 안에 있는 이들이다; 그리고 이 빛에 있는 이들은 오직 천국들 안에 있는 주님의 왕국에 있는 이들과 땅 위 주님의 왕국 (즉, 교회들)에 있는 이들 뿐인 바, 분명해지는 것은, 여기서의 “토지들”은 교회들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그 이유가 교회들은 자기들이 간판을 걸고 …교회라고 부른다고 교회가 아니다는 것, 그들이 주여…주여… 라고 주님을 고백해댄다고 교회가 아닌 것, 그러나 신앙으로부터의 선과 진리 안에 있을 때만이 교회라고 불리워지기 때문이다. 신앙 속의 선과 진리는 교회를 구성하는 본체이다, 그렇다, 간추리고 간추려 생각하면 이것이 교회인 것이다, 그 이유는 신앙의 선과 진리 안에 주님이 계시기 때문, 그리고 주님이 계시는 곳에 교회가 있기 때문이다.

네 씨 안에서 땅의 모든 나라들이 복 있을 것이다. 교회 안과 밖 모두에서 선 가운데 있는 모든 이들을 의미한다. 이는 “복있다”의 의미가 선 안에서 열매 풍성해지고, 진리들 안에서 번성해짐이다로부터; “씨”의 의미가 주님으로부터 있는 선들과 진리들이다로부터; 그리고 “땅의 나라들”의 의미가 선 안에 있는 모든 이들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고로 “땅의 모든 나라들이 네 씨 안에서 복있을 것이다”란 주님으로부터 있는 선과 진리를 통하여 서로의 선행 안에 있는 이들은, 그들이 교회 안에서 이든, 밖에서 이든 모두 구원된다는 뜻이다.

그 이유는 아브라함이 내 음성에 귀기울였기… 때문이다. 이는 주님의 신성 본질이 시험을 통하여 인간 본질과 합일됨을 의미한다. 이는 아브라함이 신성한 인간 측면에서의 주님 역시 표현한다로부터; 그리고 “내 음성에 귀기울임”이 주님을 서술할 때는 시험을 통하여 인간 본질이 신성 본질과 하나가 되심을 의미한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 이유가 순종함이 주님이라 단언되는 말씀으로부터 있기 때문이다. 즉 여기서 말해지는 구절은 창. 22:1-2 인데,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을 시험하셨다, 그리고 그로 하여금 자기 아들을 데리고 가서 태워바치는 제물로 바치라고 말한 대목이다; 그리고 그가 이 음성에 귀기울였을 때, 말해진다:
이제 나는 네가 나를 경외함을 알고 있다, 그리고 너는 네 아들, 네 유일한 것을 나로부터 아끼지 않았다. 나 스스로 맹세하면서 여호와께서 말하신다, 너는 이 말을 행하였기 때문 에, 그리고 네 아들, 네 유일한 것을 아끼지 않았기 때문에 정녕 너는 복있을 것이다, 그리 고 하늘의 별들 만큼 같이 네 씨를 번성하게 할 것이다 (창 22:12, 16, 17)
“네 아들, 네 유일한 것, 나로부터 아끼지 않았다” (이것이 “음성에 귀기울였다”이다)에 의해 주님의 인간 측면이 신성 측면과 마지막 시험에 의해 하나가 되셨다가 의미된다. 이것이 “여호와의 음성에 귀기울이심”, 또는 “아버지”의 음성에 귀기울이심이 뜻해진다는 것은 게세마네에서 주님의 말씀들로부터도 분명해진다:
나의 아버지, 만일 가능하다면, 이 잔이 나로부터 지나가게 하십시요; 그렇지만 나의 뜻이 아닌 당신의 뜻을 행하소서; 다시 두 번째로, 나의 아버지, 만일 이 잔이 제가 마시지 않고 는 나로부터 지나가게 할 수 없다면, 당신께서는 그리 행하시옵소서 (마. 26:39, 42; 막. 14:36; 눅. 22:42).
여호와 또는 아버지가 주님 안에, 또는 주님이 아버지 안에, 그리고 아버지는 그분 안에 (요. 14:10, 11) 계셨으므로, “여호와의 음성에 귀기울임”에 의해서는 주님이 그분 자신의 힘으로 시험들을 통하여 인간 측면을 신성 측면에 하나가 되게 하셨다가 뜻해진다; 이는 아래 주님의 자신의 말씀으로부터 분명해진다. 요한 복음서에서: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그리고 저는 아버지를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저는 제 목숨을 양 을 위하여 내려 놓습니다. 그러므로 아버지는 나를 사랑하십니다, 그 이유는 제가 내 목숨 을 내려 놓고, 저는 그것을 다시 가져가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것을 내려 놓는 힘과 그것을 다시 가져가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명령을 저는 나의 아버지로부터 받았습니다
(요. 10:15, 17, 18).

그리고 내가 지워준 책임, 내 명령, 내 규례, 그리고 내 법들을… 이는 그분 자신으로부터의 계속적인 계시들을 의미한다. 다시 말하면, 시험들을 수단으로 하심 같이, 계시들을 수단으로 하여 주님께서는 신성 본질을 인간 본질에 하나되게 하셨다는 것, 이는 “내가 지워준 책임, 내 명령, 그리고 내 법들을 준수함”이라는 말들이 말씀의 모든 것들을 포함한다는 사실로부터 분명해진다; 즉, “책임”은 일반적 측면에서의 말씀을; “명령들”은 내적 측면의 사항들을; “규례들”은 외적 측면의 것들을; 그리고 “법들”은 특별한 측면 (세부적 측면)에서의 모든 것들을 뜻한다. 이것이 영원으로부터 말씀이신 주님, 그분으로 모든 이런 것들이 있음이신 주님을 서술하므로, 내적 의미에서 그분이 이런 사항들을 준수했다고 의미될 수는 없고, 그분의 인간 측면이 신성 측면과 합일하심의 상태에 있을 때, 그분이 자신에게 계시한(밝히 알림) 것이 의미된다.
이런 사항들은 이 구절을 처음 관조할 때 글자 의미로부터서 아주 먼 듯 하게, 아마 대략적 내적 의미에서 조차도 멀리 떨어져 있는 듯 나타난다; 그러나 여전한 것은, 이 구절이 인간에 의해 읽힐 때, 위 의미는 천국에서 나타난다. 이에 대하여는 여러 번 말하기도 하였다, 즉 의미가 천국을 향하여 상승함에서 글자 의미는 벗겨진다; 그리고 글자 의미 대신 또 다른 천국의 의미가 시각 안으로 온다, 이 의미들은 (지상에서의 것과) 너무나 달라서 당사자에게는 이 말씀이 지상에서의 똑같은 말씀으로부터 인지 의아해 할 정도이다. 그 이유가 천국에 있는 이들은 말씀의 모든 것들은 내적 의미에서는 주님을 취급한다고 알기 때문; 또한 주님은 세상에 계셨을 때, 신성으로부터 생각하셨다는 것, 고로 그분 자신으로부터 생각하셨다는 것, 그리고 그분 자신을 위해 신성으로부터의 계속적인 계시들을 통하여 모든 총명과 지혜를 획득하셨다는 것을 알기 때문; 고로 그들은 말씀을 가지고 이외 더 다른 사항은 지각하지 않는다. “책임, 명령, 규례, 법을 준수함”이 주님을 서술할 수는 없는 이유는 그분은 스스로 말씀이시고, 결과적으로 그분은 그분 스스로 책임, 명령, 규례, 법이셨기 때문이다; 이런 사항들은 그것들의 처음이 되신다는 측면에서, 그리고 그것들이 향해야 하는 마지막이 되신다는 측면에서 관련을 가진다. 그러므로 최고 의미에서 위 본문의 말에 의해서 의미되는 것은, 주님께서는 그분 자신으로부터 계속적인 계시들을 통하여 신성 본질을 인간 본질에 하나되게 하셨다는 것밖에 더 다른 의미는 없다.
순수 (진짜) 의미에서 “책임을 다함”은 일반적 측면에서의 말씀의 모든 것들을 의미함을; 그리고 “명령들”은 말씀의 내적인 것들을; “규례들”은 외적인 것들을; 그리고 “법들”은 특별한 측면에서의 말씀의 모든 것들을 의미한다는 것은 내적 의미에서 관조할 경우, 말씀의 많은 구절로부터 알 수 있으나 여기서는 몇 구절만 소개한다, 다윗서에서:
길에서 완전한 자에게 복있다, 그는 여호와의 법 안에서 걷는다. 그분의 증거들을 지키는 자에게 복 있다. 오 저의 길은 당신의 규례들을 지키는 쪽으로 방향을 잡고 있습니다. 저는 당신의 규례들을 지킬 것입니다; 오 저를 완전히는 버리지 마옵소서, 저의 온 심정으로 저 는 당신을 찾나이다; 오 저로 당신의 명령들을 배회하지 않도록 하여 주시옵소서. 당신의 말씀을 저는 제 심정 안에 감추었습니다, 하여 저로 당신에게 죄짓지 않으려 해서 입니다. 당신은 복되십니다, 오 여호와시여, 제게 당신의 규례들을 가르치소서. 내 입술을 가지고 저는 당신의 입으로부터의 모든 공정들을 선포했습니다. 저는 당신의 증거들의 길에서 기 뻐 환호했습니다. 저는 당신의 규례들을 묵상합니다; 그리고 당신의 길을 존중합니다. 저는 나 자신 당신의 규례에서 즐거워합니다; 저는 당신의 말씀을 잊지 않습니다. 당신의 종에게 보답하소서, 하여 저는 살고, 저는 당신의 말씀을 지킬 것입니다. 당신에게 제 입을 열어 저는 당신의 법으로부터 경이로운 것들을 바라볼는지 모릅니다. 저로부터 당신의 명령들을 감추지 마소서. 당신의 말씀에 따라 저에게 활기 띄게 하소서. 저에게 당신의 규례들을 가 르치소서; 제가 당신의 가르침들을 깨닫게 하소서 (시. 119:1-27).
위 119편의 전체를 망라해서 취급하는 주제는 말씀과 말씀에 관한 것들, 즉 “가르침들”, “규례들”, “공정들”, “증거들”, “명령들”, 그리고 “길들”이다; 그러나 이런 것들이 특별하게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글자 의미로부터서는 보여지는 것이 가능하지 않다. 이 시편 전체는 글자 의미에서는 사실상 같거나 비슷한 말의 반복인 듯한 것 그이상을 발견할 수 없다는 말이다; 그러나 내적 의미로부터서는 차이를 알게 되는데, 이쪽의 것은 “가르침”에 의해 의미되고, 아주 다른 것이 “규례들”, “공정들”, “증거들”, “명령들”, 그리고 “길들”에 의해 의미되어진다.
다시 같은 방식에서:
여호와의 법은 완전하여, 혼이 회복되게 한다; 여호와의 증거는 확실하여, 단순한 자를 슬 기롭게 만든다. 여호와의 규례들은 옳바라서, 심정으로 기뻐 환호하게 한다. 여호와의 명령 들은 순수하여, 눈을 밝게 한다. 여호와를 경외함은 깨끗하여, 영원히 서있다; 여호와의 공 정들은 진리이다 (시. 19:7-9).
그리고 열왕기상서에서:
다윗은 그의 아들 솔로몬에게 책임을 지워, 말하기를, 여호와 네 하느님의 책임을 준수하 라, 그분의 길들 안에서 걸으라, 모세의 법에 쓰여진 것에 따라, 그분의 규례들을, 그리고 그분의 공정들을, 그리고 그분의 증거들을 준행하라 (왕상. 2:3).
“책임을 준행함”은 일반적 측면에서의 말씀의 모든 것들을 표시한다, 그 이유가 이것이 위 구절의 시작 장소에서 언급되기 때문, 그리고 덜 일반적인 것으로 뒤를 잇고 있다; 그 이유가 “책임을 준행함”은 “준행되어져야 하는 것을 지킴”과 같은 말이기 때문이다. 모세의 책에서:
너는 여호와 네 하느님을 사랑할 것이다, 그리고 그분이 지워준 책임을, 그리고 그분의 규 례들을, 그리고 그분의 공정들을, 그리고 그분의 명령들을 언제나 준행하라 (신. 11:1);
위에서 “그분이 지워준 책임”, 또는 지켜져야 하는 것을 준행함도 일반적 측면에서의 말씀의 모든 것들을 표시한다; “규례들”은 의식들이나 내적 의미로부터의 표현과 의미된 것들과 같은 사항들인 외적인 것들을 준행함을; 그러나 “명령들”은 말씀의 내적인 것들을, 즉 생활과 교리로부터의 것들, 특별히 내적 의미로부터 있는 것들을 준행함을 의미한다. “명령들”과 “규례들”에 관하여는 주님의 신성한 자비로부터 별도로 취급할 예정이다.

6, 7절. 그리고 이삭은 그랄에 거주하였다. 7 그리고 그 곳의 사람이 그에게 그의 여인에 관하여 물었다. 그리고 그는 말했다, 그 여자는 나의 누이이다, 그 이유는 그녀가 나의 여인이다 라고 말하는 것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그 곳의 사람들이 리브가로 인해 자기를 죽이지 않도록 하려 해서 때문이었다. 그 이유는 그녀는 바라보기에 아름다웠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삭은 그랄에 거주하였다. 이는 인접되기 위해 있었던 합리적인 것들에 적절한 신앙으로부터의 것에 관한 주님의 상태를 의미한다. 이는 “그랄에 거주함”의 의미가 신앙으로부터 있는 것들 안에 있는 것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고로 이런 것들에 관한 상태를 말한다; 그 이유가 “거주한다”는 것은 사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 그리고 “그랄”은 신앙으로부터 있는 것들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삭이 신성한 합리성 측면에서의 주님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것이 인접되기 위해 있었던 합리적인 것들에 적절하다는 뜻은 이 구절의 전과 후에 이어지는 문맥상에서 파악된다; 그 이유가 이 26장은 주님이 그분 속의 신성에 의해 계발되실 때, 진리의 나타남이 있다는 것을 취급하기 때문이다.
“거주한다”는 것은 존재하는 것, 사는 것, 고로 상태를 표시하기 때문이다는 것은 말씀의 많은 구절들로부터 분명해진다. 다윗서에서:
나는 날들의 길이 동안(평생 동안) 여호와의 집에 거주할 것입니다 (시. 23:6). 내가 여호 와께 묻는 한 가지 것을 나는 추구할 것인데; 즉, 내가 여호와의 집에서 내 삶의 모든 날들 을 머물게 하는 것이다 (시. 27:4). 사기쳐 일하는 자는 내 집의 한 가운데에 거주하지 못 한다 (시. 101:7);
“여호와의 집에 거주함”은 사랑의 선 안에서 있음과 사는 것을 표시한다, 그 이유가 이것이 “여호와의 집”이기 때문이다.
이사야서에서:
죽음의 그림자의 토지에 거주하는 그들, 그들 위에 빛이 비추었다 (이. 9:2);
“죽음의 그림자의 토지에 거주하는 그들”은 선과 진리의 무지함에 있는 이들의 상태를 표시한다.
다시:
바벨은 영원히 살지 못할 것이다 (이. 13:20);
“바벨”이라는 이들의 상태는 지옥에 떨어지는 상태임을 표시한다.
다시:
오 거룹들 (사이)에서 사시는 이스라엘의 하느님 여호와 (이. 37:16); 오 거룹들 (사이)에 서 살고 계신 이스라엘의 목자, 빛을 비추이신다 (시. 80:1);
“거룹들 (사이)에서 사심”은 주님에 의해 준비되지 않으면, 누구도 사랑과 신앙의 거룩한 것들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도록 하시는 섭리 측면에서의 주님을 말한다 (308항). 다윗서에서:
평화 안에서 나는 나를 드러누이고 잠들게 할 것이다, 그 이유가 당신 여호와만이 나를 안 전함에서 살게 하시기 때문이다 (시. 4:8);
“안전함에서 살게 만드심”은 평화의 상태를 의미한다. 예레미야서에서:
오 많은 물들 위에 거주하고, 보물이 가득한 너, 너의 끝장이 온다, 네 소득의 분량
(예. 51:13);
바벨에 관하여서이다; “많은 물들 위에 거주함”은 진리에 관한 지식들이 있음을 표시한다.
다니엘서에서:
하느님 자신께서 깊고 비밀한 것들을 밝히 알리십니다, 그분은 어둠 안에 있는 것을 아시 고, 그리고 빛이 그분과 함께 거주합니다 (단. 2:22);
“거주함”은 있음을 표시한다. 다시 다니엘서에서:
이 나무 아래 들판의 짐승이 그림자를 가졌다, 그리고 하늘의 새가 거기로부터의 가지들에 거주한다 (단. 4:12).
그리고 에스겔서에서:
그것의 가지들 아래 들판의 들짐승이 새끼를 낳고, 그리고 그것의 그림자에서 모든 큰 나 라들이 거주한다 (겔. 31:6);
위에서 “거주함”은 있음과 사는 것을 표시한다. 호세아서에서:
타작 마당과 포도즙틀이 그들을 먹이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새 포도주는 떨어질 것이다. 그들은 여호와의 토지에서 거주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에브라임은 이집트로 돌아갈 것 이다 (호. 9:2, 3);
“여호와의 토지에서 거주하지 않음”은 사랑의 선의 상태 안에 있지 않는 것, 결과적으로 주님의 왕국 안에 있지 않는 것을 표시한다.

그리고 그 곳의 사람들이 그에게 그의 여인에 관하여 물었다. 이는 인간들이신성한 진리에 관하여 조사함을 의미한다. 이는 “묻는다”의 의미가 조사함이다로부터; 그리고 “그 곳의 사람들”, 즉 “그랄”의 의미가 신앙 속의 교리적인 것들 안에 있는 이들이다로부터; 그리고 여인, 즉 리브가의 의미가 주님의 신성한 합리성 속의 신성한 진리이다로부터. 이 장의 앞 부분에서, 진리의 나타남이 취급되었었는데, 거기서 진리의 나타남은 주님으로부터 신성의 유입을 수단으로 인간의 합리적인 것들에서 있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취급된 주제는 이런 나타남들을 받아들임 이다; 먼저, 신앙의 교리적인 것들 안에 있는 이들에 의해서, 그리고 이들이 “그 곳의 사람들”, 또는 그랄의 사람들에 의해 뜻해진다는 것, 그리고 이들은 영적 (평면의) 인간이라 불리우는 이들의 첫 계층에 속하는 이들이다; 그 이유가 영적 인간은 천적 인간처럼 지각하지 못하기 때문, 그리고 상대적으로 희미함의 상태에 있기 때문이다, 하여 (그들은 희미한 상태, 즉 확실한 상태에 있지 않은 관계로) 그들은 어떤 것이 그렇게 있는 지에, 또한 그것이 신성한 진리인지를 조사하는데, 그들에게 진리처럼 나타나는 것이 주어진다, 그리고 이 나타남은 합리성에 따라서, 즉 그들의 납득력에 따라서이다. 그 이유가 이 방법에서 그들이 받아지기 때문이다. 각각의 인물은 그가 진리들을 납득한 대로 같이 진리들을 받도록 허용되어진다; 그렇지 않으면 인정할 이유도 없고 받아질 이유도 만무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여기서 지금 취급된다.

그리고 그는 말했다, 그 여자는 나의 누이이다. 이는 합리적인 진리를 의미한다. 이는 “누이(sister)”의 의미가 합리적인 진리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합리적인 진리를 수단으로 뜻해지는 것은 납득력에 따라 진실이라고 나타나는 것, 또는 합리성 앞에서 나타나는 것을 말하는데, 방금 위에서 말한 바와 같다. 이삭이 리브가가 자기 누이이다고 말한 것은 비밀들에 속한다; 마치 아브라함이 사라가 자기 누이이다고 말했던 것, 처음에는 이집트에서 (창. 12:11-13, 19), 그리고 나중에는 그랄에서(창. 20:2, 5, 12) 있었던 사건이 비밀들에 속하는 것과 같다. 이 세 번의 사건은 거의 같은 것을 포함하는데, 앞의 구절들에서 설명되었으므로 거기를 참조하면 될 것이다; 똑같은 일이 세 번 발생했다; 그리고 세 번씩이라는 말이 말씀에서 관련되는 것은 그 사건 안에는 가장 큰 중요성(moment)에 속하는 비밀이 있다는 말이다, 즉 그 사건 안에는 내적 의미 외에는 누구에게도 알려질 수 없는 비밀이 있다는 것이다; 이 비밀들이 무엇인지 이어지는 대목에서 나타난다.

그 이유는 그는 그녀가 나의 여인이다 라고 말하는 것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그 곳의 사람들이 리브가 때문에 자기를 죽이지 않도록 하려 해서 때문이다. 이는 (지상에서의) 주님은 신성한 진리들 자체를 여실 수 없으셨는데, 그 이유는 신성한 선이 받아 들여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는 “말함이 두렵다”의 의미가 열 수 있지 않다로부터; 그리고 “여인”, 즉 여기서는 리브가의 의미가 신성한 진리 측면에서의 주님의 신성한 합리성이다로부터; “나를 죽인다”의 의미가 선이 받아들여지지 않음이다로부터; 그 이유가 “나”인 이삭에 의해 주님의 합리성 속의 신성한 선이 표현됨으로부터, 그 이유가 선이 받아들여지지 않을 때, 선은 무가치하게 만들어지는 바, 이는 선이 죽임을 당하는 것, 또는 멸해지는 것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 그리고 “그 곳의 사람들”의 의미가 신앙의 교리적인 것들 속에 있는 이들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상의 각각의 내적 의미 파악으로부터 이제 나타나는 바는, 만일 신성한 진리들 자체가 열어지기로 한다면(노골적으로 알려진다면), 그 진리들은 신앙의 교리적 (수준에) 머물고 있는 이들에 의해 받아지지 않을 것이다는 것, 그 이유는 이 진리 자체는 그들의 모든 납득력 수준을, 고로 그들의 모든 믿음의 수준을 훨씬 넘어 있기 때문, 결과적으로 주님으로부터의 어떤 선도 흘러들 수 없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주님으로부터의 선, 또는 신성한 선은 오직 진리들 안으로만 흐를 수 있기 때문, 이는 자주 말해왔다.
진리들 또는 진리의 나타남들이 인간에게 주어진 것은 신성한 선이 인간의 이해력을, 고로 인간 자신을 만들어 낼 수 있을런지 모른다는 의도 때문이다. 그 이유가 진리들은 선이 흘러들지 모른다는 목적쪽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릇들이나 저장소가 없으면 선은 있을 곳이 없는 셈이다 (따라서 흘러들지 못한다). 선은 그 선에 걸맞는 진리의 그릇을 발견해야 한다. 고로 진리들이 없는 곳, 또는 진리들이 받아지지 않은 곳에는 합리성, 또는 인간의 선도 없고, 결과적으로 인간은 영적 생명을 가지지도 못한다. 그러므로 인간이 진리들을 가질 수 있기 위하여, 그리하여 영적 생명을 가지는 계기를 갖기 위하여 진리의 나타남(껍데기, 외관)은 각자의 납득력에 따라 모든 이 각자에게 주어져 있다; 이 나타남이 비록 진리 자체는 아니나 진리로서 당사자에게 인정되어진다. 하여 그 수준에서 신성한 것들이 그것들 안에 있을 수 있게 된다.
이 나타남들이 무엇인지, 이것들이 신성으로부터의 진리들 대신 인간이 사용한다는 것을 알기 위해 예를 들어 보자. 이렇게 말해진다면, 즉 천국에는 장소에 대한 생각이 없다는 것, 고로 거리가 없다는 것, 그것 대신 상태에 관한 생각이 있다고 말해지면, 이것은 인간에 의해 납득됨이 가능해질 수 없다, 그 이유가 이런 말을 듣는 인간에게 거기는 서로 구분되는 것이 전혀 없을 것이 아닌가, 고로 모든 것이, 즉 모 든 것은 하나 안에, 다함께 하나 안에 있다는 것이 거절되고 만다; 그럼에도 거기서는 모든 것이 완벽히 구분되어 같은 것이 하나도 없다. 이로부터 분명해지는 바, 말씀에서 말해지는 장소들과 공간들, 또는 그것들로부터, 그것들을 수단으로 말해지는 무엇이든 그것은 진리의 나타남들이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이와 같은 나타남들을 수단으로 말해지지 않으면, 이런 장소, 공간에 관련되는 등등의 사항들은 전혀 받아지지 않을 것이고, 아마 (말씀 안의) 어떤 것도 받아지지 않을 것이다; 그 이유가 그가 세상 안에 있는 한, 즉 시간과 공간 안에 있는 한, 시간과 공간에 대한 생각은 인간의 생각들의 일반적, 특수적, 개별적 측면 모두에서 인간의 전부로서 군림하기 때문이다.
말씀의 언어는 공간의 나타남들에 따라 있다는 것은 말씀 안의 모든 것으로부터 나타난다; 마태복음서에서:
예수께서 물으시어 말하시기를, 다윗이 이렇게 말한 대목을 어떻게 생각하느냐? 즉 주께서 내 주에게 말하셨다, 너는 내가 네 적을 네 발판으로 만들 때까지 내 오른쪽에 앉으라
(마. 22:43, 44);
위에서 “오른편에 앉는다”는 것은 장소를 염두함으로부터, 고로 나타남에 따라서인데, 그럼에도 여기서 묘사된 것은 주님의 신성한 권능의 상태이다. 다시:
예수께서 말하셨다, 이제부터 너희는 권능의 오른편에 앉아 있고, 그리고 하늘의 구름들 위 에서 오는 사람의 아들을 볼 것이다 (마. 26:64);
“오른편에 앉음”, 또한 “구름들 위에서 오심”도 인간과 더불은 장소에 관한 생각으로부터 파생된 것이다; 그러나 천사들에게는 주님의 권능에 대한 생각을 가지게 한다. 마가복음서에서:
세배대의 아들들이 예수에게 말했다, 당신의 영광에서 저희들 중 하나는 당신의 오른편에, 또 하나는 당신의 왼편에 앉게 하여 주십시오.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내 오른편에, 또는 왼 편에 앉는 것은 내가 주는 것이 아니다, 그것이 준비되어 왔던 이들을 위하여 (주어질 것 이다) (막. 10:37, 40).
위로부터 분명해지는 바, 주님의 왕국에 관해 제자들이 어떤 종류의 생각을 가졌는지를 알게 한다. 즉 그들은 (왕좌의) 오른편, 왼편을 생각했다는 것이다. 하여 주님 역시 그들의 납득력에 따라, 즉 그들에게 주님이 말하셨던 왕국이라는 단어의 나타남에 따라 대답도 그것에 걸맞게 해주신 것이다.
다윗서에서:
그분은 그분의 침실로부터 나오는 신랑으로 계신다, 그리고 그의 진로를 달려가는 힘센 사 람으로 기뻐 환호하신다. 그분의 나가심은 하늘의 끝으로부터 이고 한바퀴 돌아 하늘의 끝 으로 까지이다 (시. 19:5, 6);
위는 주님에 관해 말해지고, 신성한 권능의 상태가 공간 속에 있는 것 같이 묘사되고 있다. 이사야서에서:
네가 하늘로부터 떨어지고 말았구나, 오 루시퍼, 새벽의 아들아! 너는 네 심정에서 말했다, 나는 하늘로 올라갈 것이다, 나는 내 왕좌를 하늘의 별들 너머로 드높일 것이다; 나는 높은 구름 너머로 상승할 것이다 (이. 14:12, 14);
“하늘로부터 떨어짐”, “하늘로 상승함”, “하늘의 별들 너머로 왕좌를 드높임”, “높은 구름 너머로 상승함”, 이 모든 것은 거룩한 것들을 모독하는 자기 사랑을 묘사하고 있는데, 이 모두는 공간 또는 장소에 관한 생각과 나타남으로부터 파생되고 있다. 천적인 것, 영적인 것들이 인간에게 나타나는 것과 같은 것을 수단으로, 그런 것들에 따라서 인간 앞에 표출되는 까닭에, 천국은 우리에게는 높은 쪽에 있는 것으로 묘사되지만, 실상 높은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적인 것 안에 있다.

그 이유는 그녀는 바라보기에 아름다웠기 때문이다. 이는 그것의 존재가 신성이라 불리울 경우 쉽게 받을런지 모른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바리보기에 아름다웠다”의 의미가 그것의 형체를 수단으로 즐거워함, 고로 쉽게 받아들인다로부터 분명해진다. 여기서 취급되는 이들은 신앙의 교리적인 것들 안에 있는 이들, 그리고 선으로부터 진리를 지각함을 가지지 않은 이들, 오직 부모나 선생을 통해 가르쳐진 바로부터 진리로부터의 양심만을 지닌 이들이다. 이들이 본문에서 “그 곳의 사람들”, 또는 그랄 지역에 있는 이들이다. 이와 같은 인물들과 더불어 진리로부터의 첫 확증함은 그것이 신성으로 불리는 것이다, 그 이유가 그때 그들은 즉시 거룩한 것에 대한 생각을 가지기 때문, 이 생각은 그들이 설사 말씀의 모든 것을 미처 납득하지 못한 상황에서조차 말씀에서 서술되는 모든 것을 두고도 확증한 듯한 생각, 즉 보편적인(일괄적으로) 확증을 갖게 하는 효과가 있다. 어쨌든 서술되는 것은 반드시 그들의 납득력에 적응하여야만 한다; 그 이유가 인간은 어떤 것이 존재하는 것을 아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어떤 것이 무엇인지를, 어떤 것의 본성이 무엇인지를 알고 싶어 한다, 이는 그가 알므로 해서 그의 지적 부분을 위해 어떤 확증을 발견하려 해서 이다. 그리고 이로부터 되돌아 다시 확증한다. 만일 이런 식으로 있지 않으면, 어떤 것이 설득되어 기억 안으로 들어오기까지는 될는지 모르나 그것은 기억 안에서 죽은 것, 단지 들었던 소리일 뿐이다. (되돌아 자신 스스로 사용되지 못한다); 그리고 어떤 근원으로부터 확증하는 것들은 기억 안에 고정시키지 않으면, 그것은 단지 메아리쳐 울린 소리 같이 사라지고 만다.

8, 9절. 날들이 거기서 그를 오래 끌고 가던 참에 불레셋의 왕 아비멜렉이 창문을 통하여 밖을 보았다, 그리고 보았다, 그리고 보라 이삭이 그의 여인 리브가와 더불어 웃고 있었다. 9 그리고 아비멜렉은 이삭을 불렀다. 그리고 말했다, 확실한 바, 보라 이 여자는 네 여인이다, 그리고 어떻게 너는 그녀가 자기 누이라고 말하느냐? 그리고 이삭이 그에게 말했다, 내가 말했던 이유는 내가 그녀 때문에 죽지 않도록 하려 해서 이오.

그리고 날들이 거기서 그를 오래 끌고 갔다. 이는 영접하는 상태를 의미한다. 이는 “거기서 그를 오래 끌고 갔다”의 의미가 이삭에 의해 표현된 신성한 선이 거기에 얼마 동안 있었을 때, 진리가 받아진 것이다로부터 (그 이유가 내적 의미에서 영적 평면에 의해 진리가 영접됨이 취급되기 때문); 그리고 “날들”의 의미가 상태들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불레셋의 왕 아비멜렉이 창문을 통하여 밖을 보았다, 그리고 보았다. 이는 지식들 안에서 합리적인 것을 찾는 신앙 속의 교리를 의미한다. 이는 아비멜렉의 의미가 합리적인 것을 찾는 신앙 속의 교리이다로부터; “불레셋의 왕”의 의미가 교리적인 것들이다로부터; 그리고 “창문”의 의미가 지적 능력이다로부터, 결과적으로 내적 시각, 그 이유가 원래 “창문들”의 의미가 내적 시각이었기 때문이다 고로 “창문을 통하여 바라보는 것”은 내적 시각을 수단으로 나타나는 이런 것들을 지각하는 것, 이 수단은 일반적으로 외적 인간 속에 있는 것인 지식들이다. 합리적인 것들, 또는 같은 말로 진리의 나타남들, 즉 영적 평면으로부터의 진리들은 지식들이 아니고, 지식들 안에 있다, 그 이유가 진리들은 합리성에, 고로 내적 인간에 속하기 때문이다. 지식들은 자연적 인간 속에 있기에, 그것들은 합리적인 것들을 받는 그릇들이다.
“창문들”이 내적인 시각으로부터의 것들, 즉 이해력으로부터의 것들을, 한마디로 지적인 것들을 의미하는 것은 앞에(제 1권) 첨가된 말씀의 인용 구절로부터 분명해진다; 그리고 몇 구절을 추가해보겠다. 요엘서에서:
그들은 도성을 이리저리 달려다닐 것이다, 그들은 (성)벽 위에서 달릴 것이다, 그들은 집들 안으로 기어오를 것이다, 그들은 도둑같이 창문들을 수단으로 들어올 것이다 (욜. 2:9);
교회의 마지막 날들 속의 악들과 거짓들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다; “집들 안으로 기어오름”은 의지 측면의 선들을 파괴함을 표시한다; 그리고 “창문을 수단으로 들어감”은 이해력 속에 있는 그들의 지식들과 진리들을 파괴함을 표시한다. 스바냐서에서:
여호와께서 그분의 손을 북쪽 위에로 뻗치실 것이다, 그리고 앗수르를 멸하신다; 목축들이 그녀의 한 가운데에 드러누울 것이다; 갖가지 종류의 모두 각각의 야생 동물이, 펠리칸 (pelican)과 물수리 (osprey)가 거기로부터의 석류나무에서 밤을 지낼 것이다; 음성이 창문 들에서 노래할 것이다, 가믐이 문지방 위에 있을 것이다, 그 이유는 그가 삼나무를 발가벗 겼기 때문이다 (습. 2:13, 14);
위에서는 “앗수르”인 추론을 수단으로 신앙의 진리들의 파멸이 취급되고 있다; “음성이 창문들에서 노래할 것이다”란 진리의 황무해짐, 즉 진리에 관한 지적 능력이 황무해짐을 의미한다.
사사기서에서:
창문을 통하여 그녀는 앞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시스라의 어머니가 격자(창)를 통하여 소 리쳤다, 왜 그의 병거가 오는데 이리 오래 걸리는가? (사. 5:28);
위는 영적 평면의 교회의 소생에 관한 드보라와 바락의 예언 중 일부이다: “창문을 통하여 앞을 바라봄”은 진리들을 부정하는 이들, 고로 교회 속에 있는 것을 파괴하는 이들의 추론함을 통하여를 표시한다; 그 이유가 이와 같은 추론들이 반대적 의미에서의 지적 능력이다. 예레미야서에서:
정의 없이 자기 집을 짓는 자, 공정 없이 자기 침실을 짓는 자에게 화있을 것이다; 하여 말 하신다, 나는 나에게 방이 많은 집, 공간이 넓은 집을 지을 것이다; 그리고 그에게(집에서) 창문들을 도려낸다; 그리고 삼나무로 천정을 만든다, 그리고 주홍색으로 페인트칠을 할 것 이다 (예. 22:13, 14);
“정의 없이 집을 짓는 것 그리고 공정 없이 침실들을 짓는 것”은 선하지 않은 것, 진리이지 않은 것으로부터 종교적 체계를 세우는 것을 표시한다; “집에 창을 내고, 삼나무로 천정을 하고, 주홍으로 도색을 하는 것”은 지적 진리, 영적 진리를 거짓화함을 표시한다. 예루살렘에서 성전의 창문들은 지적인 것에 속하는 것, 고로 영적인 것들에 속하는 것밖에 더 다른 것은 표현하지 않는다. 마찬가지가 에스겔서에서 묘사된 새 성전의 창문들에 의해 의미된다 (겔. 40:16, 22, 25, 33, 36; 41. 16, 26); 아마 누구이든, 예언서에서 말해지는 새 성전, 새 예루살렘, 그리고 새 땅이 주님의 왕국이다는 것을 알 것이다; 고로 그것들에 관련하여 언급된 것들은 그분의 왕국에 속하는 것들이다.

보라 이삭이 그의 여인 리브가와 더불어 웃고 있었다. 이는 신성한 선이 신성한 진리에 현존하고 있었다, 또는 신성한 선이 신성한 진리에 인접되어 있었다를 의미하는데, 이는 이삭이 주님의 합리성에 있는 신성한 선을 표현한다로부터; “웃다”의 의미가 사랑 또는 진리에 대한 애착이다로부터; 그리고 리브가의 표현이 주님의 합리성의 신성한 진리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상으로부터 분명해지는 바, “이삭이 그의 여인 리브가와 더불어 웃는다”는 신성한 선이 신성한 진리와 더불어 현존하였다가 의미된다는 것이다. 시리즈에 있는 단어들의 의미는 처음에서는 영적 진리가 그것이 신성이다는 이유로 받아진 것; 그리고 후에 신성이 그것 안에 있기 때문에, 이것은 거듭나아지는 이들, 그리고 영적 평면의 교회인이 되어가는 이들에 의해 보여지고 있다. 이들은 “아비멜렉”에 의해 뜻해진 이들이다; 즉, 신앙의 교리 안에 있는 이들, 그리고 지식들에서 합리적인 것을 찾는 이들이다.

그리고 아비멜렉이 이삭을 불렀다, 그리고 말했다. 이는 교리로부터 주님께서 지각하심을 의미한다. 이는 아비멜렉의 표현이 합리적인 것을 찾는 교리이다로부터 ; 그리고 이삭의 표현이 주님의 신성한 합리성이다로부터; 그리고 “말함(saying)”의 의미가 지각하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리고 “아비멜렉”이 신성이 지금 지각되어진 교리인 바, 그러므로 아비멜렉에 의해 이 교리 측면의 주님 또한 표현되었다. 그 이유가 최고 의미에서 말씀에 있는 모든 것들은 일반적, 세부적 측면 모두에서 주님에 대한 계시를 지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주님이 교리 자체, 즉 말씀 자체, 말씀 안의 최고 의미에서 뿐만 아니라, 내적 의미에서도, 또한 글자 의미에서 조차도 그러한데, 그 이유는 글자 의미가 내적 의미를 표현해주고 의미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적 의미는 최고 의미를 표현하고 의미를 담고 있다; 그리고 말씀에서 표현되고 의미하는 것들은 그것의 본질 안에서 표현되어진 것, 의미되어진 것, 고로 그것은 주님의 신성이다; 그 이유가 표현은 표현되어진 것의 형상밖에 더 아니기 때문이다. 말씀은 형상 안에서 주님이 눈에 보이게 표출된 것이다. 이것은 인간의 언어, 몸짓 등으로부터도 확인된다. 이런 것들은 인간 내부, 즉 그의 생각과 의지에서 생겨나는 것들의 형상일 뿐이다, 하여 그의 말과 제스츄어는 형체로 있는 생각과 의지이다; 만일 이것을 당신에게서 거두어 가버린다면, 당신에게 남는 것은 생명 없는 잡동사니, 인간이 아닌 것이다. 이것은 어떻게 말씀과 더불어서도, 글자에서조차 그러한 바, 글자 또한 신성하다.

확실한 바, 보라 그녀는 네 여인이다, 그리고 어떻게 너는 그녀가 자기 누이라고 말하느냐? 이는 만일 신성한 진리이다면, 이 진리는 합리성이 아니었다를 의미한다. 이는 “여인”, 여기서는 리브가의 의미가 주님의 신성한 합리성의 신성한 진리이다로부터; 그리고 “누이”의 의미가 합리적 진리이다로부터; 고로 “보라 그녀는 네 여인이다, 그리고 어떻게 너는 그녀가 내 누이라고 말했느냐?”는 진리가 신성이기 때문에, 그것은 합리성일 수 없다를 의미한다.
이 비밀함과 더불은 경우는 이렇다: 영적 인간, 즉 천적 인간이 가지는 지각을 가지지 않은 영적 인간은 거듭나는 인간과 더불어 신성한 진리가 합리적 진리로 어떻게 되는지를 모른다. 그들이 실로 말하는 것은, 모든 선과 진리는 주님으로부터 이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이런 것들은 합리성 안에서 세상 밖으로 알려지기에, 그들은 그것들을 자기들 자신이라고, 마치 자기들 자신으로부터 있는 듯하게 상상한다; 그 이유가 영적 수준의 인간은 그들의 자기 자신으로부터 분리될 수 없기 때문, 그리고 그들의 자기 자신이 그것을 그렇게 뜻한다; 이 경우가 천적 수준의 인간과 더불어서, 그들은 합리성에서 신성한 선과 진리를 지각한다, 즉 주님의 신성에 의해 계발될 때, 진리의 나타남인 합리성 안에서 지각한다는 말이다. 천적 인간은 자연 평면에서 조차, 즉 감각과 기억 속의 지식 속의 것들에서조차 지각한다; 그리고 천적 인간이 이런 상태이기에, 그들은 모든 선과 진리는 주님으로부터 흘러든다고 인정할 수 있는 것이다, 동시에 주님에 의해 그들로 자기 것이 되게 한 모든 선과 진리에 대한 지각력이 있다, 그리고 이것이 그들의 즐거움, 축복됨, 행복을 구성한다. 천적 인간이었던 태고인들은 자기들의 눈으로 보았던 모든 대상물에서 천적이고 영적인 것들밖에 더 이상 지각한 것이 없었다.
이 대목에서는 거듭나는 영적 수준의 인간이 취급된다, 즉 그는 주님으로부터 거듭남을 통하여 새로운 의지 안에 신성한 선을, 새 이해력 안에 신성한 진리를 받는다; 그리고 이런 인물들은 여하한 지각도 가지지 않는다. 하여 앞에서 말했듯이, 만일 진리가 합리성이다면 그것은 신성일 리가 없다는 것, 고로 만일 그것이 신성이다면 그것은 합리성인 것과 더불어 공통되는 것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는 것, 그러므로 여기서 말해지는 것은, 만일 이것이 신성한 진리이다면, 그것은 합리성 역시 아니다 이다. 이것과 비슷한 것은 우리 주변에도 널려져 있다. 즉 신앙에 관한 것들은 간편하게, 단순하게, 순박하게(simplicity) 믿어지기를 바라는 인물들이 우리 주변의 교회 안에서 우세해져 있는 모습이다. 그들은 신앙에 관한 것들을 합리적 부분의 광장으로 끌어내는 것인 정신적 관조함도 없이, 또는 신앙의 가장 깊은 비밀한 것을 (생각하려니 아는 것도 부족하고, 알려고 이리저리 찾는 것도 귀찮고 하니, 내 교회 지도자가 말해준 것만 가지는 신앙의 수준에 만족해 결말을 쥔 교인들처럼, 역자주.) 알아차림 없이, 또는 어떤 합리적 생각 없이 어떤 인간에 의해 납득된 (엉터리 막무가내식) 결론 때문에 자연적 수준에서의 말씀에서조차 자신이 지닌 신앙의 것들이 무슨 품질인지조차 모르는 채로 있지만, 실상 그렇게 있는 것이 신앙이라고 믿기를 바라고도 있다. 이런 간편, 단순한 자들의 신앙은 명료한 알아채림은 없어 답답하지만 이것이 그러한지를 부정적 시각에서 추론해대는 이들에 맞서 자신들을 보호하는데는 약효를 발휘할 경우도 있어 나름대로 이점도 있다. 그러나 이것이 그러하다고 확언하는 이들의 경우, 신앙 속의 것들을 명료하게 알아차림이 없을 경우, 피해를 입는다, 즉 그들은 생각의 자유함을 누군가에게 맡겨버린 상태, 또는 인간 속의 내적, 외적인 것 모두에서 지배를 당하는 기로에 있어 가장 높은 수준에서 이교적인 것에 자신의 양심을 맡긴 것, 즉 양심을 소경되게 한 것이기에 상해를 당할 수밖에 없다. 이것이 본문, “보라 그녀는 네 여인이다, 그리고 어떻게 너는 그녀가 네 누이라고 말했는가?”에 의미되어 있다.

그리고 이삭이 그에게 말했다, 내가 말했던 이유는 내가 그녀 때문에 죽지 않도록 하려 해서 이오. 이는 그것은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을 의미한다. 이는 앞 대목에서, 즉 “그는 그녀가 내 여인이라고 말하는 것이 두려웠기 때문에; 그 곳의 사람들이 리브가 때문에 나를 죽이지 않도록”에서 말한 설명으로부터 분명해진다. “말한다”의 의미는 지각하는 것, 생각하는 것인데, 여타 장소보다 여기서가 더 잘 의미를 부각하고 있다.

10, 11절. 그리고 아비멜렉은 말했다, 네가 우리에게 이렇게 행동하다니 어찌됨이냐, 백성 중 하나가 네 여인과 쉽사리 드러누울 뻔 했지 않느냐, 그리고 너는 우리에게 죄를 짓게 할 뻔 했지 않느냐? 11 그리고 아비멜렉은 모든 백성에게 명령하여, 말하기를, 이 사람과 그의 여인을 건드리는 자는 정녕 죽을 것이다.

그리고 아비멜렉은 말했다, 네가 우리에게 이렇게 행동하다니 어찌됨이냐? 이는 분개함을 의미한다. 이는 설명이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백성 중의 하나가 네 여인과 쉽사리 드러누울 뻔 했다. 이는 신성한 진리가 섞음질을 당하여 모독되어질 뻔 했음을 의미한다. “함께 드러누움”의 의미가 타락됨, 또는 섞음질함이다로부터; “백성 중의 하나”의 의미가 영적 평면의 교회의 어떤 하나이다로부터; “여인”, 여기서는 리브가의 의미가 신성한 진리이다로부터; 그리고 “죄지음”의 의미가 진리의 모독이라는 죄를 덮어씀이다로부터; 하여 “백성 중의 하나가 네 여인과 쉽사리 드러누울 뻔하여, 우리에게 죄지음을 덮어쓰게 할 뻔 했다”에 의해서는 교회 속의 누군가 하나가 신성한 진리에 섞음질을 쉽게 해버려, 자신 위에 진리의 모독의 죄를 덮어씀이 의미되어진다. 앞 대목에서 말한 것, 즉 아브라함은 두 번 그의 아내 사라를 누이라고, 처음에는 이집트에서, 그 다음은 아비멜렉과 더불은 그랄에서 였다. 이삭 역시 그랄에서 아비멜렉과 더불어 그의 여인을 자기 누이라고 했다; 이렇게 같은 말을 세 번 말씀 안에 기록한 것에는 그 안에 어떤 비밀한 깊은 것이 있음이 틀림 없다. 이 비밀 자체는 내적 의미에서만 보여진다, 즉 “누이”에 의해 합리적 진리가, 그리고 “여인”에 의해서는 신성한 진리가 의미된다; 그리고 신성한 진리(여인)가 합리적 진리(누이)라고 불리운 것은 신성한 진리(여인인 리브가)가 섞음질되지 않도록, 고로 모독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진리의 모독함에 주목해보면, 이렇다: 신성한 진리는 그것을 처음 인정했던 이들에 의해서 외에는 모독됨이 가능해질 수 없다; 그 이유가 인정함과 믿음에 의해 진리 안으로 처음 들어왔던 이들, 그리하여 이것을 전수하기(가르치기)를 해왔던 이들, 그 후에 그것으로부터 물러날 때, 그 후에도 이 진리는 그들에게 각인되어 그들 내부에 계속적으로 남아 있다. 하여 이 진리는 악과 거짓과 더불어 상기되어 진다; 이로 인해 진리가 악과 거짓에 들러붙음으로 해서 진리가 모독되어진다. 이런 경우 이들은 자신 안에서 모독을 정죄함을 계속적으로 가진다; 고로 이것은 그들 자신의 지옥이다; 그 이유가 지옥에 속한 자들은 선과 진리가 있는 영역에 접근할 때, 그들은 즉각 그들 자신의 지옥을 감지할 수 있다. 그 이유는 그들이 증오하는 것이 선과 진리이므로 결과적으로 선과 진리의 영역에서는 스스로 고통을 자초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진리를 모독한 이들은 그들을 고통받게 하는 것과 더불어 계속적으로 살아간다, 게다가 모독한 등차에 따라서 강도도 다르다. 이런 이유 때문에 신성한 선과 진리는 모독되지 않도록 주님에 의해 가장 특별히 섭리하신다; 그리고 더 특별한 것은, 모독을 저지를 수밖에 없는 인간들은 가능한 진리와 선을 인정하고 믿는 것으로부터 멀어져 있게 보류하시는 섭리이다; 그러므로 처음 인정하고 믿는 자(아마 맛보기에 불과한 아주 단순한 인정과 믿음의 수준, 역자주) 외에는 아무도 모독할 수 없을 것이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런 이유에서 야곱의 후손들인 이스라엘족들과 유대인들에게 내적인 진리들이 드러나지지 않았다, 하여 그들은 인간 안에 어떤 내적인 것이 있다는 것을 전혀 몰랐고, 따라서 내적 예배는 전무했다; 그리고 그들에게는 사후 삶에 관해, 주님의 천국 왕국에 관해 말해지지 않았다; 또는 그들이 기대했던 메시아에 관해서도 말해지지 않았다. 그들의 인간적 품성의 특성상 만일 그들에게 위의 사항들에 관해 말해졌다면, 그들은 필시 모독하고야 말 것임이 예견된 이유 때문이었다. 이 인류가 원하는 것은 지극히 지상적인 것들밖에 없었다; 그들이 이런 품성을 지녔기에 그들에게 허용된 것은 완전하게 믿음 없음이다; 그 이유가 그들이 조금이나마 한 때 인정하고 믿다가 모독할 경우, 그들에게 와지는 것은 가장 비통한 지옥들이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선의 어떤 것도, 자연적 수준의 선조차도 남아 있지 않을 때까지 말씀의 내적인 것을 밝혀주지 않으셨고, 세상에 오시지도 않으셨던 것이다, 그 이유가 그들은 내적 인정함과 더불어 어떤 진리를 더 이상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진리를 받는 것이 선이기 때문), 이렇게 해서 그들은 그것들을 모독할 수 없었다. 진리를 받는 선이 전혀 없는 상태가 예언서 등등에서 “시간이 가득해짐”, “시대의 극점(종말)”, 그리고 “마지막 날” 등의 말에 의해 뜻해져 있다. 이런 이유 때문에 말씀의 내적 의미의 비밀들이 이제야 밝히 알려지고 있다; 그 이유가 오늘날 어떤 선행도 있지 않기 때문에 어떤 신앙도 거의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이 시대의 극점인 바, 이때서야 모독함이라는 위험 없이 이런 비밀함들이 밝히 알려질 수 있다; 그 이유는 그들이 내면적으로는 인정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런 비밀한 이유에 아브라함과 이삭이 자기 아내를 누이라고 말한 그랄에서의 아비멜렉과 더불어 있었던 대목도 포함되고 있다.
내적 의미에서 “여인과 드러눕는” 것은 진리를 악용하고 섞음질하는 것을 표시한다 (여기서의 진리는 신성으로부터의 진리, 그 이유는 “여인” 또는 리브가가 신성한 진리를 표현했기 때문); 이는 말씀에서 “함께 드러누움”, “간통”, “매춘”에 의해 선의 타락, 진리의 거짓화를 의미한다는 사실로부터 분명해진다; 그리고 간통이 부부의 사랑에 직반대되어 간통은 부부의 사랑을 파괴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부부의 사랑은 선과 진리의 결혼으로부터 있다; 그러므로 선과 진리에 반대되는 이런 것들, 선과 진리를 파괴하는 이런 것들을 말씀에서 “간통들”이라 불리워진다.
어쨌든 알아야 하는 것은, 영적 평면의 교회 속에 있는 이들은 선을 모독할 정도만큼 선을 섞음질(간음질) 할 수 없다는 점이다, 그 이유가 그들은 천적 인간처럼 선을 지각함을 통해 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들은 진리를 모독할 수 있다, 그 이유는 이것을 그들이 인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교회의 마지막 때에서 그들은 진리를 인정함조차 할 수 없었는데, 그 이유는 그들을 보편적으로 지배한 것이 주님에 관한 불신앙, 사후 삶에 관한 불신, 내적 인간에 관한 불신앙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은 신앙의 진리가 내면적으로 관통함을 예방해준다. 또한 당사자가 위의 내면에 속한 사항들에 대해 무지하거나, 본인 자신 그것들을 믿는다고 상상하는 때 모두에서 당사자로 내면적으로 깊이 들어감을 방해하여 보편적 한계에 머물게 한다.
그러나 선을 모독할 수 있는 자는 천적 수준의 교회 속에 있는 자인데, 그 이유는 그들은 지각으로 선을 받기 때문이다. 이것은 홍수 이전, 즉 태고 때의 경우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여타 다른 이들로부터 격리되어 있고, 그들의 지옥 또한 여타 지옥들로부터 분리되어 제한되어 있다; 그리고 선을 모독함은 더 이상 거행될 수 없다는 것이 인간이 에덴으로부터 내쫓겼을 때, 여호와께서는 에덴의 동산의 동쪽에 거룹들이 살게 하셨다는 것, 그리고 그 자체 회전하는 검의 불꽃이 생명들의 나무로 가는 길을 지키게 하신 것에서 의미되어 있다 (창. 3:24).

“죄가 있음, 죄를 지었음, 범죄 행위, guilt”는 (자신의) 죄(sin)를 누구의 탓으로 돌림(blame), 또는 자신의 죄과를 누구에게 떠넘김(전가, 덧씌움, imputation) (우리의 죄를 예수께서 십자가상에서 다 떠맡으셨다, 하여 우리는 죄가 없다, 고로 이를 믿기만 하면 우리는 구원받았다고 하는 항간의 교회를 뒤흔드는 말도 연상해보면 이 단어의 이해에 도움이 될지 모른다 역자 주); 그리고 선과 진리에 위배되는 사항을 남의 탓으로 돌림을 표시하는데, 이는 “죄가 있음”이라는 단어가 언급되는 말씀의 구절들로부터 분명해진다. 이사야서에서:
여호와께서는 그분이 상해 입는 것에 만족하셨다, 그리고 그분은 그분이 약해지게 만드셨 다; 만일 네가 그분의 혼을 약하게 만들 것이다면, 그분은 그분의 씨를 볼 것이고, 그분은 그분의 날들을 길어지게 할 것이다, 그리고 여호와의 뜻이 그분의 손을 통하여 번성할 것 이다 (이. 53:10).
위는 주님을 취급하고 있다; “그분의 혼을 약해지게 만드는 것”은 그분을 미워한 이들에 의해 죄가 그분에게 떠넘겨짐, 그분의 탓이라 비난당함을 표시한다; 그리고 그분 자신 안에서 그분은 죄의 어떤 것과도 계약을 맺은 적이 없다는 것, 오히려 그분은 그것을 치워내셨다. 에스겔서에서:
너희는 너희가 흘린 너의 피를 통하여 죄가 있음이 되어진다, 그리고 너희가 만든 너의 우 상들에서 더럽히고 있다 (겔. 22:4);
위에서 “피를 흘림”은 공물이 선에 폭력을 행사함을 의미한다, 거기로부터 죄가 있음이 온다. 다윗서에서:
의로운 자를 미워하는 자는 죄가 있음을 가질 것이다; 여호와께서는 그분의 종들의 혼을 되찾으신다; 그분을 신뢰하는 누구도 죄가 있음을 가지지 않을 것이다 (시. 34:21, 22).
고로 “죄가 있음”은 남아 있는 모든 죄를 표시한다; 주님으로부터의 선을 수단으로 그것을 분리함(나로부터 떼어냄)이 “되찾으심, 구속, redemption”이다. 이것은 그들이 죄가 있음의 제물을 바칠 때, 성직자에 의해 만들어진 속죄됨을 수단으로 표현되어졌다; 마치 레. 6:1-26; 7:1-10; 19:20-22; 민. 5:1-8의 경우들인데, 거기서 죄가 있음의 종류들이 열거되고 있다. 이는 다음과 같다: 저주함의 음성을 듣는 것과 그것을 밝히지 않는 것; 불결한 어떤 것을 만지는 것; 악행을 맹세하는 것; 여호와의 거룩한 것에 관해 실수로 죄를 짓는 것; 그가 이웃을 위해 준수해야 하는 것을 이웃에게 거절하는 것; 잃어왔던 것을 발견하는 것, 그리고 그것을 부정하고, 거짓말로 맹세하는 것; 남자와 약혼 중인 하녀와 눕는 것, 되찾지 않는 것, 자유하게 하지 않는 것; 그리고 모든 죄들은 여호와의 관련한 것을 위반함으로 인간에게도 범죄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아비멜렉은 모든 백성에게 명령했다. 이는 칙령을 의미한다. 이는 “명령함”이 칙령을 만드는 것임으로부터; 그리고 아비멜렉의 표현함이 신앙의 교리 안에 있는 이들이다로부터; 그리고 최고 의미에서 주님이다로부터; 그리고 “백성”의 의미가 영적 평면의 교회 속에 있는 이들이다로부터; 이상의 각각을 종합해 볼 때, “아비멜렉이 모든 백성에게 명령을 내렸다”란 영적 평면의 교회에서 있는 주님으로부터의 칙령을 의미한다를 알 수 있다. 칙령 자체가 이 말 뒤를 잇는데, 즉 신성한 진리와 신성한 선은 열어져서는 안된다는 것, 그리고 신앙으로 접근조차 하려 해서도 안된다는 것, 그 이유는 그들이 이 선과 진리를 모독할 경우, 영원히 지옥에 떨어지는 위험에 처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아래에서 취급되는 주제이다.

이 사람과 그의 여인을 건드리는 자는 정녕 죽을 것이다. 이는 신성한 진리와 신성한 선은 공개되어서는 안됨을 의미한다. 그리고 신앙으로 가까이 가려는 것 조차도 안된다, 그 이유는 행여 신성한 진리와 신성한 선이 모독되어질 경우 영원한 저주 (구원 불가능) 이라는 위험에 빠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이 사람과 그의 여인을 건드림”의 의미가 이삭과 리브가에 의해 표현되는 신성한 진리와 신성한 선에 접근하는 것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 대목에서는 진리가 먼저 언급되고, 선은 두 번째에서 언급되는데, 그 이유는 영적 (평면의) 교회에 속한 이들, 즉 선이 아닌 진리에 섞음질하거나 모독할 수 있는 수준의 인간들이 취급되기 때문에서이다. 이런 이유로 “사람과 여인”이라 말해진다; 그리고 “정녕 죽을 것이다”의 의미가 영원히 지옥에 떨어짐, 이는 영적인 죽음; 여기서는 모독으로부터, 이것이 여기서 취급하는 주제이다.
(누구도 선과 진리 안으로의 입장을 허가하시지 않는 것, 즉 선과 진리를 인정함, 그리고 이 인정함으로부터 애착함 안으로의 입장을 허락하시지 않는다는 것은 주님의 섭리에 속한 사항이다, 그 이유는 그가 그 안에 머무르는 한, 그는 영원히 지옥에 떨어지는 위험에 노출되기 때문이다.) 하여 인간이 악과 거짓 안에 있는 한 이 인간 안에서의 선과 진리는 안쪽으로 물러가 있는다; 결과적으로 천국으로부터 그 인간과 더불어 있는 천사들은 아주 멀리 물러가 있다. 대신 지옥으로부터 악마의 영들이 상대적으로 더 접근해 있다. 그리고 이것의 거꾸로도 진실이다. 악과 거짓 안에 있는 인간으로부터 선과 진리가 옮겨짐, 결과적으로 천사들이 옮겨짐은 당사자에게 나타나지 않는다, 그 이유는 이때의 그는 악이 선이고, 거짓이 진리라고 하는 것에 설득된(확신하고 있는) 상황이어서 그것에 애착하고 즐거워하기 때문이다; 그가 이런 상태라면, 그가 자기에게서 선과 진리가 옮겨졌음을 안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인간이 선과 진리에 의해 감명을 받지 못할 때, 또는 그것들로 해서 더 이상 즐거움을 얻지 못할 때, 대신 자기 사랑함과 세상 사랑함 속에 있는 것들에 감명될 때, 즉 이런 것들만이 자신을 기쁘게 할 때, 선과 진리, 또는 천사들은 그 인간으로부터 옯겨졌다고 말해진다.
선과 진리를 아는 것, 즉, 그것들을 기억에서 붙잡고 있는 것, 그리고 그것들에 관하여 말하는 것, 이런 등등은 그것들을 소유했다고 말할 수 없다; 그것들을 소유했다고 말해지려면 그것들로 해서 심정으로부터의 감명이 있어야 한다.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을 획득하는 것이 자신의 명성과 재물에 도움이 되어서 그것들에 감명되는 것은 그가 선과 진리를 소유한 것이 전혀 아니다. 그 이유가 이런 경우, 그가 선과 진리에 감명된 것이 아닌 명예와 소득에 감명된 것이기 때문이다. 하여 그에게 선과 진리는 목적이 아닌 후자를 위한 수단 차원에서 머물고 있다. 다른 삶에서는 이런 자들이 안다는 선들과 진리들, 그들이 설교했던 선들과 진리들은 그들로부터 깔끔히 걷어내진다, 그리고 그들의 생명이 된 자기와 세상의 사랑만이 남아 있는다. 이로부터 분명해지는 바, 우리가 선과 진리가 내 삶의 목적으로 꾸준히 머물고 작동하지 않는 한, 어떤 애착과 신앙을 가지고도 선과 진리에의 접근은 누구에게도 허용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모독하는 자들은 이런 접근을 억제시킬 수 없는 자들이다.

12-14절. 그리고 이삭은 그 토지에 씨를 뿌렸다, 그리고 그 해에 일 백의 분량을 발견하였다, 그리고 여호와께서 그를 축복하셨다. 13 그리고 사람이 불어났고, 그리고 계속해서 불어나 그는 심히 위대해졌다. 14 그리고 그는 양떼를 많이 획득했고, 목축떼도 많이 획득했다, 그리고 많은 노복도 거느렸다. 그리고 불레셋 사람들은 그를 부러워했다.

그리고 이삭은 그 토지에 씨를 뿌렸다. 이는 합리성에 나타나는 주님으로부터 있는 내면의 진리들을 의미한다. 이는 “씨뿌림”의 의미가 최고 의미에서 파종자인 주님으로부터 있는 신성한 진리이다로부터; 그리고 내적 의미에서 이 진리로부터 파생된 인간과 더불은 진리와 선; 그리고 “토지”의 의미가 신성에 의해 계발될 때, 진리의 나타남들인 합리적인 것들이다로부터; 또는 같은 말로, 합리성에 나타나는 주님으로부터 있는 내면의 진리들이다로부터; 이런 나타남들, 또는 이런 진리들은 아주 높은 수준이고, 내적 의미에서 14절까지에서 취급되고 있다. 천사들은 진리의 이런 나타남들 안에 있는데, 이 나타남은 세상에서 인간의 삶동안 그의 이해력을 무한하게 초월한다.
이런 진리의 나타남들이 무엇인지 좀 더 분명히 알기 위해 예를 들어 생각해보자. 신성은 존재(being) 측면에서 무한이다, 그리고 명백히함(manifestation)에서 영원하다고 알려져 있다, 그리고 유한은 무한인 것을, 실로 영원한 것을 납득할 수 없다고, 그 이유가 영원함은 명백히함에서 무한하기 때문이다고 알려져 있다; 그리고 신성 자체는 무한이고 영원하다, 신성으로부터 있는 모든 것은 무한하고 영원하다, 그리고 무한한 존재는 천사들에 의해 납득될 수 없다고, 그 이유는 이들이 유한이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무한하고 유한인 것은 천사들 앞에서 유한인 나타남들 안에서 표출되어 있다; 그러나 이것 역시 인간 납득의 영역 훨씬 넘어에 있다. 예를 들면: 인간은 시간으로부터가 아니면 영원에 대한 어떤 생각을 한다는 것이 가능할 수 없다; 그리고 이럴진대, 그는 영원으로부터 인 것을, 신성이 시간 앞에 있었다는 것을, 또는 세상이 창조되기 이전에 계셨다는 것을 납득하는 것이 가능할 수 없다. 그리고 시간으로부터 생각하는 어떤 것이 그의 생각 안에 있는 한, 만일 그가 이 주제를 놓고 생각한다면, 그는 필시 오류들 안으로 빠져들고, 이 오류로부터의 탈출도 아주 힘들다. 그러나 천사들, 즉 시간에 대한 생각이 없고 오직 상태에 대한 생각만 있는 천사들에게, 위의 사항들을 최고로 명료하게 지각하는 것이 주어진다, 그 이유는 그들과 더불은 영원은 시간 속의 영원이 아니라, 시간에 대한 생각이 전혀 없는 상태 속의 영원이기 때문이다.
이러므로 나타남들에 관해서 천사에게 나타남들은 인간에게 나타남들을 훨씬 능가하는 비교가 가능할 수 없는 수준에 있다는 것이다; 그 이유가 인간은 제 아무리 작은 것, 사소한 것일지라도 시간과 공간으로부터 떼어내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천사들은 이런 시공과는 무관하기 때문이다, 하여 있음과 명백히함에 관해서도 시공 대신 상태로부터 생각한다. 위 살핀 바로부터 여기서 취급되는 진리의 나타남의 본성이 무엇인지를, 이 수준은 보다 높은 등차 속에 있음을 알았을 것이다. 이어지는 대목에서는 보다 낮은 등차에서 있는 진리의 나타남, 그리고 인류에 적합한 등차에서의 진리의 나타남이 다루어진다.

그리고 그 해에 일 백의 분량을 발견했다. 이는 풍부함을 의미한다. 이는 “일년”의 의미가 취급되는 상태의 전부이다로부터; “100”의 의미가 많은 것, 가득한 것이다로부터; 그리고 “분량”의 의미가 진리 측면에서 어떤 것의 상태이다로부터. 위 모두를 하나로 종합하면 진리의 풍부함을 의미한다. 여기서, 그리고 다른 구절도 그러하지만 최고 의미에서의 주제는 주님을 취급함이다, 즉 어머니쪽 인간 측면에서 그분 역시 진리의 나타남 안에 계셨다; 그러나 그분이 이 인간을 벗으셨을 때, 그분은 이런 나타남들 역시 벗어나셨다, 그리고 무한하고 영원인 그 자체를 입으셨다. 그러나 내적, 또는 관계적 의미에서 주제는 위에 상술했던 대로 천사들과 더불은 보다 높은 등차의 나타남들, 이 나타남들의 풍부함이 일 백의 분량을 그 해에 발견함에 의해 의미되어 있다. 진리의 나타남들과 더불어, 또는 신성으로부터의 진리들과 더불어 이보다 높은 등차의 나타남들은 풍부함에서 이든, 완전함에서 이든 모두에서 보다 낮은 등차에 있는 나타남들이 측량 불가능하게 할 정도로 훨씬 능가하는 속성을 지녔다; 그 이유가 수만, 수만의 수만 가지의 것으로 구분되어 천사들에게 나타나는 진리가 인간에게서는 한개의 진리로서만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보다 낮은 것들은 높은 것들의 혼성물밖에 더 아니기 때문이다. 이는 인간에 있는 기억들로부터 추리될는지 모른다, 즉 기억 속의 내면의 것들은 보다 낮은 등차인 외면의 것을 능가하고 있다. 이로부터 천사의 지혜는 인간의 지혜에 견준다면 얼마나 더 위대한지 짐작하게 한다; 셋째 천국의 천사들의 지혜는 인간의 지혜를 넘어 넷째 등급에 있다; 그러므로 그들의 지혜를 우리로서는 납득할 수 없다고 말할 도리밖에 없다.

그리고 여호와께서는 그를 축복하셨다. 이는 거기에 있는 사랑의 선에 관하여를 의미한다. 이는 “축복하심”이 천적, 영적 선 모두에서 풍요해지는 것을 의미한다로부터; 고로 “여호와에 의한 축복”은 사랑의 선인 천적인 선으로 풍요해지는 것이다, 그 이유가 여호와는 사랑 자체, 또는 선 자체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선이 취급되는 곳에서“여호와”가 명명된다; 그러나 진리가 취급되는 곳에서는 “하느님”이 명명된다.

그리고 사람이 불어났고, 그리고 계속해서 불어나 그는 심히 위대해졌다. 이는 계속적인 증가를 의미한다. 이는 “증가하는 것”이 “계속 가고 있음”, 그리고 “극도로 위대해짐”이 선과 진리의 질서에서 그것들의 계속적인 증가이다는 것; 즉 진리로부터 선으로, 그리고 선으로부터 진리로 증가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양떼를 많이 획득했고, 목축떼도 많이 획득했다. 이는 내면의 선에 관하여, 그리고 외면의 선에 관하여를 (즉 합리적 선과 자연적 선에 관하여를) 의미한다. 이는 “양떼”가 내면, 또는 합리적인 선을 의미한다로부터; 그리고 “목축떼”가 외면, 또는 자연적인 선이다로부터 알려진다. “목축떼”에 의해 의미되는 자연적인 선은 인간과 더불어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선에 대한 애착에 인접한 진리에 대한 지식들을 수단으로 획득되어진다; 그 이유가 인간과 더불은 자연적인 선은 그 자체로는 동물적인 일상의 일(affair) 수준이기 때문이다. 이런 선은 동물들에게도 존재한다; 획득된 자연적인 선, 또는 주님에 의해 인간에게 주어진 자연적인 선은 그것 안에 영적인 것을 함유한다, 하여 그것은 자연 평면에 있는 영적인 선이다. 이 선이야말로 실제의 인간의 자연적인 선이고, 한편 인간과 더불어 태어나진 것, 비록 선 같이 나타날지라도, 여전히 선은 아니다, 오히려 악일는지 모른다; 그 이유가 이것이 거짓들을 받을는지 모르고, 악인 것을 선이라고 믿을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이런 자연적인 선은 가장 나쁜 생활과 신앙을 지닌 나라들 사이에 존재한다.

많은 노복. 이는 거기로부터 파생된 진리를 의미한다. 이는 “노복, 섬김 (service)”이 아래에 있고, 종속되고, 순종하는 모든 것들이다로부터, 고로 진리이다, 그 이유는 이것은 진리로부터 있고, 선쪽을 섬기기 (minister)때문이다; 이에 대하여는 앞에서 많이 말해왔다.

그리고 불레셋 사람들은 그를 부러워했다. 이는 지식들 중에서도 기억 속의 지식에만 있는 이들은 납득하지 못했음을 의미한다. 이는 “부러워함”이 아직은 납득하지 못하고 있음을 의미하는데 이어지는 대목으로부터 분명해진다; “불레셋 사람들”은 지식들 속의 기억 속의 지식이다로부터; 고로 “불레셋 족들”은 이 기억 속의 지식 안에 있는 이들이 뜻해진다.

15-17절. 그리고 그의 아버지 아브라함의 시절에 그의 종들이 팟던 모든 우물들을 불레셋 사람들은 멈추게 하고, 그리고 먼지로 채웠다. 16 그리고 아비멜렉은 이삭에게 말했다, 우리로부터 떠나라. 그 이유는 네가 우리보다 세력이 더 커졌기 때문이다. 17 그리고 이삭은 거기로부터 떠났다, 그리고 그랄의 계곡에 천막을 쳤다, 그리고 거기에 거주했다.

그리고 그의 아버지의 종들이 그의 아버지 아브라함의 시절에 팟었던 모든 우물들을 불레셋 사람들은 멈추게 했다. 이는 지식들 중에서 기억 속의 지식 가운데 있는 이들은 신성으로부터 있는 내면의 진리들을 기꺼이 알려하지 않는다는 것, 그러므로 그 진리들을 말살하려 든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우물들”의 의미가 진리들이다로부터, 여기서는 신성으로부터 있는 내면의 진리들이다, 마찬가지로, 그의 아버지 아브라함의 시절에 그의 아버지의 종들이 팟었다고 말해진 우물도 같은 의미의 진리들이다, 그 이유가 아브라함에 의해 주님의 신성 자체가 표현되었기 때문이다; “멈추게 함”은 기꺼이 알고 싶어하지 않는 것, 고로 말살하려 드는 것을 의미한다로부터; 그리고 불레셋 사람들의 의미가 지식들 중에서 기억 속의 지식 안에만 안주하려 드는 이들(안다는 것에 만족하는 이들)이다로부터 알려진다.
보다 낮은 수준의 진리의 나타남들이 이제 취급되어진다, 이 범주에 지식들 중 기억 속의 지식들에 있는 이들이 있을런지 모른다, 그리고 여기서 “불레셋”에 의해 뜻해지는 이들이다. 신성으로부터 있는 내면의 진리들과 더불어, 그리고 이 진리들이 “불레셋”에 의해 말살되어진 것과 더불은 경우는 이렇다: 고대 교회에서, 그리고 그 후에도 생활쪽보다는 교리쪽에 관심을 많이 가졌다고 불리운 이들이 있었는데, 시간이 흐르면서 생활쪽의 것은 거절하고 신앙쪽의 것만이 교회의 필수라고 인정하고, 급기야 그들은 생활과 신앙은 별도의 사항이라 하여 분리했다; 결과적으로 선행의 교리적인 것들을 빛으로 삼고 그것이 교회의 전부이고 실체이다 했던 것은 말살되었다, 대신, 신앙의 교리적인 것들을 제 일로 삼고 있는 것을 으시대었다, 하여 이것들이 종교의 전부라고 자처했다. 그들이 선행으로부터 있는 생활로부터, 즉 생활 속에 있는 선행으로부터 신앙을 분리시켰는 바, 이들이 “할례받지 않은 자”라고 뾰족하게 말씀에서 불리우고 있다; 그 이유가 “할례받지 않은 자”에 의해 선행 안에 있을 필요는 없고 교리적인 것들에만 있으면 된다는 이들이 의미되기 때문이다.
고로 선행으로부터 떠난 이들은 자신들을 지혜와 총명으로부터도 이동시켜 놓았다; 그 이유가 그가 선 안에, 즉 선행 안에 있지 않으면 진리에 관하여 슬기롭고 총명해질 자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모든 진리는 선으로부터 있고, 선을 바라보기 때문이다; 고로 선 없이 있는 이들은 진리를 이해할 수 없다, 그리고 진리를 굳이 이해하려 들지도 않는다. 다른 삶에서 이와 같은 자들은 천국으로부터 아주 멀리 있고, 때로는 그들과 더불어서 눈이 내림에서 빛이 나타난다; 이 빛은 겨울의 빛 같아서 열매를 산출하는 열이 결핍되고 있다; 그러므로 이런 인물들이 천국 가까이 끌릴 때, 그들의 빛은 단지 어둠으로 변해진다, 그리고 그들의 마음들 역시 같은 어둠에 빠져들어 혼수 상태에 있는다. 이상 살핀 사항들로부터 분명해지는 바, 지식들 중 기억 속의 지식에만 머무는 이들은 신성으로부터 있는 내면의 진리들을 기꺼이 알려하지 않는다는 것, 오히려 그것들을 말살한다는 것이다.

그것들을 먼지로 채웠다. 이는 지상의 것들을 수단으로, 즉 자기를 사랑함과 이득을 사랑함을 수단으로를 의미한다. 이는 “먼지(dust)”의 의미가 자연 평면으로부터 있는 것들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하여 이 말의 의미는 “불레셋”이라 불리는 이들(즉 생활과는 무관하게 교리에 치중해버린 이들)은 지상적인 사랑들, 즉 자기를 사랑함과 이득을 사랑함에 의해 내면의 진리들을 말살한다는 것이다; 이런 사랑들로부터 그들은 “할례받지 않은 자”라 불리운다. 그 이유가 이 사랑들 안에 있는 이들은 아브라함의 우물들을 먼지로 채워버릴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즉 지상적인 것들을 수단으로 말씀의 내면의 진리들을 말살하는 것), 그 이유는 그들은 이런 사랑들로부터 영적인 것을 볼 수 없기 때문 (즉 주님으로부터 진리의 빛 속에 있는 것들)이다; 이 사랑들은 어둠을 도출시킨다, 그리고 어둠은 빛을 꺼지게 한다. 그 이유가 이미 말한대로, 주님으로부터의 진리의 빛의 접근에서, 생활과 더불은 교리가 아닌 교리에만 있는 이들은 완전한 어둠과 무감각 안에 있고 성내기조차, 갖가지 방법으로 진리들을 흩으리느라 분주해 있다; 그 이유가 자기 사랑과 이득을 사랑함은 신성으로부터의 어떤 진리의 접근에서 이런 반응을 가질 수밖에 없는 본성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런 인물들도 기뻐하고 자기들이 진리를 알고 있다는 사실을 자랑한다. 그렇다, 그들도 어떤 열정 같은 종류로부터 진리들을 설교할는지 모른다; 그러나 위와 같은 사랑의 불이 그들을 자극하고 지피워진 불이다, 그리고 그들의 열정은 그로부터 파생된 열렬함일 뿐이다. 즉 지상의 세계에서는 그들도 열정 비슷한 것, 또는 열렬하게 자신의 생명 자체에 반대되는 설교를 입으로 버젓이 내뱉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것들이 모든 진리의 근원인 말씀 자체를 가로막고 서있는 지상적인 것들이다.

그리고 아비멜렉이 이삭에게 말했다. 이는 그 교리에 관해 주님께서 지각하심을 의미한다. 이는 “말하다”가 지각하다를 의미함으로부터; 불레셋의 왕인 아비멜렉의 표현이 그 교리이다로부터; 그리고 이삭의 표현이 신성한 합리성에 관한 주님이시다로부터 알려진다.

우리로부터 떠나라. 그 이유는 네가 우리보다 세력이 더 커졌기 때문이다. 이는 내면의 진리들 안에는 신성이 있기 때문에 기억 속의 지식에만 머무는 이들은 내면의 진리들에 버텨낼 수 없었음을 의미한다. 이는 “우리로부터 떠나가는 것”은 현존을 견디지 못함을 의미함으로부터; “세력이 더 커진” 그의 존재란 그의 부유함 때문이다로부터; 여기서는 내면의 진리들 안에 있는 신성 때문이다. (“불레셋 사람들”이라 불리우는 이들은 선의 현존에서 견딜 수 없다는 것, 고로 신성의 현존에서 버틸 수 없다.)

그리고 이삭은 거기로부터 떠났다. 이는 주님께서는 내면의 교리적인 것들을 놓아두고 가셨다를 의미한다. 이는 “거기로부터 떠남”의 의미가 남겨두고 감이다로부터; 여기서 내면의 진리들을 남겨두고 가심이다, 그 이유는 이것들이 취급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삭은 주님의 신성한 합리성 측면을 표현한다로부터 알려진다. 주님께서 내면의 진리들을 남겨두고 가심은 주님께서는 불레셋 같은 품성을 지닌 인물들에게 내면의 진리들을 여실 수 없다를 의미한다; 그 이유가 말씀 각처에 내면의 진리들이 있는데, 지식들 중의 기억 속의 지식에 있고 생활 속에는 없는 교리를 지닌 이들은 말씀 어디를 읽어도 내면의 진리들을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이는 그들이 신앙을 구원의 제 일로 만든 것에 비해, 주님께서 사랑과 선행에 관해 매우 자주 이야기 하신 사항은 뒷 순서에 놓아둔다는 사실로부터 확인된다; 그리고 기껏 선한 일을 했을 경우도 이것을 신앙의 열매라고 하여 선행으로부터 구별하고 분리하여 선한 일의 본성을 짓밟은 형국이다. 한마디로 말씀에서 둘째 순서에 놓인 것이 첫째 순서이었다고 그들에게 나타날 뿐이다는 말이다. 즉 내면의 것이 아닌 외면의 것들이 제일가는 중요 사항으로 나타날 뿐이다; 내면의 것, 또는 첫선에 있어야 하는 것을 봄이 없이 외면의 것, 또는 차선의 것을 보고 있다면, 그는 신성의 어떤 것도 보지 못한다. 이것이 주님께서 내면의 진리들을 남겨두고 가심에 의해, 이삭이 거기로부터 떠남에 의해 뜻해진 바이다; 실상 주님께서 그것들에서 떠나신 것이 아니라, 그들이 주님으로부터 자신들을 옮긴 것이다. 그 이유가 그들의 생명은 살아 있는 생명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랄의 계곡에 천막을 쳤다, 그리고 거기서 거주했다. 이는 그분께서 자신을 더 낮은 합리적인 것들로 향하게 하셨다는 것, 즉 내면의 나타남으로부터 외면의 나타남으로 향하셨음을 의미한다. 이는 “천막을 침”이 질서 안으로 배열함을 의미한다로부터; 그리고 “그랄의 계곡”의 의미가 보다 낮은 합리적인 것들, 또는 진리의 외면에서의 나타남이다로부터, 그 이유가 “계곡”은 보다 낮은 것, 또는 외면의 것들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랄”은 신앙 속에 있는 이들, 고로 진리 속에 있는 이들을 의미한다; 그리고 “거주함”의 의미가 있는 것, 그리고 사는 것이다로부터; 하여 그가 “그랄의 계곡에 천막을 쳤다”란 주님께서 진리들을 잘 배열하시어 진리들이 생활보다는 신앙의 교리에 치중하는 이들의 천성과 납득력에 적합해지게 하셨음이 의미되어진다. 이렇게 진리들이 (거꾸로) 적응된 것들을 말씀에서도 확인될런지 모른다.
예를 들면: 교리적인 사항들에만 관심이 집중되고 생활쪽은 무시한 듯 되어 있는 이들은 천국의 왕국도 지상의 왕국과 별반 다르지 않다고 여길 수밖에 없다, 하여 남들을 지배하는 것, 이 지배함에 기쁨을 얻는 것에 그들은 친숙할 뿐이다, 이 즐거움이 여타 다른 즐거움을 앞서고 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이런 그들의 나타남에 따라 이야기하신 것을 읽어 볼 수 있다. 마태복음서에서:
행하고 가르치는 자 누구든지, 똑같이 하늘의 왕국에서 위대하다 불리울 것이다
(마. 5:19);
다윗서에서:
나는 말했다, 너희는 하느님들이다, 그리고 너희 모두는 지극히 높은 자의 아들들이다
(시. 82:6; 요. 10:34, 35).
그리고 제자들조차도 천국도 지상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견해, 하여 거기서도 남보다 더 위해하고 걸출해야 한다는 견해를 처음에 지니고 있었다; 이는 마. 18:1; 막. 4:34; 눅. 9:46에서 확인되고, 또한 왕의 좌우편에 앉고 싶다는 생각을 피력했다 (마. 20:20, 21, 24; 막. 10:37), 그러므로 그들 사이에서 누가 가장 위대한지를 두고 경쟁할 때, 주님 역시 그들의 납득력 수준과 그들의 영의 수준에 걸맞게 말하시기를:
너희는 내 왕국에서 내 식탁에서 먹고 마실 것이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열 두 지파들을 심 판하는 왕좌에 앉을 것이다 (눅. 22:30; 마. 19:28);
그때 당시 그들은 천국의 즐거움은 남보다 잘 낫다고 함에서 얻어지는 즐거움과 다르다는 것을, 그 즐거움은 겸손으로부터의 즐거움, 그리고 타인을 섬김으로 있는 즐거움이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고로 가장 큰 자를 바램이 아닌 가장 작은 자가 되기를 바램인 것을 알지 못한 것이다; 누가복음서에서 이렇게 가르치신다:
너희 사이에서 작은 자인 자는 누구든지, 마찬가지로 큰 자일 것이다 (눅. 9:48).
(교리가) 지식들 중의 기억 속의 지식에만 머물 뿐 생활에의 응용은 없는 이들은 자신이 걸출하다는 평을 듣는데서 얻어지는 즐거움 외에 다른 즐거움이 있는 줄을 알지 못한다; 그리고 이것이 그들의 마음에 착석한 유일한 즐거움이고, 그들의 생명의 전부여서 겸허함과 타인을 섬기는 애착으로부터 비롯되는 천국의 즐거움에는, 즉 주님을 사랑함과 이웃을 향한 선행으로부터의 즐거움에는, 결과적으로 거기로부터 파생되는 복됨과 행복에는 무지할 수밖에 없다. 이런 이유에서 주님께서 그들의 유약함에 적응되게 (그들의 눈높이에 맞추심) 라고 말하는 이유이다. 이런 가운데 그들이 일깨워지는 찰나를, 선쪽에 소개하는 찰나를, 즉 배우는 것, 가르치는 것, 그것을 행하는 때까지 기다리신다. 동시에 천국에서의 큰 자와 똑똑한 자가 누구인지에 대한 그 본성을 가르치신다 (마. 19:30; 20:16, 25-28; 막. 10:31, 42-45; 눅. 9:48; 13:30; 22:25-28). 위와 같은 상황이 보다 낮은 수준에서의 진리의 나타남이다; 그 이유가 이들이 차츰 큰 자, 똑똑한 자, 능력있는 자, 권위 있는 자, 천사 한 명이 수 만의 지옥의 영들보다 더 강하다는 것, 이 강함이 나로부터가 아닌 주님으로부터 선물받은 것임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이런 능력을 가지되 이 능력이 주님으로부터 임을 아는 정도에 비례하여, 결과적으로 얼마나 자신이 작은 자 인지를 실감함에 비례하여 주님으로부터 그것을 받는다; 그리고 이것을 그는 겸손과 주님을 사랑함과 이웃을 향한 선행으로부터의 선 안에 있는 한도만큼에서 믿을 수 있다.

18절. 그리고 되돌아 왔다, 그리고 그들이 아브라함의 시절에 팟었던 물들의 우물들을 다시 팟다. 그리고 불레셋이 아브라함이 죽은 후에 그것들을 틀어 막았다. 그리고 그는 그 우물들의 이름을 그의 아버지가 불렀던 이름에 따라 불렀다.

그리고 이삭은 되돌아 왔다, 그리고 그들이 그의 아버지 아브라함의 시절에 팟었던 물들의 우물들을 다시 팟다. 이는 주님께서는 고대인들과 더불어 있는 이러한 진리들을 여셨음을 의미한다. 이는 이삭이 신성한 합리성 측면에서의 주님을 표현한다로부터; “되돌아 옴과 다시 팜”의 의미가 다시 여는 것이다로부터; “물들의 우물(물이 있는 우물)”들의 의미가 지식들 속의 진리들이다로부터; 그리고 “그의 아버지 아브라함의 시절”의 의미가 진리들 측면에서 이전의 시간과 상태, 이런 진리들이 그들이 그때 당시 팟었던 우물들에 의해 의미되는 바, 고대인들과 더불어 있었던 진리들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날들”이 상태를 의미할 경우, 아버지 아브라함에 의해서 주님이 인간 본질을 신성 본질에 인접되게 하시기 이전 주님의 신성 자체가 표현되었다; “날들”이 시간을 의미할 경우, 아버지 아브라함에 의해서는 주님이 인간 본질을 신성 본질에 인접되게 하시기 이전 주님의 신성으로부터 있었던 선들과 진리들이 의미되었다, 고로 이것은 고대인들과 더불어 있었던 선들과 진리들이었다.
고대인들과 더불어 있었던 진리들이 존재했는지, 그 진리들이 오늘날의 가르쳐지는 것과 다를 것이다고 아는 사람, 이것을 생각해보는 사람조차도 드물 정도로 그 들의 선들과 진리들에 관련한 것은 오늘날 말살되어 있다. 고대인들은 주님의 왕국의 천적, 영적인 것들에 대한 표현들(Representatives)과 의미들(Significatives)을 가졌다; 그리고 표현들과 의미들을 이해했던 그들은 현자(the wise)라 불리웠다; 그들이 슬기로운 이유는 그들이 영들과 천사들과 이야기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영적, 천적 수준이기 때문에 자연적 수준인 인간에 납득될 수 없는) 천사들의 언어가 자연적 영역에 있는 인간에게 내려 올 때, 이 언어는 표현들과 의미들 안으로 낙하하는데, 이는 말씀 안에서와 같다; 이로부터 말씀은 거룩한 저술인 것이다; 신성인 것들이 자연적 인간 앞에서 완벽한 상응을 갖기 위하여서는 이외 다른 방법으로는 표출될 수 없다.
그리고 고대인들이 주님의 왕국에 관한 표현들과 의미들 안에 있었고, 이 안에는 천적, 영적 사랑, 즉 주님을 사랑함과 이웃을 향한 선행밖에 더 없기에, 그들이 가진 교리물 역시 주님을 사랑함과 이웃을 향한 선행을 취급한 교리 뿐이었다; 그리고 이런 덕택에 그들은 현자라고 불리운 것이다. 이 교리물로부터 그들은 주님이 세상에 오신다는 것, 그리고 여호와께서 주님 안에 있으실 것이다는 것, 그리고 그분은 자신 안에 있는 인간 본질을 신성으로 만드실 것이다는 것, 그리하여 인간을 구원하실 것임을 알았다. 그들은 이 교리물로부터 선행이 무엇인지, 즉 어떤 보답을 기대함 없이 타인을 섬김에 대한 애착을 알았다; 그리고 또한 선행이 있어야 하는 이웃은 우주에 있는 모든 이, 그러나 각각의 상태와 수준 등에 적합하도록 식별력을 동반해야 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오늘날 이런 교리물들은 거의 상실되었다, 그것들 대신 고대인들이 비교적으로 관심을 두지 않았던 신앙으로부터의 교리물이 득세하고 있다. 작금에 이르러 주님을 사랑함과 이웃을 향한 선행에 관한 교리물들은 부분적으로 말씀에서 “바빌로니아 사람과 갈대아 사람”으로 불리우는 이들에 의해, 그리고 부분적으로 “불레셋 사람과 이집트 사람”으로 불리우는 이들에 의해 거절되었다; 하여 깡그리 잃어져서 그것에 대한 흔적도 거의 남아 있지를 않다. 오늘날에 이르러 위의 선행은 자아를 위한 모든 관심이 결핍된 것이다는 것, 자아를 위하여 있는 모든 것에 반대되어 있는다는 것을 아는 자는 누가 있을까? 그리고 이웃은 모든 이 각각이되, 상대자 안에 있는 선의 분량과 종류에 따라서 이다는 것을 누가 아는가? 고로 누군가가 지닌 선 자체가 주님 자신이다는 것, 그 이유가 최고 의미에서 그분은 선 안에 계시고, 선은 그분으로부터 있기 때문, 또한 그분으로부터 있지 않은 선은 제아무리 선이라고 나타날지언정 선이 아님을 누가 알고 있을까? 그리고 선행이 무엇인지, 그리고 이웃이 누구인지가 알려져 있지 않기 때문에, 말씀에서 등장하는 이들, 즉 “가난한 자”, “비참한 자”, “궁핍한 자”, “아픈 자”, “배고픈 자”, “목마른 자”, “압제받는 자”, “과부들”, “고아들”, “포로된 자”, “벌거벗은 자”, “체류자”, “소경”, “귀머거리”, “절름발이”, “불구자”, 그리고 여타 다른 사람들에 의해 의미되는 것도 모른다; 그렇지만 고대인들의 교리물은 이들이 누구였는지를, 이들이 이웃의 어떤 계층에 속하는지를, 선행의 어떤 부류였는지를 가르쳤다. 글자 의미에 있는 말씀의 전체는 이런 교리적인 것들에 따라 쓰여 있다, 하여 그것들에 관한 지식을 가지지 않은 자는 말씀의 어떤 내면의 의미라도 아는 것이 가능할 수 없다.
이사야서에서:
배고픈 자에게 빵을 떼어주는 것, 그리고 내쫓긴 고뇌받는 자를 네 집으로 데려오는 것이 아니겠느냐? 네가 벌거벗은 자를 볼 때, 네가 그를 덮어주고, 그리고 네가 네 자신의 살로 부터 자신을 숨기지 않는 것이 아니겠느냐? 그때에 네 빛은 새벽같이 밝아질 것이다, 그리 고 네 치료함은 빠르게 있어질 것이다; 그리고 네 의로움이 네 앞서 갈 것이고, 여호와의 영광이 너를 그러모을 것이다 (이. 58:7, 8).
글자 의미가 의미의 전부인 듯 힘주어 말하는 이들은 만일 자기들이 배고픈 자에게 빵만을 주는 것, 내쫓긴 자, 방랑자를 자기 집으로 데려오는 것만 가지고, 그리고 벌거벗은 자를 덮어주는 것만 가지고, 그는 여호와의 영광 안으로, 또는 천국 안으로 들어갈 것이라고 믿는다; 그럼에도 이런 행동들은 때로는 사악한 자가 자기 공적을 치대기 위해 행할 수도 있는 것, 즉 바깥쪽의 행동들에 불과하다; 그러나 “배고픈 자”, “고뇌하는 자”, “벌거벗은 자”에 의해 영적으로 이와 같은 이들, 고로 이들은 선행이 실시되어야 하는 이웃의 각기 다른 상태를 의미한다.
다윗서에서:
압제받는 자를 위해 공정을 집행하는 자; 배고픈 자에게 빵을 주는 자; 여호와께서 갇힌 자 를 풀어주신다; 여호와께서는 소경의 눈을 여신다; 여호와께서는 구부려있는 그들을 일으켜 세우신다; 여호와께서는 의로운 자를 사랑하신다; 여호와께서는 방랑자를 지켜주신다; 그분 은 아버지 없는 자와 과부를 지지하신다 (시. 146:7-9);
위에서 “압제받는 자”, “배고픈 자”, “갇힌 자”, “소경”, “구부려있는 자”, “방랑자”. “아버지 없는 자와 과부”는 실제로 그러한 자를 뜻하지 않고, 영적으로 그러한 상태인 자, 즉 혼의 측면에서 그러한 자를 뜻하고 있다. 이런 자들이 누구였는지, 이런 자들이 어떤 상태와 계층의 이웃인지, 이런 각각의 이웃에 무슨 선행이 실시되어야 하는지를 고대인들의 교리적인 것들에 의해 가르쳐졌다; 그 이유가 신성이 인간과 더불은 자연 평면에 내려올 때, 그것은 이웃의 종들(genera)과 속들(speices)에 따라 구별하여 선행의 일들 안으로 내려오기 때문이다.
주님 역시 같은 방식으로 이야기하셨다, 그 이유는 그분께서는 신성 자체로부터 이야기하셨기 때문인데, 마태복음서에서:
그때에 왕이 그분의 오른편에 있는 이들에게 말할 것이다, 오라 내 아버지의 축복을 받은 너희여, 너희를 위해 준비한 왕국을 상속받아라; 그 이유가 내가 배고팟을 때, 그리고 너 희는 나에게 먹을 것을 주었고; 내가 목말랐을 때, 그리고 너희는 나에게 마실 것을 주었 고; 내가 객이었을 때, 그리고 너희는 나를 맞아들였고; 벌거벗고 있을 때, 그리고 너희는 나에게 옷을 입혔고; 내가 아팠을 때, 그리고 너희는 나를 방문했고; 내가 감옥에 있을 때, 그리고 너희는 나에게 왔다 (마. 25:34-36).
위에서 열거된 일들은 선행의 넓은 측면에서의 종들(genera)을 의미한다; 그리고 선행이 실시되어야 하는 선들, 또는 선한 사람들이 어떤 등차에 있는지를 알게 한다; 그리고 최고 의미에서 주님이 이웃이다는 것도 가르치신다, 그 이유가 그분이 이렇게 말하시기 때문이다:
너희가 네 형제의 지극히 작은 자에게 행한 것이 나에게 그것을 행한 것과 같다
(마. 25:40).
이런 몇 예들로부터 고대인들과 더불은 진리들에 의해 뜻해진 것을 알는지 모른다. 그러나 이런 진리들은 신앙의 교리적인 것들 안에 있되, 선행의 삶 안에 있지 않은 이들에 의해, 즉 말씀에서 “불레셋”이라 불리운 자들에 의해 멸절되었는 바, 이것이 아브라함이 죽은 후에 우물들을 막은 불레셋인들에 의해 의미되어 있다. 이는 다음에 취급되는 주제이다.

그리고 불레셋 사람들은 아브라함이 죽은 후에 그것들을 틀어 막았다. 이는 지식들 중에서도 기억 속의 지식에 있는 그들은 이러한 진리들을 부정했음을 의미한다. 이는 “틀어막음”의 의미가 기꺼이 알려하지 않는 것, 같은 말로, 부정하는 것, 고로 그것들을 말살하는 것이다로부터; 그리고 불레셋의 표현이 지식들 중에서 기억 속의 지식에만 안주하는 이들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신앙의 교리적인 것들 안에 있되 지식들 속의 진리들, 교리적인 것들 속의 진리들을 기꺼이 알려하지 않는 이들은 지식들 중에서 기억 속의 지식 안에 있는 이들이다. 지식들 속의 진리들 또는 교리적인 것들 속의 진리들은 삶 속에 있는 바, 이것들은 이웃을 향한 선행과 주님을 사랑함을 중요시한다. 이런 교리적인 것들과 지식들이 속하는 교리가 단지 가르쳐지고만 있는 것; 고로 행해야 한다고 가르치는 이들, 그러고서 정작 자신은 딴 짓을 하는 이들은 진리들을 기꺼이 알려 들지 않는다, 그 이유는 진리가 자기 삶과 반대이기 때문이다; 자기 생명에 반대되는 바, 결국 그는 부정한다. 이런 원인으로부터 사랑과 선행의 교리적인 것들, 고대 교회의 교리의 전부였던 것들이 말살된 것이다.

그리고 그는 그 우물들의 이름을…불렀다. 이는 이런 진리들의 품질을 의미한다. 이는 “이름들을 부름”이 품질을 의미함으로부터; 그리고 “이름들을 부르는 것”, 또는 “이름”이 품질을 의미하는 바, 이름을 언급함 없이 “부르는 것”도 이런 품질로부터 있음을 의미하고 있다. 이사야서에서:
너희는 이것을 듣거라 이스라엘의 이름에 의해 불리워진 야곱(이스라엘)의 가문아. 그 이 유가 그들은 자신들을 거룩함의 성으로부터 불렀고, 자신들이 이스라엘의 하느님 위에 머 물렀기 때문이다 (이. 48:1, 2);
위에서 “자신들을 거룩한 성으로부터 불렀음”은 그와 같은 품질을 의미한다. 누가복음서에서:
보라 너는 네 자궁 안에 임신할 것이다, 그리고 아들을 낳을 것이다, 그리고 그의 이름을 예수라고 부를 것이다; 그분은 위대하실 것이다, 그리고 지극히 높은 분의 아들이라 불리울 것이다 (눅. 1:31, 32).
“지극히 높은 자의 아들이라 불린다”는 것은 있음(being)을 표시한다.

그의 아버지가 그것들을 불렀던 이름에 따라. 이는 진리 속의 의미들을 의미한다. 고대 시대에서 인물들, 장소들, 그리고 어떤 것들에 주어진 이름들은 모두 의미들이 있었다; 고로 샘들이나 우물들에 주어진 이름들은 샘들과 우물들에 의해 이전에 이해하였던 것들에 관한 의미들이었다, 그리고 이것은 진리에 관련되고 있다; 그리고 이름들에 의미들이 있기 때문에, 이름 또는 “이름을 부름”에 의해 일반적으로 어떤 것, 또는 어떤 상태에 관한 품질을 의미했다; 이럴진대, 말씀에서 이름들에 의해 내적 의미에서는 어떤 인물, 어떤 나라, 어떤 왕국, 어떤 도성 등을 지칭하는 것이 아닌 어떤 실제의 것들을 항상 의미해주고 있다. 이 구절에 있는 “우물들”의 경우, 천국으로부터의 어떤 것이 의미되어 있다는 것은 모든 이에게 분명할 것이다; 그 이유가 이렇지 않다면, 우물들에 관련지어 있는 많은 세부 사항들 역시 신성한 말씀으로서의 가치가 없을 것이기 때문, 그 이유는 그것들을 아는 것이 아무 유용함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불레셋인들이 아브라함의 종들이 파놓은 우물들을 틀어막았다는 것, 이삭이 그것들을 다시 열었다는 것, 그리고 그는 이전의 이름들에 따라 이름지어 불렀다는 것; 그리고 그 후에 이삭의 종들이 계곡에서 우물들을 팟는데, 이를 가지고 목자들이 다툰 것; 그리고 그들은 또 다른 우물을 팟는데, 이것 가지고도 역시 그들은 다투었다는 것; 그리고 그 후에 또 다른 우물을 팟는데 이것 가지고는 다투지 않았다는 것; 그리고 또 다시 다른 우물(을 팟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들은 이삭에게 새로운 우물에 관하여 말했다 (15, 18-22, 25, 32, 33절); 이제 이 우물들에 관한 천국의 의미가 내적 의미로부터 분명해진다.

19-21절. 그리고 이삭의 종들이 계곡에서 팟다, 그리고 살아 있는 물의 우물을 거기서 발견했다. 20 그리고 그랄의 목자들이 이삭의 목자들과 다투어, 말하기를, 이 물들은 우리 것이다. 그리고 그는 이 우물의 이름을 에섹이라 불렀다, 그 이유는 그들이 그와 다투었기 때문이다. 21 그리고 그들은 또 다른 우물을 팟다, 그리고 그들은 또한 다투었다, 그리고 그는 그것의 이름을 싯나라고 불렀다.

그리고 이삭의 종들이 계곡에서 팟다, 그리고 살아 있는 우물을 발견하였다. 이는 내적 의미를 지닌 글자 의미에 관한 말씀을 의미한다. 이는 “계곡에서 팜”이 진리들이 어디 있는지를 보다 아래쪽 수준으로 내려가 찾는 것을 의미한다로부터; 그 이유가 “파는 것”은 찾는 것, 그리고 “계곡”은 아래쪽인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살아 있는 물들의 우물”이 신성으로부터의 진리들이 있는 말씀을 의미한다로부터; 고로 내적 의미를 담고 있는 글자 의미 측면에서의 말씀이다로부터 알려진다. 말씀이 “샘(fountain))”, 그리고 실로 “살아 있는 물들의 샘”이라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말씀이 “우물(well)”로도 불리우는 이유는 글자 의미가 상대적으로 샘 같기 때문이다. 또한 영적 평면에 있는 이들에게 말씀은 상대적으로 “샘”이 아니라 “우물”이기 때문이다. “계곡” 아래쪽인 것, 또는 같은 말로 외면의 것, 그리고 샘은 계곡에서 발견되었다, 그리고 글자 의미는 말씀의 보다 낮은쪽, 외면의 의미인 바, 뜻해지는 것은 글자 의미이다; 그러나 내적 의미, 즉 천적이고 신성한 의미가 글자 의미 안쪽에 있기 때문에, 즉 그 우물로부터의 물은 “살아 있다” 라고 불리운다; 이와 마찬가지가 에스겔서에서 새로운 집의 문지방 아래에서 흘러나가는 물들이다:
모두 각각의 기는(움직이는) 살아 있는 창조물, 거기로 강이 오는 때가 오는데, 살 것이다; 그리고 아주 많은 양의 물고기가 있을 것이다, 그 이유는 이 물들이 저쪽으로 와져서 치료 되고, 그리고 강이 가는 곳은 어디든지 모든 것이 살 것이기 때문이다 (겔. 47:9);
위에서 “강”은 말씀이다; “모든 것을 살게 하는 물들”은 그것 안에 포함된 신성한 진리들이다; “물고기”는 기억 속의 지식들이다.
주님의 말씀은 목마른 자에게, 즉 생명을 바라는 자에게 생명을 준다는 것, 그리고 주님의 말씀은 “살아 있는 물들을 지닌 샘”이다는 것, 이를 주님께서 야곱의 우물에서 사마리아의 여인과 이야기하실 때 가르치신다. 요한복음서에서:
만일 네가 하느님의 선물을 알았다면, 그리고 마시도록 나에게 달라고 네게 말하는 분이 누군이신지를 알았다면, 너는 그분에게 (물을) 요구하였을 것이고, 그분은 살아 있는 물을 주셨을 것이다. 내가 그에게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누구든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내가 그에게 주는 물은 그 사람 안에서 영원한 삶을 솟아오르게 하는 물 있는 샘이 될 것이다 (요. 4:10, 14).
말씀이 살아 있고, 하여 생명을 주는 이유는 말씀은 최고 의미에서 주님을, 가장 깊은 의미에서 주님이 모든 것이 되어 있는 그분의 왕국을 취급하기 때문에서 이다; 이럴진대, 말씀 안에 생명 자체가 있고, 이 생명은 경건함에서 말씀을 읽는 이들의 마음 안으로 흘러든다; 이로부터 그분 자신으로부터 있는 말씀에 관련하여 주님께서는 그분 자신이 “영원한 삶으로 솟아오르게 하는 물 있는 샘”이라고 선포하신다.
주님의 말씀이 “샘”이라 불리우둣, “우물” 또한 그렇게 불리운다, 모세의 책에서:
이스라엘은 이런 노래를 불렀다: 솟아오르라, 오 우물아, 너희는 그것에게 답하라: 제 일 인 자가 우물을 팟다; 백성의 우두머리들이 그들의 장대들을 가진 입법자를 위해 그것을 팟다 (민. 21:17, 18).
위 말들은 “장소 브엘”에서, 즉 “우물의 장소”에서 이야기 되어졌다. 여기서의 “우물”이 고대 교회의 말씀이다는 것은 위 구절에서 말해진 것으로부터 분명해진다; “제 일인 자(princes, 족장)”는 근원되는 제 일 가는 진리들이다; “백성의 우두머리(chief)들”은 보다 낮은 진리들, 즉 글자 의미에 있는 진리들; “입법자”는 주님이시다; “장대(stave)들”은 그들이 소유한 능력들을 표시한다.

그리고 그랄의 목자들이 이삭의 목자들과 다투었다. 이는 말씀의 글자 의미 만을 인정하고 가르친 이들은 글자 의미 안에 여느 다른 의미를 보지 못했다, 그 이유는 의미들이 반대적으로 나타났기 때문임을 의미한다. 이는 “논쟁함”이 내적 의미에 관한 경우, 그들은 그것을 보지 못한다고 말하는 식으로 해서 그런 의미가 없다고 부정해버림을 의미한다로부터: 그리고 “목자”의 의미가 가르치는 이들이다로부터; 그리고 “그랄”의 의미가 신앙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고로 “그랄의 계곡의 목자들”이란 말씀의 글자 의미만을 인정하는 이들을 표시한다. 그들이 내면의 의미를 보지 못하는 이유는 두 의미, 즉 글자 의미와 내면의 의미가 반대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이럴 때 그들은 왜 그런 의미가 있는지를 입증하지 못한다. 그 이유는 그것들이 전적으로 상응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들이 반대적으로 나타나는 이유는 말씀을 보는 이들의 상태 역시 반대적이기 때문이다;
이는 자신을 반대적 위치에 둔 인간의 경우와 같다, 즉 이들의 외적, 또는 자연적 인간은 그의 내적, 또는 영적 인간과 완전히 불일치함에 있기 때문이다. 이 인간은 외적, 자연적 인간의 수준만을 고집하는 바, 그는 자기 속의 내적, 영적 인간으로부터 있는 것은 자신에게 반대되어 있다고 보고 있어, 자신 스스로 반대적 위치를 선택하고 있는 셈이다; 그리고 만일 그가 이런 식으로 있지 않다면, 그의 외적, 자연적 인간이 내적, 영적 인간에 순종함을 산출하여 두 측면은 완전한 상응 관계에 있었을 것이다. 예를 들면: 반대적 위치에 있는 인간은 자기가 영원한 생명을 받으려면 자기는 재물들을 포기해야 한다고, 뿐만 아니라 육체와 세상적인 모든 즐거움도, 고로 삶의 즐거움을 포기해야 한다고 믿는다; 즉 이런 것들은 영적 삶(생명)에 반대되는 삶에 해당된다고 상상하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이런 것들 자체로 볼 때, 그렇지 않고, 그것들은 실상 상응하고 있다, 그 이유는 그것들은 목적에 대한 수단이기 때문이다, 즉 내적, 영적 인간은 선행의 선들을 수행하기 위해서 외적, 자연적 인간에 속하는 것을 즐기고, 건강한 육체에 만족하여 살아 갈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목적만이 내적 인간과 외적 인간이 반대적 위치에, 또는 상응하는 위치에 있게 하는 원인이 된다; 재물, 쾌락, 그리고 즐거움 등이 목적이라 말할 때, 두 인간들은 논쟁한다. 이런 경우, 내적 인간 속의 영적, 천적인 것들이 경멸당하고, 그렇다, 거절되어진다; 그러나 위의 것들이 목적이 되어 있지 않을 때, 두 인간들은 상응하고 있다. 즉 더 높은 목적, 사후 삶에 속하는 것, 천국의 왕국과 주님 자신에 목적을 둘 때 상응하게 된다. 이런 경우 육체적, 세상적인 것들은 영적인 것들과 비교하고 토론하고 하는 대상이 되어지지를 않는다. 그가 이런 것들을 생각할 때, 그는 그것들을 목적에 대한 수단의 한계를 넘는 일이 없다.
이로부터 분명한 바, 반대된다고 나타나 있는 것들이 자체적으로는 반대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이 반대되어 있는 한 그렇게 나타난다. 반대되어 있지 않은 이들도 반대되어 있는 이들과 일상 생활에서 거의 비슷하게 행동하고, 말하고, 재물을 취득하고, 쌓기도 하고, 여러 가지에서 쾌락과 즐거움을 즐기는 바, 바깥쪽 나타남에서 두 반대 위치의 인간은 서로로부터 구분하기 힘들 수 있다. 그 이유는 각자의 목적만으로, 또는 같은 말로 사랑들로 구별될 수 있기 때문에서 이다. 그 이유가 사랑들이 각자의 목적들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비록 바깥쪽 형체에서, 또는 육체에 관련해서, 그들은 비슷하게 나타난다 해도, 내향의 형체에서, 또는 영에 관련해서 그들은 완전히 같지 않게 나타난다. 상응 안에 있는 영, 즉 외적 인간이 내적 인간과 상응하는 인간의 영은 곱고 아름다워서 형체에서 마치 천국의 사랑과 같다; 그러나 반대되어 있는 인간의 영, 즉 외적 인간이 내적 인간에 반대하는 영도 다른 인간의 바깥쪽과 유사할는지 모르나, 형체에서 검고 추하여, 마치 자기와 세상을 사랑함 같은, 마치 타인들을 경멸하고 증오하는 것과 같다.
말씀 안에 있는 많은 것들에서 위와 같은 것을 볼 수 있다; 말하자면, 글자 의미 안에 있는 것들이 내적 의미 안에 있는 이들에게 반대되어 나타나는 경우이다. 그럼에도 그것들은 결코 반대되어 있지 않고 완전하게 상응하고 있다. 예를 들면: 말씀에서 여호와 또는 주님이 성내신다, 파괴하신다, 지옥으로 내던지신다; 그럼에도 그분은 결코 화내시지 않고, 더구나 누구이든 지옥에 던지시는 일이 결코 없으시다; 전자는 글자 의미이나 후자는 내적 의미이다. 이 둘은 반대 위치에 있는 이유는 인간이 반대 위치에 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 방식에서, 주님은 천국에 있는 천사에게 태양으로 나타나시어, 그들에게 봄철의 따뜻함을, 새벽부터 온 종일 빛을 주신다; 그러나 지옥인에게 그분은 암흑이라 할 정도의 불투명한 어떤 것으로 나타나신다, 이로부터 겨울의 차거움, 한밤중의 어둠으로 나타나신다. 결과적으로 천사들에게 그분은 사랑과 선행 안에서 나타나시고, 지옥인에게는 증오하심과 적개심으로 나타나신다; 고로 후자에게는 글자 의미에 따라서 있는 바, 그분이 성내시고, 파괴하시고, 지옥으로 내치신다; 그러나 전자에게서는 내적 의미에 따라서 인 바, 그분이 성내시고, 파괴하시고, 지옥에 내치는 경우는 결코 없는 것이다. 하여 신성에 반대되는 것을 말씀에서 취급할 경우, 그것들에 일치하는 나타남을 표출하는 것은 피할 도리가 없다. 이런 방식으로 일하는 신성을 어느 사악한 자가 악마적인 것으로 바꾸려하면, 그가 신성에 접근하려 한 만큼 멀리 지옥의 고통 안으로 내던져진다.
이런 반대적인 경우는 주님이 가르치신 기도에도 있다: “우리를 시험으로 이끌지 마옵소서 (Lead us not into temptation)”에서 이다. 글자 의미로 보면 주님은 우리를 시험으로 이끄시는 분 같다; 그러나 내적 의미에서의 경우, 그분은 누구도 시험으로 이끄시지 않는다, 사실 이 내적 의미는 통상 잘 알려져 있기도 하다 (하여 한국어 주기도문의 경우, 우리를 시험에 들게 마옵시고… 라고 의역하여 내적 의미의 조금을 맛보게 하고 있지 않나 사료된다. 역자 주). 사실상 글자 의미에 속한 여느 다른 말씀의 구절도 이와 같다.

말하기를, 이 물들은 우리 것이다. 이는 그들이 진리 안에 있음, 또는 진리들을 가지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는 “물들”이 지식들, 또한 진리들이다로부터 알려진다.

그리고 그는 이 우물의 이름을 에섹이라 불렀는데, 그 이유는 그들이 그와 다투었기 때문이다. 이는 이웃을 향한 선행은 없는 채 신앙의 교리적인 것들에만 있으면서 가르친 이들은 글자 의미 안에 내적 의미가 있다는 것을 부정하는데, 그 이유는 내적 의미가 자기들이 가르치는 것과 아주 다르기 때문 임을 의미한다. 이는 옛날에 붙여진 이름들은 실제의 것, 또는 상태를 의미하였다는 사실로부터 알게 된다; 이로 인해 그때의 사람들은 이런 것들에 관하여, 특히 그것들의 품질에 관하여 많은 것들을 마음에 새기는 것이 가능했었다. 이 구절의 경우, 그랄의 목자들이 이삭의 목자들과 논쟁했기에, 이름은 이런 주변 상황에 맞추어 명명되었다. “논쟁함(disputing)”, 또는 “다툼(contending)”은 부정함 또한 의미한다; 이로부터 이름 “에섹”이 왔는데, 원어에서 “다툼”, “논쟁함”을 뜻하고 있다. 이 말은 반대함, 상해를 입힘을 뜻하는 단어들로부터 갈라져 나왔다. 그리고 이 대목에서 “우물”은 내적 의미를 담고 있는 글자 의미라는 측면에서의 말씀을 의미하기에, “에섹” 또는 “다툼”은 말씀의 내적 의미를 부정함이 의미된다. 부정의 원인들 역시 같은 표현 안에 담겨 있다. 즉 글자와 영적 의미는 반대로 나타나 있다는 것, 그와 다른 구절도 그러하다는 것이다.
말씀의 내적 의미에 주목하면 이렇다: “불레셋인”이라 불리우는 자들, 즉 지식들 중의 기억 속의 지식만에 있는 이들, 그리고 “그랄의 목자”라고 불리우는 이들, 즉 신앙의 교리적인 것들만에 있는 이들, 이들 모두는 이웃을 향한 선행 안에 있지 않은 바, 그들은 말씀에 내적 의미가 있다는 것을 부정하는 도리밖에 방법이 없다. 그 주된 원인은 비록 그들이 입술로 주님을 고백함을 외쳐댄다 해도, 그들의 심정은 주님을 인정하지 않는 것, 비록 그들이 이웃을 사랑한다고 외친다 해도 그들의 심정은 주님을 인정하지 않고 있는 것에 있다; 그리고 심정에서 주님을 인정하지 않는 자, 그리고 심정에서 이웃을 사랑함이 없는 자는 말씀의 내적 의미를 부정하는 길밖에 또 다른 궁리를 할 수 없다; 그 이유는 내적 의미에서의 말씀은 주님을 사랑함과 이웃을 향한 사랑밖에 더 다른 것을 취급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두 명령들에 율법과 예언들, 즉 말씀 전체가 걸려 있다고 주님께서 말하신 것이다 (마. 22:37-40). 이들이 말씀의 내적 의미를 얼마나 대단하게 부정하는지를 나로 알게 하도록 다른 삶에 있는 이런 인물들을 보는 것이 허락되었었다; 글자 의미에서 나타나지 않아도 말씀의 내적 의미는 존재한다는 것, 그리고 그 의미에서는 주님과 이웃을 사랑함이 취급되고 있다는 말만 그들 앞에서 꺼내어도 그들은 부정할 뿐 아니라, 혐오하고 진저리를 내기까지 하는 것이 지각되어졌다. 이것은 이 부정함의 제일의 원인이다.
또 다른 원인은 그들은 위쪽에 두어야할 것을 아래쪽에 놓는 방식, 또는 앞 줄에 세워 진열해야 하는 것을 뒷줄에 세워두는 방식의 편법을 쓰는 것이다. 그 이유가 그들은 신앙을 교회의 제 1 원리, 어쩌면 절대적 제 1의 서열에 두고, 주님을 사랑함과 이웃을 향한 사랑에 속한 것들은 신앙의 열매 정도로 치부하는 것이다. 진리인즉, 주님을 사랑함은 에덴의 낙원에서 생명의 나무에 비교되고, 선행과 그것의 일들은 주님을 사랑함으로부터의 열매들이고, 신앙과 신앙으로부터의 것들은 생명의 나무의 잎들일 뿐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열매가 나무로부터가 아니고 잎들로부터 라고 말씀을 변형시키는 것인데, 하물며 말씀의 내적 의미를 부정하고 글자 의미만을 고집하는 것쯤이야 식은 죽 먹기에 불과한 부정함이다. 그 이유가 글자 의미로부터 수많은 교조(독단적 주장, dogma), 지독한 이단적(heretical) 주장도 자기들의 주장을 뒷받침할 수 있는 대목들을 추출해 들이대고 있음은 누구에게나 알려진 사실일 것이다. (로마병들이 주님의 겉옷(글자 의미)은 나누어 가졌으되 속옷은 제비뽑는 방식으로 가져 감으로 속옷(내적 의미)은 찢어 나누일 수 없도록 섭리된 측면을 우리에게 말해주는 복음서의 십자가상에서의 주님에 관련한 것을 곁들여 생각해보는 것도 도움이 될지 모른다. 역자 주.)
더욱이 신앙의 교리적인 것들만에 있고, 생활의 선 안에 있지 않은 이들은 진리뿐만 아니라 진리에 덧붙혀 거짓들까지 설득해대는(persuasuive) 신앙 안에, 즉 선입적인(preconceived) 원리들 안에 있을 수밖에 없다. 이런 자들은 타인들보다 더 멍청한 편이다, 그 이유가 누군가이든 설득해대는 신앙, 억지 소리하는 신앙에서 천부적으로 주어진 이해력이 무기력하여 항복한 형국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생활의 선 안에 있는 자들(즉 주님을 사랑함과 아웃을 향한 선행 안에 있는 자들)은 있는 그 만큼에서 총명하다, 즉 주님으로부터의 신앙 안에 있다는 말이다. 이로부터 전자의 부류는 말씀의 내적 의미에 관하여서 부정적 시각을 가짐이 필요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후자의 부류는 긍정적 시각을 가질 수밖에 없다; 그 이유가 교리적인 것들에만 있고, 생활의 선에 있지 않는 이들과 더불어서는 내면들이 닫혀있어, 주님으로부터의 진리의 빛이 흐를 수 없어, 그것이 그렇다 하는 지각을 그들에게 주지 못한다; 이에 반해 주님을 사랑함에 있는 이들과 더불어서는 내면들이 열려 있어, 주님으로부터의 진리의 빛이 흘러들어, 그들의 마음에 감명을 일으키고, 그것이 그렇구나 하는 지각을 준다.
한 가지 더 원인인 것은, 그들은 말씀을 읽으면서 명예들이나 이익들, 명성들을 획득하는 것, 즉 자아와 세상 사랑 외의 즐거움을 가지지 못한다; 따라서 그들이 기대하는 이런 즐거움을 말씀을 읽고 획득하지 못한다면, 그들은 말씀을 통째로 거절해버린다. 이런 부류의 인간들은 말씀을 들을 때 그것의 내적 의미를 심정에서 부정하고, 설사 글자 의미까지를 부정하지는 않는다고 상상한다 해도 실상 글자 의미 자체까지 부정하는 셈이다. 그 이유가 자기와 세상을 사랑함으로부터의 즐거움을 자기의 목적으로 삼는 이들은 영원한 삶에 속하는 모든 것을 그의 심정으로부터 내쫓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의 자연적, 육체적 인간으로부터만 이런 식의 고백을, 즉 진리들이 주님과 그분의 왕국을 위하여서가 아니고 자신과 자신 고유의 것을 위하여서 있을 때만이 진리라고 부른다. 이런 자들이 말씀의 내적 의미를 부정하는 “그랄의 계곡의 목자들”, 그리고 “불레셋인”이라 일컬어진다.

그리고 그들은 또 다른 우물을 팟다, 그리고 그들은 또한 다투었다. 이는 말씀에 내적 의미라는 것이 과연 있는지 그렇지 않은지 그 존재에 관하여를 의미한다. 이는 “또 다른 우물”, 그리고 “다툼(striving)”의 의미로부터; 그리고 시리즈로부터도 알게 된다; 그 이유가 어떤 것을 부정할 때, 말씀의 내적 의미를 부정하는 이들이 실례를 들면서 다시 다투고 경쟁할 때, 말씀의 내적 의미가 과연 존재하는지 여부를 따지는 것이 반드시 선결 조건이기 때문이다. 오늘날에 있는 최고로 격렬하다 싶은 논쟁도 이 정도 이상의 범주를 벗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인간이 어떤 것이 존재하는 지 여부, 그리고 그것이 그러한지 여부에 관련한 토론에 남아 있는 한, 그들은 지혜의 어떤 것 안으로의 발전은 결코 없다; 그 이유가 그들이 토론하는 어떤 것 자체 안에는 그들이 그것을 인정하지 않는 한 볼 수 없는 무수한 것들이 있기 때문인데, 이렇게 되는 이유 역시 그들은 그것에 속하는 모든 것에 무지하기 때문이다.
작금의 학식자들은 어떤 것이 어떤 존재를 가지는지, 그리고 그것이 있는지 여부에 관한 지점을 건너가지 못한다; 이런 결과는 인간이 진리를 이해함으로부터 닫혀지는 것이다. 예를 들면: 말씀에 내적 의미가 있는지 여부를 토론만 하는 이들은 내적 의미 안에 무수한 것들, 한계가 없는 것들이 있음을 볼 수 없다; 그리고 다시, 선행이 교회 안에서 어떤 것인지를, 그리고 선행으로부터의 모든 것들이 신앙으로부터 있지 않는지 여부를 토론하는 이들은 선행 안에 있는 무수한 것들, 한계 없는 것들을 아는 것이 가능할 수 없다, 하여 선행이 무엇인지에 관하여 완전히 무지함에서 남아 있다.
위와 같은 식으로 사후 삶에 관하여도, 죽은 자들의 부활에 관련해서도, 천국과 지옥과 더불어서도 이와 같은 것들이 존재하는지 여부를 토론만 하는 이들은 문에서 노크만 할 뿐 지혜의 장엄한 궁전이 있는 안쪽을 쳐다볼 수조차 없다. 그럼에도 이상한 것은, 이런 지경인데도 그들은 타인들에 비해 슬기롭다고 자찬한다, 게다가 이런 사항이 그러한지 여부를 토론함에서, 특히 그렇지 않음을 토론함에서 자기들을 능가할 자 없다고 떠벌린다. 한편 이들이 깔보는 단순한 선 안에 있는 이들은 어떤 토론 없이도, 학식자라는 자들이 이것 저것 들추어 이것이 있는지, 그러한지 여부를 따져 많은 시간과 노력을 함과 아주 달리 단번에 지각할 수 있다. 이들은 진리에 대한 지각을 상식적 수준에서 별 어려움 없이 가지고 있다. 이에 반해 후자는 어떤 것이 어떤 존재를 가지는지 여부에 대한 토론함을 우선적으로 바램으로 인해 단순한 자들이 누리는 복을 내팽겨치고 있다. 하여 이를 두고 주님께서 지혜롭고 똑똑하다는 자들로부터서는 감추이시고, 어린 아기들에게 밝히 알리신다고 말하시어 이 두 대비되는 자들에 관해 말하신 대목도 있다 (마. 11:25; 눅. 10:21).

그리고 그는 그것의 이름을 싯나라고 불렀다. 이는 그것의 품질을 의미한다. 이는 “이름을 부름”이 품질을 표시한다로부터; 그리고 “싯나”의 원어상의 의미가 “적대적 임”, 고로 한층 더 부정적 수준이다로 알려진다.

22, 23절. 그리고 그는 거기에서 이동했다, 그리고 또 다른 우물을 팟다, 그리고 이 우물로 인하여서는 다툼이 없었다. 그리고 그는 그것의 이름을 르호봇이라 불렀다. 그리고 그는 말했다, 이제는 여호와께서 우리를 더 확장되게 하셨다, 그리고 우리는 이 토지에서 열매를 많이 맺을 것이다. 23 그리고 그는 거기로부터 브엘-세바로 올라 갔다.

그리고 그는 거기로부터 이동했다. 이는 아직 더 낮은 것들쪽으로를 의미한다. 이는 “이동함”의 의미가 시리즈에서 뒤이어지는 다른 것들쪽으로 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보다 낮은쪽, 또는 외면의 진리들쪽으로 인데, 그 이유는 지금까지 이어져 온 것들은 질서적으로 볼 때 보다 높은, 또는 내면의 진리들이 취급되어 왔기 때문이다. 보다 낮은 진리, 또는 외면의 진리들은 말씀의 글자 의미에서 나타나는 진리들이고, 이 진리들은 자연적 인간의 납득력에 적합한 수준의 진리들이다. 이런 진리들이 지금 취급된다.

그리고 또 다른 우물을 팟다, 그리고 이 우물로 인한 다툼은 없었다. 이는 말씀의 글자 의미를 의미한다. 이는 “우물”의 의미가 말씀이다로부터 분명해진다, 그 이유가 “그는 거기로부터 이동했다, 그리고 또 다른 우물을 팟다, 그리고 이것 때문에 그들은 다투지 않았다”라고 말해지기 때문인데, 이 말을 수단으로 보다 더 외면에 있는 말씀이 의미되고, 이것을 그들은 부정 못한다는 것, 이 의미가 글자 의미라 불린다는 것이다. 말씀의 글자 의미는 세 겹이다: 즉 역사적 의미, 예언적 의미, 그리고 교리적 의미이고, 이 각각의 의미는 외적인 것들에만 있는 이들에 의해서도 납득될는지 모른다.
말씀에 주목하면 이렇다: 태고 때, 천적 (수준의) 교회가 존재했을 때, 말씀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이 교회인들은 자기들의 심정에 말씀을 새겼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주님께서는 그들을 천국을 통하여 선인 것을, 그로부터 진리인 것을 직접적으로 가르치셨고, 사랑과 선행을 지각하는 것을, 그리고 계시로부터 아는 것을 그들에게 주셨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순수한 말씀 자체(the veriest Word)가 주님이었다. 이 교회 이후 천적 (수준)이지는 않고 영적 (수준)인 교회가 계승되었다. 이 교회의 초기 시절에는 태고인들로부터 수집되어져온 말씀 외에 다른 말씀은 없었다; 이 말씀은 주님을 표현하고 있고, 그분의 왕국을 의미하고 있었다; 고로 내적 의미가 그들에게 말씀 자체(the very Word)가 되어 있었다. (그들은 쓰여진 말씀인 역사적, 예언적 말씀 역시 가졌다는 것, 그런데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는 것; 이 말씀 안에도 내적 의미가 있었다는 것, 이 의미는 주님에 관련된 것이다는 것 등등에 관해서는 2686항을 보라.) 이로부터 이 당시의 지혜는 표현들과 의미들을 수단으로 이야기하고 쓰는 것이었다; 즉 교회 안쪽에서는 신성한 것들에 관하여, 그리고 교회 바깥쪽에서는 그 외 다른 것들에 관하여 표현하고 의미하는 것을 말하고 쓴 것이다; 이는 우리에게도 매우 조금이나마 남아 있는 이 고대인들의 저술로부터도 분명해진다. 그러나 시간의 흐름에서 이 지혜는 멸절되었는데, 말씀의 책들 안에 있는 어떤 내적 의미도 알지 못하는 지경에까지 멸절되고 말았다. 유대와 이스라엘 나라가 이 구절에서 언급되는 품성 속에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예언적 말씀이 고대적이라고 생각된다는 사실로부터 이 말씀을 거룩한 저술로 간주했다, 그리고 그들은 글자의 의미 안에서 이름 여호와를 들었다; 그리고 그들은 신성으로부터의 어떤 것이 글자 의미 안쪽에 깊이 감추여 있다는 것을 믿지 않았다; 이런 점은 기독교계도 그들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이로부터 우리가 알게 되는 바는, 계속되는 시간 안에서 지혜가 가장 깊은 것들로부터 가장 바깥쪽에 이르기까지 철저히 은퇴한 것에 대해서; 그리고 인간은 천국으로부터 자신을 얼마나 멀리 옮겨놓았는 지를, 하여 땅의 먼지에까지 와닿게 했는지를, 그 먼지 안에 인간이 지혜를 놓이게 했다는 것도 짐작하게 한다. 말씀과 더불어 되어간 추세가 이렇듯, 마찬가지로 말씀의 내적 의미도 계속적으로 말살되어 갔고, 오늘날, 이 의미는 신성이 가장 근접되게 거주하는 순수한 말씀 자체(the veriest Word)일진대, 이것의 계속되는 상태들이 이 장에서 묘사되어 있다.

그리고 그는 그것의 이름을 르호봇이라 불렀다. 이는 그 결과로서 있는 진리에 관한 품질을 의미한다; 이는 “이름을 부름”의 의미가 품질을 표시함이다로부터; 그리고 “르호봇”의 의미가 진리들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원어상에서 “르호봇”은 “넓이들(breadths)”을 뜻하나, 이 넓이의 내적 의미가 진리를 표시한다.

그리고 그는 말했다, 지금 여호와께서는 우리를 더 확장되게 하셨다. 이는 거기로부터 진리가 계속적으로 증가함을 의미한다; 이는 “넓이”가 진리이다부터 알려지는데 방금 위에서 말했다; 이로부터 “확장되는 것”은 진리의 계속적인 증가를 받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토지에서 열매를 많이 맺을 것이다. 이는 거기로부터 선의 계속적인 증가가 있음을 의미한다; 이는 “열매를 많이 맺음”의 의미가 선의 계속되는 증가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리고 “토지”의 의미가 교회이다로부터, 그리고 교회로부터 있는 것들이다로 알려진다.

그리고 그는 거기로부터 브엘-세바로 올라 갔다. 이는 이로부터의 신앙에 관한 교리는 신성이었음을 의미한다. 이는 “브엘-세바”의 의미가 신앙에 관한 교리, 이는 신성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여기서 “브엘-세바”에 의해 의미되는 신앙에 관한 교리는 말씀의 글자 의미 자체인데, 그 이유는 말씀이 교리 자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글자 의미 측면에서의 말씀에서 진리들이 끌려나오기도 하지만, 때로는 진리이지 않은 것이 말씀의 글자로부터 오히려 확증의 빌미를 제공하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는 것은 세상에 널려 있는 이교(heresy)들로부터 알 것이다. 그러나 슬기로워지기 위해, 즉 선인 것을 행하기 위해, 그리고 진리인 것을 이해하기 위해 말씀을 읽는 이들은 당사자의 목적과 애착에 따라서 가르쳐진다; 비록 당사자는 모를지언정 주님께서 그의 마음 안으로 흘러드시어 계발하신다, 그리고 그가 (이해가 안되어) 난감한 구절에 부닥뜨려져도 다른 구절들로부터 이해함을 열어주시기도 한다.
더욱이 단순한 선 안에, 그리고 단순 소박한 이들이 글자 의미에 따라 믿었어도, 그가 다른 삶에 도착하면, 천사들에 의해 가르쳐질 때, 진리들을 지각하는 능력이 선물되어진다; 그리고 그러는 사이 그가 가지는 얼마 안되는 진리라도 (그가 세상에서 지녔다가 가지고 온) 선행과 순진에 의해 생생한 진리가 되어 있는다. 하여 이들이 생생한 진리들 안에 있을 때, 세상에서 자기의 무지함의 그늘에 들러붙었던 거짓들이 해를 입히지 못한다, 그 이유가 이 거짓들이 그의 선에 인접된 것이 아니라 마치 주변 멀리에 보류된 채로 있어 쉽게 내던질 수 있는 상황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생활의 선 안에 있지 않았던 자들은 이와 대조되는 형국인데, 그들이 말씀을 잘못 해석함을 수단으로 말씀으로부터 부화해낸 거짓들이 그들의 한 가운데를 점유하고 있고, 진리들이 주변으로 밀려난 형국이다; 그리고 거짓들은 그들의 악한 삶에 인접하여 있고 진리들은 사라지고 있다.

24, 25절. 그리고 여호와께서 그 밤에 그에게 나타나셨다, 그리고 말하셨다, 나는 네 아버지 아브라함의 하느님이다.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너를 복되게 할 것이다, 그리고 네 씨를 나의 종 아브라함 때문에 번성하게 할 것이다. 25 그리고 그는 거기에 제단을 건축했다, 그리고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 그리고 그의 천막을 거기에 단단히 고정시켰다, 그리고 거기서 이삭의 종들은 우물을 팟다

그리고 여호와께서 그 밤에 그에게 나타나, 말하셨다. 이는 말씀의 글자 의미는 희미하다(불명료하다)를 주님께서 지각하심을 의미한다. 이는 “여호와께서 나타나시어 말하심”이 주님을 서술할 때, 신성으로부터 지각하다를 의미한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 이유가 여호와께서 그분 안에 계셨기 때문이다; 고로 그분의 인간 본질이 신성이 되심이 아직은 아닌 상태에서 여호와의 나타나심은 신성한 지각, 또는 신성으로부터 지각하심 이었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그에게 나타나 말하심”에 의해 이것이 의미되었다; 그리고 “밤”의 의미가 그늘의 상태, 또는 불명료한 상태이다로부터 알려진다. 이 불명료함에 의해 말씀의 글자 의미가 의미되었다. 그 이유가 내적 의미가 빛에 있는 상태임에 비해 글자 의미는 상대적으로 그늘진 상태이기 때문이다.
위의 상황을 좀 더 마음에 와닿게 하기 위해 설명을 보태고 지나가고자 한다. 글자 의미와 내적 의미를 동시에 놓고 생각하면, 글자 의미는 인간의 외면, 또는 자연 평면의 것, 그리고 육체적 수준의 것에 해당됨에 비해, 내적 의미는 그의 내면, 또는 천적, 영적 수준의 것에 해당된다, 그의 내면들은 천국의 빛 안에 있고, 그의 외면들은 세상의 빛 안에 있다. 천국의 빛과 세상의 빛에는 어떤 차이가 있는지, 결과적으로 천국의 빛으로부터 있는 것과 세상의 빛으로부터 있는 것 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는지는 앞에서 이미 많이 반복해 살폈다, 한마디로 이는 낮의 빛됨과 밤의 그늘됨의 차이이다. 인간이 그늘에 있고, 주님으로부터의 진리 안에 빛이 있다는 것을 기꺼이 알려하지 않겠다면, 그는 필시 자기의 그늘이 빛이고, 빛은 그늘이다고 믿는 도리밖에 없다; 그 이유가 그는 밤의 새 같아서, 밤의 그늘에서 날면서 빛 안에 있다고 생각하고, 낯의 빛에 있을 때 그늘에 있다고 생각하는 것과 같다. 이런 인간과 더불어 내적인 눈(즉, 이해력), 인간이 내면적으로 보는 눈은 위의 새와 다를 것이 전혀 없다, 그 이유는 그가 내적인 눈을 다르게 만들어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아래쪽, 즉 육체적, 세상적인 것을 들여다 볼 때 그의 내적인 눈을 연다, 대신 위쪽, 즉 영적인 것과 천국의 것들을 들여다 볼 때는 그의 내적인 눈을 닫는다. 이런 인물의 경우는 말씀 측면에서도 동일하다. 즉 글자 의미에서 나타나는 것을 두고 그들은 빛 속에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내적 의미에서 나타나는 것을 두고 그들은 그늘 속에 있다고 믿는다 (그 이유가 말씀은 당사자의 품질에 일치하여 모든 이에게 나타나기 때문이다); 사실인즉, 글자 의미와 내적 의미의 관계는 세상의 빛과 천국의 빛의 관계이다; 즉 밤의 빛과 낮의 빛의 관계이기도 할 것이다.
내적 의미 안의 수많은 단 하나의 것들(singulars)은 다 함께 글자 의미에서 표출되는 하나의 특별한 것 (세부적인 것, 구체적인 것, 항목, particulars)을 만든다; 같은 말로, 수많은 내적 의미의 단 하나의 것들은 글자 의미에서 한 개의 일반적인 것을 만든다; 이 일반적인 것들이 인간에 의해 보여지는 것이고, 일반적인 것을 구성하고 일반적인 것 안에 있는 특별 사항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반적인 것들 안에 있는 특별한 것의 질서가 인간에게 나타난다, 그러나 각자의 품질에 따라서이다; 그리고 이 질서는 당사자에게 감명을 주는 거룩함이다.

나는 네 아버지 아브라함의 하느님이다,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있기 때문이다. 이는 신성은 말씀의 글자 의미 안에도 있었음을 의미한다. 이는 아브라함이 표현함이 주님의 신성이다로부터; 이로부터 여호와 “아브라함의 하느님”은 아브라함에 의해 표현되는 주님의 신성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 장에서 취급되는 주제가 말씀이기 때문에, 말씀 역시 주님이시다, 그 이유는 모든 말씀은 그분으로부터 있고, 말씀으로부터의 모든 것은 그분에 관해서인 바, 그러므로 “나는 네 아버지 아브라함의 하느님이다,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있기 때문이다”에 의해 신성은 글자 의미 안에도 있다가 의미된다. 말씀에 있는 신성에 주목하면, 이렇다: 신성 자체는 말씀의 최고 의미에서 이다. 그 이유는 거기 안에 주님이 계시기 때문이다; 내적 의미 안에도 역시 신성이 있는데, 이 의미 안에 천국들에 있는 주님의 왕국이 있고, 이로부터 이 의미는 천적인 의미와 영적인 의미라고 불리운다; 신성은 글자 의미 안에도 있는데, 그 이유는 거기 안에 땅들에서의 주님의 왕국이 있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이 의미는 외적 의미, 그리고 자연적 의미라고 불리운다. 그 이유는 자연적 의미에서는 신성의 나타남이 더 먼 거리에 있는 듯, (보다 순수하고, 질서 정연한 내적 의미에 비해 상대적으로 좀 더 총체적이어서 조잡한 것까지 섞인 듯)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글자 의미 안의 각각 그리고 모두는 신성하다. 이 세 의미들은 성막에서 주는 의미와 경우가 같다: 성막의 가장 안쪽, 또는 휘장 안쪽 영역, 즉 증거를 포함하는 궤가 있는 곳은 최고로 거룩, 즉 거룩 중의 거룩이었다; 성막의 내부, 즉 휘장으로 가려짐이 없는 곳, 금빛의 탁자와 촛대가 있는 곳은 거룩이었다; 그리고 외부, 뜰이 있는 곳 역시 거룩했다; 이 뜰에서 회중들이 회합했다, 그리고 이로부터 이 뜰(court)은 회합의 장소라고 불리웠다.

나는 너를 복되게 할 것이다, 그리고 네 씨를 번성하게 할 것이다. 이는 인간과 더불은 말씀의 글자 의미로부터서도 선과 진리의 증가가 있을 것임을 의미한다. 이는 “너를 복되게 함”이 선의 증가이다로부터; 그리고“네 씨를 번성하게 함”이 진리의 증가이다로부터. 말씀의 글자 의미로부터 인간과 더불은 선과 진리의 증가가 있다는 것, 또한 이 의미 안에 각각 그리고 모든 것은 신성하다는 것은 방금 서술한 대목이기도 하다, 그리고 글자 의미의 많은 구절들에 내적 의미가 열리어 있기도 하다; 예를 들면, 구약의 예언서에서 인류의 구원이 있게 할 주님이 오시리라는 것; 율법과 예언은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함에 달려 있다는 것; 그리고 미워함이 낳는 것이 “살인하는” 것이다는 것, 그 이유가 미워하는 인간은 매 순간 살인하고 있다, 이는 그의 의지 안에서와 그의 삶의 즐거움에서 이다. 이런 사항들은 글자 의미 안에 있는 내적 의미로부터 이다, 이 외에도 더 많이 있다. (자연적, 영적, 천적 의미 모두가 단번에 예시되는 대목이 요나서 끝 장 끝 절로 알고 있는데 참고하기 바란다. 역자 주)

나의 종 아브라함 때문에. 이는 주님의 신성한 인간으로부터를 의미한다. 이는 아브라함의 표현함이 주님의 신성, 또한 신성한 인간이다로부터; 그리고 “나의 종”이 주님을 서술할 경우, 신성한 인간을 의미함으로부터 분명해진다; 실상 신성한 인간은 종이 아니다, 그 이유는 이 인간 역시 여호와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신성한 인간을 수단으로 주님은 인류를 섬긴다; 그 이유가 이를 수단으로 인간이 구원되기 때문, 즉 주님께서 인간 본질을 신성 본질과 하나되게 하신 덕택에 인간은 자기의 마음으로 위쪽을 쳐다보는 것이 가능해졌고, 주님의 인간을 숭배함으로, 신성에의 접근도 가능해서 그의 구원이 가능해졌다. 인간이 “아버지”라 불리는 신성 자체와 결합함은 “아들”이라 불리는 신성한 인간을 통하여서 이다; 고로 주님을 통하여서 이고, 이분을 수단으로 영적 (평면의) 인간은 (주님의) 인간 측면을 이해하고, 천적 (평면의) 인간은 신성 자체를 이해한다. 이로부터 분명한 바, 신성한 인간은 “종”이라 불리운다는 것, 그 이유는 신성한 인간이 신성을 섬기기 때문, 하여 인간으로 신성쪽에 접근하게 할는지 모른다, 그 이유는 신성한 인간은 인간의 구원을 위해 인류를 섬기기 때문이다.
위의 사항들이 “아브라함 나의 종”에 의해 의미되어진다. 다윗서에서:
그분이 행하신 경이로운 일들을, 그분의 경이한 일과 그분의 입으로부터의 공정을 회상하 라, 오 그분의 종 아브라함의 씨 너희여, 야곱의 아들 너희여, 그분이 뽑으신 자들이여. 그 분은 그분의 종 모세를, 그분이 뽑으신 아론을 보냈다. 그분은 그분의 종 아브라함과 더불 은 그분의 거룩함의 말을 기억하셨다 (시. 105:5, 6, 26, 42);
위에서 “그분의 종 아브라함”은 신성한 인간 측면에서의 주님을 뜻한다. 마찬가지로 신성한 인간 측면의 주님이 “그분의 종 야곱”에 의해, 그리고 “그분의 종 다윗”에 의해서도 뜻해진다; 이사야서에서:
너 나의 종 이스라엘, 내가 뽑았던 야곱, 나의 친구 아브라함의 씨; 내가 땅의 끝들로부터 잡아끌었던 너, 그리고 거기로부터의 날개들로부터 너를 불렀다, 그리고 네게 말했다, 너는 나의 종, 내가 너를 선택했다 (이. 41:8, 9);
위에서 “나의 종 이스라엘”은 최고 의미에서 영적 (평면의) 교회 속의 내적인 것들 측면에서의 주님이시다; 그리고 “야곱”은 이 교회의 외적인 것들 측면에서의 주님이시다. 다시 이사야서에서:
그분이 나에게 말하셨다, 너는 나의 종 이스라엘이다, 네 안에서 나는 신성이 될 것이다. 야곱의 지파들을 일으키고 이스라엘의 보존된 자를 되돌아오게 하려고 네가 나의 종이 되 는 것은 가벼운 사항들이다; 그리고 나는 이방인들의 빛을 위해 너를 주었다, 하여 너는 내 구원을 땅의 끝까지 있게 할는지 모른다 (이. 49:3, 6);
위에서 “이스라엘, 네 안에서 나는 신성이 될 것이다”는 주님의 신성한 인간을 분명하게 표현하고 있다. 그분이 섬김으로부터 “종”이라 불리우신 것이 명백한데, 그 이유는 “야곱의 지파들을 일으키시고, 그리고 이스라엘의 보존된 자들을 되돌아오게 하려고 너는 나의 종이 되는 것”이라 말해지기 때문이다.
그분의 신성한 인간 측면에서의 주님이 “야곱 나의 종”에 의해서도 뜻해지는 것은 아래 이사야서로부터 분명하다:
나는 네게 어둠으로부터의 보물들을 줄 것이다, 그리고 비밀한 장소로부터의 재물들을 줄 것이다, 그 이유가 야곱 나의 종, 그리고 내가 선택한 이스라엘을 위함 때문이다
(이. 45:3, 4);
위에서 “나의 종 야곱, 내가 뽑은 이스라엘”은 주님을 뜻한다, 그 중에서 “야곱 나의 종”은 교회의 외적인 것들 측면에서의 주님을, “내가 선택한 이스라엘”은 교회의 내적인 것들 측면에서의 주님을 뜻한다.
같은 것이 “다윗, 나의 종”에 의해서도 의미된다. 에스겔서에서:
나는 이스라엘의 아들들을 각 처로부터 그러모을 것이다. 나의 종 다윗이 그들 위에서 왕 일 것이다; 그들 모두에게 하나의 목자가 있을 것이다. 그들은 내가 나의 종 야곱에게 주었 던 토지에서 살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거기 안에서 거주할 것이다, 그들과 그들의 아들들 과 그들의 아들들의 아들들이 영원까지 (거주할 것이다); 그리고 다윗 나의 종이 영원히 그들의 제 일인 자일 것이다 (겔. 37:21, 24, 25)
“다윗 나의 종”은 주님의 신성한 인간을 확실하게 표시한다, 그리고 이는 신성한 진리로부터 이다를 표시하는데, 이 진리가 “왕”에 의해 의미되는데, 여기서는 “다윗”에 의해서이다. 진리 자체 또한 상대적으로 종이다는 것은 이미 살폈다; 그리고 이렇기 때문에, 주님 자신도 자신을 “섬기는 자, one that serveth, 또는 ministereth”라고 부르신다. 마가복음서에서:
너희 중에 큰 자가 되려는 자는 누구든지 너희의 섬기는 자일 것이다; 그리고 너희 중에 첫째라는 자는 누구든지 모든 이의 종일 것이다. 그 이유가 사람의 아들은 섬겨지기 위해 온 것이 아니라 섬기기 위해 왔기 때문이다 (막. 10:43-45; 마. 20:26-28).
그리고 누가복음서에서:
어느 것이 더 큰 자이냐, 식탁에 앉은 자이냐, 시중드는 자이냐? 식탁에 앉은 자가 아니더 냐? 그러나 나는 섬기는 자로서 너희 사이에 있다 (눅. 22:27).

그리고 그는 거기에 제단을 건축했다. 이는 주님에 관한 의미와 표현을 의미한다. 이는 “제단”이 제 일 가는 주님에 대한 표현물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리고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 이는 그로부터의 예배를 의미한다. 이는 “여호와의 이름을 부름”의 의미가 예배이다로부터; 그리고 “여호와의 이름”은 주님이 예배되어지는 하나의 복합체에 있는 모든 것이다로부터.

그리고 거기에 그의 천막을 단단히 고정시켰다. 이는 거기 안에 거룩함이 있다를 의미한다. 이는 “천막”의 의미가 예배로부터의 거룩함(예배의 거룩함)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리고 거기서 이삭의 종들은 우물을 팟다. 이는 말씀의 글자 의미로부터 파생된 교리를 의미한다. 이는 “우물”이 말씀이다로부터; 그리고 말씀이 교리 자체이기 때문에, 고로 교회 속에 있는 모든 교리가 말씀으로부터 이기 때문에, “우물을 파는 것”은 거기로부터, 즉 말씀의 글자 의미로부터 있는 교리를 의미한다. 그 이유가 여기서 취급되는 것이 말씀의 글자 의미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말씀의 글자 의미로부터의 교리 자체는 딱 하나뿐이다-즉 선행과 사랑의 교리-이웃을 향한 선행과 주님을 사랑함의 교리 뿐이다; 그 이유가 이 교리와 이 교리에 따른 삶이 말씀의 전부이기 때문, 하여 이를 주님께서 마. 22:37-40에서 가르치신다.

26, 27절. 그리고 아비멜렉은 그의 동료 아훗삿과, 군대 장군 비골과 함께 그랄로부터 그에게 왔다. 27 그리고 이삭은 그에게 말했다, 무슨 일로 당신은 나에게 왔습니까? 그리고 당신은 나를 미워했다, 그리고 나를 당신으로부터 떠나게 했다.

아비멜렉이 그랄로부터 그에게 왔다. 이는 합리적인 것을 찾는 신앙의 교리를 의미한다. 이는 아비멜렉이 합리적인 것들을 찾는 신앙의 교리를 표현한다로부터; 그리고 “그랄”이 신앙을 의미한다로부터; 합리적인 것들을 찾는 교리가 무엇인지는 이미 살핀 바 있다. 이 구절과 33절까지에서, 말씀의 글자 의미 안에 있는 이들, 그리고 이로부터 신앙의 교리적인 것들 안에 있는 이들이 취급되고 있다; 그리고 또한 그들이 글자 의미로부터 있는 만큼에서 그들의 교리적인 것들이 내적 의미와 일치함도 취급된다. 아비멜렉과 그의 동료 아훗삿과 그의 군대 장관 비골은 이런 교리적인 것들을 표현한다. 그들은 신앙을 교리의 제 일의 필수로 만드는 이들, 그렇다고 선행을 거절하지는 않으나 선행을 교리의 둘째가는 것으로 여기는 이들을 표현한다. 오늘날 우리들의 교회들은 기독교의 이방인주의(gentilism) 안에 있는 것, 거기서는 성인들을 숭배하거나 그들의 우상물을 허용하는 주의가 있는 것 외에 대체로 위와 같은 품성 속에 있다.
주님의 모든 교회 안에서, 내적 인간인 이들, 외적 인간인 이들, 그리고 선에 애착하는 내적 인간인 이들, 진리에 애착하는 외적 인간인 이들이 있다; 이것이 여기서 아비멜렉, 그의 동료, 그리고 그의 군대 장관에 의해서도 표현되어 있다. 창. 21:22-33에서는 내적인 이들이 취급되었다, 거기서 아비멜렉과 그의 군데 장관 비골이 아브라함에게 와서 브엘-세바에서 계약을 맺었다; 그러나 여기서는 외적인 이들이 취급된다.

그리고 그의 동료 아훗삿과, 그리고 그의 군대 장군 비골. 이는 그들의 신앙의 교리 중에서 으뜸가는 것들을 의미한다. 이는 아비멜렉이 합리적인 것들을 찾는 신앙의 교리를 표현한다로부터; 이로부터 “그의 동료와 그의 군대 장관”은 으뜸가는 것들을 의미하고, 진실로 교리로부터 있는 으뜸가는 것을 의미한다. 그 이유가 “장관, captain”도 “제 일인 자, prince”같이 으뜸인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군대, army”는 교리적인 것들 자체를 의미한다. “군대”가 진리로부터 있는 교리적인 것들, 또는 보다 낮은 수준의 진리들을 의미하는 이유는 말씀에서 “전투, warefare”, 또는 “전쟁”에 의해 영적 전투, 내지 영적 전쟁이 의미되기 때문이다; 또한 “무기들”, 즉 “긴 창”, “큰 방패”, “활”, “화살”에 의해서도 영적인 전투와 전쟁 같은 것에 관련한 것을 의미하여 주는데, 이는 이미 살핀 바 있다. 그리고 이런 것들이 진리들, 또는 교리적인 것들이기 때문에, 이를 수단으로 영적인 전투들이 수행되고, 그러므로 “군대들”에 의해서도 이것들이 의미된다; 그리고 또한 반대적 의미에서는 이것들은 거짓, 또는 이단적인 것들을 의미한다.
말씀에서 “군대들”에 의해 양쪽에서 의미되는 것들은 많은 구절들에서 확인해볼 수 있다; 다니엘서에서:
숫염소의 뿔 하나가 남쪽을 향하여, 그리고 해돋이를 향하여, 그리고 아름다움을 향하여 극 도로 자라났다. 그리고 그것은 하늘의 군대에게까지 자라서, 그리고 군대의 일부와 별들의 일부를 지면으로 내던졌고, 그리고 그것들을 짓밟았다. 그렇다, 그것은 그 자체를 군대의 제 일인 자에게 까지 확장했다. 그의 군대는 계속적으로 제물을 바침으로 위법을 자행함이 주어졌다; 그리고 그것은 진리를 지면으로 내던졌다. 내가 들은 바, 거룩한 이가 말하는 것 이다; 그리고 또 다른 거룩한 이가 말했다, 이 환상은 얼마나 길어야 하는가, 성소와 군대 모두가 짓밟히도록 하는 이런 계속적인 제물 바침, 그리고 황폐케하는 위법은 얼마나 길어 야 하나? (단. 8:9-13);
“남쪽을 향하여, 해돋이를 향하여, 아름다움을 향하여 자라난 뿔”은 악으로부터 있는 거짓의 힘이다; “하늘의 군대들”은 진리들이다; “군대의 제 일인 자”는 신성한 진리 측면에서의 주님이시다; 그리고 좋은 의미에서 “군대”는 진리이기 때문에 뿔이 “군대를 지면으로 내던졌다”고 말해진다, 그리고 그 후에 그것은 “진리를 지면으로 내던졌다”고 말해진다.
다시:
북쪽의 왕이 이전보다 더 큰 무리들을 준비해둘 것이다, 그리고 그는 햇수들의 때들의 끝 에 올 것인데, 큰 군대와 많은 물질들을 거느리고 이다. 그리고 그는 그의 힘과 그의 심정 을 큰 군대를 지닌 남쪽의 왕에게 내저을 것이다; 그리고 남쪽의 왕은 극도로 크고 강한 군대로 교전할 것이다; 그러나 그는 서지 못할 것이다, 그 이유가 그의 고기를 먹은 그들이 그를 파괴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의 군대가 뒤엎을 것이다; 그리고 많은 자들이 죽임을 당할 것이다 (단. 11:13, 25, 26).
위 구절이 포함되는 11장의 전체는 북쪽의 왕과 남쪽의 왕 사이에 있는 전쟁이다; 그리고 “북쪽의 왕”, 또한 그의 군대에 의해서는 거짓들이 뜻해진다; 그러나 “남쪽의 왕”과 그의 “군대”는 진리들이 뜻해진다: 이것은 교회의 황폐해짐에 대한 예언이다.
계시록서에서:
나는 열린 천국을 보았다, 그리고 흰 말이 바라보였다, 그리고 그 위에 앉으신 분은 신실과 진실이라 불리웠다. 그분은 피에 담근 옷으로 입혀져 있었다. 그리고 천국에 있는 그의 군 대들이 흰말을 타시고, 희고 깨끗한 고운 아마포를 입으신 그분을 뒤따랐다. 그리고 나는 땅의 짐승과 왕들과 그들의 군대들이 이 말 위에 앉으신 분에 맞서려고, 그리고 그분의 군 대에 맞서려고 모여 있는 것을 보았다 (계. 19:11, 13, 14, 19);
“흰말 위에 앉으신 분”은 주님의 말씀, 또는 말씀 측면에서의 주님을 표시한다; “그분을 뒤따르는 천국에 있는 그분의 군대들”은 거기로부터의 진리들, 결과적으로 천국에서 진리들에 있는 이들을 표시한다; “짐승”은 자기 사랑으로부터의 악들을 표시한다; “땅의 왕들과 그들의 군대들”은 거짓들을 표시한다. 거짓이 진리와 싸우는 것이 여기서 묘사된 것이다.
다윗서에서:
여호와의 말씀에 의해 천국들이 만들어졌다, 그리고 그들로부터의 모든 군대는 그분의 입 의 숨에 의해 만들어졌다 (시. 33:6);
“그들로부터의 군대”, 또는 천국들로부터의 군대는 진리들을 표시한다. 진리들이 “군대”에 의해 의미되기 때문에, 왕국의 아들들과 천사들은 그들이 있는 진리들로부터 “천국들의 군대”라고 불리운다, 누가복음서에서:
갑자기 천사들과 더불어 천국의 수많은 군대가 하느님을 찬양하였다 (눅. 2:13).
다윗서에서:
여호와를 찬양하라, 너희 모든 그분의 군대들이여, 그분의 뜻을 행하는 그분을 섬기는 너 희들이여 (시. 103:21).
다시:
그분을 찬양하라 너희 그분의 모든 천사들이여; 그분을 찬양하라 너희 그분의 모든 군대들 이여 (시. 148:2).
이사야서에서:
너의 눈을 높이 들어올려라, 그리고 이것들을 누가 창조하였나를 보라; 그분은 그들의 군대 를 수를 세어 데려오신다. 그분은 그들을 이름으로 부르신다; 수많은 권능에서와 강하심에 서 인간에게 결핍된 것이 없으시다 (이. 40:26).
다시:
나는 땅을 창조하였고 그것 위에 인간을 창조했다; 나, 나의 손이 하늘로 뻗었다, 그리고 모든 그들의 군대에게 나는 명령했다 (이. 45:12);
위에서 “하늘의 군대”는 진리들을 표시한다, 고로 천사들, 그 이유는 그들이 진리들 안에 있기 때문인데 이는 이미 말했었다.
열왕기상서에서:
나는 여호와께서 그분의 왕좌에 앉으신 그분을 보았다, 그리고 천국의 모든 군대는 그분의 오른편과 왼편에 서있었다 (왕상. 22:19).
요엘서에서:
여호와께서 그분의 군대 앞에서 그분의 음성을 발음하셨다; 그 이유가 그분의 진영은 아주 크기 때문; 그 이유가 그분은 강하시어 그분의 말씀을 행하시기 때문 (욜. 2:11).
스가랴서에서:
나는 왕래하는 군대에 맞서 내 집 주변에 진을 칠 것이다, 그리고 강요자가 더 이상 그것 들을 통과하지 못할 것이다; 크게 기뻐 환호하라, 오 시온의 딸아; 큰 소리를 만들어라, 오 예루살렘의 딸아; 보라 네 왕이 네게로 오신다 (슥. 9:8, 9);
위에서 주님의 오심이 취급되어진다; 그분의 “군대”는 신성으로부터의 진리들을 표시한다. 이로부터, 그리고 주님만이 인간을 공격하려 계속적으로 궁리해대는 지옥들에 맞서 인간을 위하여 싸우시기 때문에, 말씀에서 주님은 “여호와 체바욷”, “하느님 체바욷”, “주님 체바욷”, 즉 “군대들의…” 라고 자주 불리우신다. 이사야서에서:
나라들의 왕국들이 법석대는 음성이 다함께 모였다; 여호와 체바욷께서는 전투를 위해 군 대를 소집하셨다 (이. 13:4);
“나라들의 왕국들”은 악들로부터의 거짓들을 표시한다; “전투를 위해 군대를 소집함”은 인간을 위해 싸우심을 표시한다.
이스라엘의 열 두 지파들이 주님의 천국의 왕국을 표현함처럼, 그리고 지파들과 열 둘도 마찬가지로 한 복합체에 있는 신앙의 모든 것들, 즉 왕국의 모든 진리들을 의미했다, 그러므로 그들은 “여호와의 군대들”이라 불리웠다 (출. 7:4; 12:17, 41, 51;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의 군대들에 따라서” 이집트로부터 데려 내오라고 명령되었다 (출. 6:26); 그리고 “그들의 군대들에 따라” 진영을 치는 것도 할당되었다 (민. 1:52); 그리고 그들의 “군대들”을 분류했다 (민. 2장).
“군대들”이 진리들을 의미하는 것은 에스겔서에서도 분명해진다:
바사(페르샤)와 룻과 붓 사람이 네 군대 안에, 전쟁의 네 사람들 안에 있었다; 그들은 네 안에 큰 방패와 투구를 걸어두었다, 그들은 네 영예를 공포했다; 아르왓의 아들들과 네 군 대가 네 성벽을 빙둘러 그 위에 있었다, 그리고 가마딤(용사들)이 네 망루들에 있었다 (겔. 27:10, 11);
위는 두로를 향해 있는 말씀이다, 두로를 수단으로 선과 진리에 관한 내면의 지식들이, 고로 그 안에 있는 이들이 의미된다; “군대”는 진리들 자체를 표시한다; “룻과 붓”은 지식들 안에 있는 이들인데 이미 살핀 적이 있다; “큰 방패와 투구”는 영적 전투, 전쟁에 속하는 것들이다.
“군대”가 반대적 의미에서는 거짓들을 의미하는데, 이사야서에서:
여호와께서 높음에 있는 높은 군대를, 땅 위에 땅의 왕들을 방문하시는 그 날이 온다
(이. 24:21);
“높음의 군대들”은 자기를 사랑함으로부터의 거짓들을 표시한다. 에스겔서에서:
나는 너희를 되돌려 데려올 것이다, 그리고 네 턱에 갈고리를 놓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너 를 끌어낼 것이다, 그리고 모든 네 군대, 말들, 마병들, 완전하게 입은 자들, 큰 방패와 작 은 방패를 지닌 큰 무리들 모두, 손에 검을 쥔 그들 모두를 끌어내올 것이다. 너는 네 장소 로부터 북쪽의 가장자리로 올 것이다, 너 그리고 너와 더불은 많은 백성들, 말을 탄 그들 모두, 큰 무리와 강한 군대 (겔. 38:4, 15);
위는 곡에 관해 말하고 있다, 곡을 수단으로 내적인 예배에서 분리된 외적 예배, 고로
우상 숭배가 의미된다; 그의 “군대”는 거짓들을 표시한다.
예레미야서에서:
나는 바빌론에 맞서기 위해 (활을) 당기는 자를, 그의 활을 당기고 있는 자, 그리고 자신을 비늘 갑옷을 입고 들어올리는 자를 보낼 것이다; 너희는 그녀의 젊은 이들을 아껴두지 말 라, 그녀의 모든 군대에게 저주를 주어라 (예. 51:2, 3);
“바빌론”은 외적인 것에서 거룩하게 나타나나, 내적인 것에서는 모독하는 예배를 표시한다; “그녀의 군대”는 이와 같은 모독된 내면들로부터의 거짓들이다, 이와 같은 것이 다른 구절들에서 “바빌론의 군대”로 말해지고 있다 (예. 32:2; 34:1, 21; 39:1). 에스겔서에서:
바로가 그들을 볼 것이다, 그리고 모든 그의 무리들에게 안락함은 끝이 날 것이다, 바로와 그의 모든 군대는 검에 의해 살육될 것이다. 그 이유가 내가 나로부터의 공포를 살아 있음 의 토지에 놓을 것이기 때문이다 (겔. 32:31, 32);
이집트에 관련해 말해진다, 이를 수단으로 기억 속의 지식들로부터 추론함을 수단으로 진리들을 악용한 이들이 의미된다; “그의 군대”, 또는 바로의 군대는 거기로부터의 거짓들을 표시한다; 마찬가지의 것이 다른 구절들에서 “바로의 군대”에 의해 의미된다 (예. 37:5, 7, 11; 46:2; 겔. 17:17). 누가복음서에서:
너희가 군대들로 예루살렘에 에워싸인 것을 볼 때, 그때 그녀의 황폐해짐이 닥쳤다는 것을 알아라 (눅. 21:20);
위는 시대의 종말, 또는 교회의 마지막 때가 취급된 것이다, 즉 교회에 (진정한) 신앙이 더 이상 있지 않은 때이다. “예루살렘”에 의해 교회가 의미되는데, 이미 살폈다, 이것이 “군대들로 에워싸였다”란 거짓들로 교회가 봉쇄당한 것이다.
이로부터 유대인들과 우상 숭배자들이 숭배했던 “하늘의 군대”에 의해서는 내적 의미에서 거짓들이 의미되어 있음이 분명한데, 이에 관하여 열왕기하서에서:
그들은 자기들의 하느님의 모든 명령들을 버렸다, 그리고 자기들에게 부어만든 상들, 송아 지상에 이르기까지를 만들었고, 작은 숲을 만들었고, 그리고 그들 자신들이 하늘의 모든 군 대에 엎드려 절했다 (왕하. 17:16).
위는 이스라엘족들에 관해서 말해졌다; 그리고 또 다른 장소에서 므낫세(왕)에 관해 쓰여진 바:
그는 하늘의 모든 군대를 제단을 건축했다 (왕하. 21:5);
그리고 다시:
왕 요시아는 바알을 위해, 작은 숲을 위해, 그리고 하늘의 모든 군대를 위해 만든 모든 집 기들을 성전으로부터 끌어내었다 (왕하. 23:4);
그리고 예레미야서에서:
그들은 제 일인 자들의 뼈, 성직자들의 뼈, 그리고 예언자들의 뼈를 내올 것이다, 그리고 그것들을 태양과 달, 그리고 하늘의 모든 군대 앞에 뿌릴 것이다, 이것을 그들은 사랑했다, 이것을 그들은 섬겼다, 그리고 이것에 따라 그들은 걸었다 (예. 8:1, 2).
그리고 다시:
예루살렘의 집들과 유다의 왕들의 집들은 도벳처럼 불결할 것이다, 이 집들의 지붕에서 그 들은 하늘의 모든 군대에게 향을 태웠고, 다른 신들에게 제주를 부었다 (예. 19:13).
그리고 스바냐서에서:
나는 지붕 위에서 하늘의 군대에게 예배하는 그들을 향하여 내 손을 뻗을 것이다
(습. 1:4, 5);
위에서 “하늘의 군대”는 별들을 두고 일컬어진 것이다; 그리고 “별”은 진리들을 의미하나 반대 의미에서는 거짓들을 의미하는데 이미 살폈다.

그리고 이삭이 그들에게 말했다, 무슨 일로 나에게 왔습니까? 당신은 나를 미워했다, 그리고 나를 당신으로부터 떠나게 했다. 이는 글자 의미에 집착한 이들이 말씀에서 내적 의미가 글자 의미에 반대되어 있다 하여 내적 의미를 부정하면서도 신성은 왜 원하는지를 의미한다. 이는 이미 설명된 바 있으므로 15, 16, 19-21절을 참조하기 바란다.

28, 29절. 그리고 그들이 말했다, 우리는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있었던 것을 보아 왔었다. 그리고 우리는 말했다, 이제 우리 사이에, 우리와 너 사이에 맹세를 해놓자, 그리고 우리는 너와 언약을 세워 놓고 싶다. 29 너는 우리에게 악을 행치 말라, 마치 우리가 너를 건드리지 않은 것 같이, 그리고 우리가 너에게 선한 것 외에는 아무 것도 하지 않했 듯, 그리고 너를 평화롭게 내어보낸 것 같이 이다, 이제 너는 여호와로부터 복을 받은 자이다. “그리고 그들이 말했다, 우리는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있었던 것을 보아 왔었다”란 말씀의 글자 의미만을 고집하는 이들도 글자 의미 안에 신성이 있음을 알았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우리는 말했다, 이제 우리 사이에, 우리와 너 사이에 맹세를 놓자, 우리는 너와 언약을 세워 놓고 싶다”란 그들의 신앙 속의 교리적인 것들은 그 자체만을 참작한다면 부정되지 말아야 함을 의미한다. “너는 우리에게 악을 행치 말라, 마치 우리가 너를 건드리지 않은 것 같이, 그리고 우리가 너에게 선한 것 외에는 아무 짓도 하지 않은 것 같이, 그리고 우리가 너를 평화롭게 떠나 보낸 것 같이 이다”란 말씀의 글자 의미에 집착한 이들이 말씀의 내적 의미에 폭력을 행사하지 않았다는 것, 그리고 그들은 그 의미에 폭력을 휘두르지 않아야 하리라는 것을 의미한다. “너는 여호와께로부터 복을 받았다”란 말씀의 내적 의미는 신성이었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들이 말했다, 우리는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있었던 것을 보아 왔었다. 이는 말씀의 글자 의미만을 고집하는 이들도 글자 의미 안에 신성이 있음을 알았음을 의미한다. 이는 “보아 왔었다, 확실히 보았다, seeing to see”의 의미가 주시해서 관찰하여 어떤 것을 알았음이다로부터; 그리고 “여호와가 너와 함께 있다”의 의미가 신성이 거기 안에 있었다 이다로부터 알려진다. 여기서의 주제, 이미 말했듯이, 말씀의 글자 의미가 내적 의미와 일치함이다; 결과적으로 아비멜렉, 아훗삿, 비골에 의해 의미된 신앙의 교리적인 것의 일치함이다, 단지 이들이 말씀의 글자 의미로부터 있는 만큼에서의 신앙의 교리적인 것의 일치함이다; 또한 말씀을 수단으로 땅에 있는 주님의 왕국이 천국들에 있는 주님의 왕국, 결과적으로 주님과 결합함이다; 그리고 글자 의미 측면에서 땅에 있는 주님의 왕국 자체이다. 이는 이미 말했다.
땅위 주님의 왕국에 주목해보면, 즉 그분의 교회에 주목하면, 이 경우도 말씀의 글자 의미로부터 교리를 가지는 경우와 마찬가지로 교회들은 그들의 교리 측면에서 다양하고 다양할 수밖에 없다; 말하자면 이 사회(공동체)는 이 교리를, 저 사회는 저 교리를 말하는데, 그 이유는 말씀에서 이렇게 말해지기 때문에 자기들은 이 교리를 고백하고 있다 라고 각 교회가 말하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주님의 교회는 말씀의 글자 의미로부터 그 교회의 교리를 가지기 때문에, 교리는 사방 각처에서 다를 것이다, 그리고 같은 사회(공동체) 안에서도 개인들 간에 교리의 색깔이 조금씩이라도 다를 수도 있다. 어쨌든 신앙의 교리적인 것들에서의 차이는 만약 잘 뜻하고 잘 행동하자는 측면 만큼에서는 서로의 의견이 일치하고 있다면, 교회가 하나로 있는 것을 보호하지 못한다.
예를 들면: 만일 누군가가 선행은 신앙으로부터 있다고 하는 교리를 인정하는데, 동시에 이웃을 향한 선행 안에서 살고 있다면, 이러면 실로 그는 교리측면에서 진리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는 생활 측면에서 진리 안에 있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그 사람 안에는 주님의 교회 또는 주님의 왕국이 있다. 다시: 만일 누군가가 마. 10:41, 42; 25:34-46 등등의 말씀의 글자 의미로부터 천국 입장이라는 보답을 받으려면 선한 일은 행해져야만 한다고 말한다면; 그런데도 선을 행함에서 그는 보답받는다는 생각, 선한 일에 대한 공적 따위를 전혀 갖지 않고 있다면 (즉 순수하게 선한 일 자체를 사랑하여 몰두하고 있다면), 이 사람도 마찬가지로 주님의 왕국 안에 있다, 그 이유는 생활 측면에서 진리 안에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가 생활 측면에서 이러하기 때문에, 아무도 천국에 입장하는 선에 대한 공적을 치부할 수 없다(본시 선은 주님의 소유이기 때문에)는 것, (정치인들이 표를 얻기 위해 선행을 실시하고 이를 홍보하듯) 공적주의를 염두에 둔 일들은 선이 아니다 라고 가르쳐질 때 이 사람은 하등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위의 예의 경우 같이 글자 자체와 반대되어 나타나는 경우가 글자 의미에서 이다. 이런 이유는 외적인 이들, 하물며 세상적, 육체적 사랑들에 집착하는 이들에게까지 진리의 나타남이 존재하기 위해 (구원함의 끈이 끊어지지 않기 위해), 인간 각각의 수준에 진리의 나타남이 잘 정박(숙박, accommodate)되게 하시려는 섭리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구절에서 “아비멜렉”에 의해 신앙의 교리적인 것들 안에 있는 이들, 즉 신앙이야말로 구원함을 받는데 제 1의 요소라고 만드는 이들, 그러면서도 이 교리적인 것이 내적 의미와 일치하는 이들이 취급되고 있다; 이들과 더불어서도 결합이 결과되나, 오직 선 안에 있는 이들과 더불어서만, 즉 비록 교리 측면에서 신앙이 제 1의 필수라고 말하지만, 실제의 생활 측면에서 선행이 제 1의 필수로 나타나고 있는 이들과 더불어서만 이다. 그 이유가 주님을 신뢰함, 주님을 믿음에 있을 때, 그들은 이것을 신앙 자체라고 부르면서, 그때 그들은 주님을 사랑함에 대한 애착 안에, 결과적으로 생활에서 선 안에 있기 때문이다. 이와 비슷한 주제는 많이 취급되었다: 즉, 교리적인 것이 교회를 만드는 것이 아니고 선행이 만든다는 것: 인간이 교리적인 것에 따라 살아내지 않으면 그 교리는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 교리는 진리들 측면에서 다양하나, 선행을 통하여 하나로 있다는 것: 주님을 사랑함으로부터 있게 되는 천적 (평면의) 것들에서는 주님과 인간 사이에 평행(유사, 비교, 대응, 대구, parallelism)이 있을 뿐이나, 진리로부터 있는 영적 (평면의) 것들에서는 그렇지 않다는 것: 교리는 한 개뿐이다는 것, 즉 주님을 사랑함과 이웃을 향한 선행으로부터의 교리뿐이다는 것: 만일 모든 이가 선행을 가졌다면, 비록 예배하는 방식, 교리적 강조 사항이 차이가 날지언정 교회는 하나일 것: 만일 모두가 선행을 가졌다면, 교회는 천국들에 있는 주님의 왕국과 같은 것: 천국 안에 선과 진리의 다양함은 끝이 없다할 정도이지만, 그럼에도 하나로 만들어져 있다는 것, 마치 무수한 기관과 세포가 각기 활동하지만 결국은 한 몸체로 일치하고 있는 것과 같다.

그리고 우리는 말했다, 이제 우리 사이에, 우리와 너 사이에 맹세를 놓자, 우리는 너와 언약을 세워 놓고 싶다. 이는 그들의 신앙 속의 교리적인 것들은 그 자체만에 주목한다면 부정되지 말아야 함을 의미한다. 즉 그것들이 말씀의 글자 의미로부터 있는 한, 부정되지 말아야 한다는 말이다. 이는 “우리 사이에 맹세를”의 의미가 교리적인 것과 말씀의 글자 의미 사이에 일치함이 있음이다로부터; 그리고 “우리와 너 사이에”의 의미가 교리적인 것과 내적 의미 사이에 일치됨이 있음이다로부터; “언약을 맺자”의 의미가 결합이 있을 것이다로부터 알려진다. 하여 이를 종합해보면 결과되는 의미는, 그들의 교리 자체에 주목하면 그들의 신앙으로부터의 교리는 부정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 이유가 교리들이 말씀의 글자로부터 있는 이상, 부정되는 교리는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그런 교리 안에 있는 이들이 선행의 삶 안에도 있을 경우 주님께서는 열납하신다는 것, 그 이유는 이 삶 안에서 말씀으로부터의 모든 것들은 결합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말씀의 내면의 것들은 선행 속의 내면의 선 안에 있는 삶(생명)과 결합되어질 수 있다.

너는 우리에게 악을 행치 말라, 마치 우리가 너를 건드리지 않은 것 같이, 그리고 우리가 너에게 선한 것 외에는 아무 짓도 하지 않은 것 같이, 그리고 우리가 너를 평화롭게 떠나 보낸 것 같이 이다. 이는 말씀의 글자 의미에 집착한 이들이 말씀의 내적 의미에 폭력을 행사하지 않았다는 것, 그리고 그들은 그 의미에 폭력을 휘두르지 않아야 하리라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내적 의미에 있는 시리즈에서 알는지 모른다. 그리고 이미 말했던 사항들에서 엿보인다 (11, 22, 23절).

너는 여호와께로부터 복을 받았다. 이는 말씀의 내적 의미는 신성이었음을 의미한다. 이는 “여호와께로부터 복을 받았음”의 의미가 주님에 관련해 말해질 경우, 말씀의 내적 의미에 관해서 일 경우, 그 이유가 주님이 말씀이시기 때문, 이 의미는 신성한 진리, 고로 신성으로부터 있음이다가 된다; 그러므로 글자 의미는 내적 의미에 폭력을 휘두르지 말아야 한다는 것, 휘둘러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글자 의미보다) 내적 의미가 신성으로부터 (보다 더 직접적으로, 또는 신성에 더 가까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적 의미에 폭력을 휘두르는 것은 내적 의미에서 제 1의 것을, 말씀 속의 제 1의 거룩한 사항을 부정할 경우이다; 제 1의 거룩한 사항이란 주님의 신성한 인간, 이분을 사랑함과 이웃을 향한 사랑이다. 이 세 가지가 내적 의미의 제 1의 것들이다; 이 세 가지 사항은 말씀으로부터 있는 모든 교리적인 것들 속의 내적이고 거룩한 것들이기도 하다; 마찬가지로 모든 예배 속의 내적 측면을 채우고, 거룩한 것들이다; 그 이유가 이런 내적 의미와 거룩한 것들 자체에 주님의 왕국이 있기 때문이다. 위 세 가지 외에 넷째 사항인 것은 말씀은 일반적, 세부적 측면 모두에서, 작은 마침표, 쉼표에 이르기까지에서 신성하다는 것이다. (하여 말씀을 읽고 이해가, 말의 순서가 이상하여 이해가 안된다고 하는 등등의 이유로 원어가 섯불리 의역되는 것은 대단히 조심해야 할 부분이고, 이런 측면에서 선견자가 원어로부터 라틴어로 직접 번역한 창세기, 출애굽기, 계시록은 스위든볽지언이라면 주목해야 할는지 모른다. 물론 역자의 한역은 라틴역에서 영역된 것을 사용하는 수준일 뿐이긴 하다. 그 다음으로 선견자가 위 세 책 외의 성경의 경우에서는 쉬밑(schmitt)의 라틴어역 성경이었다. 이 성경은 역자의 웹사이트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 성경에는 선견자의 메모 글씨도 볼 수 있어 매우 흥미롭기도 하다.); 한마디로 주님은 말씀 안에 계신다. 이 대목이야말로 말씀으로부터의 교리적인 것들 안에 있는 이들이라면 대체로 인정하고 고백한다; 그렇지만 말씀 안에서 글자 의미에서 나타나는 것 외에 다른 의미에서는 거룩함이 없다고 심정에서 부정하는 자들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 이유가 말씀의 외적 측면에 있는 이들이 역사적, 예언적인 말씀 안에서 거룩하다고 불리울만한 대목은 매우 조금밖에 지각하지 못하기 때문인데, 역사적, 예언적 말씀은 실상 마침표 하나에 이르기까지 에서도 내적 의미에서는 거룩하다.

30, 31절. 그리고 그는 그들에게 잔치를 베풀어 주었다, 그리고 그들은 먹고 마셨다. 31 그리고 그들은 아침에 일찍 일어났다, 그리고 (그들은) 사람 그의 형제에게 맹세했다. 그리고 이삭은 그를 떠나 보냈다, 그리고 그들은 그로부터 평화로이 떠났다.

그리고 그는 그들에게 잔치를 베풀었다. 이는 함께 거주함을 의미한다. 이는 “잔치”가 함께 거주함도 의미해주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은 먹고 마셨다. 이는 상호 교제를 의미한다. 이는 “먹는다”가 선으로부터 있는 것들에서 상호 교통함을; 그리고 “마시다”의 의미가 진리로부터 있는 것들에서 상호 교통함을 의미함에서 알려진다.

그리고 그들은 아침에 일찍 일어났다. 이는 계발되는 상태를 의미한다. 이는 “아침”, “일찍 일어남”이 계발의 상태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 이유가 최고 의미에서 “아침과 새벽”은 주님이시고, 내적 의미에서는 그분의 사랑으로부터의 천적 평면의 상태, 즉 평화의 상태; 그리고 내적 의미에서 “일어남”은 승강함이기 때문이다; 이 모두로부터 알게 되는바, “아침에 일찍 일어남”은 계발의 상태를 의미함이다.

그리고 그들은 사람 그의 형제에게 맹세했다. 이는 진리의 선 가운데 있는 이들과 더불은 확증을 의미한다. 이는 “맹세함(swearing)”, 또는 “맹세(oath)”의 의미가 확증함이다로부터; 그리고 “그의 형제와 더불은 사람”의 의미가 진리의 선, 또는 이 선 안에 있는 이들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여기서 아비멜렉에 의해, 또는 아비멜렉이 왕으로 있는 불레셋 사람에 의해 표현된 이 선 안에 있는 이들, 즉 신앙을 교회의 필수로 만들고, 신앙을 선행보다 더 우선시하는 이들이다. 이와 같은 상태인 이들에게는 진리의 선 외에 다른 선은 없다. 그 이유가 그들은 말씀으로부터 신앙 속에 있는 것밖에는 끌어내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말씀으로부터 선에 속하는 것, 고로 삶에 속하는 것은 거의 보려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들은 신앙의 교리적인 것들 안에서 자신들을 확증하게 하고, 선행의 교리적인 것 안에서는 확증해야 하는 이유를 찾지 못한다. 이들이 선을 행할 때, 이 선이 진리의 선이라 불리우는 것이다.
이 선 안에 있는 이들과 더불어서도 주님은 자신을 결합하신다, 그러나 선행의 선에 있는 이들의 결합과는 수준이 다르다; 그 이유가 사랑과 선행은 영적 결합이지만, 사랑과 선행을 통하여 있는 신앙이 아닌 경우의 신앙과는 영적 결합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이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이삭과 언약을 만들었다” 말해지지 않고, 그들은 “사람 그의 형제에게 맹세했다”라고 말해진 것이다; 그 이유가 “언약”은 사랑과 선행으로부터 있는 선을 서술하고, “맹세”는 신앙으로부터 있는 진리를 서술하기 때문이다; “함께 거주함”, 이것이 잔치에 의해 의미되는데, 이것 역시 진리의 선 안에 있는 이들을 서술하고 있다. 다른 삶에서 이런 특성을 지닌 이들로부터, 그들이 선행의 선에 있는 이들로부터 분리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해주셨다; 그 이유가 선행의 선에 있는 이들은 진리의 선에 있는 이들보다 주님과 더 친밀하게 결합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진리의 선에 있는 이들의 선은 상대적으로 단단해서, 잘 구부려지지도 않고, 상호 교통도 용이하지 않은 상황인 바, 그들은 천국 안쪽이 아닌 천국의 문지방에 있다.

그리고 이삭은 그들을 떠나 보냈다, 그리고 그들은 그로부터 평화로이 떠났다. 이는 그들이 만족했음을 의미한다. 이는 별도의 설명이 필요 없다; 그리고 이로부터도 분명해지는 것은, 이들과 더불어 “함께 거주했을” 뿐, 결합했음은 아니다는 것이다.

32, 33절. 그 날에 이삭의 종들이 그에게 와서 자기들이 팟던 우물에 관하여 보여 주었다. 그리고 그들이 그에게 말했다, 우리는 물들을 발견했습니다. 33 그리고 그는 그것을 세바라 불렀다. 그러므로 그 성의 이름은 오늘날까지 브엘-세바이다.

그 날에. 이는 그 상태를 의미한다. 이는 “날”의 의미가 상태이다로부터 알게 되고, 여기서는 취급된 교리의 상태이다.

이삭의 종들이 왔다. 이는 합리적인 것들을 의미한다. 이는 “종들”의 의미가 합리적인 것들과 기억 속의 지식들이다로부터; 그리고 이삭이 신성한 합리성 측면에서의 주님을 표현한다로부터 알게 된다. 앞에서 진행한 것으로부터 분명해지는 바, 여기서 이삭에 의해 표현되는 주님에 관련한 속성은 내적 의미 측면에서의 말씀이다는 것이다; 그 이유가 “아비멜렉, 아훗삿, 비골”에 의해서는 말씀의 글자 의미로부터 있는 신앙의 교리적인 것들이 의미되기 때문, 마찬가지인 것은, 좋은 의미에서 “불레셋인들”이라는 이들의 교리적인 것들이다, 즉 신앙의 교리적인 것들에서만 있는 이들, 그런데도 생활에서 선 안에 있는 이들, 그러나 진리의 선에 있는 이들, 이들의 교리적인 것들은 내적 의미, 고로 주님과 어떤 결합을 가진다
신앙의 교리적인 것들에만 있고, 그것에 따라 생활하는 이들은 (주님과의) 어떤 결합 안에 있다, 그러나 좀 떨어져 있는 결합의 수준에서 인데, 그 이유는 그들이 이웃을 향한 선행이 무엇인지를 어떤 애착으로부터도 알지 못하기 때문, 더욱이 주님을 사랑함이 무엇인지는 더 더욱 모르는 바, 오직 신앙으로부터의 어떤 것으로부터만 알고 있는 이유에서 이다; 고로 그들은 선에 대하여 어떤 지각함도 없고, 자기들의 교리적인 사항들이 지령을 내리는 어떤 것이 진리이다, 고로 선이다고 하는 설득에 의한 확신 같은 것 안에 있다. 그들이 이런 교리적인 것들에서 확증함을 지닐 때, 때로는 거짓인 것도 참된 것과 동등한 위치에 있을 수가 있다. 그 이유가 진리인 것에 주목하면서 확증하는 선밖에 없기 때문이다. 실로 진리는 선이 무엇인지를 지각 없이 가르칠 뿐이나. 선은 진리가 무엇인지를 가르치되 지각으로부터서 이다.
위의 사항이 어째서 그런지, 속성과 품질에서의 차이점이 무엇인지는 선행에 관한 모두를 위한(common) 교훈으로부터 (세상이 황금률이라 일컫고 있다) 알 것이라 생각된다:
사람들이 나에게 해주기를 바란 것은 무엇이든 모든 것들을 너희는 그들에게 그렇게 행하 라 (마. 7:12).
이 교훈으로부터 행동하는 이는 진실로 타인에게 선인 것을 행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그렇게 명령되었기 때문에 행동한 것, 고로 심정의 애착으로부터는 아니다; 그리고 그가 이것을 행할 때는 언제든지, 그는 자신으로부터 시작하고, 선을 행함 안에서 공적을 염두에 놓아두고 있다; 이에 비해 교훈으로부터가 아니고 선행으로부터, 애착으로부터 행동하는 이는 심정으로부터 행동하고, 고로 자유로부터 행동한다; 그리고 그가 행동할 때는 언제든지, 그는 선인 것을 진실로 뜻함으로부터 시작하고, 그렇기 때문에 선을 행함은 그에게 즐거움의 원천이요, 그에게 공적 따위는 생각에서도 없다.
이로부터 신앙으로부터 선을 행함과 선행으로부터 선을 행함에 어떤 차이가 있는지 알았을 것이다; 그리고 신앙으로부터 선을 행하는 이들은 주님이신 선 자체로부터 선행으로부터 선을 행하는 이들보다 더 멀리 떨어져 있다는 것; 그렇다 해도 전자는 지각을 가지는 만큼에서 선행의 선 안으로 진입할 수 있다는 것, 그 이유는 그들이 진리들 안에 있는 것은 조금밖에 아니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진리이지 않은 것들이 근절되지 않으면 이 선 안으로의 진입은 할 수 없기 때문, 진리 아닌 것들이 확신함으로까지 뿌리내린 동안은 이 선의 소개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에게 그들이 팟던 우물에 관하여 보여 주었다. 그리고 그들은 그에게 말했다, 우리는 물들을 발견했습니다. 이는 이것들을 수단으로 하는 내면의 진리들을 의미한다. 이는 “우물”의 의미가 말씀이다로부터; 그리고 “물들”의 의미가 진리들이다로부터, 즉 말씀으로부터 있는 진리들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고로 “그들이 팟던 우물에 관하여 그에게 보여주었다”란 말씀으로부터 그들이 교리적인 것들을 가졌는데 이 말씀에 관하여를 의미한다; “그리고 그들이 말했다, 우리는 물들을 발견했습니다”란 그들 안에, 즉 교리적인 것들 안에 내면의 진리들이 있었다를 의미한다. 이미 말한 바 같이, 말씀의 글자 의미로부터 끌어올린 모든 교리적인 것 안에는 내면의 진리들이 있다, 그 이유는 말씀의 글자 의미는 물을 함유한 우물 같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말씀의 각각 그리고 모두에는 내적 의미가 있기 때문, 또한 말씀으로부터 있는 교리적인 것 역시 그 안에 내적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말씀의 글자적 의미로부터 있는 교리적인 것들에 주목해보면, 이렇다: 인간이 교리적인 것들 안에 있을 때, 동시에 그것들에 따른 생활 안에 있을 때, 그는 자신 안에서 상응을 가지고 있다; 그 이유가 그 사람과 더불은 천사는 그가 외면의 것 안에 있는 동안 내면의 진리 안에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교리적인 것들을 통하여, 그리고 생활의 선에 따라서 그는 천국과 교통한다. 예를 들면, 성찬식에서, 그는 그때 사용된 말들로부터, 즉 “이것은 나의 몸, 그리고 이것은 나의 피”라는 말들로부터 주님에 관하여 단순 소박함 안에서 생각하지만, 그와 함께 하는 천사는 주님을 사랑함과 이웃을 향한 선행에 대한 생각을 한다; 그 이유가 주님을 사랑함은 주님의 몸과 그리고 빵과 상응하고; 이웃을 향한 선행은 주님의 피와 포도주와 상응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와 같은 상응이 있기 때문에, 천국으로부터의 애착이 천사들을 통하여 성찬식에 참여한 당사자의 거룩한 상태 안으로 흐른다. 이때의 애착을 그는 그의 삶 속의 선에 일치하여 받는다.
천사들은 모든 이의 생명 속의 애착 안에서, 고로 그가 교리적인 것들에 따라 살고 있다면, 그 교리적인 것들에 대한 애착 안에서 당사자와 더불어 거주한다; 그러나 만일 그의 삶이 애착과 일치 않는 경우는 그렇지 않다. 만일 그의 생활이 불일치할 경우, 예를 들면, 그가 교리적인 것들을 수단으로 명예와 돈벌이에 대한 애착 안에 있다면, 그때 천사들은 멀리 은퇴해 있는다, 그리고 지옥의 영들이 이 애착 안에 둥지를 틀고,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을 위하여 확증함을 주입한다, 고로 이는 설득으로부터의 확신(맹신)이다. 이것은 교리적인 것이 타인의 마음을 포로화되기만 한다면, 교리가 거짓이든 진리이든 상관 없는 것과 같다. 그밖에 지옥의 영들은 그나마 모든 신앙을 가져가버려, 남는 것은 입술의 교리, 이런 사랑들로 변경되고 흥분된 악쓰는 아우성일 뿐인 교리이다.

그리고 그는 그것을 세바라 불렀다. 이는 교리적인 것들을 수단으로 확증된 진리가 결합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이름을 부름”의 의미가 품질이다로부터; 그러므로 여기서는 교리적인 것들을 수단으로확증된 진리가 결합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 이유가 원어상에서 “세바(Shilbah)”를 뜻하는 바, 이는 확증함을 의미한다. 내면의 진리들이 자체를 말씀의 글자 의미로부터의 교리적인 것들인 외면의 진리와 결합시킬 때, 확증된 진리의 결합이라 불리운다. 이와 같은 인물과 더불어서의 결합은 신앙으로부터 있는 진리들을 수단으로 해서 이고, 선행으로부터 있는 진리들에 의해서는 아닌데, 이미 말했다.

그러므로 그 성의 이름은 브엘-세바이다. 이는 확증된 진리로부터의 교리의 품질을 의미한다. 이는 “이름”의 의미가 품질이다로부터; 그리고 “성”의 의미가 교리이다로부터; 이로부터 “브엘-세바”가 와진다, 이는 원어에서 “맹세의 우물”을 뜻하고 있다, 고로 확증된 진리로부터의 교리이다. 21장 30, 31절에서 이렇게 말해졌다:
이 일곱 암양을 내 손으로 가져왔기 때문에, 이것은 내가 이 우물을 팟다는 것을 나에게 증거할는지 모른다, 그러므로 그는 그 장소를 브엘-세바 라고 불렀다, 그 이유는 거기서 그들이 그들 둘 다 맹세했기 때문이다;
위에서 “브엘-세바”에 의해 교리의 상태와 품질이 의미되었다, 즉 이 교리는 신성으로부터 이었다는 것, 그리고 이 교리를 수단으로 결합이 있었다는 것; 그리고 이 교회의 내면들이 거기서 취급되었기 때문에, “그 장소”가 브엘-세바 라고 불리웠다; 이에 반해 여기서는, 이 교회의 외면들이 취급되었기 때문에, “성”이 브엘-세바 라고 불리우고 있다; 그 이유는 내면의 것들로부터 상태를 서술할 때는 이것이 “장소”에 의해 의미되나, 외면의 것들에 의해 상태가 서술되면 이것은 “성”에 의해 의미되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모든 교리는 그것의 내면들로부터 그것의 상태와 품질을 가지기 때문이다.

오늘날까지. 이는 상태의 불멸을 의미한다. “오늘날까지”가 상태의 불멸(영속함)을 의미하기 때문에서 이다.

34, 35절. 에서는 사십 년의 아들이었다, 그리고 그는 헷 족속 브에리의 딸 유딧과 헷 족속 엘론의 딸 바스맛을 여인으로 데려 왔다. 35 그리고 그들은 이삭과 리브가에게 영의 괴로움이었다.

그리고 에서는 사십 년의 아들이었다. 이는 진리로부터의 자연 평면의 선 측면에서의 시험의 상태를 의미한다. 이는 “에서”가 진리로부터의 자연 평면의 선을 표현한다로부터; 그리고 “40년”이 시험의 상태를 의미한다로부터 알게 된다. 에서에 관한 이런 사항들이 아비멜렉과 이삭에 관련하여 있는 말미에 붙어 있는 이유는 진리의 선 안에 있는 이들, 즉 말씀의 글자 의미로부터 파생된 것들에 따라 살고 있는 이들이 취급되어서 이다. 이미 말한 바 같이 이런 자들이 아비멜렉, 아훗삿, 비골에 의해 의미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진리의 선 안에 있는 이들, 또는 교리에 따라 살고 있는 이들은 그들의 합리성인 내면들이 거듭나진다, 그러나 그들의 자연 평면의 것들에 속하는 외면들은 아직 아니다. 그 이유는 자연적 수준의 것이 거듭나기 전 합리성이 거듭나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연 평면은 세상 안에 함께 있기에, 그리고 자연 은 인간들이 자기들의 생각과 뜻함을 발견하는 평면(plane)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거듭나는 동안 인간들이 그의 합리적, 또는 내적 인간과 그의 자연적, 또는 외적 인간과 의 전투를 준수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의 외적 인간이 그의 내적 인간보다아주 나중에서야, 내적 인간보다 아주 큰 규모의 곤경을 치루고서야 거듭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 이유는 세상에 더 가까이 있는 것, 육체에 더 가까이 있는 것은 내적 인간에게 고분고분 하는 쪽으로 구부리도록 강요함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간의 길이가 상당히 있은 후, 그리고 많은 새로운 상태들을 수단으로 내적 인간에 순종하는 쪽으로 진입된다, 이것이 자인함(自認. self-acknowledgement, 이리저리 인정을 회피해보려다가 고생 끝에 결국은 인정하는 것)의 상태, 그리고 주님을 인정함의 상태, 즉 자신 고유의 비열함을 인정하는 상태, 그리고 주님의 자비를 인정하는 상태이다; 고로 시험에 전투함으로 결과된 자신 고유의 부끄럽기 짝이 없음의 상태 (humiliation, 덜퍽 엎드려지고만 상태) 이다. 이렇기 때문에, 이 장의 끝 부분에 에서와 그의 두 아내가 인접되었다, 이들을 통해 위의 것들이 의미되기 때문이다.
자연적 선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 이유가 이 선 안으로 인간은 태어나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리로부터의 자연적 선이 무엇인지를 아는 자는 매우 드물다; 자연적 선은 네 종류이다, 즉 인간과 더불어 태어나지는 선, 즉 선을 사랑함으로부터의 자연적 선, 진리를 사랑함으로부터의 자연적 선, 그리고 악을 사랑함으로부터의 자연적 선, 거짓을 사랑함으로부터의 자연적 선이 있다. 인간과 더불어 태어나는 선은 아버지, 또는 어머니이든 그의 부모로부터 파생된 선이다. 즉 대체로 인간은 태어나면 부모의 보살핌이 절대적 조건인지라, 아이는 부모의 습관에 젖어들 수밖에 없다, 그렇지 않으면 부모와의 교통이 이루어지지도 않기 때문이다, 부모의 각종 습관을 아이들이 흡수할 수밖에 없는 바, 부모의 선 역시 자식에게로 자동적으로 파생되고 이 선에 친숙해지고, 자녀 역시 그 선을 당연시 한다, 이것이 대물림하고 한마디로 유전적 속성으로 되어간다는 말이다. 만일 부모가 선을 사랑함으로부터의 선 안에서 살았다면, 그리고 이 삶 안에서 그가 기쁨과 복됨을 지각했다면, 이 상태 안에 있으면서 자손을 임신했다면, 이 자손은 부모의 선의 상태로부터 그와 비슷한 선에 잘 기울여지는(inclination) 속성을 받는다. 만일 부모가 진리를 사랑함으로부터의 선 안에서 살았다면, 그리고 이 삶에서 자기들의 즐거움을 지각했다면, 이 상태 안에서 그들이 자손을 임신했다면, 이 자손은 (부모가 즐거움을 발견한 선과) 유사한 선에 대한 경향성(inclination)을 받는다.
이런 경우는 악을 사랑함으로부터의 선과 거짓을 사랑함으로부터의 선의 경우에서도 같은 이치이다. 아마 악과 거짓, 선과 진리라는 단어를 연상하면, 여기서 악을 사랑함으로부터에다 선을 붙여 말하는 것이 얼핏 타당치 않게 여겨졌을 것이다. (여태까지 이 책에서 이런 말을 써본 적도 없고 여기서 처음 사용되고 있는 것으로 기억된다 역자 주.) 악이나 거짓을 사랑함에서 선이라 불리운 것은 정녕 이 선이 진짜 선 자체에 반대로 나타나 있다 해도 당사자가 진짜 선으로 주장한다면 그 인물의 견지에서는 그것이 선이다는 말이다, 즉 바깥쪽 형체에서만 견주어 말한 선인 것이다. 자연적 선의 경우, 이런 형태를 가지는 경우는 매우 많다. (어쩌면 자연적 선의 거의 전부일지 모른다 역자 주) 악을 사랑함으로부터의 자연적 선 안에 있는 이들은 모두 각각의 종류의 악쪽으로 쉽게 구부려지고 흡수되어버리는 경향이 짙다. 이 선으로부터 고분고분해지려는 경향이 짙은데, 특별히 더러운 쾌락쪽으로, 간통쪽으로, 또한 잔인함쪽으로는 시키면 곧바로 몰입하는 식이다; 그리고 거짓으로부터의 자연적 선에 있는 이들은 모두 각각의 종류의 거짓들에 쉽사리 젖고 마는데, 이 선으로부터 설득하는 것을 탐욕적으로 갈망하여 배운다, 특히 위선자와 잔꾀부리는 인물의 경우일 것이다. 이들은 마음을 어떻게 포로화하는지를 알고 있다, 하여 애착들 안으로 자신들을 어물쩍 주입하고, (늑대가 양가죽을 덮어쓴 듯) 자신을 순진함으로 옷입혀 발뺌을 해놓고 있다. 오늘날 기독교계에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연적 선 안에 있고, 많은 이들이 악과 거짓으로부터 인데도 소위 자기들 나름에서 선이라 불리우는 것들 안으로 태어나고 있다, 그 이유는 그들의 부모들이 실제의 생활을 수단으로 악으로부터의 즐거움과 거짓으로부터의 즐거움과 계약되었기 때문이다, 고로 그들의 자녀 안에 그것이 이식되었기 때문, 이로부터 그들의 후손에도 이식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헷 족속 브에리의 딸 유딧과 헷 족속 엘론의 딸 바스맛을 여인으로 데려 왔다. 이는 순수한 진리 자체로부터가 아닌 또 다른 근원으로부터의 자연적 진리가 첨가됨을 의미한다. 이는 “여인”의 의미가 선에 인접한 진리이다로부터; 그러나 여기서는 자연적 선에 인접한 자연적 진리이다; 그리고 “헷족 브에리의 딸 유딧과 헷족 엘론의 딸 바스맛”이 표현하는 것은 순수한 진리 자체보다 또 다른 근원으로의 진리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 이유가 헷족은 가나안의 토지에서 직바른 이방인들에 속했고, 그들과 더불어 아브라함이 거주했고, 그들로부터 매장지를 위해 막벨라에 있는 동굴을 샀다 (창. 23장); 그리고 이들을 수단으로 이방인들 사이에 있는 영적 교회가 표현되었다; 그리고 이 교회는 말씀으로부터의 진리 안에 있지 않았기 때문에, 이들에 의해서는 순수한 진리 자체로부터가 아닌 진리가 의미되었다. 그 이유가 교회를 표현하는 나라는 그 교회에 속하는 진리와 선 역시 의미하기 때문이다; 교회는 진리와 선으로부터 교회이다; 하여 교회가 언급되어질 때, 진리와 선 역시 이해되어진다; 그리고 진리와 선이 언급될 때, 교회가 이해되어진다.
여기서의 경우는 이렇다: 진리로부터의 자연적 선은 개혁이 마무리될 때까지 영적 선은 아니다는 것, 즉, 신앙의 선과 생활의 선이 아니다는 말이다. 방금 서술했던 대로 자연적 선은 부모로부터 있다; 그러나 영적 선은 주님으로부터 있다; 그러므로 인간이 영적 선을 받으려면, 그는 거듭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이것이 거행되는 동안, 그 사람에게는 순수한 진리 자체라기 보다는 어떤 다른 근원으로부터의 진리가 처음에 인접되어 있는다, 그렇다고 딱 달라붙은 상태가 아니라 순수한 진리들을 소개하는 수단으로 사용될 뿐이다. 하여 이것이 소개함을 끝냈을 때, 순수하지 않은 진리는 분리되어진다. 이런 경우는 어린이들에게서 흔한 경우이다. 그는 처음에 많은 것들을, 마구잡이로, 하찮은 수준인 스포츠 같은 것에 이르기까지 배운다. 배워진 모든 것들이 그들을 슬기롭게 만드는 것은 아니지만, 그들이 지혜에 속한 유용한 것들을 받는 길을 준비하는데 도움을 준다; 이것들이 받아졌을 때, 전자는 분리되는데, 실로 헌신짝 던지듯 한다. 또는 과일들의 경우에도 있다: 과일들이 달콤한 쥬스를 받을 수 있기 전 시큼떨떨한 쥬스로 채워져 있다, 처음의 쥬스는 나중의 쥬스를 받는 수단이 된 것이고 후자가 마무리되면 전자는 없었는 듯 사라진다.
이는 인간이 거듭날 때 자연 평면에서도 그러하다, 그 이유가 자연적 선은 그 스스로 마치 종이 주인을 섬기듯 합리적 선에 기꺼이 순종하거나 섬기려 들지 않는다. 자연적 선은 합리적 선의 명령을 바랄 뿐이다. 그러나 이 자연적 선이 합리적 선에 고분고분하고 섬기도록 하기 위하여서는 자연적 선은 시험이나 황폐해짐의 상태에 의해 괴롭힘을 당해서, 이 선이 현세에의 욕망을 사절할 때까지 가야 하는 애로사항이 놓여 있다; 그때 주님으로부터 내적 인간을 통하여 신앙의 선과 선행의 선의 유입을 수단으로 자연적 선은 부드럽게 되고, 유전적으로 받은 선이 등차적으로 근절되고, 그리고 새로운 선이 그 선의 자리에 심어지고, 심어진 선 안으로 신앙의 진리들이 은근히 주입된다. 이는 마치 인간의 심장 안으로 새로운 섬유 조직이 삽입되고, 이를 통하여 새로운 쥬스가 유입되고, 점차적으로 새로운 심장이 거기서 자라는 것과 유사하다. 처음 받아들인 진리들은 순수한 샘(원천)으로부터 일 수 없다, 그 이유는 악들과 거짓들이 이전의 선 또는 자연적 선 안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들은 순수한 진리들과 어떤 친척 관계인 듯 진리의 나타남에 있는 바, 이를 수단으로 순수한 진리들이 은근히 심어지도록 기회를 엿보고 정착할 자리도 점차적으로 만든다. 순수한 선은 마치 동맥 속의 피, 섬유 조직상의 쥬스 같아서, 형체 안으로 진리들을 이끌어 응용한다. 이렇게 하여 자연적 인간 또는 외적 인간에 형성된 선이 일반적 선, 이 선은 형체를 만드시고 새로이 만드시는 분, 주님으로부터 합리적, 내적 인간을 통하여 영적 선의 세부적, 특수적인 것들을 다함께 연결하고 짜깁어진 듯 되어 있다. 이로부터 말씀 안에서 주님은 형성자, 창조자라 자주 불리우신다.

그리고 그들은 이삭과 리브가에게 영의 괴로움이었다. 이는 이런 근원으로부터 제일 먼저 있게 되는 것은 슬픔임을 의미한다. 이는 “영의 괴로움”이 슬픔이다로부터; 그리고 이삭과 리브가의 표현이 주님의 신성한 선과 신성한 진리 측면에서의 신성한 합리성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 이유가 여기서 취급되는 주제가 최고 의미에서는 주님이시기 때문; 그러나 표현적 의미에서는 그분의 모습과 형상인 이들이다; 즉 최고 의미에서 이 장은 어떻게 주님께서 인간을 거듭나게 해주시는가, 즉 인간을 천적, 영적 평면의 인간을 만드시는지 이다. 인간의 거듭남은 주님의 신성이 되심의 형상이다. 이는 이미 살폈다. 제일 먼저 슬픔이 있는 이유는 진리들이 자연적 선 안으로 삽입되어질 때, 그것들은 고통을 유발한다, 그 이유는 진리들이 양심을 압박하기 때문; 그리고 자연적 선에 현세에의 욕망이 현존하는 바, 이에 맞서 영적 진리가 전투하기에 걱정 불안이 유발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처음의 슬픔은 점차로 사그라들고, 결국 사라진다. 이는 병든 육체가, 다친 상처가 쿡쿡 쑤시는 과정을 지나 회복되는 과정과 같다; 이 상태에서 처음에 그것은 슬픔을 가진다.

창세기 제 27 장

성경: 창세기 27장

1. 이삭은 늙었다, 그리고 그의 눈은 어두워져서 그는 볼 수 없었다. 그리고 그는 그 의 손위의 아들인 에서를 불렀다, 그리고 그에게 나의 아들아 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가 그에게 말하기를, 저를 보고 계십니다.
2. 그리고 그가 말했다, 보다시피 나는 늙었다. 나는 내 죽음의 날을 모르고 있다.
3. 그리고 지금 네 무기들, 화살통, 그리고 활을 가져 오라, 그리고 들판으로 나가거 라,
4. 그리고 나를 위하여 사냥하여라. 그리고 나에게 내가 사랑하였었던 맛좋은 음식을 만들어라, 그리고 나에게 가져 오라, 그리고 내가 먹고 내 혼이 내가 죽기 전 너에 게 복을 빌어주리라.
5. 그리고 리브가는 이삭이 그의 아들 에서에게 말했을 때 들었다. 그리고 에서는 사 냥한 것을 가져오기 위해, 사냥할 것 때문에 들판으로 사냥을 하려고 나갔다.
6. 그리고 리브가는 그의 아들 야곱에게 말했다, 말하기를, 나는 네 아버지가 네 형제 에서에게 말한 것을 들었는데, 말하기를
7. 나에게 사냥한 것을 가져 오너라, 그리고 나에게 맛좋은 음식을 만들어라, 그리고 내가 먹고, 그리고 죽기 앞서 여호와 앞에서 너에게 복을 빌겠다.
8. 그리고 지금 내 아들은 내 음성에 귀를 기울여서, 내가 너에게 명령한 것에 따르 라.
9. 지금 양떼에게로 가라, 그리고 염소들로부터의 좋은 염소 새끼 두 마리를 가져 오 너라. 그리고 나는 그것을 네 아버지가 사랑했던 것과 같은 음식, 네 아버지를 위 한 맛있는 음식을 만들 것이다.
10. 그리고 너는 네 아버지에게 갖다 드리거라, 그리고 그는 잡수시고, 그리고 그는 그가 죽기 전 너에게 복을 빌 것이다.
11. 그리고 야곱은 그의 어머니 리브가에게 말했다, 내 형 에서는 털이 많은 사람이 고, 그리고 저는 매끈한 사람입니다.
12. 나의 아버지께서 나를 만져 보신다면, 저는 그의 눈에 그릇 인도하는 자일 것입니 다; 그리고 저는 나에게 축복이 아닌 저주를 가져 올 것입니다.
13. 그리고 그의 어머니가 그에게 말했다, 네 저주는 내 위에 있게 하마, 내 아들아; 오직 내 음성만에 귀기울이거라, 그리고 가서, 나에게 가져오너라.
14. 그리고 그는 갔다, 그리고 손에 잡았다, 그리고 그의 어머니에게 가져다 주었다; 그리고 그의 어머니는 그의 아버지가 사랑했던 것과 같은 별미를 만들었다.
15. 그리고 리브가는 집에서 그녀와 더불어 있었던 그녀의 큰 아들 에서의 바람직한 의복을 가져왔다, 그리고 그것들을 그녀의 작은 아들 야곱에게 입혔다.
16. 그리고 그녀는 암염소들의 새끼들의 가죽들을 그의 손 위에, 그리고 그의 매끈한 목에 입혔다.
17. 그리고 그녀는 별미와 그가 만든 빵을 그녀의 아들 야곱의 손에 주었다.
18. 그리고 그는 자기 아버지에게 와서 말했다, 나의 아버지여. 그리고 그는 말했다, 나를 바라보라, 너는 내 아들 누구냐?
19. 그리고 야곱은 그의 아버지에게 말했다, 저는 당신의 첫 출생 에서입니다; 저는 당신께서 말씀하신 대로 하였습니다; 일어나, 앉으셔서, 그리고 제 사냥한 것을 잡수시고, 당신의 혼이 저에게 복을 빌어 주십시오.
20. 그리고 이삭은 그의 아들에게 말했다, 어떻게 너는 그것을 빨리 발견하였느냐, 내 아들아? 그리고 그가 말했다, 여호와 당신의 하느님께서 그것이 저의 얼굴을 만 나도록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21. 그리고 이삭은 야곱에게 말했다, 가까이 오기 바란다, 그리고 나는 네가 내 아들, 참으로 내 아들 에서인지, 아닌지 만져보아야겠다.
22. 그리고 야곱은 그의 아버지 이삭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그리고 그는 그를 만졌다, 그리고 말했다, 음성은 야곱의 음성이나, 손은 에서의 손이다.
23. 그리고 그는 그가 아닌 것을 인지하지 못했다, 그 이유는 그의 손이 그의 형 에서 의 손 같이 털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그에게 복을 빌어 주었다.
24. 그리고 그는 말했다, 너는 참으로 내 아들 에서이냐? 그리고 그가 말했다 그렇습 니다.
25. 그리고 그는 말했다, 그것을 나에게 가까이 가져오너라, 그리고 나는 내 아들이 사냥한 것을 먹고 내 혼이 너에게 복을 빌 것이다; 그리고 그는 그것을 그에게 가까이 가져왔다, 그리고 그는 먹었다, 그리고 그는 그에게 포도주를 가져왔다, 그리고 그는 마셨다.
26. 그리고 그의 아버지 이삭이 그에게 말했다, 가까이 오기 바란다, 그리고 내 아들 아 나에게 키스하여라.
27. 그리고 그는 가까이 왔다, 그리고 그에게 키스했다. 그리고 그는 그의 의복의 향 취를 냄새 맡았다, 그리고 그에게 복을 빌어 주었다, 그리고 말했다, 보라 내 아 들의 향취는 여호와께서 복주신 들판의 냄새 같다.
28.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하늘의 이슬로부터와 땅의 살찐 것들로부터 네게 주실 것 이다, 그리고 풍성한 곡식과 새 포도주(를 주실 것이다).
29. 백성들이 너를 섬길 것이다, 그리고 백성들이 너에게 자신을 굽혀 절할 것이다. 너는 네 형제들의 주인이 되라, 그리고 네 어머니의 아들들은 너에게 자신을 굽 혀 절하리라. 너를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겠고, 너에게 복을 빌어주는 자는 복 을 받을 것이다.
30. 그리고 이삭이 야곱에게 복을 빌어 주는 것을 끝냈다, 그리고 야곱이 그의 아버지 이삭의 얼굴로부터 나가자 마자, 그의 형 에서가 그의 사냥으로부터 왔다.
31. 그리고 그도 역시 별미를 만들었다, 그리고 그의 아버지에게 가져왔다. 그는 그의 아버지에게 말했다, 나의 아버지시여 일어나소서 그리고 당신의 아들이 사냥한 것을 잡수시고, 당신의 혼이 저에게 복을 빌어 주소서.
32. 그리고 그의 아버지 이삭은 그에게 말했다, 너는 누구냐? 그리고 그는 말했다. 저 는 당신의 아들, 첫 출생, 에서입니다.
33. 그리고 이삭은 극도로 심히 떨었다, 그리고 말했다, 그러면 사냥감을 사냥했고, 그리고 그것을 나에게 가져왔고, 그리고 나는 네가 오기 전 모든 것을 먹었고, 그 리고 복을 빌어 주었던 그는 누구인가? 그렇다 그가 복을 받을 것이다.
34. 에서가 그의 아버지의 말을 들었을 때, 그는 극도로 크게 소리내어 울었다, 그리 고 그의 아버지에게 말했다, 저에게, 저 또한 복을 빌어 주소서, 오 나의 아버지 시여.
35. 그리고 그는 말했다, 네 동생이 속임수로 와서 네 복을 빼앗아 갔다.
36. 그리고 그는 말했다, 그리하여 그의 이름이 야곱이라 불리운 것입니까? 그리고 그 가 나를 두 번이나 속였습니다; 그는 내 생득권을 빼았고, 그리고 지금 그는 내 복을 가로챘습니다. 그리고 그는 말했다, 당신께서는 저를 위하여 복을 남겨두시 지 않았습니까?
37. 그리고 이삭은 에서에게 답하여 말했다, 보다시피 나는 그를 네 주인으로 만들었 다, 그리고 모든 그의 형제를 나는 그에게 종으로 주었다. 그리고 곡식과 새 포도 주를 가지고 나는 그를 떠받치게 했다. 이럴진대 내가 너를 위하여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이냐 내 아들아?
38. 그리고 에서는 그의 아버지에게 말했다, 당신께서 빌어줄 복이 이 하나 밖에 없 습니까, 나의 아버지시여? 나에게도 또한 복을 빌어 주소서, 오 나의 아버지시여. 그리고 에서는 그의 음성을 높혔다, 그리고 슬퍼했다.
39. 그리고 그의 아버지 이삭이 그에게 답하여 말했다, 보아라 땅의 살찐 것들로부 터 네 거처가 있을 것이고, 위로부터 하늘의 이슬로부터 네 거처가 있을 것이다.
40. 그리고 네 검에 근거하여 너는 살 것이다, 그리고 네 아우를 섬길 것이다. 그리고 장차 네가 지배권을 가지게 될 때가 오면 너는 네 목으로부터 그의 멍에를 부술 것이다.
41. 그리고 에서는 그의 아버지가 야곱에게 축복한 그 축복으로 말미암아 그를 미워 하였다; 그리고 에서는 그의 심중에 말했다, 내 아버지를 위해 곡할 날이 가까웠 다, 그리고 나는 내 동생 야곱을 죽이리라.
42. 그리고 그녀의 큰 아들 에서의 이 말이 리브가에게 말해졌다; 그리고 그녀는 (사 람을) 보내서 그녀의 작은 아들 야곱을 불렀다, 그리고 그에게 말했다, 보아라, 네 형 에서가 너를 죽여서 너에 관련된 자신을 위로하려고 한다.
43. 그리고 지금 내 아들은 내 음성에 귀기울여라, 그리고 일어나, 너는 하란의 내 오 라버니에게로 도망하여라.
44. 그리고 네 형의 분노가 풀리기까지 몇 날 동안 그와 함께 머물러라,
45. 네 형의 노여움이 너로부터 풀리고 네가 그에게 했던 것을 잊으면, 나는 거기로 (사람을) 보내서 너를 데려 오겠다. 어찌 하루에 너희 둘을 잃어서야 되겠느냐?
46. 그리고 리브가가 이삭에게 말했다, 나는 헷사람의 딸들 때문에 내 삶이 싫어졌습 니다; 만일 야곱이 여인을 이 토지의 딸들 중에서나 마찬가지인 헷의 딸들로부터 데려온다면 무엇 때문에 내가 생명들을 가집니까?”

각 절의 내적 의미

1절. 이삭은 늙었다, 그리고 그의 눈은 어두워져서 그는 볼 수 없었다. 그리고 그는 그의 장자인 에서를 불렀다, 그리고 그에게 나의 아들아 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가 그에게 말하기를, 저를 보고 계십니다.
이삭은 늙었다. 이는 새로운 상태가 가까이 다가왔음을 의미한다. 이는 “늙어짐”의 의미가 새로운 상태가 현존함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 이유가 말씀에서 “늙은 나이”는 이전 상태가 중단되고, 새로운 상태를 입음 둘 다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는 늙은 나이는 인생의 마지막 나이이고, 그 나이에서 육체적인 것들이 벗겨지기를 시작하는 바, 각자와 더불은 이전 시절 속의 사랑들도 벗어내고, 내면들이 계발되기를 시작할 때이기 때문, 그 이유는 육체의 것들이 제거되어야 내면들이 계발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천사들, 영적 방식에서 말씀에 있는 것들을 지각하기 때문에, 그들은 늙었다는 말씀을 들을 때, 그것 대신 새로운 삶에 대한 생각을 하게 되는 바, 여기서는 이 상태가 가까웠다는 것, 즉 이삭에 의해 표현된 신성한 합리성은 그 합리성 자체에 상응하는 자연 평면을, 즉 자연 평면 역시 신성이기를 바랬다는 생각을 한다.

그의 눈은 어두워져서 그는 볼 수 없었다. 이는 합리성이 신성과 더불어 자연 평면을 계발하기를 바랄 때를 의미한다. 이는 “눈”이 내면의 시각 또는 합리적 시각을 의미함으로부터; 그리고 “본다”의 의미가 지각하는 것, 이해하는 것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러므로 눈이 “어두워진다”라고 말해질 때, 이는 지각함이 더 이상 있지 않다는 것, 여기서의 경우 자연 평면에 있는 것들에 대한 지각이 없다가 의미된다; 그리고 이것을 바꾸어 말하면, 합리성은 신성과 더불어 자연 평면을 계발하기를 바랬다가 의미된다. 여기서 어떻게 이런 의미가 있는지는 인간이 거듭나질 때 인간 안에 있는 합리성과 자연 평면에 관하여 이미 말하여 살폈던 것으로부터 알게 된다, 즉 합리성이 자연 평면에 앞서 거듭나진다는 것, 그 이유는 합리성이 (자연 평면에 비해) 내면에 더 가까이, 특히 신성에 더 가까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연 평면보다 더 순수하기 때문, 고로 자연 평면보다 신성을 받기에 보다 더 안성맞춤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연 평면은 합리성을 통하여 거듭나지기 때문인 것도 그 이유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합리성은 거듭나졌는데, 자연 평면은 아직 거듭나지지 않은 상태라면, 전자는 그 자체에 어두운 시력으로 나타난다, 그 이유는 둘 사이에 상응이 없기 때문에서 이다. 상응이 없는 이유는 합리성은 천국의 빛으로부터 그것의 시력을 가지나, 자연 평면은 세상의 빛으로부터 그것의 시력을 가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상응함이 있지 않으면, 합리성은 자연 평면 안에 있는 어떤 것도 볼 수 없다, 하여 그 안의 모든 것은 그늘진 상태, 심지어는 짙은 어둠으로조차 나타나 있다. 그러나 상응이 있을 때, 자연 평면의 것들은 빛 안에서 합리성에게 나타난다, 그 이유는 세상의 빛으로부터 있는 것들이 천국의 빛으로부터 있는 것들에 의해 계발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거기 위쪽은 마치 반투명(translucent)인 것처럼 되어 있다. 이런 사항들에 관한 것은 이미 살핀 상응에 관한 대목에서 더 잘 설명되었으므로 다시 참조하기 바란다. 이상 살핀 바로부터 “이삭의 눈은 어두워져 그는 볼 수 없었다”는 말에 의해 합리성은 신성과 더불어 자연 평면을 계발하기를 바랬다가 의미된 것을 얼마나마 납득했으리라 본다, 그 이유가 최고 의미에서 주님이 취급되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이는 거듭날 때, 인간과 더불어 거행되는 것에 의해 예증이 가능한데, 그 이유는 인간의 거듭남은 주님의 신성이 되심(glorification)의 형상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그의 손위의 아들 에서를 불렀다. 이는 자연 평면의 선에 대한 애착, 또는 생활로부터의 선에 대한 애착을 의미한다. 이는 “에서”가 자연 평면의 신성한 선을 표현한다로부터; 그리고 자연 평면의 선은 애착과 생활에서 나타나는 것이다로부터, 그러므로 이것은 자연 평면의 선에 대한 애착, 또는 생활의 선에 대한 애착이다, 이것이 여기서 에서에 의해 표현되어진다. 자연 평면에 있는 선에 대한 애착, 그리고 이 애착에서 비롯되는 생활의 선이 “손위의 아들”, 그러나 진리에 대한 애착, 그리고 이 애착에서 비롯되는 진리의 교리는 “손아래의 아들”이라 불리운다. 선에 애착함, 그리고 이 애착함에서 파생되는 생활의 선이 “손위의 아들”, 즉 첫 출생이다는 것은 유아들이 무엇보다 먼저 선 안에 있다는 사실로부터 분명해진다, 그 이유가 그들이 순진의 상태 안에 있기 때문, 그리고 그들의 부모나 보모들을 향한 사랑의 상태 안에, 그리고 자기 같은 유아 동료들을 향한 서로의 선행의 상태 안에 있기 때문이다. 하여 선은 모든 이와 더불어 첫 출생이다. 이 선, 이 안으로 인간은 유아일 때, 시작하고 남아 있는다; 그 이유가 유아 시절로부터 흡수되는 것은 무엇이든 그의 생명 안으로 들어가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은 유아에게 남아 있기 때문에 이것은 생명 속의 선이 된다. 만일 인간이 유아 시절로부터 파생된 선과 같은 것 없이 있을 것이다면, 그는 숲에 있는 어느 들짐승보다 더 들짐승일 것이다. 이 선은 실로 표출되어 나타나지 않는다. 그 이유가 유아 시절에 흡수된 모든 것은 자연 평면의 어떤 것으로밖에 더 달리 나타나지 않기 때문이다, 즉 걷는 것, 또는 육체의 다른 움직임, 시민 생활의 예법; 또는 대화, 이외 다양한 것들로 나타나고 있을 뿐이다는 말이다. 이상으로부터 선이 “손 위의 아들”, 첫 출생이다는 것, 결과적으로 진리는 “손 아래의 아들”, 그 후에 태어난다는 것; 그 이유가 진리는 유아가 어린 아이, 젊은 이, 성년이 될 때까지 배워지지 않기 때문이다.
자연 평면, 또는 외적 인간에 있는 선 뿐만아니라 진리도 “아들”이다, 다시 말하면 내적 인간, 또는 합리적 인간의 아들이다는 말이다; 그 이유가 자연 평면, 또는 외적 인간 안에서 출시(공표)하는 것은 무엇이든 합리성, 또는 내적 인간으로부터 흘러든 것, 이로부터 출시되고 태어나기 때문이다; 거기에서 출시되지 않는 것, 태어나지 않는 것은 살아 있는 인간의 것이 아니다. 즉 혼 없이 육체의 감각적 어떤 것을 말하는 것이나 다를 바 없다. 이로부터 선과 진리 모두가 “아들”이라 불리운다, 그리고 참으로 합리성의 아들이라 불리운다. 그럼에도 자연 평면에서 생산되고 낳게 하는 것은 합리성이 아니고, 합리성을 통하여 자연 평면 안으로의 유입(流入, influx)이고, 이 유입은 주님으로부터 있다. 그러므로 태어나는 모든 유아들은 그분의 아들들이다, 그리고 그 후에 그들이 슬기로워질 때, 그들이 여전히 유아인 만큼에서, 즉 유아의 순진 안에 있는 정도에서, 그들의 부모, 이제는 주님을 향한 유아의 순진 안에 있는 만큼에서, 그리고 그들의 유아 동료들을 향한 서로의 선행 안에, 지금은 그들의 이웃을 향한 서로의 선행 안에 있는 만큼에서 그들은 주님에 의해 아들들로서 양자 삼아진다.

그리고 그에게 내 아들아 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가 그에게, 저를 보고 계십니다. 이는 예견되고 설비되었던 것이 현존함을 의미한다. 이는 “그를 부르고 그에게 내 아들아 라고 말함”의 의미가 예견하고 설비함이다로부터 알게 되는데, 그 이유는 이 대목이 주님의 신성을 서술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에게 말하기를, 나를 보고 계십니다”의 의미가 (즉 부름에 대한 응답의 의미가) 현존함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2-4절. 그리고 그가 말했다, 보다시피 나는 늙었다. 나는 내 죽음의 날을 모르고 있다. 3 그리고 지금 네 무기들, 화살통, 그리고 활을 가져 오라, 그리고 들판으로 나가거라, 4 그리고 나를 위하여 사냥하여라. 그리고 나에게 내가 사랑하였었던 맛좋은 음식을 만들어라, 그리고 나에게 가져 오라, 그리고 내가 먹고 내 혼이 내가 죽기 전 너에게 복을 빌어주리라.

그리고 그는 말했다, 보다시피 나는 늙었다. 이는 상태가 임박했음을 의미하는데, 이는 “늙게 됨”의 의미에 관한 설명으로부터 알게 된다.

나는 내 죽는 날을 모르고 있다. 이는 자연 평면에 있는 생명을 의미한다. 이는 “날”의 의미가 상태이다로부터; 그리고 “죽음”의 의미가 삶 안으로 다시 일어남, 또는 소생함이다로부터; 고로 “죽는 날”에 의해서는 생명이 소생하는 상태, 같은 말로 생명이 의미된다; 이것이 자연 평면 안에서 라는 것은 분명하다, 그 이유는 그 안에 있는 삶(생명)이 취급되기 때문이다. 여기서의 경우가 어떻게 이러한지는 합리성의 생명과 더불은 경우와 자연 평면의 생명과 더불은 경우를 먼저 알지 않으면 보여질 수 없다; 같은 말로 내적 인간의 생명과 외적 인간의 생명의 경우이다. 합리성, 또는 내적 인간의 생명은 자연 평면, 또는 외적 인간의 생명으로부터 구분되어 있다, 실로 아주 완벽히 구분되므로 합리성 또는 내적 인간의 삶은 자연 평면, 또는 외적 인간으로부터 떨어져서도 가능하다; 그러나 자연 평면, 또는 외적 인간의 생명은 내적 인간, 또는 합리성으로부터 떨어져서 사는 것이 불가능하다, 그 이유는 외적 인간은 내적 인간으로부터 살아 있기 때문이다. 하여 내적 인간의 생명이 중단된다면, 외적 인간의 생명은 즉각적으로 무효화된다. 그 이유는 효력 있는 원인으로부터 효과가 결과되는 것, 따라서 원인이 중단되면, 이에 따라 효과 역시 즉각 무효화로 되기 때문이다.
이는 인간의 경우에서 보여질 수 있다; 즉 인간이 세상 안에, 또는 그의 육체 안에 있을 때, 그의 합리성은 그의 자연 평면으로부터 구분되어 있는 바, 그가 육체의 외적 감각적인 것들로부터 물러나는 정도에서, 그리고 또한 그의 자연적 인간의 내면의 감각적인 것들로부터 있는 정도에서 그는 그의 합리성 안에, 고로 그의 영적 생각(사고력) 안에 있을 수 있다. 이것은 인간이 죽을 때 더 잘 나타난다, 즉 그는 육체의 외적 감각적인 것들을 모두 뒤에 남기고 그의 내면의 인간의 생명만이 존속한다; 그리고 또한 비록 그와 더불어 외적, 또는 자연적 기억 속의 지식을 실로 가지고 있다해도, 그는 그것들의 사용을 향유하지 못한다; 이로부터 분명한 바, 합리성 또는 내적 인간은 외적 인간으로부터 구분되어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인간이 육체 안에서의 삶 동안 그의 합리성은 그의 자연 평면과 구분되어 있다고까지는 나타나지 않는다, 그 이유는 그가 세상 안에, 자연계 안에 있기 때문이다; 이럴진대, 합리성의 생명은 자연 평면 안쪽에서 나타난다, 따라서 자연 평면의 것과 동시에 나타나지 않으면 그만큼 합리성 안에 어떤 생명이 있다 라는 것도 나타나지 않게 된다. 이상으로부터 자연 평면에서 상응하는 생명, 이것이 이삭이 에서에게 한 말, “나는 내 죽는 날을 모른다”에 의해 의미되어 있다, 그 이유가 합리성은 이삭에 의해, 그리고 자연 평면은 에서에 의해, 그리고 둘 모두 선의 측면에 관하여서 이기 때문이다.

지금 네 무기들, 화살통, 그리고 활을 가져 오라. 이는 그가 가졌던 선으로부터의 교리적인 것들을 의미한다. 이는 “무기들, 화살통, 그리고 활”의 의미가 교리적인 것들이다로부터, 여기서의 경우, 그가 가졌던 선으로부터의 교리적인 것들, 이는 에서에 의해 표현된 자연 평면의 선에 의해 가졌던 교리물이다.

그리고 들판으로 나가거라. 이는 선한 지면(바탕)이 있는 곳을 의미한다. 이는 “들판”의 의미가 교회의 선, 또한 교리로부터의 선이다로부터, 고로 선한 지면(바탕)임이 분명하다.

그리고 나를 위해 사냥하여라. 이는 선으로부터의 진리를 의미한다. 이는 “사냥하는” 것, 또는 “사냥 (고기)”가 자연 평면의 진리, 이로부터 생활의 선이 있다; 여기서는 선으로부터 있는 진리이다, 그 이유는 에서에게 말했기 때문인데, 에서에 의해 자연 평면의 선이 표현되었기 때문이다.

내가 사랑했었던 맛좋은 음식을 만들어라. 이는 선으로부터 이기 때문에, 거기로부터 있는 유쾌한 것들을 의미한다. 이는 “맛좋은 음식”이 유쾌한 것들이다로부터; 그리고 그것들이 에서로부터 와졌기 때문에, 에서를 수단으로 자연 평면의 선이 표현되기 때문에, 그러므로 그것들은 선으로부터 이기 때문에 유쾌한 것들을 의미하게 된다. 원어에서 “맛좋은 음식(danty)”은 미각에 즐거움과 기쁨을 주는 것들을 의미한다; 그리고 내적 의미에서 그것은 선으로부터 즐거워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것은 진리로부터 기뻐하는 것도 의미하는데, 그 이유는 다른 오각과 같이 미각도 천적인 것들과 영적인 것들과 상응하기 때문이다, 이 상응에 관하여는 차후 주님의 신성한 자비로부터 따로 살필 것이다. 이 대목의 경우가 어떻게 그런 의미를 가지는 지를 알려면, 어떤 방식에서 자연 평면이 새로이 만들어지는가, 또는 합리성으로부터, 즉 합리성을 통하여 주님으로부터 생명을 받는가를 알아야 한다.
자연 평면은 교리적인 것들을 수단으로, 또는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들을 수단으로 하지 않고서는 거듭나지지 않고, 거듭나지지 않으면 합리성에 상응하는 생명을 받지 못하고, 새로이 만들어지지도 않는다. 천적 수준의 인간은 선에 관한 지식을 우선적으로 거듭남의 수단으로 하고, 영적 수준의 인간은 진리에 관한 지식을 우선적으로 거듭남의 수단으로 한다. 교리적인 것들, 또는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들은 이 지식들에 정박하는 즐거움과 유쾌함들을 수단으로(낚시의 미끼의 경우 같이) 삼지 않으면 자연적 인간과 교통될 수 없고, 고로 결합되거나 자기 것으로 삼아질 수도 없다. 그 이유가 그것들은 외적, 또는 감각적 경로에 의해 은근히 심어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떤 즐거움 또는 유쾌함을 수단으로 하지 않는 것은 무엇이든 내재하지 못한다, 고로 계속되지 않는다. 이것이 선으로부터의 진리, 그리고 거기로부터 유쾌함에 의해 뜻해진다, 이것이 이어지는 대목들에서 취급된다.

그리고 나에게 가져 오너라, 그리고 나는 먹겠다. 이는 자기 것이 되게 함을 의미한다. 이는 “먹다”가 자기 것이 되게 함을 의미함에서 분명해진다.

내 혼이 너에게 복을 빌 것이다. 이는 그의 생명에 첨가됨을 의미한다. 결과적으로 합리성에 상응하는 생명이 첨가됨을 의미한다. 이는 “복을 빔, 축복함 (be blessed)”의 의미가 천적, 영적인 선으로 선물됨이다로부터 분명해진다; 그 이유가 유아의 선과 거기서부터 있는 생활의 선, 이는 자연 평면의 선과 동일하고, 이것이 에서에 의해 표현되는데, 이 선은 영적 선은 아니다, 즉 유아의 선은 지식과 총명이 결핍된 선, 고로 지혜가 결핍된 선이다. 유아의 선은 진리가 이식됨을 통하여, 즉 거듭남을 통하여 영적 선이 되어간다; 이로부터 합리적인 것과 자연적인 것 사이에 상응함이 온다, 결과적으로 합리성의 생명에 자연적 인간이 첨가되는 것이다; 이런 첨가됨이 “내 혼이 네게 복을 빌 것이다”에 의해 뜻해지고 있다.

내가 죽기 전에. 이는 자연 평면 안에서 소생함의 첫 상태를 의미한다. 이는 “죽는다”의 의미가 다시 일어나는 것이다로부터, 또는 생명으로 소생하는 것이다로부터 분명해진다. 이것이 처음 상태이다는 것은 유아의 선과 이에서 파생되는 생활의 선은 거듭남에서 첫 번째에 해당한다는 사실로부터 분명해진다. 고로 이 상태가 지금까지 에서에 의해 표현되어졌다. 그 다음의 상태들이 이 장의 시리즈에서 취급되어진다.

5-7절. 그리고 리브가는 이삭이 그의 아들 에서에게 말했을 때 들었다. 그리고 에서는 사냥한 것을 가져오기 위해, 사냥할 것 때문에 들판으로 사냥하려고 나갔다. 6 그리고 리브가는 그의 아들 야곱에게 말했다, 말하기를, 나는 네 아버지가 네 형제 에서에게 말한 것을 들었는데, 말하기를 7 나에게 사냥한 것을 가져 오너라, 그리고 나에게 맛좋은 음식을 만들어라, 그리고 내가 먹고, 그리고 죽기 앞서 여호와 앞에서 너에게 복을 빌겠다.

그리고 리브가는 이삭이 그의 아들 에서에게 말했을 때 들었다. 이는 진리에 대한 애착과 거기로부터 있는 생명(삶)을 의미한다. 이는 리브가가 신성한 선에 결합한 신성한 진리 측면에서의 주님의 신성한 합리성을, 고로 진리에 대한 애착 자체를 표현함으로부터; 그리고 “이삭이 말하는 것을 들음”의 의미가 그것으로부터 있는 생명을 의미한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 이유가 “말하는 것을 들음”이 내적 의미에서는 유입을 표시하기 때문, 표현적 의미에서 “듣는” 것은 순종하는 것이기 때문; 그리고 “말하는” 것은 뜻하는 것과 흘러듦을 표시하기 때문; 고로 최고 의미에서 “말하는 것을 들음”은 거기로부터 있는 생명(삶), 즉 신성한 선으로부터 있는 신성한 진리의 생명을 표시한다; “그의 아들에게”는 내적 의미에서 자연 평면의 선에 관하여를, 그리고 그로부터 자연 평면의 진리에 관하여를 표시한다. 이런 사항이 이 대목의 의미이다는 것은 글자 의미로부터서는 나타나지 않는데, 그 이유는 역사물인 글자 의미로부터 광범위하게 옮겨져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 의미가 진실인 이유는 천사의 생각함은 인간의 생각함과 완전히 다르기 때문이다. 천사의 생각함은 영적 수준이다, 그리고 그들이 내향적으로 간파할 때, 그들의 생각함은 천적 수준이 된다; 그러나 인간의 생각함은 자연적 수준이고, 인간의 생각함이 역사물로부터 파생될 때, 그 생각함은 감각적 수준이다. 그렇다 해도 주님께서는 말씀을 통하여 천국 속에 있는 영적인 것들과 세상 속에 있는 자연적인 것들 사이에 상응이 있어지게 하신다, 하여 자연적인 생각들은 영적인 생각들로 바뀔 수도 있게, 게다가 한 순간에도 바뀔 수 있게 유지해주신다. 이로부터 천국과 세상의 결합이 인간을 통하여, 실로 말씀을 통하여, 결과적으로 말씀이 있는 교회를 통하여 오게 (섭리)하신다. 인간 마음에 의해 지각되고 납득이 가능해지는 것들의 각각 그리고 모두에서 상응함이 있다는 것은 이어지는 장들의 끝에서 웅대한 사람에 관련된 (나의) 경험으로부터 분명해질 것이다.

그리고 에서는 사냥한 것을 가져오기 위해, 사냥할 것 때문에 들판으로 사냥하러 나갔다. 이는 선에 대한 애착이 신성한 합리성에 결합될만한 진리를 포획하려고 노력함을 의미한다. 이는 에서가 자연 평면의 선을 표현함으로부터; 그리고 이로부터 자연 평면에서 있는 합리성의 선에 대한 애착이 온다, 그 이유는 자연 평면 안에 있는 선은 자연 평면 자체로부터 있는 것이 아니고 자연 평면에 있는 합리성으로부터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냥한 것을 위해, 그것을 가져오기 위해 들판으로 사냥을 나감”은 자체를 위해 진리를 포획하려고 노력함을 의미함으로부터; 그 이유가 “들판”은 선한 지면(바탕)이 있는 곳을; 그리고 “사냥한 것”은 선으로부터 있는 진리를; 그리고 “그것을 가져오기 위해”는 그것을 포획하는 것, 고로 그것을 신성한 합리성에 인접되게 하는 것 등등으로부터 알려진다. 이미 말했던 바, 최고 의미에서 여기서는 주님의 자연 평면이 신성으로 되심이 취급되고 있다; 그리고 표현적 의미에서는 인간에 있는 자연 평면의 거듭남이 다루어지고 있다. 이 자연 평면의 거듭남은 진리를 통하여 성취되어야 할 것이다 라는 질서에 따라서이다. 다시 말하면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을 통하여 거듭남은 진행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 이유가 이 지식 없이 자연 평면은 합리성에 의해, 또는 합리성을 통하여 계발되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들은 합리성으로부터 흘러드는 선과 진리를 담는 그릇인 바, 이 그릇 없이는 거듭나질 수 없는 것이다; 하여 이 그릇이 담을 수 있는 품질과 양에 따라 계발도 있는다. 합리성으로부터 선과 진리를 받는 그릇들은 자연 평면의 진리들 자체이다, 이것은 기억 속의 지식들(주관적 지식들), 지식들(객관적 지식들), 교리적인 것들밖에 더 없다. 선들은 흘러든 것들의 질서로부터, 그리고 거기 그들 자신 사이에 있는 질서로부터 온다; 이로부터 자연 평면의 선이 온다.

그리고 리브가가 그의 아들 야곱에게 말했다. 이는 주님께서 자연 평면의 진리에 관하여 신성한 진리로부터 지각하심을 의미한다. 이는 리브가가 주님의 신성한 합리성의 신성한 진리를 표현한다로부터; 그리고 “말하다”의 의미가 지각하다 임으로부터 ; 그리고 야곱이 진리 측면에서 주님의 자연 평면을 표현함으로부터; 이를 종합하면, 주님께서 자연적 진리에 관하여 신성한 진리로부터 지각하심이 의미된다. 주님께서는 이삭에 의해 표현된 신성한 합리성의 신성한 선으로부터 에서에 의해 표현된 자연 평면의 선을 통하여 자신을 위해 진리를 획득하기를 뜻하셨다는 것, 이를 가지고 그분은 그분의 자연 평면을 신성이 되도록 만드실 수 있을는지 모른다는 것; 그러나 주님께서는 리브가에 의해 표현된 신성한 합리성의 신성한 진리로부터 야곱에 의해 표현된 자연 평면의 진리를 통하여 자신을 위해 진리를 획득하기를 뜻하셨다는 것, 이를 가지고 합리성이 신성이 되심, 또는 신성으로 만드실는지 모른다는 것에 대하여는 주님에 의해 새로이 만들어짐, 또는 거듭나지는 동안 인간 안에 와지는 것들을 가지고 예증하지 않으면 납득되어질 수 없다; 실로 선 측면, 진리 측면에서 합리성과 더불은 경우가 어떠한지가 알려지지 않으면 납득되지 않을 것이다는 말이다. 하여 간략히 추가로 서술해보겠다.
합리적 마음은 두 능력으로 구별되어진다, 즉 하나는 의지력이라 불리우고, 또 하나는 이해력이라 불리운다. 인간의 거듭남 동안, 의지로부터 진행하는 것은 선이라 불리우고, 이해력으로부터 진행되는 것은 진리라고 불리운다. 인간이 거듭나기 이전의 단계에서 의지력은 이해력과 하나로서 행동하지 않는다; 전자는 선을 뜻하고, 한편 후자는 진리를 뜻한다; 그러니까 의지력의 노력과 이해력의 노력은 완전히 구분된 것으로 지각되어진다. 어쨌든 이것은 곰곰이 생각하는 이들에 의해서만 지각되어지고, 의지력이 무엇인지와 의지력에 속하는 것들을 아는 이들에 의해서만, 그리고 이해력이 무엇인지와 이해력에 속하는 것들을 아는 이들에 의해서만 지각된다. 그러므로 곰곰이 생각하지 않는 이들에 의해서 지각되지 않는 이유는 자연적 마음은 합리적 마음을 통하여 거듭나는 이유에서 이다, 그리고 이것은 합리적 마음이 자연 평면의 선으로 직접적으로 흘러들어 그것을 거듭나게 하지 않고, 이해력 속에 있는 진리를 통하여, 고로 합리성의 진리로부터의 나타남에서 라는 질서에 따라서이다. 이런 사항들이 27장의 내적 의미에서 취급되고 있다; 그 이유가 “이삭”은 의지력으로부터 있는 선 측면에서의 합리적 마음을; “리브가”는 이해력으로부터 있는 진리 측면에서의 합리적 마음을; “에서”는 합리적 선으로부터 출시되는 자연 평면의 선을; “야곱”은 합리적 선으로부터 있는 진리를 통하여 출시되는 자연 평면의 진리이기 때문이다.
이런 사항들로부터 분명해지는 바는 말씀의 내적 의미 안에 무슨 비밀들이 포함되어 있는지 이다; 그렇다 해도 이런 비밀들이 인간의 납득력에 실감나게 와닿는 것은 극히 적다. 오히려 납득력을 초월하는 것들, 묘사가 가능할 수 없는 것들은 한계가 없이 존재한다. (하여 우리가 공부해도 납득되지 않는다거나 조금 납득된 것마저 쉽게 잊혀지고 마는 현실을 안타까워 하거나 실망할 필요는 없지 않을까 사료된다. 역자 주.) 하여 말씀을 더 깊게 꿰뚫어 봄에 비례하여, 즉 더 내면적으로 봄에 비례하여, 하여 천국 안으로 들어감에 비례하여, 말씀은 더욱 셀 수 없고, 말로 표현할길 없이 되고 마는데, 이는 인간에게 뿐만 아니라 보다 낮은 천국의 천사들에게도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꿰뚫음이 가장 깊은 천국에 도착할 때, 거기 있는 천사들은 비밀들이 무한하다는 것, 자기들로서는 납득함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지각하기에 이른다, 그 이유는 그것들이 무한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말씀이다.

나는 네 아버지가 네 형제 에서에게 말한 것을 들었다, 말하기를. 이는 주님께서 신성한 합리적인 것으로부터 있는 신성한 선이 선에 대한 애착을 바라고 있었다가 의미되고 있다. 이는 여기서 “아버지”인 이삭이 신성한 합리성 속의 신성한 선을 표현함으로부터; 그리고 “말한다(speaking)”의 의미가 바란다 이다로부터; 그리고 에서의 표현이 자연 평면에 있는 선에 대한 애착이다로부터 알려지고 있다.

나에게 사냥한 것을 가져 오너라. 이는 선으로부터의 진리를 의미하는데, 이는 “사냥한 것”의 의미가 선으로부터의 진리임에서 알게 된다.

그리고 나에게 맛좋은 음식을 만들어 오너라. 이는 선의 진리로부터 오는 유쾌한 것들로부터의 즐거움과 바램을 의미한다. 이는 “맛좋은 음식”의 의미가 즐겁게 하는 것이다로부터, 고로 거기로부터, 즉 진리로부터 유쾌함으로부터의 즐거움과 바램이 의미된다; 이미 여러 차례 언급했던 바와 같이 진리들은 인간의 자연 평면에 일치하고, 즐겁게 해주는 것들을 수단으로 그 평면에 도입되어진다. 그리고 이렇게 되어 도입되지 않은 것들은 거기에 내재하지 못하고, 상응에 의해 합리성과 결합하지도 못한다. 더욱이 모든 다른 기억 속의 지식들 같이 진리들도 진리들을 도입케한 유쾌하고 즐겁게 하는 것과 일치되는 자연적 인간에 속하는 기억 안에 그것들의 장소가 할당된다. 따라서 이 반대의 현상도 있다, 즉 유쾌하게 해주고 즐거움을 주던 것들이 되돌아 가면, 그것들로 해서 도입되어진 것들 역시 되돌아 가고 만다. 한편 이런 것들이 다시 생각해내질 때, 거의 동시에 즐겁게 해주고 유쾌한 것들 역시 흥분되어 인접되어 있는다.

그리고 나는 먹을 것이다. 이는 자신의 것이 되게 함을 의미한다. 이는 “먹는다”가 자기 것이 되는 것을 의미한다로부터 알게 된다. 자기 것이 되게 함은 진리들, 또는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들이 즐거움을 주고 유쾌해지게 하는 것들을 수단으로 자연 평면 안으로 은근히 심어질 때 결과되어진다; 그리고 이런 진리들이 거기 있는 선에 인접될 때, 합리성의 진리와 선, 고로 합리성과 교통이 이루어진다; 이 교통함이 자기 것이 되게 함이라 불리운다, 이는 자연 평면에 있는 합리성으로부터 있는 진리와 선도 그러하다. 그 이유가 합리성에 있는 것들은 자연 평면에 있는 것들에 상대적으로 비교하면, 특별한 것(세세한 것)들과 전체적인 (일반적인) 것들과의 관계와 비슷하기 때문이다. 특별 사항들로부터 일반 사항들이 세상에 모습을 나타낸다(공표된다), 그리고 특별 사항 없이 어떤 일반 사항도 존재 안으로 오지 못한다, 이는 세상에도 널리 알려진 진리이다. 합리성의 특별 사항들로부터의 일반 사항이 자연 평면에 진열되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일반적이기 때문에, 이것은 또 다른 형체 아래 나타난다, 그리고 이것은 이것을 구성하는 특별 사항의 질서에 따라서, 고로 거기로부터 파생된 형태에 따라서 이다. 만일 천적인 선과 영적 진리에서 끌어낸 개별적인 특별 사항들이 자연 평면에서 일반적 사항을 형성하고 있다면, 천적이고 영적인 모양(형태, form)이 출시된다(come forth), 그리고 일반 사항으로부터의 모두 각각의 개별적인 것 안에 천국의 어떤 것이 어떤 형상(image) 안에서 표현되어 있는다.
위의 경우와 같이 표현되는 것이 성찬식에서 먹고 마심에 의해 의미된 것들이다. 이 예식에서 “먹고 마심”은 자기 것이 되게 함을 의미하는데, 즉 “먹는”것은 선을, “마시는” 것은 진리를 각각 자기 것이 되게 함을 의미한다. 만일 선, 즉 주님을 사랑함과 이웃을 향한 선행이 내적 또는 합리적 인간을 형성하고 있다면, 그리고 성찬식을 통하여 외적, 또는 자연적 인간이 내적 또는 합리적 인간에 상응하고 있다면, 그때 이 인간은 특별 사항(세부 사항)과 전체 사항(일반 사항)에서 천국의 형상이, 결과적으로 주님의 형상(image)이 되고 있다; 그러나 주님을 경멸하고, 신앙의 선과 진리를 우습게 여기고, 그리고 이웃을 향해 증오심을 가지고 있는 것이 그의 내적 인간을 형성한다면, 그때 이 인간은 세부적, 일반적 사항에서 지옥의 형상이 된다; 그리고 이것이 특별하게도 동시에 거룩한 사항을 두고 그러할 경우, 이로부터 모독함이 온다. 고로 성찬식에서 귀중하게 여기면서 먹고 마시는 자는 각자의 수준에서 영원한 생명이 자기 것이 되는 한편, 이 예식을 가벼히 여기고 경멸하게까지 여기며 먹고 마신다면, 자신들에게 죽음을 자기 것이 되게 한다.

그리고 여호와 앞에서 너에게 복을 빌 것이다. 이는 그것에 의해서 결합함을 의미한다. 이는 “너에게 복을 빔”의 의미가 그의 생명에 첨가함이다로부터 분명해진다; 그리고 이에 반해 여기서 “나는 여호와 앞에서 너에게 복을 빌 것이다”라고 말해졌는 바, 이는 첨가함이 아닌 결합을 의미한다. 첨가함은 자연 평면의 진리가 합리성 속의 선과 교통함이라 단언되고, 결합함은 자연 평면의 선이 합리성의 선과 교통함이라 단언된다; 그 이유가 선으로부터 있는 천적 수준의 것들 측면에서는 주님과 인간 사이는 평행 관계(parallelism)가 설정되어 있지만, 진리로부터 있는 영적 수준의 것들 측면에서는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내가 죽기 전. 이는 고로 자연 평면에 생명이 있음을 의미한다. 이는 “죽음”의 의미가 생명으로 소생함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8-10절. 그리고 지금 내 아들은 내 음성에 귀를 기울여서, 내가 너에게 명령한 것에 따르라. 9 지금 양떼에게로 가라, 그리고 염소들로부터의 좋은 염소 새끼 두 마리를 가져 오너라. 그리고 나는 그것을 네 아버지가 사랑했던 것과 같은 음식, 네 아버지를 위한 맛있는 음식을 만들 것이다. 10 그리고 너는 네 아버지에게 갖다 드리거라, 그리고 그는 잡수시고, 그리고 그는 죽기 전 너에게 복을 빌 것이다.

그리고 지금 내 아들은 내 음성에 귀를 기울여서, 내가 너에게 명령한 것에 따르라. 이는 자연적 진리를 향하여 신성한 합리성에 있는 신성한 진리로부터 지각된 바램과 즐거움을 의미한다. 이는 이것을 말하는 리브가가 신성한 합리성의 신성한 진리를 표현한다로부터; 그리고 이것이 말해지는 야곱은 자연적 진리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것이 바램과 즐거움이다는 설명 없이 알 것이다.

지금 양떼에게로 가거라. 이는 신성한 합리성에 결합되지 않은 자연 평면에서 길들여진 선에로를 의미한다. 이는 양떼의 의미가 선이다로부터; 여기서는 야곱에게 말해지는 대목인 바, 이는 자연 평면의 선, 그리고 실로 길들여진 선, 그 이유는 집에 있는 염소이기 때문; 이에 반해 에서가 들판에서 사냥한 것은 길들여지지 않은 선이었다. 이 구절 외의 말씀에서 “양떼”는 합리성의 선이라 단정된다; 그러나 이 구절의 경우, 실상 (양떼가 아닌) “가축떼”라고 단정되는 바. 이는 자연 평면의 선이다. 길들여진 자연적인 선은 인간이 부모로부터 이어받는 선, 또는 그가 출생함으로 얻어지는 선으로, 이 선은 주님으로부터 흘러드는 자연적인 선과는 확연히 구분된다; 그러므로 이 구분을 위하여 주님으로부터 자연 평면에 흘러드는 선의 경우는 자연 (평면)의 선(Good of Nature, 주님으로부터 와서 자연 평면에 놓여진 선), 그리고 부모로부터의 것인 (인간에 의해) 길들여진 선은 자연적인 선 (Nature Good, 자연적 수준의 선)이라 부를 것이다. 더욱이 모두 각각의 인간은 그의 아버지와 그의 어머니로부터 길들여진 선을 받는다. 그리고 부모 각각으로부터의 선 또한 구분된다. 즉 아버지로부터는 내면의 선을, 어머니로부터서는 외면의 선을 받는다. 주님의 경우, 이 두 선은 최고로 정확히 구분된다. 그 이유는 그분이 아버지로부터 가진 선은 신성이었고, 어머니로부터 가진 선은 유전적 악들로 오염된 선이었기 때문이다; 주님이 아버지로부터 가졌던 자연 평면에서의 선은 그분의 자기 자신이셨다, 그 이유는 이 선이 그분의 생명 자체이었기 때문, 그리고 이것이 에서에 의해 표현되었다. 이에 반해 어머니로 파생된 주님의 자연적인 선은 유전적 악들로 더럽혀 있었는 바, 실상 악 자체 이었다, 그리고 이것이 “길들여진 선(domestic good)”에 의해 뜻해졌다. 허나 이 길들여진 선이 비록 이렇다 할지라도 이 선은 아직 자연 평면의 개혁을 위해 섬김 속에 있었다; 그러나 정작 이 선에게 개혁을 위해서 섬김을 할 것이냐고 물으면, 그것은 “no” 이다.
이런 경우는 모두 각각의 거듭나지는 인간에게도 유사할 것이다: 즉 그가 새로운 아버지로서 주님으로부터 받는 선은 내면적이나, 그가 자기 부모들로부터 받는 선은 외면적이다. 전자의 선, 즉 그가 주님으로부터 받은 선은 영적 선(영적 수준의 선)이라 불리운다; 그러나 후자, 즉 부모로부터 받은 선은 자연적 선(자연적 수준의 선)이라 불리운다. 인간이 자기 부모들로부터 받은 선은 그의 개혁을 위해 무엇보다 먼저 실용적이다, 그 이유가 이 선들을 수단으로 하면, 당사자가 즐거워할 수 있는 것을 수단으로 하기에 쉽게 안으로 끌어 들여지는데, 처음에는 기억 속의 지식들(주관적 지식들)이, 그 후에는 진리에 관한 지식들(객관적 지식들)이다; 이 선들이 개혁을 위해 섬김을 다했을 때, 섬김을 한 선들은 분리되는데, 이때 영적 선이 세상 밖으로 나오고 (公表되고, come forth), 자체를 명백히 한다. 이 사항에 관한 것은 모든 이 각자 자신의 많은 경험으로부터 자연히 납득되었을 줄로 보지만, 한가지 예만 들어 보겠다: 어린 아이가 처음 배울 때, 그는 알기를 바래서(궁금해서)라는 영향 하에 있다, 다시 말해 그는 자신을 명백히 나타내려는 목적 같은 것은 없었다는 말이다, 그러나 자신과 더불어 태어났거나 어떤 다른 근원으로부터 그를 즐겁게하고 기쁘게하는 것으로부터 알려는 바램 아래 배운다는 말이다; 그러나 그 후에, 그가 성장했을 때, 그가 알려는 바램은 어떤 목적의 영향 하에서, 말하자면 많이 앎므로 해서 소득면에서나 명예 등등에서 자기가 다른 이들보다 더 뛰어나고 싶어서, 또는 그의 경쟁자를 물리치기 위해서 등등을 위해서라는 바램의 영향 하에 배운다; 그리고 추가하면, 세상에서 어떤 목적들을 위하여도 있다; 그러나 그가 거듭나지려 예상될 때, 그는 진리로부터의 즐거움과 유쾌함의 영향 하에 있다; 그리고 그가 거듭나져 갈 때, 이것은 어떤 년령에서 일는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성년에서 이는 거행되는데, 이때 그는 진리를 사랑함의 영향 하에, 결국은 선을 사랑함의 영향 하에 있는다. 그리고 앞서 진행되어 왔던 목적들, 그 목적에 붙어 있는 즐거움들도 모두 조금씩 당사자 자신으로부터 분리되고, 그 대신 주님으로부터의 내면의 선이 분리되어 비워진 그 자리를 계승하고, 주님으로부터의 선은 당사자의 애착 안에서 그 자체를 명백히 한다. 이상으로부터 알게 되는 바, 전자의 즐거움들, 즉 선으로 바깥쪽 모양을 하고 나타났던 것은 (인간 구원을 위해 주님에게) 수단들이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수단들은 계속적으로 연속되고 있다.
이 경우를 과수원의 나무에 비교해도 가능할지 모른다. 즉 나무의 첫 시기, 또는 봄철의 시작에서 나무의 가지들은 꽃과 잎들로 장식된다, 그후 여름철에 열매의 첫 모양이 형성되고 열매의 속이 차면서 마지막으로 그 안에 그 나무와 같은 종류의 씨가 완성되어 간다. 실로 이 과수원의 나무는 효력이 만점인 것이다; 간단하지만 이와 같은 유추들이 자연 평면 안에 있고, 역시 표현적이다; 그 이유가 보편적 자연 세계는 천국들에 있는 주님의 왕국, 고로 땅 위의 그분의 왕국, 즉 교회에 있는 그분의 왕국, 그러므로 모두 각각의 거듭나는 인간을 표현하는 극장(연극 무대)이다. 이로부터 분명해지는 바, 어떻게 자연적 선, 또는 길들여진 선, 비록 바깥쪽에서만의 즐거움일지라도, 그리고 실로 세상적인 선이라 해도 자연 평면의 선을 생산하는 수단으로 사용되고, 이것 자체가 합리성의 선과 결합하고, 하여 이 선은 거듭나서 영적 평면의 선, 즉 주님으로부터 있는 선으로 마무리된다. 이런 사항들이 이 장의 “에서와 야곱”에 의해 의미되어 있다.

그리고 암염소들로부터의 좋은 염소 새끼 두 마리를 나에게 가지고 오라. 이는 선으로부터의 진리들을 의미하는데, 이에 관하여 이어진다. 두 마리인 이유는 합리성에서와 같이 자연 평면에도 의지력으로부터 있는 것과 이해력으로부터 있는 것이 있기 때문에서 이다. 자연 평면에서 의지력에 관련되는 것은 즐거움(delight)들이다, 그리고 이해력으로부터 있는 것은 기억 속의 지식들이다, 그리고 어떤 것이 되기 위해 이 둘은 반드시 결합되어야 함에 틀림 없다.
“암염소들의 염소 새끼들”은 선으로부터의 진리들을 의미한다는 것은 말씀에서 “염소 새끼들”과 “암염소들”이 언급되는 구절로부터 알 수 있다. 순수한 의미에서 말씀에서 언급되는 길들이고 유용한 짐승들은 선으로부터의 천적인 것들과 진리로부터의 영적인 것들을 의미한다는 것은 이미 살핀 바 있어 알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것들은 다양한 천적인 것들, 또는 여러 가지의 선들, 그리고 다양한 영적인 것들, 또는 여러가지의 진리들이기 때문에, 이 종류가 이 짐승에 의해, 저 종류는 저 짐승에 의해 의미된다; 고로 이 종류는 “어린 양”에 의해, 저 종류는 “염소 새끼”에 의해, 저 종류는 “양”에 의해, 또는 “암염소”에 의해, “숫양”에 의해, “숫염소”에 의해, “거세한 어린 수소”에 의해, 또는 “수소”에 의해, “말”에 의해, “낙타”에 의해, “새”에 의해; 그리고 “바다의 짐승들”에 의해, “고래”에 의해, “물고기”에 의해서도 의미된다. 이런 천적인 것들과 영적인 것들은 열거해보는 것보다 더 많은 종류들인데다가, 모두 선들과 진리들로부터 있는 것들, 즉 우리가 천적인 것, 또는 선이라고 하고, 영적인 것, 또는 진리라고 말하는 이유는 이것들은 실상 여러 겹들로 되어 있음에도 마치 하나인 것처럼 나타나기 때문이다. 즉 천국이 무수한 사회(공동체)들로 구별되어 있고, 이 구별은 천적인 것과 영적인 것의 종류들에 따라서, 또는 사랑의 선들, 그로부터의 신앙의 진리들에 따라서 구별되어진다. 게다가 선으로부터의 모두 각각의 단 하나의 종류들(genera), 그리고 진리로부터의 모두 각각의 단 하나의 종류들은 다시 그 아래 무수한 작은 규모의 종류들(species)로 구별되고, 다시 작은 규모의 종류가 이런 방식으로 무수히 구별되어 간다.
선과 진리에 관한 최고로 보편적인 종류들이 태워바치는 제물과 바치는 제물들로 제공되는 동물들에 의해 표현되고 있다; 그리고 종류들은 서로로부터 최고로 구분되기 때문에 이것 대신 저것을 바치는 혼동을 하지 않도록 꼭집어 종류들을 나열하듯 조목조목으로 명령되고 있다; 예를 들면, 어떤 경우에서는 숫양과 양, 또는 암염소; 그러나 다른 경우에서는 송아지, 어린 수소, 수소; 또한 호도애(집비둘기)와 산비둘기 같은 경우이다. “염소 새끼들”과 “암염소들”에 의해 의미되는 것에 관하여는 그것들이 바쳐지는 제물들에서, 그리고 말씀의 여타 구절들에서 알 수 있다; 거기로부터 분명한 바, 암컷과 수컷의 “어린 양들”은 내적, 또는 합리적 인간의 순진을 의미한다는 것, 그리고 “염소 새끼들”과 “암염소들”은 외적, 또는 자연적 인간의 순진, 고로 그로부터의 진리와 선을 의미한다.
외적, 또는 자연적 인간의 순진의 진리와 선이 “염소 새끼들”과 “암염소들”에 의해 의미되는 것은 아래 말씀으로부터 분명해진다. 이사야서에서: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살 것이다, 그리고 표범이 염소 새끼와 드러누울 것이다; 그리고 송 아지, 그리고 젊은 사자, 그리고 양 모두; 그리고 어린 아이가 그것들을 인도할 것이다
(이. 11:6);
위에서 주님의 왕국이 취급되어진다, 그리고 악으로부터의 두려움, 지옥 때문의 무서움의 상태가 없다, 그 이유는 주님의 현존하심 덕택이다. “어린 양”과 “염소 새끼”는 순진 안에 있는 이들을 표시한다, 그리고 이것들이 모든 것 중에서 가장 안전한 상태이기 때문에, 그것들은 첫째로 언급된다.
이집트의 첫 출생들이 죽임을 당할 때, 이스라엘 백성에게 명령된 것은 양떼로부터 온전하고 어린 것, 즉 어린 양이나 염소 새끼를 잡으라는 것, 그리고 그것들의 피의 얼마를 문설주와 인방에 놓는 것(바르는 것), 하여 파괴자로부터의 재앙이 그들에게는 없게 하라는 것이었다 (출. 12:5, 7, 13). “이집트의 첫 출생”은 사랑과 선행의 선이 꺼졌음(활력을 잃었음)을 표시한다; “어린 양”과 “염소 새끼”는 순진의 상태이다; 그리고 이 상태에 있는 이들은 악으로부터 안전하다, 그 이유가 천국에 있는 모든 이는 순진의 상태를 통하여 주님에 의해 보호되어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보호가 어린 양, 또는 염소 새끼를 죽임에 의해, 그리고 그 피를 집의 문설주와 인방에 바르는 것에 의해 표현되어졌다.
여호와께서 천사를 통하여 누군가에게 나타나셨을 때, 인간이 죽지않도록 염소중의 염소 새끼를 제물로 바쳐졌는데, 마치 사사가 될 기드온에게 (사. 6:19), 사사가 될 삼손을 임신하는 여인 마노아에게 (사. 13:16, 19) 나타나셨을 때 같다. 이런 이유는 주님이 나타나실 당사자가 순진의 상태 안에 있지 않으면 그가 천사라 해도 나타나실 수 없다; 그러므로 주님이 누군가와 더불어 현존하시자 마자, 그는 순진의 상태 안에 직바로 놓여진다; 그 이유가 주님은 순진을 통하여 들어가시기 때문, 천국에 있는 천사에 대하여도 마찬가지이다. 이렇기 때문에, 모든 이는 마. 18:3; 막. 10:15; 눅. 18:17에 따라, 여하튼 순진의 얼마만큼이라도 가지고 있지 않으면, 천국 안으로 올 수 없다. 자기에게 여호와께서 나타나시면 자기는 죽게 되리라고, 하여 이를 면하려면 태워바치는 제물을 바쳐야한다고 그들이 믿었다는 구절은 사. 13:22, 33절이다.
순수한 부부의 사랑이 순진인 것과 마찬가지로, 표현 교회에서 관습적이 된 것은 남자가 암염소의 염소 새끼를 선물함으로 아내에게로 들어가는 것이다; 이를 우리는 사. 15:1에서 발견할 수 있다; 이와 마찬가지가 유다가 다말에게로 들어갔을 때 (창. 38:17, 20, 23)의 경우도 있다. “염소 새끼”와 “암염소”가 순진을 의미한 것은 죄있음에 대한 제물 바침으로부터도 분명해진다. 이 제물 바침은 그가 (무의식 중에) 잘못함(실수, error)으로 죄지었을 때 바쳐졌다 (레. 1:10; 4:28; 5:6); 실수를 통한 죄는 그 안에 순진의 얼마라도 있는 상태라고 볼 수 있는 무지함으로부터의 죄이다. 이와 같은 것이 아래 모세의 책에서 신성한 명령으로 분명해진다:
네 지면의 첫 열매들의 처음 것을 네 하느님 여호와의 집 안으로 가져올 것이다. 너희는 염소 새끼 어미의 젖 안에서 그 염소 새끼를 삶지 말 것이다 (출. 23;19; 34: 26);
위에서 “지면의 첫 열매들, 여호와의 집으로 가져오기로 되어 있는 열매들”은 유아 안에 있는 순진의 상태를 의미한다; 그리고 “그 어미의 젖 안에서 그 새끼를 삶지 말라”란 유아의 순진은 파괴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의미되기 때문에, 위 구절의 앞 대목의 의미가 뒤따르는 구절에서 깨뜨림(혼동됨) 없이 이어지고 있다; 그럼에도 글자 의미에서는 두 대목이 한 절에 있음에도 서로 아주 색다른 듯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내적 의미에서는 서로가 긴밀하게 밀착되어 있다.
이미 말한대로, “염소 새끼”와 “암염소”가 순진을 의미하기 때문에, 성막을 덮는 천막의 커튼은 암염소의 털로 만들도록 명령되었다 (출. 25:4; 26:7; 35:6, 6, 23, 26; 36:14), 그 이유는 성막 안에서 표현된 거룩한 것들은 그것들의 본질이 순진으로부터 파생되었음에 대한 표시(sign)를 위하여서 때문이다. “암염소의 털”에 의해 순진 안에서 순진의 가장 바깥, 즉 최말단을 의미했다, 이런 순진은 이방인들과 더불어 존재한다; 그리고 내적 의미에서 이런 이방인들이 성막의 “커튼들(curtains)”에 해당된다. 이상 살핀 바로부터 어머니 리브가가 그의 아들 야곱에게 말한 “암염소들로부터의 염소 새끼 두 마리”에 의해 의미된 선으로부터의 진리들이 무엇인지, 무슨 품질에 속하는지가 분명해졌을 것이다; 즉 그것은 순진에 속한 것들, 또는 유아의 순진, 사실상 에서가 아버지 이삭에게 가져오기로 되어 있는 순진이다; 이에 관하여는 앞에서 조금 살폈다; 그리고 리브가와 야곱에 의해 가져와지는 것은 실로 선으로부터의 진리들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것은 마치 선으로부터의 진리들인 듯 먼저 나타난 것이다; 이런 이유로 이것(길들여진 선)을 수단으로 야곱은 에서인 척했다

그리고 나는 네 아버지가 사랑했던 음식과 같게 네 아버지를 위한 맛있는 음식을 만들겠다. 이는 그가 거기로부터 맛있음(기분 좋음, 유쾌함, deliciousness)들을 만들 것임을 의미한다. 이는 “맛있는 음식들”이 선으로부터 있는 유쾌한 것들을 의미함으로부터 알게 된다. 그것들이 여기서 맛있음이라 불리우는 까닭은 그것들이 순수한(진짜) 선으로부터가 아닌 진리들, 즉 (인간에 의해) 길들여진 선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너는 네 아버지에게 가져 가거라, 그리고 그는 잡수실 것이다. 이는 신성한 합리적인 것 속의 신성한 선쪽으로, 그리고 자기 것이 되게 함을 의미한다. 이는 여기서 “아버지”인 이삭이 신성한 합리성 속의 신성한 선이다로부터; 그리고 “먹는다”가 자기 것이 되게 함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러나 길들여진 선으로부터의 진리는 자기 것이 되지 않음이 이어지는 것들에서 나타날 것이다.

그는 너에게 복을 빌어 줄 것이다. 이는 그것에 의해서 결합함을 의미한다. 이는 “복을 빔”이 결합함이다로부터 알려진다.

그가 죽기 전. 이는 자연 평면에서 소생함을 의미한다. 이는 “죽음”이 소생함을 의미한다로부터 알게 되고 소생이 자연 평면에서 임이 분명하다.

11-13절. 그리고 야곱은 그의 어머니 리브가에게 말했다, 내 형 에서는 털이 많은 사람이고, 그리고 저는 매끈한 사람입니다. 12 나의 아버지께서 나를 만져 보신다면, 저는 그의 눈에 그릇 인도하는 자일 것입니다; 그리고 저는 나에게 축복이 아닌 저주를 가져 올 것입니다. 13 그리고 그의 어머니가 그에게 말했다, 네 저주는 내 위에 있게 하마, 내 아들아; 오직 내 음성만에 귀기울이거라, 그리고 가서, 나에게 가져오너라.

야곱이 그의 어머니 리브가에게 말했다. 이는 자연적 진리에 관하여 주님께서 신성한 진리로부터 지각하심을 의미한다. 이는 말씀의 역사 부분에서 “말하다”의 의미가 지각하다 임으로부터; 그리고 야곱의 표현이 자연적 진리이다로부터; 그리고 리브가의 표현이 주님의 신성한 합리성 속의 신성한 진리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자연적 진리에 관하여 신성한 진리로부터 지각함이 의미되고, 그러나 글자의 의미로부터 나타남에 따라 신성한 진리에 관하여 자연적 진리로부터 지각함이 아닌 이유는 자연 평면이 실행하기 앞서 있는 모든 관찰은 합리성으로부터 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주님의 예견하심 때문에, 의미는 “신성한 합리성 속의 신성한 진리로부터”가 된다.

내 형 에서는 털이 많은 사람입니다. 이는 형과 동생이라는 관계적 측면에서의 자연적 선의 품질을 의미한다. 이는 “에서”가 자연 평면의 선을 의미한다로부터; 그리고 “털이 많은 사람”은 이 선의 품질을 의미한다로부터 알게 된다. “털이 많다”는 진리 측면에 특별히 관련되는 자연 평면인데, 아래에서 이어지고 있다.

그리고 저는 매끈한 사람입니다. 이는 이런 관계적(상대적, relatively) 측면에서의 자연적 진리의 품질을 의미한다. 이는 여기서 말하는 자인 야곱이 진리에 관련되는 자연 평면을 의미함으로부터; 그리고 “매끈한 사람(smooth man)”이 자연 평면의 품질이다로부터 알게 되는데, 이제 말해보겠다. 이것들이 의미하는 것을 알기에 앞서, 먼저 알아야할 것은 “털이 많다”와 “매끈하다”에 의해 뜻해진 것이 무엇인지 이다. 인간에 있는 내면들은 그의 외면들에서 그 자체를 어떤 종류의 형상으로 표출한다(present), 특히 그의 얼굴에서와 그의 동작(손짓, 몸짓, 말투 등등)에서 표현한다(express). 오늘날, 당사자의 가장 깊은 것까지 표출은 되지 않지만, 그의 내면의 어느 정도는 당사자의 이런 저런 외면들에서 보여지는데, 그가 유아 시절로부터 자신을 감추는 것을 배우지 않았을 경우에서 이다. 그 이유가 감추는 것을 배웠다면, 그는 마치 자기가 또 다른 수준 낮은 마음인 척 자신을 내밀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또 다른 용모를 자신에게 권유하여 유발한다; 그 이유가 얼굴에서 나타나는 것이 보다 수준 낮은 마음이기 때문이다. 여느 마음 수준보다 더욱 발빠르게 실제의 생활로부터, 즉 습관으로부터 이를 획득하는 것이 위선자들이다; 그리고 이 위선자가 얼마나 상대를 잘 속이는지에 비례하여 낮은 마음 수준을 더욱 더 획득한다. 위선이 있지 않은 이들과 더불어 합리적 선은 생명의 어떤 불로부터 얼굴에서 나타난다; 그리고 합리적 진리는 이 불로부터의 빛으로부터 나타난다. 인간은 꼭 공부하고 배우지 않아도 타고난 어떤 지식으로부터 이런 것들을 알고 있다. 그 이유가 자체를 명백히 하는 것은 선의 측면과 진리 측면에 관련하여 당사자의 영의 생명에 속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인간이 또 다른 사람의 표정에 감동되기도 하는 이유이다; 설사 이것이 표정으로부터가 아니다 해도, 빛을 내는 마음으로부터 이다. 그러나 얼굴에서 나타나는 자연 평면은 생명의 불이나 빛에서나 더 불명료하다; 그리고 육체적 평면은 안색(complexion)으로부터의 따뜻함과 아름다움(fairness)에서, 그리고 애착들에 따른 상태의 변화에서를 제외하면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내면들은 얼굴에서 어떤 형상에서 같이 특별히 자체들을 명백히 하기 때문에, 천적 수준의 인간이었고 시치미뗌을 몰랐던 그들, 더욱이 위선과 사기침에 지독하게 무지했던 태고인들은 형태를 눈으로 보듯 얼굴에서 서로의 마음들을 확연히 볼 수 있었다; 그러므로 “얼굴”에 의해 의지로부터의 것과 이해함으로부터의 것들이 의미되었다; 즉, 선들과 진리들 측면에서의 내면의 합리적인 것들이 의미된다; 그리고 사실상 선 측면의 내면의 것들은 피와 피의 붉음에 의해; 그리고 진리 측면의 내면의 것들은 결과로서 있는 형태와 그 형태의 아름다움에 의해 의미된다. 그러나 내면의 자연 수준인 것들, 즉 거기로부터 바깥쪽으로 돌출하여 성장한 것들, 피부의 털이나 비늘의 경우, 선 측면에서의 자연 평면은 털에 의해, 진리 측면의 것은 비늘에 의해 의미된다. 결과적으로 자연적 선에 있는 이는 “털이 많은 자”이고, 자연적 진리에 있는 이는 “매끈한 자”이다. 이런 생각함으로부터 분명해지는 바, “내 형 에서는 털이 많은 사람이고, 나는 매끈한 사람이다”하는 말씀에 의해 의미된 것을 알았으리라 본다. 즉 서로는 관계적, 상대적 측면에서 하나는 자연적 선에, 다른 하나는 자연적 진리의 품질이다는 말이다. 이상의 모두로부터 분명해지는 바, 에서가 표현하는 것은 자연 평면의 선이다, 그 이유가 그가 털이 많다 (창, 25:25)로부터 에서라 불리웠기 때문, 그리고 (피부가) 붉다로부터는 “에돔”이라 불리웠다 (창. 25:30). 그가 거주한 세일 산도 같은 의미, 즉 털이 많은 것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이 의미를 가졌기 때문에, 이를 수단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벗겨진 산, 매끈한 산으로 불리운 세일쪽으로 올라갔다 (여. 11:17; 12:7); 세일 산은 또한 선쪽으로 승강하는 진리를 표현하였다.
“털이 많다”가 선을 서술하고, 이 선으로부터 진리도 서술하나, 그 반대 의미에서는 악, 이 악으로부터의 거짓을 서술하는데 이미 살폈다. 그러나 “매끈하다”는 진리를, 반대 의미로는 거짓을 서술함은 아래 말씀으로부터도 분명해진다. 이사야서에서:
모두 각각의 푸른 나무 아래 신들과 더불어 네 자신을 새빨같게 하여지게 한 너희여; 계곡 의 매끈한 것들에 네 몫이 있다 (이. 57:5, 6);
위에서 (얼굴을) 새빨같게 하여지게게 함은 악을; “계곡의 매끈한 것”은 거짓을 서술한다. 다시:
일꾼이 제련자의 힘을 돋군다, 제련자는 모루에서 망치로 쳐서 매끄럽게 한다, 이음매에게, 이것이 잘되었다 라고 말한다 (이. 41:7);
“제련자의 힘을 돋구는 일꾼”은 악이고; “망치로 매끄럽게 함”은 거짓을 서술하고 있다. 다윗서에서:
그들은 자기 입을 버터보다 더 매끄럽게 만든다; 그의 심정이 그의 말들에 접근할 때, 기름 보다 더 부드럽다 (시. 55:21);
위에서 “매끄러운 입 또는 발림말하는 입”은 거짓을 서술한다; 그리고 “심정과 그것의 부드러운 것들”은 악을 서술한다. 다시: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다, 그들은 자기들의 혀로 매끄러운 것을 이야기한다
(시. 5:9);
“목구멍이 열린 무덤”은 악을 서술한다; “혀가 매끄러운 것을 이야기 함”은 거짓을 서술한다. 누가복음서에서:
모두 각각의 골짜기가 채워질 것이다; 그리고 모두 각각의 산과 언덕이 낮은 쪽으로 가져 다 놓일 것이다; 그리고 구부러진 것이 곧바로 될 것이다, 그리고 거친 장소가 편편한 길들 이 될 것이다 (눅. 3:5);
위에서 “골짜기”는 자기를 낮추는 것, 겸비한 것(lowly)을 표시한다; “산과 언덕”은 높이 치켜든 자세, 오만한 태도(lift up)를 표시한다; “구부러진 (길)이 곧은 (길)이 됨”은 무지함에서 야기된 악이 선으로 바뀐다는 것을 표시하는데, 그 이유는 길은 “길이(length)”에 속하고, 이는 선을 서술하기 때문이다; “거친 장소가 편편한 길로 됨”은 무지로부터 야기된 거짓이 진리로 바뀜을 표시한다.

만일 제 아버지께서 나를 만지신다면. 이는 지각 중에서 가장 깊은 등급을 의미한다. 이는 “만짐(feeling)”, 고로 “느낄수 있음(being sensible)”의 의미가 지각의 가장 깊은 수준의 지각과 지각의 모두이다로부터; 그리고 “아버지”의 의미가 선이다로부터, 여기서의 경우, 주님이 취급되므로 신성한 선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만지는” 것이 지각의 가장 깊고 모두이다를 의미하는 이유는 모든 감각(sensation)은 접촉함, 닿음 (touch)이라는 촉각에 관련을 가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촉각은 지각적인 것으로부터 파생되고 세상 밖으로 나온다(공표, come forth); 그 이유가 감각은 외적인 지각 외에 더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각은 내적인 감각 외에 더 아니기 때문이다. 지각이 무엇인지는 이미 살핀 바 있다. 더구나 모든 감각과 모든 지각은 아주 다양하게 나타나지만 한 개의 공통되고 보편적인 감각 기관(sense), 즉 촉각 기관에 속하여 질 수 있다; 다양한 감각 기관들, 미각, 후각, 청각, 시각은 모두 외적인 감각들이고, 이것들은 내적인 감각, 즉 지각으로부터 근원하는 촉각의 다른 종류밖에 더 아니다. 이것은 (나의) 많은 경험에 의해 확증될 수 있는데, 주님의 신성한 자비로부터 적절한 장소에서 더 언급할 것이다. 이상으로부터 분명한 바, 내적 의미에서 “만지다”는 지각의 전부(모두)이고 가장 깊은 지각이다는 것이다. 더욱이, 내적 감각인 모든 지각은 선으로부터 공표되지 진리로부터는 아니다는 것, 진리로부터일 경우는 단지 진리를 통하여 선으로부터 일 뿐이다; 그 이유가 주님의 신성은 선 안으로 흐르고, 선을 통하여 진리 안으로, 하여 지각을 생산하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아는 바, “만일 아버지께서 저를 만지신다면”에 의해 의미되는 것에 대하여서 이다, 즉 선으로부터, 주님의 신성으로부터 있는 가장 깊은 지각과 지각의 전부이다는 뜻이다.

그리고 저는 아버지의 눈에서 그릇 인도하는 자로 있을 것입니다. 이는 질서에 외관상으로 반대되기 때문에 거절함을 의미한다. 이는 “그의 눈에서”의 의미가 품질에 관련하여 주목함이다로부터; 그 이유가 “눈”은 내적 시각이 관찰함(주목함)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릇 인도함” 또는 “그릇 인도하는 자”의 의미가 질서에 반대됨이다로부터; 여기서는 외관적으로 이다 (실상 모든 그릇 인도함은 이밖에 더 아니다); 그리고 이로부터 거절함이 있다. 그러나 “질서에 외관적으로 반대된다”에 대하여는 이어지는 대목에서 나타난다.

그리고 저는 나 자신에게 축복이 아닌 저주를 가져 올 것입니다. 이는 분열 (disjunction) 을 의미한다. 이는 “저주”의 의미가 분열, 또는 선으로부터 돌아 섬이다로부터; 그리고 “축복”은 선과 결합함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리고 그의 어머니가 그에게 말했다. 이는 신성한 진리로부터 지각함을 의미한다. 이는 “말하다”가 지각하다를 의미함으로부터; 그리고 “어머니”인 리브가가 주님의 신성한 합리성 속의 신성한 진리를 표현한다로부터 알게 된다.

네 저주는 내 위에 있게 하마, 내 아들아. 이는 거기에 분열은 있지 않을 것을 의미한다. 이는 “저주”의 의미가 분열이다로부터; 그리고 지각은 신성으로부터 있기 때문에 이것은 분열 없음이 의미된다.

오직 내 음성에 귀기울이거라, 그리고 가서, 나에게 가져 오너라. 이는 그 결과로부터를 의미한다. 이는 “음성에 귀기울임”이 순종하는 것을 의미한다로부터; 그리고 “가서 나에게 가져오라”의 의미가 행동하는 것이다로부터; 그리고 이 말이 진리 측면에서의 합리성(여기서는 리브가인 바 신성한 합리성 속의 신성한 진리)에 의해 진리 측면에서의 자연 평면(야곱)에게 말해졌기 때문에, 그러므로 “결과로부터”라는 의미밖에 더 다른 의미는 없다. 그 이유가 자연 평면은 결과로부터 보기 때문, 그러나 합리성은 원인으로부터 본다.

14-17절. 그리고 그는 갔다, 그리고 손에 잡았다, 그리고 그의 어머니에게 가져다 주었다. 그리고 그의 어머니는 그의 아버지가 사랑했던 것과 같은 별미를 만들었다. 15 그리고 리브가는 집에서 그녀와 더불어 있었던 그녀의 큰 아들 에서의 바람직한 의복을 가져왔다, 그리고 그것들을 그녀의 작은 아들 야곱에게 입혔다. 16 그리고 그녀는 암염소들의 새끼들의 가죽들을 그의 손 위에, 그리고 그의 매끈한 목에 입혔다. 17 그리고 그녀는 별미와 그가 만든 빵을 그녀의 아들 야곱의 손에 주었다.

그리고 그는 갔다, 그리고 손에 잡았다, 그리고 그의 어머니에게 가져다 주었다. 이는 자연 평면의 진리가 순종하는 상태를 의미한다; 이는 앞에서 살핀 바 있으므로 설명은 생략한다.

그리고 그의 어머니는 그의 아버지가 사랑했던 것과 같은 별미를 만들었다. 이는 즐거운 것들이나, 바람직하지 않다를 의미한다; 이는 “어머니”인 리브가가 진리 측면에서의 신성한 합리성을 표현한다로부터; 그리고 “별미”의 의미가 진리로부터 있는 유쾌한 것들이다로부터; 즐거운 것들인데 바람직하지 않다 라고 의미된 이유는 별미의 재료가 에서의 사냥한 것, 즉 순수한 선의 진리로부터 있지 않았고, 양떼 속의 염소들의 염소 새끼로부터, 즉 길들여진 선의 진리로부터 였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것은 이미 살핀 것을 참조하기 바란다.

그리고 리브가는 그녀의 큰 아들 에서의 바람직한 의복들을 가져 왔다. 이는 선으로부터의 순수한(진짜) 진리들을 의미한다; 이는 “바람직한 의복들(가장 좋은 의복들, garments of desires)”의 의미가 순수한 진리들이다로부터; “바람직한”은 진짜(geneuine)를 표시하는데, 그 이유는 큰 아들 에서에 의해 표현되는 선이 자연 평면의 진짜 선이기 때문이다.

집에서 그녀와 더불어 있었던. 이는 신성한 합리성 속의 신성한 진리를 통하여 신성한 선으로부터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그녀”는 리브가인 바, 그녀는 신성한 합리성 속의 신성한 진리를 표현한다로부터; “집”의 의미가 여기서는 신성한 선인데, 그 이유는 집이 주님을 서술하기 때문이다. 이런 사항들이 “집에서 그녀와 더불어 있었던”에 의해 의미되는 이유는 “집”에 의해 선 측면과 진리 측면 모두에서 합리성을 의미하기 때문; 또는 선에 속하는 의지 부분에서, 그리고 진리에 속하는 지적 부분에서 합리성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합리성이 의지 부분, 또는 선으로부터, 지적 부분, 또는 진리를 통하여 행동할 때, 이때 합리적 마음 평면은 “하나의 집(one house)”라고 불리우고, 이로부터 천국 자체도 역시 “하느님의 집”이라 불리운다, 그 이유는 천국 안에 선과 진리밖에 더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선은 진리를 통하여 진리 자체와 하나가 되거나 아예 결합되어 있다. 이런 대목은 하나의 집을 구성하는 남편과 아내 사이에 있는 결혼에서 표현되어진다, 그 이유는 부부의 사랑은 선과 진리의 신성한 결혼으로부터 세상 밖으로 나오기(공표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남편과 아내 모두 선으로부터 의지를 가진다, 그러나 선 자체에 속하는 진리 측면에 관련하여 차이점만 지닌다; 그러므로 선은 남편에 의해, 진리는 아내에 의해 의미된다; 그 이유가 하나의 집이 있을 때, 그때 선은 거기 안에서 모두이고, 그리고 진리는 선으로부터인 바, 진리도 선인 것이다. 본문에서 “집에서 그녀와 더불어”라고 말해지고, “그(him)와 더불어”, 또는 “그들과 더불어” 라고 말해지지 않는 이유는 지금의 주제가 진리와 선의 결합의 상태이기 때문, 즉 선과 진리들이 충분하게 하나가 됨, 또는 결합함의 상태 이전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이 상태가 아래 구절에서 묘사된다.

그리고 그것들을 그녀의 작은 아들 야곱에게 입혔다. 이는 진리에 대한 애착, 또는 진리로부터 있는 선의 생명을 의미한다; 이는 리브가의 표현이 신성한 합리성 속의 신성한 진리이다로부터; 야곱의 표현이 신성한 자연 평면의 신성한 진리이다로부터; 그리고 “입음”은 교통하고 빨아들임 인데, 여기서는 “에서의 의복들”에 의해 의미된 선으로부터의 진리들과 교통하고 흡수함을 의미한다, 고로 이 진리들은 자연 평면의 진리에 대한 애착, 여기서는 진리로부터의 선의 생명을 의미한다. 어떻게 이렇게 이해되는지는 앞서 살핀 대목에서 알려질 것이다; 그러나 이런 설명의 수준으로밖에 말할 수 없듯 이런 대목은 오늘날 지독하게 알려지지 않고 있다. 어쨌든 조금이라도 납득되는 쪽으로 열어보는 것이 주님으로부터 허락되어 있기에 노력은 해보아야 할 것 같다. 이 장에서 주님이 취급된다, 그리고 어떻게 주님께서는 그분의 자연 평면 자체를 신성으로 만드셨는지; 그리고 표현적 의미에서 인간의 자연 평면이 거듭나는지가 취급되고 있다.
인간과 더불어서의 경우는 이렇다: 거듭남의 끝은 인간이 그의 내적 인간 측면이 새로이 만들어지는 것, 고로 그의 혼, 또는 영이 새로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그의 외적 인간 역시 거듭나지 않으면 그의 내적 인간 역시 거듭나질 수 없다; 그 이유는 사후 인간이 영이 되는 다른 삶에서도 당사자와 더불어 그의 외적인간으로부터 있던 것들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즉 자연적 수준의 애착들, 교리적인 것들, 기억 속의 지식까지도 가지고 있다; 한마디로 외면 또는 자연적 수준의 기억 속의 모든 것들이다; 그 이유가 이런 것들에서 그의 내면의 것들이 종결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내면의 것들이 외면의 것들 안으로 흘러들 때 이 외면의 형편(경향, 배열, disposition)에 따라서 내면의 특성도 결정되고 만다. 그 이유가 내면의 것이 외면의 것들 안에 도착되어야 하기에 거기에 맞도록 변경됨은 필수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인간은 그의 내적, 또는 합리적 인간 뿐만아니라 그의 외적, 또는 자연적 인간도 같이 거듭나야함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렇게 되지 않으면 둘 사이에 상응함이 없다.
인간의 거듭남의 상태가 이 장에서는 “에서”와 “야곱”에 의해 표현적 의미에서 묘사되어 있다; 이 구절에서의 경우, 인간이 거듭나고 있는 동안, 또는 그가 거듭나져 왔던 동안에 있던 인간의 처음 상태의 품질이 묘사되고 있다; 그 이유가 이 상태는 그가 거듭나졌을 때의 상태의 것과 비교해 완전히 거꾸로 있기 때문이다. 거듭나는 동안, 또는 거듭나져 왔기 이전 처음에 해당되는 상태에서는 진리로부터 있는 지적인 것들이 거듭남의 첫 부분에서 외관상으로는 행동하고 있다; 그러나 그가 거듭나졌을 때, 선으로부터 있는 의지 속의 것들이 첫 부분에서 행동한다. 진리로부터 있는 지적인 것들이 거듭남의 첫 상태에 있는 첫 부분을 외관상으로 담당하고(act) 있는 것이 야곱이 자신을 위해 에서의 생득권(장자권)을 요구하는 것, 여기서 취급되기 시작하는 것인 에서의 축복을 요구한 것 등으로 야곱에 의해 표현되고 있다. 상태가 완전히 거꾸로 있다는 것은 야곱이 에서인 척하는 것, 하여 에서의 의복들을 입고, 암염소들의 염소 새끼들의 가죽을 붙이는 것에 의해 표현되었다; 그 이유가 이 상태에서 합리적 진리가 합리적 선에 결합하는 것은 아직 아니기 때문이다, 또는 같은 말로, 이해력이 의지에 결합하지 않은 것이기 때문, 이런 방식에서 자연 평면 안으로 흐르고 행동하는 바, 거기 있는 것들은 거꾸로의 모양새를 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많은 경험들로부터 알 수 있는데, 특히 인간의 이해력 부분에서 관찰된다, 즉 인간은 본인이 이해될 경우 그 이해함에 따라서 하려는 속성이 있다는 사실로부터 이다. 이럴 때 그의 자연 평면 역시 선하고 참된 것에 속하는 많은 것들을 알 수 있다, 그렇지만 의지력은 그것들에 발맞추어 행동하는 것은 아직 아니다. 다시 말해서, 그렇게 행동하는 것, 그렇게 사는 것이 참 신앙인이다고 알고 있다 해서 즉시 그대로 살거나 행동하는 것은 아니다는 말이다. 예를 들어 사랑과 선행은 인간 안에서 본질이다는 것을 가지고 생각해보자: 인간의 지적 능력은 알 수 있고 확증까지도 할 수 있다, 그러나 그가 거듭나지기 전에는 의지력은 이를 인정할 수 없다: 주님을 사랑함이나 이웃을 향한 선행 안에 전혀 있지 않은 자도 사랑과 선행이 본질이다는 것은 잘 납득한다 (가르칠 수도 있다). 이런 사항을 빠진 것 하나도 없는 듯이 잘 알고 있다: 즉 사랑은 인간의 생명 자체이다는 것, 그리고 사랑이 이러이러하면, 생명도 이러이러하다는 것; 그리고 마찬가지로 즐거웁고 유쾌한 모든 것은 사랑으로부터 이다는 것, 그 결과 모든 환희와 모든 행복은 사랑으로부터 이다는 것; 그러므로 사랑이 이러이러하면, 모든 환희, 행복도 이러이러하다는 것이다. 최고로 행복한 삶은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향한 사랑 안에 있다는 것에 대하여도 인간은 자기 의지가 의견을 달리하고 그것에 반대하고 있을지라도 이해력은 그것과는 무관한 듯 납득하고 있을 수 있다. 그 이유는 신성 자체가 이 사랑 안으로 흐르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최고로 비참한 삶은 자기를 사랑함과 세상을 사랑함으로부터 이다는 것도 안다; 그 이유가 지옥이 이 사랑 안으로 흐르기 때문이다; 그리고 주님을 사랑함이 천국의 생명이다는 것, 그리고 서로의 사랑은 이 생명으로부터 그 사랑의 혼이 있다는 것; 그러므로 인간이 그의 의지의 생명으로부터 생각하지 않는 한, 거기로부터 파생된 그의 생명에 관해 곰곰이 되새겨 생각지 않는다는 것, 하여 그만큼에서 그는 이것을 자기 이해력에서 지각한다는 것; 그러나 그가 자기 의지의 생명으로부터 생각하는 한, 그는 그만큼만 지각하지 않고, 그것을 부정하는 일도 없다는 것, 등등도 납득은 하고 있다.
또한 이해력 측면에서 이것이 명백하게 나타날런지 모르는 것은, 신성이 인간 안으로 흐를 수 있는 때란 인간이 굴욕(창피함, 면목 없음, humiliation)의 상태 안에 있을 때이다는 것이다; 그 이유가 이 상태에서 자기를 사랑함과 세상을 사랑함, 결과적으로 (신성에) 반대되는 지옥의 것들이 옮겨져 있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의지가 새로워져 있고 이 의지에 이해력이 하나되어 있지 않다면, 인간은 심정으로부터의 면목 없음의 상태는 아닌 것이다; 그렇다, 인간은 악의 삶 안에 있는 만큼에서, 즉 그의 의지가 악을 향하여 있는 한, 그만큼에서 새로워지는 상태는 가능하지 않다; 더한 것은, 어떤 주제가 그에게 불명료해 있다면, 그만큼에서 그것을 부정하기조차 한다. 그러므로 인간은 자기 이해력으로 인간의 면목 없음은 영광의 주님의 사랑을 위하여가 아니고, 그분의 신성한 사랑을 위하여이다는 것, 그리고 그분이 그것(면목 없어 하는 상태)에 의해서 선과 진리와 더불어 흘러들 수 있어, 인간을 복되고 행복하게 만드신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의지가 조언을 고려하고 있다면, 그만큼 이런 사항은 희미해진다. 이외 많은 경우들에서도 위와 비슷한 예는 찾아진다.
인간이 선과 진리인 것을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은 비록 그가 (이해했는데도) 그것을 뜻하지 않더라도 주어지고 있는 이유는 그가 개혁되고 거듭나는 능력을 지닐 수 있도록 해주려는 이유 때문이다; 이렇기 때문에 이 능력은 악인이든 선인이든 모두에게 존재한다; 그렇다, 때로는 이 능력은 악인과 더불어 더욱 예리하게 발휘되는데, 이런 차이는 있다, 즉 악한 자와 더불어서의 경우, 그들은 삶을 위한 진리에 대한 애착은 없다, 즉 진리로부터의 생활 속의 선을 위함은 없다는 말이다, 고로 그들은 개혁될 수 없다. 그러나 선한 자와 더불어서의 경우, 삶을 위하여 진리에 애착한다(진리를 사모한다). 즉 삶 속의 선을 위하여 인 바, 그들은 개혁될 수 있다. 그러나 이들의 개혁됨의 첫 상태는 교리로부터의 진리가 그들에게 자기의 첫 중요성으로 부각되어 나타난다는 것이다. 그리고 생활의 선은 그 다음 차례의 중요성에 있다, 그 이유는 그들이 진리로부터 선인 것을 행하기 때문에서 이다; 그 후에 생활의 선이 첫째로 중요하다고 부각되는 두 번째 상태를 맞이한다; 이때 교리로부터의 진리는 두 번째 위치에 있다, 그 이유가 이때 그들은 선으로부터 선한 것을, 즉 선한 의지로부터 행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렇게 되는 이유는 의지가 결혼에서 같이 이해함과 결합되었기 때문, 인간이 거듭났기 때문이다. 이 두 상태들이 내적 의미에서 에서와 야곱에 관하여 말해지는 것들 안에서 취급되고 있다.

그리고 암염소들의 새끼들의 피부들. 이는 길들여진 선으로부터의 외적인 진리들을 의미한다; 이는 “피부들”의 의미가 외적인 것들이다로부터: 그리고 “암염소들의 염소 새끼들”, 이것들은 집에서 키우는 양떼로부터 인 바, 길들여진 선으로부터의 진리들을 의미한다로부터 알게 된다. 모든 선은 그것 자신의 진리들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모든 진리는 그것 자신의 선을 가지고 있다, 이것들은 그것들이 어떤 것으로 있기 위해 함께 결합함은 필수이다. “피부들(가죽들, skins)”이 외적인 것들이다는 이유는 피부들은 동물의 가장 바깥쪽에 있고, 거기서 내면의 것들이 종결되어지기 때문이다, 인간에 있는 피부, 또는 외피의 경우도 이와 마찬가지 선상에 있다. 이 의미는 다른 삶에서 피부의 영역에 있는 이들의 표현으로부터 갈라져 나오고 있는데, 이에 관하여는 다음 장의 끝에서 주님의 신성한 자비로부터 웅대한 사람에 관하여 말할 때 말해질 것이다. 그들은 외적인 선과 진리에서만 있는 이들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피부”, 그리고 짐승들의 피부 또한 외적인 것을 의미한다; 이는 말씀으로부터서도 분명해진다. 예레미야서에서:
네 수많은 불법이 네 치마들을 벗겨지게 했고, 네 발꿈치가 폭력에 시달렸던 것이다. 에티 오피아인이 그의 피부를, 표범이 그의 반점을 바꿀 수 있느냐? 그렇다면 악행을 가르치는 너희가 선 역시 행할 수 있느냐? (예. 13:22, 23);
위에서 “치마들”은 외적인 진리들이다; “발꿈치”는 가장 바깥쪽 선이다; 그리고 이 진리들과 선들이 악으로부터 이기 때문에 위 구절에서 말해지는 바, 그들이 “에티오피아인”, 또는 검은 것과 그의 “피부”, 그리고 또한 “표범”과 “그의 반점”에 비교되었다.
모세의 책에서:
만일 네가 네 이웃의 의복을 저당잡기로 하여 저당잡았다면, 태양이 내려가기 전에 그것을 그에게 회복시켜야 할 것이다. 그 이유가 그것은 그의 유일한 덮개이기 때문; 그것은 그의 피부를 위한 그의 의복이어서 그 안에서 그는 누울 것이기 때문이다 (출. 22:26, 27).
말씀에 있는 모든 법들, 시민적이고 법정 용어이기조차 한 용어들까지 포함해서 천국에 있는 선과 진리의 법칙들과 상응을 가지고 있고, 거기로부터 법령화되어 있다. 위 구절의 경우도 이 범주에 있다; 그렇지 않다면 왜 저당잡은 의복을 태양이 저물기 전에 되돌려주어야 하는지, 그리고 왜 그의 의복이 그의 피부를 위해 있고, 그 의복 안에서 그가 드러누운다고 말해졌는지에 대한 이유를 발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내적 의미로부터 상응은 명백해 있는 바 이런 의미이다: 우리의 동료들은 외적인 진리들로부터의 사기 행위가 있어져서는 안된다는 것, 이 외적인 진리들이란 그들이 살고 의식을 치루는 교리적인 것들이다; 그러나 “태양”은 거기로부터 있는 사랑의 선 또는 생활의 선이다; 이것이 멸해져서는 안된다는 것이 “태양이 저물기 전에 의복이 회복되어야 한다”에 의해 의미되어 있다; 그 이유는 이 외적 진리들이 내면의 것들로부터의 외적인 것들, 또는 그것들의 종점이기 때문이다, 하여 “그의 의복은 그의 피부를 위해 있고, 그 안에서 그는 누울 것이다”고 말해지는 것이다.
“피부들”이 외적인 것들을 의미하기에, 성막의 덮개는 붉은 숫양들의 피부들(가죽들)로부터 있어야 한다고, 그리고 이것 위에 오소리의 피부(가죽)가 있어야 한다고 명령되었다 (출. 26:14); 그 이유가 성막은 세 천국들을 표현했기 때문, 고로 주님의 왕국 속의 천적인 (수준의) 것들과 영적인 (수준의) 것들을 표현했기 때문이다. 빙둘러 친 커튼들은 외적인 자연적인 (수준의) 것들을 표현했다, 이것이 “숫양들과 오소리들의 가죽”이다, 그리고 외부의 것들이 내부의 것들을 덮는 것들이듯, 또는 다른 말로 하면, 자연적 수준의 것들이 영적 수준과 천적 수준의 것들을 덮듯, 마찬가지인 것이 육체가 그것의 혼을 덮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위와 같이 명령되었다; 그리고 마찬가지 방식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진영들이 행군을 위해 정렬할 때, 아론과 그의 아들들은 베일(veil)로 증거궤를 덮고, 이 덮은 위에 오소리의 가죽으로 덮도록 했다; 그리고 성막에 놓였던 식탁과 그 위에 있는 것들은 두 번 물들인 진홍색 천을 펴고 그 위에 놓고, 오소리의 가죽으로 그것을 덮도록 하였다; 마찬가지로 그들은 등잔대와 성막의 집기들을 오소리의 가죽으로 된 덮게 아래 놓아야 했다; 그리고 그들이 섬김에 사용한 모든 집기들은 푸른 천 아래 놓아야 하고, 오소리의 가죽의 덮개로 덮어야 했다 (민. 4:5-12). 말씀이 거룩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면, 위에 열거된 것들이 신성한 무엇인가를 의미할 것이다고 짐작할 수 있을지 모른다: 즉, 궤, 식탁, 등잔대, 그들이 섬김에 사용한 집기들; 그리고 두 번 물들인 진홍색 덮개들; 그리고 오소리의 가죽으로 만든 덮개들; 그리고 이 모든 것들에 의해 외적인 것들 안에 있는 신성한 것들을 표현했다는 것을 짐작할 것이라 본다.
위와 마찬가지로, 인물들에 관련해서도 그렇다: 즉 예언자들은 가르치는 이들, 그러므로 말씀으로부터의 선과 진리에 관한 가르침을 표현했다, 그리고 엘리야는 말씀 자체를, 이와 마찬가지에서 세례 요한은 오시기로 되었던 엘리야라 불리웠다 (마. 17:10-13); 그러므로 그들은 말씀이 외적 형태에서 있는 그대로, 가죽 띠를 둘렀다 (왕하 1:8); 세례 요한은 낙타 털의 의복을 입고 허리에 가죽띠를 매었다 (마. 3:4). 그리고 인간과 짐승의 피부가 외부의 것들을 의미하는 것과 같이 이것들은 영적, 천적인 것들에 관련하여 자연적인 것들이다; 그리고 고대 교회에서 의미들을 수단으로 말하고 쓰는 것은 관습화되었다, 그러므로 욥기서가 그 예인데, 이 책은 고대 교회의 책이다, 여기서의 “피부”도 같은 의미 선상에 있다. 이 책의 아래 구절을 읽어보자:
나는 나를 되찾으시는 분을 안다, 그분은 살아계시다, 그리고 마지막에서 그분은 먼지 위 너머로 일어나실 것이다, 그리고 그 후에 이것들이 내 피부에 에워싸질 것이다, 그리고 내 육체로부터 나는 하느님을 볼 것이다 (욥. 19:25, 26).
“피부에 에워싸지는” 것은 자연 평면에 의해서를 표시한다. 이는 인간이 사후 그와 더불어 가지는 것과 같은 것이다; “육체로부터 하느님을 보는” 것은 우리 자신의 것으로부터 그렇게 행하는 것, 생기있게 하는 것이다. 욥기서가 고대의 책이다는 이유는 그 책에 있는 표현과 의미적 스타일로부터 이다; 그러나 이 책은 율법과 예언서라 불리우는 책들 중의 하나는 아니다, 그 이유는 이 책은 주님과 그분의 왕국에 관한 것만을 취급하는 내적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내적 의미는 순수한 말씀의 책을 만드는 한 가지 것이기 때문이다.

그녀는 그의 손 위에. 이는 받는 능력(faculty)에 따라서를 의미한다. 이는 “손”의 의미가 힘(power)이다로부터; 고로 받음의 능력이다.

그리고 그의 매끈한 목에. 이는 분리시키는 진리는 나타나지 않을 것임을 의미한다; 이는 “매끈함”이 서술하는 것이 진리에 관련하여 이다로부터; 그리고 “목”의 의미가 결합하는 것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러므로 여기서 나타남이 그의 목의 매끈함 위에 있었기 때문에 이 의미는 분리하는 진리는 나타나지 않는다 이다. 여기서의 경우가 어떻게 이렇게 되는지에 관하여는 이미 말해진 것들로부터 알 수 있다, 즉 이 선과 이해력으로부터 흘러나가는 이런 진리들, 그리고 동시에 의지로부터 있지 않은 경우, 제아무리 바깥쪽 형태에서 그렇게 나타난다 해도 이것들은 선이 아니고, 진리들도 아니다; 그리고 만일 의지가 악 속에 있다면, 선과 진리들은 결합 대신 분열이 있다; 그러나 만일 의지의 어떤 것이 선에 속하고 있다면, 그때는 그것들은 분열은 하지 않는다, 그러나 결합하고 있다, 설사 그것들이 거꾸로의 질서에서 배열되고 있다 해도 분열은 없는데, 그 이유는 그것들을 수단으로 하여 인간이 거듭나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들이 배치될 때, 그것들은 인간의 거듭남의 초기 단계들에 쓰여진다, 하여 분열하는 진리는 나타나지 않는다; 이에 관하여는 아래 더 이어나갈 것이다.
“목”이 결합하는 것을 의미하는 이유는 인간의 신체에서 보다 높은쪽과 보다 낮은쪽이 목을 사이에 두고 교통하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둘 모두에게 교통함과 유입이 있어, 결과적으로 이 중간 부분인 목에 의해 결합이 의미된다; 이는 각 장들의 끝에서 취급되는 인간 신체의 것들과 웅대한 사람 사이에 있는 상응으로부터 확실히 알게 되리라 본다, 이와 같은 의미로 있는 말씀의 구절로서 이사야서에서:
그분의 숨은 넘치는 시내와도 같이 목에 까지조차 차올랐다 (이. 30:28);
위에서 “넘치는 시내”는 거짓이 더 높은 것과 더 낮은 것의 결합을 막아버림, 고로 교통함을 도중에서 가로챔을 표시한다; 영적 선과 진리가 받아지지 않을 때, 이 결합은 가로막아지고 가로채어진다.
하박국서에서:
당신은 사악한 자의 집으로부터 머리를 짓부수셨습니다, 기초가 목에 까지조차 벗겨 뉘게 하셨다 (합. 3:13);
위에서 “사악한 자의 집으로부터 머리를 짓부셨다”란 거짓의 원리들을 파괴함을 표시한다; “목에까지조차 벗겨 드러뉘임”은 그것 때문에 결합이 가로채졌다를 표시한다. 예레미야애가서에서:
함께 짠(역어진, knit) 위법들이 내 목 위에 올라와진다; 내 힘을 압도하는 자; 하느님께서 는 나를 그들의 손에 주었다, 나는 일어날 수 없다 (애. 1:14).
“내 목에까지 승강하는 함께 짠 위법들”이란 내면, 또는 합리적인 것들을 향하여 승강하는 거짓들을 표시한다.
“목”에 의해 이와 같은 교통함과 결합함이 의미된 것 만큼이나, 목을 묶는 것(bond)들에 의해서는 주님으로부터 계속적으로 흘러나오는 영적인 것들이 인간의 합리성 안으로의 흘러듦이 더 이상 승인되지 않아, 결과적으로 자연 평면에 흘러들지 못해 야기되는 진리의 황무함, 진리의 가로채짐이 의미된다. 이 가로채짐, 또는 황무해짐이 예레미야서에서 그로 하여금 자신에게 끈들과 멍에를 만들도록 명령되고, 그리고 그것들을 그의 목에 넣도록, 그리고 그것들을 백성들에게 보내도록, 그리고 그들은 바빌론 왕 느브갓네살을 섬기게 된다고 말하도록; 그리고 백성들 중에서 자기들의 목을 그의 멍에 아래 있게 하지 않는 자는 검과 기근과 염병이 방문할 것임을 말하도록 명령되었다; 그러나 자기들의 목을 아래로 구부린 이들은 토지에 남아 있을 것이다도 말하도록 명령되었다 (예. 27:2, 3, 8, 11). “목을 바빌론 왕의 멍에 아래 놓고 그를 섬기는 것”은 진리 측면이 황무해짐을 , 그리고 선의 측면이 황폐되어짐을 의미한다; 선과 진리의 유입이 도중에서 가로채질(가로막아질) 때, 악하고 거짓인 것의 섬김이 있어지기 때문에, 그러므로 “멍에 아래 목을 놓음”은 섬기는 것도 의미한다.
다시 예레미야서에서:
고로 여호와께서 말하신다, 나는 2년 이내에 나라들의 목으로부터 바빌론의 왕 느부갓네살 의 멍에를 떼어내 부술 것이다 (예28:11);
위는 그들이 황폐해짐으로부터 해방될 것을 의미한다. 이사야서에서:
먼지로부터 네 자신을 흔들어라; 일어나라, 너는 앉으라, 오 예루살렘이여; 네 목의 묶은 것 (끈)을 열어라(풀어라), 오 포로된 시온의 딸이여 (이. 52:2).
위에서 “목의 묶은 것을 여는 것”은 선과 진리를 승인하고 받는 것을 의미한다. 미가서에서:
보라 나는 이 가문(족속)에게 악한 것을 고안하는 바, 이로부터 너희의 목을 끌어 당기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너희는 직립해 걷지 못할 것이다, 그 이유는 악한 때이기 때문이다 (미. 2:3).
“악으로부터 목을 끌어당기지 못함”은 진리를 승인하지 않는 것; “직립해 걷지 못함”은 그것 때문에 더 높은 것들을 쳐다보지 않음, 즉 천국에 속한 것들을 쳐다보지 않음이다.

그리고 그녀는 별미를 주었다. 이는 그로부터 즐거울 수 있는 것이 파생됨을 의미한다; 이는 “맛있는 음식”이 유쾌하고 즐거운 것들을 의미한다로부터 알려진다.

그리고 빵. 이는 그로부터 선이 파생됨을 의미한다. 이는 “빵”이 선임으로부터 알려진다.

그녀가 만들었던. 이는 이 선은 신성한 진리로부터 있었음을 의미한다; 이는 리브가의 표현함이 주님의 신성한 합리성 속의 신성한 진리이다로부터 분명해진다; 그리고 그녀가 “만들었다” 라고 리브가에 관해 말해지는 바, 이것은 그것들(유쾌하고 즐거운 것들)이 신성한 진리로부터 이었음을 의미한다.

야곱의 손에. 이는 이와 같은 것이 자연적 진리에 대한 애착이었다를 의미한다. 이는 이 대목이 위 진행되어 온 것을 마감하는 말임으로부터; 그리고 이때의 야곱은 이와 같았고, 하여 이런 그를 수단으로 자연적인 진리가 표현되었다. 즉 이때의 야곱은 자기 손과 목에 염소들의 염소 새끼의 피부를 두르고, 차려진 별미를 그의 아버지 이삭에게 운반하는 모습이었다.

18-20절. 그리고 그는 자기 아버지에게 와서 말했다, 나의 아버지여. 그리고 그는 말했다, 나를 바라보라, 너는 내 아들 누구냐? 19 그리고 야곱은 그의 아버지에게 말했다, 저는 당신의 첫 출생 에서입니다. 저는 당신께서 말씀하신 대로 하였습니다. 일어나, 앉으셔서, 그리고 제 사냥한 것을 잡수시고, 당신의 혼이 저에게 복을 빌어 주십시오. 20 그리고 이삭은 그의 아들에게 말했다, 어떻게 너는 그것을 빨리 발견하였느냐, 내 아들아? 그리고 그가 말했다, 여호와 당신의 하느님께서 그것이 저의 얼굴을 만나도록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는 그의 아버지에게 와서 말했다, 나의 아버지여. 그리고 그는 말했다, 보라 나다, 너는 내 아들 누구냐? 이는 이 진리의 현존으로부터 지각하는 상태를 의미한다; 이는 여기서 “아버지”인 이삭의 표현으로부터; 그리고 “아들”인 야곱의 표현으로부터 분명해지는데 이 표현은 여러 번 앞에서 언급했다; 또한 “말하다”가 지각하는 것이다로부터, 이것 역시 여러 번 살폈다, 이상으로부터와 대화에서 묻어나는 것으로부터 분명해지는 바, 여기서의 의미는 야곱에 의해 표현된 이 진리로부터 지각하는 상태이다; 그러나 지금 야곱에 의해 표현되는 이 진리의 품질이 무엇인지는 이 구절 이전과 이후의 내적 의미로부터 분명해진다, 즉 바깥쪽 형체에서 이 진리는 에서와 그의 사냥한 것에 의해 표현되는 선과 선으로부터의 진리 같이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내적 형태에서는 이와 같지 않다. 거듭나지고 있는 인간 안에서, 즉 거듭나기 이전의 진리 측면에서의 자연 평면은 이런 특성으로부터 나타나는데, 인간의 시각에서는 실로 그렇게 보여지지 않는다, 그 이유가 그는 거듭나는 동안 자기와 더불은 선과 진리에 관하여 아는 것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천국의 빛에서 이와 같은 것을 보는 천사들의 시각에서는 인간의 시각과 다르게 나타난다. 인간은 자연 평면의 선과 진리가 무엇인지 아는 것조차 없다; 그리고 그가 이것을 모르기 때문에 그는 이것을 지각할 수 없다; 그가 일반적 측면에서 이것을 지각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는 특별한 측면(세부적 측면)에서도 지각하지 못한다; 고로 그는 차이점을 지각할 수 없다, 더욱이 그것들의 상태의 바뀜을 지각할 수 없다; 그리고 이럴진대, 그는 이 선과 이 선으로부터의 진리가 어떤 경우인지를 어떤 묘사되어 있는 것으로부터 납득함에 어려움이 뒤따를 수 있다. 이런 주제들이 이 장에서 펼쳐지는 이상, 주제에 뒤이어지는 것들에서 그것이 납득되는 만큼에서 살펴보기로 한다.

그리고 야곱이 그의 아버지에게 말했다. 이는 자연적 진리가 관찰함을 의미한다; 이는 “말하다”가 지각하다를 의미함으로부터; 여기서는 관찰하다를 의미한다, 그 이유가 자연 평면으로부터 말함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야곱의 표현이 자연적 진리이다로부터 알게 되는데 이 내용은 이미 살폈다.

저는 당신의 첫 출생 에서입니다. 이는 이것이 선 자체였다고 믿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에서의 표현으로부터, 그리고 “첫 출생”의 의미가 선이다로부터, 실로 에서에 의해 표현되는 자연적 선이다로부터 분명해진다; 그 이유가 인간이 거듭나지기 이전, 자신에게 속하는 진리가 선 자체라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지각을 가진 이들은 그것이 선이 아니라 선의 형태 아래 있는 진리임을 알고 있다; 그러나 지각을 가지지 않은 이들은 이것을 선이다 라고 아는 것밖에 달리 방도가 없다. 이런 상황은 이어지는 대목에서 더 잘 나타난다.

저는 당신께서 말씀하신 대로 하였습니다. 이는 순종을 의미한다; 이는 아마 설명 없이 납득될 것이다.

일어나, 앉으시고, 그리고 제가 사냥한 것을 잡수십시오. 이는 이와 같은 선에 대한 애착으로부터의 진리를 의미한다; 이는 “일어남”이 어느 정도 상승함을 포함하고 있다로부터; 그리고 “앉음”의 의미에 어느 정도의 평온함도 포함하고 있다로부터; “먹는다”의 의미가 자기 것이 되게 함이다로부터; 그리고 “사냥한 것”의 의미가 선으로부터 있는 진리이다로부터, 그러므로 현재의 구절에서 진리가 있는 이 선에 대한 애착을 의미한다. 그 이유가 “일어나”, “앉으시고”, “잡수십시오”에 의해 의미된 것들은 애착 측면에 속하는 움직임들이기 때문, 그러므로 애착만이 그것들을 표시하기 위해 언급된다.

당신의 혼이 저에게 복을 빌어 주십시오. 이는 결합을 의미한다; 이는 “복을 비는” 것의 의미가 결합이다로부터 분명해진다.

그리고 이삭은 그의 아들에게 말했다. 이는 야곱에 의해 표현된 자연 평면에 관하여 이삭에 의해 표현된 합리성이 지각함을 의미한다; 그리고 “말하는” 것이 지각을 표시한다로부터 알려지는데, 이는 이미 여러 번 살핀 바 있다.

어떻게 너는 이렇게 빨리 그것을 발견하였느냐? 내 아들아. 이는 속도가 꽤 빠른 생산을 의미하는데, 설명은 필요 없을 것이라 본다.

그리고 그는 말했다, 여호와 당신의 하느님께서 그것이 저의 얼굴을 만나도록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이는 섭리를 의미하는 바, 이는 설명 없이도 납득이 무난할 것이다. 여기서 취급된 섭리는 거듭나는 동안 선과 이 선으로부터 파생되는 진리가 인간과 더불어 질서 있게 배치되는 것, 즉 그것들이 순수한 선과 이로부터의 순수한 진리들 같은 얼굴을 하고 바깥쪽으로 나타나는 것, 또는 표출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은 거듭남을 위한 섬김 역할을 위해, 고로 보다 더 총체적인 자연 평면의 선들과 진리들을 안으로 끌어들임을 섬기는 역할을 위해 필요불가결한 것이다. 그 이유는 진리가 선인 듯 나타남, 선으로 착각함이 거듭남이라는 목적들로 유도해주기 때문이다.

21-23절. 그리고 이삭은 야곱에게 말했다, 가까이 오기 바란다, 그리고 나는 네가 내 아들, 참으로 내 아들 에서인지, 아닌지 만져보아야겠다. 22 그리고 야곱은 그의 아버지 이삭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그리고 그는 그를 만졌다, 그리고 말했다, 음성은 야곱의 음성이나, 손은 에서의 손이다. 23 그리고 그는 그가 아닌 것을 인지하지 못했다, 그 이유는 그의 손이 그의 형 에서의 손 같이 털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그에게 복을 빌어 주었다.

그리고 이삭이 야곱에게 말했다. 이는 이 자연 평면에 관하여 지각함을 의미한다. 이는 “말하다”가 지각하다를 의미함으로부터; 그리고 야곱의 표현이 진리 측면에서의 자연 평면, 여기서는 자연 평면, 그 이유는 야곱도 외관적으로 표현했기 때문, 즉 외적 형태에서 에서를 흉내내었기 때문이다; 고로 또한 에서가 표현하는 선 측면에서의 자연, 그리고 에서의 사냥한 것, 즉 이 선으로부터 있는 진리까지 외관상으로 표현했다. 이 장에서 “그가 말했다”라는 표현이 자주 반복되는 편인데, 그 이유는 새로운 것이 시작되기 때문, 또는 새로운 지각이 시작되기 때문에서 이다.

가까이 오기 바란다, 그리고 나는 내 아들 너를 만져보아야겠다. 이는 현존함으로부터의 가장 깊은 지각을 의미한다. “가까이 옴”이 현존함(presence)을 의미한다로부터; 그리고 “만짐”의 의미가 가장 깊고 완전한 지각이다로부터 알려진다.

네가 참으로 내 아들 에서인지, 아닌지. 이는 자연적 선이 아니였음을 의미한다. 이는 이 말에서 암시되는 것이 의심함이다는 것, 그리고 이 말 뒤에 이어지는 내용으로부터; 그리고 합리성이 어떤 자연 평면인지, 무슨 품질로부터 있는지를 지각했는데, 그것은 자연적 선, 또는 에서가 아니었다를 지각함이 의미되어지고 있다.

그리고 야곱이 그의 아버지 이삭에게 다가왔다. 이는 현존의 상태를 의미한다. 이 의미는 이미 살핀 앞의 대목으로부터 분명해진다.

그리고 그는 그를 만졌다. 이는 모든 지각을 의미한다. 이는 “만짐”의 의미가 가장 깊고 완전한 지각이다로부터, 여기서의 경우, 모든 지각, 그 이유는 지각의 모든 것들은 가장 깊은 지각으로부터 있기 때문, 즉 가장 깊은 측면을 지각함은 그 아래 있는 다른 모든 것도 지각하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아래 있는 것들은 위에 있는 것들로부터의 갈래들에 불과한 바, 가장 깊은 것(높은 것)은 그 아래(그 바깥쪽) 있는 모든 것에 대한 모두이다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아래쪽에 있는 것은 내면의 것들로부터 있기 때문이다; 같은 말로, 최상의 것들로부터 있기 때문이다. 즉 무엇인가가 존재하게 되는 결과에 해당되는 것은 그렇게 하게 한 능률적인 원인으로부터 있는 것과 비등하다. 이렇게 반복해 장황하게 말한 이유는 이것은 다른 삶에서 목적이 인간을 행복하게, 또는 불행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목적은 모든 원인의 가장 깊은 측면에 해당되기 때문, 사실상 목적이 원인 안에 있지 않으면, 원인은 존재하지도 않는다. 마찬가지로 목적이 모든 결과의 가장 깊은 속에 해당되는데, 그 이유는 결과가 그것의 원인으로부터 있기 때문이다. 이렇기 때문에 인간에게 속하는 모든 것은 그 사람에 있는 목적으로부터 있고, 그러므로 다른 삶에서의 그의 상태는 그가 지녔던 목적과 같다. 이상으로부터 미루어 알게 되는 것은 만짐은 가장 깊은 지각을 의미하고, 그러므로 모든 지각도 의미한다.

그리고 말했다, 음성은 야곱의 음성이나, 손은 에서의 손이다. 이는 지적인 부분은 진리로부터 있는데 안쪽에 있고, 의지 부분은 선 속에 있는데 바깥쪽에 있는 경우인 바, 거꾸로 된 질서 속에 있음을 의미한다. 이는 “음성”이 진리 측면의 것을, “손”은 선 측면의 것을 서술함으로부터 분명해진다; 그리고 “음성은 야곱의 음성이다”라고 말해져서 야곱을 수단으로 자연적인 진리가 표현되었다. 그리고 “손”이 선을 서술하는 이유는 손에 의해 힘, 또는 능력, 자질이 의미되기 때문인데, 비록 힘이나 능력이 진리로부터 있다고 나타날지라도 진리로부터의 모든 힘과 능력은 선 외에 다른 근원은 없기 때문에서 이다; “손은 에서의 손이다”는 말 역시 같은 논리에서, 에서를 수단으로 선이 표현되었다. 이것이 거꾸로의 질서이다는 것은 질서에 따르면 안쪽에 있는 것이 의지 속에 있는 선이고, 바깥쪽에 있는 것이 이해력 속에 있는 진리이어야 했기 때문이다. 어쨌든 이미 말했듯이 이런 사항들은 얼른 납득될 수 없는 말들로서 있는데, 그 이유는 이런 사항들에 관한 어떤 지식을 지닌 이들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사실 여느 다른 구절이라 해도 그 구절에 관한 지식이 결핍될 때는 그 구절 역시 납득되지 않을 것은 뻔한 이치일 것이다; 어쨌든 이 경우가 어떻게 되어 있는지를 살피는 것이 중요한데, 그 이유는 이것이 여기서의 주제이기 때문이다.
자연 평면의 선은 내면의 선, 즉 합리성의 선 외에 다른 근원으로부터 나오지 않는다; 자연 평면은 이외 다른 근원으로부터 선을 가지지 않음은 분명하다; 그러나 유입됨이 자연 평면에 선이 있게 한다; 그리고 자연 평면의 선의 근원이 이러한 바, 자연 평면의 진리 역시 같은 근원으로부터 이다; 그 이유가 선이 있는 곳에 진리가 있기 때문, 둘은 서로 함께 하지 않으면 어떤 것이 되어 있어질 수 없다. 하여, 흘러드는 유입이 진리로 하여금 어떤 것이 되어 있게 하는 셈이다. 유입은 이런 방법에서 거행된다: 합리성의 선은 두 길로 해서 자연 평면 안으로 흘러든다; 하나는 아주 짧은 길을 통하여, 자연 평면의 선 자체 안으로 인데, 이는 즉각적이라 말해야 할 정도로 짧은(직진하는) 길이다; 이 선과 이 진리가 에서와 그의 사냥한 것에 의해 표현되어졌다. 둘째로 합리성의 선은 자연 평면 안으로 덜 짧은 길로(돌아서 가는 길로) 해서, 즉 합리성의 진리를 통하여, 그리고 이 유입을 수단으로 선 같은 어떤 형태를 나타내나, 이것은 외관상 그럴 뿐이고 사실상으로는 진리이다.
합리성의 선이 자연 평면의 선 안으로, 동시에 이 선의 진리 안으로 즉각적으로 흘러야 하는 것; 또한 합리성의 진리를 통하여 자연 평면의 선 안으로, 고로 간접적 방식으로; 마찬가지 방식에서 자연 평면의 진리 안으로 직접적, 또는 간접적 방식으로; 이런 방식에 의한 것은 유입됨이 질서에 따른 것이다. 이런 유입은 거듭나아져간 이들과 더불어 존재한다; 그러나 이미 말한 바 대로, 거듭남이 있기 전에는 또 다른 유입이 있다, 즉 합리성의 선이 자연 평면의 선 안으로 직접적으로 흐르지 않는 경우, 그러나 합리성의 진리를 통하여 간접적으로 흐르는 경우, 고로 자연 평면에 선 같은 어떤 것이 나타난다, 하여 이것은 진짜 선은 아닌 셈, 그 결과 진리도 순수하지 않다; 그럼에도 이와 같은 것도 가장 깊은 측면에서 참으로 합리성의 진리를 통하여 유입됨으로부터 선을 가지기는 한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이다. 이럴 경우, 자연 평면에서는 선이 또 다른 형태 아래 세상 밖으로 출시되어진다, 즉 바깥쪽으로 에서에 의해 표현되는 선 같이, 그러나 안쪽으로는 야곱에 의해 표현된 진리 같이 있는다; 이것은 올바른 질서가 아니지만, (현실적으로는 존재하기에) 거꾸로의 질서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방법이 아닌 여느 다른 방법에서는 인간이 거듭나질 수 없다 라고 우긴다면, 이것이 질서가 되고 만다.
나 역시 인정하는 바는, 위의 설명들이 설사 명백하게 서술되어, 이런 사항들에 관한 지식을 지닌 이들이라면 명료하게 지각하리라는 것도 가능하겠지만, 유입이 무엇인지를 모르는 이들에게는 위의 설명은 애매할지 모른다는 것; 더욱이 합리성은 자연 평면과 구분되어 있다를 알지 못하는 이들에게는 불명료할 것이다는 것; 그리고 선과 진리에 대한 구분된 생각을 갖지 않는 이들에게도 불명료할 것이다. 그러나 거듭나기 이전에 있는 자연적인 선, 그리고 자연적인 진리의 품질이 무엇인지는 거듭나기 전의 애착들만으로 부터도 나타날 수 있다. 인간이 진리에 애착을 가질 때, 그런데 그 애착함이 삶을 위해서가 아니고 타인이 모르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는 학식자가 되는 것에 있다면, 이것은 어떤 경쟁심에 대한 애착으로부터, 또는 어린이들의 시기함, 부러워함 같은 수준의 어떤 애착으로부터, 그리고 영광됨에 대한 어떤 애착으로부터 이다면, 이때 있는 자연 평면의 선, 자연 평면의 진리는 여기서 야곱에 의해 표현되는 질서, 즉 거꾸로의 질서; 즉 선이 있는 의지 부분이 바깥이고, 진리가 있는 이해함이 안쪽에 있는 형국이다.
그러나 거듭난 상태에서라면 이와 반대이다; 즉 거듭난 인간이 진리에 애착하는 이유는 삶을 질서 있게 하기 위해서, 더욱이 삶으로부터의 선 자체에 애착한다; 그리고 거듭나기 이전에 있던 진리에 대한 애착들, 즉 시기함으로부터의 애착, 영예를 위한 애착, 뭔가 자신이 잘남을 우뚝 세우려 애착한 것들은 그 자체 분리되어 있고, 마치 사라진 듯 하여 있다. 그 이유가 선이 있는 의지가 안쪽에, 진리가 있는 이해력이 바깥에 위치하기 때문, 그리고 진리는 선과 더불어 하나되어 행동한다, 그 이유는 진리가 선으로부터 있기 때문이다. 이 질서가 진짜 질서이다; 이전의 질서는 의지 부분이 바깥쪽에 있는 까닭에 의지 부분이 거꾸로의 질서에 형태를 만들어주려는 경향이 있어, 이것이 거듭남에 유익할 수 있는 많은 것들을 받아들이게 한다, 마치 깨끗한 물이든, 진흙탕이의 물이든 흡수하는 스폰지 같다. 고로 어쩌면 거듭나기 전의 인간 당사자로서는 거절하고야 말 것 까지도 몰아쳐서 받아들이게 승인한다. 하여 거듭남의 수단 역할을 하는 셈이다, 즉 선들과 진리들에 대한 생각들에 형태를 만들어 주고 다른 유용함을 위해서도 봉사하게 된다.

그리고 그는 그를 인지하지 못했다, 그 이유는 그의 손이 그의 형 에서의 손같이 털이 많았기 때문이다. 이는 바깥쪽에 있었던 의지 부분으로부터 그것이 자연적 선이었다고 지각되어지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그가 야곱을 야곱이라고, 즉 야곱이 표현하는 진리를 인지하지 못했다는 사실로부터, 그러나 그는 바깥쪽에 있는 것에서, 즉 자연적 선이다고 지각했다는 사실로부터 분명해진다; 그리고 이것은 앞에서 말해졌었던 유입 때문이다, 그 이유가 내면의 선과 외면의 선 사이에는 교통이 이루어지는데, 이 둘 사이에는 평행함, 유사함 (parallelism)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선과 진리 사이에서의 경우는 선이 진리 안으로의 유입이 있지 않으면 유사함은 있지 않다.

그리고 그는 그에게 복을 빌어 주었다. 이는 그 결과로 있는 결합을 의미한다. “복을 빔”이 결합을 의미한다로부터; 그러나 이 상태에서의 결합은 방금 위에서 말한 것 그 이상은 아니다. 야곱에 의해 표현된 진리와 더불어 가장 깊은 결합이 있었다, 또한 간접적 결합도 아니다; 고로 가장 깊은 선인 목적을 통하여, 그리고 이 결합은 이 외의 방법으로는 결과될 수 없기도 하다; 그 이유가 목적 안에 모든 발전의 요소들이 감추여 놓여 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목적을 통하여 행동하신다; 그것들을 통하여 중간물을 질서 안으로 배열해가신다; 이로부터 이삭이 야곱에게 복을 빔에 의해 표현된 결합이 오고 있다.

24, 25절. 그리고 그는 말했다, 너는 참으로 내 아들 에서이냐? 그리고 그가 말했다 그렇습니다. 25 그리고 그는 말했다, 그것을 나에게 가까이 가져오너라, 그리고 나는 내 아들이 사냥한 것을 먹고 내 혼이 너에게 복을 빌 것이다. 그리고 그는 그것을 그에게 가까이 가져왔다, 그리고 그는 먹었다, 그리고 그는 그에게 포도주를 가져왔다, 그리고 그는 마셨다.

그리고 그는 말했다, 너는 참으로 내 아들 에서이냐? 그리고 그가 말했다 그렇습니다. 이는 자연적 진리의 상태, 즉 외적인 형태로부터 그것 자체가 자연적 선이라고 믿는 상태를 의미한다. 이는 이삭이 물어보는 말, 즉 “네가 참으로 나의 아들 에서이냐?”로부터 분명해진다; 이를 수단으로 내적 의미에서 의미되는 것은 합리성의 유입이 선으로부터 야곱에 의해 표현된 자연적 진리 안으로 있다는 것밖에 더 다른 의미는 없다; 그리고 대답으로부터, 즉 “그가 말했다, 그렇습니다”란 그때 그 자체가 선이라고 믿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는 말했다, 그것을 나에게 가까이 가져 오너라, 그리고 나는 내 아들이 사냥한 것을 먹으리라. 이는 선을 통하여 자연적 진리 자체와 결합하는 것을 열망함을 의미한다. 이는 “먹는다”가 결합과 자기 것이 되게 함을 의미한다로부터; “내 아들이 사냥한 것”이란 선으로부터의 진리이다로부터 알게 되고, 열망함이 의미되는 것이 분명하다.

내 혼이 너에게 복을 빌어야 겠다. 이는 결합을 의미한다. 이는 “복을 빔”이 결합을 의미함으로부터 알게 된다.

그리고 그는 그것을 그에게 가까이 가져왔다, 그리고 그는 먹었다. 그리고 그는 그에게 포도주를 가져왔다, 그리고 그는 마셨다. 이는 먼저 선의 결합이 있음을, 그 뒤에 진리의 결합이 있음을 의미한다. 이는 “먹는다”가 선 측면에서 결합함과 자기 것이 되게 함을 의미한다로부터; 그리고 “포도주”의 의미가 선으로부터 있는 진리이다로부터; 그리고 “마시다”의 의미가 진리 측면에서 결합함과 자기 것이 되게 함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삭에 의해 표현된 합리성의 선이 그 자체를 선에 결합하는 것이 먼저 있고, 그 후에 진리와도 결합한다는 것, 그리고 이것은 야곱인 자연 평면을 통하여서 이다는 것에 주목하여 보면, 이러하다: 자연 평면이 바깥쪽으로 선이고, 안쪽으로 진리의 상태에 있을 때, 이 자연 평면은 선이 아닌 많은 것들을 받아들임을 허용한다, 그럼에도 이런 것들은 그것들의 질서에서 선에 수단을 제공하는 바, 유용하다. 그러나 합리성의 선은 이런 근원으로부터의 어떤 것과 결합하거나 자기 것이 되게 하지 않고 오직 자신의 선에 일치하는 것만에서 결합할 뿐이다. 그 이유가 선은 그 외의 것은 받지 않고, 불일치 하는 것은 거절하기 때문이다. 하여 선은 자연 평면에 있는 많은 것들을 거기에 남겨두는데, 그 이유는 이것들이 선 자체와 일치하는 더 많은 것들을 받아들이는 수단만을 제공하게 하기 위함이다.
합리성은 내적 인간 안에 있다, 그리고 내적 인간 안에서 처리되는 것은 자연 평면에게는 알려져 있지 않다, 그 이유는 합리적 평면은 자연 평면의 관찰 영역을 넘어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해서 자연적 삶만을 영위하는 인간은 그의 내적 인간 안에서, 즉 그의 합리성 안에서 거행되는 것의 어떤 것도 알 수가 없다; 그 이유가 주님께서는 이런 사항들을 인간의 지식 바깥에 배치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자신이 어떻게 거듭나는지를, 본인이 거듭나고 있다는 것조차도 거의 인지하지 못한다. 그러나 만일 그가 이런 사항을 알기를 바란다면, 그는 자신에게 제안하고 돌보고 동행하는 자신의 목적들을 참작하면 된다. 이 목적들은 누구에게나 언제나 닫혀있는 일이 없다. 만일 목적들이 선을 향하여 있다면, 말하자면, 자신보다 주님과 이웃을 더 돌보려 하고 있다면, 그는 거듭남의 상태에 있음이 확실하다; 그러나 만일 목적들이 악을 향하여 있다면, 말하자면, 그가 주님과 이웃보다 자신을 더 돌보고 있다면, 그는 거듭나는 상태 아래 있지 않다.
삶 속에 있는 자신의 목적들을 통하여 그는 다른 삶 안에 있다; 선으로부터의 목적들을 통하여 그는 천사들과 더불은 천국 안에; 악으로부터의 목적들을 통하여 그는 악마들과 더불은 지옥 안에 거주한다. 인간 안에 있는 목적들은 그의 사랑하는 것들밖에 더 아니다; 그 이유가 인간이 사랑하는 것을 그는 자기의 목적으로 지니기 때문이다; 그의 목적들이 그의 사랑들인 바, 그것들은 그의 가장 깊은 측면에서의 삶이기도 하다. 인간 안에 있는 선으로부터의 목적들이 그의 합리성 안에 있다, 그리고 이것들은 선 측면에서의 합리성, 또는 합리성으로부터의 선이라 불리운다. 선으로부터의 목적들, 또는 목적 안에 있는 선들을 통하여 주님께서는 자연 평면에 있는 모든 것들을 배열하신다; 그 이유가 목적들이 그 인간의 혼으로서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혼의 상황이 이러한즉, 혼을 둘러싼 육체 역시 그러할 수밖에 없다; 합리성이 선 측면에서 이러하듯, 합리성이 투자한 자연 평면 역시 그러할 수밖에 없다.
잘 알려진 것은, 인간의 혼은 어머니의 난자에서 개시된다는 것, 그 후에 자궁에서 부드러운 몸으로 에워싸인다는 것, 이를 통하여 혼은 출생으로 맞이하는 세상에 알맞은 방식에서 행동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인간이 거듭나는 때, 그가 다시 태어나는 경우도 위와 별반 차이가 없다. 다시 태어날 때, 그가 받는 새로운 혼은 선으로부터의 목적들이고, 이것이 합리성 안에서 개시하는데, 먼저, 거기서 난자 안에서와 같이 이다, 그리고 그 후에 자궁 안에서와 같이 완전해진다; 이 혼을 에워싼 부드러운 육체는 자연 평면과 그 안에 있는 선이다, 이것이 혼의 목적들에 일치하여 순종적으로 행동하는 것이다; 거기 안에 있는 진리들은 육체 안에 있는 (근육 속의) 섬유(fiber)들처럼 있다, 그 이유가 진리들은 선으로부터 형태를 만들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거듭남의 형상은 자궁 안에서 만들어지는 당사자 안에 표출되어 있다; 만일 당신이 이것을 믿는다면, 이것 또한 믿을 수 있다, 즉 주님으로부터 있는 천적인 선과 영적인 진리가 그를 만들어내고, 그것에 계속적으로 받을 수 있게 능력을 나누어 주신다는 것, 이 나누어 주심(impartation)은 인간 당사자가 세상을 목적으로 삼아 야수들 같지 않고, 천국을 목적으로 바라보는 품질과 양에 따라서 있게 된다. (알아두면 흥미롭고 의미심장할 수 있는 두 단어가 있다, 나누어 주심, impartation과 전가함, 씌우기, imputation이다. 전자는 새 교회의 대들보에 해당되는 단어일지 모르고, 후자는 현 기독 교회의 대들보에 해당될지 모른다. 전자의 단어에 대한 해석은 오빙이어의 기적에서 빵을 나누어주심(요. 6:11)의 구절로부터 시작하면 될 것이다. 후자의 단어의 해설은 여느 기독교 목사들에게 물어보면 된다. 또한 영한 사전만 참고해도 위 두 단어의 심각한 차이점은 어렵지 않게 여러분도 금방 알 수 있을 것이다. 더 이상의 설명은 지면 관계상 생략한다. 역자 주.)
자연 평면을 통하여 선 측면에서의 합리성은 그 자체에 선을 먼저 결합시키고, 그 후에 진리를 결합시키는데, 이것이 야곱이 별미와 빵을 이삭에게 가져오고, 그가 이것을 먹고, 포도주를 마심에 의해 의미되어 있다는 것은 육체가 그 육체의 혼을 위해 수행하는 직능에 의해 예증될는지 모른다. 혼은 육체에 배고프다 라고 하여 식품을 당기게 하는 식욕과 먹음으로부터 있는 맛있다를 향유하게 한다. 당기는 식욕과 맛의 즐거움을 수단으로, 즉 외적인 선을 수단으로 먹거리들이 육체 안으로 들어와진다; 그러나 들어온 먹거리들이 몽땅 육체의 생명의 밑천이 되어주는 것은 아니다; 즉 어떤 것은 소화작용을 위해 용매 역할에 쓰임을 받는다; 어떤 것은 부드럽게 조화를 이루게 하는 역할에, 어떤 것은 열림을 위해, 어떤 것은 그릇 같이 받아들임을 위한 역활에 소모되나; 선발된 좋은 먹거리들은 피 안으로, 그리고 피가 되고, 이로부터 혼은 그 자체를 이런 유용함으로부터 있는 것들과 결합시킨다.
합리성과 자연 평면의 관계 역시 비등하다: 식욕과 맛은 진리를 알려하는 바램과 애착과 상응한다; 그리고 지식들은 식품과 상응한다; 그리고 그것들이 상응하기 때문에 그것들은 같은 방식에서 있다; (합리성의 선인) 혼은 기억 속의 지식들과 교리 속의 것들을 갈망하고, 애착되어 있게 한다, 그리고 그것들을 갈망함 속의 즐거움과 애착 속의 선을 통하여 안으로 받아들인다. 그러나 안으로 받아들인 것들 전부가 생활 속의 선이 되는 것은 아니다; 어떤 것은 소화와 부드럽게 함을 위한 수단을 섬기고; 어떤 것은 열고 받아들임의 역할을 담당하기도 한다; 그러나 생명(삶) 속의 선들은 그 자체를 응용하고, 그리고 그것들(기억 속의 지식들, 교리들 등등)을 자체에 결합하고, 그것들로부터 자체를 위한 진리들을 만들어 낸다. 이로부터 분명한 바, 어떻게 자연 평면이 그것의 혼인 합리성을 섬기도록 합리성에 의해 배열되는 지가 분명해졌을 것이다; 같은 말로 혼에 해당되는 목적을 섬기도록 하여 그 자체를 완전해지게 하는 것, 즉 주님의 왕국에서 선용의 일익을 담당하게 하는 것이다.

26-29절 그리고 그의 아버지 이삭이 그에게 말했다, 가까이 오기 바란다, 그리고 내 아들아 나에게 키스하여라. 27 그리고 그는 가까이 왔다, 그리고 그에게 키스했다. 그리고 그는 그의 의복의 향취를 냄새 맡았다, 그리고 그에게 복을 빌어 주었다, 그리고 말했다, 보라 내 아들의 향취는 여호와께서 복주신 들판의 냄새 같다. 28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하늘의 이슬로부터와 땅의 살찐 것들로부터 네게 주실 것이다, 그리고 풍성한 곡식과 새 포도주(를 주실 것이다). 29 백성들이 너를 섬길 것이다, 그리고 백성들이 너에게 자신을 굽혀 절할 것이다. 너는 네 형제들의 주인이 되라, 그리고 네 어머니의 아들들은 너에게 자신을 굽혀 절하리라. 너를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겠고, 너에게 복을 빌어주는 자는 복을 받을 것이다.

그리고 그의 아버지 이삭이 그에게 말했다, 가까이 오너라. 이는 아직 더 내면적으로 지각하는 등급을 의미한다. 이는 “그가 가까이 오라고 말함”이 현존함으로부터 더 내면적으로 지각함이다로부터; “가까이 오는 것”에 이외 다른 의미는 없다.

그리고 내 아들아 나에게 키스하거라. 이는 그것이 하나로 묶일 수 있을지 어떨런지를 의미한다. 이는 “키스함”이 애착으로부터 하나가 됨과 결합함이다로부터 알려진다. “키스함”은 바깥쪽의 행위인데, 이는 안쪽의 행위인 결합에 대한 애착을 의미함 그 이상의 의미는 없다; 그것들 역시 상응한다. 앞에서 말했던 바와 같이 여기서 취급되는 주제는 최고 의미에서 주님에 있는 자연 평면의 신성이 되심, 즉 어떻게 주님께서 자신 안에 있는 자연 평면을 신성으로 만드셨는가에 관하여서 이다; 그러나 표현적 의미에서의 주제는 인간에 있는 자연 평면의 거듭남, 고로 합리성과 자연 평면의 결합이다; 그 이유가 자연 평면이 합리성과 결합할 때까지 자연 평면은 거듭나지지 않기 때문이다. 이 결합은 자연 평면 속의 선과 진리 안으로 합리성의 직, 간접적 유입을 수단으로 결과되어진다; 다시 말해서, 합리성의 선으로부터 자연 평면 속의 선으로 유입되는 직접적인 방식, 그리고 합리성의 진리를 통하여 자연 평면의 진리 안으로 유입되는 간접적 방식이 있는데, 후자의 결합하는 방식이 여기서 취급되고 있다.
어쨌든 이 두 결합 방식들은 신성에 의해 설비된 수단들이 아니면 불가능하다, 그리고 이와 같은 설비하심에 관하여서는 인간에게 알려진 것이 거의 없다, 게다가 세상의 빛, 즉 인간과 더불은 자연적 발광체로부터 있는 것을 수단으로 하여서는 어떤 생각도 가져볼 수 없다; 이는 오직 천국의 빛으로부터 있는 수단들, 즉 합리성의 빛으로부터만 어떤 생각이든 가져볼 수 있다. 그럼에도 이 모든 수단들은 말씀의 내적 의미에서는 밝히 드러나져 있다, 하여 내적 의미 안에 있는 이들, 즉 이런 주제들에 있는 무수한 것들을 보고 지각하는 천사들에게는 명백하여 있다.
그러나 결과들과 이 결과로부터의 표시들로부터 어떻게 이 경우가 결합과 더불어 있는지를 조금이나마 감지해볼 수 있다; 그 이유가 합리적 마음 (즉 인간의 내면의 의지와 이해력)이 그 자체를 얼굴과 그것의 표현들로부터 표현하듯, 자연적 마음 안에서 그 자체를 표현해야 하기 때문이다. 즉 얼굴이 자연적 인간의 생김새이듯, 자연적 마음은 합리성의 생김새에 해당한다. 결합이 결과되었을 때, 거듭난 이들의 경우와 같이 인간이 내면적으로 뜻하고 합리성에서 생각하는 것은 무엇이든 그 자체를 자연적 평면에서 눈에 보이게 표출한다, 이 후자가 그의 얼굴에서 똑똑히 보이게 그 자체를 표출한다. 이런 얼굴을 천사들은 가지고 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얼굴은 천적 인간이었던 태고인이 지녔다, 그 이유가 그들은 타인이 자기의 목적과 의도를 아는 것에 조금도 걱정하지 않았기 때문 마찬가지로 그들은 선밖에 뜻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주님에 의해 인도되도록 자신을 허용하고 있기에 선 외에 뜻하는 것이 없었다. 이런 특성 속에 있을 경우, 선 측면에서의 합리성은 자연 평면 속의 선과 즉각적으로 그 자체를 결합되게 한다, 그리고 이를 통하여 진리들과도 결합한다; 또한 합리성에서 그 자체와 결합한 진리를 통하여 간접적으로 자연 평면의 진리와 결합한다, 그리고 이를 통하여 거기 안에 있는 선과 결합한다; 이런 방식에서의 결합은 분리될 수 없는 결합이다.
그러나 오늘날의 인간이 얼마나 멀리 이 상태로부터 옮겨졌는지, 즉 천국적인 상태로부터 옮겨져 있는 지는 이런 천국적 상태가 시민적 신중함으로부터 말하고 행동함에 있다고 여긴다는 사실로부터, 또한 외모에 의한 표현, 즉 악한 목적으로부터 내면적으로는 뜻하고 생각하나 겉모습은 그와 반대되게 행동하는 시민적 신중함에 있다고 여기는 사실로부터 알는지 모른다. 태고인들에게 이것은 매우 큰 사악함이어서 이런 인물들은 악마로 간주하여 그들의 사회로부터 내쫓았다. 이런 것들로부터, 즉 결과들과 표시들로부터 같이, 분명해지는 것은, 선과 진리 측면에서의 합리적, 또는 내적 인간이 그의 자연적, 또는 외적 인간과 결합하는 것에 관한 것, 고로 인간-천사, 그리고 인간-악마의 품질이 무엇인지에 대해서이다.

그리고 그는 가까이 와서, 그리고 그에게 키스했다. 이는 현존함과 하나로 묶임을 의미한다. 이는 “가까이 옴”이 현존함이다로부터; 그리고 “키스함”의 의미가 애착으로부터 하나가 됨 또는 결합함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키스함”이 이 의미를 가진다는 것은 아래 구절들로부터도 분명해진다. 다윗서에서:
경외함으로 여호와를 섬기라. 아들에게 키스하라, 그분이 화내시지 않도록, 그리고 너희는 길에서 멸망할 것이다, 그 이유는 그분의 분노가 머지 않아 불붙을 것이기 때문이다. 자기 의 신뢰를 그분에게 두는 자는 복되다 (시. 2:11, 12);
위는 주님을 취급하고 있다, 그분의 신성한 인간이 “아들”이다; “그분에게 키스하는”것은 사랑의 신앙을 통하여 그분과 결합되는 것이다. 다시:
자비와 신뢰함이 함께 만나졌다; 정의와 평화가 서로 키스했다 (시. 85:10);
“정의와 평화가 서로 키스했다”란 그것이 함께 결합함을 표시한다. 호세아서에서:
에브라임은 잔혹한 것을 말했다, 그리고 바알로 죄를 지었다; 그리고 지금 그들은 더욱 더 죄짓는다, 하여 자기들에게 자기들의 은으로 부어 만들었다, 그들 자신의 총명으로 우상들 을 만들기조차 했다, 그것들의 모두는 장인의 일로 만들었다; 그들이 자기들에게 말한다, 인간들의 제물바치는 자로 하여금 송아지들에 키스하게 하자 (호. 13:1, 2);
“에브라임”은 총명을 표시한다, 여기서는 인간 자신의 총명, 즉 자신이 슬기롭다고 믿는 이들, 그리고 주님으로부터가 아니고 자신으로부터 슬기로워지기를 바라는 이들을 표시한다; “자기들의 은으로 부어만든 상”은 왜곡된 선을 표시한다; “그것들의 모두를 장인의 일로 만들었다”란 자기 총명을 표시한다. “송아지에게 키스하라”고 말한 이들, 즉 마술을 껴안는 것, 그리고 자신들을 그것에 인접하게 하는 것이다. 열왕기상서에서:
여호와께서 엘리야에게 말하셨다, 나는 바알에 절하려 굽히지 않은 무릎들, 그것에 키스하 지 않은 모두 각각의 입, 칠천이 남아있게 해두었다 (왕상. 19:18);
위에서 “키스”하는 것은 애착으로부터 누군가의 자아와 결합하는 것, 고로 예배하는 것을 표시한다.

그리고 그는 그의 의복의 향취를 냄새 맡았다. 이는 그가 지각한 선의 진리로부터 감사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향취”가 감사하는 것을 의미함으로부터; 그리고 “냄새를 맡는” 것이 감사하는 것을 지각함이다로부터; 그리고 “의복”의 의미가 진리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리고 여기서 “그의”란 에서를 말하고, 에서에 의해 자연 평면의 선이 표현되는 바, 그러므로 선으로부터의 진리가 의미된다. 선(으로부터)의 진리는 합리성의 직, 간접적 유입을 수단으로 자연 평면에서 획득되는 진리이다; 이 진리가 바라던 것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합리성의 선으로부터의 직접적인 유입에 의해서는 획득되어질 수 없었고, 간접적 유입인 합리성의 진리를 통하여서 했다. 그리고 이것은 여러 수단들, 즉 내적 의미에서의 에서와 야곱에 의해 서술되는 수단들에 의해서만 획득이 가능했다, 그러므로 “그의 의복의 향취를 냄새맡다”에 의해 지각된 선의 진리가 의미된 것이다.

그리고 그에게 복을 빌어 주었다. 이는 이리하여 결합함을 의미한다. 이는 “복을 빔”이 결합함을 의미한다로부터 알게 된다. 에서와 야곱에 관하여 연관되는 여러 세부 사항들로부터 분명한 것은, 합리성의 선은 자연 평면의 선과 그 자체를 가장 깊게 결합한다는 것, 더불어 자연 평면의 선을 통하여 그것으로부터의 진리와도 가장 깊게 결합한다는 것이다; 그 이유가 이삭이 선 측면에서의 합리성을; 그리고 리브가는 진리 측면에서의 합리성을; 에서는 자연 평면의 선을; 그리고 야곱은 그것으로부터의 진리를 표현하기 때문이다. 선 측면에서의 합리성이 “이삭”에 의해 표현되었는데, 이 선은 “에서”에 의해 표현된 자연 평면의 선과 그 자체를 가장 깊게 결합시켰고, “야곱”에 의해 표현된 진리와는 간접적 방식에 의해서만 결합시켰다. 이는 이삭이 야곱에게 축복을 발표할 때, 이삭은 에서를 생각하면서, 즉 자기의 마음에 에서를 두고 축복을 하고 있었다는 사실; 즉 그는 야곱을 생각하며 축복하지 않았다는 사실로부터 분명해진다. 축복을 말하는 당사자가 축복을 받기를 원하여 그의 마음에 놓은 자가 실지로 축복받는 자이다. 다시 말해 입으로 발음하여 나가는 모든 축복은 내부로부터 나가는 바, 그 축복은 그 축복을 생각하고 뜻한 축복자로부터 생명을 가질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축복자가 축복하기를 뜻하여 마음 안에 생각한 자가 축복받은 자인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가로챈 자, 즉 그것을 자신의 것으로 삼은 자는 정작 타인이 누려야할 어떤 것을 훔친 격이다. 이삭이 축복했을 때, 야곱이 아닌 에서를 생각하며 축복했다는 것은 이미 지나온 구절들을 상기해보아도 충분히 짐작된다; 즉 18, 19절에서, 이삭이 야곱에게, “너는 내 아들 누구이냐?” 그리고 야곱이 그의 아버지에게, “저는 당신의 첫 출생 에서입니다”; 그리고 21, 22, 23절에서, 이삭이 야곱에게 말했다, “가까이 오라, 그리고 나는 네가 진짜로 내 아들 에서인지를 만져보아야겠다,” 그리고 그가 그를 만진 후에, 말했다, “음성은 야곱의 음성인데, 손은 에서의 손이다, 그리고 그는 그를 인지하지 못했다,” 또한 24절로부터, “그리고 그는 말했다, ‘네가 진짜로 내 아들 에서이냐?’, 그리고 그는 말했다, 예 그렇습니다”; 끝으로 그가 키스했을 때, “그는 그의 의복의 향취를 냄새 맡았다”, 여기서 “그”는 에서이다; 그리고 그가 축복할 때, “그는 말했다, 보라, 내 아들의 향취.” 이상 모두로부터 그가 축복한 “아들”은 에서 그 외의 다른 자는 아니었다; 그러므로 이 후에 그가 에서로부터 그가 야곱이었다는 것을 들었을 때, 그는 심하게 부들부들 떨었다(33절), 그리고 “말했다, 네 동생이 속임수로 왔다.” 그러나 33절과 37절에 의해 축복이 야곱에게 존속된 이유인 즉, 야곱에 의해 표현된 진리가 한 때 동안 외관상에서 지배권을 가져야 하기 때문인데, 이는 이미 앞에서 여러 번 말했었다.
그러나 개혁과 거듭남의 때가 완성된 후, 가장 깊게 감추여 놓여 있었던 선 자체, 그리고 이 내부로부터 진리 속에 있도록 나타났던 각각 그리고 모든 것을 배치했던 선 자체가 모습을 나타내고, 공개적으로 지배권을 행사한다. 이것이 이삭이 에서에게 말했던 말: “네 검에 의해 너는 살 것이다, 그리고 네 아우를 섬길 것이다, 그리고 네가 그의 멍에를 네 목으로부터 부수고 지배권을 가지는 때가 올 것이다”에서(40절) 의미되어 있다. 이 말들의 내적 의미는 진리가 선과 결합되어 있는 한, 선은 외관상으로는 낮은 장소를 차지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선이 앞 자리를 차지하는 때가 온다는 것, 이때 합리성은 자연 평면의 선과 결합하고, 이로부터 자연 평면의 진리와도 결합한다; 고로 진리는 선으로부터 있게 되는 때가 온다는 말이다; 결과적으로 그때 에서는 자연 평면의 선 자체를, 야곱은 진리 자체를 표현하게 된다; 고로 최고 의미에서 주님의 신성한 자연 평면이다; 즉 에서는 신성한 선 측면에서, 야곱은 신성한 진리 측면에서 주님의 자연 평면을 표현한다.

들판의 냄새 같다. 이는 진리가 와지게 하는 좋은 지면(선한 바탕, ground)으로부터 같이를 의미한다. 이는 “들판의 냄새”의 의미가 선으로부터 진리를 지각함이다로부터, 마치 들판에서 추수함으로부터 발산되는 냄새 같다로부터 알게 된다; “냄새”가 지각을 의미하는 이유는 선으로부터 즐거움들, 진리로부터 유쾌함들이 다른 삶에서 “냄새”와 상응하여 지각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로부터, 그리고 상응으로부터 냄새는 지각을 의미함에 더 다른 것은 없고, 이것은 영적 수준의 지각에 상응하는 자연적 수준의 지각이다.

여호와께서 복을 내리신. 이는 신성으로부터 열매 맺고 번성해짐을 의미한다.
이는 “여호와께서 복을 주심”의 의미가 진리 측면에서는 번성함, 선 측면에서는 열매를 만듦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너에게 하늘의 이슬로부터 주실 것이다. 이는 신성한 진리로부터를 의미한다. 그리고 땅의 살찐 것들 이란 신성한 선으로부터를 의미한다. 이는 “하늘의 이슬”의 의미가 진리이다로부터; 그리고 “땅의 살찐 것”의 의미가 선이다로부터; 둘 모두 최고 의미에서 주님을 서술하고 있다. 진리의 번성함과 선의 열매 맺음과 더불은 경우는 이렇다: 합리성이 자연 평면 안으로 흐를 때, 그것의 선은 거기서 일반적 형태에서 표출한다; 이 선을 통하여 이것은 거기 안에 진리들을 생산하는데, 마치 인간 안의 생명이 섬유들을 만들어내고, 각 용도에 따라 형태들 안으로 그것들을 배치하는 것과 같다. 이 선, 이런 진리들을 통하여 천국의 질서 안으로 배치되어져 더 많은 선을 생산한다; 그리고 이 선을 통하여 더 많은 진리들을 생산한다. 이 진리들은 진리의 갈래들에 해당되는 셈이다. 이와 같은 자연적 수준의 생각은 선으로부터 진리가 만들어내짐, 더 나아가 진리를 통하여 선을 만들어냄, 이렇게 해서 다시 진리가 만들어내진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영적 수준의 생각은 다른 삶에 있는 이들이 아니면 가질 수 없다, 그 이유가 이 생각들은 천국의 빛으로부터 만들어내지고, 이 빛 안에 총명이 있기 때문이다.
“이슬”이 진리를 의미하는 것은 다른 말씀의 구절로부터도 분명해진다. 스가랴서에서:
평화의 씨, 포도나무가 그녀의 열매를 줄 것이고, 땅은 그녀의 생산물을 줄 것이다. 그리고 하늘은 그들의 이슬을 줄 것이다 (슥. 8:12);
새로운 교회로부터 말하면, 거기서 “포도나무가 그것의 열매를 준다”는 교회의 영적 평면, 또는 신앙의 진리가 선을 주는 것을 표시한다; 그리고 “땅이 그것의 생산물을 준다”는 교회의 천적 평면, 또는 선행의 선이 진리를 주는 것을 표시한다; 이 둘 모두가 “하늘이 주는 이슬”이다. 학개서에서:
황폐해져 있는 나의 집 때문에 네 위의 하늘이 이슬을 닫을 것이고 땅은 그녀의 생산믈을 닫을 것이다 (학. 1:9. 10);
위에서 “하늘의 이슬과 땅의 생산물”, 이것이 제지되었는 바, 앞의 인용 구절과 의미가 비슷하다.
다윗서에서:
새벽녘의 자궁으로부터, 당신은 당신의 출생의 이슬을 가지신다 (시. 110:3);
위는 주님에 관하여이다; “출생의 이슬”은 사랑의 천적 평면을 표시하고 있다. 모세의 책에서:
여호와의 축복하심이 하늘의 귀중한 것들을 위하여, 이슬을 위하여, 그리고 아래 누운 깊음 을 위하여 그의 손 (에) 있다 (신. 33:13);
위는 요셉을 축복하는 대목이다; “하늘의 귀중한 것들”은 영적인 것들이다, 이것이 “이슬”에 의해 의미되고; “아래 깊음”은 자연적인 것들을 의미한다. 다시:
이스라엘은 요셉의 샘에서만, 곡식과 새로운 포도주의 토지 안에서 안전하게 거주했다, 그 렇다, 그의 하늘이 이슬을 떨어뜨렸다 (신. 33:28);
위 구절 역시 “하늘이 떨어뜨린 이슬”은 진리로부터 있는 영적인 것들을 표시한다.
진짜 의미에서, “이슬”은 순진과 평화의 상태로부터 있는 선으로부터의 진리이다; 그 이유가 “아침”, 또는 “새벽(day-dawn)”, 이슬이 내려오는 시각에 의해 이런 상태들이 의미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늘로부터 있었던 만나는 아침에 내려온 이슬과 더불어 있었다. 모세의 책에서:
아침에 이슬이 진영 주위에 내려왔다; 그리고 내려 앉은 이슬이 물러갔을 때, 광야의 얼굴 위에 작고 둥그런 것들, 지면 위에 서리로 덮인 듯 작은 것이 바라보였다 (출. 16:13, 14). 이슬이 밤에 진영 위에 떨어졌을 때, 만나가 그것 위에 떨어졌다 (민. 11:9).
만나는 천국의 빵인 바, 이것은 최고 의미에서 신성한 선 측면에서의 주님을 의미했다; 이로부터 인간과 더불어서는 사랑의 천적 평면, 그 이유는 이것이 주님의 신성으로부터 있기 때문이다; 만나와 더불은 “이슬”은 최고 의미에서 신성한 진리를 표시하고, 관계적 의미에서 인간과 더불은 영적 수준의 진리를 표시한다; “아침”은 이 선들이 있는 평화의 상태이다.
“이슬”이 선으로부터 있는 진리를, 또는 천적 평면으로부터 있는 영적인 것을 의미하기에, 말씀에서도 “이슬”에 비교된다; 그 이유가 의미된 것은 같은 것을 비교함에도 쓰이기 때문이다. 이사야서에서:
고로 여호와께서 나에게 말하셨다, 나는 잠잠히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내 거처하는 장 소를 바라볼 것이다; 마치 빛 위에 열이 있는 맑게 갠 하늘 같이; 추수의 열기에서 이슬을 머금은 구름 같이 (이. 18:4).
호세아서에서:
오 에브라임아, 내가 네게 무엇을 할 것이냐? 오 유다야, 내가 네게 무엇을 해야 하느냐? 그 이유가 네 거룩함이 새벽의 구름 같이 있기 때문, 그리고 아침에 떨어지는 이슬 같이 있기 때문이다 (호. 6:4; 13:3).
다시:
나는 이스라엘에게 이슬로서 있을 것이다; 그는 백합 같이 꽃피울 것이다, 그리고 그의 뿌 리는 레바논 같이 고정될 것이다 (호. 14:5).
미가서에서:
야곱의 나머지들이 여호와로부터의 이슬 같이, 풀잎 위의 물방울 같이 많은 백성들 한가운 데에서 있을 것이다 (미. 5:7).
다윗서에서:
머리 위에 있는 훌륭한 기름이 아론의 의복의 테두리 위에로 내려감 같이;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 위에 내려옴 같이; 그 이유가 거기서 여호와께서는 영구히 생명의 축복하심을 명령하셨기 때문이다 (시. 133:2, 3).
그리고 모세의 책에서:
내 교리가 비 같이 떨어질 것이다, 내 말은 이슬 같이 증류할 것이다; 작은 비가 풀 위에 내림 같이; 그리고 물방울이 풀잎 위에 있음 같이 (신. 32:2);
위에서 “이슬”은 선으로부터의 진리가 번성함, 진리를 통하여 선이 열매를 풍성히 맺음을 표시한다; 그리고 이슬이 모든 아침으로 들판과 포도원을 열매있게 해주 듯, 선 자체와 진리가 “곡식과 새로운 포도주에 의해 의미되어진다. 이에 관하여는 아래에서 이어진다.

그리고 곡식의 풍성함. 이는 파생되어 나오는 자연적인 선을 의미한다. 그리고 새로운 포도주(new wine, 또는 must)란 파생되어 나오는 자연적인 진리를 의미한다. 이는 “곡식”이 선을 의미하고, “새로운 포도주”가 진리를 의미함으로부터 알게 된다. 이것은 자연 평면을 서술하고, 자연적인 선과 진리를 의미한다, 그리고 “빵과 포도주”의 경우는 합리성을 서술한다
“곡식과 새로운 포도주”가 이 의미를 가지는 것은 말씀의 아래 구절로부터도 알게 된다. 학개서에서:
하늘이 이슬을 닫았다, 그리고 땅이 그녀의 생산물을 닫았다. 그리고 나는 토지 위에, 그리 고 산들 위에, 그리고 곡식 위에, 그리고 새로운 포도주 위에; 그리고 지면이 생산하는 것 위에 가믐을 불러왔다 (학. 1:10, 11);
위에서 “가믐”은 이슬과 비의 결핍을 표시한다; “곡식 위에 가믐”은 선의 결핍이다; 그리고 “새로운 포도주 위에 결핍”은 진리의 결핍이다. 모세의 책에서:
이스라엘은 곡식과 새로운 포도주의 토지에 있는 야곱의 샘에서만 안전하게 거주할 것이 다; 그렇다, 그의 하늘이 이슬을 떨어뜨릴 것이다 (신. 33:28);
위에서 (야곱의 샘에서) “…만”은 악과 거짓들에 감염되지 않은 이들을 표시한다; “곡식과 새로운 포도주의 토지”는 교회의 선과 진리를 표시한다.
호세아서에서:
나는 이스라엘에게 이슬 같이 있을 것이다; 그는 백합 같이 싹을 낼 것이다, 그리고 그의 뿌리를 레바논 같이 고정되게 할 것이다; 그의 가지들은 앞으로 뻗을 것이다, 그리고 그의 영예는 올리브나무 같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의 냄새는 레바논 같을 것이다; 그의 그림 자 아래 거주하는 그들은 되돌아올 것이다; 그들은 곡식에 생기를 줄 것이다, 그리고 포도 나무 같이 꽃피울 것이다; 그의 기억은 레바논의 포도주 같이 있을 것이다 (호. 14:5-7);
위에서 “곡식”은 영적 선을 표시한다; 그리고 “포도주”는 영적 진리를 표시한다. 이사야서에서:
저주가 땅에 쏟아질 것이다. 새로운 포도주가 곡할 것이다, 포도주가 쇠약해질 것이다, 심 정의 모든 즐거움이 슬픔에 잠길 것이다 (이. 24:6, 7);
위에서 영적 교회의 황폐함이 취급되어진다; “새로운 포도주가 슬퍼함”은 진리가 중단될 것임을 표시한다.
예레미야서에서:
여호와께서는 야곱을 되찾으셨다. 그리고 그들은 시온의 높은 곳에 와서 노래할 것이다, 그 리고 여호와의 선함으로, 곡식쪽으로와 새로운 포도주쪽으로, 그리고 기름쪽으로, 그리 고 양떼와 목축떼의 아들들쪽으로 함께 흘러들 것이다 (예. 31:11, 12);
곡식과 새로운 포도주”는 선과 선에서 파생되는 진리를; “기름”은 그들이 가져야하는 선, 그리고 그들로부터 있는 선을; “양떼와 목축떼의 아들들”은 거기로부터 있는 진리를 표시한다; 그리고 이런 것들이 이와 같은 의미를 가지기에, 그것들은 “여호와의 선함”이라 불리운다.
호세아서에서:
그녀는 내가 그녀에게 곡식을, 그리고 새로운 포도주를, 그리고 기름을, 그리고 그들이 바 알을 위해 만든 그녀의 은과 금을 불어나게 했다는 것을 모르고 있다. 그러므로 나는 되돌 아가서, 그들에게 계절에 따라 당연히 있던 나의 곡식과 나의 새로운 포도주를 거두어갈 것이다, 그리고 나는 나의 양털과 나의 아마(삼베)를 뽑아내 던져버릴 것이다 (호. 2:8, 9);
위는 왜곡된 교회가 취급된다; 그리고 “곡식”이 곡식을 뜻하지 않음은 분명하다; “새로운 포도주”가 새로운 포도주가 아닌 것도; “기름”, “은”, “금”, “양털”, 그리고 “아마” 역시 그것들 자체를 뜻하지 않음이 분명하다. 이것들은 영적인 것들을 뜻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같은 예언서에서 새로운 교회가 취급되어진다:
나는 신실함으로 나에게 너를 약혼시켰다; 그리고 너는 여호와를 알 것이다. 그리고 네가 하늘에 경청하는 날이 올 것이다; 그리고 이것들은 땅에 경청할 것이다; 그리고 땅은 곡식 에, 그리고 새로운 포도주에; 그리고 기름에 경청할 것이다; 그리고 이것들은 이즈르엘 (Jezreel)에 경청하리라 (호. 2:20-22);
위에서 “이즈르엘”은 새로운 교회를 표시한다. 요엘서에서:
똑바로 정신차려라, 너희 술꾼들이여 슬피 울어라, 그리고 포도주에 취하는 너희 모두여 짖 어대거라, 그 이유는 새로운 포도주 때문이다, 그 이유가 그것이 네 입으로부터 끊어졌기 때문이다. 들판이 황폐해져 있다, 토지는 곡을 한다; 그 이유는 곡식이 황폐해지기 때문이 다, 새로운 포도주가 말라지고, 기름은 쇠약해졌다 (욜. 1:5, 10);
다시 요엘서에서:
너희 시온의 아들아 기뻐 환호하라, 그리고 여호와 너희 하느님 안에서 즐거워하라; 그 이 유가 그분께서 정의를 위하여 이른 비를 주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분은 너희를 위하여 비가, 이른 비가 내리게 하실 것이다, 그리고 먼저 후자의 비가 (내리게 하실 것이다). 그 리고 마당들은 순수한 곡식으로 채워질 것이다, 그리고 큰 통이 새로운 포도주와 기름으로 넘칠 것이다 (욜. 2:23, 24).
다시 요엘서에서:
그리고 그 날에 산들이 달콤한 포도주를 떨어지게 할 것이다, 그리고 언덕들은 젖을 흐르 게 할 것이다, 그리고 유다의 모든 시내는 물이 흐를 것이다, 그리고 샘이 여호와 집으로부 터 나갈 것이다 (욜. 3:18);
위에서 주님의 왕국이 취급되고 있다; 그리고 “달콤한 포도주”, “젖”, “물”에 의해 영적인 것들이 의미되고 이것의 풍부함이 아래 구절에서 묘사된다.
스가랴서에서:
여호와 그들의 하느님이 그들을 그 날에 그분의 백성의 양떼로서 구원할 것이다. 그 이유는 그분의 선함이 얼마나 위대한지! 때문이다; 그리고 그분의 아름다움이 얼마나 위대한지! (때문이다) 곡식이 젊은 이들을, 새로운 포도주가 처녀들을 번성하게 할 것이다 (슥. 9:16, 17).
다윗서에서:
당신은 땅을 방문하신다, 그것 안에서 즐거워하신다; 당신은 그것을 크게 풍요하게 하신다; 하느님의 시내가 물로 가득하다; 당신은 그들에게 곡식을 준비해두신다; 초원은 양떼로 옷 입혀진다; 계곡들은 곡식으로 덮혀진다; 그들은 환희로 소리친다, 그들은 노래도 부른다 (시. 65:9, 13).
위 모두의 구절들로부터 “곡식과 포도주”에 의해 의미되는 것이 무엇일지를 알았으리라 본다.

백성들이 너를 섬길 것이다. 이는 교회 속의 진리들을; 그리고 백성들이 자신을 굽혀 너에게 절할 것이다. 이는 선으로부터의 진리들을 의미한다. 이는 “섬기다”가 진리들에 관하여이다로부터; 그리고 “백성들”의 의미가 진리들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처음에 언급된 “백성들”은 교회의 진리들이 의미되고, 이것은 영적인 진리들이라 불리운다; 그리고 두 번째 언급된 “백성들”은 선으로부터의 진리들을 의미하는데, 이것은 영적인 선들이고, 관계적 측면에서 진리들, 선행의 선이 진리들 같이 있는 것이다. 이런 구분이 이 구절에 있는 이유는 두 백성들의 표현이 히브리어에서는 똑같은 단어들로 표현하지 않기 때문이다, 비록 조금은 차이가 있을지언정 어쨌든 이 둘 모두는 인척 관계에 있는 것만은 틀림없다.

너는 네 형제의 주인이 되라. 이는 자연적 진리에 대한 애착이 자연적 선에 대한 애착 위에서 지배하고 있는 것으로 처음에는 나타남을 의미한다. 이는 “주인”의 의미가 지배이다로부터; 그리고 “형제”의 의미가 선에 대한 애착들, 여기서는 자연적 선에 대한 애착들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리고 네 어머니의 아들들이 자신을 굽혀 너에게 절할 것이다. 이는 진리에 대한 모든 애착을 능가하여를 의미한다. 이는 “아들들”의 의미가 진리들이다로부터; 그리고 “어머니”의 의미가 영적 진리에 대한 애착이다로부터; 그렇기 때문에 교회이다로부터; 그 이유는 교회는 진리로부터, 그 진리에 대한 애착으로부터 존재하고 그렇게 불리우기 때문이다.

너를 저주하는 그들은 저주될 것이다. 이는 자신을 분리시키는 자는 분리되어질 것임을 의미한다. 그리고 너에게 복을 비는 자는 복을 받을 것이다. 이는 자신을 결합되게 하는 자는 결합될 것임을 의미한다. 이는 “저주함”이 분리됨을 의미한다로부터; 그리고 “복을 빔”이 결합됨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런 것들은 진리들을 서술하고 있다, 그리고 “저주하는 그들”에 의해서는 진리들로부터 자신들을 분리시키는 거짓들이 의미된다; 그리고 “복을 비는 이들”에 의해서는 다른 진리들에 자신들을 결합하는 진리들이 의미된다; 그 이유가 진리들과 선들과 더불어 이 경우는 그것들이 함께 사회(공동체)를 만들고, 마지막으로 마치 하나의 도성을 만들 듯 하기 때문, 고로 그것들은 연계되어 있다. 이것은 천국의 형태로부터 근원된다. 즉 천국 안에서 천사들은 선과 진리에 연관됨에 따른 질서에서 배열되어진다, 이렇게 해서 그들은 하나의 왕국, 또는 하나의 도성을 구성한다, 이로부터 선들과 진리들이 인간에게 흘러들고, 그를 자기들과 비슷한 형태 안으로 배열한다, 그리고 이 역사는 주님만에 의해서이다. 그러나 어떻게 여기서의 경우가 있어지는 가는 웅대한 사람, 천국이신 그분, 인간 안에 있는 각각 그리고 모든 것과 더불어 있는 상응으로부터 분명해지는데, 이 상응에 관하여는 주님의 신성한 자비로부터 이 장의 끝에서 첨가되어 서술해볼 것이다. 이상 모두로부터 분명해진 것은, 이삭의 축복이 야곱에게 발표는 되었으나 에서에 관련된 것을 뜻하고 있다는 것이다; 즉 진리의 번성함을 통하여 선이 열매를 풍성히 맺음, 그리고 다시 진리의 열매 맺음으로 반복되는 것이다.

30-33절. 그리고 이삭이 야곱에게 복을 빌어 주는 것을 끝냈다, 그리고 야곱이 그의 아버지 이삭의 얼굴로부터 나가자 마자, 그의 형 에서가 그의 사냥으로부터 왔다. 31 그리고 그도 역시 별미를 만들었다, 그리고 그의 아버지에게 가져왔다. 그는 그의 아버지에게 말했다, 나의 아버지시여 일어나소서 그리고 당신의 아들이 사냥한 것을 잡수시고, 당신의 혼이 저에게 복을 빌어 주소서. 32 그리고 그의 아버지 이삭은 그에게 말했다, 너는 누구냐? 그리고 그는 말했다. 저는 당신의 아들, 첫 출생, 에서입니다. 33 그리고 이삭은 극도로 심히 떨었다, 그리고 말했다, 그러면 사냥감을 사냥했고, 그리고 그것을 나에게 가져왔고, 그리고 나는 네가 오기 전 모든 것을 먹었고, 그리고 복을 빌어 주었던 그는 누구인가? 그렇다 그가 복을 받을 것이다.

그리고 이삭이 야곱에게 복을 빌어 주는 것을 끝냈다. 이는 이런 식으로 첫 결합이 결과되었을 때를 의미한다. 이는 “복을 빔”의 의미가 결합이다로부터; 고로 “이삭이 축복을 끝냈을 때”란 결합이 결과되었을 때를 의미하게 된다; 즉 첫 결합은 야곱에 의해 표현된 진리와 결합하는 것이었다는 말이다. 이는 이미 살폈다.

그리고 야곱이 이삭의 얼굴로부터 나가자 마자. 이는 상태의 변화와 발달(progression)을 의미한다. 이는 “얼굴로부터 나감”의 의미가 야곱에 의해 표현된 이런 것들이 중단되었을 때, 고로 상태가 바뀌었을 때를 의미한다; 그 이유가 지금의 주제는 에서이기 때문, 즉 내적 의미에서 자연 평면의 선이기 때문, 이 선이 어떻게 가장 깊은 측면으로부터 모습을 나타내어 그 자체를 명백히하는가 인데, 이미 앞에서 살폈다; 그리고 개혁이 진리의 섬김에 의해 완성되어졌을 때, 이 선이 지배권을 행사한다.

그의 형 에서가 그의 사냥에서 왔다. 이는 선으로부터의 진리와 그것의 도착(arrival) 을 의미한다. 이는 에서의 표현이 자연 평면의 선이다로부터; “오다”의 의미가 도착함이다로부터; 그리고 “사냥함”의 의미가 선으로부터 있는 진리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리고 그도 역시 별미를 만들었다, 그리고 그의 아버지에게 가져왔다. 이는 신성한 합리성에 바람직하고 기뻐하는 것들을 의미한다. 이는 “별미”의 의미가 선으로부터 있는 즐거운 것들과 진리로부터 있는 유쾌한 것들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선으로부터 있는 것들은 바람직한 것들이고, 진리로부터 있는 유쾌한 것들은 기뻐하는 것들이다; 그 이유가 선에 대한 애착은 바라는 것에 해당되는 바, 이때 진리에 대한 애착은 기뻐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그의 아버지에게 말했다, 나의 아버지시여 일어나시고, 그리고 당신의 아들이 사냥한 것을 잡수소서. 이는 신성한 합리성은 자연적 선으로부터의 진리 자체에 잘 어울릴 것임을 의미한다. 이는 여기서 “아버지”인 이삭의 표현이 합리성 속의 선이다로부터; “먹다”의 의미가 자기 것에 잘 어울림(자기 것으로 삼음)이다로부터; 그리고 “사냥한 것”의 의미가 자연적 선으로부터의 진리이다로부터 알려진다.

당신의 혼이 저에게 복을 빌어 주소서. 이는 거기에 결합이 있을 것임을 의미한다. 이는 “복을 빔”의 의미가 결합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리고 그의 아버지 이삭은 그에게 말했다, 너는 누구이냐? 그리고 그가 말했다, 저는 당신의 아들, 첫 출생, 에서입니다. 이는 자연적 선과 파생된 진리에 관하여 지각하는 상태를 의미한다. 이는 앞 18, 19절에서 살폈다.

그리고 극도로 심히 떨었다. 이는 상태의 뒤집힘에 관해서 있는 큰 변경(alteration)을 의미한다. 이는 “떨다”의 의미가 변경함이다로부터; 이것이 상태의 뒤집힘에 관련되어 있다는 것은 이미 앞에서 말한 인간의 두 상태들, 즉 거듭나기 이전과 이후의 상태, 즉 그가 거듭나기 전의 상태에서는 진리가 외관상 지배권을 가진다는 것; 그 반면 그가 거듭나진 후에서는 진리들이 자리를 내주고 선이 지배권을 받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말했다, 그러면 사냥감을 사냥했고, 그리고 그것을 나에게 가져 온 그는 누구인가? 이는 그 진리에 관하여 조회해봄(inquisition)을 의미한다. 이는 여기서 “그는 누구인가”라고 말해진 자가 야곱인 바, 그가 진리 측면에서의 자연 평면을 표현함으로부터; 그리고 “사냥감”의 의미가 선으로부터의 진리이다로부터; 여기서는, 이 진리에 관하여, 이것이 선으로부터 이었는지를 조회함을 의미한다.

그리고 나는 네가 오기 전 모두 먹었다. 이는 그것이 잘 어울려졌음을 의미한다. 이는 “먹다”가 자기 것이 되게 함, 자기 것에 잘 어울리게 함을 의미함으로부터 알게 된다.

그리고 그에게 복을 빌어 주었다. 그렇다, 그리고 그는 복 받을 것이다. 이는 그것은 결합되었음을 의미한다. 이는 “복 받는다”가 결합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어떻게 야곱에 의해 표현된 진리와 결합하고 자기 것이 되게 하는지에 관한 것은 이미 살폈다. 그러나 이 주제들은 자연적 인간의 납득력을 초월해 있는 고로 합리성, 또는 내적 인간에 있는 빛이 아니고서는 알아질 수 없다. 그러나 이 빛에 있는 이들은 오늘날 너무나 적은데, 그 이유는 거듭난 자가 거의 없기 때문이다, 고로 이 주제를 두고 더 이상의 예증으로 설명하는 것은 혼동으로 인해 오히려 더 그늘에 있게 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고로 간략한 몇 마디의 말과 표현 속의 내적 의미만을 언급하는 정도에서 마무리할 것이다.
이상 말해진 것만 가지고도 이삭이 그의 아들에게 사냥한 것인지를 묻고, 그는 복을 빌기 전 그것을 먹은 것, 그는 그가 먹은 후에야 축복을 한 것, 즉 먹은 후 별미를 준비하고 가져온 그에게 복을 빈 것에 관해 알았으리라 본다. 이는 이삭의 말, (여기서는 야곱에 관하여) “그가 나에게 가져왔다, 그리고 나는 네가 오기 전에 모두 먹었다, 그리고 그에게 복을 빌었다; 그렇다, 그리고 그는 복있을 것이다”로부터 분명해진다. 이런 의미에 대한 것은 고대 교회의 의식의 내적 의미에서 찾아진다; 그 이유가 그들과 더불어 먹는 것은 자기 것이 되게 함과 결합, 즉 빵을 나누어 먹는 자와 더불어 결합함이 의미되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식품은 사랑과 선행 속에 있는 것, 즉 천적인 식품과 영적인 식품이 의미되었는데, 빵은 주님을 사랑함으로부터 있는 것을, 포도주는 이웃을 향한 선행으로부터 있는 것을 의미했다. 이것들을 자기에게 어울리게, 자기 것이 되게 먹었을 때, 그 인물은 결합되어진다; 고로 그들은 서로의 애착으로부터 이야기를 하고, 함께 연합되었다. 고대인들과 더불은 잔치 역시 이런 내적 의미의 범주에 있고, 유대 교회에서 거룩한 것들을 함께 먹는 것도, 원시 기독 교회에서 정찬과 만찬에 의해 표현된 것도 같은 맥락이었다.

34-40절. 에서가 그의 아버지의 말을 들었을 때, 그는 극도로 크게 소리내어 울었다, 그리고 그의 아버지에게 말했다, 저에게, 저 또한 복을 빌어 주소서, 오 나의 아버지시여. 35 그리고 그는 말했다, 네 동생이 속임수로 와서 네 복을 빼앗아 갔다. 36 그리고 그는 말했다, 하여 그의 이름이 야곱이라 불리운 것입니까? 그리고 그가 나를 두 번이나 속였습니다. 그는 내 생득권을 빼앗고, 그리고 지금 그는 내 복을 가로챘습니다. 그리고 그는 말했다, 당신께서는 저를 위하여 복을 남겨두시지 않았습니까? 37 그리고 이삭은 에서에게 답하여 말했다, 보다시피 나는 그를 네 주인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모든 그의 형제를 나는 그에게 종으로 주었다. 그리고 곡식과 새 포도주를 가지고 나는 그를 떠받치게 했다. 이럴진대 내가 너를 위하여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이냐 내 아들아? 38 그리고 에서는 그의 아버지에게 말했다, 당신께서 빌어줄 복이 이 하나 밖에 없습니까, 나의 아버지시여? 나에게도 또한 복을 빌어 주소서, 오 나의 아버지시여. 그리고 에서는 그의 음성을 높혔다, 그리고 슬퍼했다. 39 그리고 그의 아버지 이삭이 그에게 답하여 말했다, 보아라 땅의 살찐 것들로부터 네 거처가 있을 것이고, 위로부터 하늘의 이슬로부터 네 거처가 있을 것이다. 40 그리고 네 검에 근거하여 너는 살 것이다, 그리고 네 아우를 섬길 것이다. 그리고 장차 네가 지배권을 가지게 될 때가 오면 너는 네 목으로부터 그의 멍에를 부술 것이다.

“에서가 그의 아버지의 말을 들었을 때”란 자연적 선이 신성한 선으로부터 관찰함(observation)을 의미한다; “그는 극도로 크게 소리내어 울었다”란 상태의 뒤집힘에 관하여 그것의 큰 변경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의 아버지에게 말했다, 저에게, 저에게도 복을 빌어 주소서, 오 나의 아버지시여”란 진리가 합쳐지기 이전에 사라졌다 할지라도 자연적 선이 결합을 갈망함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는 말했다, 네 동생이 속임수로 왔다”란 질서가 뒤바뀐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네 복을 빼앗아 갔다”란 이런 방법으로 결합함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는 말했다 하여 그의 이름이 야곱이라 불리운 것인가”란 그것의 품질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는 나를 두 번씩 속였다”란 질서가 뒤바뀌였다를 의미한다. “그는 내 생득권을 빼앗았다”란 우선권을 잃었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보라 지금 그는 내 복을 가로채 갔다”란 결합을 잃었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는 말했다, 당신께서는 저를 위하여 남겨두신 복이 없읍니까”란 이 앞의 상태에서 결합함에 관한 어떤 것이 있었는지 아닌지를 의미한다;
“그리고 이삭이 에서에게 답하여 말했다”란 가르침을 의미한다; “보아라 나는 그를 너의 주인으로 만들었다”란 그 상태에서 그것이 지배권을 가질 것임을 의미한다; “그리고 모든 그의 형제를 나는 그에게 종으로 주었다”란 그 때에 진리에 대한 애착에 선에 대한 애착이 외관상으로 종속시켜졌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곡식과 새 포도주를 가지고 나는 그를 떠받치게 했다”란 그것의 선과 진리를 의미함은 이 앞의 해설과 같다; “그리고 이러할진대 내가 너를 위하여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이냐, 내 아들아”란 이런 상태일 경우 선을 위해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에서가 그의 아버지에게 말했다”란 자연적 선이 관찰함을 의미한다; “당신께서는 이 한 개의 축복밖에 없다는 말씀이십니까, 나의 아버지시여”란 이런 경우에서 자연적 선으로부터 인접되어질 수 있는 것이 그밖에 없는 것인지 아닌지를 의미한다; “저에게, 저에게도 역시 복을 빌어 주소서, 오 나의 아버지시여”란 비록 그것에 의해서 진리가 합쳐졌다 할 때 조차에서도 자연적 선이 결합을 갈망함을 의미한다; “그리고 에서는 그의 음성을 돋구어 슬피 울었다”란 변경됨이 한 발 짝 더 나아간 상태를 의미한다;
“그리고 그의 아버지 이삭이 그에게 답하여 말했다”란 자연적 선은 신성으로 만들어질 것이라고 자연적 선에 관해 지각함을 의미한다; “보아라, 땅의 살찐 것들로부터 너의 거처가 있으리라”란 생명은 신성한 선으로부터 임을 의미한다; “그리고 위로부터 하늘의 이슬로부터 너의 거처가 있으리라”란 그것이 신성한 진리로부터 임을 의미한다;
“그리고 네 검에 근거하여 너는 살 것이다, 그리고 너는 네 동생을 섬길 것이다”란 진리가 선에 합쳐지고 있는 한 외관상 선한 의지는 더 낮은 위치에 있을 것임을 의미한다; “그리고 장차 네가 지배권을 가지게 될 때”란 보다 앞선 위치에 있을 것임을 의미한다; “너는 네 목으로부터 그의 멍에를 부술 것이다”란 그러면 결합은 선을 통하여 있을 것이고, 진리는 선 속에 있을 것임을 의미한다.

34-38절에 포함된 것들과 마찬가지로 이 구절의 의미도 이미 상당 부분 설명되었다. 하여 이미 여러분은 알고 있으리라 생각한다. 하여 중복을 피하기 위해 설명을 생략하되 에서의 아버지가 에서에게 하는 축복의 대목만을 살피기로 한다.

그리고 그의 아버지 이삭이 그에게 답하여 말했다. 이는 자연적 선은 신성으로 만들어질 것이라고 자연적 선에 관해 지각함을 의미한다. 이는 이삭의 의미가 신성한 선 측면에서 주님의 신성한 합리성이다로부터; 그리고 말씀의 역사적 부분에서 “말하다”의 의미는 지각함이다로부터; 그리고 이삭이 말하는 대상인 에서가 자연적인 선을 표현함으로부터 알려진다. 이 자연적 선이 신성으로 만들어질 것임이 축복으로부터 분명해지는데, 아래에서 살핀다. 앞에서 이미 말해진 것은, 에서는 신성한 선 측면에서의 주님의 자연 평면, 그리고 야곱은 신성한 진리 측면에서의 그분의 신성한 자연 평면을 표현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에서는 신성으로 만들어지는 자연적 선을 표현하고; 바로 앞의 대목에서 야곱은 신성으로 만들어지는 자연적 진리를 표현했다. 이런 경우가 어떻게 되는지에 관하여는 이미 살핀 항목으로부터 이미 알 것이라 본다; 그러나 이에 조금 더 추가해볼 것이다.
먼저 에서가 표현한 자연적 선은 주님의 유아기로부터의 자연적 선이다. 이 선은 아버지로부터서는 신성이었고, 어머니로부터서는 인간이었다; 그리고 이 선이 어머니로부터 있는 한, 이 선은 유전적 악에도 감염되어 물들어 있다; 이럴진대, 이 선 내부 아주 깊숙하게 있는 신성을 받을 수 있는 질서 안에 즉시 있을 수 없었다; 따라서 주님에 의해 질서 안으로 회복됨이 우선 시급해진다. 이 경우가 야곱에 의해 표현되는 진리와 동일하다; 그 이유가 선이 있는 곳에는 그 선이 있어지기 위하여 질서 안에 진리가 있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유아의 생각함까지 포함해서 생각으로부터 있는 모든 것은 진리 속에 있고, 이 진리는 선으로부터 있는 의지 부분에 인접되어 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선 측면과 진리 측면에서의 자연 평면을 질서 안으로 되돌려 놓으시어, 그것이 신성을 받을 수 있도록, 고로 그분의 신성으로부터 그분 자신에게 흘러들도록 하시어, 그분은 어머니로부터 있었던 모든 인간 부분을 내쫓으셨다; 이때 에서는 선 측면에서 주님의 신성한 자연 평면을, 야곱은 진리 측면에서 그분의 신성한 자연 평면을 표현한다.
그러나 에서와 야곱은 형제들 같이 서로에게 인접한 주님의 신성한 자연 평면 속의 신성한 선과 신성한 진리를 표현한다. 이 선과 진리들은 실제의 선과 진리를 받고 만들어내고 하는 작업에서는 동시적으로 힘을 발휘할 수밖에 없다. 이 실제의 선과 진리는 차츰 살필 것이다. 이런 모두로부터 분명해지는 바, 얼마나 큰 비밀들이 말씀의 내적 의미 안에 포함되고 있는지 이다. 이 비밀들은 그 비밀의 지극히 일반적 관점조차도 인간의 납득력에는 도달되지 않는다; 단지 위에 설명한 정도로 만족해야 하지 않나 생각된다. 그럼에도 그것들은 천사들의 이해함이나 납득함에는 잘 어울려진다, 그들은 이런 사항들에 관하여 인간의 말로 표현할길 없는 사랑스러움과 복됨의 표현들로 예증된 천국의 생각들을 주님으로부터 받는다; 이런 점만 가지고도 천사의 지혜에 관해 어림잡아 볼 수 있을 것이다. 허나 인간의 이해력에서는 이런 천사의 명료함이 그늘의 수준일 뿐이다.

보아라, 땅의 살찐 것들로부터 네 거처가 있을 것이다. 이는 생명은 신성한 선으로부터 있다를 의미한다; 그리고 위로부터 하늘의 이슬로부터 네 거처가 있을 것이다. 이는 그것이 신성한 진리로부터 임을 의미한다. 이는 “살찜, fatness”의 의미가 선이다로부터, 여기서는 신성한 선이다, 그 이유는 이것이 주님에 관련해 말해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거처”의 의미가 생명(살아감)이다로부터, 그리고 “거처”가 선을 서술함으로부터; 그리고 “하늘의 이슬”이 평화와 순진의 상태인 선으로부터 파생되는 진리이다로부터, 여기서는 신성한 진리, 그 이유는 이것이 주님을 두고 말해지기 때문이다. 이 구절에서 야곱에게 말해진 축복에서와 비슷한 두 단어들이 다시 등장하는데, 즉 “하느님께서는 너에게 하늘의 이슬로부터와 땅의 살찐 것들로부터” (28절) 이다; 그러나 28절에서는 “이슬”(즉 진리)이 먼저 언급되고 “땅의 살찐 것들” (즉 선)이 두 번째로 언급된다; 그리고 그것들로부터 “하느님이 주실 것이다”하고 말해진 반면; 여기, 에서에게 말해지는 대목에서는 “땅의 살찐 것들” (선)이 먼저 언급되고 “하늘의 이슬” (진리)이 두 번째로 언급되고 있다; 그리고 여기서는 “하느님이 주실 것이다”하고 말해지지 않고, “네 거처는 그것들로부터 일 것이다”라고 말해진다; 이런 대목들 역시 야곱은 진리를, 에서는 선을 표현함을 보여준다; 또한 진리가 (거듭나기) 이전의 위치에서는 외관상 앞 자리에 있다는 것; 그러나 이것은 질서의 거꾸로이다는 것, (단지 거듭남의 발전 단계상 어쩔 수 없이 되어진 형국이다는 것) 이다.

그리고 네 검에 근거하여 너는 살 것이다, 그리고 너는 네 동생을 섬길 것이다. 이는 진리가 선에 결합되어 있는 한 선한 의지는 외관상(나타남에서는) 더 낮은 위치에 있을 것임을 의미한다. 이는 “검”의 의미가 전투하는 진리이다로부터; 그러므로 “네 검에 의지하여”란 진리가 선과 결합되어 있는 동안을 표시하는데, 그 이유는 결합은 전투들을 수단으로, 즉 시험들을 수단으로 결과되기 때문이다; 이 전투, 시험 없이 진리는 결합되지 않는다; 그리고 “네 아우를 섬김”의 의미는 보다 낮은 위치에 있을 것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럼에도 선이 보다 낮은 위치에 있는 것은 아니다, 단지 겉보기에 그렇게 보일 뿐이다.

그리고 장차 네가 지배권을 가지게 될 때가 올 것이다. 이는 앞의 위치에 있을 것임을 의미한다. 이는 “지배권을 가짐”이 앞 자리에 있게 됨을 의미함으로부터 알게 된다. 이제 아래에서 살핀다.

너는 네 목으로부터 그의 멍에를 부술 것이다. 이는 그때에 결합은 선을 통하여 있을 것이고, 진리는 선 속에 있을 것임을 의미한다. 이는 “목으로부터 멍에를 부숨”의 의미가 자유함을 의미한다로부터 알게 된다. (“목”이 유입과 교통함을 의미하고, 그 결과 결합을; 그리고 “목 위에 있는 멍에”는 억제됨과 가로막음이다는 것은 3542항을 보라.); 고로 “목 위의 멍에를 부숨”은 억제됨과 가로막힘으로부터 자유함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이것은 선을 통하여 결합함; 또한 진리가 선 속에 있게 됨을 표시한다; 그 이유가 억제됨과 방해됨이 더 이상 있지 않은 곳에서 선은 그 자체 진리에게로 흘러들고 결합하기 때문이다. 이 대목에 관한 것은 앞의 많은 항목에서 여러 번 설명해왔다
그러나 진리가 우선 순위에 있고, 선은 그 뒤 순위에 있게 나타남에 대한 납득은 쉽지가 않다. 이런 원인은 대체로 이와 같은 사항들을 곰곰히 반추해보는 자가 매우 적기 때문; 그리고 진리와 구분된 것, 즉 선을 잘 숙고해보지 않는 이유 때문일 것이다. 더욱이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 안에서 살아가는 모든 이들은 선이 무엇인지를 모르는데, 그 이유는 그들은 이 두 사랑을 제외하고 어떤 선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믿지 않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들은 선에 무지하기 때문에 진리에도 무지하다, 그 이유는 진리는 선 속에, 선으로부터 있기 때문이다. 참으로 이들은 계시로부터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선인지를, 그리고 진리는 말씀으로부터 파생된 교리적인 것들로 구성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이런 사항들에 따라 살지 않는다, 그들은 이와 같은 선과 진리에 관한 지각을 가지지 않고 있다, 단지 지각과 분리된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들을 가졌을 뿐이다. 그렇다, 거듭나는 중인 이들조차도 그들이 거듭나지 않은 이상 선이 무엇인지 모른다; 그 이유는 거듭나기 이전의 그들은 진리가 선이었다고 상상했기 때문, 그리고 진리에 따라 행함이 선이다고 상상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것은 선이 아닌 진리일 뿐이다. 인간이 이 상태에 있을 때, 그는 “야곱”에 의해 묘사된 상태, 그리고 그에게 말해진 축복에서 묘사된 상태에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가 선에 대한 애착으로부터 선을 행하는 상태에 진입할 때, 그는 에서에게 주어진 축복에서 묘사된 상태 안으로 진입하는 것이다.
이것은 인간의 네 시기들로 예증될는지 모른다, 그의 첫 시기에서 인간은 말씀에 포함된 것들을 기억에 의해서만 알고 있다, 신앙의 교리적인 주제들에 대하여도 마찬가지 이다; 그리고 그는 거기로부터 있는 많은 것들에 친숙해질 때 그것이 선이라고 자신을 믿게 한다, 그리고 그것들 중 약간은 응용해보지만, 이것은 자신의 삶에서가 아니고 타인의 삶에서 응용해보는 것이다. 그의 두 번째 시기에서, 즉 그가 더 성장할 때, 그는 말씀 안에 포함된 것들, 교리 안에 있는 것들을 아는 것만에 만족하지 않고 그것들을 자신의 생각으로부터 곰곰이 생각해보기를 시작한다, 그리고 그는 그것에 자신의 생각들로부터의 것을 추가하는 데, 추가한 만큼에서 그는 기뻐한다; 그 결과 그는 일종의 세상적 사랑으로부터 진리에 대한 애착 안에 있고, 이 세상적 사랑은 만일 이 사랑이 없으면 배움이 없고 말았을 터인 바, 이 사랑은 그의 배움의 수단이 된 셈이다. 그의 세 번째 시기에서, 만일 그가 거듭나질 수 있는 이들의 한 사람에 해당된다면, 그는 유용함, 쓸모 있음 (use)에 관해서 생각하기를 시작한다, 하여 그가 말씀을 읽고, 교리적인 주제들을 곰곰이 반추해보되 이는 뭔가 쓸모 있어짐, 유용함을 위해서이다. 그리고 그가 이런 상태에서 고민할 때, 질서는 바뀌어진다, 하여 진리는 더 이상 그의 첫 순위에 머무르지 않는다. 마지막, 그의 네 번째 시기에서, 즉 그가 거듭난 시기에 올 때, 즉 그의 상태는 알찬 상태, 가득한 상태이기 때문에, 그는 말씀과 말씀으로부터 있는 교리적인 것들, 즉 진리들을 생활의 선을 위하여, 결과적으로 생활의 선으로부터 사랑한다. 고로 외관상 뒤의 위치에 있던 선이 앞의 위치에 와 있는다.
선이 외관상 뒤의 위치에 있는 이유는 인간의 모든 애착 안에 아주 깊게 숨겨 놓여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바깥쪽의 것이 안쪽의 이것에 일치하지 않는 이상 그 자체를 명백히 할 수 없다, 다시 말해 자기 영광됨이나 세상의 영광됨 같은 것들이 헛되어지고 텅비어질 때까지 전혀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러나 인간이 거듭난 후, 자아와 세상의 영광 같은 것들은 완전히 물러간다; 그리고 선, 아주 깊은 속에 감추여 놓였던 선은 마치 감금된 장소로부터 풀려나듯 모습을 나타내어 바깥쪽에 있는 것들 안으로 흘러들고, 진리들을 그 자신으로 만든다, 즉 선의 진리들로 만든다, 그렇게 해서 자체를 명백히 한다.
한편, 그의 의식 측면 안에 있는 무의식적인 것들 같이 선은 그가 생각하는 모든 것 안에 있고, 그가 행하는 모든 행위 안에 있다. 인간은 자기가 이 무의식적 측면을 가진지를 알지 못한다. 그 이유가 인간은 의식적인 것, 즉 그의 자기 자신인 것 외에는 자신 안에 어떤 것이 있는지를 모르기 때문이다. 이 무의식은 두 겹이다, 하나는 그가 아버지와 어머니로부터 가지는 그의 유전적인 것들, 한편, 다른 하나는 주님으로부터 천국을 통하여 흘러든 것들이다. 인간이 성장할 때, 그가 자신을 거듭나지도록 허용치 않는다면, 그는 자기 부모로부터 유전적으로 받은 것을 더욱 더 두드러지게 한다; 그 이유는 그가 이 유전적 악을 가져다가 (실제 생활에 응용함으로) 자기 것이 되게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거듭나는 이들과 더불어서는 천국을 통하여 주님으로부터 있는 무의식적인 것들이 성년의 나이에서 그 자체를 두드러지게 한다; 그리고 이러는 사이에 그 무의식적인 것들이 그의 생각들 속의 각각 그리고 모든 것에서, 또한 그의 의지 속의 각각 그리고 모든 것을 통치하고 있다. 물론 당사자에게 이것은 보여지지는 않는다.

41-45절. 그리고 에서는 그의 아버지가 야곱에게 축복한 그 축복으로 말미암아 그를 미워하였다, 그리고 에서는 그의 심중에 말했다, 내 아버지를 위해 곡할 날이 가까웠다, 그리고 나는 내 동생 야곱을 죽이리라. 42 그리고 그녀의 큰 아들 에서의 이 말이 리브가에게 말해졌다. 그리고 그녀는 (사람을) 보내서 그녀의 작은 아들 야곱을 불렀다, 그리고 그에게 말했다, 보아라, 네 형 에서가 너를 죽여서 너에 관련된 자신을 위로하려고 한다. 43 그리고 지금 내 아들은 내 음성에 귀기울여라, 그리고 일어나, 너는 하란의 내 오라버니에게로 도망하여라. 44 그리고 네 형의 분노가 풀리기까지 몇 날 동안 그와 함께 머물러라, 45 네 형의 노여움이 너로부터 풀리고 네가 그에게 했던 것을 잊으면, 나는 거기로 (사람을) 보내서 너를 데려 오겠다. 어찌 하루에 너희 둘을 잃어서야 되겠느냐?

그리고 에서는 그의 아버지가 야곱을 축복한 그 축복으로 말미암아 그를 미워하였다. 이는 자연적 선은 진리의 뒤집혀진 결합을 혐오했음을 의미한다. 이는 “미워함”의 의미가 여기서는 내적 의미에서 혐오하는 것이다로부터, 이 혐오함이 이어지는 것들에서 취급되는 주제이다로부터; 그리고 에서의 표현이 자연적 선, 야곱은 자연적 진리이다로부터; 그리고 “축복함”의 의미가 결합이다로부터; 여기서는 이 결합은 야곱에 의해 표현된 진리가 거꾸로된 결합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내적 의미에서 “미워하는” 것이 혐오함(싫어함)인 이유는 이것이 에서에 의해 표현된 선을 서술하기 때문에서 이다, 그리고 선은 미워함이 무엇인지조차 모른다, 선은 미워함과 직반대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두 반대되는 것들은 같은 주제 안에 결코 놓여질 수 없다. 그러나 선, 또는 선 안에 있는 이들은 미움 대신 어떤 혐오함 같은 것을 느낀다; 이로부터 “미워함”은 내적 의미에서 혐오하는 것을 표시한다; 그 이유가 내적 의미는 천국에 있는 이들을 위해 우선적으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거기로부터 내려와서 글자 의미 안에 파생될 때, 즉 말씀의 역사물에 도착할 때, 혐오에 대한 애착은 “미워함”의 표현을 빌리게 된다. 그렇다 해도 천국에 있는 이들은 여전히 미워함에 대한 어떤 생각도 지니지 않는다. 이에 대한 예증으로는 제 1권 1875항에서 경험으로부터 관련된 것, 주님의 기도문에서, “우리를 시험으로 인도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하시옵소서”라는 말에 관하여서 이다; 이 기도 안에서 순수하게 천사적인 것만이, 즉 선만이, 시험에 관한, 악에 관한 어떤 생각함이 없는 정도에 이르기까지 시험과 악이 거절되고 있다. 그리고 이 거절됨에는 주님을 생각하는 동안에도 한켠으로는 악한 존재가 생각나는 것에 관하여 그것에 분노하고 혐오하는 것이 첨가되고 있다.
이런 경우는 말씀에서 주님, 또는 여호와께서 “미워하신다”라고 읽게 되는 대목을 만날 때도 마찬가지 이다. 스가랴서에서:
너희는 네 이웃을 두고 네 심정에서 악을 생각하게 하지 말아라; 그리고 거짓말을 해서 맹 세함을 사랑하지 마라; 그 이유가 이 모두는 내가 미워하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여호와께서 말하신다 (슥. 8:17).
모세의 책에서:
너는 너희에게 기둥을 세워 두지 말라, 이것을 여호와 네 하느님께서 미워하신다
(신. 16:22).
예레미야서에서:
나의 상속 재산(이스라엘족)이 숲에 있는 사자 같이 나에게 되어졌다; 그녀는 나를 향하여 그녀의 음성을 발음하였다, 그러므로 나는 그녀를 미워했다 (예. 12:8).
호세아서에서:
길갈에서 나는 그들을 미워했다; 그들의 일들의 사악함 때문에 나는 그들을 나의 집으로부 터 몰아냈다; 나는 그들을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는다 (호. 9:15).
이 구절들에서 “미워함”이 여호와, 또는 주님을 서술하고 있으나, 내적 의미에서는 미워함이 아니라 자비이다, 그 이유는 신성은 자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이 악 안에 있는 이들 안으로 흐를 때, 그리고 그가 악의 처벌이라는 것에 몰입할 때, 이 자비는 미워함으로 나타난다, 그렇기에 글자 의미 역시 그렇게 기록되고 있다.
이와 같은 방식에서 “노여워하심”, “분노하심”, “격노하심”으로 말씀에서 주님, 또는 여호와를 서술하고 있다. 여느 다른 백성들보다 더욱 유대인과 이스라엘족들은 그들이 불친절하게 어떤 것을 관찰했을 때, 자기들 동료들에서 조차 목격될 때, 그들은 그것을 잔인하게 처리하는 것이 합당하다고 믿었다, 게다가 그들을 살해하기 조차 하여 들짐승의 밥으로 내던지기조차 했다; 그러므로 주님의 자비는 내향으로 흐르기 때문에, 그들과 더불어 이 자비는 미워함 같은 것으로 바뀌어, 그들의 적들을 향하여 뿐만 아니라 그들의 동료들을 향하여서도 미워함으로 바뀔 수밖에 없게 되었는 바, 그들은 여호와께서는 미워함을 좋아하시고, 성내시고, 분노하시고, 격노하신다고밖에 더 달리 믿을 수가 없었다. 이런 이유로 말씀 역시 그런 나타남에 따라 표현되어져 있다; 그 이유가 이와 같은 것이 인간의 품질인 바, 주님 역시 그들에 맞추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미워함이 사랑과 선행에 있는 이들과 더불어 어떤 품질 속에 있는 지가 주님의 말씀으로부터 분명해진다. 마태복음서에서:
너희가 들어왔던 것은, 너는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 그리고 네 적은 미워하라는 것이었 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네 적들을 사랑하라, 너를 저주하는 그들을 축복하라, 너 를 미워하는 그들에게 선을 행하라, 그리고 너를 핍박하고 피해를 입히는 그들을 위해 기 도하라, 그리하면 너희는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들이 될지 모른다
(마. 5:43-45).

그리고 에서가 그의 심중에서 말했다. 이는 생각을 의미한다. 이는 “심중에서 말함”이 생각함이기 때문이다.

내 아버지를 위해 곡할 날이 가까웠다, 그리고 나는 내 동생 야곱을 죽이리라. 이는 진리의 자아로부터 파생된 생명을 박탈하고 정반대로 함을 의미한다. 이는 “곡하는 날”의 의미가 상태가 정반대로 됨이다로부터; 그리고 “내 동생 야곱을 죽임”의 의미가 진리의 자아로부터 파생된 생명을 박탈함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여기서의 경우 역시 방금 앞에서 살핀 “미워함”이 내적 의미에서는 미워함이 아니다는 것과 맥락을 같이 한다. 그리고 다른 삶에서 계속적으로 거행되는 것은, 천국으로부터 흘러 악에 있는 이들에게 들어가는 모든 선은 악으로 변해진다는 것, 그리고 지옥의 것들과 더불어서도 선은 반대적으로 변해진다는 것이다; 진리가 거짓으로 변하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그러므로 이런 영들과 더불은 악과 거짓은 천국에서는 선들과 진리이다. 그리고 악과 거짓을 거절하고 있는 영들에게서는 선이 되기 위하여, 선과 진리에 관한 생각이 표출되고 있다. 더욱이 악과 거짓인 것이 선과 진리에 있는 이들에게 접근될 때, 이것은 악과 거짓으로 나타나지 않고, 그들의 선함의 본성과 상태에 일치하는 어떤 형태 아래 나타난다.
이런 모두로부터 분명해지는 바, “아우 야곱을 죽임”의 내적 의미는 죽이는 것이 아닌, 진리에 적합하지 않은 생명을 박탈하는 것이다; 그 이유가 진리는 그 스스로 생명을 가지지 못하고 선으로부터 가지는 바, 마치 선을 담는 그릇의 역할을 할 뿐이다; 그리고 선 안에 생명이 있고, 진리 안에는 없는 바, 선으로부터 있지 않으면 생명이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진리의 자아로부터 파생된 생명의 박탈은 진리의 소멸이 아니라 진리가 생기 있어짐 인 것이다; 그 이유가 진리가 그 자체로부터 생명을 가졌다고 나타날 때, 그것은 생명이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이 박탈될 때, 진짜 생명이 생명 자체이신 주님으로부터 선을 통하여 선물되어진다.
이런 사항은 다른 삶에 있는 이들로부터서는 분명하게 나타난다. 진리만에 있는 이들과 더불어서는 생각들이 닫혀진 것으로 나타난다, 하여 천국 속에 있는 것들은 오직 유입이 천국으로부터 있다고 알려지지 않는 조건에서만 그 생각들 안으로 흐를 뿐이다. 이와 달리 선 안에 동시에 있는 이들과 더불어서는 그들의 생각들은 열린 것으로 나타난다, 하여 천국 속에 있는 것들은 마치 조그만 천국으로 흘러들 듯, 또는 천국의 형상 안으로 흘러들 듯 한다; 그 이유가 그것들은 진리들을 통하여 그것들에 있는 선을 수단으로 흘러들기 때문이다. 진리가 자아로부터 파생된 생명을 박탈당하는 것은 선이 앞의 위치에 있을 때, 또는 지배권을 가질 때이다는 것은 이 미 앞의 대목들에서, 즉 외관상 앞의 위치에 진리가 먼저 있게 되는 것에 관하여, 그리고 그 다음 선이 앞의 위치에 있게 됨에 관하여 살핀 대목으로부터 이미 알고 있을 것이다; 여기서는 자아에서 파생된 생명의 박탈이 의미되어진다. 이런 것들이 “아버지를 위해 곡함”이라 불리우는 이유는 곡함의 날들이 상태가 정반대가 됨을 의미하기 때문, 이런 정반대로 되는 상태가 이삭이 극도로 떨었다 (33절)에서; 그리고 에서가 목놓아 울었다 (34절)에서도 의미되었다.

그리고 그녀의 큰 아들 에서의 이 말이 리브가에게 말해졌다. 이는 주님께서 그분의 지상 시절 자연적 선의 목적(purpose), 또는 의도(animus)에 관하여 지각하심을 의미한다. 이는 “말해짐”의 의미가 생각하는 것과 반추해보는 것이다로부터, 고로 지각하는 것이다로부터; 그리고 리브가가 주님의 신성한 합리성의 신성한 진리 측면을 표현함으로부터; 그리고 에서가 자연적 선을 표현함으로부터 알려진다. 이상을 종합해보면, “그녀의 큰 아들 에서의 말이 리브가에게 말해짐”은 자연적 선의 목적과 의도에 관하여 신성한 진리로부터 있는 주님의 지각하심을 의미하게 된다.

그리고 그녀는 보내서 그녀의 작은 아들 야곱을 불렀다, 그리고 그에게 말했다. 이는 신성한 진리를 통한 유입으로부터 진리에 대한 애착을 관찰하는 상태를 의미한다. 이는 “부르고 말한” 리브가가 신성한 선과 결합한 주님의 신성한 합리성 속의 신성한 진리이다로부터; 야곱의 표현이 자연적 진리, 또는 진리에 대한 애착이다로부터; 그리고 “그를 부르고 그에게 말함”이 지각하는 상태, 그러나 여기서는 주제가 자연 평면인 바 지각이 아닌 관찰함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보라 네 형 에서가 너를 죽여서 너에 관련된 자신을 위로하려고 한다. 이는 진리로부터 자아에서 파생된 생명을 박탈하여 상태를 바꾸려는 의도를 의미한다. 이는 누군가 때문에 “자신을 위로함”의 의미가 누군가에 관하여, 또는 어떤 것에 관하여 희망을 가지고 마음의 불편함을 달래는 것이다로부터- “너에 관하여”란 진리의 상태의 바뀜을 함축한다; -그리고 “너를(야곱을) 죽인다”의 의미가 진리에서 자아로부터 파생된 생명을 박탈한다 임으로부터(이는 생명의 소멸이 아니라 생생해짐이다, 3607항); 진리의 생명에 관련된 경우는 이러하다: 진리 안에 있는 이들, 또는 진리에 대한 애착 안에 있는 이들이 자기들이 아는 진리, 또는 자기들이 감명받은 진리에 따라서 살지 않을 때도 그들은 자기 사랑, 또는 세상 사랑으로부터 파생된 기쁨과 즐거움을 얼마 정도는 누린다. 그들은 자기의 진리에 대한 애착이 이 사랑에 인접해 있기에 이 사랑으로부터의 것이 선 같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선은 아니고, 그렇다고 완전히 무용지물은 아니다. 그 이유가 이 사랑 덕분에 그들은 배워 습득함을 기꺼이 하기 때문이다. 이후 이 지식들은 진짜 선과 선한 생활을 영위하는데 도움을 준다. 진리가 이런 상태에 있을 때, 즉 진리에 대한 애착 안에 있을 때, 이때의 진리는 자아에서 파생된 생명을 가진다고 말해지는 것이다. 그러나 이 생명은 생명이 아니다, 그 이유가 생명이 없는 자기 사랑이나 세상 사랑, 그것들로부터의 쾌락과 즐거움으로부터 있는 생명이기 때문이다. 생명은 오로지 천적이고 영적인 사랑, 이 사랑으로부터의 즐거움과 기쁨에서 비롯될 뿐이다. 그러므로 이 진리가 자아에서 비롯되는 생명을 박탈당할 때, 비로소 이 진리는 생명을 받고 살아 있게 된다.
이런 사항들은 자아와 세상에 대한 애착 안에 있는 이들에 의해서는 납득됨이 가능해질 수 없는데, 그 이유가 그들은 다른 생명은 가능하지 않다고 믿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그들은 이 생명을 박탈당한다면, 필시 자기들은 산다는 것이 완전히 중단된다고 믿는다; 그 이유가 이들은 영적인 생명, 천국의 생명이 무엇인지 결코 알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쨌든 사실인 즉, 자아와 세상에 대한 애착 속의 생명을 박탈당한 이 후에서야 천사의 생명, 천국의 생명이 표현할 길 없는 지혜와 행복과 더불어 주님으로부터 흘러든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전의 생명은 이후의 생명으로부터 바라보면, 그 생명은 말하고 생각하는 외적 형체를 빼면 생명 없음, 또는 신성의 어떤 것도 깃들지 않은 들짐승 수준의 불결한 생명 정도로만 나타난다.
선이 상태를 바꾸려고 자아로부터 파생되는 생명을 박탈하려는 의도를 가졌다는 점, 이것이 에서가 야곱을 죽여서 야곱에 관련된 자신을 위로하려 한다에 의해 의미되고 있는데, 이에 대한 경우는 이러하다: 거듭나지고 있는 이들과 더불어 그 인간안에 있는 선은 계속적으로 상태를 바꾸려하는 의도 안에 있다, 그렇게 해서 진리가 앞 자리에 있지 않고 다음 자리에 있도록하려 하고 있다. 이래야 천국의 상태에 일치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의도는 깊이 감추여놓여 있어 의도가 결과를 보기 전까지에서는 나타나지 않는다. 부부의 사랑 같은 경우가 이런 예에 적당할 것이다. 이 사랑은 인간의 유아기나 어린 시절에는 아예 없는 듯하게 보이지만 실상 그 인간 내부 깊숙이 있어 전혀 드러나지 않은 것일 뿐, 이 사랑 주변의 모든 것이 적절히 배치되는 상황에 진입할 경우 그 자체를 분명히 한다. 식물 왕국의 경우에도 이에 대한 예는 있다: 모든 나무나 모든 초목은 그것 내부에 열매나 씨를 생산하려는 의도가 깊숙이 자리잡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여러 가지 수단들, 즉 가지, 잎, 꽃 등등이 먼저 생산된 후에야 열매나 씨를 생산하려는 의도가 실제에서 가능해진다.
새로이 출생하는 이들과 더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선과 진리의 결혼의 원리는 내부에 감추인 채로 오랫동안 놓여져 있는다; 그렇지만 이 원리는 가만히 막연히 있기만 하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효능적인 원인을 찾고 그것이 결과 안에 맺어지게 하려 노력하고 있다; 그럼에도 모든 것들이 질서 안으로 배치될 때까지 이 의도는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들이 적절하게 배치될 때 밖으로 모습을 드러내어 명백히 한다. 이 노력이 자아에서 비롯하는 생명은 박탈하여 상태가 바꾸어지게 하려는 의도에 의해 뜻해진다. 이상 살핀 바로부터 분명해지는 것은 내적 의미는 글자 의미에서 표현된 것과는 매우 다르다는 것, 즉 내적 의미에서는 진리를 질서 안으로 환원되게 하려는 것, 하여 진짜 생명으로 살아 있게 하려는 것이지 파멸을 취급하는 것이 아니다는 것이다.

그리고 지금 내 아들은 내 음성에 귀기울여야 한다, 그리고 일어나라. 이는 아직까지는 지연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는 “음성에 귀기울임”의 의미가 순종이다로부터; 즉 그가 바뀌는 상태 안에서 아직 머뭇거릴 것이다는 것, 이것이 이어지는 아래에서 취급된다.

너는 하란의 내 오라버니 라반에게로 도망하여라. 이는 외적 또는 육체적 선에 대한 애착쪽으로를 의미한다. 이는 라반이 자연적 인간 안에 있는 선에 대한 애착이다로부터; 그리고 “하란”의 의미가 외적인 것, 그리고 거기로부터 상대적으로 불명료함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러나 여기서 “라반”과 “하란”에 의해 의미되는 자세한 것은 이후 그것들이 언급되는 곳에서 살핀다, 즉 이것은 공통의 지주로부터 분가된 선(방계적인 선)이다; 그 이유는 선들과 진리들은 그 자체들 사이에서 결합을 가지는데, 마치 부모, 형제, 친척 관계 등등 같은 가족 관계와 같다. 그러나 이런 사항들은 생활의 선 안에 있지 않은 이들로부터서는 감추여 있다, 얼마나 잘 감추여 있던지 그들은 선이 무엇인지조차 모르고 있다, 고로 진리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있다; 만일 그가 이런 것들을 먼저 알았다면, 즉 만일 그가 생활과 결합된 교리로부터 그렇게 행했다면, 또는 교리와 결합된 생활로부터 그렇게 했다면, 그는 그때 선과 진리에 관한 무수한 것들을 알고 지각도 할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계속적으로 구분되어 알아지고, 그 후에 그것들의 상호적이고 서로 관계하는 결합들로 이어지고, 마지막 그것들의 시리즈에 근접하고 다시 각각의 근접된 것들에서 무수한 것들을, 결국 그것의 형태에서 있는 천국, 즉 그것의 아름다움과 행복을 향유한다.

그리고 그와 함께 며칠 동안 머무르거라. 이는 연속되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머무는” 것은 “거주하는”것과 거의 마찬가지인 바, “사는” 것과 같은 의미이다. 그러나 이런 차이는 있다, 즉 “머무는” 것은 선과 더불은 진리의 삶을; “거주하는” 것은 진리와 더불은 선의 삶을 서술한다; 그리고 “날들”의 의미가 때들과 상태들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고로 이것은 때와 상태가 동시에 있는 것, 결과적으로 연속되는 것, 여기서 “며칠동안 머무르는 것”에 의해 의미되어 있다. 이 계속적인 조건, 즉 라반과 더불은 야곱의 체류는 이어지는 몇 장에 걸쳐 취급되어진다.

네 형의 분노가 풀릴 때까지. 이는 상태가 거기로 되돌려질 때까지를 의미한다; 그리고 네 형의 노여움이 너로부터 풀릴 때까지. 이는 자연적 선과 더불은 상태의 연속을 의미한다. 이는 “분노(wrath)”, “노여움(anger)”의 의미가 불유쾌한 상태들이다로부터 분명해진다. 이는 이어지는 구절에서 보여질 것이다. 이런 상태들이 더 이상 불유쾌해져 있지 않을 때, 즉 그 자체 결합하기를 시작할 때, 그때가 “분노가 풀린다”라고, “노여움이 풀릴 때까지”라고 말해진다; 이로부터 “네 형의 분노가 풀릴 때까지”는 상태가 거기로 바뀔 때까지를 의미하고; “네 형의 노여움이 풀릴 때까지”란 자연적인 선과 더불어 상태가 연속되는 것을 의미한다. “분노”는 이것을, “노여움”은 저것을 포함하는 바, 비슷하지만 다른 국면을 보여준다. 그렇지 않으면 말씀의 기록이 무익하게 반복되는 듯 여겨질 것이다. 각 표현에서 함축되는 것은 일반적 해설로부터, 또한 분노와 노여움이 서술하는 것들로부터 분명해진다; 그 이유가 “분노”는 진리를, 여기서는 선으로부터의 진리를 서술하는데, 이 진리는 에서에 의해 표현된다, 이에 반해, “노여움”은 이 선 자체를 서술한다.
“분노”와 “노여움”은 말씀에서 자주 언급되는 편에 속하는 단어이다, 그러나 내적 의미에서 그것들은 분노와 노여움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불유쾌함을 의미하는데, 진리 측면에서의 불유쾌함은 “분노”라고, 선 측면에서의 불유쾌함은 “노여움”이라고 불리운다; 그리고 반대적 의미에서, “분노”는 거짓, 또는 거짓에 대한 애착, 즉 거짓의 원리의 불유쾌함을; “노여움”은 악, 또는 악의 탐욕, 즉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의 불유쾌함이다. 이런 반대적 의미에서 일 경우, “분노”와 “노여움”은 글자 대로의 분노와 노여움이다, 그러나 선과 진리를 이 단어가 서술할 경우, 이것은 열정(zeal)이다; 이 열정이 외적 형체에서 있노라면, 분노와 노여움 같이 나타난다, 그러므로 글자 의미에서 그렇게 불리우는 것이다.
내적 의미에서 “분노”와 “노여움”이 단지 불유쾌함인 것은 아래 구절로부터도 분명해질 것이다. 이사야서에서:
여호와께서는 모든 나라들에게 격해 있으시다, 그리고 분노가 그들의 모든 군대를 향하여 있다 (이. 34:2).
“나라들을 향하여 여호와의 격하심(열받치심, heat)”은 악을 향해 불유쾌하심을 표시한다; “그들의 모든 군대를 향하여 분노하심”은 파생되는 거짓들을 향하여 불유쾌하심을 표시한다
다시:
누가 야곱을 먹잇감으로 주었고, 이스라엘을 전리품이 되게 하였느냐? 여호와가 아니더냐? 그분을 향하여 우리는 죄를 지은 것 아니냐? 그러므로 그분은 그에게 그분의 노여움의 분 노를 쏟으셨다 (이. 42:24, 25).
“노여움의 분노”는 악의 거짓을 향하여 불유쾌하심을 표시한다; “야곱”은 악 안에 있는 이들을; “이스라엘”은 거짓 안에 있는 이들을 표시한다.
다시:
나는 포도즙틀을 홀로 밟았었다; 그리고 백성으로부터 누구도 나와 더불어 있지 않았다; 그 리고 나는 그들을 내 노여움에서 짓밟았다, 그리고 그들을 내 분노에서 파괴했다; 그리고 나는 내 노여움에서 백성들을 짓밟았다, 그리고 그들을 내 분노에서 술취하게 만들었다
(이. 43:3, 6);
위는 주님이 취급되고 시험에서 그분의 승리하심들을 다루고 있다; “노여움에서 짓밟고 뭉개는” 것은 악들 위에서의 승리들을; 그리고 “분노에서 파괴하고 술취하게 만드는” 것은 거짓들 위에서의 승리들을 표시한다; 말씀에서 “짓밟는, trample upon” 것은 악을 서술하고, “술취하게 만듦”은 거짓을 서술한다. 예레미야서에서:
고로 주 여호비께서 말하신다, 보라, 내 노여움과 분노가 이 장소 위에, 인간 위에, 그리고 짐승 위에, 그리고 들판의 나무 위에, 그리고 지면의 열매 위에 쏟아질 것이다; 그리고 그 것은 태우되 꺼지지 않을 것이다 (예. 7:20);
위 구절에서는 “노여움”과 “분노”가 모두 언급되는데, 그 이유는 악과 거짓이 취급되기 때문이다.
예언서에서 통상적으로 악을 말할 때 거짓도 말해진다, 마찬가지로 선이 말해질 때 진리도 말해지는 경우가 많다. 그 이유는 선과 진리의 결혼이 천국의 결혼이기 때문이고 말씀의 모든 것 안에는 이 결혼이 스며있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노여움”과 “분노”도 같이 언급되고 있다; 그렇지 않다면 하나의 단어만으로도 표현이 넉넉했을 것이다. 예레미야서에서:
나는 스스로 내뻗친 손과 강한 팔로, 노여움에서조차, 그리고 분노에서, 그리고 큰 격함에 서 너희와 싸울 것이다; 그리고 나는 이 도성의 주민들을 짓부술 것이다, 인간과 짐승 모두 이다 (예21:5, 6).
위에서 “노여움”은 악의 처벌을; “분노”는 거짓의 처벌을; 그리고 “격함, 열받음, heat”은 이 둘의 처벌을 서술한다; “노여움”과 “분노”는 그것들이 불유쾌함을 표시하기 때문에 처벌을 표시한다; 그 이유가 불유쾌한 것들은 충돌을 있게 하는 바, 이때 악과 거짓이 처벌되는 것이다; 그 이유가 악 안에 선에 대한 불유쾌함이 있고, 거짓 안에 진리에 대한 불유쾌함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불유쾌함 때문에 충돌 또한 있을 수밖에 없다; 이로부터 처벌이 온다는 것은 이미 살핀 적도 있다.
에스겔서에서:
고로 나의 노여움이 극점에 도달될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들 위에 내 분노를 얹어 놓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나 자신을 위로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내가 그들 위에 내 분노를 극에 도달하게 할 때, 내가 노여움에서와 분노에서와 분노의 책망함에서 심판을 행할 때 나 여호와가 내 열정에서 말했었다는 것을 알 것이다 (겔. 5:13, 15);
위 구절에서 악과 거짓에 대한 불유쾌함, 고로 공격함으로부터 있는 것들, 즉 “노여움”은 악의 처벌을; “분노”는 거짓의 처벌을 표시한다. 모세의 책에서:
그를 용서하는 것을 여호와께서 반기지 않으실 것이다, 그 이유는 그때 여호와의 노여움과 그분의 열정이 그 인간을 향하여 연기를 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호와께서는 그를 이스 라엘의 모든 지파들로부터 악쪽으로 분리하실 것이다. 거기로부터의 온 토지가 유황과 소 금, 불태움일 것이다; 그것에는 씨뿌림도, 싹틈도, 어떤 풀잎도 나오지 못할 것이다; 마치 소돔과 고모라, 아드마와 스보임이 뒤짚힘 같다, 이것들은 여호와께서는 그분의 노여움과 그분의 분노에서 전복하셨다; 그리고 모든 나라들이 말할 것이다, 어찌하여 여호와께서 이 토지에 이렇게 하셨을까? 이 큰 노여움의 격함은 무슨 뜻일까? (신. 29:20-24).
“소돔”은 악을 표시하고, “고모라”는 악에서 파생되는 거짓을 표시한다, 위에서 모세가 말하는 나라들은 악과 거짓들에 관련하여 비교한 것이다, 그러므로 “노여움”은 악에 관련하여서 이고, “분노”는 거짓에 관련하여서 이고, “노여움의 격함(heat)”은 악과 거짓 모두에 관련하여서 이다. 이와 같은 것이 여호와로부터 비롯되었다고 기록되는 것은 밖으로 나타남에 따른 것이다, 그렇게 나타나는 이유는 인간이 악에 몰입할 때, 악이 그를 처벌할 때 그렇게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가 네가 그에게 한 것을 잊으면. 이는 지연됨으로부터 획득된 습관을 의미한다. 이는 “잊는다”의 의미가 여기서의 경우 불유쾌함이 계속적으로 폐지되는 것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리고 이것이 지연됨, 그 결과 습관화됨을 수단으로 결과되는 바, 이것이 “네가 그에게 한 것을 잊으면”에 의해 의미되고 있다.

그리고 내가 (사람을) 보내서 거기로부터 너를 데려 오마. 이는 그러면 끝남을 의미한다. 이는 전과 후의 구절들에서 분명해진다; 끝, 즉 “(사람을) 보내어 거기로부터 데려옴”에 의해 의미되는 것은 진리가 선에 일치할 때이고, 진리가 선에 종속되어 선을 섬길 때이다; 이 끝남은 야곱이 라반에게 체류함이 끝난 후, 에서가 야곱을 만나러 달려가고, 그를 포옹하고, 그의 목을 끌어안고, 그리고 그에게 키스하고, 그들이 함께 (감격하여) 울었을 때 당시, 에서에 의해 표현되었다 (창. 33:4); 그 이유가 끝이 있을 때, 즉 결합이 있을 때, 그때 합리성의 선은 자연 평면의 선 안으로 직접 흘러든다, 그리고 이 선을 통하여 이 선의 진리 안으로 흘러든다, 그리고 간접적 방식으로는 합리성의 진리를 통하여 자연 평면의 진리 안으로, 그리고 이 진리를 통하여 자연 평면 속의 선 안으로 흘러든다. 이로부터 합리성의 진리를 표현하는 리브가에 의해 자연 평면의 진리를 표현하는 야곱에게 “내가 (사람을) 보내어 너를 데려오마”라고 왜 말해졌는지가 분명해진다.

어찌 하루에 너희 둘을 잃어서야 되겠느냐? 이는 이와 달리해서는 결합이 없을 것임을 의미한다. 이는 만일 이런 것들이 행해지지 않는다면, 즉 야곱이 라반에게 체류함의 내적 의미에서 의미되는 것이 뒤이어 있지 않는다면, 진리는 선과 결합될 수 없다는 것, 고로 선은 자연 평면에서 진리와 하나되어 있지 못한다는 것, 결과적으로 합리성은 이 둘, 즉 자연 평면의 선과 진리 모두를 빼앗긴다는 것이다. 그 이유가 선이 진리와 자연 평면에서 결합하지 않으면, 진리가 선과 하나됨이 없으면, 거듭남이 없기 때문, 이것이 관계적 의미에서 이 장에서 취급되어 있다. 또한 이것은 앞 대목들의 결론이기도 하다.

46절. 그리고 리브가가 이삭에게 말했다, 나는 헷사람의 딸들 때문에 내 삶이 싫어졌습니다; 만일 야곱이 여인을 이 토지의 딸들 중에서나 마찬가지인 헷의 딸들로부터 데려온다면 무엇 때문에 내가 생명들을 가집니까?

그리고 리브가가 이삭에게 말했다. 이는 주님께서 신성한 진리로부터 지각하심을 의미한다. 이는 “말하다”가 지각하다를 의미함으로부터; 리브가가 주님의 신성한 합리성에서 신성한 진리 측면을 표현한다로부터; 그리고 이삭이 주님의 신성한 합리성에서 신성한 선 측면을 표현한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리고 신성한 선은 그 자체로 존재함에 비해, 신성한 진리는 신성한 선에서 파생되는 생명이다; 고로 주님은 신성한 선으로부터 원칙적으로 계시기에, “신성한 진리로부터 주님이 지각하심”이라 말하는 것이다. 합리성 속의 신성한 진리로부터 지각함은 지적 부분으로부터 이고, 이에 반해, 신성한 선으로부터의 지각함은 의지 부분으로부터 이다; 그러나 지적 부분으로부터의 지각함은 엄밀히 말하면 지적 부분 자체로부터 인 것은 아니고, 의지 부분이 흘러듦으로부터 있는 지적 부분으로부터의 지각함이다; 그 이유가 지적 부분은 의지 부분의 형태(나타남)밖에 더 아니기 때문이다. 이것은 지적 부분이 의지 부분과 결합해 있을 때의 경우이다. 그러나 이렇게 결합되어 있기 전, 이것들 각각은 그 자체대로 있는 듯 나타나 있다. 이것은 외적 부분이 그 자체 내적 부분으로부터 분리된 듯 하여 있는 것밖에 더 아니다; 그 이유가 지적 부분이 내향적으로 뜻하고 생각할 때, 의지 부분으로부터의 목적이 지적 부분의 생명을 만들고 그것의 방향을 정하기 때문이다. 지적 부분이 목적으로부터 생명을 가지는 이유는 인간이 가지는 목적(목표, end)이 그의 생명이고 삶의 방향을 정해주기 때문이다 (1909, 3570항); 이상 살핀 바로부터 표현적 의미 측면에서 누군가가 진리로부터 지각한다 말해질 경우, 최고 의미에서 신성한 진리로부터 주님이 지각하심이라 말해질 경우에 대해서 어느 정도 납득되었을 것이다.

나는 헷 사람의 딸들 때문에 내 생명을 몹시 싫어합니다. 이는 또 다른 근원으로부터 자연적 진리가 첨가됨을 의미한다. 이는 “누군가의 생명을 몹시 싫어함”이 첨가됨이 없다를 의미함으로부터, 즉 합리성의 진리에 자연적 진리의 첨가는 없다를 의미함으로부터 알게 된다, 그 이유가 첨가가 있지 않을 때, 그때 합리성쪽으로 자연적 진리의 생명은 마치 생명이 없는 듯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리고 “헷의 딸들”의 의미가 진짜이지 않은 것으로부터 있는 진리에 대한 애착이다로부터; 여기서는, 자연적 진리에 대한 애착들인데, 그 이유는 자연적 진리를 표현하는 야곱을 두고 말해지기 때문이다. 이상으로부터 분명한 바, “나는 헷 사람의 딸들 때문에 내 생명을 몹시 싫어합니다”에 의해 진짜이지 않은 것으로부터의 자연적 진리의 첨가는 있을 수 없다가 의미된다는 것이다; 고로 또 다른 근원으로부터 자연적 진리의 첨가가 있어야만 한다는 것이 사실상 의미되고 있다. 이 자연적 진리의 첨가가 이어지는 구절에서 취급된다, 즉 야곱이 라반에게 체류함의 언급이 있는 곳에서 인데, 공통되는 지주(支柱, stock)로부터의 진리들이 다시 인접된다; 그리고 헷 사람의 딸이 표현하는 진리들을 수단으로 해서 이다, 그 이유는 헷 사람은 공통된 지주로부터 있지 않은 바 불일치함이 있어 결합이 결과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헷의 아들들에 의해 이방인들 사이에 있는 영적 교회가 표현되기 때문, 이들은 말씀을 가지고 있지 않은 바, 그들의 진리들은 이 (순수한) 근원으로부터는 아니기 때문이다.

만일 야곱이 여인을 헷 사람의 딸들에서 데려온다면. 이는 자연적 진리가 그 쪽과 연계되어서는 안됨을 의미한다. 이는 “여인을 데려옴”의 의미가 연계되어짐 이다로부터; “헷 사람의 딸들”의 의미가 순수하지 않은 것으로부터의 진리에 대한 애착이다로부터; 또는 같은 말로, 진짜이지 않은 것으로부터의 진리이다로부터; 그 이유가 애착 없는 진리는 결합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미 살핀 헷의 딸들에 관한 것을 다시 살핀다면 이 대목의 의미가 어떻게 이렇게 되는지를 가늠할 수 있을 것이다.

이 토지의 딸들이나 마찬가지인. 이는 그 바탕으로부터가 아니기 때문에, 즉 진짜 교회의 진리들로부터가 아니기 때문에를 의미한다. 이는 “딸”의 의미가 교회이다로부터; 그 이유가 “딸”은 선과 진리에 대한 애착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토지(land)”가 교회가 있는 지역을 의미하는 바, 교회도 더불어 의미하게 된다; 고로 “토지의 딸들”은 교회 속의 선들과 진리들이다.

무엇 때문에 내가 생명들을 가집니까? 이는 그러므로 결합은 있지 않으리라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생명들”의 의미가 진리들과 선들을 통하여 결합함이다로부터 분명해진다; 그 이유가 공통의 지주로부터, 또는 진짜 진리로부터의 진리가 자연적 진리에 인접되어질 수 없을 때, 합리성의 진리에 자연 평면의 첨가도 있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 고로 합리성쪽에서 보건대, 그것의 생명은 생명 없음으로 나타난다; 그러므로 이 말, “무엇 때문에 내가 생명들을 가집니까?”에 의해 결합이 있지 않을 것임이 의미된다. 이 구절, 그리고 다른 구절의 경우에서도 “생명”이 생명들이라 표현하여 복수로 말해지고 있다. 여기서 복수로 말해진 이유는 인간 안에 두 능력(기능)이 있기 때문에서 이다; 하나는 이해력이라 불리우고 진리에 속한다; 또 하나는 의지력이라 불리우고, 선에 속한다; 이 두 생명들 또는 생명의 두 능력들은 이해함이 의지로부터 있을 때, 같은 말로, 진리가 선으로부터 있을 때 하나를 만든다. 이것은 히브리어에서 “생명”, 또한 “생명들”이라는 단어가 자주 등장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복수인 “생명들”로 표현된 구절들을 살펴보자:
창세기서에서:
여호와 하느님이 인간을 지면으로부터 먼지(흙, dust)로 만들어 내셨다, 그리고 그의 콧구 멍 안으로 생명들의 숨을 불어 넣으셨다, 그리고 인간은 살아 있는 혼이 되었다 (2:7). 그 리고 지면으로부터 여호와 하느님은 보기에 바람직하고, 식품으로 좋은 모두 각각의 나무 가 자라게 하셨다; 그리고 동산의 한 가운데에는 생명들의 나무가 (있었다) (2:9). 보라 나 는 생명들의 숨이 있는 모든 육을 파멸하기 위하여 땅 위에 물들의 홍수를 가져올 것이다 (6:17). 그리고 그것들, 생명들의 숨이 있는 모든 육으로부터 둘, 둘이 노아에게로 방주 안 으로 들어갔다 (7:15, 780항). 생명들의 숨으로부터 숨을 쉬는 콧구멍을 지닌 모든 것은 죽었다 (6:22).
그리고 다윗서에서:
나는 생명들의 토지에서 여호와의 선하심을 본다고 믿는다 (시. 27:13).
다시:
어떤 인간이 생명들을 바라고, 선을 보는 날들을 사랑하는가? (시. 34:12).
다시:
당신과 더불어 생명들의 샘이 있습니다; 당신의 빛에서 우리는 빛을 볼 것입니다
(시. 36:9).
말라기서에서:
내 언약은 생명들과 평화로부터 레위인과 더불어 있었다 (말. 2:5).
예레미야서에서:
고로 여호와께서 말하신다, 보라 나는 너희 앞에 생명들의 길을, 그리고 죽음의 길을 놓았 다 (예. 21:8).
모세의 책에서:
네 하느님 여호와를 사랑하는 것, 그분의 음성에 순종하는 것; 그분에게 꼭 붙어있는 것(굳 게 결합하는 것); 그 이유는 그분이 네 생명들이기 때문, 그리고 네 날들의 길이(length) 이기(오래 살게 하시기) 때문; 너는 토지에서 거주할 것이다 (신. 30:20).
그리고 다시:
이것은 너를 두고 하는 헛된 말이 아니다, 그 이유는 이것이 네 생명들이기 때문이다, 그리 고 이 말을 통하여 너희는 토지 위에서 네 날들을 길게 할 것이다 (신. 32:47);
위의 구절들 외에도 더 있으나 생략한다. “생명들”이 둘로 구성되기 때문인데, 그럼에도 하나이다; 마치 히브리어에서 “천국들 (heavens)”로 표기하는 경우와 같은데, 이것은 천국들은 아주 다양하게 많기 때문, 그럼에도 하나일 뿐이다. 마찬가지로 “물들(waters)”로 표기된 경우이다. 이 물은 위의 물과 아래의 물이 있는 바(창. 1:6, 7, 9), 이 둘을 한 번에 표현한 것이 “물들”의 복수 형태이다. (우리의 상식적으로는 물이 많든 적든 물은 개수로 세어지지 않는 바, 단수인 “물”이 자연 수준의 우리를 위하여 적합할 듯 하지만 말씀은 천사를 위하여서 먼저 존재하는 바, 영적 수준에서의 표현이 있어야 하기에 “물들”로 표기되었지 않나 하는 생각도 해본다 역자 주.) 위쪽의 물은 합리성에 속하는 물이고, 아래쪽의 물은 자연 평면에 속하는 물이지만, 이 두 물은 결합을 통하여 하나로 있기로 예정되고 있다. 다시 “생명들”에 주목해보면, 복수 형태에서 있는 이것들은 의지로부터 있는 것과 이해함으로부터 있는 것, 결과적으로 선에 속한 것과 진리에 속한 것을 의미한다; 그 이유가 인간의 생명은 주님으로부터 있는 선과 진리밖에 더 아니기 때문이다; 인간은 이 둘 없이 어떤 것을 뜻하고, 생각할 수 없고, 뜻함의 모든 능력은 선인 것으로부터, 또는 선이 아닌 것으로부터, 그리고 생각하는 모든 능력은 진리인 것으로부터, 또는 진리이지 않은 것으로부터 이다; 이로부터 인간은 생명들을 가진다, 그리고 그의 생각함이 그의 뜻함으로부터 일 때 생명들은 하나의 생명이다. 다시 말해 신앙 속의 진리가 사랑 속에 있는 선으로부터 있을 때 하나의 생명이다.
*************************************

창세기 제 28 장

성경: 창세기 28장

1. 그리고 이삭은 야곱을 불렀다, 그리고 그에게 복을 빌어 주었다, 그리고 그에게 명 령했다, 그리고 그에게 말했다, 너는 가나안의 딸들 중에서 여인을 데려오지 마라.
2. 일어나, 밧단-아람, 네 어머니의 아버지 브드엘의 집으로 가라, 그리고 너는 거기 네 어머니의 오라버니 라반의 딸들 중에서 여인을 데려와라.
3. 그리고 전능하신 하느님께서 너에게 복을 주실 것이다, 그리고 너를 열매 있게 하 시고 너를 번영하게 하실 것이다, 그리고 너는 여러 민족이 될 것이다.
4. 그리고 그분은 너에게 아브라함의 축복을 주시되, 너 그리고 너와 더불은 네 씨에 게 주시고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토지 곧 네가 체류하는 토지를 상속받게 하실 것이다.
5. 그리고 이삭은 야곱을 떠나 보냈다. 그리고 그는 밧단-아람으로 가서, 야곱과 에 서의 어머니, 리브가의 오라버니, 아람 사람 브드엘의 아들 라반에게 갔다.
6. 그리고 에서는 이삭이 야곱을 축복한 것, 그를 밧단-아람으로 보낸 것, 거기에서 그에게 여인을 데려오라 한 것, 그를 축복할 때 그에게 명령하여, 말하기를, 너는 가나안의 딸들 중에서 여인을 데려오지 마라 한 것을 보았다.
7. 그리고 야곱은 그의 아버지에게와 그의 어머니에게 귀를 기울였다, 그리고 밧단- 아람으로 갔다.
8. 그리고 에서는 가나안의 딸들이 그의 아버지의 눈에서 악이었음을 보았다.
9. 그리고 에서는 이스마엘에게 갔다, 그리고 여인들로 본처들 외에 느바욧의 누이, 아브라함의 아들 이스마엘의 딸 마할랏을 데려왔다.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10. 그리고 야곱은 브엘-세바로부터 나왔다, 그리고 하란을 향하여 갔다.
11. 그는 어떤 장소를 발견하고, 거기서 밤을 보냈다, 그 이유는 해가 저물었기 때문 이다. 그리고 그는 그 장소에서 돌을 가져왔다, 그리고 그것들을 그의 베개로 놓 았다, 그리고 그 장소에서 드러누웠다.
12. 그리고 그는 꿈을 꾸었다, 그리고 땅 위에 사다리가 놓여있는 것이 보였다, 그리 고 그것의 머리는 하늘에 닿고 있었다. 그리고 바라보니 하느님의 천사들이 그 위에서 올라가고 내려가고 있었다.
13. 그리고 바라보니 여호와께서 그 위에 서 계셨다. 그리고 그분은 말하셨다, 나는 네 아버지 아브라함의 하느님, 그리고 이삭의 하느님 여호와이다. 네가 누워있는 이 토지를 나는 너에게 줄 것이다, 그리고 네 씨에게 줄 것이다.
14. 그리고 네 씨는 땅의 먼지만큼 일 것이다, 그리고 너는 바다쪽으로 그리고 동쪽 으로, 그리고 북쪽으로, 그리고 남쪽으로 쏟아져 퍼질 것이다. 그리고 네 안에서, 그리고 네 씨 안에서 지면의 모든 족속들이 복 있을 것이다.
15. 그리고 나는 너와 함께 있을 것이고 네가 가는 곳이 어디이든지 너를 지킬 것이 다, 그리고 너를 이 지면으로 도로 데려다놓을 것이다. 나는 내가 너에게 말한 것을 다 할 때까지 너를 떠나지 않을 것이다.
16. 그리고 야곱은 그의 잠에서 깨어났다, 그리고 그는 말했다, 여호와께서 이 장소에 계신 것이 확실하다, 그리고 나는 그것을 모르고 있었다.
17. 그리고 그는 두려웠다, 그리고 말했다, 이 얼마나 무서운 장소인가! 여기는 하느 님의 집 외에 다른 것은 없다, 그리고 여기는 하늘의 문이다.
18. 그리고 야곱은 아침에 일찍 일어났다, 그리고 그가 자기 베개로 놓았던 돌을 가져 왔다, 그리고 그것으로 기둥을 세웠다. 그리고 그것의 머리에 기름을 부었다.
19. 그리고 그는 이 장소의 이름을 벧엘이라 불렀다. 그러나 이 성의 이름은 애당초 루즈였다.
20. 그리고 야곱은 서약을 서원하여, 말하기를, 만일 하느님께서 저와 함께 계시고, 그리고 제가 걷는 이 길에서 저를 지켜주시고, 그리고 저에게 먹을 빵과 입을 의 복을 주시고,
21. 그리고 제가 제 아버지의 집으로 평화로이 되돌아 간다면, 여호와께서는 저에게 하느님이실 것입니다.
22. 그리고 제가 기둥으로 세웠던 이 돌은 하느님의 집일 것입니다. 그리고 당신이 저 에게 주실 모든 것의 십분의 일을 저는 당신에게 바칠 것입니다.

각 절의 내적 의미

1, 2 절. 그리고 이삭은 야곱을 불렀다, 그리고 그에게 복을 빌어 주었다, 그리고 그에게 명령했다, 그리고 그에게 말했다, 너는 가나안의 딸들 중에서 여인을 데려오지 마라. 2 일어나, 밧단-아람, 네 어머니의 아버지 브드엘의 집으로 가라, 그리고 너는 거기 네 어머니의 오라버니 라반의 딸들 중에서 여인을 데려와라.

그리고 이삭은 야곱을 불렀다. 이는 진리로부터의 선에 관한 품질이 주님에 의해 지각됨을 의미한다. 이는 누구를 “부름”이 품질을 지각하는 것이다로부터; 그리고 이삭의 표현이 신성한 합리성 속의 신성한 선이다로부터; 그리고 야곱이 자연적 진리 측면에서의 주님을 표현함으로부터 알게 된다. 그러나 여기서, 그리고 이 장에 이어지는 것 안에서 야곱은 이 진리로부터의 선을 표현한다; 이로부터 분명한 바, “이삭이 야곱을 부름”은 진리로부터의 선 측면에 관한 품질을 주님께서 지각하심이 의미되었다는 것이다.
야곱이 여기서 이 진리로부터의 선을 표현하는 이유는 야곱은 에서의 생득권, 또한 에서에게 내리는 축복을 가로채감으로 해서, 지금의 그는 에서라는 인물을 옷입고 있다, 그렇지만 그가 이전에 표현했던 진리로부터의 선을 넘어선 수준에 있는 것은 아니다; 그 이유가 모든 진리, 즉 어떤 진리이든, 어떤 품질의 진리에 속하든, 진리 안에 선을 가진다, 이 선을 가지지 않는 진리라면, 그것은 진리가 아니다. 다시 말해 진리는 선으로부터 존재하고, 선으로부터 그것의 품질을 지니며, 선으로부터 진리라고 불리운다는 말이다. 그가 가져간 생득권, 가로챈 에서의 축복을 수단으로 가나안의 토지에 관하여 아브라함, 이삭에게 만들어진 약속을 계승하는 특전을 에서를 딛고 획득했다, 고로 야곱에 의해 주님의 신성한 자연 평면이 표현되어져야 한다, 마치 이삭에 의해 신성한 합리성이, 아브라함에 의해 신성 자체가 표현된 것과 같다. 이런 주님을 표현함이 하나의 인물 위에 있도록 하기 위하여, 야곱이 에서로부터 생득권(장자권)을, 후에는 그의 축복까지 가져간 것이 허용되었다. 하여 이제부터 야곱은 자연 (평면)으로부터의 선 (the good of the natural)을 표현한다, 그러나 이 표현함의 시작인 여기서는 이전에 표현했던 진리의 선을 표현한다. 에서 역시 아직 더 취급된다 (6-8절), 그 이유는 그가 진리의 선과 아직은 야곱에 의해 표현될 수 없는 선, 즉 주님의 자연 평면의 선으로부터의 내면의 진리를 표현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 때문이다. 여기서 야곱에 의해 표현되는 진리의 선이 무엇이며, 무슨 품질인지는 아래로부터 나타날 것이다.

그리고 그를 축복했다. 이는 고로 결합이 결과되리라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는 “축복함”이 결합되어짐 이다로부터 분명해진다. 비록 아버지 이삭이 아들 야곱이 잔꾀를 부려 아들 에서의 축복을 가져감으로 해서 그가 부들부들 떨기까지 했지만, 지금 그에게 축복한 이유는 에서가 아닌 야곱의 후손이 가나안의 토지를 소유하도록 되어 있다는 것을 뒤늦게 지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지금 그를 축복함으로 이삭에 의해 가나안의 토지의 소유자가 확증된 것이다. 그러나 이삭이 부들부들 떪의 행동에서 교활함(잔꾀)이 표현들 측면에서 야곱의 후손 안에 있을 사기적인 것(실망을 주는 것, 현혹하려 드는 것)이 예언되고, 의미되었다. 다시 말해, 그들은 주님의 왕국 속의 신성 또는 천적인 것을 표현하되 그들의 심정, 내지 성실함과는 아주 거리가 멀다는 것, 즉 아무 관계가 없다고까지 말해도 무난할지 모른다는 것이다. 고로 이 후손들이 표현하는 것은 고대 교회와는 전혀 다른 것, 내적인 것에서 분리된 외적인 것일 뿐이다는 것, 따라서 노골적인 우상 숭배자로 쉽게 전락하고 마는 특성을 지녔다는 것이다.
[2] 여기서 “축복함”이 내적 의미에서 결합함이 결과되리라는 것, 또는 결합이 의미되는 것은 이미 살핀 바도 있다. 즉 선 측면과 진리 측면에서의 자연 평면은 합리성에 결합되어져야 한다. 같은 말로, 외적 인간은 내적 인간에 결합되어져야 한다; 그 이유가 그분께서 그분의 자연 평면을 신성으로 만드시기 위해 그분은 신성한 합리성의 선과 진리에 상응하는 선과 진리를 자연 평면 안에 심어두셔야만 했기 때문이다. 선과 진리의 상응됨이 없으면, 어떤 결합도 가능하지 않다. 사실상 자연 평면에는 무수한 선들과 진리들이 있다, 또는 자연적 인간에 알맞은 무수한 선들과 진리들이 있다; 너무나 무수히 많은 관계로, 우리가 자연적 선과 진리라고 말하고 있어서 어쩌면 단 하나의 선과 진리만 있는 듯 나타남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가장 일반적인 종류들을 거의 알지 못할 정도이다; 그 이유가 자연 평면 전체, 그리고 이 평면 안에 있는 모든 것은 우리가 말로 하는 것인 선과 진리라는 표현밖에 이 범주를 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럴진대, 자연 평면의 선들과 진리들 안에 합리성의 선들과 진리들이 있을 수 있거나 있을 수 없거나 할 수 있다. 결과적으로 상응에 의해서만 자연 평면의 선들과 진리들이 합리성의 선들과 진리들에 인접될 수 있다는 말이다. 이와 같은 선들과 진리들이 이 장과 이어지는 장들에서 취급되어진다.
이 선들과 진리들을 아는 것, 이 둘을 서로 구별하는 것, 또한 그것들의 품질을 관조하는 것, 고로 그것들이 결합을 위해 어떻게 적합해지는 가를 아는 것은 우리가 내면인 것으로부터 생각하지 않는 한, 또는 천국의 빛으로부터 계발되지 않는 한 쉽지는 않다. 그 이유가 이런 것을 알았다 해도, 당사자에게는 별 기쁨이 되지 못하거나 불명료하게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것은 천사들의 납득과 이해함에는 아주 적합하고, 영들의 납득에도 적합하다. 그 이유가 천사나 영들의 생각함은 그들이 세상에서 인간으로 있었을 때 당연히 지녔던 것, 즉 세상적, 육체적, 지상적인 것들에 대한 관심사에 의해 빗나가게 하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천사나 영들은 말씀이 내적 의미로부터 그들에게 표출될 때, 지혜의 복됨과 총명의 명쾌함 안에 있다; 그 이유가 이때 신성인 것이 그들 위에서 비추이기 때문, 내적 의미에서는 최고 의미에서 주님이, 그리고 표현적 의미에서는 교회와 거듭남이 취급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 때문에 그들은 주님의 신성한 영역(sphere) 안에, 그분의 목적과 쓰임새(uses) 안에 있다.

그리고 그에게 명령했다, 그리고 그에게 말했다. 이는 곰곰이 되새겨봄, 그리고 그 결과로 지각함을 의미한다. 이는 “명령함”의 의미가 말씀의 역사 부분에서는 곰곰이 되새겨 봄(reflect)이다로부터; 그리고 “말함”이 지각함을 의미함으로부터 알게 된다. 곰곰이 되새겨 봄은 어떤 것을 두고 그것의 본성과 품질에 관하여 정신적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그리고 이로부터 지각이 온다.

너는 가나안의 딸들 중에서 여인을 데려오지 마라. 이는 거짓과 악에 대한 애착과는 결합되지 않아야 함이 규정되어(섭리되어) 있음을 의미한다. 이는 “여인을 데려 옴”이 연합되는 것, 또는 결합하는 것을 의미함으로부터; “딸들”의 의미가 애착들이다로부터; 그리고 “가나안”의 의미가 거짓과 악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일어나라. 이는 거기로부터 이 선은 승강되어야 함이 규정되어(섭리되어) 있음을 의미한다. 이는 “일어남”의 의미가 어떤 승강함을 함축하고 있음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여기서는 “가나안의 딸들”에 의해 의미된 것들로부터 “라반의 딸들”에 의해 의미된 것들 쪽으로 승강함인데, 아래에서 이어진다.

밧단-아람으로 가라. 이는 이와 같은 진리에 대한 지식들을 의미한다. 이는 “아람” 또는 “시리아”의 의미가 지식들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밧단-아람”이 진리에 대한 지식들을 의미하는 이유는 이것이 강들의 시리아 안에 있었고, 거기서 나홀, 브드엘, 라반이 거주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시리아”에 의해 진리에 대한 지식이 의미되는 것은 이미 살폈다. 밧단-아람에 관한 것은 창. 25:20에도 언급되고 있다, 그리고 다시 창. 31:18에도 있게 된다. 이런 장소에서도 마찬가지로 진리에 대한 지식들을 의미한다.

네 어머니의 아버지 브드엘의 집으로, 그리고 너는 거기로부터 네 어머니의 오라버니 라반의 딸들 중에서 여인을 데려오라. 이는 평행하여 있는(방계, 2차, collateral) 외적 선, 그리고 결합되어져야 할 선에서 파생된 진리를 의미한다. 이는 “브드엘”이 첫째 계층에 속하는 이방인들의 선을 표현한다로부터; 라반이 자연적 인간에 있는 선에 대한 애착을 표현한다로부터, 즉 외적 선에 대한 애착이다로부터, 더 정확한 표현은 공통의 지주로부터 있는 방계적인 선이다로부터; 그리고 “그의 딸들로부터 여인을 데려 옴”은 파생되는 진리에 대한 애착들과 연합됨, 또는 결합됨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여인을 데려 옴”이 결합되는 것을 표시함은 분명하고, “딸들”이 애착들이다는 것도 이미 살폈다. 이상 살핀 바로부터 분명해지는 바, 이 말들이 의미하는 것, 즉 야곱에 의해 여기서 표현된 것, 자연 평면의 선은 이 선에 평행하여 있는 외적 선으로부터 파생되는 진리들과 결합되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 점에서의 경우는 이렇다: 인간이 거듭나질 때, 처음에 그는 유아로서, 어린 아이로서, 젊은 이로서, 마지막으로 성년으로서 주님에 의해 인도된다. 유아 시절 그가 배운 진리들은 완전히 외적이고 육체적 수준이다, 그 이유가 그가 아직은 내면의 진리들을 납득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진리들은 그들의 가장 깊은 속에 포함된 것, 즉 신성으로부터의 것들에 관한 지식들 그 이상은 아니다; 그 이유가 그들의 가장 깊은 속에 있는 신성으로부터의 것들에 관한 지식들이 있고, 그렇지 않은 지식들도 무수하기 때문이다. 신성인 것을 포함하는 지식들은 그들이 내면의 진리들을 더욱 더, 계속적으로 질서 안에서 자신이 승인하여 자신 안에 받아들여가는 상태에 있는 진리들이다. 이에 반해 신성인 것을 포함하지 않는 지식들은 내면의 진리들을 승인하지 않고 내친다; 그 이유가 외적이고 육체적인 선과 진리는 지면과 비슷하여, 이 지면의 품질에 따라 이 종류의 씨들은 수용하고 저 종류의 씨는 수용하지 못하여, 이 종류의 씨는 성숙되나 저 종류는 질식하는 경우와 같기 때문이다. 그들의 가장 깊은 안쪽에 신성한 것을 함유하는 지식들은 그것 안으로 영적이고 천적인 진리와 선을 받아들이는데, 내부에 있는 신성으로부터 그것의 수용력을 소유하고 배열한다; 그러나 그것들 안에 신성인 것을 함유하지 않는 지식들은 악과 거짓을 받아들여 그런 속성 속에 있게 된다. 영적이고 천적인 진리와 선을 받아들이는 외적이고 육체적인 지식들이 여기서 “브드엘의 집(가문)의 라반의 딸들”에 의해; 그러나 이것들을 받아들이지 않는 지식들은 “가나안의 딸들”에 의해 의미되고 있다.
유아로부터 어린 아이 시절까지에서 배워진 지식들은 최고로 일반적인 그릇들이고, 이 그릇들이 선들로 채워지고, 채워짐에 비례하여 인간은 계발되어진다. 만일 그릇들이 진짜 선들을 받아들이는 상태에 있다면, 그때 인간은 진짜 선들 안에 있는 신성으로부터 계발되어지고, 이 계발은 계속 더욱 더 계발되어 간다; 그러나 이 그릇들이 진짜 선들을 그것 안에 있게 할 수 없다면, 그때 인간은 계발되지 않는다. 그런데 그가 계발된다고 나타난다면, 이것은 가짜 빛으로부터 이고, 이것은 거짓과 악으로부터의 빛인 바, 이것 때문에 그는 선과 진리에 관련하여서는 더욱 더 어두워져 간다.
이와 같은 지식들은 수많은 겹겹이다, 너무나 겹겹이어서 그 종류(genera)는 거의 세어지지 못하고 종류 아래 종속(spice)들은 각각을 식별하는 것조차 힘들다; 그 이유가 그것들은 신성으로부터 합리성을 통하여 자연 평면 안으로 많은 방법들에서 파생되기 때문이다. 어떤 지식은 직접적 방식인 합리성의 선을 통하여 자연 평면의 선 안으로 흘러든다; 또한 이 선의 진리 안으로, 그리고 시내가 여러 갈래로 나뉘어 흐르듯 외적, 또는 육체적 자연 평면 안으로 더 갈라져 흘러든다. 그리고 어떤 지식은 간접적 방식인 합리성의 진리를 통하여 자연 평면의 진리 안으로 흘러들고, 다시 외적, 또는 육체적 자연 평면으로 갈라져 흘러든다. 이것들은 마치 나라, 가족, 집(가문)과 비슷하고, 그리고 이리저리 연결되는 친척 관계, 즉 직계 가족이나 방계 가족과도 비슷하다. 천국들 안에서 이런 것들은 최고로 구분된다, 그 이유는 그 안의 모든 사회들, 그것들의 근접 관계는 선과 진리의 종과 속에 따라 구별되어지기 때문이다. 이런 사회들이나 그 사회의 근접 관계가 천적 인간이었던 태고인에 의해 표현되어졌는데, 그들은 함께 거주하는 것을 수단으로 나라들, 가족들, 가문들 같은 식으로 분류되었다. 이런 이유로 표현 교회 속에 있는 이들도 자기들 자신의 나라 속의 가족 안에서 결혼들을 체결하여 연합되었다. 이런 방법에서 그들은 천국을 표현할 수 있었고, 선과 진리 측면에서의 천국 사회들의 결합도 표현할 수 있었다. 이런 경우가 여기서 야곱과 더불어 있게 된다. 즉 자기 어머니의 아버지, 브드엘의 집으로 가서, 그의 어머니의 오라버니 라반의 딸들로부터 여인을 데려오는 것이다.
평행하게 있는(방계의, collateral) 선으로부터인 외적, 또는 육체적인 진리에 대한 지식 자체에 주목하면, 그리고 신성인 것을 함유한 진리라고 말해진다면, 하여 진짜 선들을 받아들인다면, 이런 지식들은 나중에 거듭나지는 어린 아이들에게 있는 지식들 같은 것들이다. 이 지식들이란 말씀의 역사물에 있는 것들, 즉 낙원에 관하여, 이 낙원 안의 첫 사람에 관하여, 한가운데 있는 생명의 나무에 관하여, 거기서 뱀이 유혹했다는 것에 관하여 등등이다. 이것은 신성인 것을 함유하는 지식들이고, 그 지식 안으로 영적이고 천적인 선들과 진리들을 받아들이는 지식들이다. 물론 이런 지식들은 다른 말씀의 역사물에도 있다. 예를 들면, 성막과 성전, 이것들의 건축에 관하여; 마찬가지로 아론과 그의 아들들에 관하여; 또한 성막의 절기(축제)에 관하여, 수확의 첫 열매, 누룩 없는 빵과 여타 다른 것들에 관하여 등등이다. 이런 지식들이 어린 아이에 의해 생각되고 알려질 때, 이 아이와 더불은 천사들은 그것들이 표현하고 의미하는 것들을 생각한다; 그리고 천사들이 이것 가지고 감명받기 때문에 그들의 애착이 교통되고, 아이들이 그 점에 관하여 경험하는 즐거움과 기쁨들을 야기되게 한다; 그리고 아이들의 마음이 진짜 진리와 선을 받도록 준비된다. 이런 것들과 이외 많은 것들이 방계의 선으로부터 파생되는 외적이고 육체적인 진리에 관한 지식들이 있다.

3-5절. 그리고 하느님 사다이께서 너에게 복을 주실 것이다, 그리고 너를 열매 있게 하시고 너를 번영하게 하실 것이다, 그리고 너는 여러 민족이 될 것이다. 4 그리고 그분은 너에게 아브라함의 축복을 주시되, 너 그리고 너와 더불은 네 씨에게 주시고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토지 곧 네가 체류하는 토지를 상속받게 하실 것이다. 5 그리고 이삭은 야곱을 떠나 보냈다. 그리고 그는 밧단-아람으로 가서, 야곱과 에서의 어머니, 리브가의 오라버니, 아람 사람 브드엘의 아들 라반에게 갔다.

그리고 하느님 사다이께서 너에게 복을 내리실 것이다. 이는 이 진리와 선은 시험들을 통하여 결합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하느님 사다이(God Shaddai, 전능하신 하느님)의 의미가 시험들이다로부터(아래에서 살핀다); 그리고 “복주심”의 의미가 결합됨이다로부터 (3504, 3514, 3530, 3565, 3584항) 알게 된다. 지금 야곱에 의해 진리로부터의 선이 의미되는 까닭에 (3659항), 그러므로 여기서 “너”에 의해서는 이 진리와 선이 의미된다. “하느님 사다이”가 시험들을 의미하는 이유는 고대 시대 때에 그들은 최고의 하느님(즉, 주님)을 다양한 이름들을 수단으로 그분의 특성에 일치하여, 그리고 그분으로부터 있는 선들에 일치하여서, 그리고 그분으로부터 있는 진리들에 일치하여 그분을 일컬음으로 그분에 관련된 특별한 측면들을 구별했다. 이런 사항들은 모든 이들에게 알려진 사실이다. 이런 하느님에 대한 호칭을 수단으로 고대 교회 속에 있는 이들은 유일한 한 분 하느님, 즉 주님, 여호와로 불리운 하느님을 이해했다; 그러나 교회가 선과 진리로부터 기울어진 이후, 동시에 이 지혜로부터 기운 후 그들은 자기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만들었던 한분 하느님에 대한 호칭을 이용해 많은 하느님들을 예배하기를 시작했다. 그러므로 해서 모두 각각의 나라, 모두 각각의 가족에서까지 각 자체의 하느님을 위해 많은 하느님들 중의 하나를 인정했다. 이로부터 많은 하느님들이 존재하게 되었고 이런 호칭들은 말씀에서도 자주 언급된다.
위와 같은 일은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의 가족에서도, 그리고 아브라함 자신에게도 있어 그는 다른 신들을 예배했다, 그리고 특별하게 하느님 사다이를 예배했다. 이 하느님에 대한 예배가 이 가문에 잔존했음은 모세의 책에 있는 말로부터도 분명해진다:
나는 하느님 사다이로 아브라함, 이삭, 야곱에게 나타났고, 내 이름 여호와에 의해서는 내 가 그들에게 알려지지 않았다 (출. 6:3).
이상 살핀 바가 “나는 하느님 사다이이다; 내 앞에서 걸어라(살아라), 그리고 완전해 있으라”(창. 17:1) 라고 아브라함에게 말해진 이유이기도 하다; 그리고 여기서 이삭에 의해 야곱에게 “하느님 사다이께서 네게 복을 내리실 것이다”라고 말해진 이유이다. 이것이 이어지는 이 장의 끝 부분에서 더욱 분명해진다; 즉 주님께서 꿈에 야곱에게 나타나시어, “나는 네 조상 아브라함의 하느님, 그리고 이삭의 하느님 여호와이다” (13절) 말하셨다, 이에 더 이어 야곱이, “만일 하느님이 제가 걷는 이 길에서 저와 함께 계시고, 그리고 제게 먹을 빵과 입을 의복을 주시고, 그리고 제가 제 아버지의 집으로 평화로이 되돌아 간다면, 그때 여호와는 저에게 하느님으로 계실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20, 21); 이로부터 분명한 바, 야곱의 집(가문)은 여호와를 인정하지 않고 있었다는 말이다; 그러나 야곱의 경우 만일 자기에게 은택을 배푸는 분으로 있다면, 오늘날 기독인의 이방인식의 경우와 같이 (물질적) 복을 주시는 분이다면, 그분을 하느님으로 인정하겠다는 것이다.
어쨌든 하느님 사다이는 고대 교회에서 하느님을 부른 호칭인 것은 분명하고, 특별하게 시험들, 그리고 시험 후에 와지는 복됨과 은택이라는 측면에서 주님이 그렇게 불리웠다. 이것이 내적 의미에서 “하느님 사다이”가 시험들을 의미하는 이유이다. 시험들에 의해 선과 진리의 결합이 있어진다는 것은 이미 살핀 바 있다.

그리고 너를 열매 있게 하시고 너를 번영하게 하실 것이다. 이는 파생되어 나오는 선들과 진리들을 의미한다. 이는 “열매 있게 하심”이 선 측면에서; “번성하게 하심”이 진리 측면을 언급함으로부터 분명해진다.

그리고 너는 여러 민족들이 된다. 이는 풍부함을 의미한다. 이는 별도의 설명이 필요 없다. “여러 민족들”은 진리들을 특별하게 서술한다, 그 이유가 말씀에서 “민족들, 백성들 (peoples)”은 진리 안에 있는 이들을; “나라들(nations)”은 선 안에 있는 이들을 각기 의미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여러 민족들”이 말해진 이유는 여기서 취급되는 주제가 야곱에 의해 표현된 진리로부터 있는 진리의 선(진리로부터의 선)이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진리로부터 있는 선이 있고, 선으로부터 있는 진리가 있기 때문, 전자는 야곱에 의해, 후자는 에서에 의해 표현된다. 진리로부터 있는 선은 선으로부터 있는 진리가 거꾸로있는 형국이다. 거듭남이 완성되기 이전, 거듭나는 중에 있는 이들은 진리로부터 있는 선 안에 있다; 이에 반해 거듭난 이들은 선으로부터의 진리 안에 있다.

그리고 그분은 너에게 아브라함의 복을 주실 것이다. 이는 자연 평면의 선과 진리가 신성 자체에 결합함을 의미한다. 이는 “복을 주심”이 결합이다로부터; 그리고 “아브라함”이 “아버지”라 불리우는 주님의 신성 자체를 표현한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리고 이 말들이 야곱에게 말해지고 있으므로, 야곱에 의하여 거기에 있는 신성한 선과 진리 측면에서 주님의 신성한 자연 평면이 표현해지는 바, 결국 “그분께서 네게 아브라함의 복을 주실 것이다”에 의해 자연 평면의 선과 진리가 신성 자체에 결합함이 내적 의미에서 의미되어진다. 글자 의미에서 일 경우, 이것은 “아브라함의 복”에 의해 뜻해진 가나안의 토지를 소유함이고, 뒤이어지는 말,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셨던, 네 체류함의 토지를 네게 상속되게 하실 것이다”에 의해서도 같은 뜻이 있다; 그리고 이 의미에 따라 말씀의 역사물 안에 이 의미 외에 더 천국적이고 비밀한 의미가 있다는 것을 믿지 않는 자는 이 대목을 그렇게만 납득하고 있다. 특히 이 말들에 두 번씩 밑줄을 그어 두는 유태인 나라는 여타 모든 나라와 민족 위에서 이 말이 자신들에게 내려진 특전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들의 조상들은 같은 방식에서 이 말들을 이해했고, 특히 그들은 야곱에 의해 이해된 것과 같이, 즉 방금 말해진 그의 품질 그대로, 즉 자기에게 육체적이고 세상적인 복을 주시지 않으면 그분을 알지 못한 상황인 바, 여호와를 인정하지도 못할 것이라고 자신을 납득시키고 있는 셈이다. 어쨌든 말씀 안의 아브라함, 이삭, 야곱은 생존 인물이 내적 의미에서 뜻해지지 않는다는 것, 야곱에 의해 그분이 신성으로 만드시게 될 자연 평면 측면에서의 주님을 표현한다는 것이다. 이 내용은 수없이 반복 설명하고 있어 아마 여러분의 귀에 익숙해 있을지 모른다. (말씀 안에서) 인간이 선하든, 악하든 당사자에 의해 표현되는 그 인간의 품질은 실체 없는(immaterial, 무형의, 비 물질적인, 영적인) 것이다는 것, 악한 인간도 선한 인간과 동등하게 주님의 신성을 표현할 수 있고 표현되어 왔다는 것은 이미 살핀 바도 있다.
예를 들면, 모든 왕들, 그들이 누구이든, 그들에게 속하는 왕권 자체에 의해 무슨 품질의 왕이든 주님을 표현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성직자들 역시 그들의 직능 자체에 의해 누구이든 무슨 품질의 누구이든 주님을 표현한다. 왕권과 성직 직능 자체는 이것으로 일을 하는 누구에 상관 없이 거룩하다. 이런 이유로 말씀이 악한 인간에 의해서 가르쳐지는 것도 공히 거룩하다, 또한 세례식과 성찬, 이외 다른 것도 마찬가지이다. 이로부터 분명한 바, (지상의) 어떤 왕도 자기 왕권에 속하는 신성함의 어떤 것을 자신의 것이라고 주장할 수 없다는 것, 성직자가 자신의 성직에 있는 신성의 어떤 것을 슬그머니 자신으로부터 인 듯 내비쳐 자신을 성스러운 자(하느님인 듯 하게) 로 격상하려드는 것은 황당한 일일 뿐이다. (이런 성직자를 그런 것 같다라고 추앙하여 박수치는 교인은 더 더욱 엇박자인 셈이다) 어쨌든 왕권이든, 성직이든 거기로부터 신성함을 자신에게 귀속시키려하거나, 아예 자신으로부터 나왔다고 주장하는 자는 그 주장한 만큼에서 자신에게 영적인 도둑이라는 상표를 붙이는 것이다; 또한 이들이 악을 행하는 한, 즉 정당하고 공평한 것에 반대되는 짓을 하는 만큼에서, 그리고 선과 진리인 것에 반대되는 만큼에서, 왕은 그의 거룩한 왕권의 표현을 벗는 것이고, 성직자는 거룩한 성직의 표현을 벗는 것이다. 한마디로 그만큼에서 반대적인 것을 표현하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유태 교회의 표현적 의미 안에 성직자들이 자기들의 섬김을 하는 동안 (요즘의 경우라면 예배를 섬기는 직무를 행하는 것) 특별하게 처신해야 하는 거룩함에 관련되는 많은 법들에 의해 명령되고 있다. 이 주제는 주님의 신성한 자비로부터 차후 더 말해질 것이다.

너에게 그리고 너와 더불은 네 씨에게. 이는 선과 그 선으로부터 파생된 진리와 더불어를 의미한다. 이는 여기서 “너”인 야곱이 진리의 선, 또는 진리로부터 있는 선을 표현함으로부터; 그리고 “씨”의 의미가 신앙의 선과 진리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너와 더불은”은 “야곱”인 진리의 선에 인접되어졌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선과 진리와 더불은 경우는 씨와 지면(토양, 바탕)의 경우와 같다; 내면의 선은 (열매를) 산출하는 씨와 같다, 그러나 오직 옥토 (선한 바탕, good ground)에서만 일 뿐이다. 외면의 선과 진리는 씨로 열매를 산출하게 하는 지면과 같다; 이 씨 (즉, 내면의 선과 진리)는 이와 달리해서는 뿌리를 내릴 수 없다. 이런 이유 때문에 인간의 합리성은 무엇보다 먼저 거듭나져야 하는 것이다, 그 이유가 이런 점에서 인간의 합리성은 씨이기 때문이다, 그 후에 씨를 섬기도록 인간의 자연 평면이 거듭나져야 한다; 그리고 자연 평면이 지면이기에 합리성에 있는 선과 진리는 열매를 맺을 수 있고 번성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이 씨들이 지면을 갖지 않으면 뿌리를 내리 수 없듯 합리성의 선과 진리 역시 마찬가지이다. 이런 간단한 비교로부터도 어떻게 거듭남의 경우가 있는지, 이 거듭남에 얼마나 많은 비밀들이 있을 것인지 어림될 것이다.
선과 진리를 이해하는 것, 그리고 그것들을 뜻하는 것은 합리성으로부터 있다; 합리성으로부터 선과 진리를 지각함은 씨와 같다; 그러나 그것들을 아는 것과 그것들을 행동 안으로 가져다 놓는 것은 자연 평면으로부터 이다. 기억 속의 지식들 자체와 일(작업함)은 지면과 같다, 그래서 인간이 선과 진리를 확증하게 하는 기억 속의 지식들로 해서 감명받아질 때; 특히 그가 감명된 것을 행동 안으로 가져다 놓음에서 기쁨을 느낄 때, 이는 씨들이 옥토에 뿌려져 결과되는 것과 같다. 이 수단에 의해 선은 열매를 맺고, 진리는 번성한다, 이것들은 (거꾸로) 이 지면으로부터 계속하여 합리성 안으로 상승하여 선과 진리를 완전해지게 한다. 이와 정반대의 경우도 흔하다, 즉 선과 진리를 이해할 때, 더구나 내향적으로 의지가 그 이해한 것쪽으로 기우는 것을 지각함에도 그것들을 아는 것을 사랑하지 않고, 그것들을 행동 안에 놓는 일은 더 더욱 하지 않을 때의 경우, 그 인간의 합리성 안에서 선은 열매를 맺지 못하고 진리는 번성하지 못한다.

네가 체류한 토지를 상속받게 해주실 것이다. 이는 가르침으로부터 살아감을 의미한다. 이는 “상속받음”의 의미가 또다른 사람의 생명을 가지는 것이다로부터 분명해진다; 현재의 경우, 신성으로부터의 생명, 이것이 곧 이어지는 말들에 의해 의미되어진다; 그리고 “체류함”의 의미가 가르침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토지”는 삶(생명)이 있는 곳을 의미한다. 여기서 취급된 가르침으로부터의 삶은 진리로부터 있는 선의 삶, 이것이 여기서 야곱에 의해 표현되어져 있다; 그 이유가 인간이 자기가 받은 가르침에 따라 살 때, 그때 그는 가르침의 생명(삶) 안에 있기 때문이다.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셨던. 이는 신성으로부터 임을 의미한다. 이는 “아브라함”이 말씀에서 “아버지”라 불리우는 신성 측면에서의 주님을 표현함으로부터 분명해진다. “하느님이 주셨다”가 주님의 것이 되었다를 의미하는 것은 확실하다; 그 이유가 주어진 것은 받는 자의 소유가 되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셨다”가 신성으로부터의 생명을 의미함이 확실해진다.

이삭은 야곱을 떠나 보냈다. 이는 명백히 함(manifestation, existentia)의 시작을 의미한다. 이는 야곱이 이제부터 진리로부터의 선을 표현하기를 시작한다는 사실로부터, 고로 주님의 신성한 자연 평면을 명백히 함의 시작이다; 그 이유가 이것이 야곱이 라반에게 체류함에 관하여 이어지는 것 안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삭이 야곱을 떠나 보냈다”에 의해 명백히 함의 시작이 의미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밧단-아람으로 갔다. 이는 그 진리에 관한 지식들을 의미한다. 이는 “밧단-아람”의 의미가 진리에 관한 지식들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아람 사람 브드엘의 아들 라반에게. 이는 방계의(collateral, 평행의) 선을 의미한다. 이는 라반이 공통의 지주로부터의 방계의 선을 의미함으로부터 분명해진다; 그리고 브드엘이 첫 계층에 속하는 이방인의 선을 표현한다로부터도 알게 된다, 공동의 지주인 이 선으로부터 라반에 의해 표현된 선이 와진다. 여기서 브드엘에게 “아람 사람”이라는 별명이 추가된 이유는 “아람”, 또는 “시리아”가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을 의미하기 때문에서 이다, 이 지식이 여기서 취급된다. 외적 진리, 이 진리로부터 야곱에 의해 표현되는 선이 있는데, 이 진리는 지식들밖에 더 아니다. 그 이유가 이 진리들은 인간의 제일 처음 배워진 진리들이기 때문, 그리고 거듭남을 시작하는 이들에 의해 진리들로서 간주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지식은 그 자체만 떼어 놓으면 진리가 아니나, 지식 안에 신성으로부터의 것이 있을 때, 그리고 이 신성한 것이 빛을 낼 때, 지식은 그때서야 비로소 진리들이 된다. 한편, 지식들은 넓은 측면에서 그릇과 같다. 지식을 통하여, 그리고 지식 안에 진리들이 받아진다. 그리고 맨 먼저 배워진 기억 속의 진리도 마찬가지이다.

야곱과 에서의 어머니, 리브가의 오라버니. 이는 “야곱”인 진리로부터의 선의 어머니, 그리고 “에서”인 선으로부터의 진리의 어머니와 인척 관계임(유사함, 같은 성질, affinity)을 의미한다. 이는 리브가가 주님의 신성한 합리성 속의 신성한 진리를 표현한다로부터; 그리고 야곱이 진리로부터의 선, 또는 자연 평면에서 진리로부터 있는 선이다로부터; 그리고 에서는 선으로부터의 진리, 또는 자연 평면에서 선으로부터 진리가 있음이다를 표현한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리고 자연 평면, 또는 외적 인간에 있는 선들과 진리들은 합리성, 또는 내적 인간으로부터 임신되고 출생되기 때문이다; 즉 합리성의 선을 아버지로, 합리성의 진리를 어머니로 하여 출생된다, 그러므로 위의 말들에 의해 “야곱”인 진리로부터의 선과, “에서”인 선으로부터의 진리의 어머니와 인척 관계임이 의미되어진다.
더욱이 야곱과 에서에 의해 표현되는 것들의 상황은 정밀하게 똑같은 길(방법)에 있다. 그러나 이것을 납득력에 와닿게 설명하는 것은 아주 힘들다. 그 이유는 이 주제에 관한 지극히 일반적인 것조차 오늘날 알려져 있지 않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영적 선이 무엇인지, 영적 선의 진리가 무엇인지, 이 선과 이 선의 진리가 셀 수 없는 종과 속으로 있다는 사실, 마치 혈연이나 인척 관계처럼 서로가 등차적으로 결합되어 있다는 사실 같은 것이 전혀 알려진 바 없기 때문이다. 이런 극히 일반적 사항조차 지식 수준에서 마저도 알려져 있지 않다. 따라서 그것들에 대한 등차적 관계나 인척 관계에 대한 묘사는 그늘져 있을 수밖에 없고, 더욱이 시대의 학식자들이 이와 같은 것들을 알고 싶어하지 않기 때문, 게다가 단지 껍데기 지식 수준에서 그나마 옆길로 들어서기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그들이 논쟁을 좋아하지만 이런 사항들에 관해서는 아니고, 단지 그런 것이 존재하는지 여부만을 논쟁할 뿐이다; 그들이 이런 상태에 머무는 한, 그들은 선과 진리의 무수한 종류들에 관하여 무엇이든 아무 것도 알려하지 않는다.

6-9절. 그리고 에서는 이삭이 야곱을 축복한 것, 그를 밧단-아람으로 보낸 것, 거기에서 그에게 여인을 데려오라 한 것, 그를 축복할 때 그에게 명령하여, 말하기를, 너는 가나안의 딸들 중에서 여인을 데려오지 마라 한 것을 보았다. 7 그리고 야곱은 그의 아버지에게와 그의 어머니에게 귀를 기울였다, 그리고 밧단-아람으로 갔다. 8 그리고 에서는 가나안의 딸들이 그의 아버지의 눈에서 악이었음을 보았다. 9 그리고 에서는 이스마엘에게 갔다, 그리고 여인들로 본처들 외에 느바욧의 누이, 아브라함의 아들 이스마엘의 딸 마할랏을 데려왔다.

그리고 에서는 이삭이 야곱을 축복한 것을 보았다. “야곱”인 진리의 선을 수단으로 결합하는 것에 관해 자연적 선이 생각함을 의미한다. 이는 “보다”의 의미가 생각하는 것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 이유가 생각함은 내향적으로 보는 것, 내적 시각밖에 더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에서가 자연 평면의 선을 표현한다로부터; 그리고 “축복함”의 의미가 결합함이다로부터; 이삭의 표현이 신성한 선 측면의 주님의 합리성이다로부터; 그리고 야곱의 표현이 진리의 선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위 모두를 종합해보면, “에서는 이삭이 야곱을 축복한 것을 보았다”에 의해 진리의 선을 통하여 결합함에 관하여 자연적 선이 생각함이 의미된다.
진리의 선을 통하여 결합함에 관하여 자연적 선이 생각함이 뜻하는 것은 납득력에 쉽게 와닿게 설명되기는 힘들 것 같다, 그러나 노력은 해보아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도 피할 수는 없다. 자연적 선의 생각함은 자연적 인간, 또는 외적 인간 안에 있는 합리적, 또는 내적 인간의 생각함이다; 그 이유가 생각하는 것은 자연적 인간, 또는 외적 인간이 아닌 합리적, 또는 내적 인간이기 때문이다; 전자, 또는 내적 인간은 천국의 빛 안에 있고, 이 빛 안에 주님으로부터의 총명과 지혜가 있기 때문이다; 이에 반대로, 외적 인간은 세상의 빛 안에 있고, 이 빛 안에는 총명이 없고, 생명조차 없다; 그러므로 내적 인간이 외적 인간 안에서 생각하지 않으면, 생각한다는 것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인간에게 생각함은 외적 인간 안에 있는 것처럼 나타난다, 그 이유가 인간은 세상 속에 있는 것을 통하여, 그것을 감각들을 수단으로 들어와진 것들로부터 생각하기 때문이다.
눈의 시각(시력)의 경우가 이와 같을 것이다. 감각적 인간은 눈 스스로 보고 있다고 상상한다, 허나 눈은 신체의 기관일 뿐, 내적 인간이 신체로부터 세상에 있는 것들을 보는 것이다. 아마 말함(speech)의 경우도 같은 것이다. 감각적 인간은 입과 혀 자체가 말한다고 상상한다. 이보다 여하간 조금 더 깊게 생각하는 이들은 말함은 후두부 기관, 또는 내면의 기관이 폐로부터의 숨에 의해서라고 상상한다; 그럼에도 생각함이 이런 기관들을 수단으로 말하는 것이다. 그 이유가 말은 생각이 말하는 것밖에 더 아니기 때문이다, 감각들의 오류는 이 외에도 아주 많다. 외적 인간에서 나타나는 모든 생명의 경우에서 마찬가지이다. 실상 거기 안에 있는 내적 인간이 물질적, 육체적 기관을 수단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생각함에 주목해보면, 이렇다: 인간이 육체 안에 사는 한, 그는 자연 평면에서 합리성으로부터 생각한다, 그러나 그의 자연 평면이 합리성에 상응하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따라 차이는 있다. 자연 평면이 상응할 경우, 그는 합리적이고, 영적으로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자연 평면이 상응하지 않을 때, 그는 합리적이지 않고, 영적으로 생각할 수 없다; 그 이유가 인간과 더불은 자연 평면이 그의 합리성에 상응할 때, 교통이 열려져, 주님으로부터 천국의 빛이 흘러들 수 있고, 총명과 지혜로 자연 평면을 계발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인간은 합리적이 되고 영적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그의 자연 평면이 합리성에 상응하지 않을 경우, 교통함은 닫히는 바, 주변의 빛이라 여겨질만한 것만이 흐를 뿐이어서 그저 댕그랑하는 소리 수준을 통하여, 합리성을 통하여 자연 평면으로 흐른다; 그 결과 그 인간은 합리적이지 못하고 영적으로 생각하지 못한다; 그 이유가 인간은 그가 향유하는 천국의 빛의 유입됨에 따라서 생각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인간은 자연 평면의 선과 진리가 그의 합리성과 상응함의 상태에 따라서 생각한다는 말이다.
그러나 천사들과 영들은 인간과 같은 방법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의 생각 또한 자연 평면에서 종결되어진다, 그 이유가 그들은 자기들과 더불어 자연적 모든 기억과 그것의 애착들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기억의 사용은 허락되지 않고 있다; 비록 그렇다해도 그것들은 평면(plane), 또는 기초의 역할은 하고 있어, 그들의 생각 속의 관념(idea)이 거기 안에 종결될는지 모른다. 이로부터 그들의 생각의 관념은 더 내면적이고, 그들의 말은 단어들의 형체로 된 인간의 것과 같지 않고, 실제적인 것들의 형체들로부터 되어 있다. 이는 그들의 생각이 그들의 자연 평면과 합리성이 상응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한가지 예증도 된다; 더불어 거기에도 합리적인 영들이 있다는 것, 이들은 영적으로 생각한다는 것, 또한 합리적이지 않은 영들이 있고, 그들은 영적으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도 있다; 그리고 이것은 육체의 삶에서 있던 그들의 애착과 그에 따른 생각과 정확하게 일치하여 있다는 것; 즉 그들이 세상에서 획득했었던 생명의 상태와 일치하여 있다는 것이다. .
이상으로부터 자연적 선의 생각이 무엇인지에 대한 것이 어렴풋하나마 나타났으리라 본다; 즉 이것은 자연 평면의 선 안에서 있는 생각이다. 영들의 관념에 따르면, 이것은 자연적 선으로부터의 생각이라 불리우고, 인간의 관념에 따르면, 이것은 자연 평면의 선 안에서 있는 생각이다. 이 후자, 즉 자연 평면의 선 안에서 합리성이 목적으로서 선을 중요시할 때 생각하는 것을 말한다. 고로 진리의 선을 통하여 결합함에 관한 자연적 선으로부터의 생각은 목적에 관한 자연 평면에서 있는 생각이다, 즉 진리가 어떻게 자연 평면에서 결합할 수 있는 지에 관한 생각이다는 말이다; 그리고 이것은 공통의 방법(길)을 수단으로 신성한 질서에 따라 있다; 자주 말했듯, 이것은 외적인 것으로부터 있다; 다시 말해 이것은 질서 상에서 최말단, 또는 마지막 (수준, 등차)이다. 자연 평면의 모든 거듭남은 여기로부터 개시된다. 이 마지막, 최말단의 것들은 처음에 있었던 지식들, 유아기나 어린 아이 때의 지식들이다 (3665항).
(자연 평면의 거듭남의) 시작에서, “에서”인 선으로부터의 진리는 “야곱”인 진리로부터의 선과 외적 형체에서 결합되어 있지 않다; 그 이유가 이 둘은 서로에서 거꾸로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둘은 가장 깊은 측면에서, 즉 목적 측면에서는 결합되어 있다. 그 이유가 선으로부터 있는 진리의 목적은 질서에 따라 진리들이 선에 결합되려는 것; 이것 역시 진리로부터 있는 선의 목적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목적들이 결합하는 바, 그 둘은 결합되어 있는 것과 같다. 질서의 거꾸로 됨은 첫 번째에서 목적에 관계되는 수단일 뿐이다.

그리고 그를 밧단-아람으로 보냈다. 이는 이 선에 관한 지식들을 통하여 명백히 함(manifestation, existentia)의 시작을 의미한다. 이는 “그를 보냄”의 의미가 명백히 함의 시작이다로부터; 그리고 “밧단-아람”의 의미가 진리에 관한 지식들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것들이 선에 관한 지식들이라 불리우는 이유는 모든 진리들은 선에 관한 지식들이기 때문, 그리고 선으로부터 있지 않은 진리들, 즉 목적으로서 선쪽을 보지 않는 진리들은 진리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리들이 교리쪽을 보는 한, 이 진리들은 진리에 관한 지식들이라 불리운다.

그에게 거기로부터 여인을 데려오라는 것. 이는 진리에 대한 애착을 통하여 그것으로 결합함을 의미한다. 이는 “여인”의 의미가 진리에 대한 애착이다로부터 분명해진다; 이 애착을 받아들임이 거기에 인접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를 축복하면서 그에게 명령해서, 말하기를. 이는 결합이 결과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곰곰이 생각하고 이로부터 지각도 하게 됨을 의미한다. 이는 “축복함”의 의미가 결합함이다로부터; 그리고 “명령하고 말함”의 의미가 곰곰이 생각함과 동시에 지각함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너는 가나안의 딸들 중에서 여인을 데려오지 마라. 이는 그가 거짓과 악에 대한 애착과는 결합해서는 안됨을 의미한다. 이는 “여인을 데려 옴”이 연합되고 결합하는 것이다로부터; 그리고 “가나안의 딸들”의 의미가 거짓과 악에 대한 애착들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리고 야곱은 그의 아버지에게 그리고 그의 어머니에게 귀를 기울였다. 이는 순종과 애착을 의미한다. 이는 “귀를 기울임” 또는 “누군가에게 경청함”의 의미가 순종함이다로부터 분명해진다; 그리고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경청할 때, 이는 애착으로부터 순종함을 의미한다.
그리고 밧단-아람으로 갔다. 이는 이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들을 불어 넣어지도록 함(빨아 들여지게 함)을 의미한다. 이는 “가다”와 “여행하다”의 의미가 삶의 질서와 계획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여기서는 질서에 따라 빨아 들여지는 것, 즉 “밧단-아람”에 의해 의미된 이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들을 빨아 들여지게 함을 의미한다.

그리고 에서는 가나안의 딸들이 그의 아버지 이삭의 눈에서 악이었음을 보았다. 이는 자연적 선이 지금까지 결합하고 있었던 그 진리에 대한 애착은 결합에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주님께서 예견하시고 섭리하심을 의미한다. 이는 여기서의 “보다”의 의미가 예견과 섭리이다로부터; 그리고 에서의 표현이 자연 평면의 신성한 선 측면에서의 주님이다로부터; “가나안의 딸들”, 여기서는 헷족의 딸들이 진짜이지 않은 바탕으로부터의 선에 대한 애착들이다로부터; 그리고 “그의 아버지 이삭의 눈에 악이었다”의 의미가 결합에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결국은 결합을 도출하지 못할 것); 즉 “에서”인 자연 평면의 선을 통하여 “이삭”인 합리성의 선과의 결합이 있지 못하리라는 것이다. 이상을 종합해 보면, 이 말들에 의해 주님의 예견과 섭리하심이, 즉 진짜이지 않은 바탕으로 일 경우 진리에 대한 애착은 결합에 이바지함이 없으리라는 것이다. 어떻게 이런 의미가 있게 되는지에 관하여는 에서가 자기의 여인으로 데려온 헷의 딸들의 설명이 있는 창. 26장 34, 35절과, 가나안의[헷족] 딸들로부터 자신의 여인을 삼지 말도록 야곱에게 말해진 창. 27장 46절을 되돌아보면 될 것이다. 앞 장의 가나안의 딸들은 거짓과 악에 대한 애착을, 여기서의 가나안의 딸들은 진짜이지 않은 바탕으로부터 있는 진리에 대한 애착들이 의미된 이유는 헷족들이 가나안의 토지에서 이방인들의 교회 범주에 있기 때문, 그리고 거기 있는 타 민족들, 즉 가나안, 아모리, 브리스 등등과 달리 완전히 악하고 거짓된 편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헷족에 의해서는 이방인들 사이에 있는 주님의 영적 (평면의) 교회가 표현되어졌다.
천적 수준이고 홍수 이전에 존재했던 태고 교회가 가나안의 토지 안에 있었다는 것은 이미 살핀 바 있다; 그리고 고대 교회, 즉 홍수 이후에 있던 고대 교회 역시 거기에 있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얼마의 다른 왕국들도 있었다. 이로부터 그 토지 안에 있는 모든 나라들, 그리고 마찬가지로 거기 있는 지역들과 강들도 표현적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그 이유가 천적 인간이었던 태고인들은 자기들이 본 대상물을 수단으로 주님의 왕국 속에 있는 이것, 저것을 지각했기 때문이다; 고로 또한 그 토지의 지역들과 강들을 수단으로 지각했다. 이들의 시대 이후, 이런 표현들은 고대 교회 안에 잔존하였다, 고로 그 시대 때에도 그 토지에 있는 장소들의 표현은 잔존하고 있었다. 고대 교회에서 있는 말씀, 또한 이 말씀 안에 있는 장소들의 이름들은 표현적 의미를 지니게 된 것이다. 하여, 이것은 “모세와 예언자들”이라 불리우는 시대 이후의 말씀에서도 이어졌다. 이런 상황이었기 때문에 아브라함에게 그쪽으로 가도록 명령하셨고, 그들의 후손들이 그 토지를 상속받을 것이라는 약속도 만들어진 것이다. 그렇다고 그들이 다른 민족들보다 우량한 품질의 등급인 것은 절대 아니다, 그 이유가 그들도 최악의 상황 사이에서 있어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을 수단으로 표현 교회가 설립되도록 하시기 위하여, 즉 가나안 안에 있는 인물이나 장소에 신경쓰지 않고, 그것들이 표현한 것들만에 집중함으로 (정밀하고 순수한) 표현 교회가 설립되도록 하시기 위하여; 그리하여 더불어 태고 교회와 고대 교회에서 사용된 이름들이 유지되도록 하시기 위해 (아브라함을 가나안의 토지로 불러들이신 것이다).

그리고 에서는 이스마엘에게 갔다, 그리고 아브라함의 아들 이스마엘의 딸 마할렛을 데려왔다. 이는 이 선이 신성한 근원으로부터의 진리와 결합함을 의미한다. 이는 에서의 표현이 자연 평면의 선이다로부터; 그리고 아브라함의 아들 이스마엘이 신선한 근원으로부터의 진리를 표현한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스마엘이 주님의 영적 (평면의) 교회를, 결과적으로 진리를 표현하는 것은 이미 살폈다; 그리고 아브라함이 “아버지”라 불리우는 주님의 신성을 표현한다는 것도 이미 살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의 아들 이스마엘의 딸 마할렛”에 의해서는 신성한 근원으로부터의 진리가 의미되어진다. “여인을 데려 옴”이 연합되고 결합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자명하다; 그리고 이로부터 “에서가 이스마엘에게 가고, 아브라함의 아들 이스마엘의 딸 마할렛을 데려옴”에 의해서는 이 선이 신성한 근원으로부터의 진리와 결합함이 의미된다.

여인으로 본처들 외에 느바욧의 누이. 이는 더 내면적으로 있는 천적 진리들에 대한 애착을 의미한다. 이는 “누이(sister)”의 의미가 지적, 또는 합리적 진리이다로부터; 느바욧의 표현이 영적 평면의 교회 속에 있는 선이다로부터; 이로부터 “느바욧의 누이”란 천적 진리에 대한 애착을 의미한다; 또는 같은 말로, 영적 (평면의) 선에 대한 애착이다로부터; “여인”, 또는 “헷의 딸들”의 의미가 진짜이지 않은 바탕으로부터의 진리에 대한 애착이다로부터; 그리고 “여인을 데려옴”의 의미가 연합되고 결합되는 것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상으로부터 분명해지는 바, 즉 이 말들은 에서에 의해 표현된 선은 신성한 근원으로부터의 진리와, 고로 더 내면적으로 천적 진리에 대한 애착과 결합한다는 것을 의미해놓고 있다.
위의 사항들이 어떻게 그렇게 의미되는지에 관하여는 이미 여러 번 상술해왔다, 그러나 주제의 일반적 사항들이 알려지지 않는 한 이해함이 한계에 부딪칠 수밖에 없다. 더욱이 작금에 이르러서는 세상은 이런 사항들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 그 이유가 지상적이고 천국적이지 않은 것이 관심과 돌봄의 대상이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세상의 것은 보고 알겠지만 천국의 것들은 (육체의 눈으로)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기에 관심을 둘 수 없다고 막무가내로 단언하기 때문이다. 사실상 말씀의 내적 의미에 포함된 사항들이 들추어내 알려진다면, 이에 대한 보충 설명 역시 있어야 할 것은 당연한 일이고, 이 설명을 위해 적절한 예증도 곁들여야 마땅할 것인바, 에서가 표현하는 선으로부터의 진리와 야곱이 표현하는 진리로부터의 선의 경우가 어떻게 되는지, 그리고 인간이 거듭나기 전에서는 진리로부터의 선과 선으로부터의 진리가 거꾸로 있다는 것, 그러나 거듭난 후에는 이 둘이 결합되어 있다는 것도 예증으로 아래에서 설명해보자
인간은 거듭나질 수 있다는 것에 대해서이다- 즉 주님께서는 이를 예견하시고 설비도 해두신다-첫째로 유아기와 어린 아이 수준과 같은 인간의 상태를 예견하시고 그것을 위해 준비해두심 이다. 즉 인간이 자기 이웃을 향한 선행의 일들이 무엇인지 모르는 상태, 그런 이유는 그가 선행이 무엇인지, 그의 이웃이 무엇인지를 아직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가 말씀으로부터 가난한 자를 도와야 한다는 것을, 이들을 도와주는 자는 누구든지 천국에서 보상을 받는다고 알고 있다, 하여 그는 여느 사람을 돕기보다 더 거지들에게 선을 행한다, 그 이유는 이 거지들이 말씀에서 뜻하는 가난한 자라고 믿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거리에서 구걸하는 자가 불경하고 사악한 삶을 영위하는지 여부에 대해서, 신성한 예배에 속하는 무엇이든 경멸하는지 여부에 대해서, 단지 나태하고 게으른 것을 좋아하여 구걸하고 있는지 여부에 대해서 곰곰이 생각해봄도 없이 선을 행할 뿐이다. 그럼에도 어쨌든 거듭남의 첫 수준의 상태에 있는 그는 (사려 분별이 안되어서 일 뿐) 자기 심정으로부터 선을 행하고 있다; 이 선한 행위는 거듭남이 시작되는 처음 단계인 외적 진리로부터의 선들인 것이다; (그리고 언제인가부터) 내면에 속하는 선으로부터의 진리가 이런 행동들 안으로 흘러든다, 그리고 어린이 수준의 지식들에 따라서 일들을 행한다;
그러나 언제인가 그가 더 계발되는 때, 그는 궁핍함과 곤경에 처해 있다고 믿겨지는 모든 이들에게 선을 행하기를 바란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경건한 것과 불경한 것 사이의 구분을 이들을 두고 구별해내지 못한 상태에 있어서 이웃이 같은 수준에서 동일하게 이웃이라고만 알 뿐이다. 그러나 그가 이런 사안들을 놓고 더 계발될 때, 그는 이웃을 구분하여 곧바르고 선한 자만을 가려서 돕고, 사악하고 사기치는 이웃을 도울 경우, 오히려 자신이 많은 이들에게 해를 끼치는 결과를 초래한다는 것을 알고 있는다. (강도 행각을 저지르려 하는 이웃인가 심각히 고려해보지도 않고 이웃은 사랑해야 한다 하는 계명에 따라 그가 부탁한 칼을 구해다 주는 격이다 역자주.) 그가 한참 더 계발될 때, 즉 그가 거듭나질 때, 그는 선하고 경건한 자만에게 선을 행하는데, 그 이유는 그가 선을 베푸는 인물을 두고 선을 행하지 않고 그 인물 안에 있는 선만을 사랑하여 선을 베풀기 때문이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선하고 경건함 안에 현존하시는 까닭에, 선인 것에 대한 그의 애착을 통하여 그는 자기가 주님을 사랑하고 있음을 증거하게 된다. 인간이 심정으로부터 이 선행 안에 있을 때, 그는 거듭나진다.
이로부터 분명해지는 바, 이전의 상태는 이후의 상태에 거꾸로 있었다는 것이다. 즉 이전에 선이라고 믿었던 것이 선이 아니었다는 말이다. 어쨌든 거듭남의 시작에서 비록 거꾸로일지언정 선을 행하는 것은 반드시 필요하다, 그 이유는 어떤 문제에서 그의 지식이 더 멀리 진전하지 않고 있기 때문일 따름이다; 그리고 선행의 내면의 선은 거기로부터의 지식 속에 있던 진리 외의 여느 엉뚱한 지식 안으로 흘러들 수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가지 분명한 것은, 내면의 선은 언제나 현존하고 있으면서 거듭남의 작업을 진행한다는 것, 그러나 그 자체를 명백히 하지 못할 뿐인데, 그 이유는 지식을 수단으로 인간이 선들과 진리들에 관한 진짜 본성에 관하여 계속적으로 계발되어져야 하는데, 아직 그 단계에 이르지 못해 지체되기 때문이다. 이상의 설명으로부터 여기서 야곱이 표현하는 진리로부터의 선이 무엇인지, 그리고 에서가 표현하는 선으로부터의 진리가 무엇인지; 그리고 이 둘은 처음에는 거꾸로이지만 (목적 측면에서) 결합되어 있다는 것에 대해 어느 정도 납득되었을 것이다.

10, 11절. 그리고 야곱은 브엘-세바로부터 나왔다, 그리고 하란을 향하여 갔다. 11 그는 어떤 장소를 발견하고, 거기서 밤을 보냈다, 그 이유는 해가 저물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그 장소에서 돌을 가져왔다, 그리고 그것들을 그의 베개로 놓았다, 그리고 그 장소에서 드러누웠다.

그리고 야곱은 브엘-세바로부터 나갔다. 이는 신성한 교리적인 것들로부터 더 멀리 떨어진 삶(생활)을 의미한다. 이는 “가다”의 의미가 사는 것이다로부터; 고로 “나가다”의 의미는 더 멀리 떨어져 사는 것이다; 그리고 “브엘-세바”의 의미가 교리적인 것들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 모두로부터 “야곱이 브엘-세바로부터 나갔다”에 의해서는 신성한 교리적인 것들로부터 더 멀리 떨어진 삶을 의미하게 된다. 생활이 외적 진리들 안에 있을 때 그 삶은 더 멀리 떨어져 있다 라고 말해진다, 이는 마치 거듭나는 어떤 인간의 유아기나 어린 아이 때의 삶과 같다.
이 삶이 무엇인지, 그리고 이 삶의 품질이 무엇인지를 더 보려면 몇 마디 말을 보태야 할 것 같다. 말씀의 모든 역사적 이야기들은 본질적 신성한 교리적인 것들로부터서는 멀리 떨어져 있다. 그럼에도 여전히 어린 아이를 위해서는 유용하고, 이 이야기들이 아이들의 마음 속에 있음으로 해서 이것이 끄나풀이 되어 점차적으로 진리와 선에 관한 내면의 교리적인 주제들을 소개받고 이 주제 안으로 차츰 끌어들여질 수 있다. 그리하여 마지막으로 신성한 것들 자체쪽으로까지 끌어당길 수 있다. 그 이유는 역사 이야기 내부에, 이야기들의 가장 깊은 속에 신성이 있기 때문이다. 어린이들이 역사 이야기들을 읽는 동안, 그들은 순진으로부터 역사 이야기들에 의해 감동되어진다, 한편 아이들과 더불은 천사들은 행복한 천적 수준의 상태 안에 있다, 결과적으로 (아이들은 외적으로는 눈치채지 못하지만, 그와 더불은 천사들 때문에 실제로) 그는 역사적 사실들이 표현하고 의미하는 이런저런 것들과 더불어 있는 셈이 된다. 그리하여 천사들의 천적 수준의 행복이 어린이에게 흘러들어 즐거움을 유발한다. 이런 처음의 상태가 존재할 수 있도록을 위하여, 즉 거듭나지는 이들의 유아기나 어린 시절의 처음 상태가 있어지도록 말씀의 역사물이 주어지고 있다, 그리고 쓰여진 역사물의 일반적, 세부적, 특수적 측면 안쪽에 신성에 관한 깊은 내용들을 담고 있다. 이 역사물이 신성한 교리적인 것들로부터 얼마나 멀리 옮겨져 놓여 있는지는 예를 들면 알게 된다. 누군가가 처음으로 이런 것을 알게 될 때, 즉 하느님께서 시내 산에 내려오셨고, 모세에게 십계명이 적힌 돌판을 주었다는 것, 그리고 모세는 돌판을 깨뜨렸다는 것, 하느님께서는 같은 명령들을 다른 돌판에 쓰셨다는 것을 알게 될 때이다; 이 역사물에 그가 즐거워한다면, 그는 신성한 교리적인 것들로부터 멀리 떨어진 외적 진리의 생명 안에 있는 셈이다; 그러나 그 후에 그가 명령들 자체, 가르침 자체가 그 안에 또 다른 것을 포함하고 있다는 것에 즐거워하는 한편 그것에 감동되기를 시작한다. 이때 그는 진리의 생명 안에 있다, 그러나 여전히 신성한 것들 자체로부터서는 멀리 떨어져 있다. 그 이유가 명령들에 따른 삶이 오직 도덕적 생활뿐이기 때문, 거기로부터의 교훈은 시민 생활 내지 시민적 법률 안의 인간 사회에서 사는 모든 이에게도 익히 알려진 사항들이기 때문-즉 신(조물주)은 예배되어져야 한다, 부모를 존경하라, 살인, 간음, 도둑질은 범해져서는 안된다는 것 등등은 사회인 누구나 알고 지키는 명령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거듭나지는 이들은 이런 한층 멀리 떨어진 삶(도덕적 삶)으로부터 등차(수준)을 올려 신성한 교리적인 것들 안으로 더 가까이, 즉 영적인 삶 안으로 이끌려진다. 이 수준에 올라선 거듭나는 이들은 위와 같은 누구나 대충은 알고 지키는 명령들인데 왜 굳이 그렇게 엄청난 기적적인 방식 아래 천국으로부터 보내졌는지, 평범할 듯한 명령들, 말씀을 지니지 않은 이들도 익히 아는 명령들을 왜 굳이 하느님의 손가락으로 돌판에 쓰셔야 했는지가 궁금해 하기를 시작한다. 만일 그가 이런 생각의 상태 안에 와있을 때, 그는 거듭나질 수 있는 이들 사이에 있는 셈인 바, 그는 주님에 의해 더 내면의 상태 안으로, 즉 말씀 안쪽에는 필시 더 깊은 의미들이 감추여 놓여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상태 안으로 인도된다. 물론 그는 이런 더 깊은 내용에는 친숙하지 않고 때로는 이상히 여길 수도 있는 수준밖에 더 아니다. 어쨌든 그가 이런 상태일지라도 말씀을 읽고 있다면, 그는 예언서들, 특히 복음서들에서 이런 가르침들의 각각은 읽혀지는 글자에서의 의미 외에 더 천국적인 것을 포함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는 기회를 맞는다. (이런 사람들을 위해 인터넷 정보에 우리가 아는 지식들을 열심히 올려 그들이 검색하고 알고 합리적으로 판단하는 것을 돕는 것이 우리의 사명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역자주.)
예를 들면, 부모를 존경하라는 명령이다. 지금 그가 아는 이 명령은 이렇다; 즉 인간이 새로이 출생할 때, 즉 거듭나질 때, 그는 또 다른 아버지를 받는다는 것, 이때 그는 그분의 아들이 된다는 것, 이 분이 존경되어져야 한다는 뜻임을 안다는 말이다. 고로 이 의미는 이 가르침 내부에 감추여놓인 의미인 것이다. 그리고 점차적으로 이 새로운 아버지가 주님이심을 배운다; 마지막으로 그는 그분이 존경받으며 예배되어져야한다는 것, 우리가 그분을 사랑할 때 우리는 그분을 예배하고 있다는 것을 납득한다. 거듭나는 자가 이 진리 안에 있을 때, 그리고 이것에 따라 삶을 꾸릴 때, 그는 신성한 교리 안에 있다, 그리고 그때 천사의 상태 안에 있다, 그리고 이 상태로부터 그가 이전에 알았던 것들을 다시 뒤적거리게 된다. 하여 맨 위에 여호와, 또는 주님이 계신 사다리의 층계들을 따라 신성으로부터 흘러 내려오는 것을 지각한다. 이 계단들에는 천사들이 그를 위해 오르고 내려가고 하고 있다. 지금 그는 자기가 즐거워하며 지녔던 지식들이 등차적으로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 지식들인지, 즉 얼마나 낮은 수준이었는 지를, (지금으로서는 그것이 얼마나 유치한 교리적 수준인지를) 실감한다. 이외 다른 9개의 명령들도 위와 상황이 같다. 이상으로부터 “야곱이 브엘-세바로부터 나갔다”가 신성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삶을 의미함을 알게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하란을 향하여 갔다. 이는 이 (외적) 등급의 선과 진리를 의미한다. 이는 “하란”이 외적인 선과 진리를 의미함으로부터 알게 된다; 그 이유가 “하란”에 의해 외적인 것이, 거기 거주하는 “라반”에 의해서는 선과 진리가 의미되기 때문이다; 고로 “하란”에 의해 여기서는 외적인 선과 진리를 뜻해준다. 고로 “야곱이 브엘-세바를 나가 하란을 향하여 갔다”는 내적 의미에서, 그는 신성한 교리적인 것들로부터 더 멀어지는 쪽으로 자신을 향하게 했다를 의미한다; 이는 외적인 선과 진리쪽으로 인 것이다.
위에서 “이 등급의 선과 진리쪽으로”라고 말한 이유는 선들과 진리들은 등급들에 따라 서로로부터 완전하게 구별되기 때문이다; 내면의 선들과 진리들은 보다 높은 등급이다; 외면의 선들과 진리들은 보다 낮은 등급의 선들과 진리들이다. 보다 높은 등급 안에 합리성의 선들과 진리들이 있다; 보다 낮은 등급 안에 자연 평면의 선들과 진리들이 있다; 그리고 가장 낮은 등급에 육체의 감각적 선들과 진리들이 있다. 내면의 선들과 진리들, 즉 보다 높은 것들은 외면의 선들과 진리들, 즉 보다 낮은 등급의 것들 안으로 흘러든다, 그리고 그것 안에서 자신들의 형상을 진열한다, 마치 인간의 내면의 애착들이 그의 표정이나 생김새에 진열되는 것과 같다. 이로부터 분명한 바, 내면의 선들과 진리들은 외면의 선들과 진리들과 확연하게 분리되어 있다는 것, 또는 보다 높은 것은 보다 낮은 것들과 구별되어 있다는 것이다. 얼마나 잘 분리되어 있던지, 내면의 것들은 외면의 것, 또는 보다 낮은 것들로부터 아주 독립되어 존재하는 것이 가능할 지경이다. 등차가 구분되는 것에 대한 어떤 관념(notion)을 가지지 않은 이들은 내면과 외면의 선들을 구분할 수 없고, 이 선들이 인간의 혼과 더불어, 또는 인간의 영과 육체와 더불어, 또는 다른 삶에서의 천국들과 더불어 어떻게 있는지도 알 수 없다.
천국은 크게 구분지어 셋이다. 이 천국은 저 천국에 비해 더 내면에 위치하고 있다. 가장 깊은 안쪽에 위치하는 천국이 셋째 천국이다 이 천국들은 등급별로 서로로부터 구분되고 있다. 가장 깊은 천국, 즉 셋째 천국에 있는 이들은 주님에게 가장 가까이 있는 이들이다; 내면, 또는 둘째 천국에 있는 이들은 주님으로부터 보다 더 멀리 떨어져 있다; 그리고 외면, 또는 첫째 천국에 있는 이들은 주님으로부터 한층 더 멀리 떨어져 있다. 이 천국들은 마치 인간의 가장 안쪽의 것이 그의 바깥쪽 것들과 교류하는 것과 달리 서로 간에 교류하는 것이 가능하지 않다; 그 이유는 주님을 사랑함과 이웃을 향한 선행 안에 있는 이들은 세 천국들에 상응하는 형상 안에서 가장 작은 단위의 천국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각자는 자기의 등급에 따라 주님으로부터 세 천국들의 선들과 진리들을 받는다. 서로에 상대적으로 있는 등급에 대하여는 이미 살핀 항목을 참조하기 바란다.
주님을 진짜로(실제로, real) 사랑하는 이들은 그 사랑함의 지각을 지니기 위해 선과 진리의 보다 높은 등급 안에 있는다, 고로 가장 깊은 안쪽, 또는 셋째 천국에 있는다; 고로 주님에게 더 가까이 있고, 그들은 천적 (수준의) 천사들이라 불리운다. 이웃을 향한 선행 안에 있는 이들의 경우, 그들이 선행을 지각하나, 주님을 사랑함에 대한 지각은 많지 않기에 선과 진리의 보다 낮은 등급 안에 있는다, 그래서 그들은 내면의 천국, 또는 둘째 천국 안에 있는 바, 그들은 주님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고, 그들은 영적 (수준의) 천사들이라 불리운다; 그러나 진리에 대한 애착만으로부터 이웃을 향한 선행 안에 있는 이들은 그들에게 감동을 일으킨 진리가 아니면 이웃을 향한 선행 자체에 대한 지각을 가지지 못하는 바, 선과 진리의 한층 더 낮은 등급 안에 있고, 고로 주님으로부터 한층 더 멀리 떨어져 있는데, 이들은 선한 영들이라 불리운다.
이상 살핀 바로부터 등급에 관련된 것을 어느 정도 가늠했으리라 본다; 즉 보다 높은 등급에 있는 것들은 자기보다 한 단계 아래의 것들 안에서 그 자신을 진열한다. 주님을 사랑함 안에 주님에 대한 가장 근접한 형상이 있는데, 이것이 “모습(모양, likeness)”이라 불리운다, 그러므로 주님을 사랑함 자체 안에 있는 이들은 그분의 “모습”이라 불리운다. 비록 멀리 떨어진 상태이지만 선행 안에도 주님의 형상이 있다. 그 이유가 진정한 선행 안에는 주님이 현존하시기 때문이다; 이 선행 안에 있는 이들은 그분의 “형상들(images)”이라 불리운다; 그 반면 진리에 대한 애착 안에 있는 이들, 이로부터 이웃을 향한 어떤 선행 안에 있는 이들도 주님의 형상들이나 주님으로부터 한층 더 멀리 떨어진 상태에 있다. 이 세 천국들은 이런 등급으로 구별되어 있다, 그리고 이 등급에 따라서 주님께서는 신성한 선과 진리와 더불어, 고로 지혜와 총명과 더불어, 그리고 천국의 기쁨과 행복과 더불어 흘러드신다.

그는 어떤 장소를 발견했다(lighted). 이는 상태를 의미하는데, 이는 “장소”가 상태를 의미함에서 분명해진다.

그리고 거기서 밤을 보냈다, 해가 저물어서 이다. 이는 불명료한 상태 안에서의 삶을 의미한다. 이는 “밤”이 그늘진 상태를 의미함으로부터; 고로 “밤을 보냄”은 그늘진 상태 안에서의 생활을 의미하게 된다; 그리고 “해가 짐”은 불명료해진다(희미해진다)를 의미한다; 그 이유가 해가 지는 시각은 저녁이고, 저녁은 불명료함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기서 불명료함은 두 측면에서, 즉 진리 측면인 총명의 불명료함, 선 측면인 지혜의 불명료함이 뜻해진다; 그 이유가 천사들이 주님으로부터 받는 빛 안에 총명과 지혜가 있고 이로부터 파생된 것을 천사들이 지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천사들은 빛을 지니는 만큼에서 총명과 지혜 또한 지닌다; 그러나 그들이 빛 안에 있지 않은 만큼에서 그들은 그늘진 상태에, 즉 총명과 지혜 안에 있지 않다. 이런 이유로 많은 이들이 빛이 이해함에 속하는 것을 말할 때 흔히 사용되고 있다. 인간은 이렇게 사용되는 이유를 눈치채지 못한다, 하여 이 말의 근원을 모르는체 비교를 위한 방편일 뿐이다고만 알고 있다. 이것 뿐만 아니라 다른 삶 안에 존재하는 것, 즉 그들의 영들에 관한 지각으로부터 흐르는 표현의 여러 형태의 것들을 사용은 하고 있으나 근원을 모르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이것들이 다른 삶으로부터 이기에 부지불식간에 자기들이 내면적으로 인정해버렸기 때문에 대화 속에서 받아져왔다는 것, 단지 육체의 것들을 수단으로 삭제당한 것일 뿐 임을 모르고 있다. 육체의 것들은 실상 인간의 내면의 인간이 존재하는 지각에 속한 것을 소멸시키는 속성을 지니고 있다.
말씀에서 “해가 짐”은 선행과 신앙을 가지지 않은 이들이 악과 거짓 안에 있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 그리고 이것이 교회의 마지막 때 역시 의미한다는 것은 이미 살핀 바 있다; 또한 선과 진리에 속한 것들 측면에서 희미한 것, 즉 신성한 교리적인 것들로부터 더 멀리 떨어진 등급에서 있는 것을 의미한다. “해가 짐”, 또는 “해가 지고 있다”는 것이 위와 같은 의미를 지니는 것을 아래 인용하는 말씀으로부터도 알 수 있다.
미가서에서:
환상 대신 너희에게 밤이; 점치는 것 대신 어둠이 너희에게 있다; 그리고 태양은 예언자들 위에서 내려갈 것이다, 그리고 낮은 그들 위에서 검게 될 것이다 (미. 3:6).
“태양이 예언자들 위에서 내려 감”은 그들이 어떤 진리도, 진리에 대한 어떤 이해함도 지니지 못하는 것을 의미한다; “예언자”는 교리 속의 진리들을 가르치는 이들을 표시한다.
아모스서에서:
내가 정오에서 태양을 내려가게 하고, 빛의 낮에서 땅을 어둡게 하는 그 날이 올 것이다; 그리고 나는 너희 축제들을 통곡함으로 바꿀 것이다, 그리고 너희의 노래들을 곡하는 소리 로 바꿀 것이다 (암. 8:9, 10);
“태양이 정오에서 내려가는”것은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을 지닌 이들이 진리 측면에서 희미해짐을 표시한다.
[3] 이사야서에서:
너희의 태양은 더 이상 내려가지 않을 것이다, 너희의 달은 자체를 물러나게 하지 않을 것 이다; 그 이유가 여호와께서 영원히 지속되는 빛을 발하시기 때문이다 (이. 65:20);
위는 주님의 왕국을 취급하고 있다; “태양이 더 이상 내려가지 않을 것이다”는 그들이 선의 생명 안에서와 지혜 안에서 있을 것임을 표시하는데, 그 이유는 그들이 주님의 천적 수준의 사랑과 빛 안에 있기 때문이다; “달은 자체를 물러나게 하지 않을 것이다”란 진리의 생명 안에와 총명 안에 있을 것임을 표시하는데, 그 이유는 그들이 주님의 영적 수준의 사랑과 빛 안에 있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말씀의 내적 의미에서 해가 뜨는 것과 지는 것을 뜻하는 것이 분명해졌을 것이다.
다윗서에서:
오 여호와 나의 하느님은 참으로 위대하십니다; 당신은 영광과 영예를 입으셨습니다; 당신 은 옷을 입듯 빛을 가지고 자신을 두르셨습니다; 그분은 커텐을 치듯 천국을 펼치셨습니다; 그분은 지정한 축제들을 위하여 달을 만드셨습니다; 그분은 태양의 내려감을 아십니다. 당 신은 어둠을 배치하시어 밤이 되게 하십니다 (시. 104:1, 2, 19, 20);
위 구절도 마찬가지로 “달”은 총명을 표시하고, 그리고 “해”는 지혜를 표시하는데, 모두 주님으로부터 이다; “태양이 내려감”은 각각의 희미해짐을 표시한다; “어둠이 밤이 되도록 배치하심”은 희미함의 상태를 완화되게 해주심을 의미한다. 천사들은 가장 수준 높은 빛과 덜 수준 높은 빛 사이의 변화를 가진다는 것, 또는 지혜의 가장 높은 수준과 덜 높은 수준의 변화를 가진다는 것, 그리고 상태들의 이런 변화들은 태양이 올라오는 아침으로, 태양이 가장 높은 고도인 정오로, 그것이 지는 저녁으로, 그리고 다시 아침으로 이어지는 것과 같다는 것에 대하여는 차후 주님의 신성한 자비로부터 다른 곳에서 살필 것이다.
여호수아서에서:
광야로부터 큰 강, 유브라데 강에 이르기까지조차 이 레바논, 헷족의 모든 토지, 그리고 태 양이 내려가는 큰 바다에 까지가 너의 경계일 것이다 (여. 1:4);
위 구절은 가나안의 토지의 넓혀짐을 묘사하고 있다. 이를 수단으로 주님의 왕국이 내적 의미에서 의미된다
모세의 책에서:
만일 너희가 네 이웃의 옷을 저당잡기로하여 담보물로 잡았다면, 태양이 내려가기 전에 그 것을 되돌려야 할 것이다; 그 이유는 그 의복은 그의 유일한 옷이고, 그의 피부를 위해 있 어 그것 안에서 그가 잠을 자기 때문이다 (출. 22:26, 27).
그리고 다시:
만일 그가 가난한 자이다면, 너는 그의 담보물 위에 눕지 말 것이다; 너는 태양이 내려가기 전에 그에게 분명히 되돌려야 한다; 그리고 그는 너에게 복을 빌어줄 것이다; 그리고 여호 와 네 하느님 앞에서 너를 위해 정의가 되어 있을 것이다 (신. 24:12, 13).
위의 법, 그리고 여타 다른 법에서도 마찬가지로 거기에는 신성한 법의 표현과 의미가 있다, 이것은 주님의 왕국에 있는 선과 진리에 관한 표현과 의미이고, 이것으로부터 법이 와지는데, 그 이유가 위의 세부 사항들로부터도 분명해진다. 위 구절은 법의 바탕 자체 같은 것을 함유하고 있다, 즉 인간의 동료들에게서 외적인 진리들이 박탈되어져서는 안된다는 것인데, 이 진리들은 그것에 따라 그들이 살고 있는 교리적인 것들과 의식들이다; 그리고 이런 진리들이 “의복”이다. “태양이 내려가기 전에 되돌려줌”이란 진리가 그 사람에게서 멸해지기 전에를 표시한다; 그리고 이 진리가 외적이기 때문에, “옷은 그가 잠을 자도록 그의 피부를 위한 것”이라 말해진 것이다.
다시:
불결한 것을 만진 혼은 저녁까지 불결할 것이다, 그리고 거룩한 것들을 먹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그가 그의 살을 물에서 목욕시킬 때, 그리고 태양이 내려갈 때, 그는 깨끗해진다; 그리고 그 후에 그는 거룩한 것을 먹을 것이다 (레. 22:6, 7).
그리고 다시:
깨끗하지 않은 자, 저녁을 향하여 물들에서 자신을 목욕시킬 것이다; 그리고 태양이 내려 갈 때, 그는 진영의 한가운데로 들어갈 것이다 (신. 23:10, 11).
위의 법 역시 선과 진리에 관한 법들에, 또는 주님의 왕국에 있는 질서의 법들에 그 근원을 두고 있다; 그렇지 않다면, 불결한 어떤 자가 저녁까지 불결해 있을 수 없고, 그때 그가 물들로 씻고, 태양이 내려간 이후 깨끗해질 것이라고 말해질리 없기 때문이다. 위 법들은 주님의 왕국에 있는 질서의 법으로부터 오고 있다, 즉 선하고 천사같은 영들이 자기만을 사랑함의 상태 안으로 빠져들 때, 그럼으로 해서 거짓의 상태 안에 있을 때, 그때 그들은 그들의 본성의 상태로, 또는 보다 낮은 수준의 상태로 약간 환송되어진다, 그리고 거기서 그들에게 의문이 되는 주제들을 위해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들이 흡입되어진다, 이것이 “저녁에서 자신을 물들로 씻는 것”에 의해 의미되어 있다. 그리고 그들이 “태양이 내려 감”에 의해 의미된 이 희미함의 상태에 있다가 이전의 상태로 되돌려지는데, 이것이 “깨끗해짐”에 의해, “진영의 한가운데로 들어감”에 의해 의미되어 있다. 이 주제에 관하여는 주님의 신성한 자비로부터 별도로 말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이상 살핀 바로부터 “태양이 내려 감”은 선한 자와 더불어서는 진리 측면에서 희미함의 상태를, 악한 자와 더불어서는 거짓의 상태를 의미한다는 것이 분명해졌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그 곳의 돌들을 가져 왔다. 이는 그 상태로부터의 진리들을 의미하는데, 이는 “돌들”이 보다 낮은 수준의 진리들, 고로 자연적 인간의 진리들을 의미함으로부터 알려진다.

그리고 그것들을 그의 베개로 놓았다. 이는 지극히 일반적인 자연 평면 속의 것이 신성과 교통함(친밀한 관계에 있음)을 의미한다. 이는 머리나 목을 위한 “베개”가 외적인 것들과 교통함, 고로 지극히 일반적인 자연 평면과 교통함을 의미함으로부터 알려진다; 목덜미, 또는 목은 내면의 것들이 외면의 것들과 교통함을, 같은 말로, 더 높은 것들이 더 낮은 것들과 교통함을, 그리하여 결합함을 의미한다 (3542, 3603항). 이로부터 목덜미나 목 아래 있는 것, 즉 베개는 가장 깊은 안쪽의 것, 즉 신성한 것들이 가장 바깥쪽의 것들과 교통함을, 고로 지극히 일반적인 자연 평면과 교통함을 의미한다; 그 이유가 외적인 것은 상대적으로 일반적이고, 가장 바깥의 것은 최고로 일반적이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내면의 것들로부터의 낱개들은 하나(one)로, 고로 일반적인 것으로 외면의 것들 안에서 나타나기 때문이다. 이것들은 더 나아가 꼭대기가 천국에 닿는 땅 위에 장착된 사다리, 그 위에서 오르고 내려가고 하는 하느님의 천사들이 있는 사다리에 의해 표현되고 의미되고 있는데, 이는 아래에서 살핀다.

그리고 그 곳에 드러누웠다. 이는 상태가 평온함을 의미한다. 이는 “드러누움”이 평온한(tranquillity) 상태를 의미함으로부터 분명해진다; 그 이유가 드러누움이나 잠이 듦의 의미가 이 이상 더 없기 때문이다. “드러누움”의 내적 의미에 관하여는 말씀의 다른 구절로부터도 알 수 있을런지 모른다. 여기서 표현적 의미의 내적 측면에서 취급되는 이들인, 거듭나아지는 이들은 무엇보다 먼저 평온한 상태 안에 있는다. 또는 외적인 평화 안에 있는다 (그 이유가 외적인 평화, 또는 외적 측면의 평화로움이 “평온”이라 불리우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평온은 그것 내부에 가장 깊게 있는 평화의 신성한 상태로부터 생산되어진다; 그리고 이 평온은 탐욕들이나 거짓들을 몰아냄을 통하여 외적인 것들로 세상에 나타내진다. 그 이유가 탐욕이나 거짓이 불안정한 모든 것의 원인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인간 삶의 시작에서, 즉 유아기 동안, 모두 각각의 인간은 평온의 상태 안에 있다; 그러나 그가 삶을 더 일구어나갈 때, 즉 성년이 될 때, 그는 자신을 이 상태로부터 옮겨놓는다, 그 이유는 그의 관심사가 세상 속의 것들이기 때문이다, 하여, 결과적으로 성년기에는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 이로부터 파생된 거짓들에 의해 야기되는 걱정 불안쪽에 자신을 내어준다는 말이다.
거듭나아져 가는 이들 안에서 (출생한) 새로운 생명과 더불은 경우도 위와 같은 처지이다: 먼저 그는 평온의 상태 안에 있는다; 그러나 그가 새로운 삶 안으로 건너갈 때, 그는 그와 동시에 비평온한 상태 안으로도 진입한다; 그 이유가 그가 이전에 자신 안으로 빨아들였던 악들과 거짓들이 나타나고 세상밖으로까지 버젓이 그 자태를 드러내 그를 휘젖어 방해하기 때문이다; 결국 그는 악마적인 패거리에 의해 애태움과 시험의 상태로까지 진입하고, 이 패거리들은 그의 새로운 삶의 상태를 파괴하려 골몰한다. 한편 가장 깊은 그의 내부는 평화의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그 이유가 이 평화가 그에게 있지 않으면, 그는 시험과의 전투를 감행할 수 없기 때문, 그리고 그의 전투하는 목적이 이 평화를 찾는 것이기 때문, 그리고 이 목적을 가지지 않으면, 그는 시험과 싸울 힘과 능력도 가지지 못하기 때문이다. 더욱이 그가 시험을 이겨내야 하는 이유도 이 평화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은 마치 가을과 겨울에 이어지는 봄, 저녁과 밤에 이어지는 새벽과 같다.
말씀에서 “드러누움”이 평온한 상태이다는 것은 아래 인용 구절로부터 알 수 있을 것이다. 모세의 책에서:
만일 너희가 내 규례 안에서 걷고, 내 명령을 지켜 그것들을 행한다면, 나는 토지에 평화를 줄 것이다, 그리고 너희는 드러누울 것이다, 그리고 아무도 너희를 두려워하게 만들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나는 악한 들짐승들을 토지로부터 중단되게 할 것이고, 검이 너희 토지를 통과하지 못하게 할 것이다 (레. 26:3, 6);
위 구절은 “드러누움”이 평화와 평온의 상태임을 분명하게 서술해놓고 있다; “악한 짐승들”은 악의 탐욕들을 표시하는데, 이것들이 중단된다는 것; “검”은 진리에 맞서 싸우는 거짓을 표시하는데, 이것이 “통과하지 못한다”는 것; 하여 위 구절은 평화와 평화로부터의 평온이 선과 진리로부터 이다는 것; 그것을 파괴함은 악들과 거짓들로부터 이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사야서에서:
늑대가 어린 양과 함께 거주할 것이다, 그리고 표범이 염소 새끼와 드러누울 것이다; 송아 지와 어린 사자가 함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어린 아이가 그것들을 인도할 것이다. 그리고 암소와 곰이 먹일 것이다; 그들의 어린 것들이 함께 드러누울 것이다 (이. 11:6, 7);
위는 주님이 취급되어진다, 그리고 그분의 왕국에 있는 평화의 상태기 서술된다; 그들이 “함께 드러눕는”것은 그들은 어떤 악과 거짓에 의해 침범당하지 않을 것을 의미한다. 호세아서에서:
그 날에 나는 그들을 위하여 들판의 들짐승과, 그리고 하늘들의 새들과, 그리고 땅 위를 기 는 것들과 언약을 만들 것이다; 그리고 나는 토지로부터 활과 검과 전쟁을 부러뜨릴 것이 다, 그리고 그들로 확실히 드러눕게 할 것이다 (호. 2:18);
위도 마찬가지로 “드러누움”은 불온의 원인인 악들과 거짓들의 제거로 있는 평온의 상태를 의미한다.
[5] 다윗서에서:
나는 나를 드러뉘여 잠들게 할 것이다; 그리고 나는 깨어날 것이다; 그 이유가 여호와께서 나를 받쳐주시기 때문이다. 나는 나에게 맞서겠다고 만 명이 나를 에워싼다해도 두려워하 지 않을 것이다 (시. 3:5, 6);
위에서 “드러뉘여 잠들게 함”은 평온과 안전한 상태를 의미한다. 다시:
평화 안에서 나는 나를 뉘이고 잠잘 것이다; 그 이유가 당신 여호와만이 나로 안전하게 거 주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시. 4:8).
그리고 다시:
그분은 나를 푸른 초지에서 눕게 하실 것이다; 그분은 나를 쉼의 물들쪽으로 인도하실 것이다; 그분은 내 혼을 회복시켜 주실 것이다 (시. 23:2, 3).
위의 구절들로부터 평화와 평온의 상태가 “드러누움”에 의해 의미된다는 것; 그리고 “그 장소에 드러누움”은 상태가 평온함을 의미한다는 것이 분명해진다. “장소”는 내적 의미에서 상태를 의미한다.

12-15절. 그리고 그는 꿈을 꾸었다, 그리고 땅 위에 사다리가 놓여 있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그것의 머리는 하늘에 닿고 있었다. 그리고 바라보니 하느님의 천사들이 그 위에서 올라가고 내려가고 있었다. 13 그리고 바라보니 여호와께서 그 위에 서 계셨다. 그리고 그분은 말하셨다, 나는 네 아버지 아브라함의 하느님, 그리고 이삭의 하느님 여호와이다. 네가 누워 있는 이 토지를 나는 너에게 줄 것이다, 그리고 네 씨에게 줄 것이다. 14 그리고 네 씨는 땅의 먼지만큼 일 것이다, 그리고 너는 바다쪽으로 그리고 동쪽으로, 그리고 북쪽으로, 그리고 남쪽으로 쏟아져 퍼질 것이다. 그리고 네 안에서, 그리고 네 씨 안에서 지면의 모든 족속들이 복 있을 것이다. 15 그리고 나는 너와 함께 있을 것이고 네가 가는 곳이 어디이든지 너를 지킬 것이다, 그리고 너를 이 지면으로 도로 데려다 놓을 것이다. 나는 내가 너에게 말한 것을 다 할 때까지 너를 떠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꿈을 꾸었다. 이 말씀이 예견(foresight)을 의미하는 것은 “꿈을 꿈”이 미래의 것들을 미리 말함을 의미한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 이유가 예언적인 꿈들, 이는 신성이었는 바, 장차 올 것을 예언함들이기 때문이다. 내적 의미에서의 “꿈”과 “꿈을 꾸는 것”의 의미가 이럴진대, 꿈은 최고 의미에서 주님이 취급되고, 그것들은 예견을 의미하게 된다, 그 이유가 예언함들은 주님의 신성한 예견으로부터 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자연의 공통의 질서로부터, 그리고 이 질서로부터 미리 보여질 수 없는 사건들에 관하여 예언함들의 유일한 근원이다는 것은 아래 말씀으로부터 알 수 있다. 모세의 책에서:
예언자가 여호와의 이름으로 말할 때, 그러나 그 말이 행동으로 와지지 않거나 발생하지 않을 때, 여호와께서 말하신 것이 아니다; 예언자가 건방지게 그것을 말한 것이다
(신. 18:22);
그리고 비록 장차 올 것들에 대한 예언들이라 해도 이것이 사악한 자나 또 다른 신을 숭배하는 자로부터 일지도 모른다는 것이 아래 구절로부터도 알게 된다:
만일 너희 가운데에서 예언자, 또는 꿈장이가 일어난다면, 그리고 그가 표시와 경이함을 준 다면, 그리고 그 표시와 경이함이 그가 말한대로 와지고, 그가 너희에게 말한다면, 즉 다른 신들을 따라가자, 이것을 너희는 알지 못했었다, 그리고 그들을 섬기자; 너희는 그 예언 자의 말들, 또는 꿈장이의 꿈들에 솔깃해 하지 말라; 그 이유가 여호와 너희 하느님이 너희 를 시험하시기 때문이다 (신. 13:1-3);
이로부터 분명해지는 것은 예언 자체는 신성으로부터 이었다는 것, 그러나 다른 신들을 예배하도록 설득하는 것은 예언자 당사자에게 속한 예언이었다는 것, 사람들이 솔깃해 하는지를 시험하려고 이런 예언자들에게 허용되었다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또는 다른 이유로 해서, 아주 자주 오래전부터 바알을 섬기고 다른 신들을 예배했던 이들이 환상들을 보았고, 꿈들을 꾸었고, 그들이 말한 것이 와지기도 했다, 이로 인해 많은 이들이 유혹당했다; 이것들에 관해 우리는 예레미야서 23장에서 읽어 볼 수 있다; 이 외에 “점쟁이”, “예측자”, “요술쟁이”, 그리고 “무당” 등등으로 불리우는 다른 자들도 있다, 이들은 자연 속의 마술을 공부한 이들 사이에 끼여 있는데, 이들 모두는 신성인 것에 관하여는 어떤 것도 미리 말하지 못했다, 그리고 사랑의 선과 그분에 대한 신앙의 진리에 반대되는 것만을 말했다, 이것이 마술이고, 이것들의 품질은 무엇이든 외적 형체에서 나타날지 모른다.

그리고 사다리가 땅 위에 놓여 있었다. 이는 가장 낮은 진리와 이 진리로부터 파생된 선이 교통함을 의미한다. 이는 “사다리”의 의미가 교통함(communication)이다로부터 알게 되는데, 아래에서 살핀다; 그리고 “땅”은 가장 낮은 것을 의미한다, 그 이유가 이 말 뒤에 즉각 뒤잇는 말이 “그것의 머리는 하늘에 닿았다”인데, 이것은 가장 높은 것을 표시하기 때문이다. 이를 종합하면 “사다리는 땅과 하늘 사이에 놓여있다”는 것, 또는 가장 낮은 것과 가장 높은 것 사이에 놓여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이것은 교통함(왕래함)을 의미한다. 가장 낮은 진리와 이 진리로부터 파생되는 선이 교통함이 사다리가 땅 위에 놓여 있다에서 의미되는 이유는 여기서 취급되는 것이 진리이고, 야곱에 의해 표현된 그 등급으로부터 파생되는 선이 취급된다는 사실 때문이다. 원어에서 “사다리(ladder)”는 “길(path, way)”을 의미하는 표현으로부터 파생되고 있다. 길이 진리를 뜻하는 것은 이미 살폈다. 더욱이 천사들이 진리에 관하여 이야기를 할 때, 이것은 영들의 세계에서는 “길들”로 진열되고 있다; 고로 “사다리, 그것의 한쪽 끝은 땅에, 다른 끝은 하늘에 닿게 장착되었다”가 보여주는 것은, 가장 낮은 위치에 있는 진리가 가장 높이 있는 진리와 교통함을 의미하고 있다는 것인데, 아래에서 이어진다.

그리고 그것의 머리는 하늘에 닿고. 이는 신성과 더불어를, 즉 신성과 교통함을 의미한다. 이는 “머리”, 또는 사다리의 정상(꼭대기)이 가장 높은 것을 의미함으로부터; 그리고 “하늘”의 의미가 신성한 것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최고 의미에서 주님이 취급되기 때문이다. 고로 “하늘”은 신성 자체를 의미한다; 그러나 표현적 의미에서 이는 거듭나지고 있는 인간을 다루는 바, 이는 주님으로부터 있는 가장 깊은 곳의 선과 그 선에서 파생되는 진리를 의미하는데, 마치 천국 안에서와 같다, 그리고 이로부터 천국 자체도 의미한다. 이것이 신성이라고도 불리우는데, 그 이유는 주님으로부터 이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주님 또는 같은 말로 신성, 이는 주님만으로부터 인 바, 천국의 모든 것 안에 있는 모든 것 이시다; 그리고 거기에는 신성으로부터 있지 않은 것은 하나도 없다. 이런 이유로 때로는 주님은 천국 자체 이시다 라든가, 천국 안에 있는 모든 것은 주님 안에 있다 라고 말해지곤 한다.

그리고 바라보니 하느님의 천사들이 그 위에서 올라가고 내려가고 하였다. 이는 무한하고 영원하게 교통함, 그 결과 결합함이 있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거기서 가장 낮은 것으로부터의 승강함, 그 후에 질서가 바뀌면 하강함이 있다는 것; 이는 말씀에서 천사들의 언급이 있을 때 의미하는 것, 즉 주님의 신성한 어떤 측면을 의미하는 것으로부터 알게 된다. 여기서 그들은 신성한 진리를 의미하는데, 그 이유는 여기서 그들의 존재가 “하느님의” 천사라고 불리우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내적 의미에서 진리가 취급되는 대목에서는 하느님이 명명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호와”가 명명될 경우에서는 선이 다루어진다. 그래서 비록 그 끝에 여호와께서 서 계신다고 말했음에도 천사들을 두고 여호와의 천사라 말해지지 않고 하느님의 천사들이라 말해지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 이유는 이 대목의 주제는 야곱에 의해 표현되는 것인 진리로부터 있는 선이기 때문이다. “사다리에서 오르고 내려가고”에 의해 무한하고 영원하게 교통함, 그리고 그 결과로 결합이 있음을 의미함이 더 설명 없이 위의 설명만 가지고도 족할 것이라 본다. 만일 교통함과 그 결과로 결합함이 무한하고 영원하지 않으면, 주님의 신성 자체에 관한 것을, 그리고 주님의 신성한 인간에 관한 것이 서술되어질 수 없다; 그 이유가 주님 안에 있는 모든 것은 무한하고 영원하기 때문이다; 있음 측면에서는 무한하고, 명백히 나타내심 측면에서는 영원하시다. 위 설명을 종합하면 분명해지는 것은, 즉, “사다리가 땅에 놓여있고, 그 머리는 하늘에 닿고, 사다리에서 하느님의 천사들이 오르고 내려가고 함”에 의해, 가장 낮은 것으로부터의 승강함, 질서가 바뀌면 하강함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이 승강과 하강이 어떤 것인지는 자주 말해왔던 대목이었기도 하다. 이 질서는 인간의 거듭남의 질서이기도 하고, 이것이 여기서와 이어지는 구절들에서 서술되기는 하나, 아직 교회 안에 알려진 바 없기에, 이것의 본성은 한번 더 예증을 보태어 짚고 넘어가기로 한다. 세상도 아는 것은, 인간은 그의 부모의 본성 안에서 태어난다는 것, 그리고 그의 할아버지의 본성 안에서, 더 거슬러 올라가면, 선조 대대로의 본성 안에서 태어난다는 것이다; 줄여 말해서 인간은 선조로부터 계속적으로 축적된 모든 악을 유전적으로 받아가지고 태어난다. 그러므로 당사자 자신만에 집중해보면, 자기 자신으로부터서 그가 가진 것은 악밖에 없다; 이런 결과, 이해함과 의지 모두에서 인간은 깡그리 파괴되어져 있다; 그리고 자신으로부터서 선을 뜻하는 것은 하나도 없고, 그 결과 자신으로부터 진리를 이해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러므로 그가 선이라 부르고 선이다고 믿는 것은 악일 뿐이다; 그가 진리라고 부르고 진리이다고 믿는 것은 거짓일 뿐이다. 예를 들면: 타인을 사랑하기보다 자신을 더 사랑하는 것; 타인보다 자신이 더 나아지기를 바라는 것; 타인의 것을 몹시 탐하는 것; 자신만을 챙기려드는 것, 타인을 챙겨줌은 단지 자신을 위한 방편일 경우만 허용하는 것; 등등이다. 인간이 이러한 것을 자신을 중심으로 바랄 경우, 그는 그것을 선이라고 부르고, 진리라고 말한다. 더욱이 누군가가 자신이 선이라고, 진리라고 부르는 것에 일침을 가할 경우 그는 그를 미워하고 앙갚음을 도모하려 가슴을 불태운다, 하여 그가 파멸되기를 바라고, 파멸시키기 까지 한다. 그리고 그 파멸에 즐거움을 느낀다. 그리고 이것으로 그가 자신이 선이고 진리이다를 확증하는데, 이 확증의 강도에 비례하여 그는 이런 짓을 더욱 실제적으로 감행하며 즐거움을 만끽하려 든다.
이런 인물이 다른 삶에 올 때, 그는 거기서도 똑같은 바램들을 가지고 있다. 즉 그가 세상에서 실제의 삶을 수단으로 철저히 물든 본성 자체가 거기에서 그대로 남아 있다, 게다가 그로 인해 만끽한 즐거움 역시 지각되어진다. 이런 이유 때문에 이와 같은 인물은 자신보다 타인을 더 배려하는 천국의 어떤 사회 안에 낄 수 없고, 그의 본성과 일치하는 지옥의 어떤 사회에 끼어야 한다. 고로 이런 본성은 그가 다른 삶에 당도하기 전 세상에서 반드시 뿌리뽑혀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뿌리뽑음은 자신 스스로부터는 불가능하고 거듭남을 통하여 주님에 의하지 않으면 가능해질 수 없다; 즉 그는 완전히 새로운 의지력과 새로운 이해력을 주님으로부터 받음으로 가능해진다는 말이다. 또는 다른 말로 이 능력 모두를 새로이 만듦으로 가능해진다. 그러나 이것이 결과되기 위해서 인간은 어린 아이로서 재 출생되어야 함이 급선무이다. 그리고 악과 거짓인 것, 선하고 진리인 것을 배워야함도 급선무이다; 그 이유는 지식 없이 그에게 어떤 선도 불어넣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그가 자신으로부터 판단할 경우, 그는 선인 것을 악이라고 진리인 것을 거짓이라고 인정할 것이기 때문이다.
한가지 유의 사항은 그가 이런 지식들을 배워간다고 그가 이전에 가졌던 것들에 완전히 반대되는 것만을 배운다고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즉 모든 사랑은 자기로부터 시작한다는 것; 자기(자아)가 제일 먼저 돌보아져야 하고 그 다음 타인이다는 것; 선의 실행은 대상자의 속성이 무엇이든 그가 가난하고 비참한 외적 형태만으로 판단해 실행되어야 한다는 것; 마찬가지로 과부나 고아의 경우에서도 그들이 그렇게 불리우기에 단순히 선을 베풀어야 한다는 것; 마지막으로 일반적으로 적들에게도 그러해야 한다는 것, 이럴 때 우리는 천국에 들어갈 입장권을 받는다고 판단하는 지식들도 섞여 있다는 말이다. 이런 뒤섞인 지식들, 그리고 여타 다른 지식들도 그의 새로운 삶의 유아 시기에 속하는 것들이다. 그가 이런 속성 속에 있는 동안 그는 얼마큼은 그의 이전 삶에서, 얼마큼은 그에게 도입된 새로운 생명으로부터 파생되어 있다. 이런 상태가 이상적인 상태에서는 멀리 떨어진 수준이지만 어쨌든 새로운 의지력과 이해력의 형성에 도움을 주는 것만은 확실하다. (즉 거듭남의 출발 테이프를 끊은 것만 해도 꽤 발전을 이룩한 셈일지 모른다 역자주.) 하여, 이것들은 가장 낮은 선들과 진리들이고, 이로부터 거듭남이 개시된다, 그리고 이것들이 자신 안으로 더 내면적이고 신성한 진리들에 더 가깝게 진리들을 받아들이게 승인하기 때문에, 이를 수단으로 인간이 이전에 진리들이라고 믿고 있었던 거짓들이 뿌리뽑혀 나갈지 모른다.
그러나 거듭나지는 이들은 이런 진리들을 기억 속에 담기위해 단순히 배워지지 않는다, 그러나 생활로서 배운다, 그 이유가 그들이 이 진리들을 실행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이 그것들을 실행하는 것은 주님께서 그들의 지식 없이 온전히 은밀하게 심어두셨던 새로운 의지의 시작으로부터 이다; 그리고 그들이 이 새로운 의지를 받는 만큼에서, 그는 이런 지식들도 그만큼만 받아들인다, 그리고 그것들을 행동으로 가져다 놓는다, 그리고 그것들을 믿는다. 그러나 그들이 새로운 의지로부터 받지 못한다 해도 그는 이와 같은 것을 배울 수는 있지만, 그것들을 행동으로 가져다 놓지 않는다, 그 이유가 그들은 기억 속의 지식을 쌓는 것에 관심이 있을 뿐, 생활에의 사용은 없기 때문이다.
위는 이전의 삶의 자리를 계승하는 새로운 삶이 이제 막 시작되는 유아와 어린 아이 수준의 상태이다; 그러나 이 수준을 벗어나는 새로운 삶의 소년기와 청년기에서 그는 자기의 외적 형태에서 나타나는 인물됨을 중요시하던 관점에서 자신의 선의 측면의 품질이 어떠한지에 관심의 대상이 옮겨진다; 하여 우선 시민 생활에서, 그리고 도덕적 생활에서, 마지막으로 영적 생활에서 이다; 그리고 이때 그는 선을 그의 상석에 앉히고 사랑하기를 시작한다. 그리고 선으로부터 어떤 인물이든 사랑하기를 시작한다; 마지막, 즉 그가 아직 더 완전해질 때, 그는 선 안에 있는 이들에게 선을 행하여 돌본다, 게다가 그의 선의 품질에 일치하는 선을 베푼다, 그리고 마지막, 그는 그들에게 선을 행함에서 즐거움을 느낀다, 그 이유는 그가 선 안에서 즐거움을 느끼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을 확증하는 것들에서 유쾌함을 느낀다. 이렇게 하여 그가 확증하는 것들을 그는 진리들로서 인정한다; 그리고 그것들은 그의 새로운 이해력으로부터의 진리들이다, 이 진리들은 그의 새로운 의지력의 선들로부터 흐른다.
그가 이 선 안에서 즐거움을 느끼는 수준에서, 그리고 이 진리들에서 유쾌함을 느끼는 수준에서 그는 이전 삶의 악들에 비즐거움을, 이전 삶 속의 거짓들에 비유쾌함을 느끼고 있다; 그리고 그 결과 이전의 의지력과 이전의 이해력으로부터의 것들과 새로운 의지력과 새로운 이해력으로부터의 것들 사이에 분리가 거행된다; 그리고 이것은 (행함에 관심이 없는) 앎에 대한 애착에 일치하지 않고, 앎을 실행함에 대한 애착과 일치된다. 결과적으로 그는 자기의 유아기의 진리들은 상대적으로 거꾸로이었다는 것을 보고 있다, 하여 그는 똑같은 것이지만 이제는 다른 질서 안으로 조금씩 되돌려 가져다 놓는다, 즉 이전에 상석에 있던 것은 차석으로, 이전에 차석에 앉혔던 것은 상석으로 되돌려 앉힌다는 말이다. 이는 종속 관계가 거꾸로 되는 상황이다; 고로 그의 유아기와 어린 아이 시기의 진리들을 수단으로 하느님의 천사들이 사다리를 수단으로 땅으로부터 하늘에 오르는 것이다; 그 후에 그의 성년기의 진리들을 수단으로 하느님의 천사들은 사다리를 수단으로 하늘로부터 땅으로 내려오는 것이다.

그리고 바라보니 여호와께서 그 위에 서 계셨다. 이는 가장 높으신 주님을 의미한다. 이는 구약 성경의 말씀에서 주님이 “여호와”라고 매우 자주 불리우셨다로부터; 그리고 신약 성경의 말씀에서는 여호와라고 불리우신 곳은 없고, 여호와 대신에 “주님”으로 불리우셨다는 사실로부터 분명해진다. “그것 위에 서 계심”이 가장 높게 있으심을 의미하는 것은 설명 없이 자명해진다. 이 말들이 내적 의미에 감추인 비밀인 즉, 모든 선들과 진리들은 주님으로부터 내려온다는 것, 그리고 그분에게로 올라간다는 것이다; 즉 그분은 첫째이시자 마지막째이시다. 인간이 창조된 이래 주님으로부터의 신성한 것들은 그를 통하여 자연의 최말단에까지 내려오는지 모른다, 그리고 자연의 최말단의 것들로부터 그분에게 올라갈는지 모른다; 그리하여 인간은 신성과 자연계, 자연계가 신성과 하나로 되게 하는 매체일는지 모른다; 그리고 자연의 최말단 자체는 하나로 되게 하는 매체로서의 인간을 통하여 신성으로부터 살아가는지 모른다; 물론 이런 경우는 인간이 신성한 질서에 따라 살았을 경우이다.
인간이 이렇게 창조되었다는 것은 인간 신체 역시 하나의 조그만 세상이다는 사실로부터 분명해진다, 그 이유가 자연계의 모든 비밀들이 인간 내부에 저장되었기 때문이다; 에테르(靈氣)와 그것의 변형된 것 안에 있는 모두 각각의 감추인 특성은 인간의 눈 내부에 저장되어 있다; 그리고 공기 안에 있는 모든 특성은 귀 내부에 저장되어 있다; 그리고 공기에서 떠다니며 행동하는 것은 보여질 수 없는 것은 무엇이든 그것이 지각되는 후각 기관 안에 있다; 그리고 물들과 여타 액체 안에 있는 보일 수 없는 것은 무엇이든 취각 기관 안에 저장되어 있다; 그리고 상태의 변화들 자체는 신체 모든 곳에 있는 촉각 기관 안에 저장되어 있다; 이 외에도 한층 더 감추인 것들은 만일 그의 삶이 질서에 일치하고 있다면, 그의 내면의 기관들에서 지각될 것이다. 이로부터 분명한 바, 신성은 인간을 통하여 자연계의 최말단에게 까지의 하강이 있다는 것, 그리고 자연의 최말단으로부터 신성쪽으로의 상승이 있다는 것, 더욱이 이를 인정하는 것은 심정으로부터의 신앙을 가지고, 즉 사랑과 더불어서만 이고, 이때 주님은 인간 당사자의 첫 번째이시자, 마지막 번째이심을 인정할 것이다.
이와 같은 상태에 태고인들, 즉 천적 인간이 있었었다; 그 이유가 그들은 어떤 감각을 수단으로 납득되는 것은 무엇이든 주님의 어떤 것을 생각하는 수단으로 그들에게 존재했기 때문이다; 고로 주님과 그분의 왕국에 관한 것이다; 그리고 이로부터 그들에게 세상적, 땅에 속한 것들로부터 즐거움이 왔다 (1409, 2896, 2897, 2995항). 더욱이 그들이 땅에 속한 것들을 찬찬히 볼 때, 이것들은 그들의 눈 앞에서 마치 살아 있는 듯 하여 나타났다; 그 이유가 그것들에 내려온 생명이 내적 시각과 지각 안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의 눈에 표출된 대상물은 이 생명의 형상들이기 때문이다; 이 형상들, 비록 죽은 것이지만, 이럴 경우 그들에게 살아 있다. 이와 같은 것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에 관하여 천적 천사들이 지니는 지각인 것이다. 이 지각은 나에게도 경험하도록 해주셨다; 그리고 이로부터 역시 어린 아이들도 이런 지각을 지니고 있다. 이 모두로부터, 인간을 통하여 주님의 신성한 것들이 자연의 최말단에 내려오고, 자연의 최말단으로부터 그분에게 상승하는 것에 대해서, 그리고 이것들이 신성한 교통을 표현한다는 것, 그 결과 “천사들이 땅위에 놓인 사다리, 그 꼭대기에 여호와께서 서 계신 사다리에서 오르고 내려감”에 의해 의미된 최고 의미에서 있는 결합에 대해서 알았으리라 본다.

그리고 그분은 말하셨다, 나는 네 아버지 아브라함의 하느님 여호와이다. 이는 주님, 그분으로부터 선이 오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는 여호와가 주님의 신성한 있음 자체이시다 것, 이 분이 신성한 선으로부터 “아브라함의 하느님”이라 불리우신다는 사실로부터 분명해진다. 그리고 신성한 선으로부터 모든 천적 선들과 영적 선들이 있기 때문에, 그리고 이 선들로부터 모든 진리들 역시 있기 때문에 여기서 “네 아버지 아브라함”, 즉 야곱의 아버지, 비록 이삭이 야곱의 아버지일지라도 “네 아버지”라고 말해진다. 내적 의미에서 아버지는 선을 의미한다, 그 이유는 이로부터 모든 것들이 일반적, 특수적 모두에서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선을 통하여 진리들 모두는 명백히 나타냄을 갖는다; 고로 선과 진리의 결혼으로부터 이다. 천국 자체는 선과 진리의 신성한 결혼으로 존재하는 것밖에 더 아니다, 즉 주님 안에서 선과 진리, 진리와 선의 신성한 결혼으로부터 이다는 말이다.
보편적 자연 안에서 일반적, 특수적, 세부적 모두는 선과 진리와 관련을 맺고 있다; 그 이유가 자연 안에 천국의 천적, 영적인 선들과 진리들이 표현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천국 안에 주님의 신성한 선들과 진리들이 표현되어져 있다. 이로부터 분명한 바, 선은 아버지와 비슷하다는 것, 그리고 진리는 어머니와 비슷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말씀의 내적 의미에서 “아버지”에 의해 선이, “어머니”에 의해 진리가 의미된다는 것, 실로 보다 높은 선과 진리로부터 보다 낮은 선과 진리가 출생된다는 것, 이것이 “딸들”과 “아들들”로 의미되고 있다. 이것들은 형제와 자매들로 관련을 맺고 있다, 마치 손자와 증손자 같이, 사위, 장모, 며느리 같이 관련을 맺고 있다; 줄여 말하면, 친족, 혈연관계 같은 것을 모든 등차에서 형성한다는 것, 이것은 아버지인 선이 어머니인 진리와 결혼함으로부터 이다는 말이다.
말씀의 내적 의미에서 “아버지”가 선을 의미하는 것을 아래 구절로부터 알 수 있을지 모른다. 이사야서에서:
정의를 중요시하는 너희들아, 여호와를 찾는 너희는 나에게 귀기울이거라; 너희를 파낸 바 위를, 그리하여 생겨난 구덩이의 구멍을 잘 생각해보라; 너희의 아버지 아브라함, 너희를 낳은 사라를 잘 생각해보라; 그 이유가 그가 단신으로 있을 때, 나는 그를 불렀다, 그리고 나는 그에게 복을 내렸다, 그리고 나는 그를 번성되게 했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여호와께 서 시온을 위로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그분은 모든 그녀의 버려진 장소를 위로 하실 것이 기 때문, 그리고 그녀의 광야를 에덴 같이 만드실 것이기 때문, 그리고 쓸쓸한 곳을 여호와 의 동산 같이 만드실 것이기 때문이다 (이, 51:1-3);
같은 것이 말씀의 다른 구절에서도 “아브라함”에 의해 의미된다. 요한복음서에서:
예수께서 말하셨다, 나는 내 아버지와 함께 보았던 것을 말한다; 그리고 너희는 너희의 아 버지와 함께 보았던 것을 행한다. 그들이 그분에게 답하여 말했다, 아브라함이 우리의 아버 지이십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하신다, 만일 너희가 아브라함의 아들들이다면, 너희는 아브라함의 일들을 행할 것이다; 너희는 네 아버지의 일들을 행하라 (요. 8:38, 39, 41).
그리고 마태복음서에서:
우리는 우리의 아버지로 아브라함을 가지고 있다 라고 말하려고 네 자신 속에서 생각하지 말라; 그 이유가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하느님께서는 이 돌들을 아브라함의 자녀로 일으 키실 수 있기 때문이다. 보라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여져 있다; 그러므로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 모두 각각의 나무는 잘리워져 불에 던져진다 (마. 3:9, 10).
그리고 누가복음서에서:
가난한 자 나사로가 죽었을 때, 그는 천사들에 의해 아브라함의 품으로 운반되어졌다; 그리 고 부자 역시 죽자, 그리고 매장되었다; 그리고 그가 지옥 안에 있을 때, 그가 눈을 들어올 려 멀리 떨어져 있는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았다; 그는 외쳐 말하기를, 아 버지 아브라함이시여 제게 자비를 베푸소서; 당신, 즉 아버지에게 간구하오니 당신이 그를 내 아버지의 집으로 보내소서 (눅. 16:22-24, 27).
위 구절에서 분명한 바, 아브라함이 뜻해지지 않는다는 것, 그러나 신성한 선 측면의 주님이 뜻해진다는 것이다. (아브라함이 천국에는 알려져 있지 않다는 것, 말씀에서 그의 이름이 언급되는 대목이 읽혀질 때, 주님이 이해되어진다는 것에 대하여는 1834, 1876, 1989, 3305항을 보라.)
내적 의미에서 “아버지”가 선을 의미함을 아래 구절로부터 알 수 있을 것이다. 모세의 책에서: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존경하라; 그리하면 여호와 네 하느님이 네게 주시는 토지에서 네 날들이 길어질는지 모른다 (출. 20:12; 신. 5:16).
이 훈계, 십계명의 다른 훈계 같이 두 의미들에서 진실이다; 그리고 내적 의미에서 “아버지와 어머니를 존경하는 것”은 선과 진리를 사랑하는 것, 그리고 선과 진리 안에 주님이 계신 것이다. “토지에서 날들”은 그 결과 주님의 왕국에서 있는 선의 상태들인데, 이는 “날들”이 상태들을 의미함으로부터 분명해진다; 그리고 여기서 “토지”인 “가나안”의 의미가 주님의 왕국이다로부터; 그리고 “길어지는 것”은 선이라고 단정된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의미가 이러하기 때문에 표현적 유태인의 교회에서 많은 법들이 부모들과 아들들에 관련하여 법령화하여 두었다, 이 법령의 모두 안에 있는 부모는 선과 진리를 의미하고, 최고 의미에서 신성한 선과 신성한 진리 측면에서 주님이 의미된다. 모세의 책에서:
자기 아버지, 또는 자기 어머니를 쳐죽이는 자는 반드시 죽을 것이다. 그리고 자기 아버지 또는 자기 어머니를 저주하는 자는 반드시 죽을 것이다 (출. 21:15, 17).
다시:
자기 아버지, 또는 자기 어머니를 저주한 모두 각각의 인간, 그는 반드시 죽임을 당할 것이 다; 자기 아버지 또는 자기 어머니를 저주한 자, 그 자 위에 그의 피들이 흘려질 것이다 (레. 20:9).
그리고 다시:
자기 아버지 또는 자기 어머니를 우습게 여긴 자를 저주하라; 그리고 모든 백성은 아멘하 고 말할 것이다 (신. 28:16).
에스겔서에서:
잘 보라 이스라엘의 제 1 인자여, 그의 군사력에 따라 모두 각각의 인간은 피를 흘리기 위해 너희 안에 있어 왔다; 너희 안에서 그들은 아버지와 어머니를 우습게 여겼었다
(겔. 22:6, 7).
모세의 책에서:
만일 어떤 자가 고집불통하고 반역적인 아들을 가지고 있는데, 그가 그의 아버지의 음성, 또는 그의 어머니의 음성에 순종하지 않고 있다면, 그래서 부모가 징벌할지라도 부모에게 순종하지 아니할 것이다면; 그때 그의 아버지와 그의 어머니는 그를 붙잡을 것이다, 그리고 그를 성의 원로들에게, 그리고 그의 장소의 (성)문으로 데려갈 것이다; 그리고 그의 성의 모든 사람들이 그를 돌로 그가 죽도록 칠 것이다 (신. 21:18, 19, 21).
이 모든 구절들의 글자 의미에서 “아버지와 어머니”에 의해 아버지와 어머니가 뜻해진다; 그러나 내적 의미에서는 선과 진리가; 그리고 최고 의미에서는 신성한 선과 신성한 진리 측면에서의 주님이 뜻해진다; 이를 주님 자신께서 가르치신다. 마태복음서에서:
예수께서 그분의 손을 그분의 제자들에게 뻩치셨다, 그리고 말하셨다, 나의 어머니와 나의 형제들을 보라 그 이유는 천국들에 계신 나의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자 누구든지, 나의 형제, 그리고 자매, 그리고 어머니와 같기 때문이다 (마. 12:49).
그리고 다시:
너희는 스승이라 불리우지 말라; 그 이유는 너희의 스승은 한 분, 그리스도이시다; 그리고 너희 모두는 형제들이다. 그리고 너희는 땅 위에서 너의 아버지를 부르지 말라; 그 이유는 너의 아버지는 한 분, 천국들에 계신 아버지이시기 때문이다 (마 23:8, 9).
위 구절에서 스승이라고, 땅 위에서 아버지라고 불리우는 것이 금지된 것은 아니다; 금지된 것은 주님 외에 어떤 다른 아버지를 심정에서 인정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스승”, “아버지”라는 단어가 말씀에서 언급될 때, 그들에 의해 최고 의미에서 표현되는 주님으로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이미 말했던 바 있는(3702항) 천적 인간이었던 태고인들, 그들은 땅 위에서 지각한 것은 무엇이든 주님에 관해 생각하는 수단으로 그들에게 있었다.
위와 마찬가지의 내용이 주님께서 제자 중 하나에게 이야기하신 대목에 있다. 그 제자가 말했다:
주님, 저로 먼저 가서 제 아버지를 매장하게 해주십시오; 그러나 예수께서 그에게 말하셨 다, 나를 따르라, 그리고 죽은 자가 그들의 죽은 자를 매장하게 하라 (마. 8:21, 22);
이렇게 말하신 까닭은 천국에 계신 아버지, 또는 주님과 땅 위의 아버지의 관계는 마치 산 자와 죽은 자의 관계와 같기 때문이다. 고로 부모를 존경하라는 법은 만일 주님을 존경하고, 예배하며, 사랑하지 않으면 죽은 것과 같다. 그 이유가 이 법은 이 신성한 법으로부터 내려오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내려옴으로부터 이 법은 진짜로 살아 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말하셨다, “나를 따르라, 그리고 죽은 자가 그들의 죽은 자를 매장하게 하라.” 같은 내용이 엘리야가 엘리사에게 말했던 대목에 의미되어 있다:
엘리야가 엘리사를 지나쳐 가면서, 엘리사 위에 자기 망토를 던졌다. 그러자 엘리사는 그의 수소들을 남겨두고 엘리야를 따라 달렸다, 그리고 말했다, 제가 나의 아버지와 나의 어머니 에게 키스를 하게 허락해 주십시오, 그리고 그 다음 저는 당신을 따를 것입니다. 그리고 엘 리야가 그에게 말했다, 다시 돌아가라; 내가 네게 무엇을 행했느냐? 때문이다
(왕상 19:19, 20).
엘리야에 의해 주님이 표현되어졌는데, 이는 18장 서문과 2762항에서 이미 살폈다.
말라기서에서:
잘 보아라 나는 너희에게 예루살렘에 크고 격렬한 날이 닥치기 전에 예언자 엘리야를 보낼 것이다; 그리고 그는 아들들에 대한 아버지들의 심정이, 그리고 아버지들에 대한 아들들의 심정이 바뀌게 할 것이다, 이는 내가 저주로 땅을 치지 않도록 하려 해서이다 (말. 4:5, 6).
누가복음서에서, 천사들이 스가랴에게 그의 요한에 관해 말했다:
그리고 그는 그분의 얼굴 앞에서 아들들에 대한 아버지들의 심정이 바뀌도록 엘리야의 영 과 능력 안에서 갈 것이다 (눅. 1:17);
위 구절에서 분명한 것은, “아버지들”과 “아들들”이 아버지들과 아들들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는 것, 그러나 교회의 선들과 진리들, 즉 주님께서 이제 회복시키시려 하는 선들과 진리들이다는 것이다.
말라기서에서: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의 경계를 그 너머로 확대하실 것이다. 아들은 그의 아버지를 존경 할 것이다, 그리고 종은 그의 주인을 존경할 것이다. 그런데 만일 내가 아버지이다면, 나를 존경함은 어디 있느냐? 만일 내가 주인이다면, 나를 경외함은 어디 있느냐? (말. 1:5, 6);
위에서 “아버지”는 교회의 선 안에 있는 이들을 표시한다; 그리고 “주인”은 신성한 선 측면에서의 주님을; 그리고 “주인(masster, lord)”은 신성한 진리 측면에서의 주님을, 또는 “주님”을 분명하게 표시하고 있다.
다윗서에서:
내 아버지와 내 어머니는 나를 버렸으나, 여호와께서는 나를 받아주셨다 (시. 27:10);
위에서 “아버지와 어머니”는 선과 진리를 표시한다, 인간이 자신으로서는 진리인 어떤 것도 알 수 없음을, 선인 어떤 것도 행할 수 없음을 정녕 깨달을 때를 놓고 “버려졌다”라고 말해지고 있다; 또한 위 구절은 다윗이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에 의해 버려진 것처럼 이해되지 않도록 문장 표현이 되어 있기도 하다.
다시:
당신은 인간들의 아들들보다 훨씬 더 고우시다; 왕의 딸은 (궁궐) 안에서 온갖 영화를 누 린다; 그녀의 의복은 금을 섞어 지었다. 당신의 아버지들 대신 아들들이 있을 것이다, 이들 을 당신은 온 땅의 제 1 인자로 만드실 것이다 (시 45:2, 13, 16);
위는 주님이 취급되어진다; “당신의 아버지들 대신 아들들이 있다”는 신성한 진리들이 신성한 선들로서 있을 것이다를 표시한다; “왕의 딸”은 진리로부터의 사랑을 의미한다; “금을 섞어 지은 의복”은 선으로부터 파생된 진리의 품질을 의미한다. 여기서의 주제가 주님과 그분의 신성한 인간인 것과 마찬가지로, 이 시편 전체, 그리고 그 속의 세부적인 것도 각기 그것 안에 주제와 비슷한 예언을 지니고 있음이 분명하다; 고로 “왕의 딸들”은 왕의 딸을 뜻하지 않고, 금을 섞어 지은 그녀의 의복도, 아버지 대신 아들들이라고 말해진 것도, 이들이 온 땅의 제 1 인자로 만든다도 글자대로의 뜻이 아니고, 각각의 표현은 신성한 천적, 영적인 것들에 관해서이다.
모세의 책에서:
여호와께서는 그들을 사랑하시려고 네 아버지들 안에서 즐거움을 가지셨다, 그리고 그분은 그들 뒤를 이어 그들의 씨를, 모든 백성으로부터 오늘의 너조차 뽑으셨다. 그러므로 네 심 정의 표피를 할례받아라, 그리고 더 이상 네 목이 뻣뻣해 있게 하지 말라 (신. 10:15, 16);
위 구절의 내적 의미에서 “아버지들”은 고대와 태고 교회들을 표시한다, 고대 교회와 태고 교회가 그렇게 불리운 것은 그들이 지녔던 선과 진리를 사랑함으로부터 이었다; 선을 사랑함으로부터 천적 인간들이었던 태고인들로, 진리를 사랑함으로부터 영적 인간이었던 고대인들로 불리운 것이다. 교회에 있는 그들의 선들과 진리들이 소위 “하느님께서 뽑으신 씨”이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과 그의 열 두 아들들이 여기서 뜻하는 조상은 아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족과 유태 민족이 씨가 아니다는 것은 분명하다; 이렇게 그들에게, 그들에 관하여 말해진 이유는 인간이 알아채리기 쉬운 형체를 배려하심에서 일 뿐이다.
이사야서에서:
어린이가 노인에게, 그리고 천한 자가 존귀한 자에게 건방지게 처신할 것이다. 어떤 이가 그의 아버지의 집 안에서 그의 형제를 붙잡고, 말하기를, 너는 의복을 가지고 있으니, 우리 의 제 1 인자가 되어 달라, 그는 말할 것이다, 내 집 안에는 빵도, 의복도 없으니 너희는 나를 백성의 제 1 인자로 만들지 말라 (이. 3:5-7);
위 구절은 내적 의미에서 교회의 뒤집힌 상태를 취급하고 있다. 즉 진리가 진리로서 인정되지 않을 때, 그리고 선이 무엇인지 알려지지 않을 때이다. “어떤 이가 그의 아버지의 집에 있는 그의 형제를 붙잡는다”는 모든 것이 선이다고 인정하는 것을 표시한다; “의복”은 진리를 표시한다; “제 1 인자(prince)”는 거기로부터 있는 교리 속의 제일 가는 것을; “빵도, 의복도 없다”는 선도 진리도 없었다를 표시한다.
아버지와 어머니를 수단으로, 또한 딸들과 아들들을 수단으로 선과 진리를 표현함으로부터 표현 교회들 안에는 많은 법들이 생겨났는데, 이 법들 안에는 신성한 것들이 담겨 있다. 아래 구절을 보자:
그리고 성직자의 딸, 만일 그녀가 매춘짓을 하여 자신을 모독한다면, 그녀는 자기 아버지를 모독한 것이다, 그녀는 불로 태울 것이다 (레. 21:9);
위에서 “성직자의 딸”은 선에 대한 애착을 표시한다; “아버지”는 이 애착이 있게 된 선(선으로부터 있는 애착)을 표시한다; “매춘짓”은 선을 모독함을 표시한다. 또한, 만일 성직자의 딸이 과부이다면, 또는 이혼했다면, 그리고 그녀에게 자손이 없다면, 그녀는 그녀의 아버지 집으로 그녀의 젊은 시절 같이 되돌아 갈 것이다, 그리고 그녀의 아버지의 빵을 먹을 것이다; 낯선 자는 그것으로부터의 것을 먹지 못한다 (레. 22:13).
마찬가지인데 이런 법도 있다:
네가 포로들 사이에서 아름다운 형체의 아내를 볼 때, 그리고 네가 그녀를 얻고 싶은 바램 을 가질 때, 하여 그녀를 여인으로 네게 취하고자 하면, 그때 너는 그녀를 네 집의 한가운 데로 데려가라, 그리고 그녀는 그녀의 머리를 삭발하고, 그녀의 손톱을 깍고, 그녀는 포로 의 의복을 벗고, 네 집에 앉을 것이다, 그리고 그녀의 아버지와 어머니를 위해 날들의 일 개월을 곡할 것이다; 그 후에 너는 그녀에게 갈 것이다, 그리고 그녀를 알 것이다, 그리고 그녀는 네게 여인으로 있을 것이다 (신. 21:11-13).
위 법의 모든 것들은 일반적, 세부적 모두에서 자연 평면의 진리에 대한 표현인데, 진리가 거짓들로부터 순수해진 후에 선에 의해 채택된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이런 진리가 “아름다운 형체이나 포로된 상태의 아내”에 의해 의미되어 있다; 거짓들로부터 순수해짐이 “그녀를 집의 한가운데로 데려와서, 그녀의 머리를 밀고, 손톱을 깍고, 그녀의 포로된 때의 의복을 벗기고, 그녀의 아버지와 어머니를 위해 통곡함”에 의해 의미되어 있다. 이 진리가 채택됨이 “그 후에 그녀에게로 가고, 그녀를 알고, 여인으로 그녀를 취하는 것”에 의미되어 있다.
우리는 말씀에서 결혼에 관련한 법을 읽게 된다. 이것들은 지파와 가문의 내부적으로 계약으로 맺어져 있다; 상속에 관한 법 역시 있는데, 이것들은 지파로부터 지파로 건너가지 않는다. 이 두 법의 근원은 같은 곳, 즉 주님의 왕국의 천적이고 영적인 것들로부터, 또는 선과 진리의 결혼으로부터 있다. 이 두 가지가 “아버지와 어머니”에 의해 의미되고 있다; 마찬가지로 촌수 관계에서도 허용되는 것과 금지된 것이 법령화 되어 있다; 이런 문제들을 다루는 말씀에 있는 각 법은 내향적으로는 천국의 선과 진리의 결합과 연합, 그리고 지옥의 악과 거짓의 결혼과 연합에 관련을 맺고 있고, 지옥의 것은 천국의 것과 분리되어 있다.
이스라엘 백성은 천국에 있는 주님의 왕국, 그리고 거기 있는 천국의 질서를 표현하였기 때문에, 그들은 지파별로, 가문별로, 그들의 아버지들의 집들에 따라서 구별되어야 한다고 명령되어 있었다 (민. 26장); 또한 이 질서에 따라 그들은 회중의 천막 주위 진영의 폭을 재어 나누었다. 그들이 여행할 때에도 이와 같은 질서에 따라야 했는데, 아래 구절을 읽어보자. 모세의 책에서:
모두 각각의 사람은 그가 속하는 기(깃발) 근처에, 자기들의 아버지의 집들의 기(깃발)와 더불어, 회중을 서로 마주 보게 하며, 이스라엘의 아들들이 진영을 재어서 나눌 것이다; 그 렇게 그들은 앞을 향하여 갔다 (민. 2:2, 34).
그러므로:
발람이 이스라엘이 지파별로 거주하는 것을 보았을 때, 하느님의 영이 발람 위에 왔다, 그 리고 그는 선언을 발음했다, 말하기를, 당신의 성막은 얼마나 훌륭한지요, 오 야곱아, 오 이 스라엘아; 그들은 (식물이) 심어진 골짜기들 같다; 강가의 동산들 같다
(민수기 24:5, 6, 등등).
이 예언에서 야곱도 이스라엘도 뜻해지지 않고, 천국들에 있는 주님의 왕국, 토지들에 있는 그분의 교회가 뜻해져 있고, 이것이 이 질서에 의해 표현되었는데, 그때 발람이 그들을 보았던 바, 그의 말로부터 분명해진다.
이미 설명한 바 있어 여러분도 알고 있는 것 중에서 아버지가 없는 자, 즉 “고아”의 내적 의미에 관한 것이 있다. 이들은 순진과 선행의 상태에 있는 이들, 그리고 선인 것을 알아서 실행하기를 바라는 이들, 그러나 그렇게 할 수 없는 이들이다. 이런 상태에 특별하게 있는 이들은 교회 밖에 있는 이들이다, 이들을 주님께서는 돌보신다, 그리고 다른 삶에서는 아들로 삼으신다; 그 이유는 이들이 “고아”에 의해 의미되는 이들이기 때문이다. 고아가 말씀에서 언급될 때, 함께 언급되는 일이 자주 있는 이들은 임시 체류자(덛붙이 하는 자, sojourner), 과부이다; 그 이유가 임시 체류자에 의해 선들과 진리들로 가르침을 받는 이들이 의미되기 때문; 그리고 “과부”에 의해서는 선의 상태 안에 있기는 하나 진리의 상태가 부족한 바, 진리를 바라는 이들이 의미되기 때문이다. 이 세 단어, “고아”, “임시 체류자”, “과부”는 비슷한 의미를 시리즈로 놓인 듯 하여 있다. 하여 많은 구절들에서 세 단어를 만나는 일이 자주 있다. 이상 살핀 바로부터 알게 되는 것은 진짜 의미에서 “아버지”에 의해 의미되는 것이 선이다는 것, 최고 의미에서는 주님이시다는 것이다.
그러나 말씀의 대부분의 표현들은 반대적인 의미를 동시에 지니는데, 아버지에 대해서도 그러하다; 이럴 경우 악을 의미한다; 마찬가지로 “어머니”는 진짜 의미에서는 진리를 의미하나, 반대적일 경우, 거짓을 의미한다. 이에 대해 아래 구절로부터 살펴보자. 다윗서에서:
자기 아버지들의 불법을 여호와께서 기억하실 것이다; 그리고 자기 어머니의 죄는 삭제되 지 않을 것이다 (시. 109:14).
다시:
그들은 자기들의 아버지들 같이 뒤돌아서서 불충하게 행동했다; 그들은 속이려 쏘는 활 같 이 빗겨 돌아섰다 (시 78: 57).
모세의 책에서:
그리고 너로부터 남은 그들은 네 적들의 토지들 안에서 자기들의 불법을 한탄할 것이다, 그리고 또한 자기 아버지들의 불법으로 한탄할 것이다 (레. 26:39).
이사야서에서:
너희는 자기 아버지들의 불법 때문에 자기 아들들이 살육당함을 예비하라, 하여 그들이 일 어나 땅을 소유하고 성들로 땅의 얼굴을 채우지 않게 하라 (이 14:21).
다시:
나는 네 스스로의 불법들에 보답할 것이다, 그리고 네 아버지들의 불법들도 함께 (보답할 것이다) (이. 65:6, 7).
예레미야서에서
이스라엘의 집안들은 창피하다; 그들, 그들의 왕들, 그들의 제 1 인자들, 그리고 그들의 성직자들, 그리고 그들의 예언자들; 누가 나무에게 말한다, 당신이 나의 아버지입니다; 그리 고 돌에게, 당신이 나를 낳았습니다; 그 이유가 그들은 자기들의 목을 나에게 돌아서게 했 기 때문, 그리고 얼굴이 아니다 (예. 2:26, 27).
다시:
나는 이 백성 앞에 장애물을 놓을 것이다; 그리고 아버지들과 아들들 모두 그것들에 걸려 넘어질 것이다; 이웃과 그의 동료도 (걸려 넘어질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멸망할 것이다 (예. 4:21).
다시:
아들들이 나무를 모은다, 아버지들이 불을 지핀다, 그리고 여인들이 반죽을 주물렀다, 하늘 의 여왕에게 케이크를 만들어주기 위해서이다 (예. 7:18).
그리고 에스겔서에서;
나는 너희들의 모든 역겨운 짓들 때문에 내가 지금까지 하지 않해왔던 것, 지금까지 해온 것과 더 이상 같지 않은 것을 네게 행할 것이다. 그러므로 아버지들이 자기들의 아들들을 먹을 것이다, 그리고 아들들은 그들의 아버지들을 먹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네게 심판을 집행할 것이다, 그리고 너에게 남은 모두를 나는 모든 바람들에게로 흩을 것이다
(겔. 5:9, 10);
거룩한 것을 모독함에 관해 말하고 있다. 다시:
고로 주 여호비께서 예루살렘에게 말하신다, 너의 상거래와 너의 근본 출생지는 가나안족 의 토지로부터 이다; 네 아버지는 아모리족, 네 어머니는 헷족이었다 (겔. 16:3).
마태복음서에서:
형제가 형제를 죽이라고 넘겨줄 것이다, 그리고 아버지가 자기 아들을; 그리고 자녀가 부모 에 맞서 일어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을 죽음에 놓이게 할 것이다. 그리고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들로부터 미워함을 당할 것이다. 나는 사람들이 자기 아버지와 불화하도 록, 그리고 딸은 자기 어머니와, 며느리는 시어머니와 불화하게 하려고 왔다; 그리고 인간 의 적들은 네 집안에 있는 자들이다. 나보다 아버지와 어머니를 사랑하는 자는 나에게 가 치가 없다; 나보다 아들과 딸을 더 사랑하는 자는 나에게 가치가 없다
(마. 10:21, 22, 35-37; 눅. 12:49, 52, 53).
다시:
내 이름 때문에 집, 형제들, 자매들, 또는 아버지, 또는 어머니, 또는 아내, 또는 자녀들을 떠난 자들은 백 배로 (상을) 받을 것이다, 그리고 영원한 생명을 상속받을 것이다
(마. 19:29; 눅. 18:29, 30; 막. 10:29, 30).
누가복음서에서:
만일 어떤 사람이 나에게 오는데, 그런데 (그가) 자기 아버지, 그리고 어머니, 그리고 아내, 그리고 자녀들, 그리고 형제들, 그리고 자매들을 미워하지 않는다면, 그렇다, 그리고 자기 혼 역시 미워하지 않는다. 그는 내 제자일 수 없다 (눅. 14:26).
마가복음서에서:
그리고 형제가 형제를 죽음을 당하게 넘길 것이다, 그리고 아버지가 자기 자녀를; 그리고 자녀가 자기들의 부모에 맞서 일어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죽음에 놓이게 할 것이다; 그 이유는 너희가 내 이름을 위하여 미움을 당할 것이기 때문이다
(막. 12, 13; 눅. 21:16, 17);
위는 시대의 극점(종말), 그리고 선과 진리 측면에서 뒤집혀 있는 교회의 상태가 묘사되어 있다; 즉 악이 진리에, 거짓이 선에 맞서 일어날 것이다. 반대적 의미에서 “아버지”에 의해 악이 의미되는 것은 위에서 살핀 구절로 충분하지만 아래 하나 더 추가해보겠다. 요한복음서에서: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하셨다, 만일 하느님이 너희의 아버지이셨다면, 너희는 나를 사랑할 것이다; 그 이유가 내가 하느님으로부터 말해지고 와 있기 때문이다. 너희는 너희의 아버지 악마로부터 있다, 그리고 너희의 아버지의 욕망을 행하는 것이 너희의 뜻이다; 그는 시작에 서부터 살인자였다, 그리고 진리 안에 서 있지 않았다, 그 이유는 진리가 그 자 안에 없기 때문이다; 그가 거짓을 말할 때, 그는 자기 자신으로부터 말한다; 그 이유는 그는 거짓말쟁 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거기로부터 아버지(도 있다) (요. 8:42, 44).

그리고 이삭의 하느님. 이는 신성한 인간 측면에서의 주님을 의미한다. 이는 이삭의 표현이 주님의 신성한 합리성이다로부터 분명해진다; 그리고 인간은 합리성 안에서 시작하고, 이로부터, 이를 수단으로 존재도 하는 바, “이삭의 하느님”은 주님의 신성한 인간을 의미하게 된다. 천국에서, 그리고 인간과 더불어, 그리고 보편적 자연에서 조차, 일반적, 특수적 모두에서 있는 것들은 선과 진리에 관계되는 바, 주님의 신성 역시 신성한 선과 신성한 진리로 구별되어진다, 그리고 주님의 신성한 선은 “아버지”라 불리우고, 그리고 그분의 신성한 진리는 “아들”이라 불리우신다; 그러나 주님의 신성은 선밖에 아무 것도 없다; 그렇다, 천국에서 그렇게 나타나시고 있다; 즉 천사들 앞에서 그렇게 나타나신다. 여기서의 경우 태양과 똑같다; 태양 자체는 본질 측면에서 불밖에 아무 것도 없다, 그리고 거기로부터 보여지는 빛은 태양 안에 있지 않다, 그러나 태양으로부터 있다.
고로 그분의 본질 측면에서의 주님은 신성한 선밖에 더 아니시다는 것, 그리고 이것은 신성 자체와 신성한 인간 측면에서도 그렇다는 것; 그러나 신성한 진리는 신성한 선 안에 있지 않고, 신성한 선으로부터 있다는 것이다. 이미 말한 대로 천국에서는 신성한 선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런데 신성한 선이 신성한 진리로 외관을 지니는 때, 이는 인간의 납득력을 위하여서 인데, 이때 주님의 신성은 신성한 선과 신성한 진리로 구별되어진다, 그리고 신성한 선은 말씀에서 “아버지”라 불리우고, 신성한 진리는 “아들”이라 불리운다. 이것은 주님께서 자신과 별도로 그분의 아버지와 이야기하신 것, 마치 자신 외에 또 다른 분이 있는 것처럼 되어 있는 사실 안에 감추여 놓여진 비밀들이다; 그리고 또 다른 장소에서는 그분은 자신과만 더불은 상태, 즉 하나이시다고 주장하신다. 그리고 주님께서 “나의 아버지”라고 말하시는 대목과 그분 자신을 “아들”이라 부르시는 대목 모두로부터 분명해진다.
주님이 구약 성경에서 “여호와”라고 불리우신다는 것; 그리고 거기서 그분이 “아버지”라 불리우신다는 것은 아래 구절로부터 분명해진다. 이사야서에서:
우리에게 어린 아이가 출생된다, 우리에게 아들이 주어진다; 그리고 통치함이 그분의 어께 위에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분의 이름은 경이하신 분, 상담자, 하느님, 영웅, 영원으로부터 의 아버지, 평화의 제 1 인자 라고 불리우실 것이다 (이. 9:6);
위에서 “아이가 출생함”, “우리에게 아들이 주어짐”이 주님이시다는 것은 매우 확실하다; 고로 주님은 “영원으로부터의 아버지”라고 불리우신다. 예레미야서에서:
나는 이스라엘에게 아버지일 것이다, 그리고 에브라임은 나의 첫 출생일 것이다
(예. 31:9);
주님이 “이스라엘의 하느님”이시다고 말해진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이라고 말해진다. 그리고 여기서는 “이스라엘에게 아버지”이시다고 말해진다. 말라기서에서:
우리는 한 아버지가 계시지 않았더냐? 한 분 하느님이 우리를 창조하시지 않았더냐?
(말. 2:10)
위 구절의 내적 의미에서 “창조하는 것”은 거듭나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경우는 말씀의 다른 구절에서도 같다; 그리고 주님만이 거듭나게 하는 분, 되찾으시는 분(구속자)이신 바. 여기서 “아버지”와 “하느님”이라 불리우신다. 이사야서에서:
당신이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그 이유는 아브라함이 우리를 모르고, 이스라엘이 우리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당신 여호와가 우리의 아버지이시고, 우리를 되찾는 분, 당신의 이름은 영원으로부터 입니다 (이. 63:16).
다시:
나는 네 웃옷(tunic)을 그에게 입힐 것이다, 그리고 네 허리띠로 그를 힘있게 할 것이다, 그리고 나는 네 통치권을 그의 손에 위임할 것이다; 하여 그는 예루살렘 거주민에게, 그리 고 유다의 가문에 아버지일는지 모른다; 그리고 다윗의 가문의 열쇠를 나는 그의 어깨 위 에 놓을 것이다; 그리고 그가 열되 아무도 닫지 못할 것이고, 그가 닫되 아무도 열지 못할 것이다; 나는 그를 확실한 장소에 못을 박음 같이 단단히 매여있게 할 것이다; 그리고 그는 그의 아버지의 영광의 왕좌를 위해 있을는지 모른다; 그리고 그들은 그에게 그분의 아버지 의 집의 모든 영광을 걸어둘 것인데, 이는 아들들과 손자로부터, 모두 각각의 작은 집기, 즉 컵들의 집기로부터 현악기들(psalteries)의 집기에 이르기까지 이다 (이. 22:21-24).
위 구절의 내적 의미에서 표현되고 의미된 것은 주님이시다, 그리고 주님이 “예루살렘의 거주민과 유다의 가문에게 아버지”라 불리우심이 아주 분명하다; 그 이유가 이 분의 어깨 위에 다윗의 가문의 열쇠가 있고, 이분이 열고 닫고, 아무도 열고 닫지 못하 기 때문이다 (제 22장 서문도 참조하라); 그리고 그분은 그분의 아버지의 영광의 왕좌를 가지고 있으시다, 그리고 그분 위에, 그분으로부터 모든 거룩한 것들이 있다, 이것이 여기서 “집기들”이라 불리운다; 천적인 것들은 “컵의 집기들”, 거룩한 영적인 것들은 “현악기의 집기들”에서 의미되고 있다.
왕들과 성직자들은 주님을 표현했다; 왕은 그의 왕권을 수단으로 그분의 신성한 진리 측면에서의 주님을; 그리고 성직자들은 신성한 선 측면에서의 그분을 표현했다; 또한 진리와 선의 관계는 아들과 아버지의 관계와 같은데, 그 이유는 진리는 선으로부터 있기 때문이다.
이 사항은 다른 삶에서는 아주 잘 알려져 있다, 그러므로 천국에서 그들은 주님 외에 다른 이를 두고 아버지라 부르는 일이 없다, 그리고 복음서에서 “아버지”에 의해 뜻해지는 것도 주님 외에 다른 아버지로 지각되지 않는다. 천국에서 작은 어린이들에게 사랑의 선과 이 선으로부터 진리에 대해 초보 단계를 가르칠 때, 이들은 자기들의 아버지로 주님만을 인정하는 것을 배운다; 그렇다, 천국 안으로 온 초신자들에게 한 분 하느님이 계시다는 것을 잘 알기를 간절히 원함과 더불어 가르쳐진다; 그리고 교회 내에서 태어난 이들은 삼위 전체가 주님 안에 있다는 것이 가르쳐진다; 그 이유가 기독 세계로부터 온 거의 모든 이가 자기들과 더불어 하느님은 세 분이시다는 관념을 지녔기 때문이다, 물론 그들의 입술은 한 분 하느님밖에 없다 말하지만 실상 한 분을 생각하노라면 셋의 하느님의 생각도 먼저 그의 관념 안에 들어 앉는 바, 한 분 하느님에 대한 예배는 불가능하다. 다시 말해 심정은 세분을 예배하는데, 입은 한분 하느님을 부르고 있는 셈이다.
삼위(Trinity) 전체가 주님 안에 있다는 것이 기독 세계 안에 알려져 있다는 것, 그럼에도 그들이 다른 삶에 와서는 주님을 거의 생각하지 않는다; 아니 그분의 인간 측면은 많은 그들에게 걸림돌이다. 그 이유는 그들은 인간을 신성으로부터 떼어 구별하고, 그 인간은 신성이라고 믿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들은 자신을 의로워졌다고, 고로 자신들은 순수하게 만들어져 거의 거룩하다고 여긴다; 그러나 이 사람들은 주님이 신성이 되셨다는 것, 즉 그분의 인간이 신성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은 생각하지 않는다; 그분이 여호와 자신으로부터 임신되어졌음도 ; 더욱이 신성으로부터가 아니면 누구도 의로워질 수 없다는 것, 어떤 거룩함도 가능하지 않다는 것도, 그리고 실로 주님의 신성한 인간으로부터 만이 가능해지는 것도 생각지 못한다. 이 주님의 신성한 인간이 성찬에서 표현되고 의미되어 있다는 것도 생각하지 못한다. 이 예식에서 빵은 그분의 몸이고, 포도주는 그분의 피라고 극명하게 표현되어 있는 데도 그들의 생각 속에는 주님의 신성한 인간이 없다. 주님이 아버지와 더불어 한 분이시다는 것, 그리고 그분이 영원으로부터 계신다는 것, 그리고 그분이 우주를 규율하신다는 것, 결과적으로 그분이 신성한 선과 신성한 진리이시다는 것을 생각하지 못하지만, 이것은 말씀으로부터 지극히 분명하다.
그분이 아버지와 더불어 하나이시다는 것은 아래 요한복음서의 말씀으로부터 분명해진다:
여하튼 하느님을 본 자는 없다; 독생자, 이 분이 아버지의 품 안에 있으시다 (요. 1:18)
다시:
유태인들이 예수를 죽이려고 더욱 골몰했는데, 그 이유는 그분이 이렇게도 말하셨기 때문 이다, 즉 하느님이 그분 자신의 아버지이시다는 것, 자기를 하느님과 동등하다고 만들어서 였다. 예수께서는 대답하여 그들에게 말하셨다, 참으로, 참으로, 내가 네게 말한다, 아들은 자신으로부터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그러나 그분이 보는 것을 아버지가 행하신다; 그 이유 가 그분이 행하는 것은 무엇이든, 이것들을 아들도 행하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죽은 자를 일으켜 소생케하시 듯 아들도 아들이 뜻하는 것을 소생케 한다; 아버지는 누구도 심판하 시지 않는다, 그러나 그분은 아들에게 모든 심판을 주셨다; 하여 모든 자는 그들이 아버지 를 존경하듯 아들도 존경할는지 모른다. 그 이유가 아버지가 자신 안에 생명을 가짐 같이, 아들도 그분 자신 안의 생명을 가지도록 주셨기 때문이다. 나를 보낸 아버지는 자신에게 나에 관한 증거를 지니신다; 여하튼 너희중에서 그분의 음성을, 그분의 모양(shape)을 본 자는 없다. 성경을 뒤적거려라, 그 이유가 성경은 나에 관한 증거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요. 5:18, 그 이하 등등).
이미 말했던 대로, 위 구절에서도 “아버지”에 의해 신성한 선이 뜻해진다; 그리고 “아들”에 의해 신성한 진리가 뜻해진다, 그리고 이 둘은 주님 안에 있다. “아버지”인 신성한 선으로부터 신성인 것만 진행된다, 그리고 진행되어진 것은 “아들”인 신성한 진리이다.
다시:
아버지로부터 들었고 배웠던 모든 이는 나에게 온다. 아버지와 더불어 있는 그분 외에는 누구도 아버지를 본 자 없다, 그분이 아버지를 보아 왔다 (요. 6:45, 46).
다시:
그러므로 그들이 그분에게 말했다, 당신의 아버지는 어디 있느냐?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너 희가 나를 모르니까 아버지도 모르는 것이다; 만일 너희가 나를 안다면, 나의 아버지 역시 알 것이다 (요8:19).
다시: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다: 비록 너희가 나를 믿지 않을지라도, (내가 행한) 일은 믿어라; 그 러면 너희는 아버지가 내 안에, 그리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을 알고 믿을는지 모른다
(요. 10:30, 38).
다시:
예수께서 말하셨다, 나를 믿는 자는 나를 믿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낸 그분을 믿는 것이 다; 그리고 나를 보는 자는 나를 보낸 그분을 보는 것이다. 나는 세상에 빛을 주기 위해 왔 다, 나를 믿는 자는 누구든지 어둠 안에 거하지 않을 것이다 (요. 12:44-46).
“아버지가 그분을 보내심”에 의해 내적 의미에서 그분은 아버지로부터 진행되고 있다는 것이 의미된다; 그리고 아버지께서 자기를 보내셨음을 말하는 다른 구절에서도 의미는 같은데, “빛”이 신성한 진리인 것은 위에서 알았을런지 모른다. 그리고
다시:
예수께서 그에게 말하신다, 나는 길이고, 진리, 그리고 생명이다: 나를 수단으로 하지 않고 는 아버지에게 올 자는 아무도 없다. 만일 네가 나를 알았다면, 너는 나의 아버지 역시 알 았을 것이다: 그리고 이제로부터 너는 그분을 알고 있다, 그리고 그분을 보았었다. 빌립이 그분에게 말한다, 우리에게 아버지를 보여 주십시오, 그것으로 우리에게 충분합니다. 예수 께서 그에게 말하신다, 내가 너희와 이렇게 오랜 동안 있어 왔는데, 그럼에도 너는 나를 몰 랐다는 말이냐, 빌립아? 나를 보았던 자는 아버지를 보았던 것이다; 그리고 우리에게 아버 지를 보여달라 하고 네가 말함은 어찌된 일이냐?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가 내 안 에 계심을 너는 믿지 못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야기하는 말들을 나는 나 자신으로부터 이야기하지 않는다: 그러나 내 안에 거주하시는 아버지, 그분이 일들을 행하신다. 내가 아 버지 안에 [있다]는 것,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시다는 것을 믿어라: 또는 참 일들의 목적 때 문에서 라도 나를 믿어라. 참으로, 참으로, 내가 네게 말한다, 나에 관해서를 믿는 자, 내가 행하는 일들을 그도 역시 행할 것이다; 그리고 이런 것들보다 더 위대한 일들을 그는 행할 것이다; 그 이유는 내가 아버지에게로 가기 때문이다. 너희가 내 이름 안에서 묻는 것은 무 엇이든, 나는 그것을 행할 것이다, 하여 아버지께서는 아들 안에서 신성이 되실런지 모른다 (요. 14:6-13).
다시:
내 명령들을 가진 자, 그리고 그것들을 지키는 자, 그가 나를 사랑하는 것이다: 그리고 나 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로부터 사랑받아질 것이고, 나는 그를 사랑할 것이다, 그리고 그에게 나 자신을 명백하게 할 것이다…만일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그는 내 말들을 지킬 것이다: 그리고 나의 아버지는 그를 사랑하실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에게 올 것이다, 그 리고 우리의 거처를 그와 더불어 만들 것이다 (요.14:21, 23).
신성한 진리 안에 있는 이들은 “그분의 명령들을 가지고 그것들을 행하는” 이들이다; 그리고 신성한 선 안에 있는 이들은 “그분을 사랑하는”이들이다; 그러므로 이들에 관해서 말하시기를, 그는 아버지로부터 사랑받아질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에게 와서, 우리의 거처를 그와 더불어 만들 것이다”; 즉 신성한 선과 신성한 진리가 그렇게 행하실 것이다; 그리고 그러므로 같은 복음서에서 말해진다:
그 날에 너희는 내가 아버지 안에 있다는 것을 알 것이다, 그리고 너희는 내 안에
(요. 14:30).
그리고 다른 구절에서:
거룩하신 아버지, 그들을 당신의 이름 안에서 지켜주소서; 우리가 하나이듯, 그들이 하나일 런지 모릅니다 (요. 17:11).
이 구절들로부터 주님께서는 그분 스스로 가지신 신성한 선으로부터 “아버지”에 관해, 그리고 신성한 선으로부터 있는 신성한 진리로부터 “아들”에 관해 말씀하심이 분명하다; 고로 “아버지”와 “아들”은 둘이 아니라 하나이다는 것이다; 주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신 이유는 말씀은 천국에서 같이 땅에서도 받아져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한 주님은 신성이 되시기 이전이셨기 때문에, 그분은 신성한 선으로부터 있는 신성한 진리이셨다; 그러나 그분이 신성이 되셨을 때, 각 본질 측면에서 신성한 선 자체이셨다, 하여, 그분으로부터 모든 신성한 선과 신성한 진리가 있다.
주님이 영원으로부터 계셨다는 것은 예언자들이 주님을 말한 대목으로부터도 알는지 모른다; 그리고 이 이유 때문에, 그리고 그분으로부터 신성한 진리가 있었기 때문에, 그분은 “말씀”이라 불리우신다; 이에 관해 요한복음서에서:
시작에서 말씀이 계셨다, 그리고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다, 그리고 말씀은 하느님이셨 다. 동일한 분이 하느님과 더불어 시작에서 계셨다. 모든 것들이 그분에 의해 만들어졌다; 그리고 그분 없이 만들어졌던 어떤 것도 있지 않았다. 그분 안에 생명이 있었다; 그리고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 그리고 말씀은 육을 만들었다, 그리고 우리 사이에 거주하셨 는데, 그리고 우리는 그분의 영광, 아버지의 독생자로부터의 영광을 바라보았다
(요. 1:1-4, 14);
“말씀”은 신성으로부터 있는 천국들 안에서와 땅 위에서 모든 진리를 표시한다.
[13] 주님이 영원으로부터 계셨다는 것을 그분은 분명하게 가르치시는데, 그중 한 구절인 요한복음서에서:
요한이 말했다, 이분은 내가 말했던 그분이시다, 내 뒤에 오시는 그분은 내 앞에 계셨다, 그 이유가 그분은 나보다 전에 계셨기 때문이다. 너희가 알지 못하는 한 분이 너희 한가운 데에 서 계신다; 그분은 내 뒤를 이어 오시는 분이시나, 내가 있기 이전에 계셨다
(요. 1:15, 26, 27, 30).
다시:
만일 너희가 사람의 아들이 전에 있던 곳으로 오르는 것을 본다면 (요. 8:58).
다시: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하셨다, 참으로, 참으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아브라함이 있었기 이전 에 나는 있다 (요. 13:3).
다시:
아버지 자신이 너희를 사랑하신다, 그 이유는 너희가 나를 사랑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가 아버지로부터 출생하였다는 것을 믿기 때문이다. 나는 아버지로부터 나와서 세상 안으로 왔다; 다시 나는 세상을 떠나, 아버지에게로 간다 (요. 16:27, 28).
다시:
저는 땅 위에서 당신을 신성이 되게 했습니다. 저는 당신이 하라고 하신 일을 완성했습니 다. 그리고 지금 오 아버지시여 세상이 있기 이전 당신과 더불어 가졌던 영광으로 당신 고 유의 자아로 저를 신성이 되게 하소서; 그들은 당신이 저에게 주었었던 나의 영광을 바라 볼는지 모릅니다, 그 이유가 당신은 세상의 기초가 있기 이전에 나를 사랑하시고 있기 때 문입니다 (요. 17:4, 5, 24).
이사야서에서:
우리에게 아이가 출생된다, 우리에게 아들이 주어진다; 그리고 그분의 이름은 경이로운 분, 상담자, 영웅, 영원으로부터의 아버지, 평화의 제 1 이신 분 (이. 9:6).
[14] 주님이 우주를 규율하신다는 것은 마태복음서에서:
모든 것이 나의 아버지로부터 나에게 넘겨져왔다 (마. 11:27).
다시:
예수께서 그분의 제자들에게 말하셨다, 모든 권능이 천국에서와 땅위에서 나에게 주어지고 있다 (마. 28:18).
요한복음서에서:
아버지는 아들을 사랑하시고, 아들의 손 안으로 모든 것을 주셨었다; 아들을 믿는 자는 영 원한 생명을 가진다 (요. 3:35, 36).
다시:
아버지는 아무도 심판하지 않으신다, 그러나 모든 심판을 아들에게 주셨다 (요. 5:32).
다시:
아버지가 가지신 것은 무엇이든 모든 것이 나의 것이다 (요. 16:15).
다시:
예수께서 말하셨다, 당신의 아들이 신성이 되게 하소서, 하여 당신의 아들도 당신을 신성이 되게 할런지 모릅니다; 당신은 그에게 모든 육을 넘어서는 권위를 주시기조차 하셨었습니 다 (요. 17:190, 11).
누가복음서에서:
모든 것들이 나의 아버지로부터 나에게 넘겨져 왔었다 (눅. 10:22).
위 구절들로부터 분명해지는 바, 신성한 선은 “아버지”라고 불리운다는 것, 그리고 신성한 진리는 “아들”이라 불리운다는 것이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신성한 선으로부터 신성한 진리를 수단으로 일반적, 특수적 모두에서 우주에 있는 모든 것을 규율하신다는 것이다. 이럴진대, 그리고 이것이 그러하다는 것이 (위와 같은) 말씀으로부터도 분명해지지만, 기독교 세계에서 사람들이 천국에서 같이 주님만을, 고로 한 분 하느님만을 인정하고, 경배하지 않는 것은 놀라운 일일 수밖에 없다; 그 이유가 그들이 삼위 전체가 주님 안에 있다고 알고 가르치기는 하기 때문이다. 성령(the Holy Spirit)이 아들과 아버지와 구별되는 하느님으로 예배되어지는 데, 이는 영으로부터의 거룩함(the Holy of spirit), 또는 영들 또는 천사들을 통하여 주님으로부터 진행되는 거룩함이다, 즉 그분의 신성한 선으로부터 그분의 신성한 진리를 통하여 진행되는 거룩함인데, 이에 관하여는 주님의 신성한 자비로부터 차후 더 살피겠다. (인물, person, 그래서 우리는 “성령님”이라고 부르며 설교하고 기도하는 것을 목격한다, 그러다가 어떤 때는 하나님은 한분이시다고 설교한다. 어쨌든 새 교회, the New Church 에서는 성령님은 없고 성령은 있다고 간단히 기억해도 무난할지 모른다, 역자주.)

네가 누워있는 토지, 나는 너에게 그것을 줄 것이다. 이는 그분이 있으셨던 선, 그것은 그분 자신이었던 것으로부터 이었음을 의미한다. 이는 “토지”의 의미가 자연 평면의 선이다로부터, 이는 아래에서 살핀다; “네게 누운”의 의미가 그분이 있으셨던 것임이다로부터; 그리고 “그것을 네게 줄 것이다”의 의미가 그분 자신이었던 것으로부터 이다로부터, 이에 관해서는 아래에서 살핀다. “토지”는 이 구절 이후 야곱에 의해 표현되어질 자연 평면의 선을 의미하는데, 그 이유는 “가나안의 토지”에 의해 주님의 왕국이 의미되기 때문; 그리고 이것이 주님의 왕국을 의미하기 때문에, 이것은 또한 최고 의미에서 주님을 의미한다; 그 이유가 주님은 그분의 왕국 안의 모든 것의 모두이시기 때문, 그리고 거기에 있는 모든 것은 무엇이든 그분으로부터 있지 않은 것, 그분을 찾지 않는 것은 그분의 왕국 속에 없기 때문이다. 또한 말씀에서 주님의 왕국은 “하늘과 땅”에 의해 의미된다; 그러나 이 경우에서 그것의 내면은 “하늘”에 의해, 그것의 외면은 “땅”에 의해 의미되어진다; 결과적으로 최고 의미에서 “하늘”은 주님의 신성한 합리성 측면에서의 주님을, “땅”은 그분의 신성한 자연 평면 측면에서의 주님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네가 누워 있는 토지”는 자연 평면의 선을 의미하고, 이 선 안에 그분이 있으셨고, 이 선이 야곱에 의해 표현되어지게 된다. “야곱”이 신성한 자연 평면 측면에서의 주님을 표시한다는 것은 많이 설명했다.
[2] 더욱이 “토지(land)”는 여러 의미들을 지니고 있는 이유로 가나안, 이는 “거룩한 토지”라고 불리우기도 하여, 일반적 측면에서 주님의 왕국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 “토지”(또는 “땅”)과 더불어 “하늘”의 언급이 있게 될 때, 이미 말한 대로, 이는 내면의 것, “땅(earth)”은 외면의 것을 의미한다; 결과적으로 토지는 땅 위 주님의 왕국, 즉 교회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이것은 주님의 왕국인 인간, 또는 하나의 교회 (단위)인 인간도 의미한다; 같은 말을 바꿔 말하면, “하늘”은 합리성을, “땅”은 자연 평면을 의미한다; 그 이유가 합리성은 인간에게서 내면이고, 자연 평면은 외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땅”이 이런 의미들을 가지기 때문에, 이것은 인간으로 주님의 왕국을 만들게 하는 것, 즉 신성으로부터 있는 선 역시 의미한다; 위에서 살핀 것만 보아도 말씀에 있는 “땅” (또는 “토지”)이 얼마나 다양하게 여러 의미들을 내포하는지 분명해질 것이다.
“네게 내가 그것을 줄 것이다”가 이것은 그분 고유이었던 것으로부터 있었다를 의미하는 것은 말씀에서 “주다(give)”의 의미로부터, 특히 이 단어가 주님을 서술할 경우에서 더 알게 된다; 그 이유가 이전에 보여준 바대로, 주님은 신성한 선, 또한 신성한 진리이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신성한 선은 “아버지,” 신성한 진리는 “아들”이라 불리우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신성한 선이 그분 자신 속에 있는 바, 결과적으로 그분 고유이신 바, “네게 그것을 준다”에 의해서는, 여호와에 의해 말해지고, 주님을 서술할 때, 내적 의미에서 그분 고유의 것으로부터 있다를 의미한다. 이것은 주님께서 종종 말하신 대목들, 즉 아버지께서 자기에게 “주셨다”, 즉 그분 스스로 자신에게 주셨다 라고 말하신 대목을 살피면 되는데, 요한복음서에서:
당신의 아들을 신성이 되게 하소서, 하여 당신의 아들 역시 당신을 신성이 되게 할런지 모 릅니다. 당신은 모든 육을 정복하는 힘을 저에게 주셨듯; 당신께서 저에게 무엇을 주셨든 지, 저는 사람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줄 것입니다. 저는 땅에서 당신을 신성이 되게 했습니 다; 나는 당신이 나에게 하라는 일을 완성했습니다. 나는 당신이 세상으로부터 나에게 준 사람들에게 당신의 이름을 명백히 하였습니다; 그들은 당신의 것이었고, 당신이 나에게 주 었습니다; 그들은 당신의 것입니다, 그리고 당신은 그들을 나에게 주었습니다. 지금 그들은 당신이 나에게 준 것은 무엇이든 모든 것들이 당신으로부터 이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 이유는 내가 당신이 나에게 준 말들을 그들에게 주었기 때문입니다; 나는 당신이 나에게 준 그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그 이유가 그들은 당신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나의 것은 당신의 것이고, 당신의 것은 나의 것입니다 (요. 17:1-10);
위에서 아버지께서 “주셨던”에 의해 그것들이 그분이었던 신성한 선으로부터 이었음이 의미되어진다; 고로 그분 고유의 것으로부터 이다.
위 모두로부터 분명해지는 것은 주님께서 말하신 각각의 단어 하나씩만 해도 얼마나 깊은 비밀들이 함유되어 있는지; 그리고 글자 의미와 내적 의미는 얼마나 다른지; 더욱이 글자 의미와 내적 의미와 최고 의미는 얼마나 다른지 이다. 주님께서 그와 같이 말하셨던 이유는 그때 당시의 사람들은 어떤 신성한 진리에도 완전히 무지해 있었기에, 그들은 주님이 말하셔봐야 자기 방식대로 여전히 납득할 것이나, 천사들의 경우는 다르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천사들은 여호와와 (지상의) 주님이 하나이시다는 것, 그리고 “아버지”가 신성한 선을 의미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그들은 그분 스스로 그분 자신에게 주셨다는 것, 그리고 이것이 그분 고유의 것이었음도 알았다.

그리고 네 씨에게. 이는 마찬가지로 그렇게 진리이었다를 의미한다. 이는 “씨”의 의미가 신앙의 진리이다로부터 분명해진다.

그리고 네 씨는 땅의 먼지 만큼 일 것이다. 이는 자연 평면의 신성한 진리는 자연 평면의 선과 마찬가지일 것이다를 의미한다. 이는 “씨”의 의미가 진리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로부터 “네 씨”, 또는 “야곱의 씨”는 자연 평면 속의 신성한 진리인데, 그 이유는 야곱에 의해 주님의 신성한 자연 평면이 표현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땅의 먼지”의 의미가 선이다로부터도 알게 된다. 그러므로 “네 씨는 땅의 먼지 만큼일 것이다”가 내적 의미에서 자연 평면의 신성한 진리는 자연 평면의 신성한 선과 마찬가지일 것이다를 의미하게 된다. “땅의 먼지”는 선을 의미하는데, 그 이유는 “땅”에 의해 주님의 왕국이, 결과적으로 선이 의미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 땅의 먼지”는 선을 의미하되 자연 평면의 선이다. 그 이유는 “땅”에 의해 주님의 왕국에서 가장 낮은 수준, 즉 자연 평면이 의미되기 때문이다; 한편 “하늘”, 이 땅과 더불어 언급될 경우, 내면의 것, 또는 합리적인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선의 열매 풍성해짐과 진리가 번창함이 말씀에서 “씨가 하늘의 별들 만큼, 땅의 먼지 만큼”에 의해 의미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하늘의 별들”에 의해 합리적인 것들이; “땅의 먼지”에 의해 자연적인 것들이 의미된다; 고로 이것이 불어난다는 말이다. 자연적 진리에 의해 뜻하는 것이 자연적 선과 마찬가지이다에 관하여는 주님의 신성한 자비로부터 차후 살필 것이다.

그리고 너는 바다쪽으로, 그리고 동쪽으로 쏟아져 퍼질 것이다. 이는 선이 무한하게 확대될 것임을, 그리고 북쪽으로, 그리고 남쪽으로란 진리가 무한하게 확대될 것임을, 그러므로 선과 진리의 모든 상태들을 의미한다. 이는 “쏟아져 퍼짐(break forth)”이 확장됨, 여기서는 주님을 서술하기에 무한히 확장됨을; “바다, 또는 서쪽”의 의미가 선이지만 아직은 희미한 상태, 고로 시작 단계인 선이다로부터; “동쪽”의 의미는 명료한 선, 고로 완전한 선이다로부터; “북쪽”의 의미가 진리이지만 아직은 희미한 수준의 진리이다로부터; “남쪽”의 의미는 빛 안에 있는 진리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말씀의 많은 구절들에서 네 방위에 관한 언급은 많은 편이지만 이것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에 관하여는 알려지지 아니하였다. 여느 말씀과 마찬가지로 네 방위들도 글자 의미에 따라 세상적인 것이 아닌 영적인 것과 천적인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최고 의미에서 주님 자신 속의 신성한 것들까지도 의미하지만, 인간에게 알려진 것은 단지 자연계의 방향 외에 더 달리 알려지지 않았다, 그리고 이런 방위쪽으로 “쏟아져 퍼짐”이 불어남(번창함)을 의미하는 것도 알려지지 않았다. 어쨌든 이 네 방위에 의한 표현들은 방위들, 또는 어떤 사람이 불어남을 의미하지 않고 선과 진리의 상태들, 그리고 그것들이 확장됨을 의미한다. 이는 말씀, 특히 이 바위들이 언급되는 예언서들의 말씀 가운데서 알게 될는지 모른다. 그 이유가 천국에서는 서, 동, 북, 남쪽이 알려져 있지 않고, 주님이 태양이신 것만 알려져 있다, 이 태양은 뜨고 지고, 가장 큰 고도를 수단으로 정오와 가장 작은 고도를 수단으로 한 밤이 오게 하는 세상의 태양과 다르다. 즉 그곳의 태양은 언제나 불변하다, 그러나 그것으로부터 빛을 받는 이들의 상태에 따라 세상의 방위 같은 것이 발생한다. 그 이유가 그것의 빛은 그것 안에 지혜와 총명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각 인물의 총명과 지혜의 상태에 일치하여 나타난다. 선과 진리 안에 있는 이들과 더불어, 이 태양은 열과 빛을 가지고 나타난다, 그러나 이 빛은 천적이고 영적인 열과 빛을 가지고 나타난다, 마치 우리의 태양이 떠올라서 우리가 한낮에 있는 것과 같다; 한편 선과 진리 안에 있지 않은 이들과 더불어, 우리의 태양이 져서 한밤에 있는 것과 같다. 이로부터 우리가 알 수 있는 바, 말씀의 내적 의미에서 “동”, “남”, “서”, “북”에 의해 선과 진리의 상태들이 의미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선과 진리의 상태들이 말씀에서 묘사되는 것은 이런 방위 뿐만 아니라, 일년 사 계절, 하루의 때들, 또는 하루의 상태들로도 묘사된다는 것이다. 이것들의 의미는 거의 비슷하다; 그러나 주제가 선과 진리의 확장됨일 때, 이것들은 방위들에 의해 의미되어진다. 방위 각각이 의미하는 것은 각 방위가 언급되는 구절들에서 알 수 있다. “동쪽”은 주님, 그리고 주님으로부터 있는 사랑과 선행의 선을 의미하는 것은 이미 살폈다; 그리고 “남쪽”은 빛 안에 있는 진리를 의미한다;
그러나 진짜 의미와 반대 의미에서 “서쪽”과 “북쪽”에 의해 의미되는 것은 아래 구절들로부터 알는지 모른다. 이사야서에서:
두려워말라, 내가 너와 함께 있기 때문이다; 나는 네 씨를 동쪽으로부터 데려올 것이다, 그 리고 너희를 서쪽으로부터 그러모을 것이다; 나는 북쪽에게 말할 것이다, 포기하라; 그리고 남쪽에게, 숨겨두지 말라; 멀리로부터 나의 아들들을 데려온다. 그리고 땅의 끝으로부터 나 의 딸들을 (데려온다) (이. 43:5, 6);
위는 “야곱”과 “이스라엘”로 불리우는 새로운 영적 교회에 관해 말하고 있다. “동쪽으로부터 씨를 데려옴”, 그리고 “서쪽으로부터 그러모음”은 선 안에 있는 이들을 표시한다; “북쪽에게 포기하라, 그리고 남쪽에게 숨겨두지 말라 말함”은 진리 안에 있는 이들을 표시한다.
다윗서에서:
여호와께서 되찾은 자가 말할 것이다, 우리를 그분은 적의 손으로부터 되찾으셨다, 그리고 그들을 토지들로부터, 동쪽으로부터, 그리고 서쪽으로부터, 북쪽과 바다로부터 그러모으셨 다. 그들은 고독한 길에서, 광야에서 방황했다; 그들은 거주할 성을 발견하지 못했다
(시. 107:2-4);
위는 선과 진리에 무지한 상태에 있는 이들에 관하여서 이다. “동으로부터와 서로부터”는 선에 무지한 이들을 표시한다; “북과 바다로부터”는 진리에 무지한 이들을 표시한다; 선에 무지한 이들에 관하여서는 그들은 “광야에서” 방황했다 라고; 그리고 진리에 무지한 이들에 관하여서는 그들은 “고독한 길”에서 방황했다 라고; 그리고 선과 진리 모두에서 무지한 이들에 관하여서는 그들은 “거주할 성을 찾지 못했다”라고 말해진다.
이사야서에서:
잘 보라 이들이 멀리로부터 올 것이다; 그리고 보라, 이들이 북쪽과 서쪽으로부터 올 것이 다; 그리고 이들이 시님의 토지로부터 (올 것이다) (이. 49:12);
위에서 “북쪽”은 진리 측면에서 희미함에 있는 이들을 표시한다; 그리고 “서쪽”은 선 측면에서 희미함에 있는 이들을 표시한다, 이들이 멀리로부터 라고 말해지는 이유는 그들이 주님으로부터 있는 빛으로부터 멀리 있기 때문이다.
아모스서에서:
잘 보라 내가 기근을 토지에 보내는 날들이 올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바다로부터 바다까 지 방황할 것이다, 그리고 북으로부터 동으로까지조차 그들은 여호와의 말씀을 찾으러 이 리저리 달려다닐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발견하지 못할 것이다 (암. 8:11, 12);
위에서 “기근”은 지식들이 매우 부족함, (지식들을 앎에) 실패함을 표시한다; “바다로부터 바다까지 방황함”은 지식들이 있는지를 문의함을 표시한다; “북으로부터 동까지 이리저리 달려다님”은 빛 안에 있는 이들에게 희미함에 있는 이런 지식들로부터를 의미한다. 여기서 지식들이 뜻해짐이 분명한데, 그 이유는 “여호와의 말씀을 찾아다니는 것, 그것을 발견하지 못할 것이다”라고 말해졌기 때문이다.
예레미야서에서:
북을 향하여 이 말들을 선포하라, 그리고 말하기를, 되돌아가라, 너 다시 타락하는 이스라 엘아, 여호와께서 말하신다; 나는 너희 위에 내 얼굴을 떨어지지 않게 할 것이다, 그 이유 는 나는 자비하기 때문이다. 이 날에 유다의 가문은 이스라엘의 가문으로 갈 것이다, 그리 고 그들은 북의 토지로부터 내가 너희 아버지들에게 상속분으로 준 토지에 함께 올 것이다 (예. 3:12, 13);
위는 이방인들로부터 있는 교회의 회복에 관해서 말하신다. “북”은 진리의 무지함에 있는 이들, 그럼에도 선한 생활을 하는 이들을 표시한다. 이 구절에서 북이나 북의 토지가 뜻하여지지 않음이 분명하다; 그 이유가 이스라엘 (왕국)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던 (시기였기) 때문이다. 다시:
북의 토지로부터 이스라엘의 아들들을 데려오신 여호와께서 살아계신다 (예. 16:15);
위에서 “북”은 진리에 무지함을 표시한다.
다시:
보라 나는 그들을 북의 토지로부터 데려올 것이다, 그리고 그들을 땅의 측면들로부터 그러 모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 사이에 소경과 절음발이… (예. 31:8);
“북의 토지”는 진리 때문에 선에 무지함을 표시한다; 그리고 가나안의 토지가 주님의 왕국을, 이로부터 또한 선을 표현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의 한가운데 있는 것, 마치 시온과 예루살렘은 진리가 결합된 가장 깊은 선, 그러므로 거기로부터 멀리 있는 부분들은 선과 진리 측면에서 희미함을 표현했다; 그리고 희미함에 있는 모든 것이 “북의 토지”, 또한 “땅의 측면들”이라 불리운다.
더욱이 주님으로부터의 빛과 더불어 흐르는 모든 선은 인간에 있는 희미한 것에서 종결되는 바, “북”은 “회합”, 또는 “모임”이라고도 불리운다; 이사야서를 보자:
너는 네 심정에서 말하기를, 나는 하늘 안으로 올라갈 것이다, 나는 내 왕좌를 하느님의 별 들 너머로 드높일 것이다; 그리고 나는 북의 측면들에서, 모임의 산 위에 앉을 것이다
(이. 14:13).
다시:
울부짖어라, 오 성문아; 외쳐라, 오 도성아; 너는 녹아 스러졌다, 오 블레셋아, 너희 모두 여; 그 이유가 연기가 북으로부터 나오고, 회합 안에 아무도 없어 쓸쓸하기 때문이다
(이. 14:31).
다윗서에서:
여호와는 위대하시다, 그리고 그분의 거룩함의 산에서, 우리 하느님의 성에서 크게 찬송될 지어다. 온 땅의 기쁨이 위대한 왕의 도성, 북의 측면들에 있는 시온이다 (시. 48:1, 2).
다시:
하늘은 당신의 것, 땅 역시 당신의 것입니다; 세상과 거기로부터의 가득함, 당신은 그것들 의 기초를 세우셨었습니다; 북과 오른쪽, 당신이 그것들을 창조했었습니다
(시. 89:11, 12);
위에서 “북”은 선과 진리의 빛으로부터 더 멀리 떨어진 이들을 표시한다; 그리고 “오른 손”은 그쪽으로 더 가까이 있는 이들을 표시한다.
스가랴서에서 (그는 놋쇠의 두 산들로부터, 붉고, 검고, 희고, 힘센 회색의 말들과 더불은 네 병거들이 나오는 것을 보았는데, 천사가 말했다):
이것들은 온 땅의 주님 앞에 서 있음으로부터 나가는 하늘의 네 바람들이다. 모든 검은 말 들은 북의 토지 안으로 나간다; 그리고 흰 것이 그것들 뒤를 따라 나갔다; 그리고 회색의 것이 남의 토지 안으로 나갔다. 그때 그는 그가 나에게 말했다, 말하기를, 잘 보라, 북의 토 지쪽으로 나가는 그들은 북의 토지 안에서 나의 영을 고요해지게 했다 (슥. 6:1-8);
“놋쇠의 두 산들 사이에서 나가는 병거들”은 선에 관한 교리적인 것들을 표시한다. “병거들”이 교리적인 것들을 의미하는 것은 이 밖의 장소에서 분명하게 만들 것이다; “산”이 사랑을 의미하는 것은 이미 살핀 바 있다; 이로부터 “두 산들”은 두 사랑들, 즉 주님을 사랑함인 천적인 사랑을, 이웃을 향한 사랑인 영적 사랑을 의미한다; “놋쇠”가 자연 평면으로부터 있는 선을 의미함도 이미 살폈다; 그리고 “말들”은 지적인 것들을, 고로 선에 관한 교리적인 것들을 이해함을 의미한다; “남쪽의 토지”는 선과 진리의 지식들 안에 있는 이들을 표시한다; “북쪽의 토지”는 선과 진리에 무지함 안에 있으나, 선한 생활을 꾸리는 이들, 즉 이들은 주로 직바른 이방인들이고, 이들 사이에 새로운 교회가 세워질 때, 하느님의 영이 “쉬신다(고요해진다)”라고 말해진다.
예레미야서에서:
내가 그들을 내몰았던 모든 토지들로부터, 그리고 북의 토지들로부터 이스라엘 가문의 씨 를 되돌려 데려오신 여호와, 그리하여 그들이 그들 자신의 토지에서 거주할런지 모른다 (예. 23:8);
위에서 “북쪽의 토지로부터”란 선과 진리에 관하여 무지함의 희미함으로부터를 의미한다. 다시:
쇠가 부러질 것이다, 북쪽으로부터 쇠, 그리고 놋쇠 (예. 15:12);
“쇠”는 자연적 진리를 의미한다; “놋쇠”는 자연적 선을 의미한다. 이것들이 “북쪽으로부터”이다고 말해지는 이유는 자연 평면으로부터 이기 때문, 이 평면에서 (선과 진리의 모든 것이) 종결되는데, 상대적으로 희미함에 있는 평면이다. 이 예언이 쇠와 놋쇠가 북쪽으로부터 있다는 것을 말하지 않는다는 것은 설명 없이도 자명할 것이다; 쇠나 놋쇠라는 물질 자체를 뜻한다면, 이 구절 앞 뒤에서 흐르는 신성인 것과 부합될 것이 하나도 없을 것 아닌가?
마태복음서에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사람들이 동쪽으로부터와 서쪽으로부터 와서 아브라함, 이삭, 야곱과 더불어 앉을 것이다 (마. 8:11; 눅. 13:29);
위에서 “동쪽과 서쪽으로부터의 많은 이들”은 선에 관한 지식들 안에 있고 선한 생활을 하는 이들, 그리고 희미함과 무지함에 있는 이들을; 고로 교회 내에 있는 이들과 교회 밖에 있는 이들을 표시한다; 그 이유가 선의 상태들이 “동쪽”과 “서쪽”에 의해 의미되기 때문인데, 이미 살폈다. 위 구절과 마찬가지로 동쪽과 서쪽으로부터 오는 이들이 주님의 왕국에서, 또는 그분의 교회에서 주님과 더불어 있을 것임이 예언서들에서도 말해진다; 즉 이사야서에서:
나는 네 씨를 동쪽으로부터 데려올 것이다, 그리고 서쪽으로부터 그러모을 것이다
(이. 43:5).
다시:
그들은 서쪽으로부터 여호와의 이름을 경외할 것이다, 그리고 동쪽으로 그분의 영광을 (기 릴 것이다) (이. 49:19).
다시:
그들은 나 외에 아무도 없다는 것을 태양이 떠오름으로부터와 저뭄으로부터 알 것이다; 나 는 여호와이다, 그리고 그밖에 아무도 없다 (이. 45:6).
다시:
나는 북쪽으로부터 어떤 자를 휘저을 것이다, 그리고 그가 올 것이다; 태양의 떠오름으로부 터 그는 나의 이름을 부를 것이다 (이. 41:25).
더욱이 동, 서, 남, 북에 관한 의미는 성막의 건축으로부터, 그리고 이스라엘의 아들들이 진영을 차리고 행군함으로부터, 그리고 가나안의 토지에 관한 묘사로부터, 그리고 새 성전, 새 예루살렘, 새 땅에 관한 묘사로부터 더 확연히 알아지는데 이를 하나씩 살펴보자:
성막의 건축으로부터: 성막 안의 모든 것은 방위들에 따라 배열되어졌다 (출. 38장); 즉 동쪽과 서쪽 모퉁이에 있는 것, 그리고 남쪽과 북쪽 모퉁이에 있는 것 (출. 26. 18, 20, 22, 27; 27: 9, 12, 14); 그리고 탁자를 마주 보는 촛대는 남쪽을 향하여 성막의 측면에, 그러나 탁자는 북쪽 측면에 (출. 26:35; 40:22).
이스라엘의 아들들의 진을 침과 여행으로부터: 이것 역시 방위들로부터 있다, 즉 그들은 회중의 천막을 빙둘러(사면으로) 치되, 유다, 잇사갈, 스불론 지파들은 동쪽을 향하여; 그리고 르우벤, 시므온, 그리고 갓 지파들은 남쪽을 향하여; 그리고 에브라임, 므낫세, 베냐민 지파들은 서쪽을 향하여; 그리고 단과 아셀, 납달리 지파들은 북쪽을 향하여 (민. 2장). 또한 레위 지파에 관해서, 즉 게르손 가족들은 서쪽을 향하여; 고핫 가족들은 남쪽을 향하여; 므라리 가족들은 북쪽을 향하여; 그리고 모세, 아론, 그의 아들들은 동쪽을 향하여 성막 앞에 진영이 있도록 했다 (민. 3:23-28); 이를 수단으로 주님의 왕국에서 선과 진리의 상태들에 따라 있는 천국의 질서가 표현되어졌다; 그리고 남쪽을 향하여 그들은 그들의 여행을 알리는 경보음(alarm, 나팔)을 소리내게 했다 (민. 10:6); 그리고 그들이 진영을 차릴 때와 같게 여행도 그렇게 했다 (민. 2:34).
가나안의 토지에 관한 묘사로부터:
이 토지의 남쪽, 서쪽, 북쪽, 동쪽 모퉁이에 관한 경계는 모세에 의해 설정되었다 (민. 34:2-12); 그 후에 각 지파별로 구역(lot)이 할당되었다 (여. 15-19장); 이로부터, 그리고 또한 가나안의 토지에 거주하였던 태고인으로부터 가나안 내의 모든 장소들은 각자의 위치, 거리, 방위들에 관련한 경계에 따라 (내적인 측면을) 표현하고 의미하게 되었다.
새 성전, 새 예루살렘, 그리고 새 땅에 관한 묘사로부터: 이는 에스겔서에 있는 방위들에 따라서이다. 즉 도성의 건축은 남쪽으로부터 이었다; 그리고 건물의 큰 문(gate, 정문)의 얼굴은 동쪽, 북쪽, 남쪽을 향하여 있었다; 성전의 칫수에 관하여, 그리고 그것의 작은 문(door)은 북쪽, 남쪽을 향하여 있었다 (41:11); 성전 뜰은 북쪽, 동쪽, 남쪽, 서쪽을 향하였다 (42:1, 4, 19, 11, 17-20); 그리고 이스라엘의 하느님 여호와의 영광은 동쪽의 길로부터 들어갔다 (43:1, 2, 4); 바깥 뜰의 큰 문에 관하여 (41:1, 2, 4; 44:1, 9, 10, 19, 20); 거룩한 토지의 경계들에 관하여 (47장), 북쪽을 향하여 (15-17절), 동쪽을 향하여 (18절), 남쪽을 향하여 (19절), 서쪽을 향하여 (20절); 그리고 각 지파를 위한 방위들에 따른 상속분에 관하여 (계. 21:13). 위에서 살핀 모두로부터 분명해지는 것은, 세상의 방위들에 따라 위쪽의 거룩한 것들, 또는 거룩한 것의 표현물이 내적 의미에서 배열되었다는 것, 그리고 세상의 방위들이 아닌 주님의 왕국에 있는 선과 진리의 상태들에 따라 배열되는 것을 의미했다는 것이다.
반대적 의미에서 “북쪽”과 “서쪽”이 거짓과 악인 것을 의미한다는 것은 아래 구절들로부터 알는지 모른다, 예레미야서에서:
여호와의 말씀이 두 번째 나에게 왔다, 말하시기를, 무엇을 너는 보느냐? 그리고 나는 말 했다, 나는 열린 큰 솥을 봅니다; 그리고 거기로부터의 얼굴이 북을 향하여 있습니다. 그때 여호와께서 나에게 말하셨다, 북으로부터 악이 토지의 모든 주민들 위에 열려질 것이다. 보 라 나는 북쪽의 왕국들의 모든 가족들을 불렀다, 여호와께서 말하신다; 그리고 그들이 올 것이다 (예. 1:13-15).
다시:
시온을 향하여 군기(standard)를 세워라, 다함께 회합하라, 머뭇거리지 말라; 그 이유가 내 가 북으로부터 악을 가져올 것이기 때문, 그리고 산산이 부술 것이기 때문이다 (예4:6).
다시:
드고아에서 나팔을 불어라, 그 이유가 악이 북으로부터 밖을 내다 보기 때문이다, 그리고 산산이 부수기 때문이다. 잘 보라 사람들이 북의 토지로부터 온다; 그리고 큰 나라가 땅의 측면들로부터 휘저을 것이다 (예. 6:1, 22).
다시:
그때 나는 여호와의 토지로부터 잔을 가져왔다, 그리고 모든 나라들로 마시게 했다; 예루살 렘, 그리고 유다의 성읍들, 그리고 거기로부터의 왕들, 이집트의 왕 바로, 그리고 모든 서쪽 의 군중(throng), 아라비아의 모든 왕들, 그리고 광야에 거주하는 서쪽의 모든 왕들, 그리 고 멀리와 가까이 있는 북쪽의 모든 왕들 (예. 25:17-20, 24, 26).
다시:
발빠른 자가 도망하지 못할 것이다, 용사가 피하지 못할 것이다; 북을 향하여, 유브라데 강 변 근처에서 그들은 걸려 쓰러지고 말 것이다. 강처럼 일어나는 이 자는 누구인가? 이집트 가 강같이 일어난다, 그 이유가 그가 말한다, 나는 일어날 것이다, 나는 땅을 덮을 것이다; 나는 성들과 거기로부터의 주민들을 파괴할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주 여호비 체바욷의 날 이다, 앙갚음의 날이다, 그 이유가 주 여호비께서 유브라데 강가 북의 토지에서 희생물을 가지실 것이기 때문이다. 이집트는 아리따운 암송아지이다; 파멸이 북으로부터 온다. 이집 트의 딸은 수치를 당하기로 되어 있다; 그녀는 북의 사람들의 손에 넘겨질 것이다
(예. 46:6-8, 10, 20, 24).
다시:
고로 여호와께서 말하신다, 잘 보라 물들이 북으로부터 봉기할 것이다, 그리고 넘쳐흐르는 시내같이 될 것이다, 그리고 토지와 거기로부터 가득한 것, 도성과 그 안에 거주하는 이들 을 뒤덮을 것이다 (예. 50:3).
다시:
여호와께서 바빌론에 맞서 말하신 말이다. 북으로부터 그녀애 맞서 나라가 올라올 것이다, 이것이 그녀의 토지를 황무하게 만들 것이다, 아무도 그 안에 거주하지 못할 것이다
(예. 50:3).
다시:
보라 나는 북의 토지로부터 큰 나라들이 단합하여 바빌론에 맞서게 휘저어 올라오게 할 것 이다; 그리고 그들은 그녀에 맞서려고 자신들을 정렬할 것이다; 그로부터 그녀는 취해짐을 당할 것이다. 잘 보라 사람들이 북의 토지로부터 온다, 그리고 큰 나라, 그리고 많은 왕들 이 땅의 측면들로부터 휘저어질 것이다 (예. 50:9, 41).
다시:
그때 하늘과 땅, 그리고 그 안에 있는 모든 것, 바빌론 위에서 노래할 것이다, 그 이유가 황폐자가 북으로부터 그녀에게 오기 때문이다 (예. 51:48).
에스겔서에서:
곡에게 말한다, 너는 네 있는 곳으로부터, 땅의 측면들로부터 올 것이다, 너와 너의 많은 백성; 너는 토지를 덮는 구름 같이 내 백성 이스라엘에 맞서 올라올 것이다
(겔. 38:14-16).
다시:
잘 보라 나는 네게 맞서 있다, 오 곡아, 제 1 인자여; 나는 네가 돌려서게 해서 더 나가게 하되 너의 1/6이다, 그리고 너로 북의 측면들로부터 올라오게 할 것이다; 그리고 나는 너를 이스라엘의 산들 위로 데려올 것이다. 너는 이스라엘의 산들 위에서 쓰러질 것이다; 들판의 얼굴 위에서 너는 쓰러질 것이다 (겔. 39:1, 2, 4, 5).
스가랴서에서:
오 슬프다! 북의 토지로부터 도망하라, 여호와께서 말하신다; 그 이유가 나는 하늘의 네 바 람들 같이 너희를 외국으로 흩어지게 할 것이다. 오 슬프다 시온아! 도망하라, 바빌론의 딸 과 거주하는 너희들아 (슥. 2:6, 7).
위의 구절들로부터 북쪽의 반대적 의미가 무엇인지 분명해졌을 것이다; 즉 거짓으로부터 있는 악, 그리고 악으로부터 있는 거짓이다. 거짓으로부터 있는 악은 자연적 인간에 있는 기억 속의 지식들로부터 신성한 것들에 맞서 신성한 것에 관하여 추론함에서 근원되는 바, 이것이 “이집트로부터의 북쪽의 사람들”이라 불리운다; 악으로부터 있는 거짓은 외관상 거룩하나, 내면은 모독되고 있는 외적 예배에 근원하는 바, 이것은 “바빌론”으로부터 북쪽의 나라들이라 불리운다; 곡은 거짓으로부터 악, 악으로부터 거짓, 둘 다에 의해 서술되고 있다, 그 이유가 “곡”은 내적인 것 없이 외적인 것들에서 예배함을 의미하기 때문, 결과적으로 우상적인 예배인데, 이 예배가 전 시대를 통털어 유태인들 사회 안에서 널리 퍼져 있었다.
자연적 인간 속에 있는 희미함(불명확함)으로부터 진정한 것과 거짓인 것 모두가 발생된다; 인간이 주님으로부터 말씀을 수단으로 계발되도록 허용할 때, 그의 희미함은 명료해져 간다, 그 이유가 내적인 길이 열리고, 이 길을 수단으로 유입됨과 교통함이 주님으로부터 천국을 통하여 거행된다; 그러나 그가 주님으로부터 말씀을 수단으로 계발되는 것을 원하지 않을 때, 그 대신 자신의 총명으로 계발하겠다고 할 때, 그의 희미함은 어둠이 되어 간다, 고로 거짓이 된다; 그 이유가 내적 경로가 닫히고, 어떤 유입됨이나 교통함이 주님으로부터 천국을 통하여 거행되지 않고, 그에게 있는 것은 악하고 거짓인 것으로부터 생각하고 말함으로 인간이 얼핏보기에 바깥쪽 형체가 거룩하게 나타날 뿐이다. 그러므로 전자의 경우에서 “북쪽”은 (비록 희미한 수준이지만) 진정한 것을 의미하고, 후자의 경우에서는 거짓인 것을 의미한다; 그 이유가 전자는 희미함으로부터 상승하는 것, 즉 빛쪽으로 올라가는 것, 이에 반해 후자는 희미함으로부터 아래로 더 내려가는 것, 즉 자신들을 (희미한 빛이지만 어쨌든) 빛인 것으로부터 옮겨 버린다; 고로 전자는 남쪽으로 운반되어지고, 후자는 지옥의 영역으로 운반된다.
“북쪽”이 거짓의 어둠을; “남쪽”이 진리의 빛을 의미하는 것은 숫양과 숫염소를 묘사하고, 또한 남쪽의 왕과 북쪽의 왕이 등장하는 다니엘서로부터 아주 분명한데, 먼저 숫양과 숫염소에 관해서 이렇게 말해진다:
내가 보았더니, 숫양이 자기 뿔을 가지고 서쪽 방향으로, 북쪽 방향으로, 그리고 남쪽 방향 으로 돌진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숫양 앞에 어떤 짐승도 서있을 수 없었다. 숫염소가 땅의 모든 얼굴들 위에서 서쪽으로부터 왔다; 그리고 그의 뿔 중의 하나로부터 뿔이 생겨났다, 이것은 남쪽을 향하여와 동쪽을 향하여, 그리고 아름다움(beauty)을 향하여 극도로 자라났 다 (단. 8:4, 5, 9).
남쪽의 왕과 북쪽의 왕에 관하여 (“남쪽의 왕”은 진리의 지식들 안에 있는 이들을; “북쪽의 왕”은 거짓 안에 있는 이들을 의미한다) 이렇게 적혀 있다:
햇수들의 끝에서 그들은 자신들을 다함께 연합할 것이다; 그리하여 남쪽의 왕의 딸이 공평 한 조건을 만들기 위하여 북쪽의 왕에게 올 것이다; 그러나 그녀의 팔은 강함을 얻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그녀의 뿌리들로부터의 새순 중의 하나가 북쪽의 왕의 요새 안으로 들어갈 것이다, 그리고 압도할 것이다, 그리고 포로로 이집트로 끌고 갈 것이다. 남쪽의 왕은 왕국 이 되어 일어나서 북쪽의 왕과 싸울 것이다. 그리고 북쪽의 왕은 되돌아가서 이전보다 더 많은 군대를 일으킬 것이다. 하여 많은 숫자가 남쪽의 왕과 맞서 설 것이다. 북쪽의 왕이 와서 울타리 있는 성읍들을 세울 것이다, 그리고 많은 것들을 파괴할 것이다. 남쪽의 왕은 큰 군대로 전투를 치룰 것이나, 서있지 못할 것인데, 그 이유는 그들이 그에 맞서 방책을 궁리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 후에 그는 돌아갈 것이나, 이전 같은 처지에서 있지는 못할 것 이다. 자기들의 하느님을 아는 자들은 자신들을 강건하게 할 것이다. 그리고 끝의 때에서 남쪽의 왕이 그와 다툴 것이다; 그러므로 북쪽의 왕은 병거와 마병을 가지고 그에게 회오 리바람 같이 돌진할 것이다. 황홀할 정도로 아름다운 토지에서 많은 이들이 쓰러질 것이다. 그리고 동으로부터와 북으로부터 소문들이 그를 겁내게 할 것이다; 그리고 그는 큰 분노로 나아갈 것이다; 그는 그의 종말을 맞이하고야 만다, 그리고 아무도 그를 돕지 않을 것이다 (단. 11장에서);
“남쪽의 왕”은 진리의 빛 안에 있는 이들을, 그리고 “북쪽의 왕”은 그늘에 있다가, 그 후에 거짓의 어둠에 있는 이들을 의미한다는 것은 위 구절의 세부적인 것에서 알는지 모른다; 그리고 이것이 교회의 상태, 즉 계속적으로 타락해가는 교회의 상태를 묘사하고 있다. 그들이 “남쪽과 북쪽의 왕”이라 불리우는 이유는 말씀의 내적 의미에서 “왕들”에 의해 진리들이, 반대적 의미에서는 거짓들이 의미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왕국들”에 의해서는 진리로부터 있는 것들, 반대적으로는 거짓으로부터 있는 것들이 의미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네 안에서 지면의 모든 족속들이 복될 것이다. 이는 교리의 선으로부터의 모든 진리들은 선과 합쳐질 것이다를 의미한다. 이는 “복될 것이다”가 결합될 것이다를 의미함으로부터; “족속(families)”의 의미가 선들, 또한 선으로부터의 진리들이다로부터; 그리고 “지면”의 의미가 교회 속에 있는 것, 결과적으로 자연 평면, 또는 외적 인간에 있는 선과 진리에 관한 교리이다로부터, 여기서는 이 외적 인간이 야곱에 의해 표현되어진다. 위의 모든 것을 가지고 “네 안에서 지면의 모든 족속들이 복될 것이다”는 말을 종합해보면, 교리 속의 선으로부터의 진리들은 선과 더불어 결합되어질 것이다가 의미된다. 교리 속의 선으로부터의 진리들은 주님을 사랑함과 이웃을 향한 선행에 관한 교리적인 것들이다. 자연적 인간이 선을 행하기 위하여 선을 알고자 하는 것이 그에게 즐거움과 기쁨일 때, 교리 속의 선으로부터의 진리는 자연적 인간 안에서 선과 결합한다.

그리고 네 씨 안에서. 그리고 진리들도 합쳐질 것임을 의미한다; 즉 그것들이 그와 함께 결합된다는 것인데, 이는 “씨”의 의미가 진리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리고 나는 너와 함께 있을 것이다. 이는 신성인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킬 것이다. 이는 신성한 섭리를 의미한다. 이는 여기서 “나”가 여호와, 고로 주님의 신성이다로부터; 그리고 “네가 어디로 가든지 지킨다”의 의미가 신성으로부터 있는 섭리이다로부터 알려진다; 그리고 주님이 취급되기 때문에, 신성한 섭리가 의미되어진다. 신성과 신성한 섭리를 수단으로 주님께서는 그분의 자연 평면까지도 신성으로 만드실 것임이 뜻해진다.

그리고 너를 이 지면으로 도로 가져다 놓을 것이다. 이는 신성한 교리와 결합함을 의미한다. 이는 “도로 가져다 놓음”의 의미가 다시 결합함이다로부터; 그리고 “지면(ground)”의 의미가 자연적 인간 안에 있는 선과 진리에 관한 교리이다로부터, 이 구절의 경우에서는 신성한 교리이다, 그 이유는 야곱이 라반에게 체류함에 의해 의미되는 것이 주님께서 그분의 자연 평면을 신성으로 만드시는 수단 사이에 끼여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야곱을 “도로 가져다 놓음”, 또는 그가 가나안으로 귀향함이 신성으로 만드시는 수단들 사이에 끼여 있는 각 수단들의 목적이기 때문이다; 즉 주님께서 이제 그분의 자연 평면을 신성으로 만드시는 것; 고로 “나는 이 지면으로 너를 도로 가져다 놓을 것이다”는 말에 의해서 신성한 교리와 결합함이 의미된다.
신성한 교리는 신성한 진리이다; 그리고 신성한 진리는 주님의 모든 말씀이다; 신성한 교리 자체는 최고 의미에서는 말씀이다, 이 말씀 안에서는 주님만이 취급된다. 그리고 이로부터, 신성한 교리는 내적 의미에서 말씀이다, 이 말씀 안에서는 천국들과 땅에 있는 주님의 왕국이 취급된다. 신성한 교리는 글자 의미에서도 역시 말씀이다, 이 말씀 안에서는 세상과 땅 위에 있는 것들이 취급된다. 그리고 글자 의미는 그것 내부에 내적 의미와 최고 의미를 (그릇처럼) 담고 있는 까닭에, 그리고 글자 의미 모두가 표현과 의미를 수단으로 내적 의미와 최고 의미와 상응하는 바, 거기로부터 있는 교리 역시 신성하다. 야곱이 주님의 신성한 자연 평면을 표현하는 바, 그는 글자 의미 측면에서의 말씀 또한 표현한다. 주님이 말씀이시다는 것, 즉 모든 신성한 진리이시다는 글자 의미 측면은 세상의 모든 기독교단이라면 그렇게 알고 인정하는 부분이다. 말씀의 자연 평면은 말씀의 글자 의미에 위치하여 있다. 그 이유가 글자는 (태양을 가리는, 또는 태양을 보게하는) 하늘의 구름과 가장 적절히 비교되기 때문이다 (18장 서문을 참조하라); 이에 비해 말씀의 합리적 측면, 즉 말씀의 내면인 영적 평면은 내적 의미에 위치하고 있다; 그리고 주님이 말씀이신 바, 내적 의미는 이삭에 의해, 최고 의미는 아브라함에 의해 표현되어져 있다. 위 모두로부터 알게 되는 것은 신성한 교리와 결합함이 뜻하는 것에 대해서이다, 더욱이 이 대목, 즉 야곱에 의해 표현되는 주님의 신성한 자연 평면이 서술될 경우 더욱 그렇다. 허지만 이런 교리들 모두는 사실상 주님 안에 그렇게 있는 것은 아니다, 그 이유가 그분에 있는 모두는 신성한 선이기 때문, 그리고 신성한 진리는 아니기 때문, 더욱이 신성한 자연적 진리는 더더욱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성한 진리는 천국에서는 천사들 앞에서, 땅에서는 인간들 앞에 나타나는 신성한 선이다; 그리고 천사나 인간에게 나타나는 동안에도 (글자 의미에서 이든 영적 의미에서 이든 공히) 신성한 진리임은 틀림없다, 그 이유가 이것은 신성한 선으로부터 있기 때문이다. 마치 태양의 빛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태양의 열(불)로부터 있는 것과 같다.

나는 내가 너에게 말한 것을 다 이룰 때까지 너를 떠나지 않을 것이다. 어떤 것도 그것이 결과하는 것을 막기를 원하지 않을 것임을 의미한다. 이는 설명 없이도 이해될 것이다.

16, 17절. 그리고 야곱은 그의 잠에서 깨어났다, 그리고 그는 말했다, 여호와께서 이 장소에 계신 것이 확실하다, 그리고 나는 그것을 모르고 있었다. 17 그리고 그는 두려웠다, 그리고 말했다, 이 얼마나 무서운 장소인가! 여기는 하느님의 집 외에 다른 것은 없다, 그리고 여기는 하늘의 큰 문이다.

그리고 야곱은 그의 잠에서 깨어났다. 이는 계발을 의미한다. 이는 “잠자고 있는 것”이 희미한 상태인 반면, 잠에서 깨어있는 상태는 명료한 상태를 의미하는 바, “잠에서 깨어남”은 계발되어짐을 의미하게 된다.

그리고 그는 말했다, 여호와께서 이 곳에 계신 것이 확실하다. 이는 이 상태에서 있는 신성을 의미한다. 이는 말씀의 역사적 부분에서 있는 “말하다(say)”의 의미가 지각하다 이다로부터 알게 되는데, 이 의미는 아주 많이 반복 말했던 대목이라 설명은 생략한다; 그리고 “곳, 장소”는 상태를 의미함으로부터 알게 된다. “여호와”가 신성을 표시하는 것은 분명하다; 고로 “그는 말했다, 정녕 여호와께서 이 장소에 계시다”란 신성이 이 상태 안에 있었음을 지각함이 의미된다.

그리고 나는 그것을 모르고 있었다. 이는 희미한(불명료한) 상태를 의미한다. 이것은 설명 없이 납득될 것이다; 그 이유가 “알지 못하는 것”, 또는 무지한 것은 지적인 시각으로부터 있는 것들에 관하여서 흐릿한 것(애매한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알지 못함”, 또는 무지하여 있음이 흐릿하여 있는 것을 의미함으로부터; 또한 “잠에서 깨어남”이 계발되어짐 이다로부터를 조금 더 생각해보자; 이 두 가지는 말씀의 내적 의미가 무엇인지, 무슨 본성을 지녔는지를 알게 해준다; 즉 글자 의미로부터 있는 것들은 외적 시각 앞에, 또는 어떤 다른 감각에서 나타나는 것과 같고, 이 의미에 따라서 납득도 한다; 이에 반해, 내적 의미로부터 있는 것들은 내적 시각 앞에, 또는 내적 인간의 어떤 다른 감각에서 나타나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글자 의미 안에 포함된 똑같은 것들이 인간에 의해서 외적 감각들에 따라서, 즉 세상 안에 있는 것에 따라서, 또는 세상으로부터 파생된 생각(관념, idea)들에 따라서 납득된다; 똑같은 이것이 천사들에 의해서는 내적 감각들에 따라서 지각되어진다; 즉 천국 안에 있는 것들에 따라서, 또는 천국에 있는 것들로부터 파생된 생각(idea)에 따라서이다. 전자와 후자의 것들은 하나는 세상의 빛 안에 있는 것들과, 또 하나는 천국의 빛 안에 있는 것들과 관련을 짓고 있다; 세상의 빛 안에 있는 것들은 천국의 빛 안에 있는 것에 비교한다면 (그것 자체에서는) 죽어 있다; 그 이유가 천국의 빛 안에만 주님으로부터의 지혜와 총명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러므로 세상의 빛으로부터 있는 것들이 삭제될 때에만 거기에 천국의 빛으로부터 있는 것만이 남아 있는다; 다시 말해 거기에는 지상의 것 대신 천국의 것만 있다는 말이다, 또는 자연 평면 대신 영적 평면만 있다; 위의 경우 같은 것, 즉 “알지 못했다,” 또는 무지했다는 선과 진리에 관해 희미한 상태 안에 있는 것을 의미하고; “잠에서 깨어난다”는 선과 진리에 관련하여 계발되어짐을 의미한다. 이는 다른 구절에서도 대동소이할 것이다.

그리고 그는 두려웠다. 이는 신성시되어야 하겠다는 것이 교차함(sacred alteration)을 의미한다. 이는 뒤잇는 말로부터 분명해진다, 그 이유가 그가 “여기는 얼마나 두려운 곳인가! 여기는 하느님의 집 밖에 더 다른 것은 없다, 그리고 여기가 하늘의 큰 문이다”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이 말들은 신성시되어야 하겠다는 것이 교차함을 함축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두려움에는 두 종류가 있다; 신성시되지 않아야 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은 사악한 자들에게 있는 두려움이다; 그러나 신성시되어야 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은 선한 자에게 있는 두려움이다. 이 후자의 두려움은 경외심이 있는 두려움, 또는 신성시되어야 하겠다는 두려움이라 불리우고, 이는 우리의 경이로움, 신성인 것을 갈망함, 또는 우리의 사랑의 결과이다. 존경심, 또는 신성시해야 하겠음이 빠진 두려움은 향미가 없는 것, 또는 마치 짠맛이 없는 소금 같은 것, 결과적으로 싱거운 것이다. 그러나 두려움이 동반되는 사랑은 맛을 낸 식품 같다, 그러나 소금의 맛은 아니다. 사랑의 두려움은 어떤 방법에서이든 주님에게 상처를 입히지는 않나 걱정함, 또는 이웃에, 그리고 결과적으로 사랑과 신앙, 그리고 예배의 신성시되어야 하는 것에 피해를 주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에서 비롯되는 두려움이다. 이 두려움은 여러 가지이다, 그리고 이 사람과 저 사람에게 동일하지 않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선과 진리의 양이 클수록, 그것들에 피해를 입히지는 않을까 하는 두려움도 커진다고 생각하면 될 것이다; 그렇다고 일률적으로 비례하여 두려움이 나타나는 것만은 아니다. 이와 반대로 선과 진리의 양이 적을수록, 두려움의 양도 덜해진다, 그리고 이 두려움이 사랑이 덜 있게 나타나나, 두려움이 있게 나타나기는 한다; 지옥의 두려움이 이러하다. 그리고 선과 진리를 사랑함이 없는 곳에는 존경심이 함유된 두려움, 신성시해야 하겠다는 두려움은 없다, 그러나 존경이 결여된 두려움, 또는 이익을 목적으로 있는 두려움, 이런 것들을 위하여 명성을 얻으려는데 따른 두려움, 형벌과 죽음에 따른 두려움 같은 것만 있다; 이런 두려움은 외적인 것, 또는 육체와 자연적 인간과 자연적 인간의 생각들에 영향을 줄 뿐이다; 이에 반해 전자의 두려움, 즉 존경심이 깃든 두려움, 신성시해야 하겠다는 두려움은 영에, 또는 내적 인간, 그것의 양심에 영향을 끼친다.

그리고 말했다, 이 얼마나 무서운 장소인가. 이는 이 상태를 신성시함(sanctitiy of the state)을 의미한다. 이는 앞 항에서, “두려움”이 신성시해야 하겠음이 교차됨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원어에서 “무섭다(terrible)”라는 단어는 두려움에 근원되어 파생되는 표현이다. 고로 두려움에 의해, 신성시해야 하겠다에 의해 결과되는 것, 즉 신성시함이 의미된다; 이 두 단어 모두 존경함을 단어 내면에 함유하고 있다. 그리고 “장소”는 상태이다.

여기는 하느님의 집 외에 다른 것은 없다. 이는 질서의 최말단(ultimate)에 있는 주님의 왕국을 의미한다. 이는 하느님의 집의 의미로부터 분명해진다. “하느님의 집”이라는 표현은 말씀의 많은 구절에서 있는 편이다, 그리고 외적 의미, 또는 글자대로에 따르면, 이는 거룩한 예배가 있는 성별된 건물을 의미한다; 그러나 내적 의미에서 이것은 교회를 의미한다; 아주 보편적 의미에서는 천국이다; 그리고 최고 의미에서는 신성한 인간 측면에서의 주님 자신을 의미한다. 말씀에서 우리는 때로는 “하느님의 집”, 때로는 “성전”이라 읽는데, 의미는 동일하나, 차이는 조금 있다, 즉 “하느님의 집”은 선이 취급될 경우이고, “성전”은 진리가 취급될 경우에 해당된다. 이로부터 분명한 것은, “하느님의 집”은 주님의 천적 (수준의) 교회, 더 보편적 의미에서는 천적 (수준의) 천사들의 천국, 최고로 보편적 의미에서는 주님의 천적 왕국이다, 그리고 최고 의미에서는 신성한 선 측면에서의 주님이시다; 그리고 “성전”에 의해서는 주님의 영적 (수준의) 교회, 더 보편적 의미에서는 영적 (수준의) 천사들의 천국, 가장 보편적 의미에서는 주님의 영적 왕국, 그리고 최고 의미에서 신성한 진리 측면에서의 주님이시다. “하느님의 집”이 선으로부터 있는 천적 평면, 그리고 “성전”이 진리로부터 있는 영적 평면인 이유는 말씀에서 “집(house)”이 선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태고인들 사이에서 집들이 목재로 건축했기 때문이기도 한데, 나무로 건축한 이유는 “목재(나무, wood)”가 선을 의미하는 이유에서 이다; 이에 반해 “성전”은 진리를 의미하는데, 그 이유는 성전들이 돌로 건축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돌”은 진리들을 의미한다.
“목재”와 “돌”이 이런 의미를 지니는 것은 말씀에서 언급되어서 뿐만아니라 다른 삶에서의 표현들로부터도 비롯된다. 그 이유가 선한 일을 두고 자신의 공적이라 치부하는 이들은 나무를 자르는 이들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신이 지닌 진리들을 자신의 총명에서 비롯한 공적이라고 치부하는 이들, 자신은 타인보다 진리들을 더 잘 알고 있다고 으스대는 이들, 그런데도 하는 짓거리는 악한 쪽의 것만에 집착하는 이들은 돌을 자르는 이들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나는 이런 장면을 자주 보아왔다. 이런 광경으로부터 목재와 돌이 무엇을 의미하는지가 나에게 확실해졌다. 즉 “목재”는 선을 의미한다는 것, 그리고 “돌”은 진리를 의미한다는 것이다; 또한 목재로 지은 집이 보였을 때, 선에 대한 생각이 나에게 표출되는 경험으로부터도 위의 의미에 대한 확신을 가졌기도 하다; 그러나 돌집이 보여졌을 때, 진리에 대한 생각이 표출되었다; 이에 관해 나는 천사들로부터 배웠기도 하다. 이런 이유로 말씀에서 “하느님의 집”의 언급이 있을 때, 천사들에게 선에 관한 생각이 표출되고, 어떤 선의 품질이 연결되어 취급되었다; 그리고 “성전”의 언급이 있을 때, 그들에게 진리에 대한 생각이 표출되고, 어떤 진리의 품질이 연결되어 취급되었다. 이 두 가지만 보아도 말씀 안에 천국의 비밀들이 얼마나 깊이 숨겨져 놓여있는지가 가늠된다.
여기서 “하느님의 집”이 질서의 최말단에 있는 주님의 왕국을 의미한 이유는 여기서 야곱이 취급되고, 야곱에 의해 주님의 신성한 자연 평면이 표현되기 때문이다. 자연 평면은 질서의 최말단에 있다, 그 이유가 이 평면에서 내면의 모든 것들이 종결(종점)되어 다함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들이 다함께 있기 때문에 무수한 것들이 하나로서 관조되고, 고로 거기에서는 상대적으로 희미한 상태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 상대적 희미함은 여러 차례 설명한 바 있다.

그리고 여기는 하늘의 큰 문이다. 이는 질서가 마감되는 최말단을 의미한다. 이 최말단을 통하여 자연 평면으로부터 입구인 듯 하게 외관적으로 있다. 이는 “큰 문(gate)”의 의미가 이 문을 통하여 들어가고 나감이다로부터 분명해진다. 이것이 질서가 마감되는 최말단인 것은 야곱에 의해 표현되는 자연 평면이 취급되는 이유에서이다. 이 최말단을 통하여 자연 평면으로부터 (천국으로의) 입구가 있는 듯 하게 외관적으로 있는 이유는 인간에 있는 자연적 마음을 통하여 천국의 것들(즉 주님으로부터의 것들)이 자연 평면 안으로 흘러들어 내려오기 때문이다; 그리고 같은 이 마음을 통하여 자연 평면의 것들이 승강한다; 그러나 자연적 마음을 통하여 내면의 것들 안으로 들어가는 입구가 외관상으로만 입구인 듯 하게 있는 이유는 이미 수 차례 설명되었다.
인간 편에서, 세상의 객체(물체, object)가 인간의 신체적, 또는 외적 감각(오각)들을 통하여 들어가고, 이것이 내면들에 영향을 끼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고로 질서의 최말단으로부터 안쪽에 있는 것 안으로 입구가 있는 셈이다 (밖에서 열어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말할지 모른다 역자주.); 그러나 이것은 오류이고 단지 외관상의 차원일 뿐이다는 것은 뒤의 것이 앞의 것 안으로, 또는 낮은 것이 높은 것 안으로, 또는 세상의 것과 자연 평면의 것이 천국 속에 있는 것들과 영 속에 있는 것들 안으로 (거꾸로) 흐를 수 없다는 일반적 규율로부터 분명해진다; 그 이유가 전자의 것들은 보다 더 거친 본성을 지니고, 후자의 것들은 보다 더 순수한 본성을 지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외적인간, 또는 자연적 인간으로부터 있는 거친 수준의 것들은 내적 인간, 또는 합리적 인간으로부터 있는 것들로부터 생겨나고 존속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들은 더 순수한 것들에 영향을 줄 수가 없고, 순수한 것들의 영향을 받기만 한다. 이 유입(influx)이 어떤 경우인지, 마찬가지로 외관 자체와 오류는 유입됨에 반대되는 것을 설득시키고 있다는 것은 차후 주님의 신성한 자비로부터 유입을 집중적으로 살필 때 더 설명할 것이다. 그때 말해질 것은, 질서가 마감되는 최말단을 통하여 마치 자연으로부터 (천국으로의) 입구가 있는 듯 하게 외관적으로 있다는 것이다.

18, 19절. 그리고 야곱은 아침에 일찍 일어났다, 그리고 그가 자기 베개로 놓았던 돌을 가져왔다, 그리고 그것으로 기둥을 세웠다. 그리고 그것의 머리에 기름을 부었다. 19 그리고 그는 이 장소의 이름을 벧엘이라 불렀다. 그러나 이 성의 이름은 애당초 루즈였다.

그리고 야곱은 아침에 일찍 일어났다. 이는 계발의 상태를 의미한다. 이는 “아침에 일찍 일어남”의 의미가 계발의 상태이다로부터 분명해진다; 그 이유가 말씀에서 “일어남”은 승강함의 어떤 것을 함축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침”은 천국의 빛이 옴을 의미한다. 고로 이 구절의 경우에서의 의미는 희미함으로부터 빛 안으로 승강함, 결과적으로 계발됨이다.

그리고 돌을 가져왔다. 이는 진리를 의미하는데, “돌”의 의미가 진리이다로부터 분명해진다.

그가 그의 베개로 놓았던… 이는 신성과 교통되게 하였던 것, 즉 (가장 일반적인 자연 평면의) 진리를 의미한다. 이는 “베개”, 또는 목을 받쳐주는 것이 가장 일반적인 종류에 속하는 것을 의미한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리고 그것을 기둥으로 세웠다. 이는 거룩한 경계(경계선, boundary)를 의미한다. 이는 “기둥(pillar)”의 의미로부터 알게 되는데, 이제 살핀다. 여기서의 경우가 앞서 살핀 대목으로부터 알게 될는지 모른다; 즉 이 질서의 특성은 이미 서술하였다; 즉 인간이 거듭나는 동안에서 진리는 당사자에게 첫째 자리에서 있다는 것, 그러나 사실상 이것은 거꾸로의 질서이다는 것; 그리고 인간이 거듭나졌을 때, 이 질서는 회복된다는 것; 즉 선이 첫째 자리에 있고 진리는 마지막 자리에 있는 것이다. 이것이 천사들이 사다리에서 오르고 내려가고 하는 것으로 표현되어져 있고, 특히 사다리에서 천사들은 처음에 오르고, 그 후에 내려갔다고 말해진다. 오르고 내려가고 함에서 승강함이 지금 취급되고 있다; 즉 질서의 최말단으로부터 이다; 현재의 구절에서 이것은 질서의 최말단이 있는 진리이다. 이 최말단이 거룩한 경계선이라 불리운다; 그리고 야곱이 가져와 기둥으로 세운 돌에 의해 의미되어진다. 진리가 질서의 최말단이라 말하는 이유는 선은 선 안에 종착점이 있을 수 없고 진리에서 종점을 가지기 때문이다; 즉 진리가 선의 그릇이기 때문이다.
진리 없이 인간 안에 있는 선, 즉 진리와 결합되지 않은 선은 어린 아이들에게 있는 선과 같고, 이 선은 지혜로부터 어떤 것도 아직은 없는 선이다; 그러나 아이가 성년이 되면서 그는 선으로부터 진리를 받는다, 또는 당사자 안에 있는 진리가 선과 결합하는 만큼에서, 그는 사람다움이 되는 것이다. 이것은 선이 질서의 첫 번째이고 진리는 마지막 번째임을 보여준다; 고로 인간은 그의 자연적 인간 속의 진리들인 기억 속의 진리로부터 시작해야 하고, 그의 영적 인간 속의 진리들이 교리적인 것들로부터 거듭남이 이어짐으로 지혜의 총명 안으로 진입된다; 즉 영적 삶 안으로 들어가는 바, 이제야 인간은 사람인 것이다. 예를 들면, 영적 인간으로서의 인간이 그의 이웃을 사랑하기 위하여서 그는 반드시 영적 수준의 사랑이 무엇인지, 선행(charity)이 무엇인지를, 이웃이 누구인지를 먼저 배워두워야 한다는 말이다. 물론 어떤 인간도 이런 사항들을 알기 전에 자기 이웃을 사랑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사랑은 자연적 수준이지 영적 수준은 아닌 것이다. 다시 말해 그가 베푼 선은 자연적 선으로부터일 뿐 영적 선으로부터는 아니다는 말이다; 이에 비해 그가 이런 지식을 획득한 이후라면, 주님으로부터의 영적 선이 그 사람의 그 지식 안에 심어질는지 모른다; 그리고 이것은 지식들이라 불리는 여타 모든 지식들에서, 또는 교리적인 것들에서, 또는 일반적으로 진리들에서도 공히 같다.
주님으로부터의 선이 지식들 안에 심어질는지 모른다, 또는 진리는 선의 그릇이다고 말하고 있다. 지식들을 두고 별도의 생각을 가지지 못하는 이들, 즉 지식들이란 추상적인 것들이다 라는 것 외에 더 달리 생각하지 않는 이들은 선이 지식들에 심어짐이라든가, 진리는 선의 그릇이다 하는 것에 의해 뜻해지는 것을 결코 납득하지 못한다. 그러나 알아야 할 것은, 지식들이나 진리들은 마치 시각이 눈이라는 신체 기관으로부터 라고 추상하듯, 또는 청각이 귀라는 신체 기관으로부터 라고 추상하듯, 내면의 인간, 즉 영의 가장 순수한 실체로부터라고 더 이상 추상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지식들이나 생각들은 이보다 더 순수한 실체로부터 그것의 있음을 명백히 나타낸다; 그리고 주님으로부터의 생명의 유입을 수단으로 생생해지고 가감되어 다양한 형체로 우리의 시각 앞에 표출된다; 그것들의 일치함과 조화를 이룸이 계속적으로, 그리고 동시적으로 있을 때, 마음에 감동을 주고, 소위 아름답다, 유쾌하다, 즐겁다 하는 것들을 구성한다.
인간과 더불어 평등하게 영 자체는 형체들, 연속되는 형체를 구성한다, 그러나 더 순수한 특성으로부터의 형체들이고, 육체의 시각에 보여질 수 없다. 이 형체들, 또는 실체들이 육체적 눈에 보일 수 없기 때문에, 오늘날의 인간은 지식들과 생각들이 추상적인 것들이다는 것 외에 더 달리 납득하지 못한다; 이로부터 우리 시대의 광기 또한 오고 있다. 즉 인간들은 자기들의 육체가 죽은 후 살게 되는 영을 자기들 안에 지니고 있다는 것, 따라서 자기의 영은 자기의 육체라는 실체보다 훨씬 더 진짜인 실체이다는 것을 믿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리고 만일 당신이 이것을 믿는다면, 육체적인 것들로부터 자유해진 후의 영은 많은 사람들(기독교인)이 말하는 순수해진 육체 자체, 즉 그들이 처음으로 다시 일어날 때인 마지막 심판의 때에 가지기로 되어 있다는 (되살아난 자기의) 육체일지 모른다. 영들, 또는 혼들은 몸을 가지고 있다는 것, 그 둘은 청명한 대낮에서 보듯 서로를 보고, 함께 대화하고, 서로를 듣는다, 그리고 그것들이 (지상의) 육체 안에서, 또는 세상에서 있었던 동안에서 보다 훨씬 더 절묘한 감각을 향유한다는 것에 대하여는 이와 관련한 많은 (나의) 경험을 바탕으로 하여 기록한 이 책으로부터 분명해 있으리라 본다.

“기둥”의 의미가 거룩한 경계선이다에 주목해보자. 태고 시대 때에 돌들이 경계선에 놓여졌었다는 사실로부터 유래하고 있다. 이렇게 놓음으로 자기의 소유분과 타인의 소유분을 구분하는 표시를 했고, 돌을 가지고 경계선이 그 장소에 있다는 표시를 했다. 태고인들은 모두 각각의 물건에서, 모두 각각의 기둥에서 천적이고 영적인 어떤 것에 관하여 생각했다. 그들이 세운 돌들에서 그들은 인간에 있는 최말단에 관하여, 고로 자연적 인간에 있는 진리인 질서의 최말단에 관하여 생각했다. 홍수 이후 있었던 고대인들은 이것을 홍수 이전에 있었던 태고인들로부터 받았다, 그리고 경계선에 세웠던 돌들을 거룩한 것으로 간주했다, 그 이유는 이미 말했듯, 그것들이 질서의 최말단인 거룩한 진리를 의미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 돌을 “기둥들”이라고도 불렀다; 그리고 세월이 한참 지난 뒤 이 기둥들이 예배 안으로 삽입되었다, 그래서 그것들을 자기들이 가졌던 작은 숲 안에 세웠다, 그리고 후에 거기에 그들은 성전을 가졌다, 그리고 또한 그것들 위에 기름을 부었다, 이 기름부은 것에 관하여는 이어지는 아래 구절에서 더 말할 것이다. 고대 교회의 예배는 홍수 이전 태고인으로부터의 표현과 의미에 존재했기 때문이다. 태고인들은 지상에서 천사들과 이야기했고 그들과 더불어 있었기에 그들은 돌이 진리를, 목재가 선을 의미하는 것을 천국으로부터 배웠다. 이로부터 “기둥들”이 거룩한 경계선을, 고로 인간에 있는 질서의 최말단인 진리를 의미함이 유래된 것이다; 주님으로부터 내적 인간을 통하여 유입되는 선은 외적 인간 안에서, 거기 있는 진리 안에서 종결된다. 인간의 생각, 말, 행동, 이것들이 질서의 최말단들이고, 이것은 선으로부터의 진리, 선의 형상들, 또는 선의 형체들 외에 더 다르지 않다; 그 이유가 그것들은 인간의 지적 부분에 속하기 때문, 한편 그것들 안에 있는 선, 그것들을 있게 한 것은 그의 의지 부분에 속한다.
기둥들은 예배를 위해, 표시하기 위해, 증거로 삼기 위해 꼿꼿이 세워졌다; 그리고 내적 의미에서 이것은 거룩한 경계, 또는 질서의 최말단인 인간의 자연 평면에 있는 진리를 의미한다는 것은 말씀의 다른 구절로부터 알는지 모른다. 아래에 차후 살피기도 할 구절에서 미리 읽어보자, 이는 라반과 야곱 사이의 언약에 관하여서이다: 이제 자, 너와 나, 우리가 언약을 만들자; 그리고 그것이 나와 너 사이에 증거를 위해 있게 하자. 그리고 야곱은 돌을 가져왔다, 그리고 그것을 기둥을 위해 세웠다, 그리고 라반은 야 곱에게, 이 돌더미를 잘 보라, 그리고 내가 나와 너 사이에 세운 기둥을 잘 보라; 이 돌더 미가 증거이고, 이 기둥이 증거이다, 하여 나는 이 돌더미를 건너 네게로 가지 않을 것이 다, 그리고 너는 이것을 건너 나에게 오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이 기둥은 악을 위하여 (있 다) (창. 31:44, 45, 51, 52).
위 구절에서 “기둥”은 진리를 의미한다.
이사야서에서:
그 날에 이집트의 토지에 있는 다섯 성읍이 가나안의 입술로 말할 것이다, 그리고 여호와 체바욷에게 맹세할 것이다. 그 날에 이집트 토지의 한 가운데에 여호와께 대한 제단이 있 을 것이다, 그리고 거기로부터의 경계에 여호와께 대한 기둥이 있을 것이다; 이것은 이집트 토지에 있는 여호와 체바욷에게 증거와 표시를 위해 있을 것이다 (이. 19:18-20);
“이집트”는 자연적 인간에 속해 있는 기억 속의 지식을 표시한다; “제단”은 일반적 측면에서 신성한 예배를 표시한다, 그 이유가 에벨(Eber)로부터 시작한 두 번째 고대 교회에서, 제단은 예배를 제 일 순위로 표현했기 때문이다; “이집트 토지의 한가운데”는 예배의 제 일인 것과 가장 깊은 것을 표시한다; “기둥”은 자연 평면에서 질서의 최말단인 진리이다. 이것이 표시와 증거를 위해 경계선에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모세의 책에서:
모세는 여호와의 모든 말들을 적었다, 그리고 아침 일찍 일어나서 시내산 근처에 제단을 건축했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열 두 지파를 위한 열 두 기둥들을 (세웠다) (출. 24:4);
위 구절에서 “제단”은 모든 예배를 표현하였다, 그리고 실로 예배에 있는 선을 표현했다; 한편 열 두 기둥들은 예배에서 선으로부터 있는 진리의 표현이었다.
제단들이 예배의 모든 선을 표현하는 까닭에서, 천적 진리인 것, 즉 진리는 선으로부터서만 있음을 인정하는 천적 교회를 표현하도록 유태 교회가 설립되어졌다. 천적 교회에서는 진리가 선으로부터 조금도 분리되어서는 아니되고, 신앙 또는 진리의 언급이 있을 경우, 먼저 선을 생각하고, 진리가 선으로부터임을 먼저 생각하지 않으면 진리에 대한 어떤 말도 꺼내지 않는다. 그러므로 제단의 돌을 수단으로 진리의 표현이 있었으나, 기둥들을 수단으로 진리를 표현하는 것은 금하였는데, 그 이유는 그것 때문에 진리가 선으로부터 분리되지 않도록, 선 대신 진리가 표현적으로 예배되지 않도록 하려 해서 였다. 모세의 책에서:
너희는 너희가 너희에게 만들 네 하느님 여호와의 제단 외에 어떤 나무로부터의 작은 숲도 네게 심지말라; 그리고 너는 네게 기둥을 세워두지 말라, 이것을 네 하느님 여호와께서 미 워하신다 (신. 16:21, 22);
그 이유가 진리를 선으로부터 분리하여 예배하는 것, 또는 신앙을 선행으로부터 분리하여 예배하는 것은 신성에, 질서에 반대되기 때문이다; 이것이 “너희는 너희에게 기둥을 세우지 말라, 이것을 여호와께서 미워하신다”에서 의미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기둥들을 세웠다, 그리고 그것이 질서에 반대되는 것을 표현했는데 호세아서에서:
이스라엘은 자기 열매가 불어남에 따라서 자기 제단들을 불리고 있다; 그들의 토지의 좋은 것에 따라서 그들은 그럴싸한 기둥들을 만든다; 그러나 그분은 그들의 제단들을 뒤엎으실 것이다; 그분은 그들의 기둥들을 쓰레기로 만드실 것이다 (호. 10:1, 2).
열왕기상서에서:
유다는 여호와의 눈에서 악인 것을 했다; 그들 역시 그들에게 높은 장소(산당)를, 그리고 기둥들을, 그리고 모두 각각의 높은 언덕 위에 작은 숲을 건축했다; 그분은 그들의 기둥들 을 쓰레기로 만드실 것이다 (왕상. 14:22, 23).
열왕기하서에서:
이스라엘의 아들들은 그들에게 기둥들과 작은 숲을 모두 각각의 높은 언덕에, 그리고 모두 각각의 푸른 나무 아래에 세웠다 (왕하. 17:10).
다시:
히즈키야는 높은 장소들을 제거했다, 그리고 그는 기둥들을 부수고 작은 숲을 베어내고 모 세가 만든 놋쇠뱀을 조각내어 지면으로 내렸다, 그 이유는 그들이 놋쇠뱀에게 향을 태웠기 때문이다 (왕하. 18:4).
이방인들 역시 예배의 거룩함이 제단들과 기둥들에 의해 표현된다는 신조를 전통적으로 가지고 있었는데, 그럼에도 악과 거짓 안에 있었는 바, 그들 사이에 있는 “제단들”은 예배의 악들을, “기둥들”은 예배의 거짓들을 의미했다. 이런 이유로 그것들을 파괴하라고 명령되었다. 모세의 책에서:
너희는 그들의 제단들을 뒤엎고, 그들의 기둥들을 조각나게 부수라, 그리고 너희는 그들의 작은 숲들을 베어내라 (출. 34:13; 신. 7:5; 12:3).
다시:
너희는 그들의 하느님들에게 절하지 말라, 그것들을 예배하지 말라, 그들의 일들을 따르지 말라; 너희는 그것들을 확실히 파괴해야 한다, 그리고 너희는 그들의 기둥들을 조각으로 정 녕 부수어야 한다 (출. 23:24);
나라들의 “하느님들”은 거짓들을 표시한다; 그들의 “일들”은 악들이다; 그들의 기둥들을 조각으로 부수는 것은 거짓으로부터의 예배를 파괴하는 것을 표시한다.
예레미야서에서:
바빌론의 왕 느부갓네살이 이집트의 토지 안에 있는 태양의 집의 기둥들을 조각으로 부술 것이다, 그리고 그가 이집트의 하느님들의 집들을 불로 태울 것이다 (예. 43:13).
에스겔서에서:
바빌론의 왕 느부갓네살은 자기 말의 발굽으로 너희 모든 거리들을 짓밟을 것이다; 그는 검으로 백성들을 살해할 것이다, 그리고 네 힘의 기둥들이 땅 아래로 가도록 하게 할 것이 다 (겔. 26:11);
위는 두로를 두고 하시는 말씀이다. “바빌론의 왕 느부갓네살”은 황폐해지게 하는 것을 표시한다; “말의 발굽”은 가장 수준 낮은 지적인 것들, 감각만에서 와지는 기억 속의 지식 같은 것이다; “발굽”이 가장 수준 낮은 것들을 표시함에 관하여는 주님의 신성한 자비로부터 별도로 살핀다; “말(horse)”은 지적인 것들을 표시한다; “거리들”은 진리들을, 반대적으로는 거짓들을 표시한다; “그것들을 짓밟는다”란 “두로”에 의해 의미되는 것인 진리에 관한 지식들을 파괴하는 것이다; “검으로 백성들을 살해하는 것”은 거짓인 것을 수단으로 진리들을 파괴하는 것이다. 이 모두로부터 “힘의 기둥들이 땅으로 내려가게 함”에 의해 뜻해지는 것을 알 것이다. “힘”은 진정한 것, 또는 거짓된 것을 서술한다.

그리고 그것의 머리에 기름을 부었다. 이는 거룩한 선을 의미하는데, 이는 “기름”의 의미가 사랑의 천적 평면, 또는 선이다로부터; 그리고 “머리”의 의미가 더 높은 것, 또는 내면의 것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선이 더 높은 것, 내면의 것이고, 진리는 더 낮은 것, 또는 외면의 것이다에 대하여는 이미 많이 살폈다. 이로부터 그것들의 머리에 기름을 붓는 고대 의식에 의해 의미되는 것이 분명해진다, 즉 진리는 선 없이 있게 해서는 안된다는 것, 고로 선으로부터서만 있어야 한다는 것, 고로 선이 머리와 신체의 관계 같이 통치권을 가져야한다는 것이다; 그 이유가 선이 없는 진리는 진리가 아니고, 생명 없는 소리, 그 자체 공허하게 흩어지고 마는 소리 같기 때문이다. 다른 삶에서도 그들이 선 안에서 살지 않는다면, 또는 그들이 선으로부터 진리를 붙들고 있지 않다면, 자신이 타인보다 진리를 앎에, 신앙의 교리적인 것들에 탁월하다 해도, 설사 사랑에 관한 교리적인 것들이라 해도 그것들은 축출되고 흩어져버리고 만다.
그러므로 교회는 선으로부터 분리된 진리로부터서는, 결과적으로 선행으로부터 분리된 신앙으로부터서는 교회가 아닌 것이다; 그러나 선으로부터 있는 진리로부터, 또는 선행으로부터 있는 신앙으로부터 교회는 교회인 것이다. 같은 의미에서 주님께서 야곱에게 말하셨다:
나는 네가 기둥에 기름부었던 곳, 네가 나에게 절했던 곳, 벧엘의 하느님이다 (창. 31:13);
그리고 다시 말해졌다:
야곱은 돌로 기둥을 세웠다, 그리고 그는 그 위에 제주를 부었다, 그리고 그 위에 기름을 부었다 (창. 35:14);
“기둥에 제주를 붓는 것”은 신앙으로부터의 신성한 선을; “그것 위에 기름을 붓는 것”은 사랑으로부터의 신성한 선이 의미되어진다. 돌 위에 기름을 붓는 것이 천적이고 영적인 어떤 것을 의미함도 없이 부었다면 그것이 우상적 행위로 전락되고 말 것임을 누구나 알 것이다.

그리고 그는 이 장소의 이름을 벧엘이라 불렀다. 이는 상태의 품질을 의미한다. 이는 “이름”, 그리고 “이름을 부름”의 의미가 품질이다로부터; 그리고 “장소”의 의미가 상태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상태의 품질이 “벧엘”에 의해 의미되는데, 원어에서 “벧엘”은 “하느님의 집”을 뜻한다; 그리고 이것이 질서의 최말단에 있는 선이다.

그러나 이 성의 이름은 애당초 루즈였다. 이는 이전 상태의 품질을 의미한다. 이는 “이름”이 품질을 의미함으로부터; 그리고 “성(city)”의 의미가 진리의 교리적인 것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원어에서 “루즈”는 퇴거(뒤로 물러나 있음, recession)을, 고로 분리(disjunction)를 뜻한다. 이런 상태는 진리의 교리적인 것, 또는 진리 자체가 첫 번째 자리에 있을 때, 그리고 선을 소홀히 여길 때 와지는 상태이다; 고로 진리만이 질서의 최말단에 있을 때, 결과되는 상태이다. 그러나 진리가 질서의 최말단에서 선과 더불어 있을 때, 거기에는 퇴거이든, 분리이든 없고 오로지 근접함(accession), 결합함만이 있는다. 이것이 “루즈”에 의해 의미된 상태의 품질이다.

20-22절. 그리고 야곱은 서약을 서원하여, 말하기를, 만일 하느님께서 저와 함께 계시고, 그리고 제가 걷는 이 길에서 저를 지켜주시고, 그리고 저에게 먹을 빵과 입을 의복을 주시고, 21 그리고 제가 제 아버지의 집으로 평화로이 되돌아 간다면, 여호와께서는 저에게 하느님이실 것입니다. 22 그리고 제가 기둥으로 세웠던 이 돌은 하느님의 집일 것입니다. 그리고 당신이 저에게 주실 모든 것의 십분의 일을 저는 당신에게 바칠 것입니다.

야곱이 서약하여 말했다. 이는 섭리의 상태를 의미한다. 이는 “서약함”이 내적 의미에서는 주님이 준비하여 주시기를 뜻함인데, 최고 의미에서는 주님이 취급되므로 섭리로부터의 상태를 의미하게 된다. 내적 의미에서 “서약을 말함(vow a vow)”은 주님께서 대비해 주시기를 뜻함을 의미하는 것은 대체로 서약 안에는 당사자가 뜻하려는 것이 장차 와지기를 바라고 애착하는 것이 있다는 사실로부터 이다; 고로 주님이 대비해 주시기를 바람이다. 물론 서약에는 주님이 해주신다는 약속의 어떤 것, 그리고 인간 편에서는 그분에 대한 의무 이행의 어떤 것을 동시에 함축하고 있다. 즉 당사자가 원하는 목적을 성취한다면, 그는 서약한 의무 조항을 자신 위에 가져다 놓는 것이다; 여기서 야곱의 경우, 여호와가 하느님으로 자기에게 있으실 것, 그리고 그가 기둥으로 세운 돌은 하느님의 집일 것, 그리고 자기가 가는 길을 지켜주고, 먹을 빵과 입을 옷을 주시고, 아버지의 집으로 평화로이 되돌아가게 해주신다면 자기에게 주어지는 모든 것의 십분의 일을 바치겠다는 것이다. 이것이 보여주는 것은, 그 당시 서약은 특수한 계약(compact)이었다, 자기가 바란 것을 하느님이 준비해 주신다면, 그에 대한 댓가를 치루겠노라에서 특히 자신의 하느님을 모시겠다는 것, 즉 자신의 하느님으로 인정하는 점이다.
위로부터 또하나 분명해지는 것은, 유태인 나라의 아버지들(조상들)의 품질, 여기서의 경우 야곱 같이, 그들은 여호와를 인정하지 않고 있었다. 하여 그들은 자기의 하느님으로 인정하든가 말든가 하는 선택을 자신의 절대적 권리인 듯 쥐고 있었다. 이것은 이 나라의 특유함이었다, 더구나 그들 조상들로 거슬러 올라가서 먼 시대까지조차 에서도 그러했다, 하여 모두 각각의 사람은 그의 고유의 하느님을 가지기를 바랬다, 그리고 만일 누군가가 여호와를 예배했다면, 이는 필시 여호와라 불리우는 어떤 하느님을 예배한 것이 된다, 그리고 하느님의 이름을 수단으로 다른 나라의 하느님들과 구별되어졌다. 이런 측면에서 볼 때, 여호와를 예배한다 해도 많은 하느님들 중에서 여호와라 이름 부르는 하느님을 예배하는 것인 바, 이는 우상숭배적이다; 그 이유가 이름뿐인 여호와인 바, 우상숭배밖에 더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은 오늘날 자신이 기독교인이라 자처하여 그리스도를 예배한다고 말하기는 하나, 그분의 가르침들에 따라 살지 않는 이들의 경우도 위와 별반 다르지 않다; 그들의 예배는 우상숭배밖에 더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그들은 거짓 그리스도를 예배하는 것이다 거짓 그리스도에 관하여는 마. 24:23, 24를 참조하라.

만일 하느님께서 저와 함께 계시고, 제가 걷는 이 길에서 저를 지켜주신다면. 이는 계속적으로 신성함을 의미한다. 이는 누군가와 “더불어 하느님이 계심”과 “그가 걷는 길을 지키심”은 계속적으로 신성한 것을 의미한다; 그 이유가 이것은 생명의 본질 자체가 여호와이셨던 주님을 서술하기 때문이다; 고로 그분의 전체 삶, 즉 유아기로부터 마지막까지의 모든 삶을 망라해서 계속적으로 신성하였다는 것, 그리고 이 계속됨은 그분의 인간 본질이 신성 본질과 완전한 합일에 이를 때까지도 포함해서 하는 말이다.

그리고 저에게 먹을 빵을 주시고. 이는 신성한 선과 결합하는 것까지도를 의미한다. 이는 “빵”의 의미가 주님으로부터 있는 모든 천적이고 영적인 선이다로부터, 그리고 최고 의미에서일 경우, 신성한 선 측면에서의 주님 자신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리고 “먹다”의 의미가 교통함, 내 것되게 함, 그리고 결합함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리고 제가 입을 의복. 이는 신성한 진리와 결합함을 의미한다. 이는 “의복(raiment)”의 의미가 진리이다로부터, 여기서의 경우는 주님이 취급되는 바 신성한 진리이다, 그리고 “입는다”의 의미가 내 것 삼는다와 결합한다로부터도 알게 된다. 아마 말씀의 내적 의미의 특성을 이 구절에서도 알는지 모른다. 즉 빵과 의복이 글자 의미에서 취급되는 것, 그리고 이것의 조달이 걱정되어 표현한 것, 즉 “만일 하느님께서 먹을 빵과 입을 의복을 주신다면”라고 표현될 때에서 글자 의미와 내적 의미의 차이점이다. 인간이 이 대목을 글자 의미에서 읽는다 해도 그와 함께 하는 천사들은 빵을 통해 사랑의 선과 최고 의미에서 주님의 신성한 선을 생각한다; 그들은 의복이라는 단어를 듣지만 의복이 아닌 진리를, 최고 의미에서인 주님의 신성한 진리를 생각한다. 글자 의미에서 있는 것들이 천사들에게서는 천국의 것과 신성을 생각하기 위한 객관적 표현물일 뿐이다; 그 이유가 글자 의미로 있는 말씀을 망라해 모든 것은 질서의 최말단에 있는 그릇과 같기 때문이다.
고로 인간이 거룩한 상태에서 빵을 생각할 경우, 예를 들면 성찬 예식에서의 빵, 또는 주님의 기도에서의 “매일의 빵(일용할 양식, daily bread)”에 관해 생각할 때, 인간이 빵에 관하여 가지는 생각은 그와 더불은 천사들에게 주님으로부터 있는 사랑의 선에 관하여 생각할 수 있는 객관적 표현물을 제공하는 셈이다; 천사는 인간이 빵에 관해 어떤 생각을 가지는지에 대해 어떤 것도 납득 못하나, 빵 대신 선에 관한 생각을 가진다, 그 이유는 상응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거룩한 상태에서 인간이 의복을 생각하고 있다면, 천사의 생각은 진리에 관하여서이다; 이외 말씀의 다른 경우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이것은 말씀을 수단으로 천국과 땅의 결합의 본성을 보여준다, 즉, 인간이 거룩한 태도나 방법에서 말씀을 읽을 때, 설사 그가 글자 의미 그 이상을 생각하지 못한다 해도 어쨌든 상응을 수단으로 천국과 밀접하게 결합한다는 것, 천국을 통하여 주님과도 결합한다는 것이다. 이때 인간에게 표출되는 거룩함 자체는 그 사람과 더불은 천사들이 가지는 천적, 영적인 생각들과 애착들의 유입으로부터 온다.
이와 같은 유입과 그 결과로 인간이 주님과 결합함이 있도록 성찬은 주님에 의해 제정되었다, 이 성찬과 연결하여 빵과 포도주가 주님이시다는 것을 극명하게 말해진다, 그 이유가 주님의 “몸”은 그분의 신성한 사랑을 의미한다는 것, 그리고 인간 안에 있는 상호적인 사랑 (서로 사랑함)은 천적 수준의 천사들의 사랑과 같다는 것이다; “피” 역시 마찬가지로 그분의 신성한 사랑, 인간에 있는 서로의 사랑인데, 이는 영적 수준의 천사들의 사랑과 같다. 이로부터 분명한 바, 인간이 말씀에 대해, 말씀의 특성에 대해 제아무리 무지하다 해도, 말씀의 곳곳에는 얼마나 많은 신성이 깃들여 있는지 이다. 또한 인간이 이렇게 무지했다 해도 그가 세상에서 선으로부터의 생활을 꾸려갔었다면, 그는 사후 그의 무지함을 벗을 지식과 지각을 얻게 된다; 그 이유가 그가 세상의 것, 지상의 것을 벗고 천국의 것을 입기 때문이다; 그리고 천사들의 것과 같은 것인 영적이고 천적인 생각 안에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제가 제 아버지의 집으로 평화로이 되돌아 간다. 이는 완전한 합일에까지도를 의미한다. 이는 “내 아버지의 집”이 주님을 서술할 경우, 신성 자체, 주님이 임신 때부터 가지셨던 신성 자체이다는 사실로부터 분명해진다; 그리고 “그 집으로 되돌아 간다”는 “아버지”라 불리우는 신성한 선으로 되돌아 간다 이다. 이 선이 “아버지”인 것은 3704항을 보기 바란다; 그리고 “그 집으로 되돌아 간다”는 것이 하나로 되심인 것은 분명하다. 이와 같은 의미에서 주님께서는 자신을 두고 말하시기를, 자기는 아버지로부터 나와서 세상 안으로 오고, 다시 아버지쪽으로 가야 한다고 하셨다; 다시 말해 “아버지로부터 나옴”은 신성 자체가 외관을 인간이라는 것으로 나타내심 이다; “세상에 오심”은 그분이 인간으로서 있으셨음 이다; 그리고 “다시 아버지에게로 감”은 인간 본질이 신성 본질에 하나가 되심 이다. 같은 의미가 주님의 아래 말씀에 의해서도 뜻해졌다, 요한복음서에서:
만일 너희가 사람의 아들이 이전에 있으셨던 곳으로 승강하는 것을 본다면 (요. 6:62).
다시:
아버지께서 그분의 손에 모든 것들을 주셨다는 것, 그리고 그분은 아버지로부터 나왔다는 것, 그리고 하느님쪽으로 가신다는 것을 아시는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하셨다, 아이들아, 내 가 너희와 더불어 있는 것은 잠시 뿐이다; 내가 어디로 가든, 너희는 올 수 없다
(요. 13:3, 33).
다시:
지금 나는 나를 보낸 그분에게로 간다; 너희의 누구도 나에게 당신은 어디로 가십니까? 묻 지 않는다.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유리하다; 그 이유가 내가 떠나가지 않으면 위로자가 너희에게 오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일 내가 간다면 나는 너희에게 그를 보낼 것이다. 잠간 후에 너희는 나를 보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잠간 후에 다시 너희 는 나를 볼 것이다; 그 이유는 내가 아버지에게로 가기 때문이다 (요. 16:5, 7, 16, 17).
다시:
나는 아버지로부터 나왔다, 그리고 세상 안으로 와있다; 다시 나는 세상을 떠난다, 그리고 아버지에게로 간다 (요. 16:28).
위 구절들에서 “아버지께로 감”은 인간 본질이 신성 본질에 하나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여호와께서는 저에게 하느님이실 것입니다. 이는 신성한 자연 평면 역시 여호와이셨다를 의미한다. 이것은 주님의 인간이 그분의 신성과 하나가 되심을 취급한다는 최고 내적 의미의 시리즈들로부터 분명해진다. 그러나 이런 의미가 나타나도록 하기 위하여서 우리의 생각들은 야곱의 역사라는 것에서 빠져나와 주님의 신성한 인간 안에, 여기서는 야곱에 의해 표현된 주님의 신성한 자연 평면 안에 둥지를 틀어야 할 것이다. 이미 반복하여 서술했듯, 인간 자체는 두 가지로, 즉 내적 인간과 같은 것인 합리성, 그리고 외적 인간과 같은 것인 자연 평면으로, 그리고 또한 세상에서의 생활을 위하여 가장 바깥쪽 기관, 또는 자연 평면의 수단이 되어주는 몸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리고 자연 평면을 통하여 합리성을 섬기고, 더 나아가 합리성을 통하여 신성을 섬긴다. 그런 까닭에 주님은 자신 안에 있는 전체 인간을 신성으로 만드시기 위하여, 그리고 이 만드심이 신성한 질서에 따라 하시기 위하여 세상에 오셨다. 야곱에 의해 주님의 자연 평면이 표현되고, 그가 (아버지의 집을 떠나 다른 곳에서) 체류하는 삶은 최고 의미에서 주님이 어떻게 그분의 자연 평면을 신성으로 만드셨는가에 대한 것인 바, 여기서 “만일 제가 내 아버지의 집으로 평화로이 되돌아 간다면, 여호와는 하느님으로 제게 계실 것입니다”라고 말해져서, 이것이 주님의 인간이 신성과 하나가 되심인 것, 그리고 신성 본질이 인간 본질과, 그리고 인간 본질이 신성 본질과 하나가 되심을 통하여 신성한 자연 평면 측면에서의 그분은 여호와이실 것임이 의미되고 있다. 이 하나로 있으심은 서로로부터 구별되는 둘, 그러나 사랑에 의해서만 결합되어 있는 하나이심, 마치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에서 아버지가 아들을, 아들이 아버지를 사랑할 때, 또는 형제가 형제를, 친구가 친구를 사랑할 때의 하나됨 같은 것으로 이해되지 않는다; 그러나 (주님께서 반복적으로 가르치시기도 한) 그들이 둘이 아닌 하나이기 위한 하나쪽으로의 진짜 하나됨이 있다; 그리고 그들이 하나이기 때문에, 그러므로 주님의 전체 인간은 신성한 존재, 또는 여호와이시다.

그리고 제가 기둥으로 세운 이 돌. 이는 최말단인 진리를 의미한다. 이는 앞에서 이미 살폈는 바, 설명은 생략한다.

하느님의 집일 것입니다. 이는 질서의 최말단에 있는 주님의 왕국, 그것들의 집안에서 같이 더 높은 것들이 그 안에 있다. 이미 살핀 바로부터 알려진다. 더 높은 것들이 그것들의 집 안에 있는 것같이 질서의 최말단에 있는 경우에 주목해보면 이렇다: 이와 같은 질서는 주님에 의해 제정되어져 있는데, 즉 더 높은 것들이 더 낮은 것들 안으로 흐르는 것, 하여 더 낮은 것 안에서 더 높은 것들은 일반적 측면에서의 그 자체의 형상을 표출한다, 결과적으로 어떤 일반적 형체에서 거기 안에서 다함께 있는 것이다, 고로 지극히 높은 것, 즉 주님으로부터 질서 안에 있다; 이로부터 주님의 대략적인 형상이 가장 깊은 천국이고, 이 천국은 순진과 평화의 천국, 천적 수준의 이들이 거주한다, 그 이유는 이 천국은 주님에게 가장 가까이 있기 때문, 하여 그분의 “모습(likeness)”이라 불리운다. 그 다음의 천국, 즉 보다 낮은 등차쪽으로 계속되는 천국은 주님의 “형상(image)”이다, 그 이유는 이 천국 안에서, 일반적인 어떤 것에서 같이 더 높은 천국 안에 있는 것들을 동시적으로 표출하기 때문이다. 최말단의 천국, 앞의 두 천국과 상황은 매우 유사하다, 그 이유가 더 높은 천국의 특별 사항과 개별 사항들이 이 천국 안으로 흘러들기 때문이다, 그리고 거기 안에 일반적 측면에서 표출되고, 상응하는 형체 안에서 있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는 인간에게서도 비슷하다, 그 이유는 인간은 이 세 천국들의 형상이도록 창조되어 있고 만들어내어져 있기 때문이다. 인간 안에서 가장 깊이 있는 것은 위와 마찬가지로 더 낮은 것 안으로 흘러든다; 이리하여 가장 낮은 것, 마지막의 것 안으로 까지 흐른다. 자연 평면과 육체적인 것들은 이와 같은 유입과 흐름의 과정의 맨 아래쪽에 해당되고 흐름의 마지막째이다. 이런 일련의 과정에서 마지막의 것, 즉 최말단의 것은 처음의 것과 연결되어져 있다, 이 연결 없이 마지막의 것은 단 한 순간도 존속할 수 없다. 고로 한 집안에 있는 것 같이 더 높은 것이 최말단 안에 있음에 의해 뜻해지는 것이 분명해졌을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더 높다, 또는 더 낮다, 내면이다, 외면이다 라고 말하든지, 실상 그것은 똑같다; 그 이유가 인간이 볼 때 내면의 것은 더 높은 것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이유 때문에 천국이 내적 측면 안에 있음에도 인간은 천국이 더 높은 곳에 있다고 상상하고 말한다.

그리고 당신께서 저에게 주시는 모든 것의 십분의 일을 저는 당신에게 바칠 것입니다. 이는 그분께서는 그분 자신의 능력으로 모든 것을 일반적으로나, 세부적으로나 모두 신성으로 만드셨다를 의미한다. 이는 “주다”의 의미가 주님을 서술할 경우, 그분이 자신에게 주셨다로 되기 때문, 고로 이것은 그분 자신의 능력으로 이었다 이다; 그리고 “십분의 일”이 인간의 내면들 안에 주님에 의해 저장된 선들과 진리들이다로부터, 그리고 이 선들이 “리메인스(remains)”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것들이 주님을 서술할 경우, 그것들은 주님이 자신에게 그분 자신의 능력으로 자신에게 획득하셨던 신성한 선들과 신성한 진리들이다.

*************************************

창세기 제 29 장

성경: 창세기 29장

1. 야곱은 그의 발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동쪽의 아들들의 토지에로 갔다.
2. 그리고 그는 보았다, 그리고 들판에 샘이 바라보였다, 그리고 거기에 세 무리의 양 떼가 우물가에 누워있었다. 그 이유가 이 우물로부터 그들은 가축떼에게 물을 먹 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큰 돌이 우물의 아구 위에 있었다.
3. 그리고 모든 가축떼가 그리로 다 모여졌다. 그리고 그들은 우물의 아구로부터 돌을 굴려 내었다, 그리고 양떼에게 물을 먹였다, 그리고 그들은 우물의 아구에 그 돌을 다시 굴려 놓았다.
4. 그리고 야곱은 그들에게 말했다, 나의 형제여 너희들은 어디에서 왔는가? 그리고 그들이 말했다, 우리는 하란으로부터 이요.
5. 그리고 그는 그들에게 말했다, 너희는 나홀의 아들 라반을 아느냐?
6. 그리고 그들은 말했다, 우리는 그를 안다. 그리고 그가 그들에게 말했다, 그는 평안 하시냐? 그리고 그들이 말했다, 평안하오. 그리고 보라 그의 딸 라헬이 양떼와 함 께 오고 있다.
7. 그리고 그는 말했다, 보라 아직까지는 날이 아주 좋은 바, 이는 가축을 모아 들일 때가 아니다. 너는 양떼에게 물을 먹이고, 그리고 가서 그들을 먹이라.
8. 그리고 그들이 말했다, 우리는 모든 가축떼가 다 모일 때까지 그렇게 할 수가 없 다, 그리고 그들이 우물의 아구로부터 돌을 굴린다. 그 다음 우리는 양떼에게 물을 먹인다.
9. 그가 그들과 아직 말하고 있는 동안, 라헬이 그녀의 아버지의 것인 양떼와 함께 왔 다, 그 이유가 그녀는 여 목자였기 때문이다.
10. 그리고 야곱은 그의 어머니의 오라버니 라반의 딸, 그리고 그의 어머니의 오라버 니 라반의 양떼를 보았을 때, 야곱은 가까이 다가 왔다, 그리고 우물의 아구로부 터 돌을 굴렸다, 그리고 그의 어머니의 오라버니 라반의 양떼에게 물을 먹였다.
11. 그리고 야곱은 라헬에게 키스했다, 그리고 그의 음성을 높혀 울었다.
12. 그리고 야곱은 라헬에게 자기는 그녀의 아버지의 형제이다는 것, 그리고 자기는 리브가의 아들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녀는 달려가서 그녀의 아버지에게 말했다.
13. 그리고 라반은 그의 여동생의 아들 야곱에 관한 소식을 듣자 그를 만나러 달려갔 다, 그리고 그를 껴안았다, 그리고 그에게 키스했다, 그리고 그를 그의 집으로 데 려왔다. 그리고 그는 라반에게 모든 말을 했다.
14. 그리고 라반이 그에게 말했다, 너는 정녕 내 뼈요 내 살이다. 그리고 그는 그와 함께 날들의 한 달을 거주했다.
15. 그리고 라반은 야곱에게 말했다, 네가 내 형제라고 해서 네가 아무 댓가도 없이 봉사하느냐? 무엇이 너의 댓가인지 나에게 말하라.
16. 그리고 라반은 두 딸을 가졌는데, 큰 딸의 이름은 레아였고, 그리고 작은 딸의 이 름은 라헬이었다.
17. 그리고 레아의 눈은 약했고, 그리고 라헬은 모습이 아름다웠고 바라보기에도 아름 다웠다.
18. 그리고 야곱은 라헬을 사랑했다. 그리고 그는 말했다, 나는 당신의 작은 딸 라헬 을 위하여 칠 년을 봉사하리이다.
19. 그리고 라반이 말했다, 나는 그녀를 다른 사람에게 주는 것보다 너에게 주는 편이 더 낫다. 나와 함께 있으라.
20. 그리고 야곱은 라헬을 위하여 칠 년을 봉사했다, 그리고 그 세월은 그가 가졌던 그녀에 대한 사랑 때문에 그의 눈에서 며칠로 있었다.
21. 그리고 야곱은 라반에게 말했다, 나에게 나의 여인을 주십시오, 내 날들이 다 찼 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나는 그녀에게 갈 것입니다.
22. 그리고 라반은 그 곳의 모든 남자들을 모아 놓고, 잔치를 베풀었다.
23. 그리고 저녁이 되자, 그는 그의 딸 레아를 데려왔다, 그리고 그녀를 그에게 데려 왔다, 그리고 그는 그녀에게 갔다.
24. 그리고 라반은 그의 하녀 실바를 그의 딸 레아에게 그녀의 하녀로 주었다.
25. 아침이 되자 그것은 레아였다. 그리고 그는 라반에게 말했다, 나에게 한 이런 처 사는 대체 무엇입니까? 나는 라헬을 위하여 당신에게 봉사하지 않았습니까? 그리 고 왜 저를 속이셨습니까?
26. 그리고 라반은 말했다, 이곳에서는 큰 딸에 앞서 작은 딸을 주는 식의 행동은 하 지 않는다.
27. 이 주간을 채워라, 그리고 우리는 너에게 그녀 역시 주겠다, 너는 칠 년을 다시 나에게 봉사해야 한다.
28. 그리고 야곱은 그렇게 했다, 그리고 이 주간을 채웠다, 그리고 그는 그에게 여인 으로 그의 딸 라헬을 주었다.
29. 그리고 라반은 그의 딸 라헬에게 그의 하녀인 빌하를 그녀의 하녀로 삼게 주었다.
30. 그리고 그는 라헬에게도 왔다, 그리고 그는 레아보다 라헬을 더 사랑했다, 그리 고 그에게 칠 년을 더 봉사했다.
31. 그리고 여호와께서는 레아가 미움받는 것을 보셨다, 그리고 그분은 그녀의 자궁을 여셨다, 그리고 라헬은 불임이었다.
32. 그리고 레아는 임신해서 아들을 낳았다, 그리고 그녀는 그의 이름을 르우벤이라 불렀다. 그렇게 부른 까닭은 여호와께서 내 고통을 보셨었다, 지금 내 사람이 나 를 사랑할 것이다 라고 그녀가 말해서였다.
33. 그리고 그녀는 다시 임신했다, 그리고 아들을 낳았다, 그리고 말했다, 여호와께서 내가 미움받은 것을 들으셨기에 나에게 이것 역시 주셨다. 그리고 그녀는 그의 이름을 시므온이라 불렀다.
34. 그리고 그녀는 다시 임신했다, 그리고 아들을 낳았다, 그리고 말했다, 지금 이번 에는 나의 남자가 나에게 굳게 결합할 것이다. 그 이유는 내가 세 아들을 낳았 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녀는 그의 이름을 레위라 불렀다.
35. 그리고 그녀는 다시 임신했다, 그리고 아들을 낳았다, 그리고 그녀는 말했다, 이 번에 나는 여호와를 고백할 것이다. 그러므로 그녀는 그의 이름을 유다라고 불 렀다. 그리고 그녀는 출산으로부터 아직 서 있었다.

각 절의 내적 의미

1절. 야곱은 그의 발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동쪽의 아들들의 토지에로 갔다.

그리고 야곱은 그의 발을 들어 올렸다. 이는 자연적 수준의 것이 승강함을 의미한다. 이는 “들어올림”의 의미가 승강함이다로부터; “발”의 의미가 자연적인 것이다로부터 알게 되는데, 아래에서 더 살핀다. 이 구절의 승강은 이 장이 취급하는 승강, 즉 외적인 진리로부터 내적인 선으로의 승강이다. 최고 의미에서는 주님께서 그분의 자연 평면을 신성으로까지 만드시되 어떻게 질서에 따라 등차적인 것을 수단으로 내적인 선으로 만드셨는지 이다; 그리고 표현적 의미에서 주님께서 인간을 비슷한 질서에 따라 거듭나게 하실 때 어떻게 인간의 새로운 자연 평면을 만드시는 가에 대해서이다. 성년의 나이에 거듭나지고 있는 인간은 이 장과 이 장 뒤를 잇는 장들의 내적 의미에서 묘사된 질서에 따라 거듭남의 발전을 이룩해간다는 것을 알고 있는 자는 매우 적은데, 그 이유는 거듭남을 이 장들에서 곰곰이 반영해보는 자가 적기 때문, 또한 오늘날 거듭나질 수 있는 자가 적은 것도 한가지 이유이기도 하다. 그 이유는 이들이 교회의 마지막 때에, 즉 더 이상 어떤 선행이 없는 때, 결과적으로 더 이상 어떤 신앙도 없는 때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바, 신앙이 무엇인지조차 알려져 있지 않다, 물론 그들은 인간이 구원되는 모든 것은 신앙을 수단으로 한다고 입술로 말하고 있다 해도 신앙이 무엇인지 실상 알고 있는 것이 없다는 말이다. 신앙보다 더욱 덜 알려진 것은 선행이 무엇인지 이다; 이 두 가지들은 단어들로만 알려졌을 뿐, 이 두 단어들의 본질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이렇기 때문에 질서에 따라 인간이 새로이 만들어지는 것을 곰곰이 되새겨 보는 자가 매우 적고, 또한 거듭나는 자도 매우 적다고 말한 것이다.
자연 평면이 여기서 취급되기 때문에, 그리고 이것이 야곱에 의해 표현되기 때문에, 그가 “일어나서(arose)” 동쪽의 아들들의 토지쪽으로 갔다 라고 말해지지 않고, 그는 “자기 발을 들어 올려 (lift up)” 동쪽의 아들들의 토지쪽으로 갔다 라고 말해진다. 일어나다와 들어올리다 라는 두 표현들 모두 승강 (elavation)을 의미한다. 그러나 여기서 “자기 발을 들어올렸다”라고 말해진 이유는 이것이 자연 평면의 거듭남을 뽀족히 말하려는 이유에서 이다; 그 이유가 “발”이 자연적 수준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발”이 자연 평면, 또는 자연적인 것들을 의미하는 것은 앞 장의 끝에서 말해지는 웅대한 사람과의 상응으로부터 오고 있다. 웅대한 사람 안에서 발의 영역에 속하는 이들은 자연적 수준의 빛 안에 있고 영적 수준의 빛 안에는 거의 있지 않다; 결과적으로 발 아래 부분들, 즉 발바닥, 발꿈치는 가장 낮은 자연 평면의 것들을 의미한다; 그리고 가끔씩 말씀에서 언급되는 신(발)은 최말단인 육체적 자연 평면을 의미한다.

그리고 동쪽의 아들들의 토지에로 갔다. 이는 사랑의 진리들쪽으로를 의미한다. 즉 그쪽으로 승강함이다. 이는 “동쪽의 아들들의 토지”의 의미로부터 분명해진다. 아람, 또는 시리아가 “동쪽의 아들들의 토지”로 불리우는 것이 분명한 이유는 야곱이 자신을 그리로 향하게 했기 때문이다. 일반적 측면에서 “시리아”에 의해 선에 관한 지식들이 의미되는 것은 이미 살폈다; 그러나 특별하게 “아람-나하라임”(즉 “강들의 시리아”)에 의해서는 진리에 관한 지식들이 의미되어진다. 어쨌든 이 구절의 경우, 그가 아람, 또는 시리아로 갔다 라고 말해지지 않고 “동쪽의 아들들의 토지로 갔다”리고 말해지는데, 그 이유는 이 장 전체를 망라해서 취급되는 것이 사랑으로부터의 진리들로 상승함(ascent)이기 때문에서이다. 이 진리들은 사랑으로부터의 진리들인데, 이것은 여타 다른 대목들에서 천적인 진리들로 용어화 하여 사용되고 있다. 그 이유는 이 진리들은 이웃을 향한 선행과 주님을 사랑함에 관련되는 지식들이기 때문이다; 주님을 취급하는 최고 의미에서, 이 진리들은 신성한 사랑으로부터의 진리들이다.
이 진리들, 즉 주님을 사랑함과 이웃을 향한 선행에 관련되는 진리들은 인간이 거듭나지는 것이 가능해지기 이전에 반드시 배워져 있어야 한다; 또한 인정되고 믿어져 있어야 한다; 그리고 이 진리들이 인정되고, 믿어지고, 삶에 접목된 만큼에서 인간은 거듭나진다. 그리고 자기들의 자연 평면에 심은 만큼에서 자기의 지면을 확보하고 있는 셈이다. 이 진리들은 처음에는 부모나 선생들에 의한 교육을 통하여 자연 평면 안에 심어진다; 그 다음 주님의 말씀으로부터 이다; 그 후에 본인 스스로 이 진리들을 곰곰이 반추해봄으로 심어진다; 심어진다라고 말은 했지만 엄밀히 말하면 이 진리들은 당사자의 자연 평면의 기억 속의 지식들 안에 저장되었다고, 여느 지식들과 별반 차이가 없이 막연히 저장되어 있을 뿐인 바, 이 진리들이 당사자의 삶과 일치하지 않으면 이 진리들은 실상 인정되는 것도, 믿어지는 것도 아니다. 그 이유가 삶에 일치한다는 것은 당사자가 이 진리에 대한 애착을 갖는다는 말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가 생활로부터 애착을 가지는 만큼에서 이 진리들은 자기의 지면으로서의 자연 평면에 심어진다. 물론 이렇게 심어지지 않았다 해서 진리들이 당사자와 더불어 있지 않은 것은 아니고, 단지 그의 기억 속에 많은 지식 중의 하나로서, 이 구절 성경의 말씀 역시 야곱의 역사 이야기 수준으로 있을 뿐이고, 기껏 사용해보아야 자기 명예와 소득을 위해 사용되는 지식일 따름이어서, 자기 거듭남과는 무관한 상태이다.
“동쪽의 아들들의 토지”에 의해 사랑으로부터의 진리들이 의미된다는 것, 즉 선으로 향하는 진리에 관한 지식들이다는 것은 “아들들”의 의미가 진리들이다로부터 알런지 모른다; 그리고 “동쪽”의 의미가 사랑이다로부터도 알게 된다. 그들의 “토지”는 그들이 있는 지면이다. “동쪽의 아들들”이 진리와 선에 관한 지식들에서 있는 이들이다는 것, 결과적으로 사랑으로부터의 진리들 안에 있는 이들이다는 것은 말씀의 다른 구절로부터 더 알게 된다. 열왕기상서에서:
솔로몬의 지혜는 모든 동쪽의 아들들의 지혜보다, 그리고 모든 이집트인들의 지혜보다 훨 씬 더 불어났다 (왕상. 4:30);
위에서 “동쪽의 아들들의 지혜”에 의해 진리와 선에 관한 내면의 지식들이, 고로 그것들 안에 이들이 의미된다; 그러나 “이집트인들의 지혜”는 같은 지식들이나 보다 수준이 낮은 지식들인 기억 속의 지식들이다.
예레미야서에서:
고로 여호와께서 말하신다, 너는 일어나서, 게달을 향하여 올라가서, 동쪽의 아들들을 황폐 하게 하라. 그들의 천막들과 그들의 양떼들을 그들은 가져갈 것이다; 그들은 그들의 커튼들 을 가져갈 것이다, 그리고 모든 그들의 그릇들을, 그리고 그들의 낙타들을 가져갈 것이다 (예. 49:28, 29).
위 구절에서 “동쪽의 아들들”에 의해 선과 진리의 지식들 안에 있는 이들이 뜻해진다는 것은 그들이 그들의 천막들과 양떼들, 그들의 커튼들과 모든 그들의 그릇들, 그리고 낙타들도 가져간다는 사실로부터 분명해진다; 그 이유가 “천막들”에 의해 선의 거룩한 것들이 의미되기 때문; “양떼들”에 의해 선행의 선들이; “커튼들”에 의해 거룩한 진리들이; “그릇들”에 의해 신앙의 진리들과 기억 속의 지식들이; “낙타들”에 의해 일반적 측면에서의 기억 속의 지식들이 의미된다. 고로 “동쪽의 아들들”에 의해 이런 것들 안에 있는 이들, 즉 선과 진리의 지식들 안에 있는 이들이 의미된다.
예수의 출생에서 그분에게 온 동쪽으로부터의 슬기로운 자가 “동쪽의 아들들”이라 불리운 것은 그들이 주님이 탄생하시기로 되어 있음을 알고 있었다는 것, 그리고 그들은 동쪽에서 그들에게 나타난 별을 수단으로 그분이 강림하셨음을 알았다는 사실로부터도 분명해진다. 마태복음서에서:
예수께서 유대의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셨을 때, 보라, 슬기로운 자들이 예루살렘으로 와서, 말하기를, 유태인들의 왕으로 태어나신 그분이 어디 계십니까? 그 이유는 우리가 그분의 별을 동쪽에서 보았었기 때문이고 (그래서) 그분을 경배하러 왔습니다 (마. 2:1, 2).
고대 시대로부터 이와 같은 예언적 지식은 시리아 속에 있는 동쪽의 아들들 사이에 존재했었다는 것은 주님의 강림에 관한 발람의 예언에서 분명해진다. 모세의 책에서:
나는 그분을 보았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나는 그분을 바라보고 있다, 그러나 가까이는 아니다; 야곱으로부터 한 별이 일어날 것이다, 그리고 왕권이 이스라엘로부터 일어날 것이 다 (민. 24:17) .
발람은 동쪽의 아들들의 토지, 즉 시리아 출신이었음은 이 말씀으로부터 분명해진다:
발람은 분명한 어조로 발음하여 말했다, 발락이 나를 시리아로부터, 동쪽의 산들로부터 데 려왔다 (민. 23:7).
예수님의 탄생에서 그분에게 왔던 이 현자들은 마기(Magi, 마술사)라 불리운다, 그러나 그때 당시 현자들도 그렇게 불리웠었다는 것은 많은 구절로부터 분명해진다; 즉 창. 41:8; 출. 7:11; 단. 2:27; 4:6, 7; 왕상. 4:30, 이 외에도 예언서들에도 많다.
[6] 반대적 의미에서 “동쪽의 아들들”은 악과 거짓에 관한 지식들을, 고로 그런 지식들 안에 있는 이들을 의미한다, 이사야서에서:
에브라임의 시기함은 떠날 것이다, 그리고 유다의 적들이 멸절될 것이다; 그들은 바다를 향 하여 블레셋의 어깨 위에 날아 올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함께 동방의 아들들을 약탈할 것 이다 (이. 11:13, 14).
에스겔서에서:
암몬의 아들들을 향하여. 보라 나는 소유함을 위해 동쪽의 아들들에게 너희를 넘겼다, 그리 고 그들은 너희에게 그들의 법령들을 놓을 것이다 (겔. 25:3, 4).
그리고 사사기서에서:
이스라엘이 씨를 뿌렸을 때, 미디안이 올라왔다, 그리고 아말렉, 그리고 동쪽의 아들들; 그 들이 그를 맞서 올라왔다 (사. 6:3).
“미디안”은 생활의 선 안에 있지 않기 때문에 거짓 안에 있는 이들을 표시한다; “아말렉”은 진리들을 공격하는 거짓들 안에 있는 이들을 표시한다; “동쪽의 아들들”은 거짓의 지식들 안에 있는 이들을 표시한다.

2, 3절. 그리고 그는 보았다, 그리고 들판에 샘이 바라보였다, 그리고 거기에 세 무리의 양떼가 우물가에 누워있었다. 그 이유가 이 우물로부터 그들은 가축떼에게 물을 먹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큰 돌이 우물의 아구 위에 있었다. 3 그리고 모든 가축떼가 그리로 다 모여졌다. 그리고 그들은 우물의 아구로부터 돌을 굴려 내었다, 그리고 양떼에게 물을 먹였다, 그리고 그들은 우물의 아구에 그 돌을 다시 굴려 놓았다.

그리고 그는 보았다. 이는 지각을 의미한다. 이는 “보다”가 지각하는 것이다로부터, 이 의미에 관하여는 32절에서 르우벤이 취급될 때 더 살필 것인데, 그는 “보다”로부터 그렇게 불리웠다.

그리고 우물이 바라보였다. 이는 말씀을 의미한다. 이는 “우물(well)”의 의미가 말씀, 또한 말씀으로부터의 교리이다로부터 분명해진다. 여기서 말씀이 “우물”이라 불리우는데, 그 이유는 자연 평면이 취급되기 때문에서, 그리고 글자 자체에만 주목해, 말씀을 글자 의미에만 국한해서 납득하는 수준이 취급되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합리성이 취급될 때는 말씀이 “샘(fountain)”이라 불리운다, 이 합리성을 수단으로 하면 말씀은 내적 의미에 따라서 지각될 수 있다.

들판에. 이는 교회들을 위하여를 의미한다. 이는 “들판(field)”이 선 측면에서의 교회를 의미한다로부터 분명해진다. 말씀에서 교회는 “토지(land),” “지면(ground),” “들판”으로 의미되는데, 차이는 있다. “들판”이 교회를 의미하는 이유는 교회는 들판(밭)같아서 선과 진리의 씨들을 받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교회가 말씀을 가지고 있고, 이로부터 이런 씨들이 오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이 들판에 있는 모든 것이 교회 속에 있는 모든 것, 즉 씨뿌림, 베어들임, 곡식이 서있음, 밀, 보리 그리고 다른 것들 등을 의미한다. 물론 종류별로 의미에서 차이는 있다.

그리고 바라보니 세 무리의 양떼가 우물가에 누워 있었다. 이는 교회들의 거룩한 것들과 교리적인 것들 속의 거룩한 것들을 의미한다. 이는 “3”의 의미가 거룩한 것이다로부터; 그리고 “양떼의 무리”가 교회 속에 있는 것들, 고로 교리적인 것들이다로부터; 특별히 “양떼”는 교회 내에 있는 이들, 그리고 선행으로부터 있는 선들과 신앙으로부터 있는 진리들을 배워 감동된 이들을 의미한다; 여기서 “목자”는 이런 것들을 가르치는 자를 의미한다; 그러나 양떼는 일반적으로 선 안에 있는 이들, 고로 보편적 세계에서 주님의 교회에 속하는 이들을 의미한다. 이런 모든 것들이 교리적인 것을 수단으로 선과 진리 안으로 입문되는 바, “양떼”에 의해 교리적인 것들 역시 의미된다. 그 이유가 내적 의미에서 인간의 품질을 결정하는 것들, 그리고 이런 품질로부터 있는 인간 자신도 같은 표현에 의해 뜻해지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인간이라는 주체는 그가 사람이 되게 한 품질 때문으로부터 이해되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이름들이 실제적인 것들을 의미한다고, 이들에게 실제의 것들이 속해 있음을 반복적으로 서술해왔다, 예를 들면, “두로”와 “시돈”은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들을 의미한다는 것, 또한 이와 같은 지식들 안에 있는 이들을 의미한다는 것; 그리고 “이집트”는 기억 속의 지식들을 의미한다는 것, 그리고 “앗수르”는 추론함을, 그리고 이런 추론함 안에 있는 이들 역시 의미한다는 것, 등등이다. 그러나 천국에서 천사들 사이에 있는 언어는 인물을 생각함 없이 곧바로 실제적인 것들을 수단으로 결과 된다; 고로 보편적인 것들을 수단으로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기 때문에 그들은 자기들의 강연에서 있는 수많은 사항들을 잘 절충되게 한다; 특히 그들은 모든 선과 진리를 자신들이 아닌 주님의 공로로 돌린다. 이 결과로 그들의 언어로부터의 생각들은 어떤 것, 또는 누구에 의해서가 아닌 오로지 주님만에 의해 결정되어진다. 이런 사항들로부터 “양떼”가 교회들을, 또한 교리적인 것들을 의미한다고 말해진 것임을 알 수 있다. 양떼의 무리는 “우물가에 누워있다”고 말해지는데, 그 이유는 교리적인 것들이 말씀으로부터 있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그 우물로부터 그들은 가축떼에게 물을 먹였기 때문이다. 이는 기억 속의 지식이 거기로부터, 즉 말씀으로부터 파생되었음을 의미한다. 이는 “우물”의 의미가 말씀이다로부터; 그리고 “물을 먹임,” 또는 “마실 것을 줌”의 의미가 가르침을 주는 것이다로부터; 그리고 “무리(drove)”의 의미가 교리적인 것들로부터의 기억 속의 지식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로부터 “우물로부터 무리에게 물을 먹임”이 교리적인 것들로부터의 기억 속의 지식들이 말씀으로부터 임이 분명해진다. 이제 야곱에 관해 이어지는 대목들의 최고 의미에서 주님이 취급되는데- 즉 어떻게 주님께서 그분의 자연 평면을 신성으로 만드셨는지, 그리고 이 장에서는 그것이 개시됨을 취급한다; 그리고 내적 표현적 의미에서는 거듭나지는 이들이 취급되어지는데, 주님께서는 어떻게 인간의 자연적 수준을 새로이 만드시는지가 이 장에서 개시된다; 그러므로 여기서 취급된 주제는 말씀, 그리고 말씀으로부터 파생된 교리이다; 그 이유가 개시함과 거듭남은 말씀으로부터의 교리를 수단으로 결과하기 때문이다. 이런 것들이 “우물”과 “우물에서 (가축)무리에게 물을 먹임”에 의해 의미되기에 야곱의 역사적 측면의 이런 장면이 기록으로 남겨져 있는 것이다. 만일 이런 장면에 주님께서 의미를 담지 않으셨다면, 이 장면 같은 것은 실상 역사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하찮은 모습일지 모른다. 하여 이런 장면이 감싸고 있는 것이 선과 진리에 관한 교리와 기억 속의 지식이 말씀으로부터 이다는 것이 더욱 분명해진다.
자연적 인간은 실로 선과 진리가 무엇인지를 알 수 있고 지각도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수준은 자연적, 시민적 (도덕적) 수준에서의 선과 진리일 뿐이다; 더욱이 자연적 인간은 영적 수준의 선과 진리를 알 수 없는데, 그 이유는 이것이 계시로부터, 즉 말씀으로부터 와져야만 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인간은 모든 이에 의해 소유된 각자의 합리성으로부터 이웃을 사랑해야한다는 것, 하느님을 예배해야 한다는 것을 알는지 모른다; 그러나 어떻게 이웃이 사랑되어야 하고, 하느님이 예배되어져야 하는지, 즉 영적인 선과 진리가 무엇인지는 말씀으로부터서만 알려질 수 있다. 즉 선 자체가 이웃이다는 것, 결과적으로 선 안에 있는 이들이 이웃이다는 것, 더 정밀히 말해 그들이 지닌 선이 이웃이다는 것, 하여 이 선에 따라서 이웃은 사랑되어야 한다는 것, 그리고 주님은 선 안에 현존하시는 바, 선을 사랑함에서 주님이 사랑되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마찬가지 방법에서 말씀을 가지지 않은 이들은 모든 선이 주님으로부터 있다는 것, 그리고 주님으로부터의 모든 선은 인간에게 흘러든다는 것, 하여 인간에게 선에 애착을 가지게 해주신다는 것, 그리고 이 애착이 선행이라 불리운다는 것을 알 수 없다; 말씀을 가지지 않은 이들은 우주의 하느님이 누구이신지를, 그리고 그들로부터 감추여져 계신 주님이 그분이신지를 알 수 없다; 이렇게 알 수 없을 때에도 애착의 가장 깊은 측면, 선행의 가장 깊은 측면, 결과적으로 선의 가장 깊은 측면은 주님을 주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말씀을 지니지 않은 이방인들의 경우, 그들은 실로 이 세상 삶에서 이것을 알 도리가 없다; 그러나 그들이 서로의 선행 안에서 살았다면, 그들은 선에 관한 위의 교리를 포함하여 저 세상 삶에서 말씀을 배워 지닐 능력을 가질 수 있다; 거기서 그들은 이런 주제들을 아주 쉽게 받아들여 마음에 품을 수 있다 (2589-2604항).

그리고 큰 돌이 우물의 아구에 있었다. 이는 말씀이 닫혀 있었음을 의미한다.
이는 설명 없이 알 것이다. 말씀이 글자 의미 측면에서만 이해될 때, 그리고 글자 의미에서 있는 모든 것이 교리를 위하여 가져가질 때, 말씀은 닫혀 있다고 말해진다. 더욱이 이런 것이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을 옹호하는 교리로서 인정되어질 때 (그 당사자를 위해) 더 더욱 굳게 닫혀 있는다. 이렇게 말한 이유는 이들을 포함, 사람들이 우물의 아구에 놓인 돌을 굴려내는 경우가 있다는 것, 즉 닫혀 있는 말씀이라 해서 말씀 전체가 100% 닫혀진 것은 아니다는 말이다. 말씀은 글자 의미로 완전히 덮혀있는 것은 아니고 글자 의미와 더불어 내적 의미가 매우 적지만 드러나는 구절도 있어 글자 의미만 주창하는 누구라 해도 내적 의미를 맛볼 수 있는 구절도 특별하게 있기 때문이다. (참고로, 천적, 영적, 자연적인 세 의미를 동시에 보여주는 구절로서는 요나서 끝장 끝절일지 모른다, 역자 주). 이런 구절을 통해 말씀 안에 어떤 내면의 의미가 있다는 것, 또는 교회에서 받아진 교리적인 것들로부터서도 내적 의미가 있을 것 같음이 비추일 경우가 있지만, 이것을 알려하지 않는다는 것, 알고 싶어하는 바램도 없다는 것이 현실이다.
말씀이 닫혀 있음에 의해 뜻해진 것은 유태인들로부터 특별하게 보여질지 모른다; 이들은 글자 의미에 따라서 각각 그리고 모든 구절을 설명한다, 하여 그들은 땅 위 모든 국가들에서 우선적으로 자기들 나라가 선택되었다는 것, 메시아가 가나안의 토지 안으로 자기들을 데려가려고 오신다는 것, 그리고 땅의 모든 사람들과 나라들 위에서 우뚝서게 자기들을 드높혀 주실 것이라고 믿고 있다; 그 이유가 그들은 지상적인 육체적 사랑들에 침수되어 있기 때문인데, 이것이 그들 모두를 말씀의 내면적 측면에서 닫혀 있게 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아직도 어떤 천국 왕국이 있다는 것, 자기들이 사후 산다는 것, 내적 인간이 무엇인지, 영적인 어떤 것이 있는지조차도 모르고 있다; 더욱이 그들은 메시아가 혼들을 구원하시려 오신다는 것은 더 더욱 모른다. 말씀이 그들에게 닫혀져 있다는 것은 비록 그들이 기독인들 사이에 살지라도, 그들은 기독인들의 교리적인 것을 받지 않을 것이다로도 더 분명해진다. 이사야서에서:
이 백성에게 말하라, 너희는 정녕 듣기는 하나 이해하지 못한다; 너희는 확실히 보기는 하 나 지각하지 못한다. 이 백성의 심정을 비대해지게, 그리고 그들의 귀를 무겁게, 그리고 그 들의 눈을 소경으로 만들어라. 그리고 나는 말했다, 주여, 얼마나 오래? 그리고 그분이 말 하셨다, 이 성들이 주민이 없어 황폐해질 때까지, 집에 사람이 없을 때까지, 그리고 지면이 근심으로 황폐해질 때까지이다 (이. 6:9-11; 마. 13:14, 15; 요. 12:40, 41).
인간이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 침수되어 있는 만큼에서, 그리고 이런 사랑들의 탐욕들 안에 침수된 만큼에서, 그만큼 말씀은 그 사람에게 닫혀 있다. 그 이유가 이런 사랑들은 그들의 목적으로 자아를 가지기 때문, 이 목적은 자연적 수준의 발광체에 불이 켜지게 하지만 천국의 빛은 꺼지게 하고, 이 인간은 자기와 세상의 것에 대하여는 빈틈없으나 주님과 그분의 왕국 속의 것들에 대하여는 그렇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 역시 말씀을 읽지만 명예와 재물을 획득할 목적과 더불어서, 또는 나타남을 위하여서, 또는 그것을 사랑으로부터와 습관적으로부터, 또는 경건심으로부터 읽는 것이다, 그렇지만 삶을 수정할 목적으로부터가 아니다. 이런 사람에게 말씀은 다양한 방법들에서 닫혀져 있다; 어떤 이들에서는 그들의 교리가 무엇이었든 그 교리가 내리는 지령 외에는 결코 귀를 열지 않는 방법 같은 것으로도 닫혀져 있게 하신다.
예를 들어 이런 사항들에 귀를 막아 닫혀 있다. 천국을 열고 닫는 능력이 베드로에게 주어지지 않았다는 것, 그러나 베드로의 열쇠들에 의해 의미된 사랑으로부터의 신앙에게 주어졌다는 것,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이 이 사랑에 반대된다는 것, 고로 이 두 사랑들에 있는 이들은 결코 사랑으로부터의 신앙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성인들은 예배되어져서는 안되고 오직 주님만이 예배되어야 한다는 것, 이것을 그들은 받지 않는다. (마리아상, 베드로상, 등등을 세워놓고 그들에 두 손 모아 비는 행위를 우리 역시 자주 목격하는데 이를 말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역자주.) 그리고 성찬 예식에서의 빵과 포도주는 보편적으로 인류를 향한 주님의 사랑을, 인간이 주님을 향한 상호적인 사랑이 뜻해진다는 것, 이것도 그들은 믿지 않는다; 신앙으로부터의 선, 즉 선행으로부터의 신앙이지 않으면 그 신앙은 소용이 없다는 것, 이것을 그들은 역으로 설명한다; 이런 식의 경우는 더 있지만 생략한다. 이런 품성 속에 있는 이들은 말씀 안에 있는 진리 자체의 한조각도 볼 수 없고, 아마 그들은 보기를 원하지도 않을 것이다, 그러나 자기들 고유의 독단적 주장만을 완고하게 고집할 것이다. 말씀의 영광과 신성시함 안에 내적 의미가 있다는 말을 듣는 것조차 원하지 않는다; 만일 듣게 된 경우, 이를 혐오함으로부터 그들은 그것의 언급하는 것 조차에도 진저리를 낸다. 이리하여 말씀은 닫혀져 있지만 실상 말씀은 천국 안에서 열려져 있고, 천국을 통하여 주님에게로 열려져 있다. 그러나 이것이 인간에게 단독으로 닫혀지는 경우란, 인간이 삶의 목적 측면에서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의 악들 안에 있는 만큼에서, 그 결과 거짓의 원리들 안에 있는 만큼에서 그 인간에게 닫혀 있다. 이상 살핀 바로부터 우물의 아구 위에 놓여진 큰 돌이 의미하는 것을 알았으리라 본다.

그리고 모든 (가축)떼가 그리로 모두 모였다. 이는 모든 교회들과 그들의 교리적인 것들이 말씀에서 파생되었음을 의미한다. “(가축) 떼”란 교회들, 또한 교회에 속하여 있는 교리적인 것들로부터 분명해진다. 이것들이 말씀으로부터 이다는 것이 (가축) 떼들이 그리로 함께 모여들었다에 의해 의미되어 있다.

그리고 그들은 그 돌을 우물의 아구로부터 굴렸다. 이는 그들이 말씀을 열었음을 의미한다. 이는 이미 살핀 것, “우물의 아구 위에 놓인 큰 돌”이란 말씀이 닫혀 있음이다에 관한 사항으로부터 분명해진다. 고로 그들이 돌을 우물의 아구로부터 굴려냄은 그들이 말씀을 열었다가 의미된다.

그리고 양떼에게 물을 먹였다. 이는 말씀에서 교리가 왔음을 의미한다. 이는 “물을 먹임”, 또는 “물을 마시게 줌”의 의미가 가르치는 것이다로부터 분명해진다; 그리고 “양떼”가 신앙으로부터의 선들과 진리들 안에 있는 이들이다로부터 알게된다. 고로 “양떼에게 물을 먹이는 것”은 말씀으로부터 가르치는 것, 결과적으로 교리이다.

그리고 그들은 그 돌을 우물의 아구에 다시 굴렸다. 이는 한 동안 말씀이 닫혀 있음을 의미한다. 이는 방금 위에서 살핀 바로부터 분명해진다. 교회들에 말씀이 열려 있다, 그리고 후에 닫혀져 있다에 주목해보면 이렇다: 어떤 교회가 설립되는 시작에서 말씀은 그 교회의 사람들에게 먼저 닫혀져 있다, 그리고 후에 열려지는데, 주님께서 그렇게 설비하신다; 고로 그들은 모든 교리가 두 계명들에 기초를 둠을 배운다- 즉 주님은 무엇보다 먼저 사랑되어져야 한다는 것, 그리고 이웃을 자신 같이 사랑하는 것이다, 이 두 계명들이 목적으로 간주될 때, 말씀은 열려진다; 그 이유가 율법과 예언서들, 즉 말씀 전체가 이 계명들에 의존되고 있기 때문이다, 즉 모든 것들은 이 두 계명들로부터 파생되고, 이 두 계명들과 관련을 맺기 때문이다. 그리고 교인들이 진리와 선의 원리들 안에 있을 때, 그들은 자기들이 말씀에서 보는 모든 것에서 계발되어진다; 그 이유가 그때 주님께서는 천사들을 수단으로 그들과 더불어 현존하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을 가르치시기 때문이다 (물론 당사자가 이를 눈치 못채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리고 또한 그들을 진리와 선의 삶 안으로 인도하신다.
이것은 모든 교회들의 경우에서도 알 수 있을지 모른다, 즉 교회들의 유아기 시절, 그들은 사랑으로부터 주님을 예배하고, 심정으로부터 이웃을 사랑했다. 그러나 시간의 과정에서 교회들은 이 두 계명들을 멀리하여 갔다, 그리고 사랑의 선과 선행으로부터 소위 신앙의 것들쪽으로, 고로 생활로부터 교리쪽으로 비껴 섰다; 그들이 이렇게 비껴있는 한 말씀은 닫혀져 있다. 이것이 이 말씀의 내적 의미에 의해 의미되어 있다, 즉 “바라보니 들판에 우물이 있었다, 그리고 바라보니 세 무리의 양떼가 그것 주위에 누워있었다; 그 이유가 거기로부터 그들이 가축떼에게 물을 먹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큰 돌이 우물의 아구 위에 있었다. 그리고 모든 가축떼들이 그쪽으로 함께 모여들었다; 그리고 그들은 우물의 아구로부터 돌을 굴렸다, 그리고 양떼에게 물을 먹였다, 그리고 그들은 우물의 아구 위에 다시 그것의 장소에 돌을 놓았다.”

4-6절. 그리고 야곱은 그들에게 말했다, 나의 형제여 너희들은 어디에서 왔는가? 그리고 그들이 말했다, 우리는 하란으로부터 이요 5 그리고 그는 그들에게 말했다, 너희는 나홀의 아들 라반을 아느냐? 6 그리고 그들은 말했다, 우리는 그를 안다. 그리고 그가 그들에게 말했다, 그는 평안하시냐? 그리고 그들이 말했다, 평안하오. 그리고 바라보니 그의 딸 라헬이 양떼와 함께 오고 있다.

그리고 야곱이 그들에게 말했다. 이는 선으로부터의 진리를 의미한다. 이는 야곱의 표현이 주님의 신성한 자연 평면이다로부터 인데, 이는 앞에서 살폈다. 일반적, 특수적 측면 모두에서 각 인물이 어느 구절에서 등장하든 그들 모두는 내적 의미에서는 선과 진리와 관련을 가지는 까닭에, 여기서도 자연 평면에서의 선과 진리와 관련을 가진다; 그리고 인간의 거듭남 동안에서 자연 평면에 있는 선과 진리는 다른 상태(거꾸로의 상태)로부터 출발하여 발전하여 정상적인 상태에(거듭남에) 이르므로, 야곱에 의해서는 이 과정의 시기에 발맞추어진 진리와 선의 측면에서의 자연 평면이 표현되고 있다. 그러므로 이 구절에서는 선으로부터의 진리이다. 어쨌든 각 구절 마다에서 부딪치는 다양한 것들을 상세하게 설명하다보면, 주제가 불명료하게 비치는 경우를 피하기 힘든데, 특히 이런 희미해지는 경우는 진리와 선에 관한 구분된 생각을 하지 않는 이들과 더불어, 또한 진리를 통하여 선인 것, 그리고 선으로부터 있는 진리에 관하여 구분된 생각을 하지 않는 경우는 더욱 그렇다.

내 형제여 당신들은 어디로부터 인가? 이는 거기에 선행이 있는데 그것은 어느 근원으로부터 인가?를 의미한다. 이는 “형제”의 의미가 선 안에 있는 이들, 이로부터 선 자체, 결과적으로 선행이다로부터; 그리고 “당신은 어디로부터?”란 “어느 근원으로부터 그것이 있는가?”를 의미한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런 사항들에서 알게 되는 것은, 글자 의미에서 있는 질문이나 질문하는 어떤 인물에 포함되는 것은 내적 의미에서는 어떤 인물에 대한 것으로 결정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이유가 천국의 천사들은 인간 지위를 떠나 천국으로 들어갈 때 글자의 역사물들에 관한 것은 이미 사라져버렸기 때문이다. 고로 천사들의 경우 야곱이 하란 출신의 사람들에게 한 질문, “당신은 어디로부터 왔소?” 역시 거기에 선행이 있는데, 그것은 어느 근원으로부터 이오?로 이해한다.
여기서의 경우 다음과 같다: 외적 형태에서 선행으로 나타나는 선행이라 해서 한결같이 내적 형태에서도 선행은 아니다는 것이다. 그것의 품질과 근원은 그것의 목적으로부터 알려질 뿐이다. 내적 형체가 이기적, 또는 세상적 목적에서 근원된 선행은 선행이 아니고, 엄밀히 말해 선행이란 말을 사용해서도 안된다; 그러나 선행의 목적이 이웃, 일반적 선, 천국, 고로 주님에 있는 선행은 진짜 선행이고, 이 선행 내부에는 심정으로부터 선을 행하고 싶은 애착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이런 생활로부터 파생되는 즐거움은 다른 삶에서는 복됨이 되어간다. 우리가 주님의 왕국이 그 자체 무엇인지를 알기 위하여서 선행은 어느 근원으로부터 인지를 확실히 해두는 것은 최고로 중요하다. 이 선행에 관한 문의, 또는 같은 말로 이 선에 관한 것이 이 세 절에서 지금 취급되어진다; 처음 물어지는 것은 거기 있는 선행은 어느 근원으로부터 인지 이다. 이것이 “내 형제여 당신은 어디로부터 있는가?”에 의해 의미되어 있다.

그리고 그들은 말했다, 우리는 하란으로부터 이오. 이는 공통의 줄기(common stock)로부터의 선을 의미한다. 이는 하란의 의미가 공통의 줄기로부터의 방계적인(평행한, collateral) 선이다로부터 분명해진다.

그리고 그는 그들에게 말했다, 너희는 나홀의 아들 라반을 아는가? 이는 그들은 이 줄기로부터의 선을 가지고 있는가? 를 의미한다. 이는 라반이 공통의 줄기로부터의 방계적인 선을 표현한다로부터; 그리고 나홀이 공통의 줄기이다로부터, 이로부터 라반에 의해 표현된 선이 있다; “아는 것”이 내적 의미에서는 거기로부터 있다를 의미하는데, 이는 시리아로부터 알아진다. 나홀, 브드엘, 라반에 의해 방계적인 선의 표현이 어떻게 있는지에 대하여는 간략하나마 설명이 추가되어야 할 것 같다. 세 아들, 즉 아브람, 나홀, 하란의 아버지인 데라 (창. 10:27)는 공통의 줄기를 표현한다. 이로부터 교회들이 있다. 데라 자신은 실로 우상 숭배자였다, 그러나 표현에서는 인물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사항들에 관심이 집중된다. 그리고 표현적 유태인의 교회가 아브라함에서 개시되었고, 야곱의 후손들로부터 갱신되었기 때문에, 데라와 그의 세 아들들 역시 교회들의 표현을 옷입게 된 것이다, 하여 아브라함은 진짜 교회, 즉 말씀을 가진 이들과 더불은 교회이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형제 나홀은 말씀을 가지지 않은 교회, 즉 이방인들 사이에 존재하는 교회이다. 주님의 교회는 온 땅 두루에 흩어져 있다는 것, 그리고 선행 안에서 생활하는 이방인들 사이에 존재한다는 것은 이방인들에 관하여 살폈던 대목들로부터 분명해진다.
그러므로 위의 사항이 나홀, 그의 아들 브드엘, 브드엘의 아들 라반에 의해 공통의 줄기로부터의 방계적인 선을 표현한 이유이고, 이 선 안에 이방인들 사이에 있는 주님의 교회 속에 있는 이들이 있다. 이 선은 하강의 직계 선에 있는(아브라함-이삭-야곱 등등) 공통의 선과는 이런 점에서 차이가 있다 – 즉 그들의 선과 결합된 진리들은 진짜이지 않다는 것, 그것들 대부분은 감각들의 오류라 불리우는 외적 나타남들이다는 것이다; 그 이유가 이방인들은 자기들을 계발해줄 말씀을 가지지 못했던 때문에서이다. 본질적 측면에서 선은 오로지 하나일 뿐이지만, 선의 품질은 선 안에 심어진 진리들로부터 오기 때문이다, 하여 선은 다양해지기도 한다. 이방인들에게 진리로서 나타나는 진리들은 일반적으로 그들이 어떤 하느님을 예배함 안에 있고, 이 하느님으로부터 그들은 자기들의 선을 찾고, 이 분에게 자기들의 선의 근원을 돌린다, 그래서 그들은 세상에서 사는 한 그들은 이 하느님이 주님이심을 알지 못한다; 또한 그들은 형상들(조각상 등등) 아래에서 자기들의 하느님을 예배하고 이 상 조각을 거룩시 한다; 이 외에도 여러 사항들이 있다. 그럼에도 그들이 자기들의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향한 사랑 안에 있다면 그들이 구원받음에서 기독인들과 하등 차이가 나지 않는다; 그 이유가 그들은 다른 삶에서 내면의 진리들을 받는 수용력을 가졌기 때문이다. 이것이 여기서 공통의 줄기로부터의 방계적인 선이 뜻하는 것을 보여준다. 나홀을 수단으로 선 덕택에 형제다운 사랑 안에 있는 교회로부터의 사람들이 표현된 것은 이미 살폈다; 브드엘에 의해서는 첫 계급(계층, class)의 이방인들의 선이 표현된다 (2865, 3665항); 라반에 의해서는 외적 선, 또는 육체적 선에 대한 애착이 표현된다, 그리고 공통의 줄기로부터의 방계적인 선을 표현함에도 적절하다 (3612, 3665항).
이 선은 당사자가 영적 선을 포획하는 수단을 무엇보다 먼저 제공한다, 그 이유가 이것은 외적 육체적이기 때문, 그리고 감각들의 오류인 자신들에 있는 외적 나타나남들에 기반을 두기 때문이다. 인간은 어린 시절에서 진리와 선을 인정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 아예 모르고 있다) 그리고 비록 그가 내적인 선과 진리에 관해 배웠다 할지라도, 그는 육체적 수준의 것 외의 다른 생각은 가지지 못한다. 처음의 생각들이 이렇기 때문에 외적 선과 진리는 내적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는 첫 수단들이다. 이것이 야곱과 라반에 의해 여기서 표현되고 있다.

그리고 그들은 말했다, 우리는 그를 안다. 이는 확언함을 의미한다. 이는 설명이 필요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가 그들에게 말했다, 그는 평안하뇨? 이는 이 선은 주님의 왕국으로부터가 아니뇨? 를 의미한다. 이는 평안(평화, peace)의 의미로부터 분명해지는데, 아래에서 살핀다. 역사적 의미에서 위 질문은 라반에 관하여, 그가 평안한지 여부를 묻는 것이나, 내적 의미에서의 질문은 라반에 의해 표현된 선에 관하여서 이다. 라반이 공통의 줄기로부터의 방계적 선, 즉 이방인들 사이에 존재하는 선들 같은 것, 이들은 일반적 교회 안에 있는 이들, 즉 주님의 교회 안에 있는 이들을 표현하는데 앞에서 말한 바와 같다. 이로부터 “이 선은 주님의 왕국으로부터가 아니뇨?”가 의미되는 것이다.
평화에 주목해보면, 이는 최고 의미에서 주님 자신을, 이로부터 내적 의미에서 그분의 왕국을 의미한다, 그리고 선 안에 있는 이들 안에서 가장 깊게 선에 영향을 미치는 주님의 신성을 의미한다. 이런 사항들이 말씀에서 “평화”에 의해 의미된다는 것은 아래 인용 구절로부터 분명해진다; 이사야서에서:
우리에게 어린 아이가 태어나신다, 우리에게 아들이 주어진다; 그리고 통치권이 그의 어깨 위에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의 이름은 경이한 자, 상담자, 하느님, 영웅, 영원하신 아버지, 평화의 제 일인 자라고 일컬어질 것이다. 그의 통치와 평화의 불어남은 다윗의 왕좌 위에, 그리고 그의 왕국 위에서 끝이 없을 것이다 (이. 9:6-7);
위에서 “평화의 제 일인 자”란 주님이심을 분명하게 표시한다; 그리고 “그의 통치와 평화의 불어남”이 그분의 왕국 안에 있는 것들, 고로 그분의 왕국 자체를 표시한다. 다시:
정의의 일이 평화일 것이다, 그리고 정의의 노동은 영원히 있는 안전함과 조용함일 것이다; 그리고 내 백성은 평화의 주택 안에 거주할 것이다 (이. 32:17-18);
이 구절에서 주님의 왕국이 취급되고, 그 왕국의 평화, 조용함, 안전함이 계속되고, “평화의 주택”은 천국을 표시한다.
다시:
평화의 천사가 통렬하게 울고 있다; 작은 길들이 황폐된 채로 있다, 도보로 여행하는 사람 이 끊겼다 (이. 33:7, 8);
“평화의 천사들”은 주님의 왕국 안에 있는 이들, 고로 이 왕국 자체를, 그리고 최고 의미에서 주님을 표시한다; “작은 길들이 황폐된 채로 있다, 그리고 도보로 여행하는 자가 끊겼다”란 어떤 곳에도 진리가 더 이상 있지 않다는 것을 표시한다. 다시:
좋은 소식을 가져오고, 평화를 발표하는 그의 발이 산 위에 있음이 얼마나 즐거운 일이던 가; 시온에게 네 하느님이 통치하신다 하고 말하라 (이. 52:7).
위에서 “좋은 소식을 가져오고, 평화를 발표하는 자”는 주님의 왕국을 표시한다. 다시:
산들이 떠날 것이다, 그리고 언덕들이 옮겨질 것이다; 그러나 나의 자비는 너로부터 떠나지 않을 것이다, 내 평화의 언약은 옮겨지지 않을 것이다 (이. 54:10).
다시:
평화의 길을 그들은 알지 못했었다; 그리고 그들의 행로 안에는 공정이 없다 (이 59:8).
예레미야서에서:
나는 이 백성으로부터 내 평화를 가져갈 것이다, 여호와께서 불쌍히 여기심과 자비조차 가 져가신다고 말하신다 (예. 16:5).
다시:
평화의 (양)우리가 황폐되어 있다, 그 이유는 여호와의 노염이 불타기 때문이다
(예. 25:37).
다시:
평화를 예언하는 예언자는 예언의 말이 닥친 후 그때서야 여호와께서 그를 보내신 예언자 임이 알려질 것이다 (예. 28:9).
다시:
나는 내가 너희를 향하여 생각하는 생각들을 알고 있다, 평화에 관한 생각들이다, 여호와께 서 말하신다 (예. 29:11).
학개서에서:
나중에 지은 집의 영광이 먼저 지은 집의 영광보다 더 클 것이다; 그 이유는 이 장소에 나 는 평화를 주기 때문이다 (학. 2:9).
그리고 스가랴서에서:
그들은 평화의 씨일 것이다; 포도나무가 그녀에게 그녀의 열매를 줄 것이다, 그리고 땅이 그녀의 산출분을 줄 것이다, 그리고 하늘은 그들의 이슬을 줄 것이다 (슥. 8:12).
다윗서에서:
성실함을 고수하고 곧바름을 바라보라, 그 이유는 평화가 이 사람의 목적이기 때문이다 (시. 37:37).
누가복음서에서:
예수께서 그분의 제자들에게 말하신다, 너희는 누구의 집으로 들어가든지 먼저 말하라, 이 집에 평화가 있으라. 그리고 만일 평화의 아들이 거기 있으면, 너희의 평화가 그것 위에 있 을 것이다; 만일 아니다면, 그것은 다시 네게로 돌아올 것이다 (눅. 10:5, 6).
요한복음서에서:
평화를 나는 너희에게 남긴다, 내 평화를 나는 너희에게 준다; 세상이 주는 것이 아닌 (평 화를) 나는 네게 준다 (요. 14:27).
다시:
예수께서 말하셨다, 이런 것들을 내가 너희에게 말했던 것은 내 안에서 너희가 평화를 가 질는지 몰라서이다 (요. 16:33).
위 모든 구절들의 최고 의미에서 “평화”는 주님을 의미한다; 그리고 표현적 의미에서는 그분의 왕국을, 그리고 거기 안에 있는 주님으로부터의 선을, 고로 선 안으로 흐르는 신성을, 또는 선에 대한 애착들 안으로 흐르는 신성을 의미하고, 이것은 가장 안쪽으로부터 기쁨과 행복을 누리게 한다. 이로부터 축복의 이 말들에 의해 뜻해진 것이 분명해진다:
여호와께서 너희 위에 그분의 얼굴을 들어 올리시어 너희에게 평화를 주신다 (민. 6:26);
그리고 옛적부터 사용된 인사말, “너희에게 평화가 있을 지어다;” 그리고 이 말은 예수께서 사도들에게 말하셨기도 하다. 이밖의 평화에 관하여는 지나온 항목들을 더 참조하기 바란다.

그리고 그들은 말했다, 평안합니다. 이는 확실함을 의미한다. 이는 설명이 필요 없을 것이다. 그 이유가 이것은 확언하는 응답이기 때문이다.

바라보니 그의 딸 라헬. 이는 내면의 진리에 대한 애착을 의미한다. 이는 라헬이 내면의 진리에 대한 애착을 표현한다로부터; 그리고 레아는 외면의 진리에 대한 애착이다로부터 분명한데, 이에 대하여는 뒤이어진다.

양떼와 함께 오고 있다. 이는 내면의 교리적인 것들을 의미한다. 이는 “양떼”가 교회이다로부터, 그리고 또한 교리적인 것들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여기서의 경우 내면의 교리적인 것들이다, 그 이유는 라헬에 관해서 “그녀가 양떼와 함께 오고 있다”라고 말해지기 때문이다.

7, 8절. 그리고 그는 말했다, 보라 아직까지는 날이 아주 좋은 바, 이는 가축을 모아 들일 때가 아니다. 너는 양떼에게 물을 먹이고, 그리고 가서 그들을 먹이라. 8 그리고 그들이 말했다, 우리는 모든 가축떼가 다 모일 때까지 그렇게 할 수가 없다, 그리고 그들은 우물의 아구로부터 돌을 굴린다. 그때 우리는 양떼에게 물을 먹인다.

그리고 그는 말했다, 보라 아직까지는 날이 아주 좋다. 이는 지금 상태가 발전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는 “날”이 상태를 의미한다로부터; “보라 날이 아직까지는 아주 좋다”란 발전하고 있다를 표시하는데 이는 시리즈로부터 분명해진다.

지금은 가축을 모아들일 때가 아니다. 이는 교회 속의 선들과 진리들과 교리 속의 선들과 진리들은 아직까지는 하나로서 모여질 수 없음을 의미한다. 이는 “때”가 일반적으로 상태를 의미한다로부터; “모아들임”이 하나로 있어짐이다로부터; 그리고 “가축떼(cattle)”의 의미가 일반적으로 교회 속의 선들과 진리들과 교리적인 것들 속의 선들과 진리들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일반적으로 “가축떼”가 이 의미를 가지는 이유는 표현적인 교회의 의식들에서, 그리고 말씀에서, 동물들은 선에 애착함, 또는 진리에 애착함을 의미하기 때문에서 이다.
위 사항은 교회가 다시 설립되어질 경우에서도 일반적 측면에서는 공히 같다. 즉 선과 진리의 교리적인 것들이 하나로 되어져야만 한다는 것인데, 그 이유는 교회는 교리적인 것들 위에 건축되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교리적인 것들은 서로 서로 연결되고 상호 관련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그것들이 하나 안으로 먼저 모아들이지 않으면, 거기에는 결함이 있을 것이고, 부족한 것은 인간의 합리성을 수단으로 공급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것의 결론이 (인간의 생각) 그 자체로부터 일 때, 이 결론들은 얼마나 소경되고 환각적인지는 이미 지나온 많은 항목들에서 말했다. 이런 이유로 말씀이 교회들에 주어진 것이고, 말씀은 선과 진리에 관한 모든 교리적인 것들을 포함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거듭나지고 있는 이들과 더불어서도 마치 일반적 측면에서의 교회의 경우가 특수한 측면에서의 교회와 같은 경우와도 비슷하다. 그 이유가 거듭나는 것은 특별한 측면의 교회의 경우 중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교회에 속하는 선과 진리의 교리적인 것들은 거듭나기 전, 그 인간 안에서 모아져야만 한다는 것이 “보라 아직까지는 날이 아주 좋다, 가축떼를 모을 때가 아니다”에 의해 의미되고 있다.

너는 양떼에게 물을 먹이고, 가서 그들을 먹이라. 이는 아주 적은 사람들에게 말씀으로부터의 배워짐이(가르침을 받음이) 있다를 의미한다. 이는 “양떼에게 물을 먹임”이 말씀으로부터 배워짐이 있다를; 그리고 “가서 그것들을 먹이라”는 말의 의미가 파생되는 생활과 교리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리고 그들은 말했다, 우리는 모든 가축떼가 다 모아질 때까지 그렇게 할 수 없다. 이는 그것들은 함께 있어야 한다를 의미한다. 이는 “모아짐”의 의미가 하나로 만들어짐, 함께 있음이다로부터; 그리고 “가축떼”의 의미가 교리적인 것들이다로부터. 이 말들의 의미는 이미 살폈다.

그리고 그들은 돌을 우물의 아구로부터 굴린다. 이는 이러므로 해서 말씀 속의 것들이 들추어내짐을 의미한다. 이는 “돌을 굴림”의 의미가 들추어내짐 이다로부터 ; 그리고 “우물”의 의미가 말씀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때 우리는 양떼에게 물을 먹인다. 이는 그때 그것들은 배워진다를 의미한다. “양떼에게 물을 먹임”이 배워짐, 가르침을 받음이다로 알게 되는데, 이미 살폈다.

9-11절. 그가 그들과 아직 말하고 있는 동안, 라헬이 그녀의 아버지의 것인 양떼와 함께 왔다, 그 이유가 그녀는 여 목자였기 때문이다. 10 그리고 야곱은 그의 어머니의 오라버니 라반의 딸, 그리고 그의 어머니의 오라버니 라반의 양떼를 보았을 때, 야곱은 가까이 다가 왔다, 그리고 우물의 아구로부터 돌을 굴렸다, 그리고 그의 어머니의 오라버니 라반의 양떼에게 물을 먹였다. 11 그리고 야곱은 라헬에게 키스했다, 그리고 그의 음성을 높혀 울었다.

그가 아직 그들과 말하고 있는 동안. 이는 이 경우에서 생각함을 의미한다. 이는 말씀의 역사적 부분에서 “말하다(speak)”가 생각하는 것이다로부터 분명해진다. 이것이 이 경우에서 생각함을 의미한다는 것은 분명한데, 그 이유는 그가 그들과 말하는 바로 그때에 라헬이 왔기 때문이다.

라헬이 양떼와 더불어 왔다. 이는 교회 속에 있는 내면의 진리와 교리 속에 있는 내면의 진리에 대한 애착을 의미한다. 이는 라헬이 내면의 진리에 대한 애착을 표현한다로부터; 그리고 “양떼”의 의미가 교회, 그리고 또한 교리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어째서 라헬이 내면의 진리에 대한 애착을, 레아는 외면의 진리에 대한 애착을 표현하는지를 알려면, 먼저 염두하고 있어야 하는 것은 야곱에 의해 표현되는 자연 평면이 선과 진리로 구성되고 있다는 것, 그리고 이 자연 평면에서, 마치 인간의 모든 것에서, 또는 일반적, 특수적 측면 모두에 해당되는 보편적 자연 평면의 모든 것에서, 선과 진리의 결혼은 필수적이다는 점이다. 이 결혼 없이 어떤 생산도 없다. 다시 말해 모든 생산, 모든 결과는 결혼으로부터 있다는 말이다. 그렇지만 선과 진리의 이 결혼은 인간이 태어날 때 그의 자연 평면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인간 홀로 신성한 질서 안에서 태어나지지 않기 때문이다; 실로 일찌기 인간은 순진의 선과 선행의 선을 소유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이 선은 인간의 유아 시기에 주님으로부터 흘러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선과 짝짓기 할 진리는 없다(진리는 흘러들지 않는다). 인간이 계속 나이먹어감에서, 그의 유아 시절 주님에 의해 당사자 안으로 은근히 심어두셨던 이 선은 내면들을 향하여 안쪽으로 당겨진다, 그리고 거기서 주님에 의해 보관되고 훗날 그가 입는 생명의 상태들을 부드럽게 한다. 유아기와 첫 어린 아이 시절에서의 선이 없다면, 인간은 나이 먹을수록 더욱 나빠져 이는 들짐승보다 더 흉폭해지고 말 것이다. 유아기의 이 선이 안쪽으로 깊이 당겨질 때, 이 선의 자리에 악이 와서 인간의 자연 평면 안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이 악과 더불어 거짓이 짝짓기를 한다, 그리고 인간 안에서 결합이 거행된다, 악과 거짓이 결혼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이 구원받기 위하여는 인간은 반드시 거듭나야 하고, 악은 그 자리에서 옮겨지고 주님으로부터의 선이 은근히 심어져야만 한다, 그리고 그가 받은 선에 따라, 진리가 당사자 안으로 은근히 심어진다, 그 목적은 짝짓기가 결과되기 위해, 선과 진리가 결혼하기 위해서이다.
이것들이 야곱에 의해, 그리고 그의 두 아내, 라헬과 레아에 의해 표현되는 밑그림에 해당된다. 그러므로 지금 야곱은 자연 평면의 선을 표현함을 옷입고, 라헬은 진리를 표현함을 옷입고 있다; 그러나 선과의 진리의 모든 결합은 애착을 수단으로 하는 바, 실제로 라헬에 의해 표현된 진리에 대한 애착이 선과 짝짓기를 하는 것이다. 더 나아가, 자연 평면도 합리성에서 같이 내면과 외면이 있다; 라헬은 내면의 진리에 대한 애착을, 그리고 레아는 외면의 진리에 대한 에착을 표현한다. 이들의 아버지인 라반은 공통의 줄기로부터의 선을 표현한다, 그러나 방계적인 선이다; 이 선은 방계적인 계열에서 “리브가”에 의해 의미되는 합리성의 진리에 상응하는 선이다. 그런고로 이 계열로부터의 딸들은 자연 평면에서 애착을 표현한다, 그 이유가 이것들은 아버지로부터의 이 선으로부터 딸로서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애착들이 자연적 선과 짝짓기를 하는 바, 그것들은 진리에 대한 애착을 표현한다; 하여 하나는 내면의 진리에 대한 애착을, 또 하나는 외면의 진리에 대한 애착을 표현하는 것이다.
인간의 자연 평면 측면에서 그의 거듭남에 주목하면, 야곱과 라반의 딸들, 라헬과 레아의 경우와 똑같은 바, 말씀을 내적 의미에 따라 볼 수 있고 납득하는 자는 누구든지 그에게 이 비밀들이 드러내진다. 그러나 선과 진리 안에 있는 자 외에는 이 비밀을 볼 수 없다. 이 외의 이들은 말씀 안에서 도덕적, 시민적 삶에 관계되는 것들을 지각할 수는 있다, 그리고 설사 그의 총명이 내적 의미의 얼마라도 나타나게 해준다해도 그 의미를 인정할 수 있는 만큼의 본성에 관하여 아는데까지는 도달하지 못한다. 그 이유가 그들은 선과 진리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기 때문, 하여 악이 선이라고, 거짓이 진리라고 상상한다; 그러므로 선이 언급되는 찰나에 악에 대한 생각이 표출되고, 진리가 언급되는 순간, 거짓이 표출된다; 결과적으로 그들은 내적 의미에서의 내용들의 어떤 것도 지각하지 못한다. 오히려 내적 의미들을 듣자마자, 어둠이 나타나고 그것이 빛을 꺼지게 한다.

그녀의 아버지의 것. 이는 근원 측면에서 선으로부터를 의미한다. 이는 여기서 “아버지”인 라반이 공통의 줄기로부터의 방계적인 선이다로부터; 그리고 “아버지”의 의미가 선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 이유는 그녀는 여 목자이었기 때문이다. 이는 내면의 진리에 대한 애착이 말씀 속에 있는 것을 가르친다(배우게 한다)를 의미한다. 이는 “목자”, 또는 양떼를 먹이는 자의 의미가 인도하고 가르친다 이다로부터; 그리고 여기서 “그녀”인 라헬이 내면의 진리에 대한 애착을 표현한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 가르침이 말씀으로부터 이다고 말하는 이유는 그녀가 양떼를 데리고 우물에 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물”이 말씀을 의미하는 것은 이미 살폈다. 더 나아가 가르치는 것은 내면의 진리에 대한 애착이다. (우리는 내면의 진리에 대한 애착으로부터 배워진다) 그 이유가 이 애착으로부터 교회는 교회이고, 목자, 또는 목사는 목자, 또는 목사이기 때문이다. 말씀에서 “목자”, 또는 “먹이는 자”가 인도하고 가르치는 이들을 의미하는 이유는 “양떼”가 인도받고 배우는 이들을, 결과적으로 교회, 그리고 교회의 교리들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목자”와 “양떼”가 이런 의미를 가진다는 것은 기독교계에 훤히 알려져 있다, 그 이유는 가르치는 이들, 배우는 그들이 그런 식으로 불리우기 때문이다. 따라서 말씀으로부터 이에 대한 것은 실상 확증해볼 필요도 없다.

그리고 야곱이 그의 어머니의 오라버니 라반의 딸 라헬을 보게 되었다. 이는내적 진리에 대한 애착을 그것의 근원 측면에서 인정함을 의미한다. 이는 “본다”의 의미가 인정하는 것이다로부터 분명해지는데, 이는 시리즈로부터, 또는 문맥의 연결로부터 알려진다; 그리고 라헬이 내면의 진리에 대한 애착이다로부터. “자기 어머니의 오라버니 라반의 딸”은 그것의 근원을 함축하고 있다, 즉 이 진리는 방계적 선으로부터 있다는 것, 이 선은 야곱의 어머니, 리브가에 의해 표현된 합리적 진리와 형제다운 사랑으로 결합하여 있다는 것이다.
진리에 대한 애착, 선에 대한 애착에 주목해보면 이렇다: 인간에 의해 지각되는 진리에 대한 진짜 애착과 선에 대한 진짜 애착은 모두 주님으로부터 이기 때문에 신성한 근원으로부터 이다; 그러나 그것들이 하강하는 도중에서 그것들은 다양한 흐름으로 갈라진다, 그리고 이 갈라짐으로부터 그것들은 새로운 근원을 자체를 위해 만들어낸다; 그 이유가 이것들은 진짜가 아닌 가짜의 애착들 안으로도 흐르고, 그래서 인간 안에 있는 악과 거짓에 대한 애착들 안으로도 흐르는 바, 이런 식으로 그것들은 다양해진다. 외적 형체에서 이 애착들은 진짜 애착들 같이 나타난다; 그러나 내적 형체에서 그것들은 가짜 특성으로부터 있다. 애착의 진짜와 가짜를 식별하는 유일한 방법은 애착들의 목적을 살피는 것이다; 만일 목적에 주목하여 그것들이 자기와 세상을 위하여 있다면 이 애착들은 진짜가 아니다; 그러나 그것들이 이웃의 선, 사회의 선, 나라의 선, 특히 교회의 선과 주님의 왕국의 선을 위하여 있다면, 그것은 진짜이다, 그 이유는 이런 경우, 주님이 이 선들 안에 계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누군가의 안에 있는 애착의 목적을 확실히 구분하는 것은 현자의 몫이다. 때로 이것은 마치 그것의 목적이 자기를 위한 것이 아닌데, 그런 것처럼 나타날 때도 있다; 그 이유가 인간은 만사를 자신 위에 비추어 곰곰이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관습과 습관으로부터 그렇게 할 때도 있다. 그러나 만일 어떤 이가 자기 내부에 있는 목적들을 알기를 바란다면, 그는 자기가 칭송과 자기 영광됨으로부터 즐거움을 지각하는 지를, 그리고 그 반대인 자기로부터 분리된 선용으로부터 즐거움을 가지는지를 점검하면 된다. 만일 후자이다면, 그는 진짜 애착 안에 있는 것이다. 그래도 그는 자기가 있는 다양한 상태들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그 이유가 상태들 자체가 지각을 아주 많이 다양해지게 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자신 안에서 이런 것들을 조사할 수 있으나 타인의 것은 조사할 수 없다; 그 이유가 각 인간의 애착의 목적은 주님 만에게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주님께서 아래 같이 말하신 이유이다:
판단받지 않도록 (남을) 판단하지 말라; 네가 비난당하지 않도록 (남을) 비난하지 말라 (눅. 6:37);
수천의 인물들이 진리와 선의 측면에서 비슷한 애착 안에 있는 듯 나타날는지 모른다, 그럼에도 그 애착들의 각 하나 하나는 근원 측면에서, 즉 목적 측면에서 비슷하지 않은 애착 안에 있다.
목적이 애착의 품질을 결정한다는 것, 즉 그것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거짓인지를 결정한다는 것, 그 이유는 인간의 목적이 그의 생명 자체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그의 생명 속에 있는 것, 즉 그의 사랑 속에 있는 것을 자기의 목적으로 지닌다. 자기 이웃의 선, 일반적 선, 교회와 주님의 왕국의 선이 목적일 때, 그의 혼의 측면에서 그는 주님의 왕국 안에, 고로 주님 안에 있다. 그 이유가 주님의 왕국은 인류의 선을 위함이 이 왕국의 목적(end)이고 이 목적을 위한 선용(use)의 왕국이기 때문이다 (3645항). 인간과 더불어 있는 천사 자체는 당사자의 목적들 안에만 있다. 주님의 왕국이 있는 목적 안에 인간이 있는 만큼에서, 천사들은 그와 더불어 즐거워진다, 그리고 당사자와 형제로서 자신을 결합시킨다; 그러나 인간이 자아를 위해 목적을 가지는 만큼에서 천사들은 그만큼 멀리 퇴거해 있는다, 그리고 지옥으로부터의 악령들이 가까이 다가온다, 그 이유는 지옥이 자기만을 위한 목적 안에 있기 때문이다. 이상 살핀 것만 가지고도 애착들이 어떤 근원으로부터 인지를 조사하고 아는 것은 얼마나 중요한 사항인지 모른다는 것, 이것은 오직 목적으로부터만 알려진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의 어머니의 오라버니 라반의 양떼. 이는 교회 그리고 그 교회로부터의 교리를 의미한다. 이는 “양떼”가 교회와 교리를 의미한다로부터 알게 된다. 라반이 여기서 “자기 어머니의 오라버니”라고 불리운 이유는 방금 위에서 설명했듯, 근원 측면에서 인정함이 마찬가지로 의미되었기 때문이다.

야곱은 가까이 왔다, 그리고 우물의 아구로부터 돌을 굴렸다. 이는 주님께서 자연적 선으로부터 말씀의 내면에 관한 것을 여셨다를 의미한다. 이는 야곱의 표현함이 주님의 신성한 자연 평면, 이 구절에서는 그 안에 있는 선 측면이다로부터; 그리고 “우물의 아구로부터 돌을 굴림”이 말씀의 내면들 측면에 관하여 말씀의 덮개를 벗기심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최고 내적 의미에서 주님께서 자연적 선으로부터 말씀의 내면들 측면에 관련하여 말씀의 덮개를 벗기셨다가 의미된다고 말한 이유는 여기서 야곱이 자연 평면에 있는 선을 표현하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야곱은 선을 표현함을 옷입는데, 그 이유는 지금 진리가 라헬이 표현하는 애착을 수단으로 그쪽으로 인접되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말씀의 내면 측면에서 말씀의 덮개를 벗기는 것은 선으로부터 있기 때문이다. 선이 말씀의 덮개를 벗기는 것이 분명한 것은, 그것이 각 인간 안에 있는 사랑으로부터 이고, 이 사랑 속에 있는 것을 인간은 보고, 그것을 진리들이라고 부르기 때문이다. 그렇게 부르는 이유는 그 진리가 자기의 사랑과 일치하기 때문이다. 각 인간의 사랑 안에 그의 생명의 빛이 있다, 그 이유는 사랑은 불꽃과 같아서 마치 불꽃으로부터 빛이 발출하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사랑 또는 불꽃의 경우 같이 인간의 진리의 빛도 있다. 선을 사랑함에 있는 이들은 이 사랑으로부터 있는 것, 결과적으로 말씀 안에 있는 진리들을 볼 수 있다, 그리고 그는 그가 선을 사랑하는 양과 질에 비례하여 진리들을 알게 된다 그 이유가 이런 경우 빛 또는 총명이 천국으로부터, 즉 천국을 통하여 주님으로부터 흘러들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인간이 생활 측면에서 선 안에 있지 않으면 그는 말씀의 내면들의 것을 볼 수 없고 인정할 수도 없다고 말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의 어머니의 오라버니 라반의 양떼에게 물을 먹였다. 이는 가르침을 받음(배움이 있음)을 의미한다. 이는 “양떼에게 물을 먹임”이 가르침을 주다를 의미함으로부터 알게 된다. 여기서 라반이 세 번째로 “그의 어머니의 오라버니”라고 불리워진 이유는 양떼와 라헬의 근원이 어딘지를, 그리고 이 근원으로부터 내면의 진리에 대한 애착과 교리가 온다는 것을 확실히 못박아 주시려는 의도 때문에서이다.

그리고 야곱은 라헬에게 키스했다. 이는 내면의 진리들을 향한 사랑을 의미한다. 이는 “키스함”이 애착으로부터 결합하고 하나로 됨을 의미한다는 것으로부터 분명해진다, 결과적으로 사랑으로, 그 이유는 사랑을 그 자체에만 주목하면, 애착으로부터 하나됨과 결합함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라헬의 표현이 내면의 진리에 대한 애착이다로부터 알려진다. 그러므로 “야곱이 라헬에게 키스했다”란 내면의 진리들을 향한 사랑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의 음성을 드높여 울었다. 이는 사랑의 열정을 의미한다. 그 이유는 “음성을 높혀 운다”가 사랑으로부터의 끓어오름이기 때문인다. “운다”는 슬픔쪽과 사랑쪽 모두에서 사용되는데, 그것들의 가장 높은 수준을 표시하기 위해서 이다.

12, 13절. 그리고 야곱은 라헬에게 자기는 그녀의 아버지의 형제이다는 것, 그리고 자기는 리브가의 아들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녀는 달려가서 그녀의 아버지에게 말했다. 13 그리고 라반은 그의 여동생의 아들 야곱에 관한 소식을 듣자 그를 만나러 달려갔다, 그리고 그를 껴안았다, 그리고 그에게 키스했다, 그리고 그를 그의 집으로 데려왔다. 그리고 그는 라반에게 모든 말을 했다.

그리고 야곱은 라헬에게 자기는 그녀의 아버지의 형제(brother)라고 말했다. 이는 “야곱”인 선과 “라반”인 선은 인척 관계임을 의미한다. 이는 “말하다(tell)”의 의미가 알게 만든다 이다로부터; 그리고 야곱은 선을 표현한다로부터; 그리고 인척 관계임을 알게 한 상대방인 라헬이 내면의 진리에 대한 애착이다로부터; 그리고 “형제(brother)”가 여기서는 야곱이고, 선이다로부터; 그리고 여기서 라반인 그녀의 아버지의 의미 역시 선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 모두와 시리즈로부터 분명해지는 바, “야곱이 라헬에게 자기는 그녀의 아버지의 형제이다”고 말한 것은 “야곱”인 선과 “라반”인 선은 인척 관계임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인척 관계라고 선언한 것, 결과적으로 (“라헬”인) 내면의 진리에 대한 애착을 통하여 두 선의 결합이 있다고 말하면 아마 (여러분에게) 주제를 더 불분명하게 만들게 했을는지 모른다. 그 이유는 자연 평면의 선이 무엇인지를, 그리고 이 선이 합리성의 선과 구분된다는 것을 아는 자가 거의 없기 때문이다; 또는 공통의 줄기로부터의 방계적인 선(평행으로 있는 선, 또는 수평 계열에서의 선) 이 무엇인지를; 또는 내면의 진리에 대한 애착이 무엇인지를 아는 자가 너무 적기 때문일지 모른다, 자신 스스로의 탐구로 자신을 위해 이런 것들에 관한 어떤 생각을 획득하지 못한 이들은 어렴풋한 생각밖에 더 이상 받는 것이 없다, 만일 어떤 것이 있더라도 특징 열거 명세서에 불과할 것이다; 그 이유가 인간은 자기 자신으로부터 가지든가, 또는 자신 안에서 주제를 들여다 봄으로 자신을 위해 획득하기 보다는 타인으로부터 아주 많은 것을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나머지 모든 생각함은 사라져 버리더라도, 선과 진리의 인척 관계는 무수하다는 것, 그리고 천국 사회들은 그 관계에 일치하여 있다는 것 정도만이라도 알고 있다면 족하다고 여겨진다.
야곱은 자기가 라반의 누이동생의 아들임에도 자기를 “라반의 형제”라고 부른 이유는 선으로부터 일 경우, 모두는 종교상으로 형제(brethren)이기 때문이다. 라반 역시 야곱을 형제라고 불렀는데(15절), 이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다. 피가 친족 관계를 만들고, 결합하는 것이 선이다; 그 이유가 선은 사랑으로부터 있기 때문, 그리고 사랑은 영적 결합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고대 교회에서 선 안에 있는 모두를 형제라고 불렀고, 유태 교회에서 조차 그러했던 이유이기도 하다; 그러나 유태인의 교회가 다른 사람들을 천한 것으로 평가하고, 자신들만이 뽑힌 자로 상상했던 까닭에, 그들은 유태인으로 태어난 자 만을 형제라고 불렀다, 그리고 나머지는 동료, 또는 외국인으로 불렀다. 원시 기독 교회 역시 선 안에 있는 모두를 형제라고 불렀다, 그러나 후에는 자기들 모임에 들어 있는 이들만을 형제라고 불렀다. “형제(brother)”라는 단어가 기독인들 사이에서 선과 더불어 사라져버렸다, 그리고 진리가 선의 자리를, 신앙이 선행의 자리를 꿰차고 들어 앉았을 때, 그들은 선으로부터서 더 이상 서로를 종교상으로 형제라고 부르지 않고, 이웃들이라 불렀다. 이것 역시 선행의 삶이 없는 신앙의 교리로부터의 결과물이기도 하다. 하여 자신보다 사회적, 물질적 수준에서 더 낮다 싶은 이들과의 형제 관계는 상대자가 자기 아래 있는 듯 여기고 만다. 그 이유는 이런 인물에게 있는 형제 관계는 주님으로부터, 결과적으로 선으로부터 근원이 있지 않고 자아로부터, 결과적으로 명예나 이득쪽에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기는 리브가의 아들이다는 것. 이는 이 인척들의 결합을 의미한다. 이는 별도의 설명이 필요 없을 것이다; 그 이유가 야곱의 어머니이고 라반의 여동생인 리브가로부터의 결합이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녀는 달려가서 그녀의 아버지에게 말했다. 이는 내면의 진리들을 수단으로 인정함을 의미한다. 이는 “달려가서 말함”의 의미가 알게 만듦에 대한 애착이다로부터, 이 대목에서의 경우 인정함이다가 분명하다; 그리고 그녀의 “아버지”의 의미가 라반에 의해 의미된 선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인정함이 내면의 진리들을 수단으로 있었다는 것이 라헬에 의해 표현되었다는 것, 그녀는 내면의 진리에 대한 애착을 의미하고 있다. 고로 이로부터의 결과는 이 말들에 의해 내면의 진리들을 수단으로 인정함이 의미된다. 여기서의 경우 이렇다: 야곱이 표현하는 선(즉 자연 평면에서의 선)은 일반적인 모든 선과 같이 그것의 존재 측면은 알려져 있고, 인정되고 있다, 그러나 진리들을 수단으로 하지 않으면 그것의 품질 측면은 알려지거나 인정되어지지 않는다; 그 이유가 선은 선의 품질을 진리들로부터 받기 때문이다, 그리고 진리들을 수단으로 알려지고 인정되어지기 때문이다. 선은 진리가 그것 안에 심어질 때까지 선행의 선이라 불리워지지 못한다, 그것 안에 심어지는 진리 역시 마찬가지여서 그것 안에 있는 선 때문에 진리라 불려지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어느 한 인물의 선, 비록 이 선이 타인의 선과 매우 정밀하게 비슷하다 할지라도 절대로 똑같지는 않다; 다시 말해 누군가의 선이 제아무리 보편성을 지녔다 해도 무슨 선이든 타인의 선과 같을 수 없다는 말이다. 이는 애착의 많은 부분이 초상화되는 인간의 얼굴에서도 인류 전체를 망라해 똑같은 자는 없다. 진리들 자체는 마치 아름다운 얼굴을 구성하는 듯하다, 이 속의 선은 진리의 형체로부터 이다, 그러나 영향을 주는 것은 선이다. 모든 천사의 형체가 이와 같고, 만일 인간이 그의 내면의 생명으로부터 주님을 사랑함과 이웃을 향한 선행 안에 있다면 천사의 경우와 같을 것이다. 그가 이런 형체들로 창조되어지는 이유는 하느님의 형상과 모습 안으로 다시 태어나지기 때문이다. 거듭나진 이들이 이런 형체이고, 이는 육체 측면이 어떠했든 관계가 없다. 이로부터 분명한 바, 선에 의해 뜻해지는 것은 내면의 진리들을 수단으로 인정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라반은 그의 여동생의 아들 야곱에 관한 소식을 들었다. 이는 연계된 선에 관하여 인정함을 의미한다. 이는 내적 의미에서 이 말들의 의미로부터 결과된 것들로부터 같은 방식에서 분명해진다; 이는 서술된 것을 상호 인정함이다. 여기서 취급한 주제는 선을 선택함이 분명하고, 선택함은 선과 진리의 결혼에 앞서 진행된다.

그는 그를 만나러 달려갔다. 이는 동의함을 의미한다. 이는 “만나려 달려감”의 의미가 동의함이다가 분명한데, 그 이유는 이 행동에서 결합이 내다보이기 때문이다; 이에 관하여는 아래에서 계속된다. 이것이 동의함, 또는 결합 같은 것임은 많이 알려진 상태이다.

그리고 그를 껴안았다. 이는 애착함을 의미한다. 이는 “껴안다”의 의미가 애착함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 이유가 내면의 애착이 이런 제스츄어로 외적 표현을 취하고야 말기 때문이다. 또한 모든 애착은 그것에 상응하는 신체상의 제스츄어를 가지고 있기도 하다. 일반적으로 애착은 껴안음에 의해 표현된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지식이다.

그리고 그에게 키스했다. 이것이 개시됨을 의미하는 것은 “키스함”이 애착으로부터의 결합이다로부터 분명해진다, 여기서 이 결합쪽으로 개시됨이 의미되는데, 그 이유는 결합에 앞서 진행되는 것이 개시됨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를 자기 집으로 데려왔다. 이는 결합을 의미한다. 이는 “집으로 데려옴”의 의미가 자신에게 있음이다로부터; 그 이유가 내적 의미에서 자신이 “집”이라 불리우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이 선으로부터, 이 선은 “집”에 적절히 어울린다. 이 구절의 경우 집의 의미는 라반에 의해 의미되는 선이다; 그러므로 “집으로 데려옴”은 결합이 의미된다. 여기서 “야곱”인 자연 평면의 선과 “라반”인 방계적인 선이 결합하는 과정이 내적 의미에서 충분히 묘사되어 있다. 아래 이어지는 다섯 가지가 이 결합 과정을 구성한다; 즉 서로가 인정함, 동의함, 애착함, 개시함, 그리고 결합함이다, 서로 인정함은 라헬이 자기 아버지에게 달려가 말하고, 라반이 자기 여동생의 아들에 관한 말을 듣는 것에 의미되어 있다; 동의함은 라반이 그를 만나려 달려옴에 의해 의미되었다; 애착함은 라반이 그를 껴안음에 의해; 개시함은 그가 그에게 키스함에 의해; 결합은 그가 그를 집으로 데려옴에 의해 의미되었다.

그리고 그는 라반에게 모든 말들을 했다. 이는 진리들로부터를 의미한다. 즉 거기로부터 인정함, 동의함, 애착함, 개시함, 결합함이라는 모두가 있었다는 것이 시리즈로부터 확인된다, 그리고 내적 의미에 따라 설명된 말들로부터, 이것이 결말이다.

14, 15절. 그리고 라반이 그에게 말했다, 너는 정녕 내 뼈요 내 살이다. 그리고 그는 그와 함께 한 달을 지냈다. 15 그리고 라반은 야곱에게 말했다, 네가 내 친척이라 해서 네가 아무 댓가도 없이 봉사하느냐? 무엇이 너의 댓가인지 나에게 말하라.

그리고 라반은 그에게 말했다, 너는 정녕 내 뼈요 내 살이다. 이는 진리들에 관해서와 선들에 관해서 결합되었다를 의미한다. 이는 “너는 내 뼈이고 내 살이다”라는 말의 의미가 결합이다로부터 분명해진다. 고대인들은 한 집 속에 있는 자를 두고, 또는 한 가족을 두고, 또는 어떤 혈족 관계에 있는 자를 두고 “내 뼈이고 내 살”이라는 말의 형체를 사용해 표현했다; 이로부터 이 말은 결합을 의미했다. 이 결합이 진리들에 대해서와 선들에 대해서를 의미하는 이유는 모든 영적 평면의 결합은 이 둘로부터 결과되고, 자연 평면의 모든 결합도 이 둘에 관련을 맺고 있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뼈(bone)와 살(flesh)”에 의해 인간의 자기 자신(man’s own)이 의미된다; “뼈”에 의해서는 이해력 측면에서의 자기 자신이, “살”은 의지력 측면에서의 자기 자신이 의미된다; 고로 “뼈”에 의해서는 진리 측면에서 자기 자신인 것을, 그 이유는 이것이 이해력으로부터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살”에 의해서는 선 측면에서 자기 자신인 것이, 그 이유는 이것이 의지력으로부터 있기 때문이다.
일반적 측면에서 인간의 자기 자신에 주목해보면, 여기에는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지옥적인 것, 또 하나는 천국적인 것이다; 지옥의 것은 지옥으로부터 인간에 의해 받아진다, 그리고 천국적인 것은 천국으로부터, 즉 천국을 통하여 주님으로부터 이다; 그 이유가 모든 악, 뿐만 아니라 악에서 파생되는 모든 거짓은 지옥으로부터 흘러들기 때문이다; 그리고 모든 선, 그리고 선에서 파생되는 진리는 주님으로부터 흘러든다. 이렇다는 것이 신앙의 교리로부터 인간에게 알려져 있기는 하지만, 이를 믿는 자는 만 명당 한 명이 있을지 없을지 하다. 이런 이유로 인간은 지옥으로부터 흘러드는 악이 자신에 잘 어울리는 것으로 판단하고 그것을 자기 자신으로 만들고, 주님으로부터 흘러드는 선은 당사자에게 감명을 주지 못해 결국 당사자의 자기 자신의 것으로 귀속되지 못한다. 인간이 악은 지옥으로부터, 선은 주님으로부터 각각 흘러든다는 것을 믿지 않는 이유는 당사자 자신이 자기 사랑 안에 있고, 그리고 자기 사랑함이 모든 것을 운반하는 것이라고 믿기 때문, 하여 모든 것이 당신의 안쪽으로 흘러든다고 말해주면 극도로 분노하기 까지 할 정도이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인간의 자기 자신 속의 모두에는 악밖에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이 악은 지옥으로부터, 선은 주님으로부터 이다고 믿는 것은 그가 자기를 사랑함 안에 있지 않고, 이웃을 향한 사랑과 주님을 사랑함 안에 있다는 사실로부터 온다. 그 이유가 이 두 사랑이 이런 믿음도 동반해주기 때문이다. 고로 인간은 주님으로부터 천국적인 자기 자신을 받는 것이다.
이 자기 자신은 두 상반된 의미에서 “뼈와 살”에 의해 의미된다; 결과적으로 말씀에서 “뼈”에 의해서 진리가, 반대적 의미로는 거짓이, 그리고 “살”에 의해서는 선이, 반대적 의미에서는 악이 의미된다. “뼈”가 이런 의미를 가지는 것을 아래 구절들에서 보여질 것이다. 이사야서에서:
여호와께서 너희를 계속적으로 인도하실 것이다, 그리고 너희 혼이 가뭄에서 만족할 것이 다, 그리고 네 뼈들을 튼튼하게 만드실 것이다; 하여 너는 물을 댄 동산 같이 있을는지 모 른다 (이. 58:11);
위에서 “뼈를 튼튼하게 만듦”에 의해 이해력 측면의 자기 자신을 살아 있게 만드시는 것이, 즉 이해력을 총명으로 계발해주심이 의미된다; 그리하여 말해진다, “너는 물을 댄 동산 같을 것이다.” 다시:
그때 너희는 볼 것이다, 그리고 너의 심장은 기뻐 환호할 것이다, 그리고 너의 뼈들은 풀같 이 번성할 것이다 (이. 66:14);
“뼈들이 풀같이 번성함”은 앞 구절과 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
예레미야애가서에서:
그녀의 나지르인(Nazirite)들은 눈보다 더 희고(whiter), 그들(의 살결)은 젖보다 더 희다 (fairer); 그들의 뼈들은 보석(gem)들보다 더 붉고, 광을 낸 청옥(sapphire) 이었다; 그의 형체는 검은 것보다 더 어둡고, 그들은 거리들에서 알아주지 않는다; 그들의 피부는 그들의 뼈에 딱 달라붙어, 시들어져 있다; 이것은 나무 같이 되어 있다 (애. 4:7, 8);
“나지르인”은 천적 수준의 인간을 표시한다; “눈보다 더 희고, 젖보다 더 살결이 희다”는 것은 천적 수준의 진리 안에 있다를 표시한다; 그리고 이 진리가 선을 사랑함으로부터 이기 때문에, “그들의 뼈는 보석들보다 더 붉다”하고 말해진다. “그들의 피부가 그들의 뼈에 달라붙었다”에 의해서 사랑의 천적 수준의 것들이 바뀐 상태, 즉 뼈에 살이 없는 상태, 즉 더 이상 어떤 선도 없는 상태가 서술되고 있다; 이럴 경우 모든 진리는 뼈에 붙어버린 피부같이 된다; 이것이 “시들어지고 나무 같이 되었다”로 말해졌다.
에스겔서에서:
반역적인 가문을 향하여 비유로 발음하라, 그리고 그들에게 말하라, 고로 주 여호비께서 말 하신다, 큰 솥을 걸어라, 그것을 장치하라, 그리고 그것 안으로 물을 부어라; 그것 안으로 조각들을, 모두 각각의 좋은 조각, 넓적 다리와 어깨를 그러모우라; 그것을 골라 모은 뼈들 로 채워라; 양떼로부터의 좋은 것을 가져와라; 그리고 그것 아래 뼈들의 불난로가 있게 하 라; 뼈 또한 그것의 한가운데에서 삶아지게 하라 (겔. 24:3-5, 10);
위에서 “큰 솥”은 선과 진리에 제공된 폭력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이것이 “피의 도성”이라 불리우고 있다 (6절); “큰 솥 안으로 모은 조각들, 좋은 조각, 넓적 다리와 어깨”는 살들이고, 이것에 의해 선들이 뜻해진다; 큰 솥을 채운 “골라모은 뼈들”은 진리들을 표시한다; “뼈들의 불난로”는 진리에 대한 애착이다; “뼈들이 그것의 한가운데에서 삶아짐”은 진리들에 제공된 폭력을 표시한다. 아마 모든 이가 이 구절 안에 신성한 비밀들이 저장되어 있다는 것 정도는 눈치채질 것이다. 그리고 이 비밀들을 알려면, “큰 솥,” “단지,” “조각들,” “넓적 다리와 어깨,” “골라모은 뼈들,” 그리고 “삶는 것”의 내적 의미가 무엇인지를 알지 못하면 결코 알아질 수 없다는 것도 짐작될 것이다. 미가서에서:
공정함을 아는 것은 너를 위해서가 아니더냐? (너는) 선한 자를 미워하고 악한 자를 사랑 한다; 너는 그들로부터 그들의 피부를 잡아뜯고, 그들의 뼈로부터 살을 발라낸다; 너는 내 백성의 살을 먹어치웠다, 그리고 그들로부터 그들의 피부를 벗겨냈다, 그리고 그들의 뼈들 을 부러eM렸다, 그리고 그것들을 나누되 마치 솥단지 안으로 넣을 때같이, 그리고 살을 큰 솥 안으로 넣을 때 나누듯이 하였다 (미. 3:1-3);
위 구절도 앞 구절의 의미와 비슷하다.
에스겔서에서:
그는 나를 여호와의 영 안에서 데려왔다, 그리고 나를 계곡의 한가운데, 뼈들이 가득한 그 아래에 내려 놓았다. 그리고 그가 나에게 말했다, 이 뼈들이 살아 있느냐? 그가 나에게 말 했다, 이 뼈들에게 예언하라, 그리고 그들에게 말하라, 오 너희 마른 뼈들아 여호와의 말씀 을 들어라; 고로 주 여호비께서 이 뼈들에게 말하신다, 잘 보아라, 나는 너희가 살아 있도 록 너희 안으로 숨이 들어가게 할 것이다; 나는 너희 위에 힘줄을 놓을 것이다; 그리고 살 이 너희에게 오도록 할 것이다, 그리고 피부로 너를 덮을 것이다, 그리고 네가 살도록 너를 숨쉬게 할 것이다. 나는 예언했다, 그리고 뼈들이 다함께 와서 뼈에 뼈가 (붙었다); 그리고 내가 바라보니, 오, 그것들에 힘줄이 있었다, 그리고 살이 올라왔다, 그리고 피부가 위에서 그것들을 덮었다; 그리고 그것 안에 숨이 없었다; 그리고 숨이 그것들에게 왔다, 그리고 그 것들이 살아났다, 그리고 자기들의 발로 섰다 (겔. 37:1, 3-8, 10).
위 구절이 취급한 일반적 주제는 이방인들 사이에서 다시 교회가 설립되는 것이다; 그리고 특수적으로는 인간의 거듭남이다: “마른 뼈들”은 이해력 측면에서의 자기 자신, 이것은 주님으로부터 선의 생명을 받기 전 죽어 있는 것, 그러나 죽은 것을 살게 만드심이다; “주님이 뼈들 위에 오게 하시겠다는 살”은 의지력 측면에서의 자기 자신, 이것은 천국적인 자기 자신, 또는 천적 수준의 자기 자신이라 불리우는데, 선을 의미한다; “숨”은 주님의 생명이다, 그리고 이것이 인간으로 자기 자신으로부터 뜻하고 행동하는 듯 여겨지게 인간의 선 안으로 흘러들 때, 그때 인간의 선은 생기 있어지고, 선으로부터 진리가 살아 움직인다, 하여 마른 뼈들로부터 사람이 만들어진다.
다윗서에서:
모든 나의 뼈들이 느슨해졌다, 나의 심장은 밀납 같이 되어진다, 나는 모든 나의 뼈들을 셀 수 있다. 그들은 내 의복을 그들 사이에서 나누었다, 그리고 내 속옷을 두고는 그들은 제비 뽑기를 했다 (시. 22:14, 17, 18);
위 구절의 주제는 신성한 진리들 측면에서 주님의 시험들이다, 주님의 자기 자신인 것이 “내 뼈들”이라 불리운다; 그리고 신성한 선 측면에서 주님의 자기 자신 인 것은 “내 심장”이라 불리우고 있다 그리고 “뼈들”이 이런 진리들을 의미하기 때문에, 뼈들을 세는 것은 추론들과 거짓들을 통하여 진리들을 흐트러지게 하고 싶은 바램을 표시한다. 그러므로 즉각 뒤잇는 말은, “그들은 내 의복을 나누었다, 내 속옷을 두고는 제비뽑기를 했다”이다; 그 이유가 “의복”은 진리들, 그러나 외면의 진리들을 의미한다; “그것들을 나누고 속옷을 제비뽑는 것”도 마찬가지 것을 포함하는데, 마태복음서 27장 35절에서도 그러하다. 다시:
내 혼이 여호와를 드높입니다; 그것은 그분의 구원하심을 기뻐할 것입니다, 모든 나의 뼈들 이 당신 같은 분이 누가 있는가? 하고 말할 것이다 (시. 35:9, 10);
위 구절에서 “뼈들”이 이해력 측면에서의 자기 자신을 영적 의미에서 표시하는 것은 분명하다. 다시:
당신은 나로 환희와 즐거움을 듣게 해주실 것입니다; 당신이 상하게 한 뼈들이 (나를) 드 높일 것입니다 (시. 51:8);
“상해진 뼈들이 드높일 것”이란 시험들 이후 진리들을 통하여 재창조됨을 의미한다.
“뼈”가 이해력 측면에서의 자기 자신, 즉 진리 측면에서 자기 자신, 그리고 최고 의미에서 주님의 자기 자신인 신성한 진리가 의미되었기에, 유월절 어린 양의 뼈를 부러뜨리지 말라고 명령되었다; 이에 관해 모세의 책에서:
그것은 한 집 안에서 먹어질 것이다; 너는 고기를 집으로부터 밖으로 운반하지 말라; 너희 는 어린 양의 뼈를 부러뜨리지 말라 (출. 12:46).
그리고 다른 책에서:
그들은 그것을 아침까지 남아 있게 말 것이다, 거기로부터 뼈를 부러뜨리지 말라
(민. 9:12).
“뼈를 부러뜨리지 않는 것”은 최고 의미에서 신성으로부터의 진리들에 폭력을 행사하는 것; 그리고 표현적 의미에서, 어떤 선이든 관계없이 선으로부터의 진리라면 그것에 폭력을 행사하지 않는 것이다; 그 이유가 선의 품질과 선의 형체가 진리들로부터 있고, 진리는 선의 받침목, 마치 뼈가 살에 형체를 주는 것 같기 때문이다.
신성한 진리 자체인 말씀이 죽은 자를 살아나게 한다는 것이 엘리사의 무덤에 죽은 자를 던졌는데, 죽은 자가 엘리사와 접촉되자 되살아나서 자기 발로 서는 기록에 의해 표현되어졌다 (왕하. 13:21). (엘리사가 신성으로부터의 진리 측면에서의 주님을 표현한다에 대하여는 2762항을 참조하라.) 반대적 의미에서 “뼈들”은 인간의 자기 자신으로부터인 거짓을 의미하는데, 아래 구절을 읽어보자. 예레미야서에서:
그 때에 그들은 유다의 왕들의 뼈들, 그의 제 일인 자들의 뼈들, 그리고 성직자들의 뼈들, 그리고 예언자들의 뼈들, 그리고 예루살렘 주민의 뼈들을 그들의 묘지에서 꺼내올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자기들이 사랑하고 섬기던 태양, 달, 하늘의 모든 군대 앞에 뿌릴 것이다 (예. 8:1, 2).
에스겔서에서:
나는 그들의 우상들 앞에 이스라엘의 아들들의 시체를 놓아둘 것이다, 그리고 나는 너희 제단을 빙둘러 너희의 뼈들을 뿌릴 것이다 (민. 24:8).
모세의 책에서:
하느님이 그를 이집트로부터 데려왔다; 그는 외각수의 힘을 지녔다; 그는 그의 적들인 나라 들을 먹어치울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뼈들을 부러뜨릴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활을 파괴할 것이다 (민. 24:8).
열왕기하서에서:
요시아왕은 기둥들을 조각으로 부수었다, 그리고 작은 숲들을 베어버렸다, 그리고 그들의 장소를 인간의 뼈로 채웠다; 그는 무덤으로부터 뼈를 가져갔다, 그리고 그것들로 그것을 더럽게 하도록 제단 위에서 불태웠다; 그는 거기 있던 모든 성직자들을 재단 위에 제물로 바쳤다, 그리고 사람의 뼈들을 그것들 위에서 태웠다 (왕하. 23:14, 16, 20).
모세의 책에서:
들판의 표면 위에 있는 칼로 죽임을 당한 자, 또는 죽어 있는 자, 또는 인간의 뼈, 또는 무 덤을 만진 혼은 칠 일 동안 불결할 것이다 (민. 19:16, 18).
“뼈들”이 그들이 있는 거짓들을; “무덤들”이 그들이 있는 악들을 의미하기에, 그리고 위선이 선같이 바깥쪽으로 나타나나 안쪽으로는 거짓과 모독된 것으로 더럽혀져 있기에, 주님께서 마태복음서에서 말하신다:
너희에게 화가 있을 것이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아, 위선자들아! 그 이유가 너희는 너희 자신을 회칠한 무덤 같이 만든다, 이것은 실로 바깥쪽으로는 아름답게 나타나나, 안쪽은 죽 은 인간의 뼈와 불결함으로 가득하다; 너희 역시 바깥쪽으로는 인간들에게 정의로운 자 같 이 나타나나, 너희의 안쪽은 위선과 불법으로 가득 차 있다 (마. 23:27, 28).
위 구절로부터도 분명한 것은 “뼈들”에 의해 진리와 거짓 측면 모두에서 이해력 측면의 자기 자신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살(flesh)”에 주목해보자, 살은 최고 의미에서는 주님의 신성한 인간 속의 자기 자신을 의미하고, 이는 신성한 선, 그리고 관계적 의미에서 이것은 신성한 인간, 즉 그분의 신성한 선에 의해 살아있게 만들어진 인간의 의지력 측면의 자기 자신을 의미한다. 이 자기 자신은 천국의 자기 자신이라 불리우고, 이것은 본질적으로 선 안에 있고, 이 선으로부터 진리 안에도 있는 이들에게 꼭 어울리는 주님만의 것이다. 이런 자기 자신을 천국들 안에 있는 천사들이 지니고 있고, 인간의 경우, 그의 내면들의 측면이, 즉 그의 영의 측면이 주님의 왕국 안에 있는 이들도 지닌다. 그러나 반대적 의미에서, “살”은 인간의 의지력 측면의 자기 자신을 의미한다, 이 자기 자신은 본질적으로 악밖에 없다, 그리고 주님에 의해 생기 있지 않을 경우, “죽어 있다”라고 일컬어진다, 고로 인간 자체는 죽어 있다고 말해진다.
최고 의미에서 “살”은 주님의 신성한 인간의 자기 자신, 고로 그분의 선 측면의 자기 자신이다는 것은 주님의 말씀으로부터 분명해진다. 요한복음서에서:
예수께서 말하셨다, 나는 천국으로부터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만일 누군가가 이 빵을 먹는다면 그는 영원히 살 것이다; 그리고 내가 주는 빵은 내 살이다, 이것을 나는 세상의 생명을 위하여 줄 것이다. 그러므로 유태인들은 서로가 승강이하며 말하기를, 어떻게 이 사 람이 자기의 살을 먹으라고 우리에게 줄 수 있단 말이냐? 그러므로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 하셨다, 참으로, 참으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사람의 아들의 살을 먹지 않으면, 그리고 그분의 피를 마시지 않으면, 너희는 너희 안에 생명을 가지지 못한다; 내 살을 먹 고, 그리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원한 생명을 가진다, 그리고 나는 그를 마지막 날에 일 으킬 것이다; 그 이유가 내 살이 참으로 음식이고 내 피는 참으로 음료이기 때문이다; 내 살을 먹는 자, 그리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주하고, 나는 그 사람 안에 거주한 다. 이것은 천국으로부터 내려온 빵이다 (요. 6:51-56, 58);
위에서 “살”은 주님의 신성한 인간의 자기 자신, 즉 신성한 선 측면에서의 자기 자신이다는 것이 아주 분명하다; 그리고 이것이 성만찬에서 “몸”이라 불리우고 있다. 성만찬에서 “몸” 또는 “살”은 신성한 선을 의미한다; 그리고 “피”는 신성한 진리를 의미하는데 이미 살핀 것을 참고 해도 될 것이다; 그리고 “빵”과 “포도주”는 “살”과 “피”와 같기 때문에, 즉 “빵”은 주님의 신성한 선을, 그리고 “포도주”는 그분의 신성한 진리를 의미하기 때문에, 빵과 포도주를 살과 피를 대신하도록 명령된 것이다. 이것이 주님께서 “나는 살아 있는 빵이다; 내가 주는 빵은 내 살이다; 내 살을 먹는 자, 그리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주하고 나는 그 사람 안에 거주한다; 이것은 천국으로부터 내려온 빵이다”라고 말하신 이유이다.
같은 것이 유태인의 교회에서는 아론, 아론의 아들들, 제물을 바친 자, 깨끗한 자가 제물의 살을 먹도록 명령됨으로, 그리고 이 행위는 거룩함이다는 것을 명령함으로 표현되어졌다 (출. 12:7-9; 29:30-34; 레. 7:15-21; 8:31; 신. 12:27; 16:4). 그러므로 만일 불결한 인물이 이 살을 먹었다면, 그는 자기 백성으로부터 잘리워져야 했다 (레. 7:21). (이 제물이 빵이라 불리운 것은 2165항을 참조하라.) “살”은 “거룩함의 살”이라 불리웠다 (예. 11:15; 학. 2:12), 그리고 “주님의 왕국에 있는 식탁 위에 있던 공물(offering)의 살”은 에스겔서 40:43을 보라, 거기서 새 성전이 묘사되는데, 이를 수단으로 주님의 왕국에서 그분을 예배함이 분명하게 의미되고 있다.
관계적 의미에서 “살”은 주님의 신성한 선에 의해 살아 있게 만들어진 인간의 의지 측면에서의 자기 자신을 의미한다는 것을 아래 구절로부터 알게 된다. 에스겔서에서:
나는 그들에게 하나의 심정을 줄 것이다, 그리고 나는 너의 한가운데에 새로운 영을 놓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들의 살로부터 돌로 된 심정을 옮기고 살로 된 심정을 그들에게 줄 것이다 (겔. 11:19; 36:26);.
“그들의 살로부터 돌로 된 심정”은 살아 있지 않은 의지와 자기 자신을 표시한다; 그리고 “살로 된 심정”은 살아 있게 된 의지와 자기 자신이다. 다윗서에서:
오 하느님 당신은 나의 하느님이십니다; 아침에 나는 당신을 찾습니다; 내 혼이 당신을 갈 망합니다, 내 살이 마른 토지에서 당신을 갈망합니다; 그리고 나는 물이 없어 지쳐있습니다 (시. 63:1).
다시:
내 혼이 여호와의 뜰을 갈망합니다; 내 심정과 내 살이 살아계신 하느님에게 환희를 위해 외칩니다 (시. 84:2).
욥기서에서:
나는 나를 되찾으시는 분을 알았습니다, 그분은 살아 계십니다, 그리고 마지막에서 그분은 먼지 위에서 일어나실 것입니다; 그리고 후에 이런 것들이 내 피부를 에워쌌습니다. 그리고 내 살로부터 나는 하느님을 볼 것입니다; 이 분을 나는 나 자신을 위하여 볼 것입니다, 그 리고 나의 눈이 바라볼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것은 아닙니다 (욥. 19:25-27).
“피부를 에워싼 것”은 자연 평면과 더불은 것, 즉 인간이 사후 자기와 함께 지니는 것을 표시한다; “살로부터 하느님을 보는 것”은 자기 자신이 살아있게 됨을 표시한다; 그러므로 그는 말한다, “이 분을 나는 나 자신을 위해, 그리고 나의 눈이 바라볼 것이다; 다른 것은 아니다.” 살이 인간의 자기 자신을 의미했다는 것은 교회들에 알려져 있기에, 그리고 욥기서가 고대 교회의 책이다는 것도 알려져 있기에, 그러므로 그는 이런 사항들을 의미적 측면에서 말했다. 이는 다른 구절 역시 마찬가지이고, 또한 그때 당시의 관습적인 것과 일치하여 말한 것이다; 그런데 이런 구절로부터 연역하여(추론하여), (세상의 종말에서) 죽은 몸 자체는 네 바람들로부터 (사방으로부터) 수집하여져서 다시 일어날 것이라고 외치는 이들(목사들)은 말씀의 내적 의미에 친숙해 있지 않다. 내적 의미를 아는 이들은 자기들은 몸과 더불어 다른 삶에로 건너간다는 것을 알고 있다. 단지 더 순수해진 몸이다는 것이 다른 점이다; 그 이유가 다른 삶에는 더 순수해 있는 몸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그들은 서로를 보고, 함께 대화하고, 그리고 현재의 몸 안에서 같은 모든 감각을 향유하기 때문이다, 단지 거기서는 아주 더 정교하다는 것이 다를 뿐이다. 인간이 땅에서 지니는 몸은 땅에서의 사용을 위해 있다, 그리고 그러므로 뼈들과 살로 구성된다; 그리고 영이 다른 삶에서 지니는 몸은 그 삶의 사용을 위해 고안되어져 있다, 그리고 뼈들과 살로 구성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들에 상응하는 것들로 구성된다.
반대적 의미에서 “살”은 인간의 의지 측면의 자기 자신, 이것은 본질적으로 악밖에 없다는 것을 아래 구절로부터 분명해진다. 이사야서에서:
그들은 모두 각각의 인간이 자기 자신의 팔의 살을 먹을 것이다 (이. 9:20).
다시:
나는 그들의 자신의 살을 가지고 압제자를 먹일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새 포도주와 더불 어서 같이 그들 자신의 피를 마실 것이다 (이. 49:26).
예레미야서에서:
나는 그들의 아들들의 살을 가지고, 그리고 그들의 딸들의 살을 가지고 그들을 먹일 것이 다, 그리고 그들은 모두 각각이 그의 동료의 살을 먹을 것이다 (예. 19:9).
스가랴서에서:
남아 있는 이들 모두 각각은 또 다른 자의 살을 먹게 하라 (슥. 11:9).
모세의 책에서:
나는 너를 네 죄들을 위해 일곱 배나 징계할 것이다; 그리고 너희는 너의 아들들의 살을 먹을 것이다; 그리고 너의 딸들의 살을 너희는 먹을 것이다 (레. 26:28, 29).
인간 의지 측면의 자기 자신, 고로 인간의 본성이 묘사되어 있다. 그 이유가 인간 본성은 악과 악에서 파생되는 거짓밖에 더 없기 때문이다; 고로 진리들과 선들을 미워할 수밖에 없는데, 이것이 “그의 팔의 살을, 아들들과 딸들의 살을, 그리고 동료의 살을 먹는다”에 의해 의미되고 있다.
계시록서에서:
나는 태양에서 서있는 천사를 보았다; 그리고 그는 큰 음성으로 외쳤다, 하늘의 한가운데에 서 날고 있는 모든 새들에게 말하기를, 다함께 자신들을 그러모아 위대하신 하느님의 만찬 으로 오라, 하여 너희는 왕들의 살을, 그리고 장군들의 살을, 그리고 용사들의 살을, 그리고 말들의 살을, 말 위에 앉은 이들의 살을, 그리고 자유한 자와 억매인 자 모두의 살을, 작은 자와 큰 자 모두의 살을 먹어라 (계. 19:17, 18; 겔. 39:17-20).
위 구절에 있는 것들, 즉 “왕들의 살, 장군들의 살, 용사의 살, 말의 살, 말 위에 앉은 자의 살, 자유한 자와 억매인 자 모두의 살”이 이것 그대로를 의미하지 않을 것임은 누구나 짐작될 것이다; 고로 “살”이 다른 것을 의미한다는 것은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았다. 거짓들로부터 있는 악들, 그리고 악들로부터 있는 거짓들, 이 모두가 인간의 의지 측면의 자기 자신으로부터 이다는 것은 몇 개의 표현들로부터 명백해진다.,
내적 의미에서 인간의 이해력의 측면으로부터 결과하는 거짓이 “피”이다, 그리고 그의 의지 측면으로부터 결과하는 악은 “살”이다, 그러므로 거듭나지는 인간에 관하여 주님께서 말하신다:
그분을 받아들인 많은 이들, 이들에게 그분은 하느님의 아들이 되는 능력을 주었다, 그분의 이름을 믿는 자에게조차 (주셨다), 이는 피로부터도 아니고, 육(살)의 의지로부터도 아니고 하느님으로부터 태어나진 것이다 (요. 1:12, 13).
그런고로 일반적 측면에서 살(육)은 모두 각각의 인간을 뜻한다; 그 이유가 우리가 인간이다 말하든지, 인간의 자기 자신이라 말하든지 실상 같은 것을 두고 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최고 의미에서 “살”은 주님의 신성한 인간을 의미한다는 것이 위에 인용한 구절에서, 그리고 아래 구절에서 분명해진다:
말씀이 육(살)을 만들었다, 그리고 우리들 사이에서 거주하셨다, 그리고 우리는 그분의 영 광을, 아버지의 독생자로부터의 영광을 바라보았다 (요. 1:14).
이 “살”로부터 모든 살은 살아 있게 된다, 즉 말하자면, 모두 각각의 인간은 그분의 사랑을 자기 것 되게 함을 수단으로 주님의 신성한 인간으로부터 살아 있어진다, 이 자기 것 되게 함이 “사람의 아들의 살을 먹는다”에 의해 의미되고 있다 (요. 6:51-58), 그리고 성만찬에서 “빵”을 먹음에 의해서도 의미된다; 그 이유가 “빵”은 “몸”, 또는 “살”이기 때문이다 (마. 26:26, 27).

그리고 그는 그와 함께 날들의 한 달을 거주했다. 이는 삶의 새로운 상태를 의미한다. 이는 “거주함”이 생활하다를 의미함으로부터; 그리고 “날들의 한 달”이 새로운 상태를 의미한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러나 “해”, “달”, “날” 같이 단수로 언급될 때, 이것은 전체 상태를 아우르는 말이다; 고로 진행하는 것의 끝과 그 뒤를 잇는 것의 시작을 아우르는 말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달”은 단수인 바, 진행되는 것의 끝과 이어지는 상태의 시작, 즉 새로운 상태를 의미한다. 이는 다른 구절에서도 발견된다. 이사야서에서:
드디어 달로부터 그것의 달까지, 그리고 안식일로부터 안식일까지에 이르러 모든 살(육체) 이 자신을 구부려 내 앞에 절할 것이다, 여호와께서 말하신다 (이. 66:23).
계시록서에서:
그는 나에게 수정처럼 맑은, 생명의 물의 순수한 강을 보여주었다, 이 강은 하느님의 왕좌 와 어린 양의 왕좌로부터 나오고 있다. 그것의 거리의 한가운데에서, 그리고 강의 이쪽과 저쪽에서 생명의 나무가 있었다, 그 나무는 열 두 열매들을 맺고, 매 달 그것의 열매를 생 산하고 있다 (계. 22:1, 2);
“그것의 열매를 매 달 생산함”은 선을 받음의 측면에서, 그리고 그로부터 쓸모 있음이 결과하는 측면에서 언제나 새로운 상태에 있음을 의미한다.
모세의 책에서:
레위인은 그들의 아버지의 가문에 따라, 그들의 가족에 따라 한 달 이상 된 모든 남성의 숫자를 세어라. 이스라엘의 첫 출생인 모든 남성은 한 달 이상 된 자를 세어라, 그리고 그 들의 이름들의 숫자를 가져와라 (민. 3:15, 40);
진행되는 것의 끝과 종속되는 상태의 시작(즉 새로운 상태)이 “달”에 의해 의미되었기 때문에 “한 달 이상 된 남성”으로부터 계수를 시작하라고 명령된 것이다. 다시:
만일 네가 포로들 사이에서 형체에서 아름다운 여인을 본다면, 그리고 네가 그녀에게 바램 을 가진다면, 그래서 그녀를 아내로 네게로 데려간다면, 그녀는 그녀의 포로된 의복을 벗게 하고, 네 집에 앉게 할 것이다, 그리고 그녀의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날들의 한 달을 곡할 것이다, 그리고 그 후에 너는 그녀에게 갈 것이다, 그리고 그녀를 알 것이다; 그리고 아내 로 네게 있을 것이다 (신. 21:11, 13);
위의 “날들의 한 달”은 진행되는 것의 끝, 그리고 종속되는 것, 또는 새로운 상태의 시작을 명백하게 표시한다.

그리고 라반은 야곱에게 말했다, 네가 내 형제이기 때문에… 이는 그들은 선으로부터 혈육 관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를 의미한다. 이는 라반의 표현이 공통의 줄기로부터의 방계적인 선이다로부터; 그리고 야곱의 표현함이 자연 평면의 선이다로부터; 그리고 “형제”의 의미가 선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여기서의 경우 “형제”의 의미는 근친 관계에서의 선이다, 그 이유는 이것이 라반에 의해 야곱에게, 결과적으로 선에 의해 선에게 말해진 것이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모든 혈연의 친척 관계는 그것의 근원이 선으로부터 파생된다, 그 이유가 선이 사랑으로부터 있기 때문이다. 내려가는 계열에서 사랑의 가장 가까운 등차는 혈연 친척 관계라고 불리운다, 그리고 적절하게는 “형제”에 의해 이해된다. 영계에서, 또는 천국에서는 주님을 사랑함으로부터의 것과 이웃을 향한 사랑으로부터의 것, 같은 말로 선으로부터의 것 외에 다른 친척 관계, 인척 관계는 없다는 것이 나에게 보여준 사실로부터 명백해졌다, 즉 천국을 구성하는 모든 사회들, 아주 무수하지만 서로로부터 완전하게 구분된다는 것, 사랑의 등차와 차이에 일치해서, 그리고 이 사랑으로부터 파생된 신앙에 일치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들은 육체의 삶에서 존재했던 어떤 친족 관계로부터가 아닌데도, 선으로부터, 그리고 선에서 파생된 진리로부터 서로를 인식한다는 사실로부터 확실해졌다. 거기서는 서로에서 대단히 비슷한 선을 지니지 않으면 아버지가 아들, 또는 딸을 인식하지 못한다, 또는 형제가 형제를, 자매가 자매를, 남편이 아내를 인식하는 일이 없다. 실로 그들이 다른 삶에 처음 올 때라면 만나기는 하나, 이내 분리되어진다; 그 이유가 선 자체, 또는 사랑과 선행이 그들이 속할 사회를 결정짓기 때문이다. 혈연적 친척 관계는 각 인물이 있는 사회 안에서 시작하여 다른 친척 관계로까지, 결국 먼 인척 관계인 주변으로까지 이다.

그렇다고 해서 아무 댓가도 없이 봉사하느냐? 너의 대한 댓가가 무엇인지 내게 말하라. 이는 결합의 수단이 반드시 있어야만 함을 의미한다. 이는 “댓가 없는 봉사”의 의미가 어떤 특전이 없음이다로부터; 그리고 “댓가(보상, reward)”의 의미가 결합의 수단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댓가”는 말씀에서도 가끔 등장하는 단어이다, 그리고 내적 의미로는 결합의 수단밖에 더 아니다. 그 이유가 천사들은 보상에 관하여서는 어떤 것도, 이 구절 같이 보상이라는 말을 듣는 것 자체도 지독하게 싫어하기 때문이다, 아마 그들 안에 있는 어떤 것 때문이 아닌가 싶다; 그렇다, 그들은 어떤 선, 또는 선한 행동을 두고 보상을 생각하는 것과는 정반대의 품질을 지닌 것이 틀림없다. 그들은 자기 자신인 것에는 악밖에 없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러므로 그들이 자기 자신으로부터 행하는 것은 무엇이든 보상에 반대되는 것이 동반되고야 만다; 그리고 모든 선은 주님으로부터 있고, 자신들 안에 흘러들어 자신들의 선한 행동이 있다는 것, 그나마 이것은 오로지 주님의 자비로부터 이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엄밀히 말해 선 자체는 그 선이 보상을 염두한다면 선이 아니다, 그 이유가 보상을 생각하는 순간, 이기적인 목적이 이 선한 행동에 인접하고, 인접되면 선이 주님으로부터 이고, 자비로부터 이다는 것을 부정하려는 생각이 고개를 들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유입됨이 줄어드는 만큼 선과 선에 대한 애착 안에 있는 축복과 천국 자체도 줄어들 수밖에 없다. 그 이유가 선에 대한 애착(즉 주님을 사랑함과 이웃을 사랑함)은 그것 내부에 복됨과 행복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 복됨과 행복은 애착과 사랑 자체 내부에 존재한다. 애착으로부터 어떤 것을 행하는 것, 그리고 그것의 복됨, 그리고 동시에 보상을 위하여 그것을 행하는 것, 이것들은 서로에게 직 반대된다. 그러므로 말씀에 있는 “보상, 댓가”가 읽혀질 때, 천사들은 보상의 어떤 것도 지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주님에 의해 자비로부터와 그분께서 공짜로 수여하시는 어떤 것을 지각할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상은 아직 거듭남을 개시하지 못한 자들을 위해 결합의 수단으로 아주 유용하다; 그 이유가 선과 선에 대한 애착 안에서 아직 시작하지 않은 이들(즉 아직 충분히 거듭나지 않은 이들)은 보상을 빼놓고는 달리 행동할 수 없기 때문, 그들은 선에 대한 애착으로부터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위한 복됨과 행복에 대한 애착으로부터 행동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동시에 지옥에 대한 두려움으로부터 행동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이 거듭나질 때, 이것은 거꾸로 되어 선에 대한 애착이 되어간다, 그때는 보상에 대한 생각은 더 이상 없게 된다.
이에 대한 예는 시민적 생활을 떠올리면 될 것이다: 자기 나라를 사랑하는 자, 선한 의지로부터 나라의 선을 증진하는 것을 기쁨으로 삼고, 이에 대한 애착을 가진자의 경우, 만일 이런 것의 실현이 막힐 경우, 이를 슬퍼하고 이를 행할 기회가 수여되도록 탄원도 할 것이다; 그 이유는 이것이 그의 애착의 대상이고, 그의 기쁨과 복됨의 근원이기 때문이다. 이런 자는 존경도 받고, 높은 관직에까지도 앉혀질 것이다; 이런 직책의 수여됨이 비록 그의 선행에 대한 보상이라 불리울지라도, 그에게 이런 직책은 자기 나라의 선을 증진하는 수단일 뿐이다. 그러나 자기 나라를 위한 애착을 지니지 않은 이들, 그러나 자기와 세상에 대한 애착을 지닌 이들은 명예들과 재물을 위하여 행동을 취한다. 그는 이것을 목적으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인물들은 자기 나라에 앞서 자신을 챙기고 있다(즉 공통의 선에 앞서 자신으로부터의 선을 내세운다). 한마디로 심보가 더러운 것이다. 그럼에도 자신은 진솔한 사랑으로부터 행동함을 비추이게 하려고 안간 힘을 쓴다. 그들이 나라 사랑에 관하여 개인적으로 생각할 때, 이 사랑은 자기 만큼 사랑하는 자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육체의 삶에서 이런 나라 사랑을 지닌 자가 다른 삶에 와서도 주님의 나라를 두고 똑같은 생각을 지니고 있다. 그 이유가 각 자의 애착은 삶의 형태가 바뀌어도 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16, 17절. 그리고 라반은 두 딸을 가졌는데, 큰 딸의 이름은 레아였고, 그리고 작은 딸의 이름은 라헬이었다. 17 그리고 레아의 눈은 약했고, 그리고 라헬은 모습이 아름다웠고 바라보기에도 아름다웠다.

그리고 라반은 두 딸을 가졌다. 이는 공통의 줄기로부터 있는 선으로부터의 진리에 대한 애착을 의미한다. 이는 라반이 공통의 줄기로부터 있는 선, 그러나 방계적인 선이다로부터; 그리고 “딸들”의 의미가 애착들이다로부터, 이 구절의 경우, “라반”인 선으로부터의 진리에 대한 애착이다.

큰 딸의 이름은 레아였다. 이는 그것의 품질이 외적 진리에 대한 애착임을 의미한다. 그리고 작은 딸의 이름은 라헬이었다. 이는 그것의 품질이 내적 진리에 대한 애착임을 의미한다. 이는 레아의 표현이 외적 진리에 대한 애착이다로부터; 그리고 라헬은 내적 진리에 대한 애착이다로부터; 그리고 “이름”의 의미가 품질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레아가 언니(큰 딸, elder)라 불리우는데, 그 이유는 외적 진리가 먼저 배워지기 때문, 그리고 라헬이 동생(작은 딸)이라 불리운 이유는 내적 진리는 나중에서야 배워지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인간은 외적 진리들에 먼저 감명을(영향을) 받고, 한참 후 그는 내적 진리에 감동된다는 말이다. 그 이유가 외적 진리들은 내적 진리의 평면들이기 때문이다. (그림도구에서 도화지가 외적 진리에, 색연필은 내적 진리에 해당될지 모른다 역자 주.) 다시 말해, 일반적인 것 안으로 유일한 것(낱개들, singulars, 더 이상 나뉠 수 없는 것들)이 은근히 심어지는 것이다. 또 다른 말로하면, 일반적인 것 없이 유일한 것을 납득할 수 없다는 말이다. (즉 시민적, 도덕적 선이라는 도화지가 없으면 영적 선이라는 색연필은 무용지물인 것과 같다. 역자 주) 말씀에서 글자 의미는 일반적 측면에 해당되고, 내적 의미는 유일한 측면에 해당된다. 전자는 외적 진리들에 해당되고 후자는 내적 진리들에 해당된다; 그리고 애착 없는 진리들은 진리들이 아니다, 그 이유는 그 진리 안에 생명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외적 진리이든. 내적 진리이든 진리라는 말이 언급될 때는 실상 해당 진리에 애착은 당연히 동반된다고 이해해도 될 것이다.

그리고 레아의 눈은 약했다. 이는 외적 진리에 대한 애착은 외적 진리를 이해함을 중요시함을 의미한다. 이는 레아의 표현이 외적 진리에 대한 애착이다로부터; “눈”의 의미는 이해력이다로부터; 그리고 “약함”의 의미가 비교적으로 약해 있다로부터 알려진다. 외적 진리에 대한 애착들은 이해력에서 약하다는 것, 또는 외적 진리 안에 있는 이들은 이해력에서 약해 있다는 것은 외적인 것으로부터만, 즉 일반적인 것으로부터만, 일반적인 것이 아직 유일한 것에 의해 예증받지 못한 상황에서라면, 당사자가 이해했다 라고 판단한 그 진리는 실상 허약하고 물렁하고, 흔들리는 수준이어서 작은 바람에도 나풀거리듯, 다시 말해, 자신의 진리가 타인의 견해에 흔들리는 유약한 상태이다. 그러나 유일한 것(각자의 삶)에서 예증된 진리들은 흔들리지 않고 꾸준하고 강하다, 그 이유는 이 진리는 “라헬이 지닌 것, 즉 아름다운 모습(형체, form)과 바라보니 아름답다”에 의해 의미되는 내용(본체, 본질)과 형식(형체) 모두의 것을 지녔기 때문이다. 이 둘을 겸비한 것이 라헬을 수단으로 표현된 내면의 진리에 대한 애착이다.
외적 진리들과 그것의 애착들에 의해 뜻해진 것, 그리고 내적 진리들과 그것의 애착들에 의해 뜻해진 것, 그리고 전자는 눈이 약하고, 후자는 모습에서 아름답고, 바라보기에 아름답다에 의해 뜻해진 것을 선은 가난한 이들에게 실시되어야 한다는 대목을 예로 놓고 생각해보자. 외적 진리 안에 있는 이들은 이를 글자대로인 것, 즉 일반적 진리만을 알고 있다; 그리고 그들은 진실로 가난한 자가 누구인지를 식별하지 못한다, 더욱이 말씀에서의 “가난한 자”는 영적으로 가난한 자를 뜻하는 것임을 모르고 있다. 그 결과 그는 선한 자에게나 악한 자에게 똑같이 선을 실행한다. 그는 자기가 악한 자에게 선을 행한 것이 선한 자에게 악을 행함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한다. 그러므로 이런 단순한 열정에 있는 이들은 사기적인 수법에 허망하게 휘둘려 지독한 곤혹을 치루기 십상이다. 그러나 내적 진리 안에 있는 이들은 가난한 자가 누군지를 알고, 그들 각각을 식별하고, 각 품질에 따라 모든 이 각각에게 선을 실행한다.
또 다른 예를 생각해보자: 외적 진리에 있는 이들은 우리는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는 것을 글자대로 가지고 있다. 그리고 모든 이는 똑같은 등차에서 이웃이다고 믿는다, 고로 모든 이는 똑같은 사랑으로 보듬어야 한다고 믿는다. 그래서 그런 식에서 자신들이 이끌림을 당하는데도 이를 허용한다. 그러나 내적 진리 안에 있는 이들은 모든 이는 이웃이되 각 인물의 이웃된 등차는 다르다고 알고 있다. 결과적으로 그는 외적 진리 안에 있는 이들이 모르는 무수한 것을 알고 있다; 그러므로 이웃이라는 이름을 걸었다고 자신이 엉뚱한 길로 끌어가게 내버려두지 않는다, 또한 명분이 야기하는 선의 설득으로부터 악을 도출하는 실수도 없다. (하느님의 일이라는 명분을 걸면 얼마나 많은 순진한 이들이 쉽게 빨려드는지 여러분도 목격했을 것이다 역자주.)
또 다른 예를 생각해보자: 외적 진리만에 있는 이들은 상상한다, 즉 다른 삶에서 학식자는 별같이 빛을 낼 것이다; 그리고 주님의 포도원에서 노동한 모든 이들은 여느 누구보다 보상을 확실히 받을 것이라고 상상할지 모른다. 그러나 내적 진리 안에 있는 이들은 “학식자”, “슬기로운 자”, “총명한 자”에 의해서 선 안에 있는 이들이 의미된다는 것, 그들이 어떤 인간의 지혜나 총명을 가졌든, 아니가졌든 그것은 상관 없다는 것을 안다. 그리고 선 안에 있는 이들이 별같이 빛을 낸다고 알고 있다; 그리고 주님의 포도원에서 노동한 이들은 자기로 노동하게 한 자기의 선과 진리에 대한 애착에 일치하여 보상을 받을 것이라고 알고 있다; 그리고 자신과 세상을 위해 주님의 포도원에서 일한 자들, 즉 자아 찬양과 재물을 위하여 재능을 발휘한 자들은 세상에서 자기들의 보상을 가지겠지만, 다른 삶에서의 그들의 구역은 사악한 자들의 사회이다 (마. 7:22, 23). 그러므로 외적 진리들만에 안주할 경우, 그의 이해력은 얼마나 약한지! 분명하다; 그리고 내적 진리들이 외적 진리들에 본질과 형체를 준다는 것, 또한 각 사람에게 있는 선에 품질을 부여한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이세상 삶동안 외적 진리에만 있었으되, 동시에 단순한 선 안에서 생활한 이들은 다른 삶에서 그들에게 부족한 것, 즉 내적 진리와 지혜를 받는다; 그 이유가 단순한 선으로부터 그들은 받을 수 있는 그릇을 준비하여 다른 삶으로 건너갔기 때문이다.

그리고 라헬은 모습이 아름다웠고 바라보기에도 아름다웠다. 이는 내적 진리에 대한 애착은 영적인 것들을 이해함을 중요시함을 의미한다. 이는 앞에서 설명되었다. “모습, 형체(form)”에 의해 본질이; “바라 봄(look)”에 의해 본질에서 파생되는 아름다움이 의미된다.

18-20절. 그리고 야곱은 라헬을 사랑했다. 그리고 그는 말했다, 저는 당신의 작은 딸 라헬을 위하여 칠 년을 봉사하리 이다. 19 그리고 라반이 말했다, 나는 그녀를 다른 사람에게 주는 것보다 너에게 주는 편이 더 낫다. 나와 함께 있으라. 20 그리고 야곱은 라헬을 위하여 칠 년을 봉사했다, 그리고 그 세월은 그가 가졌던 그녀에 대한 사랑 때문에 며칠에 불과한 세월로 여겨졌다.

그리고 야곱은 라헬을 사랑했다. 이는 내적 진리를 향한 선으로부터의 사랑을 의미한다. 이는 야곱의 표현이 자연 평면의 선이다로부터; 그리고 라헬의 표현이 내적 진리에 대한 애착이다로부터; 이 구절에서의 경우, 자연 평면의 선과 결합이 예상되는 내적 진리, 이 결합이 예상되는 것은 “사랑하였다”에서 추측된다.

그는 말했다, 나는 당신의 작은 딸 라헬을 위해 칠 년을 봉사하리이다. 이는 내적 진리와 결합되어지기 위하여 끈임없이 노력함(study), 동시에 이 노력은 거룩한 상태임을 의미한다. 이는 “봉사함”이 노력함이다로부터; 그리고 “7”의 의미가 거룩한 것이다로부터; 그리고 “년, 햇수”의 의미가 상태이다로부터; 이것이 결합하기 위함이었음은 분명하다. 이상을 종합하면, “나는 당신의 작은 딸 라헬을 위해 칠 년을 봉사하리이다”가 내적 진리와 결합하기 위하여 끈임없이 노력하는 것, 동시에 이는 거룩한 상태임이 의미된다. 여기서 말하는 바, 내적 진리를 배우고, 인정하고, 믿을 때, 그 진리는 자연 평면과 결합함이 있어진다는 것이다. 인간의 자연 평면에, 즉 이 인간의 기억 안에는 두 종류의 진리들, 즉 외적 , 내적 진리들이 있는데, 이것들은 기억화된 교리적인 형태 안에 있다; 그러나 이것들은 인간이 삶을 위해 그것들에 감동되기 까지 결합하지 않고 있다, 즉 그것들이 인간 당사자로부터 사랑받아질 때까지 결합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 이유가 사랑될 때에야 선이 그것들과 짝짓기를 하는 바, 이것 때문에 자연 평면은 합리성과 결합되어진다, 결과적으로 내적 인간과 결합된다. 이 경로에 의해 주님으로부터 자연 평면 안으로의 생명의 유입이 있다.

그리고 라반이 말했다, 그녀를 다른 사람에게 주는 것보다 너에게 주는 편이 더 낫다, 나와 함께 있으라. 이는 내면의 진리를 통하여 이 선과 결합함의 수단들을 의미한다. 이는 “보상, 댓가”의 의미로부터, 이를 중요시하여 대답과 확인함이 이 구절의 말이 만들어지게 한 것이므로, 결합의 수단들이 의미됨이 분명하다. 여기서 “그녀”에 해당하는 “라헬”이 내면의 진리이고, “너에게”에 해당하는 “야곱”은 선이다는 것은 이미 살폈다. “야곱”인 선이 “라반”인 선과 “라헬”인 내면의 진리를 수단으로 결합함에 주목하면, 이것에는 납득하도록 쉽게 서술하기에는 무리가 되는 비밀들이 있다; 그 이유가 첫째로 각 선에 대한 명료한 생각이 있어야만 하고, 또한 내면의 진리에 대한 애착에 관한 명료한 생각도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모든 주제를 이해함은 생각에 따라서 있기 때문; 만일 생각이 없으면 아무 것도 없다; 만일 생각이 불분명하다면 불분명하다; 만일 생각이 뒤집혀 있다면 뒤집혀 있다; 그리고 만일 생각이 명료하다면 명료하다. 이것은 애착들에 따라서도 그러한 바, 애착들을 수단으로 생각은 설사 명료하다 해도 다양해진다. 따라서 우리는 거듭나지는 모든 인간 안에서 그의 자연 평면의 선, 여기서 야곱에 의해 표현된 선이 여기서 라반에 의해 표현된 선과 라헬에 의해 표현된 내면의 진리에 대한 애착을 수단으로 결합함이 먼저 있다는 것만을 서술하고 말 것이다. (한참) 후에 이삭과 리브가인 합리성의 선과 이 선으로부터의 진리와 결합함이 있게 된다; 즉 외적 인간이 내적 인간과 결합함이 있다.

그리고 야곱은 라헬을 위하여 칠 년 동안 봉사했다. 이는 성취함을 의미한다. 이는 이 말들의 의미가 끊임없는 노력(study)과 동시에 거룩한 상태가 내면의 진리와 결합하기 위하여서였던 바로부터 분명해진다. 여기서 이런 것들을 성취함이 엿보임은 분명하다.

그리고 그 세월은 그가 라헬에 대한 사랑 때문에 며칠로 그의 눈 안에 있었다. 이는 사랑의 상태를 의미한다는 것, 즉 그것은 지루함에서 자유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그의 눈에서 있다”가 그렇게 나타나는 것을 의미함으로부터; 그리고 “날들”이 상태들을 의미함으로부터 분명해진다. 이로부터 “그가 그녀를 사랑함 때문에 그의 눈에서 며칠로”는 사랑의 상태를 표시하고 있다. 인간이 사랑의 상태 안에 있을 때, 또는 천적 수준의 애착 안에 있을 때, 그는 천사의 상태 안에 있다, 즉 애착 안에 조급함이 없다면, 시간 안에 있지 않은 것처럼 있는다. 그 이유가 조급함은 육체의 애착이고, 인간이 이 조급함 안에 있는 만큼 그는 시간 안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이 조급함 안에 있지 않은 만큼, 그는 시간 안에 있지 않다. 이것은 애착 또는 사랑에 속하는 모든 즐거움과 기쁨으로부터 일종의 형상 안에서 나타난다, 인간이 이것들 안에 있을 때, 그는 시간에 주목하지 않는다, 그 이유가 이때의 그는 내적 인간 안에 있기 때문이다. 순수한 사랑의 애착을 수단으로 인간은 육체적, 세상적인 것들로부터 물러나 있는다, 그 이유가 그의 마음이 천국을 향하여 승강되기 때문, 고로 시간 속의 것들로부터 물러나 있는다. 시간이 어떤 것이다고 나타나는 이유는 우리가 애착, 또는 사랑에 속하지 않는 것들을 곰곰이 생각하므로 해서 지루해지기 때문에서이다. 이로부터 칠 년의 세월이 그가 그녀를 사랑함 때문에 그의 눈에 며칠로밖에 있지 않았다가 의미한 것을 알았을 것이다.

21-24절. 그리고 야곱은 라반에게 말했다, 나에게 나의 여인을 주십시오, 내 날들이 다 찼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나는 그녀에게 올 것입니다. 22 그리고 라반은 그 곳의 모든 남자들을 모아 놓고, 잔치를 베풀었다. 23 그리고 저녁이 되자, 그는 그의 딸 레아를 데려왔다, 그리고 그녀를 그에게 데려왔다, 그리고 그는 그녀에게 갔다. 24 그리고 라반은 그의 하녀 질바를 그의 딸 레아에게 그녀의 하녀로 주었다.

그리고 야곱은 라반에게 말했다, 나에게 나의 여인을 주십시오. 이는 일반적인 선으로부터 내면의 진리에 대한 애착과의 결합이 지금 있었음을 의미한다. 이는 야곱의 표현이 자연 평면의 선이다로부터; 이 구절에서는 일반적인 선인데, 그 이유는 자연 평면 속의 것들은 상대적으로 일반적인 것들이고, 여기에 내적 인간으로부터 이 후자에 나타나는 자연적, 또는 외적 인간 안으로 흐르는 무수한 것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 이 구절의 경우 같이 일반적인 것들 속의 개별적인 것들이 받아지기 앞서 무수하게 있다. 이런 이유로 야곱에 의해 표현된 선을 지금은 일반적 선이라 부른 것이다. 내면의 진리와의 결합이 의미되는 것은 분명하다, 그 이유가 여기서 “나의 여인”이라 부른 라헬이 내면의 진리에 대한 애착을 표현하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내 날이 다 찼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나는 그녀에게 갈 것입니다”이는 지금 질문하는(묻는) 상태임을 의미한다. 이는 “날들”이 상태들을 의미한다로부터 분명해지고, 이에 대해서는 설명이 필요 없을 것이다.

그리고 라반은 그곳의 모든 남자들을 다 불러 모았다. 이는 이 상태 속의 모든 진리를 의미한다. 이는 “남자들(viri)”의 의미가 진리들이다로부터; 그리고 “그곳, 장소(place)”의 의미가 상태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리고 잔치를 벌였다. 이는 개시함을 의미한다. 이는 “잔치”의 의미가 자기 것이 되게 함과 결합함이다로부터; 현재의 경우는 개시함인데, 그 이유는 개시함은 결합에 앞서 있기 때문, 또한 그것을 서약하고 증명하는 것도 개시함 뒤를 잇기 때문이다. 의미적이고 표현적 의미 안에 있었던 고대인들이 벌린 잔치는 선행 속에 있는 서로의 사랑을 개시함밖에 더 다른 것은 의미하지 않았다. 결혼 잔치(nuptial feast) 역시 부부의 사랑(conjugial love)을 개시함을 의미했다; 그리고 거룩한 잔치들은 영적인 사랑과 천적인 사랑을 개시함을 의미했다; 그리고 잔치에서의 먹고 마심 때문에 잔치는 자기 것 되게 함과 결합을 의미했다 (3734항). 이 의미 때문에 주님께서도 똑같은 의미에서 말하셨다:
많은 이들이 동과 서로부터 올 것이다, 그리고 아브라함, 이삭, 그리고 야곱과 함께 천국들의 왕국에서 앉을 것이다 (마. 8:11).
그리고 다른 구절에서 제자들에게:
너희는 내 왕국에서 내 식탁에서 먹고 마실는지 모른다 (눅. 22:30).
그리고 그분이 성찬식을 설립하셨을 때, 말하셨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내가 내 아버지의 왕국에서 너희와 더불어 그것을 새로이 마시는 그 날까지, 나는 이후로부터 포도나무의 열매로부터 마시지 않을 것이다 (마. 26:29),
위 구절을 읽으면서 “주님의 왕국에서 앉는 것, 먹는 것, 그리고 마시는 것”이 앉는 것, 먹는 것, 마시는 것을 의미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 대신 이 왕국에서 존재하는 어떤 것을 의미할 것이다고 최소한 판단할 것이다. 이는 사랑으로부터의 선과 신앙으로부터의 진리를 자기 것 삼음을 의미한다; 고로 이것은 영적이고 천적인 식품(food)이라 불리우는 것을 의미한다. 위의 구절만 보아도 주님께서 말하신 모든 말씀에는 내적 의미가 있음이 분명해진다, 하여 내적 의미를 알지 못하면 아브라함, 이삭, 야곱과 더불어 그분의 왕국의 식탁에서 앉아 먹고 마심이 의미하는 것을 알 도리가 없다, 또한 그분의 아버지의 왕국에서 그 포도나무의 열매로부터 그들과 더불어 마심이 의미하는 것도 알지 못한다; 성찬식에서 빵을 먹고, 포도주를 마심이 뜻하는 것도 알아질 수 없다.

그리고 저녁 때가 되자. 이는 아직까지는 상태가 불명료함을 의미한다. 이는 “저녁”이 불분명한 상태(희미한 상태)를 의미한다로부터 분명해진다. 자기들에 잘 어울리는 의식을 지녔던 고대인들 사이에서, 저녁에 만들어진 잔치, 즉 저녁 만찬은 결합에 앞서 있는 개시함밖에 더 다른 것을 의미하지 않았다. 비록 이 개시함이 결합을 예상되게 하고 있지만 엄밀히 말하면 이 개시함은 결합함에 비교하면 불분명한 상태이다. 다시 말해, 인간이 진리 안으로, 그로부터 선 안으로 들어감이 개시되는 동안에서 그가 배운 모든 것이 그에게 불분명해 있다; 그러나 선이 자기와 결합될 때, 그리고 이 선으로부터 진리를 중요시할 때, 모든 것이 그에게 명료해져 온다, 그리고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명료해진다. 그 이유가 그는 지금 그것이 존재하는지 여부에 대해서, 그리고 이것이 그렇다는 것에 대해 더 이상 의심하지 않기 때문이다.
인간이 이 상태 수준에 있을 때, 그때 그는 무수히 많은 것을 알기를 시작한다, 그 이유가 이제 그는 중심으로부터 변두리에 이르기까지 아우르는 선과 진리에 관한 것을 믿고 지각함으로부터 진행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가 진행해감에 비례하여 그는 빙둘러 있는 것들, 그리고 더 폭넓게 많은 것을 보게 된다. 그 이유가 그는 바깥 경계선쪽으로 더욱 밀고 나갈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그 이후 경계선 내의 공간에 있는 주제들의 각각을 중심의 주제나 마찬가지로 하여 새로운 환경을 설정해 간다. 이런 와중에 선으로부터의 진리의 빛은 측량할 수 없을 정도로 증가하는 바, 계속 빛을 발하는 발광체인 듯 되어간다. 그 이유가 이때 인간은 주님으로부터 있는 천국의 빛 안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이 과연 그런지, 과연 존재하는지 토론만해댈 뿐 의심을 떨치지 못하는 이들과 더불어서는 무수한 것들이 한 조각도 나타나지 않는다; 그들에게 일반적이든, 특수적이든 모든 것들이 불분명해 있다. 그들에게는 이것이 실제로 존재하는지보다 이것의 존재가 의심스럽다하는 것에 집착하고 있다. 어떤 것이 존재하는지 여부를 놓고 재간을 부리는 자를 두고 슬기로운 자라 부르는 것이 작금의 현실이다.
예를 들면: 말씀에 내적 의미가 있다, 이것이 신비적이라 불리운다는 명제를 두고 생각해보자: 이것이 믿어질 때까지, 인간은 말씀의 내적 의미에 있는 무수한 것들의 조금도 알 수가 없다. 이것은 무한한 다양함으로 온 천국을 채울만큼 무수하지만 알아질 수 없다는 말이다. 또 다른 예를 들면, 신섭한 섭리에 관하여 추론하는 이들이 그것은 보편적일 뿐, 개별적이지는 않다고 믿는다면, 그는 섭리의 셀 수 없이 많은 것들의 얼마라도 납득해보는 것이 불가능하다. 또 다른 예를 들면, 누군가가 선 안에 있는 것이 가능한지 여부를 추론하는 자가 있는데, 그가 인간의 의지가 근본적으로 타락되어 있음을 볼 경우, 인간은 거듭남에 관련한 모든 비밀들을 결코 알 수 없다, 또는 새로운 의지가 주님에 의해 타락한 인간에게 심어질 수 없다, 또는 이런 심어짐에 관련한 비밀들을 알 수가 없다고 판단해버린다. 이런 몇 예를 들추어보아도 이런 인물이 얼마나 내적 의미에 대해 희미한 상태에 있는지를 어림하게 해준다, 더욱이 이들은 지혜의 문턱조차 넘지 못한다.

그리고 그는 그의 딸 레아를 데려왔다, 그리고 그녀를 그에게 데려왔다, 그리고 그가 그녀에게 갔다. 이는 아직까지는 외적 진리에 대한 애착과 만 결합되었음을 의미한다. 이는 레아의 표현이 외적 진리에 대한 애착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녀를 그에게 데려옴”은 부부의 결합 같은 것이 의미되는 것이 분명하다. 여기서의 경우는 이렇다: 내적 진리에 대한 애착 안에 있는 인간, 즉 주님의 왕국에 관한 내면의 비밀들을 알기를 바라는 이들이라 해도 처음 때에서는 이 비밀들이 그와 더불어 결합되어 있지 않다, 설사 그가 그것들을 알고 인정하고, 믿고 있는 듯 해도 결합된 상태는 아니다는 말이다, 그 이유가 아직까지는 그와 더불어 현존하는 것은 세상적이고 육체적인 애착들이고, 이 애착들이 그로하여금 이런 비밀들을 받아들이고 믿는 듯 하게 만들지만, 실상 이 애착들이 현존하는 만큼, 의문 중인 내면의 진리들은 결합되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 선으로부터의 진리에 대한 애착, 그리고 선에 대한 애착만이 이 비밀들에 그 자체 꼭 들어맞는다; 그리고 인간이 애착들 안에 있는 만큼에서, 내면의 진리는 그 사람에게 결합되어 있다, 그 이유가 진리는 선의 그릇이기 때문에서 이다.
주님 역시 천적인 진리와 영적인 진리(즉 내면의 진리)는 진짜 애착 외에는 결합되어지지 않도록 설비해두셨다. 이런 이유로 선으로부터의 진리에 대한 일반적 애착, 그 안에 심어진 진리들은 일반적 진리들밖에 더 아니다. 진리의 상태는 선의 상태에 일치하여 있다, 즉 신앙의 상태가 선행의 상태와 일치하여 있다. 예를 들면: 사악한 자가 주님은 보편적 천국을 통치하신다는 것, 또한 천국은 서로의 사랑과 주님을 사랑함이다는 것; 또한 이런 사랑으로 주님과의 결합이 있고, 지혜와 행복도 있는다는 것, 등등을 아는 것은 가능하다. 더 나아가 그들이 그것이 맞다는 확신까지 가지는 것도 가능하다; 그럼에도 신앙의 진리가 그들과 결합되어지지 않을는지 모른다, 더욱이 사랑의 선이 그들과 결합해 있지 않을는지 모른다. 어쨌든 열매로 그 나무를 알 듯, 결합의 여부는 당사자의 생활을 보면 알려진다. 이들이 지녔고 믿고 있는 듯 나타나는 것들은 포도송이들을 돌이 없고 비옥한 땅 안에 매장했을 때 단지 곰팡이로 해서 용해되고 마는 수준의 것, 또는 밤중의 도깨비불이 아침에 해가 오르면 흔적 없이 되는 수준일 것이다. 이에 관하여는 주님의 자비로부터 더 말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라반은 그녀에게 자기의 하녀 질바를 주어서 그의 딸 레아의 하녀가 되게 하였다. 이는 부수적인 수단들인 외적인 묶음(bond)들 또는 외적인 애정들을 의미한다. 이는 “하녀”의 의미가 외적인 애착들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라반이 그녀에게 주었다”가 그것들이 공통의 줄기로부터의 방계적인 선으로부터 이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그 이유는 공통의 선이 이런 애착들의 근원이기 때문이다. 그것들이 외적인 묶음들이라 불리우는 이유는 모든 애착들이 묶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인간을 묶는 것은 그가 지닌 애착들 외에 더 다른 것은 없다. 각 인간이 지닌 애착은 당사자에게 묶는 끈으로 실제로 나타나는 것은 아닌데도 그렇게 불리우는 이유는 애착이 인간을 통치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당사자로 그가 애착하는 것에 묶여 있게 한다. 내적인 애착들은 내적인 묶음들이라 불리우고, 진리와 선에 대한 애착은 양심의 묶음들이라 불리운다. 이 내적인 묶음에 외적인 애착, 외적인 묶음들이 상응한다. 거듭나는 이들이 외적인 것들을 수단으로 내적인 것들을 받아들일 때, 이 받아들임의 상태가 여기서 취급되고 있다, 즉 라반의 하녀를 그의 딸 레아의 하녀로 주었다고 말해진 것, 이는 이와 같은 애착들은 받아들임의 수단을 섬기도록 주어져 있다를 의미하고 있다. 이 애착들은 가장 외적인 애착들, 이는 육체의 애착들 같은 것임은 레아가 외적 진리에 대한 애착이다는 사실로부터 분명해진다. 이 주제 또한 주님의 신성한 자비로부터 차후 더 언급할 것이다.

25, 26절. 아침이 되자 그것은 레아였다. 그리고 그는 라반에게 말했다, 나에게 한 이런 처사는 대체 무엇입니까? 나는 라헬을 위하여 당신에게 봉사하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왜 저를 속이셨습니까? 26 그리고 라반은 말했다, 이곳에서는 큰 딸에 앞서 작은 딸을 주는 식의 행동은 하지 않는다. “아침이 되었다”란 그 상태에서 있는 계발을 의미한다. “보라 그것은 레아였다”란 외적 진리와 결합했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는 라반에게 말했다, 나에게 한 이런 처사는 대체 무엇입니까?”란 분개함을 의미한다. “나는 라헬을 위하여 당신에게 봉사하지 않았습니까?”란 내적 진리에 대한 애착을 위해 애써왔음을 의미한다. “왜 저를 속이셨습니까?”란 더 크게 분개함을 의미한다. “라반이 말했다, 이 곳에서는 … 행동은 하지 않는다”란 상태가 그와 같지 않음을 의미한다. “큰 딸에 앞서 작은 딸을 주는 것”이란 내적 진리에 대한 애착이 외적 진리에 대한 애착보다 먼저 진행되는 것을 의미한다.

“아침이 되었다” 이는 그 상태에서 있는 계발을 의미한다. 이는 “아침”의 의미가 계발됨이다로부터 분명해진다; 그리고 여러 때(아침, 정오. 저녁 등등)가 상태들을 의미하는 바, 아침(morning-tide, morning) 역시 상태들을 의미한다. 계발은 현재 뒤잇는 것, 즉 그는 외적 진리만과 결합했음을 인정했다와 관련이 있다.

보라 그것은 레아였다. 이는 외적 진리와 결합했음을 의미한다. 이는 레아의 표현이 외적 진리에 대한 애착이다로부터 분명해진다. 이 말들이 이 애착과 결합함을 의미하는 것은 분명한데, 그 이유는 여인으로 주어진 자는 라헬 대신 레아였기 때문이다. 이것이 포함하는 것은 앞에서 말한 것, 즉 내적 진리와 결합함에 앞서 외적 진리와 결합함에 대해 말한 대목에서 분명해진다.

그리고 그는 라반에게 말했다, 나에게 한 이런 처사는 대체 무엇입니까? 이는 분개함을 의미한다. 이는 이 구절의 말과 이어지는 말에 있는 애착으로부터 분명해진다. 분개함의 애착이 야곱 역사의 시리즈에 따라 이 구절의 말투 안으로 낙하하고 있다. 말씀의 내적 의미를 구성하는 것은 두 가지가 있는데, 그것은 애착과 실제의 것이다; 말씀의 표현 안에 감추여놓인 애착은 인간에게 나타나지 않는다. 그것은 말씀의 가장 깊은 곳에 저장되어 있다; 이렇게 저장될 뿐 인간에 나타나지 못하는 이유는 인간이 육체의 삶 동안 그는 세상적, 육체적 애착 안에 있기 때문, 이 애착은 말씀의 내적 의미 안에 있는 애착과 공통되는 것이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이 후자가 영적, 또는 천적 사랑에 대한 애착들이고, 이것을 지각할 수 있는 자는 거의 없는데, 아마 지독하게 단순한 인물이라면 스쳐지나가는 수준의 약간은 가능할 수 있다. 그 외의 인간은 진짜(순수한) 애착이 무엇인지조차 알 수 없다. 어쨌든 이 영적, 천적 애착은 주님을 사랑함과 이웃을 향한 선행 안에 포함되어 있다. 이 사랑 안에 있지 않은 이들은 비록 이 애착이 온 천국을 채우고, 말할 수 없는 다양함 안에 있지만 이 애착을 놓고 그것은 아무 것도 아니다고 믿는다. 이 다양함들과 더불은 이런 애착들은 말씀의 내적 의미 안에서 각각의 시리즈로, 각각의 표현으로, 한 음절에서 조차에도 저장되어 있다. 그러면서 단순한 선 안에 있는 이들, 동시에 순진 안에 있는 이들이 말씀을 읽을 때 빛을 발한다. 이것은 무한한 다양함으로 있다.
천사들 앞에서 빛을 발하는 애착에는 두 종류가 있다. 그것은 진리에 대한 애착과 선에 대한 애착이다. 진리에 대한 애착은 영적 천사들 앞에서, 선에 대한 애착은 천적 천사들 앞에서 빛을 발한다. 선에 대한 애착, 이것은 주님을 사랑함이고, 인간에게 말로 표현할 수 없다. 그러므로 인간이 납득할 수 없다; 그러나 진리에 대한 애착, 이는 서로의 사랑인데, 이는 지극히 일반적 수준에서 어느 정도만큼에서 인간에게 납득될는지 모른다. 그나마 순수한 서로의 사랑에 있는 이들에 의해서이다, 그리고 이것은 어떤 내적인 지각으로부터 있지 않고, 희미한 수준의 지각으로부터 이다.
예로, 여기서 취급된 분개함의 애착에 주목해보면, 선행의 애착이 무엇인지 모르는 자는 누구든지, 그가 이 선행 안에 있지 않은 결과로, 이 구절의 분노에 대해 누군가가 자신에게 악을 행할 때, 즉 노염의 분노의 수준밖에 더 다른 생각은 가질 수 없다. 천사들은 이런 분노를 가지지 않는다, 그러나 이와는 아주 다른 분노, 이는 노염의 분노가 아닌 것, 즉 열정의 분노, 악이 들어 있지 않은 분노, 미워함, 복수함 같은 것에서 아주 멀리 떨어져 있는 분노, 또는 악을 위해 악으로 되돌아가는 식, 즉 마치 천국이 지옥으로부터 있는 식의 분노는 없다. 그러므로 사실상 이 구절의 분노는 어떤 단어로도 표현할 길이 없다.
이는 다른 경우에서도 비슷한데, 선과 진리로부터 있는 애착, 또는 선과 진리 속에 있는 애착에 주목해보아도 비슷하다. 이는 천사들이 목적들 안에만 있다는 사실, 또는 목적들의 쓰임새(목적들을 위한 수단들) 안에서만 있다는 사실로부터 분명해진다. 목적들은 사랑들, 또는 애착들밖에 더 아니다; 그 이유가 인간이 사랑하는 것을 그는 목적으로 간주하고 중요시하기 때문이다. 이럴진대, 천사들은 말씀 안에 있는 것들의 애착 안에 있다; 이 애착들은 다양함과 더불어 있고, 다양한 종류의 각 애착에 따라 천사들이 있는 것이다. 이런 사항만 들추어도 말씀이 얼마나 거룩한지는 분명해질 것이다. 그 이유가 신성한 사랑 안에, 즉 신성으로부터 있는 사랑 안에, 그러므로 말씀에 포함된 것들 안에 거룩함이 있다.

나는 라헬을 위하여 당신에게 봉사하지 않았습니까? 이는 내적 진리에 대한 애착을 위해 애써왔음을 의미한다. 이는 라헬의 표현이 내적 진리에 대한 애착이다로부터; 그리고 “봉사함”이 애써왔음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왜 저를 속이셨습니까? 이는 더 크게 분개함을 의미한다. 이는 앞의 설명만 가지고도 충분할 것이다.

라반이 말했다, 이 곳에서는 … 행동은 하지 않는다. 이는 상태가 그와 같지 않음을 의미한다. 이는 “이곳, 장소”의 의미가 상태이다로부터 분명해진다. 이로부터 “우리의 장소에서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가 상태가 이와 같지 않다를 의미함이 분명하다.

큰 딸에 앞서 작은 딸을 주는 것. 이는 내적 진리에 대한 애착이 외적 진리에 대한 애착보다 먼저 진행되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여기서 “작은 딸”인 라헬의 표현이 내적 진리에 대한 애착이다로부터; 그리고 여기서 “첫 출생, 큰 딸”인 레아의 표현이 외적 진리에 대한 애착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로부터 “첫 출생에 앞서 둘째를 주는 것”이 내적 진리에 대한 애착이 외적 진리에 대한 애착에 앞서 진행되는 것을 의미함이 분명해진다. 이는 방금 앞에서 간략히 설명했었다; 여기서 조금 더 설명을 보태보자. 인간의 상태를 모르는 자는 인간이 외적, 내적 진리 모두에 친숙해 있고, 자기의 기억 안에도 들어와 있다면 내적인 진리 뿐만 아니라 외적인 진리와 다함께 결합한다고 믿는다. 그럼에도 인간이 그것들에 사는 때까지 결합은 없다, 그 이유가 삶이 결합을 보여주고 결합했음을 증명하기 때문이다.
위의 사항, 그리고 어린 시절로부터 인간 안에 심어진 경우에서도 진리인 것은, 이것들은 그가 그것에 따라 살 때까지 그의 자기 자신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다시말해 애착으로부터의 것들 안에 그의 의지가 빨려들면, 그는 자기의 기억 속의 지식으로부터, 또는 교리로부터 더 이상 삶으로 가져다놓지 않고, 그에게는 알려지지 않은 어떤 즐거움으로부터 애착 속의 것이 삶 안에 자동적으로 놓여진다 (삶 자체가 애착인 셈이다). 이는 마치 자신의 기질, 천성이 그러해서 있는 듯 여겨질 정도이다; 어쨌든 모든 이는 번복되는 사용, 습관 같은 것에 의해서도 이런 속성을 자신을 위해 획득하기도 한다. 그리고 이것은 그가 배웠었던 것으로부터 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자신이 교리를 수단으로 배워왔었던 것들이 외적 인간으로부터 내적 인간 안으로 은근히 심어질 때까지 진리와 더불은 결합은 거행될 수 없다. 진리들이 내면의 인간 안에 있을 때, 그는 기억으로부터 진리의 실행을 더 이상 하지 않고, 그의 자기 자신의 본성으로부터 실행한다, 결국 그의 내면의 기억 안에 새겨져 있어, 어떤 것을 실행할 때 내면의 기억과 동시적으로 행동 안으로 놓여진다; 이렇게 나타날 때 타인이 이런 행동을 보면, 그가 천성적으로 그런 소질을 가진 듯 여겨지게 한다. 이것은 인간이 어린 시절에 배웠던 언어들로부터, 또는 추론력으로부터, 마찬가지로 양심으로부터 보여질런지 모른다. 이로부터 분명해지는 것은, 내면에 있다 해서, 그것이 인간과 결합된 것이 아니고, 그것이 삶 속에서 나타날 때까지 인간과 결합한 것은 아니다는 것이다. 이 주제를 두고 주님의 신성한 자비로부터 따로 말해볼 기회가 있을 것이다.

27-30절. 이 주간을 채워라, 그리고 우리는 너에게 그녀 역시 주겠다, 너는 칠 년을 다시 나에게 봉사해야 한다. 28 그리고 야곱은 그렇게 했다, 그리고 이 주간을 채웠다, 그리고 그는 그에게 여인으로 그의 딸 라헬을 주었다. 29 그리고 라반은 그의 딸 라헬에게 그의 하녀인 빌하를 그녀의 하녀로 삼게 주었다. 30 그리고 그는 라헬에게도 갔다, 그리고 그는 레아보다 라헬을 더 사랑했다, 그리고 그에게 칠 년을 더 봉사했다.

이 주간을 채워라. 이는 끊임없는 노력(study)이 더 계속됨을 의미한다. 이는 “채움”의 의미가 봉사함, 또는 봉사함으로 채우는 것, 고로 끊임없는 노력이다; 그리고 “주간(week)”의 의미가 상태, 그리고 전체 기간이다로부터; 그러므로 현재의 경우, 계속해서 일어나는 상태와 기간, 결과적으로 계속적인 것이 의미된다. “주간”의 의미에 주목해보면, 이것은 “달(month)”의 의미와도 같다, 즉 이것이 단수로 언급될 때, 이것은 이전 것의 끝, 그리고 뒤잇는 상태의 시작, 고로 새로운 상태, 고로 시작으로부터 진행하여 끝까지에 이르는 바, 전 기간을 채움을 의미한다. “주간”이 모든 때들 같이 상태와 기간을 의미하는 이유는 모든 상태들 역시 그것들의 기간을 가지기 때문이다; 즉 시작, 그리고 발전해감, 그리고 끝을 가진다는 말이다; 그럼에도 다른 삶에서 이것들은 때들로 지각되지 않고, 상태들과 상태의 회전으로 지각된다. 여기서 분명해지는 것은, 고대인들이 주간을 수단으로 이해한 것은 모든 기간, 즉 날, 해, 시대 이든, 그 기간이 크든 작든 7로 구분되는 모든 기간으로 이해했다는 것이다. 여기서는 칠 년의 기간이 말해졌다; 고대인들과 더불어 일곱은 거룩한 것을 의미했다, “주간”은 거룩한 시기를, 또한 기간의 거룩함을 의미했다.

그리고 우리는 너에게 그녀 역시 주겠다, 너는 칠 년을 더 나에게 봉사해야 한다. 이는 그런 다음 끊임없는 노력의 상태가 가득 차 있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봉사, 봉사함의 의미가 끊임없는 노력이다로부터; 그리고 “칠 년”은 “주간, 칠 일”과 같은 의미인 바, 전체 기간이다로부터; 고로 충만된 상태, 이것 역시 거룩하다. 이 표현, “우리는 그녀 역시 줄 것이다”는 내적 진리에 대한 애착과 결합함이 있을 것이다를 의미한다. 내적 의미에서 “봉사함”이 끊임없이 노력함인 이유는 외적 인간의 노동은 내적 인간 안에서는 끊임없는 노력이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끊임없는 노력(study, 공부함)은 마음의 노동이라 불리운다.

야곱은 그렇게 했다, 그리고 이 주간을 채웠다. 이는 이에 대한 결과를 의미한다. 이는 “주간을 채움”의 의미가 끊임없는 노력의 계속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리고 이 노력의 결과가 뜻해짐이 분명하다.

그리고 그는 그에게 그의 딸 라헬을 여인으로 주었다. 이는 지금 선이 내면의 진리에 대한 애착과 결합했음을 의미한다. 이는 야곱이 자연 평면의 선을 표현한다로부터; 그리고 라헬이 내면의 진리에 대한 애착을 표현한다로부터; “여인으로 그녀를 주는 것”은 결합을 의미한다. 모든 선이 진리와 결합함은 처음에 외견의 외면으로부터 내면으로 진행하고, 마지막으로는 그것의 가장 깊은 측면까지 진행하는데 이것이 질서이기에. 여기서 내면의(interior) 진리에 대한 애착이라고 말해지고 있다. 그 이유가 진리 속에 있는 애착 자체는 선으로부터 안으로 흘러들기 때문이다. 선이 내적(internal) 진리에 대한 애착과 결합함은 자연 평면의 선이 합리적 진리와 결합됨에 있고, 이를 통하여 합리적 선과도 결합되어 있을 때 처음동안에서 거행된다. 이 결합이 야곱이 열두 아들의 출생 이후 아버지와 어머니의 집으로 돌아가는 모습으로 표현되는데, 이는 나중에 그 대목에서 살핀다.

그리고 라반은 그의 딸 라헬에게 그의 하녀 빌하를 그녀의 하녀로 주었다. 이는 묶음 또는 도움을 주는 수단들인 외면의 애착들을 의미한다. 이는 이미 살폈다. 라헬의 하녀 “빌하”가 외면의 애착들을; 그리고 레아의 하녀 “질바”가 외적 인 애착들을 의미하는 이유는 라헬에 의해 내적 진리에 대한 애착이; 레아에 의해 외적 진리에 대한 애착이 표현되기 때문에서 이다. 외면의 애착들은 내적인 것들에 도움이 되는 자연적인 애착들이다. 외면의 애착들이 진리가 선과 결합하는데 쓸모가 있는 이유는 이 애착들을 수단으로 하지 않으면 교리 속에 있는 어떤 교리도, 기억 속의 어떤 지식도 인간 안으로 들어갈 수 없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애착 안에 생명이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애착들 없이 단 한 절도 생각하거나 발음조차 할 수 없다. 이를 더 흥미있게 관찰하는 사람이라면, 금새 알아차리는 것은 애착 없는 음성은 자동 조작되는 음성, 생명 없는 음성임을 지각할 것이다. 고로 그 안에 있는 애착의 양과 질에 따라 그 안에 있는 생명의 양과 질도 있다. 이는 선이 없는 진리가 어떤지를; 그리고 애착은 선으로부터 진리들 안에 있다는 것도 보여준다.
인간의 이해력의 본성을 좀 더 세심히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눈치채는 것은, 의지력이 이해력 안에 있지 않으면 이해함은 없다는 것, 즉 이해력의 생명은 의지 안에 있다는 것이다. 다시 이것은 선이 없는 진리는 어떤지를, 그것은 생명 없음이다는 것, 따라서 진리는 그것의 생명을 선으로부터 받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 이유가 진리는 인간의 지적 부분에, 선은 인간의 의지 부분에 속하기 때문이다. 이 모두로부터 선으로부터 있는 선행이 없는 신앙은 어떨지를, 선행의 선이 없는 신앙의 진리들은 죽어 있다는 것을 금새 알아챌 수 있다. 그 이유는 이미 말한 대로, 진리들 안에 있는 애착의 품질과 양이 진리들의 생명과 품질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리들은 선행의 선이 없을 때 조차에서도 살아 있는 듯 나타나는 것은 자기를 사랑함과 세상을 사랑함으로부터 있기 때문이다. 이 사랑은 생명이 없어 영적 의미에서 죽음이라 불리우고 지옥의 생명이다. 애착은 계속 사랑하고 있는 것을 뜻한다.
이상 살핀 바로부터 애착들은 진리가 선과 결합하는데 쓸모 있는 수단들이다는 점; 그리고 애착들이 진리들을 받아들이게 한다는 것, 또한 진리들을 질서 안으로 배치한다는 것이다. 즉 진짜 애착들인 주님을 사랑함과 이웃을 향한 사랑으로부터 있는 애착들은 천국의 질서 안으로 배치된다; 그러나 자기를 사랑함과 세상을 사랑함으로부터 있는 애착들은 지옥의 질서 안으로 배치된다; 즉 천국의 질서에 정 반대되게 배치된다는 말이다.
가장 외적인 애착들은 신체 속의 것들인데, 이것들은 식욕과 (육체적) 쾌락이라 불리운다. 그 다음 내면의 애착들은 자연적 마음 속에 있다; 그러나 내적 애착들은 합리적 마음 속에 있고, 영적인 애착들이라 불리운다. 이 마지막에, 즉 마음 속의 영적인 애착들에 교리적 진리들은 외면, 그리고 가장 외적인 것, 또는 자연적이고 육체적인 애착들을 수단으로 받아들여진다. 그런고로 이 애착들은 쓸모 있는 수단들이고, 이것이 라반에 의해 레아와 라헬에게 주어진 하녀에 의해 표현되어 있다. 이 하녀들의 존재가 여기서 “라반”의 하녀라고 말해지는데, 이는 그 애착들이 라반에 의해 표현되는 선에 근원을 가졌음을 의미한다. 라반이 표현하는 선은 이미 살폈다. 처음 배워진 진리들은 이와 다른 애착들을 수단으로 은근히 심어지지 않는다; 진짜 애착들은 시간이 흐르면서 와지는데, 인간이 선으로부터 행동하기 전에는 와지지 않는다.

그리고 그는 라헬에게도 갔다. 이는 내적 진리에 대한 애착과 결합함을 의미한다. 이는 “…에게 감”의 의미가 결합이다는 것; 그리고 라헬이 내적 진리에 대한 애착이다로부터 알려진다.

그리고 그는 레아보다 라헬을 더 사랑했다. 이는 외적 진리보다 내적 진리를 더 사랑함을 의미한다. 이는 레아와 라헬의 표현으로부터 분명해진다; 즉 라헬은 내적 진리, 레아는 외적 진리이다.

그리고 그는 그에게 또 다른 칠 년을 봉사했다. 이는 거룩한 끊임없는 노력을 의미한다. 이는 “봉사함”의 의미가 끊임없는 노력이다로부터, 그리고 “일곱”의 의미가 거룩인 것이다로부터 알려진다. 여기서 거룩한 끊임없는 노력이라 말한 이유는 끊임없는 노력을 통하여 내적인 진리들은 선과 결합하기 때문인데, 그 이유는 모든 내적인 진리들은 주님을 바라보고 있고 그분을 사랑함을 통하여 선과 결합하기에 이 사랑함은 거룩 자체이기 때문이다.

31절. 그리고 여호와께서는 레아가 미움받는 것을 보셨다, 그리고 그분은 그녀의 자궁을 여셨다, 그리고 라헬은 불임이었다.

그리고 여호와께서 보셨다. 이는 주님의 예견과 섭리를 의미한다. 이는 “보다”가 주님을 서술할 경우, 이는 예견과 섭리를 의미하는데, 이에 관하여는 32절에서 르우벤의 이름이 “보다”로부터 주어지는 바, 거기서 자세히 말할 것이다.
예견과 섭리를 일반적 측면에서 주목해보면, 예견은 인간 편에, 섭리는 주님 편에 적절한 표현이다. 주님께서는 영원으로부터서 인류가 어떻게 있을지를, 그 인류의 각각인 인간의 품질이 어떻게 있을지를, 그리고 악은 계속적으로 불어나리라는 것, 하여 인간 스스로 지옥으로 머리를 디밀고 돌진하고야 말리라는 것을 예견하셨다. 이렇기 때문에 주님은 인간이 지옥에 디민 머리를 빼내 천국으로 돌아서게 해줄런지 모를 수단들을 설비하셨다, 뿐만 아니라 그분은 섭리하심으로부터 계속적으로 인간을 돌려세워 인도하시었다. 또한 주님이 예견하신 것은, 어떤 선도 인간 안에서 뿌리를 내리려면 그가 자유함에서가 아니면 불가하다는 것, 자유함에서 뿌리내리지 않은 것은 무엇이든 악과 시험이 접근하자 마자 사라져버리고 말 정도로 너무나 허약하다는 것이다. 또한 주님이 예견하신 것은, 인간 스스로, 또는 그의 자유함으로부터 (네가 알아서 잘해라 라고 인간 자신에게 무작정 맡겨 놓을 때) 인간은 최고로 깊은 지옥 안으로 기울고야 말 것이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만일 인간이 천국쪽으로 자신을 인도할 수 있게 그의 자유함에서 허용하지 않는다면, 지옥에 가더라도 최악의 지옥은 면하게 해줄 수 있는 설비들을 마련하시는 것이다; 그러나 만일 인간이 선쪽으로 자유함에서 인도되기를 허용한다면, 그는 천국으로 인도될는지 모른다. 이런 사항들이 예견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섭리가 무엇을 뜻하는지를 보여준다, 그리고 미리 보여진 무엇이 설비되었는지도 알게 한다.
그리고 이상 살핀 바로부터 알게 되는 것은, 주님은 예견하지 못한다고 하던가, 또는 그분은 우리의 낱개에 속하는 사항들까지는 보지 못한다던가, 이런 사항들을 그분이 예견해서 인도해주지 못한다 라고 믿는 이들이 얼마나 틀렸는지 이다. 진리인즉, 주님의 예견과 섭리는 인간과 더불은 지극히 미미한 낱개적인 사항들 안에 있다는 것이다. 이런 사항들은 수 백만 중의 하나로부터 이어서 너무나 미세하기 때문에 인간의 생각이 오히려 자신 속의 이것을 납득하지 못한다. 그 이유가 인간의 삶의 아주 작은 순간도 영원으로 이어지는 결과들의 시리즈를 포함하기 때문이다, 즉 매 순간의 것들은 뒤잇는 것에 새로운 시작으로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인간의 이해력과 의지력 모두에서 그러하다. 주님께서는 영원으로부터 인간의 품질이 무엇일지를, 이것이 영원쪽으로 무엇일지를 미리 보셨기에, 그분의 섭리는 지극히 작은 낱개들 사항에서 있게 되었는 바, 인간을 선의 품질을 지니는 쪽으로 구부리시고 통치하신다. 이 수단은 인간의 자유를 적절히 조절해가심 이다. 이 주제에 관하여 차후 주님의 신성한 자비로부터 더 살필 것이다.

레아가 미움을 받았다. 이는 외적 진리에 대한 애착은 신성으로부터 더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그만큼 덜 귀여워해짐을 의미한다. 이는 “미워함”이 덜 귀여워함이다로부터; 그리고 레아의 표현이 외적 진리에 대한 애착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외적 진리들은 내적 진리들보다 신성으로부터 더 멀리 있다는 것은 외적인 것들은 내적인 것들로부터 온다는 사실로부터 알는지 모른다; 그 이유가 외적인 것들은 내적인 것들과 하나로서 나타나기 위해 수많은 내적인 것들로 구성된 형상들과 형체들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외적인 것들의 본성상 이것은 신성으로부터 더 멀리 있다; 그 이유가 신성은 가장 깊은 측면에, 또는 가장 높은 측면에 있기 때문이다. 주님께서는 가장 높은 데로부터 인간의 가장 깊은 것들 안으로 흐르시고, 이를 통하여 인간의 내면들 안으로, 그리고 이를 통하여 외적인 것들 안으로 흘러드신다. 고로 그분은 직, 간접적으로 흘러드시는 셈이다. 그리고 외적인 것들은 신성으로부터 더 멀리 떨어져 있는 바, 이로 인해 그것들은 비교적으로 질서 밖에 있어, 그것들은 내적인 것들과 달리 질서쪽으로 환원되도록 자신들을 허용하지 않는 경향이 강하다. 이는 씨를 예로 들어도 마찬가지이다; 씨는 바깥(껍질)보다 안쪽이 더 완전하다, 안쪽은 식물 전체를, 또는 나무 전체를 각각의 질서에서, 그것의 잎과 열매를 포함해 생산할 수 있다; 외적인 형체들은 다양한 원인으로부터 상처를 쉽게 받지만 씨의 내적, 또는 가장 깊은 형체들은 그렇지 않고, 이것은 더 내면적이고 더 완전한 본성 안에 있다. 이 경우는 인간의 내적 측면과 외적 측면과도 비슷하다; 그러므로 인간이 거듭나질 때, 그는 자연 평면이 거듭나기 전, 합리적 평면이 먼저 거듭난다; 그리고 자연 평면의 거듭남은 꽤 나중에 가서야, 그리고 더욱 힘들게 거듭난다, 그 이유는 자연 평면 안에는 질서 안에 있지 않은 많은 것들이 있고, 동시에 육체와 세상으로부터 상처를 받기 쉽게 노출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렇기에 이런 것들이 본문에서 “귀여움을 받지 못한다”라고 말해진다; 그러나 그것들이 내적인 것들에 일치하는 한, 그리고 그것들이 생활과 그것들 안에 있는 내적인 것들을 바라보는데 도움을 주는 한, 또한 거듭남에 이바지하는 한, 그만큼 그것들도 역시 귀여움을 받을 것이다.

그리고 그분은 그녀의 자궁(태)을 여셨다. 이는 거기로부터 교회들의 교리가 왔음을 의미한다. 이는 “자궁을 여는 것”, 또는 임신함과 아이를 낳음의 의미가 교회가 되는 것이다로부터 분명해진다; 그리고 이것이 교리적인 것들을 수단으로 결과되기 때문에, 그러므로 “자궁을 여는 것”은 교회들의 교리들이 의미된다. 이 경우가 어떻게 있는지는 아래에서 살피게 된다.

그리고 라헬은 불임이었다. 이는 내면의 진리는 받아들여지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이는 라헬이 내면의 진리에 대한 애착을 표현한다로부터; 그리고 “불임”의 의미가 거기로부터(내면의 진리에 대한 애착으로부터) 교리들이 없었다, 결과적으로 교회들이 없었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 이유가 이 서술은 레아에 대해서 한 말, 즉 “여호와께서 그녀의 태를 여셨다”, 이를 수단으로 거기로부터(외면의 진리에 대한 애착으로부터) 교회들의 교리들이 왔다가 의미된 것에 반대되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내면의 진리들이 받아들이지 않는 이유는, 내면의 진리들은 인간의 신앙을 초월해 있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내면의 진리들은 인간의 생각들 안으로 낙하하지 않기 때문. 이 진리들은 외적인 나타남에 따라 있지도 않기 때문, 즉 인간이 자신들을 이끌도록 허용하기 좋아하는 감각의 오류들에 따라 있지 않기 때문, 이것들은 인간의 생각들과 어느 정도라도 일치한다고 믿어지는 것이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 내면의 진리이다, 즉 다른 삶에는 시간과 공간이 없다, 그러나 이런 것들 대신 상태들이 있다. 지상에서 각자 자신의 삶 동안, 즉 시간과 공간에 있는 동안 그는 시간과 공간들로부터 그의 모든 생각들을 가지는 반면, 시간과 공간이 없으면 그는 전혀 생각할 수 없다; 그리고 그러므로 다른 삶에 있는 상태들이 시간과 공간을 수단으로 인간에게 묘사되지 않으면, 또는 시공에 있는 물체들을 수단으로 상태에 있는 것을 형체화하지 않으면, 인간은 어떤 것도 지각하지 못하고, 고로 어떤 것도 믿지 못하고, 결과적으로 가르침을 받지도 못한다; 그러면 교리는 불임 상태인 바, 그것으로부터 교회는 있지 않을 것이다.
또 다른 예를 생각해보자: 천적, 영적 애착들이 세상의 애착과 육체의 애착들을 수단으로 묘사되지 않으면, 인간은 어떤 것도 지각하지 못한다. 그 이유는 인간은 이런 애착들 안에 있기 때문이다. 이 애착을 수단으로 인간은 천적이고 영적인 애착들에 대한 어떤 개념(notion)을 가질 수 있다, 그럼에도 두 애착은 서로로부터 구분되고 다르며, 마치 천국과 땅이 다른 것과 같다. 천국의 영광, 또는 천국에 있는 천사의 영광을 놓고서도, 인간은 천국의 영광을 세상의 영광에 일치하게 만들어 내지 않으면, 그는 이 주제를 납득하지 못한다, 고로 그것을 인정할 수도 없다.
이런 이유로 주님께서는 인간의 납득력에 일치되게, 외관이 동일하게 나타나도록 하시어 말씀에서 말하셨다. 말씀의 글자 의미는 이런 본성 속에 있다, 그럼에도 그것 안에는 여전히 내적 의미를 포함하고, 그 안에 내면의 진리들이 있다. 이것이 레아에 대해서는 “여호와께서 그녀의 자궁을 여셨다”라고, 라헬에 대해서는 “그는 불임이었다”라고 말한 이유이다; 그 이유는 이미 말한 대로 레아는 외면의 진리에 대한 애착을, 라헬은 내면의 진리에 대한 애착을 표현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외면의 진리는 인간이 배우는 처음의 진리인 까닭에 이 진리들을 수단으로 인간이 내면의 진리들을 받아들일 수도 있게 설비해두셨다. 이것이 다음 장에서 “하느님께서 라헬을 기억하셨다, 그리고 그녀에게 귀기울이셨다, 그리고 그녀의 자궁을 여셨다”라고 말해진 대목에서 의미되어진다.
이 주제들은 고대 시대에 있었던 교회들로부터, 그리고 그들의 교리적인 것들로부터 실체화될런지 모른다. 이것들이 외적인 진리들로부터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고로 홍수 후에 있었던 고대 교회와 더불어서는 대부분이 외적인 표현들과 의미들이있었고, 이것 안에 내적인 것들이 저장되어 있었다. 대부분의 이 교회인들은 외적인 것들 안에 있을 때 거룩한 예배 안에도 있었다, 그리고 그들 중 누군가가 초기에 그들에게 말했다, 즉 이 외적인 것들은 신성한 예배의 필수적인 요소는 아니다, 필수적인 것은 외적인 것을 수단으로 표현되고 의미된 영적인 것들과 천적인 것들이다, 그러나 그들은 이런 교리들을 통째로 거절했다, 하여 교회는 없었다. 이와 같은 것이 유태인의 교회였다: 만일 누군가가 이들에게 그들의 의식들에 관하여, 이 의식은 주님의 신성한 것들로부터 그들의 신성시함이 파생된 것이다 하고 말한다면, 그들은 그것을 통째로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이와 같은 상황은 주님이 세상에 오셨을 때도 같았다, 그 당시의 그들은 더욱 더 육체적으로 되어 있었고, 특히 이 유태 교회에 속한 이들은 더욱 그러했다. 이것은 주님과 동거동락했던 제자들, 그분으로부터 그분의 왕국에 관해 많은 것을 듣고 배웠다는 제자들 자신의 경우도 같았다, 이렇게 배운 그들인데도 그들은 내면의 진리들을 지각하지 못했고, 그 당시 유태인들이 예상한 메시아에 관해 마음에 품었던 것을 넘어서지 못했다: 즉 주님은 이 백성을 여타 모든 나라들 위에 서게해서 영광과 더불어 지배하게 하실 것이다는 것, 그리고 그들이 천국의 왕국에 관하여 주님으로부터 많은 것들을 들었음에도, 천국의 왕국은 지상의 왕국과 비슷할 것이다는 것, 하느님 아버지는 이 왕국 안에서 가장 높으신 분일 것이다, 그분 다음으로 아들이 있다는 것, 그다음 열둘인 자기들이 있다는 것, 이런 순서에서 자기들 역시 세상을 통치하게 될 것이다는 생각을 조금도 벗어나지 못했다; 그러므로 야고보와 요한이 자기들을 그분의 오른쪽과 왼쪽에 앉게 하여 달라고 주님에게 요청했던 것이다 (막. 10:35-37); 그러자 나머지 제자들이 자기들보다 더 위대해지겠다 하는 이들을 두고 분개했다 (막. 10:41; 마. 20:25-28). 이와 같은 상황은 비록 주님께서 천국에서 가장 큰 자되는 것이 무엇인지를 가르치신(마. 20:25-28; 막 10:42-45) 직후에도 제자들은 자기들의 납득력에 따라 여전히 말하고 있을 뿐이어서, 자기들은 열 두 왕좌에 앉을 것이고 이스라엘의 열 두 지파를 판결한다고 알고 있다 (눅. 22:24, 30; 마. 19:28).
만일 이것을 그들에게 말해준다면; 즉 “제자들”이란 그들 자신을 뜻하지 않고, 사랑과 신앙의 선 안에 있는 모든 이들을 뜻한다는 것; 또한 주님의 왕국 안에서는 세상에서 있는 왕좌들이 없다는 것, 지배자도 없다는 것, 통치함도 없다는 것, 당신들은 거기 있는 지극히 작다 여겨지는 누구도 판단할 수 없다는 것을 말해준다면, 그들은 이 말들을 통째로 거절하고, 정말 그렇다고 그들이 결론을 낼 경우, 그들은 주님을 즉각 떠나면서 이렇다면, 차라리 자기들의 예전 직업이 더 나을 것이다고 하여 되돌아갔을 것이다. 주님께서 그렇게 말하신 이유는 그들은 외적 진리들만을 받을 것이다는 것, 그러나 이 진리를 수단으로 내적 진리들도 받아들일지 모른다는 것 때문이다. 그 이유가 주님께서 말하신 외적 진리 내에 내적 진리들이 감추여 있었기 때문, 그리고 시간이 흐르면서 이 진리들에 그들의 눈이 열릴 것이라는 것, 그때 외적 진리들은 내적 진리들을 생각하는 수단, 내지 물체일 뿐이 되어 사라져버린바나 다름 없게 되리라는 이유 때문이었다. 이상 서술한 바로부터 이 장과 다음 장에서의 말씀, 즉 먼저 여호와께서는 레아의 자궁을 여셨다, 그리고 그녀는 야곱에게 아들들을 낳았다, 그 후에 라헬이 아들들을 낳았다에서 뜻해진 내용을 이해했을 것이다.

이 장 이후 이어지는 장들에서 야곱의 열 두 아들들이 다루어지고, 그들을 아버지(조상)로 하여 야곱의 열두 지파들의 이름들이 명명되어졌다, 하여 여기서 지파라는 단어가 의미하는 것, 그리고 왜 그 지파가 열둘이었는지를 총괄적 측면에서 다루어 본다. 지금까지 이 안에 감추여 있는 비밀들을 알았던 자는 아무도 없다. 그 이유는 말씀의 역사들은 글자에 쓰인 그대로의 역사들일 뿐이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글자에 나타난 것이 거룩한 사항들을 섬길 뿐, 더 이상의 어떤 것이 없다고 굳건히 믿어버리기 때문이다. 따라서 열두 지파들이란 이스라엘의 후손들의 분파들이 여러 구분된 나라들, 또는 일반적으로 가문들을 형성했던 것밖에 더 다른 의미는 없다고 결론 맺어두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그것들은 신성한 것들을 포함하고 있다; 말하자면, 열두 지파란 사랑과 신앙이 아주 많이 분열된 것이다는 것; 그러나 각 지파가 의미하는 것은 각 지파의 이름이 결정되는 장면인 야곱의 아들들이 출생하는 그 구절에서 살필 것이다. 일반적으로 열두 지파란 진리와 선, 또는 신앙과 사랑에 관한 교리의 모든 것들을 의미한다. 그 이유가 이것들(진리와 선, 신앙과 사랑)이 주님의 왕국을 구성하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진리 또는 신앙으로부터의 것들 안에 생각의 모든 것이; 선 또는 사랑으로부터의 모든 것 안에 애착의 모든 것이 있기 때문이다. 유태인의 교회가 설립된 이유는 이 교회 속의 것들이 주님의 왕국을 표현하도록 하기 위함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열둘로 나뉜 이 백성의 분파들은 주님의 왕국 속의 것들을 의미했다. 이것은 이전에 결코 누구에게도 열려지지 않은 비밀(mystery)이다.
숫자 “12”가 일반적 측면에서 모든 것들을 의미한다는 것은 이미 살폈다; “지파들”은 진리와 선, 또는 신앙과 사랑으로부터 있는 여러 가지 것들을 의미한다, 고로 “열두 지파들”은 이런 것들로부터의 모든 것들을 의미하는 바, 이를 하나씩 서술하기에 앞서 말씀에서 열두 지파를 찾아 확증해보자. 계시록서에서:
새 예루살렘의 거룩한 성은 열두 큰 문(gate)을 가졌다, 그리고 큰 문들 위에는 열두 천 사들이 (있었다); 그리고 거기 위에 이름들이 쓰여 있는데, 이것은 이스라엘의 아들들의 열 두 지파들의 이름들이다; 그리고 그것 안에 어린 양의 열두 사도들의 이름들(이 있다). 그 가 갈대로 도성을 쟀더니 12000 펄롱(furlong)이었다; 그리고 그가 거기로부터 성벽을 쟀 더니 144 큐빗(cubit)이었다, 이것은 사람에 대한 측량, 즉 천사에 대한 측량이었다. 열두 큰 문들은 열두 진주들이었다 (계. 21:12, 14, 16, 17, 21).
거룩한 성, 또는 새 예루살렘이 주님의 새 교회(Lord’s New Church)이다는 것은 위구절의 세부 사항들로부터 분명해진다. 위 구절에 앞서 있는 몇 장들이 교회의 상태들을 묘사하되, 그것들의 종말 앞의 것을 묘사하고 있다. 하여 인용한 위 구절에서는 새 교회를 취급하고 있다, 그러므로 큰 문들, 성벽, 성의 기초들은 교회 속의 이런 저런 사항들밖에 더 아니다, 즉 이것은 선행과 신앙에 속한 것들이다, 그 이유는 이것이 교회를 구성하기 때문이다;
고로 위 구절에서 여러 번 언급되는 숫자 “12”, 그리고 “지파들”, 또한 “사도들”역시 열둘, 지파들, 사도들 자체를 뜻하는 것이 아니고 한 복합체(complex)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을 뜻하는 것임은 누구나 빤히 알 수 있는 사항들이다; 마찬 가지로 숫자 “144” 역시 마찬가지 의미 선상에 있다. 그 이유가 144는 12×12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열둘이 모든 것들을 의미하기에, “열두 지파들” 역시 교회 속의 모든 것들을 의미함이 분명하다. 이는 이미 말한 대로 진리들과 선들, 또는 신앙과 사랑이다; 마찬가지로 “열두 사도들”에 의해서도 교회의 모든 것들, 즉 신앙과 사랑으로부터의 모든 것들이 의미된다. 그러므로 이 숫자(12)는 “사람에 대한 (사람에 관한) 측량, 즉 천사에 대한 측량”이라 불리우고, 이 말을 수단으로 진리와 선의 상태가 뜻해지고 있다.
계시록서에서와 같이, 구약 성경의 예언서들에서도 새 예루살렘이 취급된다. 거기서도 주님의 새 교회가 의미되고 있다; 즉, 이사야. 65:18, 19, 그 이하; 스가랴. 14장; 특히 에스겔, 40-48인데, 이 구절들에서 “새 예루살렘,” “새 성전,” 그리고 “새 땅”에 의해 천국들에 있는 주님의 왕국, 그리고 교회인 땅 위에 있는 그분의 왕국이 내적 의미에서 묘사되어 있다. 에스겔서에서 말해진 사항들로부터서는 더욱 분명해지는데, 그 이유는 거기서는 “땅,” “예루살렘,” “성전”, 그리고 그 안의 모든 것들, 또한 “열두 지파들”에 의해 의미가 더 명백해 있기 때문이다; 또한 토지의 분배가 취급되고, 지파들에 따라서 있는 그것의 상속분, 또한 성, 성벽, 기초들, 큰 문들, 성전 안에 속할 모든 것들에 의해서도 내적 의미가 분명해진다. 아래에는 에스겔서의 구절 중에서 지파들에 관해 언급한 구절만 인용한다: .
주 여호비께서 말하셨다, 이것은 경계이다, 이 경계를 가지고 너는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 들에 따라 토지를 상속할 것이다. 너희는 이스라엘의 지파들에 따라 이 토지를 나눌 것이 다. 그리고 너희에게 상속을 위해 제비뽑는 수단으로 나눔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너희 사 이에 체류하는 외국인들에게도 (마찬 가지이다). 그들은 이스라엘의 지파들의 한가운데에 서 상속분을 위해 너희와 함께 제비를 던질 것이다 (겔. 48:13, 21-23). 토지에 관한 것은 이스라엘에서 소유권을 위해 제 일인 자에게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나의 제 일인 자들은 내 백성을 더 이상 괴롭히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이스라엘의 가문들에 그들의 지파에 따라 토지를 줄 것이다 (45:8).
위는 상속분에 관하여서 이다, 그리고 어떻게 그것들이 지파들에게 할당되는지, 이것이 48장 1절 이하에서 언급되는데 지파들이 이름들에 의해 언급되고 있다. 그리고 도성의 큰 문들에 관하여, 이스라엘의 지파들의 이름들에 따라서이고, 같은 장 31-34절에서 읽을 수 있다.
거기서 “지파들”이 지파들을 뜻하지 않음은 분명한데, 그 이유는 에스겔이 이 예언을 할 즈음에서는 이스라엘의 열 지파는 어느 방향으로 갔는지도 확실치 않게 사방으로 흩어져 사라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은 그 후에 되돌아오지 않았고, 되돌아 올 수도 없었는데, 그 이유는 그들은 이방인들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각 지파에 대한 언급이 만들어져 있고, 그들이 토지를 어떻게 상속받을 것인지, 그들의 경계는 어떨 것인지에 대한 언급이 있다; 즉 단 지파를 위한 경계(2절); 아셀 지파를 위한 경계(3절); 납달리, 므낫세, 에브라임, 르우벤, 유다를 위한 경계, 레위지파를 위한 상속분은 무엇일지에 대해; 베냐민 지파를 위한 경계; 시므온, 잇사갈, 스블론, 그리고 갓을 위한 경계 (4-29절); 또한 도성은 이스라엘 지파들의 이름에 따라 열두 큰 문을 가져야 한다는 것; 북쪽을 향한 큰 문 셋은 르우벤, 유다, 레위를 위해; 동쪽을 향한 큰 문 셋은 요셉, 베냐민, 그리고 단을 위해; 남쪽을 향한 큰 문 셋은 시므온, 잇사갈, 그리고 스블론을 위해; 그리고 서쪽을 향한 큰 문 셋은 갓, 아셀, 그리고 납달리를 위해서 이다는 것 (31-34절); 고로 분명한 바, “열두 지파들”은 주님의 왕국의 모든 것들, 또는 신앙과 사랑의 모든 것들을 의미한다는 것, 그 이유가 이미 말한 대로 이것들이 주님의 왕국을 구성하기 때문이다.
“열두 지파들”이 주님의 왕국의 모든 것들을 의미하기 때문에, 그러므로 또한 열두 지파들은 그들의 진영 배치에 의해, 여행 순서에 의해서도 이 왕국을 표현했다. 모세의 책에서, 그들은 지파들에 따라 회중의 천막을 빙둘러 진영을 차렸다고 우리는 읽는다; 즉 동쪽을 향하여서는 유다, 잇사갈, 그리고 스블론이; 남쪽을 향하여서는 르우벤, 시므온, 그리고 갓이; 서쪽을 향하여서는 에브라임, 므낫세, 그리고 베냐민이; 북쪽을 향하여서는 단, 아셀, 그리고 납달리 지파가 진영을 차렸다; 그리고 그들이 진영을 차렸던 대로 여행도 했다 (민. 2장). 이런 사항에서 그것들은 주님의 왕국을 표현했음이 발람의 예언으로부터 분명해진다:
발람이 그의 눈을 들어올렸을 때, 그리고 각 지파들에 따라 거주하는 이스라엘을 보았을 때, 하느님의 영이 발람 위에 왔다, 그리고 그는 자기의 또렷한 말투로 발음해서 말했다, 그들의 장막은 얼마나 훌륭한지, 오 야곱아, 네 주택들아, 오 이스라엘아! 그들이 심어짐이 골짜기들 같고, 강가의 동산들 같고, 여호와께서 심으신 침향목 같고, 물가의 삼나무들 같 다 (민. 24:2-6).
발람이 이 말들을 여호와로부터 말했다는 것이 이외 여러 곳에서 분명하게 서술되어 있다 (민. 22:8, 18, 19, 35, 38; 23:5, 12, 16, 26; 24:2, 13).
이 모두로부터 분명해지는 바, 지파들에 따라 가나안의 토지의 상속에 의해 표현된 것, 이에 관하여 우리가 모세의 책에서 읽는 바, 모세는 이스라엘의 군대에 편입될 수 있는 이십 세 이상의 모든 이를 그들의 아버지의 집에 따라 계수한 이스라엘의 아들들의 모든 회중(의 기록)을 가져오게 하였다는 것; 그리고 토지는 제비뽑아 분배하였다는 것; 그들의 아버지의 지파들의 이름에 따라 그들은 상속분을 받는다는 것 (민. 26:7-56; 33:54; 34:19-29); 토지는 여호수아에 의해 제비뽑아 지파들에 따라 나눈 것 (여. 13; 15-19장) 등등이다. 앞에서 말한 대로 이런 대목에서 주님의 왕국이 표현되었다는 것은 그 구절 안의 모든 세부 사항들로부터 분명해진다; 그 이유가 “가나안의 토지”가 왕국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의 아들들이 “군대들”이라 말해진 이유, 그리고 그들이 “그들의 군대들에 따라 진을 친다(encamp)”고 말해진(민. 2:4-30) 이유는 “군대”가 같은 것, 즉 진리들과 선들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주님은 “여호와 체바욷,” 즉 “군대들의 여호와(만군의 여호와)” 라고 불리우셨다. 그러므로 그들이 이집트를 떠날 때, “여호와의 군대들”이라 불리운 것을 아래 모세의 책에서 읽는다:
사백 삼십 년이 오는 바로 그 날, 여호와의 모든 군대들은 이집트의 토지로부터 나갔다 (출. 12:41).
그들이 이집트에서, 후에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군대들”이라는 품질 수준에서 그렇게 불리운 것은 오로지 표현상의 측면일 따름이었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자명할 것이다. 그 이유가 그들은 글자 의미의 표현 그대로 “여호와의 군대들”이라면 주님의 것인 진리와 선들로 인격의 품질을 갖춘 이들이 상상되어야 하겠지만, 실상 그들은 그런 진리들과 선의 측면에서는 아마 모든 나라 중에서 최악이라 말해야 될 것이기 때문이다.
우림과 둠밈이라 불리운 것, 즉 아론의 가슴받이에서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의 이름들”에 의해 의미된 것도 위에 설명한 내용과 맥락을 같이 한다. 이 가슴받이에 관하여 우리가 모세의 책에서 읽는 바, 네 줄로 할 것, 열두 돌(stone)들이 있을 것, 이 돌들은 이스라엘의 이름들에 따라 있을 것, 그들의 이름들에 따라 열둘 일 것; 그리고 인장 새김이 열두 지파들을 위해 각 보석 위에 있을 것 (출. 28:21; 39:14) 등등이다; 그 이유가 아론은 주님의 신성한 성직을 표현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그에게 수여된 모든 것들은 신성한 천적, 영적인 것들을 표현했다. 이 표현의 의미들은 차후 그 구절들을 다룰 때 주님의 신성한 자비로부터 설명할 것이다. 가슴받이 자체 안에, 이것은 가장 거룩하였던 바, 주님 안에서 사랑과 신앙으로부터 있는 모든 것들에 관한 표현들이었다. 이것들이 우림과 둠밈이다. 이름들이 귀중한 돌(보석) 위에 새겨진 이유는 일반적 측면에서 “돌”은 진리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귀중한 돌”은 선으로부터 투명해진 진리들이다; 그리고 몇몇 지파들의 “이름들”이 품질을 의미했기에, 그러므로 돌의 특별한 종류가 각 지파를 위해 할당되었다 (출. 28:17-20; 39:8, 10-13). 그리고 각 돌의 색깔과 투명도는 각 지파에 의해 의미된 품질을 표현했다; 이로부터 여호와 또는 주님은 우림과 둠밈에 의해 대답을 주셨다.
에봇의 양 어깨 위에 있던 “두 호마노(얼룩마노, onyx) 돌들”에 의해서도 가슴받이에 있는 돌들과 같은 의미가 표현되었으나 수준상에서 덜 하였다; 그 이유가 “어깨들”은 모든 힘을, 고로 주님의 전능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슴”, 또는 “심장과 폐들”은 신성한 천적, 영적 사랑을 의미했다; 즉 “심장”은 신성한 천적 사랑을; “폐”는 신성한 영적 사랑을 의미했다, 그리고 이 장의 끝에서, 즉 웅대한 사람이 취급되는 곳에서, 심장과 폐의 영역의 상응이 취급되는 곳에서 더 자세히 알아질 것이다. “에봇의 어께 위에 있는 두 돌들”에 관해서 우리는 모세의 책에서 아래와 같이 읽는다:
너는 두 호마노 돌을 가져와라, 그리고 그것들 위에 이스라엘의 아들들의 이름들을 새겨라; 이쪽 돌에 그들 이름의 여섯을, 다른 쪽의 돌에 나머지 그들의 이름을 새기되 그들의 세대 들에 따라서이다. 너는 두 돌들을 에봇의 어깨 위에 놓을 것이다, 이는 이스라엘의 아들들 을 위한 기억함의 돌들일 것이다 (출. 28:9, 10, 12; 39:6, 7).
지파들이 진리와 선, 또는 신앙과 사랑으로부터 있는 것을 의미했기 때문에, 그리고 각 지파는 거기로부터의 어떤 보편적인 것을; 레위 지파는 사랑을 의미했기 때문에(이는 이 장 34절에서 다룬다), 이로부터 막대기들을 놓아둠에 의해 의미된 것, 즉 각 지파에 하나씩, 회중의 천막에서, 그리고 레위 지파의 막대기에서만 알몬드의 꽃이 핀 것의 의미가 알아진다. 이에 관해 우리는 모세의 책에서 읽는다:
열두 막대기들을 가져와라, 이는 그들의 아버지의 집의 각 머리를 위해 하나씩이다, 그리고 그것들을 만남의 천막 왼쪽에 놓아두라; 그리고 너는 레위 지파의 막대기 위에 아론의 이 름을 써놓아라. 그리고 아론의 막대기는 막대기들의 한가운데에 있었다, 아침에 레위 지파 를 위한 아론의 막대기에 꽃이 핀 것이 보였다, 그리고 꽃이 만발하여 알몬드가 열렸다 (민. 17:2-8);
이는 사랑이 주님의 왕국에 있는 모든 것의 필수적 근본이다는 것, 이로부터 모든 열매 풍성함이 있음을 의미했다. 아론의 이름이 그것 위에 쓰인 이유는 아론이 주님의 신성한 성직 측면에서 그분을 표현했기 때문이다. “주님의 성직”에 의해 신성한 선이 의미된다는 것, 이것은 그분의 사랑과 자비로부터이다는 것; 그리고 “주님의 왕권”에 의해서는 신성한 선으로부터 있는 신성한 진리이다.
이상 살핀 바로부터 아래 구절의 “지파들”과 “열두 지파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알는지 모른다. 계시록에서:
그리고 나는 날인되어진 그들의 숫자를 들었다; 십사만 사천 명, 이스라엘의 모두 각각의 지파로부터 날인되었다. 유다 지파에서 일만 이천 명이 날인 되어졌다. 르우벤 지파에서 일 만 이천 명이 날인 되어졌다. 갓 지파에서 일만 이천 명이 날인 되어졌다. 아셀 지파에서 일만 이천 명이 날인 되어졌다. 납달리 지파에서 일만 이천 명이 날인 되어졌다. 므낫세 지 파 중에서 일만 이천 명이 날인 되어졌다. 시므온 지파 중에서 일만 이천 명이 날인 되어 졌다. 레위 지파 중에서 일만 이천 명이 날인 되어졌다. 잇사갈 지파 중에서 일만 이천 명 이 날인 되어졌다. 스불론 지파 중에서 일만 이천 명이 날인 되어졌다. 요셉 지파 중에서 일만 이천 명이 날인 되어졌다. 베냐민 지파 중에서 일만 이천 명이 날인 되어졌다
(계. 7:4-8).
모세의 책에서:
영원의 날들을 상기하라; 세대와 세대의 햇수들을 이해하라. 지극히 높으신 분이 나라들에 게 그들의 상속분을 주었을 때, 그분이 사람의 아들들을 분리하셨을 때, 그분은 이스라엘의 아들들의 수에 따라 백성의 경계들을 놓으셨다 (신. 32:7, 8).
다윗서에서:
예루살렘은 빽빽하게 채워진 성으로 건설되었다; 그쪽으로 지파들, 야(Jah)의 지파들, 이스라엘의 증거들이 여호와의 이름을 고백하기 위하여 올라간다 (시. 122: 3, 4).
여호수아서에서:
모든 땅의 주의 언약의 궤가 너희 앞에서 요단을 건너는 것을 잘 보라. 너에게 이스라엘의 지파들로부터 열두 사람을, 모두 각각의 지파들로부터 사람을 데려와라. 모든 땅의 주의 여 호와의 궤를 맨 성직자의 발 바닥이 요단의 물에서 쉴 것인 즉, 요단의 물은 절단 될 것이 다; 그것들은 한 무더기로 서있을 것이다 (여. 3:11-13).
다시:
요단의 한가운데로부터, 성직자들의 발이 준비하여 섰던 장소로부터 열두 돌들을 가져와라, 그리고 그것들을 너희 더불어 운반하라, 모두 각각의 사람이 그의 어께 위에 돌을 운반하 되, 이스라엘의 지파들의 수에 따라서이다; 이것은 요단의 물들이 끊어졌다는 것에 대한 표 시이다. 더 나아가 여호수아는 요단의 한가운데, 언약의 궤를 맨 성직자들의 발이 섰던 장 소에 열두 돌들을 세웠다 (여. 4:3-9).
다시:
엘리야는 여호와께서 네 이름은 이스라엘일 것이다 하고 말하신 야곱의 아들들의 지파들의 수에 따라 열두 돌들을 가져왔다; 그리고 그는 여호와의 이름 안에서 제단을 건축했다 (왕상. 18:31, 32).
“지파들”이 사랑의 선들과 신앙의 진리들을 의미하는 것은 마태복음서의 주님의 말씀으로부터도 분명해진다:
그때 사람의 아들의 표시가 나타날 것이다; 그리고 그때 땅의 모든 지파들이 통곡할 것이 다, 그리고 그들은 힘과 영광과 더불어 하늘의 구름들 안에 오는 사람의 아들을 볼 것이다 (마. 24:30);
위에서 “땅의 모든 지파들이 통곡함”에 의해 진리를 인정함과 선으로부터의 생활이 더 이상 있지 않을 것이 의미된다, 그 이유는 취급된 주제가 시대의 극점(종말)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가 계시록서에서:
잘 보라 그분은 구름을 사용하시어 오신다, 그리고 모두 각각의 눈이 그분을 볼 것이다, 그 리고 그분을 찌른 그들 또한 볼 것이다; 그리고 땅의 모든 지파들은 그분 때문에 슬퍼할 것이다 (계. 1:7).
“하늘의 구름들에서 오심”에 의해 의미된 것은 18장 서문에서 알았을 런지 모른다; 또한 경험으로부터 나에게 보여진 더 많은 사항으로부터 위의 의미에 대해 더 알고 있으리라 본다.
신앙과 사랑의 모든 것들이 “지파들”이라 불리운 이유는 원어에서의 같은 표현이 “홀(scepter)”과 “지팡이(staff)” 또한 의미하기 때문이다. “홀” 또는 “지팡이”가 힘(power)을 의미하는 것은 차후 주님의 신성한 자비로부터 더 살필 것이다. 이름 “지파”는 그것 안에 진리들과 선들이 주님으로부터 자체 내에 모든 힘을 가진다는 것을 포함하고 있다. 이런 이유로 천사들이 “힘들”이라 불리우고, 마찬가지로 “주권들”이라고도 불리운다, 그 이유가 “제 1 인자”가 이스마엘로부터 내려온 “열두 제 1 인자들” 같이(창. 25:16) 선행과 신앙의 제일의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파들을 관장하는 제 1 인자도 마찬가지이다 (민. 7:13:4-16).
지금까지 말해온 열두 지파들로부터 주님의 제자들, 후에 “사도들”이라고 불린 그들이 왜 열둘이었는지; 그리고 그들이 지파들 같이 선들과 진리들 측면에서 주님의 교회를 표현했다는 것도 알았으리라 본다. 베드로가 신앙을; 야고보가 선행을; 요한은 선행의 일을 표현한 것은 이미 살핀 바 있다 (18장 서문과 22장 서문). 마찬가지로 주님께서 그들에게, 그들에 관하여 말하신 것으로부터 매우 분명하다.

32절. 그리고 레아는 임신해서 아들을 낳았다, 그리고 그녀는 그의 이름을 르우벤이라 불렀다. 그렇게 부른 까닭은 여호와께서 내 고통을 보셨다, 하여 지금 내 남자가 나를 사랑할 것이다 라고 그녀가 말해서였다.

그리고 레아가 임신해서 아들을 낳았다. 이는 외적인 것으로부터 내적인 것에 이르러 있는 영적인 임신과 출생을 의미한다. 이는 “임신함과 낳음”의 의미가 내적 의미에서 거듭나지는 것이다로부터 분명해진다; 그 이유가 거듭나지는 인간은 새로이 임신되어 출생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거듭남은 새로운 출생, 그러나 영적 측면에서의 새로운 출생이다. 인간은 참으로 인간으로 그의 부모로부터 태어나진다, 그러나 그가 주님으로부터 다시 태어날 때까지 그는 사람이 아니다. 영적이고 천국적인 삶은 인간을 사람으로 만드는 삶이다. 그 이유는 이것이 당사자를 들짐승과 구별되게 하기 때문이다. 이런 영적인 임신과 출생이 말씀에서 임신과 출생으로 언급되는 것에 의해 의미된다; 그리고 여기서 말해진 것, 즉 “레아가 임신해서 아들을 낳았다”에서도 같은 것이 의미된다. 이런 임신들과 출생들은 외적인 것으로부터 내적인 것들에로 거행된다는 것이 “레아가 임신하고 낳음”에 의해 의미되었다고 말한 이유는 레아에 의해 외적 진리에 대한 애착이 표현되기 때문; 그리고 르우벤에 의해 신앙으로부터의 진리가 표현되는데, 이것은 거듭남의 처음에 해당되고, 거듭남은 외적인 것으로부터 개시되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가 어떠한지는 레아와 라헬에 의한 야곱의 자녀들에 관하여 뒤이어지는 것으로부터 차츰 나타날 것이다.

그녀는 그의 이름을 르우벤이라 불렀다. 이는 그것에 관한 품질, 이것이 묘사됨을 의미한다. 이는 “이름,” “이름을 부름”의 의미가 품질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품질 자체는 이 말, 즉 “여호와께서 내 고뇌를 보셨다, 그 이유가 지금 나의 사람이 나를 사랑할 것이기 때문이다”에 의해 묘사되어 있는데, 이것이 르우벤이다. 여기서 야곱의 모든 아들들의 이름들이 교회의 보편적인 것들을 의미하는 것은 이제 살필 것이다. 또한 진짜 보편적인 것들도 각각의 이름 안에 놓여졌다; 그러나 당사자가 이름이 불리워진 이유의 표현에 대한 내적 의미를 알지 못하면, 무슨 보편적인 의미가 있는가도 알지 못한다. 예를 들면, 르우벤의 의름이 붙여진 이유인 “보셨다”라는 표현; 시므온으로 명명되게 한 표현인 “들으셨다”; “달라붙을 것이다”라는 표현에서 레위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그리고 “고백할 것이다”라는 표현으로부터 유다로 이름지어졌다. 이 외에 다른 이름도 마찬가지 이다.

“열두 지파들”이 진리와 선, 또는 신앙과 사랑으로부터의 모든 것들을 의미하는 것을 앞에서 살폈다; 그리고 야곱의 아들들로부터 지파들의 이름들이 명명되었는데, 이를 하나씩 취급할 것인 바, 또 다른 비밀들이 여기서 열려진다, 즉 그것들 안에 포함된 것이 열려진다는 말이다. 모든 천적, 영적 열, 또는 사랑과 선행이 마치 태양으로부터 불꽃이 있듯 천국에서 외적 형체에서 지각되어진다; 또한 이 천적이고 영적인 빛, 또는 신앙은 천국에서 외적인 형체에서 태양으로부터의 빛 같이 나타난다; 그리고 거기로부터의 빛은 그것 안에 총명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이것은 거기서 태양이신 주님으로부터 이기 때문이다는 것은 많이 살폈다. 이로부터 분명한 바, 모든 선은 태양이신 주님으로부터 있는 열로부터이다는 것; 그리고 모든 진리는 거기로부터 있는 빛으로부터이다는 것이다; 더 분명한 것은, 모든 애착들, 이는 주님으로부터 있는 천적이고 영적인 열의 변화들이다는 것, 그리고 이 변화로부터 상태의 바뀜이 있다는 것; 그리고 모든 생각들, 이는 신앙 또는 진리인 바, 주님으로부터 있는 천적이고 영적인 빛의 다양함들이다는 것, 그리고 이로부터 총명이 온다는 것이다. 이 열과 빛 안에 천국에 있는 모든 천사들이 있다는 것, 그리고 그들의 애착들과 생각들의 다른 근원은 없다는 것이다. 이는 그들의 언어로부터 명백해진다, 이는 이 근원의 결과에서 천국의 빛의 변경과 다양함들에 있다, 그리고 말로 다 설명할 수 없이 다양하고 충만되어서 납득력을 초월해 있다.
이런 사항들이 세상에서 표현적으로 전시되기 위하여 야곱의 몇 아들들에게 이름이 주어지고, 이것들이 선과 진리, 또는 사랑과 신앙의 보편적인 것들을, 고로 천적이고 영적인 열의 변화들, 그리고 이 열로부터 파생된 빛의 변화들 측면에서의 보편적인 것들을 의미하였다. 이 보편적인 것들의 질서 자체가 불꽃과 불꽃으로부터 파생되는 광휘를 결정한다. 질서가 사랑으로부터 시작될 때, 진짜 질서를 뒤잇는 모든 것은 불꽃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질서가 신앙으로부터 시작될 때, 진짜 질서를 뒤잇는 모든 것은 명료함(lucid, 투명함)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뒤잇는 것들에 따른 차이는 존재한다. 그러나 뒤잇는 것의 질서가 진짜 질서가 아니다면, 모든 것은 차이점과 더불어 희미함, 불명료함으로 나타난다. 이 질서와 이로부터 결과하는 차이에 관하여는 차후 주님의 신성한 자비로부터 별도로 살필 것이다. 이것은 주님께서 우림과 둠밈을 수단으로 어떻게 대답을 주셨는지를; 그리고 질문에 있는 문제의 상태에 따라 그들은 귀중하고 투명한 돌, 열두 지파들의 이름이 새겨진 돌로부터의 빛과 광채를 수단으로 대답을 받았다는 것을 설명한다; 그 이유가 이미 말한 대로, 이름들 위에 주님의 왕국에 있는 사랑과 신앙의 보편적인 것들이 새겨져 있었기 때문, 결과적으로 불꽃과 빛의 보편성을 수단으로 사랑과 신앙속의 것들이 천국에서 표현되어졌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먼저 말씀으로부터 확증해두어야 할 것은 언급되는 지파들의 이름의 순서가 말씀에서 다양하다는 것, 그리고 이것은 취급된 주제의 상태와 일치한다는 것; 그리고 이로부터 우림과 둠밈에 의해 주님으로부터 주어지는 대답들은 순서로부터 질문한 주제의 상태에 따라 빛을 발한다는 것을 알는지 모른다; 그리고 주제의 상태들은 선과 진리의 질서에 일치하여 다양해진다. 그러나 진리와 선의 무엇이 야곱의 각 아들에 의해 의미되는지는 설명함에서 보여질 것이다; 즉, “르우벤”에 의해서는 주님으로부터의 신앙이; “시므온”에 의해서는 주님으로부터 있는 의지의 신앙이; “레위”에 의해서는 사랑 또는 선행이; “유다”에 의해서는 사랑의 신성과 주님의 천적 왕국이 의미된다. 나머지 여덟 명에 대하여는 다음 장에서 서술할 것이다. 출생일에 따른 그들의 순서는 다음과 같다: 르우벤, 시므온, 레위, 유다, 단, 납달리, 갓, 아셀, 잇사갈, 스블론, 요셉, 베냐민 이다. (이는 29:32-35, 30:6, 8, 11, 13, 18, 20, 24; 35:18절을 보라.) 이 순서는 여기서 취급된 주제의 상태에 따라 있다, 이것은 인간의 거듭남의 순서이다; 그 이유가 거듭남의 경우, 개시함이 “르우벤”인 신앙의 진리로부터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발전해감이 “시므온”인 참된 것을 뜻함, 이로부터 “레위”인 선행으로 발전한다; 하여 주님을 향하는데, 이것은 최고 의미이고, 이것이 “유다”에 의해 표현되어져 있다. 영적 임신과 출생, 또는 거듭남은 외적 측면으로부터 내적 측면으로 진행이 된다; 즉, 신앙의 진리로부터 사랑의 선쪽으로 이다는 말이다.
야곱이 마므레(기럇아르바)에 있는 그의 아버지 이삭에게 오기 직전, 열두 아들들은 다음 순서로 명명되어져 있다: 르우벤, 시므온, 레위, 유다, 잇사갈, 스블론, 요셉, 베냐민, 단, 납달리, 각, 아셀이다 (창. 35:23-26); 이 순서는 레아와 라헬의 아들들이 출생일 그대로 먼저 명명되고 그 다음 하녀들로부터의 아들들이 그 뒤에 명명된 것이다. 이는 그 장에서 취급된 주제에 따라 있는 순서이다. 이들은 아직 더 다르게 열거된 경우를 발견할 수 있는데, 그들이 여행해서 이집트에 왔을 때이다 (창. 46:9-19); 그리고 또 다른 순서는 야곱이 그가 죽기 전, 개명된 이름 이스라엘을 지닌 때에 아들들에게 축복하는 대목이다 (창. 49:3-27); 그리고 또 다른 순서가 있는 대목은 그들이 모세에 의해 축복될 때이다 (신. 33:6-24). 그들이 회중의 천막을 빙둘러 진을 칠 때 다음 순서에서 였다: 동쪽 방면에는 유다, 잇사갈, 스불론; 남쪽 방면에는 르우벤, 시므온, 갓; 서쪽 방면에는 에브라임, 므낫세, 베냐민; 북쪽 방면에는 단, 아셀, 납달리이다 (민. 2장). 그리고 그들이 축복을 위하여 그리짐산에, 저주를 위하여 에발산에 어떤 순서에서 섰었는지는 신명기서 27장 12, 13절에서 알게 된다. 각 지파로부터 뽑은 제 일인 자가 토지를 정탐하기 위하여 보내질 때, 그들이 열거된 순서는 이렇다: 르우벤, 시므온, 유다, 잇사갈, 에브라임, 베냐민, 스불론, 요셉 또는 므낫세, 단, 아셀, 납달리, 갓이다 (민. 13:4-16). 그러나 상속분을 위하여 토지가 주어진 제 일인 자는 또 다른 순서에서 열거되고 있다 (민. 34:19-29). 어떤 순서에서 토지가 상속분으로 주어질 때 제비가 뽑히고 공표되었는지에 대하여는 여호수아서 13-19장에서 읽을 수 있다.
지파들에게 상속으로 있어지는 새로운 토지, 또는 거룩한 토지가 묘사된 에스겔서에서 열거된 그들의 순서는 이렇다: 단, 아셀, 납달리, 므낫세, 에브라임, 르우벤, 유다, 베냐민, 시므온, 잇사갈, 스불론, 갓이고, 모두는 동쪽을 향한 모퉁이로부터 서쪽, 또는 바다쪽의 모퉁이까지, 남쪽의 모퉁이에 있었던 갓을 제외하고는 남쪽을 향하여 이다 (겔. 48:2-8. 23-26); 그리고 새로운 성, 거룩한 성의 큰 문이 취급될 때, 그들은 이 순서이다: 북쪽을 향하여 큰 문이 셋, 르우벤, 유다, 그리고 레위; 동쪽을 향하여 큰 문이 셋, 요셉, 베냐민, 그리고 단; 남쪽을 향하여 큰 문이 셋, 시므온, 잇사갈, 그리고 스불론; 서쪽을 향하여 큰 문이 셋, 갓, 아셀, 그리고 납달리이다 (겔. 48:31-34). 각 지파로부터 봉인된 일만 이천 명의 순서는 계시록서 7장 5-8절에서 읽을 수 있다. 이 모든 구절들에서 지파들의 열거는 거기서 취급되는 특수한 주제의 상태에 따라서 함께 있다. 이 주제에 이 순서가 상응하고 있다. 특수한 상태는 전후 문맥에서 알아진다.
우림과 둠밈에 있는 귀중한 돌들의 순서에 대하여는 말씀에서 언급되고 묘사되어 있으나, 무슨 지파에 무슨 돌이 상응할 것이지는 언급되지 않고 있다. 이렇게 말한 이유는 돌들은 천적인 불꽃으로부터 있는 빛의 모든 것들을 표현했기 때문이다, 즉 선으로부터의 진리의 모든 것, 또는 사랑으로부터의 신앙의 모든 것들을 표현했다; 그리고 그들이 이 표현을 가졌기 때문에, 천국의 빛 자체가 주제의 상태에 일치하여 질문에 대한 대답이 기적적인 방식을 통하여 빛을 냈다, 즉 선하고 참된 것에 대해 확언하기 위하여 새빨갛게 달아오름(glowing)과 빛나게 함(shining)이 있었던 것, 더불어 선하고 참된 것의 상태의 차이에 따라 색깔의 다양해짐도 있었다; 이는 천국에서 거행되는 것과 똑같다, 거기서 모든 천적인 것들과 영적인 것들은 빛과 빛의 차이를 수단으로 표현된다, 게다가 이것은 말로 표현할 길 없고 인간에 의한 납득은 불가능하다; 그 이유는 이미 말한 대로, 천국의 빛 안에는 주님으로부터의 생명이 있기 때문, 결과적으로 지혜와 총명이, 그러므로 빛의 차이에서 진리의 생명에 속하는 모든 것들이 있기 때문, 즉 지혜와 총명에 속하는 모든 것이 있기 때문; 그리고 불꽃의 차이에서와 불꽃의 새빨갛게 달아오름과 광휘의 차이에서, 선의 생명에 속하는 모든 것, 그리고 선으로부터 진리의 생명에 속하는 모든 것, 또는 주님을 사랑함과 이 사랑함으로부터 파생되는 신앙에 속하는 모든 것이 있기 때문이다. 에봇의 가슴받이와 아론의 심장(가슴, heart)에 있었던 우림과 둠밈이 위와 같다는 것은 단어, “우림과 둠밈”이 “빛들과 완전함들”을 뜻한다는 사실로부터도 분명해지고, 우림과 둠밈이 놓여진 가슴받이가 “판단의 가슴받이”라고 불리운 사실로부터도 분명해진다. 그 이유가 “판단, 재판, 판결, 공정, judgment”이 총명과 지혜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아론의 심장에 있었던 이유는 심장이 신성한 사랑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귀중한 돌들은 금(테)를 둘러 앉혔다, 그 이유가 “금”은 내적 의미에서 사랑의 선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귀중한 돌”은 선으로부터 투명해 있는 진리이다.
우림과 둠밈에 관하여 모세의 책에서 아래와 같이 읽는다:
너는 판단의 가슴받이를 만드는데, 디자인의 일로서 (미리 잘 설계된 일로서), 에봇을 만들 때 같이, 너는 그것을 만들 것이다, 너는 금으로, 푸른 색(실)과 심홍색(실), 그리고 두 번 물들인 진홍색(실), 꼬아만든 고운 아마포로 그것을 만들 것이다. 이것은 정사각형으로 두 겹일 것이다; 그리고 너는 그것 안에 돌을 박아끼우기를 하여 놓을 것이다, 이것은 네 줄로 있을 것이다, 박아끼우는 구멍은 금으로 둘러 있을 것이다. 그리고 돌들은 이스라엘의 아들 들의 이름들에 따라 있을 것이다. 그들의 이름들에 따라 열둘이다; 모두 각각의 이름은 인 장을 새김 같이 하는데, 그것들은 열두 지파를 위해서 있을 것이다
(출. 28:15-17, 20; 39:8-14).
각 열에 있게 되는 돌들 또한 디자인되고 있다. 그리고 더 나아가:
가슴받이는 에봇으로부터 분리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아론은 그가 거룩한 장소에 들어 갈 때, 여호와 앞에서 계속적으로 기억함을 위하여 그의 심장 위에 있는 가슴받이에서 이 스라엘의 아들들의 이름들을 짊어질 것이다. 그리고 너는 우림과 둠밈을 판단의 가슴받이 에 놓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들은 아론이 여호와 앞으로 들어갈 때, 그의 심장 위에 있을 것이다; 그리고 아론은 계속적으로 여호와 앞에서 자기 심장 위에서 이스라엘의 판단을 나 를 것이다 (출. 28:28-30; 레. 8:7, 8).
여호와 또는 주님은 우림을 수단으로 질문을 받고 답을 주셨다는 것을 모세의 책에서 알아진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하셨다, 네게로 눈의 아들 여호수아를 데려와라, 그리고 너는 그 위 에 네 영광을 놓을 것이다, 하여 이스라엘의 아들들의 모든 회중이 순종하게 하라. 그는 성 직자 엘르아잘 앞에 설 것이다, 그리고 엘르아잘은 여호수아를 위하여 여호와 앞에서 우림 의 판결에 문의할 것이다 (민. 27:18, 20, 21).
그리고 사무엘서에서:
사울이 여호와께 문의했다, 그리고 여호와께서는 그에게 대답하지 않으셨다, 꿈으로도, 우 림으로도, 예언자들에 의해서도 (대답하지 않으셨다) (삼상. 28:6).

여호와께서 나를 보셨기 때문 라고 그녀가 말했기 때문이다. 이는 최고 높은 의미에서 예견, 내적 의미에서 신앙, 내면의 의미에서 이해함, 외적 의미에서 보는 것, 그리고 현재의 경우 주님으로부터의 신앙을 의미한다. 이는 “보는 것, seeing”의 의미로부터 분명해지는 바, 아래에서 살핀다. 위에서 살핀 바로부터 야곱의 아들들로부터 명명된 열두 지파들은 진리와 선, 또는 신앙과 사랑의 모든 것, 고로 교회의 모든 것, 그리고 각 지파는 어떤 보편적인 것들을 의미했다는 것; 고로 열두 지파들은 교회에 속하는 무엇이든 모든 것들을 납득하고 그것 안에 포함하는 열두 보편적인 것들을 의미했다는 것; 그리고 보편적 의미에서 주님의 왕국에 속하는 모든 것들을 의미했다는 것이다. “르우벤”이 의미하는 보편적인 것은 신앙이다. 신앙이 첫 보편적인 것인 이유는 인간이 거듭날 때, 또는 교회가 되어갈 때, 그는 반드시 먼저 신앙에 속한 것들, 즉 영적 진리에 속한 것들을 배워 그것들에 물들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그는 신앙의 교리를 수단으로, 또는 진리의 교리를 수단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인간은 자신스스로부터서는 천국의 선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하는 바, 그것을 교리로부터 배워야만 하기 때문, 이것이 신앙의 교리라고 불리우는 것이다. 신앙의 모든 교리는 삶을 목적으로 중요시한다, 그러므로 선을 중요시하는데, 선이 생명이기 때문이다. 고대인들 사이에 논쟁의 정점에 있었던 대목은 어느 것이 교회의 첫 출생인가에 관한 것이다, 즉 신앙으로부터 있는 진리가, 아니면, 사랑으로부터 있는 선이 첫 출생인지에 대한 논쟁이다. 신앙으로부터 있는 진리가 첫 출생이다는 견해를 유지한 이들은 외적 나타남으로부터 이를 주장했다, 그리고 진리가 첫째인 이유는 진리가 먼저 배워지기 때문, 그리고 배운 진리를 수단으로 선을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선이 근본적으로 첫 출생이다는 것, 그리고 선은 내적 인간을 통하여 주님으로부터 은근히 심어져 있다는 것, 이 선이 외적 인간을 통하여 진리를 양자로 삼고 받아들인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있다; 그들은 선 안에 주님으로부터 있는 생명이 있다는 것, 스리고 진리 안에는 그 진리가 선을 통하여 생명을 가지지 않는다면 생명이 없다는 것; 고로 선은 진리의 혼이다는 것, 또한 선은 혼이 혼의 몸을 가지듯 진리를 선 자체에 어울려지게 하여 진리를 옷입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하고 있다. 이로부터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외적 나타남에 따라서일 경우, 진리가 첫 장소에 있다는 것, 그리고 인간이 거듭나는 동안, 진리는 마치 첫 출생인 듯 있다는 것; 그렇지만 인간이 거듭나졌을 때, 선이 근본적으로 첫 장소에 있고, (주님에 의한) 첫 출생인 바, 이때부터는 (삶의) 첫째 자리에 있는다는 것이다.
이 장, 그리고 이 장 앞에서의 주제는 자연 평면의 거듭남, 그리고 여기서는 이 자연 평면의 거듭남의 첫 상태가 진리를 수단으로 선을 소개받는 것이기에, 야곱의 첫 아들, 르우벤은 “여호와께서 보심”으로부터 명명되어졌는데, 이는 내적 의미에서 주님으로부터의 신앙을 의미한다. 신앙 자체만에 주목해보면, 신앙에는 두 가지, 즉 이해력 측면에서의 신앙과 의지력 측면에서의 신앙이 있다; 신앙으로부터 있는 진리를 알고 이해하는 것은 이해력 측면에서의 신앙이라 불리운다; 그러나 신앙으로부터 있는 진리를 뜻하는 것은 의지력 측면에서의 신앙이라 불리운다. 이해력에 있는 신앙은 “르우벤”에 의해 의미되는 신앙이고, 의지력에 있는 신앙은 “시므온”에 의해 의미되는 신앙이다. 이해력에 있는 신앙, 또는 진리를 이해함은 의지에 있는 신앙, 또는 진리를 뜻함에 앞서 있다는 것은 모든 이가 반드시 분명히 해두어야 한다. 그 이유가 인간 당사자가 (천국의 선 같은) 어떤 것을 모르고 있다면, 그는 자기가 그것을 뜻하기 앞서 필히 그것이 존재하는지, 그것이 무엇인지를 먼저 알아야만 하기 때문이다.
외적 의미에서 “보는 것”은 시력(시각)을 의미한다는 것은 설명할 필요조차 없이 자명하다; 그리고 내면의 의미에서 “보는 것”은 이해함을 의미하는 것도 분명해질는지 모른다, 그 이유가 내적 인간의 시력은 이해력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항간에서도 익히 아는 것은, 이해력이 내적인 시력이다는 점이다, 그리고 외적 관계에서 빛이 이것이라 단언하고, 이를 지적인 빛이라 부른다. 내적 의미에서 “보는 것”이 주님으로부터의 신앙을 표시하는 것은 내면의 이해력은 진리와 선으로부터 있는 것들 외에 더 다른 대상을 가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이것들이 신앙의 대상(목적, object)이기 때문이다. 내면의 이해력, 또는 내적인 시각은 신앙 속에 있는 진리들을 그것의 대상으로 삼는데, 이것은 시민적, 도덕적 생활을 대상으로 하는 이해력에 비해 훨씬 명백히 드러나지 않는다. 드러나지 않는 이유는 전자는 후자 안쪽에 있고, 인간이 세상의 빛 안에 있는 한, 희미할 수밖에 없는 천국의 빛 안에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듭나져가고 있는 이들과 더불어 그것은 자체를 밝히 보이는데, 특히 양심에 의해서이다. 최고 의미에서 “보는 것”이 선견(foersight)이다는 것은 반드시 분명히 해두어야 하는데, 그 이유는 총명이 주님을 서술할 경우, 이는 무한한 총명, 고로 선견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보다”로부터 이름 르우벤이 명명된 것이 내적 의미에서 주님으로부터의 신앙이다는 것은 말씀의 여러 구절로부터 명백해지는 바, 아래에 그 일부를 인용한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하셨다, 너는 불같은 뱀(불 뱀)을 만들어라, 그리고 그것을 지주(긴 장대) 위에 놓아라; 그리고 뱀에 물린 모든 이가 그것을 보면, 그는 살 것이다. 모세는 놋 쇠로 뱀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것을 지주 위에 놓았다; 그리고 만일 뱀이 누군가를 물었다 면, 그는 놋쇠 뱀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그는 다시 살았다 (민. 21:8, 9).
놋쇠 뱀이 외적 감각 또는 자연 평면 측면에서의 주님을 표현했다는 것은 이미 살폈다; 그리고 “놋쇠”가 자연 평면을 의미하는 것도 살폈다. 그분에 대한 신앙이 놋쇠 뱀을 본 이들, 또는 그것을 쳐다본 이들은 다시 살았다에 의해 표현되어졌다는 것이 주님 자신께서 가르치신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높이 들어올렸듯, 사람의 아들도 들어올려져야만 한다; 그분을 믿는 자는 누구이든 멸해지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가질 것이다 (요. 3:14, 15).
이사야서에서:
주께서 말하셨다, 이 백성에게 가서 말해주어라, 너희가 듣는 것은 확실하나, 이해하지 못 한다; 그리고 너희가 보는 것은 확실하나 알지 못한다; 이 백성의 심장을 비대해지게 만들 어라, 그리고 그들의 귀를 무겁게 만들어라, 그리고 그들의 눈들이 소경되게 만들어라; (하 여) 그들이 자기들의 눈으로 보지 않도록, 그리고 자기들의 귀로 듣지 않도록, 그리고 자기 들의 심정이 이해하지 못하도록 (하라) (이. 69, 10).
“보고 있는데 알지 못한다”는 것은 진리인 것을 이해함에도 그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을 의미함이 분명하다; “그들이 자기들의 눈으로 보지 않도록 소경을 만듦”은 그들에게서 진리를 이해함을 박탈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 구절의 “본다”가 주님에 대한 신앙을 의미하는 것은 마태복음서 13장 13, 14절; 그리고 요한복음서 12:36, 37, 39, 40절로부터 분명해진다.
에스겔서에서:
사람의 아들 너는 반역의 집 한 가운데서 거주해라, 그들은 보는 눈을 가지고 있지만 보지 못하고, 그들은 듣는 귀를 가지고 있지만 듣지 못한다 (겔. 12:2);
“보는 눈을 가지나 보지 못한다”는 그들이 신앙의 진리들을 이해하나 뜻하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이것이 거짓들로 사기적인 빛을 도출하고, 진리는 어둡게 하는 악들 때문임을 이사야서에서 아래 말로 가르치신다:
이것은 반역의 백성, 거짓말하는 아들들, 여호와의 법을 듣지 않는 아들들이다; 이들이 선 각자에게 보지 말라 하고 말했다; 그리고 환상을 가진 이들에게 우리를 위하여 올바른 것 들을 보지 말라, 우리에게 매끄러운 것을 말하라, 환영을 보라 (이. 30:9, 10).
다시:
어둠에서 걷는 백성이 큰 빛을 보았었다; 죽음의 그늘의 토지에 거주한 그들은 그들 위에 서 빛을 낸 빛을 가진다 (이. 9:2).
위에서 “큰 빛을 봄”은 신앙으로부터 있는 진리를 받아들이고 믿는 것을 뜻한다. 신앙 안에 있는 이들 위에서 천국의 빛이 “빛을 낸다”고 말해진다, 그 이유는 천국에 있는 빛은 신성한 선으로부터의 신성한 진리이기 때문이다.
다시:
여호와께서 깊은 잠의 영을 쏟으셨다, 그리고 너희의 눈을 닫았다; 예언자들과 너희의 머리들, 선각자들을 그분이 덮으셨다 (이. 29:10)
“눈을 닫는 것”은 진리를 이해함을 닫는 것을 표시한다; “선각자들을 덮는 것”은 신앙의 진리들을 알고 가르치는 이들을 덮는 것을 표시한다. 선각자(seer)는 정식으로 말하면 예언자를 일컫는 말이기도 하다, 그리고 “예언자”는 가르치는 이들, 또한 교리의 진리들을 표시한다. 다시:
성직자와 예언자가 독주를 통하여 잘못하고 있다; 그들은 선각자들 사이에서 헤메고 있 다; 그들은 판결에서 어긋나고 있다 (이. 28:7);
위 구절도 앞의 구절과 의미는 같다; 그들이 어긋내고 있는 “판결”은 신앙의 진리이다. 다시:
보는 그들의 눈이 닫아지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듣는 그들의 귀가 경청할 것이다
(이. 32:3).
다시:
너의 눈이 아름다움에서 있는 왕을 바라볼 것이다, 그들은 먼 거리의 토지를 볼 것이다 (이. 33:17);
“아름다움에 있는 왕을 바라보는 것”은 주님으로부터 있는 신앙의 진리들을 표시한다, 여기서 “아름답다”는 선으로부터 그렇게 불리운다; “먼 거리의 토지를 보는 것”은 사랑의 선을 표시한다. 마태복음서에서:
심정이 순수한 자는 복되다, 그 이유는 그들이 하느님을 볼 것이기 때문이다 (마. 5:8);
위에서 “하느님을 본다”는 것은 그분을 믿는 것, 고로 신앙으로 그분을 보는 것임이 분명하다; 그 이유가 신앙 안에 있는 그들은 신앙으로부터 하느님을 보기 때문, 그 이유는 하느님은 신앙 즉, 진정한 신앙을 구성하는 신앙 안에 계시기 때문이다.
다시:
만일 네 눈이 너로 어긋나게 한다면, 그것을 뽑아내라; 그 이유가 두 눈을 가지고 지옥의 불에 던져지기 보다는 한 눈을 가지고 생명으로 들어가는 것이 더 낫기 때문이다
(마. 18:9);
위 구절에서 “눈”이 눈을 뜻하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그것을 뽑아내라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 이유는 몸의 눈이 자신을 어긋난 짓을 하게 하는 원인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리를 이해함이 여기서 “눈”이 뜻하는 것이다. 신앙의 진리를 알고 납득했는데도 악한 생활을 하고 있다면, 신앙의 진리를 알지 않고 납득도 못한 것이 더 낫다는 것이 “두 눈 가지고 지옥 불에 던지우는 것보다 한 눈 가지고 생명으로 들어가는 것이 더 낫다”에 의해 의미되어 있다.
마태복음서에서:
너희의 눈은 보기 때문에 복 있다; 그리고 너희의 귀는 듣기 때문에 복 되다. 참으로 내가 네게 말한다, 많은 예언자들과 의로운 사람들이 너희가 보는 것을 보기를 바랐으나, 그 것들을 보지 못했다 (마. 13:16, 17; 요. 12:40);
위에서 “보는 것”은 주님에 대한 신앙으로부터 있는 것들, 고로 신앙을 알고 이해하는 것을 표시한다; 그 이유가 그들이 주님을 보았기 때문에, 또는 그분의 기적들을 목격했기 때문에 복되다는 말이 아니고 그들이 믿었기 때문에 그 신앙이 복있다는 말이기 때문이다; 이를 요한복음서의 말로부터 더 알는지 모른다:
내가 너희에게 말했다, 너희 역시 나를 보아왔으나, 믿지 않았다. 이것이 나를 보내신 그분 의 뜻인즉, 나를 보는 모든 이, 그분을 믿는 모든 이는 영생을 가진다는 것이다. 아버지와 더불어 있던 그분 외에 아버지를 본 자는 아무도 없다, 그분이 아버지를 보아왔다. 참으로, 참으로, 내가 네게 말한다, 나를 믿는 자는 영생을 가진다 (요. 6:36, 40, 46, 47);
“보는데 믿지 않는 것”은 신앙의 진리들을 아는데 그것들을 받지 않는 것이다; “보고 믿는 것”은 그것들을 알고 받는 것이다; “아버지와 더불어 있던 그분 외에 아버지를 본 자는 아무도 없다”는 신성한 선은 신성한 진리를 수단으로 하지 않고는 인정되어질 수 없다를 표시한다. 그러므로 내적 의미는 그분이 주님이심을 인정하지 않으면 천적 선을 아무도 가질 수 없다 이다.
마찬가지로 복음서에서:
여하튼 하느님을 본 자는 아무도 없다; 독생자, 아버지의 품 안에 있는 그분, 그분이 그분 을 선포했다 (요. 1:18).
그리고 다시:
예수께서 말하셨다, 나를 본 자는 나를 보내신 분을 보고 있다. 나는 세상 안으로 빛으로 왔다. 나를 믿는 자는 누구든지 어둠 안에 거하지 않는다 (요. 12:45, 46);
위에서 “보는 것”이 믿는 것, 또는 신앙을 가지는 것임이 분명하다. 다시:
예수께서 말하셨다, 만일 너희가 나를 알았었다면, 너희는 나의 아버지 역시 알았을 것 이다; 그리고 이후로부터 너희는 그분을 알고 그분을 보았었다. 나를 보았던 자는 아버지를 보았었다 (요. 14:7, 9).
다시:
세상은 진리의 영을 받을 수 없다, 그 이유는 그것이 그분을 보지 못하고, 그분을 알지도 못하기 때문이다; 나는 너희를 고아들로 남겨두지 않을 것이다; 나는 너희에게 온다. 그럼 에도 아주 잠깐, 그리고 세상은 나를 더 이상 보지 못한다; 그러나 너희는 나를 본다; 그 이유는 내가 살기 때문에 너희 역시 살 것이기 때문이다 (요. 14:17-19);
위에서 “보는 것”은 신앙을 가지는 것을 의미한다, 그 이유가 주님은 신앙을 수단으로 해서만 보여지기 때문이다. 신앙은 사랑의 눈이기 때문, 주님은 신앙을 통하여 사랑을 수단으로 보여진다; 그러므로 “너희는 나를 본다. 내가 살기 때문에 너희 역시 살 것이다”라고 말해진다.
다시:
예수께서 말하셨다, 나는 보는 그들이 보지 않게, 보는 그들을 소경으로 만드는 심판을 위 해 나는 이 세상 안으로 와있다; 바리새인들이 말했다, 우리 역시 소경입니까? 예수께서 그 들에게 말하셨다, 만일 우리가 소경이었다면, 너희는 죄를 가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너희는 말하기를, 우리는 보고 있다; 그러므로 너희의 죄는 남아있다 (요. 9:39-41);
여기서 “보는 그들”이란 자신은 타인들보다 더 총명하다고 상상하는 이들을 표시한다, 이들에 관하여 말해지는 바, 그들은 “소경으로 만들어진다”는 것, 즉 신앙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는 것이다 (“보지 못함”, 또는 “소경이다”가 거짓들 안에 있는 이들, 또는 무지 안에 있는 이들이라 단언되는 것은 2383항을 참조하라.) 누가복음서에서:
너희에게는 하느님의 왕국의 신비들을 아는 것이 주어져 있다; 그러나 나머지에게는 비유 안에서 (아는 것이 주어진다); 보는 그들이 보지 못하게; 그리고 듣는 그들이 듣지 못하게 (하시려 함에서 이다) (눅. 8:10).
위는 시대의 극점(종말), 또는 교회의 마지막 때, 교회에 더 이상 어떤 신앙도 없는 때가 취급된다.
다시:
예수께서 그들과 앉았을 때였다, 그분은 빵을 들고 축복하셨다, 그리고 떼어서, 그들에게 주었다; 그리고 그들의 눈이 열려졌다, 그리고 그들은 그분을 알았다 (눅. 24:30, 31);
위 구절을 수단으로, 주님께서는 선이 없는 진리가 아닌 선을 수단으로 나타나신다는 의미를 담아두셨다, 그 이유가 “빵”은 사랑으로부터의 선이기 때문이다. 이 구절, 그리고 다른 구절로부터 “보는 것”의 내적 의미는 주님으로부터의 신앙을 의미한다, 그 이유가 진정한 신앙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신앙 외에 없기 때문이다. 이것 또한 인간으로 보는 것을 가능하게 한다, 즉 믿는 것을 가능하게 한다; 그러나 자기로부터의 신앙, 또는 인간의 자기 자신인 것으로부터의 신앙은 신앙이 아니다, 그 이유는 이것은 당사자로 거짓들을 진리들로, 진리들을 거짓들로 보게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가 진리들을 진리로서 본다면, 여전히 그는 보지 못하는데, 그 이유는 그가 믿지 않기 때문, 믿지 않는 이유는 그가 신앙들 안에서 주님을 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보기 때문이다.
“보는 것”이 주님 안에서 신앙을 가지는 것임은 천국의 빛에 관하여 이미 자주 말해왔던 사항들로부터 분명해진다, 즉 주님으로부터 있음은 총명과 지혜를 동반한다는 것, 결과적으로 그분 안에서의 신앙이 동반된다; 그 이유가 주님 안에서의 신앙은 총명과 지혜 안쪽에 내향적으로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천사들 같이 이 빛으로 “보는 것”은 주님 안에서의 신앙 외에 더 다른 의미는 있을 수 없다. 주님 자신 역시 이 빛 안에 계신다, 그 이유는 이 빛이 그분으로부터 진행하기 때문이다. 또한 이 빛은 주님 안에서의 신앙을 가진 이들의 양심 내부에서 빛을 내고 있다, 물론 인간 당사자들은 그가 육체 안에 있는 한 이 사실을 알아채지는 못한다, 그 이유가 이 빛이 육체 안에서는 세상의 빛에 의해 희미해져 있기 때문이다.

내 고뇌. (즉 “여호와께서 보셔왔기 때문”) 이는 선에 도착하는 상태를 의미한다. 이는 “고뇌”가 시험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리고 시험이 선에 도착하는 수단이 되기 때문에, “내 고뇌”는 여기서 진리로부터 오는 상태 (이는 외적 측면이다), 그리고 선에 도착하는 상태를 (이는 내적 측면이다) 의미한다.

지금 내 사람이 나를 사랑할 것이기 때문. 이는 여기에서 진리의 선이 올 것임을 의미한다. 이는 “사랑할 것이다”가 거기로부터 선이 있다를 의미한다로부터; 그 이유가 모든 선은 사랑으로부터 있기 때문, 그리고 그러므로 여기서 “사랑함”에 의해 의미된다; 그리고 “사람”의 의미가 진리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진리의 선이 무엇인지는 누누이 설명해왔었다, 즉 그것은 생활(삶)에 사용할 목적으로 진리에 애착함이다; 그 이유가 삶은 거듭나진 이 후의 인간에게서는 그의 진리가 중요시하는 선이기 때문이다. 진리에 따른 생활 없이, 진리가 선과 결합하는 결과는 있어질 수 없다, 결과적으로 선이 자기 것이 되는 일이 없다는 말이다.
이를 알기 위해 불건전하게 사는 이들과 건전하게 사는 이들을 주시해본다면, 모든 이들도 명백히 알 수 있다: 불건전하게 사는 이들의 경우, 설사 그들이 어린 시절과 소년 시절에 교회의 교리들을 배웠다 하더라도 그들에게서는 그분 안에서의 신앙과 교회의 진리를 믿고 있다는 검증이 되지 않는다; 이에 반해, 건전하게 사는 이들의 경우, 그들은 자기들이 진리들이다고 믿는 진리들 안에서의 신앙을 그들 각각이 가지고 있다. 더욱이 진리를 가르치는 이들, 마치 교회의 감독자 같은 경우, 그가 불건전하게 살고 있다면, 실로 그는 믿는다고 고백은 할지 몰라도 심정에서 그는 믿지 않고 있다.
이들 중의 일부의 경우, 신앙과 엇비슷하게 돌려대어 설득하는 재주가 대단하다, 그러나 기억 속의 지식을 논리로 확증하는 그 이상을 넘지 못한다, 그 이유는 그것이 진리이기 때문이 아니고, 그것이 자신의 직책이나, 명예나, 이득 측면에서 그것을 고백하는 것이 매우 유리하기 때문이다. 설사 그가 고백하는 것이 진리이다 해도 그것은 그의 귀를 통하여 기억 안으로, 그리고 기억으로부터 입술로 나가기는 하나 더 이상 깊이 꿰뚫지를 못해 그의 심정으로부터의 고백은 없다. 이로부터 분명한 것은, 진리를 인정함의 품질, 즉 신앙의 품질을 보여주는 것은 그의 삶이다는 것이다; 생활의 선으로부터 분리된 신앙의 발명품은 인간이 어떻게 살았든, 그는 은총을 통하여 구원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생활 속의 선이 분리된 신앙만으로도 구원됨은 모든 이의 삶의 전부가 사후에도 남아있는다는 교리와 언쟁을 벌린다.

르우벤의 출생에서 레아가 발음한 말, “여호와께서 나의 고뇌를 보셨었다, 하여 지금 내 남자가 나를 사랑할 것이다”의 내적 의미로부터 교회의 무엇이 보여질 것이다, 즉 르우벤이 의미하는 것, 또는 르우벤으로부터 이름지어진 지파가 의미하는 것, 또는 이것은 인간이 교회가 되어갈 때 처음의 상황이다는 것; 그리고 이것은 교리의 진리이기 때문에, 이것에 의하여 인간이 생활의 선에 도달할런지 모른다는 것이다.

33절. 그리고 그녀는 다시 임신했다, 그리고 아들을 낳았다, 그리고 말했다, 여호와께서 내가 미움받은 것을 들으셨기에 나에게 이것 역시 주셨다. 그리고 그녀는 그의 이름을 시므온이라 불렀다.

그리고 그녀는 다시 임신했다, 그리고 아들을 낳았다. 이는 외적인 것들로부터 더 내면적인 것들을 향하여 있는 영적인 임신과 출생을 의미한다. 이는 이미 설명한 바 있다. 거듭남의 발전은 외적인 것으로부터 더 내면의 것들을 향하여 만들어진다. 즉 다시 말해 이 발전은 이해함으로부터 있는 기억 속의 지식으로부터 의지쪽으로 이다, 이를 영적으로 말하면 신앙 속에 있는 진리로부터 선행쪽으로의 발전이다. 이해함은 의지에 앞서 진행되는데, 이것이 의지를 눈에 보일 수 있는 형체로 명백해지게 한다. 이로부터 분명한 바, 이해함은 의지의 외적인 것이다; 그리고 신앙은 선행의 외적인 것이다; 또는 같은 말로, 의지는 이해함의 내적인 것이고, 선행은 신앙의 내적인 것이다. 고로 외적인 것으로부터 더 내면쪽으로 발전함은 이해력에 있는 신앙으로부터 의지에 있는 신앙으로, 결과적으로 신앙으로부터 선행으로 발전해 가는 것이다. 이 선행이 레위에 의해 표현되는데 차후 살핀다. 신앙을 선행과 떼어 구별할 경우, 진리를 뜻한다는 것, 마치 교리 속의 진리 같은 것, 예를 들면 사도신경이라 부르는 고백 안에서와 같은 식의 진리이다고 알려져 있다; 그리고 이런 진리는 교회 안에 있는 일반적 의미에 따라서이다; 그 이유가 진리들 안에서 신앙을 가지고 거기에 안주하면, 신앙만으로 구원이 있다고 믿어지고 만다. 신앙이 신용(trust)과 신뢰(confidence)이다는 것을 아는 자는 드물다, 게다가 신용과 신뢰는 선행으로부터 있다는 것을 아는 자는 매우 드물다. 더 나아가 선행의 삶을 살지 않는 이들이 이를 안다고 말하면, 그의 말은 사기일 뿐이다.

여호와께서 …들으셨기 때문에. 이는 최고 의미에서 섭리를, 내적 의미에서 신앙에 관한 의지를, 내면의 의미에서 순종을, 외적 의미에서 들음을, 현재의 경우 주님으로부터만 있는 신앙인 의지 안에 있는 신앙을 의미한다. 이는 “들음”의 의미로부터 알려진다. “듣는다”가 청각 기관에 의해 있다는 것은 두 말할 필요조차 없다, 그러나 내면의 의미에서 “듣는 것”은 순종이고, 내적 의미에서는 의지 안에 있는 신앙이다. 이는 말씀의 많은 구절로부터 분명해지는 바, 아래에서 살핀다; 그리고 시력의 본성에 관련된 것은 청력의 본성으로부터도 알아진다. 내면의 의미에서 “시력”은 이해력이고, 내적 의미에서는 이해력 안에 있는 신앙이다 (3863항); 이렇게 말한 이유는 어떤 것의 품질은 내적인 시력에 의해 나타나지기 때문이고, 이 나타난 것들은 지적인 신앙에 의해 납득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들려진 것들이 내면들을 관통할 때, 그것들은 시력 같은 어떤 것으로 바뀌어진다, 그 이유는 들어진 것은 내면적으로 보여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듣는 것”도 역시 “시력”에 의해 의미된 것, 즉 이해함으로부터 있는 것, 또한 신앙으로부터 있는 것을 의미한다; 동시에 들음은 경우가 이러하다는 것을 설득하고, 그리고 인간의 지적 부분 뿐만 아니라, 그의 의지 부분에 영향을 미치게 한다, 그리고 들은 당사자로 그가 본 것을 뜻하게 한다. 이로부터 “들음”은 어떤 것을 이해함, 그리고 동시에 순종을 의미하고; 영적 의미에서 의지에 있는 신앙을 의미한다.
이런 의미들이 들음이라는 단어 안에 숨어 있기에, 우리가 자주 사용하고 듣는 “들음, hearing”, “귀기울임, 청종, hearkening”, “경청함, attending” 같은 언어에도 스며있다. 그리고 “누군가에게 귀기울임”은 누군가에게 순종함이다. 이렇게 때때로 주제의 내면의 것은 인간의 언어(말함)의 표현 안쪽에 포함되어져 있다. 이런 이유는 인간의 영이 말함의 표현의 의미를 생각하고 지각하기 때문에서이다. 이것이 표현의 첫 원리 안에 있는 영들과 천사들이 교류함에서도 사용되고 있다. 더 나아가 이와 같은 것은 인간에서 어떤 것이 원을 한바퀴 돌 듯 순환한다. 즉 귀나 눈, 또는 들음과 봄을 수단으로 들어가 어떤 것은 이해력 안으로 건너가고, 이해함을 통하여 의지쪽으로, 그리고 의지로부터 행동으로 나타난다. 이를 다시 말해보면, 신앙의 진리는 처음에는 기억 속의 진리가 되어 있다; 그 후에 의지 안에서 신앙의 진리가 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행동에서 신앙의 진리가, 고로 선행이 된다. 기억 속의 지식에 있는 신앙, 또는 이해력에 있는 신앙이 “르우벤”이다; 의지 안에 있는 신앙이 “시므온”이다; 그리고 의지 안에 있는 신앙이 선행이 될 때, 이것이 “레위”이다.
최고 의미에서 “듣는 것”이 섭리를 의미한다에 대하여는 이미 살핀 “보다”의 최고 의미가 예견이다로부터 알는지 모른다; 그 이유가 주님께서 보심은 이 경우가 이렇다 하는 것을 영원으로부터 영원까지 보심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님의 미리 준비하심(providing)은 이것이 그렇다는 것을 지도 감독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인간의 자유를 선쪽으로 구부리심이다, 그러나 인간이 자유 안에서 자신을 구부리게 허용하는 만큼에서이다.
“여호와께서 들으심”에 의해, 이로부터 시므온이 명명되어졌다는 것이 내면의 의미에서 순종을 의미하는 것, 그리고 내적 의미에서 주님만으로부터의 의지 안에 있는 신앙이 의미된다는 것은 말씀의 많은 구절로부터 분명해진다; 아래와 같다:
잘 보니 구름으로부터의 음성이 말하시기를,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 이 아들 안에서 나는 아주 흡족하여 있다; 너희는 그에게서 들어라 (마. 17:5);
“그에게서 들어라”는 그분 안에서 신앙을 가지는 것, 그리고 그분의 명령들에 순종하는 것을 표시한다; 고로 의지 안에 신앙을 가지는 것이다. 요한복음서에서:
참으로 참으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죽은 자가 하느님의 아들의 음성을 듣는 시각이 오 고 있다; 그리고 듣는 이들은 살 것이다. 이를 두고 놀라지 말라; 그 이유는 무덤에 있는 모든 이가 그분의 음성을 듣는 시간이 오기 때문이다 (요. 5:25, 28);
“하느님의 아들의 음성을 듣는 것”은 주님의 말씀 안에서 신앙을 가지는 것, 그리고 그것들을 뜻하는 것을 표시한다. 의지로부터의 신앙을 가지는 이들은 생명을 받는다; 그러므로 말해진다, “듣는 이들은 살 것이다.”
다시:
문으로 들어가는 자는 양의 목자이다; 그에게 문지기는 연다; 그리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 는다. 그리고 나는 이 우리 안에 있지 않은 다른 양도 가지고 있다; 그들 역시 나는 데려와 야 한다. 그리고 그들은 내 음성을 들을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 하나의 양떼가 있을 것이 다, 그리고 하나의 목자가 있을 것이다. 내 양은 내 음성을 듣는다, 그리고 나는 그들을 안 다, 그리고 그들은 나를 따른다 (요. 10:2, 3, 16, 27);
“음성을 듣는 것”은 의지의 신앙으로부터 순종하는 것을 표시한다. 다시:
진리로부터 있는 모든 이가 내 음성을 듣는다 (요. 18:37);
위도 앞의 구절과 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 누가복음서에서:
아브라함이 그에게 말했다, 그들은 모세와 예언자들을 가지고 있다; 그들이 그들에게 듣게 하라. 만일 그들이 모세와 예언자(가 말한 것을) 듣지 않으면, 그들은 설사 죽은 자가 죽음 으로부터 일어나도 설득되지 않을 것이다 (눅. 16:29, 31);
“모세와 예언자가 말한 것을 듣는 것”은 말씀 안에 포함된 것들을 아는 것, 그리고 그 안에서 신앙을 가지는 것을 표시한다; 또한 그것들을 뜻하는 것이다. 그 이유가 신앙을 가졌는데 뜻하지 않는 것은 “보았는데”, “듣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말씀에서 들음과 봄이 동시에 말해지는 대목이 많다. 이 구절 전후에서도 마찬가지여서, 르우벤은 보는 것, 시므온은 듣는 것이 의미된다; 이것들은 르우벤과 시므온이 형제이듯 형제 관계에 있다.
“봄”과 “들음”이 함께 언급되는 대목은 아래 구절로부터 분명해진다. 마태복음서에서:
그러므로 나는 비유로 그들에게 말한다; 그 이유는 그들이 보지만 보지 못하기 때문; 그리 고 듣는데 듣지 못하기 때문, 그들은 이해도 못하기 때문이다. 그들 안에서 이사야의 이런 예언들이 성취되고 있다, 이렇게 말해진다, 듣는 것으로 너희는 들을 것이다; 그리고 깨닫 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보는 것으로 보고 있다, 그리고 그들은 지각하지 못할 것이다; 그 이유가 이 백성의 심장은 총체적으로 밀납칠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귀는 무디어져 있다, 그들의 눈은 닫혀져 있다; 여하튼 그들의 눈이 보지 않도록, 그리고 그들이 귀가 듣 지 않도록, 그리고 그들의 심정이 깨닫지 않도록이다. 그러나 너희의 눈은 보기 때문에 복 되다; 그리고 너희의 귀는 듣기 때문에 복 있다. 참으로 참으로 내가 네게 말한다, 많은 예 언자들과 의로운 자들이 너희가 보는 것을 보기를 바랬었으나 그것들을 보지 못했다; 그리 고 너희가 들은 것을 들고 싶어했으나 그것들을 듣지 못했다
(마. 13:13-17; 요. 12:40; 이. 6:9).
마가복음서에서: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말하셨다, 왜 너희는 빵이 없음 때문이라 추론하느냐? 너희는 아직도 지각하지 못하고, 이해하지도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심정을 무딘채로 아직 가지고 있느 냐? 눈을 가졌는데 보지 못하느냐? 귀를 가졌는데 듣지 못하느냐? (마. 8:17, 18)
누가복음서에서:
너희에게는 하느님의 왕국의 신비들을 아는 것이 주어졌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에게는 비 유 안에서 (아는 것이 주어졌다); 그들이 보되 보지 못하고, 듣되 듣지 못하기 (때문이다) (눅. 8:10).
이사야서에서:
소경의 눈이 열릴 것이다, 그리고 귀먹어리의 귀가 열릴 것이다 (이. 35:5).
다시:
그 날에 귀머거리가 책의 말씀들을 들을 것이다, 그리고 소경의 눈이 짙은 어둠으로부터 볼 것이다, 그리고 어둠으로부터 (볼 것이다) (이. 29:18).
다시:
들어라, 너희 귀머거리들아; 그리고 쳐다보라, 너희 소경들아, 너희가 볼는지 모른다
(이. 42:18).
다시:
눈을 가진 소경인 백성, 그리고 귀를 가진 귀머거리 백성을 데려내오라 (이. 43:8).
다시:
보는 그들의 눈이 닫혀져 있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듣는 그들의 귀가 경청할 것이다
(이. 32:3).
다시:
네 눈이 너희 선생들을 볼 것이다, 그리고 너희 귀가 말을 들을 것이다 (이. 30:20, 21).
다시:
피를 들음으로부터 자기 귀를 멈추게 한 자, 악을 봄으로부터 자기 눈을 닫은 자는 높 은 곳에 거주할 것이다 (이. 33:15, 16).
에스겔서에서:
사람의 아들, 너는 반역의 집 한가운데에서 거주하라, 그들의 눈은 보는데 보지 못하고, 듣 는 귀를 가졌는데 듣지 못하는 자들이다 (겔. 12:2).
위 구절들에서 “들음”과 “봄”은 이것이 저것을 뒤잇기 때문에 모두 언급된다; 즉 이해력에 있는 신앙은 “봄”이고, 의지력에 있는 신앙은 “들음”이다. 그렇지 않으면 아마 하나만 언급해도 충분했을지 모른다. 그리고 이로부터 왜 야곱의 아들들이 하나는 “본다”로부터, 또 하나는 “듣는다”로부터 명명되었는지도 분명해졌을 것이다.
“봄”이 기억 속의 지식 안에 있는 신앙, 또는 이해력에 있는 신앙을, ”들음“이 순종에 있는 신앙, 또는 의지 안에 있는 신앙을 의미하는 것은 다른 삶에 있는 것과의 상응과 그로부터 파생되는 의미들로부터 이다. 그 이유가 지적인 이들, 그로부터 신앙 안에 있는 이들이 눈의 영역에; 그리고 순종하는 이들, 이로부터 신앙 안에 있는 이들은 귀의 영역에 있기 때문이다. 이것에 관한 더 설명은 이 장의 끝, 주님의 신성한 자비로부터 웅대한 사람, 그리고 이 사람과 더불은 인간 신체에 있는 모든 것들의 상응이 서술되는 대목에서 발견될 것이다.
그러므로 내적 의미에서 “눈”이 이해함이다는 것; 그리고 “귀”가 순종함이다는 것, 그리고 영적 의미에서 파생되는 신앙, 또는 의지에 있는 신앙이다는 것을 아래 인용 구절에서 분명해질 것이다. 이사야서에서:
그렇다, 너는 듣지 못했다; 그렇다, 너는 알지 못했다; 그렇다, 그때로부터 너희 귀는 그 자 체 열리지 않았다 (이. 47:8).
다시:
주 여호비께서 나의 귀를 듣도록 일깨울 것이다, 마치 배운 자들 같이 이다; 주 여호비께서 나의 귀를 열으셨다, 그리고 나는 반역하지 않았다 (이. 50:4, 5).
다시:
나에게 확실히 경청하라, 그리고 선인 것을 너희는 먹으라, 너희 혼이 살찜 안에서 그 자체 즐거워 할는지 모른다; 너의 귀를 기울여라, 그리고 나에게 오라; 너의 혼이 살도록 들어라 (이. 55:2, 3).
예레미야서에서:
누구에게 내가 말하고 증명해서 그들이 들을는지 모르도록 할 것인가; 잘 보라 그들의 귀 는 할례받지 않았다, 그리고 그들은 귀기울일 수 없다 (예. 6:10).
다시:
이것을 나는 그들에게 명했다, 말하기를, 너희는 내 음성을 들어라, 그리고 나는 너희 하느 님일 것이다, 그리고 너희는 나의 백성일 것이다; 그리고 너희는 듣지 않았다, 자기들의 귀 를 기울이지도 않았다 (예. 7:23, 24, 26).
다시:
여호와의 말씀을 들어라, 오 너희 여인아; 그리고 너희 귀를 그분의 입으로부터 말을 받아 들이게 하라 (예. 9:20).
다시:
너희는 너희의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그리고 나에게 순종하지도 않았다 (예. 35:15).
에스겔서에서:
사람의 아들, 내가 네게 말했던 모든 나의 말들을 네 심정에서 받을 것이다. 그리고 네 귀 에서 들을 것이다 (겔. 3:10).
다시:
나는 내 열정을 너희에 맞서 놓아둘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너희를 격노함으로 다룰 것이 다; 그들은 너희 코와 귀를 가져갈 것이다 (겔. 23:25).
“코와 귀를 가져감”은 진리와 선을 지각함을, 그리고 신앙의 순종함을 표시한다. 스가랴서에서:
그들은 귀기울기를 거절했다, 그리고 완고한 어깨로 돌아섰다, 그리고 그들의 귀를 무겁게 만들었다, 그들이 듣지 않으려 하려 해서 이다; 그리고 그들은 자기들의 심정을 최고로 굳 어 지게 했다, 그들이 법을 듣지 않으려 해서 이다 (슥. 7:11, 12).
아모스서에서:
고로 여호와께서 말하신다, 목자가 사자의 입으로부터 두 다리를, 또는 귀 조각을 잡아채듯 이, 그렇게 이스라엘의 아들들은 사마리아에서, 침대의 모퉁이에서, 그리고 침상의 끝에서 잡아채질 것이다 (암. 2:12).
“두 다리를 잡아채는 것”은 선으로부터의 의지를 표시한다; 그리고 “귀 조각”은 진리의 의지를 표시한다. “귀 조각”이 이런 의미를 가지는 것은 다른 삶과의 상응과 그로부터 파생되는 의미로부터 이다, 이에 따라 말씀의 내적 의미도 있고, 이스라엘과 유태인의 의식들에 있는 의미도 마찬가지이다. 아론과 그의 아들들이 성직 봉사에 임명되어 취임하였을 때, 명령된 바, 모세는 수양의 피를 가져와서 아론의 귓바퀴에, 그의 아들들의 귓바퀴에 놓도록, 그리고 그들의 오른 손의 엄지에, 그리고 엄지 발가락 위에 놓도록 했다 (출. 29:20). 이 의식을 수단으로 신앙의 의지가 표현되어졌다, 이 안으로 성직자로서 그는 개시되는 것이다. 이 의식이 거룩하다는 것은 모든 이가 알는지 모른다, 그 이유는 여호와에 의해 모세에게 명령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렇게 귓바퀴에 피를 놓는 것은 거룩했다. 세부적 거룩한 사항에서 의미되는 것은 말씀의 내적 의미로부터서만 알려질 수 있다, 이 의미란 의지로부터의 신앙은 반드시 보존되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귀”에 의해 순종이 의미되는 것, 내적 의미에서 신앙이 의미되는 것을 섬김으로부터 떠나지 않으려는 종에 관한 의식 행사로부터 더 알게 된다. 모세의 책에서:
만일 남종, 또는 여종이 섬김으로부터 떠나지 않으려 한다면, 그의 주인은 그를 하느님에게 데려갈 것이다, 그리고 그를 문으로, 또는 문지방으로 데려갈 것이다, 그리고 그의 주인 은 그의 귀를 송곳으로 뚫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영원히 그를 섬길 것이다
(출. 21:5, 6; 신. 15:17);
“송곳으로 문지방에서 귀를 뚫는 것”은 영구히 섬김, 또는 순종함을 의미한다; 영적 의미에서 이것은 진리를 이해함을 뜻하지 않는 것, 그러나 순종으로부터 진리를 뜻하는 것을 의미하는 바, 이것은 상대적으로 덜 자유한 상태이다.
내적 의미에서 신앙의 순종이 “귀”에 의해, 그리고 순종함은 “들음”에 의해 의미되는 바, 주님께서 자주 말하신 말씀으로부터도 분명해진다:
귀를 가진 자는 자기로 하여금 듣게 하라
(마. 13:9, 43; 막. 4:9, 23; 7:16; 눅. 8:8; 14:35; 계. 2:7, 11, 29; 3:13, 22).
최고 의미에서 “듣는 것”은 섭리를 의미한다는 것; 그리고 “보는 것”은 예견하심이다는 것은 “눈”과 “귀”가 여호와, 또는 주님을 서술하는 말씀의 구절로부터 분명해진다. 이사야서에서:
너의 귀를 기울여라 오 여호와 그리고 들어라; 너의 귀를 열어라 오 여호와 그리고 보라 (이. 37:17).
다니엘서에서:
오 나의 하느님 당신의 귀를 기울이시어 들어주소서; 오 여호와 당신의 눈을 여시고 우리 의 황폐됨을 보소서 (단. 9:18).
다윗서에서:
오 하느님 당신의 귀를 제게 기울이소서, 그리고 제 말을 들으소서 (시. 17:6).
다시:
당신의 귀를 나에게 기울이소서, 그리고 나를 구하소서 (시. 71:2).
다시:
당신의 진리 때문에 당신의 귀를 내 기도에 돌아서게 하소서, 당신의 정의 때문에 제게 응답하소서 (시. 143;1).
예레미야애가서에서:
오 여호와 당신은 내 음성을 들으셨습니다; 내 시력으로부터 당신의 귀를 숨기지 마소서 (애. 3:55, 56).
다윗서에서:
오 여호와 내 고난의 날에 당신의 얼굴을 나로부터 숨기지 마소서; 당신의 귀를 나에게 기 울이소서; 제가 외치는 날에 제게 응답하소서 (시. 102:1, 2).
여호와께서 인간의 것 같은 귀나 눈을 가지시지 않았을 것은 누구나 인정할 것이다, 그러나 “눈”과 “귀”에 의해 의미되는 것을 서술할 수 있는 신성에 속하는 특성, 즉 무한한 의지와 무한한 이해력이다. 무한한 의지는 섭리이다, 그리고 무한한 이해함은 예견이다. 이것들이 “눈”과 “귀”에 의해 최고 의미에서 이해되어진 것들이다. 이상으로부터 시므온이라 명명하게 된 “여호와께서 들으셨다”에 의해 의미되는 여러 의미들을 알았으리라 본다.

3870. 내가 미움받은 것. 이는 의지가 신앙에 상응되지 않을 경우, 그 신앙의 상태를 의미한다. 이는 “미워함”의 의미가 사랑되지 않음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 이유가 이와 같은 것이 의지가 신앙의 것과 상응되지 않을 경우 신앙의 상태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내적 의미에서 취급된 주제는 외적인 것으로부터 내적인 것으로의 인간의 거듭남이 발전해감이다; 즉 신앙의 진리로부터 선행의 선으로의 발전이다. 신앙의 진리는 외적이고 선행의 선은 내적이다. 신앙의 진리가 살아지기 위하여 그것은 반드시 의지 안으로 받아들여져야만 한다. 그래야 생명을 받기 때문이다; 진리가 앎으로부터서는 살아 있지 않으나 뜻함으로부터서는 살아 있다. 생명은 주님이 인간 안에서 창조하시는 새로운 뜻함을 통하여 주님으로부터 흘러든다. 처음의 생명은 순종을 수단으로 그 지체를 명백히 한다, 이것은 처음의 의지이다; 두 번째는 진리를 행함에 대한 애착을 수단으로 하고, 이는 의지가 발전한 것이다, 이것은 즐거움과 복됨이 진리를 행함 안에서 지각될 때 존재한다. 이렇게 신앙의 발전이 있지 않으면, 진리는 진리가 되어 있지 않는다, 때로는 삶과 무관한 것, 때로는 거짓을 확증하는 편법 수단에 동원되든가, 때로는 거짓된 것을 타인에게 설득시키려 할 때 등등에 이용당하고 만다. 이런 경우는 인간의 악한 애착, 또는 탐욕과 그 자체 짝짓기를 하기 때문이다. 즉 당사자 자신의 고유의 의지와 더불어서일 경우, 선행에 반대되기 때문에 야기되는 것이다. 오늘날 흔해진 교리, 선행 없이도 신앙만으로 구원된다는 대단히 쉬운, 그럴듯한 거듭남의 삶을 증언하는 도구로 진리가 타락된 것과 같다.
[2] 이런 신앙, 즉 선행과 분리된 신앙, 그러므로 선행에 반대되는 신앙이 르우벤에 이어지는 사건에서 표현되어져 있다, 즉 그가 자기 아버지의 첩, 빌하와 드러누운 사건이다 (창. 35:3, 4). 이에 관하여 야곱, 그 당시 이스라엘은 아래 말로 르우벤이 대단히 싫은 사람이라고 표현했다:
르우벤, 나의 첫 출생, 너는 나의 힘이다, 그리고 나의 기력의 시작이다; 너는 물 같이 가벼 워서 빼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 이유는 네가 네 아버지의 침대에 갔기 때문이다, 그 침대를 더럽혔기 때문이다; 그는 내 침상에 올라갔다 (창. 49:3, 4).
선행과 분리되고, 선행에 반대되어 있는 이 신앙의 의지와 애착은 위 인용 구절에 이어지는 시므온과 레위에 관한 아래의 말에서 역시 묘사되어 있다:
시므온과 레위는 형제이다. 폭력의 무기들은 그들의 검들이다; 그들의 비밀들 안으로 내 혼 은 가지 말지라, 그리고 그들의 회합에 내 영광은 하나되지 말지라. 그 이유는 그들이 분노 하자, 그들은 사람을 죽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기분이 유쾌하면 그들은 수소를 느슨해지게 했다. 그의 성냄은 격렬한 바 저주받아야 하고, 그들의 분노는 잔인한 바 저주받아야 한 다, 나는 그들을 야곱 안에서 나누어 낼 것이고, 이스라엘 안에서 흩을 것이다.
이것이 여기서 “시므온과 레위”에 의해 묘사된 선행으로부터 분리된 신앙이다는 것은 주님의 신성한 자비로부터 이어지는 구절에서 살핀다.

그리고 나에게 이것 역시 주셨다. 이는 계속적인 것을 의미한다. 즉 순종에, 또는 의지에 있는 신앙, 기억 속의 지식, 또는 이해함에 있는 신앙에 뒤어지는 신앙의 상태인데 이는 살폈다. 이것이 “그리고 나에게 이것 역시 주셨다”에 의해 의미된다.

그리고 그녀는 그의 이름을 시므온이라 불렀다. 이는 그것의 품질을 의미한다. 이는 “이름”, 그리고 “이름을 부름”의 의미가 품질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품질 자체는 레아가 뱉은 말, 즉 “여호와께서는 내가 미움받는 것을 들으셨다, 그리고 나에게 이것 역시 주셨다”의 내적 의미 안에 포함되어 있다. 이 품질이 “시므온”에 의해 의미된 것, 또한 그로부터 명명된 지파의 이름에 의미되어 있다. 이 품질은 인간이 거듭날 때, 또는 그가 교회가 되어갈 때, 두 번째 있게 되는 교회의 두 번째 보편적인 것(단계)이다; 즉 순종, 또는 신앙으로부터의 진리를 행하려는 의지이다; 이 순종, 이 의지 안에 선행이 심어지는데, 이것이 이어지는 구절에서 “레위”에 의해 의미되어진다.

34절. 그리고 그녀는 다시 임신했다, 그리고 아들을 낳았다, 그리고 말했다, 지금 이번에는 나의 남자가 나에게 굳게 결합할 것이다. 그 이유는 내가 세 아들을 낳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녀는 그의 이름을 레위라 불렀다.

그리고 그녀는 다시 임신했다, 그리고 아들을 낳았다. 이는 외적인 것으로부터 더 내적인 것쪽으로 있는 영적인 임신과 출생을 의미하고 있다. 이는 같은 말이 언급되는 대목에서 이미 살폈다.

그리고 말했다, 지금 이번에는 내 남자가 나에게 굳게 결합할 것이다. 이는 최고의 의미에서 사랑과 자비를, 내적 의미에서 선행을, 외적 의미에서 결합을, 현재의 경우 영적인 사랑을 의미한다. 이는 “굳게 결합함”의 의미로부터 알게 된다. 외적 또는 대략적인 내면의 의미에서 “굳게 결합하는 것(to cleave)”이 결합이다는 것은 설명이 필요 없다. 내적 의미에서 “굳게 결합함”이 선행(charity)이다는 것은 선행, 또는 같은 말로 서로의 사랑 (mutual love)은 영적인 결합이다; 그 이유는 이것이 의지의 애착들의 결합, 결과적으로 이해함으로부터의 생각들에 동의함이기 때문이다; 고로 마음의 두 부분들이 결합함이다. 최고 의미에서 “굳게 결합함”은 사랑과 자비인 것은 이런 사실로부터 분명해진다. 즉 선행, 또는 영적인 사랑이라 단언되는 무한하고 영원인 것은 자비이고, 이 자비란 비참함 안에 가라앉으려 드는 인류를 향한 신성한 사랑이다. 그 이유가 인간을 그 자체만으로 본다면 인간은 악밖에 더 아니고, 당사자 자신으로부터 자기 안에 든 것은 지옥적인 것 밖에 없기 때문, 그리고 그가 신선한 사랑으로부터 주님을 수단으로 바라볼 때, 자신으로부터 있는 지옥적인 것으로부터 자신의 승강함이 있다, 그리고 그가 구제됨이 “자비”라 불리운다. 자비가 신성한 사랑으로부터 이기 때문에, “굳게 결합함”에 의해서 사랑과 자비 양쪽 모두가 의미된다.
내적 의미에서 “굳게 결합함”이 영적인 사랑, 또는 이웃을 향한 선행을 의미한다는 것은 말씀의 아래 구절로도 알는지 모른다. 이사야서에서:
여호와께 굳게 결합한 외국인의 아들들로 말하지 말게 할 것은, 여호와께서 그분의 백성으 로부터 나를 정녕 분리하실 것이다라 말함이다. 여호와께 굳게 결합하고, 그분을 섬기며, 여호와의 이름을 사랑하는 외국인의 아들들은 그분의 종들일 것이다 (이. 56:3, 6).
“여호와께 굳게 결합하는 것”은 명령들을 준수하는 것, 이것은 영적인 사랑으로부터 이다; 그 이유가 이웃을 향한 선행의 선 안에 있지 않으면, 누구도 심정으로부터 하느님의 명령들을 준수하지 않기 때문이다. 예레미야서에서:
이 날에 이스라엘의 아들들이 올 것이다, 그들과 유다의 아들들은 슬피 울면서 가고, 자기 들의 하느님을 찾을 것이다. 그들은 시온쪽으로 얼굴이 있게 하고, 길에 관해 시온에 물을 것이다, 너희는 와서 잊혀지지 않는 영원히 지속되는 언약과 더불어 여호와께 굳게 결합되 게 하라 (예. 50:4, 5).
위에서 “여호와께 굳게 결합함”은 심정으로부터, 즉 선행의 선으로부터 명령들을 준수하는 것과 같다.
스가랴서에서:
많은 나라들이 그 날에 여호와께 굳게 결합할 것이다, 그리고 나의 백성일 것이다
(슥. 2:11).
위 구절의 의미도 앞 구절과 같다. 이사야서에서:
여호와께서 야곱을 불쌍히 여기실 것이다, 그리고 이스라엘을 다시 택하실 것이다, 그리고 그들을 그들 자신의 토지에 놓아두실 것이다; 그리고 방랑자가 그들에게 굳게 결합할 것이 다, 그리고 그들은 야곱의 집에 자신들을 연합할 것이다 (이. 14:1).
“방랑자가 그들에게 굳게 결합하는 것”은 법을 준수함이 비슷하다는 것; “야곱의 집에 연합하는 것”은 선행의 선 안에 있는 것을 의미한다, 이 선 안에 “야곱의 집”에 의해 의미된 이들이 있다. 마태복음서에서:
아무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 그는 이쪽을 미워하고 다른쪽을 사랑하든지, 또는 그가 이쪽에 굳게 결합하고 다른쪽은 경멸하든지 할 것이다 (마. 6:24).
위에서 “사랑하는 것”은 사랑의 천적 평면을 표시한다; 그리고 “굳게 결합함”은 사랑의 영적 평면을 표시한다; 둘이 언급된 이유는 둘은 서로에서 구별되기 때문이다. 만일 같다면 하나만 언급하셨을지도 모른다.
이렇기 때문에 영적 사랑에 있는 이들이 “레위의 아들들”이라 불리운다. 말라기서에서:
그분이 오시는 날에 누가 견디어내며, 그분이 나타나실 때 누가 서있을 것인가? 그분은 은 의 정제하는 분으로, 순수해지게 하는 분으로 앉으실 것이다; 그리고 그분은 레위의 아들들 을 순수해지게 하실 것이다, 그리고 금과 은 같이 그들을 걸러내실 것이다 (말. 3:2, 3).
주님은 최고 의미에서 영적 사랑 안에 있는 이들을 향한 그분의 신성한 사랑과 자비로부터 “레위”에 의해 의미된다. 말라기서를 보자:
내가 너희에게 이 명령들을 보냈다는 것을 알도록, 나의 언약이 레위인들과 더불어 있다는 것을 알도록 이다, 여호와 체바욷께서 말하신다; 나의 언약은 그들과 더불어 생명과 평화로 부터 있을 것이다. 너희는 길에서 비껴섰다; 너희는 많은 이들로 법에서 걸려넘어지게 했 다; 너희는 레위의 언약을 부패되게 했다. 그러므로 나는 너희를 정당하게 만들었다
(말. 2:4, 5, 8, 9).
그리고 최고 의미에서 “레위”는 주님의 신성한 사랑 또는 자비, 그리고 내적 의미에서 영적인 사랑, 그러므로 레위 지파는 성직 직분을 맡았다; 그 이유가 말씀의 내적 의미에서 “성직”은 사랑의 거룩함밖에 더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왕권”은 신앙의 거룩함이다.
“레위”라고 이름을 붙이게 된 표현인 “굳게 결합함”에 의해 영적인 사랑, 같은 말로 서로의 사랑이 의미되었는데, 이것이 원어적 표현에서는 서로 주고 받는 것 또한 의미하였다; 그리고 유태 교회에서 서로 주고 받는 것에 의해 서로의 사랑이 표현되었는데, 더 자세한 것은 주님의 신성한 자비로부터 별도로 취급해볼 것이다. 서로의 사랑은 우정 관계와 이런 점에서 다르다: 즉 서로의 사랑은 인간 안에 있는 선을 중요시 한다; 친구 관계는 인간에 주목하고 있다; 그리고 친구 관계가 선으로부터 인간을 주목할 경우, 또는 선을 위하여 주목할 경우, 서로의 사랑과 같아진다, 그러나 자기를 위하여 선이라 부를 경우, 친구 관계는 서로의 사랑이 아니고, 자기를 사랑함에 접근되어진다, 접근되는 만큼 서로의 사랑에 반대된다. 자체만에서 보면 서로의 사랑은 이웃을 향한 사랑밖에 더 아니다; 그 이유가 내적 의미에서 이웃은 선밖에, 최고 의미에서는 주님밖에 더 없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모든 선은 주님으로부터 있고, 그분은 선 자체이시기 때문이다. 이 서로의 사랑, 또는 이웃을 향한 선행이 영적 사랑에 의해 뜻해져 있다, 그리고 “레위”에 의해 의미되고 있다.
더 나아가 말씀에서 천적인 사랑과 부부의 사랑을 “굳게 결합함”의 표현을 수단으로 글자 의미에 표현하여 놓고 있다. 그러나 원어에서의 표현으로부터서는 레위가 명명된 것과는 다르다. 이 단어는 아직 더 가까이 결합함을 의미한다. 모세의 책에서:
너희는 여호와 너희 하느님을 경외할 것이다; 그분을 너희는 섬기고, 그분에게 굳게 결합할 것이다 (신. 10:20). 너희는 여호와, 너의 하느님의 뒤를 따라 걸을 것이다, 그리고 그분을 경외하라, 그리고 그분의 명령들을 지키라, 그리고 그분의 음성을 들을 것이다, 그리고 너 희는 그분을 섬기고, 그분에게 굳게 결합할 것이다 (신. 13:4). 여호와 너의 하느님을 사랑 하는 것, 그리고 그분의 모든 길들에서 걷는 것, 그리고 그분에게 굳게 결합하는 것 (신. 11:22). 여호와 네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 그분의 음성에 순종하는 것, 그리고 그분에게 굳 게 결합하는 것; 그 이유가 그분이 네 생명이기 때문이다 (신. 30:20).
여호수아서에서:
명령들과 법을 행함에 애써 집념하라, 이것은 여호와의 종 모세가 너희에게 명령했다, 즉 여호와 너희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 그리고 그분의 모든 길들에서 걷는 것, 그리고 그분의 명령들을 지키는 것, 그리고 그분과 굳게 결합하는 것, 그리고 네 모든 심정으로, 그리고 네 모든 혼을 가지고 그분을 섬기는 것이다 (여. 22:5).
열왕기하서에서:
왕 히즈키야는 이스라엘의 하느님 여호와를 신뢰했다. 그는 여호와께 굳게 결합했다, 그는 그분을 따름으로부터 떠나지 않았다, 그분의 명령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것들을 준수했다 (왕하 18:5, 6).
예레미야서에서:
허리띠가 사람의 허리에 굳게 결합되듯, 나는 나에게 이스라엘의 모든 집, 그리고 유다의 모든 집이 굳게 결합되게 했다, 하여 그들이 백성으로 나에게 있도록, 그리고 이름을 위하 여, 그리고 찬양을 위하여, 그리고 장식품을 위하여 있도록 이다; 그리고 너희는 순종하지 않았다 (예. 13:11).
부부의 사랑이 “굳게 결합함”에 의해 표현된 구절은 아래와 같다:
그러므로 남자는 그의 아버지와 그의 어머니를 떠날 것이다, 그리고 그의 아내와 굳게 결 합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하나의 육체일 것이다 (창. 2:24). 너희의 경직된 심정 때문에, 모세가 이 명령들을 썼다; 그러나 창조의 시작으로부터 하느님께서는 남성과 여성을 만드 셨다; 이 원인 때문에 남자는 그의 아버지와 그의 어머니를 떠나 그의 아내와 굳게 결합할 것이다; 그리고 그들 둘은 하나의 육체일 것이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 함께 결합해두신 것 을 인간이 쪼개지게 하지 말라 (막. 10:5-9; 마. 19:5). 세겜의 혼이 야곱의 딸 디나에게 굳게 결합했다; 그는 처녀를 사랑했다, 그리고 처녀의 심정에 말했다 (창. 34:3). 솔로몬은 외국의 여인을 사랑했다; 솔로몬은 사랑 안에서 이 여인들과 굳게 결합했다
(왕상. 11:1, 2).
위 모두의 구절로부터 “굳게 결합하는 것”이 사랑의 용어이다는 것, 고대 시대에서 교회들에 의해 사용됨으로 받아진 것, 이 교회들은 의미들 안에 있었다는 것; 그리고 내적 의미에서 이것은 영적인 결합밖에 더 아니다는 것, 이 결합은 선행과 사랑이다는 것임을 알았을 것이다.

그 이유는 내가 세 아들을 그에게 낳았기 때문이다. 이는 계속적인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세 아들”에 의해 의미된 계속적인 상태란 선행이 지금 도착하는 상태이다; 그 이유가 인간이 거듭나지는 동안, 즉 교회로 만들어지는 동안, 첫 번째의 일은 신앙의 진리가 무엇인지를 알고 이해해야만 하는 것이다; 두 번째 일은 그것을 뜻하고 행하는 것이다; 그리고 세 번째 일은 그것에 감동되는 것이다. 그리고 인간이 진리에 감동될 때, 즉 그가 진리에 따라 행동함에서 즐거움과 복됨을 지각할 때, 그때 그는 선행 안에, 또는 서로의 사랑 안에 있다. 이런 계속됨이 “나는 그에게 세 아들을 낳았다”에 의해 뜻해진다.

그러므로 그는 그의 이름을 레위라고 불렀다. 이는 그것의 품질을 의미한다. 이는 “이름”, 그리고 “이름을 부름”의 의미가 품질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품질은 이 말 안에 즉 “지금 내 사람은 나와 굳게 결합할 것이다, 그 이유는 내가 그에게 세 아들을 낳았기 때문이다”에 포함되어 있다. 이 품질이 “레위”에 의해 의미되었고, 그로부터 명명된 지파에 의해서도 의미된다; 그리고 이것이 교회의 세 번째 보편적인 것이다 (즉, 인간이 거듭나질 때, 또는 교회가 되어갈 때 세 번째의 단계이다), 그리고 선행이다. 선행 측면의 경우, 그 자체 안에 진리를 뜻함이 포함된다; 그리고 이를 통하여 그 자체 안에 진리를 이해함이 포함된다. 선행 안에 있는 자는 누구이든 이것을 가진다. 그러나 인간이 선행에 당도하기 전, 그는 반드시 처음에 외적인 것 안에, 즉 진리를 이해함 안에 있었어야만 하고; 다음으로 진리를 뜻함 안에 있었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진리에 애착함 안에서, 즉 선행 안에 있는다. 그리고 인간이 선행 안에 있을 때, 그는 그때 주님을 지켜보는데, 이것이 야곱의 넷째 아들인 “유다”로 표현되는 여러 의미 중에서 최고 의미이다.

35절. 그리고 그녀는 다시 임신했다, 그리고 아들을 낳았다, 그리고 그녀는 말했다, 이번에 나는 여호와를 고백할 것이다. 그러므로 그녀는 그의 이름을 유다라고 불렀다. 그리고 그녀는 출산으로부터 아직 서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다시 임신했다, 그리고 아들을 낳았다. 이는 외적인 것에서부터 내적인 것에 이르는데 더 있게 되는 영적인 임신과 출생을 의미한다. 이는 앞에서 살폈는 바 설명은 생략한다

그리고 그녀는 말했다, 이번에는 내가 여호와를 고백할 것이다. 이는 최고의 의미에서 주님을, 내적 의미에서 말씀을, 외적 의미에서 말씀으로부터의 교리를, 현재의 경우 사랑 속의 신성과 주님의 천적 왕국을 의미한다. 이는 “고백함”의 의미로부터 알게 된다. 외적, 또는 대략적인 내면의 의미에서 “고백하는 것(confess)”은 말씀으로부터의 교리임이 분명하다; 그 이유가 고백은 흔히 알고 있는 것, 즉 인간이 주님 앞에서 그의 신앙을 선포하는 것밖에 더 아니기 때문이다; 인간은 자기가 믿는 것이 무엇이든, 그것 안에서 납득한다. 결과적으로 자기에게 있는 것이 무엇이든 그 사람에게는 교리이다는 말이다. 내적 의미에서 “고백하는 것”은 말씀을 의미하고 말씀을 뒤따르고 있어야 한다, 그 이유가 신앙과 선행의 모든 교리는 말씀으로부터 있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인간 자신만으로부터 이다면, 그는 천적이고 영적인 것들에 대해서는 어떤 것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는 신성한 계시로부터서만 그것들을 알 수 있다, 이 신성한 계시가 말씀이다. 최고 의미에서 “고백하는 것”이 주님을 의미하는 것은 주님이 말씀이시기 때문, 결과적으로 말씀으로부터의 교리, 그리고 말씀이 내적 의미에서는 주님만에, 그리고 그분의 왕국만에 주목하기 때문이다. 고로 “여호와를 고백하는 것”은 사랑의 신성과 그분의 천적 왕국이 의미된다; 그 이유가 주님이 신성한 사랑 자체, 그리고 이 사랑의 유입이 그분의 왕국을 구성하기 때문, 그리고 이것은 그분으로부터 있는 말씀을 수단으로 하기 때문이다. “여호와를 고백함”으로부터 명명된 “유다”에 의해 사랑의 신성과 주님의 천적 왕국이 의미된다는 것은 이미 살폈다 (3654항); 그리고 이로부터 여기서 “고백함”이 이 의미를 가진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고백하다”, 또는 “고백”의 의미는 이 단어가 언급되는 구절로부터서도 알는지 모른다. 이사야서에서:
그 날에 너희는 말할 것이다, 나는 당신에게 고백할 것입니다, 오 여호와시여; 비록 당신이 제게 성내셨을지라도, 당신의 노염은 바뀌어집니다, 그리고 당신은 저를 위로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날에 너희는 말할 것이다, 여호와에게 고백하라, 그분의 이름을 불러라, 그분의 일들을 백성들이 알게 만들어라, 그분의 이름이 드높다함을 말하라 (이. 12:1, 4).
다윗서에서:
우리는 당신에게 고백합니다, 오 하느님, 우리는 고백합니다, 그리고 당신의 이름이 가까이 있습니다, 당신의 경이한 일들이 선포합니다 (시. 75:1).
다시:
고백을 위한 시편: 기뻐하는 시끄러움을 여호와께 만들어라, 모든 땅아; 그분이 우리를 만 드셨다, 그리고 우리 자신이 아니다, 그분의 백성, 그분의 풀밭의 양떼. 고백함으로 그분의 큰 문들을 통하여, 찬양과 더불어 그분의 뜰 안으로 들어가라; 너희는 그분에게 고백하라, 그리고 그분의 이름을 복되게 하라. 그 이유가 여호와는 선하시고, 그분의 자비는 영원하시 고, 그분의 진리는 세세토록 있기 때문이다 (시. 100:1-5).
위에서 “고백함”과 “고백”이 여호와, 또는 주님을 인정함, 그분의 것인 것을 인정함을 의미하는 것이 분명하다. 이 인정함이 교리와 말씀이다는 것은 분명하다.
이사야서에서 다시:
여호와께서 시온을 위로하실 것이다, 그분은 그녀의 모든 황폐된 장소를 위로하실 것이다; 기쁨과 즐거움이 거기 안에서 발견될 것이다. 고백과 노래하는 음성이 발견될 것이다
(이. 51:3).
그리고 예레미야서에서:
고로 여호와께서 말하신다, 잘 보라 나는 야곱의 천막들의 포로된 것을 도로 가져다놓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의 거처에 불쌍히 여김을 가질 것이다; 그리고 도성은 그녀 자신의 돌더미 위에 건축될 것이다, 그리고 궁전이 거기로부터의 방식에 따라 깃들일 것이다; 그리 고 그것들로부터 고백이 진행될 것이다, 그리고 즐거움을 만드는 그것들로부터의 음성이 진행될 것이다 (예. 30:18, 19).
다윗서에서:
나는 그분의 정의에 따라서 여호와께 고백할 것이다, 그리고 나는 가장 높으신 여호와의 이름을 노래할 것이다 (시. 7:17).
다시:
내가 하느님의 집에 갈 때, 노래함과 고백함의 음성과 더불어, 축제를 지키는 군중과 더불 어 (시. 42:4).
다시:
나는 나라들 사이에서 오 주님, 당신에게 고백할 것입니다, 나는 백성들 사이에서 당신에게 시편을 노래할 것입니다; 그 이유가 당신의 자비는 천국에서까지 조차 위대하시기 때문입 니다 (시. 57:9, 10).
위 구절로부터 분명해지는 바, “고백”은 사랑의 천적 평면에 관련된다는 것이 분명하다, 그 이유는 이 용어는 사랑의 영적 평면에 속하는 용어로부터 구별되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고백과 노래하는 음성”, “즐거움을 만드는 그들의 음성”, “나는 나라들 사이에서 당신에게 고백할 것입니다”, “나는 백성들 사이에서 당신에게 시편들을 노래할 것입니다”라 말하기 때문이다. “고백”, “고백함”은 천적 평면이다를, “노래하는 음성”, “즐거움을 만드는 그들의 음성”은 영적 평면에서의 표현들이다. 또한 “나라들 사이에서 고백함, 그리고 백성들 사이에서 노래함”이라 말해지는데, 그 이유는 “나라들”이 선 안에 있는 이들을, “백성들”은 진리 안에 있는 이들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즉 천적인 사랑 안에 있는 이들, 영적인 사랑 안에 있는 이들을 의미한다는 말이다. 말씀에서, 예언서들과 더불어서, 위의 두 표현들이 대부분 발생하는데, 하나는 천적 평면, 또는 선에, 또 하나는 영적 평면, 또는 진리에 관련되고 있다. 이는 신성한 결혼, 즉 선과 진리의 결혼이 말씀의 각 부분에서 있도록 하시기 위함이다. 이로부터 분명해지는 것은, “고백”은 사랑의 천적인 것을 포함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진짜 고백, 또는 심정으로부터 있는 고백은 선으로부터서만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진리로부터 있는 고백이 “노래함의 음성”, “즐거움을 만드는 음성”. “시편들을 노래하는 음성”이라 불리운다.
이와 같이 다윗서에서:
나는 노래를 가지고 하느님의 이름을 찬양할 것이다, 그리고 고백을 가지고 그분을 크게 보이게 할 것이다 (시. 69:30).
다시:
나는 현악기로 당신에게 고백할 것입니다, 당신의 진리까지도, 오 나의 하느님; 당신에게 나는 하프로 노래합니다, 오 당신 이스라엘의 거룩한 분이시여 (시. 71:22).
“하프로 노래하는 것”, 그리고 다른 현악기로 노래하는 것은 영적인 것들을 의미하는데, 이미 살폈다. 다시:
고백을 가지고 그분의 큰 문으로 들어가서, 찬양으로 그분의 뜰로 들어가라; 그분에게 고 백, 그분의 이름을 찬미 (시. 100:4);
위에서 “고백”과 “고백함”은 선의 사랑으로부터 이고, “찬양함”과 “찬미함”은 진리의 사랑으로부터 이다. 다시:
고백으로 여호와께 대답하라; 우리의 하느님에게 하프 위에서 시편들을 노래하라
(시. 147:7).
다시:
나는 큰 회중 안에서 여호와께 고백할 것입니다; 나는 많은 백성 사이에서 당신을 찬송할 것입니다 (시. 109:30).
다시:
우리 당신의 백성 그리고 당신의 풀밭의 양떼가 당신에게 고백할 것입니다; 우리는 세세토 록 당신의 찬양을 하나하나 열거할 것입니다 (시. 79:13).
다시:
그들로 여호와께 그분의 자비를 고백하게 하자, 그리고 사람의 아들들에게 그분의 경이한 일들을 고백하게 하자, 그들이 고백의 제물을 바치게 하자, 그리고 노래함으로 그분의 일들 을 선포하게 하자 (시. 107:21, 22).
위 구절은 하나의 것을 위해 두 가지 표현을 포함하고 있다는 것이 분명하다, 만일 두 표현 중 하나는 선인 천적 평면을, 또 하나는 진리인 영적 평면을 포함하지 않으면 중복된 말인 듯 비쳐질 수도 있다; 결과적으로 이 두 표현은 신성한 결혼이라는 하나를 표현하고 있다. 주님의 왕국 자체가 이 결혼이기 때문이다. 이 신비는 말씀 전체를 망라하여 스며들어 있다, 그러나 내적 의미를 수단으로 하지 않으면 결코 밝혀지지 않는다. 다시 말해 천적 평면에 속하는 것, 그리고 영적 평면에 속하는 것에 관한 지식을 아는 특권을 누릴 수 없다는 말이다. 어쨌든 우선적으로 익혀야 하는 것은 천적 평면이, 영적 평면이 무엇인지에 대한 일반적 측면(넓은 측면)인데, 이는 많이 취급된 바 있다.
천적 사랑으로부터인 심정으로부터의 진짜 고백은 순수한 의미에서 있는 고백이다. 이 고백 안에 있는 자는 모든 선이 주님으로부터 있다는 것을, 그리고 모든 악은 자신으로부터 이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리고 그가 이런 인정함 안에 있을 때, 그는 면목 없음의 상태 안에 있다, 그 이유가 그때 그는 주님이 자기 안에 있는 모든 것이시다는 것, 그리고 자기는 상대적으로 아무 것도 아니다는 것을 인정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고백이 이 상태로부터 만들어질 때, 이것은 천적 수준의 사랑으로부터 만들어진 것이다.
유태 교회에서 바쳐진 고백함의 제물은 감사함이었고, 보편적 의미에서 감사(기도)와 이에 대한 보답으로 바치는 제물이라 불리웠는데, 이에는 두 종류, 즉 고백과 봉헌이다. 고백의 제물이 사랑의 천적인 것을 포함했다는 것을 아래 구절에서 읽어볼 수 있다:
이것은 여호와께 바치게 되는 감사함의 제물이다; 만일 그가 고백을 위해 그것을 바친다면, 그때 그는 바치되, 고백의 제물 외에, 기름을 섞은 누룩 없는 과자들, 그리고 기름을 부은 누룩 없는 웨이퍼(wafer)들, 그리고 삶은 고운 곡식가루, 기름을 섞은 과자들, 고백의 제물 외에 누룩 있는 빵의 과자들 위에서 그는 자기 선물을 바칠 것이다 (레. 7:11-13).
여기서 언급된 모든 것들, 즉 “기름을 섞은 누룩 없는 과자들”, “기름을 부은 누룩 없는 웨이퍼들”, “삶은 고운 곡식가루”, “누룩 있는 빵의 과자들”은 사랑과 신앙의 천적인 것들, 그리고 그로부터의 고백을 의미한다는 것, 그리고 이를 바치는 이들은 반드시 면목 없음의 상태 안에 있어야만 한다.
봉헌 제물, 이는 감사함의 또 다른 종류인데, 외적 의미에서 보답함을 의미했다; 내적 의미에서는 주님께서 공급하시는 의지; 최고 의미에서는 섭리하심의 상태이다. 이것은 말씀 두루에서 이런 언급이 왜 만들어져 있는지를 가늠하게 해준다. 다윗서를 보자:
하느님에게 고백의 제물을 바쳐라; 그리고 지극히 높으신 분에게 네 서약을 갚으라. 고백의 제물을 바치는 누구이든 나를 존경하고 있다; 그리고 자기 길을 질서대로 하는 자, 그에게 나는 하느님의 구원을 보일 것이다 (시. 50:14, 23).
다시:
당신과의 서약이 제 위에 있습니다, 오 하느님; 나는 당신에게 고백함으로 보답할 것입니다 (시. 56:12).
다시:
나는 고백의 제물을 당신에게 바칠 것입니다, 그리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를 것입니다; 나는 내 서약을 여호와께 갚을 것입니다 (시. 116:17, 18).
다시 요나서에서:
나는 고백의 음성을 당신에게 바칠 것입니다; 나는 내가 서약한 것을 갚을 것입니다
(욘. 2:9).
위로부터 유다로 명명한 근거인 고백의 의미를 알았을 것이다; 즉 최고 의미에서 주님과 사랑의 신성, 내적 의미에서 말씀 그리고 주님의 천적 왕국, 그리고 외적 의미에서 천적 교회로부터 있는 말씀으로부터의 교리이다. “유다”에 의해 말씀에서 의미되는 위의 사항들이 지금 아래로부터 알는지 모른다.

그러므로 그녀는 그의 이름을 유다라고 불렀다. 이는 그것의 품질을 의미한다. 이는 “이름”, “이름을 부름”의 의미가 품질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품질 자체가 레아가 말한 말, 즉 “이때서야 나는여호와를 고백할 것이다”의 내적 의미 안에 포함되어 있다. 이는 이미 설명했다, 즉 최고 의미에서, 이것은 주님과 그분의 사랑의 신성; 내적 의미에서 말씀, 그리고 주님의 천적 왕국; 그리고 외면의 의미에서, 천적 교회로부터 있는 말씀으로부터의 교리이다. 이런 사항들이 말씀의 어디에서 이든 “유다”에 의해 의미된다. 그러나 이런 사항들을 아는 자가 거의 없는 이유는 말씀의 역사물을 한낱 역사 이야기로 치부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들고 다니는 성경책에서 예언서들은 자기들의 교리로 일부 추출한 것 말고는 대부분이 망각의 영역에 맡겨두고 있다. 그것들 안에 영적 의미가 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는데, 그 이유는 오늘날, 말씀의 영적 의미가 무엇인지, 영적인 것 자체조차 실상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는 제 일의 이유는 인간이 자연적 삶을 사는 것, 그리고 자연적 삶을 삶의 목적으로 중요시할 때, 또는 여타 다른 것에 앞서 사랑할 때, 이것은 지식들과 신앙 모두를 부수적인 것으로 치부해버리기 때문이다; 영적 생명, 영적 의미가 언급되어질 때, 허무맹랑한 것을 말한다고 간주하거나, 우울하고 불유쾌한 어떤 것이라도 말하는 듯 여기거나, 진저리를 내는 경우까지도 마다하지 않는데, 그 이유는 이것이 자신의 자연적 생활에 불일치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작금의 인류의 상태인 바, 말씀 안에 있는 이름들, 즉 나라, 민족, 인물, 도성, 산, 강 같은 이름이 의미하는 것을 알려하기 보다 그 자체대로 인정하여 거기서 생각을 멈추고 싶어한다.
어쨌든 “유다”의 내적 의미가 주님의 천적 교회; 보편적 의미에서 그분의 천적 왕국; 최고 의미에서 주님 자신을 의미한다는 것은 “유다”가 언급되는 구약 성경으로부터 알런지 모른다. 모세의 책에서:
너는 유다이다; 네 형제들이 너를 칭송할 것이다; 네 손은 네 적들의 목에 있을 것이다; 네 아버지의 아들들이 네게 자신을 구부려 절할 것이다. 유다는 사자의 새끼이다; 먹이됨으로 부터 나의 아들 너는 올라갔다; 그는 구부렸다, 어떤 사자 같이, 늙은 사자 같이 그는 웅크 렸다. 누가 그를 성나게 할까? (임금의) 홀이 유다로부터 옮겨지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실 로가 올 때까지 법률 제정자가 그의 발 사이로부터 떠나지 않을 것이다. 그는 그의 나귀의 새끼를 포도나무에 맨다, 그리고 그의 암나귀의 아들을 선택된 포도나무에 맨다, 그는 그의 의복을 포도주로 빤다, 그리고 그의 덮개는 포도의 피에서 빤다. 그의 눈은 포도주로 인하 여 붉다, 그리고 그의 이는 젖으로 인하여 희다 (창. 49:8-12).
위의 유다에 관한 야곱(이스라엘)의 예언적 발언은 내적 의미로부터가 아니면 누군가에 의해 이해되어질 수 없다, 아마 단어 하나도 이해되기 힘들다; 예를 들면, “그의 형제가 그를 칭송한다”에 의해 뜻해진 것; 그리고 “그의 아버지의 아들이 그에게 자신들을 구부려 절한다”는 것; 그리고 “그가 사자의 새끼 같이 먹잇감으로부터 올라갔고, 구부리고, 사자 같이 웅크렸다”는 것; 또는 “실로”에 의해 뜻해진 것; “그의 나귀 새끼를 포도나무에 매는 것, 그리고 그의 암나귀의 아들을 선택된 포도나무에 매는 것”; “그의 의복을 포도주에서 빠는 것, 그리고 그의 덮개를 포도들의 피에서 빠는 것”; “그의 눈이 포도주로 붉다는 것, 그리고 그의 이는 젖으로 희다는 것”, 등등이 뜻해진 것을 알 수 없다는 말이다. 그런 이유는 이런 표현들은 그것들의 각각, 그리고 모두가 주님의 왕국의 천적인 것들, 그리고 신성한 것들을 의미해놓았기 때문, 따라서 내적 의미로부터가 아니면 이해함이 가능해지지 않는다; 그리고 그럼으로 유다라는 이름에 의해서는 주님의 천적 왕국, 그리고 최고 의미에서 주님 자신이 서술된다. 위의 인용 구절의 세세한 설명은 그 대목에서 주님의 신성한 자비로부터 가능할 것이다.
위 인용 구절 같은 경우는 말씀의 다른 부분, 특히 예언서들에서 유다가 언급되는 대목에서도 같은 의미인데, 에스겔서에서:
너 사람의 아들아, 막대기 하나를 가져와라, 그리고 그 위에 유다를 위하여, 그리고 그의 동료들 이스라엘의 아들들을 위하여 라고 쓰거라; 그리고 또 다른 막대기를 가져오라, 그리 고 그것 위에, 요셉을 위하여 라고 쓰거라, 에브라임의 막대기, 그리고 그의 동료들 이스라 엘의 모든 집을 위하여 라고 쓰거라, 그리고 너를 위하여 그것들 서로서로를 하나로 합치 거라, 그리고 그들은 나의 손에서 하나가 될 것이다. 나는 그들을 이스라엘의 산 위 토지에 서 하나의 나라로 만들 것이다; 그리고 한 왕이 그들 모두의 왕일 것이다. 나의 종 다윗이 그들 위에서 왕일 것이다; 그리고 그들 모두는 한 목자를 가질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내 공정 위에서 걸을 것이다, 그리고 내 규례를 엄수하고, 그것들을 행할 것이다. 그리고 그들 은 내가 나의 종 야곱에게 주었던 토지, 너희의 아버지들이 거주했던 토지에서 거주할 것 이다; 그들과 그들의 아들들이 그것 위에서 거주할 것이고, 그들의 아들들의 아들들이 영원 히까지 거주할 것이다. 그리고 나는 평화의 언약을 그들과 건립할 것이다; 그것은 그들에게 영원히 지속되는 언약일 것이다. 나는 그들을 거기 앉혀 번성하게 할 것이다, 그리고 내 성 막을 그들의 한가운데에 영원히 놓을 것이다. 고로 나의 주택이 그들과 함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들의 하느님일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나의 백성일 것이다 (겔. 37:15-28)
위의 구절에서 “유다”가 유다를, “이스라엘”이 이스라엘을, “요셉”이 요셉을, “에브라임”이 에브라임을, “다윗”이 다윗이라는 실존 인물을 뜻한다고 상상하는 누구든지, 이 구절들이 묘사한 글자 대로 닥칠 것이라고, 즉 이스라엘은 유다, 뿐만 아니라 에브라임 지파와 연합한다고, 다윗이 그들을 통치한다고, 그들은 야곱에게 영원히 주어진 토지 위에 거주한다고, 영원히 있는 언약이 그들과 세워질 것이라고, 성막이 그들 한가운데에 영원히 세워진다고, 등등이 이루어지는 때가 닥친다고 믿는다. 그러나 내적 의미에서는 유태 나라가 전혀 뜻해지지 않는다; 그러나 “유다”인 주님의 천적 왕국과 “이스라엘”인 그분의 영적 왕국, 그리고 “다윗”인 주님 자신이 뜻해진다. 이로부터 분명한 바, 이름들에 의해 인물들이 아닌 천적이고 신성한 것을 뜻한다는 것이다.
아래의 구절도 위 구절과 비슷하다. 스가랴서에서:
많은 백성과 수많은 나라들이 여호와 체바욷을 찾으러 올 것이다. 이 날에 나라들의 언어 가 다른 열 명이 유다의 사람의 옷자락을 붙들 것이다, 말하기를, 우리는 당신과 함께 갈 것이다, 그 이유는 우리는 하느님이 당신과 더불어 있다고 들었기 때문이다 (슥. 8:22,23).
위 구절을 글자대로 납득하는 이들은 오늘날 유태나라가 믿듯, 이 예언은 아직 성취되지 않았으나, 성취될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러므로 유태인들은 가나안의 토지로 되돌아갈 것이다는 것, 그리고 많은 이들이 언어가 다른 나라들로부터 그들을 따를 것이다고, 그들은 유다의 옷자락을 붙잡을 것이다고, 자기들이 따라가게 해달라고 간구할 것이다는 것; 그때 하느님(즉 메시아, 기독인들이 주님으로 부르는 메시아)이 그들과 함께 있을 것이다고, 그들쪽으로 그들은 전환되어야 한다고 믿을 것이다. 이는 만일 “유다의 사람”이 거기 있는 유태인이었다면 이들에 대한 약속일지 모르나, 이 구절이 취급하는 내적 의미는 이방인들 사이에서 건립되는 새로운 영적 교회이다; 그리고 “유다의 사람”에 의해 주님을 사랑함으로부터 오는 구원하는 신앙이 의미된다.
“유다”가 유다를 뜻하지 않고, 내적 의미에서 주님의 천적 왕국이 뜻해진다는 것, 이것이 유다와 더불어 설립되는 교회에서 표현되었다는 것, 아래 구절로부터 명백히 보여질 것이다:
주님께서는 나라들을 위하여 깃발(기호)을 세우실 것이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내쫓긴 자들 을 모으실 것이다, 그리고 땅의 네 날개들로부터 유다의 흩어진 자를 함께 모으실 것이다. 그때 에브라임의 시기함은 떠날 것이다, 그리고 유다의 적들은 절멸할 것이다; 에브라임은 유다를 부러워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유다는 에브라임을 짜증나게 하지 않을 것이다 (이. 11:12, 13).
그리고 예레미야서에서:
잘 보라 날들이 온다, 여호와께서 말하신다, 즉 나는 다윗에게 정의로운 가지를 일으킬 것 이다, 그가 왕으로 통치할 것이다, 그리고 번영할 것이다, 그리고 토지에서 공정과 정의를 집행할 것이다. 그분의 날에서 유다는 구원될 것이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안전하게 거주할 것이다; 그리고 여호와 우리의 정의가 그분의 이름이라고 우리는 부를 것이다
(예. 23:5, 6).
그리고 요엘서에서:
그때 너희는 내가 내 거룩함의 산, 시온에 거주하는 여호와 너희의 하느님인 것을 알 것이 다; 그리고 예루살렘은 거룩함일 것이다. 그리고 그 날이 올 것이다, 즉 산들이 새 포도주 를 떨어뜨리고, 언덕들이 젖을 흘려내리고, 그리고 유다의 시내들에 물이 흐를 것이다; 그 리고 샘은 여호와의 집으로부터 생겨날 것이다, 그리고 싯딤의 시내가 물로 흐를 것이다. 유다는 영원히 거주할 것이다, 그리고 예루살렘은 세세토록 거주할 것이다
(욜. 3:17, 18, 20).
그리고 스가랴서에서:
그 날에 나는 놀래킴으로 모든 말을 칠 것이다, 그리고 미쳐버림으로 승마자를 칠 것이다; 그리고 나는 나의 눈을 유다의 집 위에서 열 것이다, 그리고 백성의 모든 말을 소경됨으로 칠 것이다. 그리고 유다의 족장들이 심정에서 말할 것이다, 나는 여호와 체바욷 그들의 하 느님 안에서 예루살렘의 거처를 나 자신 튼튼하게 할 것이다. 그 날에 나는 유다의 족장들 을 나무가 있는 불난로 같이, 곡식단에 있는 횃불 같이 만들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오른쪽 왼쪽의 빙둘러 있는 모든 백성들을 삼킬 것이다; 그리고 예루살렘은 그녀 자신의 장소 안 에, 예루살렘에서 조차 존재할 것이다; 그리고 여호와는 유다의 천막들을 먼저 구원할 것이 다, 즉 다윗의 집의 영광, 그리고 예루살렘 주민의 영광은 유다 위로 그 자체 들어올리지 않을 것이다. 그 날에 여호와께서 예루살렘의 주민들을 보호하실 것이다. 그리고 다윗의 집 이 하느님으로 있을 것이다, 마치 그들 앞에 여호와의 천사가 있는 것 같이 이다. 그리고 나는 다윗의 집 위에, 그리고 예루살렘의 주민 위에 은총의 영을 부을 것이다
(슥. 12:4-10).
위에서 취급된 주제는 주님의 천적 왕국이다, 즉 진리가 선 위에서 통치하지 않는 것, 그러나 진리는 선에 종속된다는 것이다. 진리가 “다윗의 집과 예루살렘의 주민”에 의해 의미된다; 그리고 선은 “유다”에 의해 의미된다. 이로부터 분명한 바, 왜 처음에 “다윗의 집의 영광, 그리고 예루살렘 주민의 영광이 유다 위에서 그 자체 들어올리지 못할 것”이라고 말해졌는지 이다. 그 다음, “다윗의 집이 하느님으로서, 여호와의 천사로서 있을 것, 그리고 은총의 영이 그것 위에, 그리고 예루살렘 주민 위에 부어질 것”이라 말해진다; 그 이유가 이런 상태가 진리가 선에 종속되는 상태, 신앙이 사랑에 종속되는 상태이기 때문이다. 놀래킴으로 칠 말, 소경됨으로 칠 백성“은 자아 총명을 의미한다.
다시:
그 날에 말들의 방울(bell) 위에 여호와께 거룩함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여호와의 집에 있 는 항아리는 제단 앞 대접 같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예루살렘과 유다의 모든 항아리는 여 호와 체바욷에게 거룩함일 것이다 (슥. 14:20, 21).
위는 주님의 왕국을 묘사하고 있다. 말라기서에서:
잘 보라, 나는 내 앞에서 길을 준비할 나의 천사를 보낸다; 그리고 너희가 찾는 주님은 그 분의 성전에 갑자기 오실 것이다, 너희가 바라던 언약의 천사까지도; 잘 보라, 그분이 오신 다; 그러나 그분이 오시는 날에 누가 살아 남아 있을까? 그때 유다와 예루살렘의 식사 제물을 여호와께서 반기실 것이다, 마치 옛날의 날들에서 같이, 이전의 햇수들에서 같이 (말. 3:1, 2, 4);
위에서 취급된 주제는 주님의 강림이 분명하다. 유다와 예루살렘의 식사 제물은 그때 당시 반기시지 않으셨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항이다; 그러나 사랑으로부터의 예배는 기뻐하셨다, 이것이 “유다의 식사 제물”이다, 그리고 사랑으로부터 파생된 신앙으로부터의 예배, 이것이 “예루살렘의 식사 제물”이다.
예레미야서에서:
고로 여호와 체바욷께서 말하신다, 아직 다시 그들은 유다의 토지에서, 그 안의 도성에서 내가 그들의 포로된 자들을 다시 데려올 때, 이 말을 말할 것이다; 여호와는 너희를 복되게 하신다, 오 정의의 주택아, 오 거룩함의 산이여, 그리고 유다와 거기로부터의 도성들이 그 안에서 함께 거주할 것이다. 잘 보라 날들이 온다, 여호와께서 말하신다, 나는 사람의 씨를 가지고, 그리고 짐승의 씨를 가지고 유다의 집에 씨뿌릴 것이다. 잘 보라 내가 이스라엘의 집, 그리고 유다의 집과 새 언약을 만들 날들이 온다; 내가 너희 조상들과 만들었던 언약이 아니다 (예. 31:23, 24, 27, 31, 32).
그리고 다윗서에서:
주님은 유다의 지파를, 그분이 사랑하신 시온 산을 택하셨다; 그리고 그분의 성소를 높은 곳 같이, 그분이 영원히 기초를 놓은 땅 같이 건설하셨다 (시. 78:68, 69).
위 구절, 그리고 여기서는 생략된 많은 구절로부터, “유다에 의해 말씀에서 의미된 것을 알았으리라 본다; 그리고 이것이 유태 국가가 아니다, 그 이유는 이 나라는 천적 교회임으로부터 너무나 멀기 때문이다. 실상 이 나라는 주님을 사랑함과 이웃을 향한 선행, 또한 신앙에 관련하여 주목하면 아마 모든 나라보다도 최악일 것이다, 이는 그들의 첫 조상으로부터 야곱의 아들들로 이어져 작금에 이르기까지에서 이다. (그럼에도 그들이 주님의 왕국의 천적, 영적인 것들을 표현은 할 수 있다에 대하여는 3479-3481항을 보라, 그 이유는 표현하는 인물이 아닌 표현된 것만에 주목하기 때문이다. 665, 1097, 1361, 3147, 3670항.)
그러나 그들이 여호와, 또는 주님에 의해 지시된 의식 안에 있지 않았을 때, 오히려 그것들로부터 우상숭배자로 변질되었을 때, 그때 그들은 천적, 영적인 것들을 더 이상 표현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반대인 지옥적, 악마적인 것을 표현했다. 요한복음서의 주님의 말씀이다:
너희는 악마인 너희 조상으로부터 있다, 그리고 너희의 조상의 욕망을 너희는 행하려 한다; 그는 시작으로부터 살인자였다, 그리고 진리 안에 서지 않았다 (요. 8:44).
위 구절은 “유다”에 의한 반대적 의미인데, 다음 구절을 보자 이사야서에서:
예루살렘은 걸려 넘어졌다, 그리고 유다는 타락했다, 그 이유는 그들의 혀와 그들의 일들이 그분의 영광의 눈에 반역하려고 여호와에 맞서 있기 때문이다 (이. 3:8).
그리고 말라기서에서:
유다는 불충하게 일을 처리했다, 그리고 역겨움이 이스라엘과 예루살렘에서 야기되게 했다, 그리고 유다는 여호와의 거룩함을 모독했다, 그 이유가 그는 외국의 신의 딸을 사랑했고 자신을 약혼시켰기 때문이다 (말. 2:11);
그리고 다음 인용 구절도 읽으면 유다를 이해함에 유익할 것이다: 이사야서 3장 1절과 그 이하; 8장 7, 8절; 예레미야서 2장 28절; 3장 7-11절; 9장 26절; 11장 9, 10, 12절; 13장 9절; 14장 2절; 17장 1절; 18장 12, 13절; 19장 7절; 32장 35절; 36장 31절; 44장 12, 14, 26, 28절; 호세아서 5장 5절; 8장 14절; 아모스서 2장 4, 5절; 스바냐서 1장 4절. 이 외에도 더 많은 구절이 있다.

그리고 그녀는 출산으로부터 아직 서 있었다. 이는 지상으로부터 여호와 또는 주님에게로 사다리를 수단으로 오름을 의미한다. 이는 “출생”, 또는 “낳다”의 의미가 진리와 선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 이유가 이것들이 영적 의미에서의 출생이고, 인간이 거듭나질 때, 또는 새로이 출생할 때, 진리와 선을 수단으로 하기 때문이다. 이것들 역시 레아로부터 출생한 네 아들, 즉 르우벤, 시므온 레위, 유다에 의해서도 의미되고 있다. “르우벤”은 거듭남, 또는 새로운 출생의 첫 번째 있는 진리; 이 진리는 기억 속의 지식에만 있는 진리, 즉 진리를 앎이다. “시므온”은 거듭남, 또는 새로운 출생의 두 번째에서 있는 진리; 이는 의지 측면에서의 진리, 고로 (아는) 진리를 뜻하는 것이다. “레위”는 거듭남, 또는 새로운 출생의 세 번째 있는 진리; 이 진리는 애착 측면에서의 진리, 이는 선행과 같다. 그러나 “유다”는 선을 의미하는데, 이것은 거듭남, 또는 새로운 출생의 네 번째이다, 그리고 이것은 사랑의 천적 평면이다. 거듭나는 인간, 또는 새로이 출생할 때, 그는 이 단계에 도착하는데, 이때 주님이 그에게 나타나신다. 그 이유가 그는 가장 낮은 단계로부터 사다리를 타고 오르듯, 주님이 계신 단계까지 승강했기 때문이다.
또한 이것은 꿈에서 야곱이 본 사다리, 땅에 서 있되 그 꼭대기가 천국에 도달된 사다리, 그 사다리에서 하느님의 천사들이 오르고 내려가고, 그 위에 주님, 또는 여호와께서 서 계셨던 사다리에 의해 승강됨도 의미한다 (28장 12절). 이로부터 분명한 바, 이런 사다리의 상황이 “낳음으로부터 아직 서 있었다”의 의미이다. 이 장에서 “임신하고 낳다”가 네 번 반복되었는데, 이는 외적인 것으로부터 내적인 것으로, 또는 진리로부터 선으로 발전함을 의미한다. 이 후에 하강이 뒤잇는다, 그러나 승강함이 먼저 있지 않으면 하강함은 있을 수 없다. 그리고 하강함은 선으로부터 진리를 내려다보는 것밖에 더 아니다, 이는 마치 올라간 산으로부터 아래를 내려다 보는 것과 같다. 이때 그는 산 아래, 또는 계곡에 펼쳐진 무수한 것들을 한 눈에 보고 납득한다. 이는 선 안에 있는 이들(주님을 사랑, 이웃을 향한 선행)을 진리 안에만, 또는 신앙 안에만 있는 이들에 비교함과 같은 것이다.

창세기 제 30 장

성경: 창세기 30장

1. 그리고 라헬은 자기가 야곱에게 아이를 낳아주지 못함을 보았다, 그리고 그녀는 그의 언니에 대비하여 더 열성적이었다. 그리고 야곱에게 말했다, 나에게 아들들을 주시오. 그리고 그렇게 되지 않으면 나는 죽어 있다.
2. 그리고 야곱은 라헬에게 화를 내었다, 그리고 그는 말했다, 내가 너로부터 뱃 속의 열매를 보류하시는 하느님을 대신하느냐?
3. 그리고 그녀는 말했다, 내 하녀 빌하를 보라, 그녀에게 오라, 그녀가 내 무릎에 낳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녀로부터 나까지도 건축하리라.
4. 그리고 그녀는 그에게 그녀의 하녀 빌하를 여인으로 주었다, 그리고 야곱은 그녀에게 왔다.
5. 그리고 빌하가 임신했다, 그리고 아들을 낳았다.
6. 그리고 라헬은 말했다, 하느님께서 나를 판단하셨다, 그리고 또한 내 음성을 들으셨다, 그리고 나에게 아들을 주셨다. 그러므로 그녀는 그의 이름을 단이라 불렀다.
7. 그리고 그녀는 다시 임신했다, 그리고 빌하, 라헬의 하녀는 야곱에게 두 번째 아들을 낳았다.
8. 그리고 라헬은 말했다, 하느님의 고투하심들을 가지고 나는 내 언니와 맞붙었다, 그리고 나는 이겼다. 그리고 그녀는 그의 이름을 납달리라 불렀다.
9. 그리고 레아는 자기가 출산함으로부터 잠자코 있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그녀의 하녀 실바를 데려왔다. 그리고 그녀를 야곱에게 여인으로 주었다.
10. 그리고 레아의 하녀, 실바는 야곱에게 아들을 낳았다.
11. 그리고 레아는 말했다, 떼를 지어 오고 있다, 그리고 그녀는 그의 이름을 갓이라 불렀다.
12. 그리고 실바, 레아의 하녀는 야곱에게 두 번째 아들을 낳았다.
13. 그리고 레아가 말했다, 내 복됨이로다. 그 이유는 딸들이 나를 복된 자라고 부를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녀는 그의 이름을 아셀이라고 불렀다.
14. 그리고 르우벤이 밀을 수확하는 날에 나갔다, 그리고 들에서 합환채를 발견했다, 그리고 그것을 그의 어머니 레아에게 가져왔다.
15. 그리고 라헬이 레아에게 말했다, 바라건대 나에게 네 아들의 합환채를 주라. 그리고 레아가 라헬에게 말했다, 네가 내 남자를 빼앗은 일이 작은 일이더냐, 그리고 너는 내 아들의 합환채 역시 가져가려 드느냐? 그리고 라헬이 말했다, 그러므로 그는 이 합환채를 위해 너와 오늘 밤 누울 것이다.
16. 그리고 야곱이 저녁 무렵 들에서 왔다, 그리고 레아가 그를 만나러 나갔다, 그리고 말했다, 당신은 저에게 와야 합니다. 그 이유는 제가 내 아들의 합환채를 가지고 당신을 빌려왔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는 그녀와 그날 밤에 누웠다.
17.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레아에게 귀기울이셨다, 그리고 그녀는 임신해서 야곱에게 다섯 번째 아들을 낳았다.
18. 그리고 레아는 말했다, 하느님께서 나에게 내 보상을 주셨다, 그 이유는 내가 내 하녀를 내 남자에게 주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녀는 그의 이름을 잇사갈이라 불렀다.
19. 그리고 레아는 다시 임신했다, 그리고 여섯 번째 아들을 야곱에게 낳았다.
20. 그리고 레아가 말했다, 하느님께서 나에게 신부 지참금을 기부하셨다. 이제는 내 남편이 나와 함께 살 것이다, 그 이유는 내가 여섯 아들을 그에게 낳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녀는 그의 이름을 스불론이라 불렀다.
21. 그리고 그 후 그녀는 딸을 낳았다, 그리고 그녀의 이름을 디나라 불렀다.
22.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라헬을 기억하셨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그녀에게 귀기울이셨다, 그리고 그녀의 자궁을 여셨다.
23. 그리고 그녀는 임신했다, 그리고 아들을 낳았다, 그리고 말했다, 하느님께서 내 불명예를 거두어 들이셨다.
24. 그리고 그녀는 그의 이름을 요셉이라 불렀고,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나에게 또다른 아들을 더하소서.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25. 라헬이 요셉을 낳은 뒤였다, 야곱은 라반에게 말했다, 저를 떠나 가게 해주십시오, 그리고 나는 내 장소로, 내 토지에로 갈 것입니다,
26. 저에게 제가 당신에게 봉사해서 얻은 내 여성들, 그리고 내 자녀들을 주십시요, 그리고 나는 가겠습니다. 당신께서는 제가 당신을 어떻게 섬겨왔는지 아실 것입니다.
27. 그리고 라반이 그에게 말했다, 바라건대 만일 내가 네 눈에서 은총을 발견해왔었다면 나는 그것을 시험했었다, 그리고 여호와께서 너 때문에 나에게 복을 주셔 왔다.
28. 그리고 그는 말했다, 네 보상을 나에게 나타내 보여라, 그리고 나는 그것을 줄 것이다.
29. 그리고 그는 그에게 말했다, 당신은 제가 당신을 어떻게 섬겼는지 압니다, 그리고 어떻게 당신의 물질이 나와 더불어 있어 왔는지도 압니다.
30. 당신이 제 앞에서 가졌던 것은 매우 적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돌발적으로 다수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여호와께서는 제 발에서 당신에게 복을 내리셨습니다. 그리고 지금 나는 제 자신의 집을 위하여 무엇을 해야 하리이까?
31. 그리고 그는 말했다, 내가 너에게 무엇을 주어야 할까? 그리고 야곱이 말했다, 당신은 저에게 어떤 것을 주지 않아도 됩니다. 만일 당신이 저를 위하여 이 말을 행하시면, 나는 양떼들에게 되돌아가서, 그리고 먹이고 관리할 것입니다.
32. 오늘 저는 당신의 모든 양떼들을 두루 통과하여 갈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로부터 얼룩지고 반점 있는 모든 작은 가축, 그리고 어린 양들 중에서 검은 것 모두, 그리고 염소들 중 얼룩지고 반점 있는 것들은 옮겨 놓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들이 나의 보상일 것입니 다.
33. 그리고 제 정의가 이튿날 나를 위한 답일 것입니다, 그 이유는 당신이 제 앞에 저의 보상을 오게 하리라 하셨기 때문입니다. 얼룩지지 않거나 반점이 없는 염소들, 어린 양들 중에서 검지 않은 것은 훔친 것으로 여기십시오.
34. 그리고 라반이 말했다, 보라 내가 네 말에 따르리라.
35. 그리고 그 날 그는 부분적으로 색깔이 있고 반점 있는 숫염소, 그리고 얼룩지고 반점 있고, 흰색을 가진 모든 암염소, 그리고 어린 양 중에서 검은 것 모두를 옮겼다, 그리고 그것들을 그의 아들들의 손에 주었다.
36. 그리고 그는 자기와 야곱 사이에 사흘 길이 뜨게 하였다. 그리고 야곱은 나머지 라반의 양떼를 먹였다.
37. 그리고 야곱은 포플러 나무와 개암나무와 플라타너스 나무의 싱싱한 막대를 가져왔다, 그리고 그것들의 껍질을 벗겨 흰색이 나오게 하고 막대들이 흰색이 드러낸채 있게 했다.
38. 그리고 그는 껍질 벗긴 막대들을 도랑에 있는 물구유통에 양떼들이 물을 마시러 올 때 양떼들을 마주 보게 세웠다. 그리고 양떼들은 물을 마실 때 흥분하였다,
39. 그리고 양떼들은 막대들에서 흥분하였다, 그리고 양떼들은 부분적으로 색깔이 있고, 얼룩지고, 그리고 반점 있는 것들을 낳았다.
40. 그리고 야곱은 어린 양들을 분리했다, 그리고 양떼의 얼굴들이 라반의 양떼에 있는 부분적으로 색깔 있고 검은 것들을 향하게 했다. 그리고 그는 자신만을 위한 가축떼들을 두었다, 그리고 그것들이 라반의 양떼가 안되도록 관리했다.
41. 앞장 서 함께 온 무리의 양떼로부터의 모두 각각이 흥분할 경우, 야곱은 도랑에서 양떼의 눈 앞에 막대들을 두어 막대들에서 흥분하게 하였다.
42. 그리고 뒤따라 함께 온 양떼들에게는 그것들을 두지 않았다. 그리고 나중에 온 떼들은 라반의 것이고, 처음에 온 떼는 야곱의 것이었다.
43. 그리고 이 사람은 자신을 극도로 크게 퍼트렸다, 그리고 그는 많은 양떼들, 그리고 여종들, 그리고 남종들, 그리고 낙타들, 그리고 나귀들을 소유했다.

각 절의 내적 의미

1, 2절. 그리고 라헬은 자기가 야곱에게 아이를 낳아주지 못함을 보았다, 그리고 그녀는 그의 언니에 대비하여 더 열성적이었다. 그리고 야곱에게 말했다, 나에게 아들들을 주시오. 그리고 그렇게 되지 않으면 나는 죽어 있다. 2 그리고 야곱은 라헬에게 화를 내었다, 그리고 그는 말했다, 내가 너로부터 뱃 속의 열매를 보류하시는 하느님을 대신하느냐?

그리고 라헬은 자기가 야곱에게 아이를 낳아주지 못함을 보았다. 이는 내면의 진리가 아직까지는 인정되지 못했음을 의미한다. 이는 라헬이 내면의 진리에 대한 애착, 또는 내면의 진리 자체를 표현함으로부터 알게 된다; “낳음”이 신앙 안에서, 또한 행동에서 인정함이다로 부터도 알게 되는데 이는 아래에서 살핀다; 그리고 야곱이 자연적 진리로부터의 선을 표현함으로부터 알게 된다. “낳음(bearing)”이 신앙에서, 또한 행동에서 인정하다 인 이유는 말씀에서 “출생”에 의해 영적인 출생이 의미되기 때문에서 이다. 영적 출생은 진리와 선 안에서 신앙을 인정함이다; 여기서의 경우 신앙 안에서, 또한 행동 안에서 인정함, 즉 라헬에 의해 표현된 내면의 진리를 인정함이다. 여기서 신앙 안에서, 또한 행동에서 인정함이라 말한 이유는 인간은 그것에 따라 살 때까지 신앙을 인정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기 때문에서 이다. 행함을 위하여 습득되지 않은 신앙의 진리들, 그러나 그것들을 알기만 하려는데 목적이 있을 경우, 그 자체는 악과 거짓에 대한 애착과 연합되고 만다; 그 이유가 그것들이 그것을 배운 인간과 더불어 신앙 속에 있지 않고 내면적으로는 신앙에 반대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라헬은 그의 언니에 대비하여 더 열성적이었다. 이는 외적 진리가 인정되었던 것 같이 내적 진리가 인정되지 않음에 분개함을 의미한다. 이는 “더 열성적이었다”의 의미가 분개함을 표현한다로부터, 그리고 이것은 레아가 아들을 낳듯이 낳지 못했기 때문으로부터 알려진다. 그리고 라헬이 내면의 진리를; 그리고 여기서 “언니”인 레아가 외적 진리를 의미함에서 알려진다. 이 경우가 거듭나지는 이들과 더불어서는 이렇다: 이들은 내적 진리가 무엇인지를 아는 것을 배운다, 그러나 처음에 그들은 그것에 따라 사는 신앙을 가지고 내적 진리를 인정하지 않는다. 그 이유가 내적 진리들은 외적 진리가 이 진리에 상응해서 순응(개작, adapt)할 때까지 유입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내적 진리, 즉 모든 선은 주님으로부터 있다는 것, 인간 자신으로부터 있는 모든 선은 선이 아니다는 내적 진리를 예로 삼아 말해보자. 거듭남의 시작에서 이 진리가 알려질는지 모른다, 그러나 이 진리는 신앙 안에서, 또한 행동에서 인정되지 않는다; 그 이유가 이 진리를 신앙과 행동으로 인정하는 것은 이 진리가 그러하다고 지각을 가지는 것, 그리고 이것이 그렇구나를 의지력쪽에서 애착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지각함과 애착은 선으로부터의 모든 행동 안에 담겨 있다. 그리고 인간 자신인 것으로부터의 선은 자아만을 중시할 수밖에 없어, 타인에 앞서 자신을 우선시한다는 것, 더욱이 자기가 행하는 선이 자아의 선함 덕택이라 간주할 수밖에 없음도 지각한다. 이런 사항들은 이 진리가 외적 진리와 결합하기 이전, 실상 외적 진리 안에 담겨 있다; 그러나 자아를 중시함이 중단되고, 이웃을 중시함이 느껴지기를 시작할 때까지 이 내적 진리는 외적 진리와 결합될 수 없을 뿐이다. 이상으로부터 “내적 진리가 외적 진리가 인정받듯 아직은 인정되지 않고 있음에 분개함”에 의한 것을 이해했으리라 본다.

그리고 그녀는 야곱에게 말했다, 나에게 아들들을 주시오. 이는 자연적 진리의 선으로부터 내면의 진리들을 가지기를 바라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야곱이 자연적 진리로부터의 선을 표현함에서 알려진다; 그리고 “아들들”의 의미가 진리들이다에서 알게 된다; 여기서는 내적 진리들인데, 그 이유는 이 아들들이 내면의 진리를 표현하는 라헬로부터의 아들이기 때문이다.

만일 그렇게 되지 않으면 나는 죽어 있다. 이는 그러므로 해서 다시 일어나지 못할 것임을 의미한다. 이는 “죽어 있다”가 다시 생명으로 일어나지 못하는 것을 의미함으로부터 파악된다. 고대 시대 때에 아내들은 자기가 아들이든, 딸이든 낳지 못할 때, 자기는 죽어 있다고 자신을 불렀다; 그리고 그녀들 스스로 그러하다고 믿고 있었는데, 그 이유는 후손을 남기지 못하면 자기는 기억 속에 있지 않은 것이기 때문, 이는 마치 죽은 것이나 다름 없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아이를 못 낳는 여인들이 자신을 그렇게 부르고 믿은 것은 실상 세상적 측면에 그 원인들이 있다. 그러나 모두 각각의 원인은 그 원인 앞의 원인으로부터 출시된다. 고로 자연계의 원인은 영적 세계의 원인으로부터 그렇게 있는 것이다. 영적 세계의 원인은 선과 진리의 천국 결혼이다. 이 결혼에서 낳는 것은 신앙의 진리들과 선행의 선 외에 다른 출생은 없다. 이런 것들이 “아들들과 딸들”이고, 이것이 말씀 속의 “아들과 딸”에 의해서도 의미된다. 이런 출생들을 가지지 않은 누구이든, 즉 신앙의 진리들과 선행의 선들을 낳지 않는 자는 누구이든, 그는 마치 죽은 자나 다름 없다. 즉 그는 천국, 또는 생명쪽으로 다시 일어나지 못하는 죽은 자 사이에 있는다는 말이다. 이상으로부터 라헬의 이 말, “그렇지 않다면, 나는 죽어 있다”이 의미한 것을 알았을 것이다.

그리고 야곱은 라헬에게 화를 냈다. 이것이 자연적 선의 측면에서 분개함을 의미하는 데, 이는 “화를 냄”이 분개함을 의미한다로부터 (이는 아래에서 살핀다); 그리고 야곱이 자연 측면의 선이다로부터 분명해진다. 이 화를 냄이 “라헬을 향하여”라고 말해졌다. 그 이유는 라헬에 의해 표현되는 내면의 진리가 “야곱”인 자연적인 선에 의해 신앙과 행동에서 아직은 인정되지 않고 있기 때문에서 이다. 내적 의미에서 “화를 냄”이 분개함이 있음을 표시하는 이유는, 내면들을 향하여, 또는 천국을 향하여 승강함에 있는 모두 각각의 애착은 더 온순해지고, 마지막으로 천국적인 애착으로 바뀌기 때문이다. 글자에서 나타나는 것들, 여기서는 “화를 냄”이다는 표현은 상대적으로 거친 표현인데, 그 이유는 그것들은 자연적, 육체적이기 때문일 뿐, 그것들이 육체적, 자연적 인간으로부터 내적, 또는 영적 인간으로 승강할 경우 그것들은 결국 온순하고 상냥해지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글자 의미는 자연적 인간의 납득력에 잘 정박되고, 영적 의미는 영적 인간에 잘 정박되는 이유에서 이다. 이것이 “화를 냄”이 분개함을 의미하는 것도 보여준다. 진짜 영적 분개함(그리고 천적 분개함)은 자연적 성냄으로부터 파생되는 것은 아무 것도 없고, 열정의 내면적 본질로부터 있는다. 이 열정도 바깥쪽 형체에서 나타날는지 모른다, 그러나 내적 형체에서는 성냄이 아니고, 실로 성냄으로부터의 분개함조차 없다; 그러나 이 열정은 이것이 그러하지 않는다는 것에 대해 기도로 소원함이 동반되는 어떤 슬픔이다; 그리고 더 내면의 형체에서 이것은 선하고 참되지 않은 어떤 것 때문에 천국적 즐거움이 깨지는 것을 희미하게 느끼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말했다, 내가 …하느님을 대신하느냐. 이는 그것은 불가능이었음을 의미한다. 이는 “하느님을 대신하지 못함”이 불가능이다를 의미함으로 알게 된다; 그 이유가 “하느님”은 능력, 또는 힘으로부터 명명되기 때문; 그러나 “여호와”는 있음, 또는 실체로부터 명명된다. 이런 이유 때문에 말씀에서 주제가 진리일 경우, “하느님”이 언급되고, 선일 경우 “여호와”가 언급된다. 선이 서술되고 있는 동안, 능력은 진리를 서술한다; 그 이유가 선은 진리를 통하여 힘을 가지고, 진리를 통하여 선은 닥치는 모든 것을 수행한다. 이로부터 우리는 “내가 하느님을 대신하느냐?”의 말이 이것은 불가능이었음이 의미됨을 알게 된다.

뱃 속의 열매를 보류하시는 분. 이는 반드시 내적인 것으로부터 임에 틀림이 없다를 의미한다. 이는 내적 의미로부터 결과하는 단어들의 내적 의미로부터 알게 된다; 내적 의미에서 “뱃속의 열매”는 “출생”, 즉 신앙과 행동에서 진리와 선을 인정함을 의미한다 (3905항); 그리고 진리와 선의 결합도 의미한다. 이런 인정함과 결합은 외적 인간으로부터 공표할 수 없고, 오직 내적 인간으로부터 이다; 그 이유가 모든 선은 주님으로부터 내적 인간을 통하여 외적 인간으로 흐르기 때문이다, 이 때 외적 인간의 감각적인 것들을 수단으로 은근히 심어진 진리들이 채택된다, 그리고 인간으로 신앙과 행동에서 그것들을 인정하게 한다, 이 인정함이 당사자와 결합되게 하여 자기 것이 된다. 모든 선은 내적 인간을 통하여 주님으로부터 외적 인간의 기억 안에 모아진 진리들 안으로 흐른다는 것은 앞서 여러 차례 반복적으로 설명해왔다. (선의 이런 근원을 인정함이야말로 새 교회 교리의 근간일 것이다 역자 주.)

3-5절. 그리고 그녀는 말했다, 내 하녀 빌하를 보라, 그녀에게 오라, 그녀가 내 무릎에 (아이를) 낳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녀로부터 나까지도 건축하리라. 4 그리고 그녀는 그에게 그녀의 하녀 빌하를 여인으로 주었다, 그리고 야곱은 그녀에게 왔다. 5 그리고 빌하가 임신했다, 그리고 아들을 낳았다.

그리고 그녀는 말했다, 내 하녀 빌하를 보라. 이는 자연적 진리와 내면의 진리 사이에 있는 확인(확언, affirm)하는 수단들을 의미한다. 이는 “하녀,” 또는 “몸종”이 외면의 인간에 속하는 지식들에 대한 애착이다로부터 분명해진다; 그리고 이 애착은 내면의 진리들이 자연적, 또는 외적 진리들과 결합함을 위한 수단들이기 때문에, 여기서 “몸종”에 의해 그것들 사이에서 있는 확인하는 수단들이 의미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수단들의 품질을 빌하가 표현한다. 라헬과 레아가 자손을 생산할 의도로 야곱에게 여인으로 준 몸종들을 수단으로 표현되고 의미되는 것은 다만 어떤 것을 위해 편의(service, 조력, 도움)를 제공하는 정도이다; 이 대목에서일 경우, 내면의 진리가 외적 진리와 결합하는 수단을 제공함이다; 그 이유가 라헬은 내면의 진리를, 레아는 외적 진리를 표현하기 때문, 그리고 야곱의 열두 아들들을 수단으로 인간이 거듭나지는 동안, 또는 (인간 안에서) 교회가 만들어지는 동안, 그 인간이 영적이고 천적인 것쪽에 입문하는 것을 조력하는(serve) 일반적, 또는 기본적인 사항들이 의미되기 때문, 또한 인간이 거듭나지거나 교회가 인간 안에서 만들어질 때 (즉, 죽은 상태로부터 살아 있는 상태로, 또는 육체적일 뿐인 인간의 수준에서 천국적인 인간의 수준이 되어갈 때) 그는 주님에 의해 인도하심에 따라 많은 상태들을 통과하기 때문이다. 이 일반적 상태들이 “열두 아들들”, 이후 “열두 지파들”로 불리우고 있다; 이런 이유로 “열두 지파들”은 신앙과 사랑의 모든 것들을 의미한다; 그 이유가 일반적(포괄적) 사항에는 세부적, 특수적 모든 사항들이 포함되기 때문이다. 이 후자가 전자에 관련하여 거듭남을 위한 어떤 것을 생산하는 것이다.
인간이 거듭나질 때, 내적 인간은 외적 인간과 결합한다, 즉 내적 인간의 선들과 진리들이 외적 인간의 선들과 진리들과 결합한다는 말이다; 그 이유가 인간은 진리들과 선들로부터 인간이기 때문이다. 이런 것들의 결합에는 수단은 필수적이다. 수단은 이쪽에서는 이런 것들을, 다른쪽에서는 다른 어떤 것을 파생되게 하는 것들이다. 그리고 이것은 이쪽을 우선시하여 응하면, 다른쪽은 하위에 둘 수밖에 없는 결과가 동반된다. 이런 수단들이 “하녀”에 의해 의미되는데, 내적 인간쪽에서의 수단은 라헬의 하녀에 의해; 외적 인간쪽에서의 수단은 레아의 하녀에 의해서이다.
결합을 위해 수단이 반드시 있어야만 하는 이유는 자연적 인간은 그 자체일 경우 영적 인간에 조금도 동의하지 않기 때문, 아마 반대되어 있는 만큼 불일치하고 있다고 말하는 편이 더 나을지 모른다. 그 이유가 자연적 인간은 자신과 세상을 중시하고 사랑하지만, 영적 인간은 자신과 세상이 영계에서의 쓸모 있음을 증진하는데 이바지할 경우를 뺀다면 자신과 세상을 중시하거나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다. 즉 영적 인간은 (영계를 위해) 쓸모 있는지 여부와 영계에 목적을 두고 자신과 세상을 조력자로 간주하고 사랑도 한다. 자연적 인간은 자신의 위엄이 드높아져 타인 위에 군림하는 것을 자신의 생명으로 간주한다. 그러나 영적 인간은 겸비함에 있을 때, 작은 자임을 천명할 때 생명을 가진 것으로 여긴다. 영적 인간은 자신의 높은 지위나 명성이 이웃에, 사회에, 교회에 도움을 주는 수단이 되지 않으면 자신의 지위나 명성을 무시해버린다. 다시 말해 자신이 지니게 된 명성과 지위를 자신을 위하여서가 아닌 그가 목적으로 삼는 쓸모 있음을 위하여서만 중시할 뿐이다. 자연적 인간은 다른 이들보다 더 부자이고, 세상의 재산을 소유하고 있을 때, 자기는 축복받은 자라고 여긴다. 그러나 영적 인간은 진리와 선에 관한 지식을 많이 지닐수록 자기는 더욱 부자라고 여기고, 특히 자신이 진리들에 따라 선을 실행하는 만큼에서 이다.
위와 같은 간단한 생각만 가지고도 자연적 인간과 영적 인간은 각각의 목적 측면에서 얼마나 반대되어 있는지 잘 드러난다. 그럼에도 이 두 인간은 결합되어질 수 있다는 것, 이 결합이 성사되는 것은 외적 인간의 것들이 내적 인간의 목적들에 종속되어 도움을 주게 만들어질 때이다. 그러므로 인간이 영적 인간으로 되기 위하여서는 외적 인간의 것들이 내적 인간의 방향에 고분고분하게 따라주어야 할 필요가 있다. 다시 말해 목적이 자기와 세상을 총애함을 벗어던지고, 이웃과 주님의 왕국을 사랑함을 입어야 한다는 말이다. 전자가 벗어지고 후자가 입혀지는 것은 수단을 동원하지 않고서는 결코 성사될 수 없다. 이 수단이 “하녀”에 의해 의미되고, 세부적, 특수적 수단은 하녀로부터 출생하는 “네 아들들”에 의해
의미되고 있다.
첫 번째 수단은 이것이 이렇다 하고 확언(확인)하는 것, 또는 내적 진리의 확인이다. 이 확언이 올 때, 인간은 거듭남의 시작 안에 있는다; 선이 내적 인간에 의해 작업되면서 확인함을 야기한다. 이 선은 확언이 있기 전에서는 부정적인 것 안으로, 심지어는 의심이 가득할 때는 흘러들 수 없다. 그러나 확언함이 있은 이후 이다면, 이 선은 애착을 수단으로 자체를 명백히 한다, 다시 말해 인간이 진리에 애착함과 더불어, 또는 진리와 더불어 기뻐할 때, 이 선은 자체를 명백히 드러낸다는 말이다; 처음에는 진리를 알게됨에서 이고, 그다음 진리에 따라 행동하면서 이다. 쉬운 예로 주님은 인류를 구원하신다 라는 말을 생각해보자. 이 말이 인간에 의해 확언함이 있지 않을 경우, 그가 말씀으로부터, 또는 주님에 관해 교회에서 배웠던 모든 것들, 기억 속의 지식들 중에 그의 자연적 기억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은 그의 내적 인간과 결합되어질 수 없다, 다시 말해 거기 신앙으로부터 있을 수 있는 모든 것들과 결합될 수 없다. 고로 애착이 흘러들 수 없고, 심지어 인간의 구원함에 이바지하는 이런 진리의 일반적 개념 안으로 조차 애착은 흘러들 수 없다. 그러나 확언함이 있을 때, 거기에는 무수한 사항들이 보태어지고, 안으로 흐르는 선을 가득채운다; 그 이유가 선은 주님으로부터 계속적으로 흘러들지만, 확언함이 없는 곳에는 받아들임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확언함은 첫 번째 수단이고, 마치 이 수단은 주님으로부터 안으로 흘러드는 선의 첫 거처인 듯 하여 있다. 이런 경우는 위의 간단한 명제 외에 신앙의 진리들이라 불리우는 여타 진리들에도 똑같이 적용된다.

그녀에게 오라. 이는 이것에는 결합하는 능력이 있다를 의미한다. 이는 “누군가에게 옴”이 결혼인 것이 언급될 때인 경우, 결합함을 말한다로부터; 여기서의 경우, 확언과 더불어 있는 결합력이다; 그 이유는 결합의 첫째는 이것이 그렇다 하는 확언과 더불어 있음에 틀림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녀는 내 무릎에 (아이를) 낳을 것이다. 이는 내면의 진리에 대한 애착 안에 인정함이 있고, 이로부터 결합이 있다를 의미한다. 이는 “낳다”가 신앙과 행동에서 인정하는 것이다로부터; 그리고 “무릎,” 또는 “넓적다리”가 부부의 사랑(conjugial love)에 속하는 것들이다로부터; 고로 신앙의 진리가 사랑의 선과 결합함에 속하는 것들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 이유가 이 결합은 주님의 왕국에 있는 혼인의 원리 자체이기 때문이다. 고로 “내 무릎에 낳는다”란 라헬에 의해 표현된 내면의 진리로부터 인정함을 의미한다. 아내의 동의하에 하녀로부터 출생하는 아들과 딸이 합법적으로 인정받기 위해 주인의 무릎에서 출산하는 고대인의 관습은 영적이고 천적인 것들을 의미하고 표현한 의식에 그들의 예배가 존재했던 고대 교회로부터 파생되었다. 이 교회에서, “낳는다”는 진리를 인정함을 의미하고, “무릎”은 부부의 사랑, 고로 애착으로부터 있는 선과 진리의 결합을 의미했기 때문에, 아내가 불임했을 때, 그녀가 살아 있는 자로 다시 일어나지 못하는 죽은 자로 낙인 받지 않게 하려는 의도로 (하녀로부터 자기 무릎에 낳게 하는) 의식이 용인되어 있었다.
내적 의미에서 이런 말을 수단으로 확언, 또는 인정함의 두 번째 단계가 의미되었는데, 이는 애착으로부터 있는 확언과 인정이다; 그 이유가 결합이 거행되기 위하여 확언, 또는 인정함의 안쪽에 애착이 반드시 있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모든 결합은 애착을 수단으로 결과되고, 애착 없이 진리는 생명을 가지지 못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이웃은 사랑되어져야만 한다는 진리, 선행은 이 진리에 의해 존립된다는 것, 그리고 선행 안에 영적 생명이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은 만일 애착이 이 진리에 동행하지 않으면 (또는 시중들어 주지 않으면), 즉 이 진리들이 심정으로부터 뜻함이 없으면, 실상 알몸 상태의 수준, 즉 기억 속의 지식으로 덩그러니 있을 뿐이다. 애착 없이 이 진리들은 살아 있지 않다. 다시 말해 제아무리 잘 알고 있다 해도 그럼에도 그는 이웃을 사랑하지 않고, 여전히 이웃보다 자기를 더 사랑한다. 하여 그는 자연적 생명만 지녔을 뿐이고 영적 생명 안에 있는 것은 아니다. 바꿔말해 자연적 애착이 영적 애착을 다스리고 있다. 자연적 애착이 통치하는 한, 그 인간은 “죽은 자”라고 불리우는데, 그 이유는 천국의 생명에 반대되는 생명(삶)을 가지고 있기 때문, 그리고 천국의 생명이 생명 자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그녀로부터 나까지도 건축할 것이다. 이는 그것에 의해서 이 애착은 생명을 가짐을 의미한다. 이는 “건축하다(build)”가 죽어가는 것이 아님, 결과적으로 다시 일어남, 또는 살아 있게 됨을 의미함에서 분명해진다.

그리고 그녀는 그에게 그녀의 하녀 빌하를 여인으로 주었다. 이는 확언하는 수단이 인접하였음을 의미한다. 이는 빌하가 표현하는 것, 그리고 하녀가 의미하는 것이 확언하는 수단이다로부터; 그리고 “여인으로 줌”이 인접하는 것이다로부터 분명해진다.

그리고 야곱은 그녀에게 왔다. 이것은 결합되어졌음을 의미하는데, 이는 누군가에게 “들어감, 또는 옴”이 결혼인 것을 서술할 때, 결합을 말함에서 알게 된다.

그리고 빌하는 임신했다, 그리고 야곱에게 아들을 낳았다. 이는 받아들임과 인정함을 의미한다. 이는 “임신하다”의 의미가 받아들임이다로부터; 그리고 “낳는다”의 의미가 인정함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 이유가 영적 의미에서 임신과 출생은 선으로부터 진리를 받아들임, 결과적으로 인정함이기 때문이다.

6절. 그리고 라헬은 말했다, 하느님께서 나를 판단하셨다, 그리고 또한 내 음성을 들으셨다, 그리고 나에게 아들을 주셨다. 그러므로 그녀는 그의 이름을 단이라 불렀다.

그리고 라헬이 말했다, 하느님께서 나를 판단하셨다, 그리고 또한 내 음성을 들으셨다. 이는 최고 의미에서 공정과 자비를; 내적 의미에서 신앙의 거룩함을; 외적 의미에서 생활의 선을 의미하는데, 이는 “하느님이 나를 판단하심”, 그리고 “내 음성을 들으심”의 의미로부터 분명해진다. “하느님이 나를 판단하심”이 주님의 공정(justice)을 의미하는 것은 추가 설명이 필요치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분이 내 음성을 들으심” 역시 마찬가지 이다; 그 이유는 주님은 공정함으로부터 모두를 판단해주시기 때문, 그리고 자비하심으로부터 모든 것을 들으시기 때문이다. 그분은 신성한 진리로부터 이시기 때문에 공정함으로부터 판결하신다, 그리고 그분은 신성한 선으로부터 이기 때문에 자비하심으로부터 들으신다; 공정하심으로부터 그분은 신성한 선을 받지 않는 이들을 판단하신다; 그리고 자비하심으로부터 그분은 행동하는 것들을 들으신다. 그러나 여전하신 것은, 그분이 공정함으로부터 판결하실 때, 동시에 자비로부터도 있으신다는 것이다; 그 이유가 모든 신성한 공정 안에 자비하심이 있기 때문이다, 마치 신성한 진리 안에 신성한 선이 있는 것과 같다. 이 대목은 신비함들이 너무나 깊어서 이런 식의 몇 마디 말로 마감하기에는 너무나 벅차므로 차후 주님의 신성한 자비로부터 별도로 말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하느님께서 나를 판단하셨다, 그리고 또한 내 음성을 들으셨다”에 의해 내적 의미에서 신앙의 거룩함이 뜻해지는 이유는 진리 측면이라 단언되는 신앙이 신선한 공정에 상응하기 때문; 그리고 선 측면인 거룩함은 주님의 신성한 자비에 상응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 “판단하는 것”, 또는 “판결”이 신앙의 진리 측면을 서술하기 때문, 그리고 “판단하시는” 분이 하느님이다고 말해졌기 때문에, 이것은 선인 것, 또는 거룩한 것을 표시한다. 고로 신앙의 거룩함은 이 표현들 모두에 의해 의미되는 것임이 분명해진다; 그리고 전체로서의 이 하나가 그것들 둘 다에 의해 의미되기에, 두 표현들은 “그리고 또한”이라는 말로 묶여져 있다. 외적 의미에서 생활의 선이 의미되는 것 역시 상응으로부터 인데, 그 이유는 생활의 선이 신앙의 거룩함에 상응하기 때문이다. 내적 의미 없이는 “하느님이 나를 판단하셨다, 그리고 또한 들으셨다”에 의해 의미되는 것이 알아질 수 없다는 것은 하나의 생각을 이해력에 표출해보려 해도 글자 의미에서는 모순되지 않게 표출될 수 없다는 것으로부터도 분명해진다.
이 구절, 그리고 “요셉”의 출생에 이르기까지의 구절에서 “하느님”이 명명되고, 이 구절 앞의 (네 아들의 출생, 29:31-35)에서는 “여호와”가 명명되어진 이유는 본 장에서는 영적 인간의 거듭남이 취급되나, 앞 29장에서는 천적 인간의 거듭남이 취급되었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영적 인간으로부터 있는 신앙의 선이 주제가 될 경우, “하느님”이 명명되어지고, 천적 인간으로부터 있는 사랑의 선이 주제일 경우, “여호와”가 명명되기 때문이다. 29장에서의 이야기는 유다쪽으로 내려가면서 있었는데, 거기서 유다는 천적 인간을 표현했다; 그러나 30장에서는 이야기가 요셉쪽으로 내려가면서 계속되는데(23, 24절), 그는 영적 인간을 표현하게 된다. 유다쪽으로 이어지면서 “여호와”가 명명된 것은 29장 32, 33, 35절에서 발견된다. 요셉쪽으로 내려가며 이어지는 이야기에서 “하느님”이 명명된 것은 30장 6, 8, 17, 18, 20, 22, 23절에서 발견된다; 그리고 그 후에 “여호와”가 다시 명명되고 있는데, 그 이유는 주제가 영적 인간으로부터 천적 인간으로 바뀌기 때문이다. 이런 대목은 구절들 안에 감추여놓인 비밀이다. 그리고 내적 의미를 모르면 아무도 알 수 없는 사항이기도 하다, 또한 천적 인간이 누구인지, 영적 인간이 누구인지를 먼저 알고 있지 않으면 알 도리가 없다.

그리고 나에게 아들을 주셨다. 이는 이 진리가 인정되어졌음을 의미한다. 이는 “아들”의 의미가 진리이다로부터; 그리고 “아들을 줌”의 의미가 이 진리를 주는 것이다로부터, 이는 이것을 인정함과 같은 말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 이유가 인정한 모든 진리는 주님에 의해 주어지기 때문이다. “아들을 줌”은 “낳는다”를 당연히 포함한다. 그리고 “낳는다”는 인정함인데 이미 살폈다.

그러므로 그녀는 그의 이름을 단이라 불렀다. 이는 그것의 품질을 의미한다. 이는 “이름”, 그리고 “이름을 부름”의 의미가 품질(quality)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품질 자체는 이름 “단(Dan)” 안에 들어 있다. 그 이유는 그가 “판단함”으로부터 그렇게 불리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 이름은 라헬의 모든 말, 즉 “하느님이 나를 판단하셨다, 그리고 또한 내 음성을 들으셨다”에 의해 의미된 것, 즉 생활의 선, 그리고 신앙의 거룩함, 최고 의미에서 주님의 공정하심과 자비하심의 의미도 포함하고 있다. 이 의미는 “단”에 의해, 그리고 단으로부터 “단지파”라고 불리우는 지파에 의해 표현되는 교회의 일반적 원리이다. 이 일반적 원리는 인간이 거듭나질 수 있기에 앞서, 또는 교회로 만들어지기 이전, 당사자에 의해 확언, 또는 인정함이 있어야 하는 첫 번째 원리이다. 이 사항들이 확언되거나 인정되지 않으면, 신앙과 생활 속의 이외 다른 사항도 받아들임이 가능해질 수 없다, 그러므로 확언되어질 수도 없고, 인정함은 더 더욱 가능할 수 없다. 그 이유가 자신과 더불어 신앙만을 확언한 자, 그리고 신앙의 거룩함, 즉 선행(이것이 신앙의 거룩함이다)을 확언하지 않는 자는 그가 확언한 것 역시 생활의 선, 즉 선행의 일에 의해 확언하지 않기 때문, 즉 신앙의 본질에 흥미가 없다, 하여 결국 그것을 거절하고야 말기 때문이다. 하여 확언함과 더불어 인정함을 동반하는 것이 거듭나지려는 이들과 더불어서는 첫 번째 원리이지만, 거듭나져 가고 있었던 이들과 더불어서는 마지막 번째가 된다. 그러므로 거듭나지려는 이들에게 “단”은 첫 번째에 해당되고, 거듭 나져 온 이들에게 “요셉”은 마지막 번째이다; 그 이유가 “요셉”은 영적 인간 자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거듭나져온 인간에게 “요셉”은 첫 번째이고, “단”은 마지막 번째인데, 그 이유는 거듭나지려는 이들은 이것이 그렇다 하는 확언, 즉 신앙은 거룩하다는 것, 생활 속에 선이 있어야만 한다는 것을 확언함으로부터 거듭남을 개시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적 인간인 거듭난 인간은 영적 선 자체 안에 있다, 그리고 영적 선 자체로부터 그는 이런 확언함은 마지막에 해당하는 것으로 간주한다; 그 이유가 이 사람과 더불어 있는 신앙의 거룩함과 생활의 선은 이미 확증되어 왔기 때문이다.
“단”은 거듭나려 할 때 첫 번째 사항임에 분명한 확언함이다는 것은 위의 설명 외에 “단”이 언급되는 다른 구절들로부터 더 확인된다. 아래 구절은 야곱, 예언하는 그때 당시 그는 이스라엘인데, 그의 아들들에 관한 예언들 중 단에 관한 대목이다:
단은 이스라엘 지파의 하나로 자기 백성들을 판결할 것이다; 단은 길 위의 뱀, 좁은 길 위의 독사일 것이다, 하여 말의 뒤꿈치를 문다, 그리고 말 위의 승마자를 뒤쪽으로 떨어지게 한다. 나는 당신의 구원을 기다립니다, 오 여호와시여 (창. 49:16-18).
여기서 “단”은 진리를 확언함을 표시한다, 이에 관련하여 말해지는 바, 누군가가 감각적인 것들로부터 진리에 관련하여 추론할 때, “단”은 “길 위에 있는 뱀, 좁은 길에 있는 독사이다”; 누군가가 가장 낮은 지적인 것들 또는 기억 속의 지식에게 의견을 물을 때, 그리하여 그것들로부터 결말을 끌어낼 때, “말의 뒤꿈치를 물고, 승마자를 뒤쪽으로 떨어지게 한다.” 이런 이유로 말해지는 바, “나는 당신의 구원을 기다립니다, 오 여호와시여” 이다. “뱀”은 신성한 신비함들에 관하여 감각적인 것들과 기억 속의 지식들로부터 추론하는 인간이다; 그리고 “길” 또는 “좁은 길”은 진리를 의미한다; 그리고 “말의 뒤꿈치”는 가장 낮은 지적인 것들 또는 기억 속의 지식들이다; 그 이유가 “말”은 지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몸체에서 가장 낮은 부분이 “뒤꿈치”이다.
다시 열두 지파들에 관한 모세의 예언에서:
단에 관해 그가 말했다, 단은 사자의 새끼이다, 그는 바산으로부터 껑충 뛴다 (신. 33:22).
“사자”는 말씀의 내적 의미에서 교회의 힘인 교회의 진리를 의미한다, 그 이유는 진리로 싸우고 정복하기 때문이다; 그런고로 사자의 새끼는 진리에 관련해 첫 번째 있어져야 하는 것, 즉 확언과 인정함을 표시한다. “바산으로부터”라고 말해지는 이유는 확언과 인정함이 자연 (평면의) 선으로부터 있기 때문이다. 예레미야서에서:
네 심정을 사악함으로부터 씻어내라, 오 예루살렘아, 하여 너는 구원될는지 모른다. 네 불법에 관한 생각들을 네 한가운데에서 얼마나 오랫동안 숙박하게 할 작정이더냐? 그 이유가 음성이 단으로부터 선포하기 때문, 그리고 에브라임 산으로부터 불법을 듣게 하기 때문이다
(예. 4:14, 15);
“단으로부터”는 확언되어지기로 되어 있는 진리를 표시한다; “에브라임 산으로부터”는 이 확증함이 애착으로부터 이다를 표시한다.
예레미야서에서:
평화를 기다리나 좋은 것이 없다; 그리고 치료될 때를 기다리나 (좋은 것이 없다), 그리고 잘 보라 공포이다. 말의 콧김을 뿜음이 단으로부터 들려졌다; 강한 자의 말의 울음 소리가 온 토지를 전율케 했다; 그리고 그들은 와서 토지와 거기로부터 가득한 것, 도성과 그 안에 거주하는 그들을 삼켰다. 그 이유가 잘 보라 나는 너희 사이에 뱀, 독사를 보낼 것이다, 이에 맞서는 마술은 없다, 그리고 그것들이 너희를 물을 것이다 (예8:15-17);
“말의 콧김을 뿜는 것이 단으로부터 들려졌다”는 비 확언적인 것으로부터(즉 부정적 방식으로) 진리에 관해 추론함을 표시한다; “전율한 토지”, 그리고 그들이 “토지의 가득한 것을 삼킴”은 교회와 교회 속의 모든 것들을 표시한다; 그 이유가 비 확언된 것으로부터 진리에 관해 추론하는 이들은 신앙의 모든 것을 파괴하기 때문이다; “뱀, 독뱀”은 추론함을 표시한다.
에스겔서에서:
오고 있는 단과 야완은 네 장터에서 빛나는 철을 주었다; 육계와 창포가 네 거래 물품 안에 있었다 (겔. 27:19);
위는 두로를 취급한 대목이다, 두로에 의해 진리와 선에 관한 지식이 의미된다. “단”은 확언되는 처음의 진리들을 표시한다; “장터(fairs)”와 “거래 물품(trading)”은 진리와 선에 관련한 습득물을; “빛나는 철”은 (시간적으로) 처음에 있는 진리인 자연적 진리를; “육계”와 “창포”는 선을 있게 한 자연적 진리이다.
아모스서에서:
그 날에 아릿따운 처녀들과 젊은 이들이 목마름으로 시들해질 것이다. 사마리아의 죄있는 것(우상) 을 두고 맹세한 그들, 그리고 말했다, 네 하느님 오 단이 살아 있다; 그리고 브엘세바의 길이 살아 있다; (이렇게 말한) 그들까지 엎드려질 것이고, 다시 일어나지 못할 것이다
(암. 8:13, 14);
“네 하느님, 오, 단이 살아 있다, 그리고 브엘세바의 길이 살아 있다”는 그들이 신앙의 모든 것들과 신앙에 관한 교리를 부정함에 있다를 표시한다. 위에서 신앙의 모든 것들을 부정함이 의미된 이유는 단은 가나안의 토지의 마지막 경계(가장 북쪽), 그리고 브엘세바는 가나안의 첫 번째 토지, 또는 한가운데, 또는 가장 안쪽(가장 남쪽)이었기 때문에서 이다; 또한 “가나안의 토지”에 의해 주님의 왕국이 표현되고 의미되었기 때문, 고로 교회도 표현되고 의미되었기 때문, 그리고 사랑과 신앙의 모든 것들 역시 표현하고 의미되었기 때문, 그 이유는 이것들이 주님의 왕국과 교회 속에 있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가나안의 토지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은 그것들의 거리, 위치, 경계들에 따른 것조차도 표현적이었다.
예루살렘이 정식으로 있기 전, 토지의 가장 안쪽, 또는 한가운데, 즉 첫 번째 경계는 브엘세바였는데, 그 이유는 거기서 아브라함과 이삭이 거주했기 때문에서 이다; 그러나 토지의 가장 바깥, 즉 마지막 경계는 단이었다; 그러므로 한 복합체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이 의미될 경우, “단으로부터 브엘세바까지”라고 말해졌다. 이를 사무엘하서에서 읽어보자:
사울의 가문으로부터 왕국이 옮기는 것, 그리고 이스라엘과 유다 위에, 단으로부터 브엘세바에까지 조차에서 다윗의 왕좌가 세워지는 것 (삼하. 3:10).
사무엘하서에서:
단으로부터 브엘세바에 이르기까지 모든 이스라엘이 모였다 (삼하. 17:11).
그리고 다시:
다윗이 요압에게 말했다, 단으로부터 브엘세바에 이르러 이스라엘의 모든 지파들을 통과해가라 (삼하. 24:2, 15).
열왕기상서에서:
유다와 이스라엘, 단으로부터 브엘세바에 이르러 모든 이 각자가 자기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안전하게 거주했다 (왕상. 4:25).
위 표현은 역사적 의미에서 가나안의 토지의 모든 것들을 뜻했다; 그러나 내적 의미에서는 주님의 왕국의 모든 것들을, 그리고 교회의 모든 것들 역시 뜻한다.
“단”을 살피는 앞의 대목에서 “단”은 첫 경계이다 라고 말했고, 또한 마지막 경계이다 라고도 말했는데, 그 이유는 신앙과 선행이 인간과 더불어 시작 단계에 있을 때, 진리와 선을 확언함은 모든 사항들 중에서 처음에 해당되기 때문, 그러나 신앙과 선행 안에 있는 이들과 더불어서는 이 확언은 마지막 단계에 있기 때문이다. 또한 가나안의 토지가 상속분으로 나뉠 때 마지막 몫이 단에게 할당되었다 (여. 19:40 이하 등등); 그 이유가 제비를 던짐이 여호와 앞에서 이었기 때문이다 (여. 18:6); 그런고로 각 지파가 표현하는 것에 따라 제비뽑아진 것이다.
그리고 몫이 지파들 사이에서 있게 단에게 떨어지지 않았다는 것, 그러나 지파들의 경계선들 넘어이었다는 것 (사. 18:1), 단 지파는 날인되는 만 이천 명의 지파들에 관한 언급이 있는 계시록서에서 요한에 의해 생략되었다는 것 (계. 7:5-8), 이런 기록이 있는 이유는 진리를 확언함, 또한 선을 확언함이 확언함 자체로 끝나 더 이상의 발전이 없는 이들은 “날인된” 자들 안에, 즉 주님의 왕국 안에 없기 때문이다. 최악질의 인간이라 해도 진리들과 선들을 아는 것은 할 수 있고, 또한 그것이 그러하다고 확언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러나 진리를 확언함의 품질은 각자 삶으로 증명해진다.
“단”은 창. 14:14에서 경계선으로서 언급되었다; 이 구절은 아브라함이 적을 멀리까지 뒤쫓을 때의 마지막 장소로서 언급되는데 위와 비슷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단”이라 불린 도성은 그 때 당시 단의 후손들에 의해 실지로 건축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 후에 이다 (여. 19:47; 사. 18:29); 그럼에도 그때조차 이 도성은 가나안의 토지로 들어간다는 측면에서는 첫 경계선이라고, 나간다는 측면에서는 마지막 경계선이라 불리웠다; 그리고 토지의 가장 안쪽은 헤브론이었는데, 그 후에 아브라함과 이삭이 거주한 브엘세바가 되었다.

7, 8절. 그리고 그녀는 다시 임신했다, 그리고 빌하, 라헬의 하녀는 야곱에게 두 번째 아들을 낳았다. 8 그리고 라헬은 말했다, 하느님의 고투하심들을 가지고 나는 내 언니와 맞붙었다, 그리고 나는 이겼다. 그리고 그녀는 그의 이름을 납달리라 불렀다.

그리고 그녀는 다시 임신했다, 그리고 빌하, 라헬의 하녀가 낳았다. 이는 앞 구절에서 살핀 바와 마찬가지로 받아들임과 인정함을 의미한다. 이는 “임신함”의 의미가 받아들임이다로부터; 그리고 “낳다”의 의미가 인정함이다로부터; 그리고 또한 “하녀”의 의미가 “도움을 주는 수단”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 이유가 여기서의 주제는 내적 인간과 외적 인간의 결합을 위하여 섬김에 있는 두 번째 일반적 수단이기 때문이다.

야곱에게 둘째 아들을… 이는 두 번째의 일반적 진리를 의미한다. 이는 “아들의 의미가 진리이다로부터 분명해진다. 여기서의 의미가 일반적 진리인 것은 앞에서 말한 것, 즉 야곱의 열두 아들, 그리고 이들로부터 열두 지파라 불리우는 지파들이 교회의 일반적 사항들, 또는 교회의 신앙과 사랑, 또는 진리와 선으로부터의 일반적인 것들이어서, 그들에 의해 이 사항들이 표현되고 의미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반대적 의미 역시 표현하고 의미하는데, 이는 신앙과 사랑으로부터가 아닌 것, 즉 거짓과 악으로부터 있는 모든 사항들이고, 이는 이후 등장할 것이다.

그리고 라헬은 말했다, 하느님의 고투하심들을 가지고 나는 내 언니와 맞붙었다, 그리고 나는 이겼다. 이는 최고의 의미에서 자신의 힘을, 내적 의미에서 승리가 있는 시험을, 외적 의미에서 자연적 인간이 저항함을 의미한다. 이는 “하느님의 고투하심(wrestlings of God)”과 “맞붙었음(wrestling)”의 의미가 시험들이다로부터 분명해진다; 그 이유가 시험들은 내적 인간과 외적 인간, 또는 영적 인간과 자연적 인간이 맞붙는 것밖에 더 아니기 때문이다. 맞붙는 이유는 각각은 상대쪽을 지배하기를 바라고 있기 때문, 그런데 누가 지배자인지가 분명치 않을 때, 전투는 발발하고, 이 전투가 여기서 “맞붙었다(씨름했다)”라고 말해진다. “이기는” 것은 정복하는 것임은 설명이 필요 없을 것이다.
최고 의미에서 이 말들이 자신의 힘을 의미하는 이유는 주님이 세상에서 인간 안에 계실 때, 그분 자신의 힘을 가지고 계속 시험들과 맞부딛치시어 정복하셨기 때문에서 이다; 그러나 인간의 경우는 주님의 경우와 다르다. 즉 인간은 어떤 영적 시험도 맞부닥쳐서 자신의 힘으로부터 시험을 정복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이유가 주님께서 인간 안에서 시험과 맞부닥치시어 정복해주시기 때문이다.
내적 의미에서 “하느님의 고투하심”과 “이김”이 인간이 정복하는 시험들을 표시한다는 것은 방금 앞에서 말한 것으로 분명할 것이다. 그러나 외적 의미에서 자연적 인간이 저항함이 의미되는 이유는 모든 시험은 그밖에 더 다른 것은 없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앞에서 말했듯이, 영적 시험들에서 내적 인간과 외적 인간, 또는 영적 인간과 자연적 인간, 어느쪽이 우월한지, 그리하여 어느쪽이 상대쪽을 지배할 것인지를 놓고 다툼이 있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이 둘은 서로에 반대되기 때문이다. 인간이 시험들에 있을 때, 당사자의 내적 인간, 또는 영적 인간은 천사들을 통하여 주님에 의해 통치되어진다; 그러나 그의 외적, 또는 자연적 인간은 지옥의 영들을 통하여 통치된다; 그리고 이 둘 사이에서의 전투가 인간에게는 시험들로서 지각되는 것이다. 인간이 거듭나질 수 있는 조건, 즉 신앙과 생명 안에 있을 경우, 그는 시험들을 정복할 것이다; 그러나 이런 조건을 갖추지 않은 경우라면, 그는 시험에서 굴복당한다. 자연적 인간이 저항한다는 것은 그녀가 “자기 언니와 맞붙었다”라고 말해지는 대목에 의미되어 있는데, 그 이유는 여기서의 언니는 “레아”이고, 레아는 외적 인간에 애착함을 의미하고 있고, 라헬은 내적 인간에 애착함을 의미해주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녀는 그의 이름을 납달리라 불렀다. 이는 그것의 품질, 즉 시험에서 승리함이 있다는 것, 또한 자연적 인간의 저항함이 있다는 것도 의미한다. 이는 “이름”, 그리고 “이름을 부름”의 의미가 품질(quality)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품질 자체가 이름 “납달리”에 담겨 있다. 그 이유가 그의 이름이 “맞붙다, 씨름하다”에서 명명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납달리는 교회의 두 번째 일반적 진리를 표현했다. 그 이유가 시험은 내적 인간과 외적 인간의 결합을 위한 수단이기 때문이다. 이 두 인간은 서로에게 모순되는 상황에 있지만, 시험을 수단으로 상응되고 일치되는 쪽으로 조정된다. 참으로 외적 인간은 그 자체로만 보면, 그것의 생명의 즐거움이 있는 육체적, 세상적인 것들밖에 더 갈망하는 것이 없다. 그러나 내적 인간, 이 인간이 거듭나질 수 있는 이들과 더불어서일 경우, 천국쪽으로 열리고, 천국 속의 것들을 바라는 바, 이때 천국의 것들 안에서 천국의 즐거움을 발견한다. 따라서 인간이 시험 중에 있는 동안이라면, 이 두 종류의 즐거움 사이에 전투가 있다. 이 전투가 있어도 인간은 이를 알지 못한다. 그 이유는 당사자가 천국의 즐거움이 무엇인지를, 지옥의 즐거움이 무엇인지를 모르기 때문, 더욱이 이 둘은 서로에 완전히 반대되기 때문이다. 천적 (수준의) 천사들은 인간이 세상적, 육체적 즐거움을 목적 차원이 아닌 수단 차원으로 격하시켜, 이것이 천국의 즐거움을 위한 수단, 방편으로 삼지 않으면 세상적, 육체적 즐거움에 있는 인간과 더불어 있을 수가 없다. 이것이 결과될 때, 천사들은 양쪽에서 인간과 더불어 있을 수 있다. 이러면 그의 즐거움은 복됨, 축복이 되고, 마지막으로 다른 삶에서 행복이 된다.
거듭남 이전이라 해도 자기의 자연적 인간의 즐거움은 지옥적이 아니다고, 그리고 이 즐거움은 악마적인 영들에 의해 소유당해져 있지 않다고 믿는 자가 있다면, 그는 대단한 착각이다. 그렇게 착각하고 마는 이유는 그가 이 경우에서 인간과 더불어 어떠한지를 모르기 때문에서 이다. 즉 거듭나기 전일 경우, 그의 자연적 인간이 여느 다른 인간 같이 있다고 자신에게 나타날런지는 몰라도 그의 자연적 인간은 악귀나 지옥의 영에게 소유당해져 있음을 모른다는 말이다. 더 나아가 자신도 다른 신앙인 같이 거룩함에 있다고, 자기도 신앙의 진리와 선에 관하여 열심히 추론하는 이들 틈에 끼여 있다고, 참으로 자기는 신앙의 진리와 선에 대해 확신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할지라도, 만일 그가 자기 직업에서 공정함과 공평함에 대해 애착하고 있음이, 그리고 동료들 틈에서와 자신의 생활에서 진리와 선에 대해 애착함이 자신 안에서 지각되지 않고 있다면, 그의 즐거움은 지옥의 즐거움으로부터 있다는 것을 자신에게 눈치채게 해야 할 것이다. 그 이유가 지옥의 사랑은 자기와 세상을 사랑함 외에 더 아니기 때문이다. 이 사랑이 그의 즐거움을 만들 경우, 거기에는 신앙으로부터의 것, 선행으로부터의 것은 있지 않기 때문이다. 지옥의 즐거움이 인간 안에서 우위를 차지하고 있다면, “단”에 의해 의미된 것, 즉 거듭남의 시작인 첫 수단, 신앙의 거룩함과 생활의 선에 대해 확언함과 인정함 외의 여타 다른 수단들은 죽어저 있거나 사라져버린 수준에서 있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시험을 수단으로 함이 있는데, 이것이 거듭남을 위한 두 번째 수단이고, 이것이 납달리에 의해 의미되어 있다; 그 이유가 이 수단은 첫 수단에 뒤잇기 때문, 즉 신앙과 선행으로부터의 진리와 선에 대한 확언함과 인정함이 없는 이들에게는 시험의 어떤 전투도 발생할 수 없기 때문, 전투가 없는 이유는 자연적 즐거움이 납득시키려 하는 악과 거짓에 저항하는 (천국적인) 어떤 것이 당사자 안에 없기 때문이다.
“납달리”가 언급되는 다른 말씀에서 납달리는 시험 후에 있는 인간의 상태를 의미한다; 이스라엘이 된 야곱의 예언에서:
납달리는 풀어놓은 암사슴이라, 세련된 말들(sayings)을 준다 (창. 49:21);
위에서 “풀어놓은 암사슴”이란 시험 이후 존재하는 자유해진 상태에 있는 자연적 진리에 대한 애착을 표시한다; 이 상태는 “납달리”에 의해 의미된 시험들 안에 있는 품질이기도 하다; 그 이유가 시험들에서 분투노력함은 자유에 관련하여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모세의 예언을 보자:
납달리에게 그는 말했다, 납달리는 특별하게 사랑받음에 만족하고 있다, 그리고 여호와의 복됨이 가득하다, 그는 서쪽과 남쪽을 소유할 것이다 (신. 33:23).
야곱의 아들들과 지파들의 표현들은 그들이 명명됨이 질서와 일치하여 있다. 그리고 드보라와 바락의 예언에서:
스불론은 자기 혼을 죽기까지 하여 헌신한 백성들이다, 그리고 납달리는 들판의 높은 장소에서 (그러 하였다) (사. 5:18).
위 구절은 내적 의미에서 시험의 전투들이 취급되고 있다; 그리고 그들은 악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 이들 사이에 있는데, 그 이유는 그들이 진리들과 선들 안에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들판의 높은 장소에서” 있는 것이다.

9-11절. 그리고 레아는 자기가 출산함으로부터 잠자코 있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그녀의 하녀 실바를 데려왔다. 그리고 그녀를 야곱에게 여인으로 주었다. 10 그리고 레아의 하녀, 실바는 야곱에게 아들을 낳았다. 11 그리고 레아는 말했다, 떼가 오고 있다, 그리고 그녀는 그의 이름을 갓이라 불렀다.

그리고 레아는 자기가 출산함으로부터 잠자코 있는 것을 보았다. 이는 인정되어 왔던 더 다른 외적 진리는 없었음을 의미한다. 이는 레아가 외적 진리를 표현한다로부터; 그리고 “낳는다”가 신앙과 행동에서 인정함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러므로 내적 의미에서 레아가 낳음으로부터 잠자코 있음은 더 다른 진리들이 인정되어 오지 않았음이 의미된다.

그리고 그녀는 그녀의 하녀 실바를 데려왔다. 이는 확인된 합쳐지는 수단들을 의미한다. 이는 “하녀”가 외적 인간이 내적 인간과 결합하는데 도움이 되는 확인된 수단을 의미함에서 알려진다.

그리고 그녀를 야곱에게 여인으로 주었다. 이는 이 수단이 결합을 결과되게 했음을 의미한다. 이는 “여인으로 주다”의 의미가 결합이다로부터 분명해진다.

그리고 실바, 레아의 하녀가 야곱에게 아들을 낳았다. 이는 외적 진리가 인정함을 의미한다. 이는 “낳다”가 인정함이다로부터; “하녀”가 확인된 결합하는 수단이다로부터; 그리고 “아들”의 의미가 진리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리고 레아가 말했다, 떼가 오고 있다. 이는 최고의 의미에서 전지하심과 전능하심을, 내적 의미에서 신앙의 선을, 외적 의미에서 일들을 의미한다. 이는 여기서의 “떼(troop)”의 의미로부터 알게 된다. 최고 의미에서 “떼”의 의미가 전능하심(omnipotence)과 전지하심(omniscience)인 이유는 여기서의 “떼”는 다수(multitude)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수(숫자가 많음)”가 주님의 신성을 서술할 경우, 이는 무한히 숫자가 많음이고, 이 많음은 전능하심과 전지하심밖에 더 다른 의미는 없다. 그러나 전능하심은 크기에 속하는 양(量, quantity)을; 전지하심은 숫자가 많음에 속하는 양으로부터 이다. 또한 전능하심은 무한한 선, 또는 신성한 사랑, 고로 신성의 의지를 서술한다; 그러나 전지하심은 무한한 진리, 또는 신성한 총명을 서술한다. 내적 의미에서 “떼”가 신앙의 선인 것은 상응으로부터 이다; 그 이유가 주님의 신성한 전능하심에 선행으로부터 있는 선이; 그리고 그분의 전지하심에 신앙으로부터 있는 진리가 상응하기 때문이다.
외적 의미에서 “떼”가 일(work)들을 의미하는 이유는 이것들이 신앙의 선에 상응하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신앙으로부터의 선이 일을 생산하기 때문, 다시 말해 신앙의 선은 일함 없이는 그 존재가 가능하지 않기 때문에서 이다. 바꿔말해 선을 생각함과 선을 뜻함은 선을 행함 없이 가능하지 않은 것과 같다. 전자는 내적 측면이고, 후자는 외적 측면일 뿐이다. 더욱이 일만에 국한해 생각해보아도 그것이 신앙의 선에 상응하지 않으면, 그것들은 선행의 일도, 신앙의 일도 아닌 것이 되기 때문이다. 즉 그것들이 내적 측면으로부터 오지 않기 때문, 따라서 죽은 일에 불과하기 때문, 이 죽은 일 안에는 선도, 진리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들이 상응할 경우, 그때 그것들은 선행이든, 신앙이든 어느쪽의 일이 되어 있는다. 선행의 일은 그 일의 혼, 즉 선행으로부터 흐르는 것들이고, 신앙의 일은 신앙으로부터 흐르는 것들이다. 선행의 일은 거듭난 인간과 더불어 존재하나; 신앙의 일은 아직 거듭난 것은 아닌 이들, 그러나 거듭나아지고 있는 이들과 더불어 존재한다. 이런 경우는 선으로부터의 애착과 진리로부터의 애착에서도 같은 경우이다. 그 이유가 거듭난 인간은 선에 애착함에서, 고로 선을 뜻함으로부터 선을 행하기 때문; 그러나 거듭나고 있는 인간은 진리에 애착함에서, 고로 선을 앎으로부터 선을 행한다. 이 둘의 차이점은 이미 반복적으로 말해왔기에 설명은 생략한다. 어쨌든 이로부터 무슨 일이 있는지가 명백해진다.
일에 관하여 더 살핀다면, 신앙의 선은 인간의 의지와 이 의지로부터 파생되는 생각이 그의 얼굴에 있는 것에 비교된다. 이것이 당사자의 마음이다는 것, 즉 그의 의지와 의지로부터 파생된 생각이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만일 의지와 생각이 그것들의 형상으로서 그의 얼굴에 표출되지 않으면, 이때 보여진 것은 그의 의지와 생각이 아닌 바, 그것은 위선, 또는 사기(가짜)이다; 그 이유는 표출된 것이 그가 뜻하고 생각한 것과 다르기 때문이다. 이 경우는 생각과 의지로부터 있는 인간의 내면들에 관련하여 있는 신체의 모든 행동과도 똑같다. 인간의 내적 측면은 행동, 행동함을 수단으로 하는 그의 외적 측면 안에 살고 있다. 만일 행동 또는 행동함이 당사자의 내적인 것에 의거 있지 않다면, 이것은 그 행동은 그 행동을 생산하고 있는 그의 내적인 것이 아닌 것, 그러나 관습과 습관이 자극함으로부터 되풀이 되는 행동일 뿐이다. 또는 위조된 어떤 것, 즉 위선이나 사기침 같은 것이다. 이로부터 무슨 일인지가 다시 명백해진다; 그리고 이로부터 더 생각해볼 것은, 신앙을 고백하는 이들, 더욱이 신앙의 선을 고백하는 이들, 그런데 일을 부정하고, 더욱이 일함을 거절한다면, 이는 신앙이 결핍된 것, 선행이 결핍되었음이 명백해진다.
위와 같은 것이 선행과 신앙으로부터의 일의 본성이고, 인간은 일 안에 있지 않으면 그는 선행과 신앙 안에 있는 것이 결단코 아니기에, “일(work)”은 말씀에서 자주 언급되고 있다; 아래 구절들에서 읽어보자:
당신의 눈은 인간의 아들들의 모든 길들 위에 열려 있으시다, (이는) 그의 길들에 따라서, 그리고 그의 일들의 열매에 따라서 모두 각각에게 주시기 위하여서 이다 (예. 32:19).
예레미야서에서:
너희 모두는 자기의 악한 길로부터 돌아서라, 그리고 너의 일들을 선한 일로 만들어라 (예. 35:15).
예레미야서에서:
나는 그들의 일에 따라서, 그리고 그들의 손의 일에 따라서 보답할 것이다 (예. 25:14).
호세아서에서:
나는 그의 길들(로부터) 그를 방문할 것이다, 그리고 그의 일들(로부터) 그에게 보답할 것이다 (호. 4:9).
미가서에서:
토지는 그 안에 거주하는 자들 때문에, 그들의 일함의 열매 때문에 황무해질 것이다 (미. 7:13).
스가랴서에서:
고로 여호와 체바욷께서 말하셨다: 너희는 네 악한 길로부터, 그리고 네 악한 일들로부터 돌아서라. 여호와 체바욷께서 우리의 길에 따라, 그리고 우리의 일들에 따라 우리에게 행하시기로 생각하셨듯 이, 그렇게 그분은 우리에게 하셨다 (슥. 1:4, 6).
계시록서에서:
이 후로부터 주님 안에서 죽는 죽은 자들은 복되다; 그렇다, 영에게 말한다, 그들은 자기들의 노동함으로부터 쉴런지 모른다; 그리고 그들의 일들이 그들을 뒤따르고 있다 (계. 14:13).
계시록서에서:
나는 하느님 앞에 선 크고 작은 죽은 자를 보았다, 그리고 책들이 열려졌다; 그리고 생명의 책인 또 다른 책이 열려졌다; 그리고 죽은 자는 그들의 일들에 따라, 책들 안에 쓰여져 왔던 것으로부터 심판되어졌다. 그리고 바다가 그 안에 있던 죽은 자를 포기했다; 그리고 죽음과 지옥이 그것들 안에 있는 죽은 자를 포기했다; 그리고 그들 모두 각각은 자기들의 일들에 따라서 심판되어졌다 (계. 20:12, 13).
계시록서에서:
잘 보라 나는 빠르게 온다, 그리고 내 보상이 각자의 일들에 따라서 모든 이에게 주려고 나와 더불어 있다 (계. 22:12).
요한복음서에서:
이것이 심판이다, 즉 빛이 세상에 와 있다, 그리고 인간들이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했다, 그 이유는 그들의 일들이 악하였기 때문이다. 악을 행하는 모든 이는 빛을 미워한다, 그리고 자기 일들이 견책받지 않으려고 빛에 오지 않는다; 그러나 진리를 행하는 자는 빛쪽으로 온다, 하여 그의 일들은 명백히 나타나는데, 그가 하느님 안에서 일해 왔기 때문이다 (요. 3:19-21).
요한복음서에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할 수 없다, 그러나 세상은 나를 미워한다, 그 이유는 내가 그것의 일들이 악이다고 증명하기 때문이다 (요. 7:7).
다시:
예수께서 유태인들에게 말하셨다, 만일 너희가 아브라함의 아들들이다면, 너희는 아브라함의 일들을 행할 것이다. (그런데) 너희는 너희 아버지의 일들을 행하고 있다 (요. 8:39, 41).
다시:
만일 너희가 이런 것들을 안다면, 만일 너희가 그것들을 행한다면 너희는 복되다 (요. 13:17).
마태복음서에서:
너의 빛을 인간 앞에 비추이게 하면 그들이 너희의 선한 일들을 볼는지 모른다. 그것들을 가르치고 행하는 누구이든, 그는 천국들의 왕국에서 큰 자라 불리울 것이다 (마. 5:16, 19).
마태복음서에서:
나에게 주여 주여 라고 말하는 모든 이가 천국들의 왕국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내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자(이다). 많은 이들이 그 날에 나에게, 주여, 주여, 우리가 당신의 이름으로 예언하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당신의 이름으로 악마들을 내쫓고, 그리고 당신의 이름으로 많은 능력 있는 일들을 행하지 않았습니까 하고 말할 것이다. 그리고 그때 나는 그들에게 고백할 것이다, 나는 너희를 결코 알지 못한다, 불법을 일하는 너희는 나로부터 떠나라 (마. 7:21-23).
누가복음서에서:
집의 주인은 그들에게 대답하여 말할 것이다, 나는 네가 어디로부터 인지를 알지 못한다; 그때 너희는 말하기를 시작할 것이다, 우리는 당신의 현존하심에서 먹고 마시었습니다, 그리고 당신이 우리의 거리들에서 가르치셨습니다; 그러나 그분이 말하실 것이다, 내가 네게 말한다, 나는 네가 어디로부터 인지를 알지 못한다, 불법을 일하는 자인 너희여 나로부터 떠나라 (눅. 13:25-27).
마태복음서에서:
내 말들을 듣고, 그것들을 행하는 모든 이, 나는 그를 슬기로운 자에 비교할 것이다; 그러나 내 말들을 듣고, 그것들을 행하지 않는 모든 이는 어리석은 자에 비교할 것이다 (마. 7:24, 26).
마태복음서에서:
사람의 아들이 그분의 천사들과 더불어 그분의 아버지의 영광 안에서 오실 것이다, 그리고 그때 그분은 모든 이에게 각자의 일들에 따라 보답하실 것이다 (마. 16:27).
이런 구절들로부터 일함이 인간을 구원한다는 것, 그리고 사람을 정죄도 하는 셈이다는 것이 분명해진다; 말하자면, 선한 일은 구원을, 악한 일은 정죄한다는 말이다; 그 이유가 인간의 일 안에 그의 의지가 들어 있기 때문이다; 선을 뜻하는 자는 선을 행한다; 그러나 선을 뜻하지 않는 자, 제아무리 자기가 선을 뜻하고 있다 말할지라도 그가 선을 행하지 않을 때에 선을 뜻하고 있지도 않는다. 이것은 흡사 나는 그것을 뜻한다고 말하고, 나는 그것을 뜻하지 않는다 하고 말하는 것처럼 있다는 말이다. 그리고 의지 자체가 일 안에 있기 때문에, 그리고 선행은 의지로부터 있기 때문에, 그리고 신앙은 선행으로부터 있기 때문에, 그가 선한 일을 행하지 않을 때 그의 의지로부터의 것, 그의 선행과 신앙으로부터의 것이 무엇일지는 명명백백하다. 특히 그 반대의 상황, 즉 악한 일을 하고 있을 경우 역시 더더욱그렇다.
더 나아가 알아야 할 것은, 주님의 왕국은 일로부터 있는 삶으로부터 인간 안에서 시작한다는 점이다. 그 이유가 이때 그는 거듭남의 시작 안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님의 왕국이 인간 안에 있을 때, 이 왕국의 종착점은 일 안에 있다, 그리고 그때 인간은 거듭난다. 그 이유가 그의 내적 인간이 외적 인간과 상응으로 일치되어 외적 인간 안에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의 일은 그의 외적 인간으로부터 있다, 한편 선행과 선행에서 파생되는 신앙은 그의 내적 인간 속에 있다; 그러므로 그의 일이 선행인 셈이다. 그러므로 내적 인간의 생명은 외적 인간으로부터의 일 안에서 세상 밖으로 출시된다(공표된다). 그러므로 마지막 심판을 말하시는 주님께서 챙기시는 것은 일 뿐이다. 하여 그분이 선한 일들을 행하여 온 이들에게 너희는 영원한 삶(생명) 안으로 들어가라고 말하시고; 악한 일을 하여 온 이들에게 너희는 지옥으로 떨어져야 한다고 말하셨던 것이다 (마. 25:32-46). 위에서 살핀 대목으로부터 또하나 분명해지는 것은, 주님의 품 안에서 그분의 가슴에 기대고 있던 요한에 관한 의미이다. 그는 제자들 중에서도 가장 사랑받아진 제자라 말해진다 (요. 13:23, 25; 21:20); 그런 이유가 요한이 선한 일을 표현했기 때문이다. (창세기 18, 22장 서문을 보라.) 신앙의 일이 무엇인지, 일이라는 측면이 비슷한 바, 이것 역시 신앙의 열매라 불리울는지 모른다; 그리고 선행의 일이 무엇인지는 주님의 신성한 자비로부터 별도의 장소에서 충분히 살필 기회를 가져볼 것이다.

그리고 그녀는 그의 이름을 갓이라 불렀다. 이는 그것의 품질을 의미한다. 이는 “이름”, 그리고 “이름을 부름”의 의미가 품질이다로부터 알게 되는데 이미 살폈기에 설명은 생략한다. 품질 자체가 “갓”에 의해 의미되어진다, 즉 신앙으로부터의 선과 일로부터의 선이다. “품질”은 내부에 있는 것은 무엇이든 모든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는 신앙의 선 내부에와 일 내부에 있는 모든 것이다; 그리고 이것들은 무수하다, 그 이유는 각각 안에서 개별적인 바 품질 역시 무수하게 다양할 수밖에 없기 때문, 그리고 신앙의 선 안에 있지 않은 이들, 그리고 선한 일 안에 있지 않은 이들의 경우에서는 반대의 의미를 갖는데, 이것 또한 “갓”이 언급되는 구절에서 표현된다. 내적 인간의 신앙으로부터의 선과 외적 인간의 선한 일이 상응할 때, 이것들은 세 번째 일반적 수단이고, 이것은 인간이 주님의 왕국 안으로 입장하기 이전, 즉 그가 거듭남을 수단으로 교회를 만들 수 있기 이전, 신앙과 행동으로 인정되어져야 하는 것이다.

12, 13절. 그리고 실바, 레아의 하녀는 야곱에게 두 번째 아들을 낳았다. 13 그리고 레아가 말했다, 내 복됨이로다. 그 이유는 딸들이 나를 복된 자라고 부를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녀는 그의 이름을 아셀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실바, 레아의 하녀는 야곱에게 두 번째 아들을 낳았다. 이는 두 번째 일반적 진리를 인정함을 의미한다. 이는 “낳다”의 의미가 인정함이다로부터; “하녀”의 의미가 외적 인간이 내적 인간과 결합하는데 도움을 주는 확언하는 수단이다로부터; “아들”의 의미가 진리, 여기서는 일반적 진리이다로부터; 그리고 야곱, 레아, 실바가 표현하는 것을 종합해보면, 이 말의 내적 의미가 외적 인간이 내적 인간과 결합하는데 도움을 주는 두 번째 일반적 진리를 인정함임을 보여준다.

그리고 레아는 말했다, 내 복됨이로다 그 이유가 딸들이 나를 복된 자라고 부를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최고의 의미에서 영원을, 내적 의미에서 영원한 삶으로부터의 행복을, 외적 의미에서 애착들로부터의 기쁨을 의미한다; 이는 “복됨”의 의미로부터, 그리고 “딸들이 나를 복된 자라고 부를 것이다”의 의미로부터 알게 된다. “복됨(blessedness)”이 최고 의미에서 영원이다는 것은 인간 안에 있는 어떤 것이 상응함으로부터가 아니면 보여질 수 없다; 그 이유가 신성인 어떤 것, 무한인 어떤 것은 인간이 어떤 생각을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인 유한한 것들로부터가 아니면 그나마 납득되지 않는다. 유한한 것들로부터 끌어낸 생각 없이, 특별히 공간과 시간에 관한 것들에 관한 생각 없이, 인간은 신성의 어떤 것, 더욱이 무한한 것을 납득할 수 없다. 공간과 시간에 관한 생각이 없으면 인간은 어떤 생각도 전혀 할 수 없다; 그 이유가 인간은 자기 신체에 관련하여서, 고로 외적 감각들로부터 있는 자기의 생각들에 관련하여 시간 안에 있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천사들은 시간과 공간 안에 있지 않고, 상태에 관한 생각만을 가진다, 그러므로 말씀에 있는 시간과 공간은 상태들을 의미한다.
두 상태들이 있다, 즉 공간에 상응하는 상태, 시간에 상응하는 상태이다. 공간에 상응하는 상태는 있음 (Esse, being, 實體, 존재자, 본질)에 관한 상태이고; 시간에 관련한 상태는 공표됨(公表, Existere, coming forth, 세상에로 나옴, 實在)이다. 인간을 만드는 두 가지 것은 있음과 공표됨이다. 인간의 있음은 주님으로부터 진행되는 영원한 것을 받는 그릇(수용체, recipient)밖에 더 아니다; 그 이유가 인간들, 영들, 그리고 천사들은 주님으로부터 생명을 받는 그릇을 만들어내거나 그 그릇 자체 그 이상은 아니기 때문이다. 공표됨이 생명을 받아들임이라 단언된다. 인간은 자기가 (스스로) 있다(존재한다) 라고, 그리고 이 있다가 자신으로부터 라고 믿는다; 그러나 이미 말했던 바대로, 그는 공표된 것, 즉 (있음으로부터 생명을 받아들임으로) 세상에 모습을 나타낸 것 뿐이다. (엄밀히 말해) 있음(Being)은 주님 안에만 있다. 그리고 “여호와”라 불리운다. 여호와이신 있음으로부터 모든 것은 있도록(존재하도록) 나타난다(sicut sint). 그러나 주님의 있음, 또는 여호와는 어느 누구와도 교통되어질 수 없다; 오로지 주님의 인간에만 국한되어 교통된다. 신성한 있음, 즉 여호와께서 주님의 인간을 만드셨다. 공표됨(coming forth)은 주님에게도 해당되어질 수 있다; 그러나 그분이 신성을 입고 계셨던 곳에서만, 즉 그분이 세상에 계셨던 때만에 국한된다. 그러나 그분이 신성한 있음이 되셨을 때, 공표됨은 그분으로부터 진행되어 나오는 것 외에는 그분에게 해당되지 않는다. 그분으로부터 진행되어지는 것이 그분 안에서 공표된 것 같이 나타나는 것일 뿐, 그분 안에 있는 것은 아니고, 그분으로부터 있는 것이고, 이것이 인간들, 영들, 천사들이 공표되게 한다. 인간, 영, 천사 안에서 공표됨은 살아 있음이다; 즉 사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살아 있음은 영원한 행복이다. 영원한 생명(삶, 살아 있음)으로부터의 행복은 주님의 신성한 있음으로부터 인 최고 의미에서의 영원에 상응한다. 영원한 생명으로부터의 행복이 “복됨”의 내적 의미에서 의미되고, 외적 의미에서는 애착들로부터의 기쁨이다는 별도의 설명이 필요 없을 것이다.
이것이 여기서 의미된 것은 영원한 생명으로부터의 기쁨에 상응하는 진리와 선에 대한 애착들로부터의 기쁨이다. 모든 애착들은 각기 그것들의 기쁨을 가진다. 애착이 이러이러하면 기쁨도 이러이러하다. 악과 거짓에 애착함 역시 그것들의 기쁨을 가지고 있다; 인간이 거듭나지기를 시작하기 이전, 그리고 주님으로부터 진리와 선에 애착함들을 받기를 시작하기 이전에서, 악과 거짓에 애착함들로부터의 기쁨만이 있는 듯 여겨진다. 하여 여타 다른 기쁨들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인간은 믿는다, 급기야 만일 자신에게서 이 기쁨을 박탈한다면, 자기는 깡그리 멸해진 수준에로 떨어지고 말 것이라 생각하기까지 한다. 그러나 주님으로부터 진리와 선에 애착함을 받는 이들은 과거 그들이 유일한 기쁨이다고 믿었던 것의 본성을 점차적으로 보고 지각하여, 그것은 상대적으로 천박한 기쁨이다는 것, 참으로 불결한 기쁨이다는 것도 알게 된다. 이쯤에서 더 발전하면, 그는 악과 거짓으로부터의 기쁨들을 하찮은 것, 야비한 것으로 간주한다. 이쯤에서 더 발전하면, 그는 그것들을 혐오함 아래 있게 한다.
나는 악과 거짓에 애착함들로부터의 기쁨 안에서 있어 왔었던 다른 삶에 있는 이들과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다; 그리고 나는 허락을 받아 그들이 자기들의 기쁨들을 박탈할 때까지 그들에게는 생명이 없다는 것을 말해주었다. 그러나 오히려 그들은 자기들로부터 이 기쁨을 박탈하면 자기들에게 어떤 생명도 남아 있지를 않는다고 내게 말했다 (이는 현 세상에 있는 어떤 인물에서도 마찬가지 이다). 그러나 나는 그 기쁨이 박탈될 때 생명이 시작된다는 것, 이 생명은 천국의 것과 같은 것이고 이전 당신들이 지녔던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생명임을 허락을 받아 말해주었다. 그러나 이런 사항을 그들은 납득할 수 없었는데, 그 이유는 알지 못하면 믿어지는 것이 아무 것도 없기 때문이다. 이는 세상에서 자기와 세상을 사랑함에 있고 선행이 없는 이들과도 일맥 상통한다. 그들은 이런 사랑들로부터의 기쁨들을 알고 있다, 그러나 선행으로부터의 기쁨들이 아니다. 고로 그들은 선행이 무엇인지에 무지해 있다, 게다가 그들은 선행 안에 어떤 기쁨이 있다는 것은 더욱 모른다; 선행의 기쁨들이 보편적 천국을 채우고, 거기서 복됨과 행복을 구성하고 있다는 것을 모른다; 그리고 만일 당신이 이것을 믿으려 뜻한다면, 이것이 총명과 지혜 역시 그것들의 기쁨들과 더불어 구성한다는 것도 알게 된다; 그 이유가 선행의 기쁨들 안으로 주님은 진리의 빛과 선의 불꽃과 더불어, 그리고 파생되는 총명과 지혜와 더불어 흘러드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거짓들과 악들은 이런 기쁨들을 거절하고, 질식시키고, 악용하고 타락시킨다, 그러므로 어리석고 미친 짓을 하는 것이다. 이상 설명으로부터 애착들로부터의 기쁨의 본성과 품질이 어떠한지와 이것이 영원한 생명으로부터의 행복에 상응한다는 것이 분명해졌을 것이다.
이 시대의 인간(교인)을 꽉 붙들고 있는 것 중 하나는, 죽음의 문턱에 있는 자가 믿노라고 고백하면, 그는 과거 일생동안 자기가 지녀왔던 애착의 품질이 어떠하든 상관 없이 천국으로 들어간다는 것이다. 나는 이렇게 믿었고, 살아왔던 이들과 이야기를 했던 적이 가끔 있었다. 그들이 다른 삶에로 올 때, 그들은 처음에는 자기들의 과거 생활을 중시함이 없이, 즉 과거 악과 거짓에 애착함으로부터의 기쁨을 입고 있는 것, 이것이 자기들의 목적들이었음에 아랑곳할 바 없이 자기는 천국으로 들어가리라는 것, 그 외의 다른 생각은 없었다. 나는 그들에게 모든 이가 천국으로 들어가는 것은 허락되어 있다는 것을, 그 이유가 주님은 천국에 들어가기를 바라는 누구이든 그 사람으로부터 천국 입장을 방해하시지 않기 때문이다는 것을 허락을 받아 말해주었다. 그러나 그들에게 천국 입장이 승인되었을 때, 그들이 거기서 살 수 있는지 여부를 그들은 알 수 있다. 거기서 살 수 있음을 굳건히 믿는 자 역시 천국에 들어오게 허락되었다. 그러나 거기서의 생명은 주님을 사랑함과 이웃을 향한 사랑함이고, 이 사랑들이 거기 생명으로부터의 모든 영역과 행복을 에워싸고 있기에, 거기에 들어온 그들은 혼돈에 빠져들고, 숨쉬는 것조차 할 수 없는 지경에서 자기들의 애착들이 불결하다는 것을 지각하기를 시작하고, (천국 안에서) 지옥의 고통을 느끼기 시작한다. 이런 결과로 그들은 자신들을 아래쪽으로 향하여 디밀면서, 자기들은 (천국으로부터) 멀리 떠나있기를 바란다고, 천국에 있는 것은 자기들로서는 지옥이다고 말한다. 이 대비되는 상황은 이쪽의 기쁨과 저쪽의 기쁨의 본성이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한마디로 악과 거짓에 애착함으로부터의 기쁨 안에 있는 이들은 진리와 선에 애착함으로부터의 기쁨에 있는 이들과 결단코 섞여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 기쁨들은 서로에 반대된다, 마치 천국과 지옥 같다.
영원한 생명의 행복에 대해 주목해보자: 선과 진리에 애착하며 살아가는 이들이라 해도 그가 세상에 있는 이상 그는 영원한 생명으로부터의 행복들을 지각할 수 없다, 그러나 그 대신 어느 정도의 어떤 기쁨을 지각할 수 있다. 이런 이유는 그가 신체 안에 있는 동안 그는 세상의 관심사들 안에 잠겨 있어 결과적으로 (자기 내부 깊숙이 있는) 영원한 삶의 행복이 여타 다른 방법에서 명백히 나타내보이려 하나 이를 세상의 근심 걱정이 방해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영원한 생명으로부터의 행복이 깊숙한 내부로부터 바깥쪽으로 인간과 더불어 있는 세상적 관심과 그에 따른 근심들 안으로 흐를 때, 이 행복은 그것들 안에 잠겨져서, 일종의 희미한 기쁨, 없어도 무방하다 싶을 정도의 기쁨의 수준에 있는다. 그러나 이 기쁨은 복됨이 있는 내부에, 즉 이 행복 내부에 여전히 둥지를 갖고 있다. 이 행복이야말로 하느님 안에서 만족하는 행복이다. 인간이 육체를 벗을 때, 그리하여 세상적 관심과 그에 따른 근심도 놓아야 하는 때, 그의 내면의 인간 내부에서 희미함 안에서 감추여 놓였던 행복은 밖으로 나와 자체를 밝힌다.
우리가 애착이라는 단어는 상당히 많이 사용하는 편인 바, 애착에 의해 뜻해지는 것을 살펴보자. 애착은 사랑밖에 더 아니나, 차이점이라면 사랑을 계속하는 것이다. 그 이유가 악과 거짓과 더불어서 이든, 선과 진리와 더불어서 이든 우리는 계속 사랑함으로부터 어떤 결과를 빚어내기 때문이다. 이 사랑은 당사자에게 속해 있는 일반적, 특수적, 개별적, 낱개 하나하나에 이르기까지, 한 마디로 사사건건 안에 항상 출석하고 있어, 인간으로서는 그것이 사랑으로서 지각되지 않을 뿐이다. 하여 이 사랑은 각자의 특성에 따라, 각자 사건의 경우에 따라, 넓은 측면에서는 인간의 그때 그때의 상태들과 변화됨에 따라 다양하게 옷을 바꿔 입을 뿐 사랑함은 계속적이다. 이 사랑의 계속됨(continuous)이 애착(affection)이라 불린다. 이 계속됨은 인간이 뜻하고 생각하고 실행하는 모든 것 안에서 있다. 다시 말해 이 계속됨이 인간의 삶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당사자의 모든 기쁨을 만드는 바, 결과적으로 그의 생명 자체인 셈이다; 그 이유가 인간의 생명은 그의 애착으로부터의 기쁨밖에 실상 더 아니다; 고로 그의 사랑으로부터의 애착밖에 더 아니다. 사랑은 인간의 뜻함이고, 이 뜻함 때문에 생각함이 파생되고, 그것의 실제화가 행동이다.

그리고 그녀는 그의 이름을 아셀이라고 불렀다. 이는 그것의 품질을 의미한다. 이는 “이름을 부름”의 의미가 품질이다로부터 인데 이미 설명했다. 품질 자체가 단어 아셀이 표현하는 것에 있다. 원어에서 “아셀”은 “복됨”을 뜻한다; 그러나 여기서의 경우 이름에는 그의 어머니 레아가 말한 것, 즉 “내 복됨에서; 그 이유가 딸들이 나를 복있다고 부를 것이기 때문이다”에 의해 의미된 모든 것, 즉 영원한 생명으로부터의 행복에 상응하는 애착들로부터의 기쁨을 포함한다. 이것은 외적 인간이 내적 인간에 결합하는 네 번째 일반적 원리이다; 그 이유가 인간이 영원한 생명의 행복에 자신 내부에 있는 기쁨이 상응한다는 것을 지각할 때, 이때 그의 외적 인간은 그의 내적 인간과 결합되기를 시작하기 때문이다. 이 두 인간을 결합되게 하는 것은 진리와 선에 애착함으로부터의 기쁨이다. 그 이유는 애착들로부터의 기쁨 없이 어떤 결합도 있을 수 없기 때문, 또한 인간의 생명은 애착들로부터의 기쁨 안에 있기 때문이다. “그녀를 복되다고 부르는 딸들”에 의해 교회가 의미된다. 이것이 레아에 의해 말해진 이유는 하녀로부터의 출생을 수단으로 결합에 도움을 주는 수단들인 일반적 진리들이 의미되기 때문, 그리고 교회가 인간 안에서 출시된다는 것을 의도하기 위한 이유 때문이다. 인간이 이 기쁨, 또는 애착을 지각할 때, 그는 교회가 되어가기를 시작하고 있다; 그리고 이런 까닭에 이것이 네 번째, 또는 하녀의 마지막 아들에서 말해진다.
“아셀”은 말씀에서도 자주 언급된 편이다. 그러나 아셀에 의해서, 뿐만 아니라 다른 아들들에 의해서도 마찬가지지만, 그때마다 취급되는 주제의 품질, 즉 각 대목에서 취급된 주제인 각 상태에 있는 것들의 품질이 의미된다; 또한 각 품질은 각 아들이 명명되는 순서에 따라서도 있다. 예를 들면 순서가 “르우벤” 또는 신앙으로 시작하는 경우는 이런 상태의 품질의 종류를, 순서가 “유다” 또는 천적 (평면의) 사랑으로 시작하는 경우는 다른 상태의 품질의 종류를, 그리고 순서가 “요셉” 또는 영적 (평면의) 사랑으로 시작하는 경우는 또다른 상태의 품질의 종류가 의미된다는 말이다; 그 이유가 첫 번째인 것의 본질과 품질은 갈래를 만들어 뒤이어지는 것들 안으로 건너가기 때문이다. 이것은 각 아들이 명명되는 장소에서 그것들의 의미가 다양해지는 바탕이다. 여기에서 같이 그들의 출생이 취급되는 곳에서는 그들에 의해 교회의 일반적 원리가 의미된다; 결과적으로 교회를 만드는 신앙과 사랑으로부터의 모든 것이 의미된다. 그리고 이 후의 것이 이 전의 것 안에 담겨 있는 이유 때문에, 이것은 인간의 거듭남, 또는 인간이 교회가 되기 이전 인간의 상태도 취급하고, 최고의 의미일 경우, 주님, 즉 어떻게 그분이 그분의 인간을 신성으로 만드셨는지가 취급된다. 고로 벧엘에서 야곱에 의해 보여진 사다리에서의 오름이 여호와에게 조차 닿아진 것과 흡사하다.

14-16절. 그리고 르우벤이 밀을 수확하는 날에 나갔다, 그리고 들에서 합환채를 발견했다, 그리고 그것을 그의 어머니 레아에게 가져왔다. 15 그리고 라헬이 레아에게 말했다, 바라건대 나에게 네 아들의 합환채를 주라. 그리고 레아가 라헬에게 말했다, 네가 내 남자를 빼앗은 일이 작은 일이더냐, 그리고 너는 내 아들의 합환채 역시 가저가려 드느냐? 그리고 라헬이 말했다, 그러므로 그는 이 합환채를 위해 너와 오늘 밤 누울 것이다. 16 그리고 야곱이 저녁 무렵 들에서 왔다, 그리고 레아가 그를 만나러 나갔다, 그리고 말했다, 당신은 저에게 와야 합니다. 그 이유는 제가 내 아들의 합환채를 가지고 당신을 빌려왔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는 그녀와 그날 밤에 누웠다.

그리고 르우벤은 밀을 수확하는 날에 나갔다. 이는 신앙이 사랑과 선행에 주목하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는 “르우벤”의 표현함이 거듭남의 첫 번째 사항인 신앙이다로부터; “날들”의 의미가 상태들이다로부터; 그리고 “밀”의 의미가 사랑과 선행이다로부터; 그러므로 “밀 수확”은 사랑과 선행의 상태가 발전함을 의미한다. 외적 인간이 내적 인간과 결합하는 수단들이 하녀에 의해 얻어진 야곱의 네 아들들의 표현 아래에서 묘사되어져 있다; 그리고 지금 취급되는 주제는 이외 나머지 아들들을 수단으로 하는 선과 진리의 결합이다; 그러므로 “합환채(dudaim)”가 먼저 말해지고, 이를 수단으로 이 결합, 또는 부부의 관계가 의미되고 있다. “밀 수확”이 사랑과 선행의 발전하는 상태를 의미하는 이유는 “들판”이 교회를, 고로 교회에 속한 것들을; 들판에 뿌려진 “씨”가 선과 진리에 관한 것들을; 그리고 씨로부터 나온 식물, 즉 밀, 보리, 그리고 다른 곡식들은 사랑과 선행에, 또는 신앙에 속하는 것들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이런 사항들에 관련되는 교회의 상태들이 “파종기”와 “수확기”에 비교되고, 창세기 8장 22절에서와 같이 불리운다.
“밀”이 사랑과 선행에 속한 것들을 표시하는 것은 아래 구절로부터도 알게 된다. 모세의 책에서:
여호와께서는 그가 땅의 높은 장소들을 타게 만드시고, 들판의 소출을 먹게 하시고, 바위로부터 꿀을 빨게 하시고, 단단한 바위로부터 기름을 (빨게 하신다); 목축떼와 양떼의 버터를 어린 양들과 숫양들의 지방, 바산의 아들들과 더불어, 그리고 밀의 콩팥의 지방과 더불어 숫염소의 지방과 더불어 (먹게 하신다), 그리고 너는 포도의 순수한 피를 마셨다 (신. 32:13, 14);
위 구절의 내적 의미에서 취급된 주제는 고대 교회인데, 그것이 세워졌을 때 당시의 상태였다; 그래서 그 교회 안에는 사랑과 선행으로부터의 모든 것들, 그리고 신앙으로부터의 모든 것들이 있었음이 의미들을 수단으로 묘사되어져 있다. “밀의 콩팥의 지방”은 사랑과 선행으로부터의 천적인 것; 그리고 “지방(fat)” 또는 “지방이 풍부함(fatness)”이 천적인 것을 (353항), 그리고 “밀”은 사랑을 의미하기에, 그것들은 말씀에서 자주 함께 접합하여 있는다. 다윗서에서:
나의 백성이 나에게 순종적이었다, 이스라엘은 내 길 안에서 걸었다. 그분은 그들에게 밀의 지방을 먹이실 것이다, 그리고 바위로부터 꿀을 가지고 나는 너희를 만족하게 할 것이다
(시. 81:13, 16).
다윗서에서:
여호와, 그분은 네 경계를 평화롭게 만드신다, 그리고 밀의 지방을 가지고 너를 채우신다
(시. 147:14).
“밀”이 사랑과 선행이다는 것을 예레미야서에서 알는지 모른다:
많은 목자들이 내 포도원을 망가트렸다, 그들은 내 들판의 몫을 짓뭉개었다, 그들은 내 들판의 몫을 고독한 광야로 만들었다. 파괴자들이 광야의 모든 언덕들에 당도해 있다; 그 이유가 여호와의 검이 토지의 이쪽 끝에서 토지의 저쪽 끝에 까지에 이르러 삼키기 때문이다; 어느 육체도 평화롭지 않다. 그들이 밀을 뿌렸었지만, 가시들을 수확했다 (예. 12:10, 12, 13).
“포도원”과 “들판”은 교회를 표시한다; “고독한 광야”는 교회의 황폐함을; “삼키는 검”은 진리의 황폐함을; “평화가 없다”는 감동을 주는 선이 없음을; “밀을 뿌림”은 사랑과 선행으로부터의 선들을; “가시들을 수확함”은 자기와 세상을 사랑함으로부터의 악들과 거짓들을 표시한다.
[4] 요엘서에서:
들판이 망가졌다, 지면이 슬퍼한다, 그 이유는 곡식이 망가졌고, 새 포도주는 말라졌고, 기름이 쇠약해지고, 농부는 부끄러워졌고, 포도원지기는 울부짖는다, 그 이유는 밀과 보리 때문이다; 그 이유가 들판의 수확이 멸해졌기 때문이다. 네 자신에 띠를 두르고 통곡하라, 너희 성직자들아; 울부짖어라, 너희 제단을 섬기는 자여 (욜. 1:10, 11, 13).
위 구절은 황폐된 교회의 상태를 묘사하고 있다는 정도는 누구나 짐작할 것이다; 고로 “들판”과 “지면”은 교회이다; “곡식”은 교회의 선, 그리고 “새 포도주”는 교회의 진리 (3580항)이다; 그리고 “밀”은 천적 (수준의) 사랑, “보리”는 영적 (수준의) 사랑이다; 그리고 교회의 상태가 취급되기에, 말해지는 바, “네 자신에 띠를 두르고 통곡하라 너희 성직자들아; 울부짖어라 너희 제단을 섬기는 자들아” 이다.
[5] 에스겔서에서 여호와의 영으로부터 예언자에게 이렇게 말해졌다:
네게로 밀, 보리, 콩, 렌즈콩(팥), 기장(조), 귀리를 가져와라, 그리고 그것들을 한 그릇에 담아라, 그리고 그것 가지고 네게 빵을 만들어라. 너는 인분을 가지고 그들의 눈 앞에서 케이크를 만들어라. 그렇게 이스라엘의 아들들은 불결한 자기들의 빵을 먹을 것이다 (겔. 4:9, 12, 13);
위는 선과 진리를 모독함이 취급되고 있다; “밀, 보리, 콩, 렌즈콩, 기장, 귀리”는 다양한 종류의 선들과 이 선에서 파생되는 진리를 표시한다; 이것을 인분을 가지고 “빵” 또는 “케이크”로 만듦은 선과 진리의 모든 것을 모독함을 표시한다.
[6] 계시록서에서:
내가 보고 잘 보니 검은 말이었다; 그리고 그 위에 앉은 자는 자기 손에 저울을 가졌다. 그리고 나는 네 살아 있는 창조물 한 가운데로부터의 음성을 들었는데, 말하기를, 밀 한 분량에 일 페니, 그리고 보리 세 분량에 일 페니; 그리고 기름과 포도주는 다치게 말라 (계. 6:5, 6);
위는 선과 진리의 황폐해짐이 취급된다; “한 페니에 밀 한 분량”은 사랑이 부족함을; 그리고 “한 페니에 보리 세 분량”은 진리가 부족함을 표시한다.
[7] 에스겔서에서:
유다와 이스라엘의 토지는 너의 상인들이었다; 민닛의 밀, 그리고 과자(pannag), 그리고 꿀, 그리고 기름, 그리고 유향을 가지고 그들은 너와 거래하였다 (겔. 27:17);
위의 주제는 두로이고, 두로를 수단으로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들이 의미된다; 사랑과 선행의 선과 그것들의 행복이 “민닛의 밀, 과자, 꿀, 기름, 유향”이다; “유다”는 천적 (평면의) 교회를, 그리고 “이스라엘의 토지”는 영적 (평면의) 교회이고, 이 교회들로부터 사랑과 선행의 선과 행복이 있다; “거래함”은 획득함이다.
[8] 모세의 책에서:
밀과 보리의 토지, 그리고 포도나무와 무화과 나무와 석류 나무의 토지, 올리브의 토지, 기름의 (토지), 그리고 꿀의 토지 (신. 8:8);
위는 가나안의 토지를 묘사하고 있는데, 가나안의 토지는 내적 의미에서 주님의 왕국이다 (1413, 1437, 1585, 1607, 3038, 3705항). 사랑과 선행의 선들이 “밀과 보리”에 의해; 그리고 신앙의 선들은 “포도나무와 무화과 나무”에 의해 의미된다.
[9] 마태복음서에서:
그분의 부채가 그분의 손에 있다, 그리고 그분은 그분의 타작 마당을 통째로 걸러내실 것이다; 그리고 그분은 그분의 밀을 곳간에 모아들이시나, 그분은 겨를 꺼지지 않는 불로 태우실 것이다 (마. 3:12).
위는 세례 요한이 주님을 두고 이야기한 것이다; “밀”은 사랑과 선행의 선을 표시한다; “겨”는 선이 하나도 없는 것을 표시한다. 마태복음서에서: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하라, 그리고 추수 때에 나는 수확자들에게 말할 것이다, 가라지들을 먼저 거두어라, 그리고 그것들을 단으로 묶어 태워라, 그러나 밀은 내 곳간 안으로 그러모아라 (마. 13:30);
“가라지들”은 악들과 거짓들을; 그리고 “밀”은 선들을 표시한다. 이것들은 비교적이다(비유이다). 말씀에서의 비유들은 의미들을 수단으로 만들어지고 있다.

그리고 들에서 합환채를 발견했다. 이는 선행과 사랑으로부터의 진리와 선에 있는 부부의 사랑에 속하는 것들을 의미한다. 이는 “합환채(dudaim)”의 의미가 부부의 사랑에 속하는 것들이다로부터 인데, 아래에서 살핀다; 그리고 “들판”의 의미가 교회이다로부터, 결과적으로 신앙의 진리와 선행의 선이다로부터 알려진다. 그 이유는 이것들이 교회를 만들기 때문이다. 합환채가 무엇인지를 성경 번역가들은 모른다. 그들은 그것이 열매나 꽃을 가진 식물일 것으로 추정하고 자기들 각자의 의견에 따라 이름을 주고 있다. 어쨋든 그것에 어떤 이름을 붙여야 올바른 이름이 될 것인지는 중요 사항이 못된다. 단지 교회 속에 있었던 고대인들 사이에서 모든 열매나 꽃이 의미적이었다는 사실이 중요할 뿐이다; 그 이유가 그들이 알고 있는 것은, 자연계는 전체적이든, 세부적이든 모두에서 주님의 왕국을 표현하는 극장 무대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연계의 세 왕국에 있는 것들도 표현적이다는 것, 하여 자연계 각각의 것은 영계에 있는 어떤 특별한 것을 표현한다는 것, 그러므로 열매나 꽃 역시 그러하다는 것이다. “합환채”에 의해 선과 진리는 부부임을 의미한다는 것은 여기서의 내적 의미에서의 시리즈로부터 알는지 모른다; 뿐만 아니라 이 단어의 원어에서 갈라져 나온 단어들로부터도 알게 된다. 그 이유가 단어 “합환채”로부터 파생되는 것이 사랑들과 사랑들을 수단으로 결합함을 뜻하기 때문이다. “합환채”가 이로부터 근원한다는 것, 그리고 부부적인 것이다는 것은 아래 말들로부터 분명해진다;
아침에 우리는 포도원쪽에서 일어날 것이다; 우리는 포도나무가 꽃피웠는지, 그리고 포도를 내밀 었는지, 석류가 꽃들을 나오게 했는지를 볼 것이다; 거기서 나는 네게 내 사랑들(dudim)을 줄 것이다; 합환채가 향기를 내뿜을 것이다 (아. 7:12, 13).
위 구절 역시 “합환채”에 의해 의미되는 것을 보여준다.
위 구절이 발견되는 책, 아가서에 주목해보자, 이 책은 “모세와 예언서들”이라 불리우는 책들 사이에 있지는 않다, 그 이유는 이것에는 내적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고대 문체로 쓰여져 있고, 고대 교회의 책들로부터 수집된 의미들로, 그래서 고대 교회에서 천적이고 영적인 사랑을 의미한 것들, 고로 부부의 사랑을 의미하는 것들로 가득하다. 이것이 이 책의 본성인 것은 그것의 글자 의미에서 많은 사항들이 점잖치 못하다는 것, 이런 것은 “모세와 예언서들”이라 불리는 책과 더불은 경우가 아니다는 것에서 분명해진다; 그리고 이 책 내부에 천적인 것, 그리고 부부의 사랑을 의미하는 것과 같은 것이 수집되었기에, 마치 이 책이 어떤 신비적인 의미를 소유한 것처럼 나타날 뿐이다.
위와 같은 “합환채”의 의미로부터 지금 우리는 “르우벤이 들판에서 그것들을 발견했다”에 의해 사랑과 선행으로부터의 진리와 선의 부부 관계가 의미되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말하자면, 이는 결합되어질 수 있다를 의미한다. 그 이유가 영적 의미에서 부부의 원리는 선과 더불어 진리는 결합될 수밖에 없다는 것, 그리고 선은 진리와 더불어 결합되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로부터 모든 부부의 사랑이 온다; 그러므로 진짜 (순수한) 부부의 사랑은 선과 진리 안에 있는 이들, 고로 천국의 결혼 안에 있는 이들이 아니면 가능해질 수 없다.

그리고 그것을 그의 어머니 레아에게 가져왔다. 이는 외적 진리에 애착함에 응용함을 의미한다. 이는 “가져오다”가 응용하다, 적용하다임으로부터; 그리고 레아가 외적 진리에 애착함을 표현한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리고 라헬이 레아에게 말했다. 이는 내면의 진리에 애착함이 지각함, 그리고 그것을 갈망함을 의미한다. 이는 “말함”이 지각함이다로부터; 그리고 라헬이 내면의 진리에 대한 애착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 의미가 이 진리에 애착함과 이 진리를 갈망함이다는 것은 뒤이어지는 것으로부터도 분명해진다; 그 이유가 라헬이 말한다, “내가 바라건대 네 아들로부터 나에게 주라.”

바라건대 나에게 네 아들의 합환채를 주라. 이는 부부의 사랑에 관한 것에 애착함과 그것을 갈망함은 상호적으로 번갈아서 결합되어져야 할 것임을 의미한다. 이는 “합환채”의 의미가 부부의 사랑에 속한 것들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 의미가 애착과 갈망이다는 것은 분명해진다.

그리고 그 여자가 그녀에게 말했다, 네가 내 남자를 뺏은 일이 작은 일이더냐? 이는 부부이기를 바램이 있음을 의미한다. 이는 여기서 레아의 남편도 되는 야곱을 데려 감의 의미가 그들 사이에 있는 서로의 사랑을 포함하는 것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러므로 “네가 나의 남자를 뺏는 일이 작은 일이더냐?”에 의해 거기에 부부이기를 갈망함이 있음이 의미되고 있다.

그리고 너는 내 아들의 합환채 역시 가저가려 하느냐? 이는 그러므로 자연적 선과 외적 진리와의 부부의 관계는 철회될 것임을 의미한다. 여기서 “가저감”의 의미가 철회함이다로부터; “합환채”의 의미가 부부인 것이다로부터; 그리고 “아들”의 의미가 진리이다로부터 알게 되는데; 여기서의 경우, 외적 진리, 그 이유는 이것을 말하는 이가 레아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레아”가 외적 진리인 것은 이미 살폈다.

그리고 라헬이 말했다. 그러므로 그는 오늘 밤 네 아들의 합환채를 위해 너와 누울 것이다. 이는 결합함이 있을 것임에 동의함을 의미하는데, 이는 설명이 필요치 않을 것이다.

그리고 야곱은 저녁에 들판으로부터 왔다. 이는 진리의 선이 선의 상태에 있기는 하나 자연적인 것에 속하는 바 불명료한(희미한) 상태임을 의미한다. 이는 야곱의 표현함이 자연 평면의 진리의 선이다로부터; “들판”의 의미가 선 측면에서의 교회이다로부터, 고로 선이기도 하다; 그리고 “저녁”의 의미가 희미함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리고 레아가 그를 맞으러 나갔다, 그리고 말했다, 당신은 나에게 와야 합니다. 이는 외적 진리에 애착함 쪽에서 그와 함께 결합하기를 갈망함을 의미한다. 이는 레아가 외적 진리에 애착함을 표현한다로부터 분명해진다. 이 의미가 결합하기를 갈망함인 것은 설명이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그 이유가 저는 내 아들의 합환채로 당신을 빌려왔기 때문입니다. 이는 사전에 생각함으로 약속되어진 것을 의미한다. 이는 “삯을 내고 빌림, hiring to hire”의 의미가 약속된 것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것이 예견(foresight)으로부터 인 이유는 인간 안에서 진리가 선과, 그리고 선이 진리와 더불어 있는 모든 결합은 예견으로부터 있기 때문이다. 즉 주님의 섭리하심으로부터 있다는 말이다. 그 이유가 여기서 취급된 주제는 진리가 선과, 그리고 선이 진리와 결합하는 것이기에, 여기서의 선은 인간에게 걸맞는 선이기 때문에서이다. 그리고 모든 선은 주님으로부터 이다는 것, 즉 선이 진리와 결합함을 통하여 그 선이 자기 것 되게 함이 있기에 여기서 “예견함으로부터”라고 말했던 것이다. 주님의 섭리는 이 결합에 특별한 관심이 있다. 그 이유가 이 결합을 수단으로 인간은 인간이 되고, 야생 동물과 구별되어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가 이 결합으로 선을 받는 만큼에서 그는 인간이 된다; 다시 말해 그가 이 결합을 결과 하기 위해 주님에게 허가를 내주는 만큼에서 그는 인간이 된다는 말로 바꿀 수도 있다. 그러므로 이 선은 인간과 더불어 있는 선이다; 그리고 이 외에 영적인 다른 선, 그리고 영원쪽으로 남는 다른 선은 가능하지 않다.
더욱이 인간이 세상에 있는 한, 생명(삶)의 기쁨들인 외적 인간의 선들은 이 선을 내향적으로 함께 하는 만큼에서 (그가 소유하게 되는) 유일한 선일 뿐이다. 재물로부터의 선을 예로 생각해보자. 재물이 그것들 안쪽에 영적인 선을 가지는 만큼에서, 즉 재물들이 그것의 목적으로 이웃의 선을, 나라에 대한 선을, 즉 공공의 선을, 그리고 교회의 선을 그것의 목적으로 가지는 만큼에서 그것들은 선이 된다. 그러나 흔히 우리가 이야기하는 영적인 것은 세상적으로 부유함의 상태에서는 가능하지 않다고, 또한 이런 부유함은 천국에 자신의 방을 마련하는데 걸림돌이 된다고 자신을 스스로 설득하는 이들은 크게 빗나가는 것이다. 그 이유가 만일 그들이 자신의 재산을 포기한다면, 사실상 그들은 누구에게도 (마음에서만 선을 행할 수 있을지 몰라도 구체적으로는) 선을 행할 수 없기 때문이고, 그럴 경우, 세상에서의 남은 시간 동안 자신마저 비참해지기 때문이다. 결국 그는 이웃의 선, 공공의 선, 교회의 선조차 자신의 목적으로 삼아 계속적으로 행동할 수 없고, 자신은 구원되어져 천국에서 더 큰 자가 되어진다 라고 착각하게 되는 자신만이 덩그러히 남을 뿐이다. (아마도 이렇게 하는 멍청한 자가 요즘 세상에서 있기는 힘들지 몰라도 가끔 누구에게 설득당해 낭패를 보는 자도 있기는 하다.) 더구나 그들이 세상적 선을 벗어던진다면, 그들은 자신을 타인들의 경멸의 대상이 되게 만들 뿐이고, 결과적으로 자신이 세상에서 유용한 인간이 되는 것, 또는 세상에서의 의무들을 이행하는데 있어 무용지물로 전락되게 할 뿐이다.
위의 경우와 매우 유사한 예로 인간이 섭취하는 영양물이 있다. 이 영양물은 건전한 육체 안에 건전한 마음을 가지는 것이다. 만일 인간이 자기 신체로부터 가져야할 영양분을 박탈한다면, 그는 자신에게서 자신의 목적으로 필요해지는 조건을 박탈하는 셈이 되고 만다; 그러므로 영적인 인간도 세상의 영양물을 얕보지 않고, (건강한 음식을 맛있게 먹는) 쾌락조차 경멸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그는 이런 영양물이나 쾌락에 집착하지 않는다, 즉 그는 그것을 그의 목적으로 삼는 것은 아니고 목적에 대한 수단 중의 하나로만 간주한다는 말이다. 이런 간단한 예증으로부터 이외 다른 사항도 판단해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그날 밤 그녀와 누웠다. 이는 결합을 의미하는데, 별도의 설명은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이쯤해서 말해볼 것은, 앞의 주제들에서는 단어들의 내적 의미들을 피력하는 수준에서만 살폈는데, 그 이유는 앞의 주제들은 하나의 시리즈로 설명하지 않으면 납득되어질 수 없는 특성을 지녔기 때문에서이다. 그 이유가 취급된 주제가 진리와 선의 결합, 그리고 선과 진리의 결합, 이 결합이 영적 의미에서 이해되는 부부의 관계이기 때문이다; 즉 영적 의미에서의 부부의 관계가 인간과 더불은 천국의 결혼, 교회 안에서 있는 천국의 결혼을 만들기 때문이다. 이 천국의 결혼의 신비함들이 앞의 구절들에서 묘사되어지고, 아래와 같은 사항을 밝히 알리고 있다. 천국의 결혼은 선이 진리와 결혼함, 또는 진리가 선과 결혼함이다고 말해왔는데, 그럼에도 이 결혼은 이쪽 수준과 다른쪽 수준이 같은 상태에서 결합되지 않는다. 다시 말해 이쪽의 수준은 다른쪽보다 수준이 낮고, 다른쪽은 이쪽 수준보다 높은 상태에서 결합이 있다는 말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외적 인간의 선은 내적 인간의 진리와 결합한다; 같은 말로, 자연적 인간의 선과 자연적 인간의 진리 사이에서 결합이 있지 않고, 자연적 인간의 선과 영적 인간의 진리 사이에서 결합이 있다. 이 결합이 결혼을 만든다.
이것은 내적, 또는 영적 인간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여기서도 영적 인간의 선과 진리 사이에서 천국의 결혼이 있지 않고, 영적 인간의 선과 천적 인간의 진리 사이에서 결혼이 있다. 그 이유가 천적 인간이 영적 인간보다 상대적으로 더 높은 수준에 있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천적 인간의 선과 진리 사이에서 천국의 결혼은 있지 않고, 천적 인간의 선과 주님으로부터 진행하는 신성으로부터의 진리 사이에서 있다. 주님의 신성한 결혼 자체는 그분의 신성한 인간 안에서 신성으로부터의 선과 신성으로부터의 진리 시이에서 있지 않고, 신성으로부터의 선과 신성 자체 사이에서 있다, 즉 아들과 아버지 사이에서 있다는 말이다; 그 이유가 주님의 신성한 인간으로부터의 선이 말씀에서 “하느님의 아들”이라 불리우고, 신성 자체가 “아버지”라 불리우기 때문이다.
이런 사항들이 합환채에 관련하여 말해진 내적 의미 안에 포함된 신비함들이다. 아마 모든 이들 역시 합환채라는 (식물이 무엇인지 확연치는 않지만) 단어 안에 어떤 신비함이 있음에 틀림이 없다는 정도는 가늠하고 있을 것이다. 그 이유가 르우벤이 들판에서 합환채를 발견한 것, 그리고 라헬이 그것을 바랬다는 것, 그리고 그것을 가져감에서 그들의 남자가 레아와 눕게된다는 약속을 한 것; 그리고 야곱이 저녁에 들판에서 귀가하자 레아가 야곱을 마중나간 것, 그리고 자기가 합환채로 삯을 지불하여 그를 빌려왔다고 말한 것, 등등에 신성한 어떤 사항이 감추여 있지 않으면, 아마 이런 사건들이 말씀에 수록된 것조차 의아히 여기면서 구절 자체를 하찮은 구절로 전락되게 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렇다 해도 그 안에 놓인 신성한 사항들은 야곱의 아들들, 그리고 아들들로부터 명명된 지파들에 의해 의미된 것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하면; 그리고 내적 의미에서의 주제의 시리즈를 알지 못하면; 더욱이 천국의 결혼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하면 (왜 이런 사건이 말씀의 이 대목에 끼여 있는지에) 불투명한 채로 묻혀질 수밖에 없게 된다. 한마디로 취급된 주제가 외적 인간에 있는 선이 내적 인간에 있는 진리에 애착함과 결합함임을 영영 모른다는 말이다.
이 신비함을 더 이해하기 위해 예증을 들어보자. 외적 인간의 진리들은 인간이 자기 부모들로부터 처음 배워지고, 그 뒤 선생들로부터, 그 뒤 책들, 또는 자신의 연구함으로부터 배워지는 기억 속의 지식들이다. 외적 인간의 선들은 그가 배워진 것들로부터 지각하는 그것들의 쾌락과 기쁨이다. 진리들이 있는 기억 속의 진리들, 그리고 선이 있는 기쁨들은 함께 결합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들의 결합은 당사자 안에서 천국의 결혼을 만들지 않는다. 그 이유가 자기와 세상을 사랑함에 집착하고 있는 이들, 그러므로 악과 거짓 안에 있는 것도 개의치 않는 이들에게 있는 기억 속의 지식들, 교리적인 것에 이르기까지 기쁨들과 결합되어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는 (자연계에서는) 이런 사랑들로부터의 기쁨들과 더불어 진리들조차 결합되어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인물들은 천국 결혼의 밖에서 있다. 그러나 외적 인간 또는 자연적 인간의 선이 있는 기쁨 또는 쾌락이 영적인 사랑으로부터, 즉 이웃, 나라, 사회, 교회, 마지막으로 주님의 왕국을 사랑함으로부터 있을 때, 더욱이 천적인 사랑인 주님을 사랑함으로부터 있을 때; 다시 말해 영적 사랑이 내적 인간, 또는 영적 인간으로부터 외적 인간 또는 자연적 인간의 기쁨 안으로 흘러들 때, 외적 또는 자연적 인간의 기억 속의 지식들이나 교리적인 것들과 결합하는 바, 이 때 당사자와 더불어 천국의 결혼이 있게 된다. 이런 결합은 악한 자의 경우는 가능하지 않고 오직 선한 자의 경우에서 일 뿐이다. 즉 자기의 목적을 영적인 사랑, 천적인 사랑에 두고 있는 이들의 경우에만 해당된다.
위와 같은 사항을 알게 되면, 단어들을 내적 의미에서만 풀이한 각각에 의해 의미된 것을 알게 된다. 즉 (거듭남의 시작의 첫 단계인 신앙의 진리인) 르우벤이 합환채를 발견한 것에 대해; 그가 그것을 (외적 진리에 애착함인) 자기 어머니 레아에게 가져온 것에 대해; (내적 진리에 애착함인) 라헬이 그것을 갈망했다는 것; 그것이 그녀에게 주어졌다는 것; 그러므로 레아가 (자연적 인간에 있는 진리로부터의 선인) 그녀의 남자 야곱과 누웠다는 것; 그리고 뒤이어지는 구절들, 레아에 의해 야곱에게 잇사갈과 스불론이 태어난 것, 이들을 수단으로 부부의 사랑에 관한 것들, 고로 천국의 결혼이 표현되고 의미되었다는 것; 그때 요셉이 출생되었고, 그를 수단으로 지금까지 다루어진 결혼 자체인 주님의 영적 왕국이 의미되고 표현되었다는 것에 관하여도 실마리를 풀게 해서 알게 해준다.

17, 18절.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레아에게 귀기울이셨다, 그리고 그녀는 임신해서 야곱에게 다섯 번째 아들을 낳았다. 18 그리고 레아는 말했다, 하느님께서 나에게 내 보상을 주셨다, 그 이유는 내가 내 하녀를 내 남자에게 주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녀는 그의 이름을 잇사갈이라 불렀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레아에게 귀기울이셨다. 이는 신성한 사랑을 의미한다. 이는 누군가에게 “귀기울임”의 의미가 하느님 또는 주님을 서술할 경우 신성한 사랑이다로부터; 그 이유가 귀기울임이 누군가가 바라는 것, 간구하는 것을 실행함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신성한 선으로부터 인 바, 그리고 신성한 선은 신성한 사랑으로부터 오는 바, 누군가에게 “귀기울이심”은 최고 의미에서 신성한 사랑이 의미된다. 말씀의 내적 의미와 더불은 경우는 글자의 의미가 천국을 향하여 승강하는 것, 고로 생각함이 주님으로부터 있는 영역으로 진입하여 주님에 관한 것과 주님에 속한 것일 때의 경우인 바, 주로 이것은 천사들이 지각하는 경우에 해당된다. 이것에 글자 의미는 평면을, 또는 생각하는 수단을 제공할 뿐이다. 그 이유가 글자의 의미는 천사들에게 와질 수 없기 때문, 그 이유가 글자 의미는 세상적, 지상적, 육체적인 것들에 대부분의 지면을 할애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여 이로부터서는 천사들은 생각할 수 없는데, 그 이유는 그들이 영적, 천적인 것들 안에 있기 때문, 고로 지상의 것 넘어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에서 말씀은 인간을 돕기 위해 있지만 동시에 천사들을 위해서도 있는 책이다. 이런 점이 세상 어느 책과도 비교할 수 없는 특별한 점인 것이다.

그리고 그녀는 임신했고 야곱에게 다섯 번째 아들을 낳았다. 이는 받아들임과 인정함을 의미한다; 이는 “임신함”의 의미가 받아들임이다로부터; 그리고 “낳다”의 의미가 인정함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리고 레아는 말했다, 하느님께서 나에게 내 보상을 주셨다, 그 이유는 내가 내 하녀를 내 남자에게 주었기 때문이다. 이는 최고 의미에서 진리로부터의 신성한 선과 선으로부터의 진리를, 내적 의미에서 천적인 부부의 사랑을, 그리고 외적 의미에서 서로의 사랑을 의미한다; 이는 “보상(reward)”의 의미로부터 알는지 모른다. “보상”이란 단어는 말씀 안에서 자주 등장하는 단어이기는 하나 각 구절들에서 이 단어가 의미하는 것을 아는 자는 매우 적다. 인간이 행하는 선을 수단으로 인간은 칭찬받을 것이 아무 것도 없다(공덕(功德, merit)을 얻지 못한다)는 것은 교회들에 알려져 있다. 그 이유는 그 선이 그의 것이 아닌 주님의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공덕을 얻는 것, 또는 공덕 자체는 인간쪽을 보고 있기 때문(인간쪽으로 기울어져 있다), 하여 그 자체 자기 사랑에 결합하기 때문, 그리고 자신은 타인보다 탁월하다는 생각과도 결합하고, 결과적으로 타인을 경멸함과도 결합해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보상을 위하여 행해진 일들은 그 자체 선이 아니다, 그 이유는 그것들은 순수한 원천으로부터 솟아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즉 이웃을 향한 선행으로부터 솟아나지 않았다는 말이다. 이웃을 향한 선행은 그것 안쪽에 타인도 자신 같이 잘되기를 바램이 있다; 그리고 천사들의 경우, 자신이 잘됨보다 타인이 더 잘되기를 바램이 있다. 선행에 애착함 역시 이와 같다; 그러므로 이것은 모든 자기 공덕(self-merit)에 반대되어 있다, 결과적으로 보상을 기대하는 모든 선을 행함에 반대된다. 선행 안에 있는 이들에게 보상은 친절을 보여줄 수 있음에 있고, 그렇게 행하도록 허용됨 안에 있고, 그리고 친절을 받아들임 안에 있다. 이것이 기쁨, 그렇다 선행에 애착하는 이들에 의해 향유되는 복됨 자체이다. 이로부터 말씀에서 언급되는 “보상”이 무엇인지가 분명해진다. 즉 선행에 애착함으로부터의 기쁨과 행복이다; 또는 같은 것으로 서로의 사랑으로부터의 기쁨과 행복이다. 그 이유가 선행에 애착함, 그리고 서로의 사랑은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이상으로부터 분명한 바, 외적 의미에서의 “보상”은 여기에서는 서로의 사랑이다.
보다 높은 의미에서, 또는 내적 의미에서 “보상”을 수단으로 천적인 부부의 사랑이 의미된다는 것은 천국의 결혼에 관해 말해졌던 바로부터 알았을런지 모른다, 즉 이것은 선과 진리의 결합이다는 것; 그리고 서로의 사랑은 이 결합으로부터 또는 이 결혼으로부터 있다는 것이다. 이로부터 분명한 바, 내적 의미에서의 “보상”은 천적인 부부의 사랑이다는 것이다.
최고 의미에서 “보상”은 진리로부터의 신성한 선과 선으로부터의 진리이다는 것은 천국의 결혼이 거기로부터 파생된다는 사실로부터 분명해진다; 그 이유가 이 합일이 주님 안에서 있기 때문, 그리고 그분으로 진행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이 천국 안으로 흘러들 때, 이것이 선과 진리의 부부 관계를 만든다, 그럼으로 서로의 사랑을 만든다. 지금 말해진 것, 앞서 말해졌던 것으로부터, 레아의 말, 즉 “하느님께서 나에게 내 보상을 주셨다, 그 이유는 내가 내 남자에게 내 하녀를 주었기 때문이다”에 의해 내적 의미에서 의미되는 것이 분명해졌을 것이다; 그 이유가 “하녀”에 의해 외적 인간이 내적 인간과 결합함에 도움을 주는 확언하는 수단이 의미되기 때문이다. 고로 하녀의 아들들에 의해 의미된 이런 저런 것들이 확언되고 인정되기 이전에서는 선과 진리의 어떤 결합도 공표될 수 없다는 것, 고로 어떤 서로의 사랑도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 이유가 이런 확언이 먼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우리 앞의 말들에 의해 뜻해진다.

그리고 그녀는 그의 이름을 잇사갈이라 불렀다. 이는 그것의 품질을 의미한다. 이는 “이름을 부름”의 의미가 품질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 이유가 이름 잇사갈은 “보상”으로부터 명명되었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이름은 보상에 관해 말해졌던 것을 포함하고, 동시에 레아의 말에 의해 의미된 것까지 포함한다. “잇사갈”에 의해 “보상”이 뜻해지고; 그리고 외적 의미에서 “보상”은 서로의 사랑이고; 그리고 내적 의미에서 선과 진리의 결합이지만, 현재의 기독교계의 극히 적은 이들만이 “보상”의 이런 의미를 알기에, 그런 이유는 그들이 서로의 사랑이 무엇인지를, 더욱이 인간이 천국의 결혼 안에 있기 위하여는 선은 반드시 진리와 결합해야만 한다는 것을 모르기에 보상의 의미를 알 수 없는 바, 이를 좀 더 서술해두는 것이 좋지 않을까 싶다. 나는 이 주제를 놓고 기독교계로부터 온 다른 삶에 있는 많은 이들, 그리고 학식이 대단하다는 이들과도 이야기를 나누어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다; 그러나 놀라웁다 말해야 하는 것은, 내가 이야기를 하도록 허락된 이들 중의 거의 누구도 그것에 관하여 알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런데도 그들은 만일 자기들이 자기들의 추론을 사용해도 좋다고 한다면 자신들로부터 이에 관해 많은 것을 알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들이 사후 삶에 관하여는 걱정하지 않고 오직 세상 삶에 관해서만 걱정했을 때, 이런 것들이 그들의 관심 밖에 있었다.
그들이 자신들로부터 알고 있어 왔다고 하는 것을 그들은 추론을 사용하기 위해 선택했는데 아래와 같다: 첫째, 인간이 자기 육체를 벗을 때, 그는 세상에서 가졌던 이해력보다 훨씬 더 계발된 이해력을 충분히 발휘하게 된다는 것, 그 이유는 그가 육체 안에 있는 동안, 육체적, 세상적인 것들이 그의 생각들을 점령하고 있어 이것이 이해력을 희미하게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육체를 벗을 때, 이와 같은 것들이 간섭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것은 바깥쪽의 감각들의 것들로부터 마음의 추상을 수단으로 내면의 생각 안에 있는 이들과 더불어서도 그러하다. 이로부터 그들은 사후 삶이 죽음 이전 삶보다 더 명백한 시야와 계발됨을 누린다는 것을 알는지 모른다; 그리고 인간이 죽을 때, 그는 그늘짐에서 빛 안으로 건너간다는 것, 그 이유는 그가 세상의 것들로부터 천국의 것들에로 건너가기 때문, 그리고 육체의 것들로부터 영의 것들에로 건너가기 때문이다. 그러나 경이하다 말해야 하는 것은, 이 모든 사항을 알고 있다 해도 그럼에도 그들은 반대로 생각한다는 점이다, 즉 육체 안에서의 삶의 상태가 상대적으로 명료하다는 것, 그리고 육체를 벗은 이 후의 삶의 상태는 상대적으로 희미하다고 생각한다.
만일 그들이 자기의 추론을 사용한다면 알는지 모른다는 두 번째 사항은 인간이 세상에서 자신을 위해 획득한 생명이 그를 따라다닌다는 것이다; 즉, 그는 사후 그와 같은 생명 안에 있다는 점이다. 자신의 것 모두가 일괄하여 죽는다는 조건을 달지 않고서는 죽음에서 자신이 유아로부터 획득해왔던 생명을 벗을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다; 그리고 이 생명은 한 순간에 또다른 생명으로 바뀔 수 없다는 것, 그 반대의 상태로는 더 더욱 가능할 수 없다. 예를 들면: 사기침의 생명을 획득하고 이 생명에서 기쁨을 발견했던 자는 사기침의 생명을 벗지 못하고 사후에도 여전히 사기치고 있다. 자기를 사랑함에 있는 이들, 그럼으로 해서 자기를 떠받들어주지 않는 이들을 증오하고 앙갚음하는 자, 그리고 이외 다른 악에 있는 자는 육체의 삶 이후 그것들 안에 남아 있다; 그 이유가 이것들은 그들이 사랑한 것들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이 그들 생명의 기쁨을 구성했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그들의 생명 자체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런 것들은 그들의 생명을 완전히 소멸한다는 조건을 달지 않는 이상 그들로부터 거두어내질 수 없다. 이런 경우의 예는 다른 경우에도 많다.
인간이 자신으로부터 알는지 모른다는 세 번째의 것은, 인간이 다른 삶으로 건너갈 때, 그는 건너간 곳에서 있을 장소가 없는 많은 것들을 뒤에 남겨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음식, 의복, 집에 대한 걱정 같은 것, 또한 돈을 벌 걱정, 명예를 확보하는 것, 등등의 모든 것은 육체의 삶에서 인간에 의해 생각됐던 것들이다; 그러나 다른 삶에서는 이 지상의 왕국으로부터 있지 않은 다른 것들을 수단으로 계승된다.
그러므로 인간이 알 수 있는 네 번째 사항은 세상에 있는 자는 세상의 것들에 대해서만 생각을 가졌다는 것, 그리하여 세상의 것들에 전체적으로 소유당해져 왔다는 것, 그리고 그것들로 부터서만 생명의 기쁨을 획득한 이들은 천국의 것들에 관하여 생각하는 것이 자기들의 기쁨이 되는 이들 사이에 낄 수 없다는 것이다.
이로부터 다섯 번째 사항이 뒤따른다; 육체와 세상으로부터의 외적인 것들이 거두어질 때, 그때 인간은 내향적으로 있어 온 듯하여 있는다는 것, 즉 그는 내향적으로 생각하고 뜻한다. 만일 그의 생각들이 내향적으로 사기침, 음모를 획책함, 위엄을 갈망함, 이득을 갈망함, 명성을 갈망함 따위이었다면; 만일 그들이 증오함과 앙갚음에 들끓고 있었다면, 그는 자기가 여전히 그런 상태 아래 있다는 것을 볼 것이다. 그가 미리 계획한 목적을 위하여 사람들로부터 자기의 생각을 감추여 있게 하고, 한편 자신의 심정에 가지지도 않은 것을 믿도록 타인을 이끌고 있다 해도 그는 지옥에 속한 것을 생각하고 있음이 보여질 수 있다.
외적으로 값어치 있는 것 같은 이런 모든 것들은 다른 삶에서 거두어진다는 것은 바깥쪽의 것들은 육체와 더불어 모두 벗어지고 더 이상 어떤 사용도 없다는 사실로부터 알려질는지 모른다. 이로부터 모든 이는 자기가 천사들 앞에 어떤 종류의 인간으로 나타날 것인지를 자신을 위해 결말지을 수 있다.
알는지 모를 여섯 번째의 사항은 천국, 또는 천국을 통한 주님은 계속적으로 일하시고 선과 진리와 더불어 흘러드신다는 것이다; 그런데 인간 안에, 즉 사후에 사는 내면의 인간 안에 선과 진리를 담는 그릇인 평면, 또는 바탕이 없다면, 흘러드는 선과 진리는 받아질 수 없다; 이런 이유로 인간이 육체 안에서 사는 동안 자신 안쪽에 이런 평면을 확보하려 열심을 내야 한다; 그러나 이 평면은 이웃을 향하여 선인 것을 생각함과 이웃에 선인 것을 뜻함이 아니고서는 확보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웃에게 선인 것을 행함과 그로부터 생명의 기쁨을 획득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다시 말해 이 평면은 이웃을 향한 선행을 수단으로, 즉 서로의 사랑을 수단으로 획득되어진다. 이 평면이 양심이라 불리운다. 이 평면 안으로 주님으로부터의 선과 진리는 흐를 수 있고, 받아질 수 있다; 그러나 선행이 있지 않은 곳, 결과적으로 양심이 없는 곳은 아니다. 그 이유가 이 평면이 없으면 흘러드는 선과 진리는 통과해가거나 악과 거짓으로 변하기 때문이다.
인간이 자신으로부터 알 수 있는 일곱 번째의 것은, 하느님을 사랑함과 이웃을 향한 사랑이 인간을 인간답게 만든다는 것, 하여 들짐승과 구별되게 해준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들이 천국의 생명을, 또는 천국을 만든다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이 이런 사항을 알지 못하는 이유는 그가 이런 것들을 알기를 바라지 않기 때문이다. 바라지 않는 이유는 그가 반대적인 삶을 영위하기 때문이다, 더불어 그는 사후의 삶이 있다고 믿지 않기 때문이다. 사후의 삶이 있다고 믿기는 하나, 선행이 결여된 신앙의 원리를 채택하였기 때문이다. 그들은 죽는 그 시간에 믿노라는 고백 하나로 그 순간까지의 삶은 아랑곳하지 않아도 된다는 신앙의 원리, 즉 신앙만으로 구원이 확실하다고 하는 교리에 일치하여 믿기 때문이다.

19, 20절. 그리고 레아는 다시 임신했다, 그리고 여섯 번째 아들을 야곱에게 낳았다.
20 그리고 레아가 말했다, 하느님께서 나에게 신부 지참금을 기부하셨다. 이제는 내 남편이 나와 함께 살 것이다, 그 이유는 내가 여섯 아들을 그에게 낳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녀는 그의 이름을 스불론이라 불렀다.

그리고 레아는 다시 임신했다, 그리고 여섯 번째 아들을 야곱에게 낳았다. 이는 진리를 받아들임과 인정함을 의미한다. 이는 “임신함”의 의미가 받는 것이다로부터; 그리고 “낳는다”가 인정한다를 의미함으로부터 알게 된다; 그리고 “아들”의 의미가 진리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리고 레아는 말했다, 하느님께서 나에게 신부 지참금을 기부하셨다, 이제는 내 남자가 나와 함께 살 것이다, 그 이유는 내가 그에게 여섯 아들을 낳았기 때문이다. 이는 최고의 의미에서 주님의 신성 자체와 그분의 신성한 인간을, 내적 의미에서 천국의 결혼을, 외적 의미에서 부부의 사랑을 의미한다. 이는 “함께 산다(거주한다)”의 의미로부터, 또한 이때 레아가 말한 말로부터 알게 된다. “함께 거주한다”, 또는 “동거함”이 최고 의미에서 주님의 신성 자체와 주님의 신성한 인간인 이유는 “아버지”라 불리운 신성 자체가 “하느님의 아들”이라 불리운 신성한 인간 안에 상호적으로와 교차적으로 계시기 때문에서 인데, 이는 요한복음서에서 주님 자신의 말로부터 이다:
예수께서 말하신다, 빌립보야,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본 것이다.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가 내 안에 계신다는 것을 믿어라 (요. 14. 9-11; 10:38).
이 합일이 신성한 결혼 자체이다는 것에 대하여는 이미 말했다. 그럼에도 이 합일은 동거함은 아니고, 단지 글자 의미에서 “동거함”에 의해 표현되었을 뿐이다; 다시 말해 한 분이 아버지와 아들로서 글자 의미에서 두 분으로, 어떤 때는 셋으로, 즉 아버지와 아들, 성령으로 글자 의미에서 표출되어져 있을 뿐이다. 이에 대한 것은 별도로 주님의 신성한 자비로부터 살필 기회가 있을 것이다.
글자 의미에서의 “함께 거주함” 또는 “동거함”이 천국의 결혼인 것은 위와 똑같은 원인으로부터 이다. 그 이유는 이 결혼이 신성한 결혼으로부터 출시되기 때문이다. 이 신성한 결혼은 아버지와 아들의 합일, 또는 주님의 신성 자체와 그분의 신성한 인간의 합일이다.
천국의 결혼은 주님의 왕국이라 불리우고, 천국이라 불리기도 한다; 그리고 이것이 신성한 결혼으로부터 출시되기 때문이다. 이것이 “동거함”의 내적 의미에서 의미된 것이다, 천국은 “하느님의 주택”이라고도 불리우고 있다. 이사야서에서:
하늘로부터 내려다보소서, 그리고 당신의 거룩함과 당신의 장식품으로 된 주택으로부터 바라 보소서; 당신의 열정과 당신의 권능 있는 행하심은 어디 있습니까? 당신의 동정심으로부터의 동정하심과 나를 향한 불쌍히 여기심은 자체를 감금해 버렸습니다 (이. 63:15);
“거룩함의 주택”은 천적인 왕국을 표시한다; 그리고 “장식품으로 꾸민 주택”은 영적인 왕국을 표시한다. 위 구절의 “주택”은 “함께 거주함”과 “동거함”의 같은 근원으로부터 이다.
외적 의미에서 “함께 거주함” 또는 “동거함”이 부부의 사랑인 이유는 모든 진짜 부부의 사랑은 천국의 결혼, 즉 선과 진리의 결혼 외에 다른 근원으로부터는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사랑은 신성한 결혼으로부터 이다. 이 결혼은 주님의 신성 자체와 주님의 신성한 인간 측면에서의 주님이시다.
이런 사항들이 “함께 거주함”, 또는 “이제 내 남자가 나와 함께 거주한다”에 의해, 뿐만 아니라, “하느님께서 신부 지참금을 나에게 수여하셨다”에 의해서도 의미된다. 앞의
말은 선으로부터의 진리가, 뒤의 말에 의해서는 진리로부터의 선이 의미되었는데, 이 둘 모두가 천국의 결혼을 만든다. 그리고 결론적으로, “내가 그에게 여섯 아들을 낳았기 때문에”라고 말해진다; 그 이유가 “여섯”은 여기서 열둘과 같은 의미, 즉 신앙과 사랑의 모든 것들을 의미한다. 말씀에서 숫자의 절반, 또는 두 배는 주제가 비슷하다면 같은 의미를 지닌다.

그리고 그녀는 그의 이름을 스불론이라 불렀다. 이는 그것의 품질을 의미한다. 이는 “이름을 부름”의 의미가 품질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는 “함께 거주함”으로부터 “스불론”이라 명명되었다. 이 이름에는 “함께 거주함”에 관해 말해진 모든 것, 그리고 레아의 말들에 의해 의미된 것까지 포함된다.

21절. 그리고 그 후 그녀는 딸을 낳았다, 그리고 그녀의 이름을 디나라 불렀다.

그리고 그 후 그녀는 딸을 낳았다. 이는 이러한 모든 일반적 진리들에 애착함을, 그리고 또한 선이 있는 신앙으로부터의 교회도 의미한다. 이는 “딸”의 의미가 애착이 있음이다로부터, 또한 교회이다로부터; 그러나 교회의 무엇, 또는 교회의 무슨 종류에 애착하는지는 단어 딸에 첨가되는 말로부터 나타난다. 즉 “시온의 딸”이라 말해져서 “시온”이 첨가될 때는 천적인 교회를; “예루살렘의 딸”이라 불리워서 “예루살렘”이 첨가될 경우는 영적인 교회를 의미한다는 말이다. 이외 다른 경우도 많다. 여기 같이 아무 것도 첨가됨이 없을 경우, 선이 있는 신앙으로부터의 교회가 “딸”에 의해 의미된다; 그 이유가 여기까지에서 선이 안쪽에 있는 신앙의 일반적 진리들이 묘사되어 왔고, 그것들의 받아들임과 인정함이 있어 왔기 때문이다; 이런 진리들이 야곱의 “열 아들들”에 의해 의미되었다, 그리고 이 아들들 뒤를 이어 딸이 태어났다고 말해졌는 바, 이는 모든 이런 진리들이 있는 교회를 뜻한다는 것이 시리즈로부터 분명해진다.
우리가 선이 있는 신앙으로부터의 교회를 말하든지, 또는 영적 교회를 말하든지, 이 둘은 같은 말이다; 또한 우리가 모두에 애착함, 즉 모든 이런 진리들에 애착함이라 말해도 같은 말이다; 그 이유가 교회는 선이 있는 진리에 애착함으로부터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선에 애착함으로부터 진리가 있다; 그러나 진리에 애착함으로부터가 아니면 선이 있지 않고, 선에 애착함으로부터가 아니면 진리가 있지 않다. 교회로부터 있다고 말하는 이들이 진리에 애착함에 있으나 진리로부터의 선 안에 있지 않다면, 그는 진리들에 따라 살지 않는 바, 이는 대단히 실수한 것이다. 이런 자들은 비록 그들이 교회에 소속되어 있다 해도 그들은 교회 밖에 있는 것이다; 그 이유가 그들은 악에 애착함 안에 있어 진리가 결합될 수 없기 때문이다. 진리에 대한 그들의 애착함은 주님으로부터 있지 않고 자신들로부터 있다; 그 이유가 그들은 자신들을 중요시하고, 진리에 대한 지식들을 수단으로 명성을, 영예와 부를 얻으려 의도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교회쪽에, 주님의 왕국쪽에, 더욱이 주님쪽에 하등 관심이 없다. 선에 애착함 안에 있되 진리가 있지 않은 이들은 비록 교회에 소속되었어도 교회로부터 있는 것은 아니다; 그 이유가 그들은 자연적 수준의 선 안에 있을 뿐 영적인 선 안에 있지 않기 때문이고, 그들은 외관적으로 선이다면 그 원인, 목적, 또는 바탕이 악이라 할지라도, 또는 외관적으로 진리이다면 그 바탕이 거짓이라 해도 개의치 않는 바, 결국 갖가지 종류에 악과 거짓이 자신을 끌고가게 허용해 버린다.

그의 이름을 디나라 불렀다. 이는 그것의 품질을 의미한다. 이는 “이름” 또는 “이름을 부름”의 의미가 품질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디나가 표현하고 의미하는 품질은 선이 있는 신앙으로부터의 교회에 있는 모든 것을 의미한다. 이는 방금 앞에서 살폈다. 똑같은 의미가 그녀의 이름의 갈래로부터 분명해진다, 그 이유가 원어에서 “디나”는 “판단, 재판, 공정, judgment”을 뜻하기 때문이다.
22-24절.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라헬을 기억하셨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그녀에게 귀기울이셨다, 그리고 그녀의 자궁을 여셨다. 23 그리고 그녀는 임신했다, 그리고 아들을 낳았다, 그리고 말했다, 하느님께서 내 불명예를 거두어 들이셨다. 24 그리고 그녀는 그의 이름을 요셉이라 불렀고,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나에게 또다른 아들을 더하소서.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라헬을 기억하셨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그녀에게 귀기울이셨다. 이는 예견과 섭리를 의미한다. 이는 “기억하다”가 하느님을 서술하기 때문에 예견을 의미하는데, 그 이유는 “기억함”은 누군가를 바라보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최고 의미에서 “보다”는 예견함인데 이는 이미 살폈다; 그리고 “귀기울임”이 하느님을 서술하므로 섭리가 의미된다.

그리고 그녀의 자궁을 여셨다. 이는 받아들이고 인정하는 수용력을 의미한다. 이는 “자궁을 열다”의 의미가 임신과 출산하는 수용력을 주는 것이다로부터; 고로 내적 의미에서 진리로부터의 선들과 선으로부터의 진리를 받아들이고 인정하는 수용력을 의미한다. “임신하고 출산함”이 받아들임과 인정함을 표시하는 것은 이미 반복적으로 피력해 왔다.

그리고 그녀는 임신했다, 그리고 아들을 낳았다. 이는 받아들임과 인정함을 의미한다. 이는 이미 위에서 알았을 것이다.

그리고 말했다, 하느님께서 내 불명예를 거두어 들이셨다. 그리고 그녀는 그의 이름을 요셉이라 불렀다,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나에게 또다른 아들을 더하소서. 이는 최고의 의미에서 신성의 영적 평면에 관련된 주님을; 내적 의미에서 영적 왕국을; 또는 신앙으로부터의 선을; 그리고 외적 의미에서 구원, 또한 열매맺음과 번성함을 의미한다. 이는 말씀에 있는 요셉의 표현으로부터, 이는 아래에서 살핀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내 불명예를 거두셨다”의 의미로부터, 그리고 “여호와께서 제게 또다른 아들을 더하소서”의 의미로부터 알게 된다; 그 이유가 그는 “거두어들임, gathering”과 “더함, adding”으로부터 “요셉”이라 명명되었기 때문이다. “하느님께서 내 불명예를 거두셨다”가 지금 라헬은 더 이상 불임 상태에 있지 않다는 것, 고로 1절에서 야곱에게 말한 죽어있는 상태가 아니다를 의미한다. 그 이유가 라헬에 의해 내면의 진리에 애착함, 또는 진리 측면에서의 내면의 인간이 표현되었기 때문이다. 내면의 인간은 만일 외면, 또는 자연적 인간이 선들과 진리들에 관련하여 상응하지 않으면 마치 죽은 자 같이 있다
이 둘이 둘이 아니기 위해서, 즉 함께 하나의 인간이기 위해서 서로가 서로에 결합되고 있어야만 한다. 이 결합은 자연적 또는 외적 인간이 준비될 때까지, 즉 레아와 하녀들에 의한 야곱의 열 아들들에 의해 의미된 일반적 진리들을 받아들이고 인정할 때까지; 그리고 레아에 의한 야곱의 마지막 아들, “함께 거주함”으로부터 명명된 스불론에 의해 의미된 결합, 즉 자연적 인간의 선이 진리들과 결합할 때까지 공표될 수 없다(세상 밖으로 나와질 수 없다). 이 결합이 결과된 이후 내면의 인간과 외면의 인간은 천국의 결혼 안으로 들어가는데, 이는 이미 말했다. 그것들이 그 전에 천국의 결혼 안으로 들어가지 않는 이유는 큰 비밀이다; 그 이유가 내면의 인간의 선은 외면의 인간의 선과 그 자체 결합하고, 이를 수단으로 그 안에 있는 진리와 결합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내면의 인간의 선은 그 안에 있는 진리에 애착함을 수단으로 외면의 인간의 선과 그 자체 결합한다, 그리고 또한 그 안에 있는 진리와 결합한다; 고로 직접적, 간접적으로 이다. 내면의 인간이 먼저 외면의 인간과 결합하기에, 이 결합이 결과되기 이전 내면의 인간은 마치 존재하지 않는 듯, 마치 죽은 듯하여 있기에, 말해지는 바, “하느님께서 내 불명예를 거두어 들이셨다”이다. 이런 상태가 하느님께서 거두어 들이신 불명예에 의해 의미되어진다, 즉 그분은 그녀를 불명예로부터 해방되게 하셨다 이다.
그러나 뒤이어지는 말에 의해: 즉 요셉이라 명명되게 한 말, “여호와께서는 나에게 또다른 아들을 더하소서”에 의해, 또다른 신비함들이 의미되어지는데, 이러하다: 요셉에 의해 주님의 영적 왕국, 고로 영적 인간이 표현되었다; 그 이유가 이 왕국이 모두 각각의 영적 인간 안에 있기 때문이다. 영적 인간을 구성하는 두 가지는 선행과 신앙; 같은 말로 선과 진리이다. 선행으로부터 신앙이, 선으로부터 진리가 있는데, 이것이 요셉에 의해 표현되어져 있다. 신앙 안에 선행이, 진리 안에 선이 있는 것이 “또다른 아들”에 의해 의미되었고, 이것이 창. 35:16-18에서 베냐민에 의해 표현된다. 고로 “요셉”은 천적 영적 인간이다; 그리고 “베냐민”은 영적 천적 인간이다. 이 둘 사이의 차이점은 선으로부터 진리가 있음과 진리 안에 선이 있음에 관해 앞에서 말해져왔던 것으로부터 알는지 모른다. 이것은 라헬의 다른 말: “여호와께서는 내게 또다른 아들을 더하소서”에 의해 의미되어져 있다. 그러나 이 신비함들은 신앙으로부터의 선 안에 있는 이들 외에는 보여질 수 없다; 그 이유가 이것들은 천국의 빛에 있는 그들의 내면에 관하여서 이기 때문이다. 이 빛 안에 총명 또한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들은 세상의 빛 만에 있는 이들에 의해서는 보여질 수 없다, 그 이유가 이 빛 안에는 총명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천국의 빛이 세상의 빛 안에 있는 한도에서만 가능할지 모른다. 그러나 천국의 빛 안에 있는 천사들에게는 이런 사항은 일상적인, 대단히 평범한, 매우 당연한 사항일 뿐이다.
위 살핀 바로부터 이 말들, “하느님께서 내 불명예를 거두어 들이셨다”와 “여호와께서는 나에게 또다른 아들을 더하소서”에 의해 최고 의미에서 신성의 영적 평면에서의 주님이; 그리고 내적 의미에서는 주님의 영적 왕국, 또는 이 왕국의 영적 평면인 신앙으로부터의 선이 의미됨을 알았을 것이다. 그러나 외적 의미에서 이 말들에 의해 구원, 또한 열매맺음과 번성함이 의미되는데, 이런 이유 때문이다. 주님의 영적 왕국, 이미 반복적으로 서술했던 그대로, 선행 안에 있는 이들과 선행에 의해 신앙 안에 있는 이들로 구성된다. 이것은 주님의 천적 왕국과 구별된다. 이 천적 왕국은 주님을 사랑함 안에 있는 이들과 이 사랑함에 의해 선행 안에 있는 이들로 구성된다. 이 천적 왕국이 세 번째 천국, 또는 가장 깊은 천국을 구성한다; 그러나 영적 왕국에 있는 이들은 두 번째 천국, 또는 내면의 천국을 구성한다.
위 라헬의 말에서, 처음 말에서는 “하느님”이, 그 다음 말에서는 “여호와”가 언급되었는데, 그 이유는 전자는 진리로부터 선으로의 승강을; 후자는 선으로부터 진리로의 하강에 관련되었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영적 인간은 신앙으로부터의 선 안에(즉 진리가 있음으로부터 선 안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영적 인간이기 이전의 경우, 그는 신앙으로부터의 진리 안에( 즉 선을 담고 있는 진리 안에) 있다; 주제가 진리일 경우, 단어 “하느님”이 사용되고; 주제가 선일 경우, 단어 “여호와”가 사용된다.
요셉에 의해 주님의 영적 왕국, 또는 영적 인간, 고로 신앙으로부터의 선이 표현된다는 것을 요셉이 언급되는 다른 구절로부터도 알게 된다. 이스라엘이 된 야곱의 예언이다:
요셉은 결실이 풍부한 자의 아들, 샘가의 결실이 풍부한 자의 아들, 담 위에서 행진하는 딸의 아들이다; 활쏘는 자가 그를 더 비참하게 할 것이고 그에게 쏠 것이고, 그를 미워할 것이다; 그러나 그는 자기 활의 강함 아래 머무를 것이다; 그의 손의 무기들은 야곱의 전능하신 분에 의해 강하게 만들어질 것이다; 거기로부터 목자가, 이스라엘의 돌이 있다; 네 아버지의 하느님에 의해, 그리고 그분이 너를 도울 것이다, 그리고 사다이와 더불어, 그리고 그분이 위로부터 하늘의 복됨으로, 아래 놓인 깊음의 복됨과 가슴의 복됨과 자궁의 복됨과 더불어, 너를 복되게 하실 것이다; 네 아버지의 축복은 영원히 지속되는 언덕들쪽으로 내 선조들의 축복을 능가할 것이다; 그것들이 요셉의 머리 위에, 그의 형제들로부터의 나지르인의 머리 위에 있을 것이다 (창. 49:22-26);
위 예언의 말들 안에 주님의 신성의 영적 평면의 묘사가 최고 의미에서 포함되고 있다; 그리고 내적 의미에서 그분의 영적 왕국이 포함되어 있다. 위 구절의 세세한 것은 그 장의 설명에서 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모세의 예언에서:
그가 요셉에게 말했다, 그의 토지가 여호와께로부터 복을 받을 지라, 즉 하늘의 귀중한 것, 이슬, 그리고 아래 뉘인 깊은 것; 그리고 태양의 열매들의 귀한 것, 그리고 달들(months)의 소출의 귀한 것; 그리고 동쪽의 산의 첫 열매, 그리고 영원히 지속되는 언덕들의 귀한 것; 그리고 땅의 귀한 것과 그로부터 충만한 것; 그리고 수풀에서 거주하는 자로부터의 선한 의지이다; 그것들이 요셉의 머리 위에 올 것이다, 그리고 자기 형제들의 나지르인의 머리의 관 위에 올 것이다
(신. 33:13-17).
이스라엘이 주님의 영적 교회를 표현했기에, 야곱, 그때 당시 이스라엘인 그가 자기가 죽기 전 요셉에게 말했다:
내가 이집트 안으로 오기 이전, 이집트의 토지에서 네게 태어난 두 아들들은 나의 것이다; 에브라임 과 므낫세는 르우벤과 시므온 같이 나의 것이다. 나를 모든 악으로부터 되찾은 천사가 소년들을 축복하여, 나의 이름이 그들 위에, 내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의 이름이 그들 위에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토지의 한가운데에서 다수로 성장하게 하라
(창. 48:5, 16).
영적 교회를 구성하는 두 가지 것이 있는데, 그것은 이해력과 의지력이다. 그 둘 중에서 이해력은 에브라임에 의해, 그리고 의지력은 므낫세에 의해 표현되어진다.이로부터 요셉의 두 아들들이 야곱, 그때 당시 이스라엘에 의해 양자로 채택되고, 그의 자신의 것으로 인정한 이유를 알 것이다. “에브라임” 역시 말씀에서, 특히 예언서에서 자주 언급되고, 거기서 그는 진리와 선의 지적 측면을 의미했고, 이것은 영적 교회에 속한다.
에스겔서에서:
여호와께서 말하셨다, 사람의 아들아, 네게로 막대기 하나를 가져오라, 그리고 그것 위에, 유다와 그의 동료 이스라엘의 아들들이라고 쓰거라; 그리고 또다른 막대기를 가져다가 그것 위에, 요셉, 에브라임의 막대기, 그리고 그의 동료 이스라엘의 가문이라고 쓰라; 그리고 그것들을 서로 합쳐라, 하여 네 손에서 하나가 될 것이다. 고로 주 여호비께서 말하셨다, 잘 보라, 나는 요셉의 막대기, 즉 에브라임과 그의 동료 이스라엘의 지파들의 손에 있는 것을 가져다가, 유다의 막대기와 더불어 놓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들을 하나의 막대기로 만들 것이다, 그리고 그것들은 내 손에서 하나일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들을 토지에서, 이스라엘의 산들에서 하나의 나라로 만들 것이다, 그리고 하나의 왕이 그들 모두를 통치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더 이상 두 나라가 아니다, 그리고 그들은 다시 두 왕국으로 나뉘는 일이 더 이상 있지 않을 것이다 (겔. 37:16, 17, 19, 22).
주님의 천적왕국과 영적 왕국이 위에서 취급되어진다. 천적 왕국은 “유다”이다; 영적 왕국은 “요셉”이다; 이 왕국들이 둘이 아닌 하나이다로 말해진다. 또한 이 왕국들은 주님이 세상에 오심으로 하나로도 만들어졌다.
영적 왕국에 관해 주님께서 요한복음서에서 말하신다:
그리고 나는 이 우리 안에 있지 않은 다른 양을 가지고 있다; 나는 그들 또한 데려와야만 한다, 그리고 그들은 내 음성을 들을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 하나의 양떼가, 그리고 하나의 목자가 있을 것이다 (요. 10:16).
이것이 “두 막대기, 즉 유다와 요셉의 막대기, 이것은 하나로 함께 연합될 것이다, 그리고 주님의 손에서 하나일 것이다”에 의해 의미되어져 있다. 천적인 것(천적 수준)이 세 번째 천국, 즉 가장 깊은 천국을 구성한다; 그러나 영적 수준은 두 번째 천국, 즉 내면의 천국을 구성한다; 그리고 그것들은 하나이다, 그 이유는 이것이 다른 것 안으로 (즉 천적인 것이 영적인 것 안으로) 흘러들기 때문이다. 고로 영적인 것은 천적인 것에 평면(plane)을 제공하는 셈이다. 이런 방식으로 이 둘은 굳게 상호적으로 건립하고 있다. 셋째, 또는 가장 깊은 천국에 있는 신성의 천적 수준은 주님을 사랑함이다; 천적 영적 수준에 선행이 있다. 이 선행은 영적 수준이 있는 곳, 즉 둘째, 또는 내면의 천국에서 최고의 것, 제 일 순위의 것이다. 이것은 유입의 본성이 무엇인지를 보여주고, 또한 유입을 수단으로 공동으로 설립함의 본성도 보여준다. “나무”는 주님을 사랑함으로부터의 선, 그리고 이웃을 향한 선행으로부터의 선 모두를 의미한다. 이런 이유로 유다와 요셉은 “나무 막대기 위에 쓰여질 것이다”, 이 둘은 “하나가 될 것이다”라고 말해진 것이다.
스가랴서에서:
나는 유다의 가문을 튼튼하게 할 것이다, 그리고 나는 요셉의 가문을 구원할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들로 거주하게 할 것이다, 그 이유는 내가 그들 위에 자비를 가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은 내가 마치 그들로부터 떠난 적이 없었던냥 있을 것이다; 그 이유가 나 여호와가 그들의 하느님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그들에게 대답할 것이다 (슥. 10:6);
위 구절도 주제는 두 왕국들, 천적 왕국과 영적 왕국이다 (천적 왕국은 “유다”이고 영적 왕국은 “요셉”이다). 그리고 영적 왕국의 구원도 주제이다.
아모스서에서:
고로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가문에게 말하셨다, 너희는 나를 찾으라, 그리고 너희는 살 것이다. 여호와를 찾으라, 그리고 너희는 살 것이다, 그분이 요셉의 가문 안에서 불 같이 돌발하지 않도록 하라, (돌발하면) 그것은 삼킬 것이고, 그것을 끌 수 있는 자는 없다. 악을 미워하고, 선을 사랑하라, 그리고 큰 문에서 공정을 설립하라; 여호와 하느님 체바욷께서 요셉의 남은 자들에게 은총을 내리실는지 모른다 (암. 5:4, 6, 15);
위 구절에서도 영적 왕국이 “요셉”에 의해 의미된다; “이스라엘의 가문”은 영적 교회이다; “요셉”은 이 교회의 선이다, 그리고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가문에게 말하시기를, 너희는 나를 찾으라, 그리고 너희는 살 것이니, 그분이 요셉의 가문 안에서 불 같이 돌발하지 않도록 하라”라고 말해진 것이다.
다윗서에서:
귀를 주소서, 오 이스라엘의 목자여, 당신은 요셉을 양떼 같이 인도하십니다; 거룹들 위에 앉으신 당신은 빛을 발하십니다. 에브라임, 그리고 베냐민, 그리고 므낫세 앞에서 당신의 능력을 휘저으십 니다, 그리고 오시어 우리를 구원하신다 (시. 80:1-3);
위 구절에서도 “요셉”은 영적 인간이다; “에브라임, 베냐민, 므낫세”는 이 교회의 세 구성 요소들이다.
다시:
소리 높혀 노래하고 소고를 쳐라, 현악기와 더불어서 하프를 즐거이 켜라; 새로운 달(moon)에서, 축제에서, 우리 절기의 날에 나팔을 불어라; 그 이유가 이것이 이스라엘에게 규례이기 때문, 야곱의 하느님의 판단이기 때문이다; 그분이 이집트의 토지에 맞서 가셨을 때, 그분은 그것을 증거를 위해 요셉에게 지시하셨다; 나는 내가 몰랐던 언어를 들었다 (시. 81:2-5);
위에서 “요셉”이 영적 교회이다, 또는 영적 인간이다는 것은 위 말과 표현의 각각으로부터 분명해진다; 그 이유가 말씀 안에 영적인 것을 표현하는 용어들, 또는 천적인 것을 표현하는 용어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은 말씀 두루에서 한결 같이 있다. 위 구절에서 영적인 것을 표현하는 단어는 “노래”, “현악기와 더불은 소고”, “새 달에, 우리의 절기에 있는 축제에서 나팔을 붐”이다. 이로부터 주제가 “요셉”인 영적 교회임이 분명해진다.
에스겔서에서:
고로 주 여호비께서 말하셨다, 이것은 너희가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들에 따라서, 토지를 상속 받을 경계이다; 경계선들(lines)이 요셉에게 있을 것이다 (겔. 47:13);
위 구절의 주제는 주님의 영적 왕국이다; 그러므로 “경계선들이 요셉에게 있을 것이다”라고
말해졌다. 주님의 신성의 영적 평면은 그분의 “왕권”이라 불리우는데, 그 이유는 주님의 왕권 측면은 그분의 신성한 진리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분의 “성직” 측면은 그분의 신성한 선이다. 주님의 왕권 자체는 요셉이 이집트에서 왕으로 만들어짐에서 요셉에 의해 표현되어졌다. 이 표현에 관하여는 그 장의 설명에서 알게 될 것이다.
주님의 신성한 영적 평면, 또는 신성한 진리, 이것이 최고 의미에서 요셉에 의해 표현되어진 것에 주목해보자. 신성한 진리는 주님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있는 것이다; 그 이유가 주님은 신성한 선밖에 더 아니시기 때문이다; 신성한 진리는 신성한 선으로부터 진행된다. 이를 비교적으로 말하면, 이것은 태양과 태양의 빛 같이 있다; 빛은 태양 안에 있지 않으나, 태양으로부터 진행된다; 이것은 불과도 비슷하다. 불의 빛은 불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불로부터 진행한다. 신성한 선 자체도 말씀에서 “태양”과 “불”에 비교된다. 마찬가지로 “태양”과 “불”이라 불리운다. 주님의 천적 왕국은 주님으로부터 진행하는 선으로부터 살아 있다; 그러나 그분의 영적 왕국은 신성한 선으로부터 파생하는 진리로부터 살아 있다; 그러므로 다른 삶에서 주님은 천적 평면에 태양으로 나타나신다; 그러나 영적 평면에는 달로서 나타나신다. 열과 빛 모두 태양으로부터 진행한다. 비교컨대, 열은 사랑의 선, 이 선은 천적, 영적인 열이라 불리운다; 빛, 이는 선으로부터 파생되는 진리인데 영적인 빛이라 불리운다. 다른 삶에서 태양으로서의 주님으로부터 진행하는 천적인 열과 영적인 빛 안에 사랑의 선과 신앙의 진리, 고로 지혜와 총명이 있다.; 그 이유가 주님으로부터 진행하는 모든 것은 살아 있기 때문이다.
이상 살핀 바로부터 우리는 신성의 영적 평면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 그리고 이로부터 영적 왕국이 온다는 것, 그리고 천적 왕국이 온다는 것도 알 수 있다; 그리고 영적 왕국이 신앙의 선, 즉 선행이다는 것, 이 선은 주님으로부터 직접 흐른다는 것, 또한 천적 왕국을 통하여 간접적으로도 흐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주님으로부터 진행하는 신성의 영적 평면이 말씀에서 “진리의 영”이라 불리우고, 거룩한 진리이다; 이는 어떤 영으로부터 있지 않고 그분에 의해 보내진 영을 통하여 주님으로부터만 있다; 이는 요한복음서에서 주님 자신의 말씀으로부터 알게 된다:
그분, 진리의 영이 오실 때, 그분이 너희를 모든 진리 안으로 안내할 것이다; 그 이유가 그분은 자신으로부터 말하시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분이 무엇을 듣든지 그것을 그분은 말하실 것이다; 그리고 그분은 장차 있을 것을 너희에게 선포하실 것이다. 그분이 나를 영광되게 할 것이다; 그 이유는 그분이 나로부터 가져갈 것이고, 그것을 너희에게 선포하실 것이다
(요. 16:13, 14).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25, 26절. 라헬이 요셉을 낳은 뒤였다, 야곱은 라반에게 말했다, 저를 떠나 가게 해주십시오, 그리고 나는 내 장소로, 내 토지에로 갈 것입니다, 26 저에게 제가 당신에게 봉사해서 얻은 내 여성들, 그리고 내 자녀들을 주십시요, 그리고 나는 가겠습니다. 당신께서는 제가 당신을 어떻게 섬겨왔는지 아실 것입니다.

라헬이 요셉을 낳은 뒤였다. 이는 요셉으로 표현된 영적인 것을 인정함을 의미한다. 이는 “낳다”의 의미가 인정함이다로부터; 라헬의 표현이 내면의 진리에 애착함이다로부터; 그리고 요셉의 표현이 영적 왕국, 고로 영적 인간이다로부터, 그리고 결과적으로 주님의 영적 평면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 이유가 주님으로부터 있는 영적 평면이 영적 인간을 만들고, 또한 영적 왕국도 만들기 때문이다. 하녀들과 레아에 의한 야곱의 아들들에 관련된 것에서 일반적 진리들을 받아들임과 인정함이 취급되었고, 마지막으로 내면의 인간과 그것들의 결합, 고로 그가 영적 인간으로 만들어질 때까지 조차의 인간의 거듭남이 취급되었다; 즉 “요셉”이 영적 인간이다. 그리하여 지금 즉각적으로 뒤이어지는 것은 선의 열매맺음과 진리의 번성함인데, 이것이 야곱이 라반의 양떼를 수단으로 자신을 위해 획득하는 “양떼”에 의해 의미되고 있다. 그 이유가 내면의 인간과 외적 인간의 결합, 또는 영적 인간과 자연적 인간의 결합 이후, 선의 열매맺음과 진리의 번성함이 거행되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이 결합이 인간 안에서 있는 천국의 결혼이기 때문이고, 이 결혼으로부터 선의 열매맺음과 진리가 번성함이 태어나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역시 외적 의미에서의 “요셉”에 의해 선의 열매맺음과 진리의 번성함이 의미된다.

야곱이 라반에게 말했다. 이는 자연적 진리의 선이 신성한 근원으로부터 있는 2차적인 선쪽으로를 의미하는데, 이 2차적인 선(방계적인 선, collateral good)을 수단으로 내면들의 결합이 있다를 의미한다. 이는 야곱의 표현이 자연적인 진리이다로부터; 그리고 라반의 표현이 신성한 근원으로부터의 방계의 선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내면들의 결합이 이 선을 통하여 결과된다는 것은 앞에서도 반복적으로 설명해왔다. 이 선이 “라반의 양떼”에 의해 의미되고, 이 선을 통하여 야곱은 자신을 위해 그의 자신의 양떼를 확보한다 (이에 관하여는 뒤이어진다).

나를 떠나가게 하소서, 그리고 저는 내 장소, 내 토지에로 갈 것입니다. 이는 그때 당시 합리성 속의 신성과 결합하는 상태를 자연적 진리가 갈망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이 말을 말하는 야곱이 자연적 진리의 선을 표현함으로부터; “장소”의 의미가 상태이다로부터; 그리고 “토지”의 의미가 합리성 속의 신성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 이유가 “내 토지”에 의해 자기가 보내지기를, 가기를 바랬던 것에서 자기 아버지 이삭과 자기 어머니 리브가가 뜻해지기 때문이다. 결합을 갈망함이 의미되는 것은 단어들 안에 포함된 애착으로부터 분명해진다.

저에게 내 여성들을 주십시오. 이는 자연 평면에 속하여 있는 자연적 진리에 애착함들을 의미한다. “내 자녀”란 그로부터 파생된 진리도 마찬가지로 소속되었음을 의미한다. 이는 “여성들”, 또는 “여인들”이 진리에 애착함들이다로부터; 그의 “여인 레아”는 외적 진리에 애착함을; 그리고 “라헬”은 내면의 진리에 애착함이다; 그리고 “자녀들”의 의미가 파생되는 진리들이다로부터; 그 이유가 “아들들”이 진리들을 의미하기 때문; 고로 여성들로부터 태어난 “자녀들”에 의해서는 파생된 진리들이 의미되기 때문이다. 하인들에게 주어진 여성, 이 여성으로부터 태어난 자녀는 이 하인이 섬긴 주인의 것이어야 한다는 것은 고대인들의 규례였다; 이는 모세의 책에서 읽을 수 있다.
만일 네가 히브리인의 하인을 산다면, 6년을 그가 섬길 것이다, 그리고 7년째에서 그는 댓가를 치루지 않고 떠날 것이다. 만일 그의 주인이 그에게 여인을 주고, 그녀가 그에게 아들들이나 딸들을 낳는다면, 여인과 그녀의 자녀들은 그녀의 주인의 것이다, 그리고 그는 그의 신체와 더불어 나갈 것이다 (출. 21:2, 4).
이것은 고대 교회에서의 규례이었고, 이것을 라반도 알고 있었기에, 야곱은 자신을 위해 여성들과 야곱의 자녀들을 달라고 주장했던 것이다. 이는 아래 구절에서도 알게 된다.
라반이 야곱에게 말했다, 딸들은 나의 딸들이다, 그리고 아들들은 나의 아들들이다, 그리고 양떼는 나의 양떼이다, 그리고 네가 보는 모든 것, 그것은 나의 것이다 (창. 31:43);
그리고 야곱이 이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라반에게 “나에게 내 여성들과 내 자녀들을 주십시오” 라고 말한 것이다. 그러나 앞의 인용 구절에서 모세에 의한 규례는 외적 또는 자연적 인간의 선들과 진리들을 획득한 내적, 합리적 인간의 권리를 표현했다; 그 이유가 하인(남자 하인)은 진짜 진리들이 은근히 심어지기 이전, 시작에서 있는 자연 평면의 진리를 표현했기 때문이다. 엄밀히 보면 시작 때에서 획득한 진리는 진리가 아니고, 진리처럼 나타날 뿐이다, 그럼에도 이미 말했던 그대로 진짜 진리들과 선들을 이끌어들이는 수단이 되어 섬김 역할을 톡톡히 담당해준다; 그러므로 선들과 진리들이 자연 평면의 진리를 수단으로, 또는 그것의 섬김에 의해 은근히 심어졌을 때, 이 수단들은 떠나게 하고, 획득한 진짜 선들과 진리들만이 존속된다. 이런 사항이 표현되기 위하여 하인들에 관한 법이 교부된 것이다.
그러나 야곱만에 국한해 주목하면, 그는 라반이 사들인 하인이 아니고, 오히려 라반보다 더 (등격이 높게) 구별되는 가문으로부터 였다. 그는 자신이 품팔아서 라반의 딸들을, 고로 그녀들로부터 출생한 자녀들을 샀다; 그 이유가 이런 것들은 그가 봉급으로 받은 것들이라는 말이다. 고로 그들 전부에 관한 라반의 생각은 진리와 일치하는 것이 아니다. 더욱이, “히브리 종”은 진짜 선들과 진리들을 이끌어들임을 위해 섬기는 진리를, 그의 “여인”은 자연적 선에 애착함을 의미했다. 이것 역시 야곱에게는 해당 사항이 아니다. 야곱에 의해서는 자연적 진리로부터의 선을, 그의 “여성들”에 의해서는 진리에 애착함이 표현되었다. 위 인용 구절에서 “주인”에 의해 합리성이 표현되었는데, 이 본문에서 “주인”인 듯 행세하는 라반에 의해서는 합리성을 표현하지 않고 방계적인 선을 표현할 뿐이다; 이것은 진짜 선(순수한 선)이 아니고, 진짜처럼 나타날 뿐이다, 그리고 실상 야곱이 표현하는 진리들을 이끌어들이는 섬김을 할 뿐이다
한 단계 더 진보된 이런 사항들이 누구인가 자신의 납득력에 와닿게 할 자는 극히 적다; 그 이유는 자연 평면의 진리와 선이 무엇인지를, 그리고 그것들은 합리성의 진리와 선으로부터 구별된다는 것을 아는 자 역시 매우 적기 때문에서 이다. 더욱이 선들과 진리들이 진짜가 아니고, 진짜인 듯 나타나면서 진짜 선들과 진리들을 이끌어들임에서 섬김 역할을 한다는 것, 특히 거듭남의 시작에서 그러하다는 것을 아는 자는 더 더욱 적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사항들이 이 구절의 말들의 내적 의미 안에, 그리고 뒤이어지는 라반의 양떼, 그리고 그 양떼로부터 야곱이 자신을 위해 양떼를 확보하는 구절의 내적 의미 안에 포함되어 있기에, 우리는 이런 사항들을 지나쳐 갈 수 없다. 지나쳐 가서는 안되는 이유는 이런 사항들을 납득하는 약간의 사람들 때문이다. 이들은 이런 사항들을 알기를 바라는 이들이고, 영적 선과 진리에 애착함 안에 있는 이들인데, 이들은 이런 사항들에 주목하기에 계발되어진다.

제가 당신에게 봉사해서 얻은… 이는 그분 자신의 힘으로부터를 의미한다. 이는 “봉사함, 섬김”이 노동함, 애씀을 의미한다로부터, 그리고 봉사함이 주님을 서술할 경우, 그분 자신의 힘으로부터를 의미한다; 그 이유가 그분 자신의 힘으로부터 주님께서는 신성한 선들과 신성한 진리들을 획득하시어 그분의 인간을 신성으로 만드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가겠습니다. 이는 신성한 합리성과 결합함을 의미한다. 이는 “가다”의 의미로부터 분명해진다; 즉 그의 장소, 그의 토지로 감이 “가다”에 함축되어 있다; 이를 수단으로 합리성 속의 신성과 결합하기를 갈망함이 의미된다.

당신은 제가 당신을 어떻게 섬겨 왔는지 알 것입니다. 이는 그분 자신의 권능으로 땀흘려 일하고 애씀을 의미한다. 이는 앞에서 살핀 바 있어 설명은 생략한다; 이외 더 포함된 것은 앞에서 살핀 것을 참조하면 될 것이다, 그리고 이어지는 구절에도 있다.

27-30절. 그리고 라반이 그에게 말했다, 바라건대 만일 내가 네 눈에서 은총을 발견해 왔었다면 나는 그것을 시험했었다, 그리고 여호와께서 너 때문에 나에게 복을 주셔 왔다. 28 그리고 그는 말했다, 네 보상을 나에게 나타내 보여라, 그리고 나는 그것을 줄 것이다. 29 그리고 그는 그에게 말했다, 당신은 제가 당신을 어떻게 섬겼는지 압니다, 그리고 어떻게 당신의 물질이 나와 더불어 있어 왔는지도 압니다. 30 당신이 제 앞에서 가졌던 것은 매우 적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돌발적으로 다수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여호와께서는 제 발에서 당신에게 복을 내리셨습니다. 그리고 지금 나는 제 자신의 집을 위하여 무엇을 해야 하리이까?

그리고 라반이 그에게 말했다. 이는 “라반”에 의해 의미된 선으로부터 지각함을 의미한다. 이는 “말하다”의 의미가 지각함이다로부터; 그리고 라반의 의미가 신성으로부터의 방계적인 선이다로부터 알려진다. 이 선으로부터 지각함이 이 말, 즉 “라반이 그에게 말했다”에 의해 의미된 이유는 말씀 안에서의 인물들은 그 인물 자체가 아닌 실제의 것들을 의미하기 때문에서 이다; 최고 의미에서 주님 안에 있는 신성한 것들; 그리고 내적 의미에서 인간 안에 있는 신성한 것들이 취급된다는 말이다; 고로 두 인물들이 아닌, 한 개인 안에 있는 두 개의 것들이다.

바라건대 만일 내가 네 눈에서 은총을 발견해 왔었다면. 이는 강하게 끄덕임을 의미한다. 이는 누군가의 “눈에서 은총을 발견했다”의 의미가 강하게 끄떡임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강하게 끄떡임은 그것이 현존하기를 바랄 때, “라반”에 의해 의미된 선이라고 단정된다. 자신 안에 있는 선과 진리에 애착함 위에서 곰곰이 되새겨 생각하는 자, 그렇게 할 수 있는 자, 그리고 그것들의 정신적 기쁨(delight)과 육체적 기쁨(pleasure)에서도 곰곰이 되새길 수 있는 자는 이쪽이 다른쪽에 우선하여 더 좋아한다는 강한 끄덕임을 알아채게 할 것이나, 곰곰이 되새겨 봄이 없는 자는 강한 끄덕임 비슷한 것도 나타나지 않는다.

나는 그것을 시험했었다, 그리고 여호와께서 너를 위해 나에게 복을 주셔 왔다. 이는 축복 하심이 자연 평면의 선을 위하여 신성으로부터 있었고, 섬김도 자연 평면의 선쪽으로 있도록 되어졌다를 의미한다. 이는 “여호와께서 복을 주시는지를 시험했다”의 의미가 어떤 것이 신성으로부터 이었는지를 아는 것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것이 자연 평면의 선을 위하여 이다는 것, 그쪽으로 섬김도 있었다는 것이 “너를 위하여”에 의해 의미되어져 있다; 그 이유가 “야곱”은 자연적 진리로부터의 선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라반”은 섬기는 방계적인 선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말했다, 나에게 네 보상을 나타내 보여라, 그리고 나는 그것을 줄 것이다. 이는 단독으로 바랬던 것을 줄 것임을 의미한다. 이는 설명이 필요 없이 분명해진다. 지금까지 말해왔던 것이 분명한 방식으로 이해력에 밝혀질 수 없는 이유는 우리의 지성(마음, mind)이 라반과 야곱으로 전개되는 역사적 시리즈에 대한 생각으로부터 내적 의미에서 취급되는 영적인 것들쪽으로 단번에 바뀌어질 수 없기 때문 (그 이유가 역사적 의미가 언제나 생각에 달라붙어 생각을 꽉 채우고 있다, 그렇지만 역사물이 아닌 것이 시리즈와 구절과 구절의 연결에서 납득하기 위하여서는 역사적 시리즈에 달라붙으려 하는 우리의 생각이 존재하지 않게 노력해야 하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라반과 야곱 둘 다에 의해 표현된 선에 대해 명료한 관념을 가지는 것이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반드시 기억하고 있어야 하는 것은, 라반에 의해 표현된 선은 진짜 선들과 진리들을 이끌어 들임에서만 유용한 섬김을 하는 속성을 가졌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유용한 섬김이 끝나면, 그 선은 뒤에 남겨두고 떠나야 한다는 것이다. 라반에 의한 선의 품질은 이미 상술한 바 있다. 좀 더 설명하면, 이 선은 마치 무르익지 않은 과일 안에 있는 미숙한 것, 그러나 이 미숙한 것을 수단으로 상큼한 쥬스가 이끌어들여 진다는 것에 비교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용도를 섬긴 이후, 그것은 흡수당해지고, 과일은 다른 소질(fiber)을 수단으로 무르익는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진짜 쥬스의 것들에 의해 무르익는다.
인간은 유아기와 어린 아이 시기에 많은 것들을 단지 사용할 목적으로 배운다, 그러나 그가 배운 그것들은 더 유용한 것들을 배우는 수단(섬김) 역할을 한다; 그리고 이 단계는 계속적으로 이어져 가고, 마지막, 그는 영원한 생명(삶)에 관한 것들을 배운다; 그리고 그가 이것들을 배울 때, 이전에 배웠던 것들은 거의 삭제당해진다. 마찬 가지 방식에서 인간이 주님에 의해 새로이 출생할 때, 그는 진짜 선과 진리에 애착함이 아닌 다양한 선과 진리에 애착함에 의해 인도되어진다, 그러나 이 다양한 진짜이지는 않으나 그때 당시 진짜 같이 여겨지는 선과 진리는 진짜 선과 진리를 우리로 납득 가능하게 하여, 끝내 우리로 하여금 진짜 선들과 진리들을 흡수하게 한다; 이것이 완료되었을 때, 이전의 애착들은 잊혀지거나 뒤쪽에 남아 있는다. 그 이유는 이것들은 단지 수단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이것이 “라반”에 의해 의미된 방계의 선과 “야곱”에 의해 의미된 진리로부터의 선의 관계에서, 뿐만 아니라, 이후 뒤이어지는 라반의 양떼와 야곱의 양떼의 관계에서도 동일하다.
이것들이 이 구절과 뒤이어지는 구절에 포함된 신비함들이다. 그러나 이런 사항들은 말씀 안에서 역사적 형체를 빌려 전달되는데, 그 이유는 말씀이 누구에게서 이든, 즉 아이들이든, 어른이든, 학력이 높든, 낮든 등등의 사람들에게서 각자 나름대로 기쁨을 가지고 읽혀지기 위하여서 이고, 읽혀지는 목적은 역사적 의미로부터 거룩한 기쁨 안에 있고, 그들과 동행하는 천사들은 내적 의미에서 기쁨을 가지는 것이다. 그 이유가 내적 의미는 천사의 총명에 적합하고, 외적 의미는 인간에게 잘 적응되기 때문이다. 이 수단으로 해서 천사와 인간의 제휴함이 있다. 그러나 인간은 이 제휴됨을 전혀 알지 못한다. 단지 거룩한 느낌에 동반되는 것으로부터 있는 어떤 종류의 기쁨만을 지각할 뿐이다.

그리고 그는 그에게 말했다, 당신은 제가 당신을 어떻게 섬겨 왔는지 압니다. 이는 2차적인 선은 진리의 선에 관한 마음과 능력을 알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이는 내적 의미에서 있는 시리즈에 속한 것으로부터 알게 된다. 누군가의 품질을 안다는 것은 그의 마음을 아는 것임이 분명하다. 누군가가 자기를 섬기는 것으로부터 그의 품질을 아는 것, 또는 “어떻게 내가 섬겼는지”에서 그의 품질을 아는 것은 그의 능력을 아는 것이다는 것은 여기서 “섬김, serving”이 누군가의 능력을 의미한다로부터 보여질는지 모른다; 그 이유가 야곱에 의해 능력을 가지는 것인, 진리로부터의 선 측면에서 주님의 신성한 자연 평면이 표현되었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어떻게 당신의 물질(가축들)이 있었는지가 뒤따르는데, 이 말에는 이것 또한 신성으로부터 이었다가 의미된다.

당신이 내 앞에서 소유했던 것은 매우 적었습니다. 이는 2차적인(방계의) 선은 그것이 결합되어지지 않으면, 그것은 메마른(무익한, barren) 상태였음을 의미한다. 이는 내적 의미에서 있는 시리즈로부터 보여진다. 그 이유가 라반에 의해 표현된 선의 품질, 그것이 “야곱”인 진리의 선과 결합이 있기 전, 아주 적은 유용함만을 가져었던 것으로 묘사되는 바, 이는 메마른 상태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경우가 어떠한지는 이어지는 구절에서 나타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돌발적으로 다수가 되었습니다. 이는 그 이후 열매맺었음을 의미한다. 이것은 결합 이후 열매맺음이 있었다는 것이 “돌발적으로 다수가 되었다”에서 의미되고 있다.

그리고 여호와께서는 내 발에서 당신에게 복을 내리셨습니다. 이는 자연 평면이 소유했던 것은 신성으로부터 이었다를 의미한다. 이는 “여호와께서 복을 내리심”의 의미가 선을 수여함이다로부터; 그리고 이것이 결합이다는 것; 고로 “여호와께서 복을 내리심”은 결합을 통하여 신성한 선이 수여됨을 의미한다; 여기서의 경우, 야곱에 의해 표현되는 자연 평면의 선을 수여하심이다. “발”에 의해 자연 평면이 의미된다. “발”이 자연인 것은 이미 말했다, 그리고 같은 의미가 이 장의 끝에 있는 인간에 있는 모든 것과 더불은 웅대한 사람과의 상응으로부터도 나타날 것이다. 이로부터 분명한 바, “여호와께서 내 발에서 당신에게 복을 내리셨다”에 의해 자연 평면이 소유한 것은 신성으로부터 이었다가 의미된다.
이 말들, 그리고 이 말들 앞쪽에 있는 말들 안쪽에 감추인 신비함은 알려졌다 해도 극히 적은 자에게 알려졌기에 밝히려는 것이다. 인간 안에 있는 선들, 뿐만 아니라 교회 안에, 또한 교회 밖에 있는 선들은 다양하다, 또한 너무나 다양해서 이 사람의 선과 저 사람의 선이 정밀하게 같을 수 있는 경우가 거의 없다. 이렇게 선의 다양함은 선 때문이 아니라 선과 결합되는 진리로 인해서이다; 그 이유가 모든 선은 그 선의 품질을 진리들로부터 가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진리들은 그것의 본질을 선으로부터 가진다. 또한 다양함들은 각자의 사랑으로부터의 애착으로부터 세상 밖으로 출시된다(공표된다); 이것은 인간의 삶(생활)에 의해 당사자 안에 깊이 뿌리박고 그 인간에게 잘 어울려 있다. 교회 내에 있는 사람들에서 조차 진짜 진리들을 지닌 자는 거의 없고, 교회 밖의 경우에서는 더 더욱 적다.; 다시 말해 진짜 진리에 애착함 안에 있는 인간은 매우 드물다는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활의 선 안에 있는 이들, 즉 주님을 사랑함과 이웃을 향해 선행 안에 있는 이들은 구원된다. 이들이 구원되어질 수 있는 이유는 주님의 신성이 하느님을 사랑함으로부터의 선 안에, 그리고 이웃을 향한 선행 안에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신성이 안쪽에 자리잡고 있는 모든 것들은 질서적으로 배열되고 있어, 그것들은 천국들 안에 있는 진짜 선과 진짜 진리와 결합될 수 있다. 이것이 이런 경우이다는 것은 천국을 구성하는 사회들로부터 분명해진다. 이 사회는 셀 수 없이 많고, 그 사회는 일반적, 특수적, 개별적으로 모두가 선과 진리에 관하여 다양하다, 그럼에도 모두는 하나의 천국을 만들어 낸다; 마치 신체의 기관이나 사지들이 비록 다른 환경과 거리에 위치함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인간을 만들고 있는 것과 같다. 그 이유가 많은 것들로부터 만들어진 하나는 정밀하게 똑같은 모형의 단위들로 구성되는 것이 결코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화를 이루는 다양함이 결합되었다고 말해볼 수 있다; 이런 경우는 영계에서 선들과 진리들에서도 마찬가지 이다. 그것들은 셀 수 없이 다양하여 정밀하게 꼭 같은 것은 하나도 없다. 그럼에도 사랑과 선행을 통하여 신성으로부터 하나를 만든다. 그 이유가 사랑과 선행은 영적인 결합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의 다양함은 천국의 하모니(harmony)이다, 이렇게 하모니를 만들므로 그것들은 신성 안에서, 즉 주님 안에서 하나이다.
더욱이 하느님을 사랑함으로부터의 선과 이웃을 향한 선행으로부터의 선은 진리측면에서, 그리고 진리에 애착함에서 제아무리 다양하다 해도, 진짜 진리와 선을 받아들일 수 있다. 그 이유가 이 선은 말하자면 딱딱하거나 반항적이지 않고, 부드럽고 잘 구부려지는 바, 주님의 인도하심에 자신을 쉽게 내어주기 때문이다. 이와 완전 반대의 경우는 자기 사랑함과 세상을 사랑함 안에 있는 이들의 경우이다. 이들은 주님쪽으로, 주님에 의해 구부려지지도 않고 주님의 인도하심에 자신을 내어주지도 않는다, 오히려 강경하게 저항한다, 그 이유는 그들은 자신을 스스로 인도하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게다가 거짓 원리로 자신을 굳힌 이들의 경우는 더 더욱 재론의 여지가 없다. 그들이 이런 특성 속에 있는 한 그들은 신성의 입장을 허용하지 않는다.
이상 살핀 바로부터 야곱이 라반에게 한 말에 의해 의미된 것이 분명해졌을 것이다; 그 이유가 “라반”에 의해 진짜이지 않은 선이 의미되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는 진짜 진리가 그것 안에 심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비록 진짜이지는 않다 해도 같은 속성 속에 있기에 진짜와 결합될 수 있고 신성이 그것 안에 있을 수 있다. 이런 선은 어린 아이나 교회 내에서 진리는 적게 알지만 선 안에 있는 단순 순박한 이들, 또는 자기들의 하느님들을 거룩하게 예배하는 직바른 이방인들 사이에 늘 존재한다. 이런 선을 수단으로 진짜 진리들과 선들이 도입되어질 수 있다. 이에 관하여는 이미 살핀 바 있다 (3690, 2598-2603항).

그리고 지금 나는 내 자신의 집을 위하여 무엇을 해야 하리이까? 이는 지금 그것 자신의 선은 거기로부터 열매를 만들 것임을 의미한다. 이는 “집”의 의미가 선이다로부터; 그리고 여기서는 “나의 집”인 바, 야곱에 의해 의미되는 선이다. “이 집을 위하여 행동하는” 것은 거기로부터 선이 열매 있게 만들어짐을 의미하는데, 이는 주제가 선을 열매맺음과 진리가 번성함인 것으로부터 분명해진다; 그 이유가 마지막 출생인 “요셉”에 의해 이 열매맺음이 의미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라반의 양떼를 수단으로 자신을 위해 야곱이 획득한 “양떼”에 관한 것이 지금 이어지는 바, 이 의미가 거기에도 묘사되어져 있다. 외적 인간과 내적 인간의 결합이 결과될 때까지 선이 열매를 맺음이 없고 진리가 번성하지도 않는다는 것은 다른 이에게 선을 뜻하는 것, 그래서 선을 생각하는 것이 내면의 인간으로부터 있다는 것; 그러나 선을 행하는 것, 그것을 수단으로 선을 가르치는 것은 외적 인간으로부터 있다는 사실로부터 알는지 모른다. 선을 행함이 선을 뜻함과 결합되지 않으면, 그리고 선을 가르침이 선을 생각함과 결합되지 않으면, 인간 안에 선이 없다; 그 이유가 악한 자가 악을 뜻하면서 선을 행할 수 있기 때문, 또한 악을 생각하면서 선을 가르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위선자나 모독적인 인물들도 웬만한 타인들보다 자신을 더 잘 위장해서 빛의 천사로 버젖이 거리에서 교회 안에서 제나름대로는 거룩한 듯 행세하나, 그들 내부는 악한 생각으로 차있다. 이런 경우를 들추어보아도 선을 행함이 선을 뜻함과, 그리고 선을 가르침이 선을 생각함과 결합되지 않으면 누구에게서도 선은 열매맺지 못한다는 것이다; 즉 외적 인간이 내적 인간과 결합되어야 선의 열매는 맺어진다.

31-33절. 그리고 그는 말했다, 내가 너에게 무엇을 주어야 할까? 그리고 야곱이 말했다, 당신은 저에게 어떤 것을 주지 않아도 됩니다. 만일 당신이 저를 위하여 이 말을 행하시면, 나는 양떼들에게 되돌아 가서, 그리고 먹이고 관리할 것입니다. 32 오늘 저는 당신의 모든 양떼들을 두루 통과하여 갈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로부터 얼룩지고 반점 있는 모든 작은 가축, 그리고 어린 양들 중에서 검은 것 모두, 그리고 염소들 중 얼룩지고 반점 있는 것들은 옮겨 놓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들이 나의 보상일 것입니다. 33 그리고 제 정의가 이튿날 나를 위한 답일 것입니다, 그 이유는 당신이 제 앞에 저의 보상을 오게 하리라 하셨기 때문입니다. 얼룩지지 않거나 반점이 없는 염소들, 어린 양들 중에서 검지 않은 것은 훔친 것으로 여기십시오.

그리고 그는 말했다, 내가 너에게 무엇을 줄까? 이는 지식을 의미한다. 이는 그가 자기 보상, 또는 삯으로 무엇을 얼마나 원하는지를 알기 위하여 있는 간청과 문의임에서 알는지 모른다. 그리고 야곱이 말했다. 이것이 응답함인 것은 설명이 필요 없다.

만일 당신이 저를 위하여 이 말을 하신다면 저에게 어떤 것을 주지 않아도 됩니다. 이는 진리로부터 있는 선의 쪽에서 가져와져야 할 것임을 의미한다. 이는 “어떤 것을 주지 않는 것”의 의미가 라반에 의해 표현된 선을 수단으로 가져오지 않는 것; 그러나 야곱에 의해 표현된 선, 즉 진리로부터의 선을 수단으로 함으로부터 가져와져야 할 것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가져와져야 하는 것은 아래에서 이어져 서술되고 있다.

나는 양떼에게로 돌아가서, 그리고 먹이고 관리할 것입니다. 이는 라반에 의해 표현된 선은 쓸모 있게, 즉 앞에서 살핀 것 같이, 진짜 선들과 진리들을 이끌어 들이는 데에 응용되어야 함을 의미한다. 이는 “양떼”, 여기서는 라반의 양떼의 의미가 라반에 의해 표현된 선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되돌아가서 먹이고 관리한다”는 것은 이 선을 쓸모 있게 응용한다는 것인데, 이어지는 대목으로부터 분명해진다; 그 이유가 야곱은 라반의 양떼를 수단으로 그의 자신의 것을 획득했는 바, 라반의 양떼는 야곱에게 쓸모 있는 수단이 되었기 때문이다.

저는 오늘 모든 당신의 양떼를 통과하여 갈 것입니다. 이는 그분께서 모든 선의 품질을 지각하심을 의미한다. 이는 “양떼”의 의미가 선이다로부터 분명해진다; 그리고 “그것 모두를 통과하여 감”이 그것의 품질을 알고 지각하는 것이다로부터 파악된다.

거기에서 얼룩지거나 반점이 있는 모든 작은 가축을 옮긴다. 이는 그분의 것인 모든 선은 악(얼룩짐)과 거짓(반점)이 섞여있는 데에서 분리되어질 것임을 의미한다. 이는 “옮김”의 의미가 분리하는 것이다로부터; 그리고 “양떼”(여기서는 염소나 어린 양 중의 하나이다)의 의미가 선들과 진리들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 구절과 이 장에서 이어지는 구절들 안에 신비함들이 있지만, 누군가가 생각하기를, 신성한 말씀일진대, 왜 이런 하찮은 언급이 섞여 있는가 하고 의아해 하는 이 구절 같은 경우에서 오히려 글자 안쪽에 더 많이 포함되는 경우도 있다는 점에 우리는 유의할 필요가 있다; 즉 야곱이 자기 보상, 또는 삯을 위해 염소들 사이에서 얼룩지거나 반점 있는 것, 어린 양들 중에서 검은 것을 요구한 것; 그 다음 그는 라반의 양떼들이 흥분할 때 그것들 앞에 흰색이 나오게 껍질을 벗긴 개암나무와 플라타너스 나무 막대기를 물통에 놓았다는 것; 어린 양들의 경우, 그는 양떼의 얼굴이 라반의 양떼 중에 잡색이고 검은 것을 향하게 놓았다는 것; 고로 그는 부자가 되었다는 것, 이는 선한 쪽에서의 기교가 아닌 악한 기교로 부자가 되었다는 것 등에 신비함들이 있다는 말이다. 얼핏 읽어가지고는 이런 대목에서 신성한 어떤 것이 조금도 나타나지 않을 수 있다. 이에 반해 말씀 속의 모든 것, 소수점 하나에 이르기까지 일반적, 특수적 모든 측면에서 신성하다는 것에 아마도 모든 이가 동의한다. 더욱이 구원을 위해 사소로운 수준에 머물고 있는 구절은 하나도 없다는 점도 모든 이가 알 것으로 추측한다. 여하튼 신성인 말씀은 구원함과 영원한 생명에 이바지하지 않는 대목은 하나도 없다.
이 구절, 이외 다른 구절에서도 모든 이는 어떤 신비함이 말씀 안쪽에 포함되었다고 결말짓는다, 그리고 세부 사항들로부터의 각각은 현 구절 같이 어떤 특성을 지녔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안쪽에서는 더 많은 신성한 것들을 산출하고 있다고 결말을 본다. 하지만 그것들이 안쪽에서 산출하는 것은 내적 의미로부터가 아니면 누구에게도 나타나는 것은 가능할 수 없다; 즉, 인간이 이런 사항들을 역사적, 자연적 의미에서 읽는 동안, 영적 의미 안에 있는 천사들에 의해서는 어떻게 지각되는지를 아는 것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그 이유가 이 두 의미들은 비록 가까웁게 결합되어 있지만, 동시에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지가 이미 설명해온 많은 세부 사항들로부터, 그리고 나머지 모든 구절로부터도 실감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 구절과 이 장의 이어지는 구절에 포함된 신비 자체는 지금까지 라반과 야곱에 관해 설명한 것, 즉 “라반”은 진짜 선들과 진리들을 이끌어들이는데 이바지하는 선이다는 것으로부터; 그리고 “야곱”은 진리로부터의 선이다는 것으로부터도 어느 정도 알려졌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아주 적은 인물들만이 영적 선에 상응하는 자연적 선이 무엇인지를; 그리고 영적 선이 무엇인지를, 그리고 두 선 사이에 상응이 있어야만 함을 알고 있다. 그리고 선이라고 나타나는 어떤 종류의 선이 진짜 선들과 진리들을 이끌어들이는 수단이다는 것을 아는 자도 매우 드물다. 이런 것을 취급하는 신비함들은 납득력에 쉽게 설명되어질 수 없다, 그 이유는 그것들은 이해력의 그늘 아래로 추락되기 때문, 다시 말해 제아무리 주제를 선명하게 설명해도 마치 내 나라 언어가 아닌 외국어로 말하는 것을 듣는 격이어서 듣는 자가 이해하지 못한다는 말이다. 그럼에도 이 신비함은 설명되어야 한다, 그 이유는 내적 의미에 저장된 것이 지금 열려지기 때문이다.
최고 의미에서 여기서 취급된 주제는 주님이시다, 즉 그분이 어떻게 그분의 자연 평면을 신성으로 만드셨는지 이다; 그리고 표현적 의미에서 인간에 있는 자연 평면이다, 즉 주님께서 인간의 자연 평면을 어떻게 거듭나게 하시는지 이다, 그리고 인간의 자연 평면이 인간 안쪽과 상응하게 어떻게 변형되는지 이다; 즉 육체의 죽음 이후 살게 되는 그 인간, 그때에는 영이라 불리우는 그 인간, 영이 육체로부터 떼어놓일 때, 이 영은 뼈와 살 외의 바깥쪽의 인간에 속하는 모두를 가져간다. 내적 인간과 외적 인간의 상응함이 시간의 세계 안에서, 또는 육체의 삶에서 결과되지 않았으면, 이 상응함은 영영 결과되지 않는다. 거듭남을 수단으로 주님에 의한 둘의 결합이 여기서의 내적 의미에서 취급되어진다.
인간은 자기가 거듭나질 수 있기 이전, 반드시 인정하고 받아들여야만 하는 일반적 진리들이 지금까지 다루어져 왔다. 즉 야곱과 레아와 하녀들의 열 아들들에 의해서 이다. 그리고 인간이 이 진리들을 받아들이고 인정한 이후, 외적 인간이 내면의 인간과, 또는 자연 평면이 영적 평면과 결합함이 이미 취급된 “요셉”에 의해 의미되어져 있다. 그리고 지금 질서에 일치하여 취급된 주제는 선의 열매맺음과 진리의 번성함이다. 이 결합이 결과되었을 때, 정밀하게 말하면 결합이 결과되는 만큼에서 선의 열매맺음과 진리의 번성은 처음으로 세상 밖으로 출시된다. 출시된 것이 야곱이 라반의 양떼를 수단으로 획득한 “양떼”에 의해 의미되어져 있다. 여기서 “양떼”에 의해 선과 진리가 의미되었는데, 이는 말씀의 다른 많은 장소에서도 마찬가지로 의미되고 있다; 그리고 “라반의 양떼”에 의해서는 라반에 의해 표현된 선, 이미 서술해온 라반의 본성이 의미된다. “야곱의 양떼”에 의해서는 라반의 양떼를 수단으로 획득한 진짜 선과 진리가 의미된다. 그리고 여기서 진짜 선과 진리가 획득되는 방법이 서술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우선 “얼룩짐,” “반점 있음,” “검다,” “희다”가 내적 의미에서 의미되는 것이 알려져야 납득이 가능해진다. 그러므로 이것들을 먼저 설명한다. 얼룩지거나 반점은 검고 흰 것으로 구성되어진다; 일반적으로 “검다”는 악을 의미하고, 특별하게는 인간의 자기 자신을 의미하는데, 그 이유는 인간의 자기 자신에는 악밖에 없기 때문이다. 또한 “검다”는 거짓을 의미하는데, 특별하게는 거짓으로부터의 원리를 의미한다. “희다”는 내적 의미에서 진리를 의미한다, 더 적절한 의미는 주님의 정의와 공적이고, 파생적으로는 인간 안에 있는 주님의 정의와 공적을 의미한다. 주님 측면에서의 희다는 특별히 “빛나게 희다”라고 불리운다, 그 이유는 주님으로부터 있는 빛은 빛나기 때문이다. 그러나 반대 의미에서 “희다”는 인간의 자기 정의, 또는 그의 자신의 공적을 의미한다; 그 이유가 선이 없는 진리가 이와 같은 자기 공적을 수반하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누군가가 선을 행할 때, 진리로부터의 선을 행하지 않으면, 그는 언제나 보답을 기대하고 있다, 그 이유는 그가 자신을 위해 그것을 행했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누군가가 선으로부터 진리를 행할 때, 이 선은 주님으로부터 있는 빛에 의해 계발되어진다. 이것이 “반점”에 의해 의미되는 것, 즉 거짓이 혼합된 진리이다를 보여준다; 그리고 “얼룩지다”에 의해 의미된 것, 즉 악이 섞인 선이다를 보여준다.
실제의 색깔이 다른 삶에서도 보여지는데, 너무나 아름답고 광휘가 있어 그것들은 묘사되어질 수 없다 (1053, 1624항); 그리고 그 색깔들은 빛의 다채로움으로부터 있고 그늘은 검고 흰 것으로부터 있다. 그러나 거기서의 빛이 비록 눈 앞에서 빛으로 나타난다 할지라도, 그것은 세상의 빛 같지 않다. 천국에서의 빛은 그 빛 안에 총명과 지혜를 지니고 있다; 그 이유가 주님으로부터 신성한 총명과 지혜가 거기서 빛으로 표출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천국 전체를 밝게 한다. 마찬가지 방식으로 다른 삶에서의 그늘 역시 그늘로서 나타나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세상의 그늘 같지는 않다; 그 이유가 거기서의 그늘에는 빛이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총명과 지혜가 빠져 있다. 그러므로 거기서의 희다와 검다는 빛 안에 총명과 지혜를 가지는 빛으로부터, 그리고 총명과 지혜가 빠져 있는 그늘로부터 출시되고 있기에, “희다”와 “검다”에 의해 위에서 살핀 것이 그 의미가 된다. 결과적으로 색깔들이 희다와 검다는 빛과 그늘의 변화이고, 평면들 안에서의 경우 같이, 그것은 색깔들이라 불리우는 다양하게 채색됨이 산출되어진다.
위 모두로부터 지금 우리가 알게 되는 것은, “얼룩진” 것, 즉 온 몸 전체가 검은 점과 흰 점을 찍듯이 한 것인 “얼룩짐, speckled”은 악이 혼합된 선을 의미한다는 것; 또한 “반점, spotted”인 것은 거짓이 혼합된 진리를 의미한다는 것이다. 이것들은 진짜 선들과 진리들을 산출하기 위하여 라반의 선으로부터 가져온 것들이다. 그러나 이것들이 어떻게 이 목적을 섬기는지는 참으로 천국의 빛 안에 있는 이들 앞에서나 명료하게 표출되어질 수 있는 신비함이다. 그 이유는 천국의 빛 안에만 총명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세상의 빛 안에 있는 이들의 경우, 그들은 거듭나지는 경우 같이 세상의 빛이 천국의 빛에 의해 계발되어야 한다; 그 이유가 모두 각각의 거듭나는 인물은 천국의 빛으로부터 자기 안에 있는 선들과 진리들을 보는데, 그 이유는 천국의 빛이 그의 지적인 시각을 생산하고, 세상의 빛은 그의 자연 평면의 시각을 생산하기 때문이다.
이 경우에 대해 몇 마디 말을 보탤까 한다. 인간 안에서는 순수한 선, 즉 악이 섞이지 않은 선이 없다; 순수한 진리, 즉 거짓이 섞이지 않은 진리가 없다. 그 이유가 인간의 의지는 악밖에 없기 때문, 이 악으로부터 그의 이해력에 거짓이 계속적으로 흐른다; 그 이유는 잘 알려진 바대로, 인간은 그의 선조들로부터 축적되어온 악을 상속이라는 수단으로 받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그 다음 그는 실제의 형태 안에서 악을 생산한다, 그리고 그것을 그의 자기 자신으로 만든다. 그리하여 자신으로 인해 자신에게 더 많은 악을 보탠다. 그러나 인간과 더불은 악은 다양한 종류들로부터 있다; 즉 선이 섞여질 수 없는 악들이 있고, 선이 섞일 수 있는 악들이 있다; 거짓들의 경우도 이와 같다. 이렇지 않다면, 인간의 거듭남은 가능해질 수 없다. 선들과 진리들이 섞일 수 없는 악들과 거짓들은 하느님을 사랑함과 이웃을 향한 사랑에 반대되는 악의 경우이다; 즉 증오함, 복수함, 잔인함, 자기와 비교해 타인을 경멸함; 거짓으로 설득함 따위들이다. 그러나 선들과 진리들이 섞일 수 있는 악들과 거짓들은 하느님을 사랑함과 이웃을 향한 사랑에 반대되지 않는 경우이다.
예를 들면: 만일 누군가가 타인보다 자기를 더 사랑한다면, 그리고 이 사랑으로부터 도덕적, 시민적 생활에서, 그리고 기억 속의 지식들과 교리적인 것들에서, 그리고 타인들보다 더 걸출하여 재산과 위엄함이 드높여짐에서 타인을 능가하려고 애쓰고 있다면, 그럼에도 한편에서는 하느님을 인정하고 숭배한다면, 또한 심정으로부터 이웃에 친절하게 공직을 수행하고 있다면, 그리고 양심으로부터 공정과 타당한 것을 행한다면, 자기로부터의 이런 사랑의 악은 선과 진리가 섞일 수 있는 악의 종류이다; 그 이유가 이것은 인간의 자기 자신인 악이기 때문, 그리고 유전적으로 태어나지는 악이기 때문; 그리고 그 사람으로부터 이 악을 갑자기 거두어간다면 그의 첫 생명의 불을 꺼지게 하는 악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타인 위에 군림하는 자신을 사랑하는 자, 그리고 이 사랑으로부터 자신과 비교해 타인을 경멸하는 자, 그리고 숭배하듯 자신을 존경하지 않는 이를 증오하고, 그에게 그런 댓가로 앙갚음질과 잔인함을 발휘함에서 기쁨을 즐기는 자, 이런 자로부터의 악에는 선과 진리가 섞일 수 없다. 그 이유가 그것들은 두 큰 일반적 사랑에 정반대이기 때문이다.
다른 예를 들어보자: 만일 누군가가 자신도 죄들로부터 순수해지는 것이 가능하다고 믿고, 고로 마치 더러운 자신을 많은 물로 씻어 깨끗해진다 믿어 실지로 깨끗하게 씻었다 하자, 그리고 이런 사람이 회개를 수행한 적이 있고 강요된 참회를 했을 때, 또는 고백함 이후, 그의 고백자로부터의 선포가 있을 때, 또는 그가 거룩한 성찬에 참여한 이후, 만일 그가 새 삶을 선과 진리에 애착함 안에서 살고 있다면, 비록 엉터리 교리에 자신도 한몫 끼인 형세이지만, 그가 끼여든 이 거짓은 선과 섞일 수 있는 거짓인 셈이다. 그러나 만일 그가 이전과 마찬가지인 육체적, 세상적 생명으로 살고 있다면, 이 거짓은 선이 섞일 수 없는 거짓이다.
다시 예를 생각해보자: 잘 믿고 있음으로 인간은 구원된다고 믿으면서 잘 믿지 않고 있는 자가 있다 해보자; 그런데 잘 믿기를 뜻하고, 결국 잘 실행하고 있다면, 이 거짓은 선과 진리가 섞일 수 있는 거짓이다; 그러나 그렇지가 않다면 선과 진리가 섞일 수 없는 거짓이 된다. 마찬가지로 누군가가 인간은 사후 다시 일어난다는 것에 무지하다면, 결과적으로 부활을 믿지 않는다면; 또는 만일 그가 이런 사항을 알아챘는데 아직 의심 중에 있다면, 아마 그것을 부정함쪽에 기울어 있다면, 그런데도 선과 진리 안에서 살고 있다면, 그의 거짓과 더불어서는 진리와 선이 섞일 수 있다; 그러나 그가 거짓과 악 안에서 살고 있다면, 진리와 선은 이런 거짓과는 섞일 수 없다, 그 이유는 그것들이 정반대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거짓이 진리를 파괴하고, 악은 선을 파괴하기 때문이다.
또다른 예를 생각해보자: 목적으로 선인 것을 가지는 잔꾀부림과 흉내냄(…인 척 함)은 신중함이 있다; 그리고 그것들과 혼합된 악들은 목적으로부터, 목적을 위하여 선과 섞일 수 있다. 그러나 목적으로 악을 가지는 잔꾀부림과 흉내냄은 신중함이 없고 교활함과 사기인 바, 이것과 더불어 선은 결코 결합될 수 없다; 그 이유가 악을 목적으로 하는 사기는 인간 안에서 일반적이든, 특수적이든 모든 것들에서 지옥의 것을 야기시키고, 악을 그 중앙에 놓고 선은 주변쪽으로 밀쳐버리기 때문이다. 이 질서는 지옥 자체이다. 아마 이런 경우의 다른 예는 셀 수 없게 많을 것이다.
선들과 진리들이 인접될 수 있는 악들과 거짓들이 있다는 것은 이런 사실, 즉 수많은 가지각색의 교조(독단적 주장)들과 교리들이 있다는 사실로부터도 볼 수 있을지 모른다. 이것들 중의 많은 것들이 이단적이나, 그럼에도 각각 안에서 구원되는 이들이 있다; 또한 주님의 교회가 교회 밖에 있는 이방인들 사이에 있기도 한다; 그리고 비록 그들이 거짓들 안에 있을지라도, 선행의 생명을 살아내는 이들은 구원되어진다 (2589-2604항); 이것은 악이 선들과, 진리가 거짓과 섞여 있을 수 있는 경우가 아니면 결코 가능하지 않다. 그 이유가 악이 선과, 거짓이 진리와 섞여 있으나 주님에 의해 질서 안으로 경이하게 배열되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함께 결합한 것도, 하나로 합쳐진 것도 아니고, 서로에 인접되고 서로에 응용하는 국면이다. 섞여 있는 것들 중에서 선들과 진리들은 중앙쪽으로 배치하고 악들과 거짓들은 주변쪽으로 배치하는 방식이다. 그러면 선들과 진리들은 중앙쪽으로, 악들과 거짓들은 바깥쪽으로 향하게 된다. 고로 후자는 전자에 의해 빛을 받는 형국인데, 이는 중앙으로부터 바깥쪽으로 빛을 비추어 검고 흰 것이 다양한 채색을 산출하는 것과 같다. 이것이 천국의 질서이다. 이것들이 “얼룩지고” “반점 있는” 것에 의해 내적 의미에서 의미되어져 있다.

그리고 어린 양떼 사이에서 모두 각각의 검은 것. 이는 라반에 의해 의미된 선에 속하는 순진이 있는 자기 자신을 의미한다. 이는 “검다”가 인간의 자기 자신이다로부터; 그리고 “어린 양”의 의미가 순진이 있음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순진이 있는 자기 자신에 관해 주목해보자. 이것이 “어린 양들 사이에서 검은 것”에 의해 의미되는데, 이 경우는 이러하다. 모든 선 안에는 그것이 선이기 위하여 순진이 반드시 있어야만 한다. 순진 없는 선행은 선행이 아니다; 더욱이 순진 없이 주님을 사랑함은 어불성설이다. 이런 이유로 순진은 사랑과 선행에, 결과적으로 선에 필수적이다. 순진이 있는 자기 자신은 자아로부터서는 악밖에 없다는 것, 모든 선은 주님으로부터 있다는 것을 입만으로가 아닌 심정으로부터 알고, 인정하고, 믿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자기 자신인 것은 검은 것밖에 없다; 부연 설명하면, 이는 그의 의지 측면의 자기 자신이 악일 뿐 아니라 그의 이해력 측면의 자기 자신이 거짓이다는 것을 알고, 인정하고, 믿는 것이다. 인간이 이런 고백함에 있고 심정으로부터 믿을 때, 주님은 선과 진리와 더불어 흘러드시어, 그에게 반짝이는 흰 것인 천국의 자기 자신을 은근히 심으신다. 이런 인정함과 심정으로부터의 믿음 안에 있지 않다면, 누구도 진정한 겸손 안에 있을 수 없다; 진정한 겸손 안에 있는 자는 자아의 절멸, 또는 자기의 자아를 몹시 싫어함, 고로 자아가 결석한 듯한 상태에 있는다. 이때야말로 그가 주님의 신성을 받을 수 있는 상태에 있다. 이런 수단으로 해서 주님은 겸허하고 죄를 깊이 뉘우치는 심정 안으로 선을 가지고 흘러드신다.
위와 같은 것이 순진이 있는 자기 자신이다. 이것이 여기서 야곱이 자신을 위해 선택한 “어린 양들 사이에 검은 것”에 의해 의미되어 있다; 그러나 양들 사이에 흰 것은 선들 안에 놓여진 자아 공적이다. 이것을 야곱은 선택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이것은 순진에 반대되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선들 안에 자기 공적을 놓는 자는 모든 선이 자신으로부터 라고 인정하고 믿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그가 행하는 선들에서 그는 주님이 아닌 자신을 중요시하기 때문, 따라서 그는 그의 공적 때문에 댓가를 요구한다. 그러므로 이런 자는 자신과 비교해 타인을 경멸하고, 때로는 그들을 사정 없이 규탄하는 바, 그는 이런 상태의 정도에 비례하여 천국의 질서로부터, 즉 선과 진리로부터 퇴조한다. 이런 모두로부터 분명해지는 바, 이웃을 향한 선행과 주님을 사랑함은 그것 안에 순진이 없으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누구나 자기 안에 순진의 얼마 만큼이 없으면 천국 안으로 올 수 없다; 이는 주님의 말씀에 따라서 이다:
참으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작은 어린 아이 같이 하느님의 왕국을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누구든 지, 그는 거기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마. 10:15; 눅 18:17);
위의 “작은 어린 아이”는 순진을 의미하는데, 다른 구절에서도 같다.
“어린 양들”이 순진을 의미하는 것은 말씀의 많은 구절로부터 알게 되는데, 아래 몇 구절만 첨가하였다. 이사야서에서:
이리가 어린 양과 더불어 거주할 것이다, 그리고 표범이 아이와 드러누울 것이다; 그리고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비육 가축이 함께 (거주할 것이다), 그리고 어린 아이가 그것들을 인도할 것이다 (이. 11:6);
위에서 취급된 주제는 주님의 왕국이다, 그리고 이 왕국 안에 있는 평화와 순진의 상태이다. “이리”는 순진에 맞서 있는 이들을; 그리고 “어린 양”은 순진 안에 있는 이들을 표시한다. 다시 이사야서에서:
이리와 어린 양이 함께 먹을 것이다, 그리고 사자가 수소와 더불어 짚을 먹을 것이다, 그리고 먼지는 뱀의 빵일 것이다. 그들은 내 거룩함의 모든 산을 상하게 하지 않을 것이고 파괴하지도 않을 것이다 (이. 65:25);
위 구절의 “이리”는 순진에 맞서는 이들을 표시한다; 그리고 “어린 양”은 순진 안에 있는 이들을 표시한다. “이리”와 “어린 양”이 반대되기에, 주님께서는 그분이 파견하는 칠십 명에게 말하셨다:
잘 보라 나는 너희를 이리들 한가운데에 있는 어린 양들 같이 파견한다 (눅. 10:3).
모세의 책에서:
그분은 그가 바위로부터 꿀을 빨도록, 그리고 단단한 바위로부터 기름을 빨게 하신다; 가축떼의 버터를, 그리고 양떼의 젖을, 어린 양들과 숫양들의 지방과 더불어, 바산의 아들들
(신. 32:13, 14);
위는 고대 교회의 천적인 것들을 내적 의미에서 취급한다, 그리고 “어린 양들의 지방”은 순진의 선행을 표시한다.
원어에서 “어린 양들”은 다양한 이름들로 표현되어지고 있다, 이 다양한 이름들을 수단으로 순진의 다양한 단계들이 의미된다; 그 이유가 이미 말했듯이, 모든 선 안에는 그것이 선이 되게 만드는 순진이 반드시 있다; 결과적으로 진리 안에서도 그러하다. 위 구절에서의 “어린 양들”은 “양”에서도 사용되는 단어와 같은 단어로 표현되어 있다 (레. 1:10; 3:7; 5:6; 17:3; 22:19; 민. 18:17도 참조하라); 그리고 이것은 선행의 신앙 속의 순진이 의미된다. 그밖의 구절에서 이것들은 다른 단어들에 의해 표현되고 있다. 이사야서에서:
너희는 광야를 향하여 (있는) 바위로부터 토지의 통치자의 어린 양을 시온의 딸들의 산으로 보내라 (이 16:1).
이사야서에서 또다른 단어에 의해서 이다:
주 여호비께서 강함 안에서 오신다, 그리고 그분의 팔이 그분을 위하여 통치하실 것이다; 그분은 목자 같이 그분의 양떼를 먹이실 것이다, 그분은 그분의 팔에 어린 양들을 그러모우실 것이다, 그리고 그분의 품 안에서 그들을 운반하실 것이다, 그리고 (젖을) 빰을 주는 이들을 부드럽게 인도하실 것이다 (이. 40:10, 11);
위에서 “그분의 팔 안에 어린 양들을 그러모으시고, 그리고 그분의 품에서 그들을 운반하는”것은 순진이 있는 선행 안에 있는 이들을 표시한다.
요한복음서에서:
예수께서 자신을 제자들에게 보이셨을 때, 그분은 요나의 아들, 시몬, 베드로에게 말하시기를, 너는 나를 이들보다 더 사랑하느냐? 그가 그분에게 말하신다, 그렇습니다, 주님, 제가 당신을 사랑하는 것을 당신은 아십니다. 그분이 그에게 말하신다, 내 어린 양들을 먹이라. 그분이 그에게 두 번째로 말하신다, 요나의 아들, 시몬아,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그가 그분에게 말하신다, 예, 주님, 제가 당신을 사랑하는 것을 당신은 아십니다. 그분이 그에게 말하신다, 내 양을 먹이라
(요. 21:15, 16).
위 구절, 그 외의 구절에서도 “베드로”는 신앙을 의미한다; 그리고 신앙은 그것이 이웃을 향한 선행으로부터, 고로 주님을 사랑함으로부터 있지 않으면 신앙이 아니다; 그리고 선행과 사랑은 그것들이 순진으로부터 있지 않으면 선행과 사랑이 아니다. 이런 이유로 주님께서는 처음에 베드로에게 그가 주님을 사랑하는지를, 즉 신앙 안에 사랑이 있는지 여부를 물으시고, (있다고 대답하자) 그 다음 “내 어린 양을 먹이라”고, 즉 (신앙은) 순진 안에 있는 이들을 먹이라고 말하신다. 두 번째에서도 같은 질문과 대답이 있는 다음, “내 양을 먹이라”고, 즉 (신앙은) 선행 안에 있는 이들을 먹이라고 말하신다. (즉 신앙 이론, 내지 교리물 등은 선행을 실행하고 있는 이들의 참고서 수준에 있어야 한다는 말, 즉 신앙을 선행보다 중요하게, 한 단계 높은 자리에 앉히지 말라는 것, 바꿔 말해 신앙은 선행의 보좌관 역할을 해야 한다는 뜻일지 모른다 역자 주.)
주님은 그분의 왕국 안에 있는 순진 자체이시기에, 순진의 모든 것은 그분으로 있기에, 그분은 “어린 양”이라 불리우신다; 요한복음서에서:
다음 날, 세례 요한은 예수께서 자기에게 오심을 보고, 말하기를, 잘 보라, 세상의 죄를 가지고 가시는 하느님의 어린 양이시다 (요. 1:29, 36).
그리고 계시록서에서:
이들은 어린 양과 전쟁을 만들 것이다, 그리고 어린 양은 그것들을 정복하실 것이다; 그 이유가 그분은 주들 중의 주님이시고, 왕들 중의 왕이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분과 더불어 있는 이들은 불리우고, 뽑힌 이들이다 (계. 17:14; 그 외의 구절로는 5:6; 6:1, 16; 7:9, 14, 17; 12:11; 13:8; 14:1, 4; 19:7, 9; 21:22, 23, 26, 27; 22:1, 3).
최고 의미에서 유월절 어린 양이 주님이시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그 이유가 유월절이 주님께서 신성이 되심, 즉 그분의 인간이 신성을 입으심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표현적 의미에서 이것은 인간의 거듭남을 의미한다; 그리고 유월절 어린 양은 거듭남에 필수 요소인 것, 즉 순진을 의미한다; 그 이유가 순진이 들어 있는 선행을 수단으로 하지 않고서는 누구도 거듭나질 수 없기 때문이다.
순진이 주님의 왕국에서 제 일의 것이고, 거기서 천적 평면 자체이기에, 그리고 제물과 태워 바침이 주님의 왕국의 영적, 천적인 것들을, 그러므로 순진이 있는 주님의 왕국의 필수 요소 자체이기에, 순진이 어린 양들에 의해 표현되어졌다. 이런 이유로 항구히, 또는 매일 태워바침이 하나는 아침에, 또 하나는 저녁에 어린 양들로 만들어졌다 (출. 29:37-39; 민. 28:3, 4), 그리고 안식일에는 두 배로 바쳐졌다 (민. 28:9, 10), 그리고 더욱이 절기들에서는 더 많은 어린 양이 바쳐졌다 (레. 23:12; 민. 28:11, 17, 19, 27; 29장). 순진에 관한 위와 같은 이유로 아이를 낳은 여인이 자기의 깨끗해짐의 날들을 다 채운 후에는 태워바침을 위해 어린 양, 그리고 어린 비둘기와 호도애를 바쳤다 (레. 12:6), 이는 부부의 사랑의 결과가 의미되기 위하여 이다; 또한 순진이 “유아들”에 의해서도 의미된다.

그리고 염소들 사이에서 얼룩지고 반점 있는 것들. 이는 악과 거짓이 혼합되어 있는 진리로부터의 모든 선이 그분의 것임을 의미한다. (여기서의 “염소들”은 원어를 엄밀히 번역하면 암염소들이고, 흔히 염소떼로 번역한다.) 이는 “반점”이 거짓을, “얼룩”이 악을 의미함으로부터; 그리고 “암염소들”의 의미가 진리로부터의 선, 또는 신앙으로부터의 선이다로부터 알려진다. 이 모두가 그분의 것이다가 이어지는 말, 즉 “그리고 이것이 나의 보상이다”에서 의미되고 있다.
이쯤에서 진리로부터의 선 (the good of truth)이, 또는 신앙으로부터의 선행(the charity of faith)이 무엇인지에 대해 설명을 보태어 볼까 한다. 인간이 거듭나질 때, 신앙으로부터 있는 진리가 외관상으로는 먼저 온다, 그리고 선행으로부터 있는 선은 외관상으로 그 뒤를 따른다; 그러나 인간이 거듭났을 때, 선행으로부터의 선이 명명백백하게 먼저 진행되고, 신앙으로부터의 진리는 명백하게 그 뒤를 따른다. 그 이유가 인간이 거듭나질 때, 그는 선인 것을 진리로부터 행하는데, 그 이유는 그가 선인 것을 진리로부터 배우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것이 결과되게 하는 것은 진리 안쪽에 있는 선이다. 그 이유가 선은 내적인 경로를 수단으로, 즉 혼의 경로를 수단으로 주님으로부터 흘러들기 때문; 그러나 진리는 외적인 경로를 수단으로, 즉 육체의 것인 감각들을 수단으로 흘러들기 때문이다. 후자의 길을 수단으로 들어오는 진리는 안쪽에 있는 선에 의해 채택되어진다, 그리고 그것과 결합한다, 그리고 이것은 인간이 거듭나질 때까지이다. 그 다음 변혁(혁명)이 거행된다, 그리고 진리는 선으로부터 행해진다. 이상 살핀 바로부터 선행으로부터의 선들이 무엇인지, 진리로부터의 선이 무엇인지가 가늠되었을 것이다. 선행의 선들이 신앙의 열매들이라고 많은 이들이 말하는 것을 듣는데, 그 이유는 거듭남의 시작에서 외관상 그렇게 나타나는 것을 가지고 결말을 짓기 때문이다. 그들이 이와 달리해서는 알지 못하는 이유는 거듭나고 있는 자의 경우, 극소수만이 알기 때문, 그리고 상당히 거듭나져왔던 이들, 또는 선에 애착함 안에, 또는 선행 안에 있는 자 외에는 이를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선에 애착함으로부터, 또는 선행으로부터서는 이것이 분명하게 보여질 수 있다, 또한 지각된다; 그러나 거듭나지지 않고 있는 이들은 선에 애착함, 선행이 무엇인지조차 알지 못한다. 그들에게 이것을 묻는다면, 그들은 이것은 자기들과 상관 없는 어떤 것이라고 추론할 뿐이다. 이렇게 추론으로 나온 것에서 그들은 선행을 신앙의 열매라고 부른다. 실상 신앙이 선행으로 있어야 함에도 그렇게 불려질 수밖에 없는 처지이다. 선행 안에서 살고 있는 단순 순박한 사람에게는 어느 것이 먼저이고 어느 것이 뒤에 서야 하는지 추론함은 중요 사항이 아니다. 그 이유가 선행이 신앙의 생명임을 진즉 알고 있기 때문이다.
(말씀에서) “가축떼, cattle”에는 어린 양들 뿐만 아니라 양들, 염소 새끼들, 암염소들, 숫양들, 그리고 숫염소들이 뜻해진다. 비록 어린 양들과 암염소들만 언급되는 경우일지라도 그렇다는 말이다; 그리고 “암염소들”에 의해서는 신앙으로부터의 선행이 의미된다; 그 이유가 이런 사항들이 여기서 내적 의미로 취급되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반점 있다”가 원어에서는 “어린 양”을 의미하는 단어에 의해 표현되어져 있다 (이. 40:10. 11도 같다); 그리고 “얼룩지다”는 “목부” 또한 뜻하는 단어에 의해 표현되어져 있다 (왕하. 3:4; 암. 1:1).

그리고 이것은 저의 보상일 것입니다. 이는 이것은 그분 자신으로부터 이었음을 의미한다. 이는 “보상”의 의미가 그의 것, 즉 자기의 봉사함 때문에 있는 야곱의 것이다로부터; 그리고 이런 사항들이 그분의 자기 자신의 힘으로부터를 의미함에서 알게 된다. 이는 신성한 거룩함이다; 그 이유가 모든 영적, 천적인 선은 주님의 신성한 거룩함으로부터 진행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제 정의가 저를 위한 답일 것입니다. 이는 그분께서 가지셨던 신성한 거룩함을 의미한다. 이는 “정의”가 선이라고 단언됨에서 알게 된다; 그러나 여기와 같이 주님에 관해 서술할 때, 이것은 신성한 거룩함을 의미한다; 그 이유는 모든 영적, 천적인 선은 주님의 신성한 거룩함으로부터 진행하기 때문이다.

이는 영원쪽으로를 의미한다. 이는 이튿날의 의미로부터 분명해진다. “어제”, “오늘”, “내일”이 말씀에서 언급될 때, 영원은 최고 의미 측면에서 의미된다; “어제”는 영원으로부터를 의미한다; “오늘”은 영원을 의미한다; 그리고 “내일”은 영원쪽으로를 의미한다. 그 이유가 말씀에서 언급되는 때들은 상태들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는 “시대들”, “햇수들”, “달들”, “주들”, “날들”에서도 공히 같은 것을 보여준다. 그러나 주님과 더불어서는 상태들이 없다; 그러나 모든 것이 영원이고 무한이다. 이런 사항을 통해 “내일”에 의해 영원쪽으로가 의미됨을 알게 된다.

그 이유는 당신이 제 앞에 나의 보상을 오게 하리라 했기 때문. 이는 그분의 자기 자신인 것을 의미한다. 이는 “보상”이 주님을 서술할 경우, 그 의미는 그분의 자기 자신인 것을 의미하기 때문, 즉 그분 자신의 힘을 수단으로 획득하심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염소들 중에서 얼룩지지 않고 반점이 없는 것. 이는 “라반”으로 의미된 선으로부터 있지 않는 것은 진리의 선 안에서 악과 거짓이 혼합되었음을 의미한다. 이는 이미 살폈다.

그리고 어린 양 중에서 검은 것. 이는 순진의 첫 상태를 의미한다. 이는 “검다”가 인간의 자기 자신인 것이다로부터; 그리고 “어린 양”의 의미가 순진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어린 양들 안에서 검다”가 여기서 순진의 첫 상태임을 의미하는 이유는 거듭나지않고 있는 인간의 자기 자신이 거듭남의 처음에서는 그를 지배하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처음 당시에서, 그는 자기의 자신으로부터 선인 것을 행하고, 이 행함은 마치 자기 자신인 것처럼 있어져야만 한다고, 이러므로 해서 자기는 천국의 자기 자신인 것을 수여받을는지 모른다고 상상하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어린 양들 사이에 검은 것”이 순진의 처음 상태를 의미한다.

이것은 내가 훔친 것. 이는 그것은 그의 것이 아니었음을 의미한다. 이는 설명 없이 알 것이다. 글자 의미에서의 이 표현은 껄껄스러운 어떤 것 같이 소리날지 모른다; 그러나 이 소리가 천국쪽을 향하여 건너갈 때, 그것의 껄껄스러움은 잃어진다, 그리고 부드럽고 온순한 소리로 되어진다. 비슷한 표현이 마태복음서에서 발생한다:
그러므로 경계하라, 그 이유가 너의 주님이 어느 시간에 오실 것인지를 너희가 알지 못하기 때문이 다. 그러나 이것을 알아라, 만일 그가 어느 시간에 도둑이 오는지를 알았었다면, 그는 경계하였을 것이고, 자기 집을 통과하여 부수도록 내버려두지 않았을 것이다 (마. 24:42, 43).
그리고 계시록서에서:
만일 너희가 깨어있지 않으면, 나는 도둑 같이 너희에게 올 것이다, 그리고 너는 내가 네게 어느 시간에 올지를 알지 못한다 (계. 3:3).
계시록서에서:
보라 나는 도둑 같이 온다, 깨어 있고, 자기 의복을 간직한 자는 복 있다 (계. 16:15).
이 표현들은 주님에 관하여 사용되었다: “도둑 같이”란 말은 예기치 못한 것, 예상하지 못했던 것만을 의미한다. 내적 의미에서 “훔치다”는 주님의 것을, 즉 선과 진리를 자기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을 표시한다; 이는 거듭남의 시작에서 흔히 발생하고, 순진의 처음 상태이기도 한데, 이 표현은 이 말이 글자에서 소리내어지는 것보다 더 부드럽기는 하다. 결과적으로 “이것이 내가 훔친 것”은 이것이 자기 것이 아니었다를 의미한다.

34-36절. 그리고 라반이 말했다, 보라 내가 네 말에 따르리라. 35 그리고 그 날 그는 부분적으로 색깔이 있고 반점 있는 숫염소, 그리고 얼룩지고 반점 있고, 흰색을 가진 모든 암염소, 그리고 어린 양 중에서 검은 것 모두를 옮겼다, 그리고 그것들을 그의 아들들의 손에 주었다. 36 그리고 그는 자기와 야곱 사이에 사흘 길이 뜨게 하였다. 그리고 야곱은 나머지 라반의 양떼를 먹였다.

그리고 라반이 말했다, 보라 내가 네 말에 따르리라. 이는 동의함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는 그 날 부분적으로 색깔이 있고 반점 있는 숫염소를 옮겼다. 이는 선으로부터의 진리들이 라반의 선에 어울려졌던 악과 거짓들과 더불어 흩으러져 있고, 섞인 상태에서 분리되어졌다를 의미한다. 이는 “옮기다”의 의미가 분리됨이다로부터; 그리고 “숫염소들”의 의미가 선으로부터의 진리들이다로부터 (이는 아래에서 살핀다); 그리고 “부분적으로 색깔 있다”가 흩으러져 있고, 악들과 섞여 있다를 의미함으로부터; 그리고 “반점 있다”가 거짓들과 섞여 있고 흩으러져 있다를 의미함으로부터 (이는 앞에서 살폈다) 알려진다. 여기서는 “숫염소”가, 다음에서는 “암염소”가 언급되는데, 그 이유는 “숫염소”가 선으로부터의 진리들을; “암염소”는 진리로부터의 선들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 둘 사이의 차이점은 이미 상술했다 (3995항).
숫컷과 암컷 사이의 정밀한 구분이 말씀에서 만들어진다. 이는 제물과 태워바침으로부터 분명한데, 이와 관련하여 특별한 명령이 바쳐질 짐승에 관련하여, 즉 숫컷 어린 양인지, 암컷 어린 양인지, 암염소인지, 숫염소인지, 양 또는 숫양인지 등등에 주어져 있다; 이런 모두에서 이런 경우는 숫컷으로, 저런 경우는 암컷으로 바치도록 명령되고 있다. 일반적으로 보면, “숫컷”은 진리를 의미한다; 그리고 “암컷”에 의해서는 선이 의미된다. 그러므로 여기서 “숫염소”에 의해서는 선으로부터의 진리들이; “암염소”에 의해서는 진리로부터의 선들이 의미된다. 이제 뒤이어지는 “암염소”에 의해서는 그것들(진리들)에 인접된 선들이 의미된다. 이렇게 암, 수 염소의 본성에서 차이가 있기에, 그는 부분적으로 색깔 있는 숫염소를 옮겼다고 말해지나, 얼룩있는 것들은 아닌데, 이것은 암염소로부터 라고 말해진다; 그 이유가 “부분적으로 색깔 있다”는 진리가 흩으러져 악들과 섞인 것을; “얼룩지다”는 선이 흩으러져 거짓들과 섞인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3993항); 악들과 섞인 진리는 이해력에 속하고, 악들과 섞인 선은 의지력에 속한다. 이것이 다른 점이다. 이 모두는 라반에 의해 의미된 선으로부터 있다는 것이 분명한데, 그 이유는 그 가축들이 라반의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말씀에서 “(가축)떼”는 선과 진리, 같은 말로 선과 진리 안에 있는 이들, 그러므로 주님의 교회로부터 있는 이들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 신비함들은 이 이상 더 설명할 수 없다, 그 이유는 납득력이 선들과 진리들 안에서 배워지고, 동시에 계발되지 않으면 분명해질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반드시 먼저 알고 있어야만 하는 사항은, 선으로부터의 진리들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들로부터 있는 선들이 무엇인지에 관해서; 그리고 라반에 의해 여기서 표현된 이 선으로부터 아주 많은 것들이 분리되어질 수 있다는 것 등이다. 이 주제에 관해 지식을 갖지 않은 자들은 모두 각각의 선 안에는 무수한 것들이 있다는 것, 이는 너무나 많아서 대단한 학식자에 의해서도 일반적으로도 분류하기 힘들다는 것이다. 그 이유가 진리들을 수단으로 획득한 선들이 있고; 이 선들로부터 태어난 진리들이 있고; 다시 이 진리들을 수단으로 획득한 선들이 있기 때문이다. 선들로부터 태어난 진리들이 있다, 이것 역시 위와 같이 시리즈로 있다; 악들과 섞인 선들이 있다; 위에서 상술한 바대로 거짓들과 섞인 진리들이 있다; 그리고 이런 것들이 어울리고(섞이고) 부드러워지고 하는 것은 아주 다양하고, 여러 겹겹이어서 수만 겹을 초과할지 모른다; 그리고 그것들은 삶의 모든 상태들에 따라서 다양해진다; 그리고 삶의 상태들은 인간의 시기에 일치하여 일반적으로 다양해진다, 그리고 특별하게는 모든 종류들의 자기 애착들에 일치하여 다양해진다. 이로부터 라반의 선으로부터 아주 많은 것들이 분리되어질 수 있다는 말을 어느 정도라도 납득하였는지 모른다. 이런 종류 중에서 어떤 것은 진리들에 인접되는데 이것은 야곱의 아들들에 의해 의미된다; 어떤 것은 뒤에 남겨진다; 그리고 이것들로부터 다른 것들이 파생된다. 그러나 전에 말했던 대로 이런 사항들은 배워지고 계발이 동시에 있지 않으면 이해력에 와닿지 않는다.

얼룩지고 반점 있는 암염소 모두. 이는 악과 거짓에 혼합된 상태인 그들의 선들을 의미한다. 이는 “암염소”의 의미가 진리로부터의 선들이다로부터; 여기서는 진리들에 인접되어 왔던 선들이다; “얼룩지다”의 의미가 악들이 섞인 선들이다로부터; 그리고 “반점 있다”의 의미가 거짓들이 섞여 있는 진리들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 안에서 흰색을 가진 것. 이는 안에 진리가 있다를 의미한다. 이는 “희다”의 의미가 진리이다로부터, 그러나 적절하게는 주님의 정의와 공적, 그리고 파생적으로는 인간 안에서 있는 주님의 정의와 공적이다. “희다”가 이 의미를 가지는 이유는 주님으로부터 있고, 빛남과 흼의 근원인 천국의 빛이 진리를 의미하기 때문; 그러므로 이 빛에 의해 계발되는 것, 그리고 빛남이 되는 것은 인간 안에 있는 주님의 정의와 공적이라 불리우는 것들이다. 선으로부터 주님의 정의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자들, 그리고 자기의 공적을 거절하는 이들이 “의로운” 자에 의해 특별하게 의미되어 있다. 이를 마태복음서에서 주님께서 말하신다:
의로운 자는 그들의 아버지의 왕국에서 태양 같이 빛날 것이다 (마. 13:43).
“빛남 또는 희게 빛남”이 이 의미를 가지는 것은 말씀에 있는 다른 구절로부터 분명해진다. 모세의 책에서:
그의 눈은 포도주보다 더 붉을 것이다, 그리고 그의 이는 젖보다 더 희다 (창. 49:12);
위는 유다에 관해 말해지는데, 유다를 수단으로 주님의 사랑의 신성 측면에 관련된 주님이 표현되었다; 그리고 내적 의미에서, 천적 왕국; 그리고 천적 인간이 표현되었다. “눈이 포도주보다 더 붉음”은 신성한 지혜를 의미한다; 그리고 “이가 젖보다 더 흼”은 신성한 정의를 의미한다. 다윗서에서:
당신은 히솝(우슬초)으로 저를 순수해지게 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나는 깨끗해질 것입니다; 당신은 나를 씻으실 것입니다, 그리고 나는 눈보다 더 희어질 것입니다 (시. 51:7);
“씻는 것”, 그리고 “눈보다 더 희게 만드는 것”은 주님의 정의를 받아들임으로 죄들로부터 순수해지는 것을 표시한다. 계시록서에서:
일곱 등잔대들의 한가운데에 사람의 아들 같은 분이 계셨다; 그분의 머리와 머리털은 흰 양털 같이, 눈 같이 희었다; 그리고 눈은 불 속의 불꽃 같았다 (계. 1:13, 14).
계시록서에서:
너는 자기들의 의복을 더럽히지 않은 몇 이름들을 사데 (교회) 안에서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들은 흰 것 안에서(흰옷을 입고) 나와 더불어 걸을 것인데, 그 이유가 그들은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극복하는 자는 흰 의복을 입을 것이다 (계. 3:4, 5).
계시록서에서:
내가 네게 조언하는 것은 나로부터 불로 순수해진 금을 사서, 부자가 되라는 것이다; 그리고 흰 의복, 너는 그것을 입게 될는지 모른다 (계. 3:18).
다시:
제단 아래 모두 각각의 혼에게 흰 겉옷(도포, robe)이 주어졌다 (계. 6:9-11).
다시:
나는 왕좌 앞에, 그리고 어린 양 앞에, 흰 도포로 치장하고 서 있는 그들을 보았다, 그리고 원로 중의 한 명이 나에게 말했다, 흰 도포를 입은 이들은 누구이냐? 그들은 어디로부터 왔느냐? 그리고 나는 그에게 말했다, 나의 주여, 당신이 아십니다. 그리고 그가 나에게 말했다, 이들은 큰 환난으로부터 온 자들이다, 그리고 자기들의 도포를 빤 자들이다, 그리고 자기들의 도포를 어린 양의 피에서 희게 만든 자들이다 (계. 7:9, 13, 14).
다시:
희고 빛나는 고운 아마포를 입고, 금띠를 자기들의 가슴에 두른 천사들 (계. 15:6).
다시:
내가 보았고 잘보니 흰말이었다, 그리고 그 위에 앉으신 이는 활을 가지셨다, 그리고 그분에게 왕관이 주어졌다 (계. 6:2).
다시:
이 후에 나는 천국이 열린 것을 보았다, 그리고 잘 보니 흰말이 있었다. 천국에 있는 그분의 군대들이 희고 깨끗한 고운 아마포를 입으신 흰말 위의 그분을 뒤따랐다 (계. 19:11, 14).
위와 같은 구절을 포함하는 많은 구절들에서 “희다”에 의해 신앙으로부터의 진리가 의미되어지고 있다; “흰 의복”과 “흰 도포”는 이외 다른 의미는 없다. 그러나 유의할 점은, 여기서 말하는 신앙으로부터의 진리는 자신들로부터, 자신의 똑똑함으로부터 자기의 신앙을 가졌다고 말하는 이들에게는 해당되지 않는다. 그 대신 자신의 신앙과 지혜를 주님으로부터 가졌다고 믿는 이들에 속하는 말이다는 점이다. 그 이유가 이들이야말로 진리와 선의 어떤 것도 자신의 공로로 돌리지 않기 때문, 즉 자기들이 소유하는 진리들과 선들을 통하여 공적을 가졌다고 절대 믿지 않는다; 따라서 그들은 자신이 지닌 선들과 진리들로부터서 의로운 자라 칭함을 스스로 거절한다. 오직 그것들을 주님의 덕분으로 돌리고 있다. 고로 주님의 은총과 자비 때문이라 믿고 있다. 이것이 위 구절에서 “흰 의복을 입는” 것, 그리고 “어린 양의 피에서 희게 만드는” 것이다. 천국으로 입장하는 이들에게서 벗겨져야 하는 두 가지가 있다. 이는 자기 자신(own)과 결과적으로 자기에 대한 확신(confidence), 그리고 자아로부터 있다고 확신하는 공적(merit) 또는 자기 자신으로부터 의로워졌다는 정의로움이다. 천국에 입장하는 이들은 이것을 벗어내고, 주님으로부터 있는 천국의 자신, 그리고 주님의 공적, 또는 정의로움을 입는다; 그리고 그들이 이것을 입는 정도에 따라 얼마나 더 깊은 천국에, 즉 더 내면적인 천국에 거주하느냐가 결정된다. 이 두 가지 것이 위 구절에서 “붉다”와 “희다”에 의해 특별하게 의미되어 있다; 즉 “붉다, red”에 의해서는 그때(천국 입장) 당시 가지는 사랑의 선을; “희다, white”에 의해서는 신앙의 진리가 의미된다.

어린 양 중에서 검은 것 모두. 이는 순진이 있는 자기 자신을 의미한다. 이는 비슷한 말이 등장하는 곳에서 이미 살폈다.

그것들을 자기 아들들의 손에 주었다. 이는 분리된 진리들과 선들이 진리들에 주어졌음을 의미한다. 이는 “아들들”의 의미가 진리들이다로부터 분명해진다. “그들의 손에 주는 것”은 그들에게 결정권과 처분권을 주는 것인데, 그 이유는 “손”이 힘(권력)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아들들”에 의해 의미된 진리들은 감각적이라 불리우는 진리들인데, 그 이유는 그것들이 감각들로부터 있고, 자연적 마음의 가장 바깥쪽의 것들이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인간의 자연 평면은 이쪽에서는 육체의 감각적인 것들과 교통하고, 다른쪽에서는 합리적 마음의 합리적인 것들과 교통하기 때문이다. 이 중간에 있는 것들로 해서 세상에로 열려져 있고 육체로부터 있는 감각적인 것들로부터 천국으로 열려져 있고 합리적 마음으로부터 있는 합리적인 것들로 까지의 승강함이 결과된다; 이 승강함으로부터 하강함, 즉 천국으로부터 세상으로의 하강이 있다; 그러나 이것은 인간 안에서 만이 있다. 이런 승강과 하강이 이 장의 내적 의미에서 취급된 것들이다; 그리고 각각 그리고 모든 것들이 표현적으로 진행되기 위하여, 합리성은 이삭과 리브가에 의해서; 그리고 자연 평면은 야곱과 그의 두 여인들에 의해서; 그리고 감각적 평면은 그들의 아들들에 의해서 표현되어졌다. 그러나 감각적 평면에서, 이 평면은 질서의 최말단이기 때문에, 앞에서 살핀 바대로 모두 각각의 아들은 각기 어떤 일반적 진리를 표현하기에, (시간상의) 앞의 것(진리와 선)들이 함께 존재한다. (즉 최말단이 그릇 역할을 하는 바, 그 안에는 감각적 평면에서 천적 평면, 주님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일반적, 특수적, 개별적인 것이 함께 있다는 말일지 모른다. 이를 겹겹으로 된 양파를 연상하면 도움이 될지 모른다. 또는 현재의 각 인간의 처신이 과거의 그 인간, 내지 미래의 그 인간을 결정할 수 있다는 점에서 우리의 현재는 여기서 말하는 최말단일지 모른다. 역자 주.)

그리고 그는 자기와 야곱 사이가 사흘 길이 뜨이게 하였다. 이는 그들의 상태가 모두 분리되었음을 의미한다. 이는 “길이 놓임(뜨임)”의 의미가 분리되어지는 것이다로부터; “3”의 의미가 마지막인 것, 완성, 끝(목적)이다로부터, 고로 모두가 분리됨이다; 그리고 “날들”의 의미가 상태들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리고 야곱은 나머지 라반의 양떼를 먹였다. 이는 남겨져 있었던 것으로부터 그는 합쳐질 수 있는 이런저런 선들과 진리들을 가져왔음을 의미한다. 이는 “양떼”의 의미가 선들과 진리들이다로부터. “양떼의 나머지를 먹이는 것”은 남아 있는 것으로부터 결합되어질 수 있는 이런저런 선들과 진리들을 의미하는데, 이는 이어지는 구절에서 분명해진다. 그 이유가 이것이 그 구절에서 취급되는 주제이기 때문이다.

37-40절. 그리고 야곱은 포플러 나무와 개암나무와 플라타너스 나무의 싱싱한 막대를 가져왔다, 그리고 그것들의 껍질을 벗겨 흰색이 나오게 하고 가지가 흰색이 드러낸채 있게 했다. 38 그리고 그는 껍질 벗긴 가지를 도랑에 있는 물구유통에 양떼들이 물을 마시러 올 때 양떼들을 마주 보게 세웠다. 그리고 양떼들은 물을 마실 때 흥분하였다. 9 그리고 양떼들은 막대에서 흥분하였다, 그리고 양떼들은 부분적으로 색깔이 있고, 얼룩지고, 그리고 반점 있는 것들을 낳았다. 40 그리고 야곱은 어린 양들을 분리했다, 그리고 양떼의 얼굴들이 라반의 양떼에 있는 부분적으로 색깔 있고 검은 것들을 향하게 했다. 그리고 그는 자신 만을 위한 가축떼들을 두었다, 그리고 그것들이 라반의 양떼가 안되도록 관리했다.

그리고 야곱은 자기에게 포플러 나무의 싱싱한 막대를 가져왔다. 이는 자연적 선에 적당한 힘을 의미한다. 이는 “막대(rod)”의 의미가 힘(power)이다로부터; 그리고 “포풀러나무”의 의미가 자연 평면의 선이다로부터(이는 아래에서 살핀다) 알게 된다. 단어 “막대”는 말씀에서 자주 언급되는 편이다, 그리고 말씀 어느 곳에서나 힘을 의미하는데, 이는 목자가 양떼에게 힘을 발휘하는 것으로부터 신체를 받쳐주는 지팡이 역할을 담당하는 것에 이르기까지에서 힘을 의미한다. 마치 오른손이 힘을 의미하는 것처럼 이다; 그 이유가 “손”에 의해 힘이 의미되기 때문이다. 막대가 이런 의미를 가졌기에, 고대 시대 때에 막대는 왕들에 의해 사용되었고, 왕임을 표시하는 휘장이었는데, 이 휘장의 막대는 짧은 지팡이, 또한 홀이었다. 막대들은 왕만 사용한 것이 아니라 성직자나 예언자들도 사용하였는데, 이는 각자에 속하는 직분의 힘을 의미하였다. 아마 아론과 모세의 경우가 대표적일지 모른다. 이런 이유로 모세가 기적을 수행할 때, 막대를 뻗치거나 손을 뻗거나 한 이유이다; 그 이유가 신성한 힘이 “막대”나 “손”에 의해 의미되기 때문이다. “막대”가 힘을 의미하기 때문에 이집트의 마술사들이 마술적 기적을 수행할 때도 막대를 사용했다. 이로부터 지금도 마술사들은 그들의 손에 있는 막대를 가지고 표현하는 때가 많다.
그러나 원어에서, 목자나 왕들, 성직자나 예언자들에 의해 사용된 막대들은 또다른 단어에 의해 표현되어져 있다; 즉 여행자의 지팡이를 표시하는 단어에 의해, 또한 목자의 막대를 표시하는 단어에 의해서인데, 이에 대하여는 다른 구절들, 즉 창. 32:10; 출. 12:11; 삼상. 17:40, 43; 슥. 11:7, 10을 참조하면 알 것이다. 이 본문의 경우의 막대는 신체를 보조한다고 말해지지 않고 나무로부터, 즉 포풀러 나무, 개암나무, 플타너스 나무로부터 잘라낸 나무가지 토막이고, 이것을 양떼의 얼굴 앞 물구유통 안에 놓아두려는 막대이다. 그렇지만 이 막대도 위에서 상술한 막대와 같은 의미를 가진다, 그 이유는 이 막대가 내적 의미에서 자연적 선의 힘, 그리고 파생적으로 자연적 진리들을 묘사하기 때문이다.
막대가 만들어진 포풀러 나무에 주목해보자. 일반적으로 나무는 지각들과 지식들을 의미하는데, 그 중에서 천적 인간을 서술할 때 지각이; 영적 인간을 서술할 때, 지식이 의미된다. 그러므로 나무들은 특별하게는 선들과 진리들을 의미한다, 그 이유는 선들과 진리들이 지각들과 지식들에 속하기 때문이다. 나무들 중 어떤 종류, 즉 올리브 나무, 포도나무는 영적 인간으로부터 있는 내면의 선들과 진리들을 의미한다; 그리고 어떤 종류, 즉 포풀러, 개암, 플라타너스 나무는 자연적 인간으로부터 있는 외면의 선들과 진리들을 의미한다. 그리고 고대 시대 때에 각 나무는 선과 진리의 어떤 특별한 종류를 의미했기에, 작은 숲에서 개최된 예배는 숲의 나무들의 종류에 일치하고 있었다. 여기서 언급된 포풀러 나무는 흰 포풀러 나무이다, 이 나무는 나무의 흰 것으로부터 그것의 이름이 유래되어 불리우고 있다. 이로부터 “포풀러 나무”는 진리로부터 있는 선을 의미했다; 또는 같은 말로 진리의 선을 의미했다. 이 나무가 호. 4:13에서 언급되는데, 거기서는 반대적 의미, 즉 거짓된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개암나무, 그리고 플라타너스 나무. 이는 파생되는 자연적 진리들로부터 의 힘을 의미한다. 이는 “개암나무”, “플타너스 나무”의 의미가 자연적 진리들이다로부터 분명해진다. 이것이 이 나무들의 의미이다는 것은 말씀의 다른 장소로부터 명백해질 수 없다, 단지 에스겔서에서 “플라타너스 나무”의 언급만 있다:
하느님의 동산에 있는 삼나무들이 그를 덮어 가리지 못하고, 전나무는 그의 굵은 가지만도 하지 않고, 그리고 플라타너스 나무는 그의 가지들만큼 하지 않다, 그의 아름다움에 견줄 어떤 나무도 없었다 (겔. 31:8);
위 구절이 취급하는 주제는 지식들과 영적 교회의 인간에 관련되는 합리적인 것들이다. “하느님의 동산”은 영적 교회이다; “삼나무들”은 합리적인 것들이다; “전나무”와 “플라타너스나무”는 자연 평면의 것들; “전나무”는 선 측면에서의 자연적인 것들; “플라타너스 나무”는 진리 측면에서의 자연적인 것들이다.

그리고 그것들의 껍질을 벗겨 흰색이 나오게 하고 막대들이 흰색이 드러난채 있게 했다. 이는 진리의 내면의 힘에 의해 질서적으로 배열됨을 의미한다. 이는 “껍질 벗기기”, 또는 “나무 껍질들”의 의미가 내면의 것들이 빛으로 오도록 외면의 것들을 제거함, 고로 벌거벗음, 벗김이다로부터; “희다”의 의미가 진리이다로부터; 그리고 “막대”의 의미가 힘이다로부터; 여기서는 내면의 힘인데, 그 이유는 나무 껍질 안쪽에 있는 막대이기 때문이다. 진리의 내면의 힘으로 질서적으로 배열함은 내면의 인간이 외면의 인간쪽으로 영향력을 행사함, 또는 영적 인간이 자연적 인간쪽으로 영향력을 행사함이다; 그 이유가 자연적 인간 안에서 선과 진리의 질서적인 모든 배열은 영적 인간으로부터 오기 때문이다(즉, 영적 인간을 통하여 주님으로부터), 그리고 사실상 자연적 인간 안에 있는 진리를 통하여서 이다; 그 이유가 주님은 영적 또는 내면의 인간의 선 안으로 흘러드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이 거듭날 때까지에서는 선을 통하는 직접적 방식이 아닌 그 안의 진리를 통하여 자연적 인간 안으로 흘러드신다; 그러므로 자연적 인간 안에서 질서쪽으로의 모든 배열은 내면의 인간에 의해 결과되어진다. 이 외의 방법으로는 자연 평면, 또는 자연적 인간은 질서쪽으로 배열되는 것이 가능할 수 없다(거듭날 수 없다). 질서적 배열, 또는 거듭남이 내면의 인간에 의해 실시된다는 것은 진리를 인정함으로부터 분명해진다. 진리를 인정함은 내면의 인간에 의해 인정함이 있지 않으면 인정함은 없다; 그리고 또한 양심으로부터의 경우에서도, 이는 내면의 인간에 의해 진리를 인정함이다; 지각으로부터인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질서로의 배열은 진리를 수단으로 내면의 인간에 의해 결과되기에, 힘(능력, power)이 진리라고 단언되고, 또한 힘을 의미하는 막대에 의해, 또한 손에 의해 힘이 의미된다; 이는 본문 외 많은 구절들에서 확증해볼 수 있다. 유의할 점은 힘이 진리 자체에서 있는 것이 아니라 사실상 힘은 선 안에 있다는 것이다. 고로 선으로부터 진리 안에 있다; 더 꼼꼼하게 말하면, 주님으로부터 선을 통하여 진리 안에 있다. 이는 어느 정도이지만 진리의 내면의 힘이 질서적인 배열을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최고 의미일 경우, 이 본문은 주님이 취급되는데, 그분 자신의 힘이 의미된다; 그 이유가 신성은 자체적으로 힘을 가지기 때문, 그 이유는 신성의 힘은 다른 곳에 근원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그가 껍질을 벗긴 가지를 도랑들에 놓았다. 이는 더 준비를 함을 의미한다. 이는 뒤이어지는 것으로부터 분명해진다; 그 이유가 뒤어어지는 대목에서 진리의 내면의 힘의 효과가 취급되기 때문이다. 즉 힘이 “막대들”에 의해 의미된다; 내면의 인간에 의한 질서적 배열이 “벗김”에 의해; 그리고 “도랑들, gutters”에 의해서는 자연 평면에 있는 진리의 선이 의미된다.

양떼들이 물을 마시러 오는 물 구유통들 안에. 이는 진리에 애착함을 의미한다. 이는 “물”의 의미가 지식들(주관적 지식들)과 기억 속의 지식들(객관적 지식들)이다로부터 이것들은 자연적 인간의 진리들이다; “마시는 구유통”, 또는 “물 구유통”, 이는 물을 담는 그릇인 바, 내적 의미에서는 진리의 선들, 선들이 진리의 그릇이 됨으로부터; 그리고 “마시러 옴”의 의미가 진리에 애착함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마시러 오다”가 진리에 애착함인 이유는 이것이 목마름을 암시하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목마름은 욕구, 바램, 고로 진리를 앎에 애착함, 진리를 빨아들임에 애착함을 의미하다, 그리고 이것은 “물”이 일반적으로는 진리를 의미하기 때문에서 이다; 이에 반해 “배고픔”도 욕구, 바램을 의미하지만, 선을 빨아들임에 애착함을 의미한다; 이것은 식품으로 사용되는 것 중 대표적인 것인 “빵”이 선을 의미하기 때문에서 이다(2165항). 고로 이 본문이 진리에 애착함을 의미함이 분명해진다.

양떼를 마주 보게; 그리고 양떼들이 물을 마시러 왔을 때 그것들은 흥분했다. 이는 그들이 결합되도록 애착조차도 열정을 내기까지 조차 함을 의미한다. 이는 “마시러 옴에서 흥분을 함”의 의미가 애착의 열정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흥분을 함”이 열정을 의미하는 것은 분명하다; 그리고 “마시러 옴”이 진리에 애착함인 것은 앞에서 살폈다. “양떼를 마주 보게”가 그것들(진리와 선)에 결합이 있어지도록 이다고 말하는 이유는 쳐다봄이 애착을 자극함(흥분시킴)을 포함하기 때문에서 이다. 이 방식에서 영적인 것들도 결합한다. 더욱이 진리와 선을 이식함 모두, 또한 결합함 모두는 애착을 수단으로 작업되어진다. 습득된 진리들과 선들, 인간이 감명받지 못한, 더욱이 인간이 아직 애착하지 않고 있으면, 그것들이 기억 안으로 들어오기는 하지만, 벽에 살짝 붙은 듯 있어 살짝 부는 바람에도 어디론가 날려지고 마는 깃털 같다.
기억 안으로 들어가는 것들의 경우는 이렇다: 애착 없이 들어가는 경우는 기억의 그늘에 빠져 든다; 그러나 애착과 더불어 들어가는 경우는 빛에 온다. 빛에 있을 경우, 제아무리 사소한 주제라 여겨지는 것이라 해도 명료하고 생생하게 보여지고, 나타나는 것이 중요하다 여겨진 주제와 동등하다. 그러나 자기 주변이 그늘인 이들의 경우는 이렇지 않다. 이것이 사랑의 애착의 결과이다. 이로부터도 진리가 이식됨의 모두, 그로부터 선과의 결합 모두는 애착을 수단으로 결과된다는 것을 알게 한다; 그리고 애착이 더 클수록, 더 강한 결합이 있다. 여기서 “애착의 열정(ardor)”은 가장 깊은 애착이다.
그러나 진리들이 선 안에 심어지고, 선과 결합하려면, 진리와 선에 애착함을 수단으로 해야 한다, 이 애착들은 그것들의 원천들로부터 일 때만, 즉 이웃을 향한 선행과 주님을 사랑함으로부터서만 잘 진행된다. 그러나 악들과 거짓들은 이와 반대여서 악과 거짓에 애착함을 수단으로 심어지고 결합된다, 이것들은 그것들의 원천인 자기를 사랑함과 세상을 사랑함으로부터서만 잘 진행한다. 두 경우가 이렇고, 내적 의미에서 취급되는 여기서의 주제가 자연적 인간 안에서의 선과 진리의 결합이므로, 여기서와 뒤이어지는 본문에서 양떼들이 마시러 올 때 그것들이 흥분한다는 언급을 하여 위와 같은 경우가 의미되어지게 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양떼들은 막대들에서 흥분을 했다. 이는 그분 자신의 힘으로부터의 결과를 의미한다. 이는 “흥분함, growing warm”의 의미가 애착으로부터의 결과이다로부터; 그리고 “막대들”의 의미가 그분 자신의 힘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리고 양떼들은 부분적으로 색깔 있고, 얼룩지고, 그리고 반점 있는 것들을 생산했다. 이는 그것에 의해서 자연적 선 자체는 “라반”으로 의미된 중간에 위치하는 선으로부터 그것과 비슷한 것들을 가졌음을 의미한다. 이는 생산함(산출함, 낳음)이 인정함과 결합함이다로부터 (3911, 3915항); “부분적으로 색깔이 있다”가 악과 섞인 진리들이다로부터; “얼룩지다”의 의미가 악과 섞인 선들이다로부터; 그리고 “반점이 있다”가 거짓들이 섞인 진리들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런 것들이 여기서 의미된 것들, 즉 “라반”에 의해 의미된 선으로부터 오는 것이 마치 원금을 저축해 두었는데 이자가 발생하여 원금이 불어나듯, 야곱에 의해 표현된 자연적 진리의 선의 불어남이 발생한 것이다.

그리고 야곱은 어린 양들을 분리했다. 이는 순진에 관하여를 의미한다. 이는 “어린 양들”이 순진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여기서의 의미를 “순진에 관하여”라고 말했는데, 그 이유는 이어지는 본문에서 취급되는 주제가 자연 평면의 선과 진리를 배열하는 것이고, 이 배열함이 순진을 받아들이고 적용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양떼의 얼굴들을 부분적으로 색깔 있는 것들을 향하도록 했다. 이는 악과 거짓들과 더불어 흩어져 있는 진리들 쪽으로를 의미한다. 이는 “부분적으로 색깔이 있다”의 의미가 흩어져 악들과 섞인 진리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리고 모든 검은 것. 이는 그런 종류의 상태, 즉 “어린 양들에 있는 검은 것”에 의해 의미된 상태를 의미한다.

라반의 양떼 안에서. 이는 “라반”으로 의미된 선 안에서를 의미한다. 이는 “양떼”의 의미로부터, 그리고 라반의 표현이 선이다로부터 꼼꼼히 말하면 중간의(중매하는) 선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 선을 수단으로 자연 평면은 선들과 진리들을 가진다.

그리고 그는 스스로 자신만을 위한 가축떼를 놓았다. 이는 그분 자신의 힘에 의해 선들과 진리들을 분리하심을 의미한다. 이는 “(가축) 떼들, droves”, 또는 “양떼, flock”의 의미가 선들과 진리들이다로부터; 그리고 “스스로 자신만을 위해 놓다”의 의미가 그분 자신의 힘으로 획득해오신 것들을 분리하는 것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여기서의 최고 의미에서 취급되는 주제는 주님이시고, 어떻게 그분이 그분의 자연 평면을 신성으로 만드셨는지, 그리고 이것이 그분 자신의 힘으로부터, 그리고 여전히 질서에 따른 수단들에 의해서 이다. 그분이 자신 안에서 신성으로 만드신 선들과 진리들이 여기서 “가축떼들, droves”이고, 이것을 그분은 스스로, 자신만을 위해 놓으셨다.

그리고 그것들이 라반의 양떼와 섞이지 않게 했다. 이는 “라반”으로 의미된 선으로부터 절대적으로 분리됨을 의미한다. 이는 지금까지 말해왔던 것들로부터 분명해지는 바, 설명은 생략한다. 간단히 더 설명하면, 신성한 선들과 진리들은 인간인 것으로부터의 것은 어떤 것이든지 절대적으로 모두 분리되어야 한다. 그 이유는 신성으로부터의 것은 인간의 것 넘머이고 무한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단어들의 내적 의미들에 관하여 털어놓은 사항들은 너무나 내면적이고 너무나 신비해서 이해력이 받아들여 그 안에 진열해두기에는 무리일지 모른다. 그 이유가 취급된 주제가 최고 의미에서는 주님, 어떻게 주님이 그분의 인간 평면을 신성으로 만드셨는지 이기 때문; 그리고 표현적 의미에서, 그분이 인간을 거듭나게 하실 때, 어떻게 인간의 자연 평면을 만드시는가에 관해서 이기 때문이다. 이 사항들은 내적 의미에서 충분히 표출되었다.
최고 의미에서 여기에 포함된 것들은 주님에 관한 것, 즉 어떻게 그분 자신의 힘으로 그분은 자신 안에 있는 자연 평면을 신성으로 만드셨는가 인데, 이 사항은 천사의 이해력도 다 이해하지 못하는 수준, 즉 그들의 이해력을 초월해 있다. 이 사항의 얼마 만큼은 인간의 거듭남을 되새겨보면 알는지 모른다, 그 이유는 인간의 거듭남은 주님의 인간이 신성이 되심(Lord’s Glorification)의 형상(image)이기 때문이다. 이 거듭남으로부터 인간은 얼마 만큼이라도 어림할 수 있을지 모른다 (어림할 수 있다는 것을 놓고 누구나 가능성이 없다고 잘라 말할 수는 없겠지만, 아마 거듭나져온 이들의 경우에만 해당될 것이다). 어림하는 것도 육체 안에 있는 이상 대단히 불명료한 수준이다. 그 이유가 인간의 육체적이고 세상적인 것들은 당사자의 마음을 깜깜한 구석은 아니더라도 그늘진 쪽으로 몰아 처박아 아주 낮은 마음의 수준에 감금하기 때문이다. 더구나 거듭나져오지 않고 있는 이들은 지각들이 없기 때문에, 그나마 지식들마저 없으면 약간의 납득도 불가능하다. 이들은 선행에 애착함이 수단이 되어 거듭남이 결과한다는 것을 아는 것조차도 못한다; 그러므로 그들은 양심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한다; 게다가 내적 인간이 외적 인간과 상응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그들의 상상 속에 존재해보기도 힘들다. 이들도 본문의 단어들을 모르는 것은 아니고, 문맹자가 아닌 이상 대다수의 사람들이 이 단어들을 읽을 수 있다. 그러나 이들은 단어로부터의 어떤 것에 무지해 있다. 이 단어가 어떤 것을 의미하기에 여기에 이런 말씀이 나열되는지를 생각해보는 것조차 결핍된 현실을 보기만 해도, 이 본문들에 신비함이 내적 의미에서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 반사적으로 표명된다. 다시 말해 이 본문 같은 경우는 아마 어둠 속에서 무엇을 보라는 것, 귀머거리에게 잘 알아들으라고 큰소리로 외쳐대는 것일지 모른다. 더욱이 이들 안에 당당하게 군림해 그를 통치하는 자기를 사랑함과 세상을 사랑함으로부터의 애착들이 위 신비함을 알게 허용하지 않고, 아예 보지도 듣지도 못하게 한다. 이 두 사랑이 위 신비함을 즉각 거절하고, 설사 깜박하고 삼켰다 해도 즉시 토해낼 것이다. 그러나 선행에 애착하는 이들의 경우는 완전히 다르다. 이들은 알게 된 이런 사항들에 가슴이 벅차다. 그 이유가 그들과 함께 한 천사들이 인간 당사자가 이 신비함에 관한 지식들 안에만 있어도 행복함 안에 있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이때 당시 천사들은 주님을 취급하는 사항들임을 알고 있기 때문, 또한 그 사항 안에 천사들이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이웃과 그의 거듭남을 취급하는 내용들 안에 있기 때문이다. 이 본문의 신비함을 읽는 동안, 천사들로부터(엄밀히 말해 주님으로부터 천사들을 통하여) 있는 기쁨과 복됨은 선행에 애착하는 이들 안에 흘러든다; 그리고 한걸음 더 나아가 이 본문 안에 신비함으로부터의 거룩함이 있다고 믿을 때 더 한층의 기쁨과 복됨이 있다, 이에 더하여 이 본문의 내적 의미에 포함된 사항들의 얼마라도 납득할 때, 더 한층 기쁨과 복됨이 있다.
여기서 취급된 주제는 주님이 내적 인간의 선 안으로 유입하심 이다, 그리고 실지로 선을 통하여 진리 안으로도 유입하신다; 그 다음 유입됨은 외적, 또는 자연적 인간 안으로 있다, 그래서 (자연 평면의) 선과 진리 안으로 유입이 거행된다; 또한 (자연 평면에서) 진리를 받아들임이 있고, 이 진리는 거기(자연 평면)에 있는 선과 결합함이 거행된다; 그래서 수단이 되어 섬기는 선이 여기서 “라반”과 그의 “양떼”에 의해 의미되고 있다. 말씀의 내적 의미에 있고, 말씀의 내적 의미가 자기들의 실지의 말씀이 되는 천사들은 이 주제들이 인간의 납득력에 거의 당도하지 않지만, 당도한다 해도 금새 자기의 희미함에 꾸겨넣어지지만, 그들은 무수히 많은 것들을 보고 지각한다. 인간의 이런 수준은 이 주제에 관해 위와 같은 극히 일반적인 수준 외에 더 이상 뾰족하게는 설명할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41, 42절. 앞장 서 온 무리의 양떼로부터의 모두 각각이 흥분할 경우, 야곱은 도랑에서 먼저 함께 온 양떼의 눈 앞에 막대들을 두어 막대들에서 흥분하게 하였다. 42 그리고 뒤따라 온 양떼들에게는 그것들을 두지 않았다. 나중에 온 떼들은 라반의 것이고, 처음에 온 떼는 야곱의 것이었다.

앞장 서 함께 온 것들의 양떼로부터의 모두 각각이 흥분하는 경우. 이는 자발적으로 있는 것들을 의미한다. 이는 “흥분함”의 의미가 애착의 열정과 그것의 결과이다로부터; “양떼”의 의미가 진리와 선이다로부터; “앞장 서 함께 옴”의 의미가 자발적인 것들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앞장 서 함께 온 것”이 자발적인 것들이다는 것은 이 구절의 내적 의미의 연결로부터, 그리고 애착으로부터 있는 것은 무엇이든 자발적이다로부터, 특히 “흥분함”에 의해 의미된 것인, 애착의 열정으로부터 있는 것은 더욱 자발적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래서 더욱 자발적인 것이 여기서 “흥분한다”는 말을 두번 반복하여 그것을 강조하고 있다; 또한 원어에서 이 단어로부터 파생된 의미가 최대한도로 사랑함이다로부터도 짐작된다. 더구나 여기서 자연 평면의 진리와 선의 결합이 취급되고, 이 결합은 자발적이지 않으면 결과되지 않는다는 것, 즉 자유한 가운데서만 결합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것은 “앞장 서 함께 온 무리의 양떼로부터의 모두 각각이 흥분함”, 또는 “앞장 서 함께 온 양떼의 무리의 모두 각각이 흥분함”이 자발적으로 있는 선들과 진리들, 또는 자유함에 있는 선들과 진리들, 같은 말로 최대한도의 애착으로부터 있는 선들과 진리들을 의미함을 보여주고 있다.

야곱은 도랑에서 양떼의 눈 앞에 막대들을 놓아, 막대들에서 흥분하도록 했다. 이는 그분 자신의 권능에 의해 불러 일으켜지고 결합하는 것들을 의미한다. 이는 “막대”의 의미가 힘이다로부터; 그리고 이것이 주님을 서술할 경우, 그분 자신의 힘이다로부터; 그리고 양떼가 흥분하도록 도랑에서 그것들의 눈 앞에 놓다“의 의미는 그것들이 결합하라고 불러 일으킴이다로부터 알게 되는데, 이는 앞에서 이미 살폈다.

그리고 뒤따라 함께 온 양떼들에게는 그것들을 두지 않았다. 이는 강제적으로 있는 것들을 의미한다. 이는 “뒤따라 함께 온 양떼, 또는 나중에 함께 온 양떼”의 의미로부터 알게 된다. “앞장 서 함께 온 양떼, 또는 처음에 함께 온 양떼”는 자발적인 것, 또는 자유한 것임은 이미 살폈다. “나중에 함께 온 양떼”는 강요당한 것, 또는 자유하지 않은 것을 의미한다. 이는 내적 의미에서 있는 연결로부터 분명해진다; 뿐만 아니라 “흥분함”이 이 대목에서는 언급되지 않는다는 것, 즉 거기에는 애착의 열정이 없다는 것으로부터도 알게 된다. 애착으로부터 있지 않은 것은 무엇이든 그것은 자발적인 것, 자유한 것이 아니다, 그 이유는 자발적, 또는 자유로이 있는 모든 것은 애착 또는 사랑으로부터 이기 때문이다. 이 단어의 원어에서 파생된 단어 중에는 표현에 불충분함을 뜻하는 단어도 있다; 그 이유가 애착의 열정이 불충분해감이 더할수록 자유함은 감소되기 때문이다; 이때 행동된 것은 자유로이 했다가 아니고 결국은 강제로 했다가 되기 때문이다.
진리와 선의 모든 결합은 자유함에서, 또는 자발적인 상태로부터 결과된다는 것, 결과적으로 모든 개혁됨과 거듭남이 그렇다는 것은 이미 인용한 구절에서 살폈기도 하다; 그리고 이 반대의 경우인 자유가 결석한 상태에서는 결합이 없다, 거듭남도 결과될 수 없다는 것도 살핀 바 있다. 주님의 섭리, 인간의 구원, 그리고 많은 이들이 지옥에 떨어짐을 추론하는 동안에서, 인간의 자유한 상태에 있지 않으면 진리와 선의 결합도 없고, 진리와 선을 자기 것이 되게 함도 없고, 결국 거듭남도 없다는 것을 알아채지 못하는 이들은 자신을 그늘들에 내던지고, 결과적으로 오류의 무덤 안에 묻힌다. 그 이유는 그가 상상하는 것이, 만일 주님이 마음만 작정하시면, 모든 이는 지옥 갈 일이 없다고, 그분이 기적이나, 죽은 자를 살리시거나 직접 계시해줌, 또는 인간을 악과 거짓으로 천사들을 시켜 방어해줌으로, 또는 강력한 강제 수단으로 인간을 선쪽으로 몰아세우심으로 인간이 회개를 수행하게 하실 수 있고, 이런 저런 인간이 모르는 기발난 수단을 동원하실 수 있다고 상상하기 때문이다.
이런 자가 한가지 깜박한 대목은 위 모두가 강제적이어서 누구도 위와 같은 수단을 가지고 개혁이 가능해질 수 없다는 것에 대해서 이다. 어떤 강제성에 속하든 강제성은 인간 당사자에게 어떤 애착도 나누어주지(immpart) 못한다. 또는 만일 당사자에게 어떤 애착을 강제로 나누어주려 들면, 이것은 악에 애착함과 동맹을 맺게 된다. 그 이유가 (처음에) 거룩한 어떤 것이 불어넣어진다, 실지로 거룩한 어떤 것이 불어 넣어진다; 그러나 인간의 상태가 바뀔 때, 인간이 이전의 애착들로 되돌아오면, 즉 악들과 거짓들의 상태로 되돌아 오면, 그때 거룩한 것들은 그 자체를 악들과 거짓들과 결합한다, 하여 모독된다, 급기야 모든 지옥들 중에서도 가장 비참한 지옥쪽으로 자신을 이끌고 만다. 이런 이유로 공개적인 기적들은 오늘날 수행되지 않는다, 그러나 기적이 수행됨이 없는 것은 아니고 단지 공개적이지 않다는 것, 즉 인간의 눈에 띄는 식의 기적은 없다는 말이다; 즉 오늘날의 기적은 인간에게 거룩함을 입힌 듯 하여 당사자로 분발하게 하지 않는다는 것, 인간의 자유를 거두어가는 식에서 수행되지 않는다는 것; 그러므로 죽은 자가 다시 일어나지 않는다, 그리고 인간이 악을 행하려 들기 직전 어떤 계시로, 또는 천사를 시켜 그를 제지하여 악에서 손을 떼게 하거나, 공개적인 강제성을 동원해 선쪽으로 당사자를 이동하게 하는 식의 기적은 없다.
인간의 자유는 주님이 일하시는 것 안에 있다, 그리고 이를 수단으로 그분은 그를 구부리신다(권고하신다); 그 이유가 모든 자유가 인간의 사랑 또는 애착 속에, 애착으로부터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의지 속에, 의지로부터 있다. 만일 인간이 자유함 안에서 선과 진리를 받지 않으면, 선과 진리는 그의 것이 됨, 자기 것으로 삼아지지 않는다. 설사 누군가가 그렇게 하도록 강제당할 때, 그것들은 그의 것이 아니고, 단지 당사자 속에 있을 뿐이다. 이렇게 선과 진리를 지니는 인간으로부터 진행되는 선과 진리는 자신 스스로 행하여지는 것이 아니다. 인간이 시험들이나 영적 전투들 안에 있을 경우, 간혹 선쪽으로 강요당하는 듯 나타날 때가 있는데, 이는 단지 여느 때보다 더 강한 자유를 가지는 것일 뿐이다. 또는 인간이 선과 진리쪽으로 자신을 강요할 때도 마치 자신이 자신을 강요하는 듯 나타난다; 그러나 이것은 자기의 자아를 밀어붙이게 하는 수준이다. 누군가가 자신을 강요할 때, 그는 내부에 있는 자유로부터 그렇게 하는 것이다. 이럴진대, 주님의 섭리에 관하여, 인간의 구원에 관하여, 그리고 많은 이를 지옥에 빠트림에 관하여서에 이르기까지를 추론하는 이들이 자신들을 어떤 그늘 안으로, 어떤 오류 안으로 침몰시키는지 자명해진다, 더욱이 그들은 주님께서 작업하시는 수단이 자유이다는 것, 결코 강제 충동으로가 아니다는 것을 모르고 있다; 거룩함에 속하는 것들을 두고 강제성을 동원하는 것 만큼 위험한 것은 없다. 거룩한 것은 반드시 자유함 안에서 받아져야 한다.

나중에 함께 온 것들은 라반의 것이었다는 자신의 애착과 자신의 품질에 일치하지 않는 것들은 뒤에 남겨짐을 의미한다. 그리고 먼저 함께 온 것들은 야곱의 것이었다는 자발적인 것들, 또는 자유로운 상태에서 있어진 것들은 결합되어졌음을 의미한다. 이는 이미 살폈다. 강제적인 것들에 의해 여기서는 결합되지 않았던 것들, 그리고 결합될 수 없었던 것들이 의미되었다; 그리고 자발적인 것들에 의해 결합되었던 것들, 그리고 결합될 수 있는 것들이 의미되었다. 후자의 경우, 자발적인 것들은 그것들의 애착들과 그것의 품질에 따라서 있다는 것도 뜻하고 있다. “라반”과 그의 “양떼”에 의해 의미된 선이 쓸모 있음에 충당된 후, 그 다음 분리된다고 이미 상술했었다. 이 분리됨은 다음 장에서 다루어진다.

43절. 그리고 이 사람은 자신을 극도로 크게 퍼트렸다, 그리고 그는 많은 양떼들, 그리고 여종들, 그리고 남종들, 그리고 낙타들, 그리고 나귀들을 소유했다.

그리고 이 사람은 자신을 극도로 크게 퍼트렸다. 이는 증가함을 의미한다. (즉 선과 진리가 증가함이다) “자신을 퍼트림”은 증가되어지는 것; “극도로”는 측량하기 힘들 정도로를 의미함이 분명하다.

그리고 그는 많은 양떼들을 소유했다. 이는 그 결과인 내면의 선들과 진리들을 의미한다. 이는 “양떼들”의 의미가 선들과 진리들이다로부터(343항); 그리고 이것들은 내면적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리고 여종들과 남종들. 이는 중간의 선들과 진리들(즉 자연적 선들과 진리들 자체)을 의미한다. 이는 “여종들”은 자연 평면의 애착들, 그러므로 자연 평면의 선들이다로부터; 그리고 “남종들”은 자연적 인간의 진리들인 기억 속의 지식들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리고 낙타들, 그리고 나귀들. 이는 외면과 외적 측면에 있는 선으로부터의 진리들을 의미한다. 이는 “낙타들”이 일반적 기억 속의 지식들이다로부터 (일반적 기억 속의 지식들은 더 낮고 더 외면에 있는 선으로부터의 진리들이다.) 그리고 “나귀들”의 의미가 (낙타로 의미된 것보다) 더 낮고 외적 측면에 있는 자연적 선으로부터의 진리들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내면의 선들과 진리들이 무엇인지; 또한 중간의 선들과 진리들이 무엇인지; 마찬가지로 외면과 외적인 선들과 진리들이 무엇인지는 이미 말해졌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인간 안에는 세 가지 것들, 즉 육체적, 자연적, 합리적인 것들이 있다. 육체적인 것은 가장 바깥쪽에, 자연적인 것은 중간에, 합리적인 것은 내면에 있다. 이 셋 중에서 어느 하나가 인간 안에서 다른 것 위에 군림할 때, 그는 육체적 인간이든, 자연적 인간이든, 합리적 인간이든 어떤 종류의 인간이 되어 있다. 인간의 세 부분은 경이로운 방법으로 교통하고(communicate) 있다; 육체적인 것은 자연적인 것과, 그리고 자연적인 것은 합리적인 것과 교통한다. 인간이 태어날 당시, 그 인간은 육체적일 뿐이나, 완전해짐을 향유할 수 있는 수용력을 안쪽에 가지고 있다. 그 후에 그는 자연적 인간이 되어간다, 마지막으로 그는 합리적 인간이 될 수 있다; 이로부터 이쪽이 저쪽과 교통함이 있는 것을 알는지 모른다. 육체적인 것은 감각들을 수단으로 자연적인 것과 교통한다. 그러나 이해력에 속하는 것들을 수단으로, 그리고 의지력에 속하는 것들을 수단으로 구분되고 분리된 방식으로 교통한다. 그 이유가 이 두 자질 (faculties, 이해력과 의지력)들은 인간이 인간이기 위하여서라면, 또는 적어도 인간이 될는지 모르기 위하여서라면 어쨌든 반드시 완전해져야만 하기 때문이다. (오각 중에서) 시각과 청각은 인간의 지성력을 완전하게 하는데 특별히 기여한다; 그리고 나머지 삼각은 의지력에 특별히 집중되고 있다. 이 오각들을 수단으로 인간의 육체적인 것들은 그의 자연적인 것, 즉 그의 중간의 부분과 교통한다. (이는 이미 상술했다). 그 이유가 감각들을 수단으로 (인간 안에) 들어간 것들은 자연 평면을 일종의 그릇(receptacle)으로 하여 자체들을 놓아두기 때문인데, 이 때의 자연 평면은 기억(memory)이다. 자연 평면의 정신적 측면에서 비롯되는 기쁨(delight), 육체적 측면에서 비롯되는 기쁨(쾌락, pleasure), 그리고 바램(욕구, desire)은 의지력에 속하고, 자연적 선들이라 불리운다.
위에 상술한 것들을 수단으로 인간의 자연 평면은 그의 내면 부분인 합리성과 교통한다. 이렇게 교통함으로 자연 평면으로부터 합리성으로 자체를 승강시킨 것들은 합리적 평면을 자신들을 위한 일종의 그릇으로 삼아 자신들을 놓아두는데, 이 때의 그릇은 내면의 기억이라 불리운다. 합리적 평면 안의 복되고 행복한 것들은 의지력에 속한다, 그리고 합리적 선에 속하고, 합리적 선으로부터 있다; 그리고 어떤 것을 내면에서 (정신적으로) 바라봄들(views), 전망함, 또는 (정신적 측면의) 시야들과 지각들은 이해력에 속하고, 이것들에 속하는 것을 합리적 진리들이라 부른다. 위의 셋이 인간을 구성하고, 이 셋들 사이에 교통이 있다. 외적인 감각들은 육체적인 것들이 자연적인 것과 교통하는 수단이다; 그리고 내면의 감각들은 인간의 자연적인 것들이 합리적인 것들과 교통하는 수단이다. 그러므로 외적인 감각들에 참여하는 자연 평면에 있는 것들은 육체에 적당한 바, 선으로부터 외면과 외적인 진리라고 불린다; 그러나 인간의 영에 적당한 내면의 감각들에 참여하는 것들, 그래서 이것이 합리성과 교통하는데, 이것들은 내면의 선들과 진리들이라고 불리운다. 이 둘 사이에 있는 것, 즉 양쪽에 참여하는 것(중매하는 것)은 중간의 선들과 진리들이라 불리운다. 이 셋은 내면들로부터 질서쪽으로 있다, 그리고 이것이 본문의 내적 의미에서 “양떼들, 그리고 여종들, 그리고 남종들, 그리고 낙타들, 그리고 나귀들”에 의해 의미되어 있다.
**************************************

창세기 제 31 장

성경: 창세기 31장

1. 그리고 그는 라반의 아들들이 하는 말을 들었다. 말하기를, 야곱이 우리 아버지의 모든 것을 가져 갔다. 그리고 우리 아버지의 것으로부터 그는 모든 그의 풍부함을 만들었다.
2 그리고 야곱은 라반의 얼굴 표정을 보았다, 그리고 보라 그는 예전 같지 않았다.
3. 그리고 여호와께서 야곱에게 말하셨다, 네 아버지의 토지에로, 그리고 네 출생지로 되돌아 가거라, 그리고 나는 너와 함께 있겠다.
4. 그리고 야곱은 보냈다, 그리고 라헬과 레아를 그의 양떼가 있는 들판으로 불렀다. 그리고
5. 그는 그들에게 말했다, 내가 당신들의 아버지의 얼굴을 보았더니, 그는 예전과는 아주 딴판이다. 그리고 내 아버지의 하느님께서 나와 함께 계셔왔다.
6. 당신들도 아는 바, 나는 전력을 다하여 당신들의 아버지를 섬겼다.
7. 그리고 당신의 아버지는 나를 속였다, 그리고 내 보상을 열 번이나 바꾸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그가 나에게 악행을 하는 것을 내버려두지는 않으셨다.
8. 만일 그가 얼룩진 것들은 다 너의 보상이다 라고 말하면 온 양떼가 얼룩진 것을 낳았고, 그가 부분적으로 색깔이 있는 것이 너의 보상이다고 말하면 온 양떼는 부분적으로 색깔 있는 것을 낳았다.
9.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당신들의 아버지의 획득물을 거두어서, 그것을 나에게 주셨다.
10. 그리고 그 양떼가 흥분하기 시작했을 때 나는 내 눈을 들었고, 꿈에서 보았다, 그리고 보라 양떼 위에 뛰어 오른 숫염소는 부분적으로 색갈 있고 얼룩지고, 회색이었다.
11. 그리고 하느님의 천사가 꿈에 나에게 말하셨다, 야곱아. 그리고 나는 말했다, 저를 바라보 고 있나이다!
12. 그리고 그는 말했다, 바라건대 네 눈을 들어보라, 그리고 양떼 위에 올라 탄 모든 수염소는 부분적으로 색깔 있고 얼룩지고, 회색인 것을 보아라. 그 이유는 내가 라반이 너에게 했던 모두를 보아왔기 때문이다.
13. 나는 네가 기둥에 기름부었던 곳, 네가 나에게 서원을 하였던 곳, 벧엘의 하느님이다. 이 토지에서 빠져 나가거라, 그리고 네 출생지로 돌아가라.
14. 그리고 라헬과 레아는 대답하여 그에게 말했다, 우리는 더 이상 우리 아버지의 집에서 유산이나 지분을 가지는 것이 없지 않느냐?
15. 우리는 아버지에게 외국인으로 세어지고 있지 않는가? 그러기에 그는 우리를 팔아 버렸고, 우리의 은을 먹어 치웠다.
16. 하느님께서 우리의 아버지로부터 거두어 간 모든 재물은 우리의 것이고 우리의 아들들의 것이다. 지금 하느님께서 당신에게 말한 모든 것을 행하시오.
17. 그리고 야곱은 일어났다, 그리고 그의 아들들과 그의 여인들을 낙타 위에 올렸다.
18. 그리고 그는 모든 그의 습득물, 그리고 그가 수집한 모든 그의 물질, 그가 밧단-아람에서 모았던 것인 그가 사들인 습득물을 챙겨서 가나안의 토지에 있는 그의 아버지 이삭에게로 떠났다.
19. 그리고 라반은 그의 양떼의 털을 깍으러 나갔다. 그리고 라헬은 그녀의 아버지의 것인 드라빔을 훔쳤다.
20. 그리고 야곱은 자기가 도망한다는 것을 그에게 말하지 않았는 바 그는 아람 사람 라반의 심정을 훔쳤다.
21. 그리고 그는 자기와 자기가 가졌던 모든 것을 가지고 달아났다. 그리고 그는 일어나 강을 건넜다, 그리고 그의 얼굴을 길르앗 산을 향하여 놓았다.
22. 그리고 셋째날 야곱이 도망쳤음이 라반에게 알려졌다.
23. 그리고 그는 그와 함께 그의 형제들을 거느리고 칠일 길을 추격했다, 그리고 길르앗 산에서 그에게 합류했다.
24. 그리고 하느님께서 밤에 아람 사람 라반에게 꿈에 오셨다, 그리고 그에게 말하셨다, 너는 선으로부터 악에 이르기까지 조차에서 야곱에게 말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25. 그리고 라반은 야곱을 따라 잡았다, 그리고 야곱은 산에서 그의 천막을 고정시켰다. 그리고 라반은 길르앗 산에서 그의 형제들과 함께 고정시켰다.
26. 그리고 라반이 야곱에게 말했다, 너는 무슨 짓을 했느냐, 너는 내 심정을 훔쳤다, 그리고 검에 붙잡힌 포로들 같이 내 딸들을 끌고 가버렸지 않았느냐?
27. 어찌하여 너는 도망하려는 네 자신을 감추었느냐? 그리고 나를 훔쳤느냐? 그리고 나에게 말하지 않았느냐? 그리고 나는 너를 기뻐하며, 그리고 노래하며, 소고치며, 그리고 하프를 켜며 떠나 보냈을 것이다.
28. 그리고 너는 내 아들들과 내 딸들에게 키스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았다. 지금 너는 어리석게 행동했다.
29. 내 손이 너에게 악을 행하는 하느님 같이 있게 하다니! 그리고 너의 아버지의 하느님이 어제 밤 나에게 말하셨다, 말하기를, 너는 선으로부터 악에 이르기까지 조차에서 야곱에 게 말하지 않도록 주의하여라.
30. 그리고 이제 너는 가야 하는 곳으로 가라, 그 이유는 네가 네 아버지의 집을 향하기를 갈망해왔기 때문이다. 어찌하여 너는 내 신들을 훔쳤느냐?
31. 그리고 야곱은 라반에게 답하여 말했다, 나는 당신께서 무력으로 나로부터 당신의 딸들을 데리고 갈까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
32. 당신께서 당신의 신을 누구에게서 찾든지 그는 우리 형제 앞에서 살지 못할 것입니다. 당신은 나와 더불어 있는 것을 뒤져보시오, 그리고 그것을 당신에게 가져가십시오. 그리고 야곱은 라헬이 그것들을 훔친 것을 모르고 있었다.
33. 그리고 라반은 야곱의 천막으로 왔다, 그리고 레아의 천막으로 왔다, 그리고 두 하녀의 천막으로 왔다, 그리고 그것들을 찾지 못했다, 그리고 레아의 천막에서 나가서 라헬의 천막에 왔다.
34. 그리고 라헬은 드라빔을 가져다가 그것들을 낙타의 짚 안에 놓고, 그것들 위에 앉았다. 그리고 라반은 모든 천막을 다 더듬어 나갔다, 그리고 그것들을 찾지 못했다.
35. 그리고 그녀는 그녀의 아버지에게 말했다, 제가 당신 앞에서 일어나지 못한다고 화내지 말아주세요, 그 이유는 여인의 길이 제게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는 수색했다, 그리고 드라빔을 발견하지 못했다.
36. 그리고 야곱은 성을 냈다, 그리고 라반에게 따지고 들었다. 그리고 야곱은 라반에게 답하여 말했다, 내 잘못이 무엇입니까? 제가 무슨 죄를 지었기에 당신은 불 같이 내 뒤를 추격하셨습니까?
37. 당신은 내 모든 집기들을 다 만져 보았는데 당신은 당신 집의 집기 중 무엇을 찾았습니까? 제 형제와 당신의 형제 사이에 그것을 놓고, 그들로 우리 둘 사이를 판가름하게 합시다.
38. 저는 당신과 이십 년을 지냈습니다. 당신의 양과 당신의 암염소들이 그들의 새끼를 지우지 아니하였고, 저는 당신의 양떼 속의 수양을 먹지도 않았습니다.
39. 저는 찢긴 것을 당신에게 가져다 주지 않고, 나는 그 손실을 떠안았고, 낮에 도적을 당했든 밤에 도적을 당했든 당신은 그것을 제 손에 청구했습니다.
40. 그러므로 저는 낮에는 더위가, 밤에는 추위가 나를 괴롭히는 것을 견디었습니다, 그리고 제 잠은 제 눈에서 쫓겨났습니다.
41. 저는 당신의 집에서 이십 년, 십사 년은 두 딸을 위해서, 육 년은 당신의 양떼를 위해서 당신을 섬겼습니다, 그리고 당신은 열 번씩 제 삯을 바꿨습니다.
42. 나의 아버지의 하느님,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삭이 두려워하는 분께서 저와 함께 계시지 아니하였더라면 지금 당신은 저를 빈 손으로 내보내셨을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저의 비참함과 내 손의 수고함을 보셨는 바, 어제밤 판결하셨습니다.
43. 그리고 라반은 답하여 야곱에게 말했다, 이 딸들은 내 딸들이다, 그리고 이 아들들은 내 아들들이다, 그리고 양떼는 내 양떼이다, 그리고 네가 보는 모든 것은 나의 것이다. 그리고 나는 오늘 이 딸들에게, 그들에게서 출생한 그들의 아들들에게 무엇을 할 수 있을까?
44. 그리고 이제 오라, 나와 너 사이에 언약을 만들자, 그리고 그것이 나와 너 사이에 증거가 되게 하자.
45. 그리고 야곱은 돌을 가져왔다, 그리고 그것을 기둥으로 세웠다.
46. 그리고 야곱은 그의 형제들에게 말했다, 돌들을 모아라. 그리고 그들은 돌들을 가져왔다, 그리고 돌 무더기를 만들었다, 그리고 그들은 그 무더기에서 먹었다.
47. 그리고 라반은 그것을 여갈사하두다 라고 불렀고, 야곱은 갈르엣 이라 불렀다.
48. 그리고 라반이 말했다, 이 무더기는 오늘 나와 너 사이에 증거이다. 그러므로 그는 그것의 이름을 갈르엣,
49. 그리고 미스바라 불렀다. 그 이유는 그가 말하기를, 우리가 그의 동료로부터 감추여진 사람일 것이나 여호와께서 나와 너를 지켜보실 것이기 때문이다.
50. 만일 네가 내 딸들을 박대한다면, 그리고 만일 네가 내 딸들을 제치고 여인을 데려 온다면, 우리들과 더불은 사람은 없지만 보라 하느님께서 나와 너 사이에서 증거하신다.
51. 그리고 라반이 야곱에게 말했다, 이 무더기를 보아라, 그리고 내가 너와 나 사이에 세운 이 기둥을 보라.
52. 이 무더기가 증거이다, 그리고 이 기둥이 증거가 된다, 그리고 나는 악을 위하여 이 무더기, 이 기둥을 넘어 너에게 건너 가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너는 악을 위하여 이 무더기, 이 기둥을 넘어 나에게 오지마라.
53. 아브라함의 하느님과 나홀의 하느님, 그들의 아버지의 하느님께서 우리 사이를 판결하신 다. 그리고 야곱은 그의 아버지 이삭이 두려워하는 분을 두고 맹세했다.
54. 그리고 야곱은 산에서 제사를 드렸다, 그리고 그의 형제를 불러 빵을 먹었다. 그리고 그들은 빵을 먹었다, 그리고 산에서 그 밤을 보냈다.
55. 그리고 아침에 라반은 일찍 일어났다, 그리고 그의 아들들과 딸들에게 키스했다, 그리고 그들에게 복을 빌어 주었다. 그리고 라반은 떠나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각 절의 내적 의미

1-3절. 그리고 그는 라반의 아들들이 하는 말을 들었다. 말하기를, 야곱이 우리 아버지의 모든 것을 가져 갔다. 그리고 우리 아버지의 것으로부터 그는 모든 그의 풍부함을 만들었다. 2 그리고 야곱은 라반의 얼굴 표정을 보았다, 그리고 보라 그는 예전 같지 않았다. 3 그리고 여호와께서 야곱에게 말하셨다, 네 아버지의 토지에로, 그리고 네 출생지로 되돌아 가거라, 그리고 나는 너와 함께 있겠다.

그리고 그는 라반의 아들들이 하는 말을 들었다, 말하기를, 이는 “라반”에 의해 의미된 선으로부터의 진리들이 그것의 품질로부터 자연 평면에서 주님에 의해 획득된 선과 비교함을 의미한다. 이는 “아들들”의 의미가 진리들이다로부터; 그리고 “라반”이 공동의 지주(stock)로부터 있는 방계의(2차적인, collateral) 선을 표현한다로부터; 고로 이 선은 진짜(순수한) 선들과 진리들을 받아들임을 위해 봉사하는(섬기는) 선일는지 모른다; 여기서의 경우 그렇게 봉사했던 선을 의미하는데, 그 이유는 그것의 분리가 취급되기 때문이다. 야곱이 “이 말들을 들었다”에는 라반의 선의 품질이 자연 평면에서 주님에 의해 획득된 선에 비교되어졌다가 내적 의미에 포함되고 있다; 이는 이어지는 사항들로부터 보여질는지 모른다: 즉 라반의 아들들이 분노했다는 것, 그리고 야곱이 자기 아버지의 모든 것들을 갸져갔다고 선언한 것, 야곱이 라반의 얼굴을 보니, 그는 예전 같지 않았다는 것 등으로부터 이다.
야곱에 의해 표현된 진리의 선에 비(교)하여 라반의 선의 품질은 어떠한지에 대한 것은 앞 장에서 서술하고 보여진 바 있으나, 여기서 예증을 통해, 즉 인간의 거듭남을 가지고 한 번 더 짚어보기로 한다. 그 이유는 여기서 인간의 거듭남이 표현적 의미에서 취급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인간이 거듭나아지고 있을 때, 그는 주님에 의해 어떤 종류의 중간의 선 (중매하는 선, mediate good) 안에 간직되어 있는다. 이 선은 진짜 선들과 진리들을 받아들임을 위해 봉사한다; 그러나 이 임무 수행이 끝나면, 이 선은 진짜의 선들과 진리들로부터 분리된다, 아마 거듭남에 관하여, 또는 새로운 인간에 관하여 어떤 것을 배운 모든 이라면 거듭난 이 후의 새로운 인간은 (세상에서 지니고 있어야만 하는 육체만 같을 뿐) 옛 인간과 전혀 다르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다. 그 이유가 새로운 인간은 영적이고 천적인 것에 애착함 안에 있고, 이 애착함이 새로운 인간에게 정신적 기쁨(delight)과 육체적 기쁨(pleasure, 쾌락)을 생산하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옛 인간은 세상적이고 지상적인 것들에 대한 애착함 안에 있고, 이 애착함도 옛 인간에게 정신적 기쁨과 육체적 기쁨을 생산하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새로운 인간은 천국의 것들을 목적들로 주목해서 보고, 옛 인간은 세상 안의 것들을 목적들로 주목해서 본다. 이로부터 분명한 것, 즉 새로운 인간은 옛 인간과 모든 측면에서 다르고 딴판이다는 점이다.
인간이 옛 인간의 상태로부터 새로운 인간의 상태로 데려다 놓여지기 위하여, 세상 속의 욕망들(현세에의 욕망들, conscupiscences)을 벗어야 하고, 천국에 애착함들을 반드시 입어야 한다. 이 작업은 셀 수 없이 가지각색인 바, 이는 주님만이 아실 뿐이고, 천사들에게도 주님에 의해 알게 해주신 것만에 국한되어 그들도 알고 있다; 더욱이 인간에게는 극히 적은 자에게만 주님에 의해 알려지고 있다. 그럼에도 말씀의 내적 의미 안에서는 이 사항들을 알도록 일반적, 특수적, 개별적 모두에서 명명백백하게 만들어져 있다. 인간이 옛 인간이다로부터 새 인간이다의 상태로 될 때 (즉 거듭나아지고 있을 때), 이는 (어느 목사가 누구에게 십자가의 피의 공로를 믿습니까?라고 묻는 것에 믿습니다! 라고 고백만하면 단 번에 당신은 새 인간이다 라고 어느 목사의 선포에 따라 새 인간이 되는 것이 아니라) 햇수에 햇수를 더하고 곱하여 이루어지는 것, 그렇다, 인생의 마지막까지를 포함, 인생 전체가 요구된다고 말해도 되는 시간의 길이를 거쳐 이루어진다. 그 이유가 현세에의 욕망은 뿌리채 뽑혀나가야 하고, 천국에 애착함들이 (그 자리에 주님에 의해) 은근히 심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는 이전에 가지지 않았던 생명을 선물받아야 한다. 이에 대해 당사자는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한다. 인간 생명의 상태의 변화가 이렇게 엄청 큰 폭의 차이가 있다는 것, (또한 이 큰 변화가 단 번에 되어지지 않는다고 위에 말한 바를 인정한다면,) 필시 따르는 것은 인간은 세상에 애착함과 천국에 애착함 양쪽을 오가는 선 안에 오래 간직될 필요가 있다는 것, 즉 인간은 중간의 (중매하는, 중재하는, mediate) 선 안에 오랫동안 간직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인간은 이 선 안에 간직되어 있지 않으면, 그는 천국의 선들과 진리들도 인정하는 단계에 결코 와지지 않는다.
중재하는 선, 또는 중간(middle)의 선이 “라반과 그의 양떼”에 의해 의미되고 있다. 그러나 이 중간의 선에 인간은 마냥 간직되는 것은 아니고, 중간의 선이 그 본분을 다하고 나면, 반드시 이 선은 분리되어야 한다. 이 분리가 이 장에서 취급된다. 중간에 위치한 선을 사용함이 끝나면 분리되어야 함은 유아기로부터 노년에 이르기까지에서 수행하는 상태들의 변화를 예증으로 삼아도 될는지 모른다. 크게 구분해서 인간의 시기는 유아기-아이시절-젊은 이-성년-노년이다 (요즘은 너나 나나 워낙 오래 살므로 확실치는 않지만, 위의 시기를 나이로 구별해본다면 1-3세, 4-17세, 18-29세, 30-70세, 70 이후 라고 말해도 될는지 모른다 역자주.) 어쨌든 모두 아는 바, 인간은 젊은 이로 건너갈 때, 그가 가지고 놀던 장난감들과 더불어 유아기, 어린 시절을 벗는다는 것; 그가 성숙되는 상태로 건너갈 때, 이전의 시기를 벗고; 노년기로 건너갈 때도 그렇다는 것이다. 그리고 만일 이런 변화의 과정을 되씹어 본다면, 알게 되는 바, 각 시기는 그것 나름대로 기쁨들을 가지고 있다는 것, 이것 덕분에 그는 이어지는 시기 안으로 계속되는 단계들을 받아들인다; 즉 이 기쁨들은 당사자로 다음 단계로 데려다주는 용도에 충당된다; 마지막으로 노령에 있는 그에게 총명과 지혜를 가져다주는 도우미 역할을 한다.
이로부터 분명한 바, 새로운 상태를 입을 때, 이전의 상태는 뒤에 남겨진다는 것이다.
어쨌든 위의 시기별 비교함은 기쁨들이 수단들이다는 것, 그리고 이 수단들은 인간이 이어지는 단계 안으로 진입할 때 뒤에 남겨진다는 것만은 확실하다는 점이다; 이에 반해 인간의 거듭남 동안 그의 상태는 그의 이전 상태와 완전히 다르다; 그리고 거듭나는 그를 인도하는 것은 어떤 자연적 방법에 의해서가 아니라 주님에 의해 초자연적 방법에 의해서 이다는 점이다; 누구도 주님만에 의해 설비된 거듭남을 위한 매체(media), 또는 수단에 의하지 않고, 고로 우리가 지금 말하는 중간의 선에 의하지 않고 거듭난 상태에 도달할 자는 없다. 그리고 인간이 자기의 목적으로 세상적, 지상적, 육체적인 것들을 가지지 않는 상태로, 그리하여 천국으로부터 있는 것들을 목적으로 삼는 상태 안으로 데려와졌을 때, 이때 (양쪽을 오갈 수 있는) 중간의 선은 분리되어진다. 어떤 것을 목적으로 가지는 것은 그것을 그밖의 어떤 것보다 더 사랑하는 것이다.

야곱은 우리 아버지의 모든 것을 가져 갔다. 이는 지금 “야곱”으로 의미되는 선에 속한 모든 것들이 중간의 선으로부터 그분에게 주어졌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라반의 아들들이 야곱에게 주어져서 가져 간 것이 아님을 이어지는 대목에서 알 수 있다

그리고 우리 아버지의 것으로부터 그는 이 모든 풍부함을 만들었다. 이는 그분은 그것들을 그분 자신에게 주셨음을 의미한다. 이는 “풍부함을 만듦”의 의미가 그분 자신에게 주는 것이다로부터; 그 이유가 최고 의미에서 이는 주님을 서술한다, 즉 누군가로부터 선과 진리를 가져올 일 없는 분이신 바, 오직 그분 자신으로서만 가져오실 수 있기 때문이다. 그분의 어머니쪽의 인간에 관련된 다른 선은 실로 수단으로서 그분을 섬겼다; 그 이유가 수단이 된 이 선을 라반이 의미했는데, 그는 야곱의 어머니 리브가의 형제(오라버니) 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중간의 선을 수단으로 그분께서는 자신을 위해 그분 자신의 힘으로 그분의 자연 평면을 신성으로 만드는 어떤 것들을 획득하셨다. 수단들로부터 획득하는 어떤 것이 있고, 수단에 의해 획득되는 어떤 것이 있다. 주님께서는 수단들에 의해 선을 획득하셨다, 그 이유는 그분은 사람으로 태어나셨고, 어머니쪽으로부터 그분이 추방하셔야만 하는 유전적인 것들이 파생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분은 수단들로부터 선을 획득하시지 않았다, 그 이유는 그분은 여호와로부터 임신되었고, 여호와로부터 신성을 받으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분은 자신에게 그분이 신성을 만든 선들과 진리들을 주셨다. 그 이유가 신성 자체가 필요한 것은 아무것도 없기 때문, 중간의 선조차 필요 없으셨기 때문이다; 그분은 질서에 따라 모든 것들이 행해져야만 한다는 것을 뜻하신 것이다.

그리고 야곱은 라반의 얼굴 표정을 보았다. 이는 “야곱”으로 의미된 선이 물러날 때 중간의 선과 더불어 있는 상태의 바뀜을 의미한다. 이는 야곱의 표현함이 자연 평면의 선이다로부터; 그리고 라반이 표현함은 중간의 선이다로부터; 그리고 “얼굴 표정”의 의미가 내면들, 같은 말로 상태의 변화들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 이유가 뒤잇는 말, “그가 그의 얼굴 표정을 보았다, 그리고 바라보니 그는 예전 같지 않았다”라고 말해지기 때문이다. 말씀에서 내면들이 “얼굴”에 의해 의미되는 이유는 내면들은 얼굴을 통하여 빛을 내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신들을 거울 안에서 같이, 또는 형상에서처럼 얼굴에서 표출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얼굴 표정, 생김새(안색)는 생각들의 상태들과 애착들의 상태들을 의미한다.

그리고 보라 그는 예전 같지 않았다. 이는 “야곱”에 의해 의미된 선을 향하여 상태가 완전히 바뀌웠다를 의미한다, 어쨌든 라반의 것으로부터 가져온 것은 아무것도 없고, 전과 같이 야곱의 것은 야곱 자신의 것을 가졌을 뿐이다. 오직 야곱에게 바뀐 것은 결합에 관 한 상태뿐인데, 이는 “그(라반)는 그(야곱)에게 전혀 예전 같지 않았다”는 말이 야곱을 향해 상태가 완전히 바뀌었다를 표시한다는 사실로부터; 또는 라반의 것을 가져오지(훔치지) 않았다는 사실로부터도 알게 된다.
이 구절이 인간 안에 있는 선들과 진리들에 관련하여 있는지를 납득하기 위하여 거의 누구에게도 알려지지 않은 것을 밝히 알려야만 가능할 것 같다. 참으로 알고 있고 인정하는 것은 모든 선과 모든 진리는 주님으로부터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어떤 이에게 인정된 것은 유입이 있다는 것, 그러나 이 유입을 당사자는 눈치채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알려지지 않았고, 적어도 심정에서 인정받지 못하는 것은, 인간 주위에 영들과 천사들이 있다는 것, 그리고 당사자의 내적 인간은 그들 한가운데에 있다는 것, 고로 주님에 의해 통치된다는 것, 비록 이런 사항이 말해졌다 해도, 거의 믿지 않는다는 것이다. 다른 삶에는 무수한 사회들이 있다는 것, 이 사회들은 각각의 선과 진리의 모든 부류들(genus)에 따라 주님에 의해 정리정돈되어 배치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 반대의 사회들은 악과 거짓의 모든 부류에 따라 배치되어 있다; 선과 진리의 어떤 부류들이 있지 않는 만큼, 또는 이 부류들로부터의 어떤 종(種, species)이 있지 않은 만큼, 참으로 어떤 특수한 다양함이 있지 않은 만큼, 이 부류와 종은 이와 같은 천사의 사회들을 가지지 않는다, 또는 이 부류와 종에 상응하는 천사의 사회가 있지 않다. 이와 반대로도 아니다, 즉 악과 거짓의 어떤 부류들, 부류들로부터의 종들, 참으로 어떤 특수한 다양함, 이 종류와 종들에 상응하는 악마적인 사회들이 있지 않다. 비록 인간이 위의 사회를 알아채지 못할지라도 인간 각각은 그의 내면들 측면에서(즉 그의 생각들과 애착들 측면에서) 이와 같은 사회 안에 있다. 인간이 생각하고 뜻하는 모든 것은 이 근원으로부터 있는 바, 만일 인간에게서 그가 속한 이런 영들과 천사들의 사회들을 거두어가 버린다면, 그는 그 순간 생각함도, 뜻함도 없어지고 말아 그는 절대적으로 죽은 자 같이 되고 만다. 비록 인간이 자기 스스로부터 모든 것들을 가지고 있다고, 그래서 천국도 지옥도 있지 않다고, 또는 천국이든, 지옥이든 자기로부터는 아주 멀리 옮겨져 있다고 믿는다 할지라도, 여하튼 인간의 상태는 위와 같이 있다는 말이다.
더욱이 각자 안에 있는 선이 자기에게는 단순한 것, 또는 하나로서 나타나지만, 그럼에도 다양하고, 다양한 것으로 구성되므로 그것의 일반적 측면을 일일이 조사하는 것이 가능할 수 없다. 이것은 악의 측면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이와 같은 것이 인간 안의 선이고, 인간과 더불은 천사들의 사회이다; 그리고 이와 같은 것이 인간 안의 악이고, 인간과 더불은 악령들의 사회이다. 인간은 이런 사회들을 자신에게 소환한다(출두하라고 명령한다), 즉 그는 자신을 이런 영들의 사회 안에 놓아둔다; 그 이유가 비슷한 것끼리 제휴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탐욕스러운 인간은 똑같은 탐욕 안에 있는 비슷한 영들의 사회를 소환한다. 복수함에서 기쁨을 만끽하는 자는 비슷한 기쁨 안에 있는 이들을 소환한다. 이 외의 많은 경우가 있다. 이 영들은 지옥들과 교통한다, 그리고 인간은 그것들 한가운데에 있으면서, 자신의 뜻에 있지 않고 그것들의 뜻에 있는 만큼에서 그것들에 의해 통치되어진다, 비록 인간 당사자가 자신의 기쁨으로부터, 고로 자유함으로부터 그는 그렇게 하므로 자신이 자신을 지휘한다고 상상할지라도 그렇다는 말이다. 그러나 탐욕적이지 않은 이들, 타인에 앞서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이들, 타인을 경멸하지 않는 이들, 복수함에서 기쁨을 향유하지 않는 이들은 비슷한 천사들의 사회 안에 있다, 그리고 그것들을 수단으로 주님에 의해 인도되어진다, 참으로 그들의 자유함을 수단으로 모든 선과 진리쪽으로 그는 자신이 인도되게 허용한다; 게다가 그가 더 내면적이고 더 완전한 선쪽으로 자신이 인도되도록 허용하는 만큼에 비례하여 그는 더 내면쪽이고 완전한 천사의 사회들에로 데려와진다. 그의 상태의 변화는 (그가 속하는) 사회들의 바뀜밖에 더 아니다. 이런 경우를 알도록 나에게는 수년에 걸쳐 경험을 가져보게 허락된 바 있다, 이로 인하여 인간의 유아기로부터 각자에게 친밀해진 것이 나에게도 친밀해 있다는 사실로부터 분명해졌다.
이런 모두로부터 지금 분명한 것은, 어떻게 이런 경우가 인간의 거듭남과 더불은 경우인지에 대하여서 이다, 그리고 중간의 기쁨들과 선들과 더불어, 이것들을 수단으로 그는 그의 옛 인간의 상태로부터 새 인간의 상태쪽으로 주님에 의해 가져다 놓이는지도 분명해진다는 말이다 – 즉 이것은 천사들의 사회들을 수단으로, 이 사회들의 바뀜으로 결과된다는 것이다. 중간의 선들과 기쁨들은 이런 사회들밖에 더 아니고, 이것이 주님에 의해 인간에게 적용되는데, 인간 각자가 그것들을 수단으로 영적이고 천적인 선들과 진리들을 받아들일는지 모르는 정도에서 적용된다; 그리하여 이 받아들임이 결과되면, (중매 역할을 한) 사회들은 분리된다, 그리고 더 내면쪽으로, 더 완전한 선과 진리가 그에게 인접된다. 이것이 본문에서 “라반”에 의해 의미된 중간의 선이 뜻하는 바이다, 그리고 이 선의 분리됨을 수단으로 하는 것이 이 장에서 취급되는 주제이다.

여호와께서 야곱에게 말하셨다. 이는 주님께서 신성으로부터 지각하심을 의미한다. 이는 역사적 말씀의 부분에서 있는 “말하다, say”의 의미가 지각하다 임으로부터 알게 된다. “여호와”가 주님이심은 이미 살핀 바 있다. 이로부터 “여호와께서 말하셨다”가 주님이 신성으로부터 지각하심이 의미됨을 알게 된다.

네 아버지들의 토지로 돌아가거라. 이는 그분께서는 지금 신성으로부터의 선에 자신이 더 가까워지게 해야 한다를 의미한다. 이는 아버지들(조상)의 토지의 의미가 신성으로부터의 선이다로부터, 그 이유가 주님을 서술하기 때문이다; “토지(가나안)”는 주님의 왕국을, 그리고 최고 의미에서는 주님의 신성한 인간을, 그 이유가 이것이 흘러들어 그분의 왕국을 생산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버지”는 선을 표시한다. 그리고 지금 선들과 진리들이 획득되었는 바, 이를 가지고 주님께서는 그분의 자연 평면을 신성으로 만드시는데, 이 선들과 진리들이 야곱이 라반에게 체류하고, 거기서 야곱이 풍부해짐에 의해 표현되어져 있다, 이에 뒤이어 “자기 조상의 토지로 되돌아 감”에 의해서는 그분 자신을 신성으로부터의 선에 더 가까이 있게 하시려는 것이 의미되어 있다.

그리고 네 출생지로. 이는 그분은 자신을 (신성으로부터의 선에서) 파생되는 진리에 향하게 하셔야 함을 의미한다. 이는 “출생지(nativity)”의 의미가 선으로부터 있는 진리이다로부터 알려진다. 그 이유가 모든 진리는 선으로부터 출생되기 때문이다; 이와 다른 근원지는 없다; 그리고 이것이 선으로부터 있기에 진리라고 불리우는 것이다. 그리고 진리로부터 이것이 선임이 확증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너와 함께 있겠다. 이는 그러면 그것은 신성일 것임을 의미한다. 이는 여호와께서 말하셨다는 사실로부터; 그리고 여호와가 주님을 뜻한다로부터 알게 된다 (4068항); 고로 신성을 뜻한다. 이렇게 누군가와 더불어 있는다는 것은 거기에 신성이 있는 것이다. 최고 의미는 주님에 관련된 사항이므로 글자 의미에서는 나뉨이 있지만, 최고 내적 의미에서는 하나됨(unity)만 있다

4-13절. 그리고 야곱은 보냈다, 그리고 라헬과 레아를 그의 양떼가 있는 들판으로 불렀다. 그리고 5 그는 그들에게 말했다, 내가 당신들의 아버지의 얼굴을 보았더니, 그는 예전과는 아주 딴판이다. 그리고 내 아버지의 하느님께서 나와 함께 계셔왔다. 6 당신들도 아는 바, 나는 전력을 다하여 당신들의 아버지를 섬겼다. 7 그리고 당신의 아버지는 나를 속였다, 그리고 내 보상을 열 번이나 바꾸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그가 나에게 악행을 하는 것을 내버려두지는 않으셨다. 8 만일 그가 얼룩진 것들은 다 너의 보상이다 라고 말하면 온 양떼가 얼룩진 것을 낳았고, 그가 부분적으로 색깔이 있는 것이 너의 보상이다 라고 말하면 온 양떼는 부분적으로 색깔 있는 것을 낳았다. 9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당신들의 아버지의 획득물을 거두어서, 그것을 나에게 주셨다. 10 그리고 그 양떼가 흥분하기 시작했을 때 나는 내 눈을 들었고, 꿈에서 보았다, 그리고 보라 양떼 위에 뛰어 오른 숫염소는 부분적으로 색갈 있고 얼룩지고, 회색이었다. 11 그리고 하느님의 천사가 꿈에 나에게 말하셨다, 야곱아. 그리고 나는 말했다, 저를 바라보고 있나이다! 12 그리고 그는 말했다, 바라건대 네 눈을 들어보라, 그리고 양떼 위에 올라 탄 모든 숫염소는 부분적으로 색깔 있고 얼룩지고, 회색인 것을 보아라. 그 이유는 내가 라반이 너에게 했던 모두를 보아왔기 때문이다. 13 나는 네가 기둥에 기름부었던 곳, 네가 나에게 서원을 하였던 곳, 벧엘의 하느님이다. 이 토지에서 빠져 나가거라, 그리고 네 출생지로 돌아가라.

야곱은 (사람을)보내서 양떼가 있는 들판으로 라헬과 레아를 불렀다. 이는 지금 “야곱”으로 의미된 선을 수단으로 진리에 애착함이 첨가됨(adjunction), 그리고 이 선이 떠났을 때, 그때에 적용함을 의미한다. 이는 “야곱”의 표현이 자연 평면의 선이다로부터; 그리고 라헬과 레아의 표현이 이 선에 인접되어진 진리에 애착함이다로부터; “라헬”은 내면의 진리에 애착함을; “레아”는 외면의 진리에 애착함이다; 그리고 “이들에게 (사람을) 보내서 양떼가 있는 들판으로 부름”은 자체에 그것들을 인접되게 함을 표시함이 분명하다. “들판”은 선으로부터 있는 것, 그리고 선이 있는 곳을 의미한다; 그리고 “양떼”는 지금(까지) 획득했던 선들과 진리들 자체, 그리고 이것들쪽으로 라헬과 레아에 의해 뜻해진 진리에 애착함들이, 선(야곱)이 떠났을 때, 적용되어졌다. 이 장에서 야곱은 자연 평면의 선을 표현하고, 이 평면에서 이 선을 신성과 결합하기 위해 더 가까이 끌어 당겼다, 그 이유는 자연 평면의 선이 “라반”에 의해 의미된 선으로부터 자체를 꾸준히 분리시키려 함에 있었고, 또한 분리함의 행동 안에서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표현들은 선과 진리에 관한 상태의 변화에 따라서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상태의 바뀜들은 이런 선과 진리 안에 있는 영들과 천사들의 변화에 의거 있기 때문이다.
중간의 선 안에 있는 영들과 천사들이 물러날 때, 그때 더 완전한 선 안에 있는 새로운 사회들이 가까이 끌어당겨진다. 인간의 상태는 그 인간이 있는 영들과 천사들의 사회들에 의존된다. 즉 같은 생각 속에, 같은 의지 속에 있다는 말이다. 그러나 각 인간의 상태의 바뀜은 두 경우가 있는데, 하나는 그가 어떤 사회들을 자신에게 인접하게 할 때, 그리고 다른 경우 하나는 어떤 사회가 주님에 의해 그에게 인접될 때이다. 전자의 경우이다면, 그는 악 안에 있다; 후자의 경우이다면 그는 선 안에 있다. 후자의 경우의 선은 그의 생명(삶)의 개혁을 도우려고 사회들을 통하여 흘러든다. 야곱에 의해 표현된 선과 “라헬과 레아”에 의해 표현되는 진리에 애착함들이 야곱이 “라반”에 의해 의미된 선으로부터 떠날 때 적용되는 것에 관해 이 장의 내적 의미에서 말해지는 것은 사회들과 그것들의 바뀜들과 정확히 일치한다. 천사들은 사회들로부터 인간이 가지는 상태들, 고로 인간의 선들과 진리들, 결과적으로 우리로서는 한 개의 일반적인 사항으로도 거의 나타나지 않는 무수한 것들을 지각한다. 고로 천사들은 원인 자체 안에 있다, 그 반면 인간은 결과 안에만 있어 그것들을 보지 못한다, 본다 해도 원인으로 결과하는 어떤 변화들을 통하여 이지만 너무나 희미한 지각력 안에서 일 뿐이다; 그리고 그가 주님에 의해 천사들을 통하여 계발되지 않으면 선과 진리에 관한 것은 아무것도 보지 못한다.

그리고 그는 그들에게 말했다, 내가 너희 아버지의 얼굴을 보니, 그가 나를 보는 것이 예전 같지 아니하였다. 이는 “라반”으로 의미된 선 안에서 있는 상태의 바뀜을 의미한다.
이는 여러 번 설명되었다.

그리고 내 아버지의 하느님은 나와 함께 계셔 왔다. 이는 그분이 가지셨던 모든 것들은 신성으로부터 이었음을 의미한다. 이는 “그분의 아버지의 하느님”이 그분의 서술할 경우, 그분이 가지신 신성이다는 사실로부터; 그리고 “나와 함께 계셔 왔다”는 그분이 가지신 모든 것들은 신성으로부터 이었다를 의미함에서 알게 된다. 주님이 자신 안에 있는 인간을 신성으로 만드셨을 때, 그분도 그분 주위에 영들과 천사들의 사회들을 가지셨다. 그 이유가 그분께서는 모든 것들이 질서에서 이루어져 나가기를 뜻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분은 영들과 천사들의 사회가 섬김의 본분을 다하게 하려고 그분 자신에게 소환하셨다, 그리고 그분이 좋아하시는 쪽으로 그것들을 바꾸셨다; 그렇다고 그것들을 자신에게로 가져가시거나 자신에게 적용하신 것은 아니다. 그분은 신성으로부터만 적용하셨을 뿐이다. 이런 방법에서 그분은 천국과 지옥 역시 질서 안으로 되돌리셨다. 이런 방식의 단계들을 계속하시어 그분은 그분 자신을 완전히 신성이 되게 하셨다. 그분께서는 영들과 천사들의 사회들을 (그분의 인간을 신성이 되게 하시는 작업 등등에) 요긴하게 사용할 수도 있으셨지만 그것들로부터 어떤 것도 취하시지 않으셨는데, 예증으로 더 생각해보자.
선이 자신들로부터 있다 라고, 고로 선들 안에 자신의 공적을 놓는 사회들도 그분을 이런 선에 관한 기억 속의 지식을 그분에게 소개함으로 그분에게 유용함을 제공했고, 제공된 이 선으로부터 자기 공적을 주장함이 없는 선 안으로, 즉 신성으로부터 있는 것과 같은 선에 관한 지혜 또한 받아들임에 요긴한 도움을 제공했다. 이 지식과 이로부터의 지혜는 이런 사회들로부터 있는 것은 아니나, 그것들을 수단으로( 그것들을 디딤돌로 삼아) 획득되어졌다. 또 다른 예를 생각해보자: 자신들이 매우 슬기롭다 라고 믿는 사회들, 그래서 선과 진리에 관하여 추론하는 이들, 그리하여 그것이 이런지 저런지 모든 것에 관하여 추론해대는 이들은 대부분 영적 평면에(수준에) 속하는 사회들이다; 이 사회들 역시 이런 인물들에 관한 지식, 즉 추론하는 그들이 얼마나 큰 그늘 안에 있는지를 실감하게 하여, 주님이 그들에게 자비를 가지지 않으시면 그들은 필시 멸해지리라는 것을 알게 되셨지만, 이 지식은 오히려 신성으로부터 더 많은 것을 받아들이셨다, 다시 말해 받아들인 것은 이 사회로부터가 아니고 단지 이 사회들을 수단으로(빌미 삼아) 되어졌다는 말이다.
또 다른 예를 생각해보자. 하느님을 사랑함 안에 있는 사회들, 그리고 그들이 그 하느님이 무한하신 분이라고 기대하며, 숨겨진 하느님을 예배하면서, 자기들은 그분을 사랑함 안에 있을 수 있다 라고 믿는 사회들의 경우이다. 그럼에도 그들이 어떤 생각을 동원해서 무한하신 분을 유한하신 분으로 만들지 않으면, 또는 유한한 지적인 생각들을 수단으로 자신들 안쪽에서 보일 수 있게 숨겨진 하느님을 표출하지 않으면 실지로 위와 같이 믿지 못하는 사회도 있다. 그들이 믿지 못하는 바, 그들은 두꺼운 어둠 안을 쳐다보고, 그 안에 있는 어떤 것을 사랑으로 얼싸 안는데, 이로부터 많은 공상적이고 충분히 이해되지 않는 기발난 발상이 각자의 생각들에 일치하여 일어나고야 마는 사회도 있다. 이런 사회들이라 해도 그들의 내면의 품질에 관한 것, 또한 그들의 사랑의 품질에 관한 지식 안으로 그분을 끌어들여, 이들 역시 그분의 인간이 신성이 되지 않으면 구원해줄 수 없다 라는 것을 실감하게 함으로 그분에게 서비스를 제공한다. 이 지혜 또한 이런 사회들로부터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사회를 수단으로 신성으로부터 이다. 이런 위의 예들은 이 구절의 주제인, “라반”으로 의미된 선으로부터 취해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 그러나 주님이 가지셨던 모든 것들은 신성으로부터, 즉 그분 자신으로부터 이었다는 것을 곰곰이 생각해보게 하고 있다.

그리고 너희들이 아는 바, 나는 전력을 다해 너희 아버지를 섬겨 왔다. 이는 그것은 그분 자신의 권능 속에 있었음을 의미한다. 이는 “섬기다”의 의미가 애쓰다(study) 이다로부터; 그러나 주님을 서술할 경우, 그분 자신의 힘이다로부터; 그리고 이것은 “전력을 다해”라고 표현하여 이를 한층 더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너희 아버지는 나를 속였다, 그리고 내 삯을 열 번이나 방법들을 바꾸었다. 그분께서 그분 자신으로부터 이 선 속의 것들을 적용했을 때 그분 자신을 향한 선의 상태를 의미한다, 그리고 그것의 바뀜은 아주 컷다도 의미한다. 이는 “아버지”, 여기서는 라반인 바, 이 의미는 중간의 선이다로부터; “삯”의 의미가 그분 자신으로부터 이다로부터; 그리고 “열 번”의 의미가 바뀜이 아주 큼이다로부터 분명해진다. “열”은 아주 크다를 표시한다; 그리고 “방법들”은 바뀜들을 표시한다. 이 선의 상태 자체는, 주님께서 그분 자신으로부터 이 선으로부터 있는 것을 적용하셨을 때, 바뀜이 있다와 관련이 있고, 또한 바뀜을 함축하고 있다. 만일 라반에 의해 의미된 선 대신, 이런 선 안에 있는 영들과 천사들의 사회를 가지고 생각해보면 이 경우가 어떻게 서 있는지가 분명해진다. 사회들은 그 사회가 들러 붙어 있어온 자들에게서 쉽게 떼어지지 않는다. 따라서 떼어져야 하는 때가 닥치면, 이 사회들의 영들은 분노한다. 본문에서 라반이 야곱에게 그의 삯을 두고 처신했듯 행동한다; 그렇다, 그들은 만일 어떤 선이 자기들을 수단으로 당사자에게 옴을 지각하면, 그들은 그 선이 자기들부터 그에게 왔다고 말한다; 그 이유가 그들은 자기들의 분노함에서 악으로부터 말하기 때문이다.
거듭나지는 이들에게서도 이와 비슷한 경우는 자주 있다. 주님께서는 인간을 거듭나게 해주시려 사회들을 수단으로 하여 진짜 선들과 진리들을 받아들이게 하는데 유용하게 하신다, 그리고 이 도우미 역할이 끝나면, 이전의 사회로부터 다른 사회로 옮기신다. 이때 이전의 쓰임을 당한 사회는 분노한다. 그러나 이런 사항들이 인간에게 나타나지 않는데, 그 이유는 그가 영들과 천사들의 집단 안에 있다 라고 믿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천사들에게는 명료하게 나타나고, 인간 차원의 경우라면, 주님의 신성한 자비로부터 영들과 천사들과 이야기함이 허락되었거나, 그들 중의 하나로서 그들 사이에 있거나 하는 인간이면 가능할지 모른다.
영들은 인간들이 이런 대목을 알지 못함에, 더욱이 자기들이 인간과 더불어 있음을 알지 못함에, 또한 많은 이들이 자기들의 현존함을 부정할 뿐만 아니라 지옥과 천국이 있음도 부정하고 있음에 한탄하고 있다. 어쨌든 이들은 이런 부정함이 인간의 우둔함 탓이라고 말한다. 사실인 즉, 인간은 이에 대해 생각함이 조금도 없다는 것, 이에 대해 뜻함도 조금도 없다는 것, 인간의 이런 실상이 영들을 통하여 주님으로부터 오지 않는다는 것도 사실이다; 그리고 이것은 주님께서 인류를, 특별하게는 각 인물을 통치하시는 수단들로서 그것들에 의해 있다는 것도 사실이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내가 악행을 당하도록 내버려두시지 않았다. 이는 그럼에도 그것은 방해할 수 없었음을 의미한다. 이는 “악행을 당하게 내버려두시지 않다”의 의미가 주님을 서술할 경우, 방해될 수 없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 이유는 신성에 악행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기 때문, 그러나 신성의 유입은 방해될 수 있다. 모든 악이 이 유입을 방해한다; 그리고 여기서도 “악을 행하는 것”에 의해 의미되고 있다.

만일 그가 이렇게 말한다면, 얼룩진 것은 네 삯이 될 것이다 라고 하면, 모든 양떼는 얼룩진 것을 낳았다.” 이는 그분의 자유를 의미한다, 그리고 그분의 자유 안에서 주님은 이런 것들, 즉 선들에 인접해 있는 악들조차도 가져 가셨음을 의미한다. 이는 내적 의미에서 있는 주제의 상태로부터 알게 된다. 그 주제란, 그분은 삯을 바꿀 자유를 가지셨다는 것, 고로 그분의 자유 안에서 이런 것들이 취해졌다는 것이다. 취해진 이것들에는 선들에 인접된 악들조차 포함되었다는 것은 “얼룩짐”의 의미가 악이 섞인 선들이다로부터 명백해진다.

그리고 만일 그가 이렇게 말한다면, 부분적으로 색깔 있는 것이 네 삯이다 라고 하면, 모든 양떼는 부분적으로 색깔 있는 것을 낳았다. 이는 인접해 있는 것이 거짓인 경우도 앞의 경우와 같음을 의미한다. 이는 바로 앞의 대목과 같은 경우이다; 그리고 “부분적으로 색깔 있다”의 의미가 악들과 섞여 흩어져 있는 진리들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결과적으로 거짓들이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너희 아버지의 획득물을 거두어 가셔서, 그것을 나에게 주셨다. 이는 이러한 것들은 신성으로부터 이었음을 의미한다.

양떼들이 흥분하는 때에. 이는 그들이 합쳐지도록 하려는 애착의 열정을 의미한다. 이는 “흥분함”이 애착의 열정과 그 결과를 의미한다로부터; 고로 그것들(선들과 진리들)은 결합되어야 하리라는 것을 의미한다.

나는 눈을 들었고 꿈에서 보았다. 이는 자연적 선이 불명료한 상태에서 지각함을 의미한다. 이는 “눈을 들어올림”의 의미가 생각하는 것, 또한 의도하는 것, 고로 지각하는 것이다로부터; 그리고 “꿈에서”의 의미가 불명료함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자연 평면의 선이 “야곱”이다.

그리고 보라 양떼 위에 올라 탄 숫염소는 부분적으로 색깔 있고, 얼룩지고, 회색들 이었다. 이는 “야곱”으로 의미된 자연적 선은 그 근원으로부터 인 이와 같은 것들에 물들여지고 마는(감화되고 마는) 결과를 의미한다. 이는 앞 장에서 이런 주제들에 관해 말해진 것으로부터 분명해지는데, 앞 장에서, 라반의 양떼를 수단으로 얼룩지고, 색갈 있고, 반점 있는 것들이 야곱의 것으로 되어진 대목의 의미에서 파악된다.

그리고 하느님의 천사가 꿈에서 나에게 말하셨다, 야곱아. 그리고 나는 말했다, 저를 바라보고 있나이다! 이는 신성으로부터의 지각, 그리고 그 희미한 상태 안에 현존하심을 의미한다. 이는 말씀의 역사적 부분에서 “말하다”의 의미가 지각하는 것이다로부터; 그리고 “하느님의 천사”의 의미가 신성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 이유가 “천사”라는 단어가 말씀에서 언급될 경우, 이는 주님의 어떤 것, 즉 신성의 어떤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천사는 자신으로부터 말하지 않고 주님으로부터 말하기 때문, 특히 여기서와 같이 꿈에서의 경우는 더욱 그러하다. 더 나아가 천사들은 선과 진리의 어떤 것도 자신들로부터 라고 말하는 것을 듣기만 해도 분노하기까지 할 정도이다. 고로 그들은 이런 생각들이 행여나 있을지 염려하여 이런 생각들을 제거하기에 바쁘고, 이런 경우가 다른 이들에게서도 발생하는 일은 절대 없어야 한다고 생각하므로 타인들부터도 이런 생각을 떼어 놓아주려 애쓴다. 그 이유가 자기들이 생각하고, 뜻하고 결과하는 선과 진리의 모든 것은 주님으로부터서만 있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기 때문이다. “꿈에”의 의미는 불명료함에서를 표시한다. 자연 평면에서의 현존, 이 현존은 불명료함 안에 있다는 것은 본문의 야곱이 천사에게 대답함에서도 의미되어져 있다.

그리고 그는 말했다, 바라건대 네 눈을 들어라. 이는 그분 자신이었던 것으로부터 거기로 주의를 기울이심을 의미한다. 이는 “눈을 들어올림”의 의미가 생각하고 의도하는 것, 고로 주의를 기울임이다. 이 대목의 의미가 그분 자신으로부터 이었던 것이다는 본문, “네 눈을 들어보라”라고 말해짐과 시리즈로부터 분명해진다.

그리고 양떼 위에 올라 탄 모든 숫염소는 부분적으로 색깔 있고, 얼룩지고, 회색 임을 보라. 이는 이런 것들을 받아들임이 있을 것임을 의미한다. 고로 그분은 이와 같은 것들을 빨아들이실 것임을 의미한다. 이는 앞에서 말했다.

그 이유는 라반이 너에게 했던 모두를 보아 왔기 때문이다. 이는 “라반”으로 의미된 선의 자기 자신, 이것은 그 자체로부터 행동하지 않음을 의미한다. 이는 라반의 표현이 중간의 선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중간의 선의 자기 자신은 그 자체로부터 행동되지 않는다는 것은 “나는 그가 네게 했던 모두를 보아왔다”의 말에 의미되어 있다. 이 의미를 가지는 것은 내적 의미에서 있는 주제를 정신적으로 조망함으로, 또한 이런 선 안에 있는 사회들로부터 분명해진다. 그 이유가 이들로부터 이 선의 품질이 명백하게 보여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는 그것들은 교통함을 위해, 그리고 수단들로서 섬기는 영들의 사회들이기 때문이다. 이 선들은 그 자체로부터, 그리고 그것의 자기 자신으로부터 많은 것을 행하지 않고 그 선 자체가 타인에 의해, 즉 천사들에 의해서는 선쪽으로, 악령들에 의해서는 악쪽으로 인도되어지게 허용한다는 말이다. (그래서 중간의 선이라 불려지는지도 모른다.) 이것은 이어질 구절들에서 있게 되는 라반의 말로부터도 나타난다. 이 모두는 “라반”에 의해 의미된 선의 자기 자신에 의해 뜻해짐을 보여준다, 즉 이 선은 자체 스스로 행동하지 않는다는 것임을 보여준다는 말이다. 지금까지의 구절 (6-12절)의 내적 의미의 내용들은 요약하는 방식으로만 밝혀왔다. 그 이유는 이 구절의 많은 단어들이 앞 구절에서 이미 살폈기 때문이므로 의문점은 앞 구절들에서 다시 살피기 바란다.

나는 벧엘의 하느님이다. 이는 자연 평면에 있는 신성을 의미한다. 이는 “벧엘”의 의미가 질서의 최말단에 있는 선, 결과적으로 자연 평면에 있는 선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 이유는 영적 평면과 천적 평면에 있는 것들의 종착점이 거기 이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분명한 바, “벧엘의 하느님”은 자연 평면에 있는 신성이다는 것이다. “벧엘”이 자연 평면에 있는 신성을 의미하기에, 거기에 있는 천적인 것들에 관한 지식들도 의미한다. 그 이유는 이런 사항들이 선 속에 있기 때문이다.

네가 기둥에 기름부었던 곳. 이는 진리의 선이 있는 곳, 그리고 그것의 경계선을 의미한다. 이는 “기둥”의 의미가 거룩한 경계선, 고로 질서의 최말단, 그러므로 진리이다로부터; 그리고 “기름부음”의 의미가 여기서는 야곱에 의해 행해진 기름부음, 그리고 기둥의 머리 위에 기름을 부음인 바, 진리를 선으로 만드는 것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네가 나에게 서원했던 곳. 이는 거룩인 것을 의미한다. 이는 “서원을 함”의 의미가 주님께서 준비해주시기를 뜻하는 것이다로부터 분명해진다; 그리고 최고 의미에서는 주님을 서술하는 바, 그분이 준비하신다를 뜻한다; 그 이유는 주님이 준비하시는 것은 무엇이든 그분으로부터 진행하는 것이고, 그분으로 진행되는 것은 무엇이든 거룩이기 때문, 그러므로 “서약을 함”이 여기서 거룩한 것을 의미하게 된다. 이런 설명을 얼핏 읽어서는 이해함에 다소 무리가 뒤따르는 것은 피하기 힘들다. 그러나 인간이 서약을 할 때, 그는 자신을 어떤 대상에 구부리고, 신성에 관련하여 자신 위에 어떤 것을 부과하기 때문이다. (흔한 경우, 하느님께서 제가 원하는 이런 것을 해주시면, 저 역시 당신에게 저런 사항을 실행한다고 약속합니다 같은 식이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는 간증 같은 데에서 우리가 흔히 듣지 않을까 싶다. 역자주.) 그러나 이런 서원이 인간이 아닌 신성 자체, 또는 주님이실 경우, 이는 어떤 소원을 비는게 아니라 뜻하심, 준비하심, 즉 행하심이다. 따라서 신성 또는 주님이 행하시는 것은 그분으로 진행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분으로부터 진행되는 것은 무엇이든 거룩하다.

지금 일어나라. 이는 승강을 의미한다. “일어남, arising”은 말씀 어디에서 이든 승강함을 의미한다.

이 토지로부터 빠져 나가거라. 이는 이 선으로부터 분리됨을 의미한다. 즉 “라반”에 의해 의미된 선으로부터 분리됨인데 이미 설명한 바 있다.

그리고 네 출생의 토지로 돌아가거라. 이는 진리로부터의 신성한 선과 결합함을 의미한다. 이는 “토지로 돌아감”의 의미가 그분 자신을 신성으로부터의 선에 더 가까워지게 하심이다로부터; 그리고 “출생”의 의미가 진리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로부터 “네 출생의 토지로 돌아감”에 의해 진리로부터의 신성한 선과 결합함이 의미됨을 알게 된다.

14-16절. 그리고 라헬과 레아는 대답하여 그에게 말했다, 우리는 더 이상 우리 아버지의 집에서 유산이나 지분을 가지는 것이 없지 않느냐? 15 우리는 아버지에게 외국인으로 세어지고 있지 않는가? 그러기에 그는 우리를 팔아 버렸고, 우리의 은을 먹어 치웠다.
16 하느님께서 우리의 아버지로부터 거두어 간 모든 재물은 우리의 것이고 우리의 아들들의 것이다. 지금 하느님께서 당신에게 말한 모든 것을 행하시오.

그리고 라헬과 레아는 대답하여 그에게 말했다. 이는 진리에 애착함들의 상호 (의존) 관계를 의미한다. 이는 “대답하다”에서 동의함을 말할 경우, 상호적임이 의미된다, 그리고 받아들임도 의미된다로부터; 그리고 라헬의 표현함이 내면의 진리에 애착함; 그리고 레아는 외적 진리에 애착함이다로부터 알려진다. 앞에서 진행해온 것의 내적 의미에서 취급된 주제는 자연 평면의 선이고, 이것이 “야곱”에 의해 의미되었고, 이 선이 “라반”인 중간의 선과 분리되었을 때의 경우에 대해서, 그리고 어떻게 자연 평면의 이 선이 자체를 “라헬과 레아”에 의해 의미된 진리에 애착함들에 인접되게 하였는지에 대한 것이었다. 지금 취급되는 주제는 진리에 애착함들로부터의 선에 상호적으로 어떻게 적용되는지 이다. 이 적용함(application)이 지금 “라헬과 레아”에 의한 말들에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이런 말들의 의미는 이런 정도의 설명만 가지고는 어떤 이해력에도 명쾌함을 선물하기는 매우 힘들고 그나마 좀 더 가능해지려면, 배움이 있든지, 이것들에 관한 기억 속의 지식으로부터 기쁨을 지각함이 있든지 해야 한다. 한마디로 이 대목들에 대한 영적 지식들을 갖는 것이다. 이 구절 같은 경우에 필요한 것은 (순수하게) 영적인 지식들 뿐이다. 이 외의 것들을 이 구절에 적용함은 아예 생각조차 할 필요도 없다. 그 이유가 세상적, 지상적인 것을 자기의 목적으로 가지는 이들은 자기들의 감각들을 세상의 것, 지상의 것으로부터 물러나 있게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설사 물러났다고 장담하고, 실지로 그렇게 했다 해도, 이들이 지각하는 것은 비 기쁨인 것들이기 때문이다. 이럴 경우 그들은 자기들이 사랑하는 것, 즉 그들의 목적으로 가지는 것들로부터 물러나 있거나 떠나 있을 것이다. 이런 본성을 지닌 자, 즉 어떻게 선이 그 자체를 진리의 애착함들에 인접되게 하는지를; 그리고 어떻게 진리에 애착함이 자체를 선에 적용하는지를 자기가 알기를 바라는지를; 그리하여 자기가 이를 아는 것에 지루해하는지, 그렇지 않은지를 테스트하려는 자의 경우이다; 이때 그는 이런 사항들이 자기에게 별 이득이 없다고 말할런지 모른다, 그리고 자기는 그것들에 관하여 아무것도 납득함이 없다고도 말할런지 모른다.
그러나 이런 사항들이 세상의 사업과 관련된 것으로 그에게 말해지면, 이 사항이 제아무리 난해한 이해가 있다 해도 개의치 않고 달려든다, 또는 이런 사항들을 납득하면 상대의 애착들을 꿰뚫는 바 이를 이용하면 자신에게 잘 따라붙게 할 것이다고 귀띰한다면 아마도 그는 한술 더 떠서 애착의 내면들조차도 파헤치겠다고 덤벼든다. 과학의 난해한 문제를 탐사하느라 애쓰는 자에게 이런 사항들을 응용하면 엉켜진 난제들을 탐사하는데 도움을 줄 것이라 말하면 그의 눈이 번득거릴 것이다. 그러나 영적 선과 진리가 의문 안에 있게 될 때, 그는 이 주제를 지루하게 느끼고, 금새 등을 돌려 댈 것이다. 이런 것들은 교회에 존재하는 인간의 품질이 알려지도록 하기 위하여 말해져 왔었다.
그러나 선이 그 자체쪽으로 진리를 어떻게 인접되게 하는지, 그리고 진리가 그 자체를 선쪽으로 어떻게 인접하는지에 대한 것은 생각 또는 관념이 선과 진리로 똑바로 향하는 것보다 영들이나 천사들의 사회들을 향하는 것이 더 잘 알아지게 나타날 수 있다. 그 이유가 선과 진리는 이 사회들을 통하여 흘러들기 때문이다; 또한 이미 말한 바 같이(4067항), 인간의 뜻함과 생각함은 이 사회들로부터 오기 때문, 즉 그것들로부터 안으로 흐르기 때문, 마치 이는 그것들이 당사자 안에 있는 듯 나타난다. 여기서의 경우가 어떤지 역시 영들과 천사들의 사회로부터 이다, 즉 그것을 아는 것은 원인 자체로부터 아는 것이다; 그리고 천사들의 사회로부터 아는 것은 이 원인들의 목적들로부터 그것을 아는 것이다. 그것 자체가 인접한 역사적 사항들은 이것들을 더 명백하게 나타나게 한다.
내적 의미는 진리들에 선이 첨가됨을; 그리고 자연 평면에서 진리가 적용됨을 취급한다; 그 이유가 이미 자주 말한 바 같이, 야곱은 자연 평면에 있는 선이고, 그의 여인들은 진리에 애착함들이기 때문이다. 사랑과 선행 속에 있는 선은 주님으로부터 흘러들되, 인간 당사자와 더불어 있는 천사를 통하여서 이다. 다시 말해 당사자의 지식들 외의 어떤 다른 것 안으로는 아니다. 그리고 선이 거기에 고정될 때, 생각은 지식들의 진리들 안에 간직되어 있는다; 이것들로부터 많은 것들이 관련되고 일치될 경우 불리움을 받는다; 그리고 이 불리움은 인간이 이것이 그렇다고 생각할 때까지, 그리고 이것이 그렇기 때문에 애착으로부터 그것을 뜻할 때까지 이다. 이것이 행하여질 때, 선은 그 자체를 진리들에 결합시키고, 진리들은 자유함 안에서 그 자체를 적용한다; 그 이유는 모든 애착은 자유를 있게 하는 원인이기 때문이다.
어쨌든 이런 때 조차에서도 의심이나 부정함 따위가 당사자와 합류하여 왔던 양들에 의해 흥분되어진다; 그러나 애착함이 우세해 있는 한, 우세한 만큼에서 그는 긍정적인 확언을하는 쪽으로 인도되어진다, 하여 그는 이런 참된 것들을 수단으로 진리들 안에서 확증한다. 선이 이런 방식에서 흘러들 때, 이 선이 천사들을 통하여 흘러드는 것인지가 당사자에게 짐작되지 않는다, 그 이유는 이것이 아주 내면적으로 흐르고, 특히 인간의 희미함 안으로, 즉 세상적, 육체적인 것들로부터 있는 인간의 희미함 안으로 흐르기 때문이다. 어쨌든 확실한 원칙은 선이 천사들로부터 흐르지 않고, 주님으로부터 천사들을 통하여 흐른다는 것이다; 이 점을 모든 천사들은 고백하고, 결단코 자신들로부터서는 어떤 선도 있지 않다는 것, 누군가가 선이 당신 덕분이라 말만해도 분개할 정도이다. 이런 모든 것은 원인 자체로부터 인 바, 이제 알아야 하는 것은, 선이 진리쪽에 어떻게 인접하는지, 그리고 진리가 적용되는 것은 어떻게 되는지에 대한 것이다. 이것이 여기서의 내적 의미에서 취급된 주제이다.

우리는 아버지의 집에서 더 이상 지분이나 상속을 가지는 것이 없지 않느냐? 이는 “라반”으로 의미된 선으로부터 그들이 분리되는 첫 상태를 의미한다. 이는 이 말들, “우리는 더 이상 지분이나 상속을 가지지 않느냐?”의 의미가 우리는 더 이상 어떤 결합도 가지지 않느냐?이다로부터; 그리고 “우리 아버지의 집”의 의미가 라반에 의해 표현된 선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로부터 결과되는 것은, 이 말들에 의해 라반에 의해 의미된 선과의 첫 분리가 의미되었다는 것이다. 그 이유가 처음의 상태는, 마음이 의구심 가운데 있다; 두 번째 상태는 의구심이 추론들에 의해 추방된다; 세 번째는 확언함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행동함이다. 이 단계에서 진리와 더불은 선은 자체를 지적인 부분으로부터 의지 안으로 은근히 심는다, 그리고 자기에게 걸맞게 한다.

우리는 아버지에게 외국인으로 취급되어지고 있지 않느냐? 그런고로 그는 우리를 팔았다. 이는 그들이 그것에 더 이상 속하지 않도록 하려고 그들 사이를 나쁘게 했음(이간질 했음)을 의미한다. 이는 “외국인으로 세어짐”의 의미가 이간질을 당함이다로부터; 그리고 “팔다”의 의미가 이간질 당하려고 그들은 그것에 더 이상 속하지 않았다 인 바, 이로부터 알게 된다.

그리고 우리의 은을 게걸스럽게 먹어 치웠다. 이는 만일 그들이 분리되지 않는다면 이런 애착들로부터의 진리들은 소멸될 것임을 의미한다. 이는 “먹어 치움”의 의미가 소멸되는 것이다로부터; 그리고 “은”의 의미가 진리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우리의 은”이 이런 애착들로부터의 진리인 이유는 이미 자주 말한 바 대로, 진리에 애착함들이 라헬과 레아에 의해 표현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사항들이 포함되고 있는 것은 중간의 선을 수단으로 은근히 심어진 선들과 진리들의 경우가 어떤 것인지를 알지 않으면, 또는 중간의 선을 담당하는 영들의 사회들이 어떤 특성을 지녔는지를 알지 못하면 위의 내용이 여기에 포함되어 있다는 것도 알지 못한다. 중간의 선을 조력하는 영들의 사회들은 세상의 것들 안에 있다; 그러나 진리에 애착함들을 소개하고 받아들이게 함을 조력하는 천사들의 사회들은 세상의 것 안에 있지 않고 천국의 것 안에 있다.
이 두 종류의 사회들이 거듭나지는 이들에 관계하여 행동한다; 그리고 그가 천사들에 의해 천국의 것들 안쪽으로 개시하는 만큼, 세상의 것들에 있는 영들은 물러나진다; 그리고 이 영들이 물러나지지 않으면, 진리들은 사라진다. 그 이유가 세상의 것과 천국의 것이 인간 안에서 일치함 안에 있으려면, 천국의 것이 세상의 것을 지배할 경우 뿐이기 때문이다. 고로 이 반대, 즉 세상의 것이 천국의 것을 통치한다면 두 종류의 일치함은 없다. 이 둘이 일치함 안에 있을 때, 진리들은 인간의 자연 평면에서 번성한다; 그 반대의 경우는 진리의 위축이다. 아마 소멸되기까지도 한다, 그 이유는 세상의 것이 천국의 것을 어두워지게 하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의구심 안에 처박는다는 말이다. 이러다가도 천국의 것들이 통치할 때면, 세상의 것들 위에 빛이 드리워져 명료한 상태에서 의심은 축출된다. 무엇보다 제일 먼저 사랑하려드는 것이 그를 통치한다. 이런 사항들은 만일 진리에 애착함들에 의해 뜻해지는 것들이 세상의 것(중간의 선)에서 분리되지 않으면 소멸되리라는 것을 보여준다. 이것이 본문, “그가 우리의 은을 먹어치웠다”에서 의미되고 있다.

하느님께서 우리 아버지로부터 거두어 들인 모든 재산은 우리의 것이요 우리 아들들의 것이다. 이는 모든 것들은 (누군가에 의해 주어진 것은 아무것도 없고) 오로지 그분의 신성으로부터 흘러듦을 수단으로 그분께서 거기로부터 자신에게 가져온 것들인 바, 그분 자신의 힘으로부터 이었음을 의미한다. 이는 앞에서 설명되었다.

그리고 지금 하느님께서 당신에게 말하신 것 모든 것을 행하시오. 이는 주님의 섭리를 의미한다. “하느님께서 말하신 모두를 행함”은 순종함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것이 주님을 서술할 경우, 이는 설비하심을 의미한다; 그 이유가 그분은 또 다른 누구로부터 행동되지 않고 그분 자신으로부터만 행동하시기 때문이다. 하느님은 자신에게 “행하라”고 말하시는 것이 아니라, 자신으로부터 행하고 있다고 말하신다.

17-18절. 그리고 야곱은 일어났다, 그리고 그의 아들들과 그의 여인들을 낙타 위에 올렸다. 18 그리고 그는 모든 그의 습득물, 그리고 그가 수집한 모든 그의 물질, 그가 밧단-아람에서 모았던 것인 그가 사들인 습득물을 챙겨서 가나안의 토지에 있는 그의 아버지 이삭에게로 떠났다.

그리고 야곱은 일어났다. 이는 “야곱”으로 의미된 선이 승강함을 의미한다. 이는 “일어남”의 의미가 승강함을 포함한다로부터; 그리고 야곱의 표현함이 자연 평면의 선이다로부터, 여기서는 신성쪽으로 더 가까이 당겨지는 선이다, 그 이유는 중간의 선, 또는 “라반”과 분리되어지기 때문이다. 이것이 인간에 주목하면, 그가 천국의 것들에 더 가까이 당겨지는 바, 그가 “승강된다”고, 또는 높은쪽으로 당겨진다 라고 말해진다. 이렇게 말해지는 이유는 인간은 천국이 더 높은 데에 있다고, 하여 승강되어야 천국 안에 들어간다고 믿고 있기 때문에서일 뿐이다. 사실상 이런 표현은 외관만으로부터의 표현이다, 그 이유는 천국, 또는 천국의 것들(즉 영적이고 천적인 것들)은 높은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안쪽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그가 영적 사랑과 신앙 안에 있을 때, 그는 그의 내면들 측면에서 천국 안에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의 아들들과 그의 여인들을 낙타에 들어올렸다. 이는 진리들의 승강, 그리고 진리에 애착함들의 승강, 그리고 이 승강함이 일반적인 것들 안에서 질서 있게 배열됨을 의미한다. 이는 “아들들”의 의미가 진리들이다로부터; 그리고 “여인들”, 여기서는 라헬과 레아, 그녀들의 하녀들인데, 이들은 진리에 애착함, 지식들(주관적 지식들)에 애착함, 기억 속의 지식들(객관적 지식들)에 애착함을 의미한다; 그리고 “낙타들”의 의미가 자연 평면에 있는 일반적 기억 속의 지식들이다로부터 알려진다.
표현들과 상응함이 어떤 경우인지를 알지 않으면, “그는 그의 아들들과 여인들을 낙타들 위에 들어올렸다”는 말이 위와 같은 의미를 가지는 것을 믿을 수 없다; 그 이유가 문장 내에서 단순히 아들, 여인, 낙타만을 생각한다면, 이 단어 자체 안에 함유하는 어떤 영적인 뜻과는 너무나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단어나 문장을 영적으로 보고 지각하는 천사들은 지상의 아들을 생각하지 않고, 아들이 말하여지면, 진리를 생각한다. 여인이 언급되면, 여인이 아닌 진리에 애착함, 지식들에 애착함, 기억 속의 지식들에 애착함을 떠올린다. 낙타 역시 마찬가지여서 자연 평면의 일반적인 것들을 떠올린다. 그 이유가 이런 것이 이런 모든 것들에 대한 상응이고, 이와 같은 것이 천사의 생각이기 때문이다. 경이로운 또 하나는 육체 안에서 사는 내적인 영적 인간의 경우도 이와 같다는 것이다. 물론 외적 인간의 경우는 이를 알아채지 못한다. 이런 이유로 해서 거듭나져가다 죽는 이들은 이와 같은 생각 안에 있게 되어 별다른 배움을 따로 가질 필요도 없이 그는 천사들과 더불어 생각하고 이야기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이것은 그가 이런 내면의 생각을 (세상에서) 꾸준히 지녀오다가 죽었을 경우가 아니면 불가능하다. 생각들이 (양쪽 세계를 향해) 이런 특성을 지니는 것은 자연적인 것들과 영적인 것들의 상응으로부터 오고 있다; 그러므로 비록 말씀의 글자 의미가 자연적 수준이지만, 그것 안쪽에 영적 수준의 것들을 포함할 수 있고, 게다가 영적인 것들의 개별적, 특수적인 것들도 포함할 수 있다. 이런 것은 내면, 또는 영적 생각과 거기로부터 파생되는 말 속에 있다; 또는 다른 말로 하면, 천사들의 생각과 말 안에 있다.
진리들의 승강과 진리에 애착함의 승강, 이 승강함이 일반적인 것들에서 질서적으로 배열되고 있다에 주목해보면, 이러하다: 진리들과 애착함들의 승강은 영원한 생명(삶)으로부터의 것과 주님의 왕국으로부터의 것들이 육체의 생명(삶)과 세상의 왕국에 속한 것들 앞에 놓여질 때 가능해진다. 다시 말해 인간이 전자의 것을 중요함의 제 1의 서열에 두고 이것을 자신의 우두머리로 인정할 때, 그리고 후자의 것은 도구로 삼고 두 번째 중요한 것으로 인정할 때, 그와 더불은 진리들과 애착들은 승강된다; 그 이유가 인간이 천국의 빛 안으로 운반되는 정도에 비례하여 자신 내부에 총명과 지혜를 지니기 때문이다. 그러면 세상의 빛으로부터 있는 것들은 마치 그가 천국의 것을 거울로 보듯 그가 지닌 천국의 형상이 되어 있는다. 이 반대의 경우도 당연히 존재한다. 즉 육체의 생명 속의 것들과 세상의 왕국 속의 것들이 삶의 중요도에서 제 1 의 서열로 장착될 경우이다. 그가 이렇게 장착한 이유는, 후자의 것, 천국의 빛이든, 천국의 왕국이든 그의 육체의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 또는 누군가가 거기로 왔다는 것을 보지 못했기 때문, 최소한 그것들에 대해 알려진 것이 없어 알지 못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게다가 이런 것들이 존재한다고 믿든, 믿지 않든 자신에게 오는 이득도, 해함도 아무것도 없다는 결론에 당도한다. 하여 이런 생각들을 확증하여 굳히고 세상의 삶을 사노라면, 그는 선행과 신앙을 지독하게 경멸하고야 만다. 이런 인간이 될 경우, 진리들과 진리에 애착함들의 승강은 아예 없고, 승강되기는커녕 질식되든가, 거절되든가, 타락되든가 하는 식으로 치닫는다. 그 이유가 그는 자연적 수준의 빛 안에 있기 때문이다, 이 안으로 어떤 천국의 빛도 흐르지 않는다. (자연계와 영계는 평행적 관계(parallelism)에 있어 상응이라는 사다리가 아니면 승강, 하강을 할 수 없다 역자주.) 이상 살핀 바로부터 진리의 승강, 진리에 애착함의 승강에 의해 뜻해진 바를 알았을 줄로 본다.
이제는 일반적인 것들에서 이 승강함들이 질서적으로 배열되고 있다를 생각해보자. 사실 이 배열은 필수적 결말이다; 그 이유가 인간이 천국의 것들을 세상의 것들 앞에 장착하는 만큼에서 세상의 것들은 천국의 상태들에 따라 배열되기 때문, 위에서 말한 바대로, 천국의 것을 거울을 통해 보는 것 같이 세상의 것이 천국의 형상이 되어 있다. 그 이유가 이 두 가지 는 상응하는 표현들이기 때문이다. 질서 안으로 배열함을 결과하는 것은 목적들이다. 즉 주님께서는 인간 안에서 목적들을 통하여 질서적인 배열을 해주신다는 말이다. 그 이유는 질서 안에 서로 뒤잇는 세가지가 있기 때문인데, 그것은 목적들(ends), 원인들(causes) 결과들(effects)이다. 목적은 원인을 생산하고, 원인을 통하여 결과가 도출된다. 목적이 있고, 목적이 있음으로 원인이 밖으로 출시되고, 원인이 세상 밖으로 출시한 것이 결과이다. 목적들은 인간 안에서 가장 깊은 것들이다; 원인들은 중간, 또는 중매하는 것들인데, 중매하는 목적들이라 불리운다; 그리고 결과들은 최말단(ultimate), 그리고 최종의 것(last) 또는 최말단의 목적들이라 불리운다. 결과들은 일반적인 것들(generals)이라고도 불리운다. 이상 살핀 바로부터 일반적인 것들에서 질서적으로 배열됨이 무엇인지 가늠되었을 것이다. 즉, 영원한 생명(삶)에 속한 것, 주님의 왕국에 속한 것이 목적으로 주목될 때, 모든 중간의 목적들, 또는 원인들, 그리고 모든 최말단의 목적들, 또는 결과들이 목적 자체에 일치하여 질서적으로 배열된다; 그리하여 목적 자체가 자연 안에 있는데, 그 이유는 결과들이 거기 있기 때문이다; 같은 말로 일반적인 것들이 거기 있기 때문이다.
자기 스스로 판단력을 소유하고 어떤 주제이든 곰곰이 따져 생각할 수 있는 년령 이후의 모든 이라면 자기가 두 왕국들 안에 있다는 것, 즉 영적 왕국과 자연적 왕국 안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영적 왕국은 내면에 있고, 자연적 왕국은 외면에 있다는 것도 알 수 있다; 결과적으로 그는 두 왕국에서 이것이 저것 앞에 놓이게 할 수 있다; 즉 그는 다른 것에 우선하여 이것을 목적으로 중요시 할 수 있다는 말이다. 고로 목적으로 중시한 것이 그를 통치한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그가 자기의 목적으로 영적 왕국을 중시하고 그 왕국에 속한 것을 우선시 한다면, 그는 주님을 사랑함과 이웃을 향한 선행을 제 1의 것, 가장 높은 것으로 인정한다. 결과적으로 모든 것들은 사랑과 선행을 확증하고 신앙으로부터 이다 라고 말해진다; 그 이유가 이것들이 이 왕국에 속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럴 경우 자연 평면 안의 모든 것이 이 왕국에 종속되고 순종하기 위하여 이 왕국의 것에 맞추어 질서 안에 배열된다. 그러나 인간이 자연적 왕국을 그의 목적으로 가지고 그의 중요도의 첫 순위에 앉힐 때, 그는 주님을 사랑함에 속한 모든 것, 이웃을 향한 선행에 속한 모든 것, 고로 신앙으로부터 있는 모든 것을 무엇이든 쓸모 없게 만들고 그렇게 만든 만큼 소멸되어진다. 그 대신 세상을 사랑함과 자기를 사랑함, 이 사랑에 속한 모든 것이 자신의 모든 것이 되게 한다. 이럴 경우, 그의 자연 평면에 있는 모든 것들은 그의 목적들에 발맞추어 배열된다, 고로 천국의 것들에 지독하게 반대되어 있다; 이리하여 그는 자신 안에 지옥을 만든다. 목적으로 중시하는 것이 사랑인 이유는 모든 목적은 사랑 속에, 사랑으로부터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사랑되어지는 것은 무엇이든 그의 목적으로 중요시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자기가 모은 그의 모든 물질과 그의 모든 습득물을 챙겨 떠났다. 이는 라반의 것으로부터 파생된 선과 진리가 분리됨을 의미한다. 이는 “챙겨 떠남, carry away”의 의미가 분리되는 것이다로부터; “습득물”의 의미가 진리이다로부터; 그리고 “물질, substance”의 의미가 선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가 모은 것”은 라반과 그의 양떼와 관련이 있는데, 그 이유는 야곱이 라반의 양떼를 수단으로 재산을 획득했기 때문이다. “습득물”이 진리를; “물질”이 선을 표시하는 이유는 습득물이 원어에서의 경우, 일반적으로 “가축떼, cattle”를 의미하는 단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가축떼”는 특별한 측면에서, 즉 “양떼”와 동시에 언급되는 때가 자주 있는데, 이럴 경우, 양떼가 선을, 가축떼는 진리를 의미한다. “물질”은 이런 저런 모든 것들이 획득되게 하는 자원(resources)을 의미한다. 습득물과 물질은 재산이라는 측면에서 거의 비슷한 의미를 지니지만, 이 두 단어가 같이 언급될 경우, 하나는 진리를, 다른 하나는 선을 서술하는데, 그 이유는 말씀의 특별한 측면 모두 각각 안에는 선과 진리의 천국 결혼이 스며 있기 때문이다.

그가 사들인 습득물. 이는 다른 근원으로부터의 것들을 수단으로 획득된 것들을 의미한다. 이는 “습득물”의 의미가 진리들이다로부터; 그리고 “사들임”의 의미가 또 다른 근원으로부터 획득된 것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 이유가 사들인 습득물은 또 다른 근원으로부터 이기 때문, 그러나 아직 라반의 양떼를 수단으로 획득되어졌던 것들로부터 있었다.

그가 밧단-아람에서 모았던 것. 이는 자연 평면에 있는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들을 의미한다. 이는 “밧단-아람”의 의미가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가나안의 토지에 계신 그의 아버지 이삭에게로 가기 위해. 이는 그분의 인간이 신성으로 만들어져야 한다는 의향에서, 합리성 속의 신성한 선과 합쳐지기 위하여를 의미한다. 이는 이삭의 표현함이 신성한 합리성이다로부터; 그리고 특별하게는 합리성의 신성한 선이다로부터; 그리고 “가나안의 토지”의 의미가 주님의 천적 왕국이다로부터; 그리고 최고 의미, 즉 주님을 서술할 경우, 그분의 신성한 인간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상 살핀 바를 종합하면, “가나안의 토지에 계신 그의 아버지 이삭에게로 감”은 그분의 인간이 신성으로 만들어질 의향으로 합리성의 신성한 선과 결합하기 위하여가 의미되어 있다.
인간 안에 있는 합리성과 자연 평면의 결합에 대해서 말해보면, 합리성은 내적 인간 속에 있고, 자연 평면은 외적 인간 속에 있다고 알려지고 있다; 그리고 그것들의 결합이 인간을 산출하는데, 결합 당시의 품질이 그 인간이다. 그리고 두 인간이 하나로서 행동할 때 결합이 있다; 그리고 자연적 인간이 합리적 인간을 섬기고 종속될 때 그들은 하나로서 행동한다. 인간의 경우, 이것은 주님이 해주셔야만 가능하지만, 주님의 경우, 그분 자신에 의해서 하셨다.

19-21절. 그리고 라반은 그의 양떼의 털을 깍으러 나갔다. 그리고 라헬은 그녀의 아버지의 것인 드라빔을 훔쳤다. 20 그리고 야곱은 자기가 도망한다는 것을 그에게 말하지 않았는 바 그는 아람 사람 라반의 심정을 훔쳤다. 21 그리고 그는 자기와 자기가 가졌던 모든 것을 가지고 달아났다. 그리고 그는 일어나 강을 건넜다, 그리고 그의 얼굴을 길르앗 산을 향하여 놓았다.

그리고 라반은 그의 양떼의 털을 깍으러 나갔다. 이는 선용(use)의 상태, 그리고 선으로부터 목적이 있는 상태를 의미하는데, 이 상태가 “라반의 양떼”이다. 이는 “털을 깍음”의 의미가 선용이다로부터; 고로 목적이다, 그 이유가 선용(use, 쓸모 있음, 유용함)이 목적이기 때문, 이는 아래에서 살핀다; 그리고 “양떼”의 의미가 선이다로부터. 이것이 선용의 상태와 목적의 상태가 “털을 깍으러 나감”으로 의미됨을 보여준다. 여기서 취급되는 주제는 “라반”인 중간의 선이 “야곱”인 라반의 양떼를 수단으로 획득한 선으로부터 분리됨이다; 그러나 이 분리됨이 어떤 경우인지는 이 선 안에 있는 영들의 사회로부터가 아니면 알려질 수 없다, 그리고 영들의 사회로부터 이 선이 인간에게 흘러듦에 관하여는 내가 경험한 것을 아래에 서술해보는 도리밖에 없다.
(영들의 사회 안에는 크게 구분한다면) 선한 영들이 있다, 그런가 하면 중간 수준으로 선한 영들이 있다, 또한 악한 영들이 있다. 이들은 인간의 거듭남 동안 당사자에게 인접해 있다, 인접한 목적은 이 영들을 수단으로 그가 진짜 선들과 진리들을 소개받고, 진짜의 것을 받아들여졌으면 해서 이다, 그리고 이 작업은 주님에 의해 천사들을 수단으로 해서 이다. 그러나 당사자에게 인접한 영들, 또는 영들의 사회들이 거듭나지려는 인간과 일치하여 있지는 않다, 물론 잠간 동안 정도의 시간 간격 정도에서는 일치해 있는 경우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인접한 인물의 거듭남에 도우미 역할을 끝내면, (일치하지 않기에) 분리되어진다. 그들이 분리되는 방식들은 아주 다양하다. 즉 선한 영의 경우는 이렇고, 중간의 영은 저렇고, 악한 영의 경우는 더 더욱 다르다. 선한 영의 분리는 이 분리됨을 알아채림 없이 진행되어 결과가 나타난다. 그 이유가 선한 영들은 자신들이 어떻게 해야 주님이 흡족해 하시는지를 알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간 정도로 선한 영들은 선한 영과는 달리 많은 수단이 동원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게다가 자유함 안에서 물러나게 하는 정도에 (눈치채서 스스로 분리되어 주는 정도에) 이르려면 많은 방법들이 요구된다. 그 이유가 그 영들이 자기들의 기쁨(delight)과 자기들 수준의 복됨을 지각하기 위하여서는 그들의 선의 원래 상태로 되돌려야 하기 때문이다, 즉 이 영들은 거듭나는 인간과 연합하기 이전에서 자기들이 발견했던 기쁨(pleasure) 만큼으로 되돌려 데려다 놓으면 그들은 거듭나는 인간의 기쁨의 수준과 일치하지 않아 불편함을 갖게 되어 결국 제 스스로 분리된다. 악령 역시 자유 안에서 분리를 진행하지만, 이 자유란 그것들이 자신의 기준에서 말하는 자유일 뿐이다. 그들이 거듭나는 인간에게 인접되게 하신 이유는 거듭나는 인간으로 거절되어져야 하는 천국과 반대적인 생각들과 기쁨들을 받아들여 보게 해줄까 하는 의도에서 이다. 그러면 반작용이 있어 오히려 선들과 진리를 더 빨리, 더 확고히 붙드는 챤스를 가지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확증함이 시작될 때, 그 영들은 거듭나는 인간에게 남아 있는 것에 불편함을 지각하고, 분리됨에서 기쁨을 누릴 것같이 여기면서 결국 스스로의 자유함에서 떨어져 나간다. 거듭나는 인간의 선과 진리에 관련한 상태는 대략 위와 같이 하여 바뀜이 있다.
“양털을 깍는 것”이 선용(use)을 수행하는 것을 표시하는데, 그 이유는 말씀에서 “양털을 깍음”은 선용(유용함) 밖에 더 다른 의미가 없기 때문, 그 이유가 이를 수단으로 양털이 획득되기 때문이다. “양-털 깍음”이 선용을 표시하는 것을 모세의 책에 있는 구절로부터 분명해진다:
네 목축떼와 네 양떼로부터 태어나는 첫배의 숫컷 모두는 여호와 네 하느님에게 신성한 것으로 구별해 바쳐라; 너는 네 숫소의 첫배를 일을 부리지 말고, 네 양떼의 첫배의 털을 깍지 말라; 그러나 너는 여호와께서 선택하신 장소에서 매 해마다 여호와 네 하느님 앞에서 그것을 먹을 것이다 (신. 15:19);
위에서 “양떼의 첫배의 털을 깍지 말라”는 것은 그것으로부터 가정에서의 선용을 만들지 말라는 것을 표시한다. “양털 깎음”이 선용을 의미했기에, 그 시절 양털 깍는 날은 특별한 행사를 치루는 날로서, 어떤 공적 직능을 수행하듯 여겼다. 이는 창. 38:12, 13에서 유다가 “그는 자기 양떼의 털을 깍았다”라는 구절로부터도 알게 되고; 다윗의 아들들에 관한 사무엘하서에서:
이 년이 지났을 때 였다, 압살롬이 에브라임에 있는 바알하솔에서 양털을 깍는 행사를 가졌다; 그리고 압살롬이 왕의 모든 아들들을 불렀다; 그리고 압살롬이 왕에게 왔다, 그리고 말했다, 보십시오, 지금 당신의 종이 양털 깍는 행사를 개최합니다; 왕이시여, 바라옵건대, 그의 종, 당신의 종과 더불어 가게 하소서 (삼하. 13:23, 24).

그리고 라헬은 그녀의 아버지의 것인 드라빔을 훔쳤다. 이는 진리에 관련하여 라반으로 의미되는 상태의 변화를 의미한다. 이는 여기서 “훔치다”의 의미가 귀하고 거룩하게 여기는 것을 가져감, 고로 상태가 바뀜이다로부터; 그리고 “드라빔(teraphim)”의 의미가 진리들인 바로부터, 이는 아래에서 살핀다; 그리고 “아버지”의 의미가, 여기서는 라반, 그에 의해 의미되는 선이다; “아버지”가 선을 의미한다. 위 살핀 바를 종합하면, “라헬은 그녀의 아버지의 것인 드리빔을 훔쳤다”에 의해 진리 측면에서 “라반”에 의해 의미되는 상태가 바뀜이 의미되게 된다.
이런 내용들이 포함되는 것은 영들이 (거듭나는 인간으로부터) 분리되어질 때, 그 영들의 상태로부터 알는지 모른다. 그 이유가 선과 진리 측면에서의 영들의 상태는 이 영들이 속하여 있는 사회와 일치하여 있기 때문이다. 대체로 모든 생각은 다른 것들을 통하여 흐른다, 즉 생각 속의 주제들은 대체로 사회 안에 있는 이들을 통하여 흐른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이들이 이 사회로부터 옮겨 저 사회로 보내질 때, 그들의 생각과 애착의 상태 역시 바뀐다, 고로 선과 진리 측면의 그들의 상태도 바뀐다. 그런데 만일 그들이 불일치하는 사회 안으로 보내질 경우, 그들은 불편함을 가지게 되고, 뭔가 억류된 느낌까지 들어 거기를 빠져나와 일치하는 사회로 떠난다. 이런 이유로 악한 자는 선한 자의 사회 안에 머물기가 힘들다, 이 반대의 상황도 마찬가지 이다; 그리고 모든 영들과 천사들은 사랑으로부터 있는 애착에 일치되는 사회들 안으로 구별되어진다. 그러나 사랑의 모든 애착은 그것 안쪽에 다양한 것들을 포함한다; 그렇지만 한 개가 군림하는 바, 이 한 개 아래에서라면, 각 영은 많은 사회들 안에 있을 수 있기는 하다. 그러나 여전한 것은 자기를 통치하는 애착인 것을 향하려고 노력하는 것, 따라서 결국은 그 애착에로 귀착하고야 만다.
“라반”에 의해 의미된 선, 그리고 이 선의 상태가 바뀜에 주목해보자. 이 선이 야곱에 의해 표현된 선과 더불어 있는 동안에서는 이 선도 신성에 가까이 있었다. 그 이유가 “야곱”이 자연 평면에 있는 신성으로부터의 선을 표현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함께 있었던 동안에서는 선과 진리의 더 완전한 상태에 있었다. 그러나 분리됨이 있게 되자, 이것은 선 측면에서, 진리 측면에서 모두에서 또 다른 상태에 놓여지게 되었다. 간단히 말하면, 다른 삶에서의 상태의 바뀜은 신성에 더 가까이, 또는 더 멀리에 위치하느냐밖에 더 아니다. 이로부터 라반에 의해 의미된 선이 야곱으로 의미된 선과 분리될 때의 상태 변화가 어떤 경우가 될 것인지 짐작이 될 것이다.
“라헬이 자기 아버지의 것인 드라빔을 훔쳤다”는 것은 진리들 측면에서 상태의 바뀜을 의미한다고 말한 이유는 “드라빔”이 라반의 하느님들(his gods)을 뜻하기 때문이다. 이는 이어지는 구절에서, 라반이 야곱에게 한 말로부터 분명해진다:
어찌하여 너는 내 하느님들을 훔쳤느냐? 그리고 야곱이 대답했다, 당신이 당신의 하느님들을 발견할 때 그가 누구이든, 그는 우리의 형제 앞에서 살지 못할 것이다 (창. 31:30, 32)
내적 의미에서 “하느님들”은 진리들을 의미한다, 이런 이유로 구절의 주제가 진리일 경우, “하느님(God)”이 명명되어진다.
드라빔은 그들이 하느님에게 문의할 때 사용했던 우상들이다, 그리고 그들이 받았던 대답들은 신성으로부터의 진리들이었기에, 호세아서에서 진리들이 “드라빔”에 의해 의미되었다:
이스라엘의 아들들은 많은 날들을 왕 없이, 그리고 제 일인 자 없이, 그리고 제물을 바침 없이, 그리고 에봇과 드라빔 없이 앉았다(살아왔다) (호. 3:4);
“에봇”과 “드라빔”은 대답으로 그들이 받았던 신성으로부터의 진리들을 표시한다, 그 이유가 그들이 하느님께 물어볼 때, 그들은 에봇을 입었기 때문이다 (삼상. 23:9-12). 스가랴서에서:
드라빔이 불법을 말한다, 그리고 점장이가 거짓을 보고 있다, 그리고 꿈장이들이 헛것을 말한다 (슥. 10:2);
위에서도 “드라빔”은 대답들을 표시하나 불법적인 대답들이다.
“드라빔”이 위와 같은 것을 의미했기에, 이것을 소지함이 금하여졌음에도 누군가에게서 이것들이 발견되곤 했다; 그중 한 예가 사사기서에 있다:
미가는 하느님의 집을 가졌다, 그리고 그는 에봇과 드라빔을 만들었다, 그리고 자기 아들들 중의 하나의 손을 채웠다(임무를 지웠다), 그리하여 그가 자기의 성직자가 되게 했다. 그리고 단지파의 몇 명이 그들의 형제들에게 말했다, 이 집 안에 에봇과 드라빔, 새긴 우상과 부어만든 우상이 있다는 것을 너희는 알고 있느냐? 그리고 이들이 미가의 집 안으로 갔을 때, 그들은 새긴 우상, 에봇과 드라빔, 그리고 부어만든 우상을 가져갔다. 그리고 성직자의 심정은 선이었다, 그리고 그는 에봇과 드라빔과 새긴 우상을 가져갔다. 그리고 미가는 단지파의 아들들을 뒤따라 갔다, 그리고 말했다, 너희는 내가 만든 내 하느님들, 그리고 성직자를 가져갔다, 그리고 떠나버렸다, 그리고 나는 무엇을 더 가지겠는가? (사. 17:5; 18:14, 18, 20, 24).
다윗의 아내, 미갈 또한 그것들을 가지고 있었는데, 사무엘상서를 보면:
그리고 미갈은 드라빔을 가져왔다, 그리고 그것들을 침대 안에 놓았다, 그리고 그것들을 옷으로 덮었다. 그리고 사울의 특사가 왔다, 그리고 잘 보라, 드라빔이 침대 안에 있었다
(삼상. 19:13, 16).
어쨋든 드라빔은 금지된 우상들이었다는 것은 그것들에 관해 말해진 다른 장소에서 분명해진다 (삼상. 15:23; 왕하 23:24; 겔. 21:26).

그리고 야곱은 아람 사람 라반의 심정을 훔쳤다. 이는 선에 관련하여 라반으로 의미되는 상태의 변화를 의미한다. 이는 “훔치다”의 의미가 귀하게 여기고 거룩한 것을 가져가버림, 고로 상태가 바뀜이다로부터; “심정”의 의미가 의지로부터 진행하는 것이다로부터; 그리고 의지가 선으로부터의 의지일 경우, “심정”은 의지를 표시한다; 그리고 라반의 표현함이 중간의 선이다로부터, 그리고 이 선이 지금 분리되고 있다; 그리고 이것이 분리되고 있기에, 그는 지금 “아람 사람”이라 불리운다. 이는 24절에서도 이어진다. “아람 사람 라반”은 이전 같은 신성한 선과 진리가 있지 않은 선을 표시한다. 그 이유는 아람, 또는 시리아는 유브라데 강에 의해 가나안의 토지로부터 분리되었기 때문, 그러므로 내적 의미에서 주님의 왕국, 그리고 최고 의미에서 주님의 신성한 인간 이 의미되는 가나안의 토지 바깥쪽이 의미되기 때문이다. “아람”과 시리아는 특별하게는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런 지식을 의미하는 이유는 거기에도 고대 교회가 있었고, 이 교회의 잔존물이 오랜 동안 거기에 남아 있었기 때문, 이는 발람에 관한 기록으로부터 알게된다. 그는 이 지방 출신이었고, 여호와에 관한 지식을 가졌던 바, 그는 주님에 관한 예언도 했다. 그러나 거기에서도 우상이 번창한 이후 아브람이 거기를 떠나도록 부름받았다, 그리고 아브람으로부터 두드러지게 표현 교회의 설립이 등장하면서, 아람, 또는 시리아는 교회 밖의 영역을 표현했다, 또는 교회로부터 분리됨을, 고로 주님의 왕국에 속한 것에서 멀리 떨어짐을 표현했다; 비록 이렇다해도 아람은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을 의미함은 여전히 보유하고 있다. 야곱이 라반에게 자기가 떠남을 말하지 않음으로 라반의 심정을 훔친 이유는 방금 앞에서는 진리 측면에서의 상태의 변화가 있었고, 바로 여기서는 선 측면에서의 상태의 변화를 의미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는 말씀에서 진리가 취급되는 곳에서는 선도 취급되어 말씀의 어느 곳이든 선과 진리의 천국 결혼을 의미해두기 때문이다.

그는 자기가 도망하는 것을 라반에게 말하지 않았다. 이는 분리를 수단으로를 의미한다. 이는 별도의 설명은 필요하지 않다. “야곱이 자기가 도망치는 것을 라반에게 말하지 않음으로 그의 심정을 훔쳤다”가 역사적 의미에서 뜻해지는 것은, 야곱은 라반으로부터 라반이 야곱의 것인 모든 것도 자기의 소유물로 간주하는 희망을 박탈하여 그에게 심통(心通, distress)을 되돌린 것이다. 그 이유가 그 당시의 법에 따라 야곱이 (자기의 종처럼) 자기를 섬겼기에, 야곱의 모든 것, 그의 아내들인 자기의 딸, 거기서 나온 아들들, 뿐만 아니라 그의 양떼 등등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자기 것에 속하는 것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이런 당시의 법은 모세의 책에서도 발견된다:
만일 네가 히브리인의 종을 산다면, 6년을 봉사하게 하고, 7년째에는 그가 아무 댓가도 치루지 않고 나갈 것이다. 만일 그의 주인이 그에게 아내를 준다면, 그리고 그녀가 그에게 아들들과 딸들을 낳는다면, 아내와 그 자녀는 그의 주인의 것이다, 그리고 그는 자기 몸만 가지고 나갈 것이다 (출. 21:2, 4).
라반이 이런 식으로 생각했다는 것은 뒤이어지는 구절에서 야곱의 말로부터도 분명해진다:
내 아버지의 하느님,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삭이 두려워하는 분이 나와 함께 계시지 않았던들, 당신은 나를 빈손으로 떠나보냈을 것이다 (42절).
그리고 라반의 말로부터:
라반이 야곱에게 대답하여 말했다, 딸들은 나의 딸들이다, 그리고 아들들은 나의 아들들이다, 그리고 양떼는 나의 양떼이다, 그리고 네가 보는 모든 것이 나의 것이다 (43절);
위의 라반의 말은 사실상 억지 주장이다. 그 이유가 야곱은 그가 사들인 종이 아니다, 야곱의 아내들은 그가 봉사한 댓가로 받았고, 양떼 역시 그의 삯으로 라반이 지불한 것이기 때문, 고로 그 당시의 법이 야곱에게는 해당되지 않는다. 게다가 야곱은 라반보다 더 수준 높은 집안의 자녀 출신이다. 이제 야곱은 도망치므로 해서 라반이 예상해왔던 희망을 박탈하고 대신 심통만을 되돌렸기에, 그는“자기가 도망함을 말하지 않음으로 아람 사람 라반의 심정을 훔쳤다”고 말해진 것이다. 그러나 이 말들은 내적 의미에서는 선 측면에 관련하여 “라반”에 의해 의미된 상태가 바뀜이 의미되어지고 있다. 분리함에 의한 상태의 바뀜은 앞에서 살폈다.

그는 자기와 자기가 가졌던 모든 것을 가지고 달아났다. 이는 분리됨을 의미한다. 이는 앞의 대목과 비슷하므로 중복 설명은 피한다.

그리고 그는 일어났다. 이는 승강을 의미한다. 이 말 역시 이미 살폈는 바, 설명이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강을 건넜다. 이는 결합이 있는 상태를 의미한다. 이는 “강”, 여기서는 유브라데강의 의미가 결합, 즉 신성과 결합함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강”이 이 의미를 가지는 이유는 강 건너쪽 가나안의 토지와의 경계선에 해당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가나안의 토지의 모든 경계선들은 마지막인 것, 처음인 것을 표현하고, 의미했다; 마지막인 것은 거기에서 끝남이 있었기 때문; 그리고 처음인 것은 거기서부터 시작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모든 경계선들은 경계선 밖으로 나가는 이들에게는 마지막이 되고, 경계선 안으로 들어오는 자에게는 시작에 해당되기 때문이다. 지금의 야곱은 들어가고 있다, 고로 이 강은 그의 처음에 해당하는 바, 이는 결합을, 최고 의미에서는 신성과 더불은 결합을 표시한다; 그 이유가 가나안의 토지가 내적 의미에서는 주님의 천적 왕국을; 최고 의미에서는 주님의 신성한 인간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야곱이 강을 건넘에 의해 의미되는 것이 분명해진다.
그리고 그의 얼굴을 길르앗 산을 향하여 놓았다. 이는 거기에 선이 있음을 의미한다. 이는 “산”의 의미가 사랑의 천적 평면, 즉 선이다로부터 분명해지고, 이와 더불어 결합이 있었다. “길르앗”은 그것의 품질을 의미한다. 강이 경계선이었고, 처음의 결합이 거기에서 있었기에, “길르앗 산”, 이것은 요단강 이쪽 편(가나안쪽)에 위치하는 바, 처음의 결합이 거행되는 선을 의미한다.
길르앗 토지, 즉 산이 서 있는 곳, 그곳은 넓은 의미에서 이해할 경우, 가나안의 맨끝 안쪽, 요단강의 이쪽 편에 있었다, 그리고 르우벤 지파와 갓 지파에게, 특히 므낫세 지파의 절반에게 상속분으로 할당된 지역이다. 그리고 상속분으로 주어지는 토지는 이보다 더 멀리 확장되었으므로 폭넓게 이해하면 가나안의 토지 경계 안쪽이라 말해지는 것이다. 이 세 지파에게 상속분으로 할당된 기록은 모세의 책에서 발견된다 (민. 32:1, 26-41; 신. 3:8, 10-16; 여. 13:24-31). 그러므로 가나안의 토지를 전체적으로, 즉 한 장의 지도로 펴볼 경우, 말씀에서 말해지는 바, “길르앗으로부터 단에 이르기까지”, 또는 “브엘-세바로부터 단에 이르기까지”하고 말해지고 있다, 그 이유가 단 역시 경계선에 위치했기 때문이다. “길르앗으로부터 단까지”라는 표현에 관한 것은 모세의 책에서 발견된다:
모세는 모압의 평야로부터 느보산 위, 여리고의 맞은편인 비스가의 꼭대기로 올라갔다; 그리고 여호와께서는 그에게 길르앗으로부터 단까지의 모든 토지를 보여주셨다 (신. 34:1, 2);
그리고 사사기서의 책에서:
길르앗은 요단 건너에 거주한다; 그리고 단, 왜 그가 배들을 두려워하는가? (사. 5:17)
길르앗은 경계선이었기 때문에, 길르앗은 영적 의미에서 처음의 선을 의미한다. 이 선은 육체의 감각으로부터의 선이다. 그 이유가 이 선 또는 이 선으로부터의 기쁨(pleasure)은 거듭나지려는 인간이 거듭남을 개시할 때 맨 먼저 있게 되는 선에 해당되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길르앗”이 취해진 경우가 예언서에 있는데, 예. 8:20, 22; 22:6; 46:11; 50:19; 겔. 47:18; 옵. 19절; 미. 7:14; 슥. 10:10; 시. 60:7; 그리고 반대 의미일 경우, 호. 6:8; 12:12 이다.

22-25절. 그리고 셋째날 야곱이 도망쳤음이 라반에게 알려졌다. 23 그리고 그는 그와 함께 그의 형제들을 거느리고 칠 일 길을 추격했다, 그리고 길르앗 산에서 그에게 합류했다. 24 그리고 하느님께서 밤에 아람 사람 라반에게 꿈에 오셨다, 그리고 그에게 말하셨다, 너는 선으로 악에 이르기까지 조차에서 야곱에게 말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25 그리고 라반은 야곱을 따라 잡았다, 그리고 야곱은 산에서 그의 천막을 고정시켰다. 그리고 라반은 길르앗 산에서 그의 형제들과 함께 고정시켰다.

사흘째 날에 라반에게 알려졌다. 이는 결합의 끝을 의미한다. 이는 “셋째 날”의 의미가 마지막인 것, 또한 완성인 것, 고로 끝인 것이다로부터, 또한 시작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 이유가 결합의 상태의 끝은 이어지는 상태의 시작, 이것도 분리함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기서는 “셋째 날”에 의해 의미된다.

그가 도망했다는 것. 이는 분리를 의미한다. 이는 “도망함”의 의미가 분리되어짐이다로부터 분명해진다.

그리고 그는 자기와 더불어 그의 형제들을 데리고 갔다. 이는 잃어진 것들 대신에 있는 선을 의미한다. 이는 “형제들”의 의미가 선들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형제들”에 의해 내적 의미에서 비슷한 선과 진리에 있는 이들, 즉 선과 진리에 애착함이 비숫한 이들이 의미된다. 그 이유가 다른 삶에서는 모든 이들이 애착들과 일치하여 연합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연합된 이들이 형제다움(brotherhood, 형제애)을 구성한다. 실지로 그들은 자신들을 두고 형제들이라 부르지는 않으나, 그들은 결합을 수단으로 형제들이다. 지상에서 혈연이나 결혼을 수단으로 이루어지는 관계가 있는 반면, 다른 삶에서는 선과 진리에 따라 친족 관계 여부가 생산된다; 그러므로 이 둘 사이에는 상응함이 있다; 다른 삶에서 선과 진리 자체만을 주목한다면, 이는 주님만으로부터 있기에, 주님 외에 다른 아버지는 없음을 인정한다. 그러므로 선들과 진리들 안에 있는 모든 이는 형제다움 안에 있다; 그렇지만 이는 총괄적 측면이고, 개별적 측면으로는 선과 진리의 품질에 따라 친족 관계의 수준이 결정된다. 이 수준들이 말씀에서 “형제들,” “자매들,” “사위,” “며느리” “손자들,” “손녀들” 등등의 가족간의 호칭으로 불리우고 있다.
지상에서의 경우, 이런 친족 관계는 공동의 어버이와의 관련에 의해 명명되지만, (다른 삶에서는) 그것들이 애착들에 관련하여 달라진다; 어쨌든 지상의 이런 형제다움이나 친족 관계는 다른 삶에서는 사라져 버리고, 제아무리 지상에서 형제들이었다 해도 각자의 선과 진리가 비슷하지 않으면, 각기 다른 형제다움 안으로 와진다. 처음 입장시에는 대체로 함께 있을 듯하나 아주 짧은 시간에 분리되어진다; 다시 말하지만, 저 세계는 인간을 함께 묶여있게 하는 물질(재물)이 없고, 그 대신 애착들이 있기 때문, 그리고 이 애착의 품질은 다른 세계에 입장함과 동시에 청명한 날 같이 분명해지기 때문, 또한 이쪽 편이 가지는 애착의 종류가 다른쪽 편을 향하여 가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애착의 품질들이 적나나해질 때, 그리하여 각자의 애착이 그것에 걸맞는 사회를 끌어 당길 때, (지상에서) 불일치한 배열이지만 함께 있을 수밖에 없어왔던 이들은 분리, 해체된다; 즉 외적 인간으로부터 있어온 모든 형제다움, 친구 관계 등등은 모두 철폐되어지고, 내적 인간으로부터 있어온 것만이 남는다. “그가 자기와 함께 자기 형제들을 데리고 갔다”에 의해 잃어진 것들 대신에 있는 선들이 의미되는 이유는 이미 말한 대로, 이 사회가 저 사회로부터 분리될 때, 다른 사회에로 오는 격인 바, 이전의 사회의 선 대신에 다른 선들에로 오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를 추격했다. 이는 결합의 열정이 계속됨을 의미한다. 여기서의 “추격”은 결합에 대한 열정(분리되지 않겠다는 열정)이 계속됨이 분명하다. 여기서 취급되는 주제는 중간의 선이 쓰임을 다한 후 진짜 선으로부터 분리됨이다. 이 분리됨의 과정은 앞에서 반복 설명했다. 그러나 이 분리됨은 인간이 관찰할 수 있게 어떤 존재를 가질 수 없기에 인간에게는 매우 불분명하나, 천사들에게는 무수한 다양성을 포함하여 아주 분명하다. 이 분리됨이 거듭나는 인간에게서는 거듭남의 도우미들(ministers)로서 당사자와 늘 현존하기에 당사자와 함께하는 천사들은 이 도우미를 수단으로 결과되는 그의 상태의 바뀜을 보고 지각한다. 그리고 주님으로부터 이 중간의 선에 따라, 이것을 수단으로 그와 함께 한 천사들은 인간 당사자가 허용하는 범주 내에서 그를 선쪽으로 인도한다. 게다가 이 과정은 천국에서는 매우 중요한 쓸모 있음의 수준이기에, 이 장의 많은 구절을 할애하여 상세하게 언급되고 있다. 그러므로 다시 한번 우리가 실감할 수밖에 없는 것은 말씀의 내적 의미가 천사의 말이다는 것이다.

칠 일 간의 길. 이는 진리의 거룩함을 의미한다. 이는 “길”이 진리를 의미함에서; 그리고 “7”의 의미가 거룩한 것이다로부터; 여기서의 경우, 의미는 결합하려는 열정, 즉 진리의 거룩함과 더불은 결합함 자체로부터의 열정이다.

그리고 길르앗 산에서 그에게 합류했다. 이는 그것으로 해서 얼마쯤의 결합 같은 것이 있음을 의미한다. 이는 “합류하다(join)”의 의미가 결합이다로부터; 그리고 “길르앗 산”의 의미가 처음 결합에서 있는 선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고로 “길르앗 산에서 그와 합류함”에 의해 얼마쯤의 결합이 있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밤에 꿈으로 아람 사람 라반에게 오셨다. 이는 이 선이 그 자체로 남겨질 때 이 선은 희미하게 지각함을 의미한다. 이는 라반이 중간의 선을 표현한다로부터; 그리고 그가 야곱과 분리될 때, 그는 “아람 사람”이라 불리운다로부터; 그리고 “밤에 꿈”의 의미가 희미한 것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 희미함에서 지각함이 “하느님께서 밤에 꿈으로 오심”에 의미되었다.

그리고 그에게 말했다, 너는 선으로부터 악에 이르기까지 조차에서 야곱에게 말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이는 서로 간에 어떤 교통함(친밀한 관계)도 더 이상 없음을 의미한다. 이는 “선으로부터 악에 이르기까지 조차에서”의 의미가 선을 말하면서 속으로는 악을 생각하고 있는 것, 그리고 이렇다보면 결국은 악을 말하고 악을 행하게 된다 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런 식으로 처세를 하는 인물을 눈치채면, 누구도 그와 더 이상의 친분 관계를 유지하려는 자는 아마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런 이유는 실제적으로 결합하는 것이 생각함과 뜻함이기 때문이다. 물론 말들끼리도 결합이 가능할는지 모르나, 말하는 자가 선을 생각하고 선을 뜻하는구나 라고 듣는 자로 하여금 믿게 설득하든지, 믿는 자가 그렇게 믿어버리고 말든지 하는 때의 경우만 해당될 것이다. 그러나 다른 삶에서는 모든 생각이 명명백백하다, 그 이유가 인물들로부터 품어져나오는 어떤 기운(영적 기운, sphere)을 수단으로 교통(소통)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듣는 자나 말하는 자나 공히 자기가 어떤 종류의 인물인지, 즉 자기의 생각과 의지가 어느 방향인지, 어떤 특성인지를 감출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결합은 이 기운에 일치하여 결과된다. 따라서 본문, “너는 선으로부터 악에 이르기까지 조차에서 말하지 않도록”이 내적 의미에서 더 이상 어떤 교통함도 없다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리고 라반이 야곱을 따라 잡았다. 이는 결합의 어떤 것을 의미한다. 이는 앞에서 살폈다.

그리고 야곱은 산에서 그의 천막을 고정시켰다. 이는 지금 “야곱”으로 의미된 선 이 있는 사랑의 상태를 의미한다. 이는 “천막”의 의미가 사랑의 거룩함이다로부터; 그리고 “천막을 고정시킴”이 이 사랑의 상태이다로부터; 그리고 “산”의 의미가 선이다로부터; 지금 여기서는 “야곱”에 의해 뜻해진 선이다로부터 알려진다.

그리고 라반은 길르앗 산에서 그의 형제와 함께 고정시켰다. 이는 얼마 정도의 이 결합 안에 있는 이 선의 상태를 의미한다. 이는 라반의 표현함이 야곱에 의해 표현된 선으로 지금 분리된 선이다로부터; “고정함”의 의미가 이 선의 상태이다로부터; (여기서 라반은 고정시켰다고만 기록하여 천막이라는 단어는 빠져 있는데, 그 이유는 라반과 관련되는 상태는 얼마쯤의 결합말고는 사랑의 거룩한 상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한글역 성경의 경우 라반이 천막을 고정시켰다 라고 번역되고 있는데, 영역의 경우는 단어 천막이 빠져 있다. 아마 천막이 빠져 있는 번역이 옳은 번역일 것이다 역자주.) 그리고 “형제들”의 의미가 라반에 의해 의미된 선과 연합한 선들이다로부터; 그리고 “길르앗 산”의 의미가 처음 결합과 마지막 결합이다로부터 알려진다. 이로부터 “라반이 자기 형제들과 길르앗 산에서 고정시켰다”의 의미가 이 결합의 얼마쯤에서 있는 이 선의 상태임이 분명해진다. 지금 위에 설명한 매우 간단한 의미 그 이상 포함된 것들은 납득력에 잘 정착되어질 수 없는데, 그 이유는 주님에 의해 영들과 천사들의 사회들이 거듭나는 인간에게 인접할 때와 분리될 때 다른 삶에서 발생하는 것들로부터 말하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이렇게 인접하고 분리하고 하는 과정은 저 세계에 존재하는 질서에 일치하고 있다는 말이다. 이런 과정의 일부 단계들은 이 장에서 얼마라도 서술되었는데, 그것들이 인간에게는 완전히 알려지지 않은 상황인지라, 아마 읽는 자는 이것이 신비함들이라고 하여 이해함을 포기할 수도 있을지 모른다. (어쩌면 이 책을 덮고 읽기를 포기할지 모른다 역자주.) 어쨌든 여기에 제시한 내적 의미 정도만에서 라도 만족해야 하지 않나 싶다. (육체를 지닌 우리로서는) 그것들의 수천 분의 일조차도 확실히 납득하는 것은 가능할 수 없기 때문이다.

26-30절. 그리고 라반이 야곱에게 말했다, 너는 무슨 짓을 했느냐, 너는 내 심정을 훔쳤다, 그리고 검에 붙잡힌 포로들 같이 내 딸들을 끌고 가버렸지 않았느냐? 27 어찌하여 너는 도망하려는 네 자신을 감추었느냐? 그리고 나를 훔쳤느냐? 그리고 나에게 말하지 않았느냐? 그리고 나는 너를 기뻐하며, 그리고 노래하며, 소구치며, 그리고 하프를 켜며 떠나 보냈을 것이다. 28 그리고 너는 내 아들들과 내 딸들에게 키스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았다. 지금 너는 어리석게 행동했다. 29 내 손이 너에게 악을 행하도록 하느님에게 있게 하다니! 그리고 너의 아버지의 하느님이 어제 밤 나에게 말하셨다, 말하기를, 너는 선으로부터 악에 이르기까지 조차에서 야곱에게 말하지 않도록 주의하여라. 30 그리고 이제 너는 가야하는 곳으로 가라, 그 이유는 네가 네 아버지의 집을 향하기를 갈망해왔기 때문이다. 어찌하여 너는 내 신들을 훔쳤느냐?

그리고 라반이 야곱에게 말했다. 이는 교통하는 상태를 의미한다. 즉 지금 “라반”에 의해 의미된 선이 야곱에 의해 표현된 지금의 선과 교통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말함”의 의미가 교통함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결합의 어떤 것이 결과된 만큼에서를 말한다; 그리고 “라반이 야곱에게 말했다”는 말이 즉각 뒤잇는 바, 교통함이 “말함”에 의해 의미된다.

너는 무슨 짓을 했느냐? 이는 분개함을 의미한다. 이는 여기에 포함된 애착으로부터, 그리고 라반의 이어지는 말이 분개함의 하나임에서 분명해진다.

너는 내 심정을 훔쳤다. 이는 이전처럼 신성한 선을 더 이상 갖지 못함을 의미한다. 이는 “심정을 훔침”의 의미가 귀하게 여기고 거룩한 것을 가져가버림이다로부터; 이 분리를 통하여 이전 같은 식으로 신성한 선은 더 이상 갖지 못했다.

그리고 내 딸들을 끌고 가버렸다. 이는 전과 같은 진리에 애착함은 더 이상 없음을 의미한다. 이는 “딸들”(여기서는 라헬과 레아)의 의미가 진리에 애착함들이다로부터 분명해진다.

마치 검에 붙잡힌 포로 같이. 이는 진리에 애착함들이 그것으로부터 가져가버려졌음을 의미한다. 이는 설명 없이 분명할 것이다. 진리에 애착함들이 “검에 붙잡힌 포로들 같이”라고 불리우는 이유는 “검(sword)”이 진리를 서술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것은 이미 설명된 바 있다.

어찌하여 너는 도망하려는 네 자신을 숨겼느냐? 그리고 나를 훔쳤느냐? 그리고 나에게 말하지 않았느냐? 이는 분리됨이 자유로움에서 결과되어 왔었는지 아닌지 하는 상태를 의미한다. 이는 “도망하려는 네 자신을 감춤”의 의미가 기꺼워하지 않는 것으로부터 자체를 분리함이다로부터; “나를 훔침”의 의미가 귀하고 거룩한 것을 가져감이다로부터; 그리고 “나에게 말하지 않음”의 의미가 여기서는 분리함을 수단으로를 표시함으로부터; 이 말들과 뒤이어지는 말의 모두로부터 의미되는 것은 분리함이 그것의 뜻에 거슬러 만들어졌다는 것, 분리함은 자유한 상태에서 행해졌어야 한다는 것이다. 자유함의 이 상태가 지금 이어지는 말, 즉 “나는 기뻐하며, 노래부르며, 소고치고 하프를 켜며 너를 떠나 보냈을 것이다”에 의미되고 묘사되어 있다. 그러나 이 말은 그때 당시 그의 신조에 따른 라반의 말일 뿐이다. 거듭나지고 있는 이들과 더불어 진행되는 중간의 선이 진짜 선들에서 분리됨, 이것이 자유함에서 행해지는 것의 경우가 어떠한지는 앞에서 (난해하다 여겼을지 모르지만) 설명은 해둔 바 있다, 이를 다시 참조하기 바란다.
어쨌든 이 경우가 실감나게 인간에게 전혀 와닿지 않는다, 그 이유는 인간 당사자들이 자기와 더불어 있는 선이 어떻게 다양해지는 지를 모르기 때문, 더욱이 모두 각각의 선의 상태가 어떻게 바뀌는지를 모르기 때문, 최소한 대충적인 차원에서라도, 즉 유아의 선이 어떻게 다양해지는지, 이 선이 어린 아이의 선으로 바뀌고, 젊은 이의 선으로 이어지고, 다시 성년의 선에 진입하고 노년의 선으로 들어가는지 조차 모르기 때문이다. 거듭나지지 않고 있는 이들의 경우는 바뀌는 선들이 없다, 그러나 애착들과 기쁨들의 바뀜은 있다. 거듭나는 이들에게는 선들의 상태의 바뀜들이 있고, 이 바뀜은 유아로부터 생을 마감하는 때까지에 걸쳐서 있다. 그 이유가 주님은 어떤 종류의 생명쪽으로 인간 당사자를 인도해야하는지를 아시기 때문, 동시에 인간 각자가 주님에 의해 자신이 인도되도록 어떻게 허용해 가야하는지도 아시기 때문; 그리고 모든 것들은 일반적 특수적, 참으로 작은, 사소한 낱개 수준의 것도 예견되어 설비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은 선들의 상태의 바뀜들의 경우들이 어떻게 진행되는지를 전혀 모른다; 모르는 주된 이유는 그가 이런 주제에 관한 지식들이 없는 것이 첫째 이유이다, 더구나 오늘날 대다수의 인간이 이에 관하여는 어떤 지식도 습득하기를 바라지 않는 것도 주된 이유이다. (신앙 생활을 잘해서 사업도 성공하고, 병도 치료되었거나 하는 등등의 신앙 간증을 들어야 웬지 나의 마음도 감동받는 것을 느끼는 것이 육체 속의 인간의 현실이어서인지 몰라도 이런 식의 동영상이 신앙인의 대화에서 주류를 이루는 것 같다 역자주.) 그리고 주님께서는 인간에게 직접적으로 흘러들어 그를 가르치시지 않고, 간접적 방법, 즉 그의 지식 안으로 흘러드시는 간접적 방법으로 (이래야 인간 당사자의 선택의 자유함을 침해하지 않는다, 역자주) 흘러드시기에 인간은 선들의 상태의 바뀜에 친숙해질 수 없다. 그리고 인간이 이런 주제에 관한 지식 없이 있기를 바라는 조건에 있는 한, 더욱이 오늘날 자신이 거듭나지게 허용해주는 이들이 너무나 적기에, 설사 이런 주제를 적나나하게 해설해놓는다 해도 그것들이 납득되어질리 만무하다.
어쨌든 이 주제를 놓고 한 개의 예증이라도 해두고 넘어가야 할 것 같기에, 내가 다른 삶에서의 경험을 말해보겠다. 나는 기독 세계로부터 다른 삶으로 온 이로부터 경험을 가졌다. 그는 자신의 지식이 타인보다 월등히 수준이 높다고 자부하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그는 지상 삶 동안 그것이 맞다고 인정해왔었다. 그러나 그는 악한 생활을 해왔기 때문에, 그는 선과 자유함에 관해서, 그리고 그 결과인 기쁨과 복됨에 관하여 매우 어리석은 무지함 에 있었던 바, 그는 지옥의 기쁨과 자유함, 그리고 천국의 기쁨과 자유함 사이의 차이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사실상 그는 어떤 것도 있지 않았다고 말했다. 타인보다 더 학식이 뛰어나다는 이들사이에서조차 있는 이런 무지함이 어떤 그늘 안으로 그들의 추론을 밀어넣을지, 그렇다, 크고 미친 몽상으로 여기서 내적 의미에서 말해지는 주제인 선과 자유함에 관한 것이 돌변되고야 말는지 모른다. 그럼에도 진리인즉, 말씀 각처에는 천국의 비밀들을 포함하지 않는 대목은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설사 인간에게는 어느 순간에서도 나타나지 않더라도 그렇다는 말이다. 제아무리 지식의 결핍이 대단하고, 무지함에도 아랑곳하지 않는 현실이 현재의 인간이지만 어쨌든 천국적인 것들은 기꺼이 존재하고 있다.

그리고 나는 너를 기뻐하며, 노래하며 떠나보냈을 것이다. 이는 자기 자신으로부터 그것(즉 라반에 의해 의미된 선)이 그 자체 진리들 측면에 관하여 있다고 믿는 상태를 의미한다. 이는 “나는 너를 떠나보냈을 것이다”가 이것은 자유함 안에서 그 자체를 분리할 것이다를 의미함으로부터; 그러나 이 상태에 있을 때 그 자체가 분리된 것은 아닌데, 이는 앞에서 말했다; 이런 것이 보여주는 바, 그는 자기 자신으로 자신을 있게 한다고 믿은 상태에서 라반이 뱉은 말들이다는 것이다. 그 이유가 자신으로부터 믿어지는 것은 진리이지 않은 것으로부터 믿는 것이고, 그 반면 자신으로부터 라고 믿지 않는 것, 그러나 주님으로부터 라고 믿는 것은 진리로부터 믿는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관련된 상태는 진리들에 관련되는 상태인 것은 “기뻐하며, 노래하며”에 의해 의미되어 있다. 그 이유가 “기뻐함과 노래함”이 진리들 측면을 서술하기 때문이다.
말씀에서 간혹 등장하는 단어는 “기뻐함(기쁨, gladness)”, “기쁨(환희, joy)”이 있다. 때로는 이 두 단어가 동시에 언급되기도 한다; 그러나 “기뻐함”은 주제가 진리와 진리에 애착함을 취급할 때 언급되고; “기쁨”은 선과 선에 애착함을 취급할 때 언급된다. (한글 번역에서는 통상 기쁨으로 번역되는 영어 단어에는 여러 개가 있는데, 대체로 이 책과 성경에 잘 등장하는 단어로는 pleasure, delight, gladness, joy가 있다. 역자 역시 예전에는 이 단어들을 한글로 다르게 표현해서 구분해보려 애썼으나 요즘은 대체로 기쁨이라 번역하고 괄호에 영어를 삽입하기도 한다. 구분하지 않게 된 이유는 영한 사전에서 기쁨으로 대체로 번역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어 단어의 경우 기쁨의 종류를 구분하고저 다른 단어를 사용하는 것으로 역자는 알고 있다. 즉 pleasure는 주로 육체적, 감각적, 관능적, 또는 향락적 기쁨을 표시할 때; delight는 동작이나 표정으로 기쁨이 표시된다고 생각될 때; gladness는 생각 측면, 고로 진리 등으로부터 기쁨을 표시할 때; joy는 영적인 기쁨, 정확히 말하면 선 측면에서의 기쁨, 가장 깊은 측면에서의 기쁨, 즉 천적 수준의 기쁨을 표시할 때 라고 역자는 추측하므로 참고하고, 역자의 생각이 틀릴 수도 있으므로 더 연구하기 바란다. 역자 주.)
이사야서에서:
잘 보라 기쁨(joy)과 기뻐함(gladness)이 있다, 숫소들을 잡고 양을 죽이고, 고기를 먹으며 포도주 를 마신다 (이. 22:13);
위에서 기쁨은 선을 서술하고, “기뻐함”은 진리를 서술하고 있다.
이사야서에서:
포도주 때문에 거리들에서 외침이 있다; 모든 기뻐함이 황량해짐으로 만들어질 것이다, 그리고 모든 기쁨이 추방될 것이다 (이. 24:11).
이사야서에서:
여호와께서 되찾은 자가 돌아올 것이다, 그리고 노래하며 시온으로 올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머리 위에 영원히 지속돠는 기쁨(이 있을 것이다); 그들은 기쁨과 기뻐함을 획득할 것이다, 그리고 슬픔과 슬피움은 도망칠 것이다 (이. 35:10; 51:11).
이사야서에서:
여호와께서 시온을 위로하실 것이다; 기쁨과 기뻐함이 거기 안에서 발견될 것이다, 고백함과 노래하는 음성(을 발견할 것이다) (이. 51:3).
예레미야서에서:
나는 유다의 성읍들과 예루살렘의 거리들에서 기쁨의 함성과 기뻐함의 소리, 신랑의 소리와 신부의 소리가 중단되게 할 것이다, 그 이유는 토지가 황폐될 것이기 때문이다 (예. 7:34; 25:10).
예레미야서에서:
기쁨의 함성과 기뻐함의 소리, 신랑의 소리와 신부의 소리, 너희를 여호와 체바욷께 고백하라 라고 말하는 그들의 음성 (예. 33:11).
예레미야서에서:
기뻐함과 몹시 기뻐함이 갈멜로부터, 그리고 모압의 토지로부터 모아들여져 왔었다 (예. 48:33).
요엘서에서:
식품이 우리의 눈 앞에서 끊어지고, 여호와의 집으로부터 기뻐함과 몹시 기뻐함이 중단되었지 않던가? (욜. 1:16)
스가랴서에서:
단식함이 유다의 가문에게 기쁨과 기뻐함과 좋은 절기들로 있을 것이다 (슥. 8:19).
말씀에 있는 모든 것에는 천국의 결혼(즉 선과 진리의 결혼)이 있다는 것을 모르는 이는 말씀에서 기쁨(환희, joy)과 기뻐함(즐거워함, gladness)의 매 한가지 기쁨이다고 믿을런지 모른다. 그리고 두 표현이 언급된 것은 기쁨을 더 강조하려 해서 일 것이라고, 따라서 그 중 하나는 불필요할지도 모른다고 여길지 모른다. 그러나 말씀의 마침표, 쉼표 등등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에는 영적 의미 없이 사용된 것은 없다. (단지 우리가 그것 모두를 납득하지 못할 뿐이다 역자주.) 기쁨(joy)은 선 측면을 서술하고, 기뻐함(gladness)은 진리 측면을 서술한다. “노래” 역시 진리 측면을 서술한다. 이는 “노래(song)”라는 단어가 언급되는 구절에서 확인된다; 즉 이. 5:1; 24:9; 26:1; 30:29; 42:10; 겔. 26:13; 암. 5:23 등등이다.
주님의 왕국에 있는 모든 것들은 선 또는 진리에 관련되고 있다. 다시 말해 사랑으로부터의 것들과 선행으로부터의 신앙에 관련되고 있다. 선에 관련되는 것들, 또는 사랑 속에, 사랑으로부터 있는 것들은 천적이다 라고(천적 수준이다 라고, 천적 평면에 속해 있다 라고, 천적 왕국으로부터, 또는 천적 왕국에 속해 있다 라고, 또는 셋째 천국으로부터 라고) 불리운다; 그러나 진리에 관련되는 것들, 또는 선행으로부터의 신앙 속에 있는 것들은 영적이다 라고 (영적 수준이다 라고, 영적 평면에 속해 있다 라고, 영적 왕국으로부터, 또는 영적 왕국에 속해 있다 라고, 또는 둘째 천국으로부터 라고) 불리운다. (흔한 신학서들의 경우, 천적이라는 말은 천국적이라는 말과 같은 의미에서 혼용해 사용될지 모르고, 영적이라는 말은 육체적이라는 단어에 대비해서만 사용될지 모르나, 이 책의 경우, 위와 같이 근원이나 수준이 다름을 명기하기 위해 다르게 사용된다. 물론 이 책도 영적 세계(약칭 영계)에서의 경우는 자연계에 대비하여 사용된다. 이런 식의 단어 표기는 타 신학서 내지 타 종교의 교리에는 없을지 모른다. 하여 이런 언어에 친숙해지지 않은 독자의 경우 이해함에 혼동될지 모르므로 유의하기 바란다. 역자주.) 기쁨이라는 단어를 포함, 말씀에 있는 모든 것들은 일반적, 특수적, 개별적, 낱개 하나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것에서 주님의 왕국이 취급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최고 의미(가장 깊은 의미)에서는 주님 자신이 취급되고 있다; 그리고 주님의 왕국은 선과 진리의 결혼, 또는 천국의 결혼이다; 그리고 주님 자신 안에도 신성한 결혼이 있고, 이 결혼으로부터 천국의 결혼이 도래한다; 그러므로 말씀의 모든 것에는 이 결혼이 있다. 특히 예언서들에서 이런 결혼의 표기를 위해 글자적으로는 중복되는 듯한 표기가 많은데, 이는 같은 뜻을 단지 단어들을 바꾼 것에 불과한 것으로 지루하게 여기며 말씀을 읽어서는 안될 것이다. 이런 반복됨들 역시 무의미한 적은 결코 없다, 즉 반복된 듯한 표현의 이것은 천적인 것 (즉 사랑과 선에 속한 것), 저것은 영적인 것(즉 선행으로부터의 신앙, 또는 진리로부터의 신앙)이 의미되어진다; 이런 사항들이 보여주는 것은, 말씀의 모든 것에는 천국의 결혼(즉 주님의 왕국)이 있다는 것, 그리고 최고 의미에서 신성한 결혼 자체(즉 주님)가 있다는 것이다.

소고치며 하프를 켜며. 이는 영적 선에 관하여를 의미한다. 이를 좀 더 꼼꼼하게 말하면, 이 선(중간의 선, 라반이 표현하는 선)은 영적 선에 관한 것도 이 선 자체로부터 있다고 믿는 상태를 의미한다. 이는 “소고(timbrel)와 하프(harp)”가 선을 서술하나, 그 중 영적 선을 서술함에서 분명해진다. (이는 말씀의 많은 구절에서 확인된다.) 영적 (수준의) 선(spiritual good)은 신앙으로부터의 선이라 불리우고 선행(charity)이다; 그러나 천적 (수준의) 선은 사랑으로부터의 선이라 불리우고, 이는 주님을 사랑함이다. 천국들에는 주님의 두 왕국들이 있다. 그 중의 하나가 그분의 천적 왕국이라 불리우고, 이 왕국 안에는 주님을 사랑함 안에 있는 이들이 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그분의 영적 왕국이라 불리우고, 이웃을 향한 선행 안에 있는 이들이 있다. 이 두 왕국들은 서로로부터 구분되나, 이 둘은 하나로서 행동하고 하나를 이루고 있다. 이 구분되는 천적, 영적 왕국에 관하여는 이미 자주 서술되어 왔다.
고대 시대의 교회에서도 여러 종류의 악기들을 사용했다. 즉 타악기(소고, timbrel), 현악기(psaltery), 관악기(pipe), 하프(harp), 데카코르드(decachord, 옛 그리스의 열 줄을 지닌 현악기) 등등이다. 이들의 어떤 것은 천적 종류(평면, 수준)에, 어떤 것은 영적 종류(평면, 수준)에 속해 있다. 따라서 말씀에서 이런 악기의 언급이 있게 되면, 선의 어떤 종류, 영적 선이나 천적 선의 어떤 것을 암시하게 된다. 소고와 하프는 영적인 것들의 부류에 속했다, 그러므로 이 대목에서도 “영적 선에 관련하여”라고 말한 것이다.

너는 나로 내 아들과 내 딸들과 키스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았다. 이는 이 선의 확신(신조, belief)에 일치하는 자유로운 상태에서의 분열을 의미한다. 이는 “키스함”의 의미가 애착으로부터 있는 결합이다로부터, 그러므로 “키스하게 내버려두지 않다”는 분열(disjunction)을 의미한다; 그리고 “아들들”은 진리들을; “딸들”은 선들을 의미한다; 고로 선들과 진리들에 관하여 있는 분열이 의미된다. 이 분열이 이 선의 확신에 일치하는 자유한 상태에서 있었다는 것이 문맥의 연결에서 찾아진다.

지금 너는 어리석은 짓을 했다. 이는 분개함을 의미한다. 이는 말의 표현에 포함된 애착에서 분명해진다.

내 손이 네게 악을 행하도록 하느님에게 있게 하다니! 이는 만일 그것이 능력을 지녔다면 하는 분개함의 상태를 의미한다. 이는 “손”의 의미가 힘이다로부터 분명해진다. 이것이 말해진 상태, 이것들에 의해 의미된 상태가 분개함인 것은 분명하다.

그리고 네 아버지의 하느님이 어젯밤 나에게 말하셨다. 이는 그것은 신성에 의해 허락되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이는 설명 없이 분명해졌을 것이다.

말하시기를, 너는 야곱에게 선으로부터 악에 이르기까지 조차에서 말하지 않도록 주의하여라. 이는 교통함(친밀한 관계 유지)이 금지되어졌음을 의미한다. 이는 “선으로부터 악에 이르기까지 조차에서 말함”의 의미가 더 이상 어떤 교통함도 없다를 의미함에서 알게 된다, 고로 교통함이 금지되어졌음 이다.

지금 너는 가야할 길을 가라. 이는 그것 자신으로부터 자체가 분리되도록 행동함을 의미한다. 이는 “가야할 길을 간다”가 분리되어짐이다로부터 분명해진다. 이것이 그것 자신으로부터 인 것은 분명하다.

너는 네 아버지의 집을 향하는 것을 갈망해왔기 때문이다. 이는 직접적으로 흘러드는 신성한 선과의 결합을 갈망함을 의미한다. 이는 “아버지(즉 이삭과 아브라함)의 집”의 의미가 직접 흘러드는 선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 외에 이삭과 함께 있는 아브라함은 직접적으로 흘러드는 신성한 선을, 라반은 방계의 선을, 또는 직접적으로 흘러들지 않는 선을 표시한다. 방계의 선, 또는 직접 흐르지 않는 선은 중간의(중매하는) 선이라고 앞 폐이지에서 말해왔다. 그 이유가 이 선은 선들로서 나타나는 세상의 것에 속하는 많은 것들에서 파생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선은 선은 아니고 선 비숫하게 보일 뿐이다. (그렇지만 세상의 우리들은 이것도 선이라고 알고 있으므로 이 책을 읽는데 혼동을 주는 경우가 많아지는 원인일지 모른다. 역자주.) 한편, 직접 흘러드는 선은 주님으로부터 직접적으로 오는 선, 또는 주님으로부터 천국을 통한 간접적으로 오는 선, 이 선은 방금 위에서 언급한 세상 속의 선과는 분리되는 선이다.
거듭나지는 모두 각각의 인간은 처음에는 중간의 선 안에 있다, 그 이유가 진짜 선들과 진리들을 받아들이는데 유용한 수단으로 중간의 선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제아무리 명약이 발견되었어도 인간 신체가 흡수하지 못하면 아무 소용이 없기에 약의 체내 흡수를 위해 여러 촉매제(중매제)를 사용하는 것을 미루어 생각하면 이 대목의 이해에 도움이 될지 모른다. 역자주.) 그러나 이 선이 유용한 도움을 주고 나면, 이 선은 분리되어진다. 그리고 인간은 보다 더 직접 흘러드는 선으로 데려다 놓여진다. 그리하여 거듭나는 인간은 거듭남의 등차 별로 완전해진다. 예를 들면; 거듭나지는 인간에게서 처음의 경우, 그는 자신이 선을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이 자신으로부터 이다고 믿는다, 따라서 이로부터 그가 행한 선행의 공로는 자신에게 있다고 믿는다; 그 이유가 그는 선이 어떤 다른 근원으로부터 흘러들 수 있다는 것을 아직은 알지 못하고, 설사 누군가가 말해주어 알았거나, 어떤 책을 통해 알았다 해도 납득하지 못하고, 여전히 자신이 선을 행하였으니 그 선행에 대한 보답을 받는 것은 당연지사 아닌가 하는 생각에서 물러서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처음의 그가 선행을 해보아야 내게 이득될게 없는데 라고 판단한다면, 선행의 시작은 아예 물건너가고 말 것이다. 그러나 진짜는 아니고 모조품 수준일지언정 붙들고 있으면 선인 것을 행하는 습관에 젖어들면서, 그는 선인 것을 행함에 애착함, 뿐만 아니라 선에 관한 지식들 안으로, 심지어 공적 주의에 관한 것까지를 살피고 숙고해보는 단계로 진입한다. 이 단계를 지나면서 그는 선인 것을 행함에 애착함 안으로 인도될 때, 그는 이전과는 다르게 생각하고, 이전과는 다르게 믿기를 개시한다. 즉 선은 주님으로부터 흘러든다는 것; 따라서 자신이 행하는 선으로부터 자신이 보상을 받을 이유가 없다는 것을 생각하고 믿는다는 말이다; 결국 그는 선인 것을 뜻하고 행함에 애착하는 상태 안에 있어, 그는 자기 공적 주의를 철저히 배제하고, 심지어 그것을 혐오하기까지에 이른다. 결론적으로 선으로부터 선에 감동되어 있다. 그가 이런 상태에 있을 때, 선은 직접 안으로 흘러든다. (이 수준이면 요한복음서 14장에서, “빌립에게 예수께서 내가 그분 안에, 그분이 내 안에 계신다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하고 반문하신 구절을 실감할지 모른다 역자주.)
또 다른 예로 부부의 사랑(conjugial love)을 생각해보자. 이 사랑의 발단으로 처음에 있었던 선은 (상대쪽의 어느) 아름다움이었다. 또는 예의 범절 (깍듯이 대접해줌), 또는 각자가 서로를 두고 생각해보니 내게 꼭 맞는 어떤 것의 발견(이것은 단지 바깥쪽 측면에서 걸맞는 것), 또는 조건이 거의 동등함, 또는 자신이 바라던 어떤 속성(자신에게 없다고 여긴 어떤 특성이 상대에게서 발견됨) 등등 같은 것인데, 이는 가지각색일 것이므로 예를 다 들어 말하기는 힘들다. 어쨌든 이런 것들이 서로가 서로를 볼 때 선(좋은 것, 바라는 것)이 되어 있다. 여기서 말하는 중간의(중매하는) 선에 해당될지 모른다. 하여튼 이 선들은 부부의 사랑의 처음 중간의 선들이다. 이 후에 마음들의 결합이 온다, 이 결합 안에서 이쪽이 저쪽으로서 처럼 뜻한다. 그러면 상대가 원하는 것(기뻐하는 것)을 행함에서 자신도 기쁨을 지각한다. 이것이 두 번째 상태이다. 그러면 이전의 것들은 비록 현존한다 해도 더 이상 중요시할 사항은 아니되어 있다. (눈이 예뻐 결혼을 결정했는데, 몇 년 뒤 자식을 낳으면서 알게 된 것은 그녀가 눈 수술 덕분에 예뻐진 것이었을 때일지라도, 이미 그 남자는 그녀의 눈 예쁨을 좋아했었음을 훨씬 넘는 그녀를 사랑함에 있을 경우가 아닌가 싶다 역자주.) 마지막으로 천적인 선과 영적인 진리에 관련하여 하나가 됨(일체가 됨, unition)이 뒤따른다. 이 하나됨 안에서는 이쪽이 저쪽이 믿는 것과 꼭같이 믿는다. 또한 이쪽이 감동되는 대목은 저쪽도 감동되고 있다. (물론 지상 세계에서 오래 같이 산 부부의 경우에서도 보여지기는 하나, 이는 부부 양쪽의 영적 세계를 두고 하는 말이 라 생각하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사료된다 역자주) 이 상태가 올 때, 둘은 함께 천국의 결혼 안에 있다. 이는 선과 진리의 결혼이다, 고로 부부의 사랑 안에 있다. 그 이유가 부부의 사랑은 이외 더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둘의 애착들 안으로 흘러드시지만 하나의 애착 안으로 흘러드시는 것과 같이 하신다. 이것이 직접 흘러드심이다; 그러나 이전의 선, 즉 간접적으로 흘러드신 선은 직접 흘러드는 선을 받아들이게 해주심의 수단 역할로 끝난다.

어찌하여 너는 내 신들을 훔쳤느냐? 이는 진리를 잃어버렸기에 분개함을 의미한다.
이는 앞에서 라헬이 드라빔을 가져감에 관련하여 설명된 바 있다.

31, 32절. 그리고 야곱은 라반에게 답하여 말했다, 나는 당신께서 무력으로 나로부터 당신의 딸들을 데리고 갈까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 32 당신께서 당신의 신을 누구에게서 찾든지 그는 우리 형제 앞에서 살지 못할 것입니다. 당신은 나와 더불어 있는 것을 뒤져보시오, 그리고 그것을 당신에게 가져가십시오. 그리고 야곱은 라헬이 그것들을 훔친 것을 모르고 있었다.

그리고 야곱은 라반에게 답하여 말했다, 나는 당신께서 무력으로 나로부터 당신의 딸들을 데리고 갈까 두려워 했기 때문입니다. 이는 분리가 그 선의 자유 안에서 있어졌을 경우, 필시 진리에 애착함은 해를 당했을 것임을 의미한다. 이는 앞에서 진행한 대목, 즉 “라반”에 의해 의미된 선쪽에서 있는 자유함에서의 분리가 취급된 것에 대한 답변이 여기서 있는 바로부터 분명해진다. 이 대목 역시 내적 의미에서 천국의 비밀들을 포함하고 있으나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은 이유로 상세한 설명을 할 수 없을 것 같다. 이 선의 자유함에서 분리가 있을 경우 필시 존재하고야 마는 상태, 이런 상태에서 진리에 애착함들은 해를 입고 말 것임이 “당신이 강제로 나로부터 당신의 딸들을 데려간다면”에 의해 의미됨은 분명하다; 그 이유가 “딸들(라헬과 레아)”에 의해 진리에 애착함이 의미되기 때문인데, 이는 앞에서 여러 번 상술했다. 그리고 이어지는 아래 대목에서 더 잘 알는지 모른다.

당신이 당신의 신들을 누구에게서 찾든지 그는 우리 형제들 앞에서 살아 있지 못할 것입니다. 이는 이 진리는 그의 것 [라반의 것]이 아니었다는 것, 그의 진리는 그의 선 [야곱의 선] 안에 내재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신들(gods)”, 즉 드라빔이 진리들이다로부터; 그렇지만 “라반”에 의해 의미된 선으로부터의 진리들은 아니고, 라헬에 의해 표현된 애착으로부터의 진리들이었다. 이 진리들이 “신들”에 의해 여기서 의미되었기에, 라헬이 그것들을 훔쳤다고 서술되어진 것이다; 그리고 이어지는 대목에서 이에 대해 더 말하고 있다; 내적 의미에서만 분명한 것을 나타내는 신비함들이 이런 대목에 포함되어 있지 않다면 이런 행위 자체가 기록되지 않을 수도 있지 않을는지 모른다. 그리고 여기서 주제로 취급된 진리들은 “라반”에 의해 의미된 선으로부터의 진리들이 아니라, 라헬에 의해 표현된 진리에 애착으로부터의 진리들이기애, “당신이 당신의 신들을 누구에게서 발견하든 그는 우리의 형제들로부터 살지 못할 것이다”에 의해 진리는 그의 것이 아니다는 것, 그리고 그의 진리는 그의 선[야곱의 선]에 내재할 수 없다가 의미되는 것이다.
이 신비와 더불은 경우는 이렇다: 모두 각각의 영적 선은 그것 자신의 진리들을 가진다; 그 이유가 이 선이 있는 곳에는 그것의 진리들도 있기 때문이다. 그 자체만에 주목하면, 선은 하나이나 진리들을 수단으로 다양해진다; 그 이유가 진리들은 육체의 기관 중 하나를 구성하는 섬유(fiber)들에 비교된다. 기관의 형체에 일치하게 섬유들은 기관을 만들어 내고, 결과적으로 기관의 기능을 만들어 낸다, 그리고 기능의 작동은 혼을 통하여 흐르는 생명을 수단으로 결과된다. 이 생명은 주님으로부터 있는 선으로부터 이다. 고로 이 선, 비록 하나이지만 모두 각각의 개별적인 것으로 다양해지고, 이것과 저것이 결코 같지 않은 모든 것으로 다양해진다. 그러므로 이 선으로부터의 진리는 또다른 선으로부터의 진리와 내재할 수 없다. 그러므로 이쪽 인간의 진리가 또 다른 인간의 선 안에 내재할 수 없다. 그 이유가 선 안에 있는 모든 이와 더불은 진리들은 당사자 안에서 서로 교통하고, 어떤 형체를 생산하는 바, 이쪽의 진리가 저쪽으로 이동될 수 없다; 그러나 이것이 저쪽으로 갈아타는 경우, 그것을 받는 당사자의 선의 형체 안으로 건너가되, 또 다른 양상(면모, 외관, 모습, aspect)을 입어야 한다. 어쨌든 이런 대목에 있는 신비함은 너무나 깊은 차원인지라 간단한 몇 줄의 말 가지고는 상술될리 만무하다. 그러므로 정확히 똑같은 진리를 동시에 두 인간이 받는다 해도 이쪽 인간의 마음과 저쪽 인간의 마음은 결코 같지 않다; 따라서 인간의 숫자만큼 다양함도 크고, 그들 각각의 애착들과 생각들 역시 다양하다. 하여 보편적 천국은 항구적인 다양함으로 있는 천사의 형체로 구성된다, 이 다양한 형체가 주님에 의해 하나의 천국 형체로서 하나를 생산하도록 섭리되고 있다. 그 이유가 하나(one)는 결코 똑같은 것들로 구성되지 않고 형체 안에 다양한 것들로 구성되고, 이것이 그들의 형체에 따라 하나를 만든다. 이상 모두로부터 그의 진리[라반의 진리]에 뜻해진 것은 그의 선[야곱의 선] 안에 내재하지 않음이 분명해졌을 것이다.

당신은 나와 더불어 있는 것을 뒤져보시오, 그리고 그것을 당신에게 가져가시오. 이는 이 선 속의 모든 것들은 분리되어졌음을 의미한다. 이는 말들의 뜻으로부터 분명해진다. 즉 당신의 것이 나와 더불어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 즉 “라반”에 의해 의미된 선으로부터의 것은 야곱이 가졌던 선 안에 있지 않다는 것, 결과적으로 이 선의 모든 것은 분리되어졌다를 의미한다.

그리고 야곱은 라헬이 그것들을 훔친 것을 모르고 있었다. 이는 그것들은 내면의 진리에 애착함 속에 있었음을 의미한다. 이는 라헬의 표현함이 내면의 진리에 애착함이다로부터; 그리고 “훔치다”의 의미가 귀하게 여기고 거룩한 것을 가져감이다로부터 분명해진다. 이 구절의 말 그대로 라헬이 라반의 신들인 드라빔을 훔침에 의해 진리 측면에서 라반에 의해 의미된 상태가 바뀌었다가 의미된다; 그리고 여기서와 이어지는 대목에서, 상태의 바뀜이 더 묘사되고 있다. 이는 라반에 의해 표현된 선이 “야곱”인 선으로부터 분리된 후, 이 분리를 통하여 또 다른 상태로 와졌다는 사실로부터 결과한다; 그 이유가 선들이 결합되어 와졌을 때 라반에 의해 표현된 선에게 나타났던 진리들이 마치 그것들이 가져가버림을 당한 것처럼 지금 지각되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라반이 그것들(진리들)을 잃었다고 그것을 두고 불평하고, 그가 천막들을 수색했으나 발견하지 못하고 마는 이유이다. 그 이유가 좋은 의미에서의 드라빔은 그의 것이 아니고 “라헬”인 진리에 애착함들에 속하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에 대한 설명은 다른 삶에서 발생한 것이 아니면 보여질 수 없을 것 같다: 그 이유가 인간 가까이에서 발생한 것들은 마치 그것들이 인간 안에서 발생한 것처럼 그에게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경우는 다른 삶에서 영들과 더불어서도 똑같기 때문이다. 중간의 선 안에 있는 영들의 사회들이 천사들의 집단 안에 있을 때, 천사들에게 속한 선들과 진리들이 마치 자기들 것인냥 나타나기 때문이다, 참으로 그들은 이와 달리는 방법이 없다. 그러나 그들이 분리될 때, 그때 그들은 이런 경우는 아니다 라고 지각한다; 그러므로 그들은 자기들이 소속했던 천사의 집단이 진리를 가져가버림에 불평을 한다. 이런 상황이 여기서 드라빔을 두고 나누는 대화에 의해 내적 의미에서 의미되어 있다.
일반적으로 말하면, 자기 자신의 것인 선과 진리는 누구에게든지 없다, 모든 선과 진리는 주님으로부터 안으로 직접 흐르거나, 또는 주님으로부터 천사들의 사회들을 통하여 간접적으로 흘러들 뿐이다; 그럼에도 선과 진리는 마치 인간의 것인냥 나타나는데, 그것들을 인간이 자신에게 얼마나 잘 어울리게 한 정도에 따라서이지만, 그가 그것들이 자신의 것이 아니고 주님의 것임을 아는 상태에, 그리고 인정하는 상태에, 마지막으로 믿는 상태에 이를 때까지이다. 더욱이 말씀으로부터, 따라서 기독 세계에도 알려진 바, 모든 선과 진리는 주님으로부터 있다는 것, 어느 선도 인간으로부터 없다는 것이다; 이것에 한술 더 떠 말해진 말씀으로부터 있는 교회의 교리물들은 이렇게 선포한다, 즉 (어느 선도 인간으로부터 없는 바) 인간은 자신으로부터 선을 얻으려고 애쓸 수 없다, 고로 그것을 뜻할 수 없다, 그러므로 그것을 행할 수 없다 – 그 이유가 선을 행함은 선을 뜻함이기 때문 – 그리고 모든 신앙 역시 주님으로부터 있다; 하여 신앙 역시 주님으로부터 흐르지 않으면 인간은 전혀 신앙을 가질 수 없다고 선포한다는 말이다.
이런 것들이 교회의 교리물이나 설교 등을 통해 선포된다. 그러나 적은 숫자, 아마 매우 적은 숫자만이 그것이 그렇다 라고 믿는다는 것은 이런 사실로부터, 즉 그들은 모든 생명은 그 자체로 있다고 상상한다는 점에서, 그리고 생명이 흘러든다 라고 생각하는 자는 거의 없다는 사실에서 알게 된다. 인간의 모든 생명은 사고력과 의지력에 존재한다; 그 이유가 생각하고 뜻하는 능력을 가져간다면, 남아 있는 생명은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진짜 생명 자체는 선을 생각함과 선을 뜻함에, 또한 진리를 생각함과 우리가 진리이다고 생각하는 것을 뜻함에 존재한다. 이런 것들이 인간으로부터 있지 않고 주님으로부터 있다는 것, 그리고 그것들은 천국을 통하여 주님으로부터 흘러든다는 것이 말씀으로부터 있는 교회의 교리물과도 일치하는 바, 판단력이 있고 곰곰이 되새겨 보는 이들이다면 모든 생명도 거기로부터 흘러든다고 결말지을지 모른다.
이는 반대의 경우인 악과 거짓의 경우도 똑같다. 말씀으로부터의 교리물들에 따라서 악마는 악을 불어넣으려 무진 애를 쓴다. 그러므로 누군가가 큰 죄악을 범할 때, 그가 자기를 악마가 끌고가게 내버려두었었다 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렇다고 믿는 자가 거의 없을지라도 이는 엄연한 사실이다; 그 이유가 모든 선과 진리가 주님으로부터 있듯이 모든 악과 거짓은 지옥으로부터, 즉 악마로부터 있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우리는 모든 선과 진리가 흘러들 듯, 악과 거짓도 흘러든다는 것, 결과적으로 생각함과 뜻함의 모든 것도 흘러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흘러듦에서 판단력이 있고 곰곰이 되새겨보는 자라면, 모든 생명이 비록 인간 안에 저절로 있는 듯하지만 그것이 흘러듦을 알 수 있다.
이런 경우는 최근 이 세상에서 저 세상으로 갓 올라온 영들에게 자주 보여진다. 그들 중의 얼마가 말했다, 만일 모든 악과 거짓 또한 흘러든다면, 악과 거짓의 어떤 것도 인간의 탓일 수 없다, 그리고 그것들은 인간의 과오 때문이 아니다, 그 이유는 이것들은 인간 외의 또 다른 근원으로부터 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에게 돌아온 대답은 그들이 자신으로부터 생각하고 뜻한다고 믿음으로 악과 거짓을 자기 것이 되게 했다는 것; 만일 그들이 이런 경우가 실제로 있다고 믿는다면, 그들은 악과 거짓을 자기 것이 되게 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그 이유가 그들이 모든 선과 진리가 주님으로부터 있다고 믿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만일 그들이 이것을 믿었다면, 그들은 자신을 주님에 의해 인도되게 허용했을 것이다, 그러한 바 그들은 다른 상태에 있어 왔을 것이다는 것; 그 다음 그들의 생각과 의지 안으로 진입한 악이 생각과 의지에 영향을 주지 못했을 것이다, 그 이유는 악이 아닌 선이 그들의 생각과 의지로부터 밖으로 나갔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인간에게 영향을 주는 것은 당사자 안으로 들어간 것이 아니라 안에서 밖으로 나간 것이기 때문이다 (막. 7:15).
많은 이들이 이 성경 말씀을 알 수 있지만 믿는 자는 거의 없는 실정이다. 악한 자도 이 말씀을 알 수 있지만 그들 역시 믿지 않는다. 그 이유는 그들은 자기 자신인 것 안에 있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에게 모든 것이 흘러듦을 보여줄 때, 흘러듦이 자기들로부터 거두어진다면, 자기들은 더 이상 살 수 없을 것이라고 주장은 하면서도 자신의 것 안에서 살기를 허락받는 쪽으로 걱정하며 탄원을 재촉하는 만큼에서 위 사항을 사랑할 뿐이다. 이런 것을 아는 이들조차 지니는 확신에서도 별반 차이가 없다. 어쨌든 이런 사항들은 중간의 선에 있는 영들이 다른 인간과 결합하고 분리될 때, 그들과 더불어 어떤 경우가 발생하는지를 알게 하려고 말해져오고 있었다; 즉 그들이 결합되었을 때, 그들은 선들과 진리들이 비록 자신들 것이 아님에도, 그것이 자기들 자신이다고 하는 것 외에 달리 아는 것이 없다.

33-35절. 그리고 라반은 야곱의 천막으로 왔다, 그리고 레아의 천막으로 왔다, 그리고 두 하녀의 천막으로 왔다, 그리고 그것들을 찾지 못했다, 그리고 레아의 천막에서 나가서 라헬의 천막에 왔다. 34 그리고 라헬은 드라빔을 가져다가 그것들을 낙타의 짚 안에 놓고, 그것들 위에 앉았다. 그리고 라반은 모든 천막을 다 더듬어 나갔다, 그리고 그것들을 찾지 못했다. 35 그리고 그녀는 그녀의 아버지에게 말했다, 제가 당신 앞에서 일어나지 못한다고 화내지 말아주세요, 그 이유는 여인의 길이 제게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는 수색했다, 그리고 드라빔을 발견하지 못했다.

그리고 라반이 야곱의 천막으로, 레아의 천막으로, 두 하녀의 천막으로 왔다, 그러나 그것들을 찾지 못했다. 이는 그들의 거룩한 것들 안에는 이런 진리들은 있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이는 “천막”의 의미가 거룩인 것이다로부터, 여기서는 거룩한 것들이다, 그 이유는 천막들이 야곱, 레아, 하녀들의 천막이었기 때문이다. 의문시되는 진리들이 거기에 있지 않았다는 것이 그가 천막에서 드라빔을 찾지 못했음에 의해 의미되고 있다. 야곱에 의해서는 자연 평면의 선이; 레아에 의해서는 외적 진리에 애착함이; 하녀들에 의해서는 외적인 애착들이 표현되고 있다; 여기서 의문시되는 진리가 외적 측면에 있지 않고 내적 측면에서 있기에, 그것들은 위 세 인물들의 천막에서(그들의 거룩한 것들에서) 발견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라헬의 천막에서, 즉 내면의 진리에 애착함으로부터의 거룩한 것 안에서 발견된다; 그 이유가 라헬이 내면의 진리에 애착함을 표현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레아의 천막에서 나와 라헬의 천막으로 왔다. 이는 이 진리로부터의 거룩함을 의미한다. 이는 이미 살폈다. 선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지만 진리들도 외면과 내면이 있다는 것이다; 그 이유가 내적 인간과 외적 인간이 있기 때문이다. 내적 인간으로부터의 선들과 진리들은 내적 선들과 진리들이라 불리우고, 외적 인간으로부터의 선들과 진리들은 외적 선들과 진리들이라 불리운다. 내적 인간으로부터 선들과 진리들은 세 등차로부터 있는데, 이는 세 천국들이 있는 것과 같다. 외적 인간으로부터의 선들과 진리들 또한 세 등차들이 있는데, 이것들은 내적인 것들과 상응한다. 내적인 것과 외적인 것 중간에 선들과 진리들이 있다 (즉 중간의 선들과 진리들이다); 그 이유가 중간의 선(중매하는 선) 없이 교통함은 가능할 수 없기 때문이다. 자연적 인간에 적절한 선들과 진리들이 있는데, 이것들은 외적 선들과 진리들이라 불리운다; 그리고 육체 속에 있는 감각의 선들과 진리들 또한 있다, 고로 이것은 가장 바깥쪽의 선들과 진리들이다. 세 등차들 중 마지막째의 선과 진리들은 외적 인간에 속하고, 이미 말한 대로, 그것들은 그 만큼의 내적 인간의 선들과 진리들에 상응한다; 이에 관하여는 주님의 신성한 자비로부터 별도로 취급해 볼 것이다.
각 등차의 선들과 진리들은 각 등차별로 완전히 구별되고 있다, 하여 각 등차가 섞이거나 혼동되는 일은 결코 없다. 더 내면에 있는 것들은 구성 성분(component)에 해당되고, 더 외면에 있는 것들은 혼합물(composite)에 해당한다. 이 선들과 진리들이 등차별로 정확히 구분되고 있다 할지라도, 그럼에도 인간에게는 구분되어진 상태로 나타나지 않는다. 감각적 인간은 모든 내면의 것들을 감각적 수준 그 외의 것으로는 보지 않는다, 다시 말해 그는 내적인 것들 자체를 감각적이다고만 볼 뿐이다; 그 이유가 그는 감각적인 것으로부터, 즉 가장 바깥쪽으로부터 안쪽을 보기 때문이고, 그렇게밖에 말할 수 없는 이유는 바깥에서는 안쪽을 들여다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안쪽으로부터서는 바깥을 본다. 자연적 인간의 수준인 자 (즉, 기억 속의 지식으로부터만 생각하는 자)는 그가 자연적인 것으로부터만 가장 안쪽의 것도 생각하는 바, 이때 그는 사실상 외적 인간일 뿐이고, 따라서 그는 가장 안쪽의 것을 자연적인 것 이상임을 알지 못한다. 그러나 자연적인 기억 속의 지식들 덕택에 열려져왔었던 분석적(해석적)인 원리들로부터 판단하고 결말짓는 내면의 인간은 그가 지닌 이것들(분석 원리)이 인간이 소유하는 가장 안쪽의 것들임을 믿는다, 그 이유는 그것들이 자신에게 가장 안쪽에 위치한 것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런 분석적 원리들이라 해도 그의 합리적인 것들 아래쪽에 있을 뿐이다, 고로 진짜 합리적인 것들에 비교해 상대적으로 이것들은 보다 외면, 또는 아래쪽에 있다. 위에 설명한 경우들이 인간의 납득력이다. 위에서 방금 말한 자연적, 또는 외적 인간 역시 그 인간 수준에서 세 등차로 나뉘어 있다; 또한 내적 인간도 세 천국들에 있는 것과 같은 세 등차들로 구성되고 있다.
이상 말해진 모두로부터 “드라빔”에 의해, 즉 이것이 야곱, 레아, 두 하녀들의 천막에서는 발견되지 않았지만, 사실상 라헬의 천막에 있었다는 것, 즉 내면의 진리에 애착함의 거룩한 것 안에 있었다에 의해 의미된 진리들의 경우가 어떤 경우인지 보였을 것이다. 신성으로부터 있는 모든 진리는 거룩한 것 안에 있는데, 그 이유는 신성으로부터 있는 진리는 거룩하므로 거룩한 것 말고는 있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 주님으로부터 안으로 흘러드는 것은 애착(즉 사랑)으로부터 거룩하다 라고 말해진다, 그리고 이것이 인간을 진리에 감동되게 한다.

그리고 라헬은 드라빔을 가져갔었다. 이는 신성으로부터 있는 내면의 자연적 진리들을 의미한다. 이는 라헬의 표현함이 내면의 진리에 애착함이다로부터; 그리고 “드라빔”의 의미가 신성으로부터의 진리들이다로부터, 내면의 진리들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리고 그것들을 낙타의 짚 안에 놓았다. 이는 기억적 지식들 안에를 의미한다.
이는 “낙타의 짚”이 기억 속의 지식들을 의미한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런 지식들이 “짚”이라 불리우는 이유는 두 가지 때문, 즉 이것이 낙타의 식품이고, 이 짚은 상대적으로 거칠고 질서 없이 흩으러진 엉성한 양상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기억 속의 지식들은 나무들의 수풀(덤불, thickets)들, 또는 숲속의 수풀들에 의해 의미되기도 한다.
기억 속의 지식들이 상대적으로 조잡하고 엉성한 바, 이것이 “짚” 또는 “덤불”에 의해 의미된다는 것은 단지 기억 속의 지식들에만 있는 이들에게는 그렇다는 것이 아예 나타나지 않는다, 그래서인지 좀 배웠다하는 자들은 이를 알고 있는 듯 여긴다. 이들이 믿는 바, 인간이 더 알면, 또는 소유하는 기억 속의 지식이 더 많으면, 더 슬기로워진다는 것이다. 그러나 경우에 따라 그럴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을 나는 다른 삶에 온 자, 즉 세상에서 기억 속의 지식에만 있었던 자, 그것 때문에 학식이 높다 평판을 받고 살았던 이들로부터 확실히 알게 되었다. 그 이유가 이들이 기억 속의 지식들에 노련하지 않은 이들 보다 더 우둔해 있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가 내게 알려졌다, 즉 기억 속의 지식들은 실로 슬기로워지는 수단임은 틀림없다, 그러나 그 반대로 미친 자 되는 수단도 된다는 것이다. 선으로부터 있는 이들에게 기억 속의 지식들은 슬기로워지는 수단이나, 악으로부터 있는 이들에게 그것은 미친 자 되는 수단이다. 그 이유가 기억 속의 지식들을 수단으로 악한 생활 뿐만 아니라 거짓 원리가 올바른 진리이다고 확증하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그들은 시건방져서 오만한 신념 (자아 설득)으로 가득 찰 수밖에 없는데, 그 이유는 자신의 슬기가 타인의 것과 비교 안되게 높다고 스스로 인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그들은 자기들의 합리성을 파괴하는데 이르고야 만다. 그 이유가 기억 속의 지식으로부터 추론할 수 있는 자는 없기 때문이다, 설사 합리력을 향유하는 이들보다 더 고고하게 외관상으로 나타난다 해도 그렇다는 말이다. 그 이유가 이런 노련함은 얼빠진 빛의 결과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합리성에서 탁월한 자는 선이 선인 것, 진리가 진리인 것, 그 반대인 악이 악인 것, 거짓이 거짓인 것을 분명하게 볼 수 있는 자 뿐이다. 이에 반해 선을 악으로, 악을 선으로, 또한 진리를 거짓이라고, 거짓이 진리이다로 간주하는 자는 제 아무리 능변이 출중하다 해도 결단코 합리성이 그 사람 안에 있다 라고 말조차도 해볼 수 없다. 선이 선이라고, 진리가 진리라고, 악이 악이다고, 거짓이 거짓이라고 분명하게 갈라서 보는 사람과 더불어 빛은 천국으로부터 그 사람 안으로 흘러들어, 그의 지력을 계발한다, 하여 그가 자기의 이해력에서 보는 추론들은 자신에게 드리운 많은 광선들로 해서 야기된 것들이다. 똑같은 빛이 그들의 기억 속의 지식도 계발해준다, 하여 이 지식들은 진리를 확증하고, 더 나아가 엉성하고 조잡하게 널려 있는 이 지식들마저 질서에 일치하는 천국의 형체 안으로 정돈되고 배열해놓아 필요시 유용한 수단이 될 수 있게 준비된다. 그러나 선과 진리에 반대하여 있는 이들, 마치 악한 생활 안에 있는 이들 같이 이 천국의 빛이 드리움을 승인하지 않고, 그 대신 얼빠진 자신들의 빛만으로 기쁨을 향유하려든다. 결국 이것은 어둠 안에서 벽에 있는 점이나 줄무늬를 바라보고는 굉장한 벽화가 그려져 있다 라고 기발난 말솜씨로 타인을 설득해대기까지 하는 것과 같다. 허나 진짜 빛, 천국의 빛으로 보면 점이고 단순히 이리저리 마구 그어진 줄일 뿐임을 실감하는 것과 같다.
이상 살핀 바로부터 기억 속의 지식은 슬기로워지는 수단이자, 미쳐버리는 수단도 된다는 것을 알았을 것이다. 다시 말해 이것은 합리성을 보다 더 완전해지게 하는 수단이지만, 때로는 합리성을 파괴하는 수단도 된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다른 삶에서, 이런 지식들을 수단으로 자신의 합리성을 망치게 한 이들은 이런 지식들에 정통하지 못했던 이들보다 더 아둔해 있었다. 이런 지식들이 상대적으로 조잡하다는 것은 이 지식들이 외적 인간, 또는 자연적 인간에 속해 있다는 것으로도 분명해진다; 이에 반해 기억 속의 지식을 수단으로 연마된 합리성은 영적 인간, 또는 내적 인간에 속해 있다. 위 둘은 순수성에 관하여 서로에서 너무나 다르고, 따라서 서로는 멀리 멀리 떨어져 위치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들 위에 앉았다. 이는 그것들이 내면적이다를 의미하는데, 그 이유는 그것들이 낙타의 짚 안에 놓이고 그녀가 짚 위에 앉음으로 해서 그녀 아래에 있는 형국이기 때문이다. 이는 “낙타의 짚”의 의미가 기억 속의 지식들이다로 알게 되는데 이미 살폈다 “드라빔”에 의해 의미되는 진리들은 기억 속의 지식들은 아니지만, 이 지식들 안에 있다. 세 등차들로 된 진리들에 주목하면, 보다 내면인 진리는 보다 더 외면인 진리보다 안쪽에 있는데, 이것이 질서 안에서 챙겨 놓이는 형국이다.

그리고 라반은 모든 천막을 다 더듬어 보았다, 그리고 그것들을 찾지 못했다. 이는 그의 자신이었던 것은 거기에 있지 않았다를 의미한다. 이는 내적 의미의 시리즈로부터 알게되므로 설명은 생략한다.

그리고 그녀는 그녀의 아버지에게 말했다. 이는 선 쪽으로를 의미한다. 이는 “아버지”의 의미가 선이다로부터; 그리고 여기서의 아버지는 라반인 바, 이는 중간의 선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제가 당신 앞에서 일어날 수 없다 해서 내 주인의 눈에 분노하심이 있게 하지 마세요. 이는 그것들은 밝혀질 수 없음을 의미한다. 이는 내적 의미에 있는 것들의 시리즈로부터 분명해지는 바 설명은 필요 없다. 그 이유가 일어선다는 것은 열어보이는 것, 그러므로 “드라빔”에 의해 의미된 진리들을 밝히는 것이기 때문, 고로 “일어설 수 없다”는 그것들이 밝혀질 수 없다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여인의 길이 제게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아직까지 그것들은 불결한 것들 사이에 있음을 의미한다. 이는 “여인의 길(경수)”이 불결함을 의미하기 때문, 고로 그녀가 앉은 것들 역시 불결해 있다 (레. 15:19-31); 고로 그것들이 아직도 불결한 것들 사이에 있다가 의미된다. 내면의 진리들이 불결한 상태이다 라고 말해지는 때는 이 진리들이기억 속의 진리 안에서 상응하는 상태에는 아직 있지 못할 때, 즉 서로 일치함의 상태에 있지 못할 때이다. 이런 상태가 제거되는 때란 인간이 깨끗해지는 때, 즉 거듭나질 때이다.

그리고 그는 수색했다, 그리고 드라빔을 발견하지 못했다. 이는 그들은 그의 것이 아니었음을 의미한다. 즉 이 진리들은 라반의 것이 아니었다는 말이다. 이는 “수색했으나 발견하지 못했다”로부터 알게 된다. 외적 역사적 의미에서 본다면, 드라빔들은 라반의 것이나 단지 숨겨져서 찾지 못했다를 말하고 있으나, 내적 의미에서는 드라빔은 그의 것이 아니다를 말하고 있다. 이런 진리들(신성으로부터의 진리들)이 라반에 의해 의미된 선에 속하지 않고 내면의 진리에 속해 있다는 것이다. 이 모두로부터 드라빔에 관련하여 어떤 신비함들이 감추여 놓였는지 실감할 것이다.
신성으로부터의 진리들이 “드라빔”에 의해 의미된 이유는 고대 교회 속에 있던 이들은
신성을 다양한 이름들을 수단으로, 결과들에 있는 다른 나타남들에 따라서 구별했다; 예를 들면, “하느님 사다이”에 의해서는 시험들로부터, 즉 시험 안에서 주님께서 인간을 위해 전투하시고, 그 후 인간에게 이익들을 수여하심으로부터 그렇게 이름을 불렀다 (1992, 3667항); 인간이 자신으로부터 신앙의 신비함들 안으로 들어오지 않도록 하시는 그분의 섭리로부터서는 “그룹(cherubs)들”이라 불렀다; 그들이 대답으로 받은 신성으로부터의 진리들은 “드라빔”이라 불렀다; 이 외에도 신성의 특성에 따라 특별한 이름들이 붙여졌다.
슬기로운 이들의 경우에서는 여러 이름들이 있지만 이는 하느님들이 아닌 하나의 유일한 주님을 의미한다고 이해했으나, 단순한 이들에게서는 자신들을 위해 (자신들의 필요에 따라, 즉 아들을 원하는 여인이거나, 사업 성공을 원하는 자이거나, 높은 지위를 원하거나 하는 따위) 필요한 만큼 많은 신성에 관련한 표현물들을 고안해냈다. 이것이 더 극성적인 형태, 즉 우상 숭배 수준으로 돌아섰을 때, 그들은 자신들을 위해 아주 많은 하느님들을 모양지었다. 요즘의 말로 유행을 탄 것이다. 이것이 번져 이방인들 역시 많은 독특한 제나름의 우상들을 창안했다. 하여 사방 곳곳에서 우상들은 많이 불어났다. 어쨌든 고대 시대에서 신성한 사항들이 이런 이름들에 의해 이해되었던 바, 그것들 중의 극히 일부가 말씀 안에서 유지 존속된 것이 “사다이(Shaddai)”, 또는 “그룹(cherubs)들”, 또는 “드라빔”이라는 단어들이다. 대답으로 오는 신성으로부터의 진리가 “드라빔”에 의해 의미된 것은 호. 3:4에서 분명해진다.

36-42절. 그리고 야곱은 성을 냈다, 그리고 라반에게 따지고 들었다. 그리고 야곱은 라반에게 답하여 말했다, 내 잘못이 무엇입니까? 제가 무슨 죄를 지었기에 당신은 불같이 내 뒤를 추격하셨습니까? 37 당신은 내 모든 집기들을 다 만져 보았는데 당신은 당신 집의 집기 중 무엇을 찾았습니까? 제 형제와 당신의 형제 사이에 그것을 놓고, 그들로 우리 둘 사이를 판가름하게 합시다. 38 저는 당신과 이십 년을 지냈습니다. 당신의 양과 당신의 암염소들이 그들의 새끼를 지우지 아니하였고, 저는 당신의 양떼 속의 숫양들을 먹지도 않았습니다. 39 저는 찢긴 것을 당신에게 가져다 주지 않고, 나는 그 손실을 떠안았고, 낮에 도적을 당했든 밤에 도적을 당했든 당신은 그것을 제 손에 청구했습니다. 40 그러므로 저는 낮에는 더위가, 밤에는 추위가 나를 괴롭히는 것을 견디었습니다, 그리고 제 잠은 제 눈에서 쫓겨났습니다. 41 저는 당신의 집에서 이십 년, 십사 년은 두 딸을 위해서, 육 년은 당신의 양떼를 위해서 당신을 섬겼습니다, 그리고 당신은 열 번씩 제 삯을 바꿨습니다. 42 나의 아버지의 하느님,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삭이 두려워하는 분께서 저와 함께 계시지 아니하였더라면 지금 당신은 저를 빈 손으로 내보내셨을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저의 비참함과 내 손의 수고함을 보셨는 바, 어젯밤 판결하셨습니다.

그리고 야곱은 성을 내었다, 그리고 라반에게 따졌다. 이는 자연 평면에서의 열정을 의미한다. 이는 “격노함”, 또는 “화를 냄”, 결과적으로 “따짐(꾸짖음)”의 의미가 열정이다로부터; 그리고 야곱의 표현함이 자연 평면의 선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격노함, 화를 냄”, 그리하여 “따짐”의 의미가 열정이라 말한 이유는 천국에서, 또는 천사들과 더불어서 화를 냄은 없고 열정은 있기 때문이다. 화를 냄과 열정은 다른데, 화를 냄 안에는 악이 있고, 열정 안에는 선이 있다; 사실상 화를 내는 자는 화낸 상대에게 악을 의도함에 있으나 열정에 있는 자는 상대에게 선을 의도함에 있다; 실제의 행동이 개시된다면, 선을 의도함에 있는 자의 경우는 즉각 선행이 발휘되나 악 안에 있는 자는 그 반대일 뿐이다. 비록 바깥 형체에서 이 둘은 비슷할지 몰라도 내적 형체는 판연히 다르다.

그리고 야곱은 답하여 라반에게 말했다, 제 잘못이 무엇입니까? 무슨 죄를 지었기에 당신은 이렇게도 불같이 저를 추격하셨습니까? 이는 그분께서 자신을 분리하신 것은 악으로부터가 아니었다를 의미한다. 이는 “잘못(transgression)”, “죄”의 의미가 악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추격해온 원인은 야곱이 자신을 분리했기 때문임은 분명하다, 고로 이 의미는 그분이 자신을 분리하신 것은 악으로부터가 아니었다가 된다.

당신은 내 집기들을 다 만져 보았는 바 당신은 당신 집의 집기들 중 무엇을 찾았습니까? 이는 선으로부터의 어떤 진리들도 그의 자신으로부터 있었던 것은 없고, 모든 진리는 주어진 것이었음을 의미한다. 이는 “자기 집의 집기들”이 그의 자신의 진리들이다로부터 분명해진다. 이로부터 분명한 바, “자기 집의 집기들”은 그의 자신의 진리들을 표시함이다. “그것들을 뒤지고 발견 못함”은 그의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 결과적으로 모든 것은 주어져왔었다는 것이다.

그것을 내 형제와 당신의 형제 사이에 놓고, 그들이 우리 둘 사이를 판결하게 해봅시다. 이는 공정하고 공평한 것으로부터 판결이 있음을 의미한다. 이는 “형제들”의 의미가 선들이다로부터 분명해진다. 그리고 “내 형제들과 당신의 형제들”은 공정하고 공평한 것을 표시하고, “그들로 우리 둘 사이를 판가름하게 하자”는 판결을 표시함이 분명하다. “내 형제들과 당신의 형제들”이 공정과 공평인 이유는 여기서 취급되는 주제가 자연 평면이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영적 평면에서 선과 진리인 것이라 불리우는 것이 자연 평면에서는 공정과 공평이라 불리움이 마땅하기 때문이다. 인간에게는 두 평면(plane)이 있는데, 이 위에 주님으로부터 있는 천적인 것들과 영적인 것들이 놓여진다. 두 평면 중 하나는 내면이고 또 하나는 외면이다. 평면 자체는 양심밖에 더 아니다. 이 평면들 없이(즉 양심 없이) 주님으로부터의 천적, 영적인 것들은 고정될 수 없다, 그 이유가 마치 체 위에 물을 붇는 격이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이런 평면(양심)이 없는 이는 양심이 무엇인지를 모른다; 더욱이 그들은 영적, 천적인 것이 있다는 것을 믿지 않는다.
내면의 평면, 또는 내면의 양심은 진짜(순수) 의미에서 선과 진리가 있다; 그 이유가 주님으로부터 흐르는 선과 진리가 이 양심을 움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외면의 평면은 외면의 양심이다; 그리고 거기에 적절한 의미에서 공정과 공평인 것이 있다; 그 이유가 도덕적, 시민적 종류 모두에서 공정과 공평인 것이 있기 때문, 이것도 마찬가지로 흘러들고 외면의 양심을 움직인다. 여기서도 역시 가장 바깥의 평면이 있는데, 이것도 양심으로 나타나나, 이것은 양심은 아니다. 즉 자기 자신의 명예, 명성 때문에, 그리고 세상의 부유함과 소유를 위하여, 그리고 법을 두려워하여 있는 공정과 공평인 것을 행하는 것이다. 이 세 평면들이 인간을 통치한다, 즉 이것들은 주님께서 인간 당사자를 통치하는 수단이다. 내면의 평면을 수단으로 (즉 영적 선과 진리에 대한 양심을 수단으로) 주님은 거듭나져왔었던 이들을 다스리신다. 외면의 평면을 수단으로 (즉 공정과 공평인 것에 대한 양심을 수단으로, 다시 말해 도덕적, 시민적 종류에서의 선과 진리에 대한 양심을 수단으로) 주님께서는 아직 거듭나지 않고 있는, 그러나 거듭나질 수 있는 이들을, 그리고 또한 만일 육체의 삶 안에 있지 않다면, 그러나 다른 삶에서 거듭나고 있는 이들을 다스리신다. 가장 바깥 평면, 즉 양심은 아니지만 양심 같이 나타나는 평면을 수단으로 주님께서는 위의 두 부류 외의 모든 이들, 악한 자에 이르기까지 모두를 통치하신다; 이 통치하심이 없으면 이들은 완전한 사악함이나 미친 자에로 돌진하기 십상이고, 이 평면의 제한이 없으면 정말로 그렇게 실행되어버리기 때문이다. 이 세 평면을 수단으로 자신들이 다스려지게 허용하지 않는 모든 이들은 미쳐 있든지, 또는 법들에 따라 처벌되어있다.
거듭나는 자와 더불어 이 세 평면들은 하나로서 행동한다; 그 이유는 이것이 다른 것 안으로 흐르기 때문, 그리고 내면의 것이 외면의 것을 배열한다. 첫 평면, 또는 영적 선과 진리에 대한 양심은 인간의 합리성 안에 있다; 그러나 둘째 평면, 또는 도덕적, 시민적 차원의 선과 진리에 대한 양심(즉 공정과 공평에 대한 양심)은 인간의 자연 평면 안에 있다. 이로부터 공정과 공평이 무엇인지 분명해졌을 것이고, 본문에서 이것이 “형제들”에 의해 의미된다는 것, 즉 공정은 “내 형제들”, 공평은 “네 형제들”에 의해 의미된다; 그 이유가 그들이 공정과 공평이라 불리우는 이유는 주제가 자연적 인간이기 때문이고, 공정과 공평이 자연적 인간을 적절하게 서술하기 때문이다.

이십 년 간 나는 당신과 함께 지냈습니다. 이는 그분의 자기 자신을 의미한다. 이는 “20”이 리메인스의 선을 의미함에서 알게 된다. 그러나 이 “20”이 주님을 서술할 경우, 이는 그분의 자기 자신밖에 더 의미하지 않는다. “20년”은 이 자기 자신의 상태들을 의미한다. 라반에 대한 야곱의 말들에 포함된 것들은 주님께서 그분의 자신의 힘으로 그분 자신을 위하여 획득하신 자연 평면에 있는 자기 자신을 취급하고 있다, 그리고 사실상 이 자기 자신의 다양한 상태들에 관하여서 이다.

당신의 양과 당신의 암염소는 제 새끼를 지우지 않았습니다. 이는 선에 관한 그것의 상태와 진리의 선을 의미한다. 이는 “양”의 의미가 선이다로부터, 이는 아래에서 살핀다; 그리고 “암염소”의 의미가 진리의 선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위에서 간단히 말한 “선”은 좀 더 꼼꼼히 말하면, 의지력으로부터의 선(의지의 선)을 뜻한다; 그러나 “진리로부터의 선(진리의 선)은 이해력으로부터의 선이 뜻해진다. 의지력의 선은 선으로부터 선을 행함이다; 그러나 이해력의 선은 진리로부터 선을 행함이다. 진리로부터 선을 행하는 이들에게 위 둘은 한가지인 듯, 같은 것인 듯 나타나나; 그럼에도 그것들은 서로에서 많이 다르다; 그 이유가 선으로부터 선을 행하는 것은 선을 지각함으로부터 선을 행하는 것이다; 그리고 선을 지각함은 천적 평면(수준)에만 존재한다; 이에 비해 진리로부터 선을 행하는 것은 기억 속의 지식으로부터 선을 행하는 것, 결과적으로 이해력으로부터 선을 행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그렇다 하는 지각이 없이 선을 행하는 것; 그리고 우리가 타인에게서 배웠기 때문에, 또는 자신의 지력을 수단으로 자신으로부터 의문시되던 선에 대한 것의 결론을 맺어 선을 행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것은 실로 오류투성이의 진리일는지 모른다, 그러나 만일 이 진리가 목적으로 선을 가지고, 인간이 이 목적을 향해 실행한다면 선 같이 되어 간다.
“양”이 선을 의미하는 것은 말씀의 많은 구절로부터 보여지는데, 몇 구절만 아래에 첨가한다. 이사야서에서:
그분은 괴롭힘을 당하셨다, 그리고 그분은 입을 열지 않으셨다; 그분은 죽임을 당하려는 어린 양 같이, 그리고 양털 깍는 자 앞에서의 양 같이 인도되신다, 그리고 그분은 그분의 입을 열지 않으셨다 (이. 53:7);
위는 주님에 관하여서이고, 그분이 양에 비교되시고, 진리로부터가 아니고 선으로부터 이심에 관하여서이다. 마태복음서에서:
예수께서는 파견하시는 열둘에게 말하셨다, 이방인들의 길로 가지 말라, 그리고 사마리아인들의 성읍으로 너희는 들어가지 말라; 그러나 오히려 이스라엘의 집의 잃어진 양에게로 가라
(마. 10:5, 6);
“그들이 가지 말아야 하는 이방인들”이란 악들 안에 있는 이들을 표시한다. “사마리아인들의 성읍들”은 거짓들 안에 있는 이들을 표시한다; “양”은 선들 안에 있는 이들을 표시한다.
요한복음서에서:
그분이 부활하신 후에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말하셨다, 내 어린 양들을 먹이라; 두 번째 말하셨다, 내 양들을 먹이라; 그리고 세 번째 말하셨다, 내 양들을 먹이라 (요. 21:15-17);
“어린 양”은 순진 안에 있는 이들을 표시한다; 처음 언급된 “양들”은 선으로부터 선 안에 있는 이들을; 마지막 “양들”은 진리로부터 선 안에 있는 이들을 표시한다. 마태복음서에서:
사람의 아들이 그분의 영광 안에서 오실 때, 그분은 그분의 오른쪽에 양을; 그분의 왼쪽에 염소를 놓으실 것이다; 그리고 그분은 그분의 오른쪽에 있는 이들에게 말하실 것이다, 오라 너희는 내 아버지의 복을 받은 자들이다, 세상의 창설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준비된 왕국을 상속받으라; 그 이유는 내가 굶주렸다, 그리고 너희는 나에게 먹을 것을 주었다; 내가 목말랐다, 그리고 너희는 나에게 마실 것을 주었다; 내가 낯선 사람이었다, 그리고 너희는 나를 안으로 데려갔다; 나는 벌거벗고 있었다, 그리고 너희는 나를 입혔다; 내가 병들었다, 그리고 너희는 나를 방문했다; 내가 감옥에 있었다; 그리고 너희는 나에게 왔다. 너희가 내 형제들 중의 지극히 작은 자의 하나에게 했던 만큼, 너희는 그것을 나에게 했다 (마. 25:31-40);
위에서 “양들”은 선들을, 즉 선 안에 있는 이들을 표시함은 분명하다. 모든 종류의 선행의 선들이 위 구절들의 내적 의미에서 포함되어져 있는데, 이는 별도로 주님의 신성한 자비로부터 살필 기회를 가질 것이다. “숫염소들”에 의해 신앙 안에 있고 선행 없음 안에 있는 이들이 의미된다.
마찬가지로 에스겔서에서:
너에 관하여, 오 나의 양떼들아, 주 여호비께서 말하신다, 잘 보라 나는 가축떼와 가축떼 사이를, 양의 숫양들, 그리고 숫염소들 사이를 판결한다 (겔. 34:17);
위의 “숫염소들”은 특히 선행 없음으로부터 신앙 안에 있는 이들이다는 것은 “숫염소들”의 의미가 좋은 의미에서 신앙의 진리 안에 있고, 그로부터 얼마의 선행 안에도 있는 이들이다로부터 알는지 모른다; 반대적 의미에서, 신앙이 구원한다를 구원 신앙 논리의 출발점으로 삼고, 선행 없음의 신앙 안에 있는 이들이다. 이와 똑같은 이들이 바로 앞에 인용한 주님의 말씀에도 있다. 그러나 신앙의 진리가 없는데, 선행의 선도 없는 이들은 위와 같은 심판의 진행 절차도 필요 없이, 그들이 거짓 안에 있다는 어떤 유죄 판결도 필요 없이 지옥으로 운반된다.

당신의 양떼 속의 숫양들을 나는 먹지 아니했습니다. 이는 그분께서는 그의 것 속에 있는 선으로부터의 진리를 가져가신게 하나도 없으셨음을 의미한다. 이는 “숫양들”이 선으로부터의 진리들을 의미함으로부터 알게 된다; 그 이유가 “양들”은 선들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숫양도 양떼에 속하므로, 선으로부터의 진리들을 의미하게 된다; 그리고 “먹다”의 의미가 자기 것이 되게 함이다로부터, 고로 가져가는 것이다; 즉 이는 또 다른 그의 것으로부터 가져가서 자기 것이 되게 함이다.

찢긴 것을 저는 당신에게 가져오지 않았습니다. 이는 그분의 탓이 아닌 악은 그 선과 함께 있었음을 의미한다. “찢김”의 의미가 또 다른 것에 의해 입혀진 죽음인 바, 그분의 과오에 의하지 않은 악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인간과 더불은 악은 많은 근원들이 있다. 첫 번째 악은 선조 대대로 축적되어 내려 받아진 상속으로부터 있는 악이다. 이 악은 각자의 자아 안에 있다. 두 번째 악은 실제적인 것으로부터 있는 악, 즉 악한 생활을 수단으로 자신이 획득해버린 악이다. 이 악을 그는 부분적으로는 상속에 의해서 받는데, 마치 악의 바다로부터 한바가지를 퍼담아 자신의 행동 안으로 옮겨다놓는 식이다. 이것에 부분적으로 자신이 창안한 많은 악들이 추가된다. 그러나 실제상의 악, 즉 인간이 그의 자기 자신을 만드는 악은 다양한 근원들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대별하면, 두 가지이다: 하나는, 자신의 과오가 없이 타인(다른 것들)으로부터 악을 받는 것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자기의 과오를 통하여 자기 자신에 일치되게 악을 받는 것이다. 자기의 과오 없이 타인의 악으로 말미암아 받아진 악이 말씀에서 “찢긴 것(what is torn)”에 의해 의미된다. 그러나 자신에 일치됨으로부터 받아진 악, 즉 자신이 저지름으로 받아진 악은 말씀에서 “시체(carcass)”에 의해 의미된다.
그러므로 고대 교회에서, 유태 교회에서도 마찬가지지만, 시체는 그 자체로부터(저절로) 죽은 것, 또는 시체, 또는 찢겨 죽은 것을 먹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다. 모세의 책에서:
시체와 찢긴 것을 먹는 모든 혼, 그가 본토박이 이든 외국인 이든, 그는 자기 옷들을 빨 것이다, 그리고 물로 자신을 씻을 것이다, 그리고 저녁 때까지 불결할 것이다. 그리고 만일 그가 그것들을 빨지 않는다면, 그의 살을 씻지 않으면, 그는 자기의 불법을 낳을 것이다
(레. 17:15, 16).
레위기서에서:
너희는 시체와 찢겨서 시체가 된 것을 먹어 자신이 더러워지지 않도록 먹지 말라: 나는 여호와이다 (레. 22:8);
위에서 “찢겨서 시체가 된 것”은 거짓으로부터 있는 악, 즉 숲에서 찢어 죽이는 들짐승인 악한 자에 의해 주입된 거짓으로부터 있는 악을 표시한다; 그 이유가 말씀에서 지옥적인 자들이 들짐승에 비교되기 때문이다. 출애굽기서에서:
거룩함의 사람들을 너희는 나에게 있게 하라; 그러므로 너희는 들판에서 찢긴 어떤 고기도 먹지 말고, 그것을 너희는 개들에게 던질 것이다 (출. 22:30).
에스겔서에서:
예언자가 여호와께 말한다, 제 혼은 더렵혀지지 아니하였습니다; 그리고 저는 시체나 찢겨 죽은 것을 먹지도 않았고, 제 입 안으로 역겨운 고기가 오지 않았습니다 (겔. 4:14).
에스겔서에서:
성직자들은 어떤 시체, 또는 새이든, 짐승이든, 찢겨 시체된 것을 먹지 말라 (겔. 44:31);
위는 새로운 땅이 있는 주님의 왕국에 관해 말하고 있다.
이런 구절들로부터 “찢겨 죽은 것”이 내적 의미에서 뜻해진 것을 알았을는지 모른다; 그러나 이에 대해 분명히 알아지도록 한 번 더 예를 들어 생각해보자: 만일 인간이 선으로부터의 생활을 이끌고 있고, 또는 자신의 생활을 선쪽에서 잘 이끌 듯 타인에게도 그렇게 하고 있지만 악 안에 있는 또 다른 인간의 이런 추론에 설득당하게 자신을 허용해버린다면, 즉 당신이 선으로부터 생활을 하고 있지만, 그 생활이 당신이 구원받는데, 별 효과가 없다고 결론적으로 말할 때의 경우이다. 이 인간의 추론인즉, 모든 인간은 죄들 안에서 태어나지기 때문 (아담이 지었다는 죄, 통상 말하는 원죄론일지 모른다); 그리고 (주님만이 선의 근원이신 바, 주님 외에 선을 행할 자는 없기에) 아무도 자신으로부터 선을 행할 수 없기 때문, 그러므로 선을 행할 수 없다는 것; 그러므로 구원의 수단은 신앙이라 불리우는 것으로 설비되어져 왔다는 추론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선의 생활 없이 신앙을 수단으로 구원되어질 수 있다고 말한다, 따라서 죽기 몇 분 전 일 때조차에서도 신앙을 받는다면 구원될 수 있다는 것이다. 만일 선한 생활을 잘 꾸려가던 누군가가 이런 논리에 자신을 설득당하게 허용하면, 그는 자신의 생활 측면은 시체가 되어가는 바, 나중에는 선으로부터 생활을 경멸하기까지에 이른다. 이 때의 이 인간을 두고 말씀에서 “찢겼음”이라고 말해진다; 그 이유가 “찢김”이 선 안으로 거짓이 은근히 심어짐을 서술하기 때문이다. 그리하면 선은 더 이상 살아 있지 않게 된다 (“시체”이다).
부부(conjugial)라는 것을 예로 삼아 한 번 더 생각해보자: 이 단어를 두고 누군가가 처음에는 매우 수준 높은 단어로 간주하여 이를 천국에서의 부부로 중요시하였다 하자, 그런데 그 후에 결혼한 짝들이라는 수준, 또는 두 부부 모두 부부라는 것은 세상만을 위한 부부, 아이들을 돌보고 교육하기 위하여, 또는 상속을 위하여, 급기야 결혼의 묶음은 단지 계약에 불과할 뿐이다, 고로 동의함이 있으면 계약 해제, 느슨한 조건으로 계약을 변경함 따위의 기발난 착상도 동원한다, 하여 음탕함이 부부 사이에 스며들고 결과된 것이 결혼에 대한 천국적 수준이 “찢긴” 것이다.
찢은 자가 악한 자인데, 이것은 외적인 것들로부터 추론함으로 야기되는데, 이 안으로 내적인 것들은 생활의 악 때문에 은근히 심어질 수 없다. 예레미야서를 보자:
숲으로부터 나온 사자가 큰 자를 죽인다, 사막의 이리가 그들을 황폐해지게 한다, 표범이 그들의 성읍들을 망보고 있다, 거기로부터 나가는 모든 이는 찢긴다, 그 이유는 그들의 위법이 번창했고, 그들의 뒤로 미끌어짐이 증가했기 때문이다 (예. 5:5, 6).
그리고 아모스서에서:
에돔이 검을 들고 그의 형제를 추격했다, 그리고 그의 동료들을 파괴했다, 그리고 그의 분노는 영구히 찢었다, 그리고 그는 꾸준히 자기의 격노를 유지한다 (암. 1:11).

나는 그 손실을 메꾸었습니다(짊어졌습니다). 이는 선이 그것으로부터 왔다를 의미한다. 이는 “손실을 짊어짐”이 선을 만드는 것을 의미한다로부터; 여기서, 선이 그것으로부터 왔다는 것을 의미한다. 과오로부터의 악에 주목해보면, 이것은 앞에서 “시체”와 “찢긴 것”에 의해 의미된 바와 비슷한데, 이러하다; 과오(과실, fault)로부터의 악, 또는 실제의 악을 수단으로 계약해버린 수준의 악, 그리고 생각 안에서 신앙, 또는 확신에 이르도록 굳혀진 악은 (저 세상에서도) 수정되어질 수 없고 영원히 남아 있는다; 이에 비해 과오로부터가 아닌 악, 또는 당사자가 생각함을 수단으로 확증해버리지 않은 악, 또는 이런 생각으로부터 내향적으로 자기가 자기를 설득하지 않은 악 역시 실제로는 (저 세상에서) 남아 있지만, 그것은 바깥쪽에 붙어 있다; 그 이유가 이 악은 당사자의 내면쪽을 뚫지 못하는 바, 그의 내적 인간을 타락되게 못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런 악 때문에 선이 오는 경우가 발생한다; 즉 외적 인간 안에 있는 것들에서 아직 선으로서 감동되지 않은 것, 그렇지만 선이라고 동의된 것들을 내적 인간은 볼 수 있으나 이것을 두고 내적 인간은 악쪽에 더 기울어 있다고 보는 한편, 같은 외적 인간에 있는 악들과 비교해보게 된다. 이때 내적 인간은 두 비교로 해서 선쪽을 더욱 명료하게 보게 된다. 이때 인간은 선에 더 강하게 감동되어진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선이 그것으로부터 온다고 말한 것이다.

내 손으로부터 당신은 그것을 청구했습니다. 이는 그것은 그분으로부터 이었음을 의미한다. 이는 “손”의 의미가 힘이다로부터, 고로 이것은 그분으로부터 이었다를 뜻하게 된다; 그 이유는 그분 자신의 힘으로부터 인 것은 그분으로부터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낮에 도적을 당했든 밤에 도적을 당했든. 이는 자아 공적으로부터의 악을 의미한다.
이는 “훔침을 당함”, 또는 “도적질 당함”의 의미가 자아 공적 (self-merit)의 악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인간이 자신이 지녔었다고 판단하여 선을 자신에게로 돌릴 때, 또는 선행이 자신이 본래 선한 인간이어서 라고 할 때, 또한 자신이 지닌 선, 자신의 선한 인간됨 때문에 자신은 당연히 구원받아 마땅하다고 할 때, 거기에 자아 공적이라는 악이 의미되고, 이 악이 말씀에서 “도적(theft)”에 의해 의미되어 있다. 그러나 이 악에 주목해보자, 개혁되는 모든 이가 처음에서는 선이 자신으로부터 이다고 상상한다, 그러므로 자신이 행한 선을 수단으로 자신은 구원을 받을만 하다고 상상한다. 이렇게 구원을 받을만 하다고 상상한 것은 선이 자기 것이다고 상상했던 결과로부터이다. 그 이유가 이 생각이 저 생각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신을 거듭나지게 허용한 이들은 자기들의 생각에서 이것을 확증하지 않는다, 또는 이것이 그렇다 라고 자기가 자기를 설득하지 않는다; 그러나 오히려 그런 생각이 사라져간다. 그 이유가 누군가가 외적 인간 안에 있는 한, 자신의 개혁의 단계는 모든 이의 경우에서 이렇기 때문이다. 모든 이의 개혁은 이와 달리해서는 행해질 수 없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외적 인간은 이 이상의 것을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외적 인간이 현세에의 강한 욕망과 더불어 제거될 때, 그래서 내적 인간이 일을 시작할 때; 즉, 주님께서 내적 인간을 통하여 총명의 빛과 더불어 흘러드실 때, 그의 외적 인간은 계발된다; 이때 인간은 처음의 경우와 다르게 믿기를 시작한다, 그리고 선이 자신으로부터가 아니고 주님의 (선물하신) 덕분에 자신 안에 있음을 믿는다. 이상으로부터 여기서 과오로부터 있지 않은 악, 즉 선을 오게 하는 자기 공적의 악을 뜻하는 것이 분명해졌을 것이다. 그러나 유의할 것은, 인간이 성년기에 와 있을 때, 그의 생각 안에서 확증한다면, 그래서 자기는 자기가 행한 선을 수단으로 구원받고도 남는다고 선행에 대한 공적을 자신에게 귀결되도록 자신을 설득했다면, 의문시되던 악, 그의 주변을 맴돌던 악은 철저히 그에게 들러 붙어 떼어내지지 않아 수정되어질 수 없다는 점이다. 그 이유가 이런 인간은 주님의 것인 것을 자신들의 것이라고 주장한다, 고로 주님으로부터 계속 흘러드는 선을 받지 않는다; 즉 주님으로부터 흘러드는 선을 자신들의 것으로 전환하여 자기 자신이라 주장하는 바, 주님의 선을 더럽히기 때문이다. 이것이 “도둑”에 의해 의미되는 악들이다.

그러므로 해서 저는 낮에는 더위를, 밤에는 추위를 견뎌내어야 했고, 제대로 잠을 청해 볼 수도 없었습니다. 이는 시험을 의미한다. 이는 “더위(heat)”와 “추위(cold)”의 의미가 너무나 많은 사랑, 너무나 적은 사랑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 두 사랑은 극과 극에 위치하고 있다. 태양의 높, 낮음에서 “낮”은 신앙 또는 진리의 상태를; “밤”은 신앙 또는 진리가 없는 상태를 의미한다; 그리고 “잠을 청해 볼 수가 없다, 잠이 눈으로부터 몰아내졌다”의 의미가 계속적으로, 또는 쉼 없이 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런 상황은 시험 안에서 경험되는 것인 바, 이를 일반적으로 말하여 시험들이라 말한 것이다. “더위”가 너무나 많은 사랑을 의미하는 이유인즉, 영적인 불과 열이 사랑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와 반대인 영적인 추위는 사랑 없음이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인간의 생명 자체는 사랑밖에 더 아니기 때문이다; 사랑 없이 인간은 무엇에서 이든 생명을 갖지 못한다. 아마 곰곰이 되새겨볼 수 있는 사람이라면 그는 자기 신체 안에서 불과 열의 모든 원천이 이 근원으로부터 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추위”는 모든 사랑이 결핍된 것을 의미하지 않고, 단지 영적인 사랑과 천국의 사랑의 결핍일 뿐이고, 이 사랑들의 결핍이 영적인 죽음이라 불리운다. 인간이 이 사랑을 박탈해버릴 때, 그에게 자기를 사랑함과 세상을 사랑함이 점화된다. 이 사랑이 상대적으로 춥고, 차게 되어갈 수 있는데, 이는 인간이 육체 안에서 살 때 뿐만 아니라 다른 삶에 와서도 이어진다. 만일 육체 안에서 살 때, 이 인간에게서 이 사랑을 거두어버린다면, 그는 거의 어떤 생명도 가지지 않을 만큼으로 차가와져 간다. 아마 이 사람 더러 천국적이고 신성한 것들을 거룩한 방식에서 생각해보도록 강요한다면, 그는 앞의 경우나 동일하게 차가워져 가고 말 것이다. 다른 삶에서, 이런 인간이 지옥들 사이에 올 때, 그는 불 안에, 또는 탐욕들의 열기 안에 있다; 그러나 만일 그가 천국에 접근한다면, 이 불과 열기는 차거움으로 변해진다, 그가 더 접근할수록, 그 차거움의 정도는 증가해져 간다. 이런 차거움에서 기인된 것이 지옥에 있는 이들의 “이를 갊” 이다 (마. 8:12; 13:42, 50; 22:13; 24:51; 25:30; 눅. 13:28).

이십 년 동안 나는 당신 집에서 당신을 섬겼습니다. 이는 그분의 자기 자신을 의미한다. 이는 “20”이 리메인스의 선을 의미함으로부터 분명해진다. 그리고 이 말이 주님을 서술할 경우, 그분이 자기 자신에게 획득하셨던 선, 고로 그분의 자기 자신을 표시한다; 그리고 “섬기다”의 의미가 주님을 서술해줄 경우, 그분의 자신의 힘이다로부터 알려진다.

십사 년은 두 딸들을 위해서. 이는 그분이 진리에 애착함을 거기로부터 자신에게 획득하시는 첫 기간을 의미한다. 이는 “14”, 또는 2주의 의미가 처음 기간이다로부터 분명해진다; 그 이유가 말씀에서 “주들(weeks)”은 크든 작든 전체 기간밖에 더 의미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2주가 하나로서 명명되는 경우, 그 의미는 똑같다. 그 이유가 숫자가 증가하는 것이 그 의미를 거두어지는 것(바꾸어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여기서 말하는 “14” 또는 2주의 의미가 분명해질 것이다. 그리고 “두 딸들”, 즉 라헬과 레아의 의미가 진리에 애착함들이다로부터 알려진다; “딸들”은 애착들을 의미한다.

그리고 육 년은 당신의 양떼를 위해서. 이는 그후 아마도 그분은 선을 획득하셨을 것임을 의미한다. 이는 “6”의 의미가 전투와 노동이다로부터, 여기서는 전투와 노동으로부터 남아 있게 된 것, 고로 그 후에 와진 것; 그리고 “양떼”의 의미가 선이다로부터 알려진다.

그리고 당신은 내 삯을 열 번이나 바꾸었다. 이는 그분께서 이런 선들을 자신에게 적용하셨을 때 그분을 향한 그것의 상태를 의미한다. 이는 “삯, 댓가, reward”가 주님을 서술할 경우, 그분 자신으로부터를 표시함으로부터, 고로 그분이 그분 자신에게 선들을 적용하셨을 때이다; 그리고 그것들을 “바꿈”의 의미가 그분을 향하여 있는 라반에 의해 의미된 선의 상태이다로 알게 된다. “열 번”은 상태가 아주 크다를 의미한다.

제 아버지의 하느님,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삭이 두려워하는 분이 나와 함께 하시지 아니하였더라면. 이는 신성과 신성한 인간이 아니면을 의미한다. 이는 “제 아버지의 하느님”의 의미가 선 측면에서의 신성이시다로부터; “아버지”는 신성한 선이시다, 그리고 “아들”은 신성한 진리이시다, 여기서는 각 실체(Essence)로부터의 신성한 선; “아브라함의 하느님”의 의미가 신성한 실체라 불리우는 신성 자체이시다, 그 이유는 아브라함이 신성 자체 측면에서의 주님을 표현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삭이 두려워하시는 분”의 의미가 신성한 인간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여기서 “두려워하는 분, Dread”라고 언급되는데, 그 이유는 신성한 진리가 선 안에 있지 않은 이들에게 두려움, 경외함, 공포등과 같은 것을 날라다 주는 일이 많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성한 선은 그렇지가 않아 아무에게도 공포를 전달하지 않는다. 똑같은 것이 이 장 53절에서 뜻해진다: 즉 “야곱은 그의 아버지 이삭이 두려워하시는 분을 두고 맹세했다.” 그 이유가 라반이 야곱으로부터 (완전히) 분리되었는 (즉 중간의 선이 신성으로부터의 선에서 분리되었는) 그때, 그는 악으로 피해를 입히고 싶어했기 때문이다. 이는 라반이 말한 대목으로부터 분명해진다. 그러므로 그가 이런 상태에 있었기에, “이삭이 두려워하는 분”이라는 하느님에 대한 표현이 사용된 것이다. 사실 “이삭의 두려워하는 분”이 이삭의 하느님이다는 것은 누구나 짐작할 수 있고, 라반이 지금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상태에 있다는 것도 알 수 있다. 이삭은 주님의 신성한 인간을 표현한다, 그리고 이것은 신성한 합리성 측면에서이다.
선 안에 있지 않은 이들에게 두려움, 경외심을 운반하는 것은 신성한 선의 측면이 아니라 신성한 진리 측면이다에 관한 경우는 이렇다: 주님으로부터 진행하는 거룩함은 그 자체 안에 신성한 선과 신성한 진리를 가지고 있다. 이 거룩함은 주님으로부터 계속적으로 진행한다. 그것들로부터 천국들에 빛이 있다, 그러므로 인간 마음들 안에 있는 빛도 이로부터이고, 결과적으로 지혜와 총명을 있게 한다. 그 이유가 지혜와 총명이 이 빛 안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빛, 또는 지혜와 총명은 이것들을 받아들임(그릇)에 따라서 모든 것에 영향을 미친다. 악 안에 있는 이들은 신성한 선을 받지 않는다, 그 이유는 그들은 사랑과 선행이 없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모든 선은 사랑과 선행 속에(사랑과 선행으로부터)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신성한 진리는 악한 자에 의해서조차도 받아질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의 외적 인간에 의해서이고 내적 인간에서는 아니다.
이것은 태양으로부터 있는 빛과 열과도 비슷하다. 영적인 열은 사랑이다, 고로 선이다; 그러나 영적인 빛은 신앙이다, 고로 진리이다. 태양으로부터의 열이 어떤 대상물에 의해 받아질 때, 나무들과 꽃들은 생장하여 잎과 꽃, 열매와 씨를 생산한다. 이것은 봄과 여름의 시기를 지나가면서 이다. 그러나 태양으로부터의 열이 받아지지 않고, 오직 빛만 있을 때, 식물은 생장하지 못하고, 움직이지 않는 상태, 동면의 상태에 있는데 가을과 겨울이다. 영적인 열과 빛도 대동소이한데, 이것은 주님으로부터 이다. 만일 인간이 봄과 여름같은 상태이다면, 그는 사랑과 선행으로부터의 선을 받고, 열매들을 산출한다; 만일 그가 가을과 겨울의 상태이다면, 그는 사랑과 선행의 선을 받지 않는다, 따라서 열매들의 산출도 없다. 그럼에도 그는 빛만큼은 여전히 받고 있다, 즉 그는 신앙의 것들, 또는 진리에 관한 것들을 알는지 모른다. 겨울의 빛이 이와 똑같은 결과를 지니고 있다, 그 이유가 이 빛도 색깔들, 아름다움들과 그것들을 뚜렷이 보일 수 있게 만들기는 하기 때문이다, 여기까지는 여름의 빛과 별반 차이가 없다; 그러나 겨울의 빛은 내면들을 꿰뚫지 못한다, 그 이유는 이 빛 안에 열이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대상물이 활기를 띠게 자극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선이 받아지지 않고, 오직 빛만 있을 때, 이는 마치 열이 대상물에 받아짐이 없고, 오직 빛으로부터의 형체의 형상(그림자)과 빛으로부터의 아름다움만이 있을 때, 그리고 내부에 차거움이 있을 때, 거기에는 무감각, 마비 증상, 휴면 상태(torpor)만이 있을 뿐이다, 하여 거기에서 빛을 받아들임이 있을 때, 그 결과는 오그라듦, 덜덜 떠는 증상뿐이다. 이것이 살아 있는 것들 안에 두려움, 걱정, 심지어 공포까지 드리운다. 이런 비교를 통해 악한 자에게 드리우는 두려움에 대해 조금은 납득되었을지 모른다. 그것들은 신성한 선으로부터 오지 않고, 오직 신성한 진리로부터서만 일 뿐이다. 다시 말해, 이것은 신성한 선은 받지 않고 신성한 진리만 받을 경우이다는 말이다. 또한 선이 없는 신성한 진리는 내면들을 향하여 관통하지 못하고 단지 맨끝의 것들(말단들)에, 즉 외적 인간, 더 자세히 말하면, 감각적 부분에만 달라 붙어 있을 수 있을 뿐이다. 이럴 경우 내적 형체는 보기 흉하고 오염되어 있어도 육체의 눈에 보일 수 있는 것인 맨끝 부분인 외적 형체는 그럴싸하게, 번드르하게 나타날 수 있다. 이로부터 대중적이 되다시피한 신앙의 본성, 즉 선한 일들이 없어도 구원된다고 말하는 신앙, 선을 뜻하고 선행을 실행함이 없는 신앙의 모습을 상상해볼 수 있다.
신성한 진리가 신성한 인간으로부터 진행되되 신성 자체로부터가 아닐 때, 여기서 “이삭의 두려워하는 분”에서 의미되는 신성한 인간이다; 그 이유가 방금 말했듯, 공포를 야기할 수 있는 것은 신성한 선이 아니라 진리이기 때문이다. 신성한 진리가 주님의 신성한 인간으로부터 이고, 신성 자체로부터는 아니다는 것은 지금까지 밝혀지지 않았던 신비함이다. 이 경우는 이렇다: 주님이 세상에 오시기 이전, 신성 자체가 전체 천국 안으로 흘렀다; 그때의 천국은 대체로 천적인 평면 뿐이었다, 다시 말해 신성의 유입을 통하여, 신성한 전능하심을 수단으로, 사랑의 선 안에 있는 이들로 구성되었다, 따라서 이로부터 천국들에는 빛이 있었고, 지혜와 총명이 있었다. 그러나 인류가 사랑과 선행으로부터의 것 자체를 제거한 후, 빛은 천국을 통하여 더 이상 있어질 수 없고, 따라서 (천국의) 지혜와 총명이 인류 안으로 꿰뚫고 들어와 질 수 없게 되었다. 이 원인으로, (인류의 멸망을 방지해주기 위해) 인류를 구원하심의 필요성에 부응하여 있게 된 것이 주님이 세상에 오시는 것, 그리고 세상에 계신 인간을 자체 안에서 신성으로 만드심이다. 이러면 이 신성한 인간이 신성한 빛이 되고, 이 신성한 인간으로부터의 빛이 모든(보편적) 천국들과 모든(보편적) 세상을 비추고, 계발해줄 수 있을는지 모른다. 사실상 그분은 영원으로부터 빛 자체이셔 왔다, 그 이유가 이 빛은 천국을 통하여 신성 자체로부터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지상의 신성한 인간)은 인간을 입은 신성 자체이었다, 그리고 이 인간이 신성으로 만들어졌다. 지상의 신성한 인간이 신성으로 만들어졌을 때, 이 신성한 인간은 천적 (평면의) 천국 자체 뿐만 아니라, 영적 (평면의) 천국, 나아가 인류까지 계발해줄 수 있게 되었다. 즉 모든 것이 선 안에 있는 신성한 진리를 받았고 받고 있다는 것이다, 즉 그분을 사랑함과 이웃을 향한 선행 안에 있는 이들이 신성한 진리를 받았고 받고 있다는 말이다. 요한복음서에서:
그분을 영접한 많은 이들, 그분의 이름을 믿는 이들에게 그분은 하느님의 아들들이 되어지는 힘을 주셨다; 이들이 태어난 것은 피들로부터도 아니고, 육의 의지로부터도 아니고, 인간의 의지로 부터도 아니고, 하느님의 의지로부터 이었다 (요. 1:12, 13).
지금 말해진 바로부터 아래 요한복음서의 말씀이 의미하는 것도 알 수 있다:
시작에서 말씀이 있었다, 그리고 말씀은 하느님과 더불어 있었다, 그리고 하느님은 말씀이었다. 똑같은 것이 하느님과 더불어 시작에서 있었다. 모든 것들이 그분에 의해 만들어졌다, 그리고 그분 없이 만들어져 있는 어떤 것도 있지 않았다. 그분 안에 생명이 있었다, 그리고 생명은 인간들의 빛이었다. 이것은 진정한 빛이었다, 이 빛이 세상 안으로 오는 모두 각각의 인간을 비추고 있다 (요. 1:1-4, 9).
위에서 “말씀”은 신성한 진리를 의미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각각의 실체 측면에서 신성한 선이시다, 그리고 신성한 진리가 그분으로부터 진행함을 위 구절들로부터 알는지 모른다. 그 이유가 신성한 선은 인간에 의해, 천사들에 의해서까지도 받아질 수 없고, 오로지 주님의 신성한 인간에 의해서만 받아진다. 아래 말씀에 뜻해져 있다:
여하튼 하느님을 본 자는 아무도 없다; 아버지의 품 안에 계신 독생자, 그분(아들)이 그분(아버지) 을 나타내고(진열해놓고) 있다 (요. 1:18).
그러나 신성한 진리는 받아질 수 있다, 그러나 받는 인간의 품질에 따라서; 그리고 이 품질의 신성한 진리 안에 신성한 선이 거할 수 있다, 물론 이것도 수용하는 품질에 따라서이다.
본문의 말, “나의 아버지의 하느님,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삭이 두려워하시는 분이 나와 더불어 계시지 않았더라면”이 인간에 의해 읽힐 때, 위와 같은 신비한 내용들이 천사들에게 표출된다. 이런 몇 구절의 인용문만 생각해도 말씀 안에 얼마나 많은 천국적인 것이 있는지, 설사 글자상에서는 아무것도 있지 않을 듯해도 신비함이 가득하다는 것을 눈치채게끔 한다. 어쨌든 우리가 지금까지 말해온 것들은 신비함이라는 빙산의 한조각일 뿐이다. 천사들은 이런 신비함들을 보고 지각하되 무한정인 바, 인간의 언어로 표현하는 것은 불가능하고, 사실상 인간의 마음은 이런 신비함들을 담을 만한 그릇도 아니다. (그렇지만 공부를 게을리 말아야 하는 이유는 지금의 이런 앎이 천국에 가서도 계속되기 때문이다 역자주.)

필시 나는 지금 빈 손으로 내보내졌을 것입니다. 이는 혼자 힘으로 모든 것을 청구했어야 할 것임을 의미한다. 이는 “빈손으로 보내짐”의 의미가 그분으로부터 모든 것들이 거두어짐, 고로 모든 것들을 자신 스스로 청구함이다에서 알게 된다.

하느님께서는 나의 비참함과 내 손의 수고함을 보셨고, 어젯밤 판결하셨습니다. 이는 모든 것들은 그분 자신의 힘으로 그분으로부터 이었음을 의미한다. 이는 “비참함”과 “내 손의 수고함들”의 의미가 시험들이다로부터 분명해진다; 그리고 시험과 승리를 수단으로 주님께서는 신성을 인간에 하나되게 하셨다, 그리고 이것을 신성으로 만드셨다, 그리고 이것은 그분 자신의 힘으로부터 이었다, 이런 사항들이 똑같은 말들에 의해 의미되어지고 있다. “하느님이 보셨다, 그리고 판결하셨다”는 주님의 신성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주님 안에서 신성이 주님의 인간과 더불어 계셨고, 이 계심이 주님의 신성한 인간이셨고, 이것을 주님께서는 행하셨다.

43절. 그리고 라반은 답하여 야곱에게 말했다, 이 딸들은 내 딸들이다, 그리고 이 아들들은 내 아들들이다, 그리고 양떼는 내 양떼이다, 그리고 네가 보는 모든 것은 나의 것이다. 그리고 나는 오늘 이 딸들에게, 그들에게서 출생한 그들의 아들들에게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그리고 라반은 답하여 야곱에게 말했다. 이는 희미한 지각의 상태를 의미한다.
이는 “대답하여 말함”의 의미가 지각함이다로부터 알려진다. 지각의 상태가 희미하다에 대한 것은 라반이 하는 말로부터, 즉 딸들, 아들들, 그리고 양떼들이 자기 것이다고, 실상 그의 것이 아니었다로부터 분명해진다; 그리고 내적 의미에서 중간의 선이 모든 선들과 진리들이 자신의 것이라고 요구하나 그렇지 않다.

딸들은 내 딸이다, 그리고 아들은 내 아들이다, 그리고 양떼는 내 양떼이다. 이는 진리에 대한 모든 애착들, 그리고 모든 진리들과 선들은 자기 자신이었다 라고 함을 의미한다. 이는 “딸들”, 여기서는 라헬과 레아인데 진리에 애착함이다로부터; 그리고 “아들들”의 의미가 진리들이다로부터; 그리고 “양떼”의 의미가 선들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것들이 자신의 것이라 주장함은 라반의 말, “딸들은 나의 딸들, 아들들은 나의 아들들, 양떼는 나의 양떼이다”에서 분명해진다.

그리고 네가 보는 모든 것은 나의 것이다. 이는 지각하는 능력, 지적인 자질 모두 역시 자기 자신이었다 라고 함을 의미한다. 이는 “본다”가 지각하는 것과 이해하는 것을 의미한다로부터, 고로 진리와 선을 지각하는 것과 지적 능력이 자신에 속해 있다를 의미함이 분명해진다. 어떻게 이런 주장이 나오는지에 대하여는 앞에서도 설명된 바 있고, 특히 다른 삶에서 거행되는 것을 예로 삼기도 했다. 즉 영들, 특히 중간 종류에 속하는 영들이 천사의 사회 안에 있을 때, 그들은 사회로부터 자기들 안으로 흘러드는 선과 진리에 애착함이 그들의 것이다 라고 하는 것 외 달리해서는 알지를 못한다. 이렇게 다른 삶에서 애착들과 생각들의 교통이 있는데, 이것도 그 사회와 더불은 결합의 정도에 비례하여 그들은 그렇게 생각한다. 이와 똑같은 영들이 사회로부터 분리되어지고 말 때, 그들은 분노한다; 그리고 그들이 분노의 상태에 있을 때, 그들은 희미한 지각의 상태에로 와진다; 그리고 이런 상태에서는 내면의 지각은 없을 수밖에 없는데, 그들은 천사의 사회에 속하는 선들과 진리들, 즉 자신들이 잠간 속했던 그 사회의 것들이 자신의 것들인 듯 자신을 위하여 청구한다. 이런 모습이 이 본문에 묘사되어 있다. 더 나아가 많은 경험을 수단으로 나는 선과 진리에 애착함들이 다른 이들과 어떻게 교통하는지를 알게 되었다. 이런 부류의 영들이 가끔 나와 더불어 있어 왔다, 그리고 애착의 얼마만큼을 수단으로 결합되었을 때, 그들은 내 생각들과 애착들이 자기들 것이라고 아는 것 외 달리 주장하지를 않았다. 그래서 내가 배운 바, 이와 똑같은 상황이 모든 인간들에게도 있다는 것이다; 그 이유가 모든 인간은 각기 자기와 더불은 영들을 가지기 때문이다. 이 영들이 인간 당사자에게 와서 그의 애착들 안으로 들어가자 마자 아는 것은 그 사람의 것이 자기들 것이라고 하기 때문이다. 이런 식으로 해서 영들은 인간과 결합한다, 그리고 그 영들을 통하여 인간은 주님에 의해 규율되어진다 (2488항); 이런 사실들에 관하여는 이후 장들의 끝에서 경험으로부터 서술될 것이다.

그리고 나는 오늘 내 딸들에게, 그들에게서 출생한 그들의 아들들에게 무엇을 할 수 있으랴? 이는 그 자체 단독으로 감히 그것들을 요구하지 못함을 의미한다. 이는 “딸들”의 의미가 진리에 애착함이다로부터; “아들들”이 진리들을 의미한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 자체가 감히 요구하지 못한다는 것이 “내가 오늘 그들에게 무엇을 할 수 있을까?”에 의미되는 것은 이미 진행한 사항, 즉 하느님께서 그에게 꿈에서, “너는 야곱에게 선이든 악에서조차 이든 말하지 않도록 조심해라”라고 말하신 대목에서 분명해진다.

44-46절. 그리고 이제 오라, 나와 너 사이에 언약을 만들자, 그리고 그것이 나와 너 사이에 증거가 되게 하자. 45 그리고 야곱은 돌을 가져왔다, 그리고 그것을 기둥으로 세웠다. 46 그리고 야곱은 그의 형제들에게 말했다, 돌들을 모아라. 그리고 그들은 돌들을 가져왔다, 그리고 돌 무더기를 만들었다, 그리고 그들은 그 무더기에서 먹었다.

그리고 이제 오라 나와 너 사이에 언약을 만들자, 그리고 그것이 나와 너 사이에 증거가 되게 하자. 이는 신성한 자연 평면이 일들로부터의 선들과 결합함, 즉 한쪽으로 밀려나 있듯 있는 이들, 또는 이방인들의 일들 속의 선들과 결합함을 의미한다. 이는 “언약함”의 의미가 결합이다로부터; 여기서 라반인 “나”의 의미가 일들로부터의 선들이다로부터 인데, 이는 아래에서 살핀다; 그리고 야곱인 “너”의 의미가 신성한 자연 평면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라반”에 의해 한쪽으로 밀려나 있는 듯 있는 이들, 또는 이방인들에게 있는 선들, 즉 일들로부터의 선들이 의미되는 이유는 지금 라반이 야곱과 분리되었기 때문이다 (즉 중간의 선이 자연 평면의 신성으로부터의 선에서 분리되었기 때문이다), 하여 라반은 이제는 더 이상 중간의 선으로 어떤 수단을 제공하는 도우미 역할을 표현하지 않고, 단지 어떤 선, 따라서 어느 한쪽 구석에 밀려 있는 듯한 선, 또는 단순한 방계의 선을 표현하기 때문이다. 라반이 야곱과 더불어 결합되어 있기 이전 그는 방계의 선을 표현했다, 그에 따라서 한쪽에 있는 선을 표현하는데, 이 선의 본성은 아래에서 서술한다. 어쨌든 이 상황은 롯과 이스마엘의 경우에서와 매우 비슷하다. 롯이 아브라함과 더불어 있는 한, 그는 외적 감각적 인간 측면의 주님을 표현했다; 그러나 그가 아브라함과 분리되었을 때, 그는 외적 예배 안에 있는 이들, 그럼에도 선행 안에 있는 이들을 표현했다, 그리고 또한 계속적으로 있던 교회의 몇 개의 상태들을 표현했다.
이스마엘의 경우도 그러했다: 그가 아브라함과 더불어 있는 동안, 그는 주님의 처음 합리성을 표현했다; 그러나 그 후에 그가 분리되었을 때, 그는 영적 평면에 속하는 이들을 표현했다. 이와 같은 경우가 라반의 경우이다. 그 이유인 즉, 비록 분리가 만들어졌다 해도 결합은 여전히 남아 있기 때문, 단지 예전 같은 수준의 결합은 아니다는 것만 다를 뿐이다. 이런 이유로 여기서의 라반, 그리고 이어지는 대목들에서의 라반은 일들로부터의 선들, 즉 한쪽으로 밀린 듯 있는 이들, 또는 이방인들과 더불어 있는 선들을 표현한다. 이방인들이 한쪽으로 밀려 있는 듯하다고, 또는 방계의 선이다고 말해진 이유는 그들이 교회 바깥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리와 선 안에 있는 교회 안에 있는 이들은 방계적 계보가 아닌 직계에 속한다. 그 이유는 그들이 말씀을 가졌기 때문, 그들은 말씀을 통하여 천국과 교통하기 때문, 그리고 천국을 통하여 주님과 교통하기 때문, 그러나 이방인들의 경우는 말씀을 가지지 않았고, 주님을 모르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에서 한쪽으로 밀린 듯 있다 라고 말해본 것이다. 이런 이방인들이 일들로부터의 선들 안에 있는 이들을 뜻하는데, 그들은 선행의 선이 있는 외적 평면에 있기 때문이다. 이것들은 “일들로부터의 선들(goods of works)”이라 불리우나, “선한 일들(good works)”은 아니다. 그 이유가 선한 일들은 내부에 선을 지님 없이 존재할런지도 모르나, 일들로부터의 선들은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야곱은 돌을 가져왔다, 그리고 그것을 기둥으로 세웠다. 이는 이런 진리와 이 진리에서 파생되는 예배를 의미한다. 이는 “돌”의 의미가 진리이다로부터; 그리고 “기둥”의 의미가 파생되는 예배, 즉 진리로부터 있는 예배이다로부터 분명해진다. 이로부터 이와 같은 진리와 이 진리에서 파생되는 예배임이 이런 말들로부터 분명해진다. 즉 “이와 같은 진리”, 이는 이방인들과 더불어 존재하는 진리이다; 그 이유가 비록 이방인들이 말씀에 관하여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다 할지라도, 따라서 주님에 관하여 아는 것이 없다 해도, 그들은 기독인들이 가지는 것과 같은 외적인 진리들은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신(Deity)은 거룩한 태도(방식)에서 예배되어져야 한다는 것, 절기는 준수되어야 한다는 것, 부모들은 존경되어야 한다는 것, 우리는 도둑질해서는 안된다는 것, 간음질을 해서는 안된다는 것, 살인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 이웃의 물품을 몹시 탐내지 말라는 것, 등이다; 이런 사항은 십계명에도 속하는 명령 준수 사항들이다. 이것은 교회 내에서 삶의 규율들이기도 하다. 교회 내의 현자는 이런 사항을 외적 형체에서 준수할 뿐 아니라 내적 형체에서도 준수한다. 이들은 비록 신앙이 무엇인지를 잘 알지는 못해도 최소한 이런 명령 사항에 반대되는 것들은 자기들의 종교적 체계에도 반대되고, 일반적 선에도, 고로 그들이 인간에게 빚지는 내적 의무들에도 반대된다는 것, 결과적으로 선행에 반대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들은 양심의 얼마만큼을 그들의 희미한 수준에서 가지고는 있다, 하여 이 양심에 반대되는 것을 기꺼이 행동하지 않는다. 이상으로부터 분명한 바, 주님께서는 이들도 규율하신다는 것, 단지 희미한 수준일 뿐이다. 고로 그분께서는 그들에게 내면의 진리들을 받는 능력을 나누어 주신다(impart). 그들은 이 능력을 다른 삶에 가서도 받는다.
교회 밖 이방인들의 구역과 상태에 관하여 다른 삶에 있는 기독인들과 이야기를 나눌 때가 있었다. (나는) 이 삶에서 이들은 주님의 교훈들에 살지 않았던 이들보다 더 쉽게 신앙으로부터의 진리들과 선들을 받는다고 그들에게 말했다; 그런데 기독인들은 그들을 생각하는 것이 잔인함에 가까왔다, 즉 교회 밖의 그들은 지옥에 가야 마땅하다는 것, 이런 근거는 주님 없이 구원은 없다는 자기들의 정경(cannon)에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에게 말했던 진정함은 이것이다; 서로의 선행 안에서 살았던 이방인들, 그리고 공정과 공평인 것에 관한 양심 같은 종류로부터 행동하여 왔던 이방인들은 이런 선행 안에서 살지 않았던 교회인들 보다 더 쉽게 다른 삶에서 신앙을 받고 주님을 인정한다는 것이다. 더구나 거짓들 안에 있는 기독인들, 즉 천국은 자신들만을 위해 있다고 믿는 이들, 그 이유가 자기들만이 말씀을 가졌기 때문이라고, 그런데 말씀을 심정으로 가진 것이 아니라 종이 위에 쓰인 글씨만으로 지닌 이들; 하여 주님을 알기는 하는데, 그분의 신성한 인간 측면에서의 신성함을 믿지 않는 이들; 하여 그분을 그분의 다른 실체 측면에 관련하여 공동의 인간으로서만 인정하는 이들, 그러므로 그들 자신만 남아 그들 자신의 생각들에만 남아있게 될 때, 그들은 그분을 숭배하지도 않는다. 고로 그들은 주님으로부터 밖으로 있는 이들인 바, 오히려 이들에게 구원은 없다.

그리고 야곱은 그의 형제들에게 말했다. 이는 일들로부터 선 안에 있는 이들을 의미한다. 이는 야곱이 주님의 신성한 자연 평면이다로부터; 그리고 “형제들”의 의미가 선들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여기서, 일들로부터의 선들 안에 있는 이들, 그리고 이방인들이다는 것은 앞에서 보여주었다. 그 이유가 선 안에 있는 모든 이는 주님의 신성과 결합되어지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결합이 주님에 의해 “형제들”이라 불리운다; 마가복음서에서:
예수께서는 그분을 빙둘러 앉은 이들을 쳐다보시고, 잘 보라, 나의 어머니, 그리고 나의 형제들이다; 그 이유가 하느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누구이든, 나의 형제, 그리고 자매, 그리고 어머니와 똑같다 (막. 3:31, 34, 35).
모든 결합은 사랑과 선행을 통하여 있다. 아마 누구도 이 사항은 알고 있다; 그 이유가 영적 결합은 사랑과 선행밖에 더 아니기 때문이다. 주님을 사랑함이 그분과 결합함이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리고 이웃을 향한 선행도 똑같다, 이는 주님의 말씀으로부터 분명해진다:
내 형제의 지극히 작은 자 중의 하나에게 행한 만큼 너희는 나에게 그것을 한 것이다 (마. 25:40).
위에서 취급된 주제는 선행의 일들이다.

돌을 모으라; 그리고 그들은 돌을 가져왔다, 그리고 무더기를 만들었다. 이는 선으로부터 있는 진리들을 의미한다. 이는 “돌들”의 의미가 진리들이다로부터; 그리고 “무더기”의 의미가 선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무더기”가 선을 의미하는 이유는 고대 시대에서 그들은 제단을 짓기 전, 무더기를 만들고 그 위에서 사랑으로 힘을 모아 쌓았다는 증거로 삼고 그 위에서 먹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후에 고대인들의 표현물이 되어 거룩한 것으로 주목받으면서, 무더기 대신 제단을 건축했다; 이 제단 역시 돌이 재료인데, 무더기가 아닌 더 정교한 방법으로 건축한 것 뿐이다. (여. 22:28, 34). 이는 “무더기”가 제단과 같은 의미, 즉 사랑의 선을 의미한 이유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 안에 있는 “돌들”에 의해 신앙의 진리들이 의미된다.

그리고 그들은 무더기에서 먹었다. 이는 신성 속의 선으로부터 자기 것으로 됨을 의미한다. 이는 “함께 먹다”의 의미가 교통함, 결합함, 그리고 자기 것이 되게 함이다로부터; 그리고 “무더기”의 의미가 선이다로부터 알려진다; 여기서는 무더기가 신성으로부터의 선이다.

47-50절. 그리고 라반은 그것을 여갈사하두다 라고 불렀고, 야곱은 갈르엣이라 불렀다. 48 그리고 라반이 말했다, 이 무더기는 오늘 나와 너 사이에 증거이다. 그러므로 그는 그것의 이름을 갈르엣, 49 그리고 미스바라 불렀다. 그 이유는 그가 말하기를, 우리가 그의 동료로부터 감추여진 사람일 것이나 여호와께서 나와 너를 지켜보실 것이기 때문이다. 50 만일 네가 내 딸들을 박대한다면, 그리고 만일 네가 내 딸들을 제치고 여인을 데려온다면, 우리들과 더불은 사람은 없지만 보라 하느님께서 나와 너 사이에서 증거하신다.

그리고 라반은 그것을 여갈사하두다 라고 불렀다. 이는 라반으로 표현된 선의 부분에서의 품질을 의미한다. “부르다”, 또는 “이름을 부르다”의 의미가 품질이다로부터 분명해진다. 라반이 말한 시리아의 관용어 “여갈사하두다”는 “증거의 무더기”를 뜻한다. 고대 시대 때에 이런 무더기는 표시를 위해, 증거를 위해, 후에는 예배를 위해 있었다; 여기서의 경우, 표시와 증거를 위해서이다; 그 이유가 표시, 거기에 경계가 있다는 것; 그리고 증거, 거기서 언약이 만들어졌다는 것, 그리고 그들 중의 어느쪽도 상대에게 악을 행하려고 건너가서는 안되는 경계선이기 때문이다. 이는 라반의 말로부터 분명하다:
이 무더기는 증거이고, 그리고 기둥은 증거인 바, 나는 악을 위하여 이 무더기를 건너 네게로 가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너는 이 무더기를 건너 나에게 오지 말라 (52절).
이로부터 “여갈사하두다”에 포함된 것이 무엇인지는 분명해졌을 것이다. 그러나 내적 의미에서는, 라반의 부분에서 있는 진리들로부터의 선의 품질, 즉 이방인들의 부분, 즉 일들로부터의 선 안에 있는 이들의 부분에 있는 선의 품질을 의미한다.

그리고 야곱은 그것을 갈르엣이라 불렀다. 이는 신성한 자연 평면의 선의 부분에 있는 품질을 의미한다. 이는 야곱의 표현함이 주님의 자연 평면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히브리어 관용어, 또는 가나안 지역의 관용어에서 야곱이 가져온 말, “갈르엣”은 “무더기”, 그리고 “증거”, 또는 “증거 무더기”를 뜻한다. “증거 무더기”의 내적 의미가 이제 뒤이어진다.

그리고 라반이 말했다, 이 무더기는 오늘 나와 너 사이에 증거이다. 그러므로 그는 그것의 이름을 갈르엣이라 불렀다. 이는 그렇게 영원히 있을 것임을 의미한다, 이로부터 다시 그것의 품질도 의미한다. 이는 “무더기”의 의미가 선이다로부터; 그리고 “증거”의 의미가 진리를 수단으로 선을 확증함이다로부터 인데, 이는 아래에서 살핀다; “오늘”의 의미가 영원이다로부터; 그리고 “이름을 부름”의 의미가 품질이다로부터 알려진다. 품질 자체가 지역 이름 “갈르엣” 안에 포함되어 있다. 그 이유가 고대 시대 때에 이름이 붙여질 경우, 거기에는 품질이 포함되었기 때문이다. 이상으로부터 라반의 말, 즉 “이 무더기는 나와 너 사이에 오늘 증거이다; 그러므로 그는 그것을 갈르엣이라 불렀다”에 의해 의미된 것, 즉 이는 라반에 의해 의미된 선이 주님의 자연 평면의 신성으로부터의 선과 결합함을 증명함이다는 것, 결과적으로 주님께서 선을 수단으로 이방인들과 결합하신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그 이유가 이 선이 지금 라반에 의해 표현되기 때문이다. 이 선으로부터의 진리들이 결합에 대한 것을 증명한다; 그럼에도 그들이 이 세상에 사는 한 이 선은 한쪽으로 밀려 있는 듯 하여 있다, 그 이유는 그들이 신성으로부터의 진리들을 가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선에서 사는 이들(즉 서로의 선행 안에서 사는 이들), 비록 그들이 신성의 원천(즉 말씀)으로부터 직접 신성으로부터의 진리들을 가지고 있지 않다 해도, 그들의 선까지 밀봉된 것은 아니다, 그 선은 열려질 수 있고, 특히 다른 삶에서 주님에 관해서와 신앙의 진리를 배울 때 확실히 열려진다. 이에 비해 주님을 사랑함 안에, 서로의 선행 안에 있는 기독인들은 세상에 사는 동안 더 직접적인 선 안에 있다, 그 이유는 그들이 신성으로부터의 진리 안 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다른 삶에 오면, 만일 제일 먼저 반드시 떼어내야 하는 거짓들이 없다면 교육받음 없이 천국 안으로 입장한다. 그러나 선행 안에서 살지 않았던 기독인들의 경우, 그들은 자신들로부터 천국을 닫아지게 한다, 참으로 그들 중의 많은 자들이 천국을 열 수 없다; 그 이유가 그들은 진리를 알고 있되 그것들을 부정하고, 자신들을 진리에 거슬러 굳혔기 때문이다, 물론 그들은 입으로는 그렇게 하지 않았지만, 심정상으로 그렇게 했던 것이다.
라반이 자신의 관용어로 “여갈사하두다”라고 무더기를 부르고, 그 다음 가나안의 관용어로 “갈르엣”이라 불렀는데, 둘 모두 거의 같은 의미를 지닌다. 하나는 적용함을 위하여, 그 다음 적용함 때문에 결합함을 위하여이다. 가나안의 관용구, 또는 “가나안의 입술로”말하는 것은 누군가의 자기를 신성에 적용하는 것이다; 그 이유가 “가나안”은 주님의 왕국을 의미하기 때문, 고로 최고 의미에서 주님이 의미되기 때문이다; 이사야서에서:
그 날에 가나안의 입술로 말하고, 여호와 체바욷에게 맹세하는 이집트의 토지 안에 다섯 성읍들이 있을 것이다. 그 날에 이집트의 토지 한 가운데에 여호와께 대한 제단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집트의 토지에서 여호와 체바욷에게 표시를 위하여와 증거를 위하여 있을 것이다
(이. 19:18-20).
“증거(witness)”가 진리를 수단으로 선을 확증함을 표시한다는 것, 그리고 선을 수단으로 진리를 확증하는 것을 표시한다는 것, 그러므로 “증언(testimony)”은 선으로부터 진리가 있음을, 그리고 선으로부터 있는 진리를 표시한다. 이는 말씀의 많은 구절들로부터 알는지 모른다. “증거”가 진리를 수단으로 선을 확증함, 그리고 선을 수단으로 진리를 확증함을 표시함에 대하여는 아래 구절에서 분명해진다. 여호수아서에서:
여호수아가 백성들에게 말했다, 너희는 너희 자신을 향하여 증거이다. 즉 너희는 여호와를 섬기도록 그분이 뽑으셨다. 그리고 그들이 말했다, 우리는 증거(증인)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너희 한가운데 있는 이상한 신들을 내버려라, 그리고 너희 심정을 이스라엘의 하느님 여호와에게 기울여라. 그리고 백성이 여호와께 말했다, 우리는 여호와 우리의 하느님을 섬기고, 그분의 음성에 우리는 순종할 것입니다. 그리고 여호수아는 이 날 백성들과 언약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것들을 세겜에서 규례와 판결 법으로 제정했다. 그리고 여호수아는 이 말들을 하느님의 법의 책 안에 기록했다; 그리고 그는 큰 돌을 가져왔다; 그리고 그것을 여호와의 성소에 있는 상수리나무 아래에 그것을 세웠다. 그리고 여호수아가 모든 백성에게 말했다, 잘 보아라, 이 돌은 우리에게 증거일 것이다, 그 이유가 그분이 우리에게 이야기한 여호와의 모든 말들을 들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너희가 너희 하느님을 부정하지 않도록 증거로 너희에게 있을 것이다 (여. 24:22-27).
위의 증거(증인)은 확증임이 명백하다, 실로 언약의 확증, 그에 따른 결합이다; 그 이유가 “언약”은 결합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호와, 또는 주님과 더불은 결합은 선을 수단으로 하지 않으면 가능하지 않다; 그리고 결합하는 선은 진리로부터 그것의 품질을 갖는다; 따라서 “증거”는 진리를 수단으로 선을 확증함이다. 여기서 뜻해진 선은 그들이 그분을 섬기겠다고 그분을 선택함에 의해 여호와 또는 주님과의 결합이다; 확증을 만든 수단인 진리는 “돌”이다; 최고 의미에서 “돌”은 주님 자신이시다, 그 이유는 모든 진리가 그분으로부터 있기 때문, 그러므로 그분은 “이스라엘의 돌”이라 불리우신다 (창. 49:24); 그래서 말해진다, “잘 보아라, 이 돌이 우리에게 증거를 위해 있을 것이다, 그 이유는 이 돌은 그분이 우리에게 이야기하시는 여호와의 모든 말들을 들었기 때문이다.”
계시록서에서:
나는 나의 두 증인들을 줄 것인즉, 그들은 삼베옷을 입고 이천 이백 육십 일 동안 예언할 것이다. 이들은 땅의 하느님 앞에 서있는 두 올리브 나무들과 두 등잔대들이다. 그리고 만일 어떤 인간이 그들을 해치기를 바란다면, 불이 그들의 입으로부터 나와서, 그들의 적들을 삼킬 것이다; 이들은 천국을 닫는 힘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들이 자기들의 증언을 끝마쳤을 때, 끝없이 깊은 구렁(무저 갱)으로부터 오는 짐승이 그들과 전쟁을 만들 것이다, 그리고 그들을 정복할 것이고, 그들을 죽일 것이다. 그리고 삼일 반 후에 하느님으로부터의 생명의 숨이 그들 안으로 들어갈 것이다, 하여 그들은 자기들의 발로 섰다 (계. 11:3-7, 11);
위에서 언급한 두 증인은 선과 진리이다(즉, 진리가 안에 있는 선, 그리고 선으로부터 있는 진리), 모두가 심정에서 확증된 선과 진리임이 그것이 말해진 바로부터, 즉 두 증인들은 두 올리브 나무와 두 등잔대들이다로부터 분명해진다. “두 올리브 나무들”은 천적인 선과 영적인 선을 표시한다. 천적인 선은 주님을 사랑함으로부터의 선, 그리고 영적인 선은 이웃을 향한 선행으로부터의 선이다. “등잔대들”은 이런 선들로부터의 진리들이다. 이 대목은 주님의 신성한 자비로부터 등잔대를 주제로 취급하는 곳에서 더 살피게 될 것이다. 이 선들과 진리들은 천국을 닫고 여는 힘을 가진다. 이에 대하여는 22장의 서문을 참조하면 될 것이다. “무저갱으로부터의 짐승 (즉 지옥으로부터의 짐승)이 그들을 죽일 것이다”란 교회 내에서 선과 진리의 황폐해짐을 의미한다; 그리고 “하느님으로부터의 생명의 영이 그들 안으로 들어갔다, 하여 그들은 그들의 발로 섰다”란 새로운 교회를 의미한다.
고대 때에 무더기가 증거로서 놓였고, 후에는 제단이었다는 것은 여호수아서에서 분명해진다:
르우벤족과 갓족이 말했다, 잘 보아라 우리의 조상들이 만든 여호와의 제단의 모형이다, 이는 태워 바침을 위해서도 아니고, 제물을 위해서도 아니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와 너희 사이에 증거이 다. 그리고 르우벤의 아들들과 갓의 아들들은 제단을 여호와가 하느님이심에 대하여 우리 사이에 증거라고 불렀다 (여. 22:28. 34).
내적 의미에서 “증거”는 진리를 수단으로 선을 확증함을 표시한다.
“증거”가 진리를 수단으로 선을 확증함, 그리고 선을 수단으로 진리를 확증함이기에, 최고 의미에서 “증인”에 의해 주님이 의미된다, 그 이유는 그분이 확증하는 신성한 진리이시기 때문이다; 이사야서에서:
나는 너희와 영원히 지속되는 언약을, 다윗의 진정한 자비들조차 만들 것이다; 잘 보라 나는 그분을 백성에게 증인으로, 백성의 제 일인 자요 사령관으로 주었었다 (이. 55:4).
계시록서에서: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이 분은 신실한 증인이시고, 죽은 자로부터의 첫 출생이시고, 그리고 땅의 왕들의 제 일인 자이시다 (계. 1:5).
계시록서에서:
이런 사항들이 하느님의 창조의 시작이신 신실하시고 진정한 증인을 말한다 (계. 3:14).
모든 진리는 둘 또는 셋 증인의 말에 설 것이고, 증인 하나로는 안된다고 하는 명령이 표현 교회에 주어졌는데, 이 명령은 이런 신성한 법, 즉 하나의 진리가 선을 확증하지 못한다 이다, 그러나 여러 진리들이 선을 확증한다는 법칙으로부터 이다; 그 이유가 하나의 진리가 다른 진리와의 연결 없이는 확증되지 않는 바, 여러 진리가 함께 있어야 한다는 것, 그 이유가 이것이 저것을 볼 수 있게 하기 때문이다. 하나가 어떤 형체를 생산하지(완성하지) 않는다, 고로 어떤 품질을 만들지 않는다, 그러나 시리즈로 연결된 여러 개가 (정확한) 품질을 결정해준다. 하나의 음조가 어떤 멜로디를, 하모니는 더욱 생산하지 못하듯, 진리 역시 그러하다. 비록 하나의 진리가 시민적 상태 안에 기초를 두고 있다 할지라도 하나의 진리로는 의문시되는 법의 기초만 될 뿐이다; 또한 이쪽이 저쪽에 반대되지 않는 것 (서로 보완하는 것)은 십계명의 가르침의 경우가 어쩌면 대표적 예인데, 이는 살핀 바 있다 (2609항).
“증거(testimony)”가 선으로부터 진리가 있음, 그리고 선으로부터 있는 진리를 표시함은 이미 말해진 바로부터 이다; 또한 하나의 말이라 불리우는 돌판 위에 쓰여진 계명의 열 가르침이 “증거”이다는 사실로부터 이다. 모세의 책에서:
여호와께서 시내산 위에서 모세와 더불어 이야기하심을 끝내시면서, 그분은 그에게 하느님의 손가락으로 쓰신 증거의 두 판들, 돌판을 주셨다 (출. 31:18).
출애굽기서에서:
모세는 산으로부터 내려갔다, 그리고 증거의 두 판들, 판의 양쪽에 쓰여진 돌판이 그의 손에 있었다 (출. 32:15).
그리고 판들이 궤 안에 놓여졌을 때, 궤는 “증거의 궤”라 불리운다, 모세의 책에서: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하셨다, 너는 내가 네게 줄 증거를 궤 안에 둘 것이다 (출. 25:16, 21).
모세는 증거를 가져와서 궤 안에 두었다 (출. 40:20).
출애굽기서에서:
나는 너를 증거의 궤 위에 있는 두 그룹들 사이로부터 자비석 위로부터 만나고, 이야기를 할 것이다 (출. 25:22).
출애굽기서에서:
향의 구름이 증거 위에 있는 자비석을 덮을는지 모른다 (레. 16:13).
출애굽기서에서:
열둘 지파들의 막대기들이 증거 앞 만남의 천막 왼쪽에 있었다 (민. 17:4).
(“증거의 궤”를 출. 25:22; 31:7; 계.15:5에서 더 읽어보라.)
그러므로 계명의 가르침들이 “증거”라 불리운 이유는 그것들이 언약으로부터,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결합으로부터 있기 때문이다; 이 결합은 인간이 가르침들을 준수하지 않으면 외적 형체 뿐만 아니라 내적 형체에서도 존재 안으로 와질 수 없다. 이 가르침들의 내적 형체가 무엇인지는 이미 살핀 바 있다; 그러므로 이 가르침들은 진리를 수단으로 확증되는 선이다, 그리고 선으로부터 파생되는 진리인 바, 이것이 “증거”에 의해 의미된다. 이것이 그렇기 때문에 판들 또한 “언약의 판들”이라 불리운다; 그리고 궤는 “언약의 궤”라 불리운다. 이상으로부터 말씀에서 “증거”에 의해 순수 의미에서 의미되는 것이 무엇인지 분명해졌을 것이다. 더불어 신. 4:45; 6:17, 20; 이. 8:16; 왕하. 17:15; 시. 19:7; 25:10; 78:5; 93:5; 99:2, 22, 24, 59, 79, 88, 138, 167; 122:3, 4; 계. 6:9; 12:17; 19:10도 더 읽기 바란다.

그리고 미스바. 그 이유가 그가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나와 너 사이를 지켜보신다 라고 했기 때문이다. 이는 주님의 신성한 자연 평면으로부터의 현존(presence)을 의미한다. 즉 지금 라반에 의해 표현된 선 안에서를 의미한다. 이는 “쳐다봄(looking)”, 또는 “지켜보심(watching)”이 현존하심을 뜻한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 이유가 또 다른 대상을 쳐다보는 자, 또는 높은 전망대에서 누군가를 지켜본다면, 이는 보고 있다는 시각으로부터 함께 현존하는 셈이기 때문이다. 이 외에 “보는”것, 주님을 서술할 때, 예견과 섭리를 표시한다, 고로 현존 , 그러나 예견하심과 섭리하심을 수단으로 현존하심이다. 주님의 현존하심에 주목해보면, 그분은 모든 이와 더불어 현존하신다, 그러나 그분을 받아들임에 따라서이다; 그 이유가 모든 이의 생명은 주님만으로부터 있기 때문이다. 선과 진리 안에서 그분의 현존을 받는 이들은 총명과 지혜의 생명 안에 있다; 그러나 이렇게 받지 않고 악과 거짓 안에서 그분의 현존을 받는다면, 그는 미친 짓과 우둔함 안에 있다; 그럼에도 그들은 이해력이나 똑똑함의 수용력은 남보다 뛰어날 수도 있다. 이렇게 말한 이유는 악과 거짓 안에 있는 이들이 바깥 형체에서 선하고 참된 것의 탈을 뒤집어 쓰고 그럴듯하게 행세하는데 남보다 한수 높기 때문이다. 이렇게 잘 포장된 악과 거짓이 순박한 인간을 사로잡기에 이런 자가 선하고 참된 것에 대한 지식을 모르고서는 악용하지도 못하기 때문에 하는 말이다. 현존하심의 품질이 “미스바”에 의해 의미된다; 여기서의 경우, 일들로부터의 선들 안에 있는 이들과 더불어 있는 품질, 즉 이방인들과 더불은 품질, 여기서 라반에 의해 의미된 품질이다; 그 이유가 원어에서 “미스바”는 “쳐다봄”으로부터 파생되어지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우리는 그의 동료로부터 감추여진 사람일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교회 속에 있는 것에 관련하여 있는 분리를 의미한다. 이는 “감추여 있다”의 의미가 분리됨이다로부터; 그리고 “그의 동료로부터의 사람”의 의미가 교회 내에 있는 이들, 그리고 교회 밖에 있는 이들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것들이 “감추여”라고 말해진 이유는 그것들이 선과 진리 측면에 관련하여 분리되었기 때문, 고로 교회의 것들에 관련하여 분리되었기 때문이다.

만일 네가 내 딸들을 박대한다면, 그리고 네가 내 딸들을 제치고 여인들을 데려 온다면, 우리와 더불은 사람은 없지만… 이는 진리에 애착함들은 교회 안에 남아 있을 것임을 의미한다. 이는 “딸들”, 즉 라헬과 레아의 의미가 진리에 애착함들이다로부터; “여인들”의 의미가 진짜이지 않은 진리에 애착함들이로부터, 고로 교회 속에 있지 않은 진리에 애착함이다로부터; 그 이유가 진리에 애착함이 교회를 만들기 때문이다; 하여 “딸들을 제치고 여인들을 데려온다”는 것은 진짜 진리에 애착함 외에 다른 애착함들이 있을 것임을 의미한다; “우리와 더불은 사람은 없다”의 의미가 사람이 그의 동료로부터 감추여질 때, 즉 그들이 분리되어질 때 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상의 것을 종합하면 분명해지는 바, 이 말들에 의해 진짜 진리가 진짜이지 않은 진리들로 더럽혀지지 않고 교회 안에 남아있을 것이다가 의미된다.

보라, 하느님이 나와 너 사이에서 증거하신다. 이는 확증을 의미한다. 여기서는 신성으로부터 확증함이다. 이는 “증거(증인)”의 의미가 확증함이다로부터 알려진다.

51-53절. 그리고 라반이 야곱에게 말했다, 이 무더기를 보아라, 그리고 내가 너와 나 사이에 세운 이 기둥을 보라. 52 이 무더기가 증거이다, 그리고 이 기둥이 증거가 된다, 그리고 나는 악을 위하여 이 무더기, 이 기둥을 넘어 너에게 건너 가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너는 악을 위하여 이 무더기, 이 기둥을 넘어 나에게 오지마라. 53 아브라함의 하느님과 나홀의 하느님, 그들의 아버지의 하느님께서 우리 사이를 판결하신다. 그리고 야곱은 그의 아버지 이삭이 두려워하는 분을 두고 맹세했다.

그리고 라반이 야곱에게 말했다, 이 무더기를 보아라, 그리고 이 기둥을 보아라, 이는 내가 너와 나 사이에 세운 것이다. 이는 결합을 의미한다. 이는 앞에서 말해진 바로부터 분명해진다; 그 이유가 무더기와 기둥은 언약이 만들어졌음(즉 친구 관계)에 대한 표시와 증거를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고로 내적 의미에서의 의미는 결합이다.

이 무더기는 증거이다, 그리고 이 기둥이 증거이다. 이는 확증을 의미한다. 이는 “증거”의 의미가 확증함이다로부터; 즉 “기둥”인 진리를 수단으로 선을 확증함, 그리고 “무더기”인 선으로부터 진리를 확증함이다에서 알려진다.

나는 악을 위하여 이 무더기를 건너 너에게 가지 않을 것이니, 너도 이 무더기를 건너 나에게 오지 마라. 이는 선으로부터 얼마나 많이 흘러들 것인지를 규정하는 한계를 의미한다. 이는 “건너감”이 흘러듦을 의미함으로부터; “무더기”가 선을 의미한다로부터; 그리고 “기둥”의 의미가 진리이다로부터; 또한 무더기와 기둥이 표시를 위해, 증거를 위해 양쪽을 위해 있기 때문에서 이다; 그러나 이 대목에서는 한계의 표시를 위해서 이다. 결합이 취급되기에, 내적 의미는 선으로부터 얼마나 많이 흘러들 것인지를 규정하는 한계임이 앞 뒤 연결 문맥에서 살펴진다. 결합은 선을 수단으로 결과된다는 것, 그리고 선은 받음에 따라서 흘러든다는 것은 앞에서도 서술한 적이 있다. 그러나 선을 받음은 진리들에 따르지 않고서는 여하한 방법으로도 가능하지 않다, 진리가 선이 안쪽으로 흘러들게 하기 때문이다; 즉 선은 대행자이고 진리는 수용체이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모든 진리는 받는 그릇들이다. 진리들이 선이 안으로 흘러들게 하기에, 진리들은 선의 흐름을 한계짓는 것이다. 그래서 이 대목에서 선으로부터 흘러듦이 얼마나 많을 것인지를 규정하는 한계를 뜻한다고 말한 것이다.
이런 경우를 놓고 조금 더 서술해보겠다: 인간이 어떤 인간이든, 그 인간의 본성이 어떠하든, 인간과 더불어 있는 진리들은 그 인간의 애착을 수단으로, 즉 그의 사랑 속에 있는 어떤 기쁨을 수단으로 당사자의 기억 안으로 들어간 것이다. 그의 사랑으로부터 있는 기쁨, 즉 당사자가 애착하는 것도 없이는 어떤 것도 인간에게 들어가 질 수 없다, 그 이유는 애착 안에(또는 사랑함으로부터의 기쁨 안에) 자기의 생명이 있기 때문이다. 들어간 것들은 그것과 비슷한 기쁨이 재발할 때는 언제든지 그것과 연계된 것과 함께 재생산되어진다. 같은 방법에서 똑같은 진리가 누군가의 자아, 또는 또 다른 자아를 수단으로 그것이 들어갔을 때 있었던 사랑의 기쁨, 또는 애착은 같은 방식에서 다시 흥분된다. 그 이유는 그것들 끼리 서로 입맛이 같기 때문이다. 이렇게 말을 늘어 놓은 이유는 이로부터 미루어 아는 바, 인간이 선 안에 있지 않으면, 어떤 진리도 순수한 애착과 더불어 심어지지 않는다는 것, 더구나 내면적으로 뿌리내리지 못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어서 때문이다. 진리에 대한 순수한 애착(진짜 애착)은 주님을 사랑함과 이웃을 향한 선행으로부터 있는 선으로부터만 있다. 이 선은 주님으로부터 흘러들지만, 진리들이 아니면 자리잡아지지 않는다; 그 이유가 진리들 안에서 선은 환영받고, 사실상 이 둘은 일치함에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선을 받음은 진리들의 본성에 따라서이다. 서로의 선행 안에서 살았던 이런 이방인들과 더불어 존재했던 진리들은 위와 같은 일치함의 본성 속에 있으므로 주님으로부터 흘러드는 선이 그들의 진리 안에서 환영받음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이 이 세상에서 사는 한, 말씀으로부터 진리들을 가지는 기독인들과, 그리고 영적 선행 안에서 말씀으로부터 사는 이들과는 방식에서 똑같지는 않다.

아브라함의 하느님, 그리고 나홀의 하느님이 우리 사이를 판결하신다. 이는 신성이 양쪽 모두에 흐름을 의미한다. 즉 교회 내에 있는 이들이 가지는 선 안으로, 그리고 교회 밖에 있는 이들이 가지는 선 안으로 신성은 흐른다를 의미한다. 이는 “아브라함의 하느님”의 의미가 교회 내에 있는 이들에 관하여 주님의 신성이다로부터; 그리고 “나홀의 하느님”의 의미가 교회 밖에 있는 이들에 관하여 주님의 신성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로부터 분명한 바, 이 말들에 의해 신성이 양쪽으로 흐름이 의미된다는 것이다. “아브라함의 하느님”이 교회 내에 있는 이들에 주목하여 말하는 주님의 신성인 이유는 아브라함이 주님의 신성 측면, 결과적으로 주님으로부터 직접 오는 신성을 표현해서 이다. 그러므로 교회 내에 있는 이들이 “아브라함의 아들들”이라고 뾰족하게 뜻해지기도 한다 (요. 8:39). “나홀의 하느님”이 교회 밖에 이들에 주목해서 있는 주님의 신성인 이유는 나홀이 이방인들의 교회를, 그리고 그의 아들들은 형제애 안에 있는 이들을 표현하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나홀의 아들인 라반 역시 한쪽으로 있는 선, 즉 이방인들이 주님으로부터 가지는 식의 선을 표현한다. 주님으로부터 이와 같이 다양한 것이 표현되는 것은 다양한 것이 주님 안에 있어서가 아니라 주님의 신성을 담는 그릇이 다양하기 때문에서 이다. 이것은 인간 안에서 움직이는 생명과도 같다. 하나의 생명이지만 이것이 기관에서는 기관의 역할로 특징지어 지고, 섬유질에서는 그 나름대로의 역할을 표출하는 바, 하나의 생명이 표출되는 신체의 각종 부위에 따라 다르게 명명되는 것과 비슷하다. 즉 눈은 이 방법으로 보고, 귀는 저 방식으로 듣고, 혀는 또 다른 방식에 따라 지각한다; 하여 팔과 손도, 폐도, 발도, 간도, 위도, 제각각 무척 다르다. 그럼에도 다양하게 제각각 작동하는 것을 통제하는 하나의 생명이 있다. 다시 말해 생명이 다양해서 복잡한 신체 구조가 있는 것이 아니라 생명을 받는 신체들이 조건과 필요에 따라 받아지는 양상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각 기관의 형체는 행동이 결정됨에 따라 있기 때문이다.

그들의 아버지의 하느님. 이는 최고의 신성으로부터를 의미한다. 이는 “아버지의 하느님”의 의미가 최고의 신성이시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 이유가 “아버지”가 말씀에서 언급되는 곳은 어디에서든지 내적 의미에서 선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주님의 “아버지”, 또는 주님께서 “아버지”라는 말을 하실 때, 이는 그분 안에 있는 신성한 선이다. 신성한 선이 최고의 신성이다, 그러나 신성한 진리는 신성한 선으로부터 있는 진리이다, 그래서 “아들”이라 불리운다. 더 나아가 여기서의 “아버지”는 실상 아브라함과 나홀의 아버지인 “데라”이다, 그리고 그는 교회들의 공통된 지주(common stock)를 표현하는데 이미 살핀 바도 있다. 이로부터 관계적 의미에서 아브라함은 진짜 교회(순수한 교회)를 표현하고; 나홀은 이방인들의 교회를 표현한다.

그리고 야곱은 그의 아버지 이삭이 두려워하는 분을 두고 맹세했다. 이는 신성한 인간으로부터의 확증을 의미한다. 이 상태에서는 신성한 인간이 “두려워하는 분”이라 불리우고 있다; 이는 “맹세함”의 의미가 확증함이다로부터; 그리고 “이삭의 두려워하는 분”의 의미가 주님의 신성한 인간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아브라함의 하느님, 나홀의 하느님, 그들의 아버지(데라)의 하느님”, 그리고 야곱의 아버지 “이삭이 두려워하는 분”이라고 말해진 이유는 데라의 아들들이 여러 숫자의 하느님들을 인정했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그들이 우상숭배자들이었기 때문이다. 각 가문은 각 가문별로 자기들 특유의 하느님을 예배했고, 각자가 그런식으로 하느님을 모시는 것이 우상 숭배자들의 특징이고, 서로 이것을 인정했다. 이런 이유로 본문에서 여러 하느님들이 거론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의 가문에만 유독 그들의 하느님으로 여호와를 인정하도록 강요되었다(명령되었다). 이런 결과로 아브라함의 후손들이 다른 신들쪽으로 종종 타락하는 모습을 말씀의 역사, 예언 부분에서 마주친다. 다시 말해 이 후손들은 여호와의 이름을 명목상의 차원에서 인정한 것, 외적 측면에서만 인정한 것, (요즈음식으로 말하면 교회에서 믿으라니까 뭘 믿어야하는 지도 확실치 않으면서 믿습니다 하고 고백하는 식인 바) 그들은 여호와의 이름의 내적 측면은 전혀 알지 못했고, 알기를 바라지도 않았다.
그들이 교회의 의식 자체에 관심을 집중하는 만큼 그들은 우상적이었다. 그 이유가 그들이 내적 측면에서 분리되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교회의 내적인 것에서 분리될 때, 교회 속의 다양한 의식들은 우상 숭배의 도구일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의 진짜인 것이 (지독하게 외적인) 그들을 수단으로 표현되어질 수 있었다. 그 이유가 표현함들은 표현하는 인물(person)에 중점을 두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어떤 것(thing)에 집중하기 때문이다. (연극이나 드라마에서 작가가 하느님에 해당되고 배우나 탈랜트는 성경의 인물쯤으로 비교 생각해도 될지 모른다 역자주.) 그럼에도 표현 교회(representative church)가 (지상의) 존재 안으로 와지기 위하여, 그리고 주님께서 천국을 통하여 인간과의 어떤 교통이 있기 위하여 아브라함의 계보들이 비록 심정으로는 인정하지 못해도, 인정하기를 원하지 않아도, 어쨌든 입술로만이라도 여호와를 인정함 안에 보존해야하는 매우 특유한 중요성이 있었다. 그래서 그들과 더불은 표현 교회는 내적 측면이 유출되는 일은 없었고 오로지 외적 측면에서만 있었다; 이 방법에서 그들은 주님과 교통함을 가졌다; 즉 내적인 것을 수단으로 교통하는 진짜 교회(genuine church)와는 판연히 다르다. 이런 이유로 그들의 신성한 예배는 그들의 혼들에 전혀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그들의 혼에 감동을 주지 않았다); 다시 말해 그들의 신성한 예배가 그들로 하여금 다른 삶에 있는 복됨을 만들어주지 않았다, 단지 이 세상에서의 번영만에 국한되었을 뿐이다.
그러므로 그들이 이런 외적인 것들을 준수하도록 하기 위하여, 만일 그들이 내적 측면에서 여호와를 인정했을 경우 불필요한 많은 기적같은 경이로운 일들이 그들 사이에서 수행되어지기도 했고, 때로는 처벌, 포로됨, 위협 같은 것을 수단으로 그들이 예배를 준수하도록 내몰리기도 했다. 이에 반해 내적 예배에서 있는 자는 주님에 의해 내몰리는 일은 결코 없고 자유함에서 그분의 인도를 허용한다. 그들에게 제일의 중요한 외적인 것은 그들이 여호와를 고백하는 것이다; 그 이유가 여호와가 주님이셨기 때문, 이분이 그 교회의 모든 것 안에서 표현되었기 때문이다.

54, 55절. 그리고 야곱은 산에서 제물을 바쳤다, 그리고 그의 형제를 불러 빵을 먹었다. 그리고 그들은 빵을 먹었다, 그리고 산에서 그 밤을 보냈다. 55 그리고 아침에 라반은 일찍 일어났다, 그리고 그의 아들들과 딸들에게 키스했다, 그리고 그들에게 복을 빌어 주었다. 그리고 라반은 떠나 자기 자리로 돌아 갔다.

그리고 야곱은 산에서 제물을 바쳤다. 이는 사랑의 선으로부터 예배함을 의미한다. 이는 “제물을 바침”이 예배를 의미한다로부터; 그리고 “산”의 의미가 사랑의 선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제물을 바침”이 에배를 의미하는 이유는 후기 표현 교회, 또는 히브리 표현 교회에서 태워 바침과 제물 바침이 모든 그들의 예배의 중심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그들은 산에서 제물을 바쳤는데, 이는 말씀의 많은 구절로부터 분명하다. 그런 이유는 “산”이 높기 때문이다; 하여 그들은 산은 높은 것을 의미할 것이다고, 높은 것이 천국의 것이다고, 그래서 그 속에 있는 것을 천적(celestial)이다고 불렀다. 그러므로 높은 것 중의 최고는 주님을 의미해서, 그들은 주님을 가장 높은 분(Most High)이라고 불렀다. 이런 방식에서 그들은 외관으로부터 생각했다. 그 이유가 보다 더 내면의 것들은 보다 더 높게 나타난다. 천국과 인간의 관계에서도 이는 그렇게 나타나고 있다. 천국은 당사자와 더불어 내면적으로 있는데, 인간은 천국이 높은데 존재하는 듯 상상하는 버릇이 있다. 이런 이유로 말씀에서 높은 것이 언급되는 경우, 내적 의미에서 내면의 것이 의미된다. 세상에서 천국이 높은 데에 있다고 상상되게 하는 이유는 눈에 보이는 하늘이 우리 위쪽 넘어 있기 때문, 그리고 우리가 시간과 공간 안에서 살기에 생각의 범주가 시공 안에 한계지어지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내면의 것이 존재하는지, 그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자가 적다는 것, 게다가 거기에는 시간과 공간 따위가 없다는 것을 실감하는 자는 더욱 적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말씀의 언어는 인간의 생각의 관념에 일치하고 있다; 그리고 만일 인간의 생각 차원 대신, 천사의 생각 차원에 있다면, 누구도 전혀 납득하지 못하고 만다. 하여 인간의 이해력에 합당한 것의 결핍으로 인간은 그 말씀이 무엇인지에 의아해 하고, 전혀 아무것도 아니다고 결론지어 거절되고 만다.

그리고 그의 형제를 불러 빵을 먹었다. 이는 주님의 신성한 자연 평면으로부터 선을 자기 것 되게 함을 의미한다. 이는 “형제들”의 의미가 지금 언약으로 결합된 이들, 즉 친구 관계에 의해 결합된 이들이다로부터; 그리고 내적 의미에서는 선과 진리 안에 있는 이들이다로부터; 그리고 “먹다”의 의미가 자기 것이 되게 함이다로부터; 그리고 “빵”의 의미가 사랑의 선이다로부터, 그리고 최고 의미에서 주님을 의미한다. 최고 의미에서 “빵”이 주님을 의미하기에, 그러므로 빵은 그분으로부터 있는 거룩한 모든 것, 즉 선과 진리의 모든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사랑과 선행으로부터 있는 것은 선밖에 없으므로 “빵”은 사랑과 선행을 의미한다. 옛 시대에서 제물이 사랑과 선행을 의미함밖에 더 없으므로 그들은 단어 하나인 “빵”을 가지고 사랑과 선행 모두를 단번에 표현했다. 그들은 천국의 축제가 표현되도록 하기 위하여, 즉 사랑과 선행을 수단으로 결합함이 표현되도록 제물의 고기를 함께 먹었다. 이것이 지금은 성찬에 의해 의미되었다; 그 이유가 이 성찬이 제물을 바침을, 그리고 신성시 구별한 것들로부터의 절기 속의 것들을 대신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성찬은 자체 내에 내적인 것을 포함하는 교회의 외적인 것이다; 이 내적인 것을 수단으로 사랑과 선행 안에 있는 이들은 천국과, 천국을 통하여 주님과 결합한다. 그 이유가 성찬에서 있는 “먹다” 역시 자기 것이 되게 함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하여 성찬에 있는 “빵”은 천적인 사랑을, 그리고 “포도주”는 영적인 사랑을 의미한다. 인간이 성찬 예식을 거행할 때, 즉 성찬의 거룩한 상태에서 먹고 마시는 동안, 천국 안에서는 천적, 영적 사랑만이 지각된다.
“주님의 신성한 자연 평면으로부터의 선을 자기 것이 되게 함”이라는 표현을 사용한 이유는 지금 여기서 취급되는 주제가 이방인들의 선, 즉 라반에 의해 지금 표현되는 선이기 때문에서 이다. 주님과 더불은 인간의 결합은 꼼꼼히 말하면 그분의 최고의 신성 자체와의 결합이 아니라 그분의 신성한 인간과의 결합이다; 그 이유가 인간은 주님의 최고의 신성에 대한 생각은 무엇이든 가져볼 수 없고, 최고의 신성은 인간의 생각을 초월하는 바, 인간이 최고의 신성을 생각하면, 그것은 아무것도 없는 것, 즉 무로 전락하고 만다; 그러나 인간은 그분의 신성한 인간에 대한 생각은 가질 수 있다; 그 이유가 모든 이는 무언가에 관해 생각하면, 그는 생각과 애착이라는 것을 수단으로 그 무언가와 결합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반대로 생각하지 않고 애착도 없으면 결합은 없다; 따라서 만일 어떤 이가 주님의 인간을 곰곰이 생각하고 있다면, 그는 그의 생각(idea) 안에 거룩함을 가진다, 동시에 주님으로부터 오는 이 거룩함이 천국을 채우고 있다는 것 또한 생각하고(think) 있다; 하여 그는 천국 또한 생각하고 있다; 그 이유가 복합체 안에서 천국이 인간에 관련하여 있는 것을 낳고, 낳아진 이것은 주님으로부터 행해진 것, 즉 주님이 그렇게 만드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과정은 인간이 주님의 최고의 신성과의 (직접적인) 결합은 가능할 수 없다는 것, 오직 그분의 신성한 인간과 결합하고, 신성한 인간을 통하여 (간접적으로) 그분의 최고 신성과 결합한다는 사실을 설명해준다. 그러므로 요한복음서(1:18)에서 여하튼 하느님을 본 자는 없고, 독생자 뿐이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분을 통하지 않고 아버지께로 올 자는 없다; 그러므로 그분은 중재자(Mediator)라고 불리우신다. 그런데 이런 경우도 발생한다; 즉 교회 내에서 최고의 존재만을 믿는다고 말하는 이들의 경우이다, 하여 주님에 관하여는 시시하게 생각하는 이들, 심지어는 시시함을 넘어 주님에 관한 것을 전혀 믿지 않는 이들, 하여 천국이 있는 것, 지옥이 있는 것에 관심을 두지 않는 것, 이것은 죽은 다음의 일인데, 안다고 지금의 신앙 생활에 무슨 소용이 있는가, 착하게 살면서 최고의 존재 한 분을 바라보다 죽으면 되는 것 아닌가를 심정에서 다져가는 신앙인들, 하여 신앙이 자연 평면의 문턱을 넘지 못하는 바, 어찌보면 그는 자연을 예배하는 수준일 경우에 국한될 수 있다. 이런 인물들이 경험으로 신앙을 배울 경우, 악한 자도 자기들 식으로 말하는 것을 듣고 혼동을 일으키기도 한다. (스베덴보리, 내지 스위든볼지언을 두고 “신비주의자들 이다”라고 말한다. 사실 한국 언어에서는 이 신비주의 라는 말이 어떤 무당이나 점쟁이들이 하는 짓을 연상하게끔 되어 있어 자칫 스위든볼지언이 무당의 족속들 아닌가하는 착각을 듣는 상대에게 일으킨다. 그러나 신비, 신비주의 라는 단어를 국어 사전을 들추어 국문학자가 내린 정의를 읽는다면, 얘기는 아주 달라진다. 즉 순수한 내면적 직관과 직접적 체험에 의해 최고 실재자를 인식하려는 종교, 철학, 문학상의 경향이라 풀이하고 있다. 역자더러 간단히 말해보라 하면, 천국의 비밀(천국의 질서)을 지각하여(이치를 깨달아) 실생활에 적용함이라 말하고 싶음을 첨언한다 역자주.)
주님의 인간에 주목하면, 인간들은 다양한 방법에서 생각한다, 하여 이 사람은 이렇게, 저 사람은 저렇게, 이 사람이 저 사람보다 더 거룩한 생각 안에 있기도 한다. 어쨌든 교회 내에 있는 이들은 그분의 인간이 신성하다 라고 생각할 수 있고, 또한 그분은 아버지와 하나이다는 것, 또한 아버지가 그분 안에 있으시다 라는 것도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교회 밖의 사람들은 이런 생각을 가질 수 없다, 그 이유는 그들이 주님에 관하여 아는 것이 없기 때문, 그리고 그들은 자기들의 눈으로 보는 형상들로부터 외에는 신성에 대한 생각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 그러므로 자기들의 손으로 만질 수 있는 우상들 외의 생각은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주님께서는 그들의 조잡한 그분에 대한 생각 안에 있는 그들의 선행과 순종심으로부터의 선을 수단으로 이들과도 그분 자신을 결합하신다. 이런 상황 때문에 여기서 “주님의 신성한 자연 평면으로부터의 선을 자기 것이 되게 함”이라고 말한 것이다; 인간과의 주님의 결합은 인간의 생각함과 그에서 파생되는 애착에 따라서 이다. 이를 크게 구별하면, 주님에 관하여 가장 거룩한 생각 안에 있고, 동시에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들과 애착함 안에 있는 이들이 교회 내에 있다면, 이 사람은 그분의 신성한 합리성 측면에서(수준에서) 주님과 결합되어 있다. 이에 비해 위와 같은 상태의 수준에 있지는 않지만, 즉 내면의 생각과 애착 안에 있지는 않으나 여전히 선행의 선 안에 있는 교인들이라면, 그는 그분의 신성한 자연 평면과 결합되어 있다. 그러나 이 수준보다 더 낮은 상태, 즉 보다 더 조잡한 종류의 거룩함을 지닌 이들은 그분의 감각 평면과 결합되어 있다; 이 결합이 뱀에 물렸어도 놋쇠뱀을 쳐다보면 치료되는 광경에 표현되어 있다 (민. 21:9). 이 결합은 우상들을 예배하는 이방인들, 그런데도 자기들 나름의 종교에 일치하여 선행 안에서 살고 있는 이방인들 사이에 있다. 이상 살핀 바로부터 야곱이 빵을 먹으려고 그의 형제들을 부른 것의 의미가 주님의 자연 평면으로부터 선을 자기 것이 되게 함이다를 이해했을 줄로 본다.

그리고 그들은 빵을 먹었다. 이는 결과를 의미한다. 즉 외적 의미에서 친구 관계, 최고 의미에서 주님의 자연 평면에서 선과 진리의 결합을 의미함이다.

그리고 산에서 온 밤을 보냈다. 이는 평온을 의미한다. “온 밤을 지냄(묵음)”의 의미가 평화를 가지는 것이다로부터, 고로 평온이다. 언약을 한 사람들이 한 장소에서 온 밤을 머무는 것은 관례였는데, 이는 이렇게 함으로 더 이상 적대 관계가 없음을 서로에게 표시하기 위하여서 였다. 그리고 내적 의미에서는 평온과 평화이다; 그 이유가 선과 진리 측면에서 결합되어 있는 이들은 평온과 평화 안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온 밤을 지낸 것이 “산에서”라고 말해지는데, “산”이 사랑과 선행의 선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사랑과 선행이 평화를 수여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침에 라반은 일찍 일어났다. 이는 이 선이 주님의 신성한 자연 평면으로부터 계발됨을 의미한다. 이는 “아침에 일찍 일어남”의 의미가 계발됨이다로부터; 그리고 “라반”의 표현이 이방인이 지니는 선 같은 것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여기서 뜻해진 이 선의 계발됨이 주님의 자연 평면으로부터 이다는 것은 시리즈로부터 분명해진다. 계발됨에만 주목하면, 우선 모든 계발됨은 주님으로부터 있고, 주님께서는 인간 안에 있는 선을 통하여 계발해주신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믿는 바, 선과 진리, 악과 거짓에 관하여 추론할 수 있는 사람이 계발되어진다는 것이다; 그리고 계발되는 수준의 정도는 당사자가 선과 진리, 악과 거짓을 말함에서 얼마나 명민하고 세밀한 구별력(예민함, 또는 교활함)을 구사하는지에 따라, 동시에 기억 속의 많은 지식들을 가지고 자신의 추론력을 뒷받침해 주느냐에 따라, 게다가 자신이 추론한 것들을 감각 속의 것들을 가지고 얼마나 잘 비교해 증명하느냐, 또는 확신(설득)시키느냐에 따라 크기가 좌우된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이런 사람들은 자신들의 상상력과 지각력에도 불구하고 계발됨은 없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계발되게 하는 힘은 두 종류가 있기 때문이다, 즉 하나는 천국의 빛으로부터 오고, 다른 하나는 실체가 없는(얼빠진) 빛으로부터 오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두 종류는 바깥 형체에서는 똑같이 나타난다, 물론 안쪽의 형체는 너무나 판이하게 다르다. 다시 말해, 천국의 빛으로부터 있는 계발은 선 안에서 있다, 즉 선 안에 있는 이들과 더불어 있다, 이들은 선으로부터 진리를 볼 수 있어, 마치 청명한 날 물체를 보고 이것이 이렇다, 저렇다 하는 것과 같다. 그러나 얼빠진 빛으로부터 있는 자는 악 안에서의 계발이다, 즉 악 안에 있는 이들과 더불어 있는 계발이다는 말이다, 이들의 계발이다는 것은 자신들이 지닌 앎(유식함)으로부터 추론함에서 기인되는 것인지라 말로 뱉는 한도까지에서는 위의 두 종류가 같을 수 있겠지만 , 애착의 단계에서 완연히 달라진다. 후자에게는 말하고 추론하고 했던 것을 행동에 옮기려는 애착이 없다. 이런 자에게 계발됨이 없다는 것을 짐작 못하는 사람은 없을 줄로 본다.
얼(혼)빠진 빛에 주목하여 보면, 다른 삶에서는 이러하다: 모든 인간은 이 세상에서 했던 짓과 같은 짓을 저 세상에서도 구사한다. 위의 후자의 부류는 선과 진리, 악과 거짓을 능변있게 추론한다는 말이다. 게다가 육체 안에서의 삶일 때보다 더 완전하고 특출하다. 그 이유는 거기서는 이 세상에서 자신들을 한계짓게 하던 것마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의 추론들이 얼빠진 빛으로부터 이다는 것은 금새 나타난다 (물론 선한 영들과 천사들에게만 그렇다는 말이다). 그리고 그들 안으로 흘러든 천국의 빛은 즉시 얼빠진 빛으로 바뀌고 만다; 한마디로 천국의 빛은 그들 안에서 숨막히는 형국이다. 마치 태양의 빛이 어떤 것에 떨어졌는데, 불투명하고 검게 되어지는 모습 같다; 또는 천국의 진리가 거짓들 안에 있는 이들에게 흘러들 때, 재빨리 이를 자신의 것으로 삼아 자신이 창안한 듯 자신 자체로 바뀌어 악용하고 타락되는 것과 같다; 또는 태양의 빛이 추하고 불결한 것에 스며들 때, 기껏 생산하는 것은 이상한 색깔과 불쾌한 냄새뿐인 경우와 같다. 이는 자신이 타인보다 아는 것이 더 많아 능변이 빼어나다 우쭐하면서 생활은 악하고 사기투성이로 점철하는 자가 지니는 얼빠진 빛이다.
이들이 사기칠 목적으로 선인 것의 모조품을 만들지 않는 조건이다면, 그들이 누구인지, 그들의 속성이 무엇인지가 그들이 말하는 모든 것으로부터 나타난다. 이런 자들 범주에 주님을 부정하고 경멸하는 이들이 있다, 이들은 속으로 주님을 고백하는 이들을 비웃는다. 이들 사이에 간음을 사랑하는 자들이 있다. 이들은 결혼은 거룩하다고 믿고, 이 거룩함에 어떤 이유에서 이든 덧칠해서는 결코 안된다고 하는 이들을 비웃는다. 이들 사이에, 교회의 가르침과 교리들은 공통의 사람들(우리 모두)을 위하여 있다고 믿는 이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그 가르침의 범주를 벗어나서는 안된다고 말하면서, 자신을 예외로 인정하고, 은근슬쩍 이 범주를 넘나드는 자들이 있다. 이들 사이에, 모든 것들은 자연에서 기인한다고 믿는 자들이 있다, 하여 이들은 모든 것은 신성에서 기인된다고 믿는 이들을 두고 너무나 단순하여 어리석고 유약한 판단을 한다고 비아냥거린다. 이들 사이에, 만사 형통함은 자신이 지닌 신중함 때문이다고 믿는 자들이 있다. 이들이 말한다, 최고의 존재는 일반적 보편적인 것만을 통치할 뿐, 개인적, 특수적인 사건에는 개입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외 많은 경우의 예들이 많겠지만 생략한다.
위와 같은 얼빠진 빛에 있었던 자들은 다른 삶에서도 그렇게 있다. 하여 거기서도 그들은 대단한 예민함을 발휘해 추론한다; 그러나 그들이 천국의 어떤 사회에 접근할 때, 그들의 얼빠진 빛은 소멸하여 어두워진다; 결과적으로 그들의 생각들이 애매모호해져 가서 전혀 생각 자체가 있지를 않게 된다. 그 이유가 그들은 천국의 빛 때문에 경련을 일으키고 압축되어지고(오그라들고) 말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은 자기들의 빛이 있는 곳, 지옥쪽으로 머리를 디밀어 스스로 자신을 내던지고야 만다. 이상으로부터 진정한 계발이 무엇일 것인지가 분명해지리라 본다, 즉 이는 주님으로부터 있는 선으로부터 온다는 것; 또한 거짓 계발됨이 무엇인지도, 그것은 지옥으로 있는 악으로부터 온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의 아들들과 그의 딸들에게 키스했다. 이는 이러한 진리들을 인정함, 그리고 이러한 진리에 애착함을 인정함을 의미한다. 이는 “키스함”의 의미가 애착함으로부터 결합함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결과적으로 인정함 (그 이유가 키스함에 선과 진리를 수단으로 결합함이 있고, 이 결합을 인정함이 있기 때문)이 있다; 그리고 “아들들”의 의미가 진리들, 진실함들이다로부터; 그리고 “딸들”, 여기서는 라헬과 레아의 의미가 진리에 애착함들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키스함”이 애착으로부터 결합함이다는 것은 상응으로부터 이다; 더 나아가 신체의 모든 기관과 조직이 천국과 상응하고 있다는 것은 장들의 끝부분에서 이미 살핀 바도 있다. 인간의 내적인 것들이 얼굴의 모든 것들과 상응하고 있다, 그러므로 생명의 원동력(animus)은 생김새(용모)로부터 빛을 낸다, 그리고 내면의 생명의 원동력, 또는 마음은 눈으로부터 빛을 낸다. 또한 생각과 애착은 신체의 행동과 몸짓에 상응한다; 이것에 관련하여 잘 알려진 것은, 이것에는 자발적 측면과 비자발적 측면에 속하는 것들이 있다는 것이다. 그 이유가 심정으로부터 부끄러이 여김은 신체의 외적 몸짓인 무릎꿇는 자세를 산출한다. 더욱 더 심정의 부끄러이 여김은 땅에 납작 엎드리는 몸짓이다. 심정의 기쁨과 마음의 환희는 노래함과 기뻐환호함을 유발한다. 슬픔과 내적 울음은 통곡하는 울음을 생산한다; 그러나 애착으로부터의 결합은 키스함을 생산한다. 이 모두로부터 분명해지는 바, 외적 행동들이 상응하기 때문에, 그것들은 내적인 것들의 표시들이다는 것이다. 그리고 표시들 안에 내적인 것들이 있는 바, 이것이 표시들의 품질을 가져온다. 그러나 외적인 것들을 가지고 모조품을 만들기를 바라는 이들과 더불어서도, 그 외적인 것들 역시 표시들인 것만은 분명하다, 단지 그것들은 흉내내기, 위선, 사기침의 표시이다. 키스함이라는 행동도 표시이다. 모든 이는 이 행동을 통해 자신이 당신을 심정으로부터 사랑한다는 것이 의미되기를 원한다. 그 이유는 당사자는 키스함의 행동이 이런 사랑으로부터 온다는 것, 그리고 애착으로부터 결합함의 흔적이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이것 가지고 이웃에게 당신 안에 있는 선을 위하여 당신을 사랑한다는 것을 납득시키기를 바라는 경우도 있다. 그런데 사실상 자신을 위하여, 자신의 명예와 이득을 위하여, 따라서 그가 말한 선은 명분상의 선, 따라서 악으로 있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는 것은 누구나 한 번 이상 경험으로 알고 있을지 모른다. 그 이유가 목적이 자신인 자, 최소한 중간의 목적마저 선쪽에 있지 않은 자, 그런데 이 목적에 관련하여 타인과 결합하기를 바라는 자는 악 안에 있는 자이다.

그리고 그들에게 복을 빌어 주었다. 이는 그와 동시에 일어나는 기쁨(joy)을 의미한다. 이는 “복을 빔”의 의미가 성공, 행복을 경건하게 원함이다로부터; 고로 누군가가 떠날 때, 진정 기뻐함을 증명하는 것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리고 라반은 떠났고, 그의 장소로 돌아 갔다. 이는 라반에 의한 표현이 끝났음을 의미한다. 이는 “그의 장소로 되돌아 감”의 의미가 이런 상태로 감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결과적으로 이 말에 의해 라반에 의한 표현은 끝났다가 의미되어진다. 이상 모두로부터 다시 실감되는 것은 말씀에 있는 모든 것들은 일반적이든, 특수적이든 내면의 것들을 포함하고 있다는 것, 특히 내면의 것들은 인간과 더불어 있는 천사들의 지각에 매우 적합한 속성을 갖추고 있다는 점이다. 예를 들면: “빵”이 말씀에서 언급되어질 때, 천사들은 물질적 빵은 알아차리지 못하고 영적인 빵만을 지각한다; 고로 빵 대신 생명의 빵이신 주님을 지각한다. 이는 주님 자신도 요한복음서 6:33, 35에서 가르치시기도 한다. 그리고 그들이 주님을 지각하기 때문에, 그들은 주님으로부터 있는 것을 지각한다; 고로 온 인류를 향한 그분의 사랑을 지각한다; 그리고 그들은 그때 동시에 주님에 대한 인간의 상호적 사랑을 지각한다. 그 이유가 이 두 가지 것들이 생각과 애착의 하나의 생각에 부합되어 있기 때문이다.
성찬에서 빵을 받을 때 거룩한 상태에 있는 이들의 생각도 위와 다른 것은 아니다; 그 이유가 빵을 받아 먹을 때, 그는 빵만을 먹는다고 생각하지 않고 주님과 그분의 자비를, 그리고 그분을 사랑함에 관한 것, 그리고 이웃을 향한 선행에 관한 것을 생각할 것이기 때문이다; 또는 그는 회개나 삶을 수정함도 생각하는 기회를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상 이런 생각함들은 당사자가 가지는 거룩한 상태에 따라서, 특히 생각함뿐만 아니라 애착 측면에서 있는 거룩함의 상태에 따라 매우 다양하다. 어쨌든 이로부터도 분명한 한 가지는 (성찬을 받는 당사자와 함께 있는) 천사들은 말씀이 언급될 때 먹는 “빵”을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 그러나 주님에 대한 것, 더불어 사랑으로부터 있는 무수한 것들을 생각한다는 것이다. 포도주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성찬의 말씀에서 “포도주”의 언급이 있을 때, 천사들에게는 포도주를 암시하지 않고 이웃을 향한 선행을 암시받는다. 이러므로, 이 방법에서, 인간은 천국과의 연결이 있고, 천국을 통하여 주님과의 연결이 있기에, 빵과 포도주는 상징물이 되어 거룩한 상태에 있는 인간을 천국과 하나되게 하고, 천국을 통하여 주님과 하나되게 한다.
말씀 안에 있는 모든 것도 위와 다르지 않다, 그러므로 말씀은 인간으로 주님과 하나되게 하는 중매체이다; 그리고 이런 하나로 묶는 매체가 없으면, 천국은 인간에게 흘러들지 못한다. 다시 말해 매체가 없으면, 하나됨도 없는 바, 천국은 그 자체인간으로부터 아주 멀어질 것인 바, 인간은 더 이상 선쪽으로의 인도 받음도 없고, 아예 육체적, 세상적 선조차 사라지고 만다; 하여 모든 연결 고리, 아주 외적인 것마저 파괴되어 있는다. 그 이유가 주님께서는 양심 속에 있는 내적인 결합력을 수단으로 선 안에 있는 이들을 규율하시고, 악 안에 있는 이들은 외적 결합력만으로 통치하시기 때문이다. 만일 이런 결합력이 끊어진다면, 인간 모두는 미친 자 되어 있다. 마치 법의 두려움도 아랑곳하지 않는 자이거나, 자기 목숨에 대한 두려움도 없는 자이거나, 명예나 이득도 아랑곳하지 않는다거나 하여 내적, 외적 속박이 모두 깨져 멸망밖에 남는 것은 없게 될 것이다. 이상으로부터 말씀이 왜 존재하는지, 말씀의 속성이 무엇인지를 짐작하였을 줄로 안다.
**************************************

창세기 제 32 장

성경: 창세기 32장

1. 그리고 야곱은 자기 길을 갔다, 그리고 하느님의 천사가 그를 만나러 달려왔다.
2. 그리고 야곱이 그들을 보았을 때 말했다, 여기는 하느님의 진영이다. 그리고 그는 그 곳의 이름을 마하나임이라 불렀다.
3. 야곱은 자기에 앞서 특사를 에돔 들판, 시날 토지로 그의 형 에서에게 보냈다.
4. 그리고 그는 그들에게 명령하여 말하기를, 너희는 내 주 에서에게 이렇게 말하라. 당신의 종 야곱이 말합니다. 나는 라반에게 붙어 지금까지 머물렀습니다.
5. 그리고 나는 소와 나귀, 양떼, 그리고 남종과 여종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나는 사람을 내 주께 보내어 말하고, 당신의 눈에서 은혜를 발견하고저 합니다.
6. 그리고 특사가 야곱에게 돌아 왔다, 말하기를, 우리는 당신의 형 에서에게 갔습니다, 더구나 그는 당신을 만나려고 사백 명의 사람들을 거느리고 오고 있습니다.
7. 그리고 야곱은 극도로 두려웠다, 그리고 혼돈스러웠다. 그래서 그는 그와 함께 있는 사람들, 그리고 양떼들, 그리고 목축들, 그리고 낙타들을 절반씩 갈라서 두 진영으로 했다.
8. 그리고 그는 말했다, 만일 에서가 이쪽 진영으로 와서, 이쪽 진영을 쳐부수면, 남은 진영은 도망할 것이다.
9. 그리고 야곱은 말했다, 오 나의 아버지 아브라함의 하느님, 나의 아버지 이삭의 하느님, 오, 여호와시여, 저에게 말하시기를, 네 토지, 네 출생지로 돌아가라, 그리고 나는 너를 잘 돌보아 주리라.
10. 그리고 저는 당신께서 당신의 종에게 베푸신 모든 진실과 모든 자비에 못미칩니다. 그 이유는 제가 제 지팡이만 지니고 이 요르단을 건넜는데 지금은 두 진영을 거느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11. 바라옵건대 저를 나의 형의 손으로부터, 에서의 손으로부터 구출해 주십시오. 그 이유는 그가 와서 나와 아들들을 거느린 어머니를 쳐부술까 두려워해서 입니다.
12. 그리고 당신은 말하셨습니다. 나는 반드시 너를 잘 돌보아 줄 것이다, 그리고 나는 네 씨를 셀 수 없는 바다의 모래 같이 많게 하리라.
13. 그리고 그는 그 밤을 거기서 보냈다, 그리고 그는 그의 형 에서를 위한 선물을 그의 수중에 온 것으로부터 취했다:
14. 암염소 이백과 숫염소 이십, 그리고 암양 이백과 숫양 이십,
15. 젖을 내는 낙타 삼십과 그 새끼, 암소 사십과 숫소 열, 암나귀 이십과 새끼나귀 열이다.
16. 그리고 그는 그의 종들의 손에 각 떼를 따로 따로 떼어서 맡겼다. 그리고 그의 종들에게 말하기를, 내 앞서 건너가라, 그리고 각 떼 사이에 거리를 유지하라.
17. 그리고 그는 맨 앞의 종에게 명령하여 말하기를, 나의 형 에서가 너를 만날 때, 그리고 너에게 물어 말하기를, 너는 누구의 사람이냐? 그리고 너는 어디로 가느냐? 그리고 네 앞의 이들은 누구의 것이냐?
18. 그러면 너는 말해야 할 것이다, 당신의 종 야곱의 것입니다. 이것은 나의 주 에서에게 보내는 선물입니다. 그리고 그는 우리 뒤쪽에 계십니다.
19. 그리고 그는 두 번째, 세 번째 종에게, 그리고 떼를 따라가는 모든 자들에게 명령하여 말하기를, 너희도 이 말에 따라 너희가 에서를 발견할 때 그에게 말하라.
20. 그리고 또한 너희가 말해야 할 것은 당신의 종 야곱이 우리 뒤에 계십니다. 그가 이렇게 말한 까닭은 나는 내 앞서 간 선물로 그의 얼굴에 속죄할 것이고, 그 후 내가 그의 얼굴을 볼 것이다. 어쩌면 그는 내 얼굴을 쳐들어줄지 모른다.
21. 그리하여 선물이 그에 앞서 건넜다, 그리고 그는 그 밤을 진영에서 보냈다.
22. 그리고 그는 그 밤에 일어났다, 그리고 그는 그의 두 여인, 그리고 두 하녀, 그리고 열한 아들을 데려왔다, 그리고 얍복의 얕은 개울을 건넜다.
23. 그리고 그는 그들을 데려왔고, 그리고 그들을 이끌어 그 강을 건너게 했다, 그리고 그가 가졌던 모든 것도 건너게 했다.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24. 그리고 야곱은 홀로 남았다, 그리고 새벽이 될 때까지 어떤 사람이 그와 씨름을 했다.
25. 그리고 그는 자기가 이길 수 없음을 보았다, 그리고 그는 그의 넓적다리의 우묵한 곳을 건드렸다, 그리고 야곱의 넓적다리의 우묵한 곳은 그와 씨름 중에 관절이 어긋났다.
26. 그리고 그가 말했다, 나로 가게 하라, 그 이유는 새벽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말했다, 당신이 나에게 복을 빌어 주지 않으면 나는 당신을 가게 할 수 없소이다.
27. 그리고 그는 그에게 말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그리고 그는 말했다, 야곱입니다.
28. 그리고 그는 말했다, 네 이름은 더 이상 야곱이라 불리지 않고 이스라엘이라 불릴 것이다. 그 이유는 왕자 같이 너는 하느님과 사람과 더불어 경쟁했다, 그리고 이겼기 때문이다.
29. 그리고 야곱이 묻고 말했다, 바라건대 당신의 이름을 말해주십시오. 그리고 그는 말했다. 어찌하여 너는 내 이름을 묻느냐? 그리고 그는 거기서 그를 축복했다.
30. 그리고 야곱은 그곳의 이름을 브니엘이라 불렀다. 그 이유는 내가 하느님을 대면하였으나 내 혼이 보전되었기 때문이다.
31. 그리고 그가 브니엘을 지날 때 해가 그에게 떠올랐다, 그리고 그는 그의 넓적다리를 절뚝거렸다.
32.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아들들은 오늘에 이르기까지 넓적다리의 우묵함에 있는 것, 어긋나 진 것의 신경을 먹지 않는다. 그 이유는 그가 야곱의 넓적다리의 우묵한 것을 건드려 그것의 신경을 어긋나게 했기 때문이다.

각 절의 내적 의미

1, 2절. 그리고 야곱은 자기 길을 갔다, 그리고 하느님의 천사가 그를 만나러 달려왔다. 2 그리고 야곱이 그들을 보았을 때 말했다, 여기는 하느님의 진영이다. 그리고 그는 그 곳의 이름을 마하나임이라 불렀다.

그리고 야곱은 자기 길을 갔다. 이는 진리가 영적, 천적인 선과 결합하기 위해 전진을 계속함을 의미한다. 이는 “야곱”의 표현함이 여기서는 자연 평면의 진리이다로부터 알려진다. 야곱이 주님의 자연 평면을 표현함에 관하여는 이미 서술한 바 있다; 즉 역사적 대화체에서 야곱이 취급될 경우, 내적 의미에서는 주님이 취급되어, 그분이 그분의 자연 평면을 어떻게 신성으로 만드셨는지가 취급된다. 그러므로 야곱은 처음에는 이 자연 평면에 있는 진리를 표현했고, 이 진리에 “라반”이었던 방계의 선이 결합되어졌다; 주님께서 이 선과 결합하신 이후, 야곱은 이 선을 표현했다. 그러나 이런 선은 자연 평면에 있는 신성으로부터의 선은 아니나, 이 선을 수단으로 주님은 신성으로부터의 선을 받으실 수 있으셨다; 그리고 이 중간의 선은 야곱이 라반과 헤어졌을 때 그가 표현한 선이었다. 이렇게 선이라 말하고는 있지만, 엄밀히 구분하면, 이 선은 중간에 있다는 특성상 자연 평면에 있는 신성으로부터의 선과 그 자체를 결합시키는 수용력을 소유한 진리이다. 이 진리를 지금 야곱이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이 진리가 결합되어지기로 예정된 선이 에서에 의해 표현되고 있다. 지금 최고 의미에서 취급되는 것은 주님의 신성한 자연 평면의 신성으로부터의 선과 신성으로부터의 진리의 참 결합(결합 자체)이다. 야곱이 라반과 작별하고 요단(강)에, 고로 가나안의 토지 첫 입구에 당도했는 바, 그는 참 결합쪽으로 전진하고 있다. 그 이유가 내적 의미에서 가나안의 토지는 천국을 의미하고, 최고 의미에서는 주님의 신성한 인간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야곱이 자기 길을 갔다”는 말에는 영적, 천적 선과의 결합을 향하여 계속 전진함이 의미되는 것이다.
그러나 위와 같은 의미는 우리의 납득력에 충분히 안착되기 힘든 특성을 지닌 것은 사실이다. 이런 원인은 이 주제의 가장 일반적인 것들조차 학식계에조차, 기독인들에게 조차 알려져 있지 않아서 이다. 즉 인간 안에 있는 자연 평면이 무엇인지, 합리성이 무엇인지, 이것들은 서로로부터 구분된다는 것 등등이 알려져 있지 않다는 말이다; 그리고 영적 진리가 무엇인지, 영적 선은 무엇인지를 거의 모르고 있다; 또한 이것들이 서로로부터 구분된다는 것도 모르고 있다. 더 더욱 알려지지 않은 것은, 인간이 거듭나질 때, 진리가 선과 결합되는데, 자연 평면에서는 이런 구별된 방법으로, 합리성에서는 이런 구별된 방법으로 거듭나고 그 수단들은 무수하다는 것에 대해서이다. 주님은 인간을 거듭나게 하시는 똑같은 질서에 따라 그분의 인간을 신성으로 만드셨다는 것은 더 더욱 알려지지 않은 사항이다.
이런 가장 일반적 사항들이 알려지지 않은 탓에 이런 사항들에 관해 말해지는 것은 무엇이든 희미한 납득력에 있을 수밖에 없다. 그렇다 해도 그런 대목들이 서술되어야 하는 이유는 이와 달리해서는 말씀의 내적 의미는 열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간단한 사항조차도 천사의 지혜는 얼마나 큰지, 그 지혜는 어떤 종류인지를 보여주는 수단일는지 모른다; 그 이유는 말씀의 내적 의미는 주로 천사를 위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느님의 천사가 그를 만나러 달려왔다. 이는 선으로부터 계발됨을 의미한다.
이는 “하느님의 천사”가 주님의 어떤 것을 의미함으로부터; 여기서는 주님 안에 있던 신성이다; 그 이유가 주님 안에는 “아버지”라 불리운 신성 자체가 있었기 때문이다. 생명의 실체 자체(인간의 경우 혼)가 거기로부터 이었고, 그분 자신이셨다. 이 신성이 공통의 언어에서 신성한 자연 평면이라 불리우고, 오히려 주님의 신성한 실체(essence)이다. “하느님의 천사들이 달려왔다”에 의해서는 대략적 의미에서 자연 평면 안으로 신성의 유입이 있었다가 의미된다; 결과적으로는 계발됨이 의미된다; 그 이유가 모든 계발됨은 신성의 유입으로부터 있기 때문이다. 취급되는 주제가 주님의 자연 평면에서 상태가 뒤바뀜, 즉 선이 첫 자리에, 진리가 두 번째 자리에 있도록 하는 것이기에; 그리고 이 장의 첫 부분에서 취급되는 주제가 거기(주님의 자연 평면) 안에서 선 안에 진리가 심어짐이기에, 그리고 이 심어짐은 신성으로부터 계발됨 없이 결과되어질 수 없기에, 그러므로 취급되어지는 첫 번째 사항인 계발은 진리가 심어지기로 예정된 선을 수단으로 결과됨이다.

그리고 야곱이 그들을 보았을 때 여기는 하느님의 진영이다 라고 말했다. 이는 천국을 의미한다. 그 이유가 “군대(army)”가 진리들과 선들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진리들과 선들이 주님에 의해 천국 질서에서 정렬되어지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진영을 차림(진을 침, encamping)”은 군대에 의해 정렬됨을 표시한다; 그리고 천국인 천국 질서 자체가 “진영(camp)”이다. 이 “진영” 또는 질서가 이런 본성을 지녔기에 지옥이 이 진영을 부수려 꾸준히 발버둥치지만 가능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질서, 또는 천국이 “진영”이라 불리우고, 진리들과 천사들(즉 천사들)은 이 질서에서 정렬되는 바, “군대들”이라 불리기도 한다. 고로 이것은 “하느님의 진영”이 천국을 의미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 질서 자체, 고로 천국 자체가 광야에서 이스라엘의 아들들이 진영을 차림에 의해 표현되어졌다; 그리고 그들이 자기들의 지파에 따라 광야에서 다함께 거주함이 “진영”이라 불리웠다. 진영 한 가운데 성막이 있고, 이를 빙둘러 그들은 진영을 차렸는데, 이 성막은 주님 자신을 표현했다. 이런 방식으로 이스라엘의 아들들이 진영을 차린 것은 민. 1장과 33장 2-56절에서 읽어진다; 또한 그들이 지파별로 성막을 빙둘러 진영을 차렸다; 즉 동쪽을 향하여는 유다, 잇사갈, 그리고 스불론 지파가; 남쪽을 향하여는 르우벤, 시므온, 그리고 갓 지파가; 서쪽을 향하여는 에브라임, 므낫세, 그리고 베냐민 지파가; 북쪽을 향하여는 단, 아셀, 그리고 납달리 지파가; 그리고 레위 지파는 성막 근처 한가운데에서 진영을 차렸다 (민. 2:2-34).
지파들은 복합체(complex) 안에 있는 모든 선들과 진리들을 의미했다. 위와 같은 이유 때문에 발람이 지파별로 거주하는 이스라엘을 보았을 때, 그리고 하느님의 영이 발람 위에 왔을 때, 그는 또렷한 말투로 선언했다:
그들의 성막들은 얼마나 선한지(좋은지, 아름다운지), 오 야곱아, 너희 거주하는 장소들아, 오 이스라엘, 계곡들 같이 그들은 심어졌다, 강가의 동산들 같다 (민. 24:5, 6).
위 예언에 의해 백성들이 야곱과 이스라엘로 명명되었다는 것을 뜻하지 않고, 이것은 주님의 천국이 표현되었음을 뜻한 것임은 매우 분명하다. 같은 이유 때문에 광야에서의 정렬됨, 즉 지파별로 진영을 차림이 말씀의 다른 구절에서도 “진영”이라 불리우고 있다. 이런 구절들의 내적 의미에서도 “진영”은 천국 질서를 의미하고, “진영을 차림”은 이 질서에 맞추어 정렬됨, 즉 천국 안에서 선들과 진리들이 배열되는 질서가 의미되고 있다 (레. 4:12; 8:17; 13:46; 14:8; 16:26, 28; 24:14, 23; 민. 2: 4:5-33; 5:2-4; 9:17-끝절; 10:1-10, 28; 11:31, 32; 12:14, 15; 31:19-24; 신. 23:10-14).
“하느님의 진영”이 천국을 표시하는 것이 요엘서로부터 보일는지 모른다:
땅이 그분 앞에서 흔들렸다, 하늘들이 떨었다, 태양과 달이 검게 되었다, 그리고 별들이 그것의 빛남을 철회했다, 그리고 여호와께서 그분의 군대 앞에서 그분의 음성을 발음하셨다, 그 이유가 그분의 진영은 극도로 많기 때문, 그 이유가 그분의 말씀을 행하는 자가 많았기 때문이다 (욜. 2:10, 11).
스가랴서에서:
나는 군대로부터 내 집에 진영을 차릴 것인데, 그 이유는 지나가는 자, 떠나가버리는 자 때문에, 강탈자가 그들을 지나쳐 가지 못하도록 해서 이다 (슥. 9:8).
계시록서에서:
곡과 마곡이 땅의 평지를 넘어 갔다, 그리고 성인들의 진영을 에워쌌다, 그리고 사랑받는 도성을; 그러나 불이 하느님으로부터 와서 그들을 살라버렸다 (계. 20:9);
“곡과 마곡”은 내적 예배로부터 분리되어 우상 예배로 되어버린 외적 예배 안에 있는 이들을 표시한다; “땅의 평지”는 교회의 진리를 표시한다; “성인들의 진영”은 천국 또는 땅에 있는 주님의 왕국, 즉 교회를 표시한다.
말씀에 있는 대부분의 것들은 반대 의미 또한 지니는데, “진영” 역시 그러한 바, 이는 악들과 거짓들, 결과적으로 지옥도 의미한다. 다윗서에서:
설사 악한 자가 내 앞에 진영을 차릴지라도, 제 심정은 두렵지 않을 것입니다 (시. 27:3).
다윗서에서:
하느님께서는 나를 맞서 진영을 차린 그들의 뼈를 흩어버리셨다; 너는 그것들을 부끄러이 놓을 것이다, 그 이유는 하느님이 그들을 거절하셨기 때문이다 (시. 53:5).
앗시리아의 진영에서 하느님의 천사가 185,000명을 치신 것(이. 37:36), 그리고 이집트의 진영(출. 14:20)에서의 진영의 경우도 악들과 거짓들밖에 더 다른 뜻은 없다.

그리고 그는 그 곳(장소)의 이름을 마하나임이라 불렀다. 이는 이 상태의 품질을 의미한다. 이는 “이름을 부름”의 의미가 품질이다로부터; 그리고 “장소”가 상태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원어에서 “마하나임”은 “두 진영들”을 뜻한다; 그리고 “두 진영들”은 천국들, 또는 주님의 두 왕국들, 즉 천적 왕국과 영적 왕국을 의미한다; 그리고 최고 의미에서는 주님의 신성한 천적 평면과 영적 평면을 의미한다. 이로부터 분명해지는 바, 주님께서 그분의 자연 평면이 영적, 천적 선에 의해 계발되어질 때, 주님의 상태의 품질이 “마하나임”에 의해 의미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상태의 품질은 묘사되어질 수 없는데, 그 이유는 주님이 자신 안에 있는 인간을 신성으로 만드셨을 때 그분이 가지셨던 신성한 상태들은 어떤 인간의 납득력에도 와질 수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주님으로부터 있는 천국의 빛에 의해 계발되는 나타남들을 수단으로; 그리고 인간의 거듭남을 수단으로 하지 않고는 납득력에 와닿지 않는다. 그 이유가 인간의 거듭남은 주님의 인간이 신성이 되심의 형상이기 때문이다.

3-5절. 야곱은 자기에 앞서 특사를 에돔 들판, 시날 토지로 그의 형 에서에게 보냈다. 4 그리고 그는 그들에게 명령하여 말하기를, 너희는 내 주 에서에게 이렇게 말하라. 당신의 종 야곱이 말합니다. 나는 라반에게 붙어 지금까지 머물렀습니다. 5 그리고 나는 소와 나귀, 양떼, 그리고 남종과 여종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나는 사람을 내 주께 보내어 말하고. 당신의 눈에서 은혜를 발견하고저 합니다.

그리고 야곱이 그의 형 에서에게 자기에 앞서 특사를 보냈다. 이는 천적 선과 처음으로 교통함을 의미한다. 이는 “특사를 보냄”이 교통함을 의미한다로부터; 그리고 에서의 표현함이 자연 평면에 있는 천적 선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앞에서 말한 바 대로, 여기서 취급되는 주제는 (“야곱”인) 자연 평면의 신성으로부터의 진리가 (“에서”인) 자연 평면의 신성으로부터의 선과 결합함이기에, 그러므로 신성으로부터의 계발이 먼저 취급되기에 그리고 여기서 처음으로 교통함이 있기에, 이것이 야곱이 자기 형제인 에서에게 특사를 보냄에 의해 의미되는 것이다.

시날 토지로. 이는 천적 자연적 선(celestial natural good)을 의미한다. 이는 “시날의 토지”가 최고 의미에서 주님의 천적 자연적 선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시날의 토지”가 이런 의미를 가지는 이유는 시날산이 가나안의 어느 쪽 부분에서의 경계선이었기 때문이다 (여. 11:16, 17); 그리고 강, 산, 또는 토지 같은 모든 경계선들은 최말단들에 속하는 이런저런 것들을 표현했다; 이런 경계들은 한가운데 있는 가나안으로부터 표현적 의미를 지녔기 때문이다; 이 가나안은 주님의 천국 왕국을, 최고 의미에서는 그분의 신성한 인간을 표현했다. 최말단의 것들, 즉 경계선들에 있는 것들은 자연 평면, 자연 수준에 속하는 것들이다. 이 자연 평면에 영적, 천적 평면들이 종결되어진다. 고로 자연 평면은 천국들 안에 있다. 가장 깊은 천국, 또는 세 번째 천국은 천적 평면인데, 그 이유는 주님을 사랑함의 수준에 있는 천국이기 때문이다; 중간의 천국, 또는 두 번째 천국은 영적 평면인데, 그 이유는 이 천국은 이웃을 향한 사랑함의 수준에 있는 천국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최말단, 또는 첫 번째 천국은 자연적 수준 안에(평면 안에) 천적인 것이든, 영적인 것이든 지를 지닌 천국인데, 그 이유는 이 천국은 (천적이든, 영적이든) 단순한 선 안에 있기 때문이고, 여기가 질서의 최말단이다. 이것은 작은 천국인 거듭난 인간과도 비슷하다. 이런 모두로부터 “시날의 토지”가 천적 자연적 선(자연적 선으로부터 있는 천적 평면)을 의미함이 보여진다. 거기에 거주하는 에서 역시 자연적 선을 표현함은 이미 살폈다; 그러므로 그가 거주한 토지 역시 같은 것을 의미한다; 그 이유는 토지는 그 위에 거주한 거주민의 표현들을 입기 때문이다.
말씀에서 “시날”에 의해 의미되는 것을 읽어보자. 모세의 책에서:
여호와께서 시내(산)로부터 오셨다, 그리고 시날로부터 그들에게 일어나셨다, 그분은 바란산으로 부터 빛을 비추셨고 그분은 거룩함의 일만(10,000)으로부터 오셨다 (신. 33:2, 3).
사사기서의 드보라와 바락의 노래에서:
오 여호와, 당신이 시날로부터 가셨을 때, 당신이 에돔의 들판 밖으로 행진하셨을 때, 땅은 전율했고, 하늘들 역시 떨어뜨렸고, 구름들 또한 물들을 떨어뜨렸고, 산들이 흘러내렸고, 이 시내(산)도 이스라엘의 하느님 여호와 앞에서 (흘러내렸다) (사. 5:4, 5).
발람의 예언에서:
나는 그분을 본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나는 그분을 바라본다, 그러나 가까이는 아니다; 거기 야곱으로부터 별 하나가 일어난다, 그리고 홀이 이스라엘로부터 밖으로 일어난다; 그리고 에돔은 상속이 있을 것이다; 시날 또한 그의 적들의 상속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강함을 만든다 (민. 24:17, 18).
위 구절들에서 “시날”이 주님의 어떤 것을 의미하는지를 누구나 알 수 있다; 그 이유가 그분이 “시날로부터 밖으로 나가셨고, 에돔의 들판을 행진하셨다”고 , 그리고 “에돔과 시날은 상속이 있을 것이다” 하고 말해지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 말들이 주님의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말씀의 내적 의미로부터가 아니면 아무도 알 수 없다; 그러나 이 말들은 앞에서 살핀 바를 참작하면 주님의 신성한 인간, 그리고 특별하게는 선 측면에서의 신성의 자연 평면임을 알게 된다. “일어나는” 것과 “시날로부터 밖으로 나가는” 것은 그분이 그분의 자연 평면을 신성으로까지 만드신 것, 또한 이로부터 빛이 있도록 하신 것, 즉 총명과 지혜가 있도록 하셨다는 것을 표시하고 있다; 그리고 이 방법에서 그분은 여호와되어 있으시는데, 이는 그분의 인간의 합리성 뿐만 아니라 그분의 인간의 자연 평면에서도 여호와이시다; 그러므로 말해지기를, “여호와께서 시날로부터 일어나셨다”, 그리고 “여호와께서 시날로부터 밖으로 나가셨다” 이다. 이사야서의 “두마에 관한 예언”도 비슷한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
그분이 나를 시날로부터 부르셨다, 경비원아, 밤은 어떤가? 경비원아, 밤은 어떤가? 경비원이 말했다, 아침이 온다, 그리고 또한 밤도 (온다) (이. 21:11, 12).
“시날의 토지”에 의해서는 교회가 선행과 신앙을 저버린 이전 교회, 옛 교회 위에 세워질 때, 교회로부터 밖으로 있는 이들, 이방인들과 더불은 주님의 왕국이 관계적 측면에서 적절히 의미된다. 이때 어둠에 있는 이들이 빛을 가진다는 것이 말씀의 많은 구절들로부터 분명해진다. 이것이 “시날로부터 일어남”에 의해, 그리고 “시날로부터 밖으로 나가, 그리고 에돔의 들판으로부터 행진함”에 의해, 그리고 “시날은 상속이 있을 것이다”에 의해 적절히 의미되고 있다; 또한 이사야서의 말, “그분이 나를 시날로부터 부르셨다, 경비원아, 밤은 어떠하냐? 경비원이 말했다, 아침이 옵니다, 그리고 밤 또한 (옵니다)”에 의해서도 적절히 의미된다. “아침이 옵니다”는 주님의 강림을 표시한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밤(무지함)에 있는 이들에게 계발이 있다를, 그러나 주님의 신성한 자연 평면으로부터 계발이 있다를 표시한다. 말씀의 대부분에서 반대 의미 또한 있는데, 이는 에스겔서 25:8, 9; 35:2-15절이다, 그리고 말씀의 역사 부분에서도 있다.

에돔 들판. 이는 파생된 진리(즉 선으로부터의 진리)를 의미한다. 이는 “에돔의 들판”의 의미가 선 측면에서 주님의 신성한 자연 평면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 선에 진리로부터의 교리물, 또는 진리들이 결합되어진다. “파생되는 진리들”, 또는 선으로부터 있는 진리들은 진리들로부터 선인 것과는 구별된다. 진리들로부터 선인 것은 거듭나기 이전, 인간이 자신에게 빨아들인 것들이다; 그러나 선으로부터 있는 진리들은 거듭난 이후 인간이 자신에게 빨아들인 것이다. 그 이유가 거듭난 후에는 진리들이 선으로부터 진행하는데, 그 이유는 이때의 인간은 어떤 것이 진정한지를 선으로부터 보고 지각하기 때문이다. 이런 진리, 고로 선으로부터의 진리가 “에돔의 들판”에 의해 의미되는데, 마찬가지 의미가 위에 인용했던 구절의 말씀, “오 여호와여, 당신이 시날로부터 밖으로 나가실 때, 당신이 에돔의 들판을 행진하실 때”에도 담겨있다 (사. 5:4).

그리고 그는 그들에게 명령하여, 말하기를, 너희는 내 주 에서에게 이렇게 말하라. 이는 선이 더 높은 자리에 있음을 처음 인정함을 의미한다. 이는 “특사에게 말하도록 명령함”의 의미가 곰곰이 되새겨 본 바, 이것이 그렇다는 것을 지각함이다로부터, 그 결과 인정함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선이 더 높은 자리에 있다는 것은 야곱이 에서를 자기 형제라고 부르지 않고 나의 주인이라 부르는 대목에서, 이후 또한 자신을 그의 종이라고 부르는 모습에서 알게 된다. 이것은 아버지 이삭이 아들 에서에게 대한 예언적 발언에 의해서도 뜻해지고 있다:
네 검을 수단으로 너는 살 것이다, 그리고 너는 네 형제(아우)를 섬길 것이다; 그리고 네가 지배력을 가질 때가 오는데, 그때 너는 네 목으로부터 그의 멍에를 부술 것이다 (창. 27:40).
위 구절에 이 장에서 취급되는 상태의 뒤바뀜이 의미되어 있다.

저는 라반에게 머물었는데 지금까지 지체하였습니다. 이는 그분께서는 그분 자신에게 “라반”으로 의미된 선을 불어 넣으셨음을 의미한다. 이는 라반의 표현함이 중간의 선, 즉 진짜이지 않은 선, 그러나 진짜인 진리들과 선들을 받아들임에 도우미 역할을 하는 선이다로부터; 그리고 “머물다(sojourning)”의 의미가 가르쳐짐이다로부터; 그리고 “지체하다(tatty)”, 또는 “머물다(stay)”의 의미가 선과 더불은 진리로부터의 생활이다로부터; 여기서는 불어넣음(빨아들임, imbue)이다. 이상을 종합하면, “나는 라반에게 머물었는데, 지금까지 지체하였습니다”의 말에 의해 그분께서는 라반에 의해 의미된 선을 그분 자신에게 불어넣으셨다가 의미된다.
이 경우는 이렇다: 진리는 중간의 것들이 아니면 선 안에 심어질 수 없다. 그래서 앞 장에서는 이 중간의 선이 취급되었고, 야곱이 중간의 선을 표현하는 라반에게 머물면서, 양떼를 획득함이 기술되고 있다. 이 장에는 결합의 과정이 묘사되는 바, 상태의 뒤바뀜, 즉 진리가 선에 종속되는 질서로의 바뀜이다. 처음의 시기 즉 인간이 애착으로부터 진리를 배울 때, 진리는 가상적으로 (외관상으로) 첫째 자리에 있다, 그러나 이 때의 진리는 삶에 응용됨이 많지 않다. 그 이후 그가 애착으로 배운 진리에 따라 철두철미하게 살아갈 때, 선은 그의 첫째 자리에 있는다; 그 이유가 이 때의 그의 진리, 즉 그가 진리에 따라 행동하는 것을 두고 그가 선이다고 믿는 만큼에서 선이 되어 있기 때문이다. 거듭나아져왔던 이들은 이 선 안에 있다; 그리고 양심을 가진 이들, 즉 이것이 진정한 것이다고 더 이상 추론하지 않는 이들, 오히려 이것이 진리인 바, 그것을 실행하는 이들, 고로 신앙과 생활 안에 이 진리를 흡입하여 자신이 되게 만든 이들이다.

나는 소와 나귀, 그리고 양떼, 그리고 남종과 여종을 가졌습니다. 이는 각기 그것들의 질서 안에 있는 획득물들을 의미한다. 이는 “(숫)소(ox)와 나귀, 양떼와 남종과 여종”의 의미가 외면과 내면 모두에서 도구가 되어주는 선들과 진리들, 고로 각기 그것들의 질서에서 있는 획득물들이다로부터 분명해진다; 그리고 “양떼”는 내면의 자연적 선, “남종”은 내면의 자연적 진리, “여종”은 이 진리에 대한 애착인데, 이는 앞에서 이미 살폈던 의미들로부터 분명해진다. 이런 선들과 진리들이 여기서 취급되는 획득물들이다, 그리고 그것들이 질서적으로 명명되고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 이유가 외면의 것이 (수)소와 나귀이고, 내면의 것이 양떼와 남종과 여종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내 주께 사람을 보내어 말해서 당신의 눈에서 은혜를 발견하고저 합니다. 이는 그분의 상태에 관하여 가르쳐짐, 그리고 또한 선의 현존에서 진리가 짐짓 겸손해함, 부끄러워함을 의미한다. 이는 “말하게 하려고 (누군가를) 보냄”의 의미가 누군가의 상태에 관하여 가르침이 있다로부터 분명해진다. 이때 진리가 짐짓 겸손해 하고 부끄러워함이 있을 것임이 뒤이어진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 이유가 야곱이 에서를 자기 “주인”이라 부르고, “당신의 눈에서 은혜를 발견하고저 합니다”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이런 식의 상태의 뒤바뀜이나 종속됨은 어느 누구에게나 나타나지 않고 최소한 거듭나고 있는 중이거나 거듭남을 곰곰이 되새겨 생각하는 사람이 아니면 나타나지도 않는다. 여하튼 오늘날 거듭나지는 이들은 매우 적고, 이 거듭남을 곰곰이 되새겨보는 이들도 매우 적다. 그 이유가 여기서 진리와 선에 관하여 말해진 것들을 추론하는 것은 (이런 구절들에 거듭남에 관련하여 무슨 의미가 있는지를 뒤적거리는 것은) 매우 불명확할 수밖에 없는데다가 어쩌면 (어떤 의미가 있다는 것을) 아예 인정하지도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특히 신앙의 진리들을 거듭남의 첫째 자리에, 선행의 선을 둘째 자리에 두는 이들의 경우는 더욱 그러하다. 즉 교리적인 것들에는 관심이 많지만 선행의 선들에 관하여는 그렇지 않는 이들; 그리고 영원한 구원은 전자의 것으로부터 이지 후자의 것으로부터가 아니다고 끝맺는 이들의 경우가 그렇다는 말이다. 이런 방식에서 생각하는 이들은 신앙의 진리가 선행의 선에 종속되어야 한다는 것을 결코 알지 못하고 지각할 수도 없다. 인간은 자기가 생각하는 것들이 자신에게 영향을 미치게 하기 때문이다. 만일 그가 선행의 선들로부터 생각한다면, 그는 신앙의 진리들이 둘째 자리에 있어야 할 것임을 분명하게 볼 것이고, 이때 그는 빛 안에 있듯 진리 자체를 볼 수 있다; 그 이유가 선행의 선은 빛을 주는 불꽃과 같아서 인간이 진정하다 라고 상상하기 앞서 각각 그리고 모든 것들을 계발해주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는 거짓들이 어떻게 뒤섞여 있는지, 진리들의 옷을 걸치고 있는지를 지각하는 것도 어렵지 않다.

6-8절. 그리고 특사가 야곱에게 돌아 왔다, 말하기를, 우리는 당신의 형 에서에게 갔습니다, 더구나 그는 당신을 만나려고 사백 명의 사람들을 거느리고 오고 있습니다. 7 그리고 야곱은 극도로 두려웠다, 그리고 혼돈스러웠다. 그래서 그는 그와 함께 있는 사람들, 그리고 양떼들, 그리고 목축들, 그리고 낙타들을 절반씩 갈라서 두 진영으로 했다. 8 그리고 그는 말했다, 만일 에서가 이쪽 진영으로 와서, 이쪽 진영을 쳐부수면, 남은 진영은 도망할 것이다.

그리고 특사가 야곱에게 돌아와서 말하기를, 우리는 당신의 형 에서에게 당도했습니다, 그리고 더욱이 그는 당신을 만나러 오고 있습니다. 이는 선이 그 자체에(즉 진리들과) 잘 어울리기 위해서 계속 흘러들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는 형(형제)인 에서의 의미가 선(주님의 신성한 자연 평면 속의 선)이다로부터; “만나러 오고 있다”의 의미가 흘러들고 있다 이다로부터(이는 아래에서 살핀다); 그리고 유입이 되는 바, 자기 것으로 삼음이다.
자기 것으로 삼음(appropriation)에 관하여는 수 차례 살핀 바 있어, 선과 진리와 더불어, 그리고 진리 안으로 선이 유입됨, 그리고 이 선을 수단으로 진리가 자기 것으로 삼음, 즉 선이 계속 흘러들고, 진리는 이것을 받는 것의 경우에 관해 어느 정도는 알고 있으리라 본다, 그 이유가 진리는 선의 그릇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신성한 선의 경우에서는 진짜 진리 외에 다른 진리는 적용할 수 없다, 그 이유는 이 둘은 같은 수준에서 상응하기 때문이다. 인간이 진리에 애착함에 있을 때 (이 때란 인간이 거듭나지기를 시작하기 직전의 상태이다)조차에서도 선은 계속적으로 흘러들지만, 받는 그릇(진리들)이 없어 그 자체에 잘 어울려지지 않는다(자기 것으로 되지 않는다); 그 이유는 거듭남의 시작에서 인간은 거듭남을 위한 지식들을 지닌 상태는 아직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 해도 선은 계속적으로 흘러드는 바, 이것이 진리에 애착함을 생산한다. 선이 계속 흘러들게 함은 신성한 선의 끊임없는 노력 외에 다른 근원은 없다. 이로부터도 분명해지는 바, 선이 진리보다 먼저 있다는 것, 첫째 자리에 있다는 것, 그리고 제 1 의 부분에서 행동한다는 것, 비록 진리가 먼저, 제 1 인 것처럼 나타나고 있다 해도 그렇다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이 거듭나지기를 시작할 때(즉 인간이 거듭남의 지식이 있는 나이인 성년이 될 때), 선은 그 자체를 명백히 한다; 그 이유가 이 시기에 당도한 성인은 진리를 알려함에 애착하기 보다는 아는 진리를 행하려함에 애착하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진리는 그의 이해력 안에 있어왔으나, 지금 진리는 그의 의지력 안에 있다; 그리고 진리가 의지력 안에 있을 때, 이 진리는 인간 안에 있는 셈이다; 그 이유가 의지력이 인간 자체를 구성하기 때문이다. 이런 한바퀴 돌아 원을 그리는 식의 형태는 비단 인간 거듭남의 큰 틀 말고도 작은 틀이라 할 수 있는 낱개의 일들에서도 똑같다; 예를 들면, 지식 속의 모든 것은 들음이나 봄을 통하여 생각 안으로 삽입되어지고, 그리고 이 생각으로부터 의지 안으로, 그리고 이 의지로부터 생각을 통하여 행동 안으로 이동된다. 또는 마지막 단계인 행동하려 시도함이 어떤 것으로부터 방해를 받고 있다면, 언제인가 이 걸림돌이 제거되자 마자 즉시 행동에로 옮겨진다.
이상 설명으로부터 알아지는 바, 유입과 더불은 경우, 그리고 선을 수단으로 진리가 자기 것 되게 함의 경우가 어떤지이다; 즉 우선적으로 신앙 속의 진리들은 들음을 통하여, 또는 시각을 통하여 은근히 심어진다; 이때 기억 안에 저장되어진다, 이 기억함으로부터 이 진리들은 지식 안으로 계속 승강된다, 마지막 의지 안으로 흘러든다, 그리고 이때 이 진리들은 의지로부터 생각을 통하여 행동 안으로 진행한다; 그리고 만일 이 진리들이 행동 안으로 갈 수 없다면(어떤 걸림돌이 놓여 있다면), 그것들은 시도함(노력함) 안에 있다(제거되기를 기다리고 있다), 따라서 이 시도함은 그 자체 내적인 행동인 것, 따라서 걸림돌이 제거되면 즉각 외적인 행동으로 개시된다. 여기에서 간과해서는 안되는 대목은, 이런 회전 주기가 계속적으로 반복됨을 생산하는 것은 선이다는 것이다. 그 이유가 주님으로부터 있는 생명(이런 반복을 만들어 내는 힘)은 선 안으로 흐르지 않고, 선을 통하여 흐르는데, 이것은 가장 깊은 속으로부터 진행된다는 것이다. 이 가장 깊은 속(inmosts)으로부터 흘러드는 생명이 위의 회전을 생산하는 것인데, 아마 이를 자신을 놓고 뒤돌아 생각해도 누구나 아는 사항들일 것이다. 알 수밖에 없는 이유는 이 생명 없이 생산된 것은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주님으로부터 있는 생명이 선 안으로가 아니고 선을 통하여서 흐르는 바, 생산된 선이 있고, 이 선이 진리들 안으로 흐르고, 진리들을 선 자체에 잘 어울리게 한다; 따라서 인간이 진리를 알고 있는 만큼에서 잘 어울리게 하여 선을 받기에 바람직해져 있는다.

그리고 사백 명의 사람들과 함께… 이는 그것의 상태, 즉 지금 앞 자리에 놓여질는지 모른다를 의미한다. 이는 “400”의 의미가 시험과 그것의 기간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여기서의 상태는 이어지는 말로부터, 즉 “그는 극도로 두려웠다, 그는 혼란스러워졌다”, 그러므로 그는 “진영을 둘로 갈랐다”로부터(7, 8절), 그리고 이어 그는 죽기 아니면 살기 식으로 매달리듯 여호와께 간청했음으로부터 알런지 모른다(9-12절). 이것도 흡족치 않아서 그는 천사와 씨름했다. 하여 씨름이 시험을 의미해준다. 이는 이어지는 대목에서 설명할 것이다. 거듭나지는 인간의 상태가 뒤바뀜이 있을 때, 즉 선이 (중요함의) 앞 자리를 차지할 때, 이때 시험들이 거행된다. 이때 이전에서의 경우, 인간은 시험들을 수행할 수 없는데, 그 이유는 그가 자신을 방어할 지식들 안에 아직 당도해 있지 않기 때문, 다시 말해 시험을 치루고 있어도 그 와중에 자신을 위로해줄(격려해줄) 지식이 아직 없는 상태여서 이다. 이런 이유로 대체로 모든 인간은 성년기에 도달할 때까지 시험을 겪지 않는다. 시험들은 진리들이 선에 하나로 되는 것이다. 이로부터 “그와 더불어 사백 명”은 상태, 즉 선이 앞 자리를 취할는지 모른다가 의미됨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야곱은 극도로 두려웠다, 그리고 혼란스러워졌다. 이는 변화가 있을 때 겪는 상태를 의미한다. 이는 두려움과 혼란함이 시험 안에서 있는 처음의 상태인 것으로부터, 그리고 상태가 뒤바뀔 때, 또는 상태의 변화에서 오는 절차 중 하나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여기에는 지금 말해진 것, 즉 에서가 사백 명을 거느리고 야곱을 만나려고 갔다는 것, 그리고 야곱은 이 말을 전해 듣고 두려움과 혼란스러움에 휩싸였다는 것보다 더 큰 규모로 감추여 놓인 신비함들이 있지만 우리의 납득력에 쉽게 와닿을 수는 없는데, 그 이유는 그 신비함들이 너무나 깊게 내면에 놓였기 때문이다. 이렇게까지 만은 표출해볼 수 있다: 선이 앞 자리를 차지하면서 선 자체에 진리를 종속시킬 때, 이것은 인간이 영적 시험들을 수행할 때 거행되는데, 이때 내부로부터 흘러드는 선은 인간의 내면적 인간 안에 저장되어 왔던 아주 많은 진리들을 동반한다. 이것들은 선이 당사자에게서 첫 주요 부분으로 행동할 때까지 당사자의 정신적 관점, 내지 납득력에 당도해질 수 없다, 그 이유는 이때가 되어야 당사자의 자연 평면이 선을 수단으로 계발되어지기를 시작하기 때문이다. 이러면 당사자 안에서 일치하는 것, 일치하지 않는 것이 분명해지고, 이로부터 두려움과 혼란함이 당연스럽게 뒤잇는다. 그 이유가 영적 시험들은 양심 위에서 펼쳐지기 때문이고, 양심은 내면의 인간 속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이 시험 안에 들어갈 때, 당사자는 이런 두려움과 혼란스러움이 어디로부터인지를 알지 못한다, 물론 그와 더불은 천사들은 이를 알고 있다. 시험은 당사자를 가운데 두고 한쪽에서는 선들과 진리들 안에 있는 그를 천사들이 붙들고 있는 한편, 다른쪽에서는 악령들이 악들과 거짓들 안에 있는 그를 붙들고 있음에서 오고 있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영들과 천사들에 의해 출시되는 것들은 마치 인간 당사자가 자기 안에 있는 듯 정확하게(100%) 지각되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는 인간이 육체 안에서 사는 동안, 모든 것들은 자기에게 흘러든다는 것을 믿지 않고 있다면, 그는 내면적으로 출시되는 것들이 그의 바깥쪽 원인들에 의해 생산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원인들은 자기 안쪽에 있다고, 그것이 자기 자신 자체이다고 믿는다; 그렇지만 그렇지가 않다. 인간이 생각하고 뜻하는 것은 무엇이든 (즉 자신의 모두 각각의 생각과 뜻함까지를 포함해서), 이것은 지옥이든, 천국이든지로부터 이다. 그는 자신이 악들을 생각하고 뜻하여, 거짓들로 기뻐해질 때, 그의 생각들과 애착들이 지옥으로부터 이다는 것을 알는지 모른다; 한편, 그는 자신이 선들을 생각하고 뜻하여 진리들로 기뻐해질 때, 이것이 천국으로부터 있다는 것, 즉 천국을 통하여 주님으로부터 있다는 것을 알는지 모른다. 그런데 인간에게 속해 있는 이런 생각들과 애착들은 그 대부분이 또 다른 양상으로 나타난다: 예를 들면, 거듭나져가는 인간에게 속한 사항들로부터 야기되는 악령들과 천사들의 전투는 두려움과 혼돈스러움이라는 양상으로, 그리고 시험이라는 양상으로 나타난다.
위의 논리는 인간 당사자에게 역설로 나타날 수밖에 없다, 그렇게 나타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오늘날의 교인들 대부분은 자기가 생각하는 모든 진리, 자기가 뜻하고 행하는 선이 자신으로부터 이다고 믿기 때문이다. 물론 그들은 자신들이 신앙의 교리로부터만 말한다고 할지라도 그렇다는 말이다. 어쩌면 그렇게 믿는 속성을 지닌 교인에게 만일 누군가가 자기에게 자신 안으로 지옥으로부터 악령들이 흘러든다는 것, 그래서 자신이 악들을 생각하고 뜻한다는 것; 그리고 자신이 선들을 생각하고 뜻할 때 천국으로부터의 천사들이 흘러든다고 말해주면, 이 교인은 누군가가 이런 사실을 간직하고 있음에 놀라움을 금치 못할 것이다. 그 이유는 이 교인으로서는 자신으로부터 생각하고, 말하고 뜻한다 라고 말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엄밀히 말해 이 교인은 그의 교리로부터가 아니고 자신 안에 있는 이런 느낌으로부터 그의 신조(믿음, belief)를 만들어내고 있다. 설사 교리가 진정한 교리이다 해도, 느낌은 오류적인 것이다. 이에 대한 확신을 나로 하여금 갖도록 내게 많은 경험을 허락하신 바 있다.

그래서 그는 그와 더불어 있는 사람들, 그리고 양떼, 그리고 목축, 그리고 낙타들을 절반으로 나누어 두 진영으로 편성했다. 이는 에서로 표현된 선을 받기 위해 진리들과 선들이 준비되고 배열됨을 의미한다. 이는 “사람들”의 의미가 진리들, 또는 거짓들이다로부터; “양떼”의 의미가 내면의 선들, 또는 그렇지 않은 선들이다로부터; “목축”의 의미가 외면의 선들 또는 그렇지 않은 선들이다로부터; “낙타들”의 의미가 외면 또는 일반적 진리들, 또는 그렇지 않은 진리들이다로부터; 그리고 “진영들”의 의미가 질서, 좋은 측면에서는 진짜 질서, 나쁜 측면에서는 진짜이지 않은 질서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절반으로 나눈다”가 둘로 나뉜다를 뜻하고, 이것은 (뭔가를) 받기 위해 자신의 자아를 정돈하고 배열하는 것이 분명해진다. 이런 경우가 어떻게 되는 것인지는 앞에서 설명한 대목으로부터 분명해진다; 즉 선이 흘러들 때, 질서(순위)가 뒤바뀌고, 선이 앞 자리를 차지할 때, 자연 평면은 이때 계발되는 바, 진짜인 진리와 선, 진짜이지 않은 진리와 선이 보여진다; 즉 이쪽과 저쪽이 구별된다는 말이다; 고로 얼마는 유지 존속되고, 한편 다른 얼마는 옮겨지게 된다. 하여 이미 말했듯 질서는 완전히 바뀌고 만다. 선이 통치할 때 이런 결과가 수반되는데, 즉 진리가 섬기고 종노릇하는 것, 이러므로서 진리들을 수단으로 선을 받음에 따라서, 또는 선의 품질에 따라서 있는 천국 질서에 더욱 더 가까워지는 셈이다; 그 이유가 선은 진리들로부터 선의 품질을 취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말했다, 만일 에서가 이쪽 진영에 와서 이 진영을 쳐부순다면, 남은 진영은 도망할 것이다. 이는 매 사건에 따라서를 의미한다. 이는 “진영”의 의미가 질서이다로부터; “쳐부심”의 의미가 파괴함이다로부터; 그리고 “남은 진영은 도망할 것이다”의 의미가 질서는 자연 평면에서 멸해져서는 안된다는 것, 그러나 어떤 것이 남아 있어야 한다를 의미한다; 고로 매 사건에 일치하여 준비함과 배열됨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진리가 자연 평면에서 통치하는 한, 이 진리는 진짜인 진리와 진짜이지 않은 진리를, 선인 것도 볼 수 없다; 그러나 주님을 사랑함과 이웃을 향한 선행으로부터의 선이 자연 평면 안에서 통치할 때, 이 선은 진짜와 진짜 아닌 것을 보고 있다; 그러므로 선이 지배력을 발휘하는 때가 아주 가까워질 때, 인간은 (상대적으로) 무엇이 선과 진리인지에 거의 무지해 있다, 즉 자신의 자연 평면 안에서 어느 것은 파괴되어져야 하고, 어느 것은 유지 존속되어야 하는 지에 거의 무지한 상태에 있다는 말이다. 이는 시험 중에 있는 당사자들에게 명백히 나타나는 상태이다. 인간이 이런 거의 완전한 무지의 상태에 있을 때, 준비와 배열이 만들어지는데, 이는 인간에 의해서가 아닌 주님에 의해 이루어진다; 이 구절에서 주님의 경우, 그분 자신 안에서 이다; 그 이유는 (인간과 달리) 주님은 그분 자신의 힘으로 자신 안의 모든 것을 질서 안으로 배치하고 환원되게 하셨기 때문이다.

9-12절. 그리고 야곱은 말했다, 오 나의 아버지 아브라함의 하느님, 나의 아버지 이삭의 하느님, 오 여호와시여, 저에게 말하시기를, 네 토지, 네 출생지로 돌아가라, 그리고 나는 너를 잘 돌보아 주리라. 10 그리고 저는 당신께서 당신의 종에게 베푸신 모든 진실과 모든 자비에 못미칩니다. 그 이유는 제가 제 지팡이만 지니고 이 요단을 건넜는데 지금은 두 진영을 거느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11 바라옵건대 저를 나의 형의 손으로부터, 에서의 손으로부터 구출해 주십시오. 그 이유는 그가 와서 나와 아들들을 거느린 어머니들을 쳐부술까 두려워해서 입니다. 12 그리고 당신은 말하셨습니다. 나는 반드시 너를 잘 돌보아 줄 것이다, 그리고 나는 네 씨를 셀 수 없는 바다의 모래 같이 많게 하리라.

그리고 야곱은 말했다, 오 나의 아버지 아브라함의 하느님, 오 나의 아버지 이삭의 하느님, 오 여호와시여. 이는 준비와 배열이 거룩함을 의미한다. 이는 “나의 아버지 아브라함의 하느님”의 의미가 주님의 신성 자체이다로부터; 그리고 “나의 아버지 이삭의 하느님”의 의미가 그분의 신성한 인간이다로부터 알려진다. 그리고 각각이 여호와이시기 때문에, “나의 아버지 아브라함의 하느님”, “나의 아버지 이삭의 하느님”이라 말해진다. 그러나 여기서는 신성으로부터 진행하는 거룩함이 의미되는데, 그 이유는 모든 거룩함은 신성으로부터 있기 때문이다. 거룩함이 의미되는 이유 또 하나는 이 사건이 야곱에 의해 표현되는 자연 평면인데, 그 안에서 아직 에서에 의해 표현되는 선이 진리와 결합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하여 여기서의 주제는 선을 받는 상태에 관련되고 있다; 따라서 선을 받을 준비와 배열함이다. 야곱의 간원함은 이밖에 더 다른 것을 포함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 말들은 준비함과 배열함의 거룩함이 의미된다.

저에게 말하시기를, 네 토지, 네 출생지로 돌아가라, 그리고 나는 너를 잘 돌보아 주겠다. 이는 신성한 선과 진리와 더불은 결합을 위하여를 의미한다. 이는 같은 말이 등장한 구절에서 이미 살폈다.

저는 당신의 종에게 베푼 모든 진실과 모든 자비에 훨씬 못미칩니다. 이는 선에 관한 측면에서나, 진리에 관한 측면에서나 부끄러워함을 의미한다. 이는 “자비”가 사랑의 선을 서술하고, “진실”은 신앙의 진리를 서술한다로부터 분명해진다. 이것이 부끄러워함의 말들인 것은 분명하고; 이 말들에 의해 선 측면이나 진리 측면이나 모두에서 있는 부끄러워함이 의미되는 것도 분명해진다.

그 이유는 저는 지팡이만 지니고 이 요단을 건넜지만, 지금 저는 두 진영을 거느렸습니다. 이는 거의 없었으나 많아졌음을 의미한다. 이는 “지팡이”의 의미가 힘이다로부터, 그리고 진리를 서술한다로부터; “요단”의 의미가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들을 획득하기를 개시함이다로부터 인데, 이는 아래에서 살핀다; 그리고 “두 진영”의 의미가 선들과 진리들이다로부터; 그 이유가 여기서의 두 진영들이란 야곱이 반씩 갈라놓은 사람들, 양떼, 목축 낙타들이기 때문이다. 이 말들을 종합하면, 대략적인 의미가 야곱에 의해 표현되는 자가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들을 획득하는 초기에는 거의 지닌 것이 없었으나 이 후에 많아졌다 이다. 앞에서 이미 주어진 내적 의미에서의 주제는 주님에 관한 것, 즉 그분이 자신 안의 인간을 신성으로 어떻게 만드셨는지에 관한 것, 이는 질서에 따라 계속적으로 단계들을 밟으셨다는 것, 고로 그분은 총명과 지혜를 거쳐서 마지막으로 신성이신 것 쪽에 당도하셨다 이다. 이로부터 “거의 없었음으로부터 많아졌음”에 의해 뜻해진 것이 분명해졌을 것이다.
“요단”이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들을 획득함이 개시되는 것을 의미하는 이유는 이것이 가나안의 경계에 위치하기 때문이다. 이 토지의 모든 경계들은 주님의 왕국의 처음과 마지막인 것을, 그리고 그분의 교회의 처음과 마지막인 것들을, 고로 그분의 왕국과 그분의 교회 속의 천적, 영적인 것들의 처음과 마지막인 것을 의미했는데 이는 이미 살핀 바 있다. 그러므로 요단, 이것이 경계선에 위치했기 때문에, 선과 진리들에 관한 지식들을 획득함이 개시되는 것을 의미한 것이다. 그 이유가 한 인간이 교회가 되어갈 때, 또는 주님의 왕국으로 되어갈 때 처음이 되고 마지막이 되기 때문이다.
“요단”이 이런 사항들을 의미하는 것은 아래 말씀으로부터도 분명해진다. 다윗서에서:
오 나의 하느님, 내 혼이 내 안에서 엎드려집니다, 그러므로 나는 당신을 요단과 헤르몬의 토지로부 터, 그리고 작은 산으로부터 기억합니다 (시. 42:6);
“요단의 토지로부터 기억하는” 것은 마지막인 것으로부터, 고로 낮은 것으로부터를 표시한다. 다시:
유다는 그분의 성소가 되었고, 이스라엘은 그분의 지배권이 되었다; 바다가 그것을 보았고, 도망했 다, 요단은 자체를 뒤쪽으로 돌이켰다 (시. 114:2, 3, 5);
위에서 “유다”는 천적 사랑의 선을, 그리고 “이스라엘”은 영적 사랑의 선을 표시한다; “바다”는 진리에 관한 지식들을 표시한다; “요단”은 선에 관한 지식들을 표시한다. 사랑의 선이 지배권을 획득할 때, 이 지식들은 그 자체를 뒤쪽을 향하여 돌아선다고 말해진다; 그 이유가 지식들은 이 선으로부터 중요시함을 지니기 때문, 그러나 그 거꾸로는 아니다. 이는 여러 번 말해졌던 사항이다.
사사기서로부터:
길르앗은 요단 건너 거주한다, 그리고 단은 왜 배(ship)들을 두려워하는가? (사. 5:17);
“길르앗”은 감각적 선, 또는 (육체적) 기쁨(쾌락, pleasure)을 표시하는데, 인간이 거듭나질 때, 이 기쁨을 수단으로 거듭남의 개시가 있어진다; “요단 건너 거주하는”것은 개시함을 위해 있는 이런저런 사항들을, 고로 교회와 주님의 왕국의 처음과 마지막인 것들을 표시한다. 이것이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의 토지 안으로 들어갈 당시, 요단(강)에 의해서도 표현되어졌다 (여. 3:14-17; 4:1-24). 그 이유가 가나안의 토지에 의해 주님의 왕국이 표현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요단강이 갈라지고 마른 땅을 밟고 건넘은 악들과 거짓들이 제거됨, 그리고 선들과 진리들 안에 있는 이들로 (가나안의 진입을) 승인함이 의미되었다. 이와 비슷한 의미를 지닌 대목으로는, 엘리야가 하늘로 들려질 때, 엘리야에 의해 요단의 물이 갈라진 것(왕하. 2:8) ; 그리고 엘리사가 엘리야의 예언 직분을 승계받았을 때, 엘리사에 의해 요단의 물이 갈라진 것 (왕하. 2:14);
그리고 엘리사의 명령에 순응하여 나아만이 요단에서 일곱 번 몸을 씻어 그의 나병이 치료된 것은 세례를 표현했다 (왕하. 5:1-14); 그 이유가 세례는 (나에게서) 교회가 개시됨, 그리고 교회 속에 있는 이런 저런 사항들을 개시함을; 고로 거듭남과 거듭남에 관련된 것을 (수행할 것임을) 표현하기 때문이다. 어느 누구도 세례식을 거행했다고 거듭나지지 않는다, 이 예식은 그가 기억해야 하는 것에 대한 표시일 뿐이다. 그리고 교회 속의 사항들이 세례에 의해 의미되기에, 요단에 의해서도 마찬가지의 것이 의미되기에 백성들은 요단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았다 (마. 3:6; 막. 1:5). 그리고 주님 또한 요한에 의해 그것 안에서 자신이 세례받기를 뜻하셨다 (마. 3:13-17; 막. 1:9).
요단이 주님의 왕국과 교회의 처음과 마지막인 것들을, 마치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들의 획득에서(그 이유가 이를 수단으로 그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임이 있다) 처음과 마지막의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요단은 새로운 땅 또는 거룩한 토지로서 에스겔서 47장 18절에 언급되고 있다. 새로운 땅 또는 거룩한 토지가 주님의 왕국, 또한 땅에 있는 주님의 왕국인 새 교회(the New Church)이다.

바라건대 저를 저의 형의 손으로부터, 에서의 손으로부터 구출해 주십시오. 제가 그를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이는 진리가 자체를 선에 앞서게 했을 때 진리가 상대적으로 가지는 상태를 의미한다. 이는 여러 번 말한 바 있는데, 특히 야곱이 죽을 가지고 생득권을 포획한 대목에서, 그리고 교활함을 수단으로 에서의 축복을 가로채는 대목에서 이다. 그곳에서 표현하고 의미된 것인 바, 즉 인간이 거듭나질 때, 진리가 외관적으로 첫째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는 것, 선은 둘째 자리로 밀려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선이 실제로 첫째 자리를 차지하고, 진리가 둘째 자리로 밀려나질 때, 이 때가 인간이 확실히 거듭나는 때이다. 그러므로 질서가 뒤바뀔 때, 즉 선이 앞 자리를 공공연하게 차지할 때(즉 진리를 지배하고 있게 될 때), 자연적 인간은 두려움과 혼동스러움 안에 있고, 또한 시험들 안으로 들어간다. 그 이유인 즉, 진리가 첫 자리에 있을 때, 지배력을 가진 것처럼 있을 때, 거짓들은 자신들을 (진리들과) 뒤섞여 있게 한다. 그렇게 할 수 있는 이유는 진리로부터서는 어느 것이 진짜인지 아닌가를 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선으로부터서는 분명히 볼 수 있다; 따라서 거짓들이 어디 있는지가 보이므로 선의 접근에 거짓들은 혼동스럽고 두려웁게 된다. 더 나아가 선 안에 있는 이들은 거짓들이 선으로부터 빛 안에 나타날 때 두려웁기가 시작된다; 그 이유가 이들은 거짓들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 거짓들을 박멸되게 하려 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만일 거짓들이 달라붙어 있겠다고 고집하는 한 불가능하다; 이는 주님으로부터의 신성한 수단이 아니면 아니된다. 이런 이유로 거듭나지는 이들은 두려움과 혼동스러움이 있은 후, 시험 안으로 진입된다. 이는 인간이 거듭나질 때, 영적 시험을 왜 치러야 하는지에 대한 최고로 은밀한 원인이다. 어쨌든 이 원인은 인간에게 나타나는 일이 결코 없다, 그 이유는 이것은 인간의 관찰 넘어 있기 때문이다. 마치 양심을 성가시게 하고 고통을 주는 모든 것이 은밀히 있는 것과 같다.

그가 나와 아들들을 거느린 어머니를 쳐부수지 않도록. 이는 이제 막 멸망되려 함을 의미한다. 이는 별도의 설명 없이 분명해져 있을 것이다. “아들들을 거느린 어머니가 쳐부셔진다”는 말은 의미들과 표현들 사이에 살았던 고대인들의 언어 형체인데, 이는 교회인 인간과 더불어 일반적이든, 특수적이든 교회의 파멸과 교회 속의 모든 것들이 파멸됨을 의미하였다. 그 이유가 그들은 “어머니”에 의해 교회를, “아들들”에 의해 교회 속에 있는 것들을 이해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아들들을 거느린 어머니가 쳐부셔짐”은 모두가 멸해짐이다. 인간 또한 자신 안의 교회와 교회에 관한 것들이 멸해질 때 멸해지고 만다, 즉 “어머니”에 의해 적절히 의미되는 진리에 애착함, 그리고 인간 안에서 교회를 생산하는 진리에 애착함이 멸해질 때 인간은 멸해진다.

당신께서는 말하셨습니다, 나는 너를 잘 돌보아 주겠다. 이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다음 생명을 획득할 것임을 의미한다. 이는 “잘 돌봄”이 생명을 획득하는 것이다를 의미함으로부터 알게 된다. 그 이유가 야곱에 의해 진리가 표현되는데, 진리는 그 자체로부터서는 생명을 가지지 못하고 진리 안으로 흘러드는 선으로부터 생명을 가지기 때문이다; 이는 수 차례 반복 말하는 사항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잘 돌봄”에 의해서는 생명을 획득함이 의미되는 것이다. 또한 선으로부터 진리의 생명이 있음이 여기서 취급되고 있기도 하다.

나는 네 씨를 수를 셀 수 없는 바다의 모래 같이 많게 하리라. 이는 그때 열매를 맺고 번성하리라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씨”의 의미가 선행으로부터의 신앙, 또한 선행 자체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 씨를 수를 셀 수 없는 바다의 모래 같이”란 번성함이 분명하다. 열매를 맺음은 선행으로부터 있는 선을, 번성함은 신앙으로부터 있는 진리를 서술한다.

13-15절. 그리고 그는 그 밤을 거기서 보냈다, 그리고 그는 그의 형 에서를 위한 선물을 그의 수중에 온 것으로부터 취했다: 14 암염소 이백과 숫염소 이십, 그리고 암양 이백과 숫양 이십, 15 젖을 내는 낙타 삼십과 그 새끼, 암소 사십과 숫소 열, 암나귀 이십과 새끼나귀 열이다.

그리고 그는 그 밤을 거기서 보냈다. 이는 그 희미한 상태에서를 의미한다. 이는 “밤을 보냄”, 또는 “밤”의 의미가 희미한 상태이다로부터 알려진다.

그리고 그는 자기 수중에 와진 것으로부터 그의 형 에서를 위한 선물을 취했다. 이는 자연적 선의 천적 평면 안으로 가입시켜지려는(입문되어지려는) 신성으로부터의 것들을 의미한다. 이는 “자기 손 안으로 온 것으로부터 취함”의 의미가 미리 생각했던 것으로부터 일어난 이런 저런 것들로부터 있음이다로부터; 고로 신성한 섭리로부터 있는 것들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리고 신성한 섭리로부터 있는 것들이 신성하기에, “자기 손 안으로 온 것으로부터 취함”에 의해서도 신성으로부터의 것들이 의미된다; “선물”의 의미가 입문되어지고 있음이다 인데 이는 아래에서 살핀다; 그리고 에서의 표현함이 선 측면에서의 신성한 자연 평면이다로부터; 여기서는 천적인 선이다, 그 이유는 자연 평면이 아직은 신성으로 만들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선물”이 입문되어짐을 의미하는 이유는 선한 의지와 총애를 얻으려고 (에서에게) 주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옛 시대 때에 바치거나 주어지는 선물은 다양한 의미들을 가졌다; 왕과 성직자를 배알하려고 주어지는 경우의 선물은 이런 의미를; 제단에 바쳐지는 선물은 저런 의미를 지닌다; 전자는 입문을 위해서를; 후자는 예배를 의미했다 (349항). 그 이유가 모든 제물들은 일반적으로 무슨 제물이든, “선물(예물)”이라 불리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빵과 포도주로 된 식사 공물(meat-offering), 또는 헌주(libation)와 케이크(cake)로 된 식사 공물이든 특별하게 선물이라 불리웠다; 그 이유가 원어에서 “식사 공물”이 “선물(예물)”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그들이 왕이나 성직자를 뵙고저 할 때 선물을 바치는 경우는 말씀에서도 여러 구절로부터 확인된다; 즉 사울이 선견자 사무엘에게 (나귀를 찾고저) 상담을 하려 할 때 (삼상. 9:7, 8); 왕이 되는 사울을 가볍게 여긴 자들이 그에게 선물을 바치지 않았던 때 (삼상. 10:27); 세바 여왕이 솔로몬을 방문할 때 (왕상. 10:2); 그 외 대표적 구절로 이런 구절이 있다:
모든 땅이 솔로몬의 얼굴을 뵙고 그의 지혜를 구하였다; 그래서 그들 모두는 각기 자기 선물을 바쳤는데, 은 그릇, 금 그릇, 그리고 의복들, 그리고 무기들, 그리고 향품들, 말들, 노새들이다 (왕상. 10:24, 25).
그리고 이것은 거룩한 의식이었는 바, 입문함(알현함, initiation)이 의미되기에, 동방의 현자들 역시 주님의 출생 직후 와서 예물을, 즉 금, 유향, 몰약을 가져왔다 (마. 2:11); “금”은 천적인 사랑을; “유향”은 영적인 사랑을; “몰약”은 자연 평면에 있는 천적, 영적 사랑을 의미했다.
이 의식(선물 바침)이 명령된 것이 모세의 책에서 분명해진다:
여호와의 얼굴은 텅빔에서 보여지지 않을 것이다 (출. 23:15; 신. 16:16, 17);
선물(예물)이 성직자나 왕에게 주어지는 것은 마치 여호와께 주어지는 것처럼 이었다는 것은 말씀의 다른 장소에서도 분명해진다. 보내진 예물이 입문(개시, initiation)을 의미했다는 것은 (선발된) 이스라엘의 열두 제 일인 자가 기름부음을 받은 후, 제단에 입문(알현)하기 위해 보내진 예물로부터도 분명해진다 (민. 7장); 더욱이 그들의 예물은 아예 “입문(개시함)”이라 불리웠기도 하다 (민. 7:88).

암염소 이백과 숫염소 이십, 암양 이백과 숫양 이십. 이는 선들과 이 선들로 인해서 있는 신성으로부터의 진리들을 의미한다. 이는 “암염소”와 “암양”의 의미가 선들이다로부터; 그리고 “숫염소”와 “숫양”의 의미가 진리들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여기서의 경우, 선들과 신성으로부터의 진리들이다. 선들과 진리들이 셀 수 없이 언급하고, 아주 다양한 것들에 의해 의미되는 이유는 천국과 교회의 것들이 거기에 관련을 맺기 때문; 사랑과 선행으로부터의 것들은 선들에; 신앙으로부터의 것들은 진리들에 관련을 맺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이것들은 종과 속을 나뉘어서도 그러한 바 이는 무수할 수밖에 없다. 한마디로 선 안에 있는 모든 이들이 주님의 왕국 안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부터도 끝이 없을 것임이 짐작된다. 그럼에도 똑같은 사회도, 똑같은 개인도 없다. 그 이유가 똑같은 두 개의 선은 결코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모두 각각의 하나는 다양한 것들로 구성되는데, 이것들은 천국의 하모니와 일치함 안에 있다.

젖을 내는 낙타 삼십과 그들의 망아지, 암소 사십과 숫소(bullock) 열, 그리고 암나귀 이십과 새끼나귀 열. 이는 섬김에 쓰여지는 일반적인 것과 특수적인 것들을 의미한다. 이는 “낙타와 그 새끼들”과 “암소와 숫소”, 그리고 “암나귀와 새끼나귀”가 자연적 인간 속에 있는 것들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자연적 인간 속에 있는 것들이 상대적으로 섬김을 위해 있다는 것도 이미 살핀 바 있다. 그러므로 이 동물들은 일반적, 특수적으로 섬김을 위해 있는 것들을 의미한다. 위에 동물을 열거한 숫자에 주목해보면, 암염소는 이백, 숫염소는 이십, 암양은 이백, 숫양은 이십, 낙타와 새끼는 삼십, 암소는 사십, 거세한 숫소는 열, 암나귀는 이십, 그 새끼나귀는 열이라 말해지고 있는데, 이 숫자에 대한 의미는 충분한 설명이 없거나 많이 공제해버리지 않고서는 그 신비함들을 열 수 없다; 그 이유가 말씀의 모든 숫자들은 실제적인 것들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숫자들이 의미하는 것은 이 숫자가 등장하는 앞 페이지들에서 설명된 바 있으므로 그곳을 참조하면 될 것이다.
때때로 내가 궁금해 했던 대목 중의 하나는, 천사들의 언어가 영들의 세계 안으로 흘러내릴 때, 그들의 말이 숫자들로 바뀐다는 것; 또한 말씀 속의 숫자들이 읽혀질 때, 현실로 존재하는(real) 것들이 천사들에 의해 이해된다는 것이다. 그 이유가 숫자들은 천국 안쪽으로 꿰뚫고 들어오지 못하기 때문인데,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숫자들은 (자연계의) 시간과 공간을 측정하기 위해, 즉 세상과 자연계를 위한 것이고, 이것에 상응하는 천국의 것은 상태들과 상태들의 변화이기 때문이다. 천적 인간이었고, 천사들과 교통하였던 태고인들은 숫자 각각을, 게다가 곱해져 합성된 숫자에 이르기까지에서 의미된 것도 알았다; 그리고 그들로부터 이것들의 의미는 그들의 후손들에게로, 하여 고대 교회의 아들들에게로도 (물론 전부는 아니지만 상당 부분이) 전수되었다. 이를 요즘의 교인들은 신용하지 않는 바, 성경의 글자에서 나타나는 거룩함 그 이상의 거룩함은 아무것도 없다고 믿고 있다.

16-23절. 그리고 그는 그의 종들의 손에 각 떼를 따로 따로 떼어서 맡겼다. 그리고 그의 종들에게 말하기를, 내 앞서 건너가라, 그리고 각 떼 사이에 거리를 유지하라. 17 그리고 그는 맨 앞의 종에게 명령하여 말하기를, 나의 형 에서가 너를 만날 때, 그리고 너에게 물어 말하기를, 너는 누구의 사람이냐? 그리고 너는 어디로 가느냐? 그리고 네 앞의 이들은 누구의 것이냐? 18 그러면 너는 말해야 할 것이다, 당신의 종 야곱의 것입니다. 이것은 나의 주 에서에게 보내는 선물입니다. 그리고 그는 우리 뒤쪽에 계십니다. 19 그리고 그는 두 번째, 세 번째 종에게, 그리고 떼를 따라가는 모든 자들에게 명령하여 말하기를, 너희도 이 말에 따라 너희가 에서를 발견할 때 그에게 말하라. 20 그리고 또한 너희가 말해야 할 것은 당신의 종 야곱이 우리 뒤에 계십니다. 그가 이렇게 말한 까닭은 나는 내 앞서 간 선물로 그의 얼굴에 속죄할 것이고, 그 후 내가 그의 얼굴을 볼 것이다. 어쩌면 그는 내 얼굴을 처들어 줄지 모른다. 21 그리하여 예물이 그에 앞서 건넜다, 그리고 그는 그 밤을 진영에서 보냈다. 22 그리고 그는 그 밤에 일어났다, 그리고 그는 그의 두 여인, 그리고 두 하녀, 그리고 열한 아들을 데려 왔다, 그리고 얍복 나루를 건넜다. 23 그리고 그는 그들을 데려왔고, 그리고 그들을 이끌어 그 강을 건너게 했다, 그리고 그가 가졌던 모든 것도 건너게 했다.

그리고 그는 각 떼를 따로 따로 떼어서 그의 종들에게 맡겼다. 그리고 말했다, 내 앞서 건너가라. 그리고 각 떼 사이에 간격을 두어라. 이는 그것들이 입문되어지려는 방법에 관련하여 있게 되는 질서 있는 배열을 말한다. 이는 “손에 주다(맡기다)”의 의미가 힘과 더불어 가르침이다로부터; “종”의 의미는 자연적 인간 속의 것들이다로부터; 그 이유가 자연적, 또는 외적 인간 속의 모든 것들은 영적 또는 내적 인간에 종속되기 때문, 그러므로 그것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은 상대적으로 섬김 속에 있어, “종들”이라 불리운다; “떼”의 의미가 기억 속의 지식들, 또한 지식들, 고로 교리적인 것들 인데, 이것들이 자연적 인간, 또는 외적 인간 안에 있고, 아직 영적, 또는 내적 인간 안에 심어지지 않고 있는 한, 이것이 “종들의 손에 주어져 있는” 것으로 의미되어 있다. “각 떼를 따로 따로 떼어서”는 종들(genera)과 속들(species)에 따라서, 또는 계층별로의 모두 각각이다; “내 앞서 건너라”와 “떼와 떼 사이에 간격을 유지함”의 의미가 받아지는 선을 위해 길을 준비함이다; 그 이유가 여기서 취급되는 주제가 진리를 수단으로 선을 받음, 그리고 자연적 인간 안에서 이것들의 결합이기 때문이다. 이상의 몇 가지 세부 사항만으로도 이 구절의 일반적 측면에 의해 그것들이 입문되어지려 하는 길에 관련하여 질서적인 배열이 있다가 의미됨이 분명해진다. 자연적 인간 안에서 진리가 선 안으로 입문함에 주목하면, 이것은 납득력에 설명되는 것이 가능할 수 없다; 그 이유가 오늘날의 교인들은 비록 입으로는 내적 인간, 또는 영적 인간을 말하지만, 정작 이 인간이 무엇인지를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교인이 되기 위하여서 진리는 외적 인간 또는 자연적 인간 안에서 선 안으로 입문되어야만 한다는 것을 모른다; 또한 자연적 인간이 내적 인간과의 결합을 위하여 질서 있는 배열을 갖추어야 하는데, 이것이 주님에 의해 결과된다는 것은 생각 자체에도 없다. 이런 사항들, 지극히 일반적인데, 오늘날 감추여진 채로 있어 교인들이 존재 여부조차 생각하지도 않는다; 그러므로 이런 구절에 있는 질서적 배열과 입문에 관한 내적 의미에서 포함된 세부 사항들은 신비함들이라 잘라 말할 수밖에 없고, 그저 믿기지 않는 진리로서만 인정할 뿐이다; 결과적으로 세부 사항들의 열거는 허공에 외치는 메아리에 불과하고, 마치 물 또는 모래 위에 (진리의) 씨를 던지는 격이다. 이런 이유로 이 대목, 뿐만 아니라 이어지는 대목 내지 많은 구절들에서 세부 사항적인 설명은 건너뛰는 일이 많고, 단지 일반적인 사항만을 설명해놓고 있기도 하다.

그리고 그는 맨 앞에 선 자에게 명령하여 말했다, 나의 형 에서가 너를 만날 때, 너희에게 물어 말하기를, 너희는 누구의 사람이냐? 그리고 너희는 어디로 가느냐? 그리고 네 앞의 이것들은 누구의 것이냐? 그러면 너희는 말해라, 당신의 종 야곱의 것입니다. 이것은 나의 주 에서에게 보내는 예물입니다. 그는 우리 뒤에 계십니다. 이는 복종을 의미한다. 이 대목 역시 몇 단어들의 내적 의미 파악으로 분명해진다. 이로부터 일반적 의미가 결과된다. 이것이 복종이다는 것, 그리고 복종함에 관계되는 것들이 의미된다는 것은 분명해진다; 그 이유가 야곱은 자기 종들에게 자기 형을 “주”라고 부르도록 명령했기 때문, 그리고 그의 주인에게 종들을 통해 전달되는 선물이라고 말하도록 명령했기 때문이다. 선이 상대적으로 주인이다는 것, 진리는 상대적으로 종이다는 것, 그리고 그럼에도 이 둘은 “형제들”이라 불리운다는 것은 이미 많은 설명을 해오고 있다. 그들이 “형제들”이라 불리는 이유는, 선과 진리가 결합되어 왔을 때, 선은 진리 안에서 표출되는데, 마치 형상(image)처럼 이다, 그리고 그 후에 이 둘은 결과를 생산하기 위해 결합하여 행동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합 이전 일 경우, 선은 “주인”이라고, 진리는 “종”이라고 불리운다. 더욱이 서로 간에 우위를 다툴 경우는 더 더욱 그러하다.

그리고 그는 둘째와 셋째, 그리고 그 떼를 따라 간 모든 자들에게 명령하여 말하기를, 너희가 에서를 만날 때 이 말에 따라 말해야 할 것이다. 이는 질서적 배열과 복종이 계속됨을 의미한다. 이는 앞의 설명으로도 충분할 것이다.

그리고 너희는 이 말을 해야 한다. 보십시오 당신의 종 야곱이 우리 뒤에 계십니다; 그가 이렇게 말하라고 명령한 이유는 나는 내 앞서 보낸 선물로 그의 얼굴에 속죄할 것이다, 그리고 그 후 나는 그의 얼굴을 보리라. 어쩌면 그가 내 얼굴을 쳐들게 할 것이다.” 이는 이어지는 것들에 대한 준비를 의미한다. 그리고 또한 “선물이 내 앞서 건너라”란 그 결과를 의미한다. “그리고 그는 그 밤을 진영에서 보냈다”란 잇따라 일어나는 것들을 의미한다.
이는 몇 단어들을 내적 의미에서 살펴보면, 그가 자기를 친절하게 받아주도록 하기 위해 준비함을 함축한다는 것이 분명해진다. 그러나 이런 경우가 세부 사항들과 더불어서는 어떻게 있는지에 대하여서는 납득력에 열어 보일 수는 없다; 그 이유는 일반적인 것들이 알져지지 않는 한, 똑같은 주제 속의 낱개들에 관한 것은 어떤 빛 안으로도 오지 못하고 그늘에 놓여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하여 일반적 관념들이 먼저 보여주어야 한다; 그리고 이것들이 있지 않으면, 낱개적인 사항들은 그것들이 들어가는 어떤 수용소(hospice)도 발견하지 못한다. 오직 그늘이라는 수용소 안에서 그것들은 보이지 않는채 있는다. ; 그리고 거짓들이라는 수용소 안에서 그것들은 거절당하고, 질식되고, 악용되고 타락되고 만다; 그리고 악들이 있는 수용소에서 그것들은 조롱당한다. 최소한 이런 일반적인 사항만 알아도 충분할지 모른다: 인간이 주님의 왕국에 들어갈 수 있기 전, 그는 반드시 거듭나야 한다는 것(요. 3:3); 그리고 거듭날 때까지 진리는 외관적으로는 첫째 자리에, 선은 둘째 자리에 있다는 것; 그러나 그가 거듭날 때, 선이 첫째 자리에, 진리는 둘째 자리에 있는다는 것; 또한 질서가 뒤바뀔 때, 주님께서는 자연적 또는 외적 인간 안에서 잘 배치되고 질서적인 배열을 갖게 하신다는 것, 하여 거기서 진리는 선을 수단으로 받아지고, 선에 그 자체 종속한다는 것, 이 결과 인간은 진리로부터 더 이상 행동하지 않고, 선으로부터(즉 선행으로부터) 행동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 그가 신앙의 진리들에 따라 살 때, 삶을 위하여 교리들을 사랑할 때, 그는 선행으로부터 행동한다. 이 구절의 내적 의미에 포함된 것, 즉 선 앞에서 진리가 질서적으로 배열되고, 입문하고, 복종하는 일련의 과정들이 천사들에게는 빛 가운데 명료히 나타나고 있다. 그 이유가 이와 같은 것들이 비록 인간에게 보여질 수 없다 해도 이는 천사의 지혜 속에는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단순한 신앙으로부터 단순한 선 안에 있는 이들은 이런 사항들을 아는 자질을 갖추고는 있다; 이들은 세상적 관심사(걱정 근심)나 그것들로부터의 거친(막돼먹은) 관념들 때문에 육체적 삶 안에서는 납득력에 와지지 않지만, 육체를 벗은 삶에서는 그의 소질이 발휘될 수 있다; 그 이유가 거기서 그들은 계발되고 천사의 총명과 지혜 안으로 와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그 밤에 일어났다, 그리고 그의 두 여인, 그리고 그의 두 하녀, 그의 열한 아들을 데려왔다, 그리고 얍복의 얕은 개울을 건넜다. 이는 획득한 진리들과 함께 진리에 애착함으로부터 처음으로 은근히 주입됨을 의미한다. 이는 라헬과 레아인 “두 여인들”의 의미가 진리에 애착함이다로부터; 그리고 빌하와 실바인 “두 몸종들”의 의미가 수단들로 봉사하는 진리에 외면적으로 애착함들이다로부터; “아들들”의 의미가 진리들이다로부터; 그리고 “얍복의 얕은 개울”의 의미가 처음 은근히 심어짐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얍복”이 처음 은근히 심어짐을 표시하는 이유는 이것이 가나안의 경계이었기 때문이다. 이 토지의 모든 경계들이 그것의 위치나 거리에 따라 주님의 왕국의 천적, 영적인 것들을 의미하고 있다는 것은 이미 살핀 바 있다; 고로 얍복의 얕은 개울(ford, passage of Jabbok), (가나안의 토지쪽에서 보면) 또한 상대적으로 요단 저쪽 가나안의 토지에 해당되고, 르우벤과 갓지파의 상속분의 경계이었다 (민. 21:24; 신. 2:36, 37; 3:16, 17; 여호수아. 12:2; 사. 11:13, 22); 이 토지가 르우벤지파에게 할당된 이유는 이 지파가 이해력에 있는 신앙, 또는 교리를 표현했고, 이것은 거듭남의 처음, 또는 생활의 선을 달성하는 수단인 복합체 안의 교리 속의 진리를 표현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갓은 신앙으로부터의 일들을 표현했기 때문이다. 신앙으로부터의 이런 진리들, 또는 교리적인 것들, 그리고 신앙으로부터의 일들은 (거듭남에서) 처음에 실행되어지고, 이 실행을 통하여 거듭나지는 인간은 (선 쪽으로 이동하고,) 선 쪽에서 은근히 심어진다(뿌리를 내린다). 이런 이유로 “얍복의 얕은 개울을 통과함”이 처음 은근히 심어짐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그들을 데려왔다, 그리고 그들이 강을 건너게 했다, 그리고 그가 가진 모든 것도 건너게 했다. 이는 더욱 더 은근히 주입됨을 의미한다. 이는 방금 앞에서 살핀 바로부터 분명해진다; 그 이유가 그는 두 여인, 두 몸종, 아들들, 뿐만 아니라 목축과 양떼, 고로 그가 가진 모든 것이 그가 에서를 만나는 가나안 안쪽으로 건너게 했는데, 다시 이 구절에서 앞의 대목이 반복되어 사실상 언급된 셈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적 의미에서 취급된 주제가 자연 평면에서 진리가 선과 결합함이기에, 강을 건넘에 의해서는 처음 (이 결합함이) 은근히 주입됨을 의미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같은 말에 그가 가진 모든 것을 건너게 했다가 추가되었으므로 더욱 더 은근히 주입됨이 의미되는 것이다.

24, 25절. 그리고 야곱은 홀로 남았다, 그리고 새벽이 될 때까지 어떤 사람이 그와 씨름을 했다. 25 그리고 그는 자기가 이길 수 없음을 보았다, 그리고 그는 그의 넓적다리의 우묵한 곳을 건드렸다, 그리고 야곱의 넓적다리의 우묵한 곳은 그와 씨름 중에 관절이 어긋났다.

그리고 야곱은 홀로 남았다. 이는 진리로부터의 선이 포획했다를 의미하는데, 여기서의 경우, 이것이 마지막, 또는 최말단에서 이었다를 의미한다. 이는 여기서 야곱이 표현하는 것이 진리로부터의 선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앞의 많은 페이지들에서 그가 표현해 온 것, 그리고 그가 자연 평면에 있는 여러 가지 것들을 표현하기도 했는데, 그 이유는 진리와 선의 상태는 (거듭남의) 시작에서 이런 상태를, 거듭남이 발전함에 따라서는 저런 종류를, 종국에 가서는 또 다른 종류의 상태로 발전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그는 진리로부터의 선(진리의 선, the good of truth)을 표현한다. 야곱의 이런 표현함도 곧이어 씨름함이 취급되는 이유 중의 하나이기도 하다; 이 씨름함을 수단으로 시험이 의미된다; 그리고 이 시험을 수단으로 그는 이스라엘이라 명명되어진다; 하여 이름 이스라엘에 의해서는 천적 영적 인간(the celestial spiritual man)이 표현되어졌다; 또한 이어지는 구절에서 에서와의 결합이 취급되기 때문에, 이 결합을 수단으로 진리가 선 안으로 입문됨이 의미된다. 이렇기에 여기서의 야곱은 자연 평면에서 진리로부터의 최말단, 또는 마지막 선을 표현한다.

그리고 거기서 어떤 사람이 그와 씨름을 했다. 이는 진리 측면에서의 시험을 의미한다. 이는 씨름함이 시험을 의미함으로부터 알게 된다. 시험 자체는 씨름함(wrestling) 또는 전투함(combat)밖에 더 아니다; 그 이유가 진리는 악령에 의해 공격당하고, 인간과 더불은 천사에 의해 방어된다. 이 전투를 인간이 지각할 때, 시험이라 말해진다. 그러나 인간이 진리의 선 안에, 또는 진리를 사랑함 안에, 또는 진리에 애착함 안에 있지 않으면 시험은 거행될 수 없다. 그 이유가 자기 진리를 사랑하지 않는 자, 또는 자기 진리에 애착하지 않는 자가 진리를 걱정할 일이 만무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리에 애착하는 이들은 자기의 진리가 피해를 입을까 하는 걱정을 늘 하고 있다. 인간이 이것이 진리이다 라고 믿는 것으로부터 그의 이해력은 그의 생명을 생산한다; 또한 이것이 선이다 라고 자신에게 강한 인상을 남긴 것(감명을 받은 것)으로부터 그의 의지력은 그의 생명을 생산한다. 그러므로 당사자가 진리라고 믿는 것이 공격당할 때, 그의 이해력이 공격받는 셈이다; 그에게 선으로 각인된 것이 공격받을 때, 그의 의지력이 공격받는 셈이다; 그리하여 인간이 시험당하고 있다면, 그의 생명은 위태해져 있는 셈이다. 전투의 처음 단계는 진리 측면에 관하여, 또는 진리에 관하여 인 이유는 이것이 그가 제 1 로서 사랑하는 것이기 때문, 그리고 누군가의 사랑으로부터 있는 것이 악령들에 의해 공격당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이 진리보다 선을 더 사랑한 이후, 즉 질서의 뒤바뀜이 거행된 이후, 그는 선 측면에서 시험되어진다. 그러나 시험이 무엇이지를 아는 자는 별로 없는데, 그 이유는 오늘날 시험을 수행하는 자가 별로 없기 때문이다; 시험은 이웃을 향한 선행, 또는 신앙으로부터의 선 안에 있는 자만에 해당되는 말이기 때문; 만일 이 선행 안에 있지 않은 이들이 시험되기로 한다면, 그들은 즉시 굴복하기 때문; 그리고 굴복한 그들은 악을 확증하고 거짓으로 설득함(거짓을 확신함) 안으로 곧장 진입하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이들이 제휴한 악령들이 그 당사자를 정복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오늘날 영적 시험을 받도록 허락되는 이들이 매우 적다라고 말한 이유이고, 흔히 말하는 시험이란 자연적 수준의 시험, 또는 자연적 걱정의 수준일 뿐이고, 이것으로 인해서 자신이 자아 사랑과 세상 사랑으로부터 철수해 있는 것 뿐이다. 사실 이런 제약마저 없다면, 당사자의 끝은 자연적 파멸까지 초래될지 모른다.

새벽이 일어날 때 까지. 이는 “야곱”에 의해 의미되는 자연적 선이 천적 영적인 것(celestial spititual, 영적 평면으로부터의 천적인 것), 또는 진리로부터의 신성한 선(Divine good of truth)과 결합하기 이전을 의미한다. 이는 “새벽”의 의미가 최고 의미에서 주님을, 표현 의미에서 그분의 왕국을, 그리고 보편적 의미에서 사랑의 천적 평면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여기서, 천적 영적인 것(영적 평면의 천적인 것)이다. 새벽이 일어날 때, 야곱은 이스라엘이라 명명되었고 이 이름을 수단으로 천적 영적 인간이 의미되었다; 그러므로 “새벽이 일어나기 이전”은 자연적 선의 천적 영적인 것과 더불은 결합 이전이 지금의 “야곱”에 의해 의미된다. 천적 영적인 것이 무엇인지에 대하여는 이어지는 28절의 이스라엘을 다룰 때 말할 것이다.

그리고 그는 자기가 이길 수 없음을 보았다. 이는 그분이 시험들을 이겨내셨다를 의미한다. 이는 별도의 설명이 필요 없을 것 같다.

그리고 그는 그의 넓적다리의 우묵한 곳을 건드렸다. 이는 천적 영적 선이 야곱으로 의미되어진 자연적 선과 합쳐지는 곳을 의미한다. 이는 “넓적다리”의 의미가 부부의 사랑이다로부터,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천적인 사랑과 영적인 사랑 모두인데, 그 이유는 이것들이 마치 자손들이 부모로부터 있듯 부부의 사랑으로부터 파생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묵한 곳, hollow”, 또는 “꽂는 구멍, socket”, 또는 넓적다리의 강(구멍, cavity)의 의미가 결합이 있는 곳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러므로 여기서의 경우, “야곱”에 의해 의미된 자연적 선과 천적 영적 선의 결합이 있는 곳이다를 의미한다. 그러나 이 결합을 말하려면 우선 “이스라엘”인 천적 영적 선이 무엇인지, 그리고 “야곱”인 자연적 선이 무엇인지를 먼저 알아야 한다. 이는 28절에서 이스라엘로 개명되는 야곱을 취급할 때, 그 후에 다시 야곱의 후손을 취급할 때, 다룰 것이다.

그리고 야곱의 넓적다리의 우묵한 곳은 그와 씨름 중에 관절이 어긋났다. 이는 진리가 선과 그 자체를 완전하게 합쳐지게 하는 능력을 아직은 가지고 있지 않음을 의미한다. 이는 “관절이 어긋남”의 의미가 진리들 모두가 선과 더불어 천적 영적 선 안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은 아직 배열되지 못했음이다 (이는 31절에서 살핀다), 결과적으로 진리가 선과 자체를 완전하게 결합하는 힘은 아직 갖고 있지 않았음이 의미된다; 그 이유가 “넓적다리의 우묵한 곳”은 선들이 다함께 결합하는 곳을 표시하기 때문이다.

위에서 펼쳐보였던 사항들은 최고 의미에서와 내적 의미에서 이해되는 사항들이다; 그러나 이와 다른 의미, 보다 낮은 수준에서의 의미에서는 야곱의 품질과 그의 후손의 품질이 취급된다. 말씀이 주님으로부터 있고, 그분으로부터 천국을 통하여 인간에게 내려오기에, 말씀의 개별적인 것들 하나하나에도 신성은 담겨 있다; 그리고 말씀이 그분으로부터 내려 왔듯이, 마찬가지로 말씀은 상승한다, 즉 그분에게로 들리워진다, 그리고 이것은 천국들을 통하여서 이다. 세 천국들이 있다는 것은 알려져 있다, 그리고 가장 깊은 천국은 셋째 천국, 중간 천국은 둘째 천국, 그리고 가장 낮은 천국은 첫째 천국이라 불리운다; 그러므로 말씀이 상승할 때, 마치 하강할 때 같이, 말씀은 주님 안에서 신성하다; 셋째 천국에서 말씀은 천적 (수준)이다(그 이유는 이 천국이 천적 천국이기 때문이다); 둘째 천국에서 말씀은 영적 (수준)이다(그 이유는 이 천국이 영적 천국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첫째 천국에서 말씀은 자연적 (수준) 속의 천적 영적인 것(celestial and spiritual natural)이다. 또한 이 천국은 그렇게도 칭해지고 있다. 그러나 인간과 더불은 교회에서, 말씀의 글자 의미에 주목하면, 말씀은 자연적 수준이다, 즉 세상적, 지상적이다는 말이다.
위로부터 말씀의 본성이 무엇일지가, 그리고 말씀이 거룩한 것 안에 있는 이들, 즉 선과 진리 안에 있는 이들에 의해 읽혀질 때의 경우에서 말씀은 어떠할지가 분명해져 있을 것이다. 이때 말씀은 당사자에게 세상적, 또는 역사적인 말로 나타나지만, 그럼에도 그 말씀 내부에는 거룩한 것이 있다; 첫째 천국에서 말씀은 자연적 수준 속의 천적인 것과 영적인 것으로 나타나는데, 그럼에도 이 안에 신성한 것이 있다; 둘째 천국에서 말씀은 영적이다; 셋째 천국에서 이것은 천적이다; 그리고 주님 안에서 이것은 신성이다. 말씀의 의미는 천국들에 일치되게 달라진다. 주님을 취급하는 의미인 말씀의 최고 의미는 가장 깊은 천국, 셋째 천국을 위하여 있다; 말씀의 내적 의미는 주님의 왕국을 취급하는 의미인데, 둘째 천국, 중간 천국을 위하여서 이다; 그러나 내적 의미가 명명되는 나라(국민, nation)로 정해지는 말씀의 보다 낮은 의미는 첫째 천국, 가장 낮은 천국을 위하여서 이다; 그리고 가장 낮은 의미, 또는 글자 그대로의 의미, 인간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서를 위하여서 이다, 이렇지만 글자 의미는 내면의 의미, 그리고 내적인 의미와 최고 의미들에 이르러까지조차 인간으로 교통할 수 있게 하는 본성을 지니고 있다. 그 이유가 인간은 세 천국들과 교통을 가지기 때문인데, 만일 그가 주님을 사랑함 안에, 그리고 이웃을 향한 선행 안에 살고 있다면, 그는 최소 단위의 형체로서 천국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간 안쪽에 주님의 왕국이 있음을 그분께서 가르치신다:
잘 보라, 하느님의 왕국은 네 안에 있다 (눅. 17:21).
말씀 안에는 최고 의미, 그리고 내적 의미, 뿐만 아니라 보다 낮은 의미가 있다는 것, 그리고 보다 낮은 의미에서 내적 의미는 거기서 명명되는 나라(국민)으로 결정된다는 것을 알도록 하기 위하여 지금까지 말해왔었다; 이렇게 말할 때, 의미는 어떤 것들의 시리즈로부터 분명히 나타난다. 어떤 사람이 야곱과 씨름함, 그리고 야곱의 넓적 다리가 어긋남은 야곱과 그의 후손을 두고 말해졌음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나는 이 의미에 따라 이와 똑같은 단어들을 펼쳐야할지 모른다. 이 의미는 이어지는 대목들에서 내적 역사적 의미(Internal Historical Sense)라고 부를 것이다. 이 의미는 첫째 천국에서 있는 형체와 삶으로 때때로 자칫 표현되기 십상이어서 주의함이 필요할지 모른다. 하여 나는 이 주의 사항을 위해 보는 것이 허락받아지기도 했다.

내적 역사적 의미에서, 야곱의 넓적다리의 우묵한 곳을 그가 건드림에 의해 부부의 사랑은 자연적 선과 더불어 결합되는 곳을 의미하는데, 이는 “넓적다리의 우묵한 곳”의 의미가 부부의 사랑의 결합이 있는 곳이다로부터 분명해진다. 거기서 자연적 선과의 결합이 의미되어지는 이유는 넓적다리는 발까지 결합되어 있기 때문이다. 내적 의미에서 “발”은 자연적 선을 의미하는데 이는 이미 말한 바 있다.
“넓적다리”가 부부의 사랑을, “발”은 자연적 선을 표시하는 것은 지금은 쓸모없는 의미인 듯 되어 있고 잃어진 의미가 되어 있을 뿐이다. 표현과 의미 안에 있던 고대 교회는 이런 사항을 매우 잘 알고 있었다. 이와 같은 것들에 관한 지식들이 그들의 총명이고 지혜이었다. 비단 고대 교회만이 그랬던 것이 아니라 교회 밖의 사람들 역시 그러했는데, 그 흔적이 우화(fable)라고 불리우는 것들이다. 그 이유가 표현들과 의미들이 고대 교회로부터 우화들 쪽으로, 이방인들의 아주 오래된 책들 쪽으로 파생되었기 때문이다. 그들과 더불어서도 넓적다리와 허리는 부부적인 것을; 발은 자연적인 것을 의미했다. 넓적다리와 발에 관한 이런 의미는 이 책 각 장의 끝에서 취급되는 웅대한 사람과 인간의 기관이나 부위들과의 상응 관계로부터 이다. 넓적다리와 발의 상응에 관해서는 생생한 경험까지 추가하여 이후 더 말해질 것이다
오늘날 이런 의미들은 역설적인 것밖에 더 아닌 수준에 머물고, 급기야 쓸모없는 폐물 수준, 더 나아가 잃어져도 무방한 수준, 그리하여 잃어지고 말았다. 그렇지만 이 지식이 다른 지식들을 얼마나 많이 능가하는지! 이는 이 지식 없이 말씀의 내적 의미를 아는 것은 가능할 수 없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가늠될 것이다; 그리고 인간과 더불어 있는 천사들은 이 의미에 따라 말씀을 지각한다; 또한 이 지식들을 수단으로 인간은 천국과 교통함이 주어진다. (아마 더욱 신용하지 않을지 모르는 것은) 내적 인간 자체는 이 방법이 아니면 생각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 이유가 비록 인간이 육체 안에서 사는 동안 이를 알아챌 수 없을지라도 외적 인간이 글자에 따라 납득할 때, 내적 인간은 내적 의미에 따라 납득하기 때문이다. 이를 특별히 알 수 있는 것은 인간이 다른 삶에 와서 천사가 될 때, 별도의 가르침 없이 내적 의미를 알고 있는 사실로부터 이다.
부부의 사랑이 무엇인지, 이것이 넓적다리에 의해, 또한 허리에 의해 의미되는 것은 이미 살핀 바 있다; 그리고 부부의 사랑이 모든 사랑의 근본이다는 것도 이미 말했다. 이로부터 진짜 부부의 사랑 안에 있는 이들은 천적 사랑 안에도(즉 주님을 사랑함 안에도), 그리고 영적 사랑 안에도(이웃을 향한 선행 안에도) 있다; 그리고 그러므로 부부의 사랑에 의해 이 사랑 자체가 뜻해질 뿐만 아니라 모든 천적이고 영적인 사랑까지도 뜻해진다. 내적 인간이 외적 인간과 결합할 때, 또는 영적 인간이 자연적 인간과 결합할 때 이런 사랑들이 자연적 선과 결합되어진다고 말해진다. 이 결합이 “넓적다리의 우묵한 곳”에 의해 의미되는 것이다. 일반적 측면에서 야곱과 그의 후손과 더불어 이런 결합은 있지 않았다는 것은 이어지는 대목에서 나타날 것이다; 그 이유가 여기서 취급되는 주제는 내적 역사적 의미이기 때문이다.

야곱의 넓적다리의 우묵한 곳이 그와 씨름 중에 어긋났다에 의해 이 결합은 야곱의 후손에서는 상해를 입고 바뀌여놓였다를 의미한다는 것은 “관절이 어긋남”의 의미가 의문에 있는 의미 안에서 바뀌어놓이고, 그러므로 상해를 입었다임이 분명해진다. “넓적다리의 우묵한 곳”이 결합을 의미함은 앞의 설명에서 분명해질 것이다; 그리고 말씀에서 “야곱”은 당사자인 본인 뿐만 아니라 그의 모든 후손까지도 표시하고 있다는 것은 말씀의 많은 구절로부터 분명해진다 (민. 23:7, 10, 21, 23; 24:5, 17, 19‘ 신. 33:10; 이. 40:27; 43:1, 22; 44:1, 2, 21; 48:12; 49:20; 예. 10:16, 25; 30:7, 10, 18; 31:7, 11; 46:. 27, 28; 호. 10:11; 암. 7:2’ 미. 2:12; 3:8; 시. 14:7; 24:6; 59:13; 78:5; 99:4; 등등).
야곱과 그의 후손과 더불어서는 천적이고 영적인 사랑이 자연적 선과 (또는, 내적 또는 영적 인간이 외적 또는 자연적 인간과) 결합되어질 수 없는 특성 속에 있었다는 것은 말씀에서 이 나라와 관련되어지는 모든 것으로부터도 분명해진다; 그 이유가 그들은 내적, 영적 인간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했고,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이것이 그들에게 밝히 보여지지도 않았다; 그 이유가 그들은 인간 안에 존재하는 것은 외적이고 자연적 외의 다른 것은 없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들의 모든 예배에서 그들이 중시한 것은 아무것도 없고, 신성한 예배라고 해보아야 기껏 우상적 예배 그 이상은 아니었다. 그들과 더불어 구성된 교회 역시 교회가 아니었고, 단지 교회라는 것을 표현만 한 것 뿐이다. 교회의 표현이 이런 백성들과 더불어 가능했던 이유에 대하여는 이미 살폈다.
그 이유가 표현함에서의 경우, 등장 인물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표현된 것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신성, 천적, 그리고 영적인 것들이 인물들에 의해서 뿐 아니라, 생명 없는 것들, 즉 아론의 의복, 궤, 제단, 바쳐진 숫소와 양, 등불을 가진 등잔대, 금 식탁에 배열된 빵, 기름부어진 기름, 유향, 이외 많은 것들에 의해서도 표현되었다. 그러므로 이런 표현은 왕들, 그가 선 왕이든, 악한 왕이든 주님의 신성한 왕권을 표현했고; 높은 성직자의 경우도 그의 선, 악에 속한 모두가 그들이 자기들의 규례와 법도에 따라 바깥쪽 형체의 직능을 수행할 때, 주님의 신성한 성직 직분을 표현했다. 그러므로 교회의 표현이 그들 사이에서 오도록 하기 위하여 여러 규례들과 법들이 모두가 표현적인 것으로서 명백한 계시를 수단으로 그들에게 주어졌다; 그러므로 그들이 이 법 안에 있고, 이 법을 직바로 준수하는 한, 그들은 표현함이 가능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들이 이런 내려진 법들로부터 비껴설 때, 즉 다른 나라의 규례나 법들쪽으로 비켜설 때, 특히 또 다른 신을 예배할 때, 그들은 표현하는 능력을 박탈당했다. 이런 이유로 그들은 바깥쪽 수단들로 해서, 즉 포로됨, 재난, 위협, 기적 등을 수단으로 규례나 법들을 진실로 표현하는 쪽으로 내몰아쳐졌다; 그러나 이런 것은 내적인 수단에 의해서가 아니다, 즉 외적 예배 안에 내적 예배를 지닌 이들 같은 경우가 아니다. 이런 위의 사항들이 내적 역사적 의미에서, 즉 야곱과 그의 후손에 관련하여 취해지는 “야곱의 우묵한 곳의 관절이 어긋남”에 의해 의미된 사항들이다.

26-28절. 그리고 그가 말했다, 나로 가게 하라, 그 이유는 새벽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말했다, 당신이 나에게 복을 빌어 주지 않으면 나는 당신을 가게 할 수 없소이다.
27 그리고 그는 그에게 말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그리고 그는 말했다, 야곱입니다.
28 그리고 그는 말했다, 네 이름은 더 이상 야곱이라 불리지 않고 이스라엘이라 불릴 것이다. 그 이유는 왕자 같이 너는 하느님과 사람과 더불어 경쟁했다, 그리고 이겼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나로 가게 하라 새벽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라고 말했다. 이는 결합이 가까워지자 시험이 중단되었음을 의미한다. 이는 “나를 가게 하라”의 의미가 나와 씨름함으로부터 인 바, 시험이 중단되었음 이다; 그리고 “새벽”의 의미가 야곱에 의해 의미된 자연적 선이 천적 영적인 것과, 또는 진리의 신성한 선과의 결합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씨름함은 새벽이 일어나기 전에 시작되었고, 새벽이 일어난 후 중단되었다는 것, 하여 태양이 올라오는 것에 관련되었다는 것은 하루의 때들(아침 정오 저녁 등등), 일년의 때들(4계절 등등)이 상태들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시험을 수단으로 있는 결합의 상태들이다. 내적 인간이 외적 인간과 결합함이 결과될 때, 이 때가 당사자에게 새벽이다; 그 이유는 이 때 그가 영적 또는 천적 상태 안으로 진입하기 때문이다. 만일 그가 빛을 관찰할 수 있는 상태에 있다면, 빛은 새벽의 빛 같이 그에게 나타난다. 더 나아가 그는 하루가 시작되는 첫 빛이 있는 새벽 같이, 아침 일찍 잠에서 깨어난 사람 같이 그의 이해력은 계발되어 있다.

그리고 그는 말했다, 나는 당신이 복을 빌어주지 않으면 가게 할 수 없습니다. 이는 결합이 결과되어졌음을 의미한다. 이는 “당신을 가게 못함”의 의미가 시험이 중단되지 못함이다로부터; 그리고 “축복함”의 의미가 결합함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상으로부터 분명해지는 바, “나는 당신이 나를 축복하지 않으면 가게 할 수 없습니다”에 의해 시험은 결합이 결과될 때까지 중단되지 않을 것이다, 고로 결합은 결과되어야 하리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그에게 말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그리고 그는 말했다, 야곱입니다. 이는 진리로부터 있는 선의 품질을 의미한다. 이는 “이름”의 의미가 품질이다로부터; 그리고 야곱의 표현이 진리의 선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리고 그는 말했다, 네 이름은 더 이상 야곱이라 불리지 않고 이스라엘이라 불릴 것이다. 이는 이제는 신성한 천적 영적 (상태) 이다를 의미한다; “이스라엘”은 자연 평면에서 있는 천적 영적 인간이다, 그런고로 (여전히) 자연적이다; 그리고 천적 영적 인간 자체, 이는 합리성이고, “요셉” 이다. 이는 이어지는 야곱과 이스라엘에 관하여, 또한 요셉에 관한 대목으로부터 분명해진다; 하여 천적 영적 (상태)(the celestial spiritual)에 의해 여기서 뜻해지는 것을 먼저 말해두어야만 할 것 같다. 영적 인간과 자연적 인간이 있다는 것, 또는 내적 인간과 외적 인간이 있다는 것은 오늘날 교회 안에도 실상 알려져 있다; 그러나 영적 또는 내적 인간이 무엇인지는 아직 잘 알려진 편은 아니다; 더구나 천적 인간이 무엇인지, 그리고 천적 인간은 영적 인간과 구별된다는 것은 더욱 덜 알려진 편이다; 이것이 알려져 있지 않기에, 여기서 “이스라엘”이라 불리우는 천적 영적 인간이 무엇인지도 알려질 수 없는 바, 그러므로 이를 짚어보는 것이 순서일 것이라 사료된다.
세 천국들이 있다는 것, 즉 가장 깊은 천국, 중간 천국, 최말단 천국; 같은 말로 셋째, 둘째, 첫째 천국이 있다는 것은 알려져 있다. 가장 깊은 천국, 또는 셋째 천국은 천적 (평면)이다; 그 이유가 거기 있는 천사들은 주님을 사랑함 안에 있기에 그분과 가장 충분히 결합하고 있고, 따라서 여느 다른 천국과 달리 지혜 안에 있고, 순진 상태에 있어, 순진과 지혜들이라 불리우기에 천적 상태라고 불리우는 것이다. 이 천사들은 (자체적으로) 내적 측면과 외적 측면으로 구별되는데, 내적 측면에 있는 천사들은 외적 측면에 있는 천사들보다 더 천적 상태에 있다. 중간, 또는 둘째 천국은 영적 (평면)이다; 그 이유가 거기에 있는 천사들은 이웃을 향한 선행 안에, 즉 서로의 사랑(mutual love) 안에, 자신보다 타인을 더 사랑함 안에 있기 때문에 영적 (수준)이라 불리운다. 그들이 이런 상태, 수준에 있기 때문에 그들은 총명 안에 있다, 고로 그들은 총명들이라 불리운다. 이 천사들 또한 (자체적으로) 내적 측면과 외적 측면으로 구별된다. 내적 측면에 있는 천사들은 외적 측면에 있는 천사들 보다 더 영적 (상태)이다. 최말단, 또는 첫째 천국도 똑같이 천적 평면과 영적 평면이 있으나, 앞의 셋째, 둘째의 천국과 동급의 수준에 있는 것은 아니다; 그 이유가 이 천국의 천사들에게는 자연적인 것이 달라붙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천사들은 (위의 두 천국의 천사들과 구별하기 위해) 천적 자연적 천사(천적 자연적 수준 또는 상태), 또는 영적 자연적 천사 (영적 자연적 상태 또는 수준)라고 부른다. 이 천사들 또한 서로의 사랑 안에 있으나, 그렇다고 이웃을 자신보다 더 사랑하는 것은 아니다. 다시 말해 자신을 사랑하는 만큼에서 이다는 말이다. 이들은 선에 애착함 안에 그리고 진리에 관한 지식을 지니고 있다; 이들 역시 내적 측면과 외적 측면으로 구별된다.
그러나 천적 영적인 상태가 무엇인지 또한 간략히 말해두어야 할 것 같다. 방금 위에서 영적 (평면)에 있다라고 말해진 이들이 천적 영적인 천사라고 불리운다. 이들은 중간 또는 둘째 천국 안에 있다; 이들은 서로의 사랑으로부터 “천적”이라는 칭호가, 파생되는 총명으로부터 “영적”이라는 칭호가 붙여져 “천적 영적인 천사”라고 불리운다. 여기서 내적 (측면에 있는) 천사들이 요셉에 의해 표현되고, 말씀에서도 “요셉”이라 불리운다; 그러나 외적 (측면에 있는) 천사들은 이스라엘에 의해 표현되고, 말씀에서도 “이스라엘”이라 불리운다. 전자(즉 “요셉”이라 불리우는 내적 천사들)는 합리성에 참여하고; 후자(즉 “이스라엘”이라 불리우는 외적인 천사들)는 자연적인 것에 참여하고 있다. 이렇게 (조금은 복잡한 듯 하더라도)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위 둘은 합리성(합리적 평면)과 자연적인 것(자연 평면)의 중간에 위치하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에서 이스라엘은 자연 평면에서 있는 천적 영적 인간, 고로 자연적이다고 말한 것이다; 그리고 요셉은 천적 영적 인간 자체이고, 합리성이다. 넓은 의미(보편적 의미)에서 사랑과 선행으로부터 있는 모든 선은 천적이라 부르고, 그로부터 파생되는 신앙으로부터의 모든 진리와 총명은 영적이다고 말해진다.
지금까지 서술되어왔던 이런 용어들로부터 “이스라엘”이 표시하는 것도 알았을런지 모른다. 그러나 최고 의미에서 “이스라엘”은 신성한 천적 영적 측면에서의 주님을; 내적 의미에서는 천국과 땅에 있는 주님의 영적 왕국을 의미한다. 땅에 있는 주님의 영적 왕국은 영적 교회(the Spiritual Church)라고 불리우는 교회이다. 그리고 “이스라엘”이 주님의 영적 왕국을 표시하기 때문에, “이스라엘”은 마찬가지로 영적 인간을 표시한다, 그 이유가 모든 영적 인간 안에 주님의 왕국이 있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인간 한 개체가 최소 단위에서 천국, 교회이기 때문이다 (4279항). 야곱에 주목하면, 야곱을 수단으로 최고 의미에서 자연 평면에 관련되는 주님이 천적, 영적 측면 모두에서 표현되었다; 그리고 내적 의미에서 최말단 또는 첫째 천국과 같은 주님의 왕국, 결과적으로 교회 안에서도 똑같게 표현되었다. 자연 평면에 있는 선이 여기서 천적이라 불리우고, 거기 있는 진리는 영적이라 불리운다. 이런 사항들로부터 말씀에 있는 “이스라엘”과 “야곱”에 의해 의미되는 것, 또한 야곱이 이스라엘이라 명명되는 것이 의미하는 것도 분명해졌을 것이다.
이렇게 설명을 시도했긴 하지만, 여전히 애매모호해 있을 것이라고 추측된다; 그런 이유는 이미 말했듯, 영적 인간이 무엇인지, 더욱이 천적 인간이 무엇인지, 결과적으로 영적 인간과 천적 인간 사이의 구별은 어떤 것인지를 아는 자가 거의 없어온 탓이다. 이것이 알려져오지 않았던 이유는 사랑과 선행으로부터의 선과 신앙으로부터 있는 진리에 관한 지각이 구분되어 지각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진짜 선행이 없게 되면 이런 구별된 지각력도 존재하지 않는다. 또 다른 이유는, 대다수의 인간들의 경우, 사후 삶에 관한 것, 즉 천국에 관한 것에 대해 걱정함은 매우 적고, 육체의 삶, 즉 세상적인 것에 걱정과 관심이 집중해 있기 때문이다. 만일 거꾸로라면, 위에서 말해지는 것들의 납득이 어려울 일은 없을 것이다. 한마디로 인간은 자기가 사랑하는 것, 애착하는 것, 집착하는 것이라면 즉각 흡수하고 납득하고 어려울 일 하나도 없는 듯 해치우기 때문이다.
“야곱”이 이것을, “이스라엘”은 저것을 의미하는 것은 말씀으로부터 분명해진다; 그 이유가 말씀의 역사적 부분이나 예언적 부분에서 “야곱”이라고 말하고, “이스라엘”이라 말해지기 때문이다, 때로는 한 구절 안에서 두 이름이 등장하는 경우도 있다. 이로 미루어 짐작해도 말씀 안에 내적 의미가 있다는 것; 이 의미를 모르고서는 말씀의 이해는 불가능하다는 것이 분명해진다. 두 이름이 등장하는 구절들을 아래에서 살핀다:
야곱은 자기 아버지가 체류한 토지에서 거주했다. 이들은 야곱의 출생들이다; 요셉은 17년의 아들이었다(17세 이었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그의 모든 아들들보다 그를 더 사랑했다
(창. 37:1-3);
위에서 처음에는 “야곱”이라 불리운다; 그리고 이내 “이스라엘”이라 불리운다; 이스라엘이라 불리울 때, 요셉이 취급되고 있다. 다시:
야곱은 이집트에 곡식이 있다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야곱은 자기 아들들에게 말했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아들들은 (곡식을) 사러 온 이들 사이에 끼여 (곡식을) 사려고 갔다 (창. 42:1, 5).
그리고 그 후에:
그들은 이집트로부터 올라갔다, 그리고 그들의 아버지 야곱에게로 가나안의 토지에 왔다; 그리고 그들은 그에게 요셉이 자기들에게 이야기 한 모든 말들을 말했다, 그들의 아버지 야곱의 영이 되살아났다; 그리고 이스라엘이 말했다, 이것이 정말인가, 요셉 나의 아들이 아직 살아 있다니 (창. 45:25, 27, 28).
다시:
그리고 이스라엘은 여행했다, 그리고 그가 가졌던 모든 것. 하느님께서 밤의 환상에서 이스라엘에게 말하셨다, 그리고 그분이 말하셨다, 야곱아, 야곱아, 그가 말했다, 나를 바라보고 계십니다. 그리고 야곱은 브엘-세바로부터 일어났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아들들은 그들의 아버지 야곱을 운반하였 다 (창. 46:1, 2, 5).
그리고 이어서:
이것들은 이집트로 온 이스라엘의 아들들의 이름들이다, 야곱과 그의 아들들(의 이름들이다)
(창. 46:8).
다음 장에서:
요셉은 자기 아버지 야곱을 모셔왔다, 그리고 그를 바로 앞에 세웠다, 바로가 야곱에게 말했다; 그리고 야곱이 바로에게 말했다 (창. 47:7-9).
같은 장에서:
그리고 이스라엘은 고센의 토지에서 살았다; 그리고 야곱은 17년을 이집트의 토지에서 살았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날들이 죽는 쪽으로 가까이 당겨졌다; 그리고 그는 자기 아들 요셉을 불렀다 (창. 47:27-29).
다시:
그리고 누가 야곱에게 말했다, 그리고 말했다, 보십시오 당신의 아들 요셉이 당신에게 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자신을 강건하게 했다, 그리고 침대 위에 앉았다. 그리고 야곱이 요셉에게 말했다, 하느님 사다이께서 루즈에서 나에게 나타나셨다 (창. 48:2, 3).
그리고 그가 같은 장에서 이스라엘이라 불리워진다 (8, 10, 11, 13, 14, 20, 21절). 마지막으로:
야곱은 그의 아들들을 불렀다, 그리고 말했다, 네 자신을 집합하게 하라, 그리고 들어라, 너희 야곱의 아들들아, 그리고 이스라엘 네 아버지에게 귀를 기울여라. 그리고 야곱이 그의 아들들에게 임무를 맡김을 끝내기를 만들었을 때 (창. 49:1, 2, 33).
위의 구절들로부터 분명해지는 바, 야곱이 지금 야곱이라 불리우고, 그리고 지금 이스라엘이라 불리운다는 것, 고로 야곱은 이런 것을 뜻하고, 이스라엘은 저런 것을 뜻한다는 것이다; 또는 이것이 의미될 때, “야곱”이라 말해지고; 저것이 의미될 때, “이스라엘”이라 말해진다; 이런 신비함은 내적 의미가 아니고서는 이해되어지지 않는다.
하여 “야곱”이 의미하는 것, 그리고 “이스라엘”이 의미하는 것은 앞에서 말했다. 일반적으로 말씀에서 “야곱”에 의해 교회의 외적인 것들, 그리고 “이스라엘”에 의해 교회의 내적인 것들이 의미되어진다; 그 이유가 모든 교회는 외적이면서 내적 측면을, 또는 내적이면서 외적 측면을 가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교회 속에 있는 모든 것이 “야곱”에 의해, 그리고 “이스라엘”에 의해 의미되고, 교회의 모든 것은 주님으로부터 있기에, 최고 의미에서 “야곱”과 “이스라엘” 모두는 주님을 표시한다, 하여 “야곱”은 신성한 자연 평면을, “이스라엘”은 신성한 영적 평면을 표시한다. 고로 주님의 왕국과 그분의 교회 속에 있는 외적인 것은 “야곱”이고, 내적인 것은 “이스라엘”이다. 아래 인용된 구절을 보면, 각각의 의미에서 각 이름이 명명됨을 알게 된다. 이스라엘이 된 야곱의 예언에서:
야곱의 전능하신 분의 손에 의해, 거기로부터 목자이시고, 이스라엘의 돌이시다 (창. 49:24).
이사야서에서:
들어라, 오 야곱아, 나의 종아, 그리고 내가 뽑은 이스라엘아; 나는 네 씨 위에 내 영을 부을 것이다, 그리고 나의 축복을 네 아들들 위에 쏟을 것이다; 이 자가 나, 여호와께 말할 것이다; 그리고 이 자는 자신을 야곱의 이름을 수단으로 부를 것이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이름을 수단으로 자신을 별칭할 것이다 (이. 44:1, 3, 5);
위에서 “야곱”과 “이스라엘”은 주님을 분명하게 표시한다, 그리고 “씨와 야곱과 이스라엘의 아들들”은 그분에 대한 신앙 안에 있는 이들을 표시한다. 발람의 예언에서:
누가 야곱의 먼지를 셀 수 있을까? 그리고 이스라엘의 사분의 일을 셀까? (민. 23:10).
다시:
야곱에 맞서서 점을 칠 자 없고, 이스라엘에 맞서 주문을 외울 자 없다; 이 때에 야곱과 이스라엘에게 말해졌을 것이다, 하느님이 무엇을 일하셨는가? (민. 23:23)
다시:
당신의 장막은 얼마나 아름다운지 오 야곱아, 네 거주하는 장소여, 오 이스라엘아 (민. 24:5).
다시:
야곱으로부터 별 하나가 일어날 것이다, 그리고 이스라엘로부터 홀이 (민. 24;17).
이사야서에서:
나의 영광을 나는 또 다른 자에게 주지 않을 것이다. 나에게 청종하라, 오 야곱아, 그리고 내가 부른 이스라엘아. 나는 똑같은 분이다, 나는 처음이고 마지막이기도 하다 (이. 48:11, 12).
이사야서에서:
야곱은 오는 이들이 뿌리를 내리게 할 것이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꽃을 피어 만발할 것이다; 그리고 세상의 얼굴은 생산물로 채워질 것이다 (이. 27:6).
예레미야서에서:
너희는 두려워 말라, 오 야곱 나의 종아, 그리고 떨지 말라, 오 이스라엘아; 그 이유가 내가 멀리로부 터 너를 구해내었음을 보라 (예. 30:9, 10).
미가서에서:
나는 야곱을 정녕 그러모을 것이다, 너희 모두; 나는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을 정녕 소집할 것이다; 나는 그들을 보스라의 양떼 같이 함께 놓을 것이다 (미. 2:12).
야곱이 이스라엘이라 명명된 이유는 그 이름이 주어지는 때의 말 자체로부터도 분명해진다: 즉 “네 이름은 야곱이라 다시 부르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이다; 그 이유가 왕자 같이 너는 하느님과 사람과 경쟁했고, 이겼기 때문이다.” 원어에서 “이스라엘”은 “왕자 같이 하느님과 경쟁하는 자”를 뜻하고 있다. 하여 이를 수단으로 내적 의미에서는 그분이 시험들의 전투에서 이기셨다가 의미된다; 그 이유가 시험들과 시험들에서의 전투는 주님께서 그분의 인간을 신성으로 만드신 수단이기 때문이다 (1737, 1813항, 등등); 그리고 시험들과 시험들에서 승리함은 인간을 영적 인간으로 만든다; 이런 이유로 야곱이 씨름한 후에 처음으로 이스라엘이라 명명된 것이다. (“씨름”이 시험을 표시함은 4274항을 보라.) 교회, 또는 기독교인이 자신을 이스라엘이라 불려진다는 것은 알려져 있다; 그럼에도 정작 당사자가 시험을 수단으로 영적 인간이 되지 않으면 이스라엘이 아니다는 것을 실감하는 자가 별로 없다. 이름 자체 역시 똑같은 것을 포함하고 있다. 이 대목 이 후에 야곱이 이스라엘로 불리우는 것에 대해 확증되어진 것이 또 다른 장에서 볼 수 있다:
야곱이 밧단-아람으로부터 왔을 때, 하느님께서 그에게 다시 나타나셨다, 그리고 그에게 복을 주셨다; 그리고 하느님이 그에게 말하셨다, 네 이름은 야곱이다; 네 이름은 더 이상 야곱이라 불려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네 이름일 것이다; 그리고 그분은 그의 이름을 이스라엘 이라 부르셨다 (창. 35:9, 10).
이 확증함의 이유는 그 장에서 말해질 것이다.

그 이유가 왕자 같이 너는 하느님과 사람들과 경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겼다. 이는 진리들과 선들에 관련하여 있는 전투들에서 계속되는 승리들을 의미한다. 이는 “왕자 같이 경쟁함”의 의미가 전투들에서 이김, 여기서는 시험의 전투들을 이김이다로부터; 그 이유가 여기서의 주제가 시험을 다루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느님과 사람들과”의 의미가 진리들과 선들이다로부터, 이는 아래에서 살핀다.
최고 의미에서 주님이 취급되기에, “하느님과 인간들과 경쟁한 그 사람”에 의해 주님이 뜻해진다; 그 이유가 그분은 자신의 힘으로 모든 시험들을 견뎌내셨다, 그리고 그 견디심을 수단으로 지옥들을 정복하셨다; 그분은 모든 지옥들을 그들의 질서에서 그분 자신 안으로 들어옴을 승인하셨다, 천사들조차도 그렇게 하셨다. 이는 다음 페이지에서 다룰 것이다. 고로 그분은 천국들에 있는 모든 것, 지옥들에 있는 모든 것들을 질서 안으로 환원되게 하셨다, 마지막으로 그분 자신을 신성이 되게 하셨다, 즉 그분 안의 인간을 신성으로 만드셨다.
이로부터 분명해지는 것은 최고 의미에서 주님은 “야곱”과 “이스라엘”이실 뿐 아니라, 그분은 왕자 같이 경쟁하셨다는 것, 즉 시험의 모든 전투들을 견디시고 그것들에서 정복하셨다는 것, 또한 그분은 모두 각각의 인간 안에서도 시험들을 이겨내 주신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미 우리가 살펴왔던 대목들을 되짚어보고 지나감이 옳을 것이다: 즉 주님께서는 어느 누구도 경험하지 않은 가장 비통한 시험도 이겨내셨다: 주님은 신성한 사랑으로부터 싸우셨다, 이는 모든 인간과 다른 점이다: 그분은 비록 실제의 악을 가지신 것은 아닐지라도 어머니로부터 받은 유전적 악과 싸우셨고, 이러므로서 그분은 더 이상 그녀의 아들이 아니었다: 시험들 안에서의 전투에서의 계속적인 승리를 수단으로 그분은 모든 것들을 천국 형체 안으로 배치하셨다:시험들의 전투에서 계속되는 승리들을 수단으로 그분은 신성 본질이 인간 본질에 하나로 되게 하셨다: 그리고 주님은 인간 안에서의 시험을 견뎌내시고 악과 지옥들을 복종되게 하신다.
“하느님과 사람들과 경쟁하는” 것이 진리들 측면과 선들 측면에서 시험되는 것을 표시한다는 것은 글자로부터서는 전혀 나타나지 않는 비밀이다. 아마 야곱이 하느님과 씨름해서 이긴다는 이 구절을 읽으면서 뭔가 얼핏 말이 안되는 말씀 같이 느껴지지 않을 자는 없을 것이다. 상식적으로 판단해도 인간이 하느님을 싸워 이긴다는 것은 말이 안되기 때문이다. 어쨌든 성경의 글자는 그렇게 기록되고 있다. 하여 우리는 내적 의미에서 가르치는 것을 살필 이유가 있는 것이다. 즉 여기서 “하느님”에 의해, 그리고 “사람”에 의해 의미되는 것에 대해서이다. “하느님”에 의해서는 진리가, “사람”에 의해서는 선이 의미된다. 그 이유가 내적 의미에서 취급되는 주제가 진리일 경우, 이름 “하느님”은 진리를 의미하여 사용된다; 그리고 “사람”이 언급될 경우, 선을 뜻한다. “사람”이 선을 표시하는 이유는 주님만이 유일한 사람이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인간은 그분으로서 만이 사람이라 불리운다; 또한 그분으로부터 천국은 사람이고 웅대한 사람이라 불리우기 때문이다 (684, 1276, 3624-3649, 3741-3751항).
이런 이유로 천적 선 안에 있었던 태고 교회는 “사람”이라 불리웠다; 그러므로 말씀에서도 선이 취급되는 곳에서, 선이 “사람”에 의해 의미되어진다. 이사야서에서:
나는 금보다 더 드물어지게 사람(vir homo)을 만들 것이다, 그리고 오빌의 금보다 사람(homo) (이. 13:12).
이사야서에서:
땅의 주민들이 불태워질 것이다, 그리고 남은 사람(vir homo)은 거의 없을 것이다
(이. 24:6);
위의 “사람(vir homo)”은 영적 선, 또는 진리의 선을 표시한다; “사람(homo)”은 선을 표시한다. 이사야서에서:
작은 길(paths)들이 황폐해지고, 여행하는 사람이 중단되었다; 그는 언약을 헛것으로 만들었다, 그는 성읍들을 몹시 싫어했다, 그는 사람(vir homo)을 중시하지 않는다 (이. 33:8).
예레미야서에서:
내가 땅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보라 그것은 쓸모없고 텅빔이었다, 그리고 하늘들, 그리고 그것들은 빛을 가지지 않았다; 나는 바라보았고, 보라 사람이 없었다, 그리고 하늘의 모든 새들이 날아가버렸 다 (예. 4:23, 25)
예레미야서에서:
잘 보아라, 날들이 온다, 여호와께서 말하신다, 즉 나는 사람의 씨를 가지고, 그리고 짐승의 씨를 가지고 이스라엘의 가문과 유다의 가문을 씨뿌릴 것이다 (예. 31:27).
에스겔서에서:
사람의 혼과 놋그릇을 가진 상인들이 너와 거래하였다 (겔. 27:13).
에스겔서에서:
너희는 나의 양떼, 내 풀밭의 양떼, 너희는 사람이다, 그리고 나는 너의 하느님이다 (겔. 34:31).
다시:
황폐된 성읍들이 사람의 양떼로 채워질 것이다 (겔. 36:38).
위 구절들에서 “사람(homo)”은 선 안에 있는 이들을 표시한다, 고로 선, 그 이유는 인간은 선으로부터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선으로부터 있는 진리는 말씀에서 “사람(vir homo, 남성쪽의 사람)”, 또한 “사람의 아들”이라 불리운다.

지금까지 설명해온 앞의 몇 구절은 같은 단어들을 가지고 말씀에서 “야곱”이라 명명되는 유태 나라와 이스라엘 나라에도 관계하고 있다. 내적 역사적 의미라고 불리운 이 의미에서, “나로 가게 하라, 그 이유는 새벽이 일어나기 때문이다”의 말에 의해 그들이 가나안의 표현물 안으로 오기 전 표현적인 것은 야곱의 후손으로부터 떠나야 한다가 의미되어 있다. 이 나라의 특성이 무엇이었는지는 이미 말했다, 즉 그들과 더불어 내적 예배는 없고 오직 외적 예배만 있다는 것; 고로 천국의 결혼은 그들로부터 분리되어져 있었다는 것, 그러므로 어떤 교회도 그들과 더불어 설립되어질 수 없고, 오직 교회의 표현(껍데기)만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표현 교회(representative church)가 무엇인지, 교회의 표현물(the representative of church)이 무엇인지는 짚어보고 지나가야 할 것 같다. 표현 교회는 외적 예배 안에 내적 예배가 있을 때의 교회이다, 그리고 교회의 표현물은 내적 예배가 없을 때, 그럼에도 외적 예배가 있는 경우이다. 두 교회 모두 바깥쪽 의식상에서는 거의 비슷하다, 즉 비슷하거나 똑같은 규정이나 법들, 가르침들을 지니고 있다는 말이다. 그러나 표현 교회에서 외적인 것들은 내적인 것들과 상응하고 있어 이 둘은 하나를 만든다; 이에 비해 교회의 표현물은 이런 상응함이 없다, 그 이유는 외적인 것들 안에 내적인 것들이 빠져 있거나 모순되어 있기 때문이다. 표현 교회에서 천적인 사랑과 영적인 사랑은 주역(the principal)들이나, 교회의 표현물에서는 육체적 세상적 사랑이 주역들이다. 천적이고 영적인 사랑은 내적인 것 자체이다; 그러나 천적이고 영적인 사랑이 없는 곳일 경우 육체적 세상적 사랑만이 있어, 외적인 것에 내적인 것들이 결핍되어 있다. 고대 교회, 즉 홍수 이후의 교회는 표현 교회이었다; 그러나 야곱의 후손 사이에 설립된 교회는 교회의 표현물이었다.
이에 대한 구분을 위해 예증을 곁들여 보자. 표현 교회(the Representative Church)에서 신성한 예배는 산 위에서 개최되었다, 그 이유는 산들이 천적인 사랑을 의미했고, 최고 의미에서는 주님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이 산 위에서의 예배를 견지하는 동안, 그들은 자기들의 거룩한 상태 안에 있었다, 그 이유는 그들은 동시에 천적 사랑 안에 있었기 때문이다. 표현 교회에서 신성한 예배가 작은 숲(grove)들에서 개최되었다, 그 이유는 작은 숲이 영적 사랑을 의미하고, 최고 의미에서 이 사랑 측면의 주님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이 작은 숲들에서 신성한 예배를 견지하는 동안, 그들은 자기들의 거룩한 상태 안에, 동시에 영적인 사랑 안에 있었다. 표현 교회에서 그들이 신성한 예배를 드리는 동안, 그들은 자기들의 얼굴을 태양이 떠오르는 쪽으로 돌렸다, 그 이유는 태양의 떠오름 또한 천적인 사랑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이 달을 바라볼 때, 그들은 마찬가지 방식에서 어떤 거룩한 존경심이 그들의 마음을 관통했다, 그 이유는 달이 영적인 사랑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그들이 별이 많은 하늘을 응시했을 때 그러했다, 그 이유는 이것이 천사들의 천국, 또는 주님의 왕국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표현 교회에서 그들은 천막들 또는 장막들을 가졌고, 그것들 안에서 신성한 예배가 개최되었다, 그리고 이것 또한 거룩했다; 그 이유는 천막, 또는 장막이 사랑의 거룩함과 예배를 의미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외 훨씬 더 많은 예증이 있다.
교회의 표현물에서의 경우, 처음에는 표현 교회와 비슷한 신성한 예배를 산 위에서, 작은 숲들에서 개최했다, 그리고 그들 역시 태양이 떠오르는 쪽으로 얼굴을 돌렸고, 달도, 별도 비슷하게 응시했다, 천막에서의 예배 또한 비슷했다. 그러나 그들이 외적 예배 안에 있을 때, 내적 예배에는 있지 않았기에, 또는 육체적 세상적 사랑에만 있었기에, 그리고 천적, 영적 사랑은 없었기에, 그리고 산이나 작은 숲 자체를 예배했기에, 그리고 태양, 달, 별, 마찬가지로 천막, 장막 자체를 예배했기에, 고로 고대 교회에서 거룩하였던 의식들을 우상적으로 바꾸어 놓았기에, 그들은 그들 모두에게 공통되는 것들로 (주님에 의해) 제한되었다, 즉 산은 예루살렘이 있던 산 만으로, 마지막에는 시온이 있던 산 만으로, 그리고 태양이 떠오름을 보는 것도 거기서만, 또는 성전으로부터서만 보게 했다, 그리고 천막의 예배 또한 공동의 천막 즉 만남의 천막에서만 예배하게, 마지막으로는 성전에 있는 궤에서만 예배를 허용했다. 이는 그들이 거룩한 외적인 것 안에 있을 때, 교회의 표현물이 존재하도록 해주시려는 배려에서 였다, 이렇지 않으면 거기 백성이 거룩한 것들을 모독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상으로부터 표현 교회와 교회의 표현물 사이에 어떤 구분이 있는지를 알았을 것이다; 일반적으로, 표현 교회 속에 있었던 이들은 그들의 내면들 측면에서 세 천국들과 교통했다, 이 교통함에 그들의 외적인 것들은 평면으로서 그릇 역할을 해주었다. 그러나 교회의 표현물 안에 있던 이들은 그들의 내면들 측면에서 천국들과 교통하지 못했다. 그러나 여전히 그들에게도 남은 것은 외적인 것들이 평면으로서의 역할을 해주는 것 뿐이었다. 이것 마저 주님의 섭리로부터 교회와 유사한 어떤 것을 수단으로 천국과 인간 사이에 어떤 교통이 존재해 있도록 배려하셨다; 그 이유가 교회의 어떤 것을 통하여 천국과 인간의 교통이 없으면, 인류는 멸해지기 때문이다. 내적인 것들의 상응이 무엇인지는 여기서 몇 마디 말들로는 너무 부족하므로 생략하고 차후 주님의 신성한 섭리로부터 이어지는 페이지들에서 말할 것이다.

나로 가게 하라, 그 이유가 새벽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이는 표현인 것이 야곱의 후손이 가나안의 토지의 표현물 안으로 오기 이전 그들로부터 떠나야 하리라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야곱의 후손이 취급되는 내적 역사적 의미에 있는 시리즈의 것들로부터 분명해진다. 교회의 것들에 관련하여 있는 그들의 상태는 말씀에서 저녁, 밤, 그리고 아침, 또는 새벽에 의해 묘사되고 있는데, 여기서는 그들이 가나안의 토지 안으로 올 때가 새벽에 의해 묘사되었다; 다시 말해 그들이 가나안의 토지에서 교회의 표현물 안으로 올 때가 새벽으로 묘사되었다는 말이다. 이 경우 그들 사이에 교회의 표현물이 아직은 설립되어질 수는 없었는데, 그 이유는 그들이 깡그리 황폐해질 때까지, 즉 그들에게 내적인 것들에 관한 지식이 하나도 남아있지 않을 때까지 (그들은 대기하고 있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그들에게 내적인 것이 남아있고, 이것에 감동된 상태에서 이것을 모독할 것이 주님에 의해 예견되고 이럴 경우 완전 멸망이 초래되기 때문이다. 앞에서 말했었던 모독의 종류를 다시 생각해보자: 거룩한 것들을 알고 인정하는데, 그것을 모독하는 이들: 교회 내에 있는 이들이 거룩한 것들을 모독할 수 있다, 그러나 밖에 있는 이들은 아니다: 선과 진리 안에 항구적으로 남아 있을 수 없는 이들에게는 그것에 대한 믿음과 인정함이 보류되게 하신다: 그들이 모독하지 않도록 무지함에 머물게 하신다: 거룩한 것들을 모독할 때 어떤 위험이 있는지: 내적인 것이 모독되지 않도록 예배가 외적으로 되어간다: 그러므로 내적인 진리들은 유태인들에게 열려지지 않았다.
그러므로 주님에 의해 설비된 바, 교회의 진짜 표현물(즉 내적인 것)은 그들이 가나안의 토지의 표현물 안으로 오기 이전 그들로부터 떠나야 할 것, 즉 그들은 주님에 관하여 아는 것이 전혀 없는 정도로까지 되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유태인들은 메시아가 오신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이 기대하는 것은 그분이 오시어 자기들을 온 세상 모든 나라 위에 당당히 세워져서 자기들을 영광되게 해주기 위함 때문에서 였다. 한마디로 자기들의 혼이 영원히 구원되는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천국 왕국에 관하여, 사후 삶에 관하여, 선행과 신앙에 관하여 어떤 것도 알고 있지 않았다. 그들이 이런 무지함쪽으로 환원되도록 그들은 이집트에서 수백년 살았다; 그리고 거기로부터 불려내질 때 쯤 해서는 여호와의 이름조차 알고 있지 않았다 (출. 3:12-14). 더욱이 그들은 표현 교회의 모든 예배까지도 상실했다; 그들에게 광야 시내산에서 십계명이 선포된 직후, 한 달도 못되어 그들은 이집트식의 예배를 위해 금송아지를 만들기까지 한 것은(출. 32장) 위 말을 확인하게 하는 대목이다.
이집트로부터 데려내온 족속들의 특성이 위와 같았으므로 그들 모두는 광야에서 사망했다. 이 백성들로부터 요구되는 것은 규례와 가르침들을 바깥쪽 형체에서 100% 준수하는 것이다; 그 이유는 이렇게 행동함 자체가 교회의 표현물로 행동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집트에서 성장해버린 성년들(20세 이상)은 이런 행동으로의 환원이 불가능했다; 그렇지만 그들의 자식들은 비록 어려움이 많이 따르기는 해도 가능할 수 있어, 시작에서는 기적들을 수단으로, 그 후에는 두려움과 포로됨 같은 것으로 규례와 가르침을 준수하게 할 수 있었는데, 이는 말씀들(여호수아서와 사사기서 등등)에서 확인된다. 이상으로부터 교회의 진짜, 또는 내적인 모든 표현들이 야곱의 후손이 가나안의 토지에 당도하기 전에 떠났다는 것, 그리고 교회의 외적 표현만이 충분한 형체로서 그들 사이에서 시작되었다. 이렇게까지 해서라도 교회의 표현물이 가나안의 토지에서 표출되어야 했던 이유는 이 토지의 경계선, 장소 등등은 고대 시대로부터 표현물로 있어왔기 때문에 작금에 이르러서도 교회의 표현물이 표출될 수 있기에 최적의 토지이었기 때문이다.

내적 역사적 의미에서, 그가 말했다, 나는 당신이 나를 축복하지 않으면 당신을 가게 할 수 없습니다에 의해 그들은 자기들이 표현물임을 고집한다가 의미되고 있다. 그 이유가 그들의 고집이 “나는 당신을 가게 할 수 없다”에 의해, 그리고 “축복함”이 교회를 표현하기 때문이다. 이런 주제에 주목해보자: 즉 야곱의 후손은 교회의 표현물이기를 고집했다는 것, 그리고 자기들은 여느 다른 나라를 제치고 뽑혀졌다는 것을 생각해보자는 말이다. 이런 대목은 글자의 의미에서 있는 말씀의 역사물로부터는 분명해지게 까지는 만들 수가 없다, 그 이유가 글자 의미에 있는 말씀의 역사물은 그것들 안쪽에 천국의 깊은 비밀들을 포옹한 채로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런 사항들은 대부분이 시리즈에서 살펴진다; 또한 이름들 자체가 어떤 것들을 의미하기 때문인데, 많은 경우에서, 즉 아브라함, 이삭, 야곱이 최고 의미에서 주님 자신을 의미하는 등등이다. 이렇게 최고 의미에서 주님을 의미하기에 이미 많은 대목에서 말해졌다.
야곱의 후손이 뽑혀지지 않았고, 교회가 그들 사이에 있을 것이라고 고집한 것은 말씀의 많은 구절들로부터 보여지고, 특히 내적 역사적 의미로부터 보여지는데, 아래 구절은 더욱 공개적이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야기를 하셨다, 여기로부터 올라가라, 이집트의 토지로부터 나와서 내가 아브라함, 이삭, 야곱에게 나는 네 씨에게 이것을 줄 것이다 라고 맹세한 가나안의 토지 안으로 네가 올라가게 만든 너와 백성; 나는 너희 한가운데에서 올라가지 않을 것이다, 그 이유는 너희는 목이 곧은 백성이기 때문; 내가 길에서 너희를 사르지 않도록 해주기 위해서 때문이다. 그리고 백성들이 이 나쁜 말을 들었을 때, 그들은 슬퍼했다, 그리고 모두 각각의 백성들은 자기들의 장식품을 치장하기를 중단했다. 그리고 모세가 천막을 거두어서 진영에서 멀리 떨어진 데로 옮겨 진영 밖에 자신을 위하여 그것을 고정시켰다. 그리고 모세가 여호와께 말했다, 보십시오, 당신이 제게 말하기를, 이 백성을 올라가게 만들어라, 그리고 당신이 저와 더불어 보내진다는 것을 나로 알게 만드시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만일 제가 당신의 눈에서 은총을 발견하기를 간구합니다, 당신의 길을 나로 알게 만들기를 바랍니다, 하여 나는 당신의 눈에서 은총을 발견하게 하소서; 잘 보십시오, 이 나라는 당신의 백성입니다. 그러므로 그분이 말하셨다, 내가 네게 쉼을 줄 때까지 내 얼굴은 갈 것이다 (출. 33장).
위에서 모세가 백성이 이집트의 토지로부터 올라가게 만들었다는 것, 그리고 그 다음 그들은 자기들의 장식품을 치우고 슬퍼했다는 것, 그리고 모세는 자기 천막을 진지 밖에 쳤다는 것, 그리고 이것 때문에 여호와께서 동의하셨다는 것; 고로 명백한 것은 그들 스스로 고집부렸다는 것이다.
민수기서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하셨다, 얼마나 오랫동안 이 백성은 나를 성나게 할 것이냐, 그리고 얼마나 오랫동안 그들이 나를 믿지 못할 것이냐? 그 이유는 내가 그들 사이에서 펼친 모든 표시들 때문이다. 나는 그들을 염병으로 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을 소멸할 것이다, 그리고 너희로부터 그들보다 더 크고 강한 나라를 만들 것이다. 그러나 모세가 청원했다, 그리고 청원 받은 여호와께서 말하셨다, 나는 네 말에 따라 은총을 베풀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살 것이다, 그리고 온 땅은 여호와의 영광으로 채워질 것이다; 그 이유가 내 영광을 보았던 이들, 그리고 내가 이집트에 서, 그리고 광야에서 펼쳤던 나의 표시들을 보았던 이들, 그럼에도 아직도 나를 열 번이나 시험한 이들, 그리고 내 음성에 순종하지 않았던 이들, 나를 성나게 한 그들 중의 누구도 내가 그들의 조상에게 맹세한 토지를 보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너희의 작은 아이들을 데려갈 것이다 (민. 24장).
위의 말들로부터 분명해지는 바, 여호와께서는 그들을 소멸하기로 작정하셨다는 것, 그리고 결과적으로 그들 사이에 교회를 세우시지 않겠다는 것, 그러나 그들이 교회를 세워두겠노라 떼를 쓴 것이다. 위 구절의 때 이 외에도 많은 때에서 여호와께서는 반역질만 해대는 이 나라를 깡그리 진멸하시려고 뜻하셨다, 그러나 그들이 청원함을 수단으로 간청되는 것에 자신을 내어주시기도 하셨다.
이와 비슷한 것이 발람이 이 백성을 저주하도록 허락되지 않는 대목에도 포함되어 있다(민. 22, 23, 24장). 그 밖의 구절로서, 여호와께서 이 백성을 데려오신 것을 후회하셨다고 말해진다; 또한 여호와께서 간청에 응하셨다는 것; 또한 그분은 그들과 새로운 언약을 자주 하셨다는 것도 있다. 이런 대목들은 “당신이 나에게 축복하지 않으면, 나는 당신을 가게 할 수 없소이다”는 말의 내적 역사적 의미에서 의미되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 이와 같은 내용이 야곱이 에서로부터 생득권을 가져가는 것, 그리고 책략으로 에서로부터 그의 축복을 가져가는 것의 내적 역사적 의미에서도 (야곱의 후손의 억지부림이) 나타나고 있다.

내적 역사적 의미에서, 그가 그에게 말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그리고 그가 말했다, 야곱입니다에 의해 그들은 자기들의 품질과 더불은 야곱의 후손이었다가 의미된다. 이는 “이름”의 의미가 품질이다로부터; 그리고 “야곱”의 의미가 그의 후손이다로부터 알게된다.

내적 역사적 의미에서, 그가 말했다, 네 이름은 야곱이라 더 이상 불러지지 않을 것이고, 이스라엘이라 불리울 것이다에 의해 그들은 야곱으로서는 표현할 수 없고, 그들에게 주어진 새로운 품질로부터 표현할 수 있었다가 의미된다. 이는 말씀에서 “야곱”의 의미가 그의 후손이다로부터; “이름”의 의미가 품질이다로부터 알려진다. 새 품질 자체가 내적 의미에서 “이스라엘”이다; 그 이유가 “이스라엘”은 천적 영적인 상태, 고로 내적 인간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스라엘”이 천적 영적 인간, 고로 내적 인간이기 때문에, “이스라엘”은 내적 영적 교회이다. 그 이유가 영적 인간과 영적 교회는 같은 말이기 때문이다; 즉 영적 인간은 개별적 측면에서 영적 교회이고, 총체적인 숫자가 일반적 측면에서 영적 교회이기 때문이다. 만일 인간이 개별적 측면에서 교회가 아니다면, 일반적 측면에서의 어떤 교회도 있지 않을 것이다. 일반적인 모임(congregation)이 흔히 교회라고 불리운다, 그러나 어떤 교회가 있기 위하여, 이 모임 안에 있는 모든 이 각각은 일반적으로 교회 같이 있어야만 함에 틀림이 없다, 그 이유는 모두 각각의 일반성은 그 자체 부분들과 비슷하기 때문이다.
그들이 야곱으로서는 표현할 수 없고, 이스라엘인 그들에게 주어진 새로운 품질로부터서 표현할 수 있다는 것에 주목해보면 이렇다: 이것은 특별하게 이삭의 후손이 아닌 특별하게 야곱의 후손이었다; 그 이유가 이삭의 후손은 야곱만으로부터가 아니고 에서도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아브라함의 후손은 더 더욱 아닌데, 그 이유는 이 후손에는 야곱, 에서, 이스마엘의 자식들, 그두라의 자식들, 시므란, 욕산, 므단, 미디안, 이스박, 수아, 그리고 그들의 아들들 (창. 25:1-4)도 포함되기 때문이다. 지금 야곱의 후손이 표현물이기를 고집하였기에(4290항), 그들은 야곱, 이삭, 아브라함으로서 같이 표현할 수 없었다. 그들이 야곱 같이 표현 할 수 없는 이유는 야곱은 교회의 외적 측면을 표현했고, 내적 측면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런 식으로 그들은 이삭 같이도, 아브라함 같이도 표현할 수 없었다.
이렇게 그들은 누구의 후손으로서 표현할 수 없었던 바, 표현을 위한 유일한 방법은 야곱에게 새로운 이름을 주는 것, 즉 새로운 품질을 수여하는 것이다; 새로운 품질은 내적 영적 인간, 또는 내적 영적 교회를 의미해야 한다. 이런 새로운 품질이 “이스라엘”이다. 주님의 모두 각각의 교회는 내적 측면과 외적 측면을 가지고 있다. 내적 교회는 표현되어지는 것, 그리고 외적 교회는 표현하는 것에 해당된다. 더욱이 내적 교회는 영적 (평면)이거나 천적 (평면)이거나 한다. 내적 영적 교회가 이스라엘에 의해 표현되어진다, 그리고 내적 천적 교회는 유다에 의해 이 후에 표현되어진다. 그러므로 (이스라엘과 유다로) 갈라짐이 만들어진다; 하여 이스라엘족은 그 자체로 왕국이었다 (이스라엘 왕국), 그리고 유태인도 그 자체로 왕국이었다 (유다 왕국); 이 두 왕국에 관한 것은 차후 주님의 신성한 자비로부터 살필 것이다. 그러므로 야곱(즉, 야곱의 후손)은 야곱으로서는 교회를 표현할 수 없었다, 그 이유는 이럴 경우 교회의 외적인 것만을 표현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내적 측면이기 때문에 이스라엘로서 표현을 이어가야만 한다.
내적 측면은 표현되어지는 것, 그리고 외적 측면은 표현하는 것임은 이미 설명되었지만, 추가해서 인간 자신으로부터도 살펴볼 수 있다. 인간의 말(speech)은 그의 생각을 표현한다, 그리고 그의 행동은 그의 의지를 표현한다. 따라서 말과 행동은 인간의 외적인 것들이고, 생각과 의지는 그의 내적인 것들이다. 더 나아가, 인간의 얼굴 자체도 그것의 다양한 모습을 수단으로 그의 생각과 그의 의지 모두를 표현한다. 얼굴의 표정에 의해 얼굴이 표현하는 것에 대해서는 누구에게나 너무나 잘 알려져 있다; 그 이유가 진솔한 그들의 내면의 상태들을 얼굴의 표정으로부터 보여질는지 모른다. 한 마디로, 신체의 모든 것들은 의도(animus) 속에 있는 것과 마음 속에 있는 것을 표현한다.
이 경우는 교회의 외적인 측면과도 비슷하다, 그 이유가 이것들도 신체의 경우와 비슷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적 측면은 혼과 비슷하다. 마치 제단과 제단 위의 제물은 외적인 것들로 알려져 있다; 마찬가지가 제단에 올린 빵(show-bread)들이다; 또한 등불을 가진 등잔대; 마찬가지로 영구히 타는 불; 이것이 내적인 것들을 표현했다는 것은 모든 이에게 알려져 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외 의식 절차의 경우도 마찬가지 이다. 이런 외적인 것들(표현물)이 외적 측면을 표현할 수 없었고, 내적인 것들을 표현했다. 이와 마찬가지가 야곱이 야곱으로서 표현될 수 없었던 이유는 “야곱”은 교회의 외적 측면이기 때문이고, 야곱이 이스라엘로서는 표현될 수 있었던 이유는 “이스라엘”이 교회의 내적 측면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야곱의 후손이 표현을 이어가기 위하여 주어진 새로운 품질에 의해 뜻해져 있다.

내적 역사적 의미에서, 그 이유가 왕자 같이 너는 하느님과 사람들과 경쟁하였다, 그리고 이겼다에 의해 그들의 공상들과 탐욕들 안에 있었던 명령 불복종 때문에가 의미되어 있는데, 이는 “하느님”과 “사람들”의 의미가 진리들과 선이다로부터 분명해진다. 위 말의 단어들이 여기서는 반대적 의미에서 사용되고 있다; 이 반대적 의미에서 야곱의 후손들은 내면적으로 진리들과 선들이 없고, 대신 거짓들과 악들이 있는 경우이다. 거짓들이 공상들이다, 그 이유는 그것들은 공상으로부터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악들은 탐욕들인데, 그 이유는 그것들이 탐욕 속에 있기 때문이다.
이 나라가 표현이기를 고집했다는 것, 즉 그들은 온 세계 어느 나라보다 월등하게 교회이기를 고집했다. 이것이 그들의 공상과 탐욕 안에 있는 명령 불복종 때문에 허용되어졌다는 것이 여기서 뜻해진다. 이 공상들과 탐욕들의 본성에 대한 것은 다른 삶에 있는 그들과의 상호 교류를 가져보지 않으면 아무도 알 수가 없다, 하여 나로 알도록 이것이 허락되었다. 하여 나는 거기서 그들과 가끔 이야기를 했었다. 그들은 다른 이들보다 자신들을 더 사랑한다, 그리고 그들은 세상의 재물을 사랑한다; 그리고 여느 어느 것보다 더 두려워하는 것은 자신의 영예를 잃는 것, 이익을 상실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날도 옛날과도 같이, 그들은 자신과 비교하여 타인을 경멸한다, 자신들을 위해 부를 축적함에 열띤 집중력을 발휘하고, (타인의 것에는) 소심하다. 이 나라가 이런 특성 속에 옛날로부터 있어 왔으므로, 그들은 거룩한 내적인 것 없이 외적인 것만에서 어떤 것들을 정확히 보존하는데에는 여느 다른 나라가 따라올 수 없었다. 고로 교회 속의 것들을 외적 틀 안에 표현할 수 있었다. 이것은 명령 불복종 같은 것을 생산한 공상과 탐욕들이기도 하다.
위와 똑같은 것들이 말씀의 역사물에서 그것들에 관련되어진 것들로서 나타난다. 처벌이 있은 후, 그들은 여느 다른 백성들이 흉내낼 수 없는 외적 부끄러워함 안에 있을 수가 있었다. 예를 들면, 그들은 하루종일을 땅에 납작 엎드린채로 있는다거나, 먼지에서 뒹굴며 삼일을 버틴다; 그들은 여러 날 동안 삼베옷을 걸치고, 옷을 찢고, 머리에 재를 뒤집어쓴 채로 소리내어 울었다; 그들은 며칠씩 계속하여 단식을 하며 폭발하듯 소리내어 쓴 슬픔을 나타냈다. 그러나 이런 행동들은 오로지 육체적 세상적 사랑으로부터, 그리고 드높여 있음과 재산의 상실을 두려함에서 이었다; 거기에 그들을 감동하게 한 어떤 내적인 것도 있지 않았다; 그 이유는 그들은 어떤 것이 내적인지를 아예 모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예 애당초부터 알기를 원하지 않고 있었다; 즉 사후 삶이 있다는 것, 또는 영원한 구원이 있다는 것 등등에 전혀 관심이 없었다는 말이다.
이로부터 분명한 것, 즉 이런 상태에 있으려면 거룩한 모든 내적인 것은 없어야 한다는 것, 그 이유가 이것은 거룩한 외적인 것과 일치하지 않기 때문, 즉 이 둘은 지독하게 반대적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한 그들은 교회의 표현물의 역할을 누구보다 더 잘할 수 있었다는 것, 즉 거룩한 어떤 내적인 것 없이도 외적 틀만에서 거룩한 것들을 표현할 수 있었다는 것; 고로 이 나라를 수단으로 천국들과 교통하는 어떤 것이 가능해 있을 수 있었다 (4288항).

29-32절. 그리고 야곱이 묻고 말했다, 바라건대 당신의 이름을 말해주십시오. 그리고 그는 말했다. 어찌하여 너는 내 이름을 묻느냐? 그리고 그는 거기서 그를 축복했다.
30 그리고 야곱은 그곳의 이름을 브니엘이라 불렀다. 그 이유는 내가 하느님을 대면하였으나 내 혼이 보전되었기 때문이다. 31 그리고 그가 브니엘을 지날 때 태양이 그에게 떠올랐다, 그리고 그는 그의 넓적다리를 절뚝거렸다. 32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아들들은 오늘에 이르기까지 넓적다리의 우묵함에 있는 것, 어긋나진 것의 신경을 먹지 않는다. 그 이유는 그가 야곱의 넓적다리의 우묵한 것을 건드려 그것의 신경을 어긋나게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야곱이 물어 말했다, 바라건대 나에게 당신의 이름을 말해주십시오. 이는 천사들의 천국과 그곳의 품질을 의미한다. 이는 야곱의 표현함이 신성한 자연 평면에서의 주님이시다로부터; 그리고 야곱이 물었던 이름, “하느님”, 그리고 “사람들”의 의미로부터, 이 둘과 야곱은 왕자 같이 경쟁해서 이겼는데, 이 둘은 진리들과 선들, 고로 진리들과 선들 안에 있는 이들이다 에서 분명해진다. 그리고 천사의 천국은 진리들과 선들로부터 천국이기 때문에, 이 천국이 여기서 주님이 이겨내신 “하느님과 사람들”에 의해 특별하게 의미되고 있다. 때때로 말씀에서도 천사들이 “하느님들”이라 불리우기도 하고, 이것이 진리들과 선들로부터 인데, 다윗서에서:
하느님이 하느님의 모임 안에 서셨다, 그분은 하느님들의 한 가운데에서 판결하셨다. 나는 말했다, 너희는 하느님들이다, 그리고 너희의 모두는 지극히 높으신 분의 아들들이다 (시. 82:1, 6)
“하느님의 모임”, 그리고 “하느님들”이 천사의 천국을 표시함이 분명해진다. 다윗서에서:
하늘에 있는 누가 여호와께 비교될 수 있을까? 누가 하느님의 아들들 사이에서 여호와에게 견주어 질 수 있을까? (시. 89:6).
다시:
너희는 하느님들의 하느님에게 고백하라; 너희는 주들 중의 주에게 고백하라 (시. 86:2, 3).
위 구절들로부터, 그리고 왕자 같이 하느님(God)과 경쟁하고 이길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다는 사실로부터, 그리고 마찬가지로 “하느님(God)”이라 불리운 자가 자기 이름을 기꺼이 밝히지 않았다는 사실로부터, 이것은 주님께서 싸우신 천사의 천국이었음이 분명해진다. 깊은 비밀이 이 말들 안에 감추여놓여 있다는 것은 이 말들 자체로부터 분명해진다:
즉 “어찌하여 너는 내 이름을 묻는 것이냐?”로부터 이다. 만일 이 자가 여호와 하느님이었다면, 그분이 자기 이름을 감추실리 만무하다; 또한 야곱이 “당신의 이름이 무엇인가?”라고 물어볼 일도 없었을 것이다; 그 이유가 이름을 물어보는 것은 하느님(God) 자신 외에 또 다른 자이기에 물어본다는 것을 함축하기 때문이다.
시험들 안에서의 주님은 마지막 천사들 자신들과, 아마 천사의 천국 전체와 싸우셨다는 것은 아직까지 드러내져오지 않았던 비밀이다. 그러나 이 주제를 두고 천사들은 가장 높은 지혜와 총명 안에 있으나, 그들은 주님의 신성으로부터 지혜와 총명의 모든 것을 가진다. 천사 자신들, 또는 천사의 자기 자신(own)으로부터서 그들은 지혜와 총명의 어떤 것도 가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들이 주님의 신성으로부터 진리들과 선들 안에 있는 만큼에서 그들은 슬기롭고 총명하다. 천사들이 자신들로부터 지혜와 총명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을 그들은 공개적으로 고백한다; 만일 누군가가 천사에게 지혜와 총명이 당신들로부터 이다고 말한다면, 분노하기까지 할 정도이다; 그 이유가 이럴 경우 신성인 것을 신성으로부터 가져다가 내 것이라 우기는 격이기에 이는 도둑질하는 것임을 그들은 알고 지각하기 때문이다. 또한 천사들이 말하는 바, 자기 자신으로부터 있는 모든 것들은 악과 거짓, 이것은 유전적으로 받아진 것에 자기들이 세상에 인간으로 있었을 때 생겨난 실제의 모두로부터 이다는 것이다; 그리고 악과 거짓은 자기들로부터 씻어지거나 닦아지지 않는다는 것, 고로 자기들은 의롭다고 칭해져 있을 뿐이다는 것, 따라서 악과 거짓 모두가 자기들과 남아 있다는 것, 그리고 단지 주님에 의해 자기들은 자신들의 악과 거짓으로부터 물러나서 진리와 선 안에 보존되는 것 뿐이다고 말한다. 모든 천사들이 이런 사항들을 고백하는 바, 이것을 알고 믿지 않으면 누구도 천국 안으로 입장하지 못한다; 이와 달리해서 천사들은 주님으로부터 있는 지혜와 총명의 빛 안에 있어질 수 없다, 결과적으로 선과 진리 안에 있을 수 없다. 이상으로부터 욥기서(15:15)의 말과 같이, 천국이 하느님의 눈에서 순수해 있지 않다는 것이 어떻게 이해되어야 할지가 분명해질는지 모른다.
이렇기에, 주님께서는 보편적 천국(천국 전체)을 아울러 모두 천국의 질서로 환원해 놓기 위하여, 그분은 천사들로부터의 시험을 자신 안으로 용인하셨다; 즉 천사들의 자기 자신으로부터 있는 만큼에서, 또는 천사들이 선과 진리 안에 있지 않은 만큼에서 그들로부터와질 수 있는 시험까지 (마지막으로) 용납하신 것이다. 따라서 이 시험은 (그분이 겪으신 시험 중에서) 가장 깊은 시험이다. 그 이유가 이 시험은 오로지 목적(end) 측면 안으로 진입된 시험이고, 따라서 눈에 띄어지기가 가능할 수 없을 만큼 아주 미묘하다. 그러나 그들은 자기들 자신 안에 있지 않은 만큼에서, 그 만큼 그들은 선과 진리 안에 있다, 그리고 그만큼 시험되지 않는다. 더 나아가 천사들은 주님에 의해 계속적으로 완전해진다, 그렇다고 주님의 신성한 지혜와 총명에 견주어질 만큼 자기들의 지혜와 총명이 완전해지는 것은 영원히 결코 있지는 않다; 그 이유가 천사들은 유한하고, 주님은 무한이시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유한과 무한 사이에 비교나 견주거나 하는 따위는 아예 가능하지 않다는 말이다. 이런 모두로부터 왕자 같이 야곱이 경쟁한 대상인 하느님에 의해 뜻해지는 것; 또한 하느님이란 자가 자기 이름을 기꺼이 밝히지 못한 이유를 알았으리라 본다.

어찌하여 너는 내 이름을 묻느냐? 이는 천국은 그 자체를 기꺼이 밝히 드러내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이는 앞 대목에서 이미 살폈다.

그리고 그는 거기서 그를 축복했다. 이는 신성한 천적 영적 평면과 결합함을 의미한다. 이는 “축복하다”가 결합함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것이 신성한 천적 영적 평면과 결합함이다는 것은 야곱에 관해 진행해온 것, 즉 그가 이스라엘이라 명명되어짐으로부터 분명해진다; 그 이유가 이스라엘에 의해 신성한 천적 영적 평면에서의 주님이 표현되기 때문이다. 천적 영적인 것이 무엇인지는 앞에서 이미 살폈으므로 알고 있으리라 본다.

그리고 야곱은 그곳의 이름을 브니엘이라 불렀다. 이는 시험들의 상태를 의미한다.
이는 사항들의 시리즈로부터 분명해진다; 그 이유가 고대 시대에서 어떤 특이한 것이 발생한 장소에는 거기서 발생한 것과 그것의 상태를 의미한 이름들이 주어졌기 때문이다. 본문의 장소에는 시험들을 의미하는 이름이 주어졌다, 그 이유가 시험의 상태들이 야곱과 더불어 씨름이나 경쟁함이라는 말들이 등장하였기 때문이다. 원어에서의 경우, “브니엘”은 “하느님의 얼굴”을 뜻하고, 그리고 “하느님의 얼굴을 보는”것은 최고로 비통한 시험들을 견뎌냄을 뜻하는데, 아래에서 더 살핀다.

그 이유가 내가 하느님을 대면하였으나 내 혼이 보전되었기 때문이다. 이는 그분께서는 마치 시험들이 신성으로부터 있었던 듯한 아주 비통한 시험들을 견뎌내셨다를 의미한다. 이는 “하느님을 봄”의 의미가 내면의 것들을 통하여, 즉 선들과 진리들을 통하여 그분에게 접근함, 고로 현존함을 표시함이다로부터; 그리고 “얼굴”의 의미가 내면의 것들이다로부터, 결과적으로 생각들과 애착들, 그 이유가 생각들과 애착들은 마음과 의도함 속에 있어 내면의 것들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얼굴에 그것들 자체가 명백해지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리고 “내 혼이 보전됨”의 의미가 신성한 현존을 견딤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 모든 것들에 의해 그분은 시험들이 마치 신성으로부터 온 듯한 최고로 비통한 시험들을 견뎌내셨음이 의미된다는 것은 대략적(proximate)이고 희미한(먼, remote) 수준에서 찾아지는 시험의 원인 말고는 나타날 수 없는 시험의 수준이다. (다시 말해 우리로서는 지독히 간단 단순한 차원에서만 살필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역자주) 대략적인 원인은 인간을 시험으로 인도하는 것들인 인간 안에 있는 악들과 거짓들, 결과적으로 악들과 거짓들을 쏟아붓는 악령들과 악귀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심을 가지지 않으면 아무도 시험되어질 수 없다 (즉 어떤 영적 시험이 수행되어질 수 없다); 그 이유가 영적 시험은 양심의 고통밖에 더 아니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천적이거나 영적인 선 안에 있지 않으면 누구도 시험되어질 수 없다; 그 이유는 이것을 지닌 이들이 양심을 가지기 때문이다; 이외 다른 사람들은 양심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고, 양심이 무엇인지조차 모르고 있다.
양심은 주님으로부터의 새로운 의지력과 새로운 이해력이다; 고로 인간의 이 능력 안에 주님이 현존하신다; 그리고 이 인간이 선 또는 진리에 애착함에 비례하여 주님은 더 가까이 현존하신다. 만일 인간이 자기의 선과 진리에 애착함에 비례하여 보다 더 주님의 현존이 가까우면, 인간은 시험 안으로 와진다. 그 이유는, 인간 안에 있는 선들과 진리들에 의해 유연해 있는 당사자의 악들과 거짓들이 더 가까워진 현존을 견뎌낼 수 없는 때문에서이다. 이것은 다른 삶에서 거행되는 것들에서 보여질는지 모른다: 즉 악령들은 고통, 괴로움을 느끼는 것의 시작 없이 어떤 천국의 사회에 접근할 수 없다는 것; 또한 악령들은 천사들이 자기들을 쳐다보는 것에 견뎌낼 수 없다, 그 이유는 이때 그들은 너무나 번민스러워져 졸도하고 말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한 지옥이 천국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다는 사실로부터, 그 이유는 지옥이 천국을 견뎌내지 못하기 때문, 즉 천국에 계신 주님의 현존을 견뎌낼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말씀에서 말해진다:
이때 그들은 산들에게 말하기를 시작할 것이다, 우리 위에 떨어져다오; 그리고 언덕들에게 우리를 감추어다오 (눅. 23:30).
그리고 그 밖의 책에서:
그들은 산들과 바위들에게 말할 것이다, 우리 위에 떨어져라, 그리고 우리를 옥좌 위에 앉아계신 그분의 얼굴로부터 감추어다오 (계. 6:16).
더욱이 지옥에 있는 악들과 거짓들로부터 방산되는 안개 자욱하고 새까만 역청 같은 것이 산이나 바위 같이 나타난다, 이 아래 그들이 감추여져 있다.
이런 모두로부터, “네가 하느님을 얼굴과 얼굴로 보았었는데, 나는 보전되었다”에 의해 그것들이 마치 신성으로부터 인 듯한 최고로 비통한 시험들을 의미한다. 시험들과 괴로움들이 마치 신성으로부터 인 듯처럼 나타난다, 그 이유가 앞에서 말했듯, 주님의 신성한 현존을 통하여 밖으로 출시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들은 신성으로부터, 주님으로부터 있지 않고, 시험받아지고 괴로움 당해지는 당사자 안에 있는 악들과 거짓들로부터 이다. 그 이유가 주님으로부터 진행되는 것은 선하고 진정하고 자비한 거룩함 외에 없기 때문이다. 선하고 진정하고 자비한 이 거룩함이 악들과 거짓들 안에 있는 이들이 견딜 수 없는 것들이다, 그 이유는 이 둘은 완전 반대에 있기 때문이다. 악들과 거짓들, 그리고 무자비함들은 거룩한 것들에 폭력을 행사하기를 꾸준히 고집하고 있다. 이것이 위에서 “마치 신성으로부터 인 듯한” 말 안에 뜻해져 있다.
여호와를 대면하고 살아 있을 자는 아무도 없다는 것은 고대인들에게 알려져 있다, 그리고 이 지식이 고대인들로부터 야곱의 후손들에게까지 전수되었다; 그 이유가 그들이 천사를 보았는데 살아있을 때, 너무나 감격스러워했던 이유 때문이다. 사사기서에서:
기드온이 보았더니 그는 여호와의 천사였다; 그러므로 기드온이 말했다, 주 여호비시여! 제가 여호와의 천사를 대면하였던 까닭입니다. 그리고 여호와께서 그에게 말하셨다, 네게 평화가 있으 라, 두려워 말라, 너는 죽지 않을 것이다 (사. 6:22, 23).
사사기서에서:
마노아가 그의 아내에게 말했다, 우리는 정녕 죽을 것이다, 그 이유는 우리가 하느님을 뵈었기 때문이다 (사. 13:22).
그리고 모세의 책에서: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하셨다, 너는 내 얼굴을 볼 수 없다, 그 이유가 인간이 나를 보지 않아야 살아 있기 때문이다 (출. 33:20).
모세가 여호와와 대면하여 이야기를 했다는 것 (출. 33:11); 그리고 여호와는 그를 대면하여 아셨다는 것 (신. 34:10) 등등의 모세에 관한 말들의 의미는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적당한 인간의 형체 안에서 나타나셨다는 것, 예를 들면 내가 천사들에게서 배울 때의 경우 같이, 그와 더불어 앉으신 긴 수염을 가지신 노인 같은 외적 형상으로 나타나셨음을 뜻한다. 이로부터 또한 유태인들이 여호와를 길고 눈 같이 흰 수염을 하신 노인 자체로밖에, 그리고 여느 신들보다 더 큰 기적들을 베푸시는 분이시다는 것 정도로밖에 더 다른 생각을 가진 것이 없다는 것도 알게 된다. 그들은 그분을 최고로 거룩하심으로는 간주하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그들이 무슨 거룩함이 있었는지를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들은 그분으로부터 진행되는 어떤 거룩한 것도 볼 수가 없었는데, 그 이유는 그들은 어떤 내적인 것이 없는 (100%) 육체적, 세상적 사랑 안에 있었기 때문이다.

태양이 그에게 떠올랐다. 이는 선들의 결합을 의미한다. 이는 “태양이 떠오름”의 의미가 선들의 결합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새벽이 오르다(새벽이 밝아지다)”에 의해서는 결합이 가까이 있을 때, 또는 결합의 개시가 있을 때가 의미된다. 이에 비해 “태양이 떠올랐다”는 결합 자체를 표시한다; 그 이유가 내적 의미에서 “태양”은 천적인 사랑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이것은 선들을 의미한다; 그 이유가 이것들은 이 사랑(천적인 사랑, 또는 주님을 사랑함)으로부터 있기 때문이다. 천적 수준의 사랑이 당사자에게 명명백백해 있을 때(즉 그것이 당사자에게 관찰될 때), 태양이 자기 위에 “떠오른”다고 말해진다, 그 이유는 이 사랑으로부터의 선들이 그때 당사자와 결합되기 때문이다.

그가 브니엘을 지날 때. 이는 선 안에 있는 진리의 상태를 의미한다. 이는 “브니엘”의 의미가 선 안에 있는 진리의 상태이다로부터 분명해진다. 그 이유가 얍복은 야곱이 가나안의 토지로 들어갈 때, 야곱에 의해 처음 건너진 시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를 수단으로 진리에 애착함으로부터의 처음 은근히 심어짐이 의미된다. 브니엘을 그가 지금 지나감, 이를 수단으로 선 안으로 은근히 심어지는 진리의 상태가 의미된다. 또한 선의 결합이 취급되는데, 선은 선 안에 진리가 있지 않으면 선일 수 없다; 그 이유가 선은 그 선의 품질과 형체를 진리로부터 가지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선은 선 안에 진리를 가지지 않으면 그 만큼에서 당사자 안에서 선이라 불리울 수 없다는 말이다; 그러나 진리의 경우, 그것의 실재(essence), 즉 생명을 선으로부터 받는다; 이럴진대, 선의 결합이 취급되는 주제에서 선 안에 있는 진리의 상태 또한 취급될 수밖에 없다.
선 안에 있는 진리의 상태에 주목해보면, 이것은 실로 설명 못할 바는 아니나, 그럼에도 이것의 납득은 천적인 지각을 가진 이들일 경우에만 확실히 가능할 수 있다. 이 외의 사람들은 진리가 선과 결합함이라는 것을 생각조차 해보는 일도 거의 없다, 그 이유는 그들과 더불어 진리가 희미함에 있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대부분의 인간들은 자기들이 교리적인 것들로부터 배운 것이 진리라고 부르고, 이 진리에 따라 행동된 것이 선이라고 부르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지각을 가지는 이들은 자기들의 이해력에서(즉, 자기의 지적인 시각에서) 천적인 빛 안에 있다, 그리고 그들은 선과 결합된 진리들에 감명되어진다. 마치 눈이나 육체의 시각이 봄철 정원의 꽃이나 풀밭에서 감동받는 것과 같다; 그리고 내면의 지각 안에 있는 이들은 꽃들로부터 발산되는 꽃향기를 맡음 같이 이 진리들에 감동되어진다. 이와 같은 것이 천사들의 상태이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천사들은 인간보다 더 선 안에 있는 진리의 결합과 은근히 심어짐, 그에 따른 끝없는 것들의 모든 차이점들과 다양함들을 지각한다; 그 이유가 인간은 어떤 은근히 심어짐이나 결합이 있는지조차 모르고, 이것을 수단으로 영적으로 되어간다는 것 또한 모르기 때문이다.
이 주제에 관한 어떤 관념을 전달하기 위하여 몇 마디 말을 보태야 할 것 같다. 내적 인간을 구성하는 두 가지 것은 이해력과 의지력이다. 진리들은 이해력에, 선들은 의지력에 속한다; 그 이유가 인간이 이것이 이렇다라고 알고 이해하는 것을 진리라고 부르고; 그가 의지로부터 행하는 것, 고로 그가 뜻하는 것을 그는 선이라고 부르기 때문이다. 이 두 능력들은 하나를 구성해야 한다. 이것은 눈의 시력으로, 그리고 이 시력을 수단으로 경험되는 유쾌함과 기쁨을 가지고 예증될는지 모른다; 눈이 대상을 볼 때, 눈은 대상의 형체, 색깔, 동시에 부분적, 전체적으로 있는 아름다움에 일치하는 그것들로부터의 유쾌함과 기쁨을 경험한다; 한 마디로, 시리즈 안으로의 질서적인 배열에 일치하여 있는 유쾌함과 기쁨을 경험한다. 이 유쾌함과 기쁨은 (육체의) 눈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볾의 의도와 애착 속에 있다; 그리고 인간이 그것들로 애착하는 한, 그 만큼에서 그는 그것들을 보고, 그것들을 기억 안에 보관한다, 그 반면 눈이 애착 없이 본 것들은 지나쳐 가고 기억 안에 심어지지도 않는다, 고로 본 것과의 결합도 없다.
이로부터 분명해지는 바, 외적 시각의 대상들은 애착함의 유쾌함과 기쁨에 일치하여 심어진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들은 이 유쾌함과 기쁨 안에 있다는 것이다; 그 이유가 비슷한 유쾌함이나 기쁨이 상기될 때, 이 대상물들이 마음에 떠올리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비슷한 대상물이 마음에 떠오를 때, 그로 인해 있었던 유쾌함과 기쁨이 상기된다. 물론 상태들에 따라 다양해지기도 한다. 내적 시력인 이해력도 똑같다; 즉 내적 시각의 대상은 영적이다, 그리고 진리들이라 불리운다; 이 대상들의 분야는(들판은) 기억이다; 이 시각으로부터의 유쾌함과 기쁨은 선이다; 고로 선은 진리들이 뿌려지고 심어지는 들판이다. 이상 살핀 바로부터 진리가 선 안으로 은근히 심어짐이 무엇인지가 어느 정도 감지되리라 본다. 그리고 선 안에 있는 진리의 결합이 무엇인지 또한 알았을지 모른다; 또한 무슨 선이 여기서 취급되는지, 이에 관련하여 천사들은 인간이 아무것도 지각 못하는 동안 셀 수 없이 많은 것들을 지각한다.

그리고 그는 그의 넓적다리를 절뚝거렸다. 이는 선들과 함께 한 모든 진리들이 천적 영적 선으로 들어 갈 수 있도록 하는 질서에로 아직은 진리들이 배열되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이는 “절뚝거리다(halt, 멈춰서다)”의 의미가 진짜 진리들이 아직 들어 있지 않은 선, 그러나 일반적인 것들 안으로는 진짜 진리들이 심어질 수는 있고, 이럴 경우 진짜 진리와 완전 불일치되는 것은 아니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는 이후 더 설명한다.) 그러나 주님이 취급되는 최고 의미에서, “넓적다리를 절뚝거림”에 의해 선과 함께한 진리들이 천적 영적 선 안으로 들어가도록 하는 질서에로는 아직 배열되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진리들이 선 안으로(여기서는 천적 영적 선 안으로) 들어갈 때, 진리들이 있어야만 하는 질서에 주목하면, 이 대목은 납득력에 설명되어질 수가 없다; 그 이유는 이것은 우선 질서가 무엇인지, 그리고 이때 진리들의 질서인 것을 알아야 하기 때문; 또한 천적 영적 선이 무엇인지를, 그리고 그 다음 어떻게 진리들이 선을 수단으로 그것 안으로 들어가는지도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비록 이런 사항들이 서술되어진다 해도, 그것들은 천적 지각 안에 있는 이들 외에는 명백해지지 않는다, 그리고 자연적 지각만으로 있는 이들에게는 결코 납득되지 않는다. 그 이유가 천국의 지각 안에 있는 이들은 주님으로부터 천국의 빛 안에 있기 때문, 이 빛 안에 지혜와 총명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연적 빛 안에 있는 이들은 그들의 빛 안에 천국으로부터의 빛이 흘러들지 않는 이상 어떤 총명이나 지혜 안에 있지 않는다. 단지 거울 속의 지혜나 총명, 자연적 빛 안에서 표현된 것, 가상적일 뿐인 지혜나 총명이다; 그 이유가 천국의 빛의 유입 없이, 자연적 빛은 영적인 진리의 어떤 것도 바라보는 수준으로 표출되지 않기 때문이다.
진리들이 선 안으로 들어가기 위하여 진리들이 있어야만 하는 질서에 관하여는 이 정도까지는 말해볼 수 있다- 즉 모든 진리들, 선들 같이, 일반적, 특수적 측면들에서의 모든 진리들, 그리고 아주 작은 낱개 사항들조차, 천국에서는 마치 우리의 육체에 있는 모든 기관, 조직, 부위가 각각의 일을 하고 있는 듯해도 서로 유기적이고 밀접해서 하나의 결과를 생산하듯 하는 질서로 배치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런 질서로부터 진리들과 선들이 배치된 것이 웅대한 사람이라 불리운다. 이것의 생명 자체는 주님으로부터 이고, 이분은 그분 자신으로부터 일반적, 특수적 모든 것들을 이런 질서 안으로 배치하신다; 그러므로 천국은 주님의 형상과 모습인 것이다; 그러므로 진리들이 이런 질서에서 배치될 때, 그것들은 천국의 질서 안에, 선으로 들어갈 수 있다. 모두 각각의 천사와 더불은 진리들과 선들이 이런 질서 안에 있다; 그리고 거듭나지는 인간과 더불은 선들과 진리들 또한 이런 질서 안으로 배열되어진다. 한 마디로, 천국의 질서는 이웃을 향한 선행 안에 신앙으로부터 있는 진리들이 배열되는 것, 그리고 주님을 사랑함으로부터 있는 선 안에 이런 선들이 배치됨이다.
“절뚝거리는(halt)” 것은 아직 진짜 진리들은 아닌 것이 선 안에 있음을 표시한다는 것, 그러나 그럼에도 진짜 진리가 은근히 심어질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이 진리들이 진짜 진리들과 불일치한 것은 아니다는 것을 표시한다는 것; 고로 “절름발이(lame)”는 선 안에 있기는 하나, 그들의 진리에 무지함 때문에 진짜 선 안에 있지는 못한 이들이다 (이런 선 안에 서로의 사랑 안에 있는 이방인들이 속한다.) “절름발이”와 “절뚝거리다”가 좋은 의미에서 언급되는 말씀을 아래에서 읽어보자:
이사야서에서:
소경의 눈이 열릴 것이다, 그리고 귀머거리의 귀가 열릴 것이다; 그 다음 절름발이가 숫사슴 같이 뛸 것이다, 그리고 벙어리의 혀가 노래할 것이다 (이. 35:5, 6).
예레미야서에서:
잘 보아라, 나는 그들을 북의 토지로부터 데려올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들을 땅의 측면들로부터 그러모을 것이다, 그들 사이에 소경과 절름발이, 그리고 아이와 함께 산고를 겪는 그녀와 아이를 거느린 여인이 있을 것이다 (이. 31:8).
미가서에서:
그 날에, 여호와께서 말하신다, 나는 절뚝거리는 그녀를 모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내몰린 그녀를 집합시킬 것이다, 그리고 나는 절뚝거리는 그녀를 남은 자로 만들 것이다, 그리고 내몰렸던 그녀로 수많은 나라로 만들 것이다; 그리고 여호와께서 그들을 시온의 산에서 통치하실 것이다, 이 후로부터 영원까지 (미. 4:6, 7).
스바냐서에서:
그때에 나는 절뚝거리는 그녀를 구할 것이다, 그리고 내몰린 그녀를 집합시킬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들을 찬양과 이름으로 만들 것이다 (습. 2:19).
위 구절들에서 “절름발이”와 “절뚝거림”이 글자대로의 것을 뜻하지 않는다는 것이 모든 이에게 보여질는지 모른다, 그 이유가 그들이 “뛸 것이다”, “집합시킬 것이다”, “남은 자로 만들 것이다”, “구원할 것이다”라고 그들을 두고 말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들이 선 안에 있기는 하나 그 선에 필적하는 진리들 안에 있지 않는 이들이 의미된다. 이들에 해당되는 이들이 호의적인 이방인들의 경우이다는 것, 그리고 또한 교회 내에 이와 비슷한 조건에 있는 이들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의미에서 누가복음서에서 주님이 말씀하신다:
예수께서 말하셨다, 너희가 잔치를 만들 때, 가난한 자, 불구자, 절뚝거리는 자, 소경을 부르라; 이때 너희는 복받을 것이다 (눅. 14:13, 14).
다시:
집주인이 하인에게 말했다, 성읍의 큰길과 작은 길로 빨리 나가라, 그리고 가난한 자, 불구자, 절름발이, 소경을 이리로 데려오라 (눅. 14:21).
고대 교회에서 이웃, 또는 그들이 선행의 선을 수행해야할 이웃들을 계층별로 구별했었다; 그래서 그들은 어떤 계층은 “불구자”라고, 어떤 계층은 “절름발이”라고, 어떤 계층은 “소경”이라고, 그리고 어떤 계층은 “귀머거리”라고 불러서 이 말들을 가지고 영적으로 그런 상태들을
뜻했다. 또한 그들은 어떤 계층들을 “배고픈 자”라고, “목마른 자”라고, “외국인”이라고, “벌거벗은 자”라고, “병든 자”라고, “포로된 자”라고 불렀다 (마. 25:33-36); 그리고 어떤 계층을 두고 “과부”, “고아”, “궁핍한 자”, “가난한 자”, “비천한 자”라고 불러서 이들을 수단으로 진리와 선 측면에서 이와 같은 이들을 뜻했다, 그리고 가르침을 받아들이게 적합한 이들을 뜻했다, 하여 그들의 길에서 인도를 받고 그들의 혼 측면이 내세를 위해 준비되는 이들을 뜻했다. 그러나 오늘날 선행이 교회를 만들지 않고 신앙이 만들기에, 이런 인물들을 수단으로 말씀에서 뜻해지는 의미는 통째로 알려지지 않고 있다; 그렇지만 최소한 성경에서 언급되는 이런 인물들이 실제로 그런 인물들이 잔치에 초대되어야 한다거나 집주인의 명령으로 잔치에 참석하게 하라고 우리에게 명령하는 말씀은 아닐 것 같다는 정도는 감지한다. 그러나 이렇게 영적으로 있는 이들이 뜻해진다는 것, 그리고 주님에 의해 말해지는 모든 것 안에는 신성이 담겨 있을 것이다는 것, 결과적으로 천적이고 영적인 것이 담겨 있을 것을 예상 못하는 미련한 이들은 없으리라 본다.
비슷한 의미가 있는 주님의 말씀은 더 있다:
만일 네 발이 너로 넘어지게 한다면, 그것을 절단하여라; 네가 절름발이로 생명으로 들어가는 것이, 두 발을 가지고 꺼질 수 없는 불의 게헤나(지옥)로 던져지는 것보다 낫다
(막. 9:45; 마. 18:8);
걸려넘어지는 원인이어서 “절단되어야만 하는 발”에 의해 자연적 평면이 뜻해진다; 즉 영적인 것에 한결같이 반대하는 자연적인 것, 하여 진리들에 손상을 입히려 대든다면 파괴해야만 하는 자연적인 것을 뜻한다; 다시 말해 영적인 진로에 사사건건 불일치하고 진로를 방해하는 자연적인 것들을 말한다. 이렇다면 진리를 부정하고 있을지라도 단순한 선 안에라도 있는 것이 더 낫다 라는 말이다. 이것이 “절름발이로 생명으로 들어감”에 의해 의미되어 있다.
“절름발이”에 의해 선이 없음에 있는 이들, 그로부터 진리 안에도 없는 이들도 의미된다:
그때 많은 전리품을 나눌 것인데, 절름발이도 전리품을 약탈할 것이다 (이. 33:23).
다윗서에서:
내가 절뚝거릴 때, 그들은 자신들을 함께 모으고 기뻐한다; 모든 절름발이가 나에 맞서려고 자신을 모두 그러모은다 (시. 35:15).
“절름발이”에 의해 위와 같은 것들이 의미되었기에 절름발이인 어떤 것을 제물로 바치는 것이 금지되었다 (신. 15:21, 22; 말. 1:8, 13); 또한 절름발이인 아론의 씨의 어떤 자도 성직의 임무를 수행하지 못하게 했다 (레. 21:18). 절름발이와 더불어 “소경”도 비슷하다, 그 이유가 “소경”은 좋은 의미에서 진리에 무지한 상태 안에 있는 이들, 그리고 반대적 의미에서 거짓들 안에 있는 이들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원어에서 “절름발이”가 단어 하나로 표현된 경우가 있고, “절뚝거리는 자”라고 표현할 경우도 있다, 그리고 “절름발이”에 의해서는 적절한 의미에서의 경우, 자연적 외관과 감각들의 오류 때문에 영적 진리들이 흘러들 수 없는 자연적 선 안에 있는 이들이 의미된다; 그리고 반대적 의미에서 자연적 선 안에 있지 않은 이들, 그러나 악 안에 있는 이들, 하여 영적 진리의 유입이 모두 장애를 받는 이들이 의미된다; 이에 반해 “절뚝거리는 자”에 의해서는 일반적 진리들이 받아들여지기는 하는 자연적 선 안에 있는 이들, 그러나 그들의 무지함 때문에, 특별한 진리나 개별적 진리들은 받지 못하는 이들이다; 그리고 반대적 의미에서 악 안에 있으나 일반적 진리조차도 받지 않는 이들이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아들들은 넓적다리의 우묵함에 있는 것, 어긋난 것의 신경을 먹지 않는다. 이는 거짓들인 것 안에 있는 진리들은 제 것 삼아지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이는 “먹는다”의 의미가 결합됨과 자기 것이 되게 함이다로부터; 그리고 “신경”의 의미가 진리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 이유가 선 안에 있는 진리들은 마치 육체 안에 있는 신경 같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선은 살이다(flesh). 비슷한 것들이 힘줄과 살에 의해 의미된다. 에스겔서에서:
고로 주 여호비께서 이 뼈들에게 말하셨다, 나는 너희 위에 힘줄을 놓을 것이다, 그리고 네 위에 살을 가져올 것이다, 그리고 나는 네 안에 숨을 놓을 것이다; 그리고 내가 잘 보았더니, 보라 그들 위에 힘줄이 있었다, 그리고 살이 올라왔다 (겔. 37:5, 6, 8).
위 구절의 주제는 인간의 새로운 창조, 즉 거듭남이다. 그러나 진리들이 비틀려져 버렸을 때, 그때의 진리들은 더 이상 진리들이 되지 못하고, 진리들에 반대된 쪽으로 비틀림에 비례하여 진리들은 거짓들에 앞지름을 당해 있다; 그러므로 “어긋나진 것의 신경”에 의해 거짓이 의미된다. (라틴어의 단어 신경은 신경과 힘줄 모두를 뜻한다. 역자주) 이로부터 분명한 바,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아들들은 넓적다리의 우묵한 것의 신경을 먹지 않는다”가 거짓들 안에 있었던 이런 진리들은 자기 것 삼아지지 않았다가 의미된다. 이런 것들이 이스라엘의 아들에 관해서라고 말해지는 이유는 “이스라엘”에 의해 신성한 천적 영적 평면이 의미되기 때문, 그리고 “아들들”은 진리들이 의미되기 때문이다; 고로 의미인즉, 신성한 천적 영적 평면으로부터의 진리들은 어떤 거짓들을 자신들에게 자기 것이 되게 하지 않았다 이다.

오늘에 이르기까지. 이는 거짓들이 인접해서는 안됨은 영원하도록 임을 의미한다. 이는 “오늘에 이르기까지”의 의미가 이 말이 말씀 어디에서 사용되든 영구적이고 영원한 것임에서 알게 된다.

그 이유는 그가 야곱의 넓적다리의 우묵한 곳을 건드려 그것의 신경이 어긋났기 때문이다. 이는 그 이유를 의미하는데, 거짓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는 “야곱의 넓적다리를 건드림”의 의미가 거짓들이 있었기 때문에 여기서는 이유(reason)가 있음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상으로 지금까지 설명해온 똑같은 단어들이 야곱의 후손도 취급한다는 것, 그리고 이 의미는 보다 낮은 수준에서의 의미이다는 것, 또한 이 의미는 내적 역사적 의미라고도 불리운다. 이 의미에서 같은 구절이 어떻게 이해되는지를 아래에서 설명한다.

내적 역사적 의미에서 그리고 야곱이 묻고 말했다, 바라건대 당신의 이름을 말해주십시오에 의해 악령들이 의미된다. 이는 이런 의미에서 있는 많은 것들로부터 알는지 모른다. 이 의미가 이 구절의 말들과 이어지는 말들에서 야곱의 후손을 서술함에서 보여진다. 선한 영들이 아니고, 악한 영들일 것은 그가 야곱과 더불어 씨름했다는 것인데, 이때 “씨름”이 시험을 의미하기 때문; 그리고 시험은 선한 영들로부터서는 결코 그 원인이 있지 않다는 것, 오직 악령들로부터서만 있다는 것; 그 이유가 시험은 인간 안에 있는 악과 거짓의 흥분이기 때문이다. 선한 영과 천사는 악들과 거짓들을 결코 흥분시키지 않고, 그것들에 맞서 인간을 방어해주고, 그것들을 선쪽으로 구부린다; 그 이유가 선한 영은 주님에 의해 인도되기 때문; 그리고 주님으로부터는 거룩한 선과 거룩한 진리만이 진행되기 때문이다. 주님은 누구도 시험하시지 않는다는 것은 많은 이들이 교회 안에 받아진 교리들로부터 알는지 모른다, 또한 이에 대하여는 이미 살피기도 했다. 이로부터, 또한 야곱의 후손이 광야에서와 그 이후의 모두에서 모두 각각의 시험에서 길을 주었다는 사실로부터 본문의 야곱과 씨름한 자는 선한 영이 아닌 악령들임이 분명해진다. 더욱이 여기서 “야곱”에 의해 의미된 이 나라는 영적 사랑, 천국의 사랑 어느 사랑 안에도 있지 않았고, 세상적, 육체적 사랑 안에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인간들과 더불은 악령의 현존은 인간 당사자의 사랑들에 일치하여 결정되어진다. 선한 영들과 천사들은 영적인 사랑이나 천국의 사랑 안에 있는 이들과 더불어 현존한다, 그리고 악령들은 육체적이고 세상적인 사랑 안에만 있는 이들과 더불어 현존한다; 그리고 모든 이는 자신의 목적들의 품질, 자기 사랑의 품질을 관찰해보기만 해도 자기와 더불은 영의 품질을 그 만큼에서 알는지 모른다; 그 이유가 모든 이는 자기가 사랑하는 것의 목적을 가지기 때문이다.
(씨름한) 영이 자신을 하느님(God)이라고 부른 이유는 야곱이 이를 믿었기 때문에서 이다; 그의 후손도 이와 같아서, 여호와께서 표현적으로만 현존하셨을 때, 그들은 여호와가 자기들의 거룩한 외적인 것들 안에 계신다고 한결같이 믿었는데, 이는 아래에서 살핀다. 또한 그들이 믿은 것은, 여호와께서는 시험으로 인도하신다는 것, 그분으로부터 모든 악이 있었다는 것, 그리고 그분이 처벌을 단행하실 때 성내시고 격노하신다는 것이다. 이렇게 믿은 것이 말씀에서 표현되어져 있으나, 그럼에도 여호와께서는 누구도 시험 안으로 결코 인도하시지 않는다는 것, 어떤 악도 그분으로부터 있지 않다는 것, 그분이 성내시거나 격노하신 적이 없다는 것이다. 야곱과 씨름한 자가 자기 이름을 밝히기를 원하지 않은 이유이기도 하다. 내적 영적 의미에서 야곱과 씨름한 자에 의해 천사의 천국이 뜻해지는 이유는, 이 구절에서의 최고 의미에서 주님이 야곱에 의해 표현되고, 천사들 역시 그분을 시험하는 것이 허용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씨름 당시 천사들은 그들의 자기 자신인 것(악과 거짓)에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내적 역사적 의미에서, 그리고 그는 말했다. 어찌하여 너는 내 이름을 묻느냐? 에 의해 그들은 이것이 악령들로부터 이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다가 의미된다.

내적 역사적 의미에서 그리고 그는 거기서 그를 축복했다에 의해 그렇게 행해졌다가 의미되는데, 이는 “복을 주다, bless”가 여기서의 경우, 그들이 교회의 표현물로 봉사했다를 의미함에서 알게 된다; 그 이유가 여기서는 “그가 거기서 그에게 복을 주었다”에 의해 그렇게 행해졌다가 의미되기 때문이다.

내적 역사적 의미에서 야곱은 그곳의 이름을 브니엘이라 불렀다에 의해서는 그들이 표현들을 입은 상태가 의미된다, 이는 “이름을 부름”의 의미가 품질이다로부터; “장소”의 의미가 상태이다로부터; 그리고 “브니엘”의 의미가 내적 역사적 의미에서는 표현을 입는 것이다로부터; 그 이유가 표현을 입는 것은 진행되고 이어지는 대목에서 취급되는 주제이기 때문이다. “브니엘”이 의미하는 것은 “그 이유가 내가 하느님을 대면했으나 내 혼이 보전되었기 때문”이라는 말에 의해 설명되어진다. 이 말을 수단으로 주님께서는 표현적으로 현존하셨다는 것이 의미된다(이는 더 설명한다), 고로 그들이 표현들을 입는다가 의미된다. 장소의 이름은 인물의 이름과 마찬가지로 한결같이 같은 의미를 가지는 것이 아니라 상황, 조건에 따라서 의미함도 바뀐다. 즉 글자 의미에서 “야곱”은 실존 인물 야곱 자신을 의미한다; 내적 역사적 의미에서는 그의 후손이다; 내적 영적 의미에서는 거듭나는 인간에 있는 자연적 인간이다; 그러나 최고 의미에서 “야곱”은 신성한 자연 평면의 주님을 의미한다. 브니엘의 경우도 이와 맥락이 같다.

내적 역사적 의미에서 그 이유는 내가 하느님을 대면하였으나 내 혼이 보전되었기 때문이다에 의해서는 그분은 표현적으로 현존하셨다가 의미되어 있다. 이는 “하느님을 대면하여 봄”의 의미가 이 말들이 야곱의 후손이 있었던 상태를 서술할 때는 주님이 표현적으로 현존하셨다 이다로부터 알려진다. 그런 이유는 외적 형체, 또는 육체의 시력으로 하느님을 대면하여 본다는 것이 현존하시는 그분을 보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거듭나는 이들과 더불어서, 즉 영적인 사랑과 신앙 안에 그분이 현존하심 같이 야곱의 후손과 현존하는 것이 아닌 것은 이 나라에 관해 말해진 대목에서 이미 살폈다: 즉 그들은 외적 예배 안에 있었다는 것, 내적 예배 안에 있지 않았다는 것, 같은 말로 그들은 육체적, 세상적 안에 있었고, 영적, 천국적 사랑 안에 있지 않았다. 이들의 상태와 더불어서 주님이 현존하심은 불가능하다는 것은 누구나 쉽게 납득될 것이다. 따라서 그분이 그들에게 현존하신 방법은 표현적일 뿐에서만 이었다.
이 대목은 조금 더 말해두어야 할 것 같다. 영적 사랑이나 천국의 사랑 안에 있지 않은 이들, 그러나 육체적, 세상적 사랑만에 있는 이들은 자기와 더불어 악령밖에 더 가진 것이 없다, 설사 그가 거룩한 외적 상태에 있다해도 그러하다; 그 이유는 선한 영은 이런 인물과 더불어 현존함이 가능하지 않기 때문, 그런 이유는 선한 영은 인간이 어떤 종류의 사랑을 지녔는지를 순간적으로 지각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마치 우리가 공기 중에 떠돌아다니는 불쾌한 냄새를 후각으로 즉각 감지하는 것과 같이 내면들로부터 방산되는 영기를 지각한다. 여기서 취급된 이 나라는 선과 진리, 또는 사랑과 신앙의 측면에서 위와 같은 상태 안에 있었다. 어쨌든 그들이 교회의 표현물로서 쓸모있음에 이바지하기 위하여 그들이 거룩한 외적 상태에 있도록 주님에 의해 기적적으로 설비되었다, 따라서 그들은 악령들에 의해 포위된 상태이지만, 동시에 천국 안으로 들리워질 수 있을런지도 모르는 거룩한 상태의 조건에도 있었다; 그리고 이것은 선한 영들과 그들의 내부 측면에 있는 천사가 아닌 밖의 측면에 있는 천사에 의해 설비되었다; 그 이유는 그들의 안쪽은 텅빔이거나 깨끗하지 않음의 상태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이 천국과) 교통함은 인간 자신과 더불어서가 아니라, 그들이 있었던 거룩 자체와 더불어 주어졌다. 이 거룩은 그들이 자기들에게 주어진 규례나 교훈을 충족할 경우에 있어진다. 이 규례나 교훈은 주님의 왕국 속의 영적인 것과 천국적인 것들에 관한 모든 표현이었다. 이것이 주님께서 그들과 더불어서는 표현적으로서만 현존하신다에 대한 설명이다. 그러나 주님은 영적 사랑 안에, 이 사랑으로부터 신앙 안에 있는 교회 내의 사람들과는 위와는 아주 다르게 현존하신다. 이들과 더불어서의 경우, 선한 영들과 천사들은 그들의 외적 예배 뿐아니라 그들의 내적 예배에도 동시에 있는 바, 이들과 더불어서는 당사자 자신과 더불어 천국의 교통이 존재한다; 그 이유가 주님께서는 천국을 통하여 그들의 내적 측면들을 통하여 그들의 외적 측면 안으로 흘러드시기 때문이다. 이들에게 예배의 거룩함은 다른 삶에서 매우 유익하다; 그러나 전자에 속하는 이들은 아니다.
전자에 속하는 이들은 아마 거룩한 사항들을 설교하는 성직자나 원로인데, 생활은 악하고, 악한 신조를 지녔을 경우도 포함될 것이다. 이들과 더불어서도 선한 영들은 아예 존재하지 않고 악령들만 있을 뿐이다. 설사 이들이 거룩한 형체의 외적 예배를 집전하는 그 시간조차에서도 악령만 득실거릴 뿐이다. 이런 설교자가 천국과 어떤 교통도 없을 것은 누구나 당연히 아는 사항이지만 여기에 들러붙는 악령은 너무나 위장이 잘되어 있어 그 진위를 가늠할 즈음이면 단순한 사람들이 이미 피해를 입은 이후가 되는 경우가 빈번하다. 이런 자들에 대한 경험을 나에게도 허락하셨는데, 아마 따로 말할 기회가 주님의 신성한 자비로부터 있을 것이다.
야곱으로부터 내려가지는 나라가 위와 같은 품성, 즉 악령들에 둘러싸여 있음에도 표현적으로는 주님이 현존하시는 특성 속에 있어왔다는 것은 말씀에서도 알는지 모른다; 그 이유가 그들은 심정으로부터 여호와를 예배함과는 일찌감치 멀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하여 그들은 기적이라는 묘약의 약효가 떨어지면 즉각 다른 신들로 돌아서고 우상숭배자로 전락하였다. 이런 그들의 모습은 그들이 심정으로는 다른 신들을 예배하고 입으로만 여호와를 고백했다는 것에 대한 명백한 증거이다, 이렇게 그들이 했던 이유의 원인은 자기들이 주변 나라보다 우뚝서고 싶다는 욕망 때문이다. 이 백성이 심정에서는 이집트의 우상을 예배하고, 그분의 기적들 때문에 입으로는 여호와를 고백했다는 것은 아론이 그들을 위하여 금빛의 송아지를 만들었던 것으로부터도 분명해진다 (출. 32장). 아론 역시 이런 백성과 별 차이가 없었다는 것이 2-5절, 35절에서 특별히 나타난다. 이와 같은 대목은 모세의 책, 그리고 사사기서, 사무엘서, 열왕기서에서도 비일비재하다.
그들이 외적 예배에만 있고, 어떤 내적 예배에는 있지 않았다는 것은 율법이 선포될 때 그들이 시내산에 가까이 오지 못하게 금지하고 만일 산을 만지기만해도 죽고야만다고 명령된 사실로부터도 확인된다 (출. 19:11-13; 20:16, 19). 그 이유는 그들의 내적 측면이 불결했기 때문이다. 다른 모세의 책에서 말해진다:
여호와께서 그들의 불결함 사이에서 그들과 거주하셨는 것 (레. 16:16).
이 나라의 품질은 모세의 노래로부터도 (신. 32:15-43), 그리고 예언서의 많은 구절로부터도 분명해진다. 이런 모두로부터 이 나라와 더불어서 어떤 교회도 있지 않고, 오로지 교회의 표현물만 있었다는 것, 그리고 주님께서는 그들과 표현적으로서만 현존하셨음이 분명해진다.
이들에 관해 서술되었던 내용을 정리하여 비교해보자: 야곱의 후손과 더불어 교회의 표현물이 있었다는 것, 그러나 교회는 아니다는 것: 교회를 표현함은 그들이 완전히 내적 측면이 황폐해질 때까지 설립되지 않았다는 것, 그렇지 않았다면 그들은 거룩한 것들을 모독하고야 말았을 것이다는 것: 그들이 규례를 엄수할 때는 표현할 수 있었으나, 돌아섰을 때는 아니다는 것: 이 때문에 그들은 의식들을 꼼꼼하게 엄수해야 했다는 것, 이를 위해 그들은 외적 수단으로 해서 내몰아쳐졌다는 것: 그들이 교회의 표현물만을 위해 있기 위하여 그들은 내적 예배 없이 외적 예배만으로 만들어졌다는 것: 이런 이유로 교회의 내면의 것들은 그들에게는 닫혀졌다는 것: 이런 연유로 그들은 여느 백성보다 내적인 것 없는 외적 예배만에 있을 수 있었다는 것: 이 이유로 그들은 오늘까지 보존되어져왔다는 것: 그리고 그들의 거룩한 외적 측면은 그들의 혼 측면에 어떤 영향도 미치지 않았다.

내적 역사적 의미에서, 태양이 그에게 떠올랐다에 의해 그들이 표현 안으로 왔을 때가 의미되어진다. 이는 “태양이 떠오를” 때란 야곱의 후손이 여기서 취급되는 바, 그들이 표현 안으로 왔을 때이다. 이에 비해 “새벽이 올라옴”은 그들이 표현 안으로 오기 이전의 상태가 의미된다. 태양의 떠오름은 교회가 되어가는 모든 이, 또는 교회를 표현하게 되는 모든 이를 두고도 말해진다.

내적 역사적 의미에서 그가 브니엘을 지날 때에 의해서 그들이 가나안의 토지에 왔을 때가 의미된다. 이는 브니엘이 야곱이 얍복강을 건넌 이후 첫 경유지이다는 것, 그리고 모든 경계들은 거리와 위치에 따라 의미가 있다는 것으로부터 분명해진다. 고로 “브니엘”이 첫 경계선인 바, 이는 그들이 가나안의 토지에 왔을 때가 의미된다.

내적 역사적 의미에서 그는 그의 넓적다리를 절뚝거렸다에 의해 이 후손과 더불어서는 선들과 진리들이 완전히 파괴되었다가 의미되는데, 이는 여기서 “그”가 야곱이고, 야곱이 표현함이 그의 후손이다로부터; “넓적다리를 절뚝거리다”가 선이 없음 안에 있는 이들을 표시함으로부터; 결과적으로 진리 없음 안에 있는 이들이다. 그러므로 “넓적다리를 절뚝거림”에 의해 여기서는 선들과 진리들이 이 후손에서는 완전히 파괴되었다를 의미한다.
이 나라의 품질은 주님 자신께서 비유들에서 말하신 사항들로부터도 분명해진다; 이 비유의 내적 역사적 의미에서 이 나라에 관해 말해지고 있다 : 즉 왕에게 빚을 탕감받은 자비를 입은 종이 자기에게 빚진 또다른 종에게 무자비했던 것 때문에 처벌되는 무자비한 종의 비유 (마. 18:23-35); 자기 포도원을 소작인들에게 세를 주고 해외로 떠난 주인이 세를 받고자 종들을 보낼 때, 하나는 막대로 두둘겨패고, 또 하나는 죽였고, 마지막으로 보낸 그의 아들을 포도원 밖으로 내쳐 살해한 포도원 소작인의 비유 (마. 21:33-45; 막 12:1-9; 눅. 20:9-19): 주인이 그의 종들에게 달란트를 주었는데, 한 달란트를 받은 종은 그 달란트를 땅에 묻어두었던 달란트의 비유 (마. 25:14-30; 눅. 19:13-16): 강도들에 의해 부상당한 자를 못본척 지나쳐가는 이들과 적극적으로 치료한 자가 대비되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 (눅. 10:30-37): 큰 잔치에 초대되는 사람들이 각자 핑계를 대고 불참함에 관해 주님께서 말하신다, 초대를 받았던 이들은 누구도 내 만찬을 맛보지 못할 것이다 (눅. 14:16-24):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 (눅. 16: 19-31): 자신과 비교해 타인을 경멸한 이들에 관한 비유 (눅. 18:10-14): 두 아들의 비유, 이 둘 중 하나는, 나는 포도원에 갈 것이다 하고 말하고 가지 않았다; 그리고 예수께서 말하셨다, 참으로 내가 네게 말한다, 세리와 창녀가 너희에 앞서 하늘의 왕국에 간다 (마. 21:28-32).
마. 23: 13-39에서 공개적으로 주님께서 선언하시어 이 나라의 품질을 말하신다: “너희는 너희 자신에 맞서 증언한다, 즉 “너희는 예언자들을 죽인 그들의 아들들이다는 것, 그리고 너희는 네 조상의 분량을 채우고 있다” (마. 23:13-23). 마가복음서에서: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하셨다, 엘리아스가 너희에 관해 옳게 예언한다, 이 백성은 입으로는 나를 경외하나, 그들의 심정은 나로부터 멀다; 그들은 헛되이 나를 예배한다. 교리들을 위해 하느님의 명령들을 내던지고 인간들의 가르침을 가르친다” (마. 7:6-13). 요한 복음서에서: 유태인들이 예수에게 자기들은 아브라함 자손이었다고 대답했다; 그러나 예수께서 그들에게 너희들은 악마인 너희 아버지로부터 있다, 그리고 너희 아버지의 바램들을 너희는 행하고 싶어한다; 그는 시작으로부터 살인자였다, 그리고 진리에 서 있지 않았다, 그 이유는 진리가 그 사람 안에 없기 때문이다; 그가 거짓을 말할 때, 그는 자기 자신을 말하고 있다; 그는 거짓말을 말하는 자이기 때문에, 그리고 그것의 아버지이기 때문에…(요. 8:33, 44). 그들이 이와 같기 때문에, 그들은 “악하고 간음적인 세대”라고도 불리운다 (마. 12:39), 그리고 “독사의 자식들” (마. 3:7; 23:33; 눅. 3:7): “독사의 자식들이여, 너희는 악하면서 어떻게 선한 것을 말하느냐?” (마. 12:34).
이 나라와 더불어서는 어떤 자연적 선조차도 남아있지 않았다는 것이 무화과 나무를 통해 말해진다:
예수께서 길에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그것에 오셨다, 그러나 거기 위에서 잎들 외에는 아 무것도 발견하지 못하셨다; 그러므로 그분은 그것에 말하셨다, 이 후로부터 영원히 너는 열매 없이 자라거라, 그리고 이내 무화과나무는 시들어버렸다 (마. 21:19);
무화과나무는 자연적 선함을 표시한다.
이 구절로부터 선들과 진리들이 이 나라와 더불어서는 완전 파괴되었음이 보여질는지 모른다. 선들과 진리들이 내면적으로 하나도 없을 때, 이것이 완전히 파괴되었다 라고 말해진다. 바깥쪽으로 나타나는 선들과 진리들은 그것의 있음과 그것의 살아 있음은 내적인 것으로부터 파생된다; 그리고 이것이 내적인 것, 저것은 외적인 것인데, 제아무리 인간의 눈에서 후자가 내적인 것 같은 듯 해도 아니다는 말이다. 내가 어떤 이를 그의 육체의 삶에서 알았었던 자가 있는데, 그는 살아있을 당시 나라와 공동의 선을 위하여, 공평과 공정을 위하여, 교회를 위하여 헌신적 열정을 가진 것으로 알고 있었던 자인데, 다른 삶에서 보니 그는 지옥에 있고 그중에서도 최악의 지옥에 있는 것에 매우 놀랐다. 그 이유인즉, 그의 내면들이 불결하고 모독적이었던 데서 비롯되었다. 그의 열정은 명성, 이익 등등을 위한 가짜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외면의 것들이 벗겨져 내면으로만 사는 저 삶에서는 누구나 자신의 진짜인 것만 드러나기 때문이다. 이것이 선들과 진리들이 완전 파괴되었다고 말한 것의 예이다.

내적 역사적 의미에서,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아들들은 넓적다리의 우묵함에 있는 것, 어긋나진 것의 신경을 먹지 않는다에 의해 이 후손들은 이를 알아야 한다가 의미되어 있다. 이는 이것이 기념물 같은 것이다는 사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이 그들의 품질이었음을 기억해야 한다는 것, 그러므로 이를 알고 있어야 한다로부터 알게 된다.

내적 역사적 의미에서, 오늘에 이르기까지조차에 의해 그들은 이와 같이 영원히 있다가 의미되는데, 이는 “오늘날까지조차”의 의미로부터 알게 된다. 즉 말씀에서 언급되는 “오늘날까지”가 영원을 뜻함으로부터 알려진다. 이 후손들은 아주 이른 초기때로부터도 이런 특성 속에 있어왔음이 말씀으로부터 알려지고 있다: 즉 야곱 자신의 아들들로부터 이다; 르우벤의 경우, 그는 아버지의 첩인 빌하와 누웠다 (창. 35:22); 시므온과 레위의 경우, 그들은 하몰과 세겜, 도성의 모든 이를 죽였다; 게다가 나머지 아들들도 이에 합세했다 (창. 34:1-31). 그러므로 야곱은 그가 죽기 전 그들에 관해서 말했다, 르우벤, “너는 빼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 이유는 너는 네 아버지의 침상에 올라갔기 때문이다; 그 다음 너는 네자신을 무가치하게 만들었다; 그는 내 침상에 올라갔다” (창. 49:3, 4); 그리고 시므온과 레위, “그들의 비밀 안으로 내 혼은 가지 말지라, 그리고 그들의 회합에 내 영광은 연합하지 말지라; 그 이유가 그들이 분노하자 그들은 사람을 죽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기분이 유쾌하면, 그들은 숫소를 느슨해지게 했다. 그들의 성냄은 저주받아야 하고 그들의 분노는 가장 비통한 것이다; 나는 그들을 야곱 안에서 나눌 것이다, 그리고 이스라엘 안에서 흩으릴 것이다 (창. 49:5-7).
유다의 품질은 그가 자기 아내로 가나안족의 출신을 데려왔다는 사실로부터 보여진다 (창. 38:1, 2); 이는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의 아내로 리브가를 데려오기 전 그의 심복에게 엄하게 명령했던 것에 위반된다(창. 24:3, 6); 이 나라의 삼분의 일은 가나안의 여자의 아들인 셀라로부터 였다 (창. 38:11; 46:12; 민. 26:20; 여상. 4:21, 22). 이 외에 이들의 사악한 행위, 그리고 야곱의 다른 아들들이 요셉을 죽이려했던 것도 있다 (창. 37:18-36). 이집트에서의 이 후손의 품질은 그들이 광야에서 있던 것에서 연관되어 명백해진다. 거기서 그들은 틈만나면 반역했다; 그리고 후에는 가나안의 토지에서 그들은 자주 우상숭배자로 타락했다; 마지막으로 주님의 시대에서의 경우는 방금 위에서 말했다 (4314항); 그리고 그들이 어떤지는 알려져 있다, 즉 주님에 반대되고, 교회의 것들에 반대되고, 이웃을 향한 선행 등에 반대되고 있다. 이런 사항들로부터, 이 나라가 선과 진리의 완전 파괴 속에 있음이 엿보여질 것이다. 그러므로 이들 사이에 어떤 교회가 있을 것은 누구도 더 이상 예상하지 않는다, 또는 교회의 표현물 그 이상은 기대하지 않는다, 더욱이 그들만이 선택되었다는 의견은 어불성설이다.

내적 역사적 의미에서, 그이유는 그가 야곱의 넓적다리의 우묵한 것을 건드려 그것의 신경을 어긋나게 했기 때문이다에 의해 그들은 거듭남을 수단으로 근절될 수 없는 유전적인 것을 가졌기 때문, 그들은 거듭남을 허용하지도 않을 것이기 때문이 의미되어 있다. 이는 “넓적다리”의 의미가 부부의 사랑이다로부터; 결과적으로 모든 천국적, 영적 사랑이다로부터 분명해진다; 그리고 “넓적다리의 우묵한 곳”이 부부의 사랑의 결합이 있는 곳이다로부터, 그리고 천국적, 영적 사랑이 자연적 선과 결합하는 곳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러므로 “그것을 건드리는 것”, 또는 그것이 절뚝거리도록 상하게 하는 것은 이런 사랑들로부터 있는 선을 파괴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야곱에게 발생했다는 것은, 이것이 그의 후손에게 건너간다는 것, 고로 유전적이 된다는 것이다. “어긋난 것의 신경을 먹지 않는다”가 거짓을 의미함은 앞에서 살폈다, 여기서는 유전적 악으로부터의 거짓이다. 이로부터, 그리고 이 시리즈로부터 이어지는 것은 이 유전성은 거듭남에 의해 박멸될 수 없다는 것, 그 이유는 그들이 거듭남을 (주님에게) 허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이 이런 유전성을 가졌다는 것, 그리고 그들은 거듭나질 수 없다는 것은 말씀 안에서 이와 연관되는 구절로부터 분명해지는데, 특별하게 아래 구절이 있다:
모세는 모든 이스라엘을 불렀다, 그리고 그들에게 말했다, 너희는 여호와께서 너희 눈에서, 이집트의 토지에서 바로에게, 바로의 모든 종들에게, 그리고 모든 그 토지에 했던 모든 것 들을 보았었다; 그리고 여호와께서는 너희에게 아는 심정을, 보는 눈을, 듣는 귀를 오늘날 까지조차 주시지 않으셨다 (신. 29:2, 4).
같은 책에서:
내가 맹세한 토지로 그들을 데려오기 이전 나는 그들이 하는 꾸며낸 것들을 알고 있다 (신. 31:21).
그리고 다시:
나는 그들로부터 내 얼굴을 감출 것이다, 나는 그들의 마지막인 것을 볼 것이다; 그 이유는 그들은 대대로 외고집쟁이들이고 진리 없는 아들들이기 때문이다. 나는 그들을 절멸할 것 이다, 나는 인간으로부터 그들을 기억함이 중단되게 할 것이나, 내가 걱정하는 것은 적들의 분노가 오해하는 것이다. 그 이유가 자기들끼리 하는 말에서 이 나라는 멸해지는 나라이다, 그들 안에 총명이 없다 하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그들의 포도나무는 소돔의 포도나무이고, 들판의 포도는 고모라의 포도이기 때문이다; 그들의 포도들은 독약, 포도송이는 그들에 쓰 다. 그들의 포도나무는 용들의 독이고, 독사의 잔인한 머리들이다. 이것이 내게 쌓이고 내 보물들 안에 봉인하여 있지 아니한가? (신. 32:20, 26-34);
위와 비슷한 대목들은 특별히 예레미야서에 있다.
이것이 “야곱의 넓적다리를 건드림”에 의해 의미되었다, 그리고 결과로서 뒤따르는 그의 절름발이가 호세아서에서 분명해진다:
여호와께서 유다와 논쟁하신다, 야곱을 그의 길에 따라, 그리고 그의 일함들에 따라 그분은 그에게 보응할 것이다; 그는 자기 형을 자궁 안에서 밀어냈다; 그의 슬픔 안에서 그는 하느 님과 경쟁했다, 그리고 천사들을 향해 경쟁했다, 그리고 이겼다; 그는 울었고, 그에게 간청 했다 (호. 12:2-4);
위의 “하느님과 경쟁하는”것은 내적 역사적 의미에서 볼 때, 교회의 표현물이 자기들과 더불어 있어야 한다고 졸라대는 것이다. 위 구절로부터도 그들은 야곱 자신으로부터도 그들의 특성을 유전적으로 가졌다, 그리고 이 한 구절 말고도 이런 내용을 더 확인해볼 많은 구절을 지나쳐 왔다. (하여 나머지는 여러분에게 맡긴다.)
유전성을 특별하게 조명해보자: 오늘날 교회에서, 모든 유전적 악은 당사자를 지상에 있게 한 부모(첫째 부모)로부터 이다고 믿고 있다. 그러므로 이런 점에서 다시 모든 이가 죄있음이 증명되어진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렇지가 않다. 유전적 악은 그것의 근원이 모두 각각의 부모와 부모의 부모, 한마디로 선조로부터 이다. 인간이 본인 자신의 생활로부터 획득한 모두 각각의 악, 설사 본인이 즐겨 사용하였거나 습관적인 것조차 포함해서 자기 같이 되어간 모두 각각의 악은 자녀에게 파생되어지고, 이 악에 선조 대대로 심어져왔던 악이 포개져 자녀의 유전성이 되어진다. 아버지로부터의 유전적 악은 상대적으로 내향적이고, 어머니로부터의 것은 외향적이다. 따라서 전자는 뿌리뽑기가 쉽지 않을 수 있으나, 후자는 그렇지는 않다. 인간이 거듭나질 때, 당사자의 가장 가까운 부모로부터 뿌리를 내린 유전적 악은 뿌리들을 수단으로 잡아 뽑혀진다; 그러나 거듭나지지 않는 이들과 더불어서, 또는 거듭나질 수 없는 이들과 더불어서 유전적 악은 (송두리채) 남는다. 이것이 유전적 악이다. 아마 위의 글을 곰곰이 생각하는 이라면 이에 대해 분명해질 것이다; 또는 어떤 가족(가문)이 지니는 특이한 악 또는 선 때문에 이 가족과 저 가족이 구별되는 경우를 여러분의 주위에서 살펴보아도 위의 글은 쉽게 납득될 것이다. 그리고 이런 가문별로의 특성은 부모와 선조로부터 인 것은 알려진 사실이다. 오늘날 남아 있는 유태 나라도 비슷한데, 이 나라는 다른 나라들과 분명히 구분되어진다, 그리고 이런 구분된 특이함으로부터 그들은 알려지는데, 이 특이함에는 유전적인 것 뿐 아니라 태도, 언어, 얼굴도 포함된다.
어쨌든 유전적 악이 무엇인지를 아는 자는 매우 적다; 유전적 악은 악을 행함 안에 존재한다고 믿어지고 있다; 그러나 유전적 악은 악을 뜻함 안에, 그리고 악을 뜻함으로부터 생각함 안에 존재한다; 다시 말해 유전적 악은 의지 자체 안에, 그리고 의지로부터 생각함 안에 존재한다; 고로 의지나 생각함에 있는 시도함(conatus)이나 애씀(endeavor) 자체 안에 있다. 이 악은 당사자가 선한 것을 행동하는 때조차에서도 거기에 들러붙어 있다. 이것은 악이 또 다른 사람에게 닥칠 때 느껴지는 기쁨에 의해서도 알려진다. 이 뿌리는 깊게 감추여놓여 있으면서, 주님으로부터 천국을 통하여 선하고 진정한 것을 받는 내향의 형체 자체를 타락(부패)시킨다, 다시 말해 (알아볼 수 없게 내향의 형체를) 찌그러뜨린다; 그리하여 주님으로부터 선과 진리가 흘러들 때, 선과 진리는 심사숙고되거나 악용되거나 질식되어지거나 한다. 이런 이유는 오늘날 선과 진리를 지각함이 존재하지 않음에서 비롯된다. 그렇지만 이 지각 대신에, 오늘날은 거듭나는 자와 더불어 양심이 존재한다, 이것이 선하고 참된 것을 인정하는데, 부모나 선생들로부터 배워진 선하고 참된 것을 인정함이다. 타인보다 자아를 더 사랑하는 것, 자신을 존경하지 않으면 악을 행함도 서슴치 않는 것, 복수함에서 즐거움을 만끽하는 것, 천국보다 세상을 더 사랑하는 것 등등 모두는 유전적 악으로부터 이다; 그리고 같은 근원으로부터 탐욕이나 악한 애착들도 파생된다. 이런 것들이 자신의 유전적 악 안에 있다는 것, 이런 것들이 천국의 애착들에 직반대 된다는 것에 많은 이들이 무지하다; 그렇지만 다른 삶에서는 명백히 보여지는 바, 얼마나 많은 악들이 유전적 악으로부터 실제의 삶에 의해 이끌려 나오는지, 자신이 이런 근원으로부터의 악한 애착들을 수단으로 얼마나 멀리 자신을 천국으로부터 분리시켜 놓았는지 보여진다.
야곱의 후손은 거듭남을 허용하지 않기 때문에 거듭남을 수단으로 그들로부터서 유전적 악을 박멸할 수 없었다는 것은 말씀의 역사물로부터도 분명해진다; 그 이유가 모세에 의해 기록된 바 같이 그들은 광야에서 모든 시험들에 길을 터주었기 때문이다; 또한 그 후에는 가나안의 토지에서도 기적의 효력이 사라질 즈음이면 스프링 같이 되돌아가 있었다; 그렇지만 그들의 경우, 이런 시험들은 외향적일 뿐 내향적으로, 또는 영적으로는 아니다. 다시 말해 영적 수준에서 그들은 시험되어질 수 없었다; 그 이유는 이미 말했듯, 그들은 내적 진리들을 몰랐기 때문, 하여 내적 선도 몰랐기 때문이다; 그리고 누구도 자기가 가지지 않았거나 알지 못했거나 하면 시험되어질 수 없다. 시험은 거듭남의 진짜 수단 자체이다. 이것들이 그들이 거듭남을 허용하지 않음이라는 위의 말에 대한 의미이다. 이 상태에 관하여와 다른 삶에서 그들에게 할당된 지역은 이미 살폈다.
**************************************

창세기 제 33 장

성경: 창세기 33장

1. 그리고 야곱이 눈을 들어 보았다, 그리고 보라, 에서가 사백 명의 사람들과 함께 오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아이들을 나누어 레아에게, 라헬에게, 두 하녀에게 맡겼다.
2. 그리고 그는 하녀들과 그들의 아이들을 첫 번째에, 레아와 그녀의 아이들을 그 뒤에, 라헬과 요셉을 그 뒤에 두었다.
3. 그리고 그 자신이 그들 앞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그가 그의 형에게 가까이 접근될 때 까지 자신을 땅에 구부려 일곱 번 절을 했다.
4. 그리고 에서는 그를 만나려고 달려갔다, 그리고 그를 포옹했다, 그리고 그의 목을 어긋맞추 었다, 그리고 그에게 키스했다. 그리고 그들은 울었다.
5. 그리고 그는 그의 눈을 들었다, 그리고 여인들과 아이들을 보았다. 그리고 말했다, 너와 함께 한 이들은 누구냐? 그리고 그는 말했다, 하느님께서 당신의 종에게 은혜로 수여하신 아이들 입니다.
6. 그리고 하녀들이 가까이 나아왔다, 그들과 그들의 아이들이 나아왔다, 그리고 그들은 절을 했다.
7. 그리고 레아와 그녀의 아이들 또한 나아가 절을 했다. 그리고 그 뒤에 요셉과 라헬이 가까이 나아와 절을 했다.
8. 그리고 그는 말했다, 내가 만난 이 모든 진영들은 무엇이냐? 그리고 그가 말했다, 내 주의 눈에서 은혜를 발견하기 위해서 입니다.
9. 그리고 에서는 말했다, 나는 많은 것을 가지고 있다, 내 동생아, 네 것은 네게 있게 하라.
10. 그리고 야곱이 말했다, 아닙니다, 바라건대, 제가 당신의 눈에서 은혜를 발견하였다면, 부디 내 손으로부터 내 선물을 받아 가소서. 그 이유는 제가 하느님의 얼굴을 보는 것 같이 당신의 얼굴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당신은 나를 받아 주셨기 때문입니다.
11. 청컨대 제가 당신에게 가져 온 제 복을 가져 가십시오, 그 이유는 하느님께서 저에게 은총을 베풀어 수여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나는 모든 것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는 그에게 강권했다, 그리고 그는 그것을 받아 갔다.
12. 그리고 그는 말했다, 같이 떠나 가자, 그리고 나는 너 가까이에서 가리라.
13. 그리고 그는 그에게 말했다, 내 주도 아시는 바, 아이들은 연약합니다, 그리고 제게는 젖을 물리고 있는 양떼들과 목축떼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만일 그것들을 하루만 내몰아 친다 해도 모든 가축떼들은 죽을 것입니다.
14. 청컨대 내 주는 제 앞서 가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저는 세일의 내 주께 당도할 때 까지, 저는 아이들의 발과 일의 발에 맞추어 천천히 나아가렵니다.
15. 그리고 에서는 말했다, 청컨대 내 사람을 너와 머무르게 하여라. 그리고 그는 말했다, 어찌하여 이러십니까? 내 주의 눈에서 은혜를 발견하게 하십시오.
16. 그리고 에서는 그 날 자기 길로 해서 세일로 돌아 갔다.
17. 그리고 야곱은 숙곳으로 여행했다, 그리고 자기를 위하여 집을 지었다, 그리고 그의 획득물들을 위하여 우릿간을 만들었다. 그러므로 그는 그 장소의 이름을 숙곳이라 불렀다.
18. 그리고 야곱은 세겜의 성, 살렘에 왔다, 이곳은 가나안의 토지 안에 있다, 그는 밧단-아람 에서 이쪽으로 왔고 이 성의 얼굴쪽을 향하여 진을 쳤다.
19. 그리고 그는 자기가 천막을 펼친 들판의 일부를 일백 크시타에 세겜의 아버지 하몰의 아들들의 손으로부터 샀다.
20. 그리고 그는 거기에 제단을 세웠다, 그리고 그는 그것을 엘 엘로헤 이스라엘이라 불렀다.

각 절의 내적 의미

1-3절. 그리고 야곱이 눈을 들어 보았다, 그리고 보라, 에서가 사백 명의 사람들과 함께 오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아이들을 나누어 레아에게, 라헬에게, 두 하녀에게 맡겼다.
2 그리고 그는 하녀들과 그들의 아이들을 첫 번째에, 레아와 그녀의 아이들을 그 뒤에, 라헬과 요셉을 그 뒤에 두었다. 3 그리고 그 자신이 그들 앞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그가 그의 형에게 가까이 접근될 때까지 자신을 땅에 구부려 일곱 번 절을 했다.

그리고 야곱이 눈을 들어 보았다. 이는 “야곱”인 진리로부터의 선이 시선을 집중하고 지각함을 의미한다. 이는 “눈을 들어올림과 봄”의 의미가 지각함과 시선을 집중함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 이유가 눈을 들어올림은 마음(내적 측면)을 상승하게 함에 상응하는 외적 측면이기 때문, 결과적으로 지각함도 있는다; 그러므로 “보는” 것은 시선을 집중함에 상응한다.

그리고 보라 에서가 왔다. 이는 자연 평면으로부터의 신성한 선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와 더불어 사백 명의 사람들. 이는 그것의 상태, 여기서는 신성한 선이 자연 평면에 있는 진리와 결합하는 상태인데, 그 이유는 이 결합함이 이 장에서 취급하는 주제이기 때문이다. “400”은 말씀에서 시험의 기간과 상태를 의미한다; 선이 진리와 결합하는 모든 것은 시험을 통하여 결과되기에, 여기서도 같은 뜻이 의미되고 있다.
사실상 진리와 결합하는 선 자체는 시험되지 않고, 진리가 시험될 뿐이다. 더욱이 진리가 선에 의해 시험되는 것이 아니라 거짓들과 악들에 의해 시험되어진다, 또한 오류들과 환영들과 이것들에 애착함들에 의해서도 시험된다. 즉 이런 것들이 자연 평면에서는 진리들에 달라붙어 있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선이 흘러들 때, 즉 선이 내적인 경로에 의해, 또는 내적 합리적 인간에 의해 결과되어질 때, 감각들과 감각적 환영들로부터 만들어내지는 자연적 인간의 생각(관념, idea)들은 감각들과 감각들로부터의 환영 같은 것들로부터 형성되었기에, 이것들은 합리적 인간으로부터의 선의 접근에 버텨낼 수 없기 때문, 즉 자연적인 인간은 합리적 인간에 동의할 수 없다, 고로 자연 평면에는 걱정근심과 흔들림이 발생한다, 즉 시험이 있다. 이런 사항들이 이 장에서 야곱이 두려움과 걱정근심으로 휩싸임으로 묘사되고 있다. 그 결과 에서가 사백 명과 더불어 올 때 절대 복종과 겸비해짐이 도출될 수밖에 없게 된다; 그 이유가 이렇게 되어지지 아니하고서는 그들의 결합이 (절대적으로) 결과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로부터도 “400”의 의미가 시험의 상태들임이 보여질는지 모른다; “400”은 시험 자체가; 그리고 “…명(사람들)”은 선이 자연 평면 안으로 흘러들 때 선과 결합된 진리들이 의미된다.
이런 사항들은 인간과 더불어 매우 흐릿함 (불명료함, 지독하게 의심함) 안에 있는데, 그 이유는 인간들이 육체 안에 살고 있을 때의 경우, 합리적인 것과 자연적인 것들 사이의 구분이 나타나지 않기 때문이다. 더욱이 거듭나지 않는 이들에게서는 전혀 나타나지 않고, 거듭나는 이들이다면 아주 조금 나타난다. 그런 이유는 인간들이 이에 대해 곰곰이 숙고하려 하지 않기 때문, 실로 인간은 그것에 관하여는 관심 밖의 일로 여기기 때문, 또한 인간의 내면의 것들에 관한 지식들은 거의 말살된 지경에 이르러 있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이런 인간의 내면에 관한 지식들이 옛적의 교회인들은 그들의 총명의 전부가 이것으로 만들어져 있었다. 어쨌든 이런 사항들에 관하여는 이미 살핀 것, 합리성과 합리성이 자연 평면 안으로 유입됨, 즉 자연 평면은 합리성을 통하여 거듭나짐에 관해 살핀 대목에서; 그리고 합리성은 자연 평면에 앞서 진리를 받는다는 것에서도 (여러분에게) 보여주었을런지 모른다. 합리성으로부터 선과 더불어 자연 평면 안으로 흘러드는 위의 진리들이 에서와 더불어 오는 “사백 명”에 의해 의미되어 있다.

그리고 그는 아이들을 나누어 레아에게 맡겼다. 이는 그들의 애착 아래 외적 진리들을 배열함을 의미한다. 이는 “나누어 맡김”의 의미가 배열함이다로부터; “아이들”, 또는 “아들들”의 의미가 진리들이다로부터; 그리고 레아의 표현함이 외면의 진리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여기서의 “아이들”은 외면의 애착으로부터의 진리들, 결과적으로 외적 진리들을 표시한다. 이런 진리들은 감각적 진리들이라 불리우는 외적이다 라고 말해지는데, 즉 육체의 감각들을 통하여 세상으로부터 직접적으로 흘러드는 것들이다. 그러나 내면의 진리들(라헬의 아들들에 의해 의미된다)은 자연 평면에 내면적으로 있는 것들이다, 그리고 합리성이 바라봄에 더 가까이 있다, 그리고 이것에는 오류나 환영들이 감각적 진리들에 달라붙어 있듯 강하게 붙어 있지 못한다. 그 이유가 내면으로 더 갈수록, 세상적이고 지상적인 것들로부터 더 순수해져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라헬에게. 이는 자기들의 애착 아래 내면의 진리들이 배열됨을 의미한다. 이는 라헬의 표현함이 내면의 진리에 애착함이다로부터 분명해진다. 그러므로 그녀의 “아이들” 또는 “아들들”은 여기서는 내면의 진리들을 표시한다.

그리고 두 하녀들에게… 이는 앞 두 애착들을 섬기고 있는 것들에 애착함 아래를 의미한다. 이는 “하녀들”의 의미가 기억 속의 지식(주관적 지식들)들과 지식들(객관적 지식들)에 애착함들이다로부터, 그리고 외적 인간과 내적 인간의 결합에 도우미 역할을 하는 수단들이다로부터; 그리고 여기서 “하녀들”인 실바와 빌하의 표현함이 수단으로서의 섬김 속에 있는 외면의 애착들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리고 그는 하녀들과 그들의 어린이들을 첫 번째에 두고, 레아와 그 어린이들을 그 다음에, 그리고 라헬과 요셉을 그 다음에 두었다. 이는 나머지가 안에 포개지는 식의 더 일반적인 것들로부터의 질서를 의미한다. 이는 방금 위에서 살핀 내용 모두로부터 알는지 모른다. 즉 “하녀들”은 기억 속의 지식들과 지식들에 애착함들을; “레아”는 외면의 진리에 애착함을; “라헬”은 내면의 진리에 애착함을 표시함에서 알게 된다. 기억 속의 지식들과 지식들에 애착함들은 가장 외적 측면이다; 그 이유가 기억 속의 지식들과 지식들 자체 로부터, 그 안에 진리들이 있기 때문이다. 외적 진리에 애착함은 이 뒤를 잇는다, 그리고 이것 보다는 더 내면적이다, 그리고 내면의 진리에 애착함은 더욱 내면적이다. 더 외적일 수록 더 일반적이다; 그리고 더 내면적일 수록 덜 일반적이고, 하여 상대적으로 특수적(particular), 낱개적(singular)이라 말해진다.
일반적인 것들에 주목하면, 이것들이 일반적이라 불리우는 이유는 그것들이 특수적인 것들로 구성되고, 결과적으로 그것들이 그것들 내부에 특수적인 것들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수적인 것들 없이 일반적인 것들은 일반적이지 않다, 그러나 특수적인 것들로부터 일반적인 것들이라 불리운다. 이는 전체와 부분의 관계와 같다. 전체는 부분들이 있지 않으면 전체라고 불리울 수 없다, 그 이유가 전체는 부분들로 구성되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어떤 사물의 본성 안에는 다른 것들로부터 출시되고 존속되지 않는 것은 없기 때문, 그리고 이것이 다른 것들로부터 출시되고 존속되기 때문에, 이것은 일반적이라 불리운다, 그리고 그것을 구성하고 그것으로부터 있는 것은 특수적인 것들이라 말해진다. 외적인 것들은 내적인 것들로 구성된다, 그러므로 외적인 것들은 상대적으로 일반적이다. 이것은 인간과 인간의 능력들과도 비슷하다; 이것들이 더 외면적일 수록, 그것들은 더 일반적이다; 그 이유가 그들은 더 내면적인 것들로 구성되고, 더 내면적인 것들은 가장 내면적인 것들로 질서 안에서 구성되기 때문이다.
신체 자체, 그리고 신체 속의 것들, 즉 외적 감각과 행동들이라 불리우는 것들은 상대적으로 가장 외적이다. 자연적 마음과 마음 속의 것들은 덜 일반적이다, 그 이유는 더 내면적이고, 상대적으로 낱개적이기 때문이다. 이런 사항들은 인간이 육체를 벗고 하나의 영이 될 때 명백해진다; 그 이유가 그때 육체적인 것들은 영의 것들로부터의 가장 일반적인 것들 외에 더 아니다는 것, 그리고 육체적인 것들은 자기 영으로부터 출시되었고 존속하였기 때문이다; 고로 영에 관한 것들은 상대적으로 특수적인 것들로 있어 왔던 셈이다. 똑같은 영이 천사가 될 때 (즉 천국으로 들리울 때), 자신이 일반적인 것들 안에서 보았고 느꼈던 것, 그러나 과거 희미함 안에 있었을 뿐이었다는 것이 명백해지고, 지금은 똑같은 것을 보고 느끼나 특수적인 것들 안에서와 명료함에 있다는 것이다. 그 이유가 그가 이전에 하나로서 보았었고 느꼈던 무수한 것들을 지금 느끼고 보기 때문이다.
이것은 인간이 세상에서 사는 동안이라 해도 자기 자신으로부터 분명해진다; 즉 그가 유아기에 보고 느꼈던 것들은 가장 일반적이다; 그러나 그가 어린 시절과 젊은이 시절에 보고 느꼈던 것은 유아 시절의 일반적인 것들 속의 특수적인 것들이다; 그리고 그가 성년기에 보고 느끼는 것들은 앞의 특수적인 것들 속의 낱개들이다. 그 이유가 인간이 나이먹어감에 따라서, 유아기의 일반적인 것들 안으로 특수적인 것이 은근히 심어지고, 그 후에 특수적인 것들 안으로 낱개적인 것들이 은근히 심어지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그는 더 내면적인 것들을 향하여 계속적으로 발전하기 때문이고, 일반적인 것들을 특수적인 것들로 채워가고, 특수적인 것들은 낱개적인 것들로 채워가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일반적인 것들로부터 그 외 나머지가 있는 질서”가 뜻한 것을 알는지 모른다. 이것이 하녀들과 그녀들의 자녀들이 처음에, 그리고 레아와 그의 자녀들이 그 뒤에, 그리고 라헬과 그녀의 아이가 열을 지어 서는 순서로 있는 것에 의해 의미되어 있다.
이것은 인간이 거듭나질 때, 또는 같은 말로, 인간 안에 있는 진리들이 선과 결합되어질 때의 경우와도 비슷하고, 이것이 여기서 취급하는 주제이기도 하다. 그때 그들의 진리들(여기서는 “하녀들”과 그들의 “자녀들”이다)과 더불은 일반적인 애착들이 처음에 선 안으로 은근히 심어진다; 그 다음 덜 일반적인 것들(상대적으로 특수적인 것들)이 은근히 심어지는데, 여기서는 “레아”와 그의 “자녀들”이다; 마지막으로 더욱 덜 일반적인 것들 (이는 상대적으로 낱개들이다)이 은근히 심어지는데, 여기서 “라헬”과 “요셉”이다. 인간은 마찬가지 방식에서 나이들, 즉 처음에는 유아기에, 그 다음 어린 시절과 젊은이 시절에, 마지막으로 성년기를 지나며 통과한다.

그 자신이 그들을 통과해서 그들 앞에서 나아갔다. 이는 보편적인 것, 고로 모든 것들을 의미한다. 이는 야곱에 관한 표현, 즉 “그 자신, he himself”가 진리로부터의 선이, 즉 의지와 행동 안에 있는 선이다로부터 분명해진다. 즉 진리로부터의 선은 모든 것들에서 보편성에 해당된다; 그 이유가 위에서 말한 사항인 일반적인 것들, 특수적인 것들, 그리고 낱개적인 것들이 보편성에 속하고, 그것 안에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신을 땅에 구부려 일곱 번 절했다. 이는 모든 것을 복종시킴을 의미한다. 이는 “누군가가 자신을 땅쪽으로 구부림”의 의미가 창피함, 굴욕(humiliation)의 결과이다로부터, 결과적으로 복종함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복종의 가장 높은 수준이 “일곱 번”에 의해, 그리고 모든 것의 복종이 “야곱이 자신을 구부림”에 의해 의미되어 있다; 그 이유가 야곱은 모든 것들의 보편적인 것을 표현하기 때문이다.
창피함과 복종함에 주목해보자. 이것은 인간이 예배할 때, 신성의 현존에서 있어야만 한다는 것에 대한 이유를 아는 자는 매우 적다; 결과적으로 이것이 무엇을 결과하는지를 아는 자도 적다. 내면의 것들에 관한 지식들 안에 있지 않은 자는 신성은 인간의 창피해짐과 복종함을 의도하신다는 것, 마치 어떤 인간이 영광되겠다는 욕망 아래 왕이 되려 하는 경우 같은 식으로밖에; 결과적으로 신성은 인간의 복종과 창피함으로부터 영광을 뜻하신다는 것밖에, 하여 인간이 신에게 돌리는 영광에 흡족해 하시는 분이다고밖에 믿어질 수 없다. 그러나 이 경우 역시 아주 다르다. 신성이 영광에 애착함에 계실까? 또는 무슨 영광을 신성은 인간으로부터 가지는 것일까? 그분이 인간으로 창피해함과 복종함이 있게 하시는 것은 그분을 위해서가 아니라 인간을 위한 것 때문이다. 그 이유가 인간이 이런 상태에 있을 때, 그는 자신 안에 있는 악과 거짓을 싫어함을 느낀다, 고로 그것들을 제거한다, 그리고 이 제거함에서 신성은 선과 진리와 더불어 흘러들 수 있다. 모든 이 각자가 자신 안에서 일어나는 이것을 이미 눈치채고 있을는지 모른다. 우쭐해대는 마음 속에 있는 자는 자기를 사랑함 안에 있다, 그리고 자신을 타인 위에 놓으려 할 뿐만아니라 신성의 어떤 것에도 관심이 없다, 결과적으로 선의 유입을 거절하고, 이로부터 진리들과 결합함도 거절한다. 이것이 신성 앞에서 인간이 창피해져야 하는 진짜 이유이다.
그러므로 인간이 자신을 신성 앞에서 겸비해지게 하고 복종되게 하지 않으면, 그는 거듭나질 수 없고, 선이 진리들과 결합되어지는 것도 가능할 수 없다. 창피해함과 복종함은 진리들 측면을 서술하는데, 그 이유는 진리는 외적 인간을 통하여 흘러들고, 선은 내적 인간을 통하여 흘러들기 때문이다; 그리고 외적 인간을 통하여 흐르는 것들은 오류들을 동반하는 바, 결과적으로 그 애착들과 더불어 거짓들이 따라붙는다. 이에 반해 내적 인간을 통하여 흐르는 경우는 다르다, 그 이유는 내적 인간을 통하여 흐르는 것은 신성이기 때문, 그리고 진리들과 결합하기 위해 진리들을 만나러 온다. 이상으로부터 모든 것들의 복종이 야곱이 자기 형이 가까이 올 때까지 땅에 엎드려 일곱 번 절을 함에 의해 의미된 것이 무엇인지가 분명해졌을 것이다.

그가 그의 형에게 가까이 접근하기 까지. 이는 “야곱”인 진리로부터의 선의 부분에서 결합함이 있음을 의미한다. 이는 “접근함, 끌어 당김(draw near)”의 의미가 자신을 결합되게 하는 것이다로부터; 여기서 “형”인 에서의 표현함이 자연 평면에 있는 신성한 선이다로부터; 그리고 야곱의 표현함이 진리로부터의 선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어떻게 이와 같은 상황이 위치해 있는지는 앞의 항목과 같다.

4절. 그리고 에서는 그를 만나려고 달려갔다, 그리고 그를 포옹했다, 그리고 그의 목을 어긋맞추었다, 그리고 그에게 키스했다. 그리고 그들은 울었다.

그리고 에서는 그를 만나려고 달려갔다. 이는 자연 평면에 있는 신성한 선이 유입됨을 의미한다. 이는 “만나려고 달려가는” 것의 의미가 유입이다로부터; 그리고 에서의 표현함이 자연 평면에 있는 신성한 선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만나려고 달려감”이 유입을 표시하는 이유는 신성한 선이 내적 인간을 통하여 흐르고, 외적 인간을 통하여 은근히 심어진 진리를 만나려고 가는데, 그것들이 결합하기 위하여이기 때문이다. 같은 것이 이어지는 말로부터, 즉 포옹하고, 목을 어긋맞추고, 키스함이 이어짐에서 분명해진다; 이런 행동을 수단으로 사랑을 수단으로 결합하는 것이 의미되어지는데 아래에서 알려질 것이다.

그리고 그를 포옹했다. 이는 사랑으로부터 첫 결합함을 의미한다. 이는 “포옹함”이 애착이다로부터 분명해진다. 그리고 애착함이 사랑으로부터 있고, 사랑은 결합함을 쳐다보고 있기에, 여기서 사랑으로부터 결합함이 의미된다. 이 결합함이 첫 번째이다고 말한 이유는 더 가까운 결합들인 목을 어긋맞추고 키스함이 뒤를 잇기 때문이다. 포옹함이 사랑의 결합으로부터 흐른 결과(효과)이다는 것은 더 많은 설명은 필요 없을 것이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내적 의미에서 이것이 이 결합을 표시한다; 그 이유가 말씀에서 내적 의미로부터의 것들이 외적인 것들에 의해 표출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의 목을 어긋맞추었다. 이는 이 보편적인 것들에서 있는 모든 것들의 두 번째 결합함을 의미한다. 이는 “목을 어긋맞춤”의 의미가 더 가까운 결합인데, 그 이유가 이 행위가 더 가까운 포옹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내적 의미에서 “목”에 의해 유입됨과 내면의 것들이 외면의 것들과 교류함, 결과적으로 결합함이 의미되기 때문이다. 이것이 모든 것들 또는 이 보편적인 것에 있는 모든 것들과 더불은 결합을 표시한다고 말한 이유는 여기서 “그의 목”의 “그의, his”가 뜻한 것이 야곱인데, 이 야곱은 진리들 측면에서 있는 모든 것들의 보편성을 표시하기 때문이다.
자연 평면에서 선이 진리와 결합함이 여기서 묘사되는데, 이렇다: 선은 내적 인간을 통하여 외적 인간 안으로 흐른다, 그리고 거기서 외적 인간을 통하여 은근히 심어져 왔었던 진리들과 그 자체 결합한다. 그 이유가 내적 인간을 통하여 흐르는 선은 사랑으로부터 있기 때문이다; 사랑으로부터 있지 않은 어떤 영적인 선, 천적인 선도 없다, 다시 말해 이로부터 그것은 있고, 이로부터 인간 안에서 선이라 불리운다는 말이다. 선 안에 있는 사랑 자체, 또는 선과 더불은 사랑 자체가 결합하는 것이다는 말이다. 사랑이 내부에 있어 표출되지 않으면, 어떤 결합도 가능해질 수 없다; 그 이유가 사랑은 영적인 결합밖에 더 아니기 때문, 즉 사랑을 수단으로 결합이 결과되기 때문이다. 사랑은 주님 외에 다른 근원으로부터 있지 않다; 그 이유는 그분이 천적, 영적인 모든 사랑의 원천이고 근원이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모든 선은 그분으로부터 파생되기 때문이다. 이 사랑은 두 겹이다; 즉 천적 사랑은 주님을 사랑함이고; 영적 사랑은 이웃을 향한 사랑인데, 선행(charity)이라 불리운다. 이 사랑들로부터 천적, 영적 모든 선이 있다; 그리고 이 선들 자체가 신앙의 진리들로 불리우는 진리들과 결합한다; 사랑 없이 주목하는 신앙의 진리들은 생명 없는 단어들일 뿐이다; 사랑을 통하여, 고로 사랑의 선과 결합함을 통하여 그들은 생명을 받는다. 이상으로부터 보여지는 바, 사랑의 선 안에 있는 이들 외에서는 신앙의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신앙은 사랑에 의거 존재한다는 것이다.
사랑의 선 안에 있는 이들과 더불어서가 아니면 어떤 신앙도 존재하지 않기에 어떤 확신함, 신뢰함도 있는 것이 아니다. 사랑과 선행 안에 있지 않는 모든 이들이 신앙의 확신이나 신뢰함이라 불리우는 것들은 가짜의 신뢰, 또는 그들이 두려움, 또는 고통 번민의 상태에 있을 때, 또는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의 꼬드김에 빠져 있을 때, 악마적인 영들과 더불어서나 가능한 것과 같은 것들일 뿐이다. 그러나 오늘날 인간들은 선행의 선들 없이 구원이 가능한 신앙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신앙의 진리들이 구원할 수 없다는 것을 멀리로부터 막연히 보고도 가까이서 보아서는 확실한 듯 착각하고 있다. 이 기발난 주장은 사악한 자들마저 신앙이 있다고 말해도 될 지경이지만, 여전히 거기에 어떤 확신이나 신뢰를 두려한다. 사실상 신앙 측면을 두고 말해지는 확신이나 신뢰함은 영적인 확신이나 신뢰함이다. 이것은 자유함의 심정 상태에서야 가능하다, 다시 말해 고통이나 번민 같은 장애물이 짓누르는 비자유한 조건에서가 아닌 것, 즉 사랑과 선행의 선을 통하여 흐르는 확신과 신뢰이어야 한다는 말이다. 영적 확신과 신뢰는 선이 진리들과 결합한 이들에서만 가능하고, 삶의 이전의 과정에 의해서는 뿌리내려지지 않는다; 고로 생활 속의 병듦이나 불행, 또는 죽음이 임박했을 때이기 때문에 두려움에 따라 있게 되는 확신과 신뢰는 영적 수준이지 않다. 강박감에 시달리는 상태에서 나타나는 이런 확신과 신뢰가 인간을 구원한다면, 모든 인간은 구원될 것이다. 삶 속에서 이런 종류의 확신을 하는 일은 늘 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어쨌든 이런 사항에 관한 것은 차후 주님의 신성한 자비로부터 별도로 살필 것이다.

그리고 그에게 키스했다. 이는 사랑으로부터 있는 내면의 결합을 의미한다. 이는 “키스함”이 사랑으로부터 결합함을 의미한다로부터 알게 되는데, 여기서는 내면의 결합이다. 이 구절의 경우, “에서”인 자연 평면에 있는 신성한 선이 “야곱”인 자연 평면에 있는 진리와 결합함이 일반적 측면에서 취급되어진다; 그러나 이어지는 것 안에서 이 결합이 영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결합 자체에 주목하면, 인간의 거듭남을 결과하는 것이 이 결합이다; 그 이유가 인간은 자기 안에 있는 진리들이 선과 결합함, 즉 신앙에 속하는 것들이 선행에 속하는 것들과 결합하는 사실에 의해 거듭나지기 때문이다. 이 과정이 이 구절과 이어지는 구절 안에서도 충분히 묘사되어 있다. 실로 주님이 취급되는 주제이기도 하다; 즉 그분께서 그분의 자연 평면을 어떻게 신성으로 만드셨는지, 결과적으로 그분이 신성한 선을 그분의 자연 평면에 있는 진리에 하나되게 하셨는지에 관해서이다. 그러나 인간의 거듭남은 주님의 신성이 되심에 대한 형상이기에, 내적 의미에서 인간의 거듭남도 동시에 다루어지고 있다. 인간의 거듭남에 대해 생각해보는 것은 웬만하면 이해력에 와닿지만, 주님이 신성이 되심에 대한 생각은 그렇지가 못하다, 하지만 후자를 가지고 흐릿하게나마 예증은 가능하다.
이상 설명된 것들로부터 명백해지는 것 또 하나는 거듭남을 결과하게 하는 수단인 선이 진리와 결합함은 더욱 더 내면으로 발전해간다는 것, 즉 진리들이 선과 더욱 내면적으로 계속적으로 결합함이다. 그 이유가 거듭남의 끝은 내적 인간이 외적 인간과 결합함, 또는 영적 인간이 합리성을 통하여 자연적 인간과 결합함이다. 이 양쪽의 결합 없이 거듭남은 없다. 선이 자연 평면에 있는 진리들과 먼저 결합할 때까지 이 결합은 결과될 수 없다; 그 이유가 자연은 평면이어야만 하고, 자연 안에 있는 것은 상응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자연적인 것이 거듭나질 때, 선과 진리의 결합은 더 내면쪽으로 계속된다. 그 이유가 영적인 것은 자연적인 것 안에 있는 가장 안쪽의 것과 먼저 결합하고, 그 다음 더 외면의 것들로 가면서 결합하기 때문이다. 외적인 것 안에 있는 진리가 진리로부터의 선이 되지 않으면, 즉 진리가 의지와 행동 상에 있지 않으면, 인간의 내적인 것은 그 자체를 그의 외적인 것과 결합되게 할 수 없다. 진리가 행동 안에 있을 때에야 주님은 당사자의 내적 인간, 더 정확히 말하면 내적 인간 속의 선을 통하여 인간에게 흘러드시는데, 흘러드신 만큼에서 선과 진리가 결합할 수 있다. 이 선이 외적 인간에 있는 선과 결합될 수 있다, 그러나 선이 진리와 직접적으로 결합함은 아니다.
이로부터 알는지 모르는 것은, 합리성이 자연적인 것과, 또는 내적 인간이 외적 인간과 결합함이 거행될 수 있기 이전, 인간에 있는 진리는 의지와 행동에 있는 진리 (즉 진리로부터의 선)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어떻게 진리가 진리로부터의 선이 되는지는 모든 이가 반드시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 대목이다. 모든 신성한 진리는 두 가지 가르침에 집중되어 있다; 즉 주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자기 같이 사랑하는 것이다. 진리는 이 가르침으로부터 있고, 이 가르침을 위하여 있고, 그리고 이 가르침쪽으로 더 가깝게, 또는 더 멀리 도달하고 있다. 그러므로 진리들이 행동 안으로 놓일 때, 진리들은 그것들의 시작 안으로, 그리고 그것들의 끝(목적) 안으로, 즉 이웃을 향한 사랑 안으로, 그리고 주님을 향한 사랑 안으로 계속적으로 은근히 심어져 간다. 이것에 의해서 진리는 선이 되어가는데, 이것이 진리로부터의 선(진리의 선)이라 불리운다; 그리고 이것이 거행될 때, 이것은 내적 인간과 결합될 수 있다; 이 결합은 계속적으로 더 내면적이 되어가는데, 더 내면적 진리들이 이 선 안에 심어지는 만큼에 비례하여서 이다. 행동이 앞에 있고, 인간의 뜻함이 뒤따른다; 이렇게 말한 이유는 인간이 이해력으로부터 행한 것을 그는 결국 의지로부터 행하고, 그것을 습관으로 놓아간다; 그리고 이것은 그의 합리성 또는 내적 인간 안에 은근히 심어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렇게 은근히 심어졌을 때, 인간은 진리로부터 더 이상 행동하지 않고, 선으로부터 행동한다; 그 이유가 그때 그는 그 안에서 복됨의 얼마만큼을 지각하기를 시작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복됨이 천국의 얼마만큼인 것처럼 지각하기도 한다. 이것은 당사자와 더불어 사후 남아 있는다, 그리고 이것을 수단으로 그는 주님에 의해 천국으로 올리워진다.

그리고 그들은 울었다. 이는 결과를 의미한다. 이는 “운다”의 의미가 슬픔의 결과, 또한 기쁨의 결과이다로부터 분명해지는데, 여기서는 사랑을 통하여 선이 진리들과 결합함으로부터 있는 기쁨의 결과이다.

5-7절. 그리고 그는 그의 눈을 들었다, 그리고 여인들과 아이들을 보았다. 그리고 말했다, 너와 함께 한 이들은 누구냐? 그리고 그는 말했다, 하느님께서 당신의 종에게 은혜로 수여하신 아이들 입니다. 6 그리고 하녀들이 가까이 나아왔다, 그들과 그들의 아이들이 나아왔다, 그리고 그들은 절을 했다. 7 그리고 레아와 그녀의 아이들 또한 나아가 절을 했다. 그리고 그 뒤에 요셉과 라헬이 가까이 나아와 절을 했다.

그리고 그는 눈을 들었다. 이는 지각을 의미하는데, “눈을 들어올림”이 지각임으로부터 알게 된다.

여인들과 아이들을 보았다. 이는 진리들에 애착함과 그 애착에 소속된 진리들에 관하여를 의미한다. 이는 “여인들”의 의미로부터, 여기서 하녀들이고, 그리고 레아와 라헬의 하녀들이고, 레아와 라헬은 진리에 애착함들이다로부터; 그리고 “어린이”, 또는 “아들들”의 의미가 진리들이다로부터, 여기서는 애착들에 소속된 진리들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리고 말했다, 너와 함께 한 이들은 누구냐? 이는 인정함을 의미한다. 이는 글자 의미에서 있는 질문이 최고 의미에서 질문이지 않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 이유가 주님은 일반적, 특수적 모두에서 모든 것을 이미 아시기 때문에 그분이 물어보실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질문, “이들은 네게 누구이냐?”는 인정함을 의미한다. 그 이유가 에서에 의해 자연 평면에 있는 신성한 선 측면의 주님이 표현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신성한 선은 자체에 결합하는 진리들을 즉각적으로 인정한다. 더욱이 모든 선도 마찬가지 인데, 그 이유는 선은 진리들로 불리우는 것 없이 존재를 가질 수 없기 때문, 또한 진리는 진리들이 선이라 부르는 것들과 결합함이 없으면 진리들일 수 없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자신들로부터의 자신들을 결합되게 한다; 선이 이러하듯 진리 역시 마찬가지 이다. 선은 진리들을 인정하고 남편과 아내의 관계 같이 그 자체 짝을 이룬다; 그 이유가 선이 진리와 결합함은 영적 의미로는 결혼이기 때문이다.

그는 말했다, 하느님께서 당신의 종에게 은혜로 수여하신 아이들 입니다. 이는 신성한 섭리로부터의 진리들을 의미한다. 이는 “아이들”, 또는 “아들들”이 진리들이다로부터; 그리고 “하느님께서 은혜로 수여하셨다”는 말의 의미가 신성한 섭리로부터 이다; 그 이유는 하느님께서 수여하는 것은 무엇이든 그분의 섭리 속에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녀들이 가까이 나아왔다, 그들과 그들의 아이들, 그리고 그들은 절을 했다. 이는 감각적인 기억 속의 지식과 그것의 진리들, 그리고 그것들의 복종(submission)을 의미한다. 이는 “하녀들”의 의미가 기억 속의 지식들, 그리고 외적 인간 속에 있는 지식들에 애착함이다로부터, 결과적으로 감각적인 기억 속의 지식들이다; “아이들”, 또는 “아들들”의 의미가 진리들이다로부터; 그리고 “자신을 숙임, 절을 함”의 의미가 복종함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하녀들”에 의해 의미되는 감각적인 기억 속의 지식들은 세상의 외적인 것들로부터의 기억 속의 지식들이다, 그러므로 모든 지식들 중에서도 가장 일반적인 지식들이다, 그리고 이 지식들은 외적 감각들을 통하여 직접 들어간 것들이다, 다시 말해 감각 자체에 의해 지각된 것들이다. 이런 것들 안에 어린 아이들 모두가 있다; 더구나 이 지식들은 영적인 것들에 관한 지식들에 평면 역할을 해준다; 그 이유가 영적인 것들은 자연적인 것들을 기초로 하고, 그것들 안에서 표현되어져 있기 때문이다. 진리들은 질서에 따라서 선과 결합하는데, 그 순서는 보다 외적인 것들로부터 시작한다; 그러므로 본문에서 하녀들과 그 자녀들이 먼저 나아와 절하여 복종했다.

그리고 레아 역시 그리고 그녀의 아이들이 가까이 나아와 절을 했다. 이는 외면의 것들에 관련하여 있는 신앙 속의 진리에 애착함, 그것들의 진리들, 그리고 그것들이 복종하도록 소개함(introduction)을 의미한다. 이는 레아의 표현함이 외면의 진리에 애착함이다로부터, 그리고 그러므로 외면의 것들 측면에서 신앙의 진리에 애착함이다로부터; 그리고 “아이들”, “아들들”이 진리들이다로부터; 그리고 “절을 함”의 의미가 복종함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즉 에서에 의해 표현되는 자연 평면의 신성한 선에 복종하도록 소개함이다.

그리고 그후 요셉과 라헬이 가까이 나아왔다, 그리고 절을 했다. 이는 내면의 것들에 관련하여 있는 신앙 속의 진리에 애착함들, 그리고 그것들이 복종하도록 소개함을 의미한다. 이는 요셉의 표현함이 영적 평면 속의 천적인 것(the celestial spiritual)이다로부터; 그리고 라헬의 표현함이 내면의 진리에 애착함이다로부터; 그리고 “절을 함”의 의미가 복종하도록 소개함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8-11절. 그리고 그는 말했다, 내가 만난 이 모든 진영들은 무엇이냐? 그리고 그가 말했다, 내 주의 눈에서 은혜를 발견하기 위해서 입니다. 9 그리고 에서는 말했다, 나는 많은 것을 가지고 있다, 내 동생아, 네 것은 네게 있게 하라. 10 그리고 야곱이 말했다, 아닙니다, 바라건대, 제가 당신의 눈에서 은혜를 발견하였다면, 부디 내 손으로부터 내 선물을 받아 가소서. 그 이유는 제가 하느님의 얼굴을 보는 것 같이 당신의 얼굴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당신은 나를 받아 주셨기 때문입니다. 11 청컨대 제가 당신에게 가져 온 제 복을 가져 가십시요, 그 이유는 하느님께서 저에게 은총을 베풀어 수여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나는 모든 것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는 그에게 강권했다, 그리고 그는 그것을 받아 갔다.

그리고 그는 말했다, 내가 만난 이 모든 진영들은 무엇이냐? 이는 거기로부터 파생된 특별한 것들을 의미한다. 여기서 “진영들”의 의미가 특별한 것들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렇게 말한 이유는 이 진영들이 앞 장 14, 15절에서 열거되기 때문, 즉 암염소 이백, 숫염소 이십, 암양 이백과 숫양 이십, 젖을 내는 낙타 삼십과 그 새끼들, 어린 암소 사십과 거세한 숫소 십, 암나귀 이십과 그 망아지 열인 바, 이를 모두 아울러 말하고자 특별한 것(선물)들이라 말했을 뿐이다; 그러나 이를 수단으로 섬김에 유용한 선들과 진리들이 뜻해지고, 결과적으로 개시함이 결과되는 바, 이는 특별한 것들이다. 여기서 언급되는 특별한 것들은 진리들을 진리로서, 선들을 선으로 확증하는 것밖에 더 아니다. 그것들은 인간의 생각함과 애착함들에게, 즉 그가 알고 사랑하는 것들에게 부속물로 있다, 그리고 이런 부속물 때문에 그는 그것이 맞다고 확인하고 좋아하기도 한다. 옛날 시대의 교회에서 왕이나 성직자에게 주게 되는 선물들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 이었다. 잘 알려진 바, 자기 외의 누군가가 자신의 의견이 선하고 진정하다고 맞장구를 치도록 추론들과 애착들을 수단으로 제 편이 되게 끌어들이는 것은 세상사에 흔한 일인 것이다. 이럴 때 확증을 위해 있는 것이 특별한 것으로 뜻해지는데, 이것이 본문에서는 “진영들”에 의미되어 있다. 그렇기에 이 특별한 것, “진영들”은 “내 주의 눈에서 은총을 발견하기 위해서”라고; 그 뒤에 “만일 제가 당신의 눈에서 은총을 발견했다면, 제 손으로부터의 제 선물을 받는다고 하십시요” 라고도 말해진다.
이런 경우는 영적인 것들에서도, 또는 신앙의 주제를 놓고도, 이것들이 선행의 선과 결합될 때 마찬가지 경우로 있다. 인간이 믿는 바, 선들과 진리들은 천국으로부터 직접 받는다는 것, 즉 자기 내부의 어떤 매체 없이 받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큰 착오이다. 그 이유가 주님께서는 당사자의 애착들을 수단으로 인도하시기 때문, 고로 그분은 암묵적인 섭리로 그를 구부리신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 그분은 자유함을 통하여 당사자를 인도하신다. 모든 자유가 애착, 또는 사랑 속에 있다는 것은 이미 살폈다; 그리고 이로부터 선과 진리의 모든 결합은 강제적이 아닌, 자유함에서 결과되어진다. 그러므로 인간이 선쪽으로 자유함에서 인도되어질 때, 진리들이 그때 응낙되고 심어진다, 그리고 그는 그것들에 의해 감동되어진다, 고로 천국의 자유 안으로 조금씩 입문된다. 거듭나져 온 누군가가 (즉 이웃을 사랑하고, 더욱이 주님을 사랑하는 자가) 그의 과거 삶을 곰곰이 반영해보면, 그는 그의 생각들 속의 많은 것들, 그리고 자기 애착 속의 많은 것들에 의해 인도되어져 왔었다는 것을 발견한다.
그런 것들로부터 파생되는 것들이 여기서 특별한 것들로 뜻해진다는 것을 예를 들어 더 생각해볼 수 있다. 인간은 사후 생명을 가진다는 진리가 선 안으로 은근히 심어지는 경우에 대해서이다. 이런 진리는 당사자에게 특별한 것들을 수단으로 확증하지 않으면 응낙되지 않는다; 즉 인간은 자기가 보고 느끼는 것, 뿐만 아니라 자기가 보지도 못하고 느끼지도 못하는 것도 생각할 수 있다는 것; 그는 애착을 수단으로 이런 것들과 결합될 수 있다는 것, 결과적으로 천국과, 더 나아가 주님 자신과 결합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신성과 결합될 수 있는 자는 결코 죽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런 사항들, 그리고 이외 더 많은 사항들이 이런 진리가 선 안으로 은근히 심어지기 이전, 또는 그 진리가 충분하게 믿어질 수 있기 이전 당사자에게 처음 발생하는 특별한 것들이다. 실로 이런 진리는 첫째로 복종시켜지는 것들이지만, 그래도 여전히 그것들은 특별한 것들로 해서 응낙됨이 결정된다는 말이다.
또 다른 예로서 인간은 영이다는 진리, 그리고 인간은 세상에 있는 동안 육체가 영을 옷입히고 있는 것이다 라는 진리에 대해서 이다. 이것 역시 선 안으로 은근히 심어질 수밖에 없는 진리이다; 그 이유가 세상 속의 인간은 대체로 천국에 관심을 갖지 않고 살아가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죽으면 끝장이라는 동물적 수준에서 살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진리 역시 특별한 것들을 수단으로 하지 않으면 은근히도 심어지지 않는다. 이런 식이 필요할지 모른다; 즉 육체는 이 세상에서의 삶을 위해 섬김 속에 있다는 것, 하여 인간은 물질적 눈으로 세상의 것들을 본다는 것, 그럼에도 육체를 도구로, 물질적 기관으로 하여 생각하고 뜻하는 내면의 어떤 것이 있다는 것; 그리고 인간의 영이 자기 자신이다는 것, 또는 인간 자신이다는 것, 이것이 육체의 기관 형체들을 통하여 행동하고 느낀다는 것; 그리고 그는 이것을 한때나마 그렇다고 하는 신조를 갖게 되면 그 후 자신의 많은 경험들로부터 확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모든 것들은 특별한 것에 해당된다; 이것들은 당사자에게서 발전하려 준비자세에 있다, 그리고 이것은 의문상에 놓인 진리 자체로 하여금 선 안으로 은근히 심어지게 한다. 이와 비슷한 사항들이 본문에서 “진영들, camps”에 의해 의미되어 있다.

그리고 그는 말했다, 내 주의 눈에서 은혜를 발견하기 위해서 입니다. 이는 감사하고 있음이 개시됨을 의미한다. 이는 별도의 설명은 필요하지 않을 것 같다; 그 이유가 “은혜를 발견한다”가 자기들을 받아들인다는 것, 그리고 받아들여지는 것이 감사함에서 개시되는 것, 고로 받아들임이 은근히 심어지는 것을 표시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에서는 말했다, 나는 많은 것을 가지고 있다, 내 동생아, 네 것은 네게 있게 하라. 이는 그가 진리로부터 선에 애착함을 은근히 심어주기 위하여 있는 무언의 승낙을 의미한다. 이는 사양하고 있으나 그 안에는 동의함이 포함되고 있음으로부터 알게 된다; 그 이유가 사양했지만 결국 선물 받음을 수락했기 때문이다. 누군가가 거절하고 다시 수락하는 것에서 때로는 애착이 은근히 심어지는 결과를 맞기도 한다; 더욱이 애착함이 배가되어, 잘 생각함을 건너 뜻함으로까지 발전하기도 한다. 영적 삶에서도 인간은 주님에 의해 인도되는 때에도 위와 같은 시민적 생활에 있는 것과 비슷한 경우가 발생하기도 한다. 하여 생각함뿐만 아니라 뜻함으로 까지 이어진다는 말이다. 만일 좋아함이 승낙되어지지 않으면, 눈에 보이는 목적은 상실될 것이다; 그러므로 목적은 주는 자에게 그것을 생각하기를 더 열렬하게 종용할 것이다, 하여 그것을 심정으로부터 뜻해보라고 까지 종용할 것이다.
이런 시민적 생활에 있는 것들이 영적 삶에서 나타나지 않는 이유는 진리가 선과 결합된 이들, 즉 거듭나는 이들이 매우 적은 탓이다. 또한 거듭나지는 이들이라 해도 이런 사항들을 곰곰이 생각하는 자는 적기 때문이다. 또한 그렇게 할 수 없는 이유는 그들이 영적 선이 무엇인지를 모르기 때문이다, 영적 선을 모르는 이유는 선행이 무엇인지를, 이웃의 진짜 의미를 모르기 때문이다. 그들이 이런 사항들을 모르기 때문에, 그들은 신앙에 속하는 진리에 대한 내면의 생각도 가지지 못한다. 더구나 그들은 영적 생활을 시민적 생활로부터 광범위하게 분리한다. 하여 그들은 이쪽으로부터 저쪽에 대한 것을 끌어내려 감히 시도조차 하지 않는다. 이 두 삶은 상응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영적 삶이 시민 생활에서 표현되어진다는 것을 그들은 전혀 알지 못한다, 그리고 어떤 자는 이 두 삶의 비교조차 허용하지 않는다; 시민 생활 안에 있는 것들이 아니면 영적 생활에 관한 어떤 생각도 가질 수 없다가 진정할 진 대, 만일 후자를 한쪽으로 밀어내면, 후자는 땅에 추락하고 만다, 게다가 마지막 더 이상 믿지도 않을 때까지, 즉 영들과 천사들이 인간들 같이 서로 연계되고 대화한다는 것, 또는 인간들이 명예있고, 어울리는 것, 공정과 공평, 선하고 참된 것, 더욱 완전해짐에 관하여 추론함 같은 것도 마찬가지로 한다는 것을 아예 믿지 않을 때까지로 추락한다. 그들은 서로를 보고 듣고 탐구하고, 사회들에서 함께 연합하고, 함께 거주한다는 것, 그 외 많은 다른 것들을 더욱 덜 믿는다.

그리고 야곱은 말했다, 아닙니다, 청컨대. 이는 애착의 첫 시작을 의미한다. 이는 앞 대목에서 선물받기를 사양함이 애착이 은근히 심어지게 한다고 말해졌는데, 여기서는 “아닙니다, 청컨대”라고 그가 말함으로 애착이 은근히 심어짐이 명백해진다. 이로부터 이 말들이 애착의 첫 시작을 표시함이 분명해진다.

만일 제가 당신의 눈에서 은혜를 발견했다면, 내 손으로부터 제 선물을 받아 주십시요. 이는 애착이 은근히 심어지도록 하기 위한 상호간의 애착을 의미한다. 이는 앞에서 살핀 것과 뒤이어지는 것들로부터 분명해진다. 그 이유가 여기서 취급되는 주제가 자연 평면에서 선이 진리들과 결합함이기 때문, 결과적으로 애착의 은근히 심어짐이 선으로부터 진리 안으로 있음이다. 야곱에 의해 보내진 선물을 사양함이 이 목적을 위해 있었다; 즉 애착이 진리 안으로 은근히 심어지기 위하여이다; 그러므로 에서의 사양함에 즉각 이어지는 말, “아닙니다, 청컨대”에 의해 애착의 첫 시작이 의미되었다. 그러므로 이 말, “만일 제가 당신의 눈에서 은혜를 발견한다면, 제 손으로부터 제 선물을 받으십시요”는 애착이 은근히 심어지도록 하기 위하여 있는 애착을 주고받음이 의미된다; 그 이유가 그는 이 말을 선한 의지, 즉 애착으로부터 말하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이어진 말은, “그는 강권했다”하고 말해졌다.
애착이 상호적으로 있음에 의해, 즉 에서인 선에 의해 야곱인 진리 안으로 은근히 심어지는 애착은 진리에 애착함이다고 뜻해진다. 그 이유가 두 애착들은 천국에 있는 애착들, 즉 선에 애착함과 진리에 애착함이기 때문이다. 진리에 애착함은 선으로부터서만 근원한다. 애착 자체는 이 근원으로부터 오고 있다; 그 이유가 진리는 자체로부터 생명이 없기 때문, 그러나 선으로부터 생명을 받는다; 그러므로 인간이 진리로 말미암아 감동될 때, 이것은 진리로부터가 아닌 진리 안으로 흐르는 선으로부터 이다. 그리고 애착 자체를 생산한다. 이것이 여기서 “애착이 은근히 심어지기 위하여 있는 상호적인 애착”에 의해 뜻해진다. 주님의 말씀에 감명받은 이들이 교회 안에 많다는 것, 그리고 말씀을 읽노라고 많은 수고를 아끼지 않는 이들도 많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나 말씀을 읽는 목적으로 자기들이 진리 안에서 배워져야 함을 가지는 자는 매우 적다는 사실이다. 그 이유가 말씀을 읽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기의 독단적 주장(dogma)에 머무르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자신이 고안해낸) 독단적 자기 논리를 확증해줄 근거를 찾는 것이 말씀을 읽는데 수고를 마다하지 않는 그들에게 목적이 되어 있다는 말이다. 이런 자들의 수고함이 얼핏보면 진리에 애착해서인 듯하나 그렇지 않다. 진리들에 관하여 배우기를 사랑하는 자, 즉 진리가 무엇인지를 알기를 사랑하는 자, 이 목적 때문에 성경을 수색하는 자만이 진리에 애착하는 이들이다. 또한 선 안에 있는 자, 즉 이웃을 향하여 선행 안에, 더 나아가 주님을 사랑함 안에 있는 자 외에는 진리에 애착함 안에 있는 자는 없다. 이런 사람과 더불어서 만이 선이 진리 안으로 흘러들고, 애착을 생산한다; 그 이유는 주님은 이 선 안에 현존하시기 때문이다.
아래 구절을 가지고 예증을 삼아도 될는지 모른다. 즉 진짜 선행으로부터의 선 안에 있는 이들에 관한 것이다;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이야기하신 대목이다:
내가 네게 말한다, 너는 베드로이다, 그리고 이 바위 위에 나는 내 교회를 세울 것이다, 그리고 지옥의 문들이 그것에 맞서 우세하지 못할 것이다; 나는 네게 천국들의 왕국의 열쇠들을 줄 것이다, 그리고 네가 땅에서 묶는 것은 무엇이든 천국들에서도 묶여질 것이다, 그리고 땅에서 푸는 것은 무엇이든 천국들에서 풀어질 것이다 (마. 16:15-19).
진짜 선행의 선으로부터 진리에 애착함에 있는 이들은 이 말들에 의해 뜻해지는 것을 배우기를 사랑한다; 그래서 교회가 세워지게 되는 바위(베드로)에 의해 뜻해지는 것이 선행으로부터의 신앙임을, 그리고 천국을 열고 닫는 열쇠들이 이 신앙에 주어져 있다는 것을 들을 때, 이들은 기뻐 환호하고, 이 진리에 감명 받는다. 그 이유는 이 해석에서 주님만이 신앙의 근원이신 바, 주님만이 이 권능을 행사하실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짜 선행으로부터의 선으로부터 진리에 애착하지 않는 자, 즉 어떤 다른 선으로부터 진리에 애착하는 자, 특히 자기를 사랑함과 세상을 사랑함으로부터 이다면, 이 진리에 감동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를 슬프게, 또는 화나게 하는데, 그 이유는 그들이 성직자를 위해 이 권능을 주장하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그들이 화나는 이유는 그들에게서 지배권이 박탈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이 슬퍼지는 이유는 존경받고 있음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이번에는 진짜 선행의 선으로부터 진리에 애착하는 이들을 예로 생각해보자: 만일 이들이 선행이 교회를 만들지, 선행에서 분리된 신앙이 아니다고 말하면, 이들은 이 진리를 기쁨으로 받는다; 이에 반해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으로부터 진리에 애착하는 이들은 이 진리를 받지 않는다. 더욱이 진짜 선행의 선으로부터 진리에 애착하는 이들의 이웃을 향한 사랑은 자신으로부터 시작되지 않고 주님으로부터 시작된다는 진리를 들을 때 그들은 기뻐 환호한다; 이에 반해, 자기와 세상을 사랑함으로부터 진리에 애착하는 이들은 이 진리를 받지 않고, 오히려 이 사랑은 자신들로부터 있는다는 주장을 구부리려 들지 않는다. 고로 그들은 이웃을 자신 같이 사랑하라가 무엇인지를 모르고 있다. 진짜 선행의 선으로부터 진리에 애착하는 이들은 천국의 복됨은 선한 의지로부터, 그리고 이기적 목적을 위하여가 아닌 상태에서 타인에게 선을 행함에 있다는 진리를 들을 때 기뻐 환호한다; 이에 반해 자기와 세상을 사랑함에서 진리에 애착하는 이들은 이 진리를 바라지도 않고, 그것을 납득조차 원하지도 않는다.
진짜 선행의 선으로부터 진리에 애착하는 이들은 외적 인간의 일들이 내적 인간으로부터 있지 않으면, 즉 선을 뜻함으로부터 있지 않으면 아무것도 아니다는 진리를 배울 때, 기쁨으로 이를 받는다; 이에 반해 자기와 세상을 사랑함에서 진리에 애착하는 이들은 외적 인간의 일들을 극구 추켜세우고 내적 인간의 선한 의지로부터 이어야 함에 대해서는 아랑곳하지 않는다. 사실상 이들은 내적 인간의 선한 의지가 사후 남을 뿐, 내적 인간에서 분리된 외적 인간의 일들은 죽어 있고, 멸해짐을 아예 모르고 있다. 아마 위의 사항들을 악 안에 있는 이들은 믿지 않고, 선 안에 있는 이들만이 믿는다는 것을 일상 생활의 경험에만 비추어도 확증된다. 이로부터 분명한 바, 신앙 속의 진리는 선과 더불어 결합하나 악과 더불어서는 결합하는 일이 결코 없다는 것이다.

그 이유가 제가 하느님의 얼굴을 뵙는 것 같이 당신의 얼굴을 뵈었기 때문이요, 당신께서는 나를 받아 주셨기 때문입니다. 이는 상호 은근히 심어짐과 더불은 지각 안에 있는 애착 자체를 의미한다. 이는 “하느님의 얼굴을 보듯 얼굴을 본다”의 의미가 지각 안에 있는 애착이다로부터; 그 이유가 “얼굴”에 의해 내면들이 의미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느님의 얼굴”에 의해 모든 선이 의미된다; 이 선이 흘러들 때, 지각 안에 애착을 준다. 그리고 “나를 받아 주셨음”의 의미가 애착이 은근히 심어졌다 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청컨대 저에게 내려진 복을 가져 가십시오. 이는 자연 평면에 있는 신성한 선에 인접되어 있는 신성한 것들을 의미한다. 이는 여기서 말하는 “복”은 창. 32:14, 15에서 언급된 것들이다로부터; 이 복을 수단으로 개시함을 결과하는데 쓰여지는 그들의 것들과 더불은 신성한 선들과 진리들이 의미되고, 이것들이 자연 평면의 신성한 선들에 인접되어 있다.

그 이유는 하느님께서 저에게 은혜로 수여하셨기 때문입니다. 이는 섭리로부터 를 의미한다. 즉 이 말 자체가 섭리를 암시한다.

그리고 제가 모든 것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는 그분의 영적인 부유함을 의미한다. 이는 “그가 모든 것을 가짐”의 의미가 주님의 영적인 부유함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 이유가 그가 가진 것들이 양떼들과 가축떼들 이었고, 이것들에 의해 선들과 진리들이 의미되었기 때문이다. 이것들은 영적인 부유함들에 해당된다. 영적인 부유함은 진리를 말하나 이를 사용함은 선으로부터 이고 선이 창출된다.

그리고 그는 그에게 강권했다, 그리고 그는 받아 갔다. 이는 진리의 선으로부터 있는 이 애착은 신성한 선에 의해 영감된 애착을 수단으로 은근히 심어졌음을 의미한다. 이는 지금까지 펼쳐보인 많은 사항들로부터 미루어 알게 된다. 신성한 선을 수단으로 선에 영감된 진리에 애착함 자체는 “그가 그에게 강권함”에 의해 증명되고 있다. 이 절에서 취급된 진리에 애착함에 더 주목해보면, 알아지는 것은, 이것이 진리로부터 이다고 나타난다, 고로 진리 안에 있다라고, 그렇지만 진리로부터가 아니다는 것, 그러나 선으로부터 이다는 것이다; 그 이유가 진리는 그 자체로는 생명을 가질 수 없고, 선으로부터만 가지기 때문이는 것이다. 진리의 나타남이 마치 진리로부터 인 듯한 것은 육체 안에 있는 생명이 비록 육체로부터 인 듯 해도 육체로부터가 아니고 혼으로부터 인 것에 비교된다. 더구나 혼으로부터가 아니고, 혼을 통하여 생명의 첫째(즉 주님으로부터)로부터 이다. 이런 예로, 거울 안에 있는 형상은 마치 거울로부터 인 듯 하지만, 그것은 허상이다는 것과도 비슷한 맥락이다.
말씀을 단지 역사물로서만 고집하는 이들이게 말씀의 이런 구절에 있는 이런 내적 의미, 이미 살펴온 구절들의 내적 의미는 실로 나타나지 않는다, 그 이유가 그들은 에서와 야곱, 앞서 보낸 선물이 선물일 뿐 거기에 별도의 의미가 있다는 것에 대하여는 무슨 황당한 소리냐고 반문하기 때문이다; 더구나 에서에 의해 자연 평면에 있는 신성한 선이 표현된다는 것, 야곱에 의해서는 자연 평면에서 신성한 선과 결합되는 진리를 표현한다는 것도 모른다; 그리고 이 대목에서 이 두 사람이 친근하게 대화함이 선을 수단으로 진리 안으로 영감된 애착이 의미된다는 것도 모른다. 어쨌든 이런 사항을 모른채 이 구절을 누군가가 읽고 있다면, 이 말씀을 듣는 천사는 직바로 위의 내적 의미에서 이해하고 있다. 그 이유가 천사들은 영적인 측면 외의 다른 생각은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하여 그들과 더불어 있는 역사물은 영적 생각으로 금새 바뀌어진다. 이 방식에서 천사의 생각은 인간의 생각과 상응하고 있다. 말씀을 거룩하고 신성하게 있도록 하는 것은 이런 항구적인 상응 때문이다; 글자 의미가 승강함으로 영적으로 된다, 그리고 이 영적인 것은 주님에까지 조차 이르고, 거기 신성이 있다. 이것이 영감(inspiration)이다.

12-16절. 그리고 그는 말했다, 같이 떠나 가자, 그리고 나는 너 가까이에서 가리라.
13 그리고 그는 그에게 말했다, 내 주도 아시는 바, 아이들은 연약합니다, 그리고 제게는 젖을 물리고 있는 양떼들과 목축떼가 있습니다, 그리고 만일 그것들을 하루만 내몰아 친다 해도 모든 가축떼들은 죽을 것입니다. 14 청컨대 내 주는 제 앞서 가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저는 세일의 내 주께 당도할 때 까지, 저는 아이들의 발에, 그리고 제 앞에 있는 일의 발에 맞추어 천천히 나아가렵니다. 15 그리고 에서는 말했다, 청컨대 내 사람을 너와 머무르게 하여라. 그리고 그는 말했다, 어찌하여 이러십니까? 내 주의 눈에서 은혜를 발견하게 하십시오. 16 그리고 에서는 그 날 자기 길로 해서 세일로 돌아 갔다.

그리고 그는 말했다, 같이 떠나 가자. 이는 계속적인 것(즉 진리가 선과 결합함이 계속되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떠나감, 여행”, 그리고 “가자”의 의미가 더 앞쪽으로 진보함을 포함하는 말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 이유가 진보함이나 계속되는 것들이 지금 이어지는 사항들의 내적 의미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나는 네 옆 가까이서 가리라. 이는 그들이 결합되어져 있음을 의미한다. 이는 “네 옆에서”가 인접됨을 표시하는 바 그들이(즉 선이 진리들과) 결합되어져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그에게 말했다, 내 주도 아시는 바, 아이들은 유약합니다. 이는 아직 신성한 생명을 얻지 못한 진리들을 의미한다. 이는 “어린이들”, 또는 “아들들”이 진리들이다로부터; 그리고 “유약함”의 의미가 최근의 것들, 고로 어떤 생명을 가지지 못한 것들, 그렇지만 진짜인 것들이다로부터 ; 여기서는 아직 신성이지 않은 것, 그 이유는 여기서 취급되는 주제가 신성한 자연 평면에서 주님의 신성이 되심이기 때문이다. 거듭나지는 이들, 마치 태어난 인간이 나이를 먹어가듯, 유아기, 어린 시절, 젊은이 시절, 즉 초기 성년기, 성년기를 통과한다; 그 이유가 거듭나지는 이들 역시 새로이 출생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거듭나는 자가 유아였을 때, 자기 안에 있는 진리는 실로 생명을 가지고 있으나, 아직 영적 생명이지는 않다. 이 진리는 선이 결합되는 특수적, 낱개적 진리들이 없는 (막연한) 일반적 진리일 뿐이다; 결과적으로 외면의 결합만 있을 뿐 내면의 결합은 없다. 내면의 결합은 계속적으로 결과되어진다, 마치 인간이 나이를 먹어가며 발전하는 경우와 같다. 이 유아기의 상태가 본문에서 “아이들은 유약합니다”에, 또한 이어지는 말, “ 그리고 양떼와 목축떼가 젖을 빨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만일 그것들이 하루만이라도 내몰아 친다면, 모든 가축떼들은 죽을 것입니다”에도 의미되어 있다.

그리고 제게는 젖을 물리고 있는 양떼들과 목축들이 있습니다. 이는 아직까지는 신성한 생명을 얻지 못한 내면의 선들과 자연적인 선들을 의미한다. 이는 “양떼들”의 의미가 내면의 선들이다로부터; 그리고 “목축떼들”의 의미가 외면 또는 자연적인 선들이다로부터; 그리고 “젖을 빨림”의 의미가 최근의 선들, 여기서는 자연 평면에서 태어나는 영적인 선들이다로부터 알려진다. 거듭나는 인간에 관련하여 유아기의 상태에서 영적인 것들은 잠재적으로 내부에 있다; 그 이유가 영적인 생명은 계속적으로 시기를 거쳐 발전한다; 이를 부화되는 알(egg)에 빗대보면, 유아기는 어린 시절의 알이고, 어린 시절은 젊은 이 시기의 알, 젊은이는 성년기의 알인 셈이다. 이로부터 아직 신성한 생명을 가지지 못한 내면, 자연 모두에서의 선이 뜻해진다는 것, 그리고 이것이 젖을 빠는 양떼들과 목축떼들에 의해 의미되어 있다.

그것들은 하루만 내몰아 친다 해도, 모두 죽고 말 것입니다. 이는 지체했다, 계속했다 하는 것, 그렇지 않을 경우 그들은 살지 못할 것인 바, 그러므로 그들이 결합을 위해 준비됨을 의미한다. 이는 시리즈 자체로부터 알게 된다. 그 이유가 앞에 진행한 것들에서 취급한 주제가 일반적 측면에서의 선과 진리의 결합이었는데, 여기서는 특별한 측면에서 같은 것을 취급하기 때문이다. 진리가 선 안으로 은근히 심어짐의 과정 자체가 내적 의미에서 여기에 묘사되어 있다. 그것의 본성이 무엇인지는 실로 어느 정도 수준까지는 일반적 측면에서 설명함으로부터 나타날지 모른다; 그러나 그것의 신비함들 측면의 것은 아니다. 이 신비함들은 천국의 빛에 있는 이들에게만 명료해 있을 뿐이다. 그렇지만 세상의 빛 안에 있는 이들이라 해도 세상의 빛 안으로 천국의 빛이 드리움을 승인할 때 매우 조잡하지만 어느 정도는 가능하다. 이런 예를 가지고 생각해보자; 즉 인간이 다시 태어날 때 그는 자연계에서 태어난 자가 삶의 나이들, 시기들을 통과하듯 생명의 나이들, 시기들을 통과해 간다; 그리고 앞의 과정들, 시기들, 상태들은 이어지는 단계들에게 부화되는 알의 역활을 담당하고 있다. 다시 말해 그는 계속적으로 임신되고 출생하는 것이다. 이 계속은 이 세상의 삶에서 뿐만 아니라 다른 삶에 가서도 그러하다. 그리고 그가 지금 지닌 상태들은 한계가 없이 앞에서 기다리는 상태들보다 결코 더 완전하지 않다. 따라서 거듭남에 연결하여 거행되는 것들은 얼마나 무수할 것인지 짐작될 것이다. 더욱이 이 짐작되는 것 중 어느 하나도 인간 당사자에게 알려져 있지 않다. 하여 여기서 취급된 주제인 선이 진리들 안으로 계속적으로 은근히 심어지는 방식과 상태는 그 얼마나 위대한 작업인지 모른다.

청컨대 내 주께서는 당신의 종에 앞서 먼저 가십시오. 이는 더 일반적으로 현존함을 의미한다. 이는 누군가에 “앞서 지나감, 먼저 감”이 여기서는 선이 진리들과 결합함이 취급되는 곳인 바, 더 일반적인 현존이 의미된다. 그 이유가 선이 진리들과 결합함을 수단으로 결과되는 거듭남에서 행동하는 것이 선이고, 진리는 선이 행동되게 자체를 허용한다; 그리고 선이 자체를 진리들에 적용할 때, 그래서 선 자체가 진리들과 조금씩 결합할 때, 그때 진리가 반작용함이 나타난다. 그럼에도 그것은 진리가 아니고 결합된 선, 또는 진리에 인접한 선이다, 이 선이 진리를 통하여 반작용하는 것이다. 이 인접함이 더 일반적인 현존에 의해 뜻해진다.
“선이 진리들과 결합함”이라고 말해지는데, 이는 사실상 선과 진리가 들어있는 사람을 미리 염두한 말이다; 그 이유가 사람이라는 주체 없이 이런 사항들이 서술될 수 없기 때문이다. 천국에서 그들은 추상적인 것들을 수단으로 이 방법에서 생각하고 이야기한다, 그 이유는 그들이 선과 진리를 자신들에게 돌리지 않고 주님에게 돌리는 이유 때문이다; 그리고 주님으로부터의 선과 진리가 전체 천국을 채운다. 이 방법으로 말하는 것은 고대인들에게는 친숙하다.

그리고 저는 천천히 진행할 것입니다. 이는 계속 준비해가는 상태를 의미한다. 이는 (취급되는 주제가 선이 진리 안으로 은근히 심어짐, 그리고 진리를 수단으로 그것이 받아짐에서) “천천히 진행함”의 의미는 계속 준비하는 상태를 (고로 진행 속도가 느린 것) 의미함에서 알게 된다.

제 앞에 있는 일의 발에서. 이는 일반적인 것들에 따라서를 의미한다. “일의 발”은 앞에서 말해진 것들, 즉 아이들은 유약하고, 젖을 물리는 가축떼가 많아 하루라도 내몬다면, 다 죽고 말리라는 것을 뜻한다. 이 말들에 의해 일반적인 것들에 따라서가 의미되는 것은 거기서 말해진 것들로부터 분명해진다. 즉 “일의 발”, “어린이의 발”에서 “발”은 자연 평면을 의미하기 때문; 그리고 여기서 자연 평면이 취급되고 있다.

그리고 아이들의 발걸음에 따라서. 이는 그 속에 있는 진리들에 따라서를 의미한다. 이는 “아이들”, 또는 “아들들”의 의미가 진리들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 속에 있는 진리들은 일반적인 것에 있는 진리들이다; 일반적인 것들은 앞 대목에서 알(egg)에 비교하여 말했다; 일반적인 것들은 특수적인 것들을 포함하고, 특수적인 것 안에 낱개의 것들이 포함되고 있다. 첫 상태에서, 즉 유아기의 상태 안에 잠재적으로 특수적인 것들이 있고, 이 특수적인 것 안에 낱개적인 것들이 있다; 하여 이 후에 그것들은 생산적이 되어, 자체를 행동에서 내민다; 이것이 계속적으로 있게 된다. 거듭나지는 이들은 주님에 의해 이런 방법에서 인도된다, 그 이유가 그들은 일반적인 것들 내부에 이어지는 것들을 빨아들여 있는 상태이고, 이것이 계속적으로 출시되는데, 이것은 납득할 수 없는 질서와 시리즈에 있다. 그 이유가 일반적, 특수적인 것에 있는 모든 것들은 그것들이 영원히 있게 될 것까지 포함해서 주님에 의해 예견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여타 다른 일반적 진리들은 거듭나지는 인간 안에서 선과 결합되어 있지를 않고, 오직 특수적인 것들을 일반적인 것들 안으로 맞추어 넣을 수 있을 뿐이고, 또한 낱개적인 것들은 특수적인 것들 안으로 맞추어 넣여져 있을 뿐이다.
그러나 여전히 이런 특수적인 것들 속의 낱개적인 것들까지도 그것들 넘어 존재하는 것들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일반적인 것들밖에 더 아니다; 그 이유가 모두 각각의 존재물 안에 아직 불명확한 것들이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것과는 비교가 안 되는 지혜를 가진 천사들이지만, 그들은 상대적으로 가장 일반적인 것들만을 안다고, 자기들도 모르는 것을 두고서는 불명확하다고 고백한다. 그리고 그들은 무한이라는 단어는 감히 내뱉지도 못한다, 그 이유는 유한과 무한 사이에 어떤 관계(ration)나 비율(ratio) 같은 것이 없기 때문이다. 이로부터도 우리는 말씀이 어떤 속성 속에 있는지 추측해볼 수 있다. 즉 말씀은 신성하다는 것, 말씀은 그 근원으로부터 그 자체 무한한 것들을 포함하고 있다는 것; 결과적으로 천사의 지혜에 속하는 말로도 표현 안되는 것들까지 함유한다는 것; 그럼에도 이와 같은 것들이 인간의 납득력에 적합해져 있다는 것이다.

제가 내 주가 계신 세일에 당도할 때 까지. 이는 그들이(즉 야곱인 진리가 에서인 선과) 결합되어질 수 있을 때까지를 의미한다. 이는 “세일”의 의미가 자연 평면에서 영적인 것과 천적인 것의 결합, 즉 신앙으로부터 있는 진리가 선행으로부터 있는 선과 결합함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진리가 자연 평면에서 선과 결합되는 것, 그리고 최고 의미에서 선이 진리와 결합된 주님의 신성한 자연 평면이 아래 말씀들에서 “세일”로 적절히 의미되어 있다. 이스라엘의 아들들에 대한 모세의 예언에서:
여호와께서 시내(산)으로부터 오셨다, 그리고 세일로부터 그들에게 일어나셨다; 그분은 바란 산으로부터 빛을 내보내신다, 그리고 그분은 일 만의 거룩함으로부터 오셨다 (신. 33:2).
발람의 예언에서:
나는 그분을 보고 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나는 그분을 바라보고 있다, 그러나 가까이는 아니다; 야곱으로부터 별이 일어날 것이다, 그리고 홀이 이스라엘로부터 일어날 것이다; 그리고 그의 적들로부터 에돔이 상속분일 것이다, 그리고 세일이 상속분일 것이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강함을 수행할 것이다 (민. 24:17, 18).
드보라와 바락의 노래에서:
오 여호와, 당신이 세일로부터 나가실 때, 당신이 에돔의 들판으로부터 떠나실 때, 땅이 전율했습니 다, 산들이 흘러 내렸습니다, 이스라엘의 하느님 여호와 앞에서 이 시내(산)이 (흘러 내렸습니다) (사. 5:4, 5).
이사야서에서:
그가 세일로부터 나에게 외쳤다, 경비원아, 밤은 어찌되었는가? 경비원아, 밤은 어찌되었는가? 경비원이 말했다, 아침이 오고 있다, 그리고 또한 밤 (이. 21:11, 12).
이 외에 앞서 세일이 언급된 곳(창. 32:3, 4240항)도 더 참조하기 바란다.

그리고 에서가 말했다, 청컨대 내 사람을 너와 함께 있도록 하자. 이는 선의 진리로부터 있는 어떤 것들이 결합되어질 것을 의미한다. “너와 함께 있는 것”의 의미가 결합하는 것이다로부터; 그리고 “내 사람”의 의미가 선의 진리로부터 있는 어떤 것들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사람(people)”이 진리들을 표시함은 이미 살폈다; 그러므로 “나와 더불은 사람(내 사람)”은 선의 진리들을 표시한다. 선의 진리들이 무엇인지는 이미 여러 차례 설명되어 왔다. 이것들은 선으로부터 진행되는 진리들이다. 다시말해 내적 인간을 통하여 외적 인간 안으로 흐르는 선과 더불은 진리이다. 이 진리들이 에서가 거느리고 온 “사백 명”에 의해 의미되어 있다 (4341항); 그러므로 여기서는 얼만큼의 이 진리들이 뜻해진다.

그리고 그는 말했다, 어찌하여 이러십니까? 저로 내 주의 눈에서 은혜를 발견하게 해주십시오. 이는 더 내면적으로 현존함으로부터의 계발을 의미한다. 이런 방식의 복종함이 모든 것으로부터 보여질는지 모른다; 그 이유가 이를 수단으로 아주 가까운 현존함은 거절하나 멀리 떨어진 현존함에는 동의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뜻으로 다른 말로 바꾸면, 이는 더 내면적으로 현존함, 이로부터 계발이 온다.

그리고 에서는 그 날 자기 길로 세일로 돌아 갔다. 이는 자연 평면에서 진리의 선이 합쳐지는 쪽으로 있는 신성한 선의 상태를 의미한다. 이는 “날”이 상태를 의미함으로부터; 그러므로 그가 그 날 돌아감은 그때 입는 상태를 표시한다; 그리고 에서의 표현이 자연 평면에서의 신성한 선이다로부터; 그리고 “길”의 의미가 의지와 행동에 있는 진리이다로부터; 그리고 “세일”의 의미가 진리가 선과 결합함이다로부터; 이상의 의미들을 한 의미로 가져다놓으면, 자연 평면에서 진리의 선이 인접되는 쪽으로 있는 신성한 선의 상태가 의미된다.
위 본문의 말이 이런 의미를 가지는 것은 역사적 의미에서는 결코 나타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영적, 또는 내적 의미 안에는 포함되어 있다. 인간 안에 있는 천국, 당사자와 함께하는 천사는 세상적인 역사물은 무엇이든 관심 밖인 바, 에서가 누구인지, 세일이 무엇인지를 모른다, 그리고 에서가 돌아간 날도, 세일로 가는 길도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들에 상응하는 영적인 것들로부터 생각들을 받고, 그것들로부터 이런 의미를 끌어낸다; 그 이유가 이것들이 상응을 수단으로 결과되기 때문이다. 즉 이런 상응 관계는 마치 누군가가 외국어로 말을 하는데, 말은 무슨 말인지 모르나 말의 뜻은 파악하는 것과 같다. 이것이 말씀의 내적 의미와 더불은 경우인데, 내적 의미는 천사들 안에 있는 보편적 언어, 또는 그들의 생각 속의 영적 언어와 더불어 동시적으로 일어난다. 그들의 말은 영적이다, 그 이유는 그들의 생각이 주님으로부터 있는 천국의 빛으로부터 있기 때문이다.

17-20절. 그리고 야곱은 숙곳으로 여행했다, 그리고 자기를 위하여 집을 지었다, 그리고 그의 획득물들을 위하여 우릿간을 만들었다. 그러므로 그는 그 장소의 이름을 숙곳이라 불렀다. 18 그리고 야곱은 세겜의 성, 살렘에 왔다, 이곳은 가나안의 토지 안에 있다, 그는 밧단-아람에서 이쪽으로 왔고 이 성의 얼굴쪽을 향하여 진을 쳤다. 19 그리고 그는 자기가 천막을 펼친 들판의 일부를 일백 크시타에 세겜의 아버지 하몰의 아들들의 손으로부터 샀다. 20 그리고 그는 거기에 제단을 세웠다, 그리고 그는 그것을 엘 엘로헤 이스라엘이라 불렀다.

그리고 야곱은 숙곳으로 여행했다. 이는 그 때 당시 진리로부터의 선의 생명에 관한 상태를 의미한다. 이는 야곱의 표현함이 진리로부터의 선; 여기서는 “에서”인 선으로부터 그것에 인접한 것들로부터 그 당시의 진리로부터의 선이다, 이것들이 여태까지 취급되어 왔었다; “여행함”의 의미가 질서와 생활의 실제, 고로 삶의 상태이다로부터; 그리고 “숙곳”의 의미가 이 상태의 품질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리고 자기를 위하여 집을 지었다. 이는 그 상태에서 진리로부터 선이 증가함을 의미한다. 이는 “집을 지음”의 의미가 총명과 지혜로 외적 인간을 가르침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리고 총명은 진리에, 지혜는 선에 속하는 바, 여기서 “집을 지음”에 의해서는 진리로부터 선이 증가함이 의미된다. 진리의 선이 무엇인지는 이미 상술했다; 즉 이것은 의지와 행동에 있는 진리이다. 이 진리가 선이라 불리우는 것이다, 그리고 이 선으로부터 있는 양심이 진리의 양심이라 불리운다. 진리로부터 있는 이 선은 선행을 선한 의지로부터 실행함에 비례하여, 즉 이웃을 사랑함에 비례하여 증가한다.
선과 진리라는 용어가 설명함에서 빈번하게 사용되는 이유는 천국에 있는 모든 것, 결과적으로 주님의 교회에 있는 모든 것들은 선과 진리에 관련한 것을 낳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말하면, 이 두 가지는 교리와 생활에 속하는 모든 것들을 포함한다; 교리에 속하는 모든 것은 진리들에, 생활에 속하는 모든 것은 선들에 속한다. 더 나아가 보편적인 사실은, 인간의 마음은 진리와 선으로부터 있는 것 외에 다른 대상물(object)들을 가지지 않는다; 마음 속의 이해력은 진리로부터 있는 것이 그것의 대상물이다; 그리고 그것의 의지력은 선으로부터 있는 것들이다. 그러므로 분명해지는 것은, 진리와 선은 가장 광범위한 의미 속의 용어이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들의 파생물들은 말로 말할 수 없이 많은 숫자로 있다. 이런 맥락에서 진리와 선이라는 단어는 자주 사용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의 획득물을 위해 우릿간을 만들었다. 이는 일반적인 것들에서도 똑같이 그 당시 선과 진리의 증가가 있음을 의미한다. 이는 “획득물들”의 의미가 선들과 진리들이다로부터; 그리고 “우릿간을 만듦”, 또는 천막이 집을 지음과 비슷해서, 진리로부터 선의 증가를 받는 것인데, 그 차이는, “집을 지음”은 덜 일반적, 고로 더 내면적이고, “우릿간을 만듦”은 더 일반적, 고로 더 외적이다. 집을 지음은 자신들(즉 야곱, 그의 아내들과 아이들)을 위해서이고, 우릿간은 종들, 양떼들, 목축떼들을 위해서 이다. “우릿간” 또는 “천막”은 말씀에서 진리의 거룩함을 의미한다, 그러나 성막 역시 “천막”이라 불리우기도 하지만 이는 선의 거룩함을 의미하여 구별된다. 원어에서 전자는 “숙곳(Succoth)”이라 불리우나, 후자는 “오하림(Ohalim)”이라 불리운다. 진리의 거룩함은 진리로부터 있는 선이다.
이것이 “숙곳”이라 불리우는 우릿간 또는 천막의 의미인 것은 아래 말씀의 구절로부터 분명해진다. 다윗서에서:
여호와 하느님이 거룹 위에 타시고 날으셨다, 그리고 바람의 날개 위에서 운반되셨다; 그분은 어둠을, 물의 어둠을, 하늘의 구름을 그분의 숨는 장소로, 그리고 그분의 천막(숙곳)을 빙두르게 만드셨다 (시. 18:11, 12).
그리고 다시:
그분이 내려오셨을 때 그분은 하늘을 구부리셨다, 그리고 짙은 어둠이 그분의 발 아래 있었다; 그리고 그분은 거룹을 타시고 날으셨다, 그리고 바람의 날개 위에서 운반되셨다; 그분은 천막들(숙 곳)을 위하여 그분을 빙둘러 어둠을, 바다(waters)로 묶음을, 하늘의 구름들을 놓으셨다
(삼하. 22:10-12);
위에서 취급한 주제는 신성한 계시, 또는 말씀이다. “그분이 내려오실 때 하늘을 구부리심”은 말씀의 내면들을 감추심을 표시한다; “그분의 발 아래 짙은 어둠”은 인간에게 나타나는 것은 상대적으로 (말씀의 글자 의미 같이) 깜깜하다는 것을 표시한다; “거룹을 타심”은 그렇게 설비되었음을 표시한다; “천막들을 위하여 그분을 빙둘러 어둠을 놓으시는” 것, 또는 “그분의 천막을 위하여 그분의 주위들”은 감추인 장소, 즉 글자의 의미에 있는 진리의 거룩함을 표시한다; “바다로 묶는” 것 그리고 “하늘의 구름들”은 글자에 있는 말씀을 표시한다. 같은 것이 이사야에 있는 이 말들에 의해서도 의미된다:
여호와께서 시온 산의 모두 각각의 거주지 위쪽에, 그리고 그녀의 집회들 위쪽에 낮에는 구름을, 그리고 밤에는 불의 불꽃의 연기와 빛남을 창조하실 것이다; 그 이유가 거기에 모든 영광을 위쪽에 덮개가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낮에는 그늘을 위하여, 그리고 홍수와 비에 대하여 피난처와 숨음을 위하여 천막 (숙곳)이 있을 것이다 (이. 4:5, 6);
위에서도 역시 “구름”은 말씀의 글자 의미를 표시한다; 그리고 내적 의미에서는 “영광”을 표시한다; 또한 마. 24:30; 막. 13:26; 눅. 21:27에서도 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 “천막” 역시 진리의 거룩함을 표시한다. 내면의 진리들이 “숨음” 안에 있다 라고 말해진다, 그 이유가 만일 내적 의미가 밝히 드러나 있다면, 필시 모독해버리고야 말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아래 다윗서에서도 말해지고 있다:
당신은 그것들을 인간들이 올가미를 씌울 것을 궁리하는 모삭으로부터 당신의 얼굴의 숨는 장소에 감추이신다; 당신은 그것들을 혀들의 다툼 때문에 천막(숙곳)에 감추신다 (시. 31:21).
“천막”이 진리의 거룩함인 것은 아래 구절에서도 분명해진다:
그 날에 나는 무너진 다윗의 천막(숙곳)을 세울 것이다, 그리고 터진 곳을 막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폐허를 세울 것이다, 그리고 나는 영원의 날들에 따라 건축할 것이다 (암. 9:11).
“무너진 다윗의 천막을 세우는” 것은 진리의 거룩함이 멸해진 이후 그것을 회복하는 것이다; “다윗”은 신성한 진리 측면에서의 주님을 표시한다, 그 이유는 “왕”이 신성한 진리를 표시하기 때문이다. “천막”이 진리의 거룩함을 의미하기에, 그리고 “천막들에 거주함”이 파생되는 예배를 의미하기에, 유태 교회와 이스라엘교회에서는 “성막절”이라 불리우는 천막들의 절기가 제정되어져 있었다 (레. 23:34, 42, 43; 신. 16:13, 16); 이런 구절에서도 이 절기가 “숙곳절”, 또는 “천막절”이라고도 불리우고 있다.

그러므로 그는 그곳의 이름을 숙곳이라 불렀다. 이는 이 상태의 품질을 의미한다. 이는 “이름을 부름”의 의미가 품질(quality)이다로부터; 그리고 “장소”의 의미가 상태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 상태의 품질이 “숙곳”이 포함하는 것, 즉 그때에서 선으로부터 진리에 있는 거룩함의 상태의 품질이다. 그 이유가 “숙곳”이 “천막들”을 뜻하고, “천막들”은 진리의 거룩함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아래 다윗서에서 “숙곳”이 같은 의미에서 있다:
나는 세겜을 나눌 것이다, 그리고 숙곳의 골짜기를 측량할 것이다; 길르앗은 내 것이다; 므낫세도 내 것이다; 에브라임 또한 내 머리의 강함이다; 유다는 나의 율법가이다
(시. 9:6, 7; 108:7, 8)

그리고 야곱은 세겜의 성, 살렘에 왔다. 이는 고요함 속에 있는 신앙으로부터의 내면의 진리들을 의미한다. 이는 “살렘”의 의미가 평화의 고요함이다로부터 (이는 아래에서 살핀다); 그리고 “세겜의 성”은 신앙으로부터의 내면의 진리들이다로부터 (이에 대하여는 다음 장에서 살핀다) “살렘”이 평화의 고요함을 의미하는 것을 아래 다윗서로부터 보여질는지 모른다:
유다 안에 하느님이 알려져 있다, 그분의 이름은 이스라엘에서 위대하시다; 살렘에도 그분의 천막이 있다, 그리고 시온에 그분의 거주지가 있다; 거기에서 그분은 활, 방패, 검, 전쟁의 살아 있는 숯불을 깨트리신다 (시. 76:1-3절);
위에서 “살렘”은 평화의 고요함을 표시함이 분명하다, 그 이유는 “거기서 그분은 활, 방패, 검, 그리고 전쟁의 살아 있는 숯불을 깨트리신다”라고 말해지기 때문이다; 또한 살렘이 원어에서 뜻하는 것 역시 고요함과 완전함이기 때문이다. 이 평화 안에 내면의 진리들이 있다; 즉, 신앙과 생활에서 내면의 진리들에 있는 이들이 있다. 그러나 인간들이 외면의 진리들 안에 있는 한, 그리고 특히 외면의 진리로부터 내면의 진리 안으로 올 때, 그 상태는 비고요함이다, 그 이유는 그때 거기에는 싸워야 하는 시험이 있기 때문이다. 이 장의 야곱에 의해서도 글자 의미에서도 이를 엿볼 수 있다; 즉 그가 에서를 만나기 전, 그는 죽음도 각오해야 한다는 어마어마한 걱정과 공포에 휩싸인 채, 에서를 만났으나, 이후 지금 그는 형에 대한 그런 걱정이 사라지고 평화의 상태에 있다.

이것은 가나안의 토지 안에 있다. 이는 주님의 왕국 안에를 의미한다. 이는 “가나안의 토지”가 주님의 왕국이다로부터 분명해진다. 인간이 신앙과 생활에서 내면의 진리들 안에 있을 때, 그는 주님의 왕국 안에, 그리고 고요의 상태 안에 있다, 그리고 그때 그는 시험으로 출렁거리는 바다를 높은 언덕 위에서 내려다 보는 자 같이 외면의 것들을 응시한다.

그가 밧단-아람으로부터 이쪽에 왔을 때. 이는 이전의 상태 후에를 의미한다. 이는 “이쪽에 왔을 때”의 의미가 이후이다로부터; 그리고 “밧단-아람”의 의미가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들이다로부터, 그러나 외면의 지식들이다. 이 지식들은 진짜 선들과 진리들을 받아들임을 위해 일한다; 그 이유가 그곳에 라반이 있었고, 라반에 의해 이와 같은 선에 애착함이 표현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가 밧단-아람으로부터 이쪽에 왔을 때”라고 말해지는 이유는 외적 진리들과 선들로부터 내적인 선들과 진리들 안으로 왔기 때문이다; 고로 이 전의 상태로부터 이 후의 상태로 옴이다.

그리고 성의 얼굴을 향하여 진을 쳤다. 이는 (이 진리의 선쪽으로) 적용함을 의미한다. 이는 “진을 침”의 적절한 의미는 질서에 따라 배열하는 것이다로부터, 그러나 여기서는 적용함(application)이다; 그 이유가 “진을 치는” 것이 여기서는 그의 가축들과 더불어 정착함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또한 “진영(camp)”에 의해서도 뜻해진다; 그리고 “성의 얼굴”의 의미가 이 진리의 선들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 이유가 “얼굴”이 내면들이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선과 진리에 애착함들 인데, 이것이 얼굴로부터 빛을 발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들판의 일부를 샀다. 이는 이 진리로부터의 선을 자기 것이 되게 함을 의미한다. 이는 “산다”의 의미가 자기에게 어울리게 함이다로부터; 그리고 “들판의 일부”의 의미가 이 진리로부터 있는 선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거기에 그는 자기 천막을 펼쳤다. 이는 거룩한 것을 의미한다. 이는 “천막”의 의미가 거룩한 것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세겜의 아버지, 하몰의 아들들의 손으로부터. 이는 이 진리는 또 다른 출처로부터의 신성한 줄기로부터에 근원을 두고 있다를 의미한다. 이것에 대한 설명은 다음 장에서 하몰과 세겜이 취급되는 곳에서 말해질 것이다.

일백 크시타에. 이는 충분한 것을 의미한다. 이는 “100”의 의미가 충분한 상태, 결과적으로 충분한 것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러나 여기서의 경우, 더 적절한 의미는 많다 이다. 그 이유가 취급된 주제가 내면의 진리들로부터 선을 자기 것이 되게 함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세겜의 아버지, 하몰의 아들들”에 의해 의미된다. 화폐(coin)들인 “크시타”에 의해 내적 의미에서 이와 같은 진리들이 의미된다. 이 단어 역시 “진리”를 뜻하는 단어로부터 파생되고 있다 (시. 60:6). 선이 이런 진리들과 결합함은 아래에서 말해질 것이다.

그는 거기에 제단을 건립했다. 이는 내면의 예배를 의미한다. 이는 “제단을 건립함”이 예배이다로부터 분명해진다. 그 이유가 제단은 주님을 표현하는 제일가는 표현물이기 때문이다. 예배에 의해 여기서는 신성의 영적 평면으로부터의 내면의 예배가 뜻해진다, 이 주제가 지금 뒤잇는다.

그리고 그는 그것을 엘 엘로헤 이스라엘이라 불렀다. 이는 신성의 영적 평면(즉, 내면의 예배)으로부터를 의미한다. 이는 “엘 엘로헤”의 의미로부터 (아래에서 살핀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의미가 영적 평면이다로부터알게 된다. 이 장 17절에서 말해진 것에 주목해 말하면 이렇다: 즉 이 장에서 취급된 주제의 최고 의미는 주님이시고, 그분이 그분의 자연 평면을 어떻게 신성으로 만드셨는지 이다. 그러나 최고 의미인 주님에 관련한 것은 신성이기 때문에 인간의 생각을 능가해 있다. 하여 나는 이를 보다 낮은 수준의 것으로 예증해보려 한다, 즉 주님께서 인간 자연 평면을 거듭나게 하시는 방식이다. 그 이유가 내적 의미에서 인간의 자연 평면의 거듭남이 여기서 취급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인간의 거듭남은 주님의 신성이 되심(glorification)의 형상이기 때문이다. 주님은 신성한 질서에 따라 자신을 신성이 되게 하셨다, 즉 그분 자신을 신성으로 만드셨다; 그리고 같은 질서에 따라 그분은 인간을 거듭나게 하신다, 즉 인간을 천적이고 영적 수준으로 만드신다. 여기서는 그분이 인간을 어떻게 영적 수준으로 만드시는지를 설명한다, 그 이유는 “이스라엘”이 영적 (수준의) 인간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영적 (수준의) 인간은 내면의 합리적 인간이 아니고, 내면의 자연적 인간이다.내면의 합리적 인간은 천적 (수준의) 인간이라 불리운다. 이 두 인간, 즉 영적, 천적 인간의 차이는 자주 서술되어왔었다. 인간은 자기 안의 진리들을 선과 결합되게 함으로 영적 인간으로 만들어진다, 다시 말해 신앙 속의 것들이 선행 속의 것들과 자연 평면에서 결합함으로 영적 인간으로 만들어진다. 자연 평면에서 외면의 진리들이 먼저 선과 결합하고, 그 후에 내면의 진리들과 결합한다. 이 장의 1-17절까지는 외면의 진리들의 결합이, 17-20절까지는 내면의 진리들의 결합이 취급되고 있다. 내면의 진리들은 내적 인간을 통하여 외적 인간으로 흘러드는 계발 외의 다른 방법으로는 선과 결합하지 않는다. 이 계발로부터라 해도 신성한 진리들은 오직 일반적 방법에서만 명백해 있을 뿐이다, 즉 무수한 대상물을 희미(불명료)하여 구분할 수 없는 상태로 눈에 보여지는 것과 같다 (아마 요즘식으로 말하면 백내장이 심각한 상태에서 물체를 보는 것을 연상하면 될지 모른다, 역자주.) 이것이 에서가 야곱에게 “청컨대 내 사람을 붙여주마”라고 말함에 대해 야곱이 “어찌하여 그러십니까? 부디 당신의 눈에서 은총을 발견하게 해주십시요”라고 대답함에 의미되어 있다.
영적 인간이 상대적으로 희미함에 있다는 것에 대하여는 이미 살폈다. 이 영적 인간이 이스라엘에 의해 표현되고 있다. 영적 인간은 이런 사실로부터 그렇게 불리운다, 즉 천국의 빛, 이 안에 총명과 지혜가 있고 이 빛이 세상의 빛 속의 인간에 있는 것들 안으로 흘러들고, 이 흘러든 것이 세상의 빛 속의 것으로 천국의 빛 속의 것을 표현하게 한다, 이리하여 상응함이 있는다. 영적 수준 자체에 주목하면, 이는 주님으로부터 있는 신성한 빛 자체, 결과적으로 진리의 총명과 이로부터 파생되는 지혜이다. 그러나 영적 인간과 더불어 신성한 빛이 신앙 속에 있는 것들을 비춘다, 그러면 당사자는 이것을 진리이다고 믿는다; 이에 비해 천적 인간과 더불어서는 신성한 빛이 사랑의 선을 비춘다. 어쨋든 이런저런 사항들이 천국의 빛에 있는 이들에게는 명료하다 해도, 그럼에도 세상의 빛에 있는 이들에게는, 고로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에서는 불명확해 있다; 아마 너무나 불명료해 있어 거의 총명해질 수 없을 정도이다; 하여 내적 의미로 취급된 사항들을 열어서 이들에게 분배되는 것도 아직은 마찬가지로 미미해 있다; 그러나 계발이 있을 때가 오고 있다.
제단이 엘 엘로헤 이스라엘이다고 불리운 이유, 이를 수단으로 신성의 영적 평면으로부터의 내면의 예배가 의미된 이유는 최고 의미에서 “엘 엘로헤”는 신성한 영적 평면과 같고, “이스라엘”도 그러하기 때문이다. 원어에서 “엘 엘로헤”는 “하느님 하느님”을 뜻한다, 그리고 더 꼼꼼하게 말하면, “하느님들의 하느님”을 뜻한다. 말씀에서, 여호와 또는 주님은 많은 구절에서 단수로 “엘”, 또한 “엘로아”; 그리고 마찬가지로 그분은 복수로 “엘로힘”이라 불리우시는데, 때로는 한 구절 안에, 한 시리즈 안에서 두 단어가 등장하기도 한다. 말씀의 내적 의미에 친숙하지 않은 이들은 이것이 왜 그렇게 기록되었는지를 알 수 없다. “엘”은 이것을; 그리고 “엘로아”는 저것을; “엘로힘”은 또 다른 것을 포함한다는 것을 모든 이는 말씀이 신성하다는 사실로부터, 즉 말씀의 근원이 신성으로부터 이다는 사실로부터, 그렇기 때문에 모든 단어들, 지극히 작은 단어인 마침표에 이르기까지에 영감되어 있다는 사실로부터 알는지 모른다.
“엘”이 언급될 때, 이 단어가 포함하는 것은 이미 살폈던 대목으로부터, 즉 진리가 취급될 때, “엘 엘로힘”, 또는 “하느님”이 언급된다는 것에서 이미 알고 있는지 모른다. 그러므로 “엘” 그리고 “엘로힘”은 최고 의미에서 신성의 영적 평면이 의미된다, 그 이유가 이것은 신성한 진리와 같기 때문이다, 그러나 “엘”에 의해서는 의지와 행동에 있는 진리가 의미되는데, 이는 진리로부터의 선과 같은 말이다. 표현 “엘로힘”은 복수로 사용되는데, 그 이유는 신성으로부터의 진리(truth Divine)를 수단으로 주님으로부터 있는 모든 진리가 뜻해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또한 천사들은 때로 말씀에서 “엘로힘”, 또는 “하느님들”이라 불리운다, 이는 아래 인용하는 구절로부터도 나타날 것이다. 지금 최고 의미에서 “엘” 그리고 “엘로힘”이 진리 측면에서 주님을 의미하기에, 또한 힘 측면에서도 그분을 의미한다; 그 이유가 진리가 언급될 때, 힘이 서술되기 때문이다. 또한 선이 힘을 발휘할 때, 진리를 수단으로 행동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진리로부터의 힘이 말씀의 어디에서 취급되든, 주님은 “엘” 그리고 “엘로힘”, 즉 “하느님”이라 불리운다. 그러므로 또한 원어에서, “엘”은 강력한 분을 의미한다.
말씀에서 신성의 영적 평면이 취급되는 곳, 또는 같은 말로, 신성한 진리, 고로 신성한 힘(권능)이 취급되는 곳일 때, “엘”, 그리고 “엘로힘”, 또는 “하느님”이 언급된다는 것을 아래 구절로부터 더 분명해질 것이다. 모세의 책에서:
하느님이 밤의 환상에서 이스라엘에게 말하셨다, 나는 네 아버지의 하느님들의 하느님(엘 엘로헤)이다; 이집트로 내려가는 것을 두려워말라, 그 이유가 나는 너를 거기서 위대한 나 라로 만들 것이기 때문이다 (창. 46:2, 3);
위 구절에서 그분은 그를 위대한 나라로 만드시겠다고 말해진 바, 취급된 주제는 진리와 진리의 힘인 바, “엘 엘로헤”라고 말해지고, 대략적 의미에서 이는 “하느님들의 하느님”을 의미한다. 대략적 의미에서 “엘로힘”이 “하느님들”을 표시하는 이유는 진리들과 파생되는 힘을 서술하기 때문인데 아래 구절에서도 분명해진다:
야곱은 거기에 제단을 건축했다, 그리고 그 장소를 엘-벧-엘이라 불렀는데, 그 이유는 그 가 자기 형 앞에서 도망했을 때, 거기서 엘로힘이 그에게 밝히 나타나셨기 때문이다
(창. 35:7).
그리고 그밖의 말씀에서:
여호와 네 하느님, 그분은 하느님들의 하느님, 그리고 주들 중의 주님, 위대한 하느님(엘), 강력하시고, 무서운 분이시다 (신. 10:17);
위에서 “하느님들의 하느님”이 “엘로헤 엘로힘”에 의해 표현되어진다, 그리고 그 후에 “엘”에 의해 “하느님”이 표현되어지는데, 이 분에게 위대하심과 강력하심이 있다고 서술된다.
다윗서에서:
여호와는 위대한 하느님(엘)이시다, 그리고 모든 신들(엘로힘) 위에 계신 위대한 왕이시다. 그분의 손에는 땅으로부터 수색하심이 있다; 그리고 산들의 강함은 그분의 것이다
(시. 95:3, 4);
위에서 “하느님” 또는 “엘”이 사용된 이유는 취급된 주제가 신성한 진리와 파생되는 힘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한 “하느님들”은 취급된 주제가 거기서 파생된 진리들이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내적 의미에서 “왕”은 진리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모든 하느님들 위에 계신 위대한 왕이 무엇을 포함하는지가 분명해진다. “땅으로부터 수색함”은 교회의 진리들을 표시한다. 그리고 교회의 선으로부터의 힘으로부터 “산들의 강함”이라 불리운다. 다윗서에서:
천국에 있는 누가 자신을 여호와에게 비교할 것이냐? 하느님들(엘임, Elim)의 아들들 중의 누가 여호와에게 견줄 것이냐? 하느님(엘) 강대한 분이 거룩한 자들의 비밀 안에 (계신다). 오 여호와 하느님 체바욷(Zebaoth), 누가 당신이 강하신 야(Jah)이시듯 있는가?
(시. 89:6-8).
위에서 “하느님들의 아들들” 또는 “엘임(Elim)”은 신성으로부터의 진리들이 표시되고, 이로부터 힘이 서술됨이 분명해진다; 그 이유가 “하느님(엘) 강대한 분, 여호와 만군의 하느님, 당신 같이 강한 자 누가 있는가?”라고 말해지기 때문이다.
다윗서에서:
여호와에게 드려라, 오 너희 하느님들의 아들들아, 여호와에게 영광과 강대함을 드려라 (시. 29:1).
모세의 책에서:
그들은 자기들의 얼굴을 떨어뜨렸다, 그리고 말했다, 모든 육의 영들의 하느님들 중의 하느 님 (엘 엘로헤) (민. 16:22).
다윗서에서:
나는 말했다, 너희는 하느님들(엘로힘)이다 그리고 너희는 가장 높으신 분의 모든 아들들 이다 (시. 82:6; 요. 10:34);
위에서 그들이 진리들로부터 “하느님들”이라 불리운다, 그 이유는 “아들들”이 진리들이기 때문이다. 다시:
너희는 하느님들의 하느님(엘로헤 엘로힘)에게 고백하라; 너희는 주들의 주님에게 고백하 라 (시. 136:2, 3).
다니엘서에서:
왕은 자기 자신의 기쁨에 따라서 행동할 것이다, 그리고 자신을 부풀릴 것이다, 그리고 자 신을 모든 하느님(엘) 위로 들어올릴 것이다, 그리고 하느님들의 하느님(엘 엘로힘) 위에 서 경이로운 것들을 말할 것이다 (단. 11:36);
이로부터 대략적 의미에서 “엘 엘로헤”가 “하느님들의 하느님임이 분명하다, 그리고 내적 의미에서 “하느님들”은 주님으로부터 있는 진리들을 서술한다. 단수인 “엘”, 또는 “하느님”이 말해질 경우, 취급되는 주제는 신성한 진리로부터 있는 힘, 또는 주님의 신성한 영적 평면인데, 아래 구절로부터 알게 된다. 모세의 책에서:
내 손이 네게 악을 행하도록 하는 하느님 같이 있게 하다니… (창. 31:29).
다시:
하느님(엘)을 위한 손이 거기에 없다 (신. 28:32).
미가서에서:
하느님(엘)을 위한 손이 거기에 없다 (미. 2:1).
“하느님을 위한 손”은 거기에 힘이 있을지 모른다를 표시한다. 다윗서에서:
나는 그의 손을 바다 위에, 그리고 그의 오른손을 강들 위에 놓을 것이다; 그는 나를 당신 은 나의 아버지, 나의 하느님 (엘), 내 구원의 반석 (시. 89:25, 26)이라 부를 것이다;
위는 진리들로부터의 힘에 관해 말한다. 다시:
사악한 자는 자기 심정에서 말한다, 하느님(엘)이 잊혀졌다, 그분은 그분의 얼굴을 감추셨 다, 그분은 결코 보시지 않을 것이다: 일어나십시요, 여호와 하느님(엘), 당신의 손을 들어 올리십시요; 무엇 때문에 사악한 자가 하느님(엘로힘)을 멸시합니까? (시. 10:11-13);
앞 인용 구절과 같은 것을 표시하고 있다.
다시:
여호와는 나의 바위, 나의 요새, 나의 구원자; 나의 하느님 (엘), 나의 바위 (시. 18:2).
위는 힘이 취급되고 있다. 이사야서에서:
남은 자가 돌아올 것이다, 야곱의 남은 자, 강력하신 하느님(엘)에게 (이. 10:21).
다시:
우리에게 아이가 출생한다, 우리에게 아들이 주어진다; 그리고 통치권이 그분의 어깨 위에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분의 이름은 경이하신 분, 상담자, 하느님(엘), 전능하신 분, 영원하 신 아버지, 평화의 제 1인 자 (이. 9:6).
다시:
내 구원의 하느님(엘)을 잘 보라, 나는 신뢰할 것이다, 그리고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다; 그 이유는 그분이 나의 힘이시기 때문이다 (이. 12:2).
다시:
나는 하느님(엘)이다; 그렇다, 이 날로부터, 내가 그분이다, 그리고 내 손으로부터 구출할 수 있는 자는 없다, 내가 행동하는데, 누가 이것을 막을 수 있을까? (이. 43:12, 13);.
권능에 관해서 말해진다. 예레미야서에서:
위대하시고 강력하신 하느님(엘), 그분의 이름은 만군(군대들)의 여호와이시다
(이. 32:18).
사무엘하서에서:
내 하느님(엘)과 함께 나는 (성)벽을 뛰어넘을 것이다. 하느님(엘), 그분의 길은 완전하시 다 여호와의 강연은 순수하시다. 여호와 외에 누가 하느님(엘)인가? 우리의 하느님(엘로 힘) 외에 누가 바위인가? 하느님(엘)은 내 피난처의 강함이시다 (삼하. 22:30-33).
모세의 책에서:
하느님(엘)은 거짓말하시는 인간이 아니시다, 또는 후회하는 인간의 아들이 아니시다; 그분 이 말하셨는데, 그분이 행하시지 않겠는가? 또는 그분이 이야기를 하셨는데, 그분이 세우시 지 않을까? 그분은 그들을 이집트로부터 데려내왔다, 그분은 외각수의 강함 같으시다; 그 때에서 야곱과 이스라엘에게 말하실 것이다, 무엇을 하느님(엘)이 역사하셨는가?
(민. 23:19, 22, 23);
위 구절의 내적 의미에서 힘과 진리가 취급된다. 그리고 다시:
하느님(엘)이 그를 이집트로부터 데려내왔다; 그분은 마치 외각수의 강함들을 지니신다; 그 분은 그분의 적들인 나라들을 소멸하실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뼈들을 부러뜨릴 것이다, 그리고 그의 던지는 창을 짓부술 것이다 (민. 24:8).
“뿔들과 외각수의 강함들”은 선으로부터의 진리의 힘을 의미하는데 이미 살폈다. 이는 여러 구절에서 언급되는 편은 아니다. 말씀의 대부분의 것들이 반대적 의미도 가지는 바, “하느님”과 “하느님들” 또한 그러하다, 이들의 이름들이 거짓과 거짓으로부터의 힘을 취급하는 경우가 이에 속한다; 에스겔서에서:
강함의 하느님들(엘임)이 그에게 지옥의 한 가운데에서 말할 것이다 (겔. 22:21).
이사야서에서:
너희는 모든 푸른 나무 아래 하느님 안에서 뜨거움 안에서 있어 왔다 (이. 57:5);
위에서 단어 “하느님들”은 거짓들로부터 사용되고 있다. 다른 구절에서도 이런 경우가 더 있기도 하다.
**************************************

창세기 제 34 장

성경: 창세기 34장

1. 그리고 레아가 야곱에게 낳은 딸, 디나가 그 토지의 딸들을 보려고 밖으로 나갔다.
2. 그리고 그 토지의 왕자, 히위족 하몰의 아들, 세겜이 그녀를 보았다. 그리고 그녀를 데려왔 다, 그리고 그녀와 누웠다, 그리고 그녀를 강탈했다.
3. 그리고 그의 혼은 야곱의 딸 디나에게 굳게 결합되었다, 그리고 그는 이 처녀를 사랑했다, 그리고 이 처녀의 심정에 말했다.
4. 그리고 세겜은 그의 아버지 하몰에게 말했다, 말하기를, 이 소녀를 여인으로 얻게 해주십시 오.
5. 그리고 야곱은 그가 그의 딸 디나를 더럽혔다는 것을 들었다. 그리고 그의 아들들은 들판에서 그의 획득물과 함께 있었다; 그리고 야곱은 그들이 올 때까지 잠잠했다.
6. 그리고 세겜의 아버지 하몰이 야곱에게 말을 하려고 밖으로 나왔다.
7. 그리고 야곱의 아들들이 들판으로부터 와서 그 소식을 들었다, 그리고 사람들은 슬퍼했고, 분노에 찼다, 그 이유는 그가 야곱의 딸과 드러누웠는 바, 하지 말았어야 하는 부끄러운 짓을 이스라엘에게 하였기 때문이다.
8. 그리고 하몰은 그들에게 말했다. 말하기를, 나의 아들 세겜, 그의 혼이 당신의 딸을 열망한 다. 청컨대 그녀를 여인으로 그에게 주라.
9. 그리고 우리들과 친척 관계를 맺자. 너희의 딸을 우리에게 주고, 그리고 우리의 딸을 너희에게 데려가라.
10. 그리고 너희는 우리와 함께 거주하라, 그리고 이 토지가 너희 앞에 있을 것이고, 너희는 거주하며, 여기저기에서 매매를 펼쳐가서 너희의 소유를 얻으라.
11. 그리고 세겜은 그녀의 아버지에게 그리고 그녀의 형제들에게 말했다, 나로 당신들의 눈에서 은혜를 발견하게 하라, 그리고 당신들이 무엇을 말하든 나는 줄 것이다.
12. 나에게 혼인지참금과 예물이 몇 곱절이더라도 나는 너희가 말한 그대로 주리라. 그리고 나에게 이 처녀를 여인으로 주라.
13. 그리고 야곱의 아들들은 세겜과 그의 아버지 하몰에게 속여 답하였다. 그리고 말했다, 그 이유는 그가 그의 누이 디나를 더럽혔기 때문이다.
14. 그리고 그들은 그들에게 말했다. 우리가 포피를 가진 남자에게 우리의 누이를 준다는 말은 할 수가 없다, 그 이유는 그것은 우리에게 치욕이기 때문이다.
15. 그렇지만 우리가 당신에게 동의할 수 있는 조건은 당신들이 우리 같이 당신을 위해 모든 남자가 할례를 받는 것이오.
16. 우리는 당신에게 우리의 딸을 줄 것이고, 당신들의 딸을 우리에게 데려올 것이오. 그리고 우리는 당신과 함께 살 것이고 우리는 한 백성이 될 것이오.
17. 그리고 만일 당신이 할례받으라는 우리의 말에 귀기울이지 않는다면, 우리는 우리의 딸을 데리고 갈 것이오.
18. 그리고 그들의 말들이 하몰의 눈에, 그리고 하몰의 아들 세겜의 눈에 좋게 보였다.
19. 그리고 이 젊은이는 이 말을 행하는데 지체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그가 야곱의 딸에 흠뻑 만족해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그의 아버지의 모든 가문에서 가장 귀한 존재였다.
20. 그리고 하몰과 그의 아들 세겜은 그들의 성문에로 와서, 그 성의 남자들에게 이야기를 했다, 말하기를
21. 이 사람들은 우리들과 평화롭다. 그리고 그들을 이 토지에서 살게 하자, 그리고 여기저기 에서 매매를 펼치게 하자, 그리고 보라 이 토지는 그들 앞에서 공간이 넓다. 우리가 그들의 딸을 여인으로 데려오고, 우리가 우리의 딸을 그들에게 주자.
22. 그럼에도 사람들이 우리와 함께 거주하고, 한 백성이 되는데 동의해야 하는 것은, 모든 남자가 그들이 할례된 것 같이 할례받아야 하는 것이다.
23. 그러면 그들의 획득물, 그들이 사들인 것, 그들의 짐승이 우리의 것도 되는 것이 아니더냐? 오로지 우리는 그들에게 동의만 하면 된다, 그리고 그들은 우리와 함께 살 것이다.
24. 그리고 성문의 안에서 밖으로 나간 모든 이들이 하몰과 그의 아들 세겜의 말에 귀기울였다. 그리고 그들은 성문을 출입하는 모든 남자에게 할례를 베풀었다.
25. 그리고 삼일이 지났다. 그들이 아파하고 있을 즈음, 야곱의 두 아들, 디나의 오라버니 시므온과 레위가 각기 자기 검을 손에 쥐었다. 그리고 그 성을 대담하게 들어갔다. 그리고 모든 남자를 살육했다.
26. 그리고 그들은 하몰과 그의 아들 세겜을 그의 칼 끝으로 살해했다. 그리고 디나를 세겜의 집에서 데려왔다.
27. 그리고 야곱의 아들들이 찔려 죽은 이들에게 왔다. 그리고 그 성을 약탈하였다. 그 이유는 그들이 자기들의 누이를 더럽혔기 때문이다.
28. 그들의 양떼, 그리고 그들의 목축들, 그리고 그들의 나귀들, 그리고 그 성에 있는 것은 무엇이든지, 그리고 들판에 있는 것은 무엇이든지 그들은 가져갔다.
29. 그리고 그들의 모든 재물, 그리고 그들의 갓난 아이, 그리고 그들의 여인들, 그 집에 있는 모든 것을 그들은 포로로, 전리품으로 가져갔다.
30. 그리고 야곱은 시므온과 레위에게 말했다, 너희는 나에게 화를 끼쳐 나로 하여금 이 토지의 주민, 가나안족과 브리스족에게 악취를 내게 하였다. 그리고 나는 숫자에서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그리고 그들은 다함께 합세해 나를 칠 것이다, 그리고 나는 멸망할 것이다, 나와 내 집도 말이다.
31. 그리고 그들이 말했다, 그가 우리의 누이를 창녀같이 취급함이 옳은 것입니까?”

각 절의 내적 의미

1-4절. 그리고 레아가 야곱에게 낳은 딸, 디나가 그 토지의 딸들을 보려고 밖으로 나갔다. 2 그리고 그 토지의 왕자, 히위족 하몰의 아들, 세겜이 그녀를 보았다, 그리고 그녀를 데려왔다, 그리고 그녀와 누웠다, 그리고 그녀를 강탈했다. 3 그리고 그의 혼은 야곱의 딸 디나에게 굳게 결합되었다, 그리고 그는 이 처녀를 사랑했다, 그리고 이 처녀의 심정에 말했다. 4 그리고 세겜은 그의 아버지 하몰에게 말했다, 말하기를 이 소녀를 여인으로 얻게 해주십시오.

그리고 디나는 밖으로 나갔다. 이는 신앙의 모든 것들에 애착함, 그리고 거기에서 파생된 교회를 의미한다. 이는 디나의 표현함이 모든 진리들에 애착함과 이로부터 파생되는 교회이다로부터 분명해진다. 그 이유가 야곱의 열두 아들들이 신앙의 모든 것들, 고로 교회의 모든 것들을 표현했기 때문이다. 고로 레아와 그 하녀들로부터 야곱의 열 아들이 태어난 이후 태어난 디나는 그것들에 애착함, 그러므로 교회를 의미한다. 그 이유가 교회는 진리에 애착함으로부터 있기 때문이다; 즉 우리가 진리에 애착함이라 말하든지 교회라고 말하든지 같은 말이기 때문; 또는 인간은 진리에 애착함으로부터 교회이기 때문이다.

레아가 야곱에게 낳은 그녀의 딸. 이는 외적인 것들 안에서를 의미한다. 이는 레아의 표현함이 외적 진리에 애착함이다로부터 분명해진다; 그리고 야곱의 표현함이 최고 의미에서 자연 평면에 있는 신성한 진리 측면의 주님이다로부터, 그리고 관계적 의미에서 외적 교회를, 또는 같은 말로 교회의 외적인 것들을 표현한다. 이로부터 “그녀가 야곱에게 낳은 레아의 딸”이 외적인 것들에 있는 진리에 애착함임이 분명해진다.

그 토지의 딸들을 보려고. 이는 진리에 애착함들과 그로부터 파생된 교회들과 친숙해지려 함을 의미한다. 이는 “보는” 것의 의미가 (어떤 것)에 친숙해지게 되는 것이다로부터; “딸들”의 의미가 애착들과 그로부터 파생되는 교회들이다로부터; 그리고 “토지”, 여기서는 가나안의 토지의 의미가 교회가 있는 지역, 또한 교회 자체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 구절에 포함된 것들의 의미는 이어지는 사항들로부터 보여질는지 모른다; 그 이유가 취급되는 주제가 야곱의 후손들 사이에 설립되기로 예정된 교회의 표현물이기 때문이다. 이 표현물은 그들이 내면의 진리들 측면에서 완전히 황폐해지기 전에서는, 즉 그들이 더 이상 내면의 진리들을 일체 알지 못해지기 전에서는 설립되어질 수 없었다. 이는 앞에서도 이미 언급했었다. 이 내면의 진리들은 그들에게 명령된 의식들에 의해 모두 표현되고 의미되어져 있다; 그 이유가 모든 의식들은 천국들에 있는 주님의 왕국에 있는 어떤 것, 결과적으로 땅 위 주님의 왕국, 즉 교회에 있는 어떤 것을 표현하고 의미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표현되고 의미된 것들은 여기서 뜻하는 내면의 진리들이다. 야곱의 후손들에게 명령된 사항들의 각각 그리고 모두는 교회의 표현물이 그들 사이에 설립되었을 때 (모세의 책 중에서도 특히 출애굽기서와 레위기서에 기술되고 있다), 주님의 왕국 속의 천적, 영적 사항들을 표현하고 의미했다는 것은 이미 많은 곳의 설명들에서 살펴왔다. 이런 사항들이 야곱의 후손들에게는 알려져 있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만일 그들이 알았다면, 이를 모독했을 것이기 때문에 모독함을 예방해주시기 위함 때문이다; 이런 이유에서 그들은 그들의 내면들 측면에서 완전히 황폐해지기 이전에는 교회의 표현물 안으로 와질 수 없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족들에 의해 내면의 진리들이 의문 선상에 놓이고, 아예 소멸되어버림이 이 장에서 묘사되고 있다.
야곱의 후손들에게 명령된 표현물들은 사실상 새로운 것은 아니고, 대부분이 이미 고대인들 사이에서 사용되어 왔었던 것들이다; 그러나 차이점은 있다; 고대인들은 야곱의 후손들(유태인과 이스라엘족)이 했듯 외적인 것들을 예배하지 않았고 그들은 내적인 것들을 예배했다, 그리고 이를 수단으로 그들은 주님 자신을 인정했다. 그때까지도 가나안의 토지에는 고대 시대의 교회로부터의 것이 남아 있었다; 특히 헷족과 히위족 사이에서 잔존하였다. 이런 이유 때문에 이 나라들을 수단으로 교회 속에 있어 왔던 진리들이 표현되었다. 이상 살핀 바로부터 토지의 딸들을 보려고 나간 레아에 의한 야곱의 딸 디나에 의해 의미된 것이 보여지고 있을 것이다; 그 이유가 디나에 의해 야곱의 후손들 사이에 설립된 외적 교회가 표현되고; 토지의 딸들은 고대인들 사이에 있는 교회들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말씀의 내적 의미에서 “딸들”은 말씀의 어느 곳에서나 교회들을 의미하는데, 이미 살폈다; 그리고 “토지”는 교회가 있는 지역과 나라를, 고로 교회를 의미한다

그리고 세겜이 그녀를 보았다. 이는 진리를 의미한다. 이는 세겜의 표현함이 진리이다로부터, 여기서는 고대 시대로부터 있는 교회 속의 진리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것이 세겜에 의해 표현되는 이유는 세겜이 속한 나라와 더불어 (고대) 교회로부터의 것이 아직 잔존하였기 때문이다. 이 나라가 마음씨 고운 나라들 중의 하나이다는 것은 하몰과 세겜이 야곱과 그의 아들들에게 이야기함에 신실함이 엿보였다는 것(8-12절), 세겜이 디나를 아내로 데려가도록 정중한 태도로 허락을 받으려했다는 것 (18-24절)으로부터 분명해진다; 이런 그들의 품성은 교회 속의 진리가 그들에 의해 표현되어진 이유 중의 하나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 외에도, 세겜 성은 아브람이 시리아로부터 가나안의 토지로 왔을 때 첫 경유지였기도 하다 (창. 12:6); 그리고 지금은 야곱이 시리아로부터 와서 첫 경유지가 되고 있다. 여기에서 그는 자기 천막을 펼쳤다, 그리고 우릿간을 만들었다, 그리고 제단을 건립했다 (창. 33:17-20). 아브라함과 야곱의 여행과 체류함은 최고 의미에서 주님에 관련하여서와 주님에 의해 거듭나지는 인간의 관계적 의미에서 있는 신앙의 진리들과 사랑의 선들 쪽으로 발전해감을 표현하는데, 이는 여러 번 상술했었다. 그러므로 “세겜 성”에 의해 맨처음의 빛이 의미된다, 결과적으로 내면의 진리가 의미된다, 그 이유는 이것이 첫 번째의 빛이기 때문이다.
이 장의 내적 의미에서, 야곱의 후손이 어떻게 자신들 안에서 빛의 첫 번째 되는 것, 즉 내면의 진리를 소멸시키는지가 다루어지고 있다. 내적 역사적 의미에서, 야곱의 아들들은 그들의 모든 후손들을 의미한다; 그 이유가 말씀의 내적 의미에서 주님의 왕국 속의 것들이, 고로 그분의 교회 속의 것들이 집중적으로 취급되기 때문이다. 사실 야곱의 아들들 자신들이 어떤 교회를 구성하지는 않았고, 그들의 후손들에서 구성되었다; 즉 이집트로부터 나온 이 후의 후손들 만이 해당되는데, 실제적으로는 가나안의 토지로 들어간 후손들 이 후의 자손들로부터 이다.
세겜으로부터 그렇게 명명된 이 성읍에 주목해보자. 이 성은 고대적으로는 “살렘(Shalem)”이라 불리운 것은 앞 장으로부터도 분명해진다:
야곱은 세겜의 성 살렘에 왔다, 이곳은 가나안의 토지 안에 있다 (창. 33:18);
“살렘”이 고요함을 의미하고, “세겜 성”은 신앙의 내면의 진리들을 의미한다. 인간이 이런 진리들 쪽으로 와질 때, 그는 고요한 상태 안으로 온다. 그러나 같은 성읍(살렘)이 후에는 “세겜”으로 불리워졌다는 것이 아래에서 확인된다:
요셉의 뼈, 이를 이스라엘의 아들들이 가져와서 그들은 야곱이 이백 크사라를 주고 세겜의 아버지 하몰의 아들들로부터 산 들판의 지분에, 세겜에 매장했다 (여. 24:32).
그리고 사사기서에서:
에벳의 아들 가알이 세겜 성읍 주민들에게 말하기를, 우리가 그를 섬겨야 한다고 하는데, 누가 아비멜렉이고, 누가 세겜인가? 그는 여룹바알의 아들이 아니냐?, 그리고 스볼이 그의 장관이더냐? 너희는 세겜의 아버지 하몰의 사람들을 섬기라, 그리고 왜 우리가 이 사람을 섬기느냐?
(사. 9:28)
이 세겜 성은 한참 후에 수가라고 불리웠다:
예수께서 수가라고 불리운 사마리아의 성에 오셨다, 이곳은 야곱이 그의 아들 요셉에게 준 들판에 가깝다; 그리고 야곱의 우물이 거기 있었다 (요. 4:5, 6).
위 구절로부터 이 성읍이 내면의 진리를 의미한다는 것이 분명해지고 아래 구절도 있다:
길르앗은 불법을 일하는 그들의 성읍이다, 이것은 피로 범벅이 되어 왔다; 그리고 (강도)떼가 사람을 기다림 같이, 성직자들의 동료 떼거리가 사악하였기 때문에 세겜의 길에서 살인한다; 이스라엘의 가문 안에서 나는 더러운 것들을 보았었다 (호. 6:8-10);
위에서 “세겜의 길에서 살인하는” 것은 내면이 있는 이들에게서조차 진리를 소멸하는 것, 고로 모든 외적 진리들을 소멸하는 것을 의미한다. 내면의 진리의 소멸은 아비멜렉이 이 성읍을 파괴하고 소금을 뿌림에 의해서도 의미되고 있다 (사. 9:45).

히위족 하몰의 아들. 이는 고대인들로부터를 의미한다. 이는 여기서 세겜인 “아들”의 의미가 내면의 진리이다로부터 분명해지는데 앞에서 언급했다; 그리고 하몰의 표현함이 이 진리의 아버지, 고로 고대인들로부터 이다에서 알려진다; 그 이유가 표현물과 의식들 안에 내면이 있었던 진리는 고대 때의 교회로부터 방산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하몰은 “히위족”이라고도 명명되었는데, 그 이유는 히위 민족에 이런 진리가 고대 시대로부터 있어 왔기에 그들 사이에서 히위족을 이름 뒤에 붙여 말하므로 이런 진리까지 언급되게 하였었기 때문이다. 하여 여기서도 하몰이 “히위족”이라 불리워진다. 이렇게 가나안에 있는 모든 민족들에 의해 고대 교회의 어떤 선 또는 진리가 의미된 이유는 거기에 천적 평면에 속했던 태고 교회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후에 교회가 있어 왔던 여느 민족들 같이 이 나라들도 우상숭배적으로 변질되었던 바, 반대적 의미인 우상 숭배 역시 의미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히위족은 고대로부터 가졌던 것 때문에 내면의 진리를 의미했고, 특히 그들은 다른 민족들과 달리 마음씨 고운 민족 중의 하나여서 이들과 더불어서는 불법적인 것이 대단하게 오염된 상태는 아니었다; 즉 교회의 진리가 완전히 소멸된 것은 아니다는 말이다. 그 한 예가 히위 민족의 기브온족인데, 특별한 섭리로 그들은 여호수아와 계약을 맺음으로 생존할 수 있었다 (여. 9:15). 그들이 히위족이다는 것은 여. 9:7과 11:19에서 보여진다. 이상으로부터 알게 되는 바, 고대인들로부터의 내면의 진리가 “히위족 하몰의 아들 세겜”에 의해 의미되어진다는 것이다.

그 토지의 왕자. 이는 교회들 사이에서 제 일 가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왕자”의 의미가 제 일 가는 것이다로부터; 그리고 “토지”의 의미가 진리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리고 그는 그녀를 데리고 갔다, 그리고 그녀와 누웠다, 그리고 그녀를 강탈했다. 이는 이 진리가 그녀의 형제들, 야곱의 아들들에 의해 의미된 진리에 애착함과 합쳐질 수 있는 방법은 이외 더 없음을 의미한다. 이는 “그녀를 데리고 감, 그녀와 누움, 그녀를 강탈함”이 결합함이기는 하나 약혼(betrothal) 같은 합법적인 방법에 의해 이루어진 결합은 아니었다를 뜻함으로부터 알게 된다. (혼인에는 두 가지, 즉 하나는 정신적 혼인, 또 하나는 육체적 혼인, 전자는 약혼, betrothal이라 불리우고 후자는 결혼, marriage라고 구분되는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역자주) 이것이 이외 다른 방법에서는 결합되어질 수 없었다가 의미됨에 대하여는 별도의 설명이 필요할 것이다. “히위족 하몰의 아들 세겜”에 의해 의미된 고대인들로부터의 내면의 진리는 고대인들 사이에 있던 교회의 내적인 것이었다; 고로 이것은 그들의 규례들, 재판들, 그리고 법들의 내적인 것이었다; 한 마디로 그들의 의식들, 또는 의식에 준하는 것들의 내적인 것이었다는 말이다. 이 진리들은 그들로 삶을 영위하게 한 교리적인 것들, 실로 선행으로부터의 교리적인 것들 이었다; 그 이유가 고대 때에 진짜 교회에 속해 있던 이들은 선행의 교리 외에 다른 교리는 없었기 때문이다. 선행을 교리에 관계해서 말하면 내면의 진리들이라 불리울 것이고, 생활에 관계해서 말하면 선들이라 불리울 것이다. 만일 어떤 교회가 야곱으로부터 튀어나온 민족들과 개시되기로 한다면, 그들은 필시 이런 진리들과 선들 안에서 개시되어야만 한다; 그 이유는 외적인 것과 더불어 내적인 것이 없으면, 즉 인간이 외적인 것들 안에 있을 때, 내적인 것도 생각하지 않으면, 또는 적어도 내적인 것 때문에 외적인 것에 의해 감명됨이 있지 않으면, 교회의 어떤 것도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내적인 것이 교회를 만들기 때문인데, 이 내적인 것 안에 주님이 계시기 때문이다; 이 내적인 것 안에 그분으로부터의 영적, 천적인 것들이 있다.
그러나 야곱으로부터 튀어나오는 민족, 즉 이스라엘족과 유대족은 약혼에 의해 결과되는 합법적인 방법으로 이런 내적인 것들 안에서 개시할 수 없었다; 그 이유는 그들의 외적 예배가 상응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그들의 아버지들, 즉 아브라함, 이삭, 야곱으로부터 그들은 에벨에 의해 설립된 예배를 받았기 때문이고, 이 예배는 고대 교회의 예배와는 예배의 외적인 것들에서 차이가 많았다. 이런 다른 점들 때문에 고대인들 사이에 존재했던 내면의 진리들은 약혼 같은 식의 합법적인 경로로 해서 결합되어질 수 없었다; 하여 여기서 기술된 방식밖에 없었다. 따라서 “다른 방법으로 해서 이 진리가 디나의 형제들, 즉 야곱의 아들들에 의해 의미된 진리에 애착함과 결합되어질 수 없었다”라는 말이 이해되었을 줄로 안다.
그러나 설사 결합이 고대인들에게 알려진 법에 의거한 방식에서 였다 해도, 이 민족은 이런 특성 속에 여전히 있어 왔다; 즉 고대인들로부터 있었던 내면의 진리가 야곱의 후손들 사이에 존재했던 예배의 외적인 것들과는 결단코 결합되어지지 않아야 하는 특성 속에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이 민족들과 더불어서는 어떤 교회도 설립될 수 없었던 바, 이것 대신 거기에는 교회의 표현물(교회의 껍데기)만 있었을 뿐이다. 이 민족은 내면의 진리들을 받는 것이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자신들 안에서 그것들을 완전히 소멸시켜야 하는 특성 속에 있었기에 본문 13절에서 야곱의 아들들이 하몰과 세겜에게 허위로 대답함에서 이것이 표현되고 있다; 더 나아가 시므온과 레위가 검의 날로 도성을 짓부수고, 하몰과 세겜을 살해하고 (25, 26절), 아들들의 나머지를 조각내고, 도성을 약탈하고, 양떼와 목축떼를 끌고 갔으며, 도성 안에, 들판에, 그리고 집 안에 있는 무엇이든 가져갔던 것이다 (27-29절). 이로부터 야곱, 즉 이스라엘에 의한 예언이 의미하는 것도 분명해진다:
시므온과 레위는 형제들이다, 폭력의 도구들은 그들의 검이다; 내 혼이 그들의 음모 안으로 가게 하지 말자, 내 영광이 그들의 모임에서 하나로 되게 하지 말자; 그 이유는 그들은 격노함에서 사람을 살해했다, 그리고 그들은 쾌락에서 숫소를 느슨해지게 했다; 그들의 성냄은 격렬했기 때문에 저주되어야 하고, 그들의 격노함이 슬퍼졌기 때문에 저주 받을지어다; 나는 그들을 야곱에 서 갈라낼 것이다, 그리고 이스라엘에서 그들을 흩어지게 할 것이다 (창. 49:5-7).

그리고 그의 혼은 디나에게 굳게 결합되었다. 이는 결합쪽으로 기울었음을 의미한다.
이는 “그의 혼이 굳게 결합함”의 의미가 기울어짐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것이 결합하는 것임이 분명한데, 그 이유는 부부의 사랑에 속하는 것들은 내적 의미에서 영적인 결합을 포함하기 때문, 즉 진리가 선과, 선이 진리와 결합함이 포함되고 있다. 내적 의미에서 부부의 사랑에 속하는 것들이 이 결합을 포함하는 이유는 부부의 사랑은 그것의 근원이 진리와 선의 결혼, 그리고 선이 진리와 결혼으로부터 파생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말씀에서 선에 섞음질함이 “간통(adultery)”에 의해, 그리고 진리를 거짓화함이 “매춘(whoredom)”에 의해 뜻해지고 있다. 이상 살핀 바로부터 이 장에서 세겜과 디나와 관련된 것은 내적 의미에서는 세겜에 의해 표현된 진리가 디나에 의해 표현된 진리에 애착함과 결합함밖에 더 다른 의미는 없다는 것을 알는지 모른다; 고로 “그의 혼이 디나와 굳게 결합했다”의 말에 의해서는 결합쪽으로 기울었음이 의미된다.
이 장의 전체가 디나를 향한 부부의 사랑이 취급되고, 어떻게 세겜이 여인으로 그녀를 추구했는지, 그리고 부부의 사랑에 속한 것들에 의해 영적인 결합이 의미되기에, 결혼과 그것들에 속한 것들이 영적 결합밖에 더 다른 뜻이 없음을 다른 말씀에서도 확증해보자:
계시록서에서:
즐거워 기뻐서 날뛰자, 그리고 그분에게 영광을 드리자, 그 이유는 어린 양의 결혼이 오기 때문이고, 그분의 아내가 자신을 준비하였기 때문이고, 마치 어린 양의 결혼식 만찬에 불리운 이들…
(계. 19:7, 9)
계시록서에서:
나는 거룩한, 새 예루살렘을 보았는데, 천국의 안으로부터 밖으로 하느님으로부터 내려오고 있고, 그녀의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신부 같이 준비되었다. 일곱 천사 중의 하나가 나에게 말했다, 오라, 내가 신부, 어린 양의 아내를 보여주겠다; 그리고 그는 나를 영 안에서 크고 높은 산 위로 운반하였고, 그리고 나에게 하느님으로부터 천국의 안에서 밖으로 내려오는 위대한 성, 거룩한 예루살렘을 보였다 (계. 21:2, 9, 10);
위 구절에서 약혼과 결혼에 관련되는 것에 의해 의미되는 것은 주님께서 교회와 결혼하는 것, 이 결혼은 진리와 선을 수단으로 한다는 것밖에 더 없다는 것이 분명한데, 그 이유는 “거룩한 성”과 “새 예루살렘”이 교회 외에 더 다른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말라기서에서:
유다는 불충하게 (일들을) 처리했다, 그리고 이스라엘과 예루살렘에서는 역겨운 짓이 범하여졌다, 그 이유가 유다는 여호와의 거룩함을 모독했기 때문이다, (즉) 그가 사랑했고 그에게 이상한 신의 딸을 약혼시켰기 때문이다. 여호와께서는 불충하게 처리했던 너를 향하여, 너와 네 젊은 이의 아내 사이에 증거를 해오셨었다 (말. 2:11, 14);
위에서 “이상한 신의 딸을 사랑하고 약혼하는 것”은 자신의 자아를 “젊은 이의 아내”인 진리와 결합하는 대신 거짓과 결합하는 것이다.
에스겔서에서:
너는 네가 나에게 낳은 아들들과 딸들을 데려갔다, 그리고 그들을 삼키게 제물로 바쳤다. 네 매춘짓들이 작은 일이더냐? 너는 자기 남편과 아들들을 싫어한 네 어머니의 딸이다; 그리고 너는 그들의 남편들과 아들들을 싫어했던 네 여자 형제들의 누이이다 (겔. 16:20, 45);
위에서는 예루살렘의 역겨운 짓이 취급된다, 이 짓을 한 이유는 그들이 악들과 거짓들 안에 있었기 때문이고, 이 장에서 결혼에 반대되는 짓, 간통과 매춘 같은 것들에 의해 묘사되어 있다. “그들이 싫어한 남편들”은 선들이다, 그리고 “아들들”은 진리들이다; 그리고 “딸들”은 이것에 애착함들이다.
이사야서에서:
노래하라, 애를 낳지 못한 자, 산고를 겪지 않은 자는 노래함으로 다시 소리를 내고, 환희로 외쳐라, 그 이유는 결혼한 이의 아들들보다 홀로된 자의 아들들이 더 많기 때문이다. 너는 과부됨의 치욕을 더 이상 기억하지 않을 것이다, 그 이유는 너를 만드신 자들이 네 남편들이고, 여호와 체바욷이 그분의 이름이고, 그리고 너를 되찾으신 자가 이스라엘의 거룩한 분이시기 때문이다, 그분은 온 땅의 하느님이라 불리우신다; 그 이유가 버림받아 영에서 고뇌하는 여인 같고, 젊은 이의 여인이 이혼되었을 때 같은 너를 여호와께서 부르셨다 라고 네 하느님이 말하셨다. 모든 네 아들들은 여호와로부터 가르쳐진다, 그리고 네 아들들의 평화는 많다 (이. 44:1, 5, 6, 13).
결혼에 의해 진리와 선, 선과 진리의 결합이 있기에, 이것이 위 구절들에서 “남편과 아내”에 의해; “아들들과 딸들”에 의해; “과부들”에 의해; “이혼 자”에 의해; “낳음”, “산고”, “홀로됨”, 그리고 “애를 못낳음”에 의해 의미됨이 분명하다. 그 이유가 이런 것들이 결혼에 관련되기 때문이다. 이런 단어들의 영적 의미는 이미 설명을 거쳤으므로 여기서는 생략한다.
이사야서에서:
시온을 위하여 나는 침묵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예루살렘을 위하여 나는 쉬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너희에게 버려진 자로 더 이상 있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네 토지는 결혼한 자로 불리울 것이다, 그 이유가 여호와께서 네 안에서 흡족해 하실 것이기 때문, 그리고 네 토지는 결혼되어질 것이기 때문; 젊은 자가 처녀와 결혼하기 때문에, 네 아들들이 너와 결혼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신랑이 신부로 해서 기뻐함이 있을 것이고, 네 하느님이 네 위에서 흡족해 하실 것이다 (이. 62:1, 4, 5);
말씀의 내적 의미를 모르는 이들은 위와 같은 말씀 속의 사항들은 일반 언어에서와 같이 비교함들일 뿐이라고 상상하고, 하여 교회가 딸에, 처녀에, 그리고 아내에 비교되는 것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말씀에 있는 모든 것들은 영적이고 천적인 것들의 표현이고, 실지로 상응하고 있다; 그 이유가 말씀은 천국으로부터 내려와 있기 때문, 하여 말씀의 근원이 신성이고, 글자 의미에 속하는 것들이 천적이고 영적인 것들과 상응한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천국들의 왕국 (즉, 천국에 있는 그분의 왕국, 교회인 땅에 있는 그분의 왕국)을 “자기 아들을 위해 결혼식을 만들고, 거기에 많은 이들을 초대한 사람, 왕”에 견주시고(비유하시고) 있다 (마. 22:2-14); 또한 “자기들의 등불을 가지고 신랑을 만나기 위해 나간 열 처녀들” (마. 25:1-13)의 비유도 있다. 그리고 주님은 교회 속에 있는 이들을 “결혼식에 참석한 아들들”이라 부르신다:
예수께서 말하셨다, 결혼식에 참석한 아들들이 신랑이 그들과 더불어 있는 한 슬퍼할 수 있느냐? 그러나 그들로부터 신랑을 데려갈 날이 올 것이다, 그리고 그때 그들은 단식할 것이다 (마. 9:15).
그러므로 또한 선에 애착함과 진리에 애착함이 “신랑과 신부의 기쁨과 즐거움”이라 불리운다, 그 이유는 천국의 기쁨이 이런 애착들로부터, 이런 애착 안에 있기 때문이다.
이사야서에서:
네 아들들이 너와 결혼할 것이다, 그리고 신랑의 기쁨이 신부 위에 있듯, 여호와 네 하느님이 네 위에서 흡족해 하실 것이다 (이. 62:5).
예레미야서에서:
기쁨의 목소리와 즐거움의 목소리, 그리고 신랑과 신부의 목소리, 그들의 목소리가 말하기를, 너희는 여호와에게 고백하라, 그 이유는 선이 여호와이기 때문이다 (예. 33:11).
예레미야서에서:
나는 유다의 성읍들로부터와 예루살렘의 거리들로부터 기쁨의 함성과 즐거움의 함성을, 신랑의 함성과 신부의 함성이 중단되게 할 것이다, 그 이유는 토지가 황폐해짐쪽으로 나아갈 것이기 때문이다 (예. 7:34; 16:9; 25:10).
계시록서에서:
등불의 빛이 바빌론에서 더 이상 비추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신랑의 음성과 신부의 음성이 그녀 안에서 더 이상 들려지지 않을 것이다 (계. 18:23).
사랑을 통하여 진실로 부부이듯, 땅 위의 결혼은 선과 진리의 결혼인 천국의 결혼에 상응한다, 그러므로 약혼과 결혼에 관하여 말씀에서 교부된 법들은 천국의 결혼의 영적인 법들에 완전하게 상응한다, 예를 들면 오직 한 아내만을 배우자로 하라는 것 등등이다 (막. 10:2-8; 눅. 16:18); 그 이유가 이것이 천국의 결혼에서 있는 경우이기 때문이다, 즉 선은 그것 고유에 속하는 진리가 아니면 결합되어질 수 없고, 진리는 그것 고유에 속하는 선이 아니면 결합될 수 없는 것이 천국의 결혼이다. 만일 선이 그것 고유의 것 외의 다른 진리와 결합하면, 그것은 전혀 존재할 수 없어 찢어져 멸해지고 만다. 영적 (평면의) 교회에서 아내는 선을 표현하고, 남자(남편)는 진리를 표현한다, 그러나 천적 (평면의) 교회에서 남편은 선을, 아내는 진리를 표현한다; 이것은 신비함들이다; 그들은 표현할 뿐만아니라 그들의 활동들에서도 그것들에 상응한다.
위 신약 성경 외에 구약 성경에서 결혼에 관련해 교부된 법들도 천국의 결혼의 법들에 마찬가지 방식에서 상응하고 있다. 즉 출. 21:7-11; 22:15, 16; 34:16; 민. 36:6; 신. 7:3, 4; 22:28, 29 이고, 금지되는 것들의 등차에 관한 법들도 있다 (레. 18:6-20); 이에 대한 보다 더 상세한 것은 주님의 신성한 자비로부터 별도로 살핀다. 결혼의 법들과 등차들은 천국의 결혼인 선과 진리의 법들에서 그것의 근원을 가진다는 것, 그리고 그것들에 관련하여 있는다는 것이 에스겔서에서 분명해진다:
성직자 레위인은 자기의 아내를 이혼된 과부로부터 데려와서는 안된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가문의 처녀들로부터, 그리고 성직자의 과부로 있었던 과부를 데려올 것이다 (겔. 44:22);
위 구절에서 취급된 주제는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과 천국의 가나안이다, 그리고 이것들이 주님의 왕국과 그분의 교회임이 분명해진다. 결과적으로, “레위인”에 의해 레위인이 의미되는 것이 아니고, “과부와 이혼된 그녀”가 과부와 이혼되어 있었던 그녀를 의미하지 않고, 이런 것들이 상응하는 것들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는 이 처녀를 사랑했다, 그리고 그녀의 심정에 말했다. 이는 사랑을 의미하는 바 별도의 설명이 필요 없다.

그리고 세겜은 그의 아버지 하몰에게 말했다. 이는 고대인들 사이에 있었던 진리로부터 생각함을 의미한다. 이는 “말하다”가 말씀의 역사물에서는 지각하는 것, 그 결과 생각함이다로부터; 그리고 하몰의 아들, 세겜의 표현함이 고대인들 사이에 있는 진리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러므로 “세겜이 그의 아버지 하몰에게 말했다”란 고대인들 사이에 있던 진리로부터 생각함을 표시한다.

말하기를, 저에게 이 소녀를 여인으로 얻게 해주십시오. 이는 이 진리가 저 진리에 애착함과 결합되기를 바랬다를 의미한다. 이는 여기서 소녀, 즉 디나가 그녀의 형제들인 야곱의 아들들에 의해 의미된 진리에 애착함을 의미함으로부터; 그리고 “여인으로 얻음”은 결합하는 것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5-7절. 그리고 야곱은 그가 그의 딸 디나를 더럽혔다는 것을 들었다. 그리고 그의 아들들은 들판에서 그의 획득물과 함께 있었다. 그리고 야곱은 그들이 올 때까지 잠잠했다.
6 그리고 세겜의 아버지 하몰이 야곱에게 말을 하려고 밖으로 나왔다. 7 그리고 야곱의 아들들이 들판으로부터 와서 그 소식을 들었다. 그리고 사람들은 슬퍼했고, 분노에 찼다, 그 이유는 그가 야곱의 딸과 드러누웠는 바, 하지 말았어야 하는 부끄러운 짓을 이스라엘에게 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야곱은 그가 그의 딸 디나를 더럽혔다는 것을 들었다. 이는 합법적이지 않은 결합을, 즉 여기서 야곱에 의해 표현된 외적 교회에 속한 진리에 애착함과 합법적이지 않은 결합을 의미한다. 이는 “더럽히는” 것이 합법적이지 않게 결합함임을 의미함으로부터 알게 된다; 그 이유가 결혼에 의해서는 합법적인 결합을 의미하기 때문, 그러므로 “더럽힘”은 합법적이지 않은 결합이 의미된다; 디나의 표현함이 신앙의 모든 것들에 애착함, 그러므로 그로부터 파생된 교회이다로부터; 그리고 야곱의 표현함이 여기서는 외적 고대 교회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여기서 “야곱”에 의해 외적 고대 교회가 의미되는 이유는 이 교회가 그의 후손들 사이에서 설립되기로 되어 있었기 때문이고, 만일 그의 후손들이 고대인들 사이에 존재했던 내면의 진리를 받았다면 아마 설립되어졌을 것이다. 이 교회가 여기서 야곱에 의해 표현된 것은 이어지는 이 장의 구절로부터도 분명해진다; 그 이유가 그는 그의 아들들이 도성을 짓부수고, 하몰과 세겜을 살해하는 음모를 꾸미는 자리에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가 시므온과 레위에게 “너희는 나에게 화를 끼쳐 나로 하여금 이 토지의 주민에게 악취를 내게 하였다”하고 말하였다(30절). 그리고 그가 죽음을 앞두고 예언적 말에서, “내 혼이 그들의 비밀 안으로 가지 말지라, 그들의 회합 안에서 내 영광이 하나가 되게 하지 말지라; 그 이유는 그들의 성냄에서 그들은 사람을 죽였다, 그리고 그들의 쾌락에서 그들은 숫소를 느슨해지게 했다” (창. 49:6). 더 나아가 말씀의 다른 구절에서도 외적 고대 교회가 야곱에 의해 표현되어진다. 야곱이 이 교회를 표현하는 이유는 그가 최고 의미에서 주님의 신성한 자연 평면을 표현하기 때문, 이것에 외적 교회가 상응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아들들”에 의해서는 그의 후손들이 의미된다. 이들은 자신들 안에서 고대인들 사이에 존재했던 진리를 소멸했다, 고로 교회 안에 있는 것을 파괴했다, 그 결과 그것의 표현성만 그들과 더불어 남았다.

그리고 그의 아들들은 들판에서 그의 획득물과 함께 있었다. 이는 그의 후손들을 의미하고, 이들은 자신 고유의 광신적인 신앙에 있었다는 것이 그의 “아들들”이 그의 후손들을 의미함으로부터; “획득물”의 의미가 외적 진리들이다로부터; 그리고 “들판”의 의미가 교회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러므로 “그의 아들들이 들판에서 그의 획득물과 함께 있었다”에 의해 그들은 자신들 고유의 광신적 신앙 안에 있었다가 의미된다; 그 이유가 야곱의 후손들 사이에 존재한 그대로의 그들의 교회는 “광신적 신앙”이라 말해야 마땅할 것이기 때문, 그들의 외적 예배는 내적인 것이 하나도 없었다.

그리고 야곱은 그들이 올 때까지 잠잠하였다. 이는 그와 그의 후손들에 속해 있던 진리들로부터 상담함을 의미한다. 이는 “잠잠히 있는” 것의 의미가 조용하게 생각하고 상담을 취함이다로부터; 그리고 “그들(아들들)이 올 때까지”의 의미가 그와 그의 후손들에 속했던 신앙의 진리들로부터 이를 행하는 것이다로부터 알려진다. 상담함이 아들들과 더불어, 고로 야곱의 아들들에 의해 의미된 진리들과 더불어 있었던 바, 이것은 야곱과 그의 후손들에 속했던 진리들로부터 이었음이 뒤따른다.

그리고 세겜의 아버지 하몰은 야곱에게 말하려고 밖으로 나갔다. 이는 그 교회의 진리들에 관하여 상담함을 의미한다. 이는 세겜의 아버지 하몰의 표현함이 고대인들로부터의 진리이다로부터; 야곱의 표현함이 외적 고대 교회이다로부터; 그리고 “그와 이야기를 함”이 상담함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러므로 이 말들에 의해 그 진리에 관하여 상담함이 의미된다.
말씀에서 이름이 어떤 것을 의미함을 모르는 이들은 “세겜의 아버지 하몰이 그와 이야기를 하려고 밖으로 나갔다”에 의해 고대인들 사이에 존재했던 교회의 진리가 야곱의 후손들 사이에서 새로이 설립되려 했던 고대 교회와 일치함에 있었던 진리와 상담함이 의미되는 것에 의아해 할는지 모른다; 그러나 이런 설명은 말씀의 내적 의미의 본성을 아는 이들에게는 하등 흥분될 일이 아니고, 고대인들의 책들로부터 배웠던 이들에게서는 이것이 저술의 한 가지 방식일 뿐이다; 그 이유가 지혜, 총명, 지식들, 등등 같은 것을 함께 이야기하려고 어떤 사항을 꺼내드는 것은 고대인들에게는 관습적이기 때문이다; 또한 이야기를 한 후에 그것들이 의미함에 따라 그것들에 이름을 주었다. 고대인들과 더불은 신들(gods)과 반신반인(半神半人, demigods)은 이런 차원에서 있어 왔다, 하여 자기들의 역사적 형체에서 자기들의 주제들을 표현하기 위하여 그것에 걸맞는 인물들을 고안해 내었다. 옛 현인(sage)들은 고대 교회로부터 이런 관습을 가져왔는데, 이것이 아시아권의 세계에 널리 퍼졌다; 그 이유가 고대 교회의 사람들은 표현들과 의미들을 수단으로 신성시되는 것들을 표명하였다. 고대 교회는 홍수 이전에 있었던 태고인들의 입으로부터 이를 받았다; 그리고 천국으로부터도 이것들을 받았다, 그 이유가 그들은 천국과 교통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첫 번째 천국, 이는 세 천국 중 마지막 째(제일 바깥쪽)인데, 이 천국은 표현들과 의미들 안에 있다. 이는 말씀이 표현들과 의미들로 쓰여진 이유이기도 하다. 말씀이 이런 특유한 특징을 가지고 있으나 이것이 고대인들에 의해 소유되지는 않았고, 말씀의 주제 각각은 계속적인 시리즈 안에서 주님의 왕국의 영적, 천적인 사항들을 표현하고, 최고 의미에서는 주님 자신을 표현한다; 역사물 자체에서 조차 이런 특성을 유지하고 있고, 더욱이 그것들은 실재로 상응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이 상응은 주님으로부터 세 천국들을 통하여 계속적이다는 것이다.

그리고 야곱의 아들들이 들판으로부터 왔다. 이는 그들이 자기들의 광신적 신앙으로부터 상담했다를 의미하는데, 이는 “야곱의 아들들”의 의미가 그들로부터 파생된 민족이다로부터, 그들 사이에 교회의 표현이 설립되어졌다로부터; 그리고 “들판”의 의미가 광신적 신앙이다로부터 알려진다; “들판으로부터 오는” 것이 광신적 신앙으로부터 상담함이다는 것은 시리즈로부터, 즉 광신적 신앙인 들판으로부터 “왔다”고 서술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슬퍼했다, 그리고 그들은 심히 분노했다. 이는 그들은 고대인들 사이에 있었던 교회 속의 진리를 향하여 악 안에 있었음을 의미한다. 이는 “슬퍼하고 심히 분노함”의 의미가 악 안에 있음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것이 고대인들 사이에 있는 교회의 진리를 향하여서 였다고 말한 이유는 이것이 하몰의 아들 세겜을 향하여서 였고, 하몰에 의해 고대인들 사이에 있는 진리들이 의미되었기 때문인데, 이는 이미 살폈다. 그들이 악 안에 있었다는 것은 이어지는 사항들로부터 분명한데, 즉 그들이 사기쳐서 이야기 했다는 것 (13절), 그 다음 세겜과 하몰이 그들의 요구에 동의했다는 것, 그 후에 그들이 그들을 살해했다는 것(26-29절)에서 보여진다. 고로 “슬퍼하고 심히 분노함”이 여기서 의미하는 것은 그들이 악 안에 있음이다. 그런데 이 말이 언듯 여겨지기로는 열정인 것처럼 나타난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이어지는 말이 세겜이 이스라엘에게 해서는 안되는 행위를 저질렀기 때문이라는 서술, 슬퍼함이 자기 누이 동생을 두고 있어진 것이기에 열정 같은 것으로 나타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러나 이것은 열정(zeal)이 아니다, 그 이유는 열정은 악 안에 있는 자와 더불어서는 어불성설이기 때문, 즉 선 안에 있는 자에게만 해당될 뿐이다. 그 이유가 열정은 그것 내부에 선을 지니기 때문이다.
그들의 후손과 더불어 존재했던 광신적 신앙이 그것 내부에 선을 가졌던 것은 진실이다, 그 이유가 그 신앙의 각각 그리고 모든 것은 주님의 왕국의 천적 영적인 것을 표현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광신적 신앙에 있는 이들만에 초점을 맞춘다면, 그것 내부에 선이 없었다, 그 이유는 그것의 외적인 것은 내적인 것 없이 있었기 때문인데, 앞에서 언급했었다. 지금의 경우와 같이 이 민족의 광신적 신앙은 이렇게 그들 사이에서 널리 유행하였다: 즉, 그들은 모세와 예언자들을 인정한다, 고로 말씀을 인정한다, 또한 말씀자체가 거룩하다는 것도 인정한다, 그러나 그들에 초점을 맞추면, 말씀은 거룩하지 않다, 그 이유가 말씀 안에 있는 모든 것에서 그들은 자신을 중요시하기 때문이다, 고로 말씀을 세상적으로, 아니 지상적으로 만든다, 그 이유가 말씀 안의 천국적 요소를 그들은 전혀 알지 못하고, 관심도 없기 때문이다. 이런 상태에 있는 이들은 자기의 광신적 신앙 안에 있을 때, 선 안에 있을 수가 없다, 그러나 악 안에 있다, 그 이유가 천국적인 어떤 것도 흐르지 않기 때문, 그들은 자신 안에서 천국적인 것을 소멸해버린다.
더욱이 고대 교회에 알려진 법에 의거 있었던 것은 처녀를 강탈한 자는 혼인지참금을 주고 그녀를 그의 아내로 데려가야 한다는 것인데, 모세의 법에 이렇게 서술되고 있다:
만일 남자가 약혼되지 않은 처녀를 설득하고, 그녀와 누웠다면, 그는 자기 아내이도록 하는 혼인지 참금을 그녀에게 수여할 것이다. 만일 그녀의 아버지가 그녀를 그에게 주기를 정녕 거절한다면, 그는 은을 지불하는데, 처녀의 혼인지참금 만큼이다 (출. 22:15, 16).
다른 모세의 책에서:
만일 남자가 처녀인 소녀를 발견했는데, 그가 약혼해오고 있지도 않았는데, 그녀를 붙잡고, 그녀와 누웠는데, 그들이 (그를) 붙잡았다면, 그녀와 누운 남자는 소녀의 아버지에게 은 오십 조각을 줄 것이다, 그리고 그녀는 그의 아내일 것이다, 그 이유는 그가 그녀를 강탈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그녀를 자기의 모든 날 동안 그녀를 멀리 (방치)해서도 안된다 (신. 22:28, 29).
위 법과 같은 법이 고대인들에게 알려져 있다는 것은 세겜이 소녀의 아버지와 형제들에게 말한 말로부터 분명해진다: 즉, “그리고 세겜은 그녀의 아버지에게 그리고 그녀의 형제들에게 말했다, 나로 당신들의 눈에서 은혜를 발견하게 하라, 그리고 당신들이 무엇을 말하든 나는 줄 것이다. 나에게 혼인지참금과 예물이 몇 곱절이더라도 나는 너희가 말한대로 주리라. 그리고 나에게 이 처녀를 여인으로 주라” (11, 12절). 그래서 세겜이 이 법을 충족하기를 바랬을 때, 그리고 디나의 형제들이 그에게 동의를 하되 그들이 내건 조건은 모든 남성이 할례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즉 그렇지만 우리가 당신에게 동의할 수 있는 조건은 당신들이 우리 같이 당신을 위해 모든 남자가 할례를 받는 것이오. 우리는 당신에게 우리의 딸을 줄 것이고, 당신들의 딸을 우리에게 데려올 것이오. 그리고 우리는 당신과 함께 살 것이고 우리는 한 백성이 될 것이오 (15, 16절). 그러나 디나의 형제들은 이 법으로부터 (선으로부터) 행동하지 않았다, 오히려 법에 반대되는 악으로부터 행동했다.
실로 자기들의 법에 따라 행동한 셈이었다: 즉 그들은 다른 민족들과 결혼해서는 안된다는 자기들의 법에 따른 셈이다. 모세의 법에 이렇게 서술되어 있다: “너희는 네 아들을 위하여 그들의 딸들을 데려오지 말라, 그리고 그들의 딸들은 그들의 신들을 따라 우상숭배의 죄를 범한다, 그리고 네 아들들로 그들의 신들을 따라 우상숭배의 죄를 범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출. 34:16); 그리고 다시: “너는 (타) 민족들과 친척 관계를 체결하지 말라, 네 딸을 너희는 그의 아들에게 주지 말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딸을 네 아들에게 데려오지 말 것이다, 그 이유는 그가 네 아들이 나를 따름으로부터 돌아서게 하여 다른 신들을 섬기게 할 것이기 때문이다” (신. 7:3, 4). 그러나 이 법은 우상숭배하는 민족들에 초점을 맞추어 주어진 법인데, 그들과 결혼함에 의해 이스라엘의 아들들이 진실로 표현적 예배로부터 우상숭배하는 예배로 전락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였다; 그 이유가 그들이 우상숭배자가 되었을 경우, 그들은 주님의 왕국 속의 영적, 천적인 사항들을 더 이상 표현할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 반대인 지옥적인 것을 표현하고, 그러면 그들은 예배하기 위해 지옥으로부터 어떤 악마를 불러일으킬 것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런 것들에 그들은 신성한 표현물들을 적용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이 그(녀)들의 신들을 따라 우상숭배하는 죄를 범하지 않도록”라고 말해져 있는 것이다. 이 법이 주어진 이유에는 또 다른 이유도 있다; 즉 “민족들”은 악들과 거짓들이 의미되는 바, 이것과 이스라엘의 아들들에 의해 표현되는 선들과 진리들이 섞이지 말아야 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악마적이고 지옥적인 것들이 천국적이고 영적인 것들과 혼합되는 일은 없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자기들의 예배를 받아들이고, 할례받고 여호와를 인정하는 이들에게 마저 상호 결혼함이 금지된 것은 결코 아니었다. 이들을 그들은 “자기들과 더불어 우거하는 체류자”라고 불렀는데, 모세의 책에서 이렇게 말해진다:
만일 체류자가 너희 사이에서 체류하겠다면, 그리고 여호와께 대한 유월절을 기꺼이 준수한다면, 그의 모든 남성들로 할례받게 할 것이다, 그때 그를 가까이 오게 하고 그것을 지키게 하라, 그리고 그는 토지의 주민으로 있을 것이다; 거기에는 주민을 위하여와 너희 사이에 체류하는 체류자를 위하여도 하나의 법이 있을 것이다 (출. 12:48, 49).
그리고 다시:
체류자가 너희와 더불어 체류할 때, 그는 여호와께 유월절을 지킬 것이다; 유월절의 규례에 따라, 그리고 거기로부터의 규정들에 따라, 그는 행할 것이다; 하나의 규례가 너를 위하여, 체류자를 위하여와 본토박이를 위하여 있을 것이다 (민. 9:14).
이들이 “그들 한가운데에 체류하는 체류자” 또는 “그들과 더불어 체류하는 체류자”라고 불리운 이유는 “체류하는”것이 가르침을 받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체류자”는 규례와 교리적인 것들로 가르침을 받게 자신을 허용한 이들이 의미된다. 같은 책에서:
만일 체류자가 여호와께 쉼의 냄새를 위하여 불로 살라바치는 제물을 만드는 너희와 체류하겠다면, 너희가 행하듯 그도 행할 것이다: 회합에 관련하여 너희를 위하여와 체류하는 체류자를 위하여 하나의 규례가 있고, 너희 대대손손을 위하여 영원의 규례이다; 너희가 여호와 앞에서 있듯. 그들도 그렇게 있을 것이다; 하나의 법과 하나의 공평함이 너를 위하여와 너희와 더불어 체류하는 체류자를 위하여 있을 것이다 (민. 15. 14-16).
이 규례가 야곱과 그의 아들들 뿐만 아니라 세겜과 하몰에게도 알려져 있었다는 것은 그들의 말들로부터 분명해진다; 그 이유가 이스라엘 민족과 유태 민족에게 주어졌었던 규례, 공정, 법들이 새로운 것이 아니었기 때문, 즉 이런 법은 고대 교회 안에 이미 존재해왔고, 에벨로부터 이고, 히브리라고 이름 불러진 두 번째 고대 교회에 이미 존재했기 때문인데 이는 앞에서 상술했었다. 결과적으로 이 법이 알려져 있다는 것은 이 말로부터 분명하다: 즉 “야곱의 아들들이 하몰과 세겜에게 말했다, 우리는 표피를 가진 남자에게 우리의 누이를 주겠다는 말을 할 수가 없소, 그 이유는 이것이 우리에게 치욕적이기 때문이오; 그럼에도
우리가 당신에게 동의할 수 있는 조건은 만일 우리가 행하듯, 당신의 모든 남성이 할례를 받는 것이오, (그러면) 우리는 우리의 딸들을 당신들에게 줄 것이고, 그리고 당신들의 딸들을 우리에게로 데려오기도 할 것이오, 그리고 우리는 당신들과 더불어 거주하고, 하나의 백성을 위하여 있을 것이오“ (14-16절); 그리고 똑같은 말이 세겜과 하몰로부터도 있다, 하여 자신들 뿐만 아니라 도성의 모든 남성이 할례 받아지게 하였다 (18-24절).
그러므로 세겜이 법에서 이야기하는 체류자가 된 것이 분명하다, 고로 야곱의 딸을 여인으로 데려올 수 있었다; 따라서 그들을 살해하는 것은 사악한 행위였다, 하여 임종을 앞둔 야곱이 이를 증언하였다 (창. 49:5-7). 유다 뿐만아니라 모세, 또한 유태 나라와 이스라엘 나라의 왕들, 또한 많은 백성에 이르기까지 여러 나라들로부터 아내를 데려왔다는 것은 말씀의 역사물로부터 확인된다; 이런 아내들이 그들의 규례들, 공정함들, 법들을 받아들였고, 체류자로서 인정되었다는 것은 의심할 바 없는 사실이다.

그 이유는 그가 야곱의 딸과 누웠는 바, 하지 말았어야 하는 어리석은 짓을 이스라엘에게 했기 때문이다. 이는 이 결합은 그들이 가졌던 진리에 반대되기 때문에 그들의 눈에서 불법적이었다를 의미한다. 이는 “야곱의 딸과 눕는 어리석은 짓을 범함”의 의미가 불법적인 결합이다로부터 분명해진다. 여기서 (야곱이라 말해지지 않고) “이스라엘에게”라고 말해지고 있는 이유는 “이스라엘”에 의해 교회의 내적인 것이 의미되기 때문이다. 그 다음 “야곱의 딸”이라고 말해지는데, 그 이유는 “야곱”에 의해서는 교회의 외적인 것이 의미되기 때문이다. 이 결합이 (할례를 받음으로 해서) 합법적이 된다 하더라도, 이 결합은 야곱의 아들들의 눈에서는 불법으로밖에 나타나지 않고 있는 것은 이미 말해진 사항들로부터 알는지 모르고 방금 앞에서도 보여주었다.

8-12절. 그리고 하몰은 그들에게 이야기했다, 말하기를, 나의 아들 세겜, 그의 혼이 당신의 딸을 열망한다. 청컨대 그녀를 여인으로 그에게 주라. 9 그리고 우리들과 친척 관계를 맺자. 너희의 딸을 우리에게 주고, 그리고 우리의 딸을 너희에게 데려가라. 10 그리고 너희는 우리와 함께 거주하라, 그리고 이 토지가 너희 앞에 있을 것이고, 너희는 거주하며, 여기저기에서 매매를 펼쳐가서 너희의 소유를 얻으라. 11 그리고 세겜은 그녀의 아버지에게 그리고 그녀의 형제들에게 말했다, 나로 당신들의 눈에서 은혜를 발견하게 하라, 그리고 당신들이 무엇을 말하든 나는 줄 것이다. 12 나에게 혼인지참금과 예물을 몇곱절로 요구해도 나는 너희가 말한대로 주리라. 그리고 나에게 이 처녀를 여인으로 주라.

그리고 하몰이 그들에게 이야기했다, 말하기를. 이는 고대인들 사이에 있는 교회의 선을 의미한다. 이는 “하몰”의 표현함이 고대인들로부터 인 것이다로부터, 즉 고대인들 사이에 있었던 교회의 선이다. 그 이유가 교회의 선이 아버지이고 이로부터 파생된 진리(“세겜”)가 아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말씀에서 “아버지”에 의해 선이; “아들”에 의해 진리가 의미된다. 여기서 “고대인들 사이에 있는 교회의 선”이라 말하고, “고대 교회의 선”이라고는 말하지 않은 이유는, 전자는 홍수 이전 태고 교회로부터 파생된 교회를, 후자는 홍수 이후 존재한 교회를 뜻하는 이유 때문이다. 이 두 교회에 관한 것은 앞의 페이지들에서 다루어왔다; 거기서 보여준 바, 홍수 이전이었던 태고 교회는 천적 (수준) 이었고, 홍수 이후인 고대 교회는 영적 (수준) 이었다. 이 둘 사이의 차이점은 여러 번 취급한 바 있다.
천적 수준이었던 태고 교회로부터의 아껴두신 것이 가나안의 토지에 존재했었는데, 특히 히위족과 헷족이라 부른 이들 사이에서 잔존했다. 이 아껴두신 것이 가나안의 지역 외의 다른 곳에는 잔존하지 않은 이유는 “사람.” 또는 “아담”이라 부른 태고 교회가 가나안의 토지 안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러므로 “에덴의 동산”이 이 토지 안에 있었고, 이 동산을 수단으로 이 교회인의 총명과 지혜가 의미되고, 그리고 동산 안의 나무들을 수단으로 그들의 지각이 의미되었다. 그리고 총명과 지혜가 이 “동산” 또는 낙원에 의해 의미되었기 때문에, 교회 자체도 그것에 의해 뜻해졌다; 그리하여 천국 자체도; 천국 자체를 뜻했기 때문에, 최고 의미에서는 주님이셨다; 그리고 그러므로 이 의미에서 “가나안의 토지” 자체는 주님을, 관계적 의미에서는 천국과 교회를, 그리고 개인적 의미에서는 교인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단어, “토지(land)”, 또는 “땅(earth)”이 말씀에서 이 단어만 사용될 경우, 위와 마찬가지 의미를 가진다; “새 하늘(천국)과 새 땅”은 교회의 내적 외적 측면에서 있는 새 교회이다. 태고 교회가 가나안의 토지 안에 있었다; 그리고 이런 결과로 거기 있는 장소들은 표현성을 갖게 되었다, 이런 이유로 아브람으로 하여금 그쪽으로 가도록 명령되었다, 그리고 토지가 그의 후손들, 야곱의 아들들에게 주어져서 장소들의 표현성에 일치하여 말씀이 쓰여지도록 유지되어졌다.
위의 모든 사항들은 “고대인들 사이에 있는 교회”, 즉 태고 교회로부터의 아껴두신 것이 뜻해지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이 아껴두신 것이 히위족과 헷족 사이에서 존재했기에, 아브라함, 이삭, 그리고 야곱, 그리고 이들 모두의 본처들은 히위족의 토지에서 그들과 더불어 매장지를 획득한 것이다 (창. 23:1-20; 49:29-32; 50:13); 그리고 요셉 역시 히위족과 더불어 매장되었다 (여. 24:32). 세겜의 아버지 하몰이 태고 교회의 아껴두신 것들을 표현했다, 그러므로 하몰에 의해 고대인들 사이에 있는 교회의 선이 의미되었다, 결과적으로 신성한 지주(stock)로부터 있는 내면의 진리의 근원이 의미되었다.

나의 아들 세겜. 이는 그 선으로부터 파생된 진리를 의미한다. 이는 세겜의 표현함이 내면의 진리이다로부터 알려진다, 고로 거기로부터 파생된 진리, 즉 “하몰”인 선으로부터의 진리이다; 그 이유가 교회의 모든 진리는 그것의 선으로부터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외 다른 근원으로부터 이 진리는 세상 밖으로 출시되지 않는다. 여기서 세겜에 의해 표현된 이 진리가 내면의 진리라고 불리우는데, 이는 본질적 측면에서는 선행의 선밖에 더 아니다. 그 이유가 천적 수준인 태고 교회는 주님을 사랑함 안에 있었기 때문, 그리고 그로부터 모든 진리를 지각함 안에 있었다; 그 이유가 이 교회인들은 거의 천사들과 같았고, 천사들과 교통했고, 이로부터 자기들의 지각이 왔기 때문, 그러므로 그들은 신앙 속의 어떤 진리를 두고 추론하지 않고, 단지 “그렇다”라는 말만 했다; 그 이유가 그들은 이 진리를 천국으로부터 지각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신앙에 관한 것은 언급조차 하지 않았고, 그 대신 선행에 관해서만 말했다, 이런 이유로 여기서 내면의 진리가 선행의 선을 뜻한다고 말한 것이다.
그러나 영적 수준에 속하는 고대 교회의 경우는 주님을 사랑함에 있던 태고 교회와는 달리 이웃을 향한 선행 안에 있었다; 이들은 신앙의 진리를 통하여가 아니면 선행을 달성할 수 없었는데, 그 이유는 태고인들 같이 지각을 가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신앙의 진리가 그러한지를 알기 위하여 탐구하기를 시작했다.

그의 혼이 당신의 딸을 열망하고 있다, 청컨대 그녀를 그에게 여인으로 주시오. 이는 바깥쪽 형체에서는 고대 교회 같이 나타나는 이 새로운 교회와 결합하기를 바램을 의미한다. 이는 “혼이 갈망함”의 의미가 바램이다로부터; 여기서 “딸”로 칭해지는 디나의 표현함이 진리에 애착함이다로부터; 고로 교회이다, 그 이유가 교회는 진리에 애착함으로부터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기서는 “새로운 교회”가 뜻해진다; 그리고 “여인으로 그녀를 줌”의 의미가 결합이다로부터 알려진다.
야곱의 후손들 사이에 설립되는 새로운 교회가 고대 교회 같이 바깥쪽 형체에서 나타났다에 주목해보면 알게 되는 것은,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족과 유태 민족에게 명령된 규례나 재판, 법 등등이 고대 교회에 존재했던 규례나 재판, 법과도 비교해도 새삼 새로운 것은 아니었는데, 특히 약혼이나 결혼, 종, 먹어도 되고 먹지 않아야 하는 동물이라든가, 깨끗하게 함, 축제들, 성막들, 계속 타는 불, 이외 많은 것들에서 전혀 이상한 것이 없었다는 말이다; 게다가 제단들, 태워바침, 제물, 헌주, 등등에 관해서도, 과거 에벨로부터 있었던 두 번째 고대 교회로부터 받아진 것들이었다. 이런 사항들이 모세로부터 명령되기 전 이미 알려져 있었다는 것은 말씀의 역사물에 있는 제단들, 불로 태워바침, 제물들로부터도 분명해진다.
이 중 한 예가 발람에 관련된 역사물인데, 그는 일곱 제단들을 쌓고, 그리고 거세된 어린 숫소와 숫양의 제물을 제단 위에 정렬해놓았다는 기록이다 (민. 23:1, 2, 14, 15, 29). 또는 많은 구절들에서 나라들에 있는 제단들이 파괴되었다는 기록 같은 것에서도; 또한 엘리야가 살해한 바알 예언자들의 제단들이다 든가, 이들이 제물을 바친 것 등등에서 확인된다. 이런 모두로부터 분명해지는 것은, 야곱의 민족에게 명령된 제물들은 새로운 것이 아니다는 것, 그들의 규례, 법, 등등 역시 그렇다는 것이다. 단지 이런 사항들이 민족들 사이에서 우상숭배적이 되어버린 것인데, 특히 그들이 어떤 모독된 하느님을 예배하는 방식을 통하여, 고로 신성한 것들을 표현한 것들이 지옥적인 것들을 표현하게 바뀜으로 우상숭배적이 된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에는 새로운 어떤 것이 추가된 것이 없어 고대 교회의 표현 예배가 회복됨으로 다시 그때의 것이 불러와지도록 된 것이다. (고대 교회에서의 예배는 신성한 사항들을 표현한 식의 예배, 그래서 이 책에서는 표현 교회라는 용어를 만들어 사용하고, 모세를 통해 주어지는 것들에 의한 야곱의 후손들(유태 나라와 이스라엘 나라)에 의한 교회는 교회의 표현물이라 이 책에서 불리우기도 하므로 혼동하지 않기를 바란다 역자주.) 이상으로부터 분명한 바, 이 새로운 교회, 즉 야곱의 후손들 사이에 조직된 교회는 바깥쪽 형체에서는 고대 교회 같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와 인척 관계를 나누자, 너희의 딸을 우리에게 주라, 그리고 우리의 딸을 너희가 데리고 가라. 이는 선들과 진리들의 합일(union)을 의미한다. 이는 “인척 관계를 나눔”의 의미가 합일이다로부터; 그리고 “딸들”의 의미가 애착들, 고로 선들이다로부터. 합일이 진리들과 더불어 있다는 것은 “우리에게 주고, 너희에게 데려가는” 것에 의미되어 있다; 그 이유가 “세겜”에 의해, 그리고 “야곱의 아들들”에 의해 진리들이 의미되는 것은 이미 살폈다. 그러므로 분명해지는 바, 이 말들이 선들과 진리들의 합일이 의미된다는 것이다, 즉 이 새로운 교회는 이 합일을 수단으로 고대 교회 같이 외적 형체에서 뿐만 아니라 내적 형체에서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너희는 우리와 함께 거주하리라. 이는 생활을 의미한다. 이는 “거주함”이 사는 것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고로 “우리와 함께 거주하는” 것은 함께 사는 것, 그리고 하나의 교회를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토지가 너희 앞에 있을 것이다, 너희는 거주하라. 이는 하나인 교회를 의미한다. 이는 토지의 의미가 교회이다로부터; 그리고 “우리와 함께 거주함”의 의미가 함께 사는 것이다로부터; 고로 교회는 하나일 것이다.

그리고 여기저기에서 매매를 통하여 펼쳐라, 그리고 거기서 네 사업을 얻으라. 이는 서로 동의한 일반적인 것으로부터 오는 교리적인 주장들을 의미한다. 이는 “매매(trading)”의 의미가 누군가가 자기를 위해 지식들을 획득하는 것, 또한 그것들을 교통하는 것이다로부터, 그러므로 “토지 여기저기에서 매매를 펼치는” 것은 하몰의 아들 세겜과 그의 도성에 의해 의미되는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들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표시한다; 그리고 “그 안에서 소유를 얻는 것”은 하나를 만드는 것, 고로 함께 동의하는 것; 그 이유는 한 토지에서 함께 사는 이들은 하나를 만들고 동의하고 있기 때문이다. “매매하는”것이 지식들을 획득하는 것, 또한 그것들을 교통하는 것을 의미하는 이유는 천국에서 말씀은 그것의 내적 의미에 따라서만 지각되기 때문, 다시 말해 그곳에는 지상에서 같은 금, 은 등등의 매매물이 없기 때문에 자연물의 매매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 그러므로 우리가 말씀에서 “매매함”을 읽을 때, 이것은 영적 의미에서 매매인 것, 즉 매매에 상응하는 것, 일반적으로 말하면, 지식들을 획득하고 교통하는 것, 특별하게 말하면, 이름되는 목적물에 의해 가리켜지는 지식들이다. 고로 만일 “금”이 명명된다면, 사랑의 선과 지혜로 이해되고; 만일 “은”이 명명되면, 총명과 신앙으로부터 있는 진리로 이해한다; 만일 “양”, “숫양”, “염소 새끼”, “어린 양”이 말해지면, 이것이 고대 시대 때에 거래되었는데, 이런 것들은 이 동물들이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등등이다.
이에 관련해 대표적인 구절로 에스겔서를 읽어보자:
두로에게 말하라, 오 너희는 바다의 입구에 거주하면서, 많은 섬들에게 백성들의 무역상이었다, 다르싯은 온갖 종류의 재물의 풍부함 때문에 네 상인이었다; (즉) 그들은 은, 철, 주석, 납 같은 (물품)을 그들의 장터에 공급했다. 야완과 두발과 메섹은 사람의 혼과 놋그릇을 가지고 네 무역상이 되어 네게 상품을 조달했다. 드단의 아들들은 네 무역상이 되어, 많은 섬들이 그들의 손의 상품이었 다. 시리아는 네 많은 제조품으로 너의 상인이었다. 유다와 이스라엘은 밀, 민닛과 과자, 그리고 꿀, 기름과 유향을 가지고 네 무역상이 되어 네게 상품을 조달했다. 다메섹은 너의 많은 제조품을 가지고 너의 상인이었는데, 그 이유는 헬본 포도주와 쟈갈(Zachar)의 양털을 가짐에서, 풍부한 재물 때문이다. 단과 야완은 네 장터에 실을 공급하였다. 드단은 병거를 탈 때 사용하는 의복을 가지고 네 무역상이었다. 아라비아 사람과 게달의 모든 제 일인 자들은 어린 양, 숫양, 염소 새끼를 가지고 네 손의 상인이었다, 이것들로 그들은 네 상인들이었다. 스바와 라아마의 무역상들은 각종 우수한 향품을 가지고 네 무역상이었다; 그리고 모든 귀중한 돌과 금을 수단으로 그들은 너와 매매했다. 하란과 간네와 에덴과 앗수르와 길맛은 너의 무역상이었다. 이들은 아주 아름다움을 가지고, 즉 푸른 공(ball)들과 자수품을 가지고서 였다; 그리고 끈으로 묶은 귀중한 의복의 보물과 삼나무로 그것들은 네 상품 안에 있었다; 그러므로 너는 바다의 심장에서 빼어나게 명성이 자자했다
(겔. 27장).
이로부터와 다른 많은 구절로부터 나타나는 것은, “매매”, “상업”, “상품”, 그리고 “세공품(ware)”이 선과 진리에 관련되는 것들밖에 더 아니다는 것이다. 두로의 장사한 내역을 열거한 이 예언적 말씀이 그것들에 의해 영적이고 천적인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면 무엇 때문에 지리멸렬할 듯한 느낌마저 들게 하고, 우리와 전혀 관계가 없는 구절들 같이 여기게 하는 이 구절이 왜 귀중한 말씀의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을까? 그러므로 우리는 이런 물품들에는 다른 것들이 의미됨을 눈치채야 할 뿐만 아니라, 열거되는 민족들에 의해서도 다른 사항들이 의미됨을 감지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내적 의미를 알지 않으면 이런 사항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알 도리가 없다; 예를 들면, “다르싯,” “야완,” “두발,” “메섹,” “드단의 아들들,” “아라비아 사람,” “스바,” “라아마,” “하란,” “간네,” “에덴,” “아시라아,” “길맛,” 그리고 또한 그들의 상품들, 즉 “은,” “철,” “주석,” “납,” “놋그릇,” “밀,” “민닛,” “과자,” “꿀,” “기름,” “유향,” “헬본의 포도주,” “쟈갈의 양털,” “실,” “병거용 깔 옷,” “어린 양,” “숫양,” “숫염소,” “향료,” “귀중한 돌,” “금,” “푸른 볼,” “자수품,” “묶는 끈,” “삼나무”에 의해 의미되는 것을 알 수가 없다는 말이다. 이것들과 비슷한 것들이 교회의 선들과 진리들과 주님의 왕국, 또한 이런 선들과 진리들에 관한 지식들을 의미한다. 이런 이유로 두로가 여기서 다루어진 것이고, 두로에 의해 지식들이 의미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세공품들, 즉 선들과 진리들이 주님의 교회와 왕국 안에 있기 때문에, (주님의 교회와 왕국을 의미하는) 가나안의 토지는 태고 때로부터 “세공품”, “상품”으로부터 파생되는 이름을 갖고 있다. 그 이유가 이름 가나안의 의미도 원어에서는 이와 같기 때문이다. 이런 모두로부터, “토지 여기저기에서 매매를 펼치는” 것에 의미하는 바를 알았을 것이다.

그리고 세겜은 그녀의 아버지와 그녀의 형제들에게 말했다. 이는 고대의 신성한 지주(stock)로부터 있는 진리가 광신적인 신앙 속의 선과 진리와 상담함을 의미한다. 이는 “말하다”의 의미가 여기에서는 상담하다 이다로부터; 세겜의 표현함이 고대의 신성한 지주로부터 있는 진리이다로부터; 여기서 야곱에 해당되는 “아버지”의 의미가 진리의 선이다로부터; 그리고 야곱의 아들들인 “그녀의 형제들”의 의미가 진리들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세겜”이 고대의 신성한 지주로부터 있는 진리이다는 것은 앞에 추가로 설명된 사항으로부터 분명해진다; 그 이유가 히위족 하몰은 그의 민족과 가문을 망나하여 모두가 천적 수준이었던 태고 교회가 가나안 토지에 남도록 아껴진 것이기 때문이다. 온 세상 모든 교회들을 통털어도 이 교회만큼 신성으로부터 있었던 교회는 없었다; 그 이유가 이 교회는 주님을 사랑함으로부터의 선 안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의 자발적 측면과 지성 측면은 하나를 만들었다, 고로 하나의 마음이었다, 이런 이유로 그들은 선으로부터 진리를 지각하였다; 그 이유는 주님께서 그들의 의지의 선 안으로 내적 경로를 수단으로 흘러드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를 통하여 그들의 이해력의 선, 또는 그들의 진리 안으로 흘러드셨다; 그래서 이 교회는 특출하게 “사람(Man)”이라 불리웠다, 그리고 또한 “하느님의 모습(likeness)”이라고도 불리웠다. 그러므로 왜 하몰과 세겜이 고대의 신성한 지주로부터 이다고 말해지는 지가 분명해졌을 것이다. “사람”, 또는 히브리어로 “아담”이라 불리웠던 태고 교회가 가나안의 토지에 있었다는 것은 “느빌림”이라 불리운 그들의 후손으로부터 분명해진다; 이들이 가나안의 토지에 있어 왔다고 민. 13:33에서도 말해진다. 그러나 그때 당시 가나안의 토지로 불리운 것은 이집트의 강으로부터 유브라데강에 거쳐 있는 지역을 아우르고 있다 (창. 15:18).

나로 너희의 눈에서 은혜를 발견하게 하라, 그리고 너희가 나에게 말하는 것을 나는 너희에게 주리라. 이는 자기가 가진 마음과 같은 마음을 저쪽도 가지고 있다면을 의미한다. 이는 “누군가의 눈에서 은총을 발견하는”것의 의미가 기울음을 함축하는 말투임으로부터, 여기서는 이쪽으로 기우는 것, 즉 그들이 자기에게 무엇을 말하든 줄 것이다는 것이다. 이 말에 의해 만일 그들의 쪽에 같은 마음을 지닌다면 그의 쪽에서 그것에 마음을 두고 있다는 것이 의미되는데, 이는 내적 의미의 시리즈에서 분명해진다. 그 이유가 내적 의미에서 “그들이 말하는 것을 주는”것은 진리와 선 측면에서 그들과 하나를 만드는 것을 표시하기 때문이다.

나에게 혼인지참금과 예물을 몇 곱절로 요구해도 나는 너희가 말한대로 주리라. 이는 그는 그들과 함께 있는 것들을 수락할 것이고, 그것들을 그의 자신으로 만들 것임을 의미한다. 즉 그는 그들에게 속해 있는 교회의 외적인 것들을 받아들일 것, 그리고 외적인 것들을 자기에게 속해 있는 내적인 것들과 함께 해서 그의 자신으로 만든다는 것, 고로 그들은 함께 하나의 교회를 구성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너희가 말하는 것을 준다”의 의미가 진리와 선 측면에 관하여서 그들과 하나를 만드는 것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들에게 몇 곱절로 말하라고 그가 말한 혼인 지참금과 선물 자체는 하나 안으로 일치함을 의미한다; 그 이유가 약혼되어지는 처녀에게 주어지는 혼인지참금은 상호 동의 함의 표시였기 때문이다. 그가 그들에게 자기에게 혼인 지참금과 선물을 몇 곱절로 하라고 말한 (이때 당시 은 오십 조각이었는데 이를 훨씬 넘게 요구하라고 한 것) 이유는 그가 광신적 신앙을 받아들이기 이전, 그녀와 누웠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를 야곱이 동의할지 또는 거절할지는 고대인들에게 알려진 법에 따라서이고, 이것이 출. 22장 16절에 서술되어 있다; 특별한 것은, “세겜”인 내면의 진리가 “디나”인 외면의 진리에 애착함과 결합하기를 바램이 있었기 때문이다. 혼인 지참금이 동의함의 표시, 고로 시작함을 확인함이었기 때문에 은을 지불하는 것, 또는 은을 주는 것은 어떤 것이 자신의 것이다에 대한 표시였다; 고로 처녀가 그의 것이다를 표시한다; 그리고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은 상호적인 것이다. 고로 신랑은 신부의 것이 되고, 신부는 신랑의 것이 된다는 말이다.

그리고 나에게 이 처녀를 여인으로 주라. 이는 결합이 조건임을 의미한다. 이는 “여인으로 주다”의 의미가 결합이다로부터, 여기서는 조건이 되어 있는데, 그 이유는 서로의 흥정이 성사된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13-17절. 그리고 야곱의 아들들은 세겜과 그의 아버지 하몰에게 속여 답하였다, 그리고 말했다, 그 이유는 그가 그의 누이 디나를 더럽혔기 때문이다. 14 그리고 그들은 그들에게 말했다, 우리가 포피를 가진 남자에게 우리의 누이를 준다는 말은 할 수가 없다, 그 이유는 그것은 우리에게 치욕이기 때문이다. 15 그렇지만 우리가 당신에게 동의할 수 있는 조건은 당신들이 우리 같이 당신을 위해 모든 남자가 할례를 받는 것이오. 16 우리는 당신에게 우리의 딸을 줄 것이고, 당신들의 딸을 우리에게 데려올 것이오. 그리고 우리는 당신과 함께 살 것이고 우리는 한 백성이 될 것이오. 17 그리고 만일 당신이 할례받으라는 우리의 말에 귀기울이지 않는다면, 우리는 우리의 딸을 데리고 갈 것이오.

그리고 야곱의 아들들이 세겜과 그의 아버지 하몰에게 속여 답했다. 이는 고대인들 사이에 있는 교회의 진리와 선들에 관한 악한 의견과 의도를 의미한다. 이는 세겜의 표현함이 고대인들 사이에 있는 진리들, 또는 고대의 신성한 지주로부터 있는 진리이다로부터; 하몰의 표현함이 이 진리가 와진 선이다로부터; 그리고 “속이다”의 의미가 악한 의견과 의도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 이유가 “사기침, 속임”의 의미가 일반적 의미에서일 경우, 또 다른 자를 향한 악을 함축하는 것, 그리고 자기가 말하고 행동하는 것을 향하여 악을 함축하기 때문, 그 이유는 사기치는 자는 타인을 향해 반대되는 것을 생각하고 의도하기 때문이다. 그 한 예가 이 장에 기술되어 있다. 그러므로 “야곱의 아들들이 세겜과 그의 아버지 하몰에게 속여서 대답했다”에 의해 고대인들 사이에 있는 교회의 선과 진리에 관한 악한 의견과 의도가 의미됨이 분명해진다.
야곱의 아들들, 또는 후손들은 내적 인간의 진리와 선에 관하여 악한 의견과 의도밖에 없었는데, 그 이유는 그들이 내적인 것 없이 외적인 것들 안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한 그들은 내적인 것들을 쓸모 없게도 만들었다, 고로 내적인 것들을 지독하게 경멸했다. 이것은 오늘날의 그들의 민족들과도 여전하고, 그들은 여전히 외적인 것들 만에 있다. 외적인 것들 만에 있는 이들은 내적인 것 안에 있는 것이 무엇이 있는지 조차 모른다; 그 이유는 그들이 내적인 것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이다. 만일 누군가가 그들 앞에서 내적인 것을 언급한다면, 그들은 그렇다고 자기들의 교리로부터 긍정은 한다 (그럼에도 이 긍정함 역시 사기적으로 만들어진다), 그렇지 않을 경우, 그들은 심정과 입술 모두에서 부정해 버리는데, 그 이유는 그들은 외적 인간의 감각적인 것을 넘어서지 않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그들은 사후 어떤 삶이 있다는 것을 믿지 않는다; 또한 자기들의 육체와 더불어 일어나지 않으면 어떤 부활도 가능하지 않다고 믿는다; 그들에게는 부활에 관해 이런 의견을 갖는 것이 허용되었는데, 그 이유는 그외 다른 방도가 없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그들은 모든 생명을 육체 안에 놓아두는데, 육체의 생명은 사후 살게 되는 영의 생명으로부터 이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외적인 것들 만에 있는 이들은 다른 믿음을 가질 수 없다; 그 이유는 그들과 더불어 외적인 것들이 내적인 것들에 관한 모든 생각을 소멸하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그들에게 있는 모든 신앙을 소멸하기 때문이다.
오늘날 이런 종류의 무지함이 최고의 영향력을 떨치기에 내적인 것들과 동떨어져 외적인 것들에 있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한번 더 서술해 짚어보고 가야 할 것 같다. 양심이 결여된 모든 이들이 외적인 것들 만에 있는다; 그 이유는 내적 인간은 양심을 수단으로 자체를 명백히 하기 때문이다; 양심을 가지지 않은 이들이 선하고 참된 것을 생각하고 행할 경우, 이는 그것 자체를 위하여서가 아니라 자신의 이득과 명예가 걸려 있기 때문에서이다. 또는 법에 대한 두려움과 자기의 목숨을 위한 두려움 같은 것 때문인 바. 만일 이런 것의 제한마저 없다면, 그들은 갖가지 사악함을 위해 직진하고 만다. 다른 삶에서 이것은 육체의 삶에서 이런 특성 속에 있어 왔던 이들로부터 분명해진다, 그 이유가 거기서 내면이 열려 있기 때문인데, 하여 그들은 타인을 파괴하려 끝없이 노력하고 있어, 그들은 영적인 방식에서 묶여 있다.
우리가 더 알아야 하는 것 또 하나는, 외적인 것들 안에 있는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내적인 것들 안에 무엇이 있는지, 그리고 외적인 것들 만에 있는 이들은 내적인 것들이 무엇인지를 생각조차 품을 수 없다, 그러므로 그것에 의해 감동되는 일도 없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예를 들어 생각해보자. 천국에서 가장 작은 이가 가장 큰 자이다는 것, 겸비해 있는 것이 높임을 받는다는 것이다; 또한 가난하고 궁핍해 있는 것이 부자이고 풍부함 안에 있는 것이다. 외적인 것들 만에 있는 이들은 이런 사항들을 납득할 수 없다, 그 이유가 그들이 생각하건대, 지극히 작은 자가 큰 자가 되는 것, 겸비한 자가 높혀지는 것, 가난한 자가 부자인 것, 궁핍한 자가 풍부해지는 것을 납득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실상 천국에서는 매우 정밀하게 이 주제가 적용되지만 그들은 이를 납득하지 못한다. 그들이 납득할 수 없기에 그들은 그것들로 해서 감명받는 일도 없고, 따라서 육체적, 세상적인 것들 안에서 안주하고, 그것들로 감명되고, 그들은 내적인 것들에 반대되는 것만을 느낄 뿐이다. 그들은 위와 같은 것이 천국 안에 존재하는 것을 모른다, 그들이 외적인 것들 만에 있는 한, 그들은 그것들을 알려하지 않는다, 정녕 그들은 그것들을 알 수가 없다. 그럼에도 천국에서 알고, 인정하고, 심정으로, 애착으로부터 믿는 것은 이렇다; 즉 자기는 자신으로부터 능력을 가진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 오직 자기가 지니는 능력은 주님으로부터 이다는 것, 하여 자기는 지극히 작은 자이다고 말한다, 그럼에도 큰 자이다, 그 이유는 그가 주님으로부터 능력을 가지기 때문이다. 이 경우는 겸손 안에 있는 이들과도 똑같아서 그는 높임 안에 있다; 그 이유가 자기는 자신으로부터 능력을 가진 것이 없다는 것을, 자신으로 총명과 지혜도 없다는 것을, 자신으로부터 선과 진리가 없다는 것을 알고, 인정하고, 애착으로부터 믿는 겸손한 자는 주님에 의해 능력을, 진리의 총명을, 선의 지혜를 걸출하게 수여받고 있다.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가 부유하고 풍부함에 있는 경우도 위와 마찬가지이다; 그 이유가 자기는 자신으로부터 소유한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음을, 자신으로부터 슬기로워진 것이 없음을 심정으로부터 애착으로부터 믿는 자가 가난하고 궁핍하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천국에서 이와 같은 인간은 부자이고 풍부해 있다, 그 이유는 주님이 그에게 모든 재산을 주시기 때문, 주신 만큼에서 그는 타인들보다 더 슬기롭고 부자이다, 그리고 가장 화려한 궁전에서 거주한다, 그리고 천국의 모든 재물의 창고 안에 거주한다.
이런 예를 더 생각해보자: 즉 외적인 것들 만에 있는 자는 천국의 기쁨이 자신보다 이웃을 더 사랑함에 있다는 것, 무엇보다 주님을 더 사랑하는 것, 행복은 이 사랑의 질과 양에 따라 있는다는 것을 납득하는 것이 가능하지 않다는 것에 대하여서 이다; 그 이유가 외적인 것 만에 있는 이들은 자기 이웃보다 자신을 더 사랑하기 때문; 만일 그가 타인을 사랑한다면, 이는 그들이 자기를 좋아하기 때문에서이다, 하여 그는 자신을 위하여 그들을 사랑한다, 고로 그들 안에 있는 자신을 사랑하는 것, 그리고 자신 안에 있는 그들을 사랑하는 것이다. 이런 특성 속에 있는 자는 자신보다 타인을 더 사랑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다, 그리고 실로 그는 그것을 알려고 뜻하기나 하는지 미지수이다. 그러므로 천국이 이런 사랑 안에 존재한다고 그에게 말해질 때, 그는 그것에 혐오감을 느낀다. 그러므로 육체의 삶에서 이런 특성 속에 살아왔던 이들은 어떤 천국의 사회에도 접근할 수 없다; 그 이유는 그들의 혐오감에서 그들은 지옥으로 머리를 곤두박질하기 때문이다.
외적인 것들 안에 있는 것이 무엇인지, 내적인 것들 안에 무엇이 있는지를 아는 자가 너무나 적기에,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믿는 것은, 내적인 것들 안에 있는 자는 외적인 것들 안에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하여 거꾸로의 것을 들추어 나는 예증을 해볼 것이다. 신체의 자양분과 혼의 자양분을 들추어 보자: 단지 육체적 기쁨만에 있는 자는 자신을 중요시한다, 하여 자기 위장에 탐닉한다, 사치스럽게 사는 것을 사랑한다, 그리고 수준 높은 기쁨을 만드는 것이 먹는 것, 마시는 것에 있다. 내적인 것들 안에 있는 자 역시 이런 것들 안에서 기쁨을 발견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를 통치하는 애착은 육체의 건강에 필요한 식품으로 그의 신체에 자양분을 주는 것뿐이다, 그 목적은 건강한 신체 안에 건강한 마음을 가지도록 하는데 있다, 이것을 위해 신체가 수단으로 섬김을 할 뿐이다. 영적 인간인 자는 이 정도에서 멈추지 않는다. 그의 마음, 또는 혼의 건강은 총명과 지혜를 획득하는 수단으로 중요시한다. 즉 이런 획득함은 지상의 명성, 영예, 이익을 위한 것이 아니고 사후 삶을 위하여서 이다. 이보다 더 깊은 내면의 수준에 있는 영적인 자는 총명과 지혜를 주님의 왕국에서 쓸모 있는 멤버로서 섬김을 다할 수 있는 목적을 위해 중간의 목적으로밖에 중요시할 뿐이다; 하여 천적 수준의 인간은 주님을 섬길는지 모른다. 이런 사람에게 육체의 식품은 영적 식품을 즐기기 위한 수단이다, 그리고 영적 식품은 천적 식품을 즐기기 위한 수단이다; 그리고 그것들이 이런 방식에서 섬길 때, 이런 식품들 역시 상응하고 있다, 그러므로 모두가 식품들이라 불리운다. 그러므로 외적인 것 만에 있는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내적인 것 안에 무엇이 있는지에 대해서 분명해졌을 것이다. 유태 민족과 이스라엘 민족이 이 장에서 내적 역사적 의미에서 취급되어 있다. 그들은 유아기에 죽은 아이들을 제외하고 대부분이 위에서 가리킨 특성 속에 있다, 그 이유는 그들은 여타 다른 이들보다 탐욕 안에 있어 그들은 외적인 것 안에 있다. 금과 은 자체를 위하여서만 이익을 창출하기를 사랑하는 이들은 금과 은을 소유함 안에 자기들의 생명의 기쁨이 존재한다, 이것들은 가장 바깥, 또는 가장 낮은 쪽에 있다, 그 이유가 그들의 사랑의 대상이 단지 지상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어떤 유용함을 위해 금과 은을 사랑하는 이들은 자신을 그 선용함에 따라 지상적인 것 넘어로 들어올린다. 인간이 사랑하는 유용함 자체가 그의 생명을 결정하고, 그를 타인과 구별되게 한다; 악용함은 인간을 지옥적으로 만든다, 그리고 선용함은 그를 천국적으로 만든다. 즉 유용함 자체가 아니라 유용함을 사랑함이 그를 천국인으로 만든다. 모든 이의 생명은 그의 사랑 속에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말했다, 그 이유는 그가 그의 누이 디나를 더럽혔기 때문이다. 이는 결합의 시작은 접근을 수단으로 하지 않고서는 이와 달리 있을 수 없었음을 의미한다. 이는 “그가 그녀를 데려다가 그녀와 눕고, 그녀를 강탈했다”는 말의 설명으로부터 알는지 모른다; 이 말에 의해 이 진리가 그녀의 형제 야곱의 아들들에 의해 의미된 진리에 애착함과 결합될 수 있는 다른 방법은 이와 달리 없었다가 의미된다. 그가 그녀를 “더럽혔다”가 여기서 위에서 인용한 구절과 같은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

그리고 그들이 그들에게 말했다, 우리는 …라는 말은 할 수 없다. 이는 그들이 승인하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우리의 누이를 포피를 가진 남자에게 주는 것. 이는 그들이 교회 속의 선과 진리가 표현물에 존재하게 만들지 않으면, 이들이 의미하는 것들로부터 물러나야 할 것임을 의미한다. 이는 “포피”의 의미가 외적 표현물이다로부터, 즉 그들이 교회 속에 있다는 표시이다; 그러므로 교회 속에 있는 자와 그렇지 않은 자를 구분할 때, 할례와 포피가 늘 말해지곤 했다. 그 이유가 “할례”는 더러운 사랑, 즉 자기를 사랑함과 세상을 사랑함으로부터 후퇴함을, 그리고 주님을 사랑함과 이웃을 향한 사랑함에 접근함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본문에 의해서는 그들의 광신적 신앙에 접근함이 의미되고, 결과적으로 그들 같이 그들도 내적인 것들로부터 물러남으로 해서 교회의 선과 진리를 표현물 안에 있게 만들어야 한다는 것, 이와 달리해서는 자기들 같이 있지 못한다는 것이 의미되는데, 이 말에 따라서, 즉 “이 안에서 우리는 당신에게 동의할 것이오, 만일 당신이 우리 같이 있다면”에 따라서 이다.
할례의 특별한 의미가 무엇인지를 아는 자가 거의 없기에 이에 대하여도 조금 더 짚어두고 가야할 것 같다. 양쪽 성(sex)에 있는 생식기는 선과 진리의 결합에 속하는 것들을 의미한다; 이것들은 결합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실제로 그것들에 상응하고 있다. 인간의 기관이나 부위들 모두는 천국에 있는 영적인 것들과 상응 관계를 가진다고 각 장의 끝에서 살폈었다. 결과적으로 기관과 부위들은 세대에 할당되고 있다. 이것들은 선과 진리의 결혼에 상응한다; 그리고 이 결혼으로부터 부부의 사랑으로 내려간다. 포피가 생식기를 덮고 있기에, 태고 교회에서 이것은 선과 진리에 관하여 불명료함에 상응했으나, 고대 교회에서는 자기들의 더러움에 상응하고 있다. 그 이유가 태고 교회인과 더불어 그들은 내적 인간이었던 관계로 선과 진리가 불명료해 있을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더럽혀져 있지는 않았다; 이에 반해, 고대 교회인과 더불어, 이들은 비교적으로 외적 인간이었기에, 선과 진리가 더럽혀질 수 있었다, 그 이유는 더럽혀지는 것은 외적인 것들, 즉 외적인 사랑들이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태고 교회인들은 할례에 관해 아는 바가 없었고, 오직 고대 교회인 만이 이를 알았다
이 교회로부터 할례가 많은 민족들에게로 퍼뜨려졌다; 그리고 이것은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에게 새로운 어떤 것으로서 명령된 것이 아니었고, 단지 회복되어지기로 되어 있는 불연속적인 의식일 뿐이었다.; 그리고 이것은 그의 후손들이 교회 속에 있다는 표시가 되어진 것뿐이다. 그러나 이 민족은 이 의식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몰랐고 알려고도 하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그들의 광신적 신앙은 표현물 자체, 외적 주제들에만 존재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비록 할례가 자기와 세상 사랑으로부터 순수해짐을 표현하는 표시일지라도, 그들은 하나의 일반적 정죄함 안에 모든 비할례를 포함시켰다. 자기와 세상 사랑으로부터 순수해지는 이들이야말로 영적으로 할례받은 자이다, 이런 자를 “심정에서 할례받은” 자라고 말해진다. 모세의 책에서:
여호와 너희 하느님이 너희 심정, 그리고 네 씨의 심정을 할례받게 할 것이니, 네 모든 심정으로, 그리고 모든 네 혼으로 여호와 네 하느님을 사랑하라 (신. 30:6).
같은 책에서:
너희는 너희 심정의 포피를 할례받을 것이다, 그리고 너의 목은 더 이상 굳어져 있지 않을 것이다 (신. 10:16).
예레미야서에서:
너의 놀리는 지면을 갈아엎어라, 그리고 너의 심정의 포피를 제거하라 (예. 4:3, 4).
그러나 자기를 사랑함과 세상을 사랑함에 있는 이들은 그들이 할례받았음에도 “비할례자”라고 불리운다; 예레미야서에서:
보라 내가 이집트에, 유다에, 에돔에, 암몬의 아들들에, 모압에, 광야에 거주하는 (머리털의) 귀퉁이를 자른 모두에서 포피를 할례받은 이를 방문하는 날이 오고 있다; 그 이유가 모든 민족들이 비할례되었기 때문, 그리고 이스라엘의 모든 가문은 심정에서 비할례되었기 때문이다
(예. 9:25, 26);
이 구절은 많은 다른 민족들이 할례받아졌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 이유는 “나는 포피에서 할례된 모든 이를 방문할 것이다”라고 말해지기 때문이다. 그런고로 이미 서술했듯 할례는 새로운 의식이 아니었다는 것, 또는 타 민족과의 구별의 표시로 야곱의 후손에게만 지정한 의식은 아니었다. 불레셋인들은 할례되지 않았는 바, 그들은 “할례받지 않은 자”라고 통상적으로 말해지고 있다.

그 이유가 이것은 우리에게 치욕이기 때문이다. 이는 이것이 그들에게 반대적 일 것임을 의미한다. 이는 “치욕”의 의미가 그들의 광신적 신앙에 반대됨, 고로 그들에 반대됨이다로부터 알려진다.

그렇지만 우리가 당신에게 동의할 수 있는 것은, 만일 당신들이 우리 같이 있는다면. 이는 그들의 광신적 신앙에 접근함을 의미한다. 이는 “동의함”의 의미가 접근함이다로부터; 그리고 “그들 같이 있는다”의 의미가 그들이 외적인 것만에 있고 내적인 것 안에 있지 않는 것, 이래야 그들 같이 있기 때문이다. 이쯤에서 우리가 한 번 짚고가야 하는 대목은 왜 우리가 내적인 것들 안에 있어야 하는지에 대한 것이다. 곰곰이 되새겨 생각하는 사람이다면 알 수 있는 것은 내적인 것을 수단으로 인간은 천국과 교통하기 때문이다는 것이다, 그 이유가 천국들 전체가 내적인 것들 안에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인간이 그의 생각과 애착, 즉 그의 이해력과 의지력의 측면이 천국 안에 있지 않으면 그는 사후 천국에 갈 수 없다, 그 이유는 그는 천국과 교통함을 가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교통함은 육체적 삶 동안 그의 이해력에 속하는 진리들과 그의 의지력에 속하는 선들을 수단으로 인간에 의해 획득되어진다, 그리고 그가 이 교통함을 획득하지 않으면, 그 후에는 그는 그것을 획득할 수 없다, 그 이유는 사후 그의 마음은 그가 육체의 삶에서 열리어오지 않았으면 내면의 것들을 향하여 열리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
각 인간은 자기의 애착들의 생명에 일치하는 어떤 영적 영역(sphere)으로 에워싸여 있는 줄을 알아채지 못한다. 천사들에게 이 영역은 땅 위 가장 기분을 상큼하게 하는 느낌을 알아채는 냄새의 영역보다 더 지각할 수 있다. 만일 인간의 생명이 단지 외적인 것들에서만 지나쳐가버리고 말았다면, 즉 자기 이웃을 향한 미워함으로부터 오는 쾌락 안에서, 결과적으로 앙갚음이나 잔인함으로부터, 간음질로부터, 자아 드높임과 타인을 경멸함으로부터, 은밀한 도둑질로부터, 탐욕으로부터, 사기침으로부터, 사치행각으로부터, 이외 다른 악들로부터 이었다면, 그때 그를 에워싸고 있었던 영적 영역은 이 세상에서 시체나 분뇨, 쓰레기 등등으로부터 있는 냄새의 영역 만큼 더럽다. 이런 삶을 살았던 이들은 사후 자기와 더불어 이 더러운 영역을 운반한다, 그리고 이것에 상당하는 영역에 반드시 필요한 것은 지옥 안에서 이 특성에 걸맞는 장소이다.
그러나 내적인 것들 안에 있는 이들, 즉 자비심과 이웃을 향한 선행에서 기쁨을 느꼈던 이들, 무엇보다 주님을 사랑함에서 복됨을 느꼈던 이들은 천국 영역 자체인 깊이 감사하고 유쾌한 영역으로 에워싸여 있다, 그러므로 그들은 천국 안에 있다. 다른 삶에서 지각되는 모든 영역들은 인간이 있어 왔던 사랑들과 이에서 파생되는 애착들로부터, 결과적으로 그들의 생명으로부터 근원한다. 그 이유가 사랑과 사랑에서 파생하는 애착들이 생명 자체를 만들기 때문이다; 의문에 있는 영역들도 사랑들과 파생되는 애착들로부터 근원하기에 그것들은 인간 당사자가 뜻하고 행동하는 의도와 목적으로부터 근원한다; 그 이유가 인간은 자기가 사랑하는 것을 목적으로 가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목적들은 그의 생명을 결정하고, 생명의 품질을 구성한다; 그리고 이것은 그의 영역의 주요한 근원이다. 이 영역은 천국에서 최고로 절묘하게 지각되어진다, 그 이유는 보편적인 천국은 목적들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는 내적인 것들 안에 있는 인간의 품질이 어떤 것인지를 볼 수 있다, 또한 외적인 것들 안에 있는 것도 알 수 있다, 또한 외적인 것들 만에 있지 않고 내적인 것들 안에 있을 필요가 있는 이유도 알았을 것이다.
그러나 위의 사항들은 외적인 것들 만에 있는 이들에게는 완전한 무관심의 무제들일 뿐이다. 이는 제 아무리 시민 생활을 처리함에 뛰어나게 명석하다 해도, 아는 것이 남다르게 뛰어나 학식계에서 명성이 자자하다 해도, 당사자가 외적 것들만에 집착한다면 그는 자신이 보고 듣고 만져지지 않는 이상, 어떤 것도 믿지 않는다, 결과적으로 천국이든 지옥이든 믿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리고 만일 그에게 사후 즉시 다른 삶으로 들어간다고 말하고, 그때 당신은 보고, 듣고, 말하고, 만지는 감각을 육체를 지녔던 때보다 더 완전하게 할 수 있다고 말하면, 그는 이 말을 역설이나 공상으로 여겨 단 번에 거절할 것이다; 그리고 사후 살게 되는 혼 또는 영이 인간 자신이고, 그가 세상에서 운반한 신체가 아니다 라고 말해주어도 돌아오는 응답은 같을 것이다.
하여 뒤어지는 것은, 외적인 것들 만에 있는 이들은 내적인 것들에 관하여 말해진 것에 아무 관심도 기울이지 않는다는 것, 설사 내적인 것들이 그들이 장차 맞을 왕국에서, 그가 영원히 살게 되는 왕국에서 당신을 복되고 행복하게 만든다 라고 말해주어도 반응은 마찬가지이다. 많은 기독인들이 이런 불신앙 안에 있다; 이것을 기독교계로부터 다른 삶으로 오는 이들과 이야기 해보고 알도록 허락받았다; 그 이유가 다른 삶에서 그들은 자기들이 생각했던 것을 감출 수 없기 때문, 자기 생각이 자기임을 공개적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기들이 목적으로 가졌던 것을, 즉 그들이 사랑해왔던 것을 감출 수 없는데, 그 이유는 이것이 그들의 영역을 수단으로 자동으로 명백해 있기 때문이다.

당신을 위해 모든 남자가 할례받는 것. 이는 외적인 표현물만을, 그리고 그렇게 해서 그들(세겜쪽인 고대의 것)이 그들(야곱의 아들들)에게 순수하게 있을 것임을 의미한다. 이는 “모든 남성을 할례받게 하는” 것의 의미가 외적인 표현물, 즉 그들이 교회 속에 있다는 표시, 여기서는 그들이 야곱의 아들들의 광신적 신앙 속에 있다는 표시이다로부터(4462항) 알게 된다. 그렇게 해서 그들은 야곱의 아들들의 눈에서 순수하게 있을 것임이 이어지는데, 그 이유는 야곱의 후손이 내적인 것들에서가 아닌 외적인 것들에 존재하는 순수성과 거룩함을 만들었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의 딸을 당신에게 줄 것이고, 우리는 당신의 딸을 데려올 것이오. 이는 이런 방법으로 결합함을 의미한다. 이는 앞에서 말해진 결혼에 관한 사항으로부터 분명해진다; 즉 영적 의미에서의 결혼은 선과 진리의 결합이다는 것이다; 그 이유가 “우리의 딸을 당신에게 주고, 당신의 딸을 데려오는 것”은 상호 결혼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는 당신과 함께 거주할 것이오. 이는 생활에 관련하여 결합함을 의미한다. 이는 “당신과 함께 거주함”의 의미가 함께 사는 것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리고 우리는 한 백성이 될 것이다. 이는 교리에 관련하여서도 결합함을 의미한다. 이는 “백성”의 의미가 교회의 진리이다로부터, 결과적으로 교리이다에서 알게 된다. 고로 “하나의 백성으로 있는 것”은 교리를 수단으로 결합함을 표시한다. 교인과 결합되는 것은 두 가지가 있는데, 그것은 생활과 교리이다. 생활이 교인들을 결합해놓을 때, 교리는 그들을 분리하지 않는다; 그러나 교리만이 그들을 결합하게 하고 있다면, 오늘날의 교회의 경우 같이 그들은 서로로부터 분리하고, 교리들이 있는 만큼에서 교회들도 있는다; 이는 비록 교리가 삶을 위하여 있었다할지라도, 삶이 교리로부터 있었다고 할지라도 그렇다는 말이다. 만일 교리만이 교인들을 결합하게 하고 있다면 교인은 서로로부터 분리하고 마는 이유는 이 교리로부터의 교인은 다른 교리로부터의 교인을 정죄하고, 심지어 지옥으로 가라고 비난하기조차 한다는 때문으로부터 분명해진다. (이 교회가 저 교회를 두고 이단이라 말하고 그 교인은 지옥간다 라고 말하는 경우일지 모른다. 천국가느냐 지옥가느냐는 하느님만의 절대적 판단일 뿐이다. 역자주) 그러나 만일 생활이 그들을 결합되게 하고 있다면 교리가 교인을 분리시키지 않는 이유는 생활의 선 안에 있는 인간은 다른 견해 속에 있는 인간을 비난하지 않고, 상대의 교리를 두고 그것은 그의 신앙과 양심의 주제로 남아있게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은 교회 바깥쪽에 있는 이들에게조차 마찬가지이다; 그 이유가 무지함은 순진과 서로의 사랑 안에서 사는 이들을 비난할 수 없고, 마치 그가 죽을 때 무지 안에 있는 이들은 어린이가 죽는 경우와 비슷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만일 당신이 할례받으라는 우리에게 귀기울이지 않으면. 이는 그들이 그들의 진리들로부터 물러나서 외적 표현물을 계승하지 않으면을 의미한다. 이는 이와 비슷한 것을 앞에서 살핀 바로부터 분명해진다. 이 구절에서 야곱의 아들들에 의해 말해진 것은 하몰과 세겜의 마음에 있는 것과 반대되는 의미를 덮고 있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내적 의미에서도 반대되는 것을 안고 있다. 그 이유는 13절에서 그들이 속임수로 말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말하면서 생각은 다른 것을 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딸을 데리고 가야 하리다. 이는 거기에 결합이 있지 않을 것임을 의미한다. 이는 결혼의 의미가 선과 진리의 결합이다로부터 분명해진다. 그러므로 “딸을 데리고 감”은 결혼으로 그녀를 주는 것이 아니다는 것, 고로 결합이 있지 않을 것이다. 여기서 야곱의 아들들은 자기들이 마치 야곱이나 된 듯하여 말하고 있다. 그 이유가 그들은 “우리는 우리의 누이를 데려간다”고 말해야 마땅한데, “우리의 딸”이라 말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이유는 내적 의미로부터 나타난다, 즉 출. 22:15, 16의 법에 따라 결혼을 거절하고 승낙하는 것은 아버지의 몫이다. 그러나 여기서 취급되는 내용이 야곱의 후손과 그들의 광신적 신앙이기에, 이를 표현하는 아들들이 아버지 대신 대답을 하고 있는 것이다. 야곱 자신은 대답할 수 없었는데, 그 이유는 여기서 그는 고대 교회를 표현하기 때문이다.

18-24절. 그리고 그들의 말들이 하몰의 눈에, 그리고 하몰의 아들 세겜의 눈에 좋게 보였다. 19 그리고 이 젊은이는 이 말을 행하는데 지체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그가 야곱의 딸에 흠뻑 만족해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그의 아버지의 모든 가문에서 가장 귀한 존재였다. 20 그리고 하몰과 그의 아들 세겜은 그들의 성문에로 와서, 그 성의 남자들에게 이야기를 했다, 말하기를 21 이 사람들은 우리들과 평화롭다, 그리고 그들을 이 토지에서 살게 하자, 그리고 매매를 펼치게 하자, 그리고 보라 이 토지는 그들 앞에 공간이 넓다. 우리가 그들의 딸을 여인으로 데려오고, 우리가 우리의 딸을 그들에게 주자. 22 그럼에도 사람들이 우리와 함께 거주하고, 한 백성이 되는데 동의해야 하는 것은, 모든 남자가 그들이 할례된 것 같이 할례받아야 하는 것이다. 23 그러면 그들의 획득물, 그들이 사들인 것, 그들의 짐승이 우리의 것도 되는 것이 아니더냐? 오로지 우리는 그들에게 동의 만 하면 된다, 그리고 그들은 우리와 함께 살 것이다. 24 그리고 성문의 안에서 밖으로 나간 모든 이들이 하몰과 그의 아들 세겜의 말에 귀기울였다. 그리고 그들은 성문을 출입하는 모든 남자에게 할례를 베풀었다.

그리고 그들의 말들이 하몰의 눈에 좋게 보였다. 이는 생활에 관련해 짐짓 겸손해 함을 의미한다. 이는 “그 말들이 좋게 보였다”의 의미가 짐짓 자신을 낮춤이다로부터; 그리고 하몰의 표현함이 고대인들 사이에 있는 교회의 선이나, 여기서는 생활이다로부터; 그 이유가 생활은 선으로부터 있고, 교리는 진리로부터 있기 때문인데, 교리는 이 뒤를 잇는 세겜에 의해 표현된다. 여기서 하몰에 의해 선이 아닌 생활이 표현되는 이유는 그가 야곱의 아들들의 외적인 것들에 짐짓 겸손히 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몰의 아들 세겜의 눈에서도. 이는 교리에 관련해서 짐짓 겸손해 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세겜의 표현함이 고대인들 사이에 있는 교회의 진리이다로부터; 이 진리는 “하몰”인 선으로부터 있다. 그러나 여기서 “세겜”은 교리를 표현하는데 방금 위에서 살폈다.

그리고 이 젊은이는 이 말을 행하는데 지체하지 않았다. 이는 받아들이기를 열망함을 의미한다. 이는 “말해진 것을 행함에 지체하지 않았다”의 의미가 그 말에 짐짓 겸손히 굴기를 열망함이다, 고로 그 말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 이유는 그는 야곱의 딸에 흠뻑 만족해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는 이 교회의 광신적 신앙에 관하여를 의미한다. 이는 “야곱의 딸”인 디나의 표현함이 고대 교회의 진리에 애착함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 이유가 이 교회가 야곱에 의해 여기서 표현되기 때문이다. 거기에 이 교회의 진리에 애착함과 결합되려 하는 열망이 있었다, 그러나 이 교회는 야곱의 후손들 사이에 있었는 바, 이 교회는 오로지 외적일 뿐인데, 하몰과 세겜은 이 외적인 것들을 받아들이기로 동의했다. 고로 “야곱의 딸”에 의해 이 교회의 광신적 신앙이 의미된다.

그리고 그는 그의 아버지의 모든 가문에서 귀한 존재였다. 이는 고대인들 사이에 있는 교회 속의 진리 중에서 제 일인 것을 의미한다. 이는 “귀한 존재”가 제일 가는 것을 의미함에서 분명해진다. “귀한 존재”인 그는 “왕자”와 거의 같은 수준이고, 왕자는 제일 인 것을 표시하는 단어이다. 그러나 그는 자기 아버지의 가문에서 귀한 존재였다고 말해지지 실지로 왕자라고 말해지지 않은 이유는 하몰과 세겜은 태고 교회의 잔류민이 그들의 뿌리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고대 교회에서 “왕자”라고 불리워도 마땅하다. 고대인들 사이에 있는 교회의 진리들에서 제 일인 것이 의미되는 이유는 이것이 세겜을 두고 말하기 때문이고, 그를 수단으로 고대인들 사이에 있는 교회의 진리가 표현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몰과 그의 아들 세겜이 그들의 성문으로 왔다. 이는 고대인들 사이에 있는 교회에 속해 있는 이들의 교리 속의 선들과 진리들을 의미한다. 이는 하몰의 표현함이 고대인들 사이에 있는 교회의 선이다로부터; 세겜의 표현함이 거기로부터 파생된 진리이다로부터; “성문”의 의미가 진리의 교리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들의 성의 남자들에게 이야기를 했다, 말하기를, 이는 설득함을 의미한다. 이는 “이야기를 함”의 의미가 뜻하는 것, 그리고 안으로 흘러드는 것, 여기서는 설득하는 것이다로부터, 그 이유가 뜻하는 자는 설득함 안에 있기 때문, 그리고 거기로부터 흘러듦 안에 있는 자는 설득과 교통하고 있기 때문이다. “성의 사람들”은 교리의 진리들 안에 있는 자들이다, 여기서는 세겜에 의해 표현되는 진리와 비숫한 진리 안에 있는 이들이다. 그 이유가 고대 시대에서 성의 주민은 실상 민족 중의 한 가문 정도에 인척이 가까운 얼마의 사람들이 보태져서 거주하는 정도이고, 이들을 두고 “성”이라는 단어가 사용되고 있다. 그리고 내적 의미에서는 가문으로 이해되는 것이 아니라 생활과 교리 측면에서 있는 가문의 품질로 이해된다. “성”에 의해서는 교리의 진리가; “성의 주민”은 교리의 선이 의미된다, 그러나 성의 주민들이 성의 “남자들”로 불리울 경우, 이는 교리의 선이 아닌 교리의 진리가 의미된다, 그 이유는 말씀에서 남자들(viri)은 진리들을 표시하기 때문이다.

이 사람들은 우리와 더불어 평화롭다. 이는 찬성을 의미한다. 여기서는 교리적인 것들 측면에서의 찬성이다. 이는 “남자들”의 의미가 진리들이다로부터, 고로 교리적인 것들이다; 그 이유가 교회의 진리들이 하나 안으로 수집되고 인정될 때 교리적인 것들이라 불리기 때문이다; 그리고 “평화롭다”의 의미가 그들이 동의한다는 것이다로부터; 그 이유가 교회의 독단적 주장과 교리적인 것들에 관하여 일치하는 경우 영적 의미에서 평화롭다 말해지기 때문이다.

그들을 이 토지에서 살게 하자. 이는 생활에 관련하여를 의미한다. 이는 살게 함의 의미가 생활함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말씀의 다른 구절에서 같이 여기서도 “토지”에 의해 교회가 의미된다, 고로 “토지에서 사는 것”은 교회의 것에 따른 생활의 유사함을 의미한다. 말씀 안에 쓰여진 것은 무엇이든 그 자체 또는 그 본질에서 영적이다는 것을 누구나 알고 있다. 그러나 그것의 영적인 것은 글자에서 나타나지 않는다; 그 이유가 글자는 세상적, 특히 역사적 부분의 경우는 더욱 그렇다; 그러나 말씀이 인간에 의해 읽혀질 때, 그 안의 세상적인 것은 영계에서, 즉 천사들과 더불어서는 영적인 것이 되어 있다; 그 이유는 천사들은 모두 각각의 주제에서 영적으로밖에 더 달리 생각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토지에서 살게 하자”의 경우도 마찬가지, 즉 영적으로 이를 생각하면 주님의 왕국 속의 것들, 고로 교회 속의 것들로 생각하는 것이다.

여기저기에서 매매를 펼치게 하자. 이는 교리에 관하여를 의미한다. 이는 “여기저기에서 매매를 펼침”의 의미가 선과 진리의 지식들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다로부터, 고로 교리 안으로; 그 이유가 교리가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을 함유하고 가르치기 때문이다.

그리고 보라 이 토지는 그들 앞에서 공간이 넓다. 이는 넓힘, 즉 교리의 진리를 넓힘을 의미한다. 이는 “토지”의 의미가 교회이다로부터; 그리고 “공간이 넓다”의 의미가 진리들 측면에 관하여 넓힘, 고로 교리 측면에 관하여 넓힘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말씀에서, 치수, 분량에 속하는 단어는 글자 의미에서 있는 무게, 길이, 폭 같은 것을 의미하지 않고 상태의 품질을 의미한다; 그 이유가 계량함은 공간을 염두에 두고 하는 말이나 다른 삶에서는 시간과 공간이 없고 그것에 상응하는 상태만 있기 때문이다. “길다”는 거룩함을, “높다”는 선을, 그리고 “넓다”는 진리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공간에서 넓은 토지”는 교회에서 교리의 진리를 넓힘이 의미된다. 이런 의미 파악은 글자 의미 외에 다른 영적인 어떤 것이 말씀 안에 있다는 것을 알아채지 못하고 있는 이들에게는 어쩌면 당황스러움을 유발할지 모른다. 그러나 여기서 등장하는 “넓이”의 경우만을 예를 삼아 다른 책의 구절에서 언급되는 것을 살피면 아마 납득될지 모른다; 이사야서에서:
앗시리아는 유다를 통과하여 갈 것이다; 그는 밀어닥쳐 관통할 것이다; 그는 목에까지조차 도달할 것이다, 그리고 그의 날개의 넓힘은 토지의 넓이를 채울 것이다 (이. 8:8).
다윗서에서:
오 여호와 당신은 나에게 적의 손 안으로 감금되게 아니하셨습니다, 당신께서는 제 발이 넓이에서 서게 만드셨습니다 (시. 31:8).
다윗서에서:
곤경으로부터 저는 야(Jah)를 불렀습니다; 그분은 넓이에서 저에게 대답하셨습니다 (시. 118:5).
하박국에서:
나는 갈대아인들을 일으켜세운다, (이 민족은) 모질고 날랜 민족이라 토지의 넓이들에서 걷는다 (합. 1:6);
위 구절에서 “넓이들”에 의해 교회의 진리외의 다른 의미는 없다.
“넓이”가 이 의미를 가지는 이유는 영계에서, 또는 천국에서 주님은 모든 것들의 중심되시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그분은 거기서 태양이시기 때문이다. 선의 상태에 있는 이들은 각자가 지닌 선의 양과 질에 비례하여 내면적이다, 그러므로 “높이”가 선을 서술한다. 선에서 같은 수준에 있는 이들은 진리에서도 같은 수준에서 있다, 그러므로 같은 거리에, 다시 말하면 같은 경계선 내에 있는다, 이로부터 “넓이”는 진리들을 서술한다; 그러므로 인간이 말씀을 읽을 때, 그 사람과 더불어 있는 천사는 “넓이”를 진리로 이해한다. 우리가 말씀의 역사물들에서, 즉 길이, 넓이, 높이를 수단으로 방주, 제단, 성전, 그리고 도성의 바깥쪽 공간들이 취급되는 구절들을 읽게 될 때, (우리와 함께 있는 천사들은) 선과 진리의 상태들로 지각한다. 새 땅, 새 예루살렘, 그리고 새 성전이 취급되는 에스겔서 (40-47장)에서의 경우, 천국과 새로운 교회가 의미되는데, 그때 언급되는 측량함에 의해 모든 세부 사항이 의미됨에서도 위의 내용들을 알는지 모른다. 또한 에스겔서와 유사한 계시록서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이 책에서 새 예루살렘은 정사각형이라 말해지고, 그것의 길이는 그것의 넓이만큼 크다고 말해진다 (계. 21:16).
영계에서 내면쪽으로 있는 것들은 말씀에서는 보다 높은쪽에 있다로 묘사된다, 그리고 외면쪽인 것은 보다 낮은쪽에 있다로 묘사되고 있다; 이렇게 묘사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인간이 이 세상에 사는 동안, 그는 내면의 것, 외면의 것이라는 말을 어떤 방법으로도 납득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그가 시간과 공간 안에 있기 때문, 그리고 시공에 속한 것들이 그의 생각 안으로 들어가기 때문, 하여 그의 생각은 시공의 것들로 착색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런 설명으로 분명해지는 것은, 재는 것에 관련된 것들, 즉 높이, 넓이, 길이 같은 것은 공간이라는 한계를 지녔다는 것, 그러나 영적 의미에서 이것들은 선에 애착함들과 진리에 애착함들이 상태들을 결정한다는 것이다.

그들의 딸을 여인으로 우리에게 데려오자, 그리고 우리의 딸을 그들에게 주자. 이는 결합을 의미한다. 이는 앞에서 이와 비슷한 말을 살핀 대목으로부터 알 것인 바, 설명은 생략한다.

그럼에도 우리와 함께 거주하기 위해 사람들이 동의해야 하는 것. 이는 그들은 생활에 관하여 찬성할 것임을 의미한다. 이는 “동의함”이 찬성하는 것이다로부터 ; “거주함”이 생활하는 것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한 백성이 되는 것. 이는 교리에 관련하여 찬성할 것임을 의미한다. 이는 “백성”의 의미가 교리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들이 할례받은 것 같이 모든 남자가 할례받는다. 이는 그들이 그것에 의해서 외적인 것만에 관련하여 표현하고 의미하도록 시작될 것이다를 의미한다. 이는 “할례를 받음”이 외적인 표현물, 그들이 교회 속에 있다는 표시로부터 알게 되는데, 여기서의 경우는 야곱의 후손들에 있는 광신적 신앙 속에 있다는 표시이다. 그리고 이 남자들이 그들의 광신적 신앙을 수락하였기 때문에, 그리고 이 신앙은 외적인 것들만에 존재하였기 때문에, “그들이 할례받은 것 같이”라고 말해진다. 그러므로 위 구절은 의문에 있음을 수단으로 외적인 것들 만에 관련하여 유태인의 표현물과 의미물 안에서 시작함을 의미한다. 이는 이어지는 것들로부터 그것들 안에 놓여진 것이 더 나타난다.

그들의 획득물, 그리고 그들이 사들인 것. 이는 그들의 진리들을 의미한다. 이는 “획득물”과 “사들인 것”의 의미가 진리들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리고 이 단어는 이런 방법에서 서로 구별된다: “획득물”이 작은 가축일 경우, 진리로부터의 선을 표시한다, 그 이유는 이것이 “작은 가축”의 의미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진리로부터의 선은 뜻함과 행동함에 있는 진리이다; 이에 반해, “사들인 것”은 그 밖의 구절에서는 “은을 주고 산 것”이라 말해지는데, 진리를 표시한다. 전자, 즉 진리로부터의 선은 삶 속에 있는 진리이고; 후자, 또는 영적인 진리는 교리 속에 있는 진리이다.

그리고 모든 그들의 짐승. 이는 그들의 선들을 의미한다. 이는 “짐승”의 의미가 선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우리의 것이 아니더냐? 이는 이것들은 똑같고 하나의 형체 속에 있었음을 의미한다. 이는 시리즈로부터 알게 된다. 하몰과 세겜과 그들의 가문들 사이에 부분적이지만 아직 남은 태고 교회의 선들과 진리들이 야곱의 후손들 사이에 있는 고대 교회의 선들과 진리들과 일치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 이유가 야곱의 후손들 사이에 조직되는 의식(의례)들은 태고 교회의 내적인 것들을 표현하고 의미하되, 단지 외적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것이 아니더냐?”에 의해 그들은 똑같았고, 하나의 형체였다가 의미된다,
이를 예를 들어 더 생각해보자. 그들이 제물을 바쳤던 제단은 주님에 대한 매우 중요한 표현물이었다; 그러므로 이것은 “히브리”라고 불리운 고대 교회에서 예배의 기초이자 근본이 되었다; 결과적으로 건축된 제단의 일반적, 특수적 측면 모두, 즉 제단의 치수들, 즉 높이, 넓이, 길이, 그리고 돌, 놋그물, 뿔, 또한 그 위에서 꺼지지 않고 타는 불, 이 외에 제물과 태워바침에 이르기까지도 표현적이었다, 이것들이 표현한 것은 주님 속에 있는 진리들과 선들, 그리고 주님으로부터 있는 진리들과 선들이고, 이것들은 예배의 내적인 것인데, 이것들이 제단의 외적인 것에서 표현되었기에, 이는 태고 교회의 진리들과 선들과 하나의 형체이고 똑같은 것이다. 치수들, 즉 높이, 넓이, 길이는 일반적으로는 선, 진리, 그로부터 파생되는 거룩함을 의미했다; 특별히 돌은 보다 수준 낮은 진리들을; 제단 주위에 그물을 만든 재료인 놋쇠는 자연적 선을 의미했다; 뿔은 선으로부터 있는 진리의 힘을 의미했다; 제단 위의 뿔은 사랑을 의미했다; 제물과 태워 바침은 각기 종류들에 따른 천적인 것들과 영적인 것들을 의미했다. 그러므로 이런 외적인 표현물 안에 내적인 것들이 함유되어 있는 것은 분명하다, 그리고 내적인 것에 관련하여서는 두 교회가 비슷하다; 그리고 이런 경우는 다른 의례들에서도 비슷하다.
그러나 태고 교회의 사람들은 이런 외적인 것들에는 관심이 없었는데, 그 이유는 그들은 내적 인간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주님은 내적 경로로 해서 그들 안으로 흘러드셨고, 그들에게 선인 것을 가르치셨다. 선의 차이나 다양함이 그들에게 진리들이었다, 그리고 이 진리로부터 세상에 있는 각각 그리고 모든 것들은 주님의 왕국에 있는 것을 표현했다는 것을 알았다; 그 이유가 전체 세계, 또는 보편적 자연계는 주님의 왕국을 표현하는 극장 무대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대 교회인은 내적이지 않고 외적 인간이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흘러드시어 그들과 함께하시는데 내적 경로를 사용하실 수 없었다. 그러나 외적 경로로 해서 그들에게 선한 것을 가르치시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의 첫 번째는 표현적이고 의미적인 것을 수단으로 선인 것을 가르치시는 것이다 (이로부터 표현 교회가 일어났다), 그리고 후에는 표현되어지고 의미되어진 선과 진리에 관한 교리적인 것을 수단으로 선인 것을 가르치시는 것이다 (이로부터 기독 교회가 일어났다). 내적 형체에 관련하여서 기독 교회는 표현 교회와 똑같다; 그러나 표현 교회의 표현적, 의미적인 것들은 주님께서 세상에 오신 이후 폐지되었다, 그 이유는 그것들의 모두와 각각은 주님을, 결과적으로 그분의 왕국 속의 것들을 표현하고 의미했기 때문인데, 그분이 세상에 직접 계신 상태에서는 그런 것들의 표현과 의미는 필요 없어졌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표현하고 의미한 것들 모두이든, 각각이든 그분으로부터 있고 말하자면 그분 자신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태고 교회와 기독 교회의 차이는 마치 대낮의 태양 빛과 한밤의 달빛과 별빛이다; 그 이유가 내적인 방법으로 선들을 보는 것은 대낮의 태양으로 물체를 보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이는 태고 교회와 고대 교회의 차이도 위 기독 교회의 차이나 마찬가지지 이지만 한 가지 예외는, 기독 교회인의 경우, 그들이 내적인 것들을 인정했다면, 또는 주님이 가르치신 진리들과 선들을 믿고 행하였다면, 보다 더 충만된 빛 안에 있을 수 있다는 점이다. 선 자체는 위의 어느 교회이든 같지만, 이를 명료함에서 보느냐와 희미함에서 보느냐에서 차이가 난다. 명료함에서 그것을 보는 이들은 셀 수 없이 많은 신비함들을 보는데, 마치 천국에 있는 천사들이 보고 감동되는 것만큼 일지 모른다; 그러나 희미함 안에서 그것을 보는 이들은 의심에서 자유한 상태로부터 어떤 것을 거의 보지 않는다, 그리고 그들이 보는 것은 밤의 그늘(즉 거짓들)과 혼합되어져 있다, 그리고 어떤 것도 내향적으로 감동되지 않는다. 지금 본문에서 선이 두 교회들에서 똑같고, 진리 역시 그러한 바, “그들의 것이 우리의 것이 아니더냐?”에 의해 선들과 진리들은 똑같고 하나의 형체 속에 있다가 의미되고 있다; 그 이유가 이미 말했듯이, 하몰과 세겜은 태고 교회로부터 남아 있는 것에 속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야곱의 후손은 비록 외적일 뿐이고, “히브리”라고 불리웠을 뿐, 어쨌든 고대 교회에 속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몰과 그의 아들 세겜은 할례받음에서 매우 큰 죄를 범하였다는 것이 아래에서 보여질 것이다.

오직 그들에게 동의만 하면 된다, 그리고 그들은 우리와 함께 거주할 것이다. 이는 만일 우리가 짐짓 겸손히 굴어준다면을 의미한다는 것, 그리고 그렇게 하여 자기들의 생활이 그들과 연합될 것이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동의함”이 짐짓 겸손히 굴어줌을 의미함에서; 그리고 “우리와 거주함”이 함께 사는 것, 또는 자기들의 생활을 연합시키는 것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리고 그들은 하몰과 그의 아들 세겜의 말에 귀기울였다. 이는 동의함을 의미하는데, 별도의 설명은 필요 없을 것이다.

그의 성문의 안에서 밖으로 나간 모든 이. 이는 그들이 고대인들 사이에 있는 교회의 교리로부터 물러날 것임을 의미한다. 이는 “밖으로 나감”의 의미가 여기서는 물러나는 것이다로부터; 그리고 “성문”의 의미가 교리이다로부터, 여기서는 고대인들 사이에 있는 교회의 교리이다로부터, 그 이유가 “그의 성문”이 세겜의 성문이기 때문, 그리고 세겜에 의해 고대인들 사이에 있는 교회의 진리가 의미되기 때문이다; 이미 말한 대로, 고대인들 사이에 있는 교회에 의해서는 태고 교회로부터 이었음이 의미된다. 이에 대하여는 이어지는 것으로부터 분명해진다.

그리고 그들은 그의 성문의 안에서 밖으로 나간 모든 남자에게 할례를 실시했다. 이는 외적인 것들에 접근함을 의미한다. 이는 “모든 남자에게 할례를 실시함”의 의미가 외적인 것만의 측면에서 야곱의 후손들이 가지고 있는 표현들과 의미들 쪽에서 개시함이다로부터; 그리고 “성문의 안에서 밖으로 나감”의 의미가 고대인들 사이에 있는 교회의 교리로부터 물러남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들 자신의 교리로부터 물러나고 외적인 것들에 접근함 모두가 의미가 되었기 때문에, “그의 성문의 안에서 밖으로 나간 모든 이”라는 말이 두 번 언급되었다. 다른 장소에서의 경우, “그것 안으로 간 그들”이라 말해지는데, 이럴 경우, 교리에 접근함, 그리고 외적인 것들로부터 퇴거함이다. 이에 반해 여기서는 그 반대가 의미되고 있다.
위 경우가 어떻게 되는지를 한 번 더 살피고 가야할 것 같다. 하몰과 세겜과 그의 가문들의 선조인 태고 교회인은 고대 교회인과는 천성과 태생적 품질이 완전히 다르다; 그 이유가 태고 교회인은 견실한 의지를 가졌으나 고대 교회인은 그렇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주님은 태고 교회인과 더불어서는 의지를 통하여, 고로 내적인 길을 수단으로 흘러드실 수 있으셨다; 그러나 의지가 파괴되어진 고대 교회인과는 그렇지가 못했다; 하여, 그들과 더불어서는 그분은 내적인 경로가 아닌 그들의 이해력을 통하여 흘러드셨다. 의지력을 통하여 흘러드시는 것은 사랑의 선을 통하여 흘러드시는 것이다, 그 이유가 모든 선은 사랑 속에, 사랑으로부터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해력을 통하여 흐르는 것은 신앙 속의 진리, 신앙으로부터의 진리를 통하여 흘러드시는 것이다, 그 이유가 모든 진리는 지적 부분 속에, 지적 부분으로부터 있기 때문이다. 주님께서 고대 교회인을 거듭나게 하셨을 때, 그분은 그들의 지적 부분에 새 의지를 만들어 주셨다. 위 살핀 바로부터도 알게 되는 것은 태고 교회인과 고대 교회인은 천성과 태생적 품질이 완전히 다르다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해서 태고 교회인은 내적 인간이었고, 그들에게는 예배의 외적인 것들이 없었다; 한편 고대 교회인은 외적 인간이었고, 그들은 예배의 외적인 것들을 가졌다; 전자는 내적 측면으로부터 외적인 것들을 보았는 바, 마치 대낮의 태양빛을 통하여 보는 것과 같다; 그리고 후자는 외적 측면에서 있는 것들을 통하여 내적 사항들을 보았는데, 마치 한밤중의 달빛이나 별빛을 통하여 보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천국 안에서 주님은 전자에게는 태양으로, 후자에게는 달로 나타나신다. 이를 구분해 말하기 위해 우리는 전자를 “천적(celestial)” 수준, 천적 인간이라 일컫고, 후자는 “영적(spiritual)” 수준, 영적 인간이라 일컫는다. (우리의 일상 대화에서 상용하는 자연적, 영적이라는 말과는 의미가 다르다는 점을 유의하기 바란다. 그 이유가 이 책을 정독하지 않은 사람들은 영계 안에 두 왕국과 세 천국이 있다는 말을 들어본 적도, 생각해본 적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일반인들, 교회인들을 포함해서 천국과 지옥이 있다는 막연한 수준, 지극히 일반적 개념밖에 없어 영적이라는 말은 단순히 천국과 지옥을 상상해보는 정도에 그치고 말기 때문이다. 이런 용어 파악이 이 책을 읽기 전에 되어 있지 않으면 이 책의 설명은 매우 혼돈스러워 난해한 책이 되고 만다. 스베덴보리의 책보다 더 육체와 영체를 설명한 책은 지구상에 없을 것이다. 역자주)
위 둘의 차이를 예증해보기 위해 예를 더 들어 볼까 한다: 만일 태고 교회인이 말씀 의 역사적 부분이든 예언적 부분이든 읽을 때, 그는 어떤 가르침이나 해설로 미리 도움 받음 없이 읽는 말씀 속의 내적 의미를 본다: 따라서 그에게는 말씀 속의 천적, 영적 수준의 의미들이 즉시 나타난다, 그 대신 글자 의미의 것들은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 고로 내적 의미는 그에게 명료함에서 있고, 글자 의미는 희미함에서 있다. 아마 그는 누군가가 말할 때, 단어들을 동원하지 않고도 의미를 파악하는 자일 것이다. 다시 말해 상대방이 알지도 못하는 외국어로 말해도 무슨 의미를 전달하려는 지를 파악한다는 말이다. 이에 비해 고대 교회인이 말씀을 읽을 때, 그는 말씀에 대한 가르침이나 해설이 없으면 읽는 말씀의 내적 의미를 볼 수 없다. 고로 그에게 내적 의미는 희미함 안에 있고, 그 대신 글자 의미는 명료함 안에 있다. 그는 타인이 말하는 것을 들을 때, 그는 의미가 동반되지 않는 단어들에 집중되어 있다, 고로 그에게는 의미는 잃어진 상태인 셈이다. 게다가 유태인이 말씀을 읽을 때, 그는 글자 의미를 넘어서는 그야말로 어떤 것도 납득하지 않는다, 그는 어떤 내적 의미가 있다는 것을 알아채지 못한다, 더 나아가 내적 의미가 있음을 부정한다; 오늘날, 기독 교회인의 경우도 비슷하다.
위 모든 차이는 본문에 등장하는 (내적인 것들 안에 있고 외적인 것들 안에 있지 않았던 태고 교회인의 나머지들의 부류에 속하는) 하몰과 세겜, 그리고 (외적인 것들 안에 있고 내적인 것들 안에 있지 않았던) 야곱의 아들들에 의해 표현되는 것들을 보여준다; 더 나아가 하몰과 세겜은 자기들의 내적인 측면이 닫아짐 없이 외적인 것들에 접근할 수도, 야곱의 아들들 사이에 있는 것들을 받아들일 수도 없었다; 그렇게 되었다면 그들은 영원한 파멸을 맞이할 수밖에 없다.
이것은 하몰과 세겜, 그들의 가문들이 살해당한 비밀한 이유이다. (정상적 절차를 밟는 결혼에 이르면 그들은 내적인 것과 외적인 것의 섞음질이 결과되므로 그들의 구원을 위해 이것까지는 허락되지 않은 것이다. 역자주.) 살해당함이 섭리적 차원에서 허락될 수밖에 없었다고 해서 야곱의 아들들이 저지른 매우 중대한 범죄가 무죄이다는 말은 아니다. 단지 그들은 이런 비밀한 이유를 알지 못했다; 그리고 이런 비밀한 이유가 그들이 예상한 목적도 아니었다. 모든 이 각각은 자기의 목적, 또는 의도에 따라서 심판받는다, 그리고 야곱의 아들들의 의도가 사기적이었다는 것은 13절에서 이미 서술되었다; 그리고 이런 범죄가 주님에 의해 허락될 경우, 이것의 주동자는 악한 인간들과 지옥의 선동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악한 자가 선한 자에게 의도하고 실행하는 모든 악은 주님에 의해 선으로 되돌려진다, 본문의 범죄 사건이 이에 해당된다; 하여 하몰과 세겜, 그리고 그의 가문들은 구원받았다.

25-29절. 그리고 삼일이 지났다, 그들이 아파하고 있을 즈음, 야곱의 두 아들, 디나의 오라버니 시므온과 레위가 각기 자기 검을 손에 쥐었다, 그리고 그 성을 대담하게 들어갔다, 그리고 모든 남자를 살육했다. 26 그리고 그들은 하몰과 그의 아들 세겜을 그의 칼 끝으로 살해했다, 그리고 디나를 세겜의 집에서 데려 왔다. 27 그리고 야곱의 아들들이 찔려 죽은 이들에게 왔다, 그리고 그 성을 약탈하였다, 그 이유는 그들이 자기들의 누이를 더럽혔기 때문이다. 28 그들의 양떼, 그리고 그들의 목축들, 그리고 그들의 나귀들, 그리고 그 성에 있는 것은 무엇이든지, 그리고 들판에 있는 것은 무엇이든지 그들은 가져 갔다. 29 그리고 그들의 모든 재물, 그리고 그들의 갓난 아이, 그리고 그들의 여인들, 그 집에 있는 모든 것을 그들은 포로로, 전리품으로 가져 갔다.

그리고 삼일 째가 되었다. 이는 끝맺음이 있을 때까지 계속되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삼일 째”의 의미가 시작으로부터 끝까지 완성인 것이다로부터, 또한 계속적인 것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것이 “삼일 째 날”의 의미이다는 것은 말씀의 역사 부분을 세상적 역사물로만 간주하는 이들, 또는 이 단어가 거룩한 책 안에 있기에 거룩한 단어로만 간주하는 이들에 의해서는 거의 믿어질 수 없다. 그러나 말씀의 역사 부분 자체는 그것 안에 글자에서는 나타나지 않는 영적이고 천적인 것들을 감싸고 있을 뿐만 아니라, 단어들 역시, 숫자들에 이르기까지에서 그러하다는 것은 이미 앞에서 설명했었다; 특히 역사 이야기 형식을 빌리지 않는 예언적 부분들의 경우 더욱 두드러지는데, 이는 주님의 신성한 자비로부터 더 명백해질 것이다. 어쨌든 숫자 “3”, 또한 “7”, 그리고 “12”는 숫자 안에 깊은 비밀들을 내포하고 있다는 것만큼은 말씀의 내면의 사항들에 관심이 있어 말씀을 세심히 살피는 모든 이를 위해서라도 명백히 해주어야 할 것 같다; 그리고 만일 이 숫자들이 의미로 가득 차 있다면, 이 외의 모든 숫자들 역시 각 숫자 안에 깊은 무엇인가를 내포하여야 할 것이다; 그 이유는 말씀은 전체를 망라해 거룩하기 때문이다.
때로 천사들과 이야기를 할 때, 마치 쓰여진 숫자들이 청명한 날 종이 위에 있는 어떤 것 같이 내 눈 앞에 나타났다, 그리고 나는 천사들이 이야기하는 것들 자체가 이런 저런 숫자들 안으로 떨어지는 것을 지각했다; 그리고 이 경험으로부터 나는 말씀 안에서 언급되는 모두 각각의 숫자는 그것 안쪽에 어떤 신비함들을 붙잡고 있다는 것을 배웠다; 아래 구절로부터 명백해진다:
그는 거룩한 예루살렘의 성벽을 측량했는데 144큐빗이었다, 이는 사람의 칫수, 즉 천사의 칫수이다 (계. 21:17).
그리고 다시:
총명을 가진 자로 하여금 짐승의 숫자를 계산하게 하라, 그 이유가 이 숫자는 사람의 숫자이기 때문이고, 그의 숫자는 666이다 (계. 13:18).
처음 언급된 숫자, “144”는 12 자체를 곱하여 결과된 숫자이다는 것, 그리고 숫자 “666”은 3과 6의 산물이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이 숫자들이 그것들 안쪽에 포옹된 거룩한 것이 무엇인지는 “12”의 거룩함으로부터 (577, 2089, 2129, 2130, 3272, 3858, 3913항), 그리고 숫자 “3”의 거룩함으로부터 나타난다 (720, 901, 1825, 2788, 4010항).
나중 숫자 “3”은 끝장을 보기까지에 이르러 완성되는 것, 고로 규모가 크든 작든 어떤 하나의 기간을 의미하는데, 이 숫자는 표현적 교회에서 받아졌다, 그리고 어떤 것이 의미되는 때는 언제든지 이 숫자를 사용했다; 그리고 또한 말씀에서도 사용되었다 (말씀 안에서 모든 것들은 일반적, 특수적 모두에서 의미를 가진다); 아래 인용 구절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그들은 삼일의 여행을 해서 제물을 바칠 것이다 (출. 3:18; 5:3).
그들은 셋째 날을 향해 준비를 해야 한다는 것, 그 이유는 삼일 째 날에 여호와께서 시내산에 내려오시기 때문이다 (출. 19:11, 15, 16, 18).
셋째 날까지 제물의 고기를 남겨두어서는 안된다 (레. 7:16-18; 19:6, 7).
분리함의 물이 삼일 째 날과 일곱 째 날에 불결한 자 위에 뿌려질 것이다 (민. 19:11-22).
전쟁에서 죽임을 당한 자를 만진 자는 삼일 째 날과 일곱 째 날에 순수해질 것이다 (민. 31:19-25).
여호수아는 삼일 째 날에 요단을 건너라고 백성에게 명령했다 (여. 1:11; 3:2).
여호와께서 사무엘을 세 번 부르셨다, 그리고 사무엘은 세 번째 엘리에게 달려갔다, 그리고 엘리는 여호와께서 사무엘을 부른 세 번째를 깨달았다 (삼상. 3:1-8).
요나단이 다윗에게 삼일 째 저녁까지 들판에서 자신을 숨기고 있으라고 말했다는 것, 그리고 요나단이 그에게 삼일 째 날에 그에게 보낸다는 것, 그리고 자기 아버지의 의향을 밝히 알게 하겠다는 것; 그리고 그 때 요나단은 돌쪽에서 세 번 화살을 쏘았다; 그리고 이후 다윗은 요나단 앞에서 세 번 자신을 땅에 엎드렸다 (삼상. 20:5, 12, 19, 20, 35, 36, 41).
세가지 사항 중에서 선택하도록 다윗에게 제공되었다: 칠 년 기근이 오는 것, 그는 그의 적들 앞에서 석 달을 도망해야 하는 것, 또는 토지에 삼일 간의 염병이 있는 것이다 (삼하. 24:11-13).
르호보암이 자기 아버지께서 지운 멍에를 가볍게 해주기를 요청한 이스라엘의 회중에게 말하기를, 그들은 삼일을 떠나 가서 있으라는 것, 그리고 다시 오라는 것; 그리고 왕이 그들에게 삼 일 째 날에 나에게 오라 하고 명한 대로, 그들이 삼일째 날에 르호보암에게 다시 왔다
(왕상. 12:5, 12).
엘리야는 자신을 과부의 아들 위에 세 번 뻗쳤다 (왕상. 17:21).
엘리야는 물을 태워 바침의 제물과 장작에 세 번 붓도록 백성에게 말했다, 그리고 그들은 그것을 세 번 실시했다 (왕상. 18:34).
요나는 고래의 뱃속에서 삼일 낮과 삼일 밤을 있었다 (욘. 1:17; 마. 12:40).
주님께서는 포도원을 심은 사람에 관하여 이야기하셨다, 그는 자기 종을 세 번 보냈다, 그리고 그 후에 자기 아들을 보냈다 (막. 12:2, 4-6; 눅 20:12, 13).
베드로가 세 번 나를 부인할 것이라고 그분은 베드로에 관해 말하셨다 (마. 26:34; 요. 13:38).
그분은 베드로에게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라고 세 번 말하셨다 (요. 21:15-17).
위 구절들과 이 외 많은 다른 구절들에서 숫자 “3”에는 어떤 신비함이 있다는 것, 그러므로 이 숫자는 고대 교회에서 의미를 지닌 숫자로 받아졌다는 것을 알는지 모른다. 이 숫자는 규모가 크든 작든 교회의 전체 기간과 교회 안에 있는 것들의 전체 기간을 의미함이 분명하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이 숫자는 완성하는 것, 또한 끝장으로까지 계속되는 것을 의미함을 아래 호세아서로부터 분명해진다:
여호와께서는 우리에게 이틀 후에 생기를 주실 것이다; 삼일 째에 그분은 우리를 일으켜 세우실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분 앞에서 살 것이다 (호. 6:2).

그들이 아파하고 있을 즈음. 이는 탐욕들을 의미한다. 이는 할례를 받은 후에 “고통함”의 의미가 탐욕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 고통이 탐욕을 의미하는 이유는 할례가 자기를 사랑함과 세상을 사랑함으로부터 순수해짐을 의미하기 때문, 그리고 육의 모든 탐욕은 이 사랑들로부터 이고, 그러므로 탐욕이 이 “고통함”에 의해 의미된다; 그 이유는 인간이 이런 사랑들로부터 깨끗해질 때, 마치 인간이 거듭나질 때의 경우 같이, 그는 고통과 번민 안에 있다, 그리고 고통과 번민 안에 있는 탐욕들의 제거함이 있는다. 어떤 신비함이 의식에 의해 표현되어질 때, 의식의 각각의 세부 사항은 그것이 완성될 때까지 신비함의 어떤 것을 감싸고(포옹하고) 있다. 이런 경우의 실 예가 할례 때에 사용하는 돌로 만들어진 작은 창, 또는 칼의 경우 이고; 이 때 흘리는 피; 수술하는 방식; 결과적으로 상태와 더불은 경우 등등이다. 이 외에도 깨끗해짐들, 취임식, 신성하게 함, 여타 다른 축제들의 경우도 있다. 본문에서 할례 후의 “고통”에 의해서는 하몰, 세겜, 그리고 성의 사람들이 야곱의 후손들에 있는 외적인 것들을 바램에서 야기된 탐욕이 의미되고 있다.

야곱의 두 아들, 시므온과 레위. 이는 신앙과 사랑을 의미한다. 이는 시므온의 표현함이 의지에 있는 신앙이다로부터, 그리고 레위의 표현함이 영적인 사랑 또는 선행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것은 “시므온과 레위”에 관한 일반적 의미, 그리고 그들 뒤를 이어 그 이름으로 불리우는 지파들에 관한 일반적 의미이나, 반대적 의미에서는 거짓된 것과 악을 의미한다; 그 이유가 거짓은 신앙의 진리에, 그리고 악은 선행의 선에 반대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것이 유태 나라라는 측면에서 시므온과 레위의 표현함이다. 이 나라는 자체 안에 있는 (예배의 내적인 것들인) 신앙과 선행의 모든 것을 소멸되게 했다. 이는 이어지는 구절로부터, 즉 그들이 하몰과 세겜, 성의 사람들을 죽였고, 칼로 찌른 사람들에게로 와서 약탈했다는 대목에서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이것을 시므온과 레위가 저지른 이유는 신앙의 진리와 선행의 선이 거짓과 악으로 변했다는 것을 표현하기 위해서 였다; 그 이유가 교회에 있는 진리가 거짓이 되고, 선이 악이 될 때, 교회의 끝장이 있기 때문이다.

디나의 오라버니(형제들). 이는 그 교회 속의 진리들과 선들을 의미한다. 이는 “형제들”의 의미가 진리들과 선들, 또는 신앙과 선행이다로부터; 그리고 디나의 표현함이 진리에 애착함, 결과적으로 교회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각자 자기 검을 손에 쥐었다. 이는 거짓과 악을 의미한다. 이는 “검(sword)”의 의미가 싸우는 진리, 그로부터 진리를 방어함; 그리고 반대적 의미에서는 싸우는 거짓, 그로부터 진리의 황폐됨이 의미됨에서 알게 된다. “검”이 여기서 악도 의미하는 데, 그 이유는 이 범죄 행동에 선행, 선을 표현한 레위가 포함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반대적 의미일 경우, 이것은 악인 바, 악으로부터의 거짓을 수단으로 전투하고, 그 결과는 악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성을 대담하게 들어갔다, 그리고 모든 남자를 살해했다. 이는 그들은 고대인들 사이에 있는 교회의 교리 속의 진리들을 근절시켰음을 의미한다. 이는 “성”의 의미가 교회의 교리이다로부터, 여기서의 경우는 고대인들 사이에 있는 교회의 교리인데, 그 이유는 이 교회가 하몰과 세겜이 있는 성이기 때문이다; “대담하게”의 의미가 보증함이다로부터, 여기서는 악하고 거짓인 것의 보증이다; “남자”의 의미가 진리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로부터 “그 성을 대담하게 들어가서 모든 남자를 살해했다”에 의해 거짓과 악을 보증함으로부터 그들이 고대인들 사이에 있는 교회의 교리 속의 진리를 근절해버렸음이 의미됨이 분명해진다. 이는 야곱의 후손들과 더불어 설립되어 왔었던 (태고 교회의 잔여물이었던) 고대인들 사이에 있던 교회이었다는 것, 그 이유가 고대 교회가 멸망해지기를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에서의 내적 의미에서 그들은 자신들 안에 있는 신앙의 모든 진리와 선행의 모든 선을, 고로 예배의 모든 내적인 것을 소멸되게 해버렸다; 그러므로 어떤 교회도 이 후손들과 더불어 설립되어질 수 없었다. 게다가 그들의 목이 굽어지지 않는 비타협적 기질까지 더하여짐으로 교회의 설립은 완전 불가능하고, 대신 교회의 표현 자체만 (완전한 껍데기)이 그들과 더불어 설립되어진다.

그리고 그들은 검의 끝에서 하몰과 그의 아들 세겜을 살해했다. 이는 그들이 교회 자체를 근절해버렸다를 의미한다. 이는 하몰의 표현함이 선 측면에서의 고대인들 사이에 있는 교회이다로부터; 세겜의 표현함이 진리 측면에서의 고대인들 사이에 있는 교회이다로부터; 그리고 “검의 끝”의 의미가 전투하는 악과 거짓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또한 이를 수단으로 하여 그들은 자신들에 있는 교회를 소멸되게 하고 말았다.

그리고 세겜의 집에서 디나를 데려갔다. 이는 그들이 진리에 애착함을 거두어 갔음을 의미한다. 이는 디나의 표현함이 진리에 애착함이다로부터 분명해진다. 대략적 내적 의미에 의하면, 그들은 태고 교회의 잔여물로부터 있었던 이들로부터 진리에 애착함을 거두어 갔음 인데, 그 이유는 “그녀를 세겜의 집에서 데려갔다”라고 말해지고, “세겜의 집”은 이 교회의 진리로부터의 선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의미되는 이유는, 여기서 취급되는 주제가 야곱의 아들들에 의미되는 야곱의 후손들 사이에 있는 진리와 선이 근절됨, 그리고 모든 것들도 취급된 주제에 적용되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세겜의 집”은 태고 교회인과 더불어 존재했던 것과 같은 진리로부터의 선이 단순하게 의미된다. 그리고 이 선이 야곱으로부터 튀어나오는 나라에서 소멸된 것이다; 그 이유가 말씀의 내적 의미에서 이름이나 단어들의 의미는 그것들이 적용되는 주제에 의해 결정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여기서는 하몰과 세겜과 그의 가문들과 더불은 선과 진리가 깨짐도 동시에 의미한다, 그 이유는 그들이 외적인 것들에 접근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시므온과 레위에 관하여 펼쳐놓은 사항들이 진실로 그러하다는 것은 죽음을 바로 앞둔 야곱의 예언적 발언으로부터 보여질는지 모른다:
시므온과 레위는 형제들이다, 폭력의 도구들은 그들의 검들이다; 내 혼은 그들의 비밀 안으로 들어가게 하지 말자, 그들의 모임 안에 내 영광은 하나되게 하지 말지라, 그 이유는 그들은 자기들의 분노함에서 사람을 살해했고, 자기들의 쾌락 안에서 숫소를 느슨해지게 했기 때문이다; 그들의 분노는 격렬했기 때문에, 그들의 격노함은 슬펐기 때문에 저주받을 지라; 나는 그들을 야곱 안에서 가를 것이다, 그리고 이스라엘 안에서 흩을 것이다 (창. 49:5-7).
“시므온과 레위”에 의해 야곱의 후손들이 거짓으로 변하게 한 신앙 속의 진리, 악으로 변하게 한 선행 속의 선이 의미된다. 그들이 “형제들”이라 불리운 이유는 선은 진리의 형제, 선행은 신앙의 형제이기 때문이다. “폭력의 도구들이 그들의 검들이다”란 거짓들과 악들이 진리들과 선들에 폭력을 감행했음을 의미한다. “내 혼은 그들의 비밀 안으로 가게 하지 말자, 그들의 모임에 내 영광이 하나되게 말지라”는 생활과 교리가 분리됨을 의미하는데, 그 이유는 말씀에서 “혼”은 삶, 생명을 서술하고, “영광”은 교리를 서술하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그들은 자기들의 분노함에서 사람을 살해했고, 자기들의 쾌락 안에서 그들은 숫소를 느슨해지게 했다”란 이미 작심한 악 안에서 그들은 교회의 진리와 교회의 선을 소멸했다가 의미된다; 그 이유가 “사람”은 교회의 진리를, 그리고 “숫소”는 교회의 선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들의 분노는 격렬했기 때문에, 그들의 격노함은 슬펐기 때문에 저주받을 지라”란 진리와 선으로부터 돌아섬에 대한 처벌을 의미한다. 그 이유가 “저주하는 것”은 자신의 자아를 돌려세우는 것을; 그러므로 처벌되어짐을; “분노함”은 진리로부터 돌아섬을, 그리고 “격노함”은 선으로부터 돌아섬이기 때문이다. “나는 그들을 야곱 안에서 가를 것이다, 그리고 그들을 이스라엘 안에서 흩을 것이다”란 진리들과 선들이 그들 교회의 내적, 외적 모두에서 더 이상 있지 않을 것을 의미한다. “가르고”, “흩음”은 그들로부터 분리해서 근절해버림을 표시한다; “야곱”은 교회의 외적 측면, “이스라엘”은 교회의 내적 측면이다.
이런 사항들이 위 예언에서 시므온과 레위에 관련해 말해지는 이유는 그들에 의해 일반적 측면에서는 교회의 진리와 선이 의미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진리와 선이 무익해지고 효능 없게 될 때, 더욱이 거짓과 악이 그것들의 자리를 메울 때, 그때 교회는 사멸한다. 이와 같은 사항이 위 야곱의 예언적 말들의 의미인 것이 분명한 이유는 야곱이 저주했음에도 시므온 지파와 레위 지파는 저주받지 않았다는 것, 특히 레위 지파는 성직 직분을 계승했다는 것, 시므온 지파는 다른 지파들과 같이 대우받았다는 사실 때문이다.

야곱의 아들들은 찔려 죽은 자들에게 왔다, 그리고 그 성을 약탈했다. 이는 이 모든 후손이 교리를 파괴했음을 의미한다. 이는 “야곱의 아들들”의 의미가 야곱의 후손이다로부터; “약탈함”의 의미가 파괴함이다로부터; 그리고 “성”의 의미가 교회의 교리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시므온과 레위가 성에 있는 모든 남자, 그리고 하몰과 세겜 또한 살해한 후, 그들은 나갔다, 그리고 그 다음 야곱의 아들들이 찔려죽은 자들에게 왔고 그 성을 약탈했다는 기록은 신비에 속하는 바, 이는 내적 의미로부터 살피지 않으면 분명해지지 않는다.
이 신비는 이렇다: 시므온과 레위에 의해 표현된 교회의 진리와 선이 소멸된 후, 그리고 거짓과 악이 그것의 자리를 차지한 후, 이때 나머지 야곱의 아들들에 의해 반대적 의미에서 의미되는 거짓들과 악들이 보태어졌다. 교회의 진리와 선이 소멸되자마자, 그들에 의해 표현되었던 일반적 측면에서의 신앙과 선행은 어떤 종류의 악들과 거짓들이 되고 만다, 여기에 거짓들과 악들이 추가되기까지 한다; 그 이유가 거짓들과 악들은 진리와 선이 타락되거나 소멸된 교회 안에서 자라오르기 때문이다. 이것이 시므온과 레위가 성의 남자들, 하몰과 세겜까지 살해하고, 디나를 데려 간 이후 야곱의 나머지 아들들이 찔려죽은 자들에게 와서 약탈하는 대목에 의해 의미되고 있다.
말씀 안에서 “찔려진 이들”이 소멸된 진리들과 선들을 의미하는 것은 아래 구절로부터 분명해진다:
너는 역겨운 싹틈 같이, 돌 구덩이 아래로 내던진 검에 찔려 살해된 자의 의복 같이, 발 아래 짓밟힌 주검 같이, 네 무덤의 안에서 밖으로 내던져졌다 (이. 14:19);
위는 바빌론에 대해서이다; “검에 찔린 이들”은 교회의 진리들을 모독해왔던 이들을 표시한다. 다시:
찔린 자가 밖으로 내던져지고 그들의 시체의 악취가 올라올 것이다 (이. 34:3);
교회에 감염된 거짓들과 악들을 취급하고 있다, 이것이 “찔린” 자에 의해 의미되고 있다.
에스겔서에서:
나라들의 폭력자들이 네 지혜의 아름다움에 맞서 그들의 검을 뽑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네 잘 생김을 모독할 것이다; 그들은 너로 구덩이 안으로 처넣을 것이다, 그리고 너는 바다의 한가운데 에서 찔림을 당한 이들의 죽음들 (같이) 죽을 것이다 (겔. 28:7, 8);
위는 두로의 제 일인 자에 관해서인데, 그들에 의해 진리와 선에 관한 지식들에서 제일 가는 것들이 의미된다; “바다의 한가운데에서 찔림을 당한 이들의 죽음을 죽는 것”은 기억 속의 지식들을 수단으로 거짓들을 부화하는 이들, 그렇게 해서 교회의 진리들을 더럽히는 이들을 표시한다.
다시:
이들은 지옥쪽으로, 검으로 찔려진 이들쪽으로 내려갈 것이다; 네가 에덴의 나무들을 가지고 더 낮은 것들의 땅쪽으로 내려가기를 만들겠다고 할 때, 너는 할례받지 않은 자의 한가운데에서, 검으로 찔려진 이들과 더불어 누울 것이다 (겔. 31:17, 18).
다시:
내려가서 할례받지 않은 자와 함께 눕는다; 그들은 검으로 찔려진 이들의 한가운데에 추락할 것이다; 용사 중의 제 일인 자가 지옥의 한가운데에서 그에게 이야기를 할 것이다 (겔. 32: 19-21);
위는 이집트와 바로에 대해서이다; “검으로 찔려진 이들”은 지식들을 통하여 미쳐버리게 된 이들을 표시한다, 이를 수단으로 그들은 자신들에 있는 교회의 진리의 신앙을 꺼지게 한다.
다윗서에서:
나는 구덩이로 내려가는 이들로 세어짐을 당했다; 나는 힘이 없는 사람 같이, 내버려진 죽은 자 같이, 무덤에 누운 찔린 자 같이, 하여 더 이상 기억되지 않는 자 같이, 당신의 손에 의해 절멸된 자 같이 되어버렸습니다 (시. 88:4, 5);
“지옥 안에 있는 찔리운 자들”, “구덩이 안에”, 그리고 “무덤 안에”는 거짓들과 악들을 수단으로 자신들 안에 있는 진리들과 선들을 파괴해버린 이들을 표시한다. 그들이 검에 찔려 죽었다는 이유만으로 그들이 지옥에 있는 것이 아닌 것만은 분명하다.
이사야서에서:
왁자지껄하던 성, 기뻐외치던 성, 그들이 검으로 찔려진 것이 아니다, 그리고 전쟁에서 죽임을 당한 것이 아니다; 너희 안에서 발견된 모두는 다함께 결박되었는데, 이들은 멀리 도망쳤었다 (이. 22:2, 3);
교회의 진리들이 보여질 수 없게 한 감각적인 것들로부터의 오류들에 관해 말해진다, 이에 관해 그들은 부정적인 의심 안에 있다, 그리고 “찔려지나 검으로가 아니다”라고 말해진다.
에스겔서에서:
나는 네 위에 검을 가져온다, 그리고 나는 너의 높은 장소(산당)들을 파괴한다, 그리고 너의 제단들은 파괴될 것이다, 그리고 너의 규례들은 깨어질 것이다, 그리고 나는 네 우상들 앞에 너의 찢기운 자들을 눕혀지게 할 것이다; 찢기운 자들이 네 한가운데에 엎드려질 때, 너는 내가 여호와임을 알 것이다; 찢기운 자들이 네 우상들 한가운데, 제단을 빙둘러 있게 될 때 너희는 (내가 여호와 임을) 인정할 것이다 (겔. 6:3, 4, 7, 13);
위에서 “찢기운 자들”은 교리의 거짓들 안에 있는 이들을 표시한다.
다시:
집을 더럽힌다, 그리고 찢겨진 자들을 가지고 뜰을 채운다; 그들이 밖으러 나가 성을 짓부셨다 (겔. 9:7);
위는 예언적 환상이다; “집을 더럽히고 찢겨진 자들을 가지고 뜰을 채운다”는 것은 선들과 진리들을 모독함을 표시한다. 다시:
너는 이 성에서 너의 찢기운 자들을 불어나게 했다, 그리고 너희는 찢기운 자로 거리들을 채웠다; 그러므로 주 여호비께서 말하셨다, 너의 찢기운 자들을 너는 그것의 한가운데에 놓았다, 그들은 육이다, 그리고 이것은 가마이다, 그리고 그분은 너희를 그것의 한가운데로부터 데려내오실 것이다 (겔. 6:3, 4, 7, 13);
“찢기운 자”란 거짓들과 악들을 가지고 자신들 안에 있는 교회의 진리들을 소멸해버린 이들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표현 교회에서의 경우, 찢기운 것을 만진 자는 불결했다, 이에 관해 모세의 책에서:
들판의 표면에서 검에 찔리운 자, 죽은 자, 인간의 뼈, 또는 무덤을 만진 자는 누구든지 칠일 동안 불결할 것이다 (민. 19:16, 18).
그러므로 요구 사항이 있고, 속죄(죄를 씻음)가 송아지를 수단으로 만들어졌다, 모세의 책에서:
만일 찔리운 자가 들판에서 뉘여 있는 것을 발견한다면, 그리고 그를 누가 쳐죽인지를 몰랐다면, 그때 성의 원로들과 재판관들이 나가서, 찔리운 자를 빙둘러 앉은 성읍들과의 거리를 재어보고, 가장 가까운 성의 원로들은 일을 시키지 않고, 멍에를 메어본 적이 없는 숫소의 암송아지를 가져오 고, 이것을 골짜기, 또는 강으로 데려가서, 송아지의 목을 벨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손을 송아지의 머리 위에서 씻을 것이다, 그리고 말하라, 우리의 손은 피를 뿌리지 않았다, 그리고 우리의 눈은 그것을 보지 않았다; 당신의 백성 이스라엘을 속죄하소서, 오 여호와시여, 그리고 당신의 백성 한가운데에서 순진한 피를 주지 마십시요; 그리고 피는 그들을 위해 속죄될 것이다 (신. 21:1-8).
위의 법들이 주어진 이유는 “찔린” 자에 의해 거짓과 악을 수단으로 교회의 진리가 왜곡되고, 파괴되고, 모독되는 것이 의미되기 때문인 것은 내적 의미를 살피면 확실해진다. “들판에서 찔려 뉘여 있는 자”라고 말해지는 이유는 “들판”이 교회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노동을 해보지 않은 암송아지란 순진 안에 있는 외적 인간의 순진을 의미한다. 이런 의미들이 알려지지 않으면, 속죄하는 과정에 결부된 것은 얼통당토한 것 같아 이해함은 커녕 놀람을 일으킬 수밖에 없다.

그 이유는 그들이 자기들의 누이를 더럽혔기 때문이다. 이는 그들이 신앙 속의 진리를 더럽혔음을 의미한다. 이는 “(몸을) 더럽힘”의 의미가 (명예를) 더럽힘이다로부터; 그리고 “누이”의 의미가 진리이다로부터, 여기서는 신앙 속의 진리인데, 그 이유는 여기서 누이는 신앙의 모든 것에 애착함이 의미되기 때문, 등등으로부터 알게 된다. 그들의 누이를 세겜이 더럽힘이 그들이 신앙의 진리를 더럽힘을 의미하는 이유는 모든 진리에 애착함, 고로 교회 자체가 그녀에 의해 의미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녀는 형제들에 의해 여인으로 세겜에 주어지지 않았는데, 그들과 더불어 더럽혀져 남아 있었기에, 그러므로 그녀의 형제가 반대적 의미를 표현하듯 그녀 역시 그러하였다, 하여 모든 거짓들에 애착함이 표현되었다, 고로 교회가 부패된 것이 표현되었다; 이리하여 “그들이 자기들의 누이를 더럽혔기 때문이다”는 말은 그들이 신앙의 진리를 더럽혔다가 의미되는 것이다.

그들의 양떼들과 목축들. 이는 그들이 합리적 선과 자연적 선을 파괴했음을 의미한다. 이는 “양떼”의 의미가 합리적 선이다로부터; 그리고 “목축”은 자연적 선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리고 그들의 나귀들. 이는 거기로부터, 즉 합리적, 자연적 선으로부터 파생된 진리들을 의미한다. 이는 “나귀”, 또는 “암나귀들의 아들(새끼)”, 또한 “노새”의 의미가 자연 평면 속의 진리와 합리성 속의 진리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리고 그 성에 있었던 것은 무엇이든지, 그리고 들판에 있었던 것은 무엇이든지, 그들은 가져갔다. 이는 교회 속의 모든 진리와 선을 의미한다. 이는 “성”의 의미가 교리, 고로 교회의 진리이다로부터; 그리고 “들판”의 의미가 선 측면에 관한 교회, 고로 교회의 선이다로부터; 고로 “성 안에 있는 것은 무엇이든, 그리고 들판에 있는 것은 무엇이든”은 교회의 모든 진리와 선을 표시한다.

그리고 모든 그들의 재물. 이는 그들이 획득해왔던 지식 속의 모든 주제(matter)들을 의미한다. 이는 “재물(wealth)”이 지식에 관한 주제들이다로부터 알게 되는데, 이는 말씀의 많은 구절로부터 분명해진다; 그 이유가 영적 재물, 고로 영적 의미에서 이해되는 재물은 이 외에 더 다른 것은 없기 때문이다. 영적 재물이 알려져 있는 만큼에서 지식에 관한 주제도 그 만큼 있다; 그리고 주님의 왕국에서 (고로 교회에서) 이것들이 재물을 구성하는데, 이에 관하여 주님의 신성한 자비로부터 다른 지면에서 별도로 살필 기회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모든 갓난 아이. 이는 모든 순진을 의미한다. 이는 “갓난 아이”의 의미가 순진이다로부터 알려진다.

그리고 그들의 여인들. 이는 선행을 의미한다. 이는 “여성”, “여인”, “아내”의 의미가 진리에 애착함과 선에 애착함이다로 알게 된다. 진리에 애착함은 배우자가 언급될 때, 즉 배우자가 “남편”이라 불리울 때이다; 그리고 선에 애착함은 배우자에 관한 언급이 없이 “남자(man, vir)”이라는 표현이 사용될 경우이다. 이 구절의 경우, “여인”이 선에 애착함을 표시하는 이유는 그녀들이 진리들이 의미되는 성의 남자들의 여인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성은 모든 곳에서 세겜의 성이라 불리우는데, 이 세겜을 수단으로 고대인들 사이에 있는 교회의 진리가 표현되었다. 영적 선에 애착함은 선행과 같은 말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여인”은 선행이 의미된다.

그들은 포로로, 전리품으로 만들었다. 이는 그들은 그것들을 홀랑 벗겼고 악용했음을 의미한다. 이는 시리즈의 의미들부터 분명해진다.

그리고 그 집에 있었던 모든 것. 이는 교회 속의 모든 것을 의미한다. 이는 “집”의 의미가 선 측면에서의 교회이다로부터, 고로 교회의 모든 것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더불어 이 구절의 끝부분에서 집의 언급이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30-31절. 그리고 야곱은 시므온과 레위에게 말했다, 너희는 나에게 화를 끼쳐 나로 하여금 이 토지의 주민, 가나안족과 브리스족에게 악취를 내게 하였다. 그리고 나는 숫자에서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그리고 그들은 다함께 합세해 나를 칠 것이다, 그리고 나는 멸망할 것이다, 나와 내 집도 말이다. 31 그리고 그들이 말했다, 그가 우리의 누이를 창녀 같이 취급함이 옳은 것입니까?”

그리고 야곱은 말했다. 이는 외적인 고대 교회를 의미한다. 이는 야곱이 표현함이 고대 교회이다로부터 분명해진다. 그리고 고대 교회, 모두 각각의 교회 같이 외적 측면과 내적 측면을 지니는 바, 말씀에서 야곱에 의해서는 외적 교회가, 이스라엘에 의해서는 내적 교회가 표현되어진다.

시므온과 레위에게. 이는 영적인 것들과 천적인 것들의 표현을 의미한다. 이는 시므온의 표현함이 신앙, 고로 반대적 의미는 거짓이다로부터; 레위가 표현함은 사랑인데, 반대적 의미로는 악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러므로 여기서 그들은 영적이고 천적인 것들의 표현을 표시하는데, 그 이유는 신앙 속의 것들은 영적인 것들을, 사랑 속의 것들은 천적인 것들이라 불리우기 때문이다. 시므온과 레위가 이런 것들의 “표현”을 의미한다고 말한 이유는 그들에 의해 어떤 인물을 의미하지 않고 어떤 것(thing)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고로 그들이 표현한 것은 실체가 없는 것, 즉 비 물질인 것이다. 야곱의 후손들의 품질이 교회를 설립할 수 없는 지경이라 하더라도, 교회를 표현함이 야곱의 후손들 사이에서 가능할 수 있게 하는 것은 그들이 주님에 의해 명령된 의례를 바깥쪽 형체에서 엄격히 준수하는 것이다. 그 이유가 여기서 교회를 표현한다고 말하는 범위는 교회의 껍질만을 말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구절에서도 “시므온과 레위”에 의해 영적, 천적인 것들이 의미된다.

너희는 나에게 화를 끼쳐 나로 하여금 이 토지의 거주민에게 악취를 내게 하였다. 이는 고대 교회 속에 있었던 이들이 그들을 몹시 싫어했을 것임을 의미한다. 이는 “나에게 화를 끼쳐, 나로 냄새를 풍기게 만들었다”의 의미가 그들로 몹시 싫어하게 느끼게 함이다로부터; 그리고 “토지의 거주민”의 의미가 여기서는 고대 교회 속에 있는 이들이다로부터 알려진다. 그 이유가 “토지”에 의해 교회가 의미되기 때문이다, 고로 “토지의 거주민들”에 의해 교회 속에 있는 이들, 여기서는 고대 교회 속에 있는 이들이 의미되는 이유는 이 교회가 가나안의 토지에 있는 몇 나라들 사이에 잔존하였기 때문이다. 이 고대 교회가 모두 멸해질 때까지 야곱으로부터 튀어나온 사람들 사이에 표현뿐인 교회의 출현은 있지 않았다. 다시 말해 창세기 15:16에서 말해진 바대로, 토지의 거주민의 불법이 극점에 이를 때까지 야곱의 후손들의 가나안의 토지로의 입장은 승인되어지지 아니하였다; 그 이유가 이전 것이 황폐될 때까지 새로운 교회의 출현은 없기 때문이다.

가나안족과 브리스족에게. 이는 선과 진리 안에 있는 이들을 의미한다. 이는 “가나안족”의 의미가 교회의 선 안에 있는 이들을; “브리스족”은 교회의 진리 안에 있는 이들을 의미함에서 알게 된다. 두 민족이 이런 의미를 가지는 이유는 고대 교회가 거기서 그들 사이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가나안의 토지에 태고 교회의 사람이 존재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고대 교회의 사람들, 특히 “히브리”라 일컬어진 고대 교회인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가나안의 토지의 거주민들은 일반적으로 “히브리인들”이라 불리운 이유 때문이다 (창. 40:15), 그리고 또한 그들은 제단들을 가졌고, 제물을 바쳤다. 그러므로 그들이 우상숭배자가 된 이후 그 제단을 파괴함이 말씀 안에서도 자주 언급되고 있다. 그러므로 교회, 또는 교회의 어떤 것이 남아있는 한, 교회의 선이 “가나안족”에 의해, 교회의 진리가 “브리스족”에 의해 의미된다. 그러나 그들과 더불은 교회의 어떤 것이 극점에 도달할 경우, 악이 “가나안족”에 의해, 거짓은 “브리스족”에 의해 의미된다.

그리고 나는 숫자에서 [적은 바]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이는 그것은 쉬울 것임을 의미한다. 이는 “숫자에서 적은 바 죽을 수밖에 없다”의 표현의 의미로부터 알게 된다; 그러나 내적 의미에서의 시리즈에 일치할 경우, 이는 양이 아닌 질을 말하는 바, 쉬운 것을 의미한다. 이를 뒤집어 말하여, “그들이 모이면 숫자가 많다”라고 읽을 수도 있는 바, 야곱쪽은 이들에게 쉽게 멸망당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은 다함께 모여 나를 칠 것이다, 그리고 나는 파괴될 것이다. 이는 그러므로 해서 고대 교회는 멸해질 것임을 의미한다. 이는 “다함께 모임”, “나를 침”, “파괴됨”의 의미가 결과적으로 멸망함을 예상하고 있기 때문이다. 고대 교회가 뜻해지는 이유는 야곱이 자신과 자신의 집을 두고 말하기 때문인데, 야곱은 여기서 고대 교회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와 내 집도. 이는 진리와 선에 관하여를 의미한다. 여기서 “나”는 야곱인데, 여기서 그의 표현은 진리 측면에 관련되는 교회인데, 이는 앞에서 많이 살펴왔다; 즉 그는 자연 평면에 있는 신성한 진리를 표현한다는 것이다. 지금 표현함의 측면만 말해보면, 그는 최고 의미에서 자연 속의 신성한 진리에 관련하여 주님을 표현한다, 또한 자연 안에 있는 신성한 진리에 관련된 주님의 왕국을 표현한다, 결과적으로 진리 측면에서의 교회를 표현한다; 그 이유가 이것들은 서로가 상응하기 때문이다; 즉 그분의 왕국과 교회 안에 있는 모든 진리는 주님의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선 측면에서의 교회가 “내 집”에 의해 의미되는 것은 “집”의 의미가 선 측면에서의 교회이다로부터 분명해진다.

그리고 그들은 말했다. 이는 응답을 의미한다. 이는 별도의 설명이 필요 없을 것이다.

그가 우리의 누이를 창녀 같이 취급함이 옳은 것입니까? 이는 그들이 애착을 가지고 있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이는 디나가 더럽혀진 후, 또는 창녀가 된 이후, 디나의 표현함이 거짓들에 애착함이다로부터, 고로 부패된 교회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는 결과적으로 진리에 어떤 애착도 더 이상 있지 않았다는 것이다.
**************************************

창세기 제 35 장

성경: 창세기 35장

1. 그리고 하느님께서 야곱에게 말하셨다, 일어나라, 벧엘로 올라 가라, 그리고 거기서 거주하 라. 그리고 거기에 네가 네 형 에서를 피해 도망할 때 너에게 나타난 하느님께 제단을 만들어라.
2. 그리고 야곱은 그의 집안 식구들에게, 그리고 그와 함께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말했다, 너희 가운데 있는 이방인들의 신들을 내던져라, 그리고 자신들을 깨끗하게 하여라, 그리고 너희들의 의복을 갈아 입어라.
3. 일어나 벧엘로 올라 가자, 그리고 나는 거기에 내 곤경의 날에 나에게 대답하셨고, 내가 걷는 길에서 나와 함께 해주셨던 하느님께 제단을 만들 것이다.
4. 그리고 그들은 야곱에게 그들의 손에 있었던 이방인들의 모든 신들을, 그리고 그들의 귀에 달았던 귀걸이를 주었다. 그리고 야곱은 그것들을 세겜 근처였던 상수리나무 아래에 숨겼다.
5. 그리고 그들은 여행했다. 그리고 하느님의 공포가 그들 주위에 있는 성들을 덮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야곱의 아들들을 추격하지 아니했다.
6. 그리고 야곱은 루즈에 왔다, 이곳은 가나안의 땅 안에 있다, 이것은 벧엘이다, 야곱과 그와 함께 있는 모든 사람이 왔다.
7. 그리고 그는 거기에 제단을 건축했다, 그리고 그 장소를 엘-벧엘이라 불렀다. 그 이유는 그가 그의 형 앞에서부터 도망할 때 신들(the gods)이 그에게 밝히 알려졌었기 때문이다.
8. 그리고 리브가의 유모 드보라가 죽었다, 그리고 그녀는 벧엘 아래로부터 상수리나무 아래 매장되었다; 그리고 그는 그것을 알론-바굿이라 불렀다.
9. 그리고 하느님은 그가 밧단-아람에 왔을 때 야곱에 의해 다시 보여졌다, 그리고 그에게 복을 주셨다.
10. 그리고 하느님께서 그에게 말하셨다, 네 이름은 야곱이다. 네 이름은 야곱이라 더 이상 부르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네 이름일 것이다. 그리고 그분은 그의 이름을 이스라엘이라 부르셨다.
11. 그리고 하느님께서 그에게 말하셨다, 나는 전능한 하느님이다. 열매를 많이 맺고 번성하 라. 나라들과 나라들의 단체가 너로부터 있을 것이다, 그리고 왕들이 네 허리에서 나오리 라.
12. 그리고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준 토지를 나는 너에게 줄 것이다, 그리고 나는 너 뒤의 네 씨에게 이 토지를 줄 것이다.
13.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그와 더불어 말하셨던 장소에서 그의 위쪽으로부터 올라 가셨다.
14. 그리고 야곱은 그분께서 자기에게 말하셨던 장소에 기둥, 돌 기둥을 세웠다. 그리고 그는 그 위에 음료 공물을 부었다, 그리고 그 위에 기름을 부었다.
15. 그리고 야곱은 하느님께서 자기에게 말하셨던 이곳의 이름을 벧엘이라 불렀다.
16. 그리고 그들은 벧엘로부터 여행했다. 그리고 에브라데로 가되 아직은 그 토지에 있을 즈음 라헬이 해산하였다, 그리고 그녀는 출산에서 참기 어려운 것들을 겪었다.
17. 그리고 그녀의 해산의 고통이 극에 달할 즈음 산파가 그녀에게 말했다, 걱정하지 말라, 그 이유가 이 또한 당신에게 아들이다.
18. 그리고 그녀의 혼이 떠나려 하여 그녀가 죽으려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그의 이름을 베노니라 불렀다. 그리고 그의 아버지는 그를 베냐민이라 불렀다.
19. 그리고 라헬은 죽었다. 그리고 에브라데로 가는 길에 매장되었다. 이곳은 베들레헴이다.
20. 그리고 야곱은 그녀의 무덤에 기둥을 세웠다. 이것은 오늘날까지 라헬의 무덤의 기둥이다.
21. 그리고 이스라엘은 여행했다, 그리고 그의 천막을 에델 망대 너머로 펼쳤다.
22. 그리고 이스라엘이 그 토지에 거주하고 있는 때였는데 르우벤이 가서 그의 아버지의 첩, 빌하와 누웠다, 그리고 이스라엘이 들었다. 그리고 야곱의 아들들은 열둘이었다.
23. 레아의 아들들은 르우벤 야곱의 장자, 시므온, 레위, 유다, 잇사갈, 스불론이다.
24. 라헬의 아들들은 요셉과 베냐민이다.
25. 그리고 라헬의 하녀 빌하의 아들들은 단과 납달리이다.
26. 그리고 레아의 하녀 질바의 아들들은 갓과 아셀이다. 이들은 야곱의 아들들인데, 밧단-아 람에서 그에게 출생되어졌다.
27. 그리고 야곱은 기럇-아르바, 마므레로 가서 그의 아버지 이삭에게 왔다. 이곳은 헤브론이 다, 여기서 아브라함과 이삭이 체류했다.
28. 그리고 이삭의 날들은 일백 팔십 년이었다.
29. 그리고 이삭은 기한이 만료되어 죽었다, 그리고 그는 충분한 날들을 살아 늙고 그의 백성들에게로 거두어졌다. 그리고 에서와 야곱이 그를 매장했다.

각 절의 내적 의미

1-4절. 그리고 하느님께서 야곱에게 말하셨다, 일어나라, 벧엘로 올라 가라, 그리고 거기서 거주하라. 그리고 거기에 네가 네 형 에서를 피해 도망할 때 너에게 나타난 하느님께 제단을 만들어라. 2 그리고 야곱은 그의 집안 식구들에게, 그리고 그와 함께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말했다, 너희 가운데 있는 이방인들의 신들을 내던져라, 그리고 자신들을 깨끗하게 하여라, 그리고 너희들의 의복을 갈아 입어라. 3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자, 그리고 나는 거기에 내 곤경의 날에 나에게 대답하셨고, 내가 걷는 길에서 나와 함께 해주셨던 하느님께 제단을 만들 것이다. 4 그리고 그들은 야곱에게 그들의 손에 있었던 이방인들의 모든 신들을, 그리고 그들의 귀에 달았던 귀걸이를 주었다. 그리고 야곱은 그것들을 세겜 근처였던 상수리나무 아래에 숨겼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야곱에게 말하셨다. 이는 야곱이 지금 표현하는 것과 같은 신성으로부터 자연적 선이 지각함을 의미한다. 말씀의 역사물에서 “말하다, to say”는 지각하다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 말하셨다”는 신성으로부터 지각함을 표시한다; 그리고 야곱의 표현함이 여기서 최고 의미에서는 자연적 선 측면에서의 주님이시다. 야곱이 등장하는 앞 페이지들에서 그가 말씀 안에서 표현하는 것들을 살펴왔는데, 그는 여러 가지 것들을 표현해 왔는데, 이를 간략히 정리해보자:
최고 의미에서 야곱은 일반적 측면에서의 주님의 신성한 자연 평면을 표현한다. 그분이 그분의 자연 평면을 신성이 되게 하셨을 때, 이 때는 처음의 때와는 다르셨다. 그러므로 야곱은 다양한 것들을 표현했다; 즉 처음에는 진리 측면에서의 주님의 자연 평면을, 그 다음 발전해가는 중간 선상에서는 선으로부터의 진리 측면에서의 주님의 자연 평면을, 마지막으로는 선 측면에서의 주님의 자연 평면을 표현했다. 그 이유가 주님의 신성이 되심은 진리로부터 진리의 선으로,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선이 되심이셨기 때문인데, 이는 자주 언급했던 대목이다. 지금은 이 세 부분 중에서 마지막에 해당되는 부분, 즉 자연적 선 측면에서의 주님을 표현한다. 야곱이 선 측면에서 주님의 신성한 자연 평면을 표현하는 이유는 이것이 마지막 단계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주님께서 그분의 자연 평면을 신성으로 만드셨을 때의 발전 단계였는데, 이는 그분이 인간을 거듭나게 하실 때도 비슷하다; 그 이유는 주님은 그분의 인간을 신성으로 만드신 질서와 같은 질서로 인간을 새로이 만드심을 기뻐하시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인간의 거듭남은 주님의 신성이 되심의 형상인데, 이는 반복적으로 서술해오고 있다. 주님이 인간을 새로이 만드실 때, 처음에 인간에게 신앙의 진리들을 가르치신다, 그 이유가 신앙에 관한 진리 없이 인간은 주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천국과 지옥이 어떠한지를, 그것들이 존재하는지를 아예 알지도 못하고 있기에, 더욱이 그는 주님에 관련한 무수한 사항들을, 천국과 땅에 있는 그분의 왕국에 관하여, 게다가 지옥에 관련된 사항에 관하여 알지 못한 채로 있기 때문이다.
그가 위와 같은 사항들을 배우기 이전, 그는 신앙의 진리로부터의 선이 무엇인지를 알 수 없다; 그 이유는 이 선은 시민적, 도덕적 규례나 법들로부터 알게 되는 시민적, 도덕적 선과 다르기 때문이다. 이런 선은 교회 밖의 민족들이나 나라들도 알 수 있는 선이다; 신앙의 진리로부터의 선은 영적 선이다; 이 선은 말씀에서 선행이라 불리운다; 이 선은 일반적으로 보면, 이기적인 이유 없이, 고로 애착의 기쁨으로부터 타인에게 선을 뜻하고 행하는 것이다. 이 선이 영적 선이고, 이 선은 신앙의 진리들을 수단으로 하지 않고는 이 선의 수준에 도달할 수 없다. 따라서 이 진리들은 말씀을 수단으로, 말씀을 설교함으로 주님에 의해 가르쳐진다. 인간이 신앙의 진리들을 배운 이후, 그는 진리를 뜻하는 쪽으로, 진리를 기꺼이 행하려는 쪽으로 주님에 의해 점진적으로 인도되어진다. 이 진리는 진리로부터의 선이라고 불리운다; 그 이유는 진리로부터의 선은 의지와 행동에 있는 진리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이 진리의 선이라 불리우는 이유는 교리 속에 있어 왔던 진리가 생활 속에 있기 때문이다. 마지막 단계는, 인간이 선을 뜻함에서, 즉 의지로부터 선을 뜻함으로부터 기쁨을 지각할 때, 이 선은 진리로부터의 선(진리의 선)이라 더 이상 불리우지 않고, 선이다. ; 그 이유가 그 때 그는 거듭나진 상태여서, 그는 진리로부터 선을 더 이상 뜻하지 않고, 오히려 선으로부터 진리를 실현해간다; 그리고 이때 그가 행한 진리는 마치 선인 것처럼 있다; 그 이유가 이 진리는 근원을 선으로부터 가지고 진리의 본질을 파생시키기 때문이다. 이상의 설명으로부터 야곱이 최고 의미에서 선 측면에서 주님의 자연 평면을 표현하는 이유를 알았을 것이다. 여기서 야곱이 이 선을 표현하는 이유는 내적 의미에서 더 전진함이 취급되기 때문, 즉 “이스라엘”인 자연 평면의 내면의 것들을 향하여 전진함이 취급되기 때문이다 (4536항). 인간과 더불은 진리가 선이 될 때까지 주님에 의해 거듭나지는 누구도 이 내면의 것들 쪽으로 인도되어질 수 없다.

일어나라, 벧엘로 올라 가라. 이는 신성한 자연 평면에 관하여 지각함을 의미한다. 이는 “일어남”의 의미가 승강함이다로부터, 여기서는 신성쪽으로 자연 평면이 승강함이다; 그리고 “올라가는” 것의 의미가 더욱 내면들을 향함인데 이는 아래에서 설명한다; 그리고 “벧엘”의 의미가 자연 평면에 있는 신성, 또는 질서의 최말단에 있는 신성이다로부터. 그 이유가 원어에서 “벧엘”이 “하느님의 집”을 뜻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느님의 집은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이 있는 곳이기에, 대략적 의미에서 “벧엘”은 이런 지식들을 의미한다. 그러나 내면들은 질서의 최말단들에서 마감되고 종결되고, 거기서 다함께 있어, 마치 한 집 안에 다함께 거주하듯 하여 있기에, 그리고 인간에 있는 자연 평면은 그의 내면들이 종결되는 그의 최말단이기에, “벧엘”, 또는 “하느님의 집”은 자연 평면도 의미한다, 그리고 꼼꼼히 말하면 자연 평면에 있는 선을 의미한다; 그 이유가 “집”은 내적 의미에서 선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더욱이 지식들은 자연 평면에, 또는 질서의 최말단에 있다.
“올라감”이 내면들을 향하여를 표시하는 이유는 내면의 것들이 보다 더 높은 것들이라 불리우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러므로 내면의 것들을 향하여 발전함이 내적 의미에서 취급될 때, “올라감”이라는 말이 채용되는데, 마치 이집트로부터 가나안으로 “올라감”의 경우와 같다, 그리고 가나안의 토지 자체 안에서 “올라감”은 내면의 부분들쪽으로 향하는 것, 내면의 부분들로부터 예루살렘으로, 그리고 예루살렘 자체에서는 거기 있는 하느님의 집으로 향하여 올라가는 것이다. 이집트로부터 가나안으로 “올라감”에 관한 구절로는 모세의 책에서:
바로가 요셉에게 말했다, 올라가서 네 아버지를 매장하라; 그리고 요셉은 올라갔다, 그리고 바로의 모든 종들도 그와 함께 올라갔다; 그리고 그와 더불어 병거와 마병들도 올라갔다
(창. 50:6, 7, 9).
사사기서에서:
그리고 여호와의 천사가 길갈로부터 보김으로 올라갔다, 그리고 그는 말했다, 나는 너를 이집트로부 터 올라가게 만들었다 (사. 2:1);
위에서 “이집트”는 내적 의미에서 기억 속의 지식을 의미한다. 이 지식은 주님의 왕국 속의 것들을 납득하는데 도움을 준다; 그리고 “가나안의 토지”는 주님의 왕국을 의미한다. 그리고 기억 속의 지식들은 보다 낮은 것들, 같은 말로 외면의 것들이고, 주님의 왕국의 것들은 보다 높은 것들, 같은 말로 내면의 것들이기에, “이집트로부터 가나안의 토지로 올라간다”라고 말해지고 있다, 그 반대의 경우는 “가나안으로부터 이집트로 내려감”이다 (창. 42:2, 3; 43:4, 5, 15 등등).
가나안의 토지 자체 안에서 “올라감”은 그것의 내면의 부분쪽으로 인데, 여호수아서에서:
여호수아가 말했다, 가서 토지를 정탐하라; 그리고 사람들이 올라가서 아이(성)을 정탐했다; 그리고 그들이 여호수아에게 되돌아와서 말했다, 모든 백성들이 올라가지 않아도 된다; 약 이천 명, 또는 삼천 명의 남자들이면 됩니다; 그리하여 삼천 명의 남자들이 그쪽으로 올라갔다
(여. 7:2-4);
“가나안의 토지”는 주님의 왕국을 의미하고, 가나안의 최말단 경계들로부터 더 멀리 떨어진 부분들은 내면의 것들이 의미된다, 그러므로 “올라감”이라는 말이 여기서 사용된다. 그리고 둘러싸인 부분들로부터 예루살렘까지; 그리고 예루살렘에서 하느님의 집까지의 경우도 마찬가지 이다 (왕상 12:27, 28; 왕하. 20:5, 8; 마. 20:18; 막. 10:33; 눅. 18:31; 등등). 그 이유가 예루살렘에 의해 가나안의 가장 깊은 곳이 의미되기 때문, 고로 주님의 영적 왕국이 의미되기 때문; 그리고 하느님의 집은 예루살렘의 가장 깊은 곳이기 때문에 하느님의 집에 의해서는 주님의 천적 왕국이 의미된다, 그리고 최고 의미에서는 주님 자신이 의미된다. 이로부터 사람들은 그것들쪽으로 “올라간다”라고 말했다. 이상으로부터 “일어나라, 벧엘로 올라가라”에 의해 내면들을 향하여 발전함이 의미됨을 알게 되는데, 이 주제가 이 장에서 다루어지고 있다.

그리고 거기서 거주하라. 이는 생활(삶)을 의미한다.

그리고 거기에 너에게 나타나셨던 하느님에게 제단을 만들어라. 이는 거기 있는 거룩한 것을 의미한다. 이는 “제단”이 주님을 표현하는 제일의 표현물이다로부터; 그러므로 “하느님께 제단을 만드는” 것은 예배의 거룩한 것을 의미한다로부터 알게 된다.

네가 네 형 에서를 피해 달아날 때. 이는 진리가 선 앞에 놓여있었을 때를 의미한다. 이는 에서의 표현함이 주님의 신성한 자연 평면에서의 신성한 선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여기서의 의미가 진리가 선 앞에 놓였을 때이다는 것은 야곱에 관하여 설명한 대목의 일부로부터 보여진다 (창. 27장); 즉 그가 에서 앞에서 도망하는 대목인데, 그 도망한 원인은 그가 에서로부터 생득권을 가져 갔기 때문이다. 이것에 의해 진리가 자체를 선 앞에 놓은 것이 의미되었다; 그 이유가 거기서 야곱은 주님의 자연 평면 속의 진리를, 에서는 선을 표현했기 때문이다. 진리가 선 앞에 자체를 놓는 이유는 누군가가 거듭나질 때, 진리가 외관상으로는 첫째 자리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거듭나진 이후 선이 첫째 자리에, 진리는 둘째 자리에 있는다. 이로부터 , “네가 네 형 에서를 피해 도망할 때”가 진리가 선 앞에 놓였을 때를 의미함을 알게 된다.

그리고 야곱은 그의 집안 식구들에게, 그리고 그와 함께 있는 모든 이들에게 말했다. 이는 당시 있었던 것 같이 자연적 선에 의해 배열됨을 의미한다. 이는 “자기 집안 식구들에게, 그리고 그와 함께 있는 모든 이들에게”의 의미가 배열함이다로부터; 그리고 여기서 야곱의 표현함이 자연적 선이다로부터 알게 되는데, 그 이유는 지금 취급되는 주제가 선에 의해 진리가 배열됨을 취급하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영적 선이 자연적 마음에서 첫 부분에서 행동하기를 시작할 때, 거기 있는 진리들을 질서 안으로 배열하기 때문이다.

너희들 가운데 있는 이방인들의 신들을 내던져라. 이는 거짓들은 거절해야 함을 의미한다. 이는 “내던짐”의 의미가 거절함이다로부터; 그리고 “이방인들의 신들”의 의미가 거짓들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말씀에서 “신들”은 진리들을 의미하나, 반대적 의미에서는 거짓들을 의미한다; 그리고 교회 밖에 있는 이들이 이방인들이라 불리우고, 결과적으로 거짓들과 악들 안에 있는 이들인 바, “이방인들의 신들”은 거짓들을 표시한다.

그리고 자신들을 깨끗이 하라 그리고 의복을 갈아 입으라. 이는 거룩함이 입혀지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깨끗이함”, “순수해짐”의 의미가 성별되어짐 이다로부터; 그리고 “의복을 갈아 입음”의 의미가 입는 것, 여기서는 거룩한 진리들을 입는 것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 이유가 말씀의 내적 의미에서 “의복들”은 진리들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의복을 갈아 입는 것이 교회에서 받아진 표현물이다는 것은 분명하나, 내적 의미에서 의복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알지 않으면 의복이 표현하는 것을 알 수 없다. 여기서 취급된 주제가 거짓의 거절과 자연 평면에서 선에 의해 진리들이 배열됨인 바, 그들이 옷을 갈아 입는 것이 야곱에 의해 명령되었다.
의복을 갈아 입는 것이 거룩한 진리들이 입혀지는 표현물이다는 것은 말씀의 다른 구절로부터 알는지 모른다. 이사야서에서:
깨어라, 깨어라, 오 예루살렘아, 네 강함을 입으라, 오 시온아, 치장된 네 옷을 입으라. 오 예루살렘, 거룩한 성아; 그 이유는 할례받지 않은 자들과 불결한 자들이 더 이상 네게로 계속 오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52:1);
“시온”이 천적 교회이고, “예루살렘”이 영적 교회이고, 천적 교회는 주님을 사랑함으로부터 선 안에 있는 교회이고, 영적 교회는 신앙과 선행으로부터 진리 안에 있는 이들이기에, “강함”은 시온을 서술하고, “의복”은 예루살렘을 서술한다; 그리고 그것으로 그들이 깨끗해진다가 의미된다.
스가랴서에서:
여호수아가 더러운 옷을 입고, 천사 앞에 섰다; 그리고 [천사가]가 대답하여 자기 앞에 서있는 이들에게 말했다, 말하기를, 여호수아로부터 더러운 것을 제거하라; 그리고 그에게 말했다, 보라, 나는 너희가 의복을 갈아 입음으로 너희의 불법이 너희를 지나가게 했다 (슥. 3:3, 4);
위 구절로부터 분명해지는 바, 의복을 제거하고, 의복을 갈아 입음이 거짓들로부터 순수해짐을 표현했다는 것이다, 그 이유가 “나는 너희의 불법이 너희를 지나가게 했다”고 말해지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사람들은 의복을 갈아 입는 대목이 말씀에서 간혹 있는데, 그 이유는 이로 인해 표현물이 진열되기 때문이다.
내적 의미에서 새 교회를 의미하는 새 성전을 취급하는 에스겔서에서 의복을 갈아 입음에 의해 표현되는 것을 아래에서 알게 된다:
성직자가 안으로 들어갈 때, 그들은 거룩한 장소의 안에서 바깥뜰로 나가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자기들을 섬긴 의복을 놓아두어야 하는데, 그 이유는 그 의복은 거룩함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른 의복을 입을 것이다, 그리고 백성들에 속한 것들에 접근할 것이다 (겔. 42:14).
그리고 다시:
그들이 바깥뜰로 백성에게로 나갈 때, 그들은 거룩한 장소에서 자기들을 섬긴 의복을 벗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들을 거룩함의 방에 놓아둘 것이다, 그리고 다른 의복들을 가지고 백성들을 성별되게 할 것이다 (겔. 44:19).
모든 이가 알 수 있는 것은, 여기서 새 성전과 거룩한 성과 토지에 의해, 위 44장 전, 후에서의 묘사와 예언자에 의해 서술되는 것에 의해 어떤 새로운 성전이나 새로운 토지의 언급함을 뜻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이유가 이것은 의식이나 의례들이 폐지되지 않은 채로 새로운 것이 설립되는 듯한 언급이기 때문; 또한 그들 사이에 유업으로 상속되는 토지를 나눔이 이스라엘 지파의 이름에 의해 언급되나 이 지파들은 북쪽으로 끌려가서 영영 되돌아 오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이로 미루어 볼 때, 여기서 언급되는 의식들에 의해서는 교회의 영적, 천적 사항들을 의미한다는 것, 이와 비슷한 것으로는 아론이 성직 임무를 수행할 때 의복을 갈아 입음에 의해 의미된 것과도 비슷하다; 모세의 책에서:
그는 태워 바침을 만들 때, 그는 자기 의복, 그리고 그의 고운 아마포 반바지를 입을 것이다, 재를 그는 제단 옆에 놓을 것이다. 후에 그는 자기 의복을 벗을 것이다, 그리고 다른 의복을 입을 것이다, 그리고 재를 진영 밖 깨끗한 장소에 가져다 놓을 것이다, 이렇게 하여 그는 태워 바침을 만들어라 (레. 6:9-11).
깨끗해지는 것이 성별되어짐을 표시한다는 것은 명령되어졌던 깨끗해짐으로부터, 즉 그들은 자기들의 살과 의복을 씻어야 한다는 것, 그리고 그들은 분리함의 물로 뿌려져야 한다는 것으로부터 알는지 모른다. 이런 행동들로부터 누구도 성별되어지지 않는다는 것은 영적 인간에 관하여 어떤 지식을 가진 자는 알는지 모른다; 인간을 입힌 의복과 불법과 죄는 무엇에서 같은 것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그럼에도 그들이 자신들을 깨끗이 한 후, 그들은 거룩해질 것이라고 때때로 말해지고 있다. 이로부터 분명해지는 바, 이스라엘족에게 강요된 의식들이 단순하게 거룩하였던 이유는 그것들이 거룩한 것들을 표현했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표현물이었던 그들은 그들의 개인 인물 차원에서는 거룩하게 된 것이 아니다는 것, 단지 표현물에 의해 추상적으로 표현된 거룩함이 그들과 더불어 있는 영들을 감동시킨 것, 그리고 천국에 있는 천사들을 감동되게 한 것 뿐이다.
인간이 생존하기 위하여 천국과 교통함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는 필요성, 그리고 이것은 교회를 수단으로 한다는 것, 이와 달리해서는 그들은 짐승 같이 되어진다는 것, 그러면 내적, 외적 묶음이 결핍된다는 것; 고로 타인을 파괴하려드는 데에 어떤 제한도 없어 결국 서로는 파멸되고 만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교통함이 어떤 교회를 수단으로 가능하지 않자, 주님에 의해 설비된 것은 표현물을 수단으로 교통함이 기적 같이 결과되게 하셨다. 성별됨 (성화, sanctification)이 씻음과 깨끗해짐의 의식을 수단으로 표현되어진 것은 말씀의 여러 구절로부터 분명해진다. 여호와께서 시내산에 내려오셨을 때, 그분은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오늘과 내일 그들을 성별되게 하라, 그리고 그들로 자기들의 의복을 빨게 하라, 그리고 셋째 날을 준비하라 (출. 19:10, 11).
에스겔서에서:
나는 네 위에 깨끗함의 물을 뿌릴 것이다, 그리고 너는 모든 네 불결함으로부터 깨끗해질 것이다, 그리고 나는 네 모든 우상들로부터 너를 깨끗하게 할 것이다, 그리고 나는 네게 새로운 심정을 줄 것이다, 그리고 나는 네 한가운데에 새로운 영을 놓을 것이다 (겔. 36:25, 26);
위에서 “깨끗한 물을 뿌리는” 것은 심정이 순수해짐을 표현했음이 분명하다; 고로 “깨끗해지는” 것은 성화되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일어나 벧엘로 올라 가자. 이는 신성한 자연 평면을 의미한다.

그리고 나는 거기서 하느님께 제단을 만들 것이다. 이는 거룩함에서 내면의 것들이 종결되어짐을 의미한다. “하느님께 제단을 만듦”의 의미가 예배의 거룩함이다로부터; 그 속에서 내면의 것들이 종결됨이라고 말한 이유는 그가 “거기서”, 즉 벧엘에서 제단을 만들게 되었기 때문이다. “벧엘”에 의해 자연 평면이 의미되고, 이 안에서 내면의 것들이 종결되어진다.

내 곤경의 날에 나에게 대답하셨던 분. 이는 진리를 선 앞에 놓고 있는 상태에서를 의미한다. 이는 “날”의 의미가 상태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내 곤경의 날”에 의해 선 앞에 진리를 놓는 상태가 의미되어진다는 것은 앞에서 설명한 대목으로부터 알는지 모른다; 그 이유가 “곤경의 날”이 “네가 네 형 에서를 피해 도망할 때”의 구절에서와 같은 의미를 포함하기 때문이다.

내가 걷던 길에서 나와 함께 계셨던. 이는 그분의 신성한 섭리를 의미한다. 이는 “그가 걷는 길에서 누군가와 더불어 있다”에서 누군가가 신성, 또는 주님이시라고 단언될 경우, 신성한 섭리가 의미된다; 그 이유가 설비하심은 누군가와 더불어 현존하는 것, 그리고 그를 악들로부터 방어하시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은 야곱에게 그들의 손에 있었던 이방인들의 모든 신들을 주었다. 이는 가능한한 많은 모든 거짓들을 거절했음을 의미한다. 이는 “이방인들의 신들”의 의미가 거짓들이다로부터; 그리고 “그들의 손에 있었던”의 의미가 가능한한 많이 있다로부터; 그 이유가 “손”은 힘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손에 있다”는 그들의 힘으로부터 있다는 의미이다. “그것들을 야곱에게 줌”은 선이 그것들을 거절했음을 표시한다, 그 이유는 이 장에서 야곱에 의해 자연 평면의 선이 표현되기 때문이다.

그들의 귀에 달았던 귀걸이들. 이는 실제적인 것들을 의미한다. 이는 “귀걸이”의 의미가 순종을 표현하는 휘장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귀”가 순종을 의미하는 이유 때문인데, 그리고 순종으로부터의 것들은 실제적인 것들인데, 그 이유는 순종함은 행동에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실제의 것들이 여기서는 거절되어져야 하는 거짓들이라 단언된다. 여기서 내적 의미에서 취급되는 거짓들을 거절함, 실제에 있는 것들조차 거절함에 대해 조금 더 살펴보자; 인간이 주님으로부터 거듭남을 수단으로 선으로 와서, 선으로부터 진리를 행하기 이전, 그는 진리들과 더불어 혼합된 아주 많은 거짓들을 가지고 있다; 그 이유가 그는 그의 인생 첫 시기인 유아와 어린 시절에서는 신앙의 진리들을 수단으로 그의 생각들이 이끌여 들여진다; 그러나 이 후에는 세상의 외적인 것과 육체의 감각적인 것들로부터 발생하는 생각들을 이끌여 들이는데, 이때 이런 것들은 오류들과 뒤섞여 있어, 결과적으로 거짓들 사이에 뒤섞여 있다. 이런 것들이 실제적으로 사용되는데, 그 이유는 인간이 믿는 것을 행하기 때문이다. 이런 거짓들이 여기서 뜻해진다. 이것들은 인간이 거듭날 때까지, 즉 그가 선으로부터 행동할 때까지 남아 있는다, 그리고 그 다음 선, 즉 선을 통하여 주님께서는 그가 습득한 진리들을 질서 안으로 내려 보낸다, 그리고 이것이 행하여질 때, 거짓들은 진리들로부터 분리되고 제거된다.
이런 사항에 관해서 인간은 아주 무지하다, 그럼에도 그의 초기 시절로부터 그의 마지막 시기에 이르기까지에서 거짓들의 거절과 제거함은 진행된다, 그리고 이것은 모두 각각의 인간에게 해당되고, 특별하게는 거듭나는 이들과 더불어서의 경우이다. 이것은 거듭나지 않는 이들에서조차 거행된다, 그 이유가 그가 성년이 되고, 그의 판단력이 성숙될 때, 그는 어린 시절의 판단들을 무익하고 불합리한 판단으로 간주한다, 고로 자기로부터 아주 멀리 떼어 놓는다. 그러나 거듭나는 자와 거듭나지 않는 자의 차이는 이렇다, 즉 거듭나는 자는 신앙과 선행의 선과 일치하지 않는 것들을 자기로부터 제거한다; 그러나 거듭나지 않는 자는 자기의 사랑의 기쁨과 일치하지 않는 것들을 자기로부터 제거한다. 그러므로 후자는 진리들을 거짓들로, 거짓들을 진리들로 간주한다. 귀걸이에 주목해보자; 이것에는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이마쪽으로 있는 코걸이가 있고, 귀에 매다는 귀걸이가 있다. 이마쪽으로 있는 코에 매다는 것은 “코 보석”이라 불리우고, 선을 표현하는 휘장(배지, badge)이다, 한편 귀에 매다는 것은 순종을 표현하는 휘장이고 “귀걸이”라고 불리운다. 그러나 원어에서는 이 두 종류를 같은 단어로 표현하고 있다.

그리고 야곱은 그것들을 세겜 근처 상수리나무 아래에 숨겼다. 이는 영원히 거절함을 의미한다. 이는 “숨기다”의 의미가 거절하고 죽은 것으로 여겨 매장함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리고 “상수리나무 아래”의 의미가 영원쪽으로 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 이유가 상수리나무는 수명이 매우 긴 나무인 바, 어떤 것을 그것 아래 숨길 때, 영구적인 것이 의미되기 때문이다; 이것은 휩쓸려지는(엉클어지는) 것도 의미한다, 더욱이 불합리적이고 거짓인 것과 엉클어지는 것도 의미된다. 그 이유가 자연 평면의 가장 낮은 수준의 것들은 그것의 지식과 기쁨을 육체의 감각적인 것들로부터, 고로 오류들로부터 파생되게 하는 만큼에서 상대적으로 엉키고 오류적으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상수리나무(oak)”에 의해 자연 평면의 가장 낮은 수준의 것이 의미되는데, 좋은 의미에서는 가장 낮은 수준에 있는 진리와 선들; 반대적 의미에서는 가장 낮은 수준에 있는 거짓들과 악들이 의미된다.
더욱이 거짓들이 거듭난 인간 안에서 제거될 때, 그것들은 자연 평면의 가장 낮은 쪽으로 거절되어진다; 그러므로 인간이 성숙한 판단력과 명민함을 지닐 때, 특히 그가 총명하고, 슬기로울 때, 그것들은 그의 내면의 시각으로부터 더 제거된다. 진리들은 거듭나는 인간과 더불어서는 그의 자연 평면의 가장 깊은 쪽, 거기서 작은 태양 같이 있는 선 근처에 있다; 그리고 이 진리들은 선과의 유사성(혈족 관계)과 친근성(친족 관계)에 따라서 멀리, 또는 보다 가까이의 거리가 정해진다. 오류적인 진리들은 보다 더 바깥쪽 주변에, 거짓들은 가장 바깥쪽으로 거절된다.
“상수리나무”가 자연 평면의 가장 낮은 것인 거짓들을 표시하는 이유는 고대 교회에서, 주님의 왕국을 표현하는 외적 예배가 있었을 때, 어떤 종류의 나무이든 모든 나무들은 영적 또는 천적인 어떤 것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올리브나무와 그것으로부터의 기름은 천적 사랑으로부터 있는 것들을 의미했다; 포도나무와 그것으로부터의 포도주는 선행과 선행애서 파생되는 신앙으로부터 있는 것들을 의미했다; 다른 나무들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즉 삼나무, 무화과나무, 포풀러나무, 너도밤나무, 상수리나무, 등등의 나무는 이 나무들이 구절에서 발견될 때 때때로 그 의미를 설명해왔다. 이런 이유로 나무들의 언급은 말씀에서 자주 있는 편이다; 또한 일반적 측면에서 동산, 작은 숲, 삼림도 그러한데, 사람들은 어떤 특정한 나무 아래에서 자기들의 예배를 가졌다. 그러나 이런 예배가 우상숭배로 돌아섰을 때, 그리고 야곱의 후손과 더불어 교회의 표현물(표현뿐인 교회)이 설립되었을 때는 자칫하면 우상숭배로 전락되기 일쑤였는 바, 나무들, 숲 안에 아주 많은 우상들이 세워졌다. 하여 그들에게는 동산이나 작은 숲, 그 안의 나무 아래에서 예배를 가지는 것을 금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무들은 그것들의 의미함을 지녔다, 그러므로 보다 더 고상한 나무들, 즉 올리브나무, 포도나무, 삼나무 뿐만 아니라, 포풀러, 너도밤나무, 상수리나무 역시 말씀에서 언급될 경우, 고대 교회에서와 같은 의미를 지닌다.
좋은 의미에서 “상수리나무”는 자연 평면의 가장 낮은 수준에 있는 진리들과 선들을 의미하고, 반대적 의미에서는 거짓들과 악들을 의미함이 이 나무가 언급되는 다른 구절에서 의 내적 의미에서 분명해진다. 이사야서에서:
여호와를 버린 자들은 살라질 것이다, 그 이유는 그들은 자기들이 기대했던 상수리나무로부터 부끄러움을 당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너희는 잎들을 내던진 상수리나무 같이, 그리고 물 없는 동산 같이 있을 것이다 (이. 1:28-30).
이사야서에서:
여호아 체바욷의 날이 오만한 자와 비천한 자 모두 위에, 그리고 레바논의 삼나무 위에, 그리고 바산의 모든 상수리나무 위에 있을 것이다 (이. 2:12, 13);
모든 이는 여호와의 날이 삼나무와 상수리나무 위에 있을리 만무하다는 것, 그러나 그것들에 의해 의미된 것들 위에 있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 다시:
신들을 만들어내는 자들이 삼나무를 찍어내고, 너도밤나무와 상수리나무를 가져온다, 그리고 숲의 나무들에서 자신을 위해 힘을 돋운다 (이. 44:14).
에스겔서에서:
그들의 찌름을 당한 자들이 모든 언덕 위에, 산들의 모든 머리 위에, 모두 각각의 푸른 나무 아래, 모두 각각의 엉클어진 상수리나무 아래, 그들이 모든 우상들에게 쉼의 냄새를 주었던 장소에 서 그들의 제단들을 빙둘러 우상들의 한가운데에서 있을 때 너희는 내가 여호와이신 것을 인정할 것이다 (겔. 6:13).
더욱이 고대인들이 언덕들과 산들 위에서 예배를 가졌는 이유는 산과 언덕이 천적인 사랑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배가 우상숭배자들에 의해 집전되었을 때, 여기서와 같이 그것들은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들은 이 예배를 나무 아래에서 드렸던 이유는 이것들이 각 종류에 따라 의미를 지녔기 때문이다. 위 구절의 “엉클어진 상수리나무 아래”는 예배가 거짓들로부터 있었음을 표시한다, 이것은 자연 평면의 가장 낮은 것인데, 그 이유는 가장 낮은 것은 상태가 엉클어져 있기 때문이다. 호세아서에서:
그들은 산들의 머리 위에서 제물을 바친다, 그리고 언덕들 위에서, 상수리나무, 포풀러나무, 그리고 단단한 상수리나무 아래 향을 태운다, 그 이유는 거기로부터의 그늘이 좋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너의 딸들이 매춘을 범하고, 너의 며느리가 간음을 범한다 (호. 4:13);
“매춘을 범하는” 것은 진리들을 거짓화하는 것, 그리고 “간음을 범하는” 것은 선을 악용하는 것이다. 스가랴서에서:
네 문들을 열어라, 오 레바논아, 그리고 불이 삼나무를 삼키게 하라, 그 이유는 장대한 것들이 황폐해 있기 때문이다; 울부짖거라, 너 바산의 상수리나무여, 그 이유는 바잘(Bazar)의 숲이 내려 앉았기 때문이다 (슥. 11:1, 2).

5-7절. 그리고 그들은 여행했다. 그리고 하느님의 공포가 그들 주위에 있는 성들을 덮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야곱의 아들들을 추격하지 아니했다. 6 그리고 야곱은 루즈에 왔다, 이곳은 가나안의 땅 안에 있다, 이것은 벧엘이다, 야곱과 그와 함께 있는 모든 사람이 왔다. 7 그리고 그는 거기에 제단을 건축했다, 그리고 그 장소를 엘-벧엘이라 불렀다. 그 이유는 그가 그의 형 앞에서부터 도망할 때 신들(the gods)이 그에게 밝히 알려졌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은 여행했다. 이는 계속적인 것을 의미한다. 이는 “여행하다”가 잇따르는 것, 고로 계속되는 것, 고로 내면의 것을 향하여 발전함이 계속되는 것이다.

그리고 하느님의 공포가 그들 주위에 있던 성들을 덮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야곱의 아들들을 추격하지 아니했다. 이는 거짓들과 악들이 가까이 올 수 없었음을 의미한다. 이는 “하느님의 공포”의 의미가 방어함이다로부터 인데, 이는 아래에서 살핀다; “그들 주위에 있던 성들”의 의미가 거짓들과 악들이다로부터, “성”은 진짜 의미에서 교리의 진리이고, 반대적 의미에서는 교리의 거짓들이다; 여기서 “성”이 악을 의미하는 이유는 성의 거주민들이 좋은 의미에서는 선을, 반대 의미에서는 악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을 추격하지 않았다”의 의미가 가까이 올 수 없음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하느님의 공포”가 방어함이다는 것은 다른 삶에서 거행되는 것을 가지고 예증해보여야 할 것 같다; 그 이유가 거기에서 지옥들이 천국 가까이 오는 것, 악령들이 천국의 어떤 사회에 접근하는 것이 가능할 수 없기 때문인데, 그 이유는 그들은 하느님의 공포 안에 있기 때문이다. 악령들이 천국의 어떤 사회에 접근할 때, 그들은 근심과 고통 안으로 갑자기 빠져들고 만다. 그들이 감히 대들지 못하는 것이 “하느님의 공포”에 의해 뜻해진다. 하느님 또는 주님이 그들을 공포로 몰아넣는 것이 아니나, 그들이 거짓들과 악들 안에 있기 때문에, 고로 선들과 진리들에 반대되어 있기 때문에 공포가 야기되는 것이다.

그리고 야곱은 루즈에 왔다, 이곳은 가나안의 토지 안에 있다. 이는 이전 상태에서의 자연 평면을 의미한다. 여기는 벧엘이다 이란 신성한 자연 평면을 의미한다. 이는 “루즈”의 의미가 이전의 상태에서의 자연 평면, 또는 인간이었던 자연 자체이다, 그리고 이것이 신성으로 만들어짐이 “이것은 벧엘”에 의해 의미된다. “벧엘”이 명명되는 다른 구절에서도 마찬가지로 언급됨을 볼 수 있다. 즉 여호수아서에서: “유다의 아들들과 요셉의 아들들 사이에 있는 베냐민에게 제비뽑혀진 (토지의) 경계는 루즈쪽으로 나아가서, 루즈 남향 측면, 이것은 벧엘이다” (여. 18:11, 13). 그리고 사사기서에서: “요셉의 가문은 벧엘로 올라갔다, 그리고 벧엘을 정탐했다; 그리고 성의 이름은 옛날에는 루즈였다” (사. 1:22, 23).

4557. 그와 그와 함께 있는 모든 사람들. 이는 거기에 있었던 모든 것과 더불어를, 즉 자연 평면에 있었던 모든 것과 더불어를 의미한다. 이는 “야곱”의 표현함이 거기에 있는 선이다로부터; 그리고 “사람들”의 의미가 진리들이다로부터; 고로 “그와 더불어 있는 사람들”은 이 선으로부터의 진리들을 표시한다. 자연 평면에 있는 모든 것들은 선과 진리에 관련된 것을 낳기에, 본문의 말들에 의해 거기에 있는 모두와 더불어가 의미된다.

그리고 그는 거기에 제단을 건축했다. 이는 신성화됨에 의해를 의미한다. “제단”은 주님을 표현하는 제일의 표현물이다; 그렇기 때문에 예배의 거룩함, 그리고 주님을 서술할 경우, 그분의 신성한 인간, 그리고 이 인간으로부터 진행하는 거룩함 이다. 교회에서 주님을 표현하는 제일의 표현물이 제단이다는 말은 최고 의미에서는 주님의 신성한 인간 측면에서 주님 자신이기도 하다; 이런 의미에서 제단은 주님의 인간 자체이다. “그가 거기에(벧엘에) 제단을 건축함”이 그분의 자연 평면이 신성이 되심을 의미한다; 그 이유가 “벧엘”에 의해 신성한 자연 평면이 의미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그곳을 엘-벧엘이라 불렀다. 이는 거룩한 자연 평면을 의미한다. 이는 “벧엘”이 신성한 자연 평면이다로부터, 그러나 “엘-벧엘”이라 불리울 경우, 이는 신성이 아닌, 거룩한 자연 평면을 의미하게 된다; 그 이유가 주님께서 그분의 인간을 신성으로 만드셨을 때, 먼저 그분은 인간을 거룩하게 만드셨기 때문이다. 인간을 신성으로 만드심과 거룩하게 만드심의 차이는 이렇다: 신성한 것은 여호와 자신이나, 거룩한 것은 여호와로부터 이다. 전자는 신성한 있으심, 후자는 거기로부터 출시됨 이다. 주님께서 자신을 신성이 되게 하셨을 때, 그분은 그분의 인간 또한 신성한 있으심, 또는 여호와로 만드셨다; 그러나 그분이 이를 행하시기 이전, 그분은 그분의 인간을 거룩하게 만드셨다. 이것은 주님의 인간이 신성이 되시는 과정이었다. 그러므로 또한 벧엘은 “엘-벧엘”이라고도 불리우는데, 이는 “엘”에 의해 의미된 것, 즉 “신들이 그에게 밝히 알리었기 때문에”가 더하여진 것이다. 그 이유가 “엘”이 원어에서 “하느님(God)”을 뜻하나 여기서는 복수인 “신들(gods)”인데, 신들은 내적 의미에서 거룩한 진리들을 표시한다. 그러나 이어지는 구절, 15절에서, 야곱은 장소의 이름을 벧엘이라 불렀다고 말해진다, 그리고 첨가되는 말, “하느님께서 그에게 이야기 하셨던”이라고 말하여 단수의 하느님이 말해진다. 그 이유가 “벧엘”은 원어에서 “하느님의 집”이기 때문; 그러나 “엘-벧엘”은 “하느님 하느님의 집”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엘-벧엘”은 거룩한 자연 평면을, 그리고 “벧엘”은 신성한 자연 평면을 표시한다.

그 이유는 거기서 신들이 그에게 밝히 알려졌었기 때문이다. 이는 거룩한 진리들을 의미한다. 이는 “신들”이 거룩한 진리들을 의미함으로부터 알게 된다. 이것들이 야곱에 의해 표현된 선에 인접하여졌다는 것이 “신들이 거기서 그에게 밝히 알려졌다”에 의해 의미된다. 이 장소가 “엘-벧엘”이라 불리운 것, 그럼에도 창. 28:19에서와 창 35:15에서 벧엘로 불리운 것, 여기서 “엘-벧엘”이라 불리울 때는 “신들이 그에게 밝히 알려졌기 때문에”라고 말해져서 복수의 하느님이, 이후 15절에서는 “하느님이 그에게 이야기 하셨던 곳”이라 말하여 단수의 하느님이 언급되는 것은 신비적이다. 이 신비함은 내적 의미로부터가 아니면 알아질 수 없다. 더욱이 많은 다른 신비함들이 여기에도 감추여 있지만, 이것들은 열려질 수 없다.

그가 그의 형 앞에서부터 도망할 때. 이는 진리들이 선 앞에 놓여진 후에를 의미한다. 이는 앞 절에서 같은 말의 언급에서 이미 살폈다.

8절. 그리고 리브가의 유모 드보라가 죽었다, 그리고 그녀는 벧엘 아래로부터 상수리나무 아래 매장되었다; 그리고 그는 그것을 알론-바굿이라 불렀다.

그리고 리브가의 유모가 죽었다. 이는 유전적 악이 추방되었음을 의미한다. 이는 “죽다”의 의미가 끝나다 이다로부터; 여기서는 추방되는 것, 그 이유는 취급되는 주제가 유전적 악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리브가의 유모 드보라의 표현함이 유전적 악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유아에게 자양분을 공급함, 젖을 물림에서 유모(nurse)는 천적 영적인 것(영적 평면의 내적 부분, what is celestial spiritual)을 수단으로 순진이 은근히 심어짐을 의미한다; 그 이유가 젖(milk)이 천적 영적 (평면)을 표시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녀가 젖을 물린 유아는 순진을 표시한다. 그러나 여기서 “리브가의 유모 드보라”에 의해 어머니로부터 받아진 것, 그리고 유아 때에 자양분으로 받아진 것이 의미된다. 이것은 주님께서 싸우셨던 어머니로부터 받으신 유전적 악이었다는 것은 이 유전적 악에 관해 살폈던 대목으로부터 알는지 모른다, 그리고 그분이 이 악을 추방하심으로부터, 그리하여 마지막으로 그분은 마리아의 아들이 아니게 되셨다.
인간은 자기 부모 양쪽으로부터 악을 내려받는다는 것, 이 악이 유전적 악이라 불리운다는 것은 알려진 사실이다. 이렇게 그가 이런 악을 지니고 태어나나, 이 악은 인간이 성년이 되어 그의 이해력과 의지력으로 행동할 때까지 모습을 확실히 드러내지 않는다; 더욱이 유아 시절의 경우에서는 아주 깊이 숨겨져 있다. 주님의 신성한 자비 덕분에 누구도 유전적으로 받아진 것에 대해서는 책임이 없다, 그러나 그가 행한 것, 즉 실제적이 되는 것에서만 그 책임을 물으신다, 그리고 유전적인 것은 인간이 자신의 이해력과 의지력으로 행동할 때까지 실제적이 되어질 수 없다; 그러므로 유아들은 그분으로부터의 유아들과 천사들을 수단으로 인도받는다, 그러므로 유아들은 유전적 악들이 유아들이 행동하는 모든 것에서 잠복하여 있는 동안이라 해도 순진의 상태에서 나타난다. 이 유전적 악은 유아들에게 자양분을 가져다준다, 또는 유모로서 있는다, 그러나 이는 유아들이 자신 스스로 판단할 때 까지이다; 그 다음 그들이 거듭나지고 있다면, 그는 주님에 의해 새로운 유아의 상태 안으로, 그리고 마지막으로 천국의 지혜 안으로 가져다 놓여진다; 그 이유가 진짜 유아, 또는 순진은 지혜 안에 거주하기 때문이다. 차이는 이렇다: 유아의 순진은 밖에 있고, 유전적 악은 안에 있다; 이에 반해 지혜의 순진은 안에 있고, 악은 실제적, 유전적 악 모두 밖에 있다. 이로부터, 그리고 이미 서술해왔던 바로부터 알게 되는 바, 유전적 악은 초기 유아로부터 새로운 유아의 시기까지에서 유모로서 행동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유모”가 유전적 악을 의미하는 것, 또한 천적 영적인 것을 수단으로 순진이 은근히 심어짐 또한 의미한다.
이 장은 내적 의미에서 주님의 자연 평면에서 선을 수단으로 진리들이 배치되고 배열됨을 취급하기에, 그리고 결과적으로 내면의 것들쪽으로 발전함이 취급되기에, 유전적 악의 추방 또한 취급되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리브가의 유모, 드보라가 죽고 상수리나무 아래 매장되었다는 갑작스런 언급이 이 구절에 삽입된 것이고, 위의 설명들을 포함하지 않으면 이 구절에서 드보라의 등장은 시리즈를 훼방놓는 듯한 인상만 풍길 뿐 우리의 이해함과는 너무나 동떨어질 뿐일 것이다.
“리브가의 유모”에 의해 특별하게 의미된 신비함 자체는 아직은 열어질 수 없는데, 그 이유는 열어보이기 전, 알아야 할 사항이 있기 때문이다; 즉 합리성이 자연 평면 안으로 유입됨의 본성, 즉 이것은 두 가지 경로, 하나는 직접적인 경로, 즉 합리성의 선으로부터 자연 평면의 선 안으로 유입되는 것, 또 하나는 간접적인 경로, 즉 합리성의 선으로부터 거기 있는 진리를 통하여 자연적 진리의 선 안으로 유입되는 것이다. “리브가”는 합리성 속의 진리이다; 그리고 “이삭”은 합리성의 선이다; “에서”는 “이삭”인 합리성의 선으로부터 직접적인 유입을 수단으로 있는 자연 평면의 선; “야곱”은 “리브가”인 합리성의 진리를 통한 간접적인 유입을 수단으로 있는 자연 평면의 진리의 선, 또는 자연 평면의 선이다. 이런 사항은 이 구절에서 왜 “리브가의 유모”가 여기서 유전적 악을 의미하고 서술하는지에 대한 신비함을 알기 전에 알고 있어야만 하는 사항들이다. 그 이유는 이런 사항들로부터 이 악의 본성이 알려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녀는 벧엘 아래로부터 상수리나무 아래 매장되어졌다. 이는 영원히 거절했음을 의미한다. 이는 “매장됨”의 의미가 거절되어지는 것이다로부터, 그 이유가 매장된 것은 거절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상수리나무 아래”의 의미가 영원히 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벧엘 아래로부터”가 자연 평면의 바깥을 의미하는데, 그 이유는 아래쪽에 있다는 것의 내적 의미는 바깥이기 때문이다. “벧엘”은 신성한 자연 평면이다.
여기서의 경우는 이렇다: 거듭나아가는 인간에 있는 악, 유전적이든 실제적이든 모두는 무효화되도록 사라져버리는 식의 박멸됨은 있지 않고, 오직 분리되어질 뿐이다, 그리고 주님이 처분하심에 의해 그것들은 주변쪽으로 거절되어진다; 그리고 이 악은 인간과 더불어 영원히 남아 있다; 그러나 주님께서 그의 악을 보류되게 하심으로 그가 선 안에 보존되게 해주신다. 이것이 거행될 때, 이는 마치 악들이 내던져지고 인간은 악들로부터 순수해진 것처럼, “죄 없다고 (justified)” 말해지는 듯 나타난다. 천국의 모든 천사들이 고백하는 바, 자기들로부터서는 악과 악에서 파생되는 거짓밖에 더 없다고, 그러나 주님으로부터서는 선과 선에서 파생하는 진리만 있다고 고백한다.
위 주제를 두고 어떤 다른 견해를 품는 이들, 그리고 세상에서 사는 동안, 자기의 교리로부터 자기들은 의로워졌기에, 자기들은 거룩하다는 것, 유전적이든, 실제적이든 자기들의 악을 청산했다고 자신을 확증한 이들은 그들로부터 있는 것은 악밖에 없다는 것, 그들이 자신들로부터 라고 생각되는 선이 자신들의 것이 아닌 주님으로부터 있는 것임을 생생한 경험으로부터 알 때까지 이 상태 안에 간직된다. 이와 같은 경우는 천사들과 인간 사이에서 거듭나는 이들에 해당된다.
그러나 주님의 경우는 다르다. 그분은 어머니로부터 온 모든 유전적 악을 자신으로부터 제거해서 추방하시고, 내던지셨다. 그 이유가 그분은 그분의 아버지로부터 상속됨에 의해 어떤 악도 가지시지 않았다, 그 이유는 그분은 여호와로부터와 어머니로부터 임신되어졌기 때문이다. 이것이 다른 점이다; 이것이 주님이 정의를 만드심, 거룩함 자체, 신성에 의해 뜻해진 것이다.

그리고 그는 그것을 알론-바굿이라 불렀다. 이는 추방되어진 유전적 악이 있는 자연 평면의 품질을 의미한다. 이는 “이름을 부름”의 의미가 품질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알론-바굿”은 원어에서 “상수리나무가 울다”를 뜻하고, 이 장소가 그렇게 불리운 이유는 “상수리나무”가 가장 낮은 자연 평면을 표시하는데, 이 평면 안으로 유전적 악이 내던져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울다”는 마지막 작별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비록 죽은 육체가 매장을 수단으로 거절되어진다 해도, 그 육체 안에 있던 내면의 것들은 살아 있다 함을 알면서도, 죽은 자를 매장했을 때 죽은 자를 위해 우는 것은 관습화 되어졌다. 그러므로 “알론-바굿”, 또는 “우는 상수리나무”에 의해 의미된 것을 알았을 것이다.

9-13절. 그리고 하느님은 그가 밧단-아람에 왔을 때 야곱에 의해 다시 보여졌다, 그리고 그에게 복을 주셨다. 10 그리고 하느님께서 그에게 말하셨다, 네 이름은 야곱이다. 네 이름은 야곱이라 더 이상 부르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네 이름일 것이다. 그리고 그분은 그의 이름을 이스라엘이라 부르셨다. 11 그리고 하느님께서 그에게 말하셨다, 나는 전능한 하느님이다. 열매를 많이 맺고 번성하라. 나라들과 나라들의 단체가 너로부터 있을 것이다, 그리고 왕들이 네 허리에서 나오리라. 12 그리고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준 토지를 나는 너에게 줄 것이다, 그리고 나는 네 이후 네 씨에게 이 토지를 줄 것이다. 13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그와 더불어 말하셨던 장소에서 그의 위쪽으로부터 올라 가셨다.

하느님은 그가 밧단-아람에서 왔을 때 야곱에 의해 다시 보여졌다, 그리고 그에게 복을 내리셨다. 이는 내면의 자연적 지각을 의미한다. 이는 “하느님이 보여짐”의 의미가 내면의 지각함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러므로 “하느님이 보여짐”이 주님에 관한 것을 서술할 경우, 신성으로부터 지각함을 표시하는데, 이는 내면의 지각함과 같은 말이다. 자연 평면이 이 지각을 가졌다는 것이 하느님이 야곱에 의해 보여짐에 의해 의미된 이유는 야곱이 주님의 자연 평면을 표현하기 때문, 이에 대한 것은 자주 언급해온 편이다. “다시 그가 밧단-아람으로부터 왔을 때”란 그가 “밧단-아람”에 의해 의미된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들을 획득한 이 후를 의미한다. “그리고 그에게 복을 내리셨다”란 자연 평면의 더 내면의 것쪽으로 발전함, 그리고 거기서 선과 진리가 결합함을 의미한다; 그 이유가 “복을 내림”은 주님께서 누군가에게 선물하시는 모든 선이라고 단정되기 때문이다, 특히 선과 진리의 결합이라 단언된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그에게 말하셨다, 네 이름은 야곱이다. 이는 주님의 외적인 신성한 자연 평면의 품질을 의미한다. 이는 “이름”의 의미가 품질이다로부터; 그리고 야곱의 표현함이 주님의 신성한 자연 평면이다로부터 알려진다. 이것이 외적이라 말한 이유는 “이스라엘”이 주님의 내적 자연 평면이기 때문인데, 아래에서 살핀다.

네 이름은 더 이상 야곱이라 부르지 않을 것이다. 이는 더 이상 외적인 것 만으로 있지 않을 것임을 의미한다. 이는 위에 말한 것과 아래에서 살피는 이스라엘 관한 사항에서 알게 된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네 이름이리라. 이는 그분의 내적 자연 평면, 또는 “이스라엘”인 자연 평면의 영적 측면의 품질을 의미한다. 그분은 그의 이름을 이스라엘이라 불렀다란 그분의 내적 자연 평면, 또는 자연 평면의 천적 영적인 것(the celestial spiritual of the natural)을 의미한다. 이는 “이름”의 의미가 품질이다로부터; 그리고 “이스라엘”의 의미가 주님의 자연 평면의 내적 측면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야곱이 이스라엘이라 불리운 이유를 알려면 내적 자연 평면이 무엇인지, 외적 자연 평면이 무엇인지를 알아야만 하고, 더 나아가 자연 평면의 천적 영적인 것이 무엇인지도 알아야 한다. 사실 이런 사항들은 야곱이 천사에 의해 이스라엘이라 불렸던 구절에서 설명한 바 있지만, 거기서의 설명이 매우 적은 것 같아 여기서 추가로 설명을 보태어볼 것이다.
인간 안에는 완전히 구분되는 두 가지 것, 즉 합리성(합리적 평면)과 자연 평면이 있다. 합리적 평면은 내적 인간을, 자연 평면은 외적 인간을 구성한다; 자연 평면은 합리적 평면 같이 그것 자체의 내적 측면과 외적 측면을 가진다. 자연 평면의 외적 측면은 육체의 감각으로부터, 즉 이 감각을 통하여 직접적으로 세상으로부터 흘러드는 것으로부터 있다. 이 외적 인간을 수단으로 인간은 세상적인 것, 육체적인 것과 교통한다. 이 자연 평면에서 독점적으로 있는 것들이 감각적 인간들이라 불리운다; 독점적으로 있다고 말한 이유는 생각 안에서 이 인간들은 감각과 세상의 것을 넘어서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연 평면의 내적 측면은 외적 측면에 있는 것들로부터 분석적으로, 유추적으로 끌어낸 결론들로 구성되고 있다. 더욱이 이 결론은 감각들로부터 끌어당기고 연역(추론)한 것이다. 고로 자연 평면은 감각들을 가지고 세상의 것과 육체의 것과 교통하고, 분석적, 유추적으로 해서 있는 것들을 통하여 합리성과, 고로 영계의 것들과 교통한다. 고로 자연 평면은 외적인 것과 내적인 것의 교통함이 직접적이다. 그 이유는 외적 측면을 가지고는 자연계와, 내적 측면을 가지고는 영계와 교통하기 때문이다. 자연 평면에서 외적 측면을 야곱이 특별히 표현하고, 내적 측면을 이스라엘이 표현하고 있다. 이 경우는 합리적 평면도 마찬가지여서, 거기에도 외적 측면과 내적 측면이 있어 이것 역시 직접적이다; 이 합리적 평면은 요셉의 경우에 해당되므로 주님의 신성한 자비로부터 요셉을 집중적으로 말하는 대목에서 살필 것이다, 그 이유는 요셉이 합리적 평면의 외적 측면을 표현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천적 영적인 것이 무엇인지에 대하여는 이미 서술한 바도 있다, 즉 천적인 것은 선으로부터 있는 것, 그리고 영적인 것은 진리로부터 있는 것이다; 고로 천적 영적인 것은 진리로부터 선에 속한 것(진리의 선으로부터 있는 것)이다. 주님의 교회 또한 내적 측면과 외적 측면이 있는데, 야곱의 후손들을 수단으로 교회의 내적 측면이 외적인 것을 수단으로 표현되어야만 하기에, 야곱은 더 이상 야곱이라 불리울 수 없고, 이스라엘이라 불리워야만 하는 것이다. 여기에 더 알면 좋을 것은, 합리적 평면과 자연 평면 모두에서도 천적과 영적이라 불리우는 것에 대해서이다. 즉 천적인 것은 주님으로부터 선을 받을 때, 영적인 것은 주님으로부터 진리를 받을 때, 그렇게 일컬어진다; 그 이유가 주님으로부터 천국 안으로 흘러드는 선은 천적이라고, 진리는 영적이라 불리운다. 야곱이 이스라엘이라 불리움은 최고 의미에서 주님께서 내면의 것들쪽으로 발전하심, 그분 자신 안의 자연 평면의 외적, 내적 측면을 신성으로 만드심을 의미한다; 그 이유가 최고 의미에서는 표현된 것이 그분에 관련을 가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그에게 말하셨다. 이는 신성으로부터 지각함을 의미한다. 이는 “말하다”의 의미가 말씀의 역사물에서는 지각하다 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것이 신성으로부터 이었다는 것은 “하느님께서 말하셨다”에 의해 의미되고 있다; 그 이유가 신성은 임신 때로부터 주님 안에 있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그분의 있음 이었다, 그 이유가 그분은 여호와로부터 임신되셨기 때문, 그러므로 그분의 지각하심은 신성으로부터 이었기 때문, 그러나 이것은 그분의 인간에 의해 받아들임의 상태에 따라서 이었다, 그 이유는 그분은 계속적인 단계들을 수단으로 그분 자신 안에 있는 인간을 신성으로 만드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신성, 또는 하느님은 그분 안에 있었기에, “하느님이 그에게 말하셨다”의 말에 의해 신성으로부터 지각하심이 의미된 것이다.

나는 하느님 사다이 (전능한 하느님) 이다. 이는 과거에는 시험의 상태, 그리고 지금은 신성으로부터의 위로가 있는 상태를 의미한다. 이는 “하느님 사다이”의 의미가 시험 있음과 이후 위로가 있음이다로부터 분명해진다. 그 이유가 여호와, 또는 주님이 고대인들에 의해 시험과 위로에 관련하여 “하느님 사다이”라 불리웠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하느님 사다이”는 과거에 있는 시험, 지금은 신성의 위로가 있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이 “과거”라고 말한 이유는 시험들이 야곱에 의해, 뾰족하게는 야곱이 천사와 씨름함에 의해, 그리고 그가 에서를 만났을 때 (창. 33장) 표현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시험들을 수단으로 자연 평면 안에서 선과 진리의 결합이 결과되었다. 이 결합 자체가 위로됨인데, 그 이유는 결합은 시험들의 끝이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그가 끝에 도착할 때, 그가 수단들 안에서 허용했던 고된 것들에 따라서 위로를 가지기 때문이다.
우리가 알고 있어야 하는 것은, 일반적 측면에서 선이 진리와 결합함은 모든 결합함에서 반드시 시험들을 수단으로 결과된다는 것; 이런 이유로 악들과 거짓들의 저항에 부딪치고, 마치 반역을 일으키기라도 하듯, 악들과 거짓들은 선이 진리와, 진리가 선과 결합함을 막기 위해 발버둥을 친다. 이 전투는 인간과 더불어 있는 영들 사이에서, 즉 악과 거짓에 있는 영과 선과 진리에 있는 영 사이에서 벌어지는데, 이것이 인간 자신 안에서의 시험으로서 인간에 의해 지각되는 것이다. 하여 악들과 거짓들에 있는 영들이 선들과 진리들에 있는 영들에 의해 정복되어져, 당사자로부터 떠나도록 강요당할 때, 후자는 주님으로부터 천국을 통하여 기쁨을 가진다, 그리고 이 기쁨이 위로 받음으로, 그리고 자신 안에서 이듯 인간에 의해 지각된다. 그러나 기쁨과 위로를 받음은 승리함 때문이 아니라, 선과 진리의 결합 때문이다; 그 이유가 선과 진리의 모든 결합은 자체 내에 기쁨을 가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결합은 천국의 결혼 안에 신성이 있기 때문이다.

열매 맺고 번성하라. 이는 선과 선으로부터의 진리, 신성을 의미한다. 이는 “열매를 맺음”이 선을 서술하고, “번성함”이 진리를 서술함에서 알게 된다.

나라들과 나라들의 단체가 너로부터 있을 것이다. 이는 선과 선의 신성한 형체들을 의미한다. 이는 “나라”의 의미가 교회의 선이다로부터; 그리고 “나라들의 단체”의 의미가 선으로부터 있는 진리들이다로부터, 다른 말로, 선의 형체들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리고 최고 의미에서 주님이 취급되는 바, 이는 선의 신성한 형체들이다 에서 알게 된다.
나는 선의 형체들이 무엇인지를 먼저 서술하고, 그 다음 “나라들의 단체”가 그것들을 의미하는 것을 서술해본다. 선으로부터 있는 진리들이 선의 형체들이라 말해지는 이유는 진리들은 선이 모양을 만들어낸 것밖에 더 아니기 때문이다. 어떤 다른 방법에서 진리를 받는 자, 특히 진리들을 선으로부터 분리하여 받는 자는 진리들이 무엇인지를 모른다. 실로 진리들은 선으로부터 분리된 듯하여 나타난다, 그러나 이는 선 안에 있지 않은 이들에게서만 그럴 뿐이다, 또는 자신들이 뜻하고 행동하려는 것과 달리 생각하고 이야기하는 이들에게서만 분리된 듯 나타날 뿐이다. 인간은 자기 이해력과 의지력이 한 마음을 구성하도록 창조되었다, 그래서 이해력이 의지와 하나로 행동할 때, 즉 인간이 생각하고 말하는 대로 뜻하고 행동할 때, 그것들은 한 마음을 구성한다, 그 이유가 이럴 경우, 그의 이해력의 것들이 그의 의지력의 형체들이기 때문이다. 이해력의 것들이 진리들이라 불리운다, 그 이유는 진리들은 이해력 속에 있기 때문이다; 이에 비해 의지력의 것들은 선들이라 불리우는데, 그 이유는 선들이 의지 속에 있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알게 되는 것은, 그 자체에 국한해서 본다면, 이해력은 의지력이 모습을 만들어낸 것밖에 더 아니다.
그러나 단어 “형체(form)”는 인간의 철학의 냄새를 풍기는 단어인 바, 이 주제를 예를 수단으로 예증해보자. 이로부터 진리들은 선의 형체들임이 보여질 것이다. 시민 생활과 도덕 생활에서는 존경할만한 것과 어울리는 것이 존재한다. 전자는 시민적 업무에서 심정으로부터 타인에게 잘 해주려 뜻하는 것이고, 후자는 말이나 제스추어에서 이를 증명하는 것이다. 고로 그 자체로만에 주목하면, 후자는 전자의 형체밖에 더 아니다, 그 이유가 전자는 후자의 근원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전자가 후자를 수단으로 자체를 보일 때, 전자는 후자의 세세한 측면에서도 나타난다, 하여 말에서 발음된 것, 제스추어로 보여준 것이 무엇이든 존경할만한 것이다, 즉 존경할만한 것들이 형체나 형상을 통하여 빛을 발한다는 말이다. 이 방법에서 두 가지 것, 이해력과 의지력은 본질과 형체로서 같이 하나를 만든다. 그러나 만일 누군가가 전자를 후자로부터 분리해버린다면, 즉 누군가가 동료에게 악을 뜻하려 하면서도 그를 향해 호의를 비치고 있다면, 그가 존경할만한 것의 형체를 어울리는 것을 수단으로 보여주려 골몰해도 그의 언어나 제스추어 같은 것에서 존경할만한 것은 더 이상 어떤 자취도 없다. 그 이유가 이것은 실제로 비존경할만 것이라고 이를 식별하는 이들이 부를 것이기 때문, 하여 이것은 거짓 꾸밈, 또는 사기일 뿐이기 때문이다.
이런 모두로부터 진리들과 선들과 더불어서도 이런 경우가 어떻게 있을 것인가를 우리는 알 수 있다; 그 이유가 영적 생활에 있는 진리들은 시민 생활에 있는 어울리는 것과 입장이 비슷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진리들이 선의 형체들일 때, 그리고 선으로부터 분리되어 있을 때의 각 경우에서 진리의 품질이 무엇인지가 분명해진다; 그것들이 선으로부터 있지 않을 때, 그것들은 어떤 악으로부터 있고, 악의 형체들이다, 이는 이것들이 제아무리 선의 형체를 가장해도 그러하다. “나라들의 단체”가 선의 형체들이다는 것은 “나라들”의 의미가 선들이다로부터 알려진다. 그러므로 “단체(company)”, 또는 그것들의 모임은 그것들을 모음을 표시하는데, 이는 형체밖에 더 아니다; 그리고 이것이 진리이다는 것은 이미 살폈다. 그리고 진리들이 의미된 것이기에, 그리고 “나라”를 수단으로 선이 의미되었기에, 그러므로 “나라”가 야곱으로부터 있을 뿐 아니라 “나라들의 단체”도 있을 것이라 말해진 것인 바, 만일 이렇게 의미되지 않았다면 하나의 표현으로도 충분했을 것이다. 더욱이 말씀에서 “단체”, “모임”, “군중”은 진리들에 관해 말해지고 있다.

그리고 왕들이 네 허리로부터 나오리라. 이는 신성한 결혼으로부터의 진리들을 의미한다. 이는 “왕들”의 의미가 진리들이다로부터; 그리고 “허리”의 의미가 부부의 사랑으로부터의 것들, 결과적으로 천국의 결혼으로부터의 것들, 최고 의미에서 신성한 결혼으로부터의 것들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신성한 결혼으로부터의 진리들은 주님의 신성한 인간으로부터 진행되는 것들, 그래서 거룩함이라 불리우는데, 그 이유는 주님의 신성한 인간은 신성한 결혼 자체이시기 때문, 그리고 이로부터 진행하는 것들은 거룩하기 때문, 그리고 천적, 그리고 영적이라 불리우고, 천국의 결혼을, 즉 진리가 선과, 선이 진리와 결합함이 결과되게 하기 때문이다. 이 결혼이 천국 안에 존재하고, 천국에 있는 모든 이 하나하나에서, 또한 교회 안에 있는 모든 이 각각이 선 안에, 동시에 진리 안에 있는다면 그들 안에서도 이 결혼은 존재한다.

그리고 내가 아브라함에게, 이삭에게 주었던 이 토지를 나는 너에게 주리라. 이는 자연 평면에 있는 신성한 선을 내 것 되게 해주심을 의미한다. 이는 “토지”의 의미가 선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여기서 “토지”라고 말해진 토지는 가나안의 토지인 바, 이는 내적 의미에서 주님의 왕국을 표시한다, 그러므로 땅에 있는 주님의 왕국인 교회도 표시한다, 그리고 이렇게 표시하는 바, 이것은 선을 표시한다, 그 이유는 이것이 주님의 왕국과 교회의 필수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고 의미에서 “가나안의 토지”는 주님의 신성한 선을 표시하는데, 그 이유는 천국과 땅에 있는 주님의 왕국에 있는 선은 주님으로부터 있기 때문이다. 이는 아브라함과 이삭의 표현함이 주님의 신성이다로부터, 즉 아브라함은 신성 자체를, 이삭은 신성한 인간을, 특히 주님의 신성한 합리성을 표현함으로부터도 분명해진다; “네게 토지를 줌”의 의미가 자연 평면에 그것을 어울리게 함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 이유가 야곱이 여기서 주님의 신성한 자연 평면을 표현했기 때문이다. 이 모두로부터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주기로 한 토지를 나는 네게 줄 것이다”가 신성한 선이 자기 것이 되게 함이다 임이 분명해진다.

그리고 네 이 후 네 씨에게 나는 토지를 줄 것이다. 이는 자연 평면으로부터의 신성한 진리가 자기 것이 되게 하심을 의미한다. 이는 “씨”의 의미가 신앙의 진리이다로부터, 그리고 최고 의미에서 신성한 진리이다; 그리고 “네 씨에게 토지를 줌”의 의미가 최고 의미에서 신성한 선이 신성한 진리에 어울리는 것(자기 것이 되게 함)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러나 이것이 자기 것이 되어진 신성한 진리인 이유는 그분이 신성이 되시기 이전에서, 그분은 자기의 인간 측면에서는 신성한 진리이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로부터 주님께서 자신을 두고 말하시기를, 나는 “진리”이다고 하셨다 (요. 14:6), 그러므로 그분은 “여인의 씨”라 불리우신다 (창. 3:15). 그러나 주님께서 그분의 인간 측면에서 신성이 되신 뒤에, 그분은 신성한 선이 되셨다; 그 다음 신성한 선으로서의 그분으로부터 신성한 진리가 진행되었고 진행되고 있다; 이것이 주님께서 보내시기로 하셨던 “진리의 영”이다 (요. 14:16, 17; 15:26, 27; 16:13-15; 또는 3704항도 보라.) 위 모두로부터 분명해지는 바, “네 뒤의 네 씨”의 말에 의해 최고 의미에서 그분에게 어울려진 신성한 진리가 의미된다; 그리고 또한 신성한 진리는 그분 자신인 신성한 선으로부터 진행한다, 그리고 선 안에 있는 이들, 이 선으로부터 진리 안에도 있는 이들에게 자기 것이 되게 하여 주신다.

그리고 하느님은 그와 더불어 말하셨던 장소에서 그의 위쪽으로부터 올라 가셨다. 이는 이 상태 안에 있는 신성을 의미한다. 이는 “하느님이 그의 위쪽으로부터 올라 가셨다”의 의미가 신성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 이유가 “올라가는” 것은 내면의 것들쪽으로 승강함을 포함하기 때문, 그리고 주님을 서술할 경우, 즉 여기서 “하느님”인 바, 이는 신성쪽으로 승강함을 표시한다; 그리고 “그분이 그와 더불어 이야기하신 장소”의 의미가 이 상태이다로부터도 알게 된다. 그러므로 “그분이 그와 더불어 이야기하신 장소”는 그분이 있으셨던 상태를 표시한다.

14, 15절. 그리고 야곱은 그분께서 자기에게 말하셨던 장소에 기둥, 돌 기둥을 세웠다. 그리고 그는 그 위에 음료 공물을 부었다, 그리고 그 위에 기름을 부었다. 15 그리고 야곱은 하느님께서 자기에게 말하셨던 이곳의 이름을 벧엘이라 불렀다.

그리고 야곱은 그분께서 자기에게 말하셨던 장소에 기둥, 돌 기둥을 세웠다. 이는 이 신성한 상태 안에 있는 진리의 거룩함을 의미한다. 이는 “기둥”의 의미가 진리의 거룩함이다로부터 알게 되는데 아래에서 살핀다; 그리고 “그분이 자기에게 말하셨던 장소에”의 의미가 이 상태 안에 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기둥을 세움, 그리고 그 기둥에 음료 공물을 부음, 그리고 그 기둥 위에 기름을 부음의 기원에 관하여 우선 몇 마디 거들어야 할 것 같다.
고대 시대 때에 세운 기둥들은 표시를 위해, 또는 증거를 위해, 또는 예배를 위해서 이었다. 예배를 위해 세운 기둥은 기름부어, 거룩해졌는데, 예배 역시 거기서 개최했다, 고로 예배는 성전에서, 작은 숲에서, 나무 아래 작은 숲에서, 다른 장소들에서도 개최되었다. 이 의식의 표현은 태고 시대에서 돌들이 민족들의 가문들 사이에 경계선이 되게 세워둠으로 서로에게 악을 행하려고 서로가 이 경계선을 넘지 않게 하려는 목적에서 세워진 것에서 유래되었다 예를 들면, 창. 31:52에서 라반과 야곱이 쌓은 돌무더기일 것이다. 악을 행하려고 서로가 이 경계선을 넘지 않아야 함이 민족들(나라들)의 법이었다. 그리고 태고인들은 경계선에 세워진 돌들을 보았을 때, 그들은 질서의 최말단에 있는 진리들에 관하여 생각을 했다; 그 이유가 이들은 땅 위에 있는 모든 것들은 천적이고 영적인 것들과 상응함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의 후손들로 내려가면서, 이들이 대상물을 볼 때, 그들은 천적, 영적인 것과의 상응 관계에는 덜 중요시하고, 대신 세상적인 것에 더 중점을 두기 시작했는 바, 그들은 이런 상응적인 사항들은 선조로부터 파생된 것을 존경하는 수준에서만 거룩하게 생각했다. 드디어 홍수 직전 살았던 태고인의 후손들, 그리고 지상적, 세상적인 것들을 천적, 영적인 어떤 것에 대한 목적물로서 더 이상 보지 않았던 이들은 돌들을 거룩한 것으로 간주하여 그것들에 제주를 붓고, 기름을 부었다; 그리고 그들은 “기둥들”이라 부르고, 예배를 위해 사용했다
이것이 홍수 이후 고대 교회에 남아 있었고, 대상물들은 표현적이 되어서, 그들이 내적 예배를 달성하는데 섬김 역할을 했다. 즉 그들은 대상물을 바라보며 그것들이 표현한 것을 자녀에게 가르쳤는 바, 대상물은 거룩한 사항들을 알기 위해 가져다 놓인 셈이었다. 따라서 그들은 대상물을 보고 그것이 표현한 사항에 감동되었다. 이런 이유로 고대인들은 그들의 성전에, 작은 숲에, 숲에, 언덕이나 산에 예배를 위한 기둥들을 가졌다. 그러나 예배의 내적인 것이 고대 교회에서 완전히 멸해졌을 때, 그리고 그들이 외적인 것들을 거룩하고 신성한 것으로 붙잡았을 때, 고로 그것들을 우상적으로 예배하기를 시작했을 때, 그들은 자기들의 몇몇 신들을 위해 기둥들을 똑바로 세웠다. 그리고 야곱의 후손들은 우상적인 사항들에 매우 쉽게 빠져들었기에, 그들에게는 기둥들을 똑바로 세우는 것, 그리고 작은 숲을 가지는 것, 또는 언덕이나 산에서의 어떤 예배도 금했다; 그러나 그들이 하나의 장소에 함께 모여들게 되었는데, 이 장소는 궤가 있었던 곳, 후에는 성전이 있는 곳, 고로 예루살렘이었다. 이렇지 않았다면 각 가문들은 자기들이 예배할 외적인 것, 우상들을 가졌을 것이고, 그러면 교회의 표현물 또한 그 민족 사이에서 설립되었을리 만무했을 것이다. (기둥에 관하여는 3727항도 보라.) 위 사항은 기둥의 근원이 무엇인지를, 그것들이 의미하는 것을, 그리고 그것들이 예배에서 채용되었을 때, 그것들은 거룩한 진리를 표현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 이유가 “돌”은 질서의 최말단에 있는 진리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에 더 알게 되는 것은, 거룩한 것은 특별하게는 신성한 진리를 서술한다는 것; 그 이유가 신성은 주님 안에 있고, 그리고 신성한 진리는 그분으로부터 진행하고, 거룩함이라 불리우기 때문이다.

그는 그 위에 음료 공물을 부었다. 이는 진리로부터의 신성한 선을 의미한다. 이는 “음료 공물(제주 祭酒)”의 의미가 진리로부터의 신성한 선이다로부터 알게 되는데, 이에 관해 아래에서 살핀다. 그러나 먼저 내가 서술할 것은 진리로부터의 선이 무엇인지 이다. 진리로부터의 선은 다른 장소에서는 신앙으로부터의 선, 그리고 이웃을 향한 사랑, 또는 선행이라 불리웠다. 선에는 두 개의 보편적 종류가 있다; 신앙으로부터의 선과 사랑으로부터의 선이다. 신앙의 선이 “음료 공물”에 의해, 사랑의 선은 “기름”에 의해 의미된다. 내적 경로로 해서 주님에 의해 선으로 데려와지는 이들은 사랑의 선 안에 있고, 외적 경로로 해서 주님에 의해 데려와지는 이들은 신앙의 선 안에 있다. 천적 교회의 사람들, 마찬가지로 가장 깊은 천국, 또는 셋째 천국의 천사들은 사랑의 선 안에 있다; 그러나 영적 교회의 사람들, 마찬가지로 중간 천국, 또는 둘째 천국의 천사들은 신앙의 선 안에 있다. 이런 이유로 전자는 천적 선, 후자는 영적 선이라 불리운다. 그 차이는 선을 뜻할 때, 선한 의지로부터 인지, 선한 이해력으로부터 인지 이다. 그러므로 후자, 영적 선, 또는 신앙의 선, 또는 진리의 선이 “음료 공물”에 의해 의미되고, 전자, 즉 천적 선, 또는 사랑의 선은 내적 의미에서 “기름”에 의해 의미된다.
이와 같은 것이 “음료 공물”과 “기름”에 의해 의미되는 것은 내적 의미가 아니고서는 알려질 수 없다, 또한 이렇게 의미됨이 모든 이에게 알려져야 하는 이유는 그렇지 않으면 돌 위에 음료 공물을 붓고 기름을 붓는 행위가 그야말로 말씀이 우상 숭배적인 행위가 기록된 것으로 비신앙자에게는 조롱거리 건수밖에 더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왕을 만드는 과정들, 그의 머리 위에 왕관을 씌우고, 뿔에 담은 기름으로 그에게 붓는 것, 그의 손에 홀을 쥐게 하는 것, 검과 열쇠를 차게 하고, 심홍색 도포를 두르게 하고, 장식을 한 말을 타고, 고위급에 속하는 이들에 의해 식탁에서 섬겨지고, 등등 같은 모든 축하식이 거룩한 것을 표현하지 않으면, 그리고 그것들이 천국과 교회와의 상응을 통하여 존경되지 않으면, 이는 어린아이의 장난 수준이 규모에서만 커진 것밖에 더 아닐 것이다.
어쨌든 이런 의식들은 그것들의 근원을 태고 시대에, 즉 의식들이 거룩한 것들을 표현하던 시대에 두고 있다. 더욱이 그것들이 오늘날 존경할만한 것으로 간주된 것은 그것들이 표현하는 것, 또는 그것들이 상응하는 것 때문이 아니라, 해석을 수단으로 현재 통용되는 상징성 때문이다. 그러나 위의 것들, 즉 왕관, 기름, 뿔, 홀, 검, 열쇠, 흰말을 탐, 고관의 섬김을 받음 등등의 것이 무엇을 표현하는지를, 그것들이 무엇에 상응하는지를 알고 있다면, 아마 더욱 존경할만 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을 그들은 알지 못한다, 경이로운 것은, 그들이 알기를 바라지 않는다는 것, 즉 말씀에 있는 이런 사항들이 표현하고 의미하는 것을 어떤 수준에서 이든 알기를 바라지 않는다는 것, 하여 오늘날, 이런 사항들은 인간의 마음 안에서 파괴되어져 있다는 것이다.
“음료 공물”이 진리의 선, 또는 영적인 선을 의미하는 것은 음료 공물이 채용된 제물을 바치는 의식으로부터 알는지 모른다. 제물은 목축, 또는 양떼로부터 만들어지고, 이는 주님에 대한 내적 예배의 표현물이었다. 이 제물 바침에 음료 공물과 식사 공물이 더하여졌다. 식사 공물은 고운 곡식가루에 기름을 섞어 만들었는데, 천적 선, 또는 사랑의 선을 의미한다, 그리고 “기름”은 주님을 사랑함을, “고운 곡식가루”는 이웃을 향한 선행을 의미한다. 그러나 포도주로 구성되는 음료 공물은 영적 선, 또는 신앙의 선을 의미했다. 그러므로 음료 공물과 식사 공물 모두는 성찬식에서의 빵과 포도주와 같은 것을 의미했다.
이것들이 태우는 공물과 제물에 더하여졌다. 모세의 책에서:
너는 날마다 계속적으로 일 년된 두 어린 양을 바칠 것이다; 하나는 아침에, 다른 하나는 저녁 사이에 바친다; 그리고 찧어 만든 기름 사분의 일 힌을 섞은 고운 곡식가루 십분의 일 (에바), 그리고 처음 어린 양을 위한 사분의 일 힌의 포도주의 음료 공물을; 그리고 두 번째 어린 양을 위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출. 29:38-41).
레위기서에서:
수확의 첫 열매들의 곡식단을 흔드는 날에, 너는 여호와께 태움의 공물을 위해 일 년된 흠없는 어린 양을, 식사 공물은 기름을 섞은 고운 곡식가루 십분의 이를, 그리고 음료 바침은 포도주로 하되, 사분의 일 힌을 바쳐라 (레. 23:12, 13, 18).
민수기서에서:
그의 나지르인됨의 의무의 날들이 충만되는 날에서, 그는 그의 선물을 여호와께 바칠 것이다, 그리고 고운 곡식가루의 누룩 없는 것의 바구니, 기름을 섞은 과자들, 기름을 부은 누룩 없는 웨이퍼들(wafers), 그것들의 식사 공물과 음료 공물과 더불어 바쳐라 (민. 6:13-15, 17).
민수기서에서:
매일의 제물의 태움의 공물 위에 너는 어린 양을 위한 음료 공물 사분의 일 힌; 거룩한 장소에서 너는 포도주의 음료 공물을 여호와께 부을 것이다 (민. 28:6, 7).
더욱이 다양한 종류의 제물에 식사 공물과 음료 공물에 관하여는 민. 28:7-31; 29: 1-40을 더 읽으면 될 것이다.
식사 공물과 음료 공물이 이런 의미를 가졌다는 것은 사랑과 신앙이 예배의 모든 것을 결과한다는 사실로부터도 알는지 모른다; 그리고 성찬의 빵과 포도주가 사랑과 신앙을 의미한다는 것, 고로 예배의 모든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사람들이 주님을 예배함에 대한 진짜 표현함으로부터 타락되었을 때, 그리하여 다른 신들로 눈을 돌렸을 때, 하여 그들에게 음료 공물을 부었을 때, 이때의 음료 공물은 선행과 신앙에 반대되는 것들을 의미했다, 즉 세상을 사랑함으로부터의 악들과 거짓들을 의미했다. 이사야서에서:
너희는 푸른 모든 나무 아래에서 신들과 더불어 뜨거워졌다, 너는 또한 음료 공물을 그것들에 쏟아부었다, 너는 식사 공물을 바쳤다 (이. 57:5, 6);
“신들과 더불어 뜨거워지는” 것은 거짓으로부터의 현세에의 욕망을 표시한다; “푸른 모든 나무 아래”란 모든 거짓들로부터의 믿음을 표시한다; “그것들에 음료 공물을 붓고, 식사 공물을 바치는 것”은 그것들을 예배함을 표시한다. 이사야서에서:
여호와 등진 너희, 내 거룩함의 산을 잊은 너희, 갓(Gad) 위한 식탁을 마련하고, 므니(Meni)에게 음료 공물을 채우는 너희 (이. 65:11).
예레미야서에서:
아들들은 장작을 모은다, 아버지들은 불을 지핀다, 여인들은 가루를 반죽한다, 이는 하늘의 여왕을 위하여 이고, 다른 신들에게 음료 공물을 쏟아부은다 (예. 7:18).
다시:
우리가 우리 입에서 뱉은 말을 확실히 실행하여 하늘의 여왕에게 향을 태우고, 우리의 아버지들이 하던 대로, 그리고 우리의 제 일인 자들이 유다의 성읍과 예루살렘의 거리에서 하던 대로 그녀에게 음료 공물을 쏟는 것이다 (예. 44:17-19);
“하늘의 여왕”은 모든 거짓들을 표시한다, 그 이유는 “하늘의 군대들”이 진짜 의미에서 진리들이나, 반대 의미에서는 거짓들이기 때문이다; “왕과 여왕”도 마찬가지인데, 여왕은 그것들의 모두를 표시하고, “그녀에게 음료 공물을 붓는 것”은 예배하는 것이다.
다시:
갈대아인들이 도성을 불태울 것이다, 그리고 집의 지붕에서 그들은 바알에게 향을 바쳤다, 그리고 다른 신들에게 음료 공물을 부었다 (예. 32:29);
“갈대아인들”은 거짓이 있는 예배 안에 있는 이들을 표시한다; “도성을 태우는 것”은 거짓인 것으로부터의 교리적인 것들 안에 있는 이들을 파괴하고 황폐해지게 하는 것을 표시한다; “집의 지붕에서 바알에게 향을 바치는 것”은 악인 것을 예배함을 표시한다; “다른 신들에게 음료 공물을 붓는 것”은 거짓인 것을 예배함을 표시한다.
호세아서에서:
그들은 여호와의 토지에서 거주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에브라임은 이집트로 돌아갈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아시리아에서 불결한 것을 먹을 것이다; 그들은 여호와께 포도주를 붓지 않을 것이다 (호. 9:3, 4);
“여호와의 토지에서 거주하지 않는 것”은 사랑의 선 안에 있지 않다를 표시한다; “에브라임은 이집트로 돌아갈 것이다”란 교회의 지적 측면이 단지 지식적이고 감각적일 뿐임을 표시한다; “그들이 아시리아에서 불결한 것을 먹을 것이다”란 추론으로부터의 불순하고 모독적인 것들을 표시한다; “그들은 여호와께 포도주를 붓지 않을 것이다”란 진리로부터 예배함이 없다를 표시한다.
모세의 책에서:
이것이 말해질 것이다, 제물의 지방을 먹었고, 음료 공물의 포도주를 마셨던 그들이 신뢰했던 바위, 그들의 신들은 어디 있는가? 그것들을 일어나게 해서 그들을 돕게 하자 (신. 33:37, 38);
“신들”은 앞 구절들에서 같이 거짓들을 표시한다; “제물의 지방을 먹은 것”은 그들이 예배의 선을 파괴했음을 표시한다; “그들의 음료 공물의 포도주를 마신 것”은 그들이 예배의 진리를 파괴했음을 표시한다. 음료 공물은 피라고도 단언된다. 다윗서에서:
그들은 자기들의 슬픔들을 불어나게 할 것이다, 그들은 또 다른 것(신들)쪽으로 서두른다, 나는 피의 그들의 음료 공물을 붓지 않도록, 그리고 내가 내 입술에 그들의 이름들을 담지 않도록 할 것이다 (시. 16:4);
위 말들에 의해 진리의 모독들이 의미된다; 그 이유는 이 의미에서 “피”는 선행에 가해진 폭력을 표시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모독.

그리고 그 위에 기름을 부었다. 이는 사랑으로부터의 신성한 선을 의미한다. 이는 “기름”의 의미가 사랑의 신성한 선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돌 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음료 공물과 기름을 붓는” 것은 내적 의미에서 최말단에 있는 진리로부터 내면의 진리와 선쪽으로, 마지막 사랑의 선으로까지 발전하는 과정을 서술하고 있다. 그 이유가 “돌기둥”은 질서의 최말단에 있는 진리이고, “음료 공물”은 내면의 진리와 선이고, 그리고 “기름”은 사랑의 선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것이 주님의 인간을 신성으로 만드심에 있는 주님의 발전 과정이었다, 그리고 이 과정은 거듭남을 수단으로 주님께서 인간을 천국 수준으로 만드실 때 수행되는 과정이기도 하다.

그리고 야곱은 하느님께서 자기에게 말하셨던 그곳의 이름을 벧엘이라 불렀다. 이는 자연 평면 속의 신성과 그것의 상태를 의미한다. 이는 “이름을 부름”의 의미가 품질이다로부터; 그리고 “벧엘”의 의미가 신성한 자연 평면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리고 그것의 상태는 “하느님께서 그에게 말하셨던 장소”의 의미에서 언급되었다.

16-20항. 그리고 그들은 벧엘로부터 여행했다. 그리고 에브라데로 가되 아직은 그 토지에 있을 즈음 라헬이 해산하였다, 그리고 그녀는 출산에서 참기 어려운 것들을 겪었다.
17 그리고 그녀의 해산의 고통이 극에 달할 즈음 산파가 그녀에게 말했다, 걱정하지 말라, 그 이유가 이 또한 당신에게 아들이다. 18 그리고 그녀의 혼이 떠나려 하여 그녀가 죽으려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그의 이름을 베노니라 불렀다. 그리고 그의 아버지는 그를 베냐민이라 불렀다. 19 그리고 라헬은 죽었다. 그리고 에브라데로 가는 길에 매장되었다. 이곳은 베들레헴이다. 20 그리고 야곱은 그녀의 무덤에 기둥을 세웠다. 이것은 오늘날까지 라헬의 무덤의 기둥이다.

그리고 그들은 벧엘로부터 여행하였다, 그리고 에브라데에 당도하기 전 아직 그 토지에 있을 때였다. 이는 이제는 천적 평면 속의 영적인 것이었음을 의미한다. 이는 “벧엘로부터 여행함”의 의미가 신성한 자연 평면으로부터 신성의 발전이 계속됨이다로부터; “당도하기 전 아직 그 토지에 있음”의 의미가 직접적인 것이다로부터, 이에 대하여는 아래에서 살핀다; 그리고 “에브라데”의 의미가 이전 상태에 있는 천적 평면 속의 영적인 것이다로부터 (베들레헴의 경우는 새로운 상태에서의 천적 평면 속의 영적인 것이다), 그러므로 말해진다, “에브라데, 이것은 베들레헴이다” (19절).
이 구절에서 취급되는 주제는 내면의 것들을 향하는 주님의 신성의 발전이다, 그 이유는 주님께서 그분의 인간을 신성으로 만드셨을 때, 그분은 인간을 거듭남에 의해 새로이 만드시는 것도 같은 질서에서 발전되게 하셨다, 즉 외적인 것으로부터 내적인 것들로까지, 고로 질서의 최말단에 있는 진리로부터 내면인 선, 즉 영적인 선으로까지, 이로부터 천적인 선으로까지 발전해가게 하셨다. 그러나 이런 사항들이 누군가의 이해력에 와 닿으려면, 외적 인간과 내적 인간이 무엇인지, 그리고 전자와 후자는 구분된다는 것, 비록 인간이 육체 안에서 사는 동안 하나로서 나타날지라도 구분이 확실하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또한 자연 평면이 외적 인간을 구성한다는 것, 합리적 평면이 내적 인간을 구성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더 나아가 영적 평면(수준)이 무엇인지, 천적 평면(수준)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한다.
[3] 이런 사항들은 지금까지 자주 언급하여 밝히 알게 하려 노력한 것들이다. 그럼에도 영원한 삶에 관해 알고 싶지 않았던 결과로 이런 사항들에 관해 어떤 생각도 사전에 가져보지 못한 이들은 위의 사항들에 대한 어떤 생각을 가지는 것이 불가능함을 발견한다. 하여 어떤 이는 이렇게 말한다, “내적 인간이 누구이냐? 내적 인간이 외적 인간으로부터 구분지음이 가능하단 말인가? 자연 평면이 무엇이냐? 그리고 합리적 평면이 무엇이냐? 그것들은 하나가 아니더냐? 더 나아가, 영적 평면은 무엇이고, 천적 평면은 무엇이냐? 이것은 새로운 구분이 아니야? 우리가 영적이라는 단어는 들어보긴 했지만, 천적이라는 단어는 들어본 적도 없지 않던가?” 등등이다. 어찌되어 있건 이 경우는 이렇다: 이런 주제들에 관해 어떤 생각을 이전에 가져보지 못한 이들, 즉 세상과 육체의 관심과 걱정이 그들의 모든 생각들이 소유했기 때문에, 그 외 어떤 것을 알려는 바램이 없었기 때문이었던 이들; 또는 자기들이 알고 있는 것만 가지고도 자기들의 교리적 주장을 아는 것은 충분하다는 이들, 그 결과로 위의 주제들을 알 필요가 없다는 이들, 이들 모두가 공통적으로 말한다, “우리는 세상을 볼 수 있으나, 다른 세상은 우리가 볼 수 없다, 아마 그것은 있는지, 없는지 나는 알 바 아니다.” 이런 인물들은 이런 모든 주제들이 거추장스런 옷에 불과하다, 하여 이런 주제들이 귀에 들리는 처음 순간에 심정으로 그것들을 내치고 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은 말씀의 내적 의미 안에 포함되고 있다, 그리고 이런 내용들은 그것에 걸맞는 단어나 용어 없이는 말로 설명할 수 없다. 우리가 외면의 것을 표현함에서 자연 평면이라는 용어, 내면의 것을 표현하는데 합리적 평면이라는 용어보다 더 적절한 용어는 없다; 진리로부터 있는 것들에 대해서는 영적 (평면, 수준)이라는 단어가, 선으로부터 있는 것들에 대해서는 천적 (평면, 수준)이라는 용어가 필요한데, 이것 없이는 어떤 것도 서술되고 묘사해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런 용어들이 필요하다고 인정하고 그것을 알기를 바라는 이들만을 위해 이 장에서 등장하는 용어를 간략히 설명한다. 최고 의미에서 취급되어 왔던 주제는 주님의 자연 평면이 신성이 되심, 관계적 의미에서 인간이 그의 자연 평면 측면에서의 거듭남이다. 야곱은 교인에게 있는 자연 평면의 외면 측면을, 이스라엘은 자연 평면의 내면 측면을 표현했다; 그 이유가 영적 인간은 자연 평면으로부터 있고, 천적 인간은 합리적 평면으로부터 있기 때문이다. 주님의 신성이 되심(Lord’s glorification)은 외적인 것들로부터 더 내면의 것들쪽으로 발전해가심 이고, 이와 같은 방식에서 인간의 거듭남도 발전해간다는 것, 이를 표현한 것이 야곱이 “이스라엘”이라 불리우는 것임은 이미 살폈다.
그러나 더욱 내면의 것들을 향한 발전, 즉 합리적 평면으로의 발전이 지금 취급된다, 그 이유는 위에서 말한 대로 합리성이 내적 인간을 구성하기 때문이다. 자연 평면의 내적 측면과 합리적 평면의 외적 측면 사이에 있는 것, 즉 양쪽의 중간에 있는 것이 천적 평면 속의 영적인 것(spititual of celestial)에 의해 뜻해지고, 이것이 “에브라데”, 그리고 “베들레헴”에 의해 의미되고, 베냐민에 의해 표현된다. 이 중간(intermediate)의 것은 얼마쯤은 “이스라엘”인 자연 평면의 내적 부분으로부터, 얼마쯤은 “요셉”인 합리적 평면의 외적 부분으로부터 파생되고 있다; 그 이유가 중간인 것은 각 평면의 맨끝의 어떤 것으로부터 파생되어야 중간에서의 역할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누군가가 영적 수준에서 천적 수준으로 발전하려면 질서상 그는 이 중간의 것을 통과하여야 함이 필수적이다. 그 이유가 이 중간의 것 없이 더 높은 쪽으로 올라감은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어떤 질병에 대단한 치료약이 발견되었다 해도 이 약이 신체에 흡수되지 못하면 먹어보아야 아무 효력이 없기에 이 흡수작용을 원활히 하게 하는 신체와 약 사이의 중간의 것(촉매제)이 치료약 발견 다음으로 중요한 필수적 단계인데, 아마 이 촉매제가 여기서 설명하려는 중간의 것에 대한 실예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역자주)
이 중간의 것을 통과하여 발전함의 본질이 야곱이 에브라데에 옴, 그리고 라헬이 거기서 출산함에 의해 묘사되고 있다. 그러므로 벧엘로부터 여행함, 그리고 에브라데로 당도하기 전 아직 체류해있던 토지에 의해 신성의 자연 평면으로부터 “에브라데”와 “베들레헴”에 의해 의미되고, 베냐민에 의해 표현된 천적 평면 속의 영적인 것쪽으로 주님의 신성의 발전하심이 계속되는 것이 의미되고 있다. 천적 평면 속의 영적인 것이 위에서 말해진 중간의 것인데, 영적 인간으로부터는 “영적”이라 불리우고, 이것 자체만을 관조한다면, 자연적 인간 속의 내면이고, 그리고 천적 인간으로부터서는 “천적”이라 불리우고, 이것 자체만을 관조한다면 합리적 인간이다. “요셉”은 합리적 인간 속의 외면 부분이다, 그러므로 합리적 인간으로부터 영적 평면 속의 천적인 것이 요셉이라 단언된다.

그리고 라헬은 해산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녀는 출산함에서 참기 어려운 것들을 겪었다. 이는 내면의 진리에 대한 시험을 의미한다. 이는 “출산함”의 의미가 진리 속에 있는 영적인 것들과 선 속에 있는 천적인 것들이 세상 밖으로 출시됨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 이유가 내적 의미에서 “출산함”은 영적 출생에 속한 것을 표시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라헬의 표현함이 내면의 진리에 애착함이다로부터; 그리고 “참기 어려운 것들을 겪음”의 의미가 시험을 수행함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렇게 시험을 수행함이다고 말한 이유는 “참기 어려운 것을 겪다”가 진리들과 선들을 서술할 경우, 이는 시험밖에 더 다른 의미는 없기 때문이다. 어느 인간도 시험을 수행하지 않고 거듭남을 달성할 수 없는 이유는 내면의 선들과 진리들이 유전적으로부터, 실제적으로부터 있는 악들과 거짓들과 싸워야 하기 때문, 이 때 인간은 주님에 의해 내부로부터 선들과 진리들 안에 보존되는데, 유전적인 것으로부터 튀어나오는 악들과 거짓들의 공격을 받고, 이것이 실제적인 것으로부터 인간과 더불어 있는 악들과 거짓들 안에 있는 악령과 악귀에 의해 표출되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시험이 오고, 악들과 거짓들이 극복되고 내쫓기고, 제거되는 한편 선과 진리들은 확증된다. 이것들이 라헬이 출산함과 출산함에서 참기 어려운 것을 겪음에 의해 의미되어 있다.
그리고 그녀의 해산의 고통이 극에 달하였다. 이는 시험 후를 의미한다. 이에 대하여는 바로 앞에서 설명이 있었으므로 생략한다.

산파가 그녀에게 말했다, 걱정하지 말라. 이는 자연 평면으로부터의 지각을 의미한다. 이는 “말하다(say)”가 말씀의 역사 부분에서는 지각하다이다로부터; 그리고 “산파”의 의미가 자연 평면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여기서 “산파(midwife)”가 자연 평면을 표시하는 이유는 내면의 시험이 수행될 때, 즉 내면의 인간이 시험을 겪고 있을 때, 자연 평면은 산파 같은 역할을 해주기 때문이다; 자연 평면이 도움을 제공하지 않으면, 내면의 진리로부터의 어떤 출생도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내면의 진리가 태어날 때, 그것들을 품안으로 받는 것이 자연 평면이기 때문, 그리고 내면의 진리가 밖으로 나가 일함을 제공하는 것이 자연 평면이기 때문이다. 내면의 진리를 자연 평면에서 통째로 받아들이는 것은 영적 출생으로부터의 것들에게 언제나 있는 경우이다; 이것은 인간이 거듭나질 때, 첫 순서는 자연 평면이 받을 준비가 되어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자연 평면이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진 만큼에서 내면의 진리들과 선들은 출생되고 번성한다. 또한 이것은 인간이 육체의 삶 동안 신앙의 진리들과 선들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으면, 그는 다른 삶에서 그것들을 받아들일 수가 없어 결과적으로 구원되어질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는 항간에서 하는 속어, 즉 나무가 쓰러지면, 쓰러진 그대로 있다, 또는 인간이 죽을 때, 그는 그런채로 있는다 같은 식의 말에 의해서도 뜻해진다. 인간은 다른 삶에서 그의 자연적 기억 모두를 자기와 더불어 가진다. 또는 그의 외적 인 간의 것 모두를 자기와 더불어 가진다. 이것은 일종의 기초 평면 역할을 하고, 이 안으로 내면의 진리들과 선들이 낙하한다. 그런데 만일 이 평면이 내면의 진리들과 선들을 받을 수 없는 지경이라면, 내면의 것들은 소멸되거나, 악용되거나, 거절되거나 하고 만다. 이상으로부터 분명한 바, 자연 평면이 산파 역할을 한다는 점이다. 내면의 인간이 출생할 때, 자연 평면이 받는 그릇인 만큼에서, 이것은 산파처럼 있다는 것은 출애굽기에서 바로의 명령을 따르지 않은 산파들에 관련된 것들의 내적 의미로부터도 알는지 모른다. 즉:
이집트의 왕이 히브리 여인들의 산파들에게 말했다, 그리고 그가 말했다, 너희가 히브리 여인의 산파 업무를 수행할 때, 변통에서 그들을 보고 만일 아들이거든 죽이고, 딸이거든 살려두어라. 그러나 산파들은 하느님을 두려워했다, 그리고 이집트의 왕이 그들에게 말한 것을 행하지 않았다, 하여 사내 아이를 살려두었다. 그래서 이집트의 왕이 그들을 불렀다, 그리고 그들에게 말했다, 왜 너희는 이 말을 행치 않고 사내 아이들을 살려두었느냐? 그러자 산파들이 바로에게 말했다, 그 이유는 히브리 여인들은 이집트 여인들 같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무척 건강해서 산파가 당도하기 전 출산해버렸습니다. 그리하여 하느님께서는 산파들을 잘 돌보셨다, 그리고 백성들은 불어났다, 그리고 그 숫자가 굉장했다. 산파들이 하느님을 경외하였기 때문에, 그분은 그들에게 집들을 만드셨다 (출. 1:15-21);
히브리 여인이 출산한 딸들과 아들들에 의해 새로운 교회의 선들과 진리들이 표현되었다; 산파에 의해서는 선들과 진리들을 받는 만큼에서의 자연 평면이 표현되었다; 이집트의 왕에 의해서는 일반적 측면에서 기억 속의 지식이 표현되었다; 이 지식이 신앙 속의 것들 안으로 들어갈 때, 거꾸로의 방식에 의해, 즉 감각들과 기억 속의 지식이 지령을 내리는 것 말고는 어떤 것도 믿어서는 안된다는 방식에 의해 진리들을 소멸되게 한다. 여기서 “산파”가 자연 평면에서 진리를 받아들임이다는 것에 대해서는 출. 1장을 밝히 설명하는 때에 주님의 신성한 자비로부터 더 상세히 알려질 것이다.

그 이유가 이 또한 당신에게 아들이기 때문이다. 이는 영적인 진리를 의미한다. 이는 “아들”의 의미가 진리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여기서는 영적 진리이다, 그 이유는 여기서 “아들”이 베냐민이고, 베냐민에 의해 천적 평면 속의 영적인 것이 표현되기 때문이다.

그녀가 죽으려 하여 그녀의 혼이 떠나려 하고 있었다. 이는 시험의 상태를 의미한다. 이는 “혼이 나가고 죽는다”의 의미가 극도의 시험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 시험은 옛 인간이 죽고 새 인간이 생명을 받는 때에 존재한다. 이것이 시험인 것은 진행된 것으로부터, 즉 “출산에서 힘든 것을 겪는다”가 내면의 진리의 시험을 표시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뒤를 잇는 말, “라헬은 죽었다”로부터도 알려진다.

그리고 그녀는 그의 이름을 베노니라 불렀다. 이는 이 상태의 품질을 의미한다. 이는 “이름을 부름”의 의미가 품질이다로부터 아는데, 이는 여러 번 설명했었다. 내적 의미에서 여기서 묘사된 상태는 시험의 상태, 이 상태의 품질이 “베노니”에 의해 의미된 것이다. 원어에서 “베노니”는 “나의 슬픔의 아들”, 또는 “슬퍼함”을 뜻한다.

그리고 그의 아버지는 그를 베냐민이라 불렀다. 이는 천적 평면 속의 영적인 것의 품질을 의미한다. 이는 베냐민의 표현함이 천적 평면 속의 영적인 것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미 설명한 바 같이, 영적 평면과 천적 평면 사이에 존재하는 중간의 것, 또는 영적 인간과 천적 인간 사이에 존재하는 중간의 것이다. 원어에서, “베냐민”은 “오른손의 아들”을 뜻한다; 그리고 “오른손의 아들”에 의해 천적 선으로부터 있는 영적 진리, 결과적으로 힘이 의미된다; 그 이유가 선이 진리를 수단으로 힘을 가지기 때문이다. “아들”이 진리이다, 그리고 “손”은 힘이다; 그러므로 “오른손”은 가장 높은 힘이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오른쪽에 앉음”에 의해서는 선으로부터 있는 진리 덕택에 있는 힘의 상태가 의미되는데, 이것이 주님을 서술할 경우, 전능함, 또한 주님의 신성한 선으로부터 진행하는 신성한 진리이다 (시. 110:1; 마. 22:14; 26:63, 64; 막. 14:61, 62; 16:19; 눅. 22:69); 그리고 이것이 신성한 힘, 즉 전능하심을 표시하는 까닭에 “하느님의” “힘의 오른편에서”라고 말해진다.
이로부터, 진짜 의미에서 “베냐민”에 의해 의미되는 것은 “요셉”인 천적 선으로부터 있는 영적 진리임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둘 모두는 영적 인간과 천적 인간 사이에 있는 중간의 것이다. 그러나 이 선과 이 진리는 “유다”에 의해 표현된 천적 평면, “이스라엘”에 의해 표현된 영적 평면과 구분되어진다. 전자는 더 높고 더 내면적이나, 후자는 더 낮고 더 외면적이다. 그 이유가 이미 말한 대로 이것들은 중간의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천국의 빛을 수단으로 계발되지 않으면, 아무도 요셉에 의해 표현된 선, 베냐민에 의해 표현된 진리에 관한 생각을 가질 수 없다. 천사들은 이것들에 명료한 생각을 가지는데, 그 이유는 그들의 모든 생각들이 주님으로부터 있는 천국의 빛으로부터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 빛 안에서 인간으로서는 납득이 불가능한 무한한 것을 보고 지각할 수 있다. 아래에 예증을 가져보자.
모든 인간은 누구든지 천적 수준으로 이든, 또는 영적 수준으로 이든, 그렇게 되어가는 가능성을 가지고 자연 평면에서 태어나나, 주님만은 영적이고 천적인 수준에서 태어나셨다, 이런 이유로 그분은 베냐민의 토지 경계선인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셨다. 그 이유가 “베들레헴”은 천적 평면 속의 영적 평면이 의미되고, 베냐민에 의해서는 천적 평면 속의 영적인 것이 표현되기 때문이다. 주님만이 영적이고 천적인 수준에서 태어나신 이유는 신성이 그분 안에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사항은 천국의 빛 안에 있지 않고서는 납득될 수 없다; 그 이유가 세상의 빛 안에 있는 자, 그래서 세상의 빛으로부터 자기의 지각을 가지는 자는 진리가 무엇인지, 선이 무엇인지를, 더욱이 진리와 선의 내면의 것쪽으로 등차를 통하여 승강하는 것이 있다는 것을 거의 모르기 때문이다. 고로 천사가 정오의 빛 안에서 명백히 보여지는 각 등차에서 있는 진리와 선의 무수한 것들에 완전히 무지해 있다. 이것만 가지고도 천사의 지혜가 인간의 것과 비교해 어떤 본질에 속하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교회가 취급되는 예언서에서 자주 등장하는 여섯 이름들이 있다. 즉 “유다,” “요셉,” “베냐민,” “에브라임,” “이스라엘,” “야곱”이다. 교회의 선과 진리가 각 이름들에 의해 내적 의미에서 뜻해지는 것을 모르는 이들은 예언서의 각 구절에 신성한 신비함에 관한 어떤 것을 아는 것이 가능할 수 없다. 다시 말해, “유다”가 천적 평면을, “요셉”이 영적 평면 속의 천적인 것을, “베냐민”이 천적 평면 속의 영적인 것을, “에브라임”이 교회의 지적 측면을, “이스라엘”이 영적 평면의 내적 부분을, “야곱”이 영적 평면의 외적 부분을 의미하는 것을 알지 못하면 교회의 무엇이 예언서에서 뜻하여지는 가를 알 수 없다는 말이다.
위 이름 중에서 베냐민만을 특별히 주목해보자. 그는 천적 평면 속의 영적인 것을 표현하고, 요셉은 영적 평면 속의 천적인 것을 표현하는 바, 이 둘은 천적 평면과 영적 평면 사이에 있는 중간의 것을 표현한다, 그래서 이 둘은 아주 밀접하게 결합하기에, 그들의 결합이 요셉의 역사에서 묘사되어 있다. 즉:
요셉이 그의 형제들에게 말했다, 너희들은 가장 어린 동생을 데려와야만 너희가 죽지 않을 것이다 (창. 42:20).
그들이 베냐민과 더불어 되돌아왔을 때, 그리고 요셉은 자기 동생 베냐민을 보았다, 그는 말했다, 이 애가 너희의 가장 어린 동생이냐? 그리고 그가 말했다, 하느님이 네게 은혜를 베푸시기를, 나의 아들아. 그리고 요셉은 성급해졌다, 그 이유가 그의 뱃속이 그의 동생을 향하여 불탔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울 장소를 찾아서, 그의 침실로 들어갔다, 그리고 거기서 울었다
(창. 43:29, 30).
그는 베냐민의 몫을 그들 모두의 지분을 다섯 배나 넘게 불렸다 (창. 43:34).
그가 자신을 그의 형제들에게 알린 이후, 그는 그의 동생 베냐민의 목을 끌어 안고 울었다; 그리고 베냐민도 그의 목에서 울었다 (창. 45:14).
그는 그들 모두에게 의복을 바꿔입게 내주었다, 그러나 베냐민에게 그는 은 삼백 조각을 주었다, 그리고 갈아입을 의복을 다섯 벌을 주었다 (창. 45:22).
위 구절 모두로부터 분명한 바, 요셉과 베냐민이 가장 밀접하게 결합해진다는 것, 이는 그들이 한 어머니로부터 때문이 아니라 그들에 의해 “요셉”인 선과 “베냐민”인 진리 사이에 존재하는 영적 결합이 표현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둘은 천적 인간과 영적 인간 사이에 있는 중간의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요셉은 베냐민을 수단으로 하지 않고서는 그의 형제들과, 자기 아버지와 결합할 수 없었다, 그 이유가 중간의 것 없이 결합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위 인용 구절의 대목에서 요셉이 자신이 누구인지를 베냐민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밝히지 않았다.
더 나아가 말씀, 특히 예언서에서 베냐민에 의해 교회 속에 있는 영적 진리가 의미되는 것을 이스라엘의 아들들에 관한 모세의 예언에서 볼 수 있다:
베냐민에게 그는 말했다, 여호와의 사랑을 받는 자, 그분은 베냐민 위에 확실하게 거주하실 것이고, 모든 날 (동안)을 그의 위를 덮으실 것이다, 그리고 그분은 그의 어깨들 사이에 거주하실 것이다
(신. 33:12)
“여호와의 사랑을 받는 자”란 천적 선으로부터 있는 영적 진리이다; 이 선은 이 진리와 더불어 “확실하게 거주한다”라고, “그것은 온종일을 덮고 있다”고, 또한 “그것의 어깨들 사이에 거주한다”고 말해지고 있다, 그 이유가 “어깨”는 내적 의미에서 모든 힘을, 그리고 선은 진리를 수단으로 모든 그것의 힘을 가지기 때문이다 (3563항).
예레미야서에서:
베냐민의 너희 아들들은 예루살렘의 한가운데로부터 도망하라, 그리고 나팔로 소리를 내고, 포도원 의 집 위에서 예언을 집어들어라; 그 이유가 악이 북쪽으로부터 내다보고, 큰 부서짐이 있기 때문이다 (예. 6:1);
“베냐민의 아들들”은 천적 평면으로부터의 영적 진리들을 표시한다; “예루살렘”은 영적 교회를 표시한다; “포도원의 집”, 또는 “벤학게렘”도 영적 교회를 표시한다; “악이 북으로부터”는 인간의 감각적인 것과 감각에서 파생되는 기억 속의 지식을 표시한다. 다시:
만일 너희가 안식일을 거룩히 여기는 때가 오면, 그들은 유다의 성들로부터, 예루살렘 주변으로부 터, 베냐민의 토지로부터, 평지로부터, 산으로부터, 남쪽으로부터 태움의 공물과 제물, 그리고 식사 공물, 그리고 유향, 그리고 감사함의 공물을 바치러 여호와의 집으로 들어갈 것이다
(예. 17:24, 26).
그리고 다시 다른 구절에서:
산의 성들에서, 평지의 성들에서, 남쪽의 성들에서, 그리고 베냐민의 토지에서, 그리고 예루살렘 주변에서, 그리고 유다의 성들에서 양떼들이 아직은 그것들을 세는 자의 손 옆을 지날 것이다 (예. 33:13);
위에서 “베냐민의 토지”는 교회의 영적 진리를 표시한다; 그 이유가 교회의 모든 것들, 첫 등차로부터 마지막 등차까지가 “유다의 성들,” “예루살렘의 주변들,” “베냐민의 토지,” “평지,” “산,” “남쪽”에 의해 의미되고 있다.
호세아서에서:
너희는 기브아에서 뿔로 소리를 내고, 라마에서 나팔로 소리를 내라, 너희 벧아웬에게 그대 베냐민 을 따라 소리쳐라, 에브라임이 견책의 날에 황무해질 것이다 (호. 5:8, 9).
“기브아,” “라마,” “그리고 벧아웬은”은 “베냐민”인 천적 평면으로부터의 영적 진리 속의 것들을 표시한다, 그 이유가 기브아는 베냐민 안에 (사. 19:14); 그리고 라마도 (여. 18:25), 그리고 벧아웬 (여. 18:12) 역시 베냐민의 토지 안에 있기 때문이다; “뿔로, 나팔로 소리를 내는 것”, 그리고 “소리치는 것”은 “에브라임”인 교회의 지적 평면이 황무하게 만들어짐을 발표하는 것을 표시한다.
오바디야서에서:
야곱의 집은 불이 될 것이고, 요셉의 집은 불꽃이 될 것이다, 에서는 그루터기를 위해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남쪽으로부터의 그들은 에서의 산을 상속받을 것이고, 평지에 있는 이들은 불레셋 을 상속받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에브라임의 들판을 상속받을 것이다, 그리고 사마리아의 들판; 그리고 베냐민은 길르앗을 (상속받을 것이다) (옵. 18, 19);
다른 구절에서 같이, 이름들이 어떤 것을 의미하는 것은 분명하다, 따라서 야곱의 집, 요셉의 집, 에서의 집, 에서의 산, 불레셋, 에브라임의 들판, 사마리아의 들판, 베냐민, 길르앗, 더 나아가, 남쪽의 그들, 집, 평지, 산, 그리고 들판에 의해 의미되는 것을 알지 못하면, 이 구절의 납득은 불가능하다; 또한 역사적으로 관련하여 이 구절에서 행하여진 것을 아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각 표현이 포함하는 것을 아는 자는 이 구절에 있는 천국의 신비함들을 발견할 것이다. 여기서도 베냐민은 천적 평면으로부터의 영적인 것이다.
이와 비슷한 구절이 스가랴서에도 있다
여호와께서 온 땅 위에 왕이실 것이다; 그 날에 한 분 여호와가 계실 것이다, 그리고 그분의 이름은 하나이실 것이다; 온 땅은 평지로서 둘러싸일 것인데, 기브아로부터 림몬에 까지 이다, 그리고 그녀는 자신 아래 거주할 것인데, 베냐민의 문으로부터 첫 문의 장소에 까지, 모퉁이의 문에 까지 조차, 그리고 하나넬의 망대로부터 왕의 포도즙틀에 까지 조차에서 이다
(슥. 14: 9, 10).
마찬가지로 다윗서에서:
귀를 주어라 오 목자여, 요셉을 양떼 같이 인도하는 너희여, 거룹들 위에 앉은 너희여; 에브라임, 그리고 베냐민, 그리고 므낫세 앞에서 네 힘을 휘저으라, 그리고 우리를 구원하시러 오신다
(시. 80:1, 2).
마찬가지로 드보라와 바락의 예언에서:
여호와께서는 나를 위하여 용사 사이에서 통치하실 것이다; 에브라임으로부터 나온 자의 뿌리는 아말렉 안에 있고, 그들 뒤에 베냐민이 네 백성 안에 있다, 마길로부터 입법가가 내려올 것이다, 그리고 스불론으로부터 필기사의 홀을 끌어당기는 그들이 있다 (사. 5:13, 14).
계시록서에서:
나는 봉인된 자의 숫자를 들었는데, 이스라엘의 각 지파로부터 봉인된 십 사만 사천명 이었다; 스불론 지파로부터 일만 이천 명이, 요셉 지파로부터 일만 이천 명이, 베냐민 지파로부터 일만 이천 명이 봉인되었다 (계. 7:4, 8);
위에서 “이스라엘의 지파들”은 선들과 진리들 안에, 그러므로 주님의 왕국 안에 있는 이들을 의미한다; 그 이유가 “지파들”, “12”, “12000” 모두는 사랑과 신앙의 모든 것들, 또는 선과 진리의 모든 것들이기 때문이다. 위 모든 지파들은 네 등급으로 나뉘는데, 이 중의 마지막 번째에 스불론, 요셉, 베냐민의 각 일만 이천 명이 해당되는데, 마지막에 있는 이유는 스불론 지파가 천국의 결혼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 안에 천국이 있다, 고로 이 안에 모든 것들이 있다; “요셉”은 여기서 영적 평면 속의 천적인 것, 또는 진리의 선; 그리고 “베냐민”은 이 선으로부터의 진리, 또는 천적 평면 속의 영적인 것이다. 이것은 천국에 있는 결혼이고, 고로 이것들은 마지막에서 명명된 것이다.
베냐민이 교회에 있는 천적 평면 속의 영적인 것, 또는 선으로부터의 진리를 표현했기에, 이는 천적 선과 영적 진리 사이에 중간의 것이기에, 예루살렘은 베냐민의 아들들의 상속분으로 제비가 뽑아졌다; 그 이유가 시온에 성전이 건축되기 이전, 예루살렘이 일반적으로 교회를 의미했기 때문이다. (예루살렘이 베냐민 지파에 할당된 것에 대하여는 여. 18:28; 사. 1:21을 보라.)

그리고 라헬은 죽었다, 그리고 에브라데로 가는 길에 묻혔다. 이는 이전에 있던 내면의 진리에 애착함이 끝남을 의미한다. 이는 “죽다”의 의미가 어떤 것이 존재하기를 중지하는 것, 즉 끝이다로부터; 라헬의 표현함이 내면의 진리에 애착함이다로부터; “묻힘”의 의미가 이전의 상태를 거절함이다, 그리고 새로운 것이 소생함이다로부터; 그리고 “에브라데”의 의미가 이전 상태에 있는 천적 평면 속의 영적인 것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런 모두로부터, 라헬이 죽고 에브라데로 가는 길에 묻혔다에 의해 내면의 진리에 애착하는 이전의 상태가 끝나고, “베들레헴”인 새로운 상태가 소생함이다가 분명해진다.
진짜 의미에서, 라헬이 죽고 에브라데로 가는 길에 묻혔다에 의해 유전적인 것이 시험을 수단으로 영원히 추방되는 것, 내면의 진리에 인간적 수준의 애착함을 신성한 애착이 추방하는 것이 의미되고 있다. 이런 이유로 낳은 아들은 어머니에 의해서는 “베노니”, 또는 “슬픔의 아들”이라 불리웠으나, 그의 아버지에 의해서는 “베냐민”, 즉 “오른손의 힘”이라 불리운다. 어머니로부터 있는 인간적 애착 안에는 유전적 악이 있으나 신성한 애착에서는 선밖에 더 없다; 그 이유가 인간의 애착 안에는 자기를 위하여 목적으로서 자기와 세상으로부터의 영광이 있으나; 신성한 애착 안에는 인류의 구원을 위해 자기로부터 있을런지 모르는 자기를 위한 목적이 있다. 이에 대한 주님의 말씀을 읽어보자:
나는 너희가 나에게 주었던 이들을 위해 기도한다, 그 이유가 나의 모든 것은 너희의 것, 그리고 너희의 것은 나의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그들 안에서 신성이 되어진다; 그들 모두는 하나일는지 모른다, 마치 너희 아버지가 내 안에 있는 것 같이 이다, 그리고 나는 너희 안에 있어, 그들 역시 우리 안에서 하나일는지 모른다. 너희가 나에게 준 영광을 나는 그들에게 주었다, 하여 그들은 우리가 하나이듯 하나일는지 모른다; 나는 그들 안에, 그리고 너희는 내 안에
(요. 17:9, 10. 21-23).

이는 베들레헴이다. 이는 이 장소에서 천적 평면 속의 새로운 영적인 것의 부활이 있음을 의미한다. 이는 “베들레헴”의 의미가 새로운 상태에 있는 천적 평면 속의 영적인 것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 이유가 “에브라데”는 이전의 상태 안에 있는 천적 평면 속의 영적인 것, 그리고 그녀가 거기에 매장됨에 의해 새로운 상태의 부활이 의미된다. 라헬이 그녀의 둘째 아들, 또는 베냐민을 베들레헴에서 출산하고, 아들을 출산함에서 죽었다는 것, 또한 다윗이 베들레헴에서 출생하였고, 기름부워진 왕이었다는 것, 마지막으로 주님이 거기서 탄생하셨다는 것은 아직은 밝히 알려지지 않은 신비함이고, 이는 “에브라데”, “베들레헴”에 의해 의미되는 것, 그리고 베냐민, 다윗에 의해 표현되는 것, 특히 천적 평면 속의 영적인 것이 무엇인지 등등을 알지 못하면 밝히 알 수 없다; 그 이유는 천적 평면 속의 영적인 것이 이 장소에 의해 의미되고, 이 인물에 의해 표현되었기 때문이다.
주님이 거기서 탄생하시고 다른 장소에서는 탄생하시지 않은 이유는 그분만이 영적, 천적 인간으로 탄생하셨고, 모든 다른 인간은 주님으로부터 거듭남을 수단으로 영적, 또는 천적 인간으로 되어 가는 가능성을 가지고 자연적 인간으로 출생하기 때문이다. 주님이 영적, 천적 인간으로 탄생하신 이유는 그분은 자신의 인간을 신성으로 만드시기 위함 때문인데, 이렇게 만드심은 질서에 따라, 즉 최고로 낮은 수준으로부터 최고로 높은 수준까지에 이르러 있는 모든 인간의 것을 신성으로 만들어 가신 것이다; 이를 바탕으로 하여 천국들과 지옥들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질서 안으로 배치하셨다. (여기서 말하는) 영적, 천적인 것은 자연 평면, 또는 외적 인간과 합리적 평면, 또는 내적 인간 사이의 중간의 것이다; 다시 말해, 중간의 것 아래쪽으로는 자연 평면, 또는 외적 인간이, 위쪽으로는 합리적 평면, 또는 내적 인간이 있다는 말이다.
위의 사항들을 납득할 수 없는 자는 왜 주님께서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셨는가 역시 제 아무리 별난 계시를 수단으로 삼아도 납득할 수 없다. 태고 시대로부터 “에브라데”는 천적 평면 속의 영적인 것을 의미했다; 그러므로 그 후에 “베들레헴”도 같은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이는 다윗 당시에 아래 구절이 말해진 이유이다. 다윗서에서:
그는 여호와께 맹세했다, 그는 야곱의 전능하신 분에게 서약했다, 저는 여호와를 위한 장소를, 야곱의 전능하신 분의 주택을 발견할 때까지 저는 내 집의 천막 안으로, 내 침대의 침상 위로 오르는 것도, 제 눈꺼풀이 꾸벅 조는 것도 하지 않을 것입니다; 오 우리는 에브라데에서 그분(Him) 에 관하여 들었습니다, 우리는 숲의 들판들에서 그분(Him)을 발견했습니다; 우리는 그분(Him)의 주택으로 갈 것입니다, 우리는 그분(Him)의 발판에서 우리 자신을 굽혀 절할 것입니다
(시. 132:2-7);
위의 말들이 주님에 관해서 말해진 것임은 매우 분명하다; 그 이유가 “우리는 그분에 관하여 들었다,” “우리는 그분을 발견했다”는 원어에서의 경우, 이름 여호와(Jehovah)로부터 취한 철자 h가 단어들의 끝에서 표현되어 있기 때문이다.
미가서에서:
너 베들레헴 에브라데여, 수 천의 유다 사이에서 너는 매우 작고, 너로부터 이스라엘의 통치자일 자가 나에게 세상 밖으로 출시될 것인데, 그의 나감은 옛 것으로부터 이고, 영원의 날들로부터 이다 (미. 5:2; 마. 2:6).
이 예언으로부터 유태 사람에게 알려진 것은 메시아 또는 그리스도가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시리라는 것이다. 마태복음서에서:
헤로데는 백성의 대 성직자와 서기관 모두를 모아 놓고, 그들에게 그리스도 (메시아)가 어디서 탄생하는지를 물었다; 그들이 그에게 말했다, 유대의 베들레헴입니다 (마. 2:4, 5).
요한복음서에서:
유태인들이 말했다, 그리스도가 다윗의 씨로부터, 다윗이 있던 성으로부터 나온다고 성경은 말하지 않더냐? (요. 7:42).
그리고 그분이 거기서 탄생하신 것은 마. 2:1; 눅. 2:4-7에서 알게 된다. 이런 이유, 그리고 그분이 다윗으로부터 있으셨기 때문에, 주님은 “이새의 지주로부터의 가지”, 그리고 “이새의 뿌리” (이. 11:1, 10)라고 불리우신다; 그리고 다윗이 베들레헴에서 출생하고, 거기서 기름부워졌다 (삼상. 16:1-14; 17:12). 그러므로 베들레헴은 “다윗의 성”이라 불리워진다 (눅. 2:4, 11; 요. 7:42). 다윗은 특히 주님의 왕권, 또는 신성한 진리 측면에서 그분을 표현했다.

그리고 야곱은 그녀의 무덤에 기둥을 세웠다. 이는 거기서 다시 일어나는 영적 진리의 거룩함을 의미한다. 이는 “기둥”의 의미가 진리의 거룩함이다로부터, 여기서는 천적 평면으로부터 있는 영적 진리의 거룩함인데, 그 이유는 이것이 취급되는 진리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덤”의 의미가 부활함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것은 오늘날까지 라헬의 무덤의 기둥이다. 이는 거룩한 상태가 영원함을 의미한다. 이는 “기둥”의 의미가 진리의 거룩함이다로부터; 그리고 “무덤”의 의미가 부활이다로부터; 그리고 “오늘날까지”의 의미가 영원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21, 22절. 그리고 이스라엘은 여행했다, 그리고 그의 천막을 에델 망대 너머로 펼쳤다. 22 그리고 이스라엘이 그 토지에 머무르고 있는 때였는데 르우벤이 가서 그의 아버지의 첩, 빌하와 누웠다, 그리고 이스라엘이 들었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여행했다. 이는 이 때 당시 자연 평면 속의 천적, 영적인 것을 의미한다. 이는 “여행함”의 의미가 계속적인 것이다로부터, 여기서는 더 내면의 것들을 향하여 계속됨이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표현함이 자연 평면의 천적, 영적인 것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자연 평면의 천적, 영적인 것이 무엇인지는 앞에서 설명했다, 즉 이것은 진리의 선, 또는 신앙의 진리를 수단으로 포획된 선행의 선이다. 내면의 것들을 향하여 발전함이 무엇인지는 세상에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이것은 기억 속의 지식들 쪽으로 발전함은 아니다, 그 이유가 이것은 내면의 것들을 향하여 있는 어떤 발전함도 없이도 자주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은 성년 시절의 판단력 쪽으로 발전함도 아니다, 그 이유는 이것 역시 내면의 것들로부터 떠나 있으면서도 때때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내면의 진리에 관한 지식들 쪽으로 발전함도 아니다, 그 이유가 이 지식들은 인간이 그것들에 감동되지 않으면 아무 소용에도 닿지 않기 때문이다. 내면의 것들을 향하여 발전함은 내면의 것들에 애착함 안에 심어진 진리의 지식들을 수단으로, 고로 애착들을 수단으로 천국과 주님을 향하여 발전함이다.
내면의 것들을 향하여 발전함의 본성이 무엇인지는 이 세상에 있는 누군가에게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나 다른 삶에서는 분명하게 나타난다, 그 이유가 거기서는 안개 같은 종류로부터 빛 안으로의 발전함이 있기 때문이다; 외면의 것들 만에 있는 이들은 상대적으로 안개 안에 있고, 천사들에 의해 하나 안에 있게 보여진다; 이에 반해 내면의 것들 안에 있는 이들은 빛 안에 있고, 결과적으로 지혜 안에 있다, 그 이유가 거기서의 빛은 지혜이기 때문; 경이롭다 말해지는 대목은 안개 안에 있는 이들이 빛에서와 같이 빛 안에 있는 이들을 볼 수 없다는 것, 그러나 빛 안에 있는 이들은 안개 안에서 같이 안개 안에 있는 이들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취급되는 주제가 내면의 것들을 향하여 주님의 신성이 발전함이기에, 여기서의 야곱은 “이스라엘”이라 불리운다, 그러나 다른 경우들에서, 즉 이 장의 앞 장들에서 같이, 그리고 마지막 구절에서 같이, 그는 “야곱”이라 불리운다.

그리고 그의 천막을 에델의 망대 너머로 펼쳤다. 이는 거기서부터의 내면의 것들을 의미한다. 이는 “천막을 펼침”의 의미가 거룩한 것의 발전, 여기서는 내면의 것들을 향함이다로부터; “망대 너머”의 의미가 내면의 것들 안으로 이다로부터 알게 되는데 이는 아래에서 살핀다; 그리고 “에델”의 의미가 상태의 품질, 즉 내면의 것들을 향한 거룩한 것의 발전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고대 때로부터 에델 망대는 이 의미를 가졌으나, 이 에델이라는 이름은 여. 15:21 외에는 말씀의 다른 곳에 등장하지 않기에 비교해보거나 하는 식으로 의미를 확증하는 방식은 가능하지 않다. “망대 너머”가 내면의 것들을 향하여를 표시하는 이유는 내면이 높은 것들을 수단으로, 고로 산, 언덕, 망대, 지붕, 등등 같은 것으로 표현되기 때문이다. 그 이유인즉, 외적 감각들을 통하여 세상의 자연인 것들로부터 자기들의 생각들을 끌어내는 마음에 내면의 것들은 그것들보다 더 높은 것으로 나타나기 때문에서 이다.
“망대들”이 내면의 것들을 의미하는 것은 말씀의 다른 구절들로부터 알는지 모른다. 이사야서에서:
나의 친애하는 자가 기름의 아들의 뿔에 포도원을 가졌다, 이것을 그는 빙둘러 울타리를 치고, 돌을 걷어내고, 그것 위에 고상한 포도나무를 심었다, 그리고 그것의 한가운데에 망대를 건축했다 (이. 5:1, 2);
“포도원”은 영적 교회를; “고상한 포도나무”는 영적 선을; “그것의 한가운데에 건축된 망대”는 진리에 관한 내면의 것을 표시한다. 마찬가지로 주님의 비유에서:
집주인 되는 사람이 포도원을 심었다, 그리고 그것 주변에 울타리를 쳤다, 그리고 그 안에 포도즙틀 을 팟다, 그리고 망대를 건축했다, 그리고 그것을 농사꾼들(소작인들)에게 세로 주었다
(마. 21:33; 막. 12:1).
에스겔서에서:
아르왓의 아들들과 너의 군대가 네 성벽을 빙둘러 있었고, 가마딤들은 네 망대들에 있었다, 그들은 자기들의 방패들을 네 성벽들을 빙둘러 걸었다; 이것들은 네 아름다움을 완전하게 했다
(겔. 27:11);
위는 두로를 취급하는데, 이를 수단으로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들, 또는 이 지식들 안에 있는 이들이 의미된다; “망대들에 있는 가마딤”은 내면의 진리에 관한 지식들을 표시한다.
미가서에서:
여호와께서 시온 산에서 그들을 지금으로부터 영원까지 통치하실 것이다; 그리고 너 양떼의 망대, 시온의 딸의 언덕이여, 그것은 네게로 올 것이다, 그리고 이전의 왕국이 되돌아 올 것이다, 예루살렘의 딸의 왕국이여 (미. 4:7, 8);
위는 주님의 천적 왕국이 묘사되고 있다; 그 왕국의 가장 깊은 쪽은 주님을 사랑함이고, “시온 산”에 의해 의미되고 있다; 이 주님을 사랑함에서 파생된 것이 서로의 사랑이고, 이것이 “시온의 딸의 언덕”에 의해 의미되는데, 이 사랑은 영적 의미에서 이웃을 향한 선행이라 불리운다; 선으로부터의 내면의 진리들이 “양떼의 망대”에 의해 의미된다; 이로부터 천적 왕국의 영적 부분이 온다는 것이 “예루살렘의 딸의 왕국”에 의해 의미된다. 다윗서에서:
시온 산이 기뻐하게 하자, 유다의 딸들이 크게 기뻐하게 하자, 그 이유는 당신의 공의 때문입니다; 너희는 시온을 에워싸라, 그리고 그것 빙둘러 띠를 두르라, 거기서부터 망대를 세어라
(시. 48:11, 12);
위에서 “망대들”은 사랑과 선행으로부터 있는 것을 방어하는 내면의 진리들을 표시한다.
누가복음서에서: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지 않는 자는 누구이든 내 제자일 수 없다; 그 이유가 너희 중 누구가, 망대를 건축하기를 바란다면, 먼저 앉아서 그것을 완성하는데 드는 비용을 계산하지 않더냐? 또는 어떤 왕이 다른 왕과 전쟁을 치러야 한다면, 우선 앉아서, 만 명으로 이만 명을 대적할 수 있을지를 상담하지 않겠느냐? (눅. 14:27, 28, 31, 33);
말씀 속의 내적 의미를 모르는 이들이 상상하는 것은, 위 구절은 주님께서 비교함을 수단으로 말하신 것이라고, 즉 망대를 건축하고, 전쟁을 치루는 것에 의해 더 이상의 뜻해짐은 없다고 상상한다, 이들은 말씀에 있는 모든 비교함들이 뭔가를 표현하고 의미한다는 것을 모른다. 즉 “망대를 건축하는 것”은 누군가가 자아를 위하여 내면의 진리들을 포획하는 것, 그리고 “전쟁을 치루는 것”은 이 진리들로부터 전투를 수행하는 것임을 모르고 있다는 말이다; 이런 의미를 위 구절이 지닌 이유는 취급되는 주제가 교회 안에 있는 이들에 의해 수행되는 시험이기 때문이다; 이들이 여기서 주님의 “제자들”이라 불리운다. 이 시험들은 그들이 반드시 운반해야 하는 “십자가”에 의해 의미되어 있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들로부터, 또는 그들 고유의 것으로부터 결단코 시험을 정복할 수 없다는 것이 “그가 가진 모든 것을 포기하지 않는” 누구든지, 그는 내 제자일 수 없다“에 의해 의미되고 있다. 고로 이 모든 것들은 하나의 주제를 놓고 시종일관 하고 있다; 이에 반해 망대와 전쟁을 내적 의미 없이 비교함으로만 연관하면, 앞, 뒤에 모순이 발생한다.
“망대들”의 반대적 의미, 즉 내면들이 자기와 세상을 사랑함에 있는 이들, 고로 거짓들을 가지고 전투하는 이들, 이 거짓들을 수단으로 자신들의 광신적 신앙을 확증하는 이들이 아래에서 “망대들”에 의해 표현되어 있다. 이사야서에서:
인간들의 거만함이 낮은 데로 가져다놓일 것이다, 그리고 여호와 체바욷께서는 거만하고 높은 모든 자 위에, 도도한 모든 자 위에 높혀지실 것이다, 그리고 그는 겸손해질 것이다; 그리고 높은 레바논의 모든 삼나무 위에, 바산의 상수리나무 위에, 그리고 모든 높은 산 위에, 그리고 드높인 모든 언덕 위에, 그리고 드높인 모든 망대 위에, 견고한 모든 성벽 위에 높혀지신다
(이. 2:11-15);
위는 이런 사랑들의 내면들과 외면들이 “삼나무”, “상수리나무”, “산들”, “언덕들”, “망대”, 그리고 “성벽”에 의해 묘사되고 있다 (“망대”에 의해서는 내면의 거짓들이다)), 고로 내면의 것들은 높이 있는 것들에 의해 묘사되는데, 두 반대되는 것의 이런 차이는 있다; 즉 악들과 거짓들 안에 있는 자들은 자신들이 타인들 보다 높다고 여긴다, 그러나 선들과 진리들에 있는 이들은 자신들은 타인들 보다 낮고 덜 가치 있다고 믿는다 (마. 20:26, 27; 막. 10:44). 그럼에도 선들과 진리들이 높은 것들이다고 (말씀에서) 묘사된다; 그 이유는 천국에서 그것들은 주님에게, 가장 높으신 분에게 더 가까이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말씀에서 “망대”는 진리들을, “산들”은 선들을 서술한다.

이스라엘이 그 토지에 머무르고 있을 때였다. 이는 이 상태 안에 있을 때, 즉 진리로부터의 선 안에 있을 때를 의미한다. 이는 “머무름”의 의미가 사는 것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 이유는 “머무름(abide)”이 “거주하다(dwell)”와 같은 것을 뜻하기 때문이나, 약간의 차이는 있는데, 머무름은 진리 측면을, 거주함은 선 측면을 서술한다; “토지”의 의미가 선 측면에서의 교회이다로부터, 여기서는 진리의 선 측면에서의 교회가 의미되고 있다.

르우벤이 가서 그의 아버지의 첩, 빌하와 누웠다. 이는 분리된 신앙을 수단으로 선을 모독함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들었다. 이는 이 신앙은 거절되었음을 의미한다. 이는 르우벤의 표현함이 교리와 이해력에 있는 신앙이다로부터, 이 신앙은 교회의 첫 번째 것이다, 여기서는 이 신앙이 선행으로부터 분리되고 있는데, 아래에서 살핀다; 그리고 “그의 아버지의 첩 빌하와 누움”의 의미가 선을 모독함이다로부터, 그 이유가 “간통을 범하는 것”은 선을 타락하게 하는 것, 또는 선에 섞음질을 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아버지의 첩과 눕는 것”은 그것들을 모독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스라엘이 들었다”의 의미가 이 신앙은 거절되었다 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스라엘이 들음에 대한 적절한 의미는 영적 교회가 이를 알았고 그것에 동의했다 일 것이다; 그 이유가 “듣다”에 의해 귀기울이다가 의미되고, “이스라엘”에 의해 영적 교회가 의미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짜 교회는 동의하지 않는다는 것이 앞으로 르우벤에 관해 말해지는 것에서 나타날 것이다. 그러나 내적 의미에서 이 신앙은 거절되어졌다가 의미된다, 그 이유가 야곱이 이 악질적인 행위에 관하여 느꼈고 생각했다고 말해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는 그 행위를 지독하게 역겨웁고 혐오했다는 것이 르우벤에 관한 그의 예언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즉:
르우벤, 너는 나의 첫 아들, 나의 힘, 나의 힘의 시작이다; 명예에서 뛰어나고 힘에서 특출하다. 물 같이 불안정한 바, 너는 특출하지 않아, 네 아버지의 침대 위로 갔다, 그때 그것을 모독했다, 그는 내 침상 위에 갔다 (창. 49:3, 4);
이것 때문에 그의 생득권이 박탈되어졌다 (역상. 5:1). 그러므로 “이스라엘이 들었다”에 의해 이 신앙이 거절되었다가 의미됨이 분명해진다
교회의 진리와 선이 인정되고 믿어질 때, 그런데 인간이 그것에 반대되어 살 때, 분리된 신앙에 의해 선을 모독함이 결과되어진다. 그 이유가 이해력 안에서 선행의 것들로부터 신앙의 것들이 분리된 이들, 그로부터 생활 안에 있는 이들과 더불어, 악은 진리와, 거짓은 선과 결합되어진다; 그리고 이 결합 자체가 모독함이라 불리우는 것이다. 이들은 신앙으로부터 진리와 선이 무엇인지를 알지라도, 심정으로는 여전히 믿지 않는 이들이다.
영적 교회 속에 있는 이들이 구원되어질 수 있기 위하여, 주님은 그들의 지적 부분을 의지 부분으로부터 기적적으로 분리하셨다; 그리고 지적 부분이 새로운 의지를 받는 것을 수여하셨다. 그러므로 지적 부분이 신앙 속에 있는 선을 납득하고 지각할 때, 그래서 이 선을 자체에 자기 것에 어울리게 할 때, 그럼에도 인간의 의지(인간 고유의 의지는 악이다)가 아직도 버젓이 통치하고, 명령할 때, 진리와 악, 선과 거짓의 결합이 결과되어진다. 이 결합이 모독이다, 그리고 성찬에서 무가치하게 먹고 마심에 의해 뜻해진다. 즉 이 예식에서 있는 선은 “몸”에 의해, 진리는 “피”에 의해 의미되는 바, 이 둘은 분리될 수 없다, 그 이유는 이런 방식에서 결합된 것들은 영원까지 결코 분리되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 고로 이 모독에는 가장 깊은 지옥이 기다린다. 신앙의 진리와 선이 무엇인지 아는 이들, 그럼에도 심정으로 믿지 않는 이들은 (오늘날의 경우 대부분이 이러하다) 그것들을 모독할 수 없다, 그 이유는 지적 측면이 그것들을 받지 않기 때문, 자체에 그것들을 흡수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분리된 신앙을 거절함이 여기서 취급되고, 뒤어지는 것에서 진짜 질서에서 있는 진리와 선이 등장하고, 그 후 직접적으로 합리성, 또는 지적 부분과의 결합이 있다. 곧바로 명명되는 야곱의 아들들은 진짜 질서에 있는 진리들과 선들이다, 그리고 이삭은 합리성 또는 지적 부분이다. 야곱과 그의 아들들이 이삭에게 옴은 지적 부분과의 이 결합이 내적 의미에서 있는 것이다.

22-26절. 그리고 야곱의 아들들은 열둘이었다. 23 레아의 아들들은 르우벤 야곱의 장자, 시므온, 레위, 유다, 잇사갈, 스불론이다. 24 라헬의 아들들은 요셉과 베냐민이다. 25 그리고 라헬의 하녀 빌하의 아들들은 단과 납달리이다. 26 그리고 레아의 하녀 질바의 아들들은 갓과 아셀이다. 이들은 야곱의 아들들인데, 밧단-아람에서 그에게 출생되어졌다.

그리고 야곱의 아들들은 열둘이다. 이는 지금 신성한 자연 평면에 있는 모든 것들의 상태를 의미한다. 이는 야곱의 표현함이 신성한 자연 평면이다로부터; “열둘”은 모두이다로부터, 그리고 야곱의 아들들을, 그리고 명명되는 지파들을 서술할 경우, 열둘은 진리와 선의 모든 것들이다. 주님의 자연 평면에 주목하면, 열두 아들들은 어떻게 그분께서 그분 자신 안에서 그분의 자연 평면을 신성으로 만드셨는가를 보여준다, 그 이유가 그분의 자연 평면이 야곱에 의해 표현되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서 취급되는 주제는 신성한 자연 평면이 신성한 합리적 평면과 결합함이고, 이 결합이 야곱이 이삭에게 옴에 의해 표현되어졌다; 그 이유가 이삭은 주님의 신성한 합리적 평면을 표현하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야곱의 모든 아들들이 새로이 열거되고 있다. 그 이유가 진리와 선의 모든 것들이 자연 평면에 있어야만 합리성과의 충분한 결합이 가능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자연 평면은 합리성에 그릇 역할을 담당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이 이미 열거된 바 있지만 확실히 있음을 위해 다시 일일이 열거되고 있다. 그러나 한가지 더 알아야 하는 것은 열거되는 순서가 앞의 순서와 다르다는 점이다. 즉 빌하와 질바의 아들들, 즉 단, 납달리, 갓, 아셀이 마지막 순서에 있다는 것, 그렇지만 실제적으로는 그들은 잇사갈, 스불론, 요셉, 베냐민보다 먼저 출생된 아들들이다. 이렇게 순서가 바뀐 이유는 지금의 진리와 선은 신성으로 만들어졌을 때가 취급되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이것들이 언급된 질서는 취급되는 주제에 일치하여 있기 때문이다.

레아의 아들들. 이는 질서적으로 외적 측면에서 있는 신성한 선들과 진리들을 의미한다. 이는 레아의 표현함이 외적 진리에 애착함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러므로 그녀의 “아들들”은 르우벤, 시므온, 레위, 유다, 잇사갈, 스불론에 의해 표현된 선들과 진리들이다. 이는 아래에서 이어진다.

르우벤 야곱의 첫 출생. 이는 신앙의 선을 의미한다. 이는 “첫 출생”의 의미가 신앙이다로부터; 그리고 야곱의 표현함이 자연적 진리로부터의 선이다로부터; 그리고 르우벤의 것으로부터가 신앙의 품질이다에서 알게 된다. 르우벤은 진짜 의미에서 신앙의 진리를 의미한다; 그러나 신앙의 진리가 선으로 만들어진 이후, 그는 신앙의 선을 의미한다. 더욱이 그 자체에 국한해보면, 신앙의 진리는 신앙의 선이다, 그 이유는 신앙은 선행으로부터 있지 않으면 불가능하기 때문, 즉 진리는 선으로부터가 아니면 불가능하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인간이 거듭나질 때, 선이 첫째 자리에, 또는 첫 출생이다. 이로부터 “르우벤 야곱의 첫 출생”에 의해 여기서 신앙의 선이 의미되는 것이다. 같은 것이 다른 구절에 더 있다:
르우벤은 살고 죽지 않게 하자, 그리고 그의 숫자들(그의 동아리들)은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일 것이다 (신. 33:6).
위 구절에서 “르우벤”이 신앙의 선을 표시하는 이유는 그가 첫 장소에, 유다가 둘째 장소에 놓여 있다는 사실로부터 이다. 즉 이스라엘의 아들들에 관한 모세의 예언 때(신. 33장))의 순서는 야곱의 예언 때(창. 49장)의 순서와 다르다. 그런 이유는 그들이 명명되는 순서는 취급되는 주제에 일치하여 놓이기 때문에서이다.
마찬가지로 계시록서에서:
나는 봉인된 숫자를 들었는데, 각 지파로부터의 십 사만 사천 명이었다. 유다 지파로부터는 일만 이천 명, 르우벤 지파로부터는 일만 이천 명, 각 지파로부터는 일만 이천 명이 봉인되어졌다
(계. 7:4, 5)
위에서는 유다가 첫 장소에, 르우벤은 둘째 장소에, 그리고 갓은 셋째 장소에서 명명된다. 이 셋은 첫 분류(등급, class)를 구성하는데, 주님의 왕국이 취급되는 주제이기에 “유다”는 가장 깊은 데에, 즉 셋째 천국에 있는 선, 곧 천적 선, “르우벤”은 영적 선, 이는 신앙의 선과 같은 것, 중간 천국, 또는 둘째 천국에 있는 선이다, 그리고 “갓”은 자연 평면의 선, 이는 첫째 천국에 있는 선이다. 그러나 이것은 드보라와 바락의 예언에서는 다르다:
잇사갈의 제 일인 자들이 드보라와 더불어 있었다, 그리고 잇사갈이 있었듯, 바락도 그러했다; 골짜기 안으로 그는 그의 발을 보내었다, 르우벤의 부류 안에 심정의 큰 판결이 있었다; 왜 너희는 가축떼의 쉿쉿함을 들으려고 두 짐들 사이에 거주하는가? 르우벤의 부류들에게 심정의 큰 수색함이 있었다 (사. 5:15, 16);
위 구절의 의미를 알려면, 먼저 잇사갈, 드보라, 바락, 르우벤이 무엇을 표현하는지를 알아야 한다; 그리고 “제 일인 자들”, “골짜기”, “부류들”, “심정의 판결”, “두 짐들”, “가축떼의 쉿쉿함”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까지 알아야 한다. 여기서 “르우벤”은 신앙을 표시한다.

그리고 시므온, 그리고 레위, 그리고 유다, 그리고 잇사갈, 그리고 스불론. 이는 외적인 신성한 선들과 진리들에 필수적인 것들을 의미한다. 이는 각각의 인물의 표현으로부터 알게 된다; 즉 시므온은 최고 의미에서 섭리, 내적 의미에서 의지에 있는 신앙, 외적 의미에서 순종; 레위는 최고 의미에서 사랑과 자비, 내적 의미에서 선행과 영적 사랑, 외적 의미에서 천적 교회 속에 있는 말씀으로부터의 교리; 잇사갈은 최고 의미에서 신성한 진리의 선과 선의 진리, 내적 의미에서 천적 부부의 사랑, 외적 의미에서 서로의 사랑; 그리고 스불론의 의미가 최고 의미에서 주님의 신성 자체와 그분의 신성한 인간, 내적 의미에서 천국의 결혼, 그리고 외적 의미에서 부부의 사랑. 이상의 것들은 주님의 선들과 진리들이 외적 측면에서 있어야 하는 필수적인 것들이다, 그러나 천국의 빛 안에 있지 않으면, 이것들의 각각이 어떻게 그것들과 더불어 있는지를 알 수 없다, 그 이유가 거기 안에서는 이런 사항들이 빛과 불꽃의 번쩍거림을 수단으로 우림과 둠밈 안에서 주어지는 대답들 같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주님으로부터 지각함이 있다. 그 이유는 우림과 둠밈 안에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들에 따른 열두 귀중한 돌들이 있기 때문이다.

라헬의 아들들은 요셉과 베냐민이다. 이는 내면의 선들과 진리들을 의미한다. 이는 라헬의 표현함이 내면의 진리에 애착함이다로부터, 그러므로 “라헬의 아들들”은 내면의 선들과 진리들이다. 이것들의 필수적인 것들이 요셉과 베냐민에 의해 표현되어진다; 요셉에 의하여 최고 의미에서 신성한 영적 평면, 내적 의미에서 영적 왕국, 외적 의미에서 영적 왕국의 선; 그리고 베냐민에 의하여 신성한 천적 평면 속의 영적 평면(영적인 것). 위 두 필수적인 것들은 내면의 선들과 진리들 안에 있다.

그리고 라헬의 하녀 빌하의 아들들은 단과 납달리이다. 이는 내면의 선들과 진리들을 섬기며 있는 것들을 의미한다. 이는 라헬의 하녀 빌하의 표현함이 내면의 진리에 애착함에 수단이 되어 섬기며 일어나는 차후의 애착함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더욱이 “하녀”는 결합을 위해 봉사하는 수단을 표시한다, 그리고 그녀의 “아들들”은 이와 같은 수단들을 표시한다. 차후의 선들과 진리들에 의해 직접적으로 들어가지 않는 이런 선들과 진리들이 뜻해진다, 그러나 이것들은 이와 같이 행한 바로부터 파생되고, 그것들에 하녀 같이 인접되어 있다, 그리고 이것은 또한 중재하고 촉진도 한다. 이런 필수적인 것들이 단과 납달리에 의해 표현되어 있다; 단에 의해 최고 의미에서는 그분의 정의와 자비를, 내적 의미에서는 신앙의 거룩함을, 외적 의미에서는 생활의 선을; 납달리에 의해서는 최고 의미에서 그분 자신의 힘을, 내적 의미에서는 시험에서 승리가 있음을, 외적 의미에서는 자연적 인간으로부터 저항함을 의미한다. 이것들은 내면의 선들과 진리들을 섬김 속에 있는 수단들에게 필수적인 것들이다.

레아의 하녀 질바의 아들들은 갓과 아셀이다. 이는 외면의 선들과 진리들을 섬기는 것들을 의미한다. 이는 레아의 하녀 질바의 표현함이 외면의 진리에 애착함에 수단이 되어 섬기는 차후의 애착임다로부터 알게 된다. “하녀”는 결합을 위해 섬김 속에 있는 수단을 표시한다: 그리고 그녀의 “아들들”은 이와 같은 수단들, 갓과 아셀에 의해 표현되는 필수적인 것들을 표시한다; 갓은 최고 의미에서 전능하심과 전지하심을, 내적 의미에서는 신앙의 선을, 외적 의미에서는 일들을; 아셀은 최고 의미에서 영원을, 내적 의미에서 영원한 생명의 행복을, 그리고 외적 의미에서 애착의 기쁨을 표현하고 있다. 이상 것들 모두는 이 때에서 야곱의 아들들의 열거함이 포함하는 것들이다; 그러나 어떻게 그것들이 다함께 이것이 저것에 뒤잇고, 이것이 저것 안에 있거나 하는지 등등 같은 서로에 부합하면서 시종일관되는 지에 대하여는 천국의 빛 안에 있지 않으면 세상의 빛으로는 알 수가 없다. 게다가 미력하나마 알게 된 것들 마저 인간의 단어들로는 표현해내기에는 딱히 사용할 만한 만족스런 단어를 찾는 것도 무척 힘들다; 그 이유가 인간의 단어라는 것은 세상의 빛 안에 있는 것으로부터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사실상 천국의 빛으로부터 있는 생각들은 세상의 생각들을 초월해 있어 세상의 생각들은 그것들을 표현할 수 없다. 따라서 감각적인 것들 수준을 떼어낸 상태에 있는 이들이라면 아마 매우 흐릿하고 미미한 정도에서 알 수 있다.

이들은 야곱의 아들들인데, 밧단-아람에서 그에게 출생되어졌다. 이는 그들의 근원과 그들의 현재 상태를 의미한다. 이는 이미 말해왔던 것, 즉 야곱의 아들들을 일반적, 특수적, 개별적으로 말한 것들, 즉 그들에 의해 일반적으로는 주님의 신성한 자연 평면에 있는 모든 것들이 의미된다는 것, 이 모든 것들을 다함께 취합한 상태가 여기서의 “야곱”이다. 그들의 근원은 그들이 밧단-아람에서 출생됨에 의해, 또는 진리와 선에 관한 지식들로부터 있는 것들이 의미된다. 그 이유가 이런 사항들이 “밧단-아람”에 의해 의미되기 때문이다. 열두 아들들의 모든 것들이 야곱 한 명으로 취합되어 있다고 위에서 말한 이유 중의 하나는 원어에서의 표현을 영어로 완전 꼼꼼하게 바꾸어놓으면 아들들임에도 이를 단수로 받고 있다; 즉 These are the sons of Jacob, who were born to him in Paddan-aram이 아니라, These are the sons of Jacob, who was born to him in Paddan-aram로 번역된다. 이후 이어지는 것에서 취급되는 주제는 신성한 자연 평면이 신성한 합리적 평면과 결합함이다. 이 결합함이 야곱이 자기 아버지 이삭에게 당도함에 의해 표현되어진다.

27-29절. 그리고 야곱은 기럇-아르바, 마므레로 가서 그의 아버지 이삭에게 왔다. 이곳은 헤브론이다, 여기서 아브라함과 이삭이 체류했다. 28 그리고 이삭의 날들은 일백 팔십 년이었다. 29 그리고 이삭은 기한이 만료되어 죽었다, 그리고 그는 살만큼 살아 늙고 그의 백성들에게로 거두어졌다. 그리고 에서와 야곱이 그를 매장했다.

그리고 야곱은 그의 아버지 이삭에게 왔다. 이는 지금 신성한 합리적 평면에 신성한 자연 평면이 결합되어지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야곱의 표현함이 방금 위에서 취급한 상태에서의 신성한 자연 평면이다로부터 분명해진다; 그리고 이삭의 표현함이 신성한 합리성(합리적 평면)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결합함이 야곱이 이삭에게 옴에서 의미되고 있다. 뒤이어져 이 장의 끝까지 내려가면서 취급되는 주제는 자연 평면이 합리적 평면과 결합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즉각 진행되는 것 안에는 선과 진리의 모든 것들이 포함되었다, 이 모든 것의 품질들은 야곱의 열두 아들들에 의해 의미되고, 이미 살핀 대로 각 아들은 진리와 선의 어떤 일반적인 측면을 표현한다.
뒤이어지는 구절에서 취급되는 자연 평면과 합리적 평면의 결합에 주목하면, 이내 알게 되는 것은, 합리적 평면은 자연적 평면보다 (천국에 속한 것을) 더 쉽게 더 빨리 받는다는 점이다. 그 이유는 합리성은 자연 평면보다 더 순수하고 더 완전하기 때문, 그런 이유는 합리적 평면은 내면에, 더 높은쪽에 위치하기 때문, 합리성 자체만을 관조하면, 이것은 천국의 빛 안에 있어 천국의 것들에 적응되기 쉽게 있다. 이것이 합리성이 자연 평면보다 더 빨리, 더 쉽게 천국의 빛에 속한 것들, 즉 진리와 선들, 또는 총명과 지혜에 속한 것들을 받는 이유이다. 그러나 자연성은 더 조잡하고, 더 불완전하다, 그 이유는 이것이 외면에, 더 낮은쪽에 위치하기 때문, 이것 자체만을 관조하면, 이것은 세상의 빛 안에 있다; 이 빛은 천국의 빛으로부터 합리성을 통하여 받는 만큼에서만 그것 안에 총명과 지혜를 가질 뿐 그것 자체로는 총명과 지혜의 어떤 것도 없다. 요즈음 학식자들이 이야기하는 것으로부터의 유입(influx)이라는 것은 (본서에서 사용하는 유입과는 정확히 같지는 않지만) 대충 이를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
어쨌든 자연 평면과 더불어서의 경우는 이렇다: 초기 유아와 어린 시절로부터 자연 평면은 외적 감각들을 통하여 세상으로부터 흘러드는 것들로부터 그 평면의 품질을 받는다, 그리고 이것으로부터, 이것을 수단으로 인간은 지적인 것을 획득한다. 그러나 이 시기에서의 인간은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의 기쁨들 안에, 결과적으로 탐욕들 안에, 이는 유전적으로, 실제의 삶 모두에서 그렇게 있기에, 그가 그 시기에 획득하는 지적인 것들은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들로 채워져 있는다. 따라서 자신이 총애하는 것은 무엇이든 그에게는 선들이고 진리들이다, 그 결과, 이 시절의 그의 자연 평면에 있는 선들과 진리들은 거꾸로의 상태, 즉 천국의 질서에 반대되어 있다. 인간이 이 상태에 있을 때, 실로 천국의 빛은 합리적 평면을 통하여 흘러든다, 그 이유가 비록 외견상이지만 당사자가 선량하고 공정한 시민으로 되어 있는 이유가 그나마 그가 합리성으로부터 생각하고, 추론하고 이야기하고 행동하는 능력을 가졌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아직은 그의 자연 평면은 빛에 속한 것들, 그의 영원한 행복에 도움을 줄 수 있는 것들은 없다, 그 이유는 이것을 자연 평면을 통치하는 기쁨들이 반갑게 여기지 않기 때문인데, 그런 이유는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은 이웃 사랑과, 결과적으로 주님을 사랑함에 직선적으로 반대되기 때문이다. 실로 인간은 빛에 속한 것들, 천국에 속한 것들을 알고 있을런지 모른다, 그러나 그것들이 자신의 명예를 드높히는데, 부를 축적하는데, 요약해서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 도움을 주는 것 빼고는, 그것들이 당사자를 감동시키지 못하고 있다.
이로부터도 자연 평면의 질서는 천국 질서에 반대적으로, 거꾸로 나타난다. 그러므로 천국의 빛이 합리성을 통하여 자연 평면 안으로 흘러들 때, 합리적인 것들은 뒤쪽으로 후퇴하든지, 질식되든지, 악용되고 말든지 등등이다. 그러므로 자연 평면이 합리적 평면과 결합하기 전, 반드시 요구되는 조건은 자연 평면이 거듭나야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자연 평면이 거듭나질 때, 주님으로부터 천국을 통하여 흐르는 것들, 고로 합리성을 통하여 자연 평면으로 흐르는 것들은 받아진다, 그 이유는 일치하기 때문이다. 사실 자연 평면은 합리성으로부터의 선과 진리, 또는 합리성을 통하여 주님으로부터 있는 선과 진리를 받는 그릇밖에 더 아니다. 그 이유가 자연 평면에 의해 외적 인간이 뜻해지기 때문, 외적 인간은 자연적 인간이라고도 불리울 수 있기 때문, 그리고 합리성은 내적 인간이라 불리우기 때문이다. 이런 사항들이 지금까지 늘 사용해온 단어들인데, 그렇기에 여기서 취급되는 것, 즉 자연 평면이 합리적 평면과 결합함도 어느 정도나마 납득되고 있을 것이다.

기럇-아르바, 마므레로. 이는 그것의 상태를 의미한다. 이는 “마므레”의 의미가 이것이 인접된 것쪽으로 그것의 질과 양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리고 “기럇-아르바”의 의미가 진리 측면에서의 교회, 고로 진리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로부터 “마므레 기럇-아르바”는 진리 측면에 관한 자연 평면의 상태가 의미된다, 그리고 “헤브론”에 의해서는 선의 상태가 의미되는데 아래에서 이어진다.

여기는 헤브론이다. 이는 그들이 결합되어졌을 때의 상태를 의미한다. 이는 “헤브론”의 의미가 교회의 선이다로부터, 여기서는 주님의 신성한 자연 평면의 신성한 선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내적 의미에서 교회의 어떤 것들을 의미하는 것들은 최고 의미에서는 주님의 신성의 어떤 것을 의미하는데, 그 이유는 교회의 것이 주님으로부터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헤브론”이 그들이 결합되어졌을 때의 상태라고 말한 이유는 거기에 이삭이 있었기 때문, 이삭에 의해 주님의 신성한 합리성이 표현되었기 때문; 그리고 야곱이 그쪽으로 왔고, 야곱에 의해서는 주님의 신성한 자연 평면이 표현되었고, 고로 그가 그쪽으로 옴에 의해 결합이 의미되었기 때문이다. 하여, “마므레, 기럇-아르바, 여기는 헤브론이다”라고 말해진 이유는 신성한 자연 평면이 선을 수단으로 합리성의 선과 결합되었기 때문이다. 이삭은 선 측면에서의 신성한 합리성을, 이에 비해 리브가는 진리 측면에서의 신성한 합리성을 표현한다, 그리고 리브가는 여기서 언급되지 않고 있다.

거기는 아브라함과 이삭이 체류했었던 곳이다. 이는 신성한 삶 모두를 의미한다. 이는 “체류함”의 의미가 생활함이다로부터; 그리고 아브라함의 표현함이 주님의 신성 자체이다로부터; 그리고 이삭의 표현함이 그분의 신성한 합리성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신성한 자연 평면이 신성한 합리적 평면과 결합함이 여기서 취급된 주제이기에, 아브라함과 이삭이 명명되고, 거기서 그들이 체류했다고 말해지는데, 이는 신성한 삶 모두를 의미하기 위함이다. 즉 “야곱”인 신성한 자연 평면의 삶도 다함께 의미되고 있다. 그리고 신성 자체, 신성한 합리성, 그리고 신성한 자연 평면이 주님 안에서 하나이기에, “아브라함과 이삭이 체류했던 곳”이라 말할 때 (한 분 임이 명시되도록) 복수 동사(peregrinati)를 사용하지 않고 단수 동사(peregrinatus)가 사용되고 있다.

4616. 그리고 이삭의 날들은 …이었다. 이는 이 때 당시 신성한 합리성의 상태를 의미한다. 이는 “날들”의 의미가 상태들이다로부터; 그리고 이삭의 표현함이 신성한 합리성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일백 팔십 년. 이는 이 상태의 품질을 의미한다. 이는 말씀에서 모든 숫자들은 어떤 것을 의미한다로부터 알게 된다; 고로 “일백 팔십 년, 180년”은 어떤 것의 품질, 또는 취급되는 상태의 품질을 의미한다. “100”은 충만된 상태를; “80”은 시험들, 여기서는 시험들을 수단으로 이다; 이 외의 다른 것들은 알려질 수 없다. 그 이유가 숫자들은 그들의 의미를 이 숫자보다 더 간단한 숫자들로부터 가지기 때문이고, 큰 숫자 (복잡한 숫자)는 작은 숫자 (단순한 숫자)가 불어난 것이기 때문이다. 180년은 12×15=180으로도 의미를 헤아릴 수 있다. (숫자를 생각해볼 때 수표에 기재하는 방식을 연상하면 도움이 될지 모른다, 즉 우리가 180불을 수표에 적는다면 일백 팔십 불이라고 영어로도 적는데, 이때의 각 단위별 숫자로 간단한 숫자를 해석하면 될 것이다, 즉 일백, 그리고 팔십; 또는 육백 육십 육, 666도 육백, 육십, 육의 각 숫자의 의미를 파악하고 이를 합치면 될 것이다. 더불어 작은 숫자는 역자의 성경 상응 사전을 참조하면 이해가 빨라질 수 있다. 역자주.)

그리고 이삭은 기한이 만료되었다, 그리고 죽었다. 이는 신성한 자연 평면에서 소생함을 의미한다. 이는 (육체의 삶이) “기간이 다 참(expiring)” 그리고 “죽다(dying)”가 (영의 삶이) 소생함(시작함)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말씀에서 어떤 이가 “죽었다”와 관련될 때, 내적 의미에서는 그의 마지막과 또 다른 것에서 새로운 어떤 것, 고로 계속됨이다; 예를 들면, 유다와 이스라엘 왕국의 어떤 왕이 죽었다, 또는 대 성직자가 죽었다와 관련될 때, 이것은 내적 의미에서는 그들의 표현함이 끝난 것, 그리고 또 다른 것에서 그것의 시작이 있는 것, 즉 소생하는 것이다. 더욱이 다른 삶에 있는 이들, 그리고 말씀의 이런 대목을 읽는 인간과 더불어 있는 영들은 죽음에 대한 어떤 생각을 갖지 못한다, 그 이유는 거기서는 그들이 죽음에 관하여 어떤 것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것 대신 그들은 또 다른 것에서 계속됨을 지각할 뿐이다. 더욱이 인간이 죽을 때, 그의 육체적 부분만, 땅에서의 삶을 위해 봉사한 육체만이 죽는 것, 대신 육체를 사용함이 더 이상 없는 세계에서 그의 영은 그의 삶을 계속한다.
이삭이 기한이 다 차서 죽는다가 신성한 자연 평면에서 소생함을 의미하는 이유는 합리성은 그것에 상응하는 자연 평면이 있지 않으면 삶을 가지지 못하기 (생명을 가지지 못하기) 때문이다. 눈의 시각을 예로 들면, 시각은 시각 바깥쪽에 대상물이 존재하지 않으면, 시각은 있으나마나 한 셈인 것과 같다. 같은 경우로서 서로의 위치가(입장이) 반대인 경우도 그러한데, 그 이유는 이것들이 죽음을 유발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수맥의 경우도 흐름이 없으면 막힌다. 합리성 역시 이런 맥락에서 있다; 즉 자연 평면에서 합리성의 빛을 받아들임이 없으면, 그것의 시각은 멸해진다, 그 이유가 자연 평면에 있는 지식들이 합리성에게는 시각의 대상물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만일 이런 대상물이 빛에 반대되어 있다면, 즉 진리의 총명에, 선의 지혜에 반대된다면, 합리성의 시각은 멸해진다, 그 이유는 합리성 자체에 반대되는 것 안으로 흐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악과 거짓 안에 있는 이들에게는 합리성이 닫혀 있다, 하여 천국과의 교통은 열려 있지 못하고, 단지 그들이 생각하고 추론하고 이야기함을 위하여 째진 틈새로만 교통함이 가능해 있을 뿐이다. 결과적으로 자연 평면이 합리성과 결합하려면, 자연 평면은 합리성을 받을 준비가 필요하고, 이를 주님께서는 거듭남을 수단으로 결과되게 하신다. 이 결합이 있을 때, 합리성은 자연 평면 안에서 살아 있다. 그 이유가 이미 말한 대로 합리성은 그것의 대상물을 자연 평면에서 보기 때문이다; 즉 눈의 시각과 세상의 대상물과의 관계와 같은 것이다.
실로 합리성은 자연 평면의 생명과 구분되는 생명을 자체 안에 가지고 있다; 마치 혼이 육체 안에, 인간이 자기 집 안에 있는 것과 같이 있다. 이는 천국들의 경우도 같다. 즉 가장 깊은 천국, 즉 셋째 천국은 그것 아래에 있는 천국들로부터 구분되어 살아 있다, 그럼에도 이 천국이 중간 천국, 즉 둘째 천국에서의 받아들임이 없으면, 그것의 지혜는 사라질 것이다. 둘째 천국의 빛과 총명이 가장 낮은 천국, 즉 첫째 천국에서 받아들임이 없으면, 마지막으로 인간의 자연 평면에서의 받아들임이 없으면, 이 천국의 총명 역시 사라질 것이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밖의 어딘가에서 받아들임이 있게 설비해두셨다. 그러므로 천국들은 이쪽이 다른 쪽을 섬기도록 주님에 의해 만들어졌다; 마지막으로는 인간의 자연 평면과 감각 측면이 가장 낮은 수준에서의 받아들임이 되어 있게 만들어져 있다; 이렇게 하여 신성은 질서의 최말단에 계시고, 세상으로 건너오신다. 그러므로 만일 최말단의 것이 앞서의 것에 일치하고 응답한다면, 앞서의 것들은 최말단 안에 함께 있다; 그 이유가 최말단인 것들은 그것 앞에 있는 것의 그릇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계속적인 모든 것이 다함께 있는 것이다. 이상의 설명으로부터 신성한 자연 평면에서 소생함에 의해 뜻해진 것이 분명해졌을 것이다.

그리고 그의 백성들에게로 거두어졌다. 이는 지금 신성한 합리성은 신성한 자연 평면 속에 있는 것들 사이에 있음을 의미한다. 이는 “그의 백성들에게로 거두어짐”의 의미가 표현함의 역할이 다했음; 고로 여기서는 신성한 자연 평면 속에 있는 것들 사이에 있다 이다. 누군가가 죽었을 때, 고대인들은 “그는 자기 백성들에게 거두어졌다”라고 말했다; 이는 대략적 의미에서 그가 다른 삶에서 그의 자신의 것 사이에 있다는 것을 뜻한다. 그 이유가 그의 육체적 삶 동안, 자신의 영의 측면은 영들과 천사들의 동아리 안에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가 죽으면 당연히 그곳에 그들 사이에 있기 마련이다. 이것이 그가 거두어진다는 “백성”에 의해 뜻해진 것이다. 그러나 말씀의 내적 의미에서, 즉 교회와 주님의 왕국의 선들과 진리들이 취급되는 대목에서 “백성들에게로 거두어짐”에 의해 일치하거나 상응하는 진리들과 선들 사이에 있는다는 것이 뜻해진다. 모든 천국의 사회들은 선들과 진리들 안에 있고, 거기 있는 진리들과 선들은 각기 다른 차이의 그늘과 더불어 땅과 연관되고 연결을 하여 있기에, “백성들”은 이런 진리들 안에 있는 사회들에 있는 진리들이다.

살만큼 살아 늙고. 이는 생명의 새로움을 의미한다. 이는 “늙다”의 의미가 이전의 상태를 벗고 새로운 상태를 입는 것이다로부터, 여기서는 생명의 새로움이다; “살만큼 살다”의 의미는 충만된 상태이다.

그리고 그의 아들들, 에서와 야곱이 그를 매장했다. 이는 신성한 합리성은 자연 평면의 선 안에서 그리고 자연 평면의 진리로부터의 선 안에서 다시 일어났다를 의미한다. 이는 “매장되어짐”의 의미가 부활이다로부터, 그리고 표현함이 또 다른 것 안에서 소생함이다로부터; 에서의 표현함이 선 측면에서의 주님의 신성한 자연 평면이다로부터; 야곱의 표현함이 진리의 선 측면에서의 주님의 신성한 자연 평면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 모두로부터, 그리고 앞에서 말해진 바로부터 그의 아들 에서와 야곱이 그를 매장했다에 의해 그는 자연 평면의 선 안에서와 진리의 선 안에서 다시 일어났다가 의미된다. “매장되어짐”이 내적 의미에서 다시 일어남인 이유는 육체가 죽었을 때 혼은 다시 일어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매장”이 말씀에서 언급될 때, 천사들은 벗어버린 육체를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다시 일어나는 혼만을 생각하고 있다; 그 이유가 그들은 영적 차원의 생각 안에 있기 때문, 고로 생명에 속하는 것들 안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자연계에서 죽음에 속하는 모든 것들은 영계에서 생명에 속하는 것들을 의미한다.
**************************************

창세기 제 36 장

성경: 창세기 36장

1. 그리고 이것들은 에서의 출생들이다; 그는 에돔이다.
2. 에서는 가나안의 딸들로부터 그의 여인을 데려왔다. 헷 족속 엘론의 딸인 아다, 그리고 히위 족속 시브온의 딸인 아나의 딸 오홀리바마,
3. 그리고 이스마엘의 딸, 느비욧의 누이 바스맛이다.
4. 그리고 아다는 에서에게 엘리바스를 낳았다, 그리고 바스맛은 르우엘을 낳았다.
5. 그리고 오홀리바마는 여우스, 그리고 알람, 그리고 고라를 낳았다. 이들은 가나안의 토지에 서 에서에게 출생한 그의 아들들이다.
6. 그리고 에서는 그의 여인들, 그리고 그의 아들들, 그리고 그의 딸들, 그리고 자기 집의 모든 혼들, 그리고 그의 획득물, 그리고 모든 그의 짐승, 그리고 그가 사들인 것들, 즉 그가 가나안의 토지에서 획득했던 것을 챙겼다, 그리고 그의 동생 야곱의 앞으로부터 어떤 토지로 떠나갔다.
7. 그 이유가 그들의 물질은 함께 거주하기에는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이 체류하는 그 토지는 그들이 지닌 획득물 때문에 더는 지탱할 수 없었다.
8. 그리고 에서는 세일 산에서 거주하였다. 에서인 그가 에돔이다.
9. 이들은 세일 산에서의 에돔의 조상, 에서의 출생들이다.
10. 이들은 에서의 아들들의 이름들이다. 엘리바스는 에서의 아내 아다의 아들이다. 르우엘은 에서의 아내 바스맛의 아들이다.
11. 그리고 엘리바스의 아들들은 데만과 오말과 스보와 가담과 그나스이었다.
12. 그리고 딤나는 에서의 아들 엘리바스의 첩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엘리바스에게 아말렉을 낳았다. 이들은 에서의 아내의 아들들이다.
13. 그리고 이들은 르우엘의 아들들이다. 나핫과 세라와 삼마와 미사이다. 이들은 에서의 아내 바스맛의 아들들이었다.
14. 그리고 이들은 에서의 아내, 시브온의 딸, 아나의 딸 오홀리바마의 아들들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에서에게 여우스와 얄람과 고라를 낳았다.
15. 이들은 에서의 아들들의 족장들이다. 에서의 장자 엘리바스아들들이다. 데만 족장, 오말 족장, 스보 족장, 그나스 족장,
16. 고라 족장, 가담 족장, 아말렉 족장이다. 이들은 에돔의 토지에 있는 엘리바스의 족장들이 다. 이들은 아다의 아들들이다.
17. 그리고 이들은 에서의 아들 르우엘의 아들들이다. 나랏 족장, 세라 족장, 삼다 족장, 미사 족장이다. 이들은 에돔의 토지에 있는 르우벨의 족장들이다. 이들은 에서의 아내 바스맛의 아들들이다.
18. 그리고 이들은 에서의 아내 오홀리바마의 아들들이다. 여우스 족장, 얄람 족장, 고라 족장이다. 이들은 아나의 딸 오홀리바마로부터의 족장들이다.
19. 이들은 에서의 아들들이다. 그리고 이들은 족장들이다. 그 자신이 에돔이다.
20. 이들은 그 토지의 거주민, 호리족 세일의 아들들이다. 로단과 소발과 시브온과 아나와
21. 다손과 에셀과 디산이다. 이들은 에돔의 토지에 있는 세일의 아들들, 호리족의 족장들이 다.
22. 그리고 로단의 아들들은 호리와 헤맘이었다. 그리고 로단의 누이는 딤나였다.
23. 그리고 이들은 소발의 아들들이다. 알완과 마나핫과 에발과 오남이다.
24. 그리고 이들은 시브온의 아들들인데, 아야와 아나이다. 아나는 자기 아버지 시브온을 위해 나귀를 먹일 때에 광야에서 노새를 발견했다.
25. 그리고 이들은 아나의 아들들이다. 디손과 아나의 딸 오홀리바마이다.
26. 그리고 이들은 디손의 아들들이다. 헴단과 에스반과 이드란과 그란이다.
27. 그리고 이들은 에셀의 아들들이다. 발한과 사아완과 이간이다.
28. 이들은 디손의 아들들이다. 우스와 아란이다.
29. 이들은 호리족의 족장들이다. 로단 족장, 소발 족장, 시브온 족장, 아나 족장,
30. 디손 족장, 에셀 족장, 디산 족장이다. 이들은 세일의 토지에 있는 그들의 족장들에 따른 호리족의 족장들이다.
31. 그리고 이들은 거기서 어떤 왕이 이스라엘의 아들들을 다스리기 전, 에돔의 토지에서 통치했던 왕들이다.
32. 그리고 브올의 아들 벨라가 에돔에서 통치했다. 그리고 그 성의 이름은 딘하바였다.
33. 그리고 벨라가 죽었고, 보스라 사람 세라의 아들 요밥이 그를 대신하여 통치하였다.
34. 그리고 요밥이 죽었다, 그리고 데만 족속의 토지의 후삼이 그를 대신하여 통치하였다.
35. 그리고 후삼이 죽었다, 그리고 브닷의 아들, 즉 모압의 들판에서 미디안 족속을 쳐부순 하닷이 그를 대신하여 통치하였다. 그리고 그의 성의 이름은 아윗이었다.
36. 그리고 하닷이 죽었다, 그리고 마스레가의 삼라가 그를 대신하여 통치하였다.
37. 그리고 삼라가 죽었다, 그리고 (유브라데)강의 르호봇의 사울이 그를 대신하여 통치하였 다.
38. 그리고 사울이 죽었다, 그리고 악볼의 아들 바알하난이 그를 대신하여 통치하였다.
39. 그리고 악볼의 아들 바알하난이 죽었다, 그리고 하달이 그를 대신하여 통치하였다. 그리고 그 성의 이름은 바우였다. 그리고 그의 아내의 이름은 메사합의 딸인 마드렛의 딸, 므헤다벨이다.
40. 그리고 이들은 에서의 족장들의 이름들인데, 그들의 가문들에 따라서, 그들의 장소에 따라서, 그들의 이름들에서 이다. 딤나 족장, 알와 족장, 여뎃 족장,
41. 오홀리바마 족장, 엘라 족장, 비논 족장,
42. 그나스 족장, 데만 족장, 밉살 족장,

각 절의 내적 의미

1. 그리고 이것들은 에서의 출생들이다; 그는 에돔이다. “그리고 이것들은 에서의 출생들이다”란 자연 평면에서의 주님의 신성한 선에 있는 갈래들을 의미한다. “그는 에돔이다”란 자연적인 것과 육체적인 것에 관련하여 있는 주님의 신성한 인간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것들은 에서의 출생들이다. 이는 자연 평면에서의 주님의 신성한 선에 있는 갈래들을 의미한다. 이는 “출생들”의 의미가 선과 진리의 갈래들이다로부터; 그리고 에서의 표현함이 자연 평면에서의 주님의 신성한 선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 선이 이 장에서 취급되는 주제이다; 그러나 이 선의 본질에 관하여서는 누구의 이해력에도 와닿지 못하고, 어떤 천사의 이해력에도 거의 와닿지 못하기에, 이 선에 관하여는 단지 이름들만을 수단으로 기술될 뿐이다. 그 이유가 에서에 의해 표현되어진 자연 평면에서의 주님의 신성한 선은 그분이 탄생하심으로부터 신성을 가졌던 것으로부터의 선, 이는 그분이 여호와로부터 임신되고, 그러므로 그분은 그분의 혼으로서 가지셨던 신성한 있으심을 탄생시로부터 가지셨는 바, 결과적으로 그분의 가장 깊은 생명으로서 가지셨던 선에 해당된다.
이 선이 그분께서 어머니로부터 입게 된 것을 수단으로 바깥쪽으로 옷입혀졌다; 그리고 이것은 선이 아니었고, 그 자체 악이었기에, 그러므로 그분은 그 악을 그분 자신의 힘으로, 특별히 시험들과의 전투를 수단으로 추방하셨다; 그리고 이 인간을 그분은 자신 안에서 새로이 만드셨다, 그 다음 그분은 그분이 탄생시로부터 가지셨던 선과 결합되게 하셨다. 야곱은 그분이 그분 자신의 힘으로 그분 자신에게 포획한 선을 표현했다, 이 내용들은 앞 장에 다루어져 왔다. 이것은 그분이 신성한 선과 결합시킨 선이다, 그리고 고로 그분은 자신 안에서 인간을 모두 신성으로 만드셨다. 에서가 표현한 선은 내적 경로로 해서 흘러들었다, 그리고 합리적 선을 통하여 자연 평면으로 흘렀다; 그러나 야곱과 이스라엘이 표현한 선은 외적 경로로 해서 흘러들었다, 그리고 신성이 합리적 선을 통하여 그것을 만나러 나갔다, 그러나 간접적으로는 합리성의 진리를 통하여 자연 평면으로 흘러들었다. 이삭은 이 합리적 선을, 리브가는 이 합리적 진리를 표현한다.

그는 에돔이다. 이는 자연적인 것과 육체적인 것에 관련하여 있는 주님의 신성한 인간을 의미한다. 이는 에돔의 표현함이 자연적 선 측면에서 주님의 신성한 인간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 선에 진리의 교리적인 것들이 인접하여 있다, 고로 자연적, 육체적 측면에 관련되어 있다. 그 이유가 교리적인 것들은 진리에 육체 같이 있다, 또는 영적 의미에서 자연적 진리가 육체적으로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에돔에 의해 자연적, 육체적인 것에 관련하여 있는 주님의 신성한 인간이 표현되고 있다. 교리는 진리가 구체화되어 있는 것과 같다, 그 이유는 교리는 그 자체로는 진리가 아니기 때문, 그러나 진리가 영혼이 육체 안에 있듯 교리 안에 있는 것이다.
이어지는 구절들 안에서 주님의 자연 평면에서의 신성한 선이 취급되나, 그것의 갈래들이 위에 상술한 이유로 해서 이름들만 기술되고 있다; 즉 이 선으로부터의 갈래들은 모든 이의 이해력을 초월해 있다, 천사의 이해력도 초월해 있다. 그 이유가 천사는 유한하기 때문, 유한한 것은 무한한 것을 납득하지 못한다. 그럼에도 이 장이 읽혀질 때, 이름들 안에 포함된 갈래들이 아주 일반적인 방법에서 주님으로부터 신성한 사랑의 유입을 수단으로, 그리고 신성한 선과 더불어 그들을 감동하게 하는 천적 불꽃을 수단으로 있는 유입에 의해 천사들에게 표출되어진다.
말씀은 작은 점에 이르기까지에 영감된 것이 없다고 믿는 자, 또는 각각의 시리즈가 신성한 사항들을 표현한다는 것 외에, 그러므로 천적, 영적인 것들을 표현한다는 것 외에, 각 단어가 이런 사항들을 의미한다는 것 외에 다른 방법으로 말씀은 영감된다고 믿는 자가 이 36장을 읽고 상상해버리고야 마는 것은 이것은 에서의 가계(족보) 그 이상의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말씀이라는 단어보다 더 포괄적 표현인 성경을 두고도 모두가 신성하다 라고 대체로 말하고 있는데, 그 안에 있는 이런 가계 기록은 무엇일까? 더 나아가 가계 안에 있어야할 신성은 무엇인가? 라고 생각해보아야 하지 않을까?

2-5절. 에서는 가나안의 딸들로부터 그의 여인을 데려왔다. 헷 족속 엘론의 딸인 아다, 그리고 히위 족속 시브온의 딸인 아나의 딸 오홀리바마, 3 그리고 이스마엘의 딸, 느비욧의 누이 바스맛이다. 4 그리고 아다는 에서에게 엘리바스를 낳았다, 그리고 바스맛은 르우엘을 낳았다. 5 그리고 오홀리바마는 여우스, 그리고 알람, 그리고 고라를 낳았다. 이들은 가나안의 토지에서 에서에게 출생한 그의 아들들이다. “에서는 가나안의 딸들 중에서 그의 여인을 데려왔다”란 자연적인 선이 가상적인 진리에 애착함과 첫 결합함을 의미한다. “헷 족속 엘론의 딸인 아다, 그리고 히위 족속 시브온의 딸인 아나의 딸 오홀리바마”란 고대 교회로부터 있었던 품질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스마엘의 딸, 느비욧의 누이 바스맛”이란 신성한 지주로부터의 진리에 애착함과 두 번째 결합함을 의미한다. “그리고 아다는 에서에게 엘리바스를 낳았다, 그리고 바스맛은 르우엘을 낳았다”란 거기로부터의 첫 갈래들을 의미한다. “그리고 오홀리바마는 여우스와 얄람과 고라를 낳았다”란 두 번째 갈래를 의미한다. “이들은 가나안의 땅에서 그에게 낳아진 에서의 아들들이다”란 주님의 왕국의 선으로부터를 의미한다.

여기서 취급된 주제는 주님께서 탄생 때로부터 주님 안에서 신성이었던 선, 그리고 이 선에 인간으로 탄생하시어 그분이 자신에게 획득한 진리와 선, 또한 이로부터의 갈래들이 결합함이다; 그리고 이미 말했듯, 이런 사항들의 본질은 누구의 이해력, 천사의 이해력에도 와닿지 못하게 초월해 있는 바, 이를 세부적으로 설명될 수는 없다. 더욱이 이 구절들은 단지 이름들 뿐이고, 이 이름을 수단으로 이 신성한 선이 그것의 갈래들과 함께 묘사되어 있다; 그리고 게다가 이름들에 빛을 드리우는데 한몫을 하는 역사적 의미를 여타 구절로부터 살펴봄 없이, 오직 이름만을 펼쳐보인다는 것은 오히려 의심만 조장할지 모른다; 그 이유가 설사 설명이 완벽하다 가정해도 실제의 것들이 말씀에 있는 이름들에 의해 의미된다는 것을 믿을 자가 거의 없을 것이다. 이런 이유로 나는 이 장의 내용들을 단지 복사하듯 베끼는 수준에서 머물 것이다, 그리고 납득력에 잘 적응될만한 일반적인 사항을 대략적인 윤곽의 수준에서 서술하고 말 것이다. 그 이유가 신성 안에 있는 것들은 누군가에게 결코 나타나지 않으나, 신성으로부터의 것은 각자의 이해력에 따라서 아주 일반적인 방법에서 나타난다, 이것 역시 오직 미미한 윤곽에서 일 뿐이다. 더 알고 있어야 하는 것은, 선 안으로 태어나는 인간은 없다는 것, 인간은 악 안으로 태어난다는 것, 즉 그의 아버지로부터는 내면의 악 안으로, 그의 어머니로부터는 외면의 악 안으로 태어난다는 것이다; 그 이유가 모든 이의 유전성은 악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님만이 아버지쪽에서는 선 안으로, 그리고 신성한 선 자체 안으로 탄생하셨다; 주님이 탄생된 이 신성한 선이 여기서 취급된다. 이것의 갈래들은 그분이 인간을 신성으로 만드셨을 때, 그리고 그분이 그것을 신성이 되게 하신 것을 수단으로 세상에 나타나게 출시되었다. 이러므로 해서 일반적 설명도 여기서 가능해 있는 것이다.

6-8절. 그리고 에서는 그의 여인들, 그리고 그의 아들들, 그리고 그의 딸들, 그리고 자기 집의 모든 혼들, 그리고 그의 획득물, 그리고 모든 그의 짐승, 그리고 그가 사들인 것들, 즉 그가 가나안의 토지에서 획득했던 것을 챙겼다, 그리고 그의 동생 야곱의 앞으로부터 어떤 토지로 떠나갔다. 7 그 이유가 그들의 물질은 함께 거주하기에는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이 체류하는 그 토지는 그들이 지닌 획득물 때문에 더는 지탱할 수 없었다.
8 그리고 에서는 세일 산에서 거주하였다. 에서인 그가 에돔이다. “그리고 에서는 그의 여인, 그리고 그의 아들들, 그리고 그의 딸들, 그리고 자기 집의 모든 혼들, 그리고 그의 획득물, 그리고 그의 모든 짐승, 그리고 그가 가나안 토지에서 획득한 것인 그의 구입 물품을 챙겼다, 그리고 그의 동생 야곱의 앞으로부터 어떤 토지로 떠나갔다”란 신성한 선에 속한 모든 것들과 천국에 상응되었던 것, 천국인 것으로부터 파생된 진리들을 의미한다. (표현을 위하여 야곱으로부터 물러나고 있다) “그 이유가 그들의 물질이 너무나 많아서…”란 무한함 때문에를 의미한다. “…그들이 함께 거주할 수 없었다”란 표현물들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들이 체류하는 그 토지는 그들이 가진 것 때문에 지탱할 수 없었다”란 모든 곳이 묘사될 수 없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에서는 세일 산에 거주하였다”란 자연적 선으로부터의 진리를 의미한다. “에서, 그가 에돔이다”란 주님의 신성한 인간을 의미한다.

9-14절. 이들은 세일 산에서의 에돔의 조상, 에서의 출생들이다. 10 이들은 에서의 아들들의 이름들이다. 엘리바스는 에서의 아내 아다의 아들이다. 르우엘은 에서의 아내 바스맛의 아들이다. 11 그리고 엘리바스의 아들들은 데만과 오말과 스보와 가담과 그나스이었다. 12 그리고 딤나는 에서의 아들 엘리바스의 첩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엘리바스에게 아말렉을 낳았다. 이들은 에서의 아내의 아들들이다. 13 그리고 이들은 르우엘의 아들들이다. 나핫과 세라와 삼마와 미사이다. 이들은 에서의 아내 바스맛의 아들들이었다. 14 그리고 이들은 에서의 아내, 시브온의 딸, 아나의 딸 오홀리바마의 아들들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에서에게 여우스와 얄람과 고라를 낳았다. “그리고 이들은 에돔의 조상 에서의 출생들이다”란 자연 평면에 있는 신성한 선에서의 갈래들을 의미한다. (“에돔의 조상”이란 여타 다른 것들이 갈라져 나오는 신성한 선이다) “세일 산에서”란 선으로부터의 진리들에 관하여를 의미한다.
“이들은 에서의 아들들의 이름들이다”란 갈래들의 품질을 의미한다. “엘리바스는 에서의 아내 아다의 아들이다, 르우엘은 에서의 아내 바스맛의 아들이다”란 선과 진리의 결혼으로부터 온 이 갈래들의 상태를 의미한다. “그리고 엘리바스의 아들들은 데만과 오말과 스보와 가담과 그나스였다”란 선으로부터의 첫 갈래들을 의미한다. “그리고 딤나는 에서의 아들 엘리바스의 첩이었다”란 그들을 섬기는 것들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녀는 엘리바스에게 아말렉을 낳았다”란 감각적인 것을 의미한다. “이들은 에서의 아내 아다의 아들들이다”란 두 번째 갈래를 의미한다. “그리고 이들은 르우엘의 아들들이다, 나핫과 세라와 삼마와 미사이다. 이들은 에서의 아내 바스맛의 아들들이다”란 세 번째 갈래들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들은 에서의 아내, 시브온의 딸, 아나의 딸 오홀리바마의 아들들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에서에게 여우스와 얄람과 고라를 낳았다”란 그와 동시에 있는 갈래를 의미한다.

15-19절. 이들은 에서의 아들들의 족장들이다. 에서의 장자 엘리바스아들들이다. 데만 족장, 오말 족장, 스보 족장, 그나스 족장, 16 고라 족장, 가담 족장, 아말렉 족장이다. 이들은 에돔의 토지에 있는 엘리바스의 족장들이다. 이들은 아다의 아들들이다. 17 그리고 이들은 에서의 아들 르우엘의 아들들이다. 나랏 족장, 세라 족장, 삼다 족장, 미사 족장이다.이들은 에돔의 토지에 있는 르우엘의 족장들이다. 이들은 에서의 아내 바스맛의 아들들이다.
18 그리고 이들은 에서의 아내 오홀리바마의 아들들이다. 여우스 족장, 얄람 족장, 고라 족장이다. 이들은 아나의 딸 오홀리바마로부터의 족장들이다. 19 이들은 에서의 아들들이다. 그리고 이들은 족장들이다. 그 자신이 에돔이다. “이들은 에서의 아들들의 족장들이다”란 선으로부터의 제 1의 진리들을 의미한다. “에서의 장자 엘리바스아들들이다. 데만 족장, 오말 족장, 스보 족장, 그나스 족장, 고라 족장, 가담 족장, 아말렉 족장이다”란 주님의 왕국 안에서 어떤 품질을 지닌 첫 번째 분류에 속한 것을 의미한다. “이들은 에돔의 토지에 있는 엘리바스의 족장들이다. 이들은 아다의 아들들이다”란 첫 분류된 것 속의 제 1의 진리들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들은 에서의 아들 르우엘의 아들들이다. 나랏 족장, 세라 족장, 삼다 족장, 미사 족장이다”란 천국 안에서 두 번째 분류된 것, 그리고 그들의 품질을 의미한다. “이들은 에돔의 토지에 있는 르우엘의 족장들이다”란 두 번째 분류를 의미한다. “이들은 에서의 아내 바스맛의 아들들이다”란 선과 진리의 결혼으로부터를 의미한다. “그리고 이들은 에서의 아내 오홀리바마의 아들들이다”란 세 번째 분류 속의 제 1의 진리들을 의미한다. “여우스 족장, 얄람 족장, 고라 족장이다”란 그들의 품질, 이로부터 주님의 왕국 안에서 그들의 품질인 것을 의미한다. “이들은 아나의 딸 오홀리바마로부터의 족장들이다”란 선과 진리의 결합으로부터 일어나는 제 1의 진리들을 의미한다. 이 열둘 족장들은 열두 지파와 같이 선을 수단으로 그들이 배열되고 있다. “이들은 에서의 아들들이다. 그리고 이들은 족장들이다”란 이들은 선으로부터의 진리들 속의 제 1의 것들이다. “그 자신이 에돔이다”란 주님의 신성한 인간 안에서를 의미한다.

20-28절. 이들은 그 토지의 거주민, 호리족 세일의 아들들이다. 로단과 소발과 시브온과 아나와 21 다손과 에셀과 디산이다. 이들은 에돔의 토지에 있는 세일의 아들들, 호리족의 족장들이다. 22 그리고 로단의 아들들은 호리와 헤맘이었다. 그리고 로단의 누이는 딤나였다. 23 그리고 이들은 소발의 아들들이다. 알완과 마나핫과 에발과 오남이다. 24 그리고 이들은 시브온의 아들들인데, 아야와 아나이다. 아나는 자기 아버지 시브온을 위해 나귀를 먹일 때에 광야에서 노새를 발견했다. 25 그리고 이들은 아나의 아들들이다. 디손과 아나의 딸 오홀리바마이다. 26 그리고 이들은 디손의 아들들이다. 헴단과 에스반과 이드란과 그란이다. 27 그리고 이들은 에셀의 아들들이다. 발한과 사아완과 이간이다. 28 이들은 디손의 아들들이다. 우스와 아란이다. “이들은 그 토지의 거주민, 호리족 세일의 아들들이다”란 그들의 순서대로 거기로부터 나온 진리들이다. “로단과 소발과 시브온과 아나와 다손과 에셀과 디산이다”란 그들의 품질을 의미한다. “이들은…세일의 아들들, 호리족의 족장들이다”란 이전의 선으로부터 오는 선 속의 주요한 진리들을 의미한다. “…에돔의 토지에 있는..”이란 주님의 신성한 인간 안에서를 의미한다. “그리고 로단의 아들들은 호리와 헤맘이었다. 그리고 로단의 누이는 딤나였다”란 진리의 두 번째 분류를 의미한다. “그리고 이들은 소발의 아들들이다. 알완과 마나핫과 에발과 오남이다”란 진리의 세 번째 분류와 그 품질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들은 시브온의 아들들인데, 아야와 아나이다”란 세 번째 분류와 품질을 의미한다. “아나는…광야에서 노새를 발견했다”란 기억 속의 지식들로부터를 의미한다. “…자기 아버지 시브온을 위해 나귀를 먹일 때에…”란 그가 기억적 지식 안에 있었을 때에를 의미한다. “그리고 이들은 아나의 아들들이다. 디손과 아나의 딸 오홀리바마이다”란 세 번째 분류와 그들의 품질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들은 디손의 아들들이다. 헴단과 에스반과 이드란과 그란이다”란 네 번째 분류와 그들의 품질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들은 에셀의 아들들이다. 발한과 사아완과 이간이다”란 네 번째 분류와 그들의 품질을 의미한다. “이들은 디손의 아들들이다. 우스와 아란이다”란 다섯 번째 분류와 그들의 품질을 의미한다.

29, 30절. 이들은 호리족의 족장들이다. 로단 족장, 소발 족장, 시브온 족장, 아나 족장, 30 디손 족장, 에셀 족장, 디산 족장이다. 이들은 세일 의 토지에 있는 그들의 족장들에 따른 호리족의 족장들이다. “이들은 호리족의 족장들이다”란 이어지는 것들로부터 온 주요한 진리들을 의미한다. “로단 족장, 소발 족장, 시브온 족장, 아나 족장, 디손 족장, 에셀 족장, 디산 족장이다”란 그들의 품질을 의미한다. “이들은 세일의 토지에 있는 그들의 족장들에 따른 호리족의 족장들이다”란 계속되는 것들에 있는 주요한 진리들을 의미한다.

31-39절. 그리고 이들은 거기서 어떤 왕이 이스라엘의 아들들을 다스리기 전, 에돔의 토지에서 통치했던 왕들이다. 32 그리고 브올의 아들 벨라가 에돔에서 통치했다. 그리고 그 성의 이름은 딘하바였다. 33 그리고 벨라가 죽었고, 보스라 사람 세라의 아들 요밥이 그를 대신하여 통치하였다. 34 그리고 요밥이 죽었다, 그리고 데만 족속의 토지의 후삼이 그를 대신하여 통치하였다. 35 그리고 후삼이 죽었다, 그리고 브닷의 아들, 즉 모압의 들판에서 미디안 족속을 쳐부순 하닷이 그를 대신하여 통치하였다. 그리고 그의 성의 이름은 아윗이었다. 36 그리고 하닷이 죽었다, 그리고 마스레가의 삼라가 그를 대신하여 통치하였다.
37 그리고 삼라가 죽었다, 그리고 (유브라데)강의 르호봇의 사울이 그를 대신하여 통치하였다. 38 그리고 사울이 죽었다, 그리고 악볼의 아들 바알하난이 그를 대신하여 통치하였다.
39 그리고 악볼의 아들 바알하난이 죽었다, 그리고 하달이 그를 대신하여 통치하였다. 그리고 그 성의 이름은 바우였다. 그리고 그의 아내의 이름은 메사합의 딸인 마드렛의 딸, 므헤다벨이다. “그리고 이들은… 에돔의 토지에서 통치했던 왕들이다”란 주님의 신성한 인간에 있는 제일의 진리들을 의미한다. “…거기서 어떤 왕이 이스라엘의 아들들을 다스리기 전…”이란 자연적 진리 안에서 내면의 영적인 것이 아직은 일어나지 않았을 때를 의미한다. “그리고 브올의 아들 벨라가 에돔에서 통치했다”란 첫 진리를 의미한다. “그리고 그 성의 이름은 딘하바였다”란 거기로부터 온 교리를 의미한다. “그리고 벨라가 죽었고, 보스라 사람 세라의 아들 요밥이 그를 대신하여 통치하였다”란 그것의 본질적인 것 같이 거기로부터 있는 것, 그리고 그것의 품질을 의미한다. “그리고 요밥이 죽었다, 그리고 …그를 대신하여 통치하였다”란 거기로부터 였던 것을 의미한다. “…데만 족속의 토지에서…”란 그것이 있었던 근원을 의미한다. “그리고 후삼이 죽었다, 그리고 브닷의 아들…하닷이 그를 대신하여 통치하였다”란 그 다음부터 였던 것을 의미한다. “모압의 들판에서 미디안을 쳐부순…”이란 거짓으로부터 순수해짐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의 성의 이름은 아윗이었다”란 그 다음부터 있는 교리적인 것들을 의미한다. “그리고 하닷이 죽었다, 그리고 마스레가의 삼라가 그를 대신하여 통치하였다”란 그 다음부터 파생되어 있던 것, 그리고 그것의 품질을 의미한다. “그리고 삼라가 죽었다, 그리고… 사울이 그를 대신하여 통치하였다”란 거기로부터 였던 것을 의미한다. “(유브라데)강의 르호봇이…”이란 그것의 품질을 의미한다. “그리고 사울이 죽었다, 그리고 악볼의 아들 바알하난이 그를 대신하여 통치하였다”란 거기서부터 였던 것과 그 품질을 의미한다. “그리고 악볼의 아들 바알하난이 죽었다, 그리고 하달이 그를 대신하여 통치하였다”란 거기서부터 였던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 성의 이름은 바우였다”란 교리를 의미한다. “그리고 그의 아내의 이름은 메사합의 딸인 마드렛의 딸, 므헤다벨이다”란 그것의 선을 의미한다.

40-43절. 그리고 이들은 에서의 족장들의 이름들인데, 그들의 가문들에 따라서, 그들의 장소에 따라서, 그들의 이름들에서 이다. 딤나 족장, 알와 족장, 여뎃 족장, 41 오홀리바마 족장, 엘라 족장, 비논 족장, 42 그나스 족장, 데만 족장, 밉살 족장, 43 막디엘 족장, 이람 족장이다. 이들은 그 구역과 거처를 따른 에돔 족장들이다. 에서 자신이 에돔의 조상이다. “그리고 이들은 에서의 족장들의 이름들인데, 그들의 가문에 따라, 그들의 장소에 따라, 그들의 이름들에서 이다”란 그들로부터 온 선 속의 교리적인 것들, 그들의 일어남, 상태, 그리고 품질을 의미한다. “딤나 족장, 알와 족장, 여뎃 족장, 오홀리바마 족장, 엘라 족장, 비논 족장, 그나스 족장, 데만 족장, 밉살 족장, 막디엘 족장, 이람 족장이다”란 그들의 교리적인 것들의 품질을 의미한다. “이들은 에돔의 족장들이다”란 제1의 교리적인 것들을 의미한다. “그들의 거주지에 따라, 그들이 점유한 토지에 따라”란 진리들과 선들에 관하여를 의미한다. “에서 자신이 에돔의 조상이다”란 주님의 신성한 인간에 있는 자연 평면의 신성한 선을 의미한다.
**************************************

창세기 제 37 장

성경: 창세기 37장

1. 그리고 야곱은 그의 아버지가 체류한 토지에서, 가나안의 토지에서 거주했다.
2. 이들은 야곱의 출생들이다. 십칠 세 된 요셉은 그의 형제들과 함께 양떼를 돌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그의 아버지의 여인인 빌하의 아들들과 실바의 아들들과 더불어 소년이었다. 그리고 요셉은 그들의 아버지에게 그들의 나쁜 사건들을 가져다 주었다.
3. 그리고 이스라엘은 그의 모든 아들보다 더 요셉을 사랑했다, 그 이유는 그가 고령에 얻은 아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그에게 여러 색깔로 된 옷을 만들어 입혔다.
4. 그리고 그의 형제들은 그의 아버지가 그의 모든 형제보다 요셉을 더 사랑하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그들은 그를 미워했다, 그리고 그에게 평화로이 말할 수 없었다.
5. 그리고 요셉은 꿈을 꾸었다, 그리고 그는 그것을 그의 형제들에게 말했다, 그리고 그들은 그를 더 미워하였다.
6. 그리고 그는 그들에게 말했다, 바라건대 내가 꾼 꿈을 들어 보시오.
7. 그리고 우리는 들판 한가운데에서 단을 묶고 있었소, 그리고 내 단이 일어났소, 그리고 직바로 섰소. 그리고 당신들의 단들이 내 주변에 왔소, 그리고 내 단에 절을 하였소.
8. 그리고 그의 형제들이 그에게 말했다, 참으로 네가 우리를 통치할 것이냐? 또는 네가 참으로 우리 위에 군림할 것이냐? 그리고 그들은 그의 꿈 때문에, 그리고 그가 한 말들 때문에 그를 더 더욱 미워했다.
9. 그리고 그는 또 다른 꿈을 꾸었다, 그리고 그것을 그의 형제들에게 말했다, 그리고 말했다, 보라 나는 꿈을 꾸었다, 그리고 해와 달과 열한 별들이 스스로 나에게 절을 했소.
10. 그리고 그는 그것을 그의 아버지에게, 그리고 그의 형제들에게 말했다. 그리고 그의 아버지는 그를 나무랬다, 그리고 그에게 말했다, 네가 꾸었다는 그 꿈은 대체 무엇이더냐? 나와 네 어머니와 네 형제들이 참으로 너에게 와서 몸을 땅으로 구부려 절한다는 말이냐?
11. 그리고 그의 형제들은 그를 시기하였다, 그러나 그의 아버지는 이 말을 간직하였다.
12. 그의 형제들은 세겜에서 그들의 아버지의 양떼를 먹이러 밖으로 나갔다.
13. 그리고 이스라엘은 요셉에게 말했다, 네 형제들이 세겜에서 양떼를 먹이고 있지 않느냐? 오너라, 그리고 나는 그들에게 너를 보낼 것이다.
14. 그리고 그가 그에게 말했다, 나를 바라보라! 그리고 그는 그에게 말했다, 청컨대 가서 네 형제들의 평화를, 양떼들의 평화를 보거라, 그리고 다시 나에게 그 말을 가져오너라. 그리고 그는 그를 헤브론의 골짜기로부터 보냈다, 그리고 그는 세겜에 왔다.
15. 그리고 어떤 사람이 그를 발견했다, 그리고 바라보니 그는 들판에서 방황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 사람이 그에게 물었다, 말하기를, 너는 무엇을 찾느냐?
16. 그리고 그는 말했다, 나는 내 형제들을 찾고 있습니다, 바라건대 그들이 어디서 양떼를 먹이고 있는지 말해주십시오.
17. 그리고 그 사람이 말했다, 그들은 여기로부터 떠났다, 그 이유가 나는 그들이 도단으로 가자 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요셉은 그의 형제들을 뒤쫓아 갔다, 그리고 그들을 도단에서 찾았다.
18. 그리고 그들은 멀리 저쪽에 있는 그를 보았다, 그리고 그가 그들에게 가까이 오기 전, 그들은 그를 죽이자고 음모를 꾸몄다.
19. 그리고 그들은 남자 그의 형제에게 말했다, 보라 꿈의 주인이 온다.
20. 그러므로 지금 오고 있으니 그를 죽여서 구덩이에 던지자, 그리고 우리는 말할 것이다, 악한 들짐승이 그를 삼켰다. 그리고 우리는 그의 꿈이 무엇일지를 보게 되리라.
21. 그리고 르우벤이 들었다, 그리고 그를 그들의 손에서 구출하려고 말했다, 그를, 그 혼을 치지는 말자.
22. 그리고 르우벤은 그들에게 말했다, 피를 흘리게 하지 말자. 그를 광야에 있는 이 구덩이에 던지자. 그러나 그에게 손을 대지 말자. 이는 그가 그들의 손에서 그를 구출해서, 그의 아버지에게로 되돌려 보내려 해서 였다.
23. 그리고 요셉이 그의 형제들에게 왔을 때, 그들은 요셉에게서 그의 웃옷, 그가 입고 있는 여러 색깔로 된 웃옷을 벗겼다,
24. 그리고 그들은 그를 데려가서 구덩이에 그를 던졌다. 그리고 그 구덩이는 그 안에 물이 없이 텅 비어 있었다.
25. 그리고 그들은 빵을 먹으며 앉아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그들의 눈을 들고 보았다, 그리고 바라보니 이스마엘 사람의 집단이 길르앗으로부터 왔는데, 그들은 낙타에 양념과 수지(향유)와 소합향을 싣고 이집트로 운반하려 내려가고 있었다.
26. 그리고 유다가 그의 형제들에게 말했다, 우리가 우리의 형제를 죽이고, 그의 피를 덮는다 한들 그것이 무슨 이득이 있을까?
27. 가서 그를 이스마엘 사람들에게 팔아버리자, 그리고 우리의 손을 그에게 대지 말자, 그 이유는 그는 우리의 형제이고, 우리의 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의 형제들은 그에게 귀기울였다.
28. 그리고 거기를 사람들, 미디안 사람들, 상인들이 지나갔다, 그리고 그들은 요셉을 구덩이 에서 끌어내 들어 올렸다, 그리고 요셉을 이스마엘 사람들에게 은 이십에 팔았다. 그리고 그들은 요셉을 이집트로 데리고 갔다.
29. 그리고 르우벤이 구덩이로 돌아왔다, 그리고 보라, 요셉이 구덩이에 없었다. 그리고 그는 자기 옷을 찢었다.
30. 그리고 그는 그의 형제들에게 돌아 왔다, 그리고 말했다, 아이가 없다, 그리고 나는 어디로 가야 할꼬?
31. 그리고 그들은 요셉의 옷을 가져왔다, 그리고 염소 중에서 숫염소를 죽였다, 그리고 옷을 피에 담그었다.
32. 그리고 그들은 여러 색깔로 된 옷을 보냈다, 그리고 그들은 그것을 그들의 아버지에게 가져왔다, 그리고 말했다, 이것을 우리는 발견했습니다. 그것이 당신의 아들의 것인지 아닌지 지금 알아보십시오.
33. 그리고 그는 그것을 알았다, 그리고 말했다, 이것은 내 아들의 옷이다. 악한 들짐승이 그를 삼켰다. 요셉이 찢겨진 것이 확실하다.
34. 그리고 야곱은 그의 옷을 찢었다, 그리고 그의 허리에 삼베옷을 둘렀다, 그리고 많은 날 동안 그의 아들 때문에 통곡했다.
35. 그리고 그의 모든 아들들과 그의 딸들이 그를 위로하려고 일어났다. 그러나 그는 자신을 위로 받기를 거절했다, 그리고 말했다, 나는 통곡하면서 내 아들이 있는 무덤으로 내려가야 한다. 그리고 그의 아버지는 그를 위하여 울었다.
36. 그리고 미디안 사람들은 그를 이집트, 바로의 신하, 친위대장 보디발에게 팔았다.

각 절의 내적 의미

1-3절. 그리고 야곱은 그의 아버지가 체류한 토지에서, 가나안의 토지에서 거주했다. 2 이들은 야곱의 출생들이다. 십칠 세 된 요셉은 그의 형제들과 함께 양떼를 돌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그의 아버지의 여인인 빌하의 아들들과 질바의 아들들과 더불어 소년이었다. 그리고 요셉은 그들의 아버지에게 그들의 나쁜 사건들을 가져다 주었다. 3 그리고 이스라엘은 그의 모든 아들보다 더 요셉을 사랑했다, 그 이유는 그가 고령에 얻은 아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그에게 여러 색갈로 된 옷을 만들어 입혔다.

그리고 야곱은 그의 아버지가 체류한 토지, 가나안의 토지에서 거주하고 있었다. 이는 주님의 신성한 자연 평면이 신성한 합리적 선 아래 일치되어졌음을 의미한다. 이는 “거주함”의 의미가 사는 것이다로부터; 야곱의 표현함이 최고 의미에서 주님의 신성한 자연 평면이다로부터; 여기서 “아버지”인 이삭의 표현함이 선 측면에서 주님의 신성한 합리성이다로부터; 그리고 “가나안의 토지”의 의미가 최고 의미에서 주님의 신성한 인간이다로부터. 이상을 종합하면, “가나안의 토지에서, 그의 아버지가 체류한 토지에서 야곱이 거주한다의 의미는 주님의 자연 평면이 신성한 인간 안에서, 신성한 선 아래 일치되게, 또는 함께 살아감을 표시한다. 주님의 자연 평면은 앞에서 취급되었다 (창. 35:22-26에서); 즉 자연 평면 안에 있는 모든 것이 지금 신성이었다; 그리고 (창. 35:27-29에서) 주님의 신성한 자연 평면이 그분의 신성한 합리성과 결합함. 여기서 결론적인 것이 이어진다: 신성한 자연 평면이 신성한 합리적 선 아래 이 선에 일치하는 생활을 영위했다.
위에서 “신성한 합리적 선 아래”라고 말한 이유는 자연 평면이 이것 아래에서 살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합리성(합리적 평면)은 높다, 내면이다, 또는 관습적 표현을 빌리면, (시간, 순서에서) 앞이다(prior), 상석(上席)이다, 중요하다 (prior) 인 반면, 자연 평면은 낮다, 외면이다, 결과적으로, (시간, 순서에서) 뒤이다(posterior) 이기 때문이다; 고로 후자는 전자에 종속된다. 게다가 그것들이 일치할 때의 경우, 자연 평면은 합리성의 일반적 측면밖에 더 아니다; 그 이유가 자연 평면이 가지는 것은 무엇이든 합리성에 속하기 때문이다. 차이점이라면, 개별적인 측면과 그것들의 일반적인 측면, 또는 개별적 측면과 그것들의 형체 측면에 있다는 차이뿐이고, 이 안에서 낱개적인 것은 하나로서 나타난다. 학식자들이 아는 사항은 목적은 원인 안의 모두이고, 원인은 결과 안의 모두이다는 것이다; 고로 원인은 목적이 형체로 있는 목적이고, 결과는 원인이 형체로 있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만일 당신이 원인을 제거하면, 결과는 통째로 멸해지고, 만일 목적을 제거하면, 원인이 통째로 제거된다. 더 나아가 원인은 목적 아래, 결과는 원인 아래 있다. 이와 같은 경우가 자연 평면과 합리적 평면이다.

이들은 야곱의 출생들이다. 이는 뒤따라오는 것들을 의미한다. 이는 “출생들”의 의미가 교회 속에 있는 이런저런 것들로부터의 갈래들, 즉 선의 진리로부터의 갈래들, 또는 사랑의 신앙으로부터의 갈래들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 이유가 말씀의 내적 의미에서 출생들의 다른 의미는 없기 때문이다. 이들이 이어지는 것 안에서 취급된다, 그러므로 “야곱의 출생들”이 뒤따라오는 것들을 표시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것이 “출생들”의 의미인 것은 이 말 뒤를 곧 이어 가계를 말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말해지는 것은 요셉- 그의 꿈들- 요셉에 대한 형제들의 음모- 그가 이집트로 끌려가짐이기 때문이다.

요셉. 이는 주님의 영적 평면에서의 신성한 인간을 의미한다. 이는 요셉의 표현함이 최고 의미에서 신성한 영적 평면에서의 주님이다에서 알게 된다. 주님이 요셉에 의해 표현되었다는 정도는 교회에도 널리 알려져 있다; 그 이유가 천국적인 요셉이 말해질 경우, 막연히 주님을 표현한다 외에 별다른 생각을 사람들이 갖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님의 무엇이 표현되는지와 같은 구체적인 사항은 알고 있지 않다; 그 이유는 이 사항이 주님의 신성한 인간으로부터 진행하는 신성한 영적 평면이기 때문이다. 주님의 신성한 인간으로부터 진행하는 신성한 영적 평면은 천국과 교회 안에 있는 그분으로부터의 신성한 진리이다. 영적 평면의 본질은 신성한 진리 외에 더 다른 것은 없다. 신성한 영적 평면, 또는 신성한 진리는 주님의 왕권적 측면이라 불리운다, 그리고 다른 말로 그리스도, 또는 메시아라고도 불리운다. 이 이유 때문에 요셉은 이집트에서 마치 왕인 듯 만들어져, 그에 의해 주님의 왕권으로부터 있는 것이 표현되어졌다.

십칠 년의 아들. 이는 주님의 영적 평면에서의 신성한 인간의 상태를 의미한다. 이는 말씀에서 언급되는 나이들의 햇수로부터 분명해진다. 즉 다른 숫자들 역시 어떤 것과 상태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마치 햇수, 또는 나이 속의 숫자들이 마치 숫자 계산 그 이상의 어떤 의미가 없는 듯 여겨지는 이유는 이것의 숫자는 여느 다른 숫자보다 시간이라는 개념이 후광으로 있어 역사성이 더 짙게 풍겨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숫자들 역시 어떤 것들과 상태들을 포함한다는 것은 이미 살폈다; 즉 창. 5장과 창. 17:1; 25:7에서, 그리고 창. 35:28에서 이다; 더욱이 천국의 것을 포함하지 않는 말씀의 어떤 역사물도 없다는 사실로부터 이다; 즉 말씀의 이런 숫자들을 읽는 인간의 생각으로부터 당사자와 더불은 천사들은 그 생각을 건너가서 바뀌는 바, 천국에는 천사들로부터 말씀의 역사물의 영적 의미가 생산된다.
십칠 세 된 요셉에 의해 의미된 것은 말씀의 다른 구절에 있는 의미로부터 보여질는지 모른다; 즉 시작(beginning), 그러나 여기서는 요셉에 의한 표현의 시작이다. 더 나아가 일반적 측면과 잠재적 측면에서일 경우, 이 숫자는 요셉에 의해 표현되는 모든 것을 포함하고 있다; 그 이유가 “7”은 거룩함을, 그리고 “10”은 리메인스(remains, 아껴두신 것, 남은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의 형제들과 더불어 양떼를 기르고 있었다. 이는 주님의 영적 평면에서의 신성한 인간은 신앙 안에 있는 이들과 더불어 현존하면서 그들을 가르쳤음을 의미한다. 이는 “양떼를 먹임”의 의미가 가르치는 것이다로부터, 특히 교인들을 교리로부터 가르치는 것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여기서는 가르쳐진 이들과 현존함이 의미되는데, 그 이유는 “요셉은 자기 형제들과 더불어 양떼를 먹이고 있다”라고 말해지기 때문이다; 그의 형제는 이 장에서 선행으로부터 신앙쪽으로 기운 교회, 그리고 마지막으로 신앙만으로 기울려 버린 교회, 고로 거짓들을 표현하는데, 이는 아래에서 나타날 것이다.

그리고 그는…소년이었다. 이는 처음에를 의미한다. 이는 “소년(boy)”이 새로운 교회를 서술할 경우, 이 교회의 처음에서 인 것, 또는 새로운 교회의 처음의 상태인 것을 의미함에서 알게 된다. 그 이유가 인간이 인생의 여러 단계들을 지나가듯, 교회도 유아, 소년, 성년, 노년의 단계를 가지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교회 역시 인간들 같이 일반적 측면에서는 그렇게 불리운다. 특히 이 단계 중에서 소년이라 불리우는 이 (새로운) 교회에서, 이 교회는 아주 빠르게 (주님을) 외면해버린다. 즉 주님이 처음에는 가르치는 이들과 배우는 이들과 더불어 현존해 계시지만, 그 후에 그분은 이 새로운 교회에 의해 떠나보내지고 만다; 즉 이것이 요셉이 그의 형제들에 의해 구덩이에 쳐넣어지고 팔리워 멀리 보내짐을 당하는 것에 의해 표현되어지고 있다.
이와 같은 모습은 신앙으로부터 시작하는 모두 각각의 교회이지만, 선행으로부터 시작하는 교회는 아주 다르다. 신앙으로부터의 교회는 이 교회가 가야할 방향을 지시해줄 것은 이해력밖에 없다; 그런데 이해력의 방향을 제시하는 것은 인간의 유전적인 것밖에 없고, 인간의 유전적인 것은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 뿐이다. 이 사랑들이 이해력에게 자신들의 사랑을 확증할 근거를 말씀에서 찾아보라고 설득하여 꼬드기고, 확증물이 안되는 말씀은 기막힌 아이디어로 이 말씀을 설명하여 교묘히 발뺌하도록 유도한다. 그러나 선행으로부터 시작하는 교회는 이와는 아주 다르다: 선이 이 교회의 지도자(director), 그리고 선 안에 계신 주님이 지도자이시다; 그 이유는 주님과 신앙 사이에 선행의 선과 사랑의 선이 끼어 있기 때문이다; 이 중재하는 것 없이 영적 교통(교제, 왕래, communication)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만일 악이 선의 장소 안에 있다면, 이 악은 주님을 몰아내는 바, 그분으로부터 있는 것, 고로 신앙으로부터 있는 모든 것을 거절하든지, 악용하든지 한다. 그 이유가 제대로 말하자면, 신앙은 선을 통하여 그분으로부터 있기 때문이다.

그의 아버지의 여인 빌하의 아들들과 질바의 아들들과 더불어. 이는 주님의 영적 평면에서의 신성한 인간이 그들에 의해 거절되어졌음을 의미한다. 이는 “빌하의 아들들과 질바의 아들들”의 의미가 수단을 제공하여 도움을 주는 외면들과 보다 수준이 낮은 진리에 애착함들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고로 “빌하의 아들들과 질바의 아들들과 더불어”는 “요셉”인 신성한 진리가 상대적으로 섬김 속에 있는 낮은 것들쪽으로 거절되어졌다를 의미한다. 신앙이 선행 앞에 놓여지는 때, 또는 신앙이 심정에서 제 일의 것이 되어 있는 때, 그리하여 선행이 그 다음 자리, 심정에서 둘째 자리에 있는 때, 신성한 진리가 낮은 쪽으로 거절된다고 말해진다; 그 이유가 모든 신성한 진리는 신성한 선으로부터 있고, 거기서부터 진행되기 때문이다. 인간의 경우도 만일 선으로부터 진리가 진행되지 않으면, 그는 주님 안에 있지 않다. 이 신성한 진리는 주님으로부터 진행하는 영의 거룩함 자체이다, 그리고 이것이 “보혜사(Paraclete, 중재자, 위안자),” 그리고 “진리의 영”이라 불리운다 (요. 14:16, 17).

그리고 요셉은 그들의 나쁜 사건들을 그들의 아버지에게 가져다 주었다. 이는 그것으로부터 그들의 품질이 나타남을 의미한다. 이는 요셉의 표현함이 주님으로부터 있는 신성한 영적 평면, 또는 신성한 진리이다로부터; “아버지”의 의미가 선이다로부터, 여기서는 야곱에 의해 표현되는 고대 교회의 선이다. 이는 이 장의 끝부분에서 알려질 것이다; 그리고 “나쁜 사건”의 의미가 요셉의 형제들에 의해 의미된 이들의 과실과 악덕이다로부터, 이들은 이미 말했듯 선과 진리로부터 돌아선 교회인들을 표시한다. 이는 이 단어들의 대략적인 내적 측면에서의 의미들이다. 즉 요셉의 형제들에 의해 의미된 과실과 악덕은 그것들을 고대 교회의 선으로부터 주목해서 본다면 신성한 진리에 의해 나타나게 만들어지거나 눈에 보이게 노출되는 것이다; 또는 같은 말로, 이 진리(신성한 진리)로부터 그들의 품질이 나타나지는 것이다.
이것들에 주목하면 이런 경우이다: 교회의 거짓들과 악들 (즉, 교회 안에 있는 이들의 거짓들과 악들)은 그것 안에 있는 이들에게 들어나지 않는다; 그 이유는 거짓의 원리들이 거짓들로부터, 악들이 악들로부터 보여지지 않기 때문, 그 이유는 거짓의 원리들이 진리들을 완전하게 안개로 덮기 때문, 그리고 악한 생활이 진리들을 꺼져버리게 하기 때문이다. 거짓의 원리와 악한 생활 모두는 거짓들이 진리들이고 진리들이 거짓들이라고. 그리고 선이 악, 악이 선이라고 나타나게 유도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그러한 것은 다양한 경험으로부터 분명해진다. 그러나 교회, 또는 교회인들은 천국 안에서 전혀 다르게 나타난다; 그 이유가 천국 안에 주님으로부터의 신성한 진리가 있다, 그리고 천국 안의 신성한 진리는 빛이다, 그리고 이 빛 안에서 그들의 품질은 나타난다. 그 이유가 모든 이 각각은 자기의 혼, 또는 영의 측면에서는 어떤 사회 안에, 천국의 사회이든, 지옥의 사회이든 소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생각은 거기 있고, 그의 말함과 행동들은 거기에 있는 그의 생각들과 더불은 다양한 교류 안에서 인간 사이에 있다.
더 나아가 어떻게 교회인들의 품질이 신성한 진리에 의해, 또는 신성한 빛 안에서 나타나지게 만들어지는 가에 주목해보자. 최근 세상으로부터 있는 악한 영들이 자신들을 지옥으로 내던지기 앞서, 그들이 우선적으로 상상하고 있는 것은 자신들이야말로 천국에 당연히 받아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천국으로 받아들임에 유일하게 필요한 것은 각자의 품질에 관련되지 않고 그분의 은총이 우선적으로 중요하다는 것, 따라서 그분의 은총이 있다면, 천국은 누구에게나 입장하도록 열려있다는 것을 믿고 있다. 하여 그들 중의 일부가 첫 사회들이 있는 곳, 즉 천국의 입구에로 들려졌다; 그러나 그들이 거기로 오자, 그들은 고통이 느껴지고, 질식될 지경이고, 그들의 생각함과 뜻함은 괴로움에 시달리고 만다; 즉 세상으로부터 있는 거짓의 원리로부터의 그들의 생각의 생명, 그리고 악한 생활로부터의 그들의 의지의 생명이 심통을 겪고 있다는 말이다. 그들이 거기 있는 빛 안에서 자신들을 쳐다볼 때, 그들은 악마들로, 송장으로, 괴물로 나타난다; 그러므로 그들은 이 사회로부터 아래쪽으로 자신을 머리를 처박듯 내던진다; 그 빛으로부터 어두운 지옥의 안개 안으로 내던짐으로 거기서 이전의 자신들의 호흡을 되찾는다; 거기서 몽상으로부터 그들의 영이 악이 아닌 것으로 자신들에게 나타난다. 이런 방식에서 그들은 자신들의 품질을 배운다. 이상의 경험으로부터 신성한 진리로부터 그들의 품질이 나타남이 어떤 방식에서 인지가 분명해졌으리라 본다.

지금 이스라엘은 요셉을 그의 모든 아들들보다 더 사랑하였다. 이는 합리성의 신성한 영적 평면이 자연 평면 속의 신성한 영적인 것과 결합함을 의미한다. 이는 야곱의 표현, 그가 “이스라엘”로 불리울 때, 자연 평면의 신성한 영적 부분, 또는 자연으로부터 영적 평면의 천적 부분이다로부터; 요셉의 표현함이 합리적 평면의 신성한 영적 부분, 또는 합리성으로부터 영적 평면의 천적 부분이다로부터; 그리고 “사랑함”의 의미가 결합되어지는 것이다로부터, 그 이유가 사랑함은 영적인 결합이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이스라엘이 요셉을 사랑함의 의미는 합리성의 신성한 영적 평면이 자연의 신성한 영적 평면과 결합함임이 분명해진다. 이 결합이 취급되기 때문에, 여기서 야곱은 1-2절에서 “야곱”이 아닌 “이스라엘”로 불리우는 것이다. 이름이 바뀜으로부터 어떤 비밀한 것들이 여기의 내적 의미 안에 포함되었다는 것이 추리된다. 그러나 자연의 신성한 영적 평면과 합리성의 신성한 영적 평면의 결합의 본성이 무엇인지에 여기서 취급할 필요가 없는데, 그 이유는 이후 자연스레 뒤이어지기 때문이다; 즉 다음 장에서 어느 정도 나마 펼쳐 보여질 것이다. 이 장에서는 오직 이 정도에서, 즉 영적 평면이 합리성과 자연 평면의 모두에서 서술되어진다는 것이다; 그 이유가 영적 평면은 주님으로부터 있는 신성한 진리이기 때문; 그리고 이 진리가 합리성 안에서, 또는 내적 인간 안에서 빛을 발할 때, 합리성의 영적 평면이라 불리운다; 신성한 진리가 자연적 인간 안에서, 또는 외적 인간 안에서 빛을 낼 때, 이 진리는 자연의 영적 평면이라 불리운다.

그 이유는 그가 그의 고령에 얻은 아들이었기 때문이다. 이는 그 안에 있는 그것 자신의 생명을 의미한다. 이는 “고령”의 의미가 이전의 상태를 벗고, 새로운 상태를 입는 것, 또는 삶(생명)의 새로움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 이유가 내적 의미에서 “고령”은 나이가 많다를 의미하지 않는데, 그 이유는 내적 인간, 또는 인간의 영은 고령이 무엇인지를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체, 또는 외적 인간이 늙게 될 때, 내적 인간은 삶의 새로움 안으로 건너가기에, 신체적 힘이 사그라들기에 나이를 수단으로 인간의 영은 완전해져 간다. 완전해져 감은 다른 삶에서도 있는 바, 천국에 있는 이들은 주님에 의해 더 완전한 삶 안으로 계속적으로 데려가진다. 그리고 결국 최고령에 죽은 이들조차, 젊은 이의 꽃피는 건강한 시절 안으로 데려가진다. 위로부터 “고령”에 의해 내적 의미에서는 삶(생명)을 의미함을 알았으리라 본다. 그것 안에 있는 그것 고유의 생명에 의해 뜻해진 것은 앞에서 설명했다.
인간의 영 또는 내적 인간은 고령이 무엇인지를 모른다고 앞에서 말했다, 그렇지만 이 영이 육체 안에서 생각하고, 이 영으로부터 육체는 생명을 가진다. 영의 이 생각이 육체에 전달될 수 없는 이유, 고로 인간은 죽음 이후 자기가 산다는 것을 아는 이유는 그의 영이 육체 안에 남아 있는 한, 그는 자기의 자연적 인간이 빨아들이게 된 원리로부터밖에 더 달리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원리를 받는 것과 그것에 대한 확신은 신체가 살아 있을 때 만에서 이다는 것, 그리고 이 신체가 죽을 때, 인간의 모든 것은 죽는다고 결론을 가지기 때문에 이 진실성의 유입이 받아지지 않는다. 그러나 여전히 유입됨이 그 자체를 분명히 할 수 있는 사실 중의 하나는 대부분의 인물들이 사후 자기들의 매장에 관하여, 동시에 사후인데도 자기가 찬사받는 것에 관심이 많다는 현실, 게다가 좀 더 특별하다 싶은 이들은 자기들의 명성에 관하여 까지도 생전에 챙겨 놓고 죽음을 맞이하려 한다는 사실, 이런 사실의 확인은 그가 생전에 살아 있는 자들로부터 자기에 대한 기억이 멸해지지 않도록 하고 싶어 대단한 기념비나 화려한 기념물(건축물)을 세워두려 한다는 사실로부터 알게 된다. 이런 것들 안으로 삶은 영원히 지속된다는 점에 관련하여 천국으로부터의 유입은 이 점에 별다른 신앙을 가지지 않고 다른 것에 관심을 두는 이들에게도 있게 (섭리) 된다. 이런 유입마저 있지 않으면 사후 자기들의 기억이 살아 있다는 사실에 관련되는 모든 것에 완전히 무관심 상태에 있어질 것이다.

그리고 그는 그에게 여러 색깔로 된 웃옷을 만들어 입혔다. 이는 거기서부터 있는 진리의 나타남, 이것 때문에 자연 평면의 영적인 것이 알려지고 구별된다. 이는 “웃옷(튜닉, tunic, 여성들이 멋으로 걸치는 무릎까지 내려오는 긴 웃옷)”의 의미가 자연 평면의 진리이다로부터, 이는 더 설명한다; 그리고 “여러 색깔”의 의미가 자연 평면의 영적인 것이 알려지고 구별되게 하는 수단인 진리의 나타남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것들이 “여러 색깔들”에 의해 의미된다는 것은 다른 삶에서도 이 세상과 같은 색깔이 나타난다는 것을 알지 않으면 납득될 수 없다. 특히 거기서의 색깔은 이 세상의 색깔을 아름다움이든 다양함에서 이든 훨씬 능가한다. 그리고 이 색깔들의 근원을 알지 않으면 납득되지 못한다. 다른 삶에서 보여진 색깔들은 거기 있는 빛의 다양함으로부터 이다, 다시 말해 지혜와 총명이 변경된 것이다; 그 이유가 거기서 나타나는 빛은 주님으로부터 있는 신성한 진리로부터, 또는 그분으로부터의 신성한 영적인 것, 같은 말로, 신성한 총명과 지혜이다; 이것이 천사들과 영들의 눈 앞에서 빛으로 나타난다. 그러므로 이 빛으로부터의 색깔들에 의해 의미된 것, 즉 진리의 품질들, 고로 진리의 나타남은 선과 진리에 애착함들로부터 나타난다는 것이다.
“웃옷”이 자연 평면의 진리이다에 대하여는 이미 살피기도 했다, 그러나 거기서 미처 살피지 않은 대목을 나는 여기서 말씀의 다른 구절로부터 확증해보려 한다. 유태 교회에서 왕들은 신성의 영적 평면, 또는 신성한 진리 측면에서의 주님을 표현했다, 그러므로 왕들의 딸들은 여러 색깔로 지은 웃옷으로 입혀졌다, 그 이유가 “딸들”에 의해 선과 진리에 애착함들이 의미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교회들이 의미되었다; 이들에 관해 이렇게 읽는다:
다윗의 딸, 다말 위에 다양한 색깔의 웃옷이 있었다(입혀졌다), 그 이유가 이런 도포는 처녀인 왕의 딸들에게 입혀진 의상이었기 때문이다 (삼하. 13:18).
대 성직자들이 신성의 천적 평면, 또는 신성한 선 측면에서의 주님을 표현했기 때문에, 아론에게는 주님의 신성한 선으로부터 있는 신성한 진리를 표현한 웃옷으로 입혀졌다; 그 이유가 신성한 선이 주님 안에 있고, 신성한 진리는 그분으로부터 진행하기 때문, 그리고 이런 의복들에 의해 표현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주님께서 세 제자, 베드로, 야고보, 요한 앞에서 변모하셨을 때, 신성한 선은 태양으로 나타났고, 신성한 진리는 빛 같이 나타난 의복으로 표현되어졌다 (마. 17:2).
아론과 그의 아들들에게 입혀진 의복들이 이렇게 묘사되어 있다:
너는 아론을 위해 고운 아마포로 튜닉(웃옷, tunic)를 만들어라, 그리고 고운 아마포 관을 만들어라, 그리고 너는 수를 놓는 자의 일로 벨트 (belt)를 만들어라. 그리고 아론의 아들들을 위해 너는 튜닉을 만들고, 그들을 위해 벨트들을 만들고, 그들을 위해 머리끈을 만들어라, 이는 영광과 장식을 위해서이다 (출. 28:39, 40).
여기서의 세부 사항들은 주님의 신성한 선으로부터의 신성한 진리에 속하는 어떤 것이 의미되는데, 특히 “고운 아마포 튜닉”는 신성한 영적인 것을 의미한다. 다른 구절에서:
너는 의복들을 가져오라, 그리고 아론 위에 튜닉, 그리고 에봇의 도포, 그리고 에봇, 그리고 가슴받이를 놓아라 (입혀라), 그리고 그가 에봇의 허리띠를 두르게 하라; 그 후에 너는 그의 아들들에게 접근해서 그들 위에 튜닉을 놓을 것이다 (출. 29:5, 8; 40:14).
이런 세부 사항들에서 의미되는 것들은 주님의 신성한 자비로부터 출애굽기 편에서 취급될 것이다.
예언자들 역시 튜닉으로 입혀졌는데, 그러나 머리에 관해서 이다. 그 이유는 예언자들에 의해 교리의 진리들 측면에 관련하여 주님을 표현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교리의 진리들은 자연 평면, 또는 외적 인간 속에 있기 때문에 예언자들은 머리에 튜닉을 가졌는데, 그 이유는 “머리털”이 자연 평면인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 튜닉(tunic)에 대한 역자의 지식이 짧아서 이에 대한 번역으로 긴 웃옷, 속옷 또는 영어 발음 그대로 옮기거나 하였는데 이에 대한 더 정확한 번역은 독자에게 맡긴다
“튜닉 (긴 속옷)”이 주님으로부터의 신성한 진리를 의미한다는 것은 신약 성서에서 “튜닉”이 언급된 구절로부터 더욱 명확해진다:
군인들은 그분의 의복들을 가져다가 각 군인에 한 부분씩으로 네 부분들로 만들었고, 튜닉 역시; 지금 튜닉은 솔기가 없이, 위로부터 통째로 짜깁었다. 그러므로 그들이 서로에게 말했다, 이것을 나누지 말자, 하여 성경이 말한 것, 즉 그들은 내 의복들을 그들 사이에서 나누었다, 그리고 내 튜닉 위에 그들은 제비를 던졌다 하고 말한 것이 성취되어졌다 (요:19:23, 24). 위 구절을 읽는 이들의 경우, 이 구절 그대로 그들이 의복을 나누어 갖고, 튜닉은 제비뽑아 군인 누구 한 사람이 가져갔다 했는데, 제아무리 성경 구절들이 거룩하다 해도 이런 사건 세부사항에 이르러서까지 무슨 위대한 신비가 포함되었다고 상상조차 해보지도 않고 지나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그럼에도 위 구절의 세부 사항은 신성으로부터의 어떤 것이 표현되고 의미되고 있다. 그 이유가 “튜닉”에 의해 주님의 신성한 진리가 의미되었기 때문, 이 진리는 유일한 하나(one only)이자, 선으로부터 있는 진리이기에 이 튜닉은 솔기 없다고, 통째로 위로부터 짜깁어져 있다고 표현되고 있다.
같은 것이 “아론의 튜닉”에 의해 의미되고 있다; 즉 이 옷은 짜깁어진 옷, 짜는 사람의 일에 의한 옷이었다:
그들은 고운 아마포로 튜닉를, 짜는 사람의 일로, 아론과 아론의 아들들을 위해 만들었다
(출. 39:27).
주님은 신성한 진리가 부분들로 교회의 수준 낮은 진리들을 가진 유대인들에 의해 행해지듯 찢어지는 것을 허용하지 않으셨다.
신성한 선으로부터 있는 신성한 진리가 유일한 하나이기 때문에, 왕국의 복음을 전도하기 위해 보내질 때, 두 벌의 튜닉을 지니지 않도록 명령되어졌다;
예수께서는 하느님의 왕국을 전파하기 위해 열 두 제자들을 보냈다; 그리고 그는 그들에게 말했다, 길을 위해 아무것도 가져가지 말라, 장대도 아니고, 자루도 아니고, 빵도 아니고, 은도 아니다; 각 사람이 두 벌의 튜닉을 가져가지 말라 (눅. 9:2, 3);
그리고 마가복음서에서:
그분은 그들에게 명령하셨다, 그들은 길을 위해 지팡이만을, 그들의 벨트에 자루도, 빵도, 놋쇠도 가져가지 말라; 그러나 신발을 신어라; 그리고 두 튜닉을 입지 말라 (막. 6:8, 9);
그리고 마태복음서에서:
네 벨트에 금도, 은도, 놋쇠도 소유하지 말라, 길을 위해 자루도, 두 (벌의) 튜닉, 신발, 장대도 아니다 (마. 10:9, 10).
위의 모든 세부 사항들은 제자들로 전도하도록 보낸 주님의 왕국 속의 천적이고 영적인 것들에 대한 표현물이다. 그들이 자신들과 더불어 금, 은, 놋쇠, 자루, 그리고 빵까지도 지참하지 말라고 하신 이유는 이런 사항들이 주님만으로부터 있는 선들과 진리들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즉 “금”은 선을 의미하고; “은”은 거기로부터 있는 진리를; “놋쇠”는 자연적 선을; “빵”은 사랑의 선, 또는 천적인 선을 의미한다. 그러나 “튜닉”와 “신발”은 위의 사항들을 입히는 진리들을; “지팡이”는 선으로부터의 진리의 힘을 의미한다. “튜닉”은 내면의 자연적 진리이다, 그리고 이것들이 이중적으로 있어서는 안되고 단 하나로 있어야 하기에, 두 장대도, 두 벌의 신발도, 또는 두 벌의 튜닉을 가지는 것을 금하셨다. 이런 신비함들이 위 주님의 명령 안에 있다, 그리고 이 신비함들은 내적 의미로부터가 아니면 알려지지 않는다.
주님께서 말하신 모두와 각각은 신성한 사항들의 표현이다, 결과적으로 그분의 왕국 속의 천적이고 영적인 것들을 표현하고 있다, 고로 인간의 납득력에도 적합하고 동시에 영들과 천사들의 이해력에도 적합하고 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말하신 이런 사항들은 온 천국을 채우고, 계속 채우고 있다. 따라서 말씀의 내적 의미를 아는 것, 그리고 이를 사용하는 것이 중요함이 분명해진다. 더 나아가 이 의미 없이 자기가 기뻐하는 독단적 주장이 무엇이든 말씀으로부터 확증할 수 없다; 그리고 말씀의 나타남만 가지고 말한다면, 악 안에 있는 이들에게 글자 의미는 조롱할 빌미를 많이 제공한다, 하여 그들은 말씀이 신성하다라고 여기기는커녕 아예 어떤 요상한 발상을 하여 그것을 믿을 준비만 갖추고 있다.

4-11절. 그리고 그의 형제들은 그의 아버지가 그의 모든 형제보다 요셉을 더 사랑하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그들은 그를 미워했다, 그리고 그에게 평화로이 말할 수 없었다. 5 그리고 요셉은 꿈을 꾸었다, 그리고 그는 그것을 그의 형제들에게 말했다, 그리고 그들은 그를 더 미워하였다. 6 그리고 그는 그들에게 말했다, 바라건대 내가 꾼 꿈을 들어 보시오. 7 그리고 우리는 들판 한가운데에서 단을 묶고 있었소, 그리고 내 단이 일어났소, 그리고 직바로 섰소. 그리고 당신들의 단들이 내 주변에 왔소, 그리고 내 단에 절을 하였소.
8 그리고 그의 형제들이 그에게 말했다, 참으로 네가 우리를 통치할 것이냐? 또는 네가 참으로 우리 위에 군림할 것이냐? 그리고 그들은 그의 꿈 때문에, 그리고 그가 한 말들 때문에 그를 더 더욱 미워했다. 9 그리고 그는 또 다른 꿈을 꾸었다, 그리고 그것을 그의 형제들에게 말했다, 그리고 말했다, 보라 나는 꿈을 꾸었다, 그리고 해와 달과 열한 별들이 스스로 나에게 절을 했소. 10 그리고 그는 그것을 그의 아버지에게, 그리고 그의 형제들에게 말했다. 그리고 그의 아버지는 그를 나무랬다, 그리고 그에게 말했다, 네가 꾸었다는 그 꿈은 대체 무엇이더냐? 나와 네 어머니와 네 형제들이 참으로 너에게 와서 몸을 땅으로 구부려 절한다는 말이냐? 11 그리고 그의 형제들은 그를 시기하였다, 그러나 그의 아버지는 이 말을 간직하였다.

그리고 그의 형제들은…보았다. 이는 신앙 속에 있는 것들, 대략적 의미에서는 야곱의 후손을 의미한다. 이는 “보다”의 의미가 주목하고 이해하다 이다로부터; 그리고 요셉의 형제들의 표현함이 신앙 속에 있는 이런저런 것들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 이유가 이 장에 있는 요셉은 주님의 신성한 영적 평면, 또는 신성한 진리를 표현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의 형제들은 선행으로부터 돌아서서 신앙쪽으로, 그 다음 선행에서 분리된 신앙에, 결국은 거짓들쪽에 있는 교회를 표현한다. 고로 여기서 요셉의 “형제들”에 의해 신앙 속에 있는 이런저런 것들이 의미된다; 그리고 이와 같은 처지에 있는 것이 야곱의 후손이었기 때문에 대략적 의미에서는 이 후손이 의미되는 것이다.

그들의 아버지는 그의 모든 형제보다 그를 더 사랑했다. 이는 주님의 신성한 영적 평면이 신성한 자연 평면과 합쳐졌음, 대략적 의미에서는 “아버지”인 고대 교회와 합쳐졌음을 의미한다. 이는 비슷한 단어들이 등장했던 곳에서 설명한 적이 있다. 대략적 의미에서 이는 고대 교회와 결합되어졌음이 의미된다; 이 교회가 “아버지”에 의해 뜻해진 이유는 이 의미에서 앞 항목에서, 요셉의 “형제들”에 의해 야곱의 후손이 의미되었기 때문, 결과적으로 그들 사이에서 표현된 교회가 의미된다. 이런 사항들이 어떻게 이렇게 이해되는지는 이미 반복적으로 서술해왔었다; 그러나 이어지는 시리즈를 위해 반복적이지만 다시 몇 마디 보탤까 한다.
홍수 이후 주님에 의해 건립된 고대 교회는 표현 교회였다; 그래서 이 교회 예배의 외적인 것 모두 그리고 각각은 주님의 왕국의 천적인 것과 영적인 것을 표현했고, 최고 의미에서 주님의 신성한 것들 자체를 표현했다; 또한 예배의 내적인 것 모두와 각각은 선행에 관련되어 출생되고 있었다. 이 교회는 아시아쪽 세계로 대규모로 퍼져나갔다, 그리고 거기 있는 많은 왕국들을 통하여 퍼져갔다; 비록 그들 사이에 신앙의 교리적인 것들에서는 차이점은 있지만, 여전히 교회는 하나였는데, 그 이유는 교회의 각 부분에 있는 모든 것은 선행을 교회의 본질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때 당시에 신앙을 선행으로부터 분리시키고, 신앙을 교회의 본질로 만든 이들이 생겨났는데, 이들이 “함”이라 불리운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이 교회는 우상숭배로 전락했다, 그리고 이집트, 바빌론, 그와 다른 장소들에서 마술로도 전락했다; 그 이유가 그들은 내적인 것 없는 외적인 것을 예배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이 선행으로부터 퇴조했을 때, 천국 역시 그들로부터 퇴조했다, 그리고 천국 대신 그들을 인도했던 지옥으로부터 영들이 왔다.
이 교회가 황폐해졌을 때, 일종의 새로운 교회가 에벨로부터 시작되었고, 이것이 히브리 교회라고 불리웠다. 이 교회는 시리아와 메소포타미아 지역에 존재했다, 또한 가나안의 몇몇 민족 사이에도 존재했다; 그러나 이 새로운 교회는 고대 교회와는 사뭇 달랐는데, 그 이유가 이 교회는 외적 예배의 본질을 제물을 바침에 두었기 때문이다. 실로 이 교회는 예배의 내적인 것은 선행이다고 인정은 했다, 그러나 이 인정함이 고대 교회의 경우 같이 심정 측면에서가 아니었다; 고로 이 교회 역시 우상 숭배로 전락했다.
마지막 주님을 기쁘시게 한 것은 아브라함의 후손, 야곱으로부터 교회의 어떤 새로운
종류를 건립하시는 것, 그래서 고대 교회의 예배의 외적인 것들을 도입하시는 것이다. 그러나 이 민족의 특성상 그들은 교회의 어떤 내적인 것도 받을 수가 없었다, 그 이유는 그들의 심정은 선행에 완전 반대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교회가 건립되되 완전 껍데기만의 교회, 즉 표현 교회가 아닌 교회의 표현물이 그들 사이에 조직되었다. 야곱의 아들들, 또는 요셉의 형제들이 대략적 의미에서 이런 교회를 의미하게 되었다, 그리고 야곱, 그들의 아버지가 고대 교회를 의미한 이유이기도 하다. 말씀의 많은 장소들, 특히 예언서들에서 고대 교회가 “야곱”에 의해 뜻해진다; 또한 때때로 고대 교회가 “아버지와 어머니”라고 불리운다. 즉 “아버지”는 선 측면에서, “어머니”는 진리 측면에서 고대 교회를 의미한다. 이상 살핀 바로부터, 그들의 아버지가 모든 요셉의 형제들보다 요셉을 더 사랑하였다가 주님의 신성한 진리가 고대 교회와 결합되어졌다를 의미한 이유를 알았으리라 본다.

그리고 그들은 그를 미워했다, 그리고 그에게 평화로이 말할 수 없었다. 이는 경멸과 증오를 의미한다. 즉 요셉에 의해 표현된 신성한 진리를 경멸함과 그것을 증오함인데, 이는 “미워함”의 의미가 통상 미워하는 누군가가 지니는 미워한다가 아니다는 것, 그 이유는 경멸함, 증오함 같이 미워한다는 단어보다 더 센 표현도 천국에서는 좀 더 온순한 표현으로밖에 표현할 수 없기 때문이다; 즉 천국은 미워함이 무엇인지, 경멸, 증오함이 무엇인지를 모르는 곳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강한 표현인 경멸함이 미워한다는 수준에서 표현될 뿐이다; 그리고 “그에게 평화로이 말할 수 없다”의 의미가 아주 싫어함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 이유가 “평화로이 말한다”가 누군가가 잘되기를 원한다를 뜻하기 때문, 하여 고대인들은 평화라는 단어를 수단으로 최고 의미에서 주님 자신을, 내적 의미에서 그분의 왕국과 거기 안에서의 생명을, 또는 구원을, 그러나 외적 의미에서는 세상에서의 건강함과 안전함으로 이해했다. 이 의미의 반대가 누군가에 평화로이 말할 수 없음, 즉 그가 잘되기를 바라지 않음, 고로 아주 싫어하는 것, 여기서는 신성한 진리를 아주 싫어하는 것이다.

그리고 요셉은 꿈을 꾸었다. 이는 그것에 관하여 설교함을 의미한다. 이는 “꿈을 꾸다”의 의미가 설교하는 것이다로부터; 그리고 꿈이 요셉을 취급하기 때문에 주님의 신성한 인간에 관하여 설교함이 의미된다. 여기서 “꿈”이 설교함을 의미하는 이유는 요셉의 두 꿈 안에 요셉에 관련하여 설비되고 예견되는 모든 것들, 또는 요셉의 형제들에 의해 표현되는 교회, 또는 신앙으로부터 시작하는 교회 내에서 신성한 진리에 관련하여 설비되고 예견되는 모든 것들이 요약적으로 들어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신성한 진리들은 꿈이든, 환상이든, 말함에 의해서이든 고대 시대에서 명명백백해졌다는 것, 그리고 이로부터 설교함들이 있었다; 결과적으로 말씀에서는 “예언자”들에게 신성한 진리가 말함에, 환상에, 또는 꿈에 의해서 명명백백해졌고, 이들에 의해 진리들을 가르치는 이들이 의미되었다, 그리고 추상적 의미에서 교리의 진리들이 의미되었다.
그러므로 같은 것이 “환상을 봄”, 그리고 “꿈을 꿈”에 의해 의미된다. 즉:
나는 내 영을 모든 육 위에 쏟을 것이다, 그리고 너희 아들들과 너희 딸들은 예언할 것이다, 너희 노인들은 꿈을 꿀 것이다, 너의 젊은 이들은 환상들을 볼 것이다; 그리고 또한 남종들과 여종들 위에, 이 날에 나는 내 영을 쏟을 것이다 (욜. 2:28, 29);
위 구절에서 “그들 위에 영을 쏟는 것”은 진리들에 관하여 가르침이 있다를 표시하고, “예언하는 것”은 그들을 가르치고 그들에게 설교하는 것을 표시한다, 그리고 같은 것이 “꿈을 꿈”에 의해 의미된다. “노인”은 슬기로운 자이다, “젊은 이”는 총명한 자, “종들”은 아는 이들을 표시한다.
예레미야서에서:
고로 여호와 체바욷께서 말하신다, 네게 예언하는 예언자들의 말들을 경청하지 말라; 그들은 너희를 헛되게 만든다, 그들은 자기들 심정의 환상을 말한다, 그리고 여호와의 입으로부터가 아니다. 나는 예언자들이 말하는 것을 들었었다, 내 이름으로 거짓을 예언한다, 말하기를, 나는 꿈을 꾸었다, 꿈을 꾸었다. 꿈을 가진 예언자는 꿈을 말하게 하라; 그러나 내 말을 가진 자는 진리 안에서 내 말을 말하게 하라. 보라 나는 거짓으로 꿈을 예언하는 그들에 맞서 있다, 여호와께서 말하신다; 그들이 그들에게 말한다, 그리고 내 백성을 그들의 거짓말로 내 백성을 타락하는 쪽으로 인도한다 (예. 23:16, 25, 28, 32);
위 구절에서 “예언한다”란 가르치고 전도하는 것을 표시한다. 그러나 거짓말의 꿈으로부터, 이로부터 그들의 설교함이 있다.
이외 다른 구절로서 예레미야 29:8, 9; 스가랴. 10:2도 있다. 모세의 책에서:
너희 한가운데에서 예언자가 일어난다면, 또는 꿈을 꾸는 꿈장이가 일어난다면, 그가 너희에게 표시와 경이로움을 줄 것이다, 그리고 표시와 경이로움이 와서, 그것 가지고 그가 너희에게 말하기 를, 너희가 알지 못해왔던 다른 신들을 따라가자, 그리고 그를 섬기자; 너희는 이 예언자, 또는 꿈장이의 말들에 순종하지 말라. 그리고 이 예언자, 또는 꿈장이를 너희는 죽일 것이다, 그 이유는 그가 여호와 너희 하느님에 맞서 반역질하도록 말했기 때문이다 (신. 13:1-3, 5);
위의 “예언자,” “꿈장이”는 가르치고 전도하는 자를 표시하는데, 여기서는 거짓들이다.

그리고 그는 그것을 그의 형제들에게 말했다. 이는 분리된 신앙 속에 있는 이들의 현존에서를 의미한다. 이는 요셉의 형제들의 표현함이 선행으로부터 신앙쪽으로 돌아선 교회, 또는 추상적 의미에서 신앙 속의 것들이다로부터; 여기서는 선행으로부터 분리된 신앙 속에 있는 이들인데, 그 이유는 “그들은 그를 미워함을 추가했다”는 말이 이어지기 때문이고, 이 말에 의해 더 크게 경멸하고 증오함이 의미되기 때문이다. 이 교회에 주목하면, 이 교회의 시작에서는 선행이 설교되어졌다, 그러나 그나마 이론에 불과한 것, 즉 (생활은 없는) 교리만에 국한된 선행, 고로 기억 속의 지식으로만 있는 선행, 따라서 선행 자체로부터가 아닌, 애착으로부터가 아닌, 또는 심정으로부터가 아닌 선행이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선행과 애착이 심정에서 폐지되어지자, 신앙이 설교되어졌다; 그리고 마지막 어떤 선행도 더 이상 있지 않고, 신앙만이 있고, 이 신앙은 일함 없이 구원이 있다라고 말한다; 그러자 일들은 선행의 일들이라 더 이상 말해지지도 않고, 신앙의 일들, 신앙의 열매들이라 말한다.
이런 방법에서 실로 인간들은 선행과 신앙이 결합하고는 있다, 그러나 교리만으로부터일 뿐, 생활로부터가 아니다. 그리고 그들이 신앙의 생활에, 또는 선에 구원함의 어떤 것이 있다고 하지 않고, 오직 신앙만이 구원한다 라고 말했기에, 그들은 신앙이 구원하는 힘을 지닌다 라고 확정해버리는 가운데, 그들은 신앙이 열매라는 단어와는 거리를 두게 되면서 결국 일함이라는 단어는 천국 입장과는 슬그머니 무관하게 되고 만다. 어쨌든 진짜 확신함은 선 안에서가 아니면 가능할 수 없다, 그러나 가짜 확신이나 거짓 확신은 악 안에서조차도 가능하다. 그리고 그들은 신앙을 선행으로부터 더욱 분리하기 위하여, 그들은 이런 주장도 서슴치 않는다; 즉 딱 한 번의 확신, 즉 “예수를 인정함”만 가져도, 또는 죽기 직전 믿노라고 고백함만 가져도, 이전 삶은 어찌되었건 그는 구원되었다 라고 단정짓는 방식이다. 이들도 모든 인간은 자신의 삶의 결과에 따라 심판된다는 것, 사후 인간의 삶의 결과는 남아 있는다는 것을 성경이 말한다는 것은 알지만, 이런 대목을 슬쩍 비껴가는 것 뿐이다. 이런 간단한 몇 마디 말만 생각해보아도 선행으로부터 분리된 신앙의 품질이 무엇일지, 신앙의 삶이 아닌 신앙만으로 만들어지는 교회의 품질이 어떨지 짐작될 것이다. 그들의 근원되는 것으로부터 흐르는 거짓들에 관하여는 주님의 신성한 자비로부터 다음 페이지에서 더 살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그를 더 미워하였다. 이는 경멸과 증오가 더 크게 보태졌음을 의미한다. 이는 비슷한 단어가 등장한 앞에서 이미 살폈기에 생략한다.

그리고 그는 그들에게 말했다, 청컨대 내가 꾼 꿈을 들어 보시오. 이는 설교의 내용들을 의미한다. 이는 “꿈을 꾸다”가 설교함이다로부터, 여기서는 설교의 내용들인데, 그 이유가 그의 꿈에 대한 서술이 이어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라보니 우리는 들판의 한가운데에서 단을 묶고 있었다. 이는 그들이 교리로부터 가르쳐지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이는 “단”의 의미가 교리이다로부터; “단을 묶다”의 의미가 교리로부터 가르쳐진다 이다; 그리고 “들판”의 의미가 교회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들판의 한가운데”란 교회의 내면인 것, 고로 이것은 얼만가의 선행의 신앙 안에 있는 이들이다; 그 이유가 “한가운데”가 내적 의미에서 내면인 것과 가장 내면(가장 안쪽)인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교회의 한가운데, 또는 교회의 가장 안쪽에 있는 이들은 선행 안에 있는 이들, 여기서는 어떤 선행의 신앙 안에 있는 이들이다. 이들과 더불어 주님께서 현존하신다, 그 이유는 주님은 선행 안에 계시기 때문, 그리고 선행을 통하여 신앙 안에도 계시기 때문이다. 이렇게 의미되는 이유는 이어지는 말로부터 이다; 즉 요셉의 단이 일어났고, 그리고 다른 단들이 그것 주위를 빙둘러 일어났다고 말해지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요셉의 단에 의해서는 주님의 신성한 진리로부터의 교리가 의미되기 때문이다.
“단”이 교리를 의미하는 이유는 들판이 교회를 의미하기 때문, 그리고 들판에 서있는 곡식(corn)은 교회에 있는 진리이다; 그러므로 곡식이 있는 단은 진리가 있는 교리를 의미한다. 아래 구절 역시 비슷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눈물로 씨를 뿌리는 그들은 노래하며 수확할 것이다; 씨의 던짐을 낳으려 꼭 가고 우는 자, 그는 노래하며 올 것이고, 그의 단을 낳을 것이다 (시. 126:5, 6);
위는 영적 포로됨에 있다가 자유해진 이들에 관해서 말해진다. “씨의 던짐을 낳는” 것은 진리들로 가르침을 받는 것, “노래하며 오는” 것은 진리에 애착함으로부터의 기쁨을 표시한다, 그리고 “단을 낳는” 것은 이 진리로부터의 교리적인 것들을 표시한다.

그리고 보라, 내 단이 일어났다, 또한 직바로 서있었다. 이는 주님의 신성한 인간에 관한 교리적인 것을 의미한다. 이는 “단”의 의미가 교리이다로부터; 그리고 “일어남과 직바로 섬”의 의미가 통치할 최고의 존재, 그들이 숭배할 최고의 존재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 존재가 주님의 신성한 인간이시다는 것은 이어지는 말로부터 분명해진다; 즉 열한 단들이 자신들을 이 단쪽에 엎드려 절했다는 것; 그리고 두 번째 꿈에서, 해와 달과 열한 별들이 자신을 엎드려 요셉에게 절했다 라고 말해지기 때문, 이로 인해 통치할 최고의 존재, 그들이 경배할 최고의 존재가 의미되고, 또한 이 의미는 야곱이 말하기를, “나와 네 어머니와 네 형제들이 실로 자신들을 땅쪽으로 구부려 네게 절하란 말이냐?”에서도 분명해진다. 이미 말했던 바 같이, 주님의 신성한 진리가 요셉에 의해 표현되어진다; 이 진리의 최고의 존재는 주님 자신이시다; 그리고 교리적인 것들에서 최고의 사항은 그분의 인간이 신성이시다는 것이다.
교리적인 사항들 속의 최고 사항의 경우는 이렇다: 태고 교회, 이 교회는 천적 (수준의) 교회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특히 이 교회는 사람이라 불리웠고, 무한한 존재를, 무한으로부터 세상 밖으로 나온 파생물(deriverative)을 숭배했다; 그리고 자기들의 내적 인간 안에서 지각될 수 있는 것들과 자기들의 외적 인간에서 느낄 수 있었던 것들로부터, 그리고 세상 안에서 (육체의 눈으로) 보일 수 있는 것들로부터, 이 교회인들은 무한한 있음(존재, being)을 지각할 수 없었으나, 무한으로부터 세상 밖으로 나온 파생물에 관하여는 어떤 지각을 가질 수 있었기 때문에, 그러므로 그들은 무한한 있음이 있는 이 파생물을 숭배했다. 무한한 있음이 들어있는 세상에 출시된 무한한 있음을 그들은 신성한 사람으로 지각했는데, 그 이유는 세상에 출시된 무한한 있음은 무한한 있음으로부터 천국을 통하여 세상에 낳아졌다고 그들은 알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천국이 웅대한 사람이고, 인간 안에 있는 모두와 각각은 이 사람에 상응하기에, 그러므로 그들은 무한한 있음으로부터 세상에 출시된 무한한 있음에 관하여 신성한 사람 외에 더 다른 지각을 가질 수 없었다; 그 이유가 무한한 있음으로부터 웅대한 사람으로서의 천국을 통과하는 것은 무엇이든 거기로부터 각각 그리고 모든 것 안에서 형상(image)을 동반하기 때문이다. 이런 천적 수준의 교회가 타락하기를 시작했을 때, 이들이 내다본 것은, 세상에 출시된 무한한 것은 더 이상 인간의 마음 안으로 유입되어질 수 없다는 것, 고로 인류는 멸해지고야 말리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밝히 알려진 것은, 그분 자신 안의 인간을 신성으로 만들게 할 누군가가 태어나야 할 것이다는 것; 이 방법에서 전에 있어 왔었던 똑같은 세상에 출시된 무한한 있음이 되어 가는 것, 그리고 마지막에서 전에 있어 왔었던 무한한 있음과 하나가 되는 것이다. 이로부터 주님에 관한 이 예언이 창세기 3장 15절에 있게 되었다.
이것이 요한복음서의 아래 말씀에 서술되어 있다:
시작에서 말씀이 있었다, 그리고 말씀이 하느님과 더불어 있었다, 그리고 하느님은 말씀이셨다. 동일하게 하느님과 더불어 시작에서 있었다. 모든 것들이 그분에 의해 만들어졌다, 그리고 그분 없이 만들어졌던 어떤 것도 만들어지지 않았다. 그분 안에 생명이 있었다, 그리고 생명은 인간의 빛이었다. 그리고 말씀이 육으로 만들어졌다, 그리고 우리들 사이에 거주하셨다; 그리고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바라보았다, 이 영광은 아버지의 독생자에 관하여 이고 은총과 진리가 가득하다 (요. 1:1-4, 14);
“말씀”은 신성한 진리이다, 이 진리는 본질 측면에서 무한한 있음으로부터 세상에 출시된 무한한 있음, 그리고 주님의 인간 측면에서의 주님 자신이시다. 이 인간 자체로부터 신성으로부터의 진리가 지금 진행되어 천국 안으로 흘러든다, 그리고 천국을 통하여 인간들의 마음 안으로도 흘러든다; 결과적으로 이 진리가 우주를 규율하고 통치하는데, 마치 영원으로부터우주를 규율하고 통치하는 것과 같다; 그 이유가 이것은 무한한 있음과 하나이고 똑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그분은 인간을 신성과 결합되게 하셨기 때문, 이렇게 행해진 결과, 그분은 자신 안에 있는 인간을 신성으로도 만드신 것이다. 이로부터 신성으로부터의 진리의 최고인 것은 주님의 신성한 인간임이 분명해진다, 그리고 이로부터 교회의 신성한 사항 사이에서 최고인 것은 그분의 인간이 신성이시다는 사항이다.

그리고 바라보니, 당신들의 단이 와서 둘러섰다. 이는 신앙 속에 있던 이들, 즉 얼만가의(약간의, some) 선행으로부터 있는 신앙 안에 있던 이들을 의미한다. 이는 “와서 빙둘러 섰다”의 의미가 여기서는 숭배하기 위해 접근함이다 인데, 그 이유는 이어지는 말이, “그들은 자신들을 구부려 그의 단에 경배했다”이기 때문에서 이고, 이를 수단으로 숭배함이 의미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단”의 의미가 교리이다로부터, 여기서는 교리의 모든 사항들, 또는 신앙의 모든 것들이다. 여기서 “단”이 이런 의미를 가지는 이유는 진짜 의미에서 신앙의 모든 것들이 야곱의 아들들에 의해 표현되기 때문, 꿈에서 야곱의 아들들 역활을 “단”이 대신해 주었기 때문이다; 또한 꿈의 무대가 들판의 한가운데에서 이었는 바, 이는 내면인 것, 또는 교회의 내면에 있는 이들을 의미한다. (교회의 내면에 해당하는 것은 선행인 바,) 얼만가의 선행으로부터 신앙 안에 있는 이들이 의미되는 것이다. 이것들이 “와서 빙둘러 서고, 자신들을 구부려 요셉의 단에 절을 한” 것이다. 이것들이 한가운데로부터 보다 멀리 떨어진 것, 또는 외면의 것을 뜻하지 않고 적당한 의미에서 “요셉의 형제들”이 뜻해짐이 분명한 이유는 진행되고 이어지는 말로부터 이다; 즉, 그들이 더욱 더 그를 미워했다, 즉 그를 경멸하고 증오심을 가졌다는 것; 즉 “미워함”, “평화로이 말하지 못함”, 그리고 “시기함” 같은 단어들이 그의 형제들에 대한 것이고, 이것이 경멸과 증오심을 의미하기 때문에서 알게 된다.

그리고 자신들을 구부려 내 단에 절을 했다. 이는 숭배함을 의미한다. 이는 “자신들을 구부려 절을 함”의 의미가 굴종의 결과, 고로 숭배함이다로부터; 그리고 “요셉의 단”의 의미가 여기서는 주님의 신성한 인간에 관한 교리이다로부터, 고로 이것은 교회의 내면쪽에 있는 이들이 숭배하는 신성한 인간을 의미한다. 그러나 외면에 있는 이들, 즉 분리된 신앙 속에 있는 이들은 숭배함으로부터 가능한한 멀리 있다. 선행으로부터 분리된 신앙이 이런 결과를 빚는 이유는 이미 말한 대로 주님은 선행 안에 현존하시기 때문, 그리고 선행을 통하여 신앙 안에 현존하시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선행은 결합되게 하는 매체이기 때문이다. 선이 없는 진리는 무엇일까? 그리고 의지력 없는 지성은 무엇일까? 고로 선행 없는 신앙은 무엇일까? 확신함에서 그것의 본질 없이 맹목적 확신(믿습니다)함은 무엇일까?
선행으로부터 분리된 신앙 안에 있는 이들이 주님의 신성한 인간을 전혀 숭배하지 않는다는 것이 이런 품성을 지니고 기독교계로부터 다른 삶에 와서, 나와 이야기를 했던 많은 이들로부터 분명해졌다; 그 이유가 그 삶에서는 이 세상의 경우처럼, 즉 심정이 말하는데, 입이 말하지 않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고로 거기서는 모든 이의 생각들이 이 세상의 어떤 말함 보다 더 명료하게 소통되어진다. 다시 말해 누구도 자기가 생각하고 믿는 대로만 말하는 것이 허용된다는 말이다. 이 세상에서 주님을 설교했던 이들 중의 많은 이들이 그분을 통째로 부정한다; 그래서 어떤 이유로 지상에서 그분을 설교하고, 바깥쪽 형체일지언정 그분을 경배했는지를 물었더니, 자기들에게 직책의 의무로 지워진 것이기 때문이다는 것, 그 덕분에 명예와 소득도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분을 설교는 하지 않았지만 그분을 고백했던 이들이 있어 물었더니, 자기들은 교회 안에서 출생했기에, 자동적으로 그런 분위기에 있게 되었고, 만일 이런 자기들이 태어나진 종교에 반대하면 “왕따” 당할 것이기에 고백했을 뿐이다고 응답했다. 기독교계로부터 온 대다수가 주님의 인간이 신성이시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그리고 그분만이 천국과 우주를 규율하신다는 것을 거의 대다수가 알지 못했다; 더욱이 그분의 신성한 인간이 천국에 있는 모든 것이시다를 모르고 있다. 이것이 그러하다는 것은 노골적으로 밝히 나타나질 수 없었던 이유는 기독 교회가 선행으로부터 신앙쪽으로 돌아서리라는 것, 결과적으로 그분으로부터 그 자체 분리되리라는 것, 그리하여 거절할 뿐만 아니라 그분의 신성한 인간으로부터 있는 거룩함을 모독하리라는 것이 주님에 의해 예견되었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선행에서 분리된 신앙은 이와 달리 있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
오늘날 신앙이 선행으로부터 분리되어져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 이유가 교회들이 자기들의 독단적 주장들에 따라 서로를 분리하기 때문, 그리고 자기들의 주장이 가르치는 것과 다르게 믿는 자들은 누구이든 자기들의 종교 단체로부터 축출하고 비방도 한다. 이들은 노골적이지 않을 뿐 타인의 (영적) 소유물을 일말의 자비심도 없이 갈취하려드는 날강도 같아서, 교묘하게 이웃의 선행의 일마저 폄하하여 영적 간음을 범한다. 그럼에도 자기 교회의 원칙만 준행하면 된다는 식이다. 다시 말해, 교회를 구성하는 것이 생활로부터가 아니라 교리만으로부터 이다. 신앙에 인접한 열매들은 자기들의 교리 안에만 있을 뿐, 그들의 마음 안에는 전혀 없다.

그리고 그의 형제들이 그에게 말했다. 이는 분리된 신앙 속에 있는 이들을 의미한다. 이는 요셉의 형제들의 표현함이 선행으로부터 신앙쪽으로 돌아서고, 결국 선행으로부터 신앙을 분리한 교회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러나 이 교회에서 내면인 이들이 꿈에서의 “(곡식)단들”에 의해 의미되어진다. 요셉의 형제들이 이 교회를 표현하는 이유는 대략적 의미에서 그들이 교회의 표현물을 의미했기 때문, 또는 야곱의 후손 사이에 조직된 광신적 신앙을 의미했다. 이 후손들은 기독교회에서 이해된 신앙 같은 것은 전혀 아는 바 없었고, 오직 진리만 알았었다. 그들에게 진리는 기독인들에게 신앙과 견줄만하다. 더욱이 히브리어에서는 한 단어로 진리와 신앙 모두에 사용되고 있다. 그러나 유태 교회는 진리라는 단어를 십계명의 가르침으로 이해했다; 이를 조금 더 확장하면 모세에 의해 내려받은 율법, 심판들, 증거들, 규례들 까지도 포함할 수 있다. 그들은 진리의 내면들을 알지 못했다, 아마 알기를 원하지도 않았다가 더 적절할지 모른다.
기독 교회의 경우, 이 교회는 자기들이 말하는 교리적 주제들에 신앙이라는 이름을 주고, 이 신앙이 교회의 내면의 것들로 반드시 믿어져야만 하는 사항들로 굳혀놓았다. 그 이유가 신앙이라는 단어를 수단으로 보통의 사람들에서 이해되는 것은 교의들(신조들, creeds)이기 때문, 또는 신조들의 책들이 가르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앙에 관한 교리적인 것들, 또는 그것들에 관한 지식이 누군가를 구원할 수 없다고, 신앙의 생활 안에 있는 자가 거의 없다고 생각하는 이들은 확신을 신앙이라 부른다. 이들은 보통의 사람 너머 있고, 타인들보다 더 학식이 있다. 이런 사항들로부터 보건대, 여기서 취급된 주제는 내적 의미에서 야곱의 후손들 사이에서 조직된 교회의 표현물일 뿐 아니라, 유태 교회에 이어지는 기독 교회까지 아우르고 있다는 것이다; 그 이유가 주님의 말씀은 보편적이기 때문, 일반적으로 모두 각각의 교회에 이르기까지 아우른다고 납득되기 때문이다. 하여 주님에 의해서는 기독 교회이든, 유태 교회이든 공히 예견되고 있다는 것, 그러므로 유태 교회는 대략적 의미에서, 또는 내적 역사적 의미에서, 그리고 기독 교회는 내적 의미에서 취급된다.

네가 참으로 우리를 통치할 것이냐? 또는 네가 참으로 우리 위에 군림하겠다는 것이냐? 이는 그들은 이해력과 의지력 속의 것들에 관하여 복종 당해지고 말리라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통치함”이 이해력 속의 것들이 복종당해지는 것, “군림함”은 의지력 속의 것들이 복종 당해지는 것을 의미함에서 분명해진다. “우리를 통치함”과 “우리 위에 군림함”이 그들이 복종당해지고 말 것임을 표시할 뿐 아니라, 여기서 사용된 두 표현들은 이것은 이해력 측면에, 다른 하나는 의지력 측면에 관련되고 있다. 이런 표현은 말씀, 특히 예언서들에서 두드러진 표현들인데, 하나가 두 방법에서 표현되는 것이다; 이런 표현 방법 안에 있는 신비함들을 알지 못하는 이들은 이런 표현이 아마도 강조를 위한 중복적 표현일 것이라고 밖에 생각하지 못한다. 그러나 이것은 그렇지가 않고, 말씀의 모두 각각의 세부적인 것 안에서도 천국의 결혼, 즉 진리가 선과, 선이 진리와 결혼함이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인간 안에서의 이해력과 의지력의 경우도 있다. 이 표현은 진리에 관련되고, 저 표현은 선에 관련된다; 고로 이것은 지성에, 그 이유가 지성은 진리에 속하기 때문, 저것은 의지력에, 그 이유가 이것은 선에 속하기 때문이다. 더욱이 말씀에 있는 표현들은 이런 의미를 꾸준히 가지는 용어들로 구성된다. 이것은 하나를 위해 두 표현들이 사용된 것 안에 감추인 비밀들이다. 이와 마찬가지인 것이 여기서의 “우리를 통치함”과 “우리 위에 군림함”의 경우이다. 하여 “통치함(reigning)”은 이해력 속에 있는 진리와 관계되고, “군림함(having dominion)”은 의지력 속에 있는 선에 관련되고 있다. 아래 다니엘서에서도 “왕국”은 진리를 서술하고, “군림함”은 선을 서술하는데, 이 구절의 주제 역시 주님의 신성한 인간이다:
그분에게 군림하심과 영광과 왕국이 주어졌다, 하여 모든 백성, 나라들, 그리고 언어들이 그분을 예배할 것이다; 그분의 군림하심은 영원히 지속되는 군림하심이다, 이 군림하심은 사라지지 않는 다, 그분의 왕국은 멸해지지 않는다 (단. 7:14);
그리고 다윗서에서:
당신의 왕국은 모든 영원함들의 왕국입니다, 그리고 당신의 군림하심은 모든 세대에 있습니다 (시. 145:13).

그리고 그들은 그를 그의 꿈과 그의 말들 때문에 더욱 미워하였다. 이는 진리에 관한 설교 때문에, 여기서는 주님의 신성한 인간에 관한 설교 때문에 한층 더 강해진 증오와 경멸을 의미한다. 이는 “더욱…하였다(보탰다, added)”가 더욱 그러했다 임에서; 그리고 “미워함”의 의미가 경멸하고 증오하는 것이다로부터; “꿈”의 의미가 설교함이다로부터; 그리고 “말들”의 의미가 진리들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말들”이 진리들을 표시하는 이유는 천국에의 모두 각각의 단어는 주님으로부터 있기 때문이다; 하여 내적 의미에서 “말들”은 진리들을 의미하고, 일반적으로 “말씀”은 모든 신성한 진리를 의미한다.
주제 자체에 주목하면, 이것은 모든 것 중에서 최고의 진리인 것, 즉 주님의 인간이 신성이시다는 진리이고, 이것을 특히 선행으로부터 분리한 신앙을 가진 교회가 경멸하고 증오한다. 고대 교회 속에 있던 이들, 그리고 신앙을 선행으로부터 분리하지 않은 이들은 우주의 하느님이 신성한 사람이셨다는 것을, 그분은 신성한 있음(being)이셨다는 것을 믿었다; 이로부터 그들은 그분을 “여호와”라고 명명하였다. 그들은 이것이 태고 교회로부터 이었다고 알았다, 그리고 그분이 그들의 형제들 중의 얼만가에게는 사람으로 나타나기도 하셨기 때문이다. 그들이 또한 알았던 것은, 자기들의 교회의 모든 의식들과 외적인 것들이 그분을 표현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선행에서 분리된 신앙 속에 있던 이들은 그렇게 믿을 수 없었는데, 그 이유는 어떻게 인간이 신성일 수 있느냐를 납득할 수 없었기 때문, 또한 신성한 사랑이 이를 결과되게 했다는 것을 납득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고 만 이유는 그들은 자기들의 외적 감각들을 통하여 받은 어떤 생각(관념)들로부터 납득하지 못한 것은 무엇이든 아무것도 아니다로 간주했기 때문이다. 선행으로부터 분리된 신앙이 이런 대목을 소중하게 간직해버렸는데, 그렇게 한 이유는 지각의 내적 측면이 닫혀졌기 때문이다, 마치 이는 유입을 가능하게 하는 중간의 것인 매체가 없는 경우와 같다.
이어져온 유태 교회는 여호와가 사람이셨다는 것, 또한 하느님이셨다는 것을 실로 믿었다, 그 이유는 그분이 모세와 예언자들에게 사람으로 나타나셨기 때문, 이런 이유로 유태인들은 자기들에게 나타난 모든 천사를 “여호와”라고 불렀다, 그럼에도 그들은 그분에 관하여 이방인들이 자기들의 신들을 가졌던 그 수준의 범주를 넘어서 생각하지를 못했는데, 그 이유는 자기들에게 기적을 수행하신 여호와 하느님을 선호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들은 여호와가 말씀에 있는 “주님”이시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그리고 자기들의 모든 의식들이 주님의 신성한 인간을 표현한 것도 전혀 몰랐다. 그들이 지니는 메시아, 또는 그리스도에 관한 생각은 오로지 모세보다 더 위대한 예언자로 오시리라는 것, 또는 다윗보다 더 위대한 왕으로 오시어 엄청난 기적들을 가지고 자기들을 가나안의 토지 안으로 데려다놓으시리라는 것 뿐이다. 그들은 그분의 천국 왕국에 관하여 어떤 것도 듣기를 원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그들은 세상적인 것밖에 납득되는 것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는 그들은 선행에서 분리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기독인의 교회, 어쨌든 외적 예배에서 실로 주님의 인간을 신성으로서 숭배한다, 특히 성찬식에서 더욱 두드러진다, 그 이유는 그분께서 빵은 그분의 몸이고, 포도주는 그분의 피라고 말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은 자기들의 교리에서 그분의 인간을 신성으로 만들지 않고 있다, 그 이유는 그들은 신성의 속성과 인간의 속성 사이에 구분이 있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해서 이 교회 역시 선행으로부터 신앙쪽으로 방향을 틀었고, 마지막으로 신앙이 선행에서 분리되었다. 그리고 그들은 주님의 인간은 신성이다고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많은 이들이 넘어지거나 심정에서 그분을 부정하고 있다. 어쨌든 진리인즉, 주님의 신성한 인간은 신성한 있음으로부터 세상으로 출시된 신성한 있음이시다는 것이다. 이 두 분은 한 분이시다는 것을 주님께서 분명히 가르치신다:
예수께서 빌립에게 말하셨다, 내가 너희에 이토록 오래 있어 왔는데, 너희는 나를 알지 못했다는 말이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본 자이다. 내가 아버지 안에, 아버지가 내 안에 있는 것을 너희는 믿지 못하느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그리고 내 안에 아버지가 계시는 것을 믿어라
(요. 14:9-11);
이 외에도 다른 구절들이 더 있다. 세상에 출시된 신성한 있음은 (본래의) 신성한 있음으로부터 진행한 신성 자체, 그리고 형상에서는 사람이시다; 천국, 그 속의 모든 것은 웅대한 사람을 표현한다; 이 웅대한 사람에 관하여는 각 장의 끝에서 살펴왔다, 그 안에서 인간 안의 모든 것이 상응한다.
실로 주님께서는 또 다른 인간이신 것으로 태어나셨고, 어머니로부터 유약한 인간을 가지셨다; 그러나 이 인간(human)을 주님께서는 통째로 내던지셨다, 하여 그분은 더 이상 마리아의 아들이 되지 않으셨다, 그리고 자신 안의 인간(Human)을 신성으로 만드셨다, 이것이 그분이 신성이 되심에 의해 뜻해진다; 그리고 또한 그분은 그분이 변모하심으로 그분이 신성한 사람이신 것을 베드로, 야고보, 요한에게 보이셨다.

그리고 그는 또 다른 꿈을 꾸었다. 이는 다시 설교함을 의미한다. 이는 “꿈”의 의미가 설교함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리고 그것을 그의 형제들에게 이야기했다, 그리고 말했다. 이는 분리된 신앙 속에 있는 이들의 현존에서를 의미한다. 이는 요셉의 형제들의 표현함이 분리된 신앙에 있는 이들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내가 아직 더 꿈을 꾸었다. 이는 설교의 내용들을 의미한다.

바라보니, 해와 달. 이는 자연적인 선과 자연적인 진리를 의미한다. 이는 “해”가 천적 (평면의) 선, “달”은 영적 (평면의) 선, 또는 진리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해”는 최고 의미에서 주님을 의미하는데, 그 이유는 그분이 영적 사랑에 있는 천국에 있는 이들에게 해로 나타나시기 때문; 그리고 “달” 역시 최고 의미에서는 주님을 의미한데, 그 이유는 그분은 영적 사랑에 있는 천국에 있는 이들에게 달로 나타나시기 때문이다; 천국에 있는 모든 빛은 이 둘로부터 이다. 그러므로 해로부터의 빛에 의해 사랑의 천적 평면, 또는 선이 있다; 그리고 달로부터의 빛에 의해 사랑의 영적 평면, 또는 진리가 있다; 그러므로 이 구절에서 “해”가 자연 평면의 선, “달”이 자연 평면의 진리인 이유는 여기서의 해와 달은 야곱과 레아를 서술하기 때문이다; 이는 10절로부터 분명해지는데, 거기서 야곱이, “나와 네 어머니와 네 형제가 실로 와서 땅으로 자신을 굽혀 네게 절한다는 말이냐?” 라고 말하기 때문, 그리고 야곱과 레아는 자연 평면의 선과 자연 평면의 진리를 표현하기 때문인데, 이는 앞에서 자주 언급해왔다. 주님으로부터 오는 신성함이 최고 의미에서 그분에 있는 신성이다; 그러나 관계적 의미에서 그분으로부터의 신성이다. 그분으로부터의 신성한 선이 소위 천적 평면(수준)이고, 그분으로부터의 신성한 진리는 소위 영적 평면(수준)이다. 합리성이 이를 받을 때, 의미되는 것은 합리적 평면의 선과 진리이다; 그러나 자연 평면이 이것들을 받을 때, 의미되는 것은 자연 평면 의 선과 진리이다. 여기서 해와 달은 자연 평면의 선과 진리인데, 그 이유는 야곱과 레아를 두고 말해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열한 별들. 이는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을 의미한다. 이는 “별들”의 의미가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들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별”이 말씀에서 이 의미를 가지는 이유는 별이 밤에 빛을 내는 작은 발광체로 어렴풋한 빛을 내보내기 때문, 마치 지식들이 선과 진리에 어렴풋한 빛을 내보내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이런 지식들이 “별”에 의해 의미되는 것은 말씀의 많은 구절로부터 분명해진다. 예레미야서에서:
고로 낮의 빛을 위해 태양을, 밤의 빛을 위해 달과 별들의 운행을 주시고, 파도들이 요동치는 바다를 휘저으시는 여호와께서 말하셨다 (예. 31:35);
위 구절은 새로운 교회가 취급된다, 그리고 “낮의 빛을 위해 태양을 주심”에 의해 사랑과 선행의 선이 의미된다, 그리고 “밤의 빛을 위해 달과 별들의 운행을 주심”에 의해 진리와 지식들이 의미된다.
다윗서에서:
여호와께서는 큰 발광체들을 만드시고, 낮은 태양이 규율하고, 밤은 달과 별들이 규율하게 하셨다 (시. 136:7-9);
말씀의 내적 의미에 관해서 무지한 이들이 믿게 되는 것은, “태양”은 세상의 태양, “달과 별들” 또한 세상의 달과 별들이다는 그 이상은 없다; 하여 이로부터 영적이고 천국적 의미는 아무것도 발생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말씀은 모두 각각의 단어들에서 천국적일 뿐이다; 이로부터 분명해지는 것은 사랑과 선행의 선들, 그리고 신앙의 진리들, 이들에 관한 지식들 모두가 의미된다.
창세기서의 첫 장, 거기에서 천국 인간에 관한 새로운 창조에서 이렇게 서술되어 있다:
하느님께서 말하셨다, 낮과 밤이 구별되기 위해 하늘의 광활한 공간에 발광체들이 있어라; 그리고 그것들로 표시를 위해서와 때들을 위해서, 그리고 날들과 햇수들을 위해서 있게 하자; 땅 위에 빛을 주기 위해 하늘의 광활한 공간에 발광체를 위해 그것들로 있게 하자; 그리고 그렇게 있었다. 그리고 하느님은 두 큰 발광체를 만드셨다; 더 큰 발광체는 낮을 규율하도록, 작은 발광체는 밤을 규율하기 위해 있다; 그리고 별들이 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땅위에 빛을 주기 위하여, 그리고 낮을 규율하고, 밤을 규율하고, 그리고 빛과 어둠 사이를 구별하기 위하여, 그것들을 하늘의 광활한 공간에 놓으셨다 (창. 1:14-18, 30-38항).
마태복음서에서:
이 날들의 환난 후에 즉시 태양은 어두워질 것이고, 달은 그녀의 빛을 주지 않을 것이고, 별들은 하늘로부터 떨어질 것이다, 그리고 하늘의 힘들이 흔들릴 것이다 (마. 24:29);
위에서 “태양과 달”에 의해 사랑과 선행이, 또는 선과 진리가 의미된다, 그리고 “별들”에 의해 지식들이 의미된다, 이는 앞에서 살폈다; 그리고 마지막 날, 또는 교회의 마지막 상태가 여기서 취급되기에, “태양이 어두워짐과 달이 빛을 주지 않음”에 의해서는 그때에 사랑의 선과 선행의 선이 멸해짐이 의미된다; 그리고 “별이 하늘로부터 떨어짐”에 의해서는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들 역시 사멸함을 의미한다.
이런 것들이 의미되는 것은 위 구절 말고도 예언서들에서 같은 단어가 등장하는 구절에서 더 확인된다. 이사야서에서:
잘 보라 여호와의 날이 잔인하게 온다, 땅을 황폐해지게 만들기 위해서이다, 그리고 그분은 그것의 안에서 밖으로 죄인들을 파괴하실 것이다. 하늘의 별들과 별자리들이 그들의 빛으로 빛을 내지 않을 것이다; 태양은 그것의 떠오름에서 어두워질 것이다, 그리고 달은 그녀의 빛이 빛을 내게 하지 않을 것이다 (이. 13:9, 10).
요엘서에서:
여호와의 날이 가까이 있다. 태양과 달이 검게 되어졌다, 그리고 별들은 그들의 빛을 냄에서 철수했다 (욜. 3:14, 15).
에스겔서에서:
내가 너희를 꺼지게 할 때, 나는 하늘을 덮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거기로부터의 별들을 검어지게 할 것이다; 나는 구름으로 태양을 가릴 것이다, 그리고 달은 그녀의 빛이 빛나게 만들지 않을 것이다, 하늘에 있는 모든 빛의 발광체들을 나는 네 너머에서 검게 만들 것이다, 그리고 네 토지 위에 어둠을 놓을 것이다 (겔. 32:7, 8).
그리고 계시록서에서:
넷째 천사가 소리를 냈다, 그리고 태양의 삼분의 일 부분이 쳐부심을 당했다, 그리고 달의 삼분의 일 부분, 그리고 별들의 삼분의 일 부분; 그것들의 삼분의 일 부분이 어두워질 것이다, 그리고 낮은 그것의 삼분의 일을 위하여 빛을 내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밤도 마찬가지 방식에서 이다
(계. 8:12).
더욱이 “별들”이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들임이 아래 다니엘서에서 분명해진다:
숫염소의 뿔 중의 하나로부터 작은 뿔이 생겨났다, 그리고 그것은 남쪽을 향하여, 동쪽을 향하여, 그리고 광채를 더함을 향하여 극도로 자랐다. 그리고 그것은 하늘의 군대와 별들에까지 이르게 자랐다; 그리고 군대와 별들의 얼마를 땅 아래로 내던졌고 그것들을 짓밟았다 (단. 8:9, 10);
그리고 계시록서에서:
꼬리를 가진 큰 용이 하늘의 별들의 삼분의 일을 잡아당겼다, 그리고 그것들을 땅쪽으로 내던졌다 (계. 12:4).
위 구절들에 있는 “별들”이 자연계의 별을 뜻하지 않는다는 것은 누구나 짐작되고도 남을 것이다. 위 다니엘서와 계시록서에서는 교회의 마지막 때에서의 교회의 상태를 묘사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다윗서에서:
여호와께서는 별들의 숫자를 세신다; 그분은 모든 것에 이름을 주신다 (시. 147:4).
다시:
너희 태양과 달이여 여호와를 찬양하라, 너희 빛의 별들아 그분을 찬양하라 (시. 148:3).
그리고 계시록서에서:
큰 표시가 하늘에서 보여졌다; 여인이 태양을 두르고, 달은 그녀의 발 아래에, 그리고 그녀의 머리 위에는 열두 별의 왕관이 있었다 (계. 12:1).
“별들”이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들을 의미하기에, 그것들은 교회의 교리물도 의미한다, 그 이유가 이것들은 지식들이기 때문이다. 마지막 때에서 선행으로부터 분리된 신앙에 관한 교리물이 계시록서에서 별에 의해 이렇게 묘사되고 있다:
셋째 천사가 소리를 냈다, 그리고 하늘로부터 횃불같이 타는 큰 별이 떨어졌다, 그리고 그것은 강들의 삼분의 일 부분 위에, 그리고 물의 샘들 위에 떨어졌다; 그리고 별의 이름은 쑥이라 불리우고, 많은 이들이 물들로 인해 죽었다, 그 이유는 그것들이 쓰게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계. 8:10, 11);
이 별에 의해 쓰게 만들어진 물들은 진리들이다, 그리고 “강들과 물들의 샘들”은 말씀으로부터의 총명과 지혜이다.

나에게 굽혀 절을 했다. 이는 숭배함을 의미한다. 이는 굽혀 절함의 의미가 숭배함이다로부터 알게 되는데 앞에서 살폈다.

그리고 그는 그것을 그의 아버지에게 그리고 그의 형제들에게 말했다. 이는 그것이 알 수 있도록 주어졌음을 의미한다. 이에 대하여는 별도의 설명이 필요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의 아버지는 그를 나무랬다, 그리고 그에게 말했다, 네가 꾸었다는 꿈은 대체 무었이란 말이더냐? 이는 분개함을 의미한다. 이는 “나무램”의 의미가 분개하다 이다로부터; 그리고 이 분개함의 원인은 주님의 신성한 인간에 관한 진리를 설교함 때문인데, 이것이 “꿈을 꿈”에 의해 의미되었다. 아버지와 요셉의 형제들은 고대의 것으로부터 파생된 유태인의 종교를 표시한다. 이 종교의 외적 측면은 고대 교회의 외적 측면과 대부분 같다. 고대 교회 속에 있는 이들과 더불어서는 그들의 외형물 안에 내적인 것이 있었으나, 유태인의 종교 속에 있는 이들의 경우는 그렇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그들은 어떤 내적인 것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 이는 지금의 경우도 변함이 없다; 그럼에도 안쪽에 내적인 것이 있었다. 이렇게 내적인 것을 지닌 외적인 것이 여기서 “아버지”라고 불리우고, 내적인 것 없는 외적인 것이 “형제들”이라 불리운다; 그러므로 이런 서술이, 즉 “그의 형제들은 그를 시기했고, 그의 아버지는 그의 말을 마음에 간직했다”가 뒤이어진다. 이어진 이 말의 앞 부분은 내적인 것 없는 외적인 것에 있는 이들의 증오함이, 뒤 부분에서는 진리가 아직은 그들의 종교 안에 남아 있었다가 의미된다.
이것은 기독 교회에서도 별반 차이가 없다. 이 교회에서도 내적인 것 없이 외적인 것에만 머무르는 이들이 성찬식에 참석하여 빵을 먹고 포도주를 마시나, 그들에게는 이 의식이 준행하라는 명령 때문에, 그리고 교회가 이를 받아들였기에 무작정 아무 생각 없이 참석을 한다. 그러나 이들보다 조금 더 나은 그들 중의 얼만가는 빵과 포도주가 거룩하다는 것을 믿는다, 그러나 그들 안에 있게 된 거룩함이 “빵”은 천국에 있는 사랑과 선행의 거룩함으로부터, “포도주”는 거기 있는 선행과 신앙의 거룩함으로부터 이다는 사실로부터 내려오고 있다고 믿는 것은 아니다. (아예 그런 지식조차 없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이에 반해, 외적 예배에 있되 동시에 내적 예배에도 있는 이들은 빵과 포도주를 숭배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것들이 표현하는 주님을 경배한다, 그리고 그분으로 사랑의 거룩함, 선행의 거룩함, 그리고 신앙의 거룩함이 있음을 믿는다; 그리고 이 거룩한 의식을 준행하되, 교리로부터가 아닌 자신의 삶에 어울려진 사랑과 선행, 그리고 신앙으로부터 이다.

나와 네 어머니와 네 형제들이 실로 와서 땅쪽으로 자신을 구부려 네게 절한다는 말이더냐? 이는 교회가 숭배하리라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와서 절을 함”의 의미가 이제 막 숭배하려 드는 것이다로부터; 그리고 여기서 “나”인 “아버지”, 그리고 “어머니”, 그리고 “형제들”의 의미가 교회, 여기서는 유태인의 교회이다로부터 알려진다.

그리고 그의 형제들은 그를 시기했다. 이는 그들이 증오함을 의미한다. 이는 “시기함”이 증오함이다로부터, 이 의미는 앞에서 살핀 “미워함”, “평화로이 말하지 못함”과도 같다; 그 이유가 “시기함”이 원어에서 일 경우, 시기적이고 말다툼질을 함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시기하고 다툼은 미워함의 결과이기에 증오함이 같은 단어에 의해 의미된 것이다.

그리고 그의 아버지는 이 말을 간직하였다. 이는 이 진리가 그들의 광신적 신앙에 남아 있었다를 의미한다. 이는 여기서 “아버지”의 의미가 고대의 것으로부터 파생된 유태인의 종교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리고 “간직함”의 의미가 내향적으로 보존함이다로부터, 고로 남아 있다가 의미된다; 그리고 “말”의 의미가 진리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광신적 신앙에 남아 있는 진리에 의해 뜻해진 것은 앞의 항목을 살피면 된다.

12-17절. 그의 형제들은 세겜에서 그들의 아버지의 양떼를 먹이러 밖으로 나갔다.
13 그리고 이스라엘은 요셉에게 말했다, 네 형제들이 세겜에서 양떼를 먹이고 있지 않느냐? 오너라, 그리고 나는 그들에게 너를 보낼 것이다. 14 그리고 그가 그에게 말했다, 나를 바라보라! 그리고 그는 그에게 말했다, 청컨대 가서 네 형제들의 평화를, 양떼들의 평화를 보거라, 그리고 다시 나에게 그 말을 가져오너라. 그리고 그는 그를 헤브론의 골짜기로부터 보냈다, 그리고 그는 세겜에 왔다. 15 그리고 어떤 사람이 그를 발견했다, 그리고 바라보니 그는 들판에서 방황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 사람이 그에게 물었다, 말하기를, 너는 무엇을 찾느냐? 16 그리고 그는 말했다, 나는 내 형제들을 찾고 있습니다, 바라건대 그들이 어디서 양떼를 먹이고 있는지 말해주십시오. 17 그리고 그 사람이 말했다, 그들은 여기로부터 떠났다, 그 이유가 나는 그들이 도단으로 가자 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요셉은 그의 형제들을 뒤쫒아 갔다, 그리고 그들을 도단에서 찾았다.

그리고 그의 형제들은 양떼를 먹이러 밖으로 나갔다. 이는 신앙으로부터 가르치는 이들을 의미한다. 이는 요셉의 “형제들”의 의미가 신앙으로부터 있는 교회인들 이다로부터; 그리고 “양떼를 먹임”의 의미가 가르치는 것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들의 아버지의… 이는 고대인들의.., 그리고 원시 교회의…를 의미한다. 이는 “아버지”, 또는 야곱의 의미가 고대 교회이다로부터, 또한 원시 기독 교회도 의미한다. 이 원시 교회는 시작에서 있었던 기독 교회를 뜻한다. 크게 네 교회가 말씀 안에서 취급되었다. 홍수 이전 존재했고, 사람이라 명명된 교회가 있었는데, 이는 태고 교회라고 불리운다. 다음은 홍수 이후에 존재한 교회로 고대 교회이다. 그 다음 야곱의 후손에게 이어진 교회인데, 실로 이 교회는 교회는 아니고 교회의 표현물이다; 이 표현물은 광신적 신앙이라고도 불리운다. 그리고 주님이 오신 이후 설립된 것, 이는 기독 교회라고 불리운다. 이 교회의 처음에서는 원시 교회라고 불리웠다.

세겜에서. 이는 첫 조짐들을 의미한다. 이는 “세겜”의 의미가 고대의 신성한 지주로부터 파생된 진리이다, 그리고 교리 측면에서는, 여기서 신앙에 관한 교리의 첫 기본 원리이다; 그 이유가 이름의 서술은 시리즈에서 주제에 따라 있기 때문이다. 첫 기본 원리는 교리물의 일반적인 사항이기도 하다; 일반적인 사항은 처음 받아진 것이고, 특별한 것들은 이어져서 받아지는 것들이다.

그리고 이스라엘이 요셉에게 말했다. 이는 신성한 영적 평면으로부터 지각함을 의미한다. 이는 말씀의 역사물에서 “말함”의 의미가 지각함이다로부터; 그리고 요셉의 표현함이 신성한 영적 평면이다로부터 알려진다.

네 형제가 세겜에서 양떼를 먹이고 있지 않느냐? 이는 그들이 가르치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는 “양떼를 먹임”의 의미가 가르치는 것이다로부터; 그리고 “세겜”의 의미가 신앙에 관한 교리의 첫 기본 원리(rudiments)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오너라, 그리고 나는 너를 그들에게 보낼 것이다. 이는 그것은 신성한 영적인 선들을 가르쳐야 할 것이다를 의미한다. 이는 요셉의 표현함이 주님의 신성한 영적 평면이다로부터 분명해진다. 여기서 “보내짐”이라고 말해질 경우, 이는 신성한 영적 선들을 가르치는 것을 표시한다; 그 이유가 내적 의미에서 “보내지는” 것은 앞으로 나가는 것과 진행하는 것이기 때문, 또한 동시에 가르치는 것이다; 여기서의 경우는 주님의 신성한 영적 평면으로부터 진행하는 신성한 영적 선들을 가르치는 것이 된다. 신성한 영적 선들은 사랑과 선행으로부터 있는 것들이다; 그러나 신성한 영적 진리들은 거기로부터의 신앙 속에 있는 것들이다. 전자를 가르치는 이는 후자 역시 가르치고 있는 셈이 된다; 그 이유가 후자는 전자로부터 있고 전자에 관하여서 이기 때문이다. 내적 의미에서 “보내어짐”이 진행하는 것과 가르치는 것임은 말씀의 많은 구절로부터 분명해지고, 특히 주님의 경우에서, 그분은 아버지에 의해 “보내졌다”라고 말하신다, 이를 수단으로 그분은 그분으로 진행하셨다, 즉 신성한 선으로부터 진행하셨다가 의미된다; 또한 주님께서는 위로자 또는 진리의 영을 “보낸다”하고 말하신다; 이를 수단으로 거룩한 진리가 그분으로부터 진행한다가 의미된다. 예언자들 또한 “보내졌는데,” 이를 수단으로 그들은 주님으로부터 진행되는 것을 가르쳤다가 의미된다. 보내지다 라는 말은 말씀에서 아주 많이 등장하기에 아마도 웬만큼 말씀을 읽은 이라면 이 의미의 확증은 어렵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가 그에게 말했다, 나를 보아라. 이는 확언함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는 그에게 말했다, 청컨대 가서 네 형제들의 평화를 보아라. 이는 주님의 모두 각각의 오심에서, 그리고 (이 오심을) 지각함이 가르친 이들과 더불어 어떻게 있었는지를 의미한다. 이는 “말함”의 의미가 지각함이다로부터; 그리고 “평화”의 의미가 안전함이다로부터, 고로 어떻게 이것이 그들과 더불어 있는지를; 그리고 형제들의 의미가 여기서의 경우 신앙으로부터 가르치는 이들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로부터 명백한 바, 이 말들에 의해 가르친 이들과 더불어 지각함이 어떻게 있었는지 이다. 주님의 모두 각각의 오심 또한 의미되는 이유는 요셉에 의해 신성한 영적 평면에서의 주님이 표현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가서 네 형제들의 평화를 보라고 말해질 때, 주님의 오심이 의미된다. 모두 각각의 오심에 의해서는 말씀으로부터의 진리가 생각 안으로 흘러들 때면 언제든지가 뜻해진다.

그리고 양떼의 평화. 이는 어떻게 신성한 영적인 선들이 배움을 받고 있는 이들, 또는 교회와 있었는지를 의미한다. 이는 “평화”의 의미가 그들과 더불어 그것이 어떻게 있었는지 이다로부터; 그리고 “양떼”의 의미가 배우고 있는 이들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 이유가 “목자” 또는 양떼를 먹이는 자는 선행의 선을 가르치고 그쪽으로 인도하는 자를 표시한다; 그리고 “양떼”는 배우는 자, 인도받는 자를 표시하고, 교회 또한 표시한다.

나에게 다시 말을 가져오너라. 이는 지식을 의미한다. 이는 “말을 다시 가져옴”의 의미가 사건들이 어떻게 되었나를 보고하는 것, 고로 지식이다로부터 알려진다.

그리고 그는 그를 헤브론의 골짜기로부터 보냈다. 이는 자연적이고 감각적인 신성으로부터를 의미한다. 이는 “보내어짐”의 의미가 진행되는 것과 가르치는 것이다로부터; 그리고 “골짜기”의 의미는 아래쪽에 있는 이것, 저것이다로부터; 그리고 “헤브론”의 의미가 선 측면에서의 주님의 교회이다로부터 알려진다. 고로 이 말들에 의해 교회의 보다 낮은 것을 가르쳤다가 의미된다, 그리고 이런 이유는 그들이 보다 높은 것들을 납득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선행 없이 신앙만을 가르치는 자는 교회의 보다 높은 것, 또는 내면의 것들에 주목할 수가 없다; 그가 그런 이유는 자기를 내면쪽으로 인도하는 어떤 것도 가지지 않았기 때문, 그래서 이것이든, 저것이든 자기에게 명령되는 것은 신앙으로부터만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일 그가 선행을 가르친다면, 그때 그는 선을 가진다, 그리고 선이 그에게 명령하고 인도한다; 그 이유가 모든 진리는 선으로부터 있고, 선을 취급하기 때문이다, 또는 같은 말로, 신앙의 모든 것은 선행으로부터 있고, 선행을 취급하기 때문이다. 누구나 상식적 수준에서도 아는 바는 교리의 모든 것이 (선한) 생활에 초점을 맞추어 짜여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 구절의 말에 의해 자연적이고 감각적인 신성으로부터를 의미하는 것은 보다 높은 감각이다; 그 이유가 교회의 보다 낮은 것들이 주님의 자연적이고 감각적인 신성으로부터 있다 라고 말해지기 때문이지만, 그렇다고 주님 안에서 이런 것들이 보다 낮다 라는 말은 아닌데, 그 이유는 주님 안에서, 그리고 그분의 신성한 인간 안에서 모든 것은 무한이기 때문, 마찬가지로 그분은 각 본질 측면에서도 여호와 이시다, 따라서 여기서는 인간 안에서 일 경우가 해당된다. 그 이유가 감각적인 인간은 주님 안에 있는 것, 그분으로 있는 것, 모든 것을 감각적으로만 납득이 가능할 뿐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자연적인 인간이라면 자연적으로만 만사가 납득될 뿐이다. 즉 받는 당사자의 품질 때문에 본문에서도 그렇게 의미된다. 천적 수준의 인간의 품질을 지닌 이다면, 그래서 진실로 합리적이다면, 그는 내면의 것들을 지각한다, 그리고 그들을 두고는 주님의 합리적 신성으로부터 가르쳐진다 라고 말해질 것이다. 이것은 말들에 의해 의미된 보다 높은 감각이다.
“골짜기”가 교회의 보다 낮은 것들을 뜻한다는 것은 다른 구절로부터도 분명해진다:
환상의 골짜기로부터의 예언이다. 네가 어쩌자고 지붕꼭대기까지 올라가느냐? 요동치는 날, 짓밟 힘의 날, 난감해지는 날이 환상의 골짜기에서 주 여호비 체바욷께 있다 (이. 22:1, 5);
“환상의 골짜기”는 감각적인 것으로부터, 고로 보다 낮은 것들로부터 있는 영적인 것들에 관한 몽상들을 표시한다. 다시:
네 아름다운 골짜기들은 병거들로 가득하였다, 그리고 마병들이 성문에서 정렬하였다 (이. 22:7);
“아름다운 골짜기들”은 자연적, 또는 외적 인간에 있는 선하고 참된 것들을 표시한다. 다시:
누군가의 음성이 광야에서 외치기를, 너희는 여호와의 길을 준비하라, 우리의 하느님을 위하여 작은 길을 열심히 편편하게 만들어라; 모두 각각의 골짜기가 찬양될 것이다 (이. 40:3, 4);
“골짜기”는 낮은 것들을 표시한다.
예레미야서에서:
너희는 어찌하여 나는 더럽게 하지 않았다, 나는 바알림을 따라 가지 아니했다 라고 말하느냐? 골짜기에 있는 네 길을 보아라, 네가 무엇을 했는지를 인정하라 (예. 2:23);
위의 “골짜기”는 기억 속의 것들과 감각으로부터의 것들을 표시한다. 이것들은 보다 더 낮은 것들인데, 이를 가지고 그들은 진리들을 타락시킨다. 다시:
나는 너희에 맞서 있다 오 골짜기, 그리고 평지의 반석의 거주민아, 여호와께서 말하신다; 누가 말한다, 누가 우리에 맞서 내려올 것이냐? (예. 21:13)
“골짜기와 평지의 반석의 거주민”은 선행이 안에 없는 신앙을 표시한다. 다시:
황폐케하는 자가 모든 도성에 올 것이다, 그리고 어느 도성도 피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골짜기는 멸망할 것이다; 그리고 평지는 파괴될 것이다 (예. 48:8);
이 구절도 앞 구절과 비슷한 의미를 가진다. 다시:
너는 골짜기들에서 자랑 못할 것이다; 네 골짜기는 흘러가 버렸다 오 성미가 비꼬인 딸들아 (예. 49:4);
“골짜기”는 예배에 있는 외적인 것들을 표시한다, 이것 역시 최고로 낮은 것이다.
에스겔서에서:
나는 곡에게 이스라엘에서 매장을 위한 장소를 줄 것이다, 통과하는 그들의 골짜기 (이다), 그리고 거기에 그들은 곡과 모든 그의 무리들을 묻을 것이다; 이로부터 그들은 그것을 부를 것이다, 곡의 무리들의 골짜기 (겔. 39:11, 15);
“곡”은 내적인 것 없이 외적 예배에 있는 이들을 표시한다, 이로부터 그의 매장할 장소는 “통과하는 그들의 골짜기”, 그리고 “곡의 무리들의 골짜기”라고 불리운다. 다윗서에서:
그렇다, 내가 그늘의 골짜기를 통과하여 걸을 때, 나는 어떤 악도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다
(시. 23:4);
“그늘의 골짜기”는 보다 더 낮은 것들을 표시하는데, 통상 이것들은 그늘 안에 있는 경우가 많다.
골짜기들이 산들과 언덕들 사이에 있기에, 그리고 산과 언덕 아래에 있기에, “골짜기들”은 교회의 더 낮은 것, 또는 외면의 것이 의미되는데, 그 이유는 언덕과 산이 교회의 더 높은 것, 또는 내면의 것이 의미되기 때문, 하여 “언덕”은 선행 속의 것들을, “산”은 주님을 사랑함 안에 있는 이들이다; 그리고 가나안의 토지에 의해 주님의 왕국과 그분의 교회가 의미되기에, 그러므로 그것은 “산들과 골짜기들의 토지”라고 불리운다, 즉 하늘의 비로부터 물을 마시는 (토지)라고 불리운다 (신. 11:11). 여기서 요셉이 헤브론의 골짜기로부터 보내졌다고 말해진 이유는 선교가 신앙에 관한 것을 가르친 이들에게 있었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신앙 안에 있되 선행 안에는 있지 않은 이들은 보다 낮은 것들 안에 있기 때문이다; 그들과 더불어 신앙은 기억 안에, 이로부터 입 안에만 있고, 심정 안에, 그리고 일함 안에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세겜에 왔다. 이는 일반적 교리물들에 관한 지식을 의미한다. 이는 세겜의 의미가 첫 기본 원리, 또는 교리물들에서 일반적인 것들이다로부터 분명해진다.

그리고 어떤 사람이 그를 발견했다, 그리고 보니, 그는 들판에서 방황하고 있었다. 이는 그것들은 교회의 일반적인 진리로부터 멀어져 버렸음을 의미한다. 이는 “들판에서 방황함”이 교회의 일반적인 진리로부터 멀어져 버렸음을 의미함에서 알게 된다; 그 이유가 “들판”이 선 측면에서의 교회이기 때문, 그리고 “들판의 사람”이 교리물들로부터 있는 생활의 선 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말해진 “사람(남자, vir)”은 교회의 진리가 의미된다. 주님을 인정은 하나 그분의 인간을 신성으로 인정하지는 않는 것, 또한 신앙을 교회의 필수 요소로서 인정은 하나 선행을 필수 요소로 인정은 하지 않는 것이 교회의 일반적 진리로부터 멀어져 버렸다고 말해진다. 사실 이 두 필수 요소, 즉 주님의 인간이 신성임, 선행이야말로 교회의 핵심 진리, 즉 일반적 진리(포괄적 진리, 또는 모든 교리를 아우르는 진리)이다; 다시 말해 (기독 종교의 어느 교파라고 자칭하든 그들이 내세운) 진리가 위 두 진리로부터 퇴각할 때, 이는 핵심 진리로부터 멀어져버리고 만다는 말이다. (이러면 그 기독 종교는 진정한 기독 종교(True Christian Religion)가 아니게 된다.) 이를 행하는 자는 누구이든 그는 이내 특수적인 진리들로부터도 멀어지고 만다. 예를 들면, 누군가가 기발난 착상을 해서 출생된 거짓 원리로부터 출발해서, 그 원리로부터 연역하여 결말(중요한 것, 핵심)을 갖게되면, 이것 역시 거짓 원리로부터인 바, 거짓임이 틀림 없다는 말이다. 그러나 거짓 원리는 이 세상에서 이런 식으로 하여 세력을 확장해간다.

그리고 그 사람이 그에게 물었다, 너는 무엇을 찾고 있느냐? 이는 예견을 의미한다.
이는 이 시리즈가 예견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말했다, 나는 내 형제들을 찾고 있습니다, 청컨대 그들이 어디서 양떼를 먹이는지 말해주십시오. 이는 어떻게 이런 경우가 있었는지에 관한 지식, 그리고 그들이 어떤 상태에 있었는지에 관한 지식을 의미한다; 대략적으로, 단어들에 따르면, 일반적 진리(핵심 진리)가 신앙으로부터 가르친 이들과 더불어서 어떻게 있었는지, 그리하여 그들의 상태는 어떠했는지를 배우는 것이다; 그 이유가 “형제들”에 의해 신앙으로부터 가르친 이들이 의미되기 때문; (일반적 진리가) 가르친 이들과 더불어 어떻게 있었는지는 “그들을 찾고 있음”, 또는 “그들의 평화를 보려함”에 의해 의미되고 있다; “어디서”에 의해서는 상태가 의미된다, 그 이유가 내적 의미에서 (천국에서) 장소에 관련되는 모든 것은 상태를 표시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먹이는 이들”은 가르치는 이들이 의미된다.

그들은 여기에서 떠났다, 그 이유가 나는 그들이 도단으로 가자 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기 때문이다. 이는 그들은 일반적인 교리(핵심 교리)로부터 특수한 어떤 교리로 자신들을 향하게 했음을 의미한다. 이는 “떠나다”의 의미가 자신들을 어디로 향하게 하다 이다로부터; 그들이 떠난 장소인 “세겜으로부터”의 의미가 교리의 일반적 사항 (핵심 사항)이다로부터; “도단”의 의미가 교리의 특수적 사항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도단”이 이런 의미를 가지는 이유를 말씀의 다른 구절로부터 확증하기는 힘들 것 같다; 그 이유는 도단이 언급되는 구절이 한 군데밖에 없기 때문이다 (왕하 6:13); 즉 시리아왕이 엘리사를 잡으려 도단으로 병거와 마병과 큰 군대를 보냈는데, 오히려 엘리사에 의해 군대들의 눈이 멀어 사마리아까지 이끌려와서 결국 자기 나라로 허겁지겁 도망하고 마는 역사에만 등장했을 뿐이기 때문이다.
말씀의 모든 역사물들은 주님의 왕국의 천적, 영적 평면의 모든 것들을 표현하는 바, 위 엘리사의 기적 사건도 예외는 아니다. 시리아 왕에 의해 진리에 관한 지식 안에 있는 이들이 표현되었다; 여기서는 반대적 의미인바, 진리 아닌 것에 관한 지식 안에 있는 이들이 표현되었다; 엘리사에 의해서는 주님의 말씀이 표현되었다; 도단에 의하여는 말씀으로부터의 교리물들이 표현되었다; 시리아 왕이 보낸 병거와 마병과 큰 군대는 교리의 거짓들을 표현했다; 엘리사의 사환이 본 엘리사를 에워싼 산에 불병거와 말들이 가득함은 말씀으로부터 있는 교리 속의 선하고 진정한 것들을 의미했다; 눈이 멀므로 해서 처부숨을 당해 시리아왕에게 되돌려 보내진 이들에 의해서는 거짓들 자체가 의미되었다; 그리고 그들이 엘리사에 의해 사마리아로 이끌려지고, 거기서 그들의 눈이 열려짐에 의해서는 말씀을 수단으로 가르침이 의미된다. 이상의 설명은 이 기적 사건에 대한 것인데, 이 사건 안에, 엘리사가 있었던 도단은 말씀으로부터 있는 선하고 진정한 것에 관한 교리적인 것들이 의미된다. 본문의 도단 역시 이 의미와 거의 같아서, 교리의 특수적인 것들밖에 더 다른 의미는 없다; 그러나 여기서의 특수적인 교리란 거짓 원리들로부터의 특수적인 교리를 말한다, 그 이유는 취급되는 주제가 신앙으로부터 시작하는 교회이기 때문, 이 교회의 특징은 교회의 시작 당시, 출발 당시, 애당초, 선행으로부터 분리되고 있다는 점이다. 형성되는 모든 교리물들에 풍미를 주는 것이 일반적 원리인데, 선행 없는 신앙이 이 교회에 (특별한) 맛을 내고 있다.
사실 모든 교회가 시작에서는 대체로 교리 속의 일반적 사항만 알고 출발한다. 다시 말해 지극히 단순함에서 출발하는데, 어린 아이 같다; 그러나 시간의 과정에서, 특별 사항들이 보태져 간다; 이 특별 사항은 부분적으로는 일반적 원리를 확증하는 사항일 수 있고, 어떤 사항은 일반적 원리에 반대는 아니지만 어느 정도는 상반되는 원리가 추가되기도 한다; 또한 명백히 일반 원리에 반대되는 특별 사항들을 추가하면서 이것이 일반 원리와 충돌하지 않도록 설명(변명, excuse)을 위한 사항이 겹친다. 어쨌든 이런 모든 것들이 거짓 원리로부터의 특별한 것들이다; 한 아버지로 일반적 원리를 인식하는 모든 교리 속의 모든 것들은 서로서로가 동료, 친구, 동아리임의 관계에 있는데 마치 혈연이나 결혼을 통한 인척 관계 같이 끈끈하게 있다. 이로부터 분명해지는 것은, 일반적 원리가 거짓일 때, 모든 것들은 거짓으로 맛을 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요셉은 그의 형제들의 뒤를 따라갔다, 그리고 그들을 도단에서 찾았다. 이는 그들은 거짓 원리들로부터의 특이한 것들 안에 있었음을 의미한다. 이는 요셉의 표현함이 신성한 진리 측면에서의 주님이시다로부터; “그의 형제”의 표현함이 선행으로부터 신앙으로 돌아서버린 교회, 결국에는 분리되어 신앙만 있는 교회이다로부터; 그리고 “도단”의 의미가 거짓 원리로부터의 특별한 것들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거짓 원리들로부터의 특수적인 것들에 관하여를 알기 위해 그것들의 몇 가지만이라도 예로 삼아 살피는 것이 나을지 모른다. 즉 원리로서 신앙만을 인정하는 교회의 교리물들은 이렇다. 신앙만으로 인간은 의롭다해짐을 받는다는 것, 따라서 신앙만으로 그의 모든 죄는 씻어진다는 것, 설사 그가 죽기 몇 분전 일지라도 믿습니다 라는 고백만으로도 당사자의 구원은 가능하다는 것, 구원은 은총을 통하여 천국 안으로 입장을 허가받는 것이다는 것, 또한 아이들은 신앙에 의해 구원될 수 있다는 것, 이방인들은 신앙이 없기 때문에 구원되지 못한다는 것; 이 외에 더 있으나 생략한다. 이런 것들이 신앙만으로 라는 원리를 지주로 하여 갈라져나온 특수적인 것들이다. 그러나 만일 교회가 신앙의 생활을 원리로서 인정한다면, 이웃을 향한 선행과 주님을 사랑함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결과적으로 선행과 사랑의 일들을 인정해야 한다는 말이다, 이러면 앞에 열거한 신앙만으로에서 출발한 특수적인 것들은 산산조각되어 지고 말 것이다. 즉 의롭다 되어짐이라는 말 대신 거듭남을 인정한다, 하여 주님께서 “너희가 새로이 출생되지 않으면, 그는 하느님의 왕국을 볼 수 없다”(요. 3:3)라는 말씀을 중요시한다는 말이다; 그러면 그는 거듭남이 신앙의 생활에 의해 결과된다는 것, 분리된 신앙에 의해서가 아님을 인정한다. 더불어 자신의 모든 죄들이 나로부터 씻어져 없어져 깨끗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자비 덕분에 나로부터 나의 죄를 멀리 있게 억눌러주신다는 것, 그리하여 상대적으로 선 안에, 이 선으로부터 진리 안에도 있게 해주신다는 것; 고로 모든 선은 주님으로부터 이다는 것, 모든 악은 자신으로부터 이다는 것도 인정한다. 단 한 번의 “믿습니다”라는 고백으로 구원이 가능해지는 것이 아니라, 고백 이후 꾸준한 신앙으로부터의 생활에 의해 내 안에 쌓여진 신앙에 의해서 이다는 것; 구원은 은총을 통하여 천국 안으로의 입장 허가증을 받듯 하는 것이 아니다는 것, 그 이유가 천국은 주님에 의해 누구에게나 열려져 있으나, 그가 천사가 될 수 있는 생명의 본질을 갖추지 않으면, 그가 자신의 의지로 천국으로부터 달아나는 것이다. 어린 아이가 신앙에 의해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삶에서 그들은 주님에 의해 선행의 선과 신앙의 진리를 배운다는 것, 그렇게 해서 천국으로 받아진다는 것이다. 이방인들이 신앙이 없기 때문에 그들이 구원되지 못한다가 아니라, 그들도 다른 이들 같이 자기들의 삶이 사후에도 남아 있고, 하여 서로의 사랑에서 살아온 이들은 신앙의 선들을 거기서 배우게 되고, 여느 기독인들이나 마찬가지로 천국 안으로 받아진다. 즉 생활의 선 안에 있는 이들이 바라고 믿는 것과 같다.
원리로서 신앙만을 인정하는 교회는 선행이 무엇인지를 알 수 없다. 이웃이 무엇인지 조차도 모른다, 고로 천국이 무엇인지도 모른다; 따라서 누가 이렇게 말하면 의아히 여길 것이다. 즉 사후 삶의 행복과 천국에서의 기쁨은 타인이 행복하기를 바라고, 타인에게 선처하는 것 안으로 흐르는 신성이다는 것, 그리고 거기로부터의 행복과 복됨은 모든 지각을 능가한다는 것, 이 유입을 받음은 신앙의 생활을 하지 않은 자에게는, 즉 선행의 선 안에 있어 오지 않았던 이들에게는 주어질 수 없다는 것을 들었을 때이다. 신앙의 생활이 구원한다는 것을 주님께서 마태복음 25장 31부터 끝절에 이르러 분명하게 가르치신다; 이외 많은 구절이 있다; 그러므로 아타나시안 신조라고 불리우는 신조(신경)도 끝 부분에서 이렇게 가르치고 있다; 즉 “모든 이는 그의 일들의 결과로 보답받을 것이다; 선하게 산 자는 영원한 생명으로 들어갈 것이고, 악하게 산 자는 영원한 불로 들어갈 것이다.”

18-22절. 그리고 그들은 멀리 저쪽에 있는 그를 보았다, 그리고 그가 그들에게 가까이 오기 전, 그들은 그를 죽이자고 음모를 꾸몄다. 19 그리고 그들은 남자 그의 형제에게 말했다, 보라 꿈의 주인이 온다. 20 그러므로 지금 오고 있으니 그를 죽여서 구덩이에 던지자, 그리고 우리는 말할 것이다, 악한 들짐승이 그를 삼켰다. 그리고 우리는 그의 꿈이 무엇일지를 보게 되리라. 21 그리고 르우벤이 들었다, 그리고 그를 그들의 손에서 구출하려고 말했다, 그를, 그 혼을 치지는 말자. 22 그리고 르우벤은 그들에게 말했다, 피를 흘리게 하지 말자. 그를 광야에 있는 이 구덩이에 던지자. 그러나 그에게 손을 대지 말자. 이는 그가 그들의 손에서 그를 구출해서, 그의 아버지에게로 되돌려 보내려 해서 였다.

그리고 그들은 멀리 저쪽에 있는 그를 보았다. 이는 주님의 신성한 인간을 아주 다르게 지각함을 의미한다. 이는 “보다”의 의미가 지각함이다로부터; “멀리 저쪽”의 의미가 아주 다르게(remotely) 이다로부터; 멀리 있는 것이 요셉이었는데, 요셉의 표현함이 신성한 진리 측면의 주님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여기서 “요셉”에 의해 주님의 신성한 인간이 뜻해진 이유는 이것이 신성한 진리의 최고 원리이기 때문이다. 교회를 구성하는 두 핵심 원리 (일반 원리, 제 일의 두 원리)는 주님의 인간이 신성이시다는 것, 그리고 주님을 사랑함과 이웃을 향한 선행이 교회를 만든다는 것, 그리고 사랑과 선행으로부터 분리된 신앙은 아니다는 것이다. 이것들이 신성한 진리의 제 일 가는 것들이기에 이것이 요셉에 의해 표현되어지고 있다; 그 이유는 일반적 측면에서 신성한 진리를 표현하는 같은 인물이 신성한 진리의 특별한 것도 표현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특별하게 표현한 것은 시리즈로부터 분명해진다.

그리고 그가 그들에게 가까이 오기 전, 그들은 그를 죽이자고 음모를 꾸몄다. 이는 그들은 주님의 신성한 인간으로부터 있는 신성한 영적 평면이 소멸되기를 원함을 의미한다. 이는 “음모함”이 타락된 마음으로부터 뜻하는 것이다로부터; “죽이자”의 의미는 소멸함이다로부터; 그리고 “요셉”의 표현함이 신성한 영적 평면, 또는 신성한 진리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신성한 진리는 주님의 신성한 인간으로부터 진행되기 때문에, 신성한 평면은 주님의 신성한 인간으로부터 이다고 말해진다.
여기서의 경우는 이렇다: 천국 전체를 망나해 있는 신성한 진리는 주님의 신성한 인간 외의 다른 근원으로부터서는 진행되지 않는다. 신성 자체로부터 있는 것은 어떤 천사에게도 직접적으로 흐를 수 없는 이유는 신성 자체가 무한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님의 신성한 인간을 통하여 간접적으로만 흐를 뿐이다. 이 사항이 주님의 이 말씀에 의해 뜻해진다: 즉 “여하튼 하느님을 본 자는 없다; 독생자, 아버지의 품 안에 있는 자, 그분이 그분임을 분명히 하셨다(set forth, declared).” 이런 이유로 신성한 인간 측면에서의 주님이 중보자(중재자, Mediator)라고도 불리우신다.
이 분 역시 영원으로부터 있으셨고, 신성한 있으심이기에, 천국을 통하여, 천국에서 신성이 밖으로 나타나심 없이 어떤 천사와도, 어떤 영과도, 어떤 인간과도 교통될 수 없었다. 신성 자체 측면에서의 주님이 신성한 있음이고, 신성한 인간 측면에서의 주님은 신성의 밖으로 나타나심이다에 대하여는 앞에서 살핀 것을 참조하기 바란다. 주님 안에서 그분의 인간이 신성으로 만들어지지 않으면, 주님의 인간 자체는 신성한 있음으로부터 어떤 유입도 받을 수 없었다; 그 이유가 신성을 받는 것은 반드시 신성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알게 되는 바, 신성한 진리는 신성 자체로부터 직접 진행되지 않고, 주님의 신성한 인간으로부터 진행된다는 것이다.
이 사항을 신앙의 생활을 하지 않고, 신앙만을 위해 끝까지 싸우는 이들은 자신 안에서 소멸해버린다; 그 이유가 그들은 주님의 인간이 여느 평범한 인간, 자기와 별반 다르지 않는 인간으로 믿기 때문이다; 비록 입술로 주님을 고백하지만 이로 인해 그들은 주님의 신성을 많은 사항들로부터 부정하는 결과를 야기한다. 그러나 신앙의 생활을 실현해가는 이들은 구세주 하느님으로서의 주님에게 무릎을 꿇고 경배하고, 신성 본질과 인간 본질을 교리에서 따로 구분하지 않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들은 성찬에서도 그렇게 행한다. 이리하여 그들과 더불어서는 주님의 신성한 인간이 그들의 심정 안에 계신다.

그들은 남자 그의 형제에게 말했다. 이는 그들의 서로의 생각들을 의미한다. 이는 “말하다”가 지각하다와 생각하다를 의미함으로부터; 그리고 “남자 그의 형제에게, man to his brother”의 의미가 서로적으로 (mutually)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고대인들이 서로적인 것을 의미할 때 쓴 관습적 말이 본문에 등장하고 있다; 즉 “남자 그의 형제에게” 이다; 이런 관습적 표현이 사용된 이유는 “남자(man, vir)”가 진리를 의미하고, “형제”가 선을 의미하고, 이 둘 사이에는 최고로 친밀한 서로의 관계가 사이에 끼어 있기 때문이다; 또한 진리와 선, 그리고 선과 진리의 결합은 서로적으로, 상호적으로 거행되기 때문이다.

보라 꿈의 주인이 온다. 이는 이런 것들은 텅비었음을 의미한다. 이는 “꿈”이 설교함을 의미한다로부터, 여기서는 신성한 진리에 관하여 설교함이다, 그 이유는 이것이 요셉에 관하여서 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본질적 측면에 관련되는 신성한 진리는 신앙만에 있는 이들에 의해 거절되어진다, 그러므로 여기서의 “꿈”은 텅빈 것들이 의미된다; 그 이유가 이런 인물들에게 거짓들은 진리들로, 진리들은 거짓들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만일 거짓들로서가 아니다면, 텅빈 것들로서 이다; 그리고 “꿈의 주인”은 이에 대한 설교자이다. 신성한 진리가 이런 인물들에게 텅빈 것들로 나타나는 것은 많은 것들에서 분명해진다; 예를 들면, 말씀은 거룩하다, 하여 말씀의 점 하나도 신성한 영감이 들어 있다, 이렇게 말씀이 신성하고 거룩한 이유는 말씀 안에 주님의 왕국의 천적이고 영적인 사항들이 표현되고 의미되어 있기 때문이다는 것, 이런 사항들이야말로 신성한 진리이다고 입을 모은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즉 말씀이 내적 의미에서 열려질 때, 그리고 말씀의 세부 사항들이 표현하고 의미하는 것을 배우게 될 때, 신앙만에 있는 이들은 이런 것들이 텅빈 것, 즉 무슨 쓸모가 있느냐고 말하며 거절한다; 비록 이런 천적이고 영적인 사항들이야말로 외적 인간이 세상적, 물질적인 것으로 흠뻑 만족하는 수준의 기뻐함보다 훨씬 더 위대한 기쁨을 내적 인간에게 선물하는데도 그렇다는 말이다.

지금 오고 있으니 그를 죽이자. 이는 교리의 본질인 주님의 신성한 인간에 관한 사항이 소멸됨을 의미한다. 이는 “죽이다”가 소멸시키다를 의미함으로부터; 그리고 그들이 죽이기를 원했던 자, 요셉의 표현함이 주님의 신성한 진리, 특별하게는 주님의 신성한 인간에 관한 교리이다로부터, 이는 교리의 본질임에 관하여는 앞에 살폈다. 신앙만을 인정하는 교회가 이 본질되는 진리를 소멸시켰다는 것은 알려진 바이다; 그 이유가 그들 속의 어느 것이 주님의 신성한 인간을 신성이다고 믿는 것일까? 그들은 자기들의 주장 자체로부터 돌아서지 못하는가? 그럼에도 고대 교회에서 세상에 오시기로 되신 주님이 신성한 사람이시다는 것이 믿어졌고, 그분이 여호와라고 불리셨다는 것이 많은 말씀의 구절들에서 보여지지만, 여기서는 한 대목만 살펴보겠다:
광야에서 소리치는 자의 음성이 있다, 너희는 여호와의 길을 준비하라, 우리 하느님을 위하여 작은 길을 평평하게 하라 (이. 40:3).
위 구절이 주님에 관하여 말해진다는 것, 그리고 세례자 요한에 의해 이 길이 준비되고, 작은 길이 그분을 위해 편편해졌다는 것은 복음서로부터 분명해진다 (마. 3:3; 막. 1:3; 눅. 3:4; 요. 1:23); 더 나아가 주님 자신의 말씀으로부터도 있다; 즉 그분은 아버지와 더불어 하나이시다는 것, 그리고 아버지는 그분 안에, 그분은 아버지 안에 있다는 것; 또한 그분에게 하늘과 땅의 권능이 주어졌다는 것, 그리고 심판은 그분에 속한다는 것 등등이다. 하늘과 땅의 권능, 심판에 관하여 조금만 아는 자라 해도 그분이 인간 측면 역시 신성이시지 않으면 이런 것들이 그분에게 있어질 수 없다는 정도를 모를리 없다.
신앙만으로 안에 있는 이들은 인간을 새로이 만드는 것, 또는 그를 정화하는 것, 더욱이 주님의 인간을 신성으로 만드시는 것을 알 수 없다; 그 이유는 그들이 사랑과 선행에 관해 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향한 선행이 인간을 새로이 만들고 정화한다는 것, 한편 신성한 사랑 자체가 주님을 신성으로 만든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사랑이 인간의 있음 자체, 그러므로 그의 생활이다. 그리고 사랑은 인간을 사랑 자체의 형상에 따라 모양을 만들어 낸다; 즉 사랑은 인간의 혼 같은 것, 그의 내면의 본질이어서 이것이 그 자체의 형상쪽으로 육체를 창조하고 모양있게 만드는 것과 같다. 이런 방식에서 사랑은 그것이 뜻하고 생각하는 것과 같게 육체를 수단으로 행동하고 감각작용을 가진다. 고로 육체는 결과로서 있고; 혼은 안에 목적이 있는 원인으로서 있다; 결과적으로 혼은 육체의 모든 것, 마치 목적으로부터의 원인이 결과에 있는 모든 것인 것과 같다. 혼이 여호와 자신이었던 그분의 인간은 신성으로밖에 더 달리 신성이 되실 수 없으셨다. 그러므로 주님의 인간을 신성으로 만드신 이후 그분의 인간을 여느 인간의 인간 같이 여기는 것은 얼마나 큰 실수인지 모른다. 그분의 신성한 인간으로부터 천국에 있는 모든 지혜가, 모든 총명이, 또한 모든 빛이 진행된다. 그분으로부터 진행하는 것은 무엇이든 거룩하다; 그리고 신성으로부터 이지 않은 거룩함은 거룩함이 아니다.

그리고 그를 구덩이 중 하나에 던지자. 이는 거짓들 사이에를 의미한다. 이는 “구덩이”의 의미가 거짓들이다로부터 분명해진다. “구덩이들”이 거짓들인 이유는 거짓의 원리들 안에 있어 왔던 이들이 사후 더 낮은 땅 아래 한동안 보관되면서 거짓들이 그들로부터 제거되어 마치 한쪽으로 거절되어 있는 듯 할 때까지 있기 때문이다. 이 장소들이 “구덩이들”이라 불리우고, 그것들 안으로 가는 자는 반드시 황폐됨 안에 있어야 한다. 이런 이유 때문에 “구덩이들”은 추상적 의미에서 거짓들이 의미된다. 보다 더 낮은 땅은 발 아래 다음이고 짧은 거리에서 빙둘러 있는 구역이다. 여기에 사후 천국으로 들리우기 이전, 대부분의 인물들이 있다. 이 땅 또한 말씀에서 자주 언급된다. 이것 아래쪽에 황폐함의 장소들이 있다, 이것이 “구덩이”라 불리운다, 그리고 그것들 아래 적당한 넓이에서 지옥들이 있다.
이로부터 “지옥”에 의해 뜻해지는 것, “더 낮은 땅”에 의해 뜻해지는 것, 그리고 “구덩이”에 의해 뜻해지는 것이 분명해질 것이고 말씀에서 언급되는 구절을 읽어보자:
너는 지옥으로, 구덩이의 측면으로 아래로 데려가졌었다. 너는 네 무덤 밖으로 내던져졌는데, 마치 역겨운 어린 가지, 검으로 찔리워 살해당한 자들의 의복 같고, 구덩이의 돌들에로 아래로 내려간다 (이. 14:15, 19);
위는 바빌론의 왕에 관해서 말했다, 이 왕에 의해 진리를 모독함이 표현되었다; 그 이유가 “왕”이 진리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빌론”은 모독이다. “지옥”은 저주받은 자가 있는 곳, 그리고 그들의 저주됨이 역겨운 어린 가지에, 그리고 검에 찔리워 살해당한 자들의 의복에, 구덩이의 돌에로 아래로 간 것에 비교된다. “살해당한 자의 의복”은 진리가 모독됨이다; “검으로 찔리움”은 자기 안에서 진리가 꺼져버린 이들이다; “구덩이”는 황폐함이 반드시 있어야 하는 거짓이다. “돌들”은 테두리들, 그러므로 그것들은 “측면들”이라 불리우는데, 그 이유는 구덩이가 빙둘러 있는 곳이 지옥들이기 때문이다. 이상 살핀 바로부터 짐작되는 것은 위 구절이 내적 의미를 알지 못하면, 이 구절이 뜻하는 것을 아는 것이 불가능해짐이다.
구덩이가 등장하는 위와 비슷한 구절이 에스겔서에도 있다:
내가 구덩이로 내려가는 그들과 더불어 너를 아래로, 시대의 백성에게로 데려갈 때, 그리고 너를 시대로부터 황무함에 있는, 더 낮은 구역의 땅에서 거주하게 만들 것이고, 하여 너는 구덩이로 내려간 그들과 거주하지 못할 것이다; 그 다음 나는 산 사람의 토지에서 꾸밈을 놓을 것이다 (겔. 26:20);
“구덩이로 내려 간 그들”은 황폐함쪽으로 보내진 이들을 표시한다; “구덩이 안으로 간 그들과 거주하지 않음”은 거짓들로부터 배달되어지는 것을 뜻한다.
다시:
물들로부터의 모든 나무들의 어느 것도 자기의 키 때문에 자신을 뽐내지 못할 것이고, 자기의 가지를 뒤엉킨 굵은 가지 사이로 보내지 못하고, 자기의 높음 때문에 물들을 마시는 모든 자들, 그들 너머에 서지 못한다; 그들 모두는 죽음쪽으로, 인간들의 아들들 한가운데에 있는 더 낮은 땅으로, 구덩이 안으로 내려가는 그들에게 배달될 것이다. 나는 민족들을 그의 황폐하는 소리에서 흔들게 만들 것이다, 이때 나는 그를 구덩이로 내려가는 그들과 더불어 지옥 안으로 내려가게 만들 것이다; 그리고 에덴의 모든 나무들, 레바논의 아름답고 제일 가는 것, 물들을 마시는 모든 것이 더 낮은 땅에서 위로될 것이다 (겔. 31:14, 16);
위는 이집트에 관해서 이다, 이를 수단으로 지식 자체로부터 신앙의 신비함들 안으로 들어가는 것, 즉 그렇게 들어간 이들이 의미된다. 앞에서 말해진 바로부터 이 구절의 의미도 짐작될 것이다; 즉 여기서 예언자에 의해 언급된 것인 “지옥”에 의해, “구덩이”에 의해, 그리고 “더 낮은 땅”에 의해 의미된 것이 분명해져 있을 것이다. 위의 구절에 있는 “물들의 나무들”, “에덴의 나무들”, “뒤엉킨 굵은 가지들 사이로 보내진 가지”, “레바논의 아름답고 제 일 가는 것”, 그리고 “물들을 마시는 모든 것”에 의해 의미되는 것은 내적 의미로부터가 아니면 파악되지 않는다.
다시:
사람의 아들아, 이집트의 무리를 위해 소리내어 울어라, 그리고 그녀로 내려가게 하라, 그녀조차도, 그리고 당당한 민족들의 딸들, 더 낮은 지역의 땅으로, 구덩이 안으로 내려 간 그들과 더불어, 앗수르가 거기 있다, 이들의 무덤들이 구덩이의 측면들에 놓여 있다, 검으로 살해된 모두
(겔. 32:18, 22, 23);
위 구절의 의미는 앞의 구절의 설명에서 알려질지 모른다. 다윗서에서:
오 여호와여, 당신은 지옥으로부터 제 혼을 데려왔습니다; 당신은 저를 구덩이로 내려간 그들 사이로부터 살아있게 보존하셨습니다 (시. 30:3).
다시:
저는 구덩이로 내려간 그들과 더불어 세어졌습니다; 저는 힘이 없는 사람으로 세어졌습니다. 당신은 저를 더 낮은 구역에, 어둠에, 깊음에 놓으셨습니다 (시. 88:4, 6).
요나서에서:
나는 산들의 베어내짐 아래로 갔습니다; 땅의 빗장들이 제 위에 영원히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당신은 구덩이로부터 제 목숨을 꺼내왔습니다 (욘. 2:6);
위에서 취급된 주제는 주님이 겪으신 시험들, 그것들로부터 해방됨이다. “산들의 베어내짐”은 최고로 저주된 이들이 있는 곳, 그것들 빙둘러 나타난 어두운 구름들은 “산들”이다.
“구덩이”는 거짓의 황폐함이고, 추상적 의미에서 거짓인데, 아래 이사야서에서:
그들은 구덩이에 묶임 같이 정녕 모아질 것이다, 그리고 감옥에서 잠금당해 있을 것이다; 날들이 많은 후에 그들은 방문받을 것이다 (이. 24:22).
다시:
궁핍함을 일으킨 자의 분노는 어디 있느냐? 전방으로 인도하던 자가 급하게 열 것이다; 그리고 그는 구덩이에서 죽지 않을 것이다, 빵이 떨어지지 않을 것이다 (이. 51:13, 14).
에스겔서에서:
보라 나는 네 위에 낯선 자들을 데려올 것이다, 민족들의 광폭, 그가 네 지혜 위에 검을 빼어들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너의 빛남을 모독할 것이다. 그들은 너를 구덩이로 내려다 놓을 것이다. 그리고 너는 바다들의 심장에서 찔려진 그들의 죽음들을 죽을 것이다 (겔. 28:7, 8);
위는 두로의 제 일인 자에 관해서이다, 이들로 해서 거짓의 원리들에 있는 이들이 의미된다.
스가랴서에서:
크게 기뻐하라 오 시온의 딸아; 소리내라, 오 예루살렘의 딸아; 보라 왕이 네게로 오신다; 그분은 공정하시고, 가엾으시고, 그리고 나귀를 타신다, 그리고 암나귀의 망아지 위에. 네 언약의 피를 수단으로 나는 너의 묶인 자를 물이 없는 구덩이로부터 파견할 것이다 (슥. 9:9, 11);
위에서 “물이 없는 구덩이”란 진리가 전혀 없는 거짓을 표시한다; 이어지는 본문에서, 요셉을 물이 없는 구덩이에 던졌다와 같다 (24절). 다윗서에서:
당신에게 저는 소리칠 것입니다 오 여호와여, 저의 반석이신 당신은 제게 잠잠하지 마소서, 그렇지 않고 당신이 제게 잠잠해 있으신다면, 저는 구덩이로 내려가는 그들 같이 보여집니다 (시. 28:1).
다시:
여호와께서는 황폐함의 구덩이로부터, 진흙 수렁으로부터 나를 꺼내 올리셨다; 그리고 그분은 내 발을 반석 위에 놓으셨다 (시. 69:15).
다시:
그분은 그분의 검을 보내셨다, 그리고 그들을 치료했다, 그리고 그들의 구덩이들로부터 그들을 구조하셨다 (시. 107:20);
“그들의 구덩이들로부터”란 거짓들을 표시한다. 다시:
서둘러, 저에게 대답해주소서, 오 여호와여; 제 영이 소진되어집니다, 당신의 얼굴을 나로부터 숨기지 마소서, 그렇지 않으면 저는 구덩이로 내려가는 그들 같을 것입니다 (시. 143:7).
“구덩이”는 거짓을 의미하고, “소경”은 거짓들 안에 있는 이들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말하신다; “그들을 내버려 두어라, 그들은 소경의 소경 인도자들이다. 만일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면, 모두 구덩이에 빠질 것이다” (마. 15:14; 눅. 6:39). 요셉에 의해 표현된 것과 비슷한 것이 예언자 예레미야에 의해 표현되었다, 즉:
그들은 예레미야를 데려갔다, 그리고 그를 경비원의 뜰에 있는 구덩이 안으로 그를 던졌다; 그리고 그들을 끈을 가지고 예레미야를 아래로, 물이 없는 구덩이 안으로 내려가게 했다 (예. 38:6);
즉, 그들은 진리가 하나도 없는 거짓들 사이에서 신성한 진리들을 거절했다.

그리고 우리는 악한 들짐승이 그를 삼켰다고 말할 것이다. 이는 탐욕의 삶으로부터의 거짓말을 의미한다. 이는 “들짐승”이 애착과 탐욕을 의미함으로부터; 그 이유가 “들짐승”이 진짜 의미에서 살아있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악한 들짐승”은 여기서 탐욕들의 생활이 의미된다; 이것이 거짓말인 것은 분명하다. 이는 앞에서 살핀 것과도 관련이 있다; 즉 거짓들 사이에서 신성한 진리는 탐욕의 생활로부터서는 거짓말에 불과하여 (즉 탐욕의 삶 안에 있는 자의 견해에서는 신성한 진리가 거짓말이므로) 그들이 거절한다는 것이다. 거짓의 근원은 세 가지가 있다; 하나는 교회의 교리, 또 하나는 감각들의 오류, 또하나는 탐욕의 삶이다. 교회의 교리로부터의 거짓은 대체로 인간의 지적 부분만에 달라붙어 있다. 이 거짓은 당사자의 유아 시절로부터 이것이 이렇다 하는 것을 권유받고 있다가 나중에 어떤 확증물을 통해 그 거짓을 견고하게 한다. 감각의 오류로부터 있게 되는 거짓 안에 있는 이들은 이해력으로부터의 통찰력은 거의 없는 편이다, 그 이유는 그들은 수준 낮고 감각적인 것들로부터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탐욕의 삶으로부터 있는 거짓은 의지 자체로부터, 같은 말로 심정으로부터 튀어나온다 (솟구친다); 그 이유가 인간이 심정으로부터 뜻하는 것이야말로 그의 바라는 것, 즉 그의 소원 사항이라 말해도 되기 때문이다. 이 거짓은 셋 중에서 가장 지독하다, 그 이유는 그것은 본래부터 타고나기(inhere) 때문, 따라서 주님으로부터 새 생명으로 새 삶 (완전 거듭남, 완전 새 삶, 과거의 삶과 완전 다른 삶, 새 술이 새 부대에 담긴 것, 새 옷에 어떤 헌 옷이 깁어지지 않은 것, 요즈음의 스위든볼지언에게 요구되는 삶일지 모른다 역자 주.)이 아니면 그 뿌리는 뽑혀나가지 않기 때문이다.
널리 알고 있는 것, 즉 인간에게는 두 능력이 있다는 것, 그것은 이해력과 의지력이다. 이해력이 흡수하거나 빨아들이는 것들은 의지 안으로 자동적으로 건너가지지 못한다; 그러나 의지가 흡수하는 것은 이해력 안으로 어렵지 않게 건너간다. 그 이유는 인간이 뜻하는 것은 무엇이든, 그가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만일 그가 탐욕으로부터 악을 생각한다면, 그는 그 악을 생각하고 그 악을 확증한다. 생각함을 수단으로 악을 확증함이 탐욕들의 생활로부터의 거짓들이라 불리우는 것이다. 이 거짓들은 당사자에게는 진리들로 나타난다; 그리고 그가 자신 안에서 그것들을 확증했을 때, 진리들은 그에게 거짓들로 나타난다; 그 이유가 이때 그는 빛의 유입을 차단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일 그가 자신 안에서 이런 거짓들을 확증하지 않았다면, 그의 이해력이 이전에 빨아드렸던 진리들이 이 거짓들에 저항하고 그것들이 확증되어지는 것을 허용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의 꿈들이 무엇일지를 볼 것이다. 이는 그것에 관한 설교가 거짓일 것과, 그렇게 나타날 것임을 의미한다. 이는 “꿈”의 의미가 설교함이다로부터; 그리고 그들의 눈에서 이런 것들이 거짓으로 나타났기에, 그러므로 “꿈”에 의해 여기서는 신성한 진리에 관한, 특히 주님의 신성한 인간에 관한 설교가 의미되는데, 이것이 그들의 견해에서는 거짓이었다. 이것이 그들의 말, “그의 꿈들이 무엇일지를 볼 것이다”에 의해 의미되어 있다. 주님의 신성한 설교에 관한 설교들이 나타났다는 것, 더욱이 그들에게 거짓으로 나타났다는 것에 대하여는 방금 앞에서 살폈다; 그 이유가 탐욕의 생활로부터 확증한 것은 다른 나타남을 가지고 있지 않다.
거짓들이 탐욕의 생활로부터 확증된 것은 이런 원인으로부터도 있는다; 즉 그들은 천국이 무엇인지를, 지옥이 무엇인지를, 이웃을 향한 사랑이 무엇인지를, 자기와 세상을 사랑함이 무엇인지를 모르는데에도 원인이 있다. 만일 그들이 이런 사항들을 알았다면, 또는 기꺼이 알려고 하기만 했어도 그들은 아주 다르게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오늘날 말해주는 이웃을 향한 선행의 정의가 물질이 없어 가난한 이웃에게 재물을 나누어주는 것, 그가 악하든 선하든 관계없이 그들을 돕는 것으로만 알고 있다. 이렇기 때문에 선행의 교리는 거절되고 신앙만의 것을 얼싸안는다; 더 나아가 이들은 많은 것들을 수단으로 선행에 맞서 자신을 확증한다; 예를 들면, 자신은 죄들 안에서 태어났으니 자신으로부터서는 선을 행할 수 없다는 것, 설사 자신이 선을 행한다면 결국 그 공적을 자신 안에 놓아야 한다는 식이다. 그리고 그가 한편에서 이렇게 생각하면서, 다른 한편에서는 탐욕의 생활로부터 생각한다, 하여 그는 신앙만으로 구원한다는 쪽으로 기우는 것이 득이 된다는 생각이 들어 그쪽을 향한다. 하여 그가 거기 있을 때, 그는 선행의 일이 구원받음에 불필요하다고 믿을 때까지 자신을 더욱 더 굳힌다. 이런 것들이 방출될 때 그는 이런 새로운 관념에로 빠져 있는다; 즉 인간의 본성은 이렇기 때문에, 구원의 수단은 주님에 의해 설비되었는데, 이것이 신앙이라 불리운다; 그리고 인간이 마지막 순간에 임했다 해도, 그를 위해 고통받으셨던 아들을 생각함을 통하여 하느님께서 그 사람 위에 자비를 가지신다는 신뢰, 확신을 고백하면 그때도 구원의 길은 그에게 열려있다고 말한다, 하여 요한복음(1:12, 13)에서, 그 외 많은 장소에서 말하신 대목으로 부터서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는다. 이런 추론으로 신앙만이 교회에 필수인 것으로 인정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모든 곳에서 이 방식에서 인정되지 않는 이유는 교구 목사가 신앙만을 설교함으로 어떤 것을 얻을 수 없고, 오직 일들에 관한 설교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웃을 향한 선행의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지가 알려져 있었다면 그들은 교리의 거짓 안으로 결코 추락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선행의 기본은 자신의 의무, 직장, 직업 등의 모든 것에서 올바르고 공정하게 행동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악행자를 법에 따라 재판하는 판사가 열정으로부터 이를 행하는 것, 그는 악행이 수정되기를, 그의 선을 기대하면서 재판을 한다. 또한 사회와 나라에 유용함을 기대하며 업무를 수행한다. 이것이 그에게는 일반적으로 이웃이 되어 있다. 이에 대하여는 주님의 신성한 자비로부터 별도로 살필 기회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르우벤이 들었다. 이는 일반적인 측면에서 교회의 신앙으로부터의 고백을 의미한다. 이는 르우벤의 표현함이 이해력 또는 교리에서의 신앙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는 거듭남의 첫 번째의 것이기도 하다. 사실 이는 복합체에서 교리의 진리를 수단으로 생활의 선이 달성할 수 있는 것을 말하는 바, 여기서의 경우는 그렇지 못한 바, 일반적 측면에서 교회의 신앙으로부터의 고백이 의미된다. 이 구절에서 르우벤이 중간에 끼여있는 격이 되고 있는데, 그 이유는 신앙으로부터 시작하는 교회가 이 신성한 진리, 즉 주님의 인간이 신성이시다는 진리가 그 신앙 안에 남아있지를 않으면, 교회이기를 중단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 진리야말로 교회의 핵심 원리요 최고의 진리이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르우벤은 이 진리를 표현한 요셉을 살려 그의 형제의 손에서 빼내어 아버지에게 보내기를 원했던 것이다. 따라서 이 줄거리 속에는 교회를 위해서 이 진리를 요구하기를 원했다가 담겨 있다. 더욱이 르우벤이 구덩이로 되돌아갔을 때, 요셉이 거기에 있지 않은 것을 보고 자기 옷을 찢으며 그의 형제에게 말하기를 아이가 없다, 그리고 나, 어디로 나는 가야 하는가? 라고 (29, 30절) 말했는데, 이것에 의해 더 이상 주님에 대한 신앙이 없다, 고로 교회도 없다가 의미된다.
이 최고 또는 핵심 진리, 즉 주님의 인간이 신성이시다가 신앙만에 있는 교회에 있는 이들에 의해 부정되어진다. 그럼에도 그들은 말씀으로부터 주님 안에 신성이 있다는 것을 알고는 있다, 그렇지만 어떻게 인간이 신성일 수 있는 지에 대하여는 납득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그들은 주님의 속성을 신성 본질과 인간 본질로 구분을 만들었다. 어쨌든 신앙의 생활 안에, 또는 선행 안에 있는 이들은 자기들의 하느님, 구세주로 주님을 경배한다; 그리고 경배함에서 그들은 주님의 신성과 그분의 인간을 구분함 없이 생각한다, 고로 그들은 주님에 있는 모든 것이 신성이다고 심정에서 믿는다. 그러나 그들이 교리로부터 생각할 때, 그들 역시 교리로부터서는 어떻게 인간이 신성일 수 있는지를 납득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들은 자기들의 교리에 따라서 말한다.

그리고 그를 그들의 손에서 구출하려고. 이는 해방을 의미한다. 이는 설명이 필요 없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그를, 그 혼을 치지는 말자 라고 말했다. 이는 그것은 소멸되어서는 안된다, 그 이유는 그것은 종교의 생명이기 때문이다. 이는 “치다”의 의미가 소멸해버리는 것이다로부터; 그리고 “혼”의 의미가 생명이다로부터, 여기서는 종교의 생명이다. 주님의 인간을 인정하고 경배하는 것이 종교의 생명인 것은 앞에서 말해진 바로부터 분명해진다; 또한 인간에게는 이런 속성이 있다; 즉 자기가 지각할 수 있고 생각해볼 수 있는 어떤 것을 예배하기를 바란다는 것, 이는 감각적 인간조차도 그러해서 자기의 감각으로 어느 정도라도 지각할 수 있는 어떤 것을 예배해야 예배드린 느낌을 갖는 것, 다시 말해 자기가 지각하고 생각되는 어떤 것에 신성이 있지 않으면 기꺼이 예배하지 않는 속성을 인간이 지녔다는 사실로부터도 분명해진다. 이것은 인류에게 공통적이다. (더 부연 설명을 하면, 많은 이들이 관광을 할 때 흔히 목격하는 것은 과거 대단한 종교 건축, 그것이 불상이든, 교회 예배당이든 불가사이하다 말할 정도로 규모나 방법에서나 대단한 것들을 보게 된다. 현재의 경우도 이는 예외가 아니다. 거대한 예배당, 세상에서 가장 큰 성가대, 어마어마한 헌금 액수 발표 등등을 심심찮게 듣고 목격한다. 요즈음은 인터넷 세상이라 더욱 그 광고 파장은 대단하다. 한마디로 세력 과시이기도 하다. 이런 곳에서 설교를 듣고 찬송을 불러야 뭔가 신성이 와닿은 느낌, 또는 내 기도 소원이 성취될 것 같은 기대가 용트림 한다. 다시 말해, 수천 년 전이나 지금이나 아마도 미래에도 인간이 신성을 생각하고 지각하는 각도는 변치 않을지 모른다. 역자주) 이런 이유로 이방인들은 우상들을 예배하고, 이 예배 안에 신성이 있다고 믿는다, 이와 비슷하게 어떤 신앙인들은 자기들이 신들, 또는 성인들이라고 믿어지는 죽은 인간들에 자신의 소원을 빌기도 하고 심지어 어떤 이는 예배한다. 이러는 이유는 인간은 자기의 감각에 와닿는 어떤 것이 없으면 뭔가 허전해 있기 때문이다. (다시말해, 절뚝거리던 자가 어떤 목사의 기도 몇 마디에 벌떡 일어나 걸어가는 현장을 목격하며 예배를 보아야 세상을 다 삼킬 것 같은 믿음이 생겨 예배드린 맛을 느끼는 것과 같을지 모른다 역자주.)
최고 있음(존재)을 인정하면서도 이 최고 있음을 지각하지 못하는 이들의 경우, 그들의 대부분은 하느님이 없다를 인정하고, 대신 자연을 인정한다. 그 이유는 자연계는 오각을 통해 자신들에게 납득되는 것 같기 때문이다. 기독교계의 배웠다 하는 많은 이들의 경우도 이런 오류에서 허우적대는데, 그 이유 역시 그들이 주님의 인간이 신성이심을 믿지 않기 때문이다. 하여 자신을 신성으로부터 아주 멀어지게 옮겨다놓은 이들, 또는 지독하게 육체적이 되어간 이들이 자연계의 우람한 나무나 요상하게 우뚝 선 돌을 예배하지 않도록; 그들이 죽은 어떤 인간을 예배하지 않도록; 그리하여 그가 하느님 자신이 아닌, 어떤 악마에게 들러붙지 않도록, 인간의 속성이 위와 같아서 그렇지 않으면, 어떤 방법으로도 그분을 지각하지 못하기 때문에 교회의 모든 것이, 교회와 더불어 인류가 멸해지고 말기에, 신성 자체가 인간인 체 하시기로 뜻하셨다, 다시 말해 인간의 옷(몸)을 입으시기로 뜻하셨다. 이 대목에서 학식자가 경청해야 할 것은, 그들은 신성이 입으신 인간, 즉 주님의 인간을 생각하면서 동시에 그것이 신성이심을 인정하는 것이다. 이렇지 않고 주님의 인간의 신성을 부인해버리면 그들은 자신들을 위해 스스로 장애물을 자기 앞에 두고 마는 바, 결국 아무것도 믿지 않는 결과를 야기한다.

그리고 르우벤은 그들에게 말했다. 이는 권면함을 의미한다. 대략적 의미에서, 이는 일반적 측면에서의 교회의 신앙이 자기들이 폭력을 행하지 말자고 권면하는 고백을 의미한다. 이는 아래에서 더 이어진다.

피를 흘리지 마라. 이는 그들은 거룩한 것에 폭력을 휘둘러서는 안된다를 의미한다. 이는 “피”의 의미가 거룩한 것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러므로 “피를 흘린다”는 거룩한 것에 폭력을 휘두른 것이다. 천국에 있는 모든 거룩함은 주님의 신성한 인간으로부터 진행한다, 그러므로 교회 안에 있는 모든 거룩함도 신성한 인간으로부터 있다. 그러므로 거룩한 것에 폭력이 휘둘러져서는 안된다는 것, 그러므로 성찬식이 주님에 의해 제정되었다, 이 예식 안에서 빵은 그분의 살이고, 포도주는 그분의 피 이다는 말씀을 (열두 제자 이하 대부분의 인간이 위와 같은 인간 속성에서 탈피하지 못하기에, 일부러, 또렷이 심정에 담아지기를 원하시어) 명백한 어조로 말하셨다. 고로 거룩함이 오는 근원은 그분의 신성한 인간이심을 확실히 가슴에 담아두기를 뜻하신 것이다. 고대인들과 더불어, 살과 피는 인간의 자신을 의미했다, 그 이유는 인간이 살과 피로 구성되기 때문이다; 고로 주님께서 시몬에게, “너는 복되다, 그 이유는 살과 피가 네게 그것을 밝히 알게 한 것이 아니라 천국들에 계신 내 아버지이시기 때문이다” 하고 말하셨다 (마. 16:17). 살과 피, 그러므로 성찬에서 빵과 포도주에 의해 의미된 살과 피는 주님의 인간 자신(Lord’s Human own)을 표시한다. 주님의 자신 자체 (Lord’s own itself), 즉 그분이 그분의 자신의 힘을 수단으로 자신에게 획득하신 주님의 자신 자체가 신성이다. 임신으로부터의 그분의 자신은 그분이 여호와 그분의 아버지로부터 가졌던 것이다, 그리고 여호와 자신 이셨다. 그러므로 그분이 인간 안에서 자신에게 획득한 자신은 신성이었다. (주님의) 인간(Human) 안에 있는 이 신성한 자신이 그분의 살과 피라고 불리우는 것이다; “살”은 그분의 신성한 선이고, “피”는 신성한 선으로부터의 신성한 진리이다.
주님의 인간이 신성이 되신 이후, 또는 신성으로 만들어진 이후의 주님의 인간은 여느 자연계에 존재한 자연적 인간 수준으로 생각되어질 수 없고, 인간 형체 안에 있는 신성한 사랑으로만 생각되어야 한다. 이 생각은 천사들에게는 아주 대단해서 그들이 나에게 나타날 때, 그들은 인간 차림새를 한 사랑과 선행의 형체로서 이다. 그리고 이 근원은 주님으로부터 이다; 그 이유가 주님께서 신성한 사랑으로부터 그분의 인간을 신성으로 만드셨기 때문이다; 인간의 경우도 이와 같아서, (지상 삶에서 지녀왔던) 천국의 사랑을 통하여 사후에도 그는 천사가 되고, 위에서 말한 대로 인간의 모양새 아래 사랑과 선행의 형체로서 나타난다. 이로부터 분명한 바, 주님의 신성한 인간에 의해, 천적 의미에서, 신성한 사랑 자체, 인류를 향한 사랑, 모든 이를 구원하여 영원히 복되고 행복하게 하시기를 뜻하시는 사랑, 당사자가 받을 수 있는 한 그들 자신의 것으로 삼게 해주시는 사랑이 의미된다. 이 사랑과 주님에 대한 인간의 상호적인 사랑, 또한 이웃을 향한 사랑이 성찬식에 표현되고 의미되어져 있다; 즉 신성한 천적 사랑은 살, 또는 빵에 의해, 신성한 영적 사랑은 피, 또는 포도주에 의해 의미되고 있다.
이로부터 주님의 살을 먹고 그분의 피를 마심에 의해 요한복음서에서 의미되는 것이 분명해진다:
나는 천국으로부터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만일 누군가가 이 빵을 먹으면, 그는 영원히 살 것이다; 그리고 내가 줄 빵은 나의 살이다. 참으로, 참으로, 내가 네게 말한다, 너희가 사람의 아들의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지 않으면, 너희는 너희 안에 생명을 가지지 못한다. 내 살을 먹는 자는 누구든지,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누구든지 영원한 생명을 가질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를 마지막 날에 일으킬 것이다. 그 이유가 실로 내 살은 음식이고, 내 피는 실로 음료이기 때문이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주하고, 그리고 나는 그 사람 안에 거주한다. 이것은 천국으로부터 내려온 빵이다 (요. 6:51-58).
“살과 피”는 이미 말한 대로, 주님의 신성한 인간으로부터 있는 신성한 천적 평면과 신성한 영적 평면을 의미하기에, 다른 말로 하면, 그분의 사랑으로부터의 신성한 선과 신성한 진리를 의미하기에, “먹고 마심”에 의해서는 자신의 것으로 만듦이 의미된다; 그리고 이것은 사랑과 선행의 삶에 의해, 또는 신앙의 삶에 의해 결과되어진다.
“피”가 주님의 신성한 인간으로부터 진행하는 신성한 진리, 또는 신성한 영적 평면을 의미하기에, 그러므로 진행되는 거룩함도 의미한다; 그 이유가 주님의 신성한 인간으로부터 진행하는 신성한 진리가 거룩함 자체이기 때문이다.
거룩함은 신성한 진리 외의 다른 근원은 없다. “피”가 이 거룩함을 의미한다는 것은 말씀의 많은 구절로부터 확인되지만 아래 한 대목만 살펴본다:
고로 사람의 아들에게 주 여호비께서 말하신다, 하늘의 모든 새들에게 말하라, 들판의 모든 들짐승 에게 말하라, 네 자신들이 모이게 오너라; 사방으로부터 네 자신을 내가 너희를 위하여 바치는 내 제물 위에, 이스라엘의 산 위에 큰 제물조차 그러모으라, 하여 너희는 살을 먹고 피를 마실는지 모른다. 너희는 용사의 살을, 그리고 땅의 제 일인 자들의 피를, 숫양들로부터, 염소들로부 터, [어린 거세 수소로부터], 바산의 살진 그것들의 모두로부터 이다. 그리고 너희는 너희가 배부를 때까지 지방을 먹을 것이다, 그리고 너희가 취할 때까지 피를 마실 것이다, 내가 너희를 위하여 바친 내 제물로부터 이다. 그리고 너희는 내 식탁에서 말과 병거와 강한 자와 전쟁의 모든 사람과 더불어 앉을 것이다 (겔. 39:17-21).
여기서 취급된 주제는 주님의 왕국으로 모든 이를 다 부르심이다, 그리고 특별하게는 이방인들 사이에 교회를 다시 설립하심이다; 그리고 그들이 “살을 먹고 피를 마심”에 의해서는 신성한 선과 신성한 진리를 자기 것으로 만듦, 고로 주님의 신성한 인간으로부터 진행하는 거룩함이 의미된다. 위 구절에서 “살”이 살을, “피”가 피를 뜻하지 않을 것은 두뇌가 수준 이하이지 않은 이상 누가 알지 못할까? 또는 용사의 살을 먹는다, 땅의 제 일인 자의 피를 마신다, 말과 병거, 강한 자, 전쟁의 모든 자와 더불어 식탁에 앉는다, 이런 것이 실제 있을 수 있다고 굳게 믿을 자 어디에 있을까?
계시록서에서:
나는 태양에 서있는 천사를 보았다; 그리고 그는 큰 음성으로 외쳐, 하늘 사이를 나는 모든 새들에게 말하기를, 다 모여 위대한 하느님의 만찬에 오너라; 하여 너희는 왕들의 살을, 대장들의 살을, 그리고 강한 자의 살을, 그리고 말들의 살을, 그리고 그것 위에 앉은 그들의 살을, 모든 남자들의 살을, 자유한 자, 억매인 자, 작은 자, 큰 자 모두의 살을 먹을는지 모른다 (계. 19:17, 18);
위 구절을 이해하려면, “살,” “왕들,” “대장들,” “강한 자,” “말들,” “그 위에 앉은 자,” “자유한 자,” “억매인 자”의 단어들의 내적 의미를 알지 못하면 가능하지 않다.
스가랴서에서:
그는 민족들에 평화를 말할 것이다; 그리고 그분의 주권은 바다로 바다에 이를 것이다, 그리고 강으로부터 땅의 끝에 까지 이를 것이다. 너에 관하여 말하면, 네 언약의 피를 통하여 나는 네 묶인 자를 구덩이로부터 파견할 것이다 (슥. 9:10, 11);
위는 주님이 말해진다; “너의 언약의 피”는 그분의 신성한 인간으로부터 진행하는 신성한 진리, 그리고 그분이 신성이 되신 이후 그분으로부터 나가는 거룩함 자체이다. 이 거룩함은 성령이라 흔히 불리운다. 요한복음서에서:
예수께서 말하셨다, 만일 어떤 자가 목마르다면, 그로 하여금 나에게 오게 하라, 그리고 마시게 하라. 나를 믿는 자는 누구든지 성경이 말한 대로, 그의 뱃속으로부터 살아 있는 물의 강들이 흐를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영으로부터의 그분을 말하셨다, 이것을 그분을 믿는 그들이 받을 것이다; 그 이유는 성령이 아직 있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예수께서 아직 신성이 되시지 않았기 때문이다 (요. 7:37-39).
주님으로부터 진행하는 거룩함이 “영”이다는 것은 요. 6:63로부터도 알는지 모른다.
더욱이 “피”가 주님의 신성한 인간으로부터 진행되는 거룩함인 것에 대하여:
사기와 폭행으로부터 그들의 혼을 도로 가져다 놓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피는 그분의 눈에서 귀중할 것이다 (시. 72:14);
“귀중한 피”는 그들이 받을 거룩함을 표시한다. 계시록서에서:
이들은 큰 환난으로부터 나온 이들이다, 그리고 그들은 자기들의 도포를 빨았다, 그리고 그것들을 어린 양의 피로 희게 만들었다 (계. 7:14).
그리고 다시:
그들은 어린 양의 피로 용들을 정복했다, 그리고 그들의 증거의 말로 정복했다; 그리고 그들은 죽기까지에서 자기들의 혼을 사랑하지 않았다 (계. 12:11).
오늘날 교회가 아는 “어린 양의 피”란 주님의 십자가의 고난(죽으심)을 의미한다는 것 뿐이다. 그렇게 믿는 그들의 이유인즉, 주님께서 이 고통을 당하심으로만 자기들은 구원되었다는 것, 이를 위해 그분이 보내졌다고 믿어서이다; 그러나 이 십자가의 고난은 주님이 시험을 정복해가시는 과정의 마지막 단계이고, 이를 수단으로 그분은 그분의 인간을 충분히 신성이 되게 하셨다 (눅. 24:26; 요. 12:23, 27, 28; 13:31, 32; 17:1, 4, 5); “어린 양의 피”는 신성한 진리와 같다, 또는 주님의 신성한 인간으로부터의 거룩한 진행이다; 고로 방금 위에서 말한 “언약의 피”와 같다. 이에 관해 모세의 책에서:
모세는 언약의 피를 가져왔다, 그리고 백성들의 귀에 읽었다; 그리고 그들이 말했다, 여호와께 서 말하신 모든 것을 우리는 행하고 들을 것입니다. 그러자 모세는 피를 가져와서, 백성 위에 뿌렸다, 그리고 말했다, 잘 보라, 여호와께서 이 모든 말들 위에서 너희와 만든 언약의 피이다 (출. 24:7, 8);
“언약의 책”은 그때 당시 그들이 가졌던 신성한 진리였다, 이것이 그분의 신성한 인간으로부터 이었음을 증명하는 피에 의해 확증되어졌다.
유태 교회의 의식에서 피는 주님의 신성한 인간으로부터의 거룩한 진행밖에 더 다른 의미는 없었다, 그러므로 그들이 신성시되어졌을 때, 이것이 피를 수단으로 행해졌다; 즉 아론과 그의 아들들이 신성시되어졌을 때, 피가 제단의 뿔 위에서 뿌려졌고, 나머지 피는 제단의 밑부분에, 또한 오른쪽 귀 끝에, 오른 손의 엄지에, 그리고 오른 발의 엄지에, 그리고 그의 의복에 뿌려졌다 (출. 29:12, 16, 20; 레. 8:15, 19, 23, 30). 그리고 아론이 휘장 안쪽 자비석으로 들어갔을 때, 피는 동쪽을 향하여 일곱 번 손가락으로 자비석 위에 뿌려졌다 (레. 16:12-15). 또한 신성시 됨의 나머지 의식에서, 속죄함과 깨끗하게 함의 의식에서도 그러했다 (출. 12:7, 13, 22; 30:10; 레. 1:5, 11, 15; 3:2, 8, 13; 4:6, 7, 17, 18, 25, 30, 34; 5:9; 6:27, 28; 14:14-19, 25-30; 16:12-15, 18, 19; 신. 12:27).
“피”의 진짜 의미에 의해 거룩함이 의미되기에, 반대 의미에서는 “피”와 “피들”에 의해 그것에 폭력을 제공하는 것들이 의미된다, 그 이유는 순진한 자의 피를 뿌림에 의해 거룩한 것에 폭력을 가함이 의미되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생활 속의 사악한 것들과 예배의 모독적인 것들이 “피”라 불리운다. “피”와 “피들”이 이런 의미를 가지는 것을 아래 구절들로부터 확인해보자:
주님께서 심판의 영을 수단으로, 그리고 삭제함의 영을 수단으로 시온의 딸들의 배설물을 씻으실 때, 그리고 예루살렘의 피들을 씻으실 때 (이. 4:4).
다시:
디몬의 물들은 피로 가득하다 (이. 15:9).
다시:
너의 손은 피로 더러워 있다, 그리고 너의 손가락은 불법으로 (더러워 있다). 그들의 발은 악쪽으로 달려간다, 그리고 그들은 순진한 피를 흘리려 성급해 있다; 그들의 생각들은 불법의 생각들이다 (이. 59:3, 7).
예레미야서에서:
또한 네 치마에서 순진한 가난한 자의 혼의 피가 발견된다 (이. 2:34).
다시:
이것은 그녀의 예언자들의 죄 때문이다, 그리고 그녀의 성직자들의 불법 ( 때문이다), 즉 예루살렘 의 한가운데에서 의로운 자의 피를 뿌렸다. 그들은 거리들에서 눈멀어 방황했다, 그들은 피로 오염되었다; 그들이 [오염되게] 할 수 없는 것들을 그들은 의복을 가지고 접촉한다
(애. 4:13, 14).
에스겔서에서:
내가 네 옆을 지나쳐갔다, 그리고 네 피 아래에서 짓밟힌 너를 보았다, 그리고 나는 너에게 말했다, 네 피들 안에서 살아라, 그리고 나는 너에게 말했다, 네 피들 안에서 살아라. 나는 물들로 너를 씻었다, 그리고 네 위로부터 네 피들을 씻었다, 그리고 나는 기름으로 기름부었다
(겔. 16:6, 9).
다시:
너 사람의 아들아, 너는 피들의 도성과 논쟁을 벌이려 하느냐? 그녀에게 그녀의 모든 역겨운 짓을 알게 만들어라. 너는 네가 흘린 피를 통하여 죄있게 되었다, 그리고 네가 만든 우상들을 통하여 더렵혔다. 이스라엘의 제 일인 자들을 잘 보라, 자기의 무장한 것에 따라 모든 이가 있어 왔고 피를 흘렸다; 중상자들이 피를 뿌리기 위해 네 안에 있어 왔다; 그리고 네 안에서 그들은 산들에서 먹었다 (겔. 22:2-4, 6, 9).
모세의 책에서:
만일 누군가가 천막에서 제단 위에보다 다른 곳에서 제물을 바치겠다면, 그것은 피일 것이다; 그리고 마치 그는 피를 흘렸던 것처럼 (레. 17:1-9).
거짓되고 모독된 진리가 아래 구절에서 의미되어 있다:
나는 하늘과 땅에서 경이로움들을, 피, 그리고 불, 그리고 연기 기둥들을 놓을 것이다. 태양은 어둠으로 변해질 것이다, 그리고 달은 피로 변해질 것이다, 크고 두려운 날이 오기 전이다
(욜. 2:30, 31).
계시록서에서:
태양은 머리털로 짠 삼베옷 같이 검게 되었다, 그리고 달 전체는 피 같이 되었다 (계. 6:12).
다시:
두 번째 천사가 소리를 냈다, 그리고 마치 불로 타는 큰 산이 바다로 내던져졌다; 그리고 바다의 삼분의 일이 피가 되었다 (계. 8:8).
다시:
두 번째 천사가 바다 안으로 그의 대접을 쏟았다; 그리고 그것은 마치 죽은 자의 것 같은 피가 되었다, 그리고 모두 각각의 살아 있는 혼이 바다에서 죽었다. 그리고 세 번째 천사가 그의 대접을 강들 안으로, 물들의 샘들 안으로 쏟았다, 그리고 거기는 피가 되었다 (계. 16:3, 4).
비슷한 대목이 출. 7:15-22에서도 말해진다, 즉 이집트의 강들과 연못들, 그리고 물들의 못들이 피로 변해진 것이다; 그 이유가 “이집트”에 의해 기억 속의 지식들, 이 지식 자체로 천국의 신비들 안으로 들어감을 의미하기 때문, 하여 이로부터 신성한 진리들을 악용함, 부정함, 모독함이 있다. 이집트에서의 모든 기적들은 신성이고, 아래와 같은 것을 포함했다: 즉 피로 변한 “강들”은 총명과 지혜로부터의 진리들이다; “물들”도 비숫한 의미이다, 그리고 “샘들”도 그렇다; “바다들”은 기억 속의 주제라 할 수 있는 복합체에 있는 진리들이다; “피로 변한다”고 말해진 “달”은 신성한 진리이다. 이상으로부터 분명한 바, 달, 바다, 샘, 물, 강이 피로 변함에 의해 거짓으로 되고 모독되어진 진리가 의미된다는 것이다.

그를 광야에 있는 이 구덩이에 던지자. 이는 그들은 그것을 그들의 거짓들 사이에 한동안 감출 것임을 의미한다. 즉 그들은 그것을 거짓으로 간주할 것이다는 것, 그러나 여전히 그것을 존속시키고 있는데, 그 이유는 그것이 교회에 중요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구덩이”의 의미가 거짓들이다로부터; 그리고 “광야”의 의미가 진리가 없는 곳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단어 광야는 사람이 살지 못하는 토지라는 측면에서는 교화(계몽)되지 않은 것을 의미하고, 이 광야가 교회를 서술할 때는 선이 없는 것, 결과적으로 진리가 없는 것을 표시한다. 고로 “광야에 있는 구덩이”는 여기서 선이 없기 때문에 진리가 없는 거짓들을 뜻하다. 여기서 선이 없기 때문에 진리가 없다 라고 장황한 듯 하게 말한 이유는 누군가가 일함 없는 신앙이 구원한다고 믿을 때, 진리가 실로 존재할는지 모르나 여전히 그 사람 안에 진리가 없기 때문, 그 이유는 그가 선을 찾지 않기 때문에, 선으로부터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 진리는 살아 있지 않다, 그 이유는 그것 안에 거짓의 원리를 가지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이와 같은 진리를 가진 자의 진리는 그것을 통치하는 것으로부터 거짓밖에 더 아니다. 다른 한편, 진리들 같이 받아들여지는 거짓이 있다. 이는 그들 안에 선이 있을 때이다. 특히 이것이 순진의 선일 경우인데, 이는 교회 내에 있는 많은 이들, 이방인들과 더불어서 있는 경우이다.

그러나 그에게 손을 놓지 마라. 이는 그들은 그것에 폭력을 행사해서는 안된다를 의미한다. 이는 설명이 필요 없다.

그는 그를 그들의 손에서 구출해서 그를 그의 아버지에게 데려다 주려고. 이는 교회를 위하여 그것을 요구하도록을 의미한다. 이는 “그들의 손에서 구출함”의 의미가 자유하게 놓아둠이다로부터; “그의 아버지에게 되돌려 보냄”의 의미가 교회를 위해 요구함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 이유가 야곱, 여기서 “아버지”인데, 고대 교회로부터 갈라져 나온 유태 종교를 표현했기 때문이다. 주님의 신성한 인간에 관한 신성한 진리는 교회를 위해 요구되어야 마땅하였는데, 그 이유는 특별한 측면에서는 야곱에 의해 이 진리가 의미되기 때문이다.
이 진리에 더 주목해보자; 이 진리를 고대 교회가 인정했다는 것, 그리고 원시 기독교회도 그러했다는 것은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나 교황의 휘두름이 모든 인간의 혼들 위에 있게 되었을 때, 그리고 교황권 자체를 드높혔을 때, 마치 이사야서에서 바빌론왕에 관해 말해진 바 같이, “너는 네 심정에서 말한다, 나는 하늘의 별들 너머로 승강할 것이다, 그리고 나는 회합의 산에 앉을 것이다, 나는 구름의 높이 너머로 승강할 것이다, 나는 지극히 높은 자 같이 될 것이다”(14:13, 14)와 유사 했다; 그 다음 신성은 주님의 인간으로부터 거두어졌다, 즉 그분의 신성과 그분의 인간 사이에 구분을 만들었다는 말이다.
이것이 어떤 회의에서 어떻게 포고되었는 지가 나에게 밝히 알려졌다. 어떤 영이 나에게 나타났는데, 그는 나와 어느 정도 간격을 두고, 평평한 발바닥의 왼쪽으로의 앞에서 나타났고, 대화를 했으나, 내가 듣지 못했던 것에 관하여 이었다. 그때 내가 말한 영은 과거 주님의 두 본성, 즉 신성과 인간에 관하여 포고문을 만든 회의를 주도했던 이들 중에 속했던 자들이었다. 지금 그들과 대화하는 것이 나에게 수여되었다. 그들이 말했다, 회의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서열 1, 2위에 있는 이들이 컴컴한 방에 함께 와서 결말을 본 것은, 신성과 인간 본질을 주님의 속성으로 돌려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결론이 있어야 하는 주된 것 중 하나는 그렇지 않고서는 교황의 권세가 유지되어질 수 없어서 였다는 것이다. 만일 그들이 주님이 말하신 바 그대로 나는 아버지와 더불어 하나이시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교황이) 땅위에서 (그리스도의) 대목(대리자, vicar)으로서 인정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럴 경우 교황의 권세는 땅에 추락하고 사라지고 말아 종파들이 우후죽순격으로 일어날 것인 바, 신성과 인간을 분리함은 절대적이다 싶이 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기발난 발명품을 강화시킬 목적으로 그들은 말씀으로부터 확증될 구절들을 끌어내었다, 그리고 나머지 포고령도 설득되게 했다.
영들이 내게 더 말했다, 이 포고령을 수단으로 그들은 하늘과 땅을 통치할 수 있었다, 그 이유는 (마. 28:18에서) 주님에게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주셨는 바, 주님의 대리자가 교황이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그분의 인간이 신성이다고 인정되어진다면, 어느 인간도 하느님과 동등하게 자신을 만들자는 없다는 것, 만들 수도 없다는 것은 지극히 단순하고 무식한 자도 다 아는 이치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교황이 그리스도(예수)의 대물림을 위해서는 그리스도의 인간도 우리 인간과 동등한 위치에 놓이게 하는 것을 고안해낸 것이다. 한마디로 주님의 신성과 인간 속성을 구분한 것은 교황의 절대 권력을 위해서 이었다는 말이다. 따라서 그들은 하늘과 땅에서 주님에게 주어진 권능 역시 신성이다는 것을 들추어내고 싶어하지 않는다. 대신 주님께서 하늘의 열쇠를 (인간) 베드로에게 주셨다고… 이 열쇠가 베드로에 이어 교황에게…식으로 논리를 유도해간다. 그러나 마. 16:19에서의 베드로는 선행으로부터의 신앙을 뜻하고 인간 베도로가 아닌 것은 삼척동자도 짐작할 것이다. 이 신앙은 주님만으로부터 있기 때문에, 주님만에 속한 권능인데, 이에 대하여 창. 22장의 서문을 다시 읽어보라.

23-30절. 그리고 요셉이 그의 형제들에게 왔을 때, 그들은 요셉에게서 그의 웃옷, 그가 입고 있는 여러 색깔로 된 웃옷을 벗겼다, 24 그리고 그들은 그를 데려가서 구덩이에 그를 던졌다. 그리고 그 구덩이는 그 안에 물이 없이 텅 비어 있었다. 25 그리고 그들은 빵을 먹으며 앉아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그들의 눈을 들고 보았다, 그리고 바라보니 이스마엘 사람의 집단이 길르앗으로부터 왔는데, 그들은 낙타에 양념과 수지(향유)와 소합향을 싣고 이집트로 운반하려 내려가고 있었다. 26 그리고 유다가 그의 형제들에게 말했다, 우리가 우리의 형제를 죽이고, 그의 피를 덮는다 한들 그것이 무슨 이득이 있을까? 27 가서 그를 이스마엘 사람들에게 팔아버리자, 그리고 우리의 손을 그에게 대지 말자, 그 이유는 그는 우리의 형제이고, 우리의 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의 형제들은 그에게 귀기울였다. 28 그리고 거기를 사람들, 미디안 사람들, 상인들이 지나갔다, 그리고 그들은 요셉을 구덩이에서 끌어내 들어 올렸다, 그리고 요셉을 이스마엘 사람들에게 은 이십에 팔았다. 그리고 그들은 요셉을 이집트로 데리고 갔다. 29 그리고 르우벤이 구덩이로 돌아왔다, 그리고 보라, 요셉이 구덩이에 없었다. 그리고 그는 자기 옷을 찢었다. 30 그리고 그는 그의 형제들에게 돌아 왔다, 그리고 말했다, 아이가 없다, 그리고 나는 어디로 가야 할꼬?

요셉이 그의 형제들에게 왔을 때. 이는 그것이 이제 막 설교되었을 때를 의미한다.
이는 요셉의 표현함이 신성으로부터의 진리, 특히 주님의 신성한 인간에 관한 진리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것이 “그들에게 왔을 때”란 이것이 그들에게 설교되었을 때를 뜻한다; 그 이유가 그의 형제가 분리된 신앙 안에 있는 교회를 표현하고 이 교회에 이 진리가 설교된 것이다.

그들은 요셉에게서 그의 웃옷을 벗겼다. 그들은 진리의 나타남들을 쫓아버리고 절멸시켰음을 의미한다. 이는 “벗김”의 의미가 여기서 “요셉”인 신성한 진리를 서술할 때, 쫓아버림과 절멸해버리는 것이다로부터; 그리고 “웃옷(튜닠, tunic)”의 의미가 진리의 나타남들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진리의 나타남들을 쫓아버리고 절멸해버림은 진리 자체가 거절된 후에 거행된다; 그 이유가 진리 자체는 마음에서 스스로 빛을 발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소멸되었을런지 몰라도 여전히 나타나는데, 특히 선 안에 있는 이들에게는 더욱 그렇다. 이런 현상은 자신들 안에서 진리를 절멸시켜버리는 이들에 의해서도 보여진다, 그러므로 그들은 이런 나타남들을 쫓아내고 절멸시키려 부단히 노력해댄다.
예를 들어 더 생각해보자: 남에게 호의적으로 뜻하고 행동하는 것이 기독인의 생활의 핵심이다 라고 말한다면 누가 반대할 것인가? 그리고 만일 누군가가 이것이 선행이다 라고 말한다면, 그는 그것을 확언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것을 확언한 이들은 자기들은 이것이 무엇인지를 안다고 조차 말할 것이다, 그 이유는 이것이 삶으로부터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이 진리이다고 생각하는 이, 더 나아가 확신조차 하는 이들에 주목해보면, 그들은 말할 것이다, 자기들은 그것이 무엇인지 모른다는 것, 그 이유는 그들이 이것을 자취를 감추는 연기 같은 것 외의 다른 것으로는 지각하지 못하기 때문이다고 말한다. 신앙만으로와 이 교리로부터 확신함이 위와 같은 특성 속에서 진리의 나타남들에 관하여 심각하게 생각하는 모든 이, 특히 선한 자에게 나타나기에, 신앙만으로 확신하는 자는 이 신성한 진리의 나타남들에 가까이 접촉하는 무엇이든, 이 신성한 진리를 빙둘러 있는 무엇이든 껍질 벗기는 방식으로 이 진리의 나타남들을 쫓아버리고 절멸시키려 고된 노동도 서슴없이 해댄다. 이것이 요셉에 있던 그의 튜닉을 벗김에 의해 의미되고 있다.
위와 동일한 인물들이 믿는 바, 신앙만으로에 있는 자들은 여느 다른 이들보다 더 현명한 자이다는 것이다. 즉 이들은 독단적 교의가 무엇이었든 한 번 받아들였으면, 다양한 것들을 수단으로 그것을 확증하고, 다양한 추론들을 수단으로 요상한 교의도 진리같이 만든다. 그러나 이것은 슬기로운 자의 몫은 절대 아니다. 이것은 어떤 교묘함을 소유하는 모든 이가 할 수 있는 것들이다. 그리고 악한 자가 직바른 자보다 더 기술적으로 해내는 부분일 것이다. 이것을 행하는 것은 합리적 인간의 몫도 아니다. 합리적 인간은 확증하는 것이 거짓이든, 진리이든 위로부터 보아 있기 때문이다. 합리적 인간은 거짓을 무익한 것으로 확증한다, 그리고 그것들은 제 아무리 지혜 자체의 학교로부터 가져왔다고 누군가가 그로 믿게 하려들어도 그에게는 우스개감 수준의 것, 텅빈 것일 뿐이다. 한마디로 현자의 몫에 해당되는 것은 하나도 없다는 말이다. 어떤 것에 대해 진리인지를 보는 것, 그 다음 그것을 확증하는 것이 합리적 인간, 내지 현자의 몫이다. 사실상 진리인 것을 보는 것은 천국의 빛으로부터 보는 것이다, 이는 주님으로부터 이다; 그러나 거짓인 것을 진리로서 보는 것은 얼빠진 빛으로부터 보는 것이고, 이것은 지옥으로부터 이다.

그가 입고 있는 여러 색깔로 된 웃옷. 이는 선으로부터의 진리에 관한 나타남의 품질을 의미한다. 이는 “다양한 색깔로 된 튜닠”의 의미가 진리의 나타남들이다로부터, 이를 수단으로 자연 평면의 영적인 것이 알려지고 구별되어진다, 여기서는 나타남들의 품질이다; 그 이유로 여기서 튜닠이라는 단어가 두 번 사용되고 있다; 즉 “그들은 그의 튜닠, 다양한 색깔로 된 튜닠을 요셉으로부터 벗겼다.” 나타남들의 품질이 선으로부터의 진리들에 따라서 있다는 것은 다른 삶에서, 천국의 빛에서 보여져 표출될 때, 진리의 나타남들로부터 알는지 모른다. 거기서는 주님으로부터 천국을 통하여 오는 빛 외의 다른 빛은 없기 때문이다; 이것이 천사들의 눈 앞에서 빛으로 나타난다. 이 빛은 받는 그릇에 따라 모든 이와 더불어 다양해진다. 천사들의 모든 생각은 이 빛의 다채로움을 통하여 결과되어진다; 인간의 생각 역시 마찬가지이다, 단지 그가 그것을 알아채지 못할 뿐이다; 그 이유는 인간과 더불어 이 빛은 세상의 빛으로부터 있는 그의 자연 평면, 또는 외적 인간인 물질적 형상들, 또는 생각들 안으로 떨어지기 때문이다. 고로 천국의 빛은 그의 지적인 빛과 시각이 그것으로부터 있다는 것을 거의 알지 못하는 수준으로까지 희미해져 있다. 그러나 다른 삶에서, 눈의 시각은 세상의 빛에서는 더 이상 있지 않고 천국의 빛에 있기에, 그의 생각이 천국의 빛으로부터 근원함이 명백해진다.
이 빛이 천국으로부터 영들의 세계 안으로 건너갈 때, 거기서 다양한 색깔들 아래 표출되어진다, 이 색깔들은 아름다움에서, 다채로움에서 사랑스러움에서 세상의 빛으로부터 있는 색깔들을 무한정 능가한다. 다른 삶에서의 색깔들이 이 근원으로부터 있기에, 그것들은 선으로부터의 진리 외의 다른 근원은 없다. 그 이유가 진리는 그 자체로부터 빛을 발하지 않기 때문인데, 그런 이유는 진리 자체 안에 불꽃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리는 선으로부터 빛을 낸다, 그 이유는 선은 빛을 내보내는 불꽃 같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선이 이러이러하면, 진리의 나타남도 이러이러하여 있다; 그리고 진리가 이러이러하다면, 같은 방식에서 진리는 선으로부터 빛을 낸다. 이상 살핀 바로부터, “다양한 색깔로 된 튜닠에 의해 내적 의미에서 선으로부터의 진리들에 관한 나타남의 품질이 의미됨이 분명해졌을 것이다; 그 이유가 이 웃옷이 주인인 요셉에 의해 신성한 진리가 표현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은 그를 데리고 가서 구덩이에 그를 던졌다. 이는 거짓들 사이에가 의미된다. 이는 앞에서 살핀 것 가지고도 충분하므로 설명은 생략한다.

그리고 그 구덩이에는 물이 없어 텅 비어 있었다. 이는 그때에 참된 것은 하나도 없었다를 의미한다. 이는 “구덩이”의 의미가 거짓들이다로부터; 그리고 “텅비어 있다”의 의미가 선이 없기 때문에 진리도 하나도 없다이다로부터; 그리고 “물”의 의미가 진리이다로부터 분명해진다. “텅 비어 있음”이 선이 하나도 없기에 진리가 하나도 없다를 표시하는 것은 아래 구절들로부터 분명해진다:
그들의 큰 자들이 그들의 작은 자를 물을 위하여 보냈다; 그들이 구덩이들에 왔다, 그리고 물들을 발견하지 못했다; 그들은 자기들의 그릇들을 빈채로 되돌아갔다; 그들은 부끄러움과 수치스럼에 빠졌다, 그리고 자기들의 머리를 가렸다 (예. 14:3);
위의 “텅빈 그릇들”은 선으로부터의 진리가 없는 진리들을 표시한다. 다시:
바빌론왕 느부갓네살이 나를 삼켰다, 그는 나를 괴롭혔다, 그는 나를 텅빈 그릇으로 만들었다, 그는 나를 꿀꺽 삼켰다 (예. 51:34);
위의 “텅빈 그릇”은 진리가 없는 곳을 표시한다; 그리고 “바빌론”, 황폐케 한 이들, 즉 다른 이들로부터 진리들을 빼앗은 이들이다. 다시:
나는 땅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오 그것은 공허하고 텅빔이었다; 그리고 하늘들, 그리고 그것들은 빛을 가지지 않았다 (예. 4:23).
이사야서에서:
가마우지와 알락해오라기가 그것을 소유할 것이다; 그리고 올빼미와 까마귀가 거기 안에 거주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그것 너머로 공허의 줄을 뻗칠 것이다, 그리고 텅빔의 낚시봉 (이. 34:11).
다시:
텅빔의 도성이 깨질 것이다; 모든 집이 닫힐 것이다, 하여 아무도 안에 오지 못할런지 모른다. 포도주 위 거리들에는 외침이 있다, 토지의 기쁨이 추방될 것이다, 도성에 남은 것은 황폐함일 것이다 (이. 24:10-12);
위의 “텅빔”의 단어가 원어에서는 다른 단어로 표현되고 있으나 어쨌든 비슷한 의미의 범주에 있다. “텅빔”은 선이 없기 때문에 진리가 없는 곳이다는 것은 내적 의미에서 언급된 세부 사항에서 분명해진다; 즉 “도성”, “외침”, “포도주”, “거리들”이다. 에스겔서에서:
주 여호비께서 말하셨다, 이들의 도성에 화있을 것이다! 나 역시 난로를 크게 만들고, 뜨거워질 석탄 위에 텅빈 냄비를 놓는다, 그리고 그것의 놋쇠는 뜨겁게 될는지 모른다, 그리고 거기의 불결함이 그 안에서 녹여질는지 모른다, 거기의 더깽이가 태워질 것이다 (겔. 24:9, 11).
위에서 “텅 비다”가 의미하는 것이 분명해진다; “텅빈 냄비”는 그것 안에 더깽이와 불결한 것이 있다, 즉 악과 거짓이 있다.
마태복음서에서:
불결한 영이 인간의 안으로부터 밖으로 나갔을 때, 그는 마른 장소들을 걷다가, 쉴 곳을 찾으나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하자, 그는 말한다, 나는 내가 나왔던 내 집으로 되돌아갈 것이다; 그리고 그가 오니, 그는 그것이 텅비고, 청소되고, 그리고 자기를 위하여 준비된 것을 발견한다. 그때 그는 나가서, 자기보다 더 사악한 다른 일곱 영들을 자신과 결합한다, 그리고 그들은 안으로 들어가서, 거기 거주한다 (마. 12:43-45);
“불결한 영”은 인간에 있는 생명의 불결함을 표시한다, 그리고 그와 더불은 불결한 영들 또한 그렇다, 그 이유는 불결한 영들은 인간의 생명의 불결함에서 거주하기 때문이다; “마른 장소들”, 또는 물이 없는 곳은 진리들이 없는 곳을 표시한다; “텅빈 집”은 불결함으로, 즉 악으로부터의 거짓들로 다시 채워진 인간의 내면들을 표시한다. 누가복음서에서:
하느님께서는 배고픈 자를 좋은 것들로 채우셨다, 그리고 부자를 그분은 텅 빈채로 떠나보냈다 (눅. 1:53);
“부자”는 많은 것들을 아는 이들을 표시한다; 그 이유가 “재물”이 영적 의미에서 기억 속의 지식들, 교리적인 것들, 그리고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들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런 것들을 아는데, 행하지 않기에 “텅빈 부자”라고 불리운다; 그 이유가 그들에게 진리들은 진리들이 아닌데, 선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은 빵을 먹으려고 앉았다. 이는 거짓으로부터의 악을 제 것 삼음을 의미한다. 이는 “먹다”의 의미가 자기 것이 되게 함이다로부터; 그리고 “빵”의 의미가 사랑의 선이다로부터, 그리고 일반적으로는 모든 식품이다. 여기서는 “빵”의 의미가 반대적이어서 악을 의미한다; 그 이유가 누구나 아는 바, 성찬에서 빵을 무가치하게 먹는 자는 자신에게 선이 아닌 악을 자기 것이 되게 하는 자이다는 것 때문이다. 고대인들이 자기들의 중대한 결정을 내려야 할 때 함께 식사를 함으로 허가됨이 의미되었다. 하여, 그들은 서로가 자신의 것이 되게 했다. 에스겔서에서:
잘 보라, 이스라엘의 제 일인 자들아, 자기 무력에 따라 모든 이가 너희 안에 있었고, 피를 흘렸다; 중상꾼들이 피를 흘리기 위하여 너희 안에 있어 왔다; 그리고 너희 안에서 그들은 산에서 먹었었다 (겔. 22:6, 9).
다 잘 알려진 바, 일반적으로 악의 근원은 둘이다는 것, 하나는 생활로부터, 다른 하나는 교리로부터 이다. 거짓의 교리로부터 있는 악은 거짓으로부터의 악이라 불리우고, 이것이 여기서 뜻해지는 악이다.

그리고 그들이 눈을 들어 보았다. 이는 더 생각했음을 의미한다. 이는 “눈을 들어 올려 봄”의 의미가 의도함과 생각함인데, 여기서는 시리즈로부터 더 생각함이 의미된다

그리고 바라보니 이스마엘 사람들의 집단이 길르앗으로부터 왔다. 이는 단순한 선 안에 있는 이들을 의미하는데, 마치 단순한 선 안에 있는 이방인들 같다. 이는 이스마엘 사람들의 표현이 생활에서 단순한 선 안에 있는 이들, 이로부터 교리 측면에서도 자연적 진리 안에 있는 이들이다로부터; 그리고 “길르앗”의 의미가 외면의 선이다로부터, 인간이 거듭나질 때, 인간은 이 외면의 선에서 처음 거듭남을 시작한다. 이로부터 “길르앗으로부터 이스마엘 사람들의 집단”에 의해 이방인들과 더불어 있는 것과 같은 선, 즉 그런 단순한 선 안에 있는 이들이 의미됨이 분명해진다.
어떻게 이런 상황들이 있게 되었는지에 대하여는 이미 말했던 바에서 알는지 모르나 아래에서 조금 더 살핀다. 여기서는 이미 살핀 내용보다 조금 더 발전된 것일지 모른다: 교회 내에 있고, 자신을 신성한 진리들, 특히 이런 진리들, 즉 주님의 인간이 신성하다는 것, 그리고 선행의 일들이 구원에 기여한다는 진리에 맞서서 자신을 확증한 이들, 이들이 만일 교리 측면에서 뿐만 아니라 생활 측면에서도 이렇게 확증한다면, 그들은 이 후에 자신들이 이 진리들을 받을 수 없는 상태쪽으로 그들의 내면들은 굳혀져 있다. 그 이유가 한 때 교리에 의해 확증된 것, 동시에 생활로 확증한 것은 영원히 남아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내면의 상태를 알지 못하는 이들이 상상하는 것, 즉 제아무리 위의 진리들에 정반대로 확증해오고 있었다 해도, 그가 다시 깨닫게 되었다면, 위의 진리들을 받아들임이 뭐 그렇게 어려운 일일 것이냐고 상상할지 모른다. 그러나 이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이 다른 삶에서 이런 인물들에 관련한 경험을 통해 나로 하여금 알도록 수여되었다. 교리에 의해 확증된 것은 무엇이든 지적 부분에 의해 흡수되어진다, 그리고 생활에 의해 확증한 것은 의지 부분에 의해 흡수된다; 그리고 인간의 양쪽 생명들 안에 뿌리내린 것, 즉 이해력의 생명과 의지력의 생명에 박혀진 뿌리는 뽑혀나갈 수 없다. 사후 살아가는 인간의 혼 자체는 이 두 생명에 의해 형성되어진다, 또한 이 생명은 거기서 멀어지는 일은 결코 없다. 이런 근거로 해서, 교회 내에 있는 이들이 교회 밖에 있는 이들보다 때로는 상황이 더 심각할 수 있다고 말해왔던 것이다; 그 이유가 교회 밖에 있는 이들, 흔히 이방인이라 불리운 이들은 위의 진리들에 맞서서 자신들을 확증하지는 않고 살아가는데, 그 이유는 그들이 위의 진리들을 아예 몰랐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의 많은 부류들은 서로의 선행 안에서 살았기 때문에 만일 시간과 공간이 존재하는 자연계가 아닌 다른 삶에서의 경우, 신성한 진리들을 받는 것이 어렵지 않다 (2589-2604항).
[3] 이런 이유로 어떤 새로운 교회가 주님에 의해 설립될 때, 교회 내에 있는 이들이 아닌, 교회 밖, 이방인들과 세워지곤 했던 것이다. 이런 사항들은 말씀에서 자주 취급되고 있다. 이 대목이 책의 머리말 형식 같이 놓여진 이유는 이 대목 뒤에 이어지는 사건들, 즉 요셉이 그의 형제들에 의해 구덩이에 내던져지고, 구덩이에서 미디안족에 의해 건져내지고, 이스마엘족들에 팔려지는 사건을 이해하기 위함 때문이다. 그 이유가 요셉의 형제들에 의해 신성한 진리, 특히 두 진리, 즉 주님의 인간이 신성하다는 것, 그리고 선행으로부터의 일들이 구원을 있게 한다는 진리, 그리고 이것을 교리 뿐만 아니라 삶에 의해서 자신을 굳힌 교회인들을 표현했기 때문; 그 반면, 이스마엘족들은 단순한 선 안에 있는 이들을, 그리고 미디안 족들은 이 선으로부터의 진리 안에 있는 이들이 표현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후자는 요셉을 구덩이로부터 끌어낸 것에, 전자는 요셉을 산 것에 관련되었다. 그러나 이들에 관련되어 이어지는 것, 즉 요셉을 이집트로 데려오고, 이집트의 경호 대장에게 그를 파는 대목은 차후 거기서 살핀다.

그들은 낙타들에 양념(향료)과 수지(향유)와 소합향을 싣고 있었다. 이는 내면의 자연적 진리들을 의미한다. 이는 “낙타들”의 의미가 영적인 것을 섬기는 자연적 인간 속의 것들이다로부터, 특히 자연적 인간에 있는 일반적인 기억 속의 지식들이다; 그리고 “양념, 수지, 소합향”의 의미가 자연적 인간에 있는 선과 결합된 내면의 자연적 진리들인데, 아래에서 더 살핀다. 고대인들은 거룩한 예배에서 달콤하게 냄새를 풍기는 것과 냄새 좋은 것들을 사용했는데, 유향이나 향들이 이에 속한다; 그리고 그들이 기름부음을 위한 기름에도 혼합하여 사용했다. 그러나 실제의 제조 방법은 오늘날 알려져 있지 않은데, 그 이유는 고대인들이 예배에서 사용된 모든 것들은 천국들에 있는 영적이거나 천적인 것들에 근원을 두었다는 것, 그리고 그것들에 상응하고 있다는 것이 통째로 알려져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인간은 자신들을 천국의 것들로부터 대단히 멀리 옮겨 놓았다, 그 대신 자연적, 세상적, 육체적인 것들에는 대단히 가까이 옮겨 놓았다, 하여 인간은 영적, 천적인 존재에 관련하여서는 매우 희미함 안에, 심하게는 부정적인 자세로 일관한다.
유향과 향들이 고대인들 사이에서 거룩한 의식들에 사용된 이유는 냄새가 지각에 상응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향긋한 냄새, 즉 다양한 종류의 향료들 같은 것은 선으로부터의 진리, 또는 선행으로부터의 신앙의 것을 지각함에서 가지는 감사함과 만족함에 상응한다. 하여 다른 삶에서 주님으로부터의 선한 기쁨이 있을 때면 언제든지 지각 자체가 냄새들로 바뀐다. “양념(향료), 수지, 소합향”에 의해 각각 의미함에 관한 것은 그것들이 언급되는 다른 페이지들에서 살필 것이다. 여기서는 세 가지 모두에 공통되는 일반적 측면만 살피는데, 이것은 자연 평면에 있는 내면의 진리들을 의미하나 그것들 안에 있는 선으로부터 이다; 그 이유가 진리들 자체가 자연 평면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진리들을 수단으로 선을 만들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자연 평면의 다양함들은 선과 결합된 진리의 품질에 따라서, 결과적으로 선의 품질에 따라서 이다; 그 이유가 선은 진리들로부터 선의 품질을 가지기 때문이다. “길르앗”은 외면의 선을 의미하는데, 이 선은 감각으로부터 있고, 쾌락(pleasure)이라 불리운다, 그리고 “이집트”에 의해서는 좋은 의미에서일 경우, 외면의 선에 상응하는, 또는 이 선에 일치하는 자연적 인간의 외적 진리들인 기억 속의 지식들이 의미된다, 그러므로 이런 향품들을 낙타에 싣고 이집트로 운반하는 길르앗으로부터 오는 이스마엘 사람들에 의해 의미되는 것은, 그들이 자기들 고유의 기억 속의 지식들로부터의 내면의 진리들을 이집트에 의해 의미된 기억 속의 지식들쪽으로 운반했다 이다. 내면의 진리들은 외면의 진리들로부터의, 또는 기억 속의 지식들로부터의 결말들이다; 그 이유가 자연적 인간의 기억 속의 지식들은 어떤 것에 관하여 결말들을 끌어내기 위한 수단들을 제공한다, 고로 내면의 것들을 바라보고 있다; 이와 마찬가지 방법에서 우리들은 누군가의 용모에서 그의 마음을 바라본다, 또는 그의 눈빛의 파장 안에서, 그의 음성의 음질 안에서, 그의 제스츄어나 행동 안에서 그의 마음을 바라본다.
이런 진리들을 수단으로 인간의 자연 평면이 완전해지고 수정되기에, 이런 종류의 향료로 치료됨이 있다; 예레미야서에서 수지에 관하여:
길르앗에는 수지 나무(balsamic gum)가 있지 않던가? 거기에 의사가 있지 않던가? 그런데 왜 내 백성의 치료가 오르지 않는가? (예. 8:22).
다시:
길르앗으로 올라가라, 그리고 유향을 가져오라, 오 이집트의 딸아; 헛되이 너는 약들을 불렸다; 너를 위한 치료는 없다 (예. 46:11).
다시:
바빌론이 갑자기 붕괴되고 박살났다, 그녀 위에 아우성소리가 있다, 그녀의 고통을 위해 수지를 가져오라, 그렇게 하여 그녀는 치료될는지 모른다 (예. 51:8).
이와 같은 사항들이 영적 의미를 가지는 것은 아주 분명하다. 계시록서에서:
그리고 땅의 상인들이 그녀를 위하여 슬퍼하고 애곡할 것이다, 그 이유는 자기들의 상품을 사는 자는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그 상품은 금과 은, 그리고 귀한 돌과 진주들, 그리고 고운 아마포와 심홍색 (옷감), 그리고 비단과 주홍색 (옷감), 그리고 각종 향나무(thyine wood), 각종 상아 그릇, 귀한 재목, 그리고 놋쇠와 철, 그리고 대리석으로 만든 그릇들. 그리고 계피와 향, 그리고 연고와 유향, 그리고 포도주, 그리고 기름, 그리고 고운 곡식가루와 밀, 그리고 가축과 양, 그리고 말들, 그리고 병거, 그리고 인간의 몸들과 혼들이다 (계18:11-13);
위의 것들 각각이 주님의 왕국과 그분의 교회 안에 있는 것을 의미하지 않았으면, 결코 이렇게 지루할 정도로 특별하게 일일이 열거되지 않았을 것이다; 즉 이 단어들은 의미 없이 나열된 상품 목록이 아니다는 말이다. 다 아는 바, “바빌론”은 주님을 예배함에서 비껴서서 자기를 예배하는 이들, 그리고 거룩한 외적인 것들을 예배하면서 한편으로 거룩한 내적인 것들을 모독하는 이들이다; 그러므로 그들의 상품들은 그들이 자기 숭배를 위해 교묘하고 끈질기게 창안한 것들, 그리고 자기들 입맛에 맞게 악용한 말씀으로부터의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들과 교리들이다. 고로 여기서 언급되는 세부 사항들은 특별한 것들이 의미된다, “심홍색”, “향”, “연고”에 의해서는 선으로부터의 진리들이 의미되나, 여기서는 그것들에 관련하여 악용한 진리들과 악으로부터의 거짓들이 의미된다.
이와 비슷한 것이 에스겔서에서 두로의 상품에 관련하여 있다:
유다와 이스라엘의 토지는 무역상들이다; 민닛의 밀, 과자(Pannag), 꿀과 기름, 수지인데, 이것으로 그들은 거래했다 (겔. 27:17);
위에서도 “수지(향유, balsam)”는 선으로부터의 진리가 의미된다. 그러나 모든 말씀 단어 하나하나, 점 하나도 모두 거룩하다 말하면서도 위와 같이 내적 의미의 설명을 들을 때, 그들은 말씀 속에 내적 의미가 있다는 것을 믿지 않고 싶어 딴짓을 하는 이들에게, 위에 인용된 구절들에서 등장하는 단어들은 안에 아무것도 담지 않은 그릇, 벌거벗은 단어에 불과할 것이다; 그럼에도 그들 말대로 단어들은 거룩해서, 그 안에 신성이나, 천적인 것, 또는 영적인 것들을 담고 있다.

그것들을 이집트로 운반하려 내려가고 있었다. 이는 기억 속의 지식들 안에서의 가르침을 의미한다. 이는 “이집트”의 의미가 기억 속의 지식들이다로부터; 그리고 “그것들”인 “양념, 수지, 소합향”에 의해서는 이방인 같은 단순한 선 안에 있는 이들의 기억 속의 지식들로부터의 내면의 진리들이 의미된다, 그러므로 “그것들을 그쪽으로 운반하여 감”은 가르침에 있는 것이다가 의미된다. 이에 대해 더 주목하면 이렇다: “이집트”에 의해 의미되는 기억 속의 지식들은 영적 삶에 도움이 되는 것들, 그리고 이것들은 영적 진리들과 상응한다. 그 이유가 이전에는 고대 교회가 이집트 지역에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이 마술로 변해진 뒤, 영적인 것들을 악용한 기억 속의 지식들이 “이집트”에 의해 의미되었다. 이로부터 말씀 안에서 “이집트”는 좋은 의미에서와 반대적 의미에서의 기억 속의 지식이 (시리즈에 따라) 의미하게 되었다. 여기서는 좋은 의미에서 일 경우이다. 이집트에 의해 의미된 기억 속의 지식들로부터의 진리들은 진짜 교회로부터의 기억 속의 지식들에 의해, 고로 이 지식들 안에서 가르침을 받는 수단에 의해서가 아닌 여느 다른 수단으로는 정정되거나 건전하게 만들어지지 않는다. 이것이 여기서 의미되어 있다.

그리고 유다는 그의 형제들에게 말했다. 이는 선이다면 무엇이든지 반대하는 교회 안의 타락된 자를 의미한다. 이는 “유다”의 표현함이 좋은 의미에서는 천적인 사랑으로부터의 선, 그러나 반대 의미에서는 선이면 무엇이든 모든 선에 반대하여 있는 것을 의미하는데, 아래에서 살핀다. 그리고 그의 “형제들”의 의미가 분리된 신앙 안에 있는 교회에 있는 이들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여기서 유다에 의해 선이면 무엇이든 반대하는 이들이 표현되는 이유는 좋은 의미에서는 말씀에서 천적 사랑의 선 안에 있는 이들이 표현되기 때문이다. 천적 (수준의) 사랑은 주님을 사랑함과 이 사랑에서 파생된 이웃을 향한 사랑이다. 이 사랑 안에 있는 이들은 주님과 최고로 가깝게 결합되어 있다; 그러므로 그들은 가장 안쪽의 천국 안에 있다; 이 천국은 순진의 상태 안에 있다, 고로 여기 있는 이들은 이런 순진의 상태로부터 어린 아이로서, 형체에서는 전체적으로 사랑들로서 여타 다른 천국들에게 나타난다. 다른 이들은 그들에게 가까이 갈 수 없다, 그러므로 그들이 다른 이들에게 보내어질 때, 그들은 다른 천사들에 의해 에워싸이게 된다, 이리하여 에워싼 이들을 수단으로 그들의 사랑의 기운은 경감되어지는데, 이렇지 않으면 정작 그들이 보내진 영역에 있는 이들이 그들로 해서 졸도해버리고 만다. 그 이유가 그들의 사랑의 기운은 뼈골까지 꿰뚫기 때문이다.
천적이라 불리우는 이 사랑, 또는 이 사랑의 선이 좋은 의미에서 유다에 의해 표현되어진다, 마찬가지로 반대 의미에서 천적인 선에 반대되는 이들이 표현되어진다, 고로 선이라면 무엇이든 반대하는 이들이 표현된다. 말씀에 있는 대부분의 것들은 두 겹의 의미를 지닌다, 즉 좋은 의미와 이에 반대되는 의미이다. 좋은 의미로부터 이에 반대되는 의미 역시 알려진다; 그 이유가 반대 의미에서 포함되는 것은 무엇이든 좋은 의미의 것과 직반대되어 있다.
사랑으로부터의 선들은 일반적으로는 둘이 있다, 천적 사랑의 선과 영적 사랑의 선이다. 천적 사랑의 선에 직반대되는 것이 자기 사랑으로부터의 악이다; 그리고 영적 사랑의 선에 직반대되어 있는 것이 세상을 사랑함의 악이다. 이 악은 자기를 사랑함의 악 같이 모든 선에 직반대 되어 있지는 않다. 유다에 의해서는 반대 의미에서 자기를 사랑함에 있는 이들이 표현되고, 이스라엘에 의해서는 세상을 사랑함에 있는 이들이 표현된다. 이런 이유는 유다에 의해 주님의 천적 왕국이, 이스라엘에 의해서는 주님의 영적 왕국이 표현되었기 때문이다.
지옥들 역시 위 두 사랑들에 따라 구분되어진다. 자기를 사랑함에 있는 이들은 무슨 선이든 모두 반대하는 바, 가장 깊은 지옥 안에, 그러므로 가장 비통한 지옥들에 있다; 그러나 세상을 사랑함에 있는 이들은 무슨 선이든 지에 꼭 반대하는 것은 아닌 바, 아주 깊은 지옥들 안에 있지는 않은 바, 상대적으로 덜 비통하다.
자기를 사랑함의 악은 일반적으로 생각하기에는 외적 뽐냄인 교만이라 불리우는 정도가 아니고, 이웃을 향한 증오, 복수하려 불타는 바램, 잔인함으로 기뻐함이다. 이것들은 자기를 사랑함의 내면들이다. 이 사랑의 외면들은 자신과 비교해 타인을 경멸함, 영적 선 안에 있는 이들을 혐오함이고, 때로는 뽐냄, 교만으로, 때로는 이런 것 없이도 그 모습을 드러낸다; 이런 증오심에서 이웃을 붙드는 자는 내면적으로는 자신 외에 아무도 사랑하지 않고 있다; 그런데도 그들은 이웃과 하나로 결합하고 있다고 간주한다; 고로 그들은 자기로부터의 단 하나의 목적을 위하여 자신 안에서 이웃을, 이웃 안에서 자신을 사랑하고 있다. [6] 이와 같은 상태가 반대적 의미에서의 유다에 의해 표현되고 있다. 유태 국가는 처음부터 이런 사랑 안에 있어 왔다; 그들은 온 세상의 모든 이들을 천박한 노예들로, 그리고 자신들에 비교하건대 무가치한 자들로 간주했고; 그들을 증오함 안에서 붙들고 있었다. 더욱이 자기를 사랑함과 세상을 사랑함이 상호적으로 결합하지 않았을 때, 그들은 자신들의 협회나 형제들까지 비슷한 증오로 박해했다. 이 기질은 이 나라와 여전히 남아 있다; 그러나 그들이 묵인 아래 외국의 토지들에서 거주하기 때문에, 그들은 이런 그들의 사랑을 감추고 있다.

우리가 우리의 형제를 죽이고 그 피를 덮는다 한들 그것이 무슨 이득이 있을까? 이는 만일 이것이 완전히 소멸된다 해도 이익도, 유명해지는 것도 아무것도 없을 것임을 의미한다. 이는 “무슨 이득이 있을까?”의 의미가 이득도 유명해질 것도 아무것도 없을 것이다로부터, 이는 아래에서 살핀다; 그리고 “죽이다”의 의미가 여기서는 신성한 진리를, 특별하게는 여기서 “형제”인 요셉에 의해 뜻해진 것, 즉 주님의 신성한 인간을 소멸하는 것이다로부터; 그리고 “피를 덮는다”의 의미가 통째로 거룩한 진리를 감추여지게 하는 것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런 것들에 관련되는 경우가 어떠한지는 아래에서 분명해진다.
여기서의 “이득(gain)”이 이익과 유명해짐 뿐만아니라, 또는 “무슨 이득이 있을까?”가 이득과 유명해짐에 관하여 아무것도 있지 않을 것을 의미하는 이유는 이것이 물욕, 또는 탐욕으로부터 말해졌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이득의 물욕과 탐욕은 그것 내부에 온 세상을 소유할 뿐만 아니라 약탈과 자기들을 위하여라면 누구이든 죽이기까지 하는 것도 바라는 것을 가지고 있다; 실로 이를 방해하는 법들이 없다면 이런 물욕의 몰아침은 살인도 마다 하지 않을 것이다. 더욱이 이런 인간이 금이나 은을 소유하는 자신을 놓고서는 힘에서 가장 위대한 자로 간주하기까지 한다, 어쨌든 이런 자도 외형적 나타남에서는 자기 내부와는 다르게 나타날는지 모른다. 그리하여 이것은 오히려 탐욕에 있는 것이 세상을 사랑함 뿐만아니라 자기를 사랑함, 심지어 자기를 사랑함의 가장 더러운 것까지도 보여준다. 심보가 더럽게 탐욕하는 이들 안에 있는 뽐냄, 교만은 바깥쪽으로는 그렇게까지 눈에 띄게 있지 않은데, 그 이유는 부를 나열하는데 별로 관심 없는 듯하게 때로는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쾌락과 통상적으로 결합하는 자기를 사랑함의 종류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이런 것은 육체에 관하여, 식품이나 의복에 거의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지상의 것들로부터 통째로 있는 사랑, 돈 외에 다른 목적이 없는 사랑, 여느 다른 것보다 돈을 소유함 자체를 믿는 것이 실제적이지는 않으나 잠재성으로 있는다. 이로부터 분명한 바, 탐욕 안에 가장 낮고 비열한 자기를 사랑함이 있다는 것, 그런 이유로 다른 삶에서 탐욕자들은 돼지떼 사이에서 나타난다; 그리고 그들은 무엇보다 선이면 무엇이든 반대하고 있다. 결과적으로 그들은 짙은 어둠 안에 있어 그들은 선한 것과 진리인 것을 볼 수가 없다; 그들은 사후 인간에 속하는 어떤 내적인 것도 전혀 납득할 수가 없다; 오히려 사후 삶을 말하는 이들을 그들은 심정에서 비웃는다.
유태 나라가 시작에서 이런 본성 속에 있었다, 그러므로 그들에게는 어떤 내적인 것도 열리어지는 것이 불가능했는데, 이는 구약 성경의 말씀으로부터 분명해진다; 그리고 그들은 자기를 사랑함의 가장 나쁜 종류에 뿌리를 내렸다. 그들은 내면의 선들과 진리들을 더럽힌다, 고로 여느 사람보다 그것들을 더 모독한다, 고로 탐욕을 수단으로 그들은 내적인 것들로부터 아주 멀리 있어야 하고, 그 덕분에 짙은 어둠에 싸여 있어야 한다. 그 이유가 그들이 인정하지 않는 만큼이라도 모독할 수 없게 해주기 위함에서 이다. 이런 이유로 주님께서 그들에 관해 말하신다, “너희는 너희 아버지로부터 악마이다, 그리고 너희 아버지의 바램을 너희는 행동하기를 뜻한다. 그는 시작으로부터 살인자였다.” (요. 8:44); 그리고 유다 이스가리옷 (가롯 유다)에 관하여, 그는 유태 교회를 표현했는데, “내가 너희 열둘을 뽑지 않았더냐? 그리고 너희 중의 하나는 악마이다” (요. 6:70). 이스가리옷 유다 역시 주님을 팔므로 해서 “가서 요셉을 팔자”라고 말한 본문의 유다와 같은 것을 표현하고 있다.

가서 우리가 그를 이스마엘 사람들에게 팔자. 이는 단순한 선 안에 있는 이들은 그것을 인정함을 의미한다. 이는 “판다”의 의미가 자신들로부터서는 멀리함(소원해짐), 고로 다른 이들에 의해서 받아지는 것이다로부터, 이것이 진리를 서술할 때, 여기와 같이 그들에 의해 인정되어짐을 표시한다; 그리고 이스마엘 사람들의 표현함이 단순한 선 안에 있는 이들이다로부터 알려진다. 단순한 선 안에 있는 이들은 신성한 진리를 인정한다는 것, 특히 주님의 신성한 인간에 관한 신성한 진리를 인정한다는 것은 앞에서 이미 살폈다.

그리고 우리의 손을 그에게 대지 말자. 이는 그들은 책임질 일 없이 있을런지 모른다를 의미한다. 이는 “누군가에게 손을 놓지 않음”의 의미가 폭력을 제공하지 않음이다로부터; 그리고 폭력을 제공하지 않기 때문에 그들은 책임질 없이 있을런지 모른다를 표시하게 된다. 이것은 아래 구절에서도 의미되어진다.

그 이유가 우리의 형제요, 우리의 살이기 때문이다. 이는 그들로부터 있는 것이 받아졌기 때문에를 의미한다. 이는 “형제”의 의미가 선으로부터의 혈족 관계이다로부터; 그리고 “살”의 의미가 양쪽 의미, 즉 좋은 의미, 반대 의미 모두에서 누군가의 자기 자신, 고로 그것이 받아들여졌음 인데, 그 이유는 교회 속에 있는 이들로부터 이고, 이것이 단순한 선 안에 있는 이들에 의해서 받아들여지게 되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이스마엘 사람들은 단순한 선 안에 있는 이들을, 요셉의 형제들은 선행으로부터 분리된 신앙 안에 있는 교회를 표현하기 때문이다. 단순한 선 안에 있는 이들은 주님의 인간이 신성이심을 인정하고, 또한 인간이 구원되어지는 것은 선행의 일이 행해져야 하는 것을 인정한다. 물론 분리된 신앙에 있는 이들이 이를 모르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모든 이 앞에서 신앙만을 이라고 표면적으로 주장하지 않는다, 게다가 단순한 선에 있는 이들 앞에서는 거의 주장하지 않는다; 더욱이 그들은 상식적 논리 앞에서 감히 그들의 교리를 내놓지 않는다, 그 이유는 그렇게 했다가는 자신의 위엄과 이익 모두가 감소할 것이 불보듯 뻔하기 때문이다. 만일 그들이 이런 진리들을 부정한다고 말할 것 같으면, 단순한 선 안에 있는 자가 그들을 두고 그들은 어리석다고 말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단순한 선에 있는 이들은 사랑이 무엇인지를, 사랑의 이들이 누구인지를 알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것들로부터 분리된 신앙이 무엇인지를 모른다. 신앙을 옹호하는 논쟁은 일들에 반대되어 있다, 그리고 주님의 인간과 신성을 구분함에 관하여도 그들은 자기들이 납득 못하는 궤변이라 부른다. 그러므로 신앙만에 있는 이들이 자기들도 받아들여지게 하기 위하여 자기들의 주장을 소극적 태도 안에 놓는 식으로 기꺼이 양보하는 것도 서슴치 않는다. 그 이유가 이런 진리들이 소멸되는 것이야말로 자기들의 명예와 이득에 도움될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의 형제들은 그에게 귀기울였다. 이는 승낙함을 의미한다.

그리고 거기를 사람들, 미디안 사람들, 상인들이 지나갔다. 이는 이 선으로부터의 진리 안에 있는 이들을 의미한다. 이는 미디안 사람들의 표현함이 단순한 선으로부터의 진리 안에 있는 이들이다로부터; 그리고 “상인들”의 의미가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들을 가진 이들이다로부터; 그 이유가 이것들은 영적 의미에서는 “부자”, “재물”, “상품”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장사하는 것”은 이런 지식들을 포획하고 교통하는 것이다. 여기서의 경우는 선에 관한 지식들이 아니고 진리에 관한 지식들이 의미된다; 그 이유가 “미디안 사람”은 단순한 선으로부터의 진리 안에 있는 이들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이 “사람들(men, veri, 남자들)”이라 불리우기 때문, 이들 또한 진리들 안에 있는 이들이라 불리우기 때문이다. 역사적 시리즈로부터 보건대, 요셉이 이스마엘 사람들에게 팔리워졌는데, 그를 구덩이에서 끌어낸 것은 미디안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마지막 구절을 읽으면 이집트에서 보디발에게 판 이들도 미디안 사람들이었다. 아마 성경을 읽는 많은 이들이 상상하는 것은 요셉을 이집트에서 판 이들이 이스마엘일 것이다는 것, 그러나 성경은 미디안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 이유가 내적 의미에서 요셉, 즉 신성한 진리는 선 안에 있는 이들에 의해서는 팔리울 수 없고 선으로부터의 진리 안에 있는 이들에 의해서만 팔리워져야 하는데, 이에 대한 설명은 그 구절로 미룬다.

그리고 그들은 구덩이에서 요셉을 끌어내 들어 올렸다. 이는 최소한 거짓 가운데에는 있지 않을 것 같은 그들로부터의 도움을 의미한다. 이는 “끌어내 들어 올림”의 의미가 자유해 있는 것, 고로 도움을 제공하는 것이다로부터; 그리고 “구덩이”의 의미가 거짓들이다로부터. 여기서 끌어내 들어 올림이 도움을 제공함인 이유는 진리는 선을 돕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힘은 진리쪽에 있기 때문, 하여 선은 진리를 수단으로 힘을 발휘하기 때문이다; 더욱이, 거짓이 알려지는 수단이 진리이다, 고로 누군가가 거짓들 사이에 있지 않기 위하여 진리의 도움을 받는다. 그러므로 요셉을 구덩이에서 끌어 올린 이들은 미디안 사람들이고, 그를 산 이들은 이스마엘 사람들인 것이다.

그리고 요셉을 이스마엘 사람들에게 팔았다. 이는 단순한 선 안에 있는 이들에 의해 받아짐, 그리고 분리된 신앙 안에 있는 이들의 부분과는 멀어짐을 의미한다. 이는 “팔다”의 의미가 요셉의 형제인 분리된 신앙에 있는 이들의 측면에서는 멀어지고, 이스마엘 사람들인 단순한 선 안에 있는 이들의 측면에서는 받아지는 것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은 이십에. 이는 평가를 의미한다. 이는 “20”의 의미가 내면의 인간 안에 주님에 의해 저장된 선과 진리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것이 리메인스(remajns)라고 불리운다, 고로 거룩한 선 또는 진리, 여기서는 거룩한 진리인데, 그 이유가 “은 이십 조각”이라 말해지기 때문; “은”은 진리이다. 똑같은 숫자가 거룩하지 않은 것도 의미하는데, 그 이유는 말씀에서 사용되는 표현은 양쪽 의미를 지니기 때문, 따라서 반대 의미인 경우, 신성한 진리를 멀리한 이들 측면에서는 거룩하지 않은 것, 그러나 이 진리를 받은 이들 측면에서는 거룩한 것을 의미하게 된다. 고로 요셉의 형제들 측면, 즉 분리된 신앙에 있는 교회인들 측면에서는 거룩하지 않은 것, 그러나 이스마엘 측면, 즉 단순한 선 안에 있는 이들 측면에서는 거룩한 것을 표시한다. 이것이 평가에 의해 뜻해진 것들이다.
“20”이 거룩하지 않은 것도 의미하는 이유는 “20”은 리메인스를 표시하기 때문이다. 그들의 내면의 인간 안에서 선과 진리에 관한 리메인스를 가지지 않고, 그 대신 악과 거짓을 지닌 이들 안에서 이 거룩함은 거룩함이 아니고, 악과 거짓의 종류에 따라 더러운쪽이든지, 모독함쪽이든지 한다. “20”이 거룩하지 않은 것 역시 표시함을 말씀에서 찾아 볼 수 있다:
내가 보았는데, 날고 있는 두루마리가 바라보였다. 그리고 그가 나에게 말했다, 너는 무엇을 보느냐? 그리고 나는 대답했다, 저는 날고 있는 두루마리를 봅니다; 그것의 길이는 20엘, 넓이는 10엘이다. 그때 그가 나에게 말했다, 이것은 온 땅의 얼굴 너머로 가고 있는 저주이다 (슥. 5:1-3).
학개서에서:
누군가가 포도주즙틀로부터 50을 퍼올리려고 포도주즙틀에 왔다, 거기에 20이 있었다. 나는 폭파함으로 너를 칠 것이다, 그리고 흰가루병으로 네 손의 모든 일을 (칠 것이다)
(학. 2:16, 17).
위 구절들에서 “20”은 거룩하지 않은 것, 불결한 것, 모독한 것을 표시한다. 20세 이상의 모든 이들은 광야에서 죽게 된 것(민. 14:29; 32:11)은 햇수에서 20 이상인 것은 불경한 것을, 20 이하는 거룩한 것을 표현했다.

그리고 그들은 그를 이집트로 데리고 갔다. 이는 기억적 지식으로부터 상담함을 의미한다. 이는 “이집트”의 의미가 기억 속의 지식들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리고 신성한 진리가 기억 속의 지식들에게로 가져다 놓일 때, 이것은 그것들과 상담하는 것이다; 그 이유가 앞에서 보여준 바대로 요셉에 의해 신성한 진리가 표현되기 때문이다. 기억 속의 지식들로부터 신성한 진리에 관하여 상담함에 의해 뜻해진 것에 관하여는 더 설명이 있어야 할 것 같다. 신성한 진리에 관하여 기억 속의 지식들로부터 상담하는 것은 그것이 그런지를 그것들로부터 보는 것이다. 이렇게 보게 되는 것은 양면을 지닌다. 먼저 진리가 진리임을 확인하는 긍정적 측면이 있다; 이들은 기억 속의 지식들과 상담할 때 (즉 기억 속의 지식을 자료로 삼아 검토할 때), 그것들을 수단으로 진리를 확증하는 바, 그들의 신앙은 강화된다; 그러나 부정적인 측면도 발생한다; 즉 부정적 측면에 있는 이들이 기억 속의 지식으로부터 상담할 때, (빌미를 교묘히 만들어) 진리를 더욱 거짓쪽으로 몰아붙이는 것이다. 이것은 모든 인간의 지적 능력에 따라 있다. 만일 보다 높은쪽인 내면의 통찰력을 지니지 않은 이들이 기억 속의 지식들의 의견을 듣는다면, 그들은 그것들 안에서 진리의 확증을 보지 못한다, 그러므로 그들은 부정적인 쪽으로 기억 속의 지식들에 의해 끌려가진다; 그러나 내면의 통찰력을 지닌 이들은 확증을 보게 되는데, 이들이 보는 방법이 상응을 수단으로 하는 것이다.
인간은 사후 산다는 진리가 있다. 이 진리가 과연 진정한지를 놓고, 부정적 측면에 있는 이들이 기억 속의 지식의 의견을 듣는다면, 그들은 셀 수 없는 잡다한 생각들에 의해 이 진리에 반대되는 확증을 하게 된다. 예를 들면, 짐승들도 별반 차이가 없이 산다는 것, 즉 감각을 지니고 행동하고, 때로는 이 감각이 인간의 것보다 더 정밀하기도 한다는 것; 인간이 일반 동물보다 한 수 위에 있는 이유는 그가 성숙해질 때 획득하는 것들 때문이다는 것; 따라서 넓은 측면에서 볼 때 인간은 동물의 한 종류일 뿐이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외에도 많은 그들의 생각이 더 있다. 어쨌든 이렇게 부정적 측면에 있는 이들은 결국은 자신들을 거짓들 쪽으로 내던진다. 하여 끝내 그는 영원한 삶에 관련되는 것은 무엇이든 아무것도 믿지 않는다.
그러나 이 진리에 관하여 긍정적 측면에 있는 이들이 기억 속의 지식의 의견을 들을 때, 그는 그것들을 수단으로 자신을 확증한다, 그리고 이것 역시 셀 수 없이 많다; 그 이유가 그들은 자연에 있는 많은 것들은 인간 아래 있다고 본다; 짐승들은 본능으로부터 행동한다는 것, 한편 인간은 이성으로부터 행동한다는 것, 짐승들은 아래쪽만을 볼 수밖에 없으나, 인간은 위쪽을 볼 수 있고, 생각함을 수단으로 그는 영계의 것들을 납득하고, 그것들에서 감명을 받는다는 것, 그리고 사랑을 수단으로 하느님 자신과 결합되기까지 한다는 것, 그리하여 신성으로부터의 생명을 자신에게 어울리게, 자신의 것이 되게 한다는 것; 그리고 질서 안에서 인도되고 승강되는데, 아주 늦은 만숙에 이른다는 것을 안다. 더욱이 그는 자연에 속한 것 이 외의 모든 것에서도 확증을 발견한다, 마지막 그는 천국 왕국의 표현물을 보편적 속성 안에서 발견한다.
잘 알려진 공통적인 것은, 학식자들이 단순한 이들보다 사후 삶을 덜 믿는다는 것; 일반적으로 신성한 진리들에 대해서도 덜 명료하게 본다는 점이다. 이런 이유가 발생하는 것은 그들이 기억 속의 지식에 의견을 구하기 때문이다는 것이다. 즉 학식자들이 단순한 자들보다 대부분이 더 많은 기억 속의 지식들을 가지고 있어 부정적인 견지를 구축하기가 더 용이하기 때문이다. 그것 때문에 그들은 더 높은, 또는 내면의 것으로부터의 통찰력을 자신들 안에서 파괴한다. 하여 그들은 천국의 빛으로부터는 더 이상 어떤 것도 볼 수 없고, 단지 세상의 빛으로만 볼 뿐이다; 그 이유가 기억 속의 지식들은 세상의 빛 안에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만일 이것들이 천국의 빛에 의해 조명을 받지 못하면, 그것들은 제아무리 자신들에게 다르게 나타날지라도 어둠을 야기할 뿐이다. 이런 이유로 단순한 이들은 주님을 믿었으나, 유태 나라에서 학식 있다는 부류인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들은 믿지 않았다. 즉:
그들이 이 말들을 들은 많은 무리들이 말했다, 이 분은 진정으로 예언자이시다. 다른 이들은 이분은 그리스도 (메사아)이시다고 말했다. 바리세인들이 그들에게 대답했다, 통치자들이나 바리 새인 중의 누가 그를 믿느냐? (요. 7:40, 41, 47, 48).
그리고 누가복음서에서:
예수께서 말하셨다, 저는 오 아버지여, 하늘과 땅의 주님, 당신에게 고백합니다, 당신은 슬기롭고 총명하다는 이들로부터는 감추이게 하시고, 아기들에게 밝히 보이셨습니다 (눅. 10:21);
“아기(baby)”는 단순한 자를 표시한다. 마태복음서에서도:
그러므로 나는 비유로 그들에게 이야기를 한다; 그 이유는 그들이 보고도 보지 못하고, 듣고도 듣지 못하며, 깨닫지도 못하기 때문이다 (마. 13:13)

그리고 르우벤은 구덩이로 돌아 왔다. 이는 일반적인 측면에서 교회 속의 신앙을 의미한다. 이는 르우벤의 표현함이 일반적 측면에서 교회의 신앙을 고백함이다로부터; 그리고 “구덩이”의 의미가 거짓들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러므로 르우벤이 구덩이로 되돌아 옴은 일반적인 교회의 신앙이 분리된 신앙에 속하는 거짓들을 바라보려고 왔다가 의미된다.

그리고 보라, 요셉이 구덩이에 있지 않았다. 이는 어떤 신앙도 더 이상 있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이는 요셉의 표현함이 신성한 진리이다로부터 분명해진다; 그리고 이것이 “구덩이”로 의미된 거짓들 사이에서 나타날 때, 거기에는 더 이상 어떤 신앙도 없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그의 옷을 찢었다. 이는 크게 슬퍼함을 의미한다. 이는 “옷을 찢음”이 크게 슬퍼함, 즉 진리가 파괴되었기 때문에, 거기에 신앙이 없었기 때문에 크게 슬퍼함이다. 우리가 말씀에서 자주 읽게 되는 것 중 하나, 특히 역사적 부분에서, 어떤 인물이 옷을 찢는 광경이다; 그러나 이것의 근원은 오늘날 알려져 있지 않다, 그리고 이것이 잃어진 진리 때문에 있는 슬퍼함의 표현물이다는 것은 더 더욱 알려져 있지 않다. 이미 말했던 바 대로, 이런 행동은 “옷”이 진리를 의미했다는 사실로부터 표현물이 되었다. 더욱이 이 장에서 야곱이 자기 아들의 웃옷임을 인식했을 때, 그는 자기 옷을 찢었다고 말해지고 있다 (34절); 하여 이를 수단으로 진리가 파괴되었음에 슬퍼함이 의미되어 있다. 또는 말씀의 다른 장소에서의 몇 사건을 말해보면, 아시리아왕 산헤립이 보낸 랍사게가 예루살렘에 모욕을 퍼부었을 때, 이를 들었던 궁내대신 엘리야킴과 서기관 세바와 사관 요아가 자기 옷을 찢으며, 이 일들을 히즈키야왕에게 말했고, 이를 들은 히즈키야왕도 옷을 찢고 베옷을 걸쳤다 (이. 36:22; 37:1; 왕하. 18:37; 19:1). 랍사게가 내뱉은 모욕은 하느님, 왕, 그리고 예루살렘을 향한 것인 바, 이는 신성한 진리를 향한 것임은 이 대목들의 내적 의미로부터 더 분명해진다.
여후디가 예레미야가 쓴 책을 왕 앞에서 읽었을 때, 왕은 그 책을 불에 던졌다, 그리고 이 말씀의 낭독을 들은 왕과 그의 종들은 자기들 옷을 찢지 않았다 (예. 36:23, 24); 그들이 옷을 찢지 않음은 신성한 진리가 회복되지 않았을 때 슬퍼하지 않았다가 표시된 것이다
눈의 아들 여호수아와 여둔네의 아들 갈렙이 가나안 토지를 염탐한 자들의 악한 보고에 맞서 말할 때 그들은 옷을 찢었다 (민. 14:6); 이것도 같은 의미이다; 그 이유가 가나안의 토지가 주님의 왕국을 의미하고, 이 토지에 맞서 말하는 것은 신성한 진리에 맞서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궤가 불레셋인들에게 빼앗기고, 엘리의 두 아들이 죽임을 당하였을 때, 군인 중의 하나가 실로로 달려왔는데, 그는 자기 옷을 찢고 머리에 먼지를 뒤집어썼다 (삼상. 4:11, 12); 이는 신성한 진리와 신성한 선을 잃음에 통곡함이 의미되었다; 그 이유가 궤가 주님의 왕국을, 최고 의미에서 주님 자신을 표현하였기에, 이로부터 교회의 거룩함을 표현하였기에, 옷을 찢음은 신성한 진리를 잃음에 통곡함을; 머리에 뒤집어쓴 먼지는 신성한 선을 잃음에 통곡함이 의미되었다.
사무엘과 사울에 관해 이렇게 읽는다:
사무엘이 돌아서 갔을 때, 사울이 그의 웃옷 자락을 붙들자, 그것은 찢어져 나갔다. 그리고 사무엘이 그에게 말했다, 여호와께서 오늘 당신 위로부터 이스라엘의 왕국을 찢으셨다, 그리고 그것을 당신의 동료에게 주었다. 나는 네게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그 이유는 당신이 여호와의 말들을 거절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의 왕 위로부터 당신을 거절하셨다
(삼상. 15:26-28);
사울이 사무엘의 웃옷 자락을 찢음은 사무엘이 말한 것, 즉 왕국은 그로부터 몰수되는 것, 그는 이스라엘의 왕이 더 이상 아닐 것을 표현했다; 그 이유가 내적 의미에서 “왕국”은 신성한 진리를; 그리고 마찬가지로 “왕”과 “왕권”도 그러하다; 특별히 왕국과 이스라엘의 왕에 의해서는 주님의 왕국이 표현되었다. 마찬 가지로 여로보암과 예언자 아히야에 관련한 대목도 있다:
여로보암이 예루살렘 밖으로 나갔을 때, 그리고 예언자 아히야가 길에서 그를 발견했다, 그때 그는 새 옷을 입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 둘만이 들판에서 있었다, 아히야가 새 옷을 붙잡고 열두 조각으로 찢었다; 그리고 그가 여로보암에게 말했다, 당신이 열 조각을 가져가라; 그 이유가 고로 이스라엘의 하느님 여호와께서 말하신다, 잘 보라 나는 솔로몬의 손으로부터 왕국을 찢을 것이다, 그리고 너에게 열 지파를 줄 것이다 (왕상. 11:29-31).
사무엘하서로부터:
사울이 전쟁터에서 죽은 지 삼일 후 옷을 찢은 사람이 진영으로부터 왔다; 그리고 다윗이 사울의 죽음을 들었을 때, 다윗은 그의 옷을 붙잡고 그것들을 찢었다; 그와 더불어 있던 그의 신하들도 그렇게 했다 (삼하. 1:1, 2, 11)
위 구절에 의해 분리된 신앙에 있는 이들에 의해 신성한 진리가 내던져지고 잃은 것 때문에 슬퍼함이 표현되었다; 그 이유가 이미 말한 대로 신성한 진리가 왕권에 의해 의미되었다, 분리된 신앙에 있던 이들이 불레셋에 의해 표현되고, 그들을 수단으로 사울이 죽임을 당했다; 이는 같은 삼하 1장의 다윗의 애곡(17-27절)으로부터도 분명해진다.
압살롬이 그의 형제 암논을 죽였을 때, 그리고 그 소식이 압살롬이 왕의 모든 아들을 죽였다는 식으로 전해졌을 때, 다윗왕은 “자기 옷을 찢고, 땅위에 누웠다, 그리고 그의 신하들도 자기 옷을 찢으며 그 곁에 섰다” (삼하. 13: 28, 30, 31); 이 대목 역시 신성으로부터의 진리들이 파괴되었음을 표현하기 위하여 행해진 것이다, 신성으로부터의 진리들이 내적 의미에서 왕의 아들들에 의해 의미된 것이다. 다윗이 압살롬 앞에서 도망했을 때, 그는 자기 옷을 찢은 아렉 사람 후새를 만났다 (삼하. 15:32); 말씀에서 왕, 특히 다윗왕은 신성한 진리를 표현했다. 엘리야가 여호와의 말씀을 이스라엘 왕 아합에게 말하여, 그는 그가 행했던 악 때문에 절멸될 것이라고 했을 때, 그는 자기 옷을 찢고, 그의 살에 베옷을 걸쳤다 (왕상. 21:27).
옷을 찢거나 조각내는 것은 잃어진 진리 때문에 슬퍼함을 표현했다는 것이 아래 구절에 더 있다:
사제 힐기야가 여호와의 집에서 율법의 책을 발견하였다; 그리고 사반이 왕 요시아 앞에서 그것을 읽었다. 그리고 왕이 율법책의 말들을 들었을 때, 그는 그의 옷을 찢었다 (왕하. 22:11).
위 구절은 말씀, 즉 신성한 진리가 이토록 오랫동안 잃어진 채로, 심정과 삶에서 말살되어 왔기 때문에 옷을 찢음이 있었음이 분명하다. 주님께서 나는 그리스도, 하느님의 아들이다고 고백하셨을 때, 대사제가 자기 옷을 찢으며, 말하기를, 그가 하느님을 모독했다는 기록 (마. 26:63-65; 막. 14:63, 64)은 대사제가 주님이 말씀을 거슬러 말했다는 것, 그는 신성한 진리에 반대하여 말했다는 신앙 그 이상의 것은 없었음을 의미했다.
엘리야가 회오리바람 안에서 올라갔을 때, 엘리사가 그것을 보았고, 그는 자기 옷을 붙잡고 두 조각으로 찢었다; 그리고 그는 자기 앞에 떨어진 엘리야의 웃옷을 추켜들었다, 그리고 물을 쳤다, 그리고 강물은 이쪽, 저쪽으로 나뉘었다, 그리고 엘리사는 건넜다 (왕하. 2:11-14); 이때 엘리사가 자기 옷을 두 조각으로 찢은 것은 말씀(신성한 진리)이 잃어진 것을 슬퍼함 때문이었다; 그 이유가 엘리야에 의해 말씀, 즉 신성한 진리 측면에서의 주님이 표현되었기 때문이다. 웃옷 (튜닉)이 신성한 진리인 것은 이미 살핀 바 있다, 그러므로 이런 슬픔에서 찢은 옷(garment)은 튜닠(tunic)이었음은 위에 인용한 구절들로 분명해진다. “옷”이 교회의 진리를, 최고 의미에서 신성한 진리를 의미했기에, 그러므로 위와 같은 슬퍼함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옷을 찢음으로 불명예가 표현되기도 했는데, 즉 다윗의 신하들이 암논의 아들의 왕 하눈에 의해 턱수염이 반으로 잘리우고, 옷이 궁둥이까지에서 잘린 사건이 있다; 이로 인해 그들은 다윗에게 인정받지 못했다 (삼하. 10:4, 5).

그리고 그는 그의 형제들에게 돌아 왔다. 이는 가르치는 사람들을 의미한다. 이는 요셉의 형제들이 분리된 신앙 속에 있는 이들이다로부터; 그리고 그들은 목자들이었기 때문에, 신앙으로부터 가르치는 이들이기도 하다.

그리고 말했다, 이 아이가 없다. 이는 그 안에 신앙이 없음을 의미한다. 이는 “아이”의 의미가 신앙 속의 진리이다로부터, 그 이유가 진리가 “아들”에 의해 의미되기 때문, 고로 “아이”에 의해, 여기서 요셉에 의해 신성한 진리가 표현된다. 고대 교회에서 진리라고 불리운 것이 새로운 교회에 의해서는 신앙이라 불리우고 있다; 그러므로 “아이가 없다”에 의해서는 교회 안에 신앙이 없다가 의미된다.

그리고 나는, 내가 어디로 가야 할꼬? 이는 지금 교회는 어디에 있는가?를 의미한다. 이는 르우벤의 표현함이 일반적으로 교회의 신앙이다로부터; 그리고 르우벤이 자신을 두고 “그리고 나는, 어디로 가야 하는가?”라고 말하는 바, 이는 다른 표현으로 지금 교회는 어디에 있는가?이다. 천국적인 요셉이 있지 않는 곳에 교회는 없다는 것, 즉 신성한 진리 측면에서의 주님, 특별하게 말하면, 주님의 인간이 신성이시다는 신성한 진리, 그리고 선행은 교회의 필수이다는 것, 결과적으로 선행의 일은 필수적이다는 신성한 진리가 없으면 교회가 없는 것이다. 이는 앞에서 누누이 살피고 강조되어 왔다.
만일 이 신성한 진리, 즉 주님의 인간이 신성이심이 받아지지 않는다면, 필연적으로 따라 붙는 것은 삼위 (세 인물들)가 경배되어져야 하나, 그분의 인간은 경배되지 않는다, 그 이유는 신성이 아닌 인간은 경배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셋이 하나이다고 부른다 할지라도, 여전히 생각은 셋으로 구분하고 셋을 만든다, 오직 입만이 하나라고 말할 뿐이다. 그가 한분 하느님을 인정하고 믿는다고 말할 때, 그가 셋을 생각하지는 않는지를 그로하여금 자신 안에서 생각해보게 하자; 그리고 그가 아버지이신 하느님(성부님), 아들이신 하느님(성자님), 성령이신 하느님 (성령님)이라고 말할 때, 그리고 이를 세 인물들로 구분하고 기능 측면에서도 구분하는데, 한 분 하느님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가? 세 하느님들이 경배될 때, 교회는 어디 있는가?
그러나 주님만이 경배될 때, 주님 안에서 완전한 삼위가 있어, 그분이 아버지 안에, 아버지가 그분 안에 있는 바, 그분 자신께서 말하신다: “비록 너희가 나를 믿지 않을지라도 일들을 믿어라; 하여 너희는 아버지가 내 안에, 그리고 나는 아버지 안에 있는 것을 알고 믿을런지 모른다” (요. 10:38);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본 것이다; 빌립보야, 너는 내가 아버지 안에, 아버지가 내 안에 계신다는 것을 믿지 못하느냐? 내가 아버지 안에, 아버지가 내 안에 계시는 것을 믿어라” (요. 14:9-11); “나를 보는 자는 나를 보내신 그분을 보고 있다” (요. 7:45); “나의 모든 것은 당신의 것, 그리고 당신의 것은 나의 것입니다” (요. 17:10). 이때 기독인의 교회가 있다. 즉 주님께서 말하신 것 안에 거주할 때이다: 즉 “모든 명령들의 첫째이다, 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의 하느님은 한분 주님이시다; 그리고 너희는 네 모든 심정으로부터, 네 모든 마음으로부터, 네 모든 힘으로부터 주 너희 하느님을 사랑할 것이다; 이것이 첫째 명령이다; 그리고 둘째는 같다, 즉 이것, 너희는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이보다 더 위대한 명령은 없다” (막. 12:29-31). “주 우리의 하느님”이 주님이시다에 대하여는 다른 장소에서도 알는지 모른다 (마. 4:7, 10; 22:41-45; 눅. 1:16, 17; 요. 20:28), 또한 구약 성경의 “여호와”가 신약 성경에서는 “주님”이라 불리운다.
만일 이 신성한 진리가 교리에서와 생활에서 받아지지 않는다면, 즉 이웃을 향한 사랑, 그리고 이로부터 선행의 일들이 교회의 필수 요소가 되지 않는다면, 필수적으로 이어지는 것은, 교회에서 진정한 것을 생각하나 선인 것을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고로 교회인의 생각은 그 자체 반대적일는지 모른다; 즉 악인 것을 생각하며 동시에 진정한 것을 생각하는 것이다; 고로 악마와 더불어 악인 것을 생각하며, 주님과 더불어 진리를 생각할는지 모른다; 그럼에도 진리와 악은 전혀 일치되지 않는다, 그 이유는 “아무도 두 주인들을 섬길 수 없다, 그 이유는 그는 이쪽을 미워하고 다른쪽을 사랑할 것이기 때문이다 (눅. 16:13). 분리된 신앙이 이것을 건립하고 생활에서 이를 확증할 때, 제아무리 신앙의 열매들을 말한들, 교회는 어디 있는가?

31-35절. 그리고 그들은 요셉의 웃옷을 가져왔다, 그리고 염소 중에서 숫염소를 죽였다, 그리고 웃옷을 피에 담그었다. 32 그리고 그들은 여러 색깔로 된 웃옷을 보냈다, 그리고 그들은 그것을 그들의 아버지에게 가져왔다, 그리고 말했다, 이것을 우리는 발견했습니다. 그것이 당신의 아들의 것인지 아닌지 지금 알아보십시오. 33 그리고 그는 그것을 알았다, 그리고 말했다, 이것은 내 아들의 웃옷이다. 악한 들짐승이 그를 삼켰다. 요셉이 찢겨진 것이 확실하다. 34 그리고 야곱은 그의 옷을 찢었다, 그리고 그의 허리에 삼베옷을 둘렀다, 그리고 많은 날 동안 그의 아들 때문에 통곡했다. 35 그리고 그의 모든 아들들과 그의 딸들이 그를 위로하려고 일어났다. 그러나 그는 자신을 위로 받기를 거절했다, 그리고 말했다, 나는 통곡하면서 내 아들이 있는 무덤으로 내려가야 한다. 그리고 그의 아버지는 그를 위하여 울었다.

그리고 그들은 요셉의 웃옷을 가져 왔다. 이는 나타남을 의미한다. 이는 “웃옷”, 즉 다양한 색깔의 웃옷(tunic)의 의미가 진리의 나타남이다로부터. 이어지는 구절들에서 취급되는 주제는 그들이 범죄한 사악한 행위에 대해 무죄임을 증명함이다; 그리고 내적 의미에서 신성한 진리들에 맞서 거짓을 확증함, 그리고 이 확증함은 외관(나타남)들을 수단으로, 즉 이것은 말씀의 글자 의미로부터 추론함으로 표출되고 있다. 말씀의 글자 의미로부터 해석함에 의한 거짓의 모든 확증들은 나타남들 이고, 이로 인해 단순한 자들은 자칫 잘못 인도되기가 쉽고, 거짓이 진리로, 그리고 진리가 거짓으로 표출되는 것도 용이하다. 이 나타남들이 이어지는 구절들의 내적 의미에서 취급되어진다.

그리고 염소들 중에서 숫염소를 죽였다. 이는 기쁨들로부터의 외적 진리들을 의미한다. 이는 말씀 안에서 “염소들 중의 숫염소”의 의미가 자연적 진리들, 즉 생활의 기쁨들이 있는 외적 인간의 진리들이다로부터; 또한 외적 진리들은 기쁨들(delights)로부터 파생되어지는데 이후 살핀다. 외적 인간의 진리들, 이로부터 생활의 진리들이 있는데, 이는 말씀의 글자 의미 같은 신성한 진리들이다; 이 진리들로부터 진짜 교회의 교리물들이 파생된다; 이 진리들이 여기서 “숫염소”에 의해 의미된다, 그리고 그것들로부터의 기쁨들은 “염소들”에 의해 의미된다; 고로 “염소들 중의 숫염소”는 진짜 의미에서 이와 같은 진리들 안에 있고, 그 진리들로부터의 기쁨들 안에 있는 이들을 의미한다. 그러나 반대적 의미에서, “염소들 중의 숫염소”에 의해 외적 진리들에 있는 이들 (즉 글자 의미로부터 파생된 진리의 나타남들에 있는 이들)이 의미된다; 이 진리들은 자기들 생활 속의 기쁨들과 일치하여 있다; 고로 자기의 육체의 기쁨들인데, 일반적으로 쾌락(육체적 기쁨, pleasure)이라 불리운다; 이 쾌락은 보다 낮은 마음의 기쁨들이다; 예를 들면 명예, 이득 같은 것으로부터 얻어지는 기쁨들이다. 이런 것에서 기쁨을 가지는 인물들이 반대적 의미에서 “염소들 중의 숫염소”에 의해 의미된다. 한마디로, 이 의미에 있는 “염소들 중의 숫염소”에 의해 선행으로부터 분리된 신앙 안에 있는 이들이 의미된다. 그 이유가 이들은 자기들 생활과 일치하는 것, 즉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을 옹호하는 진리들만을 말씀으로부터 축출해내기 때문이다. 그들은 다른 진리들 마저 해석이라는 것을 수단으로 자신이 선발한 진리들에 일치하도록 가져다 놓는다. 그러므로 거짓들이 진리가 나타난 듯 하여 표출되고 있다.
“염소들 속의 숫염소”가 분리된 신앙에 있는 이들을 의미하는 구절은 아래에 있다:
보라 염소들 중의 숫염소가 온 땅의 얼굴들 위 서쪽으로부터 왔다, 그리고 땅에 닿지 않았다; 그리고 숫염소는 그의 눈 사이에 괄목할만한 뿔을 가졌다. 네 뿔들 중의 하나로부터 작은 뿔이 나왔다, 그리고 그것은 남쪽을 향하여, 그리고 동쪽을 향하여, 그리고 잘생김을 향하여 자랐다. 그렇다 그것은 하늘들의 군대에까지 자랐다; 그리고 군대의 얼마, 별들의 얼마가 땅으로 내던져졌 다, 그리고 그것들 위에서 짓밟았다; 그리고 이것은 진리를 땅으로 내던졌다
(단. 8:5, 9, 10, 12);
위에서 취급한 주제는 일반적인 교회의 상태인데, 이는 유태 교회 뿐만 아니라 이 교회의 뒤를 잇는 기독 교회의 상태까지를 다루고 있다; 그 이유가 주님의 말씀은 보편적이기 때문이다. 유태 교회의 측면에서, “염소들 중의 숫염소”는 내적 진리들로부터는 아무것도 만들지 않고, 자기들의 사랑을 옹호하는 만큼에서 외적 진리들을 받아들인 이들을 의미한다. 이 진리야말로 그들에게 가장 위대하고 가장 부유해짐으로 있을는지 모른다. 이렇게 말한 이유는 그들이 그리스도, 또는 메시아를 인식하되, 그들이 기대한 것은 단순히 왕의 차원에서, 자신들에게 왕이 된 다음, 자신들을 온 세상에 있는 나라나 민족 위에 우뚝서게 하고, 자기들 아래 모든 사람들이 노예 같은 신하로 있게 만들어 주는 왕이었다. 이것이 메시아를 향한 자기들 사랑함의 근원이었다. 그들은 이웃을 향한 사랑이 무엇이었는지 전혀 몰랐다; 단지 명예나 이득 같은 것을 나눈다는 차원에서 결합하는 정도에서 이웃이라는 것을 알았다.
기독 교회의 측면에서 “염소들 중의 숫염소”에 의해 기쁨들로부터 외적 진리들에 있는 이들, 즉 분리된 신앙에 있는 이들이 의미된다; 그 이유가 이들은 내적 진리들을 돌보지 않는 이들, 즉 관심이 별로 없는 이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만일 그들이 내적 진리들을 가르친다면, 성경 지식 차원에서 명성을 높이는 것, 하여 존경을 받는 것, 이득을 획득하는 만큼에서 일 뿐이다. (즉 맛보기 수준, 사탕발림의 수준이다는 말이다, 사실 그 이상은 그들 자신도 모르고 있을지 모른다 역자주.) 즉 이 기쁨들이 자기들의 입에서 진리들이 있는 동안 자기들의 심정에서 있다. 더욱이 잘못된 해석들을 수단으로 그들은 진짜 신앙으로부터 있는 진리들마저 자기들의 사랑들을 옹호하는 쪽으로 향하게 밀어 붙인다. 이는 위의 다니엘서의 말씀들의 내적 의미에서 의미된 것들로부터도 분명해진다; 즉 “염소들 중의 숫염소”에 의해 분리된 신앙에 있는 이들이 의미된다. 서쪽으로부터 오는 숫염소는 악으로부터 임을 표시한다. 온 땅의 얼굴 위에 오되 땅에 닿지 않음은 그가 온 교회 위에 왔다를 표시한다; 그 이유가 말씀에서 “땅”은 교회가 있는 토지, 고로 교회를 뜻하기 때문이다. 그가 가진 “뿔들”은 거짓으로부터의 힘들이다 (2832항). “눈 사이에 괄목할만한 뿔”은 신앙의 진리들에 관하여 추론함으로부터의 힘들이다. 이에 대하여는 눈에 관해 살핀 대목을 참조하기 바란다. “남쪽, 동쪽, 잘생김을 향하여 자란 뿔 하나”란 천국의 빛의 상태들인 것들을 향하여서 조차, 그리고 선과 진리의 상태들에 까지로 조차 뻗쳐가는 분리된 신앙으로부터의 힘이다. “남쪽”이 빛의 상태이다는 것; 그리고 “동쪽”이 선의 상태인 것; 그리고 “잘 생김”이 진리의 상태이다는 것도 말씀의 여기 저기로부터 알는지 모른다. 그것이 “하늘들의 군대에까지 자라고, 군대의 얼마, 별들의 얼마를 땅으로 내던졌다”란 그것(분리된 신앙)이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들을 가지고 그렇게 했다를 표시한다. 이로부터 ”진리를 땅으로 내던짐“에 의해 뜻해진 것을 알게 된다, 즉 진짜 신앙, 즉 선행을 내던짐이다. 신앙은 선행을 중요시 해야 하는데, 그 이유는 신앙이 선행으로부터 진행되기 때문이다. 고대 교회에서 진리라고 불리운 것이 새로운 교회에서는 신앙이라 불리운다.
“숫염소”가 이와 같은 의미를 가지는 것을 에스겔서에서 읽어보자;
보라 내가 작은 가축과 작은 가축 사이를, 숫양들과 숫염소들 사이를 판결한다. 너희가 좋은 초장을 먹은 것이, 그리고 남은 풀밭을 짓밟은 것이 너희에게는 작은 것이더냐? 너희가 맑아진 물들을 먹고, 그 나머지 물을 너희 발로 휘저어 놓는다; 너희는 뿔들로 유약한 모든 자들을 받아서 그들이 해외로 흩으려질 때까지이다. (겔. 34:17, 18, 21);
이 구절에서도 “숫염소들”에 의해 분리된 신앙에 있는 이들, 즉 생활 앞에 교리를 놓고, 결국 생활에 관하여는 주목하지 않는 이들이 의미된다; 그럼에도 생활, 그리고 교리가 분리되지 않을 때 인간을 만든다; 그리고 생활한 것은 사후 남는다, 그러나 교리는 그것이 생활에 가담하지 않았다면 남지 않는다. 이로부터 그들은 “좋은 초장을 먹고, 남은 초장을 발로 뭉개었다”라고 말해진다; 그리고 그들은 “맑아진 물을 마시고 남은 물을 발로 휘젖는다”라고 말해진다; 또한 “유약한 자들이 흩으러질 때까지 그들을 뿔로 받는다”라고 말해진다.
이로부터 지금 “숫염소들”에 의해 뜻해진 이들, 그리고 “양들”에 의해 뜻해진 자가 누구인지 분명해졌을 것이다. 마태복음서에서:
그분 앞에 모든 민족들이 모아질 것이다, 그리고 그분은 그들을 목자가 숫염소들로부터 양떼들을 분리하듯 서로로부터 그들을 분리할 것이다; 그리고 그분은 그분의 오른 쪽에 양떼들을, 그러나 왼쪽에는 숫염소들을 놓으실 것이다 (마. 25:32, 33);
“양들”은 선행 안에, 이로부터 신앙의 진리에 있는 이들이고, “숫염소들”은 비록 신앙의 진리에는 있을지라도 선행 없이 있는 이들, 즉 분리된 신앙에 있는 이들이다는 것은 세부 사항들로부터 분명하고, 이 안에서 그런 인물들이 묘사되어져 있다
분리된 신앙에 누가 있는지, 무슨 품질을 지녔는지, 그리고 “숫염소들”에 의해 뜻해진 것은 이 두 구절로 한 번에 보여질는지 모른다; 즉 “선한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모두 각각의 나무는 잘리워서 불에 던져진다. 그러므로 너희는 그들의 열매들을 수단으로 그들을 알게 될 것이다. 나에게, 주여, 주여, 말하는 모든 이가 천국들의 왕국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천국들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자가 들어간다. 그 날에 많은 이들이 나에게, 주여, 주여, 당신의 이름으로 예언하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당신의 이름으로 악마들을 내쫓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당신의 이름으로 능력있는 많을 일들을 행하지 않았습니까? 그때 나는 그들에게 나는 너희를 모른다 하고 고백할 것이다; 나로부터 떠나라 너희 불법을 일한 자들아” (마. 7:19-23). 그리고 누가복음서에서: “그때 너희는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며 이렇게 말하기를 시작할 것이다, 주여, 주여, 우리에게 여소서; 그러나 그분은 대답하여 너희에게 말할 것이다, 나는 네가 어디서 있는지를 모른다; 나로부터 떠나라 너희 불법의 일꾼들아” (눅. 13:25-27). 그러나 “숫염소”가 좋은 의미에서 의미하는 것, 특히 제물로 사용될 경우, 때로는 예언서들에서의 경우에 대하여는 차후 주님의 신성한 자비로부터 다시 살필 것이다.

그리고 그 웃옷을 피에 담갔다. 이는 그들은 그것을 악들로부터 온 거짓들로 더럽혔음을 의미한다. 이는 “피에 담그다”의 의미가 거짓들로 더럽히는 것이다로부터 분명해진다; 그 이유가 “피”는 반대 의미에서 거짓화된 진리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숫염소의 피인 바, 이를 수단으로 기쁨들로부터의 외적 진리들, 즉 분리된 신앙에 있는 이들이 가지는 진리들 같은 것이 의미되는 바, 이것이 악들로부터의 거짓들이 뜻해짐은 이어지는 구절의 야곱의 말들, 즉 “악한 짐승이 그를 삼켰다; 요셉은 정녕 갈기갈기 찢기운 것이 분명하다”로부터 확실하다; 그 이유가 이 말들에 의해 악의 물욕이 그것을 소멸되게 했다는 것, 고로 거짓들로부터 그것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었다가 의미되었기 때문이다. 거짓의 근원에는 셋이 있다; 즉 교회의 교리, 감각의 오류, 물욕으로부터의 생활인데, 마지막 것이 가장 지독하다.

그리고 그들은 여러 색깔로 된 웃옷을 보냈다. 이는 그러므로 해서 더럽혀져 나타남을 의미한다. 이는 “여러 색깔로 된 웃옷”의미가 나타남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들이 더럽혀져 있었다는 것은 피에 웃옷이 담가짐에 의해 뜻해진다.

그리고 그들은 그것을 그들의 아버지에게 가져다 주었다. 이는 고대인과 원시 교회 속의 선들과 진리들과 비교해봄을 의미한다. 이는 여기서 “아버지”인 야곱의 표현함이 고대 교회, 또한 원시 교회, 즉 시작 당시의 기독 교회이다로부터 알려진다. 이와 같은 웃옷을 이 교회에 가져오는 것은 내적 의미에서 진짜 교회의 선들과 진리들에 왜곡된 선들과 진리들을 비교함을 실시하는 것이다. 위에서 야곱이 고대 교회와 더불어 원시 교회, 시작때의 기독교회를 표현한다고 말한 이유는 모두가 내적 측면에서는 같고 오직 외형에서만 다를 뿐이어서이다. 고대 교회의 외적인 것들은 주님에 대한 표현물, 그리고 그분의 왕국의 영적, 천적인 것들에 대한 표현물, 즉 사랑과 선행, 이로부터 파생된 신앙에 대한 표현물이 전부이였다; 결과적으로 이와 같은 것들이 기독 교회 속에 있다. 고로 고대 교회의 외적인 것들, 또한 유태 교회의 외적인 것들이 벗겨질 때, 즉 포장을 풀면, 기독 교회가 드러나진다. 이것이 성전의 휘장이 갈라짐으로도 의미되었다 (마. 27:51; 막. 15:38; 눅. 23:45). 이런 이유로 아버지 야곱은 고대 교회, 뿐만아니라 원시 기독교회도 표현했다.

이것을 우리는 발견했습니다. 이는 이것이 그들에게 그렇게 나타난다를 의미한다. 이는 시리즈의 내적 의미로부터 알려진다; 그 이유가 그들은 이것이 요셉의 웃옷이라고 말하지 않고 그것을 발견했다고만 말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을 그의 아들의 것인지, 아닌지를 알도록 그 웃옷을 남겨두었다. 이로부터 이것은 그들에게 그렇게 나타나고 있다를 의미하게 되는 것이다.

바라건대 이것이 당신의 아들의 웃옷인지 아닌지 알아 보십시오. 이는 거기에 비슷함이 있었는지 여부를 의미한다. 이는 “그것이 무엇인지 여부를 아는 것”은 그것이 무엇과 비슷할지를 의미함에서 알게 된다. 이것은 앞에 진행된 것과 관련이 있고, 그리고 그것 뒤를 잇는다, 즉 비교해봄이 교회의 진짜 선들과 진리들과 왜곡된 선들과 진리들 사이에 실시되는 것이다; 이는 피에 담근 웃옷을 아버지에게 가져옴의 의미와도 의미가 상통한다. 그러므로 이 구절의 “당신의 아들의 웃옷인지를 알아보십시요”에 의해 그것이 무엇 같은지를 비교해보아야 함이 의미된다.

그리고 그는 그것을 알았다. 이는 참으로 그것이었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들은 요셉의 웃옷을 가져 왔다란 그것은 교회 속의 진리였음을 의미한다. 이는 “웃옷”의 의미가 교회 속의 진리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러나 그것이 더럽혀졌을 때, 그것은 [교회 속의 진리] 이었으나, 고대와 원시 교회의 것과 같은 진리는 아니었다; 그러므로 참으로 그것이었다라고 의미된다.

악한 들짐승이 그를 삼켰다. 이는 악 속의 탐욕들이 그것을 소멸시켰음을 의미한다. 이는 “악한 들짐승”의 의미가 탐욕들의 생명으로부터의 거짓말이다로부터; 결과적으로 탐욕들이다; 그리고 “삼키다”의 의미가 소멸시킴이다로부터, 그 이유는 교회의 진리를 서술하기 때문이다. 교회의 핵심 진리는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함이 제 일이 되는 것이다 (막. 12:29-31). 탐욕들이 이 진리를 소멸되게 한다; 그 이유가 탐욕의 생명에 있는 이들은 사랑과 선행의 생명 안에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이 두 생명은 정확히 반대되기 때문이다. 탐욕들의 생명은 자기를 사랑함에만 존재한다, 그리고 자기로부터, 또는 자기를 위하여가 아니면 이웃이 없다. 그러므로 이 생명 안에 있는 이들은 자기들 안에 있는 선행을 소멸되게 한다; 그리고 선행을 소멸한 이들은 주님을 사랑함 또한 소멸되게 한다; 그 이유가 선행 외에 주님을 사랑하는 수단이 없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주님은 선행 안에 계시기 때문이다. 선행에 애착함은 천국의 애착함 자체이고, 이는 주님만으로부터 오고 있다. 이상으로부터 악의 탐욕들이 교회의 핵심 생명을 소멸되게 한다는 것, 이 소멸을 위한 수단으로 고안된 것이 신앙이 구원함이라는 교리이다; 그리고 이것이 선행과 분리될 때, 진리 자체는 더럽혀진다, 그 이유가 이때는 선행이 무엇인지, 이웃이 무엇인지조차도, 결과적으로 인간의 내적인 것이 무엇인지, 천국이 무엇인지 등등이 더 이상 알려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인간의 내적인 것, 그리고 인간 안의 천국이 선행이기 때문, 즉 타인에게, 사회에, 나라에, 교회에, 주님의 왕국에, 주님 자신에게 호의적으로 기꺼이 해보려 함이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우리에게 오는 결말은, 필수적인 이런 것들이 알려지지 않을 때, 그리고 이 필수적인 것들에 반대될 때, 또는 탐욕이 우리를 통치할 때, 교회의 진리의 품질이 무엇일 것인지에 대하여 이다. 탐욕들의 생명이 이런 진리들에 관하여 말할 때, 진리가 더 이상 인식되지 않을 정도의 수준에서조차 더럽혀지지 않을까?
그가 선행의 선 안에 있지 않으면 아무도 구원될 수 없다; 다시 말해 그는 선행의 애착에 감명받아져 있어야 한다; 감명된 자는 타인에게 호의적일 수밖에 없고, 호의적 자세로 타인을 대한다. 선행에 있는 자만이 신앙의 진리를 받아서 자신의 것이 되게 할 수 있다. 이것은 천국에 있는 이들로부터 확실히 알았는데, 이들과 더불어 나는 대화하는 것이 허락되어졌다. 거기서는 모든 이가 자신들의 선행의 품질에 따른 선함과 아름다움과 더불은 선행의 형체들이다; 그들의 기쁨, 만족, 행복은 선의(호의, 친절, good-will)로부터 타인에게 선을 행할 수 있음으로부터 있게 된다. 선행으로부터 살아오지 않았던 이들은 천국과 천국의 환희(joy, 기쁨)가 호의적이려 애씀과 이로부터 적절히 잘 행함에 존재한다는 것을 아는 것이 가능할 수 없다; 그 이유는 그의 천국은 자신에게 잘 해주려는 태도 안에 있다고 생각하고, 이 생각으로부터 타인에게 적절히 행동하기 때문이다. 사실상, 이것이 지옥이다. 천국과 지옥은 이미 말한 대로 이런 사항으로부터 구별된다; 즉 천국은 선의로부터 선을 행함이고, 지옥은 악의(ill-will)로부터 악을 행함이다. 이웃을 향한 사랑 안에 있는 이들은 선의로부터 선을 행한다; 그러나 자기를 사랑함 안에 있는 이들은 악의로부터 악을 행한다. 이에 대한 이유는 이렇다, 즉 자신밖에 누구도 사랑하지 않는 이들은 자신 안에서 상대를 보는 만큼에서, 또는 상대 안에 자신이 들어 있는 만큼에서 타인을 사랑한다; 또한 그들은 이것들 안에 증오심을 담고 있어, 그나마 이런 상황에서 퇴조되자 마자, 기다렸다는 듯, 이 증오심은 튀쳐나온다. 이것은 흡사 강도들 같다; 그들은 약탈함이 성공되면, 서로를 죽이려는 바램을 심정에 품고 있다.
이런 사항들로부터 알게 되는 것은, 천국이 무엇인지, 그것은 이웃을 향한 사랑이다는 것; 지옥이 무엇인지, 그것은 자기를 사랑함이다는 것이다. 이웃을 향한 사랑에 있는 이들은 신앙의 모든 진리들을 받을 수 있다, 동시에 이 진리들에 감화되고 그 진리들을 자신으로 만든다; 그 이유가 이웃을 향한 사랑 안에 신앙의 모든 것이 있기 때문, 천국도, 주님도 그 안에 계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기를 사랑함 안에 있는 이들은 신앙의 진리들을 결코 받을 수 없다, 그 이유는 지옥이 자기 사랑 안에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기 영예와 이익을 위하여서가 아닌 여하한 방법으로는 신앙의 진리를 받지를 않는다; 고로 그들이 신앙의 진리들로 감동되어 자신의 것으로 만들리 만무하다; 그들이 감동되는 것은 신앙의 진리를 부정하는 때이다. 그들은 자신의 명예와 이득을 위한 형편상 입으로 신앙의 진리를 설파할 뿐, 심정으로는 천국과 지옥이 있는 것, 사후 산다는 것, 말씀으로부터 말해지는 모든 것, 고로 사랑과 신앙에 관한 모든 것마저 믿지 않는다. 이들이 예배드릴 때 그들 역시 자신들에게 믿는다고 나타난다; 그러나 이렇게 나타나는 이유는 그들이 어릴적부터 이런 믿음이라는 분위기에서 양육되어 왔기에 몸에 배어서 자동적으로 느끼는 믿음일 뿐이다; 따라서 이런 예배 분위기를 벗어나 자신 안에서 골몰해지면, 그는 아무것도 믿지 않는다, 고로 자기 사랑이 좋아하는 것쪽으로 고안해낸 삶을 따라간다, 게다가 이런 삶의 원리들을 그는 진리들이라 부른다, 더 나아가 이런 자기 삶의 원리를 뒷받침할 근거를 말씀의 글자 의미로부터 찾거나, 뾰족한 수가 없으면, 글자들을 이리저리 꿰맞추기도 한다. 하여 얼핏보면 성경의 몇 장 몇 절로부터 등등을 나열한 듯 해도 실상 이것의 출발지는 거짓들이다. 이런 것들이 분리된 신앙에서 출발한다는 말이다.
더욱이 알아야 하는 것은, 모든 것들은 사랑들 안에 있다는 점이다; 그 이유가 사랑들이 생명을 만들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주님의 생명은 사랑들 안으로만 흐르고 있다; 고로 사랑이 이러이러하면, 생명도 이러이러하다, 그 이유는 사랑이 생명의 그릇이기 때문이다. 이웃을 향한 사랑은 천국의 생명을 받는다; 이웃을 향한 사랑 안에 천국의 모든 것이 있다, 그리고 자기를 사랑함 안에 지옥의 모든 것이 있다. 모든 것들이 사랑들 안에 있다는 것은 자연계의 많은 것들로부터도 예증될는지 모른다. 동물들, 땅 위를 걷든, 공중을 날든, 바다에서 헤엄을 치든, 모두는 자기들의 사랑들에 따라 재촉되어진다; 그리고 그들의 생활에 도움이 되는 것은 무엇이든, 즉 자기들의 생계, 거처, 출산, 번식에 도움이 되는 것들은 그들의 사랑들 안으로 들어가 있는다. 그러므로 각 종류의 동물들은 자기들의 식품, 거처, 결혼에 관한 것, 즉 짝짓는 것, 둥우리를 짓는 것, 알을 놓는 것, 자기들의 새끼를 양육하는 것 등등을 알고 있다.
꿀벌 또한 작은 방을 어떻게 짓는지, 꽃으로부터 꿀을 어떻게 빨아야 하는지를, 그것을 벌집에 어떻게 채워야 하는지를, 겨울을 대비해 어떻게 꿀을 저장해야 하는지를 알고 있다, 그리고 여왕 아래 어떤 통치의 형태를 갖추어야 하는지 조차 알고 있다; 이 외에도 경이로움은 훨씬 많다. 이 모든 것들은 그들의 사랑들 안으로 유입을 수단으로 결과되어진다; 생명의 결과는 그들의 애착들의 형체들을 수단으로 다양해진다. 인간 역시 이 범주에 있는 바, 천국의 사랑 안에 있지 않은 것은 무엇이 있을까? 천국 안에 있는 것이 지혜와 총명의 모든 것이 아닐까? 이로부터도 선행 안에 있는 자 외에는 천국에 받아지지 않는다는 것, 선행으로부터 그들은 모든 진리들을 받는 수용력과 이 진리들, 즉 신앙의 모든 것에 감화될 수 있다. 그러나 이 반대적인 것은 분리된 신앙에 있는 이들, 즉 얼마 만큼의 진리들 안에 있으나 선행 안에 있지 않은 이들에게 발생한다. 다시 말해 그들의 사랑들은 자기들의 사랑, 즉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 일치하는 정도만큼에서만 받아들임 있다. 이와 같은 것은 지옥들이다.

요셉이 찢겨진 것이 분명하다. 이는 모두가 거짓으로부터 임을 의미한다. “찢겨 지다”의 의미가 거짓들로 해서 사라지다, 또는 모든 것이 거짓들로부터임 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악으로부터의 거짓들, 또는 탐욕들로부터의 거짓들이 여기서 뜻해진 것이다; 이에 관하여는 앞에 살핀 것도 다시 보기 바란다.

그리고 [야곱은] 그의 옷을 찢었다. 이는 파괴된 진리 때문에 슬퍼함을 의미한다.
이는 “옷을 찢음”의 의미가 파괴된 진리 때문에 슬퍼함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리고 삼베옷을 그의 허리에 둘렀다. 이는 파괴된 선 때문에 통곡함을 의미한다. 이는 “허리에 삼베옷을 두름”의 의미가 파괴된 선을 위하여 통곡함에 대한 표현이다로 알게 된다. 그 이유가 “허리”는 부부의 사랑, 그러므로 천적, 영적인 모든 사랑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은 상응으로부터 이다; 그 이유가 모든 기관, 사지, 내장 등의 신체 부위는 웅대한 사람에 상응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하여는 각 장의 끝을 참조하면 될 것이다. 이와 같이 허리도 웅대한 사람, 또는 천국과 상응하는데, 진짜 부부의 사랑 안에 있어 왔던 이들과 상응한다; 그리고 부부의 사랑이 모든 사랑들의 기초이고 근본되기에, “허리”에 의해서는 일반적으로 모든 천적, 영적 사랑이 의미된다. 이로부터 고대인들은 파괴된 선을 두고 슬퍼할 때 허리에 삼베를 둘렀다, 그 이유가 모든 선은 사랑 속에 있기 때문이다. 이 슬픔을 증명하기 위하여 허리에 삼베를 두르는 것에 대하여 말씀의 역사, 예언 부분에서 읽어볼 수 있다. 아모스서에서:
나는 너희 축제를 슬퍼함으로, 그리고 모든 너의 노래들을 애곡함으로 바꾸어놓을 것이다; 고로 나는 네 허리에 삼베옷을 두르게 할 것이다, 그리고 모든 이의 머리를 대머리가 되게 할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것을 독생자를 잃은 슬픔 같이 만들 것이고, 거기로부터 결국 쓴 날들 같을 것이다 (암. 8:10);
위에서 “허리에 삼베옷을 두름”은 파괴된 선들 때문에 있는 슬픔을 표시한다; “모든 허리”는 사랑의 모든 선들을 표시한다. 요나서에서:
니느웨 사람들은 하느님을 믿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단식을 선포했다, 그리고 그들의 가장 큰 자로부터 가장 작은 자까지 삼베옷을 입었다. 그리고 말씀이 니느웨 왕에게 왔을 때, 그는 그의 왕좌로부터 일어났다, 그리고 자기 위로부터의 도포를 내려놓고, 자기를 삼베옷으로 덮었다, 그리고 재 위에 앉았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선포했다, 사람과 짐승은 삼베옷으로 덮어지게 하라 (욘. 3:5-8);
위는 니느웨를 멸해지게 하는 악 때문에, 고로 파괴된 선 때문에 있는 슬픔을 표현하려는 표시임이 분명하다.
에스겔서에서:
그들은 자기들의 음성으로 네 위에 외쳐 발음할 것이다, 그리고 통렬하게 외칠 것이다, 그리고 먼지가 자기들 머리 위에 오게 할 것이다, 그들은 재에서 자신을 굴릴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너희를 위하여 자신들을 대머리로 만들 것이다, 그리고 삼베 옷으로 띠를 두를 것이다
(겔. 27:30, 31);
위는 두로를 두고 말해졌다, 세부 사항들은 거짓들과 악들을 위해 슬퍼함, 고로 파괴된 진리들과 선들 때문에 슬퍼함을 표현하고 있다. “외쳐 발음하고 통렬히 외치는 것”은 거짓, 또는 파괴된 진리 때문에 통곡함을 표시한다; “먼지가 머리 위에 오게 함”은 악 때문에 저주되었음을 표시한다; “재에서 자신을 굴림”은 거짓 때문에 지옥에 떨어짐을 표시한다; “자신을 대머리로 만듦”은 자연적 인간이 진리를 가지지 않았기 때문에 슬퍼함을 표시한다; “삼베옷으로 자신에게 띠를 두름”은 선을 가지지 않았기 때문에 슬퍼함을 표시한다. 예레미야서에서:
오 내 백성의 딸은 삼베옷으로 네 자신에 띠를 두르라, 그리고 재에서 네 자신을 굴려라; 너로 독생자의 슬픔을, 통렬하게 소리내어 울어라; 그 이유가 약탈자가 우리에게 갑자기 닥쳤기 때문이 다 (예. 6:26).
다시:
시온의 딸의 원로들이 땅에 앉을 것이다, 그들은 침묵할 것이다, 그들은 먼지가 자기들 머리에 오게 할 것이다, 그들은 삼베옷으로 자신들에 띠로 두를 것이다, 예루살렘의 처녀들은 그들의 머리를 땅으로 내려가게 할 것이다 (애. 2:10);
위 구절 역시 파괴된 선과 진리의 종류에 따른 비슷한 표현들이다.
이사야서에서:
모압에 관한 예언이다; 그들은 울려고 바윗과 디본으로, 높게 해놓은 장소 안으로 올라갈 것이다; 모압은 느보 때문에, 므드바 때문에 소리내어 악쓸 것이다; 모든 그의 머리들은 대머리이다, 모두 각각의 턱수염이 밀어졌다. 그의 거리들에서 그들은 삼베옷으로 띠를 둘렀다, 지붕꼭대기와 그의 거리들에서 그는 완전히 소리내어 악쓸 것이다, 울면서 아래로 갈 것이다 (이. 15:2, 3);
“모압”은 선들에 섞음질하는 이들을 표시한다. “모압”에 의해 의미된 이 섞음질함 때문에 있는 슬퍼함이 이 종류의 악에 상응하는 것과 같은 것으로 묘사되고 있다; 그러므로 거의 같은 것이 예레미야서에서 발생한다:
모든 머리는 대머리이다, 그리고 모든 턱수염은 밀려졌다; 손이 베어졌고, 삼베옷으로 허리를 둘렀다. 모압의 지붕꼭대기와 거리들에서 통째로 슬퍼함이 있다 (예. 48:37, 38).
히즈키야왕이 랍사게가 예루살렘을 향하여 뱉은 말을 들었을 때, 그는 자기 옷을 찢고, 자신을 삼베옷으로 덮었다 (이. 37:1; 왕하. 19:1);
그가 여호와를 향하여, 왕과 예루살렘을 향하여 말했기 때문에, 그러므로 슬퍼함이 있었다; 이것이 진리에 맞서 있었다는 것은 그가 자기 옷을 찢음에 의해 의미되었다; 그리고 이것이 선을 향하여 있었다는 것은 자신을 삼베옷으로 덮었다에 의해 의미되었다. 그 이유가 말씀에서 진리가 취급되는 곳에서는 선 역시 취급되어지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모든 세부 사항에서 선과 진리, 진리와 선의 천국의 결혼이 있기 때문이다; 다윗서에서:
당신께서는 나의 슬픔을 춤추는 것으로 바뀌게 하셨습니다; 당신은 내 삼베옷을 풀으시고, 나로 기쁨으로 띠를 두르게 하셨습니다 (시. 30:11);
위에서 “춤추는 것”은 진리들을, “기쁨”은 선들을 서술하고 있다. 이는 말씀의 다른 구절에서도 그러하다; 고로 “삼베옷을 푸는 것”은 파괴된 선 때문에 슬퍼함을 제거하는 것을 표시한다.
사무엘하서에서:
다윗이 요압에게, 그리고 자기와 더불어 있는 모든 백성에게 말했다. 너희의 옷을 찢어라, 그리고 너자신을 삼베옷으로 띠를 두르라, 그리고 아브넬 앞에서 통곡하라 (삼하. 3:31);
선하고 참된 것에 맞서 범해진 사악한 행위 때문에, 그들은 자기들의 옷을 찢고, 삼베옷으로 띠를 둘러야 한다고 다윗에 의해 명령된 것이다.
이와 같이 아합이 공평하고 정당한 것에 반대하여 행동했기 때문에, 그가 절멸할 것이라는 말을 엘리야에게서 들었을 때, 그는 자기 옷을 찢고, 그의 살 위에 삼베옷을 놓고, 단식했고, 삼베 위에 누웠고, 천천히 걸었다 (왕상. 21:27).
삼베옷이 파괴된 선을 서술한다는 것은 계시록서에서 분명해진다:
그가 여섯째 봉인을 떼었을 때에, 오 큰 지진이 있었다, 그리고 태양이 삼베옷 같이 검게 되었다, 그리고 달은 온통 피 같이 되었다 (계. 6:12);
“지진”은 선과 진리에 관련하여 교회의 상태의 바뀜을 표시한다; “태양”은 사랑의 선을 표시한다, 그리고 이 선이 파괴되었을 때, 삼베옷이 이를 서술한다; “달”은 신앙의 진리를 표시한다; 이 달을 피가 서술한다, 그 이유는 “피”가 왜곡되고 모독된 진리이기 때문이다.
삼베옷을 입고 재에서 굴름이 악들과 거짓들 때문에 통곡함을 표현했기에, 이것은 면목 없음도 표현한다, 따라서 회개함도 표현한다; 그 이유가 면목 없음의 제일 가는 항목은 자신에게는 악과 거짓밖에 없음을 인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똑같은 것이 회개의 진정한 것이다, 이것은 면목 없음을 통하여서만 결과되어진다, 다시 말해, 이것은 자신으로부터의 것이 고작 이런 본성 속에 있다는 것을 심정의 고백을 통하여 결과되어진다. 삼베옷을 두름이 면목 없음에 대한 표시이다에 대하여는 왕상. 21:27-29; 그리고 이것이 회개함 속에 있었다에 대하여는 마. 11:21; 눅. 10:13에서 살펴볼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이 표현물에 불과하고, 하여 오직 신체의 외적인 표시밖에 더 아무것도 없고, 심정으로부터의 내적인 것이 아닌 것에 대하여는 이사야서에서:
이것이 그의 머리가 큰고랭이(갈대) 같이 아래로 숙이는 것, 삼베옷과 재에 눕는 것이냐? 너희는 이것을 단식이라 부르고 여호와께서 열납하는 날이라 부르느냐? 이것은 내가 선택한 단식이 아니잖느냐? 사악한 자에게 묶여 있는 자를 푸는 것, 굶주린 자에게 빵을 떼는 것이 내가 선택한 단식이 아니냐? (이. 58:5-7).

그리고 많은 날 동안 그의 아들 때문에 슬퍼했다. 이는 상태를, 즉 파괴된 선과 진리 때문에 슬퍼하는 상태를 의미한다. 이는 “아들”인 요셉의 표현함이 신성한 진리, 특히 앞에서 살핀 진리이다로부터; 그리고 “날들”의 의미가 상태들이다로부터, 여기서는 크게 슬퍼함의 상태, 그 이유는 슬퍼함이 “많은 날”이라 말해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의 모든 아들들. 이는 거짓들에 있는 이들을 의미한다. 이는 “아들들”의 의미가 진리들, 반대 의미로는 거짓들, 또는 진리들, 또는 거짓들에 있는 이들이다로부터, 여기서는 거짓들에 있는 이들인데, 그 이유는 야곱의 아들들, 또는 요셉의 형제들에 의해 분리된 신앙에 있는 이들이 표현되었기 때문, 고로 신성한 진리를 소멸되게 한 이들, 고로 거짓들 안에 있는 이들이 의미되기 때문이다.

그의 모든 딸들이…일어났다. 이는 악 가운데 있는 이들을 의미한다. 이는 “딸들”의 의미가 선들이다로부터, 반대적 의미에서는 악들이다로부터, 또는 선들, 또는 악들 안에 있는 이들이다로부터 분명해진다.

그를 위로하려고. 이는 말씀의 글자 의미로부터 해석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위로함”의 의미가 어떤 것에 대한 희망을 수단으로 마음의 불편한 것, 슬픈 것을 가라앉히는 것, 여기서는 파괴된 선과 진리 때문에 슬퍼함, 또는 불편함이다; 그리고 이 슬퍼함이 말씀으로부터의 해석함들이 아니고서는 가라앉혀질 수 없기에, 그리고 야곱의 아들들과 딸들이 여기서 취급되기에, 이들에 의해 거짓들과 악들에 있는 이들이 의미되었기에, 그러므로 “위로함”에 의해서 글자의 의미로부터 만들어진 해석들이 의미된다. 그 이유가 글자 의미는 일반적인 것들을 가지기 때문, 이것들은 그릇들과 같아서, 진리 또는 거짓들로 채워질 수 있다; 고로 어떤 것을 옹호하기 위해 설명되어질 수 있다; 그리고 그것들이 일반적인 것이기 때문에, 그것들은 상대적으로 희미한 바, 내적 의미로부터 빛을 가지지 않으면 너무나 희미하다; 그 이유가 내적 의미는 천국의 빛 안에 있기 때문, 그리고 내적 의미는 천사들을 위한 말씀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글자 의미는 세상의 빛 안에 있고, 인간을 계발해주는 주님으로부터의 천국의 빛 안으로 오기 이전의 사람들을 위한 것이다. 따라서 글자 의미는 내적 의미 안으로 들어와 계발이 개시되기 이전의 단순한 이들에게 도움을 준다.
글자 의미로부터 해석함에 의해 말씀이 어떤 것을 옹호하는 쪽으로 설명하게 유도할 수 있다는 사실은 흔히 우리 주변에서 듣고 목격되기도 하는 수많은 종류의 독단적 교조, 이교들도 성경의 글자로부터, 또한 말씀의 글자로부터 확증을 갖는다는 사실로부터도 알게 된다; 예를 들면, 분리된 신앙도 주님의 아래 말씀을 가지고 확증되어진다:
하느님께서 세상을 심히 사랑하시어 그분은 그분의 독생자를 주셨다, 하여 그분을 믿는 자는 누구든지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가진다 (요. 3:16);
위 구절로부터, 또는 다른 구절들로부터도 결말을 볼 수 있는 것은 일들 없이 신앙만으로 영생이 주어진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신앙만에 집착해버리면, 주님께서 자주 말하신 것, 그분을 사랑함에 관하여, 선행과 일들에 관하여를 더 이상 주의하지 않는 쪽으로 유도되고 만다, 고로 이 요한복음의 구절에서 말해진 것쪽으로는 아니다: 즉 “받아들인 많은 이들, 그들에게 그분은 하느님의 아들이 되는 능력을 주었다, 그분의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조차 (주셨다). 이는 피로부터가 아니고, 인간의 의지로부터도 아니고, 하느님으로부터 태어나진 것이다” (요. 1:12, 13). 인간이 선행 안에 있지 아니하면 아무도 주님을 믿을 수 없다 라고 이들에게 말한다면, 그들은 곧바로 이런 해석들 안에서 피난처를 가진다; 즉 율법은 폐지되었다는 것, 우리는 죄악에서 태어난다는 것, 그러므로 우리 자신들로부터서는 선을 행할 수 없다는 것, 실행하는 이들은 자신들을 위하여 공적을 주장할 수밖에 없다는 것, 등등이다; 또한 그들은 말씀의 글자 의미로부터 이런 사항들을 확증도 한다, 마치 바리새인 과 세리의 비유에서 말해졌던 것으로부터 (눅. 18:10-14)와 다른 구절로부터 이다; 비록 이런 사항들이 위 경우 모두에 적용되지는 않을지라도 들이댄다면 변명조항으로 사용은 가능하다.
분리된 신앙 안에 있는 이들은 인간이 어떻게 살았든 은총으로부터 천국 안으로 입장될 수 있다는 것말고는 달리 믿을 수가 없다. 고로 사후 인간과 더불어 남는 것은 신앙 뿐이다. 이것을 그들은 말씀의 글자 의미로부터 확증할 수 있다. 사실상 말씀의 영적 의미 자체로부터 논리를 편다면, 주님은 모든 이를 향하여 자비를 가지신다, 고로 만일 천국이 자비 또는 은총으로부터 있고, 어떻게 살아왔느냐는 것과는 무관하다면, 모든 이가 구원된다는 논리가 됨에도 그들은 이에 대하여는 안하무인격인 태도를 보일 뿐이다. 분리된 신앙에 있는 이들이 그렇게 믿는 이유인즉, 그들이 천국이 무엇인지를 완전히 모르기 때문이다. 이렇게 모르는 이유는 선행이 무엇인지를 모르기 때문이다. 만일 그들이 얼마나 많은 평화와 기쁨, 행복이 선행 안에 있는지를 알았다면, 그들은 천국이 무엇인지를 알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사항들, 이에 대한 지식들이 그들로부터 온통 감추여 있다.
다시, 분리된 신앙에 있는 이들은 자기들이 육체와 더불어 다시 일어날 것이라는 방식 외에 달리 믿을 수가 없다. 그리고 이것은 오직 심판의 날에서 이다는 것이다; 그들은 이것도 글자 의미에 따라 설명하는 말씀의 많은 구절로부터 확증도 한다, 이런 확증과 동시에, 주님께서 말하신 부자와 나사로에 관한 말씀(눅. 16:22-31), 또는 그분이 강도에게 말하신 것, 즉 “참으로 내가 네게 말한다, 오늘 너는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눅. 23:43), 이 외에 다른 구절들에 대한 생각을 전혀 곁들이지 않는다. 신앙만에 있는 이들이 이렇게 믿는 이유는 만일 그들에게 육체는 다시는 일어나지 않는다 라고 말하면, 그들은 이런 식의 부활이라면 모두 부정한다; 그 이유는 그들은 내적 인간을 알지 못하고 납득하지도 못하는 바, 사후 내적 인간이 살아간다는 것, 선행 안에 있는 이들이 구원된다는 것, 그 이유는 내적 인간이 선행 속에 있기 때문이다는 것 또한 모르고 납득도 못한다.
분리된 신앙에 있는 이들은 선행의 일이란 가난한 자에게 주는 것, 불구자를 돕는 것 등등에만 존재한다고 밖에 달리 믿을 수가 없다, 게다가 이것을 말씀의 글자로부터 확실히 확증해 쥐고 있다. 그러나 선행의 일들이란 간단히 말해서 자신의 직업 분야에서 선하고 참된 것을 사랑함으로부터, 또는 올바르고 공평한 것을 사랑함으로부터, 올바르고 공평한 것을 행하는 것이다.
분리된 신앙에 있는 이들은 자기들의 특별난 교조를 확증하는 것밖에 다른 것을 볼 수가 없다; 그 이유는 그들은 내면의 통찰력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선행에 애착함 안에 있지 않은 이들은 외적 시각, 또는 보다 낮은 통찰력만을 가지는 바, 이로부터서는 더 높은 것들을 보는 것이 가능할 수 없다, 그 이유는 그들에게는 어둠 같이 더 높은 것이 나타날 뿐이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그들은 거짓들을 진리들로, 진리들을 거짓들로 본다, 고로 글자 의미로부터 해석함으로 해서 그들은 푸른 초장(선한 풀밭)을 짓뭉개고, 말씀의 신성한 샘의 맑은 물, 또는 말씀을 더럽힌다, 이 말씀들 같이 이다:
너희가 푸른 초장을 먹은 것, 그리고 너희 발로 남은 너의 초장을 짓뭉갠 것이 너희에게는 작은 일이더냐? 너희가 맑아진 물들을 마시고, 너희는 나머지 물을 너의 발로 휘저은다; 너희는 너희가 모든 유약한 자들이 해외로 흩어질 때까지 그들을 너희 뿔들로 치고 있다 (겔. 34:18, 21).

그리고 그는 자신이 위로되는 것을 거절했다. 이것은 있을 수 없었다를 의미한다.

그리고 그는 말했다, 나는 통곡하면서 내 아들에게로, 무덤으로 내려가야 할 것이다. 이는 고대 교회는 멸해질 것이다를 의미한다. 이는 야곱 자신이 자신에게 말하는데, 그가 고대 교회를 표현함으로부터 분명해진다; 그리고 여기서 “나의 아들”인 요셉의 표현함이 신성한 영적 평면, 또는 신성한 진리이다로부터; 그리고 “슬퍼하며 무덤으로 내려감”의 의미가 죽어짐이다. 그리고 이 죽어짐이 교회, 또는 신성한 진리를 서술할 때, 이는 멸해지다 이다.

그리고 그의 아버지는 그를 위하여 눈물을 흘렸다. 이는 내면의 슬퍼함을 의미한다. 이는 “눈물을 흘림”의 의미가 마지막 수준까지 이른 슬픔이다로부터, 고로 내면의 슬픔이다. 고대인들의 경우, 그들은 죽은 자를 놓고 외적 슬픔인 눈물을 흘림을 가지고 내면의 슬퍼함을 표현했다. 이에 대한 참고 구절로 아래를 읽어보자:
그들이 요단 건너인 아닷의 타작마당에 왔을 때, 그들은 크고 비탄에 잠겨 통곡을 했다; 그리고 그는 칠일 동안 자기 아버지를 위하여 슬퍼함을 만들었다. 그리고 토지의 주민, 가나안족이 아닷의 마당에서 슬퍼함을 보았다, 그리고 그들이 말했다, 이것은 이집트인들에게는 비탄에 잠기는 슬퍼함 이다 (창. 50:10, 11);
그리고 아브넬을 두고 다윗이 눈물을 흘림에 관하여:
그들은 헤브론에 아브넬을 매장했다; 그리고 왕은 그의 음성을 높혀 아브넬의 무덤에서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모든 백성이 울었다 (삼하. 3:32).

36절. 그리고 미디안 사람들은 그를 이집트, 바로의 신하, 친위대장 보디발에게 팔았다.

그리고 미디안 사람들이 그를 이집트에 팔았다. 이는 단순한 선으로부터의 어떤 진리 속에 있는 이들이 기억 속의 지식에 의견을 구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미디안 사람”의 표현함이 단순한 선으로부터의 진리 안에 있는 이들이다로부터; 그리고 “이집트”의 의미가 기억 속의 지식들이다로부터; 그리고 “판다”의 의미가 멀리하다 이다로부터; 그리고 요셉의 표현함이 신성한 진리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것이 단순한 선으로부터의 진리에 있는 이들에 의해 “이집트”인 기억 속의 지식들에게 팔리운다, 또는 멀어지게 된다 라고 말해질 때, 이것은 그들이 그것들에 의견을 구했음(상담했음)을 표시한다; 그 이유가 단순한 선으로부터 진리에 있는 이들은 자신들이 감각들의 오류들에 의해, 고로 이로부터 있는 기억 속의 지식들에 의해 아주 많이 인도되는 것을 허용하기 때문이다. (이를 이용하면 이상한 교파, 즉 논리상 맞지 않는 교리, 얼토당토 않는 교리, 한마디로 제멋대로 지껄이는 부흥 설교인데도 수많은 인파가 몰린다. 이때의 이 인파의 대다수가 미디안 사람, 즉 단순한 선으로부터 진리 안에 있는 자 일지 모른다. 역자주.)
28절에서 잠간 언급한 것은, 미디안 사람에 의해 요셉은 구덩이로부터 꺼내어졌고, 이스마엘 사람들에 팔리웠다; 이 정황으로 보건대, 요셉이 이집트에서 팔리려면 이스마엘 사람이어야 할 것이라 추정된다. 그러나 요셉이 이스마엘 사람이 아니고, 미디안 사람에 의해 팔리웠다고 기록된 이유는 이스마엘 사람이 단순한 선 안에 있는 이들을, 미디안 사람은 단순한 선으로부터의 진리 안에 있는 이들을 표현하기 때문이다. 요셉, 또는 신성한 진리는 선 안에 있는 이들에 의해서는 팔리울 수 없었다, 그러나 진리 안에 있는 이들에 의해서만 팔리울 수 있다; 그 이유가 선 안에 있는 이들은 신성한 진리가 무엇인지를 선으로부터 알고 있으나, 진리 안에 있는 이들은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교회인들은 대체로 두 종류로 구별된다; 즉 선 안에, 그리고 진리 안에 있는 이들이다; 선 안에 있는 이들은 천적 부류들이고, 진리 안에 있는 이들은 영적 부류들이다. 이 둘 사이는 큰 차이가 있다. 선 안에 있는 이들은 선을 위하여 선을 행함에 애착하는 이들이다; 게다가 다른 이들로부터 자기들의 선행에 어떤 보답을 기대함이 심정 속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들이 기대하는 보답이라면 자기들이 선을 행할 수 있게 허락되는 것이다; 그들은 이렇게 행함 안에서 환희(기쁨, joy)를 지각한다. 그러나 진리 안에 있는 이들 역시 선을 행함의 애착 안에 있다; 그러나 선 자체를 위하여서가 아니고, 선을 행함이 명령된 사항이기 때문에서이다. 게다가 대부분의 사람들이 보답을 기대한다; 그들의 환희는 이 보답으로부터, 그리고 영광됨으로부터 있어진다.
이상 살핀 결과, 분명해지는 것은, 선으로부터 선을 행하는 이들은 그것을 내적 애착으로부터 행한다는 것, 한편, 진리로부터 선을 행하는 이들은 그것을 얼마의 외적 애착으로부터 행한다는 것이다. 이로부터 차이가 분명해지는 것은, 전자는 내적 인간이다는 것, 후자는 외적 인간이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내적 인간인 이들은 요셉에 의해 표현되는 신성한 진리를팔 수 없다, 즉 멀리할 수 없다; 그 이유는 이들은 선으로부터 진리를 지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들은 감각들의 오류들, 고로 기억 속의 지식들에 인도당하지 못한다(끌려가지 않는다). 그러나 외적 인간인 이들은 그것을 팔 수 있고 멀리할 수 있다; 그 이유는 그들이 선으로부터 진리를 지각하지 못하고, 그것을 교리나 교리 선생들(목사들)로부터 알기 때문이다; 그리고 만일 그들이 기억 속의 지식에서 의견을 듣는다면, 그들은 오류들에 의해 한방에 자신들을 끌어가게 내놓는다; 그 이유가 그들이 내향의 명령(dictate)을 가지지 않고 있어서이다. 이런 이유로 요셉은 이스마엘에 의해 팔리우지 않고 미디안에 의해 팔린 것이다.

바로의 신하 보디발. 이는 내면의 기억 속의 지식들을 의미한다. 이는 신하 (chamberlain, 시종)의 의미가 내면인 것이다로부터, 이는 아래에서 말한다; 그리고 “바로”의 표현함이 기억 속의 지식들이다로부터; 그 이유가 “이집트”에 의해 일반적 측면에서의 기억 속의 지식들이 의미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로” 역시 같은 의미 선상에 있다; 그 이유는 말씀에서 토지, 나라에 의해 의미되는 것은 거기의 왕에 의해서도 의미되기 때문이다. 내면의 기억 속의 지식들이 “바로의 신하”에 의해 의미되는 이유는 신하 (시종)의 업무가 왕의 내무적인 것들에 연결되기 때문이다. 이 신하들은 신하들 중 더 뛰어난 자들인데, 이는 원어에서의 이 단어의 의미로부터도 분명해진다.

친위대장. 이는 해석을 위해 제일에 속하는 것들을 의미한다. 이는 제 일인 자(prince)의 의미가 제 일인 것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여기서 “친위 대장”이 해석을 위해 제일인 것을 표시하는 이유는 취급된 주제가 신성한 진리이기 때문이고, 이 진리가 단순한 선으로부터의 진리 안에 있는 이들이 기억 속의 지식들에 의견을 구함에 의해 팔리웠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말씀의 글자 의미로부터 해석함들 이다; 그리고 “친위대들(guards)”에 의해서는 섬기는 것들이 의미된다.
**************************************

창세기 제 38 장

성경: 창세기 38장

1. 그리고 이 즈음에 유다는 그의 형제들로부터 떨어져 내려 갔다, 그리고 남자 아둘람족 에게로 길을 잘못 들었다, 그리고 그의 이름은 히라였다.
2. 그리고 유다는 거기서 가나안족 남자의 딸을 보았다, 그리고 그녀의 이름은 수아였다. 그리고 그는 그녀를 데려왔다, 그리고 그녀에게 왔다.
3. 그리고 그녀는 임신했고 아들을 낳았다, 그리고 그는 그의 이름을 엘이라 불렀다.
4. 그리고 그녀는 다시 임신했고 아들을 낳았다, 그리고 그녀는 그의 이름을 오난이라 불렀다.
5. 그리고 그녀는 다시 더 임신해서 아들을 낳았다, 그리고 그녀는 그의 이름을 셀라라고 불렀다. 그리고 그는 그녀가 그를 낳을 때 그집에 있었다.
6. 그리고 유다는 그의 장자 엘을 위하여 여인을 데려왔다, 그리고 그녀의 이름은 다말이었다.
7. 그리고 유다의 장자, 엘은 여호와의 눈에서 악이었다. 그리고 여호와께서는 그를 죽게 하셨다.
8. 그리고 유다는 오난에게 말했다, 네 형의 아내에게 오라, 그리고 그녀에게 남편의 동생된 의무를 수행하라, 그리고 네 형의 씨를 일으키거라.
9. 그리고 오난은 그 씨가 자기 것일 수 없음을 알았다. 그리고 그가 그의 형의 아내에게 왔을 때이다, 그는 그것을 땅쪽으로 파괴하여서, 그의 형에게 씨를 주지 않게 했다.
10. 그리고 그의 이 짓은 여호와의 눈에서 악이었다. 그리고 그분께서는 그 또한 죽게 하셨다.
11. 그리고 유다가 그의 며느리 다말에게 말했다, 내 아들 셀라가 젊은 성인이 될 때까지 네 아버지 집에서 과부로 남아 있거라. 그 이유는 그가 그의 형제들 같이 죽지 않도록 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말은 가서 그녀의 아버지의 집에서 머물렀다.
12. 날들이 늘어나졌다, 그리고 유다의 아내 수아의 딸이 죽었다. 그리고 유다는 위로 받아졌 다, 그리고 그의 양떼의 털을 깎는 자 쪽으로 그와 그의 동료 아둘람 사람 히라는 딤나로 올라갔다.
13. 그리고 누가 다말에게 말하기를, 너의 시아버지가 그의 양털을 깎으러 딤나로 가더라.
14. 그리고 그녀는 그녀의 과부의 옷을 벗고, 자신을 너울로 덮고, 그리고 자신을 둘둘말았다, 그리고 딤나로 가는 길에 있는 샘들의 문에 앉았다. 그 이유가 그녀는 셀라가 성장한 것을 보았고, 그리고 자기가 여인으로 그에게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15. 그리고 유다가 그녀를 보았다, 그리고 그녀가 창녀라고 생각했다, 그 이유는 그녀가 자기 얼굴들을 덮어 놓고 있었기 때문이다.
16. 그리고 그는 길가에 있는 그녀에게로 길을 잘못 들었다, 그리고 말했다, 청컨대 내가 너에게 들어가도록 허락하라. 그 이유는 그는 그녀가 자기의 며느리인 것을 몰랐기 때문이 다. 그리고 그녀가 말했다, “당신이 나에게 들어 온다면 나에게 무엇을 주시렵니까?”
17. 그리고 그는 말했다, “나는 너에게 양떼로부터 염소들 중에서 새끼를 보낼 것이다.” 그리고 그녀는 말했다, “당신이 그것을 보낼 때까지 어떤 담보물을 주시렵니까?”
18. 그리고 그는 말했다, “무슨 담보물을 내가 너에게 주랴?” “당신의 손에 있는 도장과 머리 수건과 지팡이 입니다.” 그리고 그는 그녀에게 그것들을 주었다, 그리고 그녀에게 왔다, 그리고 그녀는 그로부터 임신하였다.
19. 그리고 그 여자는 일어났다, 그리고 너울을 벗었다, 그리고 그녀의 과부 옷을 입었다.
20. 그리고 유다는 그의 동료 아둘람 사람의 손에 염소 새끼를 들려서 여인의 손에서 담보물을 받아오도록 보냈다. 그리고 그는 그녀를 발견하지 못했다.
21. 그리고 그는 그곳의 사람들에게 물었다, 말하기를, 길가 샘들에 있었던 창녀는 어디에 있소? 그리고 그들이 말했다, 거기에 창녀는 없었다.
22. 그리고 그는 유다에게 되돌아와서 말했다, 나는 그녀를 발견하지 못했다. 그리고 또한 그 곳의 사람들이 말했다, 거기에 창녀는 없었다.
23. 그리고 유다는 말했다, 그녀로 그것을 자기에게 가져가게 하라, 그렇지 않으면 필시 우리가 책임을 뒤집어 쓸지 모른다. 보라 나는 이 새끼를 보냈다, 그리고 너는 그녀를 찾지 못했다.
24. 그리고 석 달이 지나갔다, 그리고 누군가 유다에게 말했다, 말하기를, 당신의 며느리 다말이 음란하게 놀아났다. 그리고 더구나 그녀는 매춘으로 아이와 함께 있다. 그리고 유다가 말했다, 그녀를 끌어내라, 그리고 그녀를 태워라.
25. 그 여자는 끌려나갔다, 그리고 그 여자는 그녀의 시아버지에게 보내졌다, 말하기를, 이것들이 있는 사람에 의해서 나는 아이와 함께 있다. 그리고 그 여자는 말했다, 청컨대 이것들, 도장과 머리 수건과 지팡이가 누구의 것인지 인정하라.
26. 그리고 유다는 그것들을 인정했다, 그리고 말했다, 그 여자가 나보다 더 정당하다. 내가 그녀에게 내 아들 셀라를 주지 않은 까닭이다.
27. 그리고 산고를 겪는 때가 오고 있었다, 그리고 보라, 쌍둥이가 그녀의 자궁에 있었다.
28. 그리고 그 여자는 해산하고 있을 때, 한 아이가 손을 내밀었다. 그리고 산파가 잡고 그의 손에 두 번 물들인 것을 매었다, 말하기를, 이것이 먼저 나왔다.
29. 그리고 그는 자기 손을 뒤로 당겼다, 보라 그의 형제가 나왔다, 그리고 그 여자는 말했다, 어찌하여 너는 깨뜨려서 네 위에 깨뜨림(위반)이 있느냐? 그리고 그는 그의 이름을 베레스라고 불렀다.
30. 그리고 그 뒤에 두 번 물들인 (것을) 맨 그의 형제가 나왔다. 그리고 그는 그의 이름을 제라라고 불렀다.

각 절의 내적 의미

1-5절. 그리고 이 때에서 있었다. 그리고 유다는 그의 형제들로부터 아래쪽으로 갔다, 그리고 남자, 아둘람족에게로 까지 길을 잘못 들어섰다, 그리고 그의 이름은 히라였다. 2 그리고 유다는 거기서 가나안족 남자의 딸을 보았다, 그리고 그녀의 이름은 수아였다. 그리고 그는 그녀를 데려왔다, 그리고 그녀에게 왔다. 3 그리고 그녀는 임신했고 아들을 낳았다, 그리고 그는 그의 이름을 엘이라 불렀다. 4 그리고 그녀는 다시 임신했고 아들을 낳았다, 그리고 그녀는 그의 이름을 오난이라 불렀다. 5 그리고 그녀는 다시 더 임신해서 아들을 낳았다, 그리고 그녀는 그의 이름을 셀라라고 불렀다. 그리고 그는 그녀가 그를 낳을 때 그집에 있었다.

그리고 이 때에서 있었다. 이는 뒤따라오는 것들의 상태를 의미한다. 이는 “때(time)”의 의미가 상태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뒤이어지는 것들의 상태이다가 “이 때에서 있었다(it came to pass in this time)”라고 말해짐에 의해 의미되고 있다; 그 이유가 …있었다는 것은 뒤이어지는 것과 관련이 있다는 말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시리즈에서 뒤이어지는 것들은 앞의 시리즈로부터 흐르고 있다. 즉 앞 장에서의 것은 대체로 야곱의 아들들이 요셉을 판 것, 그를 팔아버리자고 설득한 자가 유다였다는 것; 이 말을 했다, “유다가 그의 형제들에게 말했다, 우리가 우리의 형제를 죽이고, 그의 피를 감춘다고 무슨 이득이 있는가? 가서 그를 이스마엘 사람에게 팔자” (26, 27절), 이 구절에 의해 신성한 진리가 그들에 의해, 특히 유다에 의해 멀어진 것이 의미되었고, 대략적 의미에서 유다에 의해서는 유다 지파가 의미되고, 일반적으로는 선이라면 무엇이든 모든 선에 반대하도록 자신을 타락되게 해버린 교회인을 의미한다. 이것들이 “이 때에서”라고 말해짐을 수단으로 관련되고 있다; 그 이유가 지금 취급되려는 주제가 유다이고, 가나안족 여인에 의해 그의 아들들의 출생에 관련된 것, 그리고 그 후에 자기 며느리 다말에 의한 아들의 출생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사항들을 수단으로 이 지파와 더불어 설립되는 교회의 것들에 관련되는 유다 지파가 내적 의미에서 서술된다.
“때”에 의해 상태가 의미된다는 것, 이로부터 “이 때에서 있었다”에 의해서는 뒤이어지는 것들의 상태가 의미된다고 말한 것을 두고 아마 의아히 여겼을지 모른다; 그 이유는 “때(time)”라고 생각한 것이 어떻게 상태(state)로 바꾸어질 수 있는지를 납득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는 말씀에서 흔히 등장하는 “때”가 상태에 관련되는 어떤 것으로 어떻게 이해되어지는 가를 모르고 있어서 이다. 우선 알아야 하는 것은, 천사들의 생각들은 시간 또는 공간으로부터 어떤 것을 끌어내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그들이 천국에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우리들(인간)이 세상을 떠날 때, 더불어 우리들은 시간과 공간의 관념도 떠나고 (시간과 공간을 근거로 하여 생각할 수 없고), 그 대신 우리들은 상태의 관념을 (옷)입는다. (거기는 시간과 공간이 없고 상태밖에 없기 때문이다.); 입게 되는 상태는 (천국에서의 경우) 선과 진리의 상태에 관한 관념이다. 그러므로 인간이 말씀을 읽을 때, 그때 시간에 관해, 또는 시간에 속한 것들에 관해 생각하는 동안, 당사자와 더불은 천사들은 시간의 어떤 것을 지각하지 못하고, 그 대신 그것에 상응하는 상태 속의 어떤 것을 지각한다. 인간의 경우도 그의 내면의 생각들로부터는 시간을 지각하지 않고, 그의 외면의 생각들로부터만 시간의 관념 속에 있다. 예를 들면, 인간의 외면의 생각이 상대적으로 많이 누구러뜨려져 있는 때가 잠자는 때임을 여러분 스스로 집념해보면 납득될 것이다. 이외 더 많은 경험도 (나에게는) 있다.
이쯤해서 알아야 하는 한 가지 것은 상태에는 두 가지, 즉 선의 상태와 진리의 상태가 있다는 것이다. 선의 상태는 있음(being, 존재 자체)의 상태라 불리우고, 진리의 상태는 존재 안으로 옴(공표, 公表, 보이도록 세상에, 자연계에 나타남, 영계에서 나타남이 아님)의 상태라고 불리운다. 그 이유가 있음은 선 속에 있고, 이로부터 존재 안으로 옴이 진리 속에 있기 때문이다. 공간은 있음의 상태와 상응하고, 때(시간)는 존재 안으로 옴의 상태와 상응한다. 그러므로 인간이 “이 때에 있었다”라고 읽을 때, 천사들은 인간이 생각하는 것을 결코 생각하지 않는다. 이는 다른 구절들에서도 마찬가지 이다. 말씀에서 쓰여진 것은 무엇이든 천사와 더불어서는 상응하는 의미로 바뀌는 속성을 당연히 지니고 있어, 천사의 성경(내적 의미로 읽히는 성경)은 인간이 읽는 성경(글자 의미에서의 성경)에서는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그 이유는 글자 의미로부터의 세상적인 것이 내적 의미의 영적인 것으로 변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유다는 그의 형제들로부터 아래쪽으로 갔다. 이는 야곱의 후손, 특히 유다 지파가 그 나머지 지파로부터 분리되었음을 의미한다. 이는 유다의 표현함이 보편적 의미에서 야곱의 후손이다로부터, 그리고 특별한 의미에서는 유다 지파라고 불리게 되는 지파이다로부터; 그리고 “형제들로부터 아래쪽으로 감”의 의미가 나머지 지파들로부터 분리되어진다는 것, 여기서는 자기 형제들의 악보다 더 센 악 안으로 가는 것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 이유가 “아래쪽으로 감, going down”은 악쪽인 아래로 던져지는 것을 포함하기 때문, 마치 그 반대인 “위쪽으로 감, going up”이 선쪽으로 승강함인 것과 같은 논리이다(3084, 4539항). 이에 대한 이유는 이미 말했듯이, 가나안의 토지가 주님의 왕국, 그리고 이 토지의 가장 안쪽인 예루살렘과 시온을 표현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토지의 경계선 바깥 지역들은 주님의 왕국의 바깥쪽인 것들, 즉 거짓과 악을 표현했다. 그러므로 시온과 예루살렘으로부터 경계선쪽을 향하여 감은 “아래쪽으로 감, 내려 감”이라 불리웠고; 경계선으로부터 예루살렘과 시온으로 감은 “위쪽으로 감, 올라 감”이라 불리웠다. 그러므로 “위쪽으로 감”은 참되고 선인 것쪽으로 승강함을, “아래쪽으로 감”은 거짓되고 악한쪽으로 아래로 내던져지는 것을 포함한다. 여기서 유다 지파가 자체를 거짓과 악쪽인 아래쪽으로 던졌다가 취급되기에, 말해지는 바, 유다는 “아래쪽으로 갔다”라고, 그때 그는 “인간, 아둘람족쪽으로 길을 잘못 들어섰다”라고 말해진다; “길을 잘못 들어섬”에 의해 거짓쪽으로 돌아섬, 그리고 그 후에 악쪽으로 돌아섬이 의미된다.
유다 지파가 나머지 지파들로부터 분리되었는데, 그 이유는 이 지파가 주님의 천적 왕국을, 나머지는 그분의 영적 왕국을 표현하도록 하시려는 때문이었다. 이런 이유로 유다는 표현적 의미에서 천적 인간, 보편적 의미에서 주님의 천적 왕국; 그리고 나머지 지파들은 한 개의 이름으로, 즉 “이스라엘족, 이스라엘 지파”에 의해 불리우고. 이스라엘은 표현적 의미에서 영적 인간, 보편적 의미에서 주님의 영적 왕국이다.
유다 지파가 나머지 지파들보다 더 센 악쪽으로 아래로 간 것이 이 말들에 의해 특별히 의미되었다: “유다는 그의 형제들로부터 아래쪽으로 갔다, 그리고 길을 잘못 들어섰다.” 유다 지파가 나머지들 보다 더 악하게 된 것은 다른 구절로부터도 알게 된다. 즉:
그녀의 불충한 자매 유다는 이스라엘이 다시 잘못하는 갖은 방법을 동원해 간음을 범할 때, 내가 그녀를 떠나보내고, 그녀에게 이혼 증서를 준 것을 보았다; 그럼에도 불충한 유다 그녀의 자매는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 역시 가서 매춘을 범했다, 하여 매춘의 음성을 수단으로 토지가 모독되었다, 그녀는 돌과 나무로 간음을 범했다; 그럼에도 모든 이런 것을 위하여 불충한 유다는 나에게 되돌아오지 않았다; 불충한 이스라엘이 불충한 유다보다 그녀의 혼을 더 정당하게 하였다 (예.3:7-11).
그리고 에스겔서에서:
그녀의 자매는 정말로 보았다, 그럼에도 그녀는 그녀보다 그녀의 사랑을 더 썪게 했다, 그리고 그녀의 매춘은 그녀의 자매의 매춘 위 이었다 (겔. 23:11-끝절);
예루살렘과 사마리아에 관해서, 또는 유다와 이스라엘에 관해서 말하고 있다.
내적 의미에서 어떻게 지파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거짓으로, 이로부터 악 안으로, 마지막으로 우상 안으로 빠져드는 지를 묘사하고 있다. 이것은 이 지파가 나머지 지파로부터 분리되기 이전, 그렇게 되었기 이전을 내적 의미에서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내적 의미에서 있는 것은 신성이고, 신성한 미래의 것들 쪽이 표출되고 있다 (이 민족에 관해 미리 말해진 것에 관하여는 신. 31:16-22; 32:15-44를 보라.)

그리고 아둘람족, 남자에게로 길을 잘못 들었다. 이는 거짓을 의미한다. 이는 “길을 잘못 들어 섬”의 의미가 잘못된 것쪽으로 가버림이다로부터 알게 되는데, 그 이유는 “길을 잘못 들어서다”가 “아래로 가다” 같이 선으로부터 악으로 멀리 옮겨짐, 그리고 진리로부터 거짓으로 멀리 옮겨짐을 서술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남자(vir)”의 의미가 총명한 자, 추상적 의미에서는 진리이다로부터, 그 이유는 진짜 지적인 것은 진리들로부터 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반대적 의미에서 총명하지 않은 자, 결과적으로 거짓이 의미된다. 이 거짓이 아둘람족에 의해 의미된다, 그 이유가 아둘람은 유다의 상속분의 경계에 있었기 때문 (여. 15:35), 그러므로 해서 선으로부터 있는 진리가 의미된다; 미가서에서:
그럼에도 나는 네게 상속인을 데려올 것이다, 오 마렛사 거주민아, 아둘람에게조차 이스라엘의 영광이 올 것이다 (미. 1:15);
그러나 말씀에 있는 대부분의 것들이 반대적 의미 또한 가지는 바, 아둘람 역시 그러한 바, 이 때는 악으로부터의 거짓을 의미한다. 대부분의 것들이 반대적 의미 또한 가지는 이유는 토지를 누가 차지하고 거주하느냐에 의존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의 이름은 히라였다. 이는 그것의 품질을 의미한다. “이름”과 “이름을 부름”의 의미가 품질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방금 위에서 말해진 거짓의 품질이 의미된다; 그 이유가 말씀에서 장소와 인물 모두의 이름은 상태와 어떤 것들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유다는 거기서 가나안족 남자의 딸을 보았다. 악의 거짓으로부터 악에 애착함을 의미한다. 이는 “딸”의 의미가 선에 애착함이다로부터, 그리고 반대적 의미로는 악에 애착함이다로부터; 그리고 “남자”의 의미가 총명한 자, 추상적 의미에서, 그러나 반대적 의미에서는 총명하지 않은 자, 거짓이다로부터; 그리고 “가나안족”의 의미가 악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로부터 분명해지는 바, “가나안족 남자의 딸”에 의해 악의 거짓으로부터 있는 악이 의미된다는 것이다. 악의 거짓으로부터의 악이 무엇인지는 아래에서 살핀다.
여기서 먼저 말해두어야 하는 것은 유다 지파의 근원에 관하여이다; 그 이유는 그들이 이 장에서 묘사되기 때문이다. 이 지파, 또는 유태 민족의 근원은 셋이다: 즉 셀라로부터, 그리고 유다의 며느리 다말에 의한 유다의 아들들, 베레스가 둘째 근원이고, 셋째 근원은 세라이다. 유태 민족 전체가 유다의 이 세 아들들로부터 이었다는 것은 야곱과 더불어 이집트로 간 야곱의 아들들과 손자들이 열거된 구절로부터(창. 46:12); 또한 가문들에 따른 그들의 분류로부터 분명한데, 모세의 책에서:
그들의 가문들에 따른 유다의 아들들은 이렇다: 셀라로부터, 셀라족의 가문; 베레스로부터, 베레스 족의 가문; 세라로부터, 세라족의 가문 (민. 26:20; 역상 4:21);
이것은 이 민족의 근원이 무엇이었는지를, 즉 삼분의 일은 가나안족의 어머니로부터; 삼분의 이는 며느리로부터 였다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모두는 불법적 연결로부터 였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가나안족의 딸들과의 결혼은 엄격히 금지되었기 때문이다 (창. 24:3; 출. 34:16; 신. 7:3; 왕상. 11:2; 스. 9: 10), 그리고 며느리와 눕는 것은 사형에 처할만한 위반이었음이 모세의 책으로부터:
만일 누가 그의 며느리와 눕는다면, 그들 둘 다 정녕 죽음에 놓일 것이다; 그들은 혼동을 작업했다; 그들의 피는 그들 위에 있을 것이다 (레. 20:12).
유다가 자기 며느리와 있었던 행위를 형제에 관련해 만들어 놓은 역연혼 법에 관련시키고, 아버지에 관련해서는 이에 관련시켜서가 결코 아닐 경우, 다말에 의한 자기 아들들은 그의 장자 엘, 즉 가나안의 어머니로부터 태어났고, 여호와의 눈에 보이기에 악이었고, 그러므로 죽게 되었던 아들의 아들들로서(7절) 인정되어야 할 것임을 함축하고 있다; 그 이유가 남편의 형제에게 처음 출생한 이들은 임신되게 한 자의 것이 아니고, 형제의 씨를 일으킨 것 뿐이다가 신. 25:5, 6와 본문 8, 9절에서 분명해진다. 더욱이 다말로부터 출생한 이들은 간통(간음)으로부터 였다; 그 이유가 유다가 그녀에게 접근했을 때, 그는 그녀를 매춘부(harlot)로 생각했었기 때문이다(15, 16, 21절). 위의 사항들은 유다 민족의 근원이 어디서, 그리고 무슨 품질 속에 있었는지를, 그리고 그들이 “우리는 간음(fornication)으로부터 태어나지 않았다”하고 말했을 때 (요. 8:41)의 경우까지도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이 근원이 포함하고 표현하는 것은 그들의 내면들이 이런 품질 속에 있었다는 것, 또는 이런 근원을 가졌다는 것을 이어지는 구절들이 보여준다. 유다가 가나안족과 결혼함은 악의 거짓으로부터인 악의 근원을 포함한다, 그 이유는 이것이 “가나안족 남자의 딸”에 의해 내적 의미에서 의미되기 때문이다; 그가 며느리와 눕는 것은 악으로부터 왜곡된 진리로부터 저주됨을 포함하고 표현한다, 그 이유가 말씀 어디에서나 매춘(whoredom)은 진리를 거짓화함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악의 거짓으로부터의 악은 자기 사랑의 악에 의해 부화되어 왔던 거짓 교리로부터 있는 생활 속의 악이다; 그리고 이 생활 속의 악을 말씀의 글자 의미를 수단으로 확증한 악이다. 이와 같은 악이 유태 민족과 더불은 악의 근원이다, 그리고 이와 같은 악이 기독 세계의 어떤 이들과 더불은 그것의 악, 특히 바빌론에 의해 뜻해진 말씀 안에 있는 이들과 더불어서의 악이다. 이 악은 내적 인간을 닫아지게 하는 속성을 지녔으므로, 닫아진 만큼 양심의 어떤 것도 거기에서 형성되어질 수 없다; 그 이유가 한 인물이 거짓 교리로부터 행동된 악은 당사자가 그것을 선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허용되기만 하면, 그는 자유로이 기쁨으로 그것을 실행한다. 고로 천국은 그에게서 닫혀져 있어 그것이 열릴 수가 없다.
이 악의 품질은 예를 들어야 알게 될는지 모른다. 자기 사랑의 악으로부터 있는 이들과 더불어 믿어지는 것은, 여호와께서는 단 하나의 민족을 선택하셨다는 것, 그리고 나머지 민족들은 상대적으로 노예들이다는 것, 또한 심히 무가치한 바, 죽여도 되고, 잔인하게 취급해도 된다; 이렇게 유태 민족은 믿어 왔던 바, 오늘날 바빌론식의 민족도 그러한 바, 그들은 이 신조를 말씀의 글자로부터 확증한다. 하여 만들어진 거짓 교리를 기초로 해서 그들은 무슨 악행이든 실행한다. 이것이 악의 거짓으로부터의 악이다, 그리고 내적 인간을 파괴한다, 그리고 어떤 양심도 거기에서 만들어지는 것을 방해한다. 이들이 말씀에서 “피들에서”라고 말해지는 이들이다. 그 이유가 그들은 자기들의 신앙의 조항들을 찬양하지 않는 인류에 대하여 잔인한 격노 안에 있기 때문이다.
다른 예를 더 살펴보자: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의 악으로부터 있는 이들과 더불어 믿어지는 것은, 땅 위에서 주님의 대행자가 있음에 틀임 없다는 것, 그가 천국을 열고 닫는 권능을 지닌다는 것, 고로 모든 이의 마음과 양심을 통치한다는 것, 이 거짓을 말씀의 글자로부터 확증하고, 이로부터 실행되는 악은 무엇이든 그것은 악의 거짓으로부터의 악이다. 이 악도 이 악과 더불어 있는 이들의 내적 인간을 파괴한다. 게다가 이 악은 대단한 파괴력이 있어 그들은 더 이상 내적 인간이 무엇인지도 모른다, 결과적으로 누구도 양심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들은 사후 어떤 삶이 있다는 것, 천국과 지옥을 어떻게 말하든 더 이상 믿지 않는다.
이 악을 품질만에 주목하면, 세상의 인간들은 이 악을 다른 악들로부터 구별해낼 수 없다, 그러나 다른 삶에서는 청명한 날 보듯 천사들에 의해 알려진다; 그 이유가 악들과 거짓들은 다른 삶에서는 근원과 품질로부터 구분되어 명백해지기 때문이다, 이것의 무수한 종과 속으로의 구분이 지옥의 것들이기 때문이다. 이 무수한 차이를 인간은 거의 알지 못하고 단지 악이 존재한다고만 알 뿐, 그것의 품질을 알지는 못한다. 이런 이유는 단 하나, 그가 선이 무엇인지를 모르기 때문, 선행이 무엇인지를 모르기 때문이다; 만일 그가 선행의 선을 알았다면 그는 그와 반대되는 것, 또는 악들을 구분지어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녀의 이름은 수아였다. 이는 그것의 품질을 의미한다. 이는 “이름”이 품질이다로부터, 여기서는 악의 거짓으로부터의 악의 품질이다.

그리고 그는 그녀를 데리고 갔다, 그리고 그녀에게 왔다. 이는 유다 지파는 그 자체를 이러한 것들에, 즉 악의 거짓들로부터의 악들에 결합되게 했다를 의미한다. 이는 “그녀를 데리고 감”, 즉 여인으로 데리고 감, 그리고 “그녀에게 옴”, 또는 “그녀에게 들어감”의 의미가 결합되어지는 것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는 여러 차례 설명했다. 내적 의미에서 결혼들은 선과 진리의 결합을 표현하는데, 이것이 그것들의 (영계에서의 결혼들의) 근원이다, 그러나 반대적 의미에서는 악과 거짓의 결합, 여기서는 유다 지파가 악과 거짓과 결합함이다; 그 이유가 이것이 유다를 놓고 말해지기 때문, 그리고 유다를 따라 명명된 지파가 유다 지파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유의할 것은, 그가 그녀를 아내로서 데려갔다가 아니라 막연히 그가 그녀를 데려갔다, 그리고 그녀에게 왔다 라고 말해진 것이다. 그 이유는 이 결합은 불법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은 결혼이 아니었다, 그러나 매춘이었다, 고로 그녀로부터 출생한 아들들은 매춘으로부터 출생되었다는 것을 암묵적으로 암시하고 있다. 악이 거짓과 결합함은 이런 것밖에 더 아니다. 이 후에 그녀는 그의 아내라고, 즉 12절에서 “그리고 날들이 많이 불어났다, 그리고 수아의 딸, 유다의 아내는 죽었다”라고 서술되고 있다. 이는 그 구절에서 살핀다.

그리고 그녀는 임신했고 아들을 낳았다. 이는 교회의 거짓이 거기서부터 파생되었음을 의미한다. 이는 “임신하고 낳는다”의 의미가 신앙과 행동으로 인정하는 것이다로부터; 그리고 “아들”의 의미가 교회의 진리이다로부터, 여기서는 반대 의미인 바, 거짓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러므로 그녀에 의해 “아들을 임신하고 낳는다”는 유다 지파와 더불은 교회가 신앙과 행동으로 거짓을 인정함이 의미된다. 이 아들에 의해 교회의 신앙이 의미되는 이유는 그가 첫 출생이었기 때문, 그리고 고대 교회에서 “첫 출생”에 의해 신앙의 진리가 의미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반대적 의미에서 거짓이 의미되는데, 이것은 이집트에서 인간과 짐승의 첫 출생에 의해서도 마찬가지로 의미된다. 진리 아닌, 거짓이 의미되는 이유는 이어지는 7절에 말해진 것 때문인데, 즉 “엘, 유다의 첫 출생, 여호와 눈에서 악이었다, 그리고 여호와께서는 그를 죽게 하셨다” 때문이다. 이 아들의 이름, 엘은 이런 품질을 포함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둘째 아들 오난 또한 그의 품질은 잘못된 것, 또는 악인 것을 포함한다.

그리고 그는 그의 이름을 엘이라 불렀다. 이는 그것의 품질을 의미한다. 이는 “이름을 부름”의 의미가 품질이다로부터, 즉 교회의 거짓의 품질이다. 거짓의 품질이다고 말해진 이유는 거짓들이 서로로부터 다르기 때문이다, 진리들의 경우도 마찬가지 이다. 각기 다른 수준의 것들이 각기 다른 종류로 열거된다. 각기 다른 종류는 서로로부터 구별된다. 모두 각각의 교회에서 교회들을 타락시키는 일반적인 거짓들이 있다, 그리고 거짓은 모든 이 각각의 생명에 따라 교회 안에서 다양해진다. 여기서는 유태 교회 안에서 있었던 거짓이 취급되고, 이는 자기 사랑과 이 사랑에서 파생되는 세상 사랑의 악으로부터의 거짓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다시 임신했고 아들을 낳았다. 이는 악을 의미한다. 이는 아들의 의미가 진리, 그리고 또한 선이다로부터; 고로 반대 의미에서는 거짓, 또한 악이다, 이 악은 거짓으로부터 있는 악이다. 이 악은 그것의 본질 측면에서는 거짓이다; 그 이유가 거짓 교리로부터 악인 것을 행하는 자는 거짓인 것 또한 행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행동에서 행해지기 때문에 이것은 악이라 불리운다. 첫 출생에 의한 아들에 의해 거짓이 의미되고, 이 거짓을 수단으로 악이 의미된 것이 행동에서 악을 행한 둘째 아들, 즉 “그는 그의 형제에게 씨를 주지 않으려고, 땅쪽으로 씨를 파괴했다”와 연관되고 있다. “그리고 그가 행한 것은 여호와의 눈에서 악이었다; 그래서 그분은 그 또한 죽게 하셨다” (9, 10절). 여기서도 역시 이 악은 거짓으로부터 이었음이 분명해진다. 더욱이 고대 교회에서 둘째 아들에 의해서는 행동에 있는 신앙의 진리가 의미되어졌다; 그러므로 둘째 아들에 의해서는 행동에 있는 거짓이, 즉 악이 의미되었다. 악이 엘에 의해 의미된 것은 첫 출생 엘이 그의 아버지, 유다에 의해 이름지어졌다는 사실로부터; 한편, 오난은 그의 어머니, 수아의 딸에 의해 이름지어졌다는 사실로부터도 알게 된다. 이는 원어에서 알는지 모른다. 말씀에서 “남자(man)”에 의해 거짓이, “여인”에 의해 거짓으로부터의 악이 의미된다. 수아의 딸에 의해 악이 의미되는 것은 앞에서 말했다. 그러므로 엘, 아버지에 의해 이름지어졌기 때문에 거짓을 의미하고, 오난, 어머니가 이름지었기 때문에 악을 의미한다; 전자는 마치 아버지의 아들인 듯하게, 후자는 어머니의 아들인 듯하게 있다.
말씀에서 “남자와 아내”, 또한 “남편과 아내”는 종종 언급된다; 그리고 “남자와 아내”가 언급될 때, “남자”에 의해 진리가, “아내”에 의해 선이; 반대적 의미에서는 남자는 거짓을, 아내는 악을; “남편과 아내”의 경우에서는 “남편”에 의해 선이, “아내”에 의해 진리가, 반대 의미에서는 남편은 악을, 아내는 거짓이 의미된다. 이 신비함에 대한 이유는 이렇다: 천적 교회에서 남편은 선 안에 있고, 아내는 선으로부터의 진리 안에 있다; 영적 교회에서 남자는 진리 안에 있고, 아내는 이 진리로부터의 선 안에 있다. 이렇게 그때 있었던 것이 지금도 그렇게 있는 것이다, 그 이유는 인간의 내면들이 이 바뀜을 수행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말씀에서 천적인 선과 그것으로부터의 천적 진리가 취급되는 곳에서는 “남편과 아내”라고 말해진다; 그러나 영적 선과 그것으로부터의 영적 진리가 취급될 경우, “남자와 아내”, 오히려 “남자와 여인”이라고 말해진다. 표현들 자체로부터도 알려지는 것은 어떤 선과 어떤 진리가 말씀의 내적 의미에서 취급되는지 이다.
이것 역시 결혼들은 선과 진리, 그리고 진리와 선의 결합을 표현한다고 때때로 서술해왔던 이유이기도 하다. 더욱이 부부의 사랑은 그것의 근원을 선이 진리와 결합함으로부터 있다는 것, 영적 평면과 더불은 부부의 사랑은 진리가 선과 결합함으로부터 있다는 것이다. 결혼들 역시 이 결합들에 실제로 상응한다. 이상 모두로부터 분명해지는 바, 아버지가 첫아들의 이름을 짓는 것, 어머니가 둘째의 이름을 짓는 것, 셋째 또한 이름을 짓는 것에서 포함된 것은 원어에서 나타나듯, 즉 아버지가 첫째를 이름진 것은 그에 의해 거짓이, 둘째는 악이 의미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녀는 그의 이름을 오난이라 불렀다. 이는 그것의 품질을 의미한다. 즉 이는 위에서 말한 대로 악의 품질을 의미한다. 이는 “이름을 부름”이 품질이고, “오난”은 악의 품질을 의미하고 포함한다.

그리고 그녀는 추가로 임신해서 아들을 낳았다. 이는 우상적인 것을 의미한다. 이는 여기서의 “아들”의 의미가 우상적인 것이다로부터 인데, 그 이유는 앞서 태어났던 아들들이 거짓과 악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셋째 아들은 우상적인 것을 뜻하는데, 그 이유는 거짓과 악이 다함께 생산하는 것이 우상적인 것들을 생산하고 그것 안에 있기 때문이다. 가나안족의 여인으로부터 유다에게 출생한 셋째 만이 생존한 유일한 아들이고, 이로부터 유다 민족의 삼분의 일이 왔다; 그리고 이 민족이 우상적인 것으로부터 그것의 일어남을 가졌다는 것이 내적 의미에서 여기서 뜻해진다. 이 민족이 우상숭배쪽으로 아주 쉽게 돌아섰다는 것은 말씀의 글자 의미에 따른 역사적, 예언적 부분에서 분명해진다; 그리고 이것이 계속적으로 우상 숭배를 하였다는 것이 내적 의미로부터 분명해진다. 그 이유가 우상숭배는 우상들, 새긴 형상들, 여타 신들 뿐만 아니라, 내적인 것 없는 외적인 것만을 예배함에 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이 민족은 계속적으로 우상숭배를 하였고, 외적인 것만을 숭배하고, 내적인 것들은 통째로 제거하고 아예 알고 싶어하지도 않았다. 참으로 그들은 그들과 더불어 거룩한 것들을 가졌다, 즉 만남의 천막, 궤와 더불어, 그 위에 자비석, 빵덩어리가 진열된 식탁, 등잔대, 향, 천막 바깥의 제단, 그 위에서 태워바침과 제물 바침이 있었다, 이런 모든 것은 거룩하다 불리웠다; 그리고 천막의 가장 안쪽은 거룩들 중의 거룩이라 불리웠다, 또한 성소라고 불리웠다. 그들은 아론과 그의 대성직자들에 속한 의복들을 가졌다; 거기에 우림과 둠밈이 있었던 가슴받이와 더불은 에봇이 있었다, 이 외에도 많은 다른 것들이 있었다. 그럼에도 이런 것들은 그 자체로 거룩하지 않았다, 그러나 거룩한 것들을 표현함으로부터, 즉 주님의 왕국의 천적, 영적인 것들을, 또한 주님 자신을 표현함으로서 거룩하였다. 그들은 자신들과 더불어서는 더욱 덜 거룩하였는데, 그 이유는 백성들이 표현된 것의 내적인 것들로부터서는 전혀 감동되지 않고 오직 외적인 것만에 감동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외적인 것들만에 의해 감동되는 것이 우상 숭배이다; 그 이유가 나무나 돌, 이것들을 덮은 은이나 금을 예배하는 것이 그들이 그것 자체로 거룩하다는 몽상으로부터 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것이 그 민족인데, 오늘날도 그렇다.
그러나 아직도 그들과 더불어 있을는지 모르는 것은 교회의 표현물이다, 그 이유는 표현물은 인물을 중요시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것을 중요시하기 때문이다. 그들의 예배는 그들을 복되고 행복하게 만들지 못했다, 그러나 그들이 표현함 안에 있는 한, 세상에서의 번영만이었다, 그리고 이방인들의 우상들쪽으로 길을 바꾸지도 않았다, 고로 우상숭배자가 되었다; 그 이유가 그때 교회의 어떤 것도 이 민족과 더불어 더 이상 표현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것들이 가나안족 여인에 의한 유다의 셋째 아들에 의해 의미된 우상숭배적인 것에 의해 뜻해진 것들이다. 이 민족과 더불은 이 우상 숭배는 그것들의 근원이 내적 우상 숭배로부터 이다, 그 이유가 그들은 여타 민족들보다 더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 안에 있었기 때문; 그리고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 있는 이들이 내적 우상 숭배 안에 있기 때문, 그 이유가 그들은 자신들과 세상을 예배하고, 거룩한 의식 준행을 자기 숭배와 이득을 위하여 수행하기 때문, 즉 목적으로서 자아를 놓기 때문, 주님의 교회와 왕국이 목적이 아니다, 고로 주님을 위하여가 아니다.

그리고 그의 이름을 셀라라고 불렀다. 이는 그것의 품질을 의미한다. 이는 “이름을 부름”의 의미가 품질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우상 숭배의 품질이 셀라에 의해 의미된다, 그 이유는 거기에 많은 우상 숭배들이 있기 때문, 이에는 외적 우상 숭배와 내적 우상 숭배가 있다, 일반적으로는 모두 거짓과 악으로부터 예배함이다.

그리고 그는 그녀가 그를 낳을 때 그집에 있었다. 이는 상태를 의미한다. 이는 “그집(Chezib)”의 의미가 상태이다로부터 , 즉 셀라에 의해 의미된 우상 숭배의 상태이다, 이 안에 유태 민족이 있었다; 그리고 “낳다”의 의미가 행동에서 결합되는 것이다로부터; 그리고 결합이 우상 숭배 안에 있는 악과 더불어 있었기 때문에 말해지는 바 “그녀”가 그의 이름을 셀라라고 불렀다, 이는 원어에서 나타나는 바이다; 그 이유가 “그녀”, 즉 수아의 딸에 의해 악의 거짓으로부터의 악이 의미되기 때문이다.

6-10절. 그리고 유다는 그의 장자 엘을 위하여 여인을 데려왔다, 그리고 그녀의 이름은 다말이었다. 7 그리고 유다의 장자, 엘은 여호와의 눈에서 악이었다; 그리고 여호와께서는 그를 죽게 하셨다. 8 그리고 유다는 오난에게 말했다, 네 형의 아내에게 오라, 그리고 그녀에게 남편의 동생된 의무를 수행하라, 그리고 네 형의 씨를 일으키거라. 9 그리고 오난은 그 씨가 자기 것일 수 없음을 알았다; 그리고 그가 그의 형의 아내에게 왔을 때이다, 그는 그것을 땅쪽으로 파괴하여서, 그의 형에게 씨를 주지 않도록 했다. 10 그리고 그의 이 짓은 여호와의 눈에서 악이었다. 그리고 그분께서는 그 또한 죽게 하셨다.

그리고 유다는 여인을 데려왔다. 이는 그의 후손을 위하여 있었던 교회를 의미한다. 이는 다말, 여기서는 “여인”의 표현함이 교회이다로부터, 이는 아래에서 살핀다. 이것이 유다의 후손을 위하여 있었다는 것은 유다가 그의 첫 출생 엘을 위하여 그녀를 데려옴, 그리하여 그가 거기로부터 자손을 가지도록 함에 의해 의미되어져 있다.

그의 첫 출생 엘을 위해서. 이는 신앙 속의 거짓을 의미한다. 이는 엘의 표현함이 거짓이다로부터; 그리고 “첫 출생”의 의미가 신앙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리고 그녀의 이름은 다말이었다. 이는 그 교회의 품질, 영적이고 천적인 것들을 표현하는 교회를 의미한다. 이는 “이름”의 의미가 품질이다로부터, 여기서는 교회의 품질이다, 그 이유는 이 장에서 다말에 의해 교회가 표현되기 때문, 그리고 유다의 후손 사이에 설립되어지기로 되어 있었던 영적이고 천적인 것들을 표현하는 교회가 표현되기 때문이다. 이 교회가 다말에 의해 표현되는 것은 뒤이어지는 구절로부터 분명해진다. 이 38장 전체는 내적 의미에서 유태 교회가 취급되고, 이 교회는 고대 교회가 지녔던 것 같이 주님의 왕국의 천적, 영적인 것들을 표현하게 되어야 한다는 것을 취급한다; 그리고 이것은 외적 형체에서 뿐만 아니라 내적 형체에서도 그러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 이유가 교회는 외적인 것들부터, 즉 의식들로부터 교회가 아니고, 외적인 것들이 형식을 취하는 한편, 본질인 내적인 것들로부터 교회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야곱의 후손은 내적인 것들을 받기를 기꺼워하지 않는 상태 속에 있었다; 그러므로 그들과 더불어 고대 교회는 갱신되어질 수 없었고, 오직 그 교회의 껍데기(표현물)만을 이어갈 수 있었다. 여기서 교회의 내적인 것이 다말이다, 그리고 교회의 외적인 것은 유다와 가나안 여인에 의한 세 아들이다.

그리고 엘, 유다의 장자는 여호와의 눈에서 악이었다. 이는 그것은 악의 거짓 안에 있었음을 의미한다. 이는 엘의 표현함과 첫 출생의 의미가 신앙의 거짓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 거짓이 악의 거짓이었다는 것은 앞에서 말했다; 그러나 이 아들에 있는 악의 거짓의 본성은 교회의 껍데기조차도 그로부터의 후손 사이에 설립되어질 수 없었다; 그러므로 그는 “여호와의 눈에서 악이었다. 그리고 여호와께서는 그를 죽게 하셨다”라고 말해진다. 이 민족 전체는 그것의 근원, 특히 유다로부터 악의 거짓인즉, 생활의 악으로부터의 거짓 교리가 있었는데, 유다의 이 아들과 저 아들에게서는 조금씩 달랐다. 쓸모 있을는지 모르는 것이 예견되어졌다, 그런데 첫 출생 엘의 것은 아니었고, 둘째 오난의 것도 아니었고, 셋째인 셀라에 있는 것만이 쓸모 있다 말할 수는 없으나 보존은 가능했다. 그러므로 첫 둘은 파괴되었고, 마지막 것이 보존되어졌다. 악의 거짓이 이 전체 민족과 더불어 있었다는 것은 아래 모세의 책에 명백하게 묘사되어 있다:
그들은 자신들을 타락시켰다, 그들은 그분의 아들들이 아니다, 이것은 그들의 흠이다; 그들은 성미가 비꼬이고 꼬부라진 세대이다. 그리고 여호와께서 보시고 그들의 분노함 때문에 그분의 아들들과 그분의 딸들을 책망하셨다. 그리고 그분은 말하셨다, 나는 내 얼굴을 그들로부터 감출 것이다, 나는 그들의 후손이 무엇일 것인지를 볼 것이다; 그 이유가 그들은 심술궂음의 세대, 신의가 없는 아들들이다; 나는 그들 위에 악들을 더할 것이다, 나는 나의 화살을 그들 위에 소비할 것이다. 그들은 배고픔으로 지쳐 빠질 것이다, 그리고 타는 숯으로 살라질 것이다, 쓰라린 뒤집힘이 있을 것이다. 그들은 상담함들이 결여된 민족이다, 그리고 그들 안에 총명이 없다. 그들의 포도나무 는 소돔의 포도나무이고, 고모라의 들판의 것이다. 그들의 포도는 쓸개의 포도들이다, 그들의 포도송이는 쓴맛으로 있다; 그들의 포도주는 용들의 독이다, 그리고 독사의 잔인한 독이다. 이것이 나와 더불어 창고 안에 쌓여 있고, 내 보물들 안에 봉인되어 있지 않던가? 그들이 파괴되는 날이 임박해 있다, 그리고 그들 위에 와야 하는 것들이 성급함을 만든다 (신. 32:5, 1-24, 28, 32-35);
위 말들의 내적 의미에 의해 이 민족이 있었던 악의 거짓이 묘사되고 있다, 그리고 이것이 그들 안에 뿌리박혀 있다.

그리고 여호와께서는 그를 죽게 하셨다. 이는 거기에는 교회를 표현하는 것이 없음을 의미한다. 이는 “죽다”의 의미가 어떤 것이 있기를 중단하다 이다로부터, 또한 표현함의 끝이다로부터, 그러므로 여기서는 엘로부터의 어떤 후손 사이에서는 교회를 표현함이 있을 수 없었음이 의미된다.

그리고 유다가 오난에게 말했다. 이는 교회의 표현을 보존하기 위하여를 의미한다.
이는 뒤이어지는 구절로부터 분명해진다. 그 이유가 유다가 오난에게 형제의 의무를 수행하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이를 수단으로 교회의 계속과 보존이 표현되었다.

네 형의 아내에게 오라, 그리고 그녀에게 남편의 동생된 의무를 수행하라. 이는 그가 그것, 즉 교회의 표현을 계속해야 할 것임을 의미한다. 이는 형제의 아내에게 “오다” 또는 “들어가다”, 그리고 그녀에게 남편의 형제의 의무를 수행하는 것의 의미가 교회 속에 있는 것을 보존하고 계속하는 것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모세의 법에서의 명령은 만일 어떤 남자가 아이 없이 죽었다면, 그의 형제가 과부를 아내로 데려가서 그의 형제에게 씨를 일으키라고, 그리고 첫 출생은 죽은 형제의 이름에 의해 불리우고, 나머지 아들들은 그의 자신이 된다는 것이 “남편의 형제의 의무”라고 불리웠다. 이 규례는 유태 교회에서 발원한 새로운 규례는 아니었고, 이전에 사용되어 왔던 규례임은 이 역사로부터 분명해진다, 그리고 모세에 의해 이스라엘족들에게 명령된 많은 다른 규례들도 더 있다: 즉 그들은 가나안족의 딸들로부터 아내를 데려오지 말 것, 그들은 그들의 가문들 안에서 결혼해야 한다는 것 (창. 24:3, 4; 28:1, 2). 이런 것들로부터 분명해지는 사항은, 거기에 이전에 교회가 있어 왔다는 것, 이 교회 안에서 설립되어 왔던 규례들이 이 후에 야곱의 아들들 위에도 명령되고 선포되기도 했다는 것이다. 제단과 제물이 고대 시대로부터 사용되고 있었다는 것은 창. 8:20, 21; 22:3, 7, 8, 13으로부터도 분명해진다. 이로부터도 또 하나 명백한 것은 유태 교회가 새로운 교회는 아니었다는 것, 이것은 사멸된 고대 교회가 소생되었다는 것이다.
남편의 형제에 관련된 법이 있어 왔다는 것은 모세의 책에서 분명해진다:
만일 형제들이 함께 거주한다면, 그리고 그들 중의 하나가 죽는다면, 그리고 아들이 없다면, 죽은 자의 아내는 밖의 낯선 자에게 시집가지 말라; 그녀의 남편의 형제가 그녀에게로 들어갈 것이다, 그리고 그녀를 그에게 아내로 데려갈 것이다. 그 다음 그녀가 낳은 첫 출생은 그의 죽은 형제의 이름 위에 설 것이다, 하여 그의 이름은 이스라엘로부터 지워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만일 남자가 자기 형제의 아내에게 장가들지 않는다면, 그의 형제의 아내는 성문으로 원로들에게 갈 것이다, 그리고 말하라, 내 남편의 형제가 그의 형제에게 이스라엘에서 이름을 일으키기를 거절한다; 그는 나에게 남편의 형제의 의무를 수행하지 않는다. 그때 그의 도성의 원로들은 그를 부를 것이다, 그리고 그에게 말할 것이다; 그리고 만일 그가 서서 말하기를, 나는 그녀를 데려가기를 바라지 않는다; 그때 그의 형제의 아내가 원로들이 보는 앞에서 그에게 가까이 갈 것이다, 그리고 그의 신을 그의 발로부터 벗길 것이다, 그리고 그의 얼굴에 침을 뱉을 것이다; 그리고 그녀가 답하여 말하기를, 자기 형제의 가문을 건설하지 않는 남자에게 이렇게 대접하라; 이때로부터 그의 이름은 이스라엘에서, 자기 신발을 벗기운 자의 가문, 이렇게 불리울 것이다 (신. 25:5-10).
남편의 형제의 의미가 표현하는 것을 모르는 이들은 이 법이 이름을 보존하고, 상속을 위하여서만 있었던 법이라는 것 외의 다른 생각은 갖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형제가 형제의 아내와 결혼으로 들어가는 것은 이름을 보존하고 상속분을 보존하는 것 보다 더 중요한 것은 교회의 보존과 계속이다. 그 이유가 여기서의 결혼은 내적 의미에서 선과 진리의 결혼을, 즉 천국의 결혼을, 결과적으로 교회 또한 표현했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교회는 선과 진리의 결혼으로부터 교회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교회가 이 결혼 안에 있을 때, 교회는 천국과 하나를 만든다, 이것은 천국의 결혼 자체이다. 결혼이 이 표현을 가지는 바, 그러므로 아들들과 딸들은 진리들과 선들을 표현하고 의미했다; 그러므로 아이가 없는 것은 선과 진리의 결핍을, 고로 그 가문에서는 더 이상 교회의 표현이 없는 것, 결과적으로 그들 사회(종교 단체)로부터 나가는(왕따당하는) 것이 된다. 더욱이 형제는 혈연의 선을 표현했는 바, 이 선 가지고 과부된 아내에 의해 표현된 진리와 결합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 이유가 진리가 진리이어야 하는 것, 즉 생명을 가지고 열매를 맺고, 교회 속에 있기를 계속하려면, 진리는 그것 자신의 선(남편)이나 (차선책으로) 혈연의 선 외에 다른 선과는 결합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이상의 내용은 남편의 형제에게 처방된 의무를 수단으로 천국에서 지각되는 의미이다.
만일 남자가 남편의 형제의 의무를 수행하지 않는다면, 형제의 아내는 그의 신을 발에서 벗길 것이고, 얼굴에 침을 뱉을 것이다에 의해서는, 선과 진리의 외적, 내적인 것이 결여된 자인 바, 그는 교회 속의 것을 파괴하리라는 것이 의미되었다. 그 이유가 “신”은 외적인 것을; “얼굴”은 내적인 것을 말하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남편의 형제된 의무에 의해 교회의 보존과 계속이 의미됨이 분명해진다. 그러나 내적인 것들의 표현들이 주님의 오심에 의해 멈추었을 때, 위의 법은 폐지되었다. 이런 상황은 마치 혼 또는 인간의 영과 그의 육체가 되어가는 상황과 흡사하다. 혼, 또는 인간의 영은 당사자의 내적인 것이고, 그의 몸은 외적인 것이다; 또는 같은 말로, 혼, 또는 영은 인간의 형체 자체이나 육체는 (자연계에서) 그를 표현하는 형상이다; 그래서 인간이 다시 일어날 때, 그를 표현한 몸은 벗어진다; 그 이유가 다시 일어날 때, 그는 자기의 내적인 것으로만, 즉 그의 형체 자체로만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다른 상황을 가지고도 말해볼 수 있다. 어둠에 있는 자가 어둠을 수단으로 빛 속에 있는 것을 보는 경우이다. 또는 세상의 빛 안에 있는 자가 천국의 빛 안에 있는 것을 세상의 빛을 수단으로 보는 것이다. 그 이유가 세상의 빛은 천국의 빛과 비교하면 상대적으로 어둠 같기 때문이다. 어둠 안에서, 또는 세상의 빛 안에서 천국의 빛 속에 있는 것들은 그 안에 있는 그대로는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나 표현하는 형상으로서만 가능한데, 마치 인간의 마음이 얼굴에 나타나는 정도에서 이다; 그러므로 천국의 빛이 그 빛의 명료함에서 나타날 때, 어둠, 또는 표현하는 형상은 사라진다. 이것이 주님의 오심에 의해 결과되었다.

그리고 네 형에게 씨를 일으켜 주어라. 이는 교회가 멸해지지 않도록을 의미한다. 이는 “씨”의 의미가 선으로부터의 진리, 또는 선행으로부터의 신앙이다로부터 분명해진다. 같은 의미가 죽은 형의 이름 위에 선다는 것에 의해서도 의미되었다. “형제에게 씨를 일으키는 것”은 교회가 멸해지지 않도록 방금 위에서 말해진 것에 따라 교회 속에 있는 것이 계속되어야 함이다.

그리고 오난은 그 씨가 그의 것이 아님을 알았다. 이는 혐오함과 증오함을 의미한다. 이는 오난의 표현함이 악이다로부터 분명해진다; 그리고 형제에게 씨를 주지 않는 것, 또는 남편의 형제된 의무를 수행하지 않는 것은 교회의 선과 진리를 뜻하지 않는 것, 이것의 계속됨을 뜻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본문에 의해 혐오함과 증오함이 의미된다; 그 이유가 악은 교회의 선과 진리를 향하여 혐오함과 증오함을 갖는 것밖에 더 이상은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가 그의 형의 아내에게 왔을 때였다, 그리고 그는 그것을 땅쪽으로 파괴했다. 이는 부부의 사랑에 반대되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지금 이어지는 사항으로부터 분명해진다. 유다의 첫 출생 엘에 의해 유태 민족이 처음에 있었던 악의 거짓이 묘사되었다; 오난에 의해서는 악의 거짓으로부터의 악이 묘사되었는데, 이 악은 이후 유태 민족이 있었던 악이었다; 그리고 셋째 아들인 셀라에 의해서는 그 악으로부터 파생된 우상숭배가 묘사되었다, 이 안에서 유태 민족은 계속적으로 있었다. 악의 거짓으로부터 있는 악은 오난이 행동한 것에 의해 묘사되어졌다; 즉 그는 그의 형제에게 씨를 주고 싶지 않았던 바, 그는 그것을 땅쪽으로 파괴했다. 이것에 의해 부부의 사랑에 반대되는 것이 의미된 이유는 내적 의미에서 부부에 의해 교회 속에 있는 것이 뜻해지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교회는 선과 진리의 결혼이기 때문, 그리고 이 결혼에 악의 거짓으로부터의 악은 완전 반대로 있기 때문, 즉 이런 악 안에 있는 이들은 이 결혼에 반대한다는 말이다.
이 민족이 부부적인 어떤 것도 가지지 않았다는 것은 영적 의미에서 이해해보든지, 자연적 의미에서 생각해보든지, 그들에게는 하나 이상의 아내를 허용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족히 분명해진다. 그 이유가 영적 의미에서 이해되는 바 그대로의 부부적인 것이 있는 곳, 결과적으로 교회가 있는 곳에서는 하나 이상의 아내를 둠은 결코 허용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진짜 부부적인 것은 교회, 또는 주님의 왕국에 있는 이들 외에서는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둘 그 이상에서는 결코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진짜 부부의 사랑 안에 있는 두 인물 사이에 있는 결혼은 천국의 결혼, 즉 선과 진리의 결혼에 상응한다; 즉 남편은 선에, 아내는 이 선으로부터의 진리에 상응한다; 더욱이 그들이 진짜 부부의 사랑 안에 있을 때, 그들은 이 천국의 결혼 안에 있다. 그러므로 교회가 어디에 있든, 하나 이상의 아내를 가지는 일은 결코 허용되지 않는다. 그러나 야곱의 후손들 사이에는 교회가 없었고, 교회의 껍데기(표현물)만이, 교회의 내적인 것 없는 외적인 것만이 존재했기에, 그들에게는 일부다처가 허용된 것이다. 더 나아가 한 남편이 여러 아내들과 결혼함이 천국에서 표출되면 마치 하나의 선에 이 선에 일치하지 않는 여러 가지의 진리들이 결합된 듯 한 것, (고로 이게 뭐야? 하는 식의 물음이 있게 하는 것,) 선이 없다 라는 생각, 형상 뿐이다; 그 이유가 서로 일치하지 않는 진리들로부터의 선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고 말기 때문,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는 선의 품질은 이 선과 일치하는 진리로부터 있기 때문이다.
교회의 경우, 마치 교회가 하나가 아닌 듯 하게 표출되기도 한다, 그리고 이 교회들의 구분은 신앙의 진리들에 따라, 또는 교리물들에 따라서 이다; 그럼에도 하나의 선이 그것 안에 있는 본질일 때, 이 선은 진리들에 의해 변형되고 품질도 갖는다. 교회는 천국의 형상이다; 그 이유가 교회는 땅에 있는 주님의 왕국이기 때문이다. 천국은 많은 일반적 사회들로, 그리고 이 사회에 종속되는 더욱 많은 작은 사회들로 구별되어진다; 그러나 여전히 그것들은 선을 통하여 하나이다; 그 이유가 거기서 신앙의 진리들은 선에 따라 일치함 안에 있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신앙의 진리들은 선에 관련되고 선으로부터 있기 때문이다. 만일 천국이 신앙의 진리들에 따라 구별되어지고, 선에 따라서가 아니다면, 천국은 존재할리 만무한데, 그 이유는 생명이 없기 때문이다. 또한 천사들은 주님으로부터 생명의 하나됨, 또는 하나의 혼을 가질 수 없다. 이것은 선 안에서만, 즉 주님을 사랑함과 이웃을 향한 사랑 안에서만 가능하다. 그 이유가 사랑은 모든 것을 결합하기 때문이다. 선과 진리의 결합은 소위 이웃을 향한 사랑이다; 그 이유가 이웃은 선 안에 있고, 이 선으로부터 진리 안에 있는 자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추상적 의미에서 선 자체와 그것의 진리이다. 이상 살핀 바로부터, 왜 교회 안에서 결혼이 한 남편과 한 아내 사이에 반드시 있어야만 하는지를, 그리고 야곱의 후손에게 여러 아내를 허용했는지를 알았으리라 본다; 이런 이유로 야곱의 후손 사이에는 교회가 없었는 바, 결과적으로 교회의 표현이 결혼을 수단으로 그들 사이에 설립되어질 수 없었던 이유는 그들이 부부의 사랑에 반대되는 상태 안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형에게 씨가 주어지지 않도록. 이는 그러므로 거기에는 계속됨이 없음을 의미한다. 이는 “형제에게 씨를 주는 것”, 또는 남편의 형제된 의무를 수행하는 것의 의미가 교회 속에 있는 것의 계속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러므로 “씨를 자기 형제에게 주지 않음”이란 계속됨이 없음이다.

그리고 그의 이 짓은 여호와의 눈에서 악이었다. 이는 그것은 신성한 질서에 반대되는 것이었음을 의미한다. 이는 “여호와의 눈에서 악”, 또는 그분에 반대하는 악의 의미가 그분으로부터 있는 신성한 질서에 반대하는 것이다로부터 알려진다. 이는 행위로부터, 그리고 마찬가지로 남편의 형제에 관한 규례로부터, 즉 그의 형제의 아내는 그의 신을 그의 발로부터 벗기고, 얼굴에 침을 뱉고, 그의 이름은 이스라엘에서 자기 신을 벗기운자의 가문이라 불리운다는 것으로부터(신. 25:8-10) 알려진다. 이 규례가 의미한 것은, 그가 외적, 또는 내적 선 없이 있었다 이다; 그리고 선이 없고, 그 대신 악 안에 있는 그들은 신성한 질서에 반대하여 있다. 내면의 악으로부터 튀어나오거나 흐르는 모든 악, 즉 악한 의도나 악한 목적으로부터, 마치 본문의 오난의 경우 같은 악은 신성한 질서에 반대되어 있다; 그러나 내면의 악으로부터, 즉 악한 의도나 목적으로부터 튀어나오거나 흐르지 않는 악은 비록 그것이 내면의 악이나 별반 차이가 없는 악으로 나타난다 할지라도 목적 측면이 악이 아닌 바, 내면의 악과는 다르다. 그 이유가 목적이 모든 행위에 품질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생명은 그의 목적 안에 있다, 그 이유가 그가 사랑하여 생각하는 것을 그는 자기의 목적으로 가지기 때문이다; 인간의 혼은 이 이상 더 없다.
모든 이가 아는 바, 악은 신성한 질서에 반대된다는 것, 이 질서에 따른 선에도 반대 된다는 것이다; 그 이유가 신성한 질서는 천국에서 주님 자신이기 때문인데, 그분으로부터 있는 신성한 선과 질서가 질서를 구성하고, 이 질서에 있는 만큼에서 그는 신성한 선이 본체이고, 신성한 진리는 형체이다. 신성한 진리가 형체로 표현될 때, 이것은 사람으로 나타난다; 그 이유가 주님이 그분으로부터 계실 경우, 그분만이 유일한 사람이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천사들, 영들, 인간들이 그분으로부터 받는 만큼에서, 즉 그들이 선 안에, 이 선으로부터 진리 안에 있는 만큼에서, 고로 그분의 신성한 질서 안에 있는 만큼에서 그들은 사람이다. 이로부터 보편적 천국은 하나의 사람으로 표현되고, 웅대한 사람이라 불리운다, 그리고 인간의 전체와 각 부분은 이 웅대한 사람에 상응한다. 이는 각 장의 끝에서 살피고 있다. 이로부터 역시, 천국의 천사들 모두도 인간의 형체에서 나타난다; 그리고 그 반면, 지옥의 악령들은 몽상으로부터 서로에게 사람 같이 나타난다, 그러나 천국의 빛에서는 그들의 악에 따라 어떤 괴물 같이 나타난다; 이런 이유는 악 자체는 질서에 반대되기 때문이다, 고로 인간의 형체에 반대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분은 그 또한 죽게 하셨다. 이는 거기에도 역시 교회의 표현은 없었음을 의미한다. 이는 앞에서 살핀 바 있어 설명은 생략한다.

11절. 그리고 유다가 그의 며느리 다말에게 말했다, 내 아들 셀라가 젊은 성인이 될 때까지 네 아버지 집에서 과부로 남아 있거라. 그 이유는 그가 그의 형제들 같이 죽지 않도록 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말은 가서 그녀의 아버지의 집에서 머물렀다.

그리고 유다가 말했다. 이는 일반적 측면에서 야곱의 후손, 특별하게는 유다로부터 있는 야곱의 후손을 의미한다. 말씀에서 유다와 이스라엘을 구분해 일컫는 경우가 많다. 역사적 의미에서 “유다”에 의해서는 유다 지파가, “이스라엘”에 의해서는 분리된 열 지파가 뜻해진다. 그러나 내적, 영적 의미에서, “유다”에 의해 천적 평면, 또는 교회의 선이, 그리고 “이스라엘”에 의해서는 영적 평면, 또는 교회의 진리가 표현된다. 한편 반대적 의미에서 유다에 의해 교회의 악, 이스라엘에 의해서 교회의 거짓이 표현된다. 말씀의 영적, 내적 의미는 보편적인 바, 지파들로 구분하는 것이 아니라 외적 또는 역사적 의미로서 구분된다. 이로부터 “유다”에 의한 대략적인 의미는 야곱으로부터 있는 민족, 특별하게는 유다에 의한 야곱으로부터 있는 민족이 의미된다.

그의 며느리 다말에게. 이는 영적인 것들과 천적인 것들을 표현하는 교회를 의미하고, 이는 진리로부터 “며느리”라 불린다. 이는 다말의 표현함이 영적이고 천적인 것을 표현하는 교회이다로부터; 그리고 “며느리”의 의미가 영적 평면, 또는 교회의 진리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며느리”가 내적 의미에서 이 의미를 가지는 것은 결혼에 속하는 모든 것들, 결혼으로부터 출생하는 모든 것은 천국의 결혼 속에 있는 것을, 그리고 결과적으로 선과 진리 속에 있는 것을 표현하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이것들이 천국의 결혼 속에 있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말씀 안에서, 남편은 선을, 아내는 진리를 의미한다; 또한 아들과 딸은 그들로부터 있는 진리와 선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남편이 된 아들의 아내인 며느리는 선과 결합한 교회의 진리가 의미된다. 그러나 천적 교회 속에 있는 이들과 영적 교회 속에 있는 이들은 다르다; 즉 영적 교회에서는 남편은 남자라고 불리워서 진리를, 아내는 여인이라고 불리워서 선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말씀의 내적 의미에서 “며느리”에 의해 교회의 선에 결합된 진리가, 반대적 의미에서는 교회의 악과 결합된 거짓이 의미된다; 이는 “며느리”가 등장하는 말씀에서 분명해진다:
그들은 산의 머리에서 제물을 바친다, 그리고 언덕 위, 상수리나무, 포플러나무, 테레빈나무 아래에 서 향을 태운다, 그 이유는 거기로부터의 그늘이 좋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너희의 딸들이 매춘을 범하고, 너희의 며느리가 간통을 한다. 딸들이 매춘을 범하기 때문에 그들을, 며느리들이 간통을 범하기 때문에 그들을 내가 방문하지 않겠느냐? (호. 4:13, 14);
취급된 주제는 악과 거짓을 예배함이다, 악을 예배함이 “산의 머리에서 제물을 바친다”로, 거짓을 예배함이 “언덕에서 향을 태운다”로 의미되고 있다. 악한 생활이 “딸들이 매춘을 범한다”로, 악한 생활로부터의 거짓된 교리가 “며느리들이 간통을 한다”에 의해 의미된다. 말씀에서 간통과 매춘은 선의 섞음질과 진리의 거짓화를 의미한다; 그리고 그러므로 여기서 “며느리”는 거짓에 애착함을 표시한다.
미가서에서:
큰 자는 제 혼의 외고집을 말한다; 그리고 그는 그것을 비튼다. 그들의 좋은 것은 가시로서 있다; 직바른 것은 가시나무로서 있다. 아들은 아버지를 가볍게 평가하고, 딸은 자기 어머니에 맞서 일어난다, 며느리는 그녀의 시어머니와 맞서 일어난다; 인간의 적들은 그의 집안 식구 속에 있다 (미. 7:3, 4, 6);
위에서 취급한 주제는 악으로부터 있는 거짓인데, 황폐되는 때인 마지막 때의 교회가 이 안에 있다, 그리고 대략적 의미에서 유태 교회 역시 이 안에 있었다. “자기 어머니에 맞서 일어난 딸”은 악에 애착함이 진리에 반대된 것을; 그리고 “자기 시어머니에 맞서 일어난 며느리”는 거짓에 애착함이 선에 반대된 것을 의미한다.
위의 경우는 시험들에 있는 인간의 경우와도 비슷한 대목이 있다; 그 이유가 시험 안에서 악이 진리와, 거짓이 선과 전투함이 있고, 영적 시험은 인간 안의 거짓과 악을 황폐시킴밖에 더 다른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시험, 또는 영적 전투가 위 미가서와 아주 흡사하게 주님에 의해 묘사되어 있다:
예수께서 말하셨다, 내가 땅 위에 평화를 보내려고 온 것으로 생각하지 말라; 나는 평화를 보내려 온 것이 아니라 검을 보내려 왔다. 그 이유는 내가 온 것은 인간이 불일치하여 아버지와 맞서고, 딸은 자기 어머니와 맞서고, 며느리는 그의 시어머니와 맞서 있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인간의 적들은 그의 집안 식구 속의 그들이다 (마. 10:34-36);
예언서로부터 방금 위에서 인용한 같은 말들은 교회의 황폐해짐을 의미하는데, 여기서의 그것들은 교회에 있는 이들의 시험들을 의미한다, 그 이유는 이미 말했듯, 시험은 악과 거짓을 황폐시킴, 제거함밖에 더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이유 때문에 시험과 황폐함 모두가 물의 범람과 홍수에 의해 의미되고 묘사되었다. 여기서 역시 “불일치하여 자기 어머니와 맞선 딸”은 악에 애착함이 진리에 반대하는 것을; “며느리가 시어머니에 맞서는 것”은 거짓이 선에 반대하는 것을 표시한다. 그리고 시험에 있는 인간 안에서, 악들과 거짓들이 내부에 있고 그의 것인 바, 그것에 대해서, 그의 집안 식구라고 말해지고, “집안의 그들이 자기 적이다”라고 말해진 것이다. 시험이 묘사되었다는 것은 주님의 말하심, 즉 그분은 땅에 평화를 보내려가 아니고 검을 보내려고 오셨다 라고 말하신 대목에서 이다; 그 이유가 “검”에 의해 전투하는 진리가, 반대적 의미에서는 전투하는 거짓이 의미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그분은 평화를 주시려고 오셨다 (요. 14:27; 16:33). 위 마태복음서에서의 인용 구절에서 시험이 그렇게 묘사되었다는 것은 그 장에서 이어지는 대목에서(마. 10:38) 더 분명해진다; 즉 “자기 십자가를 짊어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는 나에게 가치가 없다.”
누가복음서 역시:
너희는 내가 땅에 평화를 주려고 온 것으로 상상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아니다; 그러나 분열이다; 그 이유가 이 후로부터 한 집에 다섯이 갈라져 있을 것이다, 셋이 둘에 맞서고, 둘이 셋에 맞서 있을 것이다. 아버지가 아들에 맞서, 그리고 아들이 아버지에 맞서 분열될 것이다; 어머니는 딸에 맞서, 그리고 딸은 어머니에 맞서; 시어머니는 며느리에 맞서, 그리고 며느리는 시어머니에 맞서 갈라져 있을 것이다 (눅. 12:51-53);
위 말들로부터 분명해지는 바, “아버지,” “어머니,” “아들,” “딸,” “며느리,” “시어머니”가 천국의 결혼으로부터 있는 이런저런 것들을 의미한다는 것, 즉 그것들의 질서에서 선들과 진리들, 또한 반대적 의미를 의미한다는 것이다; 마가복음서에서:
예수께서 말하셨다, 나와 복음을 위하여 집 또는 형제들 또는 자매들 또는 아버지 또는 어머니 또는 아내 또는 자녀들 또는 들판들을 떠난 사람은 이 때에서 집들과 형제들과 자매들과 어머니들과 자녀들과 들판들을 핍박들과 더불어 백배로 받을 것이다; 그리고 오는 시대에서 영원한 생명을 받을 것이다 (막. 10:29, 30);
말씀의 내적 의미에 친숙하지 않은 자는 집, 형제들, 자매들, 아버지, 어머니, 아내, 자녀들, 그리고 들판들이라는 것밖에 여기서 더 이상 의미되는 것이 없다고 상상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인간에게, 자기 자신에게 속한 것, 그가 포기해야 하는 것이 있고, 그는 그것을 포기한 대신 그가 주님에게서 반드시 받아서 그것의 빈 자리를 채워야 하는 것 영적, 천적인 것들이 있다는 것, 이러려면 반드시 시험을 수단으로 해야 한다는 것이 “핍박들”에 의해 뜻해지고 있다. 또한 누구나 위 구절을 두고 글자 의미대로 믿겠다고 각오해도, 어머니 한명을 포기했는데 어머니가 하나가 아닌 여러 어머니들을, 게다가 백배로 받는다는 말이 말도 안되는 소리인 것을 눈치 못채는 자는 없을 것이다.

네 아버지 집에서 과부로 남아 있어라. 이는 그 자체로부터 멀어짐을 의미한다.
이는 그가 그녀를 떠나보내고, 그에게 더 이상 되돌아 오기를 원하지 않았다는 사실로부터 분명해진다. 그는 실제로는 셀라, 자기 아들이 성장할 때까지 그녀의 아버지 집에서 남아있으라고 말했다; 그러나 여전히 그는 그녀가 셀라에게 주어지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 이유가 그는 자신에게 “그의 형들 같이 그가 죽지 않도록”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유다의 이 생각함은 14절에서, “다말은 셀라가 성장한 것, 그리고 자기가 그에게 아내로 주어지지 않는 것을 보았다”에서 유다의 생각이 행동으로 나타난 것에서도 입증되었다. 이상으로부터 그는 그녀를 자신으로부터 멀어지게 했다는 것이 의미되었음이 분명해진다; 이를 내적 의미에서 살피면, 다말에 의해 표현된 것, 즉 영적, 천적인 것들을 표현하는 교회가 유다에 의해 표현된 유태 교회로부터 멀어졌다는 것이다. 그 이유가 그들은 서로 일치하지 않았기 때문, 즉 유태주의는 교회의 껍데기(표현물)일 뿐이었고, 표현(적인) 교회는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그들은 외적인 것은 인정했으나 내적인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과부(widow)” 역시 선이 없는 교회의 진리를, 그리고 “남편”은 선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남편 없는 아내는 선이 없는 교회의 진리이다. 그리고 그녀에게 그녀는 “자기 아버지의 집에서 머물러라”고 말해질 때, 이것은 교회의 진리는 멀어져 있을 것, 그리고 자기 집에서 받아지지 않아야 할 것을 의미한다; 유태 민족은 이것을 받을 수 없었는데, 그 이유는 그들이 선 안에 있지 않고 악 안에 있었기 때문이다.
“과부”는 말씀에서 자주 등장하는 단어이기도 하다. 그러나 내적 의미에 친숙하지 않은 이들은 과부에 의해 과부가 의미된다고 믿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내적 의미에서 “과부”는 선이 없는 교회의 진리를 의미한다, 즉 선이 없는 교회의 진리 안에 있는 이들, 그러나 선 안에 있기를 바라는 이들, 결과적으로 선에 의해 인도받기를 사랑하는 이들; 그리고 “남편”은 인도하는 선이다. 이런 인물들이 고대 교회에서 과부에 의해, 그들이 남자이든, 여인이든 모두 과부의 좋은 의미에 해당된다고 이해되었다. 고대 교회에서 선행을 실시해야할 이들을 몇 계층으로 분류했는데, 그들을 가난한 자, 불쌍하고 역경에 처한 자, 묶인 자와 감옥에 있는 자, 소경과 절름발이, 낯선 자, 고아, 과부 등등이다. 그들은 선행의 일을 그들의 품질에 따라 그들에게 배분했다. 그들의 교리물들이 그들에게 이런 것들을 가르쳤다; 이 교회는 다른 교리물들이 없었다. 그러므로 이때 당시에 살았던 이들은 그들의 교리물에 따라 가르치고 적었다; 그들이 과부에 관해 가르쳤을 때, 과부에 대한 그들의 생각은 선이 없이 진리 안에 있으나 여전히 선에 의해 인도되기를 바라는 이들 외에 더 다른 과부에 대한 생각은 없었다.
위 살핀 바로부터 또한 분명해지는 것은, 고대 교회의 교리물이 선행과 이웃에 관련된 것을 가르쳤다는 것, 그리고 그들의 지식들은 외적인 것들이 의미하는 것을 앎에 있었다는 것이다. 그 이유가 교회는 영적, 천적인 것들의 표현이었으므로 그들이 교리물과 지식들을 수단으로 배운 것은 의미되고 표현된 영적, 천적인 것들이었다. 그러나 이런 교리물이나 지식들은 오늘날 완전히 말살되었다, 그야말로 그것들이 존재하지도 않았다는 정도로까지 말살되었다; 그 이유가 신앙의 교리물들이 선행의 교리물의 자리를 대신 꿰찾기 때문이다. 만일 신앙의 교리물이 과부가 되는 것, 즉 선행의 교리물로부터 분리된다면, 거의 아무것도 가르치는 것이 없다. 그 이유가 선행의 교리물이 무엇이 선인지를 가르치고, 신앙의 교리물은 진리가 무엇인지를 가르치기 때문이다. 선이 없는 진리를 가르치는 것은 소경이 길을 걷는 것과 같다. 그 이유는 가르치고 인도하는 것이 선이고, 가르쳐진 것, 인도된 것이 진리이기 때문이다. 이 두 교리물은 빛과 어둠 같이 큰 차이가 있다; 그리고 어둠이 빛에 의해 계몽되지 않는다면, 즉 진리가 선에 의해, 또는 선행에 의한 신앙에 의해 계발되지 않는다면, 어둠밖에 더 있는 것은 없다. 그러므로 누구도 어떤 것이 진리인지 아닌지를 진리를 슬쩍 보는 것으로, 지각으로부터도 알지 못하고, 오직 어린 시절에 흡수되고, 성인 시절에 확증된 교리로부터서만 아는 것이 가능하다. 이로 미루어 알게 되는 것은, 교회는 아주 폭넓게 교리를 지닌다는 것, 하여 이 교회는 진리라고, 저 교회는 거짓이라 불리우고, 이것들은 결코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좋은 의미에서 “과부들”에 의해서는 선이 없는 진리들에 있으나 여전히 선에 의해 인도되기를 갈망하는 이들이 의미된다는 것이 아래 구절에서 분명해진다:
여호와, 이 분은 억눌린 자를 위하여 심판을 집행하신다, 이 분은 배고픈 자에게 식품을 주신다, 이 분은 묶인 자를 푸신다, 이 분은 소경[의 눈을] 여신다, 이 분은 구부려 절하는 자를 일으키신다, 이 분은 공정한 자를 사랑하신다, 이 분은 체류자를 보전하신다, 이 분은 고아와 과부를 지지하신다 (시. 146:7-9);
위 구절의 내적 의미에서 주님에 의해 진리들 안에서 가르침을 받고 선으로 인도되는 자들이 뜻해진다; 이런 이들 중 얼마는 “억눌린 자,” “과부,” “배고픈 자,” “묶인 자,” “소경,” “아래로 엎드려 절하는 자,” “체류자,” “고아,” “과부,” 등등이다. 이것은 품질에 따라서 이다; 그러나 이것이 무엇인지는 내적 의미로부터가 아니면 아무도 알 수 없다. 고대 교회의 교리물들이 이를 가르쳤다. 위 구절, 내지 다른 몇 구절에서 체류자, 고아, 과부는 연합하여 명명된다, 그 이유는 “체류자”에 의해 신앙의 진리들 안에서 가르침을 받기를 원하는 이들을, 고아에 의해서는 진리 없이 선 안에 있어 진리를 수단으로 선쪽으로 인도되기를 바라는 이들을, 과부는 선 없이 진리 안에 있어 선을 수단으로 진리쪽으로 인도되기를 바라는 이들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 세 부류가 여기서, 그리고 다른 구절에서도 한 세트(set)인 듯 명명되어지는 이유는, 이들이 내적 의미에서 하나의 부류를 구성하기 때문이다, 이 셋을 한꺼번에 말하면, 선과 진리에 대하여 가르침을 받기를 원하고 선과 진리쪽으로 인도되기를 바라는 이들이 의미된다.
다시:
고아들의 아버지, 과부들의 재판관은 그분의 거룩함의 주택 안에 계신 하느님이시다 (시. 68:5);
“고아”는 작은 아이들 같이 순진의 선 안에 있는 이들, 그러나 진리 안에 있지 않은 이들을 표시하고, 이들의 아버지가 주님이시다고 말해진다, 그 이유는 그분이 아버지로서 그들을 인도하시어 진리를 통하여 선 안으로, 즉 생활의 선 안으로, 또는 지혜의 선 안으로 인도하시 기 때문이다. “과부”는 성인들이 진리 안에 있듯, 그러나 선 안에 있지 않은 이들을 표시하고, 이들의 재판관이 주님이시다고 말해진다, 그 이유는 그분이 그들을 인도하시기 때문, 즉 선을 통하여 진리 안으로, 즉 총명의 진리 안으로 인도하시기 때문이다. “고아”인 진리 없는 선은 진리의 교리를 통하여 지혜의 선이 되어 간다; 그리고 “과부”인 선이 없는 진리는 선의 생활을 통하여 총명의 진리가 되어 간다.
이사야서에서:
재판에서 가난한 자를 외면하는 불의한 법령을 포고하는 자, 그리고 뺏기 위하여 내 백성의 비천한 자를 재판 안으로 끌어들이는 자, 즉 과부들이 그들의 약탈품이 되고, 고아들을 털어가는 자에게 화있을 것이다 (이. 10:1, 2);
위에서 “비천한 자,” “가난한 자,” “과부”, 그리고 “고아”는 자연계의 그들이 아니라 영계에서 의미되는 그들이다. 유태 교회도 고대 교회에서와 같이 모든 것들은 표현적이었다, 고아와 과부에게 선을 행하는 것 역시 표현적이다. 그 이유가 영적 의미에서 이와 같이 있는 이들을 향한 선행이 천국에서 표현되기 때문이다.
예레미야서에서:
너희는 공평과 공정을 행하라, 그리고 약탈된 자를 압제자의 손에서 구출하라; 그리고 체류자, 고아, 과부로부터 사취하지 말며, 폭력을 행사하지 말며, 이 장소에서 순진한 자의 피를 흘리지 말라 (예. 22:3);
위에서 “체류자, 고아, 과부”에 의해 영적으로 그와 같은 이들이 의미된다; 그 이유가 영계에서 또는 천국에서는 지상에서 있는 것과 같은 그들이 거기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말들이 인간에 의해 읽힐 때, 천사들에 의해서 그들은 그들의 내적, 영적 의미에서 지각된다.
에스겔서에서:
보라 이스라엘의 제 일인 자들아, 너희 각각은 자기의 무력에 따라 피를 흘리기 위하여 너희 안에 있어 왔다. 너희 안에서 그들은 아버지와 어머니를 우습게 여겼다; 너희 한가운데에서 그들은 체류자를 압제를 수단으로 취급했다; 너희 안에서 그들은 고아와 과부에게서 사취했다
(겔. 22:6, 7).
말라기서에서:
나는 심판하러 너에게 가까이 올 것이다; 그리고 나는 신속한 증인을 마술사에 맞서서, 거짓 맹세자에 맞서서, 품삯을 놓고 삯꾼을, 그리고 고아와 과부를 압제하는 이들에 맞서, 그리고 체류자를 외면하는 이들에 맞서, 나를 두려워하지 않는 이들에 맞서 있을 것이다 (말. 3:5).
모세의 책에서:
너는 체류자에게 해를 끼치지 말라, 그를 압제하지 말라. 너희는 어떤 과부나 고아도 괴롭히지 말라. 만일 너희가 여하튼 그들을 괴롭혀서 그들이 나에게 외치면, 나는 그들의 음성을 반드시 들을 것이다; 그리고 나의 노염이 끓어오를 것이다, 그리고 나는 너희를 검으로 죽일 것이다, 그리고 너희 아내는 과부가 되고 너희 자녀는 고아가 될 것이다 (출. 22:21-24).
위 구절, 여타 다른 가르침과 같이, 유태 교회에서의 공정과 규례는 표현적이었다; 그리고 그 교회에서 그들이 외적으로 그렇게 행하도록 보존되었다, 그리고 이와 같은 것들을 수단으로 선행의 내적인 것들을 표현하기 위해, 비록 그들이 선행의 아무것도 가지지 않았을 지라도, 또한 내적 애착으로부터 그것들을 준행하지 않았을지라도 표현은 되어 있었다. 내적인 것은 애착으로부터 무지 안에 있는 이들을 진리들 안에서 가르치고, 선쪽으로 진리를 수단으로 인도하기 위해 있었다; 그럼으로 해서 그들은 체류자와 고아, 과부에게 영적 의미에서 선을 행할 것이다. 그럼에도 외적인 것은 표현을 위하여 남아있어야 하기에, 체류자나 고아, 과부를 억울하게 하는 이들에게 저주가 있으리라고 에발 산에서 발표되었다 (신. 27:19). “그들의 공정함을 외면하는 것(억울하게 하는 것)”란 반대되는 짓을 행하는 것, 즉 거짓과 악한 것쪽으로 생활과 가르침을 수단으로 인도하는 것이다. 그리고 타인들로부터 선들과 진리들을 빼앗고, 자기 명예나 이득을 위하여 자기 것 삼는 자에게 저주가 있기 때문에 주님께서 말하셨다:
너희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에게 화있을 것이다! 그 이유가 너희는 과부의 집을 삼키기 때문, 체면을 위해 기도를 길게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더 철저한 심판을 받을 것이다
(마. 23:14; 눅. 20:47);
“과부의 집을 삼키는 것”은 진리들을 바라는 이들로부터 진리들을 가져가고 거짓들을 가르치는 것을 뜻한다.
들판에, 올리브원에, 포도원에 남겨진 것은 체류자, 고아, 과부를 위해서 였다는 것도 표현적 이었다 (신. 24:19-22); 그리고 그들이 삼 년째 해의 소출의 십일조 바치기를 끝냈을 때, 그들은 그것을 체류자에게, 고아, 과부에게 주어야 한다고, 하여 그들의 성문에서 그들의 배를 채우도록 했다 (신. 26:12). 가르치고 선으로 인도하는 분은 주님뿐이기 때문에 예레미야서에서 말해진다:
네 고아들을 남겨두어라, 내가 그들을 살아 있게 만들 것이다; 그리고 과부들은 나를 신뢰할 것이다 (예. 49:11);
모세의 책에서:
여호와께서 고아와 과부의 재판을 집행하신다, 그리고 체류자를 사랑하시어, 그에게 빵과 의복을 주신다 (신. 10:18);
“빵”은 사랑의 선을; “의복”은 신앙의 진리를 표시한다.
엘리야에 관련된 사건: 토지에 비가 내리지 않아 가믐이 있었을 때, 그는 사렙다로 과부에게로 보내졌다, 그리고 그는 그녀에게 케잌 조금을 요구하고, 그녀가 만들어서 자기에게 먼저 가져오고 그 다음 그녀와 아들이 먹도록 했다, 그때 곡식가루 통은 다 소비되지 않았고, 기름병의 기름 역시 떨어지지 않았다 (왕상. 17:1-16)는 것 역시 표현적이다. 이는 엘리야에 관련된 다른 사건도 마찬가지로 표현적이다. 비가 내리지 않아서 가믐이 있는 토지는 교회에 진리가 황폐함을 표현했다; 사렙다의 과부는 진리를 바라는 교회 바깥에 있는 이들을 표현했다; 그녀가 그를 위해 먼저 만든 케잌(cake)은 주님을 사랑함의 선을 표현했다, 그분을 그녀는 자기가 가졌던 조금으로부터 자신과 아들 위에서 사랑하였다; 곡식가루통은 선으로부터의 진리를 의미한다, 그리고 기름병은 선행과 사랑을 의미한다; 엘리야는 위와 같은 일이 행해진 수단인 말씀을 표현한다.
이것이 주님의 말씀에 의해 내적 의미에서 뜻해진다:
자기 자신의 고향에서 예언자는 받아지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하나의 진리에 관해 말한다, 이스라엘에서 엘리야의 시대에, 하늘이 삼 년 육 개월 동안 닫히어, 모든 토지 위에 가믐이 있었던 때에 많은 과부들이 있었다. 그러나 과부였던 여인인 그들 중에서 오직 시돈의 사렙다로 엘리야는 보내졌다 (눅. 4:24-26);
엘리야는 진리를 바라는 교회 밖의 이들에게 보내진 것이다. 그러나 황폐된 교회 안의 과부들에게 엘리야는 보내지지 않았다. 이 교회인은 선 안에 있지 않기 때문에 진리 안에 있지 않은 이들이; 그 이유가 제아무리 많은 진리가 바깥쪽 형체에서 그들과 더불어 진리 같이 나타난다 할지라도, 선이 없는 곳에서는 어디든지 진리도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즉 알맹이가 없는 쭉정이 같이 있을 뿐이다는 말이다.
이런 진리 안에 있는 이들, 그리고 또한 거짓 안에 있는 이들은 “과부”의 반대적 의미에서 의미된다: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로부터 하루만에 가지와 골풀, 머리와 꼬리를 절단하실 것이다. 원로와 얼굴에서 존경된 자는 머리이고, 거짓말의 선생인 예언자는 꼬리이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그들의 젊은 이들 위에서 기뻐하시지 않을 것이다, 그는 그들의 고아와 과부에게 동정심을 가지시지 않을 것이다 (이. 9: 14, 15, 17).
예레미야서에서:
나는 토지의 큰문(성문)에서 꺄부르는 키를 가지고 그들을 꺄부를 것이다; 나는 그들로부터 자녀를 빼앗을 것이다, 나는 내 백성을 파괴할 것이다; 그들은 자기들의 길로부터 돌아서지 않았다. 그들의 과부들은 바다의 모래 이상으로 나에게 불어나졌다; 나는 그들에게, 젊은 이의 어머니 위에 정오에 황폐하게 하는 자를 데려올 것이다. 일곱을 낳은 여인은 녹초가 되고; 그녀는 졸도하고, 그녀의 태양은 낮인데도 저물 것이다 (예. 15:7-9).
다시:
우리의 상속분이 낯선 자에게로 돌아가졌다, 우리의 집들은 외국인에게 돌아갔다. 우리는 아버지 없는 고아들이다, 우리의 어머니들은 과부들 같이 있다 (애. 5:2, 3).
“과부들”에 의해 선 안에 있지 않기 때문에 진리 안에 있지 않은 이들이 의미되기에, 이들은 악으로부터의 거짓들 안에 있는 이들이나 매한가지 라고, 과부로 불리워져야 한다 라고 교회들을 질책한 것이 계시록서에서:
그녀는 자기 심정에 말했다, 나는 여왕으로 앉을 것이다, 그리고 과부가 아니다, 그리고 나는 슬픔을 보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하루에 그녀에게 재앙, 죽음과 슬퍼함이, 가믐이 올 것이다; 그리고 그녀는 불로 태워질 것이다 (계. 18:7, 8);
위 모두로부터 말씀에서 “과부”에 의해 뜻해진 것이 분명해졌을 것이다; 그리고 과부가 선 없는 교회의 진리를 표현하고 의미하고- 아내는 진리를, 남편은 선을 의미하기 때문에- 그러므로 고대 교회에서 일반적, 특수적 모든 것들은 표현적이었기에, 성직자는 성직자의 과부가 아닌 과부와 결혼하는 것을 금했다:
대성직자는 처녀에서 아내를 데려올 것이다. 과부, 또는 이혼녀, 또는 오염된 여인, 또는 간음녀, 이들을 데려오지 말 것이다; 그러나 자기 자신의 백성의 처녀를 그는 자기 아내로 데려올 것이다 (레. 21:13, 14);
그리고 새로운 성전과 새로운 성직 직분에 관하여:
성직자인 레위인은 자기 아내로 과부, 이혼녀를 데려오지 말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스라엘 가문의 씨의 처녀를 데려올 것이다; 그럼에도 성직자의 과부인 과부는 데려와도 좋다 (겔. 44:22).
위와 같이 명령된 이유는 그들이 결혼하는 처녀가 진리에 애착함을, 성직자의 과부는 선으로부터의 진리에 애착함을 표현하고 의미했기 때문이다; 또한 “성직자”는 표현적 의미에서 교회의 선이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아이 없고, 과부가 된 성직자의 딸은 거룩한 것, 또는 제물을 먹도록 허용되었다 (레. 22:12, 13).
이것이 “과부”의 의미인 것은 고대 교회 속에 있던 이들에게 그들의 교리물로부터 알려졌다; 그 이유가 그들의 교리물들은 사랑과 선행의 교리물들이었는데, 이 교리물은 오늘날에는 말살된 무수한 것들을 담고 있었다. 이런 교리물로부터 그들은 무슨 선행이 실시되어야 하는 지를, 자기들은 무슨 의무를 이웃에게 빚지고 있는 지를 알았고, 고로 자기들은 고아들, 과부들, 체류자들이라 불리워진다는 것을 알았다. 진리에 관한 그들의 지식과 기억 속의 지식들은 자기들의 교회의 의식들이 무엇을 표현하고 의미하는 지를 알았다; 그들 사이에 학식이 있는 자들은 땅 위와 세상에 있는 것들이 표현한 것을 알았다; 그 이유가 그들은 보편적인 자연계는 천국 왕국을 표현하는 극장무대이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지식들이 그들의 마음을 천국의 것들 쪽으로 승강되게 했고, 그 교리물은 그들의 생활을 인도해 주었다. 그러나 교회가 선행으로부터 신앙쪽으로 길을 잘못 들어선 이후, 더욱이 신앙이 선으로부터 분리된 이후, 그리고 선행과 선행의 일 없이도 신앙이 구원한다고 만들어버린 이후, 인간의 마음은 지식들을 수단으로 천국의 것들 쪽으로 더 이상 승강하지 못했고, 교리물에 의해서도 삶을 인도받지 못했다; 그리하여 사후 삶이 있다는 것을 믿는 자가 거의 없어지고, 거의 누구도 천국이 무엇인지를 아는 자가 없게 되었다. 동시에 말씀 안에는 글자 의미에서 나타나지 않는 영적 의미가 있다는 것은 믿어질 수 없게 되었다. 이런 길에서 인간의 마음은 닫혀져 있어 왔다.

내 아들 셀라가 성장될 때 까지. 이는 (시간이 찰) 때까지를 의미한다. 이는 “성장됨”의 의미가 어떤 나이에 있는 것이다, 즉 시간이 채워지다로부터; 그리고 셀라, 아들의 표현함이 우상적인 것이다로부터, 고로 유태 종교인데, 이들과 더불은 이 종교는 우상숭배였다. 이로부터 “셀라 나의 아들이 성장될 때까지”는 유태 종교가 내적인 것, 또는 다말인 표현 교회의 영적, 천적인 것들을 받을 수 있는 (시간이 찰) 때까지가 의미된다.

그가…말했기 때문이다. 이는 생각함을 의미한다. 이는 말씀의 역사적 부분에서 “말하다”의 의미가 지각하다와 생각하다 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러므로 여기서 “그가 말했다”에 의해 그가 자신 안에서 다말은 아내로 그의 아들 셀라에게 주어지지 않는다 라고 말했다, 또는 생각했다가 의미된다. 이는 내적 의미에서 표현 교회 속의 내적인 것들은 멀어지리라는 것이다.

그 또한 그의 형들 같이 죽지 않도록. 이는 그것이 멸해질까 걱정함을 의미한다. 즉 야곱으로부터 내려와 후손들과 더불어 있었던 교회의 표현, 특별하게는 야곱으로부터 유다를 통하여 내려가는 교회의 표현이 멸해질까 걱정함을 의미한다. 이는 “그가 죽지 않도록”의 의미가 멸해질까 걱정함이다로부터 분명해진다. 여기서 이런 점에 대해 주목해보자. 즉 만일 진짜 표현 교회의 내적인 것들이 야곱의 후손들에 인접되었다면, 야곱의 후손과 더불어 있었던 교회의 표현은 멸해졌을 것이다는 점에 대하여 이다. 이 경우는 다음과 같다. 표현 교회, 즉 고대인들 사이에 존재했었던 것과 같은 교회가 야곱의 후손과 더불어 설립되어 가기로 되어 왔었다. 그러나 이 민족의 특성은 외적인 것들만을 예배하고 숭배하기를 원했고, 내적인 것들이라면 여하튼 어떤 것도 원하지 않았다; 그 이유가 그들은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 안에, 이 사랑으로부터 거짓 안에 침수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 민족은 이방인들보다 한술 더 떠서 많은 하느님들이 있다고, 그러나 여호와라는 하느님은 여타 하느님들보다 더 위대하시다는 것, 그 이유는 그분은 더 큰 기적들을 일으키시기 때문이다고 믿었다; 그러므로 기적 사실들이 뜸해진다든가, 여호와를 자주 부르다보니 그분에게 친구 같은 느낌이 들 때 (요즘 말로 잘 대해주니까 올라타려 든다는 식, 역자주), 하여 그분을 조금 낮게 평가할 경우, 그들은 금새 다른 신들에게로 방향을 틀었는데, 이는 말씀의 역사서나 예언서에서 흔히 목격된다.
이런 이 민족의 특질 때문에, 고대인들 사이에 존재했던 것 같은 표현 교회(a representative church)는 설립되어질 수 없었고, 대신 교회의 표현물(교회의 껍데기, the representative of church)만이 존재하였다; 이렇게 라도 주님께서 설비해두신 것은 그것에 의해서 천국과의 어떤 교통이 결과될런지도 모르기 때문에서 였다; 그 이유가 표현인 것은 악한 자와 더불어서도 가능하다, 그 이유는 이것은 인물(person)이 아니라 어떤 것(thing)이기 때문이다. 비록 그들의 의식들(예배들) 안쪽에 거룩한 신성의 것들이 포함되고 있다 할지라도 이 민족들에게는 우상숭배를 하고 있었음이 분명해진다(4825항). 이런 우상숭배적인 예배와 더불어 내적인 것은 결합되어질 수 없었다, 그 이유가 만일 결합이 있다면, 즉 그들이 내적인 것을 인정했다면, 그들은 그것들을 모독하고야 말았을 것이기 때문; 그 이유가 거룩한 것이 우상적인 외적인 것과 결합된다면, 필시 모독되어지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이 민족에게는 내적인 것이 열려지지 않았고, 만일 열려졌다면, 이 민족은 멸해지고 말았을 것이다.
이 민족이 내적인 것들을 받을 수 없었고, 인정할 수도 없었다는 것은 그들에게 얼마나 내적인 것들이 밝혀졌을런지는 모르나, 어쨌든 오늘날의 그들을 보아도 분명해진다; 그 이유가 그들이 기독인들 사이에서도 살지만, 여전히 그들은 그것들을 거절하고 조소하기 때문이다. 전환하였다는 이들조차도 심정으로는 그들의 뿌리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고로 영적, 천적인 것들을 표현하는 교회가 이 민족과 더불어 있지 않다는 것, 그러나 내적인 것 없는 외적인 것, 그 자체 우상숭배인 것인 교회의 표현물만이 존재했음이 분명하다. 게다가 어떤 기독인들의 경우, 이 민족이 선택된 민족인지라 마지막 날에는 전향되고 아마 기독인들에 앞서 천국으로 불려질 것이라 착각하고 있다, 또한 더 착각하는 것은, 마지막 날 메시아, 또는 주님이 그들에게 더 큰 기적을 베푸시며 나타나서 그들을 가나안의 토지로 데려가실 것이라고 상상한다. 이런 망상적 오류가 일어나는 주요한 원인은 말씀의 예언서 부분들에 있는 “유다,” “이스라엘,” “가나안의 토지,” 등등을 단순히 유다, 이스라엘, 가나안의 토지로 이해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말씀의 내적 의미에 아무런 관심을 두지 않고 막연히 글자 의미만을 믿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말은 가서] 그녀의 아버지의 집에서 머물렀다. 이는 그 자체로부터 멀어짐을 의미한다. 이는 앞에서 살핀 바 있어 설명을 생략한다.

12-14절. 그리고 날들이 늘어나졌다, 그리고 유다의 아내 수아의 딸이 죽었다. 그리고 유다는 위로 받아졌다, 그리고 그의 양떼의 털을 깎는 자 쪽으로 그와 그의 동료 아둘람족 히라는 딤나로 올라 갔다. 13 그리고 [누가] 다말에게 말하기를, 너의 시아버지가 그의 양털을 깎으러 딤나로 가더라. 14 그리고 그녀는 그녀의 과부의 옷을 벗고, 자신을 너울로 덮고, 그리고 자신을 둘둘말았다, 그리고 딤나로 가는 길에 있는 샘들의 문에 앉았다. 그 이유가 그녀는 셀라가 성장한 것을 보았고, 그리고 자기가 여인으로 그에게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날들이 늘어나졌다. 이는 상태의 변화를 의미한다. 이는 내적 의미에서, “날” 또는 “때”가 상태이다로부터; 그리고 “늘어남”이 날, 때를 서술할 경우, 변화됨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것이 상태의 변화됨을 의미하는 것은 아래로부터 분명해진다. 이것이 “늘어나졌다, were multiplied”라고 말해진 이유는 상태의 변화가 진리들 측면을 포함했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늘어남, 불어남”이 진리들을 서술하기 때문이다. 상태와 상태의 변화는 자주 언급되기에, 그리고 이것이 뜻하는 것을 아는 자가 적기에, 설명이 보충되어야 할 것 같다. 시간과 시간의 계속, 또는 공간과 공간이 넓혀짐이 인간의 내면들, 즉 생각들과 애착들을 서술할 수가 없다, 그 이유는 이런 내면의 것들은 시공 안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비록 인간에게 시공 안에 있는 듯 나타나고 있다 할지라도 엄밀히 말해 이것은 착각일 뿐이다. 그러나 내면의 것들은 시공에 있는 것들과 상응한다. 상응하는 내면의 것들을 우리는 상태(state)라고 부른다. 그 이유가 상응하는 것들을 상태라는 단어 외에는 표현할 수 있는 단어가 없기 때문이다. 마음 또는 심정이 애착들과 생각들 측면에서 바뀔 때, 즉 슬픔이 기쁨, 또는 기쁨이 슬픔으로, 또는 불경함에서 경건함으로 등등 같이 바뀔 때 상태가 변한다 라고 말해진다. 그리고 이 변화들이 상태의 변화들이라 불리우고, 애착을 서술한다, 또한 이 애착에 의해 통치되는 만큼에서 생각들을 서술한다. 생각 속의 상태의 변화는 애착 속에 있는 것과 같은데, 마치 특별 사항들이 일반적인 것들 안에 있는 경우와 같다, 고로 서로 비교하여 다양해진다.

그리고 수아의 딸이 죽었다. 이는 거짓으로부터의 악에 관련하여를 의미한다. 이는 “죽다”의 의미가 이런 품질 속에 있기를 중단함이다로부터; 그리고 “수아의 딸”의 의미가 거짓으로부터의 악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러므로 날들이 늘어진 이후 수아의 딸이 죽다에 의해 거짓으로부터의 악 측면의 상태의 변함이 의미되고, 이는 이전 같은 상태가 아니었다가 의미된다.

유다의 아내. 이는 야곱으로부터, 특히 유다로부터 내려오는 민족들과 더불은 광신적 신앙을 의미한다. 이는 “아내”의 의미가 교회이다로부터, 여기서는 광신적 신앙, 그 이유는 내적인 것으로부터 분리된 교회의 외적인 것이다로부터, 이것이 광신적 신앙이라 불리울 수밖에 없는 이유는 그들은 거룩한 외적인 것 안에 있을 수 있는데도, 거룩한 내적인 것은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유다의 표현함이 야곱으로부터, 특별하게는 유다로부터 내려온 민족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리고 유다는 위로되어졌다란 휴식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의 양떼의 털을 깎는 자 쪽으로 올라 갔다. 이는 교회를 위해 상담하려는 어떤 승강을 의미한다. 이는 “올라감”의 의미가 승강함, 즉 외면의 것으로부터 내면의 것쪽으로 승강함이다로부터; 그리고 “털을 깍는 자”의 의미가 사용중에 있음, 고로 사용할 것임, 또는 그것을 위해 상담을 함이다로부터; “양떼”의 의미가 교회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와 그의 동료 아둘람족 히라. 이는 그것이 아직도 거짓 안에 있었음을 의미한다. 이는 아둘람족 히라의 표현함이 거짓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가 여기서 “동료”라고 말해졌는 바, 이는 거짓이 그것에 인접하였다, 또는 그것이 아직도 거짓 안에 있다가 의미된다.

딤나로. 이는 그 상태를 의미한다. 즉 교회를 위해 상담을 하는 상태를 의미한다. “딤나”가 이 상태를 의미하는 것은 사사기서에서 삼손이 딤나로 내려가서 불레셋의 딸들로부터 아내를 데려오는 대목(사. 14:1-4, 7)에서, “딤나”에 의해 본문과 같이 교회를 위해 상담을 하는 상태가 의미되는 것에서 알게 된다. 삼손이 불레셋의 딸들로부터 데려온 아내는 표현적 의미에서 선이 아닌 것으로부터의 진리, 고로 불명확한 진리인데, 이것이 여기서 딤나에 의해 표현되어지고 있다; 그 이유가 “불레셋”은 신앙의 교리 안에는 있으나 그것에 따른 생활이 없는 이들이다. 더구나 딤나는 단 지파의 상속분의 장소들 사이에서 언급되고 있다 (여. 19:43). 말씀에 있는 장소들의 모든 이름들은 어떤 것과 어떤 상태를 의미한다.

그리고 [누가] 다말에게 말하기를. 이는 영적인 것들과 천적인 것들을 표현하는 교회와의 어떤 교통을 의미한다. 이는 “말해짐”의 의미가 지각함이다로부터, 고로 교통함, 여기서는 교통함의 어떤 것; 그리고 다말의 표현함이 영적, 천적인 것들을 표현하는 교회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상태가 바뀔 때 교회와 더불은 교통함, 즉 교회를 위하여 상담하는 어떤 승강함이 있다.

네 시아버지가 그의 양떼의 털을 깎으러 딤나로 가더라. 이는 유태 교회가 자체를 위해 상담받기를 원했음을 의미한다. 이는 유다의 표현함이 야곱, 특히 여기서 “시아버지”라고 불리우는 유다로부터 내려가는 민족과 더불은 교회이다로부터, 그 이유는 “며느리”인 영적, 천적인 것을 표현하는 교회와 교통하는 어떤 것이 있었다 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올라감”의 의미가 어떤 승강함이다로부터; 그리고 “양털을 깍는다”의 의미가 교회를 위해 상담함이다로부터, “딤나” 역시 그것을 위해 상담하는 상태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런 내적 의미들이 이런 말들 안에 포함되었다는 것에 대해 여러분은 의아해 여길지 모른다; 그 이유가 이런 의미를 글자로부터서는 어떤 느낌 징후조차 감지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그 이유가 우리가 이 구절들을 읽을 때, 우리의 마음이 유다, 딤나, 양털을 깍음의 영적인 것이 아닌 것만을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천사들의 경우는 다르다, 즉 그들은 영적인 것들 안에 있기 때문에, 우리와 달리 세상적인 것들을 전혀 지각하지 못한다. 즉 우리가 글자를 읽을 때, 그들은 영적인 것으로 건너간다. 세상의 장소, 인물 등등은 멸해지고, 대신 교회에 관련되는 것, 교회의 상태, 교회 안에서 사용되는 것을 지각한다.
어쨌든 인간에게 위와 같은 얘기는 거짓말 같은 소리로밖에 나타나지 않을지 모른다. 그 이유가 인간은 세상에 사는 한, 자기가 속한 자연계에 있는 것으로부터 생각할 수밖에 없다는 것은 그가 육체적 세상적인 것들 안에 침수되어 있음에서 비롯된 엄연한 사실인 바, 그가 영적이고 천적인 것을 모르는 것이 당연할지 모른다, 더욱이 영적, 천적인 것들이 세상적, 육체적인 것들과 구분된다는 것, 즉 영과 몸이 같이 있지만 이를 따로따로 말해도 누구나 이해하지 않던가? 인간의 영이 육체 안에서 살 듯, 영적 의미가 글자 의미 안에서 살고 있다는 것, 또한 글자 의미가 멸해질 때, 영적 의미는 생존한다는 것; 고로 내적 의미는 말씀의 혼이라고 말하면 기독인들 조차 고개를 까우뚱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그리고 그녀는 자기의 과부 차림의 옷을 벗었다. 이는 선으로부터 있는 진리인체 속임을 의미한다. 이는 “과부”의 의미가 선 없이 진리 안에 이들, 그러나 선에 의해 인도되기를 바라는 이들이다로부터. 옷이 진리들을 의미하기 때문에, 과부가 입는 옷은 위의 진리를 표현했다. 그러므로 “이 옷을 벗는 것”은 과부의 표현을 중단하는 것, 즉, 선이 없는 진리이기를 중단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녀가 자신을 너울(veil)로 덮었기 때문에 선으로부터 있는 진리인체 속이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을 너울로 덮었다. 이는 진리가 불명료했음을 의미한다. 이는 “자신을 덮음” 또는 “너울로” 그녀의 얼굴을 가림의 의미가 감추는 것, 선으로부터 있는 체 하는 진리가 불명확해지게 하는 것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리고 이것은 유다와 결합하기 위해서 이었다. 옛부터의 관습에서, 신랑이 신부에게 처음 접근할 때, 그녀는 너울로 자신을 가렸다(덮었다). 이는 리브가에게 이삭이 다가왔을 때의 대목에서 살핀 적이 있다 (창. 24:65); 그리고 이를 수단으로 진리의 나타남이 의미되었다. 그 이유가 아내는 진리를 의미하고, 남편은 선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진리는 그 진리의 선과 결합할 때까지 진리의 품질이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를 표현하기 위하여 신부는 자신의 남편을 처음 볼 때, 너울로 자신을 덮었던 것이다. 이런 경우는 다말의 경우도 비슷하다. 여기서는 다말이 자기의 남편으로 유다의 아들 셈을 기다려왔는데, 정작 그녀가 셈에게 주어지지 않자, 그 대신 남편의 형제된 의무를 수행할 자로 그의 아버지를 남편으로 간주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녀는 신부가 사용하는 너울로 자신을 덮었는 바, 이는 매춘부가 아니다는 표시이기도 하다. 물론 유다의 입장에서는 그녀를 매춘부로 간주했을지라도 다말의 입장에서는 매춘부가 아닌 것이다. 유다가 그녀를 매춘부로 간주한 이유는, 유태 민족, 여기서 “유다”로 의미되는데, 그들은 표현 교회의 내적 진리들을 매춘부로밖에 달리 간주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유다는 매춘부로서의 그녀와 결합되었으나, 다말이 유다와의 결합은 그렇지 않았다. 내적 진리들은 이 민족들과 더불어서는 이렇게밖에 나타날 수 없었다. 그러므로 불명확한 진리가 다말이 자신을 덮은 너울에 의해 의미되는 것이다. 교회의 진리가 그들에게 불명확해져 있다는 것은 오늘날 그들의 회당에서 너울로 자신을 덮는 것에 의해서도 표현되고 있다.
너울이 모세에 관련된 대목도 있다. 그가 시내산에서 내려왔을 때 그의 얼굴이 빛났으므로 그는 백성들과 말을 할 때는 너울로 가려야 했다 (출. 34:28-끝절). 모세는 율법이라 불리우는 말씀을 표현했다 (창. 18장 서문 참조); 그 이유가 이런 이유에서 “율법과 예언서”라고 말해졌기 때문이다 (마. 5:17; 11:13; 22:36, 40); 때로는 “모세와 예언자”라고 말해지기도 했다 (눅. 16:29, 31; 24:27, 44). 그의 얼굴의 피부가 빛남에 의해 말씀의 내적 측면이 표현되었는데, 그 이유는 “얼굴”이 내적 측면이기 때문이다; 영적인 내적인 것은 천국의 빛 안에 있다. 모세가 백성과 말할 때는 언제나 너울로 얼굴을 가렸는데 이는 내적 진리가 그들에게는 덮인 채로 있었다는 것, 하여 불명확한채로 있어 그들은 그것으로부터의 어떤 빛을 감내하지 않아도 되게 되어 있었다.

자신을 둘둘말았다. 이는 그러므로 해서 인정되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이는 “둘둘 말다”의 의미가 감추는 것이다로부터, 고로 인정되어지지 않았다 이다.

그리고 딤나로 가는 길에 있는 샘들의 큰문(gate)에 앉았다. 이는 교회의 진리들과 거짓들의 중간에 있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샘들”의 의미가 말씀으로부터 있는 교회의 진리들이다로부터; 그 이유가 “샘”은 보편적 의미에서 말씀이기 때문이다. “샘들의 큰문”은 이런 진리들 쪽으로의 입구이다; 그리고 말씀의 글자 의미의 외적 진리들이 입구를 제공해주기 때문에, 그것들은 “큰문(성문, gate)”이다. 그러나 이 진리들이 내적 진리들에 의해 계발되지 않으면, 그것들은 악 안에 있는 이들과 더불어 거짓들을 표현한다. 그러므로 교회의 진리들과 거짓들의 중간에 있는 것이 여기서 “샘들의 큰문”에 의해 의미되는 것이다. “딤나로 가는 길 위에”란 교회가 사용함쪽으로 이다, 그 이유는 “딤나”가 교회를 위해 상담하는 상태이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그녀는 셀라가 장성한 것을 보았고, 자기가 여인으로 그에게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는 [표현 교회의 진리는] 야곱의 후손, 특히 유다로부터의 후손에 있었던 광신적 신앙과 합쳐지는 도리밖에 더 다른 방도가 있을 수 없다고 식별함을 의미한다. 이는 “보다”의 의미가 식별하다(discernment)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여기서의 식별하는 것은 표현 교회의 진리가 야곱, 특별히 유다로부터 내려오는 광신적 신앙과 결합되는 도리밖에 더 다른 방도가 없다고 판단함인 이유는 “유다”에 의해 이 후손이 의미되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그들의 광신적 신앙이고, 이것에 결합되어졌다. 그 이유는 셀라와 결합되어질 수 없었기 때문이다. 셀라에 의해서는 우상적인 것이 표현되었는데, 다말인 표현 교회의 진리는 결합될 수 없었다.

15-18절. 그리고 유다가 그녀를 보았다, 그리고 그녀가 창녀라고 생각했다, 그 이유는 그녀가 자기 얼굴들을 덮어 놓고 있었기 때문이다. 16 그리고 그는 길가에 있는 그녀에게로 길을 잘못들었다, 그리고 말했다, 청컨대 내가 너에게 들어가도록 허락하라. 그 이유는 그는 그녀가 자기의 며느리인 것을 몰랐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녀가 말했다, “당신이 나에게 들어 온다면 나에게 무엇을 주시렵니까?” 17 그리고 그는 말했다, “나는 너에게 양떼로부터 염소들 중에서 새끼를 보낼 것이다.” 그리고 그녀는 말했다, “당신이 그것을 보낼 때까지 어떤 담보물을 주시렵니까?” 18 그리고 그는 말했다, “무슨 담보물을 내가 너에게 주랴?” “당신의 손에 있는 도장과 머리 수건(kerchief)과 지팡이 입니다.” 그리고 그는 그녀에게 그것들을 주었다, 그리고 그녀에게 왔다, 그리고 그녀는 그로부터 임신하였다.

그리고 유다는 그녀를 보았다. 이는 어떻게 그때 당시 유태 민족의 광신적 신앙이 표현 교회의 내적인 것들을 주목해서 보았는지를 의미한다. 이는 “보다”의 의미가 주목하여 이해하는 것이다로부터, 고로 곰곰이 생각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녀”인 다말의 표현함이 영적, 천적인 것들을 표현하는 교회이다로부터, 여기서는 교회의 내적인 것들, 그 이유는 취급된 주제가 내적인 것이 유태 민족에 광신적 신앙에 의해 주목되고 받아들인 방법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유다의 표현함이 특별하게는 유태 민족이다로부터, 결과적으로 이 민족의 광신적 신앙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 이유가 이 민족이 말씀에서 언급되는 곳에서 그것의 교회와 관련된 어떤 것이 내적 의미에서 뜻해지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내적 의미는 자연계의 어떤 민족의 사건들이나 역사에 관심이 없고, 오직 교회의 품질에 속한 것에만 관심이 있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분명한 바, 유다가 그녀를 봄에 의해 어떻게 유태 민족의 광신적 신앙이 그때 당시 표현 교회의 내적인 것들을 주목해서 보았는지를 의미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녀가 창녀라고 생각했다. 이는 거짓 외에는 더 달리 주목한 것이 없었음을 의미한다. 이는 “창녀”의 의미가 거짓이다로부터; 고로 이로부터 뜻하는 바, 유태 민족의 광신적 신앙으로부터 그들은 교회의 내적 측면을 거짓으로밖에 더 달리 주목하지 않았다 이다. “창녀”가 거짓을 표시하는 이유는 결혼이 천국의 결혼을 표시하기 때문, 즉 천국의 결혼은 선과 진리의 결혼, 남편은 선을, 아내는 진리를 표현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아들은 진리들을, 딸은 선을; 그리고 사위와 며느리, 그리고 시아버지와 시어머니, 그리고 이런저런 친척임은 각각의 등차들에 따라 천국의 결혼 속에 있는 이런저런 것들을 표현한다. 그러므로 간통과 매춘은 반대적인 바, 악과 거짓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것들은 실제 자연계에서조차 반대적이다; 즉 자기들의 삶을 간통과 매춘에 소비하는 이들은 선과 진리를 위해서는 아무것도 돌보지 않는다; 간통과 매춘은 악과 거짓의 결합으로부터 발생한다, 이는 지옥으로부터 이다.
유태 민족이 과거에도 지금에도 내적인 것을 거짓으로 간주한다는 것은 유다가 자기 며느리 다말을 창녀로서밖에 더 달리 간주하지 않아서 자신을 창녀로서의 그녀와 결합시킨 것에 의미되어 있다. 이 민족의 이런 근원에 의해 그들의 광신적 신앙의 근원과 품질이 표현되어졌다. 이 민족이 교회의 내적인 것을 창녀로서 간주한다는 것은 아주 분명하다. 예를 들면, 어떤 이가 그들에게 이렇게 말한다면, 즉 메시아의 오심이 말씀의 예언서 부분에서 예견되었는데, 이 분이 바로 주님이시다는 교회의 내적인 것을 말하면, 그들은 그것을 거짓으로 완강하게 거절한다. 또는 메시아의 왕국은 세상적, 일시적이 아니고, 천국적이고 영원적이다고 교회의 내적인 것을 말하면, 그들은 이것 역시 거짓이라고 발표한다. 만일 누가 그들에게 교회의 의식들은 메시아와 그분의 왕국을 표현했다고 말하면, 그들은 이것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모른다.
만일 누가 그들에게 교회의 내적인 것은 선행의 선, 그리고 교리와 생활에서 동시에 있는 신앙의 진리이다고 말하면, 그들은 거짓으로 간주한다. 이외 더 많은 예가 있다. 한마디로 그들은 내적인 것을 가진 교회를 상상만 해도, 픽 웃어넘긴다. 이런 이유는 그들이 외적인 것들만에, 참으로 가장 낮은 외적인 것들 안에, 즉 지상의 것을 사랑함 안에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누구보다 뛰어난 탐욕, 철저히 지상적인 탐욕 안에 있다. 이런 인간은 교회의 내적인 것을 여하한 다른 방법에서 주목하는 것이 가능하지 않다; 그 이유가 그들은 여타 인류들보다 천국의 빛으로부터 더 멀리 있고, 여느 누구보다 더 짙은 어둠에 있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그녀가 자기 얼굴들을 덮었기 때문이다. 이는 내면의 것들이 그들에게 감추여 있었기 때문임을 의미한다. 이는 다말의 표현함이 표현 교회이다로부터 분명해진다; 그리고 “덮다”의 의미가 감추이는 것이다로부터; 그리고 “얼굴들”의 의미가 내적인 것들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로부터 그녀가 자기 얼굴을 덮음의 의미가 교회의 내면의 것들이 그들에게 감추여져 있었다 이다.

그리고 그는 길가에 있는 그녀에게로 길을 잘못들었다. 이는 [유태 민족의 광신적 신앙이] 표현 교회의 내적인 것이 거짓 같이 보여 자기와 같기 때문에 그 자체를 표현 교회의 내적인 것에 인접되게 했음을 의미한다. 이는 “길”의 의미가 진리이다로부터, 고로 반대적 의미로부터는 거짓인데, 여기서는 그가 그녀를 창녀로 간주했기에 있는 거짓이다. 이렇기에 그는 길가에로 길을 잘못 들었다고 말해진다; 그 이유가 “길을 잘못 들다, turn aside”가 거짓을 서술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말했다, 청컨대 내가 너에게 들어가도록 허락하라. 이는 결합을 위한 욕망을 의미한다. 이는 “누군가에게로 옴, 또는 들어감”의 의미가 결합되는 것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욕망이 창녀와 더불은 결합을 위해, 내적 의미에서는 거짓과 더불은 결합을 위해 있는 것을 뜻하는 것은 분명하다. 여기서 “유다”에 의해 뜻해진 유태 민족은 표현 교회의 내적 진리를 거짓으로밖에 더 달리 간주하지 않았다는 것은 앞에서 살폈다. 지금 여기서 취급되는 것은 위와 같음에도 불구하고, 이 민족은 자체를 이 진리와 결합되게 했다는 것, 물론 아내로서가 아니고, 창녀로서, 즉 진리와 더불어가 아니고 거짓과 더불어 결합되게 했다는 것이다. 욕망(lust)은 거짓과 결합함을, 즉 창녀와의 결합함을 서술하고 있다.
말씀의 외적 의미, 즉 말씀의 글자 의미만을 믿는 모든 이들은 내적 진리를 창녀 수준에서 자신들과 결합시킨다. 이들은 말씀의 내적인 것, 영적 의미를 통째로 거절한다; 이런 자들보다 더 특별한 이들은 말씀의 외적, 또는 글자 의미를 자신의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이 강력히 바라는 것들을, 또는 이득과 지배함을 옹호하도록 응용해간다. 이런 짓을 위해서는 내적 진리를 창녀 수준으로 취급하는 도리밖에 더 없다. 이것은 유태 민족으로부터 있는 이들에 의해 특별하게 실행되어졌다, 또한 말씀 안에서 바빌론이라 불리운 이들에 의해서도 실행되었다; 그러나 말씀의 글자 의미를 정말로 단순히 믿는 이들, 그럼에도 내적 의미로부터 있는 것들, 즉 사랑과 선행 안에 있는 것들, 이로부터의 신앙 안에 있는 것들에 따라 사는 이들에 의해서는 아니다. 그 이유가 이들은 사실상 말씀의 내적 의미 속에 있기 때문, 그리고 이런 사항은 (글자를 정성들여 읽는다면) 글자 의미로부터도 배울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실예의 하나인 즉, 내적 의미와 외적 의미가 다함께 와닿는 가르침으로는 무엇보다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자신 같이 사랑하라는 명령이 이에 해당된다. (요나서 끝장 끝절도 곁들여 생각해보라 역자주)
유태 민족이 내적 진리를 창녀로 간주했다는 것, 그리고 만일 그들이 내적 진리와 결합했다면, 그것은 창녀와의 결합에 관한 욕망으로부터 그렇게 했을 뿐이다는 것은 이런 예를 가지고 예증될지 모른다. 만일 그들에게 말씀은 거룩하다, 그야말로 점 하나에 이르러서도 거룩하다 라고 말해진다면, 그들 역시 인정하고, 자신을 그것에 결합한다; 그러나 이것은 욕망으로부터 이다; 그 이유가 그들이 그것을 믿는 것은 글자에서 거룩하다는 것이지, 선과 진리 안에 있는 이들이 말씀을 읽을 때 그들에게 흘러드는 거룩함으로부터 거룩하다고 여기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만일 그들에게 말씀에 있는 많은 이들, 즉 아브라함, 이삭, 야곱, 모세, 아론, 다윗 등등의 인물도 거룩한 것으로 존경해야 한다고 말한다면, 그들은 그것을 인정하고, 자신을 그 말에 결합시킨다; 그러나 어떤 욕망 때문에서 이다. 그 이유가 그들은 이런 인물들은 여타 다른 이들에 앞서 선택되었다고 믿어서 그들이 거룩하다 라고 믿는 것이기 때문, 게다가 이들은 신의 위치에서 예배되어야 한다고까지 치닫는다. 그렇지만 이런 인물들이 존경되는 것은 그들이 주님을 표현하기 때문에서 일 뿐이고, 거룩한 표현물 자체가 우리에게 감동을 주는 것은 결코 아니다. (즉 그들도 성경에서의 표현을 빼면 우리 같은 인간이었을 뿐이다 역자주) 더욱이 구분이 없는 모든 이의 삶 역시 사후 당사자와 더불어 남아 있는다.
만일 그들에게 그들과 더불어 있었던 많은 것들, 즉 궤, 성전, 태워바침의 제단, 분향 제단, 식탁 위의 빵, 등불을 지닌 등잔대, 영구히 타는 불, 제물, 향, 기름, 또한 아론의 의복, 특별하게 우림과 둠밈이 있던 가슴받이 등등이 거룩하였다고 말해주면, 그들도 인정하고 그 말에 결합하나, 이는 욕망으로부터 이다; 그 이유가 그들은 이것들 자체 안에 거룩함이 있다고 믿기 때문, 고로 돌, 나무, 금, 은, 빵, 불이 거룩하다는 것은 여호와께서 그것들 안에 내면적으로 계셨기 때문인데, 그들은 거룩함이 그것들에 실제로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이것은 그들이 말하는 내적 진리이나, 이것은 상대적으로 거짓이다; 그 이유가 거룩함은 선과 진리 안에만 있기 때문이다. 선과 진리는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향한 사랑 안에서, 이 사랑으로부터의 신앙 안에서 그분으로부터 있다; 고로 살아 있는 주체들 안에서만, 즉 주님으로부터 이런 것들을 받는 인간들 안에서만 거룩함이 있다.
다시 만일 그들에게 기독 교회는 그들과 더불어 설립된 교회와 더불어 하나이다, 단지, 기독 교회는 안쪽에, 당신들의 교회는 바깥쪽일 뿐이다, 하여 바깥이라는 껍질을 벗기면 기독 교회가 시야에 잡힌다 하고 말하면 그들은 그것을 인정하지 않고 창녀, 즉 거짓으로밖에 인정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유태주의로부터 기독교로 전향한 일부는 자신을 위 진리와 결합시킨다, 그러나 같은 욕망으로부터 이다. 말씀에서 이런 것들이 “매춘부들, whoredoms”이라고 자주 언급된다. 말씀에서 “바빌론”으로 의미되는 이들이 교회의 내적 진리들을 위와 같은 유태 민족의 방식에서 있다; 그러나 그들은 내적인 것들에 친숙해져 있었고, 그것들을 어린 시절에는 인정했으나, 성년기에 그것들을 부정했기 때문에 말씀에서 그들은 더러운 간통들과 역겨웁게 성교함(교접함)에 의해 묘사되고 있다; 그 이유가 그것들은 모독들이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그는 그 여자가 자기의 며느리인 줄을 몰랐기 때문이다. 이는 그것이 표현 교회의 진리이다 라고 지각하지 못했음을 의미한다. 이는 “며느리”의 의미가 교회의 선에 인접한 교회의 진리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것이 표현 교회의 진리가 의미되었다는 것은 여기서 며느리인 다말에 의해서 영적, 천적인 것을 표현하는 교회가 표현되었기 때문이다. 이는 앞에서 말했다.

그리고 그 여자는 말했다, “당신을 나에게 오게 한다면, 무엇을 나에게 주시렵니까?” 이는 조건 있는 상호간의 결합을 의미한다. 이는 “나에게 옴”의 의미가 결합함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리고 그는 말했다, “나는 너에게 양떼로부터 염소들 중에서 새끼를 보낼 것이다.” 이는 결합에 관한 담보를 의미한다. 이는 “염소들 중의 새끼”의 의미가 외적, 또는 자연적 인간의 순진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리고 이것이 순진이기 때문에, 이것은 부부의 사랑의 담보, 또는 결합의 담보이다. 그 이유는 진짜 부부의 사랑은 순진이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고대인들이 받아들였던 관습의 하나가 그들이 자기들의 아내에게 새로이 갈 때, 미리 염소들 중의 새끼를 보냈다. 이는 삼손에 관한 기록에서도 발견된다:
날들이 지나, 밀 수확철의 날들에서, 삼손은 염소들 중의 새끼를 가지고 그의 아내를 방문했다; 그 이유가 그는 말하기를, 나는 침실로 내 아내와 들어갈 것이다 (사. 15:1).
위 구절과 본문의 경우는 비슷하다; 그러나 본문의 경우, 말해진 염소 새끼가 미리 받아진 것이 아니기에 다말은 담보물을 요구했다. 이 담보물은 결합을 위한 담보물이지, 결혼을 위한 담보물이 아니다. 그 이유는 유다쪽에서는 창녀와의 결합을 위한 담보물이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여자는 말했다, “당신이 그것을 보낼 때까지 당신은 담보물을 주시렵니까?” 서로에게 확실함이 있는지 여부를 의미한다. 이는 앞 구절에서 다말이 나에게 오면 무엇을 줄 것이냐고 묻는 것의 의미가 조건이 있는 결합을 의미함에서 알게 된다. 여기서는 서로에게 확실함이 있는 것, 그 이유는 담보물이 약속된 것이 주어진다는 확실함을 위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말했다, “무슨 증거물을 내가 너에게 주랴?” 이는 그것은 확실했음을 의미한다. 이는 “담보물”의 의미가 확실함이다로부터; 이것이 확실하였다는 것은 담보물이 주어지는 이어지는 구절로부터 분명하다.

그리고 그 여자는 말했다, “당신의 도장.” 이는 동의함의 표시(token)를 의미한다. 이는 “도장”의 의미가 동의함의 표시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도장(signet)”이 동의함의 표시이다는 것은 고대 시대에서 칙령들이 도장을 찍음으로 확증되었기 때문인데, 하여 도장은 이것이 그렇다는 것에 대한 확증 자체, 증명함이었다. 다말이 그의 도장, 머리수건, 지팡이를 염소들의 새끼를 보내기로 한 것에 대한 담보로 요구한 것을 그녀는 이후에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것은 내적 의미 없이는 알려지는 것이 가능하지 않다는 신비함들을 포함하고 있기도 하다. 이 신비함들은 이렇다; 염소들의 새끼는 진짜 부부의 것을, 결과적으로 내적인 것을 의미했다- 그 이유가 진짜인 모든 것은 동시에 내적인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그리고 이 염소 새끼가 유다의 쪽에서는 진짜 결합, 즉 결혼은 아니었기에, 다말은 염소 새끼를 수납하지 않았다. 그러나 염소 새끼 대신 “다말”에 의해 표현된 교회의 내적인 것이 결합될지 모를 외적인 것을 가져갔다. 교회의 외적인 것들이 도장, 머리수건, 지팡이에 의해 의미되었는데, 즉 “도장”에 의해서는 동의함 자체가, “머리수건”에 의해서는 외적 진리가, “지팡이”에 의해서는 이 진리의 힘이 의미되었다; 더욱이 이런 것들은 외적 또는 자연적 인간의 결합의 담보물이다.
내적 진리가 외적인 것과 더불어, 또는 유태 민족의 광신적 신앙과 결합함이 남편의 형제된 의무 수행이라는 구실로 며느리와 시아버지의 결합, 다말과 유다의 결합에 의해 표현되었다. 그리고 유태 민족의 광신적 신앙이 교회의 내적인 것과 결합함이 유다가 창녀로서의 다말과 결합함에 의해 의미되었다. 더욱이 이 두 결합의 본성은 각기 아주 정밀하게 일치하지만, 그것들의 품질에 대해서는 우리의 납득력에 얼른 다가오게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천사들이나 선한 영들에게 이 품질은 적나나 하다. 그 이유는 이 품질이 천국의 빛 안에서 표출되기 때문, 이 빛에서 말씀 속의 신비함들은 대낮 같이 열려 있기 때문이다. 이와 대비되는 경우가 인간이 존재하는 자연계의 빛으로 말씀을 읽는 경우일지 모른다. 간략히 말하면: 야곱의 후손들과 더불어 설립된 표현들은 고대 교회의 것들 같이 정밀하지는 않다; 그러나 이 표현들은 히브리 교회 라고 불리우는 에벨(Eber)에 의해 설립된 이들에게 대부분이 있었다. 이 교회에서 예배에 관하여 새로운 종류들이 생겨났다, 즉 태워바침, 제물, 등등인데, 이는 고대 교회는 알려지지 않았었다. 따라서 교회의 내적인 것은 고대 교회의 경우에서 결합되는 방식으로 이 교회와 더불은 표현에서는 있지를 않았다. 대신 거꾸로의 방식으로 인데, 이것이 다말쪽에서는 남편의 형제된 의무 수행이라는 핑계로 며느리와 시아버지의 결합을 수단으로 ; 또한 유다의 쪽에서는 창녀와의 결합이라는 수단으로 이고, 이것들의 내적 의미에서 묘사되어 있다.

“그리고 당신의 머리 수건(머리띠)”. 이는 동의함의 표시인 진리를 수단으로를 의미한다. 이는 “머리수건(kerchief)”의 의미가 진리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머리수건”이 진리를 표시하는 이유는 이것이 옷에 관련되고 있기 때문이고, 옷은 일반적으로 진리들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의복이 육체를 옷입히듯, 진리는 선을 옷입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고대인들 사이에서 자기들을 옷입힌 모든 것은 어떤 특별하고 세세한 진리를 의미했다; 그러므로 튜닠(웃옷, tunic, 속옷)은 이 진리를, 바깥쪽 의복(chlamys)은 저 진리를, 가장 바깥쪽 의복(toga)은 또다른 진리를; 머리의 덮개들 또한 그러해서, 대성직자의 관(miter)과 터번 (turban), 또한 넓적다리와 발의 덮개인 짧은 바지(승마용 바지, breeches), 스타킹(긴양말, stocking) 등등을 분류해서 특별한 진리를 의미하였다. “머리수건”은 가장 바깥, 또는 가장 낮은 진리를 의미했는데, 이 수건은 실들을 다함께 꼬아서 만들었다, 하여 이를 수단으로 이 진리의 단호한 결정이 의미되었다. (아마 T.V등에서 요구 사항 관철을 위해 노조 파업 결의를 발표하고 구호를 외칠 때 머리에 띠(머리 수건)를 두른 것을 목격하는데, 이때 머리띠가 자기들의 결정이 단호함을 표시하는데 한몫을 한다 역자주) “머리수건”이 이런 진리를 의미하는 것은 다른 책에서 보면:
덮개로 사용하는 헝겊이 그 위에 있지 않은 열려진 모든 그릇은 불결하다 (민. 19:15);
이 구절을 수단으로 결정되지 않고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어야 한다는 것이 의미된다; 그 이유가 결정되지 않은 것은 무엇이든 열려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가장 바깥쪽 진리들쪽으로 내적 진리들의 결정됨이 있어야 한다는 것, 다시 말해 내적 진리들은 가장 바깥쪽 진리들에 종결되어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당신의 손에 있는 지팡이.” 이는 이 진리로부터의 힘을 수단으로를 의미한다.
이는 “지팡이(staff)”의 의미가 힘이다로부터, 이는 아래에서 살핀다; 그리고 “손”의 의미가 힘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여기서 “…당신의 손에 있는”이라고 말해진 이유는 가장 낮은 진리의 힘이 여기서 “유다”인 유태 민족의 광신적 신앙에 속한 것과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힘이 진리를 서술하는 것은 이미 살폈다. “지팡이”가 말씀에서는 자주 언급되는 단어에 속하는데도 불구하고 그것에 의해 영계에 있는 어떤 것이 표현된다는 것을 아는 이가 거의 없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마치 모세가 그의 지팡이를 들어 올려 기적을 수행했던 대목을 읽지만 지팡이의 영적 의미에는 무관심하다는 말이다. 또한 어린이들의 동화책 같은 곳에서도 지팡이로 마술을 발휘하는 대목에서도 지팡이는 등장하고 있다. “지팡이”가 힘을 의미하는 이유는 그것이 받침, 지지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손과 팔을 받친다, 그리고 그것들을 통하여 온 신체를 받치기도 한다; 그러므로 지팡이는 그것이 받치는 부분의 의미를 가져온다. 즉 손이나 팔의 의미를 지닌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진리의 힘이 의미된다. 각 장의 끝에서 열거하는 웅대한 사람 안에서 손과 팔은 이 힘에 상응하고 있다.
지팡이에 의해 힘(능력)이 발휘된 것은 위 모세에 관련한 대목들로부터 쉽게 알아진다. 즉, 그는 기적을 행하기 위해 지팡이(막대)를 가져오도록 명령받았다; 그리고 그는 자기 손에 하느님의 막대를 가졌다 (출. 4:17, 20); 막대로 쳤을 때, 이집트의 물들이 피가 되었다 (출. 7:15, 19, 20); 막대를 시내에 뻗쳤을 때, 개구리들이 튀어 올라 왔다 (출. 8:1-11); 막대로 먼지(흙)를 쳤을 때, 이가 되었다 (출. 8:16-20); 막대를 하늘을 향하여 뻗치자, 우박이 있었다 (출. 9:23); 막대를 토지 위에 뻗치자, 메뚜기떼가 나왔다 (출. 10:3-21). 손이 제 1 이기에 이를 수단으로 권능이 의미되고, 그리고 막대는 도구적이어서, 그의 손이 뻗쳤을 때, 기적들이 수행되었다 (출. 10:12, 13); 그의 손이 하늘을 향하여 뻗쳐졌을 때, 이집트의 온 토지에 짙은 어둠이 깔렸다 (출. 10:21, 22); 그리고 그의 손이 수프(Suph) 바다를 향하여 뻗쳤을 때, 동풍에 의해 바다는 마른 토지로 만들어졌다; 다시 그의 손을 뻗치자 바다는 원래대로 되돌아 왔다 (출. 14:21, 26, 27).
더욱이 호렙 바위를 막대로 쳤을 때, 물들이 흘러나왔다 (출. 17:5, 6; 민. 20:7-10). 여호수아가 아말렉과 전투할 때, “모세가 여호수아에게 말했다, 내일 남자들을 뽑아 아말렉과 싸우러 나가라. 나는 언덕 위에서 내 손에 하느님의 막대를 들고 서 있을 것이다. 하여 모세가 손을 들고 있는 동안에는 이스라엘이 승리했으나 손이 내려오면 아말렉이 승리했다” (출. 17:9, 11). 이런 위의 구절들로부터 분명해지는 것은 막대, 지팡이, 손이 힘을 표현했다는 것, 최고 의미에서 주님의 신성한 전능을 표현했다. 이때 당시에는 표현들이 교회의 외적인 것을 구성했고, 천국에 있는 것과 같은 영적, 천적인 것인 교회의 내적인 것이 이 외적인 것과 상응했다는 것이다. 이 상응함으로부터 그들에게 위와 같은 권능의 효력이 있었다. 따라서 모세의 지팡이 자체에 어떤 능력이 있다고 믿으면 얼마나 불합리한 지가 분명해진다.
영적 의미에서 “지팡이”가 힘이다는 것은 예언서들의 많은 구절에서 나타난다:
보라 주 여호와 체바욷께서 예루살렘으로부터 지팡이와 지주(버팀, stay)를, 즉 빵의 온 지팡이를, 그리고 물의 온 지팡이를 거두어가신다 (이. 3:1);
“빵의 지팡이”는 사랑의 선으로부터의 지지와 힘을 표시한다, 그리고 “물의 지팡이”는 신앙의 진리로부터의 지지와 힘을 표시한다. “빵”이 사랑의 선이다는 것은 이미 살핀 바 있다; 그리고 “물”이 신앙의 진리이다도 이미 살핀 바 있다. 에스겔서에도 “빵의 지팡이”가 언급된다 (겔. 4:16; 5:16; 14:13; 시. 105:16).
이사야서에서:
고로 주 여호비 체바욷께서 말하셨다, 시온에 거주하는 나의 백성들아, 이집트로의 길에서 너를 막대로 치고, 너희 위에 지팡이를 들어올리는 앗수르를 두려워 말라. 여호와께서는 그를 채찍으로 휘저으실 것이다, 마치 오렙(Oreb)의 바위에서 미디안에게 재앙이 덮친 것과 같다; 그리고 그분의 지팡이가 바다 너머 있을 것이다, 그분은 이집트로의 길에서 그것을 들어올리실 것이다
(이. 10:24, 26);
위에서 “지팡이”는 추론함과 기억 속의 지식으로부터의 힘을 표시한다. 이는 신앙의 진리들에 맞서 기억 속의 지식으로부터 추론하는 이들의 힘과 같다, 그리고 이 진리들을 악용하든지, 쓸모없게 만든다. 이것이 앗수르가 지니고 친 “막대”에 의해, 그리고 이집트로의 길에서 들어올린 “지팡이”에 의해 의미된다. “앗수르”에 의해 추론함이 뜻해짐에 대하여는 1186항을; “이집트”에 의해 기억 속의 지식이 뜻해짐에 대하여는 1164, 1165, 1186, 1462항을 보라.
스가랴서에서:
아시리아의 교만이 아래로 끌어 내려지고, 이집트의 지팡이가 멀리 떠날 것이다 (슥. 10:11).
이사야서에서:
너희는 부러진 갈대의 지팡이에, 이집트의 지팡이에 의지했다; 만일 인간이 그것에 의지하면, 그의 손 안으로 들어가서 손을 찌를 것이다 (이. 36:6);
“이집트”는 기억 속의 지식을 표시하고; 그것들로부터의 힘이 영적인 것들에서 “부러진 갈대로부터의 지팡이”이다; 그것이 들어가 찌르는 “손”은 말씀으로부터의 힘이다.
다시:
여호와께서는 사악한 자의 지팡이를 부러트리실 것이다, 치수를 재는 막대 (이. 14:5);
위에서 “지팡이”와 “막대는 힘을 분명하게 표시한다.
예레미야서에서:
탄식하라, 모압 주위의 모든 자들이여, 그리고 말하라, 어떻게 힘센 지팡이가 부러지고, 아름다움의 지팡이가 부러졌는가! (예. 48:17);
“힘센 지팡이”는 선으로부터의 힘을 표시하고, “아름다움의 지팡이”는 진리로부터의 힘을 표시한다.
호세아서에서:
나의 백성은 자기들의 나무에게 질문하고, 그들의 지팡이가 그들에게 대답할 것이다; 그 이유가 매춘의 영이 그들을 엉뚱한 쪽으로 인도했기 때문이다 (호. 4:12);
“나무에게 질문함”은 악들을 상담함을 뜻한다; “지팡이가 대답함”은 거짓이 거기로부터 있음을 뜻한다. 이 거짓은 그들이 확증하는 악으로부터 힘을 가진다; “매춘의 영”은 악으로부터 있는 거짓의 생명을 표시한다. 다윗서에서:
그렇다, 내가 죽음의 골짜기를 걸을 때, 나는 나에게 있을 어떤 악도 겁내지 않을 것이다; 그 이유가 당신이 나와 더불어 계시기 때문이다; 당신의 막대와 지팡이가 나를 위로한다
(시. 23:4);
“막대와 지팡이”는 신성한 진리와 선을 표시하고, 이것이 힘을 가진다. 다시:
사악한 자의 지팡이는 의로운 자의 구역에서 안주하지 못할 것이다 (시. 125:8).
[9] 다시:
당신은 쇠 막대로 그들을 짓부수실 것이다; 당신은 옹기장이의 그릇들 같이 그들을 흩으실 것이다 (시. 2:9);
“쇠 막대”는 자연 평면에 있는 영적 진리의 힘을 표시한다, 그 이유는 영적 진리가 들어 있는 모든 자연적 진리는 힘을 가지기 때문이다; “쇠”는 자연적 진리를; 계시록서에서도:
극복하는 자, 그리고 끝까지 내 일들을 준행하는 자, 그에게 나는 민족들을 다스리는 힘을 줄 것이다; 그는 쇠 막대로 그들을 풀을 뜯게 할는지 모른다; 옹기장이의 그릇 같이 그들은 조각들로 부셔질 것이다 (계. 2:26, 27; 또한 12:5; 19:15).
지팡이가 진리의 힘을, 즉 진리를 통한 선의 힘을 표현했기에, 왕은 짧은 지팡이 같은 홀을 지녔다; 그 이유가 왕에 의해 진리 측면에서의 주님이 표현되었기 때문이다; 신성한 진리는 왕권 자체이시다. 홀이 그것들에 속하는 힘을 의미하는데, 이는 위엄에 의해서가 아니라 진리에 의해, 즉 통치하는 진리에 의해, 이 진리는 선으로부터 있는 것 외의 다른 진리는 아니다; 고로 원칙적으로 신성한 진리, 그리고 기독인들과 더불어서는 주님, 이분으로부터 모든 신성한 진리가 있다.

그리고 그는 그것들을 그녀에게 주었다. 이는 이러므로 해서 그것은 확실해졌음을 의미한다. 이는 그녀가 요구하고 주어진 담보물의 의미가 확실함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리고 그녀에게 왔다. 이는 결합을 의미한다. 이는 누군가에게 “오다”, 또는 “들어가다”의 의미가 결합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리고 그 여자는 그로부터 임신하였다. 이는 이렇게 해서 받아졌음을 의미한다.
이는 “임신함”의 의미가 받아졌음 이다로부터; 그러나 받음의 품질은 앞 항을 보라.

19-23절. 그리고 그 여자는 일어났다, 그리고 너울을 벗었다, 그리고 그녀의 과부 옷을 입었다. 20 그리고 유다는 그의 동료 아둘람족의 손에 염소 새끼를 들려서 여인의 손에서 담보물을 받아오도록 보냈다. 그리고 그는 그녀를 발견하지 못했다. 21 그리고 그는 그곳의 사람들에게 물었다, 말하기를, 길가 샘들에 있었던 창녀는 어디에 있소? 그리고 그들이 말했다, 거기에 창녀는 없었다. 22 그리고 그는 유다에게 되돌아 와서 말했다, 나는 그녀를 발견하지 못했다. 그리고 또한 그곳의 사람들이 말했다, 거기에 창녀는 없었다.
23 그리고 유다는 말했다, 그녀로 그것을 자기에게 가져가게 하라, 그렇지 않으면 필시 우리가 책임을 뒤집어 쓸지 모른다. 보라 나는 이 새끼를 보냈다, 그리고 너는 그녀를 찾지 못했다.

그리고 그 여자는 일어났다. 이는 승강을 의미한다. 이는 “일어남”의 의미가 어떤 승강함이다로부터 분명해진다. 일어남에 의해 의미된 승강함은 영적 의미에서는 희미한 상태로부터 명료한 상태로 승강함이다; 이는 마치 무지의 상태로부터 총명의 상태로의 승강함과 비슷하다; 그 이유가 이런 길에서 인간은 세상의 빛의 상태로부터 천국의 빛의 상태로 승강되어진다.

그리고 갔다. 이는 생활을 의미한다. 이는 “가다”의 의미가 사는 것이다로부터 분명해진다. “가는” 것이 내적 의미에서는 사는 것이다는 말이 실로 인간이 존재하는 생각들의 관념들로부터서는 추상적인 듯, 또는 멀리 떨어진 듯 나타날런지 모른다. 그런 이유는 인간은 시간과 공간 안에 있기 때문, 이 시공으로부터 생각 속의 관념도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가다, 발전하다, 여행하다, 이동하다 같은 것에 대한 생각을 말한다. 이런 행동들이 공간 안에서, 또한 시간 안에서 존재하기에, 그리고 공간과 시간이 그것들에 관한 그의 생각과 짜깁어저 있기에, 삶의 상태들이 그것들에 의해 의미된다는 것을 얼른 납득하는 것이 쉽지 않다. 그러나 그것들에 관한 시공으로부터의 생각을 벗을 때, 또는 분리될 때, 의미된 영적인 것이 결과된다. 그 이유가 영계, 또는 천국에서는 시공에 관한 생각은 전혀 없고, 대신 생명의 상태에 속하는 것들만이 생각 속에 있기 때문이다. 천사나 영들의 경우도 인간의 경우 같이 자기들이 이 장소로부터 저 장소로 전진하고 이동하는 것이 나타난다; 그러나 이런 나타남을 생산하는 것은 삶(생명)의 상태들의 변화이다. 그들도 인간의 경우와 같이 자신들로부터 살아간다, 그럼에도 여전히 그들은 자신들로부터 살지 않고 생명의 전부이신 주님의 신성으로부터 살아간다. 천사들과 더불은 이런 나타남들이 진짜, 진실, 현실로 존재함(real)이라 불리운다, 그 이유는 마치 그것들이 (우리가 자연계의 생활을 보듯) 실제로 있는 것처럼 나타나기 때문이다.
때로 나는 이 나타남들에 관하여 영들과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다; 그리고 선 안에 있지 않은 이들, 결과적으로 진리 안에 있지 않은 이들은 자기들이 자신들로부터 산다는 것이 나타남이라고 하는 것을 듣고 싶어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그들은 자신들로부터 살고 싶어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신들로부터 살지 않는다는 것, 장소로부터 장소로의 발전은 변화이고, 생명의 상태의 발전이다는 것을 생생한 경험에 의해 그들에게 보여진 것 외에 말해진 것은, 그들은 자신들로부터 생명을 가진다는 것밖에 더 아는 것이 없음에 만족했을지 모른다는 것, 마치 그들은 자기들 안의 생명이 실제로 자신들로부터 있었는지조차 더 이상 가질 수 없듯 한 것과 같다; 그래도 여전히 더 나은 것은 어떻게 이런 경우가 실제로 있는지를 아는 것이다, 그 이유는 그때 그들이 진리 안에 있기 때문에서 이다, 만일 진리 안에 있다면, 그들은 천국의 빛 안에도 있는다; 그 이유가 천국의 빛은 주님의 신성으로부터 있는 진리 자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고로 그들은 자신들을 위해 선을 주장하지 못하고, 악이 그들에게 달라붙지도 못한다. 천사들은 지식을 수단으로, 뿐만 아니라 지각을 수단으로 이런 진리 안에 있다.
영계에 있는 시간들과 공간들은 생명의 상태들, 그리고 생명의 모든 것은 주님으로부터 이다는 것이 아래 경험으로부터 보여질는지 모른다. 모든 영과 천사는 오른쪽에서 선을, 왼쪽에서 악을 본다. 그리고 이 보는 것은 그가 어느쪽으로 방향을 틀든지 마찬가지이다. 다시 말해 선과 악이 그에게 나타나는 것은 그가 동쪽을, 서쪽을, 남쪽을, 북쪽을 향하여 쳐다보든지 그렇게 나타난다는 말이다. 이것은 영과 천사 모두 각각에게 진실이다; 하여 만일 둘이 쳐다보고 있는데, 하나는 동쪽을, 하나는 서쪽을 쳐다본다 해도, 둘에게 여전히 선은 오른쪽에서, 악은 왼쪽에서 나타난다. 이런 나타남은 보여지는 영들로부터 아주 멀리 떨어져 있어도, 설사 자기 뒤에 있어도 그러하다. 이상의 살핌으로부터 넌지시 암시되는 것은, 생명의 모든 것이 주님으로부터 이다는 것, 또는 주님은 모든 이의 생명 안에 계신다는 것이다; 그 이유가 주님은 거기서 태양으로서 나타나시고, 그분의 오른쪽에 선, 또는 양이 있고, 그분의 왼쪽에 악, 또는 염소가 있다. 그러므로 모든 이와 더불어 비슷해 있는 것은 이미 말한 대로 주님이 생명의 모든 것 이시기 때문이다. 아마 이런 사항은 인간에게는 역설적인 듯 보여질 수밖에 없다, 그 이유는 인간이 세상에 있는 한, 그는 세상적인 것들로부터 생각들을 가져야 하기 때문, 결과적으로 시공으로부터 생각을 가져야 하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영계에서, 위에서 말한 대로, 생각들은 시공으로부터가 아니고, 애착들과 이 애착으로부터의 생각들의 상태들로부터 이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말씀에 있는 시공 역시 상태들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녀 위로부터 너울을 벗었다. 이는 불명료했던 것이 흩으려졌음을 의미한다. 이는 “자신을 너울로 덮음”의 의미가 불명확한 진리쪽에 있음이다로부터; 여기서는 “너울을 벗음”이므로 이 불명확함이 흩으려짐이 된다.

그리고 그녀의 과부 차림새의 옷을 입었다. 이는 총명을 의미한다. 이는 “과부”의 의미가 선이 없이 진리 안에 있으나, 여전히 선에 의해 인도되기를 바라는 이들이다로부터 (4844항); 그리고 “옷”의 의미가 진리들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를 모두 취합하면 총명이 의미되는 이유는 진리들은 총명을 구성하는 것밖에 더 없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지적 마음은 선으로부터 진리들을 통하여 천국의 빛 안에 있고, 천국의 빛은 총명인데, 총명은 신성한 선으로부터 신성한 진리이기 때문이다. 과부차림새의 옷을 벗는 것이 총명을 의미하는 더 많은 이유는, 일반적 의미에서 진리 안에 있는 자가 선을 수단으로 총명의 진리, 고로 총명 안으로 인도되기를 바라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래에 간략히나마 설명을 더 한다면 어떻게 이 본문에서 이런 의미가 있는지를 알는지 모른다. 인간에 있는 진리는 그 진리가 선에 의해 인도될 때까지 총명의 진리는 아니다; 그리고 이 진리가 선에 의해 인도될 때, 그것은 처음 동안은 (진짜라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총명의 진리가 되어 있는다. 그 이유가 진리는 자체로부터 생명을 가지지 않고 선으로부터 가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후 인간이 진리에 따라 살 때, 그 진리는 선으로부터 생명을 (진짜로) 가진다. 그 이유가 이 때야말로 진리의 생명이 인간의 의지 안으로 주입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의 의지로부터 그의 행동 안으로, 고로 인간 전체에 주입된다. 인간이 알기만 하거나 또는 납득만 하는 진리는 그의 의지의 바깥쪽에 머무르고 있다, 따라서 그의 생명의 바깥쪽에 있는 셈이다; 그 이유가 인간의 의지가 그의 생명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이 진리를 뜻할 때, 이 진리는 그의 생명의 문턱 위에 있는다; 그리고 뜻함으로부터 그가 행할 때, 그때 진리는 그의 전체 인간이 되어 있다; 그리고 그가 이를 반복적으로 행할 때, 이것은 그가 습관으로부터 되돌아 가는 것 뿐만 아니라 애착으로부터 되돌아 가는 것이고, 자유함에서 되돌아 가는 것이다. (아마 자신 스스로 어떤 것을 행하고 기뻐 흡족해 하는 경우 그것 자체가 자신의 일부인 듯 여겨지는 자신의 경험을 예로 생각해보라 역자주) 이와 반대로 생각만 하고 행하지 않는 것, 더 나아가 생각은 했으나 행하고 싶지 않은 것은 자신 바깥쪽에 있고, 이는 자그마한 바람만 불어도 기다렸다는 듯이 날려가는 겨일 뿐이다. 이는 다른 삶에서 사실상 있는 일이다; 이로부터도 일함들이 없는 신앙이 이런 겨에 불과하다고 생각되지 않는가? 이로부터 총명의 진리가 무엇인지도 분명해진다. 즉 이것은 선으로부터 있는 진리이다. 진리는 이해력이라 단언되고, 선은 의지력이라 단언된다. 같으나 다른 말로, 진리는 교리 속에, 선은 생활 속에 있다.

그리고 유다는 염소들 중의 새끼를 보냈다. 이는 결혼의 담보물을 의미한다. 이는 “염소들 중의 새끼”가 부부의 사랑의 담보물, 또는 결합의 담보물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의 동료 아둘람족의 손을 수단으로. 이는 거짓을 수단으로를 의미한다. 이는 “유다의 동료”인 아둘람족 히라의 표현함이 거짓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여인의 손으로부터 담보물을 받아 가기 위하여. 이는 외적인 담보물 대신에를 의미한다. 이는 담보물인 “도장, 머리수건, 지팡이”의 의미가 외적 또는 자연적 인간의 결합의 담보물 이었다로부터, 고로 외적인 담보물 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러나 그는 그녀를 찾지 못했다. 이는 자기 쪽에서, 즉 유다쪽에서 결혼(부부)에 관한 어떤 것도 있지 않았기 때문에를 의미한다. 그 이유는 그가 그녀에게 온 것은 아내로서가 아니라 창녀로서 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줄을 아는 다말이기에 그녀는 염소 새끼를 바라지 않았는 바, 이를 수단으로 결혼 담보물이 의미되었다. 실로 다말쪽에서도 진짜(순수한) 결혼의 어떤 것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 이유가 그녀의 결합은 남편의 형제됨의 의무 수행을 빌미로 해서 시아버지와 며느리 사이의 결합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사항들이 유다가 그녀를 발견하지 못함에 담겨 있다.

그리고 그는 그 장소의 사람들에게 물었다, 말하기를. 이는 이 진리들이 상담되어졌음을 의미한다. 이는 “묻다”의 의미가 상담하다 이다로부터; 그리고 “사람들”의 의미가 진리들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장소의 사람들”은 이것의 상태에 관한 진리들인데, 그 이유는 “장소”가 상태이기 때문이다.

창녀는 어디에 있소? 이는 그것이 거짓이었는지 여부를 의미한다. 이는 “창녀”의 의미가 거짓이다로부터 알려진다.

길가 샘들에 있었던. 이는 그것이 진리 같이 나타났음을 의미한다. 이는 “샘들”의 의미가 교회의 진리들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길가”라고 말해지는데, “길”은 진리를 서술하고, 반대적 의미에서는 거짓을 서술한다; 그리고 묻는 말, “길가 샘들에 있었던 창녀는 어디 있는가?”에 의해서는 진리 같이 나타났던 거짓이었는 지가 의미된다.

그리고 그들은 말했다. 이는 진리들로부터의 지각을 의미한다. 이는 말씀의 역사 부분에서 “말하다”의 의미가 지각하다 임으로부터 알게 된다. 진리들로부터 지각함이 의미된 이유는 “장소의 사람들이 말했기” 때문, 그리고 “장소의 사람들”은 진리들이기 때문이다.

거기에 창녀는 없었다. 이는 그것은 거짓이 아니었다를 의미한다. 이는 “창녀”의 의미가 거짓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단어들의 의미에 관하여 펼쳐보인 이런저런 사항들이 시리즈들 안에 포함되었다는 것은 앞에서 말해온 것으로부터 어느 정도는 나타날는지 모른다; 그리고 더욱이 그것들은 유태 교회의 내적, 외적 진리, 즉 다말에 의해 표현된 내적 진리와 유다에 의해 표현된 외적 진리 사이의 결합의 본성이 알려지지 않으면 납득되어질 수 없는 사항들이다. 이런 사항들이 미리 알려져야 이 장 안의 단어들의 의미 파악도 그늘 안으로 빠져들지 않게 된다. 그 이유가 내적 인간의 시각인 이해력이 빛이든, 그늘이든 가지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런 사항들은 앞서 가졌던 개념에 일치하지 못하면 그늘 아래 있어질 수밖에 없게 된다. 어쨌든 시리즈에 등장하는 이런저런 세부 사항들, 너무나 무수해서 인간에 의해서는 혼돈과 더불어 납득조차 힘들어도 천사들의 이해력의 빛 안으로 명료하게 들어 간다. 이것만 보아도 인간의 총명은 천사의 총명과는 비교조차 안될지 모른다.

그리고 그는 유다에게 되돌아 왔다. 이는 반성함(곱씹어봄, reflection)을 의미한다. 이는 “유다의 동료 아둘람족”에 의해 거짓이 의미된다는 사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리고 발생한 것에 관련되어 되돌아 온 것은 거짓이라고 말해질 때, 이는 유다의 동료로부터 말해진 바, 이는 마음에 상기하는 것, 그리고 어떻게 이 경우가 있는지를 곰곰이 셍각하는 것밖에 더 아니다.

그리고 말했다, 나는 그녀를 찾지 못했다. 이는 이것은 거짓을 수단으로 밝혀질 수 없음을 의미한다. 이는 “발견하지 못함”의 의미가 밝혀질 수 없음이다로부터 분명해진다; 그리고 아둘람족이 이를 말하기 때문인데, 그에 의해 거짓이 의미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어진 말은 “나는 그녀를 찾지 못했다”에 의해 거짓은 그것을 밝힐 수 없었다, 또는 그것은 거짓을 수단으로 밝혀질 수 없다가 의미된다.

그리고 또한 그 장소의 사람들이 말했다, 거기에 창녀는 없었다. 이는 그것이 거짓이 아니었음을 진리로부터 지각했음을 의미한다. 이는 앞의 설명을 참조하라.

그리고 유다가 말했다, 그녀로 그것을 그녀에게 가져 가게 하라. 이는 이것은 그에게 무관심이었다를 의미한다. 이는 이 말들에 있는 애착으로부터 알게 되는데, 분개함과 이로부터의 무관심이다.

필시 우리는 책임을 면치 못할런지 모른다. 이는 비록 그것이 망신거리였다 해도를 의미한다. “책임을 짐, 수치스러움을 면치 못함”의 의미가 불명예, 망신거리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보라 나는 새끼를 보냈다. 이는 담보물이 있으니 충분하다를 의미한다. 이는 “염소들 중의 새끼”의 의미가 부부 사랑의 담보물, 또는 결합의 담보물이다로부터, 그러나 여기서는 오직 담보물만을 의미하는데, 그 이유는 이것을 다말이 수령하지 않았기 때문, 즉 부부의 사랑 따위는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이 이유이기에, “그는 그녀를 찾지 못했다”에 의해 만일 부부적인 어떤 것이 있지 않다면이 의미되어 있다; 이것 또한 무관심으로부터 흐르고 있다. 사실 이런 사항들은 반복 설명할 이유조차 없기는 하다, 그 이유가 이것들이 이해력의 그늘에 가리워질 수밖에 없는 탓이다. 또한 이해력의 그늘에 빠져든 것은 불신앙의 늪에 빠져든다. 예를 들면, 교회는 부부적인 것, 즉 선과 진리의 부부적 임이 있어야만 한다는 것; 또한 외적인 것 안에 내적인 것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는 것; 그리고 이 둘 없이 교회는 아무것도 아니다 등등이다. 현재의 단어들 안에서 유태 교회에 있는 내적인 것과 외적인 것들이 내적 의미에서 묘사되고 있다. 그런데도 보여지는 결과란, 이 민족에 관한 한, 외적인 것 안에 어떤 내적인 것도 전혀 없었다는 것, 이 민족들로부터 추상화된 율법과 규례만 거기에 있었다는 점이다.
유태 민족과 더불어 교회가 있었다는 것, 그들은 여느 다른 민족에 앞서 뽑히고 사랑된 민족이다고 믿으며 당차게 (설교 강단에서조차) 말해지는 것을 (요즈음의 교회에서도) 심심찮게 목격하기도 한다; 이들의 항변인즉, 그들이 이렇게 선택된 백성이기에 그렇게도 많은 기적들이 그들 앞에서 있었고, 많은 예언자들이 그들에게 보내진 것이고, 더구나 그들로 말씀을 소유하게 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이 민족 자체는 교회로부터의 어떤 것도 지니지 않았다; 그 이유가 그들의 교회가 선행 안에 있지 않았기 때문, 그들은 무엇이 진짜 선행인지를 모른다, 고로 주님에 대한 신앙도 없었다; 실로 그들은 그분이 오시리라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그분이 오시면, 자신들을 다른 민족 위에 우뚝 서게 해줄 것이라고만 상상했는데, 오셨다는 그분이 그렇지 않자, 그분을 철저히 거절했다; 게다가 그분의 천국 왕국에 관하여는 귀를 여는 것조차 지겨워했다. 교회의 내적인 사항들이라면 교리 측면 뿐만 아니라 생활 측면에서도 배제했다. 이 정도만 가지고도 이 민족에 있는 교회 속에는 아무것도 있지 않았다고 결말지을 수 있을 것이다.
교회가 사람들과 더불어 있는 방식이 있고, 교회가 사람들 안에 있는 방식이 있다. 예를 들면, 기독 교회는 말씀을 가지는 이들과 더불어 있다, 그리고 교리로부터 주님을 설교한다; 그러나 그들이 선과 진리의 결혼 안에 있지 않으면, 즉 그들이 이웃을 향한 선행과 이로부터의 신앙 안에 있지 않으면, 고로 교회라는 외적인 것들 안에 내적인 것들을 담고 있지 않으면, 그들 안에는 교회에 관한 어떤 것도 있지 않은 것이다. 교회는 내적인 것들로부터 분리된 외적인 것들 안에 있는 이들 안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또한 선행으로부터 분리된 신앙 안에 있는 이들 안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또한 교리로부터 주님을 인정하는데 생활로부터 인정함이 나타나지 않는 이들 안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교회가 민족과 더불어 있는 경우가 있고, 민족 안에 있는 경우가 있다는 말이다. 이 둘은 경우가 아주 다르다.
이 장은 내적 의미에서 유태 민족과 더불어 있는 교회와 유태 민족 안에 있는 교회를 묘사하고 있다. 이 민족과 더불은 교회의 품질은 남편의 형제된 의무를 수행한다는 빌미 아래 다말이 유다와 결합함에 의해서 묘사되어졌고; 이 민족 안에 있는 품질은 유다가 창녀로서의 다말과 결합함에 의해 묘사되었다. 이 이상의 세부적 설명은 생략한다, 그 이유는 그 이상의 것에 대한 이해는 인간의 경우 이해력의 그늘 아래로 빠져들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천사의 몫일지 모른다 역자주); 이해력의 그늘이라 말한 이유는 오늘날에도 교회의 내적인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자가 너무나 적기 때문이다. 이웃을 향한 선행이 뜻함 안에 존재한다는 것, 그리고 뜻함으로부터 행동함 안에 존재한다는 것, 그리고 이로부터 신앙이 지각함 안에 존재한다는 것을 누가 아는가? 이것을 모를 때, 특히 부정될 때, 마치 선행의 일함 없이 신앙만으로 구원받음이 있다고 함으로 선행을 부정해버릴 때, 이 장에서 묘사되는 것, 즉 유태 민족과 더불은, 유태 민족 안에 있는 교회의 외적인 것과 내적인 것의 결합에 관한 내적 의미로부터의 이해함은 그늘 아래 추락되고 만다. 선행이 내적인 것이고 교회의 본질이다는 것을 모르는 이들은 본문의 문맥을 이해함을 위한 첫 단계부터 너무나 멀어지고 만다. 따라서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향한 사랑에 관련되는 것들이 생명의 모든 것이 되어 있는 곳, 결과적으로 지혜의 모든 것, 총명의 모든 것이 있는 곳, 천국에 있는 무수한 사항들로부터는 아주 멀리 떨어져 있다.

24-26절. 그리고 석 달이 지나갔다, 그리고 누군가 유다에게 말했다, 말하기를, 당신의 며느리 다말이 음란하게 놀아났다. 그리고 더구나 그녀는 매춘으로 아이와 함께 있다. 그리고 유다가 말했다, 그녀를 끌어내라, 그리고 그녀를 태워라. 25 그 여자는 끌려나갔다, 그리고 그 여자는 그녀의 시아버지에게 보내졌다, 말하기를, 이것들이 있는 사람에 의해서 나는 아이와 함께 있다. 그리고 그 여자는 말했다, 청컨대 이것들, 도장과 머리 수건과 지팡이가 누구의 것인지 인정하라. 26 그리고 유다는 그것들을 인정했다, 그리고 말했다, 그 여자가 나보다 더 정당하다. 내가 그녀에게 내 아들 셀라를 주지 않은 까닭이다.

그후 석 달이 지났다. 이는 새로운 상태를 의미한다. 이는 “3”의 의미가 완전인 것, 이로부터 마지막과 처음 다함께, 또는 끝과 시작 모두이다로부터; 그리고 “달”의 의미가 상태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내적 의미에서 시간의 모든 기간들, 시간, 날, 주, 달, 년, 시기, 시대 같은 것들은 상태들을 의미한다; 또한 이것들이 더 세분해져 있는 경우도 마찬가지 이다; 즉 하루의 때들인 정오, 저녁, 밤, 아침; 그리고 한 해의 계절인, 여름, 가을, 겨울, 봄; 그리고 인생의 구분되는 시기인 유아, 어린 시절, 젊은 이, 성년, 노년; 등등인데, 이런 것들 모두가 각각의 상태를 의미한다. 어떤 상태들인지는 이미 살폈다.
때들이 상태들을 의미하는 이유는 때들이 다른 삶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영들과 천사들의 삶의 발전은 실로 때들에서 같이 나타난다; 그러나 그들은 인간이 때들을 생각하듯하는 때들에 관한 생각은 없다; 그들의 생각은 생명의 상태들로부터 이고, 이것은 때들에 관한 관념 없이 있다. 이런 이유로 그들 삶의 발전은 다른 시기들로 구별되지 않는다, 그 이유가 거기서 그들은 늙는 쪽으로 성장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날들이나 햇수들 같은 것이 없다, 그 이유는 그들의 태양인 주님은 언제나 떠 있고, 지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때에 관한 관념이 그들의 생각들 안으로 들어가지 않는다, 그러나 오직 상태와 상태의 발전에 대한 관념만이 그들의 생각 안으로 들어간다. 그들의 관념들은 감각 이전에 존재한 것들로부터 가져가진 것들이다.
이런 사항들은 제아무리 설명해도 역설적이다고 느낄 수밖에 없는데, 그런 이유는 인간의 생각 속의 모든 관념이 여하튼 시공에 관한 것이 섞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인간은 시공으로부터 그의 기억과 재수집이 있고, 그의 더 낮은 생각, 즉 물질이라 부르는 것도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이런 관념들을 오게 하는 기억은 다른 삶에서는 정지된 채로 있다. 다른 삶에 있는 그들은 내면의 기억 안에 있다, 그리고 그것의 생각 속의 관념들 안에 있다; 그리고 이 후자의 기억으로부터의 생각은 시간을 가지고 있지 않고 그것에 인접한 공간도 없다. 그 대신 상태들과 상태들의 발전들이 있다. 이로부터 역시 그것들은 상응하고, 이와 같은 상응의 결과 말씀에 있는 시간은 상태들을 의미한다.
“약 석 달 후”에 의해서 새로운 상태가 의미되는 이유는 “달”에 의해 상태가 의미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미 말한 바대로, “3”에 의해 마지막 그리고 처음 다 함께가, 또는 마지막 그리고 시작 모두가 의미된다. 이런 이유는 영계에서 이 상태로부터 저 상태로의 계속적인 발전이 있기 때문, 결과적으로 모두 각각의 상태의 마지막 또는 끝에서 처음 또는 시작이 있다. 그러므로 계속적이다, 고로 “석 달 후”에 의해 새로운 상태가 의미된다. 땅 위 주님의 왕국 또는 영계인 교회에도 역시 비슷해서, 한 민족과 더불은 교회의 끝에서는 저 민족과 더불은 새로운 교회의 시작이 언제나 있다. 고로 마지막은 처음으로 이어지기에, 주님에 관련해서 몇 번씩 말해지는 것은, 그분은 마지막과 처음이시다는 것이다 (이. 41:4; 44:4; 계. 21:6; 22:13); 관계적 의미에서 항구적인 것, 최고 의미에서 영원한 것이 의미된다.

그리고 이런 말이 유다에게 말해졌다. 이는 전달됨을 의미한다. 이는 “말해짐”의 의미가 어떤 소식이 전달됨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말하기를, 당신의 며느리 다말이 음란하게 놀아났다. 이는 부부적인 어떤 것이 그들 사이에 존재한다는 것은 거짓임을 지각함을 의미한다. 이는 “말하다”가 역사 부분의 말씀에서는 지각하다 이다로부터; “음란하게 놀다”의 의미가 거짓이다로부터; 다말의 표현함이 표현 교회의 내적인 것이다로부터; 그리고 “며느리”의 의미가 교회의 진리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러므로 “말하기를, 다말, 당신의 며느리가 음란하게 놀았다”는 말에 의해 부부적인 어떤 것이 그들 사이에 존재한다는 것은 거짓임을 지각함이 의미된다. 어떻게 시리즈에서 이런 것들이 있는지에 대하여는 앞에서 살핀 바도 있다, 즉 자기들의 광신적 신앙으로부터의 유태 민족은 교회의 내적인 것을 창녀로서 지각했다, 그리고 내적인 것으로부터 설교함이나 생활함은 매춘으로서 지각했다. 그 이유는 내적인 것 없이 외적인 것에만 있는 이들은 교회의 내적인 것을 창녀나 매춘으로밖에 달리 간주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즉 그들은 참된 것을 거짓이라고, 거짓을 참되다고 부른다.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는 외적인 것만으로는 무엇이 진짜인지, 가짜인지를 누구도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외적 시각으로부터 있는 것들을 판단할 내적 시각이 반드시 있어야만 한다, 이렇기 위해서 내적 시각은 반드시 천국의 빛에 있어야 한다. 주님에 대한 신앙 안에 있고, 이 신앙으로부터 말씀을 읽지 않으면, 우리의 내적 시각은 천국의 빛 안에 있지 않는다.
유태 민족이 내적인 것 없이 외적인 것 안에 있었다는 것, 그러므로 진리가 거짓이다고, 거짓이 진리이다고 믿었다는 것은 그들의 가르침만 엿보아도 판별된다. 즉 그들은 원수를 미워함을 허용할 수 있다는 것, 자기들의 광신적 신앙으로부터 있지 않은 이들을 미워하는 삶을 꾸렸다는 것 등등이다. 그들은 이렇게까지 조차 믿었는데, 즉 자기들이 이방인들을 야만적이고 잔인하게 처우하는 것을 여호와께서 흡족해 하신다는 것, 하여 그들을 죽인 후 시체를 새나 짐승이 먹게 노출시켜 놓거나, 그들을 데려다 톱질과 써레질과 벽돌구이를 시켰다. (삼하. 12:31). 더욱이 어떤 원인으로 적이라고 선포되면 동료였던 자도 위와 같은 식으로 처리했다. 고로 그들의 광신적 신앙 안에 내적인 것은 하나도 없었다는 것이 분명하다. 만일 누가 그들에게 위와 같은 짓이 교회의 내적인 것에 반대된다고 말해지면, 그들은 그것은 거짓이다고 응수했다. 그들이 외적인 것들 안에만 있고, 내적인 것에는 완전히 무지했다는 것, 그리고 내적인 것에 반대되는 생활을 했다는 것은 주님의 가르침에서도 분명해진다 (마. 5:21-48).

그리고 더구나 그 여자는 매춘으로 아이와 함께 있다. 이는 거기에서 어떤 것이 생산되어질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자궁 안에서 운반함” 또는 “아이와 더불어 있음”의 의미가 어떤 것을 생산하는 것이다로부터, 그 이유가 “씨”에 의해 신앙의 진리가 의미되기 때문, 그리고 “임신”에 의해 신앙의 진리를 받아들임이 의미되기 때문, 이로부터 “자궁 안에서 운반함” 또는 “아이와 더불어 있음”에 의해 생산함이 의미된다; 그리고“매춘”의 의미가 거짓이다로부터, 즉 그들의 광신적 신앙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위 각각의 의미로부터, 이 말, 즉 “말하기를, 다말, 당신의 며느리가 음란하게 놀아났다”; 그리고 더욱이 보라, 그녀는 매춘으로 아이와 함께 있다“에 의해 부부적인 어떤 것이 그들 사이에 존재하는 것은 거짓이다는 것, 그리고 거기로부터 어떤 것이 생산되어질 수 있다는 것을 지각함에 의미되어진다. 생산되는 것, 이를 교회에 응용하면, 진리를 수단으로 생산되는 선을 표시한다; 그리고 이것은 진리가 이해력을 통과해서 의지력 안으로 건너갈 때, 그 다음 의지력으로부터 행동 안으로 건너갈 때 생산되어진다. 그 이유가 앞에 말한 바, ”씨“는 신앙의 진리이고, ”임신“은 받음이다, 그리고 받음이 결과되는 것은 이해력 속에 있는 진리가 의지력 속에 있는 선 안으로 건너갈 때, 또는 신앙 속에 있는 진리가 선행 속에 있는 선으로 건너갈 때이다; 그리고 이것이 의지 안에 있을 때가 자궁 안에 있을 때이고, 이때 처음 생산되어진다; 그리고 인간이 행동에서 선 안에 있을 때, 즉 그가 의지로부터 선을 생산할 때, 고로 자유함과 기뻐함으로부터 선을 생산할 때, 자궁 밖으로 나가는 것, 또는 출생됨이다. 이것 역시 재출생, 또는 거듭남에 의해 뜻해진다. 이로부터도 “아이와 함께 있다”에 의해 영적 의미에서 의미되는 것이 분명해진다. 어쨌든 여기서는 반대적인 것, 즉 어떤 선도 생산되어질 수 없다가 의미되어진다; 그 이유가 여기서 묘사되는 이 민족은 어떤 진리 안에도 있지 않았기 때문, 그런 이유는 그들은 교회의 어떤 내적인 것도 없었고, 오직 거짓 안에 있었기 때문이다.
내적 인간을 만드는 재탄생 또는 거듭나지는 것이 이 민족에게는 통째로 알려지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이런 주제는 그들에게는 창녀처럼 여겨졌다. 이는 유태인의 지도자 중의 한사람인 니고데모로부터도 알게 된다 (요. 3:1-13). 즉 그가 말했다, “어떻게 인간이 늙었는데, 다시 태어날 수 있습니까? 그가 두 번째로 자기 어머니의 자궁 안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까?” 이 대목에서 주님께서 그분의 왕국과 교회 속의 내적인 것을 여셨다는 것은 아마 대체로 기독교계에 알려져 있다, 그러나 사실 이런 내적인 것들은 고대인들에게 이미 알려져 있었다; 즉 이런 것이다- 인간이 생명 안으로 들어가기 위하여 재탄생되어야 한다는 것; 그때 그는 옛 인간을, 즉 자기의 악한 바램들과 더불어 자기와 세상을 사랑함을 벗고, 새 인간을, 즉 이웃을 향한 사랑과 하느님을 사랑함을 입어야 한다는 것; 천국은 거듭난 인간 안에 있다는 것 등등이다. 이런 사항들은 고대 교회에 속해 있던 이들에게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이런 사항들을 표현하는 외적인 것들에 의해 인도되었다. 그러나 이런 사항들은 유태 민족과 더불어서는 완전히 잊혀지고 말았다; 하여 주님께서는 그것들을 가르치셨고, 표현물 자체를 폐지하셨다, 그 이유는 그들이 표현물에 그분 자신을 연계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형상(image, 허상, 거울 속의 것)은 형체(form, 실상, 거울 밖의 것)가 나타날 때 사라져야만 하기에 표현물을 폐지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그분은 새로운 교회를 설립하셨다, 이 교회는 과거 표현들을 수단으로 내적인 것쪽으로 인도되던 교회와는 같지가 않다; 이 새로운 교회는 표현(물)들 없이 그것들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그분은 외적 의식으로 두 가지만을 명령하셨다-세례와 성찬이다- 세례식은 거듭남을 상기하기 위해서 이고, 성찬식은 그분을 상기하는 것, 즉 온 인류에 대한 그분의 사랑과 그분의 이런 사랑에 감사하여 그분께 되돌리는 인간의 상호적인 사랑을 상기하기 위하여서 이다. 사실 이런 두 가지 사항 역시 고대인들에게 알려져 왔었지만, 유태 민족과 더불어서 완전히 상실되어 이런 사항들이 이 후손들에게 말해지면 그것은 거짓이라고 판단해버린다.

그리고 유다가 말했다. 이는 유태 민족이 있었던 광신적 신앙으로부터의 판결(sentence)을 의미한다. 이는 유다의 표현함이 유태 민족의 광신적 신앙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로부터의 판결이 의미되는 것은 아래 구절로부터 분명해진다.

그녀를 끌어오라, 그리고 그녀를 태워라. 이는 다말에 의해 표현된 교회의 내적인 것은 근절되어져야 한다를 의미한다. “그녀를 끌어오라, 그녀를 태워라”는 근절해버리기 위함이다. “끌어오라”는 진리 측면에서, “태워라”는 선의 측면에서 근절해버림 이다. “태워라”가 선을 근절함이라 단언되는 것은 말씀의 많은 곳에서 분명해진다; 그리고 그 이유인즉, “불”, “불꽃”이 영적 의미에서 선을 표시하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열(heat)”은 선에 애착함을 표시하고, 반대적 의미로는 악에 애착함이다. 더욱이 선은 실제로 영적인 불이고, 이 불로부터 생기를 주는 영적인 열이 온다; 그리고 악도 불이다, 이로부터 살라 없애는 열이 온다. 사랑의 선이 영적인 열인 것은 이를 곰곰이 추스려 생각하는 이라면 누구나 아는 (설명이 요구되지 않는) 너무나 자명한 사실이다. 그 이유가 만일 우리가 (절대로 필요한) 생명의 불과 열을 어디서 가지는 지를 잠깐만 곰곰이 추스르면 그것은 사랑으로부터 이다는 것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사랑이 중단되자 마자, 인간은 차갑게 되기 때문에, 반대로 그가 사랑 안에 더 있으면, 그 만큼 그의 따뜻함은 성장한다. 인간의 생명력이 이 근원으로부터 있지 않으면, 그는 생명을 지닐 수 없다. 그러나 생명을 생산하는 영적인 불 또는 열이 악한 자와 더불어서는 태워 없애버리는 불로 바뀐다. 이성이 결핍된 동물들에서도 영적인 불이 흘러서 생명을 생산해주기는 인간의 경우와 비슷하나, 이 생명은 그들의 유기체의 형체 안에 받아들임에 따라서일 뿐이다; 이런 이유로 그들의 지식들과 애착들은 선천적(본능적)이다.

그녀는 끌려 나갔다. 이는 그것이 결과를, 즉 근절됨을 이제 막 보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이는 “끌려나가 태워짐”의 의미가 근절해버림 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고로 여기서는 이 상황이 이제 막 벌어지는 찰나임을 암시한다.

그리고 그 여자는 그녀의 시아버지에게 보내졌다. 이는 은근히 뭔가를 심어줌을 의미한다. 이는 시리즈로부터 암시되는 것이 그녀의 시아버지에게 당신이 아이의 아버지임을 은근히 심어주는 결과가 있으리라 예상하게 한다.

말하기를, 이것들이 있는 사람으로 말미암아 나는 아이와 함께 있다. 이는 이와 같은 품질이 그들의 광신적 신앙 안에 있음을 의미한다. 이는 여기서 “사람”에 해당하는 자가 유다이고, 유다는 유태 민족의 광신적 신앙을 표현한다로부터; 그리고 “자궁에서 운반함” 또는 “아이와 함께 있다”가 생산되어지는 것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러나 여기서는 생산된 것은 아니고 안에 있는 것, 따라서 생산될 것이 예상되는 상태이다. 이 생산물은 첫 결과, 이 결과는 유효하기 때문에 원인이라 불리우고, 이로부터 는 더욱 결과인 셈이다.

그리고 그 여자는 말했다, 청컨대 이것들, 도장과 머리 수건과 지팡이가 누구의 것인지 인정하라. 이는 이것은 담보물로부터 알게 되어야함을 의미한다. 이는 “도장, 머리수건, 지팡이”가 외적 또는 자연적 인간의 결합에 관한 담보물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리고 유다는 그것들을 인정했다. 이는 그들의 것임을 그들이 확증했음을 의미한다. 이는 “인정함”의 의미가 확언함이다로부터, 그리고 이 확언은 그가 담보물이 그의 것임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이다. 이 구절에는 이 민족의 특질(genius)이 담겨 있다; 즉 그들은 교회의 내적인 것을 거짓으로 여겨 거절했음에도, 이것이 그들의 것들임이 그들 안으로 은근히 심어져 있을 때, 그들은 그것을 받아들이고 확언한다는 것이다. 이 민족의 경우 같이, 더러운 사랑들 안에 있고, 탐욕(avarce) 안에, 그리하여 자아 사랑 안에 있는 이들은 마음의 시선을 위쪽으로 향하게 해서 자아 외의 어떤 다른 근원으로부터 진리를 볼 수 없다; 그러므로 이것이 자신들에게서 비롯되었다고 할 때, 그들은 그것을 확언한다(확언할 수밖에 없다). 예를 들면, 그들에게 말씀은 그 자체가 신성하다, 그리고 천국의 비밀들을 포함하고 있다, 그리고 이런 비밀들은 천사들에 의해서만 납득되어질 수 있다 라고 말하면, 그들은 그것이 진리이다고 확언한다; 그 이유는 그들은 말씀을 자신들의 것으로 간주한다, 그 이유는 이것이 그들 위에, 그들 사이에 있었고, 글자에서 자신들을 취급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적 진리들, 또는 비밀들이 그들에게 알려지면 그들은 이것을 거절한다.
만일 그들에게 그들의 교회의 의식들이 자체 안에서 거룩하다고 말하면, 그들은 이것이 그렇다고 확언하는데, 그 이유는 그들이 의식들을 자신의 것으로 간주하기 때문; 그러나 거룩한 것은 그들로부터 떨어져 있는 의식들 안에서 이다고 말하면, 그들은 이것을 부정한다. 다시, 만일 그들에게 유태 교회는 천적이고 이스라엘 교회는 영적이다고 말하면, 그들은 이것 역시 그렇다고 확언한다; 그러나 그들이 영적이고 천적이다 불리우는 이유는 그 교회의 세부적인 것들이 영적이고 천적인 것을 표현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표현물은 어떤 것일 뿐 인물이 아니다고 말하면, 그들은 이것을 부정한다. 다시, 만일 그들에게 모세의 지팡이에는 여호와의 힘이 있었다, 그러나 신성한 명령에서만 힘이 있었다고 말하면, 그들은 그것을 부정하고 거짓이라 부른다.
만일 그들에게 모세에 의해 세워진 놋뱀이 뱀에 물린 자들을 치료했다, 그리고 그것은 기적이었다고 말하면 그들은 그것을 확언한다; 그러나 놋뱀 자체가 치료한 것이 아니라는 것, 그 자체 기적은 아니다, 이것은 그렇게 표현된 주님으로부터 치료된 것이다 라고 말하면, 그들은 부정하고 거짓이다고 말한다. (뱀에 관련된 것은 민. 21:7-9; 왕하. 18:4; 요. 3:14, 15를 참조하라.) 이와 같은 것들이 유다의 인정함에 의해 의미되어 있다, 그리고 유다에 의해 의미된 민족의 부분에서 다말에 의해 표현된 교회의 내적인 것과 결합되어 있다; 그리고 그들이 이와 같기 때문에, 유다는 남편의 형제된 의무 수행을 위해서 다말에게 온 것이 아니라 매춘자로서 창녀에게 간 것이다.

그리고 말했다, 그 여자는 나보다 더 정당하다. 이는 거기에 외적인 것이 내적인 것과 결합함은 없고, 단지 내적인 것이 외적인 것과 결합함 만이 있었음을 의미한다. 이는 앞에서 유태 민족의 교회에 관하여 살피기도 했다; 즉 이 백성과 더불은 교회, 이는 내적인 것이 외적인 것과 결합되어져 있다; 그러나 그들 안에는 교회가 없었다, 즉 외적인 것이 내적인 것과 결합하지 않았다. 교회는 상호적이어야만 존재한다.

내가 내 아들 셀라를 그녀에게 주지 않은 까닭에서 이다. 이는 외적인 것이 이와 같은 품질 속에 있었기 때문에를 의미한다. 이는 앞의 설명들로부터 분명해진다; 즉 다말이 유다의 아들, 셀라에게 주어질 수 없었던 이유는 주어질 경우, 즉 남편의 형제된 의무 수행의 법에 일치하여 다말이 아내로서 주어지는 것인데, 이에 반해 유태 민족의 광신적 신앙이 표현되려면, 합법적이 아닌 것에 의한 결합이어야 했기에, 즉 시아버지와 창녀로서의 며느리 사이의 결합이어야 그 광신적 신앙이 적절히 표현되기 때문에서 이다.

그리고 그는 그녀를 알려는 것을 더 추가하지 않았다. 이는 더 이상 결합은 없었음을 의미한다. 이는 “안다”는 것이 결합되는 것이다로부터; 그리고 “더 이상 추가하지 않다”의 의미가 교회의 내적인 것과의 결합은 더 이상 없었다 이다로부터; 그 이유가 교회의 내적인 것이 다말에 의해 표현되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유다는 더 이상 아들들을 갖지 못했다.

27-30절. 그리고 산고를 겪는 때가 오고 있었다, 그리고 보라, 쌍둥이가 그녀의 자궁에 있었다. 28 그리고 그 여자는 해산하고 있을 때, 한 아이가 손을 내밀었다. 그리고 산파가 잡고 그의 손에 두 번 물들인 것을 매었다, 말하기를, 이것이 먼저 나왔다. 29 그리고 그는 자기 손을 뒤로 당겼다, 보라 그의 형제가 나왔다, 그리고 그 여자는 말했다, 어찌하여 너는 깨뜨려서 네 위에 깨뜨림(위반)이 있느냐? 그리고 그는 그의 이름을 베레스라고 불렀다. 30 그리고 그 뒤에 두 번 물들인 (것을) 맨 그의 형제가 나왔다. 그리고 그는 그의 이름을 제라라고 불렀다.

때가 오고 있었다. 이는 뒤따르는 상태를 의미한다. 이는 “때”의 의미가 상태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때가 옴”이 뒤이어지는 상태인 것은 분명하다, 그 이유는 뒤따르기 때문이다.

그녀의 해산. 이는 내적 진리쪽에서 인정함을 의미한다. 이는 “해산함”이 신앙과 행동에서 인정함이다로부터; 그리고 그녀, 즉 다말의 표현함이 표현 교회의 내적인 것, 결과적으로 내적 교회이다로부터 알려진다.

그리고 보라, 쌍둥이가 그녀의 자궁에 있었다. 이는 교회의 두 가지 모두의 것들을 의미한다. 이는 “쌍둥이”의 의미가 선과 진리 모두이다로부터; 그리고 “자궁”의 의미가 임신된 선과 진리가 놓이는 곳, 결과적으로 교회 속에 있는 것이 있는 곳이다. “자궁”은 진짜 의미에서 순진이 있는 가장 깊은 부부의 사랑을 의미한다, 그 이유는 웅대한 사람 안에서 자궁은 이 사랑과 상응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천국의 결혼에 속하는 선과 진리를 사랑함에 그것의 근원을 가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결혼이 천국 자체 또는 주님의 왕국이기에, 그리고 땅 위 주님의 왕국이 교회이기에, 그러므로 교회 역시 “자궁”에 의해 의미된다; 그 이유가 선과 진리의 결혼이 있는 곳이 교회이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자궁을 염”은 교회의 파생되는 교리들을 표시하고, 그리고 교회의 진리들과 선들을 받는 수용력을 표시한다; 그리고 “자궁으로부터 세상밖으로 나옴”은 재탄생 또는 거듭남, 즉 교회가 만들어짐을 표시한다, 그 이유는 재탄생, 거듭나는 자는 누구든지 교회를 만들기 때문이다.
재탄생, 그러므로 교회가 “자궁으로부터 나감”에 의해 의미되기에, 그러므로 주님은 말씀에서, “자궁으로부터 형체를 만들어 내신 분”, “자궁으로부터 낳게 되신 분”이라 불리운다; 그리고 거듭나는 이들과 교회를 만드는 이들은 “자궁으로부터 운반됨”이다고 말해진다;
고로 여호와 너를 만드신 분, 자궁으로부터 형체를 만들어 내시는 분, 그분이 너를 돕는다
(이. 44:2).
다시:
고로 여호와 너를 되찾으신 분, 그리고 자궁으로부터 너를 만들어 내신 분 (이. 44:24).
다시:
자궁으로부터 나를 만들어 내신 여호와깨서 그분의 종이 되기 위하여, 야곱을 그분에게 다시 데려오기 위하여, 그리고 이스라엘이 그분에게 모아들이기 위하여 말하셨다 (이. 49:5).
다윗서에서:
나를 자궁으로부터 데려오신 여호와 (시. 22:9).
다시 이사야서에서:
나에게 경청하라, 야곱의 가문아, 그리고 이스라엘의 가문의 남은 모든 자들아, 자궁으로부터 운반했고 모체(자궁, matrix)로부터 태어난 (너희들아) (이. 46:23).
다윗서에서:
사악한 자들은 자궁으로부터 이간질을 한다; 그들은 뱃속으로부터 엉뚱한 곳으로 간다, 온갖 거짓말과 더불어 (시. 58:3);
위에서 “자궁으로부터 이간질 함”은 교회 속에 있는 선으로부터를 (이간질을 함을) 뜻하고, 그리고 “뱃속으로부터 엉뚱한 곳으로 감”은 진리로부터 엉뚱한 곳으로 감을 뜻한다. 호세아서에서:
해산하는 여인의 격심한 아픔이 그에게 닥칠 것이다; 그는 슬기롭지 못한 아들이다, 그 이유가 그가 아들들의 자궁에서 서있지 않아야 하는 때이기 때문이다 (산고가 시작되고 자궁이 열리면 최대한 빨리 자궁을 빠져나오는 것이 상책인데, 자궁문에서 나오지 않고 서있어 어리석다는 말인 것 같다 역자주).
위에서 “아들들의 자궁에서 서있지 않아야 한다”는 교회 속에 있는 진리의 선에 있지 않음을 뜻한다.
다시:
그들의 영광은 새 같이 출생으로부터, 뱃속으로부터, 그리고 임신함으로부터 날아가버릴 것이다 (호. 9:11);
교회의 진리가 통째로 멸해질 것을 뜻한다; “출생으로부터”는 태어난 것을 뜻하고; “뱃속으로부터”는 섭취한 것을 뜻하고; “임신으로부터”는 시작된 것을 뜻한다. 이사야서에서:
나는 네가 아주 불충하게 행동하였다는 것, 그래서 자궁으로부터 위법자라고 불리워졌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 48:8);
위와 같은 것이 교회의 시작으로부터 그들(유태 교회)의 품질이었다는 것을 뜻한다. 계시록 서에서:
큰 표시가 하늘에서 보여졌다, 여인이 태양을 휘감고, 그녀의 발 아래 달이, 그리고 그녀의 머리 위에는 열두 별들의 왕관이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뱃속에서 낳으려, 소리쳤고, 출생에서 산고를 겪고 있다, 그리고 분만하기 위하여 고통 안에 있다 (계. 12:1, 2);
“여인”은 교회이다 (252, 253, 255항); “그녀가 휘감은 태양”은 사랑의 선이다; “그녀의 발 아래 있는 달”은 신앙의 진리이다; “별들”은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이다; “열두 별들”에서 “열둘”은 모든 것을 뜻한다, 고로 신앙의 모든 것들을 뜻한다; “뱃속에서 낳음”은 교회의 진리가 임신됨을 뜻한다; “출생에서 산고를 겪음과 분만하려 고통 안에 있다”란 그것은 어려움과 더불어 받아졌다를 뜻한다.

그 여자에게 산고를 겪는 때가 왔다. 이는 생산을 의미한다. “산고를 겪음”이 신앙과 행동에서 인정하는 것이다; 그리고 신앙에서 인정하고 행동하는 것은 무엇이든 생산하는 바, 그러므로 “산고를 겪음” 역시 생산함이 의미된다, 즉 선과 진리를 생산함이 의미되는데, 이는 교회 속에 있다.

그리고 손이 나왔다. 이는 힘(능력, power)을 의미한다. 이는 “손”의 의미가 힘이다로부터알게 된다.

그리고 산파가 잡았다. 이는 자연 (평면)을 의미한다. 이는 “산파”의 의미가 자연 (평면)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어떻게 이 경우가 있는 지는 이어지는 것들로부터 알게 된다. 영계에서의 산파는 자연계에서의 산파와는 다른 의미를 가진다; 그 이유가 그곳에서는 자연계에서 같은 출생에 관련되는 것는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산파의 직능(직업 분야)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인간들이 이런 단어를 말씀으로부터 읽을 때, 당사자와 더불은 천사들은 산파 대신에 어떤 것, 참으로 영적으로부터의 어떤 것을 지각한다. 결과적으로, 천사는 자기들의 생각들을 영적인 출생에 관련되는 이런저런 것들에 놓아두고 있다; 고로 산파를 수단으로 그들은 이 출생을 조력하고 받아주는 것을 지각한다; 이것이 자연 (평면)인데, 이미 언급한 적도 있다.

그리고 그의 손에 두 번 물들인 것을 매었다. 이는 그 여자가 그것(선)에, 즉 힘에 표를 해놓았다는 것, 그리고 “두 번 물들임(double-dyed)”은 선을 표시한다. 이는 “손에 맴”의 의미가 힘(power)에 표(mark)를 놓는 것이다로부터, 그 이유가 “손”이 힘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두 번 물들인”의 의미가 선이다로부터, 참으로 영적 선이다에서 알려진다. “두 번 물들임”이 영적 선을 표시하는 것은 이것이 주홍색(진홍색, scarlet color)에 속하기 때문이다. 주홍의 색깔이 다른 삶에서 보여질 때, 영적 (평면의) 선을, 즉 이웃을 향한 선행의 선을 의미한다. 다른 삶에서 보일 수 있는 모든 색깔들은 선과 진리로부터의 어떤 것을 의미하는데, 그 이유는 그것들이 천국의 빛으로부터 존재 안으로 오기 때문이다. 천국의 빛 자체는 주님의 신성으로부터의 지혜와 총명이다. 이 빛의 다양해짐과 변형되어짐은 결과적으로 지혜와 총명의 다양함과 변형됨, 결과적으로 선과 진리의 다양함과 변형됨이다. 천국에 있는 빛은 거기서 태양으로 계신 주님으로부터의 신성한 지혜와 총명으로부터 이다는 것에 대하여는 (우리가 기억하고 있어야 하기에) 많은 장소에서 말해왔다. 색깔들이 이 근원으로부터 이다는 것, 그리고 그들이 이 빛의 다양함들과 변형됨들 이다는 것, 결과적으로 총명과 지혜의 다양해짐과 변형됨이다는 것에 대하여도 여러 번 언급하였다.
“두 번 물들임”이 영적 선을 표시하는 것을 말씀의 다른 구절로부터 확인해보자:
네가 황폐해져 있다면 너는 무엇을 할 것이냐? 만일 네게 두 번 물들인 것으로 옷입고, 금 장신구로 치장한다면, 너는 헛되이 네 자신을 아름답게 꾸미는 것일 것이다; 애인이 너를 몹시 싫어할 것이다 (예. 430);
위에서 유다가 취급된다; “너 자신을 두 번 물들인 것으로 옷입고”가 영적 선을 표시한다, 그리고 “금장신구로 너 자신을 치장한다”는 천적 선을 표시한다. 사무엘하서에서:
다윗은 사울과 요나단을 두고 통곡했다, 그리고 유다의 아들들을 가르치기 위해 활(의 노래)을 썼다(작곡했다). 너희 이스라엘의 딸들아, 사울을 위해 슬퍼하라, 그는 기쁨으로 두 번 물들인 것으로 너희를 옷입혔고, 너희 의상에 금 장신구를 놓아주신 분이시다 (삼하. 1:17, 18, 24);
위에서 “활”을 가르침은 사랑과 선행의 교리를 가르침이다; 그 이유는 “홀”이 이 교리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두 번 물들인 것을 입는 것”은 영적 선을 표시한다; 그리고 “의상에 금장신구를 놓는다”는 천적 선을 표시한다.
이것이 두 번 물들인 것의 의미이기 때문에 두 번 물들인 진홍색이 성막의 커튼들에, 베일들에, 천막의 문을 위한 덮개에, 바깥뜰의 큰 문을 위한 덮개에, 그들이 여행할 때 얼굴들의 식탁에, 그리고 거룩함의 아론의 의복에, 판단의 가슴받이 에봇에, 그리고 에봇의 도포의 가장자리(술)에서 사용하게 명령되었다. 아래에서 살핀다:
너는 성막을 위하여 열 커텐들을 만들어라; 곱게 꼬아 만든 아마로, 그리고 청색 (실), 그리고 심홍색 (실), 그리고 두 번 물들인 진홍색 (실) (출.26:1).
너는 베일을 청색, 심홍색, 두 번 물들인 진홍색 (실)로 만들어라 (출. 26:36).
바깥뜰의 큰 문을 위하여 너는 청색, 심홍색, 두 번 물들인 진홍색 (실)로 덮개를 수공예 자의 일로 만들어라 (출. 27:16).
진영이 출발할 때, 얼굴들의 식탁 위에 두 번 물들인 진홍색 천을 펴놓아라, 그리고 오소리 가죽 덮개와 함께 덮어라 (민. 4:5, 7, 8).
너는 금, 청색(실), 심홍색 (실), 두 번 물들인 진홍색 (실)과 고운 아마포로 기술공의 일로 에봇을, 마찬가지로 벨트도 만들어라 (출. 28:6, 8).
너는 기술공의 일로 판단의 가슴받이를 만들어라; 마찬가지로 에봇을 금, 청색, 심홍색, 두 번 물들인 진홍색, 고운 아마포로 만들어라 (출. 27:15).
에봇의 도포의 가장자리(술)에 [너는] 청색, 심홍색, 두 번 물들인 진홍색의 석류[를 만들어라] (출. 27:33).
궤와 더불은 회중의 천막이 천국을 표현했기에, 그러므로 위에 언급된 색깔들을 사용하도록 명령되었다; 그리고 그것들은 천국의 질서 안에서 천국의 천적, 영적인 것들을 의미한다, 즉 “청색, 심홍색”은 천적 선들과 진리들을, 그리고 “두 번 물들인 진홍색과 고운 꼬아만든 아마”는 영적 선과 진리들을 의미한다. 말씀이 거룩하다고 믿는 모든 이라면, 위의 구절 안에 있는 모든 것이 어떤 의미를 가진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리고 말씀은 주님으로부터 천국을 통하여 보내져 내려왔기 때문에 거룩하다고 믿는 자는 누구든지 그분의 왕국의 천적, 영적인 것들이 의미되었다는 것을 안다. 마찬가지로 삼나무, 진홍색, 히솝이 나병을 깨끗하게 함을 위해 사용하도록 명령되었다 (레. 14:4, 6, 52); 그리고 삼나무, 히솝, 두 번 물들인 심홍색을 붉은 어린 암소를 태울 때 거기에 던지도록 명령했다, 이로부터 분리함의 물을 준비하기 위하여서 이었다 (민. 19:6, 9).
선과 진리를 모독함이 유사한 표현에 의해 묘사되었다. 계시록서에서:
나는 진홍색 짐승 위에 앉아 있는 여인을 보았는데, 모독의 이름들로 가득하여 있고, 일곱 머리들과 열 뿔들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여인은 심홍색과 진홍색으로 옷입혀져 있고, 금빛으로 칠해져 있고, 보석과 진주들로, 그녀의 손에는 그녀의 매춘들로부터의 역겨움과 더러움을 가득채운 금빛의 잔을 들고 있었다 (계. 17:3, 4).
그리고 그 후에:
화, 화가 있다, 큰 도성이여, 고운 아마, 심홍색과 진홍색, 금빛으로 칠해졌고, 보석과 진주들로 치장한 그녀여 (계. 18:16);
위는 바빌론에 관해서이다, 이를 수단으로 선의 모독이 의미되어 있다, 여기서는 선과 진리의 모독이다, 이것이 바빌로니아인이다. 구약 성경의 예언서들에서 “바빌론”은 선을 모독함, 그리고 “갈대아”는 진리를 모독함이다.
“진홍색”은 반대 의미에서 영적 선에 반대되는 악을 의미한다;
너의 죄들이 진홍 같이 있을지라도, 그것들은 눈 만큼 희게 있을 것이다; 그것들이 심홍 같이 있을지라도, 그것들은 양털 같이 있을 것이다 (이. 1:18).
“진홍색”이 이 악을 의미하는 것은 빨간색으로부터의 “피” 때문이다. 이 빨간색(redness)은 좋은 의미에서는 영적 선, 또는 이웃을 향한 선행을 의미하지만, 반대 의미에서는 선행에 가한 폭력이 의미된다.

말하기를, 이것이 먼저 나왔다. 이는 이것이 (시간, 순서에서) 먼저임(앞임, priority)을 가졌다를 의미한다. 이는 “먼저 나왔다, coming out first”, 또는 첫 출생이다의 의미가 앞임(priority), 우위임(superiority)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여기서와 이 장의 끝까지에서 취급되는 주제는 장자임(primogeniture)이다. 말씀의 내적 의미에 관한 지식을 가지지 못한 이들은 취급되는 것이 장자임 뿐이다고, 첫 출생의 법에 따라 가지게 될 특권만을 상상하게 된다; 그러나 내적 의미의 어떤 것을 아는 자는 이런 말들 안에 더 특별한 어떤 것이 감추여 놓여 있다는 것을 짐작 못할 자는 없을 것이다. 여기서의 경우, 아이 중 하나가 자기 손을 내밀었다가 다시 뒤로 끌어당겼고, 그때에 다른 하나가 나왔다는 것, 이로부터 그들의 이름이 명명되었다는 것, 그리고 산파는 첫째의 손에 두 번 물들인 것을 매었다는 것; 성경 앞쪽으로 가보면, 이와 비슷한 사건으로 연상되는 것은 에서와 야곱이다; 이들은 자궁 안에서 다투었고, 에서가 먼저 나왔을 때, 야곱은 그의 뒤꿈치를 잡고 나왔다 (창. 25:22, 26); 이 사건 뒤쪽에서도 유사한 것이 더 있다; 즉 요셉의 두 아들에게 야곱이 축복하는 경우인데, 그는 오른손이 더 젊은 아들에게, 그의 왼손은 다른 아들에게 올려놓고 축복한 것이다 (창. 48:14, 17-19).
유태인들과 일부 어떤 기독인들이 참으로 믿는 것은, 이 본문 안에, 그리고 위의 다른 두 사건 안에 어떤 의미가 저장되어 있다는 것, 이것을 그들은 신비적이라 부르고, 이런 이유로 말씀에 관련하여 거룩함에 대한 생각이 아주 어린 시절로부터 그들 위에 각인되어 있다; 그러나 이 신비적인 것이 무엇인지를 그들에게 물으면, 그들은 모르고 있다. 그래서 그들에게 이런 사항을 미리 알지 않으면 이 대목의 의미 또한 납득되지 않는다는 것: 즉 말씀은 신성하므로, 이 의미는 천국에 있는 천사들이 이해하는 것과 반드시 같아야만 할 것이다; 말씀 안의 의미가 이러한 바, 여타 다른 신비적이다 여겨지는 대목 또한 이런 수준이고, 만일 그렇지 않다면, 말씀 속의 이런 사건들은 전설적, 마술적, 또는 우상적 수준에 머물고 말지 모른다는 것; 더욱이 천사들 사이에서 천국에 있는 이런 신비적 의미는 영적, 천적이라 불리운다는 것; 그리고 영적, 천적 의미들은 우선적으로 주님만을, 그 다음 그분의 왕국에 관한 것을, 그 다음 교회에 관한 것을, 결과적으로 선과 진리에 관해서 이다는 것; 그리고 만일 그들이 선과 진리, 또는 신앙과 사랑이 무엇인지를 알았다면, 그들은 자기들이 상상하는 신비적 의미 또한 알 수 있다는 것 등등이다. 이런 사항만 말해주어도 그들로부터 되돌아오는 응답은 이를 믿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렇다, 오늘날 이런 무지 안에 있는 이들은 영적, 천적 의미를 거의 납득하지 못한다. 아예 이런 단어에 생소해 있다. 어쨌든 세상적 상황이 이럴지라도 주님의 신성한 자비로부터 나에게는 영으로서는 천국 안에, 땅에서는 인간으로서 동시에 있게 해주셨다. 그러므로 천사들과 수 년을 계속적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이렇지 않으면 말씀의 이런 신비적 대목을 나 스스로 라면 열어보이는 것이 가능할 수 없다. 그 이유가 이 대목의 내면들, 이것들은 주님의 왕국 속의 영적, 천적 사항들이기 때문이다. 다말의 두 아들에 관련된 내적 의미가 무엇인지 아래에서 살핀다.

그리고 그는 그의 손을 끌어 당겼다. 이는 그것은 그것의 힘(능력)을 감추었음을 의미한다. 이는 “손”의 의미가 힘이다로부터 분명해진다. “끌어 당김”에 의해 감추여짐이 의미된다.

보라, 그의 형제가 나왔다. 이는 선으로부터의 진리를 의미한다. 이는 “형제”의 의미가 선으로부터 친족인 것이다로부터, 고로 선으로부터의 진리이다; 선으로부터의 진리(선의 진리)는 선으로부터 있는 진리, 또는 선행으로부터 있는 신앙이다. 여기로부터 내적 의미에서 취급되는 주제는 주님에 의해 거듭나는 이들, 또는 재탄생되는 이들의 경우에서 있는 장자임(premogeniture), 결과적으로 교회 안에서 장자임에 관해서이다. 태고 시대로부터 논쟁되어온 것이 첫 출생에 관련된 것; 즉 어느 것이 먼저인지, 첫째인지, 또는 형이고 동생인지, 구체적으로 선행으로부터 있는 선과 신앙으로부터 있는 진리에서 어느 것이 우위인지에 관하여 논쟁되어 왔다는 말이다. 선은 인간이 재탄생 또는 교회를 만드는 동안 나타나지 않고, 그 자체를 내면의 인간 안에 감추이고 있다, 그래서 선은 당사자가 재탄생되어질 때까지 외적 또는 자연적 인간의 감각(sensation) 안으로는 명료하게 와닿지 않는 어떤 애착 안에서만 명백해 있다. 이에 반해, 진리는 그 자체가 명명백백 (당당)하다; 이런 이유가 진리는 감각들(오각, senses)을 통하여 들어가서 외적 또는 자연적 인간의 기억 안에 자체를 저장해놓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많은 인물들이 진리가 첫 출생이다는 오류에 빠져들고 만다, 이 빠져듦이 좀 더 깊어지면, 진리가 교회의 본체(essential)이다고 착각해버리고 마는 수준에 이른다; 이러면 본체라고 말하는 진리를 그들은 신앙이라 부르고, 신앙은 선행 속에 있는 선 없이도 구원하는 힘을 가진다는 결론에 이르른다.
위 한가지 결론으로부터 많은 것들이 파생되는데, 이 결론은 자기들이 작성한 교리 뿐만 아니라 생활까지 감염되어 있다; 간단한 예로 대단히 사악하게만 살아왔던 자라 해도 만일 마지막 한 시간 전에 신앙 속에 있는 이런 사항들에 관한 고백을 만든다면 천국 안으로 받아진다고 말한 대목이다. 그리고 모든 이는 은총(grace)으로부터만 천국 안으로 받아질 수 있다는 것, 그의 삶에 관계없다는 것이다. 이 교리를 만들어 굳히다보니, 그들은 선행(charity)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하고, 자기들 입장에서는 알려고 애쓸 이유가 하나도 없다. 여기서 더 진전된 인물은 선행이라는 단어조차 기억에서까지 지워버린 듯해 있다; 결과적으로 천국과 지옥이 있다는 것에, 내가 가야 하는 그곳이 어떤 곳인지 알 이유도 없다. 선행 없는 신앙, 또는 선이 없는 진리는 가르치는 것이 사실상 아무것도 없기에 위와 같은 일이 벌어진다. 게다가 선으로부터 퇴조하는 정도에 비례하여 그의 어리석음은 증가한다. 그 이유가 선 안에서, 선 안으로, 선을 통하여 주님께서는 총명과 지혜를 주시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더 높은 곳에서 정신적으로 조망하게 해주신다, 더불어 이것이 그런지, 그렇지 않은지에 관한 지각도 주신다.
위의 말들은 본문의 주제인 장자임을 두고 묘사된 것이 어떤 경우인지를 보여준다: 즉 장자권은 실제적으로는 선에 속한다는 것, 그리고 가상적으로 진리에 속해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다말의 두 아들들의 출생에 의해 내적 의미에서 묘사되어져 있다; 그 이유가 산파가 손에 묶은 “두 번 물들인 것(끈, 또는 실)”이 선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먼저 나왔다”에 의해서는 우위임, 먼저임, 앞섬(priority)이 의미되기 때문; 그리고 “자기 손을 끌어당김(뒤로 당김, draw back)”에 의해 선이 그것의 힘을 감추었다가 의미되기 때문; 그의 “형제가 나옴”에 의해 진리가 의미된다; “너는 깨뜨려서 네 위에 깨뜨림을 있게 했다”에 의해 선으로부터 진리의 가상적인 분리가 의미된다; 그의 “형제가 그 뒤에 나왔다”에 의해 선이 실제로는 먼저임(priority)이 의미된다; 그리고 “두 번 물들인 것을 손에 가진 것”에 의해 이것이 선이다를 인정함이 의미된다; 그 이유는 선은 인간이 재탄생할 때까지 먼저임 이다는 것이 인정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재탄생 이후, 선이 먼저가 되어 있다, 즉 그는 선으로부터 행동하고, 선으로부터 진리를 주목해서 보고 진리의 품질을 가늠하기 때문이다.
이상의 내용들은 내적 의미에서 포함되어진 것들이고, 이것은 새로이 태어나는 이들 안에서 선과 진리가 어떻게 관련을 맺는지를 가르치고 있다; 즉 선은 실제적으로는 먼저이고, 진리는 가상적으로 먼저이다는 것이다. 따라서 선은 거듭나는 동안 첫째 자리에 있지 않다, 그러나 거듭나졌을 때 이후 선은 첫째 자리에서 명명백백해져 있다. (만일 거듭나는 동안에서 선이 앞에 있다고 가정해본다면, 아마 대부분의 인간들이 이 선을 짓밟아 모독해버릴 위험이 100%이고, 이럴 경우 그 인간의 구원은 너무나 힘들지 모르는 바, 선의 모독을 예방해주시는 섭리 차원이 중요함을 선이 자기 손을 끌어당기고, 진리가 먼저 나오는 모습에서 우리를 가르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본다 역자주.) 사실 위의 내용들에 대해서는 이미 많은 설명이 있어 왔기에 더 설명은 필요하지 않다. 선과 진리, 또는 선행과 신앙, 어느쪽이 형이고 아우인지, 또는 앞이고 뒤인지, 첫째이고 둘째인지에 대하여는 고대 시대로부터 있어온 논쟁거리 이다.
최고 의미에서 주님이 “첫 출생”이시다, 결과적으로 주님을 사랑함과 이웃을 향한 선행이 첫 출생이다는 것, 하여 첫 출생이 여호와의 것임을 표현 교회에서 법으로 정해 놓았다:
모든 첫 출생, 즉 이스라엘의 아들들 사이에서 자궁을 연 것은 그것이 인간이든 짐승이든, 그것들이 나의 것이 되도록 나에게 바쳐라 (출. 13:2).
너는 자궁을 연 모든 것, 그리고 짐승의 새끼를 연 모든 것을 여호와에게로 건너가게 하라 (양도하 라), 너희에게 있는 숫컷들은 여호와의 것이다 (출. 13:12).
자궁을 연 모든 것은 나의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가축에 관련하여 너희가 숫컷을 줄 것인데, 수소와 작은 가축을 여는 것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출. 34:19).
모든 육의 자궁을 여는 모든 것, 이것을 그들은 여호와께 가져올 것이다, 즉 인간들과 짐승들로부터 너의 것들인 것으로부터 이다; 그럼에도 인간의 모든 첫 출생을 그들은 확실히 되찾을 것이다 (민. 18:15).
보라 나는 이스라엘의 아들들 사이에서 레위 지파를 데려왔는데, 이는 이스라엘의 아들들의 자궁을 연 첫 출생을 대신해서 이다; 고로 레위 지파는 나의 것이다 (민. 3:12).
자궁을 연 것이 첫 출생이기에, 그러므로 단어 “첫 출생”이 언급되는 곳에서는 “자궁을 여는 것”이 말해진다; 이는 선이 의미되기 위하여서 이다. 이것이 선을 의미하는 것은 세부 사항이 내적 의미에서 의미하는 것을 살피면 알게 된다; 즉 제라가 자기 손을 가지고 자궁을 열었다, 그를 수단으로 선이 표현되었는데, 그가 자기 손에 두 번 물들인 것을 매었다는 것으로부터 분명해진다. 더욱이 열려진다고 말해지는 “자궁”은 선과 진리가 있는 곳, 결과적으로 교회가 있는 곳이다; 그리고 “자궁을 여는” 것은 진리가 태어나지도록 힘을 주는 것이다.
주님만이 첫 출생이신 바, 그 이유는 그분이 선 자체이시고, 그분의 선으로부터 모든 진리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야곱은 첫 출생은 아니었지만, 그분의 첫 출생을 표현하도록 그는 자기 형제 에서로부터 장자임을 사는 것이 허용되어졌다; 그리고 이것 가지고는 충분하지 않았기에, 후에 그는 이스라엘이라 불리웠는데, 이 이름에 의해 그는 진리로부터의 선을 표현하였다. 그 이유가 표현적 의미에서 이스라엘은 진리를 수단으로 오는 선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여자는 말했다, 어찌하여 너는 깨뜨려서 네 위에 어김(깨뜨림)을 있게 했느냐? 이는 그것이 선으로부터 가상적으로 분리됨을 의미한다. 이는 어김(breach)의 의미가 선으로부터 분리됨에 의해 진리가 악용됨(perversion)과 진리를 위반함(infraction)이다로부터 알게되는데 아래에서 더 살핀다. 이는 “깨뜨려서 어김이 있는” 것이 여기서는 끌어당겨서 손으로부터 두 번 맨 것을 벗기는(pull off) 것, 고로 선을 분리하는 것임이 분명하다, 그 이유가 “두 번 맨” 것이 선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가상적으로 그러했다는 것은 그렇게 산파에게 나타난 사실로부터 이어진 말이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깨뜨려 어김이 있는 자는 두 번 물들인 것을 맨 자가 아니었기 때문, 그러나 그의 형제, 즉 진리를 표현한 형제였기 때문이다. 즉 선이 실제의 첫 출생이고, 진리는 가상적으로 첫 출생이다. 이는 예를 들어 생각하면 더 나을지 모른다. 즉 신체의 사지(손, 발 등등)들이 마치 앞임 것처럼 나타난다; 그 이유가 전자가 눈에는 먼저 표출되기 때문이다, 그것을 사용할 필요성 앞에 알려진다. 그럼에도 사용할 필요성은 사지의 움직임에 앞서 있다. 그러므로 사용의 필요성에 따라 사지의 움직임은 만들어진다. 그렇다, 사용함 자체가 사지의 움직임을 만들어 사지로 사용함 자체에 적응되게 한다. 이렇게 되지 않는다면, 인간 안의 모든 것은 하나로 만장일치하여 공모할 수 없다. 이것은 선과 진리와 더불어서도 비슷하다; 마치 진리가 앞임 인 것처럼 나타나나, 앞임 인 것은 선이다, 그 이유가 선이 진리를 만들어내기 때문, 선 자체에 어울리게 진리를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진리들 자체만에 주목하면, 진리는 선들이 만들어 낸 것, 선의 형체들밖에 더 아니다. 선에 관련하여 있는 진리들은 마치 신체에서 사용의 필요성에 사지나 기관의 관계와 같다. 그 자체에 주목하면, 선은 사용함(use)밖에 더 아니다.
“어김(깨뜨림)”이 선으로부터 분리함에 의해 진리를 위반함과 진리를 악용함을 의미한다는 것을 말씀의 다른 구절로부터 찾아보자:
우리의 곳간들은 가득해서 식품으로부터 식품까지 여유가 있다; 우리의 양떼들은 천천 만만으로 우리의 거리들에 있다; 우리의 수소들에 짐이 가득하다; 거기에는 어김이 없다
(시. 144:13, 14);
위는 고대 교회의 젊은 이 시절 같은 것을 취급하고 있다; “식품으로 곳간이 가득하다”는 영적 식품, 즉 진리와 선을 표시한다; “양떼들”과 “숫소들”은 내적 선들과 외적 선들이다; “거기에 어김이 없다”는 진리가 선과 분리함으로 위반함과 깨뜨림 않고 있다를 표시한다.
아모스서에서:
나는 무너진 다윗의 천막을 일으켜 세울 것이다, 그리고 거기로부터의 위반함에 울타리를 칠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것의 파멸들을 회복할 것이다, 그리고 나는 영원의 날들에 따라 그것을 건축할 것이다 (암. 9:11).
위는 선 안에 있는 교회를 묘사한다, “무너진 다윗의 천막”은 주님으로부터의 사랑의 선과 선행의 선이다. “위반함에 울타리를 치는” 것은 진리가 선으로부터 분리함으로 해서 들어와진 거짓을 수리하는 것을 뜻한다; “영원의 날들에 따라 그것을 건축한다”란 고대 시대에서 교회의 상태에 따라를 표시한다; 이 상태와 이 때들이 말씀에서 “영원의 날들”, “시대의 날들”, 또는 “대대로”이라 불리운다:
시대의 황폐된 것, 대대로부터의 기초들이 너로부터 건설될 것이다; 그래서 너는 위반함을 수리하는 자, 작은 길을 거주할 곳으로 회복하는 자라 불리울 것이다 (이. 58:12);
교회 안에서 선행과 생활이 본질임을 묘사하고 있다. “위반함을 수리함”은 진리로부터 선이 분리됨에 의해 기어다니게 된 거짓들을 수리함을 표시한다, 모든 거짓은 이 근원으로부터 있다; 그리고 “거주하게 작은 길을 회복하는 것”은 선으로부터 있는 진리들을 표시한다, 그리고 “거주함”은 선을 서술한다.
다시:
너희는 다윗성의 위반들, 그것들이 많다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너희는 더 낮은 못의 물들을 모두 그러모았다 (이. 22:9);
“다윗성의 위반들”은 교리 속의 거짓들을 표시한다, 그리고 “더 낮은 못의 물들”은 전통들을 수단으로 그들은 말씀에 있는 진리의 위반을 만들어 냈다를 표시한다 (마. 15:1-6; 막. 7:1-14). 에스겔서에서:
너희는 위반 안으로 가는 것을 포기하지 않았다, 너희는 이스라엘의 가문을 위해 울타리를 건설하지 도 않았다, 하여 너희는 여호와의 날에 전쟁에 서 있을는지 모른다 (겔. 13:5).
다시:
나는 내가 토지를 파괴하지 않도록 토지를 위하여 내 앞에 있는 위반에 서서 울타리를 건설할 사람을 찾았었다; 그러나 나는 아무도 발견하지 못했다 (겔. 22:30);
“위반에 서있다”란 거짓들의 깨뜨림이 있지 않도록 경청하고 방어함을 표시한다. 다윗서에서:
그분의 선택하신 모세가 위반에서 그분 앞에 서있지 않으면, 그분은 백성들을 파괴하시리라고 여호와께서 말하셨다 (시. 106:23);
위에서 “위반에 서있다”는 것은 거짓들이 깨뜨리지 않도록 경청하는 것을 표시한다. “모세”는 말씀이다.
아모스서에서:
그들은 낚시로 너의 후손을 끌어낼 것이다. 너희는 위반들을 관통하여 나갈 것이다, 모든 이가 그녀 앞에서 곧바로 이다; 그리고 너희는 궁전 아래로 던져질 것이다 (암. 4:2, 3);
“위반들을 관통하여 나감”은 추론들로부터 거짓들을 관통함을 표시한다; “궁전”은 말씀이다, 결과적으로 선으로부터 있는 교리의 진리이다. 그리고 “위반들”에 의해 진리로부터 선의 분리됨에 의해 존재 안으로 오는 거짓이 의미된다; 같은 것이 표현적 의미에서, “여호와의 집의 위반들(부셔진 곳)을 튼튼하게 하고 수리하는 것”에 의해서도 있다 (왕하. 12:6-8, 12; 22:5). 사무엘하서에서:
여호와께서 웃사 위에 깨뜨림이 있어 위반함을 있게 하셨기 때문에 슬퍼했다; 그러므로 그는 그 장소를 베레스-웃사 라고 불렀다 (삼하. 6:8);
위 구절은 궤를 만졌기 때문에 죽은 웃사에 관한 기록이다; 궤에 의해 천국이 표현되어졌다, 최고 의미에서 주님이 표현되어졌다, 결과적으로 신성한 선이 표현되어졌다; 웃사에 의해서는 섬기는 것, 고로 진리가 표현되었는데, 그 이유는 진리가 선을 섬기기 때문이다. 위에 묘사된 분리함은 “웃사 위에 위반함이 있다”에 의해 의미되어 있다.

그리고 그는 그의 이름을 베레스라 불렀다. 이는 그것의 품질을 의미한다. 이는 선으로부터 진리가 가상적으로 분리함의 품질이다; 이는 “이름을 부름”의 의미가 품질이다로부터. 품질 자체는 “베레스”이다; 원어에서 “베레스”는 “위반”을 뜻한다.

그 후에 그의 형제가 나왔다. 이는 실지로는 선이 우위임을 의미한다. 이는 여기서 “형제”인 제라의 표현함이 선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 이유가 자궁을 연 자가 제라이고, 따라서 그가 첫 출생이었다, 하여 그의 손에 두 번 물들인 것이 매어졌는데, 이것은 선이다. 그의 형제가 그 뒤에 나왔다에 의해 의미되는 바, 선이 실제적으로는 앞임 이다는 것; 단지 거듭나는 동안 선이 나타나지 않기 때문에서일 뿐이다; 또한 선은 자체를 내면의 인간 안에 숨기고 있다; 그리고 이 선과 더불어 진리가 결합하는 정도에 따라 애착을 통하여 진리 안으로 흘러들 뿐이다. 그러나 진리가 선과 결합되어졌을 때, 즉 인간이 거듭나졌을 때, 선은 자체를 드러낸다; 그 이유가 이때 인간은 선으로부터 행동하고, 진리를 선으로부터로서 가늠하기 때문이다, 이때 그는 진리를 교리로부터 더 알고 싶어 하기보다 생활에 더 사용하기를 바라고 있다.

그의 손에 두 번 물들인 것을 가졌던 것. 이는 그것이 선임을 인정함을 의미한다. 이는 그가 지금 두 번 물들인 것을 손에 매고 있었다로부터 인정되었다는 사실로부터 분명해진다. 고로 자궁을 연 것이 선이었다는 것, 또는 선이 첫 출생이다가 인정되어진 것이다. 산파가 그의 손에 두 번 물들인 것을 맴에 의해 그녀는 누가 첫 출생인지를 표를 했고, 이로부터 여기서 인정함이 의미되었다.

그리고 그는 그의 이름을 제라 라고 불렀다. 이는 그 품질을 의미한다. 이는 “이름을 부름”의 의미가 품질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제라”에 의해 의미된 품질은 지금까지 내적 의미에서 취급해왔던 것, 즉 선이 실제로 첫 출생이고 진리는 가상적으로 첫 출생이다는 것이다. 품질 자체는 아주 무수한 것들을 그것 안에 포함하지만 세상의 빛에서는 보여질 수 없고, 오직 천국의 빛에서만, 고로 천사들 앞에서만 보여질 수 있다. 만일 인간이 천사들 앞에 나타난 딱 하나만 본다 해도, 그는 너무나 놀라 의아해 하여 그것을 도리어 믿지 못하겠다고 고백할지 모른다. 단언컨대, 그는 거의 어떤 것도 알지 못한다. “제라”는 원어에서 “일어남(rising, 떠오름)”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 말은 태양을 염두해야 적절한 말이고, 태양의 빛의 처음 나타남들에 어울린다. 그가 이로부터 제라 라고 이름된 이유는 거듭나지는 인간 안에서의 선이 이와 비슷하게 (서서히 태양의) 떠오름 같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이것은 처음에 떠오르고 빛을 주고, 이 빛으로부터 자연적 인간에 있는 것들이 계발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것들(영적인 것들과 천적인 것들)이 보여질는지 모르고 , 인정될는지 모르고, 믿어질는지 모른다. 다시 말해, 인간 안에 내향적으로 선으로부터 빛이 있지 않으면, 그는 그것들을 인정하고 믿어지기 위한 진리들을 볼 수 없다; 그 대신 아마 항간의 사람들에 통용되는 정도의 진리 라고, 또는 거짓으로밖에 부를 수 없을 것이다.
**************************************

창세기 제 39 장

성경: 창세기 39장

1. 그리고 요셉은 이집트로 데려 가졌다. 그리고 바로의 신하, 친위 대장, 이집트 사람, 보디발이 그를 이집트로 데리고 갔던 이스마엘 사람의 손으로부터 샀다.
2. 그리고 여호와께서는 요셉과 함께 계셨다, 그리고 그는 만사가 형통하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는 자기 주인, 이집트 사람의 집에 있었다.
3. 그리고 그의 주인은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계신다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여호와께서는 그가 하는 모든 것을 그의 손에서 순조로워지게 만드신다는 것도 보았다.
4. 그리고 요셉은 그의 눈에서 은혜를 발견하였다. 그리고 요셉은 그를 섬겼다. 그리고 그는 요셉이 그의 집을 다스리게 했다. 그리고 그는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요셉의 손에 주었다.
5. 그가 요셉을 그의 집의 위쪽에, 그가 가진 모든 것 위쪽에 앉힌 그 때로부터 여호와께서는 요셉 때문에 이집트 사람의 집에 복을 내리셨다. 그리고 여호와의 축복은 그의 집에 있는 것이든, 들판에 있는 것이든 그가 가진 모든 것에 내려졌다.
6. 그리고 그는 그가 가진 모든 것을 요셉의 손에 놓아두었다. 그리고 그는 자기가 먹었던 빵 외에는 자기에게 무엇이 있는지도 모르고 있었다. 그리고 요셉은 모양에서 아름다웠고, 그리고 쳐다봄에서 아름다웠다.
7. 그리고 이런 말들이 있은 후, 그의 주인의 아내가 요셉을 향해 자기의 눈을 들었다, 그리고 그 여자는 말했다, 나와 함께 눕자.
8. 그리고 그는 거절했다, 그리고 그의 주인의 아내에게 말했다, 내 주인께서는 집에서 무엇이 나와 함께 있는지를 모릅니다, 그리고 그가 가진 모든 것을 내 손에 놓아두셨습니 다.
9. 그는 이 집에서 나보다 더 큰 자가 아닙니다. 그리고 그는 당신 말고는 어떤 것도 나에게 보류되게 해놓은 것이 없습니다. 그 이유가 당신은 그의 아내이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내가 이 큰 악을 저질러 하느님께 죄를 진단 말입니까?
10. 그리고 시간이 흘렀는데, 그 여자는 날마다 요셉에게 말을 걸었고, 그는 그녀에게 귀를 기울이거나, 그녀와 눕거나, 그녀와 함께 있지도 아니하였다.
11. 그리고 어느 날 그가 자기 일을 하려고 집에 들어 갔었다. 그리고 이 집에는 사람이라고는 아무도 없었다.
12. 그리고 그녀는 그의 옷을 잡아 그를 붙들고, 말하기를, 나와 눕자. 그러자 그는 자기 옷을 그녀의 손에 버려두고, 그리고 도망하여 밖으로 나왔다.
13. 그리고 그 여자는 그가 자기 손에 옷을 놓아둔 채 떠난 것을 보고,
14. 그 여자는 그 집의 사람들에게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 그들에게 말하기를 보라, 그가 우리를 조롱하라고 히브리 사람을 우리에게 보냈다. 그는 나와 함께 눕겠다고 나에게 왔다. 그래서 나는 큰 소리로 외쳤다.
15. 그는 내가 소리를 드높여 외친 것을 듣고는 떠났는데, 그는 내 곁에 자기 옷을 남겼다, 그리고 도망했다, 그리고 밖으로 나갔다.
16. 그 여자는 그의 주인이 그의 집에 올 때까지 그의 옷을 자기 곁에 놓아두었다.
17. 그리고 그 여자는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 말하기를, 당신이 우리에게 데리고 온 히브리 종이 나를 희롱하려고 나에게 왔다.
18. 그래서 내가 내 소리를 높혀서 외쳤더니 그가 도망했는데 내 곁에 자기 옷을 남겼다.
19. 그의 주인이 그의 아내의 말들을 들었을 때 이었다, 즉 그 여자가 그에게 말했는 바, 말하기를, 당신의 종이 나에게 했다는 말에 따라 그의 분노가 점화되었다.
20. 그리고 요셉의 주인은 그를 잡아갔다, 그리고 그를 감옥에 처넣었는데, 이곳은 왕이 묶은 자들을 가두는 곳이었다. 그리고 그는 거기 감옥에서 있었다.
21. 그리고 여호와께서는 요셉과 함께 하셨다, 그리고 자비가 그에게 기울어 있었다, 그리고 제 1 인 자의 눈에서 그에게 은혜를 주셨다.
22. 그리고 제 1 인 자는 감옥에 있는 모든 죄수들을 요셉의 손에 맡겼다. 그리고 그들이 거기서 처리하는 것은 무엇이든 그가 행위자였다.
23. 제 1 인 자는 그의 손에 무엇이 있는지 모르고 있었다, 그 이유는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계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가 했던 것은 여호와께서 잘 풀려가게 만드셨다.

각 절의 내적 의미

1절. 그리고 요셉은 이집트로 데려 가졌다. 그리고 바로의 신하, 친위 대장, 이집트 사람, 보디발이 그를 이집트로 데리고 갔던 이스마엘 사람의 손으로부터 샀다.

그리고 요셉. 이는 합리적 평면으로부터의 영적 수준 속의 천적인 것을 의미한다. 이는 요셉을 표현함이 합리적 평면으로부터 있는 영적 인간의 천적 평면이다로부터 분명해진다 (4286항); 그러므로 여기서의 경우, 주님을 취급하기 때문에 요셉은 주님의 내적 인간을 표현한다. 인간으로 태어난 모든 이 각각은 외적이고 내적이다; 그의 외적 측면은 눈으로 보여지는 것이다, 그리고 이를 수단으로 그는 인간들과 함께 있고, 이를 수단으로 자연계에 적절한 것들이 행동된다; 그리고 내적 측면은 눈으로 보여지지 않는다, 그리고 이를 수단으로 인간은 영들과 천사들과 함께 있고, 이를 수단으로 영계에 적절한 것들이 행동된다. 모든 인간이 외적 부분과 내적 부분, 또는 외적 인간과 내적 인간을 가지는 이유는 인간을 통하여 천국이 세상과 결합할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천국은 내적 인간 안으로 흘러 들고 이를 통하여 외적 인간 안으로 흘러 들고, 이것에 의해 세상에 있는 것을 지각한다; 그리고 이로부터 세상에 있는 외적 인간은 천국에 있는 것을 지각한다. 이 목적을 위해서 인간은 두 인간을 지니도록 창조되었다.
주님 또한 그분의 인간 측면에서 외적, 내적 측면을 가지셨다; 그 이유가 그분은 여느 인간처럼 태어나심에 만족하셨기 때문이다. 그분의 외적 측면(즉, 그분의 외적 인간)이 야곱에 의해, 후에는 이스라엘에 의해 표현되어졌다; 그러나 그분의 내적 인간은 요셉에 의해 표현되어졌다. 이 내적 인간은 (꼼꼼하게 말하면) 합리적 평면으로부터의 영적 인간 속의 천적 부분이다. 같은 말이지만 조금 다르게 표현하면, 여느 인간들 같으셨던 (지상에서의) 주님의 내적 인간은 합리적 평면으로부터의 영적 인간 속의 천적 인간이다. 이 인간과 이 인간의 신성이 되심(glorification)이 이 장과 이후 요셉이 취급되는 장에서 다루어진다. 사실, 합리적 평면으로부터의 영적 인간 속의 천적 인간은 이미 앞에서 살핀 바 있다 (4286, 4585, 4592, 4594항); 즉 요셉으로 표현되는 인간은 이스라엘로 표현되는 인간인 자연 평면으로부터의 영적 인간 속의 천적 인간 위쪽에 있다.
주님은 실로 여느 인간들이 태어나는 과정을 밟으셨다; 즉 인간들은 자신의 것을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로부터 이어받는다, 즉 자기의 가장 깊은 것은 아버지로부터, (가장 깊은 안쪽의 것을 옷입히는) 자기의 외면의 것은 어머니로부터 받는다; 그러나 이 모두는 유전적 악으로 더럽혀져 있다. 그러나 주님의 경우는 다르다; 즉 어머니로부터 받는 부분은 여느 인간의 경우와 동일하다; 그러나 그분의 가장 안쪽의 것은 여호와이신 아버지로부터 인 바, 신성이셨다. 이런 이유로 주님의 내적 인간은 여느 인간의 내적 인간과 같지 않으셨다; 그 이유는 그분의 가장 깊은 측면은 여호와이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합리적 평면으로부터의 영적 인간 속의 천적 부분이라 불리우는 중간(intermediate)의 것이다. 이에 관하여는 주님의 신성한 자비로부터 이어지는 페이지들에서 더 살필 것이다.

이집트로 데려 가졌다. 이는 교회 속의 가장 수준이 낮은 기억 속의 지식(자연적 기억, 또는 외적 기억, scientifica)에로를 의미한다. 이는 “이집트”의 의미가 일반적으로 기억 속의 지식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러나 “이집트”에 의해 적절히 의미되어진 기억 속의 지식의 본성이 무엇인지에 대하여는 아직 설명되지 않았다. 고대 교회에는 교리적인 것들과 기억 속의 지식들이 있었다. 그 중에서 교리적인 것들은 하느님을 사랑함과 이웃을 향한 선행을 취급했다; 그러나 기억 속의 지식들은 자연계의 것이 영계의 것과 상응하는 관계를, 그리고 자연적이고 지상적인 것들 안에서 영적 수준의것과 천적 수준의 것들이 표현되는 것들을 취급했다. 이와 같은 것이 고대 교회 안에 있었던 이들이 지닌 기억 속의 지식들이다.
이집트는 고대 교회가 있었던 나라나 왕국들 중의 하나이다; 이런 왕국들 중에서도 이집트의 경우는 자기 후손들에게 이런 기억 속의 지식을 가장 잘 전수해왔다. 이런 이유로 기억 속의 지식이 말씀에서 “이집트”에 의해 의미되어지고, 특히 말씀의 예언적 부분에서 기억 속의 지식이 특별하게 뜻해지도록 “이집트”가 언급된다. 이집트인들의 마술 자체의 근원 역시 이 지식들로부터 이다; 즉 그들은 자연계와 영계의 상응 관계에 친숙했었지만, 그들에게 있던 교회가 종말에 이르자, 이 상응성이 마술적인 것들로 남용되고 말았다. 어쨌든 그들이 상응이나 표현, 의미들을 후손에게 가르쳐 전수한 사항들은 교회의 교리적인 것들에 유용하고, 특히 고대 교회가 지녔던 말씀을 이해함에서 긴요하게 이용되었다.; 그러므로 “이집트로 데려가짐”에 의해 교회의 기억 속의 지식들이 의미된다.
주님이 요셉에 의해 표현되기 때문에, 여기서 요셉이 “이집트로 데려가진” 것은 주님께서 그분의 내적 인간을 신성으로 만드심에서 그분은 교회의 기억 속의 지식들을 먼저 빨아 들이셨고, 이 지식들로부터, 이 지식들을 수단으로 더욱 더 내면적인 측면으로 발전해가시어, 마지막으로 내면의 것 모두가 신성이 되게 하셨다. 이렇게 하신 이유는 주님 역시 그분이 인간을 거듭나게 하시는 질서, 즉 인간을 영적 수준으로 만드시는 질서를 밟아가시는 것을 기뻐하셨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외적인 것들인 기억 속의 지식들과 신앙의 진리들로부터 내적인 것들인 이웃을 향한 선행과 그분을 사랑함 쪽으로 계속적으로 발전해가시기를 기꺼이 받아들이셨다는 말이다. 이런 사항은 호세아서의 아래 말씀에서도 분명해진다:
이스라엘이 어린아이였을 때, 나는 그를 사랑했다, 그리고 내 아들을 이집트로부터 불렀다
(호. 11:1);
위 말씀이 주님에 관련해 말해졌다는 것은 마. 2:15에서 보여질 수 있다.

그리고 바로의 신하, 보디발이 그를 샀다. 이는 그것(영적 수준 속의 천적인 것)은 기억 속의 지식들 중의 내면의 것들 사이에 있었다를 의미한다. 이는 “바로의 신하”가 기억 속의 지식들 중의 내면의 것들을 의미함으로부터; “그가 샀다”란 그가 이런 사항들을 자신에게로 돌렸다를 의미한다. 기억 속의 지식들 중의 내면의 것들은 영적인 것들에 더 가까이 있어서 기억 속의 지식들이 천국적인 것들에 더 잘 응용된다; 그 이유가 외적 인간이 기억 속의 지식들을 바깥쪽 형체에서 볼 때, 내적 인간은 안쪽 형체인 내면의 것들을 보기 때문이다.

수비대장. 이는 해석을 위해 첫째되는 것들을 의미한다. 이는 “수비대장”의 의미가 해석을 위해 첫째되는 것들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해석을 위해 첫째되는 것들은 말씀의 해석에 우선적으로 이바지하는 것들이다, 고로 말씀으로부터 있는 하느님을 사랑함과 이웃을 향한 선행의 교리적인 것들에 도움을 주는 것들이다. 고대인들의 기억 속의 지식들은 오늘날의 기억 속의 지식들과는 아주 다르다는 것을 우선 알고 있어야 한다. 이미 말한 바 대로 고대인들의 지식은 자연계에 있는 것들이 영계에 있는 것들과 어떤 상응 관계에 있는지에 관하여서 이다. 지금 철학자라 불리우는 기억 속의 지식들, 즉 아리스토텔레스, 또는 그와 비슷한 철학자들에게 위 (고대인들의) 기억 속의 지식들은 알려져 있지 않았다. 이는 고대의 작가들의 책들로부터도 분명해진다; 이 책의 대부분은 내면의 것들과 상응하고, 의미하고, 표현하는 언어로 쓰여져 있다. 몇가지 예를 들어보자.
그들은 산의 헬리콘에 위치했다, 그리고 이를 수단으로 그들은 하늘을 뜻했다; 그들은 산 아래 있는 장소를 패나서스(Parnassus)에 주었다. 이를 수단으로 그들은 기억 속의 지식들을 뜻했다, 거기서 그들은 날아다니는 말을 패가수스(Pegasus)라 불렀고, 그의 발굽으로 부수어 샘을 열었다; 과학들을 그들은 처녀들이라 불렀다. 이외 다른 전통들도 있다. 그 이유가 그들은 산이 하늘을 표시하는 것을 상응들과 표현들로부터 알았다; 언덕은 아래 있는 하늘을 뜻했고, 인간과 더불은 하늘이었다; 말은 이해함을; 그를 날게 한 날개들은 영적인 것들을; 발굽은 자연적인 마음들을; 샘은 총명을; 그레이스(Grace)들이라 불리운 처녀들은 선에 애착함들을; 그리고 뮤즈(Muse)들은 진리에 애착함들을 뜻했다. 그리하여 그들은 태양에 말들을, 식품을 그들은 앰브로시아(ambrosia)라고, 그리고 그들의 음료를 넼타르(nectar)라고 불렀다; 그 이유가 그들은 태양이 천적 (수준의) 사랑을, 말(horse)들은 거기로부터의 지적인 것들을 의미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식품은 천적인 것들을, 그리고 음료는 영적인 것들을 의미함을 알았기 때문이다.
[3] 또한 고대인들로부터 여전히 잔존하는 관습은 왕의 대관식에서 왕을 왕좌에 앉히고, 진홍색 도포를 입히고, 기름을 붓는 것, 머리에 왕관을 쓰는 것, 손에 홀, 검, 열쇠를 쥐는 것, 발굽을 은으로 감싸 화려함을 돗보인 흰말을 타는 것, 또 다른 축하 예식과 더불어 왕국의 중요한 신하들이 식탁에서 기다리는 것, 등등도 있다; 그 이유가 그들은 왕이 신성한 선으로부터 있는 신성한 진리를 표현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 그리고 이로부터 그들은 왕좌, 진홍색 도포, 기름을 부음, 왕관, 홀, 검, 열쇠, 은으로 장식한 발굽, 신하들의 기다림 등등이 의미하는 것을 알았다. 오늘날 이런 의미들을 누가 알까? 그리고 그것들을 가르치는 지식들이 어디 있을까? 인간들은 이런 것들을 상징(emblem)들이라 부르고, 상응이나 표현함에 관하여는 어떤 것이든 모르고 있다. 위로부터만 생각해도 고대인들의 지식들이 무슨 본성인지를, 그들은 오늘날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고 알려진 영적이거나 천적인 것들에 관한 지식들을 그것들 안으로 가져다 놓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고대인들의 이런 지식들을 계승한 지식들, 그리고 오늘날 철학이라 불려지는 지식들은 고대인들의 이런 지식들로부터 인간의 마음(mind)이 오히려 더 멀어지게 하고 말았다, 그런 이유는 그들이 거짓들을 확증함에도 적용했기 때문이다; 더욱이 진리들이 그것들을 수단으로 확증되어질 때, 그들은 마음을 더 어둠 안으로 빠져들게 했다, 그 이유는 그것들 대부분이 꾸밈없는(bare) 표현들이기 때문이고, 이 표현들에 의한 확증함들은 극소수에게만 납득될 뿐이고, 이 극소수마저도 이 표현들에 완전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 이런 사항들로부터 미루어보건대, 인류가 지혜쪽으로 인도하였던 고대인들의 학식으로부터 얼마나 퇴조했는지가 분명해진다. 이방인들이 고대 교회로부터 표현들과 의미들로 구성된 외적 예배에 관한 지식들을 받았다, 하여 그들 예배의 내적 측면은 표현되고 의미된 것들 안에 있었다. 이런 지식들이 진짜 의미에서 “이집트”에 의해 의미되는 지식들이다.

이집트 사람. 이는 자연적 진리를 의미한다. 이는 “사람(man)”의 의미가 진리이다로부터; 그리고 “이집트”의 의미가 일반적으로 기억 속의 지식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리고 “이집트”가 기억 속의 지식이기 때문에, 이 지식은 자연 평면이기도 하다; 그 이유가 인간에 있는 모든 기억 속의 지식이 자연 평면인 이유는 이 지식이 인간의 자연적 수준 안에 있기 때문이고, 그의 영적, 천적 수준의 것들에 관한 기억 속의 지식마저도 그의 자연적 수준의 인간 안에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인간은 이런 지식들을 자연적 평면 안에서, 그리고 자연 평면으로부터 보기 때문, 또한 인간은 자연 평면으로부터 보지 못한 것들을 납득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거듭나는 인간, 즉 영적 수준인 거듭나는 인간, 그리고 자연적 수준인 비 거듭난 인간은 각기 다른 방법으로 이런 지식들을 보고 있다. 거듭나는 인간과 더불어서 이 지식들은 천국의 빛을 수단으로 계발되어지나, 후자와 더불어서는 그렇지가 않고, 오히려 거짓과 악 안에 있는 영들을 통하여 흐르는 빛을 수단으로 한다; 엄밀히 말하면 이 빛 마저도 천국의 빛으로부터 이지만, 그들 안에서 불투명해져 마치 저녁이나 밤의 빛 같을 뿐이다; 하여 이런 영들, 이 영들로부터의 인간들은 올빼미 같이 본다; 즉 밤중에는 명료하게, 낮 동안은 매우 불분명하게 본다; 다시 말해 그들은 거짓들은 명료하게, 진리들은 흐릿하게 본다는 말이다. 또한 세상의 것들은 명료하게, 천국의 것들은 불분명하게 본다. 이런 생각들로부터 분명해지는 것은 진짜 기억 속의 지식은 자연적 진리이다는 것이다; 좋은 의미에서 “이집트”에 의해 의미되는 모든 진짜 기억 속의 지식은 자연적 진리이다.

이스마엘 사람의 손으로부터. 이는 단순한 선으로부터를 의미한다. 이는 이스라엘 사람이 단순한 선 안에 있는 이들을 표현함에서 알게 된다. 여기서의 경우, 단순한 선으로부터 있는 자연적 진리를 표현한다. 창세기 37:36에서 말해지는 바, “미디안 사람이 요셉을 이집트에서 바로의 신하 경호대장 보디발에게 팔았다”; 그러나 여기서는 “바로의 신하, 경호대장 보디발이 요셉을 그쪽으로 데려간 이스마엘 사람의 손으로부터 그를 샀다”고 말하고 있다. 이런 방식의 말함은 내적 의미를 위하여 말해지는 방식이다; 앞 구절의 경우에서는 신성한 진리를 멀리함이 취급되어지는데, 이 멀리함은 단순한 선 안에 있는 이들에 의해 야기되어지지 않고, 미디안 사람에 의해 표현되는 단순한 진리 안에 있는 이들에 의해 야기된다; 그러나 여기서 취급하는 것은 기억 속의 지식이 획득하는 것, 또는 달성해야 하는 것; 그리고 단순한 선으로부터 있는 자연적 진리가 획득해야 하는 것, 또는 달성해야 하는 것에 대해서 이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내적 의미를 위하여 위 구절 같이 말해지고 있다. 그러므로 역사적 대화체에서 어떤 모순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 이유가 요셉을 구덩이에서 끌어 올렸고, 결과적으로 요셉을 이스마엘 사람에게 넘긴 자는 미디안 사람이고, 요셉을 이집트로 데려간 자가 이스마엘 사람이기 때문이다; 고로 미디안 사람이 이집트로 가고 있는 이스마엘 사람에게 요셉을 넘겼고, 그들이 그를 이집트에 팔았기 때문이다.

그를 그쪽으로 데리고 간. 이는 단순한 선으로부터 기억 속의 지식으로 하강함을 의미한다. 이는 요셉을 데려간 이스마엘이 단순한 선 안에 있는 이들 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리고 “그쪽”인 “이집트”의 의미가 일반적 측면에서의 기억 속의 지식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리고 “데려감(내려감, go down)”이라 말해지는 이유는 기억 속의 지식이 취급되고, 이 지식은 외면에 해당되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말씀에서 내면으로부터 외면으로 가는 것을 “내려감”이라 부르고, 외면으로부터 내면으로 가는 것을 두고는 “올라감, going up”이라 말하기 때문이다.

2-6절. 그리고 여호와께서는 요셉과 함께 계셨다, 그리고 그는 만사가 형통하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는 자기 주인, 이집트 사람의 집에 있었다. 3 그리고 그의 주인은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계신다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여호와께서는 그가 하는 모든 것을 그의 손에서 순조로워지게 만드신다는 것도 보았다. 4 그리고 요셉은 그의 눈에서 은혜를 발견하였다. 그리고 요셉은 그를 섬겼다. 그리고 그는 요셉이 그의 집을 다스리게 했다. 그리고 그는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요셉의 손에 주었다. 5 그가 요셉을 그의 집의 위쪽에, 그가 가진 모든 것 위쪽에 앉힌 그 때로부터 여호와께서는 요셉 때문에 이집트 사람의 집에 복을 내리셨다. 그리고 여호와의 축복은 그의 집에 있는 것이든, 들판에 있는 것이든 그가 가진 모든 것에 내려졌다. 6 그리고 그는 그가 가진 모든 것을 요셉의 손에 놓아두었다. 그리고 그는 자기가 먹었던 빵 외에는 자기에게 무엇이 있는지도 모르고 있었다. 그리고 요셉은 모양에서 아름다웠고, 그리고 쳐다봄에서 아름다웠다.

그리고 여호와께서는 요셉과 함께 계셨다. 이는 신성이 영적 평면 속의 천적인 부분 안에 있었다를 의미한다. 이는 요셉이 합리적 평면으로부터의 영적 평면 속의 천적 부분이다로 알게 된다; 그리고 취급되는 주제가 주님, 뾰족히 말하면 그분의 인간 안에 있는 내적 인간이시기 때문에,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계셨다”에 의해 신성이 그분의 인간 안에 계셨다가 의미되어진다; 다시 말해 그분은 여호와로부터 임신되셨기 때문에 신성이 그분의 인간 안에 계셨다는 말이다. 그러나 천사들의 경우는 다르다; 즉 신성이 천사들 안에 있지 않고 천사들과 더불어 현존하신다; 그 이유는 천사들은 주님으로부터 신성을 받는 형체들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만사가 형통하는 사람이었다. 이는 모든 것들이 미리 준비되어졌다를 의미한다. 이는 “만사가 형통함”이 주님을 두고 말해질 경우, 그분은 모든 선을 수단으로 풍요해지심이 준비됨을 의미하게 된다.

그리고 그는 그의 주인, 이집트 사람의 집에 있었다. 이는 그것이 자연적 선 안으로 입회시켜지려 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는 “주인”의 의미가 선이다로부터 알게 되는데 이는 아래에서 더 살핀다; 그리고 “이집트 사람”의 의미가 일반적 측면에서의 기억 속의 지식, 고로 자연 평면이다로부터 분명해진다; “집에 있다”는 말이 입회되어지는 것인 이유는 “집”이 선이 있는 마음(mind)이기 때문, 여기서는 자연적 (수준의) 마음이다; 더욱이 “집”은 선이라고 단정되기 때문이다. 인간 안에는 두 종류의 마음, 즉 자연적 (수준의) 마음과 합리적 (수준의) 마음이 있다; 자연적 마음은 그의 외적 인간 안에 있고, 합리적 마음은 그의 내적 인간 안에 있다. 기억 속의 지식들은 자연적 마음 속의 진리들이다. 이 지식들이 자연적 마음 안에서 선과 더불어 결합될 때, “그의 집에 있다”라고 말해진다; 그 이유가 선과 진리는 마치 남편과 아내의 경우 같이 하나의 집을 다함께 구성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서 취급되는 선들과 진리들은 내면적이다; 그 이유는 그것들이 요셉에 의해 표현되는 것, 즉 합리적 평면으로부터의 영적 평면 속의 천적 부분과 상응하기 때문이다. 자연적 (수준의) 마음에서 상응하는 내면의 진리들은 선용함(uses)들에 적용되고 내면의 선들은 선용 (자체)이다.
“주님(Lord)”이라는 이름이 말씀에서 사용될 때, 내적 의미에 관한 지식을 가지지 않은 이들의 경우, 통상적으로 사용할 때 뜻해지는 것 외에 더 다른 뜻은 없다고 상상한다; 그러나 말씀에서 선이 취급되는 곳이 아니면 “주님”이라는 이름은 결코 사용되지 않는다. 이와 같은 경우는 “여호와”라는 이름에서도 마찬가지여서 이 이름이 등장하면 그 대목은 선을 취급한다; 그러나 진리가 취급되는 대목일 경우, “하느님”과 “왕”이라는 이름이 사용된다. 이 이유 때문에 “주인(lord)”에 의해서도 선이 의미되는데 아래 구절로부터 분명해진다:
여호와 너희 하느님, 그분은 하느님들 중의 하느님, 주들(lords) 중의 주님이시다 (신. 10:17).
다윗서에서:
너희는 여호와에게 고백하라. 너희는 하느님들 중의 하느님에게 고백하라. 너희는 주들 중의 주님에게 고백하라 (시. 136:1-3);
위 구절에서 여호와 또는 주님은 그분으로부터 진행하는 신성한 진리로부터 “하느님들 중의 하느님”이라 불리우시고, 그분 안에 있는 신성한 선으로부터 “주들 중의 주님”이라 불리우신다.
마찬가지로 계시록서에서:
어린 양이 그들을 정복할 것이다; 그 이유는 그분은 주들 중의 주님이시고, 왕들 중의 왕이시기 때문이다 (계. 17:14).
그리고 다시:
흰말 위에 앉으신 그분은 그분의 옷과 그분의 넓적 다리에 왕들 중의 왕, 주들 중의 주님이라 쓰인 이름을 가지셨다 (계. 19:16);
위에서 주님은 신성한 진리로부터 “왕들 중의 왕”이라 불리우시고, 신성한 선으로부터 “주들 중의 주님”이라 불리우심이 세부 사항들로부터 분명해진다; “쓰인 이름”은 그분의 품질 측면이다; 이름이 적힌 “옷(vesture)”은 신앙의 진리이다; “넓적 다리”는 사랑의 선이다. 이로부터 또한 분명해지는 것은, 신성한 진리로부터의 주님이 “왕들 중의 왕”이라 불리우시고, 신성한 선으로부터는 “주들 중의 주님”이라 불리우신다는 것이다.
이로부터 또한 누가복음서에서 “주님의 그리스도”에 의해 뜻해지는 것도 분명해진다:
성령에 의해 시므온에게 있던 응답은 그가 주님의 그리스도를 뵈올 때까지 그는 죽음을 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눅. 2:26);
“주님의 그리스도”란 신성한 선으로부터의 신성한 진리이다; 그 이유가 “그리스도”는 “메시아”와 같은 말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메시아”는 “기름부어진 자”, 또는 “왕”이다. 여기서 “주님”은 여호와이시다. 신약 성경의 말씀에서, 이름 “여호와”는 사용되지 않고 있다; 그 대신 “주님”과 “하느님”이 사용된다; 누가복음서에서:
예수께서 말하셨다, 너희는 어찌하여 그리스도가 다윗의 아들이라 말하느냐? 그 이유가 다윗 스스로 시편서에서 말하기를, 주님께서 내 주님에게 말하셨다, 너는 내 오른편에 앉으라
(눅. 20:41, 42).
같은 내용을 다윗서에서 읽는다:
여호와께서 내 주님에게, 너는 내 오른편에 앉으라 하고 말하신다 (시. 110:1).
다윗서에서의 “여호와”가 복음서에서 “주님”이라 불리우심이 분명하다. 거기서 “주님”은 신성한 인간의 신성한 선을 표시한다; 전능하심은 “오른편에 앉으심”에 의해 의미되어진다.
주님이 세상에서 계셨을 때, 그분은 신성한 진리이셨다; 그러나 그분이 신성이 되셨을 때, 즉 그분이 그분 자신 안에서 인간을 신성으로 만드셨을 때, 그분은 신성한 선이 되셨고, 이로부터 신성한 진리가 진행된다. 이런 이유로 부활 이후 제자들은 그분을 이전 같이 “스승”이라 부르지 않고, “주님”이라 불렀는데, 이는 요. 21:7, 12, 15-17, 20절로부터 분명해진다, 또한 나머지 복음서들에서 마찬가지이다. 주님이 세상에 계셨을 때, 주님이셨던 신성한 진리, 그 후 그분으로부터, 즉 신성한 선으로부터 진행하는 신성한 진리가 “언약의 천사”라고 불리운다. 말라기서에서:
너희가 찾는 주님은 그분의 성전에 갑자기 오실 것이다, 그리고 너희가 바라는 언약의 천사 (가 오실 것이다) (말. 3:1).
신성한 선이 “주님”에 의해 뜻해지고, 신성한 진리가 “왕”에 의해 뜻해지기에, 주님이 지배권(dominion)과 왕국(kingdom)을 가진 것으로 말해진다. 이때 “지배권”은 신선한 선을 서술하고, “왕국”은 신성한 진리를 서술한다, 그러므로 또한 주님은 “나라들의 주님”, 그리고 “백성들의 왕”이라 불리우신다; 그 이유가 “나라들(nations)”에 의해서는 선 안에 있는 이들이 의미되고, “백성들(peoples)”에 의해서는 진리 안에 있는 이들이 의미되기 때문이다.
선이 종에 비교해서 “주인”들이라 불리우고, 아들에 비교해서는 “아버지”라 불리운다. 말라기서에서:
아들은 그의 아버지를 공경한다, 그리고 종은 그의 주인을 공경한다; 그렇다면 만일 내가 아버지이 다면, 나의 존경함은 어디 있느냐? 만일 주인이다면, 나를 경외함은 어디 있느냐? (말. 1:6).
그리고 다윗서에서:
요셉이 종으로 팔리워졌다. 여호와의 강연하심이 그 임을(요셉임을) 증명했다. 왕이 보내서 그를 풀어주었다. 국가의 통치자가 그를 위하여 열었다, 왕은 요셉을 자기 집의 주인으로, 모든 자기 소유물의 통치자로 앉혔다 (시. 105:17, 19-21);
여기서 “요셉”에 의해 주님이 뜻해진다는 것은 몇 세부 사항들로부터 분명해진다; 여기서의 “주인”은 신성한 인간 속의 신성한 선이다.

그리고 그의 주인은 여호와가 그와 함께 계심을 보았다. 이는 신성이 자연적 선 안에 있음이 자연적 선에서 지각되어졌다를 의미한다. 이는 “보다”의 의미가 이해함과 지각함이다로부터; 그리고 “주인”의 의미가 선, 여기서는 자연적 (수준의) 선이다로부터, 그 이유가 여기서의 “주인”은 이집트 사람이기 때문, 등등으로부터 분명해진다. 신성이 자연적 선 안에 있다는 것은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계심에 의해 의미된다.

그리고 여호와께서는 그가 하는 모든 것을 그의 손에서 번창하도록 만드셨다는 것. 이는 모든 것들이 신성한 섭리 속에 있었음을 의미한다. 이는 “번창하도록 만드심”이 준비됨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고로 “여호와께서 그것을 그의 손에서 번창하게 만드심”은 신성한 섭리를 표시한다.

그리고 요셉은 주인의 눈에서 은혜를 발견하였다. 이는 그것이 받아들여졌음, 즉 그의 “주인”에 의해 의미된 자연적 선에 의해 받아들여졌음을 의미한다. 이는 “누구의 눈에서 은총을 발견함”이 받아들였다를 의미함에서 알게 된다. 여기서 “눈에서”라고 말해지는데, 그 이유는 은총(grace)이 이해함을 서술하기 때문, 그리고 이해함이 “눈”에 의해 의미되기 때문이다.

요셉은 그를 섬겼다. 이는 기억 속의 지식이 그것의 선에 충당되어졌다를 의미한다. 이는 “섬기다(minisrer)”가 또 다른 자가 필요로 하는 것을 공급함에 의해 돕는 것이다로부터, 여기서는 충당되어지는 것, 그 이유는 여기서 취급되는 주제가 자연적인 선쪽으로 기억 속의 지식이 충당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섬기는” 것은 기억 속의 지식들이라 단언된다; 그 이유가 말씀에서 “섬기는 ”것에 의해, 그리고 “종”에 의해 기억 속의 지식 또는 자연적 진리가 의미되어서 인데, 그 이유는 자연적 진리는 자기의 주인이 되는 선에 종속되기 때문이다. 기억 속의 지식은 자연적 인간의 기쁨에 비교되고, 이와 같은 식의 또 다른 경우로는, 물과 빵, 또는 음료와 식품의 경우도 있다. 물과 음료는 빵과 식품을 희석되게 하여, 그것들이 혈액 안으로, 피로부터 신체의 모든 부분들 안으로 자양분을 운반해준다; 물 또는 음료 없이 빵 또는 식품은 그 자체를 미립자로 만들 수 없어 유용하게 사용되지도 못한다.
위와 같은 경우에 해당되는 것이 기억 속의 지식과 기쁨, 또는 진리와 선의 관계이다; 그러므로 선은 진리를 바라고 갈망한다, 그리고 선이 사용함에 걸맞게 진리는 선을 섬겨 선 자체에 유익함을 제공한다. 더욱이 그것들은 영계에서도 같은 방법으로 상응하는데, 그 이유는 거기서는 자연계의 식품과 음료가 없고 그 대신 영적 식품과 음료가 있기 때문이다. 영적 식품은 선이고 영적 음료는 진리이다; 그러므로 “빵” 또는 “식품(food, 양식)”이 말씀에서 읽혀질 때, 천사들은 영적인 빵, 또는 영적인 식품, 즉 사랑의 선과 선행의 선으로 이해한다; 그리고 “물” 또는 “음료(drink)”가 언급될 때, 그들은 영적인 물 또는 영적인 음료, 즉 신앙의 진리로 이해한다. 이로부터 우리가 알게 되는 것은, 선행의 선 없이 신앙의 진리가 무엇일지, 후자 없는 전자는 내적 인간에 자양분을 줄 수 없다는 것, 같은 방식으로 물 또는 음료가 빵 또는 식품 없이 자양분을 줄 수 없다는 것, 이럴 경우의 결과는 쇠약해지고 죽음이 곧바로 예상될 뿐이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요셉을 그의 집의 위쪽에 앉혔다. 이는 선이 거기에 그 자체 적용되었음을 의미한다. 이는 요셉을 집의 위쪽에 앉힌 “주인”의 의미가 선이다로부터; 그리고 “그를 자기 집의 위쪽에 앉힘”의 의미가 거기에 자체를 적용하는 것, 즉 기억 속의 지식 또는 자연적 진리에 자체를 적용함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것이 이런 의미를 지니는 이유는 이어지는 말로부터 분명해진다; 즉 “그가 가졌던 모든 것을 그는 요셉의 손에 주었다”라고 말해지는 바, 이를 수단으로 자연적 진리에 속한 모든 것이 마치 선의 힘 안에 있다는 것이 의미되도록 말해지기 때문이다. 선이 주인이고, 진리는 섬김이다; 그리고 주인에 관해서는, 요셉을 “… 섬김 위쪽에 앉혔다”이고; 선에 관해서는, “진리 위쪽에 앉혔다”라고 말해지는 셈이다. 그러나 이렇게 말해질 경우, 내적 의미에서는 거기에 지배권이 양도되는 것이 의미되지 않고, 자체를 적용함이 의미될 뿐이다. 그 이유가 내적 의미에서 어떤 것은 그 자체로 있는 그대로가 지각되기 때문, 그러나 글자 의미에서는 나타나는 것에 따라서 설명되고 발표되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선은 언제나 지배권을 가지고 있으나, 진리가 선에 결합되도록 하기 위하여 그 자체를 적용하기 때문이다. 인간이 진리 안에 있을 때, 그가 거듭나기 이전의 경우이다면, 그는 선에 관하여는 아는 것이 거의 없다; 그 이유가 진리는 외적인 경로(방법) 또는 감각적 경로를 수단으로 그에게 흘러들고, 선은 내적인 경로로 해서만 그에게 흘러들기 때문이다. 인간은 거듭나질 때까지, 외적인 경로를 수단으로 흘러드는 것은 감지할 수 있으나 내적인 경로로 흘러드는 것은 감지할 수 없다. 그러므로 어떤 종류의 지배권이든 그것이 진리에 주어지지 않으면, 바꿔말해서 선이 진리에 선 자체를 적용하지 않으면, 진리는 선의 자기 자신으로 만들어짐을 결코 일구어낼 수 없다. 이에 대한 것은 이미 수차례 반복된 사항이다. 즉 인간이 거듭나는 동안 진리는 첫째 자리에 앉혀져 있는 것으로, 당사자의 주인이 진리인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거듭났을 때, 선이 첫째 자리에 있다는 것, 형이다는 것, 주인이다는 것이 분명해진다.

그리고 그는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그의 손에 주었다. 이는 그것에 속한 모든 것이 마치 권능을 가진 듯 있었음을 의미한다. 이는 “손”의 의미가 권능(힘, power)이다로부터 분명해진다. 고로 “그의 손에 준다”는 그것의 힘 안에 준다 이다; 그러나 이것은 오직 외관상일 뿐인 바, 권한이 있는 듯 하다고 말한 것이다.

그가 그를 자기 집의 위쪽에, 그가 가진 모든 것 위쪽에 앉힌 때부터 였다. 이는 선 그 자체가 거기에 적용된 후 있는 두 번째 상태를 의미한다. 그리고 그것에 속했던 모든 것은 마치 권능이 있는 듯 있었음을 의미한다. 이는 “…였다, it came to pass”의 표현으로부터 알게 되는데, 이 표현은 말씀에서 자주 등장하는 표현이기도 한데, 이는 새로운 어떤 것을 포함한다는 것, 결과적으로 또 다른 상태를 포함하는 표현이다. “그가 그를 자기 집의 위쪽에 앉힌 때로부터”란 선이 거기에 자체를 적용한 이후 이다로부터; 그리고 “그가 가진 모든 것 위쪽에”란 그것의 권능 안에 있는 듯 함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리고 여호와께서는 요셉 때문에 이집트 사람의 집에 복을 내리셨다. 이는 신성으로부터 그때에 그것은 자연 평면 안에 천적인 것을 가졌음을 의미한다. 이는 “복을 내리셨다”가 천적 수준의 선과 영적 수준의 선으로 풍요해졌다를 의미함으로부터; 이것이 신성으로부터 인 이유는 “여호와께서 복을 내리셨다”라고 말해졌기 때문; 그리고 “이집트인의 집”의 의미가 자연적 수준의 마음 속의 선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상 살핀 바로부터 “여호와께서 이집트인의 집에 복을 내리셨다”에 의해 의미되는 것은, 신성으로부터 그것은 그때에 자연 평면 안에 천적인 것을 가졌다 이다. 자연 평면 속의 천적인 것은 합리적 평면의 선에 상응하는 자연 평면에 있는 선이다. 즉 이 선은 “요셉”인 합리적 평면의 영적인 것으로부터의 천적인 것에 상응한다.
천적인 (수준의) 것, 뿐만 아니라 영적인 (수준의) 것은 합리적 평면과 자연 평면 양쪽 모두를 서술한다 (다시 말해 양쪽 모두에 내포되고 있다); 즉 합리적 인간인 내적 인간 속에, 그리고 자연적 인간인 외적 인간 속에 내포되고 있다는 말이다; 본질적 측면에서 보면, 영적인 (수준의) 것은 주님으로부터 진행하는 신성한 진리이고, 천적인 (수준의) 것은 진행된 신성한 진리 안에 있는 신성한 선이다. 신성한 선을 담고 있는 신성한 진리가 합리적 평면, 또는 내적 인간에 의해 받아질 때, 이것은 합리적 평면 안에 있는 영적인 (수준의) 것이라 불리운다; 그리고 신성한 선을 담고 있는 신성한 진리가 자연 평면, 또는 외적 인간에 의해 받아질 때, 이것은 자연 평면에 있는 영적인 (수준의) 것이라 불리운다. 마찬가지 방법에서, 신성한 진리 안에 있는 신성한 선이 합리적 인간 또는 내적 인간에 의해 받아질 때, 합리적 평면에 있는 천적인 (수준의) 것이라 불리운다; 그리고 똑같은 이 선이 자연적 인간 또는 외적 인간에 의해 받아질 때, 이것은 자연 평면에 있는 천적인 (수준의) 것이라 불리운다. 위의 모두는 주님으로부터 직접적으로 흘러들고, 뿐만 아니라 천사들과 영들을 통하여 간접적으로도 흘러든다; 그러나 주님이 세상 안에 계셨을 때, 흘러듦(입류, the inflow)은 그분 자신으로부터 있으셨는데, 그 이유는 신성이 그분 안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호와의 축복이…” 이는 증가함을 의미한다. 이는 “여호와의 축복”의 의미로부터 분명해진다. 진짜 의미에서 “여호와의 축복”은 주님을 사랑함과 이웃을 향한 선행을 의미한다; 그 이유는 이 사랑을 선물로 받은 이들이 “여호와로부터 복받은 자”라고 불리우고, 그때 그는 천국과 영원한 구원도 선물받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외적 의미에서, 또는 세상에서 인간의 상태에 관련하여 있는 외적 의미에서의 “여호와의 축복”이란 하느님 안에서 만족하는 것, 그렇기 때문에 자신이 현재 있는 영예(지위 등등)나 재물의 상태, 이 상태가 높은 지위이든, 낮은 지위이든, 부자이든, 가난하든 이런 여하에 관계 없이 (현재의 상태에) 만족하는 것이다; 그 이유가 하느님 안에서 만족하는 자는 자신이 지니는 영예나 재산이 선용(uses)들을 위한 수단이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이 세상적 지위나 재물에 관해, 동시에 영원한 삶(생명)을 생각할 경우, 그는 영예나 재물을 중요한 것으로 간주하지 않고, 영원한 삶에 대한 것만을 영원히 간직해야할 필수적인 것으로 간주할 뿐이다. 그러므로 “여호와의 축복”, 또는 주님으로부터의 축복이 진짜 의미에서 위와 같은 사항을 포함하기에, “복받음” 또한 그것 내부에 셀 수 없이 많은 사항들을 내포하는 바, 이로부터 이어지는 다양한 것들을 의미한다; 즉, 영적 선과 천적 선으로 풍요해지는 것; 진리에 애착함으로부터 열매가 풍성해지는 것 (2846항); 천국의 질서 안에서 결말을 보는 것; 사랑의 선을 선물받는 것, 그리하여 주님과 결합되는 것; 기쁨(환희, joy) 등등을 내포한다. 그러므로 “복받음”에 관한 세부적인 것들은 앞서 살핀 구절과 이어질 구절들의 시리즈로부터 계속 보여질는지 모른다. 여기서의 “여호와의 축복”은 선과 진리가 불어남, 또는 생명(삶)과 교리 측면에서 불어남을 의미하는 것은 이어지는 말로부터 분명해지는데, 그 이유는 “여호와의 축복이 집과 들판에서 있었다”라고 말해지기 때문이다. “집(house)”은 생명 속에 있는 선(삶으로부터 있는 선)을; 그리고 “들판”은 교리 속에 있는 진리(교리로부터 있는 진리)가 의미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여호와의 축복”에 의해 위의 사항들이 불어남이 의미되는 것이다.

…그의 집과 들판에서 그가 가진 모든 것에 내려졌다. 이는 삶(생활)에서, 그리고 교리에서를 의미한다. 이는 “집”의 의미가 선이다로부터 분명해진다; 그리고 집이 선을 의미하기 때문에, 집은 생활 또한 의미한다, 그 이유는 모든 선은 생활로부터(삶 속에)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들판”의 의미가 교회로부터의 진리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들판이 교회 속의 진리를 의미하기 때문에, 들판은 교리 또한 의미하는데, 그 이유는 모든 진리는 교리 속에 있기 때문이다. “집”과 “들판”은 말씀의 많은 구절들에서 등장하는 편이다; 이때 말씀의 어느 구절이든 그 구절이 취급하는 주제가 천적 (수준의) 인간일 경우, “집”에 의해서는 천적 선이, “들판”에 의해서는 영적 선이 의미되어진다. 천적 (수준의) 선은 주님을 사랑함으로부터의 선이고, 영적 (수준의) 선은 이웃을 향한 선행으로부터의 선이다. 그러나 취급되는 주제가 영적 (수준의) 인간일 경우, “집”에 의해 의미되는 것은 당사자 안에 있는 천적인 (수준의) 것, 즉 이웃을 향한 선행으로부터의 선이다; 그리고 “들판”에 의해 의미되는 것은 그 사람 안에 있는 영적인 (수준의) 것, 즉 신앙으로부터의 진리이다. 이 내용이 마태복음서의 아래 구절에 담겨 있다:
지붕꼭대기 위에 있는 자는 자기 집 안에 있는 어떤 것을 가져가려 내려오지 말라, 그리고 들판에 있는 자는 자기 의복을 가져가려 뒤쪽으로 되돌아가지 말라 (마. 24:17, 18, 3652항).

그리고 그는 요셉의 손에 그가 가진 모든 것을 놓아 두었다. 이는 마치 모든 것들이 그것의 힘이 미치는 범위 안에 있는 듯 나타났음을 의미한다. 이는 앞에서 밝힌 의미들로부터 분명해진다.

그리고 그는 자기가 먹었던 빵 외에는 자기가 가진 것이 무엇이 있는지도 모르고 있었다. 이는 선은 거기로부터 선의 자기 자신을 만들어지게 했음을 의미한다. 이는 “빵”의 의미가 선이다로부터 분명해진다; 그리고 “먹는다”의 의미가 누군가의 자기 자신을 만드는 것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빵 외에는 그가 가진 것이 무엇이 있는지를 몰랐다”란 받은 것은 선밖에 없었다를 의미한다. 선이 진리를 선의 자기 자신으로 만들 때, 신앙으로부터의 진리가 선의 자기 자신을 만든다고 믿어질는지 모르나, 정작 자기 자신을 만드는 것은 진리로부터의 선이다. 사용함(use)을 위해 있지 않은 진리들은 실로 접근은 될지몰라도 진입하지는 않는다 (즉 입으로는 진리를 진리라고 외칠지 몰라도 정작 진리가 자기 것이 되지 않는다는 말일 것이다). 진리들로부터 있는 모든 선용이 진리로부터의 선이다. 사용을 위해 존재하지 않는 진리들은 분리되어진다; 그리하여 (선용된) 진리는 당사자에게 남겨져 있으나 (사용되지 않은) 진리는 거절되어진다. 이때 남겨진 진리는 선쪽에 멀든 가깝든 어쨌든 선쪽으로 입문된 상태이다, 고로 그 진리는 선용 자체들(very uses)이다. 거절된 진리들은 위와 같은 입문이 없고, 진리 자체를 응용하거나 적용하거나 하지 않은 진리들이다. 진리들의 시작에서, 모든 선용들은 교리로부터의 진리들이나, 이 진리들을 계속 응용하고 적용해가면, 이 진리는 발전하여 결국 선들로 되어진다; 다시 말해 인간이 교리로부터의 진리들에 따라 행동할 때, 그 진리들은 선들이 된다는 말이다. 고로 행동함 자체가 진리들에 품질을 준다; 그 이유는 모든 행동함은 의지로부터 내려오고, 의지 자체는 이전에 진리이었던 것을 선으로 만들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분명한 바, 의지 안에 있는 진리는 신앙으로부터의 진리가 더 이상 아니고, 신앙으로부터의 선이다는 것이다; 그 이유가 인간이 행복해지는 것은 신앙의 진리가 아니라 신앙의 선이기 때문이다. 신앙의 선은 생명 속에 있는 것 자체에, 즉 의지에 감동을 주고, 의지에 내면의 기쁨, 또는 행복을 주기 때문, 그리고 다른 삶에서는 천국적인 기쁨이라 불리우는 행복을 주기 때문이다.

그리고 요셉은 모양에서 아름다웠다. 이는 거기로부터 신앙 속의 진리가 파생되었음을 의미한다. 쳐다봄에서 아름다웠다란 거기로부터 파생된 신앙의 진리를 의미한다. 이는 “외형에서 아름답다”와 “쳐다봄에서 아름답다”의 의미로부터 알게 된다; 그 이유가 “모양(form)”은 어떤 것의 실체(본질, essence)이고, “쳐다봄( a look)”은 실체로부터 파생된 명백해짐(manifestation)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모양에서 아름답다”에 의해서는 생활의 선이 의미되고, “쳐다봄에서 아름답다”는 신앙의 진리가 의미된다. 그 이유가 생활의 선은 인간의 있음 자체(the very being)인데, 이 선은 의지로부터 있기 때문; 그리고 신앙의 진리는 거기로부터 파생되어 세상 밖으로 출시됨(coming forth) 이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이해함으로부터 있는 것은 무엇이든 의지로부터 세상 밖으로 출시되기 때문이다. 인간의 생명의 있음은 그의 의지력 안에 있고, 그의 생명이 세상 밖으로 출시됨은 그의 이해력 안에 있다. 인간의 이해함은 의지가 펼쳐진 것밖에 더 이상은 아니다; 즉 생명의 품질이 생명의 쳐다봄 안에 나타나는 것을 모양 안에 놓는다. 이런 결과 분명해지는 것은, 내면의 인간의 아름다움이 어디로부터 와지는 가에 대한 것, 즉 그것은 의지의 선으로부터 신앙의 진리를 통하여서라는 것이다. 신앙의 진리 자체가 외적 모양에서 아름다움을 표출하나, 이 아름다움을 신앙의 진리 자체에 나누어주어 모양을 만들어내는 것은 의지의 선이다. 이로부터 천국의 천사들은 모양에서 사랑들과 선행들인 극도의 아름다움 속에 있다; 그러므로 그것들이 아름다움에서 나타날 때, 그것들은 가장 깊은 안쪽에 감동을 일으킨다. 사랑과 선행의 아름다움과 더불어 주님으로부터의 사랑의 선은 신앙의 진리를 통하여 빛을 발하고, 이 빛이 관통할 때, 감동을 일으킨다. 이상 살핀 바로부터 “모양에서 아름답고, 쳐다봄에서 아름답다”에 의해 의미된 것을 알았을 줄로 본다.

7-9절. 그리고 이런 말들이 있은 후, 그의 주인의 아내가 요셉을 향해 자기의 눈을 들었다, 그리고 그 여자는 말했다, 나와 함께 눕자. 8 그리고 그는 거절했다, 그리고 그의 주인의 아내에게 말했다, 내 주인께서는 집에서 무엇이 나와 함께 있는 지를 모릅니다, 그리고 그가 가진 모든 것을 내 손에 놓아두셨습니다. 9 그는 이 집에서 나보다 더 큰 자가 아닙니다. 그리고 그는 당신 말고는 어떤 것도 나에게 보류되게 한 것이 없습니다. 그 이유가 당신은 그의 아내이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내가 이 큰 악을 저질러 하느님께 죄를 진단 말입니까? “이런 말들이 있은 후…”란 셋째 상태를 의미한다. “그리고 그의 주인의 아내가 요셉을 향해 눈을 들었다”란 자연적 선에 인접한 영적 수준이 아닌 자연적 수준의 진리, 그리고 이 진리가 지각함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 여자는 말했다, 나와 함께 눕자”란 그것이 결합을 원했다를 의미한다. “그리고 그는 거절했다”란 혐오함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의 주인의 아내에게 말했다”란 이 진리에 관하여 지각함을 의미한다. “내 주인은 이 집에서 내가 무엇을 가졌는지도 모르고 있습니다”란 자연적 선은 제 것 삼는 것조차도 바라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그가 가진 모든 것을 내 손에 놓아두셨습니다”란 모든 것은 그것의 권한(힘) 안에 있었음을 의미한다. “그는 이 집에서 나보다 더 크지 않다”란 영적이지 않은 자연적 선은 시간 차원으로는 앞서나 상태 차원에서는 그렇지 않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는 당신 말고는 어떤 것도 나에게 보류되게 해놓은 것이 없습니다”란 이 선으로부터의 진리와 합쳐지는 것은 금하여졌음을 의미한다. “그 이유는 당신이 그의 아내이기 때문입니다”란 그것은 또 다른 선과 합쳐지지 않아야 함을 의미한다. “그리고 어떻게 내가 이 큰 악을 저질러 하느님께 죄를 지을 수 있단 말입니까?”란 그러므로 분열이 있을 뿐 결합은 없음을 의미한다.

이런 말들이 있은 후 이었다. 이는 셋째 상태를 의미한다. 이는 “…이었다”라는 말이 어떤 새로운 것을 포함한다는 것으로부터, 결과적으로 여기서는 세 번째 상태가 된다; 그리고 “이런 말들이 있은 후”의 의미가 이런 것들이 처리된 후 이다로부터도 알게 된다. 원어에서는 다른 언어들 같이 말들의 사이에 끼는 표시점들을 수단으로 이 시리즈와 또 다른 시리즈를 구별하지 않고 있다; 하여 본문은 처음부터 끝까지가 계속되는 듯하게 나타나고 있다. 내적 의미에서 있는 사항들 또한 그러해서 어떤 것의 이 상태로부터 또 다른 상태로 흘러가서 계속된다; 그러나 이 상태가 종결될 때, 그리고 중요한 또 다른 어떤 것이 계속될 때, 이것이 “…이었다(it came to pass 또는 it was)”에 의해 암시되어진다; 그리고 덜 중요한 상태의 변화는 “그리고(and)”에 의해 암시를 준다. 이런 이유로 “…이었다”나 “그리고”의 표현이 자주 등장한다. 이 상태는 세 번째 상태이고, 이전의 상태보다 더 내면적이다.

그리고 그의 주인의 아내가 요셉을 향해 눈을 들었다. 이는 자연적 선에 인접한 영적 수준이 아닌 자연적 수준의 진리, 그리고 이 진리가 지각함을 의미한다. 이는 “아내”의 의미가 선에 인접한 진리이다로부터, 여기서는 영적이지 않은 자연적인 진리, 그 이유는 이 진리와 이 선이 취급되기 때문이고, 이 진리가 결합된 선이 여기서 “주인”이다; 그리고 “눈을 들었다”의 의미가 생각, 의도, 또한 지각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여기서 “아내”에 의해 자연적 수준의 진리가 의미되고, 영적 자연적 수준의 진리가 아니다; 그리고 여기서 “주인”에 해당되는 남편에 의해서는 자연적 수준의 선이 의미되고, 이 선 역시 영적 자연적 수준의 선은 아니다. 그러므로 영적 수준이지 않은 자연적 수준의 선과 진리, 그리고 영적 자연적 수준의 선과 진리가 무엇을 뜻하는지 설명되어야 할 것이다. 인간에 있는 선은 2 중의 근원으로부터 있다; 즉 유전적인 것, 그러므로 우연적인 것으로부터; 또 다른 근원은 신앙의 교리와 선행의 교리로부터, 또는 이방인들의 경우는 그들의 광신적 신앙으로부터 이다. 전자로부터의 선은 영적 수준에서가 아닌 자연적 수준에서의 선이고; 후자의 근원으로부터의 선은 영적 자연적 수준에서의 선이다. 모든 선은 각기 자신에게만 걸맞는 고유의 진리를 가지는데, 이 진리는 비슷한 근원으로부터 있다.
전자로부터, 즉 유전적이고 우연적인 것으로부터의 자연적 수준의 선은 후자, 즉 신앙과 선행의 교리로부터, 또는 광신적 신앙으로부터의 자연적 수준의 선과 아주 많이 닮았으나, 이는 오직 외적 모양에서만 일 뿐, 내적 모양에서는 완전히 다르다. 전자의 근원으로부터의 자연적 수준에서의 선은 온순한 동물들과 존재하는 선에 비교될는지 모른다; 그러나 후자의 근원으로부터의 선은 이성으로부터 행동하는 인간에게 어울리는 선, 좀 더 설명을 붙이면, 각기 다른 쓰임새(uses)에 걸맞는 각기 다른 방법들로 어떻게 선한 것을 배분하는지를 아는 인간에게 어울리는 선이다는 말이다. 선한 것을 배분함이 공정(just)과 공평(fair)의 교리에 의해 가르쳐진다; 이 공정과 공평보다 더 높은 수준은 신앙과 선행의 교리에 의한 배분이다, 그리고 진실로 합리적인 이들과 더불어 많은 방법들에서 이성에 의해 확증되어진다.
전자의 근원으로부터 선을 행하는 이들의 선행의 실행은 마치 본능에 따라서 인 듯, 마치 눈먼 상태로 행동 안에서 태어나진다. 그러나 후자의 근원으로부터의 선을 수행하는 이들의 선행의 실시는 눈이 열린 상태에서, 즉 내적 의무(obligation)에 따라서 태어나진다. 한마디로, 전자의 근원으로부터 선을 행하는 이들은 공정과 공평한 것에 관한 양심으로부터가 아니다는 것, 영적 진리와 선에 관한 양심으로부터는 더욱 아니다는 것; 이에 반해 후자로부터 선을 행하는 이들은 선행을 양심으로부터 실시한다. 그러나 무슨 경우가 이런 사항과 더불어 있는지를 납득할 수 있게 해볼 수는 없다; 그 이유는 영적 수준이지 않은 이들, 또는 거듭나지 않은 이들은 선의 외적 모양으로부터 선을 보기 때문, 그리고 선을 외적 형체로만 보는 이유는 선행이 무엇인지를, 이웃이 무엇인지를 모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가 이런 사항들을 모르는 이유는 그가 선행의 교리물들을 가지고 있지 않은 이유 때문이다. 천국의 빛 안에서 이런 사항들은 매우 또렷하게 구분되어 나타난다, 그러므로 이것들은 영적 인간, 또는 거듭난 자와 더불어서도 또렷하게 나타난다, 그 이유는 이것들이 천국의 빛 안에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여자는 말했다, 나와 함께 눕자. 이는 그것이 결합을 원했다를 의미한다. 이는 “나와 함께 눕자”의 의미가 결합이다로부터 (즉, 지금 “요셉”인 영적 자연적 수준의 선과 여기서 “주인의 아내”인 영적 수준이지 않은 자연적 수준의 진리가 결합하자는 것이다) 알게 되는데, 이 결합은 불법적인 결합이다. 선이 진리와, 진리가 선과 결합함이 말씀에서 결혼에 의해 묘사되어진다. 그리고 불법적인 결합들은 매춘들에 의해 묘사된다. 여기서의 경우, 영적 수준이지 않은 자연적 수준의 진리가 영적 자연적 수준의 진리와 결합함이 요셉의 주인의 아내가 요셉과 눕기를 원했다에 의해 묘사되어지고 있다. 이것들 사이에서의 결합은 내적 측면에서는 가능하지 않고 외적 측면에서만 가능할 뿐이다. 이 외적 측면에서의 결합은 외관상의 결합이다. 그러나 이것은 인척 관계일 뿐이다. 이런 이유로 그녀는 요셉의 의복(garment)을 수단으로 그를 붙잡았고, 요셉은 그녀의 선에 그의 의복을 남겨두었던 것이다; 그 이유가 내적 의미에서 “의복”은 외적인 것을 의미하고, 이를 수단으로 외관상의 결합인 것, 또는 이를 수단으로 인척 관계가 있는 것도 의미된다. 이에 대하여는 12, 13절에서 더 살핀다.
이런 사항들이 의미되는 것은 마음, 또는 생각이 말씀의 역사물에 집중하는 한 보여질 수 없다; 그 이유가 역사물에 초점을 둘 경우, 말씀 안에서 보여지는 것은 인간 요셉, 보디발의 아내, 또는 자기 의복을 남겨두고 도망한 요셉밖에 더 이상 아무것도 없기 때문, 그리고 의복에 의해서도 어떤 불법적인 영적 결합밖에 더 이상 지각되는 것이 없다. 그러나 역사적 말씀은 단지 역사적이지만은 않고 신성하다는 것, 하여 이 역사물 안에는 영적이고 신성한 어떤 것이 내재되어 있다는 것이 믿어진다면, 이때로부터 우리의 마음, 또는 생각은 역사적 사건 안쪽을 탐사하게 되고, 말씀 안의 영적이고 신성한 사항들은 주님의 교회와 왕국에 관한 것임을, 최고 의미에서는 주님 자신에 관한 것을 우리에게 알게 해주고 있다는 것을 감지하게 된다. 인간이 사후 즉각 있는 것, 즉 그가 다른 삶 안으로 들어올 때, 그런데 그가 천국 안으로 들려지는 사람의 하나이었다면, 그때 그가 알게 되는 것은, 자기에게 말씀의 역사물에 관한 것은 남아 있는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참으로 요셉이든, 아브라함이든, 이삭, 야곱이든 하나도 없다는 말이다; 그러나 그가 말씀으로부터 배워 자기 삶에 적용했던 영적인 것과 신성한 것들만 남아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말씀은 영적이고 신성에 속한 사항들을 내향적으로 함유하고 있다는 말이다. 이것이 말씀의 내적 의미라고 불리운다.

그리고 그는 거절했다. 이는 혐오함을 의미한다. 이는 “거절하다”의 의미가 싫어하는 것이다로부터, 즉 의문에 있는 결합을 싫어하는 것이다; 그 이유가 거절하는 자가 도망치기까지 하여 싫어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의 주인의 아내에게 말했다. 이는 이 진리에 관하여 지각함을 의미한다. 이는 “말하다”의 의미가 말씀의 역사물에서는 지각하는 것이다로부터; 그리고 “그의 주인의 아내”의 의미가 자연적 선에 인접한 영적 수준이지 않은 자연적 수준의 진리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내 주인은 집에서 무엇이 나와 함께 있는 지를 모르고 있습니다. 자연적 선은 제 것 삼음조차도 바라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이는 “주인”의 의미가 자연적 선이다로부터; 그리고 “이 집에서 내가 무엇을 가졌는지를 모른다”의 의미가 자기 것 삼기를 바라지 않는 것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 구절의 말씀이 이런 의미를 가졌다는 것은 내적 의미에서 있는 시리즈로부터가 아니면 보여질 수 없다; 그 이유는 세 번째 상태가 취급되기 때문, 즉 영적 평면 속의 천적인 것이 자연 평면 안에 있었기 때문이다: 이 상태에서 영적 수준인 자연 평면의 선과 진리는 영적 수준이지 않은 자연 평면의 선과 진리로부터 분리되어진다; 결과적으로 “집에서 무엇이 나와 함께 있는지를 모른다”에 의해 자기 것이 되게 하려는 바램이 없다가 의미된다. 이런 사항들은 신비함들인 바, 예를 가지고 설명해야만 분명해진다. 욕망만으로부터 누군가의 아내와 결합되는 것은 영적 수준이 아닌 자연적 수준이다; 그러나 부부의 사랑으로부터 누군가의 아내와 결합하는 것은 영적 자연적 수준이다. 그리고 그 후에 남편이 욕망만으로부터 결합될 때, 그는 자기가 범칙하는 셈이다고 믿는다, 마치 음탕한 짓을 하는 자와 같은 자로 믿는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그는 이것이 자기에게 어울려지기를 더 이상 바라지 않는다. 다른 예를 생각해보자: 친구의 품질이 어떻든 관계 없이 친구에게 이득이 되게 한다면, 이는 영적 수준이지 않은 자연적 수준이다; 그러나 친구 안에 있는 선을 위하여 친구에게 이득이 되게 한다면, 더욱이 이득되게 해주려는 친구로서 선 자체를 붙들고 있다면, 이것은 영적 자연적 수준(영적 수준으로부터의 자연적 수준, 또는 자연 평면 속의 영적인 것 )이다; 그리고 만일 악이 있는 친구에게 이득을 보게 한다면, 자기가 범칙하는 것과 같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다; 그 이유는 자기가 악한 친구를 통하여 타인에게 해를 끼치는 셈이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기가 음험한 친구를 볼 때, 그는 영적 수준이지 않은 자연적 수준의 것을 자기 것이 되게 함에서 혐오스러움을 갖는다. 이 외에도 예증은 여러분의 경험에서도 많을 것인 바 각자 그것을 상기해보기 바란다.

그가 가진 모든 것을 내 손에 놓아두셨습니다. 이는 모든 것은 그것의 권한 안에 있었음을 의미한다. 이는 이미 방금 앞의 비슷한 단어가 등장한 구절로부터 알게 된다. 그러나 이런 차이는 있다, 즉 거기서 취급된 주제는 두 번째 상태인 자연 평면 안에서 영적 평면 속의 천적인 것이었다; 그 이유가 그때 자연적 선이 자체를 적용했기 때문, 하여 그 자체쪽으로 진리를 자기 것이 되게 했다; 이 상태에서 선은 실제로 지배권을 가졌고, 진리는 가상적으로 지배권을 가졌다. 그러므로 이 때의 이 단어들은 그것의 모두가 마치 권한 안에 있었는 듯 하였다가 의미된다. 그러나 여기서 취급된 주제는 세 번째 상태에서의 영적 평면 속의 천적인 것, 즉 자연적 선이 자연 평면에서 영적 수준이 되는 때이다; 그리고 이 상태에서는 자기 것이 되게 함은 없다, 그러므로 본문에 의해 의미되는 것은 모든 것은 그것의 권한(힘, power) 안에 있었다가 의미된다.

그는 이 집에서 나보다 더 크지 않다. 이는 영적이지 않은 자연적 선은 시간 차원으로는 앞서나 상태 차원에서는 그렇지 않음을 의미한다. 이는 “나보다 더 크지 않다”의 의미가 지배권이 동등하였다는 것, 결과적으로 두 지배권 모두가 제 1 순위의 지배권이다는 것이다. 내적 의미의 시리즈로부터 분명한 것은, 영적이지 않은 자연 평면의 선은 시간 차원에서는 제 1의 순위이나, 영적인 자연 평면의 선(good spiritual natural)은 상태(state) 차원에서는 제 1의 순위이다. 상태 측면에서 앞서는 것(제 1의 순위인 것)은 품질 측면에서 더 탁월하다.

그리고 그는 당신 말고는 어떤 것도 나에게 보류 시켜 놓은 것이 없습니다. 이는 이 선으로부터의 진리와 결합되는 것은 금하여졌음을 의미한다. 이는 “나에게 보류됨”의 의미가 금지된 것이다로부터; 여기서의 “당신”, 즉 보류되게 해놓은 당신인 “아내”의 의미가 영적이지 않은 자연 평면의 진리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 이유는 당신이 그의 아내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그것은 또 다른 선과 합쳐지지 않아야 함을 의미한다. 이는 “아내”의 의미가 그것의 선에 인접한 진리이다로부터 분명해진다, 여기서의 경우, 영적이지 않은 자연 평면의 진리가 영적이지 않은 자연 평면의 선에 인접한 것이다.

그리고 어떻게 내가 이 큰 악을 저질러 하느님께 죄를 지을 수 있단 말입니까? 이는 그러므로 분열이 있을 뿐 결합은 없음을 의미한다. 이는 “악”, 또는 “죄”의 의미가 분열과 결합 없음이다로부터, 즉 자연 평면의 영적인 선이 영적이지 않은 자연 평면의 진리와 결합할 때, 이때 분열만 있고 결합은 없다는 말이다; 그 이유가 이 둘은 서로 같지 않고, 어울리지 않는 바, 그 둘은 서로로부터 자신들을 찢어내고 만다. 여기서 “악을 행하고 하느님께 죄를 진다”고 말해지는데, 이 말 자체만으로 생각해도, 즉 악, 또는 죄는 선으로부터 분열됨밖에 더 이상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더욱이 악 자체는 비합일(disunion, 분리) 안에 존재한다. 이것은 선으로부터 분명하다, 그 이유는 선은 결합이기 때문이다, 결합인 이유는 모든 선은 주님을 사랑함과 이웃을 향한 사랑으로부터 있기 때문이다. 주님을 사랑함으로부터의 선은 인간으로 주님과 결합되게 한다, 결과적으로 그분으로부터 진행되는 모든 선과 결합한다; 그리고 이웃을 향한 사랑으로부터의 선은 당사자를 천국과, 그리고 천국 안의 사회(공동체)와 결합되게 한다; 그러므로 이 사랑을 통해서도 당사자는 주님과 결국은 결합한다; 그 이유가 천국을 다시 일컬으면 주님이라 불러야 마땅하기 때문, 그런 이유는 주님은 천국의 모든 것 안의 모두이시기 때문이다.
악과 더불어서는 위와 정반대이다. 악은 자기를 사랑함과 세상을 사랑함으로부터 있다. 자기를 사랑함으로부터의 악은 인간을 주님으로부터, 뿐만 아니라 천국으로부터도 분리되게 한다; 그 이유가 그가 사랑하는 것이 자신뿐이기 때문; 타인을 사랑하는 것은 그가 타인을 자신으로 간주하는 경우, 즉 자신을 사랑함에 유리할 경우 뿐이다. 그러므로 그는 자신쪽으로 모든 것의 시선을 돌리게 한다; 그리고 결국은 그 시선을 여타 다른 것들로부터 비키게하는데, 특히 주님으로부터 이다; 그리고 이런 사회 안에 있는 각자가 서로를 향해 이 짓을 하는 바, 각자는 서로로부터 찢겨질 수밖에 더 다른 방도가 없다. 모두는 분리되는 방향으로만 향하고 있다, 그들 각각이 외견으로는 타인이 친구이나 마음 속에서는 타인들을 적들로 간주하고 있다, 따라서 누군가가 자신에게 “no” 라고 말하면, 즉시 그는 그를 증오하여, 그가 망하는 꼴을 보고 기쁨을 취한다. 세상을 사랑함으로부터의 악 역시 별반 다르지 않다. 이 사랑은 타인들의 재물과 물품들을 몹시 탐낸다. 더불어 타인들이 소유한 모든 것을 소유하기를 바라고 있다. 이로부터 적대감과 증오심이 발생된다. 이것은 자아 사랑의 악과 종류는 같지만 수준이 약간 낮은 편일 뿐이다. 따라서 누군가로 하여금 악이 무엇인지, 그리고 죄가 무엇인지를 알게 하겠다면, 자아 사랑과 세상 사랑이 무엇인지를 알려주면 된다; 그리고 선이 무엇인지를 알게 하려면, 그에게 하느님을 사랑함과 이웃을 향한 사랑이 무엇인지를 알려주면 된다. 이 방법 안에서 그는 악이 무엇인지를, 결과적으로 거짓이 무엇인지를 알게 된다; 그리고 이로부터 그는 선이 무엇인지를 알 것이고, 결과적으로 진리가 무엇인지도 알게 된다.

10-15절. 그리고 시간이 흘렀는데, 그 여자는 날마다 요셉에게 말을 걸었고, 그는 그녀에게 귀를 기울이거나, 그녀와 눕거나, 그녀와 함께 있지도 아니하였다. 11 그리고 어느 날 그가 자기 일을 하려고 집에 들어 갔었다. 그리고 이 집에는 사람이라고는 아무도 없었다. 12 그리고 그녀는 그의 옷을 잡아 그를 붙들고, 말하기를, 나와 눕자. 그러자 그는 자기 옷을 그녀의 손에 버려두고, 그리고 도망하여 밖으로 나왔다. 13 그리고 그 여자는 그가 자기 손에 옷을 놓아둔 채 떠난 것을 보고, 14 그 여자는 그 집의 사람들에게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 그들에게 말하기를 보라, 그가 우리를 조롱하라고 히브리 사람을 우리에게 보냈다. 그는 나와 함께 눕겠다고 나에게 왔다. 그래서 나는 큰 소리로 외쳤다. 15 그는 내가 소리를 드높여 외친 것을 듣고는 떠났는데, 그는 내 곁에 자기 옷을 남겼다, 그리고 도망했다, 그리고 밖으로 나갔다.

시간이 흘렀다. 이는 네 번째 상태를 의미한다. 이는 앞에서 설명한 바 있다.

그 여자가 날마다 요셉에게 말을 걸었다. 이는 이 문제에 관한 생각을 의미한다. 이는 “말을 걸다(speak)”의 의미가 생각하다 이다로부터, 즉 요셉에 관련하여서, 그러므로 여기서는 “요셉”에 의해 뜻해지는 문제에 관련하여서 이다. 그리고 “날마다”는 집요하게를 뜻한다. “말을 걸다, 이야기를 하다, speak”가 내적 의미에서 생각하다인 이유는 생각함이 내면의 말(speech)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인간이 생각할 때, 이때 그는 자신과 이야기를 하는 셈이다. 내면의 사항들은 그것에 상응하는 외면의 사항들을 수단으로 글자의 의미에서 표현되어진다.

그는 그녀에게 귀를 기울이지도, 그녀와 눕지도 아니 하였다. 이는 결합되어지는 것을 싫어했음을 의미한다. 이는 “귀를 기울임”의 의미가 경청하거나 순종하지 않음이다로부터, 여기서는 싫어하는 것인데, 그 이유는 그는 자기 옷을 남겨두고 도망할 정도여서 듣는 것 조차도 아주 멀리하려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녀와 누움”의 의미가 불법적으로 결합함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녀와 함께 있지도. 이는 이런 식으로 하나가 되어 있지 않도록을 의미한다. 이는 누군가와 “함께 있다”의 의미가 더 친근하게 결합되는 것, 또는 하나가 되어짐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있다(to be)”가 하나가 되어짐을 뜻하는 것은 어떤 것의 있음 자체는 선이고, 모든 선은 사랑으로부터 있기 때문, 그리고 이것은 영적인 결합, 또는 하나됨 이다. 그러므로 최고 의미에서 주님은 있음(being), 또는 여호와라 불리우시는데, 그 이유는 사랑으로부터 있는 모든 선, 또는 영적 결합으로부터 있는 모든 선이 그분으로부터 이기 때문이다. 천국이 그분으로부터의 사랑을 통하여, 그리고 이 사랑을 받음을 통하여 그분과 상호적인 사랑을 통하여, 그리고 서로의 사랑을 통하여 그분과 하나를 만들 때, 결혼이라 불리우고, 이를 통하여 천국의 존재는 있는다. 만일 사랑과 선행이 교회의 있음으로 되어 있다면 교회 역시 위와 비슷할 것이다. 그러므로 결합, 또는 합일이 없는 곳에는 있음도 없다; 그 이유가 하나를 가져오는 어떤 것, 또는 하나되게 하는 어떤 것이 있지 않으면, 거기에는 분해됨과 소멸됨밖에 더 없다.
고로 시민 사회에서, 즉 모든 이가 자신을 위해 있는 곳, 자신을 위하여가 아니면, 또 다른 사람을 위해서는 아무도 있지 않는 곳에서는 하나됨을 만드는 법들이 있지 않으면, 그리고 이득이나 영예, 명성, 그리고 생명을 잃음에 대한 두려움이 있지 않으면, 사회는 깡그리 분산되어지고 말 것이다; 이런 사회의 있음에도 또한 결합 또는 하나됨은 있다, 그러나 외적 측면에서 일 뿐이고, 한편 내적 측면에서는 그것 안에 있음이 없다. 이런 이유로 이런 인물은 저쪽 삶에서는 지옥 안에 보존된다, 그리고 거기서는 위와 마찬가지로 외적 묶임(bond)들에 의해, 특히 두려움들에 의해 모두가 보존되어진다; 그런데 이 묶음들이 느슨해질 때면,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듯, 각자는 타인을 파멸하려고 음모에 몰입한다, 그들이 지닌 생각이라고는 타인을 소멸하는 것 뿐이다. 이와 달리 천국에는 주님을 사랑함을 통하여, 그리고 이 사랑에서 파생된 서로의 사랑을 통한 내적인 결합이 있다. 거기서 외적인 묶임들이 느슨해질 때, 그들은 더욱 가깝게 결합한다; 그리고 그들이 주님으로부터 있는 신성한 있음에 더 가까이 데려와지기 때문에, 그들은 더 내면적으로 애착함 안에 있는다, 고로 자유함 안에, 결과적으로 복됨 안에, 행복함에, 환희 안에 있다.

어느 날 이었다. 이는 다섯 번째 상태를 의미한다. 이는 “…이었다”의 의미가 새로운 것을 포함함 이다로부터, 고로 새로운 상태, 여기서는 다섯 번째 상태이다.

그는 그의 일을 하려고 집에 들어 갔다. 이는 그것이 자연 평면에서 영적 선과 결합하는 일을 하려는 가운데 있었을 때를 의미한다. 이는 요셉의 표현 아래 있는 이 39장에서 취급되는 이 결합은 요셉의 표현 아래 있다는 사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러므로 “그가 그의 일을 하려고 집 안으로 갔다”란 이 결합의 일이 의미된다.

그 집에는 아무도 없었다. 이는 누구의 도움도 없이 있었다를 의미한다. 이는 이 구절에 의하여 그가 홀로 있었다가 의미되어진다는 사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리고 내적 의미에서 “요셉”에 의해 주님이 의미되고, 어떻게 그분은 그분의 내적 인간을 신성이 되게 하셨는가, 또는 내적 인간을 신성으로 만드셨는지가 의미되기 때문에, 본문의 의미는 그분은 누구의 도움도 없이 이 일을 해 내셨다 이다. 주님께서는 누구의 도움 없이 그분의 인간을 그분 자신의 힘에 의해 신성으로 만드셨다는 것은 이런 사실로부터 알는지 모른다, 즉 그분은 여호와로부터 임신되셨기 때문에 신성이 그분 안에 있으셨고, 고로 신성은 그분의 것이었다; 그러므로 그분이 세상 안에 계셨을 때, 그리고 자신 안에 있는 인간을 신성으로 만드셨을 때, 그분은 이 일을 그분 자신의 신성으로부터, 또는 그분 자신으로부터 행하셨다. 이것이 이사야서의 아래 구절에도 있다:
보스라로부터 물들인 의복들을 가지고 에돔으로부터 온 이 분은 누구신가? 그분의 의상은 훌륭하 고, 수많은 그분의 힘셈으로 행군하시는 이분은 누구이신가? 나는 포도즙틀을 홀로 밟았다; 그리고 사람들로부터 나와 함께 한 사람은 없었다. 내가 쳐다보았으나 돕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그리고 나는 어처구니가 없었고, 나를 떠받쳐준 자는 아무도 없었다; 그러므로 나의 자신의 팔이 나에게 구원을 가져다 주었다 (이. 63:1, 3, 5).
그리고 같은 예언서에서:
그분은 인간이 없음을 보셨다, 그리고 중재하는 이가 아무도 없음에 놀라워졌다; 그러므로 그분의 자신의 팔이 그분에게 구원을 가져왔다; 그분의 정의가 그분을 휘저었다. 그러므로 그분은 정의를 쇠미늘 갑옷으로 입으셨다, 그리고 구원의 투구를 그분의 머리 위에 쓰셨다 (이. 59:16, 17).

그녀는 그의 옷으로 그를 잡아 붙들었다. 이는 영적이지 않은 진리가 그 자체를 영적 진리의 최말단에 적용했음을 의미한다. 이는 보디발의 아내가 표현하는 것이 영적이지 않은 자연 평면의 진리이다로부터; 여기서 “…을 잡아 붙들다”의 의미가 자체를 적용하는 것이다로부터; 그리고 “옷”의 의미가 진리이다로부터, 여기서는 옷이 요셉의 것인 바, 영적 진리의 최말단이다, 그 이유가 여기서 “요셉”은 자연 평면에 있는 영적인 선이기 때문이다. 이 선의 진리와 더불어 영적 이지 않은 자연 평면의 진리가 결합하기를 원했다는 것은 내적 의미에 있는 시리즈로부터 분명해진다.
그러나 영적이지 않은 자연 평면의 진리가 자연 평면의 영적인 진리와 결합하기를 원한다고 말한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또는 무엇을 포함하는지가 오늘날에 비밀이 되어버린 주된 이유는 영적 진리가 무엇인지를, 그리고 영적이지 않은 자연 평면의 진리가 무엇인지를 알기를 간절히 바라는 자가 거의 없기 때문이다; 더욱이 단어 “영적”이라는 것조차 듣는 것도 거북해 하고, 설령 이런 단어의 노골적인 언급이 있었을 경우, 침울해짐이 이들의 표정을 덮기까지 한다. 이런 모습은 나에게 실제로 보여졌었다. 내 마음이 이런 용어들에 머무는 동안, 영들이 기독교국으로부터 표출되었는데, 이때 이들은 과거 그들이 살고 있었던 상태로 놓여졌다. 그때 그들은 영적 선과 진리의 단어만을 생각함에서도 우울해질 뿐만 아니라, 혐오함과 더불어 몹시 싫어함을 드러냈는 바, 말하기를 자기들은 세상에서 구토를 야기시키는 어떤 것을 내부로부터 느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에게 말하도록 나에게 주어진 것은, 이 몹시 싫어함을 야기시킨 이유는 당신들의 애착함들이 단지 지상적, 육체적, 세상적인 것들만에 고정되었던 결과로 발생된 것이다, 그 이유가 인간이 이런 것들에 침수된 상태일 때, 그는 천국에 관한 것들을 몹시 싫어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들은 말씀이 설교되는 예배하는 장소를 늘 출입하되 천국에 관한 것을 알기를 바램으로부터가 아니라, 초기 어린 시절의 때로부터 물들어 있던 어떤 다른 바램들로부터 였다. 이 정도로부터도 오늘날 기독교국의 품질이 무엇인지는 가늠될 것이다.
위와 같이 되는 원인, 일반적으로 간결하게 말하면, 작금의 기독인의 교회가 선행이 아닌 신앙만을 강조하여 설교하기 때문, 다시 말해 생활이 아닌 교리만을 강조하기 때문; 그리고 생활이 설교되지 않을 때, 인간은 선에 애착함이 없음 안으로 들어가진다; 그리고 그가 선에 애착함 안에 있지 않을 때, 그는 진리에 애착함 안에도 있지 않는다 (진리는 선을 실현하기 위해 필요한 도구이기 때문이다. 역자주). 이런 이유 때문에 대부분의 인물들이 자기들이 어린 시절로부터 익숙해져 왔던 종교적 관행의 틀을 벗어나 천국의 이런저런 모습들을 듣는 것마저도 싫어하고 만다. (다시 말해 죽으면 당연히 가야 하고 영원히 거기서 살고 있어야 한다는데, 굳이 지금부터 천국에 관해 알아야 할 필요가 있느냐 잘라 말하면서 천국에 관한 이야기를 듣는 것에서 기쁨을 가지지 않는다는 말이다. 역자주.)
그럼에도 사실인즉, 인간은 세상에서의 자신의 활동들을 수단으로 천국 속에 있는 것들을 맛봄으로 거기로 입문하게 하는 초보적 단계를 밟도록 하려고 세상에서 존재한다는 것; 그리고 이 세상에서의 인간의 삶(의 기간)은 사후 그의 삶(의 기간)에 비교하면 거의 한 순간도 못된다는 것; 그 이유는 저쪽 삶은 영원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기가 사후 살 것이다는 것을 믿는 자가 많지 않다; 따라서 천국에 속한 이야기는 그들에게 아무 소용이 없다. 어쨋거나 나는 다음 사항을 확실함을 가지고 선포한다: 인간은 죽음 후 즉시 다른 삶 안에 있는다는 것, 그리고 이 세상에서의 그의 삶이 거기서 전적으로 계속된다는 것, 게다가 삶의 품질 역시 이 세상에서의 것과 같다는 것이다. 이런 사항을 내가 주장할 수 있는 이유는 내가 그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나는 육체의 삶에서 나와 친숙해왔었던 많은 이들을 그들의 사망 후 대화를 가졌기 때문이다; 고로 생생한 경험에 의해 나는 어떤 몫(lot)이 모든 이들을 기다리는지, 즉 각자의 삶의 품질에 따른 몫이 무엇인지를 알도록 주어졌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위와 같은 품질 속에 있는 이들은 이런 것들 조차 믿지 않는다. 어쨌든 영적이지 않은 자연 평면의 진리가 자연 평면의 영적인 진리와 결합하기를 원한 것이 뜻하고 내포하는 것, 이것이 그녀가 “요셉의 옷을 잡아 그를 붙들었다”에 의해 의미되는 것에 관하여는 이어지는 아래로부터 보여질 것이다.

말하기를, 나와 함께 눕자. 이는 결합을 목적으로 하여를 의미한다. 이는 “…와 누움”의 의미가 결합이다로부터; 여기서는 결합(만)을 목적으로, 또는 결합해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의도로가 의미된다. (흔히 우리가 하는 말과 비슷한 것, 즉 그저 색욕 성취를 위해서 요셉을 붙잡은 것, 역자주)

그리고 그는 자기 옷을 그녀의 손에 놓아둔 채… 이는 그것이 이 최말단의 진리를 가져갔음을 의미한다. 이는 “그녀의 손에 놓아둠”의 의미가 그녀의 권한 아래 있음 인데, 그 이유가 “손”은 능력, 또는 힘(권능, 권한)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녀가 그의 옷을 잡아 붙들었기 때문에 여기서는 가져가버렸다가 뜻해진다; 그리고 “옷(garment, 겉옷)”의 의미가 최말단의 진리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영적이지 않은 자연 평면의 진리가 자연 평면의 영적인 진리와 결합하기를 원했다는 것, 그리고 이 결합을 싫어했다는 것, 그리고 이런 이유로 최말단의 진리가 남겨졌다는 것, 또는 최말단의 진리를 가져가게 내버려두었다는 것에 대해서는 예증을 들어 설명을 추가하지 않으면 납득될 수 없다. 그러나 우선 알아야 하는 것은, 영적이지 않은 자연 평면의 진리가 무엇인지, 그리고 자연 평면의 영적인 진리가 무엇인지 이다, 그리고 이 두 진리들은 최말단에서는 인척지간이기는 하나 결합은 없다에 대해서 이다.
이미 말한 그대로 이런 사항들은 예를 가지고 명료함을 만들어 보아야 한다. 교회 내에서도 영적이지 않은 자연 평면의 진리가 있다, 즉 선은 가난한자에게, 과부에게, 고아에게, 이렇게 불려지는 이들에게만 실시되어야 한다는 것, 그리고 그들에게 선을 행하는 것이 말씀에서 명령하는 선행이다는 것에 대해서 이다; 영적이지 않은 진리 안에 있는 이들의 경우, 그들은 (말씀에서 언급되는) 가난한 자, 과부, 고아를 글자 그대로의 의미 그 이상의 의미는 없다고 이해하고 있다. 이에 반해 영적인 진리 안에 있는 이들의 경우, 그들도 글자 그대로의 그 의미가 있는 것을 믿는다, 그러나 이 의미는 그들에게서는 마지막 순위에 해당되는데, 그 이유는 가난한 자들 부류 안에는 사악한 자도, 때로는 하느님도 사람도 두려워하지 않는 몰염치한 자도 끼어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말씀에서 “가난한 자”는 영적인 사항들에 가난한 자, 즉 자신들로 부터서는 진리와 선에 대해 아는 것이 없다고 심정으로 고백하는 자, 하여 모든 선과 진리는 값을 치룸도 없이 주님께서 수여하는 선물을 수단으로만 영적 가난을 면할 수 있다고 고백하는 자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과부”나 “고아”의 경우도 위의 가난한 자의 경우와 비슷한데, 단지 상태만 다를 뿐이다. 위의 예로부터 분명해지는 바, 과부, 가난한 자, 고아라는 명분만에서 선을 실시하는 것은 자연 평면에서 영적인 진리 안에 있는 이들에게서는 진리의 최말단에 해당된다; 그리고 이런 진리는 내면의 것들을 옷입힌 의복 같다. 또한 명백한 것은, 최말단에서의 진리의 실시는 영적이지 않은 자연 평면의 진리 안에 있는 자이든, 영적 진리 안에 있는 자이든 공히 발생된다는 것이다. 차이는 인척 관계일 뿐 결합은 아니다는 것이다.
또 다른 예로, 선은 이웃에게 실시되어야 한다를 생각해보자. 자연 평면의 영적인 진리 안에 있는 이들은 모든 이 하나하나를 이웃으로 간주한다, 그럼에도 모든 이는 제각각의 다른 중요도와 등차 안에 있다고 믿는다; 그리고 그들이 심정에서 말하는 것은, 선이 실시되어야 하는 우선 대상은 선 안에 있는 이웃들이다는 것이다; 그리고 악 안에 있는 이들 역시 이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들은 처벌되어질 때, 선이 그들에게 실시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 이유는 처벌이 악한 자로 하여금 죄지음을 단절시켜줄지 모르기 때문이다; 이런 방법들에서, 악한 자에 의해 선한 자에게 악행이 있지 않도록 하는 배려가 뒤따른다. 영적이지 않은 자연 평면의 진리 안에 있는 교회내의 사람들 역시 모든 이는 이웃이다고 믿는다; 그러나 그들은 각각의 이웃에게 있는 등차나 구분됨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자기들의 불쌍히 여김을 유발하게 하는 이웃이라면 누구이든 개의치 않고 선을 실시한다; 이리하여 때로는 악한 자가 선한 자보다 약삭 빨라 선행의 혜택을 누려 더 많은 힘을 비축해 전보다 더 큰 악행이 선한 자에게 미치는 경우도 발생한다. 위 두 경우, 즉 영적이지 않은 자연 평면의 진리와 자연 평면의 영적인 진리, 모두는 최말단의 진리 차원에서는 동일하다는 것; 그럼에도 거기서 결합은 없고 인척 관계 수준이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이웃이라는 단어와 선행을 두고 각기 다른 생각과 의미를 지녔기 때문이다.
이런 예를 가져보자. 가난한 자와 불쌍한 자가 하늘의 왕국을 상속받을 것이다고 누군가가 일반적으로 말할 경우이다. 이것은 자연 평면에서 영적인 진리에 있는 이들에게는 최말단의 진리이다, 그 이유는 그들이 내향적으로 견지하는 가난한 자란 영적으로 가난한자이기 때문, 그리고 말씀에서 가난한 자가 천국을 상속받는다 역시 영적 측면에서의 가난한 자를 뜻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영적이지 않은 자연 평면의 진리에 있는 이들은 말한다, 즉 천국을 상속받으려면 이 세상에서 가난해져야 한다는 것, 다른 이들보다 더욱 고통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재물, 지위, 세상적 기쁨들, 잡다한 혼란함, 또는 정신을 흩으러지게 하는 수단들을 두고 그것들이 인간으로 하여금 천국으로부터 물러나지게 하는 것들이다고 우겨댄다. 이런 예로부터 명백해지는 것은, 그들이 동의하는 최말단의 진리가 무엇인지, 그리고 어떤 속성으로부터 최말단의 진리가 있는지에 대한 것이다; 그럼에도 거기에도 결합은 없고 인척 관계만 있다.
이런 예를 생각해보자. 말씀에서 거룩하다고 불리우는 것들, 즉 자비석과 더불은 궤, 등불대, 향, 빵, 제단, 등등, 그리고 마찬가지로 성전, 그리고 아론의 의복, 이것이 거룩한 의복이라 불리우는데, 특히 우림과 둠밈을 포함하는 가슴받이를 가진 에봇이다. 이 거룩하다 불리우는 것들에 대해 자연 평면에서 영적인 진리 안에 있는 이들은 그것 자체가 거룩한 것이 아니다는 것, 또는 그것들 안으로 어떤 거룩함을 주입하여 거룩해진 것도 아니다는 것, 그러나 그것들은 표현적으로 거룩하다는 것, 다시 말해 그것들이 주님의 왕국 속의 천적이고 영적인 것들을, 최고 의미에서 주님 자신까지 표현하기에 거룩하다고 믿는다. 그러나 영적이지 않은 자연 평면에서의 진리 안에 있는 이들도 이런 것들이 거룩하다고 믿는다, 그러나 그 자체가 거룩하다고, 또는 거룩함을 불어넣음으로 자체 안에 거룩함이 있다고 믿는다. 이로부터 분명한 바, 두 부류 모두 최말단에서는 거룩함에 동의한다는 것, 그러나 두 부류의 진리는 자체들을 결합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이 진리와 저 진리는 다른 생각으로부터 출발하고 다른 형체 안에 있기 때문, 즉 영적 인간과 자연적일 뿐인 인간의 차이와 같기 때문이다.
또 다른 예를 가져보자. 모든 신성한 진리들은 말씀의 글자 의미로부터 확증될 수 있다는 것, 또한 지적인 것이나 합리적 평면을 수단으로 계발되는 이들과 더불어서도 확증될 수 있다에 대해서이다. 이는 영적 인간에게는 최말단의 진리이다. 이런 최말단이고 일반적인 진리는 자연적 인간 역시 인정되는 항목이다; 그러나 그는 말씀으로부터 확증될 수 있는 모든 것은 진리이다는 단순함에서 믿고 있다; 특히 그 자신이 말씀으로부터 확증했을 경우는 더욱 믿는다. 그러므로 이에 대해 위 두 부류의 인간에게 동시에 발생되는 것은, 모든 신성한 진리는 확증되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일반적 진리는 이것과 저것이 다른 관점에서 있다. 단지 자연적인 인간은 자신 안에서 확증한 것, 또는 타인에 의해 확증된 것, 무엇이든 신성한 진리이다고 믿는다; 그러나 확증은 진리 뿐만 아니라 거짓도 있을 수 있다는 것을 간과하고 있다, 그리고 확증할 때 거짓도 진리와 꼭 같게 나타난다는 것, 때로는 진리보다 더 정교할 수 있다는 것, 그 이유는 감각들의 오류가 맞장구를 치고, 천국의 빛이 아닌 세상의 빛 안에서 거짓을 표출하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분명해지는 바, 자연적 인간의 시야에서 최말단의 영적 진리의 품질이 무엇인지에 대해서이다, 즉 이것은 의복 같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의복이 벗겨질 때, 자연적 인간과 영적 인간은 전혀 일치하지 않는다, 결과적으로 영적 인간은 자신을 방어할 수단이 되는 어떤 것도 더 이상 가지고 있지 않는다. 이것이 요셉이 도망하되, 자기 겉옷을 남겨둔 채 밖을 나간 것에 의해 의미되고 있다. 자연적일 뿐인 인간은 내면의 것들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외면의 것들이 가져가짐을 당하든가, 또는 철수하든가 할 경우, 자연적 인간과 영적 인간, 이 둘은 완전히 분리되고 만다. 더 나아가 자연적 인간은 영적 인간이 최말단의 진리를 확증하는 수단들의 모든 것들을 거짓이라 부른다; 그 이유는 자연적 인간은 자기 스스로 확증한 것이 정말 그러한지를 볼 수 없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영적인 빛으로부터 있는 것들을 자연적인 빛으로부터는 보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는 말이다. 이는 질서에 정반대이다. 영적인 빛으로부터 자연적 빛 안에 있는 것을 보는 것이 질서에 따른 것이다.

그리고 도망해서 밖으로 나갔다. 이는 그것은 그 자체를 방어하기 위한 것으로 진리를 가지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이는 그가 자기 겉옷을 남겨 둔 채 “도망해서 밖으로 나감”의 의미가 분리됨이 결과되었다는 것, 또는 공통되는 어떤 것도 더 이상 있지 않았다 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겉옷”이 최말단의 진리인 바, 그 자체를 방어하는 수단이 되는 진리가 없었다.

그녀가 보았을 때… 이는 이 문제에 관하여 지각함을 의미한다. 이는 “보다”가 지각함을 의미한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 문제에 관하여란 더 이상 인정됨이 없는 최말단 진리에 의해 결과된 분리됨에 관하여서 이다, 이것이 그가 그녀의 손에 자기 옷을 남겨둔 채, 도망함에 의해 의미되어지고 있다.

그 여자는 그녀의 집에 있는 사람들에게 소리질렀다. 이는 거짓들을 의미한다. 이는 “소리침”의 의미가 거짓이다로부터; 그러므로 “소리지르는 것”은 거짓을 서술한다. “그녀의 집의 사람들”은 진짜 의미에서는 선으로부터의 진리들이나, 반대 의미에서는 악으로부터의 거짓들이다. 지금 보디발의 아내가 집의 사람들에게 말하는 것, 그리고 자기 남편에게 말하는 것 모두가 거짓들임은 그녀의 말 자체로부터 분명해진다. 자연적 진리, 여기서 보디발의 아내인데, (가장 바깥쪽 나타남에서는 얼핏 영적 진리와 결합된 듯 보였던) 최말단의 영적 진리가 찢겨져버린 이상, 이 진리가 말할 수 있는 것은 거짓 뿐이다, 또는 진리에 반대되는 것 뿐이다.

그리고 그들에게 말했다, 말하기를, 이는 간곡히 타이름을 의미한다. 여기서의 “말하다”의 의미는 간곡히 타이르다 인데, 그 이유는 내적 의미에서 “말하다”는 지각하다 이고, 또한 교통(소통, communication)하다도 뜻하기 때문; 그러므로 여기서, 그녀가 “소리쳤다”, 그 다음 그녀는 “말했다, 말하기를”라고 말해지기 때문에, 이는 간절히 소통함, 즉 자기 말을 잘 듣도록 타이름이 뜻해진다.

보라, 그가 우리에게 히브리 사람을 데려왔다. 이는 종을 의미한다. 이는 “히브리 사람”의 의미가 섬김을 서술함에서 알게 된다, 그리고 이후 구절에서 요셉이 “히브리 출신 종”이라 말해짐으로부터도 명료해진다, 또한 단순히 “종”으로부터도: 즉 17절에서, “당신이 우리에게 데려온 히브리 출신 종이 나에게 왔다”, 그리고 19절에서, “이 말들에 따라 당신의 종이 나에게 행동했다”에서도 알 수 있다. 여기서 “히브리 사람”이 종인 주된 이유는 여기서 보디발과 그의 아내에 의해 표현된 영적이지 않은 자연 평면의 진리와 선 안에 있는 이들은 요셉에 의해 표현되는 영적 진리를 종으로밖에 더 달리 간주하지 않기 때문에서 이다; 그 이유는 그들은 생활과 교리 모두에서 거꾸로된 질서 속에 있기 때문, 하여 그들에게서는 자연 평면이 지배하고 영적 평면은 섬김을 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질서에 따를 경우, 영적 진리가 통치하고 자연적 진리는 영적 진리를 섬겨야 한다; 그 이유는 영적 진리는 앞서고, 내면적이고, 더 높고, 그래서 신성에 더 가깝기 때문, 한편, 자연 평면의 진리는 뒷서고, 외면적이고, 더 낮고, 하여 신성으로부터 더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인간 안에, 그리고 교회 안에 있는 영적인 것은 천국에 비교되고, 천국이라 불리우기도 한다. 그리고 자연 평면의 것은 땅에 비교되고, 땅이라 불리우기도 한다. 그러므로 영적인 이들, 즉 자기 안에서 영적 수준의 것들이 지배하는 이들은 다른 삶에서 그들의 머리는 주님을 향하여 위쪽을 향한 모습으로 천국의 빛 안에서 나타난다, 그리고 그들의 발은 지옥을 향하여 아래쪽을 향한 채로 나타난다; 이에 반해, 자연적인 이들, 즉 자기들 안에서 자연적 수준의 것이 지배하는 이들은 대체로 천국의 빛 안에서 그들의 발은 위쪽을 향하고, 그들의 머리는 아래쪽을 향한 채로 나타난다, 물론 자신들의 빛에서는 다르게 나타난다, 그러나 그들의 빛은 악한 애착들로부터 결과하는 가짜 빛인 바, 결과적으로 몽상 안에 그들은 있는 것이다. 자연적 인간들은 영적 사항들을 자신들을 도와주는 부속품 수준으로밖에 간주하지 않는다. 이것이 이집트인들이 히브리인들을 종으로밖에 더 간주하지 않는 것에 의해 표현되어져 있다; 그 이유가 이집트인들에 의해서는 자연적 지식 안에 있는 이들, 그러므로 자연적 수준인 이들이 표현되기 때문; 그러나 히브리인들에 의해서는 교회 속에 있는 이들, 그러므로 상대적으로 영적인 이들이 의미된다. 더욱이 이집트인들은 히브리인들을 하찮은 자들, 즉 종들 수준으로 간주했다. 하여 그들은 히브리인들과 식사하는 것조차 역겨워했다 (창. 43:32); 그리고 히브리인들이 바치는 제물들 역시 이집트인들에게는 역겨웠다 (출. 8:26).

우리를 조롱하라고… 이는 그것이 일어났다(rose up)를 의미한다. 이는 내적 의미에서의 시리즈 자체로부터 알게 된다, 또한 “조롱하다”가 간절함과 더불어 말해질 경우, 일어나다가 의미됨에서 알게 된다.

그는 나와 눕자고 나에게 왔다. 이는 자연 평면의 영적인 진리가 자체를 결합하기를 바랬다를 의미한다. 여기서 “오다”의 의미는 바라다 이다로부터 알게 되는데, 그 이유는 목적을 가지고 오는 자는 바라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눕다”의 의미가 자체를 결합하는 것이다로부터도 알게 된다.

그리고 나는 큰 소리로 외쳤다. 이는 혐오함이 있었다를 의미한다. 이는 “외치다”가 거짓을 말하다 이다로부터; 그리고 현재의 경우, “외치다”는 어떤 거짓을 말하는 것이 내포되고 있다, 즉 그녀는 도움을 청하려고 “집의 사람들에게 외쳤다” 안에 이미 거짓이 포함되었다, 그리고 여기서 “그녀는 큰 소리로 외쳤다”라고 말해져 앞의 자신이 말한 것에 혐오를 느꼈던 것이다.

그가 …듣게 되자. 이는 그것이 지각되어졌 때를 의미한다. 이는 “들음”이 순종함을, 또한 지각함을 의미함으로부터 알게 된다. 이것이 순종을 뜻함에 대하여는 이미 살핀 바 있다; 이것이 지각함도 뜻하는 것은 귀의 기능 자체, 고로 들음의 본성으로부터 분명해진다. 귀의 기능은 타인의 말을 받는 것, 그리고 받은 것을 공동의 감각 기관(sensory)에 운반하는데, 이는 감각 기관으로 다른 인물이 생각하는 것을 지각해보도록 하기 위함, 고로 “듣다”는 결과적으로 지각하다를 위해서인 셈이다. 들음의 본성은 누군가가 말하는 것을 자신의 생각으로부터 또 다른 생각 안으로 옮겨지게 하는 것, 그리고 생각으로부터 그의 의지 안으로, 그리고 의지로부터 행동 안으로 옮겨지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듣다”는 순종하다 이다. 따라서 두 직능, 즉 순종과 지각은 들음에 잘 어울린다. 언어 자체에서, “들음(hearing)”과 “귀를 기울임(listening, hearkening)”은 구별되는데, 전자는 지각하는 것에, 후자는 순종하는 것에 어울린다. 이 두 직능들이 들음에 속하는 이유는 인간은 이 직능을 수단으로 하지 않고는 자기 생각 속의 것을, 그리고 자기 의지 속의 것을 타인과 교통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인간을 설득함에 들음의 기능은 강력한 도구이고, 추론들을 수단으로 자기의 생각, 자기가 뜻하는 바를 타인들로 하여금 행동하게, 순종하게 유도할 수 있다. 위에 살핀 바로부터 분명해지는 것은, 원을 이루는 교통함이 결과된다는 것, 즉 의지로부터 생각 안으로, 그리고 말(언어) 안으로; 그리고 말함으로부터 귀를 통하여 타인의 생각과 의지 안으로 이다. 그러므로 웅대한 사람 안에서 청각에, 또는 귀에 상응하는 영들이나 천사들은 지각함 뿐만 아니라 순종함이다. 그들이 순종함이다는 것은 앞에서 살폈다; 그들이 순종들이기 때문에 지각들이다, 그 이유는 이것이 다른 것도 내포하기 때문이다.

내가 내 소리를 더 높혀서 외쳤다. 이는 큰 혐오임을 의미한다. 이는 “큰 소리로 외치다”가 혐오함이다로부터, 여기서는 “소리를 높혀 외침”인 바, 큰 혐오함을 표시한다.

그는 내 곁에 자기 옷을 남겼다. 이는 접근했다에 대한 증거이다를 의미한다. 이는 “옷을 남김”이 최말단 진리를 가져감이다로부터; 그러나 여기서는 증거인데, 그 이유는 그녀의 손에 있는 옷과 그녀가 보여준 옷(즉 최말단 진리를 수단으로 자체를 결합하기를 바랬다를 입증했다)은 접근이 있었다에 대한 증거이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살핀 의미는 여하튼 거리가 좀 떨어진 듯 여겨질지 모른다, 그러나 여전히 그녀가 말했던 것 안에 포함되어 있다.

그리고 도망해서 밖으로 나갔다. 이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그 자체 분리되었음을 의미한다. 이는 “도망함과 밖으로 나감”이 자체를 분리함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런데 보디발의 아내가 집의 사람들에게 요셉에 관하여 이야기한 것은 거짓들이다; 즉 이를 내적 의미로 바꾸어 말해 보면, 영적이지 않은 자연 평면의 진리가 자연 평면의 영적인 진리에 관해 이야기를 한 것, 또는 영적이지 않은 자연적 수준의 인간이 영적 자연적 수준의 인간에 관해서 이야기를 한 것이다.

16-18절. 그 여자는 그의 주인이 그의 집에 올 때까지 그의 옷을 자기 곁에 놓아두었다. 17 그리고 그 여자는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 말하기를, 당신이 우리에게 데리고 온 히브리 종이 나를 희롱하려고 나에게 왔다. 18 그래서 내가 내 소리를 높혀서 외쳤더니 그가 도망했는데 내 곁에 자기 옷을 남겼다.

그리고 그 여자는 자기 곁에 그의 옷을 놓아두었다. 이는 그것은 최말단의 진리를 유지했음을 의미한다. 이는 “자기 곁에 놓아둠”의 의미가 유지하다(retain) 이다로부터; 그리고 “옷”의 의미가 최말단의 진리이다로부터, 이 진리가 가져가버림을 당한 셈인 바, 이제 영적 인간은 자연적일 뿐인 인간들에 맞서 자신을 방어할 어떤 것도 더 이상 없게 되었다, 그리고 이 사건에서 피해가 그에게 가해졌다. 이때 영적 인간이 무엇을 말하든, 자연적일 뿐인 인간은 자기들은 지각하지 못한다, 또한 그것은 그렇지 않다 라고 말할 뿐이다. 그리고 내적, 영적 사항에 관한 언급이 있을 경우, 그들은 그것을 (사기친다 라고) 비웃고, 기껏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해도 신비적(mystical)이다고 일컬을 뿐이다; 그러므로 그 둘 사이의 모든 결합은 깨어지고, 이렇게 깨어질 때, 영적 인간은 자연적일 뿐인 이들 사이에서 힘든 것들을 견뎌야 한다, 이것이 보디발의 아내가 요셉의 옷을 증거로 남편에게 제시한 이후 요셉이 감옥이 내던져짐을 당함에 의해 표현되어져 있다.

그의 주인이 그의 집에 올 때까지. 이는 그것이 자연적 선과 소통할런지 모른다를 의미한다. 이는 “주인”의 의미가 영적이지 않은 자연 평면의 선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집(house)”이 내적 의미에서 자연적 (수준의) 마음인데, 그 이유는 자연적 (수준의) 마음은 합리적 (수준의) 마음과 더불어 집의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이 집 안에 있는 남편은 선이고, 아내는 진리이고, 딸들과 아들들은 선과 진리에 애착함들이다, 그리고 선과 진리가 부모되는 남편과 아내로부터 파생되어진다; 여종들과 남종들은 (자연적 수준의) 기쁨(pleasure)들과 기억 속의 지식들이고, 이것이 섬김과 확증함을 위해 사용된다. 그러므로 여기서 “자기 주인이 자기 집에 올 때까지”에 의해서는 자연적 선이 그것의 거주지에 올 때까지가 의미되고, 이곳은 진리가 선과 결합함이 있는 곳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거짓이 이것이 진리이다 라고 선을 설득하고 있는데, 영적이지 않은 자연 평면의 선은 쉽게 설득당하는 결점이 있다. “그의(요셉의) 주인”이라고 말해지는데, 영적이지 않은 자연 평면은 영적인 것을 종으로서 생각하기 때문이다.
인간 속의 자연적, 합리적 마음이 “집”이라 불리우는 것은 아래 구절로도 분명해진다:
불결한 영이 사람으로부터 나갔을 때, 그는 쉴 곳을 찾으려 마른 장소들을 배회한다; 그리고 그가 그것을 발견하지 못하면, 그는 말하기를, 나는 내가 나왔던 내 집으로 돌아갈 것이다. 그리고 돌아와서 그것이 말끔히 청소되고 곱게 장식된 것을 발견하면, 그때 그는 나가서 자신보다 더 악한 일곱 영들을 데리고 온다; 그리고 그들은 거기에 들어가서 거주한다 (눅. 11:24-26);
위 구절에서 “집”은 자연 수준의 마음을 표시한다; 이 집이 “말끔히 청소되고 곱게 장식된 집”이라 말해지는데, 이는 자연적 마음 안에 남편과 아내인 선들과 진리들이 없을 때, 그리고 아들들과 딸들인 선과 진리에 애착함이 없을 때, 그리고 남종들과 여종들인 선과 진리를 확증함이 없을 때이다. 인간 자신이 “집”이다, 그 이유는 합리적 마음과 자연적 마음이 인간을 만들기 때문이다; 이런 것들 없이, 즉 선들과 진리들과 애착들과 이런 애착들을 섬기는 것들 없이 인간이 있을 때, 그는 인간이 아니고 짐승일 뿐이다.
같은 복음서에서 인간의 마음이 “집”에 의해 뜻해진다:
자체에 맞서 갈라지는 모든 왕국은 황폐해진다, 그리고 집이 집 위에 떨어진다 (눅. 11:17).
마가복음서에서:
만일 왕국이 자체를 향하여 갈라진다면, 이 왕국은 서있을 수 없다. 그리고 만일 집이 자체에 맞서 갈라진다면, 이 집은 서있을 수 없다. 이 집으로 들어간 후, 먼저 힘센 자를 묶지 않으면 힘센 자의 그릇을 강탈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그 다음, 그는 이 집을 털 것이다
(막. 3:24, 25, 27).
위에서 “왕국”은 진리를 의미한다, 그리고 “집”에 의해서는 선이 의미된다; “집”이 탁월한 의미로 선을 의미하는 구절이 아래에 있다.
누가복음서에서:
만일 집주인이 도둑이 몇 시에 올 것인지를 알았다면, 그는 적어도 경계했었을 것이다, 그리고 자기 집이 부셔짐을 당하게 허용하지 않았을 것이다 (눅. 12:39).
다시:
이 후로부터 한 집 안에 셋이 둘에, 둘이 셋에 맞서 [갈라진] 다섯이 있을 것이다. 아버지는 아들에 맞서, 아들은 아버지에 맞서, 어머니는 딸에 맞서, 그리고 딸은 어머니에 맞서 갈라질 것이다 (눅. 12:52, 53);
위에서 취급된 주제는 말씀의 내적, 또는 영적 의미가 열려져 있은 이후, (이 의미를 깨달은) 교회인들이 부닥쳐야 할 영적 전투들이다. “집”은 인간, 또는 그의 마음을 표시한다; “아버지”, “어머니”, “아들”, 그리고 “딸”은 그것들의 애착들과 더불은 선들과 진리들이다, 그리고 반대적 의미에서는 그것들의 애착들과 더불은 악들과 거짓들이다; 이로부터, 이것과 더불어 전투가 있다.
주님께서 그분의 제자들에게 명령하신다:
너희가 어느 집이든지 들어가거든, 먼저 말하라, 이 집에 평화가 있으라; 그리고 만일 평화의 아들이 거기 있다면, 너희의 평화가 거기서 쉴 것이다; 그러나 만일 아니다면, 네게로 되돌아 올 것이다; 그러나 같은 집에 머물러라; 그들이 가지는 것을 먹고 마시라; 집으로부터 집으로 건너가지 말라 (눅. 10:5-7);
이는 그들이 선 자체 안에, 즉 주님을 사랑함과 이웃을 향한 선행의 선에 머물러야 함을, 그리고 어떤 다른 것으로 건너가서는 안됨을 표현했다.

그리고 그 여자는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는 거짓을 말함을 의미한다. 이는 이어지는 구절로부터 분명해진다; 그 이유가 그녀가 남편에게 말한 것은 거짓들이기 때문이다.

말하기를, 당신이 우리에게 데려온 히브리 종이 나에게 왔다. 이는 그 종을 의미한다. 이는 앞에서 말해진 것으로부터 알게 된다; 여기서 “요셉”인 이 종에 의해 영적인 진리와 선이 뜻해진다, 그리고 이 진리와 선이 영적이지 않은 자연 평면에서는 종으로서 나타나고 있다. 예를 들면, 영적 진리와 선이 바라는 것은, 인간은 타인 위에 군림함에서 기쁨을 취하려 해서는 안된다는 것, 그러나 일반적, 특수적, 세부적 측면에서 이든지 사회나 나라에 유익한 것으로 보답하려는 것을 바래야 한다는 것, 고로 자신이 지닌 권한의 선용 안에서 기쁨을 취해야 한다는 것이다. 자연적일 뿐인 인간은 이 기쁨이 무엇인지에 무지하다, 게다가 이런 기쁨의 존재를 부정한다. 이 인간도 위선적이지만 어쨌든 똑같은 것을 말할 수는 있다; 그럼에도 결국 그는 자신이 앉은 지위나 명성으로부터 자기를 주인으로 만들므로 기쁨을 만든다; 사회에 관련한 고위직도 자신의 종이나 다름없이 여겨 앞의 경우와 별반 차이가 없다. 그 이유가 그의 가치 평가 기준은 자기를 좋아하는 만큼에 따라서 이기 때문이다. 다른 예를 생각해보자. 만일 사용(use)과 목적(end)이 어떤 것을 두고 영적인 것으로,
또는 영적이지 않은 것으로 만든다고 말해진다면, 즉 공동의 선, 교회, 그리고 하느님의 왕국을 위한 사용과 목적은 그것을 영적이 되게 만든다는 것, 그러나 자아를 위한 사용과 목적이 앞의 사용과 목적을 압도한다면, 그것은 영적이지 않게 만든다는 것, 이것을 자연적 인간은 참으로 입으로는 인정할 수 있으나, 심정으로는 아니다; 배움에서 주입된 이해함으로부터 입을 가지고, 그러나 이해함으로부터 심정을 가지고가 아닐 경우, 이는 악한 애착들에 의해 파괴되어진다. 이럴 때 그는 자아를 위한 사용과 목적을 주인으로 만들고, 공동의 선, 교회, 하느님의 왕국을 위한 사용과 목적을 종으로 만든다. 되려 그는 자기 심정에서 말한다, 누가 이와 달리 할 수 있단 말인가?
한마디로 자연적 인간은 자신으로부터 분리된다고 간주하는 것은 무엇이든 완전히 쓸모 없는 것이고 거절해야 하는 것으로 여긴다, 그래서 그는 자신과 결합하는 것으로 간주되는 것은 무엇이든 가치있는 것으로 여기고 받아들인다; 그는 자신이 알든 모르든 선 안에 있는 모든 이는 자신과 결합하는 것으로 간주하는 것, 또는 자신이 알든 모르든 악 안에 있는 모든 이는 자신과 분리하는 것으로 간주하는 것이 영적이다는 것, 이것을 자연적 인간은 모르고 있고, 알기를 원하지도 않는다; 사실 이때 천국에 있는 것들은 결합하고 지옥에 있는 것들은 분리된다. 그러나 자연적 인간은 이로부터 기쁨을 느끼지 못하는데 (그 이유는 그가 영적 유입을 받지 못하기 때문인데), 이 때의 그는 영적 유입을 완전히 무가치한 것, 노예적인 것으로 간주한다; 고로 그가 육체의 감각들과 자아 사랑과 세상 사랑 속의 악한 애착을 통하여 흘러 들어 그가 느끼는 쾌락과 비교해볼 때 아무 소용이 없는 것으로 간주한다. 하지만 실상 이런 쾌락은 죽어 있다, 그 이유는 이것이 지옥으로부터 이기 때문이다; 한편 영적 유입으로부터 기쁨은 살아 있다, 그 이유는 이것이 주님으로부터 천국을 통하여 있기 때문이다.

나를 희롱하려고. 이는 그것이 일어났음을 의미한다. 조롱함의 의미가 일어나다 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가 큰소리를 내어 외쳤다. 이는 큰 혐오가 지각되어졌을 때를 의미한다. 이는 “큰소리를 내어 외치다”가 큰 혐오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는 내 곁에 자기 옷을 남겼다. 이는 증거를 의미한다. 이는 “그녀 곁에 자기 옷을 남기다”의 의미가 접근을 시도했다는 증거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내적 의미에서 “옷(garment)”은 진리를 의미하고, “옷을 남김”은 최말단 진리를 가져감을 의미한다. 이것이 여기서는 접근을 시도했다는 증거를 의미하는 이유는 최말단 진리, 이것이 남기거나 가져갔을 때, 영적 인간에 맞서는 자연적 인간에게는 증거가 된다. 자연적 인간은 자기에게 남긴 것을 두고 자신이 영적 인간과 결합되기라도 한 듯 치부하지만, 실상은 결합된 것이 아니다; 그 이유가 영적 인간이 최말단 진리를 펼쳐 놓을 때, 닮지 않았음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하여는 앞의 예증이 유익할 것이다. 자연적 인간, 뿐만 아니라 영적 인간도 가난한 자, 과부, 고아에게 도움이 필요하다고 입을 모은다; 그러나 영적 인간의 경우, 악 안에 있는 가난한자, 과부, 고아이다면 도와주어서는 안된다는 것, 더욱이 자신이 궁핍한 자라고 일컬으면서, 실상 부자인 자에게는 도움이 필요 없다고 단정한다; 그 이유는 이런 부류들은 그런 자신의 처지를 빌미로 사기치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는 말씀에서 말하는 “과부”나 “고아”, “가난한 자”는 영적 측면에서 그런 처지에 있는 자를 뜻한다고 결론 맺는다. 그러나 자연적 인간의 경우, 도움은 가난하다고, 고아라고, 과부라고 불리우는 자들에게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말씀에서 말하는 이들 역시 이런 자들을 두고 하신 말씀이다고 생각한다. 그는 도움받는 그들이 악한 자이든, 선한 자이든 개의치 않고, 더구나 그것이 영적으로 그렇게 있는지의 여부도 알고 싶어 하지도 않는다. 이로부터 명백한 바, 가난한 자, 고아, 과부를 도와야 한다는 최말단 진리는 두 부류의 인간 모두에게 똑같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행위를 벗겨놓고 볼 때, 이것은 비슷한 것이 없다. 비슷한 것이 없어, 분리됨이 야기될 때, 이것은 자연적 인간에게 영적 인간이 접근을 시도했다는 증거의 빌미를 제공한다; 이를 가지고 자연적 인간은 자신을 방어할 어떤 것도 더 이상 없는 영적 인간에 맞서 거짓된 것을 퍼붓는다. 이런 견지로부터서도 “옷”이 증거, 증명을 의미함을 알 수 있다.
예를 하나 더 생각해보자. 영적 인간 뿐 아니라 자연적 인간도 도움은 이웃에게 주어져야 한다, 그리고 모든 이는 이웃이다고 말한다. 영적 인간의 경우, 개개의 인물은 각기 다른 등차와 관점에서 있기에 도움을 주는 것도 각기 다르게 제공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악한 인물의 경우, 그가 자기도 이웃이라 일컫는다 해서 그에게 도움을 주는 것은 이웃에게 해를 입히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자연적 인간의 경우, 이웃에게 도움을 제공해야 한다는 것, 모든 이는 이웃이다에 대해서는 영적 인간과 결합된 상태이다. 그러나 자기를 좋아하는 자는 그가 악하든 선하든 관계 없이 이웃이라 생각한다. 이런 예로부터 분명한 바, 두 인간은 최말단 진리에서는 외관적으로 결합되어 있다, 그럼에도 결합은 없다; 그리고 이런 사항들이 설명될 때, 분리됨이 있다. 이러면, 이 최말단 진리는 자연적 인간에게 영적 인간이 자기를 비웃는 듯 여기면서 영적 인간에 맞서기 위한 증거가 된다.

그리고 도망했다. 이는 그때 그 자체 분리되었음을 의미한다. 이는 “(밖으로) 도망함”의 의미가 자체를 분리하는 것이다로부터; 그리고 결과적으로 영적 인간 자체를 방어할 진리가 없게 된 것이다.

19, 20절 그의 주인이 그의 아내의 말들을 들었을 때 이었다, 즉 그 여자가 그에게 말했는 바, 말하기를, 당신의 종이 나에게 했다는 말에 따라 그의 분노가 점화되었다. 20 그리고 요셉의 주인은 그를 잡아갔다, 그리고 그를 감옥에 처넣었는데, 이곳은 왕이 묶은 자들을 가두는 곳이었다. 그리고 그는 거기 감옥에서 있었다.

…이었다. 이는 새로운 상태를 의미한다. “ …이었다, 또는 …되었다”란 새로운 상태, 또는 새로운 것을 포함하는 말이다, 여기서는 영적인 자연 평면의 상태를 의미한다. 이 상태가 진리의 최말단이 요셉으로부터 가져가버려짐을 당한 후, 그리하여 영적이지 않은 자연 평면의 진리와 어떤 결합도 있지 않은 이후, 요셉에 의해 표현되어지고 있다.

그의 주인은 그의 아내의 말들을 들었을 때, 즉 그녀가 그에게 말한 것을 (들었을 때). 이는 진리 같이 나타난 거짓과 소통함을 의미한다. 이는 “말들을 들음”의 의미가 소통함이다로부터, 그 이유가 “들음”은 지각하는 것, 고로 소통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내”의 의미가 영적이지 않은 자연 평면의 진리인데, 여기서는 거짓을 의미한다. 거짓 자체가 말함이 그녀가 그에게 말한 말들에 의해 의미되어 있다. 거짓이 소통함이 여기서 “그의 주인”에 의해 된 것, 즉 영적이지 않은 자연 평면의 선과 더불어 있다. 거짓이 진리로서 그에게 나타났다는 것이 아래로부터 분명해진다.
여기서 취급된 주제는 영적이지 않은 자연 평면의 선은 거짓이 진리로서 둔갑했음에도 쉽게 설복된다는 것이다. 영적이지 않은 자연 평면의 선이 무엇인지, 그 선의 품질이 무엇인지, 또는 이 선 안에 있는 이들이 누구이며 어떤 품질인지에 대하여는 앞에서 살핀 바 있다, 즉 유전적인 것으로부터, 고로 자신의 의지와는 관계 없이 태생적으로 상냥하고 호의적인 이들은 선인 것을 자연 평면으로부터 행하고 종교로부터는 아니다. 다시 말해 자연적 수준으로부터와 종교 수준으로부터 선을 행하는 것은 아주 다르다는 말이다. 이 둘은 세상에서 인간에 의해 식별되어질 수 없는데, 그 이유는 인간들이 내면적인 것들에 친숙해 있지 않기 때문이나, 다른 삶에서는 이 둘은 완벽하게 식별된다; 그 이유가 다른 삶에서는 내면들이 열린 채로 놓여 있기 때문이다, 즉 생각들, 의도들, 목적들이 각 자신들을 명명백백하게 하는 바, 마치 청명한 날에 물체를 식별하는 것과 같다.
이렇기 때문에, (주님께서) 영적이지 않은 선 안에 있는 이들, 그리고 영적인 선 안에 있는 이들의 품질을 나로 알도록 해주신 적이 있었다. 영적이지 않은 자연 평면의 선 안에 있는 이들은 자신들을 누구에게나 설득당해지게 내버려두어서, 악한 자에게도 우습게 자신을 내놓고 있다; 그 이유가 악령과 악귀가 누군가의 악한 애착들 안으로 들어갈 때, 이것들은 그 누군가의 생명 안에, 또는 그 생명으로부터의 기쁨 안에 있기 때문, 그리고 그것들이 악한 애착들로부터의 생명 안에 들어갔을 때, 그것들은 그를 갖가지의 악들로 꾀는 바, 그때 거짓을 진리라고 설득한다. 이런 짓을 그것들은 영적이지 않은 자연 평면의 선 안에 있는 이들에게 쉽게 해버린다; 그러나 영적 선 안에 있는 이들에게는 그렇게 할 수 없다, 그 이유는 이들은 악하고 거짓인 것을 안쪽으로부터 알기 때문이다. 그 이유인즉, 영적인 선 안에 있는 이들이 세상에서 살았을 때, 그들은 교리로부터 가르침들을 받았고, 이 교리와 더불어 그들은 내적 인간에 감화되었던 결과, 그들에게는 천국이 그의 작전을 펼칠 수 있는 평면(바탕)이 마련되어 있기 때문; 그 반면, 영적이지 않은 자연 평면의 선 안에 있는 이들은 세상에서 살았을 때, 그들은 내적 인간에 감화되는 교리로부터의 가르침을 받지 않았던 결과, 그들에게는 천국이 작동할 수 있는 바탕이 없기 때문이다. 물론 이들에게도 천국으로부터 흘러드는 것은 두 부류 모두에게 있지만 후자의 경우는 받지 않는다; 그 이유는 이 흐름이 자연적 인간에게 당도할 때, 악령, 내지 악한 패거리들이 즉시 그것을 가져가버리기 때문이다. 그 방법은 질식시키든지, 뒤집든지, 헐뜯든지 등등이다. (씨뿌리는 자의 비유를 참고로 더 생각해보아도 좋을지 모른다 역자주.)
그러므로 자연적 선 만에 있는 이들은 다른 삶에서 힘든 것들을 견뎌내야 한다. 그래서 때로는 자기들은 지옥적인 것들 사이에 있다고 불평을 한다, 그렇지만 다른 이들 같이 선한 것을 실행하고 있다. 이때 그들에게 말해지는 바, 당신들은 이성이 결핍된 온순한 동물의 수준에서 선한 것을 실행한 것이다, 교회의 어떤 선이나 진리에 관한 것을 갈망해왔던 것은 아니다는 것이다; 이렇기 때문에 그들은 내적 인간 안에 선과 진리를 받는 그릇을 가진 것은 아니어서, 그들은 천사들이 방어해주지 못한다; 그리고 그들은 선의 나타남 아래 많은 악들을 행했었다.

말하기를, 당신의 종이 나에게 했다는 말에 따라. 이는 확증을 의미한다. 이는 그의 아내가 진리를 말했다고 그가 믿었던 것, 이 믿음이 그에게 확증을 갖게 했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 이유가 그를 설득한 그의 아내는 영적이지 않은 자연 평면의 진리인데, 여기서는 거짓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영적이지 않은 자연 평면의 선은 거짓에 의해 쉽게 자체를 설득되게 허용하는데 이는 이미 살폈다. 잘 알려진 바, 거짓들은 진리들로 통째로 나타나도록 확증되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이교로부터 분명해진다, 그들의 세부 사항들, 비록 거짓들이라 해도, 그럼에도 이교 안에 있는 이들에게는 확증함을 수단으로 진리들로서 나타난다. 이는 종교를 가지지 않은 이들로부터 분명하다, 그들은 교회로부터의 것들에 맞서 자신들을 철저히 이렇게 확증한다: 그들은 교회가 평범한 사람들을 어떤 억제 안에 붙들어 두려고 하는 것일 뿐에서 발상된 관념(의향, notion)을 두고서도 진리로서 보고 있다는 것; 또한 자연계가 모든 것의 모두이다 (영계는 없다)는 것; 하여 신성은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어 어떤 것이라 말하기도 힘들다는 것; 인간은 짐승 같이 죽는다는 것 등등이다. 이런 견해, 또는 이와 비슷한 견해들에 주목하는 영적이지 않은 자연 평면의 선 안에 있는 이들은 여느 사람보다 더욱 쉽게 설득되고 거짓을 진리로 확증하고 만다. 그들은 안쪽에 거울이 없고, 오직 바깥쪽에만 있다, 고로 거짓들이 실재인 것들로 나타난다.

그의 분노가 점화되었다. 이는 영적 진리를 혐오함을 의미한다. 이는 “분노”의 의미가 선행의 선으로부터 물러서는 것, 고로 혐오함, 여기서는 영적 진리를 혐오함인데, 그 이유는 이것이 여기서 취급되는 주제이기 때문이다. “분노”가 혐오를 표시하는 이유는 인간이 누군가에 맞서 분노하여 있는 한, 그는 자기 마음을 상대로부터 비켜 있게 하기 때문이다; 분노가 야기되는 이유는 누군가가 자기의 사랑에 반대되기 때문에서 이다. 이 사랑을 수단으로 누군가와 결합이 있으나, 이 결합이 깨어질 때, 인간은 성냄을 발휘한다, 마치 자기 삶의 기쁨을 상실해 버리기라도 한 듯 하여 있다는 말이다. 이리하여 잃었다고 여겨 생긴 슬픔이 비탄으로 악화되고, 이 비탄은 분노로 돌변한다.

그리고 요셉의 주인은 그를 잡아갔다. 이는 자연 평면으로부터의 시험을 의미한다. 이는 이어지는 사항으로부터 분명해진다, 즉 요셉에 관한 것, 그가 감옥에 넣어졌다는 것, 이 상황은 내적 의미에서 자연 평면에서 영적 선의 시험을 묘사하고 있다; 그리고 이런 말들, “요셉의 주인이 그를 잡아갔다”도 감옥에 넣어짐과 마찬가지로 시험을 의미한다. 시험들에는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진리들 측면, 또 하나는 선들 측면에서 이다. 진리들 측면에서의 시험들은 영들에 의해 야기되나, 선들 측면에서의 시험들은 악귀들(genii)에 의해서 이다. 다른 삶에서 영들과 악귀들의 구별은 영들의 경우는 마음의 지적 부분 안으로 들어가 행동한다, 따라서 신앙 속에 있는 것들에서 행동한다; 그러나 악귀들은 의지 부분으로 들어가는 바, 사랑으로부터 있는 것들 안으로 들어가 행동하는 것으로 구별이 가능해진다. 영들은 자신들이 보이도록 표출하고, 또한 말을 수단으로 명백히 한다; 그러나 악귀들은 자신들이 보여지지 않게 하고 있다, 그리고 유입을 수단으로 바램들과 욕망들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서는 자신들을 명백히 하지 않는다. 다른 삶에서 이 둘은 분리된 상태를 유지한다, 즉 악 또는 지옥의 영은 앞쪽 그리고 더 낮은 영역들의 땅 아래 양쪽 측면들에서 나타난다; 한편 악 또는 지옥의 악귀들은 뒤쪽 부분 그리고 등 뒤 거기 땅 아래 깊은 곳에서 나타난다. 이 말한 그대로, 진리들 측면의 시험들은 악령들에 의해 결과되고, 선 측면의 시험들은 악귀들에 의해 결과된다. 이어지는 페이지에서 취급되는 시험들은 악령들에 의해 결과되는 것들이다, 고로 이것은 선을 향하여 거짓을 말함에 관련되어 결과된다. 이 시험들은 악귀에 의한 시험에 비해 온순하다, 그리고 이것들이 (시험에서) 첫 번째로 발생한다.

그리고 그를 감옥에 처넣었다. 이는 선을 향하여 거짓을 말함에 관하여를 의미한다. 이는 “그를 감옥에 처넣고 거기에 억류해놓음”의 의미가 선을 향하여 거짓을 말함 측면에서의 시험들에 놓여짐이다로부터 알게 되는데, 아래에서 살핀다; 그러나 시험들에 관한 뭔가를 우선 말해야 할 것 같다. 오늘날 기독교 세계에서 시험들이 어디서(어찌하여) 오는지를 아는 자가 거의 없다. 시험들을 수행하는 당사자가 지닌 시험에 대한 믿음은, 그것들은 인간 내부에 있는 악들로부터 발생하는 고통들이다는 것, 이것이 처음에는 불편한 심기를 만들고, 그 다음 흥분되고, 마지막으로 자기를 괴롭힌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가 이런 믿음을 가지는 이유는 시험들이 악령들에 의해 결과된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 그리고 그가 세상에 있는 동안 그는 영들의 집단 안에 있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 그리고 그는 자기와 함께 하는 어떤 영이 있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 한편 그의 내면 측면에서는 영들과 천사들의 사회 안에 계속적으로 있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이다.
시험들에 주목하면, 시험은 인간이 거듭남의 행동 안에 있을 때 거행된다; 그 이유가 시험을 수행하지 않으면 거듭날 자는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이때 시험은 자기 주변에 있는 악령들로부터 발생한다. 이때 그는 자신이 존재하는 악의 상태 안으로, 즉 그의 자기 자신인 그 [생명] 자체의 상태에 놓여진다; 그리고 그가 이 상태 안으로 올 때, 악 또는 지옥의 영들이 그를 에워싼다, 그리고 그것들이 그가 천사들에 의해 내향적으로 보호됨을 지각할 때, 악령들은 당사자가 생각해왔었던 거짓들을 흥분시킨다, 그리고 그가 저질러왔던 악들도 흥분시킨다; 그러나 그의 내부로부터 천사들은 그를 방어해준다. 이 전투가 시험으로서 인간 안에서 지각되어진다; 그러나 정작 당사자는 이에 대해 매우 희미한 수준이어서 그는 자신이 단지 흥분되었다는 정도밖에 더 달리 알지 못한다; 게다가 만일 인간 당사자가 유입(influx)에 관하여 믿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면, 그는 완전히 희미한 상태에 있는 바, 그는 악령들과 천사들이 경합하는 것에 관하여는 수 천 분의 일도 거의 지각하지 못한다. 어쨌든 그럼에도 전투는 인간과 그의 영원한 구원을 위하여 치뤄지고 있다, 그리고 이것은 인간 자신으로부터 싸워진다; 그 이유가 전투는 인간 안에 있는 것들과 그것에 관하여 치뤄지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에 대해 (주님께서) 나로 극도의 확실성과 더불어 알게 해주신 적이 있었다. 나는 전투를 들었었다, 나는 유입을 지각했었다, 나는 영들과 천사들을 보았었다, 그리고 그때 후에 나는 이 주제에 관해 그들과 대화했다.
이미 말한 대로, 시험들은 인간이 영적으로 되어가는 때에 주로 거행된다; 그 이유가 그때서야 그는 교리의 진리들을 영적으로 납득하기 때문이다. 물론 인간은 이것을 자주 알아채지 못하나, 그와 더불은 천사들은 여전히 그의 자연적인 것들 안에서 영적인 것을 보고 있다; 그 이유가 그의 내면들이 그때 천국을 향하여 열리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거듭남을 지속해가는 사람은 세상에서 그의 삶의 뒤를 따라 천사들 사이에 있는 바, 그는 이전에 자연적인 것으로 나타났던 영적인 것들을 지각하는 바, 그는 양쪽 (세상)을 보는 셈이다. 인간이 이런 상태 안으로 와 있고, 시험 안에 있으면, 즉 그가 악령들의 공격을 받고 있으면, 그에게는 천사들이 작전을 펼칠 수 있는 평면(바탕, plane))을 지니고 있어, 천사가 그를 위해 방어 작전을 수행할 수 있다. 그 이유가 방어 작전이 그와 더불어 있는 영적인 것 안으로 흘러 들고, 이로부터 자연 평면으로도 흐르기 때문이다.
최말단의 진리가 철회되었을 때, 그러므로 인간이 자연 평면에 속한 이들에 맞서 자신을 방어할 어떤 것이 없을 때, 이때 그는 시험들 안으로 와진다, 그리고 악령들, 단지 자연적일 뿐인 이들에 의해, 선을 향하여 거짓들을 말함으로 기소되어진다. 예를 들어 생각해보자: 즉 이웃에게 은혜를 베풀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그렇게 말했고, 이를 행동으로 입증했을 경우에 대해서이다. 그럼에도 지금 이웃에 의해 뜻해지는 것은 선과 진리 안에 있는 이들만이지, 악과 거짓 안에 있고, 이를 고치지 못하는 이들은 아니다; 결과적으로 그는 더 이상 기꺼이 악한 자에게 은혜를 베풀지 않는다, 또는 그가 그에게 은혜를 베푸는 것은 그의 악행의 수정을 위하여 그가 처벌되기를 바란다. 그리고 그의 이웃이 악을 피하게 할 목적을 위해 그가 거짓된 것을 생각하고 말한 책임을 그에게 묻고, 그가 말하는 대로는 생각하지 않는다.
다른 예를 생각해보자. 인간이 영적 인간으로 되어질 때, 그는 자신의 재물을 수도원이나 교회에 주면 그것이 거룩하고 경건히 쓰여진다고를 더 이상 믿지 않는다; 그리고 그가 영적 인간으로 되기 이전, 그는 이런 기부가 거룩하고 경건하였다고 생각했는데, 이런 것들이 그를 거짓말로 채웠다; 그래서 그가 이전에 거룩하고 경건하다고 흠모해왔던 모든 그의 생각들을 휘젖고, 그가 그렇게 행동했었던 것도 휘젖는다. 이런 식의 예증은 각자의 경험에서 다시 생각하기 바란다. 위의 (악)령들은 인간이 이전에 가졌던 애착들 안으로 집중적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그것들을 흥분되게 한다, 그리고 또한 그가 생각했고 행동했던 거짓되고 악한 것들을 휘젖는다. 고로 악령들은 당사자에게 불안을 가져다 준다, 심지어 자포자기도 유발하는 의심의 국면도 부닥치게 한다.
이와 같은 것이 영적 불안들의 근원이고, 양심의 고통들이라 불리우는 고통들의 근원이다. 유입과 교통됨을 수단으로 이런 것들은 인간에 마치 그것들이 자신 안에 있었는 듯 나타난다. 이를 알고 믿는 자가 거울 안에서 자신을 보면, 그는 거울 안에 나타나는 자신이 자신이 아니다고 믿는다, 그 대신 그것의 다른 쪽, 즉 그의 형상(image)만이 자신이다고 믿는다; 한편, 거울 속의 자신이 자신이다고 믿는 이의 경우, 그는 거기서 나타나는 그가 자신이고, 그의 형상은 자신이 아니다고 믿는다.

“감옥에 던져지고 거기에 억류되는 것”이 선을 향하여 거짓을 말하는 측면에서의 시험들에 놓여짐을 표시하는 이유는 발바닥 아래 빙둘러 모든 영역이 “감옥”이라 불리우기 때문이다, 거기서 이들은 황폐된 상태로 간직된다, 즉 거짓의 원리와 거짓으로부터의 악한 생활 안에 있어왔던 이들, 그럼에도 의도 측면에서는 선 안에 있던 이들이 거기에 황폐된 상태로 계속 유지된다는 말이다. 이들은 거짓의 원리를 벗고, 또한 이 거짓으로부터 파생되는 생활의 기쁨을 중단할 때까지 천국 안으로 받아들여질 수 없다. 거기에 있는 이들은 시험들에 놓여 있다; 그 이유는 거짓의 원리들과 이 거짓으로 파생되는 생활의 기쁨의 중단은 시험을 수단으로 하지 않고는 내던져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들이 있는 장소, 또는 그들이 지닌 상태가 일반적으로 “감옥”에 의해, 장소 자체는 “구덩이들”에 의해 의미되어진다. 다른 삶에 있는 황폐됨에 대하여는 이미 살핀 바 있다.
황폐된 상태에 있는 이들이 “억류된 자”라고 불리운다. 그들이 어떤 끈, 또는 쇠사슬로 묶인채로 있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은 이전의 생각들과 파생된 애착들 측면에서 자유하지 못해 있다는 말이다.
말씀에서 “억류된 자(bound)”에 의해, 그리고 “감옥 안에” 있는 이들에 의해 뜻해지는 것이 다른 구절로부터도 분명해진다, 이사야서에서:
나는 너희에게 백성의 언약을 위하여, 이방인의 빛을 위하여, 소경의 눈을 여는 것을, 억류된 자를 감옥으로부터, 그리고 어둠에 앉은 그들을 감금의 집으로부터 데려오는 것을 줄 것이다 (이. 42:6, 7);
위는 주님에 관해서, 그분의 오심에 관하여 말하고 있다. 여기서 “소경의 눈을 여는 것, 그리고 감옥으로부터 억류된 자를, 감금의 집으로부터 어둠에 앉은 그들을 데려오는 것”이란 선과 진리에 무지함에 있는 이들, 그럼에도 알기를 바라고, 안 것에 감화되기를 바라는 이들을 표시한다; 그러나 이 구절의 원어에서는 “감옥(prison)”이 다른 단어에 의해 표현되어지고 있다.
다시:
모든 젊은이들이 감옥 안에 숨겨졌다; 그들은 전리품으로 만들어졌다. 그리고 구출하는 자 아무도 없다, 그리고 데려내오라 라고 말하는 자 아무도 없다 (이. 42:22);
“젊은이들”은 내적 의미에서 신앙의 진리들이다, 이 진리들이 “감옥에 숨겨졌다”고, 그리고 “전리품으로 만들어졌다”고 말해지는데, 이는 그것들이 더 이상 인정하지 않았을 때이다. 다시:
그 날에 여호와께서 높음에 있는 높음의 군대를, 그리고 지면 위에 있는 지면의 왕들을 방문하실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그러모아질 것이다, 구덩이 위쪽에서의 묶인 자, 그리고 그들은 감금의 장소 위쪽에서 잠궈질 것이다; 많은 날들 이후, 그들을 방문할 것이다 (이. 24:21, 22);
“구덩이 위쪽에서의 묶인 자”는 방문함 안에 있는 이들, 또는 시험들 안에 있는 이들을 표시한다.
다시:
너희는 방문의 날에, 황폐해짐의 날에 무엇을 행할까? 이것은 멀리로부터 오고 있다; 누구에게로 너희 도움을 위해 달아나느냐? 그는 자신을 아래로 굽히지 않는다; 그들은 묶인 자 아래로, 죽임을 당하는 자 아래로 추락할 것이다 (이. 10:3, 4);
“묶인 자 아래로”란 황폐함의 장소 아래 있는 지옥을 표시한다; 그리고 “죽임을 당함”은 찔림을 당한 자보다(창. 34:27) 덜한 등차에서, 거짓의 원리들에 의해 신앙의 진리들을 자신들 안에서 소멸시킨 이들을 표시한다.
스가랴서에서:
그는 민족들에게 평화를 말할 것이다; 그분의 지배권은 바다로부터 바다에조차, 그리고 강으로부터 땅의 끝들까지 조차일 것이다. 너에 대해 또한 말하건대, 당신의 언약의 피를 수단으로 나는 물이 없는 구덩이로부터 묶인 자들을 파견할 것이다. 너희는 요새로 돌아오라, 희망의 묶인 자 너희들이여 (슥. 9:10-12);
“구덩이로부터 묶인 자를 파견함”은 황폐함 안에서인 시험 안에 있는 이들을 표시한다. 황폐함에 있는 그들이 있는 장소들이 “구덩이들”이라 불리우는데 이미 살핀 바 있다 ( 창. 37:18-22, 4728, 4744항). 다윗서에서:
여호와께서는 궁핍한 자(로부터) 들으시고, 그분의 묶인 자들을 경멸하시지 않으신다 (시. 69:33).
다시:
묶인 자의 한숨지음이 당신 앞에 오게 하라 (시. 79:11).
다시:
하늘들로부터 여호와께서는 땅으로 뒤쪽을 쳐다보시어, 묶인 자의 한탄소리를 들으시고, 죽음의 아들들에게 여신다 (시. 102:19, 20).
위에서 “묶인 자들”은 황폐함 안에 있는 이들, 그리고 시험들 안에 있는 이들을 표시한다. 이사야서에서:
흡족히 반기시는 어떤 때에 나는 네게 대답하였었다, 그리고 구원의 날에 나는 네게 들었었다; 그리고 나 또한 너를 지켰었다, 그리고 나는 네게 백성의 언약을 주어, 토지를 회복하기 위하여, 황폐된 유산들을 나누기 위하여, 묶인 그들에게 앞으로 나가라 하고 말하기 위하여 이다; 그리고 어둠에 있는 그들에게 네 자신 베일을 벗으라 (라고 말하기 위하여 이다). 그들은 길들 위에서 먹여질 것이다, 그리고 모든 높음들 위에, 좋은 풀밭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굶주리지도, 목마르지도 않을 것이다 (이. 49:8-10).
다시:
주 여호비의 영이 내 위에 계신다, 여호와께서 나를 기름부으셨다, 그분은 좋은 소식을 가난한 자에게 전하기 위하여, 그리고 부셔진 심정을 매어주기 위하여 나를 보내셨다; 포로된 자에게, 묶인 자에게, 눈에서 붙들려 있는 자에게 자유를 선포하기 위하여, 여호와께서 흡족해 하시는 어떤 해에 선포하기 위하여 이다 (이. 61:1, 2).
다윗서에서:
여호와, 그분은 억눌린 자를 위하여 판결하신다; 그분은 배고픈 자에게 식품을 주신다; 수감된 자들을 풀어주시는 여호와; 소경을 여시는 여호와; 아래쪽으로 구부린 자를 일으키시는 여호와; 공정한 자를 사랑하시는 여호와; 낯선 자들을 지켜주시는 여호와; 그분은 아버지 없는 자와 과부를 떠받쳐주신다 (시. 146:7-9);
위에서 “묶인 자”는 거짓들 때문에 황폐함 안에 있는 이들과 시험들 안에 있는 이들을 표시한다. 이 구절들로부터 또한 분명해지는 바, 아래 마태복음서에서 “묶인 자”, 또는 “감옥에 있는 자”, 마찬가지로 “배고픈 자”, “목마른 자”, 그리고 “낮선 자”가 의미하는 내용들이다:
그때 왕이 그의 오른편에 있는 이들에게 말한다, 내가 배고팟었다 그리고 너희는 나에게 먹을 것을 주었다, 내가 목말랐었다 그리고 너희는 나에게 마실 것을 주었다, 내가 낯선 자이었다 그리고 너희는 나를 모아들였다, 벌거벗었다 그리고 너희는 나를 옷입혔다, 내가 병들었다 그리고 너희는 나를 찾아주었다, 내가 감옥에 있었다 그리고 너희는 나에게 왔다 (마. 25:34-36);
위 구절에 대하여는 이 39장의 서문을 참조하라.

왕이 묶은 자들을 가두는 곳이었다. 이는 거짓들에 있는 이들의 상태를 의미한다. 이는 “곳(장소, place)”의 의미가 상태이다로부터; 그리고 “왕이 묶은 자들”의 의미가 거짓들 안에 있는 이들이다로부터; 그리고 이들이 거짓들 안에 있기 때문에 이들은 황폐해짐 안에 있다, 그리고 이들은 시험들 안에서 세상에서 거듭나지고 있는 이들이다; 그 이유가 시험은 거짓인 것을 황폐되게 하기 때문; 동시에 진정한 것을 확증하게 하기 때문이다. 이들이 “왕이 묶은 자들”이라고 불리우는 이유는 “왕”이 내적 의미에서 진리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가 “묶은 자들”은 거짓 안에 있는 이들이다. 더욱이 왕이 묶은 자들을 붙들어두는 장소는 “구덩이들”이라 불리운다, 그러므로 요셉이 말한다, “나는 히브리인들의 토지로부터 데려와졌다; 그리고 여기서 나는 구덩이 안으로 처넣어질 어떤 짓도 하지 않았다” (창. 40:15). “구덩이”가 황폐됨의 장소인 것은 이미 살핀 바 있다.

그는 거기 감옥에서 있었다. 이는 시험이 계속되는 기간을 의미한다. 이는 “감옥”의 의미가 황폐됨, 또한 시험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리고 “거기 있다”의 의미는 거기 머무른다, 고로 계속되는 기간을 의미한다.

21-23절. 그리고 여호와께서는 요셉과 함께 하셨다, 그리고 자비가 그에게 기울어 있었다, 그리고 감옥의 제 1 인 자의 눈에서 그에게 은혜를 주셨다. 22 그리고 제 1 인 자는 감옥에 있는 모든 죄수들을 요셉의 손에 맡겼다. 그리고 그들이 거기서 처리하는 것은 무엇이든 그가 행위자였다. 23 제 1 인 자는 그의 손에 무엇이 있는지 모르고 있었다, 그 이유는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계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가 했던 것은 여호와께서 잘 풀려가게 만드셨다.

그리고 여호와께서는 요셉과 함께 계셨다. 이는 신성이 그분 안에, 즉 (최고 의미에서 요셉에 의해 표현되는) 주님 안에 있었다를 의미한다. 여기서는 시험들에 있는 신성이 그분 안에 있었다를 의미하고 이것이 여기서 취급됨이 분명하다; 그 이유는 신성 자체가 여호와이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분이 주님 안에 계셨다는 것이 “여호와께서는 요셉과 함께 계셨다”에 의해 의미되어 있다. 글자 의미 수준에서는 요셉이 취급되므로, 그와 함께 계셨다 라고 말해지나, 내적 의미에서는 주님이 취급되므로 그분 안에 있었다 이다. 신성이 그분 안에 있었다는 것은 기독교회인 이면 모두 아는 사실로부터, 즉 그분은 여호와로부터 임신되어졌다는 것으로도 알는지 모른다; 이런 이유로 주님은 여호와를 나의 “아버지”라고 자주 부르셨다. 인간의 있음 자체, 그러므로 인간 생명의 가장 깊은 것은 아버지로부터 이다; 이 있음 자체를 옷입히는 것, 외면의 것들은 어머니로부터 이다; 그러므로 주님의 있음, 그러므로 그분의 생명의 가장 깊은 측면은 신성이었다, 그 이유는 이것이 여호와 자신이셨기 때문이다; 옷입힘, 또는 외면들은 그분이 출생을 수단으로 어머니로부터 가져온 인간이셨다. 이 인간은 시험당해질 수 있었다; 그 이유가 이것은 어머니로부터 유전적 악으로 오염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장 깊은 측면이 신성이었기 때문에 그분은 이 악한 유전성을 그분 자신의 힘으로 내던지실 수 있으셨다; 그분은 이 내던지심을 시험들을 수단으로 계속적으로 수행해가셨고, 마지막 시험인 십자가에서의 시험에 이르기까지 수행하심으로 결국 그분은 그분의 인간을 신성이 되게, 즉 인간을 신성으로 만드셨다. 이로부터 신성이 그분 안에 있었다는 서술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았을는지 모른다.

그리고 자비가 그에게 기울어 있었다. 이는 모든 것에 있는 신성한 사랑을 의미한다. 이는 “자비(mercy)”가 최고 의미에서 신성한 사랑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최고 의미에서 이해되는 신성한 있음 자체는 인간으로서는 완전히 이해할 수 없다; 그리고 이 사랑으로부터 진리를 통하여 모든 것들은 세상 밖으로 출시되고 살아간다. 이는 생명을 가지는 것들, 생명을 가지지 않는 것들 모두에서 이다. 있음 자체로부터의 이 신성한 사랑은 주님 안에 있는 생명의 가장 깊은 측면을 통하여 그분이 어머니로부터 취하신 인간으로부터 하셨던 모든 것 안으로 흘렀고, 모든 것을 목적들 쪽으로 방향을 잡게 했다, 그리고 이 목적들 중의 최말단의 목적은 인류가 구원되도록 하시려는 것이다. 그리고 주님은 그분 안에 있는 신성 자체로부터 그분의 인간의 본성을 보셨는데, 이것은 유전적으로 악 안에 있었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는 그에게 자비를 기울게 하셨다”고 말해진다; 그리고 이를 수단으로 최고 의미에서 모든 것 안에 있는 신성한 사랑이 뜻해진다. 그 이유가 신성한 자비는 비참함 안에 침수된 이들, 즉 시험들에 있는 이들을 향한 신성한 사랑밖에 더 아니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시험에 있는 이들이 비참함 안에 있는 이들이기 때문, 이들이 말씀에서도 “비참한 자(the miserable)”에 의해 뜻해지고 있다.

그리고 감옥의 제 1 인 자의 눈에서 그에게 은혜를 주셨다. 이는 그 결과로 해서 있는 안심됨을 의미한다. 이는 “평화를 줌”의 의미가 안심됨이다로부터, 그 이유가 시험 안에서 “평화를 주는” 것은 희망을 가지고 위로하는 것, 또는 안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제 1 인 자”의 의미가 제 1 의 진리이다로부터, 이는 아래에서 더 살핀다; 그리고 “감옥”의 의미가 거짓의 황폐해짐, 결과적으로 시험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리고 감옥의 제 1 인 자. 이는 시험의 상태에서 통치하는 진리를 의미한다. 이는 “제 1 인 자”의 의미가 제 일의 진리, 고로 통치하는 진리이다로부터, 이는 아래에서 더 살핀다; 그리고 “감옥”의 의미가 거짓의 황폐해짐, 결과적으로 시험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시험들의 상태에서 통치하는 진리에 의해 뜻해지는 것이 먼저 말해져야 할 것 같다. 시험에 있는 모든 이들에게 주님으로부터의 진리가 흐른다, 이 진리는 그의 생각들을 규율하고 통치하고, 시험으로 고생하는 자들이 의심들에 빠질 때, 더 나아가 자포자기 할 때, 언제든지 그를 일으킨다. 이 통치하는 진리는 당사자가 말씀으로부터, 또는 교리로부터 배워왔던 진리, 그리고 자신 안에서 확증했던 진리이다. 물론 이외 다른 진리들도 이런 때에는 마음으로 불러들여지나, 그 진리들이 그의 내면들을 통치하지 않는다. 때로 통치하는 진리는 이해함 앞에 가시적으로 표출되지 않고, 희미함 안에 숨겨 놓여져 있기도 하는데, 그래도 여전히 이 진리가 그를 통치한다; 그 이유가 주님의 신성이 그 진리 안으로 흐르고, 그 진리 안에서 마음의 내면들을 지켜주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진리가 빛 안으로 올 때, 시험에 있는 당사자는 위로를 받고, 안심되어진다.
이는 이 진리 자체가 아니고, 이 진리에 애착함 때문인데, 이를 수단으로 주님께서는 시험들에 있는 이들을 통치하신다; 그 이유가 신성은 애착으로부터 있는 이런 저런 것들 안으로만 흐르기 때문이다. 인간의 내면들 안에 심어져 뿌리내린 진리는 애착에 의해 심어져 뿌리내린 진리이지, 애착에 의해서가 아니면 100% 아니다; 그리고 애착에 의해 심어져 뿌리내린 이 진리는 애착에 착 달라붙어 있고, 애착에 의해 다시 불려진다; 그리하여 이 진리가 다시 불려질 때, 진리와 결합된 애착이 표출되는데, 이것이 인간의 상호적 애착(reciprocal affection)이다. 위의 과정들이 시험들에 있는 인간과 더불은 경우이므로, 인간은 누구든지 그가 성년의 나이를 채울 때까지, 그리고 그가 통치될 수 있는 수단이 되는 진리를 빨아들일 때까지, (즉 당사자를 좌지우지할 만한 어떤 진리로 감화될 때까지) 어떤 영적인 시험들에 노출되는 것이 승인되지 않는다. 만일 노출된다면, 그는 시험 아래 가라앉고 말아 처음 보다 더 악화되고 만다. 이상 살핀 바로부터 시험들의 상태에서 통치하는 진리에 의해 뜻해진 것을 알았을는지 모른다; 이것이 “감옥의 제 1 인 자”에 의해 의미되어 있다.
“제 1 인 자”가 제 1 의 진리를 표시하는 이유는 “왕”이 내적 의미에서 진리 자체를 의미하기 때문에서 이다; 그러므로 “제 1 인 자, 왕자(prince)들”이 왕의 아들들이기 때문에 진리 자체로부터의 첫 번째의 것을 의미한다. “제 1 인 자”가 이런 의미를 가진다는 것은 이미 살핀 바 있다 (창. 12:15, 창. 17:20). 그러나 앞에서는 말씀의 다른 구절로부터서는 살피지 않았기에 아래에 다른 구절을 추가해본다. 이사야서에서:
우리에게 한 어린 아이가 태어나진다, 우리에게 한 아들이 주어진다; 그리고 지배함(principality) 이 그분의 어깨 위에 있을 것이다-평화의 왕자(제 1 인 자). 그분의 지배하심과 평화의 불어남은 끝이 없을 것이다 (이. 9:6, 7);
위 구절은 주님에 관하여 말해진다. “어깨 위에 있는 지배”는 그분으로부터 천국들에 있는 모든 신성한 진리이다; 그 이유가 천국들이 선으로부터의 진리들에 따른 지배함들로 구별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천사들은 “지배함들, 권품(權品)들, principalities”이라 불리운다. 평화는 가장 안쪽으로부터 선과 진리들에 감동되는 상태, 이는 천국들에 있는 복된 상태이다; 그러므로 주님은 “평화의 왕자(제 1 인 자)”라고 불리우시고, 그분의 지배하심과 평화의 불어남은 끝이 없다“라고 말해진 것이다.
이사야서에서:
소안의 제 1 인 자들은 어리석다, 현명한 자, 바로의 상담자들아. 너희는 어찌 바로에게, 나는 현명한 자의 아들이다, 고대의 왕들의 아들이다 라고 말하느냐? 소안의 제 1 인 자들은 바보들이 되어진다, 놉의 제 1 인 자들은 사기당했다; 그리고 그들은 이집트, 지파들의 모퉁이돌로 하여금 실수하게 했다 (이. 19:11, 13);
위는 이집트를 취급하고 있다, 이집트를 수단으로 교회의 기억 속의 지식이, 고로 질서의 최말단인 자연 평면의 진리가 의미되어진다; 그러므로 이집트 역시 여기서 “지파들의 모퉁이 돌”이라 불리운다, 그 이유가 “지파(tribe)들”은 하나의 복합체에 있는 진리에 관한 모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위 구절에서의 “이집트”는 교회의 진리를 악용하는 기억 속의 지식, 고로 “소안의 제 1 인 자들”과 “놉의 제 1 인 자들”은 질서의 최말단에 있는 왜곡된 진리들이다. 그는 자신을 “고대의 왕들의 아들”이라 일컫는다, 그 이유는 이집트에 있는 기억 속의 지식은 고대 교회로부터의 진리들로부터 있었기 때문이다. 진리들 자체가 “왕들”에 의해 의미되는데, 이미 위에서 살폈다, 그리고 고대 교회의 진리들은 “고대의 왕들”에 의해 의미되어진다.
다시:
앗수르는 옳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의 심정은 옳게 중재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그의 심정은 파괴하는 것이고, 몇 나라들도 아닌 (모든) 나라들을 멸절하는 것에 있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그는 말하기를, 나의 제 1 인 자들이 왕들이 아니더냐? 하기 때문이다 (이. 10:7, 8);
위의 “앗수르”는 신성한 진리들에 관하여 추론함을 표시한다, 이로부터 거짓들이 와진다, 고로 외고집의 추론들이다. 고로 왜곡된 진리들, 또는 거짓들, 이것은 추론들에 의해 생산되어지고, 이것이 순수 진리 자체들로서 나타나는 바, 이것이 “나의 제 1 인 자들이 왕들이 아니더냐?”라는 말에 의해 의미되어 있다. “앗수르”가 추론함이다는 것, 그리고 그의 “왕들인 제 1 인 자들”은 순수 진리 자체들이라고 믿어지는 제 1 의 거짓들이다는 것은 마음이 글자의 역사적 의미 안에 가두는 한, 더 나아가 글자에서 나타나는 것보다 신성한 말씀 안에 더 거룩하고 보편적인 어떤 것이 있음에 관하여 소극적 태도를 취하는 한, 보여질 수 없고, 믿어지지도 않는다; 어쨌든 “앗수르”는 추론과 추론함, 그리고 “왕들”은 진리들 자체, “제 1 인 자, 또는 왕자들”은 진리로부터의 제 1 의 것들로 내적 의미에서 이해되어진다. 앗수르가 이 외의 의미로 천국에서 알려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래서 천사들은 왕과 제 1 인 자에 대한 (글자대로의) 생각을 자신들로부터 거절한다; 그리고 그들이 이것을 인간 안에서 지각할 때, 그들은 이것을 주님쪽으로 전속시켜, 주님으로부터 진행하는 것과 천국에 있는 주님의 것들, 즉 그분의 신성한 선으로부터의 신성한 진리를 지각한다.
다시:
앗수르는 검으로 망할 것이나, 인간으로부터가 아니다; 그리고 검, 인간으로부터가 아닌, 그를 삼킬 것이다; 그의 바위는 공포를 이유로 소멸할 것이다, 그러나 그의 제 1 인 자들은 기호(ensign) 로 말미암아 낙담할 것이다 (이. 31:8, 9);
또한 이집트에 관해서도 말해지는데, 이는 교회가 악용한 기억 속의 진리이다. 신성한 진리들에 관하여 기억 속의 지식들로부터 추론함, 이로부터 악용과 거짓화됨이 온다는 것이 “앗수르”이다, 악용되고 거짓화된 진리들이 “제 1 인 자들”이고, “앗수르를 망하게 하는 검”은 거짓을 가지고 전투함과 황폐하는 진리이다. 다시:
바로의 힘셈이 너를 위하여 부끄럼이, 그리고 이집트의 그림자를 신뢰함은 질책됨이 되어갈 것이다, 그의 제 1 인 자들이 소안에 있을 때이다 (이. 30:3, 4);
“소안에 있는 제 1 인자들”은 위와 같이 왜곡된 진리들을, 고로 거짓들을 표시한다.
다시:
펠리컨(사다새, pelican)과 알락해오라기가 그것을 소유할 것이다; 그리고 올빼미와 갈가마귀가 거기 안에 거주할 것이다; 그는 그것 넘어로 텅빔의 줄을, 그리고 황폐함의 낚싯봉을 뻗칠 것이다. 고상한 자들이 거기로부터 있지 않다, 그들은 왕국이라 부를 것이다, 그리고 모든 그녀의 제 1 인 자들은 아무것도 아닐 것이다 (이. 34:11, 12);
“펠리컨”, “알락해오라기”, “올빼미”, “갈가마귀”는 말씀에 있는 신성한 진리들이 아무 소용이 닿지 않을 때 존재 안으로 오는 각기 다른 거짓을 표시한다. 진리의 황무함과 황폐함이 “텅빔의 줄, 그리고 황폐함의 낚싯봉”에 의해 의미된다; 그리고 그들에게 제 1의 진리들이 “제 1 인 자들”에 의해 의미되어진다. 다시:
나는 거룩함의 제 1 인 자들을 모독함으로 갚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야곱에게 저주를 줄 것이다, 그리고 이스라엘에게 질책들을 줄 것이다 (이. 43:28);
“거룩함의 제 1 인 자들을 모독하는” 것은 거룩한 진리들을 모독함을 표시한다; 외적 교회와 내적 교회의 진리가 박멸됨이 “야곱에게 저주를, 이스라엘에게 질책들을 준다”에 의해 의미되고 있다. 이는 앞에서(창. 32:26-28) 살폈기도 하다.
예레미야서에서:
다윗의 왕좌 위에 앉은 왕들과 제 1 인 자들이 병거와 말들을 타고 도성의 큰문을 수단으로 들어갈 것이다, 그들과 그들의 제 1 인 자들(도 그러할 것이다) (예. 17:25);
역사적 의미에서 말씀을 이해하는 이들은, 왕들과 제 1 인 자들이 병거들과 말들을 타고 도성의 큰문(성문, gate)을 수단으로 들어간다고 말해진 글자에 더 깊고 거룩한 어떤 것이 저장되어 있음을 알아챌 수 없기에, 그들은 이런 글자로부터 왕국의 존속 기간이 관련된다는 정도의 의미만을 수집한다; 그러나 “도성,” “왕들,” “제 1 인 자들,” “다윗의 왕좌,” 그리고 “병거와 말을 탐”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를 아는 이들은 이 글자 안에 더 깊고 거룩한 것들을 보게 된다; 그 이유가 “도성”, 또는 예루살렘은 주님의 영적 왕국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왕들”은 신성한 진리들을 의미한다; “제 1 인 자들”은 진리로부터의 제 1 의 것들을; “다윗의 왕좌”는 주님의 천국을; “병거와 말을 탐”은 교회 속의 영적인 이해력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다시:
갈대아인들을 향한 검, 그리고 바빌론의 거주민들을 향한, 그리고 그녀의 제 1 인 자들을 향하고 그녀의 현명한 자를 향한 (검). 거짓말쟁이들을 향한 검. 그녀의 말들을 향한 검 그리고 그녀의 병거들을 향한 검 (예. 50:35-37);
“검”은 거짓에 맞서 싸우는 진리를, 그리고 진리에 맞서 싸우고, 그리고 진리를 황폐케하는 거짓을 표시한다; “갈대아인들”은 진리들을 모독하는 이들을 표시한다; 그리고 “바빌론의 거주민들”은 선을 모독하는 이들을 표시한다; “제 1 인 자들”은 제 1 의 진리들에 대한 거짓들을 표시한다; “말들”은 교회의 지적 측면을; “병거”는 교회의 교리를 표시하고, 이것들의 황폐해짐이 “말들과 병거들을 향한 검”에 의해 의미되어 있다.
다시:
어찌하여 주님께서 그분의 성내심에서 시온의 딸 위에 구름을 드리우게 하셨는지! 주님은 야곱의 모든 거주민들을 삼키시고 유보하시지 않으셨다; 그분은 그분의 분노하심에서 유다의 딸의 요새들 을 파괴하셨다; 그분은 그것들을 땅쪽으로 내던지셨다; 그분은 왕국과 거기로부터의 제 1 인 자들을 욕되게 하셨다; 큰 문들은 땅 안으로 가라앉았다, 그리고 그분은 빗장들을 조각나게 부수셨 다; 왕과 제 1 인 자들은 민족들 사이에 있다 (애. 2:1, 2, 9);
“시온의 딸과 유다의 딸”은 천적 수준의 교회를 표시하는데, 위 구절에서는 파괴된 천적 교회를 표시한다; “왕국”은 거기 안에 있는 교리 속의 진리들을 표시한다 (2547, 4691항); “왕”은 진리 자체를, 그리고 “제 1 인 자들”은 진리 자체로부터의 제 1 의 것들을 표시한다.
다시:
우리의 피부는 불가마 같이 검게 되었다. 기근의 폭풍 때문이다. 그들은 시온의 여인들을 , 유다의 도성들에 있는 처녀들을 강탈했다, 제 1 인 자들은 자기들의 손으로 목매달았다 (애. 5:10-12);
“제 1 인 자들이 자기 손으로 목을 맴”은 진리들이 모독되었다를 표시한다, 그 이유가 “목을 맴”이 모독의 지옥에 떨어짐을 표현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표현 때문에, 백성들이 바알브올을 따라 매춘짓을 범하고 그들의 신들을 예배했을 때, 제 1 인 자들을 목매달아야 한다고 도 명령되었다 (민. 25:1-4); 그 이유가 바알브올을 따라 매춘을 범하는 것, 그리고 그들의 신들을 예배하는 것은 예배를 모독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에스겔서에서:
왕이 통곡할 것이다, 그리고 제 1 인 자가 놀람으로 옷입을 것이다, 그리고 토지의 백성의 손들이 떨 것이다; 나는 그들의 방법을 따라 그들을 취급할 것이다 (겔. 7:27);
위에서도 “왕”은 일반적 측면에서의 진리를 표시한다, 그리고 “제 1 인 자”는 일반적 진리로부터의 제 1 의 것들을 표시한다.
다시:
그들의 한가운데에 있는 제 1 인 자가 어둠에서 어깨에 메고, 앞으로 나아갈 것이다; 그들은 파서(dig) 벽을 통하여 밖으로 데려갈 것이다; 그는 자기 눈으로 땅을 보지 않게 자기 눈을 베일로 가렸다 (겔. 12:12);
위에서 “제 1 인 자”는 제 1 인 자를 뜻하지 않고 교회의 진리를 뜻함이 매우 분명하다; 그리고 “어둠에서 어깨에 멜 것이다”라고 말해지는데, 이는 모든 자기들의 힘을 가지고 거짓들 사이 아래쪽으로 운반한다는 것을 뜻한다, 그 이유는 “어둠”이 거짓들이기 때문이다; “얼굴을 베일로 가림”은 진리가 전혀 보이지 않아야 함을 표시한다; 그가 “자기 눈으로 땅을 보지 않는” 것은, 교회 속의 어떤 것도 보여지지 않을 것을 뜻한다. 호세아서에서:
이스라엘의 아들들은 많은 날에서, 왕 없이, 제 1 인 자 없이, 제물을 바침 없이, 기둥 없이, 에봇 없이, 드라빔 없이 앉을 것이다 (호. 3:4).
그리고 다윗서에서:
왕의 딸은 내부에서 모든 영광스러움으로 있다; 그녀의 의복은 금으로 짜깁고, 바느질로 작업하고, 그녀는 왕쪽으로 데려와진다; 네 아버지들 대신 네 아들들이 있을 것이다, 너는 그들에게 전체 땅에서 제 1 인 자들로 놓여질 것이다 (시. 45:13-16);
“왕의 딸”은 주님의 영적 왕국이다, 이 왕국이 주님의 신성한 진리로부터 그분의 영적 왕국이라 불리우고, 여기서 그녀의 옷이 금으로 짜깁고 바느질로 작업함에 의해 묘사되어진다; “아들들”은 주님의 신성으로부터 있는 이 왕국의 진리들이고, 이 진리들은 “제 1 인 자들”, 즉 제 1 의 진리들임에 틀림이 없다. 새 예루살렘에서와 새 땅에서 자기 소유물들과 더불어 함께하는 “제 1 인 자”가 에스겔서 (44:3; 45:7, 8, 17; 46:8, 10, 12, 16, 18; 48:21)에서 묘사되는데, 이 “제 1 인 자”는 일반적 측면에서 주님의 신성으로부터 있는 진리를 의미한다; 그 이유가 이 구절들에서 “새 예루살렘”, “새 성전”, 그리고 “새 땅”에 의해 천국 안과 땅 위에 있는 주님의 왕국이 뜻해지기 때문이다, 여기서의 표현에 의해 묘사되는 것은 말씀의 다른 부분들에서도 같은 표현에 의해 발견된다.

감옥에 있는 모든 죄수들을 요셉의 손에 맡겼다. 이는 그분 자신으로부터 모든 거짓들 위에 군림하심, 즉 시험들의 상태들에서 진리가 통치함을 의미한다. 이는 “요셉의 손에 맡김”의 의미가 그의 힘 안에 있다로부터, “손”은 힘(power)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고로 그분 자신으로부터 이었다가 의미된다, 그 이유가 그분의 권능으로부터 결과되는 것은 그분 자신으로 결과되는 것이기 때문, 내적 의미에서 주님이 “요셉”에 의해 뜻해진다에 대하여는 이미 살폈다 (창. 39:19, 20). 고로 “감옥의 제 1 인 자가 요셉의 손에 감옥에 있는 억류된 자들을 맡겼다”에 의해 시험들의 상태에서 모든 거짓들 위에서 그분 자신으로부터 진리가 통치하심이 의미된다. 여기서와 이 장의 끝쪽으로 이어짐에서의 내적 의미에서의 주제는 주님이 취급되는데, 이는 어떻게 그분 자신의 힘으로부터 그분께서는 시험들의 상태에서 통치하셨는지, 즉 악들과 거짓들 안에 있는 지옥들을, 그리고 인류 안으로 악들과 거짓들을 계속적으로 쏟아내는 지옥들을 어떻게 정복하셨는지를 다루고 있다. 그분 자신의 힘을 수단으로 그분은 지옥들을 정복하시고 복종하게 하셨다, 그리고 자신 안에서 인간을 신성이 되게(glorified), 또는 신성으로 만드셨다. 이에 대한 것은 앞에서도 많이 살폈다. 이에 대하여는 말씀의 많은 구절로부터도 분명해지는데, 아래 한 대목만 살핀다. 요한복음서에서:
나는 내 혼을 내려놓는다, 하여 나는 다시 그것을 가져갈는지 모른다. 나로부터 그것을 가져갈 자는 아무도 없다, 그러나 나는 그것을 나 자신으로부터 내려놓는다. 나는 그것을 내려놓는 힘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나는 그것을 다시 가져갈 힘을 가지고 있다 (요. 10:17, 18).
십자가의 열정(passion, 수난)은 시험들의 마지막이었다는 것, 그리고 이를 수단으로 주님께서는 자신 안에 있는 인간을 완전하게 신성이 되게 하셨다는 것, 또는 그 인간을 신성으로 만드셨다는 것은 말씀의 여러 대목들로부터도, 즉 요. 13:31, 32; 17:1, 5; 눅. 24:26로부터 분명해진다.

그들이 거기서 무엇을 하든 그가 행위자였다. 이는 절대적 권능을 의미한다. 이는 설명 없이도 알 것이다; 그 이유가 이 말들은, 모든 것들이 그분 자신으로부터 이었다는 것을, 고로 그분은 하시든, 하시지 않든지에 관하여 절대적 권능을 가지셨음을 포함하기 때문이다.

제 1 인 자는 그의 손에 무엇이 있는지도 모르고 있었다. 이는 그분 자신이 진리를 통치하셨다를 의미한다. 이는 “감옥의 제 1 인 자”의 의미가 시험들의 상태에서 통치하는 진리이다로부터; 그리고 “자기 손에 무엇이 있는지도 모름”의 의미가 이것은 그분 자신으로부터 이다는 것, 고로 절대적 권능으로부터 이다는 것에서 알게 된다.

그 이유는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계셨기 때문이다. 이는 그분 안에 있으신 신성으로부터를 의미하는데, 이는 방금 앞을 참고하면 될 것이다.

그리고 그가 했던 것은 여호와께서 잘 풀리게 만드셨다. 이는 신성한 섭리는 그분 자신으로부터 있었다를 의미한다. 이는 “잘 풀리게 만드심”의 의미가 섭리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것이 신성이다는 것은 “여호와”에 의해 뜻해진다는 것, 그리고 이것은 그분 자신으로부터 있었다는 것은 “그가 했던 것”에 의해 뜻해진다. “잘 풀리게 만드심”이 최고 의미에서 섭리인 이유는 자연 평면의 최말단에서 나타나는 모든 것이 번창하는 것은 그것의 근원 측면에서 주님의 신성한 섭리로부터 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그러하고, 또한 (행)운으로부터 라고 말해지는 모든 것도 거기로부터 이다는 것에 대하여는 주님의 신성한 자비로부터 영계에서의 경험들로부터 다른 장소에서 살필 것이다.

창세기 제 40 장

성경: 창세기 40 장

1. 이런 말들이 있은 후에, 그들, 즉 이집트 왕의 술 담당자와 빵 담당자가 그의 주인, 이집트 왕에게 죄를 짓는 일이 있었다.
2. 그리고 바로는 그의 두 시종들, 곧 술 담당 제 1 인 자와 빵 담당 제 1 인 자에게 화를 내었다.
3. 그리고 그는 그들을 감옥에, 수비대장의 집에 있는 구치소에 놓았는데, 이곳은 요셉이 억류되어져 있는 곳이었다.
4. 그리고 수비대장은 그들 위에 요셉을 놓았다, 그리고 그는 그들을 섬겼다. 그리고 그들은 구치소에서 (여러) 날들 동안 있었다.
5. 그리고 그들, 감옥에 억류된 이집트 왕의 술 담당자와 빵 담당자, 그들 둘 다 꿈을 꾸었고, 그들 각자가 같은 날 밤에 꾸었고, 각자의 꿈의 해석은 각각이었다.
6. 그리고 요셉이 아침에 그들에게 왔다, 그리고 그들을 보았다, 그리고 보라, 그들은 근심하고 있었다.
7. 그리고 그는 그의 주인의 구치소에서 그와 함께 있는 제 1 인 자들에게 물어, 말하기를, 오늘 당신들의 안색이 좋지 않으니 어찌된 일입니까?
8. 그리고 그들은 그에게 말했다, 우리는 꿈을 꾸었다, 그리고 그 꿈의 해석자가 없다. 그리고 요셉은 그들에게 말했다, 해석은 하느님에게 속한 것 아닙니까? 청컨대 나에게 말해보시오.
9. 그리고 술 담당자들의 제 1 인 자가 요셉에게 그의 꿈을 말했다, 그리고 그에게 말했다, 내 꿈에서 내 앞에 포도나무가 있었다.
10. 그리고 포도나무에는 세 어린 가지가 있었고, 싹이 났고, 꽃이 피었고, 거기로부터의 송이들이 포도들로 익었다.
11. 그리고 바로의 잔이 내 손에 있었다, 그리고 나는 포도들을 가져왔다, 그리고 그것들을 바로의 잔에 짜넣었다, 그리고 나는 바로의 손바닥에 그 잔을 바쳤다.
12. 그리고 요셉은 그에게 말했다, 이것이 그것에 관한 해석입니다. 세 어린 가지들은 삼 일입니다.
13. 이제부터 삼 일이 지나면 바로께서 당신의 머리를 들어올려 줄 것입니다, 그리고 당신은 복직할 것입니다, 그리고 당신은 당신이 술 담당자 이었을 때 했던 이전의 방법대로 바로의 잔을 그에게 바칠 것입니다.
14. 그러니 당신이 잘 되어 있을 때 당신과 함께 나를 기억하여 주십시오, 그리고 부디 나에게 자비를 행하여 주십시오. 그리고 나에 관하여 바로에게 진술해 주십시오, 그리고 나를 이 집에서 꺼내어 주십시오,
15. 나는 도적에게 유괴되었기에 히브리인들의 토지에서 끌려왔습니다. 여기서도 그들이 나를 구덩이에 처넣어도 될만한 어떤 짓을 하지 않았습니다.
16. 그리고 빵 담당자들의 제 1 인 자는 그가 좋게 해석한 것을 보았다, 그리고 그가 요셉에게 말했다, 나 역시 내 꿈 안에 있었다, 그리고 보라 내 머리 위에 구멍들을 가진 세 바구니가 있었다.
17. 그리고 가장 위쪽 바구니에 빵 굽는 자가 작업한 바로를 위한 모든 음식이 있었다. 그리고 새가 내 머리 위에로부터 바구니의 안으로부터 그것들을 먹었다.
18. 그리고 요셉은 대답하여 말했다, 이것이 그 꿈의 해석입니다. 세 바구니는 삼 일입니다.
19. 지금부터 삼 일 안에 바로는 당신 위로부터 당신의 머리를 떼어 들어 올릴 것입니다, 그리고 나무에 당신을 매달 것입니다. 그리고 새들이 당신 위에서 당신의 살을 먹을 것입니다.
20. 그리고 사흘이 지나, 바로의 생일이었다, 그리고 그는 그의 모든 종들에게 잔치를 베풀었다. 그리고 그는 그의 종들 가운데에서 술 담당자들의 제 1 인 자의 머리와 빵 담당자들의 제 1 인 자의 머리를 들어 올렸다.
21. 그리고 그는 술 담당자들의 제 1 인 자를 그의 술 담당직에 복직시켰다, 그리고 그는 잔을 바로의 손바닥에 바쳤다.
22. 그리고 그는 빵 담당자들의 제 1 인 자를 매달았다. 요셉이 그들에게 해석해준 그대로였다.
23. 그리고 술 담당자들의 제 1 인 자는 요셉을 기억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그를 잊었다.

각 절의 내적 의미

1-4절. 이런 말들이 있은 후에, 그들, ,즉 이집트 왕의 술 담당자와 빵 담당자가 그의 주인, 이집트 왕에게 죄를 짓는 일이 있었다. 2 그리고 바로는 그의 두 시종들, 곧 술 담당 제 1 인 자와 빵 담당 제 1 인 자에게 화를 내었다. 3 그리고 그는 그들을 감옥에, 수비대장의 집에 있는 구치소에 놓았는데, 이곳은 요셉이 억류되어져 있는 곳이었다. 4 그리고 수비대장은 그들 위에 요셉을 놓았다, 그리고 그는 그들을 섬겼다. 그리고 그들이 구치소에서 (여러) 날들 동안 있었다.

…일이 있었다.. 이는 새로운 상태, 그리고 그 뒤를 잇는 것들을 의미한다. 이는 옛날 문장의 표현에서 이 표현은 앞의 사건에 마침표를 찍는 역할을 하고, 뒤잇는 사건의 전개를 예고하는 바, 이는 새로운 상태, 그리고 뒤잇는 것들을 의미하게 된다.

이 말들 후에…이는 앞서 일어난 것들 이후를 의미한다. 원어에서 “말들(words)”의 의미가 어떤 것들이 있음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여기서의 경우 “이 말들 후에”인 바, 이는 이런 것들 후에를 뜻한다, 고로 앞서 있는 어떤 것들 이후를 뜻한다. 원어에서 “말들”은 어떤 것들 또한 의미하는데, 그 이유는 “말들”이 내적 의미에서 교리로부터의 진리들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일반적으로 모든 신성한 진리는 “말씀(the Word)”이라 불리우고, 그리고 주님 자신, 모든 신성한 진리가 이 분으로부터 오는 바, 최고 의미에서 “말씀”이시다 (1288항). 우주에 존재하는 어떤 것이 신성한 선으로부터 신성한 진리를 수단으로 하지 않으면 진짜의 어떤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러므로 히브리어에서 “말들”은 어떤 것들 또한 뜻한다. 우주에 있는 어떤 것은 그것이 실재의 어떤 것이기 위하여는 신성한 선으로부터 신성한 진리를 수단으로, 즉 “말씀”을 수단으로 하여야만 함이 요한복음서에서 분명해진다:
시작에서 말씀이 있었다, 그리고 말씀은 하느님과 더불어 있었다, 그리고 하느님이 말씀이었다, 모든 것들은 그분에 의해 만들어졌다; 그리고 만들어졌던 어떤 것도 그분 없이 만들어지지 않았다 (요. 1:1, 3).
표현들의 내면의 의미들 대부분은 영들과 천사들 사이에 있는 내면의 인간에서 근원하고 있다; 그 이유가 인간의 영의 측면, 또는 육체의 사망후 살아가는 인간 자체 측면은 천사와 영들의 집단과 더불어 살아가기 때문, 물론 외적 인간은 이를 알아채지 못한다; 그리고 그가 천사와 영들의 집단 안에 있기 때문에, 당사자 역시 보편적(우주적, universe) 언어 안에서, 고로 말들(words)의 근원들 안에 그들과 더불어 있다. 그러므로 내적 형체에서는 완전히 일치하지만, 외적 형체에서는 일치함을 벗어나 나타나는 많은 의미들을 말들에 나누어준다(impart). 그 하나의 예가 이 구절의 “말들”이 어떤 것들을 의미하는 경우이다. 이와 비슷한 경우는 많다. 더 예를 들면, 이해력은 내향의 “시각” (inward sight, 영적으로 봄)이라 불리우기에, 빛 덕분에 이 봄이 있게 되는 경우; 주의를 기울임과 순종함은 “들음”과 “경청함”이라 불리우고; 어떤 것을 지각함은 “냄새를 맡음”이라 불리우는 경우 등등이다.

그들이… 죄를 지었다. 이는 뒤집힌 질서를 의미한다. 이는 죄지음의 의미가 신성한 질서에 반대적으로 행동하는 것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신성한 질서에 반대하는 것이 “죄”이다. 신성한 질서 자체는 신성한 선으로부터의 신성한 진리이다. 선으로부터 진리 안에, 즉 선행으로부터 신앙 안에 있는 모든 이는 이 질서 안에 있다, 그 이유가 진리는 신앙 속에, 선은 선행 속에 있기 때문이다; 선으로부터의 진리 안에 있지 않은 자, 결과적으로 악으로부터 진리 안에, 또는 악으로부터 거짓 안에 있는 모든 이는 이 질서에 반대되어 있다; “죄”에 대한 이 밖의 의미는 더 없다. 여기서 술 담당자와 빵 담당자가 “죄지음”에 의해 의미된 것은, 외적인 감각적인 것들이 내적인 것들에 비교하건대 거꾸로된 질서 안에 있었다는 것, 하여 그것들은 일치하지도, 상응하지도 않았다 이다.

이집트 왕의 술 담당자. 이는 지성 부분에 종속되어 있는 육체 안의 것들을 의미한다. 이는 “술 담당자(butler, 주류 관리자)”의 의미가 외적 감각, 또는 육체의 감각, 이 감각은 내적 인간의 지적 부분에 종속되고 있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는 아래에서 더 설명한다); 그리고 “이집트 왕”의 의미가 자연적 인간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어지는 구절들에서 술 담당자와 빵 담당자가 취급되기에, 그리고 이들이 육체 속에 있는, 육체로부터 있는 외적 감각적인 것들을 의미하기에, 여기서 이 감각적인 것들에 관하여 설명을 보태야 할 것 같다. 누구나 아는 바, 외적 또는 신체적으로 있는 감각들은 다섯이다; 즉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이고, 이 오각들이 신체의 모든 삶(생명)을 구성한다; 그 이유가 이것들 없이 신체는 도무지 살아 있지를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것들이 결핍될 때, 죽고, 시체가 된다; 고로 인간의 신체적 부분 자체는 감각들(sensation)의 그릇밖에 더 아니다. 결과적으로 감각들로부터 있는 생명(생활, 삶)의 그릇밖에 더 아니다. 감각함(sensitive, 느끼는 것)이 제 1 이고, 신체의 감각 기관은 감각함의 도구일 뿐이다. 감각함 없는 감각 도구라면, 인간이 세상에서 자신을 맡기고 있는 신체의 오각조차 별소용이 없게 된다; 제 1 순위인 감각함과 더불은 감각 도구들이 하나로서 행동할 때 만이 당사자에게 유용하고, 유익하다. 즉 이것이 신체적인 부분일 뿐이어서 이다.
인간의 모든 외적 감각적인 것들은 그의 내적 감각적인 것들과 관련된 것을 낳는다 (내적 감각적인 것들에 어울리는 것을 생산한다); 그 이유가 외적 감각들(오각)이 인간에게 주어져 그의 신체 안에 놓여진 목적은 내적 인간이 세상에 있는 동안 그것들이 내적 감각적인 것들(마음 속의 감각적인 것들)에 종속되어 섬기도록 하려는 것 때문이다. 그런데 인간의 외적 감각들이 그의 내적 감각들 위에서 통치하기를 시작할 때, 인간은 잃어지고 만다; 그 이유가 이럴 경우, 내적 감각적인 것들은 종의 수준으로만 간주되는 바, 외적 감각적인 것들이 권위를 가지고 명령하는 것들을 확증하는 것을 섬길 뿐이기 때문이다. 외적 감각적인 것들이 이런 상태에 있을 때, 그것들은 방금 위에서 말한 것 같이 거꾸로된 질서 안에 있다.
위에서, 인간의 외적 감각적인 것들은 내적 감각과 관련된 것을 낳는다고 말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이는 그의 지적 부분과 의지 부분에 관련된 것을 낳는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그의 지적 부분에 종속되는 것과 그의 의지 부분에 종속되는 외적 감각들이 있다는 말이다. 지적 부분(만)에 종속되는 감각은 시각이다; 지적 부분에 우선적으로 종속되고, 그 다음 의지 부분에도 종속되는 감각은 청각이다; 그러나 지적 부분과 의지 부분 모두에 (동시에) 종속되는 감각은 후각과 미각이다; 그러나 의지 부분(만)에 종속되는 감각은 촉각이다. 외적 감각적인 것들이 이런 부분들에 종속되어 있다는 것과 어떤 방식에서 종속되는 지까지를 여기에서 살피는 것은 이 구절의 내용상 너무나 곁길로 접어들지 않나 여겨진다; 그렇다 해도 이미 앞 장의 끝에서 이런 감각들의 상응에 관하여 보여준 바 있으므로 전혀 살피지 않았다고 말할 필요까지는 없을 것 같다.
한 가지는 짚어두고 가야할 것 같다; 즉 신앙으로부터 있는 모든 진리들은 지적 부분에 속한다는 것; 사랑과 선행으로부터 있는 모든 선들은 의지 부분에 속한다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진리 또한 선에 관하여 믿는 것, 인정하는 것, 아는 것, 보는 것은 지적 부분에 속하나, 이런 것들이 애착되어지고 사랑되는 것은 의지 부분쪽에서 이다; 그리고 인간이 진리로 애착하고 사랑하는 것은 선이다. 그러나 진리가 선 안으로 건너갈 때, 어떻게 지적 부분의 것이 의지 부분 안으로 흘러가는지에 대한 것은 보다 더 섬세한 탐사가 요구되는 바, 이는 주님의 신성한 자비로부터 기회가 생길 때 말할 것이다.
“술 담당자”가 내적 인간의 지적 부분에 종속되는 감각적 측면인 이유는 마시는 것에 관련되는 것, 즉 물, 젖, 포도주 등등이 진리에 관련된 것을 낳기 때문, 진리는 지적 부분에 관련되는 바, 고로 지적 부분에 관련된 것을 낳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을 돕는 것이 신체의 외적인 것, 즉 오각들이기 때문에, “술 담당자”는 감각적인 것, 또는 감각적인 것들 중의 어떤 한 감각을 의미하게 된다. 위 모두로부터 “술 담당자”에 의해 의미되는 것은 분명해졌을 것이다.

그리고 빵 담당 자. 이는 의지 부분에 종속되는 육체에 있는 감각들을 의미한다. 이는 “빵 담당자(빵굽는 자, baker)”의 의미가 내적 인간의 의지 부분에 종속되는 신체의 감각, 또는 외적 감각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빵 담당자”가 이런 의미를 가지는 이유는 식품쪽 에 있는 모든 것, 또는 먹는 모든 것, 즉 빵, 일반적인 식품(food), 또는 빵을 만드는 모든 작업이 선을 서술하기 때문, 그러므로 의지 부분에 관련된 것을 낳기 때문이다.
여기서와 여기를 뒤잇는 구절에서 두 종류의 외적 감각들이 내적 의미에서 취급되는 이유는 앞 (39)장에서 취급된 주제가 주님, 그리고 주님이 그분의 자연 평면 속의 내면들을 어떻게 신성이 되게 하셨는지, 또는 신성으로 만드셨는지 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취급되는 주제는 주님, 그리고 주님께서 그분의 자연 평면 속의 외면들을 어떻게 신성이 되게 하셨는지, 또는 신성으로 만드셨는지에 대한 것이다. 자연 평면의 외면들은 신체적인 것들, 또는 감각들의 그릇이 되는 감각 기관 모두를 아울러 일컬어지는 말이다. 그 이유가 이 둘 모두가 소위 신체를 구성하기 때문이다. 주님께서는 그분 자신에 있는 신체 자체를, 즉 신체의 감각들과 감각 기관들 모두를 신성이 되게 하셨다; 그리하여 무덤으로부터 그분은 신체와 더불어 다시 일어나셨다, 그리고 그분께서 부활하신 후에 아래와 같이 제자들에게 말하셨다:
내 손과 발을 보라, 이것은 나 자신이다; 나를 보고 만져보라; 그 이유가 영은 살과 뼈를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너희가 나를 보는 바 그대로 가지고 있다 (눅. 24:39).
교회 내의 대다수가 믿는 것은, 모든 이는 마지막 날에 다시 일어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의 신체도 다시 일어난다는 것이다. 이 견해는 너무나 광범위하게 퍼져 보편화되어 이외 다르게 믿으려드는 자가 거의 없다시피하는 것이 작금의 현실이다. (이 교파가 저 교파를 두고 이단이라 서로 손가락질을 주고 받아도 이 대목만큼은 묵시적으로 모두가 일치하여 동의하고 있지 않나 생각된다 역자주.) 이 견해가 세력을 떨친 이유는 자연적 인간을 생각할 때, 그것은 살고 있는 지금의 자신의 신체 그 이상에 대한 생각이 전무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신체가 다시 생명을 받지 않는다고 생각하려들면, 부활 자체 역시 부정해버려야 하는 오류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부활을 인정하려면 너와 나 모두가 세상에서 지닌 신체(고깃덩어리)도 부활한다고 전제해야 한다는 말이다. 그러나 이 주제에 대한 진실은 이렇다: 인간은 사후 즉시 다시 일어난다, 그때 그는 이 세상에서와 같은 신체에 있는 자신으로 나타난다; 즉 자신의 손, 발, 얼굴, 가슴, 배, 허리 등등이 비슷하다는 말이다; 그리하여 그가 자신을 보고 만질 때, 그는 말하기를, 자기는 세상에서 있는 인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보고 접촉한 것은 그가 세상에서 자신을 운반해주었던 그의 외적 측면의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것은 살아 있는 인간 자체를 구성하는 그의 내적 측면의 것이다; 세상에서의 경우 이 내적 측면의 것을 외적 측면의 것이 감싸고 있었던 것, 또는 각 내적 측면에 해당하는 각 외적 측면의 것이 각기 내적 측면의 것에 종속되어 그 직능을 발휘했을 뿐이다.
지상의 육체적 부분은 다른 기능들과 다른 힘들과 능력들이 있는 다른 세계, 이런 것쪽으로 그의 신체의 본성이 길들여진 저 세상에서의 당사자에게 어떤 사용함도 더 이상 없다. 신체로 하여금 보게 했던 그의 눈, 이것은 그가 세상에서 가졌던 것들이 아니고, 거기서 가지는 것들은 그의 내적 인간의 눈이다. 즉 그가 이전에 세상적, 지상의 것들을 신체의 눈을 통하여 보게 했던 내적 인간의 눈 이다는 말이다. 그가 만져서 느끼는 이 신체는 그가 세상에서 향유해왔던 손이나 촉각이 아니라, 그가 거기서 향유하는 촉각이나 손, 사실 이 촉각은 그가 세상에서 밖으로 생겨나 지닌 촉각의 원인에 해당되는 것이다. 더욱이 거기서의 모든 감각은 더 정교하고 더 완전하다; 그 이유는 외적인 것의 제약을 벗어난 내면만의 감각이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내면의 것이 더 완전한 상태인 이유는 내면의 감각이 외면의 감각에 감각력을 주기 때문이다. 단지 내적 감각이 외적 감각에서 행동할 때, 그것이 무디어지거나 불분명해질 뿐이다. 더욱이 내적 감각은 내적 측면의 것에서만 감각할 수 있고, 외적 감각은 외적 측면의 것에서만 감각한다. 고로 사후에는 내적 측면의 눈이 인간으로 서로를 보게하는 바, 그는 자기의 내면의 품질에 걸맞는 집단 안에 있는다. 이 주제에 주목하여 확실함이 있도록 나로 영들 자체를 만져보도록, 그리고 그것에 관하여 그들과 자주 대화하는 것을 허락해 주시기도 했다.
영들이라 불리우는 사후 인간들, 그리고 만일 그들이 선 안에서 살아왔다면, 천사들인 인간들은 이런 것에 극도로 놀라워한다; 즉 교인들이 세상이 멸해지는 마지막 날까지 영원한 생명을 보지 못한다는 것을; 그리고 마지막 때 그는 자기가 내던진 먼지(dust, 몸)으로 다시 입혀진다는 것을 믿는 것에; 그리고 그런데도 교인들은 사후 다시 일어난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것 등등에 놀란다는 말이다; 인간이 죽을 때, 그는 자기가 천국 안에, 또는 지옥 안에 있다라고 누가 말하지 못하는가? 어린 아이가 죽었을 때 그들이 천국 안에 있다라고 누가 말하지 못하는가? 죽음이 임박한 병자에게 당신은 다른 삶 안으로 곧바로 들어갈 것을 확증해줌으로 죽는 당사자를 누가 위로하지 못하는가? 죽음의 고통 안에, 또는 죽음이 준비됨에 있는 자는 이밖에 더 달리 믿지 못한다; 아니, 이 믿음으로부터 많은 이들이 자신들을 위해 저주의 장소로부터 다른 장소로 운반되기를, 그리고 그들을 천국 안으로 입장하는 능력을 요구하기도 한다; 그러면서 이런 말함들을 자기들의 편(이익)쪽에서 한덩어리로 모은다. 주님께서 강도에게 “오늘 너는 나와 함께 낙원에서 있을 것이다”(눅. 23:43)라고 하신 말씀을 누가 알지 못할까? 그리고 그분이 부자와 나사로에 관해 말하신 것, 즉 전자는 지옥으로 운반되고, 후자는 천국 안으로 천사에 의해 들려졌다는 것 (눅. 16:22, 23)을 누가 알지 못할까? 그리고 주님께서 부활에 관해 가르치신 것, 즉 “그분은 죽은 자의 하느님이 아니고 산 자의 하느님이시다”(눅. 20:38)는 것을 누가 알지 못할까?
인간이 자기 영으로부터 생각하고 말할 때, 그는 위의 주님의 말씀들을 알고 있고, 그렇게 생각하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그가 자기 교리로부터 생각하고 말할 때, 그는 아주 다르게 말한다; 즉 자기는 마지막 날까지 다시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모든 이는 그가 죽을 때 마지막 날이다는 것, 또한 그때 그의 심판이 있다라고 많은 이들이 말한다. “피부로 에워싸인 것, 그리고 육으로부터 하느님을 봄”(욥. 19:25, 26)에 의해 뜻해진 것은 앞에서 살핀 것에서 알았을는지 모른다 (3540끝 항). 이런 사항들은 인간이 죽은 후에는 세상에서 자기를 옷입힌 육을 가지고 다시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오직 주님만이 그렇게 일어나셨다, 그리고 이것은 그분이 세상에 계시는 동안, 그분의 몸을 신성이 되게 하셨기 때문, 또는 몸을 신성으로 만드셨기 때문이다.

그들의 주인 이집트 왕을 향하여. 이는 그것들이 자연적 인간의 새로운 상태에 반대되어 있음을, 즉 “술 담당자와 빵 담당자”에 의해 의미된 것인 신체의 감각적인 것들, 또는 외적인 감각들이 자연적 인간의 새로운 상태에 반대되어 있음을 의미한다. 이는 “이집트의 왕”의 의미가 일반적 측면에서의 기억 속의 지식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왕이 나라의 머리라 볼 수 있는 바, 이는 어느 것의 일반적인 것을 의미하게 된다. 여기서는 이집트의 왕인 바, 일반적 측면에서의 기억 속의 지식이 의미되고, 그렇기 때문에 자연적 인간도 의미하게 된다, 그 이유는 모든 기억 속의 지식이 자연적 인간의 진리이기 때문이다: 자연적 인간의 선 자체는 “주인”에 의해 의미된다. 여기서 자연적 인간의 새로운 상태가 의미되는 이유는 앞 39장에서 자연 평면의 내면들을 새로이 만듦이 묘사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최고 의미에서, 이것들은 주님에 관련되는데, 그것들이 신성이 되어지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 취급되는 주제는 자연 평면의 외면들인데, 이것들은 내면들과 상응하든지, 또는 하모니를 이루는 쪽으로 환원되기로 되어 있다. 새로워진 자연 평면의 내면들, 또는 자연적 인간의 새로운 상태가 “그들의 주인 이집트의 왕”에 의해 의미되어진다; 그리고 질서 안으로 환원되지 않은 외면들, 그러므로 질서에 반대되는 외면들이 “술 담당자와 빵 담당자”에 의해 의미되어 있다.
자연 평면에는 내면들이 있고, 외면들이 있다; 자연 평면의 내면들은 기억 속의 지식들과 이 지식들에 애착함이다; 그리고 자연 평면의 외면들은 두 종류의 감각적인 것들인데, 이는 방금 앞에서 살폈다. 인간이 죽을 때, 그는 자기 뒤에 자연 평면의 이런 외면의 것들을 남긴다; 그러나 그와 더불어 자연 평면의 내면의 것들은 다른 삶으로 운반되어, 거기서 그것들은 영적인 것들과 천적인 것들을 위한 평면으로서 섬긴다. 인간은 죽을 때, 그는 뼈와 살 외에는 그가 잃는 것이 하나도 없다; 그 이유가 그는 자기가 행하였던, 말했었던, 또는 생각했던, 모든 것에 관한 기억을 자기와 함께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는 모든 그의 자연적 애착들과 바램들도, 고로 자연 평면의 모든 내면들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자연 평면의 외면들에 관한 것은 그에게 필요하지 않다; 그 이유가 그는 이 세상에 있는 것을 보거나 듣거나 냄새맡거나 맛보거나 만져보거나 해야 하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실로 저세상의 감각도 이세상에서와 같게 작동하나 여전히 이세상의 감각 같지는 않은데, 그 이유는 그것들은 살아 있는 것을 가지고 있고, 이것은 자연계에 적절한 감각은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다른 삶에 있는 각각 그리고 모든 것들은 그곳의 태양이신 주님으로부터 출시되고 존속해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것들은 자기들 안에 살아 있는 것을 가지고 있다; 이에 반해 자연계에 있는 각각 그리고 모든 것은 자연력의 불인 이곳의 태양으로부터 출시되고 존속해간다, 그러므로 그것들 안에는 살아 있는 것을 가지고 있지 않다. 이것에서 살아 있게 나타나는 것들은 영계, 즉 영계를 통하여 주님으로부터 외에 다른 근원은 없다.

그리고 바로는 화를 내었다. 이는 새로운 영적 인간은 그 자체를 돌아 서있게 했다를 의미한다. 이는 바로, 또는 이집트의 왕의 표현이 새로운 자연적 인간, 또는 자연적 인간의 새로운 상태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리고 “화를 냄”의 의미가 자체를 돌아서 있게 함이다로부터 알려진다; 그러므로 여기서 이것은 새로이 만들어진 자연 평면은 자연 평면의 외면, 또는 신체의 감각 부분으로부터 자체를 돌아서 있게 했다 인데, 그 이유는 이것이 그것과 상응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의 두 시종들을 향하여. 이는 육체 안의 두 종류의 감각적인 것들로부터 그 자체를 돌아서 있게 했다를 의미한다. 이는 “시종(courtminister)들”, 즉 술 담당자와 빵 담당자의 의미가 양쪽 종류의 감각적인 것들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신체의 감각적인 것들, 즉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은 마치 자기들의 주인, 왕인 내면의 인간에 비교하면 궁전의 시종들 같다. 그리하여 이 시종들인 감각들은 육체의 눈에 보일 수 있는 것들과 인간의 사회로부터 왕인 내면의 인간이 경험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을 수 있게 하여, 이를 통해 총명과 지혜를 획득하는 기회를 갖게 해준다. 그 이유가 인간은 어떤 지식을 가지고 태어나지 않기 때문, 더구나 어떤 총명도, 어떤 지혜도 갖지 않고 태어나기 때문, 단지 그런 것들을 받는 수용력과 그것들을 빨아들이는 능력만 가지고 있을 뿐이다. 이 빨아들임은 두 경로를 수단으로, 즉 내적 경로와 외적 경로를 수단으로 해서 결과되어진다. 내적 경로에 의해서는 신성인 것이, 외적 경로에 의해서는 세상에 있는 것이 흘러든다. 이것들은 인간 안쪽에서 만난다, 그때 당사자가 신성인 것에 의해 계몽되는 것을 자신에게 허용하는 만큼에서 그는 지혜 안으로 온다. 외적 경로에 의해 흘러드는 것들은 신체의 감각적인 것들을 통하여서 흘러든다; 비록 그것들이 자신들로부터서 흘러드는 것은 결코 아니다 할지라도, 내적 인간에 의해 신성으로부터 내적 경로를 수단으로 흘러드는 천적이고 영적인 것들을 위한 평면(plane)이 되어 섬기도록 불러 일으켜진다. 이로부터 분명해지는 것은, 신체의 감각들은 궁전의 시종들 같다는 것이다. 자연적 인간을 영적 인간에 비교해 말하면, 이밖에 더 이상은 아니다.
여기서 시종으로 번역한 단어의 원어에서의 사용 범위로 볼 때, 섬기는 자(minister, 대신, 성직자), 조신(朝臣, courtier), 시종(侍從, chamberlain), 또는 내시(eunuch, 환관, 고자)로 번역이 가능하다; 여기서의 내적 의미에서는 선과 진리에 관련된 자연적 인간, 보다 특별하게 말하면, 선에 관련된 자연적 인간인데, 이를 이사야서에서:
여호와와 굳게 결합한 낯선 자의 아들은 말하기를, 여호와는 그분의 백성으로부터 나를 분리하실 것이 분명하다 라고 이야기하게 하지 말라; 고자가 말하기를 잘보라 나는 마른 장작이다 라고 말하게 하지 말라. 그 이유는 여호와께서 내 안식일들을 준수하고, 나를 기쁘게 하는 것을 선택하며, 내 언약을 간직하는 고자에게 이렇게 말하셨기 때문이다: 나는 그들에게 내 집과 내 (성)벽 안쪽에 장소와 이름을 줄 것인즉, 아들들과 딸들보다 더 나을 것이다; 나는 그들에게 절멸되지 않을 영원으로부터의 이름을 줄 것이다 (이. 56:3-5);
위 구절에서 “고자”는 선 측면에서의 자연적 인간, 그리고 “낯선 자의 아들”은 진리 측면에서의 자연적 인간이다; 그 이유가 주님의 교회는 외적 측면과 내적 측면이 있기 때문이다. 외적인 교회로부터 있는 이들은 자연적 수준의 교회에 있다. 한편, 내적인 교회로부터 있는 이들은 영적 수준의 교회에 있다. 자연적 인간임에도 불구하고 선 안에 있는 이들이 “고자들”, 그리고 진리 안에 있는 자연적 인간이 “낯선 자의 아들”이다; 진실로 영적이거나 내적인 인간은 교회 안쪽에서만 발견되기로 되어 있기에, “낯선 자의 아들”에 대해서는 이방인, 또는 교회 바깥쪽에 있는 이들, 그럼에도 자기들의 신앙에 따라 진리 안에 있는 이들이 의미되어진다. 그리고 “고자들”에 의해서는 선 안에 있는 이들(교회 밖의 이들, 또는 자기들의 신앙에서 선 안에 있는 이들)이 의미된다.

술 담당 제 1 인 자에게, 빵 담당 제 1 인 자에게. 이는 지적 부분과 의지 부분에 종속되어 있는 일반적인 감각적인 것들로부터를 의미한다. 이는 “술 담당자”의 의미가 지적 부분에 종속되는 감각적인 것이다로부터; 그리고 “빵 담당자”의 의미는 의지 부분에 종속되는 감각적인 것들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리고 “제 1 인 자(prince)”의 의미가 제 1 의 것이다로부터, 여기서는 일반(general)의, 또는 공통(common)의를 말한다. 그 이유가 제 1 의 것은 공통의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즉 제 1의 것이 그 외 나머지를 통치하듯, 너와 나 모두에게 공통되는 것이 너와 나 모두를 통치해주기 때문이다 (관습적, 상식적, commonsence인 것이 사회를 다스려주는 경우도 더불어 생각해보라 역자주.) 그 이유가 세세한 것들(특수적인 것들, partcular)이 일반적인 것들에 관련하여 제 1 의 것을 산출하기 때문 (일반적에 걸맞는 것을 우선적으로 생산하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는 세부적인 것들이 일반적인 것과 하나를 만들기 위해, 또는 반대되는 경우가 나타나지 않게 하기 위하여서이다.

그리고 그는 그들을 구치소에 놓아두었다. 이는 거절을 의미한다. 이는 “구치소에 놓는다”가 거절한다를 의미함에서 알게 된다; 그 이유는 누군가를 구치소에 놓는다는 것은 그를 거절한다는 말이기 때문이다.

수비대장의 집에 있는. 이는 해석을 위한 제 1 의 것들을 의미한다. 이는 “수비대장(prince of the guards)”의 의미가 해석을 위한 제 1 의 것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여기서의 경우에서의 의미는 양쪽 종류의 감각적인 것들이 해석을 위한 제 1 의 것을 수단으로 거절되어졌다는 것, 즉 내적 의미 측면에서의 말씀으로부터 있는 것들에 의해 거절되어졌다 이다; 감각적인 것들 안에 신앙이 없을 때, 이것들은 거절되어진다고 말해진다. 그 이유가 감각적인 것들과 감각적인 것들을 수단으로 생각 안으로 들어가는 것들은 오류(fallacy)들이고, 인간 안에서 세력을 떨치는 모든 오류가 이 근원으로부터 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신앙의 진리들을 믿는 자가 거의 없게 되고, 자연 인간은 영적 인간에 반대하여, 즉 외적 인간이 내적 인간에 반대하여 있게 된다; 그러므로 만일 자연적 또는 외적 인간이 영적 또는 내적 인간을 통치하기를 시작하면, 신앙 속의 것들은 더 이상 믿어지지 않는다; 그 이유가 오류들이 그늘지게 하고 탐욕들이 신앙의 진리들을 질식시키기 때문이다.
감각들의 오류들이 무엇인지를 아는 자가 거의 없는 바, 그리고 그것들이 합리적인 것들 위에, 그리고 신앙으로부터의 영적인 것들 대부분 위에 큰 그늘을 드리운다는 것, 심지어 그것들을 꺼져버리게 하고, 특히 인간이 자아 사랑과 세상 사랑으로부터 있는 탐욕들의 즐거움 안에도 있게 될 때는 신앙으로부터의 영적인 것은 멸절당하는 바, 이에 대하여는 예증으로 더 살펴보자. 첫째로, 자연계에 대한 감각의 오류, 자연계 안에 있는 것들에 대한 감각의 오류, 영적인 것들에 대한 감각의 오류이다. 1. 단순한 자연적 감각의 오류, 또는 자연 안에 있는 것에 대한 오류는 이렇게 믿는 것들이다: 태양이 하루 한바퀴씩 이 지구를 회전한다고 믿는 것, 그리고 또한 모든 별들과 더불은 창공도 그렇다는 것; 그리고 비록 이것이 신용될 수 없다 해도-불가능이기 때문에-엄청난 불의 바다가 태양이다는 것은 신용할 수 없고 불가능이다고, 마찬가지가 셀 수 없는 별들의 경우도 그렇다고, 그리고 이것도 서로에게 상대적으로 장소의 어떤 변화 없이 매일 한 번 지구 주위를 돌 것이다; 더 첨가하는 말인즉, 지구가 회전과 자전을 수단으로 매일 그리고 해마다의 운동이 있다는 것은 행성들로부터 보여질는지 모른다는 것, 행성들 역시 지구들이다는 것, 그것들 중의 어떤 것은 달들과 더불어 그것들 주위를 회전한다는 것, 그리고 관찰에 의해 알려지는 바, 우리의 지구 같이 매일, 그리고 해마다의 운동을 만든다는 것, 이런 감각의 오류가 많은 인물들과 더불어 득세하고 있다.
2. 단지 자연적 감각의 오류, 또는 자연에 있는 것에 대한 감각의 오류이다: 즉 단 하나만의 대기(atmosphere)가 있다는 것, 그리고 이것은 이쪽 일부로부터 또 다른 일부로 계속적으로 더 순수해진다는 것, 그리고 이것이 중지되는 곳은 진공(vacuum)이 있는다는 것이다. 인간의 외적 감각만에 의견을 타진한다면, 이외 달리 납득되지 않는다. 3. 단지 자연적 감각의 오류이다: 즉 첫 창조로부터 씨들 안에는 나무나 꽃으로 성장하고, 자신들을 재생산하는 특성이 각인되어져 있다는 것, 그리하여 이로부터 존재 안으로 옴이 있고 만물의 존속함이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주장을 한다면, 즉 어떤 것이 존재 안으로 항구적으로 오고 있지 않으면, 그것은 존속될 수 없다는 것, 이는 존속함이 존재 안으로 항구적으로 옴이 있다는 법칙에 따라서이다는 것, 그리고 모든 것은 그 자체에 앞서 있는 어떤 것에 연결되어 있지 않으면 없음으로 전락된다는 것, 신체의 감각과 이 감각으로부터의 생각은 이것을 납득하지 못한다는 것, 각각 그리고 모든 것들은 그것들이 존재 안으로 온 방식 안에서 영계로부터의 유입을 수단으로, 즉 신성으로부터 영계를 통하여 유입됨으로 존속되는 것을 납득하지 못한다.
4. 이런 자연적 감각만의 오류도 있다: 즉 단순한 본질 자체가 있는데, 단세포와 원자들이다; 그 이유가 외적 감각의 범위 안쪽에 있는 것은 무엇이든, 단순한 본질 자체이고, 그밖의 것은 아니라고 자연적 인간은 믿어진다는 것이다. 5. 이런 자연적 감각만의 오류도 있다: 모든 것들은 자연 속에, 자연으로부터 있다, 그리고 납득되지 않는 더 순수하고 내면적인 자연 안에 어떤 것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만일 이렇게 말해진다면, 즉 자연 넘어, 또는 안쪽에 영적이고 천적인 것이 있다고 말하면, 이것은 거절당해진다; 그리고 그것이 자연이 아니다면,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다고 믿고 만다. 6. 이런 감각의 오류도 있다: 즉 육체만이 살아 있고, 육체가 죽을 때 그것의 생명은 멸해진다는 것이다; 인간의 감각(감각적 인간)은 내적 인간이 외적 인간의 세세한 부분들에 있다는 것, 그리고 내적 인간은 자연 안쪽에 있다는 것, 그리고 내적 인간은 영계 안에 있다는 것을 100% 납득 못한다; 그러므로 믿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것도 믿지 않는데, 납득되지 않기 때문, 즉 죽음 이후 내적 인간은 육체로 다시 옷입혀지지 않고 살아간다는 것이다.
7. 그러므로 이런 감각의 오류도 있다: 즉 인간은 짐승들 그 이상의 수준에서 사후 살지 못한다는 것, 그 이유는 인간의 생명 역시 여러 측면에서 짐승과 비슷하기 때문, 단지 짐승보다 조금 더 완전한 동물일 뿐이어서 이다는 것이다. 감각적 인간, 즉 감각으로부터 생각하고 결론을 끌어내는 인간은 인간이 짐승 넘어, 그리고 짐승보다 더 높은 생명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납득 못한다, 그 이유는 그는 어떤 것의 원인에 관하여, 뿐만 아니라 신성에 관하여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신성과 결합된 신앙과 사랑을 수단으로 생각할 수 없기 때문, 또한 거기로부터의 유입을 받을 수 없기 때문, 그것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 없기 때문, 고로 인간 안에 상호성이 있기 때문, 받아들임 역시 있기 때문, 이것은 짐승의 경우는 결코 없기 때문이다.
8. 이리하여 파생된 오류도 있다: 즉 인간의 살아 있는 부분 자체, 혼이라 불리우는 것, 이것은 에테르 같은 어떤 것, 또는 불꽃 같은 것일 뿐이다는 것, 이것은 인간이 죽을 때 사라진다는 것; 그리고 이것이 심장 안에, 또는 뇌 안에, 또는 이것의 어떤 부분 안에 주재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마치 기계가 작동하듯 거기로부터 통치한다는 것이다. 내적 인간이 외적 인간의 모든 부분 안에 있다는 것, 그리고 눈은 그 자체가 보지 못한다는 것, 귀도 그 자체는 듣지 못한다는 것, 그러나 내적 인간으로부터 보고 듣는다는 것을 감각적 인간은 납득하지 못한다. 9. 이런 오류도 있다: 즉 빛 또는 열은 태양, 또는 자연력의 불 외에 다른 근원으로부터는 와질 수 없다는 것이다. 총명인 빛이 있다는 것, 천국의 사랑인 열이 있다는 것, 모든 천사들은 이런 빛과 열 안에 있다는 것을 감각적 인간은 납득하지 못한다. 10. 이런 감각의 오류도 있다: 즉 인간은 자신으로부터 살고 있다고, 또는 이 생명은 당사자에게 나누어져 왔다는 것을 믿는다; 그 이유가 이와 달리 감각적 마음에 나타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자체 생명을 가진 것은 신성 뿐이다는 것, 고로 생명은 하나이다는 것, 세상에 있는 생명들은 생명을 받는 그릇 형체일 뿐이다는 것을 감각적 마음은 전혀 납득 못한다.
11. 감각적 인간이 오류로부터 이렇게 믿는다: 즉 간통들은 허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 이유가 감각적 인간으로부터 그는 결론 맺기를, 결혼들은 후손의 교육을 위하여 질서의 행위일 뿐이다는 것; 이 질서가 파괴되지 않는 한, 결혼들로부터 후손이 나와지는 것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는 것; 결혼으로부터 있는 것이 외설적인 것과 다른 것은 그것이 허용됨의 여부 차이에서일 뿐이다는 것; 고로 성경으로부터 기독교계에 의해 금지되지 않았다면, 한 아내 그 이상과 결혼하는 것이 질서에 반대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들에게 이렇게 말해준다면, 즉 천국의 결혼과 지상의 결혼들 사이에 상응함이 있다는 것; 당사자가 영적 진리와 선 안에 있지 않으면, 누구도 자신 안에 결혼의 어떤 것을 가질 수 없다는 것, 또한 진짜 결혼이 남편과 몇 아내들 사이에서 존재함은 가능할 수 없다는 것, 그러므로 결혼들은 그 자체 거룩하다는 것, 이런 사항들이 감각적 인간에게는 하등 중요하지 않은 바, 거절되어진다. 12. 이런 감각의 오류도 있다: 즉 주님의 왕국, 또는 천국에서의 기쁨이나 행복이 지상의 왕국과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는 것, 즉 이쪽의 것이 저쪽보다 더 클 것이다는 것, 그러므로 이쪽이 저쪽보다 더 영광스럽다는 것이다; 이런 오류가 생기는 이유는 천국에서는 가장 작은 자가 큰 자이다는 것, 꼴찌가 첫째되는 곳임을 감각적 인간은 전혀 납득 못하기 때문이다. 이들에게 이렇게 말해준다면, 즉 천국에 있는 기쁨, 또는 천사들의 기쁨은 공적이나 보답 받음 없이 타인이 혜택을 누리도록 그들을 도와줌에 있다는 것을 말하면, 놀라운 만큼 감각적 인간은 슬퍼지고 만다. 13. 감각의 오류이다: 즉 선한 일들은 보상을 받을만 하다는 것, 그리고 자신을 위하여 누군가에게 혜택이 가게 하는 것이 선한 일이다는 것이다. 14. 이런 감각의 오류도 있다: 즉 인간은 신앙만에 의해 구원된다는 것, 그리고 신앙은 선행을 가지지 않은 이들 안에 존재할 수 있다는 것, 사후 남는 것은 신앙이지, 살아온 삶은 아니다는 것이다. 이런 등등의 예들은 여러분도 더 말해볼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므로 인간 안에서 감각적인 것이 통치할 때, 신성으로부터 계발되는 합리적 평면은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어둠 안에 있는다, 그리고 이때 믿어지는 것은, 감각적인 것으로부터 결말내려지는 것이 합리적인 것이다.

감옥에. 이는 거짓들 사이에를 의미한다. 이는 “감옥(prison house)”의 의미가 거짓으로부터의 황폐됨, 그러므로 거짓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요셉이 억류되어져 있는 곳. 이는 지금 이러한 것들에 관련하여 자연 평면 속의 천적인 상태를 의미한다. 이는 “장소”의 의미가 상태이다로부터; 그리고 요셉의 표현함이 합리적 평면으로부터 있는 영적 평면의 천적인 것이다로부터, 여기서는 자연 평면의 천적인 것인데, 그 이유는 지금 자연 평면 안에서 자연 평면으로부터 시험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억류되어 있음”의 의미가 시험들로부터의 상태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39 장에서 취급되는 주제는 자연 평면의 내면에 있는 이런저런 것들 측면에서 자연 평면에 있는 영적 평면의 천적인 것에 관한 시험들의 상태였고, 여기서는 자연 평면의 외면에서 있는 것들에 관련된 시험들이다.

그리고 수비대장은 그들 위에 요셉을 두었다. 이는 자연 평면 속의 천적인 것이 해석을 위한 제 1의 것들로부터 그들을 가르쳤음을 의미한다. 이는 “수비대장”의 의미가 해석을 위한 제 1 의 것이다로부터; 요셉의 표현함이 자연 평면의 천적인 것이다로부터; 그리고 “위에 두었다”의 의미가 여기서는 가르치는 것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 이유가 조사함이나 수정함의 목적을 위해 거절되어진 이런저런 것들 위에 놓여진 자이기 때문에 그는 선생의 직능을 수행한다.

그리고 그는 그들을 섬겼다. 이는 그가 그들을 훈육했음을 의미한다. 이는 “섬기다(minister)”의 의미가 훈육하다(instruct)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여기서의 경우, “섬기다”가 누군가에게 종이 되어 섬긴다를 뜻하지 않는데, 그 이유는 그가 그들 위에 앉혀졌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섬기다”가 그들에게 혜택이 돌아갈만한 어떤 것을 공급하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그리고 여기서 취급되는 주제가 새로운 자연 평면 또는 외적 감각이기 때문에, “섬기다”에 의해 훈육하다가 의미된다. “…위에 두다”는 생활 속에 있는 선을 서술하고 있다; 그리고 “섬기는”것은 교리 속에 있는 진리를 서술하고 있다.

그리고 그들은 구치소에서 (여러) 날들 동안 있었다. 이는 그들이 거절함의 상태에서 오래 있었다를 의미한다. 이는 “날들(days)”의 의미가 상태들이다로부터; 그러므로 여기서 “날들 동안”은 그들이 “구치소(custody)”에 의해 의미되는 거절됨의 상태에서 오래 있었다를 뜻한다. 내적 의미에서 포함된 세부 사항들이 이 부분에서는 더 이상은 놓여질 수 없는데, 그 이유는 내적 의미 속의 것들에 대한 생각을 이 세상에 있는 것들로부터 더 이상 형체화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즉 영적 인간 속의 천적 평면의 실예에 관하여, 그리고 자연 평면의 내면이 새로이 만들어질 때 자연 평면에서 그것의 상태의 실예에 관하여, 새로이 자연 평면이 만들어진 이후 자연 평면의 외면이 거절되는 것의 실예에 관하여 이다. 그러나 이것들과 유사한 것들로부터는 어떤 생각을 천국에 있는 것들로부터 형성할 수 있을런지 모른다. 그렇다해도 생각하는 동안 감각적인 것들로부터 물러나지지 않을 경우, 어떤 생각함마저 쉽지가 않다.
인간의 사고력이 감각적인 것들을 초월해 승강되어 있게 해서, 아래쪽에 있는 감각적인 것을 내려다보도록 하지 않으면, 그는 말씀에 있는 어떤 내면적인 것도 이해할 수 없다; 더욱이 천국 속에 있는 이런저런 사항들을 세상 속에 있는 것들로부터 추출해낼 수 없다; 그 이유가 감각적인 것들이 그것들을 질식되게 하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감각적인 이들과 지식들을 획득함 자체에 자신의 모든 것을 헌신해 가는 이들이 오히려 천국으로부터의 어떤 것을 납득하는 것이 더 힘들 경우가 적지 않다; 그 이유가 그들은 세상으로부터의 이런저런 것들에 자기들의 생각을 침수시켜 왔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자기들의 용어들을 세상적인 것들로부터 추출해 거기에 자신을 푹 담가둔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의 관점을 넘어서, 또는 그들의 용어로부터 자유하여 천국에 관한 것을 생각하는 것이 매우 힘들다는 말이다. 즉 자기 자신을 감각적인 것들 안에 침수시켜 놓아서 더 이상 그것을 벗어나 쳐다볼 수 없는 지경에 있다는 말이다. 이런 이유로 학식자가 단순한 자보다 천국의 것을 덜 믿고, 덜 지혜롭다; 그 이유가 차라리 단순한 자가 자신들만의 용어나 지식들이 없어 그것들 넘어의 것을, 감각의 것 넘어의 것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학식자들은 만사를 자신이 설정한 틀에 끼여맞추는데 혈안이 되어 있다; 따라서 그들의 마음은 나름대로 애써 획득했다는 자신이 설정한 사고력 안에 고정되어 있다. 한마디로 그들의 마음은 감옥에 억류되어 있다.

5-8절. 그리고 그들, 감옥에 억류된 이집트 왕의 술 담당자와 빵 담당자, 그들 둘 다 꿈을 꾸었고, 그들 각자가 같은 날 밤에 꾸었고, 각자의 꿈의 해석은 각각이었다. 6 그리고 요셉이 아침에 그들에게 왔다, 그리고 그들을 보았다, 그리고 보라, 그들은 근심하고 있었다. 7 그리고 그는 그의 주인의 구치소에서 그와 함께 있는 제 1 인 자들에게 물어, 말하기를, 오늘 당신들의 얼굴들이 악한데 어찌된 일입니까? 8 그리고 그들은 그에게 말했다, 우리는 꿈을 꾸었다, 그리고 그 꿈의 해석자가 없다. 그리고 요셉은 그들에게 말했다, 해석은 하느님에게 속한 것 아닙니까? 청컨대 나에게 말해보시오.

그리고 그들은 둘 다 꿈을 꾸었다. 이는 그들에 관한 예견을 의미한다. 이는 “꿈”의 의미가 예견이다로부터; “그들 둘 다”란 “술 담당자와 빵 담당자”에 의해 의미된 양쪽 종류의 감각적인 것들을 표시한다. 이 꿈들이 이런 것들에 관하여서 이었다는 것은 이어지는 구절로부터 알게 된다. 최고 의미에서 “꿈”이 예견을 표시한다는 것은 주님으로부터 천국을 통하여 직접적으로 흘러드는 꿈들은 장차 오게 되는 것들을 미리 말하기 때문이다. 이런 꿈들에 해당되는 꿈에 대한 실예로는 (창. 37장의) 요셉의 꿈, (여기서의) 술 담당자와 빵 담당자의 꿈, 바로의 꿈, 느부갓네살의 꿈, 그리고 일반적 측면의 예언적 꿈 등등이다. 이와 같은 꿈들에 의해 미리 말해진 장차 닥칠 사항들은 주님의 신성한 예견(foresight) 외에 다른 근원은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일반적, 세부적, 특수적 모든 것들이 미리 보여져 있었음을 눈치챌 수 있다.

같은 날 밤에 각기 꿈을 꾸었다. 이는 그들에게 희미한(불명료함) 상태 안에 있었던 사건에 관하여를 의미한다. 이는 “꿈”의 의미가 예견, 그러므로 예보(prediction)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리고 이것이 예보를 의미하기 때문에, 이것은 사건(event)을 의미한다, 그 이유는 예보는 사건에 관하여이기 때문이다; 또한 “밤”의 의미가 희미함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영적 의미에서 “밤”은 악으로부터 거짓에 의해 가져와진 그늘의 상태, 고로 마음이 불명료하게 보는 상태를 의미한다. 세상에서 밤에 불명료함은 자연계에서의 불명료함이나, 다른 삶에서의 밤의 불명료함은 영계에서의 불명료함이다. 전자는 이 세상의 태양이 없음에 따라 빛이 박탈됨에서 발생되나, 후자는 주님이신 천국의 태양이 없음에 따라 (총명 속에 있어야 할) 빛이 박탈됨으로부터 발생된다. 이 박탈됨은 세상의 태양처럼 천국의 태양이 저뭄으로부터 야기되지 않고, 인간, 또는 영이 악으로부터의 거짓 안에 있음으로부터, 자신을 천국의 태양으로부터 옮김으로부터, 고로 자신 위에 희미함을 가져옴에서 발생된다. 밤과 밤의 불명료함에 관한 위의 간단한 생각만 가지고도 영적 의미가 자연적 의미에 비교해 어떤 위치에 서있는지에 대해 여러분의 마음에 와닿는 무엇이 있을지 모른다. 더욱이 자연계의 희미함은 한 겹뿐이지만, 영계의 희미함은 세 겹이다; 즉 하나는 악으로부터의 거짓의 희미함, 둘째는 진리에 무지함으로부터 있는 희미함, 셋째는 내면의 것들보다 외면의 것에 비중을 둠에 의해, 즉 내적 인간의 합리적인 것들에 비교해 외적 인간의 감각적인 것들을 중요시함에 따른 희미함이다. 어쨌든 위 세 겹의 희미함 모두는 (주님으로부터 있는 총명과 지혜인) 천국의 빛이 받아들여지지 않음이 그 원인이다; 사실상 이 빛은 계속적으로 흘러들고 있다; 그러나 이것이 악의 거짓에 의해 거절되고, 질식되고, 악용되어지는 것이다; 그리하여 진리에 무지한 자에 의하여서는 이 빛이 매우 조금만 받아들여진다; 그리고 외적 인간의 감각적인 것들에 의해서는 이 빛이 일반적 차원으로 만들어져 무디어진다(dulled, 활발하지 못함, 우둔해짐, 가슴을 꼭찌름(pointed)이 없음, 나의 생명이 되지 못함, 나에게 특별한 것이 아니되어 있음, 즉 불명료함).

그의 꿈의 해석은 각각이었다. 이는 그들이 자신들 안에 가졌던 것(사건)을 의미한다. 이는 “꿈의 해석”이 꿈을 펼쳐보임, 그러므로 사건에 관한 지식, 고로 그들이 자신 안에 가졌던 사건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꿈”이 사건을 표시함은 방금 위에서 살폈다.

술 담당자와 빵 담당자. 이는 양쪽 종류의 감각적인 것들에 관하여를 의미한다. 이는 “술 담당자”의 의미가 지적 부분에 종속되는 감각부분이다로부터; 그리고 “빵 담당자”의 의미가 의지 부분에 종속되는 감각 부분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것들이 자연 평면의 내면에 의해 거절되어졌다는 것은 앞에서 살폈다. 어쨌든 우리가 알아야 하는 것은, 여기서 거절되어졌다고 말한 감각들은 신체의 오각이 아니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이 오각으로부터 신체는 살아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관점들, 또는 생각들, 또한 애착들과 바램들이 거절되어졌다는 말이다. 세상의 대상물(object)들은 한편으로는 감각적인 것들을 통하여, 또 한편으로는 합리적인 것들을 통하여 자연적 수준의 기억 또는 외적 부분 안으로 들어간다. 이 대상물들은 이 기억 안에서 자체들을 분리한다. 합리적인 것들을 통하여 들어간 대상물들은 보다 더 내면의 장소에 위치하고, 감각적인 것들을 통하여 들어간 대상물은 보다 더 외면에 위치한다. 그러므로 이미 말했듯이, 자연 평면은 두 겹, 즉 내면과 외면으로 되어 있다.
자연 평면의 내면이 이집트의 왕 바로에 의해 표현되어지고, 자연 평면의 외면은 술 담당자와 빵 담당자에 의해서 표현되고 있다. 이 둘의 차이는 어떤 것을 두고 갖는 각각의 관점들, 이로부터 파생되는 결말들로부터 보여질는지 모른다. 자연 평면의 내면으로부터 생각하고 결론맺는 자는 합리적인 만큼에서 그는 합리적 평면을 통해 들어간 것에 동화된다; 그러나 자연 평면의 외면으로부터 생각하고 결론 맺는 자는 감각적인 만큼에서 감각적인 것으로부터 들어간 것에 동화된다. 전자는 합리적 인간, 후자는 감각적 인간이라 불리운다. 인간이 죽을 때 그는 자기와 더불어 자연 평면의 모든 것을 가져간다; 그래서 그가 세상에서 형성해왔던 모든 것이 그와 더불어 남겨져 있다; 따라서 그가 합리적 평면으로부터 있는 것을 흡수한 만큼에서 그는 합리적 인간이다; 또한 그가 감각적인 것으로부터 있는 것을 흡수한 만큼에서 그는 감각적 인간이다. 차이는 이렇다: 자연 평면이 합리적 평면에 있는 것을 끌어당겨 자체에 어울리게 하는 만큼에서 그의 자연 평면은 자연 평면의 외면 속의 감각적인 것들을 합리적 평면 아래에 있는 것으로 내려다보며 지배하는 만큼에서, 그것들이 무가치하다고 간주하여 거기로부터 파생되는 오류들을 거절한다; 이에 반해 자연 평면이 신체의 감각들로부터의 어떤 것을 자체쪽으로 끌어당겨 자체와 어울리게 한 만큼에서 이것은 합리적인 것들을 아래에 두고 그것들이 무가치하다고 간주하여 그것들을 거절한다.
예를 들면, 자연적 인간의 합리적 평면이 납득할 수 있는 것은 인간은 자신으로부터 살 수 없고, 주님으로부터 천국을 통하여 생명이 유입됨에 의해 살 수 있다는 것; 그러나 감각적 인간은 이를 납득할 수 없다, 그 이유가 그가 이렇게 말하기 때문, 즉 자기는 생명이 자신 안에 있음을 분명히 느끼고 지각한다는 것, 감각의 증거에 반대되게 말하는 것은 무익한 짓이다는 것이다. 또 다른 예를 들면: 자연적 인간의 합리적 평면은 천국과 지옥이 있다는 것, 이에 반해 감각적 인간은 이를 부정한다, 그 이유는 이 세상보다 더 순수한 어떤 세상이 있다는 것을 납득 못하기 때문이다. 자연적 인간의 합리적 평면은 보여지지 않는 영들과 천사들이 있는 것을 납득한다; 그러나 감각적 인간은 이를 납득하지 못한채, 자기가 보고 만지지 못하는 것은 없는 것, 아무것도 아닌 것이라고 상상한다.
또 다른 예를 들어보자: 자연적 인간의 합리적 평면이 납득하는 바, 총명한 인간은 목적들을 바라본다는 것, 그리하여 어떤 최말단 목적에 필요한 수단들을 미리보고 수단들을 배치한다. 그는 어떤 것들의 질서로부터 자연을 쳐다보고, 자연은 수단들의 복합체임을 보고, 그때 총명의 최고의 있음(Being) 자체가 자연의 복잡한 수단들을 배열하고 배치하신다는 것을 지각한다; 그러나 우리가 영적 인간이 되지 않으면 그는 최말단 목적이 무엇인지를 보지 못한다는 것도 인정하고 있다. 한편, 감각적 인간은 자연과 구분되는 어떤 것이 있다는 것, 더욱이 자연을 넘어 어떤 자주적인 실재(Entity)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을 납득하지 못한다. 이해되는 것, 슬기 있는 것, 목적들을 내다보는 것, 수단들을 배치하는 것 등등이 자연이라 불리우지 않으면 납득하지 못한다. 따라서 이것들이 자연이라 불리워야 납득하는 바, 그는 자연은 마치 발명자가 자동화 기계를 고안해 자동 체계로 생산하듯 하는 식의 진행이 있다고 납득한다. 위의 몇 예로부터, 자연 평면의 내면과 외면에 의해 뜻해지는 것, 감각적인 것들에 의해 무엇이 거절되는지가 알아졌을런지 모른다; 즉 오각으로부터의 것을 거절함이 아니라 오각으로부터 내면의 것들에 관해 내린 결말의 것을 거절하는 것이다.

이집트 왕의… 이는 자연 평면의 내면에 종속되어져 있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이 장에서 이집트 왕, 또는 바로의 표현이 자연 평면의 새로운 상태이다로부터, 결론적으로 자연 평면의 내면인데, 그 이유가 이것이 새로이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자연 평면의 내면이 무엇인지, 외면이 무엇인지에 대한 것은 바로 앞에서 말했다. 말씀의 역사적, 예언적 부분들에 있는 내적 의미의 본성에 관해 간단히나마 말해야 할 것 같다. 역사적 의미에서 언급되는 인물들이 있다, 여기서만 보아도, 요셉, 바로, 수비대장, 술 담당자와 빵 담당자 등등의 여러 인물들이 등장하고 있다; 내적 의미에서 그들 모두는 다양한 어떤 것들을 의미한다, 그렇지만 이런 것들이 한 명의 인물 안에만 있을 뿐이다. 여기서의 경우, 요셉은 합리적 평면으로부터 영적인 것 속의 천적인 것, 또한 자연 평면 안에서 영적인 것 속의 천적인 것 측면에 관한 주님을 표현하고, 바로는 자연 평면의 새로운 상태 측면에서의 그분, 또는 자연 평면의 내면 측면에 관련한 그분을 표현하고, 술 담당자와 빵 담당자는 자연 평면의 외면 속에 있는 것들 측면에서 그분을 표현한다. 이와 같은 것이 내적 의미이다; 그리고 이런 의미들은 이외 다른 말씀에서도, 즉 아브라함, 이삭, 야곱이 언급되는 곳에서도 마찬가지 이다. 이 세 인물 역시 글자 의미에서는 세 인물들이나, 최고 의미에서는 이 세 인물이 한 분 주님을 표현한다; 즉 아브라함은 그분의 신성 자체를, 이삭은 신성한 지적 부분을, 야곱은 그분의 신성한 자연 평면을 표현한다. 이는 예언서 역시 같다. 예언서에서 때로는 이름들만이 나열되는 경우도 있고, 지역명이나 왕국, 도성들만이 언급되는 경우도 있지만, 내적 의미에서는 이 이름들은 한 개의 어떤 것을 표출하고 묘사하고 있다. 이를 알아채지 못하는 자들은 다양한 어떤 것을 장황하게 생각하도록 글자 의미에 의해 이끌려지고 만다, 따라서 정작 생각되어야 할 한가지 어떤 것은 사라져버린 상태이다.

감옥에 억류된… 이는 거짓들 사이에 있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감옥에 억류됨”이 거짓들 사이에 있다를 의미함으로부터 알게 된다. 거짓들에 있는 이들, 더욱이 악들 안에 있는 이들이 “감옥” 안에 “억류되어, 묶여 (bound)” 있다 라고 말해지지만, 그들이 어떤 사슬 같은 것으로 묶이듯 감옥에 억류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자유함에 있지 않기 때문, 자유함 안에 있지 않은 이들은 내면적으로 묶임 안에 있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거짓들 안에서 자신들을 확증해온 이들은 진리를 선택하고 받아들이는데 있어 더 이상 어떤 자유함에도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렇게 거짓 안에서 자신을 확증한 이들은 진리를 보는 것 조차에서도 자유하지 못하다, 더욱이 진리들을 인정하고 믿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그 이유가 그들은 거짓이 진리이다, 진리가 거짓이다는 설득의 감옥 안에 억류되어 있기 때문이다. 믿게 만듦인 설득(persuasion)은 어떤 것을 생각하는 모든 자유함을 거두어 가버리는 속성을 지니고 있다; 결과적으로 누군가의 사고력 자체를 감옥 안에 억류하고, 묶어두는 셈이다. 자신들 안에서 확증함을 통하여 거짓의 설득 안에 있어왔던 다른 삶에 있는 이들로부터 위의 사항이 어떤지를 경험함에 의해 나는 분명히 알게 되었다.
진리들을 완전히 인정하지 않는 이들, 인정하지 않고 그것들을 다시 되받아치는 이들이 있다, 그리고 이 되받아침은 그들이 설득되어 있는 정도에 따라, 특히 거짓이 악으로부터일 때, 또는 악이 그것들을 설득했을 때 완악함이 더욱 심하다. 이것들이 아래 주님의 말씀에서 뜻해진 이들이다:
어떤 씨들은 단단한 길 위에 떨어졌다, 그리고 새들이 외서 그것들을 먹어치웠다 (마. 13:4);
“씨들”은 신성한 진리들이다; “단단한 바위”는 설득력이고; “새들”은 거짓의 원리이다. 억류됨 안에, 또는 감옥 안에 있는 이들은 자기들이 그런 처지에 있는 것조차 모른다; 그 이유는 그들이 자신들의 거짓들로 감동(애착)되어져 있고, 거짓들로부터 튀어나오는 것으로부터 악한 것을 위하여 그것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자기들이 자유함에 있다고 상상한다, 그 이유는 애착함 안에 또는 사랑으로부터 있는 것은 무엇이든 자유하게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러나 거짓을 확증하지 않은 이들, 즉 거짓의 설득력에 휘둘리지 않은 이들은 진리들을 인정하고, 보고, 그것들을 선택한다, 그리고 그것들에 애착하고(감동되고), 그 후에 거짓들을 볼 때, 그것들이 자신들 아래 있음을 본다, 더불어 거짓의 꼬드김에 사로 잡힌 이들이 어떻게 억류되었는지도 본다. 이들은 더욱 자유해져 무수한 진리들을 전체 천국을 통하여 광범위하게 살필 수 있다; 그러나 선 안에 있지 않으면 누구도 이런 자유함에 있지 못한다; 그 이유가 선으로부터 인간은 천국 안에 있고, 천국 안에서 진리들은 선으로부터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리고 요셉이 아침에 그들에게 왔다. 이는 영적 평면의 천적인 것에 밝히 알려지고 명료해짐을 의미한다. 이는 요셉의 표현함이 영적 평면의 천적인 것이다로부터; 그리고 “아침”의 의미가 계발됨의 상태이다로부터, 고로 밝히 알려지고 명료함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아침”이 이 의미를 가지는 이유는 하루의 모든 때들, 한 해의 모든 때들 같이 천국의 빛의 다양해짐에 일치하여 있는 다양한 상태들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천국의 빛의 다양해짐들은 매일 그리고 매해 있는 세상의 빛의 다양해짐 같은 다양함이 아니라, 총명과 사랑의 다양해짐이다; 그 이유가 천국의 빛은 주님으로부터의 신성한 총명밖에 더 아닌데, 이것이 눈 앞에서의 밝음이다; 이 빛의 열은 주님의 신성한 사랑인데, 이것이 감각에 따뜻함이다. 이 빛이 인간에게 이해함을 주고, 이 열이 당사자에게 활력있게 하는 따뜻함을, 선으로부터의 따뜻함을 준다. 천국에 있는 아침은 선과 진리 속에 있는 이런저런 것들에 관하여 계발되는 상태인데, 이 상태는 선과 진리가 인정될 때, 더욱이 진리가 진리이고, 선이 선임을 지각할 때 존재한다. 지각은 내적으로 밝히 앎이다; 그러므로 “아침”에 의해서 밝히 알려지는 것이 의미된다; 그때 불명료해 있던 것이 명료해진다; “아침”은 명백한 것 또한 의미된다.
더 나아가, “아침”에 의해 최고 의미에서 주님 자신이 의미되어진다, 그 이유가 주님은 천국에서 모든 빛을 오게 하는 태양이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분은 언제나 떠오름에 계시는바, 고로 아침으로 계신다. 더욱이 그분은 신앙으로부터 있는 진리와 사랑으로부터 있는 선을 받는 모든 이와 더불어 언제나 떠오르심(rising)이시다. 그러나 이런 진리와 선을 받지 않는 이들과 더불어서 그분은 해가 저뭄에 계신다; 그러나 거기서는 태양이 언제나 떠오름에 있기 때문에 저무는 일이 없지만, 진리와 선을 받지 않는 이들의 경우에서는 당사자와 더불어 마치 해가 저문 것같이 나타날 뿐이다. 이는 지구에 거주하는 이들에게 있는 태양의 변화에도 어느 정도 비교해볼 수 있을지 모른다. 이 태양도 저무는 일이 없고, 위치가 바뀌거나 장소를 이동하는 일도 없이 언제나 같은 장소에서 여전히 빛을 보낼 뿐이다; 그러나 태양이 저문 것으로 나타나는데, 그 이유는 지구가 날마다 한 번 자전하기 때문, 그리하여 지구의 거주민으로 하여금 태양을 봄으로부터 옮겨지게 하는 셈이기 때문이다 (5084항); 그러므로 저문다는 것은 태양이 아니고 태양의 빛으로부터 지구의 거주민이 옮겨진 셈이다. 이런 비교는 예증적 측면의 하나인데, 자연계의 모든 부분에는 주님의 왕국을 표현하는 어떤 것이 있다. 또한 우리를 가르치는 바, 천국의 빛이 박탈됨, 즉 총명과 지혜가 박탈됨은 총명과 지혜의 태양이신 주님 때문에 발생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왕국 속의 거주민이 당사자로 하여금 빛에서 옮겨지게 하는 수단인 지옥이 자신을 인도하게 허용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을 보았다. 이는 지각을 의미한다. 이는 “봄”의 의미가 이해하다와 지각하다 임으로부터 알게 된다.

그리고 보라, 그들은 근심하고 있었다. 이는 그들이 슬픈 상태에 있었음을 의미한다. 이는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바로의 제 1 인 자들에게 물었다. 이는 의심 안에 있는 감각적인 것들을 의미한다. 이는 “바로의 제 1 인 자들”의 의미가 양쪽 종류의 감각적인 것들, 즉 지적 부분과 의지 부분에 종속되는 것들이다로부터 분명해진다.

그의 주인의 집의 구치소에서 그와 함께 있었던… 이는 거절되어졌던 것을 의미한다. 이는 “구치소 안으로 주어졌다”의 의미로부터, 고로 “구치소 안에 있다”가 거절됨의 상태 안에 있다 이다.

말하기를, 오늘 당신들의 얼굴이 악한 것(좋지 않은 것)은 어찌된 일입니까? 이는 어떤 애착으로부터 이 슬픔이 있었는지를 의미한다. 이는 “얼굴들(faces)”의 의미가 내면들이다로부터, 고로 애착들이다로부터 분명해진다. 그 이유가 인간의 내면들로부터 생각들이 오는 바, 이 생각 또한 애착들이기 때문이다; 이것들이 그의 사랑으로부터 있기에 그것들은 그의 생명 속에 있다. 우리에게도 알려진 바, 순진에 있는 이들과 더불어 애착들은 얼굴에서 가시적으로 표출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애착들이 표출되듯, 일반적 측면에서의 생각들 또한 그러하다; 그 이유는 생각들은 애착들의 형체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얼굴 자체만에 주목하면, 얼굴은 내면들을 표현하는 형상밖에 더 아닌 것이다. 천사들에게 모든 얼굴은 이런 식으로 나타나고 더 달리 나타남은 없다; 그 이유가 천사들은 물질적 차원의 인간의 얼굴을 보지 않고 영적인 형체에서, 즉 애착과 애착에서 파생되는 생각들이 표출된 것을 보기 때문이다. 이런 것들이 인간의 진짜 얼굴을 만든다; 이는 얼굴에서 애착이 박탈될 때, 이것은 죽은 얼굴이다는 것, 그 반대일 경우, 생명을 가지고 그것들에 따라 기뻐해짐이 있다는 사실로부터도 알는지 모른다. 애착의 근심함, 또는 “근심이 어떤 애착으로부터 인가”가 요셉의 말, 즉 “어찌하여 오늘 당신들의 얼굴이 악합니까”에 의해 의미되어 있다.

그리고 그들은 그에게 말했다. 이는 이런 것들에 관하여 지각함을 의미한다. 이는 “말하다(say)”의 의미가 역사적 형체의 말씀에서 지각함이다로부터 알려진다.

우리가 꿈을 꾸었다. 이는 예보를 의미한다. 이는 “꿈”의 의미가 예견, 그러므로 예보를 의미함에서 알게 된다.

그리고 그것을 해석할 사람이 없다. 이는 그것들 안에 무엇이 있는지 아무도 모른다를 의미한다. 이는 “해석함”이 내부에 있는 것, 고로 그것들 안에 있는 것을 펼쳐보임 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리고 요셉은 그들에게 말했다. 이는 자연 평면 속의 천적인 것을 의미한다. 이는 요셉이 자연 평면 속의 천적인 것을 표현한다로부터 알게 된다.

해석들은 하느님에 속한 것 아닙니까? 이는 신성이 이런 것들 안에 있음을 의미한다. 이는 “해석함”의 의미가 꿈들을 서술할 경우, 그것들 안에 있는 것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신성은 “하느님”에 의해 의미되어진다.

청컨대 나에게 말해보시오. 이는 그것은 알려질 것임을 의미한다. 이는 “청컨대 그것을 말하라”의 의미가 그것은 알아질 것이다를 내포하는 말임으로부터 분명해지는데, 이는 아래에서 분명해진다.

9-13절. 그리고 술 담당자들의 제 1 인 자가 요셉에게 그의 꿈을 말했다, 그리고 그에게 말했다, 내 꿈에서 내 앞에 포도나무가 있었다. 10 그리고 포도나무에는 세 어린 가지가 있었고, 싹이 났고, 꽃이 피었고, 거기로부터의 송이들이 포도들로 익었다. 11 그리고 바로의 잔이 내 손에 있었다, 그리고 나는 포도들을 가져왔다, 그리고 그것들을 바로의 잔에 짜넣었다, 그리고 나는 바로의 손바닥에 그 잔을 바쳤다. 12 그리고 요셉은 그에게 말했다, 이것이 그것에 관한 해석입니다. 세 어린 가지들은 삼일 입니다. 13 이제부터 삼일이 지나면 바로께서 당신의 머리를 들어 올려줄 것입니다, 그리고 당신은 복직할 것입니다, 그리고 당신은 당신이 술 담당자 이었을 때 했던 이전의 방법대로 바로의 잔을 그에게 바칠 것입니다.

그리고 술 담당자들의 제 1 인 자가 요셉에게 그의 꿈을 말했다. 이는 영적 평면 속의 천적인 것이 지적 부분에 종속된 감각적인 것으로부터 있었던 이런저런 것들에 관한 사건을 지각했음을, 그리고 이것은 지금까지 거절되어 왔었다를 의미한다. 이는 요셉의 표현함이 영적 평면의 천적인 것이다로부터; 그리고 “꿈”의 의미가 예견, 그러므로 사건, 고로 미리 보여지고 지각된 사건이다로부터; 그리고 “술 담당자들의 제 1 인 자”는 일반적 측면에서의 지적 부분에 종속된 감각들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것이 거절되어져 있었다는 것이 그가 구치소에 있었다에 의해 뜻해진다. 더욱이 요셉에 의해 영적 평면의 천적인 것이 표현되는데, 이 요셉이 사건을 지각하는 것이 이어지는 구절에서 분명해진다.
“영적 평면의 천적인 것”이라 말해지는데, 이를 수단으로 주님이 뜻해진다; 이런 추상적 방식으로 주님이 말해질 수 있는 이유는 그분은 천적 평면 자체, 영적 평면 자체, 즉 선 자체, 진리 자체이시기 때문이다. 이를 가지고 인간도 생각해본다면, 이것들은 인물로부터 추상적으로 마음에 품어질 수가 없다, 그 이유는 자연 수준인 것이 인간이라는 인물의 생각 전체를 뒤덮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우리가 주님에 있는 모든 것이 신성이다는 것을, 그리고 신성은 모든 사고력 넘어 있다는 것을 , 그리고 이런 모든 사항은 천사들에게조차 납득할 수 없다는 것을 고려할 때, 결과적으로 만일 우리가 납득할 수 있는 것이라고 여겨지는 것을 발췌한다면, 거기에 남는 것은 있음(being)과 세상 밖으로 출시됨(공표됨, coming forth), 이는 천적 평면 자체와 영적 평면 자체, 즉 선 자체와 진리 자체이다.
그럼에도 인간은 감각들을 통하여 세상으로부터 들어온 자연 평면으로부터의 어떤 것과 연합되지 않으면 추상적인 어떤 것에 관하여 무엇이든 생각의 관념을 가질 수 없기에, 설사 인간이 육체적, 지상적인 어떤 것에 침수된다 할지라도 신성인 것이 인간 안에서 멸해지지 않도록, 그리고 신성인 것이 누구와도 함께 있다 해도 인간의 불결한 것에 의해 그것이 더럽혀지지 않도록, 그리하여 신성인 것과 더불은 천적, 영적 평면으로부터의 모든 것이 멸해지지 않도록, 이것이야말로 여호와께서 그분 자신이 실제로 있으시는 것과 같게 자신을 표출하시는 것, 이는 천국에서도 똑같게 나타나시는데, 이는 신성한 사람으로서 이시다. 그 이유가 천국의 모든 것은 인간의 형체로 꾸며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이 장의 끝에서 보여주는 것, 즉 천국인 웅대한 사람과 인간의 모든 것이 상응함에 대한 것들이다. 이 신성, 또는 천국에 있는 여호와로부터의 이 신성이 영원으로부터의 주님이시다. 이와 같은 것을 주님께서는 자신 안에서 인간을 신성으로 만드시고, 또는 신성이 되게 하셨다. 복음서에서 이를 분명히 알려주셨는데, 그분이 세 제자, 베드로, 야고보, 요한에게 변모하시어 나타나셨을 때, 이 모습이 위에 해당된다 (마. 17:1, 2); 이 외에 때로 그분은 예언자들에게도 나타나셨다. 이로부터 모든 이는 신성 자체를 사람에 관련시켜, 동시에 주님에 관련하여 생각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하여 주님 안에서 신성 자체는 아버지이시고, 천국에 있는 이 신성은 아들이고, 거기로부터 진행되는 신성이 성령이다. 이것들이 하나이다는 것을, 그분 자신 가르치신 구절들로부터 분명해진다.

그리고 그에게 말했다. 이는 지각으로부터의 계시를 의미한다. 이는 “말하다”가 역사적 부분의 말씀에서 의미하는 것이 지각하다 임으로부터 알게 된다, 고로 계시도 의미하는데, 그 이유는 계시는 내적 수준의 지각이고 지각으로부터 있기 때문이다.

내 꿈에서. 이는 예보를 의미한다. 이는 “꿈”의 의미가 예견, 그로부터 예보이기 때문이다.

보라 내 앞에 포도나무가 있었다. 이는 지적 부분을 의미한다. 이는 “포도나무”의 의미가 영적 교회에서의 지적 부분이다로부터 알게 되는데, 이는 아래에서 차분히 설명하겠다. “술 담당자”에 의해 지적 부분에 종속되는 감각이 의미되고, 거기로 지적인 것의 유입이 감각 안으로 있음이 여기서 취급되기에, 그러므로 꿈에서 포도나무가 나타나되 싹, 꽃, 포도송이와 더불어 나타났고, 이를 수단으로 유입과 이 감각의 재 출생이 묘사되고 있다. 영적 교회의 지적인 것에 주목할 때 미리 알고 있어야 하는 것은, 이 교회가 말씀의 어디에서 취급되든 이 교회의 지적 부분이 취급된다는 점이다. 그 이유는 이 교회는 인간 안에서 거듭나지고 교회가 되는 것은 이 지적 부분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말해두는 이유는 일반적 측면에서 교회는 두 가지, 즉 천적 (평면의) 교회와 영적 (평면의) 교회가 있기 때문이다. 천적 교회는 의지 부분 측면에서 거듭나질 수 있는 인간, 또는 의지 측면에서 교회가 되어질 수 있는 인간과 더불어 있는 교회이다. 영적 교회는 방금 위에서 말한 바 같이, 지적 부분에서 거듭나질 수 있는 인간, 또는 지적 측면에서 교회가 되어질 수 있는 인간과 더불어 있는 교회이다. 홍수 이전 있었던 교회인 태고 교회는 천적 교회이었는데, 그 이유는 이 교회에 속했던 이들과 더불어서 의지 부분에서 어떤 완전함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홍수 이후 있었던 고대 교회는 영적 교회이었는데, 그 이유는 이 교회에 속했던 이들과 더불어서는 의지 부분에서의 어떤 완전함이 있지 않았고, 지적 부분에서만 완전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말씀에서 영적 교회가 취급되는 대목에서는 이 교회의 지적 부분이 중점적으로 다루어지는 것이다. 영적 교회로부터 있는 이들과 더불어 거듭나지는 것이 지적 부분이다는 것을 알게 해주는 사실은, 이 교회인은 천적 교회인이 가졌던 것 같은 것, 즉 선으로부터 진리를 지각함을 가지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즉 영적 교회인이 되려면, 먼저 신앙 속에 있는 진리를 배우고, 지적인 것을 빨아들이고 (지적인 것에 동화되고), 그리하여 선인 것을 진리로부터 배운다; 이렇게 배운 후에서야 그는 그것을 생각할 수 있고, 그것을 뜻할 수 있고, 결국 그것을 행할 수 있게 된다; 이 행함 후에 새로운 의지가 당사자 안의 지적 부분에서 주님에 의해 만들어진다. 이 새 의지를 수단으로 영적 인간은 천국 안으로 주님에 의해 승강되어지나, 당사자에게 이미 잘 어울려져 있었던 악은 여전히 남아 있는다; 그 다음 이 의지는 기적적으로 분리되는데, 이것은 더 높은 힘(force)을 수단으로 분리되는 바, 그의 악으로부터의 것들은 억눌러져 있게 되고 그는 선 안에 보존된다.
그러나 천적 교회인은 선행의 선을 가지고 유아의 빨아들이는 방식을 수단으로 의지 부분에서 거듭나진다; 그리고 그가 선행의 선쪽에로 도달되었을 때, 그는 주님을 사랑함의 지각 안으로 인도되어지고, 이런 인도됨에 의해 신앙의 진리들이 거울 안에서와 같이 지적 부분에서 그에게 나타난다. 그리하여 이해력과 의지력이 이 인간 안에서 온전한 하나의 마음을 만든다. 그 이유가 이해력 안에 있는 것들을 수단으로 의지력에 있는 것이 지각되어졌기 때문이다. 이것 안에 처음 “사람”을 수단으로 의미된 완전함에서 천적 교회가 존재한다.
“포도나무”가 영적 교회의 지적 부분이다는 것은 말씀의 많은 다른 구절에서도 분명해진다. 예레미야서에서:
너는 시홀의 물들을 마시겠다고 이집트로의 길에서 무엇을 하고 있느냐? 또는 너는 강의 물들을 마시겠다고 앗시리아로의 길에서 무엇을 하고 있느냐? 그럼에도 나는 너에게 완전하게 고상한 포도나무, 진리의 씨를 심었다; 그때 너는 나에게서 돌아서서 낯설은 포도나무의 타락한 어린 가지들쪽에 있음은 어찌된 것이냐? (예. 2:18, 21);
위는 이스라엘에 관해 말하는데, 이스라엘을 수단으로 영적 교회가 의미된다. “이집트”와 “시홀의 물들”은 남용된 기억 속의 지식들을 표시한다; “앗시리아”와 “강의 물들”은 생활의 선과 신앙의 진리에 맞서는 이런저런 지식들로부터 추론함을 표시한다; “고상한 포도나무”는 영적 교회인을 표시하고, 영적 교회가 지적 부분으로부터 “포도나무”라고 불리워진다; “낯설은 포도나무의 타락한 어린 가지들”은 타락하여 뒤집힌 교회인을 표시한다.
에스겔서에서:
이스라엘의 가문에 관한 수수께기와 비유이다. 큰 독수리가 토지의 씨를 가져왔다, 그리고 그것을 씨뿌림의 들판에 놓았다; 그것은 싹을 내었고 낮은 키의 화려한 포도나무가 되었다, 그리하여 그것의 어린 가지들은 그녀를 향하여 뒤쪽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거기로부터의 뿌리들은 그녀 밑에 있었다; 그리하여 그것은 어린 가지들을 만든 포도나무가 되었다, 그리고 독수리에게 잔가지 들을 내보냈다. 이 포도나무는 그것의 뿌리들을 활용했다, 그리고 그것의 어린 가지들을 그녀를 향하여 보냈다, 많은 물들 가의 좋은 들판에서 이다. 그것은 가지를 만들도록 심어졌다, 하여 그것은 훌륭한 포도나무 일는지 모른다 (겔. 17:2, 3, 5-8);
위에서 “독수리”는 합리적 평면을 표시한다; “토지의 씨”는 교회의 진리를 표시한다; 그것이 “화려한 포도나무가 되어짐”과 “훌륭한 포도나무”는 영적 교회가 되어감, 이 교회는 생산이 있는 포도나무로부터 “포도나무”라고 불리운다. 이 생산물은 영적 선 또는 선행의 선을 의미하고, 이로부터 지적 부분에 심어진 신앙의 진리가 온다.
에스겔서에서:
네 어머니는 네 닮음에서 포도나무 같이 있었고, 물들 가에 심었다; 열매 풍성한 것, 그리고 많은 물들 때문에 풍성한 가지들을 만들었다; 어디서 그녀는 통치를 낳는 그들의 홀을 위한 강함의 막대들을 가졌다; 그리고 그것의 키는 그 자체 뒤엉킨 큰 가지들 위로 들어올렸다, 그리고 어린 가지들에서 그것의 높이가 나타났다 (겔. 19:10, 11);
위 구절 역시 이스라엘에 관하여서이다, 이스라엘을 수단으로 영적 교회가 의미되는데, 이것이 “포도나무”에 비교되는데, 앞의 인용 구절들에서와 같은 이유 때문이다. 이 구절에서는 자연적 인간 안에서, 마지막에까지 조차, 즉 “뒤엉킨 큰 가지들”인 감각들로부터의 기억 속의 지식에까지에 이르는 영적 교회의 갈래들을 묘사하고 있다.
호세아서에서:
나는 이스라엘에게 이슬 같이 있을 것이다; 그의 가지들은 갈 것이다, 그리고 그의 영예는 올리브의 영예 같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의 냄새는 레바논의 것 같이 (있을 것이다). 그의 그림자 안에 거주하는 그들이 되돌아 올 것이다; 그들은 곡식을 살아나게 할 것이다, 그리고 포도나무로서 꽃피울 것이다; 그의 기억은 레바논의 포도나무로서 있을 것이다. 오 에브라임아, 네가 우상들과 더불어 더 이상 무엇을 하려 하겠느냐? (호. 14:5-8);
“이스라엘”은 영적 교회를 표시한다, 지적 부분에 심어진 신앙의 선으로부터 이 교회의 꽃피움이 “포도나무”에, 그리고 그것의 기억이 “레바논의 포도나무”에 비교된다; “에브라임”은 영적 교회에 있는 지적 부분이다.
스가랴서에서:
백성의 남은 자들; 평화의 씨; 포도나무는 그녀의 열매를 줄 것이다, 그리고 땅은 그녀의 생산물을 줄 것이다, 그리고 하늘들은 이슬들을 줄 것이다 (슥. 8:11, 12);
“백성의 남은 자들”은 내면의 인간 안에 주님에 의해 저장된 진리들을 표시한다; “평화의 씨”는 거기 있는 선을; “포도나무”는 지적 부분을 표시한다.
말라기서에서:
나는 너를 위하여 살라지는 그를 꾸짖을 것이다, 하여 그가 너를 위하여 토지의 열매를 썪게 하지 않도록 이다; 포도나무는 너를 위하여 들판에서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 (말. 3:11);
“포도나무”는 지적 부분을 표시한다; 지적 부분이 신앙의 진리들과 선들을 박탈당하지 않을 때, 포도나무는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해진다; 그런 반면, 지적 부분 안에 거짓들과 결과적으로 악들일 때 그것은 “텅빔”이라고 말해진다; 호세아서에서:
이스라엘은 텅빈 포도나무이다, 그는 자신 같이 열매를 만든다 (호. 10:1).
모세의 책에서:
그는 그의 나귀의 어린 새끼를 포도나무에 맬 것이다, 그리고 그의 나귀의 아들은 뽑은 포도나무에 (맬 것이다), 그가 자기 의복을 포도주에서 빨은 후에, 그리고 그의 덮개를 포도들의 피에서 빨은 후이다 (창. 49:11);
위는 야곱, 이때 당시는 이스라엘로서 그의 열두 아들들에 관한 예언이다, 위는 유다에 관하여서 인데, 그를 수단으로 주님이 표현되어졌다. 위에서 “포도나무”는 영적 교회에서의 지적 부분이다, 그리고 “뽑은 포도나무”는 천적 교회에 있는 지적 부분이다.
다윗서에서:
여호와, 당신은 이집트로부터 포도나무가 세상 밖으로 출시되게 하셨다; 당신은 민족들을 몰아내셨 다, 그리고 그것의 뿌리들이 뿌리내리도록 하셔서 그것이 토지를 채웠다. 산들은 그것의 그림자로, 하느님의 삼나무들은 (그것의) 굵은 가지로 덮혀졌다. 당신은 거기로부터 어린 가지들을 바다에까 지 조차, 작은 가지들은 유브라데까지 내보내셨다. 숲으로부터의 수퇘지가 그것을 짓밟았다, 그리고 들판의 들짐승이 그것을 뜯어먹었다 (시. 80:8-11, 13);
“이집트로부터의 포도나무”는 최고 의미에서 주님의 인간이 신성이 되심이 그것과 그것의 어린 가지들에 의해 묘사되면서 주님을 표시하고 있다. 내적 의미에서 여기서의 “포도나무”는 영적 교회이고, 또한 이 교회인, 즉 주님에 의해 지적 부분에서 거듭나진, 또는 새로이 만들어진 교회인이다. “숲의 수퇘지”는 거짓이고, “들판의 들짐승”은 악이다, 이것들이 주님에대한 신앙 측면의 교회를 파괴한다.
계시록서에서:
천사가 그의 낫을 땅쪽으로 내밀었다, 그리고 땅의 포도나무를 수확했다; 그리고 그것을 하느님의 분노의 큰 포도즙틀 안으로 내던졌다; 포도즙틀은 도성 밖에서 짓밟아졌다, 그리고 포도즙틀로부터 말들의 굴레들에까지 이르러 피가 되었다 (계. 14:19, 20);
“땅의 포도나무를 수확함”은 교회에서 지적 부분을 파괴하는 것을 표시한다; 그리고 이것이 “포도나무”에 의해 의미되기 때문에, “포도즙틀로부터 말들의 굴레에 이르기 조차에서 피가 되었다”라고 더 말해지고 있다; 그 이유가 “말들”이 지적인 것들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사야서에서:
이런 날이 닥칠 것이다, 즉 은 일 천이 되는 일 천의 포도나무가 있었던 모든 장소가 찔레와 가시나무들이 있을 것이다 (이. 7:23).
다시:
땅의 거주민들이 불태워질 것이다, 그리고 인간은 드물게 남겨질 것이다; 새 포도주가 곡할 것이다, 포도나무가 쇠약해질 것이다 (이. 32:12, 13).
다시:
그들은 혼합하지 않은 포도주의 들판을 위해, 열매 풍성한 포도나무를 위해 자신들의 가슴을 두드릴 것이다. 내 백성의 토지 위에 가시덤불과 가시가 올라올 것이다 (이. 32:12, 13).
위 구절에서 취급된 주제는 신앙의 선과 진리 측면, 즉 지적 부분 측면에서 영적 교회의 황폐됨이다; 그 이유는 앞서 말한 그대로 신앙의 진리와 선은 이 교회인의 지적 부분 안에 있기 때문이다. 모든 이도 아는 것은, 여기서의 “포도나무”가 포도나무를, “땅”이 땅을 뜻하지 않는다는 것; 그러나 그것들은 교회의 어떤 것을 뜻하리라는 것이다.
진짜 의미에서 “포도나무”는 지적 부분의 선을; 그리고 “무화과나무”는 자연적 인간의 선을; 또는 같은 말이지만 다르게 말하면, “포도나무”는 내면의 인간의 선을, 그리고 “무화과나무”는 외면의 인간의 선, 그러므로 “무화과나무”가 언급되는 동시에 “포도나무”가 언급되는 경우가 상당하다; 아래 구절에서:
나는 정녕 그것들을 불사를 것이다; 포도나무에 포도들이 없다, 무화과나무에 무화과들이 없다, 그리고 잎들은 떨어져 버려진다 (예. 8:13).
다시:
나는 너희들 위에 멀리로부터 민족들을 데려올 것이다, 오 이스라엘의 가문아, 이들이 너희 포도나 무와 너희 무화과나무를 먹어치울 것이다 (예. 5:15, 17).
호세아서에서:
나는 그녀의 포도나무와 그녀의 무화과나무를 황폐케 할 것이다 (호. 2:12).
요엘서에서:
민족이 내 토지 위에 생겨날 것이다, 그것은 나의 포도나무를 황폐함으로, 그리고 나의 무화과나무 를 거품으로 환원시킬 것이다, 그것을 정녕 벗겨지게 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내던질 것인즉, 거기로부터의 어린 가지들은 희게 만들어진다; 포도나무는 시들어진다, 그리고 무화과나무는 쇠약해진다 (욜. 1:6, 7, 12).
다시:
내 들판들의 들짐승들은 걱정하지 말라; 그 이유는 광야의 거주하는 장소가 풀밭이 되어지기 때문이다; 나무가 그것의 열매를 만들고, 무화과나무와 포도나무가 그것들의 강함을 산출할 것이기 때문이다 (욜. 2:22).
다윗서에서:
그분은 그들의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를 치셨다, 그리고 그들의 경계(선에 있는) 나무를 부러뜨리 셨다 (시. 105:33).
하박국서에서:
무화과나무는 꽃피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생산물이 포도나무들에서 있지 않을 것이다 (합. 3:17).
미가서에서:
시온으로부터 교리가, 그리고 예루살렘으로부터 여호와의 말씀이 나갈 것이다; 그들은 모두가 자기들의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 아래 앉을 것이다, 그리고 두려움을 만들 자 아무도 없다
(미. 4:2, 4).
스가랴서에서:
그 날에 너희는 인간을 자기 동료라고 부를 것이다,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이다
(슥. 3:10).
열왕기상서에서:
솔로몬의 때에, 빙둘러 모든 건너편 지역까지에서 (민족과) 평화가 있었다; 그리고 유다와 이스라 엘은 신뢰함 안에서 거주했다, 모든 이가 자기의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이다
(왕상. 4:24, 25).
“무화과나무”는 자연 평면의 선, 또는 외면의 인간의 선인데, 이미 살핀 바 있다 (217항). “포도나무”가 진리로부터의 선과 선으로부터의 진리에 의해 새로이 만든, 또는 거듭나진 지적 부분인 것은 주님께서 그분의 성찬 예식을 제정하셨을 때 그분의 제자들에게 말하신 말씀으로부터 분명해진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이 후로부터 나는 내가 내 아버지의 왕국에서 너희와 더불어 새로이 마시는 그 날까지 포도나무의 이 생산물로부터의 것을 마시지 않을 것이다 (마. 26:29);
진리로부터의 선과 선으로부터의 진리, 이를 수단으로 지적인 부분이 새로이 만들어짐, 또는 인간이 영적 인간으로 만들어짐이 “포도나무의 생산물”에 의해 의미되어져 있고, 거기로부터 자기 것이 되게 함이 “마심”에 의해 의미되고 있다 (“마시다”가 자기 것에 되게 함, 자기에게 어울리게 함이다에 대하여는 3168항을 보라.) 이것이 다른 삶에서가 아니면 충분하게 행해지지 않는다는 것이 “내가 내 아버지의 왕국에서 너희와 더불어 그것을 새로이 마시는 날 까지”에 의해 의미되어 있다. “포도나무의 생산물”이 포도액 또는 포도주를 뜻하지 않는다는 것, 그러나 주님의 왕국으로부터의 천국의 어떤 것임은 매우 분명하다.
영적 인간에서 지적 부분이 주님만으로부터 있는 진리에 의해 새로이 만들어짐, 또는 거듭나짐이 있기에, 주님께서는 자신을 “포도나무”에 비교하시고, 그분으로부터 있는 진리, 결과적으로 그분 안에서 진리 안에 심어진 이들을 그분께서는 “어린 가지들”에 비교하시고, 거기로부터의 선은 “열매”에 비교하셨다. 요한복음서에서:
나는 진정한 포도나무이다, 그리고 내 아버지는 포도원의 농부이시다; 그분은 열매를 맺지 아니하 는 내 안의 모든 어린 가지들을 거두어내신다; 그러나 열매를 맺는 모든 어린 가지들을 그분은 가지치기를 하시어 더 많은 열매를 맺게 하신다. 내 안에 머물어라, 그리고 나는 너희 안에 머무른다. 어린 가지가 포도나무에 머무르지 않으면 그 자체로 열매를 맺을 수 없듯, 너희가 내 안에 머무르지 않으면, 너희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나는 포도나무이다, 너희는 어린 가지들이다; 내 안에 머무르는 자, 내가 머무르는 자, 그리고 나는 그분 안에, 똑같이 많은 열매를 맺는다; 나 없이 너희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이것이 나의 명령인 즉, 내가 너희를 사랑했던 그대로 너희는 서로 사랑하라 (요. 15:1, 2, 4, 5, 12);
최고 의미에서 “포도나무”는 신성한 진리 측면에서 주님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내적 의미에서는 영적 교회인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포도원”은 영적 교회 자체를 의미한다. 나지르인이 천적 (평면의) 인간을 표현하는데, 이 인간은 영적 (평면의) 인간 같이 신앙의 진리를 통하여가 아니고 사랑의 선을 통하여, 다시 말해 그의 지적 부분을 통하여가 아니고 그의 의지 부분을 통하여 거듭나진 이들이다. (이는 이미 살핀 바 있다.) 그러므로 나지르인은 포도나무로부터 출시되는 어떤 것도 먹지 않도록, 고로 포도주를 마시지 않도록 명령되어 있었다 (민. 6:3,4; 사. 13:14); 이로부터 역시 분명해지는 것은, “포도나무”는 영적 인간에 속하는 지적 부분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이는 이미 말했다.
어쨌든 나지르인에게 포도나무로부터 출시되는 어떤 것이라도 금한 이유를 알려면, “포도나무” 자체가 지니는 의미를 알아야 하고, 또한 천적 교회와 영적 교회가 있다는 것도 알아야 하고, 또한 천적 교회인은 영적 교회인과 다른 방식에서 거듭나진다는 것, 즉 전자는 의지 부분에 심어진 씨를 수단으로, 후자는 지적 부분에 심어진 씨를 수단으로 거듭나진다는 것을 먼저 알아야 한다. 이런 사항들은 말씀의 내적 의미에 저장된 신비함들(arcana)이다.

포도나무에 세 어린 가지가 있었다. 이는 거기서부터 마지막까지에 이르러 있는 갈래(derivation)들을 의미한다. 이는 “포도나무”의 의미가 지적 부분이다로부터; “3”의 의미가 완성하는 것과 마지막에까지 조차 이르도록 계속적인 것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리고 “어린 가지들”의 의미가 갈래들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 이유가 “포도나무”는 지적 부분이고, “어린 가지들”은 포도나무 즉 지적 부분으로부터 마지막인 감각적인 부분까지 내려가며 있는 갈래들을 의미한다; 그 이유는 질서상 처음에 해당되는 것은 지적 부분이고 마지막은 감각 부분이기 때문이다. 일반적 측면에서의 지적 부분은 내적 인간의 시각인데, 이 시각은 주님으로부터 있는 빛인 천국의 빛으로부터 보는 것, 그리고 이 시각이 보는 모든 것은 영적이고 천적이다. 이에 반해, 일반적 측면에서의 감각 부분은 외면의 인간의 시각, 여기서는 시각의 감각 부분인데, 그 이유는 이 감각은 지적 부분에 종속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감각은 (자연계의) 태양으로부터인 세상의 빛으로부터 보는 바, 이 감각이 보는 모든 것은 세상적, 육체적, 지상적인 것 뿐이다.
인간 안에는 천국의 빛 안에 있는 지적 부분으로부터 세상의 빛 안에 있는 감각 부분에로 내려가면서 갈래들이 있다; 이런 질서에 있지 않으면, 감각 부분들은 어떤 인간의 생명도 가질 수 없었다. 인간의 감각은 그것이 세상의 빛으로부터 본 결과로 해서 생명을 가지지 않는다; 그 이유는 세상의 빛은 그것 안에 생명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천국의 빛으로부터 보는 결과로 생명을 가진다. 이 천국의 빛이 인간과 더불은 세상에 있는 이런저런 것들 안으로 낙하할 때, 이 빛이 그것들을 살아 있게 하고, 당사자로 대상물을 지적으로, 고로 인간으로서 보게 한다; 그리고 이런 것들로부터, 즉 그가 세상에서 보았었고 들었었던 것들로부터의 지식들을 수단으로, 고로 감각들을 통하여 들어와진 것들로부터 인간은 총명과 지혜를 가지고, 이로부터 그는 시민적, 도덕적, 영적 생명(삶)을 가진다.
갈래들에 특별히 주목해보면, 이 갈래들은 인간 안에서 뾰족하게 이렇다는 식으로 드러나 있을 수는 없다. 사실상 이 갈래들은 지적 부분과 감각 사이에서 사다리 역할을 하는 관계로 일종의 단계(step)들, 또는 등차(degree)들이다. 그러나 이 등차들을 납득하려면, 내면과 외면의 관계, 즉 이 둘은 서로에서 아주 뚜렷하게 구분되어 있다는 것, 그리하여 내면의 것은 외면의 것 없이 존재할 수 있고 존속해가지만, 외면의 것은 내면의 것 없이 존재나 존속이 가능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인간의 영은 물질적 몸 없이 존속할 수 있다, 또한 죽음을 수단으로 몸으로부터 분리될 때 실제적으로 그렇게 존속한다. 인간의 영은 내면의 등차 안에, 몸은 외면의 등차 안에 있다. 이것은 사후 인간의 영과 비슷하다: 만일 당사자가 복된 상태이다면, 그는 마지막 등차인 첫째 천국 안에, 내면의 등차이다면 둘째 천국에, 가장 안쪽 등차이다면 셋째 천국에 있는다. 그가 이 상태(의 어느 등차 안)에 있을 때 그는 나머지 다른 등차 안에도 동시에 있는다; 그러나 나머지 등차들은 당사자 안에서 (부름받음이 없기에) 무활동 일 뿐이다. 이는 육체가 잠든 상태와도 견줄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이런 차이는 있다, 즉 천사들과 더불어서 일 경우, 내면들은 가장 높은 깨어 있음의 상태에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감각적인 것들과 더불은 육체인 마지막 상태 외에도 인간 안에는 천국들이 있는 만큼이나 많은 등차들이 있는 셈이다.
위의 살핀 바로부터, 처음으로부터 마지막까지에 이르러 있는 갈래들, 또는 지적 부분으로부터 감각 부분에까지 내려가며 있는 갈래들이 어떤 경우일지에 관하여 약간이나마 알았을 줄로 본다. 인간의 생명, 이는 주님으로부터 이고, 가장 안쪽 등차들을 통하여 마지막, 또는 최말단 등차로 내려간다, 그리고 각 등차에서 앞선 것으로부터 갈라지는데, 더욱 더 일반적 등차쪽으로 되어간다, 그리고 최말단 등차에서 가장 일반적 등차가 된다. 보다 낮은 등차들에 있는 갈래들은 계속적으로 있는 그것보다 높은 등차들의 낱개적인(singular) 것들과 세부적인(particular) 것들이 더 순수한 본성으로부터의 것이 첨가됨과 아울러, 그 다음, 보다 더 총체적인(gross) 본성은 이런 저런 계속된 갈래들을 담는 그릇들로 섬김 역할을 위해 구성물(composition)들, 또는 결합물(combination, 구조물, conformation)들이 되어 있는다. 그러나 만일 (앞선 것을 담아야 할 뒤의) 그릇들이 분해된다면, 내면의 등차들 안에 있는 낱개적인 것들과 세부적인 것들은 앞의 보다 높은 본성 안으로 (계속적으로) 되돌아 간다. 그리고 인간과 더불어 신성과의 연결이 있기에, 그리고 인간의 가장 깊은 안쪽은 당사자로 신성을 받을 수 있는 본성 속에 있기에, 따라서 당사자가 신성을 인정하고 애착함을 수단으로 그는 신성을 그의 자기 자신으로 만들 수 있기에, 이런 상호 관계를 통하여, 인간은 결코 죽을 수 없다는 것, 그 이유는 그가 신성 안에서 계속 심어져왔었기 때문, 그러므로 영원하고 무한인 것 안에 계속 심어져왔었기 때문, 이는 단지 유입됨을 통하여서만이 아니라, 신성을 받아들임을 통하여서 이기 때문이다.
이상 살핀 바로부터 인간을 짐승들에 비교하는 자, 그래서 사후 인간은 동물이 사는 것 이상 더 사는 것이 없다고 믿는 자가 얼마나 무식하고 미쳤는지 알게 되었을 줄로 본다. 인간과 달리 동물이 지니는 생명을 받는 그릇은 사라질 수밖에 없다; 그 이유는 그들과 더불은 유입은 그들의 유기적 형체를 통과하여 세상 안으로 건너가기 때문, 하여 그들의 생명의 종착지는 세상이고 결코 되돌아 오지 않기 때문이다.

싹이 돋았다. 이는 재생(재 출생, rebirth)이 결과되게 하는 (수단인) 유입 (influx)을 의미한다. 이는 “싹틈,” 또는 잎들을 냄과 후에 꽃이 핌의 의미가 재 생산의 처음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유입(influx)이 의미되는 이유는, 인간이 재 출생(reborn)되어질 때, 영적 생명이 당사자 안으로 흘러들기 때문, 즉 나무가 그것의 생명을 싹틔울 때, 태양으로부터의 열을 통하여 안으로 흘러듦이 있는 것과 같다고 말해도 될 것이다. 인간으로 태어나는 자는 말씀에서 때때로 식물 왕국에 있는 것들, 특별하게는 나무들에 비교하고 있다; 그리고 이 비교는 전체 식물 왕국, 뿐만 아니라 동물 왕국도 인간 안에 있는 이런 저런 것들을 표현하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주님의 왕국 안에 있는 이런저런 것들을 표현해준다; 그 이유가 인간은 가장 작은 형체의 천국이기 때문이다. 이에 관하여는 각 장의 끝에서 살폈던 웅대한 사람과 인간과의 상응에서 말했다. 그러므로 고대인들은 인간을 소우주라고 불렀다; 그리고 그들은 천국의 상태에 관하여 더 알고 있었던 바, 아마 인간을 작은 천국이라 불렀을지도 모른다. (자연계는 보편적 측면에서 주님의 왕국을 표현하는 극장 무대 같다는 2758, 3483, 4939항을 보라.)
그러나 특별하게, 주님에 의해 새로이 출생(born anew), 또는 거듭나지는 인간이 천국이라 불리운다; 그 이유는 그때 그는 주님으로부터 있는 신성한 선과 진리 안에, 결과적으로 천국 안에 심어져 있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재 출생(reborn)되는 인간은 씨로부터 있는 나무 같이 시작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선으로부터 있는 진리가 말씀에서 “씨”에 의해 의미된다.); 또한 거듭나는 인간은 나무처럼 잎을, 꽃을, 마지막으로 열매를 생산한다; 그 이유가 그는 총명으로부터 있는 이런저런 것들을 생산하는데, 이것이 말씀에서 “잎들”에 의해 의미되기 때문, 그 다음 지혜로부터 있는 이런저런 것들은 “꽃피움”에 의해, 마지막으로 생명으로부터 있는 이런저런 것들, 즉 행동선상에 있는 사랑과 선행으로부터의 선들, 이것이 말씀에서 “열매들”로 의미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것이 열매를 맺는 나무들과 거듭나지는 인간 사이에 있는 표현적인 닮음 (모습, likeness)이다. 또한 영적 진리와 선에 관하여 알게 되는 어떤 것이 있다면, 거듭남에 관한 본성이 나무로부터 배워질는지 모른다. 이로부터 분명해지는 바, 이 꿈에 있는 “포도나무”에 의해 지적 부분에 종속되는 측면에서의 인간의 재생의 과정 모두가 표현적으로 묘사되고 있음이다: 즉, 먼저, 세 어린 가지들에 의해, 그 다음 싹틈에 의해, 그 다음 꽃핌에 의해, 그 후에 포도송이들이 포도들로 익어감에 의해, 마지막으로 눌러짜져 바로의 잔 안으로 들어가고 바로에게 바침에 의해 묘사되고 있다.
더욱이 주님으로부터 천국을 통하여 흘러든 꿈들은 표현물에 따른 것밖에 더 달리는 결코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연물에 있는 이것 저것이 무엇을 표현하는지를 알지 못하는 바, 특히, 어떤 것이 표현인지를 알아채지 못하는 이들은 이 표현들이 단지 비교함들이다는 것, 흔히 우리가 말하는 공통의 언어에 있는 비교함들밖에 더 아니다고 믿을 수밖에 없다. 사실상 이 꿈들은 비교함들이기는 하나, 상응하는 비교함들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내면의 천국에 있는 천사들이 주님의 왕국에 있는 영적이고 천적인 것들에 관하여 대화할 때 영들의 세계에서 보이도록 실제적으로 표출되어진다.

꽃이 피었다. 이는 거듭남 가까이에 와 있는 상태를 의미한다. 꽃핌이 나무로부터 싹틈 이후 그리고 열매가 있기 전인 바, 이는 거듭남 상태 이전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방금 앞에서 말했듯이, 나무의 싹틈과 열매맺음은 인간의 재 출생을 표현한다: 즉 나무가 잎들로부터 푸르러지는 것은 처음의 상태이고; 꽃이 피는 것은 두 번째의 상태, 즉 거듭남의 가까이에 있는 상태이고; 열매맺음은 세 번째의 상태, 즉 거듭남 자체이다. 이로부터 “잎들”은 총명으로부터의 것들, 또는 신앙의 진리들을 의미한다, 그 이유가 이것들은 재 출생, 또는 거듭남의 처음의 것들이기 때문이다; 한편, “꽃핌들”은 지혜로부터의 것들, 또는 신앙의 선들을 의미하는데, 그 이유는 이것들이 재 출생 또는 거듭남에 앞서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열매들”은 생활로부터 있는 것들, 또는 선행의 일들을 의미하는데, 그 이유는 이것들이 거듭난 자의 상태 자체를 구성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것이 식물 왕국에 존재하는 것은 영적 세계로부터의 유입으로 인하여서 이다. 어쨌든 이런 사항들이 모든 것을 신성이 아닌 자연계에 그 탓을 돌리는 이들에게는 믿어질 수 없는 것들이다; 이들에 반대쪽인 것, 즉 모든 것을 신성에, 자연계에 그 원인이 하나도 없다고 믿는 자는 모든 것이 신성으로부터 임을 보도록 허락될 뿐만 아니라, 모든 것은 상응을 가진다는 것도, 그러므로 표현적이다는 것도 알게 해준다; 마지막으로 그들로 알도록 허락하는 것은, 보편적 자연은 주님의 왕국을 표현하고 있다는 것; 고로 신성은 자연 속의 모두 각각의 세세한 사항 안에 있다는 것, 하여 자연은 영원과 무한의 표현물이다는 것, 즉 영원까지조차 번식함으로부터 영원에 대한 것을, 씨들의 불어남으로부터 무한인 것을 표현한다는 말이다. 이런 노력함들은 신성이 계속적으로 흘러들지 않으면 식물 왕국에 있는 모든 것에서 존재할 수 없었다; 그 이유가 유입으로부터 노력함(endeavor)이 오고, 노력함으로부터 에너지(energy)가, 에너지로부터 결과(effect)가 오기 때문이다.
모든 것을 자연의 탓에 돌리는 이들은 위와 같은 사항들은 그것들의 첫 창조 때에 열매들과 씨들에 나누어 주어져 있었다는 것, 그 후에 이것이 이런저런 활동들을 추진시켰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존속함(subsistence)은 존재 안으로 항구적으로 오고 있음이다는 것을, 이와 비슷한 말로, 번식함은 항구적인 창조이다는 것을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이 생각하지 않는 것은, 결과는 원인의 계속이다는 것, 그리고 원인이 중지될 때, 결과 역시 중지된다는 것, 결과적으로 원인의 계속적인 유입 없이, 모두 각각의 결과는 즉각적으로 사멸된다는 것에 대하여서 이다; 그들이 생각하지 않는 것은, 모든 것들의 처음, 즉 신성과 연결되지 않은 것은 즉각적으로 절멸된다는 것, 그 이유는 앞의 것은 뒤의 것이 존재하기 위하여 뒤의 것 안에 계속적으로 있음에 틀림이 없다는 것에 대하여서 이다.
모든 것을 자연에 그 탓을 돌리고, 신성에는 조금 내지 아무것도 돌리지 않는 이들이라해도 이런 사항들을 심각히 생각할 수 있다면, 그들 또한 자연에 있는 모두 각각의 것들은 영계에 있는 것들을, 결과적으로 주님의 신성을 가장 가깝게 표현하는 곳인 주님의 왕국에 있는 것들을 표현한다는 것을 인정할 수 있다. 이런 이유로 유입이 영계로부터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꼼꼼히 말하면, 유입은 주님의 신성으로부터 영계를 통하여 있다는 것이다. 자연적 인간들이 이런 사항들을 곰곰이 생각하지 않는 이유는 그들이 그것들을 기꺼이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이다; 그 이유가 그들은 지상적, 육체적인 것들 안에, 그러므로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의 생활 안에, 그러므로 영계, 또는 천국으로부터 있는 이런저런 것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거꾸로된 질서 안에 있기 때문이다. 이런 거꾸로의 질서에서 위의 사항들을 볼 수가 없다; 그들은 아래쪽에 있는 것을 두고 마치 위쪽에 있는 것, 위쪽에 있는 것이 아래쪽에 있는 것으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다른 삶에서 이런 이들이 천국의 빛에서 보여질 때, 그들은 머리를 아래쪽으로, 발은 위쪽을 향하고 있다.
이들 사이의 누가 거기서 이런 것이 있다는 것을 볼까? 즉 꽃피우는 나무들이나 여타 식물들을 볼 때, 그것들이 이제 열매들이나 씨들을 생산하기 때문에 마치 그것들의 즐거움 안에 있는 것처럼 간주하며 볼까? 그리고 그것들은 자기들의 꽃핌에서 열매나 씨의 시작을 가질 때까지 계속하고 있다, 그리고 자기들의 과일즙을 그들의 시작 안으로 운반하고 있다; 만일 이들이 인간의 재 출생 또는 거듭남을 알았다면, 이들은 이런 식물의 과정이 거듭남 이전 인간의 상태와 닮았다는 것으로부터 이런 표현함들을, 즉 인간도 식물과 마찬가지 방식에서 총명과 지혜의 선으로부터 꽃피움이 있다는 것을, 즉 내면의 즐거움과 아름다움 안에 있는 것을, 그 이유는 그가 총명과 지혜의 선들을 삶 안에 심으려는 수고함 안에 있는 것을, 즉 열매들을 생산하는 수고함 안에 있는 것을 표현함을 보게 된다. 이런 인간의 상태가 이런저런 본성을 지녔다는 것이 알려질 수 조차 없는 이유는 (꽃을 통해) 표현되는 내면의 즐거움과 아름다움이 세상 사랑의 즐거움과 자아 사랑의 기쁨에만 푹 젖은 이들에게 완전히 알려지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두 사랑의 즐거움과 기쁨 속에 있는 이들에게는 내면적으로 있는 즐거움이 너무나 비현실적이고 무미건조해서 혐오할 정도로 반대한다. 즉 이들은 내면적 기쁨을 하찮은 것, 무가치한 것으로 여겨 거절한다. 게다가 영적이고 천적인 어떤 것이 있다는 것조차 부정한다. 이로부터 현 시대의 미쳐버림이 오고 있다. 이 미쳐버림이 현 시대에서는 지혜이다로 믿어지고 있다.

그리고 거기로부터의 송이들이 포도들로 익었다. 이는 영적 진리가 천적 선과 결합함을 의미한다. 이는 “익다(ripen)”의 의미가 진리가 선과 결합하기 조차에 이르는 거듭남, 또는 재 출생의 과정이다로부터; 고로 결합함; 그리고 “송이(cluster)들”의 의미가 영적 선의 진리, 그리고 “포도(grape)들”의 의미는 천적 진리의 선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여기서는 이 진리와 선 모두가 술 담당자에 의해 표현되는 그 감각 안에 있다. 감각 안에서 이것들의 결합은 송이들이 포도들로 익어감과 비슷하다; 그 이유가 재 출생, 또는 거듭남에서모든 진리는 선과 결합하려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이런 결합을 통해 생명을 받지 못한 진리는 결과적으로 열매들을 만들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익어가는 나무의 열매 안에서 표현되어지고 있다. 여기서 “송이”로 표현된 익지 않은 열매들은 진리가 아직은 우쭐대는 상태, 주권을 쥐고 있는 상태를 표현한다; 그러나 “포도”인 익은 열매들은 선이 주권을 행사하는 상태를 표현한다. 선이 우월함(주권을 가짐, predominance)은 익은 포도들에서 지각되어지는 맛과 달콤함으로도 표현되고 있다. 그러나 이 정도의 살핌보다 더 자세한 것, 즉 지적 부분에 종속된 감각에서 진리가 선과 결합함에 관한 것인 더 특수적인 것들은 더 이상의 설명이 주어질 수 없다, 그 이유는 그것들은 (모두 각각의 인간의 공통된) 납득력에 와닿게 말하기에는 너무나 깊은 수준이기 때문이다. (이에 관하여는 여러분 각자의 삶 속에서의 경험으로 각자가 개별적으로 알아야 할 것이다 역자 주.) 더욱이 필요한 것은 영적 평면 속의 천적인 상태에 관한 지식, 그리고 이 감각에 관한 지식이 먼저 여러분의 이해력에 와 있어야 하고, (진리와 선의) 이 결합이 존재 안으로 오게 하는 자연 평면의 상태에 관한 지식도 이해력에 당도해 있어야 한다.
“포도들”이 영적 인간의 선, 즉 선행(charity)을 의미함에 관하여는 말씀의 많은 구절들에서 분명해진다; 이사야서에서:
내 아주 사랑하는 자가 기름의 아들의 뿔에서 포도원을 가졌다; 그는 이 포도원이 포도들을 산출하리라고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것은 들포도들을 생산했다 (이. 5:1, 2, 4);
위에서 “포도원”은 영적 교회를 표시한다; 그가 “포도들이 산출되리라고 바라봄”은 선행의 선들이다; 그리고 그것이 “들포도를 생산함”은 증오함과 보복함으로부터의 악들을 표시한다. 다시:
고로 여호와께서 말하셨다, 새 포도주가 송이들에서 발견되는 바, 그리고 누군가가 말한다, 그것을 파괴하지 말라, 그 이유는 복됨이 그것 안에 있기 때문이다 (이. 65:8);
“송이에 있는 새 포도주”는 자연 평면에 있는 선으로부터의 진리를 표시한다.
예레미야서에서:
내가 그것들을 정녕 그러모을 것이다, 여호와께서 말하신다; 포도나무에 포도들이 없다, 무화과 나무에 무화과가 없다 (예. 8:13);
“포도나무에 포도들이 없다”는 내면의 선 또는 합리적 선이 없다를 표시한다, 그리고 “무화과 나무에 무화과가 없다”는 외면의 선 또는 자연적 선이 없음을 표시한다; 그 이유가 “포도나무”는 지적 부분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적 부분에서 진리와 선의 결합이 있을 때, “포도나무”는 합리적 인간이다, 그 이유는 합리적 평면이 거기로부터 있기 때문이다.
[5] 호세아서에서:
나는 광야에 있는 포도들 같은 이스라엘을 발견했다; 나는 너희 아버지들(조상)을 무화과의 시작에서 그 나무의 첫 익은 것으로 보았다 (호. 9:10);
“광야에 있는 포도들”은 아직 영적으로 만들어지지 않은 합리적 선을 표시한다; “무화과 나무에 있는 첫 익은 것”은 아직 영적으로 만들어지지 않은 자연적 선을 표시한다; “이스라엘”은 고대의 시작에서 있던 그들의 영적 교회를 표시한다. (야곱의 아들들이 여기서의 “아버지들”에는 속하지 않는다, 어쨌든 “조상들”로 일컬어지는 이들과 더불어서 고대 교회가 처음 놓여졌다.)
미가서에서:
먹을 송이들이 없다; 내 혼이 첫 익은 것을 바랬다; 거룩함이 땅으로부터 멸해져 있다, 그리고 인간들 사이에 곧바른 자가 없다 (미. 12:1, 2);
“먹을 송이들”은 시작에서 있는 선행의 선을 표시한다; “첫 익은 것”은 시작 당시에 있는 신앙의 진리이다.
아모스서에서:
보라 이런 날이 온다, 밭을 가는 자가 수확자에 이르는 날, 씨를 끌어당기는 자가 포도들을 밟는 자에 이르는 날이다; 그리고 산들이 새 포도주를 떨어뜨릴 것이다, 모든 언덕들이 녹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포로된 내 백성을 되돌릴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황폐된 도성들을 건축하고 거주할 것이다; 그리고 정착하여 포도원을 심을 것이다, 그리고 거기로부터의 포도주를 마실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송이들을 만들 것이다, 그리고 그것들의 열매를 먹을 것이다 (암. 9:13, 14);
위는 영적 교회가 놓여짐을 취급한다. 고로 이것이 묘사되어 있다: 영적 선이 그것의 진리와 결합함이 “수확자에 이르는 밭을 가는 자”에 의해; 그리고 영적 진리가 그것의 선과 결합함이 “포도를 밟는 자에 이르는 씨를 끌어당기는(draw) 자”에 의해 묘사되어져 있다; 거기로부터의 사랑과 선행의 선들이 “산들이 새 포도주를 떨어뜨리고 언덕들이 녹고 있다”에 의해 의미되어진다; “포로된 백성들을 되돌린다”에 의해 거짓들로부터의 해방을 표시한다; “황폐된 도성들을 건설함”은 거짓화된 진리의 교리물을 개정하는 것을 표시한다; “도성들에 거주하고 포도원을 심는다”에 의해 영적 교회 속에 있는 이런저런 것들을 함양함을; “거기로부터 포도주를 마신다”에 의해 선행 속에 있는 이 교회의 진리들을 자기 것이 되게 함을; 그리고 “송이들을 만들고 그것들로부터의 열매들을 먹는다”에 의해 거기로부터 파생된 선을 자기 것이 되게 함을 표시한다. 누구나 아는 바, “도성을 건축함,” “포도원을 심음,” “포도주를 마심,” “송이들을 만듦,” “그것들의 열매들을 먹음,” 등등이 단지 자연적 수준의 것들이다는 것, 따라서 이런 것 안에 영적 의미가 포함되지 않으면 거기에 신성은 하나도 있지 않다는 것이다.
모세의 책에서:
그는 자기 의복을 포도주에서 빨았고, 자기 덮개를 포도들의 피에서 빨았다 (창. 49:11);
위 구절은 주님에 관하여 말해졌다; “포도주”는 신성한 사랑으로부터의 신성한 선을 표시하고; “포도들의 피”는 거기로부터의 천적인 선을 표시한다.
다시:
가축떼의 버터(butter, 젖지방)와 양떼의 젖, 바산의 아들들인 어린 양들과 숫양들, 그리고 숫염소 의 지방과 더불어, 밀의 콩팥의 지방과 더불어; 그리고 너는 섞지 않은 포도의 피를 마신다
(신. 32:14).
위 구절은 고대 교회에 관하여서 이다; 즉 사랑과 선행으로부터 있는 이 교회의 선들이 묘사되어 있다, 그리고 각 표현은 특별한 어떤 선을 의미하고 있다: “포도의 피”는 천적 선으로부터의 영적인 것, 즉 주님이 있으심으로부터 진행하는 천국에 있는 신성이다. 포도주가 “포도들의 피”라 불리우는데, 그 이유는 둘 모두 주님으로부터 진행하는 거룩한 진리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포도주”는 영적 교회에 관련되고, “피”는 천적 교회에 관련된다, 이런 이유로 포도주가 성찬예식에 사용하도록 명령되어 있다.
다시:
그들의 포도주는 소돔의 포도나무로부터 이다, 그리고 고모라의 들판들로부터 이다; 거기로부터의 포도들은 담즙의 포도들이다, 그것들은 쓴맛의 송이들을 가지고 있다 (신. 32:32);
위 구절은 유태 교회에 관련하여서 이다; 그들의 “포도나무는 소돔으로부터와 고모라의 들판들로부터 이다”란 지적 부분이 지옥의 사랑으로부터의 거짓들에 의해 에워싸인 것을 표시한다; “거기로부터의 포도들은 담즙의 포도들이다”와 “그것들로부터의 송이들은 쓴맛을 가지고 있다”는 의지 부분도 지적 부분과 비슷하였다를 표시한다. 그 이유가 좋은 의미에서 “포도들”은 선행을 의미하여, 의지 부분을 서술하나, 여기서는 지적 부분 내에 있는 의지 부분을 서술하고 있다; 고로 의지 부분이 지적 부분과 비슷한 것이다, 반대적 의미에서도 비슷하다, 그 이유는 모든 진리는 이해력으로부터, 모든 선은 의지력으로부터 있기 때문이다.
계시록서에서:
천사가 말했다, 당신의 날카로운 낫을 내밀으라, 그리고 땅의 송이들을 그러모으라, 그 이유는 그녀의 송이들이 충분히 익었기 때문이다 (계. 14:18);
“땅의 송이들을 그러모음”은 선행의 모든 것들을 파괴함을 표시한다.
마태복음서에서:
그들의 열매를 수단으로 너희들은 그들을 알 것이다. 그들은 가시들로부터 포도들을, 또는 엉컹퀴로 부터 무화과들을 그러모은다 (마. 7:16).
그리고 누가복음서에서:
모든 나무는 그것 자신의 열매로 알려진다. 그 이유가 가시들로부터 그들은 무화과들을 그러모으지 못하고, 가시덤불로부터 그들은 포도를 거두지 못하기 때문이다 (눅. 6:44).
이웃을 향한 선행이 위 구절들에서 다루어지는 바, 그들은 “자기들의 열매들에 의해 (자기들이 어떤 종류의 인간인지를) 알려진다”고 말해지는 것이다. 열매들은 선행의 선들이다; 선행의 내적 선들이 “포도들”이고 외적 선들은 “무화과들”이다.
아래는 유태 교회에서 법제화된 법이다:
네가 네 동료의 포도원에 올 때, 너는 네 혼에 따라 배불러지도록 포도들을 먹을는지 모르나, 네 그릇에 어떤 것도 놓아서는 안된다 (신. 23:24);
위 구절은 다른 교리와 종교에 있는 다른 이들과 제휴한 모든 이들은 그들의 선행의 선들을 배우고 용인할 수 있지만, 그것들에 물들어져서는 안된다는 것, 그리고 자신의 진리들을 가지고 그들과 합쳐져서는 안된다는 것을 포함하고 있다. “포도원”은 교회를 표시하는 바, 그것은 교리 또는 종교가 있는 곳을 표시한다; “포도들”은 선행의 선들; “그릇”은 교회의 진리이다.

그리고 바로의 잔이 내 손에 있었다. 이는 자연 평면의 내면이 외면 안으로 유입됨, 그리고 받아들임이 시작됨을 의미한다. 이는 바로의 표현함이 자연 평면의 내면이다로부터; 그리고 술 담당자의 표현함이 자연 평면의 외면이다로부터; “내 손에”는 당사자와 더불어를 뜻하고; “잔”의 의미가 담아내는 어떤 것, 동시에 담아진 어떤 것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러므로, 그리고 내적 의미에서의 시리즈로부터, “바로의 잔이 내 손에 있었다”에 의해 자연 평면의 내적인 것이 외면 안으로 유입됨, 그리고 거기 안에서 받아들임이 시작됨을 의미한다 자연 평면의 내면, 그리고 외면이 무엇인지에 대하여는 앞에서 서술했다, 즉 자연 평면의 내면은 합리적 평면과 교통하고, 이 안으로 합리적 평면이 흘러든다, 그리고 자연 평면의 외면은 감각들과 교통하고, 또는 감각들을 통하여 세상과 교통하는 바, 세상은 이 안으로 흘러든다. 유입에 주목하면, 이것은 주님으로부터 합리적 평면을 통하여 자연 평면의 내면 안으로, 그리고 내면을 통하여 외면 안으로 계속된다. 그러나 흘러든 것은 받아들임에 따라 바뀌고 변화된다. 타락된 자와 더불어, 거기서 선들은 악들로 바뀌어진다, 그리고 진리들은 거짓들로 바뀐다; 그러나 거듭난 자와 더불어 선들과 진리들은 거울 안에서와 같이 거기서 표출된다. 그 이유가 자연은 내적 인간의 영적인 것들을 표현하는 얼굴 같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얼굴은 외면들이 내면들과 상응할 때 표현적이 된다, 이상 설명으로부터도 자연 평면의 내면이 외면 안으로 유입됨에 대하여, 그리고 거기 안에서 받아들임의 시작이 있다는 것에 대하여 어느 정도 납득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포도들을 가져왔다, 그리고 그것들을 바로의 잔에 짜넣었다. 이는 거기 영적 근원으로부터의 선들 안으로 상호 유입됨이 있다를 의미한다. 이는 “포도들”의 의미가 선행의 선들이다로부터, 고로 영적 근원으로부터의 선들이다로부터, 그 이유가 진짜 선행의 모든 선들은 이 근원으로부터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로의 잔 안으로 짜넣다”의 의미가 상호 유입됨이 있다 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상호 유입됨이라고 말한다고 해서 자연 평면의 외면의 것이 내면의 것 안으로도 유입됨이 있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그 이유는 이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외면의 것들은 내면의 것들 안으로 흘러드는 것이 가능할 수 없다; 이를 다른 말로 말해보면, 더 낮은 것, 또는 뒤의 것이 더 높은 것, 또는 앞의 것 안으로 흘러들 수 없다; 그러나 합리적 평면은 자연 평면의 내면의 것을 불러 일으키는 바, 이로 인해 자연 평면의 외면의 것도 불러 일으켜진다; 그러나 거기 안에 있는 자체의 것들이 불러 일으켜지는 것이 아니고, 결말지어진 것들, 또는 그것들로부터 추출된 것들이 불러 일으켜진다. 이것이 상호 유입됨이다. 이 유입은 마치 세상에 있는 것들이 감각을 통하여 내면들을 향하는 것처럼 나타난다; 그러나 이것은 감각의 오류이다; 유입은 내면들로부터 외면들 안으로 있다, 이 유입을 수단으로 지각함이 있는다. 이 주제를 두고 나는 영들과 여러차례 대화한 적이 있었는데, 생생한 경험을 수단으로 내면의 인간이 외면 바깥에서 행해진 것들을 외면들 안에서 보고 지각한다는 것을 보게 했다. 그리고 감각적인 것들은 다른 근원으로부터 생명을 가지지 않는다는 것, 또는 다른 근원으로부터 감각력이 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오류의 특성상, 이런 오류는 심히 대단한 바, 자연적 인간에 의하여서는 결코 추방되어질 수 없고, 합리적 평면일지라도 감각으로부터 추상적으로 생각할 수 있지 않으면 추방되기 무척 힘들다. 이런 사항들이 말해진 이유는 상호 유입됨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알아보기 위해서 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 잔을 바로의 손바닥에 바쳤다. 이는 자연 평면의 내면을 수단으로 자기 것이 되게 함을 의미한다. 이는 “잔을 바치다(고로 마실 포도주)”의 의미가 자기 것이 되게 하다 이다로부터; 그리고 바로의 표현함이 자연 평면의 내면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는 앞에서 이미 살핀 바로부터 분명해지는데, 즉 여기서 취급되는 주제가 내면의 인간의 지적 부분에 종속되는 감각적인 것의 거듭남이다 (이 감각은 “술 담당자”에 의해 의미된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진리와 선의 유입과 이 유입을 자연 평면의 외면이 받아들임 이다; 그러나 이런 사항들은 합리적 평면, 자연 평면, 또는 유입에 관하여 어떤 구분된 관념을 가지지 않은 이들의 납득력으로 부터서는 아주 먼 거리에 있는 바, 더 이상의 설명은 하지 않을 것이다.
더 나아가 “잔(cup)”은 말씀에서 종종 언급되는 단어인데, 이 단어를 수단으로 진짜 의미에서 영적 진리, 즉 선행의 선으로부터 있는 신앙의 진리가 의미된다; 이와 같은 의미 선상에 있는 단어는 “포도주”이다; 그리고 반대적 의미에서 악을 오게 하는 거짓이 의미된다, 또한 악으로부터의 거짓도 의미한다. “잔”이 “포도주”와 같은 의미를 가지는 이유는 잔은 담는 것, 포도주는 담아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것들은 한 가지 것을 구성한다, 그러므로 이쪽이 저쪽에 의해 뜻해진다.
이와 같은 의미가 “잔”에 의해 의미되는 것을 아래 구절들로부터도 분명해진다:
여호와, 당신께서는 내 적들의 현존에서 내 앞에 식탁을 정돈하여 놓으실 것입니다; 당신께서는 기름을 가지고 내 머리를 살찌우게 만드실 것입니다; 내 잔이 넘칠 것입니다 (시. 23:5);
“식탁을 정돈하여 놓음과 기름을 내 머리에 붓는 것”은 선행과 사랑의 선으로 선물받는 것을 표시한다; “내 잔이 넘칠 것이다”란 그러므로 자연 평면이 영적 진리와 선으로 가득해지는 것을 표시한다. 다시:
내가 여호와께 무엇으로 보답할까? 나는 구원들의 잔을 가져갈 것입니다, 그리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를 것입니다 (시. 116:12, 13);
“구원들의 잔을 가져감”은 신앙의 선들을 자기 것이 되게 함을 표시한다.
마가복음서에서:
너희가 그리스도의 것(제자)이기 때문에 내 이름 안에서 물 잔을 마시게 주는 자는 누구든지, 참으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그는 그의 보상을 잃지 않을 것이다 (막. 9:41);
“내 이름 안에서 물 잔을 마시게 주는 것”은 적은 선행으로부터 신앙의 진리들 안에서 배우는 것을 표시한다.
마태복음서에서:
이어, 잔을 가지시고, 감사함을 드리며, 그분은 그들에게 주면서, 말하시기를, 너희 모두는 이 잔으로부터 마시라; 그 이유가 이것은 나의 피, 새 언약의 것이기 때문이다
(마. 26:27, 28; 막. 14:23, 24; 눅. 22:20).
위 구절에서 마시라고 말해질 때 포도주가 아니라 잔을 마시라는 듯이 말해지고 있다. “포도주”는 영적 교회를 서술하나, 그러나 “피”는 천적 교회를 서술한다. 물론 이 둘 모두가 주님으로부터 진행하는 거룩한 진리를 의미하기는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영적 교회에서는 이웃을 향한 선행으로부터 신앙의 거룩함이고, 천적 교회에서는 주님을 사랑함으로부터 선행의 거룩함이다. 영적 교회와 이렇게 구별된다; 즉 전자는 이웃을 향한 선행 안에 있고, 한편 후자는 주님을 사랑함 안에 있다; 그래서 성찬 예식은 온 인류를 항한 주님의 사랑, 그리고 이런 그분을 향한 인간의 상호적인 사랑을 표현하고 의미하기 위하여 제정되어졌다.
“잔”에 의해 담는 것이; “포도주”에 의해 담기는 것이 의미되는 바, 결과적으로 “잔”에 의해서는 인간의 외적 측면이, 그리고 “포도주”에 의해서는 인간의 내적 측면이 의미되는 바, 그러므로 주님께서 말하셨다:
너희에게 화있을 것이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아, 위선자들이여! 그 이유가 너희는 잔과 접시의 바깥은 깨끗이 하나, 안쪽 부분은 강탈한 것과 난폭한 것으로 가득차 있다. 너 눈이 먼 바리새인이여, 먼저 잔과 접시의 안쪽을 깨끗이 해라, 그리고 바깥쪽 또한 깨끗해질 것이다
(마. 23:25, 26; 눅. 11:39);
위 구절 역시 “잔”에 의해 내적 의미에서 신앙의 진리가 뜻해지는데, 신앙의 선 없이 신앙의 진리를 탐닉하는 것이 “잔의 바깥을 깨끗이함”인데, 특히 내면들이 위선, 사기, 증오, 복수, 잔인함으로 꽉 차 있을 경우 더욱 긴요하다. 그 이유는 이때 신앙의 진리가 외적 인간 안에만 있고 내적 인간 안에는 전혀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신앙의 선을 빨아들이고, 연마하는 것이 내적 인간 안에서 진리들로 선과 결합되게 하는 것인데, 이것이 “잔의 안쪽을 먼저 깨끗이함, 그러면 바깥쪽도 깨끗해짐”에 의해 의미되고 있다.
마가복음서에서:
거기에 바리새인들과 유태인들이 받아서 고수하는 많은 다른 것들이 있었는데, 잔들, 단지들, 놋그릇들, 침상들을 세례함(씻음, baptizing) 같은 것이다. 너희는 하느님의 명령을 저버리면서 인간들의 전통을 고집하고 있다, 즉 단지들과 잔들을 세례함들 같은 것이다; 그리고 많은 이와 비슷한 짓을 너희는 행하고 있다. 너희는 너희 전통을 지키도록 하려고 하느님의 명령을 포기하고 있다 (막. 7:4, 8, 9).
“잔”이 반대 의미에서는 악을 있게 하는 거짓, 악으로부터 있는 거짓이 의미된다는 것이 아래 구절에서 분명해진다:
고로 이스라엘의 하느님 여호와께서 나에게 말하셨다, 내 손으로부터 분노의 포도주의 이 잔을 가져가라, 그리고 내가 너희에게 보내는 모든 민족들로 그것을 마시게 하라. 그리고 그들이 마실 것이다, 그리고 이리저리 휘청거리고, 미쳐버리는데, 그 이유는 내가 그들 사이에 보내는 검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는 여호와의 손으로부터 잔을 받았다, 그리고 모든 민족들로 여호와께서 나에게 보낸 자들로 마시게 만들었다 (예. 25:15-17, 28);
“분노의 포도주의 잔”은 악이 있게 하는 거짓을 표시한다. 거짓을 수단으로 악이 있다고 의미되는 이유는 포도주가 취하게 하고 발광하게도 만들기 때문, 이와 비슷하게 하는 것이 거짓인데, 영적인 취함은 납득되지 않아서 믿어지지 않을 때, 믿어져야 한다는 것에 관해 추론을 수단으로 미쳐지게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해서 거짓들이 온다, 그리고 거짓들로부터 악들이 온다; 그러므로 말해지기를, “그들은 마실 것이다, 그리고 이리저리 휘청거리고, 미쳐버린다, 그 이유는 내가 보낼 검 때문이다.” “검”은 진리에 맞서 싸우는 거짓이다.
예레미야애가서에서: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우스의 토지에 거주하는 에돔의 딸아; 잔이 네게도 통과하여 지날 것이다; 너는 술취해질 것이고 벗겨질 것이다 (애. 4:21);
“잔으로부터 술취함”은 거짓들로부터 발광하는 것을 표시한다, 그리고 “수치함 없이 벗겨지는 것”은 악이 거기로부터 파생되는 것을 표시한다.
에스겔서에서:
너는 너희 자매의 길에서 걸었다; 그러므로 나는 그녀의 잔을 네 손에 줄 것이다. 고로 주 여호비께서 말하신다, 너는 너희 자매의 잔을 마실 것이다, 이 잔은 깊고 넓다; 너는 웃음거리와 조롱거리를 아주 크게 당할 것이다; 너는 황폐함과 황무함의 잔을 가지고 술취함과 슬픔으로 채워질 것이다, 너희 자매 사마라아의 잔을 너는 마시고 내리 누를 것이다, 그리고 너는 거기로부터 질그릇 조각을 가루로 만들 것이다 (겔. 23:31-34);
위는 예루살렘에 관해서이다, 이 구절에 의해 천적 교회의 영적인 것이 의미된다. “잔”은 여기서 악으로부터의 거짓을 표시한다; 그리고 이것이 교회를 황폐하게, 또는 파괴하기 때문에, “황폐함과 황무함의 잔”이라 불리운다. 이사야서에서:
깨어라, 깨어라, 일어나라, 오 예루살렘아, 여호와의 분노의 잔을 그분의 손으로부터 마셨던 예루살 렘이여; 너는 전율의 잔의 찌끼를 마셨었다 (이. 51: 17).
하박국서에서:
너는 너의 표피가 벗기워지는 것을 마시라; 여호와의 오른손의 잔이 네게로 빙돌러 올 것인즉, 수치스러운 구토함이 네 영광 위에 있을 것이다 (합. 2:16).
다윗서에서:
여호와의 손에 잔이 있다, 그리고 그분은 포도주를 가지시고 섞으셨다, 그분은 혼합물로 채우셨다, 그리고 거기로부터 쏟으셨다; 그러나 거기로부터의 찌끼들, 땅의 모든 사악한 자가 그것을 빨아냈 다, 그리고 그것들을 마셨다 (시. 75:8);
위 구절들에서도 “잔”은 거짓들로부터의 발광함과 발광함으로 파생되는 악들을 표시한다. 또한 위 구절에서 “여호와의 분노의 잔”, 또한, “여호와의 오른손으로부터”라고 말해지고 있는데, 그렇게 말해진 이유는 유태 민족도 여느 민족들 같이 악들과 거짓의 처벌이 여호와 외의 다른 근원으로부터 있지 않는다고 믿었기 때문에서이다. 그러나 그것들은 인간 자신으로부터, 그리고 당사자와 더불어 있는 지옥의 패거리들로부터 이다. 이런 식의 외관으로부터의 서술 방식은 자주 있는다; 그러나 내적 의미는 이런 구절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고 믿어져야 하는 지를 가르친다
“잔”도 “포도주” 같이 반대적 의미에서 거짓들을 통하여 오는 악들, 악들로부터의 거짓들을 의미하기에, “잔”은 시험 또한 의미한다, 그 이유는 거짓이 진리에, 악이 선에 맞설 때, 시험이 거행되기 때문이다. “잔”이 시험을 표현하고 서술하려 사용된 것을 아래 구절로부터 알게 된다:
예수께서 기도하셨고, 말하시기를, 만일 이 잔이 저로부터 건너가기를 당신이 뜻하신다면! 그럼에 도 제 뜻으로 마옵시고, 그러나 당신의 뜻이 행해지게 하옵소서
(눅. 22:42; 마. 26:39, 42, 44; 막. 14:36);
위에서 “잔”은 시험을 표시한다, 마찬가지로 요한복음서에서: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말하셨다, 네 검을 칼집에 놓아라; 내 아버지께서 나에게 주셔왔던 잔, 내가 그것을 마셔야 하지 않겠느냐? (요. 18:11).
그리고 마가복음서에서:
예수께서 야고보와 요한에게 말하셨다, 너는 너희가 묻는 것을 알지 못하고 있다; 너희는 내가 마시는 잔을 마실 수 있느냐? 그리고 내가 세례받는 세례로 세례받아질 수 있느냐? 그리고 그들이 말했다, 우리는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하셨다, 너희는 내가 마시는 잔을 실로 마실 수 있고, 내가 세례받는 세례로 너희도 세례받아질 것이다
(막. 10:38, 39; 마. 20:22, 23).
이로부터 분명한 바, “잔”이 시험이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시험은 선들과 진리들에 맞서 거짓들을 수단으로 전투하는 악들을 통하여 야기되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세례는 거듭남을 의미하기 때문, 그리고 거듭남은 영적 전투들을 수단으로 결과되기 때문에, 그러므로 “세례”에 의해서도 시험이 동시에 의미된다.
직 반대 의미에서, “잔”은 모독인 이들, 즉 내향적으로는 선행에 반대되어 있는데, 외향적으로는 거룩한 체하는 이들과 더불은 악으로부터의 거짓을 의미한다; 이런 의미에서 잔이 사용된 구절이다:
바빌론은 온 땅을 술취하게 만드는 여호와의 손에 있는 금빛의 잔을 가졌었다; 모든 민족들은 그녀의 포도주를 마셨었다, 그러므로 민족들이 미쳐버렸다 (예. 51:7);
“바빌론”은 내향적으로는 모독적이나, 외향적으로는 신성이 있음 안에 있는 이들을 표시한다; 그들이 신성으로 가리워지게 한 거짓이 “금빛의 잔”이다; “온 땅을 술취하게 만듦”은 그들이 (“땅”에 의해 뜻해지는) 교회를 잘못들과 미쳐버림 안으로 인도함을 표시한다. 그들이 외적 신성 아래 숨겨놓은 모독적인 것들은 그들이 모든 것 중에서 최고로 위대하고, 가치 있다고 여겨 쟁취한 것, 고로 신들로, 하늘과 땅의 소유자로 숭배되어야 한다는 것들, 고로 인간의 영혼과 몸을 송두리째 통치해야 한다는 것들을 신성인 척 해놓은 신성과 거룩한 것들을 수단으로 붙들고 있는 것들이다. 이로부터 그들은 외적 인간 측면에서 천사들 같이 나타나나, 내적 인간에서는 악마들이다.
같은 바빌론이 계시록서에서 말해진다:
여인은 진홍과 주홍으로 차려입고, 금과 보석과 진주들로 장식하고, 그녀의 손에 그녀의 매춘의 역겨움과 더러움을 채운 금빛의 잔을 가지고 있었다 (계. 17:4).
다시:
위대한 바빌론이 무너졌다, 무너졌다, 그리고 악마들의 주택이 되어졌다. 그 이유는 모든 민족들이 그녀의 매춘의 격노함의 포도주를 마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땅의 왕들이 그녀의 매춘을 범하였다. 나는 천국으로부터의 음성을 들었다, 말하기를, 그녀가 너희에게 되갚은 대로 그녀에게 되갚으라, 그녀가 섞은 잔에서, 그녀가 섞은 것의 두 배로 섞어라 (계. 18:2-4, 6).
다시:
셋째 천사가 큰 음성으로 말했다, 만일 어떤 이가 짐승과 그의 형상을 숭배한다면, 그는 하느님의 분노의 잔에서 섞이지 않은 것을 섞은 하느님의 분노의 포도주를 마실 것이다; 그리고 그는 불과 유황으로 괴롭혀질 것이다 (계. 14:9, 10).

그리고 요셉은 그에게 말했다, 이것은 그것에 관한 해석입니다. 이는 본질적으로 가진 것에 관하여 자연 평면 속의 천적인 것으로부터 지각하여 밝히 알게 됨을 의미한다. 이는 “말하다(say)”의 의미가 말씀의 역사적 부분에서 지각하다 이다로부터, 여기서는 지각함으로부터 밝히 앎, 그 이유는 꿈과 해석에 관하여서 이기 때문이다. 즉 모든 계시(밝히 앎)는 주님으로부터 천사들을 통하여 말로부터, 또는 지각으로부터 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요셉의 표현함이 자연 평면에 있는 천적인 것이다로부터; 그리고 “해석”의 의미가 본질적으로 가진 것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상으로부터 “요셉이 그에게 말하기를, 이것은 그것에 관한 해석이다”에 의해 본질적으로 가졌던 것에 관하여 자연 평면의 천적인 것으로부터의 지각으로부터 밝히 앎이 의미된다.
지각으로부터 이든 천사를 통해 주님께서 말하심 이든 계시에 주목해보자; 우리가 아는 바, 선과 선으로부터의 진리 안에 있는 자, 특별히 주님을 사랑함의 선 안에 있는 자는 지각으로부터 계시를 가진다; 그 반면, 선 안에 있지 않고 진리 안에 있는 자, 이 자도 실로 계시들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자기들 내부에서 들리는 생생한 음성을 통하여, 고로 주님으로부터 천사들을 통하여 이다. 이 계시는 외적이나, 전자는 내적이다. 천사들, 특히 천적 평면의 천사들은 지각으로부터 계시를 가진다, 이는 태고 교회인들이 가졌던 것과 같다, 그리고 얼마의 고대 교회인도 가졌다, 그러나 오늘날의 경우, 거의 누구도 이런 계시를 가질 수 없다; 이에 반해, 아주 많은 이들, 즉 선 안에 있지 않았던 이들조차도 지각 없이 말로부터, 또는 환상들 또는 꿈들을 수단으로 계시들을 가졌었다.
이와 같은 계시들을 대부분의 유태 교회에 있던 예언자들이 가졌다; 그들은 음성을 들었다, 그들은 환상을 보았다, 그리고 그들은 꿈을 꾸었다; 그러나 그들은 지각을 갖지 않았기에, 그들이 가진 것들은 그것들이 의미한 것에 관한 어떤 지각 없는 단순한 말이나 시각의 계시들일 뿐이었다. 그 이유가 진짜 지각은 주님으로부터 천국을 통하여 와서, 지적 부분에 영적으로 감동을 주고, 그리고 그것을 지각적으로 실제로 어떤 것인지를 내적 동의 함과 더불어, 알지 못하는 것을 생각하도록 인도된다. 이것은 본질적으로 있는 것임을, 이것은 어떤 것과의 연결로부터 흐르고 있음을 상상하게 한다; 그런 반면 주님으로부터 천국을 통하여 받아쓰게 함(a dictate)이 있다; 이것은 생각의 내면들 안으로 흐르는데, 자연적, 또는 감각적인 것을 넘어서 있는 것들에 관하여, 즉 영계 또는 천국에 관하여서 이다. 이상 살핀 바로부터 지각으로 있는 계시가 무엇인지 가늠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요셉에 의해 표현된 주님, 그리고 여기서 내적 의미에서 취급되는 계시 측면에서) 주님이 가지셨던 지각으로부터의 계시는 그분 자신 안에의 신성으로부터, 고로 그분 자신으로부터 이었다.

세 어린 가지란 삼일 입니다. 이는 마지막에까지조차 내려가며 계속되는 갈래들을 의미한다. 이는 “3”이 하나의 시기 그리고 그 시기가 시작으로부터 끝까지 계속됨이다로부터; “어린 가지들”의 의미가 갈래(derivation)들이다로부터; 그리고 “날(day)들”의 의미가 상태들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상으로부터 뒤이어지는 것, 즉 “세 어린 가지들은 삼일이다”에 의해 술 담당자에 의해 표현된 이 감각의 재 출생함의 상태, 그 처음의 상태로부터 그것의 최말단의 상태까지 내려가며 있는 상태가 의미된다; 그것의 계속적인 갈래들은 “어린 가지들”에 의해 의미된다.
각 감각적인 것들의 재 출생의 상태, 그리고 자연 평면에 있는 각각의 것들의 재 출생의 상태, 또한 합리적 평면에 있는 각각의 것들의 재 출생의 상태는 시작으로부터 끝까지그것들의 발전함을 가진다; 그리고 그것들이 끝(목적)에 당도할 때, 그것들은 일종의 새로운 시작을 개시한다, 즉 끝으로부터 그것들이 이전 상태 안에서 애써왔었던 쪽으로, 더 멀리 있는 목적쪽으로의 개시함이 있다는 말이다; 결국, 순서가 뒤바뀌는 형국인 셈인데, 즉 마지막이었던 것이 처음인 것이 되어 있는다, 즉 인간이 합리적 평면 측면에서와 자연 평면에서 거듭나지는 형국이다. 처음 상태의 시기들은 신앙으로부터 있는 진리들로부터 선행으로부터 있는 선들쪽으로 이다; 이때 신앙의 진리들은 첫째 부분에 가상적으로 행동한다, 그리고 선행의 선들은 차선에 있다, 그 이유는 신앙의 진리들이 그것의 목적으로 선행의 선을 쳐다보기 때문이다. 이 시기들은 인간이 거듭나질 때까지 계속된다. 이 후에 선행, 목적이었던 선행이 시작이 되어주는데, 이로부터 새로운 상태가 개시된다, 이 개시는 양쪽 방향으로, 즉 더 내면쪽으로, 그리고 외면인 것쪽으로 이다; 전자의 방향은 주님을 사랑함을 향하여서 이고, 후자의 방향은 신앙의 진리들을 향하여, 그리고 더 나아가 자연적인 진리들을 향하여, 또한 감각적인 진리들을 향하여서 진행되고, 이는 합리적 평면에 있는 사랑의 선과 선행의 선과 상응관계를 이룰 때까지, 고로 천국의 질서에 합류할 때까지 계속된다.
이상 살핀 것들이 계속적 발전, 또는 최말단의 것까지로 내려가는 갈래들에 의해 뜻해진 것들이다. 거듭나지는 인간과 더불은 이런 발전과 갈래들은 항구적이다, 즉 그의 유아 시기로부터 세상 삶의 마지막 시기에 이르기조차, 그후 영원으로까지 조차 이다. 그럼에도 그가 완전 거듭남이라고 말할 수준에까지 당도하지는 못한다. 그 이유는 거듭나져야 하는 것들이 셀 수 없이 많기 때문이다, 이는 합리적 평면, 자연적 평면 모두에서 숫자로는 계산하기 힘들 정도로 많다, 즉 그것들의 모두들이 각기 어린 가지들을 가지고 있다, 즉 내면을 향하여, 외면을 향하여 발전과 갈래들을 가진다는 말이다. 인간은 이에 관해 아는 것이 하나도 없다; 그러나 주님은 모든 것들, 모든 낱개의 것들을 아시고 매 순간을 위해 설비하신다. 만일 그분이 한 순간이라도 중지한다면, 모든 발전들은 혼돈에 빠진다; 그 이유가 앞의 것이 뒤의 것을 계속적 시리즈에서 쳐다보기 때문이다, 그리고 영원쪽으로 결과의 시리즈를 생산하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분명해지는 바, 신성한 예견과 섭리가 모든 것 안에 있다는 것, 지극히 작은 것에 이르러서도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그렇게 있지 않으면, 또는 만일 그것들이 보편적일 뿐이다면, 인류는 멸해지고 말 것이다.

이제부터 삼일. 이는 거기에 새로운 상태가 있을 것임을 의미한다. 이는 “3”의 의미가 마지막쪽으로까지 조차 계속인 것이다로부터, 고로 완성인 것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리고 “날들”의 의미가 상태들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로부터 분명한 바, “3일”에 의해 완성된 상태가 의미되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3일 안에”, 또는 “3일 후에”는 새로운 상태를 표시한다; 그 이유가 완성된 상태 후에 새로운 것이 시작하기 때문이다.

바로께서 당신의 머리를 들게 할 것이다. 이는 설비된 것, 그로부터 결말이 있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머리를 들게 함”의 의미가 결말을 내는 것, 최고 의미에서 설비하는 것이다로부터 분명해진다; 그 이유가 신성한 결말, 그리고 어떤 것을 결말나게 함이 섭리이기 때문이다. “머리를 들게 함”은 감옥에 있는 자, 또는 억류된 자를 살려주는 쪽이든 죽게하는 쪽이든 어느쪽으로 형집행이 건너가는 고대인들 사이에 있던 관습적 형체의 말이다. 이때 생명쪽일 경우에서 “머리를 들게 함”이 아래에 표현되어졌는데, 열왕기하서에서:
바빌론의 왕 에윌므로닥이 그가 왕으로 즉위한 해에, 감옥으로부터 유다의 왕 여호야긴의 머리를 들게 하였고, 그에게 좋은 말로 했고, 그리고 그의 왕좌를 비빌론에서 자기와 더불은 왕들의 왕좌 위에 놓이게 했다 (왕하. 25:27, 28).
마찬가지로 예레미야서에서:
바빌론의 왕 에윌므로닥이 그의 통치 원년에, 유다의 왕 여호야긴의 머리를 들게 했다, 그리고 그를 감옥으로부터 데려내왔다 (예. 52:31).
그러나 그들이 죽음쪽으로 판결하였을 때, “머리를 그로부터 떼어내 들게 했다”라고 표현되었는데, 이는 이어지는 빵 담당자에 관한 것, 즉 “삼일이 지나면, 바로는 당신으로부터 머리를 떼어 들 것이다” (19절).
형집행의 이런 형체는 표현물들 안에 있었던 고대인들 사이에서, 감옥이나 구덩이에 억류된 이들의 표현으로부터 근원되고 있다; 그리고 이들을 수단으로 더 낮은 땅 아래 황폐됨 안에 있었던 이들이 표현되어졌다, 그러므로 “그들의 머리를 들게 함”에 의해서는 그들이 자유해짐이 의미되었는데, 그 이유는 이때 그들은 천국의 사회들 안으로 황폐됨으로 승강, 또는 들어올려졌기 때문이다. “들어올리는 것” 또는 “승강하는 것”은 내면의 것들을 향하여 발전하는 것이다; 그 이유가 승강된 것, 또는 높은 것이 내면의 것을 서술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이 내면의 것들을 향하여 있기 때문에, 이것은 천국을 향하고 있다, 그 이유는 천국은 내면의 것들 안에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머리를 들게 함”에 의해 의미된 것이다. 그러나 누군가의 “머리를 떼어 들게 함”은 그를 죽음쪽으로 판결한 것이 의미된다, 그 이유는 판결 때에 구덩이, 내지 황폐함 안에 있던 이들이 천국쪽으로 승강하던지, 더 낮은 깊음들쪽으로 내려가든지 하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함 때문에 형집행의 이런 형체의 말이 말씀에서 받아들여졌다. 그러므로 “머리를 들게 함”에 의해 결말인 것을 의미함이 분명하다; 그리고 결말인 것이 의미되기 때문에, 최고 의미에서 설비되는 것도 의미된다; 그 이유는 신성이 결말짓는 것이 설비되기 때문이다.

당신은 복직될 것이다. 이는 지적 부분에 종속된 감각적인 것 속의 것들이 질서에로 환원됨, 그리하여 그것들이 자기들 위치인 마지막 장소에 있게 됨을 의미한다. 이는 술 담당자의 표현함이 지적 부분에 종속되는 감각이다로부터, 결과적으로 자연 평면의 외적 측면에 있는 이 감각의 것들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 이유가 감각 자체가 질서 안으로 환원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 그러나 감각을 통하여 인간의 공상 안으로 들어가는 이런저런 것들이다는 말이다. 그리고 “복직, 즉 위치에 되돌림”의 의미가 질서 안으로 환원됨이다; 그리고 감각적인 것들(즉 세상의 것들이 감각기관을 통하여 들어간 것들)이 마지막 장소에 있고, 이 마지막 장소가 내면의 것들을 섬기며 돕는다. 그러므로 이런 사항까지도 (“복직됨”에 의해) 의미되고 있다. 더욱이 거듭난 자와 더불어 이런 감각의 것들은 마지막 위치에 있다; 그러나 거듭나지 못한 자와 더불어서는 첫째 자리에 있다.
감각의 것들이 첫째 위치에 있는지 마지막째에 있는지는 조금만 관심을 기울여도 쉽게 지각되어질 수 있다. 만일 그가 감각적인 것이 자극하는 것, 또는 간절히 바라는 것을 허가하고, 지적 부분이 명령하는 것은 허가하지 않는다면, 이때 감각적인 것들이 첫째 위치에 있고, 그 인간은 요구들에 의해 통치되고, 전적으로 감각적이다. 이런 인간은 합리적 평면이 없는 동물의 조건으로부터 과히 멀지 않다, 그 이유가 이런 인간은 동물들이 통치되는 방식에서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마 동물보다 더 나쁜 조건으로 치닫을지 모른다, 그 이유는 그의 감각이 자극하고 바라는 것쪽으로 악들과 거짓들을 확증하도록 그의 지력, 합리력을 남용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일 그가 그것들을 허가하지 않으면, 그러나 내부로부터 어떻게 그것들이 거짓들로 빗나가는지를, 악들을 부추키는지를 본다면, 그리고 그것들을 징벌하려 노력하고, 그것들이 고분고분해지는 쪽으로 돌려놓으려 노력하면, 이때 감각적인 것들은 질서 안으로 환원되어 그것들의 장소인 마지막째의 장소를 충실히 담당하게 된다. 감각의 것들이 마지막 장소에 있을 때, 행복하고 복된 느낌이 내면의 인간으로부터 이런 저런 것들의 즐거움 안으로 흘러든다, 그리고 수 천 배로 증가해간다. 감각적 인간은 이렇게 되는 것을 믿지 못한다, 그 이유는 이 인간은 그것을 납득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감각적 인간은 감각의 즐거움 외의 즐거움은 감지할 수 없다, 그리고 이보다 더 높은 빛은 없다고 생각한다. 그는 감각적인 것들의 안쪽에 있는 행복하고 복된 느낌을 별 소용이 없는 것으로 무시해버린다; 그 이유는 감각에 알려지지 않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믿기 때문이다.

그리고 당신은 바로의 잔을 그의 손에 바칠 것이다. 이는 그러므로 해서 감각적인 것들이 자연 평면의 내면들을 섬기게 된다를 의미한다. 이는 “마시도록 잔을 바침”의 의미가 자기 것이 되게 함이다로부터; 그리고 또한 이것은 섬기는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바로의 표현이 자연 평면의 내면이다로부터 알려진다. 자연 평면에는 내면들과 외면들이 있다는 것, 그리고 외면들은 감각들을 통하여 세상으로부터 자연적 마음 안으로, 즉 그것의 기억과 거리로부터 상상 안으로 직접 들어감으로 구성된다.
외면의 인간 속에 있는 것이 자연 평면의 내면과 외면이다는 것, 그러므로 내면의 인간 속에 있는 것은 합리적인 것이다에 관하여를 알기 위하여, 이에 대해 설명을 추가해야 할 것 같다. 인간은 유아로부터 어린 시절까지에서 단지 감각적일 뿐이다, 그 이유는 그가 이 시기에서는 지상적인 것, 육체적인 것, 세상적인 것들만을 그의 육체의 감각을 통하여 받고, 이런 것들로부터 그의 생각들과 관념들이 형성되기 때문이다. 이 때의 경우, 그의 내면의 인간과의 교통은 아직 열리지 않은 시기이다, 또는 그의 인생 시기상 내면의 인간과는 거리가 멀어 그는 세상적인 것들만을 납득할 수 있고 유지할 수 있을 뿐이다. 이 시기에 그가 가지는 순진은 외적일 뿐, 내적이지는 않다; 그 이유가 진정한 순진은 지혜 안에 거주하기 때문이다. 외적인 순진을 수단으로 주님께서는 감각들을 통하여 들어오는 것들을 질서 안으로 환원하신다; 그리고 이 처음 시기에 주님으로부터의 순진의 유입 없이, 인간에 어울리는 합리력, 또는 지력을 세울 어떤 기초도 있어질 수 없고, 건축되어질 수도 없다.
어린 시절로부터 초기 청년기까지에서 인간에 어울리는 것을, 시민 법들이 요구하는 것을 배움으로, 그리고 존경할 수 있는 것을 양친이나 선생들과 학문들로부터 가르침을 수단으로 자연 평면의 내면들과의 교통이 열리어진다. 그리고 초기 청년기로부터 초기 성년기까지에서 시민적 도덕적 생활 속의 진리들과 선들을 배움에 의해 자연 평면과 합리적 평면 사이의 교통이 열리어진다, 특히 영적 삶 속의 진리들과 선들은 말씀을 읽고 들음을 수단으로 열리어진다; 그러나 이 때의 청년들은 진리들을 수단으로 선들과 동화되는 만큼에서, 즉 그가 배우는 진리들을 행하는 만큼에서, 합리적 평면이 열리어진다; 그 반면 그가 진리들을 수단으로 선들에 동화되지 않는 만큼에서, 또는 그가 진리들을 행동하지 않는 만큼에서, 합리적 평면은 열려지지 않는다, 그럼에도 지식들은 자연 평면 안에 남아 있는다, 즉 그의 기억 안에, 고로 마치 집의 문지방 바깥쪽에 위치하는 것과 같다.
어쨌든 이때의 당사자가 선들과 진리들을 경시하고, 부정하고, 반대되게 행동하고, 즉 그것들 대신 거짓들을 믿고 악들을 행한 만큼 그의 합리적 평면은 닫히고, 그의 자연 평면의 내면도 닫힌다; 그럼에도 주님의 신성한 섭리로부터 상당한 양의 교통함의 가능성이 남아 있어 이해력의 어느 수준에서라도 선들과 진리들을 납득함이 가능해지도록 남아 있는다, 그렇지만 그것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려면, 그는 심각한 회개를 수행하고, 거짓들과 악들과의 투쟁을 한동안 감내해야 한다. 어쨌든 거듭남을 자신에게 허용하는 이들과 더불어, 반대의 것은 지나가는 때가 온다; 그 이유가 합리적 평면이 점차로, 계속적으로 그것들 안에서 열리기 때문, 그리고 거듭남쪽으로 자연 평면의 내면들이 종속되고 자연 평면의 외면 역시 종속된다. 이것은 특히 청년기로부터 성년기에서 거행된다, 그리고 자기 삶의 마지막에 이르기까지에서 발전적으로 지속된다, 그 후에 천국에서 영원까지 이다. 이상 살핀 바로부터 인간 아래 있는 자연 평면의 내면과 외면이 무엇인지를 알았으리라 본다.

이전의 방법에 따라. 이는 질서의 법칙에 일치하여를 의미한다. 이는 “이전 방법”이 질서의 법칙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 이유가 외면의 것들이 내면의 것들에 종속되어야 하는 것이 질서의 법칙이기 때문이다, 또는 더 낮은 것이 더 높은 것에 종속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들을 종으로서 섬기는 것이다; 그 이유가 외면의 것, 또는 더 낮은 것들은 종의 수준밖에 더 아니기 때문, 한편 내면, 또는 더 높은 것은 상대적으로 주인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것이 “이전의 방법에 따라”의 말의 의미인 이유는 종으로서의 술 담당자가 그의 주인으로 바로를 섬겼기 때문이다. 이는 종속됨의 법칙에 일치된다; 고로 술 담당자에 의해 표현된 감각적인 것은 질서의 법칙에 일치하여 바로에 의해 표현된 자연 평면의 내면을 섬긴다.
보다 낮은 것 또는 외면의 것들이 더 높은 것, 또는 내면의 것들을 섬기는 것이 질서의 법칙이다는 것은 감각적 인간에게는 전혀 알려지지 않은 것들이다; 그 이유가 단지 감각적인 자들은 내면이 무엇인지를 모른다, 고로 상대적인 외면의 것도 무엇인지를 모른다. 그가 아는 것은 자기가 생각하고 말하고, 뜻하고 행동하는 것 뿐이다; 그래서 그는 생각하는 것과 뜻하는 것이 내면이다고, 뜻하고 행동하는 것은 외면이다고 상상한다; 그러나 그는 감각만으로부터 생각하는 것, 그리고 욕구만으로부터 행동하는 것이 자연 평면의 외면으로부터만에서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그리고 이것은 특히 그가 거짓들을 생각하고 악들을 뜻할 때 더욱 그러하다; 그리고 이런 인물 안에서 내면의 것들과의 교통은 닫혀 있다, 그러므로 그는 내면의 생각함과 뜻함이 무엇인지 모른다. 만일 그에게 내면의 생각함이 진리로부터 생각하는 것이고, 내면의 뜻함이 선으로부터 행동하는 것이다고 말해주면, 그는 이것을 전혀 납득하지 못한다, 더구나 내면의 인간은 외면의 인간과 구분된다는 것, 그리고 내면의 인간은 더 높은 위치에서 외면의 인간이 되어가는 것을 볼 수 있다는 것, 그리고 내면의 인간은 외면의 인간을 질타하고 단련시키는 능력을 지니고 있어 외면의 인간이 몽상으로부터 보고, 탐욕으로부터 바라는 것을 생각하거나 뜻하지 못하게 할 수 있다는 것을 납득하지 못한다.
이런 것들을 그는 그의 외적 인간이 자신을 지배하고 통치하는 한 보지 못한다; 그러나 그가 이 상태로부터 벗어날 때, 예를 들면 그가 불행이나 병듦 등등으로 야기되는 의기소침(우울) 안에 있게 될 때, 그는 이런 것들을 볼 수 있고 납득할 수 있다, 그 이유는 이때 외적 인간의 지배가 중지되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이해력은 주님에 의해 인간에게 언제나 보존되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거짓들과 악들 안에 있는 이들과 더불어서는 매우 희미한 수준에서 있는데, 거짓들과 악들이 잠들 듯 잠잠해짐에 비례하여 명료해진다. 주님의 신성은 인간과 더불어 계속적으로 흘러들고 당사자를 계발해주나, 거짓들과 악들이 있는 곳 (즉 진리들과 선들에 반대하는 것이 있는 곳)에서는 신성한 빛은 되튀기거나 질식되거나 악용되어지고 마는 바, 마치 갈라진 틈새를 통하여 받아들이는 만큼에서 라도 감각적인 것들로부터 생각하고 말하는 한편, 말함의 형체들로부터 영적인 것들을 생각하고 말하는 것도 마치 갈라진 틈새를 이용하듯 하여 자연적, 또는 육체적 기억에 인상지운다.

당신이 그의 술 담당자 이었을 때. 이는 이 종류의 감각적인 것들과 더불어 여느 때 같이를 의미한다. 이는 “술 담당자”의 의미가 감각적인 것들, 또는 지적 부분에 종속되는 그것들의 부분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것들과 더불어 “여느 때 같이”가 “당신이…이었을 때”에 의해 의미되고 있다. 감각적인 것들이 합리적인 것 아래에 있고 종속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에 대하여는 앞 페이지들에서 여러 차례 언급해온 바이지만, 이 종속됨이 여기서 다시 내적 의미에서 취급되기에, 그것에 관련하여 어떤 경우가 있는지는 아직 더 보여주어야 함이 남아 있는 것 같다.
감각적인 것을 종속시켜 놓고 있는 인간이 합리적 인간이라 불리운다; 그러나 이렇지 않을 경우, 즉 종속되어 있지 않은 인간은 감각적 인간이라 불리운다. 어쨌든 당사자가 합리적 인간인지, 감각적 인간인지는 타인에 의해서는 거의 식별되지 않는다; 그러나 자신 스스로가 자기의 내면들, 즉 의지와 생각을 조사한다면 식별될 수는 있다; 인간이 감각적인지 또는 합리적인지는 그의 말이나 행동으로부터 다른 이들에 의해 알려질 수 없다고 말한 이유는 말 속에 있는 생각의 생명, 또는 행동 속에 있는 의지의 생명은 어떤 육체적 감각들로 나타나지 않기 때문이다. 소리만이 들려지고 제스추어만이 애착과 함께 보여질 뿐, 애착 역시 그런 체 하는지, 진짜로 그런지 여부는 식별되지 않는다; 그러나 다른 삶에서, 이것은 선 안에 있는 이들에 의해서 말이든 행동이든 모두가 똑바로 지각되어진다. 즉 생명의 품질이 무엇인지와 어느 근원으로부터 생명이 파생되는지도 구별된다. 이 세상의 경우, 어떤 표시들로부터 약간이지만 감각적인 것이 합리적인 것에 종속되어 있는지, 또는 합리적인 것이 감각적인 것에 종속되었는지가 추측되기는 한다. 그 표시들은 이렇다. 만일 인간이 거짓의 원리들 안에 있고, 자신이 계발되기를 허용하지 않는다면, 그리고 진리들을 전적으로 거절하고, 추론 없이 완고하게 거짓들을 방어한다면, 이것은 그가 감각적 인간이고 합리적 인간이 아니다는 표시인 바, 합리적 평면은 닫혀져 있고, 천국의 빛을 인정하지 않는다.
더욱 감각적인 인간은 거짓으로 설득해대는 자들이다, 그 이유는 거짓의 설득력은 합리적 평면을 완전히 닫히게 하기 때문이다. 거짓의 원리에 있는 것이 있고, 거짓을 설득함에 있는 것이 있다. 거짓으로 설득해대는 이들은 그들의 자연 평면에 어떤 빛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 빛은 겨울철의 빛과 같다. 다른 삶에서 이 빛은 그들과 함께 눈 같이 희게 나타난다; 그러나 천국의 빛이 그것에 떨어지자 마자 그것은 검게되어진다, 그리고 설득력의 품질과 수준에 따라 밤 같이 어두워진다. 이것은 그들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도 그들과 더불어 분명해 있다, 그 이유가 이때 그들은 진리인 것은 무엇이든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렇다, 그들의 거짓의 영향으로 밤이 되고 희미해진 결과 그들에게 진리들은 무가치한 것으로 있어 진리를 두고 냉소할 뿐이다. 단순한 자에게 이런 인물들은 때로 합리적 인간처럼 나타난다; 그 이유는 겨울의 눈 같이 흰 것을 수단으로 그들은 추론을 통하여 매우 솜씨좋게 거짓들을 확증할 수 있어 거짓들이 진리들로 나타나게 하기 때문이다. 이런 설득력 안에 많은 학식자들이 있고, 그들은 거짓들을 자신들 안에서 삼단 논법이나 철학적인 추론들을 수단으로, 마지막으로는 획득한 지식들을 수단으로 확증한다. 고대인들 사이에 이런 인간들은 지식의 나무에 있는 뱀들이라 불렀다; 그러나 오늘날 그들은 합리적 평면이 없는 내면의 감각적 인간이라 불리워질지 모른다.
인간이 단지 감각적인지, 합리적인지에 대한 제 1 의 표시는 그의 생명으로부터 이다; 이와 같은 것은 그의 말과 그의 일들 안에서 나타나지 않으나 그것 내부에 있다; 그 이유가 말의 생명은 생각으로부터 있고, 일들의 생명은 의지로부터 있고, 이 둘의 생명은 의도 또는 목적으로부터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의도 또는 목적은 말과 일의 내부에 있는 바, 이것이 생명이다; 그 이유가 내면의 생명이 없는 말은 단지 소리일 뿐이고, 내면의 생명이 없는 일들은 단지 움직임 뿐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사후 생명은 남는다”라고 말할 때의 바로 그 생명이다. 만일 인간이 합리적이다면, 그는 잘 생각함으로부터 말하고, 잘 뜻함으로부터 행동한다, 즉 그는 신앙으로부터 이야기를 하고, 선행으로부터 행동한다는 말이다; 만일 인간이 합리적이지 않다면, 그렇다 해도 그때 실로 그는 합리적 인간으로서 행동하기를 , 이야기하기를 시작할는지 모른다; 그러나 여전히 당사지 안에 합리적 평면으로부터의 생명은 아무것도 없다; 그 이유가 악의 생명은 합리적 평면과 교통 또는 길을 가로막고, 당사자로 단지 자연적, 또는 감각적이게 만들기 때문이다.
합리적 평면과의 교통을 닫히게 하거나 합리적 평면이 되어가는 능력을 당사자로부터 박탈하는 두 가지 것들이 있는데, 그것은 속임(사기)과 모독이다. 속임은 내면들을 중독되게 하는 미묘한 독 같다, 그리고 모독은 거짓들을 진리들에, 악들을 선들에 섞는다; 이 둘을 통하여 합리적 평면은 완전히 사멸한다. 모든 인간 안에는 그의 유아 시기로부터 주님께서 저장해두신 선들과 진리들이 있는데, 이것이 말씀에서 “리메인스(remains), 아껴두신 것들, 남은 것들, 그루터기”이라 불리우고 있다; 이 리메인스가 사기침에 의해 중독당하고, 모독함에 의해 섞음질이 된다. 위의 표시들로부터 합리적인 자와 감각적인 자가 누구인지 대충 짐작되었을 줄로 본다.
감각적인 것들이 합리적 평면의 휘하에 들어가 있을 때, 이때 인간의 첫 상상함이 형성되어짐으로 부터의 감각적인 것들은 주님으로부터 천국을 통하여 오는 빛을 수단으로 계발되는 것, 그리고 또한 빛을 받고 상응되기 위하여 질서 안으로 정리정돈되는 것이다. 그것들이 이 상태 안에 있을 때, 감각적인 것들은 그것이 진리들을 인정하고 보여지고 하는 따위의 길에 더 이상 머물러 지체하지 않고, 진리에 일치하지 않는 것은 즉각 내던지고, 일치하는 것은 받아들인다. 이때 일치하는 것들은 마치 중앙에 있는 것 같고, 불일치하는 것들은 주변에 위치하는 것 같다; 중앙에 있는 것들은 마치 천국으로 들려져 있는 것 같고, 주변의 것들은 아래쪽을 향하여 매달려 있는 듯 하다. 중앙에 있는 것들은 합리적 평면을 통하여 빛을 받는다, 그리고 그것들이 다른 삶에서 시야에 표출될 경우, 점진적으로 빛이 감소되면서 주변에까지 빛을 어렴풋이 드리우는 작은 별들 같이 보여진다. 이렇게 있는 것이 합리적 평면의 지배 아래 있는 감각적인 것들이다, 이것은 인간이 거듭나는 동안 거행된다, 그리고 이를 수단으로 거듭나는 자는 자신의 수준에 걸맞는 양의 진리들을 인정하고 보게 된다. 그러나 합리적 평면이 감각적인 것의 휘하에 있을 경우, 반대에 부딛친다; 그 이유가 거짓들이 중간, 또는 중앙에 있고, 진리들이 주변으로 밀려나 있기 때문이다. 중앙에 있는 것들은 어떤 빛 안에 있다, 그러나 그 빛은 얼빠진 빛, 또는 석탄불로부터 오는 빛 같고, 이 안으로는 지옥 사방에서 빛이 흘러든다. 이 빛은 어둠이라 불리우는 빛이다, 그 이유는 천국으로부터의 어떤 빛이 그 안으로 흘러들면, 어둠으로 바뀌기 때문이다.

14, 15절. 그러나 당신이 잘 되어 있을 때 당신과 함께 나를 기억하여 주십시오, 그리고 부디 나에게 자비를 행하여 주십시오. 그리고 나에 관하여 바로에게 진술해 주십시오, 그리고 나를 이 집에서 꺼내어 주십시오, 15 나는 도적에게 유괴되었기에 히브리인들의 토지에서 끌려왔습니다. 여기서도 그들이 나를 구덩이에 처넣어도 될 만한 어떤 짓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당신과 함께 나를 기억해 주십시오. 이는 신앙을 받음을 의미한다. 이는 자신에 관한 이런저런 사항들을 말하는 요셉이 자연 평면에 있는 천적인 것에 관련한 주님을 표현한다로부터; 그리고 “당신과 함께 나를 기억해달라”의 의미가 신앙을 받음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 이유가 주님을 기억함, 또는 주님을 잊지 않는 것은 신앙이라는 방법 외에 다른 근원으로부터의 방법은 없다. 그러므로 “당신과 함께 나를 기억함”은 그가 신앙을 받을는지 모른다를 표시한다. 신앙에 주목해보면 이렇다: 신앙을 받고 신앙을 가지는 자는 주님을 계속적으로 잊지 않는다, 설사 그가 다른 것들을 생각하거나 이야기하는 때조차에서도, 또는 그가 자기의 공직을 수행하든 개인적 일을 하든, 가정 일을 하든, 비록 그가 주님을 기억하고 있는지를 의식하고 있지는 않는다해도 그는 주님을 계속 잊지 않고 있다;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신앙 안에 있는 이들에 의한 주님을 기억함은 실로 그들을 보편적으로 지배하기 때문, 그리고 보편적으로 지배하는 것은 생각함을 그것에 방향을 맞추어 꼬집어 생각하려들지 않는 한, 지각되지는 않기 때문이다.
이것은 인간과 더불은 여러가지 것들에 의해 예증될는지 모른다. 어떤 사랑 안에 있는 자, 그 사랑이 무엇이든, 이 사랑에 속하는 것이 무엇이든 계속적으로 곰곰이 생각하고 있다; 그리고 이 생각함은 설사 그가 다른 것들에 관련하여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함에 관여하고 있는 중에도 계속된다는 말이다. 다른 삶에서 이는 모든 이 각자의 주변의 영적 기운으로부터 매우 분명하다; 그 이유가 이 기운만으로부터도 간단하게 거기 있는 모든 이가 무슨 신앙을 지녔는지, 무슨 사랑 안에 있는지, 설사 상대방이 엉뚱한 것을 말하고 생각하고 있는 때라 해도 알려지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누군가를 보편적으로 지배하는 똑같은 것이 영적 기운도 생산하고, 타인들 앞에서 자기 생명도 나열해주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알는지 모르는 것은, 우리가 주님, 구원, 사후 삶에 관하여 꾸준히 생각하고 있어야만 한다고 말해질 때 뜻해지는 것에 대해서이다. 이를 선행으로부터 신앙 안에 있는 이들은 행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들은 이웃의 틀린 것(ill)을 생각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들은 자기들의 생각, 말, 행동의 모든 것에서 공평과 공정을 가진다; 그 이유가 보편적으로 지배하는 것은 세부 사항들 안으로도 흘러들고, 안내하고 그것들을 통치하기 때문, 그렇게 되는 이유는 주님께서 선행 속에, 그리고 선행에서 파생되는 신앙 속에 있는 이런저런 것들에서 마음을 붙들어주시기 때문, 고로 모든 것이 일치를 이루도록 배열해주시기 때문이다. 선행으로부터 있는 신앙의 기운은 천국을 지배하는 기운이다; 그 이유가 주님은 사랑과 더불어 흘러드시고, 사랑을 통하여 선행과 더불어 흘러드시기 때문, 결과적으로 신앙 속에 있는 진리와 더불어 흘러드시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천국에 있는 모든 이는 주님 안에 있다라고 말해진다.
지금 이어지는 것에서 취급되는 주제는 지적 부분에 종속되는 감각적인 것의 재 출생인데, 이것이 술 담당자에 의해 표현되어져 있다; 그리고 이것의 재 출생이 취급되기 때문에, 신앙을 받음 또한 취급되는 것이다. 그 이유가 감각적 인간도, 합리적 인간 같이 신앙을 수단으로 다시 태어난다, 그러나 선행이 흘러든 신앙을 수단으로 해서 이다. 선행이 신앙 안으로 흘러들어 생명을 주지 않으면, 신앙은 보편적으로 지배할 수가 없다; 그 이유는 그가 사랑하는 것이 그를 지배하기 때문, 그가 기억에서 알고 붙들고 있는 것이 당사자를 지배하지 않는다.

당신이 잘 되어 있을 때. 이는 상응함이 있을 때를 의미한다. 이는 “당신이 잘 되어 감”의 의미가 자연 평면의 외면, 또는 감각적인 것이 재 출생, 또는 거듭남이 취급될 때 상응함도 있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 이유가 상응함이 있을 때까지 그것의 잘 되어 감도 있지 않기 때문이다. 다른 장의 끝에서 상응이 무엇인지는 알았으리라 본다. 감각적인 것과 자연 평면의 것들과의 상응함이 있다; 자연 평면의 것들과 영적 평면의 것과 상응함이 있다; 영적 평면의 것들과 천적 평면의 것과 상응함이 있다; 마지막으로 천적 평면의 것들과 주님의 신성과의 상응함이 있다; 고로 신성으로부터 최말단의 자연 평면까지 내려가며 계속적으로 상응함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전에 상응이라는 것을 결코 생각해보지 않았던 이들이라면 상응의 본성에 관한 관념을 형성해보는데 어려움이 있을지 모르는 바, 여기에 조금 더 설명을 추가해본다. 철학으로부터 널리 알려진 것이 있다: 즉 목적은 원인의 첫째이다는 것, 원인은 결과의 첫째이다는 것이다. 목적, 원인, 결과는 순서적으로 뒤를 잇고, 하나로서 행동하는 바, 없어서는 안될 것은, 결과는 원인에 상응한다는 것, 원인은 목적과 상응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목적이 원인으로, 원인이 결과로는 나타나지 않는다; 그리고 원인이 결과를 생산하기 위하여 원인은 결과가 있는 영역으로부터 관리하는 수단을 자체쪽으로 가져가야만 하고, 이 수단으로 해서 원인은 결과를 생산할는지 모른다. 이 관리하는 수단이 상응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들이 상응하기 때문에, 목적은 원인 안에 있을 수 있고, 원인을 자극하여 움직일 수 있다. 상응함이 없을 경우는 이와 아주 다르다; 그 이유가 이 때의 경우, 목적은 그것이 있어야 할 원인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원인은 결과를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관리하는 수단에 의해 만들어진 형체에 따라 원인 안에서, 결과 안에서 바뀌고 다양해진다.
인간에 있는 일반적 특수적 모든 것들, 자연에 있는 모든 것들 조차에서도 목적, 원인, 결과로서의 서로가 서로를 계승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들이 서로에게 상응하고 있기에 그것들은 하나로서 행동한다; 그 이유가 이때야말로 목적은 원인의 모든 것 안에서 모두이기 때문, 원인을 통하여 결과의 모든 것 안에서 모두가 되어 있는다. 예를 들면, 천국의 사랑이 목적일 경우, 뜻함은 원인이고, 행동함은 결과인 바, 만일 거기에 상응함이 있다면, 천국의 사랑은 의지 안으로 흐르고, 의지는 행동 안으로 흘러들고, 고로 그것들은 상응함을 수단으로 마치 행동함이 사랑인 것처럼 하나로서 행동한다; 또는 선행의 신앙이 목적이고, 생각이 원인, 그리고 말함이 결과일 때, 만일 상응함이 있다면, 선행으로부터의 신앙은 생각 안으로 흐르고, 말함 안으로, 그리고 그것들은 하나로서 행동하는 바, 상응함을 수단으로 말함은 마치 신앙인 것처럼 있다. 어쨌든 사랑과 신앙이라는 목적이 뜻함과 생각이라는 원인을 생산하기 위하여서는 상응될 합리적 마음에 있는 관리하는 수단을 자체쪽에 가져다놓아야 한다; 그 이유가 상응이라는 관리하는 수단 없이 사랑 또는 신앙이라는 목적은 천국을 통하여 주님으로부터 흐르는 것이 제아무리 많아도 받아질 수 없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분명한 바, 인간의 내면들과 외면들, 즉 당사자에 있는 합리적인 것, 자연적인 것, 감각적인 것이 상응함 안으로 놓여 있어야만 신성의 유입을 받아, 결과적으로 그는 다시 태어날는지 모른다; 그리고 다시 태어날 때까지, 그는 잘되어감에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당신이 잘되어 있을 때”에 의해 상응함이 있을 때가 의미되는 것이다.

부디 나에게 자비를 행하여 주십시오. 이는 선행을 받음을 의미한다. 이는 “자비”의 의미가 사랑이다로부터; 여기서는 이웃을 향한 사랑, 또는 선행이다, 그 이유는 신앙을 받음이 앞에서 말해졌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신앙과 선행은 감각적인 것이 재 출생될 때 하나를 만들기 때문이다. “자비”가 선행을 의미하는 이유는 선행 안에 있는 모든 것이 자비 안에 있기 때문, 다른 말로 하면, 이웃을 사랑하는 모두는 사랑받는 당사자에게 자비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선행의 행동들이 자비의 일들을 수단으로 말씀에서 묘사되어져 있다; 마태복음서에서:
내가 굶주렸을 때, 너희는 나에게 먹을 것을 주었다; 내가 목말랐을 때, 너희는 나에게 마실 것을 주었다; 내가 낯선 자이었을 때, 너희는 나를 맞아주었다; 벌거벗었을 때 너희는 나를 입혔다; 내가 아팠을 때, 너희는 나를 찾아 주었다; 내가 감옥에 있었을 때, 너희는 나에게 왔다
(마. 25:35, 36);
그리고 다른 구절에서 가난한 자, 고통받는 자, 과부, 아버지 없는 자에게 혜택을 주는 것도 있다.
선행은 본질적으로 이웃이 잘 되기를 바라는 것, 선에 감동되어지는 것, 선이 이웃이라고 인정하는 것, 결과적으로 각자의 선의 등차에 따라 등차적으로 선 안에 있는 이들을 이웃으로 인정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선행, 선에 감동되는 것이기 때문에 비참함에 있는 이들을 향하여 자비로 감동되는 것이다. 선행의 선은 그것 안쪽에 위의 사항들을 가진다, 그 이유는 이 선은 온 인류를 향한 주님의 사랑으로부터 내려오기 때문이다; 이 사랑이 자비이다; 그 이유는 모든 인류는 비참함 안에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때로는 자비가 그 자체를 악한 자, 선행이 없음 안에 있는 자에게서도 보여지는 경우도 많다; 그 이유는 자기와 더불어 하나를 만드는 자기의 친구들을 향하여 보여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기의 친구들이 문을 열 때, 자신도 문을 연다. 이 자비는 선행의 자비는 아니다, 그러나 자기를 위한 친구 관계의 자비인 것이다; 엄밀히 따지면 무자비인 셈이다; 그는 자기와 하나를 만드는 친구들 외의 다른 이들을 경멸하고 미워하는 쪽으로 치닫고 만다.

그리고 나에 관한 진술을 바로에게 하여 주십시오. 이는 자연 평면의 내면과 교통함을 의미한다. 이는 누군가에게 “진술을 함”의 의미가 교통함을 의미한다로부터; 그리고 바로의 표현함이 자연 평면의 내면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자연 평면의 내면과 교통함”에 의해 상응함을 수단으로 결합함이 뜻해진다. 자연 평면의 내면은 합리적 평면으로부터 있는 진리와 선에 관한 관념들을 받아, 장차 사용을 위해 저장되는 곳이다; 그러나 자연 평면의 외면은 감각들을 통하여 세상으로부터 있는 것들에 관한 형상들과 어떤 것에 관한 생각들을 받는다.
자연 평면의 외면들에 있는 관념들은 자연 평면의 내면에 있는 것들에 의해 계발되지 않으면, 오류들을 표출하는데, 이것이 감각들로부터의 오류라고 불리운다. 인간이 이런 오류들 안에 있을 때, 그는 그 오류들에 동의하지 않는 것들은 믿지 않고, 오류들이 확증하는 것밖에 믿는 것이 없다; 이른 바, 거기에는 상응함이 없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 인간이 선행에 동화되어 있지 않으면, 상응함도 없다; 그 이유가 선행은 수단들을 하나가 되게 하는데, 그 이유는 수단들의 선 안에 주님으로부터의 생명이 있기 때문이다. 이 생명이 진리를 질서 안으로 정렬되게 하여, 선행의 형체, 또는 형상에 있는 선행이 존재 안으로 올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이 형체는 다른 삶에서 가시적으로 나타난다; 이것은 천사의 형체 자체이다. 그러므로 모든 천사들은 선행의 형체들이고, 이 형체로부터의 아름다움은 신앙 속에 있는 진리로부터 이다, 그리고 이 아름다움의 생명은 선행 속에 있는 선으로부터 이다.

그리고 나를 이 집에서 꺼내 주십시오. 이는 악들로부터 구출됨을 의미한다. 이는 “꺼냄(bring out)”의 의미가 구출됨(해방됨, deliverance)이다; 그리고 “집”의 의미가 선이다로부터, 그러므로 반대 의미에서는 악이다. 그러므로 분명한 바, 악들로부터 구출됨이 “나를 이 집으로부터 꺼내달라”의 말에 의해 의미되는 것이다. 이것 역시 앞의 말로부터 뒤이어지는 순서상에 있다. 신앙이 자연 평면의 외면에서 받아졌을 때 (이것이 여기서 취급된다, 5130항을 참조하라), 상응함이 결과되었다, 그리고 선행이 받아졌을 때(5132항), 고로 자연 평면의 내면과의 교통함이 결과되었다(5133항), 이때 자연 평면의 내면이 악들로부터 구출되는데, 그 수단이 소외되어져버린 듯한 요셉에 의해 표현되는(5086, 5087, 5106항) 천적인 것에 의해서이다; 이 소외되어져 있음(멀어진 채로 있음, alienated)이 그가 “도둑에 의해 끌려왔음”에 의해 의미되어지고 있는데, 이는 아래에서 이어진다. 더욱이 선행과 신앙을 수단으로 자연 평면이 거듭나질 때, 악들로부터의 구출됨이 있다; 그 이유가 이때 악들이 분리되고 그 악들이 있던 중심부에서 주변으로, 선으로부터의 진리의 빛이 도달하지 못하는 외곽으로 내던져지기 때문이다. 이 방법으로 인간 안의 악들은 분리되나, 여전히 (외곽으로 밀려났을 뿐) 사실상 당사자와 함께 있는데, 그 이유는 그것들은 완전하게 파괴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님의 경우, 그분도 자신 안에서 자연 평면을 신성으로 만드셨다; 그리고 악들과 거짓들을 깡그리 내던지시고 파괴하셨다 (인간의 경우, 악이 외곽으로 밀려나 당사자와 함께 있으나 주님의 경우는 이런 식은 아니다. 역자주.) 그 이유는 신성은 악들과 거짓들과 공통되는 것이 하나도 없기 때문; 신성은 선 자체, 진리 자체이기 때문, 따라서 이것은 악과 거짓인 것으로부터 무한하게 제거하시기 때문이다.

5135. 나는 도적에게 유괴됨으로 끌려와졌다. 이는 천적 수준의 것들이 악들로 말미암아 멀어졌음을 의미한다. 이는 자신에 관한 이런저런 것을 말하는 요셉의 표현함이 자연 평면에 있는 천적인 것이다로부터 (5086, 5087, 5106항); 그리고 “도적에 의해 유괴됨”이 악으로 말미암아 멀리되어졌음 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 이유가 “훔치는(steal)” 것이 소외되게 하는 것, 그리고 “도적(theft)”은 소외되게 하는 악, 그리고 또한 자연 평면에서 천적 수준의 것을 (자기 것이라고) 요구하는 악이기 때문이다. “도적”은 점유하고 있음으로부터의 주거지에 관련하여서는 멀어짐, 이 주거지로부터 선들과 진리들이 내던져짐, 그리고 그 주거지를 악들과 거짓들로 채워짐을 의미한다; 또한 “도적”은 도적 자체의 속성상 타인에 속한 것을 요구하는 것, 타인의 선들과 진리들을 자신의 선들과 진리들로 만들어버리는 것, 심지어 이 선들과 진리들을 악들과 거짓들에 적용하는 것을 의미한다. 영적 의미에서 “도적”이 무엇인지는 알려져야 할 것 같은 바, 악들과 거짓들이 거처에 들어가서 그곳의 소유물을 취할 때, 악들과 거짓들과 더불은 경우가 어떻게 있는지, 또한 그것들이 거기 있는 선들과 진리들을 요구할 때의 경우가 어떤지에 관해 짚어보고 가야할 것 같다.
유아로부터 어린 시절까지, 때로는 초기 성년기까지, 자기 부모나 선생들로부터의 가르침을 수단으로 인간은 선들과 진리들을 빨아들인다(동화되어진다); 그 이유가 이때 그는 강렬한 욕망(avidity)을 가지고 그것들을 배운다, 그리고 그것들을 단순함 안에서 믿는다. 순진의 상태는 그것들에 호의를 보이고, 그것들을 기억에 적합시킨다; 그러나 이것은 그것들을 문지방에 턱걸이 해놓았을 수준일 뿐이다; 그 이유가 유아의 순진과 어린 시절의 순진은 합리적 평면을 감동되게 하는 내적 순진은 아니고, 자연 평면의 외적 측면만을 감동되게 하는 외적 순진이다. 그러나 인간이 나이가 더 먹어 자신으로부터 생각하기를 시작할 때, 즉 예전 같이 부모나 선생들에 의존하여 생각하는 것이 아닐 때, 이때 그는 과거 배우고 믿었던 것을 다시 추켜들고 되새김질을 하여, 그것들을 확증하든, 의구심을 품든, 부정하든 한다. 만일 그가 그것들을 확증한다면, 그가 선 안에 있다는 표시이다; 만일 그가 그것들을 부정한다면, 그가 악 안에 있다는 표시이다; 만일 그가 의구심을 품었다면, 세월이 지나면서 그는 긍정이든, 부정이든 어느 쪽에 동의할 것이다는 표시이다.
인간이 어린 아이인 첫 시기에 열심을 내어 배우고, 또는 믿은 것들, 그리고 그 후에 그가 확증하거나 의심하든, 또는 부정하든 하는 것은 특히 이러하다: 하느님이 계시다는 것, 그리고 그분이 한 분이시다는 것; 그분이 만물을 창조하셨다는 것; 그분은 선을 행하는 이에게는 보상을, 악을 행하는 이에게는 처벌하신다; 사후 삶이 있다는 것, 이 삶에서 악한 자는 지옥으로, 선한 자는 천국으로 간다는 것, 고로 천국과 지옥이 있다는 것, 그리고 사후의 삶은 영원하다는 것; 또한 우리는 매일 기도해야 한다는 것, 그리고 이 기도는 겸손을 가지고 해야 한다는 것; 안식일은 거룩히 준수해야 한다는 것; 부모들을 존경해야 한다는 것; 그리고 누구도 간통, 살인, 도적질을 범해서는 안된다는 것 등등이 있다. 이런 사항들을 인간은 초기 어린 시절과 더불어 받아들이고 동화되어진다; 그러나 그가 자신으로부터 생각하기를 시작하고, 자신을 인도하기를 시작하면서 그가 자신 안에 있는 위의 사항들에 관하여 확증한다면, 그리고 그것들에 그것의 내면적인 것을 보탠다면, 그리고 그것들에 따라 생활한다면, 이때 그는 잘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만일 그가 이런 사항들을 어기기를 시작하면, 결국 부정하기까지 하면, 시민법상에서나 사회 측면 상에서는 무난하다 해도 그는 그것들에 따라 사는 것이 외적 측면에서 일 뿐일는지 모르고, 이때 그는 악 안에 있다.
이 악이 “도적”에 의해 의미되는데, 단지 예전에 선이 있어왔던 거처로부터 점유물을 취득하는 만큼에서의 도둑질에 한하여, 또는 전부터 있어왔던 선들과 진리들을 가져가버리는 만큼에서, 그리고 그 거처에 악들과 거짓들을 적용하는 만큼에서의 도적이다. 이때 주님께서는 이 거처로부터 초기 어린 시절로부터의 선들과 진리들을 옮기시는데, 그것들을 내면들을 향하여 철수시켜서 장차 사용을 위해 그것들을 자연 평면의 내면에 저장해두신다. 자연 평면의 내면에 저장된 선들과 진리들이 말씀에서 “리메인스”에 의해 의미되고 있다. 그러나 만일 악이 거기 있는 선들과 진리들을 훔친다면, 그리고 훔친 그것들을 가지고 악들과 거짓들을 확증하는데 응용한다면, 특히 이 짓을 사기침으로부터 행한다면, 이때 이 레메인스는 소진되어진다; 그 이유가 이때 악이 선들과 진리들이 거짓들과 혼합되는데, 이것들이 분리 못할 정도까지 섞이기 때문이다; 이러면 인간과 더불어 끝장이다.
이와 같은 것이 “도적”에 의해 의미되는 것은 영적 삶의 것들에 “도적”이란 단어를 단지 적용만 해도 알는지 모른다. 영적 삶에서의 재물은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 외에 다른 것은 없다, 그리고 선들과 선의 진리들로부터 발생하는 삶의 더 없는 행복 외에 다른 소유물이나 상속물은 없다. 앞서 말했듯, 이런 것들을 훔치는 것이 영적 의미에서 “도적”이다; 그러므로 말씀에서 영적 “도적”에 의해서도 이외 다른 의미는 없다.
스가랴서에서:
나는 나의 눈을 들어올렸다, 날고 있는 두루마리가 바라보였다. 이때 그가 나에게 말했다, 이것은 온 땅의 얼굴들 위에 가고 있는 저주이다; 그 이유가 거기로부터 훔치는 모든 이가 척결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맹세하는 모든 이도 척결될 것이다. 나는 그것을 내던지기 위하여 도적의 집 안으로, 거짓말을 위해 내 이름을 수단으로 맹세한 자의 집 안으로도 들어 갈 것이다; 그리고 이 집에서 밤을 보낼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다 태워버리되 거기로부터의 나무로된 것과 돌로 된 것들이다 (슥. 5:1, 3, 4);
선 측면의 리메인스를 가져가버리는 악이 “훔치는” 자와 “도적의 집”에 의해; 그리고 진리 측면의 리메인스를 가져가는 거짓이 “맹세하는 자”와 “거짓말을 위해 맹세하는 자의 집”에 의해 의미되어 있다; “온 땅의 얼굴들”은 보편적 측면에서의 교회를 표시한다; 그러므로 “저주가 집과 거기로부터의 나무와 돌을 사를 것이다”라고 말해진다. “집”은 자연적 마음, 또는 이 마음에 관련한 인간이다; “나무(wood)”는 거기 안에 있는 선들을; “돌들”은 진리들이다.
모독함, 그러므로 해서 선과 진리를 가져가버림이 아간의 행위, 즉 그는 고발되어 말살되어야 하는 것들로부터의 것들인 시날의 외투, 은 이백 세겔, 금쐐기를 가져가서, 그것들을 자기 천막의 한가운데 땅 아래에 숨겼다, 하여 그는 돌로 처죽임을 당했다, 그리고 모든 것들은 불태워졌다;
여호수아서에서: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말하셨다, 이스라엘은 죄를 지었다, 그들은 내가 그들에게 명령한 나의 언약을 위반했다; 그리고 그들은 고발된 것들을 가져갔다, 그리고 훔쳤고, 거짓말을 했고, 자기 집기 사이에 그것을 두었다 (여. 7:10, 11, 21, 25);
“고발된 것들”은 거짓들과 악들을 뜻했다. 이것들은 거룩한 것과 결단코 혼합될 수 없다; “시날의 외투, 은 세겔, 금쐐기”는 영적 의미에서 거짓에 속하는 부류(spicy)들이다; “그것들을 천막의 한 가운데 땅 아래에 숨김”은 거룩한 것들과 혼합됨을 의미했다. 이런 것들이 이스라엘이 “훔치고, 거짓말을 하고, 그것을 자기들의 집기들 사이에 놓음”에 의해 의미되어 있다; 그 이유가 “집기들”이 거룩한 진리들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예레미야서에서:
내가 그를 방문하는 때, 나는 그 위에 에서(Esau)의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만일 포도 수확자가 그에게 온다면, 그들이 약간의 포도 이삭을 남아 있게 하지 않을 것이냐? 만일 도둑들이 밤에 온다면, 그들이 싹쓸어 파괴하지 않을 것이냐? 나는 에서를 발가벗길 것이다, 나는 그의 비밀한 것들을 드러내게 할 것이다, 그리고 그는 감출 수 없을 것이다, 그의 씨는 황폐해질 것이다, 그리고 그의 형제들, 그리고 그의 이웃들도, 그리고 그는 있지 않다 (예. 49:8-10);
위에서 “에서”는 거짓들이 인접되는 쪽에 있는 자아 사랑의 악을 표시한다. 이 악이 남아 있는 선과 진리를 다 소진해버림이 “싹쓸어 파괴하는 밤중의 도둑”에 의해; 그리고 “그의 씨, 그의 형제들, 그리고 그의 이웃들이 황폐해지고 그는 있지 않다”에 의해 의미되고 있다. “씨”는 선행으로부터 신앙 속에 있는 진리들을 표시한다; “형제들”은 선행 속에 있는 선들을 표시한다; “이웃들”은 당사자에게 속하는 관련되고 인접된 선들과 진리들을 표시한다.
에서에 관해 말해지는 위와 비슷한 대목이 오바디야서에 있다:
만일 도둑들이 네게 온다면, 만일 뒤엎는 자가 밤중에 온다면, 가져갈대로 몽땅 털어가지 않겠느냐? 만일 포도 수확자가 네게 온다면, 그들이 어떤 송이들을 남겨놓을 것이 있을 것 같으냐? (5절);
“포도 수확자”는 악으로부터 있지 않은 거짓들을 표시한다; 이 거짓들에 의해서는 리메인스인 것, 즉 주님에 의해 자연 평면의 내면에 저장된 선들과 진리들이 다 소진되지 않으나, 악으로부터의 거짓들에 의해서 일 경우, 그것들은 진리들과 선들을 훔칠 뿐 아니라 훔쳐간 선들과 진리들을 가지고 악들과 거짓들을 확증하는데 응용한다.
요엘서에서:
많은 백성과 용사, 그들은 영웅들 같이 달릴 것이다; 그들은 전쟁의 용사 같이 성벽을 기어오를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그의 길들에서 모든 이를 행군시킬 것이다; 그들은 도성 안을 이리저리 달릴 것이다; 그들은 성벽을 달릴 것이다; 그들은 집 안으로 기어오를 것이다; 그들은 도둑 같이 창문들을 통하여 들어갈 것이다 (욜. 2:2, 7, 9);
“많은 백성과 용사”는 진리들에 맞서 싸우는 거짓들을 표시한다; 그리고 그들이 진리들을 파괴함에 무척 강력한 바, 그들은 “영웅들과 용사들 같이”라고 말해진다; 그들이 “이리저리 달린다”고 말해지는 “도성”은 진리의 교리물들을 표시한다; “그들이 기어오를 집”은 그들이 파괴하는 선들을 표시한다; “그들이 통과하는 창문들”은 지적인 것들과 이에서 파생되는 추론들을 표시한다; 그러므로 그들은 “도둑”에 비교되는데, 그 이유는 그들이 이전에 진리들과 선들이 점유한 거처의 점유물들을 가져가버리기 때문이다.
다윗서에서:
너는 규율을 미워하고 내 말들을 네 뒤쪽으로 내던진다; 만일 네가 도둑을 본다면 너는 그와 함께 달릴 것이다, 그리고 네 몫은 간통자들과 함께 이다. 너는 악을 위해 네 입을 연다, 그리고 네 혀를 가지고 너는 사기침을 엮는다 (시. 50:17-19);
위는 사악한 인물을 두고 말해지는데, “도둑과 더불어 달린다”란 거짓을 수단으로 자신으로부터 진리를 멀어지게 하는 것을 표시한다.
계시록서에서:
그들은 자기들의 살인과 마술과 매춘과 도적질을 회개하지 않았다 (계. 9:21);
“살인”은 선들을 파괴하는 악들을 표시한다; “마술”은 진리들을 파괴하는 악들로부터의 거짓들을; “매춘”은 진리들을 거짓화해버리는 것을; “도적질”은 이렇게 하여 멀어져버린 선들을 표시한다.
요한복음서에서:
참으로, 참으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양우리 안으로 문을 통하여 들어오지 않는 자, 그러나 어떤 다른 길을 기어오르는 자, 그는 도둑이고 강도이다. 그러나 문을 통하여 들어가는 자는 양의 목자이다. 나는 문이다; 나를 통하여 만일 누군가가 안으로 들어간다면, 그는 구원될 것이다, 그리고 들어가고 나갈 것이다, 그리고 풀밭을 발견할 것이다. 도둑은 오는 것은 훔치고, 살인하고 파괴하기 위하여서 일 뿐이다 (요. 10:1, 2, 9, 10);
위 구절에서 다시 “도둑”은 공적(merit)으로부터의 악을 표시한다; 그 이유가 주님의 것을 그분으로부터 가져가버리는 자, 그리고 그것이 자신으로부터의 것이라고 주장하는 자가 도둑이라 불리운다. 이 악이 길을 닫히게 하고 주님으로부터 선과 진리들이 흘러드는 것을 방해하는 바, 이것이 “살인하고 파괴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마찬가지가 십계명에 있다:
너희는 훔치지 말라 (신. 5:19; 4174항).
위 모두를 참작하면, 유태 교회에서 도둑질에 관련하여 제정된 법들에 의해 의미된 것도 분명해질 것이다 (출. 21:16; 22:1-4; 신. 24:7), 그 이유가 이 교회 안에 있는 모든 법들이 영적 세계에서 근원되기 때문, 그것들은 천국 안에 있는 질서의 법들과 상응하기 때문이다.

히브리인들의 토지로부터. 이는 교회로부터를, 즉 천적인 것들이 악을 통하여 교회로부터 멀어져버렸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히브리인들의 토지”가 교회를 의미한다로부터 알게 된다. 여기서의 “히브리인들의 토지”는 가나안의 토지이다; 그 이유가 요셉이 거기로부터 끌려왔기 때문이다. 말씀에서 가나안의 토지가 교회를 의미하게 된 이유는 교회가 거기에서 태고적부터 있어왔기 때문이다; 처음인, 홍수 이전에는 태고 교회가; 홍수 이후는 고대 교회가; 그 다음 히브리 교회라 불리운 두 번째 고대 교회가; 그리고 마지막으로 유태 교회라고 불리운 교회가 있었다. 그리고 유태 교회가 거기에 설립되기 위하여, 아브람이 시리아를 떠나 그쪽으로 가도록 명령되어졌다, 그리고 그에게 이 토지가 상속분으로 그의 후손에게 주어지리라고 약속되어졌다. 이런 이유로 말씀에서 “토지(land)” 또는 “땅(earth)”이 교회를 의미한다, 그리고 “온 땅(whole earth)”이라는 말 역시 때때로 등장하는데, 이는 보편적 측면에서의 교회를 의미한다; 또한 “새 하늘과 새 땅”은 새로운 교회의 내적 측면과 외적 측면을 의미한다. 거기서 교회가 태고적부터 계속 이어져 왔던 이유는 태고 교회인, 즉 천적 수준이었던 그들은 세상에 있는 모든 것, 땅 위에 있는 모두 각각의 것 안에서 주님의 왕국을 표현하는 것들을 보았던 특수함 때문이다; 다시 말해 그들은 세상과 땅으로부터의 대상물들은 천국의 것들에 관하여 생각하는 수단으로 자기들에게 있었다는 말이다. 이것이 태고 교회 이후 고대 교회에 알려지게 된 모든 표현(representative)들과 의미(significative)들의 근원이 되었다. 그 이유는 “에녹(Enoch)”에 의해 뜻해진 자들에 의해 이 표현과 의미들이 수집되었고, 후손의 사용을 위해 보존되었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가나안의 토지 안에 있는 모든 장소, 산과 강 등등, 태고인들이 거주했던 곳, 마찬가지로 주변의 모든 왕국들까지도 표현물이 되었다; 게다가 말씀이 쓰여지기 위하여는 표현과 의미가 필수적인 바, 이 목적을 위하여 교회는 가나안의 토지에서 계속적으로 보존된 것이다; 그러나 주님께서 오신 이후, 그 밖의 장소로 이동되었다, 그 이유는 표현들이 그때 폐지되었기 때문이다.
앞의 서술로부터 분명한 것은, 여기서 “히브리인들의 토지”라고 불리운 가나안의 토지에 의해 교회가 의미되었다는 점이다; 이를 염두해서 지금까지 서술해왔던 대목들을 정리하면 이렇다: 홍수 이전 태고 교회가 가나안의 토지에 있었다; 홍수 이후 고대 교회의 일부가 거기에 있었다; 또한 히브리 교회라고 불리운 두 번째 고대 교회가 거기 있었다; (교회를 계속 존재하도록 하시려는) 똑같은 이유를 위하여 아브람이 거기로 가도록 명령되었다, 그리고 그 토지가 그의 후손에게 주어졌다는 것; 이로부터 가나안의 토지는 주님의 왕국을 표현했다는 것; 그리고 이런 이유로 해서 말씀에서 “땅” 또는 “토지”가 교회를 의미했다는 것이다.

여기서도 나는…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 이는 순진을 의미한다. 이는 설명이 필요 없는데, 어떤 악도 행동하지 않는 것도 순진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나를 구덩이에 처넣어도 될 만한… 이는 거짓들 사이에서 거절됨을 의미한다. 이는 “구덩이”의 의미가 거짓이다로부터 분명해진다. 위에서 악이 취급되었다; 즉 천적인 것들이 악으로 말미암아 멀어져버린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거짓이 취급된다, 그 이유는 말씀에서 이쪽 측면이 언급될 경우, 다른 측면 역시 언급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 즉 악이 언급되는 곳에서 거짓 또한 언급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또는 선이 취급되는 곳에서는 진리 또한 다루어진다, 그 이유는 말씀의 모든 곳 안에 결혼이 있게 하시려 해서 일런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천국의 결혼은 선과 진리의 결혼이고, 지옥의 결혼은 악과 거짓의 결혼이기 때문; 악이 있으면, 거짓이 있는데, 이는 남편이 있으면 아내 역시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것과 같다. 또는 선이 있으면 진리가 있다고 추정되는데, 진리는 남편과 아내 같이 선과 결합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신앙의 품질은 생활로부터 알려질는지 모른다; 그 이유는 선이 생활로부터 있기 때문이고, 진리는 신앙으로부터 있기 때문이다; 악과 거짓의 경우도 이치는 같다.

16-19절. 그리고 빵 담당자들의 제 1 인 자는 그가 좋게 해석한 것을 보았다, 그리고 그가 요셉에게 말했다, 나 역시 내 꿈 안에 있었다, 그리고 보라 내 머리 위에 구멍들을 가진 세 바구니가 있었다. 17 그리고 가장 위쪽 바구니에 빵 굽는 자가 작업한 바로를 위한 모든 식품이 있었다. 그리고 새가 내 머리 위에로부터 바구니의 안으로부터 그것들을 먹었다. 18 그리고 요셉은 대답하여 말했다, 이것이 그 꿈의 해석입니다. 세 바구니는 사흘입니다. 19 지금부터 사흘 안에 바로는 당신 위로부터 당신의 머리를 떼어 들어 올릴 것입니다, 그리고 나무에 당신을 매달 것입니다. 그리고 새들이 당신 위에서 당신의 살을 먹을 것입니다.

그리고 빵 담당자들의 제 1 인 자가…보았다. 이는 의지 부분에 종속된 감각 부분이 지각함을 의미한다. 이는 “보다”의 의미가 이해하고 지각하는 것이다로부터; 그리고 “빵 담당자들의 제 1 인 자”의 의미가 의지에 종속된 감각 부분이다로부터, 고로 이 분분의 감각적인 것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가 좋게 해석했다는 것… 이는 발생할 것을 의미한다. 이는 “해석하다”의 의미가 그것 안에 가진 것이다, 또는 거기 안에 있는 것이다; 고로 또한 발생할 것도 의미한다로부터 알게 된다. 좋은 것이 발생되라는 것이 감각부분이 지각함으로부터 인데, 사실 감각의 지각은 상대적으로 매우 불분명하다. 실제적으로 지각은 세 근원으로부터, 감각 (자체), 즉 자연 평면의 외면으로부터, 그리고 내면으로부터, 그리고 합리적 평면으로부터 존재한다; 그 이유가 인간이 애착으로부터 내면의 생각 안에 있을 때, 그의 마음은 감각적인 것들로부터, 그리고 육체로부터 물러가 있는다, 그리하여 그는 합리적 지각 안에 있는다; 그 이유가 그때 아래 있는 것들, 또는 외적 인간에 속하는 것들이 잠잠해 있기 때문, 그리고 인간은 영 안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이 외면의 생각 안에 있을 때, 이는 세상에 존재하는 원인으로부터 이고, 이때 그의 지각은 자연 평면의 내면으로부터 이다, 그러나 애착으로부터 어떤 생명과 더불어서는 아니다. 그러나 인간이 (육체적) 쾌락 안에, 그리고 세상 사랑과 자아 사랑으로부터의 즐거움들 안에 있을 때, 그는 감각으로부터 있다; 그 이유가 이때의 그의 생명은 외적인 것들 안에, 또는 육체 안에 있기 때문, 그리고 내적인 것들은 단지 자신을 불명예스러워지게, 격에 맞지 않게 터져나오려드는 자신의 불같은 성미를 추스르는데 이용하는 정도에서만 인정하기 때문이다. 어쨌든 지각이 외적 측면으로 더 있을수록 더 불분명한 지각이 될 수밖에 없는데, 그 이유는 외면의 것들은 상대적으로 일반적 측면에 해당되기 때문, 일반적 측면은 무수하다 말할 수 있는 내면의 것들이 외면에서 하나로 나타난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가 요셉에게 말했다. 이는 자연 평면에 있는 천적인 것이 지각함을 의미한다. 이는 “말하다”가 말씀의 역사적 부분에서 지각함을 의미한다로부터; 그리고 요셉의 표현함이 자연 평면에 있는 천적인 것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나 역시 꿈 안에 있었다. 이는 예보를 의미한다. 이는 “꿈”의 의미가 사건에 관한 예보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리고 보라 세 바구니들… 이는 연속되는 의지로부터의 것들을 의미한다. 이는 “3”의 의미가 완성인 것, 그리고 마지막까지조차에 이르도록 계속되는 것, 고로 연속인 것이다로부터; 그리고 “바구니들”의 의미가 의지로부터의 것들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바구니들”이 의지로부터의 것들인 이유는 그것들이 식품을 붙드는(담는) 그릇이기 때문, 또한 식품(food)은 영적이고 천적인 선들이고, 선들은 의지로부터 있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모든 선은 의지에, 모든 진리는 이해함에 속하기 때문이다. 어떤 것이 의지로부터 출시되자 마자, 그것이 좋은 것으로서 지각되어졌다. 앞의 구절들에서 지적 부분에 종속되는 감각이 취급되었고, 이 감각이 술 담당자에 의해 표현되었다; 지금 취급되는 것은 의지 부분에 종속되는 감각인데, 이것이 빵 담당자에 의해 표현되고 있다.
지적인 것들에서 계속적인 것이 포도나무, 그리고 세 어린 가지들, 꽃이 핌, 송이들, 포도들에 의해; 마지막으로 지적 부분 속에 있는 진리가 잔에 의해 표현되어졌다; 의지로부터 있는 것들의 연속적인 것들은 머리에 있는 세 바구니들, 이 바구니의 가장 위쪽에 바로를 위한 모든 식품이 있고, 이는 빵 담당자의 일로 표현되어지고 있다. 의지로부터 있는 것들의 연속적인 것에 의해서는 인간의 가장 안쪽으로부터 감각들이 있는 그의 가장 바깥쪽까지의 연속적인 것이 뜻해진다; 그 이유가 사다리의 경우 같이 단계들, 또는 등차들이 있기 때문, 이것이 가장 안쪽들로부터 가장 바깥쪽들까지에 해당된다. 가장 안쪽 안으로 주님으로부터의 선이 흐른다, 그리고 이것은 합리적 평면을 통하여 자연 평면의 내면 안으로 흐른다, 그리고 거기로부터 자연 평면의 외면 안으로, 즉 감각 안으로 흐르는 바, 이것은 사다리의 각 층계들 같이 구분되나 계속적이다; 그리고 각 등차에서 받음에 따라 품질이 결정된다. 이에 대한 본성과 그것의 계속됨은 이어지는 페이지들에서 보여질 것이다.
“바구니들”은 선들이 담긴 만큼에서 의지로부터의 것들을 의미한다. 이를 말씀의 다른 구절에서 살펴보자:
여호와께서 나에게 보이셨다, 여호와의 성전 앞에 무화과 두 바구니가 바라보였다; 한 바구니 안에 극히 좋은 무화과들, 첫 익은 무화과들 같았다; 그러나 다른 바구니에는 극히 나쁜 무화과들이 있었는데, 이것은 너무 나빠 먹지 못할 정도였다 (예. 24:1, 2);
위에서 “바구니”는 원어에서는 다른 단어에 의해 표현되어졌는데, 이것은 자연 평면에 있는 의지 부분을 의미한다; 한 바구니에 있는 “무화과들”은 자연적 수준의 선들, 다른 바구니의 무화과들은 자연적 수준의 악들이다.
모세의 책에서:
너희가 여호와 너희 하느님께서 너희에게 줄 토지 안으로 올 때, 너희는 토지의 모든 열매의 첫 익은 것을 가져올 것이다, 이것을 너희는 너희 토지로부터 가져올 것이다, 그리고 너는 그것을 바구니 안에 놓을 것이다, 그리고 여호와께서 선택한 장소 안으로 갈 것이다. 그 다음 성직자는 너희 손으로부터 바구니를 가져갈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여호와 너희 하느님의 제단 앞에 놓을 것이다 (신. 26:1, 2, 4);
위에서 “바구니”는 지적 부분에 있는 새로운 의지 부분을 의미하는 또 다른 단어에 의해 표현되어졌다; “땅의 열매의 첫 익은 것”은 거기로부터 파생된 선들이다.
모세의 책에서:
아론과 그의 아들들을 성별하기 위하여, 모세는 누룩 없는 빵을, 그리고 기름을 섞은 누룩 없는 과자들을, 그리고 기름을 부은 누룩 없는 웨이퍼(wafer)들을 가져왔다; 고운 밀가루로부터 너희는 그것들을 만들 것이다. 그리고 너희는 그것들을 한 바구니 위에 놓을 것이다, 그리고 바구니 안에서 가까이 가져올 것이다. 아론과 그의 아들들이 숫양의 고기와 바구니에 있는 빵을 만남의 천막 문에서 먹을 것이다 (출. 29:2, 3, 32).
위에서 “바구니”는 이 장에서와 같은 단어로 표현되어져 있는데, 이는 의지 부분을 의미하고, 이 안에 “빵,” “과자,” “기름,” “웨이퍼,” “밀가루,”, 그리고 “밀”에 의해 의미된 선들이 있다; 의지 부분에 의해 그릇이 뜻해진다; 그 이유가 주님으로부터의 선들이 인간의 내면의 형체들 안으로 흐르기 때문, 그리고 이 형체들이 그릇이고, 만일 받기를 원한다면, 이런저런 선들이 함유된 “바구니들”이 된다.
다시:
나지르인으로 취임될 때, 그는 고운 밀가루의 누룩 없는 것, 기름을 섞은 과자를, 그리고 기름을 부은 누룩 없는 웨이퍼들, 그것들의 식사 제물과 더불어, 그리고 그것의 음료 제물과 더불어 가져오는 것이다; 또한 숫양을 그는 여호와께 평화 예물의 제물로 만들 것이다, 이 외에 누룩 없는 것들의 바구니이다; 그리고 성직자는 숫양의 삶은 어깨를, 그리고 바구니로부터 누룩 없는 과자 하나를, 그리고 누룩 없는 웨이퍼 하나를 가져간다, 그리고 그것들을 나지르인의 손 위에 놓을 것이다, 그리고 성직자는 그것들을 여호와 앞에서 흔듦과 더불어 흔들 것이다
(민. 6:15, 17, 19, 20);
위에서도 역시 “바구니”는 담는 그릇으로서의 의지 부분을 표시한다; “과자들”, “기름”, “식사 제물”, “삶은 숫양의 어깨”는 표현되어져 있는 천적 선들이다; 그 이유는 나지르인이 천적 인간을 표현했기 때문이다.
이때 당시 예배에서 사용된 이런저런 것들은 바구니들에서 운반되었다; 예를 들면, 기드온에 의한 염소 새끼가 있는데, 이것을 그는 상수리나무 아래 천사에게 가져왔다 (사. 6:19); 그리고 이런 이유로 바구니들은 담는 그릇들을 표현했고, 바구니들 안의 것들은 내용들을 표현했다.

** 창. 40:16절에 대하여 공동 번역은 “흰 과자를 담은 바구니 셋”; 개역 한글은 “흰떡 세 광주리”; 표준 새 번역은 “빵이 담긴 바구니 세 개”; 개역개정은 “흰 떡 세 광주리”; 본서 저자는 “구멍들을 가진 세 바구니, three baskets with holes in them”; 1611년 킹제임스역은 “three white baskets”, 그리고 참고난에 “full of holes”이라고 첨가해놓고 있다. 보스톤의 어느 신학교의 졸업 논문에서 이 번역문에 대한 시비로 졸업장을 받지 못하고 신학교 문턱을 건넌 사람도 보았다. 아마 그 교수는 킹제임스의 참고난을 첨가하면 완전 오역으로, 하여 가증한 번역으로 판단해서인 듯하다. 역자주.

내 머리 위에서 (그것들 안에) 구멍들을 가진… 이는 중간 어느 곳에도 종결됨이 없다를 의미한다. (세 바구니 모두를 관통하는 구멍들을 가졌다 라고 연상된다 역자주.) 이는 “그것들 안에 구멍들을 가지다”의 의미가 가장 높은데로부터 가장 낮은데까지 열려있다, 고로 닫혀있지 않다; 고로 중간 어느 곳에도 종결됨(termination)이 없다 이다로부터; 그리고 “머리”의 의미가 내면들, 특히 의지로부터의 내면들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 이유가 머리 안에 시작에서 있는 모든 본질과 형체들이 있기 때문, 그러므로 모든 감각들이 그쪽을 향하고 있고, 거기서 자신들을 표출한다, 그리고 모든 행동들이 그것으로부터 내려오고, 그들의 근원을 가져온다. 분명한 또 하나는, 마음의 능력들, 즉 의지력과 이해력이 거기에 있다; 그러므로 “머리”에 의해 내면들이 의미된다. 이 바구니들은 머리 안에 있는 것들을 표현했다.
의지 부분에 종속된 감각적인 것들이 지금 취급되고, “그것들 안에 구멍들을 가진 바구니들”에 의해 내면들은 중간 어느 곳에 종결됨이 없이 있다가 의미된다. 이런 이유로 이 감각적인 것들은 거절되고 저주되었다. 아래에서 더 살핀다. 즉 중간 어느 곳에 종결됨이 없이 있음에 의해 뜻해진 것을 서술해보는 것이 급할 것 같다. 인간의 내면들은 등차적으로 구별되어진다, 그리고 각 등차에서 내면들이 종결되어진다, 그리고 종결됨을 수단으로 다음 아래의 등차와 구별된다; 고로 가장 안쪽으로부터 가장 바깥쪽까지 이다. 합리적 평면의 내면이 첫 등차를 구성한다; 이 안에 천적 수준의 천사들이 있고, 이 안은 가장 안쪽, 또는 셋째 천국이다. 합리적 평면의 외면이 두 번째 등차를 만든다; 이 안에 영적 수준의 천사들이 있다, 이 안에 중간, 또는 두 번째 천국이 있다. 자연 평면의 내면이 세 번째 등차를 만든다; 이 안에 선한 영들이 있다, 또는 최말단 또는 첫 번째 천국이 있다. 자연 평면의 외면, 또는 감각들이 네 번째 등차를 만든다; 이 안에 인간이 있다. 인간 안에서 이 등차들은 최고로 뚜렷이 구분되고 있다.
그러므로 만일 그가 선 안에 살고 있다면, 그는 자기의 내면들 측면에 관련하여서는 지극히 작은 형체에서의 천국이다, 또는 그의 내면들이 세 천국들에 상응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가 선행과 사랑의 삶을 살았었다면, 그는 사후 셋째 천국으로까지 운반되어질 수도 있다. 어쨌든 이런저런 특성 중의 어떤 특성 속에 있을 것일지에 대한 선결 조건은 당사자 안에 있는 모든 등차들이 잘 종결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 종결을 수단으로 각 등차는 서로로부터 구분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들이 종결될 때, 또는 종결됨을 수단으로 서로로부터 구분이 만들어져, 이때 각 등차는 주님으로부터 흘러드는 선이 안주하는 평면이 된다, 즉 이 평면이 선을 받는 것이다. 평면으로서의 역할을 하는 이 등차들 없이 선은 받아지지 않는다, 받아지지 않는 바, 오히려 구멍이 난 바구니를 통과하듯 아래쪽 감각으로 흘러내려 가고, 이때 어떤 방향도 없는 바, 이것은 선 같이 감각 안에 나타나는 것들쪽으로 흘러 더러움으로, 즉 자아 사랑과 세상 사랑의 기쁨으로, 결과적으로 증오, 복수, 잔인함, 간통, 탐욕, 또는 단지 육욕에 빠짐, 사치적인 것만에 몰두함 같은 것으로 변하여진다. 이런 경우는 인간의 의지로부터의 것들이 중간에 어떤 종결점이 없을 때, 또는 만일 “그것들 안에 구멍들을 가지고” 있을 때 발생된다.
이 종결점들, 결과적으로 평면들이 있는지의 여부를 아는 것은 완전히 가능하다; 그 이유가 선과 진리에 관한 지각들, 그의 양심으로부터의 지각들이 이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천적 수준의 천사들 같이 선과 진리의 지각들을 가진 이들과 더불어 종결점들은 처음으로부터 마지막까지에서 있다; 그 이유가 모든 등차들의 종결점들 없이 이런 지각함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영적 수준의 천사들 같이 양심을 가지는 이들과 더불어서도 역시 종결점들이 있다, 그러나 두 번째 등차로부터, 또는 셋째로부터 마지막까지에서 있고 첫 등차는 이 천사들에게 닫혀 있다. 여기서 “두 번째 등차”, 또는 “셋째”로부터 라고 말해지는데, 그 이유는 양심이 두 겹, 즉 내면과 외면이 있기 때문이다; 내면의 양심은 영적 선과 진리에 속한 것이고, 외면의 양심은 공정과 공평인 것에 관한 것이다. 양심 자체는 신성한 선의 유입이 종결되는 내면의 평면이다. 그러나 양심을 가지지 않은 이들은 이 유입을 받을 어떤 내면의 평면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리고 이 인물들과 더불어 선은 아래쪽을 통과하여 자연 평면의 외면으로, 또는 자연 자체인 감각(육체 감각 자체)으로 흐르는 바, 이때 이 선은 더러운 즐거움들로 변해진다. 때로 이 인물들은 양심 측면에서 고통을 느끼는 듯 보여진다, 그러나 그것은 양심이 아니다; 이것은 그들의 즐거움을 상실함, 즉 세상 명예가 실추됨, 세상 사업이 망함, 건강을 잃음, 자신 같은 부류의 친구들과의 우정이 깨짐 등등으로 야기되는 고통일 뿐이다. 이상 살핀 바로 구멍을 가진 바구니들에 의해 영적 의미에서 의미된 것이 분명해졌으리라 본다.
특히 다른 삶에서 인간의 의지로부터의 것들이 종결점을 가지고 있는지 가지고 있지 않은지 식별된다. 종결점들을 가진 이들과 더불어서 영적 선과 진리를 위한 열정이 있다, 또는 공정과 공평인 것을 위한 열정이 있다, 그 이유가 이런 인물들은 선을 위하여 선인 것을, 진리를 위하여 진리인 것을 행하기 때문, 또는 공정 또는 공평을 위하여 정당하게 행동했기 때문이다. 바꿔 말해 명예나 이익 등등이 행동 결정을 좌지우지 하지 않았다는 말이다. 의지로부터의 내면들이 종결점을 가지고 있어왔던 모든 이들은 천국 안으로 들리워진다, 그 이유가 그것 안으로 흘러드는 신성이 이들을 인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의지로부터의 내면들이 종결점을 가지지 않아 왔었던 이들은 자신들을 지옥쪽으로 데려간다; 그 이유가 신성이 (안주할 평면인 종결점이 없는 바) 통과되어 지옥적인 것으로 변해지기 때문이다. 즉 태양의 열이 더러운 배설물에 쪼여져 악취만이 생산되는 경우 같다. 결과적으로 양심을 가진 모든 이들은 구원된다; 그러나 양심을 가지지 않은 이들은 구원될 수 없다.
의지로부터의 것들이 그것들 안에 구멍들을 가지고 있다고, 또는 종결되지 않는다고 말해왔는데, 이것은 선과 진리에 대한 애착이 없을 때, 또는 공정과 공평에 관한 애착이 없을 때 발생한다; 또는 이런 사항들이 세상의 재물이나 명예를 획득하기 위해 쓸모가 전혀 없다고 상대적으로 평가 절하하는 경우에 즉시 발생한다. 애착들이 종결하고 닫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므로 “묶는” 역할, 억류되어 있게 하는 역할을 한다. 선과 진리에 애착함은 “내적 측면의 묶임들”이고, 악과 거짓에 애착함들은 “외적 측면의 묶임들”이다. 악과 거짓에 애착함들이 묶여있지 않으면, 인간은 미쳐버릴 것이다; 그 이유가 발광함은 이런 묶임들이 느슨해지는 것밖에 더 다르지 않다; 고로 그것들은 이런 인물들 안에서 비 종결점들이다; 이런 인물 안에는 내적 묶임들이 없기에, 내향적으로 그들은 생각들과 애착들 측면에서 미쳐 있고, 단지 미쳐 있지 않은 듯 나타나는 이유는 그를 외적인 묶임들에 의해, 즉 세상의 명예나 이득 등등을 획득하기 위하여, 결과적으로 법의 두려움이나 목숨의 손실 같은 외적 묶임들이 그의 미쳐버림이 밖으로 불거져 나오지 못하게 제지해주기 때문이다. 이것이 유태 교회에서 천으로 덮지 않고 열려 있는 죽은 자의 집의 그릇들은 불결하다고 표현되어져 있다 (민. 19:15).
위와 비슷한 사항이 “구멍들이 가득한 일들”에 의해 이사야서에 있다:
비단실로 만드는 이들, 그리고 구멍들이 가득한 일들을 짜깁는 그들은 얼굴이 붉어질 것이다; 그리고 거기로부터의 기초들은 조각으로 부셔질 것이다, 만드는 그들 모두가 혼의 물웅덩이를 고용한다 (이. 19:9, 10);
그리고 에스겔서에서 있는 “구멍들”이다:
영이 예언자를 뜰의 문쪽으로 데려갔다; 거기서 그는 보았다, 그리고 벽에 구멍이 바라보였다; 그리고 그가 그에게 말했다, 벽을 통과하는 뚫린 구멍으로 오너라; 그러므로 그는 벽을 통하여 뚫었다, 그리고 문이 바라보였다; 그때 그가 그에게 말했다, 안으로 들어가서 그들이 여기서 행하는 역겨운 것들을 보라. 그가 안으로 가서 보았을 때, 기어다니는 것과 짐승의 갖가지 그림들, 역겨움들, 그리고 이스라엘 가문의 모든 우상들, 이것들이 빙둘러 벽들에 초상화된 것이 바라보였다 (겔. 8:7-10).

그리고 가장 위쪽 바구니…이는 의지의 가장 안쪽을 의미한다. 이는 “바구니”의 의미가 의지 부분이다로부터; 그리고 “가장 위쪽”의 의미가 가장 안쪽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가장 위쪽”이 가장 안쪽인 이유는 공간 안에 있는 인간과 더불어서는 내면의 것이 보다 높은 것으로, 그리고 외면의 것들은 보다 낮은 것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러나 공간에 대한 관념이 중단될 때, 즉 천국 안에, 인간이 내면의 생각 안에 있을 때, 이때 높은 것과 낮은 것에 대한 관념이 중단된다; 그 이유가 높이와 깊이는 공간에 대한 관념으로부터 오기 때문이다. 그렇다, 내면의 천국에서 내면과 외면에 대한 관념이 없다, 그 이유는 공간의 어떤 것 역시 이 관념에 집착하기 때문이다; 그 대신 보다 더 완전한지, 보다 덜 완전한지에 대한 관념만 있다; 그 이유가 내면의 것들은 외면의 것들보다 더 완전한 상태 안에 있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내면의 것들은 신성에 더 가까이 있고, 외면의 것들은 신성으로부터 보다 더 떨어져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가장 위쪽이 가장 안쪽을 의미하는 이유이다.
그럼에도 외면에 비교하여 내면이 무엇인지에 대한 것은 이것들이 등차들과 더불은 경우가 어떠할지에 대해 알아야 납득된다. 인간은 내면인 것에 관한 다른 개념을 가지고 있지 않고 보다 더 순수한 것이 계속적인 감소에 있는 것보다 더 완전하다는 개념 정도만 알고 있다. 그리고 더 순수한 것과 더 거친 것이 하나 안에서, 그리고 같은 등차 안에서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단지 팽창과 수축의 정도에 따라, 결정해감에 따라, 또한 동종의 것과 이종의 것이 삽입됨에 따라서 일 뿐이다고 생각하는 정도이다. 이런 생각들이 인간의 내면에 관하여 우세를 떨치는 한, 외면들이 내면들과 서로 엉겨붙어 있다는 것, 고로 절대적으로 하나로서 행동한다는 관념을 피하기는 불가능하다. 그러나 등차들에 관한 진짜 생각이 형성될 때, 내면들과 외면들이 어떻게 서로 구분지어 있는지와 아주 잘 구분되어 있어 내면들은 외면들 없이 존재 안으로 올 수 있고 존속할 수 있다는 것, 그러나 외면들은 내면들 없이 결코 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다. 더불어 내면들은 외면들 안에서 상응 관계에서 있다는 것도, 또한 외면들이 내면들을 어떻게 표현하는지도 알게 된다. 이런 이유로 학식자들이 혼과 몸의 상호 작용에 관한 것만을 가설적으로 취급할 수 있었다; 이것 뿐만이 아니고, 이것은 그들 중의 많은 이들이 육체 안에 생명이 있다 라고 믿게 한 이유도 되었는 바, 그들은 육체가 죽을 때, 내면이 육체에 달라붙어 있기 때문에 내면도 죽는다 라고 믿는다. 하지만 죽는 것은 외면의 등차일 뿐, 이때 내면은 존속하고 살아 있다.

거기에는 바로를 위한 모든 식품(음식). 이는 자연 평면의 자양분을 위한 천적인 선이 가득함을 의미한다. 이는 “식품(food)”의 의미가 천적인 선이다로부터; 그리고 바로의 표현함이 자연 평면의 내면이다로부터, 또한 일반적 측면에서의 자연 평면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 이유가 그것들이 상응할 때, 자연 평면의 내면들과 외면들은 하나를 만들기 때문이다; 그리고 식품이 자양분을 위해 있는 바, “바로를 위한 모든 식품이 가득하다”는 말에 의해서는 자연 평면의 자양분을 위한 천적인 선이 가득함이 의미된다. 이 식품은 바구니 가장 위쪽에 있다라고 말해지고 있다. 이를 수단으로 의지 부분의 가장 안쪽이 천적인 선으로 가득하였다가 의미된다. 그 이유가 주님으로부터의 선은 인간의 가장 안쪽을 통하여 흘러들고, 거기로부터 사다리의 층계 같이 등차적으로 외면들에까지 흘러들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가장 안쪽은 상대적으로 가장 완전한 상태인 바, 주님으로부터 직접적으로 선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더 낮은 것들에서는 그렇지 않다. 만일 더 낮은 것이 주님으로부터 직접 받아진다면, 그들은 그것을 희미하게, 심지어 악용하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상대적으로 불완전하기 때문이다.
주님으로부터의 천적 선의 유입과 그것을 받음에 주목해보자. 알려진 바, 인간의 의지 부분이 선을 받는다는 것, 그리고 그의 지적 부분이 진리를 받는다는 것, 그런데 지적 부분이 진리를 자기 자신으로 만들기 위하여서는 동시에 의지 부분이 선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거꾸로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그 이유가 이쪽 편이 이런 방식에서 다른쪽으로 흐르면, 다른쪽이 그것을 받도록 준비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지적 부분의 것들은 계속적으로 다양해짐에 있는 형체에, 그리고 의지 부분 속의 것들은 이 다양해짐이 하모니를 결과하도록 하는 것에 비교될는지 모른다; 결과적으로 진리는 다양해짐들에, 선은 거기로부터의 즐거움들에 비교될는지 모른다; 선들과 진리들의 이런 경우는 필수적인 요소에 해당되기에, 이쪽은 다른쪽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것, 또한 이쪽은 다른쪽을 수단으로 하지 않고서는 생산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식품”이 천적 선을 의미하는 이유는 천사의 식품은 사랑의 선들과 선행의 선들밖에 없기 때문, 이 식품이 천사들을 살아 있게 만들 뿐만 아니라 새로워지게 한다. 특히 행동에 있는 이 선들, 또는 이 선들을 실제화함이 천사들의 새로워짐을 가능하게 한다. 그 이유는 그것들이 천사들의 바램들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램들이 행동에서 실현될 때, 그것들은 새로워짐과 생명을 줄 수가 있다. 이와 같은 것들이 인간의 영에 자양분이 생기게 하는 한편, 물질의 식품은 육체에 자양분이 생기게 한다는 것은 즐거움 없는 식품은 자양분이 생기게 함에서 조금밖에 도움이 되지 못하나 기쁨을 동반하는 식품은 자양분을 많이 생기게 한다는 사실로도 알는지 모른다. 식품을 받는 통로 또는 도관이 열리고 피로 운반하는 것은 즐거움들 이다; 그 반면 즐겁지 않은 식품은 그것을 닫게 한다. 천사들과 더불어 이 즐거움들은 사랑의 선들과 선행의 선들이다, 그리고 이로부터 추리될 수 있는 것은, 그것들이 지상의 식품들에 상응하는 영적인 식품들이다는 것이다. 선들이 식품이듯, 진리들은 음료이다.
“식품”은 말씀의 많은 곳에서 언급된다, 그리고 내적 의미에 친숙해 있지 않은 이들은 이 식품이 영적인 식품이지만 여느 지상의 식품을 뜻한다는 것밖에 알 수가 없다. 아래 몇 성경 구절에서 이를 살펴보자:
모든 백성이 빵을 구하면서 신음하고 있다; 그들은 자기들도 탐을 내는 것들을 식품을 위하여, 혼을 새롭게 하려고 주었다 (애. 1:11).
이사야서에서:
목마른 모든 이여, 너희는 물들쪽으로 가라, 그리고 은을 가지지 않는 자여, 너희는 가라, 사라, 먹으라; 그렇다, 가라, 은 없이, 대가 없이 포도주와 젖을 사라 (이. 4:1).
요엘서에서:
여호와의 날이 가까이 있다, 그리고 뇌신(thunderer)으로부터 황폐함 같이 그것이 올 것이다. 식품이 우리의 눈 앞에서 멸절되지 않더냐? 우리의 하느님의 집으로부터 즐거움과 기쁨(이 멸절되 지 않더냐)? 낱알들이 그것들의 흙덩어리 아래에서 썩어 없어졌다, 곳간은 황폐해졌다, 창고는 파괴되었다, 그 이유는 곡식이 시들었기 때문이다 (욜. 1:15-17).
다윗서에서:
우리의 곳간은 식품이 계속 들어와져 가득하다; 우리의 양떼들은 거리에서 천천이고 만만이다. 우리의 거리들에는 울부짖음이 없다. 이런 상황에 있는 백성이 복있는 자이다(시. 144:13-15).
다시:
모든 것들이 당신을 기다립니다, 즉 당신은 그들에게 제때에 그들의 식품을 주실는지 모릅니다. 당신은 그들에게 주시고, 그들은 그러모읍니다; 당신은 당신의 손을 펴십니다, 그들은 좋은 것으로 배불러집니다 (시. 104:27, 28);
위 구절들에서 천적인 선과 영적인 선이 내적 의미에서 뜻해지고, 한편 글자 의미에서는 물질적인 식품이 뜻해진다. 이로부터 분명한 바, 이런 방식으로 말씀의 내면들과 외면들이 있다는 것, 또는 말씀은 영으로부터 있고, 한편 글자로부터 있어 서로가 상응하고 있다는 것이다; 하여 인간이 말씀을 글자 의미에 따라 이해하는 동안, 당사자와 더불은 천사들은 영적 의미에 따라 이해하고 있다. 말씀이 이렇게 두 의미들로 쓰여 있는 이유는 말씀이 인류와 천국 모두에서 사용되기 위해서 이다; 이런 이유를 위해, 말씀 안의 모든 표현들은 천국의 것을 의미하고, 그리고 말씀의 모든 것들이 천국 속의 것들을 표현하고 있다, 말씀 속의 마침표 같은 지극히 작은 부분에 이르러서조차 그러하다.
“식품”이 영적 의미에서 선이다는 것을 주님께서 분명하게 가르치시고 있다:
멸해지는 식품을 위하여 노동하지 말라, 그러나 영원으로부터의 생명쪽에서 머무르게 하는 식품을 위하여 노동하라, 이것을 사람의 아들이 너희에게 주고 있다 (요. 6:27).
다시:
내 살이 진실로 식품이다, 그리고 내 피가 진실로 음료이다 (요. 6:55);
위에서 “살”은 신성한 선이다(3813항); 그리고 “피”는 신성한 진리이다 (4735항). 그리고 다시:
예수께서 그분의 제자들에게 말하셨다, 나는 너희가 모르는 먹을 식품을 가지고 있다. 제자들이 서로에게 말했다, 어느 사람이 그분에게 먹을 무언가를 가져왔는가?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하셨다, 나를 보내신 그분의 뜻을 행하는 것, 그리고 내가 그분의 일을 완성하는 것이 내 식품이다 (요. 4:32-34);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것, 그리고 그분의 일을 완성하는 것”은 행동에 있는, 또는 실제에 있는 신성한 선이다, 이 선이 진짜 의미에서 “식품”이다.

빵 담당자가 작업한…이는 감각 부분의 모두 각각의 사용에 따라서를 의미한다. 이는 “일(work)”의 의미가 모두 각각의 사용(use)함이다로부터(이후 더 살핀다); 그리고 “빵 담당자”의 의미가 의지 부분에 종속되는 감각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일”이 사용을 표시하는 이유는 그것이 의지 부분, 또는 의지 부분에 종속되는 감각이라 단언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를 수단으로 행하여지는 무엇이든 , 그리고 “일”이라 불리울 수 있는 것은 사용임에 틀림 없다. 선행의 모든 일들은 이 밖에 더 아니다, 그 이유가 선행의 일들은 사용함들이라는 의지로부터 일들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새들이 내 머리 위에로부터 바구니의 안으로부터 그것들을 먹었다. 이는 악으로부터의 거짓이 그것을 소진시켜버렸다를 의미한다. 이는 “새”의 의미가 지적인 것들, 또한 생각들, 고로 생각으로부터 파생되는 것들; 즉, 진짜 의미에서 갖가지 종류의 진리들, 그리고 반대 의미에서 거짓들이다로부터; 그리고 “먹다”의 의미가 소진(소비)시키다 이다로부터(원어에서도 먹다는 소진시키다를 뜻한다); 그리고 “바구니”의 의미가 의지 부분이다로부터, 여기서는 의지 부분으로부터의 악인데, 그 이유는 바구니가 그것에 구멍들을 가졌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새가 머리 위에로부터 바구니의 안으로부터”에 의해 악으로부터의 거짓이 소진되게 함이 의미된다.
거짓은 두 근원으로부터 있다; 교리로부터와 악으로부터 이다. 교리로부터의 거짓은 선들을 소진되게 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인간이 교리의 거짓 안에 있으면서도, 아직 선 안에도 있을는지 모르기 때문, 그러므로 교리로부터의 인간, 이방인들 조차 구원되어진다; 그러나 악으로부터의 거짓은 선들을 소진시켜 버리는 거짓이다. 악은 그 자체가 선에 반대되어 있다, 그럼에도 그 자체가 선을 소진시키는 것이 아니라 거짓을 수단으로 하여 소진시킨다, 그 이유가 거짓이 선에 소속된 진리들을 공격하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진리는 선을 에워싼 외보(outwork, 성벽)같기 때문이다. 이 외보가 거짓에 습격을 당한다, 그리고 이것들이 선을 습격할 때, 파멸쪽으로 치닫는다.
“새들”이 지적인 것들을 뜻한다는 것을 모를 경우, 말씀에서 새가 등장하는 구절에서 새 자체가 뜻해진다고 생각하거나 속담이나 비교해 말함 같은 수준에서 뜻해지는 새로서만 납득할 뿐이다. 내적 의미로부터가 아니면, “새들”이 이해함에 관한 것들, 즉 생각함들, 관념들, 추론들, 원리들, 결과적으로 진리들 또는 거짓들을 뜻하는 것을 알지 못한다:
하느님의 왕국은 겨자씨의 낱알에 비유할 수 있다, 이것을 인간이 가져다가 자기 동산에 심었다; 그리고 그것은 자라났고, 큰 나무가 되었다; 그리하여 하늘의 새들이 그것의 가지들에 거주했다 (눅. 13:19);
“하늘의 새들”은 진리들을 표시한다.
에스겔서에서:
장대한 삼나무로 성장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 아래 날개들을 지닌 모두 각각의 날개로부터의 모두 각각의 새가 거주할 것이다; 거기로부터의 가지들의 그늘에서 그들이 거주할 것이다
(겔. 17:23);
“모두 각각의 날개로부터의 새”는 모두 각각의 종류로부터의 진리들을 표시한다. 다시:
앗수르는 레바논에 있는 삼나무였다. 하늘들의 모든 새들이 자기들의 둥지들을 그것의 굵은 가지들 에 만들었다, 그리고 그것의 가지들 아래 들판의 모든 짐승들이 새끼를 키우고, 그것의 그늘에서 모든 큰 민족들이 거주했다 (겔. 31:3, 6);
“하늘들의 새들”은 진리들을 표시한다.
다시:
그것의 파멸 위에 하늘들의 모든 새들이 거주할 것이다, 그리고 들판의 모든 야생 동물들이 그것의 가지들 위에 있을 것이다 (겔. 31:13);
위에서 “하늘들의 새들”은 거짓들을 표시한다. 다니엘서에서:
느부갓네살은 꿈에서 보았다; 땅의 한가운데 있는 나무가 바라보였다; 들판의 짐승은 그것 아래 그늘을 가졌다, 그리고 하늘의 새들이 거기로부터의 가지에서 거주했다 (단. 4:10, 12, 18);
위에서 “하늘의 새들”은 거짓들을 표시한다.
예레미야서에서:
내가 바라보았고 보라 거기에 사람이 없었다, 그리고 하늘의 모든 새들이 도망가졌다 (예. 4:25);
“사람이 없다”는 선이 없다를 표시한다; “도망가진 하늘의 새들”은 진리들이 사라졌음을 표시한다. 다시:
하늘들의 새로부터, 짐승에게조차, 그들은 도망쳤다, 그들은 없어졌다 (예. 9:10);
위와 비슷한 의미에서 마태복음서에서:
파종자가 씨를 뿌렸다; 그리고 얼마는 단단한 길 위에 떨어졌다, 그리고 새들이 와서 그것들을 삼켰다 (마. 13:3, 4).
위에서 “새들”은 추론들을, 또한 거짓들을 표시한다. 이 의미는 이외 많은 구절들에서도 비슷하다.

그리고 요셉은 답하여 말했다. 이는 자연 평면에 있는 천적인 것으로부터 지각함으로부터 밝히 앎(계시)을 의미한다. 이는 “대답함과 말함”의 의미가 지각함으로부터 밝히 앎이다로부터; 그리고 요셉의 표현함이 자연 평면에 있는 천적인 것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여기서 “요셉”이 자연 평면에 있는 천적인 것인 이유는 취급되는 주제가 자연 평면이기 때문에서 이다. 천적인 것과 영적인 것이라는 말에 주목해보면 이렇다: 주님의 신성으로부터 천국 안으로 흘러드는 천적인 것 자체와 영적인 것 자체는 원칙적으로 합리적 평면의 내면에서 거주한다; 그 이유가 거기야말로 (신성을 받음에 있어) 더 완전한 형체로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주님의 신성으로부터의 천적인 것과 영적인 것은 합리적 평면의 외면으로도 흘러든다, 마찬가지로 자연 평면에도 흘러든다; 그리고 직, 간접적으로도 흘러든다; 즉 간접적으로는 합리적 평면의 내면을 통하여서 이다, 그리고 직접적으로는 주님의 신성 자체를 통하여서 이다. 직접적으로 흘러드는 것은 배열 배치하고, 간접적으로 흘러드는 것은 배치를 받는다. 이것은 합리적 평면의 외면에서, 자연 평면에서의 경우이다; 이로부터 자연 평면에 있는 천적인 것이 뜻한 것도 가늠되었을 것이다.
천적인 것은 신성한 선으로부터 이고, 영적인 것은 신성한 진리로부터 이다, 이 둘 모두는 주님으로부터 이다; 그리고 이것들이 합리적 평면에 있을 때, 그것들은 합리적 평면에 있는 천적인 것과 영적인 것, 그리고 자연 평면에 있을 때, 그것들은 자연 평면에 있는 천적인 것과 영적인 것이라 불리운다. “합리적” 인간 또는 “자연적” 인간이라는 말은 당사자가 천적인 것과 영적인 것을 받기 위하여 자신을 만들어낸 만큼에서 일컬어지는 말이다. 또한 인간의 “합리적” 평면은 그의 내적 부분이고, 자연적 평면은 그의 외적 부분이기도 하다. 유입을 통하여, 이 유입을 받아들임에 따라 인간은 천적 수준, 또는 영적 수준의 인간이라 불리운다: 당사자가 주님의 신성한 선을 자신의 의지 부분에 받아들이면 천적 수준의 인간이 되고, 그의 지적 부분에 받아진다면, 영적 수준의 인간이다.

이것이 그에 관한 해석입니다. 이는 그것(꿈) 안에 가진 것을 의미한다. 이는 “해석”의 의미가 그것 안에 가진 것이다로부터, 또는 거기 안에 있는 것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세 바구니들. 이는 연속되는 의지로부터의 것들을 의미한다. 이는 “세 바구니들”의 의미가 의지로부터의 연속되는 것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사흘이다. 이는 마지막에 조차를 의미한다. 이는 “3”이 어떤 시기, 그리고 시작으로부터 끝까지, 마지막에까지 조차에 이르는 어떤 것의 계속적인 발전을 의미한다로부터 알게 된다.

지금부터 사흘 안에. 마지막 안에 있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바로 위의 “3”의 의미로부터 알게 된다.

바로는 당신 위에로부터 당신의 머리를 떼어 들어 올릴 것입니다. 이는 내다 본 바로부터 결론인 것을 의미한다. 이는 “머리를 떼어 들어 올림”이 설비된 것, 그러므로 결말인 것, 또는 설비된 것으로부터 결론인 것으로부터; 여기서는 내다 본 것으로부터, 그 이유는 이어지는 말이 빵 담당자는 나무에 매달려질 것이라 말해지고, 이것이 거절과 지옥에 떨어짐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설비된 것으로부터가 아니고) 내다 본(foreseen) 것으로부터 결론이다 라고 말한 이유는 섭리(providence)는 선으로부터의 것을, 예견(foresight)은 악으로부터의 것을 서술하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모든 선은 주님으로부터 흘러드는 바, 이것은 설비된 것이다; 그러나 모든 악은 지옥으로부터, 또는 지옥과 하나를 만드는 인간의 자기 자신인 것으로부터 이기 때문이다. 섭리를 악에 주목하여 말해보라 하면, 섭리는 악을 덜 악한쪽으로 결정을 보게끔, 그리고 가능만하다면 선쪽으로 방향이 틀어지게 하는 것 뿐이다. 현 구절에서 예견이 의미된 이유는 취급되는 주제가 의지 부분에 종속되는 감각이고, 이 감각이 악 때문에 거절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당신을 나무에 매달 것입니다. 이는 거절과 저주를 의미한다. 이는 “나무에 매달다”의 의미가 거절과 지옥에 떨어짐(damnation)이다로부터 분명해진다; 그 이유가 나무 위에 매다는 것은 저주(curse)이고, 저주는 신성으로부터의 거절, 결과적으로 지옥에 떨어짐이기 때문이다. 나무에 매다는 것이 저주인 것이 모세의 책에서도 분명해진다:
인간 안에 죽어야 한다고 판단되는 범죄가 있을 때, 그리고 그가 죽음에 놓여질 때, 너는 그가 나무에 온 밤을 매달려 머무르지 않게 할 것이다, 그러나 너는 같은 날 그를 확실히 매장하라, 그 이유가 매달려진 자는 하느님의 저주이기 때문이다; 너는 너의 하느님 여호와께서 네게 상속분으 로 줄 토지를 더럽혀지지 않게 하라 (신. 21:22, 23);
그가 “온 밤을 나무에 매달려 머무르지 않게 하라”는 항구적인 거절을 의미한다; 그 이유가 저녁에서 하루가 새로이 시작되었기 때문, 그러므로 매달려진 자가 저녁 이전에 내던져지지 않으면, 악이 거절된 것이 아니다를, 결과적으로 토지는 어떤 범죄로부터 자유해지지 않은 것, 고로 더럽혀 있는 것을 표현하고 말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추가된 것은, “너는 여호와 너의 하느님이 상속으로 네게 주는 토지를 더럽히지 말라”는 명령이다. 매단 자를 저녁까지 더 이상은 남겨두지 않는 구절은 여. 8:29; 10:26에서도 더 확인된다. 유태 민족들 사이에 두 가지 처벌이 있다; 그것은 돌로 침과 매다는 것이다. 돌로 침은 거짓 때문에, 나무에 매다는 것은 악 때문에 발발한 죄의 형벌이다; 그 이유는 “돌(stone)”이 진리이기 때문이다, 반대적 의미에서는 거짓이다; 그리고 “나무(wood)”는 선이다, 반대적 의미에서는 악이다; 그러므로 예언적 말씀에서 때때로 언급되는 말은, “간통을 범한 자는 돌과 나무로”가 있다. 그 이유는 진리의 악용(뒤집음), 고로 거짓이, 그리고 선에 섞음질을 함, 즉 악이 의미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새가 당신 위에로부터 당신의 살을 먹을 것이다. 이는 악으로부터의 거짓이 이런 감각들로부터의 것들을 소진되게 할 것임을 의미한다. 이는 “먹다”의 의미가 소진시키는 (consume)것이다로부터; 그리고 “새”의 의미가 거짓이다로부터; 그리고 “살(flush)”의 의미가 선이다로부터, 그러므로 반대 의미에서는 악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 이유가 말씀의 대부분의 표현이 반대 의미를 지니기 때문인데, 이 반대 의미는 진짜 의미로부터 알려진다; 그리고 “나무 위에로부터”의 의미가 의지 부분에 종속하는 감각적인 것들이다로부터 인데, 그 이유는 이런 등등이 빵 담당자를 두고 표현되기 때문이다. 이런 것들은 악인 바, 거절되어져야 하는 것들이다는 것은 앞에서 살폈다.
그러나 이 점에 대한 것, 즉 술 담당자에 의해 표현되는 지적 부분에 종속되는 감각적인 것들은 유지 존속되나, 빵 담당자에 의해 표현되는 의지 부분에 종속되는 감각적인 것들은 거절된 점, 이것이 어떤 경우인지에 대한 것을 더 주목해보아야 할 것 같다. 그 이유는 이것은 계발됨 없이 납득되어질 수 없는 비밀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래의 설명이 납득함에 자그마한 빛이라도 드리워지게 할지 모른다. 감각적인 것들이란 오각이라는 외적, 또는 신체의 감각들을 통하여 인간의 기억과 그의 바램들 안으로 은근히 주입되어져 왔던 일련의 기억 속의 지식과 기쁨들이다, 그리고 이것들 모두가 자연 평면의 외면을 구성하고, 이로부터 인간은 감각적 인간이라 불리운다. 기억 속의 지식들은 지적 부분에 종속되어 있고, 그의 바램들은 의지 부분에 종속된다; 기억 속의 지식들은 이해함으로부터 있는 진리들에 관련된 것을 낳는다, 그리고 기쁨들은 의지로부터 있는 선에 관련된 것을 낳는다. 전자는 술 담당자에 의해 표현되고 유지 존속되었다; 후자는 빵 담당자에 의해 표현되었고 거절되었다.
전자가 유지 존속된 이유는 비록 어느 기간에 한정될지언정, 그것들은 지적인 것들에 일치할 수 있었기 때문; 그러나 후자가 거절된 이유는 그것들이 일치하는 것이 가능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여기서 최고 의미 측면에서 취급되는) 주님 안에 있는 의지 부분은 임신으로부터 신성이셨기 때문, 그리고 신성한 선 자체이셨기 때문; 그러나 그분이 출생을 수단으로 어머니로부터 가지게 된 의지 부분은 악 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거절되어야만 했고, 이것 대신에 새로운 의지가 지적인 것들을 수단으로 신성한 의지 부분으로부터, 또는 신성한 진리를 수단으로 신성한 선으로부터, 고로 그분 자신의 힘으로부터 획득하셔야만 했다. 이것이 여기서 내적 의미에서 묘사된 비밀이다.

20-23절. 그리고 사흘이 지나, 바로의 생일이었다, 그리고 그는 그의 모든 종들에게 잔치를 베풀었다. 그리고 그는 그의 종들 가운데에서 술 담당자들의 제 1 인 자의 머리와 빵 담당자들의 제 1 인 자의 머리를 들어 올렸다. 21 그리고 그는 술 담당자들의 제 1 인 자를 그의 술 담당직에 복직시켰다, 그리고 그는 잔을 바로의 손바닥에 바쳤다. 22 그리고 그는 빵 담당자들의 제 1 인 자를 매달았다. 요셉이 그들에게 해석해준 그대로였다. 23 그리고 술 담당자들의 제 1 인 자는 요셉을 기억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그를 잊었다.

그리고 사흘째가 되었다. 이는 마지막에서…를 의미한다. 이는 “셋째 날(사흘 날)”의 의미가 상태의 마지막 째이다로부터, 그 이유가 “날”이 상태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세 번째”의 의미가 완성인 것, 고로 마지막인 것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상태의 마지막 째에 의해 앞의 상태가 마지막에 오고 새로운 상태가 시작된다가 뜻해진다. 새로운 상태는 거듭나고 있는 인간 안에서 시작한다, 즉 질서가 바뀌었을 때, 즉 내면의 것들이 외면의 것들 위에서 지배하기를 시작했을 때이다, 그리고 외면의 것들이 두 내면의 것, 즉 지적 부분으로부터의 것들과 의지 부분으로부터의 것들을 섬기기를 시작할 때이다. 이것은 거듭나지고 있는 이들에게서 관찰되는 것인데, 즉 이들 내부에 있는 어떤 것이 감각적 기쁨들과 육체적, 지상적 쾌락
이 자기들 쪽으로 지적인 것들을 끌어당겨 확증하고 지배하려는 것으로부터 그것들이 단념되게 한다는 것이다; 이런 경우일 때, 앞의 상태는 마지막에 이르고, 새로운 상태가 첫 상태에서 있는다.
거듭나고 있든, 그렇지 않든, 상태의 바뀜들은 출시되고, 이 바뀜이 거꾸로도 있다; 즉 거듭나지는 이들과 더불은 경우가 이쪽의 길이다면, 거듭나지 않고 있는 이들과 더불은 경우는 저쪽의 길인 셈이다. 거듭나지 않고 있는 이들과 더불어, 이 바뀜들 또는 역으로 바뀜들은 육체쪽에서, 그리고 시민 생활쪽에서의 원인 때문에 있다. 육체가 원인이 되는 경우란 생활의 때와 더불어 오고, 생활의 때와 더불어 지나가버리는 탐욕들, 그리고 신체의 건강을 되돌아 숙고함과 세상에서 장수함이다; 시민 생활에서의 원인은 탐욕들의 바깥쪽 굴레 같이 여겨지는 것, 즉 똑똑하다는 명성이나 공정과 선함을 획득하기 위하여 시민 생활에서 준수하는 것, 그러나 명예와 이득을 목적으로 해서 일 경우이다. 그러나 거듭나고 있는 이들과 더불은 바뀜, 또는 역으로의 전환의 원인은 영적 이유들을 위한 것에서 비롯되는데, 이것은 선함과 공정 자체로부터 진행된다; 인간이 이런 것들에 감동되기를 시작할 때, 그는 앞의 상태의 끝에, 새로운 상태의 시작에 있다.
위의 설명만 가지고는 본문의 구절을 납득하는데 무리가 있으므로 예증을 통해 더 살펴보자. 자신이 거듭나지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 이들의 경우, 그는 육체를 위하여 육체로부터의 것들을 사랑한다, 그리고 다른 목적은 없다, 그리고 그는 세상을 위하여 세상으로부터의 것들을 사랑한다, 그는 심정에서 더 높은 것, 더 내면인 것이 있다는 것을 부정하기 때문에 더 높게 올라감도 없다. 그러나 거듭나짐이 있는 이들과 더불어서의 경우, 이들도 육체를 사랑하고 세상의 것들을 사랑하기는 마찬가지 이다. 그러나 이 사랑은 더 높고 더 안쪽의 것을 사랑함에 목적을 두고 있다; 그 이유가 그는 건강한 육체 안에 건전한 마음을 가지는 것이 목적이기 때문; 그리고 그는 더 나아가 이 건강한 몸과 건전한 마음을 더 내면의 것과 더불어 사랑하는 바, 그는 선을 사랑함과 진리를 이해함으로 세상 삶에 풍미를 더 보탠다. 그도 역시 세상 속의 것을 사랑하나, 그는 내면의 것에 있는 것을 목적으로 하여, 세상의 것을 수단으로 하고 있다. 하여 그가 세상으로부터 가지는 명예, 재물, 무엇이든 선하고 진정한 것, 공정과 공평인 것을 위한 방편에 불과하다.
위 두 대비되는 인간의 품질이 보여주는 바, 둘 모두 바깥쪽 형체에서는 별 차이가 없는 듯 보일는지 모르나 내적 형체에서는 완전 딴판이다. 이미 말해왔던 바로부터, 무슨 동기로부터 인지, 그리고 그 동기의 본성이 무엇인지, 이것이 두 부류의 인간 안에서 상태의 바뀜과 역으로의 바뀜까지 생산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더 알 수 있는 것은, 거듭나는 자 안에서 내면의 것들이 외면의 것들을 지배한다는 것, 한편 거듭나지 않는 자 안에서는 외면의 것들이 내면의 것들을 지배한다는 것이다. 인간 안에서 지배력을 가지는 것이 그의 목적들이다. 그 이유가 목적들에 자기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이 종속되게 하기 때문이다. 그의 생명 자체는 그의 목적 외에 다른 근원으로부터 있지 않다, 그 이유는 그의 목적이 언제나 그의 사랑이기 때문이다.

바로의 생일에. 이는 자연 평면의 거듭나짐이 있었을 때를 의미한다. 이는 “태어나짐”이 거듭나지는 것이다로부터 (아래에서 설명한다); 그리고 “바로”의 표현함이 자연 평면의 내면이다로부터, 여기서는 일반적 측면에서의 자연 평면인데, 그 이유는 거듭나는 자와 더불어, 자연 평면의 내면과 외면은 서로의 상응함을 통하여 하나로서 행동하기 때문이다. “태어나짐”이 거듭나짐인 이유는 내적 의미에서는 영적인 것들이 의미되기 때문에서 이다, 그리고 영적인 출생이 거듭남이고, 곧 재 출생이라 불리우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말씀에서 “출생(birth)”이 언급될 때, 천국에서는 “물과 성령”에 의해 결과되는 것, 즉 신앙과 선행을 통하여 결과되는 것밖에 더 다른 의미로는 이해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인간이 사람인 것, 다른 동물과 확연히 구별되게 하는 것이 다시 태어남, 또는 거듭남을 수단으로 있어지기 때문이다; 이때야말로 당사자는 주님의 왕국을 받는 상속자와 아들이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그의 모든 종들에게 잔치를 베풀었다. 이는 자연 평면의 외면과 더불은 (거듭남의) 개시와 결합을 의미한다. 이는 “잔치”의 의미가 결합쪽으로 개시함이다로부터, 또한 사랑을 통하여 결합함, 그리고 자기 것이 되게 함이다로부터; 그리고 “종들”의 의미가 자연 평면의 외면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 이유가 인간이 거듭나지고 있을 때, 보다 더 낮은 수준의 것들이 더 높은 수준에, 보다 외면쪽의 것들이 보다 내면쪽의 것들에 종속되기 때문, 이때서야 비로서 외면의 것들이 종들이 되고, 내면의 것들은 주인이 되어 있는다. 이와 같은 것이 말씀에서 “종들”이 의미함이다; 그러나 이들이 이러할 때, 주님에 의해 사랑되는 종들이 되는 것이다; 그 이유가 이것이 그것들을 결합하는 서로의 사랑이고, 그것들이 섬기는 태도 역시 심정으로부터 고분고분하는 자세를 취하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선은 내부로부터 흘러들고, 그것 안에 이 즐거움을 생산하기 때문이다. 옛날에 잔치들은 다양한 이유들로 해서 개최되었는데, 이 잔치를 수단으로 서로의 사랑을 개시함과 서로의 결합을 의미했다. 이 잔치는 생일에도 벌렸는데, 이것은 새로운 출생, 또는 거듭남을 표현했고, 이것이 사랑을 통하여 인간 안에 있는 내면과 외면의 결합, 결과적으로 인간 안에서 천국과 세상의 결합이다; 이때 인간 안의 세상적, 자연적인 것이 영적, 천적인 것과 결합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머리를 들어 올렸다. 이는 설비된 것과 예견된 것에 따라서를 의미한다. 이는 “머리를 들어 올림”이 설비된 것으로부터 결론인 것, 또한 예견된 것으로부터 결론 인 것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것은 지적 부분에 종속되는 감각적인 것에 관련하여 설비된 것이고, 선으로서 유지 존속되었는데, 이것이 술 담당자에 의해 표현되어졌다; 그리고 의지 부분에 종속되는 감각적인 것에 관하여서 예견되었는데, 이것은 악으로서 거절되었고, 이것이 빵 담당자에 의해 표현되어졌다. 선은 설비되고 악은 예견되는 이유는 모든 선은 주님으로부터 오고, 모든 악은 지옥으로부터, 또는 인간의 자기 자신으로부터 있기 때문이다.

술 담당자들의 제 1 인 자와 빵 담당자들의 제 1 인 자의…이는 두 부분들, 즉 지적 부분과 의지 부분에 종속된 감각적인 것들에 관하여를 의미한다. 이는 술 담당자의 표현함이 지적 부분에 종속되는 감각적인 것들이다로부터; 그리고 빵 담당자의 표현함이 의지 부분에 종속되는 감각적인 것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의 종들 한가운데에서. 이는 자연 평면의 외면들 안의 이런저런 것 사이에 있었다를 의미한다. 이는 “한가운데에”의 의미가 “그들 사이에”이다로부터; 그리고 “종들”의 의미가 자연 평면의 외면에 있는 것들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말씀에서, 아래쪽에 있는 모든 것, 그러므로 더 높은 것에 종속되는 보다 낮은 모든 것들이 “종들”이라 불리운다, 마치 자연 평면의 외면 속에 있는 이런저런 것들, 또는 거기에 있는 감각적인 것들이 자연 평면의 내면 속에 있는 것들에 관련하여서도 “종들”의 위치에 있는 것과 같다. 후자의 것들이 합리적 평면에 관련하여 “종들”이라 불리운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일반적, 특수적 측면에서 인간에 있는 모든 것들, 또는 인간의 바깥쪽이든, 안쪽이든 모두는 신성에 관련하여 “종들”이라 불리운다, 그 이유가 신성은 최고이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종들”의 한가운데에서 바로 왕이 재판을 집행한 그들이란 술 담당자와 빵 담당자이었는데, 이들은 궁전의 제 1 인 자들, 또는 고관들이었다; 이들이 아무리 높다 해도, 여느 신하도 종들이듯 이들도 왕과의 관계에서 종들이라 불리우고 있다. 왕권은 신성한 진리 측면에서의 주님을 표현한다. 이 분에 관련하여 모든 이는 똑같이 종들이다, 이는 이유 여하 누구인지를 막론하고 이다; 그리고 주님의 왕국, 또는 천국에서, 가장 큰 자는 다른 자들보다 가장 큰 종이다, 그 이유는 그는 다른 이들보다 더 큰 순종함 안에 있기 때문이다, 또한 다른 이들보다 더 큰 겸허함 안에 있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이들은 “지극히 작은 자가 가장 큰 자일 것이다”에 의해 뜻해진 자들이기 때문이다, “마지막째인 자가 첫째인 자일 것이다”에 의해서도 뜻해진다:
첫째인 자는 마지막째인 자 일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째인 자는 첫째인 자일 것이다
(마. 19:30; 20:16; 막. 10:31; 눅. 13:30).
너희 사이에 있는 지극히 작은 자가 큰 자일 것이다 (눅. 9:48);
그리고 또한 “큰 자가 섬기는 자일 것이다”, 그리고 “첫째인 자는 종들일 것이다”:
너희 사이에서 큰 자인 자는 누구든지 너희의 섬기는 자(minister)일 것이다; 그리고 너희의 첫째인 자는 누구이든 모든 이의 종일 것이다 (막. 10:44; 마. 20:26, 27).
그분으로 있는 신성한 진리에 비교하여서 “종들”이라 불리우고, 그분으로부터 있는 신성한 선에 비교하여서는 “섬기는 자”라 불리운다. “첫째인 마지막째인 자”가 다른 이들 보다 더 확실하게 종들인 이유는, 그들은 생명의 모든 것, 결과적으로 자기들이 가지는 능력의 모든 것이 주님으로부터 이고 자신들로부터서는 전혀 아니다는 것을 다른 이들 보다 더 잘 알고, 인정하고, 지각하기 때문이다, 또한 입술로의 인정보다 심정으로 더욱 인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와 반대인 경우에 있는 이들인데도 신성에 비교하여 “종들”이라 자신을 부르고, 내심으로는 주인으로 행세하기를 바라는 이들도 있다; 그 이유가 이들은 신성이 자기를 총애하지 않으면, 분노하고 성낸다; 결국 그들은 신성에 반대하고, 신성으로부터의 모든 권능을 가져다가 자신들의 공로로 치부해버린다. 이런 특성을 심정에 지닌 채로 교회 안에 버젓이 있는 이들은 상상하기보다 더 많다. 이들은 주님을 부정한다, 그리고 자기들은 한 분 최고의 존재를 인정한다고 말한다.

그는 술 담당자들의 제 1 인 자를 그의 술 담당직에 복직시켰다. 이는 지적 부분의 감각적인 것들이 받아졌고 종속되게 만들었다를 의미한다. 이는 “술 담당자들의 제 1 인 자”의 표현함이 지적 부분에 종속되는 일반적인 감각 속의 것들이다로부터; 그리고 “그를 술 담당직에 복직되게 함”의 의미가 지적 부분 아래 질서로 환원함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여기서 “술 담당직에”라고 말해지는 이유는, 술 담당직과 그 직분에 관련된 것들, 즉 포도주, 새 포도주, 독주, 물 등등이 이해력에 속하는 것을 서술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음료와 마실 것을 줌(바침)도 그러하다; 그러므로 분명한 바, “술 담당자를 그의 술 담당직에 복직시켰다”에 의해 지적 부분의 감각적인 것들을 질서 안으로 환원되게 했다, 고로 그것들을 받고 그것들을 종속시켰다가 의미된다는 것이다.
감각 속의 것들이 내향적으로 보는 것과 행동에서 결과를 맺는 양쪽 측면에서 내면의 것들에 수단이 되어주어 섬기고 봉사할 때, 그것들은 받아들여지고 종속됨이 만들어진다; 그 이유가 인간은 자연 평면의 외면 안에서 내면의 것들을 보기 때문, 마치 인간이 얼굴에서 애착들을 보는 것과 같다, 그리고 상대방의 더 내면의 것을 눈에서 발견하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은 내면의 얼굴 없이, 또는 이와 같은 평면 없이, 육체 안의 인간은 감각의 것 넘어 있는 것을 전혀 생각할 수 없다; 그 이유가 그는 마치 상대방의 얼굴을 보고 있지만 실상 얼굴 자체가 아닌 그의 애착과 생각을 보듯 넘어의 것을 보기 때문이다. 또는 누군가의 연설을 들을 때, 우리가 그 연설의 단어 하나하나를 생각하지 않고 연설의 뜻(목적)을 헤아리는 경우와도 같을 것이다. 이런 경우는 자연 평면의 외면과도 비슷하다; 이것이 거울 안에서 자신을 보듯 내면에 평면이 되어주어 내면의 것들을 섬기지 않으면, 인간은 전혀 생각할 수 없다; 그러므로 외적 평면이 유아 시기로부터조차 첫째로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일들은 인간에게 알려져 있지 않다, 그 이유는 이와 같은 일은 내면적으로 출시되는 지라 인간이 내면적 숙고함을 제외하고는 자신의 관점(시야, view) 안으로 와지지 않기 때문이다.
자연 평면의 외면의 품질은 다른 삶에서는 매우 분명하다, 그 이유는 영들과 천사들의 얼굴들이 이것으로부터, 이것에 따라서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천국의 빛에서 내면들, 특히 의도들이나 목적들이 이 얼굴을 통하여 빛을 발한다. 만일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향한 선행이 내면들을 만들었다면, 그에 따른 광휘가 얼굴에 있다, 그리고 얼굴 자체는 형체에서 사랑과 선행이다; 그러나 만일 자아 사랑과 세상 사랑, 이로부터 파생되는 증오, 복수, 잔인함, 등등이 내면들을 형성했다면, 그에 상당하는 악마적인 표현이 얼굴에 있다, 그리고 얼굴 자체가 형체에서도 미워함, 복수함, 잔인함이다. 이로부터 분명한 바, 자연 평면의 외면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의 사용은 어떠한지, 이것이 내면의 것들에 종속될 때의 경우, 거꾸로 내면의 것들이 외면에 종속 당할 때의 경우가 무엇인지가 분명해졌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잔을 바로의 손바닥에 바쳤다. 이는 자연 평면의 내면은 도움이 된다(쓸만 하다)를 의미한다. 이는 앞에서 살폈다.

그리고 그는 빵 담당자들의 제 1 인 자를 매달았다. 이는 의지 부분의 감각적인 것들은 거절되었음을 의미한다. 이 말도 앞에서 살폈으므로 설명은 생략한다.

요셉이 그들에게 해석해준 그대로였다. 이는 자연 평면에 있는 천적인 것으로부터의 예보를 의미한다. 이는 “해석함”이 꿈이 그것 안에 무엇을 가졌는지를 말하는 것. 또는 무엇이 발생할 것인지를 말하는 것이다로부터, 고로 예보하는 것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리고 요셉의 표현함이 자연 평면에 있는 천적인 것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지적 부분의 감각적인 것들은 유지 존속되었고, 의지 부분의 것들은 거절된 것이 어떤 의미를 담았는지는 이미 살폈다.
이 40장이 내적 의미에서 취급하는 주제는 자연 평면의 외면의 것들이 종속됨에 대한 것이다; 이것이 종속을 만드는 이유는 자연 평면의 내면의 것들에게 평면(plane)이 되어주어 섬김을 하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그 이유가 이런 종속됨이 만들어지지 않으면, 내면의 진리들과 선들, 결과적으로 천적, 영적인 것을 지니는 내면의 생각들이 표현될 수 있는 바탕을 가질 수 없기 때문이다; 내면의 것들은 외면의 것들을 얼굴, 또는 거울로서 삼아 표현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종속됨이 없을 경우, 인간은 내면의 생각을 가질 수 없다; 아니, 그는 어떤 신앙도 가질 수 없다; 그 이유가 덜 납득하든 확연히 납득하든 납득 자체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내면의 것에 대한 지각은 더 더욱 없다. 자연 평면이 종속됨을 만드는 유일한 것, 그리고 자연 평면을 상응함쪽으로 환원되게 하는 유일한 것은 순진이 있는 선이다; 이 선이 말씀에서 “선행(charity)”이라 불리운다. 감각적인 것들과 기억 속의 지식들은 이 선이 흘러가도록 할는지 모르는 유일한 수단들이고, 이 수단들에서 이 선은 형체를 가지고 자체를 표출한다, 그리고 모두 각각의 선용(use)을 위하여 자체를 펼쳐 놓는다(unfold); 그러나 이 선 없는 기억 속의 지식들, 심지어는 신앙의 진리들 자체일지라도 더러운 것이 다닥다닥 들러붙은 비늘(scale)들, 필히 제거해야 하는 비늘 같은 수준일 뿐이다. 그러나 어떻게 기억 속의 지식들과 신앙의 진리들을 수단으로 선을 통하여 자연 평면의 외면의 것들이 질서 안으로 환원되고, 내면의 것들과 상응 관계를 가지는 가에 대하여 옛적부터 있어왔던 납득함으로부터 오늘날에는 멀어져버렸는지에 대한 이유는 몇 가지가 있다; 가장 중요한 이유는 교회 내부에 선행이 더 이상 있지 않은 까닭이다; 그 이유는 교회의 마지막 때이기 때문, 그러므로 이런 사항들을 알려는 애착이 없기 때문이다. 이렇기에 설사 감각의 것 넘어, 또는 감각의 것 안쪽에 어떤 것이, 천사의 지혜가 거기에서 설명되고 있다 라는 말만 꺼내도 즉각 되돌아 오는 것은 방어적인 자세의 반감(aversion) 뿐이다. 자연 평면의 내면쪽에 있는 것이 내적 의미이고, 말씀의 내적 의미에 관한 것이 이제는 펼쳐지고 있기에, 얼마나 그 의미가 납득될지는 몰라도 여하간 선포되고 있다는 것은 틀림이 없는 엄연한 사실이다.

그리고 술 담당자들의 제 1 인 자는 요셉을 기억하지 않았다. 이는 자연 평면의 천적인 것들과의 결합은 모든 방법에서 아직은 있지 않았다를 의미한다. 이는 “요셉을 기억함”의 의미가 신앙을 받음이다로부터, 결과적으로 결합이다로부터 알려지는데, 그 이유는 결합이 신앙을 수단으로 결과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기억하지 않음”은 모든 방법(길, way)에서 아직은 결합이 있지 않았다를 뜻하게 된다; 그리고 술 담당자의 표현함이 지적 부분의 감각적인 것이다로부터; 그리고 요셉의 표현함이 자연 평면의 천적인 것이다로부터 알려진다.

그리고 그는 그를 잊었다. 이는 이동(removal)을 의미한다. 이는 “기억하지 않음”이 비 결합인 바, “잊음”의 의미는 이동함이다는 것이 알려진다; 그 이유가 이동함이 거행되는 이유는 비 결합에 따라서 이기 때문이다. 망각(oblivion)에 빠지는 것 역시 이동, 옮김, 제거됨과 거의 비슷한 지경이다. 이런 상황에 있는 것이 지적 부분에 종속되는 감각 속의 것들인데, 그 이유는 유지 존속된 것들이 결합된 것은 아니기 때문, 게다가 아직은 오류들로부터 완전 자유한 것도 아니기 때문, 더구나 순수해지는 만큼에서만 결합 역시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에 관하여는 다음 장에서, 즉 요셉을 기억하는 술 담당자의 고백에서 더 말해질 것이다.

**************************************

창세기 제 41 장

성경: 창세기 41장

1. 날들의 두 해의 끝으로부터 이었다 그리고 바로가 꿈을 꾸었다, 그리고 바라보니 그는 강 가에 서있었다.
2. 그리고 보니 강으로부터 바라보기에 아름답고 살 안에 지방이 많은 일곱 암소가 올라왔다. 그리고 그들은 사초가 무성한 곳에서 먹었다.
3. 그리고 보니 바라보기에 흉악하고 살 안이 얇은 또 다른 일곱 암소가 뒤따라 강에서 올라왔다. 그리고 강 둑 위 암소 곁에 서있었다.
4. 그리고 바라보기에 흉악하고 살 안이 얇은 암소가 바라보기에 아름답고 지방이 많은 일곱 암소를 먹어 치웠다. 그리고 바로는 깼다.
5. 그리고 그는 잠들었고, 두 번째로 꿈을 꾸었다, 그리고 보니 낟알로부터의 일곱 이삭이 한 줄기에서 나왔는데, 지방이 많고 우량하였다.
6. 그리고 보니 동풍에 바싹 말리워지고 홀쭉한 일곱 이삭이 그것들 뒤를 따라 튀어나왔다.
7. 그리고 그 홀쭉한 이삭들이 일곱 지방이 많고 알찬 이삭을 삼켜버렸다. 그리고 바로는 깼다, 그리고 보니 그것은 꿈이었다.
8. 그리고 아침이 되자 그의 영혼은 번민했다. 그리고 그는 사람을 보내서 이집트의 마술사, 그리고 현인들을 모두 불렀다. 그리고 바로는 그들에게 그의 꿈을 말했다. 그리고 바로에게 이런 것들을 해석해주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9. 그리고 술 담당자들의 제 1 인 자가 바로에게 말했다, 말하기를 저는 오늘에야 내 죄를 기억합니다.
10. 바로께서 종들에게 화를 내셨습니다, 그리고 저를 수비대장의 구치소에 처넣으셨는데, 나와 빵 담당자들의 제 1 인 자도 함께 입니다.
11. 그리고 우리는 같은 날 밤에 꿈을 꾸었는데, 나와 그 입니다. 우리는 각자의 꿈의 해석에 따라서 각기 꿈을 꾸었습니다.
12. 그리고 거기서 우리와 함께 히브리 소년이 있었는데 그는 수비대의 제 1 인 자의 종이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에게 말했습니다,
13. 그리고 그는 우리에게 우리의 꿈들을 해석해 주었습니다. 그는 우리의 꿈에 따라서 각각에게 그는 해석을 했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흐른 뒤 그가 우리에게 해석했던 그대로 되었습니다. 그는 나를 복직 시켰고 그는 그를 매달았습니다.
14. 그리고 바로는 (사람을) 보내서 요셉을 불렀다, 그리고 그들은 그를 구덩이로부터 황급히 데려왔다. 그리고 그는 깎고 그의 옷을 갈아 입었다, 그리고 바로에게 왔다.
15. 그리고 바로가 요셉에게 말했다, 나는 꿈을 꾸었다, 그리고 그것을 해석하는 자가 아무도 없다. 그리고 내가 너에 관해 들은즉, 말하기를, 너는 꿈을 듣고 그것을 해석한다더라.
16. 그리고 요셉이 바로에게 대답했다, 말하기를, 내가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바로에게 평화를 대답하실 것입니다.
17. 그리고 바로는 요셉에게 이야기를 했다, 내 꿈에서 바라보니 나는 강둑 옆에 서있었다.
18. 그리고 바라보니 강으로부터 살 안에 지방이 많고 형체에서 아름다운 일곱 암소가 올라왔다, 그리고 그들은 사초가 무성한 곳에서 먹고 있었다.
19. 그리고 바라보니 일곱 다른 암소가 그것들 뒤를 따라 올라 왔는데, 그것들은 야위고 형체에서 흉측했는데, 나는 이렇게 불량한 것을 이집트의 모든 토지에서 본 적이 없었다.
20. 그리고 야위고 흉한 암소가 처음의 지방이 많은 일곱 암소를 먹어 치웠다.
21. 그리고 그것들은 그것들의 뱃속으로 왔다, 그리고 그것들이 그것들의 뱃속에 왔는지는 알려지지 아니했다. 그리고 그것들의 외모는 처음 같이 나빴다. 그리고 나는 깼다.
22. 그리고 나는 꿈에서 보았다, 그리고 바라보니 알차고 우량한 일곱 이삭들이 한 줄기에서 나왔다.
23. 그리고 바라보니, 동풍에 말리워지고, 야위고 시든 일곱 이삭들이 그것들 뒤를 따라 튀어나왔다.
24. 그리고 야윈 이삭들이 우량한 일곱 이삭들을 삼켰다. 그리고 나는 이것을 마술사들에게 말했다, 그리고 그것을 나에게 말해주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25. 그리고 요셉은 바로에게 말했다, 바로의 꿈은 하나 입니다. 하느님께서 하시려는 것을 그분은 바로에게 보여주셨습니다.
26. 일곱 우량한 암소는 일곱 해입니다, 그리고 일곱 우량한 이삭들은 일곱 해입니다. 그 꿈은 하나 입니다.
27. 그리고 그것들 뒤를 따라 나온 일곱 야위고 흉칙한 암소는 일곱 해입니다, 그리고 동풍에 말리워진 텅빈 일곱 이삭들은 흉년의 일곱 해입니다.
28. 이것을 내가 바로에게 이야기를 했다 라는 말입니다. 하느님께서 하시는 것을 그분께서는 바로가 보겠끔 하신 것입니다.
29. 바라보니 이집트 전역에 큰 풍년의 일곱 해가 올 것입니다.
30. 그리고 그것 뒤를 따라 흉년의 일곱 해가 발생할 것입니다. 그리고 생산의 모든 풍부함이 이집트 전역에서 잊혀질 것입니다. 그리고 이 기근이 이 토지를 사를 것입니다.
31. 그리고 산출물의 풍부함도 그 뒤를 이은 기근으로 알려져 있지 않을 것입니다. 그 이유는 엄청난 비통함이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32. 그리고 이 꿈이 바로에게 두 번 있어진 이유는 이 말이 하느님에 의해 설립되었고 하느님께서는 이 일을 지체하심 없이 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33. 그리고 이제 바로로 하여금 총명하고 슬기로운 사람을 찾아서, 그 자로 하여금 이집트의 토지 위에 놓게 하십시오.
34. 바로로 하여금 이렇게 하게 하십시오, 그리고 그로 하여금 이 토지의 통치자들을 임명하게 하십시오, 그리고 생산물이 풍성한 일곱 해에 이집트 토지로부터의 오분의 일을 가져오게 하십시오.
35. 그리고 그들에게 장차 올 이 좋은 해들로부터의 모든 양식을 모으게 하십시오, 그리고 도성들에 양식을 위해 바로의 손 아래 곡식을 쌓으십시오, 그리고 그들에게 그것을 지키게 하십시오.
36. 그리고 이 양식은 이집트의 토지에 있게 될 기근의 칠 년에 맞서는 토지에 비축을 위하여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 토지는 기근에 절단되지 아니할 것입니다.
37. 그리고 이 말은 바로의 눈에서, 그리고 그의 종들의 눈에도 좋게 보였다.
38. 그리고 바로는 그의 종들에게 말했다, 우리가 하느님의 영을 담고 있는 이런 사람을 발견할 수 있을까?
39. 그리고 바로는 요셉에게 말했다, 하느님께서 너에게 이 모든 것을 알게 해준 것을 보면, 너보다 더 총명하고 슬기로운 자는 아무도 없다.
40. 너는 내 집 위에 있을 것이다. 그리고 네 입술에 모든 나의 백성이 키스할 것이다. 내가 너보다 더 위대한 것은 오직 이 왕좌에서 일 뿐이다.
41. 그리고 바로가 요셉에게 말했다, 보아라, 나는 이집트 모든 토지 위에 너를 앉힌다.
42. 그리고 바로는 자기 손에서 반지를 빼내어, 그것을 요셉의 손에 끼웠다. 그리고 그에게 고운 아마포 옷을 입혔다, 그리고 그의 목에 금 목걸이를 걸었다.
43. 그리고 그는 자기가 가진 두 번째 병거를 그가 타게 했다. 그리고 그들은 요셉 앞에서 물렀거라 하고 외쳤다. 그리고 그는 이집트의 모든 토지 위에 그를 앉혔다.
44. 그리고 바로는 요셉에게 말했다, 나는 바로이다, 그리고 너 없이는 누구도 이집트의 모든 토지에서 손이나 발을 들 자가 없으리라.
45. 그리고 바로는 요셉의 이름을 사브낫-바네아 라고 불렀다. 그리고 그에게 온의 성직자 보디베라의 딸 아스낫을 여인으로 주었다. 그리고 요셉은 밖으로 나가 이집트의 토지를 지배했다.
46. 그리고 요셉이 이집트의 왕 바로 앞에 섰을 때 삼십 세의 아들이었다. 그리고 요셉은 바로 앞으로부터 나가서, 이집트의 모든 토지를 통과했다.
47. 그리고 땅은 산출이 풍성한 칠 년에 수확물을 만들었다.
48. 그리고 그는 이집트의 토지에 있었던 칠 년의 모든 양식을 거두어 들였다. 그리고 도성의 들판의 양식을 도성 안에 놓았는데, 그는 도성 둘레에 있는 것들을 도성의 한가운데에 쌓았다.
49. 그리고 요셉은 곡식을 바다의 모래 만큼, 그것을 초과할 정도로 너무 많아 그는 세기를 중단하였는데, 그 이유는 그것이 끝이 없었기 때문이다.
50. 그리고 요셉에게 두 아들이 태어났는데 흉년이 오기 전이었고, 이들은 온의 성직자 보디베라의 딸 아스낫이 그에게 낳아주었다.
51. 그리고 요셉은 큰 아들의 이름을 므낫세라 불렀다. 그 이유가 하느님께서 나로 나의 모든 고뇌, 그리고 모든 나의 아버지의 집을 잊게 하셨기 때문이다.
52. 그리고 둘째의 이름을 그는 에브라임이라 불렀다. 그 이유가 하느님께서는 내가 괴로워하던 토지에서 나로 열매가 많이 열리게 만드셨기 때문이다.
53. 그리고 이집트의 토지에 있었던 풍년의 칠 년이 끝났다.
54. 그리고 기근의 칠 년이 오기 시작했다, 요셉이 말한 그대로였다. 그리고 모든 토지에 기근이 있었다. 그리고 이집트의 모든 토지 안에는 빵이 있었다.
55. 그리고 이집트의 모든 토지도 기근에 시달렸다. 그리고 백성들은 빵 때문에 바로에게 애원했다. 그리고 바로는 모든 이집트 사람에게 말했다, 요셉에게 가라. 그가 너희에게 말하는 것을 행하라.
56. 그리고 기근이 이집트의 모든 얼굴을 덮었다, 그리고 요셉은 모든 창고를 열었다, 그리고 이집트에게 팔았다. 그리고 기근은 이집트의 토지에서 더욱 심해졌다.
57. 그리고 모든 땅이 (양식을) 사기 위하여 이집트로, 요셉에게 왔다. 그 이유는 기근이 모든 땅에서 심각해졌기 때문이다.

각 절의 내적 의미

1-4절. 날들의 두 해의 끝으로부터 이었다 그리고 바로가 꿈을 꾸었다, 그리고 바라보니 그는 강 가에 서있었다. 2 그리고 보니 강으로부터 바라보기에 아름답고 살 안에 지방이 많은 일곱 암소가 올라왔다. 그리고 그것들은 사초가 무성한 곳에서 먹었다. 3 그리고 보니 바라보기에 흉악하고 살 안이 얇은 또 다른 일곱 암소가 뒤따라 강에서 올라왔다. 그리고 강 둑 위 암소 곁에 서있었다. 4 그리고 바라보기에 흉악하고 살 안이 얇은 암소가 바라보기에 아름답고 지방이 많은 일곱 암소를 먹어 치웠다. 그리고 바로는 깼다.

날들의 두 해의 끝으로부터 이었다. 이는 결합한 상태 이 후를, 즉 앞 40장에서 살핀 것인, 자연 평면의 외면으로부터의 것이 자연 평면의 내면으로부터의 것과 결합한 상태 이 후를 의미한다. 이는 “날들(days)의 두 해,” 또는 “두 해의 때(time)”의 의미가 결합의 상태들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 이유가 “2”가 결합을 의미하기 때문, 그리고 “해, 년(year)”은 상태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2”가 결합을 의미하는 이유는 영계에 있는 일반적, 특수적 모든 것, 결과적으로 자연계의 모든 것은 두 가지 것, 즉 선과 진리- 행동하는 것과 흘러드는 것으로 선에, 그리고 경험하고(suffer) 받는 것으로 진리에 관련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두 세계의 것들이 이 둘에 관련을 가지기에, 둘이 결혼의 어떤 형상을 수단으로 하나를 만들지 않으면 아무것도 생산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결합이 “2”에 의해 의미된다.
결혼의 어떤 형상이 자연계의 모두와 각각 안에, 자연계의 세 왕국 안에 있는 바, 결혼의 어떤 형상 없이 자연계 안에서 세상 밖으로 출시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자연계에서 어떤 것이 출시되기 위하여서는 열과 빛이 있어야만 한다; 자연계의 열은 영계에 있는 사랑의 선에, 빛은 신앙의 진리에 상응된다. 이 둘, 열과 빛이 어떤 것을 생산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하나로 행동하여야만 한다; 만일 하나로서 행동하지 않으면, 겨울철의 열과 빛처럼 아무것도 생산되지 않는다. 이것이 영적으로 진리이다는 것은 인간의 경우에서 분명해진다. 인간은 두 능력을 가지고 있다. 의지력과 이해력인데. 의지는 영적 열, 즉 사랑과 선행의 선을 받도록; 이해력은 영적인 빛, 즉 신앙의 진리를 받도록 만들어져 있다. 이 둘이 인간 안에서 하나를 만들지 않으면, 아무것도 생산되지 않는다; 그 이유가 신앙의 진리 없는 사랑의 선은 결정하지 못하고, 또는 어떤 품질이라고 결정되지도 않는다, 그리고 사랑의 선이 없는 신앙의 진리는 어떤 것을 결과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천국의 결혼이 인간 안에서 있어질는지 모르기 위하여, 또는 인간이 천국의 결혼 안에 있을는지 모르기 위하여, 이 둘은 한 인물 안에서 반드시 하나를 만들어야 한다. 이 이유 때문에 고대인들은 세상 안의 모든 것, 그리고 인간 안에 있는 모든 것을 결혼들에 비교했다. 위의 설명으로부터 왜 “2”가 결합을 의미하는지 분명해졌을 것이다.

그리고 바로가 꿈을 꾸었다. 이는 자연 평면에 관련하여 설비된 것을 의미한다. 이는 바로의 표현함이 자연 평면이다로부터; 그리고 “꿈을 꿈”의 의미가 장차 올 어떤 것에 대한 예보, 고로 최고 의미에서 예견이다로부터; 그리고 이것이 예견, 또는 미리 봄인 바, 이것은 섭리, 또는 설비인 것도 되는데, 마치 이것 없이 저것도 없는 경우와 같다. 그 이유가 섭리는 영원까지의 계속됨 안에서의 상태를 중요시하기 때문, 이것은 미리 보지 않으면 설비되어질 수가 없다. 현재인 것을 위해 설비를 만들되, 장차 올 것을 미리 보지 못하면, 따라서 현재 동안 미래를 설비하지 않으면, 이는 목적 없이, 질서 없이, 결과적으로 지혜와 총명 없이 인 바 , 고로 신성으로부터가 아니다가 되고 말 것이다. 섭리는 선이라 단언되나, 예견은 선이 아닌 것으로부터 이다고 단언된다. 예견이 선을 서술할 수 없는 이유는 선은 신성 안에 있기 때문, 그리고 신성 자체로부터 신성에 따라서 존재 안으로 와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견은 선이 아닌 것, 그리고 악인 것을 서술할 수 있다; 그 이유가 이것은 신성의 바깥에서 존재 안으로 오기 때문이다, 그리고 신성에 반대되는 다른 이들(것들)로부터 이다. 고로 섭리는 선으로부터 있는 것을 말하는 바, 영적 평면의 천적인 것과 자연 평면의 결합을 두고 말해진다; 이것이 이 41장에서 취급된다; 그러므로 “꿈을 꿈”에 의해 여기서 설비된 것이 의미된다.

그리고 보니 그는 강가에 서있었다. 이는 경계선으로부터 경계선까지를 의미한다. 이는 “강”, 여기서는 이집트의 강, 또는 나일 강의 의미가 경계선(bounadary)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강”이 경계선을 의미하는 이유는 큰 강들, 즉 유프라테스, 요단, 그리고 나일 강, 그리고 더욱이 바다는 가나안의 토지의 가장 먼 경계선들에 해당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가나안의 토지 자체가 주님의 왕국을 표현했는 바, 그러므로 그 토지 안의 모든 것들이 이 왕국에 있는 다양한 것들을 표현했는 바, 결과적으로 강들은 이 왕국의 가장 먼 한계들, 경계선들을 표현했다. 나일, 또는 이집트의 강은 지적 부분에 종속하는 감각적인 것들, 고로 지적 부분으로부터 파생되는 기억 속의 지식들을 표현했다; 그 이유가 이것들은 주님의 왕국 속의 영적인 것들의 최말단의 것들이기 때문이다. 경계선으로부터 경계선까지가 여기서 의미된다고 말한 이유는 “강가에 서있었다”는 당사자가 바로(왕)이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바로에 의해 일반적 측면에서의 자연 평면이 표현되기 때문이다. 내면의 것으로부터 최말단까지 있는 것을 바라보는 것이 최말단 옆에 서있음에 의해 표현된다; 이때 경계선으로부터 경계선까지를 바라는 것이기 때문, 그러므로 내적 의미에서 본문에 의해 위와 같이 의미되는 것이다.

보니 강으로부터. 이는 경계선에서를 의미한다. 이는 “강”의 의미가 경계선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강으로부터”가 경계선에서를 표시하는 이유는 그것들(암소, 이삭)이 거기서 나타났기 때문이다.

일곱 암소가 올라왔다. 이는 자연 평면으로부터의 진리들이 있었다를 의미한다. 이는 “암소(kine)”의 의미가 자연 평면의 진리들이다로부터 (아래에서 설명한다); 일곱이 있었다고 말해지는데, “7”은 거룩한 것을 의미하는 바, 이 주제에 거룩함이 추가되고 있다. 거룩함이 추가되는 이유는 지금 취급되는 주제가 영적 평면과 결합을 수단으로 더 발전된 자연 평면의 재 출생이기 때문이다. “암소들(kine)”, “어린 암소들(heifers)”이 자연 평면의 진리들을 의미하는 것은 “수소들(oxen),” “(거세한) 어린 수소들(bullocks)”이 자연 평면의 선들을 의미한다는 것으로부터 알는지 모른다; 그 이유가 말씀 어디에서 이든 남성(수컷, male)은 선을 의미하고, 여성(암컷)은 진리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으로는(다른 세상에서는) 남성이 진리를, 여성이 선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암소(cow)”는 자연 평면의 진리를 의미하는데, 그 이유는 “수소”가 그 진리의 선을 의미하기 때문에서 이다.
이런 의미함의 원인은 영들의 세계에서의 표현들로부터 이다; 그 이유가 천국에 있는 이들이 애착들에 관하여 이야기를 할 때, 영들의 세계에서 애착의 어떤 종류에 상응하는 짐승들이 표현되어지기 때문이다. 이것은 나로 하여금 보도록 자주 주어졌었다, 그리고 나는 그것이 왜 있었는지에 궁금했었다; 그러나 짐승들의 생명들이 애착밖에 더 아니다는 것이 지각되어졌다, 그 이유가 그들은 이성 없이 본능으로 자기들의 애착을 따르기 때문, 그리하여 그것 자신의 사용쪽으로 각 애착을 운반해가기 때문이다. 짐승들이 땅 위에 나타나는 것은 이런 애착들에 걸맞은 육체적 형체들밖에 더 아닌 셈이다. 그러므로 (다른 삶에서) 애착들 만에 관하여 대화를 할 때, 이런 애착의 최말단 형체들은 이런 짐승들의 육체적 형체들과 비슷하게 나타는 것이다; 그 이유가 이런 애착들은 그것들 각각에 상응하는 것들 외의 어떤 다른 것들로 입혀질 수가 없기 때문이다. 나는 세상 어느 곳에도 존재하지 않았던 이상한 짐승, 즉 알려지지 않은 형체들이고 혼합된 애착들의 형체들로부터의 이상한 짐승들을 보았던 적이 있었다.
이것이 말씀에서 “짐승들”에 의해 애착들이 의미되었는지에 대한 이유이다; 그러나 무슨 애착들인지는 내적 의미로부터서만 나타날 뿐이다. “수소들”에 의해서는 자연 평면의 선이 의미된다는 것에 대하여는 이미 인용했던 구절들로 알았을 것이다, 그리고 “암소들”에 의해서는 자연 평면의 진리들이 의미되는 것도 암소가 등장하는 구절로부터 알게 된다; 예를 들면, 이. 11:7; 호. 4:16; 암. 4:1 등등이다; 또한 이스라엘의 아들들을 깨끗해지게 만드는 분리함의 물을 만드는데 사용될 재를 만듦에서 이다, 즉 진영 밖에서 붉은 암소를 태우되, 거기에 삼나무, 우슬초, 두 번 물들인 진홍색 (실)을 (함께 태워) 재를 준비했다 (민. 19:2-11). 이런 준비 과정의 구절이 내적 의미에 의해 열려졌을 때, “붉은 암소”가 불결했었던 자연 평면의 진리가 의미되었다는 것, 그리고 이 암소가 태워짐을 수단으로, 또는 “삼나무,” “우슬초,” “두 번 물들인 진홍색 실”에 의해 의미된 것들을 수단으로 하여 깨끗해지게 만들어진다는 것이 보여진다; 이렇게 하여 만들어진 “물”은 순수해짐의 수단들을 표현하고 있다.

바라보기에 아름답고. 이는 신앙으로부터 있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아름다움”과 “바라보다”의 의미로부터 알게 된다. 영적인 아름다움은 내면의 진리에 애착함이다, 그리고 영적인 바라봄은 신앙이다; 그러므로 “바라보기에 아름답다”는 신앙의 진리에 애착함이 의미된다. 영적인 아름다움이 내면의 진리에 애착함인 이유는 진리가 선의 형체이기 때문이다. 천국에서 신성으로부터 있는 선 자체는 천사들로 생명을 가지게 한다; 그러나 천사들의 생명의 형체는 그들의 선으로부터 있는 진리들을 수단으로 주어진다. 그럼에도 아름다움은 (단순히) 신앙의 진리에 의해 생산되지 않고 선으로부터 있는 신앙의 진리 내부에 있는 애착 자체에 의해서 이다. 만일 신앙의 진리만으로부터 아름다움이 있다면, 이는 그림이나 조각의 수준이다; 그러나 선으로부터 있는 진리에 애착함으로부터의 아름다움은 천국의 사랑에 의해 생명이 불어넣어진 살아 있는 아름다움 이다; 이 아름다움이 얼굴로부터 빛을 발하는 사랑 또는 애착으로부터 천사들은 말로 다 말해질 수 없는 아름다움에서 나타난다; 이들의 얼굴로부터서는 신앙의 진리를 통하여 사랑의 선이 빛을 발한다, 이것은 시각 앞에서 나타나짐, 뿐만 아니라 그들로부터 와지는 기운들로부터 지각되어진다. 그들이 이로부터 아름다움을 가지는 이유는 보편적인 천국이 웅대한 사람이고, 인간 안의 모든 것은 일반적, 특수적 모든 측면에서 웅대한 사람과 상응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랑의 선 안에 있고, 이 선으로부터 신앙의 진리 안에 있는 자는 천국의 형체 안에 있고, 천국이 존재하는 아름다움 안에 있고, 거기에는 주님으로부터의 신성이 모든 것 안의 모두가 되시어 계신다. 그러므로 지옥에 있는 이들, 선과 진리에 맞서 있는 그들은 소름끼치게 추하다; 그리고 천국의 빛 안에서 이들은 인간들로 나타나지 않고 괴물로서 이다. 영적으로 바라본다는 것이 신앙인 이유는 내적 의미에서 “바라보는(look)” 것과 “보는(see)” 것이 이해하는 것이기 때문, 더 나아가, 내면의 의미에서는 신앙을 가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살 안에 지방이 많은. 이는 선행으로부터 있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지방, 살찐(fat, fatness)”의 의미가 천적인 것이다로부터, 그리고 사랑과 선행으로부터 있는 선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리고 “살”의 의미가 주님으로부터 선을 수단으로 살아 있게 된 의지이다로부터, 고로 사랑과 선행으로부터 있는 선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로부터 “살 안에 지방이 많은”에 의해서는 선행으로부터 있는 것이 의미되는데, 그 이유는 “바라보기에 아름답다”에 의해 신앙으로부터 있는 것이 의미되기 때문이다. 이런 방법에서, 자연 속의 진리들이 “암소”에 의해 의미되고, 암소들의 형체와 본체를 수단으로 묘사된다- 즉 신앙의 진리들의 형체는 신앙 속에 있는 것으로, 그것의 본체는 선행 속에 있는 것으로 구성되고 있다는 말이다. 이런 내용들은 글자 의미에서는 나타나지 않는다.

그리고 그것들은 사초가 무성한 곳에서 먹고 있었다. 이는 가르침(instruction)을 의미한다. 이는 “먹이를 줌(feed),” 같은 말로 “풀을 뜯게 함(pasturing)”이 가르쳐지는 것이다로부터; 그리고 “사초 식물(sedge),” 또는 강가 근처에서 마구잡이로 자라 키가 큰 풀들(갈대 등등)이 자연적 인간 속의 기억 속의 지식들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풀(grass)” 또는 “초본(herbage)”이 이런 지식들을 표시한다는 것은 말씀으로부터 명료해진다. 그러므로 “사초가 무성한 곳에서 먹는” 것은 기억 속의 지식들 안에서 가르쳐지고, 그리고 이런 지식들을 수단으로 선과 진리에 관하여 배우는 것이다; 그 이유는 기억 속의 지식들은 수단들이기 때문, 마치 거울과 같은데, 이 안에서 내면의 것들의 형상이 그 자체를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형상 안에서, 마치 거울에서 같이 다시, 신앙 속의 선들과 진리들이, 결과적으로 천국 속에 있는 것들, 영적인 것들이라 불리우는 것들이 되튀겨오거나 표현되어 있거나 한다; 그러나 이 형상, 더 내면적인 바, 선행으로부터의 신앙 안에 있지 않으면 누구에게도 나타나지 않는다. 이것이 진짜 의미에서 있는 “사초가 무성한 곳에서 먹다”의 의미이다.
“먹이는” 것, 즉 (풀을) 뜯는 것이 가르쳐짐을 표시한다는 것은 이런 단어가 등장하는 아래 구절로부터 분명해진다. 이사야서에서:
그때 그분은 너희가 토지에 뿌린 씨로부터 비를, 토지의 증가분으로부터 빵을 주실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살찌고 풍부하다, 그 날에 너희 가축들이 넓은 풀밭에서 먹을 것이다 (이. 30:23);
위에서 “가축(cattle)”은 선과 진리 안에 있는 이들을 표시한다; “넓은 풀밭에서 먹는 것”은 가르침이 풍부하게 있다를 표시한다.
이사야서에서:
나는 백성의 언약을 위하여 너(Thee)를 주었었는데, 토지를 회복하기 위하여, 황폐된 상속 재산을 분배하기 위하여, 묶인 자에게, 나가라 하고 말하기 위하여; 어둠에 있는 그들에게 너희를 밝히 알게 하라 하기 위하여. 그들은 길에서 먹을 것이고, 그리고 모든 언덕 위에서 그들의 풀밭이 있을 것이다 (이. 49:8, 9);
이는 주님의 오심에 관하여 말해진다, “길들에서 먹는다”는 진리들 안에서 가르침이 있다; “풀밭”은 가르침 자체를 표시한다. 예레미야서에서:
내 풀밭의 양떼를 흩으리고 파괴하는 목자들에게 화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나의 백성을 먹이는 목자들에 맞서 이스라엘의 하느님 여호와께서 말하셨었다 (예. 23:1, 2);
“목자들”은 가르치는 이들, “양떼”는 가르침을 받는 이들을 표시한다; 고로 “먹이는” 것은 가르치고 있는 것을 표시한다.
선생들을 “목자들”, 배우는 자들은 “양떼들”이라 일컬은 것은 관습적 언어로 자리매김되어 있다. 또한 “먹인다” 라고 말하는 방식은 설교에서, 또는 말씀으로부터의 교리로부터 가르침에서 습관적으로 일컬어진다; 이런 습관적 말투는 비교함에 의해 생겨난 말이지, 의미함으로부터 와진 말은 아니다. 즉 말씀에서 의미했기에 와진 말은 아니다는 말이다. “먹이다”가 그것의 의미로 말씀에서 말하여지는 이유는 말씀으로부터의 교리 또는 가르침이 천국에서 말하여질 때, 영적인 것들이 자연 평면의 것으로 나타나는 곳인 영들의 세계에서는 푸른 풀밭이, 초본, 꽃들이, 양떼들과 더불어 시각에서 표현되어지기 때문이다; 게다가 천국에서 말하여지는 말씀으로부터 교리나 가르침에 따라 다양하게 나타나기 때문이다.
예레미야서에서:
나는 이스라엘을 그의 주택으로 도로 데려올 것이다, 하여 그는 갈멜과 바산에서 먹여질는지 모른다; 그리고 그의 혼은 에브라임과 길르앗 산에서 충분히 만족될 것이다 (예. 50:19);
“갈멜과 바산에서 먹여지는 것”은 신앙의 선들과 선행의 선들 안에서 가르침이 있을 것을 표시한다. 다시:
시온의 딸로부터 모든 그녀의 영예는 나갈 것이다, 그녀의 제 1 인 자들은 숫사슴들 같이 되어질 것이다, 그들은 풀밭은 찾지 못할 것이다 (애. 1:6).
에스겔서에서:
나는 그들을 좋은 풀밭에서 먹일 것이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높은 산 위에 그들의 우리들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좋은 우리에서 누울 것이다, 그리고 살찐 풀밭에서 그들은 이스라엘의 산들에서 먹을 것이다 (겔. 34:14).
호세아서에서:
이제 여호와께서 넓음에서 있는 양 같이 그들을 먹이실 것이다 (호. 4:16);
“넓음에서 그들을 먹이는 것”은 진리들 안에서 가르치는 것을 표시한다. 미가서에서:
너 베들레헴 유브라데여, 너로부터 이스라엘의 통치자일 그분이 나에게 출시되실 것이다. 그분은 여호와의 강함 안에서 서계시고 먹이실 것이다 (미. 5:2, 4).
다시:
너의 막대를 가지고 너의 백성을 먹이라, 홀로 거주하는 너의 상속분의 양떼, 그들로 바산과 길르앗에서 먹게 하라, 시대의 날들에서 같이 이다 (미. 7:14).
스바냐서에서: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은 먹여지고 쉼이 있을 것이며, 두렵게 만들 자 아무도 없다 (습. 3:13).
다윗서에서:
여호와는 나의 목자이시다, 초본의 풀밭에서 그분은 나를 눕게 만드시고, 쉼의 물들쪽으로 그분은 나를 인도하신다 (시. 23:1, 2).
다시:
우리를 만드셨었던 그분이시다, 그리고 우리가 아니다, 그분의 백성, 그리고 그분의 풀밭의 양떼; (다른 문서(성경 사본)에서 읽으면) 그러므로 우리는 그분의 것, 그분의 백성, 그리고 그분의 풀밭의 양떼이다 (시. 100:3).
계시록서에서:
왕좌의 한가운데에서 계신 어린 양이 그들을 먹이실 것이다, 그리고 그들을 물들의 살아 있는 원천들쪽으로 인도하실 것이다 (계. 7:17).
요한복음서에서:
나는 문이다; 나를 수단으로 만일 누군가가 들어간다면, 그는 구원될 것이다, 그리고 들어가고 나갈 것이다, 그리고 풀밭을 발견할 것이다 (요. 10:9).
다시: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말하셨다, 내 어린 양들을 먹이라; 그리고 두 번째, 내 양을 먹이라; 그리고 세 번째, 내 양을 먹이라 (요. 21:15-17).

그리고 보니 일곱 다른 암소가 그 뒤를 따라 강으로부터 올라 왔다. 이는 또한 경계선에 있는 자연 평면의 거짓들을 의미한다. 이는 “암소”의 의미가 자연 평면의 진리들이다로부터, 이로부터 반대적 의미에서는 자연 평면에 있는 거짓들이다; “강”의 의미가 경계선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것들이 경계선에서 있었다는 것은 “강으로부터 올라왔다”고 말해진 것으로부터 알게 된다; “올라 오는 것”은 외면의 것으로부터 내면의 것을 향하여 발전함을 서술한다.
이 주제가 어떤 경우인지 더 살피고 가야 할 것 같다. 그 이유는 이 주제가 뒤이어지는 구절들에서의 주제들이기 때문이다. 앞 장에서의 주제는 자연 평면에 있는 외면, 그리고 이 외면 안에 지적 측면의 계층에 속하는 것들과 의지 측면의 계층에 속하는 것들이 있다는 것, 그런데 전자는 받아졌고, 후자는 거절되었다. 지적 측면의 계층에 속하는 것들이 술 담당자에 의해, 의지 측면의 계층에 속하는 이들은 빵 담당자에 의해 표현되어졌다; 그리고 지적 측면의 계층에 속한 것들은 받아져서 그것들은 자연 평면의 내면에 종속되도록 만들어졌다. 이런 내용이 앞 장에서 취급되었는데, 이것은 자연 평면의 재출생의 첫 번째 이었다.
어쨌든 이 장에서 취급되는 주제는 영적 평면 속의 천적인 것들이 유지존속되어진 자연 평면의 것들, 즉 지적 부분으로부터의 것들 안으로 유입됨이다. 이 지적 부분의 것들이 여기서 “바라보기에 아름답고 살 안에 지방이 많은 암소”에 의해 의미되어 있다. 그러나 자연 평면이 지적 부분만 가지고 재출생될 수 없기에, 의지로부터의 것들 또한 있었다; 그 이유가 모든 것 안에서 지적 부분의 어떤 것이 반드시 있되, 동시에 의지 부분에서도 어떤 것이 있어야 그 어떤 것이 존재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의지 부분인 빵 담당자가 거절되었을 때, 새로운 것이 그 거절된 자리에 흘러들지 않으면 안된다. 이 새로운 의지는 영적 평면의 천적인 것으로부터 이다; 이 천적인 것이 자연 평면 안으로 유입됨이 이 장에서 취급되어진다. 이 상태에서 있는 자연 평면의 경우가 어떠한지가 이 장의 내적 의미에서 묘사되어져 있다; 즉 자연 평면에 있는 진리들이 거짓들을 통하여 추방되고 말았다는 것, 고로 자연 평면은 영적 평면의 천적인 것들쪽으로 남겨지고 말았다는 것, 이것이 좋은 암소가 악한 암소에 의해 먹어치움을 당함에 의해, 그리고 알찬 낟알이 텅빈 낟알에 의해 삼켜짐, 그리고 그 후에 요셉이 모든 이집트를 위하여 대비함에 의해 의미되어지고 있다; 그러나 이런 주제들은 주님의 신성한 자비로부터 뒤이어지는 각 구절들에서 말해질 것이다.
이런 의미들은 인간의 이해력의 빛에서 곤란함에 부닥치고 말 수밖에 없는 속성을 지니고 있다; 그 이유는 이런 사항들이 거듭남에 관한 비밀한 것들이고, 이것이 그 자체 무수하다 해도 인간은 그것의 어떤 하나도 거의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유아 시기로부터 세상에서의 마지막 시기, 그리고 그 이후 영원까지에서 선 안에 있는 인간은 매 순간 다시 태어나지고 있다, 이는 그의 내면 뿐만 아니라 외면을 총망라하여 다시 태어나지고, 이 태어나짐은 놀라운 과정들을 수단으로 한다. 이 과정들 대부분이 천사들의 지혜를 구성하고, 이것은 말로는 표현을 다할 수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게다가 이 지혜는 인간의 귀가 듣지 못하고, 눈은 보지 못하고, 어떤 인간의 생각 안으로 들어가지도 못한다. 말씀의 내적 의미가 이와 비슷한 것을 취급하고 있다, 고로 내적 의미는 천사의 지혜에 적합한 의미들이다; 그리고 내적 의미가 이 지혜로부터 글자 의미 안으로 흐를 때, 이 의미는 인간의 지혜로 개작되어진다, 그리고 그것에 의해서 감추인 방법 안에서 선으로부터 말씀의 진리들을 알고자하는 바램 안에 있는 이들에게 감명을 준다.

바라보기에 흉악하고. 이는 신앙으로부터 있지 않은 것을 의미한다. 이는 “바라보기에 아름답고”의 의미가 신앙으로부터 있는 것이다로부터, 고로 여기서의 “바라보기에 흉악하다”는 신앙으로부터 있지 않은 것을 의미한다.

살 안이 얇은. 이는 선행으로부터 있지 않은 것을 의미한다. 이는 “살 안에 지방이 많다”의 의미가 선행으로부터 있는 것이다로부터; 그러므로 이 구절에서 “살 안이 얇다”는 신앙으로부터 있지 않은 것을 표시한다, 그 이유가 위 둘은 반대적 의미를 지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강둑 위 암소 곁에 서있었다. 이는 그것들은 진리들이 있었던 경계선들에서 있었다를 의미한다. 이는 “강둑 위에서 …곁에 서있었다”의 의미가 경계선들에서 있음이다로부터 분명해진다; 그리고 “암소”의 의미가 자연 평면의 진리들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거짓들이 진리들이 있었던 경계선들에서 있었다는 것이 어떤 경우인지는 이어지는 아래 구절들에서, 특히 우리가 이집트 토지의 기근의 일곱 해, 이것들이 바라보기에 흉악하고 살 안이 얇은(thin) 일곱 암소와 동풍으로 말리워 홀쭉한(thin) 일곱 이삭으로 예보되고 의미된 것임을 살필 때 나타날 것이다.

그리고 바라보기에 흉악하고 살 안이 얇은 암소가 먹어 치웠다. 이는 신앙으로부터, 선행으로부터도 있지 않았던 거짓들이 추방했음을 의미한다. 이는 “먹어 치움”의 의미가 소비해버렸음 이다로부터; 여기서는 추방했다 인데, 그 이유는 자연 평면의 진리들이 살아 있게 만들어질 때까지, 또는 영적 평면의 천적인 것에 의해 거듭나질 때까지, 이 진리들은 거짓들에 의해 마치 추방당해진 듯하여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라보기에 흉악하다”에 의해 신앙으로부터 있지 않다 이다로부터; 그리고 “살 안이 얇다”에 의해 선행으로부터 있지 않다가 의미됨으로부터 알려진다.

바라보기에 아름답고 지방이 많은 일곱 암소. 이는 신앙으로부터 있고 선행으로부터도 있었던 자연 평면의 진리들을 의미한다. 이는 “암소”의 의미가 자연 평면의 진리들이다로부터; 그리고 “바라보기에 아름답다”의 의미가 신앙으로부터 있었음 이다로부터; 그리고 “지방이 많다”의 의미가 선행으로부터 있었음 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주제 자체에 주목하면, 진리들이 경계선들에서 거짓들에 의해 추방되었다는 것인데, 이는 모든 거듭남의 시작에서 거행된다는 것을 우리는 눈치채어야 할 것이다; 즉 인간 안으로 은근히 심어진 진리들은, 시작에서, 그 자체만 보면 참으로 진리들인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 진리들은 당사자 안에서 선과 결합이 있을 때까지 진리가 아닌 것이다. 결합이 있을 때, 그 선은 진리들을 진리들로 있도록 하여 준다. 선은 본질이고, 진리는 이 본질의 형체이다; 그러므로 시작에서 거짓들이 진리들 가까이 있다; 다시 말하면, 진리들이 있는 경계선에 거짓들 또한 있다는 말이다; 그러나 선이 진리들과 결합하는 순간, 거짓들을 줄행랑치고 만다. 이것은 다른 삶에서 실제로 벌어지고 있다, 거기서 거짓의 기운이 진리들 안으로 선이 유입됨에 따라 진리들에 그 자체가 응용된다; 즉 진리들 안으로 매우 조금의 선이 흘러들 때는 거짓들의 기운이 가까이 있다; 그러나 선의 유입이 많아지면, 거짓의 기운은 철수한다. 그리고 선이 진리들과 완전해지게 결합하면, 거짓의 기운 역시 완전하게 추방된다; 거짓의 기운이 가까이 있을 때, 이는 시작에서의 경우인데, 이 본문에서 같이, 진리들이 추방되어진 것처럼 여겨진다; 그러나 이 진리들은 한동안 그것들이 선으로 채워지는 곳인 내면에 밀려나 놓여 있다, 그리고 거기로부터 계속적으로 되돌려진다. 이것이 “일곱 암소”와 “낟알의 일곱 이삭”에 의해 의미되고, 더 나아가 “풍년의 일곱 해”와 “기근의 일곱 해”에 의해 의미된 것이다; 거듭남에 관해 아는 것이 없는 자, 인간의 내적 상태에 관해 아는 것이 없는 자는 이런 것들을 납득할 수 없다.

그리고 바로는 깼다. 이는 계발됨의 상태를 의미한다. 이는 “깨어남”의 의미가 계발됨이다로부터; 그리고 바로의 표현함이 자연 평면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러므로 “바로는 깼다”에 의해서는 자연 평면에서 계발됨의 상태를 의미함이 분명해진다. 계발됨에 의해 여기서는 영적 평면의 천적인 것, 고로 내부로부터의 일반적 계발됨이 의미된다. 내부로부터 흘러드는, 또는 와지는 계발됨은 마음의 보다 낮은 부분에 있는 일반적 측면에서 이다; 그러나 이것은 계속적으로 덜 일반적이 되어가고, 마지막으로 특수적이 되어진다; 이 마지막 때가 선으로부터의 진리들이 일반적인 것들 안으로 은근히 심어질 때의 경우이다; 그 이유가 선으로부터의 모두 각각의 진리는 빛을 발하고, 또한 계발해주기 때문이다. 이것은 방금 앞에서 말해졌던 사항들이기도 하다(5206항); 즉 진리들이 자연 평면으로부터 추방되었다는 것, 이는 자연 평면이 내부로부터 일반적 방식에서 계발되기 위하여서 이다; 그리고 이 후에 이 일반적 계발 또는 일반적 빛에서, 진리들은 그것들의 질서 안에 다시 놓여지고, 이것 때문에 자연 평면은 특수적인 방법에서 계발되어진다.
인간 안에서 영적인 것과 자연적인 것의 상응, 또는 그의 내적인 것과 그의 외적인 것의 상응은 이런 방법에서 결과되어진다; 그 이유가 진리들이 먼저 포획되고, 다음 마치 추방된 것처럼 있으나 추방된 것은 아닌 상태로, 그러나 떨어진 곳에 저장된 상태로 있기 때문이다; 이때 보다 낮은 것이 일반적 방식에서 보다 높은 것을 수단으로, 또는 외면의 것이 내면의 것을 수단으로 계발되어진다; 그리고 이 빛 안에서 진리들은 그것들의 질서에로 다시 놓여진다. 이것 때문에 거기 있는 모든 진리들은 그것의 일반적 측면의 형상들이 되어간다, 그리고 상응하고 있다. 더욱이 영계와 자연계 모두에서 거행되는 것들의 각각과 모두에서 일반적인 것이 먼저 다가와진다; 그 후에 덜 일반적인 것이, 그리고 마지막 특수적인 것(세부적인 것들, particulars)이 거기 안에 계속적으로 삽입된다. 이런 식의 삽입함, 또는 맞추어짐 없이, 어떤 것도 내재될 리 만무할 것이다; 그 이유가 어떤 일반적인 것 안에 있지 않은 것, 일반적인 것에 의존하지 않는 것은 무엇이든 사라지고 말기 때문이다.

5-7절. 그리고 그는 잠들었고, 두 번째로 꿈을 꾸었다, 그리고 보니 낟알로부터의 일곱 이삭이 한 줄기에서 나왔는데, 지방이 많고 우량하였다. 6 그리고 보니 동풍에 바싹 말리워지고 홀쭉한 일곱 이삭들이 그것들 뒤를 따라 튀어나왔다. 7 그리고 그 홀쭉한 이삭들이 일곱 지방이 많고 알찬 이삭을 삼켜버렸다. 그리고 바로는 깼다, 그리고 보니 그것은 꿈이었다.

그리고 그는 잠들었다. 이는 희미한 상태를 의미한다. 이는 “잠들다”의 의미가 희미한 상태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더 나아가 영적 의미에서 “잠”은 이 밖의 의미는 없다. 즉 “깨어있다(wakefulness)”가 명료한 상태밖에 더 이상의 의미는 없는 것과 같다; 그 이유가 진리들에서 희미한 상태일 때 영적으로 잠든 상태이고, 진리들이 명료함에 있을 때 영적으로 깨어 있는 상태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이 명료함의 수준에 따라 영들이 깨어 있고, 희미함의 수준에 따라 영들은 잠들어 있다. 이로부터 “잠듦”이 희미한 상태를 뜻함이 분명하다.

그리고 두 번째로 꿈을 꾸었다. 이는 설비되었음을 의미한다. 이는 “꿈을 꿈”의 의미가 설비되는 것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리고 보니 낟알로부터의 일곱 이삭이 한 줄기에서 나왔다. 이는 함께 연합한 자연 평면의 기억 속의 지식들을 의미한다. 이는 “이삭들(ears, spikes)”의 의미가 자연 평면에 속하는 기억 속의 지식들이다로부터(아래에서 살핀다); 그리고 “한 줄기에서”의 의미가 함께 연합된 것이다로부터; 그 이유가 그것들의 근원적 측면에서 한 줄기에 있는 것들이 함께 연합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삭들”이 기억 속의 지식들을 의미하는 이유는 “낟알(corn)”이 자연 평면의 선을 의미하기 때문, 그리고 이삭이 낟알로부터 있는 바, 기억 속의 지식들이 자연 평면의 선을 담는 그릇들이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일반적 측면에서 모든 진리들은 선을 담는 그릇들이다, 기억 속의 진리들도 그러한데, 그 이유는 이 지식들은 가장 낮은 진리들이기 때문이다. 가장 낮은 진리들, 또는 자연 평면의 외면으로부터의 진리들이 기억 속의 지식들이라 불리운다, 그 이유는 그것들이 인간의 자연 평면 안에, 또는 외적인 기억 안에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들 대부분이 대체로 세상의 빛 역할을 감당하기 때문, 이로부터 타인들에게 단어들의 형체를 수단으로, 또는 세상으로부터 있는 것과 그것의 빛으로부터의 것들을 수단으로 단어들로 형체화된 관념들에 의해 표출하고 표현하기 때문이다. 안쪽의 기억 안에 있는 것들, 어쨌든 그것들이 천국의 빛에 참가하는 만큼에서 기억 속의 지식들이라 불려지지 않고 진리들이라 불려진다. 여기서 “이삭들”에 의해 의미된 기억 속의 지식들은 교회의 기억 속의 지식들이다.
여기서 두 꿈들이 있는 이유, 즉 하나는 일곱 암소, 다른 하나는 낟알로부터의 일곱 이삭에 관한 꿈들이 있는 이유는 내적 의미에서 자연들, 즉 자연의 내면과 외면이 취급되고 이어지는 구절에서 그것 모두의 재출생이 취급되기 때문이다. “일곱 암소”에 의해서는 자연 평면의 진리들이라 불리우는 자연 평면의 내면 속의 것들이 의미되고(5198항); 그리고 낟알로부터의 일곱 이삭들”에 의해서는 기억 속의 지식들이라 불리우는 자연 평면의 외면 속의 진리들이 의미되고 있다.
내면과 외면의 기억 속의 지식들이 “유브라데 강과 이집트의 강으로부터의 이삭들”에 의해 의미되고 있다: 이사야서에서:
그 날에 여호와께서는 이집트의 강 조차에 이르는 강으로부터 이삭들을 흔드실 것이다, 그리고 너희는 서로서로 모여들 것이다, 너희 이스라엘의 아들들. 그리고 그 날에, 큰 나팔 소리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앗시리아의 토지에서 멸해지는 그들이 올 것이다, 그리고 이집트의 토지에서 내쫓긴 자들이 올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예루살렘의 거룩함의 산에서 자신들을 굽혀 여호와께 경배할 것이다 (이. 27:12, 13);
“앗시리아의 토지에서 멸해지는 자”란 내면의 진리들을 표시한다, 그리고 “이집트의 토지에서 내쫓긴 자”는 외면의 진리들 또는 기억 속의 지식들을 표시한다.
이와 같이 마가복음서에서 싹, 이삭, 낟알에 비교함은 기억 속의 지식들, 신앙의 진리들, 선행의 선들을 수단으로 인간이 재출생함을 포함하고 있다:
예수께서 말하셨다, 하느님의 왕국은 이와 같다, 인간이 땅위에 씨를 던질 때와 같다; 그 다음 자고 일어나고, 밤과 낮, 그가 모르는 동안 씨는 발아하고 성장한다. 그 이유가 땅이 그 자체 열매를 맺기 때문이다; 먼저 싹, 그 다음 이삭, 그 후 이삭 안에 낟알이다. 열매가 생산되어질 때, 그는 낫을 놓는다, 그 이유는 추수가 오기 때문이다 (미. 4:26-29);
싹, 이삭, 그리고 낟알에 비교되는 “하느님의 왕국”은 거듭남을 통하여 와지는 인간 안에 있는 천국이다; 그 이유가 거듭나아져 왔던 자는 자기 안에 하느님의 왕국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형상에서 하느님의 왕국 또는 천국이 되어간다. “싹”은 첫 번째의 기억 속의 지식이다; “이삭”은 싹으로부터 파생되는 진리에 관한 기억 속의 지식이다; “낟알”은 이 진리로부터 파생되는 선이다. 더 나아가 이삭을 줍는 것에 관한 법들이 제정되었다 (레. 19:9; 23:22), 그리고 이웃 (밭)의 서있는 낟알로부터 이삭을 따는 자유에 관한 것도 있다 (신. 23:25), 그리고 하느님께 공물을 바칠 때까지, 빵도, 볶아진 낟알도, 푸른 이삭도 먹지 못함에 관련한 법도 있다 (레. 23:14). 이런 구절들에서 “이삭들”에 의해 의미된 것이 표현되었다.

지방이 많고 우량한. 이는 신앙과 선행으로부터의 것들이 적용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이는 낟알로부터의 이삭들에 의해 의미된 기억 속의 지식들을 서술할 경우, “지방이 많다”의 의미가 신앙의 선을 받을 수 있는 것들이다로부터; 그 이유가 기억 속의 지식들은 그릇들이다, 그리고 “지방이 많음”이 기억 속의 지식들을 서술할 경우, 이것은 선행으로부터 신앙 속에 있는 것을 받음을 위해 적당함(꼭맞고 있음, fitness)을 의미한다로부터; 그리고 “우량한(good)”이 낟알로부터의 이삭들에 의미된 기억 속의 지식들을 서술할 경우, 이 지식들은 선행의 선을 받을 수 있다를, 결과적으로 이 기억 속의 지식들 안으로 선행으로부터의 것들이 적용될 수 있다를 의미함으로부터 알게 된다. “지방이 많다”는 신앙으로부터의 것들에, “우량한”은 선행으로부터의 것들에 관계되는데, 이는 말씀의 어느 곳에서이든지 변동 없이 일치하는 (용어들의) 사용법이라 말할 수 있다. 즉 두 개의 형용사가 하나의 것에 사용될 경우, 하나는 신앙으로부터의 것을, 또 하나는 선행으로부터의 것을 포함한다; 그리고 이렇게 포함하는 또 다른 이유는 말씀의 모두 각각의 세부적인 것들 안에 선과 진리의 결혼이 스며있기 때문이다. “지방이 많다”가 신앙으로부터의 것들을, “우량한(good)”이 선행으로부터의 것들을 의미하는 것은 이미 지나온 바로 앞 구절의 “바라보기에 아름답고(good) 살 안에 지방이 많은 암소들”의 경우와도 맥락을 같이 한다. 사실상 신앙의 것들과 선행의 것들이 적용, 응용될 수 있는 기억 속의 지식들은 매우 많은 편이다; 예를 들면, 좋은 의미에서 “이집트”에 의해 의미되는 교회의 기억 속의 모든 지식들 같은 경우이다; 결과적으로 상응들, 표현들, 의미들, 유입, 질서, 총명, 지혜, 애착들에 관한 진리들인 모든 기억 속의 지식들; 또한 자연 평면의 안쪽과 바깥쪽, 눈에 보일 수 있는 것과 보일 수 없는 것을 아우르는 모든 진리들이다;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이것들이 영적 진리들에 상응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보니 일곱 이삭들, 홀쭉하다. 이는 선용이 없는 기억 속의 지식을 의미한다. 이는 “이삭들”의 의미가 기억 속의 지식들이다로부터; 그리고 “홀쭉한”의 의미가 선용이 없는(no use) 것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여기서 “홀쭉하다(thin)”가 “알차다(full)”와 대비를 이루고 있는 이유는 “알차다, 가득하다, 충만하다” 안에는 선용이 있기에 와지는 상태, 결과적으로 선이 그 안에 있는 상태이기 때문, 즉 선한 모든 것은 선용으로 와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홀쭉하다”는 선용이 없다는 뜻을 담고 있다. 선용이 없는 기억 속의 지식들은 영광과 쾌락 외에 다른 목적을 지니지 않은 것들이다. 이런 목적들은 선용으로부터 있지 않다, 그 이유는 그것들은 이웃에 혜택을 주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동풍에 바싹 말리운. 이는 탐욕이 꽉 차 있음을 의미한다. 이는 “동풍으로 바싹 말려졌다”의 의미가 탐욕들의 불에 의해 소진되었다 이다로부터 분명해진다. 그 이유가 진짜 의미에서 “동풍”과 “동쪽”은 주님을 사랑함과 이웃을 향한 사랑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반대 의미에서 그것들은 자아를 사랑함과 세상을 사랑함, 결과적으로 악한 바램들과 탐욕들이다; 그 이유가 이것들이 이런 사랑에 연루되고 있기 때문이다. “불”이 여기서 이런 것들에 관련하여 암시되고 있는 바, 결과적으로 “바싹 말리운, 볶아진(parched)”이 홀쭉한 이삭들에 관련하여 서술되고 있다.
그 이유가 열과 빛에는 두 근원들이 있기 때문이다; 근원의 하나는 세상의 태양이고, 또 하나의 근원은 천국의 태양이신 주님이시다. 세상의 태양이 세상과 세상 속의 모든 것을 향해 열을 쏟아내는 것을 모르는 이는 아무도 없다; 그러나 천국의 태양이 전체 천국 안으로 열을 쏟는다는 것은 그리 알려져 있는 형편이 아니다. 그럼에도 (통상적 언어인 “열받친다, 가슴이 뜨거워진다, 감동된다”라고 말할 때, 뜻해지는 열,) 즉 인간 내부에도 (신체의 체온이 아닌) 또 다른 열이 있다는 것을 곰곰이 되생각한다면 이런 것을 알는지 모른다; 즉, 이 열은 세상의 열과 공통점이 없다는 것, 이 (정신적인) 열이야말로 생명의 원천에 속하는 열이다는 것이다. 이로 미루어 볼 때, 이 열은 세상의 열과는 다른 본성으로부터 있다는 것; 이 열은 살아 있으나 세상으로부터의 열은 살아 있지 않다는 것; 그리고 영적인 열에 생명이 있기 때문에 이것이 인간의 내면, 즉 그의 의지와 이해함에 불을 밝힌다는 것, 그리고 그에게 바라게 하고 사랑하게 하고 감명받아지게 해준다는 것까지 알 수 있을는지 모른다. 이런 이유로 바램, 사랑, 애착들은 영적인 열이고, 그렇게 불리우는 것이다. 그것들이 열인 것은 아주 분명하다, 그 이유는 이 열은 살아 있는 신체들로부터 사방으로 뿜어내기 때문, 아마 최고의 추위에서조차 아랑곳하지 않고 뿜어내지기 때문이다; 또한 바램들과 애착들, 즉 사랑들이 따뜻해져 갈 때, 그만큼에서 신체도 따뜻해진다. 이 열이 말씀에서 “타다,” “불,” “불꽃” 같은 단어에 의해 뜻해진 열이다; 그리고 진짜 의미에서 이것은 천국적이고 영적인 사랑이고, 반대적 의미에서는 신체적이고 지상적인 사랑이다. 이로부터 여기서 “동풍에 바싹 말리운”이 탐욕들의 불에 의해 살라짐을 의미한다는 것이 분명해진다, 그리고 기억 속의 지식들을 서술할 경우, 이것은 낟알로부터의 “홀쭉한 이삭들”이고, 탐욕으로 가득함이 의미된다는 것이다.
“동풍”에 의해서는 탐욕으로부터 있는 것과 이로부터 파생되는 망상들이 의미되는 것을 아래 구절로부터 확인해 볼 수 있다. 다윗서에서:
그분께서는 하늘들에서 나가도록 동풍을 만드셨다, 그리고 그분의 권능으로 그분은 남풍을 나오게 하셨다, 그리고 그분은 그것을 비로 만드시어 그들 위에 고기가 먼지 만큼 내려오게, 그리고 바다의 모래 만큼 날개 달린 새가 내려오게 하셨다 (시. 78: 26, 27);
위 구절에서, 이 바람이 가져온 “고기(살, flesh)”에 의해 악한 바램들이, 그리고 “날개 달린 새”에 의해서는 악한 바램에서 파생되는 몽상들이 의미되고 있다. 이는 민. 11:31-35에서 한 번 더 분명해진다; 즉 그들이 먹는 고기 때문에 그들을 치시어 죽게 하셨는데, 그래서 그곳은 “탐욕의 무덤들이라 불리웠다; 그 이유는 탐욕을 부린 백성들을 거기에 매장했기 때문이다.”
에스겔서에서:
심어져 왔었던 포도나무를 잘 보라, 그것이 번성하더냐? 동풍이 그것을 만질 때 그것이 지독하게 시들지 않더냐? 싹들의 침대들 위에서 그것은 시들 것이다 (겔. 17:10).
그리고 다시:
분노함에서 포도나무는 뽑히고 말았다, 그것이 땅에 내팽개쳐졌다, 그리고 동풍이 그것의 열매를 시들어지게 했다; 불이 모든 이를 삼켰다, 그 이유는 불이 그것의 가지들 중 하나로부터 나갔기 때문, 그것이 그것의 열매를 삼켰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것 안에 강함의 막대, 통치를 위한 홀이 없다 (겔. 19:12, 14);
위에서 “동풍”은 탐욕들에 속하는 것을 표시한다.
이사야서에서:
그분은 그분의 거친 바람 위에서 묵상하셨다, 동풍의 날에서 이다 (이. 27:8).
호세아서에서:
동풍이 올 것이다, 여호와의 바람이 광야로부터 오고 있다; 그리고 그것의 샘이 마를 것이다, 그리고 그것의 원천이 말라질 것이다; 그것은 탐나는 모든 그릇들의 보물을 약탈품으로 만들 것이다 (호. 13:15);
위 구절 역시 “동풍”은 탐욕들에 속하는 것을 표시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예레미야서에서:
동풍 같이 나는 그들을 적들 앞에서 흩으릴 것이다 (예. 18:17).
다윗서에서:
동풍으로 당신께서는 다르싯의 배들을 부수실 것입니다 (시. 48:7).
이사야서에서:
당신은 당신의 백성, 야곱의 가문을 버리셨다, 그 이유는 그들이 동풍으로 채워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점쟁이들이 블레셋족들 이다 (이. 2:6).
호세아서에서:
에브라임은 바람을 먹고 있다, 그리고 동풍을 뒤따른다; 날마다 그는 거짓과 황폐케하는 것을 불리고 있다 (호. 12:1);
위에서 “바람”은 몽상들을 표시한다, 그리고 “동풍”은 탐욕들을 표시한다. 위와 비슷한 동풍의 의미를 지닌 사건으로는 출. 10:13, 19에 있는데, 거기서 “동풍”에 의해 메뚜기떼가 생산된 것, 또는 출. 14:21에서 “동풍”으로 수프 바다(홍해)가 갈라진 것도 있다.

그것들 뒤를 따라 튀어 나왔다. 이는 가까이에서 나타남을 의미한다. 이는 “튀어오름”이 여기서는 나타남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것들 뒤를 따라”의 의미가 가까이 있다, 또는 경계선에 있다 이다로부터; 즉 “그것들 뒤를 따라”, 즉 바라보기에 아름답고 살 안에 지방이 많은 암소, 그 뒤를 따라 출현한 바라보기에 흉악하고 살 안이 얇은 암소의 경우에서와 비슷하다. “그것들 뒤를 따라”가 가까이를 뜻하는 것은 “…따라(after)”가 시간 측면에서 계속적인 것을 표시해서 이다; 그리고 영계에서, 그리고 결과적으로 영적 의미에서, 시간의 개념은 전혀 없다, 그 대신 상응하는 상태만이 있다.

그리고 홀쭉한 이삭들이 지방이 많고 알찬 일곱 이삭들을 삼켜버렸다. 이는 선용이 없는 기억 속의 지식이 선량한 기억 속의 지식을 추방했다를 의미한다. 이는 “홀쭉한 이삭”의 의미가 선용이 없는 기억 속의 지식들이다로부터; 그리고 “지방이 많고 알찬 이삭들”의미가 신앙의 것들과 선용의 것들에 응용될 수 있는 기억 속의 지식들, 결과적으로 선량한 기억 속의 지식들이다로부터; 그리고 “삼켜버리다(swallow up)”의 의미가 추방하는 것이다로부터, 이는 암소의 경우 “먹어치웠다(eat up)”와 거의 같은 상황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영계의 경우도 이와 같다: 거짓들이 있는 곳에 진리들은 존재하지 않는다; 한편 진리들이 존재하는 곳에 거짓들은 존재할 수 없다. 이것이 저것을 추방하는 것이다, 그 이유는 서로에게 반대이기 때문이다. 즉 거짓들은 지옥으로부터 있고, 진리들은 천국으로부터 있기 때문이다. 때로 거짓들과 진리들이 하나의 주제 안에 있는 것처럼 나타나는 경우도 있다; 이럴 경우, 이 거짓들은 당사자 안에서 진리들에 반대하는 거짓들이 아니고 적용함을 수단으로 연합시켜진 거짓들일 뿐이다. 어떤 주체 안에서 진리들이 있는데, 동시에 (어디 한쪽 구석에) 이 진리들에 반대하는 거짓들도 있다면, 이는 “미적지근함(lukewarm)”이라 불리우고; 거짓들에 진리들이 섞인 경우, 이는 “모독(profane)”이라 불리운다.

그리고 바로는 깼다. 이는 계발의 일반적 상태를 의미한다. 이는 앞에서 설명했으므로 생략한다.

그리고 보라 그것은 꿈이었다. 이는 그 희미함에서를 의미한다. 이는 “꿈”의 의미가 희미한 상태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희미함(obscure)”이라 말한 이유는 진리들이 추방되었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진리들이 있지 않으면 희미함이 당연히 있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천국의 빛은 진리 안으로만 흘러들기 때문이다; 또한 천국의 빛은 주님으로부터의 신성한 진리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천사들과 영들, 또한 인간과 더불은 진리들은 보조적인 빛들이다; 그들은 진리들 안에 있는 선을 수단으로 신성한 진리로부터 자기들의 빛을 가진다; 그 이유가 진리들이 선으로부터 있지 않으면, 즉 그들이 자기들의 진리들 안에 선을 가지지 않으면, 그들은 신성으로부터 어떤 빛도 받을 수 없다. 그들은 그것을 선을 수단으로 받는다, 그 이유는 선이 불 또는 불꽃 같기 때문, 그리고 진리는 그것으로부터 있는 빛의 광선 같기 때문이다. 다른 삶에서 선이 없는 진리도 빛을 낸다, 그러나 그 빛은 겨울철의 빛으로 빛나고, 천국의 빛에서 그 빛은 짙은 어둠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희미하다”에 의해 뜻해진 것은 선량한 기억 속의 지식들이 선용이 없는 것들에 의해 추방되었을 때 자연 평면의 상태이다. 이런 희미함의 상태는 일반적 방식에 의해 계발될 수 있다; 그러나 거짓으로부터 와지는 희미함의 상태는 계발되지 못한다; 그 이유가 이 희미함은 너무나 완벽하게 어두워서 천국의 빛에 어떤 틈새도 허용하지 않는 바, 거짓이 제거되지 않는 이상 계발되어질 수 없는 희미함이기 때문이다.

8절. 그리고 아침이 되자 그의 영은 번민했다. 그리고 그는 사람을 보내서 이집트의 마술사, 그리고 현인들을 모두 불렀다. 그리고 바로는 그들에게 그의 꿈을 말했다. 그리고 바로에게 이런 것들을 해석해주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아침이 되었다. 이는 이 새로운 상태에서를 의미한다. 이는 “…되었다, 또는 …이었다”라는 표현은 새로운 것을 포함한다로부터; 그리고 “아침”의 의미가 계발의 상태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여기서 뜻해진 새로운 상태란 앞 구절에 관련한 것들에 대해서이다. 이 상태와 이것의 품질이 여기서 취급되는데, 발생할 것들에 관한 것이 희미한 상태이기 때문에 혼동함이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 상태의 품질에 관한 것은 그가 영적 기운 안에 있지 않으면, 동시에 자신 안에서 거행되는 것들에 주의를 하지 않으면 누구도 거의 어떤 것도 알 수 없다. 아마 그는 일반적으로 계발되는 것이 무엇인지 알려 할 수도 없다, 더 나아가 계발의 일반적 상태에서 먼저 혼돈이 있다, 그리고 선으로부터의 진리들이 그것들의 질서 안에 놓여질 때까지 종용하지도 않는다. 이런 경우에 대한 것은 천사들에 의해서는, 또는 선한 영들에 의해서는 분명하게 지각된다, 그 이유는 그들은 영적 기운 안에 있기 때문이다. 이런 주제들에 슬기로움을 발휘하는 것, 그리고 그것들에 관하여 곰곰이 생각하는 것은 천사나 영들에게는 기쁜 일이다; 그러나 자연 평면의 기운 안에, 더구나 감각적 수준의 기운에 머물고 있는 이들에게, 특히 지독하게 육체적 지상적인 것만으로부터의 기운에 머무는 이들에게 이런 주제들은 짜증나는 주제일 뿐이다.

그의 영은 번민했다. 이는 혼돈을 의미한다. 이는 “영 안에서 번민함”의 의미가 혼돈이 있음이다로부터 알려진다. 여기서 “영”에 의해, 때로 말씀의 다른 곳에서와 같이 내면의 애착과 생각이 뜻해진다. 이것은 인간의 영이기도 하다. 고대인들은 내면의 애착과 생각을 영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영을 수단으로 그들은 특별하게는 육체의 죽음 이후 살게 될 내면의 인간을 뜻했다; 한편 오늘날의 경우, “영”은 생각만을 뜻한다. 다시 말해 이 영은 어떤 주체 없이 단순히 육체 안에 있는 생각 외에 더 이상은 없다. 이렇게 된 이유는 내면의 인간이 인간 자신이다고 더 이상 믿어지지 않고, 혼 또는 영이라 흔히 불리우는 내면의 인간은 거기 생각과 보조를 맞추는 주체 없이 오로지 생각이다고 믿어지게 되었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주체 없는 생각일 경우, 이것은 필시 연기나 에테르 같이 육체가 끝난 후 사라질 것이다. 이것이 오늘날 “영 안에서 번민한다”, “영이 슬프다,” “영이 즐겁다,” “영이 기뻐 뛴다” 등등으로 말해질 때, “영”에 의해 이해되어지는 것에 해당된다. 그럼에도 영이라 불리우는 것은 내면의 인간 자신이다는 것, 이것이 슬프고, 기뻐하고 즐거워하고 번민한다는 것, 이 영 안에 비록 육체적 눈이 볼 수 없다 해도 생각이 내재한 형체가 전체 인간이다.

그리고 그는 (사람을) 보내어 이집트의 모든 마술사들, 모든 현인들을 불렀다. 이는 내면 뿐만 아니라 외면의 기억 속의 지식과 상담함을 의미한다. 이는 “마술사들”의 의미가 좋은 의미일 경우, 내면의 기억 속의 지식들이다로부터 (아래에서 설명한다); 그리고 “현인들”의 의미가 외면의 기억 속의 지식들이다로부터(아래에서 설명한다) 알게 된다. 이집트의 마술사들과 현인들이 기억 속의 지식들을 의미하는 이유는 이집트는 고대 표현 교회가 존재했던 왕국들 중의 하나이었기 때문이다. 이집트에서 관심이 대단해 있던 것은 고대 교회로부터의 기억 속의 지식들이었는데, 이 지식은 상응, 표현, 의미에 관련된 것들이다; 그리고 이 지식들을 수단으로 교회 속의 책들 안에 쓰여진 것들을 밝혀냈다; 그리고 이 밝힌 것이 그들의 거룩한 예배의 한 측면을 차지했다. 이로부터 이집트에 의해 일반적 측면에서의 기억 속의 지식들이 의미되었다, 또한 이집트의 왕도 마찬가지이다. 이집트인들 사이에서 이런 지식들에 노련하였고 이것을 가르쳤던 이들이 “박사들”, 또는 “마술사”, 그리고 “현인”이라 불리웠다. 신비적 기억 속의 지식들에 노련했던 이들이 “마술사”라 불리웠고, 신비적이 아닌 기억 속의 지식들에 능통했던 이들이 현자들이라 불리웠다; 결과적으로 내면의 기억 속의 지식들을 가르쳤던 이들이 “마술사들”이라 불리웠고, 외면의 기억 속의 지식들을 가르쳤던 이들은 “현자들”이라 불리운 것이다. 이런 이유로 이런 지식들이 “마술사”와 “현자들”에 의해 말씀에서도 의미되었다. 그러나 그들이 교회의 내면의 기억 속의 지식들을 오용하기를 시작한 이후, 그리고 그것들을 마술로 변하게 한 이후, 이집트에 의해서는 타락된 기억 속의 지식을 의미하였다, 이집트의 “마술사”와 “현자”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때 당시의 마술사들은 영계에 속하는 이런저런 것들을 알았다. 이것을 그들은 교회의 상응과 표현들로부터 배웠다; 그러므로 그들 중의 많은 이들이 영들과 교통하였고, 이 방법에서 사람을 현혹시키는 기교를 배워, 이를 수단으로 그들은 마술 기적들을 수행했다. 그러나 “현자”라고 불리운 이들은 마술사들과는 관심의 각도가 달랐다. 그들은 어려운 문제들을 풀려했고, 자연계의 것들의 원인들을 가르쳤다. 이런 것들이 그 당시의 지혜를 구성하였고, 그것들에 능통해지는 것이 “지혜”라고 불리웠는데, 이는 솔로몬에 관련한 것으로부터 알게 된다. 열왕기상서에서:
솔로몬의 지혜는 동쪽의 모든 아들들을 넘어, 그리고 이집트인들의 모든 지혜를 넘어 불어났다, 그는 모든 사람들보다, 즉 에스라족 에당, 마흘의 아들들, 헤만, 갈골, 다르다보다 더 슬기로웠다. 그는 삼 천 잠언들을 말하였고, 그의 노래들은 일 천 다섯이었다. 더 나아가 그는 나무들을 이야기하 되, 레바논의 삼나무로부터 (성)벽으로부터 나오는 우슬초에 이르기까지 였다; 그는 또한 짐승과 새에 관해, 그리고 기어다는 것들과 고기들에 관해 이야기를 했다. 그러므로 솔로몬의 지혜를 듣기 위하여 그의 지혜에 관해 들었던 땅의 모든 왕들로부터 모든 백성들로부터 왔다
(왕상. 4:30).
아래는 위와 관련되는 세바의 여왕에 관해서이다:
그녀는 그에게 어려운 질문들을 던지기 위해 왔다. 그리고 솔로몬은 그녀에게 그녀의 말들을 말했다, 그가 그녀에게 말하지 않고 감추어둔 말은 왕으로부터 있지 않았다 (왕상. 10:1, 3).
이로부터 그 당시 “지혜”라 불리운 것, 그리고 이집트에서 뿐만 아니라, 시리아, 아라비아, 바빌론에서 “슬기롭다”라고 불리운 것이 무엇인지가 분명해졌을 것이다; 그러나 내적 의미에서 “이집트의 지혜”에 의해 의미된 것은 자연 평면의 것들에 관한 기억 속의 지식 외에 다른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리고 “박사”는 영적 평면의 것들에 관한 기억 속의 지식을; 고로 “현자”는 외면의 기억 속의 지식을; “마술사”에 의해서는 내면의 기억 속의 지식을, 그리고 “이집트”에 의해서는 일반적 측면에서의 기억 속의 지식 외에 다른 의미는 없다. “이집트”와 그녀의 “현자들”에 의해 아래 이사야서에서도 마찬가지가 의미되고 있다:
소안의 제 1 인 자들은 어리석다, 바로의 슬기로운 상담자의 상담은 야만적이 되어진다; 나는 슬기 있는 자의 아들, 옛 고대의 왕들의 아들이다 라고 어떻게 바로에게 말할 것이냐? 어디에 지금 너희의 현자들이 있느냐? (이. 19:11, 12).
“마술사들”, 또는 “박사들”이라 불리웠던 이들, 그들은 영적인 것들에 관한 지식 안에, 그리고 그 지식으로부터 계시 안에 있었다는 것은 동쪽으로부터 예루살렘으로 왔던 박사로부터 명백해진다. 그들이 와서, 유태인들의 왕으로 태어나신 그분이 어디 있는지를 물었고, 그들이 말하기를, 자기들이 동쪽에서 그분의 별을 보았다고, 그래서 그분을 경배하기 위해 왔다고 말했다 (미. 2:1, 2). 비슷한 것이 다니엘에서도 분명해진다, 그는 “마술사들의 제 1 인 자”라 불리웠다 (단. 4:9); 다시:
여왕이 벨사살에게 말했다, 왕국 안에는 거룩한 신들의 영이 있는 사람이 있다; 그리고 당신의 아버지의 시대에서, 빛과 통찰력과 지혜, 신들의 지혜 같은 것이 그 사람 안에서 발견되었다; 그러므로 느부갓네살 왕, 당신의 아버지는 그를 마술사들, 점성가들, 점장이들의 제 1 인 자로 만드셨다 (단. 5:11).
다시:
그들 모두 사이에서 다니엘, 하나냐, 미사엘, 그리고 아사랴 같은 자를 발견하지 못했다; 그 이유가 그들이 왕 앞에 섰을 때, 왕이 그들에게 묻는 것에 관하여 지혜와 통찰력으로부터의 모든 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 하여 그는 자기 왕국에 있는 모든 마술사, 점술가보다 열 배나 더 낫다는 것을 발견했다 (단. 1:19, 20).
출. 7:11, 22; 8:7, 18, 19에서 언급되는 반대적 의미의 “마술사들”은 영적인 것들을 남용한 이들을 의미하고, 그럼으로 해서 마술적 기교를 부린 이들로 알려져 있다. 그 이유가 마술은 뒤집는 것, 영계의 질서 속에 있는 것을 뒤집어 응용하는 것밖에 더 아니기 때문이고, 이로부터 마술이 왔다. 그러나 이런 마술이 오늘날 자연적 수준이다 불리운다, 그 이유는 자연 넘어의 어떤 것이 더 이상 인식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영적인 것을 수단으로 자연 평면의 안쪽의 것을 이해하지 않으면 영적인 것은 부정되어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로는 그들에게 그의 꿈을 말했다. 이는 장차 올 것들에 관하여를 의미한다.이는 “꿈”의 의미가 예견, 예보, 사건, 고로 올 것들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것이 내적 의미에서 어떻게 서있는지는 시리즈로부터 분명해진다. 이 구절에서 취급된 주제는 자연 평면에서 진리들이 추방되었기에 자연 평면이 희미한 상태일 때, 그래서 장차 올 것에 관하여 기억 속의 지식들과 상담할 때, 등장하는 자연 평면의 새로운 상태이다; 그 이유가 이와 같은 희미함이 발생할 때, 발생하는 생각, 사건이 무엇일 것이냐? 이다.
이것은 인간의 거듭남 동안 거듭남의 모두 각각의 상태 안에서 공통적인데, 이 상태가 내적 의미에서 여기서 묘사되어지고 있다; 그러나 이런 상태들이 알려지지 않는 이유는 거듭나지는 자들이 적기 때문, 게다가 거듭난 자라 해도 이런 사항들을 곰곰이 되튀겨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오늘날에서 인간은 자기 안에서 거행되는 것에 관심이 없다, 그 이유는 그의 외적 사항들에 그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외적인 것들이 자신의 모든 것을 점령해버린 자에게 내적인 것은 귀찮은 물건, 쓸모 없는 어떤 것일 뿐이기 때문, 그들의 삶의 목적들이 외적인 것들에 있기 때문이다. 이 희미함에 주목해보려 들면, 이들이 내뱉는 말인즉, 내적인 그것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는가? 그것으로부터 돈이 나오냐, 영예가 나오냐 등등일 뿐이다. 또는 왜 내가 혼의 상태나 내적 인간의 상태들을 생각해야 하는가? 진리가 추방되어 희미하든, 진리가 다시 놓여져 명료해 있든 그것이 무슨 차이가 있느냐? 나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 말한다. 또는 어떤 내적 인간이 있어 나에게 의구심의 문제로 있는지 라든가, 육체 속에 있다는 혼 외에 혼의 어떤 다른 상태가 있는지 여부라든가, 사후 사는 어떤 혼이 있는지 여부라든가, 누가 죽은 자로부터 되돌아와 이런 것들을 선포했는가? 이런 식으로 오늘날의 교회인은 자신과 이야기 한다. 또한 내적 인간의 상태에 관하여 어떤 책을 읽거나 듣거나 할 때도 위와 유사한 것을 생각하고 있다. 이로부터 분명한 것은, 왜 인간과 더불어 자기 안에서 계속되어져 가는 것들이 오늘날에는 감추여져 있고, 통째로 알려져 있지 않은데 대한 이유이다.
이해력의 위와 같은 무기력함, 즉 불분명함, 희미함은 고대인들 사이에서는 결코 존재하지 않았다. 내면의 것을 경작하는 것, 갈고 닦는 것이 그들의 지혜이었다, 고로 이해력과 의지력 모두를 완전해지게 하는 것, 이를 수단으로 자기들 혼의 복지를 위하여 설비하는 것이 그들의 지혜이었다. 고대인들이 자기들의 관심을 위와 같은 것들에 두고 있었다는 것은 지금 잔존하기조차 하고 있는 그들의 저술로부터, 그리고 솔로몬에게 들으려고 하는 모든 이의 바램으로부터 확실해진다:
그러므로 모든 이들이 솔로몬의 지혜를 들으려고 그의 지혜에 관하여 듣고 있어왔던 땅의 모든 왕들로부터 왔다 (왕상. 4:34).
그러므로 세바의 여왕이 왔다, 그녀는 천국의 기쁨(bless)으로부터 솔로몬의 지혜를 들음으로부터 왔는 바:
당신의 사람들, 당신의 종들은 복 있다, 그들은 계속 당신 앞에 서서 당신의 지혜를 듣는다
(왕. 10:8).
오늘날 누가 위 구절과 같은 이유로 해서 자신이 복된 자라고 부를까?

그리고 이러한 것들을 바로에게 해석해주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이는 무슨 일이 발생할 것인지는 알려지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이는 “해석하다”의 의미가 발생할 것을 아는 것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러므로 “아무도 해석하지 못했다”는 알지 못했다를 표시한다; 그 이유가 내적 의미에서, “아무도 없다”는 어떤 것에 대해 부정적인 것, 고로 있었지 않은 것이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내적 의미 안에서는 누군가의 생각이 어떤 것에 대한 생각으로 바뀌어지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남편, 아내, 딸, 아들 등등이 내적 의미 안에서는 진리, 또는 선으로 바뀌어진다는 말이다. 금방 지나온 앞에서, 마술사와 현자가 내면과 외면의 기억 속의 지식으로 바뀌는 것이다. 이런 이유는 영계에서, 또는 천국에서 시야에 잡히는 것인 인물이 아닌 어떤 것(a thing)만 있기 때문에서 이다. 그 이유는 인물들은 한계를 주고 어떤 유한한 것 위에 그것을 집중한다; 이에 반해 어떤 것들은 한계가 없다, 어떤 것은 무한까지, 고로 주님에까지 넓혀진다. 이런 이유로 말씀에서 명명되는 어떤 인물도 천국에서 지각되지 않고, 그 대신 그 인물이 표현하는 어떤 것만이 지각되어진다; 마찬가지로 나라, 민족이 지각되지 않고 그것의 품질만 지각된다. 또한 인물, 민족, 백성에 관한 말씀의 역사적 서술도 천국에서는 알려지지 않는다; 결과적으로 아브라함, 이삭, 야곱, 이스라엘 백성, 유태 민족이 누구인지가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이런 인물과 민족이 표시하는 것만이 알려지고 있다; 이는 이 외의 모든 다른 경우도 같다. 고로 천사의 언어는 한계 없이 있다, 또한 상대적으로 보편적이다.

9-13절. 그리고 술 담당자들의 제 1 인 자가 바로에게 말했다, 말하기를 저는 오늘에야 내 죄를 기억합니다. 10 바로께서 종들에게 화를 내셨습니다, 그리고 저를 수비대장의 구치소에 처넣으셨는데, 나와 빵 담당자들의 제 1 인 자도 함께입니다; 11 그리고 우리는 같은 날 밤에 꿈을 꾸었는데, 나와 그 입니다. 우리는 각자의 꿈의 해석에 따라서 각기 꿈을 꾸었습니다. 12 그리고 거기서 우리와 함께 히브리 소년이 있었는데 그는 수비대 제 1 인 자의 종이었습니다; 13 그리고 우리는 그에게 말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우리에게 우리의 꿈들을 해석해 주었습니다. 그는 우리의 꿈에 따라서 각각에게 그는 해석을 했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흐른 뒤 그가 우리에게 해석했던 그대로 되었습니다; 그는 나를 복직시켰고 그를 매달았습니다.

그리고 술 담당자들의 제 1 인 자가 바로에게 말했다. 이는 지적 부분에 종속된 감각적인 것으로부터의 생각을 의미한다. 이는 “말하다(speak)”의 의미가 생각하는 것이다로부터; 그리고 술 담당자들의 제 1 인 자의 의미가 지적 부분에 종속된 감각적인 것이다로부터 알려진다. 감각으로부터 생각함이 무엇인지는 앞에서 살폈다.

말하기를. 이는 거기로부터 지각함을 의미한다. 이는 “말하다(say)”의 의미가 지각하는 것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거기로부터” 지각함, 또는 생각으로부터 지각함이 무엇인지는 오늘날의 인간들의 이해력에 와닿게 펼쳐보여질 수 없다, 그 이유는 오늘날 영적인 지각이 무엇인지가 통째로 알려져 있지 않기 때문; 그리고 알려져 있지 않은 것은 제아무리 멋진 서술로 이를 서술한다 해도 납득력 안으로의 진입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지각은 인간과 더불어 있는 천사들의 언어나 생각밖에 더 아니기 때문이다. 이 언어, 생각이 흘러든다면, 어떤 것이 그러한지, 그러하지 않은지를 지각하는데, 그나마 이것도 사랑과 선행의 선 안에 있는 이들과 더불어서 일 뿐이다. 그 이유가 이것은 선을 통하여 흐르기 때문이다. 이들과 더불어 이 지각함은 생각들을 생산한다, 그 이유가 그들에게 지각적인 것은 생각의 일반 측면이기 때문이다. 그렇다 해도 생각으로부터의 지각함은 실제로는 주어지지 않는다, 오로지 가상적으로만 주어질 뿐이다. 어쨌든 이런 신비적인 사항에 관하여는 더 이상 말해 볼 수도 없다, 그 이유는 이미 말했듯이, 오늘날 지각이 무엇인지가 알려져 있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오늘 내 죄들을 기억합니다. 이는 분리된 상태에 관하여를 의미한다. 이는 “죄들”의 의미가 거꾸로의 질서 속에 있는 것이다로부터; 그리고 “기억함(rember)”의 의미가 결합함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고로 “죄들을 기억하다”는 거꾸로된 질서 속에 있는 것과 결합하는 것이다로부터, 결과적으로 바로에 의해 표현된 자연 평면으로부터 분리되는 것이다; 그 이유가 거꾸로의 질서와 결합된 것은 무엇이든 질서 안에 있는 것으로부터 분리되고야 말기 때문이다. “기억하다”가 결합하다인 이유는 다른 삶에서 누군가를 기억하면(떠올리면) 결합되기 때문이다; 거기서 어떤 영이 자기 마음에 또 다른 영을 부르자마자, 그 영이 표출되어 함께 말하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천사들과 영들은 자기들이 알고 있거나 들었거나 했던 모든 인물들을 만날 수 있어, 그들과 이야기할 수 있다. 단지 주님께서 그렇게 허용하실 때만 가능하다.

바로께서는 그의 종들에게 화를 내셨습니다. 이는 자연 평면이 그 자체 돌아섰을 때를 의미한다. 이는 앞에서 살핀 바 있다.

그리고 나를 수비대장의 구치소에 가두었다. 이는 해석을 위해 제 1 의 것들을 수단으로 거절함을 의미한다. 이 내용은 같은 말이 앞에서 있던 곳에서 설명하였는 바, 생략한다.

나와 빵 담당자들의 제 1 인 자. 이는 두 감각적인 부분들을 의미한다. 이는 여기서 “나”에 해당하는 술 담당자들의 제 1 인 자가 일반적 측면에서의 지적 부분에 종속하는 감각적인 것을 표현함으로부터; 그리고 빵 담당자들의 제 1 인 자의 표현함이 일반적 측면에서의 의지 부분에 종속하는 감각적인 것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고로 “나와 빵 담당자들의 제 1 인 자”에 의해서 양쪽 감각적 부분들이 의미된다. 우리가 “양쪽(both)” 감각적 부분이라 말하는 이유는 인간 안에는 인간의 생명을 구성하는 두 능력들, 즉 의지력과 이해력이 있기 때문, 이것에 당사자 안에 있는 모든 것이 관계를 가지기 때문이다. 인간 안에서 그의 생명을 구성하는 두 능력들이 있는 이유는 천국에서 생명을 만드는 두 가지 것들, 선과 진리가 있기 때문에서 이다; 선은 의지력에 관계하고, 진리는 이해력에 관계한다. 이로부터 분명한 것은, 인간을 영적으로 만드는 두 가지가 있다는 것, 결과적으로 그를 다른 삶에서 복되게 하는 두 개의 것, 선행과 신앙이 있다는 것이다; 선행은 의지에, 신앙은 이해함에 관계하고, 선행은 선에, 신앙은 진리에 관련이 있다.
이 둘, 즉 선과 진리에 자연계의 각각 그리고 모든 것들이 관련을 낳고, 이 둘로부터 그것들은 존재하고 존속한다. 그것들이 이 두 가지 것들에 관련이 있다는 것은 열과 빛으로부터 분명해진다. 즉 열은 선에, 빛은 진리에, 그러므로 영적인 열은 사랑의 선이고, 영적인 빛은 신앙의 진리이다. 보편적 자연계에 있는 각각 그리고 모든 것들은 이 다른 둘, 즉 선과 진리에 관련됨을 낳고 있다, 그래서 선은 열에서, 진리는 빛에서 표현되는 바, 선행 없는 신앙이 어떤 품질일지, 또는 선을 뜻함 없는 진리를 이해함이 어떤 품질이어야 할지 여러분은 가늠될 것이다. 즉 빛은 찬란한데도 모든 것이 활기가 없다, 열이 없기 때문, 이런 겨울의 빛과 같지 않을까? 이런 상태가 신앙만에 있고 사랑의 선이 없는 인간의 경우이다. 그런데 (영계에서는) 이럴 경우 그가 차거움에만 있고 밝은 빛 안에서 있는 것이 아니라 어둠 안에도 있게 된다. 그가 차거움 안에 있는 이유는 그가 선에 반대되기 때문, 그가 어둠에 있는 이유는 그가 진리에 반대하기 때문이지만, 선에 반대하는 자는 결국 진리에서도 반대하게 된다. (영계에서는 즉각 일치되게 나타난다.) 이는 제아무리 당사자 스스로 자신을 판단하건대 자신이 찬란한 빛에 있다 여겨도 그것은 빛 안에 있는 것 같은 착각일 뿐이다. 그 이유가 선이 진리를 필요로 하는 때에 그 선에 어울리는 진리를 가져다 쓰기 때문이다. (즉 선은 본체, 실체, 진짜 당사자이고, 진리는 그릇, 도구, 선에 옷을 입히는 가상, 외관, 형체이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주님이나 우리에게서나 선이 첫째로 중요한데, 그 이유는 선이 생명 자체이기 때문이다. 이 점을 확실히 알고 가슴에 꼭 새겨둔다면 이 책을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을 줄 것이라 사료된다. 역자주) 사후 인간의 상태는 (많이 아는 것, 내지 그의 진리 수준이 아니고) 지상에서 지녔던 그의 선의 상태에 따라 결정되어진다.

그리고 우리는 같은 날 밤에 꿈을 꾸었다. 이는 희미함 속에서 미리 본 것을 의미한다. 이는 “꿈”의 의미가 미리 본 것이다로부터; 그리고 “밤”의 의미가 그늘의 상태, 고로 희미함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나와 그. 이는 두 감각적인 부분들에 관하여를 의미한다. 이는 여기서 “나”에 해당하는 술 담당자의 표현함이 두 감각 부분 중에 어느 하나이고, 여기서 “그”에 해당하는 자는 빵 담당자인데, 그는 두 감각 부분 중에 다른 부분이다로 알게 된다.

우리는 그의 꿈의 해석에 따라서 각기 꿈을 꾸었다. 이는 양쪽에 결과일 것이다를 의미한다. 이는 “해석”의 의미가 그것 안에 무엇을 가질 것인지, 그리고 무엇이 발생하는지 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고로 있을 사건을 미리 본 것이 “꿈”에 의해 의미된다.

그리고 거기서 히브리 소년이 우리와 함께 있었다. 이는 시험 때문에 교회의 무죄함이 저쪽에서 거절되었음을 의미한다. 이는 “소년”의 의미가 죄없는 것이다로부터 (이는 아래에서 설명한다); 그리고 “히브리”의 의미가 교회로부터 있는 자이다로부터, 고로 교회로부터 있는 것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시험 때문에 저쪽에서 거절되어짐이 “거기서 그가(히브리 소년이) 있었다”에 의해 의미되어져 있다. 여기서의 거기서는 구치소를 지칭하고 있다. 그런데 요셉을 쳐넣은 “구치소”는 시험의 상태를 의미한다; 이 상태에 관하여는 39-40장에 다루었다.
“소년”이 죄없음을 표시하는 이유는 내적 의미에서 “어린 아이(a little child)”가 순진한 것(순진인 것)을 표시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말씀에서 “젖을 빨음(유아),” “어린 아이,” 그리고 “소년(아이)”이라는 단어를 읽는데, 이들을 수단으로 순진의 세 등차가 의미된다; 첫 등차는 “젖을 빨음”에 의해; 두 번째 등차는 “어린 아이”에 의해, 세 번째 등차는 “아이”에 의해서 이다. 그러나 “아이” 시기를 지나면서 순진을 의미함은 중단되기 시작한다 (순진이라는 외관의 모습을 벗기를 시작한다. 다시 말해 진짜 순진은 우리의 내면으로 후퇴한다. 다시말헤 우리의 구원을 위해 꼭 필요한 진짜 순진, 즉 순수한 순진을 보호하시고 지켜주시기 위해 우리의 내면으로, 당사자 자신, 내지 누구의 손찌검도 가능할 수 없는 (창. 3:24) 곳, 주님만이 홀로 섭리하시는 곳, 내면으로, 내적 인간 안으로 당분간 물러가 있게 하신다. 역자주). 이 아이 또는 소년에 의해서는 순진의 등차가 “죄없음(guiltless)”이라 불리운다. 위 세 시기의 인간을 수단으로 순진의 세 등차가 의미되었듯, 사랑과 선행의 세 등차들도 똑같은 방식으로 의미된다. 그 이유는 천적(수준)의 사랑, 영적 (수준의) 사랑, 즉 주님을 사랑함과 이웃을 향한 선행은 순진 안에서가 아니면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하는 것은, 위에 언급한 세 아이, 즉 유아, 어린 아이, 아이가 지닌 순진은 외적일 뿐인 순진이다는 것; 내적인 순진은 그가 새로이 태어남, 즉 영적으로 젖을 빨음- 영적으로 어린 아이가 됨-영적으로 아이가 됨, 한마디로 영적 성장을 거칠 때까지 인간 안에서 가능할 수 없다 (인간 안에서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이런 상태들이 말씀에서 세 아이들로 의미되어 있다; 그 이유가 말씀의 내적 의미에서는 이것밖에 더 다른 의미는 없다; 결과적으로 영적 출생, 즉 재출생, 거듭남이라 불리우는 것밖에 더 없다는 말이다. “죄없음”이라 불리우는 순진의 품질이 “소년(boy)”, 또는 “아이(child)”에서 의미되는 경우를 아래 구절에서 볼 수 있다:
예수께서 말하셨다, 아이처럼 하느님의 왕국을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누구든지 그 안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눅. 18:17);
“아이처럼 하느님의 왕국을 받는 것”은 순진으로부터 선행과 신앙을 받는 것이다. 마가복음서에서:
예수께서 아이를 데려와서 그를 그들의 한가운데에 놓으셨다; 그리고 그분이 그분의 팔 안에 그를 가져오셨을 때(안으셨을 때), 그분이 그들에게 말하셨다, 내 이름 안에서 이런 어린이들 로부터의 하나를 받아들이는 자는 누구든지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막. 9:36, 37; 눅. 9:47, 48);
위에서 “아이”에 의해 순진이 표현되었다; 그리고 아이(순진)를 받아들이는 자는 주님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 이유는 그분이 순진의 모든 근원이시기 때문이다. 아마 위 구절을 글자로만 읽고 아무런 설명이 없어도 누구나 짐작할 수 있는 것은, “주님의 이름 안에서 아이를 받아들이는”것이 주님의 이름으로 어떤 아이를 받아들이라고 말하신 것이 아니다는 것, 고로 천국의 어떤 것이 이것에 의해 표현됨이 틀림이 없다고 확신될 것이다. .
마태복음서에서:
아이들이 성전에서 외쳤다, 다윗의 아들에게 호산나. 성직자들이 분개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하셨다, 아주 어린 아이들(babes)과 젖을 빠는 유아들의 입으로부터 당신께서는 찬양을 완성하셨다(완전한 찬양을 가지신다)는 말씀을 결코 읽지 못하였느냐?
(마. 21:15, 16; 시. 8:2);
아이들의 외침, “다윗의 아들에게 호산나”는 순진만이 주님을 인정하고 받아들인다는 것, 즉 순진을 자신 안에 지닌 이들만이 주님을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이다. “아주 어린 아이들(babes)과 젖을 빠는 유아들의 입으로부터 당신께서는 찬양을 완성하셨다(완전한 찬양을 가지신다)”에 의해서 의미되는 것은, 찬양이 주님에게 와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순진을 통하여서만 이다; 그 이유가 이것만이 모든 교통과 모든 유입을, 결과적으로 (주님께)접근함을 결과되게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말하신다:
너희가 전환되어지고, 어린이들 같이 되지 않으면, 너희는 천국들의 왕국 안으로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마. 18:3).
아래 구절애서 “소년”, “아이”에 의해 순진이 의미된다:
도성의 거리들이 거기로부터 놀고 있는 소년들과 소녀들로 가득할 것이다 (슥. 8:5);
위는 새 예루살렘, 또는 주님의 왕국에 관해서 말해지고 있다. 다윗서에서:
여호와를 찬양하라, 젊은 청년과 소녀들아, 어린이들을 지닌 노인들아 (시. 148:12).
다시:
여호와께서는 구덩이로부터 너희의 생명을 새로이 하신다, 그분은 너희의 입을 선으로 배불리신다, 하여 너희는 독수리 같이 너희의 어린 시절로 새로이 한다 (시. 103:3).
요엘서에서:
그들은 내 백성을 놓고 제비를 뽑았다; 그 이유는 그들이 소년을 음행을 위해 주었고, 그들이 마셨던 포도주를 위해 소녀들을 팔았기 때문이다 (욜. 3:3).
예레미야서에서:
너희를 통하여 나는 남자와 여자를 흩뜨릴 것이다, 그리고 너희를 통하여 나는 늙은 이와 아이를 흩으릴 것이다, 그리고 너희를 통하여 나는 청년과 처녀를 흩으릴 것이다 (예. 51:22).
이사야서에서:
우리 위에 어린 아이가 태어나진다, 우리 위에 아들이 주어진다; 그리고 통치가 그분의 어깨 위에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분의 이름은 놀라우신 분, 상담자, 하느님, 영웅, 영원으로부터의 아버지, 평화의 제 1 인 자 이실 것이다 (이. 9:6).

수비대의 제 1 인 자의 종. 이는 거기 안에 해석을 위해 첫째로 섬겨야 하는 진리가 있었음을 의미한다. 이는 “종”이 진리를 서술한다로부터; 그리고 “수비대의 제 1 인 자”의 의미가 해석을 위해 제 1 의 사항들이다로부터; 그리고 진리가 말씀의 해석을 위해 섬김 속에 있기 때문에, 그러므로 섬기는 진리가 “수비대의 제 1 인 자의 종”에 의해 의미되어 있다.

우리는 그에게 말했다. 이는 거기로부터 지각이 있었다를 의미한다. 이는 “말하다(tell)”의 의미가 지각하다 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리고 그는 우리에게 우리의 꿈을 해석해 주었습니다. 이는 희미함에서 미리 본 것들이 무엇이었는지를 의미한다. 이는 “해석하다”의 의미가 거기 있는 것이다로부터; 그리고 “꿈들”의 의미가 희미함에서 미리 본 것들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의 꿈에 따라 각각에게 그는 해석을 했다. 이는 진리로부터를 의미한다. 그리고 시간이 흐른 뒤 그가 우리에게 해석한 그대로 되었다는 사건은 해석과 같았음을 의미한다.

그는 나를 복직시켰다. 이는 지적 부분의 감각적인 것은 받아들여졌음을 의미한다. 여기서 “나”인 술 담당자의 의미가 지적 부분의 제 1 인 자이다로부터; “지위에 되돌림”은 질서로 회복되었음, 즉 종속되었음, 고로 받아들였음 역시 의미된다.

그리고 그는 그를 매달았다. 이는 의지 부분의 감각적인 것은 거절되었음을 의미한다. 여기서 “그”인 빵 담당자가 의지 부분의 감각적 부분이다로부터; 그리고 “매단다”의 의미가 거절되는 것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14절. 그리고 바로는 (사람을) 보내서 요셉을 불렀다, 그리고 그들은 그를 구덩이로부터 황급히 데려왔다. 그리고 그는 깎고 그의 옷을 갈아 입었다, 그리고 바로에게 왔다.

그리고 바로는 (사람을) 보냈다. 이는 새로운 자연 평면의 것을 좋아함을 의미한다. 이는 바로의 표현함이 자연적 인간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영적 평면의 천적인 것을 받기를 좋아함(기울음, incline)이 그가 “사람을 보내어 요셉을 불렀다”에 의해 의미되고 있다. 좋아함 자체가 이어지는 말로부터 더 분명해진다; 즉 그는 “그를 자기 집 위에, 그리고 이집트의 모든 토지 위에 앉혔다, 그리고 그의 입 위에 모든 그의 백성이 키스할 것을 말했다”로부터 (40-43절)이다. 이 점에 관한 경우는 이렇다: 상태가 충만될 때, 즉 모든 것이 자연 평면에서 내면, 또는 더 수준 높은 것으로부터의 유입을 받기 위해 준비 되었을 때, 그리고 흘러든 것을 자체에 적용함이 준비되었을 때, 그 다음 자연 평면은 좋아함을 가진다, 즉 받기 위한 애착을 가진다. 이 방법에서 전자는 인간이 주님에 의해 새롭게 만들어질 때, 후자에게 숙박되어진다.

그리고 요셉을 불렀다. 이는 영적 평면 속의 천적인 것을 받으려고를 의미한다. 이는 요셉의 표현함이 영적 평면 속의 천적인 것이다로부터 분명해진다. 이를 받는 것이 그가 “부르다”에 의해 의미되는 것은 이미 살폈다.

그리고 그들은 그를 구덩이로부터 황급히 데려왔다. 이는 시험의 이런저런 상태의 것이 방해함을 재빠르게 거절하는 것, 그리고 바뀜을 의미한다. 이는 “구덩이”의 의미가 황폐함의 상태, 고로 또한 시험의 상태이다로부터; 그리고 “그를 황급히 구덩이로부터 데려옴”의 의미가 시험으로부터 있는 이런저런 것들을 재빠르게 거절함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구덩이”가 시험의 상태를 표시할 때, , “누군가를 거기로부터 황급히 데려옴”은 시험의 상태로부터 있었던 이런 저런 것들을 빠르게 거절함이 의미되는데, 이는 이어지는 구절에서, 즉 “그는 (수염을) 깎고 의복을 갈아 입었다”에서 알게 된다.
이에 따른 상태에 관련하여 있는 시험의 상태는 마치 구덩이나 감옥의 형편과 같다; 즉 지저분하고 불결한 조건이다; 그 이유가 인간이 시험될 때, 불결한 영들이 그 사람 주변에 있고, 그를 둘러싸고, 그 사람에게 있는 악들과 거짓들을 흥분되게 하고, 그를 그런 것들 안에서 붙들고, 그것을 과장하여 자포자기조차 발생하게 하기 때문이다. 이때 그는 지저분하고 불결해 있다. 더욱이 이 상태가 다른 삶에서 시야에 잡힐 때, 이것은 불결한 장소로부터 방산되는 짙은 안개 같이 나타난다, 그리고 그것으로부터 지독한 악취가 지각되어진다. 이와 같은 것이 시험에 있는 이, 또는 황폐에 있는 이, 즉 더 낮은 땅에 있는 구덩이 안에 있는 이를 에워싼 기운의 나타남이다.
그러나 시험의 상태가 중지될 때, 안개는 사라지고, 창공은 맑다. 이런 이유는 시험을 수단으로 인간과 더불은 거짓들과 악들이 발가벗겨져들어나 제거되기 때문이다; 안개가 나타나는 것은 그것들이 노출될 때이고, 창공이 맑아지는 것은 그것들이 제거되는 때이다. 이 상태의 변화가 요셉이 “자신의 수염을 깍고, 옷을 갈아입다”에 의해 의미되어져 있다.
더 나아가 시험의 상태는 강도들 사이에 있을 때의 인간의 상태에도 견주어진다; 강도들로부터 도망함에서 그의 머리털은 엉클어지고, 그의 용모는 거칠고, 그의 옷은 찢긴 상태이다. 만일 그가 시험에 굴복한 형국에 있을 때, 그는 위와 같은 상태에 남아있는 셈이다; 그러나 만일 그가 시험을 정복한다면, 그의 얼굴과 용모 머리털의 모양새는 정숙 말끔해지고, 그는 의기양양한 상태, 고요한 상태에 진입한다. 이럴지라도 지옥의 영들과 악귀들은 틈새를 노리고 또 다른 수법으로 그를 공략하려 드는 바, 본문의 표현, “그를 구덩이로부터 황급히 데려 왔다”라고 말하여 시험의 상태를 거절함은 재빠르게 거절함이 동반되어야 장애물이 제거되어 변화가 온다는 것까지 암시하고 있다.

그리고 그는 깎았다. 이는 자연 평면의 외면의 것들에 관련하여 거절하고 변화됨을 의미한다. 이는 “머리와 턱수염을 깍는”것이 자연 평면의 외면 속에 있는 이런저런 것들을 거절하는 것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 이유가 깍아 떨어져나간 머리털이 그의 자연 평면이기 때문이다. 머리와 턱수염 모두의 털은 웅대한 사람 안에서 자연 평면의 외면에 상응한다; 그러므로 감각적 인간에 상응한다 (이 인간은 육체의 눈이 보는 자연 이 외의 어떤 것도 믿지 않는 이들, 이들은 자신의 신체 감각들에 의해 납득되는 것보다 더 순수하고 더 내면의 어떤 것이 있음을 아예 납득하려조차 기꺼워 하지 않는다.) 다른 삶의 천국의 빛에서 그들은 털로 나타난다, 얼마나 털이 많던지 그들의 얼굴은 턱수염밖에 더 없는 듯 할 정도이다. 이렇게 털로 뒤덮힌 얼굴이 자주 나에게도 보여져왔었다. 그러나 합리적이었던 이들, 즉 영적 인간이었던 이들의 경우, 그들 안에서 자연 평면은 올바르게 종속되고 있어, 깔끔하게 빗질한 털로 나타난다. 그렇다, 다른 삶에서는 털로부터도 그의 자연 평면 측면에 관한 것의 품질이 알려질는지 모른다.
지금 말해진 바로부터 “깎다”에 의해 의미되는 것이 분명해졌을 것이다. 에스겔서에서:
사독의 아들들 레위인 성직자들은 그들이 섬기는 곳 안에서의 자기들의 의복을 벗고, 그것들을 거룩함의 침실에 놓아두어라, 그리고 그들은 다른 의복들을 입을 것이다, 그들은 (섬김을 할 때 입은) 자기들의 의복 안에서 백성들을 신성스러워지게(죄를 씻게) 하지 말 것이다, 그리고 반드시 그들은 머리를 깎되 자기들의 머리를 깎지 말고 아래로 내려가게도 하지 말 것이다
(겔. 44:19, 20);
위는 새 교회의 새 성전과 새 성직에 관해서 말해진다; 그리고 “다른 의복을 입는다”란 거룩한 진리들을 의미한다; 그들이 “자기들의 머리를 깎지 말고, 아래로 내려가게 하지말고, 정녕 자기들의 머리를 깍는다”에 의해서는 자연 평면을 거절하지 말고, 자연 평면이 (영적 평면의 것에) 일치되게 하여 (영적 평면에) 편의를 제공하라는 것, 고로 영적 평면에 종속되어 있게 하라는 것이 의미되고 있다. 말씀에 거룩함이 있다고 믿는 신앙인 모두에서, 위 예언서에서 언급하는 새 땅, 새 성전, 새 도성, 새 성직이 거기 글자가 서술한 바 그대로에서 같다고 여겨질 자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즉 성직자 레위인들, 사독의 아들, 거기 안에서 섬길 것이다, 그리고 그때 그들의 섬김의 의복을 벗고 다른 의복을 입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머리를 깎을 것이다 등등의 글자들이다; 그러나 이런 것들의 모두와 각각은 새로운 교회에 속하는 이런저런 것들을 의미한다.
아래 구절의 경우, 대 성직자, 아론의 아들들, 그리고 레위인들에 관하여 명령된 규례들 역시 그 명령 안쪽에 거룩한 것을 포함하지 않았다면 이 규례 자체가 주어지지도 않았을지 모른다:
그의 형제들 중의 대 성직자, 머리 위에 기름부음의 기름이 부어졌던 자, 그리고 그가 그의 의복을 입기 위해 자기 손을 채웠던(fill) 자, 그의 머리를 깎지 말 것이다, 그리고 그의 의복을 가르지 말 것이다 (레 21:10).
아론의 아들들은 그들의 머리 위에서 대머리를 만들지 말 것이다, 그들은 그들의 턱수염의 모퉁이를 깎지 말 것이다; 그들은 자기들의 하느님을 거룩히 할 것이다, 그리고 자기들의 하느님의 이름을 모독하지 말 것이다 (레. 21:5, 6).
고로 너희는 레위인들을 깨끗해지게 할 것이다. 그들 위에 속죄의 물들을 뿌려라, 그리고 그들은 그들의 살 위에 면도날이 지나가게 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자기들의 의복들을 빨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깨끗해질 것이다 (민. 8:7).
위의 구절들, 즉 대성직자는 자기 머리를 깎지 말 것, 자기 의복을 찢지 말 것; 아론의 아들들은 그들의 머리 위에서 대머리를 만들지 말 것, 자기들의 턱수염의 모퉁이를 깎지 말 것, 그리고 레위인들이 깨끗해질 때는 그들의 살에 면도날을 가지고 밀어야한다는 것; 이런 등등의 명령들에 교회로부터의 것은 무엇이 있는 것일까? 또는 이런 명령들 안에 거룩한 것은 무엇일까? 그러나 외적 또는 자연적 인간을 내적, 또는 영적 인간에게 종속되게 하는 것, 그리하여 이 두 평면, 즉 두 인간 모두가 신성에 종속되는 질서에 앉히는 것, 이것이 거룩한 것이고, 인간들이 이런 구절을 읽을 때, 천사들이 듣고 그들이 지각하는 의미들이다.
위 구절과 비슷한 것이 여호와께 거룩하였던 나지르인과 더불어서도 있었다:
만일 어떤 인간이 우연히도 나지르인 옆에서 갑자기 죽는다면, 그리고 그는 자기의 나지르인됨을 더럽혀버렸다; 그때 그는 자기를 깨끗해짐의 날에 자기 머리를 깎을 것인데, 칠 일째에 그는 그것을 깎을 것이다. 그리고 그의 나지르인됨의 날이 다 찰 때, 그는 자기의 나지르인됨의 머리를 만남의 천막의 문에서 깎을 것이다; 그리고 그의 머리의 털을 가져다가, 그것을 평화 제물의 희생물 아래 있는 불 위에 놓을 것이다(민. 6:9, 13, 18);
나지르인이 무엇인지, 무슨 거룩함을 그가 표현했는지는 이미 살폈다. 거룩함이 그의 머리털에 거주한다는 것은 “머리털”이 무엇인지가 상응에 의해 알려지지 않으면, 고로 나지르인의 머리털이 무슨 거룩함에 상응되었는지를 알지 않으면 결코 납득되어질 수 없다. 마찬가지로 삼손이 그의 머리털로부터 어떻게 힘셈을 가졌는지가 납득될 수 없다. 그가 드릴라에게 이야기하는 아래 구절을 읽어보자:
내 머리 위에 면도날이 오지 못하였다, 그 이유는 나는 내 어머니의 자궁으로부터 하느님의 나지르 인이 되어왔기 때문이다; 만일 내가 깎는다면, 그때 내 힘셈은 나로부터 나갈 것이다, 그리고 나는 약해질 것이다, 하여 나는 여느 인간 같을 것이다. 그리고 드릴라는 사람을 불렀다, 그가 그의 머리의 일곱 타래진 머리털을 깍아버렸다, 그리고 그의 힘셈은 그로부터 나갔다. 그리고 후에 그의 머리의 털이 자랐을 때, 힘셈이 그에게 되돌아왔다 (사. 16:17, 19, 22);
상응으로부터 파생되는 지식 없이 나지르인에 의해 신성한 자연 평면 측면에서의 주님이 표현되어졌다는 것을, 그리고 나지르인됨은 이와 다른 의미가 없다는 것을, 그리고 삼손의 힘셈은 그의 나지르인에 관하여 표현함으로부터 있었다는 것을 누가 알 수 있을까?
말씀 안에 내적 의미가 있다는 것, 그리고 글자 의미는 내적 의미에 있는 것들을 표현하고 있다는 것, 이런 등등을 모르는 자, 특히 믿지 않는 자는 이런 것들 안에 거룩한 어떤 것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인정하지 않는 그 순간일지라도, 가장 거룩한 것이 그런 구절들 안에 있다. 말씀이 거룩인 내적 의미를 소유한다는 것을 인간이 알지 못하면, 특히 믿지 못하겠다면, 아래 구절이 자신의 가슴 안에서 무엇을 열매맺어지게 할 것인지도 알 수 없다:
진리가 멸해지고 그들의 입으로부터 잘라져 나간다. 너희의 나지르인됨의 털을 잘라내고, 그것을 멀리 내던진다 (예. 7:28, 29).
이사야서에서:
그 날에 주님께서 앗시리아왕을 통하여, 머리, 그리고 발의 털을 강의 건널목에서 고용한 면도날로 깎을 것이다 (이. 7:20).
미가서에서:
너희를 대머리로 만들어라, 그리고 너희를 깎아라, 너희 유쾌함의 아들들 때문이다, 너희 대머리임 을 독수리 같이 확장하라, 그 이유는 그들이 너희로부터 이주했기 때문이다 (미. 1:16).
(말씀의 내적 의미, 내지 말씀이 지니는 상응력을 모르거나 인정 못한다면) 엘리야와 관련된 것, 즉 그는 털이 많은 자, 그의 허리에 가죽띠를 두름에 관련하여(왕하. 1:8) 무슨 거룩함이 거기에 포함되었는지를 알 자는 없다; 또는 엘리사에 관련된 것, 즉 그의 머리가 대머리라고 놀려댄 어린이들이 나무로부터의 (털이 많은 짐승인) 암콤에 의해 찢겨 죽은 사건이(왕하. 2:23, 24) 무슨 거룩함을 지녔는지를 알 도리가 없다.
엘리야와 엘리사에 의해 말씀 측면에 관련한 주님이 표현되어졌다, 고로 그들에 의해 말씀이, 특히 예언적 부분의 말씀이 표현되어졌다는 말이다. 이는 창. 18장의 서문에서 살핀 바 있다. “머리털이 많음”과 “가죽띠”는 글자 의미를, 즉 “털이 많은 자”는 진리들 측면에서의 글자 의미를, “가죽띠”는 선 측면에서의 글자 의미를 의미했다. 그 이유가 말씀의 글자적 의미는 말씀의 자연적 수준에서의 의미이다, 그 이유가 이 의미는 자연계의 것, 세상의 것들로부터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말씀의 내적 의미는 영적 수준에서의 의미이다, 그 이유는 이 의미가 천국에 있는 것들로부터 있기 때문이다. 이 두 의미들은 인간 속의 내적 부분과 외적 부분을 위하여도 있다; 그리고 외적인 것 없이 내적인 것도 없는데, 그 이유는 외적인 것은 내적인 것이 존속해야 하는 질서의 최말단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엘리사를 대머리라고 부르는 식으로 말씀에 접근하는 것은 말씀은 외적인 것에서 결핍이 있다고 결론짓는 것, 즉 말씀은 인간의 납득력에 적합한 의미가 없다고 결론지어버림을 함축하고 있다.
위 모두로부터 말씀의 모든 세부 사항들이 거룩하다는 것이 분명해졌을 것이다; 글자 안에 있는 거룩함은 내적 의미를 아는 것으로부터 헤아리지 않으면 이해력에 나타나지 않으나, 천국으로부터의 유입을 수단으로 말씀이 거룩하다고 믿는 이들의 지각에는 와진다. 비록 내적 의미가 인간에 의해 이해되지 않는 처지라 해도, 여전히 내적 의미는 당사자에게 감동을 주고 영향을 끼치는데, 그 이유는 내적 의미 안에 있는 천사들의 애착이 (미약하지만) 교통되기 때문이다. 이런 모두로부터도 역시 분명해지는 것은 말씀이 인간에게 주어진 이유는 인간이 천국과 교통을 할런지도 모른다는 것, 그리고 천국에 있는 신성한 진리가 유입을 수단으로 당사자에게 감동이 있게 해줄는지 모른다는 것 때문이다.

그리고 그의 의복을 갈아 입었다. 이는 자연 평면의 내면으로부터 있는 것에 관하여는 적합한 것을 입음에 의하여를 의미한다. 이는 “바꿈(change)”의 의미가 제거하는 것, 거절하는 것이다로부터; 그리고 “의복(garment)”의 의미가 자연 평면의 내면으로부터 있는 것이다로부터 (이는 아래에서 살핀다) 알게 된다; 그러므로 뒤어지는 것은 (새 “옷”에 의해 의미되는) 적합한 것이 입혀졌다 이다. 의복(garment, 꼭집어 말하면 겉옷, 외투가 적합할지 모른다)은 말씀에서 많이 등장하는 단어 중의 하나이다. 이 단어를 수단으로 아래쪽에 있는 것, 바깥쪽에 있는 것이 뜻해진다, 그리고 위쪽, 또는 안쪽의 것을 덮는 것도 뜻해진다; 그러므로 “의복”에 의해 인간의 외적인 것, 결과적으로 인간의 자연적인 것(자연 평면, 자연적 수준의 것)이 의미되어진다, 그 이유는 자연적 수준의 것이 내적, 또는 영적 수준의 것을 덮기 때문이다. 특별하게, “의복”에 의해서 신앙으로부터 있는 진리들이 의미되는데, 그 이유는 이것들이 선행으로부터 있는 선들을 덮기 때문이다. 위의 의복의 의미의 근원은 천사나 영들이 입고 나타나는 의복으로부터 이다. 영들은 빛남이 없는 의복을 입고 나타나나, 천사들은 빛나는 의복을 입고 나타나고, 마치 빛남을 만들기라도 하듯 한데, 그 이유는 그들 주위의 빛남 자체가 의복으로 나타나기 때문, 마치 주님께서 변모하셨을 때, 그 모습은 빛 같았고, 또는 빛나고 번쩍거렸던 것과 같다 (마. 17:2; 눅. 9:29). 영들과 천사들의 품질은 그들의 의복들로부터도 신앙의 진리들 측면에서는 알려질 수 있다, 그 이유는 이런 것들이 의복에 의해 표현되기 때문; 그러나 이 신앙의 진리들은 자연 평면에서의 신앙의 진리들에 관한 것이다; 그 이유는 합리적 평면에서의 신앙의 진리들은 얼굴과 얼굴의 아름다움으로부터 나타나기 때문이다. 이들의 의복의 빛남은 사랑의 선과 선행의 선으로부터 오는데, 이 빛남은 원인으로부터의 빛남이다. 이상 살핀 바로부터 영계에서 의복에 의해 표현되는 것, 결과적으로 영적 의미에서 “의복”에 의해 뜻해지는 것이 분명해졌을 것이다. 요셉이 갈아 입은 옷, 즉 벗어버린 의복은 감옥, 또는 구덩이로부터의 의복들이었다, 그리고 이 의복들에 의해 오류적인 것들과 거짓이 의미되었다. 이런 것은 시험의 상태에서 악귀나 영들에 의해 흥분되어진다; 그러므로 그가 “의복을 갈아입음, 바꿔 입음(change)”에 의해서는 자연 평면의 내면으로부터 있는 측면에 관련되는 거절과 바꿔짐, 더불어 자기에게 어울리는 새 의복을 입음에 의해 적합해질 수 있는 이런저런 것들을 표시했다. 의복에 관련하여 이미 말해졌던 것을 다음 사항들을 다시 살피면 도움이 될 것이다: 즉 천적인 수준의 것은 옷을 입지 않는다는 것, 그러나 영적, 자연적인 수준의 것이 옷을 입는다는 것(창 3:21); “의복”은 상대적으로 더 낮은 진리들을 표시한다는 것: 의복을 갈아입음은 거룩한 진리들이 입혀짐을 표현한다는 것; 의복을 찢음은 잃어버리고 파괴되고 한 진리들 때문에 통곡함을 표현한다는 것: 그리고 결혼 예복을 입지 않은 채 예식에 참석한 이들에 의해 의미되는 것 등등이다.

그리고 바로에게 왔다. 이는 그것에 의해서 새로운 자연 평면과 소통함을 의미한다. 이는 “오다”의 의미가 유입에 의해 교통함이다로부터; 그리고 바로의 표현함이 새로운 자연 평면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 구절의 단어들이 무엇을 포함하는지는 이미 열어보여 왔던 것만 가지고도 충분한데, 그 이유는 취급되는 내용이 어떻게 요셉이 구덩이로부터 자유해져서 왕에게 왔는지 이기 때문이다. 내적 의미에서 요셉에 의해 영적 평면의 천적인 것에 관련되는 주님이, 바로에 의해서는 외적 인간, 또는 자연적 인간이 표현되고; 요셉이 있었던 구덩이에 의해서는 영적 평면의 천적인 것에 관련되는 주님의 시험의 상태가 표현되고; 그리고 그가 바로에 의해 구덩이로부터 불려내짐은 시험들로부터 해방됨의 상태, 동시에 유입과 새로운 자연 평면과 교통함의 상태가 의미되고 있다. 이상으로부터 분명해지는 것은 어떻게 주님께서 그분의 자연 평면을 새로이 만드셨는지, 마지막으로는 신성으로까지 만드셨는지가 여기서 묘사되어 있다.
이 내용은 인간이 이 역사적 말씀의 구절을 읽을 때 천적 수준의 천사들이 생각하는 사항들이다. 더 나아가 그들은 이런 사항들을 생각하는 것이 가장 즐거운 일이다, 그 이유는 그들이 주님에 관련된 것 중에서도 그분이 지상에서 그분의 인간을 신성으로 만드신 것, 이를 통해 그분은 인류를 구원하셨다는 것을 생각하는 것이 최고의 기쁨을 지각함 안에 있기 때문, 이때 그들은 주님의 신성한 기운 안에, 마치 주님 안에 있는 듯하여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천사들로 최고로 천국의 기쁨 안에 있게 해주시기 위하여, 동시에 지혜 안에도 있게 해주시기 위하여, 신성의 과정(섭리하심)을 말씀의 내적 의미 안에 충분하게 묘사해두셨다. 이에 더하여 인간의 거듭남의 과정도 충분히 묘사해두셨다 그 이유가 인간의 거듭남은 주님의 신성이 되심의 형상이기 때문이다. (교회에 다녀보면, 목사의 설교를 듣다보면 나와지는 천당가는 결론은 간단히 몇 줄로도 요약되는데, 또는 십계명을 다 나열해도 한 페이지를 넘기기 힘든데, 목사들이 설교에서 사용하는 성경 구절의 일 년 사용량을 별도로 다 베낀다 해도 작은 책 한 권도 못될 것 같은데, 왜 주님께서는 성경을 이렇게도 두껍게 (개역개정 1754페이지) 되도록 허락하시어, 직업이 목사인 경우야 읽으면 도움이 되겠지만 평신도의 경우 알지도 못하는 구절들을 읽어내느라 힘들게 하시는가 라는 말을 누군가에게서 들은 적도 있다. 그러나 지상 생활을 통해 인간이 거듭남이 되는 듯 하다가 미끄러져 후퇴하고, 전진하는 듯 싶다가 추락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한 것을 감안하면 이 정도 두께의 성경은 한 개인의 일생의 길이에만 비교해도 별로 두껍다 말할 필요도 없지 않을까 생각한다 역자주). 천사들이 모여 대화하는 것이 무엇인지, 결과적으로 사후 천사가 된 인간들이 무엇을 이야기하는지에 관해 어떤 이들은 궁금해하는데, 이를 이해 못하는 것도 아니고,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여긴다. 그러나 이런 분들에게 무엇을 이야기를 하는지를 아는 것이 별로 어렵지 않다는 것을 말해주고 싶다. 그 이유는 그런 모든 것들이 말씀의 내적 의미 안에 포함되었기 때문이다; 즉 주님의 신성이 되심, 그분의 왕국, 교회, 사랑의 선, 신앙의 진리를 통한 인간의 거듭남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단지 그들은 대부분 말로 나타낼 수 없는 비밀한 것을 수단으로 이런 내적 의미들에 관해 이야기할 뿐이다.

15, 16절. 그리고 바로가 요셉에게 말했다, 나는 꿈을 꾸었다, 그리고 그것을 해석하는 자가 아무도 없다. 그리고 내가 너에 관해 들은즉, 말하기를, 너는 꿈을 듣고 그것을 해석한다 더라. 16 그리고 요셉이 바로에게 대답했다, 말하기를, 내가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바로에게 평화를 대답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가 요셉에게 말했다. 이는 자연 평면으로부터 영적 평면의 천적인 것을 지각함을 의미한다. 이는 말씀의 역사 부분에서 있는 “말하다(say)”의 의미가 지각하는 것이다로부터(이는 앞에서 많이 언급했다); 그리고 바로의 표현함이 자연 평면이다로부터; 그리고 요셉의 표현함이 영적 평면의 천적인 것이다로부터; 자연 평면으로부터 영적 평면의 천적인 것이 의미되는 이유는 주님이 요셉과 바로 모두에 의해 표현되기 때문, 즉 요셉에 의해서는 영적 평면의 천적인 측면이, 바로에 의해서는 자연 평면 측면이 표현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바로가 요셉에게 말했다”에 의해서는 주님께서 자연 평면에 있는 영적 평면으로부터의 천적인 것으로부터 지각하심이 의미된다. 그러나 이 지각함이 무엇인지, 무슨 품질인지를 납득하게 말해보라 하면, 우선 해결해야 하는 것은 영적 지각에 관하여, 그리고 영적 평면의 천적인 것으로부터에 관하여, 그리고 자연 평면이 영적 평면으로부터 구분되는 방식에 관하여 어떤 생각(idea)을 먼저 만들어 가지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참으로 이런 주제들에 관한 것은 이미 어떤 주제들은 또 말하나 하고 귀찮을 정도로 반복 언급되기도 했다 (저자로서는 그런 대목이 실로 중요했기 때문 아닐까 역자주).

나는 꿈을 꾸었다. 이는 예보를 의미한다. 이는 “꿈”의 의미가 예견, 예보이다로부터; 여기서 “꿈”이 예보인 것은 이어지는 것으로부터 분명하다, 그 이유가 꿈에서 칠 년 풍년과 칠 년 흉년이 (미리 보여진 것은 아니고) 미리 말로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을 해석하는 자가 아무도 없다. 이는 그 안에 무엇이 있었는지에 관하여 무지함을 의미한다. 이는 “꿈”이 거기 안에 무엇이 있었는지 인 바, “꿈을 해석 못함”은 거기 안에 무엇이 있었는지에 무지함이 의미된다. 내적 의미에서 “아무도 없다(no one)”는 아무도 없다(no one, none)를 뜻하여 어떤 사람이 그 안에 삽입되는 것을 전제로 말해지는 것이 아니고, 단지 대단히 단순한 부정적 표현이다. 그래서 단순히 아니다(not), 고로 알려지는 것이 아니다, 꿈에 보인 것에 관해 아는 것이 아니다, 또는 무지하다고 할 뿐이다. 그 이유인즉, 내적 의미는 특정 인물, 또는 인물에 결정된 어떤 것조차도 관심이 없고, 일반적 측면에서의 인물의 어떤 것만이 함축해 놓여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말씀을 읽을 때 그 말씀의 자연적 글자가 영적 글자로 바뀔 때, 시간, 공간, 인물로부터 있는 것이 내적 의미로 바귈 때, 필수적으로 멸해지는 세 가지 것들이 있다: 즉 시간, 공간, 인물(人物, person, 육체를 지닌, 지녔던 인간) 이다. 그 이유는 영계에는 시간도, 공간도, 특정 어떤 인물도 없기 때문. 이 두 가지는 자연계를 위해 필요한 것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항간에서 죽는 이를 두고 말해지는 바, 아무개가 시간 (세계)의 안으로부터 밖으로(out of) 건너갔다, 그는 시간 속에 있는 것, 또는 시간으로부터 있던 것을 자기 육체와 더불어 뒤에 남겨두었다 라는 식과 비슷하게 말하지 않던가! 영계에서는 인물쪽으로 결정된 것에 관심이 없는데, 그 이유는 당사자의 연설이나 대화 같은 것이 시간과 공간의 제약으로 한계받아 옹색했었지만, 거기서는 이런 시공이 없어 (자동적으로) 무한대로 그의 말을 늘리든 줄이든 노골적으로 들어내기 때문이다. 더불어 언어에 있는 한계의 팽창과 수축됨은 언어가 보편적이 되는 원인이기에, 무한할 수 있고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도 표현해낼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천사들의 말이 이런 특성 속에 있는데, 특히 천적 수준의 천사들은 상대적으로 더욱 무한계이다; 그 결과 그들 언어로부터의 모든 것은 무한하고 영원한 것 안으로, 결과적으로 주님의 신성 안으로까지 흐를 수 있다.

그리고 내가 너에 관하여 들었더니. 이는 영적 평면의 천적인 것이 지닌 수용 능력을 의미한다. 말하기를, 너는 꿈을 듣고 그것을 해석한다 더라란 미리 본 것 안에 무엇이 있는지를 지각함을 의미한다. 이는 “너에 관해서 듣다”의 의미가 그것이 이러하다는 것을 아는 것, 지각하는 것, 결과적으로 수용 능력이 있다는 것이다로부터; 이런 말을 듣는 자인 요셉의 표현함이 영적 평면의 천적인 것이다로부터; “듣다”의 의미가 지각하다 이다로부터; “꿈”의 의미가 미리 본 것이다로부터; 그리고 “해석”의 의미가 거기 안에 있는 것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로부터 분명해진다: 즉 “나는 너에 관해 들었는데, 말하기를, 너는 꿈을 듣고 그것을 해석한다”에 의해 미리 본 것에 있는 것을 지각함을 위한 영적 평면의 천적인 것의 수용 능력이 의미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요셉은 바로에게 대답했다. 이는 지식을 의미한다. 이는 “대답하다”의 의미가 의문이 있는 어떤 것에 대해 이것이 이러이러함을 알도록 누군가에게 하는 것, 결과적으로 지식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말하기를, 내가 아닙니다. 이는 그것은 인간만으로부터 있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이는 “내가 아니다”, 또는 “나에게 속해 있지 않다”가 요셉에 의해 표현된 주님에 관해서인 바, 인간 만으로부터가 아닌 신성으로부터 임을 의미함으로부터; 그 이유가 신성이 미리 보시고, 결과적으로 거기 안에 있는 것을 아시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주님이 세상에 계셨을 때, 그분은 실로 인간 안에서 섭리와 예견을 가지셨는데, 이는 신성으로부터 이다; 그러나 그분의 신성이 되심(glorification) 이래, 예견과 섭리는 신성만으로부터 이다. 그 이유가 신성이 되신 인간은 신성이기 때문이다. 인간 자체만을 주목하면, 인간은 신성으로부터 생명을 받는 그릇밖에 더 아니다; 그러나 주님의 신성화 하신 인간, 또는 그분의 신성한 인간은 신성으로부터의 생명을 담는 그릇이 아니고, 생명의 있음 자체(very being)이고, 거기로부터 진행되는 것이 생명이다. 이와 같은 것이 주님에 관하여 천사들이 가지는 생각이다; 그러나 오늘날 기독 교회로부터 다른 삶으로 오는 이들은 거의 모두가 주님을 여느 다른 사람으로서, 신성으로부터 분리할 뿐만 아니라 여호와로부터도 분리하고 있다, 더욱이 그분으로부터 진행하는 거룩함에서조차 분리해놓고 있다. 그들은 “한 분 하느님”을 말하나, 그들의 생각 속에서는 세 하느님이 오락가락 할 뿐이다. 그들은 신성을 셋 사이에 나누고 있다; 그 이유는 그들이 신성을 인물들 안으로 구별하여 각 하느님을 부른다, 그리고 각 인물들에 고유한 특성을 부여한다. 결과적으로 다른 삶에서 기독인들에 관해서 말해지는 바, 그들은 세 하느님들을 예배한다는 것, 그 이유는 그들이 셋을 생각하기 때문, 그들이 제아무리 하나라고 억지를 써도 아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방인 이었었는데 기독인으로 전환한 이들은 주님 만을 경배한다; 그리고 이런 이유는 최고의 하느님이 인간으로 땅 위에서 자신을 명명백백하게 하실 수밖에 없었다는 것; 그리고 자기들이 이렇게 최고 하느님을 생각하지 않으면, 그들은 도무지 어떤 하느님에 대한 생각도 아예 가질 수 없다는 것, 그러면 그분을 알 수 없다는 것, 결국 더욱 덜 그분을 사랑하게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았었기 때문이다.

하느님께서 바로에게 평화를 대답하실 것입니다. 이는 결합을 수단으로 신성한 인간으로부터를 의미한다. 이는 방금 앞에서 설명한 바로부터 분명해진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답하실 평화”의 의미가 주님의 신성한 인간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하느님”이 신성을 표시하는 것은 어떤 설명도 없이 분명하다, 그리고 최고 의미에서 “평화”가 주님이시다는 것은 이미 살폈다. 이 대답은 결합을 통하여 오고 있다는 것, 즉 영적 평면의 천적인 것과의 결합을 통하여, 그리고 자연 평면과의 결합을 통하여 오고 있다. 그 이유는 이것이 여기서 취급되기 때문이다.

17-24절. 그리고 바로는 요셉에게 이야기를 했다, 내 꿈에서 바라보니 나는 강둑 옆에 서있었다. 18 그리고 바라보니 강으로부터 살 안에 지방이 많고 형체에서 아름다운 일곱 암소가 올라왔다, 그리고 그들은 사초가 무성한 곳에서 먹고 있었다. 19 그리고 바라보니 일곱 다른 암소가 그것들 뒤를 따라 올라 왔는데, 그것들은 살 안이 얇고 형체는 흉측했는데, 나는 이렇게 불량한 것을 이집트의 모든 토지에서 본 적이 없었다. 20 그리고 야위고 보기 흉한 암소가 처음의 지방이 많은 암소를 먹어 치웠다. 21 그리고 그것들은 그것들의 뱃속으로 왔다, 그리고 그것들이 그것들의 뱃속에 왔는지는 알려지지 아니했다. 그리고 그들의 외모는 처음 같이 나빴다. 그리고 나는 깼다. 22 그리고 나는 꿈에서 보았다, 그리고 바라보니 알차고 우량한 일곱 이삭들이 한 줄기에서 나왔다. 23 그리고 바라보니, 동풍에 말리워지고, 야위고 시든 일곱 이삭들이 그것 뒤를 따라 튀어나왔다. 24 그리고 야윈 이삭들이 우량한 일곱 이삭들을 삼켰다. 그리고 나는 이것을 마술사들에게 말했다, 그리고 그것을 나에게 말해주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그리고 바로가 요셉에게 이야기를 했다. 이는 자연 평면으로부터 영적 평면의 천적 부분이 생각함을 의미한다. 이는 앞에서 살폈다, 거기서 같은 단어들이 사용되었기 때문에 반복을 피하기 위해 여기서는 설명하지 않지만, 앞 구절에서는 “바로가 요셉에게 말했다”라고 쓰여졌는데, 여기서는 “바로가 요셉에게 이야기를 했다”라고 쓰여진 것만을 살핀다; 그 이유가 “말하다(say)”가 지각을, “이야기를 하다 (speak)”는 생각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바로가 요셉에게 이야기를 했다”에 의해 자연 평면으로부터 영적 평면의 천적 부분이 생각함이 의미된다. 즉 이는 담화(대화, converse)가 아니다는 말이다. 그 이유는 외면의 것은 자체로부터서는 결코 생각하지 못하고, 오직 내면의 것으로부터서만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되 다른 상황인 것을 말해보면, 낮은 수준의 것은 그것보다 높은 수준의 것으로부터 생각하지 않으면 생각하지 못한다; 설사 내면의 것, 또는 더 높은 것이 외면, 또는 보다 낮은 것 안에서 생각하는데, 마치 외면, 또는 낮은 것이 자체로부터 생각했다 라고 나타날지라도, 이것은 오류이다는 말이다. 이것은 마치 누군가가 거울에서 자기를 보는데, 거기에 거울이 있다는 것을 모르는 경우와 같아서, 거기에 물체가 없는데, 거기에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 라고 상상한다는 말이다.
지금, 영적 평면의 천적 부분이 내면, 또는 더 높은 것이고, 자연 평면은 외면 또는 더 낮은 것이기 때문에, 자연 평면으로부터 영적 평면의 천적 부분이 생각함이 “바로가 요셉에게 이야기를 했다”에서 의미된다. 한마디로, 아래쪽의 것은 그 자체로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는 것; 그러나 그것이 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그것보다 높은 것으로부터 이다; 그리고 이것이 그렇기 때문에, 명백한 것은, 모든 것은 최고 높은 분으로부터, 즉 신성으로부터 이다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인간이 이해함으로부터 생각함, 그리고 의지로부터 행동함을 지극히 높으신 분, 즉 신성으로부터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가 거짓되게 생각하고, 그가 악하게 행동함은 그가 자신으로부터 감명되어졌던 형체로부터 오고 있다; 그리고 그가 진실로 생각하고 잘 행동하는 것은 그가 주님으로부터 받아왔던 형체로부터 이다; 그 이유가 우리 모두 아는 바, 하나 그리고 똑같은 힘과 에너지라 해도 명상(mediate)들과 맨끝(extreme)들에서 배치되는 형국에 따라 다른 동작(motion)들을 생산한다는 것이다; 고로 인간 안에서 신성으로부터의 생명도 형체들에 따라서(생명을 받는 그릇에 따라서) 가지각색의 생각들과 행동들을 생산한다.

위의 사항 하나 외에 17-24절에 있는 말들은 그 앞과 거의 같으므로 중복 설명을 피하기 위해 생략하므로 필요하면 앞 절을 참조하기 바란다.

25-27절. 그리고 요셉은 바로에게 말했다, 바로의 꿈은 하나입니다. 하느님께서 하시려는 것을 그분은 바로에게 보여주셨습니다. 26 일곱 우량한 암소는 일곱 해입니다, 그리고 일곱 우량한 이삭들은 일곱 해입니다. 그 꿈은 하나입니다. 27 그리고 그것들 뒤를 따라 나온 일곱 야위고 흉칙한 암소는 일곱 해입니다, 그리고 동풍에 말리워진 텅빈 일곱 이삭들은 흉년의 일곱 해입니다.

요셉이 바로에게 말했다. 이는 영적 평면의 천적인 것으로부터 자연 평면의 것을 지각함을 의미한다. 이는 “말하다”가 말씀의 역사 부분에서 지각하다를 의미함으로부터; 요셉의 표현함이 영적 평면의 천적인 부분이다로부터; 그리고 바로의 표현함이 자연 평면이다로부터 알게 되는데, 이에 관한 것은 앞에서 설명 되었다.

바로의 꿈은 하나입니다. 이는 미리 보여진 두 가지는 똑같다를 의미한다. 이는 “꿈”의 의미가 미리 보는 것이다로부터; 그리고 바로의 표현함이 자연 평면이다로부터; 그리고 “하나입니다”의 의미가 여기서는 양쪽에서 똑같다, 즉 자연 평면의 내면과 외면에서 똑같다 이다로부터; 바로가 암소에 관하여 꿈을 꾼 것은 자연 평면의 내면에 관하여 미리 본 것이고, 그가 이삭에 관하여 꿈을 꾼 것은 자연 평면의 외면에 관하여 미리 본 것이다; 그리고 자연 평면의 두 부분이 결합에 의해 하나로서 행동하기 때문에, 양쪽에서 똑같다가 의미된 것이다.

하느님께서 하시는 것을 그분은 바로에게 보이셨다. 이는 설비된 것을 자연 평면이 지각하도록 주어졌음을 의미한다. 이는 “하느님께서 하시는 것”의 의미가 설비된 것이다로부터(아래에서 살핀다); “보이심”의 의미가 교통하는 것과 지각하도록 주신다 이다로부터; 그리고 바로의 표현함이 자연 평면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로부터 분명한 바, “하느님께서 하시는 것을 그분은 바로에게 보이셨다”에 의해 설비된 것, 그것이 자연 평면이 지각하도록 주어졌다가 의미된다는 것이다. “하느님이 하시는” 것이 설비된 것인 이유는 하느님(즉, 주님)이 하시는 모든 것은 섭리이고, 신성으로부터 인 섭리는 그것 안쪽에 영원하고 무한한 것을 가지기 때문이다; 영원한 이유는 어떤 것으로부터 어떤 종착점을 바라보지 않기 때문, 그리고 어떤 것쪽으로 어떤 종착점을 바라보지 않기 때문이다. 무한인 것인 이유는 무한인 것이 모든 낱개의 것 안에서, 낱개의 것이 보편적인 것 안에서 동시에 주목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섭리(providence)”라 불리운다. 각각 그리고 모든 것 안에서 주님께서는 무한하고 영원한 것을 행하신다. 이에 관하여는 주님의 신성한 자비로부터 더 살필 것이다.

일곱 우량한 암소는 일곱 해입니다. 이는 내면의 자연 평면에서 진리가 증가하는 상태를 의미한다. 이는 “암소”의 의미가 자연 평면의 내면의 진리들이다로부터; “해(year)”의 의미가 상태이다로부터; 일곱이 있었다고 말해진 이유는 “7”이 거룩한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주제에 거룩함이 추가된다; 그리고 시작으로부터 끝까지의 전체 기간 또한 포함하고 있다. 그러므로 꿈에서 일곱 암소와 낱알로부터의 일곱 이삭이 꿈에서 보여지고, 그 후에 풍년의 일곱 해, 흉년의 일곱 해가 있었다. 또한 일곱째 날은 신성하게 되었고(거룩해졌고), 표현 교회에서 일곱째 해는 안식의 해로, 일곱째가 일곱 번(49) 이후의 해(50)는 희년이었다.
“일곱”이 거룩한 것을 의미하는 것은 영들의 세계에 있는 숫자들의 의미로부터 온다; 거기서 모든 숫자들은 어떤 것을 포함하기 때문이다. 1-9까지이라 말해 볼 수 있는 단순한 숫자들, 또한 10 이상이라 말해볼 수 있는 복합 숫자가 때로 내 시각 안에 나타났는데, 때로는 긴 시리즈에서 나타나기도 했다; 그것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내가 궁금해 하자, 내게 말해진 것은, 그것들은 천사의 언어로부터 출시된 것, 때로는 실제의 것들이 숫자들에 의해 짐짓 표현되어진다는 것이다. 이 숫자들은 천국에서 나타나지 않으나, 영들의 세계에서 이런저런 숫자들이 시야에 표출되어진다. 이것은 천적 수준의 인간이어서 천사들과 대화한 태고인들에게는 알려져 있었다, 그리고 이로부터 그들은 숫자들을 수단으로 교회의 셈(계산, reckoning)을 만들어 냈다, 이렇게 만들어 낸 것을 수단으로 그들은 자기들이 단어들에 의해 세부적으로 표현한 것을 보편적으로 표현했다. 그러나 각 숫자가 무엇을 포함했는지는 그들의 후손과 더불어 모두가 남아있지 않았고, 간단한 숫자들인, 2, 3, 6, 7, 8, 12; 이로부터 파생되는 숫자, 즉 24, 72, 77 정도만 겨우 잔존해 알려졌을 뿐이다. 특히 “7”은 가장 거룩한 것, 최고 의미에서 신성 자체를 의미했다. 그리고 표현 의미에서 사랑으로부터의 천적 평면(천적인 것)을 의미했다. 이것이 왜 천적 수준의 인간의 상태가 “일곱 째 날”에 의해 의미되었는지에 대한 이유이다 (84-87항). 숫자들이 실제의 것을 의미하는 것은 말씀에 등장하는 아주 많은 숫자들로부터 분명해진다. 계시록서에서:
총명을 가진 자로 하여금 짐승의 숫자를 계산하게 하라, 그 이유는 이것은 인간의 숫자이기 때문이 다, 그리고 그의 숫자는 666(six hundred and sixty six)이다 (계. 13:18).
그리고 다시:
천사가 거룩한 예루살렘의 성벽을 쟀더니, 144(a hundred and forty four) 큐빗이고, 이것은 인간의 측량, 즉 천사의 측량이다 (계. 21:17).
144는 12×12로부터 있고, 또한 12로부터 72가 온다.

일곱 우량한 이삭들은 일곱 해이다. 이는 자연 평면의 외면에 있는 진리들이 증가함을 의미한다. 이는 낟알로부터의 “이삭들”의 의미가 좋은 의미에서는 기억 속의 지식들이다로부터, 그리고 결과적으로 자연 평면의 외면으로부터의 진리들인데, 그 이유는 이것들이 기억 속의 지식들이라 불리우기 때문; 그리고 “해”의 의미는 상태이다.

그 꿈은 하나이다. 이는 양쪽 다 결합을 수단으로 있을 것임을 의미한다.

그것들 뒤를 따라 나온 일곱 야위고 불량한 암소는 일곱 해입니다. 이는 자연 평면의 내면에 떼지어 몰려든 거짓들이 불어나는 상태를 의미한다. 이는 “암소”의 의미가 진짜 의미에서 자연 평면의 내면에 있는 진리들이다로부터, 그러나 반대 의미에서는 거기 안에 있는 거짓이다로부터, 그러므로 전자는 “우량한(good)” 암소, 후자는 “야위고 불량한(thim and evil)” 암소라고 말해지고 있다; “나옴(coming up)”의 의미가 내면의 것들을 향하여 전진함이다로부터; 그리고 “해”의 의미가 상태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7”이 거룩한 것을 의미하기에 반대 의미에서는 모독적인 것이 의미된다; 그 이유가 말씀의 대부분의 표현에서 반대 의미도 지니기 때문이다. 이런 까닭에 천국에서 거행되는 것들이라 해도, 그것이 지옥을 향하여 아래로 내려가면서 반대적인 것들로 변하고, 실제로도 반대적인 것이다. 다시 말해 거룩인 숫자 일곱이 지옥쪽에서는 모독이 되어진다.
거룩하고 모독적이고 양쪽에서 “7”에 의해 의미되는 것을 7이 언급되는 계시록서로부터도 확증할는지 모른다, 먼저 거룩한 것을 의미하는 구절들이다:
요한은 일곱 교회들에게, 계시고, 계셨으며, 오실 그분으로부터; 그리고 그분의 왕좌 앞에 있는 일곱 영들로부터 은총과 평화가 있으라 (계. 1:4).
이런 것들을 일곱 영들, 일곱 별을 가지신 그분이 말하신다 (계3:1).
왕좌로부터 나와 왕좌 앞에서 타고 있는 일곱 등불, 이것은 하느님의 일곱 영들이다 (계. 4:5).
나는 왕좌 위에 계신 그분의 오른 손에서 일곱 인으로 봉해진 안쪽에도, 뒤쪽에도 쓰여진 책을 보았다 (계. 5:1).
내가 보았고 바라보니 왕좌의 한가운데에서 마치 죽임을 당한 듯 하여 어린 양이 서계셨다, 이 분은 일곱 뿔들과 일곱 눈들을 가지셨고, 이것은 모든 땅에 파견된 하느님의 일곱 영들이다
(계. 5:6).
일곱 천사들에게 일곱 나팔들이 주어졌다 (계. 8:2)
일곱째 천사의 음성의 날에서 하느님의 신비는 극점에 있어질 것이다 (계. 10:7)
일곱 재앙들을 가졌던 일곱 째 천사가 성전으로부터 나갔는데, 희고 빛나는 고운 아마포 옷을 입고, 금띠를 그들의 가슴에 띠고 있었다. 네 생물 중의 하나가 일곱 금빛의 유리병(vial)을 주었다
(계. 15:6, 7)
반대적 의미에서 “일곱”이 모독적인 것을 의미하는 것을 아래에서 읽는다:
잘 보니 크고 붉은 용, 일곱 머리들과 열 뿔들을 가졌고, 그의 머리들에는 일곱 왕관들이 있었다 (계. 12:2)
나는 바다로부터 올라오는 짐승을 보았는데, 일곱 머리들과 열 뿔들을, 그리고 그의 뿔들 위에 왕관들을 가졌고, 그의 머리들 위에 모독의 이름을 가지고 있다 (계. 13:1)
나는 진홍색의 짐승 위에 앉아 있는 여인을 보았는데, 모독의 이름이 가득하였고, 일곱 머리들과 열 뿔들을 가지고 있다. 만일 누군가가 지혜를 가지고 있다면, 여기에 총명이 있다. 일곱 머리들은 일곱 산들이다, 거기에 여인이 그것들 위에 앉아 있다; 그리고 그것들은 일곱 왕들이다. 있었고, 있지 않은 짐승은 그 자신 여덟번 째 왕이고, 일곱으로부터 이다; 그리고 그는 파멸로 가고 있다 (계. 17:3, 7, 9-11).

동풍에 말리워진 일곱 텅빈 이삭들. 이는 외면의 자연 평면에 떼지어 몰려든 거짓들이 불어나는 상태를 의미한다. 이는 낟알로부터의 “이삭들”이 기억 속의 지식들이다로부터, 이것은 자연 평면의 외면으로부터의 진리들이다, 그러므로 반대적 의미는 거기 있는 거짓들이다.

흉년의 일곱 해일 것이다. 이로부터 진리가 얼핏 보기에 없는 듯함과 결핍됨을 의미한다. 이는 “기근”의 의미가 지식들의 결핍(lack)이다로부터, 고로 진리가 결핍됨(privation)이다; 그 이유가 거짓들이 진리들을 추방하는 것, 그리하여 마치 진리들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듯 나타난 것이 “야위고 불량한 암소가 일곱 지방이 많은 암소를 먹어치웠다; 그리고 그것들은 그것들의 뱃속에로 왔다, 그리고 그것들이 그것들의 뱃속으로 왔었는지가 알려지지 않았다”에 의해 의미되어 있다; 그리고 또한 “야윈 이삭들이 일곱 우량한 이삭들을 삼켰다”에 의해 의미되어 있다. 여기서 취급된 것들, 즉 진리가 시작에서는 자연 평면 양쪽(내면과 외면)에서 번성할 것이다는 것, 그러나 그 후에(나중에) 진리들은 (번성함이) 실패되어가서 (번성했었음이) 있었기라도 했었는지 흔적 조차 거의 보여지지 않는다는 것을 말하는데, 이는 인간의 개혁과 거듭남과 더불어 어떤 경우에 해당하는지를 알지 않으면 아무도 알 수 없어 비밀한 말씀이 되어 있고 만다. 어쨋든 이것은 이어지는 구절들의 내적 의미에서 취급되는 주제이기도 한 바, 몇 마디 진전있는 말을 보태고 가야 할 것 같다.
인간이 개혁되는 시기에서, 첫 번째로 인간 각각은 말씀으로부터, 또는 교리로부터 진리들을 배우고, 그것들을 기억 속에 저장한다. 그러나 개혁되어질 수 없는 자가 진리들을 배웠고 그것들을 기억 속에 저장했을 때, 그는 이 정도이면 충분하다고 믿는다; 그러나 이는 정말 대단한 실수이다. 실수라고 말한 이유는 획득되어진 진리들은 개시(initiate)되어 선과 결합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개시하다라는 단어가 이 책에서는 꽤 등장하는 편인데, 사실 마땅한 의역어를 아직 찾지못해 영어 사전의 번역을 거의 그대로 사용하는 편이라 틀린 번역은 아니겠지만, 중요한 것은 독자에게 와닿는 실감나는 단어로 얼마나 자리매김되는 지가 번역의 관건이기에 여기서 한마디 더 거들면, 이렇다, 예를 들면, 어떤 가게가 있는데, 그 가게가 하루의 장사를 위해 가게문을 열 때, 처음 물건을 팔아주는 이를 두고 개시해주는 손님이라 하여 서비스로 조금 더 퍼주거나 할인도 기쁘게 해주어 기어이 살 수밖에 하려고 하는 주인을 연상하면 될 것이다. 주인이 기뻐하는 이유는 그 날의 장사 운수(?)를 재는 척도로 여겼기 때문이다, 실제로도 이 첫 손님에 연결되어 매상을 올릴 것이라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배웠던 진리를 개시함(견습함, 또는 요즈음 말로 인턴쉽)은 거듭남의 전진 기지이자, 옷을 입을 때의 첫 단추 잠그기에 해당하는 바, 매우 중요하다 역자주.); 그런데 이 개시됨은 자아 사랑과 세상 사랑의 악들이 자연적 인간 안에 남아 있는 한, (엄밀히 말하면, 사실상) 행해질 수 없다. 그렇지만 이 사랑들은 첫 소개자(도입자, introducer)들에 해당한다, 그렇다고 소개된 진리들 자체가 그 사랑들과 결합하는 것은 도무지 가능할 수 없다. 그러나 진리는 결합이 필수인 바, 어쨌든 결합이 결과되도록 하기 위하여 이 사랑들에 의해 소개되고 거기서 유지 보존되는 진리들은 처음에는 (위 두 사랑들과 결합을 피함이 우선 중요하므로) 추방당해져 있어야만 한다. 사실상 이 진리들이 추방당해진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보여지지 않게 감추여지도록 안쪽으로 철수되어 있다. 이런 상황을 본문에서 “없는 듯처럼(seeming)” 여겨지게 진리가 결핍됨이라는 표현으로 설명한 것이다. 이것이 행해질 때, 자연 평면은 안쪽으로부터 계발되어진다(빛이 드리워진다), 그리고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의 악들이 길(방법, way)을 주고 있다; 그리고 그것들이 저장된 진리들에 길을 터주는 등차에 따라, 그리고 선과 결합되어진다. 인간이 얼핏 느끼기에 진리들이 결핍되었다고(없다고) 할 때의 경우를 말씀에서는 “황무해 있음(desolated)”이라 일컬어지고, 비교적 표현으로는 “저녁(evening)”에 해당한다; 인간이 아침 안으로 오기 전, 저녁이 있다; 그래서 표현 교회에서의 하루는 저녁에서 시작한다. (여기에 창 1장에서 “저녁과 아침은 첫째 날…둘째 날이었다”고 표현된 것도 곁들여 생각해보라 역자주.)

28-32절. 이것은 내가 바로에게 이야기를 했다 라는 말입니다. 하느님께서 하시는 것을 그분께서는 바로가 보겠끔 하신 것입니다. 29 바라보니 이집트 전역에 큰 풍년의 일곱 해가 올 것입니다. 30 그리고 그 뒤를 따라 흉년(기근)의 일곱 해가 발생할 것입니다. 그리고 생산의 모든 풍부함이 이집트 전역에서 잊혀질 것입니다. 그리고 그 기근이 토지를 사를 것입니다. 31 그리고 산출물의 풍부함도 그 뒤를 이은 기근으로 알려져 있지 않을 것입니다. 그 이유는 엄청난 비통함이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32 그리고 이 꿈이 바로에게 두 번 있어진 이유는 이 말이 하느님에 의해 설립되었고 하느님께서는 이 일을 지체없이 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내가 바로에게 이야기를 했다 라는 말이다. 이는 자연 평면이 영적 평면의 천적인 것으로부터 생각한 것을 의미한다. 이는 “말(word)”의 의미가 실재의 것이다로부터(이는 설명한다); “이야기 하다”의 의미가 생각하는 것이다로부터; 여기서 이야기를 하는 요셉의 표현함이 영적 평면의 천적 부분이다로부터(이는 앞에서 살폈다) 알게 된다. 이상 모두로부터 분명한 바, “이것은 내가 바로에게 이야기를 했다 라는 말이다”에 의해 진짜의 것, 또는 자연 평면이 영적 평면의 천적 부분으로부터 생각했던 것이 의미된다는 것이다. 이제 원어에서의 “말(word)”에 주목하면, 이는 어떤 진짜의(real) 것이 뜻해진다; 그리고 이로부터 신성한 계시가 “말, 말씀(Word)”이라 불리우고, 또한 최고 의미에서 주님이시다. “말씀”에 의해 주님에 관련하여, 또는 그분으로부터의 계시에 관련하여 서술할 때, 대략적 의미에서 신성한 진리가 의미되고, 이 진리로부터 진짜인 모든 것은 그것들의 존재를 가진다.
진짜인 모든 것들이 존재 안으로 왔다는 것과 주님으로부터 있는 신성한 진리를 통하여 존재 안으로, 고로 말씀을 통하여 온다는 것은 아직 밝히 알려지지 않은 비밀이다. 이렇게 믿어졌다: 모든 것들은 하느님의 왕국에서 왕같이 그분이 말하시고 명령하심에 의해 창조되어왔다는 것이다. (우리가 말하는 식으로 하느님도 말하신 것은 아니다는 뜻, 대표적인 예가 창 1장의 “빛이 있으라 하니 빛이 있었다” 일지 모르니 연관하여 더 생각해보길 바란다 역자주.) 이것이 모든 것은 말씀을 통하여 만들어져 왔었고 창조되어져 왔었다는 것을 뜻하는 것은 어쨌든 아니고, 이는 신성한 선으로부터 진행하는 신성한 진리, 즉 주님이시고, 이 분으로부터 모든 것들은 존재 안으로 왔었고, 존재 안으로 오고 있다는 말이다. 신성한 선으로부터 진행하는 신성한 진리가 우주에서 최고로 최고로 진짜(진실, reality) 자체이고 최고로 최고로 본질 자체(essential, 실체)이고, 이 진실과 본질이 만들고 창조한다. 신성한 진리(Divine Truth, 하느님의 진리)를 두고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생각하고 끝내는 것은, 이것은 마치 연설자의 입으로부터 유출되어 공기를 통하는 말(word)이라는 상상 외에 더 다른 생각까지 발전한 자는 매우 매우 드물다. (창 1장 내지 모세 오경을 기록한 위대한 모세도 이 말에 대한 것은 인간적 차원에서의 말로서만 알고 기록할 수밖에 없었을지 모른다 역자주.) 신성한 진리에 대한 위의 대부분의 사람들의 생각이 생산한 견해는, “말씀”은 어떤 명령(하는 말), 고로 모든 것들은 명령하는 말에 의해서만 만들어졌다는 것에 다다른다. 고로 주님의 신성으로부터 진행되었던 어떤 진짜의 것으로부터가 아닌 셈이다; 그러나 누누이 말했듯이, 주님으로부터 진행하는 신성한 진리, 최고의 진실 자체와 실체 자체가 모든 것들의 근원이고, 이 근원으로부터 선에 관하여와 진리에 관하여 형체들이 있다. 이 비밀한 주제에 관하여는 주님의 신성한 자비로부터 이어지는 페이지들에서 더 말해질 것이다.

하느님께서 하시려는 것. 이는 설비되어진 것에 관하여를 의미한다. 이에 대하여는 이미 살폈다.

그분께서는 바로가 보겠끔 하셨다. 이는 자연 평면이 지각함을 의미한다. 이는 “보다”가 이해하다와 지각하다를 의미함으로부터, 그리고 바로의 표현함이 자연 평면이다로부터 알려지고 있다.

바라보니 …일곱 해가 온다. 이는 섭리하심의 상태들을 의미한다. 이는 “해”의 의미가 상태들이다로부터; 그리고 “오다”의 의미가 섭리하심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 이유가 “오다(come)”와 “지나가려고 오다(come to pass)”가 신성을, 또는 하느님이 하시는 것을 서술할 경우, 섭리에 일치하여 발생하는 것, 결과적으로 섭리로부터 있는 것을 표시한다. 풍년의 일곱 해와 기근의 일곱 해가 이어지는 구절들에서 다루어진다. 이때 “해들”에 의해 상태들이, 즉 생산물이 풍부한 일곱 해들은 자연 평면에서 진리가 증식되는 상태들을; “기근의 해들”에 의해서는 자연 평면에서 진리가 부족함과 결핍됨이 의미된다. 일반적 측면에서 이집트에서 있는 풍년과 기근의 일곱 해들에 의해서는 인간의 개혁과 거듭남의 상태들을 내적 의미에서 묘사하고 있다, 그리고 최고 의미에서는 주님의 인간이 신성이 되심에 관련한 상태들이 묘사되고 있다. 이런 내적 의미들이 담겨지도록 하시기 위하여 본문의 이런 사건들이 이집트의 토지에서 거행된 것이다; 그리고 이집트의 토지와 바로에 의해 내적 의미에서 자연 평면이 의미되기 때문에 주님 안에 있는 자연 평면도 여기서 취급된다.
우리가 짚어서 알고 있어야 하는 것은, 그때 당시 닥친 것들, 그리고 이를 가지고 말씀에서 묘사한 것들은 주님 자신을, 그분의 인간이 신성이 되심(glorifying)을, 그리고 표현 의미에서 그분의 왕국을, 결과적으로 일반적 측면에서의 교회를, 낱개적 측면의 교회를, 고로 인간의 거듭남을 표현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 이유가 거듭남을 수단으로 인간은 낱개적인 교회로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그때 당시 거행된 것이 이런 저런 것을 표현하였다는 것의 제 1 의 관심은 말씀을 위하여서 인 것, 즉 말씀 안에서 신성을 표현하는 것, 그리고 영적, 천적 사항들을 시리즈로 표현하는 것, 이 말씀이 교회인 뿐만 아니라 천국의 천사들에 유익함을 주도록 하시기 위한 것 등등이다; 그 이유가 천사들은 신성한 것들을 이런 말씀들로부터 지각하기 때문, 이런 천사들이 애착을 가지고 말씀을 읽는 이들과 교통하여 그 인간에게도 감동함이 있게 한다. 이로부터 그 인간은 거룩함을 느낀다. 이런 이유로 본문의 사건들이 이집트의 토지에서 거행된 것이다.

이집트 전역에 큰 풍년이 있다. 이는 양쪽(외면, 내면)의 자연 평면 안에서 진리가 증식됨이 있음을 의미한다. 이는 “풍년(생산물의 풍부함)”의 의미가 진리의 불어남이다로부터 (아래에서 설명한다); 그리고 “이집트의 토지”의 의미가 양쪽의 자연 평면이다로부터; 그 이유가 “이집트”에 의해 기억 속의 지식이 의미되기 때문; 그리고 기억 속의 지식이 의미되기에 마찬가지로 자연 평면도 의미된다; 그 이유는 자연 평면에 있는 것이 기억 속의 지식이라 불리우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집트의 모든 토지(전역)”에 의해서는 자연 평면의 내면과 외면 모두가 의미된다. “산물이 풍부함”이 진리가 불어남을 의미하는 이유는 이것이 진리의 부족을 의미하는 기근과 대조를 이루기 때문이다. “산물의 풍부함”을 원어에서 표현하는 용어 역시 기근과 반대되어 의미되는 것을 표현한다, 그리고 “산물의 풍부함”이 내적 의미에서는 지식의 저장이 충분함을 의미하는데, 그 이유는 기근이 진리의 부족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지식들은 자연적 인간의 진리들밖에 더 아니고,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진 것은 아직 아니다; 이런 진리들의 불어남이 여기서 뜻해진다. 지식들은 그것들이 이해력에 의해 인정될 때까지 인간 안에서 진리들이 되지 않는다. 진리들이 되어짐은 당사자에 의하여 확증될 때이다; 그리고 이 진리들이 자신의 것이 되는 것은 그가 그 진리들에 따라 살아갈 때이다; 그 이유가 자신의 생명으로 만들어지지 않으면 어떤 것도 당사자 자신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그가 스스로 진리들 안에 있는 이유는 그의 생명이 그 진리들 안에 있기 때문이다.

그 뒤를 이어 흉년의 일곱 해가 발생할 것이다. 이는 진리의 부족이 있을 때 수반되는 상태들을 의미한다. 이는 “해”의 의미가 상태이다로부터; 그리고 “기근”의 의미가 진리의 부족이다로부터; 그리고 “그 뒤를 이어”의 의미가 이어지는 것들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생산물의 모든 풍부함이 이집트의 토지에서 잊혀질 것이다. 이는 진리가 옮겨져버림(제거됨)과 자연 평면의 양쪽에서 외관상 나타나는 진리의 결핍을 의미한다. 이는 “잊다” 또는 “잊어지다”의 의미가 옮겨짐, 그리고 이로부터 외관상 결핍되어 있음이다로부터; 그리고 “산물의 풍부함”의 의미가 진리가 불어남 또는 진리가 배가됨이다로부터; 그리고 “이집트의 토지”의 의미가 자연적 수준의 마음, 또는 인간의 자연 평면, 여기서는 자연 평면의 양쪽 모두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잊다”, “잊어지다”의 의미가 옮겨져버림과 외관상 결핍됨을 표시하는 이유는 이것이 기억과 더불은 경우, 이로부터 생각과 더불은 경우이기 때문이다. 인간이 곰곰이 생각하는 것은 그의 시야 아래에 직접적으로 있는다, 그리고 생각하는 것에 관련된 것들은 자신을 빙둘러 질서적으로 표출된다, 게다가 관련되지 않은 것조차도 표출된다, 그러나 이것은 당사자 자신으로부터 아주 멀리 있는데, 마치 잊혀 있다. 반대적인 것들은 관련된 것들로부터 분리되어 아래쪽에 매달려 있고 그 자체 표출은 아래쪽에서이다, 그리고 위쪽과의 균형 하에 있다. 질서에서의 이런 놓여짐(배치됨)은 흘러드는 선을 수단으로 하고, 이런 경우가 모든 인간의 생각함과 더불은 경우이다. 이런 경우가 다른 삶에서 생각들로부터 나타난다; 그 이유가 천국의 빛 안에서 있는 천국에서 생각들은 시야에 자칫 표출되기 십상인데, 이때 그것들의 배열의 형체가 보여지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분명한 바, “잊어짐”은 내적 의미에서 옮겨짐과 외관상 결핍됨 (또는 없음) 이다는 것이다.

그리고 기근이 토지를 사를 것입니다. 자포자기까지에 이를 것임을 의미한다. “기근”의 의미가 지식들의 부족, 이로부터 진리의 결핍이다로부터; 그리고 “토지” 여기서는 이집트의 토지의 의미가 자연적 수준의 마음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것이 자포자기까지를 의미하는 이유는 “기근이 토지를 불사를 것이다”라고 말해지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토지”가 자연적 수준의 마음을, “기근”에 의해서는 진리의 결핍이 의미될 때, 이는 자포자기밖에 더 의미할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이때 소진됨이 영적 방식에서 거행되기 때문이다. 이 구절에서 진리의 결핍에 의해 황무함의 상태가 야기됨이 묘사되고 있다. 이 상태의 마지막 단계가 자포자기이다. 자포자기가 이 상태의 마지막 단계인 이유는 그것에 의해서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이 제거되어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선을 사랑함과 진리를 사랑함이 그것의 자리에 은근히 심어진다; 그 이유가 거듭나지려는 이들의 경우에서, 자포자기는 영적 생명에 관하여 이고, 결과적으로 선과 진리의 결핍에 관하여 이기 때문이다, 이런 인물들은 진리와 선이 결핍될 때, 그들은 영적 생명에 관련해 자포자기 하기 때문; 이로부터 그들이 자기들의 자포자기로부터 빠져나올 때, 그들은 기쁨과 복됨을 향유한다.

그리고 생산물의 풍부함이 그 토지에서 알려져 있지 않을 것입니다.” 이는 거기서 이전과 같은 진리의 지각은 아예 없을 것임을 의미한다. 이는 “알려짐”이 지각되어짐이다로부터; 그리고 “생산물의 풍부함”의 의미가 진리가 번성함이다로부터; 그리고 “토지”, 여기서는 이집트의 토지의 의미가 자연적 수준의 마음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로부터 분명한 바, “생산물의 풍부함이 토지에서 알려져 있지 않을 것이다”에 의해 거기에서 이전에 있던 것과 같은 진리의 지각은 아무것도 없을 것이다가 의미된다.
이 구절에서 취급된 주제는 황무해짐의 마지막 상태이다. 즉 거듭남 이전 진행된 자포자기가 있을 때의 황무해짐의 상태이다. 그리고 이것이 현 구절에서 취급된 주제인 바, 이것이 어떤 경우인지를 서술해야만 할 것 같다. 천국 안으로 올 수 있기 위하여 모두 각각의 인간은 개혁되어야만 하고, 반드시 새로이 태어남, 또는 거듭나져야만 하는데, 그 이유는 “인간이 다시 태어나지 않으면, 그는 하느님의 왕국을 볼 수 없다”이기 때문이다 (요. 3:3, 5, 6). 인간이 죄 안으로 태어나지고, 이 죄가 오랜 동안 즉 부모, 조부모, 그리고 선조들로부터 불어나졌다, 그리고 이 죄는 유전적인 것으로 만들어졌다, 고로 후손들에게 물려주는 셈이 되어왔다. 태어나지는 모두 각각의 인간은 계속적으로 불어나진 이런저런 유전적 악들 안에서 태어나진다; 결과적으로 인간 모두에게는 죄밖에 더 아무것도 없다; 그러므로 그가 거듭나지 않으면, 그는 통째로 죄 안에 남아 있는다; 따라서 인간이 거듭나지기 위하여 그는 먼저 개혁(reform)되어야만 한다; 이 개혁은 신앙으로부터의 진리들을 수단으로 행해진다; 그 이유가 그는 말씀으로부터, 그리고 이 말씀으로부터의 교리로부터 선이 무엇인지를 배우기 때문이다. 말씀으로부터, 또는 말씀으로부터의 교리로부터 선에 관한 지식들이 신앙으로부터의 진리들이라 불리운다, 그 이유는 신앙 속의 모든 진리들은 선으로부터 튀어나오고 선쪽으로 흐르기 때문인데, 그 이유는 이 진리들은 그것의 목적으로 선을 찾기 때문이다.
이것이 처음 상태이고, 이것을 개혁의 상태라고 불리운다. 자기의 어린 시절 내지 청년기를 교회 안에서 보낸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런 상태 안으로 입문되어져 있다. 그러나 거듭나진 자가 적은 이유는, 교회 안의 이런 이들 대부분이 신앙의 진리들, 또는 선에 관한 지식들을 배우지만, 이는 어릴 때 자신의 의지가 판단함이 없이 무작정 데려다 놓아둔 곳이 교회이어서, 성경 말씀을 잘 외우면 부모가 좋아하니까, 교회 선생의 칭찬 때문에 등등이고, 한참 이후인 더 나이가 들어서는 명성, 명예, 이익 등등을 위하여 있어진 지식이나 진리들이 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런 사랑들(세상 사랑, 자기 사랑 등등의 사랑들)을 수단으로 흡수된 신앙의 진리들은 이런 사랑들이 내 속에서 차지했던 자리에서 옮겨질 때까지 그는 새로이 태어난다거나 거듭나질 수 없다. 그러므로 그가 이런 사랑들을 옮겨지게 하기 위해서는 시험의 상태로 진입해질 수밖에 없게 된다. 자신에게 맡겨진 사랑들이 지옥의 패거리에 의해 흥분되어진다; 그 이유는 이 사랑들이 당사자와 더불어 살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때 유아 시절 순진의 상태에서, 그 후에 이런 시험에서의 사용을 위해 내면적으로 저장되고 보전된 선과 진리에 애착함들이 천사들에 의해 흥분되어진다. 이때 시험들로서 인간이 느끼는 다툼이 악령들과 천사들 사이에 있다; 그리고 다툼이 선들과 진리들에 관하여서 이기 때문에 이전에 은근히 심어진 진리들은 악령들에 의해 주입된 거짓들에 의해 추방된 듯 있다, 하여 진리들은 더 이상 나타나지 않고 있다(있지 않은 듯하여 있다). 이때 인간 당사자가 자신을 거듭나지게 허용한다면, 선으로부터의 진리의 빛이 내적인 길을 통하여 자연 평면 안으로 주님에 의해 은근히 드리워진다. 이 빛 안으로 진리들은 질서 안에서 귀환한다.
이것이 거듭나지는 인간과 더불은 경우이다; 오늘날 이런 상태 안으로 입장하겠다고 허가하는(admit) 이들은 너무나 적다. 어쨌든 인간 각자가 거듭남을 자신에게 허가하는 만큼에서, 모든 이는 영적 생명의 진리들과 선들 안에 있는 가르침들을 수단으로 개혁되기를 시작한다; 그러나 대체로 인간들이 성년 초기의 나이에 들어서자마자 그들은 세상에 의해 어디론가 끌려가지도록 자신을 내어놓는다. 고로 지옥의 영들 편에 들어가 있다, 이 영들의 이간질을 수단으로 그들은 점진적으로 천국으로부터 멀어져 버리고, 천국은 없다고 거의 믿고야마는 지경에까지 다다른다. 고로 이들은 어떤 영적 시험의 안으로 자신이 놓여지게 할 수 없다, 그 이유는 만일 그들이 영적 시험의 상태에 놓여진다면 그들은 즉시 굴복할 것이기 때문, 그러면 그의 마지막 상태는 이전의 상태 보다 더 악화될 것이기 때문이다 (마. 12: 45). 이상 살핀 바로부터 이 본문에 내적 의미에서 포함된 것과 더불은 경우가 어떠한지, 즉 개혁됨과 거듭남의 상태와 더불어 어떤 경우일 것인지가 보여졌으리라 본다. 이 구절의 상태는 자포자기라는 마지막 상태이다.

그 뒤를 이은 흉년 때문에 매우 큰 비통함이 있을 것이다. 이는 이와 같은 결핍 때문에를 의미한다. 이는 “기근”의 의미가 선에 관한 지식들의 부족, 결과적으로 진리의 결핍으로부터; 그리고 이와 같은 결핍 때문에 마지막으로 자포자기함으로부터; 이로부터 “큰 비통함”의 의미가 심각한 자포자기함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자포기함의 하나인 황무해짐의 마지막 상태가 여기에 포함되어져 있다.

이런고로 이 꿈은 바로에게 두 번 겹쳐 있었다. 이는 자연 평면의 양쪽 것들에 관하여 미리 보여졌기 때문을 의미한다. 이는 “꿈”의 의미가 미리 본 것이다로부터; 바로의 표현함이 자연 평면이다로부터; 그리고 “두 번 겹쳐 있다”의 의미가 양 측면의 자연 평면, 즉 자연 평면의 내면과 외면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첫 꿈에서는 암소에 관한 것인데, 이는 자연 평면의 내면에 관하여 미리 본 것이다; 두 번째 꿈은 낟알로부터의 이삭에 관한 것인데, 이는 자연 평면의 외면에 관하여 미리 본 것이다. 그러므로 “두 번 겹침”은 양쪽에 관하여를 표시한다

이 말이 하느님에 의해 설립되었기 때문이다. 이는 그것이 신성임을 의미한다. 이는 설명 없이 알는지 모른다; 그 이유는 “말”이 하느님을 서술 할 때, 신성한 진리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이 “하느님에 의해 설립되어진다”라고 말해지기 때문에 이 일은 반드시 닥치고야 마는 사항들임을 의미한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그것을 지체함 없이 행하신다. 이는 사건 각각 모두에서를 의미한다. 이는 “행하다”의 의미가 하느님을 서술할 경우, 섭리하심이다로부터, 섭리하심으로부터 사건 역시 의미하는데, 그 이유는 섭리하심 속에 있는 것은 무엇이든 사건이기 떼문이다; 그리고 “그것을 지체함 없이”란 모두 각각의 사건에서를 의미한다. 내적 의미에서 “서두름”은 시간을 뜻하는 빨리 하는 것을 뜻하지는 않고, 대신 상태를 뜻하는 것, 충분하게 인 바, 이는 모두 각각의 사건을 뜻한다. 그 이유가 서두름은 시간을 함축하고 있으나 영계에서는 시간이 없고 상태만 있기 때문이다. 고로 시간 안에 있는 서두름은 거기서는 그것과 상응하는 이런저런 상태에 관련을 가진다; 상응하는 이런저런 조건들은 많은 것들이 다함께 결과를 향하여 행동하기 때문에, 어떤 사건이 확실히 결과함이 보증된다.

33-36절. 그리고 이제 바로로 하여금 총명하고 슬기로운 사람을 보게 하시고, 그를 이집트의 토지 위에 놓게 하십시오. 34 바로로 하여금 이렇게 하게 하십시오, 그리고 그로 하여금 이 토지 위에 통치자들을 임명하게 하십시오, 그리고 생산물이 풍성한 일곱 해에서 이집트 토지로부터의 오분의 일을 가져오게 하십시오. 35 그리고 그들로 장차 올 이 좋은 해들로부터 모든 양식을 모으게 하십시오, 그리고 도성들 안에 양식을 위해 바로의 손 아래 낟알을 쌓으십시오, 그리고 그들로 그것을 지키게 하십시오. 36 그리고 이 양식은 이집트의 토지에 있게 될 기근의 칠 년에 맞서는 토지에 비축을 위하여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 토지는 기근에 절단되지 아니할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 바로로 하여금…보게 하십시오. 이는 자연 평면이 앞쪽을 바라봄을 의미한다. 이는 “보다”, “바라보다”가 앞쪽을 향하여 쳐다보는 것이다로부터; 그 이유가 여기서의 “보다”는 활동을, 즉 행동함을 함축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행동되는 것을 함축하지 않는 경우, 이는 이해하다와 지각하다를 의미한다. 자연 평면이 앞쪽을 바라보는 경우는 이렇다: 인간의 자연 평면, 또는 인간의 자연적 수준의 마음, 이 마음은 합리적 평면의 아래에 있는데, 그 자체로부터서는 어떤 것쪽으로 앞을 보지 않는다; 그러나 앞을 보는 것은 내부로부터 인데, 단지 내면이 보는 것이 마치 외면이 보는 것같이 여겨질 뿐이다. 이는 거울 안의 자신이 진짜 자기인냥 여기는 것과 같다. 또한 이것이 요셉이 바로에게 이야기를 함에 의해 내적 의미에서 표출되어지고 있다; 그 이유가 요셉에 의해 영적 평면의 천적 부분이, 이는 안쪽의 것이고, 그리고 바로에 의해서는 자연 평면이, 이것은 바깥쪽의 것이기 때문이다; 고로 요셉은 바로에게 여기서 매우 총명하고 슬기로운 자로 비쳐졌다.

총명하고 슬기로운 사람. 이는 유입되는 진리와 선에 관하여를 의미한다. 이는 “총명한 자”의 의미가 진리이다로부터, “슬기로운 자”의 의미가 진리로부터의 선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우리가 알아야하는 것은, “총명하고 슬기로운 사람”이 내적 의미에서는 그런 품성을 지닌 인물이 아니고 총명하고 슬기로움에 속하는 추상적인 것, 즉 진리와 선이다는 것이다. 다른 삶에서, 특히 천국에서, 모든 생각, 이로부터 모든 언어는 인물들로부터 추상한 것을 수단으로 운반되어진다; 그러므로 거기서의 생각과 언어는 보편적이고, 상대적으로 한계도 없다; 그 이유가 생각과 언어가 인물들, 그리고 특정한 품질들, 그리고 이름들, 또한 단어들쪽에서 결정되어지는 만큼, 그것들은 덜 보편적이 되고, 그리고 실제의 것쪽으로 결정되고, 거기에 머무른다. 그 반면, 그것들이 인물들, 그 인물들에 관련된 것쪽에서 결정되지 않는 만큼, 그러나 그것들로부터 추상한 진짜인 것쪽으로 결정되는 만큼, 그것들은 실제의 것으로부터 떨어져 결정되고, 자아를 넘어 확장되고, 정신적 시야는 더 높게 되고, 결과적으로 더 보편적이 된다.
이것은 인간의 생각함으로부터 나타나는 자체이기도 하다. 즉 누군가가 이야기하는 것에서 나열되는 단어들에 주목하는 만큼 그는 말들의 의미에 주목하지 못한다. 다시 말해 기억 속의 세부적인 것에 주목하고 그것들에 안주하는 만큼, 진짜인 것의 본성을 지각하지 못한다, 더욱 중요한 것은, 모든 것에서 자체에 주목하는 만큼, 생각을 협소해지게 하고 보편적 방식에서 주제를 바라봄으로부터 자체를 옮겨지게 한다는 것이다. 그럼으로 누군가가 타인 보다 자신을 더 사랑하는 만큼에서, 그는 덜 슬기로워진다. 이로부터 분명해지는 바, 인물들로부터 추상된 것이 글자 의미에서 인물들에게 결정되어 있는 것들에 의해 내적 의미에서 의미된다는 것이다. 말씀에서 “지혜,” “총명,” “지식”이라는 단어 사이에 구분되어짐이 놓여지는데, “지혜”에 의해서는 선으로부터 있는 것이, “총명”으로부터서는 진리로부터 있는 것이, “지식”으로부터서는 인간의 자연 평면이 있는 이런 것들의 양쪽을 뜻한다. 모세의 책에서:
나는 브살렐을 하느님의 영으로, 지혜로, 총명으로, 지식으로, 그리고 모든 작업 안에 채웠었다 (출. 31:2, 3; 35:30, 31);
그리고 다시:
너희는 각 지파에 따라서 슬기롭고 이해력 있고, 앎이 있는 자를 (나에게) 주어라(보내라), 하여 나는 그들을 너희 머리로(족장으로) 놓을 것이다 (신. 1:13).

그리고 그를 이집트의 토지 위에 놓으십시오. 이는 자연적 수준의 마음 안에 있는 모든 것이 질서 안으로 가져와짐을 의미한다. 이는 어떤 것을 “위에 놓는다”의 의미가 질서 안으로 가져다 놓을 누군가를 임명하는 것이다로부터; 그리고 “이집트의 토지”의 의미가 자연적 수준의 마음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에 의해 여기서는 “총명하고 슬기로운 사람”이 뜻해지고, 그에 의해 진리와 선이 의미된다. 이로부터 분명한 바, 이 말들에 의해 진리와 선은 자연 평면에 있는 모든 것을 질서 안으로 가져다 놓을 것임이 의미된다. 참으로 자연 평면의 모든 것을 질서 안으로 가져다 놓는 것이 선과 진리이다; 그 이유가 그것들은 안쪽으로부터 흘러들고, 배열하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가 인간의 지력과 더불어 어떠한지를, 그리고 어떻게 인간이 정신적으로 어떤 것을 관조 할 수 있는지를, 그것들을 지각하는지를, 분석적으로 생각하는 지를, 거기로부터 결말들을 끌어내는지를, 그리고 마지막, 그것들이 의지로 넘어가서 의지를 통하여 행동 안으로 가는 지를 알지 못하는 자는 이 모든 것들에 있는 경이로운 것의 아무것도 보지 못한다; 그는 이런 모든 것들은 자연적으로 흐르고 있다고 상상한다; 고로 그것들이 주님으로부터 천국을 통하여 유입됨으로부터 있는 하나이고 모두이다는 것을 전혀 눈치채지 못한다, 그리고 이 유입 없이 인간은 전혀 생각할 수 없다는 것, 그리고 이 유입이 중단될 때, 생각의 모든 것 역시 중단된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한다. 그가 더 모르는 것은, 주님으로부터 천국을 통하여 흘러드는 선이 모든 것들을 질서 안으로 놓이게 한다는 것, 당사자가 허용하는 만큼에서 그들은 천국의 형상에 따라 모양을 만든다는 것, 이로부터 생각은 천국의 형체에 따라 일치되어 흐른다는 것이다. 천국의 형체가 이 형체이고, 이 형체 안으로 천국의 사회들은 질서 안으로 가져다 놓여진다, 그리고 그것들은 주님으로부터 진행하는 선과 진리에 의해 도출된 형체에 일치하여 질서 안으로 가져와진다.

바로로 하여금 이렇게 하게 하십시오. 이는 앞쪽을 더 멀리 바라봄을 의미한다.
이는 앞에서 살핀 것으로 충분하다,

그로 하여금 토지 위에 통치자들을 임명하게 하십시오. 이는 자연 평면 안에서 일반적인 측면들을 질서 있게 배열함을 의미한다. 이는 “위에 임명하다”의 의미가 질서 안으로 가져오다 이다로부터; “통치자들”의 의미가 일반적 측면들이다로부터; 그리고 “토지”, 즉 이집트의 토지의 의미가 자연적 수준의 마음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통치자들”에 의해 일반적인 것들이 의미되는 이유는 세부 사항, 특수 사항들이 일반적인 것 안에, 또는 그 아래 있기 때문이다; “제 1 인 자들”에 의해 제 1 의 것들이 의미되는 것도 여기서 통치자와 비슷하다.

그리고 이집트 토지의 오분의 일을 가져오게 하십시오. 이는 보존되어져서, 그 후 저장되어져야 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오분의 일을 가져옴”의 의미가 여기서는 십분의 일과 같은 것, 또는 십분의 일을 가져옴과 같은 것을 의미함으로부터 분명해진다: 말씀에서 “십일조를 바치는” 것은 리메인스(remains)를 만드는 것을, 그리고 리메인스를 만드는 것은 선들과 진리들을 그러모으는 것, 그다음 그것들을 비축하는 것이다. 말씀에서 절반과 두 배되는 숫자는 원래의 숫자와 같은 의미선상에 있다; 즉 “20”은 “10”과, “4”는 “2”와, “6”은 “3”과, “24”는 “12”와 등등이다. 뿐만 아니라 더 불려진 숫자들의 경우도 같다: 즉 “100”이나 “1000”도 “10”과 같은 의미선상이다. 또한 “72”와 “144”는 “12”와 그러하다. 그러므로 곱해진 숫자들의 의미는 단순한 숫자들로부터 그 의미(품질, 속성)를 알 수 있다. 그리고 때로는 단순한 숫자가 포함하는 것을 전체 숫자들로부터 알게 되기도 한다; 즉 “5”는 “10”으로부터, “둘과 반(21/2)”은 “5”로부터 등등이다. 일반적으로도 알려져 있는 것은, 곱해진 숫자들은 단순한 숫자들과 같은 것을 뜻한다는 것, 그러나 더 충분해진 것을 말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나누어진 숫자들도 같은 뜻을 포함하나 단지 덜 충분해 있는 것을 말한다.
세부적 측면에서, 이 본문에 등장하는 “5”에 주목하면, 이 숫자는 두 겹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즉 조금(a little, 작음) 그리고 그 조금에서부터 어떤 것(something), 또한 리메인스를 의미한다. 이 숫자가 조금을 의미하는 것은 많음(much)을 의미하는 숫자와 관련하여 가지는 의미이다; 즉 “1000”, “100”, 그러므로 “10”과도 관련되어 의미를 가진다. 그러므로 “5”가 조금과 어떤 것을 의미한다. “5”가 리메인스를 의미하는 것은 “10”에 관련을 가질 때 인데, “10”이 리메인스를 의미함에 대하여는 이미 말했다.
말씀이 글자에서는 나타나지 않는 내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모르는 이들은 말씀에 있는 숫자들이 진짜의 것들을 의미함에 크게 놀라워 할지 모른다. 그런 이유는 그가 숫자들로부터 어떤 영적 생각을 만들어 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숫자들은 천사들이 가지는 영적인 생각으로부터 흐른다는 것은 앞의 설명에서 알는지 모른다. 생각 또는 진짜의 것들이 숫자들이 상응하는 것에 있다는 것 정도까지는 그가 알는지 모르나, 이것의 근원은 그들로부터 감추여 놓여 있다; 즉 이런 상응들, “12”는 신앙의 모든 것들에, “7”은 거룩한 것들에, 또한 “10”과 “5”의 상응은 내부의 인간에 주님에 의해 저장된 선들과 진리들에 상응한다는 것 등등이다. 어쨌든 이런 상응함이 있다는 것을 아는 것으로 족할지 모른다: 즉 이런 상응들로부터 말씀에 있는 모든 숫자들은 영계에 있는 어떤 것을 의미한다는 것, 결과적으로 숫자들 안으로 영감된 신성이 숫자들 내부에 감추여 놓여 있다는 것 정도이다.
예를 들면, 이어지는 구절에서 “5”가 언급되는데, 이는 마치 또 다른 나라로 가는 사람이 종들에 그들의 능력들에 따라, 각기 다섯, 둘, 그리고 하나를 배부하고 떠나는 사람에 관한 주님의 비유에서 같다:
그리고 다섯 달란트를 받은 그는 그것들을 가지고 거래를 했다, 그리고 또 다른 다섯 달란트를 벌었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두 달란트를 받은 그도 거래를 해서 두 달란트를 벌었다; 그러나 한 달란트를 받은 그는 그의 주인의 은을 땅에 감추었다 (마. 25:14 이하);
글자 의미를 넘어 생각하지 않는 자는 숫자들 자체, 즉 5, 2, 1은 이 비유를 구성하기 위해 가져다 쓴 것밖에 더 아니다고 알고 있을 뿐, 이 숫자들 자체 안에 비밀이 있다는 것을 짐작조차 못한다; 즉 “다섯 달란트를 받았던 종”은 주님으로부터 선과 진리를 받겠다고 승인한 이들, 그러므로 리메인스를 받았던 이들을 의미한다; “둘을 받았던 이”는 년수를 거듭하는 가운데 선행을 신앙에 결합해왔던 이들을 의미한다; 그리고 “하나를 받았던 이”는 선행 없이 신앙만을 받아왔던 이들을 의미한다. 마지막 번째로부터서는 “그는 자기 주인의 은을 땅에 감추었다”라고 말해지는 이유는 그가 가졌던 “은”은 내적 의미에서 신앙으로부터 있는 진리가 의미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선행 없는 신앙은 이익을 창출하지 않는다, 또는 열매를 맺지 않는다. 이런 의미들이 숫자들 안에 있다.
이와 유사한 다른 비유가 더 있다: 즉 왕국을 받기 위해 먼 나라로 떠나는 사람이 그의 종들에게 10 파운드를 주고, 자기가 올 때까지 그것들을 가지고 거래를 하라고 말한 비유이다. 그가 돌아왔을 때 첫째가 말했다:
주인이시여, 당신의 파운드가 열 파운드들을 벌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그에게 말했다, 잘하였다, 너는 선량한 종이다, 그 이유는 네가 매우 작은 것에 충실하였기 때문이다, 너는 열 성읍 위에 있거라. 그리고 둘째가 말했다, 주인이시여, 당신의 파운드가 다섯 파운드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그에게 말했다, 너 역시 다섯 성읍 위에 있어라. 셋째는 냅킨(napkin) 안에 파운드를 쓰지 않고 두었다. 주인이 말했다, 그로부터 파운드를 빼앗아라, 그리고 그것을 열 파운드들을 가진 자에게 주어라 (눅. 19:12 이하)
위에서도 “10”과 “5”는 리메인스를 의미한다; 단지 10은 조금 더, 5는 조금 덜 많은 리메인스일 뿐이다. 냅킨 안에 쓰지 않고 싸두었던 자는 자신들을 위해 신앙의 진리들을 포획했던 자들, 그 진리들을 선행과 결합하게 하지 않은 자들, 그러므로 그 진리들로부터 벌어들인 것, 열매맺은 것이 없는 이들이다.
다른 비유에도 이와 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 즉 만찬에 초대되는 이들에 관한 큰잔치의 비유에서, “나는 수소 다섯 겨리를 샀다, 그리고 나는 그것들을 입증하러 간다” (눅. 14:19); 아브라함에게 부자가 말했다, “저는 다섯 형제들을 가지고 있습니다…누군가를 그들에게 보내서, 그들이 이 고통의 장소에 오지 않게 해주십시오” (눅. 16:28); 열 처녀들의 경우, 그 중에서 다섯은 신중했고, 다섯은 어리석었다 (마. 25:1-13); 그리고 주님의 이런 말씀도 있다: “ 너희는 내가 땅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아니다; 그러나 분열이다; 그 이유가 이후로부터 한 집에 다섯이 있을 것인데, 셋이 둘에, 둘이 셋에 반대할 것이기 때문이다” (눅. 12:51); 그리고 역사적 사실에서조차 역시, 즉 주님께서 남자 오천 명을 빵 덩어리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먹이신 것, 그리고 군중들로 백씩, 오십씩 앉게 명령하신 것, 그들이 먹은 후, 그들은 조각들을 열두 광주리에 가져왔다는 것 등등이다 (마. 14:15-21; 막. 6:38이하; 눅. 9:12-17; 요. 6:5-13).
이 구절들이 역사적 사건들이기에, 이 사건들 안에 있는 숫자들이 의미함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 거의 믿어질 수 없을지 모른다. 즉 남자들의 “오천 명”, 빵 덩어리 “다섯”, 물고기 “두 마리”, 앉았던 군중들의 “백 명”, “오십 명”, 거두어들인 조각들의 바구니가 “열둘” 등등이다; 그럼에도 각각의 숫자 안에 비밀이 있다. 그 이유가 모두 각각의 세부 사항들은 신성한 것들이 표현되기 위하여 섭리로부터 있었기 때문이다.
이어지는 페이지들에서 “다섯” 또한 진짜 의미와 반대 의미에서 상응되는 영계에 있는 이런저런 것들을 의미하고 있다. 이사야서에서:
올리브 나무를 흔듦에서 같이 거기 안에 이삭들이 남을 것이다, 굵은 가지의 머리에서 둘 또는 셋의 과실이, 열매맺는 나무로부터의 작은 가지들에 넷 또는 다섯이 있을 것이다 (이. 17:6).
이사야서에서:
그 날에 이집트의 토지 안에는 가나안의 입술로 이야기 하고, 여호와 체바욷에게 맹세하는 다섯 성읍이 있을 것이다 (이. 19:18).
다시:
다섯의 꾸짖음에 너희가 도망하기 전에, 일천 명이 한 사람의 꾸짖음에서 도망할 것이다; 이는 너희가 산 위 머리 위에 깃대(mast)로서 남을 때까지, 언덕 위에 깃발(ensign) 같이 남을 때까지이 다 (이. 30: 17).
계시록서에서:
다섯째 천사가 소리를 냈다, 그때 나는 하늘로부터 땅으로 떨어지는 별을 보았다; 그리고 그에게 끝이 없는 구덩이의 열쇠가 주어졌다. 거기로부터 올라온 메뚜기떼들에게 말해지기를, 그것들은 자기들의 이마에 하느님의 인을 가지지 않은 사람들을 죽이지 말라, 그러나 그것들은 다섯 달 동안 괴롭혀질 것이다 (계. 9:1, 3-5, 10).
같은 방식에서 숫자 “다섯”은 다음의 예들에서 표현적 이었다: 즉 남자와 여자의 평가는 햇수들에 따라, 한 달들로부터 오 년까지, 그리고 오 년으로부터 이십 년까지 일 것이다 (레. 27:1-9); 다시 만일 들판이 되찾아지면, 오분의 일 부분이 더해질 것이다 (레. 27:19); 그리고 만일 십분의 일들이 되찾아진다면, 오분의 일 부분이 더해질 것이다 (레. 27:31); 오 세겔로 잉여의 첫 출생이 되찾아진다는 것 (민. 3:46-끝), 불결한 짐승의 첫 출생은 오분의 일을 더함으로 되찾아진다는 것 (레. 27:27). 어떤 위반을 위하여는 오분의 일 부분이 더해진다는 것 (레. 22:14; 27:13, 15; 민. 5:6-8). 그리고 만일 인간이 수소 또는 양을 훔친다면, 그리고 그것을 죽이거나 판다면, 그는 수소 한 마리를 위해 다섯 수소들을, 한 마리 양을 위해 네 마리 양을 지불할 것이다. (출. 22:1).
숫자 “다섯” 안에서 천국의 비밀을 붙들고 있다는 것, 그리고 “십” 역시 그러하다는 것은 거룹들로부터 분명해진다, 이에 관해 열왕기상서로부터:
솔로몬은 지성소에 올리브 목재로 두 거룹들을 만들었는데, 높이가 각각 십 큐빗이었다. 다섯 큐빗이 한 거룹의 날개 였다, 그리고 다섯 큐빗은 다른 거룹의 날개 이었다; 이것은 이 날개의 끝으로부터 저 날개의 끝까지가 십 큐빗이었다; 그렇게 거룹은 십 큐빗이었다. 거룹 모두는 하나의 측량과 하나의 형체로부터 이었다 (왕상. 6:23-27).
똑같은 것이 성전을 빙둘러 있는 물두멍으로부터도, 등잔대로부터도 분명해진다, 이에 관해 같은 책에서:
물두멍의 받침들이 놓여졌다, 다섯은 오른쪽으로 집의 어깨 근처에, 그리고 다섯은 왼쪽으로 집의 어깨 근처에 이다. 또한 등잔대가 놓여졌는데, 지성소 앞에 다섯은 오른쪽에, 다섯은 왼쪽에 이다 (왕상. 7:39-49).
놋바다는 가장자리로부터 가장자리까지 십 엘(ell)이었다, 그리고 높이는 다섯 엘, 그리고 삼십 엘이 빙두른 척도 이었다 (왕상. 7:23); 이는 거룩한 것들이 숫자들, 즉 “10”, “5”, “30”에 의해 의미되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사실 빙두른 척도인 삼십은 기하학적으로 직경 같은 것과 상관되지 않고 불분명하나 숫자 삼십의 기록은 분명하다. 그렇다 해도 이 그릇을 빙두른 것에 의해 의미되는 것도 포함되고 있다.
영계에서 모든 숫자들이 진짜의 것을 의미하는 것은 에스겔서에서 천사들이 상세하게 측량한 새 땅, 새 도성, 새 성전을 묘사한 대목으로부터 분명해진다 (겔. 40-43, 45-49장을 보라). 거룩한 것들에 관한 묘사들은 대체로 숫자들로 설명되는 편이다, 그러므로 이런 숫자들이 포함하는 것들을 모르는 이들은 그 안에 포함된 비밀들의 어떤 것도 거의 알지 못한다. 위 에스겔서에서 숫자 “10”과 “5”가 언급되는 구절도 거기서 발생하고 있다 (40:7, 11, 48; 41:2, 9, 11, 12; 42:4; 45:11, 14), 이 외에 곱해진 숫자들, 즉 “25,” “50,” “500,” “5000”도 있다. 에스겔의 위의 장들로부터 새 땅, 새 도성, 새 성전이 천국에 있는 주님의 왕국, 이로부터 땅에 있는 그분의 교회가 의미됨이 분명해진다.
숫자 “5”의 사용에 관한 위와 같은 예들을 열거한 이유는 이어지는 본문에서 말해지는 바, 이집트의 토지에서 생산되는 오분의 일을 풍부함의 칠 년 동안 수집하여 기근의 칠 년에서의 사용을 위해 보존되어진다는 말 때문이다. 그러므로 “오분의 일”은 주님에 의해 인간 안에 저장된 선들과 진리들이 의미됨을 여러 구절을 예로 동원하면서까지 보여주어왔다, 그리고 기근이 있을 때에 사용을 위하여 보존된 것이란 선과 진리의 부족과 결핍이 있을 때의 사용을 위함이다. 이런 것들이 주님에 의해 인간 안에 저장되어 있지 않으면, 시험과 황폐함의 상태에서 그를 들어올려지게 할 것이 아무것도 없게 되고, 결과적으로 시험이나 황폐함을 통하여 거듭나질 수 있게 되는 것도 아무것도 없다는 말이다; 고로 그는 다른 삶을 위한 구원의 수단 없이 있어지고 말 것이다.

생산물이 풍성한 일곱 해에. 이는 선들과 더불은 진리들이 번창하는 그 때에 은근히 심어짐을 의미한다. 이는 “해들”의 의미가 상태들이다로부터, 그러므로 때들(times)이다로부터 (이는 아래에서 설명한다); 그리고 “생산물이 풍부함”의 의미가 진리의 번창, 진리가 불어남이다로부터; 여기서는 그러므로 선과 더불은 진리가 불어나는 것을 의미한다. 그 이유는 선이 없는 진리는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 그리고 선과 결합되지 않은 진리는 내부의 인간 안에 저장되지 않기 때문이다. “해들(년수들)”이 상태들, 뿐만아니라 때들도 의미하는 이유는 “해들”이 내적 의미에서는 전체의 상태, 즉 시작으로부터 끝까지의 전체 기간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 기간들은 때들에 의한 방법 외에 표현되어질 수 없고, 시간 안에 있는 이들에 의해 납득될 수 있는 표현 방법이기도 하다.

그들로 모든 양식을 모으게 하라. 이는 사용으로부터 있는 모든 것을 의미한다. 이는 “모으다(gathering)”의 의미가 다함께 가져와서 보존하는 것이다로부터; 그리고 “양식”의 의미가 사용으로부터 있는 모든 것들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내적 의미에서 “양식, 식품 (food)”은 인간의 혼에 자양분을 공급하는 것들을, 즉 사후 당사자에게 영양분을 공급하는 것들을 의미한다. 그 이유가 그때 그는 혼, 또는 영으로서 살고 더 이상 물질적 식품은 필요 없고, 영적 식품만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때의 식품은 사용으로부터 있는 모든 것, 또는 사용에 이바지한 모든 것으로 구성된다. 사용에 이바지한 것은 선과 진리인 것을 아는 것이다; 사용으로부터 있는 것은 선인 것과 진리인 것을 뜻하고 행하는 것이다; 이런 것들이 천사들에게 자양분을 공급하는 것들, 그러므로 영적 식품, 또는 천국의 식품, 하늘의 양식 등으로 불리운다. 안쪽에 내면의 이해력과 내면의 의지력, 또는 의도들과 목적들이 있는 인간의 마음은 육체를 지닌 지상의 생활 기간을 포함하여 모든 인생에서 영적 식품 외의 다른 식품에서 영양분을 공급받지 않는다. 물질적 식품은 마음을 꿰뚫지 못한다, 그것은 오로지 육체의 것들만을 좌지우지할 뿐이다. 물질적 식품이 육체를 떠받치는 동안, 영적 식품은 마음이 향유하는 목적을 떠받든다. 한마디로 건강한 육체에 건전한 마음이다.
영적 의미에서 “식품”은 사용으로부터 있는 모든 것을 표시하는 이유는 모든 인간의 앎, 그리고 모든 그의 이해력과 슬기 있음, 그러므로 모든 그의 의지력은 그것들의 목적으로 사용을 가져야 하기 때문이다(사용을 전제로 습득하여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의 생명(삶)의 품질은 그의 사용의 품질에 따라서이다. 내적 의미에서 “식품”이 사용으로부터 있는 모든 것을 표시한다는 것이 주님의 말씀에서 분명해진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말하셨다, 나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먹을 식품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제자들이 서로에게 말했다, 어느 누가 먹을 것을 그분에게 가져왔을까?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하신 다, 내 식품은 나를 보내신 그분의 뜻을 행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분의 일을 완전하도록 하는 것이다 (요. 4:32-34);
그리고 다른 구절에서:
멸해지는 식품을 위해 노동하지 말라, 그러나 영원한 생명쪽으로 남는 식품을 위해 애쓰라, 이것을 사람의 아들은 너희에게 줄 것이다; 그 이유는 사람의 아들에게 하느님 아버지가 하사하셨기 때문이다 (요. 6:27).

장차 올 이 좋은 해들로부터의. 이는 그 때에 모아지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해들”의 의미가 상태들, 또한 때들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오는 좋은 해들”란 선들과 더불은 진리들이 번성하는 때들이다, 이것이 “생산물이 풍부한 일곱 해들”에 의해 의미된다.

그리고 그들로 하여금 곡식(낟알)을 쌓게 하라. 이는 동시에 있는 진리로부터의 모든 선을 의미한다. “쌓는 것(heap up)”의 의미가 모으는 것, 그리고 동시에 보존하는 것이다로부터; 그리고 “곡식, 낟알(corn)”의 의미가 자연 평면의 선이다로부터, 여기서는 자연 평면에 있는 진리로부터의 선이다. 진리로부터의 선은 의지 안에와 행동 안에 있는 진리이다. “낟알”이 선을 의미하는 이유는 “들판(field)”이 영적 의미에서 교회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들판에 속하는 것은 무엇이든, 즉 씨, 씨뿌림, 수확, 작물, 낟알, 또는 낟알로부터의 이삭, 또는 머리, 그리고 특수적 측면에서, 즉 밀, 보리, 여러 종류의 곡물(grain)에 이르기까지의 무엇이든, 교회로부터 있는 이런 저런 것들을 표시한다; 그리고 교회로부터 있는 모든 것들은 선과 진리에 관련이 있다.

바로의 손 아래. 이는 자연 평면에서 필요함과 그와 동시에 처분을 위해서를 의미한다. 이는 “손”의 의미가 힘(power)이다로부터; 그러므로 “손 아래”는 필요시 처분(disposal)을 위하여를 표시한다. 그 이유가 누군가의 힘 안에 있는 것은 그의 처분 아래 있기 때문; 그리고 바로의 표현이 자연 평면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도성들 안에서 양식을 위하여. 이는 자연적 수준의 마음의 내면들에 있는 것들을 의미한다. 이는 “양식”의 의미가 사용으로부터 있는 모든 것이다로부터; 그리고 “도성들”의 의미가 자연적 수준의 마음의 내면들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보편적 의미에서 “도성들”은 교회 속의 교리적인 것들을 의미한다; 그러나 개인적 의미에서 그것들은 교리적인 것들이 있는 인간의 내면들을 의미한다, 또는 오히려 진리들이 선들과 결합해 있는 곳을 의미한다. 인간 안에 있는 선들과 진리들이 마치 도성 같이 있다는 것은 이미 살폈다; 그러므로 교회가 있는 인간 자신은 “하느님의 도성”이라 불리운다. “도성”의 의미는 “집(house)”의 의미와 같은 맥락에 있다. 보편적 의미에서 “집”은 선을 의미한다, 그러나 개인적 의미에서 집은 인간을 의미한다, 그리고 특별하게는 마음 안에서 결합을 이루고 있는 선과 진리 측면에서의 인간의 마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집에 딸린 것, 즉 개개의 방, 뜰, 바깥 건물을 아우러서 말할 때의 집은 작은 형체에서의 도성이다.
자연적 수준의 마음의 내면들이 “도성들”에 의해 의미되는 구절을 읽어보자:
그 날에 이집트의 토지에는 가나안의 입술들로 이야기하고, 여호와 체바욷께 맹세하는 다섯 도성들 이 있을 것이다 (이. 19:18);
그리고 내면들 안에 있는 선들과 진리들이 “도성들”에 의해 의미되는 것을 읽어보자:
그는 파운드를 가지고 열 파운드로 만든 자에게 말했다, 잘하였다 너는 선량한 종이다; 그 이유는 네가 매우 작은 것에서 충실하여 왔었기 때문인데, 너는 열 도성 위에 있어라. 그리고 두 번 째에게 말했다, 다섯 파운드를 만든 자이다, 너 또한 다섯 도성 위에 있어라 (눅. 19:12이하).
그러므로 본문의 “도성들 안에 곡식을 쌓고 그것들을 지킨다”에 의해 선들과 결합한 진리들이 자연적 수준의 마음의 내면들 안에 저장되어진다는 것이 의미된다; 그리고 이런 진리들과 선들이 거기에 저장되었을 때, 그것들은 “리메인스”라고 불리운다, 이 안에 인간 당사자의 최고의 영적 생명이 존재한다, 이로부터 그는 필요시와 궁핍함, 즉 모두 각각의 영적 기근에서 영적으로 자양분을 공급받는다.

그리고 그들에게 그것을 지키게 하라. 이는 창고에 쌓아 놓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지키다, 감시하다(guard)”의 의미가 “도성들”에 의미된 자연적 수준의 마음 안에 쌓아두는 것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리고 이 양식은 토지에 비축을 위하여 있을 것이다. 이는 그것은 자연적 평면의 모든 사용을 위해 거기에 있을 것임을 의미한다. 이는 “양식”의 의미가 선들과 진리들이다로부터; 그리고 “비축을 위하여”의 의미가 모두 각각의 사용을 위해 쌓는 것이다로부터, 그 이유는 이어지는 기근의 해들에서 사용을 위하여 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토지”의 의미로부터, 여기서는 이집트의 토지인 바, 자연적 수준의 마음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기근의 일곱 해에 맞서는. 이는 결핍될 경우 그 요구됨에 따라서를 의미한다. 이는 “기근”의 의미가 진리의 부족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리고 필요시의 경우일 것은 생각해볼 것도 없이 자명하다; 그 이유가 “해들”이 내적 의미에서 상태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런 해들에 맞서”는 필요가 있을 때의 이런저런 상태들을 표시한다.

이집트의 토지에 있을… 이는 자연 평면에 있을 것을 의미한다. 이는 이집트의 의미가 자연적 수준의 마음이다로부터. 여기서, 그리고 이 책의 많은 곳에서, “자연 평면(the natural)”, 그러므로 자연적 수준의 마음도 뜻해지고 있다; 그 이유는 인간에게 두 마음들이 있기 때문, 하나는 합리적 (수준의) 마음이고, 이는 내적 인간으로부터 있는 마음이다; 또 하나는 자연적 (수준의) 마음이고, 이는 외적 인간으로부터 있는 마음이다. 이 마음 또는 이 인간을 두고 (저자는) 단순히 “자연 평면”이라 부르고 있다. (여기에서 평면(平面, plane)이라는 단어는 역자가 독자의 이해를 돕고자 하는 취지에서 삽입한 의역어 수준에 해당한다. 그 이유는 라틴어로부터의 영어 번역은 the natural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어에서 the라는 단어는 우리 말로는 번역할 길이 없는 단어이나 분명 짚어두고 지나가지 않으면 이해를 엉성하게 해버릴 위험도 있어 이 영어 단어가 등장하는 그때 그때마다 상황을 보아 역자의 해석 판단을 삽입하고 있는 실정임을 알린다 역자주.) 마음(mind)이 인간 자신이다는 것은 이제 이어지는 것 안에서 알 것이다.

그리고 그 토지는 기근에서 절단되지 아니할 것이다. 이는 인간이 멸망하지 않도록을 의미한다. 이는 “절단됨”의 의미가 멸망함이다로부터; 그리고 “토지”, 여기서는 이집트의 토지의 의미가 자연적 수준의 마음이다로부터; 그리고 이것이 자연적 수준의 마음이기 때문에, 이것은 인간 자신인데, 그 이유는 인간은 자기 마음으로부터 인간인 것이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마음 자체가 인간을 구성하는 바, 마음이 이러이러하면 인간 꼴도 이러이러하기 때문이다. “마음”에 의해 인간의 지적 부분과 의지 부분이 뜻해지는 바, 결과적으로 최고로 그의 생명 자체이다. 어리석은 이들이 상상하는 것은, 인간은 그의 바깥쪽 형체로부터 인간이다는 것; 이보다 덜 우둔한 자의 생각은, 인간은 그가 이야기를 할 수 있기 때문에 인간이다는 것이다; 이보다 더욱 덜 우둔한 자의 생각은, 인간은 그가 생각하기 때문에 인간이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것들만 가지고 인간이 인간인 것이 아니라 그가 진정한 것을 생각하고, 선인 것을 뜻하기에 인간인 것이다. 그리고 그가 진리를 생각하고 선을 뜻할 때, 그는 신성쪽을 올려 바라볼 수 있고, 그것을 지각적으로 받을 수 있다. 이로 인해 인간은 여느 동물과 구별되는 것이다.
인간처럼 여겨지는 것, 즉 이야기할 수 있고 생각할 수 있는 그의 능력이 그를 인간으로 만들지 않는 이유는 만일 그가 거짓인 것을 생각하고 악인 것을 뜻한다면, 이는 여느 동물과 구별되는 인간이되 동물 이하의 인간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이런 자는 자신이 지닌 두 능력들을 수단으로 자신 안의 인간임을 파괴한다는 말이다. 이런 자는 다른 삶에서 보여지는 그들의 모습에서 더 분명해진다. 이들이 천국의 빛, 천사의 시각에서 괴물로서 나타난다, 그리고 그들의 얼마는 들짐승으로, 그들의 얼마는 뱀으로 등등이다. 그러나 천국의 빛으로부터 지옥의 자기들의 빛으로 되돌아오면, 그들은 인간들 같이 서로가 서로를 여겨주고 있다. 진리가 그에게서 실패될 때, 즉 주님의 의해 내면 안에 저장된 선과 진리가 없었다면, 인간이 멸망하는 것이 어떠할지 이 장의 이어지는 구절들에서 말해질 것이다.

37-40절. 그리고 이 말은 바로의 눈에서, 그리고 그의 종들의 눈에도 좋게 보였다.
38 그리고 바로는 그의 종들에게 말했다, 우리가 하느님의 영을 담고 있는 이런 사람을 발견할 수 있을까? 39 그리고 바로는 요셉에게 말했다, 하느님께서 너에게 이 모든 것을 알게 해준 것을 보면, 너보다 더 총명하고 슬기로운 자는 아무도 없다. 40 너는 내 집 위에 있을 것이다. 그리고 네 입술에 모든 나의 백성이 키스할 것이다. 내가 너보다 더 위대한 것은 오직 이 왕좌 에서 일 뿐이다.

그리고 이 말은 바로의 눈에 좋게 보였다. 이는 자연 평면이 매우 기뻐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말이 좋다”의 의미가 기뻐하는 것이다로부터 분명해진다. 이것이 “눈에서”라고 말해지는데, 이는 언어에 있는 관습적 표현 형체인데, 그 이유는 “눈”이 내면의 시각, 고로 이해함, 지각, 주의함, 그리고 시각에 속하는 다른 것들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말이 그의 눈에서 좋았다”에 의해서는 매우 기뻐했다가 의미된다; 그리고 바로의 표현함은 자연 평면이다.

그리고 그의 모든 종들의 눈에도. 이는 자연 평면에 있는 모든 것이 기뻐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말이 그들의 눈에서 좋게 보였다”가 매우 기뻐하는 것을 의미함으로부터: 그리고 “종들”의 의미가 자연 평면에 있는 것들이다로부터, 특히 자연 평면의 외면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종”이 말씀에서 언급되는 때가 꽤 상당한 편인데, 그러므로 내적 의미에서 는 그 밖의 어떤 것을 섬기는 것, 그리고 일반적 측면에서는 위에 있는 것에 비해 상대적으로 아래 있는 모든 것이 의미된다; 그 이유가 보다 낮은 수준의 것이 보다 높은 수준의 것을 섬기는 것이 질서에 일치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섬김 속에 있는 한, “종”이라 불리운다. 현재의 경우에서는 종이라 불리우는 것이 자연 평면에 있는 것들이다, 그 이유가 일반적 측면에서의 자연 평면이 바로에 의해 표현되고, 일반적 측면 자체쪽으로 세부 사항들은 섬김 속에 있기 때문이다. 마치 왕국들 안에 있는 공통의 선쪽으로 섬김 속에 있는 것과 같다.

그리고 바로가 그의 종들에게 말했다. 이는 자연 평면이 그 안에 있는 모든 것과 더불어 지각함을 의미한다. 이는 “말하다”가 말씀의 역사물에서는 지각하다를 의미한다로부터; 그리고 바로의 표현함이 자연 평면이다로부터; 그리고 “그의 종들”의미가 자연 평면에 있는 모든 것들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우리가 자기 안에 하느님의 영이 있는 이런 사람을 발견할 수 있단 말인가? 이는 선이 있는 진리가 내면으로부터 유입됨, 즉 영적 평면의 천적 부분에 관하여를 의미한다. 이는 “사람”의 의미가 진리이다로부터; 그리고 “하느님의 영”의 의미가 선이 내부로부터, 고로 신성으로부터 있음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하느님의 영”은 신성으로부터 진행하는 것, 고로 선 자체를 표시하는데, 그 이유는 그 안에 선이 있기 때문, 이 선이 말씀에서 “하느님의 영”에 의해 의미된다; 그 이유가 영 자체가 나아가는 것이 아니고 선이 안에 들어있는 진리, 또는 거룩한 진리가 나아가는 것, 고로 영은 결과를 만듦에서 도구적인 역할을 하는 것이다. 선이 있는 진리가 여기서 영적 평면의 천적 부분이고, 이것을 요셉이 표현하고 있다.
교회에 알려져 있는 것은, “요셉”이 영적 의미에서 주님이시다는 것, 그러므로 주님은 “천국의 요셉”이라 불리운다는 것이다; 그러나 알려져 있지 않은 것은, 요셉이 주님 안에 있는 무엇을 표현하는지 이다. 그 이유가 주님은 아브라함, 이삭, 야곱에 의해 표현되고, 또한 모세, 엘리야, 아론, 다윗, 이외에도 말씀에서 다른 이들에 의해서도 표현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 표현들은 서로에서 완전히 일치하는 한 가지만을 표현하지 않고 있다. 예를 들면, 아브라함에 의해 주님은 신성 자체, 이삭에 의해 신성한 합리적 평면에서의 주님, 야곱에 의해서는 신성한 자연 평면에서의 주님이 표현되고 있다, 모세에 의해서는 법, 또는 역사적 부분의 말씀에서의 주님, 엘리야에 의해서는 예언적 부분의 말씀에서의 주님, 그리고 다윗에 의해서는 왕권적 측면에서의 주님이 표현된다. 그러나 요셉에 의한 표현은 앞에서 많이 살폈다. 요셉이 주님을 표현하는 것은 “자연 평면으로부터 (있는) 영적 평면의 천적 부분(the celestial of the spiritual from the natural)” 인데, 이 말로서만이 표현되어질 수 있다. 그 이유가 천적 부분은 신성으로부터의 선, 그리고 영적 평면은 이 선으로부터 있는 진리, 고로 그분의 신성한 인간으로부터 있는 선으로부터의 진리이기 때문이다. 이 주님이 세상에서 살으셨을 때의 바로 그분, 그러나 자신을 신성으로 만드신(glorified) 그분, 그리하여 자연계와 인간 자체를 초월해 건너가신 그분, 결과적으로 신성한 선 자체, 또는 인간 자체까지도 아우르는 여호와가 되신 그분이시다.
누구든 아래 내용을 알아야 긴 역사적 줄거리의 맥락을 쥐고 세부 사항이 지니는 신비함의 얼마라도 말해볼 수 있을지 모른다: 즉 요셉이 이집트에 왔고, 처음에 수비대의 제 1 인 자인 보디발의 집을 섬겼고, 그 다음 구치소에 감금된 생활을 하였고, 그러나 후에 이집트 전역의 통치자가 된 것 등등의 사건은 주님께서 어떻게 그분의 인간을 신성으로 점진적으로 만들어 가셨는가를 표현한다는 것, 이것이 말씀 안에 쓰여 있다는 것, 따라서 말씀의 내적 의미에 신성한 사항들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 이 의미는 천사들이 아주 유용하게 사용하는 의미이다는 것, 그리고 동시에 인간에게도 요긴해져, 이런 역사물을 좋아하고, 이 역사물이 자신의 마음들에서 맴돌도록 하는 한편, 천사들의 경우 그들은 주님으로부터의 유입됨을 수단으로 신성한 사항들을 이 역사물 안에서 지각한다.

그리고 바로가 요셉에게 말했다. 이는 자연 평면이 영적 평면의 천적 부분으로부터 지각함을 의미한다. 이는 말씀의 역사 부분에서의 “말하다”의 의미가 지각하다 이다로부터; 그리고 바로의 표현함이 자연 평면이다로부터; 그리고 요셉의 표현함이 영적 평면의 천적 부분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하느님께서 너에게 이 모든 것을 알 수 있게 한 것을 보면. 이는 그것은 예견과 섭리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를 의미한다. 이는 “알다”가 하느님을 서술할 경우, 이는 예견과 섭리이다로부터; 그 이유가 하느님을 두고 어떤 지식을 가지신다는 표현은 어울리지 않기 때문, 그분은 자신으로부터 모든 것들을 아시기 때문, 인간 안에 지식을 가지는 능력은 그분으로부터 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느님 안에서 “아는” 것은 미리 보심과 설비하심이다; “미리 보는 것은 영원으로부터 영원까지 아시는 것, 그리고 설비하시는 것은 미리 보신 것을 행하시는 것이다. 영적 평면의 천적 부분이 예견과 섭리를 가지는 이유는 여기서 내적 의미에서 취급되는 것이 주님, 영적 평면의 천적 부분이 요셉에 의해 표현되는 주님이시기 때문이다.

너 만큼 총명하고 슬기로운 자는 아무도 없다. 이는 이것이 진리와 선의 유일한 근원이다를 의미한다. 이는 “총명하다”의 의미가 진리이다로부터; “슬기롭다”의 의미가 선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진리와 선의 근원이 이외 다른 근원으로부터 있지 않다는 것이 “아무도 없다”에 의해 의미되는데, 그 이유는 내적 의미에서 “아무도 없다”는 말은 여느 모든 것을 배제한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너는 내 집 위애 있을 것이다. 이는 자연적 수준의 마음이 거기에 종속되고 복종할 것임을 의미한다. 이는 “집”의 의미가 마음이다로부터, 여기서는 자연적 수준의 마음이다로부터, 그 이유는 이 집이 바로에 의해 “내 집”이라 불리우고, 그를 수단으로 자연 평면이 표현되기 때문이다. 이 평면이 종속되고 복종됨이 “너는 이것 위에 있을 것이다”에 의해 의미된다. 그 이유가 누군가의 집 위에 있는 자가 실제로 그 집을 통치하고, 그 집 안의 모든 이들은 위에 있는 자에게 종속되고 복종하여야 하기 때문이다. 외관상 이렇다 해도 집의 주인에게 이름과 권위는 여전히 귀속되어 있다.

네 입에 모든 내 백성이 키스할 것이다. 이는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이 그에게 순종할 것이다를 의미한다. 이는 “입에 키스함”의 의미가 그가 명하는 것을 인정하고 행하는 것, 고로 순종하는 것이다로부터; 그리고 “모든 나의 백성”의 의미가 자연 평면에 있는 모든 것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오직 왕좌에서만 내가 너보다 더 위대할 것이다. 이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마치 자연 평면으로부터 인 것 처럼 나타날 것인데, 그 이유는 영적 평면의 천적 부분으로부터 이지만 자연 평면을 통하여 이기 때문임을 의미한다. 이는 “또 다른 이보다 더 위대하다”의 의미가 외견에서, 시각에서 더 위대해 있다 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왕좌”의 의미가 여기서는 자연 평면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자연 평면이 “왕좌”에 의해 뜻해지는 이유는 “그것 위에 앉은 그”에 의해 영적 평면의 천적 부분이 뜻해지기 때문에서 이다; 그 이유가 자연 평면은 영적 평면을 위해 왕좌 같다; 그 이유가 더 높은 것이 더 낮은 것 안에 존재하고 행동하기 위해 실로 더 낮은 것을 통하여 행동하기 때문, 그리고 행동된 것은 마치 더 낮은 것이 행동한 것처럼 나타나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에 의해 요셉에게 한 말, “왕좌에서만 나는 너보다 더 위대해 있을 것이다”에 의해 뜻해졌다.
“왕좌”는 말씀의 주제가 신성한 진리, 그리고 이로부터의 심판이 취급되는 대목들에서 자주 등장하고 있다, 그리고 “왕좌”가 내적 의미에서는 신성한 왕권에 속하는 것을, “그것 위에 앉으신 그분”에 의해 왕 또는 재판관으로서의 주님 자신이 의미되어진다. 그러나 “왕좌”의 의미는 다른 많은 구절들에서 같이 적용되는 상황에 따라 달라진다. 신성 자체와 주님의 신성한 인간이 “왕좌 위에 앉으신 그분”에 의해 뜻해질 경우, 이때는 그분으로부터 진행하는 신성한 진리가 “왕좌”에 의해 뜻해진다; 그러나 주님으로부터 진행하는 신성한 진리가 “왕좌 위에 앉으신 그분”에 의해 뜻해질 경우, 이때는 신성한 진리로 채운 보편적 천국이 “왕좌”에 의해 뜻해진다; 그러나 보다 높은 천국들 안에 있는 신성한 진리 측면에 관련한 주님이 “왕좌 위에 앉으신 그분”에 의해 뜻해질 경우, 이때는 가장 낮은 천국, 또한 교회 안에 계신 신성한 진리가 “왕좌”에 의해 뜻해진다. 이와 같이 “왕좌”는 상대적이다. “왕좌”가 신성한 진리에 속하는 것을 의미하는 이유는 진리가 말씀에서 “왕”에 의해, 또한 왕국에 의해 의미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말씀에서 “왕좌”에 의해 특별하게 뜻해지는 것은 그 구절과 연결되는 대목으로부터 분명해진다. 마태복음서에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전혀 맹세하지 말라; 천국으로도 아니다, 그 이유는 그것은 하느님의 왕좌이기 때문이다; 땅으로도 아니다, 그 이유는 그것은 그분의 발판이기 때문이다; 예루살렘으로 도 아니다, 그 이유는 그것은 위대한 왕의 도성이기 때문이다 (마. 5:34, 35).
다시 다른 구절에서:
천국을 두고 맹세하는 자, 하느님의 왕좌를 두고, 그리고 그 위에 앉으신 그분을 두고 맹세하는 것이다 (마. 23:22).
위에서 천국이 “하느님의 왕좌”이다고 분명히 말해진다; 그리고 “땅”에 의해서는 그분의 발판 이라 불리우고, 천국 아래 있는 것, 또는 교회가 의미되어진다. 마찬가지로 이사야서에서:
고로 여호와께서 말하신다, 천국들은 나의 왕좌이다, 그리고 땅은 나의 발판이다 (이. 66:1);
그리고 다윗서에서:
여호와께서는 천국들에 있는 그분의 왕좌를 단단하게 만드셨다 (시. 103:19).
마태복음서에서:
사람의 아들이 그분의 영광 안에서, 그리고 그분과 더불어 모든 거룩한 천사들과 더불어 올 때, 그때 그분은 그분의 영광의 왕좌 위에 앉으실 것이다 (마. 25:31);
위는 마지막 심판에 관한 것이다, 그리고 왕좌에 앉으신 그분이 “왕”이라 불리운다 (마. 25:34, 40). 여기서 “영광의 왕좌”가 내적 의미에서 천국에 있는 신성한 선으로부터 있는 신성한 진리이다; “왕좌에 앉으신 그분”은 주님이시다, 이 분이 신성한 진리로부터 재판관이시고, 여기서 “왕”이라 불리운다.
누가복음서에서:
그분은 위대하여 있으실 것이다, 그리고 지극히 높은 자의 아들이라 불리울 것이다; 그리고 주 하느님이 그에게 그분의 아버지 다윗의 왕좌를 주실 것이다 (눅. 1:32);
위는 천사에 의해 마리아에게 말해졌다. 누구나 아는 바, 위의 다윗의 왕좌는 다윗이 가졌던 왕국, 또는 땅 위의 왕국이 아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다윗”에 의해 다윗이 뜻해지는 것이 아니다는 것, 그러나 주님의 신성한 왕권이 뜻해진다는 것이다; 그리고 “왕좌”에 의해 발표되는 신성한 진리와 주님의 왕국을 만드는 신성한 진리가 의미된다는 것이다. 계시록서 에서:
나는 영 안에 있었다. 그리고 잘 보니, 왕좌가 천국에 설치되어졌다, 그리고 한 분이 왕좌 위에 앉아 계신다. 그리고 앉으신 그분은 외모에서 벽옥과 홍옥수를 닮았다; 그리고 외모가 에메랄드 같은 무지개가 왕좌를 빙둘러 있었다. 왕좌를 빙둘러 스물 넷의 왕좌들이 있었다; 그리고 왕좌들 위에 스물 넷의 원로들이 앉아 있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왕좌로부터 번개 들과 천둥들, 그리고 음성들이 진행되었다; 그리고 왕좌 앞에 타고 있는 불의 일곱 등불들 이 있었는데, 이것은 하느님의 일곱 영들이다. 그리고 왕좌 앞은 수정을 닮은 유리 바다였 다. 그리고 왕좌 한가운데와 왕좌를 빙둘러 앞과 뒤에 눈들이 가득한 네 동물(animal)들이 있었다. 그리고 동물들이 영광, 영예, 감사들을 세세토록 사시는, 왕좌 위에 앉으신 그분에 게 드렸을 때, 스물 넷 원로들은 왕좌에 앉으신 그분 앞에 엎드릴 것이다, 그리고 세세토록 사시는 그분을 숭배할 것이다, 그리고 왕좌 앞에 그들의 왕관들을 내던질 것이다
(계. 4:2-끝).
이런 구절들에서 주님의 영광의 왕좌, 이를 수단으로 그분으로부터 진행하는 신성한 진리가 표현적으로 묘사되고 있다; 그러나 만일 이런 표현들의 의미가 알려지지 않으면, 이런 예언적 말씀들의 의미는 거의 어떤 것도 알아질 수 없다; 하여 글자 의미 그 이상의 신성한 어떤 것도 거기에 없다고 상상하고 만다. 이럴 경우 천국의 왕국은 지상의 왕국인 것인냥 여기고 말 것이다. 어쨌든 “천국에 놓여진 왕좌”에 의해 거기 있는 신성한 진리가, 고로 신성한 진리 측면의 천국이 의미된다; 그리고 “왕좌 위에 앉으신 그분”에 의해 주님이 뜻해진다. “그분이 벽옥과 홍옥수 같이 나타나신 것을 보는” 것은 이런 돌들을 수단으로, 마치 말씀에서 이야기되는 귀중한 돌들이 의미한 것 같이 신성한 진리가 의미된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돌들”에 의해서는 신앙의 진리들이 의미된다.
“왕좌를 빙두른 무지개”는 선으로부터의 명백한 진리가 의미된다; 그리고 이것은 다른 삶에 있는 색깔들이 천국의 빛으로부터 이고, 그리고 천국의 빛은 신성한 진리 이기 때문이다. “왕좌를 빙두른 24 왕좌”에 의해 하나의 복합체에 있는 진리로부터의 모든 것들이 의미된다; “24”는 “12”에 의해 의미된 것과 같다. “왕좌로부터 진행하는 번개, 천둥, 그리고 음성”은 선 안에 있지 않은 이들과 더불은 신성한 진리에 의해 야기되는 공포가 의미된다. “불타는 일곱 등불”은 선으로부터 진리에 애착함들이고, 이것은 선 안에 있지 않은 이들에게는 상처를 입히는 바, 그러므로 “상처를 입히는 하느님의 일곱 영들”이라 불리우는데, 이는 이어지는 구절들에서 분명해진다.
“왕좌 앞 유리 바다”는 자연 평면에 있는 모든 진리, 고로 지식들이다. “왕좌 한가운데와 왕좌를 빙둘러 있는 앞과 뒤애 눈이 가득한 네 동물들”이란 천국들에서 신성으로부터 이해함으로부터 있는 것들이고, “4”는 의지로부터의 것들과 그것들이 결합함을 의미하고 있다. 그 이유가 진리들은 지적 부분 속에, 선들은 의지 부분 속에 있는 바, 말해지는 바, 그들은 앞과 뒤에 눈이 가득하였다 이다, 그 이유는 “눈”은 이해력으로부터 있는 것들을, 더 높은 의미에서는 신앙으로부터 있는 것들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주님으로부터 진행되는 신성한 진리의 거룩함이 위 인용 구절의 나머지에 묘사되고 있다.
“24 왕좌들과 원로들”에 의해 하나의 복합체에 있는 진리의 모든 것들, 또는 신앙의 모든 것들이 의미된다, 그리고 “12”도 마찬가지 인데, 진리의 모든 것들, 이로부터, 이 진리에 따라 심판이 결과된다는 것이 “열두 사도들이 앉게 될 열두 왕좌들”에 의해 의미됨이 분명하다. 마태복음서에서: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말하셨다, 참으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거듭남에서 나를 따라왔던 너희 (이다), 사람의 아들이 그분의 영광의 왕좌에 앉게 될 때, 너희 역시 열두 왕좌들에 앉아서 이스라엘 의 열두 지파들을 심판할 것이다 (마. 19:28);
그리고 누가복음서에서:
나는 너희에게 왕국을 지정할 것이다, 마치 아버지께서 나에게 지정하신 것 같이 (이다); 하여 너희는 내 왕국에서 내 식탁 위에서 먹고 마실는지 모른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들을 심판하는 왕좌에 앉을런지 모른다 (눅. 22:29, 30).
“열두 사도들”이 진리의 모든 것들을 표시하는 것은 이미 말한 바 있다; 그리고 “야곱의 열두 아들”,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들”도 마찬가지를 표시한다; 그리고 사도들이 단 한 인물도 심판할 수 없다는 사실은 여러분도 수긍할 것이다.
계시록에서:
나는 왕좌를 보았다, 그리고 그들이 그것들 위에 앉았다, 그리고 심판이 그들에게 주어졌다
(계. 20:4);
위 역시 “왕좌”가 진리로부터의 모든 것들을 의미한다, 이로부터, 이에 따라 심판이 결과 된다. 마찬가지가 “천사들과 더불어 주님께서 심판하시려 오신다”에 의해 뜻해져 있다 (마. 25:31); 말씀에서 “천사들”에 의해 주님에 있는 어떤 것이 의미되는 것은 이미 말했다, 이 예에서 그들은 신성으로부터의 진리들을 의미한다, 말씀에서 이 진리들이 “심판들”이라 불리운다.
다른 많은 구절들에서 “왕좌”를 여호와 또는 주님의 속성으로 돌리고 있다, 그리고 왕국을 표현하는 것이 왕좌 안에 있다. 보다 높은 천국에서 신성한 진리와 심판에 관한 담화가 있었을 때, 최말단 천국에서는 왕좌가 나타난다. 이것이 “왕좌”가 표현이라 말한 이유이고, 예언적 말씀에서 왕좌가 자주 이야기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리고 왜 최 고대 때로부터 왕좌들이 왕들의 표(mark)이고, 이와 같은 표가 왕권을 의미하는지의 이유이다. 모세의 책에서:
모세는 제단을 건축했다, 그리고 제단의 이름을 여호와-니씨라고 불렀다, 그리고 그는 말했다, 손이 야(Jah)의 왕좌 위에 있기 때문에, 세세토록 아말렉에 맞서 여호와의 전쟁이 있을 것이다 (출. 17:15, 16).
“손이 야의 왕좌 위에 있는 것”, 그리고 “여호와 전쟁은 세세토록 아말렉에 맞서 있다”가 뜻하는 것을, 내적 의미로부터가 아니면 아무도 알지 못한다, 그리고 “왕좌”, “아말렉”에 의해 뜻해지는 것을 알지 않으면 위 구절은 납득되지 않는다. 말씀에서 “아말렉”에 의해 진리들을 습격하는 거짓들을 의미한다, 그리고 “왕좌”에 의해 습격받는 신성한 진리 자체가 의미된다.
다윗서에서:
여호와, 당신은 나의 판단과 나의 원인을 유지시켜주셨다; 당신은 왕좌 위에 정의의 재판관으로 앉으셨다. 여호와는 영원까지 남으신다, 그분은 심판을 위하여 그분의 왕좌를 준비하셨다
(시. 9:4, 7).
다시:
오 하느님 당신의 왕좌는 영원하고 영원까지 이다, 정직의 홀이 당신의 왕국의 홀이다 (시. 45:6).
다시:
구름들과 짙은 어둠이 그분 주위에 있다; 정의와 심판이 그분의 왕좌의 버팀이다 (시. 97:2).
예레미야서에서:
그 때에서 그들은 예루살렘을 여호와의 왕좌라고 부를 것이다; 그리고 모든 나라들이 그쪽으로 모여질 것이다 (예. 3:17);
“예루살렘”은 주님의 영적 (수준의) 왕국을 표시한다.
이 왕국이 에스겔서에서 “새 예루살렘”에 의해서도 뜻해진다, 그리고 계시록서에서 “천국으로부터 내려오는 거룩한 예루살렘”에 의해서도 뜻해진다. 주님의 영적 (수준의) 왕국은 선이 안에 있는 신성한 진리를 제 1 의 순위에 두는 곳이다, 그리고 천적 (수준의)의 왕국은 신성한 선을 제 1 의 순위에 두면서 이 선으로부터 신성한 진리가 있는 곳이다; 이것이 예루살렘이 “여호와의 왕좌”라고 불리우는 이유이다; 그리고 왜 그런지가 다윗서에서 말해진다:
예루살렘에 심판을 위한 왕좌가 놓여진다 (시. 122:5).
그러나 시온은 “여호와의 영광의 왕좌”라고 불리운다. 예레미야서에서:
당신은 유다를 완전히 포기합니까? 당신의 혼이 시온을 몹시 싫어합니까? 당신의 이름을 위하여 그것을 멸시하지 마십시오, 당신의 영광의 왕좌를 더럽히지 마십시오 (예. 14:19, 21);
위에서 “시온”은 주님의 천적 (수준의) 왕국을 뜻한다.
천국에서 심판에 관련되는 주님이 표현되는 방식이 간혹 예언자들과도 관련되는 경우, 이때 그들의 시각에 육체적 눈에 보이도록 표출되기도 했는데, 다니엘서에서:
나는 왕좌들이 내던져 (놓여질)질 때까지 바라보았다, 그리고 날들의 고대(이신 분이) 앉았다; 그분의 의복은 눈 같이 희었다, 그리고 그분의 머리의 털은 깨끗한 양털 같았다; 그분의 왕좌는 불 속의 불꽃이었다, 그리고 거기로부터의 수레 바퀴들은 타고 있는 불이었다; 불의 시내가 그분으 로부터 유출되어 앞으로 나갔다; 천천들이 그분을 섬겼다, 그리고 만만들이 그분 앞에 섰다; 심판이 놓여졌다, 그리고 책들이 열려졌다 (단. 7:9, 10).
이와 같은 것들은 천국에서 꾸준히 보여진다, 모두가 표현적이다, 그리고 그것들은 더 높은 천국들에 있는 천사들의 담화로부터 나타난다, 이것이 내려옴에서 시각에 이런저런 대상물로 표출된다. 이런저런 것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알게 하는 지각이 천사의 영들에게 주님에 의해 주어졌다, 예를 들면, “날들의 고대”, “눈같이 흰 의복”, “양털 같이 깨끗한 머리털”, “불 속의 불꽃 같은 왕좌”, “수레바퀴는 타고 있는 불”, “그분으로부터 유출되는 불의 시내” 같은 것의 의미들이다. “불 속의 불꽃”과 “불의 시내”는 신성한 사랑의 선을 표현하였다.
이와 같이 에스겔서에서:
거룹들의 머리 너머인 궁창 위 왕좌의 모습이 있었다, 마치 사파이어 돌을 쳐다봄이었다; 그리고 왕좌의 모습 위는 그것 너머에서 사람을 쳐다봄 같은 모습이었다 (겔. 1:26; 10:1).
그리고 열왕기상서에서:
내가 보았다, 예언자 미기야가 말했다, 여호와께서 그분의 왕좌에 앉아계셨다, 그리고 천국들의 전체 군대가 그분의 오른편과 왼편에 서있다 (왕상. 22:19).
위의 말들이 무엇을 표현하고 의미하는지를 모르는 이들은 주님이 지상에서의 왕들 같이 왕좌를 가지고 계신다고, 고로 위 구절에서 언급되는 것이다고 믿지 않으면 안된다; 그럼에도 천국들 안 어느 곳에도 이런 저런 것들은 없다, 그러나 그런 것들이 최말단 천국에 있는 이들의 시야 앞에서 표출 된 것뿐이다. 그림을 보듯 그것들을 봄으로서 그들은 신성한 신비함들을 본다.
주님의 왕권, 이를 수단으로 그분으로부터 진행하는 신성한 진리가 의미되는데, 이 왕권이 솔로몬이 건축한 왕좌에 의해서도 표현되었다: 즉
솔로몬은 상아로 큰 왕좌를 만들었다, 그리고 그것을 정금으로 덮었다. 왕좌쪽으로 여섯 계단이 있고, 왕좌의 꼭대기는 뒤가 둥글었다; 그리고 좌석의 양쪽에 손이 있었다, 그리고 두 사자들이 손 곁에 서있고, 그리고 열두 사자들이 여섯 계단들의 이쪽과 저쪽에 서있었다 (왕상. 10:18-21).
위에서 “영광의 왕좌”가 표현되었다, “사자들”은 싸우고 정복하는 신성한 진리이다, 그리고 “열두 사자들”은 하나의 복합체에 있는 이런저런 모든 진리들이다.
말씀에 있는 거의 모든 것들은 반대 의미 또한 지녔는데, “왕좌” 역시 마찬가지이고, 이런 의미에서는 거짓의 왕국이 의미되는데 아래 구절에서 읽어볼 수 있다:
버가모에 있는 교회의 천사에게: 나는 너의 일들을 알고 있다, 그리고 네가 거주하는 곳, 사탄의 왕좌가 있는 곳조차 (계. 2:12, 13).
용은 바다로부터 올라온 짐승에게 자기의 권능을, 자기의 왕좌를, 큰 권위를 주었다 (계. 13:2).
다섯째 천사가 자기 사발을 짐승의 왕좌 위에 쏟았다; 그리고 그의 왕국은 어두워졌다 (계. 16:10).
너는 심정에서 말했다, 나는 천국들의 안으로 올라갈 것이다, 나는 내 왕좌를 하느님의 별들 너머로 높일 것이다 (이. 14:13);
위는 바빌론에 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41-44절. 그리고 바로가 요셉에게 말했다, 보아라, 나는 이집트의 모든 토지를 다스리도록 너를 앉힌다. 42 그리고 바로는 자기 손에서 반지를 빼내어, 그것을 요셉의 손에 끼웠다. 그리고 그에게 고운 아마포 옷을 입혔다, 그리고 그의 목에 금 목걸이를 걸었다. 43 그리고 그는 자기가 가진 두 번째 병거를 그가 타게 했다. 그리고 그들은 요셉 앞에서 물렀거라 하고 외쳤다. 그리고 그는 이집트의 모든 토지 위에 그를 앉혔다. 44 그리고 바로는 요셉에게 말했다, 나는 바로이다, 그리고 너 없이는 누구도 이집트의 모든 토지에서 손이나 발을 들 자가 없으리라.

그리고 바로는 요셉에게 말했다. 이는 자연 평면이 영적 평면의 천적 부분으로부터 더 지각함을 의미한다. 이는 말씀의 역사물에서 “말하다”가 지각하다를 의미한다로부터; 바로의 표현함이 자연 평면이다로부터; 요셉이 표현함은 영적 평면의 천적 부분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자연 평면이 영적 평면의 천적 부분으로부터 지각을 가지는 이유는 모든 지각은 자기 보다 더 높은 평면으로부터 가지기 때문이다; 여기서의 경우는 영적 평면의 천적 부분이다.

보아라, 나는 너를 이집트의 모든 토지 위에 앉힌다. 이는 자연 평면의 양쪽(내면, 외면)을 지배함을 의미한다. 이는 “누구를… 위에 앉힌다”의 의미가 지배력이 있다를 의미함으로부터; 그리고 “이집트의 모든 토지”의 의미가 자연 평면 양쪽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지배력에 관해서는 더 취급되어 바로가 이집트의 토지 위에 그를 앉혔다, 즉 자신의 권위를 자신으로부터 빼서 그에게 준 것이다. 이런 것들이 신성한 섭리로부터 그렇게 행동된 것은, 요셉이 주님이 세상에 계셨을 때 가지셨던 영적 평면의 천적 부분을 표하도록 하기 위함에서 이었다, 그리고 이를 수단으로 그분은 자신의 자연 평면과 감각적 부분을 배열하시어 그것들 모두가 점진적으로 신성으로 만들어져 가게 하신 것이다. 이것이 요셉에게 행해진 것은, 요셉에 관하여 쓰여진 말씀에 신성한 것들이 포함되도록 하시려해서 이었다, 그리하여 이런 사항들이 천국들에서도 역시 최고로 거룩하고 천국들에 있는 천사들에게 잘 어울려지는 말씀이도록 배열하신 것이다; 거기 천사들은 주님의 안에서 있다, 그 이유는 그들이 그분으로부터 진행하는 신성한 진리의 기운 안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말씀의 내적 의미에 있는 신성한 것들은 주님에, 주님의 인간이 신성이 되심에 관련이 있고, 이 사항으로 천사들은 가장 큰 감명을 받아 거기로부터 자기들의 모든 지혜와 총명의 복된 것을 지각한다.

그리고 바로는 그의 손에서 반지를 뺐다. 이는 이전에 자연 평면이 가졌던 권력을 확인함을 의미한다. 이는 바로의 표현함이 자연 평면이다로부터; 그리고 “반지”의 의미가 확증하는 것이다로부터; 그리고 “손”의 의미가 힘(권력, power)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로부터 “자기 손에서 반지를 뺌”에 의해 자연 평면이 이전에 가졌던 힘을 포기함이 의미된다; 그리고 “그것을 요셉의 손에 끼움”의 의미는 영적 평면의 천적 부분에 자연 평면이 그것의 모든 힘을 양도함을 의미한다. 손에 있는 반지가 힘을 확인함을 표시한다는 것을 이와 비슷한 말을 다른 구절들에서 발견할 수는 없고, 누가복음서에서 약간 비슷한 구절 만이 있다: 즉
제 1 의 의복을 가져오라, 그리고 그것을 그에게 입혀라; 그리고 반지를 그의 손에 놓아라, 그리고 그의 발에 신을 놓아라 (눅. 15:22);
위 구절 역시 “반지”는 아들로서 집주인의 권한이 있음을 확인함을 의미한다. 어쨌든 손에 끼우는 반지에 대한 의미는 고대 시대로부터 지금의 우리에게 내려온 의식으로부터 분명해진다; 즉 약혼식과 합일함의 예식으로부터, 또한 취임식의 예식으로부터인데, 이 예식에서 반지가 그들의 손에 끼우고, 그것들에 의해 권한의 확증이 의미되었다. 더욱이 손에 끼운 반지로부터의 인장들은 동의와 확증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것을 요셉의 손에 끼웠다. 이는 자연 평면이 영적 평면의 천적 부분에 모든 권능을 양도하는 것을 의미한다. “반지를 또 다른 자의 손에 놓는다”란 누군가가 그에게 그 자신이 가지는 권한을 발생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요셉의 표현함이 영적 평면의 천적 부분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리고 그에게 고운 아마포 옷들을 입혔다. 이는 영적 평면의 천적 부분이 외적으로 표시하는 것을 의미하고, 그리고 고운 아마포 옷들이 신성으로부터의 진리들을 표시한다. 이는 “의복들”의 의미가 진리들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고운 아마포 옷들”이 신성으로부터의 진리들인 이유는 고운 아마포로 만든 의복이 매우 순수하게 희고 광택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신성으로부터의 진리가 백색과 광택에 의해 표현되기 때문이다. 이유인즉, 천국의 빛나는 백색과 광택은 주님으로부터 있는 빛으로부터 이기 때문, 그리고 이 빛은 신성한 진리 자체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베드로, 야고보, 요한 앞에서 변모하셨을 때, 그분의 의복들은 “빛 같이” 나타났다 (마. 17:2); 빛남, 눈같이 극히 흼, 하여 땅에서 더 이상 희게 할 수 없을 정도의 흼 (막. 9:3); 그리고 “반짝임” (눅. 9:29)으로 나타났다. 이는 주님의 신성한 인간으로부터 있는 신성한 진리 자체가 그렇게 표현되어진 것이다. 이 중에서 외면의 진리들은 천국들에서 의복의 흰 광휘(radiance)에 의해 표현되어지고, 내면의 진리들은 얼굴의 빛남과 광휘(눈부심, resplendence)에 의해 표현되어진다. 그러므로 본문의 “고운 아마포 옷을 입었다”란 영적 평면의 천적 부분으로부터 진행하는 진리의 외적 표시들이다; 그 이유가 이것 안에 그때 당시 신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고운 아마포”와 “고운 아마포 옷”이 신성으로부터의 진리를 의미하는 것을 다른 구절로부터도 읽게 된다:
나는 너를 자수로 만든 일로 입혔다, 그리고 너에게 오소리 가죽을 신겼다, 그리고 나는 너를 고운 아마포로 띠를 둘렀다, 그리고 너를 비단으로 덮었다; 그리하여 너는 은과 금으로 치장했다, 그리고 너의 의복들은 고운 아마포와 비단과 자수의 일로 만들어졌다 (겔. 16:10, 13);
위는 예루살렘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다, 이를 수단으로 이 구절에서 고대 교회가 뜻해진다. 이 교회의 진리들이 “자수 공예의 일로 만든 의복들, 고운 아마포, 그리고 비단”에 의해, 그리고 “금과 은으로 장식함”에 의해 묘사되고 있다. “자수 공예의 일”에 의해 기억 속의 지식에 관련된 것이 주제인 진리들이 의미되고; “고운 아마포”에 의해서는 자연적인 진리들이; 그리고 “비단”에 의해서는 영적인 진리들이 의미된다.
다시:
이집트로부터 자수의 일로 만든 고운 아마포로부터 너의 항해는 있었다, 그리하여 그것이 너에게 기(깃발)로서 있게 되었다; 엘리사아 섬의 푸르고 진홍색의 천은 너의 덮개 였다 (겔. 27:7);
위는 두로에 관해서 이다, 이를 수단으로 고대 교회가 뜻해진다, 그러나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들의 측면에서의 고대 교회에 관하여 이다; 그리고 “그녀의 항해 이었던 이집트의 자수 공예의 일로 만든 고운 아마포는 이 교회의 표시(sign), 또는 외적 표시(external significative)로서, 기억 속의 지식들로부터의 진리를 의미한다.
계시록서에서:
땅의 상인들이 바빌론을 두고 슬퍼하고 애곡할 것이다, 그 이유는 자기들의 상품을 사는 자가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그 상품은 금과 은, 귀한 돌과 진주들, 고운 아마포와 자줏빛 (옷감), 비단과 주홍색 (옷감), 각종 향나무, 각종 상아 그릇, 귀한 재목으로, 그리고 놋쇠와 철로, 그리고 대리석으로 만든 각종 그릇들 (계. 18:11, 12);
위 구절에서 표현들의 모두와 각각은 교회로부터 있는 이런저런 것들, 고로 진리로부터와 선으로부터 있는 이런 저런 것들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바빌론에 관해 말해지므로 반대적 의미에서 이다. 누구나 짐작하리라 여겨지는 것은, 위 구절의 열거된 것들 각각 안에 천국의 어떤 것이 있지 않으면 천국으로부터 내려와 말씀에 열거되었을리 만무하다는 것이다. 바빌론을 취급함에서 왜 세상의 상품들을 가지고 언급하였을까? 이를 수단으로 모독된 교회가 의미되어있지 않을까?
다시:
화있다, 화있다, 고운 아마포, 그리고 진홍색, 주홍색 옷으로 입고, 금으로 띠를 두르고, 보석, 진주들(로 치장한) 그녀여 큰 도성이여 (계. 18:16);
위 구절에서 모든 세부 사항이 천국의 신성한 어떤 것을 의미한다는 것은 같은 책의 다른 구절로부터 명확해진다. 즉 고운 아마포가 “성인들의 정의”이다 라고 말하는 구절로부터 이다:
어린 양의 결혼식의 때가 와진다, 그리고 그분의 아내는 자신을 준비했다. 그 다음 그녀에게 수여된 것은 그녀가 깨끗하고 빛나는 고운 아마포로 옷입는 것이다; 그 이유가 고운 아마포는 성인들의 정의이기 때문이다 (계. 19:7, 8);
“고운 아마포가 성인들의 정의이다”인 이유는 신성으로부터 진리 안에 있는 모든 이는 주님의 정의를 입기 때문이다; 그들의 의복들은 주님으로부터 있는 빛으로부터 희고 빛난다. 이런 이유로 황폐함의 상태로부터 천국으로 들리운 이들은 그들의 피복(被覆, clad)이 빛나는 흰색으로 나타나는데, 그 이유는 그들이 자기들의 정의를 벗고 주님의 정의를 입었기 때문이다.
신성으로부터의 진리가 유태 교회에서 표현되어 있도록 하시기 위하여, 아론의 의복들은 고운 아마포로 만들 것, 또한 궤에 관한 커튼(curtain)들에서도 아마포로 만들도록 명령되었는데 아래에 몇 구절을 인용한다:
아론을 위하여 너희는 고운 아마포로 튜닉(tunic, 속옷, 속옷용 반바지)을 바둑판 무늬로 짤 것이다, 그리고 너는 고운 아마포로 관을 만들 것이다 (출. 28:39)
그들은 아론과 그의 아들들을 위하여 고운 아마실로 속옷(tunic)들을 베짜는 사람의 일로 만들었다 (출. 30:27)
너는 열 커튼들로 주택을 만들 것이다; 꼬아만든 고운 아마실, 그리고 푸른색 (실)과 심홍색 (실)과 두 번 물들인 진홍색 (실) (출. 26:1; 38:9).
너는 주택의 뜰을 만들 것이다, 고운 꼬아만든 아마실의 뜰을 위하여 (천) 걸이(hanging)들이 있을 것이다 (출. 27:9, 18; 38:9).
뜰의 문(gate)을 위한 베일(veil)은 수를 놓는 사람의 일이었고, 푸른 (실), 그리고 심홍색 (실), 그리고 두 번 물들인 진홍색 (실), 그리고 고운 꼬아만든 아마(실)이었다 (출. 38:18).
고운 아마포가 사용되어진 이유는 궤와 궤 주변의 모든 것, 또한 아론의 의복에 있는 모든 것들이 영적인 것들과 천적인 것들을 표현하였기 때문이다. 이런 대목만 보아도, 이것들이 표현하는 것을 알지 못할 때 이런 구절들이 어떻게 이해될지를 보여준다, 또한 이런 구절들에 글자 의미 그 이상의 어떤 것도 더 이상 없다고 믿을 때 이런 구절들은 전혀 이해할 수 없게 된다는 것도 보여준다.
신성으로부터의 진리 안에 있는 천사들이 고운 아마포로 만든 옷 안에서, 즉 희고 빛나는 것 안에서 나타난다는 것을 아래 계시록서에서 읽을 수 있다:
흰말 위에 앉으신 그분은 피에 담근 옷(vesture)을 입으셨다; 그리고 그분의 이름은 말씀이라 불리운다. 천국에 있는 그분의 군대가 흰말들 위에서 그분을 뒤따랐는데, 희고 깨끗한 고운 아마포 옷을 입었다 (계. 19:13, 14)
이 모두로부터, 고운 아마포는 신성으로부터의 진리를 바깥쪽에서 표시한다는 것이다; 그 이유가 흰말 위에 앉으신 그분은 말씀 측면에서의 주님이신데, 위 구절의 경우 공개적으로 말하고 있다, 그리고 “말씀”은 신성으로부터의 진리 자체이다. “흰말들”이란 말씀의 내적 의미인데, 이미 살핀 바 있다; 그러므로 “흰말들”은 신성으로부터의 진리들이다, 그 이유는 말씀의 내적 의미로부터의 모든 것들이 신성으로부터 있는 진리들이기 때문, 그러므로 그분의 군대들은 흰말들 위에서 보여졌고, 희고 깨끗한 고운 아마포 옷을 입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목에 금 목걸이를 걸어 주었다. 이는 선을 수단으로 결과되는 내면의 것과 외면의 것의 결합을 표시함을 의미한다. 이는 “목”의 의미가 유입, 또한 보다 높은 것들과 보다 낮은 것들이 교통함, 또는 내면의 것들과 외면의 것들이 교통함이다로부터; 그러므로 “목걸이(necklace)”, 이것은 목을 에워싸고 있기 때문에 이런저런 것들의 결합을 표시한다. “금목걸이”는 선을 통하여 결합함을 의미한다, 또는 선을 수단으로 결과를 봄을 의미한다, 그 이유는 “금”이 선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내면의 진리와 외면의 진리가 결합함의 표(mark)가 “목구멍에 있는 목걸이” 에 의해 의미됨을 에스겔서로부터 읽는다:
나는 너를 장신구로 장식했다, 그리고 나는 팔찌들을 너의 손들에 놓았다, 그리고 너의 목구멍에 목걸이를 (놓았다) (겔. 16:11).

그리고 그는 그가 두 번째 가는 병거를 타게 했다. 이는 이로부터 선과 진리에 관한 모든 교리가 옴을 표시함을 의미한다. 이는 “병거(chariot)”의 의미가 선과 진리에 관한 교리이다로부터 (아래에서 설명한다); 그러므로 바로가 “그를 병거에 타게 함”은 이 교리가 거기로부터 오고 있다를 표시함이다. 이 말들은 앞 구절에서 바로에 의해 말해진 것에서 추리된다: 즉 “너는 내 집 위에 있을 것이다, 그리고 네 입에 내 모든 백성이 키스 할 것이다; 왕좌에서만 내가 너보다 더 위대할 것이다” (40절). 그분으로부터 오고 있는 선과 진리에 관한 교리가 의미되는 이유는 요셉에 의해 신성한 영적 평면에서의 주님이, 고로 주님의 신성한 인간으로부터의 신성한 진리 측면에서의 주님이 표현되기 때문이다, 이로부터의 신성한 진리가 영적 평면의 천적 부분이다. 선과 진리에 관한 교리의 모든 것들은 이 근원으로부터 인데, 그 이유는 주님이 교리 자체이시기 때문, 그 이유는 교리의 모든 것은 그분으로부터 진행된 것들이기 때문, 고로 교리의 모든 것들은 그분을 취급하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모든 교리는 사랑의 선과 신앙의 진리들을 취급하기 때문이다. 이것들이 주님으로부터 있고, 주님은 그것들 안에 계실 뿐 아니라 양쪽 모두이시다. 이로부터 선과 진리를 취급하는 교리는 주님 만을 취급함이 분명해진다; 그리고 이것은 그분의 신성한 인간으로부터 진행한다.
신성한 인간, 즉 말씀을 통하여가 아니고, 신성 자체로부터는 교리의 어떤 것도 진행됨이 가능할 수 없다. 말씀은 최고 의미에서 주님의 신성한 인간으로부터의 신성한 진리이다. 가장 깊은 천국에 있는 천사라해도 신성 자체로부터 진행하는 것을 납득할 자는 아무도 없다, 그 이유는 신성 자체는 무한이기 때문, 그러므로 모든 납득력을, 천사들의 어떤 납득력도 초월해 있다. 그러나 주님의 신성한 인간으로부터 진행하는 것을 그들(천사나 우리들)은 납득할 수 있다, 그 이유는 이것은 신성한 사람으로서의 하느님을 취급하기 때문, 이 분에 관하여는 우리나 천사가 어떤 생각을 그분의 사람이심으로 만들어 낼 수 있다; 그리고 그분의 사람이심에 관련되는 어떤 생각도 만일 이 생각이 순진의 선으로부터 흐른다면 받아지고, 선행의 선 안에 있는다. 이것이 아래 주님의 말씀에서 뜻해진다:
여하튼 하느님을 보았던 자는 없다; 독생자, 아버지의 품 안에 계신 분, 그가 그분을 설명했다 (요. 1:18).
다시:
여하튼 너희는 아버지의 음성을 듣지도, 그분의 생김새를 본 적도 없다 (요. 5:37).
다시:
아들 외에는 아버지를 아무도 알지 못한다, 그리고 아들이 그분을 밝히 알릴 누구든지 (만이 알게 된다) (마. 11:27).
“병거(chariot)들”은 말씀에서 자주 언급되어지는 단어이나, 그것들이 선과 진리에 관한 교리적인 것들을 의미한다는 것, 또한 교리적인 것들에 속하는 기억 속의 지식들을 의미한다는 것을 아는 자는 거의 없다. 그 이유인즉, “병거”를 말씀에서 읽게될 때, 영적 측면에 관련된 생각은 떠오르지 않고 역사물 속의 자연적 병거만 떠오르기 때문이다; 이는 병거를 끄는 말을 두고도 마찬가지이다; 그럼에도 말씀에서 “말들”은 이해력 측면에 속하는 것들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병거”에 의해 교리적인 것들, 또한 교리에 속하는 기억 속의 지식들이 의미된다.
“병거들”이 교회의 교리적인 것들, 또한 기억 속의 지식들을 표시하는 것이 다른 삶에서 나에게 자주 보여졌다; 말들과 병거들이 나타나는 곳은 보다 낮은 땅 가까이의 오른쪽으로 있는 장소였는데, 질서 있게 배열된 마굿간과 더불어서 나타나고, 거기서 학식에 흠취되어왔었던 이들, 배움이 삶의 목적이 되어왔었던 이들이 걸으며 대화하는 것이 보여졌다. 이러한 것들은 보다 높은 천국들에 있는 천사들로부터 나타난다; 그 이유는 천사들이 이해력으로부터 있는 것들, 교리로부터의 것들, 지식으로부터의 것들에 관해서 대화를 나눌 때, 이런 대상물들이 거기 영들에게 나타나기 때문이다.
이런 것들이 “병거들”과 “말들”에 의해 의미됨에 대하여는 엘리야를 천국으로 운반하려고 불병거와 불말이 나타났던 사실로부터 분명해진다; 그리고 엘리야와 엘리사가 “이스라엘의 병거와 그 병거의 마병”이라 불리운 사실로부터도 분명해진다:
보라 그들 사이에 불병거와 불말이 왔다; 그리고 엘리야는 회오리바람 안에서 천국으로 올라갔다. 그리고 엘리사가 그것을 보았다, 그리고 그는 외쳤다, 나의 아버지, 나의 아버지, 이스라엘의 병거와 그로부터의 마병이시여 (왕하. 2:11, 12)
같은 책에서 엘리사에 관하여:
엘리사가 죽을 그의 병으로 아퍼서 죽을 때, 그리고 이스라엘 왕 요하스가 그에게로 왔다, 그리고 그의 얼굴 앞에서 슬피 울었다, 그리고 말했다, 나의 아버지, 나의 아버지, 이스라엘의 병거와 그로부터의 마병이시여 (왕하. 1:14);
엘리야와 엘리사가 병거와 마병이라 불리운 이유는 그들이 말씀 측면의 주님을 표현했기 때문이다 (이에 관하여는 창. 18장 서문을 보라). 말씀 자체는 선과 진리에 관한 교리가 제 1 에 해당된다; 그 이유가 이로부터 교리의 모든 것이 있기 때문이다. 똑같은 이유로 여호와께서 소년의 눈을 열자, 그의 눈 앞에 산이 나타났는데, “엘리사를 빙둘러 불병거와 불말이 가득하였다.” (왕하. 6:17).
“병거”가 교리물인 것을 의미하고, “말”은 지적인 것을 의미하는 것을 다른 구절로부터 발견한다:
너희는 말과 병거와 더불어, 그리고 용사와 전쟁의 모두 각각의 사람과 더불어 내 식탁에서 배불리 먹었다. 그렇게 나는 민족들 사이에 나의 영광을 놓을 것이다 (겔. 39:20; 계. 19:18);
위에서 주님의 오심이 취급되었다. 위 구절의 “말과 병거”가 자연계의 말과 병거가 아닐 것임은 누구나 짐작될 것이다. 그 이유는 그들이 이들과 더불어 주님의 식탁에서 배불리 먹을리 없기 때문, 그러나 이런 사항들과 더불어 말과 병거에 의해 의미되는 것은 이해력으로부터의 것들과 선과 진리에 관한 교리가 의미된다.
비슷한 것들이 아래 구절들에서 “말”과 “병거”에 의해 의미되고 있다:
하느님의 병거는 평화스런 것들로부터의 2만, 천(2 천만)이다; 주님이 그것들 안에 계신다; 시내산 이 성소 안에 있다 (시. 68:17).
다시:
여호와께서는 의복 같이 빛으로 덮으신다, 그분은 천국들을 커튼 같이 펼치신다, 그분은 물들에 그분의 침실들의 들보를 놓으신다, 그분은 구름들을 그분의 병거들로 만드신다, 그분은 바람의 날개 위에서 걸으신다 (시. 104:2, 3).
이사야서에서:
바다의 광야에 관한 예언이다. 고로 주님께서 나에게 말하셨다, 망을 보도록 경비병을 세워두어라, 그가 선포할 것이다; 그리하여 그가 병거를, 한 쌍의 마병을, 나귀 병거를, 낙타 병거를 보았다, 그가 잘 경청했다, 크게 경청했다; 그 이유가 사자(lion)가 망루에서 소리쳤기 때문이다, 주여 나는 낮동안 계속 서 있고, 나의 지킴에 나는 온 밤을 놓았다; 그 때에 참으로 인간의 병거, 한쌍의 마병이 보였다; 그리고 그는 말했다, 바빌론이 무너졌다, 무너졌다 (이. 21:1, 6-9).
이사야서에서:
그때 그들은 모든 나라들에서 모든 너희 형제들을 데려오고, 그들이 나의 거룩함의 산, 예루살렘으 로 말 위에, 병거 위에, 들것 위에, 노새 위에, 시중꾼 위에서 여호화께 드릴 공물을 가져올 것이다 (이. 66:20).
다시:
보라 여호와께서 불 안에서 오실 것이다, 그리고 그분의 병거들이 회오리 바람 같이 있을 것이다 (이. 66;15).
하박국서에서:
여호와께서 강들에게 노하셨습니까? 강들을 향하여 당신의 성내심이 있었습니까? 당신의 분노가 바다를 향하여 있었습니까? 이렇게 당신은 당신의 말들 위에 타셨습니까? 당신의 병거들이 구원입 니다 (합. 3:8).
스가랴서에서:
나는 내 눈을 들어올려 보았다, 그리고 두 산들 사이로부터 나오는 네 병거들이 바라보였다; 그리고 산들은 놋쇠의 산들이었다. 첫 병거에서 붉은 말이 있었다; 둘째 병거에서 검은 말이 있었다; 셋째 병거에서 흰말이 있었다; 그리고 넷째 병거에서 회색의 말이 있었다 (슥. 6:1-3).
예레미야서에서:
이 도성의 성문으로 해서 다윗의 왕좌에 앉아있는 왕들과 왕자들이 병거와 말을 타고 들어갈 것이다, 그들과 그들의 제 1 인 자들, 유다 사람, 예루살렘의 거주민들; 그리고 이 도성은 영원히 거주지가 될 것이다 (예 17:25; 22:4).
“영원히 거주할 도성”은 예루살렘이 아니라, “예루살렘”에 의해 의미되는 주님의 교회이다; 이 “도성의 성문으로 들어갈 왕들”은 왕이 아니라 교회의 진리들이다; 고로 “왕자들, 제 1 인 자들”은 진리의 제 1 의 것들이다; “다윗의 왕좌 위에 앉은 그들”이란 주님으로부터 진행하는 신성한 진리들이다; “병거와 말을 탄 이들”이란 이해력으로부터와 교리로부터 파생되는 것들이다. “병거들”이 말씀의 역사물에서 자주 언급된다, 그리고 이 역사들은 모두 표현적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표현들은 주님의 왕국 안에, 교회에서 있는 이런저런 것들이다. 그 안에 있는 “병거들” 또한 같은 의미이다.
말씀의 대부분의 표현에는 반대 의미 또한 지닌다. 이럴 경우, “병거들”은 악과 거짓들에 관한 교리적인 것들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것들을 확증하는 기억 속의 것들 또한 의미한다. 아래 구절에서 읽어진다:
도움을 위하여 이집트로 내려가는 그들에게 화가 있다, 그리고 말에 의존하고, 병거를 신뢰하는데, 그것들이 많기 때문, 그리고 마병에 의존하는데 그것들이 매우 강하기 때문; 그러나 그들은 이스라 엘의 거룩한 분을 찾지 않는다 (이. 31:1).
다시:
네 종들의 손을 수단으로 너는 주님을 모독했다, 그리고 말했다, 내 병거의 많음을 수단으로 나는 레바논 측면쪽 산들의 높이에 올 것이다; 거기서 나는 삼나무들의 드높음을, 전나무들의 빼어남을 자를 것이다 (이. 37:24);
위는 앗시리아의 장군 랍사게의 오만함에 대한 예언적인 응답이다. 예레미야서에서:
보라 북으로부터 오는 물들이 시내를 넘쳐 흐르고 토지와 그 안의 충만한 것, 도성과 그 안에 거주하는 그들 위에 범람할 것이다, 그리고 토지의 모든 거주민들은 그의 강한 말들의 발굽의 쿵쿵 소리를, 그의 병거의 바퀴가 덜커덕거려 진동하는 소리를 들을 것이다 (예. 47:2, 3).
에스겔서에서:
그의 말들의 풍부함을 이유로 그들의 먼지가 너희를 덮을 것이다; 네 성벽들은 그가 네 성문으로 들어올 때 마병의 음성과 바퀴와 병거로 해서 흔들릴 것이다, 도성의 입구 외에 그 안에서 깨뜨림이 만들어질 것이다; 그의 말들의 발굽을 수단으로 그는 모든 너의 거리들을 짓밟을 것이다
(겔. 26:10, 11).
학개서에서:
나는 왕국들의 왕좌를 전복되게 할 것이다, 그리고 나는 나라들의 왕국의 강함을 파괴할 것이다; 나는 병거들과 그것에 탄 자를 뒤엎을 것이다, 그리고 말들과 그 위의 기수들을 끌어내릴 것이다 (학. 2:22).
스가랴서에서:
나는 에브라임으로부터 병거를, 그리고 예루살렘으로부터 말을 멸절할 것이다, 나는 전투하는 활을 자를 것이다; 그리고 그는 나라들에게 평화를 이야기할 것이다 (슥. 9:10).
예레미야서에서:
이집트가 시내 같이 일어난다, 그리고 그의 물들이 시내 같이 자신들을 출렁이고 있다; 그 이유가 그가 말했기 때문, 즉 나는 올라갈 것이다, 나는 땅을 덮을 것이다, 나는 도성과 그 안의 거주민을 파괴할 것이다. 올라가라, 너희 말들아; 격동하라, 너희 병거들이여 (예. 46:8, 9).
이집트 군대가 이스라엘의 아들들을 추격할 때 사용한 말과 병거, 수프 바다 안으로 진입한 바로의 군대의 병거 바퀴가 떼어져 나간 것, 이외 말과 병거에 관해 말해진 것은 말과 병거에 관한 구절들 중에서 더 큰 묘사함을 만드는데, (출. 14:6, 7, 9, 17, 23, 25, 26; 15:4, 19) 이것들은 이해력으로부터, 교리로부터, 그리고 그것들에서 발견되는 추론들과 함께 교회의 진리들을 뒤집고 소멸하는 것이 의미된다. 이런 것들의 파멸과 죽음이 거기서 묘사되어 있다.

그가 가졌던… 이는 자연 평면을 수단으로 오는 것, 즉 그렇게 행동하는 선과 진리의 교리를 의미한다. 이는 내적 의미에서 있는 것의 시리즈로부터 분명해진다, 그리고 이미 앞에서 열어보인 것들로부터 분명해진다.

그리고 그들은 요셉 앞에서 물렀거라 라고 외쳤다. 이는 신앙을 통하여 인정함, 그리고 숭배함을 의미한다. 이는 “외치다”가 신앙을 통하여 인정함이다로부터(아래에서 설명한다); 그리고 “물렀거라”의 의미가 숭배함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물렀거라(abrech)”의 원어의 뜻은 “무릎을 구부림”이다, 무릎을 구부림은 숭배함이다. 의지로부터, 고로 사랑 또는 애착으로부터, 결과적으로 생명으로부터 있는 모든 노력들은 그것들에 상응하는 바깥쪽의 행동들이나 제스추어를 가진다; 이 행동들 또는 제스추어들은 내향의 것들과 더불은 바깥쪽의 것의 상응 자체로부터 흐르고 있다. 굴종함(고로 숭배함)을 결과하는 거룩한 경외심은 그 자체에 상응하는 행동 또는 제스추어로서 무릎을 구부리고, 땅쪽으로 꿇는 것, 땅쪽으로 몸을 구부림이 뒤잇는다. 이 상태에서 만일 숭배함이 진짜 굴종함으로부터 이다면, 또는 만일 굴종함이 진짜 거룩한 경외심으로부터 이다면, 영들의 실패함이 있다, 그러므로 결합의 길을 주는 바, 영적인 것이 무릎을 꿇는 자연적인 것과 결합하는 중간의 지역에서 결합한다; 그 이유가 아래쪽의 부분들은 자연적 평면의 것들과, 위쪽 부분들은 영적 평면의 것들과 상응을 가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무릎을 구부림은 숭배함을 표현하는 표시이다. 천적 수준의 인간과 더불어 이 행동은 동시적이다; 그러나 영적 수준의 인간과 더불어서는 의지의 결과이다.
옛 시대의 왕들이 병거를 타고 있을 때, 무릎이 구부려졌는데, 그 이유는 왕들이 신성한 진리 측면의 주님을 표현했고, “병거”는 말씀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이 숭배함의 예식은 그 의미를 알게 되었을 때 표현하는 것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그때 당시 왕들은 숭배함을 자신들쪽으로 돌리지 않고 자신들과 떨어진 왕권쪽으로 돌렸다, 물론 왕이나 왕권이나 결과적으로 동일하다해도 그렇게 했다. 그들과 더불어 왕권은 법이었다, 이 법은 신성한 진리로부터 인 바, 왕이 그 법을 보관하는 만큼에서 왕도 숭배되었다. 고로 왕은 법을 보관하는 정도를 넘어 왕권을 자신에게 돌리지 않았다. 왕권이 신성한 진리이다는 것은 앞에서도 살핀 바 있다; 결과적으로 왕권이 법이다, 이 법 자체는 왕국의 진리이고, 이 진리에 따라 그 거주민은 살아간다. 이상 말해진 바로부터 “물렀거라”, 또는 “무릎을 구부림”이 숭배함을 의미한다는 것이 분명해졌을 것이다.
“외침” 또한 살아 있는 고백 또는 신앙의 인정함에 상응하는 행동이다, 외침의 의식은 이 고백이 의미될 때 고대인들 사이에서 준행되었다. 이런 이유로 말씀에서 “외침”이나 “소리침”은 신앙으로부터 고백함과 인정함에 연결되어 자주 언급된다; 아래 구절은 세례 요한에 관련된 것이다:
요한은 예수를 증거했다 그리고 외쳐, 말하기를, 이 분이 내가 말한 그분이시다, 그분은 내 뒤애 오시나 내 앞서 계셨던 분이시다; 그 이유가 그분은 나보다 먼저 계셨기 때문이다. 나는 주님의 길을 곧게 만들어라 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음성이다 (요. 1:15, 23)
같은 책에서:
그들은 종려나무 가지들을 가지고 예수를 만나러 갔다, 그리고 외쳤다, 호산나, 주님의 이름 안에서, 이스라엘의 왕으로 오시는 그분은 복되시다 (요. 12:13).
그리고 누가복음서에서:
예수께서 바리새인들에게 말하셨다, 만일 이들이 잠잠하다면, 돌들이 소리칠 것이다 (눅. 19:40).
“외침”이 신앙으로부터 인정함이 의미되기에, 그러므로 이 인정함으로부터 받아들임이기에, 때로 주님께서 외치셨다라는 대목을 읽게 된다 (요. 7:28, 37; 12:44); 이사야서에서:
여호와께서 영웅으로 나가실 것이다, 그분은 전쟁의 사람 같이 열정을 휘저으실 것이다, 그분은 소리치실 것이다, 그렇다, 그분은 외치실 것이다 (이. 42:13).
반대적 의미에서 “외침”에 의해 인정 않음이 뜻해진다, 고로 혐오이다. 이는 살핀 바 있다; 그리고 이것은 거짓을 서술한다.

그리고 그는 이집트의 모든 토지 위에 그를 앉혔다. 이는 이와 같은 것이 그것의 권위이었음을 의미한다. “그를 모든 이집트의 토지 위에 앉힌다”가 내면, 외면 양쪽의 자연 평면에서 통치한다로부터; 그러나 여기서의 통치권은 앞의 페이지들에서 서술되었던 것과 같다; 고로 이와 같음이 그것의 권위이었다.

그리고 바로가 요셉에게 말했다. 이는 아직 더 지각함을 의미한다. 이는 “말하다”의 의미로부터; 바로의 표현함으로부터; 요셉의 표현함이 영적 평면의 천적 부분으로부터 자연 평면이 지각함이다로부터; 여기서는 더 지각함, 그 이유는 말이 반복되기 때문이다.

나는 바로이다. 이는 자연 평면이 거기에서 파생되었음을 의미한다. 이는 바로의 표현함이 자연 평면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나는 바로이다”에 의해 자연 평면이 거기에서 파생되었음이 의미되는 것은 이 말 뒤에 이어지는 말, 즉 “너 없이 이집트의 모든 토지에서 손이나 발을 들 자가 없다”로부터 분명해진다. 이 말을 수단으로 자연 평면 양쪽 측면 모두의 권능이 이 근원으로부터 이다가 의미된다; 그리고 자연 평면에 있는 것들이 이어지는 말에 의해 뜻해지기 때문에, 시작되는 처음의 말은 “나는 바로이다”라고 말해졌다. 자연 평면이 거기로부터 파생됨에 의해 자연 평면은 영적 평면의 천적 부분으로부터이다가 뜻해진다. 이 점에 관련하여 새로이 출생하는 이들, 즉 거듭나는 이들의 자연 평면은 거듭나지 않고 있는 이들의 자연 평면과는 아주 판이하다. 거듭나지 않는 자에게서의 자연 평면은 그의 모든 것이다; 이것으로부터 그는 생각하고 바랄 뿐, 합리적 평면으로부터는 아니고, 영적 평면으로부터서는 더 더욱 아니다, 그 이유는 이런 평면이 이 사람에게는 닫혀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대부분 절멸해 있다.
그러나 거듭나지는 이들 안에서 영적인 것은 그의 모든 것이 되어간다; 이는 자연 평면의 생각함과 바램에서 뿐만 아니라, 그것의 특성도 결정해준다, 즉 원인이 결과의 특성을 가름하는 것과 같다; 그 이유가 모든 결과에서 행동하는 유일한 것이 원인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자연적인 것들이 영적인 것 같이 되어간다, 그 이유는 자연 평면에 있는 자연적인 것들, 즉 자연계로부터 파생되는 지식들이 그 자체로부터 행동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영적인 것이 자연 평면에서 행동함에 단지 동의만 할 따름이다, 그리고 이런 지식들을 수단으로 영적인 것이 자연적으로 있는다; 결과 안에 어떤 것이 놓인 것과 비등하다; 그러나 원인이 결과 안에서 결과 자체를 수행하는 것이 가능해지게 하는 한도에서이다. 즉 일치함 안에서 행위로 자체를 생산하는 것이다. 이런 간단한 소견으로부터, 새로이 창조되어져가는 이들, 즉 거듭나아져가는 이들 안에서의 자연 평면의 경우는 어떠한지가 가늠되었을 것이다. 이것이 자연 평면이 거기에서 파생됨에 의해 뜻해진 것, 본문의 “나는 바로이다”에 의해 의미된 것이다.

그리고 너 없이는 아무도 자기의 손을 들지 못하리라. 이는 영계에서 힘의 모든 것은 영적 평면의 천적 부분으로부터서만 있다를 의미한다. 이는 “손”의 의미가 힘이다로부터; 그러므로 “너 없이 손을 들 자는 아무도 없다”는 그것들은 이것만으로부터 외에는 힘을 가지지 못한다. 즉 영적 평면의 천적 부분이 모든 힘을 가지고 있다는 말이다. 영적 힘이 “손”에 의해 의미되는 것은 지금 이어지는 말들에서 보여질 것이다.

또는 발이나… 이는 자연 평면에 있는 모든 것을 의미한다. 이는 “발”의 의미가 자연 평면이다로부터; 여기서는 자연 평면에 있는 힘이다. 그 이유는 “발을 들어올림”이 “손을 들어올림”에서 같이 힘이 의미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손을 들어 올림” 에 의해서는 영적 측면에서 있는 힘을; “발을 들어올림”은 자연적 측면에서 있는 힘을 의미한다; 그 이유가 발 위쪽의 신체 부분들은 영적인 것들과 관련을 가지기 때문이다. 이것은 웅대한 사람으로부터, 또는 세 천국들로부터 분명해진다. 전체 천국이 하나의 사람으로서 시각 앞에 표출될 때, 가장 깊은 천국, 또는 셋째 천국이 머리 부분에 대답한다, 그 이유는 천적 평면이기 때문이다; 중간, 또는 둘째 천국은 몸체 부분에 대답하는데, 그 이유는 영적 평면이기 때문이다, 가장 낮은 천국, 첫째 천국은 발에 대답한다, 그 이유는 자연 평면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목”에 의해, 이것은 중간이기 때문에 천적인 것과 영적인 것의 유입과 교통함이 의미된다; 그리고 “무릎”에 의해 이것 역시 중간이므로 영적인 것과 자연적인 것의 유입과 교통함이 의미된다. 이로부터 분명한 것은, “손을 들어올림”에 의해 영적 측면에서의 힘을; “발을 들어올림”은 자연적 측면에서의 힘이 의미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손”에 의해 의미되는 힘은 영적 측면의 것을 서술한다, 즉 선으로부터의 진리를 서술한다. “영적 측면(the spiritual)”이란 천국의 빛으로부터 자연 평면 안에 있는 것을, “자연적 측면(the natural)”이란 세상의 빛으로부터 자연 평면 안에 있는 것을 뜻한다. 하여 전자는 “영적, 영적 측면”, 후자는 “자연적, 자연적 측면”이라 불리운다.

이집트의 모든 토지에서. 이는 자연 평면들 양쪽에서를 의미한다. 이는 “이집트의 모든 토지에서”의 의미가 자연 평면의 양쪽 측면 모두에서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는 천사들이 지각하는 것이 이와 같다는 말인데, 인간이 이 대목, 즉 “바로는 자기 반지를 자기 손가락에서 빼서, 그것을 요셉의 손에 놓고, 그에게 고운 아마포 옷을 입히고, 그의 목에 금 목걸이를 놓고, 그로 그가 지닌 두 번째 병거를 타게 하고, 그들이 그 앞에서 물렀거라 외치고, 그는 그를 이집트의 모든 토지 위에 앉혔다”라고 읽을 때 천사는 자연 평면의 양쪽에서 지각한다는 말이다. 물론 천사들이 역사물들 자체를 지각하는 것은 가능할 수 없다, 그 이유는 그것들이 세상으로부터 있기 때문, 그리고 천국으로부터는 그렇게 있지 않기 때문, 그리고 세상으로부터의 것들은 그들에게 나타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은 천국에 있는 것과 상응함에 있기 때문에, 인간이 세상의 것들을 지각할 때 천사들은 천국의 것들을 지각한다. 천사들이 인간과 더불어 있도록 하기 위하여 말씀이 주어져 왔었다, 이 말씀 안에서 천사들은 자기가 출석하는 인간과 교통할 수 있는 신성한 거룩함을 지각할는지 모른다.

45절. 그리고 바로는 요셉의 이름을 사브낫-바네아 라고 불렀다. 그리고 그에게 온의 성직자 보디베라의 딸 아스낫을 여인으로 주었다. 그리고 요셉은 밖으로 나가서 이집트의 땅을 지배했다.

바로는 요셉의 이름을 사브낫-바네아 라고 불렀다. 이는 그때 당시 영적 평면의 천적 부분의 품질을 의미한다. 이는 “이름” 그리고 “이름을 부르다”가 품질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원어에서 “사브넷-바네아”는 “감추인 것을 밝힌 자, 그리고 장차 올 것을 연 자”를 뜻한다. 이를 수단으로 천적 수준의 의미에서 거기 안에 있는 신성이 의미된다; 그 이유가 감추인 것들을 밝힘, 그리고 장차 올 것을 여는 것은 오로지 하느님에 속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이 이름에 포함된 의미이다, 그리고 이것은 영적 평면의 천적 부분의 품질이다; 그 이유가 영적 평면의 천적 부분은 신성이 안에 있는 진리로부터의 선, 또는 신성으로부터 직접 있는 진리로부터의 선이다. 이것, 즉 신성이 안에 있는 영적 평면의 천적 부분은 주님이 세상에 계셨을 때 주님만에 속했고, 이것은 신성 자체가 있을 수 있는 (주님의) 인간(Human)이었다, 그리고 이것은 주님이 자신 안에서 모든 인간을 신성으로 만드셨을 때 벗어지실 수 있었다.

그리고 그는 그에게 온의 성직자 보디베라의 딸 아스낫을 여인으로 주었다. 이는 진리와 선 그리고 선과 진리의 결혼의 품질을 의미한다. 이는 “여인으로 주다”의 의미가 결혼이다로부터 분명해진다. 진리가 선과, 선이 진리와 결혼함인 이유는 영적 의미에서의 결혼은 이것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말씀에서 결혼에 의해서 역시 이 의미밖에 더 없다. “온의 성직자의 딸”에 의해서는 선으로부터의 진리가 의미되는데, 그 이유는 “딸”이 진리에 대한 애착, 그리고 “성직자”는 선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요셉”에 의해서는 신성이 안에 있는 진리로부터의 선인데, 이는 영적 평면의 천적 부분과 같은 말이다. 이로부터 분명한 바, 진리가 선과, 선이 진리와 결혼함이 의미되었다는 것이다. 이 결혼의 품질도 의미되어 있다. 그러나 이 품질은 이 이상 더 공포될 수 없다, 그 이유는 주님이 세상에서 가지셨던 품질은 납득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는 천사도 예외는 아니다, 그러나 대단히 그늘져 있는 수준의 생각을 만들어 낼 수는 있는데, 이는 천국에서 있는 생각 같은 것, 즉 웅대한 사람으로부터의 것 정도, 주님의 신성의 유입으로부터 웅대한 사람 안에 있는 영적 평면의 천적 부분에 대해 생각해보는 정도뿐이다. 이 생각은 지극히 일반적일 뿐에 한해서이다.

그리고 요셉은 밖으로 나가 이집트의 땅을 지배했다. 이는 자연 평면 양쪽을 그것의 자신이었을 때를 의미한다. 이는 “밖으로 나가다”의 의미가 여기서는 흘러듦이다로부터 분명해진다; 그리고 “이집트의 토지”의 의미가 자연적 수준의 마음이다로부터, 고로 자연 평면 양쪽이다. 이 구절과 이미 앞에서 살핀 것과 더불어서에 의해 영적 평면의 천적 부분의 품질이 의미된다, 그리고 영적 평면의 천적 부분이 유입을 수단으로 자연 평면의 양쪽 모두를 그것의 자신으로 만들었을 때, 선이 진리와, 진리가 선과 결혼함의 품질도 의미되고 있다. “자연 평면을 그것의 자신으로 만듦”에 의해 뜻해지는 것은 이미 살피기도 했다.

46-49절. 그리고 요셉이 이집트의 왕 바로 앞에 섰을 때 삼십 세의 아들이었다. 그리고 요셉은 바로 앞으로부터 나가서, 이집트의 모든 토지를 통과했다. 47 그리고 땅은 산출이 풍성한 칠 년에 수확물을 만들었다. 48 그리고 그는 이집트의 토지에 있었던 칠 년의 모든 양식을 거두어 들였다. 그리고 성읍의 들판의 양식을 성들 안에 놓았는데, 그는 도성 둘레에 있는 것들을 도성의 한가운데에 쌓았다. 49 그리고 요셉은 낟알을 바다의 모래 만큼, 그것을 초과할 정도로 많아 그는 세기를 중단하였는데, 그 이유는 그것이 셀 수 없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요셉은 삼십 세의 아들이었다. 이는 리메인스가 가득해진 상태를 의미한다. 이는 “30”이 리메인스가 가득함이다로부터 (아래에서 더 살핀다); 그리고 “햇수들(years)”의 의미가 상태들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말씀에서 숫자 “30”은 전투로부터의 얼마쯤, 그리고 리메인스가 가득함을 의미한다. 이렇게 두 의미를 가지는 이유는 30이 두 숫자 5와 6으로, 또한 3과 10으로 구성되기 때문이다. 5×6=30 일 경우, 전투로부터의 얼마쯤이 의미되는데, 그 이유는 “5”가 얼마쯤, 조금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6”은 전투를 의미한다; 그러나 3×10=30 일 경우, 리메인스가 가득함을 의미하는데, 그 이유는 “3”이 가득한 것을 의미하고, “10”은 리메인스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합성된 숫자는 그것을 이루는 구성 숫자와 같은 것을 포함한다.
리메인스의 가득함은 “30,” “60,” “100”에 의해서도 의미되는데, 마가복음서에서:
좋은 지면에 떨어진 씨는 싹을 틔고 성장하여 열매를 산출 했는데, 이 씨는 30(배)를, 저 씨는 60(배)를, 또 다른 씨는 100(배)를 열매맺었다 (막. 4:8, 20);
위의 숫자들은 10에 곱해짐으로 발생되고 있는 바, 그것들은 리메인스의 가득해짐을 의미한다. 그리고 거듭남을 결과되게 하는 영적 전투들 안으로 진입하는 것은 그가 리메인스를 충분히 받아지기 전에서는 승인되지 않는다. 이 의미를 포함한 명령이 민수기서에 있는데, 즉 레위인들은 삼십세가 찰 때까지 만남의 천막에서 어떤 일도 해서는 안된다는 명령이다. 이 만남의 천막에서의 일, 또는 직능은 “전투(warfare)”라고 불리우는 것을 아래 구절로부터 읽는다:
만남의 천막에서 일을 하기 위하여, 레위의 아들들의 한가운데로부터, 고핫의 아들들로부터, 삼십세로부터 오십세의 아들까지, 전투에 참가하는 모든 이의 총계를 가져와라 (민. 4:2, 3).
위와 비슷한 내용이 게르손의 아들들, 그리고 므라리의 아들들에 관련하여 말해지고 있다 (민. 4:22, 23, 19, 30; 그리고 35, 39, 43). 다윗이 통치를 시작했을 때의 나이도 삼십 세 이었던 것도 위 의미와 비슷한 것을 포함한다 (삼하. 5:4).
이런 모두로부터, 주님이 삼십 세가 되실 때까지 자신을 명백히 들어내시지 않은 이유도 지금 분명해질 것이다 (눅. 3:23); 그 나이가 차서야 리메인스가 충만해지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님이 가지셨던 리메인스는 그분 자신이 자신을 위하여 포획한 리메인스였다; 그리고 그것들은 신성으로부터 이었다; 그리고 그것들을 수단으로 그분은 인간 본질을 신성 본질에 하나되게 하셨다, 그리하여 인간 본질을 신성 본질로 만드셨다. 그분으로부터 “삼십 세”는 리메인스 측면에서 충만한 상태를 의미하게 되었고, 또한 삼십 세가 되어야 성직자 레위인들이 자기들의 임무를 수행할 수 있었던 이유이기도 했다; 그리고 다윗이 왕권 측면에서의 주님을 표현했기에 다윗은 삼십 세가 차서야 통치를 시작했다; 그 이유가 모두 각각의 표현은 주님으로부터 파생되기 때문, 고로 모든 표현은 주님을 바라보고 있다.

그가 이집트의 왕 바로 앞에 섰을 때… 이는 그것의 현존이 자연 평면에 있었을 때를 의미한다. 이는 “누군가의 앞에 서다”의 의미가 현존하다이다로부터; 그리고 이집트의 왕 바로의 표현함이 자연 평면의 새로운 상태, 또는 새로운 자연적 인간이다로부터, 고로 안에 영적 평면의 천적 부분이 있는 자연 평면, 그리고 영적 평면의 천적 부분이 그것의 자신으로 만든 자연 평면이기에 즉시 이어지는 말은, “그리고 요셉은 바로 앞으로부터 나갔다”이다.

그리고 요셉은 바로 앞으로부터 밖으로 나갔다. 이는 일반적 측면에서의 자연 평면이 영적 평면의 천적 부분에 속했을 때를 의미한다. 이는 “밖으로 나갔다”의 의미가 그쪽에 속하기 위해 있다 이다로부터 (아래에서 설명한다); 요셉의 표현함이 영적 평면의 천적 부분이고, 바로의 표현함은 자연 평면이다로부터 알려진다. “밖으로 나간다”는 것이 그쪽으로 속해 있는 것이다, 또는 그것의 자신이다는 것은 앞의 말과 뒤의 말로부터, 또한 이 표현의 영적 의미로부터 분명해진다; 그 이유가 “밖으로 나감” 또는 진행함은 영적 의미에서 누군가의 자아를 또 다른 자 앞에서 그 사람에게 숙박될 수 있는 형체 안에서 표출하는 것, 고로 누군가의 자아와 똑같게 표출하는 것, 단지 형체만 다를 뿐이기 때문이다. 이 의미에서 “밖으로 나감”이 주님에 관해 말해진다:
예수께서 자신에 관해 말하셨다, 나는 밖으로 나갔고 하느님으로부터 온다 (요. 8:42).
아버지는 너희를 사랑하신다, 그 이유는 너희가 나를 사랑했기 때문, 그리고 내가 하느님으로부터 밖으로 나갔다를 믿었기 때문이다. 나는 아버지로부터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세상 안으로 와있다; 그리고 다시 나는 세상을 떠난다, 그리고 아버지에게 간다. 그분의 제자들이 말했다, 저희들은 당신이 하느님으로부터 밖으로 나왔다는 것을 믿습니다 (요. 16:27-30).
그들은 내가 하느님으로부터 밖으로 나갔다는 진리에 관해 알았다 (요. 17:8).
“밖으로 나갔다” 또는 진행됨(proceeding)에 관해 뜻해지는 것을 예증하기 위해 예를 들어보자: 진리가 선의 형체일 때, 또는 진리가 이해력이 납득할 수 있는 형체에서 선일 때, 진리는 “밖으로 나갔다” 또는 선으로부터 진행된다 라고 말해진다. 이해력이 의지력에 모양을 만들 때, 또는 이해력이 내적 시각에 의해 지각할 수 있는 형체 안에 있는 의지력일 때, 이해력 또한 의지력으로부터 “밖으로 나갔다” 또는 진행된다 라고 말해질 수 있다. 이와 같은 것을 이해력의 생각에 주목해보면, 생각이 말이 될 때, 그것은 밖으로 나갔다, 또는 진행되고 있다 라고 말해질 수 있다; 그리고 의지력에 주목할 경우, 이것이 행동이 될 때, 의지로부터 밖으로 나갔다, 진행된다 라고 말해질 수 있다. 생각이 말이 될 때, 생각은 또 다른 형체를 가지고 자체를 옷입히는 것이다; 그래도 밖으로 나간 것은 생각이다; 그 이유가 생각에 옷입혀진 단어나 음질은 생각이 특유하게 지각되도록 밖으로 나간 생각에 추가된 것일 뿐이다. 마찬가지로 의지가 행동이 되어갈 때, 의지는 또 다른 형체로 되어가나, 여전히 의지가 이런저런 형체에서 표출된 것 뿐이다; 의지가 입은 제스추어나 움직임들은 이것을 보는 사람에게 걸맞아져 영향력이 나타나게 하려 추가된 것일 뿐이다. 외적 인간을 두고도 더 말해볼 수 있다. 이것은 내적 인간으로부터 밖으로 나간 것, 진행된 것이다. 실체상 그렇게 되는 것이다, 그 이유가 외적 인간은 내적 인간이 세상에서 존재하기 위해 만들어낸 인간밖에 더 아니기 때문이다. 이런 예들로부터 분명한 바, “밖으로 나감” 또는 진행됨의 내적 의미가 무엇인지, 즉 주님을 서술할 때, 이는 신성이 인간으로 형체를 만든 것, 그리하여 믿는 이들의 지각에 잘 숙박되도록 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이 둘은 하나이다.

그리고 이집트의 모든 토지를 통과했다. 이는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종속되게 하고 복종하게 하였을 때를 의미한다. 이는 “이집트의 모든 토지”의 의미가 자연 평면의 양 측면 모두이다로부터, 이로부터 “이집트의 모든 토지를 통과함”의 의미는 자연 평면의 모든 것을 종속되게 하고 복종하게 만드는 것임이 분명하다.

그리고 그 땅은 산출이 풍부한 칠 년에 수확물을 만들었다. 이는 진리들이 계열을 이루어 증가할 때 첫 상태를 의미한다. 이는 “칠 년”의 의미가 첫 상태들이다로부터, 그 이유는 풍년이 먼저 있고, 기근이 뒤잇기 때문이다; 그리고 “산물의 풍부함”의 의미가 진리의 증가이다로부터; “땅이 만들었다”에 의해 이런 증가가 자연 평면에서 거행되었다 이다로부터; 그 이유가 여기서의 “땅”은 자연 평면이기 때문; 그리고 “수확물(gathering, collection)”의 의미가 시리즈(seris)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시리즈가 수확물에 의해 의미되는 경우는 이렇다: 개혁되는 인간과 더불어 일반적 진리들이 먼저 은근히 심어진다, 그런 다음 일반 사항으로부터의 세부 사항에, 세부 사항으로부터 낱개 사항들에 은근히 심어져 간다; 세부 사항들은 일반 사항 아래 배열되어진다, 그리고 낱개 사항들은 세부 사항 아래 배열되어진다. 이 배열들 또는 질서 안에 놓여짐이 말씀 안에서 “묶음, 다발(bundle)”, 또는 “한 웅큼(handful)”, 또는 “수확, 모음(gathering)”에 의해 의미되어 있다. 이런 것들은 진리들이 증가할 때 시리즈로 배열되고 질서 안에 놓여지는 것밖에 더 아니다. 거듭나는 자와 더불어 이 시리즈는 천국의 사회가 놓여짐에 따라서이고, 거듭나질 수 없는 이들과 더불어서는 지옥의 사회가 놓여지는 것에 의거해서 이다. 그러므로 악 안에, 이로부터 거짓 안에 있는 이들은 최소 규모로서의 지옥인 것이다. 이 시리즈에 관하여는 주님의 신성한 자비로부터 차후 더 말할 것이다.

그리고 그는 칠년의 모든 양식을 거두어 들였다. 이는 첫 번째 상태에서 증가된 선에 인접한 진리를 보존함을 의미한다. 이는 “거두어 들이다”의 의미가 보존하는 것이다로부터; 그 이유가 그가 기근을 대비하여 거두어들인 것을 도성 한가운데 놓았기 때문; 이를 수단으로 그것들이 내면들에 저장된 것도 의미하고 있다; “양식”의 의미가 내적 인간이 자양분을 얻는 모든 것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 양식은 선과 진리이다는 것은 바깥쪽 인간이 자양분을 얻어내는 수단이 지상의 식품(양식)이고, 이것에 상응되는 것이 내적 인간을 위한 영적 양식인 선과 진리이다는 것으로부터 쉽게 알 수 있다. 여기서의 양식은 선에 인접한 진리이다, 그 이유는 이 진리가 내면들에 저장되고 보존되기 때문이다. “칠 년”에 의해서는 진리들이 증가한 첫 상태들이 의미된다. 이로부터 분명한 바, 처음 시기 동안 불어난 선에 인접한 진리의 보존이 “그는 칠 년의 모든 양식을 거두어들였다”에 의해 의미되어 있다. 그러나 선에 인접한 진리가 무엇인지 아는 자는 매우 적다, 게다가 언제, 어떻게 진리가 선에 인접되어지는지를 아는 자는 더더욱 적은 바 잠간 설명을 보충해야 할 것 같다. 인간은 자아나 세상을 위하여가 아니고, 진리와 선인 것을 위하여 이웃에 잘 선처했을 경우로부터 기쁨을 느낄 때 진리는 선에 결합되어진다. 인간이 이 애착 안에 있을 때, 그가 듣고 읽고 생각하는 진리들은 선과 결합되어진다. 눈에 띄게 주목되는 것은 이런 목적을 위하여 진리에 애착함이다. ,

이집트의 토지에 있었던… 이는 자연 평면에서를 의미한다. 이는 “이집트의 토지”의 의미가 자연적 (수준의) 마음이다로부터, 고로 자연 평면임을 알게 된다

그리고 도성들에 양식을 놓았다. 이는 내면들에 저장됨을 의미한다. 즉 선에 인접한 진리들이 내면에 저장됨이다. 이는 여기서 “놓다”의 의미가 저장하다이다로부터; “양식”의 의미가 선에 인접한 진리이다로부터; 그리고 “도성들”의 의미가 자연적 수준의 마음의 내면들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선에 인접한 진리들이 자연적 수준의 마음의 내면에 저장되고, 그 다음 그 이후 생활에서 사용을 위해 보존된다는 것, 특히 거듭나는 동안 시험에서 사용을 위해 보존된다는 것은 오늘날 적은 숫자의 이들만이 알지 모르는 비밀이다. 그러므로 이에 관해 몇 마디 거들고 지나가야 할 것 같다. “산물이 풍부한 칠 년”에 의해 처음 증가한 진리들이 의미된다, 그리고 낟알이 “도성들 안에 놓인다” 그리고 “한가운데에”에 의해 선에 인접한 진리들이 인간의 내면들 안에 저장됨이 의미된다; 그리고 “기근의 칠 년”, 그리고 거두어들임으로부터 기근 때에 생명 유지가 존속됨에 의해서는 내면들에 저장된 선에 인접한 진리들을 통하여 있게 되는 거듭남의 상태가 의미된다.
비밀은 이렇다: 초기 유아 시기로부터 첫 어린 시절까지, 인간은 주님에 의해 천국 안으로 이끌어들여진다, 그리고 실로 천적 수준의 천사들 사이에 있는다, 이를 수단으로 그는 순진의 상태 안에 보존된다; 유아로서 말해지는 시기의 상태는 어린 시절의 처음까지이다. 어린 시절의 나이가 시작될 때, 어린이는 순진의 상태를 점진적으로 벗는데, 비록 어린이가 자기 또래의 아이들을 향한 서로의 선행에 대한 애착을 수단으로 선행의 상태 안에 아직 보존되기는 해도 어쨌든 순진을 벗고 있다. 많은 아이들이 이런 상태를 청년기(youth)에 이르기까지에서 계속한다. 이러는 동안 그는 영적 수준의 천사들 사이에 있다. 그 다음, 그는 자신으로부터 생각하고 생각한 것에 따라 행동하기 때문에 그는 더 이상 이전 같은 선행 안에 있지를 않는다; 그 이유가 이 시기에 그는 유전된 악들을 불러내어 그것들에게 조언을 청하는 바, 이 악들이 자신을 인도하는 것을 허용한다. 이 상태가 도래할 때, 그가 악들을 생각하고 행동으로 생각한 것을 확증하는 정도에 따라 그가 지닌 선행의 선들과 순진은 추방당해진다; 그럼에도 그것들이 추방당해진 것은 아니고 내면들쪽을 향하여 주님에 의해 철수 되어 거기서 저장되어 있다.
그가 아직 진리들을 알지 못하는 바, 그가 이전의 두 시기에서 받아왔었던 순진과 선행의 선들은 아직 당사자로부터 등급 판정을 받지 못하고 있다, 그 이유가 진리가 선에게 품질(실재)을 주기 때문, 선은 진리들에 본체(실체)만을 줄 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청년기로부터 그는 가르침들을 수단으로, 특히 자신의 생각함들과 그것들로부터 확증함들을 수단으로 진리들을 빨아들인다. 이때 그가 선에 애착함 안에 있는 만큼에서, 당사자 안에서 주님에 의해 진리들은 선과 결합되어진다, 그리고 사용을 위해 저장되어진다. 이 상태가 “산물이 풍부한 칠 년”에 의해 의미되고 있다. 선에 인접한 이런 진리들이 적당한 의미에서 리메인스라고 불리운다. 그러므로 인간이 자신이 거듭나지는 것을 허용하는 한, 리메인스는 사용을 위해 봉사한다. 그 이유가 거듭남에 요청되는 그것들로부터의 양식이 주님에 의해 꺼내져서(불러내어져서), 자연 평면에 되보내지는데, 이는 자연 평면의 외면의 것과 내면의 것이 상응하도록, 또는 자연 평면의 것과 영적 평면의 것이 상응하도록 하기 위함이다; 그리고 이것은 “기근의 칠 년”에 의해 의미된 상태 안에서 결과된다. 이와같은 일련의 사항들은 비밀이다.
오늘날 많은 교인들 속에 주입된 신앙 중 하나는, 당사자의 삶이 무엇일지라도 인간은 자비로부터 천국으로 받아져 거기서 영원한 복을 향유한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천국에의 입장을 허가받음이 천국가는 것에 요구되는 전부라고 상상한다는 말이다. 어쨌든 이는 대단한 실수이다. 그 이유가 누구를 막론하고 입장 허가를 받고 천국 안으로 받아들여지는 따위는 없다는 것, 게다가 (그곳은 영적 세계이므로) 영적 생명을 지녀야 들어갈 수 있다는 것, 이 생명은 거듭나지 않으면 받아질 수 없다는 것, 거듭남은 생활의 선이 교리의 진리와 결합함을 통하여 가능해진다는 것이다. 거듭남을 통하여 영적 생명을 받지 않으면 누구도 천국 안으로 올 수 없음을 주님께서 가르치셨다:
참으로, 참으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인간이 새로이 태어나지 않으면, 그는 하느님의 왕국을 볼 수 없다 (요. 3:3)
그리고 이어서:
참으로, 참으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인간이 물로부터와 영으로부터 태어나지 않으면, 그는 하느님의 왕국 안으로 들어갈 수 없다 (요. 3:5);
“물”은 교리로부터의 진리이다, 그리고 “영”은 생활로부터의 선이다. 세례받았다고 천국에 입장되리라는 보장은 없다, 그러나 세례를 받음이 중요한 이유는 교인이 마음에 꼭 간직해야하는 것이 거듭남임을, 이를 표시하는 것이 세례이기 때문이다.

도성의 들판의 양식. 이는 내면들에 안성맞춤인 것들을 의미한다. 즉 내면들 안에 있는 선에 인접한 진리들이다. 이는 “양식”의 의미가 선에 인접한 진리들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내면들에 속하고 거기에 적합한 진리들이 “도성의 들판의 양식”에 의해 의미되는 이유는 이 들판이 도성에 속하고 도성을 빙둘러 있는 듯 말해지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었다는 것은 그것에 적합하고 속해져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즉각 말해진 것, “그것을 빙둘러 있는 것, 그는 거기로부터 도성 한가운데에 놓았다”이다. 빙둘러 만들어진 것들이 적합한 것들인 이유는 선에 인접한 모든 진리들은 시리즈로 배열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시리즈로 배열되면, 각 한가운데, 또는 시리즈의 가장 안쪽에 선에 결합한 진리들이 있다, 그리고 이 진리를 빙둘러 그것에 적합한 것들이 배열되고 있다, 하여 최고로 바깥쪽의 경우는 마치 시리즈가 사라져버린 듯 하여 있다. 시리즈 자체는 서로서로에 관련하여 비슷하게 배열된다, 그러나 상태의 변화에 따라 다양해진다. 선에 결합한 진리들의 이런 배열들이 있다는 것은 다른 삶에서 시각 자체에 쉽게 표출되고 있다; 그 이유가 천국의 빛에서, 그 안에 총명과 지혜가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것들이 비록 세상의 빛에서는 시야에 표출되지 못하지만 거기서는 표출될 수 있다; 내면들이 열리지 않은 사람과 더불은 천국의 빛에서는 아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합리적 통찰로부터 인정될는지 모른다, 그리고 이 방법에서 천국의 빛으로부터 합리적으로 보여진다. 이 배열들은 천국의 천사의 사회들에서 근원되고 있다; 그 이유가 이 사회들이 배열되듯, 선에 결합한 진리들이 거듭나는 자 안에서 배열되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후자는 전자에 상응하기 때문이다.

그는 도성 주변에 있는 것들을 거기로부터 도성 한가운데에 쌓았다. 이는 자연 평면의 외면에 있는 이전의 것들을 자연 평면의 내면에 있는 내면적인 것들 안에 저장했음을 의미한다. 이는 “주변”의 의미가 바깥쪽에 있는 것들, 고로 자연 평면의 외면에 있었던 것들이다로부터; “한가운데”의 의미가 안쪽에 있는 것들, 고로 자연 평면의 내면 안에 있었던 것들이다로부터 알려진다. “거기로부터 한가운데”, 또는 도성의 한가운데가 자연 평면의 내면의 내면적인 것들 안에를 표시하는 이유는 내면적인 것들이 “도성”에 의해 의미되기 때문이다. 자연 평면의 내면 속의 내면적인 것들은 그것 안에서 영적이라 불리우는 것들이다, 그리고 거기 안에 있는 영적인 것들은 천국의 빛으로부터 있는 것들이다, 이 빛으로부터 세상의 빛으로부터 있는 것들, 흔히 자연적이라 불리우는 것들이 계발되어진다; 거기 안에 있는 영적인 것들에 선에 인접된 진리들이 저장되어 있다. 거기 안에 있는 영적인 것들은 둘째 천국에서 있는 천사들의 사회들과 상응하는 것들이다, 이 천국과 더불어 인간은 리메인스를 수단으로 교통한다. 이 천국은 인간이 거듭나질 때 열리어지는 천국이다, 그리고 인간이 거듭나지지 않겠다고 할 때 닫혀지는 천국이다; 그 이유가 리메인스, 또는 내면들에 저장된 선들과 진리들은 이 천국의 사회들과 상응함밖에 더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요셉은 바다의 모래 만큼, 그것을 초과할 정도로 낟알을 쌓아올렸다. 이는 선으로부터의 진리가 증가됨을 의미한다. 이는 여기서 “쌓아올림”의 의미가 불어남, 증가함이다로부터; 그리고 “낟알”의 의미가 의지와 행동에 있는 진리이다로부터, 바다의 모래에 비교하여 이것의 불어남은 이것이 선으로부터 있다를, 여기서는 유입에 의해 영적 평면의 천적 부분의 선으로부터 이다를 의미한다; 그 이유가 내면들에 있는 진리는 선 외에 다른 근원으로부터서는 결단코 불어나지 않는다. 선으로부터가 아닌 진리의 불어남은 진리가 불어남이 아니다, 제아무리 외적 형체가 진리 같을 지라도 그것은 진리가 아니다. 이것은 그것 안에 생명 없는 형상의 종류, 고로 죽은 형상의 종류인 바, 실상 진리에 접근도 못한다; 그 이유가 인간 안에서 진리이기 위한 진리는 선으로 살아 있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즉 주님으로부터 선을 통하여 살아있어야 한다; 이럴 때 불어남이라는 말이 영적 의미에서 적용된다. 진리의 불어남이 선으로부터서만이다는 것은 결혼 같은 것 어떤 것으로부터가 아니면 아무것도 불어나질 수 없다는 사실로부터 알는지 모른다; 진리는 선 외의 어떤 것과도 결혼 안으로 진입할 수 없다; 만일 있다면, 그것은 간통일 뿐이다. 그러므로 결혼으로부터 불어나지는 것은 합법적 상태, 고로 진리이다; 그러나 간통으로 불어나진 것은 불법적 상태, 고로 가짜, 진리가 아니다.

그는 세기를 중단했는데, 그 이유는 그것이 셀 수 없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는 이 진리는 신성으로부터 천적 부분을 그것 안에 가졌음을 의미한다. 이는 진리 안에 있는 신성으로부터의 천적 부분은 한계가 없다는 것, 고로 셀 수 없이 있다는 것으로부터 알려진다. 주님 만이, 여기 요셉에 의해 표현된 주님 만이 그분이 세상에 계셨을 때 이런 진리를 가지셨다; 그리고 여기서 그분의 자연 평면의 신성이 되심도 최고 의미에서 여기서 취급되고 있다.

50-52절. 그리고 요셉에게 두 아들이 태어났는데 기근이 오기 전이었고, 이들은 온의 성직자 보디베라의 딸 아스낫이 그에게 낳아주었다. 51 그리고 요셉은 큰 아들의 이름을 므낫세라 불렀다. 그 이유가 하느님께서 나로 나의 모든 고뇌, 그리고 모든 나의 아버지의 집을 잊게 하셨기 때문이다. 52 그리고 둘째의 이름을 그는 에브라임이라 불렀다. 그 이유가 하느님께서는 내가 괴로워하던 토지에서 나로 열매가 많이 열리게 만드셨기 때문이다.

요셉에게 두 아들이 태어났다. 이는 거기로부터, 즉 영적 평면의 천적 부분이 자연 평면 안으로 유입됨으로부터의 선과 진리를 의미한다. 이는 “태어나지다”의 의미가 재 출생되어지다로부터, 고로 선으로부터 진리의 출생, 또는 선행으로부터 신앙의 출생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말씀에서 이야기하여지는 출생은 영적 출생들이다는 것은 이미 살핀 바 있다; 그리고 “아들들”의 의미, 여기서는 므낫세와 에브라임인데, 선과 진리이다로부터(아래에서 설명한다); “므낫세”는 새로운 자연 평면의 의지력을; “에브라임”은 새로운 자연 평면의 이해력을 의미한다; 그 이유는 선은 의지 측면을, 진리는 이해 측면을 서술하기 때문이다. 두 아들들의 출생에 관해서 우리가 다른 구절로부터 읽을 때, 하나는 선을, 다른 하나는 진리를 의미한다, 예를 들면 에서와 야곱의 경우가 있다; 마찬가지로 다말에 의한 유다의 두 아들, 베레스와 세라; 그리고 여기서는 므낫세와 에브라임이다. 그들의 출생이 지금 취급되는데, 그 이유는 즉각적으로 앞서 있는 것 안에 영적 평면의 천적 부분이 자연 평면 안으로의 유입이 묘사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로부터 자연 평면의 재출생이 묘사되는데, 이것은 선과 진리를 수단으로해서만 결과되었다.

기근이 오기 전에. 이는 자연 평면을 통하여 온 것을 의미한다. 이는 “기근이 오기 전에”의 의미가 선으로부터 진리의 증가함이 지속된 상태 동안이다로부터, 이 상태는 산물의 풍부함의 해들에 의해 의미되어 있다, 그리고 고로 황무해짐의 상태 앞이 기근에 의해 의미된다. 이전의 상태에서 선으로부터의 진리가 자연 평면에서 번성하였는 바, 고로 선과 진리가 영적 평면의 천적 부분에 자연 평면을 통하여 출생되어졌다, 그러므로 이 결과가 “기근이 오기 전에”라는 말에 의해 의미되어 있다.

이들을 온의 성직자 보디베라의 딸 아스낫이 그에게 낳아 주었다. 이는 결혼으로부터 온 것을 의미한다. 이는 앞에서 언급했다.

그리고 요셉은 첫 출생의 이름을 므낫세라 불렀다. 이는 자연 평면에 있는 새로운 의지력, 그리고 그것의 품질을 의미한다. 이는 말씀에서 므낫세가 표현하는 것이 자연 평면에 있는 영적 선, 고로 새로운 의지력이다로부터(아래에서 살핀다) 알게 된다; 또한 이 이름은 이 선의 품질 자체를, 또는 새로운 의지력의 품질 자체를 포함하고 있다. “이름”이 이 품질을 포함하는 것은 다른 이들에게 이름이 주어지는 구절로부터도 알는지 모른다. 여기서는 이름의 품질이 이름의 등장과 거의 동시에 암시해진다, 즉 “그 이유는 하느님이 나로 내 모든 고뇌를, 그리고 내 아버지의 집을 잊게 하셨다”이다. 이 표현 안에 므낫세에 의해 의미된 품질이 묘사되어져 있다. 더 나아가 그가 이름을 불렀다고 말해질 때, 또한 이름 자체가 품질을 포함함이 의미되어져 있다; 그 이유가 “이름”, “이름을 부름”이 품질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므낫세라 이름된 첫 출생이 자연 평면에서 있는 영적 선, 또는 거기 안에 있는 새로운 의지력을 의미하는 이유는 선이 교회에서, 또는 교회가 되어가는 인간 안에서 실제적으로 첫 출생이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진리는 첫 출생이 아니지만 마치 첫 출생 행세를 한다. 이는 인간 안에서 의지가 앞서 있다는 사실로부터도 알는지 모른다; 그 이유가 인간의 뜻함은 그의 생명(삶)의 첫 번째이고, 그의 이해함은 뜻함에 일치하여 의지 뒤를 이어 나오기 때문이다. 의지로부터 진행하는 것이 거듭남을 수단으로 주님으로부터 새로운 의지를 받았던 이들 안에서는 “선”이라 불리운다, 그러나 그것을 받기를 바라지 않았던 이들 안에서는 “악”이라 불리운다; 그리고 이해력으로부터 진행하는 것은 거듭나는 자 안에서는 “진리”라고 불리우나 그렇지 않은 자 안에서는 “거짓”이라 불리운다. 그럼에도 인간의 의지는 이해력을 통하지 않고는 감각에 나타나지 않기에, 상상되는 바, 이해력으로부터 진행하는 진리가 첫 출생이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이것은 외관을 제외하고는 아닌데 그 이유가 이해력은 이성을 위해, 추론을 위해 주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신앙으로부터 있는 진리, 선행으로부터 있는 선 중에서 어느 것이 교회의 첫 출생인지에 관한 논쟁은 오래전부터 있었다. 이를 외관으로부터 결정했던 이들은 말했다, 진리가 첫 출생이다, 그러나 외관으로부터 결정하지 않았던 이들은 선이 첫 출생임을 인정했다. 이로부터 오늘날의 경우, 신앙이 첫째로 만들어지고 교회의 본질 자체(필수 요소)로, 선행은 두 번째로, 본질 자체가 아니었다. 게다가 고대인들보다 더욱 더 오류 안으로 접어들게 만든 것은 신앙 만이 구원한다(faith alone saves) 고 선포한 것이다. 교회에서 “신앙”에 의해 교리로부터의 모든 진리가, “선행”에 의해서는 생활로부터의 모든 선이 뜻해진다. 실로 그들은 선행과 선행의 일들을 “신앙의 열매들”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인간이 자신의 과거의 삶을 어떻게 꾸렸던지 죽음의 마지막 시간을 앞두고 신앙에 의해 구원될 수도 있다고 믿어질 때, (이에 대해 어떤 목사가 누. 23:43을 성경의 근거로서 들이대는 설교 방송을 들은 적이 있는데, 여러분은 어떻게 이 구절을 생각해볼 것인지 잠간 생각해보는 것도 시간 낭비는 아닐 것이다. 역자주.) 그리고 교리적 가르침 안에서 그들이 선행으로부터 있는 일들을 선한 일들 없이 신앙 만으로 구원한다고 말하여 신앙으로부터 떼어 놓기조차 하고, 생활 속에 있는 선행의 일들은 구원을 위해 아무것도 해주지 않는다는 것을 믿으라고 말할 때, 선행의 일들이 신앙의 열매들이라고 말했던 것은 기억조차 하지 말라는 암시를 주는 바, 생각함을 가진 이들이라면 결국 오류에 빠질 수밖에 없지 않을까? 어쨌든 선행을 뺀 신앙은 죽은 신앙이다, 이 교리를 외치는 이들은 생명 있는 신앙을 내치고 있다. 혼이 없는 몸은 시각으로부터 제거되어진다. 냄새가 코를 찌르기 때문이다. 다른 삶에서 선행 없는 신앙은 이와 똑같은 대우를 받는다. 다시 말해 소위 선행 없이 신앙 안에 있어왔던 이들은 지옥 안에 있다, 한편 선행 안에 있어왔던 이들은 천국 안에 있다; 그 이유가 모두 각각의 생명은 남아 있으나, 교리의 경우, 생명으로부터 파생된 교리외의 교리는 남아 있지 않는다.
“므낫세”에 의해 자연 평면에서의 새로운 의지력, 또는 자연 평면에 있는 영적인 선이 의미된다는 것이 “에브라임”에 의해서 자연 평면의 새로운 이해력, 또는 영적인 진리가 의미된다는 것이 말씀의 다른 구절로부터 설명을 보태기가 쉬운데 비해 므낫세에 관한 언급은 다른 성경 구절에서의 언급이 많지 않아 쉽지는 않다. (에서와 야곱의 경우도 비슷하다 역자주.) 그러나 “므낫세”의 의미는 “에브라임”에 언급되는 구절로부터 추리해 볼 수는 있다. 말씀에서 둘이 언급될 경우, 하나는 선 측면을, 다른 하나는 진리 측면을 의미하는 때가 대부분이기 때문, 하여 여기서의 경우, “므낫세”에 의해 자연 평면의 영적인 선, 이는 새로운 의지력으로부터 있는 선이 의미되는데, 뒤이어지는 “에브라임”에서 더 보여질 것이다.

그 이유가 하느님께서는 나로 내 고뇌…를 잊게 하셨기 때문이다. 이는 시험 후에 제거됨을 의미한다. 이는 “잊다”의 의미가 제거됨이다로부터; 그리고 “고뇌(toil)”의 의미가 전투들, 고로 시험들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로부터 “하느님께서 나로 나의 모든 고뇌를 잊게 만드셨다”에 의해 시험 후에 제거됨, 즉 고통을 야기한 악들이 제거됨이 의미됨도 알려진다. 이것이 의미되는 것은 지금까지 요셉에 관련된 사건들, 즉 그가 가나안의 토지에서 그의 형제들과 있었고, 후에 이집트에서 관련된 것, 즉 가나안의 토지에서는 구덩이에 내던져지고, 팔려져 갔고, 이집트의 토지에서는 그가 섬김 일을 했고, 수 년을 감옥 생활을 했던 것 등으로부터 미루어 그의 고뇌가 알려진다. 시험들이 이런 사건들에 의해 의미된 것은 누누이 설명했는 바, 이것들이 그의 “고뇌”에 의해 뜻해지는 것은 설명 없이 명백해질 것이다.

그리고 모든 내 아버지의 집을… 이는 유전적인 악들의 제거를 의미한다. 이는 “아버지의 집”에 의해 여기서는 유전적 악들이 의미된다; 그 이유가 “집(house)”이 내적 의미에서 인간이 의미되기 때문, 실로 수준이 합리적이든 자연적이든 일괄하여 인간의 마음(mind), 그러나 특별하게는 마음에 있는 의지, 결과적으로 선, 또는 악인데, 그 이유는 이것들이 의지를 서술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아버지의 집”에 의해 여기서는 유전적 악들이 의미된다. “므낫세”에 의해 의미된 품질은 이 말들과 이 말에 앞서 있던 말들 안에 포함되어 있다. 원어에서 “므낫세”는 “잘 잊음(forgetfulness)”를 뜻한다, 고로 내적 의미에서는 악들을 제거함, 실제적인 악들과 유전적 악들 모두를 제거함이다; 그 이유가 이것들 모두가 제거될 때(말끔히 쓸어낼 때), 새로운 의지력이 존재 안으로 오기 때문이다(당사자도 감지할 수 있다 역자주.) 이는 지독한 불행이나 신체적 고행에서 자신 안에 있는 모든 악들을 오게하는 자아 사랑과 세상 사랑이 제거될 때, 제거된 정도에서 그는 하느님과 이웃에 관하여 잘 생각하고 이웃이 잘되는 것에 박수치는 여유로움을 가질 수 있게 되는 경우 같은 것을 통해서도 분명해진다. 영적 고통인 시험들의 경우도 등급만 다를 뿐 (외형상으로는) 비슷하다. 이로부터 내향의 비참함과 자포자기함이 있다; 그것들이 제거되어진 이후 천국의 선이 주님으로부터 흘러들고, 이로 말미암아 새로운 의지력이 자연 평면 안에 만들어지는데, 이것이 표현 의미에서의 “므낫세”이다.

그리고 둘째의 이름을 그는 에브라임이라 불렀다. 이는 자연 평면에 있는 새로운 이해력, 그리고 그것의 품질을 의미한다. 이는 “이름”, “이름을 부름”의 의미가 품질(quality)이다로부터; 그리고 에브라임의 표현함이 자연 평면에 있는 새로운 이해력이다로부터 (이는 아래에서 살핀다) 알게 된다. 우선 말해야 할 것은 “에브라임과 므낫세”에 의해 의미되는 새로운 이해력과 의지력이 뜻하는 것이 무엇인지이다. 교회에 실로 잘 알려진 것은, 하느님의 왕국에 들어가기 위하여 인간은 반드시 새로이 출생되어야 한다는 것, 즉 거듭나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주님이 이를 선포하셨기 때문이다 (요. 3:3, 5). 그러나 다시 태어나지는 것이 무엇인지는 매우 적은 자에게 알려져 잇다, 그 이유가 선과 악이 무엇인지를 아는 자가 적기 때문이다, 이는 이웃을 향한 선행이 무엇인지를 그들이 모르기 때문이다; 만일 이것을 알았다면, 그들은 선이 무엇인지도, 선으로부터 악이 무엇인지도 알았을 것이다; 그 이유가 선인 모든 것은 이웃을 향한 진짜 선행으로부터 오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신으로부터 이 선 안에 있을 수 있는 자도 아무도 없다, 그 이유는 이것은 주님으로부터 흐르는 천적 (평면) 자체이기 때문이다. 사실상 이 천적인 것은 계속적으로 흘러들고 있다, 그러나 악들과 거짓들이 이 천적 평면 자체를 받는 길목에 서있다. 그러므로 이를 받기 위하여서는 인간 당사자가 이 악들을 치워버려야, 그리고 거짓 또한 걷어내야 할 필요가 있다, 이 제거함이 유입됨을 허용한다. 악들이 제거되어진 후, 유입됨을 받는 동시에 그는 새로운 의지력과 새로운 이해력도 받는다; 그리고 새로운 것으로부터 그는 이기심 없이 이웃에게 선을 행함에서 진짜 즐거움을 느낀다, 그리고 새 이해력으로부터 그는 선하고 참된 것을 그것 자체를 위하여, 그리고 생활을 위하여 배워감에서 즐거움을 지각한다. 이 새로운 이해력과 의지력이 주님을 통하여 존재 안으로 와지는 정도에서 거듭나지는 그는 자신에게 감명을 준 선과 진리가 자신으로부터가 아닌 주님으로부터 임을 인정하고 믿고, 동시에 자신으로부터 있는 것, 또는 자기 자신 속에 있는 것은 무엇이든 악밖에 더 아니다는 것도 인정한다.
이런 사항으로부터 다시 태어나짐, 그리고 새 이해력과 의지가 무엇인지가 분명하여졌을 것이다. 그러나 거듭남을 통하여 오는 새로운 이해력과 의지력은 한 순간에 완전 성취되지 않는다, 이것은 초기 유아로부터 삶의 마감까지 진행형이다. 그리고 그 후에 다른 삶에서도 진행형이어서 영원까지이다. 그리고 이것은 신성한 수단들로 인 바, 셀 수 없고 말로 다 말할 수 없는 정도이다; 그 이유가 인간은 자신으로서는 악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것이 용광로 같아서 계속적으로 내뿜어지고, 미성숙한 선을 소멸하려 애를 쓴다. 이런 악을 제거하고 그 자리에 선을 뿌리내리게 하는 것은 짧은 인생의 모든 과정에서 마무리됨이라 말해질 결과는 가능할 수 없고, 게다가 셀 수 없고 말로 다 말할 수 없는 신성한 수단이 동원되어야 그나마 마무리의 기미가 엿보인다. 이 수단들에 관하여 오늘날 아는 자는 거의 없다, 그 이유는 인간이 자신을 거듭나지게 허용하지 않기 때문, 또한 거듭남이 어떤 것이라는 것도 믿지 않기 때문, 더 나아가 사후 삶을 믿지도 않기 때문이다. 말로 다 말해지지 못하는 거듭남의 과정은 천사들에게 가장 흥미를 주는 지혜에 속한다. 거듭남에 관한 지혜는 어느 천사의 의해서도 다 써버려 고갈되는 일이 없다. 이로부터 말씀이 내적 의미에서 취급하는 중심 주제, 제 1 의 주제 역시 거듭남이다.
“에브라임”이 자연 평면에 있는 새로운 이해력이다는 것은 말씀의 많은 구절들로부터 분명해지는데, 특히 호세아서는 “에브라임”을 많이 취급하고 있다. 이 책에서:
나는 에브라임을 안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나로부터 숨겨 있지 않다. 너는 매춘을 통째로 범해왔었 다, 오 에브라임아, 이스라엘이 더럽혀진다. 이스라엘과 에브라임은 그들의 불법으로 해서 파멸로 갈 것이다; 유다 역시 그들과 더불어 파멸로 갈 것이다. 에브라임은 책망의 날에 외톨이 신세일 것이다. 그리고 나는 에브라임에게 (좀먹음의) 나방(moth)으로 있을 것이다, 그리고 유다 집에게 는 귀찮은 벌레로 있을 것이다. 그리고 에브라임은 그의 병듦을 보았다, 그리고 유다는 자기 상처를 보았다, 그리고 에브라임은 앗시리아로 갔다, 그리고 야렙 왕에게 보냈다; 그리고 이것이 너희를 치료할 수 없었다 (호. 5:3, 5, 9, 12, 13).
같은 예언서에서:
내가 이스라엘을 치료했을 그때, 에브라임의 불법과 사마리아의 악들이 드러났다; 그 이유가 그들은 거짓말을 일삼고; 도둑으로 오고; 밖에서는 떼몰려 (노략질을) 펼친다. 그리고 에브라임은 가슴 없는 어리석은 비둘기 같이 있었다. 그들은 이집트를 불렀다, 그들은 앗시리아로 갔다. 그들이 갔을 때, 나는 그들 위에 내 그물을 펼칠 것이다 (호. 7:1, 11, 12).
다시:
이스라엘은 삼키움을 당했다; 이제 그들은 바램 없는 그릇으로 민족들 사이에 있다; 그들이 앗시리 아로 갔을 때, 고독한 들나귀이다; 에브라임이 음행의 삯을 가지고 자기에게 사랑들을 쟁취한다
(호. 8:8, 9);
이스라엘은 여호와의 토지에서 거주 못할 것이다, 그리고 에브라임은 이집트로 귀환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앗시리아에서 불결한 것을 먹을 것이다 (호. 9:3);
에브라임은 거짓말로, 이스라엘의 가문은 사기로 나를 에워쌌다; 그리고 아직 유다는 하느님과 더불어 통치한다, 그리고 거룩한 자들에게 신실하다; 에브라임은 바람에서 먹는다, 그리고 동풍을 따라 간다; 날마다 그는 거짓말과 쓸모없는 것을 불리고 있다, 그리고 그들은 앗시리아와 계약을 만든다, 그리고 기름이 아래쪽 이집트로 운반되어졌다 (호. 11:12; 12:1);
위 구절들 외에도 같은 호세아서에는 에브라임에 관한 구절들이 더 있다 (4:17-19; 5:3, 5, 9, 11-14; 7:8, 9; 9:8, 11, 13, 16; 10:6, 11; 11:3, 8, 9; 12:8, 14; 13:1, 12; 14:8).
위 구절들에서, “에브라임”에 의해 교회의 지적 측면이, “이스라엘”에 의해서는 교회의 영적 평면이, “유다”에 의해서는 교회의 천적 평면이 뜻해진다; 그리고 “에브라임”에 의해 지적 측면이 의미되기 때문에, 그가 “이집트로 간다”, 또는 “앗시리아로 간다”고 자주 말해지는데, 그 이유는 “이집트”에 의해 기억 속의 지식이, “앗시리아”에 의해 이 지식으로 추론함이 의미되어 이런 모두가 이해력을 서술하기 때문이다.
아래 구절에서도 마찬가지인데, “에브라임”에 의해 교회의 이해력 측면이 의미된다:
크게 기뻐하라, 오 시온의 딸아; 소리를 내라, 오 예루살렘의 딸아; 보라 너희 왕이 네게로 오신다. 나는 에브라임으로부터 병거를, 예루살렘으로부터 말을 멸절하고, 나는 전쟁터의 활을 끊어지게 할 것이다; 그분은 민족들을 향하여 평화를 이야기 하실 것이다; 그리고 그분의 통치권은 바다로부 터 바다에까지, 강으로부터 땅의 끝들에까지 일 것이다. 나는 나를 위하여 유다를 구부릴 것이다, 나는 에브라임을 활을 가지고 채울 것이다, 그리고 오 시온아 나는 너희 아들들을, 오 야완아 너희 아들들을 휘저을 것이다 (슥. 9:9, 10, 13);
위는 주님의 오심에 관해서, 그리고 이방인들의 교회에 관해서이다. “에브라임으로부터 병거를, 예루살렘으로부터 말을 멸절함”은 교회의 모든 이해력을 멸절함을 표시한다; “에브라임을 활로 채움”은 새 이해력을 주는 것을 표시한다. “병거”가 교리로부터 있는 것을 의미함은 이미 살핀 바 있다, 말은 이해력으로부터 있는 것을; 그리고 “활” 또한 교리로부터 있는 것을 표시한다; 그 이유가 교리로부터 있는 것은 이해력으로부터 있는 것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이해되는 대로 믿어지기 때문, 교리를 이해함이 신앙의 품질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에브라임의 아들들은 “활로 쏘는 자”라 불리워진다. 다윗서에서:
무장하고 활을 가지고 쏘는 자였던 에브라임의 아들들이 전투의 날에 뒤돌아 가버렸다 (시. 78:9).
에스겔서에서:
사람의 아들아, 너는 막대기 하나를 가져와서, 그것 위에 유다, 그리고 그의 동료 이스라엘의 아들들을 위하여 라고 쓰거라; 그다음 또다른 막대기를 가져와서, 그것 위에, 요셉, 에브라임의 막대기, 그리고 그의 동료 이스라엘의 모든 가문을 위하여 라고 쓰거라; 그 후에 그것들을 너를 위하여 서로서로를 하나의 막대기로 결합하라, 하여 둘은 내 손에서 하나가 될 것이다. 보라 에브라임과 그의 동료들 이스라엘의 지파들의 손에 있는 요셉의 막대기를 가져갈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것들을 하나의 막대기로 만들 것이다, 하여 그것들은 내 손에서 하나일는지 모른다
(겔. 37:16, 17, 19);
위에서도 “유다”에 의해 교회의 천적 평면이 뜻해진다, “이스라엘”에 의해서는 영적 평면이, “에브라임”에 의해서는 지적 측면이 뜻해진다. 선행의 선을 통하여 이것들이 하나를 만든다는 것이 둘로부터 하나를 만듦에 의해 의미된다.
예레미야서에서:
경비병이 에브리임의 산으로부터, 일어나라 너희들아, 우리의 하느님 여호와께로 시온으로 올라가 자 라고 소리칠 날이 있을 것이다. 나는 이스라엘에게 아버지일 것이다, 그리고 에브라임은 나의 첫 출생일 것이다 (예. 31:6, 9).
같은 책에서:
나는 그의 주택으로 이스라엘을 도로 데려올 것이다, 하여 그는 갈멜과 바산에서 먹을지 모른다, 그리고 그의 혼은 에브라임의 산과 길르앗에서 배불려질 것이다 (예. 50:19).
이사야서에서:
교만의 왕관에, 에브라임의 술꾼에, 그리고 시드는 꽃에와 그의 장식품의 영화에 화있을 것이다, 이것은 포도주로 괴로워하는 살찐 자들의 계곡의 머리 위에 있다 (이. 28:1).
이 구절들에서 역시 “에브라임”에 의해 교회의 이해력이 의미된다. 교회의 이해력은 (주님의) 교회인이 선들과 진리들에 관해 가지는 이해력, 즉 신앙과 선행의 교리적인 것들에 관해서 가지는 이해력이다; 고로 그것들에 관한 그들의 관념, 개념, 또는 생각(idea)이다. 진리 자체는 교회의 영적 평면이고, 선은 천적 평면이다; 그렇지만 진리와 선은 누가 이해하느냐에 따라 다르게 이해되어진다; 진리를 이해함이 이러이러하면 모든 이 각각에게 있는 진리 또한 이러이러하다. 선을 이해하는 것도 이와 비등하다.
교회의 의지가 “므낫세”에 의해 의미되는 것을 “에브라임”인 교회의 이해함으로부터 미루어 알아질는지 모른다. 이사야서에서:
여호와 체바욷의 분노하심에서 토지는 어두워지고, 백성은 불을 위한 양식(쏘시개)같이 되어진다; 자기 형제를 아껴줄 자 아무도 없다; 그들은 모두 각각이 자기 팔의 고기를 먹을 것이다: 므낫세, 에브라임; 그리고 에브라임, 므낫세: 그들 모두가 유다에 맞서 있다 (이. 9:19-21);
위 구절에서 “모든 이 각각은 자기 자신의 팔의 고기를 먹을 것이다, 므낫세, 에브라임, 그리고 에브라임, 므낫세”는 교회인의 의지가 자기 이해함에, 그리고 그의 이해함이 그의 의지에 맞설 것임을 표시한다.
다윗서에서:
하느님은 그분의 거룩함을 수단으로 이야기를 하시었다: 나는 크게 기뻐할 것이다, 나는 세겜을 나눌 것이다, 그리고 숙곳의 계곡을 측량했다. 길르앗은 나의 것이다, 그리고 므낫세는 나의 것이다; 그리고 에브라임은 내 머리의 힘셈이다 (시. 60:6, 7);
다시:
귀를 주소서, 오 이스라엘의 목자여, 요셉을 양떼 같이 인도한 당신이시여; 거룹들 위에 앉으신 당신은 빛을 발하십니다. 에브라임과 베냐민과 므낫세 앞에서 당신의 권능을 휘저으소서
(시. 80:1, 2);
위에서도 “에브라임”은 교회의 이해력을, “므낫세”는 의지력을 표시한다. 이것은 야곱이 죽기 전 에브라임과 므낫세에게 내린 축복에서도(창. 48장) 분명해진다; 또한 야곱이 르우벤 대신 에브라임을, 시므온 대신 므낫세를 (창. 48:3-7) 받는 대목에서도 분명해진다. 즉 르우벤에 의해서는 교회의 이해력, 또는 이해력과 교리에 있는 신앙이 표현되었고, 시므온에 의해서는 행동에 있는 신앙, 또는 순종함과 진리를 행하려 뜻함, 이로부터와 이를 수단으로 선행이 있는 바, 고로 행동에 있는 진리, 이것은 새 의지력으로부터의 선이 표현되었기 때문이다.
야곱, 그때 당시는 이스라엘이 자기 손을 엇갈리게 해서 자기의 오른손을 에브라임 위에, 왼손을 므낫세에 올림으로 므낫세에 앞서 에브라임을 축복한 이유(창. 48:13-20)도 과거 야곱이 에서의 생득권을 자신에게로 돌린 것, 다말에 의한 유다의 두 아들의 경우, 세라가 첫 츨생 임에도 정작 출산은 동생인 베레스의 뒤를 이어 세상 밖에 나온 것 (창. 38:28-30)도 같은 의미를 담아내고 있다. 이런 이유인즉, 이해력으로부터 있는 신앙의 진리가 인간이 거듭나는 동안 첫째 자리에서 외관적으로 있기 때문, 그다음 의지력으로부터인 선행의 선은 외관상 둘째 자리에 있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어쨌든 선이 실제적으로는 첫째 자리에 있다는 것, 이것은 인간이 거듭나져 갔었을 때 당사자에게도 명명백백해진다는 것이다.

그 이유가 하느님께서는 나로 열매가 많이 열리게 만드셨기 때문이다. 이는 그 결과 선으로부터의 진리가 번창함을 의미한다. 이는 “열매가 많이 열리게 만듦”의 의미가 번창함, 즉 선으로부터의 진리가 번창함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 이유가 “열매가 많이 열리다”는 선 측면을, “번창하다”는 진리 측면을 서술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원어에서 “에브라임”은 열매가 많이 열림으로부터 명명되어졌다, 그리고 그것의 품질은 이 말들 안에, 즉 “그 이유가 하느님께서 나로 내 고뇌의 토지에서 열매가 많이 열리게 만드셨다” 안에 포함되어 있다. 이 품질은 시험들이 자연 평면에서 경험된 후 거기에서 선으로부터의 진리가 번창되는 것이다. 선으로부터의 진리가 번창함이 무엇인지 간단히 아래에서 말해보겠다. 인간이 선 안에 있을 때, 즉 그가 이웃을 향한 사랑 안에 있을 때, 그는 진리를 사랑함 안에도 있는다; 결과적으로 그가 이 선 안에 있는 한, 그 만큼에서 그는 진리에 의해 감동된다, 그 이유는 혼이 몸 안에 있듯, 선도 진리 안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선이 진리를 불리듯, 선은 진리 안에서 자체를 번창되게 한다; 그리고 만일 진짜 선행의 선이 있다면, 그것은 진리 안에서 자체를 번창되게 하는데, 게다가 진리를 수단으로 무한하게 번창한다; 그 이유가 선에, 진리에는 한계가 없기 때문이다. 사실상 무한은 일반적 측면, 그리고 세부적 측면의 모든 것 안에 있다, 그 이유는 모든 것은 무한한 것들부터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불명확함은 어떤 방법으로든지 무한에 결코 도달될 수 없다, 그 이유는 유한과 무한 사이에 어떤 비율(ratio) 같은 것이 없기 때문이다. 오늘날 교회에서 진리의 어떤 번창함도 드물다, 그 이유는 오늘날 진짜 선행의 선이 없기 때문이다. 교회 속의 신앙의 독단적 주장(dogma, 교의)을 아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믿어지고, 이런 환경에서 인간은 태어나지고, 다양한 수단들까지 동원되어 그것들을 확증하느라 분주하다. 그러나 진짜 선행의 선 안에 있는 이들, 그러므로 진리를 애착함 안에 있는 이들은 이런 독단적 주장에 찬성하지 않는다, 그러나 진리가 무엇인지에 관하여 말씀으로부터 계발되기를 바라고 있다, 그리고 그가 그것을 확증하기 전에 보기를 바란다. 더 나아가 그는 그것을 선으로부터 본다, 그 이유는 진리를 지각함은 선으로부터 있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주님이 선 안에 계시면서, 지각을 주시기 때문이다. 인간이 이런 방법에서 진리를 받을 경우, 그 진리는 언제까지나 증가한다. 이는 작은 씨(겨자 씨)의 비유에서와 같아서, 이 씨는 나무로 자라고, 또 다른 씨들을 생산하고, 그리하여 동산을 창설하고, 등등이다.

내가 괴로워하던 토지에서. 이는 시험들이 고통을 주었던 곳을 의미한다. 이는 “토지”의 의미가 여기서는 이집트의 토지인 바, 자연 평면이다로부터; 그리고 “고뇌”의 의미가 시험이다로부터 알려진다. 이로부터 분명한 바, “내 고뇌의 토지에서”에 의해 시험들이 경험되어진 자연 평면에서가 의미된다는 것, 결과적으로 선으로부터의 진리가 거기 안에서 번창되었다 이다. 열매를 많이 열리게 됨, 또는 선으로부터의 진리가 번창함은 시험들이 제 1 의 수단이 되어 있는 바, 본문과 같이 표현된 것이다. 열매를 많이 열리게 함이 시험을 제 1 의 수단으로 하는 이유는 이렇다: 시험들은 자기를 사랑함들과 세상을 사랑함들을, 고로 악들을 제거한다; 이런 제거됨에서 진리와 선에 애착함이 주님으로부터 흘러들기 때문이다. 또한 시험들은 선과 진리를 지각함에 품질을 주는데, 이때 악령들이 시험에서 주입하는 선과 진리에 반대적인 것들을 수단으로 해서 이다. 반대되는 것을 지각함에서 우리는 상대적 존재(relatives, 관계물)를 얻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모든 품질이 오고 있다; 그 이유가 선이 아닌 것을 앎도 없이 선인 것을 알 자는 아무도 없기 때문, 또는 진리 아닌 것을 앎도 없이 진리인 것을 알 자 역시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또한 시험은 선들과 진리들을 확증한다, 그 이유가 이때에야 인간은 악들과 거짓들과 싸우기 때문이다, 게다가 시험을 극복함으로 더 한층 강력한 확증이 덤으로 얻어진다. 더욱이 시험들을 수단으로 악들과 거짓들은 복종당해진다; 따라서 그것들은 다시 일어나 감히 달려들지 못한다. 이런 길에서 거짓들과 더불은 악들은 한쪽으로 거절되어진다, 그리고 거기에 매달려 있다, 그러나 아래쪽을 향하여 수그러져 있다; 한편 진리들과 더불은 선들은 한가운데에 있고, 애착의 열정의 정도에 따라 위쪽을 향하여 들리어진다, 고로 주님을 향하여 천국쪽으로, 주님을 수단으로 그들은 들리어진다.

53-57절. 그리고 이집트의 토지에 있었던 풍년의 칠 년이 끝났다. 54 그리고 기근의 칠 년이 오기 시작했다, 요셉이 말한 그대로였다. 그리고 모든 토지에 기근이 있었다. 그리고 이집트의 모든 토지 안에는 빵이 있었다. 55 그리고 이집트의 모든 토지도 기근에 시달렸다. 그리고 백성들은 빵 때문에 바로에게 애원했다. 그리고 바로는 모든 이집트 사람에게 말했다, 요셉에게 가라. 그가 너희에게 말하는 것을 행하라. 56 그리고 기근이 이집트의 모든 얼굴을 덮었다, 그리고 요셉은 모든 창고를 열었다, 그리고 이집트에게 팔았다. 그리고 기근은 이집트의 토지에서 더욱 심해졌다. 57 그리고 모든 땅이 (양식을) 사기 위하여 이집트로, 요셉에게 왔다. 그 이유는 기근이 모든 땅에서 심각해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풍년의 칠 년이 끝났다. 이는 진리가 증가하는 상태 그 후를 의미한다. 이는 앞에서 살핀 것들만으로도 알려질 수 있다.

이집트의 토지에 있었던…이는 자연 평면 안에서를 의미한다. 이는 이집트의 토지의 의미가 자연 평면이다로부터 알려진다.

그리고 기근의 칠 년이 오기 시작했다. 이는 그 다음에 있는 황무한 상태를 의미한다. 이는 “햇수들”의 의미가 상태들이다로부터; 그리고 “기근”의 의미가 진리와 선에 관한 지식의 부족이다로부터, 결과적으로 황무함(desolation)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기근이 이와 같은 부족함, 또는 황무함을 표시하는 이유는 천적이고 영적인 양식(식품, food)에는 선과 진리밖에 더 없기 때문이다. 이것들이 천사들이나 영들의 자양분이다. 그들에게도 배고프다와 목마르다가 있다. 선이 부족할 경우 배고프다로, 진리가 부족할 경우 목마르다이다. 그러므로 물질적 식음료는 이 둘에 상응한다, 마치 빵은 천적인 사랑에, 포도주는 영적인 사랑, 뿐만 아니라 빵 또는 식품, 그리고 포도주 또는 음료에 속하는 모든 것이 상응한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것들이 부족할 때, “기근”이 발생한다, 그리고 말씀에서 이것이 “황무함(desolation)”그리고 “황폐함(vastation)”이라 불리운다. “황무함”은 진리가 실패할 때(결핍할 때), 그리고 “황폐함”은 선이 실패할 때 (결핍할 때)이다. 이 황무함과 황폐함은 말씀의 많은 구절들에서 취급되어 이렇게 서술된다; 즉 땅, “왕국들”의, “도성들”의, “민족들”의, “나라들”의, “백성들”의 황무함, 그리고 이런 용어로도, 즉 “쏟아냄”, “멸절됨”, “극에 달함”, “사막”, “공허”; 그리고 상태 자체가 서술되는데, 즉 “여호와의 날,” “그분의 분노의 날”, “앙갚음”, “어둠의 날”, 그리고 “짙은 어둠”, “구름”의, “희미함”의, “방문의 날”, 또한 “땅이 멸해질 것이다는 때의 날”, 고로 “마지막 날”과 “심판의 날” 등등이다. 인간들이 말씀의 내적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들은 이런 식으로, 즉 땅이 멸해질 때의 날이 있을 것, 그런 다음 부활과 심판이 있으리라 상상할 뿐, 이런 단어들의 “날”이 상태를 의미한다는 것, “땅”은 교회를, 고로 “땅이 멸해질 때의 날”은 교회가 그것의 마지막에 당도할 때의 상태를 의미한다는 것을 알아채지를 못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 멸해짐이 말씀에서 묘사될 때, “새 땅” 역시 묘사되고, 이것에 의해 새로운 교회가 뜻해진다. 새로운 교회에 앞서 있는 교회의 상태가 “황폐됨”과 “황무함”에 의해 적절히 뜻해지고 묘사된다. 같은 단어에 의해 인간의 거듭남에 앞서 있는 상태 또한 묘사된다, 이 상태가 기근의 칠 년에 의해 여기서 의미된다.

요셉이 말했던 그대로 이였다. 이는 영적 평면 속의 천적 부분이 예견했던 바와 같이를 의미한다. 이는 “말하다”가 말씀의 역사 부분에서 지각하다를 의미함으로부터 알게 된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요셉인 주님의 경우 인 바, 이는 그분 자신으로부터 지각하시는 것, 고로 예견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요셉의 표현함은 영적 평면의 천적 부분이다.

그리고 온 토지에 기근이 있었다. 이는 자연 평면의 모든 곳에 황무함이 있음을 의미한다. 이는 “기근”의 의미가 황무함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리고 “모든 토지들”의 의미가 자연 평면의 모든 곳이다.

그리고 이집트의 모든 토지에는 빵이 있었다. 이는 선으로부터의 진리가 증가해왔었던 결과로 있는 리메인스(remains, 남아 있는 것)를 의미한다. 이는 “이집트의 모든 토지에 있는 빵”에 의해 낟알이 풍년의 칠년 동안 모아졌다는 것이, 그리고 도성들에 쌓여 있다는 것이 뜻하여지고, 이를 수단으로 자연적 수준의 마음의 내면들에 저장된 리메인스가 의미된다. 이 대목은 자주 설명해왔었다. 그러므로 리메인스가 “이집트의 모든 토지에 있는 빵”에 의해 의미되는 것이 기근의 해들이 이미 시작되었다는 것, 이 기근은 이집트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는 것, 단지 차이는 다른 토지와 달리 이집트의 토지들은 각 도성에 비축한 것이 있다는 것만이 다르다는 것, 등등의 사실로부터 분명해진다. 그러므로 지금 이어진 말은, “그리고 이집트의 모든 토지는 기근에 시달렸다” 이다.

그리고 이집트의 모든 토지는 기근에 시달렸다. 이는 자연 평면 양쪽 측면에 황폐함이 있음을 의미한다. 이는 “기근”의 의미가 황무함이다로부터; 그리고 “모든 토지”의 의미가 양쪽의 자연 평면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리고 백성들은 바로에게 빵 때문에 소리쳤다. 이는 진리를 위해 선이 필요함을 의미한다. 이는 “소리치다”의 의미가 슬픔과 비통함에 있는 인물의 행동, 고로 뭔가가 필요함에 있다는 것을 의미함으로부터; 그리고 “백성”의 의미가 진리이다로부터; 바로의 표현함이 자연 평면이다로부터; 그리고 “빵”의 의미가 사랑의 천적 수준, 고로 선이다로부터 알려진다. 이로부터 “백성들이 빵 때문에 바로에게 소리쳤다(애원했다)”에 의해 자연 평면에서 진리를 위해 선의 필요가 의미됨을 알게 된다. 이 의미는 역사적 사실로부터서는 너무나 거리가 있는 듯 여겨질지 모른다.
따라서 진리를 위해 선이 필요한 경우가 어떤 경우인지 조금 더 살펴보자. 진리는 선을 필요로 하고 있다, 그리고 선은 진리를 필요로 한다; 그리고 진리가 선을 필요로 할 때, 진리는 선과 결합한다, 그리고 선이 진리를 필요로 할 때, 선은 진리와 결합한다; 그 이유가 선과 진리에는 상호적인 결합이 있기 때문이다; 즉 진리가 선과, 선이 진리와의 결합이다, 이 결합이 천국의 결혼이다. 인간의 거듭남의 초기 단계들에서, 진리가 번창한다, 그러나 선은 아니다; 그리고 진리가 결합되어져야 하는 선을 가지지 못할 때, 진리는 자연적 수준의 마음의 내면들 쪽으로 당겨져 저장된다. 그리하여 선이 증가됨에 따라 거기로부터 불러내진다. 이런 상태에서 진리는 선을 필요로 하고 있다, 더욱이 진리가 선과 결합함은 선이 자연 평면 안으로 흘러듦에 따라 거행된다. 그러나 이 결합에 의해 결과되는 것은 열매가 많이 열림은 없음이다. 그러나 인간이 거듭나져갔을 때, 선은 증가한다; 그리고 선이 증가한 바, 선은 진리를 필요로 한다, 하여 결합이 가능할지 모를 진리를 자체를 위해 포획한다, 하여, 선이 진리와 결합함이 있다. 이것이 거행될 때, 진리는 선으로부터 열매 풍성함을 만들어 낸다, 그리고 선은 진리로부터 열매 풍성해짐을 만든다.
이런 경우가 세상에 통째로 알려져 있지 않다는 것, 허지만 천국에는 너무나 잘 알려진 사항이다; 어쨋든 세상에 알려져야 하는 것은, 알려지는 수단이 지식에 의해서 이든 지각에 의해서이든, 천적 수준의 사랑, 즉 주님을 사랑함이 무엇인지, 영적 수준의 사랑, 즉 이웃을 향한 선행이 무엇인지이다. 이것을 알게 되면 선이 무엇인지도 알게 된다. 그 이유가 선은 위 두 사랑들로부터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 선은 진리를, 진리는 선을 바란다는 것도, 그것들은 바램과 바램의 품질에 따라 결합되어진다는 것도 알아질 것이다. 이것은 이런 사실로부터도 분명해지는데, 즉 진리가 선을 생각하면, 선이 그것에 결합하는데 동시에 이루어진다는 것, 그리고 선이 휘저을 때, 진리가 그것에 결합하는데, 마치 이미 결합이 있었기라도 하듯 빠르게 함께 있다는 사실로부터이다. 양쪽 결합 모두 애착, 바램, 기쁨, 거룩한 열망 안에 있다. 그리고 이로부터 결합의 품질이 알려질는지 모른다. 그러나 선이 무엇인지가 내향의 감각, 또는 지각으로부터는 알려져 있지 않은데, 이것은 지식에 와질 수 없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알려져 있지 않은 것은 설사 시각에 당도해도 이해될 수 없기 때문이다.
영적 선이 무엇인지가 알려져 있지 않기에, 이것이 이웃을 향한 선행이다는 것이 알려져 있지 않기에, 이것은 세상에서 논쟁의 주제이고, 특히 학식계에서는 가장 높은 선인 것에 대해서 논쟁했다. 그럼에도 이기적인 목적, 또는 세상적인 목적이 전혀 없는 서로의 사랑으로부터 지각되는 것에 기쁨, 만족함, 복됨, 행복이 있다는 것, 이것이 천국 자체를 만든다는 것을 거의 누구도 계속 옹호하지 않는다. 이로부터 분명해지는 것, 오늘날 세상에서 영적 선이 무엇인지가 전혀 알려지지 않고 있다는 것, 더욱이 선과 진리가 함께 결혼을 만들어 낸다는 것, 그리고 천국이 이 결혼 안에 있다는 것, 그리고 이것 안에 있는 이들이 지혜와 총명 안에 있고, 한계 없고 표현할 수 없는 다양함과 더불은 만족함과 행복을 가진다는 것이 알려져 있지 않다. 위 사항의 하나조차 세상에 알려져 있지 않고, 그것의 존재 조차 인식되고 믿어지지 않고 있다; 이것이 천국 자체이다, 또는 천국의 기쁨 자체인 바, 이에 대한 것이 교회 안에서의 대화의 중심이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바로는 모든 이집트 사람들에게 말했다. 이는 지각을 의미한다. 이는 말씀의 역사물에서 “말하다”가 지각하다를 의미한다로부터; 바로의 표현함이 일반적 측면에서의 자연 평면이다로부터; 그리고 “모든 이집트”의 의미가 양쪽의 자연 평면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로부터 “바로가 모든 이집트에게 말했다”에 의해 일반적, 세부적 측면에서, 자연 평면 양쪽에서 지각함이 의미된다는 것이 분명해진다.

요셉에게 가라. 이는 그것은 영적 평면 속의 천적 부분으로부터 있었음을 의미한다. 이는 요셉의 표현함이 영적 평면 속의 천적 부분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에게 가는” 것은 이것이 그로부터 있었다는 것, 즉 “백성들이 바로에게 애원했던 빵”에 의해 의미된 진리를 위한 선이 그것으로부터 있었다를 의미한다.

그가 너희에게 말하는 것을 행하라. 이는 만약 순종함이 있다면을 의미한다. 이는 “누군가가 말하는 것을 행하는 것”의 의미가 순종하는 것이다로부터 분명해진다. 이를 수단으로 만일 자연 평면이 자체에 적용하고 순종한다면 선은 거기에서 진리에 인접하여 있다가 의미되고 있다. 자연 평면이 자체적으로 적용함과 응용함이 무엇인지 좀더 살피고 지나가야 할 것 같다. 세상적인 것만에 있는 이들, 육체적인 것만에 있는 이들, 더욱이 지상의 것만에 있는 이들은 자연 평면이 그 자체에 적용하고 순종한다고 말함에 의해 뜻해지는 것을 납득할 수 없다. 그들은 이렇게 상상한다, 즉 인간 안에서 행동하는 것은 하나뿐이다는 것, 다시 말해 이것이 명령하고, 저것은 순종하는 식의 둘은 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두 인간이 있다, 즉 명령하는 것은 내적 인간이고 순종하는 것은 외적 인간이다. 그리고 인간이 세상을 목적으로 가지지 않을 때, 그 대신 천국을 목적으로 가질 때, 그리고 자아가 아닌 이웃이 목적으로 있을 때 순종이 있다, 결과적으로 그가 육체적, 세상적인 것들을 목적이 아닌 수단으로 간주할 때 순종이 있다; 그가 자신 보다 이웃을 더 사랑할 때, 세상의 것 보다 천국의 것을 더 사랑할 때 자연 평면에 순종함이 있다는 말이다. 자연 평면은 외적 인간과 같은 것이다.

그리고 기근은 모든 토지의 얼굴을 덮었다. 이는 자포자기에 이를 정도의 황무함이 있었을 때를 의미한다. 이는 “기근”의 의미가 황무함이다로부터; 그리고 “땅”의 의미가 자연 평면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기근이 “모든 얼굴들에” 있다 라고 말해질 때 자포자기가 의미되는 이유는, 이때 황무함이 모든 곳에 있기 때문에서이다; 그 이유가 황무함의 극치가 자포자기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요셉은 모든 창고를 열었다. 이는 리메인스로부터 교통함을 의미한다.
이는 “열다”의 의미가 교통하다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모든 창고”는 낟알이 저장된 재 저장소인데, 이를 수단으로 리메인스가 의미된다. 이는 반복적으로 말해왔다

그리고 이집트에게 팔았다. 이는 자기 것이 됨(appropriation, 사물화 됨)을 의미한다. 이는 “팔다”의 의미가 누군가의 것이 됨이다로부터; 그 이유가 팔려진 것은 그것을 산 자의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기근은 이집트의 토지에서 극심해졌다. 이는 황무함의 가혹함이 더욱 심함을 의미한다. 이는 “기근”과 “이집트의 토지”가 자연 평면에 황무함이 있다를, 그리고 “극심해짐”에 의해 가혹해짐이 의미됨으로부터 알게 된다.

그리고 모든 땅이 이집트로 왔다. 이는 진리들과 선들이 교회의 기억 속의 지식들 안으로 가져와졌음을 의미한다. 이는 “땅(earth)”의 의미로부터 분명해진다. 말씀에서 “땅” 또는 “토지(land)”의 의미는 다양하다: 일반적으로 이것은 교회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교회에 속하는 것들을 의미한다. 이것들은 선들과 진리들이다. 이것이 교회를 의미하기에 교인도 의미한다, 그 이유가 교인은 세부적 측면에서 교회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이 교인을 의미하기 때문에, 당사자 안에서 인간인 것, 즉 마음(mind)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이집트의 토지”는 경우에 따라 때로는 (여러 마음들 중에서) 자연적 (수준의) 마음을 의미한다. 이 구절에서의 경우, 이집트의 토지가 뜻해지지 않고, 일반적 측면의 땅, 결과적으로 선들과 진리들인 교회의 것들이 뜻해진다.
“모든 땅이 이집트로 옴”에 의해 선들과 진리들이 기억 속의 지식 안으로 가져와지는 것을 의미함은 “이집트”의 적당한 의미가 기억 속의 지식이다로부터, 또는 기억 속의 지식의 문제들이다로부터 분명해진다; 그리고 기억 속의 지식들이 좋은 의미에서 이집트에 의미되는 것은 교회 속의 이런저런 것들이다. 이것이 이 말들의 내적 의미이다는 것은 이집트의 토지가 뜻해지지 않을 때, “땅” 또는 “토지”의 의미로부터, 그리고 적당한 의미에서 이집트의 것으로부터, 그리고 본문의 말, “모든 땅이 왔다”가 복수로 되어 말해진 것으로부터, 뿐만 아니라 내적 의미에서 연결되는 상황 자체로 미루어 보아 분명해진다; 그 이유가 이 연결에서, 지금 이어지는 것이, 리메인스의 진리들과 선들이 기억 속의 지식들 안으로 가져와짐 이다.
이 경우를 더 설명하면 이렇다: 자연 평면에서 인간이 거듭나는 동안 선들과 진리들은 하나이고 모두는 기억 속의 지식들 안으로 함께 가져와진다. 거기 기억 속의 지식들 안에 있지 않은 것들은 자연 평면 안에 있지 않다; 그 이유는 자연적 수준의 마음, 이를 이해력에 종속하는 측면만에 주목하면, 이는 기억 속의 지식들로부터만 구성된다. 자연 평면에 속하는 기억 속의 지식들은 질서의 최말단이다. 자연 평면에 앞서는 것들은 그 영역에 나타나고 존재 안으로 오기 위하여는 반드시 질서 안에서 최말단 안에 있어야만 한다. 그리고 앞서 있는 것들은 그것들의 경계선, 또는 종착점 측면에서 최말단들로 향하려 하고 있다. 마치 보다 높은 것의 그릇 역할을 하는 것이 보다 낮은 것이다는 관계, 원인을 담아낸 것이 결과 이듯한 관계에서 이다. 그러므로 영적 세계는 인간의 자연 평면에서 종결되어진다, 이 안에서 영계 속의 것들이 표현적으로 자연 평면 안에 표출되어 있다. 영적인 것들이 자연 평면에서 표현적으로 표출되지 않으면, 고로 세상 안에 있는 이런 저런 것을 수단으로 표출되지 않으면, 그것들은 전혀 납득되지 않을 것이다. 이로부터 분명한 바, 자연 평면의 거듭남 동안 영계로부터 있는 모든 내면의 진리들과 선들은 그것들을 나타내기 위하여 기억 속의 지식 안으로 가져와진다.

사려고 이는 거기로부터 있는 것을 자기 것이 되게 함을 의미한다. 이는 “사다”의 의미가 자신의 자아를 위해 포획하는 것, 고로 자기 것이 되게 하는 것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영적으로 포획하고 자기 것이 되게 하는 것은 선과 진리를 수단으로 결과된다. 이 “사다”에 널리 사용되는 것의 대표적인 물질이 은과 금인데, 이것을 수단으로 포획하고 자기 것이 되게 함이 있다. 영적 의미에서 “은”은 진리이고; “금”은 선이다. 그러므로 “사는 것”은 자기 것이 됨이다. 아래 구절에서:
목마른 모든 이, 너희여 물들로 오라, 그리고 은을 가지지 않은 자, 너희여 오라, 사라 그리고 먹으라; 그렇다, 은 없이, 가격 없이 포도주와 젖을 사라 (이. 55:1; 예. 13:1, 2, 11).
마태복음서에서:
천국들의 왕국은 들판에 감추인 보물에 비유해볼 수 있다; 이것을 누가 발견했을 때, 그는 감추어 둔다, 그리고 기쁨에 차서 그는 간다 그리고 그가 가진 모든 것을 판다, 그리고 그 들판을 산다. 다시, 천국들의 왕국은 좋은 진주들을 찾고 있는 상인에 비유할 수 있다, 그는 가서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팔았다, 그리고 그것을 샀다 (마. 13:44-46).
다시:
신중한 처녀들이 우둔한 처녀들에게 말했다, 너희는 파는 자들에게 가라, 그리고 네 자신들을 위해 사라. 그리고 그들이 사러 가버린 동안, 신랑이 왔다 (마. 25:9, 10).
“사는 것”은 자기 것이 됨을 의미하기에, 그러므로 말씀에서 은을 주고 산 것은 이렇게 하지 않고 획득한 것과 선명하게 구별했다. 더욱이 은으로 산 종들은 자신의 것으로 있었다, 그리고 더 낮은 수준에서의 경우, 집에서 태어난 이들도 같다; 그러므로 그들은 함께 자주 언급되었다:
네 집에서, 그리고 네 은을 주고 산 자도 정녕 할례를 받을 것이다 (창. 17:13);
그리고 레위기서에서:
만일 성직자가 은을 치루고 어떤 혼을 산다면, 그와 그의 집에서 태어난 자, 그들은 그의 빵을 먹을 것이다 (레. 22:11).
그러므로 말씀에서 “여호와의 되찾은 자”에 의해 의미된 것이 분명해진다, 즉 선과 진리를 받아왔던 이들, 고로 주님의 것들이 잘 어울려져 있어왔던 이들이다.

요셉에게. 이는 영적 평면 속의 천적 부분이 있는 곳을 의미한다. 이는 요셉의 표현함이 영적 평면 속의 천적 부분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영적 평면의 천적 부분은 신성으로부터 있는 진리로부터의 선이다.

그 이유는 기근이 모든 땅에서 극심해졌기 때문이다. 이는 영적 평면 속의 천적 부분이 없는 모든 자연 평면에는 황무함이 있음을 의미한다. 이는 “기근”의 의미가 황무함이다로부터; 그리고 “땅”의 의미가 자연 평면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영적 평면의 천적 부분이 있던 기억 속의 지식들 외에 모든 곳에 기근이 있다가 앞서 간 것 뒤를 잇고 있다. 자연 평면의 황무함, 또는 거기서 진리가 박탈됨은 이미 말했었다; 그러나 같은 주제가 이어지는 구절에서 계속되는 관계로, 다시 말해두어야 할 것 같다. 교회 내에서 태어나지는 이들은 아주 이른 어린 시절로부터 말씀으로부터, 그리고 교회의 교리적인 것들로부터 신앙의 진리가 무엇인지를, 선행의 선이 무엇인지도 배운다. 그러나 그가 성인이 될 때, 그는 자기가 배워왔었던 신앙의 진리를 확증하거나 부정하거나를 시작한다; 그 이유는 이때 그는 이런 진리들을 자신의 시각으로부터 바라보기 때문, 그럼으로 자신의 것으로 만들던가, 또는 거절하던가를 결정하게 된다. 그 이유가 자기의 통찰로부터 인정되지 않는 것, 즉 누군가의 것으로부터가 아니고 반드시 자신으로부터 그러하다 라고 알아지지 않은 것은 자신의 것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럴 경우, 어린 시절로부터 배웠던 진리들은 그때 진입했던 것보다 그의 생명 안으로 진입되지 않는 바, 그것들은 더 내면으로 들어가버리도록 승인되든지, 또는 내쫒길 수도 있다.
주님이 보시기에 거듭나지는 이들의 경우, 이들은 자신들이 거듭나지도록 허락한 이들인 바, 비록 어릴 때의 습득한 것이 작지만 크게 불어난다, 그 이유는 이들은 진리들을 알고저하는 애착 안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이 거듭남의 행동 자체에 거의 가까이 있을 때, 그들은 이런저런 진리들을 박탈당한 듯 하여 있는다, 그 이유는 이런 진리들이 내향쪽으로 들어가버렸기 때문이다, 이때 그는 황무함의 상태에 처해 있게 나타난다; 그럼에도 거듭남은 진행형이어서, 이런저런 진리들이 자연 평면 안으로 되돌려진다, 그리고 거기서 선과 결합한다. 주님이 보시기에 거듭나지지 않고 있는 이들의 경우는 자신들을 거듭나지게 허락하지 않는 이들인데, 이들과 더불어서도 진리들은 통상적으로 불어난다, 그 이유가 이런 인물들도 이런 저런 진리들을 앎에 애착하기 때문, 그러나 그 목적은 명성, 명예, 이득 따위를 염두하여서 이다. 이들이 해를 거듭하면서 이런 저런 진리들을 자신의 시각에 복종하게 한다, 그후 그들은 그것들을 믿지 않거나 부정하거나, 또는 거짓들로 변하게 한다; 이들과 더불어서 있는 진리들은 내향으로 철수되는 것이 아니라 (마음 밖으로) 내쫒겨지는데, 비록 그것들이 생명 없이 세상의 목적을 위하여 기억 안에 남아 있다 하더라도 그렇다는 말이다. 이 상태 또한 말씀에서 “황무함” 또는 “황폐함”이라 불리우나 전자의 인간과 다른 황무함의 상태이다, 즉 전자는 외관상 황무함이나 후자는 절대적 황무함의 상태이다. 전자의 상태에서는 진리가 박탈된 것은 아니나, 후자의 경우는 그들로부터 완전 박탈되어 있다. 전자의 황무함이 이 장의 내적 의미에서 취급되어 왔다, 그리고 다음 장에서도 더 취급된다, 그리고 “칠 년의 기근”에 의해 의미되어진 것이다.
이 장에서와 똑같은 황무함이 다른 말씀에서도 종종 취급되고 있다:
깨어라, 깨어라, 오 예루살렘아, 너희는 여호와의 손에 있는 그분의 성내심의 잔을 마셔버 렸었다; 두 가지 것들이 네게 일어났다, 누가 너를 불쌍히 여기겠느냐? 폐물됨과 부서짐과 기근과 검이다; 어떻게 내가 너희를 위로하느냐? 너희 아들들은 실신했다, 그들은 모든 거 리들의 머리 위애 누워있다. 그러므로 들어라, 이것을 행하라, 너희 괴로워하고 술취한 자 여, 그러나 포도주가 아니다, 보라 나는 네 손으로부터 떨고 있는 잔, 내 분노의 잔의 찌끼 들을 가져왔었다; 너희는 그것을 다시는 더 이상 마시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것을 너희를 슬프게 만드는 그들의 손 안에 놓을 것이다 (이. 51:17-끝);
위 구절은 황무함의 상태를 묘사하는데, 이 묘사는 교회가 되어가는 교인, 또는 거듭나져가는 교인들이다. 이 황무함이 “폐물됨,” “부서짐,” “기근,” “검”, 또한 “성내심과 분노하심의 잔”이라 불리운다. 이때 그가 박탈당한 진리들이 “실신한 아들들과 모든 거리들의 머리에 누운 아들들”이다. 아들들이 진리들이다에 대하여는 앞에서 살폈다. 그리고 “거리들”이 진리들이다에 대하여도 앞에서 살폈다; 그러므로 “모든 거리들의 머리에 눕는” 것은 진리들이 사라져버린 듯 하게 나타남을 뜻한다. 이 황무함이 외관상 그러함이 분명하다, 그리고 이것을 수단으로, 마치 시험들을 수단으로 하여 거듭남이 결과된다, 그 이유가 그녀는 “더 이상 술취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분은 그들을 슬프게 만든 그들의 손에 잔을 놓을” 것이라 말해지기 때문이다. 에스겔서에서:
고로 주 여호비께서 말하셨다, 그들이 너희로 폐물로 놓여지게 하고 사방에서 너희를 삼켰 다, 하여 너희는 민족의 남은 자에게 상속분일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 이스라엘의 산들은 주 여호비의 말씀을 들어라: 고로 주 여호비께서 산들에게, 수로(水路)에게, 계곡들에게, 그 리고 황무한 폐물에, 빙둘러 있는 민족들의 남은 자들에게 약탈과 조롱거리로 내버려진 바 된 도성들에 말하셨다; 나는 내 열정과 내 분노에서 이야기를 하였었다, 그 이유는 너희가 민족들의 치욕을 짊어졌었기 때문이다. 너희를 빙두른 민족들, 이것들이 자기들의 치욕을 정녕 감당할 것이다; 그러나 너희 이스라엘의 산들은 가지들을 내밀고 내 백성 이스라엘에 게 너희의 열매를 생산할 것이다. 그 이유가 보라 내가 너희와 함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너희를 주목해서 볼 것이다, 하여 너희는 밭을 갈고 씨뿌릴런지 모른다; 그리고 나는 너희에게, 이스라엘의 가문 전체에 사람이 불어나게 할 것이다, 그리고 도성들에는 사람이 거주할 것이다, 그리고 폐물된 것들이 건축되어질 것이다. 나는 너희로 옛날의 너희 때들에 따라 거주하게 할 것이다, 그리고 너희의 시작보다 너희에게 더 낫게 행할 것이다
(겔. 36:2-12);
위 역시 취급한 주제는 거듭남에 앞서 있는 황무함이다. 이 황무함이 “황무한 폐물들”, “약탈되고 조롱거리가 된 버려진 도성들”에 의해 의미되고 있다; 그러나 거듭남은 “가지가 내밀어지고 열매를 산출함”에 의해, 그리고 “그들을 주목해서 본다는 것, 즉 밭을 갈고 씨뿌림, 사람이 불어남, 도성에 사람들이 거주함, 폐물들이 건축됨”에 의해, 그리고 “그들로 옛날의 너희의 때들에 따라 저주하게 함,” 그리고 “그들의 시작들에서보다 더 낫게 행할 것”에 의해서도 의미되고 있다.
황무함에 관련된 경우가 어떠한지는 다른 삶에서 황무함에 있는 이들로부터 분명해진다. 거기서 황무함에 있는 이들은 그들이 압도당하고 말도록 악과 거짓의 설득력을 휘둘러대는 악령들과 악귀들에 의해 괴롭힘을 당하고 있다. 그 결과는 진리들이 하나도 나타나지 않는다. 그 지경이다 해도 황무함이 마감되는 때가 다가오면, 그들은 천국으로부터의 빛에 의해 계발되어진다, 이때 악령들과 악귀들은 내쳐져 그들의 자리인 지옥으로 이다. 이것들이 “빙두른 민족들의 남은 자들에게 약탈과 조롱거리로 되어간 도성들”에 의해, 그리고 “빙두른 민족들이 자기들의 치욕을 감당함”에 의해 의미되어 있다. 위의 이사야서에서 “잔이 그녀를 슬프게 만드는 그들의 손에 놓임”에 의해서도, 또한 이사야서의 다른 구절(33:1)에서 “쓸모없이 있는 폐물자”에 의해서도 의미된다. 또한 아래 구절에서도:
나는 폐물자들을 방문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을 영원히 지속되는 황무함들로 만들 것이다 (예. 25:12)
이사야서에서:
너희 파괴자들이 너희 아들들을 서두르게 할 것이다, 그리고 너희 폐물자들이 너로부터 나 갈 것이다. 너희 눈을 들어 빙둘러 보라; 모든 함께 모이고 있다, 그들이 네게로 온다. 그 이유가 너희 폐물자들과 너희 파멸의 토지에 관련하건대, 너희의 주민을 위해 너무나 협소 해질 것이다. 너희를 들이킨 그들이 멀리 떠날 것이다 (이. 49:17-19);
위 구절, 그리고 그 전체 장에서, 취급된 주제는 거듭나져가는 이들의 황무함이다, 그리고 황무함 이후 거듭남과 열매가 많이 열림, 마지막으로 그들을 압제했던 이들의 처벌(26절)이다. 같은 책에서:
네가 폐물로 놓이지 않을 때 폐물로 놓인 너희에게 화가 있다! 네가 폐물되어 있기를 중단 할 때, 너는 폐물일 것이다 (이. 33:1);
위는 폐물된 이들이 처벌됨인데, 앞 구절에서와 같다. 같은 책에서:
나의 내쫓긴 자들이 네 안에 머물게 하라; 모압이여, 너는 폐물자 앞에서 그들에게 은신처 가 되라; 그 이유가 압제자가 중단되었기 때문, 폐물됨이 끝나졌기 때문이다 (이. 16:4);
다시:
여호와의 날이 가까이 있다, 솨다이(Shaddai)로부터 폐물됨으로 올 것이다 (이. 13:6);
“솨다이로부터의 폐물됨”은 시험들 안에서 황폐됨을 표시한다; 고대인들은 시험들 측면에서 하느님을 솨다이라고 불렀다.
다시:
그때 그들은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그분은 그들을 폐물들에서 인도해내실 것이다, 그분은 물들이 그들을 위하여 바위로부터 흐르게 하실 것이다; 그리고 그분은 물들이 흘러나오게 바위를 쪼개실 것이다 (이. 48:21);
위는 황무함 이후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있다. 다시:
여호와께서는 시온을 위로하실 것이다, 그분은 거기로부터의 모든 폐물들을 위로하실 것이 다, 거기로부터의 광야를 에덴으로 만들기 위하여 이다; 즐거움과 기쁨이 거기 안에서 발견 될 것이다, 고백과 노래의 소리가 (발견될 것이다) (이. 51:3).
위 구절도 앞 구절과 같은 것을 취급한다, 그 이유가 앞에서 말한 대로, 황무함은 인간이 거듭나질는지 모른다는 목적을 위하여, 즉 악과 거짓들이 분리된 후, 진리들이 선들과, 선들이 진리들과 결합될는지 모른다는 목적을 위하여 있기 때문이다. 선 측면에서 거듭나는 이들이 “에덴”에, 진리 측면에서 거듭나는 이들이 “여호와의 동산”에 비교되고 있다. 다윗서에서:
여호와께서는 나를 황폐함의 구덩이로부터, 진흙 수렁이로부터 만들었다, 그리고 내 발을 바위 위에 놓으셨다 (시. 40:2).
교인의 황폐함과 황무함, 또는 교회의 황폐함과 황무함이 바빌론에 있는 유태 민족의 포로됨에 의해 표현되었다; 그리고 교회가 일어섬이 그 포로됨으로부터 귀환함에 의해 표현되었다, 특히 예. 32:37-끝까지에서 묘사되어 있다; 그 이유가 황무함이 포로됨, 또는 묶인 자된 인간 같기 때문, 그러므로 “묶인 자”, “감옥에 있음”, “구덩이”에 의해서 황무함에 있는 이들이 의미되어 있다.
거듭나지 않는 자들과 더불은 황폐함과 황무함의 상태 또한 말씀에서 심심찮게 언급된다. 이 상태 안에 진리들을 부정하는 이들, 진리들을 거짓들로 바꾸는 이들이 있다: 즉 이것은 끝장을 향하여 있는 교회의 상태, 교회 안에 신앙 또는 선행이 더 이상 있지 않을 때의 교회의 상태이다. 이사야서에서:
나는 내가 내 포도원에 무엇을 할 것인지를 너희 알려지게 만들 것이다, (나는) 거기로부 터 큰 울타리(hedge)를 제거해서 먹어치워버리게 하고, 거기로부터의 작은 울타리(fence) 를 통하여 짓뭉갤는지 모르게 하겠다. 나는 그다음 황무함을 만들 것이다; 그것은 가지치기 도, 괭이질도 없을 것이다, 하여 가시나무나 잡목이 나올는지 모른다; 아니, 나는 구름들에 게 명령해서 그것들이 그것 위에 비를 내리지 못하게 할 것이다 (이. 5:5, 6).
이사야서에서:
이 백성에게 말하라, 정녕 너희는 들어라, 그러나 이해하지 못한다; 그리고 너희가 보려 애 쓰나, 알지 못한다. 이 백성의 심정을 지방이 많게 만들어라, 그리고 그들의 귀를 무겁게 만들어라, 그리고 그들의 눈에 덧칠을 하라; 그들이 자기들의 눈으로 보지 않도록, 자기 들의 귀로 듣지 않도록, 그들의 심정이 깨닫지 않도록, 그들이 전환하지 않도록, 그리고 치 료되지 않도록 할 것이다. 그때 내가 말했다, 주여, 얼마나 오래? 그리고 그가 말했다, 도성 들이 거주하는 자 없이 황폐해질 때까지, 그리고 집 안에 아무 사람도 없는 집일 때까지, 토지가 황야로 환원할 때까지이다; 여호와께서 인간을 제거하실 것이다. 그리고 사막은 토 지 한가운데에서 번성해질 것이다; 거의 십분의 일 그 이상은 아니게 그것 안에 남아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것마저) 그것은 추방당할 것이다 (이. 6:9-끝).
이사야서에서:
남은 자들이 돌아올 것이다, 야곱의 남은 자들이 하느님의 전능함쪽으로 돌아올 것이다; 그 이유는 극에 달함이 선포되어지기 때문, 정의로 넘쳐지기 때문; 극에 달함과 선포하심을 주 여호비 체바욷께서 모든 땅에 만들 것이기 때문이다 (이. 10:21-23).
다시:
여호와께서 땅을 공허하게 만드신다, 그리고 그것을 텅비게 만드신다, 그리고 거기로부터 얼굴들을 전복하실 것이다. 땅은 지독하게 공허해 있을 것, 거주할 수 있는 땅은 곡할 것, 혼돈되어 있을 것이다, 세상은 녹초가 되고 혼동될 것이다, 저주가 땅을 삼킬 것이다; 도성 에 남은 것은 폐물일 것이다, 성문은 황폐함에조차 짓부셔질 것이다; 정녕 땅은 깨질 것이 다; 땅은 조각으로 확실히 부셔질 것이다; 정녕 땅은 움직일 것이다; 정녕 땅은 술꾼같이 휘청거릴 것이다 (이. 24:1-끝).
다시:
작은 길들이 황폐해졌다, 여행자들이 끊겼다, 토지가 곡하고 애도한다, 레바논이 부끄럽게 되고, 시들어져 버렸다, 샤론이 사막 같이 되어진다 (이. 33:8, 9).
예레미야서에서:
나는 저주에게 빙둘러 있는 모든 민족들을 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을 황무함으로, 비난받음 으로, 항구적으로 폐물로 만들 것이다; 나는 그들로부터 기쁨의 소리를, 즐거움의 소리를, 신부의 음성을, 신랑의 음성을, 맷돌들의 소리와 촛불의 빛을 가져갈 것이다; 하여 온 토지 는 황무함과 황폐함일 것이다. 세월이 지나 칠십 년이 채워지면, 나는 바빌론의 왕 위에, 그리고 이 민족 위에, 갈대아인의 토지 위에 있는 그들의 불법을 방문할 것이다, 그리고 그 것을 영원히 지속되는 황무함으로 만들 것이다 (예. 25:9-12).
예레미야서에서:
보스라가 황무로, 치욕으로, 폐물로, 저주로 있을 것이다; 그리고 거기서부터 모든 도성들이 항구적 폐물들이 될 것이다; 에돔은 황무일 것이다, 그것을 수단으로 하여 가고 있는 모든 이가 놀랄 것이고, 거기서부터 모든 재앙들이 넘어 야유할 것이다 (예. 49:13-18).
에스겔서에서:
고로 주님께서 이스라엘의 토지에 관하여 예루살렘의 주민들에게 말한다, 그들은 자기들의 빵을 쓸쓸함과 더불어 먹을 것이다, 그리고 자기들의 물들을 놀람과 더불어 마실 것이다; 그녀의 손은 그것의 충만됨으로부터 황폐해질 것이다, 그 이유는 거기 안에 거주하는 모든 이들의 광폭함 때문이다; 거주되는 도성들이 황폐해질 것이다, 그리고 토지는 황무함을 만 들 것이다 (겔. 12:19, 20).
다시:
내가 너희를 황무한 도성들로 만들 때, 사는 사람이 없는 도성들 같이 만들 때; 내가 너희 를 너희에 맞서 올라온 깊음으로 만들 때, 그리고 많은 물들이 너희를 덮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너희를 구덩이로 내려가는 그들과 더불어 내려가게 만들 것이다, 그리고 너희를 더 낮은 것들의 땅에서 거주하게 만들 것이다, 그 이유가 구덩이 안으로 내려가는 그들과 더 불어서는 영원으로부터 황무함이 있기 때문이다 (겔. 26:19-21);
위는 두로에 관하여 이다. 요엘서에서:
어둠의 날, 짙은 어둠의 날, 구름의 날, 희미함의 날; 불이 그 자 앞에서 삼킨다, 그 자 뒤 에서 불꽃이 타고 있다; 토지는 그 자 앞에서 에덴의 동산 같이 있다, 그러나 그 자 뒤에 서 폐물의 광야 이다 (욜. 2:2, 3).
스바냐서에서:
여호와의 날이 가까이 있다, 분노의 날이 이 날이다, 심통과 경련의 날, 폐물됨과 황폐해짐 의 날, 어둠과 짙은 어둠의 날, 구름과 그늘의 날; 온 토지는 여호와의 열정의 불에 의해 삼키울 것이다, 그 이유가 내가 끝장을 만들 것이기 때문, 그렇다, 토지의 모든 주민들과 더불어 빠른 것을 만들 것이다 (습. 1:14-18).
마태복음서에서:
너희가 예언자 다니엘이 미리 말한 것, 즉 거룩한 장소에 서있는 황무함의 역겨움을 볼 때, 그때, 유대 광야에 있는 그들로 하여금 산들로 도망하게 하라
(마. 24:15, 16; 단. 9:27; 12:10-12).
이런 구절들로부터 황무함이 거듭나지는 이들에게서는 진리의 외관상의 황무함이다는 것, 그러나 거듭나지지 않는 이들에서는 진리의 절대적 박탈임이 분명해진다.

**************************************

창세기 제 42 장

성경 창세기 42장

1. 그리고 야곱은 이집트에 농산물이 있는 것을 보았다,
2. 그리고 야곱은 그의 아들들에게 말했다, 왜 너희는 서로를 쳐다 보고 만 있는 것이냐? 그리고 그는 말했다, 보라, 나는 이집트에는 농산물이 있다는 말을 들었다. 너희는 거기로 내려 가서, 우리를 위하여 사오너라. 그리고 우리는 살겠고, 죽지 않으리라.
3. 그리고 요셉의 열 형제들은 이집트로부터 곡식을 사려고 내려 갔다.
4. 그리고 요셉의 형제인 베냐민은 그의 형제들과 함께 보내지 않았다. 그 이유는 그가 말하기를, 해악이 그에게 닥칠까 때문에서 라고 했다.
5. 그리고 이스라엘의 아들들은 곡식을 사러 오는 이들 사이에 끼여 사기 위해 왔다. 그 이유가 기근이 가나안의 토지에 있었기 때문이다.
6. 그리고 요셉 그는 그 토지의 통치자였다. 그는 그 토지의 모든 백성에게 팔고 있었다. 그리고 요셉의 형제들이 왔다, 그리고 땅에 그들의 얼굴을 대어 그에게 절하였다.
7. 그리고 요셉은 그의 형제들을 보았다, 그리고 그는 그들을 알아 보았다, 그러나 자신을 그들에게 낯선 자로 만들었다, 그리고 그들에게 알기 어려운 것을 이야기했다. 그리고 그가 그들에게 말하기를, 너희들은 어디에서 왔느냐? 그리고 그들은 말했다, 양식을 사려고 가나안의 토지로부터 왔습니다.
8. 그리고 요셉은 그의 형제들을 알아보았으나, 그들은 그를 알지 못했다.
9. 그리고 요셉은 그가 그들에 관해 꾸었던 꿈을 회상했다, 그리고 그들에게 말했다, 너희는 스파이이다, 너희들은 이 토지의 벌거벗음을 보려고 왔다.
10. 그리고 그들은 그에게 말했다, 아닙니다, 나의 주여, 양식을 사기 위하여 당신의 종들은 왔습니다.
11. 우리는 모두 한 사람의 아들입니다. 우리는 정직합니다. 당신의 종들은 스파이가 아닙니다.
12. 그리고 그는 그들에게 말했다, 아니다, 그러나 이 토지의 벌거벗음을 보려고 너희는 왔다.
13. 그리고 그들은 말했다, 당신의 종 우리들은 가나안의 토지에서 한 사람의 아들들로서 열두 형제들입니다. 그리고 보다시피 막내는 오늘 우리의 아버지와 함께 있고, 그리고 한 명은 있지 않습니다.
14. 그리고 요셉은 그들에게 말했다, 이것이 내가 너희에게 이야기한 그것이니, 말하기를 너희는 스파이이다.
15. 그런고로 너희들은 입증해야 할 것이다. 바로의 생명에 의해 너희는 너희 막내가 여기에 오지 않으면 여기로부터 나가지 못할 것이다.
16. 너희 중 하나를 보내라, 그리고 그에게 네 형제를 데리고 오게 하라, 그리고 너희들은 갇혀 있을 것이다, 그리고 너희들의 말들이 너희와 더불어 진실한지 여부를 증명할 것이다. 또는 바로의 생명에 의해 너희는 스파이들이 확실하다.
17. 그리고 그는 그들을 구치소에 삼 일 동안 가두었다.
18. 그리고 요셉은 삼 일째 날에 그들에게 말했다, 이렇게 하라, 그리고 살아 있다; 나는 하느님을 경외하는 자이다.
19. 만일 너희가 정직하다면 너희 형제 중 하나를 너희가 있는 구치소에 가두어 놓아라, 그리고 너희는 너희 집의 기근을 위해 농산물을 가지고 가라.
20. 그리고 네 막내 형제를 나에게 데리고 오라. 그리고 네 말들이 증명될 것이다, 그리고 너는 죽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그렇게 했다.
21. 그리고 그들은 사람 그의 형제에게 말했다. 우리는 우리의 형제에 관련하여 정녕 죄가 있다, 우리는 그가 우리에게 간절히 원할 때, 우리는 듣지 아니하여 그의 혼의 괴로움을 보았다. 그러므로 이 괴로움이 우리에게 왔다.
22. 그리고 르우벤은 그들에게 대답해서 말하기를, 내가 너희에게 이야기를 하지 아니하였더냐? 아이에게 죄를 짓지 말라. 그리고 너희는 귀 기울이지 아니하였지 않느냐? 그리고 더 나아가 보라 그의 피가 대가를 찾고 있다.
23. 그리고 그들은 요셉이 그들을 듣는 줄을 알지 못했다. 그 이유는 그들 사이에 통역자가 있었기 때문이다.
24. 그리고 그는 그들을 떠나가서 울었다. 그리고 그는 그들에게 되돌아 갔다, 그리고 그들에게 이야기를 했다, 그리고 그들로부터 시므온을 데려 왔다, 그리고 그들의 눈 앞에서 그를 결박했다.
25. 요셉은 명령했다, 그리고 그들은 곡식으로 그들의 그릇들을 채웠다, 그리고 그들의 은을 원장소에 도로 놓게 하고, 그리고 길을 위한 양식을 그들에게 주게 했다. 그리고 이렇게 그는 그들에게 했다.
26. 그리고 그들은 그들의 농산물을 그들의 나귀에 싣고, 거기로부터 갔다.
27. 그리고 한 사람이 여관에서 그의 나귀에게 먹이를 주려고 그의 자루를 열었다. 그리고 그는 그의 은을 보았다. 그리고 보라 그것은 그의 자루의 아구에 있었다.
28. 그리고 그는 그의 형제들에게 말했다, 내 은이 원장소에 도로 있다, 그리고 보라 그것은 아예 내 자루 안에 조차 들어 있다. 그리고 그들의 심장은 나갔다, 그리고 그들은 서로 두려워 떨며, 말하기를, 어찌하여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이렇게 하셨을까?
29. 그들이 가나안의 토지로 그들의 아버지 야곱에게 왔다, 그리고 그들에게 일어났었던 모든 것을 이야기했다, 말하기를
30. 그 토지의 주인 남자가 우리에게 알기 어려운 것을 말했고, 우리를 그 토지의 스파이로 취급했습니다.
31. 그래서 우리는 그에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곧바른 자들입니다. 우리는 스파이가 아닙니 다.
32. 우리는 우리의 아버지의 아들들, 열두 형제인데, 하나는 있지 않고, 가장 어린 것은 가나안의 토지에서 우리의 아버지와 더불어 오늘 있습니다.
33. 그리고 그 토지의 주인, 남자가 우리에게 말하기를, 이런 식으로 나는 너희가 곧바른 자들인지 알리라. 너희 형제 중 하나를 나에게 남겨 두어라, 그리고 네 집의 기근을 위 하여 가지고, 그리고 가라,
34. 그리고 너희 가장 어린 형제를 나에게 데려오라. 그러면 나는 너희가 스파이가 아니고, 곧바른 자임을 알리라. 나는 네 형제를 너에게 줄 것이고, 그리고 너는 이 토지에서 무 역을 하며 왕래 할 것이다.
35. 그리고 한참 지나서 그들이 그들의 자루를 비웠을 때, 보라 각자의 은 꾸러미가 그의 자루에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그들의 은 꾸러미를 보았다, 그들과 그들의 아버지, 그리고 그들은 두려워했다.
36. 그리고 야곱, 그들의 아버지가 말했다, 너희는 나로 빼앗기게 한다, 요셉이 없어지고, 시므온도 없어지고, 그리고 너희는 베냐민을 데려 가려 한다. 이 모든 것들이 나에게 일어날 것이다.
37. 그리고 르우벤이 그의 아버지에게 말했다, 말하기를, 만일 내가 당신에게 그를 데려오지 않는다면 내 두 아들을 죽이소서. 그를 내 손에 주소서, 그리고 나는 그를 다시 당신에게 데려오리이다.
38. 그리고 그는 말했다, 내 아들은 너와 함께 내려가지 않을 것이다. 그 이유가 그의 형이 죽고, 그리고 그 애 만이 남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해악이 너희가 내려가는 도중에 그에게 있게 될 것이다, 그리고 너는 내 백발로 슬픔 안에서 무덤으로 내려 가게 만들 것이다.”

각 절의 내적 의미

1-5절. 그리고 야곱은 이집트에 농산물이 있는 것을 보았다 2 그리고 야곱은 그의 아들들에게 말했다, 왜 너희는 서로를 쳐다 보고 만 있는 것이냐? 그리고 그는 말했다, 보라, 나는 이집트에는 농산물이 있다는 말을 들었다. 너희는 거기로 내려 가서, 우리를 위하여 사오너라. 그리고 우리는 살겠고, 죽지 않으리라. 3 그리고 요셉의 열 형제들은 이집트로부터 곡식을 사려고 내려 갔다. 4 그리고 요셉의 형제인 베냐민은 그의 형제들과 함께 보내지 않았다. 그 이유는 그가 말하기를, 해악이 그에게 닥칠까 때문에서 라고 했다. 5 그리고 이스라엘의 아들들은 곡식을 사러 오는 이들 사이에 끼여 사기 위해 왔다. 그 이유가 기근이 가나안의 토지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보았다. 이는 신앙 속에 있는 것들을 의미한다. “보다”의 의미가 신앙 속에 있는 것들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 이유가 세상 속에 있는 것들로부터 추상화된 영적 시각은 신앙 속에 있는 것들로부터, 또는 진리로부터의 지각밖에 더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내적 의미에서 “보는 것”은 이것밖에 더 없다. 그 이유가 내적 의미는 세상으로부터의 것들이 제거될 때 밖으로 표출되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내적 의미는 천국 속의 이런저런 것들과 관련되기 때문이다. 천국의 빛, 이를 수단으로 거기에 시각이 있는데, 이 빛은 주님으로부터의 신성한 진리이다, 이것이 빛으로 천사들의 눈 앞에 나타난다, 이 빛은 세상의 대낮의 빛보다 수천 배 더 밝을 것이다; 그리고 이 빛은 그것 안에 생명을 가진 바, 그러므로 동시에 천사들의 시력을 밝게 한다, 그리고 그들의 이해력의 시각도 계발한다, 그리고 그들이 지닌 선의 품질과 양에 일치하여 진리를 지각하게 해주신다. 이 장의 내적 의미에서, 신앙의 것들이, 또는 교회의 진리들이 묘사되는 바, 이 장의 시작에서 “그는 보았다”라고 말해지고, 그가 “봄”은 신앙의 것들을 의미한다.

야곱. 이는 교회 속에 있는 진리 측면에서의 자연 평면을 의미한다. 이는 야곱의 표현함이 자연 평면에서 있는 진리로부터의 교리, 그리고 최고 의미에서 진리 측면에서의 주님의 자연 평면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집트에 농산물이 있었다는 것. 이는 “이집트”, 즉 기억 속의 지식을 수단으로 진리들을 포획하려는 의향을 의미한다. 이는 “농산물”의 의미가 교회 속의 진리들, 또는 신앙 속에 있는 진리들이다로부터; 그리고 “이집트”의 의미가 기억 속의 지식이다로부터, 그리고 진짜 의미에서 교회의 기억 속의 지식들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런저런 것들을 포획하려는 의향이 포함되었다는 것은 이제 이어지는 것으로부터 분명해진다. 여기서 “이집트”인, 교회의 기억 속의 지식들에 의해 진리와 선에 관한 모든 지식들이 뜻해지는데, 그러나 이 지식들이 내면의 인간과 결합하기 전, 또는 내면의 인간을 통해 천국과 결합하기 전, 고로 천국을 통해 주님과 결합하기 전의 지식들이 뜻해진다. 교회의 교리물들과 의례(의식)들, 그리고 이것들이 표현하는 영적인 것들에 관한 지식들은 인간이 이 지식들이 진정한 것인지를 말씀으로부터 보고, 그것들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 때까지 기억 속의 지식밖에 더 아니다.
신앙으로부터 있는 진리들을 포획하는 데는 두 방법이 있다, 즉 교리물과 말씀을 수단으로 하는 것이다. 인간이 진리들을 교리적인 것들을 수단으로 포획할 때, 그는 말씀으로부터 끌어낸 교리물 안에서 신앙을 가진다, 그리고 그는 다른 이가 그렇게 말했기 때문에 진리이다고 자신 안에서도 그것들을 확증한다; 고로 그는 사실상 자기 자신의 본래 신앙으로부터 그것들을 믿지 않고 타인의 신앙으로부터 믿고 있다. 그러나 그가 말씀으로부터 자신을 위하여 신앙의 진리들을 포획할 때, 그러므로 자신 안에서 그것들을 진리이다고 확증함을 수단으로 하는 바, 그는 그것들이 신성으로부터 이다고 믿는다, 고로 그는 신성으로부터 주어진 신앙으로부터 그것들을 믿는다. 교회 내에 있는 모든 이는 첫째로 교리적인 것들로부터 신앙 속에 있는 것들을 포획한다;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는 자신 스스로 말씀으로부터 신앙의 진리들을 자신에게 보여지게 가능할 수 있는 판단의 힘이 충분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럴 경우 이런저런 신앙의 진리들은 당사자에게는 기억 속의 지식밖에 더 아닌 것이다. 그러나 그가 더 발전하여, 즉 자신의 판단으로부터 진리들을 보는 것이 가능해질 때, 그가 들어왔고 간직했던 교리물이 진정한지 여부를 말씀과 상담하지 않는다면, 그 진리들은 기억 속의 지식들로 그에게 남아 있는다; 반면, 진리를 알려는 애착과 목적으로부터 말씀과 상담한다면, 그가 그 안에서 발견했을 때, 진짜의 원천으로부터 신앙 속의 것들을 자신을 위해 포획한다, 그리고 그것들은 신성으로부터 자기에게 나의 것이 되게 어울려진다. 이런 저런 사항들이 이 장의 내적 의미에서 취급된다; 그 이유가 “이집트”가 기억 속의 지식을 표시하고, “요셉”은 신성으로부터의 진리, 고로 말씀으로부터의 진리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야곱은 그의 아들들에게 말했다. 이는 일반적 측면에 있는 진리들에 관하여 지각함을 의미한다. 이는 말씀의 역사물에서 “말하다(say)”의 의미가 지각이다로부터; 그리고 “아들들”의 의미가 신앙으로부터의 진리들이다로부터; 그리고 그들이 야곱의 아들들이기 때문에 일반적 측면에서의 진리들이 의미된다; 그 이유가 야곱의 열두 아들은 열두 지파들 같이 신앙으로부터의 모든 것들, 고로 일반적 측면에서의 진리들이 의미되기 때문이다.

왜 너희들은 서로를 쳐다 보고 만 있느냐? 이는 왜 그들은 주저하고 있느냐를 의미한다. 이는 설명이 필요 없다.

그리고 그는 말했다, 보라 나는 이집트에 농산물이 있다는 것을 들었다. 이는 진리들은 기억 속의 지식들을 수단으로 포획되어질 수 있음을 의미한다. 이는 앞에서 밝힌 바로부터 알는지 모른다, 앞에서 “이집트에 있는 농산물”에 의해 “이집트”인 기억 속의 지식들을 수단으로 진리들을 포획하려는 의향이 의미된다는 것; 또한 “이집트”인 기억 속의 지식들이 뜻하는 것도 살폈다. “농산물(produce)”이 여기서는 “쪼개다, 깨뜨리다, 부러뜨리다(break)”를 뜻하는 원어에서의 단어로, 또한 여기서 야곱이 이집트에서 살 때, 요셉이 이집트에서 팔 때의 상황에서 사용되는 “사다”와 “팔다”도 뜻해지는 유사한 단어에 의해서도 표현되고 있다. 이런 두 의미를 지닌 이유는 고대 교회에서, 빵을 또 다른 사람에게 주게 될 때, 빵이 쪼개졌기 때문, 이를 수단으로 누군가가 지닌 선으로부터의 선을 교통하는 것, 하여 (동시에) 상대방의 선을 자기 것도 되게 하는 것, 고로 사랑을 서로에게 만드는 것(서로의 사랑을 두 배로 불려가는 것)이 의미되었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빵이 쪼개져서 또 다른 사람에게 주어질 때, 이것은 누군가의 자기 자신으로부터 교통하는 것이다; 또는 빵이 몇 개로 쪼개질 때, 그때 각 빵 조각은 나눔으로 서로가 소유하게 된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선행을 통하여 결합이 있다. 이로부터 분명한 바, 빵을 쪼갬은 서로의 사랑을 의미하였다는 것이다.
빵을 쪼개는 의식은 고대 교회 안에서 받아졌고 관습화 되었다, 그러므로 “쪼갬” 자체가 공동의 것을 만드는 농산물을 뜻했다. 이런 이유로 주님께서 빵을 주셨을 때, 그분은 빵을 쪼개셨다:
예수께서 빵 덩어리 다섯과 물고기 두 마라를 가지셨다, 그리고 천국을 바라보시면서, 그분 은 축복하셨다(감사 하셨다), 그리고 쪼개셨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빵을 주셨다
(마. 14:19; 막. 6:41; 눅. 9:16).
다시:
예수께서 빵을 가지셨다, 그리고 축복하셨다(감사하셨다), 그리고 그것을 쪼겠다, 그리고 그분은 제자들에게 주셨다, 그리고 말하셨다, 가져가라, 먹어라; 이것은 나의 몸이다
(마. 26:26; 막. 14:22; 눅. 22:19).
누가복음서에서:
시간이 지나서, 주님께서 그들과 함께 기대고(recline) 계셨을 때였다, 그분은 빵을 가지셨 다, 그리고 그것을 축복하셨다, 그리고 쪼개셨다, 그리고 그들에게 주셨다. 그리고 그들의 눈이 열려졌다, 그리고 그들이 그분을 알아 보았다. 그리고 제자들은, 빵을 쪼개심에서 주 님이 어떻게 자기들에게 알려지셨는가를 말했다 (눅. 24:30, 31, 35).
이사야서에서:
이것이 내가 선택한 단식이다, 즉 너희의 빵을 배고픈 자에게 쪼개는 것이다
(이. 58:6, 7).

거기로 내려 가라, 그리고 거기로부터 우리를 위하여 사라. 이는 그것들을 수단으로 자기 것이 되게 함을 의미한다. 이는 “내려 가다”의 의미가 외면의 것들을 향하여 감을 말한다 이다로부터 (아래에서 설명한다); 그리고 “사다”의 의미가 자기 것이 되게 함(appropriation)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것이 “거기로부터”인 이집트에 의해 의미되는 기억 속의 지식들을 수단으로 결과되고 있다. 말씀에서 우리가 가끔 읽게되는 단어에 “내려감(going down)”, “올라감(going up)”이 있는데, 이는 이 장소로부터 저 장소로 갈 경우에서 말해진다, 즉 이것은 이 장소가 저 장소보다 해발 고도가 보다 더 높거나 더 낮거나 하여서가 아니다는 말이다, 그러나 “올라감”은 내면, 또는 더 높은 것을 향하여 가고 있음을 서술하는 것이고, “내려감”은 외면, 또는 보다 더 낮은 것을 향하여 갈 경우를 서술한 것이다. 다시 말해, “올라감”은 영적 수준과 천적 수준의 것들을 향하여 감을 서술한다. 그 이유는 이 수준의 것들이 내면의 것들이고, 더 높은 것들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려감”은 자연적, 지상적인 것들을 향하여 감을 서술하는데, 그 이유는 이것들이 외면의 것들이고, 외견상 보다 더 낮다 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여기서와 다른 구절에서도 많이 발견하게 되는 표현 방식이 가난안의 토지로부터 이집트로 갈 경우는 “내려감”, 그 반대일 경우는 “올라감”으로 표현되어 우리로 하여금 읽히게 하는 것이다. 그 이유가 가나안의 토지는 천국인 것을 의미하고, “이집트”는 자연인 것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표현 의미에서 가나안의 토지는 천국의 왕국이고, 결과적으로 천적 수준과 영적 수준의 선들과 진리들이고, 이것들은 주님의 왕국이 있는 인간에서 내면 부분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그 반면, 표현 의미에서 이집트는 자연적 수준의 왕국, 결과적으로 외적 교회 (교회의 바깥 측면)에 있는 선들과 진리들, 그리고 기억 속의 지식들 대분분이다.

그리고 우리는 살 것이고, 죽지 않으리라. 이는 영적 생명을 의미한다. 이는 “살고, 죽지 않음”의 의미가 영적 생명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 이유가 “살게 하고 죽지 않게 하는 것”은 내적 의미에서는 영적 생명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다른 삶에서, “생명(life)”에 의해 일반적 측면에서는 천국이, 특수적 측면에서는 영원한 행복이 의미되기 때문; 그리고 “죽음(death)”에 의해서는 일반적 측면에서는 지옥이, 특수적 측면에서는 영원한 불행이 의미되기 때문이다. 이는 말씀의 많은 구절로부터 여러분 스스로도 쉽게 확인된다. 일반적으로 천국, 특별하게는 영원한 행복이 “생명”이라 불리우는 이유는 천국에 선으로부터 지혜와 진리로부터의 총명이 있기 때문; 그리고 선으로부터의 지혜 안에, 진리로부터의 총명 안에 주님으로부터의 생명이 있고, 이 분으로부터 모든 생명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옥에는 위의 반대가 있기 때문, 즉 선 대신에 악, 진리 대신에 거짓이, 고로 영적 생명의 소멸이 있어, 지옥은 상대적으로 죽음인 셈이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영적인 죽음은 악과 거짓이다, 그리고 인간에서의 경우, 악을 뜻하는 것, 그로부터 거짓을 생각하는 것이다. 악귀들과 악령들은 그들이 살아 있지 않다, 또는 죽어 있다 라고 말해지는 것을 듣기를 즐거워한다. 이들은 자기들은 생명을 가지고 있다고, 그 이유가 자기들도 뜻하고 생각하기 때문이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들에게 말해지는 바, 생명은 선과 진리 안에 있는 바, 악과 거짓 안에 있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 반대되기 때문이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내려갔다. 이는 노력과 행동을 의미한다. 이는 기억 속의 지식들을 수단으로 자신들에게 진리들을 포획하고 자기 것이 되게 하려 노력하고 행동함인데, 이는 “내려감”, 즉 이집트로 감이 노력과 행동함이다.

요셉의 열 형제. 이는 상응을 이루는 교회 속의 진리들을 의미한다. 이는 “형제들”이 교회 속에 있는 진리들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교회 속의 진리들은 상응함으로부터 신성으로부터의 진리인 “요셉의 형제들”이라고 불리운다; 그 이유가 상응함이 그것들을 형제와 형제되게 결합하게 해주기 때문이다. “야곱의 아들들”에 의해 신앙으로부터의 모든 것, 또는 일반적 측면에서 교회의 진리들이 의미되는데; 마찬가지로 “요셉의 형제들”에 의해서도 의미된다; 그러나 이 의미됨은 상응으로부터서 이다. 레아(와 두 몸종)에 의한 야곱의 열 아들들은 외적 측면에서의 교회 속의 진리들이 의미되고, 라헬에 의한 야곱의 두 아들들은 내적 측면에서의 교회 속의 진리들이 의미된다. 이는 앞에서 살폈다. 교회의 내적 부분과 외적 부분이 “형제들”임도 앞에서 살폈다. 주님 자신도 선행과 신앙을 통하여 상응함에 있는 파생된 선들과 진리들, 즉 진리들 안에 있고, 이 진리들로부터 파생되는 선 안에 있는 이들을 “형제들”이라 부르셨다:
왕이 그들에게 말할 것이다, 참으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내 형제들 중의 지극히 작은 자 중의 하나에게 그것을 행했었던 만큼에서, 너희는 그것을 나에게 했었었다 (마. 25:40).
다른 구절에서: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말하시기를, 누가 나의 어머니, 또는 나의 형제들이냐? 그 리고 빙둘러 보시면서, 그분은 말하셨다, 나의 어머니와 나의 형제들을 보라! 하느님의 뜻 을 행하는 자는 누구든지, 나의 형제이고, 나의 자매이고, 나의 어머니이다
(막. 3:33-35; 마. 12:49; 눅. 8:21).

이집트로부터 곡식을 사기 위해서. 이는 기억 속의 지식들을 수단으로 진리의 선이 자신들의 것이 되게 하기 위해서를 의미한다. 이는 “사다”의 의미가 자기 것이 되게 하다이다로부터; “낟알”의 의미가 진리의 선이다로부터; 그리고 “이집트”의 의미로부터 기억 속의 지식들이다로부터 알려진다.

그러나 요셉의 형제, 베냐민. 이는 중매자(the intermediate)인 천적 평면 속의 영적 부분을 의미한다. 이는 베냐민의 표현이 천적 평면 속의 영적 부분(the spiritual of the celestial)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베냐민의 표현이 영어 번역으로는 the spiritual of the celestial인데, 천적 평면의 영적 부분, 또는 천적 평면의 경계선 부분, 요셉의 표현은 the celestial of the spiritual인데, 영적 평면 속의 천적 부분, 또는 영적 평면 속의 중앙 부분으로 역자는 번역하고 이해하고 있다. 역자 주.) 일반적 측면에서 알아야 할 것은, 내적 부분은 외적 부분과 교통 관계를 가질 수 없다는 것, 그 반대로 중매자가 있어야 교통된다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요셉”인 신성으로부터의 진리는 “야곱의 아들들”인 자연 평면에 있는 일반적 측면의 진리들과 “베냐민”인 중매자 없이 교통 할 수 없다. 이 중매자가 “천적 평면의 영적 부분”이라 불리운다. 이 중매자는 이런 상황이기에, 이것은 내적 부분과 외적 부분 양쪽에 참가하고 있다. 중매자가 반드시 있어야 하는 이유는 내적 부분과 외적 부분은 서로에서 구분되어 있고, 너무나 구분이 잘되는 바, 그것들은 분리되어질 수 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인간이 죽을 때, 인간의 최말단인 신체가 그의 영인 내적인 것과 분리되는 경우이다. 중간의 것이 떼어질 때 외적인 것은 죽는다(아무 소용이 없다), 그리고 중매자가 사이에 있을 때 외적인 것은 살아 있는다 (유익하다). (어떤 약성분이 어떤 암에 특효가 인정되어도 이 약을 인체가 흡수하여 사용하지 못하면 아무 소용이 없는 약일 뿐이고, 이를 돕는 촉매제가 더불어 발견되어야만 환자에게 도움이 되는데, 이때의 촉매 물질에 해당하는 것이 여기서의 베냐민일지 모른다 역자주.) 야곱의 아들들이 베냐민 없이 있을 때, 요셉은 그의 형제들에게 자신을 명백해지게 할 수 없었다; 그런 이유로 그들에게 거의 말을 하지 않았다(구태여 설명을 하려 시도하지 않았다), 하여 그들을 스파이라고 부르고, 구치소에 감금까지 했다; 또한 위와 같은 이유에서 야곱의 아들들도 요셉을 알지 못했다.
이 중매자의 본성인 것이 베냐민에 의해 표현되었고, 이것이 천적 평면 속의 영적 부분이라 불리운다는 것을 납득 차원에 와닿게 하는 것이 쉽지는 않다, 그 이유가 이에 관한 지식의 결핍 때문, 즉 “요셉”인 영적 평면의 천적 부분에 관한 지식에 관하여, 그리고 신앙의 진리들에 관하여, 이것이 “야곱의 아들들”인 기억 속의 지식에만 있는 경우에 관하여, 그리고 “베냐민”인 천적 평면의 영적 부분에 관한 지식의 결핍 때문이다. 그러나 천국에서 이 중매자의 본성은 천국의 빛에서 보여지고 있는 바, 청명한 날에서와 같다, 이 안에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표현들을 수단으로 지각함이 있다; 그 이유가 천국의 빛은 신성으로부터 총명 자체이기 때문, 이로부터 이 빛을 수단으로 표현되는 모든 점에 관련하여 지각하는 힘이 있기 때문이다. 세상의 빛과 더불은 경우는 이와 다르다. 그 이유가 세상의 빛 안에는 총명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상의 빛을 수단으로 이해력은 그것 안으로의 천국의 빛의 유입을 수단으로 하도록, 동시에 천국의 빛 안에 있는 지각의 유입을 수단으로 해보도록 유도되어진다. 그러므로 인간이 천국의 빛 안에 있는 만큼에서 그는 총명 안에 있다; 그가 총명 안에 있는 만큼 그는 신앙의 진리들 안에 있다, 그리고 그가 신앙의 진리들 안에 있는 만큼에서 그는 사랑의 선 안에 있다; 결과적으로 천국의 빛 안에 있는 만큼 그는 사랑의 선 안에 있다.

야곱은 그의 형제들과 함께 보내지 않았다. 이는 그들이 중매자 없이 있었다를 의미한다. 이는 이미 말해진 바로도 납득될 것이다.

그 이유는 그가 말하기를, 행여 그에게 해악이 닥칠까 하고 말한 때문이다. 이는 “요셉”인 영적 평면 속의 천적 부분이 없으면 그는(야곱은) 멸해지고 말리라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해악이 닥침”이 멸해짐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 말은 아버지에 의해 말해진 것이데, 그 이유는 그가 그를 사랑했기 때문, 그리고 그가 요셉 같이 형제들 사이에서 멸해지지 않도록, 그가 멸해질까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그의 말이 (혼잣말 같은데도) 말씀 안에 추가로 삽입된 이유는 이런 내적 의미 때문, 즉 중매자는 내적 부분 없이 외적 부분과만 더불어 있으면 멸해질 것이다는 이유에서 이다; 그 이유가 중매자는 “베냐민”, 외적 부분은 “야곱의 아들들”, 내적 부분은 “요셉”이기 때문이다. 모두 각각의 중매자는 내적 부분 없이 외적 부분과만 있을 때 멸해진다, 그 이유는 중매자도 내적 부분으로부터 존재함이 오기 때문이다, 또한 이로부터 존속도 하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중매자는 내적인 것이 그 자체와 연계할 목적에서와 애착으로부터 외적인 것을 바라봄에 의해서 존재 안으로 와지기 때문이다. 고로 중매자는 내적인 것(내적 인간)과 결합되어 있어, 내적인 것을 통하여 외적인 것과도 연계된다. 그러나 내적인 것 없는 외적인 것과는 아니다. 이로부터 분명한 바, 중매 부분은 내적 부분 없이 외적 부분과만 더불어 있다면 멸해지고 만다는 것이다. 더욱이 이것은 일반적 법칙이다, 즉 영계의 것들에서도, 자연계의 것들에서도 공히 일반적 법칙이다. 즉 어떤 것은 (대를 잇는 경우같이) 그것의 앞서 있는 것과 더불어 존속할 수 있다는 것, 즉 그것의 앞서 있는 것 없이 그것의 뒤잇는 것은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후자의 것만으로라면 필시 멸해진다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자체에 앞서는 것과 연결됨이 없이 있는 모든 것은 처음의 것(the First)과의 연결도 없다. 처음이신 그분으로부터 모든 것은 존재 안으로 오고 존속된다.

이스라엘의 아들들은 (이집트로) 가는 이들 사이에 끼여 (곡식을) 사려고 왔다. 이는 영적 진리들도 여느 다른 진리들 처럼 기억 속의 지식을 수단으로 포획되어 지기를 바랬다를 의미한다. 이는 “이스라엘의 아들들”의 의미가 영적 진리들이다로부터; “사다”의 의미가 포획하는 것이다로부터; 그리고 “가는 이들 사이에”란 여느 다른 진리들처럼, 즉 그것들이 기억 속의 지식들을 수단으로 포획되리라는 것이다.

그 이유가 기근이 가나안의 토지에 있었기 때문이다. 이는 자연 평면에 있는 교회 속의 것들이 황폐되어 있음을 의미한다. 이는 “기근”의 의미가 지식들의 결핍이다로부터, 그 결과 황무함이다; 그리고 “가나안의 토지”의 의미가 교회이다로부터; 그리고 이것이 교회이기 때문에, 이것은 교회 속에 있다. 그러므로 “기근이 가나안의 토지에 있다”에 의해 교회 속의 것들 측면에서 황무함이 의미된다. 황무함이 자연 평면에서 있는 이유는 이런 사항들이 야곱의 아들들을 서술하기 때문, 그리고 이들을 수단으로 외적 교회의 것들이 의미되기 때문, 결과적으로 자연 평면에 있는 교회에 관한 것들이다.

6-8절. 그리고 요셉, 그는 그 토지의 통치자였다. 그는 그 토지의 모든 백성에게 팔고 있었다. 그리고 요셉의 형제들이 왔다, 그리고 땅에 자기들의 얼굴을 대어 그에게 절하였다. 7 그리고 요셉은 그의 형제들을 보았다, 그리고 그는 그들을 알아 보았다, 그러나 자신을 그들에게 낯선 자로 만들었다, 그리고 그들에게 알기 어려운 것을 이야기했다. 그리고 그가 그들에게 말하기를, 너희들은 어디에서 왔느냐? 그리고 그들은 말했다, 양식을 사려고 가나안의 토지로부터 왔습니다. 8 그리고 요셉은 그의 형제들을 알아보았으나, 그들은 그를 알지 못했다.

그리고 요셉, 그는 그 토지의 통치자 였다. 이는 영적 평면 속의 천적 부분, 또는 신성으로부터의 진리가 기억 속의 지식들이 있는 자연 평면을 다스렸다를 의미한다. 이는 요셉의 표현함이 영적 평면의 천적 부분이다로부터; “통치자”의 의미가 통치하는 자이다로부터; “토지”, 여기서는 이집트의 토지인데 이것의 의미가 자연적 수준의 마음, 고로 자연 평면이다로부터 알려진다. 영적 평면의 천적 부분이 신성으로부터의 진리인 이유는 주님의 내적 인간은 그것이 충분히 신성이 되기 전, 신성 자체의 그릇인 바, 영적 평면의 천적 부분이었는데, 이렇게밖에 말할 수 없는 이유는 어느 다른 말로, 또는 어떤 생각의 틀로 표현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신성을 담는 이 그릇은 신성으로부터의 진리와 같은 것이다.

그는 그 땅의 모든 백성들에게 그것을 팔았다. 이는 모든 자기 것이 되게 함이 요셉으로부터 있었다를 의미한다. 이는 “판다”의 의미가 자기 것이 되게 함이다로부터; 그리고 “토지의 백성”의 의미가 교회의 진리들이다로부터, 여기서는 자연 평면에 있는 교회의 진리들이다로부터 알려진다.

요셉의 형제들이 왔다. 이는 중재자가 없는 교회의 일반 진리들을 의미한다. 이는 “요셉의 형제들”의 의미가 교회의 일반적 진리들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들이 중재자 없이 있었는 이유는 그들이 중재자인 볘냐민이 없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신들을 구부려 땅에 얼굴을 대어 그에게 절했다. 이는 굴종함을 의미한다. 이는 “자신들을 구부림”이 굴종함이다로부터, 그리고 “땅에 얼굴을 댐”의 의미가 숭배함으로부터의 굴종함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여기서의 굴종함(humiliation)은 인정함으로부터의 굴종함, 즉 내적 굴종함이 아니라, 외적 굴종함인데, 그 이유는 그 토지의 통치자의 면전에서 인사차 하는 관습적 표현의 하나였기 때문이다. 내적이지 않고 외적이기만 한 굴종이 뜻해진 이유는 아직 상응함이 없기 때문, 그리고 상응을 통한 결합함이 아직 없기 때문이다. 자연 평면이 이 상태 안에 있을 때, 실로 이것은 마지막 등차조차에서도 겸허 자체일 수 있다, 그러나 획득된 습관으로부터 만 일 뿐이다. 이것은 진짜 애착 없이 생산되는 제스추어이고, 마치 혼이 없는 육체일 것이다. 이런 굴종이 여기서 뜻해진다.

그리고 요셉은 그의 형제들을 보았다, 그리고 그는 그들을 알아 보았다. 이는 영적 평면 속의 천적 부분을 수단으로 지각하고 인정함을 의미한다. 이는 “보다”가 지각함이다로부터; 요셉의 표현함이 영적 평면의 천적 부분이다로부터; “그의 형제들”의 의미가 교회의 일반적 진리들이다로부터; 그리고 “알아보다”가 지각함으로부터 인정함이다로부터 알려진다. 요셉 쪽에서의 인정함, 그의 형제들 쪽에서의 비 인정함에 대하여는 아래에서 살핀다.

그러나 자신을 그들에게 낯선 자로 만들었다. 이는 중매자가 없기 때문에 있는 비 결합을 의미한다. 이는 “자신을 낯선 자로 만들다”의 의미가 여기서 비 결합인 이유는 중매자가 없어 낯설게 나타나기 때문이다, 마치 내적 진리, 또는 신성으로부터의 직접적인 진리는 외적 진리들에 있는 이들에게는 이상한 듯 나타나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요셉이 자기를 그의 형제들에게 낯선 자로 만든 것은 이간질을 하기 위함 때문이 아니고 그가 그들을 사랑했기 때문, 하여 그는 되돌아가서 울었던 것이다 (24절); 그러나 그의 형제들 쪽에서는 이상함이었는데, 비 결합 때문이고, 이것이 요셉이 자신을 억누름에 의해서 표현된 셈이다. 예를 들면, 말씀에서 자주 언급되는 말 중에, 여호와 또는 주님은 백성에게 “그분 자신을 낯설게 만드신다”, 또는 그들에게 “반대하신다”, 그들을 “거절하신다”, “정죄하신다”, “지옥으로 던지신다”, “벌하신다”, 그리고 이런 등등을 가지고 “즐거워 하신다”고까지도 말해지는데, 내적 의미에서 뜻해지는 것은, 백성들이 자신들을 여호와 또는 주님에게 낯설게 만든다는 것, 그분에게 반대한다는 것, 그분의 얼굴로부터 그것들을 거절하는 악 안에 있다는 것, 위와 같은 것은 주님 또는 여호와로부터 결코 진행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말씀에서 그렇게 서술되는 이유는 외관(나타남, appearance) 때문이다; 그 이유가 딘순한 자에게 그런 식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는 내적 진리에서도 비슷해서, 내적 진리들이 중매하는 것에 의한 결합 없이 외적 진리에 의해서 시야에 잡혀질 때 이다. 이는 때로는 완전 반대로도 시야에 잡히기도 한다. 그 이유가 중간 매개에 의한 결합 없는 것들은 천국의 빛으로부터 분리된 세상의 빛으로부터가 아니면 조망할 수도 없기에, 결과적으로 이상한 것, 낯선 것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주제에 관하여는 이어지는 것에서 말해질 것이다.

그리고 그들에게 알기 어려운 것을 이야기했다. 이는 이런고로 비 상응이다를 의미한다. 이는 앞의 말, “그들에게 자신을 낯설게 만들었다”에서와 같은데, 전자는 의지로부터의 애착에 주목한 것이고, 후자는 이해력의 생각에 주목한 것만이 차이가 있을 뿐이다. 그 이유가 내적 의미에서 “이야기를 하다”는 생각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애착이 없을 때, 내적 부분은 외적 부분에 낯설게 나타난다. 그리고 상응함이 없을 때, 내적 부분이 어려운 것을 이야기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상응은 내적 부분이 외적 부분에 나타남이다. 그리고 그것의 표현함은 아니다. 그러므로 어렵다(난해하다, hardness)가 와진다.

그리고 그는 그들에게 말했다, 너희는 어디에서 왔느냐? 이는 조사함을 의미한다.
이에 대하여는 추가 설명이 필요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말했다, 가나안의 토지로부터입니다. 이는 그들이 교회 속에 있었음을 의미한다. 이는 “가나안의 토지”가 교회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양식을 사려고. 이는 선으로부터의 진리를 내 것 되게 하려고를 의미한다. 이는 “사다”의 의미가 자신들에 잘 어울려지게 하는 것, 즉 내 것 되게 하는 것이다로부터; 그리고 “양식”의 의미가 선으로부터의 진리이다로부터 알려진다.

5427. 그리고 요셉은 그의 형제들을 알아 보았다. 이는 교회 속의 이런 진리들은 신성으로부터의 진리의 빛으로부터 영적 평면 속의 천적 부분에 나타났다를 의미한다. 이는 “알아보다(know)”의 의미가 지각하다, 보다, 고로 나타나다 이다로부터; 요셉의 표현함이 영적 평면의 천적 부분이다로부터; 그리고 “그의 형제들”의 의미가 교회의 일반 진리들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리고 “요셉이 자기 형제를 알아봄”에 의해 교회의 일반 진리들이 영적 평면의 천적 부분에 나타났다가 의미되기 때문에, 이어지는 것은 영적 평면의 천적 부분이 있었던 빛으로부터 나타났다, 고로 영적 평면의 빛으로부터 나타났다. 이 빛으로부터, 이는 신성으로부터의 진리인데, 아래 있는 진리들의 각각 그리고 모두에, 또는 자연 평면의 각각 그리고 모두에 나타난다; 그러나 중매자가 없으면, 더욱이 상응함이 없으면, 그리고 상응함을 통하여 결합함이 없으면 그 역으로는 아니다. 이것은 이런 사실로부터 알는지 모른다: 천국들에 있는 천사들, 고로 천국의 빛에 있는 천사들은 천국들 아래 다음인 영들의 세계에서 거행되는 것을 볼 수가 있다, 또한 보다 더 낮은 땅에서, 지옥 안에서 거행되는 것조차 볼 수가 있으나 이와 반대로 보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
같은 이치로, 보다 더 높은 천국의 천사들은 그들 아래 보다 더 낮은 천국에서 되어가는 모든 것을 볼 수가 있다; 그러나 중매자가 없으면 그 반대는 아니다. 중매하는 영들이 있는데, 이들을 통하여 이리저리로 교통함이 결과되어진다. 그러므로 아래쪽에 있고, 중매자도 없고, 더욱이 상응함이 없을 경우, 그들은 천국의 빛으로 쳐다보았자, 그들은 아무것도 보지못하고 오직 어둠만이 나타난다; 그렇지만 거기 있는 이들은 매우 청명한 날에 있다. 이는 나의 이런 경험 하나로도 알는지 모른다: 나에게 큰 성이 나타났는데, 그 안에 수천 천의 다양한 대상물이 있었고, 모두는 기쁨을 주고 아름다웠다. 나에게는 중매자가 주어졌기 때문에 나는 그 대상물을 보았는데, 나와 함께 있던 영들은 중매자가 없는 탓에 거기 지극히 작은 대상물 하나도 보지 못했다; 그리고 네게 말해진 바, 상응함 안에 있지 않은 이들은 설사 도성 안에 있을 지라도 거기에 있는 단 하나도 지각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내면의 인간, 또는 혼이라 불리우는 인간 영의 경우도 위와 같은 경우가 있다, 내면의 인간은 외면의 인간이 하는 모든 것을 볼 수가 있다; 그러나 상응함과 중매함이 있지 않으면 그 반대로는 아니다. 결과적으로 상응함 안에 있지 않은 외면의 인간에게 내면은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나타난다, 따라서 내면의 인간에 관하여 이런저런 말이 있을 때, 외면의 인간으로서는 그에 대해 생각하는 것조차 꺼려하고 급기야 싫증을 내기까지 한다. 그러나 상응함이 있을 때, 외면의 인간은 중매자를 통하여 내면 안에서 되어지는 것을 보게 된다; 그 이유가 내면의 인간이 가지는 빛은 중매자를 통하여 외면의 인간이 가지는 빛 안으로 흐르기 때문이다, 즉 천국의 빛이 자연계의 빛 안으로 흐른다는 것, 그리고 자연계의 것을 계발한다; 이 계발됨으로부터 내면의 역사함도 나타난다. 이러므로 해서 외면의 인간, 또는 자연적 수준의 인간에 총명과 지혜가 온다. 그러나 만일 중매자가 없으면, 특히 상응함이 없으면, 내면의 인간이 외면에서 되어가는 것을 보고 지각하고, 그 정도에서 외면의 인간을 인도한다; 그러나 반대의 경우는 아니다. 만일 반대함, 모순됨, 상반되는 점이 있다면, 다시 말해 외면의 인간이 내면의 것을 통하여 흐르는 것을 남용하거나 타락하게 하거나 소멸되게 한다면, 내면의 인간은 천국으로부터 있는 그의 빛을 박탈당한다, 그리고 천국쪽으로의 교통도 그에게 닫힌다; 그러나 지옥으로부터의 교통함이 외면의 인간을 향하여 열려진다. 이 주제는 이어지는 것 안에서 보여질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를 알지 못했다. 이는 신성으로부터의 진리는 천국의 빛을 수단으로 계발되지 않은 자연적 수준의 빛 안에서는 나타나지 않는다를 의미한다. 이는 방금 지나온 대목인 “요셉은 그들을 알아보았다”에 의해서는 교회의 일반적 진리가 영적 평면의 천적 부분에는 그것의 빛으로부터 나타났다가 의미되었는데, 지금의 경우는 “그들은 그를 알지 못했다”인 바, 이는 신성으로부터의 진리, 또는 영적 평면의 천적 부분은 천국의 빛에 의해 계발되지 않은 자연적 수준의 빛에 있는 교회의 일반적 진리들에게는 나타나지 않았다가 의미되어진다. 이 주제가 어떻게 되어가는지는 방금 앞에서 예들에서 살폈는 바 이미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한가지 신비함을 하나 더 예증으로 살펴보자. 즉 천국의 영광(glory)이다. 중매자도 없이, 더군다나 상응함도 없이 천국의 빛으로부터 계발되지 않은 자연적 수준의 빛으로부터 천국의 영광을 생각하는 이들은 자연계에서 누리는 영광이라는 생각 그 이상의 것을 도저히 생각하지를 못한다. 이들이 예언적 계시들을 읽을 때, 특히 요한의 계시록서를 읽을 때 천국에 있는 모든 것은 최고로 장엄한 아름다움임을 만나게 하는 단어 영광을 두고도 그러해진다는 말이다. 이들에게 이렇게 말해주면, 즉 천국의 영광은 세상의 모든 장엄하다는 것을 훨씬 능가하고 비교가 불가능하다고, 게다가 지상의 영광은 천국의 영광이 아니다고, 그러나 천국의 영광은 거기에 나타나는 모든 것으로부터 빛을 내는 신성이다는 것, 그리고 신성한 사항들을 지각하는 것이다는 것, 그 결과 지혜이다는 것이다; 이 영광은 모든 지혜의 근원을 자신이 아닌 주님에게 돌리고, 지혜에 비교하건대 거기 있는 영광은 아무것도 아닌 수준으로 간주하는 천국에 있는 이들에 의해 소유되어진다는 것이다. 천국의 이런 영광이 중매자 없고, 상응함도 없는 자연적 수준의 빛으로만 관조된다면, 이 빛은 도무지 인정되지 않는다.
다른 예로 더 생각해보자: 천사의 힘, 능력이다. 천사의 힘에 관해 생각하는 이들, 특히 말씀에서 언급된 천사장(대천사, archangel)들의 힘에 관해 생각하는 이들이 천국의 빛으로부터 계발되지 않은 자연적 수준의 빛으로부터, 그런 이유가 중매자가 없고, 상응함도 없기 때문이다면, 세상에 있는 권능자의 힘, 즉 자기 아래에 수천 수만의 하급자를 거느리고 호령하는 권능자의 힘 외의 다른 생각을 만들어낼 수 가 없다. 게다가 이런 특출함이 천국에서도 규율될 것이다는 생각까지 상상에 보태고 있다. 어쨌든 천사의 힘은 실로 세상의 권능자의 모든 힘을 능가한다, 게다가 천사의 힘은 그곳의 제아무리 작은 천사라해도 심히 위대해서 수천 수만의 지옥의 것들을 그들의 지옥들로 몰아내 던질 수가 있다는 것, 이런 관계로 말씀에서 이들이 “권능자들”, 또는 “지배자들”이라 불리운다; 그럼에도 그들 중의 지극히 작은 자도 심히 위대한데, 그 이유는 모든 권능은 주님으로부터 이다는 것, 자신으로부터서는 아무것도 없다는 것, 고로 천국에서 힘들을 가지는 이들은 자아로부터 파생되는 힘들을 지닌다는 이들과는 정반대이다는 것을 지각하고 믿고 뜻한다는 말 또한 중매자 없고, 상응함도 없이 자연적 수준의 빛에 의해 관조하는 이들로서는 인정되지 않는 사실에 불과하다.
또 다른 예를 생각해보자: 중매자 없이, 상응함도 없이 자연적 수준의 빛으로부터 자유를 바라보는 이들은 자유란 자신으로부터 생각하고 뜻하는데 있다는 것, 자신이 생각하고 뜻한 것을 어떤 점검도 없이 행동할 수 있는 것이 자유이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자신이 생각하고 뜻하는 것은 무엇이든 가지도록 하기 위하여 최고의 부자이기를 바란다, 또한 자신이 생각하고 뜻하는 것을 실행할 수 있기 위하여 최고의 권력자이어야 하기를 바란다. 그러나 진짜 자유, 즉 천국의 자유는 그의 자유 같지 않다는 것, 즉 자신으로부터 뜻하는 것, 자아로부터 생각하는 것이 자유가 아니다는 것, 그러나 천국으로부터 생각하고 뜻하는 것이 자유이다는 것, 천사들로 하여금 자신들로부터 생각하고 뜻하게 한다면, 그들은 즉시 슬픔에 잠길 수밖에 없다는 것, 이런 사항을 위 인간은 인정하지 않는다. 이상 예들로부터 신성으로부터의 진리는 천국의 빛에 의해 계발되지 않은 자연적 수준의 빛에서는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이 어떠한지를 보여주었을 것이다. 이 자연적 수준의 빛이 “요셉을 알아보지 못하는” 요셉의 형제들에 의해 의미되어 있다.

9-16절. 그리고 요셉은 그가 그들에 관해 꾸었던 꿈을 회상했다, 그리고 그들에게 말했다, 너희는 스파이이다, 너희들은 이 토지의 벌거벗음을 보려고 왔다. 10 그리고 그들은 그에게 말했다, 아닙니다, 나의 주여, 양식을 사기 위하여 당신의 종들은 왔습니다. 11 우리는 모두 한 사람의 아들입니다. 우리는 정직합니다. 당신의 종들은 스파이가 아닙니다. 12 그리고 그는 그들에게 말했다, 아니다, 그러나 이 토지의 벌거벗음을 보려고 너희는 왔다. 13 그리고 그들은 말했다, 당신의 종 우리들은 가나안의 토지에서 한 사람의 아들들로서 열 두 형제들입니다. 그리고 보다시피 막내는 오늘 우리의 아버지와 함께 있고, 그리고 한 명은 있지 않습니다. 14 그리고 요셉은 그들에게 말했다, 이것이 내가 너희에게 이야기한 그것이니, 말하기를 너희는 스파이이다. 15 그런고로 너희들은 입증해야 할 것이다. 바로의 생명에 의해 너희는 너희 막내가 여기에 오지 않으면 여기로부터 나가지 못할 것이다. 16 너희 중 하나를 보내라, 그리고 그에게 네 형제를 데리고 오게 하라, 그리고 너희들은 갇혀 있을 것이다, 그리고 너희들의 말들이 너희와 더불어 진실한지 여부를 증명할 것이다. 또는 바로의 생명에 의해 너희는 스파이들이 확실하다.

그리고 요셉은 자기가 꾸었던 꿈들을 회상했다. 이는 영적 평면 속의 천적 부분이 자연 평면의 교회의 진리들에 관련하여 발생하게 될 것을 예견했음을 의미한다. 이는 “회상함”의 의미가 현존함이다로부터, 그 이유가 회상되어지는 것이 표출되어지기 때문이다. 요셉의 표현함이 영적 평면의 천적 부분이다로부터: “꿈들”의 의미가 예견, 예보, 그리고 사건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야곱의 아들들에 의해 의미된 진리들인 자연 평면에서 교회의 일반적 진리들에 발생할 것을 예견함이다. 그러므로 또한 “그가 그들에 관하여 꾸었던” 것이라 말해졌다.

그리고 그들에게 말했다. 이는 거기로부터 지각함을 의미한다. 이는 “말하다”의 의미가 지각하다로부터 알려진다.

너희는 스파이들이다. 이는 그들은 이득만을 추구하려 왔음을 의미한다. 이는 “스파이들”의 의미가 이득만을 추구하는 것이다로부터 알게 되는데, 이 의미밖에 “스파이”가 내적 의미에서 의미하는 것은 없는데, 이는 시리즈로부터 이다. 그 이유가 내적 의미에서 취급되는 것이 교회의 진리들이기 때문, 이 진리들이 자연 평면에 잘 어울리려면, 중개자를 통하여 영적 평면의 천적 부분을 수단으로 하지 않고는 잘 어울리거나 자기 것이 됨이 있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교회의 이런 진리들이 “야곱의 아들들” 또는 “요셉의 형제들”로; 영적 평면의 천적 부분이 “요셉”으로; 중개자가 “베냐민”으로 의미된다. 어떻게 이렇게 되는지에 대하여는 앞에서 살폈다, 즉 교회의 진리들, 이것은 교리적인 것들이라 불리우고, 초기 삶에서 배웠을 때, 마음 안으로 가져와져, 여느 기억 속의 지식들 같이 기억에 위탁되어 있다, 그리고 이 진리들 역시 인간이 자신의 눈으로 이 진리들을 다시 관조할 때까지 여느 지식들이나 마찬가지로 거기에 머무르는데, 그다음 당사자가 그 진리를 진정 진리인지 여부를 조사하고, 진리이다고 본 후 그것들에 따라 행동하기를 뜻하면, 이 진리들은 더 이상 기억 속의 지식들이 아니고, 삶의 교훈의 위치로 옮겨지고, 마지막으로 그의 생명이 된다; 그 이유는 이런 방법에서 그 진리가 자기에게 어울려져 자기 것이 되는 바, 그의 생명 안으로 들어가기 때문이다.
성숙된 시기에 도착한 이들, 더구나 노령에 도달한 이들, 그런데 교리적인 것들이라 불리우는 교회의 진리들을 자신의 눈으로 관조하지 않았던 이들, 그런데 그때서야 그 진리들이 진리인지 여부를 보았다면, 하여 그것들에 따라 살기를 기꺼이 선택했다면, 이 진리들은 당사자에게서 여느 기억 속의 지식들 수준에서만 유지될 뿐이다; 다시 말해 그 진리들은 그의 자연적 수준의 기억에만, 그의 입술에서만 있다는 말이다. 그리고 그것들이 입술로 발음될 때, 그들은 그 진리들을 내면의 인간, 또는 심정으로부터 발음되는 것이 아니라, 외면의 인간으로부터와 입으로부터만 발음하고 있다. 인간이 이 상태에서 있을 때, 그가 교회의 진리들이 진리이다고 믿는 것이 가능할 수 없다, 설사 당사자가 그렇게 믿는다고 여긴다 해도 그렇다는 말이다. 그가 진리이다고 믿는다고 여기는 이유는 그가 다른 것들에 의지했기 때문, 그리고 다른 것들로부터의 가르침들을 자신 안에서 확증한 것 때문이다. 진짜인지 가짜인지를 다른 이들의 확증으로부터 취하여 확증하는 것은 매우 쉽다 (아마 설교에서 애용되는 예화가 그 한 예일 수 있다, 그 이유가 자신의 삶이 아닌 타인의 삶이기 때문이다. 역자 주); 그 이유가 이 확증함에는 창의력(ingenuity)밖에 더 필요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교회의 이런 진리들, 또는 교회의 진리들 안에 이런 방식에서 있는 이들이 “들판의 벌거벗음을 보기 위하여 오고 있는 스파이들”에 의해 의미되고 있다. 그 이유가 이들은 진리에 대한 어떤 애착함으로부터 자기들의 교회의 교리적인 것들을 믿지 않기 때문, 그러나 명예를 거머쥐고 이득을 획득함에 애착함으로부터 믿는 이들이다. 그러므로 자신 안에서 그들이 믿는 것은 사실상 거의 없다, 그리고 교리적인 것들을 마치 장사꾼이 자기 상품을 취급하는 수준에서 그의 마음의 자리에 있을 뿐이다. 그들이 자신들을 볼 때, 학식자요 영리한 자로 나타나는데, 그 이유는 자신들 안에서는 진리들이 진리들이 아니다고 보면서도, 그 진리들이 진리들이다고 믿는 사람들을 꼬드기는데는 영악하기 때문이다. 교회의 적지 않은 고위 성직자(dignitary)들이 이런 품성 속에 있다는 것은 다른 삶에 있는 그들로부터 분명해진다; 그 이유가 그들이 거기서 어디로 가든지, 그들은 자기들의 애착들 안에, 그리고 그 애착에서 파생되는 생각들로부터의 기운 안에 있기 때문이다, 이런 기운, 어떤 기운도 거기서는 타인에 의해 분명하게 (즉각적으로) 지각되기 때문, 이 기운은 각자의 신앙의 품질, 진리에 대한 자기들의 애착의 품질이 어떠한지를 감각 자체에 알려지게 하는 원인이 된다. 물론 세상에서 이것은 명명백백하게 만들어지지 않는다, 그 이유가 이런저런 것들에 대한 영적 지각이 세상에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저런 야롯한 품성 역시 자신들의 이득에 손상을 입히지 않기 위해 노출되지 않으려는 철저한 숨김의 노력 안에 있는 것도 지상에서는 얼마든지 가능하기에 쉽게 드러나지 않는다.
위와 같은 이들이 스파이들이다는 것은, 이런 인물들이 주로 하는 짓이 상대를 고발하거나 정죄당하게 하는데 사용하기 위하여 선으로부터 진리 안에 있는 상대의 인물이 지닌 약점과 과오들에 대한 자료를 수집하는데 남몰래 주력한다는 사실로부터 분명해질지 모른다. 이들이 자기들의 교회의 교리물로 자신들 안에서 확증한 적이 있어, 소위 교황주의자(Papist)라 불리든, 개혁주의자(Reformed)라 불리든, 궤이커(Quaker)라 불리든, 소시니안(Socinian)이라 불리든, 유태인이라 불리든 위의 인물들은 스파이밖에 더 아닐까? 그들은 선으로부터 진리 안에 있는 이들에게서 과오를 캐내면 이를 핑계로 진리 자체를 조롱하고 비난한다. 그 이유가 그들은 진리들이 진리이다는 것을 납득 못하기 때문이다. 그 이유인즉, 그들이 진리 자체를 위한 진리에 애착함이 없기 때문, 더욱이 삶을 위한 진리의 획득이 없기 때문, 오로지 이득 창출을 위한 진리의 습득만이 있기 때문이다. 이런 자가 말씀을 읽으면, 이것 마저 이득을 위한 교리적 기억 속의 지식을 확증하는 자료로서만 활용할 뿐이다; 이들 중 많은 이들이 말씀을 뒤적거리는 이유는 토지의 벌거벗음을 볼는지 몰라서이다, 즉 행여 교회의 진리들이 진리들이 아니다고 빗댈만한 대목이 있는지 라든가, 자기들이 진리들이라고 말하는 것을 타인들에게 설득하는데 유용한 것이 무엇이 있나를, 이것마저 이득을 위함 때문이다.
그러나 진리와 삶을 위해 진리에 애착하는 이들, 결과적으로 주님의 왕국을 위해 진리에 애착하는 이들은 교회의 교리적인 것 안에서 신앙을 가진다. 그들이 말씀을 뒤적거리는 것은 진리를 찾으려함 외의 다른 목적은 없다. 하여 이 진리로부터 자신들의 신앙과 양심을 만들어 낸다. 누군가가 그들에게 당신들은 당신이 태어나진 교회의 것들 안에 머물러야 할 것이다고 말한다면, 그들이 곰곰이 되새겨보는 것은, 만일 누군가가 유태주의자에게서, 소시니안에게서, 퀘이커에게서, 기독교 이방인에게서, 또는 교회 밖의 누구에게서 태어나든, 동일한 말씀이 그들에게 말해져 왔었다는 것; 그리고 여기가 교회이다! 여기가 교회이다! 여기에 진리들이 있다 그리고 이외 어느 곳에도 없다! 라고 외치지만 정작 모두 각각의 곳에 교회는 있다고 말해야 한다. 이럴 경우, 말씀은 자신의 계발을 위해서 주님께 경건히 기도함과 더불어 수색되어져야 할 것이다. 이러면 교회 내의 누군가를 혼란에 빠뜨리지 않는다. 그러면 이들은 다른 이를 비난할 일도 없게 될 것이다. 그들은 모든 이 각자는 낱개로서의 교회로서 자기 신앙으로 살고 있음을 알 것이다.

이 토지의 벌거벗음을 보려고 너희는 왔다. 이는 그들은 진리가 있지 않다는 것을 그 자체로 아는 것 말고 더 나은 어떤 것도 좋아하지 않으려 함을 의미한다. 이는 “보려고 오다”의 의미가 이것이 그렇다를 알기를 바라는 것이다, 고로 그들은 알기를 바라는 것외 더 나은 어떤 것도 좋아하지 않는다 이다; “벌거벗음”의 의미가 진리들 없이 있음이다로부터 (아래에서 살핀다); 그리고 “토지”의 의미가 교회이다로부터; 여기서는 그러므로 “토지의 벌거벗음”은 교회에 진리가 없다를 표시한다. “벌거벗음”이 진리가 결핍됨, 진리들이 없음인 이유는 일반적으로 “의복”이 진리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각 특별한 의복은 각 특별한 진리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벌거벗음”은 진리들 없이 있음을 의미하는데, 아래 인용 구절로부터 더 확인될 것이다.
이 경우가 어떠한지는 앞에서 살폈다- 즉 진리 자체와 삶을 위하여서가 아니고 이득만을 위하여 진리들을 배우는 이들은 자신 안에서는 교회의 진리들이 진리들이 아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그 이유는 이득에 애착함은 지상의 애착함이기 때문, 그리고 진리에 애착함은 영적 애착함이기 때문이다. 이것이든 저것이든 어느 하나가 지배권을 쥐어야함이 틀림이 없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 그러므로 이런 애착이 있는 곳에 저런 애착이 있지 않다; 즉 진리에 애착함이 있는 곳에 이득에 애착함은 없다; 반대로 이득에 애착함이 있으면 진리에 애착함은 없다. 결과적으로 만일 이득에 애착함이 지배권을 가진다면, 필시 뒤잇는 것은 진리들이 진리들이 아니기를 바라는 것밖에 더 없게 된다. 게다가 다른 것을 두고 진리이다고 믿는 것이다; 그 이유가 만일 내적 인간이 아래쪽인 지상의 것들을 쳐다본다면, 그리고 그것들 안에 모든 것을 귀속해둔다면, 그가 위쪽을 바라보는 것은 불가능하고, 천국의 어떤 것도 귀속해두지 못하여, 지상적인 것들이 천국의 것들을 완전히 빨아먹어 없는 듯 만들거나 숨막히게 하여 죽은 듯 있게 하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천국의 천사들은 지상의 것들 안에 있는 인간과 더불어서는 도저히 있을 수 없기 때문, 이럴 경우, 천사들은 물러서고 손을 뗀다, 그러면 천국의 것 안에 있는 이들과 같이 있을 수 없었던 지옥의 영들이 재빨리 접근하기 때문이다. 이 결과, 천국의 것들이 당사자에게는 아무런 가치도 없는 것으로 전락된다, 대신 지상의 것들이 그의 전부이다. 그리하여 이 당사자는 자기 보다 이런 분야에 더 학식있는 자가 있으면 나와보라는 식의 우쭐댐을 자신 안에 지니고, 교회의 진리들은 자신의 삶과는 무관한 바, 그 진리들은 자신에게는 진리가 아니어서 있고, 이런 진리들은 단순한 자에게나 유용할 뿐이다고 그의 심정은 뇌까린다. 어쨌든 인간은 지상적 애착이든 천국적 애착이든 어느쪽에 있어야만 하는데, 그 이유는 그가 천사와 악령을 모두와 동시에 함께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누구도 천국과 지옥을 이웃집을 왔다갔다하듯 동시에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당사자가 진리 자체를 위하여 진리에 애착할 때, 즉 신성한 진리가 있는 곳인 주님의 왕국을 위하여 진리에 애착을 둘 때, 고로 주님 자신을 위하여 진리 자체를 흠모할 때, 그에게 천사가 와있고, 그가 세상에서의 목숨을 위하여 유용한 만큼에서만 이득을 경멸하지 하지 않게 되고, 그 이득 마저 그의 목적이 아닌 유용함을 위해서에 국한되고 있다. 하여 지상의 물질이 천국적 목적인 마지막 목적을 위한 중간 목적, 중매적 목적에서 그치게 된다. 한마디로 자신의 심정이 이득이라는 것 위에 놓아두지 않는다는 말이다. “벌거벗음(naked)”이 진리들 없이 있다를 의미하는 구절들을 아래에서 살펴보자:
라오디게아의 천사에게 쓰거라, 그 이유는 네가 나는 부자이다, 나는 부자되어 왔었으므로 내가 필요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너는 가엾고, 비참하고, 궁핍하고, 눈멀고, 벌거벗고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다 (계. 3:17);
위 구절의 “벌거벗음”은 진리에 궁핍해 있음을 표시한다. 다시:
나는 네게 조언한다, 불에서 순수해진 나의 금을 사는 것이다, 그러면 너는 부자일는지 모른다, 그리고 흰 의복들을 (사라), 그러면 너는 옷입혀져 있을지 모른다, 그러면 네 벌거벗음으로부터의 수치스러움이 명백하게 만들어지지(드러내지지) 않는다 (계. 3:18);
“금을 사는 것”은 자신의 자아쪽으로 선을 포획하여 자기 것이 되게 함을 표시한다; “네가 부자일는지 모른다”란 천적 수준과 영적 수준의 선 안에 있는 것을 표시한다; “흰 의복들”은 영적 진리들을 표시한다; “네 벌거벗음으로부터의 수치스러움”은 선들과 진리들 없이 있음을 표시한다.
다시:
보라 나는 도둑 같이 온다, 지켜보는 자에게, 그리고 자기가 벌거벗은 채로 걷지 않도록 자기 의복들을 간수하는 자에게 복이 있다 (계. 16:15);
“자기 의복들을 간직하는 자”란 진리들을 간직하는 자를 표시한다; “벌거벗은 채로 걷는 것”은 진리들 없이 있다를 표시한다. 다시:
왕이 그의 오른쪽에 있는 이들에게 말할 것이다, 나는 벌거벗어져 있었다, 그리고 너희가 나를 옷입혀주었다; 그리고 왼쪽에 있는 이들에게 내가 벌거벗겨져 있었다, 그리고 너희는 나를 옷입혀 주지 않았다 (마. 25:36, 43);
위에서 “벌거 벗어 있다”는 자신들 안에 선과 진리에 대한 것은 아무것도 없음을 인정하는 선한 자를 표시한다.
다시:
이것이 단식이 아니더냐? 즉 네 빵을 굶주린 자에게 쪼개어 주는 것, 그리고 내쫒겨 고뇌하는 자를 네 집 안으로 데려오는 것, 네가 벌거벗은 자를 볼 때, 그를 덮어주는 것이다 (이. 58:7);
위도 앞 구절과 의미가 비슷하다. 다시:
예루살렘은 죄를 지었다; 그러므로 그녀는 월경이 있는 여인이 되었다; 그녀를 존경하던 모든 자가 그녀를 멸시한다, 그 이유는 그들이 그녀의 벌거 벗음을 보았기 때문이다 (애. 1:8);
위에서 “벌거벗음”은 진리들 없이를 표시한다. 다시:
너는 빼어난 미모를 지니게 되었다, 유방은 모양이 뚜렸해졌다, 그리고 네 머리털은 자라나졌다, 그럼에도 너는 벌거벗어져 드러나 있다. 나는 나의 스커트(skirt)를 네 위에 펼쳤다. 그리고 네 벌거벗었음을 덮었다. 너는 자신이 벌거벗어져 드러난 채로 있던 때인 네 젊은 시절들을 기억 못했다 (겔. 16:7, 8, 22);
위는 예루살렘에 관하여서 이다, 이를 수단으로 고대 교회가 뜻해진다, 즉 고대 교회가 설립되었던 처음과 그 후에 되어져간 교회의 모습에 관한 대단히 간결한 요약, 즉 처음에 진리들 없이 있었다, 그러나 후에 그들에게 진리의 가르침이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 가르침들을 거절했다. 다시:
만일 공정과 공평을 행하여 온 의로운 자가 그의 빵을 굶주린 자에게 준다면, 그리고 벌거벗은 자를 의복으로 덮는다면 (겔. 18:5, 7);
위에서 “의복으로 벌거벗은 자를 덮는 것”은 진리들을 바라는 이들에게 진리들을 가르치는 것을 표시한다. 다시:
나는 그녀를 벗겨 벌거벗음에 있어, 그녀가 태어난 그날 같이 있게 하여, 그녀를 광야로 만들 것이다, 그리고 가믐의 토지 같이 그녀가 놓여지게 하고, 목마름으로 그녀가 죽게 할 것이다 (호. 2:3);
위에서 “벗겨 벌거벗음”은 진리들을 박탈함을 표시한다. 나훔서에서:
나는 너의 벌거벗었음을 민족들에 보일 것이다, 네 수치스러움을 왕국들에 (나. 3:5);
위에서 “민족들에 벌거벗음을 보여주는 것”은 추함을 보여주는 것을 표시한다; 그 이유가 모든 추함은 진리들의 부족으로부터, 모든 아름다움은 진리들로부터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은 그에게 말했다, 아닙니다, 나의 주여, 우리는 정직합니다. 이는 그것들은 그 자체에서 진리들이다를 의미한다. 이는 “그에게 말하기를, 아닙니다, 나의 주여”의 의미가 그들은 “너희는 스파이들이다”라는 요셉의 말에 의해 암시되는 이득을 추구하려고 온 것이 아니다 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리고 진리들 없이 있는 자신들을 아는 것 보다 더 나은 어떤 것은 없다의 경우는 아니다는 것이다. 마치 요셉의 말, “토지의 벌거벗음을 보려고 너희는 와있다”에 의해 의미된 것 같은 경우가 아니다는 말이다; 이로부터 “우리는 정직합니다”로부터, 그것들은 자신들 안에서 진리들이다가 의미된다. 그 이유가 “정직하다(upright)”가 내적 의미에서 진리를 의미하는데, 이는 다른 많은 구절들에서도 같다. 그것들이 그 자체에서 진리들이다 라는 의미는 시리즈로부터 오고 있다; 그 이유가 자신들을 위하여 진리들을 포획한 이들에게 있어서, 교회의 진리들이 이득을 위하여 있게 되면, 진리들은 실로 진리가 아니다; 그럼에도 그것들은 그 자체에서는 진리들일는지 모른다, 그 이유가 일반적 측면에서의 교회의 진리들 자체가 “야곱의 아들들”에 의해 의미되기 때문이다. “정직하다”에 의해 추상적 측면에서 진리들이 뜻해지는 이유는 내적 의미에서는 모든 것이 인물로부터 추상화된 것, 그리고 인물에 관한 생각도 어떤 것에 대한 생각으로 바뀌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생각과 생각에 파생되는 말은 정작 그 말을 발생시킨 대상물 대신 말 안에 담긴 의미가 상대에게 전달되고 그렇게 전달받아야 생각함이나 말함의 취지에 어긋나지 않는다. (생각함과 말함을 나름대로 정리할 수 있는 성년이라면, 이것은 당연지시이다. 말함(또는 글자를 읽음)은 단어를 알려는 것이 아니라 뜻을 알려고, 알게 하려는 것임을 늘 우리가 사용하는 말함이나 읽기, 쓰기 임을 되짚어 생각하면 위의 말에 대한 납득은 쉽게 된다. 역자주); 더욱이 생각함, 이로부터 파생되는 말함은 이와 달리해서는 보편적이 되어지지 않는다, 그리고 많은 것들을 동시에 납득되게 하지도 못한다, 더욱이 한계 없고 말로는 다 발음할 수 없는 것들을 전달하지 못한다, 이는 마치 천사들과 더불어서의 경우와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추상적인 생각(idea)은 인물들, 주제가 된 것들을 포함하고 있다. “정직”에 의해 진리들이 의미되고 있다.

양식을 사기 위하여 당신의 종들은 왔습니다. 이는 그들은 선을 수단으로 해서 자연 평면에 잘 어울려지게 됨을 의미한다. 이는 “종들”의 의미가 보다 낮은 것들, 상대적으로 자연 평면의 것들이다로부터 알려진다; 그러므로 또한 진리들이다, 그 이유가 진리들은 선에 종속되고 있기 때문, 그리고 말씀에서 종속된 것들이 “종들”이라 불리우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영적 평면의 천적 부분에 관련하여 자연 평면의 진리는 “종”의 위치이다; “사다”의 의미가 자기 것으로 잘 어울려지게 함이다로부터(자기 것으로 되게 하다.; 그리고 “양식”의 의미가 천적이고 영적인 선이다로부터, 또한 선에 인접한 진리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종합해보면, 선을 수단으로 자연 평면에 인접되어지는 진리, 고로 자기 것이 되게 잘 어울려지게 되는 진리이다. 진리가 당사자의 것이 되려면 선을 수단으로 하지 않으면 불가능이다. 진리가 선을 수단으로 자기 것이 될 때, 이 진리는 선이 되어간다, 그 이유는 선과 하나되어 행동하기 때문이다; 마치 선은 혼이고, 진리는 몸이 되어 있다는 말이다. 이 선 안에 있는 진리들은 흡사 몸을 만들어내는 영적 섬유(fiber)들이다. 그러므로 섬유들에 의해서는 선으로부터 진행하는 가장 깊은 형체들이 의미된다, 신경들에 의해서는 진리들이 의미된다.

우리 모두는 한 사람의 아들입니다. 이는 이런저런 진리들은 한 근원으로부터이다를 의미한다. 이는 “아들들”이 여기서는 야곱의 아들들인 바, 그 의미는 일반적 측면에서의 진리들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들이 “한 사람의 아들”이다가 한 근원이다임은 설명 없이 알 것이라 본다.

우리는 정직합니다. 이는 고로 그것들은 그 본래로부터라면 진리들이다를 의미한다. 이는 “우리는 정직하다”가 본래대로에서 진리들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당신의 종들은 스파이가 아닙니다. 이는 그러므로 그것은 이득을 위하여가 아니였음을 의미한다. 이는 “스파이”의 의미가 이득을 위하여 교회의 진리들 안에 있는 이들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여기서는 이득을 위하여가 아니였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가 그들에게 말했다, 아니다, 이 토지의 벌거벗음을 보려고 너희는 왔다. 이는 그들은 진리들이 있는지 없는지 관심 밖임을 의미한다. 이는 “토지의 벌거벗음을 보려고 옴”의 의미가 진리들이 없음을 자신들 안에서 아는 것보다 더 나은 어떤 것도 없다이다로 알게 된다, 고로 여기서는 그들이 진리들이 있는지 여부는 관심 밖이다가 의미된다.

그리고 그들은 말했다, 우리 당신의 종들은 열두 형제들입니다. 이는 신앙 속의 모든 것들이 함께 합쳐졌음을 의미한다. 이는 “열둘”의 의미가 모든 것들이다로부터, 그리고 이 열둘이 야곱으로부터의 아들들, 또는 각자의 이름에 따라 명명된 지파들로부터의 아들들, 또한 사도들로부터의 열둘일 경우, 이는 하나의 복합체에 있는 신앙으로부터 모든 것들을 서술하게 된다; 그리고 “형제들”의 의미가 선으로부터 결합함이다로부터; 그 이유가 진리들이 선을 수단으로 결합할 때, 그것들은 그것들 사이에 형제임이 있는 듯 하게 놓여지기 때문이다. 만일 선 없이 그것들이 결합되어 나타나 있다면 그것은 결합인 것은 아니다; 그 이유가 악으로부터의 거짓이 들어가서 그것들을 분리하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그것들이 하나의 근원으로부터가 아닌 바, 그것들이 파생되어짐에서도 그것들은 동일한 근원을 가지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결합이 있기 위해서는 처음과 마지막이 결합되어야 하고, 마지막에는 그것들이 지향하는 선이 반드시 있어야만하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결합되어지려는 진리들을 선이 보편적으로 통치하고 있어야 한다; 그 이유가 보편적으로 통치하는 것이 결합하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아들들. 이는 하나의 근원으로부터를 의미한다. 이는 앞에서 설명했다

가나안의 토지에서. 이는 교회 안에서를 의미한다. 이는 “가나안의 토지”가 주님의 왕국과 교회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리고 보다시피 막내는 오늘 아버지와 함께 있습니다. 이는 영적 선과의 결합 역시 있었음을 의미한다. 이는 베냐민, 여기서 “막내”의 표현이 결합하게 하는 중매자이다로부터(이는 아래에서 이어진다); 그리고 “아버지”인 야곱, 여기서는 이스라엘이 영적 선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베냐민”이 천적 평면의 영적 부분, 이것이 중매자이다는 것은 앞에서 살폈다; 즉 자연 평면, 또는 자연 평면의 것들, 그리고 “요셉”인 영적 평면의 천적 부분 사이에 있는 중간물(중매자, 조정자, 중개함intermediate), 그리고 “이스라엘”은 영적 선인 바, “보라 막내는 오늘 우리의 아버지와 함께 있다”라고 말해져서 영적 선과 결합됨을 의미해놓고 있다.

그리고 한 명은 있지 않습니다. 이는 근원인 신성한 영적 평면은 나타나지 않는다를 의미한다. 이는 “하나”인 요셉의 표현함이 영적 평면의 천적 부분, 또는 신성한 영적 평면, 또는 신성으로부터의 진리로부터 알게 된다. 그리고 자연 평면에서 진리로부터의 모든 결합은 신성한 영적 평면으로부터 진행되기 때문에 “근원이 신성한 영적 평면”이라 말한 것이다; 그리고 “있지 않다”의 의미가 나타나지 않다 이다로부터도 알게 되는데, 그 이유는 “베냐민”인 중매자가 거기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요셉이 그들에게 말했다. 이는 이 주제에 관하여, 즉 그의 형제들이 이야기한 것에 관하여 지각함을 의미한다. 이는 “말하다”의 의미가 말씀의 역사 부분에서는 지각하다 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것이 내가 너희에게 이야기한 그것이다. 이는 진리는 내가 생각했던 바 대로였음을 의미한다. 이는 “이야기하다”가 생각하다를 의미함으로부터 알게 된다.

말하기를, 너희는 스파이이다. 이는 그들은 이득을 취하려고 교회의 진리들 안에 있음을 의미한다. 이는 “스파이”가 이득을 위하여 교회의 진리 속에 있다를 의미함에서 알려진다.

그런고로 너희는 입증해야 할 것이다. 이는 그것이 그러한지 아닌지 보여질 것임을 의미한다.

바로의 생명에 의해. 이는 확실함 속에서를 의미한다. 이는 강조적 주장함의 말의 형체인데, 확실함을 함축한다. 실로 요셉은 그들이 스파이들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게다가 그들이 토지의 벌거벗음을 보려고 온 것은 아니다는 것도 알고 있다; 그럼에도 그가 그렇게 주장한 것의 내적 의미에서 확실한 것은, 교회의 진리들이 내면의 인간과 선을 통하여 결합함 없이 있다는 것은 이득밖에 목적은 더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들이 내면의 인간과 선을 통하여 결합할 때, 그것들은 선과 진리 자체, 고로 교회, 주님의 왕국, 주님 자신을 목적으로 가진다; 그리고 그것들이 이것들을 목적으로 가질 때, 그러면 많은 이득도 필요하다면 그들의 몫으로 떨어진다는 것이 아래 구절에 있다: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왕국, 그리고 그분의 정의를 추구하라, 그리고 모든 것들이 너희에게 보태질 것이다 (마. 6:33).

너희의 막내가 여기에 오지 않으면 너희들은 여기에서 나갈 수 없다. 그들이 영적 선과 합쳐지지 않으면 합쳐져야 할 필요성은 너희들과 더불은 진리에게도 있어야만 함을 의미한다. 이 의미는 단어들 자체로부터는 쉽게 보여질 수 없다; 그러나 이 의미가 거기로부터 결과된다, 그 이유는 영적 선과 결합함이 여기서 “막내 형제”에 의해 의미되기 때문이다.

너희 중 한 명을 보내서, 네 형제를 데려오게 하라. 이는 이 선과 더불은 어떤 결합이 있는다면을 의미한다. 이는 “네 형제”, 즉 막내의 의미가 영적 선과 결합함이다로부터; 그리고 “한 명을 보내 그를 데려 옴”의 의미가 만일 어떤 결합이 있다면이다로부터 알려진다; 그 이유가 의심의 어떤 것이 표현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너희는 갇혀 있을 것이다. 이는 모든 다른 점에서 비록 분리됨이 있다 하더라도를 의미한다; 그 이유가 속박된 채로 있는 자는 분리되어져 있는 것이기 때문, 즉 “아버지 이스라엘”에 의해 의미된 영적 선에서 분리된채로 있는 셈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너희 말들이 너희와 더불어 진리인지 아닌지 증명할 것이다. 이는 그때 그것은 그와 같이 거행될 것이다를 의미한다. 이는 “말들이 입증됨” 또는 “그것이 진리인지 아닌지”의 의미가 그들이 말했던 대로 그때 거행될 것이다는 확실함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확실함이 그들에 의해 말해진 것과 관련되고 있다, 그리고 내적 의미 안에 포함되어 있다.

또는 바로의 생명에 의해 너희는 정녕 스파이들이다. 이는 그렇지 않다면 너는 이득을 위하여 진리를 가지고 있음이 확실하다를 의미한다. 이는 “바로의 생명에 의해”의 의미가 확실함으로부터 이다로부터; 그리고 “스파이들”의 의미가 이득만을 추구하려 교회의 진리 안에 있는 자들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에 관한 더 많은 설명은 이미 일반적 측면에서 많이 설명했던 관계로 여기서는 생략한다. 더욱이 이런 대목들은 이해력 안으로 완벽하게 내려와질 수 없는 대목들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어쨌든 일반적 측면을 알고 있으면 세부적 측면도 어느 정도는 납득이 가능해진다. 아마 일반적 측면이 받아지지 않은 상태라면, 세부적, 특수적 측면은 아예 인정되지 않을 것이다. 그 이유가 일반적인 것들이 애착 안으로 먼저 진입되어 있지 않으면, 특수적인 것들을 위한 애착은 있어질 수도 없기 때문이다.

17-20절. 그리고 그는 그들을 구치소에 삼 일 동안 가두었다. 18 그리고 요셉은 삼 일째 날에 그들에게 말했다, 이렇게 하라, 그리고 살아 있다; 나는 하느님을 경외하는 자이다. 19 만일 너희가 정직하다면 너희 형제 중 하나를 너희가 있는 구치소에 가두어 놓아라, 그리고 너희는 너희 집의 기근을 위해 농산물을 가지고 가라. 20 그리고 너희 막내 형제를 나에게 데리고 오라. 그리고 너희 말들이 증명될 것이다, 그리고 너는 죽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그렇게 했다.

그리고 그는 그들을 구치소에 가두었다. 이는 그 자체로부터 분리함을 의미한다. 이는 “구치소에 가둠”의 의미가 거절함, 고로 분리함이다로부터 알려진다.

삼 일. 이는 충분함(full)을 의미한다. 이는 “3 일”의 의미가 시작으로부터 끝까지, 고로 충분한 것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 이유가 새로운 상태가 지금 묘사되기 때문이다. 전체의 상태가 “3 일”에 의해 의미되어진다; 그리고 그것의 마지막, 그래서 새로운 것이 “삼 일째 날에”에 의해 의미되는데, 아래에서 이어진다.

그리고 요셉은 삼 일째 날에 그들에게 말했다. 이는 충만 되었을 때 이런저런 진리들이 분리되어짐에 관하여 영적 평면 속의 천적 부분이 지각함을 의미한다. 이는 “말하다”가 지각하다 이다로부터; 그리고 야곱의 아들들의 표현이 일반적 측면에서의 교회의 진리들이다로부터, 여기서는 영적 평면의 천적 부분으로부터 분리된 교회 속의 진리들이다로부터 ; “3 일”의 의미가 상태의 마지막이자, 새로운 상태가 시작함이다로부터, 고로 충만함(fulfilment, 완성함, completion)이 있었을 때이다. 이로부터 분명한 바, “요셉이 삼 일째 날에 그들에게 말함”에 의해서는 충만함이 있었을 때, 이런 진리들에 관한 영적 평면 속의 천적 부분의 지각함은 (이런 진리) 자체로부터 분리되었다가 의미된다.

이렇게 하라 그리고 살아 있다; 나는 하느님을 경외한다. 이는 만일 그들이 신성으로부터 생명을 가지고 있다면 그와 같이 되어 있을 것임을 의미한다. 이는 “이렇게 하라”의 의미가 그렇게 있을 것이다 이다로부터; “그리고 살아 있다”의 의미가 그들, 즉 “야곱의 아들들”에 의해 의미되는 진리들은 생명을 가질 것이다 이다로부터; “나는 하느님을 경외한다”의 의미가 신성으로부터 있다 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 이유가 요셉에 의해 신성으로부터의 진리 측면, 또는 영적 평면 속의 천적 부분에서의 주님을 표현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가 여기서는 영적 평면 속의 천적 부분 안에 있는 신성 자체로부터를, 또는 진리 안에 있는 신성으로부터를 최고 의미에서 의미하고 있다. “경외함(fearing)”이 최고의 의미에서, 주님을 서술할 경우, 이는 경외함, 두려워함이 아닌 사랑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 말씀에서 때때로 언급되는 “하느님을 경외함”은 하느님을 사랑함을 의미한다. 그 이유가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은 그것의 주인이 되는 자를 따르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내적 예배 없이 외적 예배에 있는 이들에게는 두려움이 되어 있다, 그리고 이것이 영적 수준의 예배에 있는 이들과 더불어서는 거룩한 두려움, 경외함이 되어 있다, 그리고 천적 수준의 예배에 있는 이들과 더불어서는 거룩히 존경함이 되어 있다. 그러나 주님 안에서는 두려움, 경외함이 아니고 순수한 사랑이다. 이로부터 알게 되는 바, “나는 하느님을 경외한다”에 의해 주님을 서술할 경우, 신성한 사랑, 고로 신성이 의미된다는 것이다.

만일 너희가 정직하다면. 이는 만일 그들이 그 본래대로 진리들이다면을 의미한다. 이는 “직바르다, 정직하다(upright)”의 의미가 그것들이 본래에서 진리들이다 에서 알게 된다.

네 형제 중 하나를 너희의 구치소의 집 안에 가두어 두어라. 이는 의지에 있는 신앙은 분리되어야만 할 것을 의미한다. 이는 24절의 “감금되어져 있던 그들의 형제의 하나”인 시므온의 표현함이 의지에 있는 신앙이다로부터; 그리고 “너희의 구치소의 집 안에 가두다”의 의미가 분리되어지는 것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여기서의 경우는 이렇다: 의지에 있는 신앙, 또는 신앙의 진리를 행함에 관한 의지가 신앙의 진리들에 있는 이들로부터 분리될 때, 이때 신성과의 연결은 심히 미미해서 신성을 인정함 그 이상은 거의 없을 지경이다; 그 이유가 거듭나는 인간과 더불어 주님으로부터의 신성의 유입은 선 안으로, 그 다음 진리 안으로, 또는 의지 안으로, 그 다음 이해력 안으로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신앙의 진리 안에 있는 자가 주님으로부터 선을 받는 만큼에서, 주님은 그 사람 안의 지적 부분에서 새로운 의지를 만드신다, 그리고 주님이 흘러드시는 만큼에서 선인 것을 행함에 대한 애착이, 즉 이웃을 향한 선행을 실행하려는 애착이 생산된다. 이상 살핀 바로부터 (시므온에 의해 표현되는) 의지에 있는 신앙은 “베냐민”인 중매자가 현존하기 전 분리되어야 함이 분명해진다.

그리고 너희는 너희 집의 기근을 위해서 농산물을 가지고 가라. 이는 한동안 그들은 그들 자신을 위해 찾도록 자유하다를 의미한다. 이는 그들이 감금당해 있다가 그 후 그들 중의 하나만 감금당하고 난 후, “너희는 가라”의 의미가 한동안 그들이 자유해졌다이다로부터; “농산물”의 의미가 진리이다로부터; “기근”의 의미가 지식의 결핍과 황무함이다로부터; 그리고 “너희의 집”의 의미가 세부적 측면에서 각각의 진리들이 있었던 거처들, 고로 자연적 마음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상의 의미들을 취합하면, “너희의 집의 기근을 위하여 농산물을 가져감”에 의해 그들이 진리의 황무함에 있는데, 그들은 자신들과 그들의 자신을 찾을는지 모른다가 의미됨을 알게 된다.

그리고 너희의 막내를 나에게 데려오라. 이는 중매자가 현존할 때까지를 의미한다. 이는 베냐민의 표현함이 영적 평면의 천적 부분과 자연 평면 사이에 있는 중매자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렇게 되면 너희의 말은 증명되어질 것이다. 이는 그런 다음 그것은 선포해왔던 대로 진리들과 함께 있을 것임을 의미한다. 이는 설명 없이 가능할 것이다. 여기서의 경우는 이렇다: 자신에게 유리한 것을 위해서만 교회의 진리들에 있는 자들도 다른 이들과 똑같게 진리들과 더불은 경우가 어떤 경우인지를 선포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진리들은 내면의 인간과 결합하지 않으면 누군가에서 그의 것이 되어질 수 없다는 것을 선포할 수 있다, 더 말해서 진리들은 선을 수단으로 하지 않으면 결합될 수 없다, 또한 이것이 행해질 때까지 진리들은 생명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도 선포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선포는 그들이 그것들을 이야기할 때 뿐이다. 정작 그들이 자신과 이야기를 할 때, 고로 내면의 인간과(이런 자에게서는 그것들을 생각할 때라고 말하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이야기를 할 때, 위의 인간은 그 반대로 보고 있다; 비록 자기들 스스로는 반대적이고 심정으로는 진리들을 부정하기까지 할지라도, 타인 앞에서 그들에게 이것이 그렇다는 말을 하는 것은 식은 죽 먹기 이다. 그런 것에 그만큼 숙달된 것이다. (다시 말해 상대방(교인)이 무엇에 갈급한지를 파악하면, 즉 그의 취약점이 파악되면 그것이 물질인지, 명예인지, 사업 성공이든지 가릴 것 없이 파악되는 대로 거기에 발맞추어 진리를 거기에 꿰메는 식으로 진리를 선포하는 경우일지 모른다. 역자주.) 자신을 위하여 이득, 명예, 명성에 대한 탐욕은 설득하는 갖가지 수단들을 빨아들인다, 그리고 자신 안에서 이런 수단들은 진리로서 자리매김하는 것이 즉각적이다; 이런 것들이 마음들을 매료시키는 감추인 능력으로 잠재하고 있다. 모든 인간, 지독하게 우둔하지 않으면, 인간의 지적 부분에서 개혁되거나 거듭나거나 할 목적으로 어느 것이 진리인지를 이해하는 능력을 수여받아져 있다; 그러나 그가 거꾸로의 길들에서 배회하면, 그리고 교회의 신앙 속의 것들을 완벽하게 거절하면, 이때 그는 진리들을 이해하는 능력을 여전히 가지고는 있지만, 그는 그렇게 하기를 더 이상 바라지 않는 바, 그가 교회의 진리들을 듣자마자 그것들에서 고개를 돌린다.

그리고 너희는 죽지 않을 것이다. 이는 이런 방법 안에서 진리들은 생명을 가질 것임을 의미한다. 즉 진리들은 선포된 그대로 있을 것이다를 의미한다. 이는 “너희는 죽지 않을 것이다”의 의미가 너희 살아 있을 것이다로부터, 고로 그들에 의해 표현된 진리들이 생명을 가질 것이다임이 분명하다.

그리고 그들은 그렇게 했다. 이는 이 상태의 결말을 의미한다. 이는 “행함”, “행해졌음”이 앞의 상태가 끝났다이다로부터, 그리고 이어지는 것의 시작을 포함한다에서 알려진다. 이 주제를 두고 상세한 설명은 불필요하다. 그 이유는 이미 살핀바 있어서 이다. 알고 지나가야 할 것은, 이런 말들 안에 말로 표현 못하는 신비함들이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천국들에서는 몇 단어들로도 빛을 발한다, 설사 인간들 앞에서는 대수롭지 않은 문맥이라해도 그러한 바, 우리는 이를 마음에 담고 정성으로 말씀을 읽어야 한다. 우리가 말씀을 읽을 때 간혹 지각되는 거룩함에 어떤 말로도 표현 안되는 신비함들이 내재되어 있다. 비록 당사자에게 손에 쥐어주듯 명백해질 수 없을 뿐, 감추인 많은 사항들이 영감을 선물한다.

21-24절. 그리고 그들은 사람 그의 형제에게 말했다. 우리는 우리의 형제에 관련하여 정녕 죄가 있다, 우리는 그가 우리에게 간절히 원할 때, 우리는 듣지 아니하여 그의 혼의 괴로움을 보았다. 그러므로 이 괴로움이 우리에게 왔다. 22 그리고 르우벤은 그들에게 대답해서 말하기를, 내가 너희에게 이야기를 하지 아니하였더냐? 아이에게 죄를 짓지 말라. 그리고 너희는 귀 기울이지 아니하였지 않느냐? 그리고 더 나아가 보라 그의 피가 대가를 찾고 있다. 23 그리고 그들은 요셉이 그들을 듣는 줄을 알지 못했다. 그 이유는 그들 사이에 통역자가 있었기 때문이다. 24 그리고 그는 그들을 떠나가서 울었다. 그리고 그는 그들에게 되돌아 갔다, 그리고 그들에게 이야기를 했다, 그리고 그들로부터 시므온을 데려 왔다, 그리고 그들의 눈 앞에서 그를 결박했다.

그리고 그들은 사람 그의 형제에게 말했다. 이는 원인에 관하여 지각함을 의미한다. 이는 말씀의 역사물에서 “말하다”의 의미가 지각함이다로부터; “사람 그의 형제에게(a man to his brother)”의 의미가 서로에게(mutually)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들이 사람 그의 형제에게 말함”이 여기서 원인에 관하여 지각함을 의미하는 이유는 이렇다: 즉 요셉이 그들에게 거의 이야기를 하지 않았고(통역자를 사용했고), 그들을 스파이들이라 지목하고, 삼 일 동안 구치소에 감금한 이유는 지금 이어지는 구절에서 그들의 서로의 대화가 원인(과거의 사건)을 취급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에 관하여 지각함이 의미된다.

우리는 우리의 형제에게 정녕 죄를 지었다. 이는 그들이 선을 비 수용함으로해서 내적인 것을 멀리했었기 때문에 그들에게 책임이 있음을 의미한다. 이는 “죄를 지음(being guilt)”의 의미가 선과 진리를 거절함을 전가함(imputation, 누구에게 …를 덮어씌움, 즉 선과 진리를 거절함을 요셉에게 덮어 씌움) 아래 있고, 과오(fault)에서 있는 것이다로부터 (3400항 참조); 그리고 “그들이 과오를 저지른 형제”인 요셉의 표현함이 그들이 거절했고 멀리해버린 내적 부분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 이유가 요셉과 베냐민에 의해 교회의 내적 부분이 표현되기 때문, 그러나 요셉의 다른 열 형제는 교회의 외적 부분을 표현했다; 그 이유기 요셉과 베냐민의 어머니인 라헬은 내면의 진리에 애착함을, 레아는 외면의 진리에 애착함이기 때문이다. 이 장에서, 요셉에 의해 영적 평면의 천적 부분, 또는 신성으로부터의 진리, 고로 내적 부분이 표현되고; 베냐민에 의해서는 천적 평면의 영적 부분, 이는 내적 부분에서 진행되는 중간의 것(중매자, intermediate)이다; 그리고 야곱의 다른 열 아들들에 의해서는 외적 교회의 진리들, 고로 자연 평면에 있는 진리들이 표현되어진다. 42 장은 교회의 내적 부분이 일반적, 특수적 측면 모두에서 교회의 외적 부분과 결합함 또한 취급하고 있다; 그 이유가 모든 인간 각각은 일반적 측면에서의 교회(넓은 측면에서의 교회)이기에 앞서 특수적 측면에서의 교회 (좁은 측면에서의 교회, 세부적 측면에서의 교회)임에 틀림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고 의미에서 취급되는 주제는 단연 주님이시다, 즉 그분이 어떻게 그분의 인간 안에서 내적 부분을 외적 부분과 하나로 만드셨는가, 그리하여 그분이 그분의 인간을 신성으로 만드셨는가에 관하여서 이다.

우리는 그의 혼의 괴로움을 보았다. 이는 내적 부분이 멀어져 있는 동안 내적 부분의 상태를 의미한다. 이 상태에 주목해보자: 주님께서는 선과 더불어, 그리고 진리와 더불은 선 안에서 인간에게 흘러드신다; 이때 인간은 이를 받든지, 받지 않든지 한다; 만일 그가 받는다면, 이는 그에게 좋은 일이다; 그러나 받지 않는다면, 그에게 나쁜 일이다. 만일 그가 받지 않을 때, 그가 어떤 걱정(anxiety, 여기서는 혼의 괴로움, distress of soul)을 느낀다면, (주님편에서 볼 때) 이 인간은 개혁될는지 모른다는 희망이 엿보이는 셈이다; 그러나 만일 그가 걱정을 하등 느끼지 않는다면, 희망은 물거품이다. 모두 각각의 인간과 더불어 있는 것은 두 영들, 즉 지옥으로부터의 두 영들, 그리고 천국으로부터의 두 천사들이다; 그 이유가 인간이 죄들 안에서 태어나지기에, 인간은 두 측면을 가지지 않으면 살 수가 없기 때문, 즉 한 편으로는 지옥과 교통하고, 다른 편으로는 천국과 교통하는 사이에 있어야 살 수 있다는 말이다. 한마디로 인간의 모든 생명(삶)은 거기로부터 있다. 인간이 다 성장하여 자신으로부터 자신을 통치하기를 시작할 때, 즉 뜻하고 행동하는 것이 자신의 판단으로부터 라고 자신에게 비쳐질 때, 그리고 자신의 이해력으로부터 신앙에 관한 것들에 관련하여 생각하고 결말지을 때, 만일 그가 자신을 악들쪽으로 향하게(betake) 하면, 지옥으로부터의 두 영들이 가까이 다가와 있다, 그리고 두 천사들은 조금 물러가(withdraw, 움추려 있음, 후퇴함) 있다; 그러나 만일 그가 선쪽으로 자신을 향하게 했다면, 천국으로부터의 두 천사들이 가까이 다가와 있다, 그리고 지옥으로부터의 두 영들은 (거기로부터) 옮겨져 (remove, 제거되어져) 있다.
그러므로 만일 그가 자신을 악들쪽으로 향하게 하고 있을 때, (마치 젊은 시기에 이런 경우가 많다) 그는 자기가 악인 것을 행하였던 것을 곰곰이 되새기는 기회가 있는데, 이때 그가 어떤 걱정(요즈음 말로 찝찝함, 떱떨함, 께름칙함)이라도 느낀다면, 이는 그가 천국으로부터 천사들을 통하여 유입되는 것을 여전히 받을 수 있는 여지를 남겨놓고 있다는 징조(sign)이다. 또한 이것은 그가 언제인가 자신이 개혁되어지는 것을 허용할 수도 있을 것이다에 대한 징조이기도 한 셈이다; 그러나 만일 그가 자신의 악인 것을 행하였던 것을 곰곰이 생각하건대, 그에게 아무런 걱정의 느낌도 없다면, 이것은 천국으로부터의 천사를 통한 유입을 기꺼이 받으려함이 더 이상 없다는 표시이다, 동시에 차후 자신이 개혁되도록 허용하지 않을 것이라는 징조도 보인 셈이다. 그러므로 이 장의 이 대목, 즉 야곱의 열 아들들에 의해 표현되는 외적 교회를 취급함에서, 요셉이 그의 형제들로부터 멀어졌을 때 지녔을 혼의 번민이 말해지고 있다, 그리고 이어서 르우벤이 형제들을 훈계하는 형식으로 하는 말투로부터 개혁 또는 내적 부분과 외적 부분의 결합이 장차 거행되리라는 것이 예상됨이 의미되어 있다. (이는 다음 페이지에서 취급한다); 즉 걱정을 느낀 이들과 더불어서는 악을 내적으로 인정함이 있는 것이고, 이것이 주님에 의해 상기될 때, 고백함이 되고, 마지막으로 회개함이 있다.

그가 우리에게 간절히 원할 때, 우리는 듣지 아니하였다. 이는 받아들임이 없는 상황임에도 내적인 것의 계속적인 간청을 의미한다. 이는 “간절히 원함(beseech)”의 의미가 간절히 청함(entreaty)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신성으로부터의 선의 유입이 취급될 때, 멀리 있어지지 않기를 간절히 원하심이 (그분의 선이) 받아져지기를 간절히 청하심이다; 그 이유는 주님으로부터 흘러드는 선은 계속적으로 (받으라고) 재촉하는데, 마치 탄원이라도 하는 듯 할 정도이나, (이 선을) 받느냐의 여부는 인간 당사자에게 달려있다. 그러므로 멀어져 있지 않기를 간절히 원하심은 계속적으로 간청함을 의미한다. 이로부터 “듣지 않는 것”은 받아지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글자 의미에서 인물들의 숫자가 취급되는데, 마치 야곱의 열 아들들과 요셉의 경우 같은 것이다; 그러나 내적 의미에서 이것들은 하나의 주제를 취급한다. 외적 교회의 진리, 또는 자연 평면의 진리가 야곱의 열 아들들에 의해 표현되고, 또한 외적 인간에 있는 진리들이다; 그리고 영적 평면의 천적 부분은 요셉에 의해 표현되고 내적 인간에 있는 신성으로부터의 진리이다. 이는 말씀의 다른 역사물에서도 비슷하다; 그 이유가 어떤 역사물은 인물들에 의해 된 것이고, 어떤 역사 자체는 하나의 주제에 관계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르우벤이 대답해서 말하기를. 이는 교리에 그리고 이해력에 있는 신앙으로부터 아직 더 지각함을 의미한다. 이는 자기 형제에게 “대답하다”, 또는 “말하다”의 의미가 지각함이다로부터; 그리고 르우벤의 표현함이 교리와 이해력에 있는 신앙, 또는 교리의 진리를 통하여 생활의 선이 달성되어질 수 있음 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여기서 취급된 주제는 받아져 지기를 선이 간절히 청함, 또는 선에 있는 신성이 간절히 청함이기에, 언급함도 신앙으로 만들어지고, 신앙이 선을 받아들임에 관하여 가르친다. 그 이유가 만일 누군가가 선으로부터 퇴조한다면그는 어떤 걱정을 느끼는데, 이는 그의 타고난 양심의 명령으로부터가 아니고, 그가 유아로부터 획득해왔던 신앙으로부터 인 것이 명령한 것이고 걱정의 원인이다. 이것은 왜 르우벤에 의해 여기서 말해지고 이 신앙을 표현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 신앙은 교리와 이해력에 있는 신앙이라 불리우나, 시므온에 의해 표현되는 신앙은 의지와 생활에 있는 신앙이다.

내가 너희들에게 이야기를 하지 아니 하였더냐, 말하기를. 이는 거기에서 지각된 수준을 의미한다. 이는 “말하다”의 의미가 말씀의 역사물에서의 경우, 지각하다 이다로부터; 그리고 “이야기 하다”와 “말하다”가 연거푸 있어 반복되는 듯 한데, 이는 지각의 수준이 의미된다.

아이에게 죄를 짓지 말라. 이는 그것들은 분리되어서는 안된다를 의미한다. 즉 외적 부분이 내적 부분으로부터 분리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이는 “죄지음”이 분리됨이다로부터, 그 이유가 모든 죄가 분리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기서 “아이”인 요셉의 표현함이 내적 부분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리고 너희들은 귀 기울이지 아니했다. 이는 비 수용함을 의미한다. 이는 “들음”, “귀기울임”이 순종하는 것이다로부터; 그리고 이것이 순종을 표시하기 때문에, 이것은 받는 것 또한 표시한다; 그 이유가 신앙이 (마음에서) 지령하는 것에 순종하는 자는 (그로부터의 선도) 받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구절에서는 그 반대인 비 수용함이다, 그 이유는 그들은 귀기울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 보라, 그의 피가 (대가를) 찾고 있다. 이는 거기로부터 양심을 찌름이 있다를 의미한다. 이는 “피”의 의미가 선 또는 선에 제공된 폭력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 폭력 또는 이 피가 (뭔가를) 찾을 때, 이것이 내적 걱정을 야기한다, 이것이 양심의 찌름이라 불리운다; 그러나 이것은 죄지었을 때 걱정이 유발된 자에게만에 국한된다.

그리고 그들은 요셉이 그들을 듣고 있는 줄을 알지 못했다. 이는 이런 진리들이 있는 자연적 빛으로부터서는 모든 것이 영적인 빛으로부터 나타난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음을 의미한다. 이는 “몰랐다”의 주체인 야곱의 아들들의 표현함이 외적 교회의 진리들, 고로 자연 평면의 진리들이다로부터; 이로부터 이어지는 바, 이런 진리들이 있는 자연적 빛으로부터는 믿어지지 않는다가 의미된다; 그리고 요셉의 표현함이 영적 평면의 천적 부분인 바, 이는 영적인 빛 안에 있다로부터 알게 된다; 영적인 이 빛으로부터 자연 평면에 있는 진리들이 나타난다는 것이 “요셉이 그들을 들음”에 의해 의미되고 있다; 그 이유가 “듣다”가 순종하다와 지각하다 모두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고로 자연 평면에 있는 진리들이 영적인 빛으로부터 나타난 것이지 그 반대의 경우는 아니다.
자연적인 빛과 영적인 빛에 주목하면, 이러하다: 자연적 빛은 세상의 태양으로부터; 영적 빛은 주님이신 천국의 태양으로부터 있다. 인간이 유아 때로부터 배우는 신앙의 모든 진리들은 이러저런 대상들과 이로부터 파생되는 관념(idea, 영적인 생각)을 수단으로 납득되어진다; 마치 세상의 빛으로부터 모두 각각이 자연적 수준에서 납득되는 것과 같다; 그 이유가 인간의 생각으로부터의 모든 관념(idea)들은, 그가 세상에서 사는 한, 세상에 있는 이런저런 것들에 기초를 두고 있다. 그러므로 만일 이것들이 당사자로부터 거두어진다면, 그의 생각은 깡그리 멸해질 것이다. 거듭나아가지 않아왔던 인간이라면, 그는 아마 이런 사항들에 거의 무지해 있을 것이다: 즉 영적 빛이 있다는 것이나, 세상의 빛과는 공통되는 것이 없는 빛이 천국 안에 있다는 것이나, 더욱이 이 천국 빛이 세상의 빛으로부터 있는 관념들과 대상들을 계발한다는 것, 하여 인간으로 생각하고, 추론하고, 반영해보는 것을 가능하게 한다는 것에 대해서이다. 영적인 빛이 이를 행할 수 있는 이유는 이 빛이 주님으로부터 진행하는 지혜 자체이기 때문, 이 지혜가 천국에서 천사들의 눈 앞에 빛으로 표출되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빛이 아래 있는 모두와 각각에 나타난다, 또는 자연적 빛으로부터 인간 안에 있는 모두와 각각에 나타난다; 그러나 그 반대는 아니다, 그 이유는 거듭나지 않아서이다. 이 과정에서 영적 빛으로 계발된 선과 진리, 또는 천국에 있는 것들이 표현적 거울에서와 같이 자연 평면에 나타난다. 이로부터 분명해지는 바, 빛 자체이신 주님은 인간의 생각과 의지에 있는 모두와 각각의 것을 보신다, 그렇다, 보편적 자연의 모든 것을 보신다, 한마디로 그분에게 감추여 놓인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이런 모두로부터 지금 분명해지는 것은, 여기서의 경우는 어떠한지이다; 즉 이런저런 진리들이 있는 자연적 빛으로부터일 경우, 모든 것이 영적 빛으로부터 나타난다는 것을 보지 못한다는 것이 여기서, “요셉이 그들을 듣는 줄을 몰았다”에 의해 의미되어 있다는 것이다. 8절에서는 요셉은 그들을 알아보았으나 그들은 요셉을 알아보지 못했다 역시 비슷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 이유가 교회의 이런저런 진리들이 그것의 빛으로부터 영적 평면의 천적 부분에 나타났다는 것, 그러나 신성으로부터의 진리는 천국의 빛에 의해 아직 계발되지 않은 자연적 빛 안에서는 나타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 이유가 그들 사이에 통역자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는 그 다음 영적인 것들은 아주 다르게 납득됨을 의미한다. 이는 “그들 사이에 통역자가 있다”의 의미가 영적인 것들은 다르게 납득되어진다 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 이유가 통역자는 이쪽 언어를 저쪽 언어로 바꾸는 자이기 때문이다, 고로 이쪽의 의미를 다른쪽의 납득력에 놓아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 사이에 통역자가 있었다”에 의해서는 영적인 것들이 내적 인간과 더불은 선을 수단으로 아직 결합되지 않은 교회의 진리들에 있는 이들에 의해 아주 다르게 납득되었다는 것이 의미된다. 교회의 진리들이 선 안에 있는 이들에 의해 납득되는 것과 선 안에 있지 않은 이들에 의해 납득되는 것은 아주 다르다는 말이 역설적이다고 여겨질지 모르나 이는 진정하다. 그 이유가 진리들은 선 안에 있는 이들에 의해서는 영적 수준으로 납득되어진다, 그 이유는 이런 인물들은 영적 빛 안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선 안에 있지 않은 이들에 의해서는 자연적 수준으로 납득되어진다, 그 이유는 그들이 자연적 빛 안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선 안에 있는 이들과 더불어서는 진리들이 계속적으로 당사자와 결합하는 상태를 유지하고 있으나, 선 안에 있지 않은 이들과 더불어서는 진리들과의 계속적인 결합 상태가 없어, 아주 많은 오류들, 거짓들로 채워져 있을 수밖에 없다. 전자는 천국 안쪽으로 자신들을 확장해가나, 후자는 그렇게 확장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전자에게는 진리들이 충만되어지나, 후자의 경우는 갈수록 비워져 거의 텅빈 정도에서 있다. 이 가득참과 텅빔이 그가 세상에서 사는 한 당사자는 물론 인간 누구에게나 나타나보여지지 않는다. 그러나 천사들에게는 드러내져 있다. 선과 결합한 진리만이 천국에 있다는 것을 아는 인간이라면 그는 자기 신앙에 관하여 매우 다르게 느낄 수밖에 없다는 것은 당연지사가 아닐까?

그리고 그는 그들로부터 되돌아 갔다. 이는 여하간 약간 물러 섬(주춤함)을 의미한다. 이는 “그들로부터 되돌아감”이 주님 또는 신성으로부터 있는 선의 유입을 서술할 경우, 약간 뒤로 물러섬이 있다가 의미된다; 그 이유는 사실상 주님은 누구에게서나 자신을 돌려지게 하시는 분은 결코 아니나, 인간 또는 천사들의 상태에 따라 각자를 위하여 필요하시면 선의 유입을 조절하시어 그들에게 알맞게 하시는데, 이때 이 알맞게 하심이 “주춤함”에 의해 뜻해진다.

그리고 울었다. 이는 자비(mercy)를 의미한다. 이는 “울다(weep)”의 의미가 주님을 서술할 경우, 여기서 요셉에 의해 표현되는데, 자비함이기 때문이다. 울다가 슬픔과 사랑을 표현한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상태인 바, 결과적으로 이것은 자비 또는 동정함을 표현하는 데, 그 이유는 자비는 사랑이 몹시 슬퍼함이기 때문이다. 울다 또한 내적 의미에서 자비이기에, 말씀에서 “울다”가 여호와, 또는 주님을 때때로 서술한다:
나는 야셀, 십마의 포도나무 때문에 정녕 울 것이다; 나는 내 눈물들을 가지고 너희에게 물을 댈 것이다 오 헤스본과 엘르알레여 (이. 16:9);
그리고:
나는 모압의 불법을 알고 있다, 여호와께서 말하신다, 그것은 옳지 않다(는 것을 안다). 그러므로 나는 모압을 위해 울부짖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모든 모압을 위하여 외칠 것이다; 야셀의 울음보다 더 큰 울음으로 나는 너희를 위해 울 것이다 오 십마의 포도나무여 (예. 48:30-32);
“모압”은 자연적 수준의 선 안에 있는 이들, 그리고 자신이 엉뚱한 길로 들어서는 것을 허용하는 이들을 표시한다, 그리하여 선들에 섞음질을 하는 타락쪽으로 자신을 끌고 갈 때를 표시한다; “울부짖다”, “외치다”, “슬피 울다” 등등은 동정함과 몹시 슬퍼하다를 표시한다. 누가복음서에서:
예수께서 가까이 다가서서 도성을 바라보셨을 때, 그분은 도성 때문에 슬피 우셨다 (눅. 19:41)
예수께서는 예루살렘 때문에 슬퍼하셨다, 또는 그분은 예루살렘을 불쌍히 여기셨다 그리고 슬피 우셨다는 것은 그분이 도성 예루살렘이라는 건물의 파괴됨이 아까우셔서 슬퍼하신 것이 아님은 누구나 짐작할 것이다. 그분이 슬퍼하신 것은 도성 예루살렘이 허물어지듯, 교회가 허물어지는 마지막 날, 즉 교회 내에 선행이 더 이상 없는 날, 고로 신앙도 더 이상 있지 않는 날을 내다 보셨기 때문에 슬퍼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불쌍히 여김과 슬퍼하심으로부터 그분은 우셨다.

그리고 그는 그들에게 되돌아 와서 그들에게 이야기를 했다. 이는 유입을 의미한다. 이는 요셉이 그들로부터 되돌아 간 이후에 “그들에게 되돌아와서 이야기를 했다”가 유입이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요셉에 의해 표현되는 영적 평면의 천적 부분, 또는 신성으로부터의 진리가 자연 평면에 있는 진리들 안으로 흘러들기 때문이다. 이것이 “그들에게서 되돌아 와서 이야기를 함”이라는 글자 의미로 표현되어져 있다.

그리고 그들로부터 시므온을 데려갔다. 이는 의지에 있는 신앙을 의미한다. 이는 시므온의 표현함이 의지에 있는 신앙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의지에 있는 신앙이 그들로부터 분리되어져야 하는 이유는 베냐민에 의해 표현되는 중매자가 아직 표출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요셉에 의해 표현되는 신성으로부터의 진리는 중매자를 통하여 신앙의 선 안으로 흘러들고, 이를 통하여 신앙의 진리 안으로도 흘러들기 때문이다; 또는 진리를 뜻함 안으로 흘러들고, 그리고 이를 통하여 진리를 이해함 안으로 흘러든다; 또는 이웃을 향한 선행 안으로 흘러들고, 이를 통하여 신앙 안으로 흘러든다. 거듭나지는 인간과 더불어서 있어지는 (주님으로부터의) 유입(influx)이 가능한 방법은 위와 같은 경로(순서) 외에는 없다. 천사에 대한 유입도 여기서 예외됨이 없다. 이는 지상의 실체(subject)들 안으로 태양이 유입됨과도 비교해 볼 수 있다. 태양은 씨로부터 그것들의 것을 산출하게, 그들로 새로워지게 하는데, 이때 열을 가지고서이다, 마치 봄철과 여름철의 경우와 같다, 그리고 동시에 빛도 보낸다; 그것에 의해서 그것들을 생산한다; 그러나 빛만으로는 전혀 생산되지 않는다, 마치 겨울철의 빛이다. 영적인 열은 사랑의 선, 영적인 빛은 신앙의 진리이다; 더욱이 영적인 열은 동물 왕국의 주체들 안에서 생명의 열을 생산한다, 그리고 영적인 빛은 이 열로부터 파생되는 생명을 생산한다.

그리고 그를 결박했다. 이는 분리를 의미한다. 이는 “묶다”의 의미가 분리하다 이다로부터 알려진다.

그들의 눈 앞에서. 이는 지각 쪽으로를 의미한다. 이는 “눈”의 의미가 이해함과 지각함이다로부터 알려진다.

25-28절. 요셉은 명령했다, 그리고 그들은 곡식으로 그들의 그릇들을 채웠다, 그리고 그들의 은을 원장소에 도로 놓게 하고, 그리고 길을 위한 양식을 그들에게 주게 했다. 그리고 이렇게 그는 그들에게 했다. 26 그리고 그들은 그들의 농산물을 그들의 나귀에 싣고, 거기로부터 갔다. 27 그리고 한 사람이 여관에서 그의 나귀에게 먹이를 주려고 그의 자루를 열었다. 그리고 그는 그의 은을 보았다. 그리고 보라 그것은 그의 자루의 아구에 있었다. 28 그리고 그는 그의 형제들에게 말했다, 내 은이 원장소에 도로 있다, 그리고 보라 그것은 아예 내 자루 안에 조차 들어 있다. 그리고 그들의 심장은 나갔다, 그리고 그들은 서로 두려워 떨며, 말하기를, 어찌하여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이렇게 하셨을까?

요셉이 명령했다. 이는 영적 평면 속의 천적 부분으로부터 유입이 있다를 의미한다. 이는 “명령하다”가 영적 평면의 천적 부분을, 또는 외적 부분에 관련하여 내적 부분을 서술할 경우, 유입이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내적 부분은 유입 외의 다른 명령의 방법이 없기 때문, 그 다음 사용을 위해 배열됨이 있다; 그리고 요셉의 표현함이 영적 평면의 천적 부분이다로부터 알려진다.

그리고 그들은 그들의 그릇들을 곡식으로 채웠다. 이는 기억 속의 지식들에게 진리로부터의 선이 수여되었다를 의미한다. 이는 “채우다”의 의미가 지불함이 없이 채워지는 바 수여되어짐이 의미된다; 그릇들의 의미가 기억 속의 지식들이다로부터; 그리고 “곡식(낟알, corn)”의 의미가 진리로부터의 선 또는 진리의 선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리고 그들의 은을 원장소에 되돌리게 하고. 이는 그들의 것으로부터의 어떤 능력 없이를 의미한다. 이는 “은으로 사다”의 의미가 누군가의 자신으로부터 자아를 위하여 포획하는 것이다로부터; 그러므로 여기서는 “은을 원장소에 되돌려 놓는 것”인 바, 이는 무료로 수여하는 것, 또는 그들의 것으로부터의 어떤 능력 없이 이다; 이사야서에서:
목마른 모든 이, 너희는 물들로 오라, 은이 없는 자, 너희도 오라, 사라 그리고 먹으라; 그렇다, 오라, 은 없이, 값을 치룸 없이 포도주와 젖을 사라 (이. 55:1).

각각의 것을 각자의 자루에. 이는 자연 평면에서 그릇이 어디에 있든지를 의미한다. 이는 “자루”의 의미가 저장소(receptacle), 그릇, 용기이다로부터; 이것이 자연 평면에서 라고 말한 이유는 취급되는 주제가 자연 평면에 있는 진리들과 기억 속의 지식들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자루(sack)”는 특별히 기억 속의 지식들을 의미하는데, 그 이유는 자루가 곡식의 저장소이기 때문, 마찬가지로 기억 속의 지식들은 선의 저장소, 여기서 진리로부터 있는 선의 저장소이기 때문이다. 기억 속의 지식이 선의 저장소이다를 아는 자는 매우 드문데, 그 이유는 이런 사항들을 곰곰이 되생각해보는 자가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아래와 같이 생각해본다면 알아질지 모른다. 기억 속으로 들어가는 기억 속의 지식들은 언제나 어떤 애착을 수단으로 받아들여진다; 어떤 애착을 수단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은 것들은 거기에 달라붙어있지 못하고, 미끄러져 내려가고 만다. 이런 사고가 터지는 이유는 애착 안에 생명이 있기 때문이다, 즉 애착을 통하지 않고는 기억 속의 지식들에 생명이 없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분명한 바, 기억 속의 지식들은 언제나 애착으로부터 있는 이런저런 것들과 결합되어 있다는 것, 또는 사랑으로부터 있는 이런 저런 것들과 결합하고 있다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어떤 선과 결합되고 있는 것이다. 그 이유가 사랑으로부터 있는 모든 것이 선이라 불리우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선들과 함께 있는 기억 속의 지식들은 마치 결혼 관계를 형성해놓고 있다, 그러므로 선이 흥분될 때, 이와 함께 한 기억 속의 지식도 흥분되어진다; 반대로, 기억 속의 지식이 불러내질 때, 그것과 결합한 선 또한 세상 밖으로 출시된다. 따라서 모든 이 각각은 자기가 선택만 하면, 자신을 테스트(test) 받음에 놓이게 할 수 있다.
거듭나지 않고 있는 이와 더불은 경우, 그는 선행의 선을 거절해왔다. 교회의 진리들인 기억 속의 지식들은 자아 사랑과 세상 사랑으로부터의 이런 저런 것들에, 고로 악한 것들에 인접되어 있다. 이것들은 그것들에 있는 기쁨을 이유로 선이라 불리운다, 또한 잘못된 해석을 바탕으로 선이 되어 있다. 이런 기억 속의 지식들은 문제가 있는 사랑들이 보편적으로 지배할 때는 공평한 보이기(fair show)를 만든다, 그리고 등차에 따라 그것들이 지배한다. 그러나 거듭나는 자와 더불어 교회의 진리들인 기억 속의 지식들은 이웃을 향한 선행과 하느님을 사랑함, 고로 진짜 선한 것들로부터의 이런저런 것들과 결합되어 있다. 이 두 사랑들은 거듭나고 있는 모든 이와 더불어 있는 교회의 진리들 안에 주님에 의해 저장되고 있다; 그러므로 주님이 선을 위한 열정을 이런 인물들 안에 은근히 심으실 때, 이 진리들은 그것들의 질서에서 자체들을 보이기를 한다; 그리고 그분이 진리를 열정을 은근히 심으실 때, 이 선이 표출되어 불을 지핀다. 이 모두로부터 기억 속의 지식들과 진리들의 경우, 그것들이 선의 저장소들임에 대해 아는 바가 있게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에게 길을 위한 양식을 주는 것. 이는 그들이 가졌던 진리들을 받쳐주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양식(provision)을 주다”의 의미가 받쳐주는 것이다로부터 ; 그리고 “길”의 의미가 진리이다로부터; 여기서는 “길을 위하여”인 바, 그들이 이 상태에 있는 한에서를 표시하는데, 그 이유는 “길을 가는 도중에서 있는 것”이 선과 더불어 결합한 진리의 상태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양식”에 의해서는 진리와 선으로부터 받쳐줌도 의미한다. 다윗서에서:
그분은 식품을 위하여 그들 위에서 비를 만나로 만드셨다, 그리고 그들에게 천국들로부터의 낟알을 주셨다. 인간은 용사의 빵을 먹었다; 그분은 그들에게 배불러지도록 양식을 주셨다
(시. 78:24, 25).

그리고 그는 이렇게 그들에게 했다. 이는 결과를 의미한다.

그리고 그들은 그들의 농산물을 나귀에 실었다. 이는 진리들이 기억 속의 지식들 안으로 모아졌음을 의미한다. 이는 “농산물”의 의미가 진리이다로부터; 그리고 “나귀”의 의미가 기억 속의 지식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러므로 “자기들의 농산물을 자기들의 나귀에 실었다”에 의해 진리들이 기억 속의 지식들에 모아졌다가 의미된다. 이것이 이 구절의 의미이다에 대하여 자기 마음을 글자의 역사적 의미에 고정시킨 이들에게는, 특히 글자로부터 빛을 내는 것 외의 다른 의미, 특히 내적 의미 같은 것은 없다고 하는 이들에게는 이상한 듯 여길 수 있을지 모른다. 그 이유가 그들 스스로 되뇌이는 말, 나귀에 농산물을 싣는 것이 진리가 기억 속의 지식 안으로 모아진다는 말이냐?고 반문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알아야 하는 것은, 글자 의미가 인간으로부터 천사에게, 또는 천국 안으로 건너갈 때, 글자 의미는 영적 의미로 건너간다는 것이다, 그리고 글자 의미가 가장 깊은 천국 안으로 건너갈 때, 글자 의미와 아주 무관할듯한 정도로 떨어져 있는 가장 깊은 영적 의미로 건너간다는 것이다. 이 가장 깊은 천국에서 말씀의 모두와 각각은 사랑과 선행으로부터 있는 애착들 안으로 건너간다, 이 의미쪽으로 내적 의미는 평면을 제공하여 봉사한다.
말씀의 역사물들이 천국 안으로 승강할 때, 이것은 또다른 의미로 건너간다에 대하여는 이성으로부터 결말을 갖는 이들에 의해, 그리고 자연적 측면과 영적 측면에 관한 어떤 것을 아는 이들은 알는지 모른다. 그는 알 수 있다: 즉 나귀에 농산물을 싣는 것은 그야말로 순수하게 자연적 행동이다는 것, 그리고 그것 안에는 영적인 것은 무엇이든 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이것 또한 알 수 있다: 즉 천국에 있는 천사들, 또는 영계에 있는 이들은 이런 구절의 말들을 영적으로밖에는 납득할 수 없다는 것, 그들은 자기들의 장소에서 그것들의 상응으로 이해하여 영적으로 납득한다는 것, 즉 “농산물” 대신에 교회의 진리를, 그리고 “나귀들” 대신에 기억 속의 지식들을 납득한다. 말씀에서 “나귀”에 의해 섬기는 것들, 그러므로 명백한 것은, 천사들의 생각과 말함이 인간의 생각과 말함에 비교하면, 천사의 것은 영적이고 인간의 것은 자연적이다는 것이다; 그리고 전자가 하강하면, 후자 안으로 낙하하고, 후자가 승강하면, 전자로 바뀐다. 이렇지 아니하면, 인간의 것이 무엇이든 천사와. 세상의 것이 무엇이든 천국과 교통되어질리 만무하다.

그리고 그들은 거기로부터 갔다. 이는 그 결과로 있는 생활을 의미한다. 이는 “가다”의 의미가 살아가는 것이다 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리고 한 사람이 그의 자루를 열었다. 이는 관찰을 의미한다. 이는 “자루”의 의미가 자연 평면에 있는 저장소이다로부터, 이것은 진리로부터의 선을 수여받아져 있다. 그것을 “여는”것이 관찰(observe)을 표시한다는 것은 시리즈로부터 이다; 그 이유가 이어지는 말, “여관에서 자기 나귀에게 먹이를 주려고”의 의미가 외면의 자연 평면에 있는 기억 속의 지식들을 곰곰이 되생각함 이기 때믄이다.

여관에서 그의 나귀에게 먹이를 주려고. 이는 외면의 자연 평면에서 기억 속의 지식들을 곰곰이 생각했을 때를 의미한다. 이는 “나귀에게 먹이를 주다”의 의미가 기억 속의 지식들을 곰곰이 되생각해보다 이다로부터; 그 이유가 먹이(provender)가 나귀들이 먹는 식품, 즉 짚(straw)과 여물(왕겨, chaff) 등으로 구성되는 식품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기억 속의 지식들 위에서 모든 곰곰이 되생각함을 표시한다; 그리고 “여관”의 의미가 외면의 자연 평면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여관”이 여기서 외면의 자연 평면이다는 것은 다른 말씀의 유사한 구절로부터 확증될 수는 없으나 확증할 수 있는 방법은, 기억 속의 지식들이 외면의 자연 평면에 있을 때, 마치 여관에 있는 듯하다로부터 이다. 기억 속의 지식들이 외면의 자연 평면에 있을 때, 그것들은 신체의 외적 감각들과 직접 교통한다, 그리고 거기서 영면하고 이 감각들에 기초를 두고 있다. 그러므로 이 자연 평면은 기억 속의 지식들에게는 “여관”, 또는 쉼을 위한 장소, 또는 밤을 보내기 위한 장소 이다.

그는 그의 은을 보았다. 이는 그것이 그들 자신으로부터의 어떤 능력 없이 있었다는 것을 지각함을 의미한다. 이는 “보다”의 의미가 이해하고 지각하다 이다로부터; 그리고 “원장소에 놓인 은”이 그들의 것으로부터의 어떤 힘(power) 없이 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리고 보라 그것은 그의 자루의 아구에 있었다. 이는 그것들이 수여되어졌고, 그것들은 자연 평면의 외면의 문지방에 저장되어져 있었음을 의미한다. 이는 “자루(bag)의 아구”의 의미가 자연 평면의 외면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것에는 함축한 어떤 것이 저장되어 있다는 것, 그리고 그것이 (무료로) 수여되어졌다는 것이 앞의 대목으로부터 이어져서, 이것은 그들의 자신으로부터의 어떤 능력 없이 있었다는 것이 함축되어 있다. 아구(입, mouth)는 자루의 앞 부분인 바, 그러므로 저장소의 앞 부분밖에 더 다른 의미는 없다, 고로 자연 평면의 외면이다. (자루가 저장소이다에 대하여는 5289, 5494항을 보라.) 자연 평면의 외면과 내면이 무엇인지를 알기 위해 약간의 설명이 필요할 것 같다. 아직 성숙기에 이르지 않은 소년(boy)은 자연 평면의 외면 보다 더 높은 수준의 어떤 것을 생각할 수 없다; 그 이유가 그의 관념(idea)들이 감각으로부터의 것들로 구성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성숙되었을 때(소년기가 끝날 때), 그는 감각으로부터 원인 측면에 관련된 것을 끌어낸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자연 평면의 내면으로부터 생각하기를 시작한다; 그 이유가 이때 그는 감각의 것들로부터 얼마간의 진리들을 만들어 내기 때문, 이것은 감각들을 초월해 부상한다, 그러나 여전히 그는 자연 평면에 있는 것들 안에 머무르고 있다. 그 다음 그가 젊은 이가 (young man)되었을 때, 만일 그가 (육체가) 성숙되듯 그의 합리성도 갈고 닦는다면(cultivate), 그는 자연 평면의 내면에 있는 것들로부터 이성(reason)들을 만들어 낸다, 고로 이 이성은 한층 더 높은 진리이고, 자연 평면의 내면에 있는 것들로부터 끌어내져 나와 있는 것이다. 이것들로부터 있는 생각의 관념(idea of thought)들이 학식계에서 지적인 생각(intelluctual idea)들, 비 물질적인 생각(immaterial idea, 실체 없는 생각)들이라 부르고 있다. 한편 두 자연 평면에 있는 기억 속의 지식들이 감각들로부터 세상의 것들에 참가하는 한 그것은 물질적인 생각들이라 불리운다. 이런 길에서 인간은 세상으로부터 천국쪽을 향하여 그의 이해력이 올라타게(mount) 한다. 그렇지만 당사자 주변에서 계속적으로 현존하고 흘러들려 하는 주님을 선을 그가 받아들이지 않는 한, 그는 자기 이해력과 더불어 천국 안으로 와있는 것은 아직 아니다; 그러나 그가 선을 받아들인다면, 그에게는 진리 역시 (공짜로) 수여되어진다; 그 이유가 모든 진리들은 선 안에서 자기들의 숙소를 발견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진리들이 그에게 수여됨에 따라, 마찬가지로 이해력 또한 수여되고, 이것 때문에 그는 천국 안에 있다.

그리고 그는 그의 형제에게 말했다. 이는 일반적인 지각을 의미한다. 이는 “말하다”가 말씀의 역사물에서 지각하다를 의미함으로부터; 그리고 “그의 형제들”의 의미가 일반적인 것이다로부터, 그 이유가 모두에게 말한다는 것은 일반적인 것이 된다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내 은이 원장소에 도로 있다. 이는 그들로부터 도움이 없이 있었다를 의미한다.

그리고 보라 그것은 아예 내 자루 안에 있다. 이는 그것이 자연 평면의 외면에 있었다를 의미한다. 이는 “자루”의 의미가 자연 평면의 외면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리고 그들의 심장이 나갔다. 이는 두려움을 의미한다. 이는 “심장이 나가다”가 두려움을 표시하는 이유는 심장이 두려움에서 떨리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은 서로 떨었다. 이는 일반적인 공포를 의미한다. 이는 “서로(a man to his brother)”가 일반적인 것이다로부터; 여기서 두려움이 실로 두 번 표현된 셈인데, 즉 “심장이 나감”과 “떨다”이다. 이중 하나는 의지 측면이고, 또 하나는 이해력 측면이다. 두 번 언급되는 방식이 두드러진 말씀은 예언적 말씀에서 인데, 이는 단지 한 가지 것을 단어들을 바꾸어 표현한 것이다. 이 반복됨에 있는 신비함들을 모르는 이들로서는 왜 불필요하게 반복했을까 상상할지 모른다; 그럼에도 불필요한 것이 아니고, 하나는 선 측면을, 또 하나는 진리 측면에 관계하고 있다; 그리고 선은 의지 속에, 진리는 이해력 속에 있기 때문에 하나는 의지 측면을, 또 하나는 이해력 측면에 관계된다. 이런 이유는 말씀에 있는 모든 것은 거룩하고, 거룩함은 천국의 결혼, 즉 선과 진리의 결혼으로부터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천국이 말씀 안에 있다는 것, 결과적으로 주님은 천국의 모든 것들 안의 모두 이시다는 것, 마찬가지로 주님은 말씀이시다. “예수 그리스도”라는 주님의 이중적인 이름도 마찬가지를 포함한다; “예수”는 신성한 선을, “그리스도”는 신성한 진리를 표현하고 있다. 그러므로 분명한 바, 주님은 말씀 속의 모든 것 안에 계신다는 것, 마찬가지로 그분은 말씀 자체이시다는 것이다. 이로부터 이런 결말이 있을 것이다; 즉 만일 인간이 천국을 희망한다면, (주님의 이름이 “예수 그리스도” 라고 이중적으로 불려지듯) 우리도 이중적인 것을 지녀야 한다는 것, 즉 신앙 속에 있는 진리, 선행 속에 있는 선을 지녀야만 할 것, 이것만이 자신 안에 천국 있음을 가능하게 한다.

말하기를, 어찌하여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이렇게 하셨을까? 이는 그렇게 많은 섭리 때문에를 의미한다. 이는 “하느님의 행하심”이 섭리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 이유가 하느님이 행하시는 것은 섭리하심이다 외의 다른 것으로는 표현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인즉, 하느님, 또는 주님이 행하시는 모든 것 안에 영원과 무한이 있기 때문이다, 이것들은 하나의 단어로 “섭리”이기 때문이다. 이 섭리하심에 놀라움이 있기에 있어진 표현이 그렇게 많은 섭리 때문에 라는 말이다.

29-34절. 그들이 가나안의 토지로 그들의 아버지 야곱에게 왔다, 그리고 그들에게 일어났었던 모든 것을 이야기했다, 말하기를 30 그 토지의 주인 남자가 우리에게 알기 어려운 것을 말했고, 우리를 그 토지의 스파이로 취급했습니다. 31 그래서 우리는 그에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곧바른 자들입니다. 우리는 스파이가 아닙니다. 32 우리는 우리의 아버지의 아들들, 열두 형제인데, 하나는 있지 않고, 가장 어린 것은 가나안의 토지에서 우리의 아버지와 더불어 오늘 있습니다. 33 그리고 그 토지의 주인, 남자가 우리에게 말하기를, 이런 식으로 나는 너희가 곧바른 자들인지 알리라. 너희 형제 중 하나를 나에게 남겨 두어라, 그리고 네 집의 기근을 위하여 가지고, 그리고 가라, 34 그리고 너희 가장 어린 형제를 나에게 데려오라. 그러면 나는 너희가 스파이가 아니고, 곧바른 자임을 알리라. 나는 네 형제를 너에게 줄 것이고, 그리고 너희는 이 토지에서 무역을 하며 왕래 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왔다. 이는 개혁의 계속을 의미한다. 이는 “그들의 아버지 야곱에게 오다”의 의미가 여기서는 개혁됨의 계속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 이유가 그들의 아버지 야곱에 의해 자연 평면에 있는 진리의 선이 표현되고, 이것에 “오다”는 그만큼 개혁됨이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내적 의미에서 취급된 주제가 교회의 진리들이기 때문, 이 진리들이 야곱의 열 아들들이고, 어떻게 그것들이 자연 평면에 심어졌는지, 그리고 후에 영적 평면의 천적 부분과 결합되었는가에 대한 것이기 때문; 또는 어떻게 외적 인간에 있는 진리들이 내적 인간에 있는 신성으로부터의 진리들과 결합되는가에 관하여서 이기 때문이다. 이런 모두로부터 분명한 바, 여기서의 “오다”는 개혁의 계속됨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그들의 아버지 야곱에게. 이는 자연 평면의 선을 의미한다. 이는 야곱의 표현함이 자연 평면의 진리로부터의 선이다로부터; 그리고 “아버지”의 의미가 선이다로부터 알려진다. 이 선에 오는 것이 그 정도까지 개혁되는 것이다. 후에 이 선을 수단으로 “베냐민”인 중매자기 추가 되었을 때, “요셉”인 내적 부분과의 결합이 결과되어진다.

가나안의 토지로. 이는 교회에 있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가나안의 토지”가 교회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야곱에 의해 표현된 진리부터의 이 선은 외적 교회의 선이다; 그러나 이스라엘로 표현되는 진리로부터의 선은 상대적으로 내적 교회의 선이다.

그에게 그들에게 일어났었던 모든 것을 이야기했다. 이는 지금까지 설비되어 있었던 것들을 이 진리의 선으로부터 곱씹어봄을 의미한다. 이는 “말하다(tell)”의 의미가 생각하는 것과 곱씹어보는 것이다로부터; 그 이유가 누군가에게 말하는 것이 곱씹음으로부터의 생각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일어났었던 모든 것”은 섭리로부터 있는 것이다를 의미함으로부터 알려진다. 곱씹어봄이 진리의 선으로부터 있는 이유는 그들이 자기들의 아버지 야곱에게 말했기 때문, 이를 수단으로 진리의 선이 표현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곱씹어봄이 글자 의미가 함축하는 야곱의 아들들인 진리로부터 있지 않은 이유는, 보다 낮은 수준의 것, 또는 외면이 가지는 모든 곱씹어봄(반성함)과 이로부터 생각함은 비록 그 자체가 그렇게 하는 듯 여겨져도 이는 보다 높은 것, 또는 내면으로부터 오기 때문이다; 그리고 야곱이 표현한 진리의 선은 내면 부분에 속하기에, 진리의 선으로부터 곱씹어봄이 의미되는 것이다.
그들에 일어났었던 것들이 섭리 속의 것들, 설비되어진 것들인 이유는 일어나는 것, 또는 발생하는 것들을 두고 섭리로부터 이다고 말하기 떼문이다. 우리 주변에서 발생하는 것을 두고 우연한 일, 기회 또는 운으로 그 탓을 돌리는데, 이것도 일종의 섭리를 속내에서는 비치고 있는 경우이다를 참작하면 될 것이다. 신성한 섭리는 눈에 않보이게, 또는 납득 되지 않는 쪽에서 역사하는데, 이는 인간 당사자로 그가 섭리라고 하든 우연한 기회였다 하든 그의 자유 의사에 맡기기 위함에서이다. 만일 섭리함이 눈에 보이게, 납득되게 운행되었다면, 인간이 신을 믿는 것이 얼마나 쉬울 것, 확실할 것 아니냐 하고 상상될지 모르나 그것은 착오적이다. 그 이유가 인간은 언제나 그 반대를 선택하여 100% 악용할 위험성을 100% 지녔기 때문이다. 이런 타락에서 진리와 거짓이 내적 인간 안에서 결합되어 있으면, 진리는 모독되어지고, 이 모독은 그를 영원한 지옥에 떨어짐으로 이어진다. 그러므로 만일 이런 인간으로 될 소지가 다분하다면, 이런 인간은 신앙을 지녔다가 그것에서 퇴조하는 것보다는 여전히 불신앙에 있는 것이 나을지 모른다.
이에 대해 이사야서에서:
이 백성에게 말하라, 너희가 정녕 듣는다, 그러나 이해하지 못한다; 그리고 너희가 정녕 보고 있다, 그리고 알지 못한다. 이 백성의 심정을 지방이 많게 만들어라, 그리고 그들의 귀를 무겁게 만들어라, 그리고 그들의 눈을 뒤바르라; 하여 그들이 자기들의 눈으로 보지 않도록, 그리고 자기들의 귀로 듣지 않도록, 그리고 그들의 심정이 깨닫지 않도록, 그리고 그들이 다시 돌아서지 않도록, 그래서 치료되어지지 않도록 하라 (이. 6:9, 10; 요. 12:40).
이런 이유로 해서 기적들은 오늘날 작업되지 않는다, 그 이유가 눈에 보이거나 납득되는 이런저런 것들은 인간으로 그것을 믿도록 강요하기 때문, 그리고 강요된 것은 무엇이든 그의 자유를 거두어 가기 때문이다. 자유함에서 심어지지 않은 것은 거기에 머물러 있지 못한다. 인간이 선과 진리에 애착함 안에 있을 때, 자유함 안에서 심어진다.
매우 큰 기적들이 야곱의 후손 사이에서 있어진 것은 그들로 하여금 외적 형체에 있는 규례들을 준수해가게 강요하기 위함이었다. 그들을 이렇게 다루어도 괜찮았던 이유는 그들이 교회의 표현물(완전 껍데기)에만 있었기 때문, 즉 내적 부분과 완전히 분리된 외적인 것에서만 있는 이들, 고로 내면들 측면에서는 개혁되어질 수 없는 속성을 지닌 이들이었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이들은 내면의 것들을 완전하게 거절했기 때문이다. 고로 그들은 진리들을 모독할 수 없었다. 이런 부류의 인간은 거룩한 것을 모독하는 위험 없이 강요되어질 수 있었다.
오늘날 인간들은 그가 보지 않은 것을 믿어야 한다. 하여 주님께서 도마에게 말하셨다:
네가 나를 보았기 때문에 나를 믿느냐, 도마야: 보지 않고도 믿는 자에게 복이 있다 (요. 20:29).
발생되는 것들(다른 말로 우연한 기회나 운으로 돌리는 것들)이 신성한 섭리 속에 있다는 것을 실로 교회가 인정한다, 그러나 여전히 믿지 않는다; 눈에 보이는 어떤 기회를 수단으로 어떤 큰 위험에서 빠져나왔을 때, 자기는 하느님에 의해 보전되었다고, 또한 하느님께 감사하다고 말하지 않을 자 누가 있을 까? 마찬가지로 누군가가 명예를 얻거나 부자가 되었거나 했을 때, 그가 그것을 두고 하느님께 복받았다고 말하지 않을 자 누가 있을까? 고로 교인은 발생된 것이 섭리 속에 있다고 인정한다, 그러나 아직 믿는 것은 아니다. 이 주제에 관하여는 주님의 신성한 자비로부터 다른 장소에서 더 말해볼 것이다.

말하기를. 이는 지각을 의미한다. 이는 말씀의 역사물에서 있는 “말하다(say)”의 의미가 지각하다 이다로부터 알려진다.

그 토지의 주인 남자(vir). 자연 평면에서 통치하는 영적 평면의 천적 부분을 의미한다. 이는 여기서 “이 토지의 주인 남자”인 요셉의 표현함이 영적 평면의 천적 부분이다로부터 알려진다. “남자(man, vir)”가 영적 측면을, “주인(lord)”은 천적 측면을 서술한다; 그 이유가 내적 의미에서 “남자”는 진리를, “주인”은 선이기 때문, 그리고 신성으로부터의 진리가 영적 평면이라 불리우고, 신성으로부터의 선은 천적 평면이라 불리운다; 그리고 “토지(land)”, 여기서는 이집트의 토지인데, 자연적 수준의 마음을 의미함으로부터 알게 된다. 요셉에 의해 표현된 영적 평면의 천적 부분이 자연 평면의 양쪽 측면에서 통치한다는 것은 앞 장의 내적 의미 안에 포함되어 있다; 그리고 이것이 요셉이 이집트의 지배자로 군림하는 것으로 앞 장에서 끝을 맺었다.
자연 평면에 두 가지 것들이 있다: 즉 기억 속의 지식들과 교회의 진리들이다; 기억 속의 지식들에 관하여, 이것은 영적 평면의 천적 부분들, 또는 신성으로부터의 진리가 자연 평면에서 질서적으로 잘 배열되어졌다는 것이 앞 장에서 보여주었다. 지금 야곱의 열 아들들에 의해 표현되는 교회의 진리들이 취급되어진다. 기억 속의 지식들은 교회의 진리들에 앞서 자연 평면에서 질서적으로 배열되어야만 한다; 그 이유는 후자는 전자로부터 납득되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그가 유아 때로부터 습득한 이런저런 기억 속의 지식들로부터 파생된 관념들(정리되어 이것이다라고 결말을 본 생각들 역자주) 없이 당사자의 이해력 안으로 들어갈 수 없기 때문이다. 인간이 도대체 모르는 바는, 신앙의 진리라고 불리우는 교회의 진리들이 그의 기억 속의 지식들에 기초를 두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가 그것을 납득한다는 것, 그것을 기억 속에 간직한다는 것, 그리고 그것을 기억으로부터 불러낸다는 것, 이런 등등의 작업을 자기 안에 있는 기억 속의 지식을 구성하는 관념들을 수단으로 한다는 점에 대하여 이다.
다른 삶에서, 이 관념들의 품질은 그것을 바라는 이들에게 삶으로 곧잘 보여지고 있다; 그 이유가 이런저런 것들이 천국의 빛에서는 시야에 명백하게 표출되기 때문이다; 그때 또한 나타나는 것은 그들이 교회의 교리로부터의 진리를 붙들고 있는 것의 등차에 따라서, 즉 그늘짐의 정도에 따라, 빛의 광도에 따라 등등에서 나타난다; 즉 이 진리는 어떤 경우는 거짓들 사이에서, 어떤 경우는 농담이나 비방함 따위의 사이에서, 어떤 경우는 외관상의 진리들 사이에서 등등이다. 만일 인간이 선 안에 있어왔다면, 즉 만일 그가 선행의 삶을 살아왔다면, 그러면 이 선으로부터, 마치 천국으로부터의 불꽃으로부터, 진리들은 계발되고, 그것들 안에 있는 감각들의 오류들이 아릅답게 빛을 발한다; 그리고 순진이 주님에 의하여 은근히 심어질 때, 이런저런 오류들이 진리들 같이 나타난다.

우리에게 알기 어려운 것. 이는 비 상응 때문에 비 결합이 있음을 의미한다. 이는 “어려운 것들을 이야기를 함”의 의미로부터, 이는 내적인 것으로부터 분리된 외적인 것에 내적인 것을 말할 때의 경우를 서술하는 바, 비 상응함 때문에 비 결합함이 의미된다; 그 이유가 만일 외적 부분이 내적 부분과의 상응함이 없으면, 내적인 모든 것, 그리고 내적 부분으로부터 오는 모든 것이 외적 부분에서는 어려운 것으로 나타난다, 그 이유는 결합이 없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보자: 만일 내적 인간, 또는 내적인 것 안에 있는 사람에 의해 말해지는 것은, 인간은 자신으로부터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천국으부터, 또는 천국을 통하여 주님으로부터, 또는 지옥으로부터 생각한다고 말한다; 하여 만일 그가 선을 생각한다면, 이것은 천국을 통하여 주님으로부터 있다는 것; 만일 그가 악을 생각한다면, 이것은 지옥으로부터 이다는 것이다; 이런 말들이 자신으로부터 생각하기를 바라는 이들에게는 무슨 말을 하는지 조차 통째로 알기 어려운 말이 되어 있다, 그리고 만일 이것이 그러하다 여겨본다면 이 서술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라고 믿고야 만다. 허지만 이것은 진정 최고의 진리이다, 그래서 천국에 있는 모든 이는 이것이 그렇다함을 확실히 지각하고 있다.
같은 방식에서 내적 측면을 수단으로, 또는 내적인 것 안에 있는 이들에 의해 말해진다: 즉 천사들이 가지는 기쁨(joy)은 주님을 사랑함과 이웃을 향한 선행으로부터 있다는 것. 즉 그들이 사랑과 선행에 속한 것들로부터의 유용함(use)을 수행할 때, 이것들 안에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기쁨과 행복이 있는다는 것을 자아 사랑과 세상 사랑으로부터 기쁨을 가지는 이들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말이 되어 있다, 어쨌든 천국과 천국의 기쁨이 인간 안에서 시작하기 앞서 자기기 수행하는 쓸모있어짐 안에서 자아를 중시함이 죽어나가야 한다.
또 다른 예를 가져보자: 내적 부분을 수단으로 이렇게 말해진다: 인간의 혼은 내적 인간밖에 더 없다, 그리고 사후 내적 인간은 세상에서의 인간 같이 나타난다, 말하자면 비슷한 얼굴, 몸, 감각, 생각하는 능력 등등에서이다; 그러나 혼에 관해, 혼이란 생각함의 힘일 뿐이다, 고로 혼은 에테르같은 것일 뿐이다, 형체가 없다 라는 견해를 굳힌 이들에게 혼의 본성에 관해 내적 인간에 의해 말해지는 것들은 진리로부터 너무나 멀리 있는 듯 여겨질 뿐이다. 게다가 육체만이 인간이다라고 믿는 이들이, 혼이 인간 자신이고, 매장된 육체는 다른 삶에서는 쓸모 없다라는 말을 들을 때, 이것은 알기 어려운 말이 되어 있다. 허지만 이것이 진리이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그 이유가 주님의 신성한 자비로부터 나는 다른 삶에 있는 이들과 더불어 있어보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한 두 명과 더불어서가 아니라 아주 많은 이들과, 한번 만이 아닌 매우 자주, 그리고 그들과 이런 것에 관하여 대화도 했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는 나에게 대단히 많은 편이다.

그리고 우리를 그 땅의 스파이로 취급했습니다. 이는 교회 속의 진리들이 이득을 추구하려고 있었음이 관찰되었다를 의미한다. 이는 여기서 “우리”인 야곱의 아들들의 표현함이 자연 평면에 있는 교회의 진리들이다로부터; 그리고 “스파이” 또는 “토지의 스파이”의 의미가 자신의 이점만을 노리며 교회의 진리들 안에 있는 이들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리고 우리는 그에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곧바른 자들이요, 스파이가 아닙니다. 이는 그들이 이득을 취할 목적으로 교회 속의 진리들에 있었음을 부정함을 의미한다. 이는 “그에게 말하다”가 응답, 여기서는 부정하다 이다로부터; 그리고 “우리는 곧바르다”의 의미가 자신들 안에 있는 진리는 진리이다로부터; 그리고 “스파이”의 의미가 자신의 이점을 위해 교회의 진리들 안에 있는 자들이다로부터, 여기서는 그런 자들이 아니다로부터 알게 된다.

우리는 열두 형제이다. 이는 한 복합체에 있는 모든 진리들을 의미한다. 이는 “12”가 모든 것들을 의미한다로부터; 여기서는 야곱의 아들들을 서술하고, 또는 지파를 명명된 열두 지파들, 또는 열두 사도들의 경우 같은 바, 하나의 복합체(complex)에 있는 모든 진리들을 의미한다.

우리의 아버지의 아들들. 이는 한 근원으로부터를 의미한다. 이는 “아들들”의 의미가 진리들이다로부터; 그리고 “아버지”의 의미가 선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러므로 “아버지의 아들들”은 선으로부터의 진리들을 의미한다, 고로 하나의 근원(선)으로부터이다. 더 나아가 모든 진리들은 하나의 선으로부터 이다.

하나는 있지 않다. 이는 신성한 영적 근원은 나타나지 않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는 앞에서 살핀 바 있다.

가장 어린 것은 오늘 아버지와 함께 있다. 이는 그(him)로부터 영적 선에 첨가 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 대목 역시 이미 살핀 바 있다. “그에 의하여”이다고 말해지는 이유는 베냐민에 의해 표현되는 중매자는 “요셉”인 영적 평면의 천적 부분으로부터 진행하기 때문이다.

그 땅의 주인, 남자가 우리에게 말했다. 이는 자연 평면에서 통치하고 있는 영적 평면의 천적 부분에 관하여 지각함을 의미한다. 이는 말씀의 역사 부분에서 “말하다(say)”의 의미가 지각하는 것이다로부터; 그리고 “남자, 토지의 주인”의 의미가 자연 평면을 통치하는 영적 평면의 천적 부분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런 식으로 해서 나는 너희가 곧바른지 알리라. 이는 너희가 이득 때문에 교회 속의 진리에 있는 것이 아닌지 자발적으로 알려짐을 의미한다. 이는 “안다”의 의미가 여기서는뜻해지는 것이다로부터, 그 이유가 이는 시리즈로부터 뒤잇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너희는 스파이들이다”의 의미로부터, 고로 그들은 스파이들이 아니다의 의미가 그들은 이득을 위하여 교회의 진리들 안에 있지 않다 이다로부터 알려진다.

너희 형제 중 하나를 나에게 남겨 두어라. 이는 의지에 있는 신앙은 그들로부터 분리됨을 의미한다. 이는 “너희 형제들 중의 하나”인 시므온의 표현함이 의지에 있는 신앙이다로부터; 그리고 “남겨라”의 의미가 분리되는 것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 분리됨은 앞에서 서술했다.

그리고 네 집의 기근을 위하여 가져가라. 이는 한동안 그들은 자신들을 위해 이 황무함 가운데 있게 설비되었음을 의미한다. 이는 앞에서 살폈다. 황무함이 의미되는 이유는 이것이 “기근”에 의해 의미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가라. 이는 그들이 그렇게 살게 됨을 의미한다. 이는 “가다”가 사는 것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리고 네 가장 어린 것을 나에게 데려 오라. 이는 거기에 결합을 있게 하는 중매자가 있다면…을 의미한다. 이는 여기서 “가장 어린 형제”인 베냐민의 표현함이 중매자 이다로부터; 그리고 “그를 나에게 데려오라”의 의미가 이것 때문에 결합이 있을 것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 이유가 야곱의 열 아들들에 의해 표현되는 외적인 것들이 요셉에 의해 표현되는 내적인 것들과 결합함은 중매자를 수단으로 하기 때문이다.

그 다음 나는 네가 스파이가 아님을 알리라. 이는 그때 진리들은 이득을 목적으로 더 이상 있지 아니할 것을 의미한다. 이는 “스파이”의 의미가 이득을 얻고자 교회의 진리들 안에 있는 이들이다로부터, 여기서는 중매자를 통한 결합이 있으면 더 이상 그렇지 않다가 의미된다.

너희는 곧바른 자이다. 이는 이리하여 상응이 있을 것임을 의미한다. 이는 “너희는 곧바른 자이다”의 의미가 그들은 진리들 안에 있었다 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 이유가 “곧바름”이 진리이기 때문; 그리고 그때 그들이 이득을 위하여 진리들 안에 있지 않은 바, 이는 상응함이 있을 때, 그러므로 이 상응함이 “너희는 곧바르다”에 의해 의미되는 셈이다.

나는 너에게 네 형제를 주리라. 이는 이렇게 해서 진리들은 선들이 되어 갈 것임을 의미한다. 이는 여기서 “그가 그들에게 줄 형제”인 시므온의 표현함이 의지에 있는 신앙이다로부터; 그리고 그가 주어지게 될 야곱의 열 아들들의 표현함이 자연 평면에 있는 교회의 진리들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나는 너희에게 네 형제를 줄 것이다”에 의해 이 진리들이 선들이 되어갈 것이다가 의미되는 이유는 의지에 신앙이 존재할 때, 진리들은 선들이 되어가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교리로부터 있는 신앙의 진리들이 의지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이것은 생활의 진리가 된다, 그리고 행동에 있는 진리이다, 이때 선이라 불리우고, 또한 영적 선이라 불리우기 때문이다. 이 선으로부터 새로운 의지력이 주님에 의해 인간 안에 만들어내진다. 의지가 진리로 선이 되어있게 하는 이유는 의지 자체만으로부터 주목하면, 그것은 사랑밖에 더 아니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인간이 사랑하는 것은 무엇이든 그가 뜻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반대로 그가 사랑하지 않는 것은 무엇이든 뜻하지 않기 때문이다; 게다가 사랑 속에 있는 것, 사랑으로부터 있는 것은 인간에 의해 선으로 지각되기 때문, 그 이유가 그것이 그를 기쁘게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의지 속에 있는 것, 의지로부터 있는 모든 것은 선이다.

그리고 너희는 이 땅에서 거래하며 왕래 하리라. 이는 이리하여 진리들이 선으로부터 열매를 만들고 모든 것은 유용함과 유익함쪽을 향해 나아가게 될 것임을 의미한다. 이는 “무역함, 거래함(trade)”의 의미가 자신을 위해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들을, 고로 교회의 진리들을 포획하는 것, 그리고 그것들과 교통하는 것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런저런 것들을 가지고 있는 이들이 “거래자들”이라 불리운다; 그러므로 “토지에서 거래하며 오가는 것”은 그들이 어디에 있든 부지런히 이런저런 것들을 위해 애쓰는 것이다; 그 이유가 결합이 “베냐민”인 중매자를 통하여 결과 될 때, 야곱의 열 아들들로 표현된 외적 부분이 요셉으로 표현된 내적 부분과 결합이 있다, 다시 말해 인간이 거듭나아갈 때, 이때 진리들은 선으로부터 계속적으로 열매를 많이 열리게 한다. 그 이유가 선 안에 있는 이들은 일반적 진리들로부터 흐르는 진리들을 명료하게 보는 능력(capacity)이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계속적인 시리즈에서도 명료하게 보는 능력이 있다; 더욱이 세상적이고 육체적인 것들이 그늘로 내던져야 하는 일이 없는 다른 삶에서의 경우 확실히 명료하게 본다. 이 수용 능력이 선 안에 있다는 것이 많은 경험으로 나에게 보여졌다. 내가 어떤 영들을 보았는데, 그들은 세상에서 명백한 시각을 지니지는 않았으나 선행의 생활을 이끌어 간 영들이었는바, 천국의 사회들 안으로 들려졌다, 이때 그들은 거기 있는 천사와 비슷한 총명과 지혜 안에 있었다. 그 이유가 그들이 지녔던 선을 통하여 그들이 올려진 천사의 사회들로부터의 모든 유입을 받는 수용력을 지녔었기 때문이었다. 이 수용력, 그러므로 이런저런 열매 풍성함은 선 안에 있다. 그러나 선을 수단으로 그들 안에서 열매를 연 진리들은 진리들로 머물지 않고, 그것들을 수단으로 생활쪽으로 회부되고, 유용함들이 된다; 그러므로 “토지에서 오가며 거래함”에 의해 그것들 모두가 유용함과 유익쪽을 향해 나아가게 된다.

35-38절. 그리고 한참 지나서 그들이 그들의 자루를 비웠을 때, 보라 각자의 은 꾸러미가 그의 자루에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그들의 은 꾸러미를 보았다, 그들과 그들의 아버지, 그리고 그들은 두려워했다. 36 그리고 야곱, 그들의 아버지가 말했다, 너희는 나로 빼앗기게 한다, 요셉이 없어지고, 시므온도 없어지고, 그리고 너희는 베냐민을 데려 가려 한다. 이 모든 것들이 나에게 일어날 것이다. 37 그리고 르우벤이 그의 아버지에게 말했다, 말하기를, 만일 내가 당신에게 그를 데려오지 않는다면 내 두 아들을 죽이소서. 그를 내 손에 주소서, 그리고 나는 그를 다시 당신에게 데려오리이다. 38 그리고 그는 말했다, 내 아들은 너와 함께 내려가지 않을 것이다. 그 이유가 그의 형이 죽고, 그리고 그 애 만이 남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해악이 너희가 내려가는 도중에 그에게 있게 될 것이다, 그리고 너는 내 백발로 슬픔 안에서 무덤으로 내려 가게 만들 것이다.”

그리고 한참 지나서 그들이 그들의 자루를 비웠을 때. 이는 자연 평면에 있는 진리들을 사용함을 의미한다. 이는 그들이 이집트로부터 산 농산물을 “비우다(empty)”의 의미가 진리들로부터 사용(use)하는 것이다로부터, 그 이유가 “농산물”이 진리를 의미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루”의 의미가 자연 평면에 있는 저장소이다로부터, 고로 자연 평면 임을 알게 된다.

그리고 보라 각자의 은 꾸러미가… 이는 무료로 수여된 진리들을 질서대로 놓음을 의미한다. 이는 “꾸러미(bundle)”의 의미가 질서 대로 놓임이다로부터 (아래에서 살핀다); 그리고 “은”의 의미가 진리이다로부터; “각자의 자기 자루에 그것을 가지다”의미가 이것들이 무료로 수여되었다 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꾸러미”가 질서대로 놓임인 이유는 인간과 더불은 진리들은 배열되고 시리즈로 정돈되기 때문이다. 자기 사랑들과 최고로 일치되는 이런저런 것들은 (마음의) 한가운데에 위치하고, 일치함이 덜한 것들은 측면에 놓이고 전혀 일치하지 않는 것들은 주변쪽으로 거절되어진다. 이 시리즈의 가장 바깥쪽은 그의 사랑들에 반대되는 것들이다. 그러므로 중심에 있는 것들은 혈연 관계라고 불리어진다, 그 이유가 사랑이 혈연 관계를 생산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더 먼쪽에 있는 것들은 연고 관계 (친척, connects) 이다; 그리고 맨끝 경계선에서의 연결 관계는 잠잠해져 있다. 인간 안의 모든 것들은 대충 이런 시리즈로 배열된다, 그리고 “꾸러미”에 의해 의미된다.
위로부터 미루어 분명한 바, 자아 사랑과 세상 사랑에 있는 이들의 경우가 어떨지, 그리고 하느님을 사랑함과 이웃을 향한 사랑함에 있는 경우는 어떨지에 대해서이다. 전자의 경우, 그들 역시 그 사랑이 그들의 중심에 자리하고 있다, 이 사랑을 덜 좋아하는 것들은 주변쪽에서 자리하고; 이 사랑에 반대되는 것들, 즉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함에 속한 것은 내던져져 있다. 이런 상태가 지옥의 배열이다. 이 질서도 때로는 그들 주변에 밝음을 있게 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 밝음 안쪽, 그들이 있는 곳에는 어스레함, 흉측함, 소름끼침이 자리하고 있다. 그러나 천사들과 더불어서는 불꽃의 광휘가 그들의 중심에 있고, 이 광휘는 천적, 영적 사랑의 선으로부터 이다, 그리고 이로부터 주변을 빙둘러 밝음과 빛남이 있다. 그렇게 하여 나타나는 이들은 주님을 닮고 있다; 그 이유가 주님 자신, 그분이 배드로, 야고보, 요한에게 그분의 신성을 보이셨을 때, “얼굴에서 태양 같이 빛이 나왔고, 그분의 의복은 빛 같이 되었다” (마. 17:2) 이시기 때문이다. 주님의 모습인 천사들은 불꽃있는 광휘(radiance)에서 나타난다, 그러므로 무덤을 봉인한 돌을 굴려낸 천국으로부터의 천사의 용모는 흰색이었다: 즉 “그의 나타남은 빛남이었고, 그의 의복은 눈같이 희었다” (마. 28:2).

그의 자루 안에 있었다. 이는 각각의 그릇(저장소)에서를 의미한다. 이는 “자루”의 의미가 저장소 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여기서 저장소가 뜻하는 것을 조금 살펴야 할 것 같다: 인간의 자연 평면은 저장소들로 나뉘어져 있다; 그리고 각 저장소 안에 일반적인 것이, 덜 일반적(general)인 것이, 또는 상대적으로 세부적인(particular) 것이 질서적으로 놓여 있고, 이것들 안에 낱개(single)의 것들이 있다. 각각의 이런저런 일반적인 것들, 그것의 세부적인 것과 낱개의 것과 함께 그것 고유의 저장소를 가지고 있다, 이 저장소 안에서 그것의 상태를 만들어내고 바뀌게 하는 등등의 작업이 진행된다. 거듭나져가는 인간과 더불어, 이런 저런 저장소들은 당사자 안에서 헤아리기 힘든 많은 숫자로 불어나져 있고, 각각의 저장소는 천국의 각각의 사회들과 상응한다. 이런 질서적인 놓임은 사랑의 선, 그리고 이 선으로부터 신앙의 진리에 있는 이들과 더불은 질서의 간단한 배치도인 셈이다. 이상 살핀 바로부터 야곱의 열 아들들에 의해 표현되는 자연 평면에 있는 일반적 진리들이 서술될 때, 말해지는 각각의 저장소가 뜻하는 것에 대해 분명해졌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그들의 은 꾸러미를 보았다. 이는 그것이 그러했음을 지각했다를 의미한다. 즉 진리들을 질서대로 놓는 것이 무료로 수여되었다를 의미한다.

그들과 그들의 아버지. 이는 자연 평면에서 진리들과 진리의 선으로부터를 의미한다. 이는 여기서 “그들”인 야곱의 아들들의 표현함이 자연 평면에 있는 진리들이다로부터; 그리고 여기서 “그들의 아버지”인 야곱의 표현함이 자연 평면에 있는 진리의 선이다로부터 알려진다. 자연 평면에 있는 진리들과 진리의 선이 지각함이 뜻하는 것이 실로 설명될 수는 있지만 납득력에 확실히 와닿기에는 역부족이다. 그러나 행동 자체에서 이것은 영들의 이해력에는 밝은 대낮에 보듯 그것에 대한 납득은 그들에게는 아주 쉬운 것 중의 하나이다. 고로 세상에, 세상의 빛에서의 총명과 천국의 빛에 있을 때의 차이는 동일한 인물에서도 확연히 차이가 있다.

그리고 그들은 두려워했다. 이는 거룩한 것을 의미한다. 이는 “두려워함”의 의미가 이런저런 것들이 발생할 때, 신성한 섭리 속에 있다 이다로부터이다. 여기서는 “각자의 자루에 은꾸러미가 있음”에 의해 의미되는 것, 즉 진리들이 무료로 수여된 사건 때문에 있어진 두려워함이다. 이때 흘러드는 거룩함이 거룩한 존경심과 더불어 두려움까지 유발하고 있다.

그리고 야곱 그들의 아버지가 그들에게 말했다. 이는 진리의 선으로부터 그들 안에서 지각함을 의미한다. 이는 “말하다”가 말씀의 역사물에서는 지각함이다로부터; 그리고 야곱의 표현함이 진리의 선이다로부터 알려진다.

나로부터 너희는 빼앗고 있다. 이는 그러므로 교회는 더 이상 있지 않았다를 의미한다. 이는 자신을 두고 말하는 야곱인 바, 진리의 선이다로부터; 그리고 이것이 진리의 선이기 때문에, 또한 이것은 교회이기도 하다, 그 이유는 선은 교회의 본질이기 때문에서 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진리의 선이라 말하든가, 교회가 있다라고 말하든가 실제로는 같은 말이다; “빼앗기다(bereave)”의 의미가 교회의 선들과 진리들이 교회로부터 박탈됨인데, 여기서는 요셉, 베냐민, 시므온에 의해 표현되는 교회의 진리들이 박탈됨이다 (이는 아래에서 살핀다).
“빼앗기다”가 교회가 그것의 진리들을 박탈당하다를 표시하는 이유는 교회가 결혼에 비교되기 때문인데, 교회의 선은 남편에, 진리는 아내에 비교되어서 이다. 그리고 이 결혼에서 태어난 아들들은 진리들에, 딸들은 선들에 비교되어서 이다. 그러므로 “사별”, “빼앗기다”가 이야기될 때, 이것은 교회가 자기의 진리들을 박탈당함, 그리하여 교회 없음이 되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의미에서 사별이나 빼앗기다가 말씀에서 간혹 사용된다. 즉:
나는 너희에게 기근과 악한 짐승을 보낼 것이다, 그리고 너희를 빼앗도록 만들 것이다(사별하게 할 것이다) (겔. 5:17).
다시:
나는 악한 짐승이 토지를 관통하게 만들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빼앗기게 할 것이다, 그리하여 황무함이 될 것이다, 그러면 들짐승 때문에 아무도 통과하는 자가 없을 것이다 (겔. 14:5).
레위기서에서:
나는 너를 향해 들판의 들짐승을 보낼 것이다, 이것이 너희를 빼앗을 것이다, 그리고 너희 짐승을 멸절할 것이다, 그리고 너희는 작아지고, 너희의 길들은 황무함에 놓일 것이다 (레. 26:22).
위 구절들에서 “기근”은 선과 진리에 대한 지식들의 결핍을 표시한다, 그러므로 황무함이다; “악한 짐승”은 악들로부터의 거짓들을; “토지”는 교회를; “기근과 악한 짐승을 보내 토지를 빼앗기게 함”은 악들로부터의 거짓들에 의해 교회가 파괴됨, 고로 진리들을 교회로부터 박탈함을 표시한다. 예레미야서에서:
나는 토지의 큰문에서 부채로 그들을 꺄부를 것이다, 나는 사별하게 할 것이다, 나는 내 백성을 멸할 것이다 (예. 15:7);
위 또한 “사별됨”은 진리들을 박탈함을 표시한다. 다시:
그들의 아들들을 기근에 주어라, 그리고 그들이 검의 손에 의해 흘러가게 만들어라; 그들의 아내들 은 빼앗겨지고 과부들이 될 것이다 (예. 18:21);
위에서 “그들의 아내들은 빼앗겨지고 과부들이 된다”는 진리들과 선 없이 있음을 표시한다.
호세아서에서:
에브라임에 대하여, 그들의 영광은 새처럼 날아갔다, 출생으로부터, 그리고 뱃속으로부터, 그리고 임신으로부터 이다; 그 이유는 만일 그들이 자기들의 아들들을 양육한다면, 그때 나는 그들을 그 인간으로부터 빼앗을 것이다 (호. 9:11, 12).
위도 같은 의미를 가진다. 에스겔서에서:
나는 사람, 내 백성을 너희 위에서 걷게 만들 것이다. 그가 상속분으로 너희를 소유할 것이다, 그리고 너희는 그들의 상속분일 것이다, 그리고 너희는 더 이상 그들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 고로 주 여호비께서 말한다, 그들이 네게 말하기를, 너희는 사람을 소비하는 자요 너희의 백성들을 빼앗는 자들이다 하기 때문이다 (겔. 36:12, 13);
위 구절 역시 “빼앗김”은 진리들을 박탈함이다.
이사야서에서:
지금 이것이 들린다, 오 우아한 자들, 안심하고 있는 자들, 심정에서 말하기를, 나 외애 나같은 이는 없다, 나는 과부로 앉아 있지 않을 것이다, 나는 사별할 일도 없다; 정녕 두 가지 것들이 하루에 한 순간에 올 것이다, 즉 사별함과 과부신세이다 (이. 47:8, 9).
위 구절은 바빌론과 갈대아의 딸에 관하여서 이다, 즉 거룩한 외적 부분과 모독된 내적 부분 안에 있는 자에 관한 것이다, 그리고 이 거룩한 외적 부분을 이유로 그들은 자신들을 교회라고 부른다. “사별됨과 과부됨”은 선과 진리가 박탈됨을 표시한다. 다시:
네 눈을 사방으로 들어올려 보아라; 그들 모두가 자신들을 함께 모으고 있다, 그들이 네게로 오고 있다. 너의 빼앗김으로부터의 아들들이 너희 귀에 아직 말한다, 장소는 나를 위하여 답답하다; 내가 거주하도록 나로부터 가라. 그러나 너는 네 심정에서 말할 것이다, 누가 나에게 이들을 낳게 했고, 나로 보고, 빼앗기게 하고, 외롭게 하고, 사라졌고 멀리 떠나게 했는가? 나는 홀로 남겨졌는데, 이들, 어디서 그들은 있었는가? (이. 49:18, 20, 21);
위는 시온 또는 천적 수준의 교회에 관해서, 그리고 황폐해짐 이후 열매가 풍성해짐에 관해서 이다; “빼앗김으로부터의 아들들”은 그녀가 황폐해짐으로해서 박탈되었던 진리들이고, 이것이 회복되고 광대하게 불어남을 표시한다.

요셉이 있지 않다. 이는 내적 부분이 있지 않음을 의미한다. 이는 요셉의 표현함이 영적 평면의 천적 부분이다로부터, 이것은 교회의 내적 부분이다.

그리고 시므온도 있지 않다. 이는 의지 안에 신앙도 있지 않음을 의미한다. 이는 시므온의 표현이 의지에 있는 신앙이다로부터 알려진다.

그리고 너희는 베냐민을 데려가려 한다. 이는 중매자 또한 거두어진다면을 의미한다. 이는 베냐민의 표현이 중간적인 것, 중매하는 것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 모든 것들이 나에게 일어날 것이다. 이는 교회 속에 있는 것이 파괴될 것임을 의미한다. 이는 자신을 두고 말하는 야곱인 바, 교회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교회에서 요셉이 표현한 내적 부분이 없고, 시므온이 표현한 의지에 있는 신앙도 없고, 급기야 베냐민에 의해 표현되는 결합하게 하는 중매자마저도 없다면, 교회의 모든 것은 파괴되어진다. 이것이 “이 모든 일들이 내 위에 있을 것이다”에 의해 의미되고 있다.

그리고 르우벤이 그의 아버지에게 말했다. 이는 이해력에 있는 신앙 속의 것들이 진리의 선으로부터 지각했음을 의미한다. 이는 말씀의 역사 부분에서 “말하다”의 의미가 지각하다 이다로부터 ; 그리고 르우벤의 표현함이 교리에 있는 신앙, 그리고 이해력에 있는 신앙이다로부터, 결과적으로 이 신앙 속의 것들이다로부터; 그리고 여기서 르우벤이 이야기한 “아버지”인 야곱의 표현함이 진리의 선이다로부터 알려진다. 여기서 말한 자가 르우벤인 이유는 교회가 취급됨에서, 가상적으로 첫째 자리에 있는 것이 교리와 이해력에 있는 신앙이기 때문이다, 또한 여기서 교회의 것들이 파멸되지 않으려면 반드시 있어야만 하는 것도 가르치고 있다.

말하기를, 내 두 아들을 죽이소서. 이는 어떤 종류의 신앙도 살아 있지 못할 것을 의미한다. 이는 르우벤의 “두 아들들”의 의미가 신앙의 양쪽 종류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 이유가 르우벤에 의해 교리와 이해력에 있는 신앙인 바, 그의 “아들들”은 교회의 두 교리, 진리의 교리와 선의 교리, 또는 신앙의 교리와 선행의 교리이기 때문이다. 신앙의 이러저런 것들, 또는 교회의 이런저런 것들이든 베냐민에 의해 표현된 중매자와 결합함이 없으면 어느 것도 살아있지 못한다는 것이 “만일 제가 당신에게 그를 데려오지 못하면, 제 두 아들을 죽이소서”라는 말에 의해 의미되어 있다. 르우벤은 이 말들에 의해 중매자가 없으면 교회는 끝장이다는 정보를 주고 있는 셈이다. 아마 이 말들 안에 위와 같은 내적 의미가 없었다면, 르우벤은 자기 아버지에게 베냐민을 되돌려 오지 못하면 두 아들을 죽이라는 제안을 하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그 이유가 그의 제안은 그의 가문에 막을 내리는 위험한 상황도 포함되었기 때문이다. 내적 의미는 왜 그가 이렇게 말했는지를 가르치고 있다.

만일 제가 그를 당신에게 데려 오지 못한다면. 이는 중매자가 인접되지 않으면을 의미한다. 이는 여기서 “데려와야 하는 그”가 베냐민인 바, 그의 표현함이 중매하는 것이다로부터; 그리고 “데려옴”의 의미가 결합함이다에서 알려진다.

그를 내 손에 주십시오. 이는 그것의 능력이 미치는 한도에서를 의미한다. 이는 “손”의 의미가 힘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의 손에 그를 주는” 것은 엄격한 의미에서 보면 그를 그에게 맡기는 것이다; 그러나 이해력에 있는 신앙, 이것이 르우벤에 의해 표현되는데, 이것은 선행 속에 있는 것쪽이라고 신뢰받을 만한 것은 거의 없다. 그러므로 “그를 제 손에 달라”란 그것의 힘이 미치는 한도 만큼만에서를 의미하게 된다.

그리고 저는 그를 다시 당신에게 데려 올 것이다. 이는 그것은 원상복귀될 것임을 의미한다. 이는 부연 설명이 필요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말했다, 내 아들은 너와 함께 내려 가지 않을 것이다. 이는 그것은 그 자체 더 낮은 것에 놓여서는 안됨을 의미한다. 이는 “내려 가다”의 의미가 보다 더 낮은 것들을 향하여 감이다로부터, 여기서는 야곱의 아들들로 표현된 자연 평면의 외면에 있는 기억 속의 지식의 진리쪽으로 가는 것이다로부터 알려진다.

그 이유가 그의 형이 죽었기 때문이다. 이는 내적 부분이 현존하지 않기 때문을 의미한다. 이는 여기서 “형”인 요셉의 표현함이 영적 평면의 천적 부분, 또는 신성으로부터의 진리, 결과적으로 교회의 내적 부분이다로부터; 그리고 “죽어 있다”의 의미가 여기서는 현존하지 않고 있다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 이유가 그는 살아 있으나 야곱 앞에 나타나 있지 않기만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애만이 남았다. 이는 지금 그것이 내적 부분의 자리에 있음을 의미한다. 이는 “요셉”인 내적 부분이 현존하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요셉의 어머니의 다른 자식이 베냐민이다는 사실로부터, 그가 야곱으로 생각하건대, 그의 형을 대신하는 셈이다는 사실로부터 알려진다. 더욱이 요셉과 베냐민은 모두 내적 부분을, 다른 열 아들들은 외적 부분을 표현했다.

그리고 해악이 너희가 가는 길에서 그에게 있게 될 것이다. 이는 자연 평면에서 진리들 만으로, 내적 부분과 분리되어 있으면 그것은 멸망할 것을 의미한다. 이는 앞에서 살폈다

그리고 너희는 내 백발을 아래로 내려가게 만들 것이다. 이는 교회의 마지막일 것을 의미한다. 이는 “백발(gray hairs)”의 의미가, 취급되는 주제가 교회일 경우, 교회의 마지막이다로부터 알려진다. 이것이 이사야서에서:
나에게 정성을 들여라 오 야곱의 가문아, 그리고 이스라엘의 가문의 남은 모든 자들아, 너희는 자궁으로부터 데려가졌었고, 모체로부터 운반되어왔고, 노령에 이르기조차에서도 나는 똑같이 (너희를) 운반하였다; 백발된 너희라 해도 나는 운반할 것이다 (이. 46:3, 4).
위에서 “야곱의 가문”은 외적 교회를 표시한다; “이스라엘의 가문”은 내적 교회를 표시한다; “자궁과 모체로부터”란 교회의 시작으로부터를 표시한다; “노령과 백발”은 교회가 마지막쪽으로를 표시한다. 다윗서에서:
여호와의 집에 심어진 그들은 우리의 하느님의 뜰에서 싹이 틀 것이다. 그들은 백발에서도 불어남이 있을 것이다 (시. 92:13, 14);
“백발”은 마지막 단계에서를 표시한다.

슬픔 안에서 무덤으로. 이는 소생의 희망이 없음을 의미한다. 이는 여기서의 “슬픔”의 의미는 희망이 없다 인데, 그 이유는 어떤 희망도 더 이상 없을 경우, 슬픔이 있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덤(grave)”의 의미가 부활, 또는 거듭남이다로부터, 고로 교회의 소생이 의미된다; 그 이유가 만일 교회 안에서 “요셉”인 내적 부분이 없다면, 그리고 “베냐민”인 중매하는 것이 없다면, 그리고 “시므온”인 의지에 있는 신앙, 또는 선행이 없다면, 교회의 소생은 더 이상 희망이 없기 때문이다. 아마 “무덤”이 소생을 표시한다를 두고 이상하게 여겨질지 모른다; 그러나 그런 이유는 그것에 관한 인간의 생각 때문이다; 그 이유가 인간 당사자는 무덤을 죽음으로부터, 무덤에 있는 죽은 신체로부터 분리하지 않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천국의 천사들은 무덤에 대해 인간 같이 생각할 수가 없다; 인간의 것과 판이하게 다르다고 해야 할 것이다, 즉 부활과 소생이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인간의 죽은 몸이 무덤에 위탁될 때, 그는 다른 삶 안으로 소생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천사가 무덤에 관해 가지는 생각은 죽음을 생각하지 않고, 생명을, 결과적으로 소생을 생각한다.

창세기 제 43 장

성경: 창세기 43장

1. 그리고 기근은 그 토지에서 극심하였다.
2. 그리고 그들이 이집트로부터 가져온 농산물을 다 먹었을 때가 되자, 그들의 아버지는 그들에게 말했다, 돌아 가서, 우리에게 양식을 조금 더 사오너라.
3. 그리고 유다가 그에게 말했다, 말하기를, 그 사람이 우리에게 엄히 경고하기를, 너희는 네 형제가 너희와 함께 있지 않으면 내 얼굴을 볼 수 없을 것이다.
4. 만일 당신께서 우리와 함께 우리의 형제를 보낼 것이라면, 우리가 내려 가서 당신에게 양식을 사오겠습니다.
5. 그리고 만일 당신께서 보내지 않겠다면, 우리는 내려 가지 않을 것입니다. 그 이유가 그 사람이 우리에게 너희는 네 형제가 너희와 함께 있지 않을 경우, 내 얼굴들을 보지 못할 것이다 하고 말했기 때문입니다.
6. 그리고 이스라엘이 말했다, 어찌하여 너희는 그 사람에게 네 형제가 있는지를 말하여 나를 아프게 하느냐?
7. 그리고 그들이 말했다, 그 사람이 우리에게 엄히 묻고, 그리고 우리의 출생을 묻고, 말하기를, 너희의 아버지는 아직 살아 있느냐? 너는 형제가 있느냐? 그리고 우리는 그에게 이 말들의 입에 따라 말했습니다. 그가 네 형제를 데려오라 말할 줄을 우리가 어찌 알았겠습니까?
8. 그리고 유다가 그의 아버지 이스라엘에게 말했다, 이 소년을 우리와 함께 보내소서, 그러면 우리는 일어나 가리이다. 그리고 우리는 살고, 둘 다 우리와 당신, 그리고 우리의 어린 것들 까지도 죽지 않을 것입니다.
9. 제가 그를 위해 담보가 되겠습니다. 당신께서는 내 손에서 그를 요구하십시오. 만일 내가 그를 당신에게 데려와서 당신 앞에 그를 놓지 않으면, 나는 모든 날들에서 당신에게 죄인될 것입니다.
10. 우리가 머뭇거리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두 번 갔다 왔을 것입니다.
11. 그리고 그들의 아버지 이스라엘이 그들에게 말했다, 만일 그러하다면 이렇게 하라. 너희의 그릇에 이 토지의 노래를 담아서 그 사람에게 선물로 가져 가라, 즉 수지 조금과 꿀 조금과 밀랍과 소합향, 테레빈 나무의 견과와 아몬드이다.
12. 그리고 너희 손에 은을 두 배로 들고 가라. 그리고 너희들의 자루 아구에 되놓였었던 은을 너희 손에 되돌려 가지고 가라. 그것은 착오 였을지 모른다.
13. 그리고 너희 형제를 손에 가지라, 일어나라, 그리고 그 사람에게 되돌아 가라.
14. 그리고 하느님 솨다이께서 그 사람 앞에서 너희에게 자비들을 주시어, 너에게 너의 다른 형제와 베냐민을 보내리라. 설사 빼앗기게 된다면 나는 빼앗기리라.
15. 그리고 사람들은 이 선물을 챙겼다, 그리고 그들은 자기들 손에 두 배의 은을 가졌다, 그리고 베냐민도 데리고, 일어나, 이집트로 내려가서, 요셉 앞에 섰다.
16. 그리고 요셉은 그들과 함께 있는 베냐민을 보았다, 그리고 그는 자기 집을 다스리는 자에게 말했다, 사람들을 집으로 데려오라, 그리고 짐승을 잡고 준비하라. 이 사람들이 정오에 나와 함께 먹을 것이다.
17. 그래서 이 사람은 요셉이 말한대로 행동했다, 그리고 이 사람은 요셉의 집으로 사람들을 데려왔다.
18. 그리고 사람들은 그들이 요셉의 집으로 데려와졌기 때문에 두려워 졌다. 그래서 그들은 말했다, 처음에 우리의 자루에 되돌아 왔던 은을 빌미로, 우리 위에서 뒹굴고 우리 위에 자신을 내던지고, 나귀는 빼앗고, 우리를 종으로 삼으려 한다.
19. 그래서 그들은 요셉의 집을 다스리는 사람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그리고 그들은 집의 문간에서 그에게 말했다,
20. 그리고 말했다, 나에게, 내 주여, 우리가 전번에 양식을 사러 내려 왔었습니다.
21. 한참 지나 우리가 여관에 당도해서 우리의 자루를 열었는데, 보라 각자의 자루 아구에 각자의 은이 그 무게 그대로 있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것을 손에 들고 되 가져왔습니다.
22. 그리고 우리는 양식을 사려고 다른 은도 가져왔습니다. 우리는 누가 우리의 자루에 은을 놓았는지 알지 못합니다.
23. 그리고 그는 말했다, 너희는 편안하라, 두려워 말라, 너희의 하느님, 그리고 너희의 아버지의 하느님께서 너희의 자루 안에 감추인 선물을 너희에게 주셨다. 너의 은은 나에게 왔다. 그리고 그는 시므온을 그들에게 데려왔다.
24. 그리고 사람은 요셉의 집으로 사람들을 데려왔다, 그리고 물들을 주었다, 그리고 그들은 자기들의 발을 씻었다. 그리고 그는 그들의 나귀에게 사료를 주었다.
25. 그리고 그들은 요셉이 정오에 올 때를 대비해서 선물을 챙겼다. 그 이유가 그들은 거기서 자기들이 빵을 먹는다고 들었기 때문이다.
26. 그리고 요셉은 집에 왔다, 그리고 그들은 그에게 그 집으로 손에 들고 온 선물을 바쳤다, 그리고 자신을 땅으로 굽혀 그에게 절했다.
27. 그리고 그는 그들에게 평안하냐고 묻고, 말했다, 너희들이 말했던 노인인 너희의 아버지도 평안하느냐? 그는 아직 살아 있느냐?
28. 그리고 그들은 말했다, 당신의 종 우리의 아버지는 평안합니다. 그는 아직 살아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들을 구부렸다 그리고 자신을 숙여 절하였다.
29. 그리고 그는 자기 눈을 들었다, 그리고 자기 어머니의 아들, 그의 형제 베냐민을 보았다, 그리고 말했다, 이 아이가 너희가 나에게 말했던 가장 어린 형제이냐? 그리고 그는 말했다, 하느님께서 너에게 은혜를 내리기를 바란다, 내 아들아.
30. 그리고 요셉은 서둘렀다, 그 이유는 그의 연민이 그의 아우를 향하여 움직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울 곳을 찾아 그의 침실로 가서 거기서 울었다.
31. 그리고 그는 얼굴을 씻고, 나와, 마음을 억제하며, 빵을 놓아라 하고 말했다.
32. 그리고 그들은 요셉만을 위해 따로 놓고, 그들을 위해 따로 놓고, 그와 함께 먹는 이집트 사람을 위해 따로 놓았다. 그 이유는 이집트 사람은 히브리 사람과 함께 먹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이집트 사람들에게는 혐오스러운 것이기 때문에서이다.
33. 그리고 그들은 요셉 앞에 출생에 따라 장자가, 젊음에 따라 가장 어린 자가 앉았다, 그래서 사람들은 서로 보며 놀라워 했다.
34. 그리고 그는 그의 얼굴들로부터 그들에게 몫을 나누어 주었다. 그리고 그는 베냐민의 몫은 다른 사람 보다 다섯 분량을 많게 해서 나누었다. 그리고 그들은 마셨고, 그와 함께 많이 마셨다.

각 절의 내적 의미

1-5절 그리고 기근은 그 토지에서 극심하였다. 2 그리고 그들이 이집트로부터 가져온 농산물을 다 먹었을 때가 되자, 그들의 아버지는 그들에게 말했다, 돌아 가서, 우리에게 양식을 조금 더 사오너라. 3 그리고 유다가 그에게 말했다, 말하기를, 그 사람이 우리에게 엄히 경고하기를, 너희는 네 형제가 너희와 함께 있지 않으면 내 얼굴들을 볼 수 없을 것이다. 4 만일 당신께서 우리와 함께 우리의 형제를 보낼 것이라면, 우리가 내려 가서 당신에게 양식을 사오겠습니다. 5 그리고 만일 당신께서 보내지 않겠다면, 우리는 내려 가지 않을 것입니다. 그 이유가 그 사람이 우리에게 너희는 네 형제가 너희와 함께 있지 않을 경우, 내 얼굴을 보지 못할 것이다 하고 말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기근이 극심하였다. 이는 영적인 것들의 결핍으로부터 오는 황무함을 의미한다. 이는 “기근”의 의미가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들의 결핍이다로부터; 그러므로 황무함이다; 그리고 황무함이 부족함, 결과적으로 영적인 것들의 결핍, 이것이 “기근”에 의해 의미되어진다.
영계에서, 또는 천국에서의 배고픔은 (자연계의 것과 같은) 식품(food) 때문에 있는 배고픔이 있는 것이 아니다, 그 이유는 천사들은 세상에서 육체에 공급해야하는 물질적 식품은 먹지 않기 때문이다; 거기서의 식품은 그들의 마음에 자양분을 공급해주는 이런저런 식품 때문에 있는 배고픔이다. 이 식품은 영적인 식품이라 불리어지고, 이는 진리를 이해함과 선 안에서 슬기로워짐이다; 경이하다 말할 것은, 천사들은 이 식품에 의해 자양분이 공급된다는 사실 이다; 이 사실을 나로 하여금 확신하게 만들었는데 이것이다: 죽은 어린 아이가 천국에서 총명의 진리들과 지혜의 선들 안에서 가르침이 있어져왔던 이후, 그들은 더 이상 어린이로 나타나지 않고, 성인들로 나타난 것 때문이다, 그리고 이렇게 된 이유는 그들에게 선과 진리가 불어났기 때문이다; 또한 천사들은 총명과 지혜에 속한 것들을 꾸준히 갈망한다는 사실로부터도 확신되었다, 즉 그들은 저녁에서, 즉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이 다 소모된 상태에 있을 때, 그 만큼에서 그들은 덜 행복한 상태에 있고, 배고픈 바, 그들은 아침이 밝아와서 자기들을 새롭게 하기만을 갈망한다, 하여 아침을 맞으면 그들은 행복한 그들의 생활로 되돌아오는데, 이 상태는 총명과 지혜로부터 있다.
진리를 이해하는 것과 선을 뜻하는 것이 영적인 식품이다는 것에 대하여는 누군가가 신체의 자양분을 위해 물질적 식품을 즐길 때, 유쾌하게 하는 화제거리까지 곁들이면 그의 식품이 공급하는 자양분도 증가함을 느낄수 있다는 사실을 가지고도 짐작할는지 모른다. 이는 혼을 위한 영적인 식품과 신체를 위한 물질적 식품 사이에 상응함이 있다는 표시이다. 이런 생각도 해볼 수 있다: 지식, 총명, 지혜를 자기 마음이 흡수해주기를 간절히 원하는 자로 하여금 그런 것들을 얻는 시도를 못하게 제지하면, 그는 슬픔에 빠지고 괴로워하기까지 한다는 사실, 이렇게 굶주린 자는 자기의 영적 식품을 얻는 쪽으로 되돌아가, 자기 혼에 자양분을 공급하기를 갈망한다는 사실이다.
물질적 식품이 신체에 자양분을 공급하듯, 영적 식품이 혼에 그러하다는 것을 말씀의 다른 구절에서도 확인해 볼 수 있다:
인간은 빵만으로 살지 못한다; 그러나 여호와의 입으로부터의 모두 각각의 말함에 의해 인간은 살아간다 (신. 8:3; 마. 4:4).
“여호와의 입으로부터의 모두 각각의 말함”은 일반적 측면에서 주님으로부터 진행하는 신성한 진리이다, 고로 지혜로부터의 모든 진리, 특별한 측면에서는 말씀이다. 이 말씀 안에, 이 말씀으로부터 지혜 속의 것들이 있다. 요한복음서에서:
멸해지는 음식을 위하여 노동하지 말라, 그러나 영원히 지속되는 생명을 지탱하게 하는 음식을 위하여 (노동하라), 이것을 사람의 아들이 너희에게 줄 것이다 (요. 6:27);
이 음식이 주님으로부터 진행하는 지혜로부터의 진리인 것은 분명하다.
이로부터 또한 아래 주님의 말씀에 의해 뜻해지는 것도 알는지 모른다:
내 살이 실로 음식이다, 그리고 내 피는 실로 음료이다 (요. 6:55);
즉, 주님의 “살”은 신성한 선이다, 그리고 그분의 “피”는 신성한 진리이다; 그 이유가 주님께서 그분의 인간 전체를 신성으로 만드셨을 때, 그때 그분의 살은 신성한 선밖에 더 아니고, 그분의 피는 신성한 진리밖에 더 아니었기 때문이다. 신성에서는 어떤 물질도 이해되지 않음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최고 의미에서의 “식품(food)”은 주님을 서술할 경우 인류를 구원하시는 신성의 사랑으로부터의 선이다. 이 식품이 아래 주님의 말씀에 의해 뜻해진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말하셨다, 나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먹을 음식(meat)을 가지고 있다. 내 음식은 나를 보내신 그분의 뜻을 행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분의 일을 완전해지게 하는 것이다
(요. 4:32, 34).
“나를 보내신 그분의 뜻을 행하는 것, 그리고 그분의 일을 완전해지게 하는” 것이란 인류를 구원하심 이다; 이것이 행해지는 신성은 신성의 사랑이다. 이런 모두로부터 “기근”의 영적 의미가 뜻하는 바를 알았을 것이다.

그 토지에. 이는 교회 속에 있는 것들에 관하여를 의미한다. 이는 말씀에서 토지의 의미가 교회이다로부터, 여기서는 교회 속에 있는 것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 이유는 교회를 의미하는 어떤 것은 교회 속에 있는 것들 또한 의미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이것들이 그것들을 생산하기 때문이다. 말씀에서 “토지”가 교회를 의미하는 이유는 가나안의 토지에서는 교회가 최고대 때로부터 있어왔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토지(land),” 또는 “땅(earth)”이 말씀에서 언급될 때, 가나안의 토지가 뜻해지고, 이것이 뜻해질 때 교회가 뜻해진다; 그 이유가 토지가 언급될 때 영계에 있는 이들은 토지라는 생각에 머물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은 거기 있는 민족이나 나라 속의 것을 생각하고, 그 민족이나 나라에 머물지 않고 그 민족의 품질에 관한 생각을 하는 바, 고로 “토지”가 말하여질 때, 그리고 가나안의 토지가 뜻해질 때, 교회에 대한 생각을 한다. 이로부터도 분명해지는 것은, 구약 성경과 계시록의 예언들에 따라 마지막 심판의 날에서 새 땅과 새 하늘이 존재 안으로 오게 될 것이다에 대해 믿는 것도 글자 의미에서 나오는 빛 그 이상은 없다고 믿는 자들에 의해서는 얼마나 엉터리인지를 많은 이들이 납득 못한다. (어쨌든 “새 땅”은 새 외적 교회를, “새 하늘”은 새 내적 교회를 뜻하는 것밖에 더 없다) 말씀에서 언급되는 “온 땅(whole earth)” 역시 같은 맥락이다. 위의 말들은 이미 살폈던 적이 있다: 즉 교회가 가나안의 토지에 최고대 때로부터 있었다는 것; 말씀에서 “토지”에 의해 교회가 의미되는 것; “새 천국과 새 땅”에 의해 새로운 내적 교회와 새로운 외적 교회가 의미되는 것.

그리고 …되자. 이는 새로운 것을 의미한다. 이는 말씀에서 종종 있는 표현인 “…이었다(it was)”, “…되었다(it came to pass)”는 새로운 상태를 이르는 말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원어의 처음 시기에는 천국을 흉내내어 본문을 계속적으로 이어갔는 바, 구두점으로 의미를 구별하지 않았었다. 따라서 구두점으로 표를 하는 대신 “그리고”가 많이 사용되었고, 그리고 또한 “…이었다”, “…되었다” 등등이 사용되었다. 이것이 말씀에서 이런 단어들이 자주 등장하는 이유이고, “…이었다”, “…되었다”가 새로운 어떤 것을 의미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들이 농산물을 다 먹게 되었을 때. 이는 진리들이 부족했을 때를 의미한다. 이는 “농산물”이 진리이다로부터; 진리가 부족해지는 것은 “농산물을 먹기를 끝냄”에 의해 의미된다. 영계에 있는 이들은 진리와 선으로 배불려진다, 그 이유가 이것들이 그들의 식품이기 때문이다; 이것들이 사용함에 충당되었을 때, 그들은 이것의 필요함에 다시 와진다. 이것은 물질적 자양분을 매일 공급받아야 하는 경우와 이치는 비숫하다, 즉 자양분이 다 소모되면, 배고픔이 다시 온다. 영적인 것을 필요로 함인 배고픔은 영계에서는 하루 중의 저녁과 황혼이다; 이후 새벽녘과 아침이 온다. 그러므로 거기에는 교차됨이 있다. 즉 그들은 저녁, 또는 영적인 배고픔에 와지는데, 이는 그들이 배고픔을 느끼고, 진리들과 선들을 갈구하기 위하여서이다, 그들이 배고픔을 느낄 때 그들은 더 많은 자양분을 공급받는다, 마치 배고픔이 강할수록 더 많이 먹는 경우와 비슷할 것이다. 이로부터 진리들이 부족할 때 영적인 것들이 필요함이 뜻해진다는 것이 분명해졌을 것이다.

그들이 이집트로부터 가져왔던. 이는 기억 속의 지식들로부터 있었던을 의미한다. 이는 “이집트”의 의미가 기억 속의 지식들이다로부터, 즉 그것들이 “이것들로부터” 있었다는 것은 그들이 “거기로부터 그것을 가져왔다”에 의해 의미됨으로부터 알게 된다. 좋은 의미에서 “이집트”에 의해서는 교회의 기억 속의 지식들이 의미된다, 즉 교회의 형체를 위하여 섬김 속에 있는 것들이다. 이런 지식들을 수단으로 마치 뜰을 통하여 집안으로 진입하듯, 인간은 이 지식들을 통하여 교회의 진리들 안으로 들이어진다; 그 이유가 이 지식들이 감각들을 처음 두드리기(strike) 때문이다, 그리고 이럼으로 해서 내면의 것들쪽으로의 길이 열린다; 그 이유는 감각의 바깥쪽의 것들이 인간 안에서 처음 열리어지고, 그 다음 감각의 안쪽의 것들이, 마지막으로 이해력 속의 것들이 열리어지기 때문이다. 이는 대체로 많은 이가 아는 상식 수준이다; 이 마지막이 열리었을 때, 마지막 것들은 앞의 첫, 둘째의 것들에서 납득되기 위하여 표현되어진다. 그 이유는 이해력의 것들은 일종의 추출, 발췌 등등의 방식(extract, 한약을 달여 약성분을 추출하듯, 역자주)으로 일어서기 때문이다. 이 이해력 속의 것들은 결말(결론)들에 해당된다. 다시 말해 이 결말이 형체를 만들 때 이 결론은 당사자의 더 높은 평면(plane)으로 부상한다. (한마디로 첫, 둘째의 것과 마지막째의 것은 등급이 다르다. 이것은 아마 모든 이가 책을 읽는 이유일지 모른다 역자주) 이것은 주님으로부터 천국을 통하여 영적인 것들의 유입을 수단으로 일으켜졌다. 이상 살핀 바로부터, 진리들이 기억 속의 지식으로부터 어떻게 있는지가 분명해졌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아버지는 그들에게 말했다. 이는 교회 속의 것들로부터 지각함을 의미한다. 이는 “말하다”가 말씀의 역사 부분들에서는 지각하다이다로부터; 여기서 “아버지”인 이스라엘의 표현이 교회이다로부터; 그가 “아버지”라고 불리우는 이유는 말씀에서 “아버지”, “어머니”에 의해 교회 또한 의미하기 때문인데, “아버지”에 의해서는 선 측면에서의 교회를, “어머니”에 의해서는 진리 측면에서의 교회이다. 교회가 이렇게 표현되는 이유는 교회는 영적 결혼, 즉 아버지인 선과 어머니인 진리가 결혼한 것이 (진짜) 교회 (교회 자체)이기 때문이다.

도로 가서, 양식을 우리에게 조금 더 사오라. 이는 생명 있기 위하여 그들은 자신들을 위해 영적 진리의 선을 붙잡아야 함을 의미한다. 이는 “사다”가 누군가가 자신을 위해 포획하여 자기 것이 되게 함이다로부터; 그리고 “양식”의 의미가 진리의 선, 여기서는 영적 진리의 선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 이유가 이 선이 이어지는 구절들에서 취급되기 때문이다. 이것은 생명있기 위하여를 뜻하는데 아래에서 이어진다.

그리고 유다가 그에게 말했다. 이는 교회로부터의 선을 의미한다. 이는 유다의 표현함이 교회로부터의 선(교회 속의 선)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지금 유다가 베냐민에 관하여 말하는 것, 그리고 앞 장(42:36, 37)에서 르우벤이 베냐민에 관련하여 말한 것은 내적 의미가 아니고서는 밝혀질 수 없는 비밀이다. 그리고 르우벤이 말했을 때는 야곱이 “야곱”이라 불리웠는데 (42:36), 이 장에서 유다가 말할 때는 야곱이 아닌 “이스라엘”로 불리우고 있다 (43:6, 8, 11). 이런 대목에 무엇인가가 있다는 것은 아무도 부정하지 못한다. 단지 글자의 역사적 의미로부터 알려질 수 없어 어째서 그렇게 한 인물을 두 이름으로 각기 필요에 따라 언급되었는가를 알지 못하는 것 뿐이다. 다른 구절에서도 이런 일은 자주 있는 편이다. 이 비밀은 이어지는 페이지들에서 주님의 신성한 자비로부터 말해질 것이다. 지금 유다가 이야기 하는 이유는 지금 취급되는 주제가 영적 진리의 선이기 때문, 즉 포획되어져야 하는 영적 진리의 선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교회의 선인 유다가 영적 진리로부터의 선인 이스라엘에게 말하고 있다, 그리고 중매자인 베냐민을 두고 답변 거리를 자신에게 만들고 있다; 그 이유가 중매자가 선을 수단으로 결합되었음에 틀림이 없기 때문이다.

말하기를, 그 사람이 우리에게 엄히 확언하기를. 이는 내적 부분으로부터의 영적인 것은 자기들에게 반대되어져 있다를 의미한다. “엄히 확언하다”가 반대될 경우를 예상하여 말해지는 것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 이유가 그들이 자기 형제를 동반하지 않으면 자기 얼굴을 보지 못할 것이라고 확언했기 때문, 이런 확언은 반대적인 것을 예상한 말이었기 때문이다. 그의 얼굴을 보지 못함에 의해 어떤 동정함도 있지 않을 것이다가 의미되고 있다 (아래에서 살핀다); 그리고 여기서 “그 사람”인 요셉의 표현함이 신성의 영적 평면, 또는 신성으로부터의 진리이다로부터; “그 사람”은 영적 평면, 또는 내적 부분으로부터 흘러드는 진리이다.

말하기를, 너희는 내 얼굴들을 보지 못하리라. 이는 불쌍히 여김이 없을 것을 의미한다. 이는 인간을 서술할 경우, “얼굴들”의 의미가 그의 내면들, 즉 그의 애착들과 애착에서 파생되는 생각들이다로부터, 그러나 주님을 서술할 경우, 얼굴들은 자비 또는 불쌍이 여기심을 표시한다. 그러므로 “그의 얼굴들을 보지 못함”은 자비, 불쌍히 여김이 없을 것임을 뜻한다; 여기서 요셉이 최고 의미에서 주님을 표현한다. 그러나 주님이 불쌍히 여기심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 이유는 그분은 자비 자체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합을 가능하게 하는 중매자가 없을 때, 인간 측면에서 보면, 주님 안에 불쌍히 여기심이 없는 것처럼 나타나는 것이다. 다시 말해 결합하게 하는 중매자가 없다면 선을 받아들임도 없게 되는 바, 거기에는 그 대신 악이 있기 마련이기 때문에서 이다. 이때 인간이 주님에게 외친다면, 그리고 그가 악으로부터, 즉 여타 다른 것을 제치고 자신을 위하여 외친다면, (주님에게) 들려지지 않는 바, 이것은 당사자에게 주님은 매정하신 분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다. 여호와, 또는 주님의 “얼굴들”이 자비를 표시하는 것은 말씀으로부터 분명해진다; 그 이유는 여호와, 또는 주님의 “얼굴”은 적절한 의미에서 신성의 사랑 자체를 표시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얼굴이 신성의 사랑을 표시하기 때문에 얼굴은 자비에 속한 것도 표시한다; 그 이유는 사랑으로부터 있는 자비는 지독하게 불행함에 깊이 빠져 있는 인류를 향하여 보여지기 때문이다.
여호와 또는 주님의 “얼굴”이 신성의 사랑인 것은 주님이 베드로, 야고보, 요한 앞에서 변모하시어 그분이 그들에게 그분의 신성을 보이셨을 때 주님의 얼굴에 관한 서술로부터 분명해진다: 즉
그분의 얼굴은 태양 같이 빛나셨다 (마. 17:2);
“태양”이 신성의 사랑이다는 것은 많이 말해왔었다. 주님의 신성 자체는 어떤 얼굴에서도 결코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나 그분의 신성한 인간의 얼굴에서인데, 이 인간의 얼굴 안에서 신성의 사랑을 통하여, 또는 상대적으로 인류를 향하여서 신성의 자비가 나타났다. 신성한 인간에 있는 이 신성한 자비가 “얼굴들의 천사”라고 불리운다. 이사야서에서:
나는 여호와의 자비들에 관하여 말해본다. 그분은 그들에게 그분의 자비들에 따라, 그리고 수많은 그분의 자비들에 따라 대갚음을 하실 것이다, 그리고 그분은 그들을 위하여 구세주가 되셨다. 그리고 그분의 사랑을 위해, 그분의 불쌍히 여김을 위해 그분의 얼굴들의 천사가 그들을 구원할 것이다 (이. 63:7-9);
위에서 “천사”가 언급된 이유는 말씀의 내적 의미에서 “천사들”은 주님의 어떤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그분의 자비이다; 그러므로 “그분의 얼굴들의 천사”라고 말해진 것이다.
여호와 또는 주님의 “얼굴”이 자비인 것, 그리고 또한 평화와 선인 이유는 이것들이 자비 속에 있기 때문인데, 이는 이어지는 페이지들로부터 보여질 것이다. 축복 (기도)에서:
여호와께서는 그분의 얼굴들을 너희 위에 빛나게 만드신다, 그리고 너희에게 자비로우시다. 여호와 께서는 그분의 얼굴들을 너희에게 들어올리신다, 그리고 너희에게 평화를 주신다
(민. 6:25, 26);
“빛나게 그분의 얼굴들을 만드신다”는 것은 자비하심이 있다는 것, 그리고 “얼굴들을 들어올리신다”는 것은 평화를 주시는 것임은 아주 분명하다. 다윗서에서:
하느님은 우리에게 자비하시다, 그리고 우리를 축복하신다, 그리고 그분의 얼굴들을 우리 위에서 빛나게 하신다 (시. 67:2);
“얼굴들”이 여기서 자비를 표시한다. 다윗서에서:
우리에게 되돌리소서 오 하느님, 그리고 당신의 얼굴들을 빛나게 하소서, 하여 우리는 구원될는지 모릅니다 (시. 80:3, 7, 19);
앞 절과 비슷한 의미이다. 다시:
우리를 나의 적들의 손으로부터, 그리고 나를 핍박하는 그들로부터 구제하소서. 당신의 얼굴들을 당신의 종 위에 비추게 만드소서(시. 81:15, 16; 119:134, 135도 참조).
다니엘서에서:
들어주십시요, 오 우리의 하느님, 당신의 종이 기도합니다, 그리고 그의 기도들, 그리고 당신의 얼굴들을 황무해 있는 당신의 성소 위에서 빛나게 하소서 (단. 9:17);
“얼굴들을 빛나게 하심”은 자비하심이 있다를 표시한다.
다윗서에서:
“누가 우리에게 선을 보도록 만들 것이냐?” 말하는 자가 많습니다. 우리들 위에서 당신의 얼굴의 빛을 들어올리소서 (시. 4:6, 7);
“당신의 얼굴들의 빛을 들어올리는” 것은 자비로부터 선을 주는 것을 표시한다. 다시:
고통이 그들의 것일 때 그들로 내 얼굴들을 찾게 해라; 슬픔 안에서 그들로 나를 찾게 하라 (호. 5:15). 다시 다윗서에서:
너희는 내 얼굴들을 찾으라; 저는 당신의 얼굴들을 찾을 것입니다 여호와여 (시. 27:8, 9).
다시:
여호와와 그분의 강하심을 찾으라; 그분의 얼굴들을 계속적으로 찾으라 (시. 105:4);
“여호와의 얼굴들을 찾는” 것은 그분의 자비를 구하는 것을 표시한다. 다시:
나는 정의함에서 당신의 얼굴들을 볼 것입니다 (시. 17:15);
그리고 마태복음서에서:
너희는 이 작은 것들 중의 하나를 멸시하지 않음을 보라; 그 이유가 내가 너희에게 말하는 것은 천국들에서 그들의 천사들이 천국들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언제나 바라보고 있다는 것이다 (마. 18:10);
“하느님의 얼굴을 바라보는” 것은 자비로부터 평화와 선을 향유하는 것을 표시한다.
그러나 반대는 “감추는” 것, “숨는” 것이다, 또한 자비하심이 있지 않다를 의미하는 “얼굴들을 돌리는” 것도 있다. 이사야서에서:
내 성냄이 넘쳐흐름에서 나는 내 얼굴들을 순간을 위하여 너로부터 감춘다; 그러나 영원한 자비로 나는 너희 위에 자비를 가질 것이다 (이. 54:8);
위에서 “성냄이 넘쳐흐름”은 시험을 표시한다, 그리고 주님은 거기에서 자비하심이 있지 않게 나타나시기 때문에 “순간을 위하여 나는 너로부터 내 얼굴들을 감춘다”라고 말해진다. 에스겔서에서:
나는 내 얼굴들을 그들로부터 돌릴 것이다 (겔, 7:22).
다윗서에서:
얼마나 오랫동안 당신은 저를 잊으실 것입니까, 여호와여? 영원까지? 얼마나 오랫동안 당신은 저로부터 당신의 얼굴들을 감추실 것입니까? (시. 13:1). 다윗서에서:
당신의 얼굴들을 저로부터 숨기지 마소서; 성냄에서 당신의 종을 버리지 마소서 (시. 27:9). 다시:
어찌하여 여호와여 당신은 제 혼을 버리시나이까? 왜 당신은 당신의 얼굴들을 저로부터 숨기시나 이까? (시. 88:14). 다시:
성급함을 만드소서, 제게 대답하소서, 오 여호와여; 내 영이 불살라집니다. 당신의 얼굴들을 나로부 터 숨기지 마소서, 제가 그들 같이 구덩이로 내려가지 않도록 하소서. 아침에 저로 당신의 자비를 듣게 하소서 (시. 143:7, 8).
모세의 책에서:
내 성냄은 이 날에 이 백성을 향하여 뜨거운 밀납일 것이다, 하여 나는 그들을 버릴 것이다; 그리고 나는 내 얼굴들을 그들로부터 숨길 것이다, 그로부터 이것은 살라짐을 위해 있을 것이다; 정녕 나는 내 얼굴들을 그들이 저지른 모든 악을 위하여 그 날에 감추이게 할 것이다
(신. 31:17, 18);
“성내심이 뜨거운 밀납이다”는 것은 돌아서심을 표시한다; 그리고 “얼굴들을 감추이신다”는 자비하심이 있지 않다를 표시한다. 비록 주님은 성내심이 결코 없고, 그분의 얼굴들을 감추이게 하신 적이 결코 없으시다 할지라도, 위의 말들이 여호와 또는 주님을 서술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악 안에 있는 인간과 더불어 나타남으로부터 그렇게 말해진다; 그 이유가 악 안에 있는 자는 자기 얼굴을 돌리고, 자신으로부터 주님의 얼굴들을 감추게 한다, 즉 자신으로부터 그분의 자비를 제거하신다. 이것을 행하는 것은 인간 안에 있는 악들이다는 것을 말씀에서 알는지 모른다. 미가서에서:
여호와께서는 그들이 자기들의 일들을 악하게 만듦에 따라 그 때에 그들로부터 그분의 얼굴들을 감추실 것이다 (미. 3:4).
에스겔서에서:
그들이 나를 향해 위반했기 때문에, 그러므로 나는 내 얼굴들을 그들로부터 감출 것이다. 그들의 불결함에 따라, 그리고 그들의 위법에 따라 나는 그들에게 행할 것이다; 그리고 나는 내 얼굴들을 그들로부터 감춘다 (겔. 39:23, 24).
그리고 특별하게 이사야서에서:
너와 너의 하느님 사이를 분리한 것은 너의 불법이다, 그리고 네 죄들이 너로부터 그분의 얼굴들을 감추고 있다 (이. 59:2).
위 구절, 그리고 많은 다른 구절로부터 내적 의미가 있음이 분명해진다; 하여 이 의미를 찾는 자에게는 발견되어진다.

네 형제가 너희와 함께 있지 않으면. 이는 너를 위한 중매자가 없으면을 의미한다. 이는 “베냐민”의 표현함이 중매함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베냐민이 표현하는 중간 부분(intermediate, 중간물, 중개자, 매개자)은 내적 부분과 외적 부분, 또는 영적 인간과 자연적 인간 사이에 있다, 그리고 요셉에 의해 표현되는 신성으로부터의 진리로부터 진행하는 선으로부터의 진리이다. 선으로부터의 이 진리는 천적 평면의 영적 부분 (the spiritual of the celestial)이라 불리운다, 그리고 이것이 “베냐민이다에 대하여 앞에서 살핀 바도 있다. 인간의 내적, 외적 부분은 서로에서 완전히 구분된다, 그 이유가 그의 내적 부분은 천국의 빛 안에 있고, 그의 외적 부분은 세상의 빛 안에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들은 완전히 구분되기 때문에, 그것들은 이 양쪽에 가담하는 중간 부분을 수단으로 하지 않으면 결합되어질 수 없다.

만일 당신이 우리와 함께 우리의 형제를 보낸다면. 이는 중매자가 반드시 있다 라는 첨가됨이 교회에 의해 거행된다면을 의미한다. 이는 보내는 것을 해야 하는 이스라엘의 표현함이 교회이다로부터, 그러므로 “만일 당신이 보낼 것이다면”은 만일 이것이 교회에 의해 그렇게 행해진다면을 표시한다; 그리고 여기서 그들의 “형제”인 베냐민의 표현함이 중개(매)자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로부터 분명해진다, 즉 “만일 당신이 우리와 함께 우리의 형제를 보낸다면”에 의해 교회의 외적 부분이 교회의 내적 부분에 인접함에서 중매자가 반드시 있도록 교회에 의해 그렇게 행해진다면이 의미된다.

우리는 내려가서 당신에게 양식을 사오겠습니다. 이는 이때 진리의 선이 거기서 획득될 것임을 의미한다. 이는 “사다”가 포획하는 것과 자기 것이 되게 함이다로부터; 그리고 “양식”의 의미가 진리의 선이다로부터 알려진다.

만일 당신이 그를 보내지 않을 것이라면. 이는 만일 아니라면을 의미한다. 이는 앞의 말로부터 알게 된다, 즉 첨가함이 거행되는 것이 교회로부터 있지 않다면을 말한다.

우리는 내려가지 않을 것입니다. 이는 그것은 획득되어 질 수 없다를 의미한다. 이는 방금 위에서 말해졌다.

그 이유가 그 사람이 우리에게 말했기 때문입니다. 이는 영적 부분에 관한 지각을 의미한다. 이는 “사람”의 의미가 내적 측면으로부터의 영적 부분이다로부터; 그리고 “말하다”가 말씀의 역사 부분에서 지각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너희는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라. 이는 어떤 동정도 있지 않을 것을 의미한다. 이는 같은 말이 등장한 앞의 구절에서 살폈다.

네 형제가 너와 함께 있지 않을 경우. 이는 너를 위한 중매자가 있지 않으면을 의미한다. 이는 여기서 “형제”인 베냐민에 대해 살핀 앞의 설명으로부터, 즉 그가 중매자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6-10절. 그리고 이스라엘이 말했다, 어찌하여 너희는 그 사람에게 네 형제가 있는지를 말하여 나를 아프게 하느냐? 7 그리고 그들이 말했다, 그 사람이 우리에게 엄히 묻고, 그리고 우리의 출생을 묻고, 말하기를, 너희의 아버지는 아직 살아 있느냐? 너는 형제가 있느냐? 그리고 우리는 그에게 이 말들의 입에 따라 말했습니다. 그가 네 형제를 데려오라 말할 줄을 우리가 어찌 알았겠습니까? 8 그리고 유다가 그의 아버지 이스라엘에게 말했다, 이 소년을 우리와 함께 보내소서, 그러면 우리는 일어나 가리이다. 그리고 우리는 살고, 둘 다 우리와 당신, 그리고 우리의 어린 것들 까지도 죽지 않을 것입니다. 9 제가 그를 위해 담보가 되겠습니다. 당신께서는 내 손에서 그를 요구하십시오. 만일 내가 그를 당신에게 데려와서 당신 앞에 그를 놓지 않으면, 나는 모든 날들에서 당신에게 죄인될 것입니다. 10 우리가 머뭇거리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두 번 갔다 왔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이 말했다. 이는 영적 선으로부터의 지각을 의미한다. 이는 “말하다”의 의미가 지각하다이다로부터; 이스라엘의 표현함이 영적 선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리고 이스라엘이 영적 선이기 때문에 그는 영적 교회의 내적 부분이다, 그 이유는 이 교회는 영적 선으로부터 있는 교회이기 때문이다. 영적 선은 진리가 선이 되는 것이다, 그 이유는 진리가 의지 안으로 건너가고, 의지로부터 행동 안으로 건너가고, 생활 속에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진리가 생활 속에 있기 되면 이 진리는 더 이상 진리가 아닌 선이라 불려진다. 그러나 진리를 선으로 변형하게 한 의지는 지적 부분에 있는 새로운 의지이다; 이 선이 영적 선이라 불리운다. 영적 선은 천적 선과 구별된다. 그 이유는 천적 선은 인간의 의지 부분 자체에 심어지기 때문이다. 이 주제는 앞에서 취급되었었다.
야곱이 지금은 앞 장에서 같이 “야곱”이라 불려지지 않고 “이스라엘”이라 불려지는 이유는 42장에서는 진리 측면이, 43장에서는 선 측면이 취급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42장에서 야곱에게 말하는 자가 교회의 교리로부터의 진리를 표현하는 르우벤이었고, 지금 말하는 자는 교회의 선을 표현하는 유다이다. 선이 지금 취급되는 또 하나의 이유는 요셉이 표현하는 내적 부분과 야곱의 열 아들들로 표현되는 외적 부분이 중매자인 베냐민을 수단으로 야기되는 결합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적인 것과 외적인 것의 결합은 선을 수단으로 결과된다.

어찌하여 너희는 그 사람에게 형제가 아직 더 있다고 말하여 나를 아프게 하느냐? 이는 그들은 그들로부터 선으로부터의 진리를 분리시켜서 그것이 내적인 것으로부터 오는 영적 부분과 합쳐지게 했음을 의미한다. 이는 “아프게 하다(deal ill)”의 의미가 분리하다 이다로부터; 그 이유가 “아프게 하느냐”라고 말한 자로부터 베냐민이 분리되기(헤어져야) 때문이다; 그리고 “말하다(tell)”의 의미가 상대방이 생각하고 되짚어보도록 어떤 것을 주는 것, 결과적으로 교통하는 것, 고로 결합하는 것 또한 의미한다; 그 이유가 어떤 것이 상대방의 의지 안으로 건너갈 경우, 교통되는 것을 수단으로 서로의 결합이 있기 때문이다. 마치 요셉이 자기 동생 베냐민이 아직 생존하고, 아버지와 함께 있다는 것을 들었을 때, 그가 자기에게 오기를, 자기와 더불어서만 있기를, 자기와 결합하기를 원했던 것과 같다(이는 뒤어어 있는 사건이다); 그리고 요셉의 표현함은 신성의 영적 평면이다; 그러나 앞 구절에서 요셉이 “사람”으로 불려질 때의 경우에서는 내적 측면으로부터의 영적 부분이다; 그리고 여기서 그들이 말하는 자기들의 형제라는 경우에서의 베냐민은 선으로부터의 진리이다. 이상 각각의 내용을 종합해보면, “너희는 그 사람에게 형제가 아직 더 있다고 말하여 나를 아프게 하느냐?”에 의해 그들이 자기들로부터 선으로부터의 진리를 분리해서 이것이 내적 부분으로부터의 영적 평면과 결합하게 하는 것이 의미됨을 알게 된다.

그리고 그는 말했다, 그 사람이 우리에게 엄히 물었다. 이는 그것은 자연 평면에 있는 것들을 분명하게 지각했다를 의미한다. 이는 “묻다(ask)”의 의미가 상대방의 생각을 지각하는 것이다로부터 (이는 뒤이어 있는다); 그리고 여기서 “우리들”인 야곱의 열 아들들의 표현함이 자연 평면에 있는 교회의 것들이다로부터 알려진다. 여기서 “묻다”에 의해 상대의 생각을 지각하다가 의미되는 이유는, 천국에서는 모든 생각들이 (말을 하지 않아도) 교통되는 바, 상대가 무엇을 생각하는지를 별도로 물을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묻다”는 상대방의 생각을 지각하다를 의미한다; 그 이유가 땅 위에 있는 어떤 것의 내적 의미에서의 품질이 천국에서 그것의 품질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의 출생에 관하여. 이는 신앙 속의 진리들에 관하여를 의미한다. 이는 “출생(birth)”의 의미가 선으로부터의 진리, 또는 선행으로부터의 신앙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출생”이 내적 의미에서 이런 사항들을 표시하는 이유는 천국에서 출생이라는 단어를 두고 이해하는 것은 거듭남이라 불리우는 것들, 즉 신앙의 진리와 선행의 선을 수단으로 결과되는 것밖에 더 없기 때문이다. 이 출생을 수단으로 인간들은 인간 누구의 아들로부터 주님의 아들들이 된다. 이것이 “하느님으로부터 태어남”이라고 말해지고 있다(요. 1:13). 천국에서는 진리로부터의 선과 선으로부터의 진리의 다양해짐에 따라 결혼이나 친척 관계, 형제 관계가 있다; 그 이유가 천국에는 항구적인 다양해짐들이 있기 때문, 그러나 이 다양해짐은 주님에 의해 정리정돈 되어지는데, 이것이 가족 관계들, 즉 형제자매들, 사위, 며느리, 손자손녀 등등과 같은 것으로 표현된다. 일반적으로 제 아무리 이렇게 저렇게 다양해진다 해도 이 모두는 하나를 만드는데, 이것의 좋은 예증은 우리의 신체를 염두하면 될 것이다. 즉 우리의 신체의 각각의 부분들은 미세한 부분에 이르기 까지에서도 다양하지만 결국은 한 인물로 귀결되는 것을 생각하면 된다는 말이다. 하여 하나 더 생각해둘 것은 인간에 있는 형체들이 천국에 있는 형체들과 상응 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최고로 완전한 상응임에 틀림이 없다.

너의 아버지는 아직 살아있느냐? 이는 그들이 있어진 영적 선에 관하여를 의미한다. 이는 여기서 “아버지”인 이스라엘의 표현함이 영적 선이다로부터 분명해진다. “그들이 있어진(from they were)”라고 말한 이유는 이 선으로부터 있었기 때문, 아버지로부터 자녀들이 있듯, 영적 선으로부터 신앙의 진리들이 도래되기 때문이다.

너는 형제가 있느냐? 이는 내면의 진리에 관하여를 의미한다. 이는 베냐민의 표현함이 천적 평면의 영적 부분, 또는 선으로부터의 진리, 또는 내면의 진리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 내면의 진리가 신성으로부터의 진리와 자연 평면의 진리 사이에 있는 중매자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 말들의 입에 따라 그에게 말했습니다. 이는 그는 그것들을 일치되게 지각했음을 의미한다. 이는 “말하다(tell)”의 의미가 지각하다 이다로부터 분명해진다; 그 이유가 영계에서 또는 천국에서는 자기들이 생각하는 것을 입으로 말할 필요가 없기 때문, 거기에는 모든 생각함들의 교통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말들에 따라”의 의미가 일치됨이 있다 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 이유가 그것들이 그가 지각하기를 바랬던 것들이기 때문이다.

네 형제를 데리고 오라 하고 그가 말할 줄을 우리가 어찌 알았겠습니까? 이는 우리는 그가 선으로부터의 진리가 그에게 합쳐지게 하기를 원했음을 믿지 않았다를 의미한다. 이는 “어찌 알 수 있었겠습니까?”의 의미가 믿어지지 않다 이다로부터; 그리고 여기서 “형제”인 베냐민의 표현함이 선으로부터의 진리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것이 그와 더불어 결합해지려는 것이다가 “그를 데려오라”에 의미되어 있다는 것은 앞에서 살핀 바에서 분명해진다.

그리고 유다는 그의 아버지 이스라엘에게 말했다. 이는 이런저런 것들에 관하여 교회의 선으로부터 지각함을 의미한다. 이는 “말하다(say)”가 말씀의 역사적 부분에서 지각하다를 의미함으로부터 분명해진다; 유다의 표현함이 교회의 선이다로부터; 그리고 이스라엘의 표현함이 영적 교회의 내적 부분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로부터 “유다가 자기 아버지 이스라엘에게 말함”에 의해 교회의 선으로부터 교회를 지각함이 의미된다가 분명해진다.

이 소년을 저와 함께 보내십시오. 이는 그는 그에게 인접되어야 하리라는 것을 의미한다. 즉 유다에 의해 표현된 교회의 선에 인접되어야 하리라는 것이다. 이는 “저와 함께 보내라”의 의미가 그에게 인접되는 것이다로부터, 그리고 다른 이들에게 인접함이 아니다; 그 이유가 이어지는 말에서, “나는 그를 위해 담보가 될 것이다, 내 손으로부터 당신은 그를 요구하시라” 라고 말해지기 때문에서이다; 그리고 여기서 “소년”은 내면의 진리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것이 “소년(boy)”이라 불리어진 이유는 말씀에서 내면적인 것들이 상대적으로 소년이라 말해지기 때문이다. 즉 소년은 외면 보다 내면이 상대적으로 더 순진에 가까웁기 때문이고, 말씀에서 “유아”가 순진을 의미하는데, “소년” 역시 그러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우리는 일어나 가리이다, 그리고 우리는 살고 죽지 않으리이다. 이는 등차에 따른 영적 생명을 의미한다. 이는 “일어나다(arise)”의 의미가 더 높은 쪽으로, 더 내면쪽으로승강함, 결과적으로 영적 생명쪽으로 승강함이다로부터; 그리고 “가다”의 의미가 사는 것이다로부터; 그리고 이어지는 말은 “그리고 우리는 살 것이다”인 바, “가다”는 첫 번째의 영적 생명을 의미하고; “살다”의 의미는 영적 생명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 이유가 말씀의 내적 의미에서 영적 생명 외의 다른 생명은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죽지 않는다”의 의미가 더 이상 지옥에 떨어질 일은 없다, 즉 지옥에 떨어지는 상태 밖으로 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 이유가 내적 의미에서 죽음은 이외 더 다른 것은 없기 때문이다. 이상 살핀 바로부터, “우리는 일어나 가고, 살고 죽지 않는다”는 등차에 따른 생명, 즉 “일어나다”에 의해 생명 안으로 받아들여짐, “가다”에 의해 생명의 첫 번째가, “살다”에 의해 생명 자체가, “죽지 않는다”에 의해 생명 없음으로부터의 것들로부터 밖에 있음이 의미된다.
“가다”가 내적 의미에서 사는 것이다는 것이 영적 생명(삶)에 관하여 아무 지식도 없는 이들에게는 매우 이상한 듯 여겨질 것이다; 그러나 “여행함”이 인생 여정, 삶의 질서, 계속적인 생활을 표시하는 것과 별반 차이가 없다. 또한 이와 비슷한 삶의 하나인 “체류함”이 (질서에) 따라서 사는 것, 가르쳐지는 것이다를 표시하는 것과도 비등하다. “가다”. “여행하다”, “체류하다”의 의미가 이러이러하다고 말해졌지만, 사실상 이런 의미가 왜 그러한지는 다른 삶에서 있는 움직임들의 속성에 무지할 경우, 이런 의미들을 받아들이기는 쉽지는 않다. 즉 다른 삶에서 움직임(movement)들과 발전함, 진보함(progression)이란 생명의 상태의 변화들 외의 다른 근원은 없다. 이 변화들이 이 장소에서 저 장소로 발전함과 꼭같게 외적으로 나타난다. 이것이 그러하다는 것을 다른 삶에서의 나의 경험으로 확증할 수 있다; 그 이유가 비록 내 몸이 여기서, 한 장소에 머물면서도, 나는 거기서 그들과 더불어 걸었고, 그들 사이에 있었고, 그들의 거처들을 다녔기 때문이다. 또한 나는 그들과 어떻게 이런 것이 있을 수 있는지도 이야기를 했는데, 이것은 영계에서 발전을 만드는 생명의 상태들의 바뀜이다고 (나에게) 알려주었다.
이것은 이런 사실, 즉 영들을 상태의 변화들을 수단으로 순간적으로 높은 쪽에서, 또는 아래쪽에서, 또는 서쪽에서, 동쪽에서 나타난다는 사실로도 확증될 수 있다. 이 말 또한 영적 세계에서의 삶에 관하여 아는 것이 없는 이들에게는 이상하게 여겨질 수밖에 없다; 그 이유는 저쪽의 삶에는 시간과 공간이 없고 그것 대신 상태만이 있기 때문이다. 이 상태들은 외적인 것들에서 움직임들과 발전함들의 최고의 살아있는 나타남들을 생산한다. 이 나타남(appearance)은 우리 안에, 그러므로 우리의 자기 자신에 있는 생명 자체인 만큼이나 살아있고 진짜이다. 그럼에도 이 생명은 모든 생명의 원천이신 주님으로부터 흘러들고 있다. “간다”, “움직인다”가 살아있다를 의미하기에 고대인들에 의해 말해진 바, “우리는 하느님 안에서 움직이고, 살아 있고, 우리의 존재를 가진다”라고 말해졌다; [행. 17:28] (이 구절 표시는 라틴 원문에는 없으나 영역 교정자 potts이 첨가했음. 역자주) 그리고 고대인들은 “움직이다”에 의해 생명의 외적 부분을 의미했고, “살아있다”에 의해 생명의 내적 부분을, “있다”에 의해 생명의 가장 안쪽 부분을 의미했다.

우리 둘 다. 이는 교회의 외적 부분을 의미한다. 이는 여기서 “우리”가 야곱의 열 아들들이고, 그들이 교회의 외적 부분을 표현한다로부터 알려진다.

그리고 당신. 이는 교회의 내적 부분을 의미한다. 이는 여기서 “당신”이 이스라엘이고, 그가 교회의 내적 부분을 표현함으로부터 알려진다.

그리고 우리의 어린 것 역시. 이는 더욱 내면에 있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어린 것들”이 내면인 것들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더 내면인 것들이 “어린 것들”과 “소년들” 모두에 의해 의미되는 이유는 모두가 순진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순진은 가장 깊은 것(안쪽의 것, inmost)이다. 천국들 안에서 가장 안쪽, 또는 셋째 천국은 순진 안에 있는 이들로 구성된다, 그 이유는 이들이 주님을 사랑함 안에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주님은 순진 자체이시기 때문에, 그러므로 거기에 있는 그들, 즉 그분을 사랑함 안에 있는 그들은 순진 안에 있다. 이들이 모든 천국들을 망나하여 가장 슬기로운 이들일지라도 그들이 다른 이들에게 어린이 같이 나타난다. 이런 이유에서, 그리고 작은 어린이가 순진 안에 있기 때문에, 말씀에서 “작은 어린이”에 의해 순진이 의미되어진다.
천국들의 가장 안쪽이 순진이기에, 이로부터 천국들에 있는 모든 이와 더불어 그들의 내면은 순진임에 틀림이 없다. 이것은 함께 존재하는 것들이 관련되면서 연속으로 이어지는 것들을 닮는다, 즉 앞의 것들로부터 존재하는 뒤의 것들에 관련하여 등차를 수단으로 서로로부터 구분되되, 닮고 있다; 그 이유가 동시적으로 존재하는 모든 것은 연속적인 것들로부터 튀어나오기 때문이다. 전자기 후자로부터 존재할 때, 부분들은 자체들을 똑같은 질서에서 배열한다. 예를 들면, 목적, 원인, 결과는 연속적이나, 서로로부터 구분이 된다; 그리고 그것들이 함께 존재할 때, 그것들은 자체를 같은 질서 안에 배열한다; 하여 목적은 가장 안쪽에, 윈인은 다음, 결과는 마지막이다. 결과는 같은 때(장소)에 존재한다; 즉 결과 안에 원인이, 원인 안에 목적이 있지 않으면 결과는 없다. 그 이유는 만일 당신이 결과로부터 원인을 제거한다면, 당신은 결과를 파괴하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당신이 원인으로부터 목적을 제거한다면, 더 더욱 파괴하게 된다. 그 이유가 목적으로부터 원인은 원인을 만드는 것을 가지기 때문, 원인으로부터 결과는 결과를 만드는 것을 가지기 때문이다.
영계 안에서도 마찬가지 이다; 즉 목적, 원인, 결과가 서로로부터 구분이 되듯, 영계에는 주님을 사랑함, 이웃을 향한 선행, 선행으로부터의 일들이 구분되고 있다. 이 셋은 하나로, 또는 함께 존재할 때, 첫째는 둘째 안에, 둘째는 셋째 안에 반드시 있어야 한다. 따라서 선행의 일들 안에 앞의 둘이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즉 애착 또는 심정으로부터의 선행이 선행의 일들 안쪽에 있지 않으면, 그 일들은 선행의 일들이 아니다는 것; 그리고 하느님을 사랑함이 선행 안쪽에 있지 않으면, 그것은 선행이 아니다. 그러므로 당신이 내면인 것을 거두어버리면, 외면은 추락한다(타락한다); 그 이유가 외면의 것은 질서에 있는 내면의 것으로부터 그것의 존재가 오고 존속도 가능하기 때문이다. 순진 역시 이런 맥락 아래 있다. 순진은 주님을 사랑함과 더불어 하나를 만든다, 그리고 이 순진이 선행 안쪽에 있지 않으면, 선행은 선행이 아니다. 결과적으로 순진을 지닌 선행이 선행의 일들 안쪽에 있지 않으면, 이 일들은 선행의 일들이 아니다. 이로부터 천국들에 있는 모든 것 안쪽에는 순진이 반드시 있어야한다.
이것이 그렇다는 것, 그리고 “작은 어린이”가 순진을 의미한다는 것을 말씀에서: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말하셨다, 작은 어린이가 나에게 오는 것을 허용하고 금하지 말라; 그 이유가 이와같음 속에 하느님의 왕국이 있기 때문이다. 참으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작은 어린이와 같이 하느님의 왕국을 받지 못하는 자는 누구이든, 그는 거기 안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을 그분의 팔로 데려다가, 그분은 자기 손을 그들 위에 놓으시고 축복하셨다
(막. 10:14-16; 눅. 18:15-17; 마. 18:3).
위에서 “작은 어린이”에 의해 순진이 의미된다는 것, 그 이유는 작은 어린이와 더불어 순진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천국에서 순진이 있는 이들은 작은 어린이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순진의 어떤 것을 지니지 않은 자는 누구이든 천국 안으로 들어갈 수 없다; 더 나아가 자신의 판단과 의지를 수단으로 자신을 통치하는 성인들의 경우에서 같이, 아직은 순진이 자신의 것으로 삼지 못한 이들의 경우, 작은 어린이가 순진의 형체들인 천사들을 수단으로 자신을 통치하게 허용하고 금하지 말아야 한다. 작은 어린이는 자신들이 천사들에 의해 통치되는 것을 허용한다는 것을 주님의 말씀에서:
너희는 이 작은 것들 중의 하나도 경멸하지 말라; 그 이유가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천국들에 있는 그들의 천사들은 내 아버지의 얼굴을 언제나 바라보기 때문이다 (마. 18:10);
순진으로부터가 아니면 누구도 “하느님의 얼굴”을 볼 수 있는 자가 없다.
아래 구절도 순진이 “유아” 또는 “작은 어린이”에 의해 의미된다:
아기들과 젖을 빠는 아기들의 입으로부터 당신은 완전해진 찬양을 가지십니다
(마. 21:16; 시. 8:2).
다시:
당신께서는 슬기롭고 총명한 이들로부터 이런 것들이 감추이게 하시고, 그리고 그것들을 아기들에 게 밝히 보이셨다 (마. 11:25; 눅. 10:21);
그 이유가 “아기들”에 의해 의미되는 순진이 지혜 자체이기 때문, 진짜 순진은 지혜 안에 거주하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아기들과 젖을 빠는 아이들의 입으로부터 당신께서는 찬양을 완전해지게 하셨다(완전해진 찬양을 가지신다)”, 또한 이런 사항들을 “아기들에게 밝히 보이셨다.”
이사야서에서:
암소와 곰이 먹을 것이다, 그것들의 어린 것들이 함께 누울 것이다, 그리고 젖을 빠는 아기가 독사의 굴에서 놀 것이다 (이. 11:7, 8)
위는 주님의 왕국에 관하여, 특히 그곳에 있는 평화와 순진에 관하여서 이다. “젖을 빰”이 순진을 표시한다; 악의 어떤 것도 순진 안에 있는 이들에게는 미치지 못한다는 것이 “독사의 굴에서 논다”에 의해 의미되고 있다; “독사(viper)들”이란 최고로 간악한 자들이다. 이 장 은 주님에 관련됨이 분명하다:
시온에서 나팔을 소리내라, 백성들을 모이게 하라, 회중을 성결되게 하라, 원로들을 모우라, 아기들 과 가슴을 빠는 것들을 모으라 (욜. 2:15, 16);
“원로들”은 지혜로운 자를 표시한다; “아기들과 가슴을 빠는 자들”은 순진한 자들을 표시한다.
이어지는 페이지에서 “유아들”에 의해 순진이 뜻해진다, 그러나 그들 안에서 파괴되어진 순진이다:
어찌하여 너희는 너희 혼들을 향하여 너희로부터 남자와 여인을, 유아와 젖을 빰을, 유다의 한가운 데로부터 멸절하는 큰 악을 범죄하여, 나로 너희에게 남은 것이 하나도 없게 하게 하느냐?
(예. 44:7).
다시:
네 손을 너희 작은 어린이 위애서 그분에게 들어올려라, 하여 모든 거리들의 머리에서 배고픔으로 실신한다 (애. 2:19).
에스겔서에서:
예루살렘을 관통하라, 그리고 쳐부셔라, 너희의 눈이 노인, 젊은 이, 처녀, 작은 아이들을 불쌍히 여겨 남겨두지 않게 (쳐죽이라) (겔. 9:5, 6).
미가서:
내 백성의 여인들을 너희는 즐거움들로부터의 모든 이의 집으로부터 몰아내어, 거기로부터의 아기들로부터 너희는 나의 영예를 영원히 (몰아낸다) (겔. 2:9).
작은 어린이의 순진만에 주목하면, 이것은 외적인 순진이고 내적인 순진은 아니다; 그리고 이것이 내적이지 않기 때문에 어떤 지혜와도 결합될 수 없다. 그러나 천사들의 순진, 특히 셋째 천국의 천사들의 순진은 내적 순진이어서 지혜와 결합한다. 인간은 늙어가되 작은 어린 아이 같이 되도록, 하여 지혜의 순진이 그가 유아 시기에 간직했던 무지의 순진과 자체를 결합하도록, 그리하여 진정한 유아로서 다른 삶으로 건너가도록 창조되었다.

나는 그를 위해 담보가 되리이다. 이는 한동안 그 자체(신성으로부터의 진리)에 인접되어질 것임을 의미한다. 누군가를 위하여 “담보로 있다”란 그를 대신함을 뜻하는데, 이는 다음 장인 44:32, 33에서 유다가 요셉에게 말하는 대목으로부터 분명해진다; 누군가를 위해 담보가 됨이 그를 대신하는 것인 바, 한동안 어떤 자체에 인접되는 것을 표시한다.

당신은 내 손에서 그를 요구하십시오. 이는 그것이 그것의 힘에 놓여 있는 한 억지로 떼어내지지 않을 것임을 의미한다. 이는 “손”의 의미가 힘(power)이다로부터로 알게 된다, 그리고 이 힘이 그것의 힘에 놓여있는 만큼에서를 표시하는 이유는 담보함란 담보 그 자체까지에 해당하지 더 이상은 아니기 때문이다 (여기서의 내적 의미는 진리와 진리의 본성이다); 그리고 “그를 자기로부터 요구함”의 의미가 억지로 떼어내지지 않을 것이다인 이유는 또 다른 자로부터 요구받아진 자는 (그 요구가) 자기에게 인접되어져 있을 뿐, 억지로 떼어내지지 않기 때문이다.

만일 제가 그를 당신에게 데려오지 않는다면, 그리고 당신 앞에 놓지 않는다면. 이는 그가 교회로 확실히 되찾아지지 않으면을 의미한다. 이는 “당신에게 데려와서 당신 앞에 놓는다”가 완전하게 원장소로 되돌리는 것이다로부터; 그리고 되돌려지는 대상인 이스라엘의 표현함이 교회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리고 나는 모든 날들에서 당신에게 죄인일 것입니다. 이는 교회의 선은 더 이상 있지 않을 것을 의미한다. 이는 이 말을 하는 당사자인 유다의 표현함이 교회의 선이다로부터; 그리고 “죄 있다”의 의미가 분열됨(disjunction)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고로 분열됨은 그것이 있지 않을 것이다를 의미하는데, 그 이유는 분열된 것은 더 이상 함께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모든 날들”은 영원히를 의미하는 바, 더 오래 계속은 아니다. 이런 사항들이 말해진 이유는 교회의 선은 베냐민에 의해 표현되는 내적 부분과 외적 부분 사이에 있는 중개자 없이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교회의 선과 진리는 내적인 것이 중개자를 통하여 외적인 것으로 흐르기 때문, 결과적으로 교회가 그것의 선을 가져야하는 함이 중요한 만큼에서 교회의 선이 중개자를 가지는 것도 중요하다는 말이다. 이런 이유로 유다는 자기를 베냐민을 위한 담보로 만들 것을 제안한 것이다. 교회의 선은 중개자 없이 가능하지 않다는 것이 유다의 말들에 의해, 그리고 교회의 진리가 가능하지 않다는 것은 르우벤의 말들에 의해 의미되고 있다.

우리가 머뭇거리지 않았더라면. 이는 의심의 상태에서 지체함을 의미한다. 이는 “머뭇거리다”가 의심의 상태임이 분명하다; 그 이유는 “가다,” “발전하다,” “여행하다,” “체류하다”가 삶의 상태들을 의미하기 때문, 그 이유는 삶의 상태들이 의심의 상태에 있을 때, 외적 나타남이 머뭇거림의 상태에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이것은 인간 자신 안쪽에서도 나타난다; 그 이유가 그의 마음이 어떤 의심함들에 매달려 있을 때, 그는 멈춰서서 생각에 잠기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의심함은 삶의 상태를 주저하고 망설이게, 결과적으로 바깥으로도 그것이 행동에서 나타나지기 마련이다. 고로 의심의 상태에서 지체함이 “우리가 머뭇거리지 않았다면”에서 의미된 것이다.

우리는 두 번이나 갔다 왔을 것입니다. 이는 거기에 영적 생명이 내면으로, 외면으로 있어왔을 것을 의미한다. 이는 “가다”의 의미가 살아간다이다로부터; 그러므로 “되돌아오다, 또는 갔다가 왔다”의 의미는 거기로부터 사는 것이다가 의미된다; 그 이유가 그들이 그쪽으로 가서 낟알(곡식, corn)들을 획득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낟알”에 의해 영적 생명을 있게 하는 진리로부터의 선이 의미되기 때문이다; “이것들이 두 번씩”, 이것이 삶에 관련된 말이므로, 외면, 내면의 삶을 표시한다; 즉 그들이 처음 획득한 “농산물”에 의해서는 자연 평면의 외면 측면에서의 진리로부터의 선이 의미되는데, 그 이유는 처음에는 베냐민 없이 농산물을 가져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두 번째 농산물의 획득은 베냐민인 중개자가 동반되는 바, 자연 평면의 내면에서의 진리로부터의 선이 의미되기 때문이다 (이는 이어지는 구절에서 더 설명한다). 고로 “두 번이나 갔다가 왔다”에 의해서는 내, 외면에서의 영적 생명이 의미된다.
이렇게 의미되는 것을 두고 의아히 여겨질 수밖에 없을지 모른다; 특히 영적인 것에 관하여 아무것도 모르는 이들의 경우 더욱 그럴 것이다; 그 이유가 “두 번 갔다가 온다”에 영적 생명(삶)이 의미되는 것과 관련된다고 비쳐지는 것이 하나도 나타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그럼에도 이것이 위 말씀의 영적 의미인 것은 진정하다. 만일 당신이 이것을 믿는 다면, 선 안에 있는 인간의 내면의 생각 자체는 이것을 납득하는데, 그 이유는 비록 육체 안에서 인간이 영적 의미에 무지해 있는 동안 일지라도 이 생각은 내면의 생각들로부터 있는 내적 의미 안에 있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내면의 생각으로부터 있는 것인 영적 의미, 즉 내적 의미가 알려지지 않은 인간의 경우, 그의 생각들은 세상에 있는 것, 즉 시간과 공간에 가담하는 물질적인 것, 감각적인 것에 집중되어 있기에, 그의 내면의 생각은 그런 세상적 측면의 것에서는 나타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그의 내면의 생각은 그의 영이 천사들의 어떤 사회와 있는 경우, 그 천사들의 것과 같기 때문이다.
선 안에 있는 이들의 생각이 내적 의미에 따라 있다는 것은 사후 그가 천국 안으로 올 때, 그에게 어떤 통보함도 없이 자동적으로 그가 내적 의미 안에 있다는 사실로부터 알는지 모른다. 더구나 이것은 그가 세상에 있는 동안 내적 의미에서 있어지는 내면의 생각 안에 있지 않았으면 가능해질 수도 없다. 그가 이 내적 의미 안에 있는 이유는 영적 부분과 자연적 부분 사이에 상응이 있기 때문에서이다. 이는 아주 미세한 부분에서까지도 세세하게 상응하고 있다. 그러므로 선 안에 있는 인간의 내면, 또는 합리적 마음은 영계 안에 있고, 그의 외면, 또는 자연적 마음은 자연계 안에 있기 때문에, 반드시 필요한 것은 마음이 둘로 생각한다는 것, 즉 양쪽 마음이 생각해야한다는 것이다 (즉 내면의 마음은 영적으로, 외면의 마음은 자연적으로 이다). 그리고 영적인 것은 자연적인 것 안으로 낙하한다, 그리고 그것들은 상응을 수단으로 하나로서 행동한다.
인간의 내면의 마음, 즉 지적 측면이라 불리우거나, 비 물질적인 것이라고 말해지는 생각 속의 관념(idea)들은 어떤 언어라는 단어들로부터 생각하지 않는다, 결과적으로 자연적인 형체들로부터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은 이에 대해 한번 더 곰곰이 되짚어 생각하는 이들이라면 어렵지 않은 주제들이다. 다시 말해 우리는 한 시간이 걸려도 다 말할 수 없는 것을 순식간에 생각할 수 있다거나, 세세하게 많은 것들도 보편적인 것 하나로 생각해낼 수 있는 것을 되짚어보면 쉽게 납득된다. 생각 속의 관념이 영적인 것이다, 그래서 말씀이 읽혀질 때, 이외 달리 내적 의미는 있지 않다; 즉 비록 읽는 당사자에게 과거 이런 영적 관념들에 대해 알려준 바 없었을지라도 영적 관념은 자연적 관념 안으로의 유입을 수단으로 자연적 관념을 표출한다, 하여 영적 관념은 나타나지 않는다; 하여 이런 사항들에 대해 배워진 바 없으면, 그는 자연적인 것과 닮은 것이 아닌 영적인 것은 존재 않는다고 믿는다, 급기야 자신이 육체에서 이야기하는 것이 영임에도 이것까지도 영적인 것이 아니다고 믿는 정도로 까지도 치닫는다. 이리하여 자연적인 것은 영적인 것을 그늘 속으로 처박고 만다.

11-14절. 그리고 그들의 아버지 이스라엘이 그들에게 말했다, 만일 그러하다면 이렇게 하라. 너희의 그릇에 이 토지의 노래를 담아서 그 사람에게 선물로 가져 가라, 즉 수지 조금과 꿀 조금과 밀랍과 소합향, 테레빈 나무의 견과들과 아몬드들이다. 12 그리고 너희 손에 은을 두 배로 들고 가라. 그리고 너희들의 자루 아구에 되놓였었던 은을 너희 손에 되돌려 가지고 가라. 그것은 착오 였을지 모른다. 13 그리고 너희 형제를 손에 가지라, 일어나라, 그리고 그 사람에게 되돌아 가라. 14 그리고 하느님 솨다이께서 그 사람 앞에서 너희에게 자비들을 주시어, 너에게 너의 다른 형제와 베냐민을 보내리라. 설사 빼앗기게 된다면 나는 빼앗기리라.

그리고 그들의 아버지 이스라엘이 그들에게 말했다. 이는 영적 선으로부터의 지각을 의미한다. 이는 “말하다”가 말씀의 역사 부분에서는 지각하다를 의미함으로부터; 그리고 이스라엘의 표현함이 영적 선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가 여기서 “아버지”라고 불리운 이유는 아들들이 표현하는 진리들이 아들이 아버지로부터 이듯 영적 선으로부터 이기 때문이다.

만일 그러하다면, 이렇게 하라. 이는 달리 행할 도리가 없다면 그렇게 되어질 것을 의미한다. 이는 설명이 필요 없이 알 것이다.

너희 그릇에 이 토지의 노래를 가져가라. 이는 신앙의 진리에서 교회가 선발한 것들을 의미한다. 이는 “노래”의 의미가 선발한 것이다로부터; 그리고 “토지”의 의미가 교회이다로부터; 그리고 “그릇들”의 의미가 신앙의 진리들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단어 “노래(song)”가 여기서 사용된 이유는 원어에서 이 단어는 노래하다로부터 파생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토지의 노래”는 찬양들과 노래들로 환호하여 맞이한 농산물들을 의미한다, 결과적으로 선발된 것들을 내적 의미에서 의미하게 된다.

그리고 그 사람에게 선물로 가져 가라. 이는 호의를 얻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는 “토지의 주인”이라 불리우는 요셉인 “사람에게 선물을 제공함”의 의미가 호의를 얻는 것이다로 알게 된다. 고대의 표현 교회에서, 그로부터 유태 교회에서 관습적이 된 것은 사사(judges)에게 어떤 선물을 드리는 것이다, 이후 후기 시대에는 왕과 성직자를 만나기를 청할 때, 그들에게 선물을 바쳤다. 더욱이 이것은 명령되어져 있었다. 그런 이유는 그들이 그들에게 바친 선물들은 주님이 접근될 때 그분에게 제공되어야 하는 인간 안의 이런저런 것들을 표현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자유함으로부터 있는 것들, 결과적으로 인간 자신으로부터 있는 것들이다; 그 이유가 그의 자유함은 심정으로부터 있는 것으로부터 이고, 심정으로부터 인 것은 의지로부터 이고, 의지로부터인 것은 사랑 속에 있는 애착으로부터 이고, 사랑 속에 있는 애착으로부터 인 것은 자유하다, 고로 인간 자신으로부터 인 것들이다. 이로부터 접근하시는 주님에게 인간에 의해 선물은 주어져야 할 것이다; 그 이유가 왕들은 신성한 진리 측면의 주님을, 성직자는 신성한 선 측면의 주님을 표현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개시함들은 호의를 얻음을 위하여 이다.

수지 조금과 꿀 조금. 이는 자연 평면의 외면으로부터의 선의 진리들, 그리고 그것들의 기쁨을 의미한다. 이는 “수지(유향, resin)”의 의미가 선의 진리, 또는 선으로부터의 진리이다로부터 알려진다. “수지(樹脂)”가 이 의미를 가지는 이유는 이것이 연고로 분류되고, 또한 유향에 속하기 때문이다. “향료(aromatic)”들은 선으로부터의 진리 속에 있는 이런저런 것들을 의미하는데, 특히 그것들이 기름 같은 성질 때문에 기름(oil) 같은 것으로도 분류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기름”은 선을 의미한다. 이 유향이 방향성(향기로운)인 것은 창. 37:25에서 알 것이다; 이런 이유로 원어에서 똑같은 단어로 발삼(balsam, 방향성 수지, 향료)을 뜻한다. 이것이 연고, 내지 밀도 높은 기름 같았음은 분명하다. 이런 이유로 “수지”에 의해서는 자연 평면에 있는 선의 진리가 의미된다, 여기서는 자연 평면의 외면에 있는 선의 진리이다, 그 이유는 가져가라는 물품 중에서 “수지”는 첫 번째이고, 기쁨(delight)이 있는 “꿀”과 연합하고 있기 때문이다. “꿀”이 기쁨을 표시하는 이유는 그것이 달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연계에 있는 달콤한 모든 것은 영계에 있는 기쁘고 유쾌한 것들과 상응한다. 이것이 그것들의 기쁨, 즉 자연 평면의 외면의 선으로부터의 진리라고 불리운 이유는 모두 각각의 진리, 특히 선으로부터의 모두 각각의 진리는 그것들 고유의 기쁨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기쁨은 이것들에 관한 애착으로부터의 기쁨, 그리고 파생되는 사용함으로부터 있어지는 기쁨이다.
“꿀”이 기쁨(delight)이다는 것은 말씀의 다른 구절로부터도 분명해진다:
처녀가 임신해서 아들을 낳을 것이다, 그리고 그분의 이름은 임마누엘(하느님이 우리와 함께 하다)이라 부를 것이다. 버터와 꿀을 그분은 먹을 것이다, 하여 그분은 악을 거절하고 선을 선택하시 는 것을 알는지 모른다 (이. 7:14, 15);
위는 주님에 관한 말이다; “버터(butter)”는 천적 평면에 속한 것을 표시한다; “꿀”은 천적인 것으로부터 있는 것을 표시한다.
다시:
그것들이 생산하는 젖이 많을 때가 올 것이다, 그는 버터를 먹을 것이다; 그리고 버터와 꿀을 토지 한가운데에 남겨진 모든 이가 먹을 것이다 (이. 7:22);
위는 주님의 왕국에 관하여서이다; “젖”은 영적인 선을 표시한다; “버터”는 천적인 선을; 그리고 “꿀”은 두 선으로부터 있는 것, 고로 행복함, 유쾌함, 기뻐함인 것을 표시한다.
에스겔서에서:
고로 너는 금과 은으로 치장을 했다, 그리고 내 의복은 고운 아마포와 비단과 수를 놓는 작업으로 만들어졌다, 너는 고운 곡식 가루와 꿀과 기름을 먹었다; 그리하여 너는 극도로 아름다워졌다. 그리고 너는 왕국을 통틀어 번창했다. 나는 고운 곡식가루와 꿀과 기름을 가지고 너를 먹였다; 그러나 너는 쉼의 냄새를 위하여 그것들 앞에 그것을 놓았다 (겔. 16:12, 19);
위는 예루살렘에 관하여서이다, 이를 수단으로 영적 수준의 교회가 뜻해진다, 위에 묘사된 것들은 고대인들과 더불어, 그 후 되어가진 그들에 관하여서 이다. 그녀가 “금과 은으로 치장했다”란 천적 수준과 영적 수준의 선과 진리와 더불어를 표시한다; 그녀의 “고운 아마포, 비단, 수 놓은 작업으로 만들어진 의복”은 합리성 평면과 자연 평면 각각에 있는 진리들을 표시한다; “고운 곡식 가루”는 영적 (평면의) 것을; “꿀”은 그것의 유쾌함을; “기름”은 그것의 선을 표시한다. 천국에 있는 이런저런 것들이 위 구절의 세부 사항에 의해 의미된 것은 누구라도 짐작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다시:
유다와 이스라엘의 토지는 민닛의 밀과 과자(pannag) 그리고 꿀, 그리고 기름, 그리고 향유(balm) 에서 너희의 거래업자들이었다 (겔. 27:17)
위는 두로(Tyre)에 관하여서 인데, 이를 수단으로 영적 수준의 교회, 그리고 이 교회의 시작과 그 후 되어간 것들이 의미되어 있다; 그러나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들 측면에 관하여서 이다. “꿀”은 여기서 유쾌함, 그리고 천적, 영적 수준의 진리들과 선들에 관하여 배우고 앎에 애착함들로부터 있는 기쁨을 표시한다.
모세의 책에서:
당신은 그로 땅의 높은 장소들을 타게 만드신다, 그리고 그는 들판들의 생산물을 먹는다. 그분은 그로 바위로부터 꿀을, 그리고 바위 틈새로부터 기름을 빨게 만드신다 (신. 32:13);
위는 고대 영적 (수준의) 교회를 취급하고 있다; “바위로부터 꿀을 빠는” 것은 기억 속의 지식의 진리들로부터 있는 기쁨을 표시한다.
다윗서에서:
나는 그들에게 밀의 지방을 먹일 것이다, 그리고 나는 바위로부터의 꿀을 가지고 그들을 배부르게 할 것이다 (시. 81:16);
“바위로부터의 꿀로 배부르게 하는” 것은 신앙의 진리들로부터 있는 기쁨으로 채워지는 것을 표시한다.
신명기서에서:
여호와께서는 나를 좋은 토지, 원천들과 계곡으로부터 나가는 깊음들로부터의 물들의 강들의 토지, 산으로부터의 토지쪽으로 데려오신다; 밀과 보리의, 그리고 포도나무의, 그리고 무화과나 무의, 그리고 석류나무의 토지; 올리브 기름과 꿀의 토지 (신. 8:7, 8);
위는 가나안의 토지에 관하여 이다; 내적 의미에서는 천국들에 있는 주님의 왕국에 관하여서이다. “올리브 기름과 꿀의 토지”는 영적 (수준의) 선과 그것의 유쾌함을 표시한다.
그러므로 가나안의 토지는 이렇게 불리워졌다:
젖과 꿀이 흐르는 토지 (민. 13:27; 14:8; 신. 26:9, 15; 27:3; 예. 11:5; 32:22; 겔. 20:6).
위 구절의 내적 의미에서, “가나안의 토지”에 의해서 주님의 왕국이 뜻해진다; “젖이 흐른다”란 천적, 영적 수준의 것들이 풍부함을 표시한다; “꿀과 더불어”란 파생되는 행복함과 기쁨들이 풍부함을 표시한다.
다윗서에서:
여호와의 판단함들이 진리이다, 그것들 모두는 정의이다; 그것은 금 보다, 정금 보다 더 바라는 것들이다, 꿀과 벌집들에서 떨어지는 것 보다 더 달다 (시. 19:9, 10);
“여호와의 판단들”은 신성으로부터 있는 진리(truth Divine)를 표시한다; “꿀과 벌집들에서 떨어지는 것 보다 더 달다”란 선으로부터의 기쁨들과 진리로부터의 유쾌함들을 표시한다. 다시:
당신의 말들은 내 입천장에서 달고, 꿀이 내 입에서 단 것보다 더 달다 (시. 119:103);
위 구절도 앞 구절과 비슷하다.
야곱의 후손이 광야에서 빵을 위하여 가졌던 만나가 이렇게 묘사되어 있다:
만나는 고수풀 씨 같고 희었다; 그리고 그것의 맛은 꿀로 반죽한 케이크(cake) 같았다 (출. 16:31);
만나가 주님으로부터 천국을 통하여 내려오는 신성으로부터 있는 진리(the truth Divine)를 의미했는 바, 결과적으로 이는 신성의 인간 측면에 관한 주님 자신을 의미하는바, 이를 주님 자신이 요. 6:51, 58에서 가르치시고 있다; 신성으로부터 있는 모든 진리는 주님의 신성한 인간으로부터 이다, 그렇다, 이로부터 신성으로부터 있는 모든 진리가 취급된다; 이것이 이러할진대, 만나는 맛을 수단으로 기쁨과 유쾌함에 관련하여 묘사되고 있다. 즉 그것은 “꿀로 반죽한 케이크” 이었다.
세례 요한이 땅 위에 있는 신성한 진리(Divine truth)인 말씀에 관련한 주님을 표현했듯, 엘리야도 그러했는 바, 그러므로 세례 요한은 주님에 앞서 “오기로 되어있는 엘리야”이었다 (말. 3:23; 마. 17:10-12; 막. 9:11-13; 눅. 1:17); 그러므로 그의 의복과 식품은 의미적이었는데, 이에 관해서:
요한은 낙타 털로 만든 옷, 그리고 그의 허리에 가죽띠를 둘렀다; 그의 식사는 메뚜기들과 야생 꿀이었다 (마. 3:4; 막. 1:6)
“낙타 털로 만든 옷”은 진리 측면에 관련한 글자적 의미에서의 말씀(이 의미는 내적 의미를 위한 의복이다)이 자연 평면에 있는 것을 의미한다; 그 이유가 자연 평면의 것이 “털”에 의해, 또한 “낙타”에 의해 의미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식사는 메뚜기들과 꿀이다”란 선 측면에 관련한 글자적 의미에서의 말씀을 의미한다; 이것으로부터의 기쁨이 “야생꿀(들꿀)”에 의해 의미되고 있다.
외적 의미에 관하여 신성으로부터 있는 진리의 기쁨이 아래 에스겔서에서 “꿀”에 의해 묘사되어 있다:
그가 나에게 말했다, 사람의 아들아, 내가 너에게 준 이 두루마리로 네 배를 먹이고 네 창자들을 채워라. 그리고 내가 그것을 먹었을 때, 그것은 달콤함에서 꿀같이 내 입에 있었다 (겔. 3:3).
그리고 계시록에서:
천사가 나에게 말했다, 작은 책을 가져가서 그것을 먹어라; 그리고 그것은 네 배를 쓰게 만들 것이다, 그러나 네 입에서는 꿀 같이 달 것이다. 그래서 나는 작은 책을 천사의 손으로부터 받아서 그것을 먹었다; 그리고 그것은 내 입 안에서 꿀 같이 달았다; 그러나 내가 그것을 먹었을 때, 내 배를 쓰게 만들었다. 그때 그가 나에게 말했다, 너는 다시 많은 민족들과 나라들과 혀들과 왕들에게 다시 예언하라 (계. 10: 9-11).
에스겔서의 “두루마리”, 그리고 계시록의 “작은 책”은 신성으로부터 있는 진리를 표시한다. 외적 형체에서 이것은 기뻐함을 나타낸다는 것이 맛이 “꿀 같이 달다”에 의해 의미되어져 있다; 그 이유가 신성으로부터 있는 진리, 마찬가지로 말씀은 외적 형체로는, 또는 글자 의미로는 기쁨을 준다; 그 이유가 이 의미는 모든 이 제각각의 (입)맛에 맞추어 해석할 수 있게 허용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적 의미에서는 그렇지 않다, 그러므로 이것은 “쓴”맛에 의해 의미되고 있다; 그 이유가 이 의미는 인간의 내면들을 열어 보이기 때문이다. 외적 의미가 기쁨을 주는 이유는 글자 의미 안에 있는 것들은 각자의 기호에 맞게 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그것들은 일반적 진리들만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일반적 진리들은 그것이 세세한 측면, 그리고 낱개적 측면에 의해 품질이 결정되기 이전, 민감해 있기 때문이다. 글자 의미가 기쁨을 주는 또 하나의 이유는 이것이 자연 평면에 속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영적인 것은 그것 안쪽에 숨겨져 있다. 더욱이 인간이 무엇인가를 자기 안으로 받아들이기 위하여는 일단 당사자에게 기쁨을 주는 것, 또는 당사자의 입맛을 사로 잡는 것, 매우 달콤한 것이 아니면 안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그렇지 않으면 뱃속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입가에, 목구멍 근처에,) 문턱 바로 앞에서 단념되고 말기 때문이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그분의 제자들과 더불어 먹은 “벌집과 구운 물고기” 역시 말씀의 외적 의미를 의미했다 (“물고기”는 진리 측면의 외적 의미이고 “벌집”은 이것의 유쾌함 측면의 외적 의미이다); 즉:
예수께서 말하셨다, 너희는 여기서 먹을 어떤 것을 가지고 있느냐? 그들이 그분에게 구운 물고기와 벌집 조각을 드렸다, 그리고 그분은 그것들을 가져왔고, 그들 앞에서 잡수셨다 (눅. 24:41-43).
위와 같은 사항들이 의미되어져 있기 때문에,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말하셨다:
이것들은 아직 내가 너희와 함께 있는 동안 내가 너희에게 말한 말들이다, 즉 모세의 율법과 예언서들, 시편들에서 나에 관해 쓰여진 모든 것들은 충만(성취)되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눅. 24:44).
위 구절에서 제자들이 물고기와 벌집을 가진 것이 마치 우연인 듯 여겨져 물고기와 벌집에는 아무 의미도 없는 듯 지나칠는지 모른다; 허나 이것도 섭리 속에 있었던 일이었음을 생각한다면 생각이 달라질 것이다; 이 구절 뿐만이 아니라 다른 구절 역시, 말씀에서 발생하는 아주 사소한 일이라 여겨지는 글귀에 이르기까지 이다 (단지 우리가 모두를 파악 못해서 일 뿐이다 역자주). 이런 사항들에도 의미가 있기에 주님 자신에 관련한 모든 말씀에 관하여 성취되어야 한다고 말해두신 것이다. 그럼에도 글자 의미에서 볼 경우, 구약 성경에서의 주님에 관련된 사항은 적다; 그러나 내적 의미에서는 모두가 그분을 염두해 쓰여진 말씀이고, 그렇기에 그 말씀들이 거룩한 것이다. 또한 “모세의 율법, 예언서, 시편에서 주님에 관련해 쓰여진 것은 반드시 성취되어야 한다”는 주님의 말하심에서도 뜻해지고 있다.
이런 모두로부터 “꿀”에 의해 선과 진리로부터 있는 기쁨, 또는 선과 진리에 애착함으로부터 있는 기쁨이 의미된다는 것, 그리고 특별하게는 외적 기쁨, 고로 자연 평면의 외면에서의 기쁨이 의미된다. 이 기쁨은 세상으로부터 감각들을 통하여 있게 되는 자연 평면에서의 이런저런 기쁨이기에, 그러므로 그것 안에는 세상을 사랑함으로부터의 많은 것들을 포함하기에, 식사 제물에서 꿀의 사용은 금지되어졌다. 즉:
너희가 여호와께 가져올 어떤 식사 제물도 누룩으로 만들지 말 것이다; 그 이유가 여호와께 불로 태우는 것으로부터 거기에는 누룩도, 어떤 꿀도 있지 않기 때문이다 (레. 2:11);
위에서 “꿀”은 외적 기쁨을 표시한다, 그 이유는 세상을 사랑함에 가담하는 것을 그것 안에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차원에서 꿀 역시 누룩과 닮았는 바, 그 이유로 금하여진 것이다. (“누룩,” “누룩을 넣음”에 관하여는 2342항을 보라.)

밀랍과 소합향. 이는 자연 평면의 내면으로부터의 선의 진리들을 의미한다. 이는 “밀랍”, 여기서의 밀랍은 향기나는 밀랍(aromatic wax) 인데, 선의 진리 (아래에서 설명한다)를 의미한다로부터; 그리고 “소합향(stacte)” 역시 선으로부터의 진리를 의미한다로부터 알게 된다. 자연 평면의 내면에 있는 것들, 즉 밀립과 소합향 같은 것은 수지나 꿀 보다 더 순수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두 번째 장소에서 언급되고 있다; 이렇게 두 번째 장소라고 말한 이유는 세부 사항들은 (등차의) 질서에 일치시켜 말씀에서 열거되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밀랍(wax)”은 흔히 말하는 평범한 밀랍이 아니고, 소합향(storax, 때죽나무) 같은 향기나는 밀랍이다. 이 밀랍은 원어에서 사용되는 말(투)에 의해 의미되어지고 있는데, 다. 이로부터 왜 이 향기나는 밀랍이 선의 진리를 의미하는지가 분명해진다; 이런저런 향신료(양념, 향품, spice) 역시 이와 같은 맥락에서 의미되어지고 있다; 달콤한 냄새를 발산하는 향품들은 내적 의미에서 선으로부터 있는 진리들을 의미한다. 이는 선으로부터의 진리들이 천국에서는 상큼하게 지각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천사들의 지각들이 냄새들로 바뀔 때, 주님의 흡족해 하심(Lord’s good pleasure)에 관련하여 자주 발생하는 바, 이때 그들은 향품이나 꽃들로부터 냄새를 맡듯이 한다. 이것은 왜 유향(乳香, frankincense) 과 향(incense)이 감사하고 있는 냄새의 물질들로 합성되었는지에 대하여, 그리고 이것들이 거룩하게 사용됨을 위하여 채택된 이유이다; 그리고 또한 왜 향기나는 것들을 기름부음을 위한 기름에 섞었는지에 대한 이유이기도 하다. 이런 사항들이 천국에서 지각되는 것들에 그것의 원인을 두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이들은, 자기들의 (신에게) 감사함을 향품을 사용하는 제물 바침인 외적 예배를 통해 나타내라고 명령받았기에 이를 이행할 뿐이다. 이럴 경우, 그 예배에는 천국으로부터의 어떤 것도, 또는 거룩한 어떤 것도 있을 리 만무하다, 결과적으로 예배의 이런저런 주제들 안에 신성의 어떤 것도 포함하지 않게 된다.

테레빈 나무의 견과들과 아몬드들. 이는 이들 진리들에 상응하는 생활의 선들을 의미한다. 이는 “테레빈나무의 견과들”이 (아래에서 설명한다) “수지”에 의해 의미된 자연 평면의 외면의 선으로부터의 진리들에 상응하는 생활의 선들이다로부터; 그리고 “아몬드”들의 의미가 “향기나는 밀랍과 수합향”에 의해 의미되는 자연 평면의 내면의 선으로부터의 진리들에 상응하는 생활의 선들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런 저런 종류의 “견과(nut)”들이 이런 의미를 가지는 이유는 그것들이 열매들이기 때문, 그리고 말씀에서 “열매(fruit)”들이 일(work)들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유용한 나무들의 열매들은 선한 일들을, 또는 생활의 선을 의미한다. 그 이유가 사용(use)함이라는 측면에서 생활의 선들은 선한 일들이기 때문이다. “테레빈나무의 견과 (terebinth nut)들”이 자연 평면의 외면의 선으로부터의 진리들에 상응하는 생활의 선을 의미하는 이유는 그것들이 덜 고상한 부류에 속해 있기 때문이다. 또한 외면의 것들은 이런저런 덜 고상한 대상물에 의해 의미된다; 그 이유인즉, 외면의 것들 자체는 내면의 것들에 비해 보다 더 조잡하기(덜 순수하기) 때문이다; 또한 그것들은 아주 많은 내면의 것들로 구성되는 일반적인 것들이기 때문이다.
“아몬드(almond)들”이 자연 평면의 내면으로부터의 선의 진리들에 상응하는 생활의 선들을 의미하는 이유는 이 아몬드 나무는 보다 더 고상한 나무 종류에 속하기 때문이다. 이 나무 자체는 영적 의미에서 선으로부터 있는 내면의 진리를 지각함을, 그것의 꽃(blossom)은 선으로부터 있는 진리를, 그리고 그것의 “열매”는 거기서 파생되는 생활의 선을 의미한다. 이런 의미에서 말해지는 구절이다:
여호와의 말씀이 왔는데, 말하신다, 예레미야야, 너는 무엇을 보느냐? 그래서 나는 말했다, 저는 아몬드 나무의 막대를 보고 있습니다. 그때 여호와께서 나에게 말하셨다, 너는 잘 보았었다; 그 이유가 나는 그것을 행하도록 내 말을 잠에서 깨우기 때문이다 (예. 1:11, 12);
“막대”는 힘을 표시한다; “아몬드 나무(살구나무)”란 내면의 진리를 지각함을 표시한다; 여기서 여호와를 서술하는 바, 그것 위에서 깨어나심을 표시한다; “말”은 진리를 표시한다.
“레위 지파를 위한 아론의 막대로부터 싹이 돋은 아몬드(나무)들” 역시 선행의 선들 또는 생활의 선들이 의미된다, 즉:
내일이 되자, 모세는 만남의 천막 안으로 들어겄다, 보라 레위 지파를 위한 아론의 막대가 움이 돋고 순이 나고 꽃이 피어서 아몬드가 열렸다 (민. 17:8).
이것은 이 지파가 성직 직분을 위해 선택되어졌다는 표시였다; 그 이유가 “레위 지파”에 의해 선행이 의미되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영적 (평면의) 교회의 본질이다.

은을 두 배로 하여 네 손에 들고 가라. 이는 진리가 능력들 안에 받아졌음을 의미한다. 이는 “은”의 의미가 진리이다로부터; 그리고 “두 배”의 의미가 연속됨에서 있게 되는 다시 있음, 즉 그들 위에 무료로 수여된 진리이다로부터; 그리고 “손”의 의미가 능력들(할 수 있는 힘, ability)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능력들에서 있는 진리란 그것을 받음을 위한 수용력에서 있다를 뜻한다, 고로 수용력들에 따라서를 뜻한다. 그러나 진리를 받음을 위한 수용력들, 또는 능력들은 전적으로 선들에 따라서 있다, 그 이유는 주님께서 선쪽으로 그것들을 인접해놓고 있으시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그분이 선과 더불어 흘러드실 때, 그분은 수용력과도 더불어 흘러드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능력들에서 받은 진리는 선들에 따라서 이었음을 뜻한다. 진리를 받음을 위한 수용력들이 선에 따라 있다는 것은 다른 삶에서의 많은 경험으로부터 분명해진다. 거기서 선 안에 있는 이들이 수용력을 가지는 것은 진리를 지각함을 위해서 뿐만 아니라 그것을 받음을 위해서 이고, 그럼에도 그들이 지니는 선의 양과 질에 따라서이다. 그러나 악 안에 있는 이들은 진리를 받음을 위한 수용력이 없는 다른 손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쾌락(pleasure)으로부터, 결과적으로 욕구(desire)로부터 온다. 선 안에 이들도 쾌락을 가지기는 하나, 이것은 진리를 수단으로 선을 완전해지게 함에 있는 쾌락이다; 그 이유는 선이 진리들로부터 선의 품질을 가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진리들을 바라고 있다. 그러나 악 안에 있는 이들은 악 안에서 쾌락을 가지고, 거짓들을 수단으로 악을 확증함에 있는다; 그러므로 그들은 거짓들을 바라고 있다; 그들이 거짓들을 바라기 때문에 그들은 진리들에 반대하여 있다. 이런 이유로 그들은 진리들을 받음을 위한 수용력은 없다, 그 이유가 그들은 자기들 귀에 진리가 들리자 마자 거절하거나 뒤집거나 해버리기 때문이다. 이 외에, 건전한 마음 속에 있는 이들은 진리들을 받음을 위한 수용력을 가지고 있다; 즉, 악쪽으로 돌아서는 이들은 이 수용력을 소멸되게 하고, 선쪽으로 돌아서는 이들은 이 수용력을 드높인다.

그리고 너희 자루 아구에 되돌려 놓였던 은을 너희 손에 들고 가라. 이는 자연 평면의 외면에서 무료로 주어진 진리를 수단으로 그들은 힘이 닿는 한 자신들을 복종하게 해야 할 것을 의미한다. 이는 “되돌려 놓여진 은”의 의미가 무료로 주어진 진리이다로부터; “너희 자루 아구에”란 자연 평면의 외면의 문지방에서이다로부터; 그리고 “손에”의 의미가 능력에서이다로부터, 고로 힘이 닿는 한이다로부터 알려진다. 이 진리를 수단으로 자신들을 복종하게 함이 “그것을 도로 가지고 가라”에 의해 의미되어 있다; 그 이유가 영계에서 주님으로부터 무료로 받아왔던 것으로부터 그분에게 진리를 되돌리려 가져감은 그것을 수단으로 자신의 자아를 복종되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이 자신들을 복종하게 하는 방식(태도, manner)는 요셉의 집을 다스리는 사람과의 대화에서 분명해진다 (43:18-24).

혹 그것이 실수였다면… 이는 그가 싫어하지 않도록을 의미한다. 이는 실수의 의미가 반대하는 것, 싫어하는 것이다로부터, 그 이유가 여기서 뜻해진 실수란 마치 그가 은을 지불하는 것을 깜박 잊었기에 모두가 자기 자루에 이것을 도로 가져왔다는 식에서의 실수이기 때문이다; 이런 실수로 그가 이들을 반대된 상태에 있거나 싫어할 수 있을는지 모른다고 그들은 믿었다; 그 이유가 자기들이 요셉의 집으로 데려가지는 것을 두고 몹시 두려워했는 바, 말하기를, “처음에 우리의 자루에 되돌아 왔던 은을 빌미로, 우리 위에서 뒹굴고 우리 위에 자신을 내던지고, 나귀는 빼앗고, 우리를 종으로 삼으려 한다”이기 때문이다 (18절). 더욱이 “죄”는 분열과 거꾸로됨을 의미한다; 또한 그것 안에 죄지음이 있다면, 그러나 약한 죄지음이다면, “실수” 수준인바, 여기서 “그가 싫어하지 않도록”이 의미된다고 말한 것이다.

그리고 너희 형제를 손에 가지라. 이는 이런 방법에서 그들은 신앙의 선을 가지게 될 것을 의미한다. 이는 여기서 그들이 손에 넣기로 하고 있었던 “형제”인 시므온의 표현함이 의지에 있는 신앙이다로부터, 고로 신앙의 선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 이유는 신앙의 진리가 의지쪽으로 건너갈 때, 신앙의 선이 되어지기 때문; 그 이유가 이때 진리는 인간의 생명으로 건너가기 때문, 이러면 진리는 그저 알고 있는 진리가 아니라, 행하여지는 어떤 것이 되어있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그것의 본질이 바뀌어 실제적이 된다. 그러므로 더 이상 진리라고 불리우지 않고 선이라 불리운다.

그리고 일어나라, 그리고 그 사람에게 되돌아 가라. 이는 영적 진리로부터의 생활을 의미한다. 이는 “일어나다(arise)”의 의미가 내면 속의 것들로 승강함, 결과적으로 영적인 것들쪽으로 승강함이다로부터(5614항); 그리고 “사람”이라 불리운 요셉의 표현함이 영적 진리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리고 하느님 솨다이. 이는 역경 이후의 위로받음을 의미한다. 이는 “솨다이(Shaddai)”의 의미가 시험, 그리고 시험 이후 위로됨이다로부터; 그러므로 여기서는 그들이 이집트에서 당한 고난들 이후 위로됨이다. 이 의미가 분명한 것은 이어지는 말로부터, 즉 “사람 앞에서 너희에게 자비들을 베푸신다”가 이어지기 때문이기도 하다. “솨다이”가 시험, 그리고 그 이후 위로됨을 의미하는 이유는 고대인들이 하느님으로부터 있는 여러 가지 것들에 따라서, 한분 유일한 하느님을 여러 이름들을 수단으로 나타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이 시험이 그분으로부터 있다고 믿었을 때, 이때 그들은 하느님을 “솨다이”라고 불렀다, 그렇다 이 이름이 또 다른 하느님을 뜻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시험 측면에 관련하여서만의 유일한 하느님이신 셈이다. 그러나 고대 교회가 기울기를 시작했을 때, 그들은 한분 유일한 하느님을 위한 이름들 만큼 그 이상으로 많은 신들을 예배하기를 시작했다, 그리고 그 자체에 아주 더 많은 신들을 추가해갔다. 이것의 실제는 아주 우세해져, 집집마다 나름대로 그들 고유의 신을 가졌다. 하여 가문들 끼리의 구별도 신들에 따라 구별할 정도에 이르렀다.
아브라함을 출현시킨 데라의 가문은 자기들의 신으로 솨다이를 예배했다. 솨다이를 숭배함은 아브라함 뿐만이 아니라 가나안의 토지 출신인 이삭, 야곱도 그러했다. 솨다이를 숭배함이 그들에게 허용되어졌는데, 그 이유는 그들이 그들 고유의 광적 신앙(religiosity)을 무리하여 비틀어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누구도 자신이 거룩한 것으로 여기는 것으로부터 억지로 비틀어 다른 쪽으로 끌고감을 당해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스스로 생각하고 곱씹어 선택함이 아닌 끌고가는 식의 무리수를 둔 믿음은 노예적 믿음이기 때문이다 역자주.) 고대인들이 여호와 자신, 또는 주님을 “솨다이”로 이해했을 때, 이 분은 그들이 시험받았을 때 시험에 받음에 맞추어 디자인되어졌다(깔맞춤되었다); 그러므로 여호와 또는 주님은 아브라함과 더불어 이 이름 “솨다이”를 되찾게 되었다; 이는 창. 17:1, 그리고 창. 35:11로부터 분명해진다. 이런 이유는 시험 뿐만이 아니라 위로됨 또한 “솨다이”에 의해 디자인 되었다; 그 이유는 위로됨이 모든 영적 시험들 이후 이어지기 때문이다. 이에 대하여 아는 것은 다른 삶에서의 경험을 통해 나에게도 수여되었다; 즉 누군가가 악령으로부터 주입당함으로, 악을 저지르게 부추겨지고, 거짓들로 설득당하는 어려운 일을 겪었을 때, 악령들이 물러간 후, 그는 천사들에 의해 받아지고, 그의 천성에 적합한 기쁨을 수단으로 위로함의 상태에 있었다.

그 사람 앞에서 너에게 자비들을 주시리라. 이는 영적 진리가 너에게 은혜가 넘쳐나는 것을 받게 할 것이다를 의미한다. 이는 “자비들을 주다”의 의미가 은혜가 넘쳐나는 것을 받게 됨이다로부터; 그리고 “사람”이라 불리울 때의 요셉의 표현함이 영적 진리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리고 너에게 너의 다른 형제를 보내기를. 이는 그것이 신앙의 선을 주기를 의미한다. 이는 여기서 “다른 형제”인 시므온의 표현함이 신앙의 선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보내다”가 주는 것이다를 표시하는 이유는 이 단어가 인물을 두고, 인물을 수단으로 의미한 어떤 것에 관련하여 있는 “주다”로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베냐민. 이는 내면의 진리도를 의미한다. 이는 베냐민의 표현함이 내면의 진리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 내가 빼앗겨 왔던 바 같이, 나는 빼앗길 것이다. 이는 이러한 것들이 행해지기 전, 교회는 그것의 진리들을 박탈당할 것이다를 의미한다. 이는 이것을 자신에게 말하는 자인 “이스라엘”의 표현함이 교회이다로부터; 그리고 “빼앗기다”의 의미가 교회의 진리들을 박탈 당해질 것이다 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런 것들이 행해지지 않으면 교회의 진리가 박탈당한 상태에 놓인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 이유가 교회에 시므온에 의해 표현된 신앙의 선이 없다면, 그리고 베냐민에 의해 표현되는 중매자인 내면의 진리가 없으면 교회는 어떤 진리도 가지지 못하기 때문, 즉 심정으로부터 가 아닌 입술로만의 교리를 가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15-17절. 그리고 사람들은 이 선물을 챙겼다, 그리고 그들은 자기들 손에 두 배의 은을 가졌다, 그리고 베냐민도 데리고, 일어나, 이집트로 내려가서, 요셉 앞에 섰다. 16 그리고 요셉은 그들과 함께 있는 베냐민을 보았다, 그리고 그는 자기 집을 다스리는 자에게 말했다, 사람들을 집으로 데려오라, 그리고 짐승을 잡고 준비하라. 이 사람들이 정오에 나와 함께 먹을 것이다. 17 그래서 이 사람은 요셉이 말한대로 행동했다, 그리고 이 사람은 요셉의 집으로 사람들을 데려왔다.

그리고 사람들은 이 선물을 챙겼다. 이는 진리들이 호의(favor)를 획득하는 수단을 가졌음을 의미한다. 이는 “사람들”의 의미가 진리들이다로부터; 그리고 “선물”의 의미가 왕이나 성직자를 알현하고저 바치는 것인 바, 호의를 획득하는 어떤 것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리고 그들은 자기들 손에 두 배의 은을 지녔다. 이는 능력 안에 받은 진리를 의미한다. 이는 앞에서 같은 말이 등장하는 곳에서 살폈다.

그리고 베냐민. 이는 그리고 중매자도 함께를 의미한다. 이는 베냐민의 표현함이 중매자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리고 일어나 이집트로 내려갔다. 이는 기억 속의 지식들의 내면의 것들로부터 그것들을 수단으로 획득하기 위해 생활로 승강함을 의미한다. 이는 “일어나다”가 영적 삶 속의 것들쪽으로 승강함이다로부터; 그리고 “내려가다”의 의미가 그것들을 수단으로 획득되도록 생활쪽으로 이다로부터; 그 이유가 여기서 “내려가다”는 앞 8절에서, “소년을 저와 함께 보내십시오, 그러면 우리는 일어나 가고, 그리고 우리는 살 것이고, 그리고 죽지 않을 것입니다”에서 뜻해진 것과 같다. 이를 수단으로 등차별로 있는 영적 삶(생명)이 의미되어져 있다; 그리고 “이집트”의 의미가 기억 속의 지식들이다로부터, 여기서는 기억 속의 지식들의 내면의 것들이다, 그 이유는 요셉에 의해 표현되는 영적 평면의 천적 부분이 거기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곧이어 말해진 바, “요셉 앞에 섰다” 이다. 기억 속의 지식들의 내면의 것들은 자연적 마음에 있는 영적인 것들이다, 그리고 영적인 것들은 자연적 마음에 있는 기억 속의 지식들이 천국의 빛에 의해 계발될 때 거기에 있게 된다, 또는 인간이 말씀으로부터 있는 교리적인 것들에서 신앙을 가질 때, 기억 속의 지식들을 계발되어진다, 그리고 그가 선행의 선 안에 있을 때 그는 이 신앙을 가진다; 그 이유가 이때 진리들과 기억 속의 지식들은 불꽃을 수단으로 하듯 선행을 수단으로 계발되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그들은 자기들의 영적인 빛을 가진다. 이상 설명으로 기억 속의 지식들로부터의 내면의 것들이 뜻하는 것을 알는지 모른다.

그리고 요셉 앞에 섰다. 이는 거기에 영적 평면의 천적 부분이 현존함을 의미한다. 이는 누군가의 “앞에 서다”의 의미가 현존함이다로부터; 그리고 요셉의 표현함이 영적 평면의 천적 부분이다로부터 (이는 앞에서 많이 설명했다) 알게 된다. 영적 평면의 천적 부분이 자연 평면의 내, 외적 측면 모두에서 현존한다는 것이 요셉을 이집트 전역의 주인으로 만들어짐에 의해 표현되어졌다. 또한 이것은 기억 속의 지식들의 내면의 것들에서 영적 평면의 천적 부분의 현존함에 의해 뜻해져 있기도 하다; 그 이유가 이 지식들은 자연 평면에 있기 때문이다. 야곱의 아들들에 의해 표현된 진리들은 자연 평면에 있는 진리들이다.

그리고 요셉은 그들과 함께 있는 베냐민을 보았다. 이는 영적 평면의 천적 부분이 진리들과 함께 있는 영적 중매자를 지각함을 의미한다. 이는 “보다”의 의미가 이해하다와 지각하다이다로부터; 그리고 여기서 “베냐민과 함께 있는 그들”인 야곱의 열 아들들의 표현함이 자연 평면에 있는 진리들이다로부터; 그리고 베냐민의 표현함이 중매자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것이 여기서 영적 중매자라 불리우는 이유는 야곱의 열 아들들에 의해 표현되는 진리들이 “요셉”인 신성으로부터의 진리와 지금 결합되어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결합은 영적인 중매자 없이는 결과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중매자가 지각되어졌을 때, 즉각 이어지는 말은, “요셉은 자기 집을 다스리는 자에게 말했다, 사람들을 집으로 데려오라, 그리고 (짐승을) 죽이고, (식사) 준비를 하라; 사람들은 정오에 나와 함께 먹을 것이다” 이었고, 이 말을 수단으로 그들은 중개자와 더불어 있기 때문에 받아들여지고 결합되기로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자연 평면에 비교하여 영적 평면이 무엇인지에 대하여 몇 마다 말을 보태고 지나가야 할 것 같다; 그 이유는 기독교 세계에 있는 대부분의 이들의 경우, 그들에게 이 단어가 들릴 때 무슨 뜻인지를 명확히 붙잡고 있지 않아 주저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그들 스스로 영적인 것은 (눈에 보이지 않으니까) 아무도 모른다고 말한다. 인간과 더불은 영적 평면의 본질 측면에서 영적인 것은 선과 진리를 위하여 선과 진리에 애착함이다
이는 자아를 위하여 선과 진리에 애착함이 아니다; 또한 공정(just)과 공평(fair)인 것을 위하여 공정과 공평인 것에 애착함이다. 하여 당사자 자신이 이 두 가지에 애착함으로부터 기쁨과 유쾌해짐을, 더 나아가 행복함과 복됨을 느끼고 있다면, 이것은 그 사람 안에 있는 영적인 것(또는 영적 평면)에 해당한다. 이런 기쁨, 유쾌함, 행복함, 복됨은 자연 평면으로부터 오지 않고, 영계로부터, 또는 천국으로부터, 즉 천국을 통하여 주님으로부터 오고 있다. 이것이 영적인 것이고, 이것이 인간 안에서 통치할 때, 이것은 당사자가 생각하고 뜻하고 행동하는 모든 것에 영향을 미치고, 마치 옷에 물감을 들이듯 한다, 그리하여 당사자의 의지로부터의 생각들과 행동들로 영적 평면의 것에 가담하게 한다, 마지막으로 이것들이 당사자 안에서 영적인 것이 되어지고, 그가 자연계로부터부터 영계로 건너갈 때, 이것들은 당사자의 영적 인간(영적 소유물)이 되어 있는다. 한마디로, 인간 당사자가 선행과 신앙에 애착함, 즉 선과 진리에 애착함, 그리고 이로부터 파생되는 기쁨과 유쾌함, 행복함과 복됨을 내향적으로 느껴졌던 것이 당사자로 진정한 기독인을 만들고, 그의 영적 인간이다.
기독교에 있는 많은 이들이 영적인 것이 무엇인지에 무지한 이유는 그들이 교회의 본질을 신앙으로부터 만들뿐 선행으로부터 만들지 않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신앙에 관심을 둔 매우 적은 이들만이 선행에 관하여 생각해보고, 그것이 무엇인지를 대충 헤아리고 있다; 그러므로 그들에게는 선행에 관한 지식도 없게 되고, 선행 속에 있는 것에 애착함에 대한 지각도 없다; 그리고 선행에 애착하지 않는 자는 영적인 것이 무엇인지 아는 것이 가능할 수 없다. 더욱이 교회의 마지막 때에 속하여 거의 어떤 선행도 존재하지 않는 요즈음의 경우, 이는 더욱 진정한 사실이다. 일반적 의미(넓은 의미)에서 “영적”인 것(영적 평면)은 선과 진리 모두에 애착함을 뜻한다, 그러므로 천국은 영적 세계라고 불리우고, 말씀의 내적 의미는 영적 의미라고 불리운다; 그러나 특별하게 말할 경우, 선에 애착함에 속하는 것은 영적 평면 중에서 천적 부분(천적 수준)이라 불리우고, 진리애 애착함은 영적 평면 중에서 영적 부분(영적 수준)이라 불리운다. (이 책을 번역함에서 매우 혼동을 주기도 하는 단어가 영적, spiritual이라는 단어이다. 아마 이 책을 제외한 일반 종교 서적의 경우에서 사용하는 “영적”이다는 것, 흔히 항간에서, 교인들 끼리에서 오가는 말 속의 “영적”이라는 단어는 대충 자연계에 비교되는 영계만을 염두해서 나온 말이지 않나 생각된다. 그러나 이 책에서는 영적이라는 단어가 두 가지로 사용된다. 그 중 하나가 천국들을 분류할 경우 두 번째 천국을 영적 천국이라 말하기 때문이다. 또한 두 왕국들을 말할 때도 그 중 하나가 영적 왕국이라 말하기 때문이다. 이 점을 염두하고 이 책을 읽는 것이 생각의 혼동을 줄여주지 않을 까 사료된다 역자주.)

그래서 그는 그의 집을 다스리는 그에게 말했다. 외적 교회 속에 있는 것쪽으로를 의미한다. 이는 집을 다스리는 자의 표현함이 집 안에 있는 자가 내적 교회일 경우, 외적 교회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리고 내적 의미에서는 인물이 아닌 어떤 것으로 간주된다, 그러므로 “집을 다스리는 자”에 의해 외적 교회 속에 있는 것이 의미된다.

사람들을 집으로 데려와라. 이는 자연적 마음에 있는 진리들이 저쪽으로 받아들여짐을 의미한다. 이는 야곱의 아들들의 표현함이 자연 평면에 있는 교회 속의 진리들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들이 거기서 받아들여짐이 “사람들을 집으로 데려옴”에 의미되어 있다.

그리고 (짐승을) 죽이고 준비하라. 이는 자연 평면의 외면으로부터의 선들을 통하여를 의미한다. 이는 “죽이다”에는 죽이는 대상도 포함되는 바, 즉 수소, 거세한 수소, 숫염소, 또는 여러 가축들이 당연히 포함되는 바, 자연 평면의 선들이다로부터; 여기서는 자연 평면의 외면의 선들이다, 그 이유는 이것들을 통하여 그들이 처음 결합되도록 받아지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그가(요셉의 집 관리 책임자) “요셉의 집으로 사람들을 데려옴”은 영적 평면의 천적 부분으로부터 있는 선 안으로 처음 받아짐을 의미한다. “거세한 어린 수소”나 “수소” 역시 자연 평면의 선을 의미하는 바, 그들에 관련되어 있어지는 모든 것이 이 선을 의미하고 있다. 그 이유가 이것은 다른 것도 포함하기 때문이다.

이 사람들이 정오에 나와 함께 먹을 것이다. 이는 중매자가 함께 할 때 그들은 결합될 것을 의미한다. 이는 “함께 먹다”의 의미가 교통하다, 결합하다, 자기 것이 되게 하다 이다로부터 분명해진다. 그리고 그들이 “베냐민”인 영적 중매자와 함께 있었기 때문에, “정오에”라고 말해진다; 그 이유가 “정오(noon)”는 빛의 상태이기 때문, 고로 중매자를 통하여 오는 영적 상태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사람은 요셉이 말한대로 행동했다. 이는 그것을 가져다놓음을 의미한다. 이는 설명이 필요 없다.

그리고 이 사람은 사람들을 요셉의 집으로 데려왔다. 이는 영적 평면의 천적 부분으로부터 있는 선쪽으로 처음 받아들여짐을 의미한다. 이는 “데려오다”가 받아들여짐, 소개됨(introduction) 이다로부터; “야곱의 아들들”의 의미가 자연 평면에 있는 교회의 진리들이다로부터; “집”의 의미가 선이다로부터, 그러므로 교회 또한 의미한다; 그 이유가 교회는 선으로부터 교회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요셉의 표현함이 영적 평면의 천적 부분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상 살핀 바로부터, “사람이 요셉의 집으로 사람들을 데려옴”에 의해 자연 평면에 있는 진리들이 영적 평면의 천적 부분으로부터 있는 선 안으로 받아들여짐이 의미된다. 여기서 이 받아짐이 첫 번째 받아짐이다고 말한 이유는 이제 요셉과 더불어 먹었는데도 그를 알아보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이를 수단으로 일반적 결합이 의미되어지고, 이 결합은 첫 번째 받아들여짐이다; 그 이유가 이때 신성으로부터의 진리가 일반적으로는 흘러드나 이를 식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흘러든 진리에 주목하였을 때, 그때 두 번째 결합이 있다, 이것이 요셉이 자신을 그의 형제들에게 명백히 보여주는 것에서 의미되는데 45장에서 살필 것이다.

18-23절. 그리고 사람들은 그들이 요셉의 집으로 데려와졌기 때문에 두려워 졌다. 그래서 그들은 말했다, 처음에 우리의 자루에 되돌아 왔던 은을 빌미로 우리는 데려와졌다; 우리 위에서 뒹굴고 우리 위에 자신을 내던지고, 나귀는 빼앗고, 우리를 종으로 삼으려 한다. 19 그래서 그들은 요셉의 집을 다스리는 사람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그리고 그들은 집의 문간에서 그에게 이야기를 했다, 20 그리고 말했다, 나에게, 내 주여, 우리가 전번에 양식을 사러 내려 왔었습니다. 21 한참 지나 우리가 여관에 당도해서 우리의 자루를 열었는데, 보라 각자의 자루 아구에 각자의 은이 그 무게 그대로 있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것을 손에 들고 되 가져 왔습니다. 22 그리고 우리는 양식을 사려고 다른 은도 가져왔습니다. 우리는 누가 우리의 자루에 은을 놓았는지 알지 못합니다. 23 그리고 그는 말했다, 너희는 편안하라, 두려워 말라, 너희의 하느님, 그리고 너희의 아버지의 하느님께서 너희의 자루 안에 감추인 선물을 너희에게 주셨다. 너의 은은 나에게 왔다. 그리고 그는 시므온을 그들에게 데려왔다.

사람들은…두려워 했다. 이는 물러섬을 의미한다. 이는 “두려워함”이 여기서는 물러서다, 즉 내적인 것과 결합함으로부터 물러섬을 의미한다. 두려움은 여러 원인들로부터 야기된다. 예를 들면, 생명의 위험이나 이득의 손실, 명예의 실추, 명성의 추락 같은 것을 예상함으로부터, 또한 어떤 노예 상태에 처함, 고로 자유함을 잃음, 그리고 이와 더불어 삶의 기쁨을 잃음에 대한 두려움도 있다. 이것이 이제 뒤이어 취급되는 주제이다; 그 이유가 그들은 내적 부분에 인접하는 것, 그로 인해 자신의 것을 잃지 않을까 하는 것, 그리고 이와 더불어 자신들의 자유함도, 자유함과 더불어 누리는 삶의 기쁨도 잃을까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사람들이 두려워 했다”에 의해 그들이 인접되지 않도록 물러섬이 의미된 이유이다. 이쯤해서 한 마디 거들고 지나가야 할 것이 있다. 즉 외적 또는 자연적 인간이 내적 또는 영적 인간과 결합하는 경우에 대한 좀 더 발전적인 것에 관하여서이다. 외적 또는 자연적 인간은 삶의 최 초기 시절을 통치한다, 그리고 이 시절에는 내적, 또는 영적 인간이 있는지를 전혀 모른다. 그러므로 인간이 개혁되려 할 때, 그리고 자연적, 또는 외적으로만 있음으로부터 영적, 또는 내적 인간이 되어가기를 시작할 때, 처음에 그의 자연적 인간은 반역한다, 그 이유는 자연적 인간은 복종되어야 한다고 가르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자연적 인간에 속한 것들을 확증하는 것들과 더불어 자연 평면에 있는 모든 현세에의 욕망은 뿌리뽑혀야 한다고 가르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자연적 인간 자체만이 남겨질 때 자연적 인간이 생각하는 것은 이런 방식으로는 자연 평면은 필시 멸해지고 말리라는 것이다. 그 이유가 자연적 인간은 자연적인 것이 모든 것이다는 것밖에 더 아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영적 인간 안에 측량할 수 없고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들이 있다는 것에 완전 무지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렇게 자연적 인간이 생각할 때, 물러서고, 영적 인간에 종속되려 하지 않는다. 이것이 여기서 그들의 “두려움”에 의해 뜻해진 것이다.

그들이 요셉의 집으로 데려와졌기 때문에. 이는 자연 평면에 속한 진리들이 내적인 것에 근접하여지고 종속되기 때문이다를 의미한다. 이는 “요셉의 집으로 데려와짐”의 의미가 내적 부분에 인접되고 종속되는 것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 이유가 요셉을 수단으로 내적 부분이 표현되었기 때문인데, 그는 또한 신성으로부터 진리, 또는 영적 평면의 천적 부분을 표현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집”에 의해서는 인간의 내적 부분 뿐만 아니라 외적 부분까지 의미하나, 여기서는 내적 부분만을 의미하는데, 그 이유는 “요셉의 집”이라 불리웠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적 부분쪽으로) “데려와짐”에 의해 인접되는 것, 그러므로 종속되는 것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런 이유는 자연 평면이 내적 부분에 인접되어질 때, 이때 종속됨이 있어지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이전에 자연적 인간에 속했던 명령들이 영적 인간의 것이 되기 때문이다; 이 명령에 관하여는 주님의 신성한 자비로부터 이어지는 페이지에서 말해질 것이다.
이쯤에서 내적 의미에 관하여서는 몇 마디 보태고 지나가야 할 것 같다. 말씀의 내적 의미는 특별하게 다른 삶에 있는 이들을 위해 있는 의미이다. 거기 있는 이들이 말씀을 읽는 인간과 함께 있을 때, 그들은 말씀을 내적 의미에 따라서 지각하고 외적 의미에 따라서는 아니다; 그 이유가 그들은 인간의 단어들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 뿐만 아니라 단어들의 의미도 모른다, 그리고 이것은 인간의 자연적 생각에 따라서가 아니고 영적인 그들의 생각에 따라서이다. 이 영적 의미 안으로 인간과 더불어 있는 자연적 의미는 즉시 전달된다; 마치 어떤 이가 또 다른 이의 언어를 다른 언어인 자신의 것으로 바꾸고, 즉시 그것을 행동하는 것과 유사하다. 이렇게 인간의 생각인 자연적 의미도 영적 의미로 바뀐다; 그 이유가 영적 언어, 말은 천사에게 적합하고, 자연적 언어, 말은 인간에게 적합하기 때문이다. 이쪽 언어가 저쪽 언어로 갑작스럽게 바뀔 수 있는 이유는 자연계와 영계 사이에는 모두 각각에서 상응함이 있기 때문이다.
말씀의 내적 의미가 주로 영계에 있는 이들을 위한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므로 여기서 살피는 내적 의미 또한 그들을 위한 말씀이고, 이로부터 그들은 유쾌해지고 기뻐한다. 이 의미가 더 내면적일수록 더욱 세상적이고 세상의 것으로부터 유쾌해 하고 기뻐하는 인간들의 납득력으로부터서는 더욱 멀어진다; 이럴 경우, 이들은 내적 의미에 속하는 영적 사항들을 경멸하고 몹시 진저리를 낸다. 아마 여러분 자신 안에서도 이렇게 테스트해볼 수 있다; 즉 이어져 오고 있는 구절들의 내적 의미에 포함된 이런저런 사항들이 비록 함께 읽는 천사에게는 최고로 큰 기쁨을 취하고 있지만 정작 자신에게는 쓸모가 별로인 듯, 읽는 것이 지루한 듯, 내 입맛을 돋구지 않는 듯, 등등인지를 헤아려 생각해보는 것이다. 어쨌든 이렇게 되짚어 생각함으로 인간의 기쁨들과 천사의 기쁨들의 차이가 무엇인지를 조금이나마 분명해질지 모른다. 또한 어떤 것들에 천사들은 지혜라는 말을 붙이고, 인간은 어떤 것을 두고 지혜라고 하는지; 즉 인간이 쓸모 없어 냉냉하고 혐오하기까지 하는 것들에 천사들은 지혜라고 생각하는 한편, 천사들이 아무것도 아니라고 관심 밖에 놓은 것, 급기야 거절하고 금하는 것들을 인간들은 추켜들고 지혜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들은 말했다, 처음에 우리의 자루에 되돌아 왔던 은을 빌미로 우리가 끌려와졌다. 이는 자연 평면의 외면에 있는 진리는 무료로 주어지도록 나타나기 때문에 그들은 종속되어야 함을 의미한다. 이는 “되돌아 왔던 은”의 의미가 무료로 수여된 진리이다로부터; 그리고 “자루”의 의미가 자연 평면의 외면의 문지방이다로부터; “끌려와짐(bring)”의 의미가 인접되어지는 것, 또는 종속되어지는 것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여기서의 경우는 이렇다: 자연 평면의 외면에 있는 진리들이 무료로 수여된 것임을 지각했을 때, 그러므로 자신들을 내적 부분에 결합하도록 부추켜졌을 때, 그것 때문에 내적 부분에 종속되어질 때. 앞서 말한대로 그들(자연적 인간)은 자기들의 자유를 박탈당했다고, 그럼으로 삶의 모든 기쁨들을 박탈당했다고 말한다. 이렇게 말하는 경우가 발생하는 이유는, 기억 속의 지식들의 진리들이 무료로 수여되었다고 지각했고, 자연적 마음의 외면이든, 내면이든 거기에 있는 이것들이 있다는 것조차 인간에 알려진 바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전혀 알지 못하고 있는 이유는 그가 이런 지각함 안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그는 자기에게 무료로 수여된 것을 도무지 알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이것들이 자연 평면의 외면에, 또는 내면에 무엇이 저장되었는지를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그가 이런 지각을 가지지 못하는 이유는, 통상적으로 세상적이고 지상의 것들을 두고 자기에게 값진 것으로 여기고, 천적 수준, 영적 수준의 것들은 폐물 수준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런 자는 주님으로부터 천국을 통하여 있는 어떤 유입(influx)도 전혀 믿지 않는다, 고로 이런 자에게는 천국의 어떤 것도 전혀 주어지지 않는다; 그럼에도 그가 기억 속의 지식들로부터 합리적으로 추론하는 모든 진리, 그래서 자신 고유의 능력으로부터 있다라고 상상하는 모든 진리가 그에게 주어지고 있다. 그렇지만 그는 이 진리들이 자연 평면의 외면에, 또는 내면에 놓였는지를 지각할 수 없는데, 그 이유는 자연 평면이 두 겹(twofold)으로 있다는 것, 즉 외적 감각들쪽으로 가까이 당겨진 바깥쪽, 그리고 외적 감각들로부터 물러서서 합리성쪽으로 방향을 잡고 있는 안쪽의 것이 있다는 것에 무지하기 때문이다.
인간이 이렇게든 저렇게든 아는 것이 전무하기에, 그러므로 그는 이런 것들에 관하여 지각도 가지지 못한다; 그 이유가 어떤 것을 지각하기 위하여서는 그 어떤 것에 대한 지식이 반드시 먼저 와있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천사들의 사회는 자기들에게 거저 주어진 것, 게다가 그것이 어디 있는지까지도 잘 알고 지각하고 있다. 아래 나의 경험을 간단히 말해보겠다: 선 안에, 그러므로 능력 안에 있는 어떤 영이 천사의 시회 안으로 오면, 그와 동시에 그는 이전에 가져본 적도 없었던 것임에도, 그 사회가 가지는 모든 기억 속의 지식과 총명 안으로도 와있는다; 이리하여 이 영으로서는 자기가 이전에 가지고 있었기에 지금 알고 있는 것이 아니냐고 추론할 도리밖에 없다. 이때 그가 곰곰이 되짚어 보건대, 이런 총명은 주님으로부터 이 천사의 사회를 통하여 자신에게 무료로 수여되어져 있었음을 알게 된다; 또한 그는 천사의 사회로부터 그것이 어디 있는지를, 자연 평면의 외면에, 내면에 있는지를 알고 있다; 그 이유가 거기서는 어떤 천사의 사회는 자연 평면의 외면에 있고, 어떤 사회는 내면에 있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말하는 자연 평면이란 인간이 가지는 자연계가 아니라 영계에 있는 자연 평면이다. 즉 영적 인간에 결합되어 있고 종속된 자연 평면이다는 말이다. [4] 이상으로부터 분명한 바, 내적 의미에서 관련되는 것들은 다른 삶에서 실제로 거행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그들은 진리들이 자기들에게 무료로 주어졌다는 것, 이 진리들이 어디에 저장되었는지까지도 알고 있다는 말이다. 물론 이에 대해 요즈음의 인간은 전혀 아는 바 없다. 그러나 고대 시대 때에 교회 속에 있었던 그들은 위의 사항들을 그들의 기억 속의 지식들을 수단으로, 그리고 자기들의 교리물들을 수단으로 알았고 가르쳤다. 그들은 내면의 인간들이었다; 그러나 이런 시대 이래 인간들은 계속적으로 더욱 바깥쪽 방향으로, 즉 외적으로 되어갔다; 하여 오늘날 그들은 육체 안에, 즉 가장 바깥쪽에 있다. 그들은 영적인 것이 무엇인지, 내적인 것이 무엇인지 도통 모르는 것, 아예 그런 것들의 존재를 믿지도 않는 바, 이것은 가장 바깥쪽에 도착했다는 것에 대한 표시이다. 그렇다, 육체쪽으로 가장 바깥쪽으로 그들은 내면의 것들로부터 가버렸다, 하여 그들은 사후 삶이 있다는 것, 천국과 지옥이 있다는 것을 믿지 않는다. 그렇다, 내면의 것들로부터 퇴조함으로 그들은 가장 바깥쪽 경계에 이르렀다, 하여 영적인 것들에 우둔해졌는 바, 인간의 생명도 짐승의 것과 다를 바 없다, 그러므로 인간도 짐승이 죽듯 죽어진다고 말한다. 더욱 이상한 것은, 학식자들이 단순한 자들 보다 더욱 이렇다는 것이다, 하여 이와 다르게 영적인 것을 추구하려는 이들을 두고 천치 바보라고 간주해버린다.

우리 위에서 뒹굴고 우리 위에 자신을 내던지려고. 이는 이 사건 때문에 그들은 절대적 힘 아래로 환원되어야 함을 의미한다. 이는 “뒹굴다”의 의미가 괘씸한 것으로 그에게 표출되는 것이다로부터; 그리고 누군가의 “위에 자신을 내던진다”의 의미가 힘 아래로 자기를 환원되게 함이다로부터, 여기서는 절대적 힘 아래로 이다. 그 이유가 “우리를 종으로 취하고, 우리의 나귀를 가져간다”는 말이 이어졌기 때문이다. 여기서의 경우는 이렇다: 자연적 인간이 영적 인간과 결합함이 있기 전, 또는 외적 부분이 내적 부분과 결합하기 전, 자연적 인간으로 하여금, 그의 자아 사랑과 세상 사랑으로부터 일어나는 현세에의 욕망을 제거하기를 바라는지를, 하여 영적 인간 또는 내적 인간에게 복종할 것인지를 생각해보도록 하는 것이다. 자연적 인간이 영적 인간과 떨어진 상태에서 이것을 생각할 경우, 자연적 인간은 거절한다; 그 이유는 자연적 인간은 자기의 현세에의 욕망을 사랑하기 때문, 그는 자신과 세상을 사랑하고 있어서이다. 그러므로 그는 불안해진다, 그리고 만일 이것들이 제거된다면, 자기에게 남아 있는 생명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 라고 상상한다, 그 이유는 그는 자연적 인간, 또는 외적 인간에 모든 것을 귀속시켜두었기 때문이다; 또는 이후에 자기는 자신으로부터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그리고 자기가 생각하고, 뜻하고, 행동하는 모든 것은 천국을 통하여 흘러들어야 할 것이다고, 하여 자기는 더 이상 자신의 주인이 되지 못할 것이라고 상상한다. 자연적 인간이 이런 상태에 자신을 남겨둘 때, 그는 물러서고 저항한다. 그러나 얼마의 빛이 주님으로부터 천국을 통하여 그의 자연 평면 안으로 흘러들 때, 그는 다르게(다른 각도에서) 생각한다, 즉 영적 인간이 자기의 최상위에 있는 것이 더 낫다는 것, 그 이유는 이럴 경우, 그는 선한 것을 생각하고 뜻할 수 있기 때문, 하여 천국 안으로 입장할 수 있기 때문, 만일 자연적 인간이 통치한다면 이러지 않을 것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모든 천국들의 모든 천사들이 이런 특성 속에 있다는 것, 결과적으로 그들이야말로 말로 다할 수 없는 기쁨(joy)을 향유한다는 것을 곰곰이 생각할 때, 그는 자연적 인간과 다툰다, 결국은 영적 인간에 종속되기를 바란다. 이런 상태에서 인간은 거듭나짐이 있다는 것, 그리하여 그가 어느 방향으로든지 방향을 트는 자유를 가진다는 것; 그가 이런 자유함에 있는 만큼 그의 거듭나짐이 있다는 것도 알게 된다. 이것이 이 구절의 내적 의미로 취급되고 있다.

그리고 우리의 노새를 빼앗고 우리를 종으로 삼으려 한다. 이는 자연 평면에 있는 것은 무엇이든 아무것도 아니다에 이를 때까지를 의미한다. 이는 이런 말을 자신들에게 하고 있는 야곱의 열 아들들의 표현함이 자연 평면에 있는 진리들이다로부터; “종”의 의미가 아주 경미한 중요성에 속한 것들, 여기서는 아무것도 아니다에 속하는 것들이다로부터 (아래에서 설명한다); 그리고 “나귀”의 의미가 기억 속의 지식들이 자연 평면에 있는 것들이다로부터, 여기서 자연 평면의 외적 부분에 있는 것들이다, 그 이유는 야곱의 열 아들들에 의미된 진리들이 자연 평면의 내적 부분에 있기 때문이다.
자연 평면의 양쪽 부분들에 있는 것들이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말한 것에 주목하면, 이렇다: 인간이 영적 수준으로 되기 위하여서는 그의 자연 평면은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되어 있지 않으면 안된다, 다시 말해 자연 평면 자체로부터서는 할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있어서는 안된다는 말이다. 그 이유는 자연 평면이 자체로부터 할 수 있는 만큼 영적 평면은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유아때로부터 흡수되어 있는 것은, 자연 평면은 자아와 세상에 속한 탐욕들밖에 더 이상은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선행에 반대된다. 이 악들이 주님으로부터 내적 인간을 통하여 선의 유입됨을 방해한다; 그 이유가 흘러든 것은 무엇이든 자연 평면에서 악으로 바뀌기 때문이다. 또한 자연 평면은 유입이 종결되는 평면(plane)이다. 그러므로 자연 평면 (즉 자연 평면을 형성한 악과 거짓)이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지 않는 한, 선이 주님으로부터 천국을 통하여 흐르는 것은 가능할 수 없다. 즉 악과 거짓이 차있을 경우 천국의 것이 거처할 장소는 없기에 사라져버리고 만다; 그 이유는 악과 거짓과 동거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자연적인 것이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전락하지 않는 한, 내적 부분은 닫혀져 있다. 이것 역시 교회에도 이렇게 알려져 있다, 즉 옛 사람을 벗어야만 새 사람을 입는다.
거듭남이란 자연 평면이 종속되고, 영적 평면이 지배하는 것이다, 그리고 자연 평면이 상응함에 있는 때 그것은 종속된다, 동시에 영적 평면이 지배를 한다. 자연 평면이 상응함쪽으로 환원되면, 그것은 더 이상 반작용을 하지 않는다, 그러나 명령대로 행동할 뿐이다, 그리고 영적 평면에 순종한다. 즉 육체가 의지의 명령에 행동하는 것과 비등할 것이다, 또는 연설함이 연설자의 얼굴의 표현과 함께 생각의 유입에 일치하는 경우도 비슷할 것이다. (사기꾼의 말, 얼굴 표정은 그렇지 않을지 모른다. 양심이 없으므로 뻔뻔하게, 대담하게 성경 지식 등등을 지껄이기 때문일 것인 바 주위를 요한다고 생각된다 역자 주.) 이로부터 분명한 바, 인간이 영적 수준으로 상승하기 위하여 자연 평면은 뜻함 측면서 무엇이든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되어져야 한다.
우리가 알아야 하는 것, 옛 자연 평면이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되어야 하는 이유가 그것은 악들과 거짓들로부터 만들어져 왔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이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되어질 때, 인간은 새로운 자연 평면을 선물받게 된다, 이것은 우리는 자연 평면의 영적 부분(spiritual natural, 자연 평면으로부터 있는 영적 부분)이라 부른다 – 이렇게 말한 이유는 영적 평면이 자연 평면을 통하여 행동한다는 사실로부터의 영적 부분이어서 이다, 하여 자연 평면을 통하여 자체를 명명백백하게 한다, 마치 원인 결과를 통하여 자체를 들어내는 것과 같다. 원인이 결과의 모든 것이다는 세상에 널리 알려진 지식이다. 그러므로 생각하고, 뜻하고, 결과를 생산한다는 측면에서 새로운 자연 평면은 영적 평면의 표현밖에 더 이상은 아니다. 이 같은 수준에 와질 때, 인간은 주님으로부터 선을 받아들인다; 그리고 그가 선을 받아들일 때 그는 진리들도 선물받는다; 그리고 그가 진리들을 선물받을 때, 그는 총명과 지혜에서 완전해진다; 그가 총명과 지혜에서 완전해질 때, 그는 영원한 행복과 더불어 복됨을 누린다.

그리고 그들은 요셉의 집을 다스리는 사람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이는 교회의 교리물을 의미한다. 이는 “요셉의 집을 다스리는 사람”의 의미함이 교회의 외적 부분 속에 있는 것이다로부터; 고로 교리이다로부터. 그 이유가 이것이 교회 속에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사람”에 의해 진리가, 고로 교리가 의미된다, 그리고 “집”은 교회이다; 그리고 “요셉”이 내적 부분이기에, “요셉의 집”은 내적 교회이다. 말씀으로부터의 교리가 섬김 차원에서 이 집을 다스리고 있다.

그리고 그들이 집의 문에서 그에게 이야기를 했다. 이는 받아들임에 관하여 그들과 상의함을 의미한다. 이는 “요셉의 집을 다스리는 사람과 이야기를 함”의 의미가 그들과 상의함, 즉 교리물들과 상담함이다로부터; 그리고 “집의 문”의 의미가 받아들여짐이다로부터, 여기서는 자연적, 또는 외적 인간으로부터 영적, 또는 내적 인간쪽으로 받아들여짐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것이 의미되기에, 원어에서는 “집의 문에서”라고 말하지 않고 “집의 문”이라고 말해지기까지 한다.

그리고 나에게, 나의 주여. 이는 증언함을 의미한다. 이는 언어의 형체 자체가 누군가가 증언함이다로부터 분명해진다; 즉 그들이 각자의 자루 아구에서 발견된 은에 관하여 진실을 말하려 하는 바, 이는 증언함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처음에 양식을 사러 내려왔었는데. 이는 진리들을 위하여 선을 포획하고 싶어함을 의미한다. 이는 “내려오다”의 의미가 의향 또는 의도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 이유가 내려가는 자, 또는 자신을 어딘가로 향하게 하는 자는 의향으로부터 그렇게 하는 것, 여기서는 진리들을 위하여 선을 포획하는 것인데, 이것이 “양식을 사다”에 의미되어 있다. 그리고 “사다”가 포획하고 자기 것이 되게 함을 의미한다, 그리고 “양식”에 의해 진리의 선, 여기서는 자신들에 관련하여 말하는 야곱의 아들들에 의해 표현되는 진리들을 위한 선이다.

그리고 한참 지나서 우리가 여관에 당도해서 우리의 자루를 열었을 때. 이는 자연 평면의 외면을 성찰함을 의미한다. 이는 “여관”의 의미가 일반적 측면에서의 자연 평면의 외면이다로부터; 그리고 “열다”의 의미가 성찰함(introspection)이다로부터, 그 이유가 여는 (open, 풀어보는) 자는 안을 쳐다보기 위함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루”의 의미가 특별한 측면에서는 자연 평면의 외면이다.

보라 각자의 자루 아구에 각자의 은이. 이는 진리들이 마치 무료인 것처럼 주어져 왔었음이 명백하게 보여졌었다를 의미한다. 이는 “각자의 은이 각자의 자루 안에”의 의미가 무료로 주어진 진리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 말은 “각자의 자루의 입에 각자의 은이”라는 말과 거의 비슷하나, 이런 차이는 있다; 즉 위 말에 의해서는 무료로 주어져 왔었던 진리들, 그리고 자연 평면의 외면의 문턱에 저장되어 있었던 진리들이 의미된다는 것이다; 그 이유가 “자루의 입”에 의해 자연 평면의 외면의 문턱이 의미되기 때문이다. 마치 무료로 주어진 것처럼이 여기서 의미되는 이유는 그들은 내적 부분과 기꺼이 결합하고 자신들은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되어져야 하는지에 의심을 갖고 있는 상태에 있기 때문이다; 누군가가 의심의 상태에 있을 때, 그는 확증한 진리들이라도 의심함을 느낄 수밖에 없다.

은이 그 무게 그대로. 이는 각자의 상태에 따른 진리들을 의미한다. 이는 “은”의 의미가 진리이다로부터; 그리고 “무게”의 의미가 선 측면에 관련된 것의 상태이다로부터; 고로 “각자의 상태에 따른 진리들”은 각자가 받을 수 있는 선에 따라서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무게나 칫수들은 말씀의 많은 페이지들에서 언급된다; 그럼에도 그것들은 무게나 칫수를 의미하지 않는다; 그러나 무게(weigh)들은 선 측면에 관련된 것의 상태들을, 칫수(measure)들은 진리 측면에 관련한 것의 상태들을 의미한다. 무거움(heaviness)과 넓힘(확장, extension)도 그렇다; 자연계에서의 무거움은 영계에서는 선에 상응한다, 그리고 넓힘은 진리에 상응한다. 그 이유인즉, 상응의 근원지인 천국에는 무거움이나 넓힘 같은 공간이 없기 때문이다. 실로 어떤 것이 영들 사이에서 무겁다, 확장되거나가 있기는 하다; 허나 이런 것들은 더 높은 천국에 있는 선과 진리의 상태들로부터 발생하는 나타남들이다.
“은”이 진리를 의미한다는 것은 고대 시대 때부터 이미 알려져 있다. 그러므로 고대인들은 세상의 처음부터 마지막까지를 몇 시기들로, 즉 황금(golden), 은(siver), 동(copper), 그리고 철(iron) 시대로 구별했는데, 특히 이 철에는 진흙(clay) 시기를 추가했다. 하여 순진(innocence)과 흠없음(wholeness)이었을 때, 그리고 모든 이가 선으로부터 선인 것을 행했고, 정의로부터 올바른 것을 실행했었을 때의 시기를 금 시대로 분류해 통칭 그렇게 불렀다; 그 다음 순진은 더 이상 있지는 않았으나, 아직 어떤 종류의 흠없음이 있는 것, 즉 선으로부터 선인 것을 행함은 없었지만 진리로부터 진리인 것을 실행함은 있던 시기를 은 시대로 분류해 통칭 그렇게 불렀다; 그리고 그들은 이 보다 더 수준 낮아지는 시기를 동과 철 시대라고 이름 붙여 통칭 그렇게 불렀다.
그들이 이렇게 이런 시대들을 비교적 측면에서 고안해내어 부른 것은 아니고, 상응으로부터 이다; 그 이유가 고대인들은 은이 진리와 상응함을, 금이 선과 상응함을 알았는데, 이 앎은 천사들과 영들과 교통함을 수단으로 해서 였다. 그 이유가 선이 보다 더 높은 천국에서 이야기하여 질 때, 이들 아래에 있는 첫째, 또는 가장 낮은 천국에 있는 이들 사이에서는 금의 나타남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진리가 이야기하여질 때, 은의 나타남이 있다; 하여 그들이 거주하는 방의 벽들은 금과 은으로 번쩍인다, 뿐만 아니라 분위기 자체도 그러하다. 금 식탁, 금 등잔대, 많은 다른 것 역시 최말단, 또는 첫 번째 천국의 천사들에게 나타난다; 한편 진리로부터 진리 안에 이들에게는 이런저런 대상물이 은으로 나타난다. 오늘날 고대인들이 황금, 은 시대로 부른 이유가 그것들의 상응함으로부터 이었다는 것을 아는 자가 누가 있을까? 이런 사항을 모르는 자, 더욱이 이것이 맞다, 틀리다하고 논쟁을 반복함에서 쾌락을 끌어내고 그것을 지혜인 듯 빙둘러대는 자는 상응함에 속하는 셀수 없이 많은 것들의 지극히 작은 사항 하나도 알지 못한다.

그래서 우리는 각자 자기 손에 그것을 되가지고 왔습니다. 이는 무료로 주어져 왔었던 것을 가능한 한 복종 상태에 있게 함을 의미한다. 이는 “되가져오다”의 의미가 여기서는 복종 상태에 있는다 이다로부터; “우리의 손”에 의미가 가능한 한 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무료로 주어져왔었다는 것이 “그들이 되가져온 자루의 입에 있는 은”에 의해 의미되어 있다.

그리고 우리는 양식을 살 다른 은도 우리의 손에 들고 왔습니다. 이는 또 다른 근원으로부터 온 진리를 수단으로 선을 포획하고 싶어함을 의미한다. 이는 “은”의 의미함이 진리이다로부터; 그리고 “은”이 진리를 의미하는 바, “다른 은”은 다른 진리를, 결과적으로 또 다른 근원으로부터의 진리를 (진리를 무료로 수여하시는 주님으로부터가 아니면 진짜 진리는 없기에, 마찬가지로 진리 자체는 또 다른 근원은 없다); “가져오다”의 의미가 포획하고 싶다 이다로부터, 즉 그들이 사기를 원한 낟알(corn)에 의해 의미된 진리의 선을 포획하고 싶다 이다로부터 알려진다; 말씀의 글자 의미의 역사적 측면이 함축하는 바에서의 경우, “다른 은”은 요셉으로부터 양식을 사기 위해 가지고 온 것일 뿐, 다른 어떤 근원으로부터 은이 왔다는 것을 함축하고 있지는 않다. 그러나 내적 의미는 글자의 역사적 의미에 안주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그 의미에 관심이 없기 때문, 그러나 취급되는 주제에 거처를 둔다; 그 주제인즉, 만일 그들이 자연 평면의 외면에 있는 어떤 진리가 자기들에게 무료로 주어졌기 때문에 종으로 종속된다면, 그들은 어떤 다른 근원으로부터의 진리를 수단으로 선을 포획하리라는 것이다. 이 의미는 내적 의미에 있는 시리즈로부터도 그러하다, 즉 “우리는 누가 우리의 자루에 은을 놓았는지를 알지 못합니다”라고 말해져서 이다. 이를 수단으로 의미된 것은, 그들은 믿지 않을 것이리라는 것, 그 이유는 자기들은 자연 평면의 외면에 놓인 진리의 근원이 무엇인지를 모르기 때문이다는 것이다.
이와 비슷한 경우가 진리들을 수단으로 선이 개시된 영들과 더불어, 특히 모든 선과 진리는 주님으로부터서만 있다는 이 하나만을 수단으로 선이 개시된 영들과 더불어 있는 다른 삶의 경우이다. 자기들이 생각하고 뜻하는 모든 것이 자기들 안으로 흘러든다는 것을 그들이 지각할 때, 고로 그들은 자신들로부터서는 생각하고 뜻하는 힘이 없다를 지각할 때, 그들은 자기들이 할 수 있는 최대한도에서 저항한다, 그러면서 믿는 것은, 만일 이것이 그러하다면, 자기들은 자신들로부터의 생명을 가지지 못할 것이다고, 그렇기 때문에 모든 기쁨은 멸해질 것이라는 것이다, 그 이유는 그들은 이것을 자신의 것 안에 귀속시켜두었기 때문이다. 이 외에도 만일 그들이 자신으로부터 선을 행할 수 없고 진리를 믿을 수 없다면, 자기들은 자기들의 손을 놓아두고, 자신으로부터 생각하고 행하는 어떤 것도 하지 않으면서 유입만을 기다려야 한다고 상상한다. 그들이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허용되어 있다, 또한 그들이 이 근원으로부터서 선과 진리를 받는 것을 바라지 않고, 자기들 자신의 것을 잃지 않게 하는 어떤 다른 근원으로부터 선과 진리를 받기를 바래겠다는 결말에 이르는 정도까지도 허용된다. 때로는 그들이 그것을 발견하는 장소를 묻는 것도 그들에게 주어져 있다. 그럼에도 이후 그들이 그것을 어떤 곳에서도 발견 못할 때, 거듭나지는 이들은 되돌아 오고, 자기들의 뜻함과 생각함에서 주님에 의해 인도되어지기를 선택하도록 하는 자유함 안에 놓여진다. 이때 그들에게 알려지는 정보는, 그들은 천국적인 자신을 받을 것이다는 것, 이는 천사들이 가진 것과 같다는 것, 이 자신과 더불어 영원히 있는 행복함과 복됨을 누린다는 것이다.
천국적인 자신에 주목해보자: 이것은 주님에 의해 주어진 새 의지로부터 온다, 그리고 이것은 이런 사실에서 다르다; 즉 그것을 가진 이들은 자신들이 행하는 모두와 각각에서, 자신들이 배우거나 가르치는 모두와 각각에서 자신들을 중요시 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웃, 공적인 것, 교회, 주님의 왕국, 그럼으로 주님 자신을 중요시한다. 이것은 삶의 목적들이 바뀐 상태이다. 보다 더 낮은 것들, 즉 자아와 세상을 주시하는 목적들이 제거되어져 있다, 그리고 보다 더 수준 높은 것들을 응시하는 목적들로 대체되어 있다. 삶의 목적들은 인간의 생명 자체 외 더 다른 것은 아니다, 그 이유는 그것이 그의 의지와 사랑들 자체이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인간이 사랑하는 것을 그는 뜻하고 그의 목적으로 가지기 때문이다. 천국적인 자신을 선물 받은 자는 안식과 평화 안에도 있다; 그 이유가 그는 주님을 신뢰하고 있기 때문, 그리하여 악의 어떤 것도 자기에게 도달하지 못한다는 것, 현세에의 욕망이 그를 침범해 물들게 하지 못한다고 굳게 믿는다. 천국적인 자신 안에 있는 자는 자유함 자체 안에 있다; 그 이유는 주님에 의해 인도되는 것이 자유함인데, 그 이유는 그가 선 안에서, 선을 수단으로, 선쪽으로 인도되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분명한 바, 그들은 행복함과 복됨 안에 있다는 것이다, 그 이유가 이런 복됨들에 훼방질을 할 어떤 것도 있지 않기 때문, 자아를 사랑함에 속하는 것도, 즉 적개심, 증오함, 복수심 같은 것도 없다; 세상을 사랑함에 속하는 것도, 즉 사기치는 것, 공포, 불안 같은 것도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누가 우리의 자루에 우리의 은을 놓았는지 모릅니다. 이는 자연 평면의 외면에 있는 진리의 근원에 대한 무지함으로부터 오는 비 신앙을 의미한다. 이는 “알지 못하고 있다”의 의미가 영적 의미에서는 믿지 못함, 또는 비 신앙이다로부터; “누가 놓다”의 의미가 무슨 근원으로부터 무지함이 있다 이다로부터; “은”의 의미가 진리이다로부터; 그리고 “자루”의 의미가 자연 평면의 외면이다로부터 알려진다.

그리고 그는 말했다,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걱정하지 말라. 이는 잘 되고 있으니 자포자기 말라를 의미한다. 이는 “평화”의 의미가 잘 되고 있다 이다로부터 (이는 아래에서 살핀다); 그리고 “걱정하지 말라”의 의미는 자포자기하지 말라 이다로부터 알려진다. 그 이유가 내적 의미에서 상태의 변화가 취급되기 때문, 즉 그들은 자신의 힘을 수단으로 더 이상 진리를 포획하는 것, 이 진리를 통하여 선을 포획하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님으로부터의 것들이 그들에게 표출되어져 있다. 그리고 그들이 자기들의 자신을 잃지 않을까, 하여 자유함도, 결과적으로 모든 생명의 기쁨까지 잃지 않을까하는 걱정을 상상했었던 터이기에 그들은 자포자기함의 상태에 놓여지는 찰나까지 임박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걱정하지 말라”는 여기서 자포자기하지 말라가 의미된다; 그 이유가 걱정은 여러 원인들로부터 발생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다양한 것들을 의미한다.
“평화”가 잘되고 있다를 표시하는 이유는 평화는 가장 안쪽 수준인 것, 그러므로 평화는 천국에 있는 모두와 각각을 보편적으로 통치하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천국에 있는 평화는 지상의 봄철, 새벽 같아서, 이것은 감각의 바뀜들(오각으로 감지하는 바뀜들)에 의해 우리에게 감동이나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니라(즉 개별적으로 각자에게 꼭맞는 바뀜들로 감동을 갖게 하는 것이 아니라) 지각되는 모든 것 안으로 흘러드는 보편적인 유쾌함을 수단으로 우리에게 감동과 감명을 주고, 이 유쾌함(pleasantness)으로 지각 자체 뿐 아니라 몇몇의 대상물까지를 채운다. 오늘날에 거의 누구도 말씀에서 언급되는 “평화”, 뽀족히 말하면 축복문인, “여호와께서는 그분의 얼굴들을 너희 위에 들어올리시고, 너희에게 평화를 주신다” (민. 6:26)는 구절, 그리고 다른 구절에서의 평화의 의미가 무엇인지 모른다. 거의 모든 이가 평화에 대해 아는 바란, 이는 적들로부터 안전한 것, 집이나 동료 간에 고요한 것, (혹은 돈을 많이 벌어 돈 걱정에서 해제되는 것 역자주) 등등이다. 이런 평화가 이 구절에서 뜻해지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을 엄청 능가하는 평화이다. 이 평화는 아무에게도 수여되어질 수 없고, 다만 그가 주님에 의하여 인도되고, 주님 안에서 있고, 즉 모든 것의 모두로 계신 천국 안에 있는 자에게만 수여될 수 있다; 그 이유가 천국의 평화는 자아 사랑과 세상 사랑으로부터 올라오는 탐욕들이 사라져야 흘러들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이 탐욕들이 인간의 내면들을 악에 물들게 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결국은 당사자로 쉼을 만드는 것을 불안에 존재하게, 그리고 평화는 성가심 안에 있도록 한다. 그 이유는 그의 기쁨이 악들 안에 있기 때문이다. 인간이 이런 것 안에 있는 한, 그는 평화가 무엇인지를 알 도리가 없다; 그렇다 그가 이런 평화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믿는 한 그럴 것이다; 만일 누군가가 자아 사랑과 세상 사랑으로부터의 기쁨들이 거두어질 때, 그것은 지각될 수 있다고 말한다면, 그는 픽 웃어넘긴다, 그 이유는 그는 평화가 악의 기쁨들에 존재하는 것으로 만들기 때문이다, 이것은 평화에 정반대 된다.
이와 같은 것이 평화의 본성이기 때문에, 즉 모든 행복함과 복됨의 가장 깊은 쪽의 본성이기 때문에, 그러므로 그것들 모두를 통치하는 보편성이기 때문에, 고대인들은 상대방에게 잘 되고 있다를 뜻할 때 상용하는 말로, “너희에게 평화가 있으라”하고 말하고, 그가 “잘되느냐?”를 물을 때 “평화를 가졌는지” 여부를 물었다. 위와 관련된 것은 이미 말한 적이 있다: 즉 천국에 있는 평화는 지상의 봄철과 새벽 같다는 것; 주님은 최고 의미에서 평화이시다는 것, 표현 의미에서 그분의 왕국이시다는 것, 주님의 신성은 가장 안쪽으로부터의 선에 감동을 준다는 것: 모든 불안은 악과 거짓으로부터 이다는 것, 그러나 평화는 선과 진리로부터 이다는 것이다.

너의 하느님, 그리고 너희의 아버지의 하느님. 이는 주님의 신성한 인간을 의미한다. 이는 “하느님(God)”, 또는 “여호와”가 말씀에서 언급되는 경우 이는 주님이시고, 그 밖의 것은 뜻하지 않는다는 사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리고 “너의 하느님과 너의 아버지의 하느님”이라고 말해질 경우, 즉 이스라엘과 야곱과 그의 아들들의 하느님이라고 말해질 경우, 이것은 주님의 신성한 인간을 뜻한다, 그리고 실로 신성의 자연 평면에 관하여를 뜻한다; 그 이유가 이스라엘은 자연 평면의 내면 부분에 관련되는 주님을, 야곱은 외면 부분에 관련되는 주님을, 그의 아들들은 이 자연 평면에 있는 진리들을 뜻하기 때문이다.
주님이 말씀에서 “하느님”과 “여호와”에 의해 뜻해졌다는 것을 유태 교회는 알지 못했고, 오늘날의 기독인의 교회도 이것을 모르고 있다. 기독 교회가 이것을 알지 못하는 이유는 신성을 세 인물들로 구분해 놓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홍수 이후 있었던 고대 교회, 홍수 이전 이었던 태고 교회 모두는 “여호와”와 “하느님”을 주님 외에 다른 분으로는 이해하지 않았다, 그리고 실로 주님을 그분의 신성한 인간 측면에 관련하여 알고 있었다. 또한 그들은 주님 안에 있는 신성 자체에 관하여 알았다, 즉 주님이 그분의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이 신성임을 알고 있었다는 말이다; 그렇지만 그들은 주님 안에 있는 신성 자체에 관하여 생각할 수 없었다, 그러나 신성한 인간에 관하여서만 생각할 수 있었다, 결과적으로 어떤 다른 신성과 결합될 수 없었다; 그 이유가 결합은 이해력 속에 있는 생각과 의지 속에 있는 애착을 통하여, 고로 신앙을 통하여와 사랑을 통하여 결과되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만일 우리가 신성 자체를 생각한다면, 마치 생각은 끝없는 우주 안으로 추락되듯 할 것이다, 고로 사라져버린다, 이로부터 결합은 없다. 그러나 신성 자체가 신성한 인간으로서 생각할 경우, 이는 위 같은 경우가 발생하지 않는다. 고대인들이 알았던 것은, 자기들이 신성과 결합되어 있지 않으면 구원은 되어질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고대 교회들이 예배한 대상은 신성의 인간 (측면)이었다; 그리고 여호와 자신도 그분 자신을 이 고대인들에게 신성의 인간 안에서 명백히 나타내셨다. 신성의 인간은 천국들에 있는 신성 자체이다; 그 이유가 천국은 하나의 사람을 구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사람이 웅대한 사람(Grand Man)이라 불리운다. 이 사람은 각 장들의 끝에서 보여지고 있다. 천국에 있는 이 신성은 신성 자체밖에 더 아니나, 천국에서 신성한 사람으로서 계신다. 이 사람은 주님께서 입으셨고, 신성으로 만드셨고, 영원으로부터 하나되어왔었던 그대로 신성 자체에 하나되게 하신 그 사람이다; 그 이유가 한 분 만이 영원으로부터 계셨기 때문이다. 그분이 이를 행하신 이유는 이와 달리해서는 인류가 구원되어질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천국을 통하여, 고로 거기 있는 신성한 인간을 통하여 인간의 마음들 안으로 흘러드시는 것에서 신성 자체가 할 수 있는 것이 더 이상 충분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간 구원을 위한 부족함을 메우시기 위해) 신성 자체는 세상에서 입으신 인간을 수단으로 실제적으로 자체에 신성의 인간을 하나되게 하심을 뜻하셨다. 앞의 신성의 인간(영원으로부터의 신성의 인간)과 뒤의 신성의 인간(세상에서 입으신 신성의 인간) (모두가) 주님이시다.

너희의 자루에 감추인 선물을 너에게 주셨다. 이는 그것은 그들의 것으로부터의 어떤 신중함 없이 그분으로부터 있었다를 의미한다. 이는 “감추인 선물”의 의미가 인간이 선물을 받은 줄을 앎도 없는 가운데 주님에 의해 주어진 진리와 선이다로부터: 그리고 “그들의 자루, 또는 가방에 되돌려진 은”의 의미가 그들의 것으로부터의 능력 없이 있다 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로부터 분명한 바, “너희의 자루에 감추인 선물을 주셨다”에 의해 그분으로부터, 즉 주님의 신성한 인간으로부터 그들의 것의 어떤 능력 없이 자연 평면에 있는 진리와 선이다가 의미된다; 그리고 이것이 그들의 능력 없이 있기 때문에, 이것은 그들의 신중함 없이 있다. 단어 “신중함(prudence)”이 사용되었는데, 그 이유는 신중함이 섭리와 상응하기 때문, 그리고 신성한 섭리 속에 있는 것은 인간의 신중함 속에는 있지 않다.

너희의 은은 나에게 왔다. 이는 진리가 그들에 의해 포획된 것처럼으로 보여짐을 의미한다. 이는 “은”의 의미가 진리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들의 “은이 그에게 옴”은 그들이 샀다는 것, 고로 그들 자신이 포획했다를 뜻한다; 그 이유가 “사는” 것이 포획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고로 “너희의 은이 나에게 왔다”에 의해 그들에 의해 포획된 진리가 의미되어진다; 그러나 신앙 속에 있는 진리가 어떤 인간에 의해 결코 포획되지 않고, 주님에 의해 은근히 심어지고 주어질 뿐이나, 여전히 인간에 의해 포획된 것처럼 여겨지는 바, 위의 내적 의미는 “포획된 것처럼으로”라고 말해지고 있다.
교회에도 잘 알려진 바는, 진리는 주님에 의해 은근히 심어지고 주어진다는 것이다; 그 이유가 신앙은 인간으로부터가 아니고 하느님으로부터 가르쳐진다고 가르쳤기 때문이다; 고로 확신 뿐만 아니라 신앙의 진리들도 그분으로부터 이다. 그렇지만 여전히 신앙의 진리들은 인간에 의해 포획되어진냥 나타난다, 그런 이유는 이 진리들이 흘러든다는 것에 지독하게 무지하기 때문인데, 그렇게 되는 이유는 그가 이것을 지각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가 이것을 지각하지 못하는 이유는 그의 내면들이 닫혀져 있기 때문, 하여 그는 영들과 천사들과 지각할 수 있는 교통함을 가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면들이 닫혀 있을 때, 인간은 유입에 관하여는 무엇이든 알 수가 없다.
또 하나 알려진 바는, 신앙의 진리를 아는 것과 이 진리를 믿는 것은 아주 다르다는 것이다. 신앙의 진리들을 단지 아는 이들은 이 진리도 여느 다른 지식들이나 매 한가지로 그들의 기억 안에 놓아둔다. 이런 진리들을 인간은 이런저런 유입 없이도 자신을 위해 포획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들에는 생명이 없다. 아마 악한 인간도 경건하거나 직바른 이들 보다 성경 지식에, 진리에서 더욱 해박하여 있는 경우를 연상하면 이해가 될 것이다. 그러나 악한 자와 더불은 진리들에는 생명이 없다. 그 이유가 이들이 진리를 들먹일 때는 그 목적이 자신의 우쭐댐이나 이득이 그 목적에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자아 사랑과 세상 사랑이 그것들을 부풀리고 그것의 생명을 만들어 낸다. 이 생명은 지옥에 있는 생명, 영적인 죽음이다. 그러므로 이들이 진리를 꺼내 놓을 때, 이것은 기억으로부터 일뿐 심정으로부터가 아니다. 이에 반대로 신앙의 진리들을 믿는 자는 입술로부터와 동시에 심정으로부터 진리들을 꺼내놓는다. 그 이유가 그 사람과 더불은 신앙의 진리들은 바깥쪽 기억에 그것들의 뿌리를 깊이 박고 있기 때문; 그리고 거기로부터 내면, 또는 더 높은 쪽을 향하여 성장하기 때문, 즉 열매가 많이 열리는 나무 같기 때문이다; 그들은 나무들 같이 자신들을 잎들로 치장한다, 꽃을 피운다, 열매를 맺기 위하여서 이다. 인간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다.
그는 또한 신앙의 진리들을 통하여 목적하는 것은 (이웃에) 쓸모 있어짐, 즉 선행의 실습, 그에게 이것은 열매이다. 이런 것들은 제 아무리 작은 진리라 해도 자신을 위해 포획할 수 없고, 오직 주님에 의해 그에게 무료로 수여되어야 한다, 그리고 인생의 셀 수 없는 순간 마다에서 그에게 수여되고 있다. 그러나 인간은 이런 것들이 흘러듦에 관한 지각을 가지지 않고 있어서, 이미 말한대로 그는 저항한다, 그 이유는 이때 그는 자신을 잃을 것이라고, 자신과 더불어 자기의 자유를 잃을 것이다고, 자유와 더불어 자기의 기쁨을 잃을 것이라고, 하여 남을 것은 아무것도 없을지 모른다고 믿는다. 그러므로 맺어지는 그의 결말은 자기는 자신으로부터 진리를 포획하는 것밖에 다른 도리가 없다는 것만 알고 있다. 이때 진리가 그들에 의해 포획된 듯처럼 여겨진다. 더욱이 천국적인 자신이 인간에게 수여되기 위하여 그는 선을 자신으로부터 행하듯, 진리를 자신으로부터 생각하는 듯 할 필요도 필수적이지만, 이것이 주님으로부터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하는 것도 곰곰히 되짚어 보야야 한다.

그리고 그는 시므온을 그들에게 데려왔다. 이는 그가 진리들을 의지에 인접되게 했다를 의미한다. 이는 시므온의 표현함이 의지에 있는 신앙, 또는 신앙 속에 있는 진리를 행하려는 의지이다로부터; 그리고 그가 시므온을 데려다 인계한 야곱의 아들들의 표현함이 자연 평면에 있는 교회의 진리들이다로부터. 이로부터 그가 “시므온을 그들에게 데려옴”은 그가 의지를 진리들에 인접되게 했다를 의미한다.

24-28절. 그리고 사람은 요셉의 집으로 사람들을 데려왔다, 그리고 물들을 주었다, 그리고 그들은 자기들의 발을 씻었다. 그리고 그는 그들의 나귀에게 사료를 주었다. 25 그리고 그들은 요셉이 정오에 올 때를 대비해서 선물을 챙겼다. 그 이유가 그들은 거기서 자기들이 빵을 먹는다고 들었기 때문이다. 26 그리고 요셉은 집에 왔다, 그리고 그들은 그에게 그 집으로 손에 들고 온 선물을 바쳤다, 그리고 자신을 땅으로 굽혀 그에게 절했다.
27 그리고 그는 그들에게 평안하냐고 묻고, 말했다, 너희들이 말했던 노인인 너희의 아버지도 평안하느냐? 그는 아직 살아 있느냐? 28 그리고 그들은 말했다, 당신의 종 우리의 아버지는 평안합니다. 그는 아직 살아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들을 구부렸다 그리고 자신들을 숙여 절하였다.

그리고 사람은 요셉의 집으로 사람들을 데려왔다. 이는 내적 부분과의 결합이 개시됨을 의미한다. 이는 “사람들을 요셉의 집으로 데려오다”의 의미함이 자연 평면에 속하는 진리들을 내적 부분에 인접되게 하는 것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결합이 개시됨을 의미하는 이유는 이어지는 사항들로부터 명료해진다. 즉 그들이 거기서 먹는 것, 그때 요셉은 자신을 그들에게 밝히지 않았다는 것에서 분명해진다는 말이다; 이를 수단으로 일반적 유입이 의미된다, 이것이 지금 묘사되고 또한 개시됨이다.

그리고 물들을 주었다. 이는 내적 부분으로부터 있는 진리의 일반적인 유입을 의미한다. 이는 “물”의 의미가 진리이다로부터, 그리고 실로 일반적 측면에서의 진리이다. 그러므로 “물들을 준다”는 진리의 일반적 유입을 의미한다. 이것이 내적 부분으로부터인 이유는 이것이 요셉의 집에서 있었기 때문이다. 진리의 일반적 유입은 수용력에 진리를 납득함과 이해함을 주어 계발함을 의미한다. 이 계발됨은 주님으로부터 있는 천국의 빛으로부터 이다, 그리고 이 빛은 신성한 진리밖에 더 아니다

그리고 그들은 자기들의 발을 씻었다. 이는 그 결과 자연 평면이 깨끗해짐을 의미한다. 이는 “발을 씻음”의 의미가 자연 평면이 깨끗해지는 것이다로부터 분명해진다.

그리고 그는 그들의 나귀들에게 사료를 주었다. 이는 선에 관하여 가르쳐짐을 의미한다. 이는 “사료를 주다”의 의미가 선에 관하여 가르침이 있다 이다로부터; 그 이유가 “사료(provender)”에 의해 기억 속의 지식들 속의 진리들로부터의 선이 의미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료를 주는 것”에 의해, 즉 “먹이는 것”에 의해 이 선 안에서 가르쳐짐이 있다가 의미된다. 이로부터 “나귀들에게 사료를 주는 것”에 의해 기억 속의 지식들로부터의 선에 관한 가르침이 의미됨이 분명해진다. 기억 속의 지식들로부터의 선은 이 지식들 속의 진리들로부터의 기쁨이다. 기억 속의 지식들 속의 진리들은 가장 일반적인 진리들이다, 이것은 세상의 빛으로 있는 자연적 빛에서 나타난다; 그러나 그것들이 나타나기 위하여서 (즉 진리들이다로서 나타나기 위하여) 내적 부분으로부터 일반적인 유입이 있음에 틀림이 없다. 이것이 천국의 빛으로부터의 계발이다.

그들은 선물을 챙겼다. 이는 은근히 심어짐을 의미한다. 이는 “선물”이 호의를 확득하려는 것이다로부터; 고로 “선물을 챙김”은 은근히 심어짐이다.

요셉이 정오에 올 때에 대비하여. 이는 내적 부분이 빛과 더불어 현존할 때 까지를 의미한다. 이는 “그가 오는 것에 대비하여”의 의미가 현존해지는 때이다로부터; 요셉의 표현함이 내적 부분이다로부터; 그리고 “정오”의 의미함이 빛의 상태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정오”가 빛의 상태를 표시하는 이유는 하루의 때들, 즉 아침, 정오, 저녁이 다른 삶에 있는 계발됨들과 상응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거기서의 계발됨은 총명과 지혜에 속한 이런저런 것들이다, 그 이유가 천국의 빛에 총명과 지혜가 있기 때문이다. 거기에는 계발의 교체됨(alternation)들, 즉 지상에서의 아침, 정오, 저녁 같은 것이 있다. 저녁에 있는 이런저런 그늘의 상태는 거기 있는 태양으로부터는 발생하지 않는다, 즉 언제나 빛만을 주시는 주님으로부터서는 아니다는 말이고, 이는 천사들 자신들로부터이다, 그들이 자신들로부터 있는 만큼에서 그들은 그늘, 또는 저녁의 상태에 있게 되기 때문이다, 그 대신 그들이 자신으로부터 천국적인 자신으로 들어올리는 만큼에서 그들은 빛의 상태 안으로 온다. 이로부터 정오가 빛의 상태임이 분명해진다.

그 이유가 그들은 자기들이 거기서 빵을 먹는다고 들었기 때문이다. 이는 선이 진리들에 합쳐져야 할 것을 알아챔을 의미한다. 이는 “듣다”의 의미가 알아챔(notice)이다로부터; “먹다”의 의미가 자기 것에 되게 하다와 결합하다 이다로부터; 그리고 “빵”의 의미가 사랑의 선이다로부터 알려진다.

리고 요셉이 집에 왔다. 이는 내적 평면이 현존함을 의미한다. 이는 “집에 오다”의 의미가 가까이 있다, 또는 현존하다(presence) 이다로부터; 그리고 요셉의 표현함이 내적 평면(부분)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들은 자기들 손에 들고 집으로 가지고 온 선물을 그에게 바쳤다. 이는 가능한 만큼 은근히 심어짐을 의미한다. 이는 왕이나 성직자에게 바치는 “선물”의 의미가 호의를 획득함이다로부터, 고로 은근히 심어짐이다로부터; 그리고 “자기들의 손에”의 의미가 가능한 한만큼이다로부터 알려진다.

그리고 자신들을 땅으로 구부려 그에게 절했다. 이는 굴종함(humiliation, 겸허함, humility)을 의미한다. 이는 “땅쪽으로 구부려 절함”의 의미가 누군가가 자아를 낮추는 것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리고 그는 그들에게 평안하냐고 물었다. 이는 그것이 잘 있는지 지각함을 의미한다. 이는 묻다의 의미가 또 다른 자의 생각을 지각하는 것이다로부터; 그리고 “평화”의 의미가 잘 있는 것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리고 말했다, 너희가 말했던 노인인 네 아버지는 평안하시냐. 이는 영적 선과 더불어서도를 의미한다. 이는 “평화”의 의미가 잘 있다 이다로부터; 그리고 여기서 “아버지”인 이스라엘의 표현함이 영적 선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는 아직 살아있느냐? 이는 그것은 생명을 가지고 있다를 의미한다. 이는 생명“의 의미가 영적 생명이다로부터 알려진다.

그리고 그들은 말했다, 당신의 종 우리의 아버지는 평안합니다. 이는 자연 평면은 그 근원되는 선과 더불어 잘 있게 됨을 자연 평면의 내적 부분으로부터 알아챔을 의미한다. 이는 “말하다(say)”의 의미가 지각하는 것이다로부터; “평화”의 의미가 잘 있다 이다로부터; 그리고 이스라엘의 표현이 영적 선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 선이 “아버지”라 불리우는 이유는 이 아버지로부터 열 아들들이 있듯, 이 선으로부터 자연 평면의 진리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연 평면에 있는 진리들과 선들이 그들에 의해 표현되기 때문에 그들에 의해 자연 평면도 표현된다; 그 이유가 자연 평면은 그릇(containant)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안에 있는 진리들과 선들은 내용물이다. 하여 그릇과 내용물이 하나를 만든다. 이상 살핀 바로부터, “당신의 종 우리의 아버지는 평안합니다”라는 그들의 말에 의해 그 근원되는 선과 더불어 잘 있게 됨을 자연 평면의 거기로부터 알아챘다가 의미된다. 거기로부터 알아챔이란 요셉에 의해 표현된 내적 부분으로부터의 알아챔이, 그 이유는 자연 평면의 모든 지각함은 영적인 것으로부터 이고, 이 영적인 것은 주님으로부터 내적인 것을 통하여 내적 부분으로부터 있기 때문이다. 자연 평면은 어떤 지각함도 결코 가지지 못한다, 또한 생각과 애착의 어떤 생명도 가지지 못한다. 그것의 생명은 오직 영적 평면으로부터 이다; 그 이유가 자연 평면의 모든 것은 그 자체로는 죽어 있다, 그러나 그것들은 영계로부터의 유입에 의해, 즉 주님으로부터 영계를 통하여 있는 유입에 의해 살아 있는다. 영계에 있는 모든 것은 주님으로부터 있는 빛으로부터 살아 있다; 그 이유가 빛 안에 지혜와 총명이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거기로부터 알아챔, 또는 자연 평면에 있는 내적 부분으로부터 알아챔이 의미된 것은 앞에서 말해진 것으로부터도 이어지고 있다.

그는 아직 살아 있습니다. 이는 그것은 생명을 가지고 있다 를 의미한다. 이는 앞에 살폈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들을 구부렸다 그리고 자신들을 숙여 절했다. 이는 외향과 내향의 굴종함(humiliation)을 의미한다. “자신들을 구부림”의 의미가 외향의 굴종함이다로부터; “자신들을 숙여 절함”의 의미가 내향의 굴종함이다로부터 분명해진다; 그 이유가 구부림은 아래쪽으로 숙여 절함보다는 덜 굴종함이기 때문에 이는 바깥쪽에서의 굴종함을 표시한다; 그리고 숙여 절함은 좀더 강한 굴종함인 바, 이는 안쪽에서의 굴종함을 표시한다. 더욱이 “구부림(bending)”은 진리 측면에서의 굴종함, 즉 진리 안에 있는 이들의 굴종함, 고로 영적 평면(수준)에서의 굴종함을 표시한다; “숙여 절함(bowing down)”은 선 측면에서의 굴종함, 즉 선 안에 있는 이들의 굴종함, 고로 천적 평면(수준)에서의 굴종함을 표시한다
이 경우에서 “구부림”은 바깥쪽 측면에서의 굴종함(겸손함), 그리고 “숙여 절함”은 안쪽 측면에서의 굴종함이다; 그 이유가 선 안에 있는 이들이 진리 안에 있는 이들 보다 더 내면적인 인간들이기 때문이다. 이상 살핀 것들(24-28절)은 단어들의 내적의미 만을 간략히 다루었는데 그 이유는 앞에서 이미 살핀 내용들이 많기 때문에 중복을 피하기 위해서 이었다.

29-34절. 그리고 그는 자기 눈을 들었다, 그리고 자기 어머니의 아들, 자기의 형제 베냐민을 보았다, 그리고 말했다, 이 아이가 너희가 나에게 말했던 가장 어린 형제이냐? 그리고 그는 말했다, 하느님께서 너에게 은혜를 내리기를 바란다, 내 아들아. 30 그리고 요셉은 서둘렀다, 그 이유는 그의 연민이 그의 아우를 향하여 움직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울 곳을 찾아 그의 침실로 가서 거기서 울었다. 31 그리고 그는 얼굴을 씻고, 나와, 마음을 억제하며, 빵을 놓아라 하고 말했다. 32 그리고 그들은 요셉만을 위해 따로 놓고, 그들을 위해 따로 놓고, 그와 함께 먹는 이집트 사람을 위해 따로 놓았다. 그 이유는 이집트 사람은 히브리 사람과 함께 먹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이집트 사람들에게는 혐오스러운 것이기 때문에서이다. 33 그리고 그들은 요셉 앞에 출생에 따라서는 첫 출생이, 젊음에 따라서는 가장 어린 자가 앉았다, 그래서 사람들은 서로 보며 놀라워 했다. 34 그리고 그는 그의 얼굴들로부터 그들에게 몫을 나누어 주었다. 그리고 그는 베냐민의 몫은 다른 사람 보다 다섯 분량을 많게 해서 나누었다. 그리고 그들은 마셨고, 그와 함께 많이 마셨다.

그리고 그는 자기 눈을 들었다. 이는 숙고함(reflection)을 의미한다. 이는 “자기 눈을 들다”의 의미가 생각함과 유의함(attention)이다로부터, 그리고 주목함(observation) 또한 의미한다. 고로 이것은 숙고함을 표시한다; 그 이유가 숙고하는 것은 지적 시각에 집중하는 것, 그리고 이것이 그러한지를 관찰하고, 그다음 이것이 그렇구나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베냐민을 보았다. 이는 중매자를 알아챔을 의미한다. 이는 “보다”의 의미가 이해하고 알아채다 이다로부터; 그리고 베냐민의 표현함이 중매자 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자기 형제, 자기 어머니의 아들. 이는 어머니로부터인 바, 자연 평면으로부터의 내면을 의미한다. 이는 여기서 “형제” 그리고 “어머니의 아들”인 베냐민의 표현함이 내적 부분이다로부터 알려진다; 그리고 그가 중매자 인 바, 그는 요셉인 영적 평면의 천적 부분을 아버지로 하고, 자연 평면을 어머니로 하여 출시된다; 그 이유가 그는 중매 역할을 하기 위하여 양쪽에 가담하여야 하기 때문이다. 양쪽의 중간 부분이 어머니로서의 자연 평면의 내적 부분에 의해 뜻해진다. 그리고 “요셉”인 영적 평면의 천적 부분이 마찬가지로 어머니로서의 자연 평면에서, 그러나 아버지로서의 신성으로부터 출시되기 때문에, 베냐민은 그의 “형제 자기 어머니의 아들”이라 불리운다. 여기서 최고 의미에서 “요셉”에 의해 뜻해지는 주님은 그분으로부터 선행의 선을 받은 모든 이 하나하나를 “형제”라고 부른다. 그분 역시 “그분의 어머니의 아들”이라 불리우신다, 그러나 이때의 “어머니”에 의해서는 교회가 뜻해진다.

그리고 말했다. 이는 지각함을 의미한다. 이는 “말하다”가 말씀의 역사 부분에서 지각함을 의미함에서 알게 된다. “말함”이 지각함인 것은 천국에서의 경우, 세상에서의 경우와는 아주 달리 말을 오게하는 생각들 자체가 지각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영적 의미에서 “지각함”은 글자 의미에서, 또는 자연적 의미에서 “이야기함” 또는 “말함”이다.

이 아이가 너희가 나에게 말했던 가장 어린 너희 형제이냐. 이는 그들에게도 알려진 바대로 모두 이후에 태어난 자를 의미한다. 이는 “가장 어린 형제”의 의미가 모든 형제 이후에 태어난 자이다로부터 (아래에서 설명한다); 그리고 “너희가 나에게 이야기 한”의 의미가 그들에 의해 지각되어진 것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베냐민이 여기서, 그들의 “가장 어린 형제”, 모두 이후에 태어난 자, 또는 출생에서 가장 어린 자라고 불리우는 이유는 베냐민이 표현하는 중개자와 더불어의 경우 영적 의미에서도 비슷하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중매자는 인간 안에서 모두 이후에 태어나지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인간이 영적으로 태어나질 때, 즉 그가 재 출생될 때, 주님에 의해 그의 합리성, 즉 인간의 내적 부분이 먼저 거듭나지고, 후에 그의 자연 평면이 거듭나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중매자는 양쪽 평면에 가담하는 바, 즉 합리성이 영적 합리성으로 만듦에, 또는 새로이 만듦에, 또한 자연 평면을 새로이 만듦에도 가담해야 하기에, 그러므로 중매자의 출생은 자연 평면이 거듭나지는 순서에 따라 맨 나중일 수밖에 없다.
야곱의 아들들에 관련하여 말씀에 기록된 모든 것들, 그들과 그들의 후손들에 관한 실제의 삶을 가지고 쓰여진 말씀들은 그것 안에 천국의 것들을 포함하도록, 최고 의미에서는 신성의 것들을 담을 수 있도록 배려된 섭리적 차원에서 이다. 이런 맥락에서 마지막 아들로 출생한 베냐민도 예외는 아닌 바, 그는 내적 부분과 외적 부분 사이의 중간 부분, 또는 중매자, 중개자, 또는 주님께서 세상에서 가지셨던 영적 평면의 천적 부분과 그분이 지상에서 가지셨던 자연 평면 사이의 중매자를 표현하였다.
요셉과 그의 형제들에 관련된 모든 것은 최고 의미에서 주님의 인간을 신성이 되게 하심을, 즉 어떻게 주님이 그분에 있는 인간을 신성으로 만드셨는가를 표현한다. 이것이 가장 안쪽 의미에서 표현된 이유는 말씀이 그것의 가장 깊은 의미에서 가장 거룩해 있도록, 또한 천사들의 지혜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말씀의 모두 각각의 부분에서 포함하고 있도륵 하시기 위하여 때문이다; 그 이유가 천사의 지혜는 인간에 의해 납득되어질 수 없을 정도로 인간의 것을 초월해 있기 때문이다. 또한 말씀의 세부 사항들에서 주님에 관련되는 것은 천사들의 행복함 자체이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천사들은 주님 안에 거주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주님의 인간이 신성으로 되심은 인간 거듭남의 본보기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거듭남 또한 주님의 신성이 되심은 말씀의 내적 의미에서 함께 표출되고 있다. 인간의 거듭남은 셀 수 없는 신비함들과 더불어 천사의 지혜 안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천사들에게 행복을 제공하는데, 이는 인간의 개혁을 위해 사용되는 만큼에서 이다.

그리고 그는 말했다, 하느님께서 너에게 은혜를 주기를 바란다, 나의 아들아. 이는 신성은 중매자인 천적 평면의 영적 부분과도 있는데, 그 이유는 그것은 신성으로부터의 진리인 영적 평면의 천적 부분으로부터 진행되기 때문이다를 의미한다. 이는 “하느님깨서 은혜를 주기를”의 의미가 “요셉”인 영적 평면의 천적 부분에 의해 “베냐민”인 천적 평면의 영적 부분에게 말해질 때, 그리고 후자가 “아들”이라 말해질 때, 이것은 신성이 천적 평면의 영적 부분과 더불어서도 있다를 뜻한다, 그 이유는 이것은 신성으로부터의 진리인 영적 평면의 천적 부분으로부터 진행되는 중매자이기 때문이다.
이미 말한 대로 최고 의미에서 주님의 인간의 안쪽 부분은 영적 평면의 천적 부분이었다, 그리고 이것은 신성으로부터의 진리이었다, 또는 주님 안에서 신성 자체의 첫 덮개(first clothing) 이었다, 그리고 중매자인 천적 평면의 영적 부분이 거기로부터 진행되기에, 신성이 그것과도 있었다고 말한 것이다. 어떤 것으로부터 진행하는 것은 그것을 진행하게 한 것으로부터 자기의 본질을 갖는다; 그러나 이것은 교통함을 위해, 고로 보다 더 낮은 영역에서 사용되기 위해 일해 줄(serve, 섬길) 이런저런 것들로 옷입혀져 있다. 이렇게 옷입혀진 것들은 더 낮은 영역에 있는 이런저런 것들로부터 취해진 것은 진행하게 한 내적 부분이 거기 있는 이런저런 수단으로 가지고 행동하려는 목적에서이다.
본질을 준 것은 아버지로부터 이다, 그 이유가 본질은 혼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혼에게) 주어지는 덮개는 어머니로부터이다. 그 이유가 덮개는 혼의 몸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앞에서 말한 대로 왜 중매자는 중매하기 위하여 반드시 양쪽 평면으로부터 끌어져나와야 하는 이유이기도하다; 즉 아버지 격인 내적 부분으로부터와 어머니 격인 외적 부분으로부터 끌어져 나와야 한다는 말아다 (그래야 결합이 마무리 된다).

그리고 요셉은 서둘렀다. 이는 가장 깊은 쪽으로부터를 의미한다. “서두름(hasten, 허둥댐)”이 여기서는 가장 깊은 쪽으로부터 터져나오는 것이다가 분명한데, 그 이유는 이어지는 말이 “그의 연민이 움직여졌다”라고 말해지기 때문이다. 이를 수단으로 사랑으로부터의 자비가 의미된다. 연민이 터져나올 때, 그것은 가장 깊은 쪽으로부터 터져나온다, 그리고 이것은 처음에는 눈으로 응시함에서 또는 생각의 처음 순간에서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서두름”은 가장 깊은 쪽으로부터를 의미할 수밖에 없다.

그 이유는 그의 연민이 움직여졌기 때문이다. 이는 사랑으로부터의 자비를 의미한다. 이는 “연민이 움직임”이 사랑으로부터의 자비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자비”라고 말해진 이유는 그가 아직까지는 자아에 의해 인정되지 않았기 때문, 그리고 “사랑으로부터”라고 말해진 이유는 그가 자기로부터 진행시킨 중매자 이기 때문이다. “연민”이 원어에서는 가장 깊고 가장 온유한 사랑을 의미하는 단어에 의해 표현되어지고 있다.

그의 형제를 향하여. 이는 그 자체로부터 내면을 향하여를 의미한다. 이는 여기서 “형제”인 베냐민의 표현함이 중매자, 또한 내적 부분이다로부터; 그리고 중매자와 내적 부분이 “요셉”인 영적 평면의 천적 부분으로부터 진행되고 있는 바, 그러므로 내적 부분 그 자체로부터 라고 말하고 있다. 여기서 “요셉”인 주님으로부터 신성의 어떤 것을 받는 자는 누구이든, 그는 선행의 선의 어떤 것을 받는 바, 주님에 의해 “형제”, 또한 “아들”이라 불리운다.

그리고 그는 울 곳을 찾았다. 이는 사랑으로부터의 자비로부터 있게 되는 감격을 의미한다. “운다”는 사랑으로부터의 자비로 있어지는 결과이다.

그는 침실로 가서 거기서 울었다. 이는 가상적이 아닌 본래대로에서를 의미한다.
이는 “침실에 오다”의 의미가 나타나지 않도록 자아 안에 있다 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고대인들에게 관습적이 된 말 중에, “침실로 들어 감”, 또는 “문을 닫음”이 있다, 이것은 그들이 드러나지 않게 뭔가를 행동하는 것을 뜻할 때 사용했다. 이렇게 이야기하는 형체는 고대 교회의 의미들로부터 파생되었다. 그 이유가 그들은 영적 의미에서의 “집”을 인간으로 이해했고, “방들”, “침실”은 인간의 내면들로 이해했다. 그러므로 “침실에 옴, 들어감”에 의해서는 자아 안에 있는 것, 또는 나타나지 않게 있는 것을 의미했다; “방에 들어옴”이 의미들이었기 때문에, 그러므로 말씀에서 자주 언급된다. 즉
가라, 내 백성아, 너희 침실로 들어가라, 그리고 네 뒤에서 문을 잠구어라; 분노가 지나가버릴 때까지 잠간이라도 네 자신을 숨겨라 (이. 26:20);
“침실로 들어가는” 것이 여기서 글자대로에서도 뜻하지 않는다, 그러나 은폐함 안에 자아를 놓아두는 것, 그리고 자안 안에를 뜻한다.
에스겔서에서:
그가 나에게 말했다, 사람의 아들아, 이스라엘의 가문의 원로들이 어두움에서, 그의 형상들의 침실에서 모두 각자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보았지 않느냐? 그들이 말하기를, 여호와께서는 우리를 보지 않는다 (겔. 8:12);
위에서 “어두움에서, 자기 형상들의 침실에서 각자가 하는 것”은 자신들 안쪽에 내향적으로, 생각들에서를 표시한다. 그들의 생각과 애착의 내면의 것들이 침실을 수단으로 예언자에게 표현되어졌고, “형상의 방들”이라 불리운다
모세의 책에서:
바깥에서는 검이 빼앗고, 방들으로부터는 공포가 있을 것인데, 청년과 처녀, 젖먹는 것과 노인에 이르기까지이다 (신. 32:25);
위에서 “검”은 진리의 황폐와 거짓의 처벌을 표시한다; “방들로부터의 공포”는 인간의 내면들로부터를 표시한다. 여기서 “방들”이 방을 뜻하지 않음은 분명할 것이다.
다윗서에서:
그분의 방들로부터 산들에 물을 주신다 (시. 104:13);
영적 의미에서 “산들에 물을 주는 것”은 주님을 사랑함과 이웃을 향한 사랑에 있는 이들에게 복 주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분의 방들”은 천국의 내면들로부터 이다. 누가복음서에서:
어둠에서 이야기했던 것은 무엇이든 너희는 빛에서 들을 것이다, 그리고 침실에서 귀에 대고 이야기를 한 것은 지붕들에서 선포될 것이다 (눅. 12:3);
위 구절에서, “침실들”은 인간의 내면들, 즉 그가 생각한 것, 그가 목적한 것, 그가 하려고 애쓴 것을 표시한다. 마태복음서에서:
너희가 기도할 때, 너희 침실로 들어가라, 그리고 들어가서 네 문을 닫고 은밀하게 기도하라 (마. 6:6);
“침실로 들어가 기도하는 것”은 바깥쪽의 모양새를 뜻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이것이 표현적으로 말해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그의 얼굴을 씻었다. 이는 그것이 그와 같이 정리되었음을 의미한다. 이는 “얼굴울 씻다”의 의미가 나타나지 않게 정리하는 것이다로부터 알려진다; 그 이유가 얼굴에서 눈물 자국이 나타나지 않으려 씻었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이런 방법에서 정리된 것이다. 이것이 어떤 경우인지는 주님의 신성한 자비로부터 다음 페이지에서 살필 것이다. 여기서는 얼굴과 내면의 상응을 조금 살펴 볼 것이다. 얼굴은 내면들의 외적 표현이다; 그 이유가 얼굴은 거울이 표현하듯 내면들을 표현하도록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상대방은 앞의 인물이 자기를 향하여 어떤 마음을 가졌는지를 상대의 얼굴로부터 알는지 모른다; 이야기를 할 때, 연설자는 말로 뿐만 아니라 얼굴로도 자기의 느낌을 보여준다. 천적 교회 속에 있었던 태고인들이 이와 같았고, 모든 천사들도 이와 같다; 그 이유는 이들은 자기들이 생각하는 것을 타인에게 감추려하는 의도가 전혀 없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그들은 선처하고 있을 뿐 아니라 이웃이 잘 되기를 바라고, 자신들을 위하여 이웃을 헐뜯는 일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옥들은, 천국의 빛이 보이지 않을 때, 자기들의 내면들의 것들과 다른 얼굴을 지닌다. 그 이유는 그들은 육체의 삶에서 그들의 얼굴들이 이웃을 향하여 선행을 보여주었기 때문, 그러나 단지 자신의 명예와 이득 때문, 더불어 자신에게 호의적이지 않은 자가 잘되기를 결코 바란 적이 없던 자들이기 때문이다. 그 결과 그들의 내부는 적개심, 증오함, 복수심, 살인 등등에 일치되는 것이나, 한편 그들의 얼굴은 이웃을 향한 사랑으로 도배질되어 있다. 아예 이런 기교를 연마하는 것이 꽤나 똑똑한 듯 흠모되는 오늘날의 경우, 내면들과 외면들 사이의 간격은 얼마나 큰지 모른다.

나갔다. 이는 이동(removal)을 수단으로를 의미한다. 이는 “나가다”의 의미가 이동하다 이다로부터 알려진다; 그 이유가 자신을 이동하는 자는 나가거나 또 다른 자로부터 물러나기 때문이다. 내적 의미에서의 경우는 이렇다. 최고 의미에서 요셉에 의해 주님이 표현되어진다; 이스라엘의 열 아들들에 의해 거듭나지고 있는 이들과 더불은 자연 평면의 선들과 진리들이 표현되어진다; 그리고 베냐민에 의해 중매자가 표현되어진다. 중매자를 향한 사랑으로부터의 자비가 있다; 그 이유는 그것 때문에 그 아래쪽의 것이 거듭나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님의 사랑과 자비는 중매자를 통한 결합이 결과 될 때까지 나타나지 않는다; 또한 그것들(사랑과 자비들)이 나타나지 않는 것이 잘 배열된 셈이다. 이 배열은 이동함과 은폐함을 수단으로 만들어진다. 주님께서 자비를 이동하시거나 은폐하시거나 한 적은 결코 없다; 그러나 거듭나지는 이들이 자기의 악들 안에 놓일 때, 그에게 마치 주님께서 멀리서 계신 듯, 숨으신 듯 나타나는 것이다. 주님과 우리 사이에 끼어드는 것이 악들이고 주님이 우리에게 관심이 없으신 듯 나타나게 하는 것이다. 마치 짙은 구름들이 우리와 태양 사이에 끼인 격이다. 이상 살핀 것이 은폐와 이동이 뜻하는 것들이다.

그리고 그는 자신을 억제했다. 이는 감춤을 의미한다. 이는 자신을 억제함이 감추는 것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 이유가 자신을 감추는 자는 그가 내향적으로 뜻하는 것을 감추기 때문이다. 여기서 감춤에 의해 뜻해진 것은 앞 항을 다시 보라.

그리고 말했다, 빵을 놓아라. 이는 자연 평면에 있는 진리가 중매자를 통해 결합됨을 지각함을 의미한다. 이는 “말하다”가 지각하다이다로부터; 그리고 “빵을 놓다”의 의미가 자연 평면에 있는 진리들과 더불어 중매자를 통하여 결합함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빵을 놓는 것에 의해 연회 자체가 뜻해진다, 그리고 연회나 축제에 의해 결합, 특히 결합이 개시됨이 의미된다. 이것이 자연 평면에 있는 진리들과 더불어 중매자를 통해 결합이다는 것은 시리즈로부터 이다; 그 이유가 “베냐민”이 중매자이고, 야곱의 열 아들들은 자연 평면에 있는 진리들이기 때문, 이는 이미 앞에서 말했다; 그리고 결합이 중매자를 통하여 있기 때문에, 베냐민을 보면서, 요셉은 그들이 그와 더불어 먹을 것이라고 명령했다; 즉 “요셉이 그들과 함께 있는 베냐민을 보았을 때, 그는 자기 집을 다스리는 자에게 말하기를, 사람들을 집으로 데려오라, 그리고 짐승을 죽이고, 식사 준비를 하라고 말했다. 사람들은 나와 더불어 정오에 먹을 것이다” (16절).

그리고 그들은 요셉을 위해 따로 놓았다, 그리고 그들(야곱의 아들들)을 위해 따로 놓았다. 이는 내면이 그들로부터서 분리된 듯한 바깥쪽의 나타남을 의미한다. 이는 “요셉만을 위해, 그들 만을 위해 따로 놓았다”의 의미가 분리함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리고 내적 부분이 요셉에 의해, 외적 부분이 야곱의 열 아들들에 의해 표현되는 바, 그러므로 이 말들에 의해 내적 부분이 외적 부분으로부터 분리됨을 의미하나, 이는 나타남에서만 일 뿐이다, 그 이유는 그가 각각에게 몫을 보내 자신의 식탁에서 그들에게 음식을 주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집트인을 위해 따로 놓았다. 이는 거꾸로의 질서에 있는 기억 속의 지식들은 분리됨을 의미한다. 이는 이집트인들의 표현함이 거꾸로된 질서에 있는 기억 속의 지식들이다로부터 (아래에서 설명한다); 그리고 “그가 따로 먹음”의 의미가 분리함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와 더불어 먹은” 이집트인들에 의해 요셉의 집에서 먹은 이집트인들이 뜻해진다; 그러나 이들이 요셉과 더불어 먹지 않았을 것은 분명하다, 그 이유는 그들 만이 따로 먹었기 때문이다. “이집트”, 또는 “이집트인”에 의해 좋은 의미에서 교회의 기억 속의 지식들이 의미된다; 그러나 반대적 의미에서는 거꾸로된 질서에 있는 기억 속의 지식들이, 고로 교회의 진리들에 반대되는 기억 속의 지식들이 의미된다. 이 반대적 의미에서 “이집트”가 말씀에서 많이 언급되는 편이다. “이집트”가 이런 반대적 의미에서의 기억 속의 지식들을 의미하는 이유는 고대 교회의 기억 속의 지식들, 즉 천적, 영적인 것들을 의미하고 표현한 기억 속의 지식들이 여타 민족들보다 유독 관심을 많이 받아 특별히 이집트인들 사이에서 흠양되어 왔으나, 결국 그들은 이 지식들을 마술로 전락시키고 말았기 때문이다; 이것 때문에 그들은 표현 교회의 기억 속의 지식들을 거꾸로되게 하여 놓았다.
기억 속의 지식들은 인간들이 악을 행하려고 남용할 때 거꾸로된 질서에 있다라고 말해진다. 그리하여 시간이 많이 지나가면서 결국 그들이 천국의 질서를 완전히 거꾸로해 놓았을 때, 드디어 그들은 신성의 사항들을, 천국 속의 것들을, 결과적으로 선행과 신앙의 것들을 부정한다. 이런 지식들을 많이 습득한 이들은 이 지식들로부터 어떻게 추론을 빈틈없고, 능숙하게 하는지를 알고 있다, 그 이유는 그들이 감각들로부터 추론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들로부터 추론하는 것은 외적인 이런저런 것들로부터, 즉 육체와 세상 속에 있는 이런저런 것들로부터 추론하는 것인데, 이 추론은 인간의 감각들과 느낌들을 직접 붙들고 있다. 이와 같은 것들이 천국의 빛에 의해 계발되지 않으면, 그리하여 완전히 다른 질서로 배열되지 않으면, 그것들은 인간으로 천국에 속한 것들에 관해 큰 희미함에 놓여 있게 하여 인간으로 천국에 관한 것들에 관해 아무것도 납득 못하게 하고야 말게 하고, 결국 부정해버리고, 거절하고, 그만큼에서 그것들을 모독한다. 기억 속의 지식들이 질서 안에 있을 때, 그것들은 천국의 형체 안에서 주님에 의해 배열되어진다; 그러나 그것들이 거꾸로의 질서에 있을 때, 그것들은 지옥의 형체에서 배열되는 바, 최고로 거짓인 것이 그 지식의 중심에 있고, 이것을 확증하는 것들은 중심 다음에 포진한다, 한편 진리들은 완전 바깥쪽으로 물러나져 있다, 그리고 진리들이 바깥쪽에 밀려져 있기 때문에, 그것들은 진리들이 통치하는 천국과 교통이 열릴 수 없다; 그러므로 내면의 것들이 이런 인물들에는 닫혀져 있다; 그 이유가 천국은 내면적인 것들을 수단으로 열리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이집트인들은 히브리사람과 함께 빵을 먹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는 그들은 교회의 진리와 선과 합쳐지는 것은 가능할 수 없었다를 의미한다. 이는 이집트인들의 표현함이 거꾸로된 질서에 있는 이들, 고로 악과 거짓에 있는 이들이다로부터; “빵을 먹다”의 의미가 결합하는 것이다로부터; 그리고 히브리인들의 표현이 진짜의 질서에 있는 이들, 고로 교회의 선과 진리에 있는 이들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여기서는 “빵을 먹다”로, 앞에서는 “빵을 놓다”라고 말해지는데, 그 이유는 “빵”에 의해 총괄적 측면에서의 모든 식품(food)이, 고로 연회(banquet)가 의미되기 때문이다. “빵”이 모든 식품과 연회 자체를 의미하는 이유는 영적 의미에서의 “빵”은 천적 (평면의) 사랑, 그리고 천적 (평면의) 사랑은 선과 진리에 관한 모든 것을 그 평면에 함유하기 때문, 고로 영적 식품의 모든 것들을 그 사랑 안에 담고 있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이것은 이집트인에게는 혐오스러운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그들은 반대된 상태에 있다를 의미한다. 이는 이집트인들의 표현함이 거꾸로된 질서에 있는 이들이다로부터; 그리고 이집트인들이 자기들과 함께 먹을 경우 역겹다 말하는 히브리인들의 표현함이 진짜의 질서 속에 있는 이들이다로부터 알려진다. 고로 이 둘은 서로 반대되어 있다, 고로 싫음이 오고, 결국 혐오하기(지겨워함)까지에 이른다. 이 혐오함(abomination)의 단어 자체에 주목하면, 거꾸로된 질서에 있는 이들, 즉 악과 악에서 파생되는 거짓에 있는 이들은 교회의 선과 진리에 반대되어 있어, 그들이 이 선과 진리에 관하여 들을 때, 특히 그들이 교회의 내면의 것들에 관하여 들을 때, 그들은 아주 크게 혐오하여, 메스껍다 못해 토할 지경까지에 이르른다. 기독교 세계가 말씀 속의 내면의 것들을 받지 않는 것에 내가 의아해하고 있을 때, (다른 삶에서) 위와 같은 것이 나에게 말해지고 보여졌었다. 즉 기독교 세계로부터의 영들이 나타났는데, 그들은 말씀의 내면의 것들을 들으라고 강요당하고 있었다, 그러자 그들은 아주 큰 메스꺼움에 사로잡히고 결국 자기들은 토하러 나가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 내게 말해진 바, 이와 같은 것이 오늘날 모든 곳에 있는 기독교 이다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인즉, 그들은 진리 자체를 위하여 진리에 애착함이 없기 때문, 더욱이 선으로부터 선에 애착함이 없기 때문이다고 내게 알려주었다. 그들이 말씀으로부터, 또는 교리로부터 이야기하고 생각하는 것은 초기 어린 시절로부터 획득한 습관으로부터, 그리고 설립된 지상의 어떤 조직으로부터 획득한 것으로부터 일 뿐이다; 고로 이것은 내적인 것 없는 외적인 것 뿐인 셈이다.
이후 야곱의 후손들 사이에서 설립된 히브리 교회의 모든 것들은 이집트인들에게 혐오스런 것이었다는 것은 그들이 이들과 더불어 식사하기를 꺼려 했다는 것 뿐만 아니라, 히브리인들이 예배의 중심 사항으로 간주한 제물들이 이들에게는 혐오스런 것들 이었음을 말씀에서 읽을 수 있다: 즉,
바로가 말했다, 너희는 가라, 토지에서 제물을 바쳐라; 그러나 모세가 말했다, 그렇게 하지는 못합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이집트인들이 혐오하는 것을 여호와 우리의 하느님께 제물로 바치기 때문입니다; 보라 만일 우리가 이집트인들의 눈 앞에서 그들이 역겨워하는 것을 제물로 바친다면, 그들이 우리를 돌로 칠 것 아닙니까? (출. 8:25, 26).
양떼들에 풀을 뜯기는 것, 그리고 목자 또한 그들에게 역거운 것이었는데, 모세의 책에서:
양떼의 모든 목자를 이집인들은 몹시 싫어합니다 (창. 46:34).
고로 이집트인들은 히브리 교회에 속하는 모든 것을 혐오했다. 그 이유인즉, 애당초 이집트인들은 고대 표현 교회를 설립한 이들 사이에 있어왔었으나, 시간이 많이 경과하면서, 그들은 고대 교회의 하느님, 즉 여호와, 또는 주님을 거절했고, 그 대신 우상들, 특히 송아지들을 섬겼다; 그리고 애당초 그들이 속했던 고대 교회에서 배웠던 그 교회의 천적, 영적인 것에 대한 표현과 의미들 자체를 마술로 바뀌게 했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질서는 그들과 더불어 거꾸로 있게 된 것이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교회의 모든 것들이 그들에게는 혐오스런 것이 되어버렸다.

그리고 그들은 요셉 앞에 앉았다. 이는 그들은 요셉의 현존함에 의해 질서 안에 놓였다를 의미한다. 이는 “앉다”의 의미가 여기서는 질서 안에 놓다 이다로부터, 그 이유가 그들이 요셉의 명령에 따라 자리가 정해졌다는 것이 이어지는 말에서 나타나기 때문이다. (즉 출생에 따라 첫 출생이, 젊음에 따라 가장 어린 자가 앉도록 한 것이다); 그리고 “요셉 앞에”의 의미가 현존함을 수단으로 이다. 이 경우는 이렇다: 최고 의미에서 요셉에 의해 주님이 표현되고, 이스라엘의 아들들에 의해서는 자연 평면에 있는 선들과 진리들이 표현되고 있다; 그리고 주님이 현존하실 때, 이때 모든 것들은 그분의 현존 자체를 수단으로 질서에 놓여진다. 주님은 질서 자체이시다; 그러므로 그분이 현존하시는 곳에는 질서가 있다, 그리고 질서가 있는 곳에 그분은 현존하신다. 질서 자체가 이어지는 페이지들에서 묘사되어 있다, 이는 진리들은 선 아래 질서 안에서 올바르게 놓여야 하는 것이다.

출생에 따라서는 첫 출생이, 그리고 젊음에 따라서는 가장 어린 자가. 이는 선 아래 진리들의 순서(질서, order)에 따라서를 의미한다. 이는 “출생에 따라서는 첫 출생이, 젊음에 따라서는 가장 어린 자에 따라 앉는” 것의 의미가 선 아래 질서에 따라 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 이유가 이스라엘의 아들들은 그들의 (출생) 순서에서 교회의 진리들을 표현하기 때문이다 (창. 29, 30장 참조); 그러므로 “출생 (년도)에 따라” 앉는 것은 진리들의 순서에 따라서 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아들들이 표현하는 교회의 진리들은 기독교의 선을 통하여서가 아니면 어떤 질서 안으로 오지 않는다, 즉 이웃을 향한 선행의 선과 주님을 사랑함의 선을 통하지 않으면 질서 자체를 거론할 필요조차 없다는 말이다. 그 이유는 선 안에 주님이 계시고, 선 안에 천국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선 안에 생명이 있고, 살아 있는 적극적인 힘(living active force, 생명 있는 설득력)이 존재한다. (자신이 가진 교리를 이웃에 전달하고 싶다면, 즉 전도를 하고 싶다면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선으로 해야 살아있는 설득력이 어서 상대에게 납득이 가능해진다는 말일지 모른다 역자주.) 그러나 선이 없는 진리에서는 주님의 현존은 결코 없다.

그래서 사람들은 서로를 보며 놀라워 했다. 이는 그들 사이에서 각각의 상태가 바뀜을 의미한다. 이는 “놀래짐”의 의미가 예상 못한 것이다와 생각에서 상태가 갑자기 바뀜이다로부터, 놀람의 원인인 이것이 내적 의미에서 의미된다; 그리고 “서로를 쳐다보며”의 의미는 그들 사이에서 각각의 상태이다로부터 알려진다; 그 이유가 취급되는 주제가 내적 부분의 현존에 의해 야기된 선 아래 진리들이 질서 안에 놓임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질서가 새로운 바, 그들 사이에 있는 각각의 상태 또한 변화가 있다, 이것이 “사람들이 서로를 보며 놀라워함”에 의해 의미되어져 있다.

그리고 그는 그의 얼굴들로부터 그들에게 몫을 나누어 주었다. 이는 자비로부터 각자에게 적용된 선들을 의미한다. 이는 “몫”인 식품(식사, food)의 의미가 선들이다로부터 (그 이유가 모든 종류의 식품(먹을 것, food)은 선들을, 모든 종류의 음료(마실 것, drink)는 진리들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것들이 모두 각각에게 적용된 것이다는 이어지는 말로부터 분명해진다, 그리고 “그가 그들에게 나누어줌”에 의해 의미되고 있다; 그리고 요셉에 의해 의해 표현된 “얼굴들”이, 주님을 서술할 경우, 자비이다.

그리고 그는 베냐민의 몫은 그들 모두의 몫 보다 위쪽에 있도록 많게 했다. 이는 중매자를 위한 선은 자연 평면의 진리를 위한 선들 위쪽에 있다를 의미한다. 이는 “몫”의 의미가 선들이다로부터; 베냐민의 표현함이 중매자이다로부터; 그리고 여기서 야곱의 열 아들들의 표현함이 자연 평면의 진리들이다로부터 알려진다.
이로부터 그가 “베냐민의 몫을 그들 모두의 몫들 위쪽에 있게 많게 했다”에 의해 자연 평면의 진리를 위한 선들 위쪽에 중매자를 위한 선이 있다가 의미된다. 자연 평면의 진리를 위한 선들 위쪽에(넘어서, above) 중매자를 위한 선이 있는 이유인즉, 중매자는 내면에 있기 때문, 그리고 내면에는 외면 보다 선들이 더 풍부하게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어째서 이러한지를, 즉 내면들은 외면들 보다 선들과 진리들에서 더 풍부하다는 것을 아는 자는 거의 없는 것 같다. 모를 수밖에 없는 이유는 내면은 외면으로부터 구분된다는 것, 참으로 그것들은 아예 분리될 수도 있다는 것, 분리될 경우, 내면은 살아 있고, 외면은 죽어 있다는 것, 그러나 그것들이 결합하는 한, 외면은 내면으로부터 살아 있다는 것 등등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서 이다. 이런 사항들이 우선 알려진다면, 내면이 외면과 비교해서 무엇인지가 알려질 것이다, 즉 외면에서 하나로서 나타나는 것도 내면에서는 수천의 것들로 있다는 것 등등이다; 그 이유는 내면은 더 순수한(purer) 영역이고, 외면은 더 조잡하고 총체적(grosser)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선으로부터의 삶을 꾸려간 사람들이 사후 천국 안으로 오면, 그는 세상에서 가졌던 것보다 수천에 수천의 총명과 지혜와 행복을 받을 수 있는 것이다; 그 이유가 천국에서 그가 더 순수한 영역 안에, 그리고 그의 내면들 안에 있고, 육체로부터의 조잡한 것들을 벗어던졌기 때문이다. 이런 모두로부터, 자연 평면에 있는 진리들을 위한 선들을 넘어서 있는 중매자를 위한 선에 의해 뜻해진 것, 이것이 “그들 모두의 몫 보다 베냐민의 몫을 많게 했다”에 의미되고 있음이 분명해졌을 것이다.

다섯 분량들. 이는 많이 증가되었다를 의미한다. 이는 “다섯”은 많이 있다를 의미한다 (아래에서 설명한다); 그리고 “분량(measure)들”은 선으로부터 진리의 상태들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다섯”에 주목해보자. 이 숫자는 조금을 의미하는 숫자이다, 마찬가지로 얼마쯤(some), 또한 많이(much)도 의미한다. 이 숫자의 의미는 약수(part, factor)되는 숫자와의 관계에 의존된다: “10”의 약수(인수)로서의 5는 10과 같은 것을 포함한다, 그러나 등차가 덜한 것에서이다, 그 이유는 10의 절반이 5이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숫자가 곱해져 불어난 숫자들은 단수로서의 (기본) 숫자와 같은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나누기에 의해 생산된 숫자도 곱해졌을 때와 같은 것을 의미한다: 예를 들면, “5”는 “10”과 같고, “20”과도, “100”과도, “1000”과도 같다는 말이다. 나머지 형제들의 몫 보다 다섯 이상의 분량들이 베냐민에게 주어진 것은 내적 의미에 있는 주제 때문이다. 열 분량들이 주어질 수는 없었는데, 그 이유는 그들에게 너무나 많은 것이기 때문이다. 태고 교회로부터의 전통(전해 내려온 관습)을 수단으로 고대인들은 몇몇 숫자들의 경우, 그것이 어떤 것을 의미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어떤 것에 의미를 부여할 일이 발생했을 때, 숫자를 사용했다, 여기서의 경우는 다섯이다, 다른 의미의 경우에서는 다른 숫자를 사용했다, 예를 들면 “3”은 시작부터 끝까지에서의 충분한 것을; “7”은 거룩한 것을; “12”는 그들의 복합체에 있는 모든 것들을 의미했다.

그리고 그들은 마셨다. 이는 선 아래 진리들을 적용함을 의미한다. 이는 “마시다”가 진리의 교통함과 진리를 적용함이다로부터, 여기서는 진리를 적용함이다로부터 이다; 이 적용함이 선 아래에서인 이유는 모든 진리의 적용은 선 아래에서 결과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와 함께 많이 마셨다. 이는 풍부하게를 의미한다. 이는 “마시다”가 선 아래에서 진리를 적용함이다로부터; 이로부터 “많이(largely, plentifully) 마셨다”란 풍부하게를 의미한다. 이 장을 열어보인 것들로부터 분명한 것은, 취급된 주제는 자연 평면이 영적 평면의 천적 부분과 결합함이 개시됨에 관하여 이다는 것이다; 그 이유가 첫 결합함은 요셉이 자신을 자기 형제들에게 명백히 나타내보임에 의해서; 두 번째 결합은 그가 자기 아버지와 형제들을 만나기 위해 가고, 그들을 이집트로 데려옴에 의해서 표현되기 때문이다.
**************************************

창세기 제 44 장

성경: 창세기 44 장

1. 그리고 그는 그의 집을 다스리는 자에게 명령하여, 말하기를, 사람들의 자루에 그들이 운반할 수 있을 만큼 많이 양식으로 채워라. 그리고 각자의 은은 각자의 자루 아구에 놓아라.
2. 그리고 내 잔, 곧 내 은잔을 가장 어린 자의 자루 아구에 놓고, 그리고 그의 곡식에 은을 놓아라. 그리하여 그는 요셉이 말한 말에 따라 그대로 했다.
3. 아침이 빛을 자라게 했다. 그리고 사람들은 떠나갔다, 그들과 나귀들도.
4. 그들이 도성을 나와 얼마 가지 않아서 였다, 그리고 요셉은 자기 집을 다스리는 그에게 말했다, 사람들을 뒤쫒아 가라, 그리고 네가 그들을 따라 잡을 때 그들에게 말하라, 어찌하여 너희는 선을 악으로 되돌리느냐?
5. 이것은 내 주인이 마실 때, 그리고 그분이 점을 칠 때 쓰는 것 아니냐? 너희는 이렇게 하여 악을 행했다.
6. 그리고 그가 그들을 따라 잡자, 그는 그들에게 이런 말들을 이야기했다.
7. 그리고 그들은 그에게 말했다, 어찌하여 내 주인께서는 이 말들에 따라 이야기를 하십니까? 당신의 종들은 이런 말과는 거리가 멈니다.
8. 보시다시피, 우리는 우리 자루의 아구에서 발견했던 은도 우리는 가나안의 토지로부터 당신에게 되가지고 왔습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우리가 당신의 주인 집에서 은, 금을 훔치겠습니까?
9. 그것이 발견되는 자는 누구이든지 그는 죽을 것이며, 우리 또한 내 주인에게 종이 되어 있을 것입니다.
10. 그리고 그는 말했다, 이제 네 말에 따라 그렇게 하겠다. 그것이 발견되는 자는 나에게 종이 될 것이고, 너희는 죄없으리라.
11. 그리고 그들은 황급해졌다, 그리고 그들은 각자 자기 자루를 땅에 내려놓고, 제각기 자기 자루를 열었다.
12. 그리고 그는 뒤졌다. 그는 가장 나이 많은 자부터 시작했다. 그리고 가장 어린 자 까지 뒤졌다. 그리고 잔이 베냐민의 자루에서 발견되었다.
13. 그리고 그들은 자기들 옷을 찢었다, 그리고 각자의 것들을 자기 나귀에 싣고 성으로 돌아 왔다.
14. 그리고 유다와 그의 형제들은 요셉의 집으로 들어 갔다, 그리고 그는 아직 거기에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그 앞에서 (얼굴을) 땅으로 떨구었다.
15. 그리고 요셉은 그들에게 말했다, 너희들이 한 짓은 대체 어찌된 것이냐? 너희는 내가 점을 하는 자인 줄을 몰랐느냐?
16. 그리고 유다가 말했다, 우리가 내 주께 무슨 말을 하리이까? 우리가 무엇을 말할 수 있으리이까? 그리고 어떻게 우리가 정당하리이까? 하느님께서 당신의 종의 불법을 들추어내셨습니다. 보라 우리는 내 주에게 우리 모두 종입니다. 그리고 잔이 발견된 자도 그러합니다.
17. 그리고 그는 말했다, 이런 행동은 나로부터는 거리가 멀고, 잔이 발견된 자 만이 나에게 종이 되리라. 그리고 너희들은 너희 아버지에게 평화로이 올라 가라.
18. 그리고 유다는 그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그리고 말했다, 저로 하여금 나의 주여, 당신의 종이 내 주의 귀에 한마디 말을 하게 해주십시오, 그리고 부디 당신의 종을 향하여 분노하지 말아주십시오. 그 이유가 당신은 바로와 동등하기 때문입니다.
19. 내 주께서 당신의 종들에게 물어 말하기를, 너는 아버지가 있느냐, 또는 네 형제가 있느냐?
20.그래서 우리는 내 주께 말했습니다, 우리는 아버지를 모시고 있는데, 그는 노인입니다, 그리고 그가 노령에 얻은 아이가 있는데, 가장 어린 형제입니다. 그리고 그의 형은 죽었는바 그의 어머니에게는 그 아이만이 남았습니다, 그래서 그의 아버지는 그를 사랑하고 있습니다.
21. 그리고 당신께서 당신의 종들에게 말하시기를, 그를 나에게 데려오라, 그리고 나는 그에게 내 눈을 놓을 것이다.
22. 그리고 우리는 내 주에게 말했습니다, 이 소년은 자기 아버지를 떠날 수 없다. 그리고 그가 그의 아버지를 떠나면 그는 죽을 것이다.
23. 그리고 당신은 당신의 종들에게 말하셨습니다, 만일 너희의 가장 어린 형제가 너희와 함께 오지 않는다면 너희는 내 얼굴들을 더 이상 보지 못하리라.
24. 그리고 한참 시간이 흘러 우리가 당신의 종 나의 아버지에게 올라 갔을 때, 우리는 그에게 내 주의 말을 말했습니다.
25. 그리고 우리의 아버지께서 말하셨습니다, 너희는 돌아가서, 우리에게 양식을 조금 더 사오너라.
26. 그리고 우리는 말했습니다, 우리는 내려 갈 수 없습니다. 만일 가장 어린 형제가 우리와 함께 있으면 우리는 내려 갈 것입니다. 그 이유가 막내인 그가 우리와 함께 있지 않으면 우리는 사람의 얼굴들을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27. 그리고 당신의 종 나의 아버지는 우리에게 말하셨습니다, 너희는 내 아내가 나에게 두 아들을 낳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28. 그리고 하나는 나로부터 나갔다, 그리고 나는 말했다, 정녕 그는 갈갈이 찢겨 죽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후 지금까지 나는 그를 보지 못했다.
29. 그리고 너희는 내 얼굴들로부터 이 하나 역시 데려 가려 한다. 그리고 만일 해악이 그에게 떨어지면, 너는 내 흰 머리털을 악 가운데서 무덤으로 내려가게 만들 것이다.
30. 그리고 지금 내가 당신의 종 나의 아버지에게 갈 때, 그리고 이 소년이 우리와 함께 있지 않고, 그의 혼은 소년의 혼과 묶여 있는바,
31. 그가 소년이 있지 않음을 본다면 그는 죽을 것입니다. 그러면 당신의 종은 당신의 종 나의 아버지의 흰 머리털을 슬픔 속에서 무덤으로 내려가게 할 것입니다.
32. 당신의 종은 이 소년을 위해 나의 아버지 앞에서 담보가 되어 말하기를, 만일 제가 그를 당신에게 데려오지 않는다면, 저는 영영 나의 아버지에게 죄인 될 것입니다.
33. 그리고 지금 원하옵기로, 당신의 종이 이 소년 대신 내 주에게 종으로 남아 있게 하소서, 그리고 이 소년은 그의 형제와 함께 올라 가게 하소서.
34. 이 소년이 저와 함께 있지 않는데 어떻게 제가 나의 아버지에게 올라 가겠습니까? 필시 저는 나의 아버지에게 닥치는 악을 보고야 말 것입니다.

각 절의 내적 의미

1, 2절. 그리고 그는 그의 집을 다스리는 자에게 명령하여, 말하기를, 사람들의 자루에 그들이 운반할 수 있을 만큼 많이 양식으로 채워라. 그리고 각자의 은은 각자의 자루 아구에 놓아라. 2 그리고 내잔, 곧 내 은잔을 가장 어린 자의 자루 아구에 놓고, 그리고 그의 곡식에 은을 놓아라. 그리하여 그는 요셉이 말한 말에 따라 그대로 했다.

그리고 그는 집을 다스리는 그에게 명령하여, 말하기를. 이는 자신으로부터의 유입을 의미한다. 이는 “명령함”이 유입(influx)이다로부터; 그리고 “그의 집을 다스리는 그”의 의미가 교통된 것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것이 요셉이 표현하는 자신으로부터, 즉 내적 측면의 천적 평면으로부터 이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명령하는”것이 유입인 이유는 천국에서는 아무도 명령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생각함이 교통되어진다, 그리고 교통된 다른 쪽은 거기에 일치하게 기꺼이 행동한다. 어떤 것이 행하여지기를 뜻하는 바램과 더불어 생각의 교통함이 유입이고, 받는 자의 쪽은 지각함이다, 그러므로 본문의 “명령함”은 지각함 또한 의미된다.
더욱이 천국에서 그들은 생각함, 뿐만 아니라 함께 이야기도 나눈다, 그러나 지혜 속의 것들이다; 그럼에도 그들의 대화 안에 서로에게 명령하는 암시는 없다, 하여 주인이 되려하는 바램은 아무에게도 없고, 상대를 종으로 간주하는 일도 없다; 그들은 다른 이를 섬기고 봉사하기를 바라고 있다. 이로부터 천국들을 통치하는 형태가 무엇인지가 분명해진다. 이에 관하여 주님께서 마태복음서에서 이렇게 묘사해두셨다:
너희 사이에 그렇게 있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너희 사이에서 큰 자가 되려거든 너희의 섬 기는 자(minster)이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첫째인 자는 누구든지 너희의 종이어야 한다 (마. 20:26, 27);
그리고 다시:
너희 사이에 큰 자인 자는 너희의 섬기는 자 일 것이다. 자신을 드높이는 자는 낮춰질 것 이다, 그리고 자신을 낮추는 자는 드높여질 것이다 (마. 23:11, 12).
심정으로부터 자기 이웃을 사랑하는 자가 위의 주님의 말씀을 실행하고 있다. 또는 이기적 목적 없이 타인에게 선을 행함에서 진정 기쁨과 복됨을 향유하는 자가 위의 주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자이다; 즉 이웃을 향하여 선행을 가지는 이들이 진정으로 자신을 낮춘 자들이다.

사람들의 자루를 양식으로 채우라. 이는 진리로부터의 선을 가지고 자연 평면 안으로를 의미한다. 이는 “자루(bag)”의 의미가 자연 평면의 외면이다로부터; 그리고 “양식(food)”의 의미가 진리로부터의 선이다로부터 알게 되는 바, 그가 “이 집을 다스리는 자에게 사람들의 자루를 양식으로 채우라고 명령함”에 의해 자신으로부터 진리의 선 안으로 유입됨이 의미된다. “진리로부터의 선 (진리의 선, good of truth)”, 그리고 “선으로부터의 진리 (선의 진리, truth of good)”라는 표현을 자주 사용하는 편인 바, 간단히 나마 짚어보아야 할 것 가다. 천적 (평면의) 교회가 영적 (평면의) 교회와 비교하여 무엇인지를 모르면 위 두 용어의 이해도 풀리지 않는다. 선으로부터의 진리는 천적 (평면의) 교회로부터, 그리고 진리로부터의 선은 영적 (평면의) 교회로부터 있다. 천적 (평면의) 교회 속에 있는 이들과 더불어, 선은 의지 부분에 심어져 있다. 실로 의지 부분은 선이 있어야 할 (본래의) 자리이다, 그리고 이 선으로부터, 즉 주님으로부터 이 선을 통하여 이 교회인들은 진리에 대한 지각을 가졌다; 그러므로 그들은 선으로부터 진리를 가진다. 그러나 영적 (평면의) 교회 속에 있는 이들과 더불어, 선은 진리를 수단으로 지적 부분에 심어진다, 그 이유는 모든 진리가 지적 부분 속에 있기 때문, 그래서 그들은 진리를 통하여 선쪽으로 인도된다; 이들에게서는 진리를 행하는 것이 선이 되어 있다; 그러므로 그들은 진리로부터 선을 가진다. 이 후자가 영적 (평면의) 교회 속에 있는 이들이라 단언된다; 비록 선으로부터 진리가 이 영적 (평면의) 교회인에게 적용하는 것은 적절하지는 않지만, 그들을 두고도 이 용어를 사용하기도 한다. 이에 관해서는 다른 곳에서 더 설명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그들이 운반할 수 있을 만큼 많이. 이는 여유있을 정도로 충분함을 의미한다. 이에 대한 추가 설명은 필요치 않을 것이다.

그리고 각자의 은을 각자의 자루 아구에 놓으라. 이는 자연 평면의 외면에서 진리와 새로이 함께를 의미한다. 이는 “은”의 의미가 진리이다로부터; 그리고 “자루의 아구”의 의미가 자연 평면의 외면의 문지방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새로이 진리라고 말한 이유는 은이 이전에 그들의 자루 아구에 놓인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창. 42:25, 27, 28, 35).

그리고 내 잔, 곧 은잔을 가장 어린 자의 자루 아구에 놓으라. 이는 중매자에게 수여된 내면의 진리를 의미한다. 이는 “은 잔”의 의미가 선행의 선으로부터 있는 신앙의 진리이다로부터, 그리고 이 잔이 “내 잔”, 즉 요셉의 것이라 불리우는 바, 이것은 내면의 진리이다; 중매자로서의 베냐민을 서술할 경우에서, “자루 아구”는 중매자가 자연 평면에 인접되는 곳이 의미된다; 그 이유는 중매자가 중매자이기 위하여는 외적, 내적 측면 양쪽과 교통하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자연 평면의 외면이다; 그리고 여기서 “가장 어린 자”인 베냐민의 표현함이 중매자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상 살핀 바에서 요셉이 자기 은잔을 베냐민의 자루에 놓음에 의해 의미된 것이 분명해졌을 것이다.

그의 곡식(값)인 은. 이는 선으로부터의 진리를 의미한다. 이는 “은”의 의미가 진리이다로부터; 그리고 “곡식(grain)”의 의미가 선이다로부터; 그 이유가 내적인 천적 부분(internal celestial)으로부터 진행하는 내면의 진리, 또는 영적 진리, 이것이 “요셉”이고, 선으로부터의 진리이다.

그리고 그는 요셉이 말한 말에 따라 했다. 이는 그것이 그와 같이 행해졌음을 의미한다. 이는 별도의 설명이 필요 없을 것 같다.

3-5절. 아침이 빛을 자라게 했다. 그리고 사람들은 떠나갔다, 그들과 나귀들도. 4 그들이 도성을 나와 얼마 가지 않아서 였다, 그리고 요셉은 자기 집을 다스리는 그에게 말했다, 사람들을 뒤쫒아 가라, 그리고 네가 그들을 따라 잡을 때 그들에게 말하라, 어찌하여 너희는 선을 악으로 되돌리느냐? 5 이것은 내 주인이 마실 때, 그리고 그분이 점을 칠 때 쓰는 것 아니냐? 너희는 이렇게 하여 악을 행했다.

아침이 빛을 자라게 했다. 이는 그 때 당시 계발되는 상태를 의미한다. 이는 “아침”과 “빛이 자라남”의 의미가 계발되는 상태 이다로부터 알려진다. “아침”은 최고 의미에서 주님이시다; 그리고 그러므로 “아침이 빛이 자라게 했다”라고 말해질 때, 이것은 계발되는 상태를 의미한다, 그 이유가 모든 계발됨은 주님으로부터 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떠나갔다, 그들과 나귀들도. 이는 자연적 인간의 외적 측면이 그것의 진리와 기억 속의 지식과 함께 어느 정도 제거되었다를 의미한다. 이는 여기서 “사람들”이라 말해지는 야곱의 아들들의 표현함이 자연 평면에 있는 교회의 진리들이다로부터, 그러므로 외적 인간이다로부터; “나귀들”의 의미함이 기억 속의 지식들이다로부터; 그리고 “떠나가다 그리고 멀리 있는 것은 아닌 것, 즉 얼마 가지 않은 것”은 자연적 인간의 외적 측면이 그것의 진리들과 기억 속의 지식들과 더불어 얼마 정도 이동되었다가 의미된다. 즉 요셉에 의해 표현되는 내적 부분인 천적 평면(internal celestial)으로부터 얼마 정도 이동되었다가 의미된다.
“나귀들”에 주목해보자, 나귀들은 두 용도로, 즉 사람을 태우거나 짐을 운반하거나 할 때 사용된다는 것은 누구나 익히 아는 바이다; 사사(judge, 판관)들, 왕들, 그리고 그들의 아들들은 암나귀나 숫나귀, 또한 노새를 탓다, 이때 이 짐승들은 합리적 평면을, 또한 자연 평면을, 진리와 선을 의미했다; 이런 이유로 재판관과 왕으로서 주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을 때, 그분은 망아지가 딸린 나귀를 타셨다; 그 이유는 이 모습이 재판관과 왕권의 지위에 대한 표(mark, sign)이기 때문이다. 한편, 여기서와 같이 나귀가 짐을 운반하는 용도에 충당될 때, 그것들은 기억 속의 지식들(memory-knowledges, 또는 factual knowledges, 사실에 입각한 지식들)을 의미했다. 이런 지식들은 짐을 실어 운반하는 나귀와 (쓰임새에서) 다를 바 없다. 인간의 내면의 것들을 놓고 이것은 기억 속에 있는 지식들 그 이상은 아니다하여 그 이상의 생각의 발전이 없는 자는 인간의 모든 것은 이 지식들에 존재한다고 상상하고, 이 지식들이 인간 안에서 최하위 수준의 지식들이다는 것, 아마도 이런 지식 대부분은 육체가 죽을 때 함께 벗어야하는 지식인 줄을 알아채지 못하고 있다; 거기에서는 단지 진리와 선에 애착함과 더불은 (애착된) 진리와 선 만이 남는다; 기억 속의 지식은 진리와 선에게 혼에 대한 몸의 관계 같이 있다. 인간이 세상에 있는 한, 그는 진리와 선, 또는 거짓과 악을 기억 속의 지식 안에 가진다, 그 이유는 이 지식들이 그것들을 함유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지식들은 내면의 것들을 운반하는 바, 짐들을 운반하는 나귀들에 의해 의미되고 있다.

그들이 도성을 나와 얼마 가지 않아서 였다. 이는 이동된 양을 의미한다. 이는 앞에서 살핀 바 있다.

그리고 요셉은 자기 집을 다스리는 그에게 말했다. 이는 지각과 유입을 새로이 함을 의미한다. 이는 “말하다(say)”가 말씀의 역사물들에서의 의미는 지각하는 것이다로부터; 이 지각은 듣고 들은 것을 수용하는 자에 관련되는 지각인 바, 말하는 자에 관련한 유입이 된다; 그 이유가 이 둘은 서로 상호적으로 대답하기 때문이다.

사람들 뒤를 따라 올라가라. 이는 지금 그들을 자체쪽으로 인접하게 할 것임을 의미한다. 이는 “사람들 뒤를 따라가서 그들을 따라 잡는다”가 인접해지는 것이다로부터; 그 이유가 “뒤따르는 것”이 인접하고저 하는 의향을 표시하기 때문이고, “따라 잡다”는 인접함이기 때문이다. 이 장의 나머지는 야곱의 아들들의 귀환이고, 다음 장은 요셉이 자신의 정체를 드러냄, 이를 수단으로 자연 평면의 진리들이 영적 평면의 천적 부분과 결합함이 의미되고 있다. 그러므로 “사람들을 뒤따름”에 의해서는 그들을 자체에 인접되게 하는 것이 의미된다.

그리고 네가 그들을 따라 잡을 때. 이는 중간 정도로 인접함을 의미한다. 이는 그들이 요셉의 집을 다스리는 자에 의해 따라 잡힐 때의 의미가 중간 정도의 인접함이다가 분명해진다.

그들에게 말하라, 어찌하여 너희는 선을 위하여 악으로 되돌리느냐? 이는 떠나간 이유를 의미한다. 이는 “선을 위하여 악을 되돌리는 것”이 떠나감(돌아섬, return away)을 의미한다로부터, 그 이유는 악이 선에게 할 수 있는 것은 떠나감밖에 더 없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악 안에 있는 자는 선에 대해, 즉 선행과 신앙으로부터 있는 영적 선에 코방귀를 뀌기 때문이다. “악”이 떠나감이다는 것은 다른 삶에 있는 악한 자로부터 분명해진다; 그 이유가 그들은 천국의 빛에서는 발이 위쪽으로, 머리는 아래쪽으로 하여 있기 때문(3641항), 고로 완전히 거꾸로하여 있는 바, 돌아섬과 같기 때문이다.

이것은 내 주인이 마실 때 쓰는 것 아니냐. 이는 그들과 더불어 있는 내면의 진리는 천적 평면으로부터 받은 것이었음을 의미한다. 이는 “잔(cup)”의 의미로부터, 즉 “이것은 내 주인이 마실 때 쓰는 것”에 의해 뜻해진 것이 내면의 진리이다로부터; 그리고 여기서 “나의 주인”인 요셉의 표현함이 영적 평면의 천적 부분이다로부터, 여기서는 천적 평면인데, 그 이유는 내면의 진리가 취급되고, 이 진리는 영적인 것이고, 천적 평면으로부터 진행되기 때문이다. 이것을 받는 것이 요셉의 명령에 의해 베냐민의 자루 아구에 놓여진 잔에 의해 의미되고 있다.
그들은 마치 자기들이 잔을 가져간 것처럼 고소당하고 있다. 고소당하는 이유는 잔이 거기에 있어왔다는 사실(fact)만 가지고서 인데, 이유는 내적 의미로부터 분명해진다. 즉: 주님에 의해 수여되는(bestow, 또는 주님께서 나누어 주신, impart) 진리는 처음에는 그것이 주님으로부터 수여되지 않은 듯한 상태에서(주님이 나누어 주신 것이 아닌 듯한 상태에서) 받아진다; 그 이유가 거듭나기 이전에서의 인간은 자신이 진리를 포획했다고 상상하기 때문이다. 그가 이렇게 상상하는 동안, 그는 영적 도둑이 되어 있는 셈이다. 진리와 선이 자신의 것이라고, 이것은 자신의 정의와 공적의 결과물이라고 하는 한, 그는 그분의 것인 진리와 선을 자신에게로 갈취한 것이다. 이 상황이 표현되기 위하여 요셉에 의해 명령된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도둑으로 몰린 이유는 결합이 결과되기 위함이었다. 인간이 거듭나기 이전일 동안은 그는 자신의 선함, 정의, 공적이 자신의 잘난 탓이라고 믿는 것을 완전히 탈피하지 못한 영적 도둑으로 있는다는 말이다. 실로 그는 입술로는 신앙의 모든 진리와 선행의 선이 주님으로부터 이다는 것을 교리로부터 말하지만, 그가 심정으로부터 인정하는 때인, 신앙이 선 안에 심어질 때까지 실로 그는 자기가 말한 그 교리를 믿지 않고 있다.
교리로부터의 고백은 신앙으로부터의 고백과 아주 다르다. 선 안에 있지 않은 누구라해도 그는 교리로부터 고백할 수 있다, 그 이유가 이들에게 있어서 교리는 지식 수준이기 때문이다; 누구이든, 그가 영적 선 안에, 즉 이웃을 향한 선행 안에 있지 않으면, 그는 신앙으로부터 고백할 수 없다. 결합이 야기되기 위하여 야곱의 아들들이 도둑으로 고소당하고 있다는 것은 이것을 빌미로 요셉이 그들을 되돌아오게 하고, 한동안 자기들이 했던 것에 대해 되돌아 보는 한편, 그 사이에 요셉이 자신의 정체를 밝혀 자신을 그들에게 결합되게 한다.

이것으로 그가 점을 친다. 이는 천적 평면은 감추인 것들을 그것의 신성으로부터 안다를 의미한다. “점을 친다”란 감추인 것들을 아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이 신성으로부터 이다인 이유는 “요셉”인 영적 평면의 천적 부분이 신성으로부터의 진리를, 또는 신성이 안에 있는 진리를 표현하기 때문이다.

너희는 이렇게 하여 악을 행했다. 이는 그것이 자신들의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신성한 법에 반대된다를 의미한다. 이는 “도둑”의 의미가, 즉 여기서 “그들이 했던 악”에 의해 뜻해진 것의 의미가 주님에 속한 것을 자기 것이라고 요구하는 것, 요셉의 은잔에 의해 의미된 진리가 자기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것이 신성한 법에 반대되는 것은 분명하다. 인간이 주님으로부터 인 것을 자신의 것이라고, 즉 진리와 선이 자신의 것이라고 주장해서는 안되는 이유는 그가 진리 안에 있기 위하여서 이다; 그가 진리들 안에 있는 만큼에서, 그는 천사들이 있는 천국의 빛 안에 있는다; 그가 이 빛 안에 있는 만큼에서, 그는 총명과 지혜 안에 있다, 그리고 그가 총명과 지혜 안에 있는 만큼에서 그는 행복함 안에 있다이것이 인간이 심정의 신앙으로부터 모든 진리와 선은 자신으로부터 있지 않고 주님으로부터 있다를 인정해야 하는 이유이다. 이것이 당연한 진리임을 인간은 인정해야 한다.

6-10절. 그리고 그가 그들을 따라 잡자, 그는 그들에게 이런 말들을 이야기했다. 7 그리고 그들은 그에게 말했다, 어찌하여 내 주인께서는 이 말들에 따라 이야기를 하십니까? 당신의 종들은 이런 말과는 거리가 멈니다. 8 보시다시피, 우리는 우리 자루의 아구에서 발견했던 은도 우리는 가나안의 토지로부터 당신에게 되가지고 왔습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우리가 당신의 주인 집에서 은, 금을 훔치겠습니까? 9 그것이 발견되는 자는 누구이든지 그는 죽을 것이며, 우리 또한 내 주인에게 종이 되어 있을 것입니다. 10 그리고 그는 말했다, 이제 네 말에 따라 그렇게 하겠다. 그것이 발견되는 자는 나에게 종이 될 것이고, 너희는 죄없으리라.

그리고 그는 그들을 따라 잡았다. 이는 인접함이 중간 정도에 와 있다를 의미한다. 이는 이미 설명했다.

그리고 그는 그들에게 이런 말들을(요셉이 지시했던 것을) 이야기했다. 이는 이런 것이 유입됨을 의미한다. 이는 “이야기 하다(speak)”가 유입이다로부터; 그리고 “말들”의 의미가 어떤 것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어떤 것”, 그리고 “말들”은 원어에서는 동일한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그리고 그들은 그에게 말했다. 이는 지각을 의미한다. 이는 말씀의 역사적 부분에서 “말하다”가 지각하다임에서 알려진다.

어찌하여 내 주인은 이 말들에 따라 (이런 식으로) 이야기를 하십니까? 이는 이와 같은 것이 왜 흘러드는지 반영해봄을 의미한다. 이는 “이야기를 하다”가 흘러듦이다로부터; 그리고 “이 말들에 따라”의 의미는 이런 것, 또는 저런 것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어찌하여”라는 단어 안에 반영해봄이 포함되었는데, 이는 자신에게 묻는 단어로 사용되고 있다.

이런 말들에 따라 행동하는 것은 당신의 종들에게는 거리가 멈니다. 이는 그것이 의지로부터가 있지 않다를 의미한다. 즉 진리를 자신들의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에 대해서이다. 이는 “행동하다”의 의미가 의지쪽으로 이다로부터; 그 이유가 모든 행위는 의지로부터 있기 때문이다. 행위 자체는 자연 평면이고, 의지는 행위의 영적 근원이다. 고로 “당신의 종과는 거리가 멀다”는 의지로부터 있지 않다가 의미된다.

보라 우리가 우리의 자루의 아구에서 발견한 은. 이는 진리가 무료로 수여되었을 때를 의미한다. 이는 “은”의 의미가 진리이다로부터; 그리고 “우리가 발견했다”의 의미가 무료로 수여되었다 이다로부터; 그리고 “자루의 아구”의 의미가 자연 평면의 외면의 문지방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우리는 그것을 가나안의 토지로부터 되가지고 왔습니다. 이는 종교의 원리로부터 복종시켰음을 의미한다. 이는 “되가져오다”의 의미가 복종하게 하다 이다로부터; 그리고 “가나안의 토지”의 의미가 종교적인 것이다로부터 알려진다. “가나안의 토지”는 많은 것들을 포함한다, 그 이유는 그 토지는 아주 많은 것들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주님의 왕국, 교회, 결과적으로 교인까지도 포함한다, 그 이유는 한 개인도 교회이기 때문이다. 이런 사항들을 의미하는 바, 교회의 천적 평면, 즉 사랑의 선도; 또한 교회의 영적 평면인 신앙의 진리도 의미한다; 그러므로 교회 속에 있는 종교적 원리까지도 의미한다. 고로 누구도 진리와 선이 자신의 것이라고 주장해서는 안된다 라는 것도 교회의 종교적 원리 속에 있다. 이상 살핀 바만 가지고도 동일한 표현이 여러 가지 사항들을 포함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한 복합체 안에서 몇 개의 사항들을 포함하는 경우, 이것은 시리즈에 따라 있는 내적 의미를 포함한다.

그런데 어떻게 우리가 당신 주인의 집에서 은이나 금을 훔치겠습니까? 이는 어찌 우리가 신성한 천적 평면으로부터인 진리와 선을 우리 것이라고 주장할까를 의미한다. 이는 “훔치다(steal)”의 의미가 주님에 속하는 영적 의미를 자신의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로부터; “은”의 의미가 진리이다로부터; 그리고 “금”의 의미가 선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 44장 전체를 망나해 영적 도둑, 즉 주님으로부터 있는 진리와 선을 자신으로부터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 취급되고 있다. 사실 이 주제는 아주 큰 주제이어서, 사후 이런 인간은 천국 안으로 입장되어질 수 없게 된다. 다시 말해 진리와 선은 주님 만으로부터 있고, 자신으로부터서 있는 악밖에 없다는 것을 심정에서 인정할 때까지 (영들의 세계에 머무를지는 모르나)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 이것이 그러하다는 사실은 사후 인간에게 많은 경험을 수단으로 보여진다. 천국에 있는 천사들은 모든 선과 진리는 주님으로부터 있다는 것을 명백하게 지각하고 있다; 더욱이 주님에 의해 자신들은 악으로부터 보류(억제) 되고, 동시에 선 안에, 마찬가지로 진리 안에 간직된다는 것, 이 역사는 강력한 힘에 의해서 이다는 것을 확실히 지각하고 있다.
이에 대하여 내가 지각하도록 많은 햇수 동안 허락해주셨다. 하여 내가 나 자신에 남아 있는 만큼 나는 악들에 침수되었고, 내가 주님을 수단으로 악들이 억제되는 만큼에서 나는 악으로부터 선 안으로 들리워졌다. 진리와 선을 자기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천국을 통치하는 극히 보편적 진리에 반대된다, 뿐만 아니라 모든 구원은 자비 속에 있다는 것, 자신으로부터서는 지옥 안에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 거기로부터 주님을 수단으로 끌어져 나오는 것도 자비로부터 이다는 것을 인정함에도 반대 된다. 인간은 자신으로부터서는 악밖에 없고 모든 선은 주님으로부터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그는 진정 굴종함(부끄러이 여김, humiliation) 안에 있어질 수 없고, 결과적으로 주님의 자비를 받을 수도 없다 (그 이유는 주님의 자비는 굴종이나 겸허함 안으로만 흘러들기 때문이다). 이 인정함이 결여될 경우, 그는 (선에 관련한 ) 공적을 자신의 (잘난) 탓으로 돌리고, 급기야 자신이 행하는 것은 무엇이든 정의로서 간주하는 지경에 이른다; 그 이유가 주님으로부터 인 모든 진리와 선을 자신의 것이라 주장하는 것이 자신을 정의롭다로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많은 악들의 근원이다; 그 이유가 이때 그는 자기가 이웃에 행하는 모든 것 안에서 자아를 중시하고 있고, 그가 이것을 행동할 때, 실상 그는 자신을 다른 이들 위에서 사랑하고, 이때 그는 다른 이들을 내리깔본다, 물론 입이 아닌 심정에서 그렇다는 말이다. (심정에서 그렇게 있는 것은 결국은 얼굴 표정이나 눈빛 같은 것에서, 챤스만 닿으면 입으로도 까벌리는 경우도 발생하는 것 같다 역자주)

그것이 발견되는 당신의 종은 누구든지 죽을 것입니다. 이는 그렇게 행한 자는 지옥에 떨어진다를 의미한다. 이는 “죽는다”가 지옥에 떨어진다를 의미함으로부터; 그 이유가 영적 죽음은 지옥에 떨어짐밖에 더 아니기 때문이다. 이는 방금 살핀 것 같이, 즉 주님으로부터 있는 모든 진리와 선을 자신의 것이라고 주장하는 자는 천국 안에 있을 수 없다는 것, 그러나 천국 밖에 있어야 한다는 것; 그리고 천국 바깥에 있는 자는 지옥에 떨어질 일만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법칙은 진리로부터의 심판이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심판이 선으로부터 만들어지는 경우도 있다, 즉 당사자의 무지함, 또는 단순함으로부터 진리와 선이 자기 것이라 주장한 자는 지옥에 떨어지지는 않는다, 그러나 다른 삶에서 황폐함(vastation)이라는 방법에 의해 자유한 가운데 놓여 있는다. 더욱이 모든 이는 자신으로부터 참되고 선인 것을 실행해야 하나, 이것의 주인은 주님이심을 믿고 있어야 한다. 이것이 그렇다 하여질 때, 그의 총명과 신앙이 발전하면서, 그는 진리와 선의 근원이 자아이다는 오류를 벗어 던지고, 결국 자신이 행하는 선, 자신이 생각하는 진리의 모든 자신의 노력 까지도 주님으로부터 있었고, 지금도 있다는 것을 심정에서 인정한다. 그러므로 요셉에 의해 보내진 자는 비록 실로 그가 (차후) 확증할 지라도, 현재로서는 잔이 발견되는 자는 죽어야 한다는 판결함을 거절한다; 즉 그가 말한다, “이제 너희 말들에 따라 그렇게 하겠다; 잔이 발견되는 자는 나에게 종으로 있고, 너희는 죄가 없을 것이다.” 이는 보다 관대한 판결문이다. 그러나 무지와 단순성으로부터가 아니고, 신앙에서, 삶에서 확증한 원리로부터 인 경우는 다르다; 허지만 그들이 선인 것을 행한 이상, 주님께서는 자비로부터 거기에도 무지와 단순함이 어느 정도는 있다고 인정해주신다.

그리고 우리 역시 내 주에게 종이 될 것입니다. 이는 그들은 그들 자신으로부터는 자유함 없이 영원히 연계되어 있을 것이다를 의미한다. 이는 “우리 역시”의 의미가 연계됨이다로부터; 그리고 “종이다”의 의미가 자신으로부터의 자유함 없이 있는다 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 이유가 종인 자는 주인 자신과 주인의 자유함에 의존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자아로부터는 자유함 없이 있는다는 것에 대하여는 주님의 신성한 자비로부터 이어지는 페이지들에서 말해질 것이다.

그리고 그는 말했다, 지금 네 말들에 따라. 이는 참으로 그것은 공정으로부터 그렇게 있을 것임을 의미한다. 이는 앞서 설명한 곳으로부터 분명해진다. 이 짓을 한 자는 죽어야 함이 공정함으로부터 임이 “지금 너희 말들에 따라”에 의미되어 있다; 그러나 관대한 판결이 이어진다.

그와 같이 하리라. 이는 관대한 판결을 의미한다. 이 판결이 뒤이어진다.

그것이 발견되는 자는 누구이든지 나에게 종이 된다. 이는 그렇게 있는 자는 그 자신의 자유로움 없이 영원히 있을 것임을 의미한다. 이는 “종”의 의미가 자신 스스로부터의 자유함이 없다 이다로부터 알게 되는데, 여기서의 경우는 이렇다: 요셉의 명령에 의해 베냐민과 더불어 있는 은잔은 내면의 진리를 의미한다. 내면의 진리에 있는 자는 모든 진리와 선이 주님으로부터 이다는 것, 또한 자신으로부터의 모든 자유, 또는 인간 자신으로부터의 자유는 지옥적이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 이유가 그가 자신의 자유로부터 생각하고 행동할 때, 그는 악밖에 더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모든 악은 지옥으로부터 흐르는 바, 그는 악마의 종인 것이다. 또한 이런 상태인 자는 이 자유함에서 기쁨을 느낀다, 그 이유는 자신이 자닌 악과, 자신이 태어난 악과 일치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자신으로부터의 자유는 반드시 중단되어야 하고, 그 대신 천국의 자유를 옷입어야 한다. 이 자유는 선인 것을 뜻하고 그것을 행함에 있다. 인간이 이 자유를 받을 때, 그는 주님의 종이다, 이때 그는 자유함 자체 안에 있고, 그가 전에 지녔던 자유함, 그때 당시 그에게 자유 같이 나타났던 자유에 속박되어 있지 않다.

그리고 너희는 죄없다. 이는 나머지는 그들 자신의 처분대로 맡겨질 터인데. 그 이유는 과오를 나누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는 종에 관련하여 “죄없다, 비난할 점이 없다”는 것은 그들 자신의 처분(아량)에 맡겨도 된다는 것이 의미된다; 즉 과오를 부담질 일 없기 때문인데 이어진다. 이방인들 사이에서 오래된 관습 중의 하나는, 누군가가 죄를 지었을 때, 그의 동료들을 위법자로, 심지어는 그의 모든 집안을 위법자로 간주해 처벌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법은 지옥으로부터 파생된 것들이다; 거기서는 모든 동료들이 함께 악들에 가담하기 때문이다. 거기의 사회들은 선에 맞서 하나로서 행동하므로 이럴 때는 한 형제인 듯 하나, 저들 끼리에서는 서로를 향해 증오함만 증폭시키고 있다. 그들은 강도들의 하나됨, 우정관계이다. 그러므로 지옥의 동료들은 악을 위해 함께 연계되는 바, 그들이 악을 행할 때, 그들 모두가 처벌된다. 그러나 세상에서 지옥에서 같이 행하는 것은 신성한 질서에 반대 된다; 그 이유가 세상에서는 상대의 내면이 드러나 있지 않기 때문이다; 하여 상대를 파악하지 못하여, 세심한 주의력의 결핖 같은 것으로 선한 자가 악한 자에 끼여있는 형국도 많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세상의 인간들을 위한 신성의 법은 자신의 불법에서 처벌됨이다. 즉:
아버지들 (선조)이 아들들을 위하여 죽지 않을 것이고, 아들들이 아버지들을 위해 죽지 않 을 것이다; 모두 각각은 자신의 죄에서 죽임을 당한다 (신. 24:16).
에스겔서에서:
죄지은 혼이 죽을 것이다, 아버지가 아들의 불법을 낳지 않는다. 정의로운 자의 정의가 그 자 위에, 사악한 자의 사악함은 그 자 위에 있을 것이다 (겔. 18:20).
이런 구절들로부터 분명해지는 것은, 본문의 야곱의 아들들의 경우이다: 즉 “그것이 당신의 종들의 누구에게서 발견되든 그는 죽을 것이고, 우리 역시 종으로 내 주에게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셉에 의해 보내진 자는 자기 판단을 바꾸어 말했다, 즉 “발견되는 자는 나의 종이 되고, 너희에게는 죄 없다”; 그러나 여기에 유다가 요셉에게 더 말을 보탠다, “보라 우리는 나의 주에게 종들이다, 우리와 잔이 발견된 자 또한.” 요셉이 말했다, “내가 이것을 행함은 나로부터 멀다; 잔이 발견된 자만이 나의 종이다; 그리고 너희는 너희 아버지에게 평화로이 가라 (16, 17절).

11, 12절. 그리고 그들은 황급해졌다, 그리고 그들은 각자 자기 자루를 땅에 내려놓고, 제각기 자기 자루를 열었다. 12 그리고 그는 뒤졌다. 그는 가장 나이 많은 자부터 시작했다. 그리고 가장 어린 자 까지 뒤졌다. 그리고 잔이 베냐민의 자루에서 발견되었다.

그리고 그들은 황급해졌다. 이는 성마름을 의미한다. 각 개인이 자신을 분명히 할 경우, “황급함”은 성마름을 의미하게 된다.

그리고 각자는 자기 자루를 땅에 내려 놓았다. 이는 그들은 자연 평면에 있었던 것을 감각의 것들쪽으로 내려가게 가져다 놓았다를 의미한다. 이는 “내려가게 만드는 것”이 이어지는 것과 관련지을 때, 가져다 놓다가 의미된다; “자루”의 의미가 자연 평면의 외면이다로부터; 그리고 “땅”의 의미가, 여기서 그들로 “땅에 내려 놓았다”라고 말해질 때의 경우, 최말단, 가장 낮은 것, 고로 감각의 것이다로부터, 그 이유가 감각의 것들은 세상 바깥쪽으로 문지방 자체에 있기 때문이다. 감각의 것들쪽으로 가져다 놓는 것은 어떤 것이 그러한지를 통째로 확증하는 것이다; 그 이유가 주제가 감각의 증거쪽으로 가져와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제 각각 자기 자루를 열었다. 이는 그들은 이런 식으로 이 주제를 자신에게 명백히 할 수 있을런지 모른다를 의미한다. 이는 “자루를 염”이 자연 평면에 있는 것을 여는 것, 고로 주제를 명백히 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는 뒤졌다. 이는 탐사를 의미한다. 설명은 필요 없다.

그는 가장 나이 많은 자에서 시작하여 가장 어린 자에까지 뒤졌다. 이는 질서를 의미한다. 앞에서 살폈다 (5704항).

그리고 잔이 베냐민의 자루에서 발견되었다. 이는 천적 평면으로부터 온 내면의 진리가 중매자와 함께 있었음을 의미한다. 이는 “잔”의 의미가 내면의 진리이다로부터; 그리고 베냐민의 표현함이 중매자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천적 평면으로의 이런저런 진리가 중매자와 더불어 있다는 것은 요셉의 명령에 의해 베냐민의 자루에 놓여진 잔에 의해 의미되는데 이미 살핀 바 있다.

13-17절. 그리고 그들은 자기들 옷을 찢었다, 그리고 각자의 것들을 자기 나귀에 싣고 성으로 돌아 왔다. 14 그리고 유다와 그의 형제들은 요셉의 집으로 들어 갔다, 그리고 그는 아직 거기에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그 앞에서 (얼굴을) 땅으로 떨구었다. 15 그리고 요셉은 그들에게 말했다, 너희들이 한 짓은 대체 어찌된 것이냐? 너희는 내가 점을 하는 자인 줄을 몰랐느냐? 16 그리고 유다가 말했다, 우리가 내 주께 무슨 말을 하리이까? 우리가 무엇을 말할 수 있으리이까? 그리고 어떻게 우리가 정당하리이까? 하느님께서 당신의 종의 불법을 들추어내셨습니다. 보라 우리는 내 주에게 우리 모두 종입니다. 그리고 잔이 발견된 자도 그러합니다. 17 그리고 그는 말했다, 이런 행동은 나로부터는 거리가 멀고, 잔이 발견된 자 만이 나에게 종이 되리라. 그리고 너희들은 너희 아버지에게 평화로이 올라 가라.

그리고 그들은 자기들 옷을 찢었다. 이는 슬퍼함을 의미한다. 이는 “옷을 찢다”의 의미가 진리가 잃어짐 때문에 슬퍼함이다로부터; 여기서는 그들이 자신들의 것이라고 더 이상 주장하지 못하는 진리들 때문에 있는 슬픔인데, 그 이유는 자기들이 요셉의 집을 다스리는 자의 면전에서(9절), 또한 요셉의 면전에서(16절) 종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조건으로 내세운 까닭 때문이다. 이로 인해 그들은 자신들로부터의 자유함 없이, 고로 자신들로부터의 진리들 없이 있을 것이 의미되었다; 자신들로부터의 진리들 때문에 슬퍼함에 주목하면, 이것은 그들이 “자기 옷들을 찢음과 종으로 자신들을 만듦을 제공함”에 의해 의미되고 있는 바, 여기서 알려지는 것은 거듭나지는 이들과 더불어 반전(돌아섬, turn about, 거꾸로 움직임, reversal)이 거행된다는 것이다. 즉 그들은 진리를 수단으로 선쪽으로 인도되고, 후에 선으로부터 진리쪽으로 인도되는 경우이다. 이런 반전이 거행될 때, 또는 상태가 바뀔 때, 이전 것의 거꾸로가 되어 아침이 있다; 그 이유가 그들이 (진리를 수단으로 할 경우) 시험 안으로 놓여지고, 자신의 것이 약해지고, 부셔지고, 그 사이에 선이 은근히 심어지고, 선과 더불어 새로운 의지가, 그리고 새 의지와 더불어 새 자유함이, 고로 새로운 자신이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요셉의 형제들이 요셉에게로 자포자기한 채로 돌아오고, 자신들을 종으로 제공하고, 한동안 그들이 이런 상태에 있는데, 즉 시험 이후 일 때까지 요셉이 자신의 정체를 밝히지 않음을 수단으로 함이 표현되어져 있다; 시험이 정복되었을 때, 주님께서 위로하심으로 그들 위에서 빛을 비추이신다.

그리고 각자의 것을 나귀에 싣고, 성으로 돌아 왔다. 이는 진리들이 감각 속의 것으로부터 기억 속의 지식들에로 되돌려졌음을 의미한다. 이는 “나귀”가 기억 속의 지식이다로부터; “나귀에 싣고”에 의해서는 감각의 것들로부터 되돌려 가져옴이 뜻해지는데, 그 이유는 “자기들의 자루를 땅에 내려 놓다”에 의해 자연 평면에 있는 것을 감각 속의 것쪽으로 내려놓음이 의미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것을 들어올림이 여기서 “싣다”에 의해 뜻해진다; 그리고 “도성”의 의미가 교리적인 진리이다로부터 알려진다.
진리를 감각 속의 것들로부터 기억 속의 지식들 안으로 되돌려 가져다 놓는 것을 살펴보자: 감각 속의 것들과 기억 속의 것들, 그리고 진리들은 다르다. 그것들은 서로가 교대로 이어받아 간다(연속적이다); 그 이유가 기억 속의 지식들은 감각 속의 것들로부터 출시된다; 진리들은 기억 속의 지식들로부터 출시된다; 그 이유가 감각들에 의해 들어간 것들은 기억 안에 쌓여진다, 그리고 그것들로부터 인간은 기억 속의 지식들이다는 것에 대해 결론을 내린다, 또는 그것들로부터 그가 배운 기억 속의 지식을 지각한다; 기억 속의 지식으로부터 그는 진리들이다는 것에 대해 결론을 내린다, 또는 그가 배운 진리들을 그것으로부터 지각한다. 모든 이는 이런 발달 과정을 반복하면서 어린 시절로부터 성장해 간다. 그가 아이일 때, 그는 감각으로부터의 것들로부터 어떤 것들을 생각하고 납득한다; 그가 나이 들어감에 따라, 그는 기억 속의 지식들로부터 어떤 것들을 생각하고 납득한다; 후에는 진리들부터 이다. 이런 연속적인 교차 과정이 나이와 더불어 진행되면서 그의 판단력도 성장한다.
이상 간단한 설명만 가지고도 감각으로부터의 것들, 기억 속의 지식들, 진리들이 어떻게 구분되는지를 알았을 것이다. 인간은 때로는 감각으로부터의 것들 안에 있는 만큼에서 그때는 그 만큼 그는 감각들로부터 만나는 것들만을 생각하게 된다. 그가 기억 속의 지식들 안에 있는 경우, 그때는 그는 그만큼 그의 마음을 감각들로부터 승강되게 하여 내면적으로 생각한다. 그가 기억 속의 지식들로부터 결론을 가진 진리들 안에 있는 경우, 그때는 그는 더 내면적으로 생각하고 있다. 아마 각자가 자신을 곰곰이 되살피면, 이런 과정이 자신 안에서 늘 거행됨을 눈치 챈다. 또한 인간은 진리들을 기억 속의 지식 안으로 내려와 가져다 놓고, 이것들 안에서 진리들을 보기도 한다; 그리고 그는 기억 속의 지식들을 감각 속의 것들 안으로 내려다 놓을 수 있다, 그리고 감각들 안에서 그 지식들을 찬찬히 들여다 볼 수 있다, 뿐만 아니라 둘 간에 담화도 한다. 이상 살핀 바로부터 자연 평면에 있는 것을 감각 속의 것쪽으로 내려 놓는 것, 그리고 감각 속의 것들로부터 진리들을 기억 속의 지식들 안으로 되가져다 놓는 것에 대해 분명해졌을 것이다.

그리고 유다와 그의 형제들은 들어갔다. 이는 교회의 진리들과 더불은 교회의 선을 의미한다. 이는 유다의 표현함이 교회의 선이다로부터; 그리고 그의 형제들의 표현함은 자연 평면에 있는 진리들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유다가 들어가서 요셉과 이야기를 한 것이지, 첫 출생인 르우벤이 말하지 않은 것, 더욱이 다른 형제들이 아닌 이유는 유다가 표현하는 것이 선이기 때문에서 이다; 신성으로부터 있는 천적 평면과 교통하는 것은 선이지 진리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진리는 선을 통하여서가 아니면 신성과 교통을 가지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유다가 이야기를 한 것이다.

요셉의 집. 이는 내적 부분과 교통함을 의미한다. 이는 “집에 들어감”의 의미가 교통함이다로부터; 그리고 요셉의 표현함이 내적 부분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집에 들어감”이 교통함을 표시하는 이유는 “집”에 의해 인간 자신이 의미되기 때문이다, 고로 인간을 만드는 것, 즉 진리와 선과 더불은 인간의 마음이 의미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집에 들어감”이 말해질 때, 이는 그의 마음 안으로 들어감을 뜻하는 바, 교통함을 가진다는 말이 된다.

그리고 그는 아직 거기에 있었다. 이는 예견을 의미한다. 이는 그들이 되돌아오리라는 것이 요셉에 의해 예견되었다는 사실로부터 이다; 그래서 그는 집에 머물렀고, 자신을 베냐민에게 밝히 알리려고, 결과적으로는 다른 이들에게까지도 자신을 밝히기 위함이 되었다; 그리고 내적 의미에서 결합이 자연 평면의 진리들과 신성의 천적 평면과 결과된다. 여기서 “예견”이라 말한 이유는 이 의미에서 “요셉”인 주님이 최고 의미에서 취급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은 요셉 앞에서 땅에 엎드렸다. 이는 굴종을 의미한다. 이는 설명 없이 알 것이다.

그리고 요셉이 그들에게 말했다. 이는 그때 그들이 지각함을 의미한다. 이는 “말하다”가 지각하다를 의미함으로부터; 이것이 그들이 지각함인 이유는 이것이 요셉에 의해 말해지고, 요셉에 의해 내적 부분이 표현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적 부분으로부터, 즉 주님으로부터 내적 부분을 통하여 모든 지각함이 오기 때문이다. 지각의 근원은 이외에는 없다, 감각으로부터가 아니다. 그런데 마치 감각으로부터인 듯하게 나타난다, 마치 지각함이 외적 부분으로부터 유입에 의해 오는 듯하게 나타난다는 말이다; 그러나 이것은 오류이다, 그 이유가 내적 부분이 외적 부분을 통하여 느껴지는 것일 뿐이기 때문이다. 육체에 놓여진 감각들은 세상에 있는 것들을 감각할 수 있기 위해 내적 부분을 돕는 기관 또는 도구일 뿐이다; 그러므로 내적 부분이 외적 부분 안으로 흘러들어 외적 부분이 느끼도록 하고, 식별하여 보다 더 완전해지려는 쪽을 향한다. 그러나 거꾸로는 아니다.

대체 너희들은 어떤 짓을 했느냐? 이는 그들의 것이 아닌 것을 자기들 것이라고 우기는 것은 매우 큰 악이다를 의미한다. 이는 그들이 고발당한 원인인 도둑의 의미가 주님에 속하는 진리와 선을 자기들의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것은 내적 의미에서 뜻해지는 “짓, deed, 행위”이다.

너희는 내가 점을 치는 줄을 알지 못하느냐? 이는 이것은 미래와 감추인 것을 보시는 그분으로부터 감추여 있을 수 없음을 의미한다. 이는 “점을 치다, divining”의 의미가 그분의 신성으로부터 감추인 것들을 아는 것이다로부터 알려진다 (5748항), 또한 미래의 것들을 아신다, 그 이유는 여기서 “요셉”인 주님이 최고 의미에서 취급되기 때문이다, 감추여 있을 수 없다는 것은 단어 자체로부터도 분명하다.

그리고 유다는 말했다. 이는 자연 평면 안에서 교회의 선에 주어진 지각을 의미한다. 이는 “말하다”의 의미가 말씀의 역사 부분에서는 지각함이다로부터; 이것이 “주어진다”인 이유는 모든 지각함은 내적 부분으로부터 오기 때문, 즉 주님으로부터 내적 부분을 통하여 흐르기 때문이다; 그리고 유다의 표현함이 교회의 선이다로부터 알려진다. 유다가 표현하는 것에 주목해보면, 그는 최고 의미에서 신성한 사랑 측면에 관련되는 주님을, 내적 의미에서는 그분의 천적 (평면의) 왕국을, 고로 이 평면에 있는 사랑의 천적인 (수준의) 것을; 여기서는 자연 평면의 교회에 있는 사랑으로부터의 선을 표현한다. 그 이유는 지금의 경우는 내적 부분과 결합되어지려는 자연 평면에 있는 것들을 표현하는 이들 사이에 있기 때문이다.

내 주께 무슨 할 말이 있으리이까? 무슨 말을 하리이까? 이는 혼란해짐을 의미한다. 이는 이 말들의 표현의 느낌으로부터 알게 된다.

그리고 우리가 어찌 정당하리이까? 이는 우리는 죄지었음을 의미한다. 이는 “어찌 정당해지겠는가?”의 의미가 (즉 그들은 정당해질 수 없다)가 그들은 죄지었다 이다로부터; 그 이유는 정당해질 수 없는 자는 죄지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자신들이 죄지었다고 인정하는 것은 그들이 요셉에게 종으로 자신들을 제공함으로부터 분명해진다.

하느님께서 당신의 종들의 불법을 찾아내셨다. 이는 고백을 의미한다. 즉 그들이 잘못했음에 대한 고백을 의미한다. 이 잘못이란 그들이 요셉을 판 것에 대한 잘못인데, 내적 의미에서 그들이 진리와 선으로부터 자신들을 멀리 하게 만들었다는 것, 그렇기 때문에 자신들을 내적 부분으로부터 분리되게 했다는 것에 대한 고백이다.

보라 우리는 내 주에게 종들입니다. 이는 그들은 그들 자신의 자유로부터 영원히 박탈되어지게 됨을 의미한다. 이는 “종들”의 의미가 그들의 자신으로부터의 자유함 없이 있다 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들 자신으로부터의 자유함이 박탈되어진다는 것에 대하여는 이미 말한 적이 있으나, 이는 대단히 중요한 주제인 바, 다시 살피는 기회를 가지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외적 인간이 있고, 내적 인간이 있다; 외적 인간을 통하여 내적 인간이 행동한다; 그 이유가 외적 인간은 내적 인간의 도구 내지 기관이기 때문이다. 이럴진대, 외적 인간은 내적 인간에 통째로 종속되어야 함이 틀림이 없다. 이렇게 종속될 때, 천국은 내적 인간을 통하여 외적 인간 안으로 들어가 천국의 이런저런 것들에 따라 배열하고 행동한다.
이와 반대의 경우도 있다. 이는 외적 인간이 종속되지 않을 때, 오히려 통치할 때이다. 이때의 인간은 그의 목적으로 육체와 감각의 쾌락을 가지고, 특히 자아 사랑과 세상 사랑을, 한마디로 천국에 속하지 않은 것을 가진다. 목적으로 가지는 것을 인간은 사랑하고 목적에 관련 없는 것은 사랑하지 않는다. 인간이 위와 같은 목적을 가진다면, 그는 내적 인간이 있다는 것, 육체가 죽을 때 영원히 살게 되는 것이 자신 안에 있다는 것을 믿지 않는다. 그의 내적 인간은 외적 인간이 선과 진리에 반대하여 생각하고 추론하는 것이 가능해지게 하는 것만을 도울 뿐이다. 그 이유는 이럴 경우에 내적 인간이 열려 다른 유입이 없기 때문이다. 이런 인물은 천국 속의 것들을 통째로 경멸하고, 되돌아 서있기 까지 한다. 이상 간단히 살핀 바로도 분명해지는 것은, 외적 인간은 자연적 인간 같이 영적 인간인 내적 인간에 정녕 종속되어 있어야 하리라는 것, 결과적으로 그것 자신의 자유함으로부터 있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자신으로부터의 자유함은 갖가지 종류의 쾌락들에 몰입하고, 자신과 비교해 타인을 경멸하며, 타인을 박해하고 증오함에서 기쁨을 얻는 악 안에 머물게 하고, 의도적이고 사기적으로 휘두르는 일명 무 양심에서 상대를 죽음으로까지 내몰리게 해도 아랑곳하지 않게 된다. 이런 결과들로 치닫는 것이 자신으로부터의 자유함이다. 그러므로 자신으로부터의 자유함에 있는 인간은 껍질만 인간일 뿐 악마인 것이다. 그가 이런 그의 자유함을 스스로 포기하는 기회를 가질 때여야만, 그는 주님으로부터 천국의 자유함을 받게 된다, 그러나 이런 자유는 자신으로부터의 자유함을 가진 자들에게는 지독하게 알려져 있지 않다. 이런 자들이 상상하는 것은 자신의 자유를 잃으면 자신의 모든 생명은 남은 것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진실된 생명 자체는 이때부터 시작된다. 그리고 주님으로부터의 환희와 행복이 있다.

우리 모두. 이는 연루됨을 의미한다. 이는 “우리 모두”라는 말 자체로부터 알게 된다.

그리고 잔이 발견된 손을 지닌 자 역시. 이는 뿐만 아니라 신성으로부터 받은 내면의 진리를 지닌 자도를 의미한다. 이는 “손을 지닌”이 함께 있다를 의미함으로부터; “잔”의 의미가 진리이다로부터; 그리고 요셉의 표현함이 신성의 천적 평면이다로부터 알려진다.

그리고 그는 말했다, 이런 짓은 나로부터는 거리가 멀다. 이는 그것은 결코 그렇게 되어 있어서는 안됨을 의미한다. 이는 설명이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잔이 발견된 자. 이는 신성으로부터 받은 내면의 진리를 가진 자를 의미한다. 이는 앞에서 살폈다.

그는 나에게 종이 될 것이다. 이는 그는 영원히 종속될 것이다를 의미한다. 이는 “종”의 의미가 영원히 자신으로부터의 자유는 없다 이다로부터, 고로 영원히 종속된다 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리고 너희는 네 아버지에게 평화로이 돌아가라. 이는 내면의 진리가 발견되지 않는 교회의 진리는 이전의 상태로 돌아가게 됨을 의미한다. 잔이 발견되지 않은 자들, 즉 “잔”인 내면의 진리가 발견되지 않는 자에 연루되는 것을 야곱의 열 아들들이 표현한다; 그리고 “너희는 너희 아버지에게 평화로이 올라가라”가 의미함이 이전의 상태로 되돌아가는 것, 그 이유가 그들이 “요셉”인 내적 인간에 의해 받아지지 않을 때, 그들을 기다리는 것은 이전 상태뿐이기 때문이다.

18-31절. 그리고 유다는 그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그리고 말했다, 19 저로 하여금 나의 주여, 당신의 종이 내 주의 귀에 한마디 말을 하게 해주십시오, 그리고 부디 당신의 종을 향하여 분노하지 말아주십시오. 그 이유가 당신은 바로와 동등하기 때문입니다. 20 내 주께서 당신의 종들에게 물어 말하기를, 너는 아버지가 있느냐, 또는 네 형제가 있느냐? 그래서 우리는 내 주께 말했습니다, 우리는 아버지를 모시고 있는데, 그는 노인입니다, 그리고 그가 노령에 얻은 아이가 있는데, 가장 어린 형제입니다. 그리고 그의 형은 죽었는바 그의 어머니에게는 그 아이만이 남았습니다, 그래서 그의 아버지는 그를 사랑하고 있습니다. 21 그리고 당신께서 당신의 종들에게 말하시기를, 그를 나에게 데려오라, 그리고 나는 그에게 내 눈을 놓을 것이다. 22 그리고 우리는 내 주에게 말했습니다, 이 소년은 자기 아버지를 떠날 수 없다. 그리고 그가 그의 아버지를 떠나면 그는 죽을 것이다. 23 그리고 당신은 당신의 종들에게 말하셨습니다, 만일 너희의 가장 어린 아우가 너희와 함께 오지 않는다면 너희는 내 얼굴들을 더 이상 보지 못하리라. 24 그리고 한참 시간이 흘러 우리가 당신의 종 나의 아버지에게 올라 갔을 때, 우리는 그에게 내 주의 말을 말했습니다. 25 그리고 우리의 아버지께서 말하셨습니다, 너희는 돌아가서, 우리에게 양식을 조금 더 사오너라. 26 그리고 우리는 말했습니다, 우리는 내려 갈 수 없습니다. 만일 가장 어린 아우가 우리와 함께 있으면 우리는 내려 갈 것입니다. 그 이유가 막내인 그가 우리와 함께 있지 않으면 우리는 사람의 얼굴들을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27 그리고 당신의 종 나의 아버지는 우리에게 말하셨습니다, 너희는 내 아내가 나에게 두 아들을 낳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28 그리고 하나는 나로부터 나갔다, 그리고 나는 말했다, 정녕 그는 갈갈이 찢겨 죽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후 지금까지 나는 그를 보지 못했다. 29 그리고 너희는 내 얼굴들로부터 이 하나 역시 데려 가려 한다. 그리고 만일 해악이 그에게 떨어지면, 너는 내 흰 머리털을 무덤으로 악 가운데서 내려가게 만들 것이다. 30 그리고 지금 내가 당신의 종 나의 아버지에게 갈 때, 그리고 이 소년이 우리와 함께 있지 않고, 그의 혼은 소년의 혼과 묶여 있는바, 31 그가 소년이 있지 않음을 본다면 그는 죽을 것입니다. 그러면 당신의 종은 당신의 종 나의 아버지의 흰 머리털을 슬픔 속에서 무덤으로 내려가게 할 것입니다.

그리고 유다가 그에게 가까이 왔다. 이는 외적 인간이 선을 통하여 내적 인간과 소통함을 의미한다. 이는 누군가에게 이야기를 하려고 “가까이 옴”의 의미가 교통함(소통함)이다로부터; 그리고 유다의 표현함이 자연 평면에 있는 선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외적 인간이 내적 인간과 소통한다고 말한 이유는 유다는 외적 인간, 또는 자연 평면에 있는 교회의 선을 표현하고, 요셉은 내적 인간에 있는 선을 표현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선을 통하여”라고 말한 이유는 교통함은 오로지 선을 통하여서만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진리를 통하여서는 아니다는 것, 단지 진리 안에 선이 있는 경우는 가능하다.

그리고 말했다. 이는 지각을 의미한다. 이는 “말하다(say)”가 지각을 의미함으로부터 이다.

저로 하여금, 나의 주여. 이는 간절한 부탁을 의미한다. 이는 이어지는 구절들로부터 분명해진다.

부디 당신의 종이 내 주의 귀에 한마디 말을 하게 해주십시오. 이는 (간절한 부탁을) 듣는 것과 그것을 수용함을 위하여를 의미한다. “말 한마디를 이야기 하다”의 의미가 유입이다로부터, 그리고 이것이 유입일진대, 상대쪽의 경우는 수용함을, 그리고 “귀”의 의미가 순종하다 이다로부터, 여기서는 경청함 또는 들어줌이다. 그 이유는 하급자가 상급자에게 이야기를 하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분명해지는 바, “내 주의 귀애 한마디 말을 하게 해달라”의 의미가 들어줌과 수용을 위한 간절함 부탁임을 알게 된다.

부디 당신의 종에게 화를 내지 말아 주십시오. 이는 그가 외면하지 않도록을 의미한다. 이는 “화를 냄”의 의미가 돌아섬 이다로부터 인데, 그 이유는 누구에게 화가 난 자는 그 자로부터 돌아 선 것, 즉 그 자 같이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 그 반대 이기 때문이다. 성남이 외면함(돌아섬)이다는 것은 말씀의 많은 구절들에서도 분명해진다, 특히 성냄 또는 분노하심이 여호와 주님이라고 말해질 경우 더욱 그렇다, 이 경우 주님이 돌아서심이 아니라 인간이 그렇게 하는 것이다; 그가 돌아설 때 마치 주님이 그렇게 하신 듯 자신에게 비쳐지는 것이다. 사실 듣지 않은 것은 인간 당사자이다. 말씀이 그렇게 말해진 이유는 말씀이 외관(나타남)에 일치하여 이야기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성냄이 돌아섬이기 때문에, 또한 이것은 돌아선 쪽에서 선과 진리에 폭행한 것이다; 한편 돌아서지 않은 쪽에서는 폭행은 없고, 악과 거짓인 것을 싫어하여 있는 불유쾌함이다.
“성냄(anger)”이 폭행(assault) 이다고 이미 보여준 적이 있다; 또한 돌아섬이다, 그리고 진리와 선이 폭행당할 때, 처벌이 있다는 것이 아래 구절들로부터 분명해진다. 이사야서에서:
불법을 법령이다고 선포하는 자들에게 화있을 것이다. 그들은 묶인 자 아래로, 그리고 죽임 을 당한 자 아래로 추락할 것이다. 앗수르에게 화있을 것이다, 나의 성냄의 막대여. 나는 그를 위선적인 민족들을 향하여 보낼 것이다, 그리고 분노의 백성을 향하여 나는 그에게 임무룰 줄 것이다. 그는 올바른 것을 생각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의 심정은 올바른 것을 중 재하지 않는다 (이. 10:1, 4-7);
“성냄”과 “분노”는 인간쪽에서의 돌아섬과 반대함을 표시한다, 그리고 이에 수반되는 처벌과 듣지 않으심이 성내셨음 같이 나타난다; 이것이 인간쪽에서 인 바, 말해지는 것은, “불법을 법령이라고 선포하는 자들에게 화가 있다. 그는 올바르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의 심정은 올바른 것을 중재하지 않는다” 인 것이다.
이사야서에서:
그분의 성내심의 그릇들을 가지신 여호와께서 온 땅을 파괴하시려고. 보라, 여호와의 날이 분개와 분노와 성냄과 더불어 오고 잔인하여 땅을 황폐되게 만들기 위함이어서, 그분은 그 것으로부터의 죄인들을 파괴할는지 모른다. 여호와 체바욷의 분개하심에서 나는 하늘을 흔 들고, 땅을 그녀의 장소로부터 흔들 것이다, 그리고 그분의 성냄의 분노의 날에서 이다 (이. 13:5, 9, 13);
“하늘”과 “땅”은 여기서 교회를 표시한다, 이 교회가 진리와 선으로부터 돌아섰다, 이 교회의 황폐해짐과 파괴됨이 여호와의 “분개, 성냄, 분노”에 의해 묘사되어 있다; 사실상 이는 완전 반대 인 바, 즉 악 안에 있는 자들이 분개하고, 분노하고, 성낸다. 그리고 진리와 선에 자신이 반대되여 놓이게 한다. 악으로부터 있는 처벌이 그 외관 때문에 여호와께서 벌을 내렸다고 말해지는 것이다. 이 외의 말씀의 여러 곳에서 교회의 마지막 때와 그것의 파멸이 “여호와의 분노의 날”이라 불리운다.
다시:
여호와께서 사악한 자의 지팡이를, 통치자들의 막대를 부러뜨리셨다. 당신은 격노함에서 백 성들을 죽어지도록 치셨다, 성냄과 더불어 민족들을 통치하신다 (이. 14:5, 6);
위에서도 의미는 비슷하다. 이것은 범죄자가 법에 의해 처벌되어지는 것이나 별반 차이가 없다, 그런데 인간은 처벌의 악을 왕이나 재판관에게 그 탓을 돌린다. 다시:
야곱과 이스라엘은 여호와의 길에서 걷지 않는다, 그들은 그분의 법을 듣지 않는다; 그분은 그 자 위에 성냄의 분노를, 전쟁의 폭력을 쏟으셨다 (이. 42:24, 25).
예레미야서에서:
나는 내뻗은 손과 강한 팔로 너와 맞서 싸울 것이다, 그리고 성냄에서, 분노에서, 큰 열에 서 이다. 내 격노함이 불 같이 나가서, 그리고 태우고 꺼지지 않도록 할 것인데, 그 이유는 너희 일들의 사악함 때문이다 (예. 21:5, 12);
위 구절에서 “격노”, “성냄”, “큰 열(heat, 격함)”은 선하고 참된 것으로부터 돌아선 탓에 있는 악의 처벌됨밖에 더 아니다.
신성한 법에 의해 악은 처벌이 수반된다, 그리고 경이롭다 말할 것은, 다른 삶에서 악과 처벌은 완전히 밀착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 이유가 통상적인 악행 보다 더 세게 악행이 있게 되면, 처벌하는 악령들이 즉시 따라붙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지없이 처벌한다, 여기에 참작해주는 것은 없다 (용서 같은 것을 생각할 여유 없이 즉각적이다 역자주.) 돌아섬 때문에 있는 처벌의 악이 뜻해지는 것은 분명한데, 이렇게 말해짐에서, “너희의 일들의 사악함 때문에”에서 분명해진다. 다윗서에서:
그분은 그분의 성나심의 분노를, 격노하심을, 심통을 그들 위에 보내셨다, 그리고 악한 천 사들의 침입을 보내셨다. 그분은 그분의 성내심을 위하여 작은 길을 편편하게 하셨다, 그분 은 죽음으로부터 그들의 혼을 유보하시지 않으셨다 (시. 78:49, 50). (또한 이. 30:27, 30; 34:2; 54:17; 62:3, 6; 66:15; 예. 4:8; 7:20; 15:14; 33:5; 겔. 5:13, 15; 신. 9:19, 20; 29:20, 22, 23; 계. 14:9, 10; 15:7을 보라.)
위 구절의 “분노”, “성냄”, “분개”는 돌아섬, 폭행, 결과적으로 처벌을 표시한다. 돌아섬과 폭행에 대한 처벌이 여호와 또는 주님 때문이다는 것, 그리고 그분에 있는 “성냄”, “분노”, 그리고 격노 때문이다고 기록된 이유는 지독하게도 외적인 야곱으로부터 튀어나온 종족이 교회의 표현(껍데기, representative)들 안에 보존되어지게 되었기 때문, 그리고 그들을 보존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여호와를 끔찍이 두려워함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그분이 자기들에게 성내시고 분노하시어 악을 행하시는 분으로 믿게 하는 도리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내적인 것이 전혀 없이 외적인 것들로만 똘똘 뭉쳐진 이들은 그에 걸맞는 것, (그들이 이해할 수 있는 것인) 외적인 것들로 상대해주는 것이다. 그 이유가 그들을 구부릴 수 있는 내면적인 것들이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외관으로부터 있는 교회 내의 단순한 자들은 자신들이 악을 행하면 하느님께서 화를 내신다는 것밖에 달리 하느님을 납득하지 못한다. 그러나 생각이 좀 더 깊은 자일 경우, 그가 곰곰히 생각하면, 여호와, 또는 주님에게 성내심, 격노하심 따위가 있을 리 만무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이유는 그분은 자비 자체, 선 자체이시기 때문, 그리고 누군가에게 악을 행하심을 무한하게 초월하신 분이시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 이웃을 향하여 선행 안에 있는 이가 이웃에게 악을 행할 리 만무하지 않느냐는 말이다. 천국에 있는 모든 천사들이 이러할진대, 주님의 경우는 어떠할지 두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다른 삶에서의 경우이다: 주님께서 천국과 그곳의 사회들을 질서 안으로 환원하실 때, 이는 새로이 오는 자들 때문에 계속적으로 행해지는데, 그리고 그들에게 행복과 복됨을 향유하게 해주시려 해서인데, 이때 이것이 이와 반대적으로 있는 사회 안으로 (그 이유가 천국과 과 지옥은 대칭, 균형하에 있기 때문) 흘러들 때, 이들은 천국의 현존 때문에 변화를 느끼고, 동시에 성내고 분노하고, 즉시 악을 터뜨리고, 급기야 처벌의 악으로 돌진한다. 더욱이 악령들, 또는 악귀들이 천국의 빛에 접근할 경우, 그들은 성냄과 고통을 느끼기를 시작한다, 그들은 이렇게 자기들을 만든 것은 천국, 또는 주님 탓이라고 한다; 사실상 그들 스스로 고통을 자초한 것이다. 그 이유가 악은 선에 가까이 올 때, 고문 당함을 느끼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분명한 바, 주님으로부터서는 선밖에 없다는 것, 그리고 모든 악은 돌아선 자들, 반대적인 자들로부터 있다는 것이다. 이런 신비함으로부터 본문의 주제가 어떻게 있는지 분명해졌을 것이다.

그 이유가 당신은 바로와 동등하기 때문입니다. 이는 그것은 자연 평면을 다스리는 지배권을 가지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는 바로의 표현함이 일반적(전체적) 측면에서의 자연 평면이다로부터; 그리고 요셉의 표현함이 내적 부분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내적 부분이 자연 평면을 다스린다는 것이 요셉이 이집트 모든 토지의 통치자로, 또한 바로의 모든 집안에 대하여도 통치자로 앉혀졌다에 의해 표현되었다 (창. 41:40, 41).

내 주께서 그의 종에게 물어, 말하기를. 이는 그들의 생각 속의 지각을 의미한다. 이는 “묻다”의 의미가 또 다른 자의 생각을 지각하는 것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묻다”가 이것을 의미하는 이유는 영계 또는 천국에서는 누구도 다른 이의 생각을 물을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즉 상대방의 애착 속에 무엇이 있는지를 물을 필요가 없다. 거기서는 생각 자체가 드러나게 되어 있어 생각으로부터 파생되는 것을 알려 할 필요가 없이 지각되기 때문이다, 더욱이 요셉이 표현하는 내적 부분은 야곱의 아들들이 표현하는 외적 부분에 물을 필요가 없는데, 그 이유는 모든 외적인 것은 내적인 것으로부터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묻다”에 의해 생각을 지각함이 의미된다. 때로 우리가 말씀에서 읽는 바, 여호와께서 인간에게 묻는다는 대목이다, 이때도 여호와께서는 인간이 생각하는 모든 것을 알고 있으시다. 그렇게 말해진 이유는 인간이 생각하건대, 생각은 자기 안에 있으므로 감추여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물음은 이런 외관, 이 외관에서 파생되는 믿음에서 연유된 것일 뿐이다.

너에게 아버지가 있느냐, 또는 형제가 있느냐? 이는 근원으로는 선이 있고, 수단으로는 진리가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여기서 “아버지”인 이스라엘의 표현함이 영적 선, 또는 진리의 선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근원이 선인 이유는 자연 평면에 있는 진리들이 영적 선으로부터 이기 때문이고, 여기서 “형제”인 베냐민의 표현함이 진리이다로부터도 알게 된다. 이 진리가 수단이라 말한 이유는 야곱의 아들들이 표현하는 자연 평면의 교회의 진리들이 “이스라엘”인 영적 선과의 결합은 베냐민이 표현하는 진리를 통하여서 결과되기 때문이다. 결합이 이를 통하여서 이기에, 많은 구절들에서 그의 아버지가 이 진리를 표현하는 베냐민을 얼마나 사랑했는지가, 그리고 유다가 베냐민 없이 다른 이들과만 왜 돌아갈 수 없었는지가 잘 묘사되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내 주께 말했습니다. 이는 상호 지각함을 의미한다. 이는 “말하다”가 지각함이다로부터, 그리고 상호 지각함임이 분명하다.

우리는 아버지, 노인이신 분을 모시고 있습니다. 이는 그들은 근원으로서 영적 선을 가지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는 여기서 “아버지”인 이스라엘의 표현함이 영적 선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스라엘의 표현에 주목하면, 이미 살핀 바로부터 그는 영적 교회, 실로 영적 교회의 내적 부분을 표현한다는 것, 이는 진리의 선, 또는 자연 평면으로부터의 영적 선을 표현한다.

그분께는 노령에 얻은 아이, 막내가 있습니다. 이는 거기로부터 새로이 있는 진리를 의미한다. 이는 여기서 “아이, 가장 어린 것(막내)”인 베냐민의 표현함이 진리이다로부터; 그리고 “노령”의 의미가 삶의 새로움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러므로 분명한 바, “노령의 아이, 가장 어린 것”은 새로이 있는 진리가 의미된다는 것이다. 여기서의 경우는 이렇다: 거듭나져서 영적 수준으로 되어가는 인간은 처음에는 진리를 수단으로 선쪽으로 인도되어진다; 그 이유가 인간은 진리를 통하여, 또는 말씀으로부터 축출한 교리를 통하여가 아니면 영적 선이 무엇인지, 같은 말로 기독교의 선이 무엇인지를 모르기 때문이다. 이 방법에서 그는 선 안으로 입문되어진다. 선의 실습이 개시되어진 이후 그는 더 이상 진리를 수단으로 선쪽으로의 인도받음은 없으나, 그 대신 선을 통하여 진리쪽으로의 인도됨이 있다. 즉 이때 그는 선으로부터 이전에 그가 알았던 진리를 볼 뿐만 아니라, 선으로부터 그가 전에는 몰랐고 알 수도 없었던 새로운 진리들을 생산한다; 이제 그의 선에는 이전 같이 진리들을 갈망함이 더 이상 뒤따르지 않는다. (직접 생산하기 때문이다.) 이제 생산하는 새로운 진리들은 그가 처음에 가졌던 진리와는 아주 크게 다르다. 그 이유는 처음에 알았던 진리들은 생명이 매우 조금이었으나 지금 그가 획득하는 진리들은 선으로의 진리이기 때문이다.
인간이 진리들을 수단으로 선쪽으로 올 때, 그는 “이스라엘”이다; 그리고 이때 그가 선으로부터 받는 진리들, 즉 주님으로부터 선을 통하여 받는 진리들은 새로운 진리이고, 이것이 베냐민이 자기 아버지와 함께 있는 동안, 베냐민에 의해 표현된 진리이다. 이 진리를 수단으로 선은 자연 평면에서 열매가 풍성해진다, 그리고 안에 선을 지닌 셀 수 없이 많은 진리들을 산출한다. 이 방법에서 자연적 평면은 거듭나진다, 그리고 열매 풍성함을 통하여 처음에는 좋은 열매들을 지닌 나무 같이 되어 있는다, 그리고 계속적으로 불어나 동산 같이 된다. 이상 살핀 바로부터 영적 선으로부터의 새로운 진리에 의해 뜻해지는 것을 알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의 형은 죽었습니다. 이는 내적인 선은 있지 않음을 의미하는데, 이는 요셉의 표현함이 영적 평면의 천적 부분이다로부터, 고로 내적인 선이다, 그 이유는 이 선은 영적 평면의 천적 부분과 같기 때문이다; 그리고 “죽어 있다”의 의미가 더 이상 있지 않다 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두 선의 차이점, 즉 요셉의 표현으로부터인 내적 선과 이스라엘이 표현하는 영적 선의 차이이다. “요셉”은 합리성으로부터의 내적 선이고, “이스라엘”은 자연 평면으로부터의 내적 선이다. 또한 천적 (평면의) 선, 또는 천적 (수준의) 교회로부터 있는 선과 영적 (평면의) 선, 또는 영적 (수준의) 교회로부터 있는 선의 차이도 위와 비슷한 논리 선상에 있다. 이에 관하여 누누이 말해지고 있으므로 더 이상 여기서는 말하지 않는다. 이와 같은 내적, 또는 천적 선이 거기에 있지 않았다는 것; 이것이 “그의 형은 죽었다”에 의해 의미되어 있다.

막내 만이 그의 어머니에게는 남았습니다. 이는 이것이 교회의 유일한 진리이다를 의미한다. 이는 여기서 “남은 유일한 자”인 베냐민의 표현함이 새로운 진리이다로부터; 그리고 “어머니”의 의미가 교회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것, 즉 베냐민이 여기서 표현하는 진리, 즉 앞에서 기술한 것들이 교회의 유일한 진리이다에 주목하면 이렇다: 이 진리는 (“이스라엘”인) 영적 선으로부터 있는 진리이다, 그리고 이것이 그의 아버지와 함께 있는 베냐민에 의해 표현되어지고 있다; 그러나 베냐민이 요셉과 더불어서 있게 될 때는 한층 더 깊은 (높은) 내면의 진리이다. 아버지와 함께 있는 베냐민이 표현하는 진리, 이 진리가 새로운 진리라고 불리우고 이 진리가 인간으로 교회이도록 만든다. 그 이유는 이 진리에서, 또는 이 진리들 안에 선으로부터의 생명이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선으로부터 신앙의 진리 안에 있는 이들이 교회이다는 말이다; 그러나 신앙의 진리들 안에 있으나 선행의 선 안에 있지 않으면 교회가 아니다. 이럴 경우의 인간과 더불은 진리들은 생명이 없으므로 죽어 있다, 설사 똑같은 진리를 지녔다 해도 그러하다. 이로부터 이것(새로운 진리)만이 교회의 유일한 진리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의 아버지는 그를 사랑합니다. 이는 그것은 자연 평면으로부터의 영적 선과 결합을 가지고 있다를 의미한다. 이는 “사랑”의 의미가 결합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아래에서 설명한다); 여기서 “그를 사랑하는 자인” 이스라엘의 표현함이 자연 평면으로부터의 영적 선이다로부터; 그리고 베냐민, 즉 아버지가 사랑하는 자의 표현함이 새로운 진리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 진리(새로운 진리)가 이 선(영적 선)과 결합함이 “그의 아버지가 그를 사랑한다”에 의해 의미되었다. 거기에 이 진리와 더불은 결합이 실패할리 만무하다. 그 이유는 이 선(영적 선)으로부터 있기 때문이다. 이 진리와 선 사이에 있는 결합은 마치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결합 같은 것이다; 또한 마음의 뜻함과 마음의 이해함 사이에서와 같다. 의지가 선을 뜻할 때, 이 선은 이해력 안으로 은근히 심어진다, 그리고 선의 품질에 따라 형체를 가져온다; 이 형체가 진리이다. 그리고 새로운 진리가 출생되기 때문에, 결합이 있음은 분명하다
결합으로서의 사랑에 주목해보자. 사랑이 영적 결합이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 이유는 이것은 마음들의 결합, 또는 생각과 뜻함의 결합, 이 둘의 결합이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분명한 것은, 사랑 자체만에 주목하면, 이것은 영적인 것이다, 그리고 그것의 자연적인 것은 연계되고 결합함으로부터의 기쁨이다. 본질 측면에서 사랑은 상태의 변화로부터 결과하는 하모니, 그리고 형체들이나 실체들에서의 다양함들, 이 속에 인간의 마음이 존재하고 있다. 이 하모니, 만일 천국의 형체로부터이다면 이는 천국적인 사랑이다. 그러므로 사랑은 주님으로부터 있는 신성의 사랑 자체 외의 다른 근원은 가질 수 없다; 고로 이 사랑은 형체 안으로 흐르는 신성이고, 이 신성이 배열하므로 상태의 변화들과 다양함들로부터 천국의 하모니는 결과 된다.
이 사랑에 반대되는 사랑도 있다, 즉 자아 사랑과 세상 사랑이다, 이 사랑에는 결합은 없고 분열 뿐이다. 그들은 실로 결합들 같이 나타나는 경우도 있다, 말하자면 합작해서 명예를 취득하려거나 이득을 챙길 경우 같은 것인데, 이것 마저도 결국 분열쪽으로 결론 맺는다. 천국의 사랑은 자신을 위하여 타인을 사랑하는 것을 싫어한다, 그러나 다른 사람 안에 있는 선을 사랑하기 위하여 선을 행한다. 그리고 이 선을 그는 주님으로부터 받는다; 결과적으로 선 자체 이신 주님을 위하여 선을 행한다.

그리고 당신은 당신의 종들에게 말했습니다. 이는 주어진 지각을 의미한다. 이는 “말하다”가 말씀의 역사 부분에서는 지각하다를 의미함으로부터; 그리고 어떤 것이 그들에게 말해졌었기 때문에, 이것은 주어진 지각을 의미하게 된다.

그를 나에게 데려오라. 이는 새로운 진리는 내적 선에 종속되어야 함을 의미한다. 이는 “데려옴 (내려오게 만듦, making to come down)”의 의미로부터 분명해진다. 그 이유가 결합하기 위하여 내적 부분쪽으로 오는 것은 내적 부분에 종속되는 것이기 때문, 그 이유는 하위의 것은 높은 것에 통째로 종속되어야 결합이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기서 내려와야만 하는 자인 베냐민의 표현함이 새로운 진리이다로부터; 그리고 여기서 내려오게 하는 자인 요셉의 표현함이 내적 선이다로부터 알려진다.

그리고 나는 그 (아이) 위에 나의 눈을 놓을 것이다 . 이는 그 다음 선으로부터 온 진리의 유입이 있다를 의미한다. 이는 누군가에게 눈을 놓는다는 것(직접 보는 것)의 의미가 신앙 속에 있는 진리를 교통하는 것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리고 누군가에게 “자기 눈을 놓는” 것은 교통함이고, 또한 유입이다; 그 이유는 요셉이 표현하는 내적 선은 베냐민에 의해 표현된 진리와의 교통함은 유입을 수단으로 하여야 가능하기 때문인데, 그 이유는 베냐민이 표현하는 진리는 하위에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는 내 주께 말했습니다. 이는 상호 지각함을 의미한다.

이 소년은 그의 아버지를 떠날 수 없다. 이는 이 진리는 영적 선으로부터 분리되어질 수 없다를 의미한다. 이는 “떠나다”의 의미가 분리되다 이다로부터; 그리고 이스라엘의 표현함이 자연 평면으로부터의 영적 선이다로부터; 그리고 베냐민의 표현함이 새로운 진리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 진리가 “소년”이라 불리우는데, 그 이유는 마지막에 태어났기 때문이다; 또한 이 진리는 인간이 거듭나기 전에는 출생되지 않는다. 그는 선과 결합된 새로운 진리를 통하여 생명의 새로움을 받는다. 그러므로 이 진리는 “그의 노령의 아이, 가장 어린 것”에 의해 의미된다.

그리고 그가 아버지를 떠난다면 그는 죽을 것이다. 이는 만일 그것이 분리되어진다면 교회는 멸망할 것임을 의미한다. 이는 “떠나다”의 의미가 분리하다 이다로부터; 그리고 “죽는다”의 의미가 더 이상 있지 않다 이다로부터, 고로 멸해진다 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영적 선과 결합한 이 진리가 교회를 만들기에, 만일 이 진리가 이 선과 분리된다면, 교회는 멸해지고 만다. 더욱이 여기서 “아버지”인 이스라엘은 교회를 표현하나, 이 진리 없이는 교회를 표현 못한다.

그리고 당신께서는 당신의 종들에게 말하셨다. 이는 이것에 관한 지각을 의미한다.

만일 너희 막내(가장 어린 형제)가 너희와 더불어 오지 않는다면. 이는 만일 그것이 내적 선에 종속되지 않을 것이라면을 의미한다.

너희는 더 이상 내 얼굴들을 보지 못하리라. 이는 거기에 자비가 있지 않을 것이고 자연 평면에서 결합도 없을 것을 의미한다. 이는 “얼굴”이 주님을 서술할 경우, 자비이다로부터; 그러므로 “얼굴들을 보지 못한다”는 자비가 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리고 자비가 없을 때, 결합도 없다, 그 이유가 영적 결합인 사랑이 없기 때문이다. 신성한 사랑은 인류와의 관련됨에서 아주 큰 고뇌하심(miseriae, distress, misery)으로 괴롭힘을 받는(괴로움에 에워싸여진, beset) “자비(mercy, misericordia, pity)”라고 불리운다. 자연 평면에서 진리들과 더불은 결합이 없을 것이다는 것은 “얼굴을 보지 못한다”는 말은 (이스라엘이) 자연 평면의 진리들을 표현하는 야곱의 아들들에게 말해졌고, 이 말이 지금은 그들에 의해 말해지기 때문이다.
베냐민에 의해 표현되는 진리가 “요셉”인 내적 선에 종속되지 않으면 자연 평면에 있는 진리와의 결합도, 자비도 있지 않다는 것에 주목해보면, 이렇다: 인간을 교회이다라고 만드는 진리는 선으로부터 있는 진리이다; 그 이유가 인간이 선 안에 있을 때, 이때 그는 선으로부터 진리들을 보고 그것들을 지각한다, 고로 그것들이 진리들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그가 선 안에 있지 않다면, 이는 전혀 아니다. 선은 마치 불꽃 같아서 빛을 주고 계발을 해주어 인간으로 (진리들을) 보게 해주고 지각하게 하고 믿게 해준다. 그 이유가 선으로부터 진리에 애착함은 내적 시각을 (영적인) 저쪽으로, 그리고 어둠을 유발하는 세상적, 육체적인 것들쪽에서는 물러서게 한다. 여기서 베냐민이 표현하는 진리가 이와 같은 진리이다. 이것이 교회의 유일한 진리이다. 즉 이것이 인간으로 교회를 만드는 진리이다. 그러나 이 진리는 요셉에 의해 표현되는 내적 선에 통째로 종속되어야만 한다; 그 이유가 주님께서는 내적 선을 통하여 흘러드시고, 하위급에 있는 진리들에게 생명을 주기 때문이다; 고로 또한 이스라엘에 의해 표현되는 자연 평면의 영적 선으로부터 있는 이 진리에 생명을 준다.
이런 사항들로부터 명백해지는 또 하나는, 결합은 이 진리를 수단으로 하위의 진리들과도 거행된다는 것이다; 그 이유가 이 진리가 내적 선에 종속되어 이 선으로부터 자체에 선의 유입이 있지 않으면, 내적 선을 통하여 주님으로부터 계속적으로 흐르는 자비를 받음도 없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중재자가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만일 자비를 받음이 없다면, 결합도 있을리 만무하다. 이것이 “만일 너희가 너희와 더불어 가장 어린 것과 함께 오지 않으면, 내 얼굴들을 더 이상 보지 못할 것이다”에 의해 의미되어 있다.

시간이 지나 우리가 당신의 종 우리 아버지에게 올라갔을 때. 이는 영적 선으로 승강함을 의미한다. 이는 “올라감”의 의미가 승강함이다로부터 (아래에서 살핀다); 그리고 여기서 “아버지”인 이스라엘의 표현함이 자연 평면으로부터의 영적 선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올라 감”에 의해 의미되는 승강함이 내면의 것들을 향하여 인데, 이 향함은 야곱의 열 아들들에 의해 표현되는 진리들이 이스라엘에 의해 표현되는 자연 평면으로부터의 영적 선쪽으로 향함 이다. 그 이유가 자연 평면에는 내면과 외면이 있기 때문이다; 자연 평면의 내면에 “이스라엘”인 영적 선이 있고, 외면에는 “야곱의 아들들”인 교회의 진리들이 있다. 그러므로 “아버지에게로 올라 감”에 의해서는 영적 선쪽으로 승강함이 의미된다.

우리는 그에게 내 주의 말들을 말했습니다. 이는 이런 것에 관하여 인정함을 의미한다.

그리고 우리의 아버지께서 말하셨다. 이는 영적 선으로부터 지각함을 의미한다. 이는 “말하다”가 말씀의 역사물에서는 지각함이다로부터; 그리고 여기서 “아버지”인 이스라엘의 표현함이 영적 선이다로부터 알려지고 있다.

너희는 돌아가서, 우리에게 양식을 조금 더 사오너라. 이는 진리의 선을 자기 것이 되게 할 것임을 의미한다. 이는 “사다”의 의미함이 자신의 것이 되게 함이다로부터; 그리고 “양식(food)”의 의미함이 진리로부터의 선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영적 선이 일반적 측면에서는 모든 선이다, 그러나 특별한 측면에서는 진리를 수단으로 획득되는 선, 즉 의지와 행동에 있는 선이다, 그 이유는 이 선은 뜻함과 행동함으로부터 선이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진리로부터의 선(the good of truth)이라 불리운다. 고로 이 진리가 선이 되지 않으면, 다른 삶에서의 당사자에게 아무런 혜택을 주지 못한다. 그 이유가 그가 다른 삶 안으로 진입할 때, 선이 안된 이런 진리는 사라져버리고 말기 때문, 즉 (이 진리가) 그의 의지와 일치되지 않기 때문, 고로 그의 사랑의 기쁨과 더불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세상에서 신앙의 진리들을 배웠던 자, 그러나 그 진리들을 뜻하고 행함을 위하여 진리를 지니지 않았던 자, 고로 그 진리들이 선으로 바뀌지 않았던 자, 오로지 명예나 이득 같은 직업 수준에서 그 진리들을 가르치고 알고 있던 자, 제아무리 최고의 학식을 그런 진리들 분야에서 칭송받았다 해도, 다른 삶에서 그를 치장해주었던 세상에서의 그런 진리들은 온데간데 없다, 그리고 그의 자신의 의지쪽의 것, 즉 그의 본래의 생명만이 달랑 남아 있다. 이렇게 자신의 생명 안에 남아 있기에, 경이로운 것은, 그가 세상에서 애지중지 한 듯 떠벌려왔던 모든 신앙의 진리들을 싫어하고, 자신 스스로가 부정하고 있다는 것이다. 진리들을 뜻함과 행동함을 수단으로, 즉 살아냄으로 선으로 바뀌는 것이 진리로부터의 선을 자기 것이 되게 함에 의해 뜻해지고, 여기서 “양식을 조금 더 사오라”에 의해 의미되어 있다.

그리고 우리는 말했다, 우리는 내려갈 수 없습니다. 이는 거절을 의미한다.

만일 우리의 가장 어린 형제(막내)가 우리와 함께라면 우리는 내려가겠습니다. 이는 자기들과 중매자가 결합되어져 있지 않으면을 의미한다. 이는 여기서 “가장 어린 형제, 막내”인 베냐민의 표현함이 결합되게 하는 중매자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에 주목해보자: 베냐민은 “요셉”인 영적 평면의 천적 부분, 즉 내적 선과 “야곱의 열 아들들”인 자연 평면에 있는 진리들 사이에 있는 중매자를, 또한 새로운 진리도 표현하는데, 이때의 경우, 중매자가 중매자이기 위하여서는 내적 부분과 외적 부분 양쪽으로부터의 어떤 것을 가져야만 가능해진다. 그렇지 않으면 결합을 가능하게 하는 중매자일 수 없기 때문이다. 하여 베냐민은 새로운 진리가 있는 외적 부분인 자연 평면으로부터 파생된 중매자를 표현하는데, 그 이유는 이 진리는 그의 아버지 이스라엘이 표현하는 자연 평면에 있는 영적 선으로부터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매자는 요셉에 의해 표현되는 내적 부분으로부터 유입을 수단으로 파생되어진다. 고로 중매자는 각각으로부터의 어떤 것에서 파생되는 셈이다. 이것이 왜 베냐민이 결합하게 하는 중매자이고, 또한 새로운 진리인 이유이다. 즉 베냐민이 아버지와 함께 있을 때는 새로운 진리를, 요셉과 함께 할 때는 결합을 하게 하는 중매자이다는 말이다. 이에 대한 것은 이 이상으로 명료해지게는 말해볼 수 없는 비밀한 것이다. 더구나 인간 안에서 내적, 외적 부분이 서로 구분된다는 사실을 자신의 생각 안에 갖지 않은 이들에게는 아예 이해되어질 수 없다. 더욱이 진리들을 알려하는 애착을 지니지 않을 경우는 더 더욱 까마득한 내용일 뿐이다. 이것들은 천국의 빛에 의해 지적 부분 측면에서 계발되어지고, 하여 이들은 다른 이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고 있는데, 이것 역시 비밀하다.

그 이유가 우리는 그 사람의 얼굴들을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는 자비도, 결합도 있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를 의미한다.

그리고 우리의 막내가 우리와 함께 있지 않으면. 이는 중매자를 수단으로 하는 것을 빼놓고는을 의미한다. 이는 베냐민의 표현함이 중매자이다로부터 알려진다.

그리고 당신의 종 나의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말하셨습니다. 이는 영적 선으로부터 지각함을 의미한다. 이는 “말하다”가 지각하다 이다로부터; 그리고 “아버지”인 이스라엘의 표현함이 자연 평면으로부터의 영적 선이다로부터 알려진다.

너희는 내 아내가 나에게 두 아들들을 낳아준 것을 알고 있다. 이는 만일 교회 속에 영적 선이 있다면, 거기에는 내적 선과 진리가 있을 것이다를 의미한다. 이는 이것을 자신 스스로 말하는 이스라엘의 표현함이 자연 평면의 영적 선이다로부터; 그리고 여기서 그에게 두 아들들을 낳은 아내인 라헬의 표현함이 내면의 진리에 애착함이다로부터; 그리고 여기서 그녀가 낳은 “둘”인 요셉과 베냐민의 표현함이 내적인 선과 진리, 즉 요셉은 내적인 선, 베냐민은 내면의 진리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것, 즉 만일 교회 속에 영적인 선이 있다면, 거기에는 내적 선과 진리가 있을 것이다는 말에 주목해보자: 이스라엘이 표현하는 영적인 선은 진리로부터의 선, 의지와 행동에 있는 진리이다. 이 진리, 또는 진리로부터의 이 선은 인간 안에서 당사자를 교회이다로 만든다. 진리가 의지 안에 심어졌을 때 (즉 인간 당사자가 진리에 따라서 살려는 목적을 위하여 진리에 감동했던 사실들을 수단으로 지각된 진리), 이때 거기에는 내적인 선과 진리가 있다. 인간이 이 선과 진리 안에 있을 때, 이때 주님의 왕국이 당사자 안에 있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그는 교회이다, 그리고 자신과 비슷한 사람들이 모아져서 흔히 우리가 말하는 교회, 즉 일반적인(넓은) 측면에서의 교회를 만든다. 이로부터 알게 되는 것은, 교회가 교회가 되려면, 거기에 반드시 영적 선이, 즉 진리로부터의 선이 있어야만 한다는 것, 그러나 진리만으로는 결코 아니다는 것이다. 이로부터 오늘날 교회는 교회라고 불리운다, 그리고 이 교회를 저 교회와 구별한다. 진리를 배우고 아는 목적이 삶을 위하여서가 아니다면 자신 안의 그런 진리는 무엇이 되어 있을지 자신스스로에게 되물어 보라. 삶에의 적용을 가지지 않는 것을 목적으로 하여 가지는 교리적인 것들이라면 무엇이라 말해야 할까? 그리고 십계명의 가르침이 그것들에 따른 생활이 없다면 그 계명은 과연 무엇일까? 자신이 이런 계명들을 익히 알고, 일명 해석에 일가견이 있어 유창하게 말한다 해도 그것에 반대되는 삶, 적어도 그것에 소극적 태도로 일관하는 삶을 영위하고 있다면 그 가르침이 당사자에게 무슨 혜택을 주고 있을까? 하여 아무런 결과도 없다면 아마도 지옥에 떨어질 길밖에? 이런 경우가 말씀으로부터의 신앙의 교리물들에 해당되고, 기독인의 삶의 가르침들의 경우인 이유는 이것들이 영적 법칙들이기 때문이다. 교리물이 생활 속에 있지 않으면, 그것들은 아무런 도움도 당사자에게 주지 못한다. 자기 안으로 들어가는 어떤 것이 생명이 있다면, 이 생명 자체가 있는 곳이 우리의 의지 속 그 외의 다른 곳은 없다는 것을 스스로 생각해보라.
이로부터 말해지는 바, 구약 성경에서 주님에 의해 말해진 것이 신약 성경에서 확증된다; 즉 모든 율법과 모든 예언들은 하느님을 사랑함과 이웃을 사랑함에서 발견되어진다, 고로 삶 자체에서, 그러나 삶이 없는 신앙에서가 아니다; 그러므로 신앙만으로는 결코 아니다; 결과적으로 확신(confidence)안에서도 아니다, 그 이유가 확신함은 선행 없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만일 이것이 위험의 때들에서 악과 더불어 나타나면, 또는 죽음이 확실히 임박했을 때이다면, 이것은 더욱 더 가짜 확신이다. 그 이유가 이런 상황에서의 확신은 저 세상에서는 눈꼽만치도 확신한 적이 있는 것으로 나타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이 이런 신앙을 확신함이라고 하든 신뢰함이라고 하든 사악한 자들과 더불어서는 아무런 결과들이 없다, 이를 주님께서 가르치신다:
받았던 많은 그들에게, 그리고 그분의 이름 안에서 믿는 그들에게, 그분은 하느님의 아들들 이 되는 힘을 주셨다; 이들은 피(blood)들로부터 태어난 자가 아니고, 살(flesh)의 의지로 부터 태어난 자가 아니고, 인간의 의지로부터 태어난 자가 아니다, 그러나 하느님으로부터 태어난 자이다 (요. 1:12, 13).
“피들로부터 태어난” 자들은 선행에 폭행을 한 자들이다, 또한 진리를 모독한 자들이다; “살로부터 태어난” 자들은 자아 사랑과 세상 사랑으로부터 악들 안에 있는 자들이다; 그리고 “인간의 의지로부터 태어난” 자들은 거짓 신조(false persuasion, 거짓 관념 false notion)들 안에 있는 자들이다; 그 이유가 “인간”은 진리를 의미하나, 반대 의미에서 거짓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하느님으로부터 태어난” 이들은 주님에 의해 거듭나아져 왔었던 이들, 그러므로 선 안에 있는 이들이다. 그리고 이들은 주님을 영접한 이들, 그분의 이름 안에서 믿는 이들, 그리고 이들에게 그분은 하느님의 아들이 되는 힘을 주신다, 그러나 다른 이들에게는 아니다; 이로부터 분명한 바, 신앙만으로가 구원을 위해 무엇을 결과하는지 이다.
인간이 거듭나지고 교회가 되기 위하여 그는 진리를 통하여 선쪽으로 이끌어들여져야만 한다는 것; 진리가 의지와 행동에서 진리가 될 때 이끌어들여짐이 있다는 것이다. 이 진리가 선이다, 이 진리가 진리로부터의 선이라 불리운다, 그리고 계속적으로 새로운 진리들을 산출한다; 처음동안 이 진리는 그 자체를 열매가 풍성해지게 만든다. 이렇게 산출하고 열매가 풍성해지게 한 진리가 내적 진리이고, 이 진리로부터 선이 있는데, 이것이 내적 선이라 불리운다; 진리가 의지 안에 심어질 때까지 어떤 것도 내적으로 되어지지 않는다, 그 이유는 의지 속에 있는 것이 인간의 가장 깊은 측면에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선과 진리가 인간의 바깥쪽에 머무는 한, 즉 이해력에만 머무는 한, 그것들은 인간의 바깥쪽이다; 그 이유가 이해력은 바깥쪽이고, 의지는 안쪽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나는 나로부터 나갔다. 이는 얼핏 보기에 내적 선이 떠난 듯 하다를 의미한다. 이는 “나가다” 또는 어디로 가다“가 떠남이다로부터; 그리고 요셉의 표현함이 내적 선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떠남은 사실상 얼핏 그러다는 것일 뿐인데, 그 이유는 그가 살아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의 경우는 이렇다. 요셉에 관련되는 처음부터 끝까지는 질서적으로 있는 주님의 인간이 신성이 되심을 표현하였다, 결과적으로는 보다 낮은 의미에서는 인간의 거듭남의 질서를 표현하였다, 그 이유가 요셉의 일생은 주님의 인간이 신성이 되심(glorification)의 형상(image), 또는 유형(type)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거듭남의 경우에서는 이렇다: 첫 상태에서, 인간이 진리를 통하여 선 안으로 이끌어들이어 질 때, 진리가 분명하게 나타난다, 그 이유는 이것이 세상의 빛 안에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이 진리는 육체의 감각적인 것들로부터 멀리 있지 않다. 그러나 선과 더불어서의 경우는 그렇지가 않다, 그 이유는 이 진리는 천국의 빛 안에 있기 때문, 게다가 육체의 감각으로부터 아주 멀리 떨어져 있는데, 그 이유는 인간의 영 안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신앙 속에 있는 진리는 분명하게 나타나나, 선은 그렇지 않다, 허지만 선은 계속적으로 현존하고, 흘러들고, 진리들을 살아 있게 만든다. 인간은 이외 다른 방법으로 거듭나질 수 없다. 그러나 이 상태가 통과되었을 때, 이때 선은 자체를 분명히 밝힌다, 이것은 이웃을 사랑함을 수단으로, 그리고 생활을 위하여 진리에 애착함을 수단으로 밝히 알린다. 이것들 또한 요셉이 끌려가서 그의 아버지에게 나타나지 않고 있다가, 후에 그의 아버지에게 자신을 밝히는 일련의 과정에 의해 표현되었다. 이것은 또한 내적인 선이 떠나서 없는 듯 비쳐짐이 ”하나는 나로부터 나갔다“에 의해 뜻해지고 있다.

그리고 나는 말했다, 그는 정녕 찢기워서 조각나고 말았을 것이다. 이는 그것은 악들과 거짓들에 의해 멸해졌다를 지각함을 의미한다. 이는 “말하다”의 의미가 지각하다 이다로부터: 그리고 “찢기워 조각남”의 의미가 악들과 거짓들에 의해 멸해지다 이다로부터 (즉 요셉에 의해 표현된 내적 선이 멸해지는 것) 알려진다; “찢기워 조각남”이 이런 의미를 지니는 이유는 영계에서 선에 속한 것이 악들과 거짓들에 의해 찢기고 조각나는 것 외의 다른 의미는 없기 때문이다. 여기서의 경우 죽음과 같은 것, 그리고 죽음에 관련되는 것이다. 영적 의미에서 이것들은 자연적 죽음을 의미하지 않고 영적인 죽음, 지옥에 떨어짐을 의미한다, 그 이유가 영계에서는 다른 죽음이 없기 때문이다. 마찬 가지로 “찢기움”도 들짐승에 의해 찢기우는 것을 의미하지 않고 악들과 거짓들에 의해 선이 조각나는 것이다. 더 나아가 찢는 들짐승은 영적 의미에서 탐욕들의 악들과 이 악에서 파생되는 거짓들을 의미하고, 이것 역시 다른 삶에서 들짐승들에 의해 의미된다.
주님으로부터 인간에게 계속적으로 흘러드는 선은 악들과 악들에서 파생되는 거짓들에 의하여서, 그리고 거짓들과 거짓들에서 파생되는 악들에 의해서가 아니면 멸해질 수 없다. 그 이유가 이 선, 즉 내적 인간을 통하여 계속적으로 흘러드는 이 선이 외적, 또는 자연적 인간에게 당도하자마자, 이 선은 악과 거짓을 만나게 되는데, 이 악과 거짓에 의해 선은 마치 들짐승들에 의해 다양한 방법들로 찢기워 조각나고 소멸된다. 그러므로해서 내적 인간을 통한 선의 유입은 저지되는 바(check), 안쪽의 마음(inner mind)에서 머무를 수밖에 없어 유입이 닫혀지고. 영적 평면 속의 많은 것들은자연적 인간이 영적인 것들을 동원해야 추론하고 이야기되는 것을 협조하는 정도에서만이 유입됨의 승인이 있기를 기다리는 처지에 놓여 있다. 그나마 요구된 협조 사항조차 지상적, 육체적, 세상적인 것들로부터 일 뿐인 바, 실로 선과 진리에 반대되고, (그나마 끌어다 사용한 영적인 것들은 위의 세상적, 육체적, 지상적인 것들을 포장하는) 겉치레(pretence)나 사기침에 일치시키는 것 뿐이다.
하여 보편적인 법칙인 것은 유입(influx)은 유출(efflux)에 의거 자체를 조정하는 것이다, 그리고 유출이 저지된다면 유입도 저지되는 것이다. 주님으로부터 내적 인간을 통하여 선과 진리의 유입이 있고, 외적 인간을 통하여 유출이 있음에 틀림이 없다, 즉 생활(삶) 안으로의 유출, 선행(charity)의 실행(exercise)이 있다는 말이다. 이 유출이 있으면, 그때 천국으로부터의 계속적인 유입이, 즉 주님으로부터 천국을 통한 유입이 있는다; 그 반면, 만일 유출됨이 없다면, 그러나 외적, 또는 자연적 인간에서의 저항이 있다면 (즉 악과 거짓이 안쪽으로 흐르는 선을 찢어 조각내고 소멸해버림이 있다면), 유입이 유출에 따른 자체를 조절하는 보편적 법칙이 적용되어, 선의 유입은 뒤로 물러서고, 그것 때문에 내적 인간을 통한 유입은 닫혀져 있는다; 그리고 이 닫힘을 통하여 영적 사항들에 관련하여서는 우둔함이 초래되고, 심지어 인간은 영원한 삶에 관련된 것을 모르고, 알려하지도 않는다; 끝내 그는 미쳐져 있어, 거짓들로 진리들에 반대하여 맞서게까지 하고, 거짓들을 진리들이라고, 진리들을 거짓들이라고 부르고, 악들을 선들에 반대하여 맞서게 하고, 악을 선으로, 선을 악으로 만들어 버린다. 고로 그는 선을 찢고 완전하게 조각낸다. (선과 악의 구분이 없게 해버린다.)
“찢기워짐(torn)”이라는 단어는 말씀에서 때때로 언급되는데, 그때마다 대체로 적당한 의미는, 악들로부터의 거짓들을 통하여 멸해지는 것이다; 그러나 악들을 통하여 멸해지는 경우는 “시체(carcass)”라고 불리운다. “찢기운” 것만이 언급될 때는 위 두 경우 모두가 의미된다; 그 이유가 이쪽의 의미가 저쪽의 의미도 포함하기 때문이다. “찢기운” 것이 악들로부터의 거짓들을 수단으로 멸해진 것이 의미되었기 때문에, 표현 교회에서 찢기운 어떤 것도 먹지 말라는 금지 명령이 하달되어 있었다. “찢기운” 것이 위와 같은 영적인 악으로 천국에서 이해되지 않았다면 위와 같은 금지 명령도 결코 없었을 것이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들짐승에 의해 찢기운 살을 먹음에서 무슨 해(피해, harm)가 있을까?
“찢기운”것들에 관하여, 그들이 이것을 먹어서는 안된다는 것에 대하여;
시체의 지방과 찢기운 것의 지방이 모두 각각에게 사용을 위해 있을지 모르나, 먹으려하는 조건이다면, 너희는 그것을 먹어서는 안될 것이다 (레. 7:24).
다시:
시체와 찢기운 것과 더불어 더럽혀지는 바, 너희는 그것들을 먹지 말 것이다: 나는 여호 와이다 (레. 22:8).
그리고 다시:
거룩함의 사람들로 너희는 나에게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들판에서 찢기운 살을 먹 지 말 것이다; 너희는 개들에게 그것을 던져야 한다 (출. 22:31).
에스겔서에서:
예언자가 말한다, 오 주 여호비이시여! 보십시오 제 혼은 더럽혀지지 않아왔습니다, 그리고 시체와 찢기운 것을 저는 저의 젊은 시절로부터 지금까지 먹지 아니했습니다, 하여 역겨움 의 살이 내 입 안으로 오지 아니했습니다 (겔. 4:14).
위 구절들로부터 분명해지는 것은, 찢기운 것을 먹는 것이 역겨움인 이유는 그것이 찢기워졌기 때문이 아니라, 악들로부터 있는 거짓들을 수단으로 선이 조각들로 찢기움이 의미되었기 때문이다; 이에 비해 “시체”는 악들에 의한 선의 죽음을 의미했다
악들로부터의 거짓들에 의해 선이 조각들로 찢어짐이 다윗으로부터의 아래 구절들로부터 내적 의미에서 있다:
사악한 자의 모습은 사자 같이 있다, 그는 찢기를 바란다, 그리고 은폐된 장소에 앉아 있는 젊은 사자로서 이다 (시. 17:12).
다시:
그들은 나에 맞서 자기들의 입을 열었다, 찢고 으르렁대는 사자이다 (시. 22:13).
그리고 다시:
그들이 사자로서 내 혼을 찢지 않도록 구출해주는 자 아무도 없다 (시. 7:2).
“사자”는 교회를 황폐해지게 하는 이들을 표시한다. 이미 지나온 구절의 요셉에 관련한 것에서, 즉 그가 자기 형제들에 의해 팔리움을 당하고, 그의 튜닠(웃옷)은 피로 물들여져 그의 아버지에게로 보내지고, 그의 아버지가 말했다, “이것은 나의 아들의 튜닠이다, 악한 들짐승이 그를 찢고 삼켰다, 요셉은 조각들로 찢겼다” (창. 37:33)를 다시 생각해보라.

그리고 나는 지금까지 그를 보지 못하고 있다. 이는 그것이 사라졌기 때문에를 의미한다. 이는 설명이 필요 없다.

그리고 너희는 내 얼굴들로부터 이 하나 또한 데려가려 한다. 이는 만일 새로운 진리 역시 떠나려 한다면을 의미한다. 이는 여기서 말해지는 주인공인 베냐민의 표현함이 새로운 진리이다로부터; 그리고 “내 얼굴들로부터 그를 데려감”의 의미가 영적 선으로부터 떼어내지는(estrange) 것, 고로 떠나는 것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 진리가 “이스라엘”인 영적 선으로부터 있기 때문에, 만일 이 진리가 떠나버린다면, 선 자체와 더불은 모든 것은 끝장 날 것이다; 그 이유가 선은 그것의 품질을 진리들로부터 취하기 때문이고, 진리들은 선으로부터 그것의 있음(생명)을 취하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이 둘 모두는 (사실상의) 생명을 가지기 때문이다.

해악이 그에게 닥친다면. 이는 악들과 거짓들을 수단으로를 의미한다. 이는 누군가에게 “해가 닥친다”의 의미가 악들과 거짓들로 해서 상해받음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외 다른 피해당함은 영적 의미에서 뜻해지지 않는다. 그 이유는 영계에서 모든 피해는 악들과 거짓들로부터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너희는 내 흰 머리털이 악 속에서 무덤으로 내려가게 만들 것이다. 이는 영적 선, 그런고로 교회의 내적인 것은 멸망하리라를 의미한다. 이는 이스라엘의 표현함이 영적 선, 그리고 영적 교회의 내적 부분이다로부터; “흰 머리털”의 의미가 교회의 최말단이다로부터; 그리고 “악 속에서 무덤으로 내려가다”의 의미가 멸해지는 것이다로부터 알려진다. “선 안에서 무덤으로 내려가는 것”은 다시 일어나는 것과 거듭나지는 것, 그러므로 “악 안에서 무덤으로 내려가는 것”은 그 반대의 경우인 바, 고로 멸해지는 것이다. 만일 베냐민에 의해 표현되는 진리가 멸해질 것이다면, 교회의 내적 부분도 멸해진다는 말에 주목해보자: 선이 선이 되어 있으려면, 선은 그것 자신의 진리를 가지고 있어야만 한다; 진리들도 진리이기 위하여서는 그것 자신의 선을 지녀야만 한다. 진리 없는 선은 선이 아니고, 선이 없는 진리들은 진리들이 아니다. 그것들은 함께 결혼을 만들어내야 한다, 이것을 두고 천국의 결혼이라 불리운다. 그러므로 만일 이쪽이 떠난다면, 다른 쪽은 멸해진다; 그리고 이쪽이 악들과 거짓들로 해서 찢기운 바 되어 저쪽으로부터 떨어져 버리기도 한다.

그리고 지금 내가 당신의 종 나의 아버지에게 갈 때. 이는 교회의 선은 내적 교회의 영적 선과 상응함을 의미한다. 이는 지금 스스로 이것을 말하는 자인 유다의 표현함이 교회의 선이다로부터; 그리고 여기서 “아버지”인 이스라엘의 표현함이 영적 선이다로부터 알려진다. 유다가 표현하는 교회의 선은 외적 교회의 선이다; 이에 반해 이스라엘이 표현하는 영적 선은 내적 교회의 선이다; 그리고 외적 교회의 것들은 내적 교회 속에 있는 것들과 상응한다. 고로 유다가 표현하는 교회의 선은 이스라엘에 의해 표현되는 영적 선과 상응한다.

그리고 이 소년이 우리와 함께 있지 않다면. 이는 만일 새로운 진리가 그들과 함께 있지 않다면을 의미한다. 이는 여기서 “소년”인 베냐민의 표현함이 새로운 진리이다로부터 알려진다.

그리고 그의 혼이 소년의 혼과 묶여 있는 바. 이는 밀접한 결합이 있어 온 터에를 의미한다. 이는 “혼(soul)”의 의미가 생명이다로부터, 고로 이쪽의 생명이 저쪽의 생명 안에 있다는 것, 고로 친밀한 결합이 있다, 여기서는 “이스라엘”인 영적 선이 “베냐민”인 이 선으로부터의 진리와 밀접하게 결합함 이다. 이쪽의 혼이 다른쪽의 혼에 묶여 있듯이 선과 이 선으로부터의 진리가 밀접하게 결합함의 경우는 이렇다: 인간의 마음, 이는 인간 자신이고, 인간의 생명이 있는데, 두 능력들을 가지고 있다. 즉 하나는 신앙의 진리들쪽으로 할당(allot)되어져 있는데, 이해력이라 불리우고, 또 하나는 선행의 선쪽에 할당되어 있고, 의지력이라 불리운다. 인간이 인간이기 위하여서는 이 두 능력들은 반드시 하나를 만들어야 한다.
그러나 오늘날 이 두 능력들은 모두 떼어져(disjoin) 있다. 이는 이런 사실로부터, 즉 인간은 진리인 것을 이해할 수 있고, 이해했음에도 얼마든지 그것을 뜻하지 않을 수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이 두 능력은 서로에게 별개의 것인 듯하고 있다는 것을 알는지 모른다. 우리는 십계명에 있는 모든 것들이 진리이다는 것을, 또한 말씀으로부터 있는 교리물들에서도 이런저런 것들이 진리들이다는 것도 이해할 수 있다; 그렇다, 우리는 그런 사항들을 지적으로 확증할 수 있고, 그것들이 진리임을 타인들에게 전도까지 할 수 있다, 그럼에도 정작 자신을 놓고서는 다르게 뜻하고, 그것이 별개의 것인 듯, 자신과는 무관한 듯 행동할 수 있다. 이런 사실로부터 인간에 있는 이 두 능력들은 분리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러나 그것들은 분열되어 있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이런 사실로부터, 즉 진리를 깨닫는 것이 그를 천국쪽을 향하여 승강하게 한다는 것, 악을 뜻하는 것은 그를 지옥 쪽인 아래로 끌어당긴다는 것으로부터 알는지 모른다. 그렇게 해서 인간 당사자는 이 둘 사이에 걸려 있다. 그의 생명이 존재하는 그의 의지가 여전히 아래쪽으로 당기고 있다면, 필시 갈 곳은 지옥 뿐이다. 그러므로 이런 것이 발생하지 않기 위해 이 두 능력들은 결합하고 있어야 한다. 이것이 주님에 의해 거듭남을 통하여 행해진다. 그리고 이것은 신앙의 진리를 선행의 선 안에 심음을 통하여 가능해진다. 고로 신앙의 진리를 통하여 인간은 새로운 이해력을 수여받고, 선행의 선을 통하여 새로운 의지를 수여받는다. 이리하여 두 능력들은 하나의 마음을 만든다

그리고 그가 소년이 있지 않음을 볼 때 그는 죽을 것입니다. 이는 (만일 “베냐민”인 진리가 떠난다면) 영적 선은 멸해짐을 의미한다. 이는 이스라엘의 표현함이 영적 선이다로부터; 그리고 “죽는다”의 표현함이 이와같이 있기를 중지하는 것이다로부터, 고로 멸해진다 이다.

그리고 당신의 종들은 당신의 종 우리의 아버지의 흰 머리털로 하여금 슬픔 속에서 무덤으로 내려가게 만들 것입니다. 이는 교회와 더불은 모든 것은 끝장 날 것이다를 의미한다. 이는 이미 살폈다. 여기서 “아버지”인 이스라엘이 교회이다고 말하는 이유는, 그가 표현하는 영적 선이 인간 안에서 교회를 만들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우리가 “영적 선”이라 말하든지, “교회”라고 말하든지 같은 말이다. 그 이유가 그것들은 분리되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말씀에서, 특히 예언서들에서 “이스라엘”은 영적 교회이다.

32-34절. 당신의 종은 이 소년을 위해 나의 아버지 앞에서 담보가 되어 말하기를, 만일 제가 그를 당신에게 데려오지 않는다면, 저는 영영 나의 아버지에게 죄인 될 것입니다. 33 그리고 지금 원하옵기로, 당신의 종이 이 소년 대신 내 주에게 종으로 남아 있게 하소서, 그리고 이 소년은 그의 형제와 함께 올라 가게 하소서. 34 이 소년이 저와 함께 있지 않는데 어떻게 제가 나의 아버지에게 올라 가겠습니까? 필시 저는 나의 아버지에게 닥치는 악을 보고야 말 것입니다.

당신의 종은 내 아버지 앞에서 이 소년을 위해 담보가 되어 말하기를. 이는 그것 자체에 근접함을 의미한다. 이는 누구를 “위하여 담보가 된다”의 의미가 그를 자신에게 인접되게 함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 이유가 베냐민이 표현한 진리가 “아버지”인 영적 선과 더불어 있지 않고, 한동안 유다가 표현하는 외적인 선과 있을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외적 선과 영적 선은 상응을 수단으로 하나로서 행동한다.

만일 내가 그를 당신에게 도로 데려오지 않으면. 이는 그것이 영적 선과 합쳐지지 않으면을 의미한다. 이는 “도로 데려오다”의 의미가 다시 결합하는 것이다로부터; 그리고 이스라엘의 표현함이 영적 선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저는 나의 아버지에게 영영 죄인 일 것입니다. 이는 돌아서서 떠남, 그리하여 교회의 선은 있지 않을 것을 의미한다. 이는 “죄인이다”의 의미가 분열함이다로부터, 고로 돌아서서 떠남(turn away, 외면함, 돌보지 않음)이다; 그리고 만일 유다가 표현하는 외적 교회의 선이 이스라엘에 의해 표현되는 내적 교회의 선으로부터 자체를 돌려세우면, 거기에는 교회의 선은 더 이상 있지 않다. 결합 자체가 선으로부터 교회가 있게 하는 원인이다. 이 두 선들, 즉 내적 교회의 선과 외적 교회의 선의 경우는 이렇다: 내적 교회의 선, 또는 내적인 선은 외적 교회의 선, 또는 외적인 선을 유입을 수단으로 생산한다; 그리고 이렇기 때문에 내적인 선은 외적인 선을 지켜보기 위하여 외적인 선을 자신쪽으로 승강하게 한다, 하여 주님을 향하여 위쪽으로 이다. 이것은 결합이 있을 때 거행된다; 그러나 만일 분열이 있다면, 외적인 선은 자체를 돌아서게 하여 떠나고, 아래쪽을 쳐다보는 바, 멸해진다. 이런 돌아서서 떠남이 “나는 나의 아버지에게 영영 죄인일 것입니다”에 의미되어 있다.

그리고 지금 바라옵기로 당신의 종이 이 소년 대신 내 주에게 종으로 남게 하소서. 이는 복종함을 의미한다. 이는 누군가를 위해 자신을 종으로 제공하는 것은 자신으로부터의 자유함을 박탈하는 것이다, 고로 자신을 타인에게 통째로 복종하게 하는 것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를 수단으로 자연적 인간 또는 외적 인간이 내적 인간 아래 복종함이 의미된다; 그 이유가 선이 자체를 복종시키는 곳에서는 진리들 자체도 복종하는 결과가 따라오는데, 그 이유는 진리가 선으로부터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소년은 그의 형제들과 함께 올라가게 하소서. 이는 내면의 진리가 영적 선과 합쳐지기 위하여를 의미한다. 이는 베냐민의 표현함이 새로운 진리이다로부터; 그리고 “자기 형제들과 함께 올라 감”의 의미가 자기 아버지와 다시 결합함, 즉 이스라엘에 의해 표현되는 영적 선과 다시 결합함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여기서 베냐민이 표현하는 내면의 진리는 새로운 진리이다. 그 이유가 이 진리는 하위인 진리에 비교하여 내면적이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는 이 진리가 선으로부터 진행하기 때문, 이것이 내면의 진리이다. 즉 이 진리는 “이스라엘”인 영적 선으로부터 진행하기 때문에 내면의 진리인 것이다. 의지로부터의 선행의 선, 고로 애착으로부터의 선행의 선은 내적인 선, 또는 내적 교회의 선이다; 그러나 애착으로부터 있지 않은 선행의 선, 즉 순종함으로부터 있는 선, 그리고 의지로부터가 아니고 교리로부터 있는 선은 외적인 선, 또는 외적 교회의 선이다; 그리고 선으로부터 있는 진리들의 경우도 이와 같다.

이 소년이 저와 함께 있지 않고서야 어떻게 제가 나의 아버지에게 올라가겠습니까?” 이는 자연 평면으로부터의 영적 선이 내면의 진리 없이 있을 것을 의미한다. 이는 여기서 “아버지”인 이스라엘의 표현함이 자연 평면으로부터의 영적 선이다로부터; 그리고 여기서 “소년”인 베냐민의 표현함이 내면의 진리이다로부터 알려지고 있다.

필시 저는 나의 아버지에게 닥치는 악을 볼 것입니다. 이는 그것이 멸해짐을 지각함을 의미한다. 이는 “보다(see)”의 의미함이 이해하다 이다로부터, 그러므로 거기로부터 지각하다가 있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것이 멸해진다는 것이 “그에게 닥칠 악”에 의해 의미되는데, 이와 같은 말이, “그의 흰 머리털이 악 안에서 무덤으로 내려가게 만듦”의 경우이다, 또한 만일 그의 아버지가 그의 형제와 더불어 보지 못한다면, 그는 “죽을 것이다”에 의해서도 같은 말이다. 이것이 의미되어진 악이다.
**************************************

창세기 제 45 장

성경: 창세기 45장

1. 그리고 요셉은 자기 앞에 서있었던 모든 사람 앞에서 자신을 억제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소리질렀다, 모든 사람은 나로부터 물러가라. 그리하여 요셉이 자신을 그의 형제들에게 알리는 동안 거기에는 아무도 그와 더불어 있지 않았다.
2. 그리고 그는 그의 목청을 돋구어 울었다. 그래서 이집트 사람들이 들었고, 바로의 집도 들었다.
3. 그리고 요셉은 그의 형제들에게 말했다, 나는 요셉이다. 나의 아버지는 아직 살아계신가? 그런데 그의 형제들은 그에게 대답할 수 없었다. 그 이유는 그들이 요셉 앞에서 너무 당황해졌기 때문이다.
4. 그리고 요셉은 그의 형제들에게 말했다, 당신들은 나에게 부디 가까이 오시오. 그래서 그들은 가까이 다가갔다. 그리고 그는 말했다, 나는 당신들이 이집트로 팔았던 당신들의 형제 요셉이요.
5. 그리고 당신들이 저쪽으로 나를 팔았다고 해서 슬퍼하지 않고, 지금 당신의 눈에서 분노가 있지 않게 할 것입니다. 그 이유는 하느님께서 당신들을 살아 있게 만들고저 당신들 앞에 나를 보냈기 때문입니다.
6. 2년 동안 기근이 토지의 한가운데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경작함도 수확도 없는 5년이 아직 있습니다.
7.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당신들을 위하여 토지에 리메인스(remains)를 놓으시려고 당신들 앞에 나를 보냈습니다, 그리고 큰 피신으로 당신들이 살게 만드시려고 입니다.
8. 따라서 당신들이 나를 저쪽에 보낸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십니다. 그리고 그분은 나를 바로에게 아버지되게 놓으셨고, 그의 모든 집에는 주가 되게 하셨습니다, 나는 이집트의 모든 토지를 통치하고 있습니다.
9. 당신들은 서둘러 나의 아버지에게 올라가십시오, 그리고 그에게 말하기를, 당신의 아들 요셉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느님께서 나를 모든 이집트의 주로 세웠습니다. 나에게 내려 오십시오, 지체마십시오.
10. 그리고 당신은 고센의 토지에 거주할 것입니다, 그리고 당신은 저 가까이 계실 것이고, 당신, 그리고 당신의 아들들, 그리고 당신의 아들들의 아들들, 그리고 당신의 양떼, 그리고 당신의 목축들, 그리고 당신이 소유한 모든 것입니다.
11. 그리고 내가 거기서 당신을 떠받들 것입니다. 그 이유가 기근의 다섯 해가 아직 더 있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뿌리뽑히지 않도록, 당신과 당신의 집식구, 그리고 당신이 가진 모든 것이 뿌리 뽑히지 않도록 하십시오.
12. 그리고 보라 내 입으로 내가 당신들에게 말하는 것을 당신들이 보고 있다, 그리고 나의 아우 베냐민의 눈이 보고 있다.
13. 그리고 여러분은 나의 아버지에게 이집트에서의 나의 모든 영화, 당신들이 보았던 모든 것을 말씀드리시오. 그리고 서두르시오, 그리고 나의 아버지를 이쪽으로 내려 오게 하시오.
14. 그리고 그는 그의 아우 베냐민의 목들에 엎드려져서 울었다. 그리고 베냐민은 그의 목들에서 울었다.
15. 그리고 그는 그의 모든 형제와 키스했다, 그리고 그들과 울었다, 그 후에 그의 형제들은 그와 이야기 했다.
16. 그리고 이 목소리가 바로의 집에 들렸다, 말하기를 요셉의 형제들이 와있다. 그리고 이것은 바로의 눈에, 그의 종들의 눈에도 좋게 여겨졌다.
17. 그래서 바로는 요셉에게 말했다, 네 형제에게 말하라, 이것을 너희는 하라. 너희 짐승들에 (양식을) 싣고, 가서, 가나안의 토지에 당도하라.
18. 그리고 너희 아버지와 너희 집식구들을 데리고, 나에게 오라. 그리고 나는 너희에게 이집트의 토지의 좋은 곳을 줄 것이다, 그리고 너희는 그 토지의 지방을 먹을 것이다.
19. 그리고 지금 명령했다, 이것을 너희는 실시하라. 너희는 이집트의 토지로부터 수레들을 너희 아기들, 그리고 너희 여인들을 위하여 가져가라, 그리고 너희 아버지를 모시고, 오라.
20. 그리고 너희의 눈이 너희의 물자를 아끼려 하는 것을 보게 말라. 그 이유는 이집트의 온 토지의 좋은 것이,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있기 때문이다.
21. 그리고 이스라엘의 아들들이 그렇게 행동하였다. 그리고 (요셉은) 그들에게 바로의 입에 따라 수레들을 주었다, 그리고 그들에게 길 양식을 주었다.
22. 그리고 그들 모두에게 바꿔 입을 의복을 주었다. 그리고 베냐민에게 그는 은 삼백 조각을 주었다, 그리고 다섯 번 바꿔 입을 옷을 주었다.
23. 그리고 그의 아버지에게는 이 방식에 의거 보냈다, 그리고 열 마리의 나귀가 이집트의 좋은 것을 운반하고, 그리고 열 마리의 암나귀가 길을 떠나는 그의 아버지를 위해 곡식과 빵과 자양분을 나르는 것이다.
24. 그리고 그는 그의 형제들을 떠나 보냈다, 그리고 그들은 출발했다. 그리고 그는 그들에게 말했다, 길에서 다투지 말라.
25. 그리고 그들은 이집트로부터 올라갔다, 그리고 가나안의 토지로 그들의 아버지 야곱에게 왔다.
26. 그리고 그들은 그에게 말했다, 말하기를, 요셉은 아직 살아있습니다, 그리고 그는 이집트 온 토지의 통치자입니다. 그리고 그의 심정은 낙담하였는데, 그렇기 때문에 그는 그들을 믿지 않았다.
27. 그리고 그들은 요셉이 자기들에게 말한 요셉의 모든 말들을 그에게 말했다. 그리고 그는 요셉이 자기를 모시려고 보낸 수레들을 보았다, 그리고 그들의 아버지 야곱의 영은 되살아 났다.
28. 그리고 이스라엘은 말했다, 흡족하다, 나의 아들 요셉이 아직 살아 있다. 나는 내가 죽기 전에 가서 그를 보리라.

각 절의 내적 의미

1, 2절. 그리고 요셉은 자기 앞에 서있었던 모든 사람 앞에서 자신을 억제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소리질렀다, 모든 사람은 나로부터 물러가라. 그리하여 요셉이 자신을 그의 형제들에게 알리는 동안 거기에는 아무도 그와 더불어 있지 않았다. 2 그리고 그는 그의 목청을 돋구어 울었다. 그래서 이집트 사람들이 들었고, 바로의 집도 들었다.

그리고 요셉은 자기 가까이에 서있었던 모든 사람 앞에서 자신을 억제할 수 없었다. 이는 모든 것들은 이제 결합을 위하여 천적 평면으로부터의 내적 부분 (the internal celestial) 을 수단으로 준비가 만들어졌음을 의미한다. 이는 “요셉”의 표현함이 내적 선, 고로 천적 평면으로부터의 내적 부분이다로부터, 그 이유는 천적 평면에 의해 주님으로부터 진행하는 선이 뜻해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신을 억제할 수 없었다”의 의미가 모든 것이 결합을 위해 만들어졌다 이다로부터 알려진다. 이는 이런 경우와 비슷할 것이다. 누군가가 어떤 목적이나 결과를 얻기 위해 갖가지 수단을 다 동원하여 질주했다면, 결과를 개봉하고 싶은 자신을 억제할 수 없는 때와 같다. 이것을 위의 본문이 의미한다; 앞 장에서는 결합이 개시되었고, 이 장에서는 결합 자체가 진행된다. “요셉 가까이에 서있던 모든 이”에 의해서는 결합을 방해하는 이런저런 것들을 의미한다, 이런 이유로 그들은 내보내졌는데, 아래에서 살핀다.

그래서 그는 소리질렀다. 이는 결과가 아주 가까이 있음을 의미한다. 자신을 억제할 수 없을 때 나오는 것이 소리침인 바, 이는 결과가 임박했다를 뜻한다.

모든 사람은 나로부터 물러가라. 이는 역으로 있거나 일치하지 않는 기억 속의 지식들은 한 가운데로부터 내쳐짐을 의미한다. 이는 “그와 더불은 모든 사람”의 의미가 기억 속의 지식들이다로부터 알게 되는데, 그 이유는 이 사람들이 이집트인들이었고, 그들에 의해 기억 속의 지식이 의미되기 때문이다. 이들이 일치하지 않고 역으로 있다고 말한 이유는 이렇다: 결합이 외적 인간, 또는 자연적 인간에 있는 진리들이 내적 부분인 선과 결합될 때, 즉 신앙의 진리들이 선행의 선과 결합될 때, 이때 일치하지 않는 기억 속의 모든 진리들, 특히 역으로 있는 것들은 중앙에서 측면 쪽으로 거절되어진다. 고로 중앙에 있는 빛으로부터 그늘진 바깥쪽으로 거절되어진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 이 결합을 위해서 기억 속의 지식들은 필수적인 것, 중요한 것이 아닌 것으로 간주된다는 것, 따라서 부분적으로는 보여지지 않기도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하모니를 이루거나 일치하는 기억 속의 지식들이 있다면, 그것들로부터의 것은 거기 남아 있는데, 그 나마 남아 있는 것들은 추출된(extract) 지식들, 즉 격이 높아진(sublime) 기억 속의 지식들이다. 이 지식들을 가지고 내면은 감각한다. 이 감각함으로부터 얼마 정도의 즐거움 까지, 즉 하루 중에서 아침이 우리에게 주는 상쾌함 같은 정도까지는 느껴질 수는 있지만 대체적으로는 인간에 의해 지각되지 않는다. 이렇게 하여 신앙 속에 있는 진리는 선행 속에 있는 선과 결합되어진다.

그리하여 요셉이 자신을 그의 형제들에게 알리는 동안 거기에는 아무도 그와 더불어 있지 않았다. 이는 천적 평면으로부터의 내적 부분이 이 중매자를 통하여 자연 평면에 있는 진리들과 합쳐질 때 여타 어느 지식도 현존하지 않음을 의미한다. 이는 앞에서 설명되었다.

그리고 그는 그의 목청을 돋구어 울었다. 이는 자비와 환희(joy)를 의미한다. 여기서 “울다(weep)”의 의미가 자비의 결과이다로부터; 그리고 또한 슬픔의 결과, 사랑의 결과이다로부터, 고로 환희이다.

그래서 이집트 사람들이 들었다. 이는 최말단(ultimate) 조차도를 의미한다. 이는 “듣다(hear)”, 즉 우는 소리를 듣다의 의미가 자비와 환희를 지각함이다로부터; 그리고 이집트인들의 표현함이 기억 속의 지식들이다로부터, 고로 최말단들이다로부터, 그 이유가 기억 속의 지식들은 인간의 최말단, 즉 인간의 기억과 생각에 있는 것들에 해당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이 최말단이라고 당사자에게는 나타나지 않고, 오히려 그것들이 총체적으로 지혜나 총명으로부터 인 듯하게 여겨지고 있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실로 이것들은 지혜나 총명의 그릇일 뿐이다. 그 이유가 이 지식들은 육체의 감각적인 것들과 자체들을 결합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자신의 생각함을 되짚어보면 분명해진다. 즉 우리가 어떤 진리를 문의하게 되면, 우리의 생각함이 기억 속의 진리 안에서 이리저리 뒤져보는 바, 이 지식들이 표출되고 현존하는 것은 분명한데 우리의 눈, 귀 같은 감각에 모습을 나타내지는 않는다; 그 이유가 이때 생각은 이 지식들이 포함하는 것을 (한약을 달여 약만을 추출하듯) 추출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기저기 기억 속에 흩어 있는 것 뿐만 아니라 깊숙이 감추여 있다시피 있는 지식들까지도 다 뒤져낸다.) 그 다음 문의에 대한 답으로서 결론을 만들어 낸다. 여기서 한 차원 더 전진하는데, 즉 생각이 더 내면적으로 파고드는 것이다. 그 수단은 생각이 기억 속의 지식들을 생각함 자체로부터 제거하는 것이고, 얼마 만큼 제거되느냐에 따라 얼마나 깊이 내면을 수색하는지가 결정된다. 이것이 더 분명해지는 것은 다른 삶의 경우이다. 인간이 다른 삶에 오게 되어 영이 될 때, 실로 그는 자신의 기억 속의 지식들까지도 가져오지만, 거기서 그것들을 사용하지 못한다. 그 이유는 몇 가지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는 진리와 선에 관해 생각하고 이야기도 하는데, 세상에서 보다 더 또렷하고 완전하게 이다. 이로부터 알는지 모르는 것은, 기억 속의 지식들이 이해력을 형성하는 것을 돕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해력이 형성되어지고 나면, 이 지식들은 최말단 평면(plane)을 구성해줄 뿐, 인간은 이 지식으로부터 더 이상 생각하지 않고, 그 지식 위에 있게 된다.

바로의 집도 들었다. 이는 자연 평면 전체를 통하여를 의미한다. 이는 바로의 표현함이 일반적 측면에서의 자연 평면을 의미함에서 알게 된다. 고로 그의 “집”은 자연 평면 전체를 의미한다.

3-5절. 그리고 요셉은 그의 형제들에게 말했다, 나는 요셉이다. 나의 아버지는 아직 살아계신가? 그런데 그의 형제들은 그에게 대답할 수 없었다. 그 이유는 그들이 요셉 앞에서 너무 당황해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요셉은 그의 형제들에게 말했다, 당신들은 나에게 부디 가까이 오시오. 그래서 그들은 가까이 다가갔다. 그리고 그는 말했다, 나는 당신들이 이집트로 팔았던 당신들의 형제 요셉이요. 그리고 당신들이 저쪽으로 나를 팔았다고 해서 슬퍼하지 않고, 지금 당신의 눈에서 분노가 있지 않게 할 것입니다. 그 이유는 하느님께서 당신들을 살게 만들고저 당신들 앞에 나를 보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요셉은 그의 형제들에게 말했다. 이는 천적 평면으로부터의 내적 부분이 자연 평면에 있는 진리에 지각하는 능력을 주었다를 의미한다. 이는 “말하다(say)”의 의미가 말씀의 역사 부분에서의 경우, 지각하다 이다로부터, 여기서는 지각의 능력을 주는 것을 의미한다 (아래에서 설명한다); 요셉의 표현함이 천적 평면으로부터의 내적 부분이다로부터; 그리고 여기서 “그의 형제들”인 야곱의 열 아들의 표현함이 자연 평면에 있는 진리들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고로 내적 의미는 천적 평면으로부터의 내적 부분이 자연 평면에 있는 진리들에게 지각하는 능력을 주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다”가 지각하는 능력을 주는 이유는 이어지는 사항들에서의 주제가 “요셉”인 천적 평면으로부터의 내적 부분이 “야곱의 열 아들”인 자연 평면에 있는 진리들과 결합함이기 때문, 그리고 결합이 있을 때, 지각력이, 즉 진리에 애착함을 통하여, 고로 선으로부터 지각하는 능력이 주어지기 때문이다.

나는 요셉이다. 이는 자신을 명백히 함(manifestation)을 의미한다.

나의 아버지는 아직 살아계신가? 이는 자연 평면으로부터 있는 영적 선의 현존(現存)을 의미한다. 여기서 “아버지”인 이스라엘의 표현함이 자연 평면으로부터의 영적 선이다로부터; “그가 아직 살아 계신가”의 의미는 거기로부터 현존하고 있다 이다. 그 이유는 지금 요셉이 자신의 정체를 밝힘에서 사실 아버지가 살아계심으로 판단하고 있음에도 안부를 묻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은 처음에는 생각 속에서 현존했고, 이 현존함을 생각하면서 계속 요셉은 그의 형제들과 이야기를 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말한 이유인즉, “요셉”인 천적 평면으로부터의 내적 부분이 “야곱의 아들들”인 자연 평면에 있는 진리들과의 결합은 “이스라엘”인 자연 평면으로부터 인 영적 선을 통하지 않고는 결괴되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결합이 결과되었을 때, 그들은 야곱의 열 아들들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열 아들들”, 즉 자연 평면에 있는 영적 진리들이다.

그런데 그의 형제들은 그에게 대답할 수 없었다. 자연 평면에 있는 진리들은 아직 말할 상태에 있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이는 여기서 “그의 형제들”인 야곱의 아들들의 표현함이 자연 평면에 있는 진리들이다로부터; 그리고 “대답할 수 없다”의 의미가 말할 상태에 아직 있지 않다로부터, 즉 진리들로부터 내적 인간과 말할 상태는 아직 못된다는 말이다. 이 경우가 여기서는 이렇다: 내적 인간이 외적 인간과 결합될 때, 또는 선이 진리와 결합될 때, 처음에는 내적 인간 쪽에서만의 교통함이 외적 인간과 더불어 있다; 즉 교통함이 아직 상호적이지 않다는 말이다. 이 교통함이 상호적일 때, 결합이 있는다. 그러므로 요셉이 베냐민의 목을 끌어안고 울고, 그의 모든 형제들과 키스하고 난 후 처음으로 그의 형제들이 그와 대화했다고 말해지는 것이다 (15절). 이는 결합이 결과된 이후, 받아들임 덕택에 상호 교통함이 있다는 것이 의미되어진다.

그 이유는 그들이 요셉 앞에서 너무 당황했기 때문이다. 이는 그들 사이에서 동요가 있음을 의미한다. 이는 “당황함(cobsternation)이 있다”의 의미가 동요함(commotion)이 있다 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당황함은 그밖에 더 다른 의미는 없다. 동요함을 수단으로 자연 평면에 있는 진리들에 관한 질서가 새로이 배열됨(dispostion)과 설정됨(setting)이 뜻하여진다. 질서 안에서의 이런 설정됨에 관하여, 즉 인간의 기억에 있는 기억 속의 지식들과 진리들이 질서 안에서 설정됨에 관하여는 인간에게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주님이 허락하실 경우, 천사들에게는 알려진다. 그 이유가 이것은 경이로운 질서이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조그만 다발(bundle)들 같이 응집(cohere) 한다, 그리고 조그만 다발들 자체가 함께 응집한다, 그리고 이것은 인간이 마음에 품는 것들에 따라서 있다. 이 응집함은 여느 인간도 믿어본 적이 없는 경이로운 것이다. 다른 삶에서 때로는 그것들이 시야에 잡히기도 한다. 그 이유가 영적인 이런저런 것들은 천국의 빛에서는 눈의 시각에 진열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상의 눈의 시각은 아니다. 기억 속의 지식들과 진리들은 인간의 사랑들 만으로 황홀한 형체들로 배열되어진다, 즉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을 수단으로 지옥의 형체들로, 하느님을 사랑함과 이웃을 향한 사랑을 수단으로 천국의 형체들로 배열된다. 그러므로 인간이 거듭나지는 동안, 그리고 결합이 내적 인간의 선과 외적 인간의 진리들에서 결과되는 한편, 동요함은 진리들 사이에서 발생된다, 그 이유가 이 결합시에 다른 배열이 수행되기 때문이다. 이 동요함이 여기서는 “당황함”에 의해 의미되고 있다. 이때 만들어진 동요는 이전 상태의 바뀜으로부터, 즉 이전 상태에서 누려왔던 기쁨이 결핖됨으로부터 발생하는 걱정에 의해 진리 자체가 명명백백해진다. 또한 이 동요됨은 과거 삶에 관한 걱정으로도 자체를 표명한다, 즉 내적인 선과 내적 부분 자체를 더 낮은 자리에 추방해버리고 있었던 것에 대한 걱정이다. 이 걱정이 이어지는 구절에서 취급된다.

그리고 요셉은 그의 형제들에게 말했다. 이는 새로운 자연 평면이 지각됨을 의미한다. 이는 “말하다”가 지각하다를 의미함으로부터; 그리고 야곱의 아들들의 표현함이 자연 평면의 진리들, 여기서는 자연 평면이다로부터; 그 이유가 자연 평면에 있는 진리들을 표현하는 것들은 자연 평면 자체 역시 표현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바로의 경우, 그가 표현하는 것은 일반적 측면에서의 기억 속의 지식인데, 이는 그가 이집트의 왕이었기 때문인데, 그는 일반적 측면에서는 자연 평면 자체를 표현한다. 자연 평면에 있는 진리들, 그리고 자연 평면 자체, 또는 자연적 인간 자체 모두는 하나로서 행동한다, 그 이유가 진리들은 내용들(알맹이들)이고, 자연 평면은 내용을 담는 그릇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지금은 내적 의미에서 그릇이 의미되고, 내용은 어떤 시리즈에 따라서 이다.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여기서 야곱의 아들들은 새로운 자연 평면을 표현하게 되기 때문이고, 이를 위한 결합의 행동이 일반적인 설명(explication)에 일치하여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내적 부분과 외적 부분의 결합, 또는 선이 진리와 결합함이 거행될 때, 첫 번째 순서는 인간이 진리에 감동되고 선과도 감동되는 지각력이 수여되는 것이다, 이때 동요함이 느껴질 수밖에 없다; 그 다음 내면으로 교통함이 유입을 수단으로 주어진다; 등등이다. 이로부터 야곱의 아들들이 지금 표현하는 것은 새로운 자연 평면인데, 그 이유는 이전의 상태가 바뀌었기 때문이다.

당신들은 나에게 부디 가까이 오시오. 이는 내면적으로 교통함을 의미한다. 이는 “가까이 오다”의 의미가 더 밀접하게 교통하는 것이다로부터, 여기서는 내적 측면에 비교하여 외적 측면을 서술하는 경우이므로, 이는 더 내면적으로 교통하는 것이다. 인간이 모르는 것은, 자연적, 또는 외적 인간과의 교통함에는 내면과 외면의 양쪽 측면에서 있다는 것에 대해서이다. 모르는 이유는 그가 내적 인간에 관한 관념, 그리고 외적 인간의 생명과 구분되는 내적 인간의 생명에 관한 관념을 자신을 위해 만들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마 모든 이에게 내적 인간에 대해 물어본다면, 이것은 우리 안쪽에 있는 인간이다는 정도의 생각 뿐일 경우가 허다할지 모른다. 게다가 안쪽 인간이 바깥쪽 인간, 즉 외적 인간과는 별도의 생명 (또한 삶)을 지니고 있어 완전 구분된다는 것을 모르고 있다. 게다가 내적 인간의 삶은 더 순수하다는 것, 하여 인간이 죽을 때, 내적 인간은 외적 인간으로부터 진짜 분리됨이 거행되고, 이 분리됨 이후 살아가는 내적 인간이 영(spirit)이라 불리운다는 것까지 연결해 생각을 정리해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사실상 이 영이 인간 동물이라는 육체애 얹혀서 살고 있는 인간 당사자 자체이다. 이 영이 자신에게 나타나는 “나”이고 다른 삶에서는 이세상의 인간 같이 나타나는 육체라는 껍질 없는 진짜 “나”가 나타나고 있다. 저세상의 인간도 이세상의 인간이 향유한 것들, 즉 촉각, 후각, 시각, 청각, 이야기함, 생각함이 수여되어져 있다. 저 세상에 도착한 당사자가 자신이 다른 삶에 있다는 것을 꼼꼼히 반영해보지 않고 있다면, 그는 세상에서 육체 안에 있던 자기를 상상하고 있다. 이는 내가 거기 있는 영들이 말하는 것에서 확인되었다. 어쨌든 이런 사항들로부터 분명해지는 것은, 인간의 내적 부분과 외적 부분이 무엇인지 이다. 이런 두 부분들에 관하여 생각을 정리해서 지닌다면, 이후 자주 언급될 수밖에 없는 내적 인간과 외적 인간이라는 단어의 등장에서 보다 더 선명한 관념을 가지고 생각하게 될 것이라 본다. 또한 여기서 “이리 가까이 내게로 오시오”에 의해 의미된 내면의 교통함이 뜻하는 것도 더욱 실감될 것이다. (성경의 첫 장 첫 절에 등장하는 “하늘” 과 “땅”이 성경을 여는 두 단어 인 셈인데, 이것이 비록 거듭남 이전의 내적 인간과 외적 인간을 의미하지만, 어쨌든 우리가 지니는 두 인간을 선포함으로 성경의 책이 펼쳐지고 있다고 생각에 떠올린다면, 이 두 인간에 대한 것을 생각 속에 정리해두는 것이 성경의 이해에 얼마나 중요할 것인지 실감되리라 본다. 역자 주)

그래서 그들은 가까이 다가갔다. 이는 그 결과를 의미한다. 즉 보다 더 내면적으로 교통함이 결과된다 이다.

그리고 그는 말했다, 나는 … 당신들의 형제 요셉이요. 이는 유입을 수단으로 명백히 자신의 정체를 드러냄을 의미한다. 이는 “말하기를, 나는 당신들의 형제 요셉이다”의 의미가 자신이 누구인지를 명백히 함 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 명백히 함은 유입을 수단으로 된다고 말한 이유는 내적 인간이 외적 인간 안으로 가는 방법은 유입외에는 다른 수단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금 더 내면적인 교통함이 결과되어졌다. 유입을 수단으로 명백히 함이 선의 측면에서는 진리에 애착함을 통하여 통지함, 그리고 이것은 선행이다; 그러나 진리 측면에서는 그 점에 관하여 인정함, 그리고 이것은 신앙이다.

당신들이 이집트로 팔았던. 이는 그들이 멀리했던 내적 부분을 의미한다. 이는 “그들이 팔아버린 그”인 요셉의 표현함이 내적 부분(내적 인간)이다로부터; 그리고 “팔다”의 의미가 멀리해버림, 소원해지게 함이다로부터(alienate) 알게 된다. “이집트”에 의해 가장 낮은 것이 여기서 의미되는데, 그 이유는 기억 속의 지식들이 인정함을 받지 못한 상황에서는 측면으로 밀려나 있기 때문, 고로 최말단, 또는 가장 낮은 것 쪽으로 밀려나 있기 때문이다. 역사적인 요셉이 이런 경우에 처했었지만, 오늘날의 경우는 요셉이 의미하는 내적 인간도 우리라는 인간으로부터 소원된 단어로, 생소한 단어로 있기는 마찬가지로 되어 있다. 실로 이 단어는 기억 속의 지식들 중의 하나이다, 그 이유는 내적 인간이 있다는 것이 교리로부터 알려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가장 낮은 것 쪽으로 거절되어져 있었는데, 그 이유는 인정되지 않았고, 믿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실로 이것이 기억으로부터 멀어졌다기 보다는 신앙으로부터 멀어져 있다고 말하는 편이 더 정확할 것이다. 내적 의미에서 “판다”는 것은 신앙과 선행에 속한 것들을 멀리해버림, 결과적으로 인간을 내적 교회로 만드는 것으로부터 소원해짐이다는 것은 영계에서는 지상에서 같이 팔고 사는 것은 없다는 사실로부터, 그러나 “사다”에 의해서는 선과 진리를 내 것 되게 함, 그리고 “팔다”에 의해서는 그것들로부터 멀어짐이다는 사실로부터 알는지 모른다. 또한 “팔다”에 의해서는 선에 관한 지식들과 진리에 관한 지식들의 교통함을 의미하는데, 그 이유는 “거래함(trade)”이 이런 지식들을 획득하고 교통함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서의 경우 팔다는 “은(돈)을 수단으로 하여 있어지는” 통상적인 장사에서의 팔다는 아니다.
“파는” 것이 소원해짐을 표시하는 것은 아래 말씀의 구절들에서 알 수 있을 것이다:
고로 여호와께서 말하셨다, 내가 떠나보냈던 너희 어머니의 이혼 증서는 어디 있느냐?
또는 내가 너희를 판 나의 고리대금 업자는 누구냐? 보라, 너희의 죄들 때문에 너희는 팔렸었다, 그리고 너희의 위법 때문에 너희의 어머니는 떠나보내졌었다 (이. 50:1);
“어머니”는 교회를 표시한다; 그리고 “팔다”는 멀어짐(소원해짐)을 표시한다. 에스겔서에서:
때가 온다, 날이 가까이 와있다; 사는 자는 기뻐하지 마라, 그리고 파는 자는 슬퍼하지 마라; 그 이유가 분노는 거기로부터 모든 군중 위에 있다. 그 이유가 비록 그들의 목숨이 살아있는 자들 사이에 아직 있을지라도 파는 자가 판 것을 되돌리지 못하기 때문이다 (겔. 7:12, 13).
위는 영적 교회인 “이스라엘의 토지”에 관해서이다; “파는 자”는 진리들을 멀리 있게 하고 거짓들을 자신에게 은근히 심은 자들을 표시한다.
요엘서에서:
유다의 아들들과 예루살렘의 아들들을 너희는 그리스인들의 아들들에게 팔았었다, 하여 너희는 그들을 자기들의 경계로부터 멀어지게 하였다. 보라 나는 그들을 너희가 그들을 팔았던 장소로부터 휘저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너희의 아들들과 딸들을 유다의 아들들의 손 안으로 팔 것이고, 이들이 아주 멀리 떨어진 쪽의 사람들에게, 스바인들에게 팔 것이다 (욜. 3:6-8);
위는 두로와 시돈에 관해서 말하고 있다; “판다”는 것은 멀어지는 것도 표시한다. 모세의 첵에서:
그들의 반석(되신 분)이 그들을 팔았다, 그리고 여호와께서 그들을 닫으셨다 (신. 32:30);
“파는” 것이 멀어짐을 표시하는 것은 분명하다; “반석”은 최고 의미에서 진리 측면에서의 주님이시다, 표현 의미에서 신앙이다; “여호와”는 선 측면에서의 주님이시다.
영적 의미에서 “사는” 것은 자신을 위해 포획하는 것, “파는” 것은 멀리하는 것인 바,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하늘의 왕국을 팔고 사는 것에 비교하신다:
하늘들의 왕국은 들판에 감추여 있는 보물에 견주어진다; 이것을 발견했을 때, 그 사람은 감추어두 고, 그리고 기쁨을 가득히 안고, 가서 그가 가진 모든 것을 판다, 그리고 그 들판을 산다. 다시: 하늘들의 왕국은 아름다운 진주들을 찾는 상인에 비교된다; 그가 귀중한 진주 하나를 발견했을 때, 가서 그는 가진 것을 팔이서 그것을 샀다 (마. 13:44-46);
“하늘들의 왕국”은 인간과 함께 있는 선과 진리를, 고로 당사자와 더불어 있는 천국(하늘)을 표시한다; “들판”은 선을 표시한다; 그리고 “진주”는 진리를 표시한다; “사는” 것은 포획하여 그것들을 자신의 것이 되게 함을 표시한다; “그가 가진 모든 것을 파는” 것은 그가 이전에 지녔던 그의 자기 자신을 멀리함을 표시한다, 고로 악들과 거짓들을 멀리함을 표시한다. 그 이유는 이것들이 그의 자기 자신이었기 때문이다.
누가복음서에서:
예수께서 젊은 제 1 인 자에게 말하셨다, 그렇지만 네게 하나의 것이 부족해 있다; 네가 가진 것을 팔아라, 그리고 가난한 자에게 분배하라, 그때 너는 천국에 있는 보물을 가질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눅. 18:22);
내적 의미에서 위 말씀에 의해 뜻해지는 바, 인간 자신 속의 모든 것들은 악들과 거짓들밖에 없다는 것, 그러므로 “그가 가진 모든 것들”인 이것들은 반드시 멀리해야만 함이 틀림이 없다는 것이다. 멀리 했을 때 그는 주님으로부터 “천국에 있는 보물”인 선들과 진리들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마찬가지가 다른 구절에 있다:
너희의 재산을 팔아라, 그리고 자선(보시)을 하라, 닳아지지 않는 지갑을 만들어라, 실패함이 없는 천국들에 있는 보물을 만들어라 (눅. 12:33);
아마 모든 이는 위 말씀들 안에 또 다른 의미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 이유는 자기의 재산을 파는 누군가는 오늘날의 경우 자신을 거지로 만들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런 행위에서 공적 주의를 피할 수는 없다는 것 외에도, 미래에 선행을 실시할 능력을 자신에게서 영영 박탈해버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천국에는 지상에서 가난한 자였던 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부자도 있어야 하는 것이 진리이기 때문이다. 이 구절에는 위의 구절들에 있는 의미도 더 포함하고 있다.
“파는” 것이 교회의 것들을 멀리 함을 의미하는 것이 아래 구절에 있다:
포로로 잡은 여성과 결혼하여 아내가 된 그녀가 만일 기뻐하지 않으면, 어디로이든 떠나보내라, 그러나 어떤 경우이든 은을 받고 팔지 말라, 그리고 그녀를 가지고 이익을 만들지 말라, 그 이유는 그가 그녀를 괴롭혔기 때문이다 (신. 21:14);
“포로된 여성으로부터의 아내”란 진짜 지주로부터가 아닌 멀어진 진리를 표시한다, 그러나 이 진리는 인간에 속하여 있는 교회의 선에 어느 방법에서 근접될는지 모른다는 것을 표시한다; 그렇지만 이 진리가 어떤 점에서 일치함이 없다면 제거될는지 모른다는 것, 그러나 멀리해짐은 아니다는 것, 그 이유는 이것은 어느 정도까지에서는 결합되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위 법의 영적 의미이다.
마찬가지인데 아래에 법이 더 있다:
만일 이스라엘의 아들들로부터의 자기 형제들의 혼을 훔치고, 거기서 이득을 만들고, 그리고 그을 팔아먹은 자가 발견된다면, 그 도둑은 죽임을 당할 것이다, 하여 너희는 너희 한가운데로부터 악들을 멀리해버릴는지 모른다 (신. 24:7);
“이스라엘의 아들들의 도둑들”은 자신을 위하여 교회의 진리들을 획득한 이들, 그러나 그것들에 따라 살려는 목적에서가 아니고, 고로 심정으로부터 그것들을 가르치려는 것도 아니고, 그러나 그것들 때문에 이익을 창출하려는 이들이다: 이런 도둑은 지옥에 떨어진다는 것이
“그는 죽임을 당할 것이다”에 의해 의미되어 있다.

지금 슬퍼하지 않는다. 이는 심정, 또는 의지의 불안을 의미한다. 이는 “슬퍼함”의 의미가 불안함(anxiety), 그리고 실로 심정 또는 의지로부터의 불안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 이유가 즉각 이어지는 말인즉, “분노하지 않는다”이기 때문인데, 여기서는 “분노(anger)”가 영의 슬픔, 또는 이해력에서의 슬픔이 의미되기 때문이다. 여기서 심정 또는 의지의 슬픔, 그리고 영 또는 이해력의 슬픔이라 말한 이유는 상응을 수단으로 심정은 의지와 관계되기 때문, 그 이유는 의지는 천적 평면, 또는 사랑의 선에 관계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영(spirit, 숨, breath)은 폐에 관련되고, 이해력에 속한 것과 관련되기 때문, 그 이유는 이것은 영적 평면, 또는 신앙의 진리와 관계되기 때문이다. (** 라틴어에서는 영과 숨은 같은 단어를 사용한다.)

당신의 눈에서 분노가 있지 않게 할 것입니다. 이는 영의 슬픔, 또는 이해력의 슬픔을 의미한다. 이는 “분노”의 의미가 여기서는 슬픔이다로부터, 그 이유는 같은 감정의 반복, 즉 “슬퍼하지 않는다”의 반복이고, 그리고 “슬퍼하지 않는다”가 의지 또는 심정의 슬픔이기 때문에 여기서는 마음의 다른쪽인 이해력 측면의 슬픔이 의미된다; 말씀에서 반복됨이 발생할 경우, 한쪽은 의지에, 다른 쪽은 이해력에 관련된다, 이를 다시 말하면, 하나는 사랑의 선쪽에서, 그리고 다른 하나는 신앙의 진리쪽에서 이다; 그리고 “눈”의 의미가 이해함이다로부터 더 알게 된다.

그리고 당신들이 저쪽으로 나를 팔았다. 이는 그들이 가장 낮은 쪽으로 소외되게 했다를 의미한다. 이는 앞에서 살핀 바 있다.

그 이유는 하느님께서 당신들을 살게 만들고저 당신들 앞에 나를 보냈기 때문입니다. 이는 그렇기 때문에 섭리로부터 그들에게 나누어 준(impart) 영적 생명을 의미한다. 이는 “살게 만들려고”의 의미가 영적 생명이 있다 이다로부터 (아래에서 살핀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나를 당신들 앞에 보냈다”의 의미가 섭리로부터 이다를 의미함에서 알게 된다. 이것이 섭리로부터 이다는 것은 요셉의 꿈에서 분명해진다; 즉 그의 형제들이 그에게 그들 자신들을 굽혀 절할 것, 그리고 아버지도 그러할 것이 미리 보여졌는데, 이것이 섭리로부터가 아니면 예견되었을리 만무하다. “살게 만듦”에 의해 영적 생명이 의미된다는 것, 또는 거듭남을 통하여 새로운 생명이 의미된다는 것은 이것 만으로부터 알런지 모른다. 즉 말씀의 영적 측면은 영적 생명 그 이상의 표현은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어쨌든 말씀에는 자연적 생명이 있고 영적 생명이 있다. 자연적 생명은 말씀의 글자 의미에 있고, 영적 생명은 내적 의미 안에 있다; 말씀의 많은 구절들에서 “살아있게 만듦”에 의해, 그리고 “생명”에 의해 글자 의미에서 영적 생명 자체가 뜻하여진다; 에스겔서에서:
내가 사악한 자에게 너희는 정녕 죽으리라 말할 때; 그리고 너희는 그에게 경고를 주지 않거나, 사악한 자로 그의 악한 길을 단념하고 살아 있게 만들려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겔. 3:18)
다시:
너희는 보리 한웅큼과 빵 조각 때문에 내 백성 사이에서 나를 모독하여, 죽지 않아야 할 혼들이 살해되게 하고, 죽어야 할 혼들을 살게 만든다. 너희는 사악한 자의 손을 더 힘세지게 하여, (오히려) 그것들로 살아 있게 만들어 그의 악한 길로부터 되돌아오지 못한다 (겔. 13:19, 22).
호세아서에서:
이틀 후에 여호와께서 우리를 살게 만드실 것이다; 그리고 셋째 날에 그분은 우리를 일으키어, 우리는 그분 앞에서 살는지 모른다 (호. 6:2).
다윗서에서:
내가 생명의 토지에서 선을 보는 것을 믿었지 않으면 (시. 27:13).
계시록서에서:
극복하는 자에게 나는 하느님의 낙원의 한가운데 있는 생명의 나무로부터 먹도록 줄 것이다 (계. 2:7).
요한복음서에서:
아버지께서 죽은 자를 일으키시어 그들을 살게 만드심 같이, 아들도 그분이 뜻하는 자를 살게 만든다 (요. 5:21).
다시:
살게 만드는 것이 영이지, 육은 아무 이익도 내지 못한다: 내가 너희에게 이야기하는 말들은 영이고, 생명이다 (요. 6:63).
위 구절들에서 “살게 만드는 것”, 그리고 “생명”은 영적 생명, 이 생명은 천국에 있는 생명, 그리고 이 생명이 단순히 “생명”이라 마태복음서에서 불리운다:
[문(gate)이] 좁고, 길이 협소하다, 이것은 생명으로 인도한다, 그리고 그것을 발견하는 자는 거의 없다 (마. 7:14);
“생명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천국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표시한다 (마. 18:8, 9; 19:17; 막. 9:43, 45, 47; 요. 5:24).

6-8절. 2년 동안 기근이 토지의 한가운데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경작함도 수확도 없는 5년이 아직 있습니다. 7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당신들을 위하여 토지에 리메인스(remains)를 놓으시려고 당신들 앞에 나를 보냈습니다, 그리고 큰 피신으로 당신들이 살게 만드시려고 입니다. 8 따라서 당신들이 나를 저쪽에 보낸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십니다. 그리고 그분은 나를 바로에게 아버지되게 놓으셨고, 그의 모든 집에는 주가 되게 하셨습니다, 나는 이집트의 모든 토지를 통치하고 있습니다.

…동안. 이것은 실제의 경우이다를 의미한다. 이는 앞 뒤 문맥의 진행으로부터 파악되는 바 설명이 필요 없다.

기근이 토지의 한가운데에 있은지 이 년이 되었다. 이는 자연적 수준의 마음 안에서 선의 상태를 의미한다. 이는 “햇수들”의 의미가 상태들이다로부터; “기근”의 의미가 선의 결핍이다로부터 (그 이유가 “빵(bread)”이 영적 의미에서 사랑의 선, 그리고 “식품(food)”이 진리의 선, 그러므로 “기근”은 선의 결핍, 그리고 “목마름”은 진리의 결핖이기 때문); 그리고 “토지의 한가운데에”, 즉 이집트의 한가운데의 의미가 자연적 수준의 마음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리고 “한가운데에”라고 말해지는 이유는 “한가운데, 중앙 (midst)”이 가장 안쪽(inmost)이고, 거기는 선이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2년”은 선과 진리의 결합함의 상태를 표시하는데, 그 이유는 “2”가 결합을 의미하기 때문, 여기서의 경우, 결합은 아닌데, 2년이 기근의 햇수이기 때문이다.
여기서의 경우는 이렇다. 선이 일하기 위하여서는 자연적 마음 안에 진리들이 있어야만함에 틀림이 없다, 그리고 진리들은 진짜의 사랑으로부터 있는 애착을 수단으로 받아들여져야만 한다. 인간의 기억에 있는 것은 무엇이든 모든 것들은 어떤 사랑을 수단으로 받아들여진 것이다, 그리고 그 사랑과 결합되어 거기에 남아 있다. 신앙의 진리들도 예외는 아니다. 만일 이 진리들이 진리를 사랑함에 의해 받아들여졌다면, 이 진리들은 그 사랑과 결합되어 남아 있다. 그것들이 결합되어오고 있을 때, 이때 다음의 경우들이 이어진다: 만일 애착이 재생산된다면, 그것과 결합된 진리들은 동시에 세상 밖으로 출시된다. 그러므로 인간의 거듭남 동안 (이는 성인 시기에만 결과되는데, 그 이유는 그전에는 당사자가 자신으로부터 신앙의 진리들에 관하여 생각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는 주님으로부터 천사들을 수단으로 통치되어진다, 동시에 그에게 감명을 준 진리들을 간직하면서, 그리고 결합되어 왔던 애착 안에 있는 이런저런 진리들을 수단으로 해서 이다; 그리고 이 애착, 즉 진리에 대한 애착이 선으로부터 인 바, 그는 점차 선쪽으로 인도된다.
이것이 그러한지에 대하여 많은 경험으로 나에게 분명해졌다, 그 이유가 내가 주목했던 것은, 악령들이 악들과 거짓들을 주입했을 때, 그때 주님으로부터의 천사들이 이미 심어졌었던 진리들을 가지고 나를 지켜주어, 나로 하여금 악들과 거짓들을 억제하게 해주었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분명해졌던 것은, 진리에 애착함을 수단으로 뿌리내려져왔던 신앙의 진리들은 천사들이 일하는 평면이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평면을 가지지 않은 이들은 천사들에 의해 인도될 수 없어, 자신들이 지옥에 의해 인도되는 것을 내버려둘 수밖에 없다는 것, 그 이유는 천사들이 어느 곳에도 발붙일 곳이 없어 그냥 통과해 흘러가기 때문이다. 이 평면은 신앙의 진리들이 행동 안으로 놓여지지 않으면, 즉 의지 안에 심어지고, 의지를 통하여 생활 안에 놓여지지 않으면 획득되어질 수도 없다. 또 하나 언급해둘만한 것은, 인간과 더불어 신앙의 진리들 안으로 천사들이 작업하는 것은 좀처럼 명백하게 거행되는 것, 즉 이 진리에 관한 생각들을 흥분시키기 위하여 주도적인 듯한 느낌을 나타내보이지는 않는다, 그러나 애착과 함께 이 진리에 일치하는 일반적인 생각을 생산한다. 그 이유가 이 작업은 감지할 수 없는 유입을 수단으로 결과되기 때문, 이것은 시각에 표출될 때, 흐르는 빛 같이 나타난다, 이 빛은 선 안에 있는 셀 수 없는 진리들로 구성되고, 이것은 인간에 있는 어떤 낱개의 것을 에워싼다, 그리고 그를 진리 안에 있는 동안 이 진리의 사랑 안에서 간직한다. 그리하여 천사들은 인간의 마음을 거짓들로부터 승강되게 하고, 그를 악들로부터 보호한다. 어쨌든 이러저런 사항들은 인간에게 통째로 알려져 있지 않다.

오 년이 아직 더 있다. 이는 리메인스(remains)가 빛을 발할 때까지 이 상태의 기간을 의미한다. “5”의 의미가 리메인스(remains)이다로부터; 그리고 “년(year)”들의 의미가 상태들이다로부터 알려진다. 기간은 “아직” 있다를 수단으로 이 햇수가 의미되어지고 있다. 이로부터 분명한 것은, 이 말들에 의해 리메인스가 빛을 발할 때까지의 이 상태의 기간이 의미된다는 것이다. 리메인스(remains)란 주님에 의해 내면의 인간 안에 저장된 진리들과 선들이다. 여기서는 선이 자체를 드러내기 이전 진리에 애착함들과 인정함들이다. 선과 더불어 이것들은 빛을 발한다. 빛을 발하는 동안 이것들로부터 끌려나오는 만큼에서 생활에의 사용에 도움을 준다. 이것은 주님의 섭리 영역에 속한다, 그리고 이것은 계속적인데, 비록 인간이 그것에 관해 아는 바 없을 지라도, 또는 기꺼이 알려하지 않아도 계속 된다. 그 이유가 인간 당사자는 낱개적인 미미한 사항들에서까지 섭리가 있다는 것을 부정하기 때문, 그렇지만 인간 출생으로부터 마지막에 까지, 그다음 영원까지 이것은 계속적이다. 모두 각자와 더불어 어떤 숫자로 적어질 수 있는 것 보다 더 많은 섭리에 속한 것들이 매 순간 발생한다.

경작함도 수확도 없는. 이는 한동안 선, 그리고 파생되는 진리도 나타나지 않을 것을 의미한다. 이는 “경작하다(밭을 갈다, plow)”의 의미가 진리들을 받기 위해 선을 수단으로 준비함이다로부터 (이는 아래에서 더 살핀다); 그리고 “수확”의 의미가 선으로부터의 진리들이다로부터 (그 이유가 수확은 작물이 영글어 그러모을 때이기 때문, 이로부터 “수확”은 선으로부터 있는 진리이다) 알려진다. 이 진리가 존재 안으로 오기 이전, 실로 진리들이 나타나나, 그것들은 진리를 통하여 선이 있게 될 때의 진리들이고 선으로부터의 진리들은 아니다. 진리로부터 행동하는 인간은 진리를 통하여 선이 있는 진리들 안에 있으나, 선으로부터 행동하는 인간은 선으로부터 있는 진리들 안에 있는다. “경작함”이 선을 표시한다고 말해진 이유는 경작되는 들판이 선 측면에서의 교회를 의미하기 때문에서 이다, 고로 교회 속에 있는 선이다. 고로 “경작함”은 진리들을 받기 위해 선을 수단으로 준비됨이다; 더욱이 경작함에서 사용된 수소들은 자연 평면에 있는 선들을 의미한다.
이것이 경작함의 의미이기에, 표현 교회에 금해진 사항은 “수소와 나귀를 함께 가지고 (겨리를 지워가지고) 경작하는”것이다 (신. 22:10), 그러나 안쪽으로부터의 어떤 이유, 고로 영계로부터의 어떤 이유가 없다면 결코 금지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설사 함께 경작함에서 어떤 피해가 거기에 있을 수 있는 것일까? 안쪽으로부터, 또는 영계로부터의 이유인즉, “수소로 경작하는” 것은 자연 평면에 있는 선을 의미하고; “나귀로 경작하는” 것은 자연 평면에 있는 진리를 의미해서 이다. 위 금지 명령의 내면의 이유 또는 영적인 이유는 천사들은 선과 진리를 분리해서 생각하지 못한다는 것; 그들은 반드시 결합하여 하나를 만들어야만 한다는 것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수소와 나귀를 수단으로 하는 이런저런 경작을 기꺼이 바라보려 하지 않는다. 천적 평면의 천사들은 선으로부터 분리된 진리는 아예 생각하는 것조차 엄두를 못낸다, 그 이유가 자신들과 더불은 모든 진리는 선 안에 있기 때문이다; 고로 그들에게 있는 진리는 선이기도 하다. 같은 이유로 “양털과 아마를 섞어 짜서 옷을 만드는 것”도 금하였다 (신. 22:11); 그 이유가 “양털”은 선을, “아마”는 진리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밭을 가는” 것, “써레질하는” 것, “씨뿌리는” 것, “베어들이는” 것은 선과 선으로부터의 진리에 속하는 이런저런 것들임이 호세아서로부터 분명하다:
나는 에브라임을 (짐승을) 타게(ride) 만들 것이다; 유다는 밭을 갈 것이다, 야곱은 그를 위하여 써레질을 할 것이다; 정의에 따라 네 자신을 위해 씨뿌려라, 경건함에 따라 베어들여라; 너를 위하여 묵히는 지면을 부수어라; 그리고 여호와께서 오시어 정의를 가르치실 때까지 여호와를 찾을 때이다 (호. 10:11, 12);
(짐승을) “타는” 것이 에브라임을 서술하는 이유는 “타는” 것이 이해력을 향유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에브라임”은 교회의 지적 측면이다; 그러나 “경작하는” 것은 유다를 서술하는데, 그 이유는 “유다”는 교회의 선이기 때문이다.
아모스서에서:
말들이 바위에서 달리더냐? 누가 수소들을 가지고 경작할 것이냐? 하여 너희는 판단을 쓸개로, 정의의 열매를 쓴쑥으로 바뀌게 했다 (암. 6:12);
“말들이 바위에서 달리더냐?”는 신앙의 진리가 이해되더냐?를 표시한다. 그 이유가 바위는 영적 의미에서 신앙이기 때문이다 (창. 22 서문을 보라); 그리고 “말들”은 이해력 속에 있는 이런저런 것들이다; “누가 수소들로 경작하더냐?”란 그가 선을 행할 것이냐?를 표시한다. “수소들”은 자연 평면에 있는 선이다. 이것이 그렇게 행해질 수 없었다는 것이 이어지는 말, “너희가 판단을 쓸개로, 정의의 열매를 쓴쑥으로 바뀌게 했기 때문”에서 의미된다
누가복음서에서:
예수께서 말하셨다, 쟁기를 자기 손에 놓았는데, 뒤쪽을 바라보는 자는 누구나 하느님의 왕국을 위하여 적합하지 않다 (눅. 9:62)
위 말들은 마태복음서의 아래 구절과 같은 의미를 지닌다:
집 위에 있는 자는 자기로 하여금 집 안에 있는 어떤 것을 가져가려 내려오지 않게 하라; 그리고 들판에 있는 자는 자기로 하여금 자기 옷들을 가져가려 되돌아 가지 않게 하라 (마. 24:17, 18);
위 말들의 의미는 이렇다: 선 안에 있는 자는 신앙의 교리물들에 속하는 것들 쪽으로 자신을 향하게 하지 말라는 것이다. 고로 “자기 손을 쟁기에 놓은 자”는 선 안에 있는 자이다; 그러나 “뒤쪽을 쳐다보는” 것은 신앙의 교리물들을 찾는 자이다, 그리고 고로 선을 돌보지 않게 된다. 엘리야가 불쾌히 여겼던 사건이 있다. 즉 그가 들판을 경작하는 엘리사를 불렀을 때, 그가 묻기를, 자기 아버지 어머니에게 키스를 먼저 했으면 (작별 인사) 하고 물었을 때였다; 엘리야가 말했다, “가고, 되돌아오라, 그 이유가 내가 네게 무엇을 행하였는지 때문이다” (왕상. 19:19-21). 반대적 의미에서 “경작하는” 것은 선을 삭제해버리는 악들을 의미한다, 고로 황폐함을 의미한다; 예레미야서에서:
시온은 들판 같이 경작될 것이다, 그리고 예루살렘은 무더기들일 것이다, 그리고 이 집의 산은 숲의 높은 장소들 같이 되어지는 것이다 (예. 26:18; 미. 3:12).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당신들 앞에 나를 보냈습니다. 이는 그것은 신성한 섭리에 의해 결정되었음을 의미한다. 이는 “하느님께서 당신들 앞에 나를 보냈다”의 의미가 신성의 섭리이다에서 알게 된다.

당신들을 위하여 토지에 리메인스를 놓으시려고. 이는 교회의 중앙과 가장 깊은 곳을 의미한다. 이는 리메인스(remains)의 의미가 주님에 의해 인간 안쪽에 저장하신 진리들에 결합된 선들이다로부터; 여기서는 교회의 중앙과 가장 깊은 쪽에를 의미한다. “중앙과 가장 깊은 쪽”이라 말한 이유는 인간과 더불어 있는 가장 깊은 곳은 가장 안쪽의 것들과 내면의 것들이 함께 있는 곳이 자연 평면의 중앙을 점령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연속되는 것들에서 서로를 뒤잇는 것 안에서 가장 깊은 곳에 있는 것들은 중앙에 위치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자연 평면에서의 이 경우는 동시적이다; 고로 가장 깊은 쪽의 것들은 자신들을 외면의 것들에 배열한다. “토지에 당신들을 위하여 리메인스를 놓아두시려고”는 교회의 가장 깊은 측면이 야곱의 아들들과 더불어 있어야만 함을 함축하고 있다; 이는 그들이 가장 깊은 안쪽에 있어야만 한다가 아니라, 교회의 모든 형체 안에 교회의 표현이 그들과 더불어 설립되어야 한다는 말, 하여 말씀이 거기에 있도록 하신다는 말이다. 이런저런 것들이 교회에 비교하여, 추상적으로는 민족이나 나라로부터 “리메인스”에 의해 의미되어진다.
리메인스 또는 나머지(residue)라는 단어는 간혹 말씀에서 언급되는데, 이 두 단어 모두에 의한 표현들이 단지 백성의 남은 자, 나라 속의 남은 자 같은 식으로 글자에 따라서만 이해되고 있다; 허지만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아왔던 것은 그 단어들이 영적 의미에서 주님에 의해 내면의 인간 안에 저장해두신 선들과 진리들이다는 것이다; 아래 구절을 보자. 이사야서에서:
그날에 여호와의 싹이 영예를 위하여와 영광을 위하여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피신한 그들에게 장엄함과 장식함을 위하여 땅의 열매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시온에 남은 이들, 예루살렘 에 남겨진(residuus) 이들, 예루살렘에서 생명 안으로 적혀 있는 모든 이가 거룩하다 불리울 때가 온다 (이. 4:2, 3);
“시온에 남은 이들, 그리고 예루살렘에 남겨진 이들”은 생명 안으로 적혀 있는 다른 이들 보다 더 거룩한 것은 결코 아니다; 이로부터 분명해지는 바는, “남은 자와 남겨진 자”에 의해 거룩한 것들과 생명 안으로 적힌 것들이 의미된다는 것. 이런 거룩한 것들은 진리들과 결합된 선들이고, 이것들은 주님에 의해 내면의 인간 안에 저장되고 있다.
이사야서에서:
그 날에 이스라엘의 남은 자, 그리고 야곱의 집의 피신했던 이들이 자기들을 친 자들에게 더 이상 기대지 않고 진리 안에 계신 이스라엘의 거룩한 분, 여호와께 기댈 것이다. 남은 자들이 돌아올 것이다, 야곱의 남은 자들이 전능하신 하느님에게로 돌아 올 것이다 (이. 10:20, 21);
위의 “남은 자”가 어떤 백성, 또는 어떤 나라로부터의 남은 자가 아니다는 것은 말씀에서, 특히 예언서들에서, “이스라엘”에 의해 이스라엘이 뜻해지지 않는 것, “야곱”에 의해 야곱이 뜻해지지 않고, 모두에 의해 교회와 교회 속에 있는 것이 뜻해진다는 사실만 가지고도 알는지 모른다. 여기서의 경우, “남은 자들”에 의해 이스라엘과 야곱의 남은 자가 아니라 교회에 속하는 진리들과 선들이 의미된다. 그렇다, “어떤 백성의 남은 자들”, 또는 “나라 에 남겨진 자들”, 이런 식으로 말씀에서 말하여질 때, 어떤 백성이나 나라의 남은 자가 의미되지 않는 이유는 내적 의미에서 “백성”에 의해 진리들이, “나라(민족)”에 의해서는 선들이 의미되기 때문이다. “리메인스(남은 자)”에 의해 진리들과 선들이 의미되는 것이 알려져 있지 않고, 하여 이상한 듯 나타나는 이유는 글자 의미, 특히 역사적 부분에서, 이런 의미 같은 것을 생각하는 것으로부터 강력하게 보류되게, 물러나 있게 장치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사야서에서:
그때 백성의 남은 자들을 위하여 작은 길(path)이 있을 것이다, 이들은 앗수르로부터 남겨진 자(residue)일 것이다; 마치 이스라엘이 이집트의 토지로부터 올라올 때 바다를 통과하는 그들을 위해 있었던 것 같다 (이. 11:16);
위 구절 역시 의미는 비슷하다; “앗수르로부터 남겨진 자”란 외고집의 잘못된 추론을 통하여 파괴되지 않은 이들이다.
다시:
그날에 여호와 체바욷께서는 그분의 백성의 남은 자에게 잘생김의 머리띠를 위하여, 왕관을 장식품 을 위하여 있으실 것이다 (이. 28:5).
다시:
더욱이 남겨진(residua) 유다의 가문의 피신자가 다시 아래쪽을 향하여 뿌리를 내릴 것이고, 위쪽을 향하여는 열매를 산출할 것이다. 남은 자가 예루살렘으로부터 나갈 것이고, 시온으로부터서 는 피신자가 나갈 것이다 (이. 37:31, 32).
다시:
버터와 꿀을 남겨진 모든 자가 토지의 한가운데에서 먹을 것이다 (이. 7:22).
예레미야서에서:
나는 내가 그들을 흩뜨려버렸던 모든 토지들로부터 내 양떼의 남은 것들을 그러모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들의 양우리로 도로 데려다놓을 것이다, 하여 그들은 생산하고 번성할는지 모른다 (예. 23:3).
다시:
검에 의해 남은 자들로부터의 백성은 광야에서 이스라엘에게, 그에게 쉼을 주려함에서 은총을 발견하였다 (예. 31:2);
“광야에서 검에 의해 남은 이들로부터의 백성”은 “유아들”이라 불리워진 이들이었다, 이들은 죽고 남은 자들이고, 가나안의 토지로 데려와졌다. 이 “유아들(infants, 작은 아이들, 대략 7세 미만)”이 남겨졌다, 그리고 그들을 수단으로 순진의 선들이 의미되었다, 그들이 가나안의 토지 안으로 받아들여짐은 주님의 왕국 안으로의 입장이 승인됨을 표현하였다.
에스겔서에서:
너희가 나라들 사이에서 피신하는 때, 너희가 땅에서 흩터지는 때, 나는 남겨질 자를 만들 것이다. 그때 너희의 피신한 이들은 포로가 된 나라 사이에서 나를 기억할 것이다 (겔. 6:8, 9)
인간의 내면의 것들 안에 주님에 의해 저장된 선들과 진리들이 “흩트러지고 포로가 된 나라들 사이에서 남은 자와 남겨진 자”에 의해 표현된 이유는 인간이 악들과 거짓들 사이에서 있고 이것들에 포로가 된 상황에 있기 때문이다. 악들과 거짓들은 “나라들”에 의해 의미 것들이다. 외적 인간, 내적 인간으로부터 분리될 때, (아껴둘만한 것까지) 깡그리 분리되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당사자의 미래 거듭남의 발전이 다시 있을 때의 경우를 위해 선들과 진리들을 그러 모아 저장해두신다. 이렇지 않다면, 인간은 구원이 가능해질 수가 없다, 그 이유가 리메인스 없이 누구도 구원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요엘서에서:
여호와의 이름을 부른 모든 이가 피신할 때가 올 것이다; 여호와께서 말하셨던 바대로 시온산과 예루살렘에서 피신자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남겨진 자들 사이에 여호와께서 부를 자가 있을 것이다 (욜. 2:32).
미가서에서:
나라들 사이에, 많은 백성들의 한가운데에서 야곱의 남은 자가 있을 것인데, 마치 사자가 숲의 짐승들 사이에 있는 것과 같다 (미. 5:8).
스바냐서에서:
이스라엘의 남은 자는 외고집을 부리지 않을 것이다, 거짓을 이야기하지 않을 것이다; 사기치는 혀도 그들의 입 안에서 발견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먹여지고 쉼에 있을 것이고, 아무도 두려움을 만들지 않는다 (습. 3:13);
스가랴서에서:
도성의 거리들은 그 거리들에서 노는 소년소녀들로 가득할 것이다; 이것은 네 백성의 남은 자들의 눈에서 경이로울 것이다: 지금, 나는 이전의 날들 같지 않게 벡성의 남은 자들에게 있을 것이다, 그 이유가 이것은 평화의 씨이기 때문이다; 포도나무가 그것의 열매를 산출할 것이다, 그리고 땅은 그것의 증가분을 산출할 것이다, 그리고 하늘들은 그들의 이슬을 산출 할 것이다; 그리고 나는 이 백성의 남은 자를 이 모든 것들의 상속자로 만들 것이다 (슥. 8:5, 6, 11, 12);
위에서 리메인스(남은 자)들이 “평화의 씨”라 불리운다, 그리고 열매를 풍성히 맺는 선의 진리들에 있는 이들이 “포도나무는 그것의 열매를, 땅은 그것의 증가분을, 하늘들은 그들의 이슬을 산출한다”에 의해 묘사되고 있다.
영적 의미에서 뜻해지는 리메인스는 생활 속의 악들과 거짓들로부터의 확신(거짓들에 설득됨)에 의해 닫혀지고, 더 이상은 나타나지 않는다; 그리고 이전에는 인정해왔던 진리들을 부정함에 의해 그것들은 살라져버리고 만다, 그 이유가 이것은 모독이라 불리우는 진리와 거짓의 혼합이기 때문이다. 이에 관해 이사야서에서:
그분은 인간을 옮기실 것이다, 그리고 사막들이 토지의 한가운데에서 번성할 것이다: 거의 누구도 거기서 있지 못하나 십분의 일이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것은(십분의 일이) 근절될 것이다 (이. 6:12, 13)
“10”은 리메인스를 표시한다. 다시:
나는 너희의 뿌리를 죽일 것이다, 그리고 그는 너희의 남겨진 그것들을 죽일 것이다 (이. 14:30);
위는 블레셋에 관하여서이다, 이들은 지식들의 지식들에만 있는 이들, 지식들로부터의 생활이 없는 이들이다; 위에서 남겨진 이들이 “뿌리”라고 불리운다, 그 이유가 뿌리들로부터 같이 그것들(지식들)로부터 선들과 진리들이 자라오르기 때문, 이것이 인간을 사람으로 만든다. 그러므로 “그는 사람을 옮기실 것이다”는 리메인스를 파괴됨을 표시한다.
예레미야서에서:
젊은 이들은 검에 의해 죽을 것이다; 그들의 아들들과 그들의 딸들은 기근으로 죽을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는 그들에게 남은 것이 전혀 없을 것이다 (예. 11:22, 23);
위는 아나돗인에 관해서이다. 다시:
나는 유다의 남은 자들을 데려갈 것이다, 이들은 이집트에 체류하려고 그들의 얼굴을 이집트의 토지 안으로 가게 놓아둔 자들이다, 하여 그들은 모두 살라질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 피신자는 있지 않을 것이다, 또는 유다의 남은 자로 남겨진 자가 있는데, 그는 이집트의 토지에 거주하려고 왔던 자이다 (예. 44:12, 14, 28);
유다 지파로부터 있던 이들이 이집트에 체류하는 것, 거기에 거주하지 못하게 한 이유, 그리고 이 금지가 매우 심각한 금지 명령이었던 이유인즉, 유다 지파는 주님의 천적 평면의 교회를 표현했기 때문, 천적 평면은 “이집트”에 의해 의미되는 기억 속의 지식들에 관하여 지독하게도 기꺼이 알려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그들은 자기들이 있는 천적 수준의 선으로부터 모든 것들을 알기 때문이다, 만일 그들이 기억 속의 지식들 쪽으로 자신들을 향하게 한다면 선이 멸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주님의 천적 왕국에 있는 이들은 천적인 선 안에 있는 바, (그리고 천적 진리는 선행이고, 한편 영적 진리는 신앙이다) 그들은 신앙이라는 말조차 꺼내기를 주저하는데, 그 이유는 자기들이 선으로부터 “내려가지” 않도록, 그리고 뒤쪽을 향하지 않도록 조심하는 것이다. 이는 아래 말씀에서도 의미된다:
집 위에 있는 자, 자기로 하여금 집으로부터 어떤 것을 가져가려 내려 가게 하지 말라; 그리고 들판에 있는 자, 자기로 하여금 자기 옷을 가져가려 되돌아가게 하지 말라(마. 24:17, 18);
위 구절은 앞에서 살폈다 (5895항)l 그리고 이 말씀도 있다:
롯의 아내를 기억하라 (눅. 17:32);
그녀는 뒤쪽을 쳐다보았고 소금 기둥이 되었다.
어떤 것도 남겨지는 것이 없도록 철저히 저주된 나라들에 의해 불법이 그들과 더불어 극점에 달했다는 것, 하여 잔존한 선과 진리는 아무것도 없다는 것, 고로 리메인스가 전혀 없는 것이 표현되어졌다. 모세의 책에서:
그들은 바산 왕 옥을 쳐부셨다, 그리고 모든 그의 아들들, 그리고 모든 그의 백성들, 그들이 하나도 남지 않을 때까지 였다 (민. 21:35; 신. 3:3).
다시:
그들은 시혼의 성을 공략했다, 그리고 성의 모든 자, 남자, 여인, 어린 아이에게 저주를 주었다; 그들은 하나도 남지 못하게 했다 (신. 2:34).
그들이 “저주를 주었다”라고 쓰인 구절은 더 있다.
리메인스에 주목하면, 또는 주님에 의해 인간의 내면들에 저장된 선들과 진리들에 주목하면, 이렇다: 인간이 애착으로부터, 고로 자유함에서 선과 진리 안에 있을 때, 이때 선과 진리는 심어진다. 그리고 이 심어짐이 거행될 때, 천국으로부터의 천사들은 더 가까이 접근하고, 인간과 자신들을 결합한다. 이 결합은 인간의 내면들에서 선들과 진리들이 출시하게 한다. 그러나 인간이 외적 측면으로부터의 것들에 있을 때, 마치 그가 육체적, 세상적인 것들에 있을 경우, 이때 천사들은 물러간다, 그리고 그들이 물러갈 때, 이때 이런저런 선들과 진리들은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한때 결합이 있었은즉, 그 인간은 천사들과 결합하는 능력 안에는 있다, 고로 자기에게 속하는 선과 진리에 대한 수용력은 가진다는 말이다; 그러나 인간의 갖가지 사용에 따라 이런저런 것들을 배치하시는 주님의 기뻐하심이 있는 것 보다 더 자주, 더 많이 거행되지는 않는다.

당신들을 살게 만드시려 하신 것입니다. 이는 자연 평면에 있는 진리들을 위하여 거기로부터 있는 영적 생명을 의미한다. “살게 만든다”는 것은 영적 생명이 있다를 의미한다. 영적 생명의 모든 것은 리메인스로부터 인 바, 거기로부터 영적 생명이 있다 라고 말한 것이다. 그리고 이 생명이 거기로부터 있기 때문에, 이 리메인스에 관하여 말해진 이후 즉각 뒤이어지는 것은 “당신들을 살게 만드시려고”이다, 즉 야곱의 아들들에 의해 표현되는 자연 평면에 있는 진리들이다.

큰 피신으로. 이는 지옥에 떨어짐으로부터 해방됨을 의미한다. 이는 “피신함(escape)”의 의미가 지옥에 떨어짐에서 해방됨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 해방됨은 리메인스를 수단으로, 즉 주님에 의해 인간에게 저장하신 선들과 진리들을 수단으로 결과되어진다. 선들과 진리들을 받은 자, 즉 그것들이 내면들 안에 심어지도록 자신을 허용한 자는 지옥에 떨어짐을 피한다, 그리고 남겨진 자 사이에 있는다. 그러므로 말씀에서 “피신”이 말하여지는 곳에서는 “남겨진 자”나 “리메인스”의 언급 또한 있는다. 여기서는 요셉을 수단으로 하여서이고, 다른 구절을 더 읽어보자: 이사야서에서:
그 날에 땅의 열매가 이스라엘의 피신자를 위한 장식과 당당함을 위하여 있을 것이다; 그리고 시온에 남아 있는 자, 그리고 예루살렘에 남겨진 자가 거룩하다 불리우는 때가 올 것이다
(이. 4:2, 3).
다시:
그 날에 이스라엘의 남은 자, 그리고 야곱의 가문의 피신자가 자기를 친 자에게 더 이상 기대지 않을 것이다 (이. 10:20).
다시:
더욱이 남겨진 유다의 가문의 피신자가 다시 아래쪽으로 뿌리를 내리고, 위쪽으로는 열매를 산출할 것이다; 그 이유가 예루살렘으로부터 남은 자가 나갈 것이고, 시온으로부터서는 피신자가 나갈 것이기 때문이다 (이. 37:31, 32).
에스겔서에서:
너희가 나라들 사이에서 검을 피하는 자 얼마를 가질 때, 너희가 땅에서 흩어질 때, 나는 남겨지는 자를 만들 것이다; 이때 너희로부터의 피신한 그들은 나를 기억할 것이다 (겔. 6:8, 9).
요엘서에서:
여호와의 이름을 부를 자들이 피신하는 때가 온다; 여호와께서 말하신 바대로, 시온에서, 예루살렘 에서 피신자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남겨진 자 사이에서 여호와께서 부를 자가 있다 (욜. 2:32).
예레미야서에서:
피신자가 있지 않을 것이다, 또는 유다의 남은 자로 남겨지는 자가 있지 않을 것이다
(예. 44:12, 14)
위 구절들로부터 분명해지는 바, “피신하는” 것이 무엇인지, 즉 “피신하는” 이들은 리메인스를 가진 이들이다, 그리고 “피신하는” 것은 지옥에 떨어짐으로부터 건져지는 것이다.

따라서 당신들이 나를 저쪽에 보낸 것이 아니다. 이는 그들이 자연 평면 속에 있는 기억 속의 지식에로 떠나게 하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이는 그가 보내진 곳, “저쪽”인 “이집트”의 의미가 자연 평면에 있는 기억 속의 지식들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당신들이 나를 보내지 않았다”는 그들이 떠나보내지 않았다인 것은 분명하다.

하느님이십니다. 신성이 이것을 실시했음을 의미한다. 이는 설명이 필요 없다.
이에 관하여는 앞의 요셉의 사건을 살필 때 밝히 설명했다: 즉 그가 이집트에 팔리우고, 그때 처음에는 보디발의 집을 섬겼을 때인데, 그는 최고 의미에서는 주님을, 보다 낮은 의미에서는 주님에 의해 거듭나지는 이들을 표현했던 바, 기억 속의 지식들은 배워지는 처음의 것들이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이 지식들로부터 결말되어지는 것이 진리들이기 때문, 고로 이 지식들은 결말로 얻은 진리들에게 종결점인 셈이다. 이후 이 지식들은 더 내면의 것들을 향하여 진보를 만들어 간다. 이런 일련의 과정을 요셉이 표현했는 바, 이를 표현하기 위해 신성이 그를 거기에 보냈음이 분명하다.

그리고 그분은 나를 바로에게는 아버지되게 놓으셨다. 이는 지금 자연 평면은 그분으로부터 있음을 의미한다. 이는 바로의 표현함이 일반적 측면에서의 자연 평면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것이 그분으로부터이다는 것은 그가 “아버지로 앉다”에 의해 의미된다, 그 이유가 아들들은 아버지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적절한 의미는 선이다; 그리고 선에 내적, 외적 인간의 모든 것들이 의존되는 바, “하느님이 바로에게 아버지로 자기를 앉힘”에 의해 그분으로부터, 즉 선으로부터 자연 평면이 있다가 의미된다; 그 이유가 요셉은 천적 평면으로부터의 내적 부분, 또는 내적인 선을 표현하기 때문이다. 유입을 수단으로 자연 평면에 있는 모든 것들이 질서 안에 놓이고, 마지막으로 자연 평면이 자체로부터 있게 해준다.

그의 모든 집에는 주가 되게 하셨다. 이는 그분으로부터 자연에 있는 모든 것이 존재한다를 의미한다. 이는 “바로의 모든 집”의 의미가 자연 평면에 있는 모든 것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거기의 모든 것이 그분으로부터 이다는 것이 요셉이 그것 위에 주(lord)로 앉혔다에 의해 의미되었다. 더욱이 말씀에 있는 “주”는 선을 서술한다.

나는 이집트의 모든 토지를 통치하고 있다. 이는 그가 자연적 수준의 마음에 있는 기억 속의 지식을 배열한다를 의미한다. 이는 “통치한다”의미가 배열 배치한다이다로부터; 그리고 “이집트의 토지”의 의미가 자연적 수준의 마음이다로부터, 고로 모든 기억 속의 지식들이다. 그 이유가 이런 지식들은 자연적 마음에 속한 것들이기 때문이다. 기억 속의 지식들이 자연적 마음의 지적 부분(이해력 부분)을 구성한다, 그러나 내적 인간으로부터 흘러드는 선이 거기서는 의지 부분을 만들고 거기서 기억 속의 지식들을 배열한다.

9-13절. 당신들은 서둘러 나의 아버지에게 올라가십시오, 그리고 그에게 말하기를, 당신의 아들 요셉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느님께서 나를 모든 이집트의 주로 세웠습니다. 나에게 내려 오십시오, 지체마십시오. 10 그리고 당신은 고센의 토지에 거주할 것입니다, 그리고 당신은 저 가까이 계실 것이고, 당신, 그리고 당신의 아들들, 그리고 당신의 아들들의 아들들, 그리고 당신의 양떼, 그리고 당신의 목축들, 그리고 당신이 소유한 모든 것입니다. 11 그리고 내가 거기서 당신을 떠받들 것입니다. 그 이유가 기근의 다섯 해가 아직 더 있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뿌리뽑히지 않도록, 당신과 당신의 집식구, 그리고 당신이 가진 모든 것이 뿌리 뽑히지 않도록 하십시오. 12 그리고 보라 내 입으로 내가 당신들에게 말하는 것을 당신들의 눈이 보고 있다, 그리고 나의 아우 베냐민의 눈이 보고 있다. 13 그리고 여러분은 나의 아버지에게 이집트에서의 나의 모든 영화, 당신들이 보았던 모든 것을 말씀드리시오. 그리고 서두르시오, 그리고 나의 아버지를 이쪽으로 내려 오게 하시오.

당신들은 서둘러 나의 아버지에게 올라가십시오. 이는 영적 선을 의미한다. 이는 여기서 “아버지”인 이스라엘의 표현함이 자연 평면으로부터 있는 영적 선이다로부터. 영적 선이 천적 평면으로부터의 내적 부분의 아버지이다고 말한 이유는, 영적 선이 자연 평면으로부터 이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외적 부분에 속한다는 것, 내적 부분이 출시되기 전에 이미 외적 부분은 있었다는 것, 마치 아들이 있기 전에 아버지가 이미 있었다는 논리에서 뜻해진 말이다. 그러나 발전함의 질서는 외면의 것들로부터 내면의 것들 쪽으로, 마치 기억 속의 지식들로부터 지적인 것들 쪽으로 발전하는 것이다. 그리고 바깥쪽의 것들은 안쪽의 것들에 평면을 제공한다. 이런 발전으로부터, 또는 이 출생으로부터 외적 부분은 내적 부분에 의해 “아버지”라 불리운다; 결과적으로 “이스라엘”인 자연 평면으로부터의 영적 선이 “요셉”인 천적 평면으로부터의 내적 부분에 “아버지”인 것이다.

그리고 그에게 말하시오, 당신의 아들 요셉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는 천적 평면으로부터의 내적 부분에 관하여 지각함을 의미한다. 이는 “말하다”가 말씀의 역사 부분일 경우, 지각하다 이다로부터; 그리고 요셉의 표현함이 천적 평면으로부터의 내적 부분(the internal celestial)이다로부터. “이스라엘”인 영적 선이 “요셉”인 천적 평면으로부터의 내적 부분에 관하여 지각(력)이 있다가 의미되는 이유는 “당신의 아들 요셉이 말했다”의 내적 의미가 영적 선 안으로 천적 평면으로부터의 내적 부분의 유입이 지각력이기 때문이다.

하느님께서 나를 모든 이집트의 주로 세웠습니다. 이는 자연에 있는 모든 것, 그리고 각각을 배열함을 의미한다. 이는 “주로 세움”의 의미함이 배열함이다로부터; 그리고 “모든 이집트”의 의미가 자연 평면에 있는 기억 속의 지식들이다로부터, 고로 그 평면에 있는 각각 그리고 모든 것이다, 그 이유가 자연 평면은 기억 속의 지식들로 구성되기 때문이다.

나에게 내려 오십시오, 지체마십시오. 이는 확실한 결합을 의미한다. 이는 “내려오다”, 또는 “나에게 오다”의 의미가 결합함이다로부터; 그리고 “지체 말라”의 의미가 확실한 것이다로부터 알려진다.

그리고 당신은 고센의 토지에 거주할 것입니다. 이는 자연 평면에서 중앙에를 의미한다. 이는 “거주하다”의 의미가 사는 것이다로부터; 그리고 “고센의 토지”의 의미가 중앙 또는 가장 안쪽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 토지가 이집트 안에 있고, “이집트”에 의해 자연 평면에 있는 기억 속의 지식이 의미되기 때문에, “고센의 토지”는 자연 평면에서 중앙, 가장 안쪽이다. 고센은 이집트의 토지에서 가장 좋은 지역이었는 바, 기억 속의 지식들이 있는 자연 평면에서 가장 좋은 곳은 단연 중앙, 한가운데 이다; 그 이유가 자연 평면에서 선 자체는 태양 같은 어떤 것으로 있고, 중앙으로부터 변두리에 있는 진리들에 빛을 주기 때문이다.

그리고 당신은 저 가까이 계실 것이다. 이는 영구적인 결합을 의미한다. 이는 “가까이 있다”의 의미가 영구적 결합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 이유가 “요셉에게 오다”에 의해 결합이 의미되기 때문. 그러므로 “그에게 가까이 있는” 것, 고로 그 옆에 계속적으로 있는 것은 영구적인 결합이다.

당신, 그리고 당신의 아들들, 그리고 당신의 아들들의 아들들. 이는 영적 선 그리고 영적 선으로부터 있는 모든 것, 그리고 영적 선으로부터 있는 모든 것으로부터 있는 모든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당신”인 이스라엘의 표현함이 영적 선이다로부터; “그의 아들들”의 의미가 이 선으로부터 있는 것들이다로부터, 이는 자연 평면에 있는 진리들이다, “아들들의 아들들”의 의미가 이것들로부터 있는 것들, 즉 다시 태어나고 파생된 진리들이다. 선이 첫 위치 (상석)에 있고, 지배할 때, 이 선은 계속적으로 진리들을 생산한다. 즉 진리들은 주변으로 더욱 많은 진리들을 불려가는데, 마치 아주 강한 빛을 내는 별 주위에 작은 별들이 두루 깔리는 것 같다. 선만이 진리들을 증가되게 하는 것은 아니고 진리들로부터 진리들이 배가된다. 이것이 “아들들의 아들들”, 또는 손자 등등이다. 요셉은 그의 아버지를 통하여서가 아니면 그의 형제들을 초대하지 못한다, 하여 “그”가 그의 아들들, 그리고 아들들의 아들들과 더불어 와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 이유인즉, 중매를 통하지 않고서는 천적 평면으로부터의 내적 부분이 자연 평면의 진리들과 결합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당신의 양떼, 그리고 당신의 목축들. 이는 내면과 외면에 있는 자연적 선을 의미한다. 이는 “양떼”의 의미가 내적 선이다로부터, 여기서는 자연 평면의 내면에 있는 선이다, 그 이유는 그 양떼가 이스라엘의 양떼이기 때문, 이스라엘에 의해 자연 평면으로부터의 영적 선이 표현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목축”의 의미가 자연 평면의 외면의 선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목축”에 의해 외면의 선이, “양떼”에 의해 내면의 선이 의미되는 이유는 목축을 구성하는 짐승들이 수소나 거세한 수소이고, 이것들은 제물을 바침에서 선행의 외적 선들, 또는 외적 인간의 선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양떼를 구성하는 짐승은 어린 양, 양, 염소들이고, 선행의 내적 선, 또한 내적 인간의 선들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후자의 선 안에 있는 이들이 말씀에서 흔히 읽는 단어 “양떼(flock)”로 불리우고, 그것들을 인도하는 자가 “목자”라고 불리운다.

그리고 당신이 소유한 모든 것. 이는 거기로부터 있는 것은 무엇이든지를 의미한다.
이는 “당신이 가진 모든 것”이 거기로부터 있는 것 모두이다를 의미함에서 알게 된다; 그 이유가 자연 평면에 있는 선들과 진리들은 아버지로서의 영적 선으로부터 있기 때문; 그러므로 그것으로 있는 바 그것들은 그것 속에 있는 셈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가 거기서 당신을 떠받들 것입니다. 이는 천적 평면으로부터의 내적 부분으로부터 영적 생명이 계속 유입됨을 의미한다. 이는 “떠받든다(sustain)”의 의미가, 이것이 요셉에 의해 말해질 경우, 즉 천적 평면으로부터의 내적 부분을 표현하는 그가 말할 경우인 바, 천적 평면으로부터의 내적 부분으로부터 영적 생명이 계속 유입됨이 의미된다; 영적 의미에서 떠받친다는 주님으로부터 천국을 통하여 선의 유입과 진리의 유입 외에 다른 것은 없다. 이로부터 천사들 역시 유지 지탱되고, 이로부터 인간의 혼도(즉 그의 내적 인간도) 그러하다. 이 떠받쳐짐은 식료품을 수단으로 외적 인간이 떠받쳐짐과 상응된다; 그러므로 “식품(food)”에 의해 선이, “음료(drink)”에 의해서는 진리가 상응된다. 이러한 바, 인간이 식품에 관여할 때, 그와 더불은 천사들은 선과 진리에 대한 생각에 관여한다, 특이하고 경이로운 것은 식품의 종류에 따라서도 다르게 관여한다는 것이다. 고로 인간이 성찬에서 빵과 포도주를 받을 때, 그와 더불은 천사들은 사랑의 선과 신앙의 선에 관한 생각 안에 있다, 그 이유는 빵이 사랑의 선과, 포도주는 신앙의 선과 상응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들이 상응하기 때문에, 그것들은 말씀에서도 같은 상응을 가진다.
인간의 혼(즉 내적 인간)이 영적 식품과 음료, 즉 선과 진리에 의해 떠받쳐진다는 것을 주님의 말씀들로부터 분명해진다. 모세의 책에서:
인간은 빵만으로 살아 있지 않다, 그러나 여호와의 입으로부터 모두 각각의 말하심(言說, utterance)을 수단으로 인간은 살아 있다 (신. 8:3; 마. 4:4);
“여호와의 입으로부터의 말하심”은 그분으로부터 진행하는 선과 진리이다. 요한 복음서에서:
멸해지는 식품을 위하여 노동하지 말라, 그러나 영원한 생명 쪽으로 남아있게 하는 식품을 위하여 노동하라. 이것은 사람의 아들이 너희에게 줄 것이다 (요. 6:27).
다시:
제자들이 예수에게 간절히 원하여 말하기를, 스승이시여, 잡수십시오. 그분이 그들에게 말했다, 나는 너희가 모르는 먹을 식품을 가지고 있다 (요. 4:31, 32).
그리고 음료에 관하여도 마찬가지인데:
예수께서 말하셨다, 만일 어떤 이가 목마르다면, 그로 하여금 나에게 오게 해서 마시게 하라; 내 안에서 믿는 자는 누구이든, 성경이 말했던 그대로, 그의 배로부터 살아있는 물의 시내들이 흐를 것이다 (요. 7:37, 38).

그 이유가 기근의 다섯 해가 아직 더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선이 결핍되는 기간을 의미한다. 이미 “기근”과 “다섯”에 관하여는 살핀 바 있어 설명은 생략한다.

당신이 뿌리뽑히지 않도록. 이는 멸하지 않도록을 의미한다.

당신과 당신의 집식구, 그리고 당신이 가진 모든 것. 이는 영적 선 그리고 영적 선에 속해 있는 모든 것을 의미한다. 이는 여기서 “당신”인 이스라엘의 표현함이 영적 선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리고 “당신의 집식구, 당신이 가진 모든 것”은 영적 평면에 속하는 모든 것임이 분명하다.

그리고 보라, 당신들의 눈이 보고 있다. 이는 지각으로부터 증언함을 의미한다.
이는 “눈”과 “보는” 것의 의미함이 지각함이다로부터; 고로 증언함이 의미됨이 분명하다.

그리고 나의 아우 베냐민의 눈. 이는 중매자의 지각으로부터를 의미한다. 이는 “눈”과 “보다”의 의미가 이해하고 지각하는 것이다로부터; 그리고 베냐민의 표현함이 중매자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여기서의 경우 이렇다: 베냐민이 중매자를 표현하고, 이 중매자는 내면의 진리이고, 이 진리는 “요셉”인 내적 선에 의존하는 바, 이 진리는 그의 열 형제들이 표현하는 진리들인 외적 진리 보다 더 명료하고 정교한 지각을 가졌다. 즉 진리와 선이 내적 부분에 더 가까울수록, 그것들은 더 완전한 지각력을 가지는 바, 천국의 빛에서 더 깊게 지각하고, 주님 쪽으로 더 가까이 위치한다. 그 이유가 주님으로부터의 신성한 선과 진리의 유입은 계속적인 조정함(mediation), 그리고 연속적임을 통하여 발전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첫째의 원리들(첫 등차) 또는 (주님으로부터의 유입됨이) 시작하는 등차에 있는 이들은 중간 등차나 최말단 등차에 있는 이들 보다 더 명료한 지각과 더불어 유입을 받는다(그 이유는 보다 더 직접적으로 받는 셈이기 때문). 거리들에 따라서 (빛 속에 있는 경우) 선과 진리의 연속적인 희미해짐이 있다. 그 이유가 등차를 수단으로 계속적으로 더 완전해짐에는 상대적으로 어둠침침이 있기 때문이다. 위 모두로부터 분명해지는 것은, “중매자의 지각함으로부터 증언함”이 무엇을 뜻하는지 이다. 그 이유는 중매자는 내면이고, 야곱의 아들들이 표현하는 진리들은 외면이기 때문이다.

내 입으로 내가 당신들에게 말하는 것. 이는 명백하게 나타나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첫 증언은 그들의 눈이 본 것으로, 두 번째 증언은 베냐민의 눈이 본 것으로, 지금은 세 번째의 증언으로 그가 그들에게 말하는 그의 입을 가지고 이다; 이럼으로해서 그가 요셉이다는 것에 대한 모든 의구심이 제거되었다; 결과적으로 (요셉 자신이) 완전히 명백하게 나타났다는 것, 그러므로 이 말에는 명백하게 나타냄이 포함되고 있다.

그리고 여러분은 나의 아버지에게 이집트에서의 나의 모든 영화를 말하시오. 이는 자연 평면에서 영적 (평면의) 천국이 영적 선과 소통함을 의미한다. 이는 “말하다(tell)”의 의미가 교통하다이다로부터; “영화(glory)”의 의미가 영적 천국 이다로부터 (아래에서 살핀다); “이집트”의 의미가 자연 평면에 있는 기억 속의 지식들, 고로 자연 평면이다로부터; 그리고 교통함이 만들어지게 될 “아버지”인 이스라엘의 표현함이 영적 선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상 모두로부터 분명한 바, “당신들은 이집트에서 내 영화의 모든 것을 아버지에 말하라”에 의해 자연 평면에서 영적 선이 영적 (평면의) 천국과 교류함이 의미된다.
“영화”가 영적 (평면의) 천국을 표시함에 주목하면, 이렇다; 천국을 만들어내는(form, consist) 두 왕국들이 있다; 즉 천적 왕국과 영적 왕국이다. 천적 왕국은 가장 안쪽 천국, 또는 세 번째 천국, 그리고 영적 왕국은 중간의 천국, 또는 두 번째 천국이다. 천적 평면에 있는 선은 천적인 (수준의) 선이라 불리우고, 영적 평면에 있는 선은 영적인 (수준의) 선이라 불리운다. 천적 선은 주님을 사랑함의 선이고, 영적인 선은 이웃을 향한 선이다. 이 두 왕국의 결합에 주목해보면, 이 두 왕국을 결합하게 하는 것은 이웃을 향한 선행의 선이다. 그 이유가 천적 왕국의 내적 부분은 주님을 사랑함 이고 외적 부분은 이웃을 향한 선행 이기 때문이다; 한편, 영적 왕국의 내적 부분은 이웃을 향한 선행이고, 외적 부분은 선행으로부터의 신앙이다. 이로부터 이 두 왕국의 결합은 이웃을 향한 선행을 통하여 결과됨이 분명하다. 그 이유가 이 선행에서 천적 왕국의 종착점이 있고, 영적 왕국의 출발점이 있기 때문이다 (출발과 도착이 있는 버스 터미널을 연상해보아도 될지 모른다 역자주.) 고로 전자의 마지막이 후자의 시작이다. 이런 관계로 이 둘은 서로를 붙들고 있다.
“영화”가 무엇인지 이제 말해본다. “영화(영광)”는 최고 의미에서 신성한 진리 측면에서의 주님이시다, 고로 이것은 주님으로부터 진행하는 신성한 진리이다. 그러나 표현 의미에서 “영광”은 이웃을 향한 사랑의 선, 또는 선행(charity)이고, 이것은 천적 왕국의 외적 선이고 주님의 영적 왕국의 내적 선이다, 그 이유가 이 선은 진짜 의미에서 천국에 있는 신성한 진리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기서는 영적 선, 또는 선행인 이스라엘이 취급되기 때문에, 이것이 천국들에서 영적 왕국을 만들기 때문에, 그리고 땅에서 영적 교회를 만들기 때문에, 여기서 이스라엘에게 말하라고 한 요셉의 “영광”을 수단으로는 영적 (평면의) 천국이 뜻해진다. 영적 천국이 “영광”이라 불리우는 이유는 그 천국에서 나타나는 것은 무엇이든 빛 안에서, 밝게 빛남 안에서, 광휘 안에서 이기 때문이다.
“영광”이 주님의 신성한 인간으로부터 있는 신성한 진리를 서술한다는 것, 이것이 왕 측면에서의 주님의 속성이다는 것이 요한복음서에서 분명해진다;
그러나 말씀이 육으로 만들어졌다, 그리고 우리 안에서 거주하셨다, 그리고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아버지의 유일한 독생자에 관한 영광을 보았고, 은총과 진리로 가득하였다 (요. 1:14);
“말씀”은 신성한 진리이다, 그리고 이것이 주님으로부터 진행하기 때문에, 이것은 주님 자신이시다; 그리고 이로부터 “영광”은 신성한 진리를 서술한다.
누가복음서에서, 예수께서 산에서 변모하셨을 때;
보라 거기에 그분과 더불어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었다, 이들은 모세와 엘리야였다; 이들이 영광 안에서 보여졌다 (눅. 9:30, 31);
주님께서는 위 광경을 베드로, 야고보, 요한에게 신성한 빛 안에서 나타나는 것과 같은 그분의 신성한 인간을 보이셨다; 그리고 이때 그분이 보이셨던 형체는 내적 의미에서 있는 말씀과 같은 것을 바라보도록(view) 표출되었다; 고로 이것은 천국에 있는 신성한 진리와 같은 것이다, 그 이유가 말씀은 교회의 사용을 위한 신성한 진리이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그분과 더불어 모세와 엘리야도 동시에 바라보게 표출된 것이다; 그 이유가 모세에 의해서는 율법이, 고로 역사적 부분과 더불은 모세의 책들을 표현되었고, 엘리야에 의해서는 예언서들, 또는 예언의 말씀들이 표현되었기 때문이다. “모세”가 법을 뜻한다에 대하여는 창. 18장 서문을 참조하면 될 것이다; “엘리야”가 예언의 말씀을 뜻함도 같은 서문에서 있다.
마태복음서에서:
그들은 사람의 아들이 능력과 영광과 더불어 하늘의 구름들 안에서 오는 것을 볼 것이다
(마. 24:30);
말씀의 글자 의미가 “구름”이다, 그리고 내적 의미는 “영광”이다. 외적 의미 측면에서의 말씀은 구름 안에서 있다, 그런 이유는 인간의 마음들이 어둠 안에서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말씀이 구름 안에 있지 않으면, 어떤 누구에게나 거의 이해되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내적 의미에 속하는 거룩한 것들은 세상에 있는 악한 인간(people)에 의해 모독될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이사야서에서 말하신다:
여호와께서는 시온의 모두 각각의 거주지 위에, 그리고 그녀의 회합의 위에, 낮에는 구름을, 밤에는 불의 불꽃이 빛을 내게 창조하실 것이다; 모든 영광 위에 덮개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낮 동안에는 그늘을 위하여 성막이 있을 것이다 (이. 4:5, 6).
그런고로 성막 위에 낮에는 구름이, 밤에는 불이 나타났다, 그 이유는 성막이 주님의 신성한 인간을, 결과적으로 그분으로부터 진행하는 신성한 진리를, 고로 교회의 신성한 진리인 말씀을 표현했기 때문이다. 같은 사항이 모세의 책에서 이 말씀에 의해 의미되고 있다:
구름이 만남의 천막을 덮었다, 그리고 여호와의 영광이 주택을 채웠다 (출. 40:34).
다시:
여호와의 영광이 이스라엘의 모든 아들들 앞에서 만남의 천막에서 나타났다 (민. 14:10).
다른 곳에서:
구름이 천막을 덮었다, 그리고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났다 (민. 16:42).
마찬가지로 시내산 위에서 “구름”과 “영광”, 이에 관해 모세의 책에서:
모세가 산으로 올라 갔을 때, 구름이 산을 덮었다, 그리고 여호와의 영광이 육일 동안 시내산에 거주하셨다 (출. 24:15, 16).
이런 사항들이 표현한 것 역시 법, 즉 신성한 진리인 법때문이었고, 하여 이 산으로부터 선포되었다. 여호와의 구름과 영광이 모세가 산에 올라 갔을 때 보여진 이유는 그가 법, 즉 역사적 말씀을 표현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때로 말해지는 것은, “모세와 예언자들”, 또는 “율법과 예언서들”이라 불러지는 것이다. “법”에 의해서는 모세의 책과 더불어 역사적 부분의 말씀이, 그러나 예언서들은 아니다, 이 책들은 엘리야와 엘리사에 의해 표현되었기 때문이다; 말씀이 역사적 부분과 예언적 부분으로 되어 있다는 것은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러므로 말씀이 “율법과 예언서들”이라 말해질 경우, “율법”은 역사적 말씀을, “예언서들”에 의해서는 예언적 말씀이 뜻해진다.
신성한 진리가 거룹을 빙두른 구름에서와 그것들 위에서 무지개로서 밝음에 의해 표현되었다:
나는 불의 나타남, 마치 빙둘러 빛남의 나타남을 보았다; 비가 온 날의 구름에 있는 활의 나타남 같았다; 이것은 여호와의 영광의 모습의 나타남이었다 (겔. 1:27, 28);
그리고 이렇게 불리워진다:
여호와의 영광과 이스라엘의 하느님의 영광 (겔. 8:4; 10:18, 19; 11:22, 23);
비교적 측면에서 가장 깊은 천국의 영광은 “여호와의 영광”, 비교적 측면에서 중간, 또는 영적 천국에서의 영광은 “이스라엘의 하느님의 영광”이라 불리운다. 천국들에 있는 신성한 진리가 영광 안에서 나타나는 이유는 영적 천국에서의 진리 자체가 빛나는 구름으로 눈 앞에 나타나기 때문이다(이는 나에게도 보도록 허락되기도 했다), 그리고 이 진리 안쪽의 선은 거기서 불타는 것으로 나타난다. 고로 불에 의해 다양해진 구름은 외적 의미에서 “영광”인 경이로운 양상들을 표출한다. 그러나 내적 의미에서의 “영광”은 총명과 지혜이고, 이것들이 영광에 의해 표현되어져 있다.
신성한 진리, 이로부터 모든 지혜와 총명이 있다, 뿐만 아니라 외적 시각 앞에 다채로운 구름의 나타남인데, “영광”이다. 아래 구절들에서 분명해진다:
여호와께서 말하셨다, 살아 있음이 나이다, 그리고 온 땅은 여호와의 영광으로 채워질 것이다 (민. 14:21);
위 말씀은 여호와께서 하셨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의절되었을 때, 그리고 그들의 어린 것들만이 가나안의 토지에 갈 것이라고 말해졌을 때 였다, 이런 상황 아래, “온 땅이 여호와의 영광으로 채워졌다”에 의해, 그들과 더불은 교회의 표현만 할 뿐임에서, 그리고 말씀에서, 대부분이 그들을 취급하고, 거기에 여호와의 영광이 있을 것이라고, 이와 더불어 온 천국도 (영광으로) 채워질 것이라고, 이로부터 교회의 거룩한 것들이 있을 것이 의미되고 있다.
이사야서에서:
스랍이 소리쳤다, 거룩, 거룩, 거룩, 여호와 체바욷이시다; 모든 땅의 충만함이 그분의 영광이다 (이. 6:3).
다시:
여호와의 영광이 밝히 알리실 것이다, 그리고 모든 육체가 함께 볼 것이다 (이. 40:5).
다시:
그러므로 우림 안에서, 바다의 섬에서 여호와께, 이스라엘의 하느님 여호와의 이름에 영광을 드리자 (이. 24:15);
“우림”은 주님으로부터 진행하는 신성한 진리로부터 있는 빛을 표시한다; “바다의 섬들”은 진리로부터 더 멀리 떨어진 이들을 표시한다.
다시:
레바논의 영광이 그것에 주어질 것이다, 갈멜과 샤론의 영예; 그들은 여호와의 영광을, 우리의 하느님의 영예를 볼 것이다 (이. 35:2);
“레바논”은 영적 교회를 표시한다; “갈멜과 샤론”은 천적 교회를 표시한다; 선행인 천적 진리가 뜻해질 때, 글자로부터까지 “여호와의 영광”을 서술하고 있다; 앞 구절(이. 24:15)의 “이스라엘의 하느님의 영예”가 서술되는데, 이는 영적 선이 뜻해질 때, 이것 역시 선행이 있을 때이다.
다시:
일어나라, 빛을 발함이 있으라, 네 빛이 오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호와의 영광이 너희 위에 일어났기 때문이다. 보라 어둠이 땅을 덮는다, 그리고 짙은 어둠이 백성들을 (덮는다); 그러나 여호와께서는 네 위에서 일어나실 것이다, 그리고 그분의 영광이 네 위에서 보여질 것이다 (이. 60:1, 2);
위는 주님에 관하여서이고, 이분이 “빛”이라 불리우신다 (요. 1:4, 9도 비슷하다); 그리고 그분 위에서 “여호와의 영광”이 일어날 것이다고 말해진다; 즉 신성한 진리가 그분의 것이다고 말해진다. 마찬가지가 같은 예언서에서:
나 자신을 위하여, 나 지신을 위하여, 나는 그것을 행할 것이다; 어찌 그것이 모독되어진다는 말인가? 내 영광을 나는 다른 자에게 주지 않는다 (이. 48:11);
위 구절도 주님에 관하여서 이다; “영광”은 가장 높은 의미에서 신성한 인간을, 또한 신성한 진리를 표시한다, 그 이유는 이것이 거기로부터 이기 때문이다; “그분의 영광을 다른 자에게 주지 않는다”란 그분 자신과 하나인 신성한 인간에게 만 그것을 주신다는 말이다.
계시록서에서: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거룩한 성 예루살렘; 하느님의 영광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녀의 발광체는 가장 귀중한 돌 같다 (계. 21:10, 11);
“거룩한 성 예루살렘”은 천국들에 있는 주님의 영적 왕국이다, 그리고 땅에서는 그분의 영적 교회이다, 이 둘을 “영광”이 서술하고 있다; “발광체”는 신성으로부터의 진리이다.
말씀에서 신성한 진리가 왕권에 의해 표현되듯, 신성한 진리 측면에서의 주님이 왕들에 의해 표현되므로 “영광”을 왕의 속성이 되고 있다. 다윗서에서:
너희 머리들을 들어라, 오 너희 큰 문(gate)들이여; 그리고 너희는 들리어질 것이다, 세상의 너희 작은 문(door)들아; 영광의 왕이 안으로 가신다. 누가 영광의 이 왕이냐? 강하고 영웅이신 여호와; 전쟁의 영웅 여호와 (이시다). 너희의 머리들을 들오라 오 너희 큰 문들이여; 그리고 오 세상의 작은 문들을 들어라; 영광의 왕이 안으로 가신다. 누가 영광의 이 왕인가? 여호와 체바욷 (이시다), 그분이 영광의 왕이시다 (시. 24:7-10).
이사야서에서:
여호와 체바욷이 시온의 산에서 통치하실 것이다, 그리고 예루살렘에서; 그리고 그분의 영광의 원로들 앞에서 (이. 24:23);
“영광”은 신성한 진리를 표시한다. 여호와가 신성한 진리가 취급되는 곳에서는 “여호와 체바욷”이라, 또는 “군대들의 여호와(만군의 여호와)”라고 불리우신다, 그 이유는 “군대들”에 의해 진리들이 의미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왕국에 의해서는 신성한 진리가 표현되었는 바, 그러므로 왕이 앉은 왕좌는 그들이 심판했을 때 “영광의 왕좌”라고 불리웠다 (이. 22:23; 예. 14:21; 17:12). 그리고 마태복음서에서:
사람의 아들은 그분의 영광의 왕좌에 앉을 것이다 (마. 19:28).
다시:
사람의 아들이 그분의 영광 안에서 올 때, 그리고 그분과 더불은 모든 거룩한 천사들, 그때 그분은 그분의 영광의 왕좌에 앉으실 것이다. 그리고 왕이 그들에게 말할 것이다 (마. 25:31, 34, 40).
왕좌가 “영광의 왕좌”라 불리운 또 다른 이유는 심판들이 진리로부터 결과되어졌기 때문이다. 다시:
사람의 아들은 그분의 천사들과 더불은 그분의 아버지의 영광 안에서 올 것이다; 그리고 그때 그분은 모든 이에게 그의 행실들에 따라서 보답할 것이다 (마. 16:27).
위 모두로부터 “영광”에 의해 뜻해지는 것이 분명해졌을 것이다. 주님의 기도에서:
왕국과 권능과 영광이 영원히 당신의 것입니다 (마. 6:13).
천국들에서의 주님의 영적 왕국과 땅 위에서의 그분의 영적 교회는 “잘생김, comeliness”이라고도 불리우고 있다 (이. 60:7; 63:15; 64:11; 단. 8:9; 11:16, 41, 45. ** 참고: 이 구절들에서의 히브리 단어는 라틴어로는 decus 인데, kjv 등의 영역에서는 영광, glory으로 번역하는데, 원저자의 경우는 아름다움, 잘생김으로 번역하고 있다 역자주.) 더욱이 “영광”이 요셉에 의해 언급되는데, 그 이유는 가장 높은 의미에서 요셉 자신이 신성한 영적 평면, 즉 신성한 진리 측면에서의 주님을 표현하기 때문; 그리고 내적 의미에서는 그분의 영적 왕국, 그리고 또한 신앙의 선을 표현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당신들이 보았던 모든 것. 이는 거기서 주목되었고 지각된 것은 무엇이든지를 의미한다. 이는 “보다(see)”의 의미가 이해하다와 이해함으로부터 지각하고 주목하는 것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리고 서두르시오, 그리고 나의 아버지를 이쪽으로 내려 오게 하시오. 이는 더 가까운 결합을 의미한다. 이는 앞에서 살핀 바 있다; 그리고 다시 여기서 반복되고 있다, 그리고 사랑의 애착으로부터 인 바, 이것은 친밀한 결합을 표시한다.

14, 15절. 그리고 그는 그의 아우 베냐민의 목들에 엎드려져서 울었다. 그리고 베냐민은 그의 목들에서 울었다. 15 그리고 그는 그의 모든 형제와 키스했다, 그리고 그들과 울었다, 그 후에 그의 형제들은 그와 이야기 했다.

그리고 그는 그의 아우 베냐민의 목들(necks)에 엎드려졌다. 이는 중매자와 더불은 가장 깊은 결합을 의미한다. 이는 “목”의 의미가 유입, 교통, 그리고 결합인데 (** 눈이나 귀와 달리 목은 하나뿐인데, 복수인 목들로 히브리어, 라틴어 모두에서 기록하고 있다. 역자 주), 여기서 가장 적절한 의미는 결합, 즉 천적인 것과 영적인 것의 결합, 고로 “요셉”인 천적 평면으로부터의 내적 부분(the internal celestial)이 “베냐민”인 천적 평면의 영적 부분(the spiritual of celestial)과 결합함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목들에 엎드려졌다(목들을 끌어 안았다, fall)”는 자신들을 밀접하게 결합했다는 것, 결과적으로 가장 깊은 결합을 표시한다. 그리고 베냐민의 표현함이 중매자이다로부터 알려진다.

울었다. 이는 자비의 결과를 의미한다. 이는 “울다(weep)”가 자비로부터 인 것이다, 고로 그것의 결과가 의미된다.

그리고 베냐민은 그의 목들에서 울었다. 이는 영접 그리고 거기로부터의 상호성을 의미한다. 이는 이 행동이 상호적으로 있었다는 사실로부터 분명해진다; 그러므로 이것은 받아들임과 상호 관계를 표시한다. 선이 진리들과 결합함, 그리고 상호적으로 진리가 선과 결합함에 주목해보면, 선이 진리들 안으로 흐르고, 자체를 그것들에 결합할 때, 진리들 안으로 선은 자체로부터 선을 쏟는다, 그리고 선의 자신을 수단으로 선 자체에 진리가 달라붙게 한다, 이리하여 결합이 오고 있다. 그리고 진리들이 생명을 받을 때, 받은 후에는 그것들은 서로에게 작용, 반작용하여 마치 각기 자신들로부터 행동하는 듯하다. 그럼에도 진리들은 자신들로부터 행동하지 않는다, 그러나 진리들에 자체를 수단으로 하여 달라붙은 선 안으로 흐르는 선으로부터 행동한다. 이런 경우는 살아있는 육체에 있는 혈관과 같다. 진리들은 피 없는 혈관과 비슷하다; 그러나 선은 마치 피 같이 있다; 이 선이 자체를 이전에 텅비어 있던 (혈관이라는) 그릇 안으로 쏟을 때, 그것(혈관)은 움직임 안에 놓인다, 또한 선 역시 상호적으로 움직임 안에 있는다, 그 이유가 그것들은 피로부터 움직이는 능력을 받았기 때문, 마치 생명을 받은 것과 같다. 이런 모두로부터 분명해지는 바, 선이 진리들과 결합함, 그리고 상호적으로 진리들이 선과 결합하는 경우가 어떤 경우일 것인지 이다.

그리고 그는 그의 모든 형제와 키스했다. 이는 은총으로부터 인접함(adjunction)을 의미한다. 이는 키스의 의미가 애착(애정)으로부터의 결합함이다로부터, 여기서는 은총으로부터 인접함인데, 그 이유는 야곱의 아들들에 의해 표현되는 자연 평면의 진리들은 요셉인 내적 선과 비교적으로 거리가 더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 그리고 더 멀리 떨어져 있는 것들은 내적 선과 결합하려면 중매자를 통하여서만 그나마 가능해진다; 그 이유는 엄밀히 말하면, 자연 평면의 진리들은 내적 선과 상응하지 않는 이런저런 것들을 여전히 붙들고 있는 상태이기 때문 이다; 그러므로 “자기 형제들과 키스함”에 의해서는 은총으로부터 결합함이 의미된다. 여기서 자비로부터가 아니라 은총으로부터라고 말한 이유는 내적 선에서 한층 더 멀리 떨어진 상태의 진리들, 고로 상응함이 충분하지 않는 상태의 진리들은 그것들이 자비를 간청할 수 있는 만큼의 (완전) 굴종(겸허, humiliation)의 수준에 있지 않아서 이다; 그것들은 심정으로부터서는 자비라는 단어조차 끄집어낼 수가 없다, 그 대신 은총이라는 단어는 가능하다. 그리고 이것은 그것에 붙어 있는 비 상응적인 것들이 자기를 사랑함으로부터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신을 사랑하는 자는 심정으로부터서는 자신을 겸허해지게 할 수 없다; 그 이유가 그는 자신을 자신 내부로부터서는 상석에 앉히고 있기 때문, 다시 말해 모든 것에서 자신만을 중요시한다는 것, 자신 외의 것은 하찮은 일거리에 불과한 것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과 울었다. 이는 애착(애정)의 결과를 의미한다. 이는 “울다”의 의미가 자비의 결과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는 바로 앞 문단의 설명한 이유와도 상충된다.

그 후에 그의 형제들은 그와 이야기 했다. 이는 영접으로부터의 상호 소통을 의미한다. 이는 앞에서 살핀 바 있다, 또한 영접함으로부터 있는 상호 교통함이 무엇인지도 이미 살폈다.

16-20절. 그리고 이 목소리가 바로의 집에 들렸다, 말하기를 요셉의 형제들이 와있다. 그리고 이것은 바로의 눈에, 그의 종들의 눈에도 좋게 여겨졌다. 17 그래서 바로는 요셉에게 말했다, 네 형제에게 말하라, 이것을 너희는 하라. 너희 짐승들에 양식을 싣고, 가서, 가나안의 토지에 당도하라. 18 그리고 너희 아버지와 너희 집식구들을 데리고, 나에게 오라. 그리고 나는 너희에게 이집트의 토지의 좋은 곳을 줄 것이다, 그리고 너희는 그 토지의 지방을 먹을 것이다. 19 그리고 지금 명령했다, 이것을 너희는 실시하라. 너희는 이집트의 토지로부터 수레들을 너희 아기들, 그리고 너희 여인들을 위하여 가져가라, 그리고 너희 아버지를 모시고, 오라. 20 그리고 너희의 눈이 너희의 물자를 아끼려 하는 것을 보게 말라. 그 이유는 이집트의 온 토지의 좋은 것이,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목소리가 바로의 집에 들렸다. 이는 이것이 보편적인 자연 평면을 채웠다 를 의미한다. 이는 어딘가 다른 곳, 또는 멀리로부터서 들려진 목소리(voice), 이것이 유입을 서술할 경우, 채워지는 것이다로부터; 그 이유가 들려진 목소리가 채우듯, 흘러드는 유입도 그렇게 채우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로의 집”의 의미가 보편적 자연 평면이다로부터; 그 이유는 바로에 의해서는 일반적 측면에서의 자연 평면을 표현했기 때문이다.

말하기를 요셉의 형제들이 와있다. 이는 교회의 진리들이 자연 평면에서 현존하고 있다를 지각함을 의미한다. 이는 “와있다(to have come)”의 의미가 현존하고 있다 이다로부터; 그리고 야곱의 아들들, 또는 요셉의 형제들의 표현함이 자연 평면에 있는 교회의 진리들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자연 평면에는 다양한 종류의 기억 속의 지식들이 있다: 거기에는 지상적, 육체적, 세상적인 것들에 관한 기억 속의 지식들이 있는데, 이것들은 가장 수준 낮은 지식들이다, 그 이유가 이것들은 외적 감각들, 또는 육체의 것들로부터 직접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시민적 상태, 시민의 통치 정부, 규례들, 법들에 관한 기억 속의 지식들이 있다, 이것들은 앞의 지식들 보다는 약간 더 내면적이다; 그리고 도덕적 삶에 관한 기억 속의 지식들이 있다, 이것은 한층 더 내면적이다; 그러나 영적 삶에 속하는 기억 속의 지식들은 앞의 모든 것들 보다 더 내면적이다. 이 후자가 교회의 진리들이다, 이것이 인간과 더불어 교리로서만 있는 한에서는 그것은 기억 속의 지식들 그 이상이라 말할 수 없다; 그러나 그 지식들이 사랑의 선으로 있을 때, 그 지식들은 기억 속의 지식들이라는 수준을 박차고 일어난다; 그 이유는 이때 그 지식들은 영적인 빛 안에 있기 때문이다; 이 빛으로부터의 질서에서 이 지식들은 그것들 아래쪽에서 기억 속의 지식들을 쳐다 본다. 기억 속의 지식들의 이런저런 등차들을 수단으로 인간은 총명의 수준에 이른다, 그 이유가 이런 등차들을 수단으로 기억 속의 지식들은 마음을 열리게 해서, 영계로부터의 빛이 흘러들 수가 있기 때문이다. 이런 설명으로부터 자연 평면에서 진리들의 현존함에 의해 뜻해졌음이 분명해졌을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바로의 눈에 좋아 보였다. 이는 거기 안이 기쁨으로 꽉 찼음을 의미한다. 즉 자연 평면이 기쁨으로 꽉 찼다는 말이다. 이는 누군가의 “눈에 좋아 보임, 또는 …의 눈에 선이다(to be good in the eyes of) ”란 당사자에게 기쁨이다 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로의 표현함이 일반적 측면에서의 자연 평면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의 종들의 눈에도. 이는 거기 가장 낮은 것들에서 조차를 의미한다. 이는 “종들”의 의미가 보다 낮은 수준의 것들이다로부터, 고로 가장 낮은 수준의 것들이다도 의미한다. 자연 평면에 있는 기억 속의 지식들에서 보다 낮은 것, 가장 낮은 것이 무엇인지는 앞에서 살핀 바 있다.

그래서 바로는 요셉에게 말했다. 이는 천적 평면으로부터의 내적부분으로부터 자연 평면이 지각함을 의미한다. 이는 “말하다(say)”가 말씀의 역사 부분에서는 지각하다를 의미한다로부터; 바로의 표현함이 일반적 측면에서의 자연 평면이다로부터; 요셉의 표현함이 천적 평면으로부터의 내적 부분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요셉이 표현하는 천적 평면은 내적 부분이고, 바로가 표현하는 자연 평면은 외적 부분이기에, 그러므로 지각함은 천적 평면으로부터의 내적 부분으로부터 자연 평면 속에 있는다, 그 이유가 모든 지각함은 내부로부터 있기 때문이다; 어떤 경우에도 그 거꾸로인 밖으로부터 안쪽의 것을 지각함은 없다. 그 이유가 유입으로부터 지각함이 있기 때문이다.
지각함이 무엇인지는 자주 언급되어진 바이지만 여기서도 간략히 더 살펴야 할 것 같다. 모두 각각의 인간에게는 어떤 것이 그렇다, 아니다 하는 것을 지각하는 능력(capacity)이 있다. 자신 안에서, 또는 자신의 마음 안에서 결말을 끌어내는 능력이 어떤 것을 지각하게 한다. 이 능력은 영계로부터의 유입이 있지 않으면, 지독하게 불가능하다. 때로 이 선물을 향유함에서 이 사람은 저 사람의 능력보다 탁월하다. 덜 탁월한 이들은 자신 안에서, 또는 자신의 마음 안에서 맺어지는 결말이 덜 강력한 바, 덜 지각한다. 즉 이들은 타인들이 대체로 이런 신앙을 가지니까 아마도 그것이 옳을 것이다고 하여서, (또는 목사들이 설교에서 있던 말이니까 아마 맞지 않을 까하는 식의 태도로 인해 자신 내부의 결정에 사실상 자신의 이해력이 한발 뒤로 물러선 셈일 때) 당사자의 지각력은 무디어져 있게 된다는 말이다, 고로 덜 지각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보다 더 탁월한 이들은 타인들로부터가 아닌 상태에서 자신들을 위해 이것이 그렇다 여부를 보는 이들이다; 어쨌든 모든 이와 더불어 존재하는 지각은 행위 자체 안에서 세상작인 것들과 하나되어 있다. 오늘날 누군가의 지각함이 영적인 것들과만 하나되어 있는 자는 없다. 그 이유는 흘러들어 지각을 있게 하는 영적인 것들은 세상 사랑과 자아 사랑의 기쁨을 수단으로 희미해지고 결국 소멸되기 일쑤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의무감이나 관습적인 것들의 제약이 세상 사랑과 자아 사랑의 제멋대로 하려 듦을 제어하는 정도에서 겨우 기사회생되어 있기 일쑤이다; 따라서 만일 의무감에서 해제되고 관습적 제약 조건도 거두어진다면, 위 두 사랑들은 영적인 것들에 대해 퇴짜를 놓고, 증오감마저 느끼기도 하고, 아예 부정해버리기까지 이르른다.
영적인 것들에 지각을 가지는 이들은 반드시 선으로부터 진리에 애착하고 있어야 하고, 진리들을 알려는 바램을 계속적으로 지녀야만 한다. 그러면 이로 인해 그의 지적 부분이 계발된다, 그리고 지적 부분이 계발되어졌을 때, 이때 자신 안쪽에서 내향적으로 어떤 것을 지각하는 것이 그에게 주어진다. 그러나 진리에 애착함에 있지 않은 이들은 자기가 그것이 그렇다하는 것을 자기가 소속한 교회의 가르침으로부터, 그리고 성직자, 장로, 수도사 등등이 그렇게 말했기 때문에로부터 알고 있다. 이상 살핀 바로부터 지각함이 무엇인지에 대하여, 그리고 이것은 세상적인 것 안에 존재하고 영적인 것 안에 존재하지 않고 있다는 것을 알았을지 모른다; 이것은 이런 사실로부터 더 확실해질 것이다: 즉 모든 이는 자신이 출생한 교리 안에 머문다는 것, 예를 들면, 유태인으로, 교회 밖에서 태어나든 거기에 남아 있는다는 사실이다. 더욱이 그가 이교도에서 태어난다면, 그런데 이들에게 최고로 진짜되는 진리들을 말해준다면, 그래서 그들이 이 진리들을 확증조차 했다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것의 진리의 한조각도 지각하지 못한다; 그 이유는 그들에게 그 진리들은 거짓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네 형제에게 말하라. 이는 자연 평면에 있는 교회의 진리들에 관하여를 의미한다 (즉 그것들에 관하여 지각함이 있다는 것). 이는 요셉의 형제들의 표현함이 자연 평면에 있는 교회의 진리들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여기서 바로가 야곱의 아들들을, 그들의 아기들과 여인들과 더불어 초대하고 있다. 그리고 그들과 더불어 그들의 아버지도 초대하고 있다; 바로가 말한다: “네 형제에게 말하라, 이것을 너희는 행하라, 그리고 너의 아버지를 데려오라, 그리고 너는 이집트의 토지로부터 너희의 아기들과 너희의 여인들을 위하여 수레들을 가져가라, 그리고 너의 아버지를 데려와 오게 하라.” 방금 앞 절에서 요셉은 그의 아버지를 초대한다, 그리고 그의 형제들은 자기 아버지의 아들들로서만 초대하고 있다, 이렇게 말했다: “나의 아버지에게 올라가시오, 그리고 그에게 말하시오, 나에게로 오시되 지체하시지 말라; 그리고 당신은 고센의 토지에서 거주할 것이다, 당신은 내 가까이 있을 것이다, 당신, 그리고 당신의 아들들, 그리고 당신의 아들들의 아들들, 당신이 가진 모든 것도 (가까이 있을 것이다); 당신들은 서두르라, 이쪽으로 나의 아버지를 데려오라.” 바로가 야곱의 아들들을 초대했고, 요셉은 그의 아버지를 초대했는데 그에 대한 이유는 내적 의미가 아니면 분명해지지 않는다. 즉 바로에 의해 표현되는 일반적 측면에서의 자연 평면은 야곱의 아들들에 의해 표현되는 교회의 진리들에 더 직접적으로 교통하는 이유에서이다. 그러므로 바로가 야곱의 아들들을 초대하는 말을 한 것이다. 그러나 요셉에 의해 표현되는 천적 평면으로부터의 내적 부분은 야곱의 아들들인 자연 평면의 교회의 진리들과는 직접적인 교통함이 없고, 그들의 아버지인 이스라엘인 영적 선을 통하여서만 교통함을 가진다, 그래서 요셉이 자기 아버지를 초대하는 말을 한 것이다.

이것을 너희는 하라. 너희 짐승들에 (양식을) 실어라. 이는 그들은 모두 각각의 진리를 선으로 채워야 할 것을 의미한다. 이는 “짐승들에 싣는다”는 것은 진리들을 (선으로) 충분히 채운다이다로부터; 그리고 짐승이 실어나르게 되는 양식(grain)은 진리의 선이다. 여기서 “짐승들”이 진리들인 이유는 그것들이 나귀들이었기 때문이다 (창. 42:26, 27; 43:18, 24; 44:3). 그리고 “나귀들”에 의해 기억 속의 지식들이 의미되고, 그리고 중매자를 통하여 내적 선과의 결합이 결과되었기에, 여기서의 나귀인 짐승들은 기억 속의 지식들로부터의 진리들이다; 그러므로 “나귀”라는 표현 대신, 짐승이라는 단어가 사용되어 “짐을 싣는 짐승들(jumenta)”이라 불리운 것이다.

가서, 가나안의 토지에 당도하라. 이는 그들의 거주지, 즉 자연 평면에 있는 교회의 진리들의 거주지를 의미한다. 이는 “가나안의 토지”가 교회 속에 있어왔던 이들의 거주지이다로부터, 고로 선과 더불은 교회의 진리들의 거주지이다로부터, 그 이유는 이 진리들이 교회를 구성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너희 아버지와 너희 집식구들을 데리고, 나에게 오라. 이는 영적 선과 교회 속의 진리들이 자연 평면에 있는 기억 속의 지식에 접근함을 의미한다. 이는 여기서 “아버지”인 이스라엘의 표현함이 영적 선이다로부터; 그리고 그의 아들들의 표현함이 자연 평면에 있는 진리들이다로부터, 그의 아들들로부터의 모든 것이 “집식구들”이다; “오다”의 의미가 접근하다이다로부터; 여기서 “나에게”인 바로의 의미가 일반적 측면에서의 자연 평면의 기억 속의 지식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상 살핀 바를 종합하면, “너의 아버지, 그리고 너희의 집식구들을 데려와서, 나에게 오라”에 의해 영적 선과 교회의 진리들이 자연 평면의 기억 속의 지식들에 접근함이 의미된다.

그리고 나는 너희에게 이집트의 토지의 좋은 곳을 줄 것이다. 이는 기억 속의 지식들을 소유함을 의미한다. 이는 “이집트의 토지”의 의미가 기억 속의 지식들이다로부터; 그리고 그가 “토지의 좋은 곳을 준다”의 의미가 소유함이다로부터, 그 이유가 소유권을 주는 자라면 거기로부터의 좋은 곳을 주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반대의 경우도 해당된다.

그리고 너희는 그 토지의 지방(fat)을 먹을 것이다. 이는 거기서 선을 자기 것이 되게 함을 의미한다. 이는 “먹다”의 의미가 교통되는 것, 결합되는 것, 그리고 자기 것이 되게 하는 것이다로부터; 그리고 지방(fat), 또는 “살찐 것 (지방이 많음, fatness)”, 또는 “토지의”, 즉 이집트의 의미가 자연 평면에 있는 선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지방”이 천적 평면, 또는 선을 표시한다는 것은 말씀의 많은 구절들로부터 분명해진다; 이 지방은 동물로부터의 지방 뿐만 아니라 그 밖의 것들로부터의 것, 즉 버터(butter)나 기름(oil)도 포함된다. 그리고 살찌움에 가담하는 것은 무엇이든 그 정도에 따라 선으로부터 있는 것을 의미한다, 말하자면, (넓게 말해서) 젖이나 꿀, 내지 수지 등도 포함된다는 말이다.
“지방이 많음”이 천적 선, 고로 주님으로부터 있는 사랑의 표현물이었다는 것은 번제물과 (희생) 제물들로부터, 즉 이 제물들에 있는 모든 지방은 제단에서 태워졌고, 그것으로부터의 냄새는 “여호와의 쉼의 냄새”이었다로부터 분명해진다; 또한 이런 이유로 이스라엘의 아들들은 지방을 먹는 것을 금지했다. 이런 대목으로부터, 이외의 많은 대목들로부터 이스라엘족들 사이에 제정된 사항들은 천적이고 영적인 것들의 표현물이었다는 것, 고로 그것들은 거룩한 사항들을 포함했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동물의 모든 지방을 제물로 바치는 것, 그것의 타는 냄새가 여호와의 쉼의 냄새이다는 것, 또는 피처럼 지방을 먹지 못하게 하신 것에 대한 신성한 이유가 있어질리 만무했을 것이다. 만일 이런 사항들 안에는 저장된 어떤 의미가 있지 않다고 믿는다거나, 또는 단순히 지방을 여호와께서 기뻐하신 물품인가 하는 식의 막연한 생각에 자신을 생각을 멈추고 있다면, (요즈음 시대로 보면, 지방을 많이 먹으면 살쪄 건강에 해로우니까 태우라 명령하신 것은 아닌가 따위의 생각) 정녕 이런 생각의 소유자는 거룩한 말씀에 막돼먹은(gross) 해석을 들이댄 것에 불과하지 않을까? 이런저런 주님으로부터의 법령에 의해 포함된 것에 관한 지식을 얻어 보고자함은커녕 아예 개의치 않는다면, 이것이야말로 지상적, 육체적 수준일 것이다; 이는 말씀 속의 의미나 영원한 삶을 알려는 애착이 없다는 표시이다.
“지방”에 관하여 우리는 모세의 책에서 이렇게 읽는다:
너희는 내장을 덮은 모든 지방, 그리고 간 위의 대망막, 그리고 콩팥 위의 지방을 가져올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제단 위에서 태울 것이다 (출. 29:13, 22; 레. 3:4, 5, 9, 10, 14, 15; 4:8, 9, 19, 26, 31, 35; 7:3, 4).
가슴의 지방 또한 제물로 바쳐졌다 (레. 7:30, 31). 이것이 “여호와께 쉼의 냄새” 였다. 고로:
이것은 쉼의 냄새를 위하여 여호와께 태워바치는 빵이다 (레. 3:16).
성직자는 여호와의 제단 위에서 피를 뿌릴 것이다, 그리고 여호와께 쉼의 냄새를 위하여 지방을 바칠 것이다 (레. 17:6).
그리고 다른 구절에서:
수소, 그리고 양의 첫 배 새끼의 지방은 제단 위에서 태워질 것이다, 여호와께 쉼의 냄새를 위하여서 이다 (민. 18:17);
“쉼의 냄새”는 사랑의 선으로부터 감사하는 것을 의미한다.
지방이 이스라엘의 아들들에 의해 먹어지지 않았다는 것:
모든 지방은 여호와의 것으로 있게 하라. 그러므로 이것은 모든 너희의 거처에서 대대로를 위한 영원한 규례이다; 너희는 어떤 지방, 또는 어떤 피도 먹지 말라 (레. 3:16, 17).
다른 구절에서:
이스라엘의 아들들에게 이야기하여, 말하기를, 너희는 어떤 지방도, 그것이 소의 것이든, 양의 것이든, 또는 염소의 것이든 먹지 말 것이다; 여호와께 불로 만드는 제물인 짐승의 지방을 먹는 자는 자기 백성들로부터 잘리울 것이다; 너희는 어떤 피도 먹지 말 것이다 (레. 7:23, 25, 26).
태워 바침과 제물들은 이 백성과 더불어 신성한 예배의 주요한 부분을 구성했다, 그러므로 일반적 측면에서 태워바침과 제물에 의해서서는 예배가 의미되었다, 그리고 제물로 바친 것들, 또한 제물을 바치는 괴정에 의해서는 예배의 품질이 의미되었다, 그리고 지방과 지방을 태움에 의해서는 신성한 천적 평면 자체가 되었다, 이것은 주님으로부터의 사랑의 선이다. 이것이 아래 구절로부터 나타난다:
오 야곱아, 너는 나에게 은으로 달콤한 줄기(cane) 사지 않았고, 네 제물의 기름을 가지고 너는 나를 채우지 않았다; 오직 너는 나에게 네 죄들을 통하여 섬김을 만들었다 (이. 43:24)
“너는 은을 가지고 달콤한 줄기를 사지 않았다”란 너는 네 자신을 위하여 신앙의 진리들을 포획하지 않았다를 표시한다; “그리고 네 제물의 지방을 가지고 너는 나를 채우지 않았다”란 사랑의 선이 포획되지 않았다를 표시한다.
다윗서에서:
저는 당신에게 살찐 것의 태워 바침을 숫양들의 향기와 더불어 바칠 것입니다 (시. 66:15);
“살찐 것을 태워 바침”은 사랑으로부터의 예배를 표시한다. 모세의 책에서:
이렇게 말해질 경우, 즉 그들의 제물들의 지방을 먹었고, 그들의 음료 바침의 포도주를 마셨던 그들의 하느님들, 그들이 의지했던 바위는 어디 있느냐? (신. 32:37, 38);
위 말은 신들이 이런저런 것들을 가지고 먹여졌을 것이다고 상상했던 이방인들에 의해 말해졌을지도 모른다; 이들이 완전히 알아채지 못하는 것은, 제물의 지방은 예배에서 천적 평면, 또는 사랑의 선이다는 것이다; 그리고 음료 바침의 포도주는 사랑의 선으로부터 파생되는 신앙의 진리이다는 것이다. 실상 제물이 바쳐질 때, 천사들은 이런 의미들로 감명받았다; 그리고 천국이 표현과 상응을 수단으로 인간 가까이 있도록 하시기 위하여 이런 규례들이 명령된 것이다.
다윗서에서:
여호와께서는 모든 너희의 제물들을, 그리고 너희가 지방을 태워 바치는 것을 기억하실 것이다 (시. 20:3);
“지방을 태워 바침으로 만드는 것”은 예배를 선이 되게 하는 것을 표시한다. 이사야서에서:
이 산에서 여호와 체바욷께서는 모든 백성에게 기름진 것들의 잔치를, 재강(lees, 포도주의 찌끼라기 보다는 오래 저장한 포도주일 것같다. 역자주)의 잔치를, 골수가 가득한 기름진 것의 잔치를, 잘 걸러진 재강의 잔치를 만드실 것이다; 그분은 영원히 죽음을 삼키실 것이다; 그리고 주 여호비가 모든 얼굴들에서 눈물울 닦으실 것이다 (이. 25:6, 8);
“잔치”는 천국과 거기서 사랑과 선행을 통하여 천사들과 결합함을 표시한다; “살찐 것”은 사랑과 선행의 선들이다. 이사야서에서:
어찌하여 너희는 빵이 아닌 것을 위하여 은을 소비하느냐? 그리고 만족하지 못하는 것을 위하여 너는 노동을 하느냐? 진정으로 나에게 경청을 하라, 그리고 너희는 좋은 것을 먹는다, 그리고 너희의 혼이 살찌움에서 기뻐해지게 하라 (이. 55:2)
예레미야서에서:
나는 그들의 슬퍼함을 기쁨으로 바꿀 것이다; 그리고 그들을 위로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을 그들의 슬픔으로부터 즐거움으로 만들 것이다; 그리고 나는 살찌움을 가지고 성직자의 혼을 채울 것이다, 그리고 나의 백성은 내 선으로 충분히 만족할 것이다 (예. 31:13, 14);
“살쪘음(fatness)”은 선을 명백하게 표시한다, 그 이유가 “그들의 혼은 충분히 만족될 것이다”라고 말해지기 때문에서 이다; 그리고 이것이 “여호와의 선”이라 불리운다, 이는 그분으로부터 있는 천적 평면 외에 더 아니다. 다윗서에서:
내 혼은 살쪘음과 지방으로 충분히 만족할 것이다, 그리고 나의 입은 노래들의 입술로 찬양할 것이다 (시. 63:5);
위 구절의 뜻도 비슷하다. 다시:
당신은 당신의 선하심의 해에 왕관을 씌우신다, 당신의 길들에 살쪗음을 떨어뜨리신다 (시. 65:11).
다시:
사람의 아들들은 당신의 날개들의 그늘을 신뢰하신다; 그들은 당신의 집을 살찌움으로 채우셨었다; 그리고 당신은 그들을 기쁨들의 시내를 마시게 만드신다 (시. 36:7, 8).
이사야서에서:
그때 여호와께서 너의 씨에게 비를 주실 것이다, 그것을 가지고 너는 토지에 씨를 뿌릴 것이다; 그리고 토지의 소출로부터의 빵, 그리고 그것은 지방이 되고 풍부할 것이다 (이. 30:23).
계시록서에서:
살찌고 화려한 모든 것들이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너는 그것들을 더 이상 발견하지 못할 것이다 (계. 18:14);
위는 바빌론에 관해서 이다; “살찌고 화려한 모든 것들이 사라져 버렸다”는 사랑의 모든 선들과 신앙의 진리들이 그렇게 되어졌다를 표시한다. 모세의 책에서:
그분은 그를 바위로부터 꿀을 빨게, 그리고 바위의 틈새로부터 기름을 빨게 만드셨다; 목축의 버터, 그리고 양떼의 젖, 어린 양의 지방, 그리고 바산의 아들들의 숫양, 그리고 숫염소들, 밀의 콩팥의 지방과 더불어 (먹게 하시며); 그리고 포도의 피로부터 너는 순수한 포도주를 마신다 (신. 32:13, 14)
위는 고대의 영적 교회에 관하여 이야기 하고 있다. 이들의 다양한 선들이 하나하나 열거되고, “꿀,” “기름,” “버터,” “젖,” 그리고 “지방”을 수단으로 의미되고 있다.
“지방”이 선을 표시하기에, 이것은 자체로는 지방이 아닌 이런저런 것들에 인접되어 있기도 하는데, 여전히 선들을 의미한다. 고로 “지방”과 “선”은 마치 같은 것인 냥 있는 경우도 있다. 인용하는 구절에서의 “밀의 지방”이다. 마찬가지가 다윗서에도 있다:
나는 밀의 지방으로 그들을 먹일 것이다 (시. 81:16).
그리고 다른 구절에서:
그분은 네 경계를 평화로이 있게 하신다, 그리고 너희를 밀의 지방으로 충분히 만족하게 하신다 (시. 147:14).
모세의 책에서:
순수한 기름의 모든 지방, 그리고 새로운 포도주의 지방, 그리고 곡식의 모든 지방, 이것은 첫 열매들이다, 그 이유는 그것들은 여호와의 것이기 때문에 아론에게 주여졌다 (민. 18:12).

그리고 지금 명령했다, 이것을 너희는 실시하라. 이는 뜻함을 의미한다.

너희는 이집트의 토지로부터 수레들을 가져가라. 이는 기억 속의 지식들로부터의 교리물을 의미한다. 이는 “이집트의 토지”의 의미가 기억 속의 지식들이다로부터; “수레들”의 의미가 교리적인 것들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말씀에서 이집트가 취급되는 곳에서는 대체로 병거들과 말들이 등장하는 경우가 많은 편이다, 이때 “병거(chariot)들”에 의해서는 교리적인 것들이 의미되는데, 때로는 거짓 교리, 때로는 진정한 교리가 취급된다, 그리고 “말”에 의해서는 지적인 것들이 양쪽 의미에서 취급된다. “병거”가 교리적인 것들이다에 관하여는 이미 취급했다. 거의 마찬가지가 “수레(cart)”이지만 이것들에 의해서는 기억 속의 지식들로부터의 교리적인 것들이 의미된다. 기억 속의 지식들로부터의 교리적인 것들은 말씀의 글자 의미로부터 있는 교리적인 것들이다, 그리고 이것은 특히 교회가 소유한 내면의 진리들, 예를 들면, 선은 고아나 과부, 거리의 가난한 자 등등에게 먼저 베풀어져야 한다는 것, 또는 십계명의 가르침 같은 것이 해당되는데, 이런 진리들을 받아들이는 처음 시기에 있는 이들에게 유익함을 제공한다. 이런 교리적인 것들이 “이집트의 수레”에 의해 의미되고 있다. 이런 교리적인 것들은 인간이 배우는 시기에는 처음에 해당되고, 나중에는 최말단의 평면으로 쓰여진다; 그 이유가 발전이 더 내적인 것들 쪽으로 있게 되었을 때, 그것들은 최말단을 형성하기 때문이다. 더욱이 천적이고 영적인 것들은 이것들에서 실제로 종결점을 가진다. 그리고 그것들을 이용해 서기도 하고 그것 안에서 쉬기도 한다. 그 이유는 영계는 자연계를 마치 그의 발과 발바닥인 듯 가지기 때문이다. 인간은 그의 영적 삶의 측면에서 기억 속의 지식들로부터의 교리적인 것들 안에 그의 영적 생명을 가지고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말씀의 내적 의미는 말씀의 글자 의미 안에서 그것의 생명을 가지고 있다. 이런 교리적인 것들을 의미하는 “수레들”은 말씀의 몇 군데 외에서만 언급되어져 있다. 이 “수레”는 원어 그대로에 의해 언급되는데, 그 대목이 있는 곳은, 궤를 실어 운반하는 장면이 등장하는 대목에서 이다 (삼상. 6:7, 8; 삼하. 6:3), 그리고 성막이 성별될 때에서 이다 (민. 7:3). 궤가 천국을 표현했던 바, 천국은 기억 속의 지식들의 교리적인 것들 위에서 서기도 하고 그 안에서 쉬기도 한다.

너희의 아기들을 위하여, 그리고 너희의 여인들을 위하여. 이는 아직 알지 못하는 이들을 위하여를, 즉 교회의 더 내면의 것들을 위하여를 의미한다. 이는 “아기들”의 의미가 이런저런 사항들을 알지 못하는 이들이다로부터; 그리고 “여인들”의 의미가 진리에 애착함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여기서 야곱의 아들들인 “남자들(viri)”이 진리들을 의미할 때, 그들의 여인들은 진리에 애착함들을 의미한다; 한편, “남자들(viri)”이 선들을 의미할 때, 그들의 여인들은 진리들을 의미한다. 실상 이럴 때의 남자들은 남편으로 불리우는 경우가 많다. 사실상, 여기서의 여인들인 진리에 애착함들은 “남자들”인 진리들을 수단으로 하지 않으면 교회의 더 내면적인 것들을 알지 못한다. 진리들이 없는 애착들은 마치 이해력으로부터의 것도 없이 있는 의지력과 같다. 의지가 어떤 것을 알려하거나 보려는 경우, 의지는 이해력을 통하여 그것을 성취해야 한다; 그 이유가 이해력에 의지력의 시각, 또는 눈이 달려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너희 아버지를 모시고, 오라. 이는 그들의 섬김과 접근을 의미한다. 이는 “너희의 아버지를 모셔 옴”의 의미가 섬김(service)이다로부터 (아래에서 살핀다); 그리고 “오다”의 의미가 접근함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너희의 아버지를 모셔옴”에 주목해보면, 이렇다: 보다 더 낮은 것들은 내면의 것들을 섬겨야 한다. 수준 낮은 것들이 자연 평면에 있는 교회의 진리들이고, 이것이 야곱의 아들들에 의해 표현되고 있다; 한편, 내면인 것은 영적 선이고, 이것은 그들의 아버지 이스라엘에 의해 표현되고 있다. 보다 수준 낮은 것들은 섬김의 것들이 되어 있는 것 외에 더 이상을 위해 만들어져 있지를 않다, 즉 낮은 수준의 것들은 내면의 것들이 그것들 안에서 살아가고 행동하기 위해 만들어져 있는 것이기 때문, 만일 내면의 것들을 그것들에서 거두어 가버린다면, 그것들은 생명과 행동함이 없는 그릇들밖에 더 아닌 바, 실상 죽은 것이나 다름 없기 때문이다. 이것이 영과 육체의 관계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영이 물러갈 때, 육체는 즉시 죽는다. 이와 같은 상황은 내적 인간과 외적 인간의 경우도 같다, 또한 내적 인간과 주님의 경우도 마찬가지 이다; 그 이유가 내적 인간은 주님으로부터 생명을 받아가고 있기 때문, 그리고 그분의 생명의 기관밖에 더 아니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내적 인간은 그분을 사랑함과 이웃을 향한 선행에 요구되는 모든 사용을 위해 주님을 섬기려고 만들어져 있다, 하여 처음에는 자연계 안에서, 후에 영계에서 이다.

그리고 너희의 눈이 너희의 물자를 아끼려 하게 말라. 이는 도구적인 것들은 돌보아야 할 필요가 없다를 의미한다. 이는 “물자, 재료(stuff)” 또는 “그릇들”의 의미가 도구적인 것들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것들이 돌보아야할 필요는 없다는 “너희의 눈이 아끼려는 것을 보게 하지 말라”에 의해 의미되어져 있다. 일상 생활을 포함 대부분의 일에서는 필수적인 것들과 도구적인 것들이 있다. 제아무리 필수적인 것이 중요하다해도 그것을 행동으로 작업되게 하는 도구적인 것이 없다면 무용지물일 때가 많다. 도구가 만들어내는 것과 꼭 같이 있는 것이 행동이다. 예를 들면, 육체는 영의 도구이다; 외적 인간은 내적 인간의 도구이다; 기억 속의 지식은 진리의 도구이다; 그리고 진리는 선의 도구이다 (3068, 3079항) 등등이다.
말씀에서 도구적인 것들이 “그릇들(vessels)”이라 불리운다; 여기서의 경우는 “물자”이다, 그 이유는 그것들이 이주함에, 고로 집 안에 있는 것들의 이사함에 관련하여 말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필수적인 것들은 말씀에서 “것들(things)”이라 불리우고, 이것들은 도구적인 것들을 수단으로 행동한다. 고로 내면의 것들은 외면의 것들을 통하여 행동한다, 고로 내면의 것들은 상대적으로 필수적인 것에 해당한다. 도구적인 것들은 돌보아져야 할 필요가 없다는 의미란 이것들이 목적으로 간주되어서는 안되고 필수적인 것들 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 이유가 도구적인 것들이 목적으로 중요시하는 만큼 필수적인 것들은 물러나지고 때로는 사라져버리기 때문이다. 고로 만일 기억 속의 지식이 목적으로 중요시 된다면, 진리들은 돌보아지지 않는 바, 결과적으로 진리들은 흐지부지되어 급기야 어떤 진리 한조각도 지각되어질 수 없다. 더욱이 지상적, 육체적, 세상작인 것을 목적으로 가진 이들의 경우, 그들은 천국의 것들에 대해서는 하등 관심이 없는바, 그들에게서는 천국의 것들은 사라져버려 천국의 것들의 존재 조차 인정하지 않는다. 이런 사항들이 본문, “너희의 눈을 너희의 물자를 아끼려함에 있게 하지 말라”에서 의미되고 있다.
알아야 할 것인즉, “필수”와 “도구”의 상대적인(relative, 관계 있는, 친척뻘이 되는) 단어이다는 것이다; 즉 필수적인 것은 그것의 도구 또는 기관을 수단으로 즉 자체 외의 또 다른 것을 수단으로 행동하기에 그렇게 불리운다. 그러나 또 다른 필수적인 것이 앞서의 필수적인 것을 도구를 삼아 행동할 경우, 이전의 필수적인 것은 도구 수준에서 있는다는 말이다. 더욱이 창조된 우주에서는 자체적으로 필수라고 할 어떤 것도 있지 않다; 자체적으로 필수인 것은 오직 가장 높으신 분, 즉 주님 안에서만 존재할 뿐이다; 이 분만이 있음(Esse), 또는 자체적으로 필수되심(본질, 가장 중요함, Essential in itself)이신 바, 있음(esse, being)으로부터 “여호와”라 불리우신다. 따라서 이외 모든 것들은 (사실상) 도구일 뿐이다. 이로부터 분명해지는 것은, 본질적인 것만이 목적으로 중요시 되어야만 한다는 것, 도구적인 것들이 아니다는 것, 고로 주님만이 그렇게 중요시되어야 한다.

그 이유는 이집트의 온 토지의 좋은 것,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있기 때문이다. 이는 그들은 자연 평면 안에서 제일 가는 것을 가지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는 “이집트의 토지”의 의미가 자연적 마음이다로부터; “온 토지의 좋은 것”에 의해서는 제일 가는 것이 의미된다. 이 구절도 앞의 구절과 거의 같은 뜻을 담고 있다; 즉 만일 도구적인 것들이 아닌 필수적인 것들이 돌보아진다면, 그들은 도구적인 것들을 (당연히) 풍부해져 있을 것이다는 말이다. 예를 들면: 만일 진리들이 돌보아진다면, 그들은 “온 이집트의 좋은 것”인 기억 속의 지식들을 풍부히 가진다는 것. 마찬가지로 만일 선이 돌보아진다면, 그들은 진리들을 풍부히 가질 것이다. 기억 속의 지식들, 또한 진리들을 돌보아져야만함은 틀림이 없다, 그러나 인간은 목적으로서는 선만을 중요시해야 한다. 만일 눈을 목적 안에서 선 위에 두고 있다면, 그 눈의 소유자는 그 결과로 이어지는 것들을 완전히 잘 관조하게 된다, 또는 관조의 결과로 있는 이런저런 것들을 지각한다, 이 지각함은 선이 목적으로 있지 않으면 결코 가능하지 않다, 다시 말해 선이 당사자의 각각 그리고 모든 것을 보편적으로 통치하지 않으면 가능성은 한 조각도 없다는 말이다.
이런 경우는 육체와 혼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다. 인간은 반드시 자기 육체를 돌보아야 한다, 하여 자기 육체에게 자양분을, 옷입힘을 조달한다, 그리고 세상의 기쁨들을 즐기게도 한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육체를 위하여서가 아니고 혼을 위하여서, 즉 혼이 건장한 육체 안에서 상응되고 올바르게 행동하게 해주기 위하여, 고로 혼에 완전 고분고분한 기관 수준으로서 육체를 가지기 위하여야 한다. 고로 혼이 목적임에 틀림이 없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럼에도 혼 자체도 완전 목적이 아닌 중간 목적일 뿐이다, 그 이유가 인간이 돌보아야 하는 것은 자신을 위함이 아닌 양쪽 세계에서 반드시 수행하여야만 하는 쓸모 있는 자(the uses)로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이 목적으로서 (이웃의 선에게) 쓸모 있는 어떤 것을 수행할 때, 그는 목적으로서 주님을 소유한다, 그 이유가 주님은 쓸모 있음을 위하여 배열 배치함을 만들어 가시기 때문, 그리고 유용함 자체를 배치하시기 때문이다.
목적으로 가지는 것이 무엇인지 아는 자가 너무 적어 여기서 좀 더 살펴야 할 것 같다: 목적으로 가지는 것은 인간 당사자가 무엇보다 우선적으로 사랑하는 것이다. 그 이유가 인간이 사랑하는 것을 그는 목적으로 가지기 때문이다. 인간이 목적으로 가지는 것은 분명하게 식별되어지는데, 그 이유는 그것이 당사자 안에서 보편적으로(사사건건에서) 통치, 간섭하기 때문이다; 고로 당사자 자신이 자기의 목적을 의식하지 않는 때조차도, 또는 생각하지 않는 때일지라도 그것은 계속적으로 당사자 안에서 표출되고 있다, 그 이유가 그것은 내부에 자리를 잡았기 때문, 그리고 그의 내면의 생명(삶)을 만들기 때문, 고로 은근히 당사자의 각각 그리고 모든 것을 통치하고 있기 때문 이다. 예를 들면, 자기 부모를 심정으로부터 존경하는 자의 경우, 이 존경심은 그의 부모가 계신 자리에서이든, 안계신 자리에서 이든 한결 같이 각각 그리고 만사에서 존경이 표출되고 있다. 이 존경심은 그의 제스추어나 말하는 태도 같은 것에서도 감지될 정도이다. 마찬가지로 하느님을 두려워하고 경외하는 신앙인의 경우, 이 두려워함과 경외심은 그가 생각하고, 이야기 하고 행동하는 만사에서 표출된다, 그 이유는 이것이 당사자 안에 있어, 교회 건물 안에 있지 않은 때일지라도, 즉 교리와 거리가 먼 듯한 사업장에서도 비록 직접적 표출된 것은 느껴지지 않을 지라도 그 사업 까지도 통치하고 있다. 그 이유는 이것은 보편적으로 통치하기 때문, 따라서 세부적인 것도 관여한다. 인간 안에서 통치하는 것은 다른 삶에서 분명하게 지각되어진다, 그 이유가 그가 발산하는 그의 온 생명의 기운이 거기로부터 파생되기 때문이다.
이 모두로부터 분명해지는 바, 하느님은 눈 앞에서 언제나 간직되고 있어야만 한다는 것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어야 하는지 이다. 이것은 꾸준히 생각함 뿐만이 아니라, 그분을 사랑함, 또는 경외함이 보편적으로 통치하고 있어야만 한다는 것, 이런 경우야말로, 하느님이 모든 세부적 측면에서도 눈 앞에 간직하는 것이 된다. 이럴 진대, 인간이 그분을 생각하지도, 이야기하지도 않는다든가, 또는 그분에 맞서는 것을 행동하고, 그분을 불쾌하게 했다면, 보편적으로 통치하는 당사자 안에 감추여 놓인 것이 당사자의 생각, 말, 행동 자체를 까벌려지게 해주고 훈계한다.

21-23절. 그리고 이스라엘의 아들들이 그렇게 행동하였다. 그리고 (요셉은) 그들에게 바로의 입에 따라 수레를 주었다, 그리고 그들에게 길 양식을 주었다. 22 그리고 그들 모두에게 바꿔 입을 의복을 주었다. 그리고 베냐민에게 그는 은 삼백 조각을 주었다, 그리고 다섯 번 바꿔 입을 옷을 주었다. 23 그리고 그의 아버지에게는 이 방식에 의거 보냈다, 그리고 열 마리의 나귀가 이집트의 좋은 것을 운반하고, 그리고 열 마리의 암나귀가 길을 떠나는 그의 아버지를 위해 곡식과 빵과 자양분을 나르는 것이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아들들이 그렇게 행동하였다. 이는 자연 평면 안에서 영적 진리들로부터의 결과를 의미한다. 이는 “행했다”의 의미가 결과이다로부터; 그리고 이스라엘의 아들들의 표현함이 영적 진리들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자연 평면에 있는 영적 진리들이 무엇인지는 설명하고 지나가야 할 것 같다: 인간, 영, 또는 천사의 바깥 측면에 있는 신앙의 진리들은 신앙의 진리들이 아니다, 그 이유가 그것들이 어떤 주제에 적용되어, 이런저런 것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들이 인간, 영, 또는 천사에게 주제로서 적용될 때, 이때 그 진리들은 신앙의 진리들이 되어간다, 그러나 각자의 삶의 상태에 따라 차이는 있다. 처음 그 진리들을 배운 이들과 더불어서는 그것들은 기억 속의 지식들로만 있는다. 이후에 만일 어떤 이가 이 진리들에 경건하게 존경심을 가진다면, 진리들은 더 발전한다, 그리고 교회의 진리들이 된다; 그리고 그 진리들이 그 사람에게 감동을 주었을 때, 그리하여 그것들에 살고 있을 때, 이때 그 진리들은 영적 진리들이 된다; 그 이유가 영계로부터서만 있는 사랑의 선과 선행의 선이 신앙의 진리들을 채워 살아있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그 진리들로 감명되고 그 진리들에 따라 사는 것은 이 선으로부터 이기 때문이다. 신앙의 진리들이라 불리우는 진리들의 품질, 이것들에 따라 사는 자와 살지 않는 자가 나에게 보여졌다. 그것에 따라 살지 않는 자와 더불어 그것들은 흰 섬유(실) 같이 나타났다; 그리고 이 진리들을 가졌던 이들과 더불어 선은 전혀 없었다. 그것들은 부스러지기 쉽게 보였다; 그러나 이 진리들에 따라 살아간 이들과 더불어 그것들은 영으로 채워진 뇌로부터의 섬유들 같이 나타났다, 그리고 부드럽다. 고로 이 후자의 진리들은 살아있어 움직이나 전자의 경우는 꼼작 않는 죽어 있다. 이로부터 아는 바, 인간과 더불어 있는 진리들의 품질의 상태는 각자의 삶의 상태에 따라서 이다는 것이다. 야곱의 아들들에 의해 표현된 진리들은 영적이지 않은데, 그 이유는 삶에 적용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아들들로서의 그들에 의해 표현된 진리들은 영적인데, 그 이유는 삶으로 만들어져왔음으로부터 그 진리들은 사랑의 선과 선행의 선으로 채워져 왔었기 때문이다. 이 후자의 진리들이 이 대목에서 뜻하여진다, 그 이유는 취급되는 주제가 (야곱의 아들들인) 자연 평면의 진리들이 (요셉인) 내적 선과 (베냐민인) 중매자, 또한 (이스라엘인) 영적 선을 통하여 결합함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요셉은] 그들에게 바로의 입에 따라 수레를 주었다. 이는 내적 부분으로부터 그들은 자기들이 기뻐하는대로 교리적인 것들을 가졌음을 의미한다. 이는 이것들을 “주는” 자인 요셉의 표현함이 내적 선이다로부터; 그리고 “수레들”의 의미가 교리적인 것들이다로부터; 그리고 “바로의 입에 따라”의 의미가 기뻐하는대로, 즉 이스라엘의 아들들인 영적 진리들이 기뻐하는대로 이다로부터; 그 이유는 이런저런 진리들이 바로에 의해 표현되는 자연 평면에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교리적인 것들을 의미하는 수레들도 그들의 의향에 놓여져 있었기 때문이다. “기뻐하는대로”라고 말해진 이유는 “이집트의 수레들”에 의해 의미된 교리적인 것들이 말씀의 글자적 의미로부터 이기 때문이다, 이 의미는 내적 의미 없이 어떤 선이든지에 적용될 수 있다. 그 이유가 주님께서는 누군가에게 진리를 가르치실 때 공개적(노골적)으로 가르치시지 않고, 선을 통하여 참된 것을 생각하는 쪽으로 인도하신다, 그리고 당사자에게 알려지지 않는 방법에서 그분은 지각을 느끼게 하여 결과적으로 이런저런 것이 참된 것이구나 하는 것을 선택하도록 하시는데, 선택의 이유는 말씀이 그렇게 선포하기 때문, 그리고 이런 저런 것이 말씀에 일치하기 때문이다. 고로 주님께서는 각 인간이 받아들인 선에 걸맞는 진리를 내보이신다; 그리고 이것은 각 인물의 애착에 따라서, 고로 자유함에서 거행되는데, 여기서 “기뻐하는대로” 라고 말해지고 있다.

그리고 그들에게 길 양식을 주었다. 이는 한동안 선과 진리로부터 지탱함을 의미한다. 이는 “양식(provision)”의 의미가 선과 진리로부터 지탱함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리고 그들 모두에게 바꿔 입을 의복을 주었다. 이는 진리들이 선 안에서 시작함을 의미한다. 이는 “의복(garment)”들의 의미가 진리들이다로부터 (아래에서 살핀다). 고로 “바꿔 입을 의복”은 새로이 있는 진리들이다; 그리고 진리들은 그것들이 선 안에서 개시될 때 새로워진다, 그 이유는 그때 생명을 받기 때문이다. 지금 취급되는 주제는 자연적 인간이 영적 인간과, 내적 인간이 외적 인간과 결합함이다. 결합이 결과될 때, 이때 진리들은 바뀌어지고 새롭게 된다, 그 이유가 그것들은 선의 유입으로부터 생명을 받기 때문이다.
말씀에서 “의복들”에 의해 진리들이 의미된 이유는 (뇌에서는) 섬유들이 [살아 움직이는]영이듯, 혈관과 피의 관계 같이 진리들이 선을 옷입히기 때문이다. “의복들”이 진리들을 의미하는 이유는 영들, 또한 천사들이 의복을 입고 나타나기 때문, 그리고 각자에게 속하는 진리들에 따라서 옷을 입기 때문이다. 선인 것을 통하여 신앙의 진리들 안에 있는 이들은 흰 의복을 입고 나타난다, 또한 선으로부터 있는 신앙의 진리들을 안에 있는 이들은 밝은 빛을 내는 의복을 입고 있다; 그 이유가 선이 진리를 통하여 빛을 내기 때문이다, 그리고 광휘를 준다.
영과 천사들이 의복을 입고 나타나는 것을 말씀으로부터 볼 수 있다. 천사들이 보여졌던 마태복음서에서:
주님의 무덤에서 앉아 있는 천사의 나타남은 번개 같았고, 그리고 그의 의복은 눈 같이 희었다 (마. 28:3).
계시록서에서:
왕좌 위에 나는 흰 의복을 입은 이십 사 원로들이 앉은 것을 보았다 (계. 4:4).
계시록서에서:
흰 말 위에 앉으셨던 그분은 피로 물들인 의복으로 입혀져 있었다; 그리고 그분의 이름은 하느님의 말씀이라 불리었다. 천국에서 흰 말 위의 그분을 뒤따르는 그분의 군대들은 희고 깨끗한 고운 아마옷을 입었다 (계. 19:11, 13, 14);
“눈 같이 흰 의복들”, 그리고 “고운 흰 아마포(옷)”은 거룩한 진리들을 의미한다, 그 이유는 흼과 희게 빛을 냄은 거룩한 진리를 서술하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흰 것들이 빛에 가장 가깝게 접근된 색이기 때문, 그리고 주님으로부터 있는 빛은 신성한 진리이기 때문; 그러므로 주님께서 변모하셨을 때, 그분의 의복들은 빛 같이 나타났다: 즉
예수께서 변모하셨을 때, 그분의 얼굴은 태양 같이 빛나셨다, 그리고 그분의 의복들은 빛 같이 되었다 (마. 17:2).
위의 “빛”이 신성한 진리이다는 것은 대부분의 교회에 알려진 사항이다. 이 진리가 “의복”에 비교되는 구절이다: 즉
여호와께서는 빛을 의복으로 삼으시어 자신을 덮으신다 (시. 104:2).
“의복들”이 진리들이다는 것은 많은 구절들로부터 분명해지는데, 마태복음서에서:
왕이 (초대) 손님들을 보려고 들어 왔을 때, 그는 거기서 결혼 예복을 차려 입지 않은 자를 보았다; 그래서 그는 그에게 말했다, 친구여, 결혼 예복도 입지 않은 채 여기에 온 것은 어찌된 것이냐? 그러므로 그는 바깥 어둠 쪽으로 내던져졌다 (마. 22:11-13);
위 구절의 “결혼 예복을 입지 않은 자”에 대하여는 이미 살핀 바 있다. 이사야서에서:
깨어라! 깨어라! 너의 강함을 입으라, 오 시온아; 너의 장식으로 꾸민 의복을 입으라, 오 예루살렘아, 거룩함의 도성아; 그 이유는 할례받지 않은 자와 불결한 자가 너희에게 더 이상 오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52:1);
“장식으로 꾸민 의복”은 선으로부터의 진리들을 표시한다.
에스겔서에서:
나는 수를 놓는 작업으로 너를 입혔다, 그리고 너를 오소리 (가죽)으로 신겼다, 그리고 나는 고운 아마 (끈)으로 허리를 매었다, 그리고 비단으로 덮었다. 너의 의복들은 고운 아마포, 그리고 비단, 그리고 수놓는 작업으로 된 것이었다; 너는 고운 곡식가루, 꿀, 그리고 기름을 먹었다
(겔. 16:10, 13);
위는 예루살렘에 관하여서이다, 위 구절을 수단으로 태고 교회가 기한이 만료된 후 주님에 의해 세워졌던 고대 영적 교회가 뜻해졌다. 이 교회에게 수여되었던 진리들이 “의복들”에 의해 묘사되었다; “수놓는 일”은 기억 속의 진리이다, 이 지식이 순수할 경우, 마치 수놓은 작품, 레이스 (lace) 같다; “고운 아마포와 비단”은 선으로부터의 진리들이다; 그러나 천국에서, 빛 안에 있는 바, 이것들은 밝게 빛나고 투명하다.
같은 책에서:
이집트로부터의 수 놓은 일로 된 고운 아마포가 너의 돛이었다; 엘리사아섬으로부터의 푸르고 심홍색 (천)은 너의 덮개였다 (겔. 27:7);
위는 두로에 관하여서이다, 이를 수단으로 진리와 선에 관한 지식들이 표현되어졌다, 이것이 순수할 경우, “수놓는 일로 된 고운 아마포”이다; 파생되는 선, 또는 진리의 선은 “푸르고 심홍색 (천)”이다.
다윗서에서:
왕의 딸은 모든 영화로웁다; 금을 섞어 짠 것으로부터 그녀의 의복이 있다; 수놓은 (의복을) 입고 그녀는 왕에게로 데려와질 것이다 (시. 45:13, 14);
“왕의 딸”은 진리에 애착함을 표시한다; “금을 섞어 짠 것으로부터 그녀의 의복이 있다”란 안에 선이 들어 있는 진리를 표시한다; “수를 놓은 (의복)”은 가장 낮은 진리들을 표시한다. 계시록서에서:
너는 자기들의 의복들을 더럽혀 오지 않아왔던 몇 이름들을 사르디스에서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들은 흰 의복을 입고 나와 함께 걸을 것이다, 그 이유는 그들은 그럴만하기 때문이다. 극복하는 자는 흰 의복들을 입을 것이다 (계. 3:4, 5);
“의복들을 더럽히지 않음”은 진리들을 거짓들로 더럽히지 않음을 표시한다.
계시록서에서:
지켜보고, 자기 의복을 간수하는 자는 복 있다, 하여 그는 벗은 채로 걷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그의 부끄럼을 보고 있다 (계. 16:15);
위 구절의 “의복”도 진리들을 표시한다. 말씀으로부터 있는 신앙의 진리들이 이 “의복들”에 의해 적절히 의미된다. 그 근원(말씀)으로부터 이런 것들을 획득하지 않았던 자, 또는 이방인들의 경우 같이 자기의 종교적 신념으로부터 진리들 또는 진리와 유사한 것이라도 획득하지 않았던 자, 하여 자신의 생활에 그것들을 응용하지 않았던 자는 자신이 선 안에 있다 라고 상상할 지라도 그는 선 안에 있지 않다. 그 이유는 그가 말씀으로부터, 또는 자기의 종교적 확신으로부터 진리들을 가지지 않았던 바, 그는 선한 영에 의해 인도되는 만큼 악령이 추론을 수단으로 자신을 끌어가는 것도 허용했기 때문이다. 고로 그는 천사들에 의해 방어되지 못한 것이다. 이것이 위 구절의 권면인, “지켜보고 자기 의복들을 간수한 자에게 복 있다, 그는 벌거벗지 않고 걸을 것이고, 그들은 자기의 부끄럼으로 본다”에 의해 뜻해진 것이다.
스가랴서에서:
여호수아는 더럽혀진 의복들을 입고 있었다; 그렇게 그는 천사들 앞에 섰다, 그 앞에 섰던 누구가 말했다, 여호수아로부터 더러워진 의복을 제거하라. 그리고 그에게 그는 말했다, 보라 나는 너의 불법을 너로부터 건너가게 했다, 그래서 너를 의복을 바꿔 입힌다 (슥. 3:3, 4);
“더럽혀진 의복들”은 악으로부터 있는 거짓들에 의해 오염된 진리들을 표시한다; 그러므로 이 의복들이 제거되고, 다른 의복을 입을 때, 말해진다, “보라 나는 너의 불법을 너로부터 건너가게 했다.” 아마 누군가는 의복을 바꿔 입는다고 불법이 건너갈리 만무함을 알 것이다. 하여 이로부터 의복을 바꿔 입는 것이 무엇인가를 표현할 것이라는 결말도 가질 것이다. 또는 이와 유사한 다른 말씀에서의 경우, 즉 백성들을 순수해지게 하여야 할 때, 마치 시내 산 가까이 왔을 때(출. 19:14), 의복을 빨으라고 명령된 것이라든가, 그들이 불순함들로부터 깨긋해져야 할 때 (레. 11:25, 40; 14: 8, 9; 민. 8:6, 7; 19:21; 31:19-24) 에서의 경우에서도 그러하다.
그 이유가 불순한 것으로부터 깨끗해짐은 신앙의 진리들을 통하여 결과되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이 진리들이 선이 무엇인지를, 선행이 무엇인지, 이웃이 무엇인지, 신앙이 무엇인지, 주님이 계신다는 것, 천국이 있다는 것, 영원한 삶이 있다는 것을 가르치기 때문이다.
진리가 가르치지 않으면 이런저런 것들이 알려지지 않는다, 아예 이런 저런 것들이 존재하는지 조차 모를 수도 있다. 자신을 사랑함의 선과 세상을 사랑함의 선이 인간에 딸린 유일한 선이라는 것, 이 두 선으로부터 그의 생명의 기쁨이 있다는 것 외에 더 달리 자신으로부터 알 자가 누가 있을 까? 그리고 신앙의 진리가 아니면, 인간에게 적용될 수 있는 또다른 선이 있다는 것, 즉 하느님을 사랑함의 선, 이웃을 향한 선행의 선, 그리고 이 선 안에 천국의 생명이 있다는 것; 또한 이 선은 주님으로부터 천국을 통하여 흘러든다는 것, 이 흘러듦은 인간이 타인 보다 자신을 덜 사랑하는 만큼에서, 천국보다 세상을 덜 사랑하는 만큼에서 이다는 것을 누가 알 수 있을까? 이런 모두로부터 분명해지는 바, 의복들을 빰에 의해 표현된 깨끗해짐은 신앙의 진리들에 의해 결과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베냐민에게 그는 은 삼백 조각을 주었다. 이는 중매자는 선으로부터의 진리로 가득해졌음을 의미한다. 이는 베냐민의 표현함이 중매자이다로부터; 그리고 (은 조각을) “주는” 요셉의 표현함이 내적인 선이다로부터; “삼 백”의 의미함이 충만한 것이다로부터 (아래에서 살핀다); 그리고 “은”의 의미가 진리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위 모두로부터 분명한 바, “그가 베냐민에게 은 삼 백 조각을 주었다”에 의해 그는 중매자에게 선으로부터의 진리를 충분하게 주었다가 의미된다는 것이다; 베냐민이 표현하는 중매자는 천적 평면으로부터의 내적 부분으로부터 유입을 통하여 있는 내면의 진리이다. “300”이 충분한 것을 의미하는 이유는 이 숫자가 3×100에서 오기 때문이다. 그리고 “3”은 충분한 것을, “100”은 많은 것을 의미한다; 만들어내진(합성된) 숫자는 단일 숫자로부터 그것이 무엇인지가 보여진다.
“300”은 이 숫자가 등장하는 다른 구절에서도 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
노아의 방주는 길이가 300 큐빗이었다 (창. 6:15);
또한 기드온이 미디안을 대적하여 군사 삼 백 명으로 대승했는데, 사사기서에서:
자기의 입에서 자기의 손으로 (물을) 튀겨먹은 자의 숫자는 삼백 명이었다. 여호와께서 기드온에게 말하셨다, 물을 튀긴 이 삼백 명을 가지고 나는 미디안을 너의 선에 줄 것이다. 기드온은 삼 백 명을 세 부대로 나누었다, 그리고 그는 그들의 각각의 손에 나팔을 주었다, 그리고 텅빈 단지들, 그리고 단지 한가운데에 횃불을 (담았다). 그들이 삼 백개의 나팔들을 소리냈을 때, 여호와께서는 그들 모두 각각의 검이 자기 동료들을 향하게, 그리고 온 진영을 향하게 놓으셨다
(사. 7:6, 7, 16, 22);
위 구절에서도 “300”에 의해 충분한 것이, 또한 300명이 나뉜 세 부대 역시 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 각 부대의 숫자인 “100” 은 많고 충분하다를 의미한다, 결과적으로 그들이 미디안을 쳐부수는데 충분했다. 더욱이 숫자 말고도 이런 모든 것들은 표현적이다; 즉 물을 튕겨먹은 이들만 뽑아 군사가 된 것, 각각은 나팔을 가졌다는 것, 그리고 횃불을 담은 단지들 등등이다; 그리고 이런 것들이 미디안에 맞섰기 때문인데, 미디안은 진리가 아닌 진리를 표현했는데, 그런 이유는 생활의 선이 없기 때문이다. 이런 사항들의 각각은 주님의 신성한 자비로부터 다른 곳에서 살필 기회가 있을 것이다. 숫자들 또한 표현적인데, 다른 구절로서는 여호수아서에서 그들이 여리고를 공략할 때 등장하는 숫자 “7”도 있다. 즉 (성을 공략하기 앞서) 성직자가 궤 앞에서 일곱 쥬빌리(jubilee) 나팔 (일곱 양각 나팔)을 잡고, 칠일 째에는 성을 일곱 번 도는 대목 등등이다 (여. 6:4).

그리고 다섯 번 바꿔 입을 옷을 주었다. 이는 자연 평면으로부터의 많은 진리를 의미한다. 이는 “5”의 의미가 많다 이다로부터; 그리고 “바꿔 입을 의복들”의 의미가 선 안에서 개시된 진리들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것이 자연 평면으로부터 있기 때문에 “의복들”은 자연 평면을 서술하고 있다. 베냐민에 의해 표현된 중매자가 자연 평면의 진리를 가졌다고 말한 이유는 중매자는 양쪽 평면 즉 일부는 내적 부분에서, 일부는 외적 부분에서 참가하기 때문이다. 내적 부분으로 있는 것은 중매자가 선으로부터의 진리가 충분히 가지고 있음 인데, 이것은 앞 구절에서 “은 삼 백 조각”에 의해 뜻해졌다. 외적 부분으로부터 있는 것은 자연 평면으로부터 진리가 많다인데, 이것은 “다섯 번 바꿔 입을 의복들”에 의해 의미되고 있다.

그리고 그의 아버지에게 이 방식에 의거 보냈다. 이는 영적 선에 무료로 주어지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여기서 “아버지”인 이스라엘의 표현함이 영적 선이다로부터; 그리고 “보내다”의 의미가 무료로 주는 것이다로부터 알려진다. 내적인 것을 통하여 외적인 것 안으로 주님으로부터 흘러드는 모든 것은 무료로 주어지고 있다. 여기에는 영적 선 안으로 흘러드는 것조차도 포함되는데, 그 이유는 “이스라엘”인 영적 선은 자연 평면으로부터의 선이기 때문이다. 실로 주님께서는 굴종함, 숭배함, 감사함, 이외 많은 것들을 인간으로부터 요구하시고 있다. 따라서 주님께서 수여하시는 것은 그분이 요구하신 것을 받은데 따른 되갚으심이어서 사실 상 그분이 수여하시는 것은 무료가 아닌 듯하다; 그러나 주님은 그분 자신을 위하여 위의 사항 같은 것을 요구하시지 않는다. 그 이유는 신성은 인간의 굴종, 숭배, 감사함 따위로부터 영광을 가지시지 않기 때문이다. 신성 안에 자아 사랑의 어떤 것이 있으라라는 것은 상상조차 불가능하다, 즉 그분 자신이 자신을 위하여는 자아 사랑 같은 것을 (안에 내포하고) 이르는 말이다. 위의 하느님의 요구 사항들은 인간 자신을 위하여 있다. 그 이유가 인간이 굴종 안에 있을 때, 그는 주님으로부터 선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그가 장애물인 자아 사랑과 그것의 악으로부터 분리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주님은 인간 자신을 위하여 인간에게 굴종의 상태를 요구하신다; 그가 이 상태에 있을 때, 주님은 천국의 선을 가지고 흘러드실 수 있다. 이런 굴종 말고도 숭배함의 경우도 이와 매우 비슷하다. 물론 감사를 받으심(thanksgiving)의 경우도 마찬가지 맥락이다.

그리고 열 마리의 나귀가 이집트의 좋은 것을 운반하고. 이는 더 많은 섬김을 위한 [더 좋은] 기억 속의 지식들을 의미한다. 이는 “10”의 의미함이 많다 이다로부터; “나귀들”의 의미함이 기억 속의 지식들이다로부터, 여기서는 가장 낮은 기억 속의 지식들이다; 그런 이유는 나귀들이 내면의 것들을 운반하는 서비스 용역을 담당하기 때문에서이다; 그리고 “이집트의 좋은 것”의 의미가 기억 속의 지식들이다로부터, 그러나 교회에 관한 기억 속의 지식이다; 이런저런 것이 “이집트”에 적절히 의미되기 때문이다. 이런 것들이 “이집트의 좋은 것”이라고 말해진 이유는 그것들이 요셉에 의해 이스라엘에게, 즉 천적 평면으로부터의 내적 부분에 의해 영적 선에게 보내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열 마리의 암나귀가 …곡식과 빵을 나른다. 이는 더 많은 섬김과 더불은 선으로부터의 진리와 진리로부터의 선을 의미한다. 이는 “10”의 의미가 많다 이다로부터; “암나귀”의 의미함이 섬김에 속하는 것들이다로부터; “곡식(낟알)”의 의미가 진리의 선이다로부터, 그러나 여기서는 선의 진리이다, 그 이유는 “요셉”인 천적 평면으로부터의 내적 부분으로부터 이기 때문; “빵”의 의미가 이 진리의 선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곡식(grain, 낟알)”이 다른 구절들에서는 진리로부터의 선을 의미하지만, 여기서는 선으로부터의 진리(선의 진리, truth of good)를 의미한다는 것에 주목하면 이렇다: 곡식의 의미는 유입이 천적 평면의 내적 부분으로일 때와 영적 평면으로부터의 내적 부분일 때의 경우 달라진다. 전자로부터 흐르는 것은 선밖에 없다, 실로 이 선 안에 진리가 있다, 고로 이 진리 또한 선이다. 그러나 후자로부터 흐르는 것은 진리밖에 없다, 이것이 (생활에의 응용을 통해) 생명이 되어갈 때, “진리의 선”이라 불리운다. 그러므로 곡식의 의미는 때로는 선의 진리, 때로는 진리의 선인데, 여기서는 선의 진리이다, 그 이유는 요셉인 천적 평면으로부터의 내적 부분으로부터 이루어지는 유입이기 때문이다. 암나귀가 곡식과 빵을 운반하고, (숫)나귀는 이집트의 좋은 것을 운반하고 있다, 그 이유는 “숫나귀”는 진리에 관련되는 만큼에서의 섬김의 것들을 의미하고, “암나귀”는 선에 관련되는 만큼에서의 섬김의 것들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두 나귀가 서비스 용역에 각각 참가하고 있다. 그렇지 않으면 나귀를 두고 암나귀이냐, 숫나귀이냐 언급할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길을 떠나는 그의 아버지를 위한 자양분. 이는 한동안 영적 선을 위한 내면의 진리를 의미한다. 이는 “자양분(nourishment)”의 의미가 내면의 진리이다로부터, 그 이유가 이 자양분이 선의 진리와 진리의 선으로부터 출시되기 때문, 이것이 “곡식과 빵”에 의해 의미되고 있다, 더욱이 내면의 진리는 영적 선을 위한 자양분이다; 여기서 “아버지”인 이스라엘의 표현함은 영적 선이다; 그리고 “길을 위하여, 또는 길을 떠나는”의 의미가 한동안, 즉 완전 결합이 결과되기 이전, 또는 이 결합이 당도하기 이전이다.

24-28절. 그리고 그는 그의 형제들을 떠나 보냈다, 그리고 그들은 출발했다. 그리고 그는 그들에게 말했다, 길에서 다투지 말라. 25 그리고 그들은 이집트로부터 올라갔다, 그리고 가나안의 토지로 그들의 아버지 야곱에게 왔다. 26 그리고 그들은 그에게 말했다, 말하기를, 요셉은 아직 살아있습니다, 그리고 그는 이집트 온 토지의 통치자입니다. 그리고 그의 심정은 낙담하였는데, 그렇기 때문에 그는 그들을 믿지 않았다. 27 그리고 그들은 요셉이 자기들에게 말한 요셉의 모든 말들을 그에게 이야기를 했다. 그리고 그는 요셉이 자기를 모시려고 보낸 수레를 보았다, 그리고 그들의 아버지 야곱의 영은 되살아 났다. 28 그리고 이스라엘은 말했다, 흡족하다, 나의 아들 요셉이 아직 살아 있다. 나는 내가 죽기 전에 가서 그를 보리라.

그리고 그는 그의 형제들을 떠나 보냈다, 그리고 그들은 출발했다. 이는 숨겨짐 (concealment)을 의미한다. 이는 “떠나 보내다”의 의미가 자신으로부터 옮겨지는 것이다로부터, 결과적으로 이전처럼 그들과 함께 함은 더 이상 없다를 의미한다; 그리고 “가다”, 또는 “출발하다”의 의미가 살아간다, 또는 더 멀리서 살아간다, 또한 떠나다(leave)이다로부터; 고로 종합하면 숨겨지는 것이다를 의미하게 된다. 천적 평면으로부터의 내적 부분으로부터 옮겨짐, 또는 그것으로부터 숨겨짐이 지금 취급되는 이유는 그것들의 이어지는 내적 의미로부터 분명해진다.
영들의 삶, 또는 천국들에서의 천사들의 생활상이 어떤지를 알지 못하고 있는 이들이라면, 진리의 숨겨짐, 또는 선의 숨겨짐이 지금 왜 취급되는지 알지 못하고, 그들(이스라엘의 아들들)이 방금 전까지도 진리와 선의 빛 안에 있었었다는 사실도 알지 못한다. 천국에서 영들과 천사들은 그들의 아침, 정오, 저녁, 박명(황혼, 해뜨기와 해질 무렵), 다시 아침 등등의 상태가 있다. 주님이 현존하시고 명백한 행복으로 그들에게 복 주실 때가 그들의 아침이다: 이때 그들은 선을 지각함의 상태에 있다. 그들이 진리들의 빛 안에 있을 때가 그들의 정오이다; 그리고 이때의 경우, 주님은 그들에게서 좀 더 멀리 계신 듯, 감추여 계신 듯 나타난다. 천국의 모든 이들은 이런 상태의 계속적인 교차를 겪어가며 통과해가는데, 이외 달리 그들이 보다 더 발전된 완전 쪽으로 전진해가는 방법은 없다. 그 이유가 그들은 이런 교차됨에서 대비되는 상태도 경험하기 때문이다. 사실 이런 정반대의 상태, 즉 선이 아닌 것, 진리가 아닌 것을 아는 과정에서 행복하지 않은 것의 상태를 겪으며 선인 것, 진리인 것의 행복한 상태를 진지하게 경험하여 보다 더 굳건한 지각을 획득하기 때문이다.
놀라운 것은, 이 사람의 상태와 저 사람의 상태가 완전 같은 상태에 있게 되는 경우가 영원히 없다는 것, 또한 이 영과 천사가 통과하는 상태를 저 영과 천사가 통과하는 경우도 없다는 것이다. 그런 이유는 각자의 선과 진리가 각기 수준이 다르기 때문이다; 이 사람의 얼굴과 저 사람의 얼굴이 같지 않은 것과 같다 (마치 수 백 명이 같은 영화 장면을 보고 있다해도 그들의 얼굴 표정이 완전 같지 않은 것과 비슷할는지 모른다 역자주). 그럼에도 이런 (무한한) 다양함으로부터 주님께서는 하나를 만드신다. 일반적 규범(canon)인 것은, 어떤 품질을 가지는 모두 각각의 하나는 하모니의 일치함을 수단으로 그들 모두가 하나로서 나타나는 이런 저런 만장일치 쪽으로 환원되는 다양한 것들로부터 출시된다는 것이다. 고로 천국들에서는 만들어낸 통일(unity), 또는 합일(union)은 사랑과 선행을 통하여 결과되어진다.
“요셉이 자기 형제들을 떠나 보내고 그들이 출발함”에 의해 의미된 숨겨짐이 말씀에서 “저녁”이라 불려지고, 주님이 현존하심을 천사들이 지각하지 못할 때에 숨겨짐이 발생한다; 그 이유가 천국에서는 주님을 지각함이 계속적으로 있기 때문이다. 그들이 비 지각함의 상태에 있을 때, 그들은 선에 감동되지 않는다, 그들은 진리를 이전 같이 보지 못한다; 이것이 그들을 곤란하게 하지만, 곧 이어 새벽이 오고, 아침을 맞는다.

그리고 그는 그들에게 말했다, 길에서 다투지 말라. 이는 그들이 고요함 안에 있어야 하리라고 주어진 지각을 의미한다. 이는 “그들에게 말하다”의 의미가 “요셉”인 내적 부분에 의하여 주어진 지각이다로부터; 그리고 “길에서 다투지 말라”의 의미는 고요함(평온함)에 있는 것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 이유가 누군가와 다툼은 비 고요함이기 때문, 이것은 수준 낮은 마음의 소동(혼란)이기 때문이다. 방금 앞 문단에서 살핀 다른 삶에서 다양해지는 상태들은 거기 있는 이들의 선과 진리의 지각함에 따라서이다. 고로 주님의 현존을 그들이 지각함에 따라서 이다. 이 지각함에 따라 그들은 고요함도 가진다; 그 이유가 주님의 현존을 지각함에 있는 이들은 자기에게 닥치는 각각 그리고 모든 것들을 그들의 선 쪽으로 구부리고, 악들은 자기들에게 도달하지 않게 하는 지각 안에 있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그들은 고요함 안에 있다. 주님 안에서 이런 신뢰, 또는 신앙 없이 누구도 평화의 고요함 안에 와질 수 없다, 고로 환희 안에 있는 행복(천국의 기쁨)을 향유할 수 없다, 그 이유가 이런 더없는 행복(bliss)은 평화의 고요 안에 거주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은 이집트로부터 올라갔다. 이는 교회의 기억 속의 지식들로부터 물러남을 의미한다. 이는 “거기로부터 올라감”의 의미가 물러남이다로부터 (“이집트로부터 가나안의 토지 쪽으로는 올라감이라 말해지고, ”가나안의 토지로부터 이집트 쪽으로는 내려감이라고 말씀에서 언급된다, 이에 대하여는 이미 설명한 바 있다. 여기서는 “올라감”이고 이는 출발함이 의미된다.); 그리고 “이집트”의 의미로부터, 이에 대한 적절한 의미는 교회의 기억 속의 지식들이다. 이 기억 속의 지식들이 여기서 의미되는 이유는 그들이 요셉과 더불어 이집트에 있을 때 교회의 기억 속의 지식 안에 있었기 때문이다. 선에 속한 것, 진리에 속한 것들로부터 옮겨짐, 고로 교회로부터 있는 것들로부터 옮겨짐이 여기서부터 이 장의 마지막 절까지에서 취급된다. 이 옮겨짐이 앞 문단에서의 숨겨짐을, 여기서는 물러남을 뜻하고 있다. 말씀에서는 이 상태가 저녁에 의해 의미되어진다.인간이 이 상태에 있을 때, 그들은 천국적이고 영적인 것들로부터 물러나 있다, 그리고 천국적이고 영적이지 않은 이런저런 것들에 동의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숨겨짐은 주님께서 자신을 숨겨서, 또는 물러나셔서 발생된 것이 아니고, 인간 자신들에 의해 그렇게 되는 것이다; 즉 그렇게 붙드는 것이 자신들에게 적합하지가 않아서 더 이상 붙들고 싶지가 않아서 이다; 그러므로 그들이 자기 자신 쪽으로 떠났을 때 이런 상태에 도착한다; 그들이 천국에 속한 것으로부터 물러나 있는 만큼, 선은 그들에게 비 지각되고, 진리는 희미한 상태에 있다. 이상 살핀 바로부터 분명해지는 바, 주님은 자신을 숨기시지 않는다는 것, 그러나 인간, 영, 천사가 자신을 숨긴다는 것이다.

그리고 가나안의 토지로 그들의 아버지 야곱에게 왔다. 이는 영적 선이 아닌 자연적 선이 있던 거주지를 의미한다. 이는“가나안의 토지”의 의미가 교회이다로부터, 고로 교회를 표현한 이들의 거주지이다로부터, 즉, 알려진 바, 이들은 야곱의 후손들이 교회를 표현했다; 그리고 야곱의 표현함이 자연적 선이다로부터, 그러나 영적 선은 아닌데, 그 이유는 영적 선은 이스라엘에 의해 표현되었기 때문이다. 당신이 자연적 선이라고 말하든지, 교회의 외적 부분이라고 말하든지 이는 같은 말이다; 또는 영적 선과 교회의 내적 부분의 경우도 그러하다; 그 이유가 자연적 선이 교회의 외적 부분을 구성하고, 영적 선이 교회의 내적 부분을 구성하기 때문이다.
천국의 빛 안에 있는 것이 영적 수준이라 불리우는 이유는 이 빛 안에 있는 것은 선에 애착함과 진리를 지각함 안에 있기 때문이고, 이 빛은 주님으로부터 있다; 그러므로 영적 선과 진리 안에 있는 이들은 교회의 내적 부분 안에 있고, 그들의 머리 측면은 천국 안쪽에 있다. 그러나 세상의 빛 안에 있는 것은 자연적 수준이라 불리우고, 이 빛 안에 있는 것은 선에 애착함과 그 자체 안쪽에서 진리를 지각함이 없고, 그 자체 바깥쪽으로부터 지각함을 가진다; 그 이유가 천국의 빛이 흘러들어 빙둘러 있는 것을 계발하기 때문, 고로 안쪽의 계발이 아닌 바깥쪽의 계발이다; 따라서 선이 선으로서 알게, 진리를 진리로서 알게 하는 원인은 그것들이 그렇게 말해졌기 때문이지, 이것이 그러하다고 지각하여 아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머리는 천국 안에 있지 않다, 그러나 그들의 머리들은 바깥으로부터 계발된다. 야곱이 지금 “이스라엘”이 아닌 “야곱”이라 불린 이유는 지금 그들이 외적 부분의 것들 안에 있기 때문이다. 이는 위의 설명으로부터 분명해진다.

그리고 그들은 그에게 말했다, 말하기를. 이는 유입과 주목함을 의미한다. 이는 “말하다(tell)”의 의미가 교통과 결합이다로부터, 고로 유입 또한 의미한다, 그 이유가 말해진 것은 생각 안으로 흘러들기 때문이다; 그리고 “말하다(say)”의 의미가 말씀의 역사 부분에서의 경우, 지각함이다로부터 알려진다, 또한 주목함도 의미한다.

요셉은 아직 살아있습니다. 이는 내적 부분이 거절되지는 않았음을 의미한다. 이는 “요셉”의 표현함이 내적 선이다로부터; 그리고 “살아 있다”의 의미가 아직 존재한다, 고로 거절되지 않았다 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살아 있다”가 거절되지 않았다인 이유는 요셉에 의해 표현된 내적 부분이 애당초에는 야곱의 아들들에 의해 거절되어졌고, 그들의 아버지는 악들과 거짓들에 의해 멸해지고 말았다고 믿었었기 때문이다; 고로 지금 “살아 있다”에 의해서는 그것이 그렇지 않다가 의미된다.

그리고 그는 이집트 온 토지의 통치자입니다. 이는 자연적인 마음이 그것의 권위 아래 있음을 의미한다. 이는 “통치자”의 의미가 그것의 권위 아래 있다 이다로부터 분명해진다; 그리고 “이집트의 토지”의 의미는 자연적 마음이다.

그리고 그의 심정은 낙담하였는데, 그렇기 때문에 그는 그들을 믿지 않았다. 이는 자연 평면 속에 생명이 결여되어 있음 그리고 그로부터 이해력에도 생명의 결핍이 있음을 의미한다. 이는 “심정이 낙담함”의 의미가 생명의 결핍이다로부터; 그리고 이것이 야곱에 관련해 말해졌기 때문에, 그에 의해서는 자연적 선이 표현되기 때문에, 이것은 자연 평면의 생명의 결핍이 의미된다; 그리고 “믿지 않다”의 의미는 이해력의 결핍이다. 본문에서 그렇기 때문에 (thence)라고 말해진 이유는 의지로부터 있는 생명이 앞서 있고, 그 뒤를 이해력의 생명이 잇기 때문이다. 이렇게 진행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의지 안에만 생명이 있고, 이해력의 생명은 의지로부터서만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은 요셉이 자기들에게 말한 요셉의 모든 말들을 그에게 이야기를 했다. 이는 영적 평면의 천적 부분으로부터 유입이 있다를 의미한다. 이는 “이야기를 하다”가 유입이 있다를 의미함으로부터; 그리고 요셉의 표현함이 영적 평면의 천적 부분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리고 그는 요셉이 자기를 모시려고 보낸 수레들을 보았다. 이는 설득되도록 거기로부터 파생된 교리적인 것들을 의미한다. 이는 “수레들”의 의미가 교리적인 것들이다로부터; “요셉이 보낸”의 의미가 천적 평면으로부터의 내적 부분으로부터 이다; “그를 모시려고”의 의미가 설득되도록 이다; 그 이유가 그가 그를 보려고 자기에게로 그를 모시는 것은 설득하는 것을 표시한다. 그가 수레를 보고서 설득되는 것이 이제 이어지는 말, 즉 “그들의 아버지 야곱의 영이 되살아났다; 그리고 이스라엘이 말했다, 이것으로 충분하다; 요셉 나의 아들이 아직 살아 있다”로부터 분명해진다

그리고 그들의 아버지 야곱의 영은 되살아 났다. 이는 새로운 생명을 의미한다. 이는 “영이 되살아남”의 의미가 새로운 생명이다로부터; 야곱의 표현함이 자연적 선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고로 “야곱의 영이 되살아났다”에 의해 자연적 선쪽으로 새로운 생명이 있다가 의미된다. 생명은 영적인 것이 내적 부분으로부터 자연 평면에 있는 이런저런 것들 안으로 흘러들어 내부로부터 행동할 때 새로이 된다. 그것 때문에 자연 평적은 영적 으로 되어 이스라엘에 의해 표현된 영적 선에 인접한다, 이런 이유로 지금 야곱은 “이스라엘”이라 불리우는 바, 이렇게 말해진다, 즉 “야곱의 영은 되살아났다, 그리고 이스라엘이 말했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말했다. 이는 이제 영적 선이다를 의미한다. 이는 이스라엘의 표현함이 영적 선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말씀의 내적 의미에 친숙하지 않은 자는 왜 야곱이 때로는 “야곱”으로, 때로는 “이스라엘”로 불리우는지를 아는 것이 가능하지 않다; 이 장 이 구절에서 조차 같은 인물을 두고 동시에 야곱이라 하고, 이스라엘이라 말하기까지 한다. 그러므로 거기에는 말씀의 내적 의미가 있음이 분명해진다. 여기서 말해진다, “야곱의 영이 되살아났다, 그리고 이스라엘이 말했다.” 이제 다른 구절도 찾아 읽어보자:
베냐민, 요셉의 형제를 야곱은 그의 형제들과 더불어 보내지 않았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아들들은 (양식을 사러) 왔던 이들의 한가운데에서 왔다 (창. 43:4, 5).
이스라엘은 여행했다; 하느님이 밤의 환상들 안에서 이스라엘에게 말하셨다, 야곱아, 야곱아; 그리고 그는 말했다, 보십시오 제가 있습니다 (창. 46:1, 2).
야곱은 브엘세바로부터 일어났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아들들은 그들의 아버지 야곱을 모셨다 (창. 46:5).
이집트로 온 야곱의 집의 모든 혼들은 칠십 명이었다; 요셉은 그의 병거에 견인줄을 매었다, 그리고 이스라엘을 맞으러 올라갔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요셉에게 말했다 (창. 46:27, 29, 30).
이스라엘은 이집트의 토지에서, 고센의 토지에서 거주했다; 야곱은 이집트의 토지에서 17년을 살았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날들은 죽는 쪽으로 가까이 당겨졌다 (창. 47:27-29).
그리고 누군가가 야곱에게 말했다, 말하기를, 보라 당신의 아들 요셉이 당신에게로 오고 있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자신에게 힘을 내어 침대 위에 앉았다; 그리고 야곱은 요셉에게 말했다
(창. 48: 2, 3).
야곱은 그의 아들들을 불렀다, 그리고 말했다, 너희 자신들을 집합하라, 그리고 들어라, 너희 야곱의 아들들이여; 너희 아버지 이스라엘에게 귀기울여라 (창. 49:1, 2).
그들의 성냄은 격렬한 바 저주받아야 하고, 그들의 분노는 단단한 바 저주받아야 한다. 나는 그들을 야곱 안에서 나누어 낼 것이고 이스라엘 안에서 그들을 흩트리라 (창. 49:7).
그의 손의 무기들은 강력한 야곱의 손들에 의해 힘세어지게 만들어졌다. 거기로부터 목자, 이스라엘 의 돌이 있다 (창. 49:24).
이외에도 예언서들에서도 자주 등장한다.

흡족하다, 나의 아들 요셉이 아직 살아 있다. 이는 내적인 것이 멸해지지 아니했음에 따른 환희를 의미한다. 이는 “요셉”의 표현함이 천적 평면으로부터의 내적 부분이다로부터; 그리고 “살아 있다”의 의미가 멸해지지 않고 있었다, 거절되지 않고 있었다 이다로부터; 이로부터의 감정은 환희(joy, 벅찬 영적 기쁨)일 것은 분명하다.

나는 내가 죽기 전에 가서 그를 보리라. 이는 새로운 것에 앞서 결합을 갈망함을 의미한다. 이는 “가서 보다”의 의미가 결합되는 것이다로부터 분명해진다. “보다”가 결합하는 것인 이유는 영계에서는 내면의 시각이 결합하기 때문이다. 내면의 시각은 생각이다, 그리고 공동체에서 많은 이들이 하나로서 행동할 때, 마치 합창단 같은 행위가 있을 때, 이 사람이 생각하는 것을 저 사람도 생각한다; 고로 생각이 결합한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이 사람이 저 사람을 생각할 때, 저 사람이 눈 앞에 나타난다; 이렇게 해서도 생각은 결합한다. 이로부터 “가서 보다”의 의미는 결합인 것이다. 결합을 갈망한다는 것은 방금 앞 문단의 벅찬 기쁨에 곧 이어지는 표현이다. 그리고 “내가 죽기 전에”의 의미가 새로운 것이 있기 이전이다, 즉 표현들의 새로운 것에 앞서 라는 말이다. 그 이유가 말씀에서 표현들은 이런 식으로 계속 이어지기 때문, 즉 이 사람이 죽을 때, 다음 사람이 또 다른 표현함을 잇는다; 고로 새로운 것인 셈이다; 즉 아브라함이 죽었을 때, 이삭에 의해 표현이 계승되었다; 그리고 그가 죽었을 때, 야곱에 의해 표현은 계승되었다; 그리고 그가 죽었을 때, 그의 후손에 의해 표현은 계승되었다. 이것이 여기서 말한 새로운 것이다.
**************************************

창세기 제 46 장

성경: 창세기 46 장

1. 이스라엘은 여행했다, 그리고 그가 가졌던 모든 것, 그리고 브엘세바에 왔다, 그리고 그의 아버지 이삭의 하느님에게 제물을 바쳤다.
2. 그리고 하느님께서 밤의 환상에서 이스라엘에게 말하셨다, 그리고 그분은 말하셨다, 야곱아, 야곱아.
3. 그리고 그분은 말하셨다, 나를 바라보라. 그리고 그분은 말하셨다, 나는 하느님, 네 아버지의 하느님이다. 이집트로 내려가는 것을 두려워 말라, 나는 거기서 너로부터 큰 나라를 만들 것이다.
4. 나는 너와 함께 이집트로 내려가리라. 그리고 나는 너로 올라오게 하리니 정녕 올라온다. 그리고 요셉이 네 눈에 그의 손을 놓을 것이다.
5. 그리고 야곱은 브엘세바로부터 일어났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아들들은 그들의 아버지 야곱을, 그리고 그들의 아기들을, 그리고 그들의 여인들을 바로가 그를 모시라고 보낸 수레로 운반했다.
6. 그리고 그들은 그들의 가축떼, 그리고 그들이 가나안의 토지에서 획득한 그들의 소유물을 챙겼다, 그리고 이집트로 왔다, 야곱, 그리고 그와 함께 하는 그의 모든 씨,
7. 즉 그의 아들들, 그리고 그의 아들들의 아들들, 그의 딸들, 그리고 그의 아들들의 딸들, 그리고 모든 그의 씨를 그는 그와 함께 이집트로 데려 왔다.
8. 이집트로 내려간 이스라엘 가족들의 이름이 이러하니 야곱과 그 아들들, 곧 야곱의 맏아들 르우벤과
9. 르우벤의 아들 하녹과 발루와 헤스론과 갈미요,
10. 시므온의 아들 곧 여무엘과 야민과 오핫과 야긴과 스할과 가나안의 여인의 소생 사울이요,
11. 레위의 아들 곧 게르손과 그핫과 므라리요,
12. 유다의 아들 곧 엘과 오난과 셀라와 베레스와 세라인데 엘과 오난은 가나안 땅에서 죽었고, 또 베레스의 아들 곧 헤스론과 하물이요
13. 잇사갈의 아들 곧 돌라와 부와와 욥과 시므론이요,
14. 스불론의 아들 곧 세렛과 엘론과 얄르엘이니
15. 이들은 레아가 밧단 아람에서 야곱에게 낳은 자손들인데, 그 딸 디나를 합하여 남자와 여자가 삼십 삼 명이며,
16. 갓의 아들 곧 시뵨과 학기와 수니와 에스본과 에리와 아로디와 아렐리요,
17. 아셀의 아들 곧 임나와 이스와와 이스위와 브리아와 그들의 누이 세라며 또 브리아의 아들 곧 헤벨과 말기엘이니
18. 이들은 라반이 그 딸 라헬에게 준 실바가 야곱에게 낳은 자손들이라 합 십 육명이요
19. 야곱의 아내 라헬의 아들 곧 요셉과 베냐민이요
20. 이집트 땅에서 온 제사장 보디베라의 딸 아스낫이 요셉에게 낳은 므낫세와 에브라임이요
21. 베냐민의 아들 곧 벨라와 베겔과 아스벨과 게라와 나아만과 에히와 로스와 뭅빔과 훕빔과 아릇이니
22. 이들은 라헬이 야곱에게 낳은 자손이라 합 십 사명이요
23. 단의 아들 후심이요
24. 납달리의 아들 곧 야스엘과 구니와 예셀과 실렘이라
25. 이들은 라반이 그 딸 라헬에게 준 빌하가 야곱에게 낳은 자손이니 합이 칠 명이라,
26. 야곱과 함께 이집트에 이른 자는 야곱의 자부 외에 육십 육명이니 이는 다 야곱의 몸에서 나온 자며
27. 이집트에서 요셉에게 낳은 아들이 두명이니 야곱의 집 사람으로 이집트에 이른 자의 도합이 칠십 명이었더라.
28. 그리고 그는 그에 앞서 유다를 보내 자기에게 고센으로 가는 길을 보여주게 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고센의 토지에 왔다.
29. 그리고 요셉은 그의 병거에 견인줄을 채웠다, 그리고 그의 아버지 이스라엘을 맞으러 고센으로 올라 갔다. 그리고 그는 그에게 보여졌다, 그리고 그의 목들을 어긋맞겨 안고 그의 목들에서 한참동안 울었다.
30. 그리고 이스라엘은 요셉에게 말했다, 네가 아직 살아 있어 네 얼굴들을 보았으니 나는 지금 죽어도 된다.
31. 그리고 요셉은 그의 형제들에게, 그리고 그의 아버지의 집(식구)에게 말했다. 나는 올라 가서 바로에게 말할 것입니다, 내 형제, 그리고 내 아버지의 집이 가나안의 토지에 있었는데, 나에게 왔습니다.
32. 그리고 이 사람들은 양떼를 치는 목자들입니다, 그들은 가축을 치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기들의 양떼와 목축과 그들이 가진 모든 것을 가지고 왔습니다.
33. 그리고 아마 바로는 당신을 부를지 모릅니다, 그리고 말하기를, 너의 일들은 무엇이냐?
34. 그러면 당신은 말하십시요, 당신의 종들은 젊은 시절로부터 지금 까지 조차, 우리 모두, 그리고 조상도 모두 가축을 치는 사람들이였습니다. 이는 당신이 고센의 토지에 거주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입니다. 그 이유가 이집트 사람들은 양떼를 치는 목자를 지겹게 여기기 때문입니다.

각 절의 내적 의미

1절. 이스라엘은 여행했다, 그리고 그가 가졌던 모든 것, 그리고 브엘세바에 왔다, 그리고 그의 아버지 이삭의 하느님에게 제물을 바쳤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여행했다, 그리고 그가 가졌던 모든 것. 이는 결합이 시작됨을 의미한다. 이는 “여행”의 의미가 연속적이고 계속적이다로부터; 여기서는 “이스라엘”, 그리고 “요셉”의 최고 의미에서 의미되는 주님의 신성이 되심에서 연속되고 계속되는 것이다; 그러나 내적 의미에서 인간의 거듭남의 연속적이고 계속적인 것이다. 이 장에서는 자연적 인간이 영적 인간과의 결합, 또는 외적 인간이 내적 인간과의 결합이라는 주제가 연속되고 계속되는 바, 그러므로 “이스라엘이 여행했다, 그리고 그가 가졌던 모든 것”이라는 말은 이 결합의 시작을 의미하게 된다.

그리고 브엘세바에 왔다. 이는 선행과 신앙을 의미한다. 이는 “브엘세바”의 의미가 선행과 신앙에 관한 교리이다로부터, 그러나 여기서는 교리가 아닌 선행과 신앙이다, 그 이유는 이것이 “이스라엘”인 영적 선을 서술하기 때문이다. 영적 선은 교리 그 위의 수준이고, 교리는 이 선으로부터 있다; 그리고 그러므로 영적 선에 도착한 이는 교리적인 것들에 속하는 것은 필요가 없고, 다른 것들부터 있는다; 그 이유가 그는 어느 방향으로 무엇에 집중하든 그는 목적 안에 있기 때문, 그리고 목적 쪽으로 가기 위한 수단이 더 이상 필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교리적인 것들은 목적으로서의 선에 도달하는 수단밖에 더 아니다. 이런 이유로 “브엘세바”에 의해 선행과 신앙이 의미된다.

그리고 그의 아버지 이삭의 하느님께 제물을 바쳤다. 이는 거기서부터 있게 되는 예배, 그리고 신성한 지적 측면으로부터의 유입을 의미한다. 이는 “제물을 바침”의 의미가 예배이다로부터; 그리고 이삭의 표현함이 최고 의미에서 신성의 합리성, 또는 주님의 지적 측면이다로부터; 거기서부터 예배 안으로 유입이 의미되고 이어지는데, 그 이유는 그가 제물을 바친 곳, 브엘세바에 의해 의미된 것이 선행과 신앙이고, 이로부터 있는 것이 예배이다가 뜻해지기 때문이다. 야곱이 자기 아버지 이삭의 하느님에게 제물을 바쳤다는 것이 보여주는 바는, 유태 나라와 이스라엘 나라의 조상들이 무엇 같았는지(속성이 어떤 것인지)이다, 즉 그들 각각은 제각기 자신의 하느님을 예배했다는 것이다. 이삭의 하느님은 야곱의 하느님과 다른 하느님이었다는 것은 말씀에 기록된 이런 사실로부터, 즉 그가 그분에게 제물을 바쳤고, 밤중의 환상에서 그에게 말해지기를, “나는 하느님이다, 네 아버지의 하느님이다”; 또한 그가 이렇게 말하며 맹세했다, 즉 “아브라함의 하느님, 그리고 나홀의 하느님, 그들의 아버지의 하느님, (그분이) 우리 사이를 판결하신다; 그리고 야곱은 자기 아버지 이삭의 두려우신 분을 두고 맹세했다” (창. 31:53). 그리고 또한 분명한 것 하나는, 그는 처음에는 여호와를 인정하지 않았다는 것, 그 이유가 그가 이렇게 말했기 때문이다, “만일 하느님이 저와 함께 계시고, 그리고 내가 걷는 이 길에서 저를 지켜주시고, 그리고 저에게 먹을 빵을 주시고, 입을 의복을 주시고, 그리고 제가 내 아버지의 집으로 평화로이 되돌아오게 해주신다면, 그때 여호와는 나의 하느님일 것입니다” (창. 28:20, 21). 고로 그는 여호와를 조건적으로 인정했다.
자기들의 아버지들(조상)의 하느님을 인정하는 것은 그들의 관습이었다, 그러나 자기 자신의 하느님의 경우는 특별하였다. 이 관습의 근원지는 시리아에 있는 그들의 조상으로부터 갈라져 나왔다; 그 이유가 아브람의 아버지, 데라, 또한 거기 있을 때의 아브람 자신도 여호와가 아닌 다른 신들을 예배했기 때문이다. “야곱,”“이스라엘”이라 불리우는 그들의 후손 역시 이런 환경에 있을 수밖에 없었는 바, 결과적으로 심정 상에서는 그들은 이방인들의 하느님들을 예배했다, 그리고 여호와는 입에서와 이름에서만 일 뿐이었다. 하여 그들은 어떤 내적 측면은 하나도 없이 외적 측면에서만 있었기에 예배는 하느님의 이름을 입으로 부르고 외치면 되고, 그분이 자기의 하느님이라고 입으로 인정하면 되고, 그분이 자기들에게 복주시는 한 그분을 자기의 하느님으로 삼는 것, 이것이 예배의 전부 였다; 따라서 선행과 신앙의 생활로 예배가 구성되는 것은 그들의 상상 속에도 없었다.

2-4절. 그리고 하느님께서 밤의 환상에서 이스라엘에게 말하셨다, 그리고 그분은 말하셨다, 야곱아, 야곱아. 3 그리고 그분은 말하셨다, 나를 바라보라. 그리고 그분은 말하셨다, 나는 하느님, 네 아버지의 하느님이다. 이집트로 내려가는 것을 두려워 말라, 나는 거기서 너로부터 큰 나라를 만들 것이다. 4 나는 너와 함께 이집트로 내려가리라. 그리고 나는 너로 올라오게 하리니 정녕 올라온다. 그리고 요셉이 네 눈에 그의 손을 놓을 것이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밤의 환상들 안에서 이스라엘에게 말하셨다. 이는 희미한 계시를 의미한다. 이는 “하느님께서 환상들 안에서 말하셨다”의 의미가 계시하심 (revelation, 밝히 알리심)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 이유가 계시들이 만들어지는 방법들은 여러 종류들인데, 즉 꿈들에 의해서, 밤의 환상에 의해서, 낮의 환상에 의해서, 인간 내부로부터의 말함에 의해서, 보여지는 천사들로부터 당사자 바깥쪽으로부터의 말함에 의해서, 또는 보여지지 않는 천사들로부터 당사자 바깥쪽으로부터 말함에 의해서, 등등이다. 여기서의 경우, “밤중에 있는 환상”인 바, 이는 희미함을 의미한다, 그리고 희미함의 영적 의미는 진리가 나타나지 않음이다. 더욱이 말씀에서 “밤”은 악으로부터의 거짓을 의미한다, 그 이유가 악으로부터 거짓 안에 있는 이들이 밤의 희미함 안에 있기 때문이다. 고로 지옥에 있는 모든 자는 밤 안에 있다 라고 말해진다. 참으로 그들은 거기에 있는 일종의 빛 안에 있다, 그 이유가 그들도 서로를 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빛은 석탄불로부터의 빛 같다, 그리고 천국의 빛이 흘러들 경우, 어둠으로, 짙은 어둠으로 변하여진다. 그러므로해서 지옥에 있는 이들은 밤 안에 있다 라고 말해지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을 두고 밤의 천사, 또는 어둠의 천사라고도 불리운다; 한편 천국에 있는 이들은 낮의 천사, 또는 빛의 천사라고 불리운다.
“밤”이 희미한 것, 마찬가지로 거짓인 것을 표시하는 이유는 아래 말씀의 구절로부터 알는지 모른다:
예수께서 말하셨다, 낮에는 12 시간들이 있지 않더냐? 만일 누군가가 낮에 걷는다면, 그는 장애물에 걸려 넘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밤에 걷는 누군가가 있다면, 그는 넘어지고 만다, 그 이유는 빛이 그 자 안에 없기 때문이다 (요. 11:9, 10);
“12 시간들”은 진리의 모든 상태들을 표시한다; “낮에 걷는 것”은 진리 안에서 사는 것을; “밤에 걷는 것”은 거짓 안에서 사는 것을 표시한다.
다시:
낮 동안 나는 나를 보내신 그분의 일을 해야만 한다; 밤이 올 때, 아무도 일할 수 없다
(요. 9:4);
“낮”은 선으로부터의 진리를, “밤”은 악으로부터의 거짓을 표시한다. 교회의 처음의 때는 “낮”에 의해 뜻해지는데, 그 이유는 처음 당시에는 인간들이 선 안에 있어 진리가 받아졌기 때문이다; 교회의 마지막의 때는 “밤”에 의해 뜻해지는데, 그 이유는 마지막 때에는 인간들이 선 안에 있지 않기 때문에 어떤 진리도 받지를 못해서이다. 인간이 선 안에 있지 않을 때, 즉 그가 이웃을 향한 선행 안에 있지 않을 때, 설사 진리들 자체가 당사자의 입을 통해 말해진다 해도, 그는 그것들을 받지 못한다, 그 이유는 이때의 경우, 진리인 것을 전혀 지각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지각하지 못하는 이유는 진리의 빛이 육체와 세상에 속한 이런저런 것들 안으로 들어가서 그것들의 시중을 들고 있어, 육체와 세상의 것들만이 진짜인 것으로 판단되고 사랑되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천국에 속한 것들은 아닌데, 이런 인간과 더불어서의 천국에 속한 것들은 거의 값어치가 전무하다. 고로 진리의 빛은 빽빽한 어둠 안에서 질식되거나 흡수되어 있으나마나 한 듯 해진다, 마치 태양의 빛이 검은 것 안에 비출 때의 경우나 별반 차이가 없을지 모른다. 오늘날 이와 같은 때를 두고:
신랑이 지체하는 사이, 모든 처녀들은 졸다가 잠들었다. 그러나 한밤에 외침이 만들어졌다, 보라, 신랑이 오고 있다 (마. 25:5, 6);
“한 밤”은 옛 교회의 마지막 때를 표시한다, 이때란 선행이 없어 신앙이 없는 때이다, 또한 새로운 교회의 처음의 때는: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 밤에 한 침대 위에 둘이 있을 것이다; 하나는 받아들여질 것이나 하나는 남겨질 것이다 (눅. 17:34);
위 구절에서도 “밤”은 옛 교회의 마지막 때와 새로운 교회의 처음의 때를 표시한다.
마태복음서에서: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말하셨다, 너희 모두는 이 밤에 나를 향하여 수치스런 일을 벌일 것이다. 그리고 베드로에게, 이 밤에, 수탉이 울기 전, 너는 나를 세 번 부인할 것이다 (마. 26:31, 34);
주님이 밤에 붙잡히는 상황은 그 당시 그 때에 그들과 더불어 신성한 진리는 밤의 희미함 안에 있었음을, 그리고 악으로부터의 거짓이 그 장소에 있었음을 의미했다. 그리고 베드로가 세 번 부인한 것은 신앙의 진리가 가르쳐져 왔음에도 믿어지지 않았던 교회의 마지막 때를 표현했다. 이런 때가 “밤”인 이유는 그 때에 주님은 인간들의 심정에서 완전 부인되었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열두 사도들은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들 같이 신앙의 모든 것들을 표현했다, 그리고 베드로는 교회의 신앙을 표현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이 밤에 너는 나를 세 번 부인할 것이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너희 모두는 이 밤에 나에게 창피한 일을 벌일 것이다”라고 말하신 것이다.
이사야서에서:
누군가가 세일로부터 나를 불러, 경비병아, 밤이 어쨌다는 말이냐? 경비병아 밤이 어쨌다는 말이냐? 경비병이 말했다, 아침이 온다, 또한 밤도 온다 (이. 21:11, 12);
위는 주님의 오심에 관해서 말해지는데, 이는 “아침”이다, 이 오심은 땅에서 어떤 영적 진리도 더 이상 있지 않을 때에 거행되었고, 이 때가 위 구절에서 밤이다.
스가랴서에서:
여호와께 알려진 어느 날이 있을 것이다; 낮도 아니고 밤도 아니다; 그 이유가 저녁의 때쯤 빛이 있을 것이다. 그 날이 오면 예루살렘으로부터 생명 있는 물들이 나갈 것이다; 그리고 여호와께서는 모든 땅 위에서 왕이실 것이다; 그 날에 여호와는 한 분이실 것이다, 그리고 그분의 이름은 하나일 것이다 (슥. 14:7-9);
위 구절 또한 주님에 관하여, 또한 새로운 교회에 관하여 이야기를 하고 있다. “여호와는 왕이실 것, 그리고 여호와는 한 분이실 것, 그리고 그분의 이름은 하나일 것”이란 신성한 인간 측면에 관련한 주님에 관해서인데, 이 신성한 인간은 “아버지”라 불리우는 신성 자체와 더불어 하나이신 것이다. 주님이 오시기 이전, 신성한 인간은 천국들에 계신 여호와이셨다, 그 이유가 천국들을 통하여 그분은 땅 위 많은 이들 앞에서 신성한 사람으로서 자신을 표출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때 당시 신성한 인간은 주님께서 그분 자신 안에서 완전한 하나를 만드신 때와 같이 신성 자체와 더불어 완전하게 하나이셨던 것은 아니다. 이전 이 둘은 마치 분리되어 있는 듯하여 있었다는 것이 창. 19장으로부터 분명해진다, 즉 “여호와께서는 소돔과 고모라 위에 천국으로부터 여호와로부터 불과 유황이 비오게 하셨다”(24절). “낮도, 밤도 아닌” 때가 그분이 태어나신 때이다; 그 이유가 그때는 “저녁”이었기 때문, 즉 표현뿐인 교회의 마지막이었기 때문이다; “저녁의 때쯤의 빛”은 그때 나타날 신성한 진리이다.
이사야서에서:
정녕 밤에 알(Ar)은 폐물이 되었고, 모압은 베어져 버렸었다; 정녕 밤에 모압의 길(Kir)은 황폐해졌 었다 (이. 15:1);
“모압”은 자연적 선을 표시한다, 반대적 의미에서는 섞음질 된 선을 표시한다; 그것의 황폐함이 여기서 취급된다. 황폐해짐들이 “밤”에 결과되는 이유는 그때 진리가 희미해지고, 거짓들이 진입하기 때문이다. 예레미야서에서:
큰 도성이 밤에 정녕 슬피 울 것이다, 그녀의 눈물이 그녀의 뺨에 있을 것이다 (애. 1:2);
진리의 황무함을 묘사하고 있다; “밤”은 거짓을 표시한다.
다윗서에서:
너는 밤의 공포를, 낮에 날아드는 화살을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다, 정오를 황폐하게 하는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다 (시. 91:5, 6);
“밤의 공포”는 지옥으로부터 있는 악의 거짓들을 표시한다; “낮에 날아드는 화살”은 공개적으로 가르친 거짓이고, 이것 때문에 선이 파괴되어진다; “정오를 황폐하게 하는 죽음”은 노골적으로 살고 있는 악이다, 이것 때문에 진리가 파괴되어진다. 계시록서에서:
거룩한 예루살렘의 성문들은 낮에 닫히지 않을 것이다; 그 이유는 거기에 밤이 없기 때문이다 (계. 21:25).
거기에 밤은 있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초(candle)가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태양의 빛도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그 이유는 주 하느님이 그들에게 빛을 주시기 때문이다 (계. 22:5).
“거기에 밤이 없을 것이다”는 거기에 거짓이 없을 것이다를 표시한다. 다니엘서에서:
다니엘이 말했다, 나는 밤이었을 때, 나의 환상 안에 있었다. 이후 나는 밤의 환상들에서 보았다 (단. 7:2, 7);
위의 “밤의 환상들” 역시 희미한 계시를 표시한다, 그 이유가 이 구절에서 네 짐승들이 취급되기 때문, 그리고 그들의 뿔들, 그리고 희미한 계시에 속하는 많은 것들이 취급되기 때문이다. 스가랴가 “밤에” 보았던 여러 색깔의 말도 이와 의미가 비슷하다 (슥. 1:8 이하).

그리고 그분은 말하셨다, 야곱아, 야곱아. 이는 자연적 진리 쪽으로를 의미한다. 이는 야곱의 표현함이 자연적 진리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스라엘”이 아닌 “야곱”이라고 말해진 이유는 자연적 진리에 속하는 모든 것과 더불어 자연적 진리는 이집트로 내려가는 자기 아들들과 더불은 야곱에 의해 의미된 교회의 기억 속의 지식 쪽으로 개시됨에 틀림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분은 말했다, 나를 바라보라. 이는 주목함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분은 말하셨다, 나는 하느님, 네 아버지의 하느님이다. 이는 신성한 지적 측면, 이로부터 유입이 있다를 의미한다. 이는 여기서 “아버지”인 이삭의 표현함이 신성한 합리성, 또는 주님의 지적 측면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 이유가 말해지기를 “하느님, 네 아버지의 하느님”이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유입이 있다고 말한 이유는 모든 진리는 지적 측면 속에 있기 때문, 고로 또한 야곱에 의해 표현되는 자연적 진리 속에 있다. 위 말씀의 원어에서, 앞의 “하느님”은 단수인 “엘(El)”로, 두 번째 “하느님”은 복수인 “엘로힘(Elihim)”이다. 그 이유는 첫 번째 하느님은 한 분 하느님, 유일하신 분이시기 때문이고, 두 번째 하느님은 그분은 많은 속성들을 가지시고 있기 때문이다. 고로 이름 “엘로힘”, 또는 복수에서의 “하느님”이라는 표현은 말씀 거의 모든 곳에서 나타나고 있다. 많은 속성들이 있기에, 고대 교회는 그 속성 각각에 이름을 할당했다, 그러므로 그 교회의 후손들과 더불어서는 각각의 이름에 관한 이런 저런 지식들을 상실했는 바, 남은 것은 거기에 많은 하느님들이 있다는 정도뿐이었다, 하여 각 가문들은 자기들의 하느님을 위하여 그 하느님들 중의 하나를 선택했다. 마치 아브라함의 경우는 솨다이 (Shaddai), 이삭의 경우는 두려운 분(Pachad, Dread)이라 불러지는 하느님을 선택했다. 각각의 하느님은 신성의 속성들 중의 하나이기에, 그러므로 주님께서 아브람에게, “나는 하느님 솨다이”이다 라고 말하셨다 (창. 17:1), 그리고 여기서 야곱에게는, “나는 네 아버지의 하느님이다”라고 말하셨다.

이집트로 내려가는 것을 두려워 말라. 이는 자연적 진리는 그것에 소속된 모든 것과 더불어 교회의 기억 속의 지식 쪽에서 받아들여져야만 한다를 의미한다. 이는 여기서 이집트로 내려가기로 되어있는 “야곱”의 표현함이 자연적 진리이다로부터; 그리고 “내려감”의 의미가 받아들여짐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 이유가 이 받아들여짐(introduce, 개시됨, initiate)이 표현되기 위하여 야곱과 그에 딸린 모든 것들이 이집트로 내려가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집트”의 의미가 교회의 기억 속의 지식들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진리가 교회의 기억 속의 지식 쪽에서 받아짐에 주목하면 이렇다: 그때 당시 교회의 기억 속의 지식들은 자기들의 의식들에 관한 표현들과 의미들이었다, 그 이유가 교회의 모든 의식들은 이런 저런 표현들인 바, 이런 표현은 자기들의 선행의 교리물로 섬긴 그들의 기억 속의 지식들로부터 이다. 고로 이 기억 속의 지식으로부터 그들은 가난한자, 궁핖한 자, 비천한 자, 고뇌받는 자, 압제받는 자, 과부, 고아, 체류자, 감옥에 갇힌 자, 병자, 배고픈 자, 목마른 자, 절름발이, 소경, 귀머거리, 불구자 등등에 의해 뜻해지는 자가 누구인지를 알았다, 이외에도 많은 다른 분류들로 해서 이웃을 구별했다, 하여 어떻게 선행이 실행되어져야 하는지를 가르쳤다. 이와 같은 것이 그때 당시의 기억 속의 지식들이다. 오늘날 이런 것들은 기억으로부터 완전히 삭제되었다. 이런 상황은 말씀에서 언급되는 대목들로부터 분명해진다, 오늘날, 거의 누구도 말씀에서 “과부”가 등장할 경우 그 과부라는 단어가 무엇을 뜻하는지, 또는 “체류자(외국인)”, 또는 “감옥에 갇힌 자”가 언급될 경우, 무엇을 뜻하는지 알지 못한다. 어쨌든 옛날 이집트에서는 이런 기억 속의 지식들이 번창했다; 그러므로 “이집트”에 의해 기억 속의 지식들이 의미되는 것이다. “야곱”인 자연적 진리가 이런 기억 속의 지식 쪽에서 받아지는 것이 야곱이 모든 습득물을 챙겨 이집트로 내려감에 의해 표현되어져 있다.
진리들이 이런 기억 속의 지식들 쪽에서 받아지는 것은 그들이 이집트에서 있기 위해 이집트 안으로 데려가질 때이다. 이는 기억 속의 지식들이 생각 안으로 올 때, 기억 속의 지식 안으로 데려와진 진리들도 동시에 기억함 안으로 오기 때문에 여기서 받아진다고 말한 것이다; 예를 들면, 체류자(외국인)가 생각에서 표출되면, 이 체류자를 수단으로 가르침을 받아야 할 이들이 의미됨을 보게 되고, 즉시 이와 같은 선행이 실행되어야 한다는 진리도 생각 안으로 오는 경우이다. 기억 속의 지식들이 (자연적 진리들로) 채워질 때, 그다음 누군가가 이로부터 생각할 경우, 생각은 그 자체를 더 멀리 더 넓게 확장하고 흩뜨린다, 동시에 천국들에 있는 많은 사회들 쪽으로 방산된다. 이런 저런 기억 속의 지식들은, 그 자체 안쪽에 많은 진리들로 구성되고, 비록 인간에게는 알려지지 않지만, 위의 방식으로 자체를 밝힌다; 따라서 필요한 전제 조건은 기억 속의 지식들 안에 진리들이 있는 것이다.
내면의 것들이 자신들을 외면의 것들 안에 증여하는 것이 신성의 질서이다. 또는 앞의 것들이 뒤의 것들 안에 담기도록 뒤의 것들에 증여하는 것이다, 고로 마지막에 가서는 최말단의 것들 안에 앞의 모든 것들이 (겹겹이 포개진 듯) 담겨 있다. (아마 양파를 연상해도 도움이 될지 모른다. 역자주) 이런 방식은 자연계의 창조물의 어디에서이든 발생된다. 이것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인간은 충분하게 거듭나질 수가 없다, 그 이유가 진리들을 기억 속의 진리 쪽으로 가져다 놓음을 수단으로 내면의 것들과 외면의 것들이 일치를 이루고 하나를 만들어야 불일치가 발붙이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만일 불일치가 있다면, 그는 선 안에 있지 않는데, 그 이유는 그가 신성하지 않기 때문이다. 더욱이 기억 속의 지식들은 인간의 시각의 감각이 가지는 빛과 거의 같은 수준의 빛을 지니는 까닭에 진리로부터 있는 빛을 수단으로 내부에서 계발이 있지 않으면, 거짓들 쪽으로 인도되기 십상이다, 특히 감각의 오류로부터 파생되는 거짓 쪽으로 들어서고 만다; 또한 거짓들로부터 악들 안으로 진입하고야 만다. 이에 대하여는 각 장들의 끝에서 있는 유입에 관한 경험으로부터 더 알아질 것이다.

나는 거기서 너로부터 큰 나라를 만들 것이다. 이는 진리들이 선이 되어 갈 것을 의미한다. 이는 위의 말이 말해지는 대상인 “야곱”의 표현함이 자연적 진리이다로부터; 그리고 “나라”의 의미가 선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나라”와 “백성”은 말씀에서 자주 언급되는 단어이다, 그러나 모든 곳에서 이런 차이가 있다: 즉 “나라”는 선들 또는 악들을; “백성”은 진리들, 또는 거짓들을 의미한다.

나는 너와 함께 이집트로 내려가리라. 이는 그런 상태 안에 주님이 현존하심을 의미한다. 이는 “너와 함께 내려 감”의 의미가 주님의 현존하심이다로부터, 그 이유가 밤의 환상들에서 야곱에게 말하신 하느님이 주님을 뜻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너로 올라오게 하리니 정녕 올라온다. 이는 그 후 승강함이 있다를 의미한다. 이는 “올라 가다”의 의미가 승강함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여기서 의미되는 승강함은 기억 속의 지식들로부터 더 내면 쪽으로 있는 것을 말한다. 기억 속의 지식들이 진리들로 채워진 후, 인간은 더 내면을 향하여 기억 속의 지식들로부터 승강한다, 그리고 기억 속의 지식들은 당사자의 정신적 활동들의 최말단 평면으로 봉사한다. 더 내면쪽으로 향한다란 더 내면적으로 생각한다는 것, 마지막으로는 영으로서, 천사로서 생각한다는 말이다; 그 이유가 내면적 생각이 더 진전될수록 더 완전해지기 때문, 하느님으로부터의 진리와 선의 유입이 더 가까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요셉이 네 눈에 그의 손을 놓을 것이다. 이는 천적 평면으로부터의 내적 부분이 생기를 줄 것을 의미한다. 이는 요셉의 표현함이 천적 평면으로부터의 내적 부분이다로부터; 그리고 “눈에 손을 놓다”의 의미가 생기있게 함이다로부터 알려진다. 그 이유가 “눈에 손을 놓다(죽은 자의 눈을 감겨주는 것)”은 외적 감각, 또는 육체에 속한 것이 닫혀지고, 내적 감각이 열리게 되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고로 승강함이 결과돠어 생기있게 된다. 죽은 자의 눈에 손을 놓는 것은 관습이었는데, 그 이유는 “죽음”을 수단으로 생명으로의 소생이 의미되었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인간이 죽을 때, 그는 죽는 것이 아니고, 자기를 세상 삶을 위해 봉사했던 육체를 한쪽에 내려 놓고, 육체가 더 이상 필요 없는 다른 삶으로 건너갈 뿐이기 때문이다.

5-7절. 그리고 야곱은 브엘세바로부터 일어났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아들들은 그들의 아버지 야곱을, 그리고 그들의 아기들을, 그리고 그들의 여인들을 바로가 그를 모시라고 보낸 수레로 운반했다. 6 그리고 그들은 그들의 가축떼, 그리고 그들이 가나안의 토지에서 획득한 그들의 소유물을 챙겼다, 그리고 이집트로 왔다, 야곱, 그리고 그와 함께 하는 그의 모든 씨, 7 즉 그의 아들들, 그리고 그의 아들들의 아들들, 그의 딸들, 그리고 그의 아들들의 딸들, 그리고 모든 그의 씨를 그는 그와 함께 이집트로 데려 왔다.

그리고 야곱은… 일어났다. 이는 자연적 진리가 계발됨을 의미한다. 이는 “일어남”의 의미가 빛의 상태 쪽으로 승강함이다로부터, 고로 계발됨이다; 그리고 야곱의 표현함이 자연적 진리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브엘세바로부터. 이는 선행과 신앙의 교리로부터를 의미한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아들들은 그들의 아버지 야곱을 운반했다. 이는 영적인 진리들은 자연적 진리가 발전하게 해준다를 의미한다. 이는 이스라엘의 아들들의 표현함이 영적 진리들이다로부터; 그리고 야곱의 표현함이 자연적 진리들이다로부터 알려진다. “그들이 운반했다”가 그들이 발전되게 했다인 이유는 이것이 자연적 진리에 비교하여 영적 진리들을 서술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연적 진리는 영적 진리 외의 다른 근원으로부터서는 발전할 수 없다, 그 이유가 그것의 생명과 행동하게 하는 힘은 영적 근원으로부터 파생되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야곱의 아들들이 여기서 “이스라엘의 아들들”이라 불리우고, 야곱은 “야곱”이라 불리운다.

그리고 그들의 아기들을. 이는 순진 속에 있는 이런저런 것들과 함께를 의미한다. 이는 “아기들”의 의미가 순진이다로부터 알려진다. “순진 속에 있는 이런 저런 것들”, 또는 “선행 속에 있는 것”이라고 말해지는데, 그 이유는 순진과 선행 없이, 영적 진리가 자연적 진리를 발전하게 해줄 수 없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진리가 순수해지기 위하여 진리는 그것의 본질과 생명을 선행으로부터 파셍되어 있게 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선행은 순진으로부터 이다. 그 이유가 진리를 생생하게 하는 내면의 것들은 이런 순서를 따르기 때문이다: 가장 안쪽은 순진이다; 그 다음 낮은 것은 선행이다; 가장 낮은 것은 진리로부터 또는 진리에 따른 선행의 일이다. 그것들이 이 질서 안에서 서로가 연계되는 이유는 그것들이 천국들에서 그렇게 연계되기 때문이다. 가장 안쪽 또는 세 번째 천국은 순진의 천국이다; 중간 또는 두 번째 천국은 선행의 천국이다, 이것 안쪽에는 가장 안쪽 천국으로부터의 순진이 있다; 첫 번째 또는 최말단 천국은 진리의 천국이다; 이것 안쪽에는 두 번째 천국으로부터의 선행이, 이 선행 안쪽에 세 번째 천국으로부터의 순진이 있다. 이 모든 것은 인간과 더불어서도 같은 질서 속에 있다; 그 이유가 인간의 내면들 측면에 관련하여 인간은 위 세 천국들의 형상에 따라 만들어져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거듭난 인간은 특별한 측면에서, 또는 가장 작은 형체로서의 천국이다. 그러나 그의 외면의 측면애 관련하여, 특히 육체에 관련하여, 그는 세상의 형상에 따라 만들어져 있다, 그러므로 고대인들에 의하여 그는 소우주(microcosm)라 불리운다. 귀는 공기와 소리의 전체 속성에 따라, 눈은 에테르(ether)와 빛의 전체 속성에 따라, 혀는 액체에 있는 용해성과 유동성의 전체 감각에 따라, 콧구멍은 대기에 있는 이런 저런 유동성을 감각함에 따라, 촉각은 차고 뜨거운 것을 감각함에 따라, 또는 무게를 지닌 땅의 이런 저런 것들을 감각함에 따라서 등등이다. 이렇게 인간의 외적 감각들은 자연계의 전체 형상에 따라 만들어져 있다, 이와 같이 인간의 내적 감각들은 그의 이해력과 의지력에 속해 있다, 그리고 천국의 전체 형상에 따라 만들어졌는 바, 일반적 측면에서 천국이 있고, 세부적 측면에서 모두 각각의 인간은 주님으로부터 신성한 선을 받는 그릇일는지 모른다.

그리고 그들의 여인들을. 이는 선행 속에 있는 것들을 의미한다. 이는 “여인들”의 의미가 그들의 “남자들”이 진리들일 경우, 선들이다로부터, 결과적으로 선행 속에 있는 것들이다; 그 이유가 모든 영적 수준의 선들은 이웃을 향한 선행 속에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모든 천적 수준인 선들은 주님을 사랑함 속에 있다.

바로가 그를 모시라고 보낸 수레에서. 이는 교회의 기억 속의 지식들로부터 온 교리물들을 의미한다. 이는 “수레”의 의미가 교리적인 것들이다로부터; 그리고 바로의 표현함이 일반적 측면에서의 교회의 기억 속의 지식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러므로 이집트의 “왕”에 의해서는 일반적(전체적) 측면에서의 기억 속의 지식이 의미되어진다, 이는 이 구절 외의 다른 구절에서도 그러하다. 사실상 대부분의 구절들에서 “이집트”의 경우 같이 “바로” 역시 거꾸로된(악용된) 기억 속의 지식이 의미되는 경우가 많다. 좋은 측면에서의 경우인, “바로”에 의한 일반적 측면의 기억 속의 지식은 아래 구절에서 살펴진다:
어리석음들이 소안의 제 1 인 자들이다, 현자는 바로의 상담자들이다; 상담이 야만적이 되었다; 너희는 어떻게 바로에게 나는 현자의 아들이다, 고대의 왕들의 아들이다 하고 말하겠느냐?
(이. 19:11)
위에서 “바로”는 일반적 측면에서의 교회의 기억 속의 지식이다, 그러므로 그는 “현자의 아들”이라, “고대의 아들”이라 불리운다; “현자”와 “고대의 왕들”은 고대 교회의 진리들을 표시한다. 그러나 이런 지식이 우둔하게 만들어졌음이 여기서 뜻하여진다, 그 이유가 “어리석음들이 소안의 제 1 인 자들이다; 상담은 야만적이 되었다”라고 말해지기 때문이다.
다시:
그들은 이집트로 내려가려고 출발한다, 그러나 그들은 나의 입에 묻지 않았다; 자신들을 바로의 강함에서 힘세어지게 하기 위하여, 이집트의 그림자를 신뢰하기 위해서이다. 그러므로 바로의 강함은 너희에게 수치함이 될 것이고, 이집트의 그림자를 신뢰함은 치욕이 될 것이다
(이. 30:2, 3);
“자신들을 바로의 강함에서 강해지게 하는 것, 이집트의 그림자를 신뢰하는 것”은 신앙의 것들에서 기억 속의 지식들에 신뢰를 두는 것, 그러나 기억 속의 지식과 감각적인 것이 영적 진리를 받기를 명령하지 않으면, 어떤 영적 진리에서도 신앙을 가지지 않는 것을 표시한다. 이는 거꾸로된 질서이다; 그 이유가 신앙의 진리들이 첫째 자리에, 기억 속의 지식들은 둘째 자리에 있음이 확증되어야 하는 것이 질서이기 때문, 만일 기억 속의 지식들의 순위가 제 1 순위에 있으면 진리에 관한 것은 무엇이든 믿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예레미야서에서:
여호와 체바욷 이스라엘의 하느님이 말하셨다, 잘 바라보라 내가 노에서 아몬을, 그리고 바로를, 그리고 이집트를, 그리고 그것의 신들을, 그리고 그것의 왕들을; 특히 바로를, 그리고 그를 신뢰하는 자들을 방문한다(처벌한다) (예. 46:25);
위 구절에서도 “바로”는 일반적 측면에서의 기억 속의 지식을 표시한다; “그를 신뢰한 자들”은 기억 속의 지식들을 신뢰한 자들을, 그러나 말씀을 신뢰한 것이 아니고, 더욱이 말씀 안의 주님을 신뢰하지 않는다; 이로부터 거짓이 오고, 신성과 천국에 속한 것을 부정함이 온다. 특히 이런 식의 태도가 입가에서 맴돈다, 즉 “나로 하여금 내 눈으로 천국도, 하느님도 보이게 보여 보아라, 나는 믿을 것이다.” 하여 보여졌다 해도, 그들은 믿지 않을 것이다, 그 이유는 부정적인 것이 그를 통째로 지배하기 때문이다.
예레미야서에서:
바로를 향하여: 잘 보라 물들이 북으로부터 올라온다, 이것은 넘쳐흐르는 시내가 될 것이다, 그리고 토지에 범람하고 이로부터 도시와 거기에 거주하는 그들을 덮을 것이다; 하여 인간들은 외칠 것이다, 그리고 토지의 모든 주민들은 악을 쓰며 말할 것이다, 자기의 강한 말들의 발굽의 짓밟음에서 이다, 그리고 그의 병거 바퀴의 덜커덩거리는 소란한 소리에서 이다
(예. 47:1, 2, 3);
바로에 관하여 말해지는 위 구절의 각각의 것들로부터, 명백해지는 바, “바로”는 일반적 측면에서의 기억 속의 지식들이다는 것, 여기서는 거꾸로의 질서, 즉 신앙의 진리들을 파괴하는 기억 속의 지식이다. “넘쳐 흐르는 시내”는 진리에 관한 이해력을 파괴하는 기억 속의 지식이다, 고로 황폐함이다; “그것들이 토지에 범람한다”란 이것이 전체 교회에 있어진다를 표시한다; “도성과 거기 거주하는 이들”이란 교회의 진리와 거기서 파생되는 선을 표시한다; “말들의 발굽 소리”는 가장 낮은 기억 속의 지식들, 이것은 감각의 것들로부터 이리저리 방향지워지는 지식들이다; “병거의 진동”은 파생되는 거짓 교리를 표시한다; “덜커덩거리는 바퀴 소리”는 감각의 것들과 그것들의 오류들을 표시한다, 이것이 나아감을 야기한다.
에스겔서에서:
주 여호비께서 말하셨다; 잘 보라 나는 너희에 맞서 있다, 이집트의 왕 바로에, 그의 강들 한가운데 누운 큰 고래, 이렇게 말한다, 강은 나의 것이다, 그리고 나는 나 자신을 만들었다. 그러므로 나는 너희 턱에 갈고리를 놓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네 강들의 고기가 네 비늘에 찔리게 할 것이다 (겔. 29:3, 4)
위에서 “바로”는 일반적 측면에서의 기억 속의 지식을 표시한다. 이것도 그에 관해서 말해진 바로부터 분명해진다.
다시:
이집트의 왕 바로를 위해 애가를 지어라. 너는 바다들에서 고래들 같이 있다; 그리고 너는 네 시내들과 더불어 출시되었다, 그리고 네 발로 물들을 괴롭혔다, 그리고 그들의 시내들을 더럽혔다. 내가 너희를 절멸했을 때 나는 하늘들을 덮을 것이다, 그리고 거기의 별들을 검게 만들 것이다; 나는 구름으로 태양을 덮을 것이다, 그리고 달은 그녀의 빛을 빛이 나게 만들지 않을 것이다; 빛의 모든 발광체들을 나는 네 위에서 검게 만들 것이다, 그리고 네 토지 위에 어둠을 놓을 것이다 (겔. 32:2, 3, 7, 8);
위 구절, 또한 많은 예언서의 구절들 같이 내적 의미를 앎이 없이는 누군가라도 납득할 수가 없다는 것은 분명하다, 즉 바로가 바다들에 있는 고래들로서 이다, 그는 자기 시내들로부터 출시되었다; 그 자 위에서 하늘들이 덮어질 것이다, 별들은 검게 만들어질 것이다, 그리고 빛의 모든 발광체들; 태양은 구름으로 덮힐 것이다, 달은 빛을 주지 않을 것이다; 어둠이 그의 토지 위에 놓일 것이다 등등 같은 말들에 대한 의미이다. 그러나 내적 의미는 이런 말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가르친다, 즉 만일 인간이 그것들을 수단으로 신앙의 비밀 안으로 들어간다면, 그리고 그가 신앙의 비밀들을 기억 속의 지식들로부터 보지 않으면, 그가 이 비밀들을 감감의 것들로부터 보지 않으면 아무것도 믿지 못한다면, 기억 속의 지식들은 교회의 진리들을 뒤엎을 것이다는 말이다. 이것이 내적 의미인 것은 각 표현의 설명으로부터 분명해진다.
바로가 기억에만 있을 뿐인 진리로부터 “이집트의 왕”이라 불리운다; 그 이유가 기억 속의 진리는 자연 평면에 있는 진리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백성의 왕은 백성과 같은 의미를 가진다; 고로 “바로”는 “이집트”와 같은 의미를 가진다, 그러나 일반적 측면이다. “이집트”가 기억 속의 지식이다는 것은 자주 말해왔다. 바로가 “바다들에 있는 고래들”에 비교되고 있다, 그 이유는 “고래” 또는 “바다의 괴물”이 기억 속의 지식들로부터의 일반적인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다들”은 기억 속의 지식들의 집합들을 의미한다. 또한 그가 “자기 시내들로부터 출시되었다”라고 말해지는데, 그 이유는 “시내들”이 총명의 것들이기 때문, 여기서는 미친 짓에 속한 것들이 의미된다, 그 이유는 감각과 기억 속의 지식들로부터의 것들이기 때문이다. 그때 그는 “그의 발로 물들을 괴롭혔다, 그리고 그들의 시내들을 더럽혔다”라고 말해진다, 그 이유는 “물들”이 영적 진리들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발”에 의해 자연 평면으로부터의 것들이 의미된다; 고로 “자기 발로 물들을 괴롭히는” 것은 자연 평면의 기억 속의 진리를 통하여 신앙의 진리들을 뒤집고 더럽히는 것을 표시한다; 그리고 “그들의 시내들을 더럽힌다”는 총명을 뒤집고 더럽히는 것이다.
마지막, “그분이 절멸할 때, 하늘들이 닫힐 것”이라고 말해지는 이유는 “하늘들”에 의해 인간의 내면들이 의미되기 때문, 실로 이것들이 그의 하늘들이다. 기억 속의 지식들이 신앙의 진리들을 지배할 때, 또는 자연 평면이 영적 평면을 다스릴 때, 하늘들은 닫혀진다. 그때 진리와 선에 관한 지식들은 멸해진다는 것이 “나는 하늘들의 별들을, 빛의 모든 발광체들을 검게 만들 것이다”에 의해 의미되어진다. 이때 사랑의 선은 더 이상 흘러들 수 없다가 “나는 구름으로 태양을 덮을 것이다”에 의해 의미된다; 그리고 신앙의 선이 흘러들 수 없다는 것은 “달은 그녀의 빛이 빛이 나게 만들지 않을 것이다”에 의해 의미되어 있다. 그리고 고로 거짓들 만이 자연적 마음을 점유할 것이다가 “나는 네 토지 위에 어둠을 놓을 것이다”에 의해 의미되어 있다. 이상 모두로부터, 위 예언의 말씀에 포함된 의미가 무엇인지 분명해졌을 것이다. “바로”에 의해 일반적 측면의 기억 속의 지식들이 의미되는 바, 바로에 의해 일반적 측면에서의 자연 평면도 의미된다.

그리고 그들의 가축떼를 챙겼다. 이는 진리의 선들을 의미한다. 이는 가축떼(cattle)의 의미함이 진리의 선이다로부터; 그 이유가 “가축떼”에 의해 양떼와 목축떼, 그리고 말, 낙타, 노새, 나귀까지 모두를 뜻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양떼(flock)”는 내적 의미에서 내면의 선들을, 그리고 “목축떼(herd)”는 외면의 선들을, 그러나 “말들,” “낙타들,” “노새들,” “나귀들”은 지적 측면에 속하는 것들, 고로 이 측면으로부터의 모든 것은 진리에 관련된다, 고로 “가축떼”에 의해 진리의 선이 의미되고 있다.

가나안의 토지에서 획득한 그들의 소유물. 이는 교회 속에 이전부터 있던 진리들로부터 포획한 진리들을 의미한다. 이는 습득물의 의미가 포획된 진리, 또한 포획된 선이다로부터; 그리고 “가나안의 토지”의 의미가 교회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것들이 이전의 교회의 진리들로부터 포획된 것이다는 이유는 진리들이 자체들을 선으로 배가했을 때, 그것들은 이전의 진리들부터 배가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집트로 왔다. 이는 교회의 기억 속의 지식들 안으로 들이어짐을 의미한다. 이는 이집트로 “오다”, 또는 “내려가다”의 의미가 교회의 기억 속의 지식들 안으로 들이어짐(기억 속의 지식들 쪽으로 진리가 개시됨)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야곱, 그리고 그와 함께 하는 그의 모든 씨. 이는 자연적 진리, 그리고 자연적 진리에 속하는 신앙 속의 모든 것에 관하여를 의미한다. (즉, 교회의 기억 속의 지식 쪽으로 받아들이어짐, 또는 교회의 기억 속의 지식 쪽에서 개시됨이다). 이는 야곱의 표현함이 자연적 진리이다로부터; 그리고 “씨”의 의미가 선행으로부터의 신앙이다. 고로 “그와 더불은 모든 씨”란 자연적 진리에 속하는 신앙의 모든 것들을 표시한다.

그의 아들들, 그리고 그의 아들들의 아들들. 이는 그것들의 질서 안에 있는 진리들을 의미한다. 이는 “아들들”의 의미가 진리들이다로부터, 고로 “아들들의 아들들”의 의미도 비슷하다, 그러나 그것들의 질서에서 이전의 것들로부터인 진리들이다.

그의 딸들, 그리고 그의 아들들의 딸들. 이는 질서 안에 있는 선들을 의미한다. 이는 “딸들”의 의미가 선들이다로부터, 고로 “아들들의 딸들” 또한 이전으로부터 있는 선들, 고로 그것들의 질서에서이다.

그리고 모든 그의 씨. 이는 신앙의 모든 것과 선행의 모든 것을 의미한다. 이는 “씨”의 의미가 선행의 신앙이다로부터, 고로 신앙과 선행 모두이다; 그 이유가 전자가 있으면 후자가, 후자가 있으면 전자도 있는 것이 신앙과 선행의 관계이기 때문이다.

그는 그와 함께 이집트로 데려 왔다. 이는 그들은 교회 속에 있는 기억 속의 지식들에로 가져와졌음을 의미한다. 이는 이집트 쪽으로 “오다”, 또는 “내려 가다”의 의미가 진리가 기억 속의 지식 쪽으로 받아들이어짐, 또한 그쪽에서 개시됨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와 같은 의미인 것이 “이집트 쪽으로 그와 더불어 데려와짐”이다. 기억 속의 지식들이 진리들에 의해 규율될 때, 진리들은 그 지식들 안으로 들이어지고, 그 안에서 개시된다; 그리고 진리가 말씀에서 주님께서 그렇게 말하셨기 때문에 인정될 때, 기억 속의 지식들은 진리들에 의해 통치되어진다, 그리고 그것을 확언한 기억 속의 진리들이 받아들여진다, 그러나 그것에 반대되는 기억 속의 지식은 제거된다. 고로 진리는 진리를 확언한 기억 속의 지식들에 주인이다, 한편, 확언되지 않은 것들은 거절된다. 이럴 경우, 기억 속의 지식으로부터 생각하는 인간은 거짓들쪽으로 빠져들지 않는다. 이는 진리들이 내부에 있지 않은 경우이다. 그 이유가 기억 속의 지식들은 자체로부터는 진리가 아니기 때문, 그러나 그것들 내부에 있는 진리들로부터 진리이다, 그리고 이러한 식으로 그것들 안에 진리들이 있는 바, 이런 일반적 진리가 기억 속의 진리이다. 그 이유가 기억 속의 진리는 단지 그릇일 뿐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진리들과 거짓들 모두를 받을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은 한없는 다양성에 있다.
예를 들면, 모든 이는 이웃이다 라는 교회의 기억 속의 지식이 있다. 이 기억 속의 지식 쪽으로 끝없이 풍부함에서 진리들이 가져와지고 개시될는지 모른다, 그러나 각각의 이웃에는 차이가 있다; 선 안에 있는 자가 최고의 이웃이다, 그리고 이것 마저 선의 품질에 따라 차이를 가진다; 이웃의 근원은 주님 자신으로부터이다, 하여 그분에게 더 가까이 되면 될수록, 즉 그들이 선 안에 더 있을수록, 그들은 더 이웃이다; 반대로 그들이 그분으로부터 더 떨어지면, 덜 이웃이다; 그리고 또한 사회(공동체)는 개인 보다 더 이웃이다, 그리고 일반적 왕국은 사회보다 더 이웃이다, 그러나 자신의 나라는 다른 왕국들보다 더 이웃이다, 그리고 주님의 왕국은 더욱 더 이웃이다; 또한 누군가가 다른 이의 선을 위하여, 또는 그의 나라를 위하여, 또는 교회를 위하여 그의 직무를 올바르게 집행할 때 이웃은 사랑되고 있다, 등등이다. 이는 어떻게 많은 진리들이 교회의 이 하나의 기억 속의 지식 쪽으로 가져와질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이것은 하도 많은 진리들인지라, 그것들을 구별하고 인식하려고 종과 속으로 나누는 것조차 쉽지가 않다. 이것이 고대의 교회들에서는 학문이었다.
같은 기억 속의 지식도 끝 없는 거짓들로도 채워질 수 있다. 이에 대하여는 위의 전술한 진리들을 거꾸로 생각하면 될 것이다, 이런 식일 것이다, 즉 모든 이는 자신에게 이웃일 것이다, 그리고 모든 실례에서 이웃의 근원은 나자신으로부터 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가장 가까운 이웃은 나를 좋아하는 자이다, 그래서 나와 하나를 만드는 자이다, 그리고 나를 좋아하는 자 안에서 자신의 형상이 표출하게 하는 것이다; 자신의 이해득실에 유리하지 않으면 나라라 해도 내 이웃이 아니다; 등등이다. 그럼에도 기억 속의 지식은 똑같이 남아 있다; 즉 모든 사람은 이웃이다고 남아 있다는 말이다. 이런 사람은 진리로 그것을 채우고, 저 사람은 그것을 거짓들로 채운다. 이런 경우는 다른 기억 속의 지식들도 같다.

8-27절. 이집트로 내려간 이스라엘 가족들의 이름이 이러하니 야곱과 그 아들들, 곧 야곱의 맏아들 르우벤과 9 르우벤의 아들 하녹과 발루와 헤스론과 갈미요, 10 시므온의 아들 곧 여무엘과 야민과 오핫과 야긴과 스할과 가나안의 여인의 소생 사울이요 11 레위의 아들 곧 게르손과 그핫과 므라리요, 12 유다의 아들 곧 엘과 오난과 셀라와 베레스와 세라인데 엘과 오난은 가나안 땅에서 죽었고, 또 베레스의 아들 곧 헤스론과 하물이요 13 잇사갈의 아들 곧 돌라와 부와와 욥과 시므론이요, 14 스불론의 아들 곧 세렛과 엘론과 얄르엘이니 15 이들은 레아가 밧단 아람에서 야곱에게 낳은 자손들인데, 그 딸 디나를 합하여 남자와 여자가 삼십 삼 명이며, 16 갓의 아들 곧 시뵨과 학기와 수니와 에스본과 에리와 아로디와 아렐리요, 17 아셀의 아들 곧 임나와 이스와와 이스위와 브리아와 그들의 누이 세라며 또 브리아의 아들 곧 헤벨과 말기엘이니 18 이들은 라반이 그 딸 라헬에게 준 실바가 야곱에게 낳은 자손들이라 합 십 육명이요 19 야곱의 아내 라헬의 아들 곧 요셉과 베냐민이요 20 이집트 땅에서 온 제사장 보디베라의 딸 아스낫이 요셉에게 낳은 므낫세와 에브라임이요 21 베냐민의 아들 곧 벨라와 베겔과 아스벨과 게라와 나아만과 에히와 로스와 뭅빔과 훕빔과 아릇이니 22 이들은 라헬이 야곱에게 낳은 자손이라 합 십 사명이요 23 단의 아들 후심이요 24 납달리의 아들 곧 야스엘과 구니와 예셀과 실렘이라 25 이들은 라반이 그 딸 라헬에게 준 빌하가 야곱에게 낳은 자손이니 합이 칠 명이라, 26 야곱과 함께 이집트에 이른 자는 야곱의 자부 외에 육십 육명이니 이는 다 야곱의 몸에서 나온 자며, 27 이집트에서 요셉에게 낳은 아들이 두명이니 야곱의 집 사람으로 이집트에 이른 자의 도합이 칠십 명이었더라.

“이집트로 내려간 이스라엘 가족들의 이름이 이러하다”란 질서 안에서 영적 평면으로부터 온 진리들의 품질, 이것이 교회의 기억 속의 지식들 안으로 가져와짐을 의미한다. “야곱과 그 아들들”이란 전체적인 측면에서의 자연 평면 속의 진리, 그리고 세부 측면에서의 자연 평면 속의 진리들을 의미한다. “야곱의 맏아들 르우벤”이란 이해력에 있는 신앙, 이것이 첫 장소에서 가상적으로 있는다. “르우벤의 아들 하녹과 발루와 헤스론과 갈미”란 전체적인 측면에서의 신앙 속의 교리들을 의미한다. “시므온의 아들 곧 여무엘과 야민과 오핫과 야긴과 스할”이란 의지력에 있는 신앙과 전체적 측면에서의 그것의 교리들을 의미한다. “가나안의 여인의 소생 사울”이란 진짜 근원으로부터가 아닌 교리를 의미한다. “레위의 아들 곧 게르손과 그핫과 므라라”란 영적 사랑과 전체적 측면에서 그것의 교리들을 의미한다.
“유다의 아들들, 곧 엘과 오난과 셀라와 베레스와 세라”란 천적인 사랑과 그것의 교리들을 의미한다. “그런데 엘과 오난은 가나안 땅에서 죽었다”란 거짓과 악이 근절되어졌음을 의미한다. “또 베레스의 아들은 헤스론과 하물이다”란 선행의 선들로부터의 진리들을 의미한다. “잇사갈의 아들은 돌라와 부와와 욥과 시므론이다”란 천적 수준에서 있는 결혼의 사랑과 그것의 교리들을 의미한다. “스불론의 아들은 세렛과 엘론과 얄르엘이다”란 천국의 결혼과 그것의 교리들을 의미한다. “이들은 레아가 밧단 아람에서 야곱에게 낳은 자손들이다”란 이러한 교리들은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을 통하여 자연 평면에서 영적인 애정으로부터 있었음을 의미한다. “그 딸 디나”란 교회를 의미한다. “합하여 남자와 여자가 삼십 삼 명이다”란 영적 생명의 상태와 그 품질을 의미한다.
“갓의 아들은 시뵨과 학기와 수니와 에스본과 에리와 아로디와 아렐리이다”란 신앙의 선과 그로부터 파생된 일들과 그것들의 교리들을 의미한다. “아셀의 아들은 임나와 이스와와 이스위와 브리아와 그들의 누이 세라며 또 브리아의 아들 곧 헤벨과 말기엘이다”란 영원한 생명의 행복과 애착들로부터 있는 기쁨과 그것들의 교리들을 의미한다. “이들은 실바의 아들들이다”란 이들은 외적 교회 속에 있음을 의미한다. “라반이 그 딸 라헬에게 준”이란 외적 선에 대한 애착으로부터를 의미한다. “실바가 야곱에게 낳은 자손들이다”란 그들은 자연 평면으로부터 있었음을 의미한다. “십 육명이다”란 그들의 상태와 품질을 의미한다.
“야곱의 아내 라헬의 아들들”이란 천적인 애착으로부터 인 것을 의미한다. “요셉과 베냐민이다”란 교회의 내적인 것을 의미한다. “요셉”은 내적인 선을, “베냐민”은 거기서 파생된 진리를 의미한다. “그리고 요셉에게 이집트의 토지에서… 태어나졌다”란 천적 평면으로부터의 내적 부분과 자연 평면에 있는 영적인 것들을 의미한다. “온의 제사장 보디세라의 딸 아스낫이 그에게 낳았다”란 선이 진리와 결혼함 그리고 진리가 선과 결혼함으로부터를 의미한다. “므낫세와 에브라임”이란 새로운 의지력과 그것의 지성을 의미하고 이것은 교회 속에 있다. “베냐민의 아들들은 벨라와 베겔과 아스벨과 게라와 나아만과 에히와 로스와 뭅빔과 훕빔과 아릇이다”란 내적 부분으로부터의 영적인 것과 그것의 교리를 의미한다.
“이들은 라헬이 야곱에게 낳은 아들들이다”란 그들은 천적인 애착으로부터 이었음을 의미한다. “십 사명이다”란 그들의 상태와 품질을 의미한다.
“단의 아들은 후심이다”란 신앙의 거룩함과 생활의 선, 그리고 이들 속의 교리를 의미한다. “납달리의 아들은 야스엘과 구니와 예셀과 실렘이다”란 승리가 있는 시험들과 그것들에 관한 교리들을 의미한다. “이들은 빌하의 아들들이다”란 이들은 내적 교회 속에 있다를 의미한다. “라반이 그 딸 라헬에게 준…”이란 내적 선에 대한 애착으로부터를 의미한다. “칠 명이다”란 그들의 상태와 품질을 의미한다.
“야곱과 함께 이집트에 이른 자”란 교회의 기억 속의 지식 안으로 받아들이어진 모든 진리들과 선들을 의미한다. “야곱의 몸(넓적다리)로부터 나왔다”란 결혼으로부터 이었다를 의미한다. “야곱의 자부 외에”란 이 결혼으로부터 있지 않았던 것들에 대한 애착을 제외하고를 의미한다. “육십 육명이다”란 그들의 상태와 품질을 의미한다. “이집트에서 요셉에게 낳은 아들”이란 자연 평면에 있는 천적인 것과 영적인 것을 의미한다. “두 명이다”란 의지와 그로부터 파생된 지성을 의미한다. “야곱의 집 사람으로 이집트에 이른 자는 칠십 명이었다”란 질서 안에 꽉찼음을 의미한다.

위 구절에 대한 더 많은 설명은 생략하고 있다, 그 이유는 그들은 단지 이름들 뿐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의미하는 것은 방금 앞에서 주어진 일반적 설명으로부터 알 것이다. 그리고 야곱의 아들들 각각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하여는 그들의 출생이 있는 대목에서 알 수 있을 것이다. 한 가지 정리해둘 만한 것이 있다: 즉 야곱의 아들들은 비록 그들이 아직 젊다 해도 그들로부터의 아들의 출생이 이집트에서는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들의 아들들 모두는 가나안의 토지에서 출생했다는 것, 베냐민을 제외하고는 그들 모두가 밧단-아람에서 출생되었다. 이는 주님의 특별한 신성한 섭리로부터 이었다, 즉 교회 속의 것들이 그들의 출생 자체로부터 그들에 의해 표현되어야 한다는 질서 때문이다. 밧단-아람에서 태어난 야곱의 아들들은 교회 속의 것들은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들을 수단으로 새로이 태어나야만 한다는 것, 또는 거듭나야만 한다는 것을 표현했다; 그 이유가 “밧단-아람”은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들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의 출생은 신앙과 선행을 통하여 새로운 출생을 표현했다, 고로 처음에 이것들에 관한 지식들을 통하여서 이다. 그러나 그들의 아들들이 가나안의 토지에서 모두 태어나졌다는 것은 그때로부터 교회 속에 있는 이런저런 것들이 이었다는 것을 표현했다, 그 이유가 “가나안의 토지”는 교회를 표시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요셉에게 이집트에서 아들들이 태어났다는 것은 외적 인간 안에서 내적 인간이 지배함을, 특히 자연 평면에서 천적 평면으로부터의 영적 부분이 통치하는 것이 질서임을 표현했다, 즉 “므낫세”는 자연 평면에서 있게 되는 (새로운) 의지력 측면이고, 그리고 “에브라임”은 자연 평면에서 있게 되는 교회의 지적 능력(새로운 이해력)을 표현하는데, 이것을 교회가 소유해야 한다는 것이다. (** 요셉에 의해 표현되는 것을 두 목사는 조금씩 다르게 라틴어로부터 번역하고 있으나 말만 조금 다를 뿐 결국은 같은 말 뜻에 이른다. 즉 Potts 목사의 경우, the celestial spiritual 인데 천적 평면으로부터의 영적 부분이라고 역자는 번역했다. 그리고 참고로 보는 영역서인 Elliott 목사의 경우, the celestial of spiritual 이고 역자가 번역한다면 영적 평면 속의 천적 부분일 것이다. 모두 같은 말 뜻임을 알기 바란다. 역자주)

28-30절. 그리고 그는 그에 앞서 유다를 보내 자기에게 고센으로 가는 길을 보여주게 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고센의 토지에 왔다. 29 그리고 요셉은 그의 마차에 견인줄을 채웠다, 그리고 그의 아버지 이스라엘을 맞으러 고센으로 올라 갔다. 그리고 그는 그에게 보여졌다, 그리고 그의 목들을 어긋맞겨 안고 그의 목들에서 한참동안 울었다. 30 그리고 이스라엘은 요셉에게 말했다, 네가 아직 살아 있어 네 얼굴을 보았으니 나는 지금 죽어도 된다.

그리고 그는 그에 앞서 유다를 보냈다. 이는 교회 속의 선이 천적 평면으로부터의 내적 부분과 교통함을 의미한다. 이는 유다의 표현함이 교회의 선이다로부터; 그리고 요셉의 표현함이 천적 평면으로부터의 내적 부분이다로부터; “자기에 앞서 보낸다”란 교통하는 것임이 분명하다. 다른 사람이 아니고 유다가 보내진 이유는 선이 선과 교통한다는 것, 이는 직접적, 즉각적 교통함이 있다가 의미되도록 하기 위하여서 이다. 다시 말해 유다가 표현하는 외적 선이 요셉이 표현하는 내적 선과의 교통함이다. 직접, 즉각적이다고 말한 이유는 주님으로부터 흘러드는 주님을 사랑함으로부터 있는 선과 이웃을 향한 선행으로부터 있는 선은 내적 부분을 통하여 외적 부분 안으로 흘러들기 때문이다. 고로 외적 부분에서 받아진 선 만큼 거기에 선이 있게 된다. 그러나 만일 인간의 외적 부분에 선이 없이 신앙의 진리만 있다면, 이때 내적 부분을 통한 주님으로부터의 선의 유입은 외적 부분에서 받아지지 않는다; 그 이유가 진리와의 직접적인 교통함은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이 유다가 야곱에 의해 요셉에게 보내진 이유이다.

자기에게 고센으로 가는 길을 보여주도록. 이는 자연 평면의 중앙에 관련하여를, 즉 중앙에서(가장 깊은 곳에서) 교통이 있었다를 의미한다. 이는 “고센”이 자연 평면에서 중앙(midst, center, 즉 inmost)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자연 평면에서 중앙, 또는 가장 깊음에 의하여 자연 평면에서 가장 좋은 곳이 의미된다, 그 이유가 가장 좋은 것이 중앙에 있기 때문, 즉 중앙에 가장 좋은 것으로부터 선함의 등급에 따라 중앙으로부터 변두리쪽으로 점점 멀어져 가서 위치하는 것이 천국의 배열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배열은 거듭나는 자 안에서 선들의 질서적인 배열이기도 하다. 그러나 사악한 자와 더불은 배열은 가장 악한 것이 중앙에, 그리고 선들은 추방되고 계속 밀려나서 완전 외곽으로, 결국은 바깥으로 내몰린다. 이것은 사악한 자들의 개인적으로 지니는 형체이고, 일반적으로는 지옥들이다. 고로 이것은 지옥의 형체이다. 중앙에 가장 좋은 것, 그리고 측면을 향하여 선들이 질서에서 배열됨에 관하여 위에서 말한 바로부터 교회의 선이 천적 평면으로부터의 내적 부분과 교통함이 뜻해지는 것은 자연 평면에서 중앙에 관련되는 것과 더불어서 임이 분명하다.

(** “그리고 그들은 고센의 토지에 왔다”란 거기에 생명이 거주함을 의미한다. 이 대목을 추가로 설명하는 문항은 원문에서 있지 않다 역자주.)

그리고 요셉은 그의 병거에 견인줄을 채웠다”란 내적 부분으로부터의 교리를 의미한다. 이는 요셉의 표현함이 내적 부분이다로부터; “병거”의 의미함이 교리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리고 그의 아버지 이스라엘을 맞으러 … 올라 갔다. 이는 유입을 의미한다. 즉 천적 평면의 내적 부분으로부터 자연 평면으로부터 있는 영적 선 안으로 유입됨을 의미한다. 이는 “맞으러 올라가는” 자인 요셉의 표현함이 천적 평면으로부터의 내적 부분이다로부터; 그리고 이스라엘의 표현함이 영적 선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고로 “그를 맞으러 올라 가는 것”은 유입을 표시한다, 그 이유가 “맞으러 올라 가는”것이 자신을 그쪽으로 향하게 하는 것이고 그에게 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고센으로. 이는 자연 평면의 중앙에를 의미한다. 이는 방금 앞에서 설명했다.

그리고 그는 그에게 보여졌다. 이는 지각을 의미한다. 이는 “보다”의 의미가 이해하다와 지각하다 이다로부터, 그리고 또한 신앙을 가지는 것이다로부터 분명해진다. 모두에게 알려져 알고 있는 것 중 하나는 인간과 더불어 그의 생명을 구성하는 두 가지의 것이 있다는 것, 그것은 영적 빛과 영적 열이다. 영적 빛은 그의 이해력을 만들고, 영적 열은 그의 의지력을 만든다. 영적 빛은 주님의 신성한 선으로부터의 신성한 진리로부터 그것의 근원이 있다, 그러므로 선행의 선으로부터의 신앙의 진리이다. 영적 열은 주님의 신성의 사랑으로부터의 신성한 선이 그것의 근원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주님을 사랑함의 선인 천적 수준의 사랑과 이웃을 향한 선행의 선인 영적 수준의 사랑의 선이다. 위 둘이 인간의 전체 생명을 구성한다.
영적 빛에 주목해보자, 영적 빛은 이해력 안에서 이해력과 더불어 있다, 마치 자연계의 빛이 외적 시각에서 시각과 더불어 있는 것과 같다; 즉 눈이 보기 위하여서 빛이 조명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이때 눈은 눈의 바깥쪽 빙둘러 있는 것들을 본다; 그러나 눈이 보는 대상물들은 영적 이다, 즉 기억 속의 지식들과 진리들이다. 그러나 이 빛이 조명되지 않을 때, 지적 마음 또는 인간의 내적 눈은 마치 외적 또는 육체의 눈 같이 어둠에 있고, 아무것도 보지 못한다, 즉 기억 속의 지식들로부터의 진리의 어떤 것도, 그리고 진리로부터의 선의 어떤 것도 보지 못한다. 지적 마음을 비추이는 빛이 진정한 빛 자체이다, 그리고 이 빛은 자연계의 정오의 빛을 수 천 배 이상을 능가하는 빛임을 나는 내가 보았기에 증거하고 있다. 이 빛을 수단으로 천국들에 있는 모든 천사들은 자신들 바깥쪽을 빙둘러 볼 수 있고, 또한 같은 빛을 수단으로 그들은 신앙으로부터 있는 진리들과 그것의 품질을 보고 지각한다. 이로부터 “보다”에 의해 영적 의미에서 이해함 뿐만 아니라, 이해력으로부터 있는 것은 무엇이든, 즉 생각, 반영, 관찰, 신중, 등등 많은 이런저런 것들을 의미하게 된다; 마찬가지로 신앙, 뿐만 아니라 신앙으로부터 있는 무엇이든, 즉 진리, 말씀으로부터의 교리, 등등까지도 의미한다.
영적 열에 주목해보자. 이 열은 인간의 의지력 안에 의지력과 더불어 있다, 마치 자연계의 열이 육체 안에 육체와 함께 있어 생기 있게 하는 것과 같다. 그러나 그것의 첫 근원에서 이 근원은 주님으로부터 이다, 영적 열은 보편적 인류를 향한 신성한 사랑이다, 그리고 이로부터 그분에 대한 상호적인 사랑과 이웃을 향한 사랑이 있다. 이 영적 열이 진정한 열 자체이다, 이 열이 열을 가지고 천사들의 몸을 기쁘게 한다, 동시에 사랑으로 그들의 내면을 기쁘게 한다. 이로부터 “열,” “불꽃,” “불”이 말씀에서 사랑에 속하는 것들을 진짜 의미에서 의미한다, 즉 선과 진리에 대한 애착, 그리고 또한 선 자체 등등이다.

그리고 그의 목들을 어긋맞겨 안았다. 이는 결합을 의미한다. 이는 “목들을 어긋맞겨 안다”의 의미가 결합이다로부터, 즉 대단히 가깝고 친밀한 결합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 대목이 결합을 의미하는 이유는 목은 머리와 몸을 함께 결합되게 하기 때문, 그리고 “머리”에 의해서 내면들이, “몸”에 의해서는 외면들이 의미되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목”은 내면들이 외면들과 결합함을 표시한다. 고로 내면들이 외면들과, 또한 천적인 것들이 영적인 것들과 교통함이 결합 덕택인 바, 같은 단어들에 의해 의미된다, 그 이유가 “요셉”은 내적 부분을, “이스라엘”은 요셉에 비교해서 외적 부분이기 때문이다.

그의 목들에서 한참동안 울었다. 이는 자비를 의미한다. 이는 “울다”의 의미가 자비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의 목들에서 한참동안 울었다”라고 말해진 이유는 결합의 처음 그리고 계속되는 결합이 자비, 최고 의미에서 “요셉”인 주님의 자비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요셉에게 말했다. 이는 영적 선이 지각함을 의미한다. 즉 천적 평면으로부터의 내적 부분이 지각함을 의미한다. 이는 “말하다(say)”가 말씀의 역사 부분에서 지각함이다로부터; 요셉의 목들에서 울었던 이스라엘의 표현함이 영적 선이다로부터; 그리고 요셉의 표현함이 천적 평면으로부터의 내적 부분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에 관한 모두는 이미 앞쪽에서 상세히 알려져 있다.

나는 지금 죽어도 된다. 이는 새 생명을 의미한다. 이는 “죽는다”의 의미가 생명으로 부활함이다로부터, 고로 새로운 생명이다. “죽는다(dying)”가 생명의 새로움을 의미하는 이유는 위의 열거한 항들에서 보여준 바 있다; 즉 인간이 죽을 때, 즉각 그의 생명의 새로움이 시작된다; 그 이유가 지금까지 세상에서의 삶을 섬겨주기 위해 입었던 물질적 몸을 벗고 생명 안으로 일으켜지기 때문이다. 여기서 새로운 생명이 “죽는다”에 의해 의미된 이유는 새로운 생명은 내적 부분을 수단으로 유입으로부터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결합으로부터, 이것은 요셉이 이스라엘의 목들을 어긋맞겨 안음“에 의해 의미되었다.

내가 네 얼굴들을 보았으니. 이는 자비를 인지했으니를 의미한다. 이는 “보다”의 의미가 인지하다(notice)이다로부터; 그리고 “얼굴들”의 의미가 주님을 서술할 경우, 자비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네가 아직 살아 있다. 이는 자신 안에 그 결과로서 있는 생명을 지각함을 의미한다. 이는 “살아 있다”가 내적 의미에서 영적 생명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자신 안에서 이 생명을 지각함이 의미된 것은 앞의 진행된 상황에 이어져서 이다. 그리고 그를 봄에서 있는 환희가 자신 안쪽에 생명이 현존함을 지각하게 했다.

31-34절. 그리고 요셉은 그의 형제들에게, 그리고 그의 아버지의 집(식구)에게 말했다. 나는 올라 가서 바로에게 말할 것입니다, 내 형제, 그리고 내 아버지의 집이 가나안의 토지에 있었는데, 나에게 왔습니다. 32 그리고 이 사람들은 양떼를 치는 목자들입니다, 그들은 가축을 치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기들의 양떼와 목축과 그들이 가진 모든 것을 가지고 왔습니다. 33 그리고 아마 바로는 당신을 부를지 모릅니다, 그리고 말하기를, 너의 일들은 무엇이냐? 34 그러면 당신은 말하십시오, 당신의 종들은 젊은 시절로부터 지금 까지 조차, 우리 모두, 그리고 조상도 모두 가축을 치는 사람들이였습니다. 이는 당신이 고센의 토지에 거주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입니다. 그 이유가 이집트 사람들은 양떼를 치는 목자를 지겹게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요셉은 그의 형제들에게 말했다. 이는 자연 평면에 있는 진리들이 지각함을 의미한다. 이는 “말하다(say)”의 의미가 지각하다 이다로부터; 이스라엘의 아들들의 표현함이 자연 평면에 있는 영적 진리들이다로부터; 그리고 요셉의 표현함이 천적 평면으로부터의 내적 부분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상으로부터 분명한 바, “요셉이 말했다”에 의해 그가 지각함이 의미되지 않는 이유는 요셉은 내적 부분이기 때문, 그리고 모든 지각함은 내적 부분을 통하여 외적 부분, 또는 자연 평면으로 흐르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자체 스스로로부터 자연 평면은 무엇이든 아무것도 지각하지 못하고, 오직 그 자체에 앞서 있는 것으로부터만 지각한다; 물론 앞의 것이라 해도 자체로부터서는 아니고 그 앞의 앞의 것으로부터 지각이 가능하다, 고로 마지막 앞의 것은 그분 자신으로부터 계신 주님이시다. 이와 같음이 유입의 본성이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것이 지각의 본성이다. 유입과 더불어 출시됨(공표됨, coming forth)과 존속됨(subsistence)이 있다. 자체로부터 출시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러나 앞의 것으로부터 이다, 고로 모든 것들은 처음(First)으로부터, 즉 자체적(Itself)으로 있음(Esse)과 존속함(Existere)이신 분으로부터이다. 또한 같은 것으로부터 모든 것들은 존속한다, 그 이유가 계속적인 출시됨이 항구적인 존속함이 되기 때문이다. “이런 진리들 안에 있는 이들이 지각한다”라고 말하지 않고, “자연 평면에서 진리들이 지각한다”라고 말해진 이유는 이와 같은 표현이 영적 언어이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이 방법에서 생각 속의 관념(idea)이 인물들로부터 추상화 되기 때문, 그리고 어떤 것들 쪽으로 결정을 내려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떤 것들, 즉 진리들과 선들은 인간과 더불어 살아 있고, 인간을 살아 있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이것들은 주님으로부터 있고, 이 분으로부터 생명의 모든 것이 있기 때문이다. 이런 방법에서 또한 진리들과 선들을 인물의 것이라고 여기려고 생각함으로부터 물러나게 한다. 이와 같은 언어를 수단으로 일반적인 관념을 가지게 되는 바, 이 관념은 당사자의 생각이 진리들과 선들에 인접하는 것 보다 더 드넓게 확장되게 해준다; 예를 들면, 만일 “이런 진리들 안에서 이들이 지각한다”라고 말해진다면, 관념들은 즉시 인물에 국한되어지고 만다, 하여 그것들은 일반적인 관념으로 물러나는 것이 발생된다; 동시에 이런 방식이라면, 진리의 빛으로부터의 계발됨이 흐지부지 되어진다. 더욱이 다른 삶에서, 인물들에 대한 생각은 그것을 생각한 이들을 흥분시킨다; 그 이유가 다른 삶에서 모든 생각이 교통되어지기 때문이다. 이 교통함이 있는 이유는 말함의 추상화 된 형체가 사용되기 때문, 그 한 예가 여기서의 “자연 평면에서 진리들의 지각함이 있다” 이다.

그리고 그의 아버지의 집(식구)에게 말했다. 이는 거기서 선들에 관하여, 즉 선들에 관하여 지각함이 있다를 의미한다. 이는 “집(house)”의 의미가 선이다로부터; 그리고 “아버지”의 의미가 선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나는 올라 가서 바로에게 말할 것입니다. 이는 교회의 기억 속의 지식들이 있는 자연 평면과 소통함을 의미한다. 이는 “말하다(tell)”의 의미가 교통하다 이다로부터; 그리고 바로의 표현함이 교회의 기억 속의 지식들이 있는 자연 평면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말하기를, 내 형제, 그리고 내 아버지의 집이 가나안의 토지에 있었는데, 나에게 왔습니다. 이는 교회의 진리들과 선들에 관련하여서 이고, 그것들이 받아들이어졌다를 의미한다. 이는 “이스라엘의 아들들”의 표현함이 자연 평면에 있는 영적 진리들이다로부터; “아버지의 집”의 의미가 거기에 있는 선들이다로부터; “가나안의 토지”의 의미가 교회이다로부터; 그리고 “요셉에게 오다”, 또는 요셉이 있는 이집트로 오다의 의미가 교회 속에 있는 기억 속의 지식들 안으로 받아들어졌다 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리고 이 사람들은 양떼를 치는 목자들입니다. 이는 그것들은 선으로 인도한다를 의미한다. 이는 “양떼의 목자들”의 의미가 선으로 인도하는 이들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 이유가 가르치고 인도하는 자가 “목자”이고, 가르침을 받고 인도 받는 자가 “양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적 의미에서 선으로 인도하는 진리들이 뜻해진다, 그 이유가 여기서 “사람들”인 이스라엘의 아들들을 수단으로 “양떼의 목자들”은 영적 진리들을 표현하기 때문이다. 더욱이 그것을 가르치는 이들과 더불어서는 인도하는 진리들이다. 신앙 속에 있는 진리들이 선행 속에 있는 선 쪽으로 인도한다는 것은 이미 살핀 바 있다; 같은 논리에서, 일반적, 세부적, 특수적 측면에서의 모든 것들은 목적에 관련이 있고, 목적을 바라보고 있다, 그리고 목적을 바라보지 않는 것들은 존속할 수가 없다. 그 이유가 주님은 목적을 위하여가 아닌 것은 창조하신 것이 없으시기 때문이다; 같은 취지인 것은, 창조되어진 모든 것들 안에서 목적은 모든 것이다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리고 창조되어져 왔었던 모든 것들이 이런 질서에 있는 바, 처음으로부터 중간의 것들을 통하여 있는 모든 것들은 마지막의 것들, 또는 최말단의 것들을 바라보고 있다, 하여 마지막, 또는 최말단에 있는 목적은 처음 안에서 있는 목적을 중요시하고 있다. 이로부터 이것과 저것의 연결이 온다. 처음 근원으로부터 목적 자체는 신성의 사랑으로부터의 신성한 선밖에 더 없다; 고로 이는 주님 자신이시다. 그러므로 말씀에서 그분은 “처음과 마지막”, “알파와 오메가”이라 불리우신다 (이. 41:4; 44:6; 48:12; 계1:8, 11, 17; 2:8; 21:6; 22:13). 이럴진대, 인간과 더불은 생명에 속하는 각각 그리고 모든 것들은 목적에 관련되어 있어야 하고, 목적을 바라보고 있어야 할 것이다. 합리적 능력의 얼마라도 겸비한 자라면 알아챌 수밖에 없는 것은, 인간과 더불은 기억 속의 지식들은 그것들의 목적으로 진리들을 바라보고 찾는다는 것, 그리고 진리들은 그것들의 목적으로 선들을 바라보고 찾는다는 것, 그리고 선들은 마지막이고 처음의 목적이 되시는 주님을 바라보고 찾는 것이다; 그들이 그분을 진리들로부터 바라보고 찾을 경우 그들은 마지막에 있는 목적 측면에서 이다. 만일 그들이 선으로부터 주님을 바라보며 찾을 경우, 그들은 처음에 있는 목적 측면에서 이다. 선 쪽으로 인도하는 교회의 진리들의 경우가 이럴진대, 이것이 “사람들은 양떼의 목자들입니다”에 의해 의미된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가축떼의 사람들”이다가 아래에서 이어진다.

그들은 가축을 치는 사람들입니다. 이는 그들은 진리들로부터의 선을 가지고 있다를 의미한다. 이는 “가축떼(cattle)”의 의미가 진리의 선, 진리들로부터의 선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것이 자연 평면에 있는 영적 진리들인 이스라엘의 아들들에 관련되어 말해진다; 고로 선 쪽으로 인도하는 진리들을 두고 말해진다.

그래서 그들은 자기들의 양떼와 목축과 그들이 가진 모든 것을 가지고 왔습니다. 이는 내면의 선, 외면의 선 그로부터 있는 것은 무엇이든 현존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는 “양떼”의 의미가 내면의 선이다로부터; “목축떼”의 의미가 외면의 선이다로부터; “그들이 가진 모든 것”의 의미는 거기로부터 있는 무엇이든 이다로부터; 그리고 “그들이 가져왔다”의 의미가 현존하고 있다 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리고 아마 바로는 당신을 부를지 모릅니다. 이는 만일 자연 평면 안에 교회의 기억 속의 지식들이 있다면 합쳐지기를 뜻할지 모른다를 의미한다. 이는 “자신에게로 부른다”의 의미가 결합이 있기를 뜻한다 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 이유가 그들이 자기의 토지 안에서 거주하게 하고 장차 자신과 더불어 하나의 나라가 되게 하고 싶은 애착으로부터 자신에게로 부른 것은 결합되기를 뜻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로의 표현함이 교회의 기억 속의 지식들이 있는 자연 평면이다로부터도 알려진다. 바로가 부름에 의해 받아들이어짐과 결합이 상호적이다는 것, 즉 교회의 기억 속의 지식들과 자연 평면의 선들과 진리들의 결합과 상호 받아들이어짐이 의미된다; 그 이유가 모든 결합은 상호성, 즉 양쪽이 동의함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교회의 진리들이 교회의 기억 속의 지식들과 결합함이 여기서 다루어지고 있는데, 우리가 유념해야 할 것이 있다: 즉 실로 결합의 시작이 기억 속의 지식들로부터 만들어지지 않는다는 것, 그러나 이를 통하여 결합으로 진입함은 신앙의 진리 쪽에서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인간과 더불은 기억 속의 지식들은 감각의 것들부터 파생되기 때문, 고로 세상의 것들로부터 파생되는 바, 거기로부터서는 무수한 오류들이 있기 때문이다. 결합의 출발은 신앙의 진리들로부터만 있어야함이 틀림이 없다. 첫째, 교회의 교리적인 것들을 배워야만 한다, 그 다음 이 교리들이 진정한 진리인지를 말씀으로부터 검사되어야 한다; 그 이유는 교회의 우두머리가 이렇게 저렇게 말했고, 추종자들이 그것이 맞다고 확증했다고, 그 나라에 오래전부터 있어온 교회로부터의 교리이니까, 또는 자기의 출생 때부터 인간들이 그것들을 붙들고 있으니까, 다시 말해, 교황의 교리적인 것이든, 퀘이커의 교리적인 것이든, 유태인들의 것이든, 심지어 모하멭의 것이든, 모두를 아울러 몽땅 진리라고, 즉 맹목적 추종함은 위험 천만하기 때문이다. 고로 알게 되는 것은, 말씀은 수색되어져야만 한다는 것, 하여 교리가 진정 진리인지를 반드시 보아야만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진리에 애착함으로부터 행해질 때, 이때 인간은 거기로부터의 앎 없이 진리인 것을 지각하기 위하여 주님에 의해 계발되어진다. 그리고 자신이 지닌 선에 일치함에 따라 계발됨 안에서 진리의 확증함이 있게 된다. 만일 이런 진리들이 교리적인 것들과 불일치한다면, 자기로 하여금 교회를 휘젖지 않도록 조심하게 해야 한다.
그 후에, 그가 확증했을 경우, 고로 교리적인 것들이 신앙의 진리들이다는 것을 말씀으로부터 확언했을 경우, 이때 그는 자기가 소유한 기억 속의 모든 지식들을 수단으로 그것들을 확증하게 허용할 수 있다; 그 이유는 확언한 것이 보편적으로 통치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일치하는 기억 속의 지식들은 받아들이되, 그것이 오류를 포함했기에 불일치하는 것은 거절한다. 그 이유가 신앙은 기억 속의 지식들을 수단으로 힘세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자신들이 출생한 교회의 교리적인 것들이 진리인지 여부를 알려는 애착으로부터 성경을 수색하는 것은 누구에게나 금해지지 않는다. 그 이유가 그가 계발될 수 있는 방법은 이외 달리 있지를 않다. 이것이 행해진 후, 그가 기억 속의 지식들을 가지고 자신의 성벽을 튼튼히 하는 것 역시 금지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가 계발되기도 전에 자신의 방어벽부터 튼튼히 하려는 것은 질서상 맞지가 않다. 이상 설명한 것이 신앙의 진리들이 기억 속의 지식들과, 이외 모든 다른 지식들 무엇이든지와 결합해가는 방법이고 유일한 방법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오늘날 이 순서를 따르는 이는 흔치가 않다; 그 이유가 말씀을 읽는 대부분의 인물들이 진리에 대한 애착으로부터 읽지 않기 때문, 대체로 자기들이 내세운 교리들과 맞는 대목이 어디 있나 하고 탐사하는 것이 대부분의 경우이기 때문, 한마디로 자신의 주장을 말씀에게 증명해내라고 윽박지르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
주님의 왕국을 묘사하는 말씀에서, 그 안에는 영적, 합리적, 그리고 기억 속의 지식들이 함께 결합되어 있다; 그러나 이것이 단지 이름들만을 열거함으로 의미되고 있다; 즉 “이스라엘,” “앗시리아,” 그리고 “이집트”라는 나라 이름에 의해서이다. “이스라엘”에 의해서는 영적 측면이, “앗시리아”에 의해서는 합리적 측면이, “이집트”에 의해서는 기억 속의 지식이 의미된다 아래 말씀을 읽어보자:
그 날에 이집트의 토지의 한가운데에 여호와의 제단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거기로부터의 경계선 가까이에 여호와께 기둥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이집트의 토지에 있는 여호와 체바욷에게 표시를 위해, 그리고 거기로부터의 증거를 위해 있을 것이다; 그 이유가 그들은 압제자 때문에 여호와께 외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분은 그들에게 구조자, 그리고 제 1 인 자를 보낼 것이다, 그리고 그가 그들을 구원해낼 것이다. 그리고 여호와는 이집트에게 알려지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집트인들은 그 날에 여호와를 알 것이다, 그리고 제물과 식사 제물을 바칠 것이다, 그리고 여호와께 서약을 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수행할 것이다. 그 날에 이집트로부터 앗시리아 로 작은 길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앗시리아는 이집트 쪽으로 올 것이다, 그리고 이집트는 앗시리아 로, 그리고 이집트인들이 앗사리아를 섬길 것이다. 그 날에 이스라엘은 이집트와 더불어, 그리고 앗시리아와 더불어 세 번째 일 것이다, 그리고 토지의 한 가운데에서 행복할 것이다; 이것을 여호와 체바욷께서 복주실 것이다, 말하시기를, 이집트 나의 백성은 복될지어다, 그리고 앗시리아 는 내 손의 일이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나의 상속이다 (이. 19:19-25);
모든 이가 쉽게 알 수 있는 것은, 위 구절에서 이집트가, 앗시리아가, 이스라엘이 뜻해지지 않고 그 나라들의 이름을 수단으로 그밖의 뭔가를 뜻할 것이라는 것이다. 셋이 교회인 안에서 함께 결합되어 있다는 것이 예언자의 말, 즉 “이집트로부터 앗시리아로의 작은 길이 있을 것, 그리고 앗시리아가 이집트로 올 것, 그리고 이집트는 앗시리아로, 그리고 이집트는 앗시리아를 섬길 것; 그 날에 이스라엘은 이집트, 앗시리아 다음으로 세 번째 일 것, 토지의 한가운데에서 복될 것”에서 묘사되어 있다. 그 이유가 인간이 교인이 되기 위하여, 필요한 것은 그가 영적 인간, 합리적 인간이 되고, 이 인간들을 섬기는 기억 속의 지식들과 더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모두로부터 분명해지는 바, 기억 속의 지식들은 신앙의 진리들로부터 결코 거절되어서는 안된다는 것, 그러나 그것들과 결합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결합은 전자의 방법, 즉 신앙으로부터의 방법을 수단으로, 그러나 후자의 방법이 아니다는 것, 즉 기억 속의 지식들로부터의 방법은 아니다는 것이다.

그리고 말하기를, 너의 일들은 무엇이냐? 이는 그리고 당신의 선들을 알려고를 의미한다. 이는 일들의 의미가 선들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일들”이 선들인 이유는 선들은 의지로부터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의지로부터 있는 것은 선, 또는 악이다, 그러나 이해력으로부터 있는 것들, 즉 강연, 설교 등등은 진리, 또는 거짓이다. 야곱의 아들들의 일들, 또한 그들의 조상들의 일들은 가축에 풀을 뜯기는 것, 고로 목자들로서 행동하는 것이다. 이 일들이 선들을 의미하는 또 하나는 특별하게 진리들로부터의 선들이다. 일들이 이런 의미를 가지는 것은 상응으로부터이다, 그 이유가 양떼에 속하는 것들인 어린 양, 양, 염소새끼, 염소가 선행의 선에 상응하기(내적 선) 때문이다; 목축에 속하는 거세한 수소, 수소도 마찬가지(외적 선)이다. 이것들이 상응하는 것은 이런 사실로부터, 즉 천사들이 선행의 선에 관하여 대화를 할 때, 영들의 세계 어딘가에서, 또한 첫 천국, 또는 최말단 천국의 어딘가에서 양떼와 목축떼가 나타난다는 사실로부터 분명해진다. 천사들이 선행으로부터의 내면의 선을 이야기 할 때는 양떼가, 외면의 선일 경우는 목축이 나타난다. 이런 이유로 말씀에서 이런 사항들이 “양떼와 목축떼”에 의해 의미된다. 일반적으로 말씀에서 있는 모두 각각의 의미함은 다른 삶에서의 표현들로부터 그것의 근원을 가진다, 그리고 이것들은 상응으로부터 이다. 이유인 즉, 원인과 결과의 관계 같이 자연계는 영계로부터 있기 때문, 고로 자연계에서 원인으로 행동한다. 이 방법에서 이 세계의 모든 것들은 방침과 질서에서 함께 붙들고 있다.

그리고 당신은 말하십시요, 당신의 종들은 그들의 젊은 시절로부터 지금까지 조차 가축을 치는 사람들이였습니다. 이는 시작으로부터 지금까지 그들은 선이 있게 하는 진리들을 가지고 있다를 의미한다. 이는 “가축을 치는 사람들”의 의미가 진리로부터 선이 있다 이다로부터; 그리고 “그들의 젊은 시절로부터 지금까지”의 의미가 시작으로부터 아직까지 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가축떼”가 선을 있게 하는 진리들이다에 주목해보자, 모두가 아는 것은, “가축떼”에는 덩치가 크든 작든 짐을 싣는 모든 짐승들, 양떼와 목축들, 그리고 또한 낙타들, 노새들, 나귀들 모두에서 이다. 짐을 싣는 짐승은 진리들에 관련되는 이런저런 것들을 의미한다, 그러나 목축들과 양떼들은 선에 관련되는 이런 저런 것들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그러므로 “가축떼”인 일반적으로 짐을 싣는 모든 짐승들은 선인 것을 있게 하는 진리를 의미한다. 단어 “가축떼(cattle)”가 원어에서는 “습득물(acquisition)”을 뜻하는 단어로부터 이다, 그리고 “습득물”은 영적 의미에서 선을 있게 하는 진리이다, 그 이유가 선은 진리를 수단으로 획득되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작은 가축떼”는 내면의 선들을 의미한다, 그 이유가 이들에는 양떼에 속하는 것, 어린 양, 양, 염소새끼, 염소, 숫양이기 때문이다. “가축떼”가 선을 있게 하는 진리인 것을 다른 구절에서도 확인 해보자:
그때 그분은 네 씨에게 비를 주실 것이다, 이와 더불어 너는 토지에 씨를 뿌릴 것이다; 그리고 빵의 증가(가 있다); 그리고 그것은 지방일 것이고 풍부할 것이다; 그 날에 네 가축떼는 넓은 목초지에서 풀을 뜯을 것이다 (이. 30:23);
“풀을 뜯는 것”은 진리들 안에서와 선에 관하여 가르침이 있는 것을 표시한다; “넓은 목초지”는 진리의 교리를 표시한다; “넓다”라고 말해진 이유는 “넓이”가 진리이기 때문이다. 고로 “가축떼”는 진리들로부터 선이 있음이 분명하다.
네 손을 (이제는) (사람이) 살게 된 황폐된 곳 위에, 그리고 가축떼와 소유물을 가지고 일하며, 땅의 배꼽(중앙)에 거주하는 (여러) 나라로부터 그러모은 백성 위에로 도로 가져다 놓는 것 (노략질 하려 드는 것) (겔. 38:12);
위 구절에서도 마찬가지로 “가축떼”는 진리들을 통하여 선이 있음을 표시한다; 그리고 “소유물”은 선을 표시한다.

우리 모두, 그리고 조상들도. 이는 처음의 선들로부터 그렇게 있었다를 의미한다. 이는 “조상들(fathers, 아버지들)”의 의미가 선들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고로 가축을 치는 사람들, 또한 조상들 모두는 처음의 선들로부터를 표시한다. 말씀에서 “조상들”에 의해 아브라함, 이삭, 야곱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이들보다 훨씬 먼 선조이며 선 안에 있었던 고대 교회에 속했던 이들이 뜻해진다.

이는 당신이 고센의 토지에 거주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입니다. 이는 그렇게 당신의 거주지는 교회의 기억 속의 지식이 있는 자연 평면의 한 중앙이다를 의미한다. 이는 “거주하다”의 의미가 삶이 있다 이다로부터; 고로 삶의 거주지들이다; 그리고 “고센”의 의미가 자연 평면의 중앙, 또는 가장 안쪽이다로부터. 거기에 “이집트”에 의해 의미되는 교회의 기억 속의 지식들이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 이유가 고센은 이집트의 최상의 지역이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이집트 사람들은 양떼를 치는 모두 각각의 목자를 지겹게 여기기 때문입니다. 이는 교회의 기억 속의 지식에 반대되고 있는 왜곡된 기억 속의 지식과 분리됨을 의미한다.
이는 “이집트인들의 역겨워하는 것”의 의미가 기억 속의 지식들을 분리함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 이유가 역겨운 것들이 분리되는 이유는 그것들이 원리들과 사랑들을 받아들임에 반대되어 있기 때문 이다; 현재의 경우, “양떼의 목자라면 누구든지 이집트인들에게는 역겹다”라고 말해질 경우에서의 이집트인에 의해 의미된 것, 즉 거꾸로된 기억 속의 지식들에 반대함이다; 그리고 “양떼의 목자”의 의미가 선으로 인도하는 자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선을 확증하는 기억 속의 지식에 타락된(악용된) 기억 속의 지식들은 같은 부류의 지식들이지만 서로에게 반대적 이다. 악용된 기억 속의 지식들은 신앙의 진리들과 선행의 선을 파괴한다, 그리고 또한 질서를 거꾸로 하고 있다, 마치 마술사들이 이집트에 존재하는 것과 같다. 그 이유가 질서에 일치하는 아주 많은 것들을 이런 마술사들은 남용하기 때문이다, 즉 상응들과 표현들을 남용한다는 말이다. 사실상 이것들은 여느 평범한 이들에서 보다 마술사 같은 이들 사이에서 더 발달되어 있다. 악한 자들이 표현과 의미, 상응들을 응용할 때 조차 그것들은 질서에 따르고 있다, 그 이유가 이들이 그것들을 응용함에서 타인에게 명령함을 실행하고, 타인에게 피해를 주는 행위가 초래되기 때문인데, 그것들이 뒤집혀 마술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반대되는 것의 분리함이 중요한 바, 여기서는 진리들과 더불은 선이 “고센”에 의해 의미된 (자연 평면의) 중앙에 있게 될 때 거행되어 질서 안으로 가져오는 식으로 하여 결과되고 있다; 그 이유가 반대적인 악용된 기억 속의 진리들은 내던져야 하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취급한 주제는 진리들이 기억 속의 지식들과 결합함이었다. 더 나아가 내적 부분, 또는 영적 인간이 외적 부분, 또는 자연적 인간과의 결합은 진리들이 기억 속의 지식들 안으로 은근히 심어지지 않으면 가능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 이유가 자연적 수준의 애착들의 기쁨들과 함께 기억 속의 지식들은 외적 또는 자연적 인간을 구성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결합이 기억 속의 지식들과 더불어서 결과되어 있지 않으면 어떤 것도 결과되는 것은 없게 된다는 말이다. 그렇지만 인간이 거듭나도록 하기 위하여는 그의 내적 부분과 외적 부분은 함께 결합하여야만 한다, 그 이유가 그것들이 결합되어 있지 않으면, 내적 인간을 통하여 외적 또는 자연적 인간 안으로 주님으로부터 흘러드는 모든 선은 악용되거나, 질식되거나, 거절되기 때문이다, 이때 내적 인간은 닫히고 만다. 하여 이 결합이 결과되는 방법이 이 장에서 묘사되어 왔다, 이 방법은 진리들을 기억 속의 지식들 안으로 삽입하는 수단들에 의하여서 이다.
**************************************

창세기 제 47 장

성경: 창세기 47장

1. 요셉이 바로에게 와서 말했다, 그리고 말했다, 나의 아버지와 나의 형제들, 그리고 그들의 양떼들, 그리고 그들의 목축들, 그리고 그들이 가진 모든 것이 가나안의 토지로부터 왔습니다. 그리고 보라 그들은 고센의 토지에 있습니다.
2. 그는 형제들 중에서 다섯 사람을 데려다가 바로 앞에 세웠다.
3. 그리고 바로가 그의 형제에게 말했다, 너희들은 무슨 일을 하느냐? 그리고 그들은 바로에게 말했다, 당신의 종들은 양을 치는 목자인데, 우리 모두와 우리의 조상들도 목자입니다.
4. 그리고 그들이 바로에게 말했다, 우리는 이 토지에 머무르려고 왔습니다. 그 이유가 당신의 종들의 양떼를 위한 풀밭이 없기 때문입니다, 기근이 가나안의 토지에 극심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지금 바라옵건대 당신의 종들이 고센의 토지에서 거주하게 해주십시오.
5. 그리고 바로는 요셉에게 말했다, 말하기를, 너의 아버지와 네 형제들이 너에게 왔다.
6. 네 앞에 이집트의 토지가 있다. 토지의 가장 좋은 곳에서 네 아버지와 네 형제들이 살게 하라. 그들로 고센의 토지에서 거주하게 하라. 그리고 네가 알아보아 그들 사이에 활동적인 자가 있다면 내 가축의 제 1인 자로 세워라.
7. 그리고 요셉은 그의 아버지 야곱을 모셔와서 바로 앞에 세웠다. 그리고 야곱은 바로를 축복하였다.
8. 그리고 바로가 야곱에게 말했다, 네 나이가 얼마인가?
9. 그리고 야곱은 바로에게 말했다, 내가 머무르고 있는 햇수들의 날들은 일백 삼십 년입니다. 많지는 않으나 악이 내 생애의 햇수들의 날들이 되어 왔습니다. 나의 나이는 내 조상들의 체류함의 날들에서 그들의 햇수들의 날들에는 도달하지 못했습니다.
10. 그리고 야곱은 바로에게 복을 빌었다, 그리고 바로 앞으로부터 나왔다.
11. 그리고 요셉은 그의 아버지와 그의 형제들이 살 곳을 마련했다, 그리고 그들에게 이집트의 토지에서 소유권을 주었는데, 그 토지의 가장 좋은 곳, 라암세스를 바로가 명령한대로 주었다.
12. 그리고 요셉은 그의 아버지, 그리고 그의 형제들, 그리고 그의 아버지의 모든 집식구를 아기의 입에 따라 빵으로 떠받쳤다.
13. 모든 토지에는 빵이 없었다, 그 이유는 기근이 아주 극심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집트의 토지와 가나안의 토지는 기근으로 시달림을 겪고 있었다.
14. 그리고 요셉은 이집트의 토지에서, 그리고 가나안의 토지에서 발견되는 모든 은을 거두어 들였다, 그 이유는 그들이 농산물을 샀기 때문이다. 그리고 요셉은 은을 바로의 집으로 가져왔다.
15. 그리고 은이 이집트의 토지, 그리고 가나안의 토지에서 모두 소비되었을 때 모든 이집트 사람들이 요셉에게 와서 말하기를, 우리에게 빵을 주소서. 우리에게 은이 떨어졌다고 해서 왜 우리가 당신 옆에서 죽어야 합니까?
16. 그리고 요셉이 말했다, 너희들의 가축을 다오. 그리고 은이 떨어졌다면 나는 너에게 너희 가축을 받고 (빵을) 줄 것이다.
17. 그래서 그들은 그들의 가축을 요셉에게 가져왔다. 그리고 요셉은 그들에게 빵을 말과 양떼의 가축떼, 그리고 목축의 가축떼, 그리고 나귀들과 (바꾸어) 주었다. 그리고 그는 그들에게 빵을 공급하여 그 해에 모든 가축과 바꾸었다.
18. 그리고 이 해가 끝났을 때, 그들은 두 번째 해에 그에게 왔다, 그리고 그에게 말했다, 우리는 이 은이 어떻게 소비되었는지 내 주께 숨기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짐승떼는 내 주에게 있습니다. 내 주 앞에서 우리에게 남아 있는 것은 우리의 몸과 우리의 지면 밖에 없습니다,
19. 어찌하여 우리와 우리의 지면 모두가 당신의 눈 앞에서 죽어서야 되겠습니까? 우리와 우리의 지면을 빵으로 사십시오, 그리고 우리는 살 것이고, 우리의 지면은 바로에게 종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살도록 씨를 주십시오, 그러면 죽지 않습니다, 그리고 지면은 황폐해진채로 있지 않을 것입니다.
20. 그리고 요셉은 바로를 위하여 이집트의 모든 지면을 샀다. 이집트인들은 각자 그의 들판을 팔았다, 그 이유는 기근이 그들에게 너무 가혹하게 극심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토지는 바로의 것이였다.
21. 그리고 그는 백성들을 이집트의 경계 이 끝에서 저 끝 까지 이르러 도성으로 이동하게 했다.
22. 그는 오직 성직자들의 지면은 사지 않았다. 그 이유는 그 몫은 바로에 의해 성직자들에게 분배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은 바로가 그들에게 주었던 할당된 몫을 먹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들의 지면을 팔지 않았다.
23. 그리고 요셉은 백성에게 말했다, 보라 나는 오늘 바로를 위하여 너희와 너희의 지면을 샀다. 자, 여기에 너희를 위한 씨가 있다, 그리고 너희는 지면에 씨를 뿌리라.
24. 그리고 수확하면 너희는 바로에게 오 분의 일을 주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사 분(오분의 사)은 너희를 위하여 있는데, 들판의 종자를 위하여, 그리고 너희의 식품을 위하여, 그리고 너희 집에 있는 그들을 위하여, 그리고 너희 아기들을 위한 식품을 위하여 이다.
25. 그리고 그들은 말했다, 당신은 우리를 살아있게 만들었습니다. 우리는 내 주의 눈에서 은혜를 발견하였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바로의 종들입니다.
26. 그리고 요셉은 이집트의 지면에 관하여, 즉 바로가 오 분의 일을 가지되, 성직자들의 지면 만은 바로의 것이 아니라는 법령을 제정하였는데 지금까지도 유효했다.
27. 그리고 이스라엘은 이집트의 토지, 고센의 토지에서 거주했다. 그들은 거기에서 소유권을 가졌다, 그리고 열매를 많이 맺었고, 극도로 번창했다.
28. 그리고 야곱은 이집트의 토지에서 십칠 년을 살았다. 그리고 야곱의 날들, 그의 생애의 햇수는 칠 년, 그리고 일백 사십 년이었다.
29. 그리고 이스라엘의 날들은 죽는 쪽으로 가까이 당겨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그의 아들 요셉을 불렀다, 그리고 그에게 말했다, 내가 네 눈에서 은혜를 발견하여 왔었기를 간구한다면, 청컨대 네 손을 내 넓적다리에 놓고 자비와 진리를 나에게 행하라. 부디 나를 이집트에 묻지 말라.
30. 그리고 내가 내 조상들과 함께 눕거든 너는 나를 이집트로부터 운반하여 나를 그들의 매장지에 장사하라. 그리고 그는 말했다, 나는 당신의 말에 따르겠습니다.
31. 그리고 그는 말했다, 나에게 맹세하라. 그리고 그는 그에게 맹세했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침상의 머리에서 자신을 구부려 절하였다.

각 절의 내적 의미

1절. 요셉이 바로에게 와서 말했다, 그리고 말했다, 나의 아버지와 나의 형제들, 그리고 그들의 양떼들, 그리고 그들의 목축들, 그리고 그들이 가진 모든 것이 가나안의 토지로부터 왔습니다. 그리고 보라 그들은 고센의 토지에 있습니다.

그리고 요셉이 바로에게 와서 말했다. 이는 기억 속의 지식이 있는 자연 평면에서 천적 평면으로부터의 내적 부분이 현존함, 그리고 그 결과로 유입과 지각이 있음을 의미한다. 이는 누군가에게 “오다”의 의미가 현존하다 이다로부터; 요셉의 표현함이 천적 평면으로부터의 내적 부분이다로부터; “말하다(tell)”의 의미가 유입이 있다 이다로부터; 바로의 표현함이 자연 평면, 이로부터 일반적 측면에서의 기억 속의 지식이다로부터; 그리고 “말하다(say)”의 의미가 지각하다 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러므로 “요셉이 바로에게 왔다, 그리고 말했다”에 의해 기억 속의 지식이 있는 자연 평면에 천적 평면으로부터의 내적 부분이 현존함이 의미된다, 그 결과 유입과 지각함이 있다.
자주 말했던 사항은, 내적 부분의 유입이 자연 평면, 또는 외적 부분 안으로 만들어짐, 그리고 후자가 지각함이라는 것에 대해서이다; 이것이 보여주는 바는, 자연 평면은 내적 부분으로부터, 즉 주님으로부터 내적 부분을 통하여 유입이 있는 덕택에 존속하고 살아간다는 것이다. 그 이유가 이 유입 없이 자연 평면은 생명이 없기 때문, 생명이 없는 이유는 그것이 세상의 자연 안에 있기 때문이다. 세상의 것이 가지는 모든 것은 영계로부터 파생되기 때문이다; 이 세상의 자연은 생명이 지독하게 없다; 그러므로 인간과 더불은 자연이 살아 가기 위하여 주님으로부터의 유입이 있어야만 하고, 이는 주님으로부터 인간의 내적 부분 안으로 직접적으로, 뿐만 아니라 영계를 통하여 중개적, 간접적으로 있는다, 그 이유가 내적 부분은 영계 안에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연이 살아 있기 위하여 내적 부분으로부터 자연 안으로 유입이 있어야만 한다. 인간의 자연 평면은 거기로부터 생명을 받아 만들어 진다. 이것이 천적 평면으로부터의 내적 부분이 기억 속의 지식이 있는 자연 평면 안으로 유입됨에 의해 뜻해진다. 내적 부분으로부터의 유입 덕택에 바로에 의해 표현되는 외적 또는 자연 평면에 지각이 출시된다; 그 이유가 유입과 지각함은 서로 상응하기 때문이다.

6064. 나의 아버지와 나의 형제들. 이는 자연 평면에 있는 영적 선과 교회의 진리들을 의미한다. 이는 여기서 “아버지”인 이스라엘의 표현함이 자연 평면에 있는 영적 선이다로부터; 그리고 이스라엘의 아들들의 표현함이 자연 평면에 있는 진리들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방금 위에서 말한(6063항) 유입과 지각함이 이것들, 즉 자연 평면에 있는 영적 선과 교회의 진리들에 관련되고 있다.

그리고 그들의 양떼들, 그리고 그들의 목축들. 이는 진리로부터의 내면과 외면의 선들을 의미한다. 이는 “양떼들”의 의미가 내면의 선들, 그리고 “목축들”의 의미가 외면의 선들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진리의 선들이 의미되는 이유는 이스라엘에 의해 표현되는 영적 선이 진리의 선이기 때문이다. 천국 안에서와 인간에게 있는 선들은 두 근원으로부터 이다, 하나는 의지력에, 또 하나는 이해력에 근원을 가진다. 의지력에 근원을 둔 선 안에는 천적 수준의 교회 속에 있던 태고인들이 있었다; 그러나 이해력에 근원을 둔 선 안에는 영적 수준의 교회 속에 있었던 고대인들이 있었다. 전자의 선에는 셋째 천국, 또는 가장 안쪽의 천국에 있는 이들이 있다, 그러나 후자의 선 안에는 중간 천국 또는 둘째 천국에 있는 이들이 있다. 이에 대한 본성이 무엇인지는 너무나 자주 거론해왔기도 하다. 어쨌든 의지에서 근원되는 선은 선으로부터 진리가 있는다; 그러나 이해력에서 근원하는 선은 진리로부터 있는 선, 또는 진리의 선이다. 이 선은 자체적으로는 진리가 행동에 있는 것밖에 더 아니다.

그리고 그들이 가진 모든 것. 이는 그로부터 파생된 것은 무엇이든지를 의미한다.

가나안의 토지로부터 왔다. 이는 그들은 교회로부터 있다를 의미한다. 이는 어떤 “토지로부터 오다”의 의미가 거기로부터 있다 이다로부터; 그리고 “가나안의 토지”의 의미가 천국들에 있는 주님의 왕국과 지상에 있는 주님의 왕국이다로부터 알려진다.

그리고 보라 그들은 고센의 토지에 있다. 이는 그들은 기억 속의 지식들인 자연 평면의 한 중앙에 있다를 의미한다. 이는 “고센”의 의미가 자연 평면의 한 중앙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자연 평면의 중앙에 주목해보면 이렇다: 교회 속에 있는 선들과 진리들, 이것이 주님의 말씀으로부터 있다는 것이 신앙과 더불어 자연 평면에서 받아지고 인정되어갔을 때, 그것들은 거기서 중앙(중심)에 위치하게 된다. 그 이유가 바라봄 아래 곧바로 있는 이런저런 것들은 중앙에, 그리고 바라봄 아래 있으나 곧바로 있지 않은 이런저런 것들은 측면 쪽에 있는다. 고로 중앙에 있는 것들은 명백하게 나타난다, 그러나 측면의 것들은 희미하게 나타난다. 이는 눈의 시각이 가지는 경험과 똑같다. 시각 아래 곧바로 있는 것 (직시하는 것)은 중앙에 있고, 명료하게 나타난다; 그러나 시각 아래 곧바로 있지 않은 것들, 즉 중앙으로부터 떨어진 것들은 불분명하게 나타난다. 그 이유가 내적인 눈, 이는 지적 마음인데, 이 마음은 천국의 빛으로부터 그것의 시력을 가지고, 그것 자체의 바깥쪽 자연 평면에 있는 이런저런 것들을 조망한다. 이는 외적인 눈인 기억 속의 지식들도 마찬가지 인데, 이것은 자체의 바깥쪽의 대상물과 그 주변 대상물의 영역을 조망한다. 내적 시각은 인간 당사자가 지닌 진리와 선에 가장 많이 일치하는 기억 속의 지식 쪽으로 결정되고, 이때 이 지식들은 중앙 쪽에 위치한다. 내적 시각이 기억 속의 지식들을 바라보는 이유는 그것이 영적인지를 검사하고 영적인 것들 쪽으로 시각의 초점을 모으려해서이다. 하여 영적 관조함 아래 있게 하려 해서 이다.

2-6절. 그는 형제들 중에서 다섯 사람을 데려다가 바로 앞에 세웠다. 3 그리고 바로가 그의 형제에게 말했다, 너희들은 무슨 일을 하느냐? 4 그리고 그들은 바로에게 말했다, 당신의 종들은 양을 치는 목자인데, 우리 모두와 우리의 조상들도 목자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바로에게 말했다, 우리는 이 토지에 머무르려고 왔습니다. 그 이유가 당신의 종들의 양떼를 위한 풀밭이 없기 때문입니다, 기근이 가나안의 토지에 극심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지금 바라옵건대 당신의 종들이 고센의 토지에서 거주하게 해주십시오. 5 그리고 바로는 요셉에게 말했다, 말하기를, 너의 아버지와 네 형제들이 너에게 왔다. 6 네 앞에 이집트의 토지가 있다. 토지의 가장 좋은 곳에서 네 아버지와 네 형제들이 살게 하라. 그들로 고센의 토지에서 거주하게 하라. 그리고 네가 알아보아 그들 사이에 활동적인 자가 있다면 내 가축의 제 1인 자로 세워라.

그는 형제들 중에서 다섯 사람을 데려갔다. 이는 교회 속의 진리로부터 얼마를 의미한다. 이는 여기서 “형제들”인 야곱의 아들들의 표현함이 교회의 진리들이다로부터; 그리고 “다섯”의 의미가 얼마 정도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바로 앞에 세웠다. 이는 기억 속의 지식들 안에 은근히 심음을 의미한다. 이는 바로의 표현함이 일반적 측면에서의 기억 속의 진리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은근히 심어짐(insinuation)이 “그 앞에 세움”에 의해 의미되는 이유는 그것들을 표출하는 끝이 그것들, 즉 교회의 진리들을 은근히 심는 것이기 때문, 그 이유가 이것들이 “야곱의 아들들”이기 때문이다. 진리들에 주목하면, 그것들은 교회의 기억 속의 지식들 안에 은근히 심어져야만 함이 틀림이 없다; 그럼에도 이 주제에 관하여 오늘날 알려진 바 없어 여기서 더 예증해두어야 할 것 같다. 오늘날 교회의 기억 속의 지식들은 말씀의 글자 의미에 속하는 이런저런 것들이다. 내적 의미로부터의 진리들이 이런 기억 속의 지식 안으로 은근히 심어지지 않으면, 마음은 갖가지 이교(이단)들을 끌어낼 수 있다; 그러나 진리들이 그것들 안으로 은근히 심어져 있는다면 마음은 이단들을 끌어낼 수 없다.
예를 들면, 말씀의 글자 의미로부터 배웠던 이들의 경우, 하느님은 성내신다, 그분은 처벌하시고 시험으로 인도하신다, 지옥으로 내던지시고, 심지어 악이 야기되게 하신다 등등의 하느님에 관한 거짓 생각들을 끌어낸다; 하여 하느님이신 선 자체로부터 악은 출현할 수 있다, 이는 그분에게 정반대되는 위험한 도출이다, 여전히 선으로부터 선만이 오고, 악은 악으로부터서만이 온다. 그러나 만일 내면의 진리들이 기억 속의 지식들 안으로 은근히 심어져 있지 않으면, 이 지식들은 엉뚱한 발상을 도출할 수도 있다. 이런 진리들이 그럴지 모른다: 즉 인간을 성내게 하는 것은 그 사람에게 있는 악 때문이다, 이것이 시험들로 인도한다, 벌한다, 지옥으로 내던진다, 그리고 그 자체가 악을 계속 생산한다는 것; 이 주제 주위의 사정은 왕국들에 있는 법들 같은 것이다, 이 법들은 왕으로부터 온다, 반면 처벌의 악들은 왕으로부터가 아니다, 그러나 악들을 행한 이들로부터 이다.
이런 진리도 있다: 지옥들은 존재한다, 모든 악의 근원이다, 그리고 이것이 허용되어져 있는 이유는 인간을 위하여 피할 수 없기 때문, 즉 그가 악 안에 있다는 것을 보도록, 그의 생명은 거기로부터 파생되어져 있다는 것을, 그러므로 그가 악 안에 남아 있다면, 그는 자유 안에 있을 수 없다, 고로 개혁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은 악을 선쪽으로 구부리신다.
이 진리 또한 있다: 가장 일반적인 것들이 처음에 믿어지게 된다는 것, 그리고 그 후에 그것들은 개별적인 진리들을 수단으로 예증되어진다는 것; 예를 들면, 이런 일반적 측면에서의 기억 속의 진리이다: 즉 거행되는 모든 것들은 하느님으로부터 이다, 고로 처벌의 악도 모든 것이라는 말에 포함된다; 그러나 한 참 후에 이것이 어떤 방식에서 하느님으로부터 인지를 배우게 된다; 또한 허용으로부터 행해지는 것에 대한 근원과 본성도 배워진다.
마찬가지로 이 진리가 있다: 하느님에게 대한 모든 예배에는 거룩한 두려움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 이 두려움 안쪽에는 하느님은 선에는 보상을, 악에는 처벌을 하신다는 생각이 있다. 단순한 자나 어린 아이들은 이를 믿지 않으면 안된다, 그 이유는 그들이 허용이 무엇인지를 납득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는 말씀에 따라서 조차 즉 “오히려 몸과 혼을 지옥으로 파괴하실 수 있는 그분을 두려워 하라” 이다 (마. 10:28); 그리고 그들이 악인 것을 행함에서 두려움 때문에 감히 엄두를 못낼 때, 차츰 선과 함께 사랑이 은근히 심어진다, 이런 뒤에 그들은 하느님으로부터 있는 것은 선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 지각도 한다, 그리고 악은 자신들로부터 이다는 것, 마지막으로 모든 악은 지옥으로부터 이다는 것까지 이다.
더욱이 천국에 있는 이들은 하느님으로부터 있는 것은 선뿐이다는 것을 지각하나, 지옥에 있는 이들은 모든 악은 하느님으로부터 있다고 말한다, 그 이유는 그분이 그것을 허용하시고, 그것을 제거하시지 않기 때문이다고 말한다. 그러나 영들의 세계에 있는 이들에게 대답으로서 말해지는 것은, 만일 악이 그들로부터 거두어진다면, 그들은 생명이 없게 되는 것, 이것이 악 안에 있는 이들의 경우이다는 것; 그들 안에 있는 악이 법에 따라서 자신들을 처벌한다는 것; 그리고 처벌의 악 때문에 그들은 악들을 마음대로 행하려듦이 금해진다는 것이다; 또한 악의 처벌은 선을 보호하는 장치도 된다는 것이다. 이 말에 더하여, 악 안에 있는 이들, 또한 내적 예배 없이 외적 예배에만 이들, 유태인의 경우 같이, 하느님을 두려워함 안에 모든 수단에 의해서라도 있어야 하고, 하느님은 반드시 처벌하신다는 신앙도 지녀야 한다; 그 이유가 하느님을 두려워함으로부터 그들은 선인 것을 행할 수 있으나, 사랑으로부터서는 결코 아니다.
이런 것들과 이외 많은 다른 진리들이 위에 참고로 제시한 기억 속의 지식들 안으로 은근히 심어질 때, 아주 다른 면모가 나타난다; 그 이유가 이때 기억 속의 지식들은 투명한 (transparent) 그릇 같기 때문이다. 이 그릇 안에서 진리들은 하나의 일반적 진리로서밖에 보여지도록 하는 원인이 되어준다.

그리고 바로가 그의 형제에게 말했다. 이는 자연 평면에 있는 교회의 진리에 관하여 지각함을 의미한다. 이는 “말하다(say)”의 의미가 지각하다이다로부터; 바로의 표현함이 자연 평면과 일반적 측면에서의 기억 속의 진리이다로부터; 그리고 여기서 “형제들”인 야곱의 아들들의 표현함이 자연 평면의 교회의 진리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 모두로부터 “바로가 그의 형제에게 말했다”가 자연 평면에 있는 교회의 진리들에 관하여 자연 평면이 지각함이 의미된다.

너희들은 무슨 일을 하느냐? 이는 용역(service)과 사용(use)에 관하여를 의미한다. 이는 “일들”의 의미가 선들이다로부터, 고로 용역과 사용이다, 그 이유가 이것들이 선들이기 때문이다. 선행의 선들이라 불리우는 모든 선들은 사용(선용, 유용, use)들밖에 더 아니다, 그리고 사용(쓰여짐)들은 이웃을 위한, 우리의 나라를 위한, 교회를 위한, 주님의 왕국을 위한 일들밖에 더 아니다. 더욱이 그 자체에 주목하면, 선행 자체는 선행은 일로 되고, 행동 안에 담길 때까지 선행이 아닌 것이다. 그 이유가 누군가를 사랑하는데, 그에게 선을 행항 능력이 있음에도 선을 행하지 않으면, 그는 그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그 반대의 경우는 말하지 않아도 알고 있을 것이다. 상대를 향한 선행의 모든 것은 행위 자체, 또는 일 안쪽에 포함되고 있음은 누구나 경험한 사례가 적지 않을 줄로 본다. 한마디로 이에 대한 것은 논란의 여지가 없다는 말이다; 인간의 일은 자신의 선행과 신앙의 모든 것들의 복합체인 셈이다, 그리고 영적 선들이라 불리운다, 그리고 실로 실행에 의해, 즉 쓰여짐에 의해 선이 되어간다.
천국에 있는 천사들은 주님으로부터의 선 안에 있기에, 그들은 쓰여짐을 갈망하는 것 외에 더 바라는 것이 없다 이 쓰여짐이야말로 그들의 삶의 기쁨들 자체이다, 그리고 쓰임새에 따라서 그들은 더 없는 행복을 향유한다. 이를 주님께서 가르치신다:
사람의 아들은 아버지의 천사들과 더불어 그분의 영광에서 올 것이다; 그때 그는 모든 이에게 그의 일들에 따라서 보답할 것이다 (마. 16:27);
“일들”에 의해 여기서 일의 바깥쪽 형체에서와 같은 일을 뜻하지 않는다, 그러나 내향의 형체에 있는 일들을 뜻한다, 즉 그것들에 포함된 선행 등등이다; 천사들은 이외 다른 것 때문에 일을 중요시하지 않는다.
그리고 인간의 일들은 그의 선행과 신앙의 모든 것들의 복합체이다, 그리고 삶은 선행을 선행이 되게, 신앙을 신앙이 되게, 고로 선이 되게 해준다, 그러므로 주님은 여느 다른 제자들보다 더 요한을 사랑하셨다, 그리고 그는 만찬에서 그분의 가슴에 기대고 있다 (요. 21:20); 그 이유가 요한에 의해 선들 또는 선행의 일들이 표현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주님께서 베드로가 아니고 그에게 “나를 따르라” 말하셨다, 베드로에 의해서는 신앙이 표현되었다. 그러므로 “베드로”인 신앙이 분개하여 말했다, “주여, 이 사람은 무엇을 할 것입니까? 예수께서 그에게 말하셨다, 만일 내가 올 때까지 그가 남아있게 하려 뜻한다면 그것이 네게 무엇일 것이냐?” (요. 21:11-23). 이 말씀에 의해 미리 말해진 것은, 신앙은 일들을 경멸하리라는 것, 그럼에도 이 일들은 주님 가까이 있다는 것이다, 이는 양과 염소에 관한 주님의 말씀으로부터도 알아질 것이다 (마. 25:34-46), 여기서 일밖에 세어지는 것은 더 없다. 그리고 신앙은 주님을 거절할 것임이 베드로가 그분을 세 번 부인할 때 그에 의하여 표현된 것으로부터 분명하다; 그의 부인함이 밤에 있었다는 것은 교회의 마지막 때, 즉 어떤 선행도 더 이상 있지 않을 때를 의미한다; 그가 세 번 행했다는 것은 이런 조건이 그 때 완성되다를 의미한다; 이 부인함이 수탉이 울 때 이었다는 것은 교회의 새로움이 일어나기 전을 의미한다, 그 이유가 밤을 뒤잇는 동틀녃과 아침은 교회의 처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은 바로에게 말했다, 당신의 종들은 양을 치는 목자입니다. 이는 그들은 선으로 인도한다를 의미한다. 이는 “양을 치는 목자”의 의미가 선으로 인도하는 자이다로부터, 여기서는 선으로 인도하는 진리인데, 그 이유는 야곱의 아들들이 교회의 진리들을 표시하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와 우리의 조상들도. 이는 이것은 고대인들로부터서도 그러했다를 의미한다. 이는 “조상들(아버지들, fathers)”의 의미가 고대 교회 속에 있던 이들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유태인들과 이스라엘인들이 취급되는 말씀의 구절에서 칭찬과 더불어 그들의 조상들이 언급되는 경우가 많다. 말씀의 글자 의미를 벗어나지 못하는 이들은 이 조상들을 놓고 이들은 아브라함, 이삭, 야곱, 또는 야곱의 아들들에 국한되는 이해해버리는 범주를 벗어나지 못한다. 그러나 그런 구절들에서 좋은 의미에서의 내적 의미에서의 경우, 조상들에 의해 그들의 열조들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홍수 이전의 태고 교회, 홍수 이후의 고대 교회에 속했던 이들이 뜻해진다. 이 두 교회들이 “아버지들”이라 불리우는 이유는 그들로부터 교회가 내려와졌기 때문, 또한 교회에 관한 것들이 파생되었기 때문이다.
“조상들”에 의해 고대 교회에 속한 이들이 뜻해지는 구절을 읽어보자:
여호와께서는 너희 조상들을 사랑하시는 것에서 기쁨을 가지셨다, 그리고 그분은 그들 이후에 그들의 씨를 선택하셨다 (신. 10:15).
다시:
영원의 날들을 기억하라, 대대로의 햇수들을 이해하라. 지극히 높으신 분이 나라들에게 그들의 상속분을 주었을 때, 그분이 인간의 아들들을 분리했을 때, 그분은 이스라엘의 아들들의 숫자에 따라 백성들의 경계를 놓으셨다. 그러나 여수른이 살쪘을 때, 그는 하느님을 버렸다, 그들은 악마들에게, 가까이 있는 것으로부터 온 신들, 그리고 너희의 조상들이 알지 못했던 신들에게 제물을 바쳤다 (신. 31:7. 8, 15, 17);
위 구절은 모세의 예언적 노래이다, 이 노래에서 고대 교회가 7-15절까지에서, 야곱의 후손이 15-44절 까지에서 취급되고 있다. 홍수 전에 있었던 태고 교회의 상태가 “영원의 날들”에 의해, 홍수 후에 있었던 고대 교회의 상태가 “대대로의 햇수들”에 의해 의미되어지고 있다; 그들의 선의 상태가 “지극히 높으신 분이 나라들에게 그들의 상속분을 주었다”에 의해; 그리고 그들의 진리의 상태가 “지극히 높으신 분이 인간의 아들들을 분리하셨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아들들의 숫자에 따라 경계들을 놓으셨다”에 의해 의미되고 있다. 이로부터 “조상들”에 의해 고대 교회에 속한 이들이 뜻해짐이 분명하다.
마찬가지인데, 아래 구절도 있다:
거룩함의 우리의 집, 그리고 우리의 잘 꾸며진 (집), 우리의 조상들이 당신을 찬양했던 곳이 불로 타버렸다 (이. 64:11).
예레미야서에서:
너희의 아버지(조상, father)가 먹고 마시지 않았느냐? 그러나 그는 공정과 공의를 행했다; 그때 그것은 그들과 더불어 더 할 나위없었다 (예. 22:15).
다시:
그들은 여호와께, 공의의 주택에, 그리고 그들의 조상들의 희망, 여호와에게 죄를 지었다
(예. 50:7).
다윗서에서:
우리는 우리의 귀로 들었었습니다, 오 하느님, 우리의 조상들이 우리에게 말했습니다, 당신께서 그들의 날들(시절)에서, 옛날의 날들에서 행하셨던 일들입니다 (시. 44:1).
위 “조상들”의 의미와 같은 의미가 다니엘서 11:23, 37, 38에도 있다. 고대 교회 속에 있던 이들이 위의 구절들에서 “조상들”에 의해 뜻해진 것은 글자 의미에서는 보여지지 않는다, 그러나 교회와 교회의 선들과 진리들이 취급되는 내적 의미에서만 보여진다. 더욱이 천국의 결혼, 즉, 선과 진리의 결혼인 교회 자체가 말씀에서 선 측면은 “아버지”로, 진리 측면은 “어머니”로 불리운다 (3703, 5581항).

그리고 그들이 바로에게 말했다. 이는 지각의 계속을 의미한다. 이는 “말하다(say)”의 의미가 지각함이다로부터; 그리고 바로의 표현함이 일반적 측면에서의 자연 평면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자연 평면에 의한 지각함의 계속이 의미되는 이유는 “그들이 바로에게 말했다”는 표현 때문이다.

우리는 이 토지에 머무르려고 왔습니다. 이는 기억 속의 지식 안에서 생명을 구하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체류하다(머무르다, sojourn)”의 의미가 가르쳐짐이 있다, 또한 사는 것이다로부터; 고로 “머무르기 위해 오다”는 생활을 찾는 것(살 곳을 찾는 것)을 뜻한다; 그리고 “토지”, 여기서는 이집트의 토지의 의미가 기억 속의 지식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기억 속의 지식들 안에서 진리의 생활함에, 또는 기억 속의 지식들 안에서 살 곳을 찾는 진리들에 주목해보자, 알려져 있는 것은, 영계에 있는 모든 것들, 그리고 영계로부터 자연계에 있는 모든 것들은 그것들이 나타나지 않게 하면서 있을 곳(은신처)을 찾는다, 찾는 이유는 결과 안에서 원인으로 행동하는 것, 즉 그것들이 어떤 것을 계속적으로 생산하려는 목적 때문이다. 이 은신처에 대한 대표적 실예가 몸일 것이다, 이 몸 안에 있으려고 찾는 것이 혼이다. 찾는 노력은 생기가 없는 것들이 장소를 차지하고 있는 자연의 최말단에서만 중지될 뿐이다. 자연계 안에서 이것은 모든 것 안에서 보여진다; 그리고 또한 영계에서 보여진다; 즉 영계에서는 선이 진리들 안에서 생활하려고, 진리들은 기억 속의 지식들 안에서 살려고 찾고 있다, 그리고 기억 속의 지식들은 감각의 것들 안에서, 그리고 감각의 것들은 세상에서 살 곳을 찾는다.
진리들이 기억 속의 진리들 안에 있다 라는 것에 더 특별히 주목해보자: 알려진 바, 내면의 진리들이 실로 기억 속의 진리들 안에 은근히 심어질는지 모른다, 그러나 이 진리들은 기억 속의 지식들 안에 선이 있을 때까지 생명을 가지고 있지를 않는다; 그 이유가 선 안에 생명이 있고, 선으로부터 진리들 안에 생명이, 고로 진리들을 통하여 선으로부터 기억 속의 지식들 안에 생명이 있기 때문이다. 이때 선은 진리들에게 혼이다, 그리고 진리들을 통하여 육체와 같은 것인 기억 속의 지식들 안에서 혼이다. 다시 말해 이웃을 향한 선행은 신앙에 생기를 넣고 움직이게 하고, 신앙을 통하여 자연적 수준의 마음에 속하는 기억 속의 지식에도 생기를 넣고 움직이게 한다는 말이다.
진리들과 기억 속의 지식들이 서로 분리되어 있다는 것을 아는 자는 오늘날 거의 없는 것 같다. 그 이유인 즉, 선행으로부터 신앙의 진리들 안에 있는 자가 거의 없는 탓이다, 그리고 신앙의 진리들 안에 선행이 없을 경우, 이것은 진리들이 아니라 기억 속의 지식들밖에 더 수준이 못된다, 그 이유가 진리들이 기억 속의 여느 지식들이나 매한가지로 우두커니 있는 것, 즉 쓰여짐을 받지 못한 채로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앙의 진리들이 선행으로부터 있을 때, 또는 선행이 그것들 안에 있을 때, 이때 그것들은 기억 속의 지식들과 인지할 수 있을 정도로 차별화 된다, 때로는 자신들을 기억 속의 지식들 넘어로 승강되게 하고, 지식들을 자기들 아래쪽에 두고 그것들을 이리저리 뒤적거린다. 이것은 사 후 인간의 상태로부터 아주 선명하게 보일는지 모른다. 이때야말로 그가 합리적으로 신앙의 진리들과 선들에 관하여 생각하고 말할 수 있고, 이것은 육체의 삶에서의 경우 보다 더 통찰력이 있다. 그러나 그는 기억으로부터 어떤 기억 속의 지식들을 되부를 수는 없다, 비록 그가 기억들을 다 가지고는 있긴 하지만, 그것은 그에게는 잊혀져 버렸고, 철폐된 것으로 있기 때문이다. 이상 살핀 바로 분명한 것은, 그 자체 영적인 신앙의 진리들과 그 자체 자연적인 기억 속의 진리들은 서로로부터 분리되고 있다는 것; 그리고 신앙의 진리들은 선행의 선에 애착함을 수단으로 기억 속의 지식들의 수준으로부터 천국을 향하여 승강되어진다는 것이다.

그 이유가 당신의 종들의 양떼를 위한 풀밭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는 기억 속의 지식들은 진리의 선이 결여되어 있다를 의미한다. 이는 “양떼를 위한 풀밭”의 의미가 진리의 선들이 있는 기억 속의 지식들이다로부터; 고로 “풀밭이 없다”란 진리의 선들이 없는 기억 속의 지식들이다. 내적 의미에서 “풀밭”은 영적 생명을 지탱시켜주는 어떤 것, 특별히 기억 속의 지식의 진리이다, 그 이유가 육체가 식품을 요구하듯, 혼은 이것을 바라기 때문이다. 이 진리가 자양분을 준다, 그러므로 “먹이는” 것은 가르침을 주는 것(배워지는 것)을 표시한다. 기억 속의 지식과 진리들이 인간의 혼을 떠받친다는 것은 인간이 어떤 것들을 알기를 갈망함으로부터, 또한 식품과 기억 속의 지식들과의 상응 관계로부터도 매우 분명해진다, 이 상응은 인간 안에서 당사자가 식품에 관여할 때, 그 자체를 보여준다, 그 이유가 당사자가 (식품과 상응에 관해) 이야기를 하고 듣는 동안이다면, 유즙을 받는 그릇들은 열리고 받되 그렇지 않았던 때보다 더 활짝 열리어 받기 때문이다. 영적 진리들과 가르침들 또한 만일 당사자가 선에 애착함 안에서 있다면 더 충분히, 보다 더 완전하게 깨닫는 결과를 준다. 진리들이 영적 생명에 자양분을 주는 것은 선한 영들과 천국에 있는 천사들과 더불어 더욱 또렷하다, 그 이유가 선한 영들과 천사들은 어떤 것을 알기를, 그리고 슬기로워지기를 언제나 갈망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이 이 영적 식품에 결핍할 때, 그들은 황무함을 느끼고, 그들의 삶은 께느른해 있고, 그리고 그들은 배고파 있다; 그리고 자기들의 갈망함이 만족될 때까지 그들은 자기들의 삶의 행복 안으로 회복되지 못하고 일어나지도 못한다. 그러나 기억 속의 지식들이 혼에 건강한 자양분을 생산해주기 위하여, 그것들 안에는 진리의 선으로부터 생명이 있음에 틀림이 없다. 만일 이 근원으로부터 생명이 없다면, 기억 속의 지식들은 인간의 내면의 생명을 떠받쳐주지 못한다, 그러나 오직 그의 자연적 생명, 그의 영적 생명이 아닌 채로 있을 뿐이다.
“풀밭”이 내적 의미에서 인간의 영적 생명을 떠받드는 것을 표시하는 것을 다른 구절로부터도 읽어볼 수 있다:
나는 너희에게 백성의 언약을 주었는데, 토지를 회복하기 위하여서; 묶인 자들에게 나가라 하고 말하기 위하여; 어둠에 있는 자들에게 너희는 밝히 나타내라 하도록 하기 위하여서 이다; 그리고 그들은 길들에서 먹여질 것이다. 모든 언덕들 위에 그들의 풀밭이 있을 것이다 (이. 49:8, 9);
“길들 위에서 먹여지는 것”은 진리들 안에서 가르쳐짐이 있다는 것을 표시한다; “모든 언덕들 위에 풀밭”은 선으로부터 떠받쳐지는 것을 표시한다; 그 이유가 “언덕들”, “산들”과 마찬가지로 사랑의 선들이기 때문이다.
예레미야서에서:
내 풀밭의 양떼를 흩트리고 파괴하는 목자들에게 화있을 것이다 (예. 23:1);
위에서 “풀밭”은 영적 생명을 떠받쳐주는 이런저런 것들을 표시한다.
다시:
시온의 제 1 인 자들은 숫사슴 같이 된다; 그들은 어떤 풀밭도 찾지 못했다 (애. 1:6);
“그들이 풀밭을 찾지 못했다”란 선의 진리가 없다를 표시한다
에스겔서에서:
나, 나 조차 내 양떼를 수색할 것이다, 나는 그들을 좋은 풀밭에서 먹일 것이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높은 산들에 그들의 우리가 있을 것이다; 고로 그들은 좋은 우리 안에 누워있을 것이다, 그리고 지방이 많은 풀밭에서 그들은 이스라엘의 산들 위에서 먹을 것이다 (겔. 34:11, 14);
위에서 “이스라엘의 산들 위에 있는 좋고 지방이 많은 풀밭”이란 진리의 선들을 표시한다. 다시:
너희가 좋은 풀밭에서 먹었던 것이 별것 아닌 듯 여기고, 너희 풀밭의 남을 것을 발로 짓밟았다 (겔. 34:18);
위 역시 의미는 비슷하다. 호세아서에서:
나는 너희를 광야에서, 메마름의 토지에서 알았다. 그들이 그들의 풀밭을 가졌을 때, 그들은 배불리 먹었다, 그리고 그들의 심정은 우쭐대었다 (호. 13:5, 6).
요엘서에서:
짐승들이 신음소리를 낸다, 수소의 목축들이 혼란에 빠져 있다, 그 이유는 그들의 풀밭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 작은 가축떼의 양떼들이 황무해지게 만들었다 (욜. 1:18).
다윗서에서:
여호와는 나의 목자이시다; 풀잎의 풀밭에 그분은 나로 눕게 만드실 것이다; 쉼의 물들 쪽으로 그분은 나를 인도하실 것이다; 그분은 내 혼을 회복하게 하실 것이다 (시. 23:1-3).
다시:
여호와께서는 우리를 만드셨다, 그리고 우리가 자신을 만든 것이 아니다; 그분의 백성, 그분의 풀밭의 양떼(도 그러하다). [또는,] 그러므로 우리는 그분의 것이다; 그분의 백성, 그리고 그분의 풀밭의 양떼 (이다) (시. 100:3).
위 구절들의 “풀밭”은 인간이 배워야 하는 영적 생명을 중요시하는 이런 저런 진리들을 표시한다; 영적 생명은 마치 풀밭 같아서 피폐해 있을 경우, 목축들이 쇠약해지듯, 마치 육체와 식품의 관계에서와 마찬가지이다. “풀밭”은 혼 또는 인간의 영을 회복되게 하고 떠받치는 선과 진리를 표시한다는 것을 주님의 말씀에서 읽을 수 있다:
나는 문이다; 어떤 자가 나로 말미암아 안으로 들어간다면, 그는 구원될 것이다, 그리고 들어가고 나간다, 그리고 풀밭을 발견할 것이다 (요. 10:9).
“풀밭”은 그분을 인정하고, 그분만으로부터 생명을 찾는 이들이 가지는 선들과 진리들이다.

기근이 가나안의 토지에 극심하였기 때문입니다. 이는 교회 안에도 이와 같은 것들이 결핍되고 있다를 의미한다. 이는 “기근”의 의미가 선의 곂핍이다로부터; 그리고 “가나안의 토지”의 의미가 교회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리고 지금 바라옵건대 당신의 종들이 고센의 토지에서 거주하게 해주십시오. 이는 그들이 그들의 한 중앙에서 살도록을 의미한다. 이는 “거주하다”가 사는 것이다로부터; 그리고 “고센의 토지”의 의미가 자연 평면의 한가운데, 또는 중앙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리고 바로는 요셉에게 말했다, 말하기를. 이는 기억 속의 지식들이 있는 자연 평면에서 지각함을 의미한다. 이는 “말하다(say)”의 의미가 지각함이다로부터; 바로의 표현함이 기억 속의 지식이 있는 자연 평면이다로부터; 그리고 요셉의 표현함이 내적 부분이다로부터, 이로부터 자연평면은 지각함을 가진다.

너의 아버지와 네 형제들이 너에게 왔다. 이는 자연 평면으로부터의 영적 선 안으로, 그리고 거기에서 교회의 진리들 안으로 천적 평면으로부터의 내적 부분이 유입됨에 관련하여를 의미한다. 이는 여기서 “아버지”인 이스라엘의 표현함이 자연 평면으로부터의 영적 선이다로부터; 그리고 여기서 “형제들”인 그의 아들들의 표현함이 자연 평면에 있는 교회의 진리들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천적 평면으로부터의 내적 부분의 유입이 의미된 이유는 이런 사항들이 요셉에게 말해지기 때문이고, 요셉에 의해 천적 평면으로부터의 내적 부분이 표현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연 평면 안으로, 또는 외적 부분 안으로의 유입이 내적 부분으로부터 오고 있다.

그리고 네 앞에 이집트의 토지가 있다. 이는 자연 평면 속의 기억 속의 지식들은 천적 평면으로부터의 내적 부분의 후원 아래 있다를 의미한다. 이는 “이집트의 토지”의 의미가 기억 속의 지식들이 있는 자연적 마음이다로부터; 그리고 “네 앞에”의 의미가 “요셉”인 천적 평면으로부터의 내적 부분의 후원 아래 있다로부터 알게 된다.

토지의 가장 좋은 곳에서 네 아버지와 네 형제들이 거주하게 하라. 이는 그들은 이것들의 가장 안쪽에서, 즉 기억 속의 지식들의 가장 안쪽에서 살 것임을 의미한다. 이는 “토지의 가장 좋은 곳”이란 기억 속의 지식들이 있는 자연적 마음의 가장 안쪽이다로부터; “거주하다(dwell)”의 의미가 사는 것이다로부터; 그리고 여기서 “아버지와 형제들”인 이스라엘과 그의 아들들의 표현함이 자연 평면으로부터의 영적 선과 거기 있는 교회의 진리들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가장 좋다(best)”가 가장 안쪽을 표시하는 이유는 똑바로 전망되는 곳이 가장 좋은 곳이기 때문; 그 이유가 눈은 가장 애착하고 기쁨이 있는 것에 똑바로 방향을 두기 때문이다; 이런 똑바로 바라보는 곳이 가장 안쪽인 이유는 이것이 중앙에 위치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가장 강한 빛에서 눈 앞에 있다; 한편 다른 것들은 주변을 빙둘러 위치한다, 그러므로 덜 명료하다, 마지막의 것은 불명료하다, 그 이유는 그것들에는 덜 애착이 있고 기쁨도 덜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내적 빛 앞에서 있는 기억 속의 지식의 모습이다. 내적 시각의 대상물은 기억 속의 지식들과 진리들 외에 다른 것은 없다. 기뻐해지는 것과 그것들에 있는 선이 그것들을 향하여 시각을 방향짓게 한다. 내적 부분에 일치하는 진리들과 기억 속의 진리들은 영적이고 천적인 진리들과 더불어 기뻐하고 감동되는 것들과 더불어 잘 보여지는 곳(즉 가장 안쪽) 아래에 와있는다, 그 이유가 그들에게 이런 진리들은 가장 좋은 것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거짓들과 그것들과 일치하지 않는 기억 속의 지식들은 자아 사랑과 세상 사랑의 악들이 애착하고 기뻐하는 것과 더불어 전망 아래 똑바로 오지 않는다.

그들로 고센의 토지에서 거주하게 하라. 이는 중앙에를 의미한다. 이는 “거주하다”의 의미가 사는 것이다로부터; 그리고 “고센의 토지”의 의미가 자연 평면의 중앙, 또는 가장 안쪽이다로부터 알려진다.

그리고 너는 그들 사이에 활동적인 자가 있는지 알아보라. 이는 교리에서 더 특출한 것을 의미한다. 이는 “활동적인 자”의 의미가 교리 측면에서 더 특출한 것이다로부터, 그 이유가 “사람(남자, vir)”이 총명 있는 자, 또한 진리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교리이다; 그리고 “활동적(activity)”이 원어에서는 힘, 용기를 의미하는 단어에 의해 표현되고 있다, 이는 내적 의미에서 힘을 가진 것, 고로 특출한 것이다.

그들을 내 가축떼의 제 1 인 자로 세워라. 이는 그들은 기억 속의 지식의 제 일 가는 것일런지 모른다를 의미한다. 이는 “제 1 인 자(prince)”의 의미가 제 일의 것이다로부터; 그리고 “가축떼”의 의미가 선이 있게 하는 진리이다로부터, 여기서는 진리들이 있는 기억 속의 지식들이다, 그 이유는 “내 가축떼 위에”, 즉 바로의 것 위에 라고 말해지기 때문, 바로를 수단으로 선을 있게 하는 진리들이 아닌 진리들이 있는 기억 속의 지식들이 의미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7-10절. 그리고 요셉은 그의 아버지 야곱을 모셔와서 바로 앞에 세웠다. 그리고 야곱은 바로를 축복하였다. 8 그리고 바로가 야곱에게 말했다, 네 나이가 얼마인가? 9 그리고 야곱은 바로에게 말했다, 내가 머무르고 있는 햇수들의 날들은 일백 삼십 년입니다. 많지 않으나 악이 내 생애의 햇수들의 날들이 되어 왔습니다. 나의 나이는 내 조상들의 체류함의 날들에서 그들의 생애의 햇수들에는 도달하지 못했습니다. 10 그리고 야곱은 바로에게 복을 빌었다, 그리고 바로 앞으로부터 나왔다.

그리고 요셉은 그의 아버지 야곱을 모셔왔다. 이는 일반적 진리가 현존함을 의미한다. 이는 “오게 함”, 또는 “모셔옴”의 의미가 현존을 만드는 것이다로부터, 그리고 누군가에게 “오다”가 현존이 있다 이다로부터; 그리고 야곱의 표현함이 자연적 진리의 교리, 여기서는 일반적 측면에서의 진리인데, 그 이유는 그의 아들들이 세부적 측면에서의 진리들을 표현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내적 부분으로부터 인 이유는 “요셉”이 내적 부분이기 때문, 이로부터 자연 평면에 진리들이 있기 때문이다. 일반적 진리가 요셉의 “아버지”라고 불리운다, 그 이유는 일반적 진리는 무엇 보다 먼저 인간에게 은근히 심어지기 때문이다. 이후에 이 진리는 세부적, 특수적 진리들로 풍요해진다, 그리고 마지막, 내적 부분으로부터, 즉 이성과 이해력으로부터 이런 진리들을 조망함을 출시한다. 이는 인간과 더불어서도 거의 같다, 그 이유가 그의 판단력이 유아로부터 점차 증가해가기 때문이다. 또한 이는 인간이 새로이 태어날 때, 또는 거듭나질 때의 영적 진리들과 선들과도 똑같다. 그러나 내적 부분이 일반적 진리로부터 자연 평면에 출시된 이후, 상태는 바뀐다, 그리고 내적 부분은 아버지로서 자연 평면에 있는 진리를 더 이상 인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종으로서 이다. 자기 아버지 마저 그의 종이 된다는 것이 요셉의 꿈에 의해 이미 선포되었다: 즉 태양과 달과 열한 별이 그에게 경례하게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때 당시 그의 아버지가 말했다, “네가 꾸었다는 이 꿈이 무엇이란 말이냐? 나와 네 어머니와 네 형제들이 엎드려 네게 절해야 한다는 말이냐?” (창. 37:9, 10); 그러므로 그의 아버지가 그의 아들들에 의해 요셉의 면전에서 그의 “종”이라고 자주 불리우기도 했다 (창. 43:28; 44:24, 27, 30, 31); 더욱이 요셉은 모든 이와 이집트의 토지에서 주인이었다, 따라서 그의 아버지도 여기에 당연히 포함된다.

그리고 바로 앞에 세웠다. 이는 기억 속의 지식들의 일반적인 것 안으로 은근히 심음을 의미한다. 이는 이미 살폈다.

그리고 야곱은 바로를 축복했다. 이는 결합을 경건하게 소원함, 그 결과로 열매 가 풍성히 있음을 의미한다. 이는 “축복하다”의 의미가 여기서는 결합을 경건히 소원함이다로부터, 즉 기억 속의 지식들과 진리가 결합함을 경건히 소원함이다, 그 이유가 여기서 이 결합이 다루어지기 때문이다. “축복하는(bless)” 것은 많은 것들을 의미한다; 영적 의미에서 이것은 선인 모든 것, 또한 번창하는 모든 것을 포함한다; 그리고 이로부터 사랑의 선과 선행의 선을 선물함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것은 결합을 의미한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진리에 애착함으로부터 열매가 풍성해짐을 의미한다; 또한 번창하기를 경건히 소원함도 의미한다; 여기서 그러므로 여기서 취급되는 것에 대한 경건한 소원, 즉 결합을 위해, 그리하여 열매 풍성해지기 위해서 이다. 그 이유가 열매가 풍성해짐은 결합에 뒤잇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결합이 결과되었을 때, 선은 증가하고, 진리는 배가되기 때문이다. 이때 선과 진리의 결혼이 있는 바, 이로부터 위의 결과들이 생산된다. 매춘 같은 짓의 경우 위의 질서를 건너뛸는지 모르나, 이 근원으로부터의 선은 가짜일 뿐이다; 진리 역시 선을 자체에 중요시하여 가지는 바, 이 선으로부터 자체의 향기를 파생시킨다.

그리고 바로는 야곱에게 말했다. 이는 기억 속의 지식들이 있는 자연 평면에서 교회의 일반적 진리에 관하여 지각함을 의미한다. 이는 “말하다 (say)”가 지각함이다로부터; 바로의 표현함이 기억 속의 지식들이 있는 자연 평면이다로부터; 그리고 야곱의 표현함이 교회의 일반적 진리이다로부터 알려진다.

당신의 생애의 햇수의 날들은 얼마나 많은가? 이는 영적 평면으로부터 자연 평면의 생명의 상태에 관하여를 의미한다. 이는 “날들”, 또한 “햇수들”의 의미함이 상태들이다로부터; 그리고 “생애(인생, life)”의 의미함이 자연 평면에 있는 영적 생명(삶), 즉 영적 평면으로부터의 자연적 평면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리고 야곱은 바로에게 말했다. 이는 대답을 의미한다.

내가 머무른 햇수들의 날들. 이는 생명의 연속인 것에 관하여를 의미한다.
이는 “날들”, “햇수들”의 의미함이 상태들이다로부터; 그리고 “체류함들, 머무름”의 의미가 삶(생명, life)과 훈련(가르침, instruction)이다로부터, 고로 생명의 연속적인 상태이다.

일백 삼십년입니다. 이는 상태와 품질을 의미한다. 이는 말씀에 있는 모든 숫자들이 어떤 것들을 의미한다, 고로 취급되는 어떤 것의 상태와 품질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이 숫자는 특별하게 지금까지 야곱에 속하고 관련되었던 생명의 상태와 품질을, 즉 자연 평면이 이때까지 영적 평면으로부터 가졌던 영적 생명의 상태와 품질을 의미한다.

많지는 않으나(few) 악이 내 생애의 햇수들의 날들이 되어 왔습니다. 이는 자연 평면의 생명(삶)의 상태는 시험들로 꽉 차 있어 왔다를 의미한다. 이는 날들과 햇수들이 상태들이다로부터; 그리고 “야곱의 생애”의 의미가 자연 평면에 있는 영적 삶(생명)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 상태에 있는 시험들이 “악”을 가지고 있어왔던 날들에 의해 의미되어진다. 모든 시험들에는 악이 나타난다, 그 이유가 그것들은 내면의 근심 불안과 비통함이고, 마치 지옥에 떨어짐 같기 때문이다. 이때 당사자는 자신의 악들의 상태 안에, 결과적으로 그를 고발한 악령들 사이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고로 (악령들이) 양심을 고문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사들은 그를 방어한다, 즉 천사들을 통하여 주님께서 보호하신다, 그 이유가 주님께서는 그를 희망과 신뢰함 안에서 간직하시려 하기 때문, 이러므로 내부로부터 두 힘의 맞붙음이 야기 된다. 특히 당사자가 영적인 것을 받을 때, 그의 자연 평면이 시험에 놓이는 경우가 많다, 그 이유는 자연 평면에 교리의 거짓들과 생활의 악이 주재하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야곱이 이를 자신에 관련하여 말한 것이다, 그 이유는 야곱에 의해 여기서 진리 측면에서의 자연 평면이 표현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내 조상들의 생애의 햇수들의 날들에는 도달하지 못했다. 이는 그들의 생명의 상태로까지는 들어 올려지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이는 “도달하다”의 의미가 들어 올려지는 것이다로부터; 그리고 “날들”, 그리고 “생애의 햇수들”의 의미가 영적 생명의 상태들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도달하다”가 여기서 들어 올려 지는 것인 이유는 그의 조상들, 이삭과 아브라함이 더 들어 올려졌기 때문, 즉 자기 보다 더 내면의 것들이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최고 의미에서 아브라함은 주님의 신성 자체를, 이삭은 주님의 신성한 합리성을, 그리고 야곱은 그분의 신성한 자연 평면을 표현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에 의해서는 인간과 더불은 천적 평면, 이삭은 영적 평면. 야곱은 자연적 평면을 표현했다, 그 이유는 인간의 거듭남은 주님의 신성이 되심의 형상이기 때문이다. 이상 모두로부터 “그리고 그것은 내 조상들의 생애의 햇수들의 밀들에는 도달하지 못했다”에 의해 그들의 생명의 상태로까지는 들어올려지지 못했다가 의미됨이 분명하다.

(** 그들의 체류한 날들에서. 이는 그들의 생명의 상태에 관련하여서를 의미한다. 이는 원문에서 생략되고 있다 역자주.)

그리고 야곱은 바로를 축복했다. 이는 결합을 위하여 경건하게 소원함, 그리고 그 결과 열매 있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는 바로 앞으로부터 나왔다. 이는 시간에 관련하여 분리됨을 의미한다. 이는 “나왔다”의 의미가 분리되어지다 이다로부터, 여기서는 바로에 의해 표현되는 기억 속의 지식이 있는 자연 평면으로부터 시간에 관련하여 분리됨이다. “나감”에 의해 시간에 관련하여 분리됨이 의미된다는 이러하다: 앞 페이지들에서 취급한 주제는 “이스라엘”인 자연 평면으로부터의 영적 선, 또한 그의 “아들들”인 자연 평면에 있는 교회의 진리들이 “요셉”인 천적 평면으로부터의 내적 부분과 결합하여 가는 것이었다; 그러나 자연 평면과의 결합은 아직 취급되지 않았었다, 결합은 아니고 오직 거기에 은근히 심어지는 것일 뿐이었다. 그러나 이어지는 구절, 즉 13-27절로부터 취급된다. 그러므로 “야곱이 바로 앞으로부터 나갔다”에 의해 시간에 관련하여서의 분리됨이 의미된 것이다.

11, 12절. 그리고 요셉은 그의 아버지와 그의 형제들이 살 곳을 마련했다, 그리고 그들에게 이집트의 토지에서 소유권을 주었는데, 그 토지의 가장 좋은 곳, 라암세스를 바로가 명령한대로 주었다. 12 그리고 요셉은 그의 아버지, 그리고 그의 형제들, 그리고 그의 아버지의 모든 집식구를 아기의 입에 따라 빵으로 떠받쳤다..

그리고 요셉은 그의 아버지와 그의 형제들이 살 곳을 만들었다. 이는 천적 평면으로부터의 내적 부분으로부터 영적 선과 교회 속의 진리들이 생명을 받음(생명을 이어감)을 의미한다. 이는 “살다(거주하다)”의 의미가 생명이다로부터; 여기서 “아버지”인 이스라엘의 표현함이 자연 평면으로부터의 영적 선이다로부터; 여기서 “형제들”인 야곱의 아들들의 표현함이 자연 평면에 있는 교회의 진리들이다로부터; 그리고 요셉의 표현함이 천적 평면으로부터의 내적 부분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 모두로부터 “요셉이 그의 아버지와 그의 형제들의 살 곳을 만들었다”에 의해 천적 평면으로부터의 내적 부분으로부터 영적 선과 교회의 진리들이 생명을 이어감을 의미함이 분명하다.

그리고 그들에게 이집트의 토지에서, 그 토지의 가장 좋은 곳에서 소유권을 주었다. 이는 기억 속의 지식들이 있는 자연적 마음의 가장 안쪽에서를 의미한다. 이는 “소유권”의 의미가 영적 생명이 거주함(residence)이다로부터; “이집트의 토지”의 의미가 기억 속의 지식들이 있는 자연적 마음이다로부터; 그리고 “토지의 가장 좋은 곳”이란 가장 안쪽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로부터 “그리고 그들에게 이집트의 토지의 소유권을 토지의 가장 좋은 곳에서 주었다”에 의해 기억 속의 지식들이 있는 자연적 마음의 안쪽에서 영적 생명이 거주함이다가 의미된다.

라암세스의 토지에서. 이는 마음의 가장 안쪽과 그것의 품질을 의미한다. 말씀에서 있는 모든 이름들, 인물이든, 장소이든 모두는 어떤 것들을 의미한다; 그리고 “고센의 토지”는 자연적 마음의 가장 안쪽을 표시한다, 그러므로 토지의 가장 좋은 곳인 “라암세스”는 자연적 마음에서 영적인 것에 관하여 가장 안쪽을 표시한다. 그러나 이 안쪽에 관한 본성은 인간에 의해 거의 납득되지 않는다, 그 이유가 이것은 무수하고 말로 나타낼 수 없는 것들을 함유하고 있기 때문, 고로 천국의 빛에서만 보여질 수 있다; 말씀에서 이외 다른 이름들의 경우도 마찬가지 이다.

바로가 명령한 대로. 이는 기억 속의 지식이 있는 자연 평면이 동의함과 더불어를 의미한다. 이는 “명령하다”가 유입이다로부터, 그러나 여기서는 동의함인데, 그 이유는 바로에 의해 표현되는 자연 평면이 내적 부분으로부터의 유입을 수단으로 자연 평면에 속하는 모든 것을 가지고 있기 때문; 그러므로 자연 평면이 명령한다는 것은 실로 그것으로부터의 명령 같이 나타나나, 실지로는 내적 부분으로부터 이기 때문이다; 고로 이것은 동의함이다. (자연 평면을) 내적 부분에 비교한다면, 이는 말과 생각의 관계와 같다; 인간의 말이 명령한다고 나타나지만, 실지로는 생각이 한 것이다.

그리고 요셉은 그의 아버지, 그리고 그의 형제들, 그리고 모든 그의 아버지의 집식구를 빵을 가지고 떠받쳤다. 이는 천적 평면으로부터의 내적 부분으로부터 영적 선과 자연 평면에 있는 교회의 진리들 안으로 이것들의 생명인 선이 계속적으로 유입되고 있다를 의미한다. 이는 “빵을 가지고 떠받든다”의 의미가 선의 유입이 있다 이다로부터; 그 이유가 “떠받드는” 것이 여기서는 계속적으로 흘러듦을 표시한다, 이로부터 인간은 영적 생명을 가진다, 그리고 “빵”은 사랑의 선이다; 요셉의 표현함이 천적 평면으로부터의 내적 부분이다로부터; 여기서 “아버지”인 이스라엘의 표현함이 자연 평면으로부터의 영적 선이다로부터; 여기서 “형제들”인 이스라엘의 아들들의 표현함이 자연 평면에 있는 교회의 진리들이다로부터; 그리고 “모든 그의 아버지의 집”의 의미가 영적 선 속에, 그리고 이 선으로부터 한 복합체에 있는 모든 것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상 살핀 바로부터 분명한 바, “요셉은 그의 아버지, 그리고 그의 형제들, 그리고 모든 그의 아버지의 집을 빵을 가지고 떠받쳤다”에 의해 천적 평면으로부터의 내적 부분으로부터 사랑의 선이 자연 평면에 있는 영적 선과 교회의 진리들 안으로, 그리고 영적 선 속에, 그것으로부터 있는 모든 것들 안으로 계속적으로 유입함이 있다가 의미됨이다.

아기들의 입에 따라서. 이는 각각의 순진의 선의 품질에 따라서를 의미한다. 이는 “입에 따라서”가 각각, 그리고 품질에 따라서 이다로부터; 그리고 “아기”의 의미가 순진의 선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천적 평면으로부터의 내적 부분으로부터의 유입이 순진의 선의 품질에 따라서 자연 평면에 있는 영적 선과 교회의 진리들 안으로 있는다에 주목해보자: 순진은 선행의 모든 선과 사랑의 모든 선에 품질을 주는 가장 안쪽에 있다. 그 이유가 주님은 순진을 통하여 선행 안으로 흘러드시기 때문, 그리고 순진에 비례하여 이러저러하게 선행을 받음이 있게 된다; 그 이유가 순진은 선행의 본질 자체이기 때문이다. 순진의 본성은 어린 아이를 거울로 삼으면 알는지 모른다. 그들은 자기들의 부모를 사랑한다, 그리고 그들만을 신뢰한다, 그리고 부모들을 기쁘게 하는 것 외의 다른 것에는 별 관심이 없다; 그리고 그들은 식품과 입을 것을 가지는데, 그것이 필요해서만이 아닌 그들의 기쁨을 위하여서도 이다; 그리고 그들이 자기들의 부모를 사랑하기에, 그들은 부모들에 동의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 애착의 기쁨을 가지고 행동한다, 이는 명령 뿐만 아니라 명령받기를 원함에서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 무엇이든에서 자기를 중시함은 없다; 이외 유아의 특징은 더 있겠지만 더 열거함은 생략한다. 그러나 우리가 유념할 것은, 어린 아이들의 순진은 순진이 아니라 순진의 외관(semblance)일 뿐이다는 것이다. 진짜 순진은 오로지 지혜 안에만 거주한다, 그리고 지혜는 신앙의 선과 사랑의 선으로부터 자신의 자아를 주님을 향한 자세를 견지하고 있을 때만에서 존재한다. 마치 어린 아이들이 부모를 향하여 자세를 취하는 위의 경우 같다.

13-26절. 모든 토지에는 빵이 없었다, 그 이유는 기근이 아주 극심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집트의 토지와 가나안의 토지는 기근으로 시달림을 겪고 있었다. 14 그리고 요셉은 이집트의 토지에서, 그리고 가나안의 토지에서 발견되는 모든 은을 거두어 들였다, 그 이유는 그들이 농산물을 샀기 때문이다. 그리고 요셉은 은을 바로의 집으로 가져왔다. 15 그리고 은이 이집트의 토지, 그리고 가나안의 토지에서 모두 소비되었을 때 모든 이집트 사람들이 요셉에게 와서 말하기를, 우리에게 빵을 주소서. 우리에게 은이 떨어졌다고 해서 왜 우리가 당신 옆에서 죽어야 합니까? 16 그리고 요셉이 말했다, 너희들의 가축을 다오. 그리고 은이 떨어졌다면 나는 너에게 너희 가축을 받고 (빵을) 줄 것이다. 17 그래서 그들은 그들의 가축을 요셉에게 가져왔다. 그리고 요셉은 그들에게 빵을 말과 양떼의 가축떼, 그리고 목축의 가축떼, 그리고 나귀들과 (바꾸어) 주었다. 그리고 그는 그들에게 빵을 공급하여 그 해에 모든 가축과 바꾸었다. 18 그리고 이 해가 끝났을 때, 그들은 두 번째 해에 그에게 왔다, 그리고 그에게 말했다, 우리는 이 은이 어떻게 소비되었는지 내 주께 숨기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짐승떼는 내 주에게 있습니다. 내 주 앞에서 우리에게 남아 있는 것은 우리의 몸과 우리의 지면 밖에 없습니다, 19 어찌하여 우리와 우리의 지면 모두가 당신의 눈 앞에서 죽어서야 되겠습니까? 우리와 우리의 지면을 빵으로 사십시오, 그리고 우리는 살 것이고, 우리의 지면은 바로에게 종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살도록 씨를 주십시오, 그러면 죽지 않습니다, 그리고 지면은 황폐해진채로 있지 않을 것입니다. 20 그리고 요셉은 바로를 위하여 이집트의 모든 지면을 샀다. 이집트인들은 각자 그의 들판을 팔았다, 그 이유는 기근이 그들에게 너무 가혹하게 극심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토지는 바로의 것이였다. 21 그리고 그는 백성들을 이집트의 경계 이 끝에서 저 끝 까지 이르러 도성으로 이동하게 했다. 22 그는 오직 성직자들의 지면은 사지 않았다. 그 이유는 그 몫은 바로에 의해 성직자들에게 분배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은 바로가 그들에게 주었던 할당된 몫을 먹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들의 지면을 팔지 않았다. 23 그리고 요셉은 백성에게 말했다, 보라 나는 오늘 바로를 위하여 너희와 너희의 지면을 샀다. 자, 여기에 너희를 위한 씨가 있다, 그리고 너희는 지면에 씨를 뿌리라. 24 그리고 수확하면 너희는 바로에게 오분의 일을 주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사분(오분의 사)은 너희를 위하여 있는데, 들판의 종자를 위하여, 그리고 너희의 식품을 위하여, 그리고 너희 집에 있는 그들을 위하여, 그리고 너희 아기들을 위한 식품을 위하여 이다. 25 그리고 그들은 말했다, 당신은 우리를 살아있게 만들었습니다. 우리는 내 주의 눈에서 은혜를 발견하였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바로의 종들입니다. 26 그리고 요셉은 이집트의 지면에 관하여, 즉 바로가 오분의 일을 가지되, 성직자들의 지면 만은 바로의 것이 아니라는 법령을 제정하였는데 지금까지도 유효했다.

그리고 모든 토지에는 빵이 없었다. 이는 선이 더 이상 나타나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빵”의 의미함이 사랑의 선과 선행의 선이다로부터; 그리고 거기 “모든 토지에서 아무것도 없다”의 의미가 더 이상 나타나지 않았다 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지금 이어지는 것은 천적 평면으로부터의 내적 부분이 자연 평면의 모든 것을 일반적인 원리 아래 질서 안으로 환원되게 하는 것이 취급되어지는데, 그 목적은 기억 속의 지식들이 교회의 진리들과 결합함이 결과되도록, 그리고 이 진리들을 통하여 영적 선과 , 그리고 이 선을 통하여 천적 평면으로부터의 내적 부분과 결함함이 결과되도록 하려 해서 이다. 그러나 기억 속의 지식들이 일반적인 원리 아래 질서 안으로 환원되게 함은 선의 황폐됨과 진리의 황무해짐을 통하여, 그리고 머지 않은 그 후에, 유지 지탱하는 것을 줌을 통하지 않고서는 결과되어질 수가 없다; 그러므로 지금 이어지는 것에서 모든 이런 것들이 내적 의미에서 취급되어진다. 그러나 많은 이유 때문에 이 세상에서의 삶 동안의 인간의 경우, 이런 사항들은 좀처럼 거행되지를 않는다; 이에 반해 다른 삶에서 그것들은 거듭나는 모든 이와 더불어 진행된다. 그리고 그것들이 이 세상의 인간과 더불어 거행되지 않기에, 거기서 거듭나는 자에게 이 사항들이 알려지지 않은 것으로 나타난다 해도 경이로워하지 않는다, 그리고 당사자에게는 이전에 듣지 않았던 비밀한 것들 같이 여겨질 뿐이다.

그 이유는 기근이 아주 극심했기 때문이다. 이는 황량함을 의미한다. 이는 “기근”의 의미가 선의 결핍과 지식들의 결핍이다로부터; 고로 “아주 심한 기근”은 황무함을 표시한다. 황무함에 주목함과 더불어 알아야하는 것은, 진리들과 선들, 그리고 거기로부터의 지식들은 천국에 있는 이들의 영적 생명을 만든다는 것이다, 그 이유가 이것들이 천적이고 영적인 식품들이어서, 이로부터 그들이 자양분을 얻기 때문이다. 이 식품들은 주님에 의해 매일 그들에게 주어진다. 그들에게 아침이 올 때, 선들이 공급된다, 정오일 때, 진리들이 공급된다; 그러나 저녁일 때, 선들과 진리들이 결핍된다, 그리고 이 결핍은 저녁에서 동틀녘과 아침이 되돌아 올 때까지 이다. 아침일 때 천사들은 식욕이 대단히 왕성해 있다, 이것은 지상의 인간들이 배고파 먹을 것을 찾을 때 보다 더 갈망하는 상태이다. 이 상태가 “기근”의 상태에 의해 의미된다, 그리고 이것은 일종의 황무함이기도 한데, 이것은 더 낮은 땅에서 있는 황무함과는 다른 황무함이다.
이 세상의 거의 누구도 믿을 수 없는 것은 천사의 천국이 진리들과 선들, 그리고 이것들에 대한 지식에 식욕을 돋운다는 것에 대하여서 이다; 그 이유가 이득과 영예와 쾌락에 몰입하는 것밖에 관심이 없는 자들은 이런 것들이 천사들에게 삶의 주제이다는 것에 의아해 할 것이다, 하여 말한다,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들이 무엇이다는 말인가? 이것들이 삶에 무엇을 해준다는 말인가? 생명을 주고 삶에 기쁨을 안겨주는 것들이 재물과 명예와 쾌락들이 아니던가?” 그러나 그들이 알아야 하는 것은, 이런 것들로부터 있는 것들은 육체의 생명이고, 혼의 생명은 아니다는 것, 전자의 생명은 육체와 더불어 사라지고 후자의 생명은 영원히 남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세상에 거처가 있는 동안 영적 생명에 관하여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는 자는 자신의 악과 상담할 뿐이다.
황무함에 더 주목해보자, 황무함은 식욕을 이끌어내기 위하여 있다는 것이다, 그 이유가 선들과 진리들은 식욕의 강도에 따라서 받아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램들이 식욕에 의해 흥분될 때, 선과 진리를 획득함이 있어 그들로 행복과 만족함을 향유하게 한다. 그러므로 다른 삶에서 황무함에 있는 이들은 머지 않아 갱생되어저 그들의 바램들을 달성한다. 이런 교차됨을 수단으로 모든 이는 완전해져 간다. 주목해둘만한 것은, 자연계의 하루 안에 있는 교차됨이다, 즉 아침, 정오, 저녁, 밤, 그리고 다시 아침인데, 이것은 영계의 교차됨을 완전하게 표현한다는 것, 이런 차이는 있다: 영계의 교차됨은 이해력과 의지력 안으로 흘러들고, 하여 생명 속에 있는 이것저것들을 유지지탱시킨다는 것, 하여 그것을 떠받쳐준다는 것이다.
더 주목해두어도 될 만한 것은, 저녁의 그늘과 밤의 어두움은 주님으로부터 오지 않는다는 것, 그러나 천사들, 영들, 인간들에 속하는 것들로부터 온다는 것이다. 그 이유가 태양으로서의 주님은 계속 빛나고 흘러들지만, 인간에 있는 인간 자신의 것으로부터의 악들과 거짓들이주님으로부터의 그것들을 돌려있게 하고 뒤짚는다는 것, 고로 저녁의 그늘로, 밤의 어둠 안으로 자신들을 인도한다는 것이다; 이는 자연계의 태양도 같다. 그것은 계속 비추고 흘러들지만, 지구가 자전함으로 태양으로부터 돌려세워 자체를 그늘과 어둠으로 데려다 놓는다.
자연계에 이런 교차가 있는 이유는 자연계가 영계로부터 출시되었기 때문, 고로 영계로부터 존속하기 때문이다; 이러므로 보편적 자연은 주님의 왕국을 표현하는 극장 무대이다. 교차됨이 영계에서 존재하는 이유는 천국에 있는 모든 이는 계속적으로 완전해져가야 하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이런 교차됨은 자연계 안에도 있다, 그렇지 않으면 결핍과 더불어 멸해지고 만다.
더 알면 도움이 될 것은, 천국에는 밤이 없다는 것, 오직 저녁까지만 있다는 것, 이 저녁을 계승하는 것은 아침에 앞서 있는 동틀녘이다. 그러나 지옥에는 밤이 있다. 거기에도 교차됨은 있다, 그러나 이것들은 천국의 교차됨에 반대적이다; 그 이유가 지옥에서 아침은 탐욕들의 열이다, 정오는 거짓의 근질근질함(참을 수 없는 욕망)이다, 저녁은 불안 근심이다, 밤은 고통이다. 이런 모든 교차됨을 통하여 밤이 통치한다, 그리고 이것은 다양한 그늘과 밤의 어두움만을 표출한다.
더 알아야 하는 것은, 영계에서 이 사람의 교차됨과 저 사람의 교차됨은 같은 자가 없다는 것이다; 또한 거기의 교차됨은 (자연계 같이) 시간대로 나뉘어지지 않고 그들에게 보이도록 표출되는 상태의 다양함들이다; 그 이유가 시간이라는 것은 자연계 안에 있고, 상태라는 것은 영계 안에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집트의 토지와 가나안의 토지는 기근으로 시달림을 겪고 있었다. 이는 이것은 자연 평면에서와 교회 내부에서 있었다를 의미한다. 이는 “이집트의 토지”의 의미가 기억 속의 지식들이 있는 자연적 마음이다로부터; “가나안의 토지”의 의미가 교회이다로부터; 그리고 “기근”의 의미가 황무함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러므로 “이집트의 토지와 가나안의 토지는 기근으로 시달림을 겪고 있다”는 말에 의해 기억 속의 지식들이 있는 자연 평면, 그리고 교회 내부에 황무함이 있었다가 의미된다.

그리고 요셉은 모든 은을 거두어 들였다. 이는 참되고 개작할 수 있는 모든 기억 속의 지식을 의미한다. 이는 “거두어 들임”의 의미가 하나로 함께 가져옴이다로부터; 요셉의 표현함이 천적 평면으로부터의 내적 부분이다로부터; 그리고 “은”의 의미가 진리이다로부터, 그러나 여기서는 참되고 개작 가능한 기억 속의 지식이다, 그 이유는 이 은은 이집트의 토지와 가나안의 토지에 있는 은이라 말해졌기 때문인데, 이제 이어진다. 이로부터 “요셉이 모든 은을 거두어 들였다”에 의해 천적 평면으로부터의 내적 부분이 참되고 개작 가능한 기억 속의 지식을 하나 안으로 함께 가져다 놓았다가 의미된다. 기억 속의 지식이 참되고 개작 가능하다라고 말해진 이유는 오류들에 의해 어두워지지 않아왔던 기억 속의 지식들은 일소되어질 수 없는 한, 비적합한 상태가 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타인들에 의해, 또는 자신의 자아에 의해 거짓들과 악들에 응용됨으로 뒤집어지지 않은 기억 속의 지식들이 있다. 이것들은 한때 언제인가 감명된 적이 있어 기억 속에 있고 남아 있다. 그러므로 이런저런 손상을 입지 않아 자유로운 모든 기억 속의 지식들은 참되고 적합해지게 개작할 수 있는 지식들이다.

이집트의 토지에서, 그리고 가나안의 토지에서 발견되는. 이는 자연 평면에, 그리고 교회에 있었던…을 의미한다. 이는 “이집트의 토지”의 의미가 기억 속의 지식들이 있는 자연 평면이다로부터; 그리고 “가나안의 토지”의 의미가 교회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여기서의 교회는 인간과 더불은 교회 속에 있는 것이 뜻해진다. 그 이유가 인간 진리와 선 안에 있을 때 그는 교회이기 때문, 일반적 교회 역시 이런 사람들의 모임으로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그들이 농산물을 샀기 때문이다. 이는 그러므로해서 그들은 버텨냈다를 의미한다. 이는 “농산물(produce)”의 의미가 교회의 진리이다로부터; 그리고 “사다”의 의미가 자기 것이 되게 하다 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고로 의미는 버텨내는 것이다, 그 이유는 취급되는 주제가 “농산물”에 의해 의미되는 영적 식품이기 때문이다. 이 식품을 자기 것이 되게 할 때 영적 생명은 버텨낸다.

그리고 요셉은 은을 바로의 집으로 가져왔다. 이는 모든 것은 자연 평면에서 일반적인 것에 관련되는 쪽으로 가져와졌다를 의미한다. 이는 “가져오다”의 의미가 관계 안으로 가져오고 받아들이는 것이다로부터; “은”의 의미가 참되고 개작할 수 있는 기억 속의 지식이다로부터; 그리고 바로의 표현함이 일반적 측면에서의 자연 평면이다로부터; 고로 “바로의 집”은 자연 평면에 있는 일반적인 것, 그 이유는 복합체 안에 모든 것이 있기 때문이다.
참되고 개작할 수 있는 기억 속의 지식들이 일반적인 것에 관련됨 쪽으로 가져와졌다는 말에 주목해봄에서 일단 알아야 할 것은, 어떤 것이 있기 위하여, 모든 기억 속의 지식들, 그리고 또한 진리들, 무엇이든 그것들은 일반적인 것들에 관련됨 안으로 가져와짐에 틀림이 없다, 그리고 일반성 아래 놓여지고 포함되고도 있어야 함이 틀림이 없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들은 산산히 흩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기억 속의 지식들과 진리들이 어떤 것이 되기 위하여, 그것들은 하나의 형체 안으로 가져와져야 함에 틀림이 없다, 그래야 그것들은 서로 상호적으로 중요시하기 때문이다, 이러려면 그것들은 하나의 일반성 아래에서 연계되어 있어야만 한다; 그러므로 형체 안에서 그것들을 함께 붙들고 있는 것은 이 일반성이고, 그 안에 있는 각각은 시종일관 자신의 품질을 가질는지 모른다. 일반성 자체는 다른 일반성과 함께 더 큰 일반성 아래 관련됨 쪽으로 가져와짐에 틀림이 없다, 그리고 더 큰 일반성은 다시 그 보다 더 큰 일반성 아래로 등등이다. 그렇지 않으면 이것들은 사라지고 만다.
모든 것이 다함께 공존하게 붙드는 가장 큰 보편적 일반성은 주님 자신이시다, 그리고 함께 붙드는 것은 그분으로부터 진행하는 신성한 진리이다. 더 일반적인 것은 영계에서는 일반적 사회들이다, 이 쪽으로 신성한 진리는 흘러들고 그것들을 서로로부터 종류별로 구분되게 한다. 일반적인 것들은 더 일반적 사회 아래에서 덜 일반적이다. 더 일반적 사회들은 인간 안에서 (팔 다리 같은) 부분들, 기관, 내장 등에 상응한다. 이들은 경이로운 연결을 수단으로 상호적으로 중요시하면서 하나의 형체를 이루고, 서로가 함께 서로를 붙들고 있다. 또한 하나로서 모두를 함께 표출한다. 인간 안에서 가장 보편적 일반성은 함께 한 개를 붙드는 것인 혼이다. 고로 또한 주님으로부터 진행하는 신성한 진리이다, 그 이유가 이 진리는 계속적으로 흘러들면서 인간으로 그렇게 있도록 해주는 원인이기 때문이다.
주님으로부터 진행하는 신성한 진리는 “모든 것들은 말씀을 통하여 창조되었다”라고 불리운다 (요. 1:1-3), 또는 이를 통하여 모든 것들은 존재 안으로 왔었다, 결과적으로 모든 것들은 이를 통하여 존속한다. 보편적 자연계에 있는 모든 것들은 일반성 아래, 각각은 그것 자신의 일반성 아래 있다; 그리고 이와 달리해서는 그것들은 존속할 수 없다는 것은 누구나 자연에 있는 무엇이든 조금 깊이 관찰하면 금방 식별되는 사안이다.

그리고 은이 이집트의 토지, 그리고 가나안의 토지에서 모두 소비되었을 때. 이느 돌보지 않아 황폐해진 터에 참되고 융통성 있는 기억 속의 지식이 자연 평면에서, 그리고 교회에서 더 이상 보여지지 않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이는 “모두 소비됨”의 의미가 더 이상 보일 수 없이 있다 이다로부터; “은”의 의미가 참되고 융통성 있는(개작할 수 있는) 기억 속의 진리이다로부터; “이집트의 토지”의 의미가 기억 속의 지식들이 있는 자연 평면이다로부터; 그리고 “가나안의 토지”의 의미가 교회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것이 황무함 때문이었다는 것은 앞에 살핀 바로부터 분명하다.

모든 이집트 사람들이 요셉에게 왔다. 이는 내적 부분에 신청함을 의미한다. 이는 “그에게 오다”의 의미가 신청하는 것이다로부터; “이집트”의 의미함이 기억 속의 지식이다로부터; 그리고 요셉의 표현함이 내적 부분이다로부터 알려진다. 자연 평면에서 모든 기억 속의 지식은 내적 부분의 후원 아래 있었다는 것이 요셉이 이집트의 모든 토지를 통치했다에 의해 의미되었다, 그러나 자연 평면에서 기억 속의 지식들과 교회의 진리들이 결합하는 것이 내적 의미에서 이제 묘사되어진다.

말하기를, 우리에게 빵을 주소서. 이는 영적 생명의 지탱에 관하여 간원함을 의미한다. 이는 “주다”의 의미가 빵을 서술할 경우, 지탱하는 것이다로부터; 그리고 “빵”의 의미가 영적 생명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빵”에 의해서는 특별하게는 사랑의 선과 선행의 선이 의미 되나, 일반적으로는 영적 생명이 의미된다, 그 이유는 이 경우에서 “빵”에 의해 모든 식품이 뜻해지기 때문; 그리고 일반적으로 모든 식품이 뜻해질 때, 영적 생명이 뜻해진다, 그 이유가 영적 의미에서 일반적 측면에서의 식품은 모든 사랑의 선과 신앙의 진리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 둘이 영적 생명을 만들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은이 떨어졌다고 해서 왜 우리가 당신 옆에서 죽어야 합니까? 이는 진리가 결핍된 이유로 영적 죽음이 초래되는 도리밖에는 달리 없음을 의미한다. 이는 “죽는다”의 의미가 영적 죽음이다로부터(아래에서 살핀다); 그리고 “은이 떨어짐”의 의미가 진리의 결핍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진리의 결핍이 있을 때 영적 죽음이 있다에 주목하면 이렇다: 영적 생명은 진리들에 따른 활동들, 결과적으로 사용함들(uses)에 존재한다; 그 이유가 영적 삶에 있는 이들은 생활에 긴요하게 필요할 것으로 여겨 진리들에 식욕을 가지고 갈망하기 때문이다, 즉 그들은 기회가 되면 진리들을 사용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사용됨에 일치하는 만큼에서 진리를 받을 수 있고, 그 만큼에서 영적 생명도 지닌다, 그 이유는 그만큼에서 그들은 총명과 지혜의 빛 안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말씀에서 “저녁”에 의해 의미되는 때인, 그늘짐의 상태가 오는 때, 즉 진리들이 부족해졌을 때, 영적 생명은 고민하고 괴로워한다; 그 이유가 이런 것들이 자신들에게는 그늘에 속하는 것으로, 영적인 죽음에 속하는 것으로 표출되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이런 경우, 그들은 이전 같이 빛 안에 간직되고 있지 않기 때문, 그러나 부분적으로 그들 자신 쪽으로 뒤미끄려져 놓여 있기 때문이다; 거기 그늘로부터 영적 죽음의 형상, 지옥에 떨어짐이 발생된다.
“죽음”에 의해 영적 죽음, 또는 지옥에 떨어짐(damnation)이 의미되는 것은 말씀의 많은 구절들에서 분명해지는데, 아마 아래에 열거하는 구절들만 가지고도 충분할지 모른다:
이사야서에서:
정의 안에서 그분은 가난한 자를 심판하실 것이다, 그리고 정직을 가지고 땅의 야비함을 꾸짖을 것이다. 그러나 그분은 그분의 입의 막대를 가지시고 땅을 쳐부실 것이다, 그리고 그분의 입술의 숨을 가지고 그분은 사악한 자를 죽게 하실 것이다 (이. 11:4);
주님에 관해서 이다. “그분의 입의 막대”, 그리고 “그분의 입술의 숨”은 신성한 진리로부터 심판이 있다를 표시한다; “죽는” 것은 지옥에 떨어짐을 표시한다. 다시:
그분은 영원하게 죽음을 들키실 것이다: 그리고 주 여호비께서는 모든 얼굴들 위로부터 눈물을 닦으실 것이다 (이. 25:8).
다시:
죽은 자는 살지 못할 것이다; 르바임(Rephaim)은 일어나지 못할 것이다; 그 이유는 당신께서 방문하셨기 때문이다, 당신이 그들을 소멸하셨다 (이. 26:14).
다시:
너희 죽은 자는 살 것이다, 나의 주검, 그들은 일어날 것이다 (이. 26:19).
다시:
너희는 말했었다, 우리가 죽음과 언약을 만들었다, 그리고 지옥과 더불어 우리는 환상을 만들었다; 죽음과 더불은 너의 언약은 폐지되었다, 그리고 지옥과 더불은 너의 환상은 서지 못할 것이다 (이. 28:15, 18).
예레미야서에서:
너희는 빛을 기다린다, 그러나 그분은 그것을 죽음의 그림쪽으로 돌리신다, 그분은 그것을 짙은 어둠으로 만드신다 (예. 13:16).
에스겔서에서:
너희는 보리 한웅큼과 빵 조각들 때문에 내 백성 사이에서, 죽지 않아야 하는 혼들을 살해되게, 살아 있지 않아야 할 혼을 살게 만들어 나를 모독했었다 (겔. 13:19).
호세아서에서:
나는 그들을 지옥의 손으로부터 되찾을 것이다; 죽음으로부터 나는 그들을 건질 것이다; 오 죽음아, 나는 너의 유해물(pest)들일 것이다; 오 지옥아, 나는 너의 파멸일 것이다 (호. 13:14).
다윗서에서:
당신은 나를 죽음의 큰문들로부터 들어올리신다 (시. 9:13).
다시:
나의 눈을 밝아지게 하소서, 하여 우연히라도 제가 죽음에 잠들지 않도록 (시. 13:3).
다시:
죽음의 끈들이 나를 휘감았다, 그리고 지옥의 끈들 (시. 18:4, 5).
다시:
그들은 지옥에서 양떼로서 놓여질 것이다; 죽음이 그들에게 풀밭일 것이다 (시. 49:14).
계시록서에서:
나는 지옥의 열쇠와 죽음의 열쇠를 가지고 있다 (계. 1:18).
다시:
극복하는 자는 두 번째 죽음에서 상해받지 않을 것이다 (계. 2:11).
다시:
나는 너의 일들을 알고 있다, 네가 살아 있다는 이름을 가지고 있다는 것, 그러나 너는 죽어 있다. 너는 경계하라, 그리고 막 죽으려 하는 그 남은 것들을 확고히 굳히라 (계. 3:1, 2).
마태복음서에서:
어둠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다; 그리고 죽음의 지역과 그림자에 앉은 그들에게, 그들에게 빛이 일어나졌다 (마. 4:16).
요한복음서에서:
내 말을 듣는 자, 나를 보내신 그분을 받는 자는 영원한 생명을 가질 것이다, 그리고 심판 안으로 오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죽음으로부터 생명으로 건너갔다 (마. 5:24).
다시:
나는 떠나간다, 그리고 너희는 나를 찾을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너희의 죄 안에서 죽을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너희는 너희의 죄들 안에서 죽을 것이다고 말했다; 그 이유가 너희가 나는 있다를 믿지 않으면, 너희는 너희의 죄들 안에서 죽을 것이다. 만일 누가 내 말을 지킬 것이다면, 그는 죽음을 결코 보지 않을 것이다 (요. 8:21, 24, 51, 52).
“죽음”이 지옥에 떨어짐이기에, 표현 교회의 백성은 죽은 자를 만지는 것을 금해왔다, 그리고 만일 그들이 접촉되었다면, 그들은 불결한 자이었다, 그리고 깨끗해져야 했다 (겔. 44:25; 레. 15:31; 21:1, 2; 22:8; 민. 6:6-12; 19:11-끝절까지).

그리고 요셉이 말했다. 이는 내적 부분으로부터 대답이 있다를 의미한다. 이는 요셉의 표현함이 내적 부분이다로부터; 이것이 대답을 의미함은 분명하다.

너희들의 가축을 다오. 그리고 나는 너희 가축을 받고 너에게 (빵을) 줄 것이다. 이는 그들은 장래 진리로부터의 선을 가져와야 그들은 버텨낼 수 있을 것을 의미한다.
이는 “가축”의 의미가 진리의 선들이다로부터; 그리고 그들에게 “준다”의 의미, 즉 빵인데, 이는 영적 생명을 유지지탱함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만일 은이 떨어졌다면. 이는 만일 진리가 더 이상 그들에게 보여질 수 없다면을 의미한다. 이는 “은이 떨어졌다면”의 의미가 진리의 결핍이다로부터, 고로 진리가 더 이상 보여질 수 없다 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진리가 보여질 수 없다라고 말한 이유는 황무함의 상태에서 진리는 마치 도망가버린 듯 비쳐지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진리는 현존한다, 그 이유는 여하튼 가지고 있는 모든 진리와 선은 주님으로부터 인간, 영, 그리고 천사에게 주어진 것이기 때문, 하여 언제나 남아 있고, 그것들이 거두어가지는 일은 없다. 그러나 황무함의 상태에서 그것들은 나타나있지 않기 위해 그들 자신의 것을 수단으로 희미함에 있는다; 그러나 빛의 상태가 되돌아 올 때, 그것들은 현존하고 보여질 수 있다. 이것이 진리가 보여질 수 없다라고 말한 이유이다.

그래서 그들은 그들의 가축을 요셉에게 가져왔다. 이는 진리의 선들, 즉 그들이 장래 가져와야 하는 진리의 선들을 의미한다. 이는 “가져오다”의 의미가 장차 가져오는 것이다로부터; 그리고 “가축”의 의미가 진리의 선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리고 요셉은 그들에게 …빵을 주었다. 이는 영적 생명에 관련되는 자양분을 의미한다. 이는 “빵을 주다”의 의미가 영적 생명을 지탱함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말들을 위하여(말 대신에…). 이는 지적 부분으로부터의 기억 속의 지식들을 의미한다. 이는 “말들(horses)”이 지적인 것들이다로부터; 그리고 그것들이 이집트를 서술했고, 이집트에 의해 기억 속의 지식들이 의미되는 바, 여기서의 “말들”은 지적 부분으로부터의 기억 속의 지식을 표시한다. 여기서 잠간 살펴야 하는 것은 지적 부분으로부터의 기억 속의 지식이 무엇인지 이다. 인간은 지력(지성, intelluctual)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는 의지력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이 지력과 의지력은 그의 내적 인간 뿐만 아니라 외적 인간도 가지고 있다. 인간에 있는 지력은 그의 유아기로부터 그의 성숙기에 이르기까지에서 자라고 증가한다. 그리고 경험에 속하는 것과 기억 속의 지식에 속하는 것으로부터 바라보고 관찰하고 판단하는 것들에 존재한다; 또한 결과들로부터 원인들을 바라보기도 한다; 그리고 원인들과 연결하여 결과(consequense)들을 바라보기도 한다. 고로 지력은 시민적, 도덕적 생활의 범주에 속하는 이런저런 것들을 납득하고 지각함에 존재한다. 이것은 천국으로부터의 빛의 유입으로부터 존재 안으로 온다; 그러므로 모두 각각의 인간은 지력에 관하여 완전해질 수 있다. 지력은 인간이 응용(신청, appiication)하려는 것에 따라서, 자신의 삶에 따라서, 그리고 자신의 본성에 따라서 모든 이 각각에게 주어진다; 지력은 만일 건전한 마음 바탕에 있다면, 결핍되는 일이 없다. 지력이 주어지는 목적은 당사자로 자유 안에, 선택함 안에 있도록 하려 해서, 즉 선과 악을 자유함에서 선택하게 하려 해서 이다. 인간이 위에 상술한 것과 같은 지력을 가지지 않으면, 그는 이것을 스스로로부터 행할 수 없다, 고로 어떤 지력이든 그에게 자기 것이 되게 할 수 없다.
더 알아야 할 것은, 인간에게는 영적 진리와 선의 그릇이기 위하여 영적인 것을 받는 지력이 있다는 것이다. 그 이유가 선에 관한 어떤 것, 즉 선행에 관한 어떤 것, 진리에 관한 어떤 것, 즉 신앙에 관한 어떤 것도 지력을 가지지 않은 자 안으로는 은근히 심어질 수가 없기 때문, 그러나 그의 지력에 따라서만 은근히 심어진다; 그러므로 인간은 그의 성년기 까지, 즉 그가 지력을 소유할 때까지 주님에 의해 거듭나지지 않는다. 지력을 소유하기 전의 인간의 마음은 메마른 지면에 뿌려져 있는 씨 같이 사랑의 선과 신앙의 진리는 당사자에게 있다. 그러나 인간이 거듭나져갔을 때, 그의 지력은 선인 것, 이로 말미암아 진리인 것을 보고 지각하는 쪽에서 쓰임새(use)를 수행한다; 그 이유가 지력은 천국의 빛 속에 있는 이런저런 것들을 자연의 빛 속에 있는 것들 안으로 운반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전자는 후자 안에서 나타난다, 마치 인간의 내면의 애착이 컽치레에서 자유한 얼굴로부터 나타나는 것과 같다; 그리고 지력이 이 사용(쓰임)을 수행하는 바, 말씀에서, 교회의 영적 부분이 취급되는 많은 구절들에서 지력 또한 취급된다, 이에 관하여 주님의 신성한 자비로부터 다른 장소에서 더 살필 기회가 있을지 모른다.
이상 살핀 바로부터 지력으로부터의 기억 속의 지식들이 뜻하는 것, 즉 그것들은 인간이 악인지, 선인지를 지적으로 납득하고 지각하는 이런저런 것들을 확증하는 기억 속의 지식들이다. 이 기억 속의 지식들이 말씀에서 “이집트로부터의 말들”에 의해 의미되고 있다:
도움을 위해, 그리고 말들에 기대기 위해, 이집트로 내려가는 자들에게 화있을 것이다; 그리고 병거를 신뢰하는 이유는 그것들이 많고 마부가 있고 강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것들은 이스라엘의 거룩한 분을 바라보지 않는다, 여호와를 찾지 않는다. 이집트는 인간이지 하느님이 아니다; 그리고 그의 말들은 육이지 영이 아니다 (이. 31:1, 3);
위에서 “이집트로부터의 말들”은 뒤집어진(악용된) 지력으로부터의 기억 속의 지식들을 표시한다.
에스겔서에서:
그는 이집트로 사절들을 보냄으로 그를 향하여 반역했다, 이집트가 자기에게 말과 많은 사람들을 주지 않을 까 해서 였다. 그가 잘 될까? 이 짓을 한 그가 도망할까? (겔. 17:15);
위에서 “이집트로부터의 말들”은 타락한 지력으로부터의 기억 속의 지식들을 표시한다, 이것이 신앙을 주제로 상담하고 있다, 한편 말씀, 즉 주님은 자기들의 타락된 지력으로부터가 아니면 믿어지지 않는다; 고로 믿는 것이 도대체 없다; 그 이유가 부정함이 타락한 지력을 통치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기억 속의 지식들이 파멸되는 것이 바로의 말들과 병거들이 수프 바다(홍해)에 익사하는 모습으로 표현되었다; 그리고 이 지식들이 “말들”에 의해 의미되기 때문에, 그리고 거짓 교리적인 것들이 “병거들”에 의해 의미되기 때문에, 그러므로 “말들과 병거들”은 말씀에서 자주 언급되고 있다, 출. 14:17, 18, 23, 26, 28을 보라; 그리고 그 이후 있은 모세와 미리암의 노래에서:
바로의 말이 안으로 갔다, 또한 그의 병거도, 그리고 그의 마병도 바다 안으로 갔다; 그러나 여호와께서는 바다의 물들을 그들 위에 되돌아오게 하셨다. 너희는 여호와께 노래하라, 그 이유가 그분은 자신을 드높이셨기 때문이다; 말과 기병들을 그분은 바다 안으로 내던지셨다
(출. 15:19, 31).
위와 비슷한 기억 속의 지식들이 이스라엘 위에 세우는 왕을 위해 모세의 책에 규정해 둔 것에 의해서도 의미되고 있다;
만일 왕을 바란다면, 형제들의 한가운데로부터의 왕이 그들 위에 놓일 것이다; 오직 그는 자신을 위하여 말을 번성되게 말 것이다, 말들을 불리려고 이집트 쪽으로 백성을 되돌리지 말 것이다 (신. 17:15, 16);
왕은 신성한 진리 측면에서의 주님을 표현했다, 고로 총명 측면에서의 주님을 표현했다, 그 이유가 진짜(순정, genuine)가 신성한 진리로부터 있을 때 총명이 있기 때문이다. 총명은 신성한 진리인 말씀을 수단으로 포획되어야만 한다는 것, 그리고 자신의 지력으로부터의 기억 속의 지식들을 수단으로 해서는 안된다는 것이 왕은 “말들을 불려서는 안되고 말들을 불리겠다고 이집트로 사람들을 되돌리지 말라”는 훈령에 의해 의미되고 있다.

양떼의 가축떼, 그리고 목축의 가축떼. 이는 진리로부터의 내면과 외면의 선들을 의미한다. 이는 “양떼”가 내면의 선들, “목축떼”가 외면의 선들이다로부터; 그리고 이 선들이 진리로부터의 선들이기에 “양떼의 가축떼”, 그리고 “목축의 가축떼”라고 말해진다. “가축떼(cattle)”는 진리의 선이다.

그리고 나귀들. 이는 섬김의 것들을 의미한다. 이는 “나귀들”의 의미가 섬김(봉사함)의 것들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리고 그는 그들에게 빵을 공급하여 … 모든 가축떼와 바꾸었다. 이는 내적 부분으로부터의 선의 유입을 통하여 버텨나감을 의미한다. 이는 “빵을 공급하는” 것, 또는 그들에게 빵을 주는 것의 의미가 영적 생명을 유지해감이다로부터; “가축떼”의 의미가 진리의 선이다로부터; 그리고 그것들을 공급하는 요셉의 표현함이 내적 부분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것이 내적 부분을 통하여 선의 유입으로부터 있은 이유는 자연 평면에서 영적 생명의 모든 지탱함은 내적 부분으로부터의 선의 유입, 즉 내적 부분을 통하여 주님으로부터의 선의 유입 때문이어서 이다. 유입(influx)이라는 단어의 사용이 빈번한 바, 이것이 무엇인지 잠간 살피고 지나가야 할 것 같다. 유입의 본성은 자연에서의 유입(inflow)의 이런저런 것들과 비교해봄으로 알는지 모른다, 즉 태양으로부터 땅의 모든 것들 안으로 열의 유입, 이로부터 (식물 세계의) 생장하는 생명이 온다; 그리고 같은 것 안으로 빛의 유입으로부터도 생장하는 생명에 도움을 주는 것이 온다, 그리고 이 외에도 색갈과 아름다움들의 근원이다; 마찬가지로 열이 우리의 신체들 안으로 유입됨으로부터, 그리고 빛이 눈 안으로 부터도, 등등이다. 이로부터 천국의 태양이신 주님으로부터 생명의 유입이 무엇인지를 알는지 모른다, 이 분으로부터 사랑인 열이 온다, 그리고 신앙인 영적 빛이 온다. 더욱이 유입 자체가 명백하게 느껴진다는 점이다; 그 이유가 천국의 열, 이는 사랑인 바, 인간 안에서 생명의 원천을 이루는 열이 있게 한다; 그리고 천국의 빛, 이는 신앙인데, 인간 안에서 총명의 빛이 있게 한다; 단지 이것들은 받아짐에 따라 다양해질 뿐이다.

이 해에. 이 상태의 시기에를 의미한다. 이는 “해”의 의미가 시작부터 끝까지의 전체 기간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리고 이 해가 끝났을 때. 이는 이 상태의 시기 이후 황량함을 의미한다. 이는 “이 해가 끝났을 때”의 의미가 이 상태의 시기 이후이다로부터 “해”가 전체 상태의 기간을 표시하는 앞 항에서 말했다. 이 기간 이후 황량함이 있다가 의미되는 것은 이어지는 것으로부터 이다.

그들은 두 번째 해에 그에게 왔다. 이는 그 뒤를 이어 있는 상태의 시작을 의미한다.
이는 설명할 필요 없이 알 것이다.

그리고 그에게 말했다, 우리는…내 주께 숨기지 않을 것입니다. 이는 그것이 내적인 것에 알려졌다는 것을 지각함을 의미한다. 이는 “말하다(say)”의 의미가 지각하다 이다로부터; 여기서 “주”인 요셉의 표현함이 내적 부분이다로부터; 그리고 “주께 숨기지 않는다”의 의미가 알려진다 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내적 의미에서 “숨기지 않는다”가 알려진다를 표시하는 이유는 자연 부분에서 출시되고 거행되는 모든 것은 그것 자체에 속하는 모든 것을 내적 부분으로부터 가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내적 부분에게 감추여 있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럼에도 외적 의미에서, 특히 역사적 의미에서, 본문 같은 형체가 사용된다; 예를 들면, 주님께서 인간에게 이야기를 하실 때, 그분은 그에게 당장의 주제가 무엇인지를 먼저 질문하는 방식 같은 것이다. 사실 그분은 이미 다 파악하고 계시지만 대화의 순서가 그렇다는 말이다; 이런 대목이 등장하는 곳으로는 여호와의 천사가 하갈에게 이야기를 할 때(창. 16:7, 8); 아브라함에게(창. 18:9); 모세에게(출. 4:2) 등등이다; 실로 이런 방법이 아니면 (인간의) 외적 느낌이 만족할 대안이 없다, 즉 어떤 것이 발음되지 않으면, 인간이 믿는 것은 자기는 모른다 일 뿐이다.

어떻게 이 은이 소비되었는지… 이는 진리가 황량함 때문에 보이지 않음을 의미한다. 이는 앞에서 살폈다.

그리고 짐승떼는 내 주에게 있습니다. 이는 진리의 선을 의미한다. 이는 “짐승의 떼”, 또는 “양떼와 목축떼”의 의미가 진리로부터의 내면과 외면의 선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것이 황량함 때문에 더 이상 보여질 수 없다는 것은 이미 살폈다.

내 주 앞에서 우리에게 남아 있는 것은 우리의 몸과 우리의 지면 밖에 없습니다. 이는 선과 진리를 받는 그릇이 완전하게 황폐되었음을 의미한다. 이는 “몸”의 의미가 선을 담는 그릇(선의 저장소)이다로부터; “지면(ground)”의 의미가 진리의 저장소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지면”이 진리의 저장소(그릇)인 이유는 지면이 씨들을 받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면에 뿌려진 씨들에 의해 특별하게는 선행으로부터 신앙 속에 있는 것, 고로 선으로부터 진리 속에 있는 것이 의미되어진다; 지면”이 진리를 담는 그릇을 표시함에 대하여는 이미 살핀 바 있다. 이 저장소들이 황량해졌다는 것이 “이외에 내 주 앞에 남은 것은 없다”에 의해 의미된다.
진짜 의미에서 “몸(body)”은 사랑이 있는 선을 의미한다, 그리고 “지면”은 신앙 속에 있는 진리를 의미한다; 그러나 “은”과 “가축떼”로 의미되는 진리들과 진리의 선들이 황량함 때문에 더 이상 보일 수가 없을 때, 이때 “몸”에 의해서는 선의 저장소만을, “지면”은 진리의 저장소만을 의미하게 된다. 진짜 의미에서 “몸”이 사랑 속에 있는 선을 의미하는 이유는 몸, 또는 “몸”에 의해 뜻해지는 전체 인간은 주님으로부터의 생명의 저장소이기 때문, 고로 선의 저장소이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사랑의 선이 인간 안에서 생명 자체를 만들기 때문이다, 생명의 원천을 이루는 열이 사랑인바, 사랑은 생명의 열 자체이다; 그리고 이 열이 인간 안에 있지 않으면, 그는 죽은 것이다. 그러므로 내적 의미에서 “열”에 의해 사랑의 선이 뜻해진다. 그리고 인간이 천국의 사랑을 가지지 않고 지옥의 사랑만을 가질 때조차에서도, 여전히 그의 생명의 가장 안쪽은 천국의 사랑으로부터 있다, 그 이유가 이 사랑은 주님으로부터 계속적으로 흘러들기 때문이다, 그리고 흘러듦의 시작점에서는 당사자에게 생명의 원천이 되는 열이 결과되게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작점을 지나는 진행의 과정에서 인간에 의해 뒤집히고 남용되고 타락된다, 이로부터 지옥의 사랑이 온다, 이로부터 불결한 열이 있다.
진짜 의미에서 “몸”이 사랑의 선이다는 것은 천사들로부터 분명해진다, 그 이유가 그들이 현존할 때, 사랑이 그들로부터 쏟아지기 때문, 하여 천사는 보이지도 않고 사랑 밖에 더 있는 것은 없다고 여러분도 믿을 정도가 될 것이다; 이 전체 몸으로부터 또한 사랑으로부터 있는 빛으로부터 밝게 빛남이 있다; 그 이유가 사랑의 선은 그 자체로부터 발광하는 불꽃 같기 때문이다, 이것이 거기서 파생되는 신앙의 진리이다. 이것이 천국의 천사들의 특품인 바, 거기서 주님 자신이 어떠하실지는 더 말하지 않아도 이미 짐작되었을 것이다; 즉 그분으로부터 천사들은 사랑의 모든 것을 가진다, 이분의 신성한 사랑인 태양으로서 나타나고, 이 태양으로부터 천국의 빛이 있다, 그리고 거기 안에 있는 모든 이는 자기들의 천국의 열을, 자기들의 사랑을, 고로 자기들의 생명을 가진다. 주님의 신성한 인간이 이렇게 나타나고 있다, 그리고 이로부터 모든 이런저런 것이 존재한다. 이로부터 분명한 바, 주님의 “몸(body)”에 의해 뜻해지는 것이 신성한 사랑임을, 마찬가지로 그분의 “살(flesh)” 또한 신성한 사랑이다. 더욱이 주님의 몸 자체, 영광되셨을 때, 즉 신성으로 만드셨을 때, 신성한 사랑밖에 더 아니다. 무한 이신 신성에 관하여 우리가 생각한다면 이 이상 더 무엇을 생각할 수 있을까?
이 모두로부터 거룩한 만찬에서 “몸”은 보편적 인류를 향하여 있는 주님의 신성한 사랑밖에 더 뜻해지는 것은 없다, 이에 관해 복음서들에 쓰여 있다:
예수께서 빵을 가지시고, 그리고 축사하시고, 쪼개셨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주셨다, 그리고 말하셨 다, 받으라, 먹어라; 이것은 나의 몸이다 (마. 26:26; 막. 14:22; 눅. 22:19);
“이것은 나의 몸이다”라고 빵에 관해 그분이 말하신 이유는 “빵”에 의해 신성한 사랑이 의미되었기 때문이다.
신성한 사랑이 주님의 “몸”에 의해 요한 복음서에서 의미된다:
예수께서 말하셨다, 이 성전을 파괴하라, 그리고 삼 일 안에 내가 이것을 일으킬 것이다. 그러나 그분은 그분의 몸의 성전에 관해 말하셨다 (요. 2:19, 21);
“그분의 몸의 성전”은 신성한 선으로부터의 신성한 진리이다. 그리고 그분의 “몸”이 최고 의미에서 주님의 신성한 사랑의 신성한 선이시기 때문에, 그러므로 천국에 있는 모든 이는 “주님의 몸 안에” 있다라고 말해진다.
주님의 “몸”이 신성한 선이다는 것은 아래 말씀으로도 알게 된다:
나는 나의 눈을 들었다, 그리고 보았다, 그리고 잘 보니, 고운 아마옷을 입으신 사람이 보였는데, 그분의 허리는 우하즈의 금으로 띠를 하고 계셨다; 그분의 몸은 또한 녹주석(tarshish, beryl) 같았다, 그리고 그분의 얼굴은 번개의 나타남이었다, 그리고 그분의 눈은 불의 횃불로서 이었다, 그리고 그분의 팔과 발은 광을 낸 놋쇠의 빛남 같았다, 그리고 그분의 말들의 음성은 군중의 음성 같았다 (단. 10:5, 6);
“우하즈의 금으로 띠를 두름”에 의해, “번개의 나타남이 그분의 얼굴이었다”에 의해, “불의 횃불이 그분의 눈을 표현했다”에 의해, “놋쇠의 빛남이 그분의 팔과 다리이었다”에 의해 사랑의 선이 의미되어진다; “금”이 사랑의 선이다에 대하여는 이미 살핀 바 있다, 그리고 또한 “불”도 살폈다, 그리고 번개 역시 불이기 때문에 같다; 그리고 “놋쇠”는 자연 평면에서의 사랑의 선과 선행의 선이다; “녹주석(또는 감람석, 황옥)”에 의해 몸의 나머지 부분이 나타났다, 즉 머리와 허리 사이의 몸의 중간인데, 선행의 선과 신앙의 선이 의미되어진다, 그 이유는 녹주석은 빛나는 귀한 돌(보석)이었기 때문이다.

어찌하여 우리와 우리의 지면 모두가 당신의 눈 앞에서 죽어서야 되겠습니까? 이는 만일 그들이 황폐되어질 것이다면, 내적 부분 아래 영적 생명은 더 이상 있지 않을 것을 의미한다. 이는 “당신의 눈 앞에서”의 의미가 내적 부분 아래 이다로부터, 그 이유가 이 말을 받는 자가 요셉이기 때문이다; “우리와 우리의 지면”의 의미가 선과 진리의 그릇들(저장소들)이다로부터, 고로 영적 생명의 저장소들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 저장소들 안에 영적 생명이 없을 때, “죽는다”라고 말해지고 있다; 그 이유가 “죽는다”가 황무해짐, 즉 선과 진리가 영적 생명을 만드는데, 이것이 결핍됨이 의미된다.

우리와 우리의 지면을 빵으로 사십시오. 이는 그들이 선을 가지고 버텨내도록 그릇 둘 모두를 자기 것으로 삼음을 의미한다. 이는 “사다”의 의미가 자기 것이 되다 이다로부터; “우리와 우리의 지면”의 의미가 선과 진리의 저장소들이다로부터, 고로 둘 모두가 저장소들이다; 그리고 “빵으로”의 의미가 선으로부터 지탱함이다. “빵”이 사랑의 선과 신앙의 선인 이유는 여기서는 빵에 의해 모든 식품이 뜻해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는 살 것이고, 우리의 지면은 바로에게 종입니다. 이는 완전 복종함을 의미한다. 이는 “우리와 우리의 지면”의 의미가 선과 진리의 저장소들이다로부터; 그리고 “종들”의 의미가 인간의 자기 자신으로부터의 자유 없이 있다로부터, 고로 모조리 복종함이다. 저장소들에 의해 인간의 형체들 자체가 뜻해진다; 그 이유가 인간들은 주님으로부터 생명을 받는 형체들밖에 더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형체들은 인간들이 주님으로부터 있는 영적 생명이 들어옴을 거절하는 실제의 삶과 유전적인 것을 수단으로 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저장소들이 아주 많이 단념되어 그것들이 인간의 자기 자신으로부터 어떤 것도 더 이상 가지지 못할 때, 온통 복종함이 있다. 거듭나지고 있는 인간은 황무함의 반복되는 교차함에 의해 자신의 것이라고 우길만한 것이 더 이상 없는 마지막 수준까지 떨어질 때, 하여 남은 것은 주님의 것 뿐이다고 여겨지는 때를 맞는다; 그리고 그가 주님의 것이 되어갈 때, 자기에게 남은 것은 자기를 슬프게하는 것뿐이라고, 하여 근심 걱정에 사로잡힌다; 그리고 그가 그의 이런 자아의 상태로부터 건져내질 때, 그는 자기의 행복과 복됨 안으로 되돌아 온다. 이런 상태들의 순환은 모든 천사들에게 있다.
그분이 인간을 복되고 행복하게 만들기 위하여, 주님께서는 완전 복종을 요구하신다, 즉 그가 한쪽으로는 자신, 다른 쪽으로는 주님 하여 양다리 걸치기 식의 부분적 복종이 아니다는 말이다. 이럴 경우 그는 두 주인을 섬기는 셈이기 때문이다 (마. 6:24). 완전 복종은 주님의 아래 말씀에 의해서도 뜻해진다:
나 보다 아버지와 어머니를 더 사랑하는 자는 나에게 가치가 없다; 그리고 나 보다 아들과 딸을 사랑하는 자도 나에게 가치가 없다 (마. 10:37);
“아버지와 어머니”에 의해 일반적 측면에서 의미되는 것은 유전으로부터 인간의 자기 자신인 것들, 그리고 “아들과 딸”은 실제의 생활로부터 그의 자기 자신인 것들이 의미된다. 인간의 자기 자신은 “혼”에 의해서도 의미된다: 즉
자기 혼을 사랑하는 자는 그것을 잃을 것이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자기 혼을 미워하는 자는 그것을 영원한 생명쪽으로 간직할 것이다. 만일 누군가가 나를 섬기려한 다면, 그로 하여금 나를 따르게 하라; 그리고 내가 있는 곳, 거기에 나의 종 역시 있을 것이다 (요. 12:25, 26).
완전 복종이 아래 주님의 말씀에 의해 의미된다:
또 다른 제자가 말했다, 주여 , 저로 먼저 가서 나의 아버지를 묻게 하십시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에게 말하셨다, 나를 따르라; 그리고 죽은 자는 그들의 죽은 자가 매장하게 하라
(마. 8:21, 22).
복종이 100%이어야만 함은 교회의 첫째 명령으로부터도 분명하다: 즉
너희는 주 너희 하느님을 네 모든 심정으로부터, 그리고 네 모든 혼으로부터, 그리고 네 모든 마음으로부터, 그리고 모든 네 힘으로부터 사랑할 것이다; 이것은 첫째의 명령이다 (마. 12:30).
고로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 인간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주님 자신으로부터 이기 때문에 그러므로 모든 심정, 모든 혼, 모든 마음, 그리고 모든 힘, 이것은 받는 것들인 바, 주님의 것들임에 틀림이 없다, 결과적으로 복종은 당연히 통째로 이어야 한다. 이런 복종이 여기서 “우리는 살 것이고, 그리고 우리의 지면도, 바로에게 종들이다”라는 말에 의미되는 복종인 것이다. 그 이유가 바로에 의해 천적 평면으로부터의 내적 부분의 후원 아래 있는, 최고 의미에서일 경우, “요셉”인 주님의 후원 아래 있는 일반적 측면에서의 자연 평면이 표현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씨를 주십시오. 이는 이 방도에서 선행으로부터의 선과 신앙으로부터의 진리가 유입됨을 의미한다. 이는 “씨”의 의미가 선행의 선과 신앙의 진리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것을 “주는” 것이 유입이다는 것이 분명한 이유는 그것들이 주님으로부터 유입을 수단으로 인간에게 오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는 살 것이고 죽지 않습니다. 이는 이 근원으로부터 영적 생명이 있고 더 이상 지옥에 떨어짐의 공포도 없다를 의미한다. 이는 “산다”의 의미가 영적 생명이다로부터; 그리고 “죽는다”의 의미가 지옥에 떨어짐이다로부터, 여기서는 지옥에 떨어짐의 공포이다, 그 이유는 황무함의 상태이나 인간이 거듭나지는 상태 이기도한 바, 이 상태에서는 지옥에 떨어짐은 없는 바, 단지 공포일 뿐이다.

그리고 지면은 황폐해진채로 있지 않을 것입니다. 이는 마음은 교회의 기억 속의 지식으로 경작되어야 한다를 의미한다. 이는 “지면”의 의미가 진리의 저장소 이다로부터, 저장소 자체는 마음이다, 여기서는 자연적 마음이다, 그 이유는 말해지는 지면이 이집트의 지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황폐해 있다”의 의미가 보여질 수 있는 진리가 없이 있는 것이다로부터; 현재의 경우, 교회의 기억 속의 지식 없이 있는 것이다, 그 이유는 “이집트인”에 의해 교회의 기억 속의 지식들이 의미되기 때문이다, 또한 이것은 자연 평면의 진리들이기도 하다. “이집트의 토지”가 기억 속의 지식들이 있는 자연적 마음이다는 것은 이미 살핀 바 있다; 그러므로 “이집트의 지면”은 이 마음을 특별하게 의미한다. 그러므로 “지면이 황폐해 있지 않다”에 의해 마음은 기억 속의 지식들로 함양되어야 함이 틀림이 없는 것이다.

그리고 요셉은 바로를 위하여 이집트의 모든 지면을 샀다. 이는 내적 부분이 기억 속의 지식이 있는 자연적 마음 전체를 그 자신에 자기 것이 되게 해서 일반적인 후원 아래 두었다를 의미한다. 이는 요셉의 표현함이 내적 부분이다로부터; “사다”의 의미가 자신의 것이 되게 하다 이다로부터; “이집트의 지면”의 의미가 기억 속의 지식이 있는 자연적 마음이다로부터; 그리고 바로의 표현함이 일반적 측면에서의 자연 평면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고로 “바로를 위하여”는 자연 평면에서 일반적 후원 아래 놓는 것을 표시한다.

이집트인들은 각자 그의 들판을 팔았다. 이는 교회를 향하여 유익한 모든 것들이 재 통일되고 종속됨을 의미한다. 이는 “팔다”의 의미가 자기 자신의 것이 더 이상 있지 않기 위해 멀어지는 것이다로부터, 고로 단념하고 종속시키는 것(신하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들판”의 의미가 교회의 교리이다로부터, 그리고 일반적 의미에서는 교회이다. 이로부터 “이집트인들은 각자 자기 들판을 팔았다”에 의해 교회를 유익하게 하는 모든 것들이 재 통일되고 종속됨이 의미된다.

그 이유는 기근이 그들에게 너무 가혹하게 극심했기 때문이다. 이는 자포자기에 이를 정도의 황폐함이 있었기 때문에를 의미한다. 이는 기근의 의미가 교회 속에 있는 이런저런 것들에 관련하여 황무함이 있다로부터; 그리고 기근이 “가혹하게 극심하다”고 말해질 때, 이것은 자포자기를 표시한다, 그 이유가 황무함의 마지막 단계가 자포자기이기 때문이다. 자포자기가 황무함의 마지막 순서이고 시험의 마지막 단계인 데에는 많은 이유들이 있다, 허지만 여기서는 한 가지만 아래에서 열거해보겠다. 자포자기는 자신들로부터서는 선과 진리는 아무것도 없다는 것, 자신으로부터 정죄되고 말았다고, 그러나 주님에 의해 정죄되고 만 자신들이 건져내어졌다고, 그리고 근원은 선과 진리를 수단으로 함 안에서만 흘러든다는 것을 결과물들 안에서 인정하는 것을 느끼는 이들에게서 발생된다. 또한 이들에게 자포자기는 주님으로부터 있는 생명의 행복을 느끼게 하는 단초를 제공한다; 그 이유가 그들이 (자포자기에서) 이 상태로 나와 있을 때, 그들은 마땅히 죽어야 할 운명, 지옥에 떨어져야 할 운명에서 있었지만, 그런 감옥에서 자유해져 있는 것과 같다. 더욱이 황무함과 시험들을 수단으로 천국의 삶에 반대되는 상태들을 실감했지만, 이 결과는 만족하고 행복한 것에 대한 감각하고 지각함이기에 자포자기함이 마치 이를 위해 있었던 필수 과정이였음을 뒤돌아 본다. 그러므로 두 완전 반대되는 상태의 비교는 자연스레 뒤따를 수밖에 없고 그 비교는 지금의 행복을 더 진하게 만든다. (아마 이런 신앙의 체험은 많은 이들이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겪는 일들이다.)

그리고 토지는 바로의 것이였다. 이는 모든 것들은 내적 부분의 후원 아래 있는 자연 평면에 종속되어졌다를 의미한다. 이는 “토지는 바로의 것이었다”의 의미가 “토지”에 의해 의미되는 모든 것들을 자기 것이 되게 하고 종속되게 함이다로부터; 그리고 바로의 표현함이 일반적 측면에서의 자연 평면이다로부터, 이 안으로 “이집트”에 의해 의미되는 기억 속의 지식들이 가져와진다. 이것이 내적 부분의 후원 아래 있는 이유는 일반적, 부분적 모두를 아우르는 전체 자연 평면에서 이집트의 모든 토지를 통치하는 요셉에 의해 의미되기 때문에서 이다. 그리고 또한 그는 바로의 집까지도 통치하였다를 아래에서 읽는다:
요셉이 자기 형제들에게 말했다, 나를 보낸 하느님께서는 바로에게 아버지, 그의 집의 모든 이에게 는 주인으로 (되게 했다), 그리고 나는 모든 이집트의 토지를 통치한다 (창. 45:3, 8).
위 구절은 자연 평면이 내적 부분의 후원 아래 있다고 말한 이유이다.

그리고 그는 백성들을 도성들 쪽으로 이사하게 했다. 이는 기억 속의 지식 속의 진리들은 교리적인 것들에 관련되는 쪽으로 가져와졌다를 의미한다. 이는 “백성”의 의미가 진리들이다로부터, 여기서는 그것이 이집트의 사람들을 서술하므로 기억 속의 진리들이다; 그리고 “도성들”의 의미가 교리적인 것들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러므로 “백성들을 도성 쪽으로 옮기는 것”은 교리적인 것들에 관련되는 쪽으로 기억 속의 진리들을 가져오는 것이다. 이것은 앞의 이 말을 뒤잇는다, 즉 진리들은 자연 평면에서 일반적인 것에 관련되는 쪽으로 가져와진다에 뒤잇고 있다; 그 이유가 교리적인 것들은 일반적 수준인 바, 이쪽으로 진리들은 관련되게 가져와지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교회의 교리는 그것의 머리들로 나뉘어진다, 그리고 각 머리는 교회의 일반적 수준에서 있다. 이런 이유로 백성들은 요셉에 의해 도성으로 옮겨진 것이 일반적인 것들, 고로 교리적인 것들에 진리들이 관련됨이 표현된 것이다.

이집트의 이 끝에서 저 끝에 까지. 이는 기억 속의 지식이 있는 자연 평면 전체를 망라하는 확장을 의미한다. 이는 “경계의 이 끝으로부터 경계의 저 끝까지”라는 표현의 의미가 전체를 망라하여 있는 확장이다로부터; 그리고 “이집트”의 의미가 자연 평면에 있는 기억 속의 지식들이다로부터, 고로 기억 속의 지식이 있는 자연 평면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 이유가 자연 평면은 담는 것, 기억 속의 지식들은 담겨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집트의 왕 바로”에 의해 일반적 측면에서의 자연 평면, 또한 일반적 측면에서의 기억 속의 지식이 의미된다; 그리고 “이집트의 토지”에 의하여는 자연적 마음이 의미된다.

그는 오직 성직자들의 지면은 사지 않았다. 이는 내적 부분은 선을 받으려는 자연적 수용력으로부터 그 자체를 위하여 획득했는데, 그 이유가 자연적 수용력(capacity)은 스스로 존재했기 때문임을 의미한다. 이는 위 말이 나온 요셉의 표현함이 내적 부분이다로부터; “지면”의 의미가 진리의 저장소이다로부터, 여기서의 경우 선을 받는 수용력이다, 그 이유가 수용력이 받는 능력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저장소가 저장소이기 위해서는 수용력은 내부에 있음이 틀림이 없다. 이 수용력은 선으로부터 온다, 즉 주님으로부터 선을 통하여 온다; 그 이유가 사랑의 선이 주님으로부터 흘러들지 않으면, 선이든, 진리이든 무엇이든 받는 능력을 가질 자는 없기 때문이다. 주님으로부터 사랑의 선의 유입이 인간 안쪽의 모든 것들로 받는 능력을 갖게 해준다. 선을 받는 수용력이 자연 평면으로부터 이다는 것이 이집트에 있는 지면에 의해 의미된다, 그 이유가 “이집트”에 의해 기억 속의 지식들에 관련한 자연 평면이 의미되기 때문이다. 위에 주어진 내적 의미는 “성직자들”의 의미가 선들이다로부터 더 분명해진다 (아래에서 살핀다); 그리고 “사지 않는다”의 의미가 이런 수용력들을 자기 것으로 삼지 않는다 이다로부터, 사실 이 수용력은 황무함과 유지지탱시켜줌을 수단으로 내적 부분이 그것들의 수용력과 더불어 선과 진리들을 자신의 것이 되게 했던 것이다. 그 이유는 이런 수용력들은 자신으로부터, 즉 내적 부분으로부터 있었기 때문이다. 고로 “그는 성직자의 지면은 사지 않았다”는 말에 의해서는 내적 부분이 자연 평면으로부터 자체를 위해 선을 받는 수용력을 포획하지 않았다가 의미되는데, 이런 이유는 이것들이 사실상 자체로부터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의 경우 이렇다. 진리와 선을 받는 인간에 있는 수용력들은 주님으로부터 직접적으로 있다, 바꿔 말해 이 수용력을 인간이 지니는 것은 당사자의 도움이 주님에게 필요하지 않다는 말이다. 그 이유가 인간은 선과 진리를 받기 위한 이 수용력을 언제나 간직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수용력으로부터 인간은 이해력과 의지력을 가진다; 그러나 인간이 이런 것을 받지 못하는 때란 그가 악으로 돌아서 있는 때이다; 그렇다 해도 사실상 이 수용력은 당사자에게 남아있다, 그러나 그것들이 생각과 느낌쪽으로의 접근이 당사자에게 닫힌 것 뿐이다; 그러므로 진리를 보고 선을 느끼는 수용력은 인간이 자신으로 악 쪽으로 돌아서게 하고 생활과 신앙에서 악을 확증함에 비례하여 사멸한다. 인간이 진리와 선을 받는 수용력, 어떤 수용력이든 그것에 기여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은 교회의 교리에 잘 알려진 사실이다, 더구나 신앙의 진리와 선행의 선의 어떤 것도 인간으로부터 오는 것은 하나도 없다, 그러나 이 모두는 주님만으로부터 오고 있다. 그럼에도 인간은 자신 안에서 이 수용력을 파괴할 수 있다. 이로부터 지금 알아지는 것은, 내적 부분이 선을 받는 수용력들을 자연 평면으로부터 자체를 위해 어떻게 포획하는지에 대한 것이다. 그 이유는 이것들이 자체로부터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자연 평면으로부터”라고 말해지는 이유는 주님으로부터 선의 유입됨이 내적 부분을 통하여 자연 평면 안으로 있어지기 때문이다. 받는 수용력이 자연 평면으로부터 획득되었을 때, 유입이 있다, 그 이유는 이때야 말로 받음이 있기 때문이다.
선들이 “성직자들”에 의해 의미된다에 주목할 경우, 우선 알아야 하는 것은, 주님으로부터 진행되는 두 가지 것들이 진리와 선이다는 것이다. 신성한 선은 성직자들에 의해, 신성한 진리는 왕들에 의해 표현되어진다. 이로부터 “성직자”는 선을, “왕”은 진리를 의미한다. 고대 표현 교회에서, 성직과 왕권은 한 인물 안에 병합하고 있었다, 그 이유는 주님으로부터 진행하는 선과 진리가 하나로 있었기 때문, 그리고 천국에서 천사들또한 함께 인접되었기 때문이다.
고대 교회에서 이와 같이 둘이 병합되어 있던 인물이 “멜기세덱”, 또는 “정의의 왕”이라 불리웠는데, 이는 아브라함을 방문한 멜기세덱으로부터 확인된다: 즉
살렘의 왕 멜기세덱이 빵과 포도주를 가져왔다; 그리고 그는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에게 성직자 였다; 그리고 그는 아브라함에게 복을 빌어주었다 (창. 14:18, 19).
그가 양쪽 측면 모두에서 주님을 표현했다는 것은 그가 왕이었고, 동시에 성직자이었다는 것, 그리고 그에게는 아브라함을 축복하는 것, 아브라함에게 사랑의 선과 신앙의 진리의 상징물인 빵과 포도주를 제공하는 것이 허용되었다는 사실로부터 분명해진다. 멜기세덱이 양쪽 측면 모두에서 주님을 표현한 대목이 다윗서로부터도 분명해진다:
여호와께서는 맹세하셨다, 그리고 그분은 후회하시지 않을 것이다, 당신은 멜기세덱의 방식에 따라 영원하게 성직자이시다 (시. 11:4);
위는 주님에 관하여 말해졌다; “멜기세덱의 방식에 따라”란 그가 왕과 성직자이었다를 뜻하는데, 최고 의미에서 그분으로부터 신성한 선과 신성한 진리가 함께 진행된다는 것을 뜻한다.
더욱이 표현 교회가 야곱의 후손과 더불어 설립되어졌는 바, 그러므로 한 인물에서 결합되어 주님으로부터 하나로서 진행하는 신성한 선과 신성한 진리가 (애당초에서는) 표현되었다. 그러나 전쟁들이나 이 백성의 우상 숭배 때문에 이 두 직능은 우선 나뉘어졌다. 백성을 통치한 자들은 “지도자”, 후에는 “사사(판관)”라 불리웠다; 한편 거룩한 것들을 공적으로 수행한 이들은 “성직자(priest)”라고 불리었고, 아론의 후손과 레위인이 이에 속했다. 그럼에도 이후에 이 직능은 한 인물에서 함께 병합되었는데, 그 인물은 엘리와 사무엘이었다. 그러나 이 백성들의 특성상 결국 그들 사이에서 표현 교회(교회를 표현함, a representative church)가 설립되어질 수 가 없었고, 표현만 하는 교회(껍질만 교회임, the representative of church)가 유지되어갔다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는 그들 사이에서 대세를 이룬 것이 우상 숭배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두 직능들이 둘로 분리되는 것이 허용되어졌다. 하여 신성한 진리 측면에서의 주님은 왕들에 의해, 신성한 선 측면에서의 주님은 성직자들에 의해 표현되었다. 게다가 이것은 주님이 기뻐하셔서가 아닌 백성이 원해서 있게 되었다는 것이 아래 구절에서 읽어진다:
백성이 네게 말하는 모든 것에서 백성의 음성에 순종하라; 그 이유가 그들이 너를 거절한 것이 아니라, 그들은 나를 거절해왔었기 때문이다, 하여 나로 자기들을 통치하지 않게 하려 해서이다; 그리고 너는 그들에게 왕의 권위를 보여줄 것이다 (삼상. 8:7-끝절; 12:19, 20).
이 두 직능들이 분리되지 않아야 하는 이유는 신성한 선으로부터 분리된 신성한 진리는 모든 이를 정죄하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신성한 선에 하나된 신성한 진리는 구원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신성한 진리로부터 인간은 지옥 쪽으로 정죄되지만, 신성한 선에 의해서는 그가 거기로부터 꺼내져 천국으로 승강되게 한다. 구원은 자비 속에 있다, 고로 신성한 선으로부터 있다. 그러나 인간이 자비를 거절할 때, 고로 자신으로부터 신성한 선을 거절할 때 지옥에 떨어짐이 있다; 즉 그는 진리로부터의 심판에 남겨진다는 말이다.
성직자들이 신성한 선 측면에 괸하여 주님을 표현했다는 것, 그리고 이로부터 그들은 선을 의미한다는 것은 성직 직분이 제정되고 설립되는 구절들에서 알아질는지 모른다. 즉 아론이 대 성직자로 뽑힐 때의 성직 직분에 따른 이모저모들에서, 후에는 레위인들에 관한 사항들에서; 대 성직자가 제단을 보살피기 위해 지성소 안으로 들어가게 한 것이라든가, 여호와의 거룩한 것들은 성직자를 위해 있는다라든가 (레. 23:20; 27:21); 성직자들은 토지에서 몫을 가지거나 상속받지 못한다라든가, 그러나 여호와께서 그들의 몫과 상속분이다는 것 (민. 18:20; 신. 10:9; 18:1); 레위인들은 첫 출생 대신 여호와에게 주어졌다는 것, 그리고 여호와에 의해 그들은 아론에게 주어졌다는 것 (민. 3:9, 12, 13, 40-끝절; 8:16-19); 레위인과 더불어 대 성직자는 그들이 진을 칠 때, 앞을 향할 때 진영의 한가운데 있는다는 것 (민. 1:50-54; 2:17; 3:23-38; 4:1-끝절); 아론의 씨 중에서 어떤 흠이라도 있는 자는 번제단과 제물 바침에 가까이 있어서는 안된다 (레. 21:17-21); 이 외에 많은 다른 사항들이 있다 (레. 21:17-21).
모든 이런 사항들은 최고 의미에서 주님의 신성한 선을 표현했다. 고로 관계적 의미에서 사랑 속에, 선행 속에 있는 선을 표현했다. 그러나 아론의 의복들, 이는 “거룩함의 의복들”이라 불리우는데, 신성한 선으로부터의 신성한 진리를 표현했다; 이 의복에 관한 것은 차후 주님의 신성한 자비로부터 출애굽기편에서 더 말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진리가 “왕들”에 의해, 선이 “성직자들”에 의해 의미되기에, 말씀에서 “왕들과 성직자들”이 함께 자주 언급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하느님과 그분의 아버지에게 왕들과 성직자들로 만드셨다
(계. 1:5, 6; 5. 10);
“왕들”이 신앙 속에 있는 진리로부터 “만들어진다”라고, 그리고 “성직자들”은 선행 속에 있는 선으로부터 “만들어진다” 라고 말해진다. 고로 주님 안에 있는 이들과 더불어 진리와 선은 맞잡고 있다. 마치 천국에 있는 이들과 같다, 그리고 이것이 “왕들과 성직자들로 만들어짐이다”에 의해 뜻해져 잇다.
예레미야서에서:
왕과 제 1 인 자들의 심정이 멸해지는 그 날이 올 것이다; 그리고 성직자들은 놀라워질 것이다; 그리고 예언자들은 경이로워 할 것이다 (예. 4:9).
다시:
이스라엘의 집이 부끄러워질 것이다; 그들, 그들의 왕들, 그들의 제 1 인 자들, 그리고 그들의 성직자들, 그리고 그들의 예언자들 (예. 2:26).
다시:
유다의 왕들, 제 1 인 자들, 성직자들, 그리고 예언자들, 그리고 예루살렘의 주님들 (예. 8:1).
이 구절들에서 “왕들”은 진리들을 표시한다; “제 1 인 자들”은 제 1 의 진리들을; “성직자들”은 선들을; 그리고 “예언자들”은 가르치는 이들을 표시한다.
더 알게 되는 것은, 요셉이 성직자들의 지면을 사지 않음은 선과 진리를 받는 모든 수용력은 주님으로부터 있다는 것을 표현했다는 사실이다. 이와 비숫한 레위인들의 들판에 관한 법이 있다:
레위인들의 도성들의 외곽의 들판은 팔리지 않을 것이다; 그 이유가 이것은 그들의 영원한 소유지이 기 때문이다 (레. 25:34);
위 구절의 내적 의미에 의해 인간은 자신을 위해 사랑의 선과 선행의 선인, 교회의 선의 어떤 것도 주장해서는 안된다, 그 이유는 이것은 주님 만으로부터 있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그 몫은 바로에 의해 성직자에게 분배되었기 때문이다. 이는 그것은 내적 부분의 후원 아래 자연 평면을 수단으로 질서 안에 놓여있었음을 의미한다. “분배된 몫(지정된 몫)”의 의미함이 질서에 놓인 것이다로부터; 그리고 바로의 표현함이 일반적인 자연 평면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리고 이것이 자연 평면에 질서 안에 놓인 것이 내적 부분으로부터 왔기 때문에, 내적 부분의 후원 아래 있었다라는 말이 더 추가되었다, 이것은 요셉이 이집트의 통치자이었다, 또한 바로의 집도 통치했다에 의해서도 표현되고 있다.

그리고 그들은 바로가 그들에게 주었던 할당된 몫을 먹었다. 이는 선들을 질서 안에 장착됨에 따라 있었던 것 이상으로 그들 자신에게 자기 것이 되도록 하지 않았다를 의미한다. 이는 “먹다”의 의미가 누군가의 자신에게로 자기 것이 되게 함이다로부터; 그리고 “그들에게 할당된 몫”의 의미가 질서에 놓인 것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고로 “그들에게 할당된 몫을 먹다”에 의해 선들을 질서에 놓여진 것 그 이상을 자기 것이 되게 하지 않았다가 의미된다. 이것이 바로에 의해 표현되는 자연 평면으로부터 이었다는 것, 즉 내적 부분의 후원 아래 자연 평면에서 이었다는 것은 방금 앞에서 살폈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들의 지면을 팔지 않았다. 이는 이런 이유로 그들은 그것들을 단념하거나 복종시킬 필요가 없었다를 의미한다. 이는 “팔다”의 의미가 단념하다 이다로부터, 고로 복종케 하는 것이다, 그 이유가 단념하는 것은 또 다른이에게 복종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집트의 성직자의 “지면”의 의미가 자연 평면에서 선을 받는 수용력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런 이유로 그들은 그것들을 단념하거나 복종시킬 필요가 없었다는 것이 “그러므로…않았다”는 표현에 의해 의미되었다.

그리고 요셉은 백성에게 말했다. 이는 내적 부분이 기억 속의 지식 속의 진리 안으로 유입됨을 의미한다. 이는 “말하다”의 의미가 지각하다 이다로부터; 그리고 이것이 “요셉”인 내적 부분을 서술하기 때문에 이것은 유입을 표시한다, 그 이유가 외적 부분에서 지각되는 것은 내적 부분으로부터 흘러들기 때문이다; 그리고 요셉의 표현함이 내적 부분이다로부터; 그리고 “백성”의 의미가 기억 속의 지식 속의 진리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보라 나는 오늘 바로를 위하여 너희와 너희의 지면을 샀다. 이는 그것은 그 자체를 위해 획득하였다는 것, 그리고 그것들을 내적 부분의 후원 아래 있는 자연 평면에 있는 일반적인 것에 종속되게 만들었다를 의미한다. 이는 “사다”의 의미가 자기 것이 되게 함과 획득함이다로부터; 그리고 “지면”의 의미가 진리의 저장소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것들을 자연 평면에서 일반적인 것 쪽에 종속되게 했다는 것이 “그가 그것들을 바로를 위해 샀다”에 의해 의미되는데, 바로에 의해서는 일반적 측면에서의 자연 평면이 표현되고 있다. 하여 앞에서 살핀 내용에 일치함과 더불어 “내적 부분의 후원 아래” 라고 말한 것이다.

자, 여기에 너희를 위한 씨가 있다, 그리고 너희는 지면에 씨를 뿌리라. 이는 심어져야 하는 신앙의 진리와 선행의 선을 의미한다. 이는 “씨”의 의미가 선으로부터의 진리, 또는 선행으로부터의 신앙, 고로 모두이다; “뿌리다”의 의미가 심는 것이다로부터; 그리고 “지면”의 의미가 저장소이다로부터. 그러나 진리와 선이 심어질 때, “지면”은 더 이상 저장소를 의미하지 않고 들판 같이 교회 속에 있는 이런 저런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수확하면. 이는 거기로부터 파생된 열매를 의미한다. 이는 “수확(ingather)하다”의 의미가 열매들이다로부터; 그 이유가 추수, 이는 들판에서 그러모으는 것인 바, 이것은 열매들이기 때문이다.

너희는 바로에게 오분의 일을 주어야 할 것이다. 이는 리메인스를 의미한다, 즉 이것들은 내적인 것의 후원 아래 있는 자연 평면에 있는 일반적인 것을 위해 있다를 의미한다. 이는 “5”, 또는 “1/5”의 의미가 리메인스(remains)이다로부터; 그리고 바로의 표현함이 자연 평면에 있는 일반적인 것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내적 부분의 후원 아래”라고 더 붙여 말한 이유는 앞에서 살핀 바 있다. 리메인스가 무엇인지도 이미 살폈다. 즉 그것들은 내면의 인간 안에 저장된 주님으로부터의 선들과 진리들이다. 이것들은 당사자가 선의 상태에 있을 때, 그의 외면, 또는 자연 평면에 놓여지게 된다; 그러나 그가 악의 상태에 있는 순간이면, 그것들은 재빨리 되돌아서 다시 저장된다. 그것들이 이렇게 민감하게 처방되는 이유는 그것들이 악과 혼합되어 멸해지고 마는 것을 예방하시려 해서 이다. 인간이 거듭나질 수 없을 때, 당사자에게 있는 리메인스는 그의 내면 안에서 조심스럽게 보존되어진다. 그러나 인간이 거듭나질 때, 거듭나는 만큼에서 그것들은 내면으로부터 꺼내지고 외면 안으로 놓여진다, 그 이유가 거듭남을 수단으로 내면의 것들이 외면의 것들과 결합하고 하나로서 행동하기 때문이다. 리메인스는 처음에는 일반적인 것들에 놓여지고, 그 후 세부적, 특수적인 것들에 계속적으로 놓여 간다. 여기서 취급되는 내적 의미에서의 주제는 자연 평면의 거듭남이기에, 리메인스가 자연 평면에 있는 일반적인 것들을 위하여 있다고 말한 것이다.

그리고 사 분(오 분의 사)은 너희를 위하여 있다. 이는 아직 리메인스가 아닌 것을 의미한다. 이는 “사 (부)분들(4/5)”, 이는 리메인스를 의미하는 오 분의 일을 제외한 그 나머지 인 바, 가져가버려지는 것인 바, 이는 아직 리메인스가 아닌 것들이 의미된다. 숫자 “4”는 “2”와 같은 의미를 지닌다, 즉 쌍인 것들, 함께 결합한 것들을, 즉 선과 진리가 결합한 경우를 의미한다. 이것들이 아직 리메인스가 되지 못하였을 때의 그것들이 여기서 “사 분”에 의해 의미된다. 그 이유가 선들과 진리들은 그것들이 인간에게 자기 것 삼아질 때까지는 리메인스가 되지 못한다, 그리고 그것들이 자유 안에서 애착으로부터 받아질 때, 처음으로 인간에게 자기 것이 되어 간다.

들판의 종자를 위하여. 이는 마음의 자양분을 위하여를 의미한다. 이는 “종자(씨)”의 의미가 진리와 선이다로부터, 고로 신앙과 선행이다; 그리고 “들판”의 의미가 일반적 의미에서는 교회이다로부터, 그리고 특별한 의미에서는 인간에게 있는 교회이다, 고로 교회가 있는 인간, 즉 진리와 선을 받는 인간이다. 그가 “들판”이라 불리울 경우, 그의 마음이 뜻해진다; 그 이유가 인간은 그의 외적 형체로부터 인간이 아니고, 그의 마음으로부터, 즉 그의 마음을 구성하는 그의 이해력과 의지력으로부터, 또한 그의 더 내향의 마음을 구성하는 신앙의 진리와 선행의 선으로부터 인간이다. 이것, 즉 이 마음이 진짜 의미에서 인간일 때, 진리와 선에 의해 자양분을 받아 유지 존속된다; 그리고 진리와 선이 “씨”에 의해 의미되는 바, 자양분 또한 그것에 의해 의미된다. 이는 이어지는 말에서 직접적으로 분명해진다: “너의 식품을 위하여, 그리고 너의 집에 있는 자들을 위하여, 그리고 너의 아기들을 위한 식품을 위하여.” 이로부터 “들판의 씨”가 마음의 자양분을 표시한다.

그리고 너희의 식품을 위하여, 그리고 너희 집에 있는 그들을 위하여. 이는 그러므로해서 진리의 선이 각각에, 모든 것 안에 있도록을 의미한다. 이는 “식품(food)”의 의미가 진리의 선이다로부터; 그리고 “집에 있는 그들”의의미가 진리로부터 파생되는 선의 각각 그리고 모든 것들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고로 “집에 있는 그들을 위한 식품”의 의미는 각각 그리고 모든 것들에서 있는 진리의 선이다. 진리의 선이 각각 그리고 모든 것들에 있다는 말에 주목해보자: 인간이 거듭남에 비례하여, 선은 당사자에게 속하는 각각 그리고 모든 것들 안으로 그 자체를 은근히 심는다; 그 이유가 선에 애착함이 당사자 안에서 보편적으로, 즉 각각 그리고 모두에서 통치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보편적으로 통치하는 것은 낱개적으로도, 즉 각각 그리고 모든 것에서 통치한다. 이것은 모든 이와 더불은 통치하는 애착으로부터 보여질는지 모른다. 이 애착, 그것이 무엇이든, 그의 의지력의 각각의 특별한 것 안에, 또한 그의 생각의 특별한 것 안에 현존한다, 그리고 비록 생각 안에서 언제나 나타나지 않은 듯 할지라도 그것 안에 있다. 나타나지 않은 듯 한 이유는 어떤 순간에서는 대상물을 수단으로 애착에 덧입혀져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옷입혀진 애착이 벗겨지면, 통치하는 애착은 명료한 시야 안으로 와진다.
이것은 영들과 천사들의 경우로 말해보는 것이 더 나을 것 같다. 악인 영들, 또는 악이 대세인 이들은 각각 그리고 모든 것에서 악하다, 설사 그들이 참된 것을 이야기하고, 선인 것을 행하는 때 조차도 악하다, 그 이유는 사사건건에서 그들은 타인으로 선이라 믿게 하기 위해 속임수를 쓰거나, 선과 유사한 것으로 술책을 부리려는 의도 외에 다른 것은 그들의 심중에 없기 때문이다. 이것이 진행될 때, 그들의 말함은 매우 강한 어조로부터 들려지고, 또한 그들의 기운으로부터 지각된다. 선이 통치하는 천국의 천사들은 각각 그리고 모든 것에서 선이다; 바꿔말하면, 그들과 더불어서는 주님으로부터의 선이 각각 그리고 모든 것에서 빛을 내고 있다; 그 이유가 설사 그들이 악의 어떤 것을 행한 듯 여기는 때 조차에서도 그럼에도 그들의 목적이나 의도는 선이 거기로부터 있지 않을까 하는 것 뿐이다. 이런 모두로부터 분명한 것은, 선이 보편적으로 통치하는 곳은 선이 각각 그리고 모든 것을 통치한다는 것이다; 이는 악과 더불어서도 같은 이치이다. 각각 그리고 모든 것들이 같은 본성으로부터 일 때, 보편적으로 통치하는 것이 처음에 존재 안으로 온다; 그리고 보편적인 것은 이것들의 양과 질에 따라서 있는다; 그 이유가 보편적이라 불리우는 것은 그것이 개별적으로 모든 것들 안에 있다는 사실로부터 보편적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너희 아기들을 위한 식품을 위하여. 이는 순진 속에 있는 이런저런 것들에서를 의미한다. 이는 “식품”의 의미가 진리의 선이다로부터; 그리고 “아기들”의 의미가 순진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리고 그들은 말했다, 당신은 우리를 살아있게 만들었습니다. 이는 영적 생명은 여타 다른 방법에서, 여타 어느 근원에서도 없다를 의미한다. 이는 “살게 만들었다”의 의미가 영적 생명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진행되는 것에서 취급되는 주제는 자연 평면의 거듭남, 생동하게 함이어 왔다. 이것의 전체 과정이 묘사되어져 있다. 여기에 더 첨부되는 말은 자연 평면의 거듭나는 과정은 이런 방식밖에 없고, 여타 다른 근원도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내 주의 눈에서 은혜를 발견하였습니다. 이는 이 방법에서 그들은 의지를 종속시켰다와 굴종함을 의미한다. 이 말은 자기들에게 속했던 모든 것이 단념되어 온 이후 나온 말이고, 인정함의 말들이다; 고로 이런 방법에서 자기들은 종속된다는 의지로부터의 말들이기도 하다; 고로 이 말들은 굴종함의 말들이기도 하다. 이런 의미가 이 말 안에 있다는 것, 이때의 백성의 상태로부터 분명해진다, 또한 이 상태는 전 후에 이어지는 시리즈로부터도 분명해진다.

그리고 우리는 바로의 종들입니다. 이는 그들은 자기 자신을 단념하고, 내적 부분의 후원 아래 있는 자연 평면에 복종시킴을 의미한다. 이는 “종들”의 의미가 그들 자신으로부터의자유가 결핍되는 것이다로부터, 고로 그들의 자기 자신을 단념하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의 것이다”의 의미함이 내적 부분의 후원 아래 있는 자연 평면에 종속됨이다.

그리고 요셉은 그것을 법령으로 만들었다. 이는 동의함으로부터 결론지은 것을 의미한다. 이는 “법령을 만듦”의 의미가 동의함으로부터의 결말지은 것이다; 그 이유가 법령이 만들어지는 것은 양쪽의 동의로 행해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일치함에 의해 정해진 것들로 간주된다. 고로 정식으로 이다.

오늘날 까지. 이는 영원하게를 의미한다.

이집트의 지면에 관하여, 즉 바로가 오 분의 일을 가지도록. 이는 리메인스를 의미한다.

성직자의 지면 만은 바로의 것이 아니다. 이는 선을 받기 위한 수용력, 이것은 내적 부분으로부터 직접 있다를 의미한다. 자연 평면이 내적 부분과 결합함에 관하여, 그리고 황무함과 생동있게 함의 반복을 수단으로 자연 평면의 거듭남에 관하여 지금까지 말해온 것이 오늘날 교인들은 들어보지도 못한 말로서 어안이 벙벙할지 모른다. 그럼에도 이것은 진정 그렇게 실행되고 있다는 것은 아마 여러분이 겪는 영적 삶에 조회해본다면 수긍이 가는 대목이 있을지 모른다. 그리고 이것은 다른 삶에서 단순한 영들조차도 잘 친숙된 것 중의 하나이다. 그러므로 말씀이 인간에 의해 읽혀질 때, 다른 삶에 있는 이들은 말씀의 내적 의미 안에 있다, 뿐 아니라 이 모든 것들을 지각하고, 더불어 무수한 비밀들도 눈치챈다, 이런 대목은 어떤 인간의 언어로도 표현될 수 없다. 예증되어왔었던 이런저런 것은 오직 상당히 적을 뿐이다.

27-31절. 그리고 이스라엘은 이집트의 토지, 고센의 토지에서 거주했다. 그들은 거기에서 소유권을 가졌다, 그리고 열매를 많이 맺었고, 극도로 번창했다. 28 그리고 야곱은 이집트의 토지에서 십칠 년을 살았다. 그리고 야곱의 날들, 그의 생애의 햇수는 칠 년, 그리고 일백 사십 년이었다. 29 그리고 이스라엘의 날들은 죽는 쪽으로 가까이 당겨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그의 아들 요셉을 불렀다, 그리고 그에게 말했다, 내가 네 눈에서 은혜를 발견하였 왔었기를 간구한다면, 청컨대 네 손을 내 넓적다리에 놓고 자비와 진리를 나에게 행하라. 부디 나를 이집트에 묻지 말라. 30 그리고 내가 내 조상들과 함께 눕거든 너는 나를 이집트로부터 운반하여 나를 그들의 매장지에 장사하라. 그리고 그는 말했다, 나는 당신의 말에 따르겠습니다. 31 그리고 그는 말했다, 나에게 맹세하라. 그리고 그는 그에게 맹세했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침상의 머리에서 자신을 구부려 절하였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이집트의 토지에서 거주하였다. 이는 영적 선이 교회에 있는 기억 속의 지식들 사이에서 살았음을 의미한다. 이는 “거주하다(dwell)”의 의미가 사는 것이다로부터; 이스라엘의 표현함이 영적 선이다로부터; 그리고 “이집트의 토지”의 의미가 기억 속의 지식들이 있는 자연적 마음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고센의 토지에서. 이는 그들의 한 중앙에를 의미한다. 이는 “고센의 토지”의 의미가 자연 평면의 한가운데, 또는 중앙이다로부터, 고로 기억 속의 지식들의 한가운데를 의미하는데, 그 이유는 고센은 이집트의 가장 좋은 지역(tract)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거기에서 소유권을 가졌다. 이는 내적 부분에 의해 질서 안에 주어지고 놓여지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소유권(possession)”의 의미가 영적 생명의 주소지(residence)이다로부터; 그리고 요셉이 그들에게 이 소유권을 주었는 바 (11절), 이는 이 주소지가 내적 부분에 의해 주어자고 질서 안에 놓여졌다가 의미된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시리즈로부터 뒤잇는다.

그리고 열매를 많이 맺었고, 극도로 번창했다. 이는 선행의 파생되는 선들과 신앙의 진리들을 의미한다. 이는 “열매를 많이 맺다”의 의미가 선행의 선들을 산출하는 것이다로부터; 그리고 “번창함”의 의미가 신앙의 진리들을 산출하는 것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리고 “열매를 많이 맺는다”는 표현은 “열매들”로부터 오기 때문인데, 이는 내적 의미에서 선행의 일들을 의미한다; 그리고 표현, “번창하는 것”은 “다수, 수가 많다(multititude)”에서 인 바, 이는 내적 의미에서 신앙의 진리들을 서술한다; 그 이유가 말씀에서 “많다(many)”는 진리들, “크다(great)”는 선들에 관해서 말해진다.

그리고 야곱은 이집트의 토지에서 살았다. 이는 자연 평면의 진리가 기억 속의 지식들 안에 있었다를 의미한다. 이는 “살아 있다(living)”의 의미가 영적 생명 이다로부터; 야곱의 표현함이 자연 평면의 진리이다로부터; 그리고 “이집트의 토지”의 의미가 교회의 기억 속의 지식들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십칠 년. 이는 거기에서의 상태를 의미한다. 이는 “17”의 의미가 새로운 것이다로부터; 그리고 “년(햇수)”의 의미가 상태들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여기서 “야곱이 이집트에서 살았던 17년”에 의해서는 기억 속의 지식들 사이에서 자연 평면이 있는 영적 생명의 끝에 이르기까지 이어지는 이 생명의 상태의 시작이 의미된다.

그리고 야곱의 날들, 그의 생애의 햇수는 칠 년, 그리고 일백 사십 년이었다. 이는 일반적인 상태와 그 상태의 품질을 의미한다. 이는 숫자들, 즉 “7”, “40”, “100”의 의미가 밝혀진다면 알는지 모른다. “7”이 의미하는 것은 이미 살폈다; “40”이 의미하는 것도 살폈다; 그리고 “100”이 의미하는 것도 살폈다. 그러나 이런 숫자들이 만들어내는 합성된 숫자는 밝히 알기가 쉽지는 않다, 그 이유가 그것들은 요약된 서술 쪽으로, 그리고 납득함 쪽으로 표현되어지기 위해 환원될 수 있는 것 그 이상의 것을 포함하기 때문이다. 위 숫자들은 일반적 측면에서 야곱, 그리고 야곱의 품질에 의해 표현되는 상태의 전부를 포함한다. 천사들은 이런 사항들은 147이라는 숫자 자체로부터 하나의 복합체(complex, 영적 실체) 안에서 본다; 그 이유가 천사들과 더불어서는 말씀에 있는 모든 숫자들이 영적 실체들(realities)에 대한 관념(추상적 생각, idea)으로 건너가기(fall, pass) 때문이다. 이는 때로 길게 늘어 놓은 숫자들이 나에게 나타나곤 했는데, 그 때 천사들이, 자기들이 대화하는 것들이 연속되는 숫자 내부에 포함되어 있다고 말해준 사실로부터 (말씀의 숫자들에 대한 개념이) 명백해졌다. 이로부터 또한 천적 수준의 교회 속에 있던 태고인들은 숫자들로 구성되는 평가(계산, computation)를 만들었고, 이를 수단으로 자연적 수준의 마음의 관념(생각, idea)에서는 쉽게 납득할 수 없는 천국의 것들을 전달했다. 그러나 그들의 시대들 이후 이런 평가 방법은 천국적인 것들에 대한 지각과 더불어 멸절되었다, 그리고 남은 것은 단순한 숫자들의 의미, 그나마 일반적 의미만에 대한 지식이었다. 이 단순한 숫자들은 예를 들면, “3,” “6,” “7,” “12” 이다. 그리고 중복된 숫자들의 의미에 대한 지식은 많지가 않다. 오늘날 말씀 안에 있는 숫자들이 계산적 측면이 아닌 어떤 것을 의미한다는 것이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므로 이 주제에서 말해지는 것이 아마 많은 이들에게 믿기 힘든 생각에 불과할지 모른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날들은 죽는 쪽으로 가까이 당겨지고 있었다. 이는 거듭나기 직전의 상태를 의미한다. 이는 “가까이 당겨지다”의 의미가 가까이 있어진다, 고로 바로 앞에 있다 이다로부터; “날들”의 의미함이 상태들이다로부터; 이스라엘의 표현함이 영적 선이다로부터; 그리고 “죽는다”의 의미가 다시 일어남, 그리고 영적 삶 안으로 깨어남이다로부터, 고로 거듭나지는 것이다; 그 이유가 거듭나지고 있는 이들은 영적 죽음으로부터 다시 일어나기 때문이다, 그리고 새로운 생명 안으로 깨어나진다.

그리고 그는 그의 아들 요셉을 불렀다. 이는 내적 부분의 현존을 의미한다. 이는 “자신에게로 부르다”의 의미가 자신과 더불어 현존함을 만드는 것이다로부터, 고로 현존함이 있다; 그리고 요셉의 표현함이 내적 부분이다로부터 알려진다.

그리고 그에게 말했다, 내가 네 눈에서 은혜를 발견하여 왔었기를 간구한다면. 이는 갈망함을 의미한다. 이는 야곱이 요셉에게 위 말들을 말했을 때 야곱이 지녔던 애착으로부터 분명해진다. 이 애착이 대화의 이 형체 안쪽에 있다; 그 이유가 “만일 내가 네 눈에서 은혜를 발견하여 왔었기를 간구한다면”의 말은 애착이 표현되는 수단으로서의 말의 형체이기 때문이다, 고로 의지의 갈망함이다.

청컨대 네 손을 내 넓적다리에 놓아라. 이는 거룩한 묶임을 의미한다. 이는 “손을 넓적다리(thigh) 아래에 놓다”의 의미가 부부의(결혼의, conjugial) 사랑에 속하는 것을 수단으로, 모든 힘으로 묶는 것(binding)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손”에 의해 힘(power)이 의미되고, 그리고 “넓적다리”에 의해서는 부부의 사랑 속에 있는 것이 의미된다, 그리고 최고 의미에서 부부 (결혼, the conjugial)는 주님 안에서 신성과 신성한 인간의 합일 (union)이다; 그리고 이로부터 천국 안에서 신성한 선과 신성한 진리의 합일이 있다; 그 이유가 주님으로부터 진행하는 것은 신성한 선으로부터의 신성한 진리이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천국은 천국이다, 그리고 “결혼(marriage)”이라 불리운다, 그 이유가 이것은 거기서 선과 진리의 결합이고, 이 결합은 주님으로부터 진행되고, 결합을 만든다. 그리고 거기서 주님은 선이시기에, 그리고 천국은 선으로부터 파생되는 진리이기에, 그러므로 말씀에서 주님은 “신랑”이라 불리우고, 천국과 교회는 “신부”라고 불리운다; 그 이유가 선과 진리가 결혼을 만들기 때문, 그리고 그들의 결합은 부부(the conjugial)에 의해 뜻해진다. 이로부터 분명해지는 것은, 부부인 것을 수단으로 묶여져 있는 것들은 얼마나 신성한 것인지이다. 이것이 “넓적다리에 손을 놓다”에 의해 의미되어져 있다. 이로부터 선과 진리의 결혼은 진짜(순수) 부부의 사랑의 자손이다. 이에 대한 것에 관련하여, 그리고 이것의 신성(고결함)에 관련하여서는 이미 살핀 바도 있다.
(선각자는 단어 “conjugial”을 즐겨 사용하는 편이나, 영한 사전에는 없고, 대신 “conjugal”이 있고 이에 대한 번역은 “부부의, 또는 결혼의” 이다. 왜 전자의 단어를 선각자가 즐겨 사용했는지, 즉 고집하였는지를 역자는 아직은 헤아리지 못하고 있다. 또한 이 단어의 한역에서 역자는 “결혼의”로도 번역도 하나 여기서는 “부부의”로 번역하고 있다. 그 이유는 결혼이라는 단어는 결혼 생활이라고 말을 더 붙여 사용하지 않을 경우, 결혼 직전부터 결혼하는 과정이 주로 연상되지만, 부부라는 단어는 결혼 직전 내지 막 결혼하고 있음, 또는 결혼 초기 등과 같은 느낌은 전혀 주지 않고 결혼 생활이 어느 정도 긴 세월이 지난 상태, 자녀도 낳고 기르는 상태를 암시하는 것 같아서 부부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또한 부부라는 단어에는 결합이라는 단어 보다 합일이라는 단어가 더 어울리지 않을까 생각한다. 이는 독자들의 생각의 범위를 더 넓히려는 차원에서 첨가한 말이므로 참조하여 도움이 되길 바란다 역자주.)

자비와 진리를 나에게 행하라. 이는 굴종(humiliation)을 의미한다. 이는 “자비를 행하다”의 의미가 사랑의 선이다로부터; 그리고 “진리를 행하다”의 의미가 신앙의 진리이다로부터 (아래에서 살핀다) 알게 된다. 이 말들이 애원(supplication)의 말로 발음되고 있다, 고로 굴종함이다. “자비를 행하다”가 사랑의 선인 이유는 모든 자비가 사랑 속에 있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사랑 또는 선행 안에 있는 이들은 자비 안에 또한 있다, 그리고 당사자 안에 있는 사랑 또는 자비는 이웃이 필요함에, 또는 불행에 있을 때, 자비가 된다, 그리고 그는 그런 상태의 이웃에게 도움을 제공할 수 있다. 이러므로 “자비”에 의해서 사랑의 선이 의미되어지는 것이다. “진리를 행하다”가 신앙의 진리를 표시하는 이유는 모든 진리는 신앙 속에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이유 때문에 원어에서 똑같은 표현에 의해 신앙과 진리는 뜻해지고 있다.
사랑의 선과 신앙의 진리는 가장 가까운 결합에서 있기 때문에, 그리고 이쪽이 저쪽 없이는 가능할 수 없기 때문에, 본문 같은 형식으로 말하는 것은 고대인들에게는 통상적인 것이었다, 그 이유는 고대인들은 사랑의 선이 신앙의 진리와 분리될 수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이유로 이 둘은 말씀에서도 결합하여(연대로) 자주 말해진다: 즉
여호와는 자비와 진리가 크시다(많으시다, great) (출. 34:6).
사무엘하서에서:
다윗이 여부스인들에게 말했다, 여호와께서는 너희에게 자비와 진리를 행하신다
(삼하. 2:5, 6).
같은 책에서:
다윗이 기드 출신 잇대에게 말했다, 너는 돌아가라, 그리고 너와 함께 네 형제를 데리고 돌아가라, 자비와 진리와 더불어 (삼하. 15:20).
호세아서에서:
여호와께서는 토지의 거주민들과 논쟁을 가지셨다, 그 이유는 거기에 진리가 없고, 자비도 없고, 하느님에 관한 지식도 없기 때문이다 (호. 4:1).
다윗서에서:
여호와의 모든 길들은 그분의 언약을 지키는 이들에게는 자비와 진리이다 (시. 25:10).
다시:
당신은 나로부터 당신의 자비들을 보류하시지 않을 것입니다, 오 여호와여; 당신의 자비와 당신의 진리가 나를 영구적으로 지켜줍니다 (시. 40:11).
다시:
나는 여호와의 영원한 자비들을 노래할 것이다; 내 입을 가지고 나는 당신의 진리가 대대로 알려지게 만들 것이다. 그 이유는 내가 말했기 때문, 즉 자비는 영원하게 건축될 것이다; 천국들 자체에서 당신은 당신의 진리를 확증하실 것이다. 정의와 공정이 당신의 왕좌를 받친다; 자비와 진리가 당신의 얼굴들 앞에 서있다 (시. 89:24, 33; 92:2);
위 구절 외에 시편서에 더 있다 (26:3; 36:5; 57:3, 10; 61:7; 85:10; 86:15; 89:24, 33; 92:2).

부디 나를 이집트에 묻지 말라. 이는 거듭남은 기억 속의 지식에서 있지 않다를 의미한다. 이는 “묻다”의 의미가 부활과 거듭남이다로부터; 그리고 “이집트”의 의미가 기억 속의 지식들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거듭남이 기억 속의 지식들에서 있지 않다를 뜻하는 것은 아래에서 더 살핀다.

그리고 내가 내 조상들과 함께 눕거든. 이는 고대인들이 가졌던 것과 같은 생명(삶)을 의미한다. 이는 “눕다”가 삶이다로부터; 그 이유가 “눕는” 것이 여기서는 조상들과 더불어 매장되는 것을 뜻하고, 그리고 “매장되어짐”이 부활과 거듭남을 표시하는 바, “조상들과 함께 눕다”는 삶, 생명을 뜻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조상들(fathers)”의 의미가 고대와 태고 교회 속에 있었던 이들이다로부터, 고로 고대인들이다.

너는 나를 이집트로부터 운반하라. 이는 거기에 기억 속의 지식으로부터의 승강이 있을 것임을 의미한다. 이는 “나를 운반하라”의 의미가 승강함이다로부터; 그 이유가 이집트로부터 가나안의 토지로 건너가는 것은 “올라간다”라고 말해지기 때문, 고로 승강함이 의미된다, 그리고 “이집트로부터 운반하다”의 의미도 같다; 그리고 “이집트”의 의미가 기억 속의 지식들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기억 속의 지식들로부터 승강함이 무엇인지 잠간 살펴야 할 것 같다: 자연 평면의 거듭남은 영적 생명이 내적 인간을 통하여 자연 평면에 있는 기억 속의 지식들 안으로 주님에 의해 은근히 심어짐으로 결과되어진다. 이 은근히 심어짐이 이 장에서 취급되어왔다. 만일 거듭남이 상당한 진전을 보이고 있다면, 그는 더 진전될 소지를 지녔는 바, 이제 그는 자연 평면의 내면 쪽으로 승강되어진다, 이 승강함은 내적 부분의 직접적 후원 아래 있다; 거듭남이 이렇지 않게 진전이 없다면, 그의 영적 생명(삶)은 자연 평면의 외면에 있다. 이 승강함은 감각과 기억 속의 지식들에 관한 것들로부터 탈퇴함(withdrawl, 움추림, 물러남)으로 결과되어진다, 바꿔 말하면, 이런 것들 넘어로 승강함으로 결과된다, 이때 당사자는 내면의 생각과 애착 안으로 와있다, 고로 내면적으로 천국 안으로 와있다. 이 후자의 상태에 있는 이들은 내적인 교회 안에 있다. 그러나 전자의 상태에 있는 이들은 외적 교회에 있다, 이 외적 교회가 야곱에 의해, 후자에 있는 교회가 이스라엘에 의해 표현되고 있다. 그러므로 목적적 측면에서 “야곱”은 “이스라엘”일는지 모른다, 고로 “이스라엘”로서의 야곱에 의해 내면의 자연 평면인 영적 선이 표현될는지 모른다, 고로 내적 부분에 있는 영적 교회가 표현될는지 모른다. 이런 말들이 야곱에 의해 말해졌다.

나를 그들의 매장지에 장사하라. 이는 이런 저런 거듭남을 의미한다. 이는 “장사하다(bury, 매장하다)”의 의미가 거듭남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고로 “그들의 매장지에 장사하다”도 이런저런 거듭남을 표시한다.

그리고 그는 말했다, 나는 당신의 말에 따르겠습니다. 이는 신성에 의해 섭리 속에서 그렇게 행해질 것을 의미한다. 이는 누군가의 “말에 따라서 행하다”의 의미가 그렇게 행하여질 것이다로부터; 여기에 “신성에 의한 섭리 속에서”가 첨가된 이유는 아브라함, 이삭, 야곱이 세 가지 사항을 하나로 만드는 것을 표현했기 때문이다. 최고 의미에서 아브라함은 주님의 신성 자체를, 이삭은 신성한 합리성을, 그리고 야곱은 신성한 자연 평면을 표현했다; 그리고 인간을 중요시하는 측면일 경우, 이 세 열조들은 천적 선이 있는 가장 안쪽(inmost), 영적 선이 있는 내면(interior), 그리고 자연적 선이 있는 외면(exterior)을 표현했다. 이것들이 하나의 매장지 안에 셋이 있음으로 의미되고 있다, 그 이유는 “매장지(sepuchre)”에 의해 생명과 거듭남 쪽으로 부활함이 의미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말했다, 나에게 맹세하라. 이는 그것은 취소할 수 없을는지 모른다를 의미한다. 이는 “맹세(swear)”가 취소할 수 없는 확증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리고 그는 그에게 맹세했다. 이는 그것은 취소할 수 없다를 의미한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침대의 머리에서 자신을 구부려 절하였다. 이는 그가 내면의 자연 평면에 있는 이런저런 것들에로 돌아갔음을 의미한다. 이는 “자신을 구부려 절하다”의 의미가 여기서는 자신을 돌리는 것이다로부터; 그리고 “침대(침상)”의 의미가 자연 평면이다 (아래에서 살핀다)에서 알게 된다. 고로 “침대의 머리”는 자연 평면에서 더 높은 것, 즉 내면인 것이다; 그 이유가 “머리”가 말씀에서 언급될 때, 내면의 것이 의미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내면은 외면인 육체에 관련하여서인 (상대적) 내면이다. 그가 자연 평면의 내면 속에 있는 이런저런 것들 쪽으로 자신을 돌려놓음에 의해 의미된 것은, “야곱”인 자연적 진리는 “이스라엘”인 영적 선쪽으로 승강되어짐이 있었다는 것이다. 이는 앞에서 잠간 살폈다.
“침대”가 자연적인 것을 표시하는 이유는 자연 평면은 합리성 아래 있기 때문, 그리고 합리성에 침대로서 섬기기 때문이다; 합리성은 자연 평면 위에 침대에 몸을 뉘듯 하여 있다; 자연 평면이 아래에 (자리를) 펼쳐 놓기 때문에, 그것이 침대라고 불리는 것을 아래에서 읽어보자:
목자가 사자의 입으로부터 두 다리나 귀 조각을 구조했을 때 같이; 그렇게 사마리아에서, 침대의 모퉁이에서, 침상(couch, 소파겸 침대)의 끝에서 거주하는 이스라엘의 아들들을 구 조할 것이다 (암. 3:12);
“침대의 모퉁이에서”란 자연 평면의 가장 낮은 부분에서를 표시한다; 그리고 “침상의 끝에서”란 감각적인 것에서를 표시한다. 그 이유가 “백성 이스라엘”에 의해, 이들의 중심지(수도)가 사마리아였기 때문에 주님의 영적 왕국을 표현하였기 때문이다. 이에 관해 여기서는 아버지 이스라엘에 관련해 말해진다, 즉 “침대의 머리에서”이다. 그 이유는 영적 선, 이것이 아버지 이스라엘에 의해 표현되었는데, “침대의 머리”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감각적인 것 속에 있는 가장 낮은 자연 평면 속에 있는 이런저런 것들쪽으로 자신을 돌렸을 경우, 이때 그들에 관해서는 “침대의 모퉁이에서”, 그리고 “침상의 끝에서”라고 말해진다.
다시 같은 예언서에서:
상아 침대에 누운 그들, 그리고 자신들을 그들의 침상 위에 뻗친 그들; 그러나 그들은 요셉 의 어김을 위하여는 슬퍼하지 않는다 (암. 6:4, 6).
“상아의 침대들”은 가장 낮은 자연 평면의 쾌락들을 표시한다, 이것은 거만에 속하는 이것저것들이다; “요셉의 어김을 위하여 슬퍼하지 않는다”내적 부분으로부터 선이 사라짐에 관하여 관심이 없다를 표시한다. 다윗서에서:
만일 내가 내 집의 천막 안으로 온다면, 만일 내가 내 침대의 침상 위에 올라 간다면
(시. 132:3);
“내 집의 천막”은 사랑의 거룩함을 표시한다; “침대의 침상 위에로 올라가는”것은 자연 평면 위쪽, 사랑의 선으로부터 있는 진리 쪽으로를 표시한다. 위 구절의 말들이 예언적이다는 것은 누구나 짐작될 것이다, 하여 이런 말씀들은 내적 의미로서가 아니면 이해되지 않는다.
**************************************

창세기 제 48 장

성경: 창세기 48장

1. 이런 말들이 있은 후 였다, 어떤 이가 요셉에게 말했다, 보라 당신의 아버지가 아프다. 그리고 그는 그와 함께 그의 두 아들, 므낫세와 에브라임을 데리고 갔다.
2. 그리고 어떤 이가 야곱에게 말했다, 그리고 말했다, 보라 당신의 아들 요셉이 당신에게 오고 있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기운을 냈다, 그리고 침대에 앉았다.
3. 그리고 야곱은 요셉에게 말했다, 하느님 솨다이께서 가나안의 토지에 있는 루즈에서 나에게 나타나셨다, 그리고 나에게 복을 내리셨다.
4. 그리고 그분은 나에게 말하셨다, 보라 나는 너를 열매 있게 만들고, 너로 번성해지게 할 것이다, 그리고 너를 큰 무리의 백성으로 만들 것이다. 그리고 나는 이 토지를 너 이후 네 씨에게 영원히 소유하도록 주리라.
5. 그리고 지금 내가 이집트로 너에게 오기 전 이집트의 땅에서 너에게 태어난 네 두 아들, 그들은 나의 것이다. 르우벤과 시므온 처럼 에브라임과 므낫세, 그들은 나의 것이다.
6. 그리고 그들 이후 너에게서 출생하는 네 자손은 너의 것이다. 그들의 형제들의 이름에서 그들은 자기들의 상속 재산을 청구하리라.
7. 그리고 나, 내가 밧단으로부터 오는 있는데 라헬이 가나안의 토지, 그 길에서, 에브랏에 당도하기에는 아직 토지의 넓이가 있었을 때 죽었다. 그리고 나는 그녀를 거기, 베들레함과 같은 곳, 에브랏으로 가는 길에 매장했다.
8. 그리고 이스라엘은 요셉의 아들을 보았다, 그리고 말했다, 이들은 누구의 것이냐?
9. 그리고 요셉은 그의 아버지에게 말했다, 이들은 나의 아들들입니다, 하느님께서 여기서 저에게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는 말했다, 부디 그들을 나에게 데려와다오, 그리고 나는 그들에게 복을 빌어 주겠다.
10. 그리고 이스라엘의 눈은 고령인 탓에 무거워졌다. 그는 볼 수 없었다. 그리고 그는 그들을 그에게 가까이 데려 왔다. 그리고 그는 그들에게 키스하고 그들을 포옹했다.
11. 그리고 이스라엘은 요셉에게 말했다, 나는 네 얼굴을 보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리고 보라 하느님께서 나로 네 씨 역시 보게 해주셨다.
12. 그리고 요셉은 그들을 그의 넓적다리로부터 떼어 물러나게 했다. 그리고 그는 엎드려 절했다.
13. 그리고 요셉은 그들 둘 다, 그의 오른쪽에 있는 에브라임은 이스라엘의 왼쪽에, 그리고 그의 왼쪽에 있는 므낫세는 이스라엘의 오른쪽에 데려다 놓았다, 그리고 그들을 그에게 가까이 데려왔다.
14. 그리고 이스라엘은 그의 오른 손을 내밀었다, 그리고 그 손을 에브라임의 머리에 놓았다, 그리고 그는 동생이었다. 그리고 그의 왼손은 므낫세의 머리에 얹졌다. 그는 그의 손들을 엇갈리게 내밀었다,그 이유가 므낫세가 장자였기 때문이다.
15. 그리고 그는 요셉을 축복했다, 그리고 말했다, 내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 앞에서 걸어 가셨던 하느님, 내가 존재한 이래 오늘 까지 나를 먹이신 하느님,
16. 나를 모든 악에서 되찾으신 천사가 이 소년들을 축복하소서. 그리고 내 이름, 그리고 내 조상들 아브라함과 이삭의 이름이 그들 안에서 불리게 하소서. 그리고 그들로 땅의 한 가운데에서 크게 불어나게 하소서.
17. 그리고 요셉은 그의 아버지가 그의 오른손을 에브라임의 머리에 얹은 것을 보았다, 그리고 그의 눈에 좋지 않게 보였다. 그래서 그는 그의 아버지의 손을 에브라임의 머리 위로부터 므낫세의 머리 위로 옮기려고 붙잡았다.
18. 그리고 요셉은 그의 아버지에게 말했다, 그렇지 않습니다, 나의 아버지시여. 이 아이가 장자입니다. 당신의 오른손을 그의 머리에 놓으소서.
19. 그런데 그의 아버지가 거절했다, 그리고 말했다, 나는 안다, 내 아들아, 나는 알고 있다. 그도 역시 한 민족이 될 것이다, 그리고 그도 역시 크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럼에도 그의 동생이 형보다 더 크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의 씨는 국가들에 충만할 것이다.
20. 그리고 그는 이 날 그들을 축복해서, 말하기를, 너 안에서 이스라엘이 축복할 것이니, 말하기를, 하느님이 너를 에브라임 같이 그리고 므낫세 같게 평가하신다. 그리고 그는 므낫세 앞에 에브라임을 자리잡아 앉혔다.
21. 그리고 이스라엘이 요셉에게 말했다, 보라 나는 죽는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너와 함께 계실 것이다, 그리고 너를 네 조상들의 토지에로 도로 데려다 놓으실 것이다.
22. 그리고 나는 너에게 네 형제들 보다 뛰어난 한 몫을 주겠다, 이 몫은 내가 내 칼과 내 활로 아모리족의 손으로부터 얻은 것이다.

각 절의 내적 의미

6218. 1, 2절. 이런 말들이 있은 후 였다, 어떤 이가 요셉에게 말했다, 보라 당신의 아버지가 아프다. 그리고 그는 그와 함께 그의 두 아들, 므낫세와 에브라임을 데리고 갔다. 2 그리고 어떤 이가 야곱에게 말했다, 그리고 말했다, 보라 당신의 아들 요셉이 당신에게 오고 있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기운을 냈다, 그리고 침대에 앉았다.

6219. 이런 말들이 있은 후 였다. 이는 이전에 있어왔던 것들로부터 뒤이어지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말들”의 의미가 것들이다로부터; 고로 “이 말들이 있은 후”는 앞에 있어왔던 것으로부터 이어지는 것을 의미하게 된다.

6220 누군가가 요셉에게 말했다. 이는 탁월한 지각을 의미한다. 이는 “말하다(say)”의 의미가 지각하다이다로부터 (1791, 1815, 1819, 1822, 1898, 1919, 2080, 2619, 2862, 3509, 5687항); 이 지각이 탁월한 지각이라 말한 이유는 취급되는 주제가 교회의 지력과 의지력이 뒤이어지기 때문에서이다, 고로 교회의 진리와 선, 그리고 이것은 “요셉”인 천적 평면의 내적 부분을 통하여 유입으로부터 이기 때문이다.

6221. 보라 네 아버지가 아프다. 이는 거듭남이 계속됨을 의미한다. “죽는다”가 생명 쪽으로 부활함을 의미하고, 그리고 거듭남도 의미한다 (3326, 3498, 3505, 4618, 4621, 6036항); 이로부터 “아프다”, 이는 (죽는 쪽으로) 진행중이다인 바, 거듭남을 향하여 전진하는 것, 고로 거듭남의 계속인 것을 표시한다. “죽는다”가 거듭남을, 그리고 “아프다”가 거듭남의 계속을 표시한다는 말은 믿어지기에는 거리가 멀 수밖에 없을 것으로 여겨진다. 그렇지만 천사들의 말과 생각의 어떤 것을 아는 자라면, 이 의미가 그렇구나 하고 인정하는 것이 별 대수로운 일은 아닐 것이다. 천사들은 죽음 이라는 것을 모른다, 아프다는 것도 모른다, 고로 이것들에 대한 생각도 없다, 그러나 그들의 장소에서, 인간이 그것들을 읽는 것을 들을 때, 그들은 삶의 계속과 부활에 대한 생각을 가진다. 이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인간이 죽을 때, 그는 자기 영의 세상 삶을 떠받쳐준 육체를 벗고, 자기 영이 지금까지 함께 해왔던 영의 어떤 사회 안으로 들어가기 때문이다. 이것은 “죽다”와 “아프다”가 천사들 앞에서 읽혀질 때, 그들에게 표출되는 생각이다, 그리고 거듭남에 관한 생각도 마찬가지인데, 이것은 생명 안으로 부활함이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거듭나기 이전, 인간은 영적으로 죽어 있기 때문; 그러나 그가 거듭나졌을 때, 그는 살아 있고, 부활의 아들이 된다. 만일 그가 육체 안에서 살 때, 인간 자신이 천국을 갈망할 경우, 죽음과 병듦을 놓고 이것은 생명 쪽으로 부활함으로 진행해가려 함이다는 것밖에 더 달리 생각하지 않는다면, 그는 자신으로 육체에 대한 생각으로부터 철수하게 할 것이다, 특히 자신이 아플 때, 하여 죽음 가까이 다가감이 확실하다고 자신이 확신할 때 더욱 육체에 집념된 생각으로부터 철수 하게 할 것이다. (어쩌면 영과 육의 분리됨을 육체가 아직 살아 있는 동안 약간 맛볼지 모른다. 역자주) 이로부터 육체의 죽음에 관한 영적인 생각은 생명의 새로워짐에 관한 생각이다; 그러므로 부활과 거듭남이 천국에서 주제가 될 때, 이 생각들은 아래로 흐르고, 세상 속에 있는 이런저런 것 안으로 스며드는데, 이 생각밖에 더 달리 내려오지는 않는다. 고로 이 생각은 말씀과 더불어 있는 바, 이런 생각의 각각 그리고 모든 것 측면에서 주님으로부터 (천국 안에) 내려와져서, 그 다음 천국을 통하여 세상 안으로도 내려와진다; 이런 하강함에서 이 생각들(천적, 영적 의미, 또는 내적 의미)는 우선 세 천국들 각각의 납득력에 어울리는 것을 (옷)입는다, 그리고 마지막 (지상의) 인간의 납득력에 적절한 형체를 (옷)입는다. 이것이 지상의 모든 이가 마주 대하는 글자 의미인 것이다.

그리고 그는 그의 두 아들, 므낫세와 에브라임을 데리고 왔다. 이는 교회 속의 의지력과 교회 속의 지력이 내적 부분으로부터 출생함을 의미한다. 이는 므낫세가 자연 평면에서의 새로운 의지력과 이것의 품질이다로부터; 그리고 에브라임의 표현이 자연 평면에서의 새로운 지력과 이것의 품질이다로부터; 그들이 내적 부분으로부터 출생됨은 그들이 요셉의 아들이다는 것에 의해 의미된다, 그 이유는 요셉에 의해 천적 평면으로부터의 내적 부분이 표현되기 때문이다.
이쯤에서 교회의 지력과 의지력이 뜻해지는 것을 설명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교회의 지력(지성, intelluctual)은 신앙의 진리가 무엇인지를, 선행의 선이 무엇인지를 말씀으로부터 지각하는 것이다. 우리 모두 아는 바, 인간은 자신이 끌어안은 교의 (주장, tenet)는 무엇이든, 그것을 말씀의 글자 의미로부터 확증해야 속이 풀리는(안심하는) 습성을 지녔다는 것, 여기서 성경의 글자가 한몫 거드는 일익을 담당하는 본성을 지니고 있다. (어쩌면 성경의 글자기 지니는 부작용일지 모르나 이는 자연계의 글자인 이상 피할 도리는 없다 역자주), 이런 이유는 말씀의 글자 의미는 진리들을 받는 그릇들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그릇들의 품질은 당사자가 진리들을 받을 때까지 투명성을 통하여 이듯 (진리가) 나타나 있지 않고 있다. 그 이유는 글자 의미는 (지독하게 넓다 말할 수도 있는) 일반성들이기 때문이다. 이런 일반성을 말씀이 지닐 수밖에 없는 이유는 당사자가 자신에게 걸맞는 것인 특수적, 개별적인 진리들을 받기 위하여는 우선 일반성 범위의 것들이 배워져야만 하기 때문이다. (훈련소에서 전쟁을 위한 기본틀을 군인이면 누구나 습득한 다음, 각기 특별 부서에 배치되어 군인의 임무를 수행하는데, 이때 훈련소에서의 배움은 전쟁을 위한 일반성에 해당한다. 이 과정을 익힘 없이 특수한 임무를 배우는 일이 없다. 한마디로 해부학을 합격 못한 사람은 의사가 되어서는 안 되는 것일지 모른다. 역자주.) 이렇게 말씀의 글자적 의미는 당사자가의 의미로부터 자신이 내세우고 싶은 어떤 주장(교의)이든 확증할 기회를 제공하므로 수많은 교파, 이교들이 속출할 수밖에 없다, 사실상 그들 주장의 전부가 글자 의미에 빠짐 없이 있는 것은 아니고 어느 부분의 일치함을 기발나게 발굴해서, 그들 스스로 그것을 확대하여 자신의 주장의 전부가 하느님의 계시나 된 듯 진리로 비쳐지게 만든 것 뿐이다. (이른 바 휴거 소동이 인간들의 역사에 몇 번씩 등장한 것, 예수님이 승천 이후, 그분이 구름을 타고 오신다고 했는바, 하늘의 구름을 보고 구름에 나타나는 예수를 학수 고대하는 것이 현실이지 않던가, 그래도 최근은 대놓고 버젓이 이를 강조하는 연설자는 줄어든 것 같다. 아마 예수가 아무리 기다려도 구름 안에 오시지 않기 때문일지 모른다 역자주) 아마 이런 자들에게 진리 자체를 천국으로부터 듣게 한다면, 그들이 그 진리를 받아들일까? 아마 완전 거부 뿐일 것이다.
이런 이유는 그들이 교회의 지력을 가지지 않은 때문이다; 그 이유가 교회의 지력은 당사자가 말씀을 읽을 때, 하여 이 구절과 저 구절을 조심스럽게 비교하며 믿어져야 하는 것, 행동되어져야 하는 것을 지각함 안에 존재한다. 이 지력이 발견되어지는 것은 오직 주님에 의해 계발되는 때 뿐이다. 이들은 기독교 세계에서 계발된 자라고 불리어 진다. 이 계발됨은 진리들을 알기를 바라는 자, 그러나 자신의 영예나 영광 따위가 아닌 삶과 선용을 위해 알기를 바라는 자들 안에서 발견되어진다. 이 계발됨 자체는 인간에 있는 지력에 의해 받아진다, 그 이유가 계발되는 것이 지력이기 때문이다. 이는 이런 사실로부터 분명해진다: 즉 지력이 약한 사람은 말씀으로부터 이런저런 것들을 볼 수가 없기 때문, 그들은 자기들이 계발되어지리라고 믿는 신앙을 가진 것 뿐이다. 더 알아야하는 것은, 거듭나져가는 이들은 계발되어질 수 있는 지력을 주님으로부터 받는다는 것이다. 지력으로 흘러들어 지력을 계발하는 것은 주님으로부터 천국을 통하여 있는 빛이다; 그 이유가 지력이 그것의 빛, 그것의 시각, 그 결과 그것의 지각을 가질 수 있는 근원은 이외 다른 곳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교회의 지력이라 불리우는 이 지력은 단지 기억 속의 지식들로부터 오는 지력보다 더 내면적이다, 그 이유는 어떤 것이 그러하다고 하는 지각은 기억 속의 지식들로부터, 또는 철학 같은 것으로부터의 명령(dictate)이 아닌, 말씀의 영적 의미로부터 있는 명령으로부터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교회의 지력에 있는 이들은 말씀 어디에서나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선행이 교회의 근본임을 가르친다는 것을 명료하게 지각할 수 있기 때문; 그리고 인간의 생명은 사후 남아 있다는 것; 그의 생명은 그의 사랑들로부터 이다는 것; 또한 신앙은 선행으로부터 분리되면 신앙이 아니다는 것; 신앙은 주님을 사랑함의 선과 이웃을 향한 선행의 선에 인접하여 있지 않으면 아무 쓸모가 없다는 것; 결과적으로 이것들과 신앙은 영원한 생명이 있기 위해 함께 결합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 등등을 지각한다는 말이다. 이런 것들이 진리들이다는 것은 계발된 지력을 가지는 이들에 의해서만 명백하게 지각될 수 있을 뿐이다.
흔히 믿어지고 있는 대목은, 교의나 자신들의 교회의 교리물들을 능란하게 이리저리 잘 꿰매어 설득력 있는 확증함으로 열변을 토하는 이들에게 교회의 지력이 있다고 믿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교회의 지력이 아니다; 그 이유가 교의를 확증하는 것은 지력으로부터가 아니고, 감각적 부분에서 있는 창의력(발명의 재주, ingenuity)으로부터 일 뿐이다. 그래서 이런 것은 최악의 인간들에게서 발견되는 일이 흔하고, 아무것도 믿지 않는 이들에 의해서도 행해질 수 있고, 심지어 거짓 자체에만 있는 이들에 의해서 행동된다. 이런 식의 아이디어 창출 수준은 사기성이 교묘한 자들이라면 자기들이 좋아하는 쪽으로 성경의 구절들을 예증으로 슬며시 곁붙치면서 단순한 자들을 거짓 교의 안에 가둔다. 이런 결과물이 도래되는 것은 교회의 지력을 소유한 자들에게는 상상에도 없어야 정상 아닐까?
본문의 에브라임이 교회의 지력을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교회의 선은 므낫세에 의해 표현된다. 이 선은 신앙의 진리들을 수단으로 교인들 안으로 주님에 의해 은근히 심어지는 선행의 선이다. 신앙의 진리들이 선행의 선과 함께 지력 안으로 흘러들고 지력을 계발하고, 또한 지력과 의지력이 하나의 마음을 만들게 하기 때문이다. 이 지력과 의지력 모두가 내적 부분으로부터 태어나진다는 것은 많이 말해왔었다; 그 이유가 선과 진리에 애착함 모두를 수단으로 계발함이 오는데, 이 애착의 근원들은 내적 부분밖에 없기 때문, 결과적으로 이것들은 내적 부분으로부터, 즉 내적 부분을 통하여 주님으로부터 태어나진다.

그리고 누군가가 야곱에게 말했다. 이는 자연 평면 속의 진리로부터 지각함을 의미한다. 이는 “말하다(tell)”의 의미가 지각함이다로부터; 그리고 야곱의 표현함이 자연 평면의 진리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리고 말했다, 보라 네 아들 요셉이 너에게 오고 있다. 이는 내적 부분의 현존에 관하여를 의미한다. 이는 요셉의 표현함이 내적 부분이다로부터; 그리고 누군가 “에게 오다”의 의미함이 현존함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요셉”이 여기서는 내적 부분이다 라고 말해지고, 다른 장소에서는 천적 평면으로부터의 내적 부분이라 말해졌는데, 이런 의미 변경은 자연 평면에서 이 평면 아래 수준인지, 또는 이 평면 위쪽 수준인지에 따라 응용함이 변경되기 때문이다: 즉 야곱에 의해 표현되는 보다 낮은 수준이 암시되는 경우에서는 요셉에 의해 “내적 부분, the internal”이 표현되고, 보다 높은 수준일 경우인 이스라엘이 언급되는 경우, 또는 이스라엘의 아들들이라 언급될 경우, 요셉에 의해 “천적 평면으로부터의 내적 부분, the internal celestial”, 또는 “내적 부분의 선(internal good, 내적인 선)이 표현된다. 이런 이유는 유입 때문이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기운을 차렸다(힘을 일구었다). 이는 영적 선을 통하여 있는 새로운 힘을 의미한다. 이는 “기운을 차리다”의 의미가 새로운 힘(force)들을 받는 것이다로부터; 그리고 이스라엘의 표현함이 자연 평면으로부터의 영적 선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 힘들이 영적 선을 통하여 있다고 말한 이유는 “야곱”이라 말해지고, 즉각 “이스라엘”이라 뒤이어 말해졌기 때문이다: 즉 “누군가가 야곱에게 말했다. 보라 네 아들 요셉이 온다. 그 다음 이스라엘은 기운을 차렸다”라고 말해졌기 때문이다. 여기서 “이스라엘”은 자연 평면으로부터의 영적 선이다, 그러나 “야곱”은 자연 평면의 진리이다. 자연 평면의 진리는 거기서 신앙 속에 있고, 선행의 선인 영적 선을 수단으로 확증되어진다 (기운을 차린다, 힘이 돋구어진다). 또한 “이스라엘”은 교회의 내적 부분이고, “야곱”은 교회의 외적 부분이다. 교회의 외적 부분은 교회의 내적 부분 외에 다른 근원으로부터 힘이 돋구어지거나 힘을 받거나 하지 않는다. 교회의 내적 부분에 있는 이들이 선행의 선에 있는 이들이다, 이 선은 신앙의 선, 진리의 선, 영적 선, 이것이 “이스라엘”이라 불리운다; 그러나 교회의 외적 부분에서 있는 이들은 신앙의 진리에 있는 이들이다, 따라서 선 안에 있다고 잘라 말해보기에는 아직 때가 이르지 못한 수준, 그렇지만 그들의 진리 안에 선이 있는 상태, 이 진리가 “야곱”이다.

그리고 침대에 앉았다. 이는 영적 선이 자연 평면 쪽으로 돌리어졌다를 의미한다. 이는 “침대”의 의미가 자연 평면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스라엘이 침대에 앉다”가 영적 선이 자연 평면쪽으로 돌리어졌다를 표시하는 이유는 창. 47:31에서 “이스라엘은 침대의 머리에서 자신을 구부려 절하였다”에 의해서는 영적 선이 자연 평면의 내적 부분 속에 있는 이런저런 것들 쪽으로 자체를 돌렸다가 의미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가 거기로부터 자신을 옮겨 침대에 앉음에 의해서는 자연 평면 쪽으로 자체를 돌렸다가 의미된다. 자연 평면의 내면 쪽으로, 외면 쪽으로 돌림에 의해 표현되는 것은 납득력에 와닿게 하는 것이 쉽지가 않은데, 그 이유는 자연 평면에 내면과 외면이 있다는 것, 그리고 생각함이 이것이다 하고, 다른 경우에서는 저것이다 하고 말하는 이유를 아는 자가 거의 없기 때문이다; 이런 것을 모르는 자는 이런 사항들을 곰곰이 되집어 생각하려는 것도 없는 바, 어떤 경험을 바탕으로 그런 것에 관한 지식들을 가지지도 못하고 흘려보내고 말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런 것은 모든 이에게 공통적인 것이고, 단지 정도나 수준이나 따위에서만 차이가 조금 있을 뿐이다. 그 이유가 생각이라는 것은 때로 높고 고상한 것까지로 상승했다가도, 때로 낮고 천한 수준까지로도 하강하는 일을 밥먹듯 일삼기 때문이다.
이 외에 모든 이도 알 수 있는 것은, 이스라엘이 침대의 머리에서 자신을 구부려 절함, 그리고 후에 침대에 앉다를 추켜든다면, 최고로 거룩한 말씀 안에서 (의미를 찾는다고) 들먹거리기에는 너무나 경미한 주제들이 아닌가 말할지 모른다는 것, 그러나 이 말씀 역시 정녕 거룩한 말씀이다에 무게를 둔다면, 이 말의 의미 역시 알려져야 할 것이다. 이 의미는 각 단어가 지니는 개별적 영적 의미를 우선 알아야 하고, 이 의미는 천사들이 생각하는 언어들이다는 것도 알고 있어야 한다, 천사들은 세상의 물체, 육체에 속하든, 땅에 속하든 천국의 언어로만 알 뿐이다. 이 언어를 이해하는 것이 상응이다. 이에 대하여는 몇 장에 걸쳐 설명한 바 있다.

3-7절. 그리고 야곱은 요셉에게 말했다, 하느님 솨다이께서 가나안의 토지에 있는 루즈에서 나에게 나타나셨다, 그리고 나에게 복을 내리셨다. 4 그리고 그분은 나에게 말하셨다, 보라 나는 너를 열매 있게 만들고, 너로 번성해지게 할 것이다, 그리고 너를 큰 무리의 백성으로 만들 것이다. 그리고 나는 이 토지를 너 이후 네 씨에게 영원히 소유하도록 주리라. 5 그리고 지금 내가 이집트로 너에게 오기 전 이집트의 땅에서 너에게 태어난 네 두 아들, 그들은 나의 것이다. 르우벤과 시므온 처럼 에브라임과 므낫세, 그들은 나의 것이다. 6 그리고 그들 이후 너에게서 출생하는 네 자손은 너의 것이다. 그들의 형제들의 이름에서 그들은 자기들의 상속 재산을 청구하리라. 7 그리고 나, 내가 밧단으로부터 오는 있는데 라헬이 가나안의 토지, 그 길에서, 에브랏에 당도하기에는 아직 토지의 넓이가 있었을 때 죽었다. 그리고 나는 그녀를 거기 베들레헴과 같은 곳, 에브랏으로 가는 길에 매장했다.

그리고 야곱은 요셉에게 말했다. 이는 자연 평면 속의 진리가 내적 부분과 교통함을 의미한다. 이는 “말하다(say)”의 의미가 지각하다, 또한 교통하다 이다로부터, 그 이유가 또 다른 사람에 의해 지각된 것이 교통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야곱의 표현함이 자연 평면의 진리이다로부터; 그리고 요셉의 표현함이 내적 부분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하느님 솨다이께서 가나안의 토지에 있는 루즈에서 나에게 나타나셨다. 이는 신성이 이전의 상태에서 자연 평면에 나타나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하느님 솨다이(Shaddai)”의 의미가 신성이다로부터, 그 이유가 아브라함, 이삭, 그리고 야곱의 하느님이 “솨다이”이라고 불리웠기 때문, 그리고 그분은 여호와, 또는 주님, 고로 신성이셨다, 이는 이미 지나온, 창. 28:13, 20에서 살핀 바로부터 알는지 모른다; “나에게 나타나셨다”의 의미가 그분이 나타나셨다 이다로부터; “루즈”의 의미가 이전 상태에서의 자연 평면이다로부터; 그리고 “가나안의 토지”의 의미가 교회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상으로부터 분명해진다, 즉 “하느님 솨다이께서 나에게 가나안에 있는 루즈에서 나타나셨다”에 의해 신성이 영적 교회가 있는 자연 평면에서 나타나심이 의미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나에게 복을 내리셨다. 이는 생동 있게 함에 관하여 예언함을 의미한다. 이는 “복을 주시다”의 의미가 여기서는 생동 있게 함에 관하여 예언이 있다를 의미함으로부터 분명해진다; 그 이유가 복을 주심은 그분이 그를 열매가 풍성히 있게, 그를 번성하게, 그가 일련의 백성들로 한 집단으로 일구어지게, 자기 이후 자손에게 영원한 소유로 토지를 주시는 것 등등을 해주심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런 예언되는 모든 것은 생동 있게 함에 관한 것이다; 그러나 신앙의 진리와 선행의 선 안에 있는 이들에 해당된다; 그 이유가 이것들이 내적 의미에서 있는 “야곱”과 “이스라엘”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분은 나에게 말하셨다, 보라 나는 너를 열매 있게 만들고, 너로 번성해지게 할 것이다. 이는 선행의 선과 신앙의 진리를 통하여 생기 있어짐을 의미한다. 이는 “열매 풍성해지게 만들어지다”의 의미가 선행의 선이다로부터, 그리고 “번성해지다”의 의미가 신앙의 진리들에 관해 말해진다 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런 것들이 인간을 살아있게 만들기에, 생기 있어 짐이 그들을 서술한다.

큰 무리의 백성으로 만들 것이다. 이는 무한하게 증가함을 의미한다. 이는 “큰 무리의 백성”의 의미가 한계 없는 선으로부터의 진리들이다로부터; 그 이유가 “백성”들이 진리들을 의미하기 때문, 그리고 “무리(company)”는 풍부함이다. 이로부터 “큰 무리의 백성을 만든다”는 진리들이 풍부히 증가하게 된다를 의미하게 된다; 그리고 이것이 무한하다인 이유는 무한이신 분으로부터 진행하는 영계의 모든 것들은 진리들과 선들에 관하여 무한대로 불어나고 증가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무한이라 불리는 것은 숫자를 가지고 한계를 지어 말해보거나 세어질 수 없다. 그렇다 해도 영계의 무한인 것은 절대적 무한에 비해 상대적으로 유한이다. 이 둘 사이에는 비율이 적용되지 않는다.
진리들과 선들이 무한하게 증가할 수 있다는 것은 그것들이 무한이신 주님으로부터 진행하고 있다는 사실로부터 오고 있디. 진리들과 선들이 이런 속성 속에 있다는 것은 보편적인 천국은 진리와 선 안에 있다는 사실로부터 알는지 모른다, 그럼에도 이 사람의 진리와 선이 저 사람의 진리와 선과 똑같은 적은 한 번도 없다. 이런 식으로 수 천천의 천국도 같은 것은 하나도 없다. 이는 천사들이 영원히 완전 쪽으로 진행해간다는 사실로부터도, 즉 그들은 선과 진리에서 계속적으로 성장하고 있다, 그럼에도 어떤 완전함의 등급에는 도달할 수 없다, 그 이유는 무한한 영역에 언제나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진리들은 숫자적으로 무한이기 때문, 그리고 각 진리는 그것 안쪽에 무한한 영역을 지니기 때문, 등등이다.
이것은 자연에 있는 어떤 것 가지고도 더 확실해진다: 비록 인간이 숫자상 무한하게 불어난다 해도, 같은 얼굴을 가진 또 다른 자는 여전히 없다, 그리고 내부의 얼굴 또한 그렇다, 즉 마음이 같은 자, 아마 목소리의 어조 조차도 그렇다; 이로부터 분명한 것은, 모든 것들에는 무한한 다양성이 있다는 것, 이것과 저것이 같지 않다는 것이다. 이런 다양함은 영계에 속하는 진리와 선에서도 마찬가지여서 무한적이다; 그 이유가 자연계의 하나의 것이 영계의 수천 천과 상응하기 때문이다. 고로 더 내면에 속할수록 더 무한적이다.
영계에 속한 것이 무한한 이유, 자연계의 것 역시 그 다양함이 무한한 이유 모두는 무한 자체로부터 출시되기 때문이다. 이는 위에서 말했다; 그것들이 무한에서 출시되지 않으면 그것들은 결코 무한이어질 수가 없다; 그러므로 양쪽 세계의 무한이신 것들로부터 분명해지는 것은 신성이 무한이심 이다.

그리고 나는 이 토지를 너 이후 네 씨에게 영원히 소유하도록 주리라. 이는 이 선과 진리 안에 있는 이들을 위한 주님의 왕국을 의미한다. 이는 “토지”, 여기서는 가나안의 토지의 의미가 주님의 왕국이다로부터; “씨”의 의미가 신앙의 진리와 선행의 선이다로부터; 그리고 “영원히 소유함”의 의미가 주님의 생명을 가지는 것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것들이 “왕국의 아들들이다.”

그리고 이집트의 토지에서 지금 너에게 태어난 네 두 아들들. 이는 내적 부분으로부터 자연 평면에 태어난 선과 진리를 의미한다. 이는 여기서 “두 아들들”인 므낫세와 에브라임의 표현함이 내적 부분에서 태어난, 자연 평면에 있는 교회의 의지력과 지력이다로부터, 그리고 선이 의지력에, 진리는 지력 속에 있기 때문에, 같은 것에 의해 교회의 선과 진리도 의미된다; 요셉에게 “태어난 자”의 의미가 내적 부분으로부터 있다 이다; 그리고 “이집트의 토지”의 의미가 자연적 마음이다로부터, 이 안에 기억 속의 지식들이 있다, 그리고 자연 평면도 의미한다.

내가 이집트로 너에게 오기 전. 이는 자연 평면 속의 진리가 거기 기억 속의 지식들 안에 있기 전을 의미한다. 이는 “내가 네게 오기 전”의 의미가 그것이 있었기 이전 이다로부터; 자신에 관한 이것을 말하는 야곱의 표현함이 자연 평면의 진리이다로부터; 그리고 “이집트”의 의미가 자연 평면의 기억 속의 지식들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야곱과 그의 아들들이 이집트 안으로 옴에 의해 진리들이 교회의 기억 속의 지식들 안으로 은근히 심어짐이 표현되었다에 대하여는 앞 두 장들에서 보여준 바 있다.

그들은 나의 것이다. 이는 그것들은 내 안에 있다를 의미한다. 이는 자신에 관련해 이 말을 한 야곱의 표현함이 자연 평면의 진리이다로부터 (아래에서 더 살핀다); 그리고 므낫세와 에브라임의 표현함이 자연 평면에 있는 교회의 의지력과 지력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 말, “그들은 나의 것이다”가 그들을 내 안에 있다를 표시한다고 말을 한 이유는 야곱이 자연 평면의 진리, 고로 진리 측면에 관한 자연적 수준, 그리고 자연 평면에서 있는 에브라임과 므낫세에 의해 표현되는 지력과 의지력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것들이 자연 평면에서 있는 바, 그들은 “나의 것”에 의해 그것들은 내 안에 있다가 의미된 것이다. “야곱”이 자연 평면이다는 것, 최고 의미에서 주님의 신성한 자연 평면이다는 것; 그리고 관계적 측면에서 자연 평면에 있는 진리, 고로 진리 측면에서의 자연적 수준, 그러므로 그의 “열 아들들”은 자연 평면에서 있는 세부적인 교회의 진리들, 고로 지금은 “요셉의 아들들” 또한 자연적 평면에 포함된다. 바로에 의해서도 역시 자연 평면이 표현되었다, 그렇지만 진리 측면은 아니고 기억 속의 지식들에 관련되어서 이다. 이것은 진리들 보다 더 수준이 낮다, 그리고 이 안으로 진리들은 받아들여질 수 있고 은근히 심어질 수가 있다. 이것이 야곱과 그의 아들들이 이집트 안으로 옴에 의해 표현되어졌다.

에브라임과 므낫세. 이는 교회 속의 지력과 의지력을 의미한다.

르우벤과 시므온 처럼, 그들은 나의 것이다. 이는 그들은 진리와 진리로부터의 선일 것이다를 의미한다. 이는 르우벤의 표현함이 이해력에 있는 신앙, 그리고 인간을 생활의 선에 도달 할 수 있게 하는 교리의 진리이다로부터, 고로 일반적 측면에서 지력 속의 진리이다; 그리고 시므온의 표현함이 의지력에 있는 신앙, 결과적으로 행동에 있는 진리, 이는 신앙의 선 또는 진리의 선이다로부터, 고로 일반적 측면에서 새로운 의지력에 속하는 선이다. 같은 것이 에브라임과 므낫세에 의해 표현되는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르우벤은 그의 표현성(representative)을 모독해버렸다; 그리고 시므온은 그의 표현성을 더럽혔다, 그리고 이것 때문에 그들은 저주되었다(창. 39:3-7), 그러므로 그들은 생득권을 잃었다, 그들 대신, 요셉의 두 아들, 에브라임과 므낫세가 첫 출생으로 인정되어졌다 (역상. 5:1). 그럼에도 불구하고 표현성은 르우벤과 시므온에 의해 유지되었다, 그 이유가 표현하는 실제 인물이야 어찌됐든 그것이 주제는 아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르우벤과 더불은 이해력에 있는 신앙의 표현은 거기에(자연 평면에) 남아 있다는 말이다, 그리고 의지력에 있는 신앙의 표현도 거기에 남아 있다는 말이다; 그러나 에브라임과 더불어 교회의 지력을 표현함, 그리고 므낫세와 더불어 교회의 의지력의 표현함도 거기에 있다.

그리고 그들 이후 너에게서 출생하는 네 자손. 이는 그 후에 있는 내면의 진리들과 선들을 의미한다. 이는 “자손(generation)”의 의미가 신앙과 선행에 속하는 것들, 고로 진리들과 선들이다로부터; 그리고 “그들 이후에”의 의미가 그 후에 있는 내면의 것들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내면의 것들이 의미되는 이유는 이후에 내적 부분으로부터 태어나지는 (begotten) 것들은 더 내면적이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이전에 태어나져왔었던 것들이 이후에 더 내면적으로 태어나지는 것들을 생산하기 위해 섬김(봉사, 디딤돌)의 역활을 하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내적 부분은 점차적으로 자연 평면을 그것 자체 쪽으로 승강되게 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인간에 있는 지력(지성)의 모든 것들의 자손(대대)로부터 분명해진다: 즉 처음에는 감각적 인간, 이후에 그가 지적 인간이 될 때까지 더욱 더 내면 쪽으로 들어간다. (감각적 수준의 인간 ->자연적 수준의 인간-> 그 다음 자연적- 영적 수준의 인간 -> 그 다음 영적 수준의 인간 -> 그 다음 천적 수준의 인간도 가능하다는 인간의 가능성을 소설화 한 것이 빅톨 위고의 레미제라블 (일명, 쟌발잔)이 아닌가 싶다 역자주.) 이는 신앙과 선행을 수단으로 결과되는 새로운 자손과도 똑같다. 인간은 등차적으로 왼전해져 간다 (인간의 거듭나짐은 내면들을 향하여 계속적으로 승강함이다에 대하여는 6183항을 보라).
말씀에서 “세대, 자손(generation)”이 신앙과 선행에 속하는 것들을 의미하는 이유는 영적인 것 외에 내적 의미에서 이해될 수 있는 것은 없기 때문에서이다. 이런 자손이 다윗서에서 뜻해진다;
그들은 정녕 두려울 것이다; 그 이유가 하느님이 의로운 자의 자손 안에 계시기 때문이다
(시. 14:5);
“의로운 자의 자손”은 선으로부터의 진리들을 표시한다, 그 이유가 “정의”가 선을 서술하기 때문이다. 이사야서에서:
그들은 헛되이 애쓰지 않을 것이다, 공포를 산출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여호와의 복된 자의 씨이다 (이. 65:23).
다시:
누가 그것을 작업하고 행할까? 누가 시작으로부터 자손이라고 부를까? 나, 여호와, 처음, 그리고 마지막과 더불어 나는 똑같다 (이. 41:4).
에스겔서에서:
너의 무역과 너의 자손들은 가나안족의 토지 속에 있다; 너의 아버지는 아모리족이었다, 그리고 너의 어머니는 헷족이었다. 네 자손들에 관하여, 네가 태어나던 그 날에 너의 배꼽(줄)은 잘라지지 않아졌었다, 그리고 너는 내 시각을 위해 물들로 씻어지지 않았다 (겔. 16:3, 4);
위는 예루살렘의 구역질 나는 것들을 이야기 한다, 위의 “자손들”은 영적인 것에서의 자손들이 분명하다.
다시 이사야서에서:
영원의 날들에서 같이 깨어라, 영원들의 자손들아 (이. 51:9);
“영원의 날들”은 태고 교회의 상태와 시간을 표시한다, “영원”이라는 표현이 이 교회와 관련하여 서술되는 이유는 이 교회가 주님을 사랑함의 선 안에 있었기 때문, 그리고 이 선, 주님으로부터 직접적으로 흘러들기 때문에 “영원”이라 불리우고 있다. “영원들의 자손들”은 이 선으로부터 파생된 선의 형체들이다.
모세의 책에서:
영원의 날들을 기억하라, 자손 대대로의 햇수들을 깨달으라 (신. 32:7);
위에서 “영원의 날들”은 홍수 전에 있었던 태고 교회의 상태와 시간을 표시한다. 이 교회는 천적 (수준의) 교회 이었다. “자손 대대로의 햇수들”은 홍수 후에 있었던 고대 교회의 상태와 시간을 표시한다, 그리고 이 교회는 영적 (수준의) 교회이었다; 위에서 이 교회들이 취급된 것이다.
그리고 요엘서에서:
유다는 영원 쪽으로 거주할 것이다, 그리고 예루살렘은 자손 대대로 쪽으로(거주할 것이다)
(욜. 3:20);
위에서 “영원”이 유다를 서술한다, 그 이유는 유다에 의해 천적 (평면의) 교회가 표현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손 대대로”가 예루살렘을 서술하는 이유는 “예루살렘”에 의해 영적 (평면의) 교회가 의미되기 때문이다.
이사야서에서:
나의 정의는 영원 쪽으로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나의 구원은 자손 대대로 쪽으로 (있을 것이다) (이. 51:8);
위에서 “영원”은 사랑의 선을 서술하고 있다, 그 이유가 “정의”가 이 선을 서술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손”은 신앙의 선을 서술한다.
다윗서에서:
당신의 왕국은 모든 영원들의 왕국입니다, 그리고 당신의 통치하심은 모든 자손 대대로에게 있습니 다 (시. 145:13);
위에서의 의미도 앞 구절들과 같다; 그 이유가 “영원”이 천적인 것을, 그리고 “자손”이 영적인 것을 서술하지 않으면, 하나만 말해져도 될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쓸모도 없이 반복적으로 말해진 것이 아니다는 말이다.
신앙의 상태에 속하는 것들이 사생아는 십대까지 여호와의 회합에 오지 못한다는 명령에 의해서 (신. 23:2); 암몬족과 모압족은 십대 그이후 조차까지 회합에 오지 못한다는 것(3절); 에돔족과 이집트인들은 삼대까지만 회합에 오지 못한다는 것 (8절); 십계명의 명령에서도, 여호와께서는 아버지들의 불법을 아들들 위에서, 그분을 미워하는 이들에 관련하여 삼, 사대 위에(까지) 방문하실 것이다 (출. 20:5)에 의해서도 의미되고 있다.
“자손들”이 신앙과 선행 속의 것을 표시하는 이유는 영적 의미에서 자손은 거듭남 속에 있는 이것 저것, 또는 거듭나는 자 속의 이런 저런 것들 외에 다른 것을 뜻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마찬가지가 말씀에 있는 “출생들”, “해산함”, “임신함들”의 경우이다; 이런 단어들도 신앙과 선행의 임신, 해산, 출생을 표시한다.

너의 것이다. 이는 그것들은 내적 부분인 합리성 안에 있을 것이다를 의미한다. 이는 요셉에 의해 표현되는 천적 평면으로부터의 내적 부분이 합리성 안에 있다는 사실로부터 분명해진다; 그러므로 “너의 것이다”에 의해서는 그것들은 합리성 안에 있을 것이다가 의미되지만, 바로 앞에서의 경우, 즉 “나의 것이다”에 의해서는 그것들은 야곱에 의해 표현되는 자연 평면의 진리들이 있는 자연 평면 안에 있을 것이다가 의미된다. 따라서 합리성(rational)이 무엇인지 간략한 서술이나마 있어야 할 것 같다: 내적 인간의 지력이 “합리성”이라 불리운다, 그러나 외적 인간의 지력은 “자연성”이라 불리운다; 고로 합리성은 내적 부분이고, 자연성은 외적 부분이다; 그리고 이 둘은 서로로부터 완벽하게 구분된다. 진실로 합리적 인간은 천적 인간이라 불리우는 자, 하여 선을 지각함과 이 선으로부터 진리를 지각함을 가진 이들이다; 이에 비해 이 지각을 가지지 못한 이들, 그러나 지식을 가진 이들, 즉 배워진 바 있기에 진리인 것을 아는 이들, 이로부터 양심을 가진 이들은 진실로는 합리적 인간은 아니고, 내면의 자연적 인간이다. 이런 이들은 주님의 영적 (평면의) 교회 속에 있다. 영적 평면과 천적 평면은 아주 다르다, 마치 달빛과 태양빛이 다른 것에 비교된다. 고로 주님께서는 영적 평면에는 달로서, 천적 평면에는 태양으로 나타나신다.
세상에 있는 많은 이들이 상상하는 것은, 합리적 인간은 많은 것들에 관하여 예리하게 추론할 수 있는 자이다는 것이다, 하여 그가 자기의 추론들을 함께 정리하면 마치 그의 결말들은 진리처럼 나타날는지 모른다; 그러나 이런 짓은 인간들의 가장 나쁜 짓 안에서 발견된다, 이들은 악들이 선들이라고, 거짓들이 진리들이라고도 노련하게 추론헤서 설득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저리 뒤집는 것 역시 별로 힘들지 않다. 그러나 곰곰이 반영하는 자라면 알 수 있는 것은, 이런 추론의 발상은 사악한 몽상이다는 것이다, 그리고 합리적인 것이 아니다는 것이다. 합리성은 선이 선임을, 이 선으로부터 진리가 진리임을 내향적으로 보고 지각함 안에 존재한다; 그 이유가 이와 같은 인간의 시각과 지각함은 천국으로부터 있기 때문이다. 주님의 영적 교회 속에 있는 이들이 내면적으로 자연적 수준인 이유는 그들이 부모나 스승으로부터 받았던 것, 그 후에 자신이 확증한 것들을 진리로 인정하기 때문, 또한 자신 안에서 그것을 확증하는 것 외의 어떤 다른 근원으로부터서는 진리인지 여부를 내향적으로 보지도 지각도 못한다. 따라서 이것은 천적 수준과는 딴판이다. 후자가 합리적이다, 그러나 전자는 내면적으로 자연적(자연 평면의 안쪽 부분, interiorly natural)이다.
요셉에 의해 표현되는 천적 평면으로부터의 내적 부분(internal celestial)은 합리성 안에 있다; 이에 비해 이스라엘에 의해 표현되는 영적 선은 자연 평면의 내면(interior natural) 안에 있다; 그 이유가 이스라엘 의해 영적 수준의 인간들이, 요셉에 의해서는 천적 수준의 인간들이 표현되기 때문이다.

그들의 형제들의 이름에서 그들은 자기들의 상속 재산을 청구하리라. 이는 그들은 교회 속의 진리들과 선들과 함께 하면서, 그것들의 품질 속에 있어야 함을 의미한다. 이는 “이름”, “이름으로 부름”의 의미함이 품질이다로부터; 여기서 “형제들”인 에브라임과 므낫세의 표현함이 교회의 지력과 의지력이다로부터, 고로 진리와 선이다; 그리고 “그들의 상속 재산에서”의 의미가 그들 사이에 함께 있다 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리고 나, 내가 밧단으로부터 오는. 이는 지식들의 상태로부터를 의미한다. 이는 “밧단-아람”의 의미가 진리에 관한 내면의 지식들이다로부터; 고로 “밧단”은 지식들의 상태이다.

라헬이 가나안의 토지에서 죽었다. 이는 내면의 진리에 대한 이전의 애착이 끝났음을 의미한다. 이는 “죽는다”가 존재하는 것이 중지됨이다로부터, 그리고 이전의 표현함의 끝이다; 그리고 라헬의 표현함이 내면의 진리에 대한 애착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 길에서, 아직 토지의 넓이가 있었을 때 죽었다. 이는 중간인 것을 의미한다.

에브랏으로 가는. 이는 이전의 상태 안에 있는 영적 평면 속의 천적 부분을 의미한다.
이는 “에브랏”이 이전 상태에서 있는 영적 평면의 천적 부분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리고 나는 그녀를 거기 에브랏으로 가는 길에서 매장했다. 이는 이 상태를 거절함을 의미한다. 이는 “매장하다”의 의미가 거절이다로부터; 그리고 “에브랏”의 의미가 이전 상태에 있는 영적 평면의 천적 부분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베들레헴과 같은 곳. 이는 그것의 장소에서 선과 진리에 새로이 애착함을 의미한다.
이는 “베들레헴”의 의미가 새로운 상태에 있는 천적 평면의 영적 부분이다로부터, 고로 선과 진리에 새로이 애착하는 상태; 그 이유가 천적 평면의 영적 부분이 선의 진리, 고로 선으로부터 진리에 애착함이기 때문이다. 이 구절의 내용이 내적 의미에서 어떠한지를 잠간 살피고 가야할 것 같다. 여기서 취급된 주제는 진리의 이전 상태를 거절함, 그리고 새로운 상태를 수용함이다. 진리의 이전 상태는 인간이 거듭나지고 있는 동안에서 있는 상태이다, 후자, 즉 새로운 상태는 그가 거듭나져갔었을 때 있는 상태이다. 이전의 상태에서 인간은 자신이 총명해지기 위하여 진리에 애착되어진 상태이고, 후자는 삶을 위하여 진리에 애착하는 상태이다. 교리를 위하여서는 인간은 진리로부터 선을 찾고, 삶(생명)을 위하여서는 선으로부터 진리를 찾는다. 고로 후자의 상태는 전자의 상태와 반대적이다; 그러므로 전자의 상태는 그가 거듭나지는 동안 거절되어져 간다; 그리고 후자, 새로운 상태가 받아져 간다. 더욱이 두 상태를 비교해보면, 전자는 후자에 비해 불순하다. 그 이유가 그가 총명해지기를 원해서 교리를 위하여 진리에 애착할 때, 그는 명성과 영광에도 동시에 애착하는 결과를 빚기 때문이다. 이 애착은 당사자에게 표출될 수밖에 없고, 받아지게 허용될 수밖에 없는데, 그 이유는 이것이 인간의 본성이라 어쩔도리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삶을 위해 진리에 애착할 때, 그는 목적으로서의 영광과 명성은 거절하고, 생활의 선을 포옹한다, 즉 이웃을 향한 선행을 포옹한다. (이것이 베들레헴, 즉 빵의 집이다, 역자주)

8, 9절. 그리고 이스라엘은 요셉의 아들을 보았다, 그리고 말했다, 이들은 누구의 것이냐? 9 그리고 요셉은 그의 아버지에게 말했다, 이들은 나의 아들들입니다, 하느님께서 여기서 저에게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는 말했다, 부디 그들을 나에게 데려와다오, 그리고 나는 그들에게 복을 빌어 주겠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요셉의 아들들을 보았다. 이는 교회 속의 지력과 의지력에 관하여 지각함을 의미한다. 이는 “보다”의 의미가 지각함이다로부터; 그리고 에브라임과 므낫세의 표현함이 “요셉”인 내적 부분으로부터 태어난 교회의 지력과 의지력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리고 그는 말했다, 이들은 누구의 것이냐? 이는 그들의 근원을 의미하고 그리고 그것들에 관하여 지각함이다. 이는 “말하다”가 지각함이다로부터; 그리고 “이들이 누구의 것이냐?”의 의미가 그들의 근원에 관하여 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 이유가 내적 의미에서 질문은 지각함에 의해 얻어진 지식을 표시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요셉은 그의 아버지에게 말했다. 이는 내부로부터의 대답을 의미한다. 이는 설명이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그 이유가 “요셉”에 의해 내적 부분이 뜻해지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인간이 지각할 때, 그때 그는 자신과 더불어 질문을 만들고, 또한 그 질문에 스스로 대답도 하기 때문이다. 나 역시 관찰했었던 것은, 영들이 나에게 무엇을 물었을 때, 그들은 단지 내 생각을 들여다 봄으로 답을 받아냈다.

이들은 하느님께서 여기서 저에게 주신 나의 아들들입니다. 이는 그들은 자연 평면에 내적 부분으로부터 있었다를 의미한다. 이는 그들이 자기 아들들이다고 말하는 요셉의 표현함이 내적 부분이다로부터; 그리고 “여기서”인 “이집트의 토지”의 의미가 자연 평면이다로부터, 고로 자연 평면이다.

그리고 그는 말했다, 그들을 나에게 데려와다오. 이는 그들은 영적 선(의 요구)에 동의해야함을 의미한다. “그들을 그에게로 데려오다”의 의미가 그들은 동의해야 한다 이다로부터; 그리고 그들이 동의해야 하는 이스라엘의 표현이 영적 선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내가 그들에게 복을 빌리라. 이는 선과 진리에 관하여 예견함을 의미한다. 이는 “복을 빌다”가 예견하다인데, 여기서는 므낫세와 에브라임에 의해 표현되는 선과 진리에 관하여 예견함이다. “복을 빌다”기 일반적 표현 자체일 경우, 그것은 다양한 것들을 의미한다; 그것은 예견도, 즉 발생될 좋은 일, 발생될 나쁜 일 모두를 의미한다, 이는 다음 장에서 이스라엘의 예언함에서 르우벤, 시므온, 레위에게는 나쁜 것을, 유다와 요셉에게는 좋은 것을 예언하고 있다. 이 예언함이 창. 49:28에서 “복을 빈다”로 불리우고 있다: 즉 “이것은 그들의 아버지가 그들에게 이야기 한 것, 그리고 그들에게 복을 빈 것, 각자의 복에 따라서 그가 그들에게 복을 빌었다.” “복을 빔”이 예언을 표시하는 것은 49장의 1절이다: “야곱은 그의 아들들을 불렀다, 그리고 말했다, 너희는 다 함께 모일 것이다, 그리고 나는 너희에게 날들의 끝에서 너희에게 발생할 것을 말할 것이다.”

10-14절. 그리고 이스라엘의 눈은 고령인 탓에 무거워졌다. 그는 볼 수 없었다. 그리고 그는 그들을 그에게 가까이 데려 왔다. 그리고 그는 그들에게 키스하고 그들을 포옹했다. 11 그리고 이스라엘은 요셉에게 말했다, 나는 네 얼굴을 보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리고 보라 하느님께서 나로 네 씨 역시 보게 해주셨다. 12 그리고 요셉은 그들을 그의 넓적다리로부터 떼어 물러나게 했다. 그리고 그는 엎드려 절했다. 13 그리고 요셉은 그들 둘 다, 그의 오른쪽에 있는 에브라임은 이스라엘의 왼쪽에, 그리고 그의 왼쪽에 있는 므낫세는 이스라엘의 오른쪽에 데려다 놓았다, 그리고 그들을 그에게 가까이 데려왔다. 14 그리고 이스라엘은 그의 오른 손을 내밀었다, 그리고 그 손을 에브라임의 머리에 놓았다, 그리고 그는 동생이었다. 그리고 그의 왼손은 므낫세의 머리에 얹졌다. 그는 그의 손들을 엇갈리게 내밀었다,그 이유가 므낫세가 장자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눈은 무거워졌다. 이는 그의 희미한 지각을 의미한다. 이는 “눈”의 의미가 지각이다로부터, 또는 “보다” 역시 같은 의미이다; 이스라엘의 표현함이 자연 평면에 있는 영적 선이다로부터; 그리고 “무거워짐”의 의미함이 눈에 관해 말해질 경우, 희미한 것이다로부터, 고로 희미한 지각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스라엘이 요셉의 아들들을 축복할 때 그가 희미한 지각 안에 있었다는 것은 그가 (성경에서 아브라함, 이삭과 더불어) 표현함의 끝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또한 이를 일반적 측면에서 말하면, 이스라엘에 의해 표현되는 영적 선이 희미한 상태이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이 선은 천국의 빛이 아닌, 자연계의 빛이 있는 자연 평면으로부터 있기 때문, 이에 비해 영적 (평면)의 선, 천적 (평면의) 선은 천국의 빛에 있는 합리성으로부터 있다. (인간의 외적 부분), 또는 외적 인간이 위의 자연 평면에 해당된다. 이 자연 평면으로부터의 영적 선이 언급될 때, 이 선 안에 있는 이들은 주님의 영적 교회 속에 있는 이들이고, 그러므로 이 교회가 이스라엘에 의해 표현되어진다. 이 영적 수준이 상대적으로 희미하다에 대하여는 이미 살핀 바 있다; 그리고 희미함에 있는 이들은 신앙 속에 있는 진리를 첫째 자리에(첫째 중요성)놓는다, 마치 여기서 이스라엘이 자기 손을 므낫세에 앞서 에브라임에 놓는 것과 같다.
영적 인간이 이렇게 믿는 이유는 영적 인간은 진리를 수단으로 선 쪽으로 받아들여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이 받아들여졌을 때, 그들은 선을 지각하지는 않는데, 그 이유는 이 선은 내부로부터 진리에 애착함 안으로 흘러들기 때문이다, 고로 그들이 거듭나졌을 때까지 선을 지각함의 수준은 아니다는 말이다. 고로 이들은 신앙의 열매들을 선행의 선들이라 부른다. 그럼에도 죽음이 임박할 때까지 이전의 삶이 어떠하든, 좌우지간 원칙상으로 설사 선행의 일들이 없다해도 신앙만이 구원해준다고 주장하는 이들을 위해서는 신앙의 열매가 선행의 선이라 말해지는 따위는 너무나 관심에서 멀어 있다. (신앙 제일 주의, 하여 이왕이면 다홍치마라는 식으로 신앙에 있어도 되고 없다해도 괜찮다는 식에서 선한 일들을 간주하는 경우일 것이다. 역자주) 이것이 선과 진리를 희미하게 지각함이다. 어쨌든 다음과 같다: 교리로부터 파생되는 원리로부터 신앙을 선행 보다 중요시하는 이들, 그렇지만 선행의 생활 안에 있는 이들은 주님의 영적 교회 속에 있다, 그리고 구원되어진다; 그 이유는 생활 측면에서 그들은 선행의 선을 첫째에 놓았고, 교리 측면에서는 신앙의 진리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고령인 탓에. 이는 표현함의 끝에서 때문에를 의미한다. 이는 “고령”의 의미가 표현의 새로움이다로부터, 고로 이전 것의 끝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는 볼 수 없었다. 이는 용의 주도함이 없음을 의미한다. 이는 “보다”의 의미가 지각함이다로부터, 고로 용의주도함이다.

그리고 그는 그들을 그에게 가까이 데려왔다. 이는 현존을 의미한다. 이는 “데려오다”의 의미가 현존을 만들다 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리고 그는 그들에게 키스했다. 이는 진리에 대한 애착으로부터 결합함을 의미한다. 이는 키스의 의미가 애착으로부터 결합함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것이 진리에 애착하므로부터 인 이유는 “그가 그들을 포옹했다”는 말이 뒤잇고, 이는 선에 애착함으로부타의 결합함이기 때문이어서 이다, 그 이유가 “포옹함”이 키스함 보다 더 내면적이고, 더 밀착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을 포옹했다. 이는 선에 대한 애착으로부터 결합함을 의미한다. 이는 “포옹함”의 의미가 사랑의 결합함이다로부터, 고로 선에 애착함으로부터 결합함이다. “포옹함”이 이 애착을 표시하는 것은 포옹을 수단으로 사랑함을 증명하기 때문, 포옹은 사랑으로부터 흐르는 행동이다; 그 이유가 모두 각각의 영적 애착은 그것에 상응하는 제스추어(gesture)를 인간의 신체에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제스추어가 애착의 표현이다. 키스함도 이 표현 중의 하나임은 모르는 자가 없을 것이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요셉에게 말했다. 이는 내적 부분 쪽으로 승강함을 의미한다. 이는 “말하다”의 의미함이 지각하다이다로부터, 또한 유입함이다로부터; 이것이 승강함을 표시하는 이유는 이 구절에서 취급되는 주제가 사랑의 유입, 고로 내적 부분으로부터 선과 진리의 유입이기 때문이다, 이 유입이 내적 부분 쪽으로 승강함이다. 그 이유가 외적 부분은 내적 부분으로부터의 유입과 승강함을 수단으로 하지 않으면, 내적 부분을 향한 사랑 안에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외적 부분에서 느껴지는 사랑 자체는 내적 부분 속에 있었고, 이로부터 느끼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떤 결과를 생산하기 위하여 모두 각각의 행동함은 그것의 반작용 또는 상호 작용을 가져야만 한다, 그리고 행동함은 원인이고 반작용은 원인이 발생시킨 어떤 것이다, 그러므로 반작용은 행동함 속에 있다, 마치 원인으로 야기된 어떤 것이 원인 속에 있는 것과 같다. 발생시킨 원인에 있는 모든 힘이 원인으로부터 인 것이다. 이것은 보편적 자연에 있는 모두 각각의 낱개들에 있는 반작용의 경우이다.

나는 네 얼굴들을 보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이는 그의 사랑이 유입되리라는 것에 대한 희망은 가지지 않았다를 의미한다. 이는 “얼굴들”의 의미가 내면들이다로부터, 애착들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 이유가 이것들이 빛을 내는 신체 부분은 주로 얼굴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얼굴”은 신성의 사랑을, 그 결과 자비를 표시한다; 그리고 “나는 …에 관하여 생각을 갖지 못했다”의 의미가 그는 희망을 가져보지를 못했다 이다. 이것이 “얼굴을 봄”에 의해 의미되는 사랑의 유입이다는 것은 진행하는 것, 그리고 뒤이어지는 것들로부터 분명해진다.

그리고 보라 하느님께서 나로 네 씨 역시 보게 해주셨다. 이는 사랑의 유입이 지각되었을 뿐 아니라 거기로부터 선과 진리도 파생되었다를 의미한다. 이는 여기서 “씨”인 므낫세와 에브라임의 표현함이 의지력 속의 선과 지력 속의 진리이다로부터; 그리고 “씨”의 의미 또한 선과 진리이다로부터; 그리고 이렇게 말해졌기 때문이다: 즉 “나는 네 얼굴들을 보리라는 생각은 갖지 못했다, 보라, 하느님께서 나로 네 씨 역시 보게 만드셨다.” 이 말은 사랑의 유입이 지각되었을 뿐 아니라 거기로부터 선과 진리도 파생되었다를 의미하게 된다; 그 이유가 “얼굴들을 보는 것”에 의해 사랑의 유입이 의미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요셉은 그들을 그의 넓적다리로부터 떼어 물러나게 했다. 이는 영적 선의 부분에 있는 사랑의 애착으로부터 있는 의지력의 선과 지력의 진리를 의미한다. 이는 요셉의 표현함이 천적 평면으로부터의 내적 부분이다로부터; 요셉이 떼어 물러나게 한 므낫세와 에브라임의 표현함이 의지력의 선과 지력의 진리이다로부터; 그리고 “넓적다리”의 의미가 사랑의 애착함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것이 “영적 선의 부분에서”라고 말한 이유는 그들이 영적 선인 이스라엘로부터 떼어 물러나 있었기 때문이다. 이것을 수단으로 의미되는 것은, 천적 평면으로부터의 내적 부분이 영적 선으로부터 의지력의 선과 지력의 진리를 이동시켰다는 것, 즉 거기로부터의 사랑의 애착으로부터 옮겼다는 것, 그 이유는 이스라엘을 수단으로 영적 선이 표현되는데, 그가 이 선과 진리를 자신에게 접근하게 했기 때문이다 (9절). 그렇지만 실제 요셉에 의해, 즉 천적 평면으로부터의 내적 부분에 의해 그에게 가까이 접근되었다. 이런 이유로 그들은 떼어 물러나 있게 했고, 다시 요셉에 의해 가까이 데려다 놓여진다 (이는 뒤이어진다). 이유인즉, 이 방법에서 천적 평면으로부터의 내적 부분으로부터 사랑의 유입이 영적 선을 통하여 그것들 안으로 있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이것이 질서에 의거한 것이기 때문, 이로부터 그들이 축복되어질 때 외적 의식도 엄격히 이행되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이때 그것들은 주님 앞에서 표출된 것이고, 주님으로부터 “복을 빌다”에 의해 의미된 예견하심이 있다. 그러므로 요셉이 그의 아버지의 넓적다리로부터 떼어 물러나게 했다가, 다시 이스라엘 쪽으로 데려다 놓여지고 있다.

그리고 그는 엎드려 절했다. 이는 그들의 굴종함을 의미한다. 이는 “얼굴을 땅 쪽으로 구부려 절함”의 의미가 내면의 굴종함 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 이유가 이렇게 절함은 마음의 굴종함에 상응하는 행동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심정으로부터 하느님을 숭배하는 이들은 이런 식으로 구부려 절한다. 지금 요셉이 절한 이유는 그들을 대신함 때문이고, 이는 아버지 이스라엘이 아닌 주님 앞에서이고, 이 분으로부터 이스라엘을 수단으로 복을 받기 때문이다. 이 절함이 그들을 대신해 요셉에 의해 있어진 이유는 이런 경우가 영적 사항에서 있기 때문이다; 자연 평면의 의지력의 선과 지력의 진리는 주님 앞에서 그것 자체에서 겸손해질 수 없다, 오직 유입을 수단으로 내적 부분으로서만 겸허해질 수 있다. 자연 평면 자체에는 의지력과 이해력이 없다, 생명의 어떤 것도 없다. 오직 내적 부분을 중매자로 하여 주님으로부터 생명을 받아야 거기에 생명이 있다.

그리고 요셉은 그들 둘 다, 그의 오른쪽에 있는 에브라임은 이스라엘의 왼쪽에. 이는 (중요성에서) 두 번째 장소(위치)에 지력의 진리가 있다를 의미한다. 그리고 그의 왼쪽에 있는 므낫세는 이스라엘의 오른쪽에. 이는 (중요성에서) 첫 번째 장소(위치)에 의지력의 선이 있음을 의미한다. 이는 에브라임의 표현함이 지력의 진리, 므낫세의 표현함이 의지력의 선이다로부터; 그리고 “오른쪽”의 의미가 첫째 자리이다로부터; 그리고 “왼쪽”의 의미가 둘째 자리이다로부터; 이는 통상 우리의 손의 사용됨의 우선 순위로부터이다. 여기서의 경우가 어떤지가 아래에서 이어진다.

그리고 그들을 그에게 가까이 데려왔다. 이는 근접함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그의 오른손을 내밀어 에브라임의 머리에 놓았다. 이는 그가 진리가 첫째 장소에 있다라고 생각했다를 의미한다. 이는 “그의 오른손을 내밀다”가 첫째 자리이다라고 생각함이다; 그리고 에브라임의 표현함이 지력 부분, 또한 신앙의 진리이다로부터, 그 이유가 신앙의 진리가 인간의 지력 부분에 거주하기 때문이다 (사실상 이 지력에 천국으로부터의 빛이 있을 경우, 즉 영적 시각에서만 신앙의 진리가 있다). 지금 이 구절과 17-19절에서, 놓여지는 이야기는, 이스라엘이 그의 오른 손을 에브라임의 머리 위에, 그리고 그의 왼손을 므낫세의 머리 위에 얹는 것이다; 이를 수단으로 그는 신앙의 진리가 첫째로 중요하다고, 선행의 선은 그 다음 중요하다 라고 생각했다는 것이 의미되어 있다. 이런 이유는 인간이 거듭나질 때까지 이스라엘에 의해 표현된 영적 (수준의) 인간은 이와 달리 상상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 이유가 이 수준의 인간은 신앙의 진리가 무엇인지에 관하여는 느껴질 수 있는 납득력을 가지지만, 선행의 선이 무엇인지에 관하여는 그렇지가 못하기 때문이다; 후자는 내면의 길을 통해 흐르지만, 전자는 외면의 길, 즉 기억 속의 지식 같은 것을 통해 흐르기 때문이다.
아마 거듭나지 않고 있는 이들은 이렇게 절대적으로 말한다: 즉 신앙은 첫째로 중요하다, 이것이 교회의 본질이다고, 그 이유는 이 길에서 자기들이 바라는 대로 살 수 있기 때문이다는 것, 더 보태는 말인즉, 자기들은 신앙에서 구원을 가진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작금에 이르러 선행은 흔적 조차 찾기 힘들어져서 이에 대한 본성은 누구에게도 거의 알려지지 못한 채로 있는 바, 결과적으로 제대로의 신앙 역시 거의 갖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그 이유가 전자 없이 후자는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만일 선행이 첫째 자리에, 신앙을 둘째 자리에 놓고 있다면, 교회의 양상은 아주 달라질 것이다; 그 이유가 신앙의 진리에 따라 사는 이들을 두고 기독인들이라 부르지 않을 것, 선행의 생활로 기독인의 기준을 삼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때 이들은 선행이 무엇인지를 알 것이다. 이때는 지금 같이 신앙의 진리들에 관한 입씨름으로 서로를 구분짓는 바람에 교파가 많아질 이유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 대신 그들은 말한다, 교회는 하나이다, 이 안에 생활의 선 안에 있는 이들이 모두 있다, 교회가 있는 지역, 뿐만 아니라 교회가 없는 지역도 모두 이 안에 있다. 이 방식에서 교회는 주님의 왕국에 속하는 이런저런 것들의 본보기가 되어 있을 것이다; 그 이유는 선행이 계발되고, 선행 없는 신앙은 결코 없기 때문이다; 더욱이 분리된 신앙만으로 초래되는 오류도 명백히 깨끗해질 것이다.
그러므로 분명한 바, 만일 선행의 선을 첫째 위치에 두는 경우 교회의 양상은 얼마 다를지이다. 즉 선행이 본질이고, 신앙이 둘째 본질에 있어 선행을 위한 형식 부분을 담당한다면 교회의 모습은 너무나 달라지지 않을까? 이런 때의 교회의 면모는 고대 교회의 것과 비슷할 것이다. 즉 선행 외에 다른 교리물이 없던 교회, 선행 안에 교회를 만드는 것이다; 이로부터 그들은 주님으로부터 지혜를 가졌다. 이 교회의 품질이 모세의 책에서 말해지는 아래의 구절에 있다:
여호와께서 그를 여기저기로 인도하셨다, 그분은 그를 가르치셨다, 그분은 그를 눈 속의 (눈)동자 로서 지키셨다. 독수리가 그녀의 둥지를 휘젖고, 그녀의 어린 것이 파닥거리고, 그녀의 날개를 넓게 펴는 것 같이, 그분은 그를 데리고 갔다, 그분은 그를 그분의 날개 위에서 실어날랐다; 여호와만이 그를 인도하셨다, 그와 더불어 어느 이상한 신이 없었다. 그분은 그를 땅의 높은 장소들을 타게 만드셨다, 그리고 그를 들판들의 증가분으로 먹이셨다; 그분은 그가 반석으로부터 꿀을 빨게 만드셨다, 그리고 바위의 틈새로부터 기름을 빨게 하셨다; 목축의 버터, 그리고 어린 양의 지방과 더불어 양떼의 젖, 그리고 바산의 아들들 숫양들, 숫염소들, 그리고 밀의 콩팥의 지방; 그리고 포도의 피로부터 너희는 순수한 포도주를 마신다 (신. 32:10-14).
그러므로 이 교회 속에 있는 이들은 천국 안에, 거기서 모든 행복과 영광 안에 있다.

그리고 그는 동생이였다. 이는 비록 그것이 두 번째 장소에 있다 할지라도를 의미한다. 이는 “동생”의 의미가 둘째 위치에 있어져야 한다 이다로부터 분명해진다.

그리고 그의 왼손을 므낫세의 머리에 얹었다. 이는 그는 선이 둘째 위치에 있다 라고 생각했다를 의미한다. “그의 왼손을 얹다”의 의미가 둘째 위치라고 생각하다 이다로부터; 그리고 므낫세의 표현함이 의지력, 고로 선행의 선 또한 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에 대한 것은 앞에서 살폈다.

그는 그의 손들을 엇갈리게 놓았다. 이는 그러므로 질서에 따른 것이 아니다를 의미한다. 그 이유가 이러므로 해서 그는 동생을 첫출생으로 만들어 질서가 거꾸로 있게 했다; 즉 신앙의 진리가 앞서 있고 더 높다는 것, 선행의 선은 뒤의 것, 더 낮다는 것이다; 그 이유가 “생득권”은 앞의 것, 우위인 것을 표시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얼마나 많은 악이 교회 안으로 받아들여졌는지를 분명히 알게 한다. 거꾸로의 질서로 인해 교회인들은 희미함에 젖어 선이 무엇인지를, 고로 진리가 무엇인지도 모르게 되고 말았다; 그 이유가 선은 불꽃 같고, 진리는 이 불꽃으로부터의 빛 같기 때문이다; 만일 당신이 불꽃을 치워버리면 빛 역시 사라지고 만다; 그런데 만일 어떤 빛이 나타난다면, 불꽃 없이 있는 빛인 바, 사기적 빛인 것이다. 이런 사기적 빛으로부터 교회들은 서로의 의견을 내세워 다양해져, 진리를 가지고 논쟁을 일삼는다. 하여 자기들의 견해가 진리이다고, 저 견해, 저 교리는 사기라고 설득해대는 것이다. 더욱 더 나쁜 상황은, 그들이 교회의 회중에서 앞의 자리에 신앙을 놓아두었을 때, 그 다음 그들은 신앙을 선행으로부터 떼어내는 것, 하여 후자를 상대적으로 덜 중요하게 여기는 쪽으로, 삶에 별 중요성이 없는 것으로 차츰 교인들로 생각하게 하는 쪽으로 기울게 만드는 것이다. 이로부터 교회는 멸해진다; 그 이유가 인간과 더불어 교회를 만드는 것은 생활 없는 교리가 아니고, 고로 특출한 신앙인 확신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진짜 확신은 선행 안에 있는 이들에게나 가능하기 때문, 이로부터 확신 있는 신앙의 삶이 있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므낫세가 장자였기 때문이다. 이는 참으로 선이 앞선 위치에 있어 왔기에를 의미한다. 이는 므낫세의 표현함이 의지력에 있는 선이다로부터; 그리고 “생득권”의 의미가 앞인 것(우선권, priority)과 우위인 것 (superiority), 고로 “첫출생”은 앞의 위치(자리)에 있는 자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아마 누구라도 조금만 계발된다면, 선이 의지력에 있다는 것, 첫째 중요하다는 것, 진리는 둘째 중요하다는 것, 인간의 생각함 안에 있다는 것을 누구인들 알 수 없을까? 또한 인간의 의지력이 이것을 생각하게 하는데, 사고력 자체가 딴짓을 할 리가 없다. 결과적으로 인간과 더불은 선이 이것, 또는 저것이 진리라고 생각하게 한다는 것이다. (이 반대인 악의 경우도 생각해보라. 역자주) 고로 진리가 둘째 자리에 있다는 것, 선이 첫째 자리에 있다는 것을 모르기가 차라리 더 힘들지 모른다. 신앙 속에 있는 진리가 선이 아니면 뿌리를 내릴 수 없는지 여부, 신앙이 선 안에 뿌리를 내리지 않아도 신앙인지 여부는 각자의 사고력에 맡겨 조금만 생각해도 결판나는 대단히 어렵지 않는 숙제일 뿐이다. 그러므로 교회의 우선적인 것, 본질이어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 좁혀 말해서 인간 안에 있는 교회는 어떤 것이 내용이어야 하고 형식이어야 하는지 이다.

15, 16절. 그리고 그는 요셉을 축복했다, 그리고 말했다, 내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 앞에서 걸어 가셨던 하느님, 내가 존재한 이래 오늘 까지 나를 먹이신 하느님, 16 나를 모든 악에서 되찾으신 천사가 이 소년들을 축복하소서. 그리고 내 이름, 그리고 내 조상들 아브라함과 이삭의 이름이 그들 안에서 불리게 하소서. 그리고 그들로 땅의 한 가운데에서 크게 불어나게 하소서.

그리고 그는 요셉을 축복했다. 이는 지력 속의 진리와 의지력 속의 선은 내적 부분으로부터 생명을 가진다는 것을 예견함을 의미한다. 이는 “축복했다”의 의미함이 예견함이다로부터; 그리고 여기서 “요셉”이라 말해지는 에브라임과 므낫세의 표현함이 자연 평면에 있는 지력으로부터의 진리와 의지력으로부터의 선은 내적 부분으로부터 출생됨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요셉”에 의해 그의 아들들이 뜻해지는 것은 축복함의 내용 자체로부터 분명하다, 즉, “나를 모든 악으로부터 되찾으신 천사가 이 소년들에게 축복하소서, 그리고 내 이름이 그들 안에서 불리워지게 하소서”하고 말해지기 때문, 그리고 므낫세와 에브라임에 의해 표현되는 자연 평면에 있는 이 선과 진리가 자연 평면의 내적 부분 자체이기 때문이다. 내적 부분과 외적 부분은 실로 서로로부터 확실히 구분되어진다; 그러나 그것들은 자연 평면에서 함께 있다, 거기서 내적 부분은 그것 자신에 어울리는 형체 안에서와 같이 있다, 이 형체는 그것 자체로부터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 안쪽의 내적 부분으로부터서만 있을 뿐이다; 고로 그것은 (배우가) 연기하듯 행동할 뿐이다. 마치 효력(효능, 유효성, the efficient)이 결과 안에 있는 것과 같다: 효력과 결과는 서로로부터 구분되어진다, 그럼에도 효력은 효력 자신이 개작한 형체에서와 같은 식으로 하여 있다. 이 형체를 통하여 생산되는 영역에서 원인으로서 행동한다. 인간 안의 자연 평면에서 내적 부분으로부터 출생한 선과 진리의 경우도 이와 같다; 그 이유가 내적 부분은 자연 평면에서 삶을 인도하면서 그 자체도 거기 있기 위하여 자연 평면에 있는 이런저런 것들로 자체를 옷입혀 놓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옷입혀진 이것들은 덮개라는 역할밖에 더 이상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그리고 말했다, 내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 앞에서 걸어 가셨던 하느님. 이는 내적 선과 내적 진리는 신성으로부터 생명을 가졌다를 의미한다; “걷다”의 의미가 사는 것이다로부터, 또는 생명을 가지는 것이다로부터; 아브라함의 표현함이 최고 의미에서 주님의 신성 자체이다로부터; 그리고 이삭의 표현함이 주님의 신성한 합리성, 고로 주님의 내적 인간 (internal human)이다로부터; 그 이유가 야곱이 주님의 신성한 자연 평면, 또는 주님의 외적 인간 (external human)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표현적 의미에서 “아브라함”은 내적 선, “이삭”은 내적 진리이다. 표현적 의미에서 있는 이런 사항들이 “아브라함과 이삭”에 의해 의미되는 이유는 주님의 왕국에 있는 선과 진리가 그분의 신성과 신성한 인간으로부터 진행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주님 자신이 주님의 왕국에 계시기 위함인 바, 고로 그분 자신이 그분의 왕국이다.

나를 먹이신 하느님. 이는 신성은 자연 평면으로부터 있는 영적 진리의 선에 생기를 불어 넣으신다를 의미한다. 이는 “먹다”의 의미가 생기 있게 함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먹이는 것”은 가르치는 것도 의미하는데, 그 이유는 “풀밭(pasture, 목초지)”이 인간의 영적 생명을 받쳐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방금 말한 “먹이는 것”, “풀밭”은 양떼를 염두하고 한 말인데, 비해 본문의 경우는 야곱을 두고 먹여짐이 말해지고 있다; 즉 그의 삶과 생명에 필요한 것이 받쳐주어졌다는 말이다. 내적 의미에서도 역시 같은 것이 의미된다. 즉 신체의 생명을 받쳐주는 것이 내적 의미에서는 영적 생명을 받쳐주는 것을 말하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이 자연 평면으로부터의 영적 선을 표현한다는 것은 이미 살핀 바 있다; 그리고 이스라엘이 표현하는 선은 진리로부터의 선이기 때문에, 영적 진리의 선이 여기서 의미된다; 그 이유가 순수 의미에서 “이스라엘”은 영적 교회이고, 이 교회의 선은 진리의 선이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이 교회에 속하는 이들은 진리를 수단으로 선에 관하여 가르쳐짐이 있기 때문, 즉 그들이 진리에 따라서 행동할 때, 그 안에서 그들은 가르쳐짐이 있어진다는 것, 이때 이 진리가 선이라 불리운다. 이것이 진리의 선이라 불리우는 선이고, 이스라엘에 의해 표현되어진다.

내가 존재한 이래 오늘 까지. 이는 계속적으로를 의미한다. 이는 “오늘(to-day)”, 또는 “이 날 (this day)” 의 의미가 항구적이고 영원한 것이다로부터알게 된다. 그러므로 여기서 “내가 존재한 이래, 오늘 까지”는 먹여주심과 생기 있게 하심이 계속적으로 있다를 의미하게 된다.

나를 모든 악에서 되찾으신 천사(Angel). 이는 주님의 신성한 인간, 이를 수단으로 지옥으로부터의 해방이 결과되어진다를 의미한다. “천사”의 의미가 주님의 신성한 인간이다로부터 (아래에서 살핀다); “되찾음”의 의미가 해방됨이다로부터; 그리고 “악”의 의미가 지옥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악”이 지옥을 표시하는 이유는 지옥 자체는 악밖에 더 이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당신이 지옥에 있는 모든 것은 악이다라고 말하든지, 지옥은 악이다고 말하든지 같기 때문이다. “악”이 언급될 때, 지옥이 영적 의미에서 뜻해진다; 그 이유가 영적 의미 안에 있는 이들은 마치 천국에 있는 천사들이 인물들로부터 추상적으로 생각하고 이야기를 하듯 하기 때문, 이것이 양쪽의 그들에게 보편적이기 때문에, 그러므로 양쪽 모두에서 악은 지옥이다. 통치하는 악이 뜻해질 때 등장하는 단어 “죄” 역시 같은 논리에서 있다. 이를 위해 창. 4장을 읽어보자: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말하셨다, 만일 네가 잘하지 못하면, 죄가 (방)문(door)에서 누워있다; 그리고 너에게 그의 바램이 있다, 그리고 너는 그를 통치할 것이다 (창. 4:6, 7);
위에서 “죄”는 지옥을 표시한다, 하여 인간이 악을 행할 때 지옥은 당사자 바로 가까이에(at hand), 또는(또한) 즉시(at hand) 있는다. 인간과 더불은 악 자체는 지옥밖에 더 아니다, 그 이유가 악은 지옥으로부터 흘러들기 때문이다, 이때의 인간은 가장 작은 형체로서의 지옥인 것이다, 즉 지옥에 있는 이들이나 악을 행하는 자연계의 인간이나 추상적 측면에서는 같다는 말이다. 그 반면, 인간에 있는 선 자체는 당사자에 있는 천국밖에 더 아니다; 그 이유가 선은 천국을 통하여 주님으로부터 흘러들기 때문; 고로 선 안에 있는 자는 가장 작은 형상에서의 천국이다, 즉 선을 행하고 있는 인간은 천국에 있는 이들이나 같다는 말이다.

“되찾는 천사(redeeming Angel)”란 신성한 인간 측면에서의 주님이시다는 것은 인간을 옷입으시고, 그 인간을 신성으로 만드심으로 인간을 되찾으셨다는 사실로부터, 즉 인간을 지옥으로부터 되찾으셨다는 사실로부터 분명해진다; 이로부터 주님의 인간 측면에서 그분은 “되찾는 분(구속자, Redeemer)”라 불리우신다. 신성한 인간이 “천사(Angel)”라고 불리운 이유는 단어 “천사(angel)”가 보내짐을 뜻하기 때문, 그리고 신성한 인간 측면에 관련하여 주님은 “보내심”이라고 말해지는 대목을 복음서들의 많은 구절들로부터 명백해진다. 더욱이 주님이 세상에 오시기 이전, 신성한 인간(the Divine Human)은 그분이 말씀을 이야기하셨을 때 천국을 통하여 흐르는 여호와 자신이셨다; 그 이유가 여호와는 천국들 넘어 계셨기 때문, 천국들을 통하여 그분으로부터 건너온 것이 그때 당시에서는 신성한 인간이셨다; 그 이유가 천국 안으로 여호와가 유입되심을 수단으로 그분은 사람을 놓으셨고, 거기로부터 파생된 신성 자체가 신성한 사람(a Divine man)이었다. 이때 이것이 “보내짐(Sent)”이라 불리우고, 이를 수단으로 진행됨(preceeding)이 뜻해진다, 이것이 본문의 “천사(Angel)”와 같다.
그러나 그분의 이 신성한 인간을 수단으로 여호와께서는 인간에게 더 이상 흘러드실 수가 없었는데, 그 이유는 그들이 자기들을 그분의 신성으로부터 너무나 멀리 옮겨버렸기 때문, 그러므로 그분은 자신을 인간으로 옷입으셨고, 그것을 신성으로 만드신 것이다. 이로부터 천국을 통한 유입을 수단으로 신성한 인간으로부터의 선행의 선과 신앙의 진리들을 받는 인류에게 도달이 가능해지셨던 것이다, 고로 이것은 보일 수 있게 만들어졌고, 그들을 지옥으로부터 해방하실 수 있었다, 이외 다른 수단으로는 이 해방은 가능할 수가 없다. 이 건지심이 “구속하심”이라 불리운 것이고, 건진 자, 되찾으신 자인 신성한 인간 자체가 “되찾으신 천사”라고 불리운 것이다.
신성한 인간, 뿐만 아니라 신성 자체 측면에서의 주님은 천국 넘어 계신다; 그 이유가 그분은 천국에 빛을 비추이시는 태양이시기 때문이다; 고로 천국은 그분 아래 멀리 있다. 천국 안에 있는 신성한 인간은 그분으로부터 진행하는 신성한 진리이고, 이것은 태양으로서의 그분으로부터의 빛이다. 그분의 본질 측면에서 주님은 신성한 진리가 아니다, 그 이유가 이것은 태양으로부터의 빛 같이 그분으로부터 있기 때문, 그러나 그분은 신성한 선 자체, 여호와와 더불은 하나이시다.
주님의 신성한 인간이 말씀의 다른 구절에서 “천사(Angel)”라 불리우는데 아래 구절을 읽어보자:
모세가 하느님의 산, 호렙 쪽에 왔을 때, 여호와의 천사가 덤불의 한가운데로부터 불의 불꽃 안에서 그에게 나타났다. 여호와께서는 모세가 보려고 이쪽으로 방향을 트는 것을 보셨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는 덤불의 한가운데로부터 그를 불렀다. 그리고 그분은 더 말했다, 나는 너희 아버지의 하느님,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삭의 하느님, 그리고 야곱의 하느님이다 (출. 3:1, 2, 4, 6);
위에서 “여호와의 천사(Angel)”라고 불리운 자는 주님의 신성한 인간이시다, 그리고 여호와 자신이 말하셨다는 것은 매우 분명하다. 여호와께서 신성한 인간 안에 거기서 계셨다는 것은, 신성 자체는 신성한 인간을 통하지 않고는 나타나실 수 없으셨다는 사실로부터 알는지 모른다; 요한복음서의 주님의 말씀을 읽어 보면 이렇다: “하느님을 본 자는 없다, (그러나) 아버지로부터 태어나신 아들(the only begotten Son), 아버지의 품 안에 계신 분, 그분이 그를 알게 만드셨다(나타나게 만드셨다, set forth, known, declare)” (요. 1:18); 그리고 다른 구절에서, “너희는 아버지의 음성을 들은 적도, 그분의 모양을 본 적도 없다” (요. 5:37).
더욱이 신성한 인간 측면의 주님이 “천사”라고 불리우신 대목은 백성을 가나안의 토지로 인도하심이 취급되는 곳에서도 있다:
보라 나는 너희 앞서 천사(Angel)를 보낸다, 길을 지켜주어서 내가 준비한 장소로 너희를 데려오기 위하여서 이다. 너는 그분의 얼굴로부터 조심하여라, 그 이유는 그분은 너희의 위법을 참아주시지 않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나의 이름이 그분의 한가운데 있기 때문이다 (출. 23:20, 21, 23);
위 구절의 “천사”가 신성한 인간이시다는 것은 이 말, 즉 “나의 이름이 그분의 한가운데 있기 때문”이라 말해진 사실로부터 분명해진다, 즉 여호와 자신이시다. “나의 이름”에 의해 신성한 인간 안에 계신 여호와의 품질이 의미되어진다.
이사야서에서:
그들의 모든 환난에서 그분은 환난을 가지셨다, 그리고 그분의 얼굴들로부터의 천사가 그들을 구해내셨다; 그분의 사랑 안에서와 그분의 긍휼 안에서 그분은 그들을 되찾으셨다, 그리고 그분은 그들을 데려가셨다, 그리고 영원의 모든 날들(에서) 그들을 운반하셨다 (이. 63:9);
“여호와의 얼굴들의 천사”는 신성한 인간 측면에서의 주님이시다는 것은 명백하다, 그 이유는 “그분이 그들을 되찾으셨다”라고 말해졌기 때문이다.
말라기서에서:
잘 보라 너희를 찾는 주님이 그분의 성전으로 갑자기 오실 것이다, 너희가 바라는 언약의 천사 조차; 잘 보라 그분은 오신다, 여호와 체바욷. 그러나 누가 그분의 오심의 날을 참아낼까?, 그리고 그분의 나타나심에서 서있을 자 누가 있을까? 그때 유다와 예루살렘의 식사 제물이 여호와께 달콤할 것인 바, 마치 영원의 모든 날들에서 같고, 이전의 햇수들 같다 (말. 3:1, 2, 4);
“언약의 천사”는 신성한 인간 측면에서의 주님이시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 이유가 취급된 주제가 그분의 오심이기 때문이다; “유다와 예루살렘의 제물이 여호와에게 향기로울 것이다”란 사랑과 신앙으로 그분을 예배함은 그때 향기로울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유다”에 의해 유다가 뜻해지지 않고 “예루살렘”에 의해 예루살렘이 뜻해지지 않는 것은 너무나 분명하다; 그 이유가 그때나 그 후에나 유다와 예루살렘의 제물은 향기롭지 않았기 때문이다. “영원의 날들”은 천적 수준이었던 태고 교회의 상태들이다; “이전의 햇수들”은 영적 수준이었던 고대 교회의 상태들이다. 더욱이 “천사(angel)”가 말씀에서 천사를 의미하지 않고, 주님에 있는 신성으로부터의 어떤 것을 의미한다.

“되찾음”에 주목하면, 이것의 적당한 의미는 회복하는 것과 그분의 것이어왔던 그분 자신에 어울리게 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 단어는 노예됨, 죽음, 그리고 악에 관련해 서술된다; 노예이었을 때란 영적 의미에서 지옥에 의해 노예되어져 있음을 의미한다; 죽음에 관련할 경우, 이는 저주됨을 의미한다; 악에 관련해서는 여기서와 같이 지옥 안에 있는 이들이 의미된다; 그 이유가 천사들이 되찾는 악이 지옥이기 때문이다. 주님께서 이런 악들로부터 그분 자신의 인간을 신성으로 만드심으로 해방되게 하셨는 바, 그러므로 그분의 신성한 인간은 말씀에서 “구세주, 되찾는 분”이라 불리우신다: 즉
나는 너희를 돕는다, 여호와께서 말하신다, 그리고 너희의 되찾는 자,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 (이. 41:14).
다시:
고로 여호와, 이스라엘의 되찾는 분, 그의 거룩하신 분 (이. 49:7, 20).
다시:
여호와 체바욷이 그분의 이름이다; 그리고 너희를 되찾는 분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 온 땅의 하느님으로 그분은 불리우실 것이다 (이. 54:5).
위 구절들에서, “여호와”라고 불리우시는 신성 자체가 “되찾는 분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이라 불리우는 신성한 인간과 구별되고 있다.
그러나 신성한 인간 안에 여호와 자신이 계신다는 것은 아래 구절로부터 분명해진다:
고로 여호와, 이스라엘의 왕, 그리고 그의 되찾는 분, 여호와 체바욷께서 말하신다, 나는 처음이다, 그리고 나는 마지막이다, 그리고 나 외에 하느님은 없다 (이. 44:6)
다시:
고로 여호와 너희의 되찾는 분이 말하신다, 나는 너희 하느님 여호와이시다, 너희를 가르친다 (이. 48:17).
다시:
당신은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그 이유가 아브라함이 우리를 모르고, 그리고 이스라엘은 우리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당신 여호와가 우리의 아버지, 우리의 구속자이십니다; 영원으로부터 당신의 이름은 있습니다 (이. 63:16).
다윗서에서:
구덩이로부터 너의 생명을 되찾으신 여호와 (시. 103:4).
위 구절들로부터 말씀에서 “여호와”에 의해 주님 외의 다른 뜻이 없음이 분명해진다; 그리고 “여호와 구속자”는 그분의 신성한 인간이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되찾아졌었던 이들이 “여호와의 되찾으심”이라 불리운다: 즉
너희는 시온의 딸에게 말하라, 잘 보라 너의 구원이 온다; 잘 보라 그분의 보상이 그분과 더불어 있다, 그리고 그분의 일의 값이 그분 앞에 있다. 그들이 그들을 부를 것이다, 즉 거룩함의 백성, 여호와의 되찾으심 (이. 62:11, 12);
주님으로부터 그들이 “여호와의 되찾으심”이라 불리우는 것은 아주 분명하다; 그 이유가 그분의 오심에 관해 말해지기 때문이다: 즉 “보라 너의 구원이 온다; 보라 그분의 보상이 그분과 더불어 있다.” 이 외에도 이. 43:1; 52:2, 3; 63:4, 9; 호. 13:14; 출. 6:6; 15:13; 욥. 19:25 등등의 구절에서 “구속함(redemption)”이 노예됨, 죽음, 악에 관련해 서술된다.

소년들을 축복하소서. 이는 선과 진리를 가지도록 그들에게 주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축복함”의 의미가 선과 진리를 수여하는 것이다로부터; 그 이유가 영적 의미에서 “축복함”은 이외 다른 것은 포함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기서 “소년들”인 므낫세와 에브라임의 표현함이 교회의 지력과 의지력이다로부터, 이것에 진리와 선이 주어질 것이다: 즉 지력에는 진리가; 의지력에는 선이 수여되리라는 것이다.

그리고 내 이름이 그들 안에서 일컬어지게 하소서. 이는 그들 안에 자연 평면으로부터의 영적 진리의 선의 품질이 있을 것임을 의미한다. 이는 누군가의 “이름이 불리워짐”의 의미가 당사자에 있는 그의 품질이다로부터; 그리고 이스라엘의 표현함이 자연 평면으로부터의 영적 진리의 선이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품질이 그들 안에 있었기 때문에, 그러므로 그들 역시 야곱의 아들들로 받아들여졌고, 지파들로, 즉 므낫세 지파, 에브라임 지파로 만들어졌다. 그리고 레위 지파가 성직을 담당하므로 해서 상속분을 할당받는 지파들로부터 제외되었을 때, 이 두 지파가 보태져서 열두 지파로 세어졌다 (레위와 요셉이 빠졌으므로 열 지파 인데 거기에 요셉의 두 아들들이 추가된 것이다. 역자주) (여호수아서와 에스겔서 48장을 참조하라.)

그리고 내 조상들 아브라함과 이삭의 이름. 이는 내적인 선과 진리의 품질을 의미한다. 이는 “이름”의 의미가 품질이다로부터; 그리고 “아브라함과 이삭”의 표현함이 내적인 선과 진리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내적인 선과 진리는 이것들이 선과 진리이기 위하여 반드시 외적인 선과 진리 안에 있어야함이 틀림이 없다. 이미 말했듯이, 외적 부분은 어떤 것에 형체를 주는 일만 담당한다, 하여 내적 부분이 있을 그릇일 뿐이다, 그리고 주님으로부터 자체 안으로 유입됨에 따라 거기로 삶을 인도한다. 또한 내적 부분도 가장 높은 것에 비교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이 높은 것은 주님이시고, 이로부터 모든 생명이 온다; 그리고 그 아래쪽의 것들은 그들의 질서에서에서, 마지막인 육체에 이르기 까지 등차들을 통하여 생명을 담는 그릇되는 형체들일 뿐이다.

그리고 그들로 땅의 한 가운데에서 크게 불어나게 하소서. 이는 가장 안쪽으로부터 확장됨을 의미한다. 이는 “한가운데”의 의미가 가장 안쪽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러므로 “크게 불어남”의 의미가 확장함이다; “다수”로 의미되는 진리들은 가장 안쪽, 즉 중앙으로부터 주변으로 자체들을 확장한다; 그리고 확장함이 더 커질수록 천국의 질서에 더 나은 일치함에 있게 된다, 고로 보다 더 완전한 상태가 된다; 이것이 축복의 이 부분에 의해 의미되는 상태이다: 즉 “그들로 땅의 한가운데에서 다수로 자라게 하소서.”

17-20절. 그리고 요셉은 그의 아버지가 그의 오른손을 에브라임의 머리에 얹은 것을 보았다, 그리고 그의 눈에 좋지 않게 보였다. 그래서 그는 그의 아버지의 손을 에브라임의 머리 위로부터 므낫세의 머리 위로 옮기려고 붙잡았다. 18 그리고 요셉은 그의 아버지에게 말했다, 그렇지 않습니다, 나의 아버지시여. 이 아이가 장자입니다. 당신의 오른손을 그의 머리에 놓으소서. 19 그런데 그의 아버지가 거절했다, 그리고 말했다, 나는 안다, 내 아들아, 나는 알고 있다. 그도 역시 한 민족이 될 것이다, 그리고 그도 역시 크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럼에도 그의 동생이 형보다 더 크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의 씨는 나라들에 충만할 것이다. 20 그리고 그는 이 날 그들을 축복해서, 말하기를, 너 안에서 이스라엘이 축복할 것이니, 말하기를, 하느님이 너를 에브라임 같이 그리고 므낫세 같게 평가하신다. 그리고 그는 므낫세 앞에 에브라임을 자리잡아 앉혔다.

그리고 요셉은 그의 아버지가 그의 오른손을 에브라임의 머리에 얹은 것을 보았다. 이는 그는 진리가 첫 번째의 장소에 있는 것으로 간주했음을 지각함을 의미한다. 이는 “말하다”의 의미가 이해하다와 지각하다이다로부터; 요셉의 표현함이 천적 평면으로부터의 내적 부분이다로부터; 여기서 “아버지”인 이스라엘의 표현함이 자연 평면으로부터의 영적 선이다로부터; “오른손을 머리에 놓다”의 의미함이 첫째 자리에 있다라고 생각함이다로부터; 에브라임의 표현함이 자연 평면에 있는 지력의 진리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로부터 분명한 바, “요셉이 자기 아버지가 에브라임의 머리에 그의 오른 손을 얹는 것을 보았다”에 의해 자연 평면으로부터의 영적 선이 진리가 첫째 자리에 있다라고 생각했다는 것을 천적 평면으로부터의 내적 부분이 지각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의 눈에 좋지 않게 보였다. 이는 불쾌함을 의미한다. 이는 설명이 따로 필요 없다. 이것이 요셉을 불쾌하게 헸다고 말한 이유는 요셉에 의해 표현되는 천적 평면으로부터의 내적 부분은 이스라엘에 의헤 표현되는 영적 선 보다 수준이 더 높기 때문이다. 더 수준 높은 것은 더 수준 낮은 것이 어떻게 진행되어야 진리인지를 알고 보고 있기 때문이다. 즉 더 높은 것은 천국의 빛으로부터 아래 있는 것을 본다는 말이다; 고로 “요셉”인 천적 평면으로부터의 내적 부분은 “이스라엘”인 자연 평면으로부터의 영적 선이 잘못함을 보고 있다는 것, 고로 그를 불쾌하게 한 것이다.

그래서 그는 그의 아버지의 손을 붙잡았다. 이는 그의 희미한 지각의 능력 안으로 유입이 있음을 의미한다. 이는 “손을 붙잡다”의 의미함이 지각의 힘 안으로 유입이 있다로부터; 그 이유가 내적 부분이 유입을 수단으로 외적 부분에게 어떤 것을 생각하고 뜻하라고 강요할 때, 마치 여기서 그의 손을 붙잡듯, “손”에 의해 의미되는 지각의 힘으로부터 바라기 때문이다. 영적 평면이 희미함에 있다는 것은 이런 사실로부터도 분명해진다; 즉 인간이 거듭나기 이전의 경우 그는 선과 진리에 관련하여 아주 짙은 어둠에 있다, 그 다음 거듭남이 자꾸 진행을 반복하면서 자기가 인정하는 어떤 교회의 교리 안에 있는 진리로 신앙을 가지고 진리인지 아닌지를 따져본다. 어쨌든 그의 진리가 의지 속에, 그로부터 생활 속에 있게 될 때, 그 진리들은 선이 되어간다. 이때의 선을 진리의 선, 신앙의 선, 마찬가지로 영적인 선, 또는 영적 교회의 선이라 불리운다. 이런저런 근원으로부터 있는 선의 품질은 그 당사자가 주제(중요 사항)를 곰곰이 생각할 경우 알려질는지 모른다. 어쨌든 이방인들의 선을 포함 이런저런 선이라 할지라도 그 선의 주요 관심의 주제가 이웃을 향한 선행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면, 그리고 이 선행 안에 순진이 있다면 그 선은 주님께서 열납하실 수 있는 선이다.

에브라임의 머리 위로부터 므낫세의 머리 위로 옮기려고. 이는 잘못함으로부터 그를 돌아서게 하려고를 의미한다. 이는 “옮기다”의 의미가 돌아서게 함이다로부터; “에브라임의 머리 위로부터 므낫세의 머리 위로”는 잘못함으로부터 이다; 그 이유가 진리가 첫째 자리에, 선이 둘째 자리에 있는 것은 그를 위하여는 잘못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는 앞에서 살폈다.

그리고 요셉은 그의 아버지에게 말했다, 그렇지 않습니다, 나의 아버지시여. 이 아이가 첫출생입니다. 이는 선이 우위를 가진다는 것에 관하여 지각할수 있게 유입이 있음을 의미한다. 이는 “말하다(say)”의 의미가 여기서 “요셉”인 천적 평면으로부터의 내적 부분을 서술할 경우, 유입이 있다 이다로부터; 여기서는 지각할 수 있는 유입이다, 그 이유는 그가 그의 손을 붙잡을 뿐만 아니라, “그렇지 않습니다, 나의 아버지시여, 이 아이가 첫 출생이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당신의 오른손을 그의 머리에 놓으소서. 이는 그리하여 선이 첫째 장소에 있어야 하리라를 의미한다. 이는 “머리에 오른 손을 얹는다”의 의미가 첫째 자리이다라고 생각함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가 축복했을 때, 이스라엘은 그의 손을 머리에 놓았는데, 이는 고대인들로부터 받아진 의식이었다; 그 이유가 머리 안에 인간의 지력과 의지력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이에 비해 육체는 그것에 따라서 행동해주는 것, 동의하는 것이다; 고로 머리에 손을 놓는 것은 축복함이 지력과 의지력에, 고로 인간 자신에게 교통하는 것에 대한 표현이다. 고대 때로부터의 똑같은 의식이 지금까지 남아 있는 셈이다, 하여 즉위식에, 또는 작금의 축복을 위한 행위에 사용되고 있다.

그의 아버지가 거절했다. 이는 동의 않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말했다, 나는 안다, 내 아들아, 나는 알고 있다. 이는 그것은 그렇다, 그러나 그것은 다르게 나타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알고 있다”의 의미함이 여기서는 이것이 그러하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달리 나타난다 이다. “이스라엘”인 영적 선이 이를 지금 지각한 것은 “요셉“인 천적 평면으로부터의 내적 부분의 유입으로부터 이었다. 영적 선이 이런 유입으로부터 계발됨에 있을 때, 이것이 그러하다를 지각한다, 즉 선이 앞의 자리에, 진리가 그 다음 자리에 있는다는 것, 또한 이것은 달리 나타난다는 것까지 지각한다; 그러나 진리가 선을 통치할 것이라는 사실에 입각할 경우, 진리가 먼저 존재한다는 것이다. 하여 그는 어린 아들의 머리에 오른 손을, 첫 출생의 머리에 왼손을 놓는 것을 유지한 것이다.

그도 역시 한 민족이 될 것이다, 그리고 그도 역시 크게 될 것이다. 이는 선으로부터의 진리, 고로 천적 (왕국의) 인간도 증가하리라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민족(people)”의 의미가 진리이다로부터; “크게 되어짐”의 의미함이 증가하는 것이다로부터 ; 그리고 여기서 축복되는 므낫세의 표현함이 내적 부분으로부터 태어난 자연 평면이 있는 의지력의 선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선으로부터의 진리가 천적 수준의 인간 속에 있다는 것은 이미 많이 말해왔던 바이다: 즉 천적 인간은 의지력으로부터 선 안에 있는 자이다, 그리고 이로부터 진리 안에 있다; 그리고 그는 지력으로부터 진리 안에 있고, 이로부터 선 안에 있는 영적 수준의 인간과 구별된다. “므낫세”가 의지력의 선이기 때문에, 그러므로 그에 의하여 천적 인간이 표현된다, 그러나 천적 인간 중의 (내적 부분이 아닌) 외적 부분, 또는 천적 수준의 교회의 외적 부분의 인간이다; 그 이유가 “므낫세”는 자연 평면, 고로 외적 인간에 있는 의지력의 선이기 때문이다; 이에 비해 “요셉”은 천적 수준의 교회의 내적 부분이다, 그 이유는 합리성에, 고로 내적 인간에 있는 의지력의 선이기 때문이다.
천적 인간 속에 있는 선의 진리에 관하여 조금 말을 보태야 할 것 같다. 이 진리는 실로 진리라고 말은 하지만 실상 선이다. 천적 인간과 더불어 주님을 사랑함의 선과 이웃을 향한 사랑의 선이 있다. 주님을 사랑함의 선은 그의 내적 부분이고, 이웃을 사랑함의 선은 그의 외적 부분이다. 그러므로 천적 교회 속에 있는 인간들만에 주목하면, 주님을 사랑함 안에 있는 이들은 이 교회의 내적 부분 속에 있다, 그리고 이웃을 향한 사랑 속에 있는 이들은 이 교회의 외적 부분 속에 있다. 이 사랑의 선, 즉 천적 인간과 더불은 이웃을 향한 사랑의 선이 여기서 “선의 진리”라고 불리우고, 이것이 므낫세에 의해 표현되어진다. 그 이유가 천적 수준의 인간은 진리로부터 추론하지 않는다, 또는 진리에 관하여 추론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그는 선으로부터 지각을 가지고 (즉, 주님으로부터 선을 통하여 지각을 가지고) 이것이 그러하다, 그러하지 않다를 결정하기 때문이다; 천적 인간과 더불은 선행의 선이 진리라고 불리우는데, 이는 천적 수준의 진리이다.

그럼에도 그의 동생이 형보다 더 크게 될 것이다. 이는 진리로부터의 선은 더 증가함을 받는데, 이것이 영적 (왕국의) 인간이다를 의미한다. 이는 여기서 “어린 형제(동생)”인 에브라임의 표현함이 내적 부분으로부터 태어난 자연 평면에 있는 지력의 진리이다로부터, 그러나 여기서 “에브라임”은 진리로부터의 선이다 (아래에서 살핀다); 그리고 다른 이(형) 보다 “더 크게 되어짐”은 더 불어남을 받을 것이다를 의미한다. 여기서 “에브라임”이 진리로부터 선인 이유는, 그가 영적 수준의 교회인을, 그러나 영적 수준의 교회의 외적 부분의 인간을 표현하기 때문이다. 마치 므낫세가 천적 수준의 교회의 외적 부분의 인간인 것과 비슷하다. 진리로부터의 선이 이 인간을, 즉 영적 수준의 교회의 인간을 구성한다. 이 교회의 내적 부분은 이스라엘에 의해 표현되어지고, 에브라임에 의해서는 외적 부분이다. 영적 수준의 교회의 인간은 천적 수준의 교회의 인간과 이런 점에서 다르다: 영적 수준의 교회의 선은 지력 부분에 심어진다, 그러나 천적 수준의 교회의 선은 의지력 부분에 심어진다; 그러므로 (짧게 말하면) 에브라임은 영적 인간을, 므낫세는 천적 인간을 표현한다.
진리로부터의 선 또는 영적 인간이 선으로부터의 진리, 또는 천적 인간 보다 더 증가함을 받는 이유는 인간의 의지력은 계속적으로 타락시켜져 오다가 마지막으로 악이 의지를 점유해버렸다, 하여 거기에 온전한 것이라고는 남은 것이 하나도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간이 멸하지 않도록 주님께서 설비하신 것은, 인간이 지력 부분에서 거듭나져 구원되는 것이다. 의지력 부분이 온전한 자가 거의 없는 바, 천적 인간이 될 수 있는 자 역시 거의 없으나, (지력 부분에서의 거듭남을 개시하여) 영적 인간을 만드는 것은 가능한 바, 이들은 당연히 크게 증대할 것이 틀림이 없다. 고로 후자가 전자 보다 더 증대할 것이다. 이것이 그의 “동생이 형 보다 더 크게 된다”에 의해 의미되어져 있다.

그리고 그의 씨는 나라들에 충만할 것이다. 이는 신앙 속의 진리가 세력을 떨치리라(크게 유행할 것이다, 군림할 것이다, reign)를 의미한다. 이는 “씨”의 의미가 신앙과 선행이다로부터, 여기서는 신앙이다, 그 이유는 에브라임을 서술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라들에 충만함”의 의미가 풍부함, 고로 신앙의 진리가 크게 유행함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말씀에서 “충만함(fulness)”은 모두를 의미한다; 그리고 모두를 의미하지 않을 경우, 풍부함을 의미한다, 그리고 진리와 선 양쪽에서 모두를 서술한다; “다수, 수가 많음(multiude)”은 진리를, “크기, 양, 확대 (magnitude)”는 선을 서술한다. 양쪽 모두를 서술할 경우 충만함인데, 이를 아래에서 읽어보자:
잘 보라 물들이 북으로부터 일어난다, 이것은 넘쳐흐르는 시내가 될 것이다, 이것이 토지와 토지 속에 충만된 것, 도성과 그 안에 거주하는 그들을 침수되게 할 것이다 (예. 47:2);
“토지와 충만한 것”은 진리와 선 모두를, 즉 교회 속에 있는 진리와 선 모두를 표시한다. 이런 이유 때문에, 첨가되는 말은, “도성과 그 안에 거주하는 그들”이다; 그 이유가 “도성”에 의해 진리들이 의미되고, “그 안에 거주하는 그들”에 의해 선들이 의미되기 때문이다.
에스겔서에서:
그들은 외톨이 임에서 자기들의 빵을 먹을 것이다, 그리고 자기들의 물들을 깜짝 놀람과 더불어 마실 것이다, 거기로부터의 토지는 그것의 충만함으로부터 황폐해질는지 모른다 (겔. 12:19);
“토지”는 교회를 표시한다, 그리고 “충만함”은 거기 있는 선과 진리이다. 양쪽 모두가 의미되는 것은 앞의 말로부터, 즉 “그들은 외톨이 신세로 빵을 먹을 것이다, 그리고 깜짝 놀람과 더불어 물들을 마실 것이다”로부터 분명해진다; 그 이유가 “빵”에 의해 사랑의 선이, “물들”에 의해 신앙의 진리가, 이것이 “땅의 충만함”이라 불리우기 때문이다.
아모스서에서:
야곱이 자랑하는 것, 그의 궁전들을 나는 미워한다, 그러므로 나는 도성과 거기로부터의 충만함을 닫을 것이다 (암. 6:8).
다윗서에서:
천국들이 당신의 것, 땅 역시 당신의 것입니다; 세상과 거기의 충만함을 당신께서 기초를 놓으셨습 니다 (시. 89:11).
그리고 다윗서에서:
땅은 여호와의 것, 그리고 거기의 충만함; 세상, 그리고 거기 안에 거주하는 그들. 그 이유가 그분은 바다들 위에 그것을 기초를 놓으셨기 때문, 그리고 그것을 시내들 위에 건설하셨기 때문이다 (시. 24:1, 2);
위 구절의 “충만함” 역시 진리와 선을 표시한다; “땅”은 특별한 의미에서의 교회를, “세상”은 보편적 의미에서의 교회를 의미한다. “여호와께서 바다들 위에 세상의 기초를 놓으셨다”는 것은 기억 속의 지식에 있는 것들 위에를 표시한다; 그리고 “그분은 시내들 위에 그것을 건설하셨다”는 총명 속에 있는 것들 위에를 표시한다. 아마 이 구절의 말이 평범하게 생각하려 들면 앞뒤가 맞지 않는 문장에 불과할지 모른다. 그러나 조금 생각을 깊게 하는 이라면, “바다들”과 “시내들”이 뭔가 다른 어떤 것이다고, 하여 이 어떤 것이 말씀의 영적, 또는 내적 의미임을 눈치 챌 것이라 본다.

그리고 그는 이 날 그들을 축복했다. 이는 예언과 영원하게 섭리됨을 의미한다. 이는 “축복함”이 예언함이다로부터, 그러나 최고 의미에서 주님의 선견 (미리 보셨음, foresight)이다; 선견이기 때문에, 또한 섭리이다. 그 이유가 선견은 섭리 없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주님은 악을 미리 보시고, 선을 준비해두신다, 그리고 미리 보여진 악을 섭리를 수단으로 선 쪽으로 구부리신다. 여기서 “축복하는” 것이 선견과 섭리를 표시하는 이유는 축복하는 이스라엘이 최고 의미에서는 주님이시기 때문이다. 영원하게가 뜻해진 것은 “이 날”, 또는 “오늘”의 의미가 영원인 것이다로부터 분명하다.

말하기를, 너 안에서 이스라엘이 축복할 것이니, 말하기를, 하느님이 너를 에브라임 같이 그리고 므낫세 같게 평가하신다. 이는 그 자신인 영적 부분이 지력의 진리 안에 그리고 의지력의 선 안에 있을런지 모른다를 의미한다. 이는 이스라엘의 표현함이 영적 선이다로부터; 그리고 에브라임의 표현함이 지력의 진리, 므낫세의 표현함은 의지력의 선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스라엘”인 영적 부분이 그들 안에 있을는지 모른다는 것은 이 말, 즉 “너 안에서 이스라엘이 축복할 것이다, 그리고 하느님이 너를 놓는다”에 의해 의미되고 있다.
이스라엘이 “에브라임과 므낫세”인 지력의 진리와 의지력의 선 안에 있다에 의해 표현된 영적 부분에 주목하면 이렇다: 이스라엘에 의해 표현된 영적 선은 내적 교회의 영적 부분이다; 이에 비해 에브라임과 므낫세에 의해 표현되는 진리와 선은 외적 교회 속에 있다. 내적 부분이 교회의 내적 부분이기 위하여서는 교회의 외적 부분이 반드시 필요하다, 그 이유가 외적 부분이 내적 부분이 서는 기초를 붙들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적 부분이 흘러들어 담겨 있게 한다. 그러므로 외적인 것인 자연 평면 또한 반드시 거듭남이 필요한 것이다; 그 이유가 거듭나지 않을 경우, 내적 부분은 그것이 서는 기초도 그것을 담는 그릇도 가지지 못하기 때문이다. 기초도, 그릇(저장소)도 없다면, 내적 부분은 완전하게 사멸한다. 고로 (사멸하지 않으려면) 영적 부분은 지력의 진리와 의지력의 선 안에 있어야 한다.
이 주제를 예증으로 살펴보자: 인간이 자신 내부에서 평온과 복됨으로 느끼게 하는 선행의 애착 자체는 어떤 보수를 바램 없이 이웃에게 혜택을 주는 것을 행함에 있다는 것이 교회의 내적 부분이다; 그러나 이 선을 뜻하고, 진리로부터 이 선을 행하는 것, 즉 이를 말씀이 명령하였기 때문에 뜻하고 행하는 것은 교회의 외적 부분이다. 만일 외적 부분인 자연 평면이 내적 부분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즉 이 선을 뜻하고 행함에 참여 않겠다면, 그 이유가 보상이 없다면, 자아를 위해 그것들은 아무것도 아니다고 결정한다면 (그 이유가 이런 기질은 유전적으로부터, 그리고 실제적으로부터 누구나 지니는 것이다), 이때 내적 부분은 설 자리인 기초가 사라진 셈, 내적 부분에 상응하는 저장소도 없는 것, 하여 내적 부분을 통하여 주님으로부터의 유입된 것은 거절당하고, 악용당하고, 마지막으로 소멸되고 만다; 그러므로 내적 부분은 멸해지는 바, 닫아지고 멈추어진다, 하여 천국으로부터의 어떤 것도 내적 부분을 통하여 자연 평면 안으로 건너가지 못한다. 따라서 일반적 본성으로부터의 미세한 어떤 빛만이 틈새를 통하여 이리저리 다니는데, 이것은 자연적 수준의 생각함, 말함, 뜻함에 얹혀 있고, 선과 진리에 반대하는 악과 거짓이 자기들의 행동에 영적인 빛이 종속하여 박수쳐주는 부대로 전락해 있다.

그리고 그는 므낫세 앞에 에브라임을 자리잡아 앉혔다. 이는 그는 진리가 첫째 장소에 있다고 간주했는데, 그 이유는 그가 영적 부분에 있었기 때문이다 (13, 14, 17-19절에서 설명되었다).

21, 22절. 그리고 이스라엘이 요셉에게 말했다, 보라 나는 죽는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너와 함께 계실 것이다, 그리고 너를 네 조상들의 토지에로 도로 데려다 놓으실 것이다. 22 그리고 나는 너에게 네 형제들 보다 뛰어난 한 몫을 주겠다, 이 몫은 내가 내 검과 내 활로 아모리족의 손으로부터 얻은 것이다.

그리고 이스라엘이 요셉에게 말했다, 보라 나는 죽는다. 이는 영적 선이 새로운 삶에 관하여, 그리고 표현함을 끝냄에 관하여 천적 평면의 내적 부분으로부터 지각함을 의미한다. 이는 “말하다”의 의미가 지각함이다로부터; 이스라엘의 표현함이 영적 선이다로부터; 요셉의 표현함이 천적 평면으로부터의 내적 부분이다로부터; 그리고 “죽는다”의 의미가 생명으로 부활함이다로부터, 또한 이전의 표현함의 끝이다 알게 된다; 이 끝 또한 여기서 “죽는다”에 의해 의미되어 있다. 교회의 어떤 것을 표현하는 자가 죽을 때, 그 표현성은 누군가가 계속 잇는다, 즉 아브라함을 이어 이삭이, 이삭을 이어 야곱, 야곱을 이어 그의 아들들이 계승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모세가 죽었을 때, 여호수아가 승계했고, 사사 시대에도, 열왕 시대에서도 그러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너와 함께 계실 것이다. 이는 주님의 신성한 섭리를 의미한다. 이는 “하느님이 너와 함께 계실 것이다”의 의미가 주님의 신성한 섭리이다; 그 이유가 주님이 누군가와 더불어 계실 때, 그분은 그를 인도하시고, 발생할 모든 것들을, 슬프던, 즐거운 것이든 그에게 선을 위하여 발생하게 하신다; 이것이 신성의 섭리이다. “주님의” 섭리라고 말한 이유는 이 말, 즉 “하느님께서 너와 함께 계실 것이다”라고 말해지기 때문인데, 말씀에서 “하느님”에 의해, “여호와”에 의해 주님이 뜻해지기 때문에서이다; 그분 외에 하느님은 없기 때문이다. 그분은 아버지 자체, 아들 자체이신 바, 그들은 하나이시다; 아버지는 그분 안에, 그분은 아버지 안에 계신다는 것을 그분 스스로 요. 14:9-11에서 가르치신다.

그리고 너를 네 조상들의 토지에로 도로 데려다 놓으실 것이다. 이는 양쪽 고대 교회의 상태에로를 의미한다. 이는 “토지”의 의미가 교회이다로부터; 그리고 “조상들”의 의미가 고대와 태고 교회의 사람들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두 고대 교회들의 상태”라고 말한 이유는 이스라엘의 아들들과 그들의 후손들은 고대 교회들에 속했던 이들과 마찬가지로 주님의 왕국을, 즉 천적 왕국과 영적 왕국의 모두 각각의 특별한 측면에서 표현했기 때문이다. 표현 자체 역시 조직되어졌다: 즉 유태 나라와 더불어서는 천적 왕국을, 이스라엘 나라에 의해서는 영적 왕국을 표현했다; 그러나 이 두 나라는 오로지 표현뿐만 (완전 껍데기 수준의 표현)이 설립되어질 수 있었는 바, 주님의 왕국, 또는 교회의 어떤 것은 전혀 없었다; 그 이유가 그들이 바랬던 것은 내적 부분의 어떤 것은 절대 아닌 외적인 것만이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기에 표현이 존재하도록 하시기 위하여, 이것 때문에 천국과의 어떤 교통이, 그리고 천국을 통하여 주님과의 어떤 교통함이 있기 위하여, 그들은 외적 부분들에 보존되었다; 그리고 이때 주님에 의해 설비된 것은, 교통함은 내적 부분 없이 단지 외적 부분의 표현만을 수단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이런 상태 쪽에서 이다면 야곱의 후손들을 도로 데려다 놓으실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전혀 몰랐지만 그들의 외적 표현들 안에 내향적으로 감추인 신성한 것들이 뉘여 있었다; 가장 높은 의미에서의 경우, 주님의 신성한 인간에 관한 것이다; 그리고 관계적 의미에서 천국들에, 그리고 교회에 있는 주님의 왕국에 관한 것이다. 양쪽 고대 교회의 이 상태가 “하느님께서는 너를 너의 조상들의 토지에로 도로 데려가실 것이다”는 말에 의해 의미되어 있다.

그리고 나는 너에게 네 형제들 보다 뛰어난 한 몫을 주겠다. 이는 지력의 진리와 의지력의 선을 거기서 더 가지게 될 것을 의미한다. 이는 여기서 “요셉”인 에브라임과 므낫세의 표현함이 지력의 진리와 의지력의 선이다로부터; 그리고 “형제들 보다 뛰어난 한 몫을 준다”의 의미가 거기, 즉 “토지”에 의해 의미되는 교회 안에서 더 가지게 되는 것이다. 거기서 지력의 진리와 의지력의 선을 더 가지는 것, 이것들이 교회의 필수 요소이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생득권 (장자의 명분)이 요셉의 아들들에게 주어졌다 (역상. 5:1).

내가 아모리족의 손으로부터 얻은 것. 이는 악을 제어하는 승리를 수단으로를 의미한다. 이는 아모리족의 의미가 악이다로부터; 그리고 “손으로부터 취함”의 의미가 승리를 통하여 획득함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아모리족에 주목해보자. 그들에 의해 악이 의미되는데, 가나안족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말씀에서 언급되는 그 토지에 있는 나머지 나라들도 다양한 종류의 악들과 거짓들을 의미한다. 이스라엘의 아들들이 가나안의 토지를 점유하기 위해 왔을 때, 이런 나라들에 의해 이런저런 것들이 표현되어졌다, 이런 이유로 이스라엘의 아들들은 천국의 것들을, 그 토지의 나라들은 지옥의 것들을 표현했다, 하여 그들에게는 저주가 있어졌는 바, 이스라엘의 아들들은 잔존하는 그들과 계약을 맺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다.
이스라엘의 아들들은 지옥들을 표현한 이들의 토지를 탈취하여 살았다는 것은 주님의 오심의 때쯤에서 지옥의 것들이 천국의 큰 부분을 점령해왔었다는 것의 표현이었다; 그리고 세상에 오심과 그분의 인간을 그분 자신 안에서 신성으로 만드심을 수단으로 주님께서는 그것들을 추방하시어 지옥들 안으로 내던지셨다, 그리고 그것(그것들이 내쫒긴 영역)을 그분의 영적 왕국 속에 있을 이들에게 상속분으로 주셨다.
아모리족의 나라에 의해 일반적 측면의 악이 표현된 것은 그것이 언급되는 아래 구절에서 분명해진다:
예루살렘, 너의 상거래(trading)들과 너의 세대(generation, 출생들, births)들은 가나안족의 토지 로부터 있었다; 너의 아버지는 아모리족, 그리고 너의 어머니는 헷족이었다 (겔. 16:3, 45);
내적 의미에서 “아버지”는 교회의 선을 의미하나 반대 의미에서는 악을 의미한다; “어머니”는 교회의 진리를 의미하나 반대 의미에서는 거짓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말해진다 “너의 아버지는 아모리족, 너의 어머니는 헷족이었다.”
아모스서에서:
나는 그들 앞에서 아모리족을 파괴했다, 이들의 키는 삼나무들 같았다, 그리고 그는 상수리나무의 튼튼함이었다. 나는 아모리족의 토지를 소유하도록 너희를 광야에서 인도했다 (암. 2:9, 10);
위 구절 역시 “아모리족”은 악을 표시한다, 그 이유가 자아 사랑의 악이 “삼나무들의 높이와 상수리나무의 튼튼함”에 의해 묘사되었기 때문이다. “아모리족”이 일반적 측면에서의 악인 이유는 가나안의 토지 전체가 “아모리족의 토지”라고 불리웠기 때문이다. 하여 말해진 바, “나는 아모리족의 토지를 소유하도록 너희를 광야에서 인도했다.” 다시 아래에서:
유다의 왕 므낫세는 자기 앞에 있었던 아모리족들이 했던 모든 악보다 더 악한 짓을 했다
(왕하. 21:11).
내 검을 가지고에 의해 전투하는 진리를 수단으로 이다는 것은 “검(sword)”의 의미가 전투하는 진리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리고 내 활을 가지고가 교리를 수단으로가 의미되는 것은 “활(bow)”의 의미가 교리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 말, 즉 “내가 내 검과 내 활을 가지고 아모리족의 손으로부터 취한 몫”이 이스라엘에 의해 내적 의미 때문에 이야기되어졌다는 것은 아주 분명하다, 그 이유는 과거 야곱이 자기의 검과 활로 아모리족으로부터 취한 몫이 아니고, 그 몫(토지, 지분)을 하몰의 아들들로부터 샀기 때문인데, 이는 창. 33장의 이 말로부터 이다: “야곱이 세겜에, 세겜의 도성에 당도하였는데, 이곳은 가나안의 토지 안에 있고, 그가 밧단-아람으로부터 그쪽으로 왔을 때이다; 그리고 도성 앞에 진영을 차렸다. 그리고 그는 들판의 몫을 세겜의 아버지, 하몰의 아들들의 손으로부터 일백 크시라를 주고 샀다” (18, 19절). 이 들판을 그가 요셉에게 준 몫이었다는 것은 여호수아서의 이 말들로부터 알게 된다: “요셉의 뼈들, 이스라엘의 아들들이 이집트로 모셔왔는데, 그들은 세겜에서, 야곱이 일백 크시라로 세겜의 아버지 하몰의 아들들로부터 샀던 토지의 몫에 매장했다; 그리고 그것들은 요셉의 아들들에게 상속분을 위해 있었다” (여. 24:32). 이로부터 분명한 바, 이 몫은 샀다는 것, 그리고 그것이 요셉에게 주어졌다는 것이다.
이 몫의 근처에 세겜 성이 있었지만 이 성은 뜻해지지 않고 있다는 것도 주목해둘 일이다. 과거 시므온과 레위가 성의 모든 남자들을 살육하고, 그 성을 그들이 검으로 강취했었는데 (창. 34장), 야곱은 이 행위를 혐오했다, 이것 때문에 시므온과 레위를 저주했다, 그리고 자신을 이 행위로부터 떼어놓으려 했다, 하여 말한다, “내 혼이 그들의 비밀 안으로 들어가게 하지 말 것이다; 그들의 회합에 내 영광은 연합하지 말지라. 그 이유는 그들이 분노하자 그들은 사람을 죽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기분이 유쾌하면 그들은 수소를 느슨해지게 했기 때문이다. 그들의 성냄은 격렬한 바, 저주받아야 하고, 그들의 분노는 단단한 바 저주 받아야 한다, 나는 그들을 야곱 안에서 나누어 낼 것이고 이스라엘 안에서 흩뜨리라” (창. 49:5-7). 이런 모두로부터 명백한 바, “내가 내 검과 내 활을 가지고 아모리족의 손으로부터 취한 몫”이라는 말이 그에 의해 말해질 때, 그가 예언적 영 안에 있었다는 것, 이는 내적 의미를 위함이었다는 것이다.
**************************************

창세기 제 49 장

성경: 창세기 49장

1. 그리고 야곱은 그의 아들들을 불렀다, 그리고 말했다, 너희는 너희 자신을 그러모으라, 그리고 나는 날들의 끝에서 너희에게 무엇이 일어날 것인지 너희에게 말하리라.
2. 너희 자신들을 소집하고 들으라 너희 야곱의 아들들아, 그리고 너희 아버지 이스라엘에게서 들으라.
3. 르우벤, 내 장자, 너는 내 강함이다, 그리고 내 기세의 시작이다, 탁월함이 우수하고 힘도 우수하다.
4. 물 같이 가벼운 바 너는 우수하지 않을 것이다, 그 이유는 네가 네 아버지의 침대(bed) 위에 갔고, 그 다음 너는 그것을 모독했기 때문이다. 그는 내 침상(couch)에 올라 갔다.
5. 시므온과 레위는 형제이다. 폭력의 도구들이 그들의 칼들이다.
6. 그들의 비밀 안으로 내 혼은 가지 말지라. 그리고 그들의 회합에 내 영광은 연합하지 말지라. 그 이유는 그들이 분노하자 그들은 사람을 죽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기분이 유쾌하면 그들은 수소를 느슨해지게 했다.
7. 그들의 성냄은 격렬한 바 저주받아야 하고, 그들의 분노는 단단한 바 저주 받아야 한다. 나는 그들을 야곱 안에서 나누어 낼 것이고 이스라엘 안에서 그들을 흩뜨리라.
8. 너 유다야, 네 형제들이 너를 경축할 것이다, 네 손이 네 원수의 목에 있을 것이다, 네 아버지의 아들들이 너에게 절할 것이다.
9. 유다는 사자의 새끼이다. 먹이됨으로부터 내 아들 너는 올라 갔다. 그는 구부렸다, 어떤 사자 같이, 늙은 사자 같이 웅크렸다. 누가 그를 일으켜지게 할까?
10. (임금의) 홀이 유다로부터 옮겨지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법률 제정자가 그의 발 사이로부터 실로가 올 때 까지 조차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에게 백성들이 순종한다.
11. 그는 그의 젊은 나귀를 포도나무에 맨다, 그리고 그의 나귀 새끼는 특선한 포도나무에 맨다. 그는 자기 옷을 포도주로 씻는다, 그리고 그의 덮개는 포도의 피로 빤다.
12. 그의 눈은 포도주로 인하여 붉다, 그리고 그의 이는 우유로 인하여 희다.
13. 스불론은 바다들의 정박소에서 거주할 것이다, 그리고 그는 배들의 정박소에서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의 옆은 시돈 쪽을 향해 있을 것이다.
14. 잇사갈은 무거운 짐들 사이에 드러누운 뼈만 앙상한 나귀이다.
15. 그리고 그는 쉼을 보고 그것이 좋다 하고, 토지를 보고 그것이 즐거움이다 할 것이다. 그리고 그는 짐을 메기 위해 그의 어깨를 구부릴 것이다, 그리고 공물에는 종이리라.
16. 단은 그의 백성을 이스라엘의 한 지파로서 판결할 것이다.
17. 단은 길에 있는 뱀, 작은 길의 독사이고, 말의 뒤꿈치를 물 것이다, 그리고 그의 기수는 뒤를 향해 떨어질 것이다.
18. 오 여호와여, 나는 당신의 구원을 기다립니다.
19. 갓, 군대가 그를 파괴할 것이다, 그리고 그는 뒤꿈치를 파괴할 것이다.
20. 아셀로부터 그의 빵은 지방이 있다, 그리고 그는 왕의 기쁨들을 산출할 것이다.
21. 납달리는 풀어 놓은 암사슴이라, 세련된 강연을 한다.
22. 요셉은 결실이 풍부한 자의 아들인데, 아들이다는 점에서는 샘 가까이 결실이 풍부한 자이고, 딸이다는 점에서는 성벽 위에서 행진하는 딸이다.
23. 활쏘는 자가 그를 더 비참하게 하고, 그를 향해 쏘고, 그를 미워한다.
24. 그러나 그는 자기 활의 강함 안에 앉아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의 손들의 무기들은 강력한 야곱의 손들에 의해 힘세지게 만들어졌다. 거기로부터 목자, 이스라엘의 돌이 있다.
25. 너의 아버지의 하느님으로 말미암아, 그분이 너를 도울 것이다, 그리고 솨다이와 더불어, 그리고 그분은 위의 천국의 복됨(blessing)을 가지고 너로 복되게 하실 것이고, 아래에 드러 누운 깊음 속의 복됨과, 가슴들과 자궁의 복됨을 내리실 것이다.
26. 네 아버지의 복됨은 네 선조들의 복됨 보다 더 우세하여 시대의 언덕들의 바램과 맞먹을 것이다. 그것은 요셉의 머리 위에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의 형제의 나지르인의 머리의 관 위에 있을 것이다.
27. 베냐민은 이리이다. 그는 아침에 붙잡을 것이다, 그는 전리품을 게걸스럽게 먹을 것이다, 그리고 저녁에 그는 약탈품을 나눌 것이다.
28. 이 모든 것은 이스라엘의 열 두 지파들이다. 그리고 이것은 그들의 아버지가 그들에게 말한 것이다, 그리고 그들을 축복했다. 그는 각자에게 걸맞는 그의 축복에 의거 그들에게 복을 빌었다.
29. 그리고 그는 그들에게 명령했다, 그리고 그들에게 말했다, 나는 내 백성들에게로 거두어지려 하고 있다. 나를 헷사람 에브론의 밭에 있는 굴에, 우리 선조에게 매장하라.
30. 이 굴은 가나안의 토지 마므레 앞 막벨라 밭에 있는 것이다. 아브라함이 그의 매장지를 소유하기 위해 헷사람 에브론에게 밭과 함께 샀다.
31. 그들은 아브라함과 그의 아내 사라를 거기에 매장하였고, 이삭과 그의 아내 리브가도 거기 매장하였으며, 나는 레아를 그곳에 매장하였다.
32. 이 밭과 거기 있는 굴은 헷사람에게서 산 것이다.
33. 야곱이 아들들에게 명하기를 마치고 그의 발을 침대에 거두어 들이고 만기가 되니 그의 백성에게로 거두어 졌다.

각 절의 내적 의미

1, 2절. 그리고 야곱은 그의 아들들을 불렀다, 그리고 말했다, 너희는 너희 자신을 그러모으라, 그리고 나는 날들의 끝에서 너희에게 무엇이 일어날 것인지 너희에게 말하리라. 2 너희 자신들을 소집하고 들으라 너희 야곱의 아들들아, 그리고 너희 아버지 이스라엘에게서 들으라.

그리고 야곱은 그의 아들들을 불렀다. 이는 자연 평면에 있는 신앙으로부터의 진리들과 사랑으로부터의 선을 질서 안에 자리잡아 앉히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부르다”의 의미가 질서 안에 놓는다 이다로부터, 그 이유가 그들을 함께 부르는 이유는 신앙의 진리들과 선행의 선들이 질서 있게 배열되어 표출되게 하려는 때문이다; 그리고 야곱과 그의 아들들의 표현함이 자연 평면에 있는 신앙의 진리들과 선행의 선들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 장의 내적 의미에서 표현되고, 여기서 의미되는 신앙의 진리들과 사랑의 선들에 주목해보자: 이미 살핀 바는,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들은 하나로 된 복합(one complex, 그것들의 전체 their entirety) 안에 있는 모든 진리들과 선들, 고로 주님으로부터 진행하는 모든 진리들과 선들을, 결과적으로 천국 안에 있는 이것저것들을, 그리고 천국을 구성하는 이것저것들을 일반적 측면에서 표현하고 있다. 그리고 그들이 일반적 측면에서 모두 표현하였기 때문에, 특별한 측면에서 개별적으로도 표현하였다; 그 이유가 일반물은 그것 안에 특별한 것들을 포함하기 때문이다, 마치 전체가 부분들을 아우르는 것과 같다.
천국에 있는 빛들은 선들과 파생되는 진리들에 일치하여 다양해진다, 그리고 빛들에 일치하여 총명과 지혜의 상태들이 있다; 그리고 이로부터 빛은 우림과 둠밈을 통하여 반짝거렸고 흔들거렸다(quiver), 그리고 이것은 질문을 만든 주체의 상태에 일치하는 다양함과 더불어서 였다. 이것이 거행된 이유는 열두 지파들을 수단으로 일반적 측면에서의 모든 진리들과 선들이 의미되었기 때문, 하여 지파들이 가슴받이에, 즉 우림과 둠밈에 명시되었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각 지파 당 한 개의 보석을 거기에 박도록 명령되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보석인 이유는 그것들이 영적, 천적 진리들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보석들이 앉혀지게 한 금은 선을 의미했다. 이것은 우림과 둠밈에 의해 의미되어진 비밀이다.
열두 지파가 이런 의미를 가진 것은 그들이 언급되는 말씀의 구절들로부터 분명해진다; 특히 여호수아서의 가나안의 토지에서 지파들의 상속분으로부터 이다; 그리고 주님의 왕국에서 그들의 상속분으로부터, 이는 에스겔서의 마지막 장들에서이다, 거기서 우리는 새로운 땅, 새로운 예루살렘, 새로운 성전에 관해 읽는다; 그리고 계시록에서 이다 (계. 7:4-8); 또한 그들이 광야에서 진영을 펼치는 질서로부터, 이 질서는 진정한 질서에 있는 진리들과 선들의 이모저모이다. 그러므로 발람의 예언적 발음이다; “발람이 자기 눈을 들어올려, 이스라엘이 각 지파들에 따라 거주하는 것을 보았을 때, 하느님의 영이 발람 위에 왔다. 그는 또렷한 발음으로 말했다, 너희 성막들은 얼마나 좋은지, 오 야곱아! 너 거주민 오 이스라엘아! 그들이 심어진 것은 골짜기들 같고, 강가에 있는 동산 같고, 여호와께서 심으신 백단향(sandal-wood)나무 같고, 물가에 있는 삼나무들 같다” (민. 24:2-6).

그리고 말했다, 너희는 너희 자신을 함께 그러모으라. 일반적인 측면에서 있는 모든 것을 함께를 의미한다. 이는 “그러모으다”의 의미가 그것들이 함께 있어야 한다 이다로부터, 즉 야곱의 열두 아들들에 의해 의미되는 사랑의 선들과 신앙의 진리들 모두이다.

그리고 나는 날들의 끝에서 너희에게 무엇이 일어날 것인지 너희에게 말하리라. 이는 그들이 그때 있었던 질서에서 있는 교회의 상태의 품질을 의미한다. “일어날 것을 말함”의 의미가 교통하고 미리 말하다 이다로부터; 그리고 “날들의 끝”의 의미가 그들이 함께 있는 상태의 마지막 국면(final phase)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 이유가 “날들”은 상태들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끝(end)”은 마지막(last, final) 국면이다; 고로 날들의 끝은 상태의 마지막 국면이다, 즉 마지막 국면에서 질서적으로 함께 있을 때의 일반적 측면에서의 진리들과 선들이다. 교회의 상태가 의미되는 이유는 야곱과 그의 아들들에 의해 표현되는 진리들과 선들이 교회를 구성하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야곱에 의해 교회가 표현되었고; 그의 아들들 또한 교회를 표현했다. 상태의 품질이 뜻해지는 이유는 교회의 진리들과 선들의 표현함이 지파들, 또는 야곱의 아들들이 말씀에서 언급된 순서에 따라서 있기 때문이다. 르우벤이 첫 번째로 언급되는데, 이때 교회의 품질 중의 하나가 언급된다, 즉 르우벤이 처음 언급될 때는 신앙이라는 신앙의 품질에서 시작한다; 그러나 유다가 처음 언급될 때는 사랑이라는 신앙의 품질에서 시작한다; 그리고 어떤 다른 것이 처음 언급되는 경우도 마차가지로 달라진다. 또한 품질은 처음 언급된 지파 뒤를 따라 언급되는 질서에 따라서도 다양해진다. 그러므로 사실상 무수하게 출시된다, 그렇다, 무한하게 다양함들이다, 그리고 열두 지파들에 의해 의미되는 일반적 측면에서의 진리들과 선들이 특수적인 다양함들을 가지게 될 때, 각 진리와 선은 무수한 것이 되고, 이것은 그것들 각각이 또 다른 얼굴을 일반적 측면에서 갖게 한다; 이 특수적인 진리들과 선들이 무수한 낱개의 다양함들을 가지게 된다; 등등이다. 발생한 무한한 다양함들은 자연 평면에서 많은 것들을 수단으로 예증될는지 모른다. 그러므로 열두 지파가 말씀에서 하나의 질서에서 언급될 때, 다른 의미들을 가진다; 고로 (다양함 때문에) 그들이 다른 부분에서 언급될 때 또 다른 의미들을 가진다. (여기서의 경우가 그 하나의 예이기도 한데,) 이 장에서 그들이 의미하는 것들은 말씀의 다른 곳에서와 다르다.

너희 자신들을 소집하라. 이는 그들은 그들 자신을 질서 안에 자리잡아 앉혀야 함을 의미한다. 이는 “소집하다(assemble, 모으다, 조립하다)”의 의미가 질서 안에 자리잡아 앉히는 것이다로부터; 그 이유가 영적 의미에서 “소집하는” 것은 이외 다른 뜻은 없기 때문이다, 즉 진리들과 선들은 질서대로 놓여지지 않으면 모아질 수 없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주님으로부터 진행되는 보편적인 유입이 이를 결과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것은 그것들 안에 아주 미세한 것들까지 내려가는 모든 낱개들을 포함한다; 그리고 함께 모아진 모든 것들이 보편적 유입이고, 이 유입이 천국들에 있는 모든 것들을 질서로 환원한다. 보편적 유입이 이를 행할 때, 선들과 진리들은 마치 자신들을 질서 안에 자리잡아 앉혀 놓은 것처럼 나타난다, 그리고 마치 그것들이 그것 자신과 조화를 이루는 질서 안으로 흐르는 것처럼 있다. 그리고 주님으로부터의 보편적 유입에 의해 질서 안에서 계속적으로 보존되어진다. 일반적 측면에서의 천국들의 사회들도 경우는 이와 같고, 특수한 측면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그 이유가 천사들이나 영들이 소집되자 마자, 그들은 즉시 자신들에 관련된 질서 안으로 배치되는 바, 이것이 천국의 사회를 구성하기 때문, 이것이 천국의 형상이기도 하다. 이것이 거행되려면, 반드시 있어야 하는 것은, 주님으로부터 진행되는 일반적 유입이 참으로 미세한 사항에 이르기까지에서 포함되어야 하는 것, 즉 미세한 것까지도 가장 완전한 질서 안에 포함되고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많은 이들이 상상하듯, 어떤 보편적 유입이 미세한 낱개적 사항들이 포함됨 없이 있는다면, 하여 인간, 영, 천사들 각각이 낱개들을 좌지우지 한다면, 질서 대신 거기에는 혼동만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해 천국도, 지옥도, 인류도, 심지어 자연계조차 있어질 수 없다. 이것은 인간과 더불은 많은 것들로 예증될는지 모른다. 인간 당사자의 생각들이 보편적으로 질서잡혀 있고, 동시에 사랑의 애착함들에 의해 낱개적으로도 정돈되지 않으면, 그의 생각들이 합리적으로 분석적으로 그것을 위하여 흐르는 것이 불가능하다. 행동들과 더불어서도 마찬가지 이다: 보편적, 낱개적 측면에서의 혼이 신체의 각 기관 안으로 흘러들지 않으면, 육체가 질서있고 정상적 운행이 거행될 수 없다; 그러나 낱개적, 보편적 측면에서 혼이 흘러들 때, 신체의 모든 것들은 자체들에 관하여 질서 안에 자리 잡고 있다. 이를 미루어 보아도 알게 되는 것은, 진리들과 선들이 자체들을 질서 안에 자리잡아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 어림되었을 것이다.

들으라 너희 야곱의 아들들아. 이는 자연 평면에 있는 선과 진리들을 의미한다. 이는 야곱의 아들들이 자연 평면에 있는 선들과 진리들이다로부터 알려진다.

그리고 너희 아버지 이스라엘에게서 들으라. 이는 영적 선에 의해 그들에 관하여 예언됨, 최고 높은 의미에서는 주님께서 미리 보셨음을 의미한다. 이는 “듣다”의 의미가, 즉 날들의 끝에서 발생할 것을 듣는 것은 예언이다로부터; 그리고 이스라엘의 표현함이 영적 선이다로부터; 그리고 예언함이 “날들의 끝에서 발생할 것을 들음”에 의해 의미되었기 때문에, 이는 최고 의미에서 주님의 미리 보셨음이 의미된다; 그 이유가 모든 예언은 주님의 미리 보셨음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야곱의 아들들이 이스라엘에게 듣는다”라고 말해지는데, 그 이유는 교회 속에 있는 이들이 주님에게서 듣기 때문, 즉 말씀 안에서 주님으로부터 듣기 때문이다. 하여 주님께서는 신앙의 진리들과 사랑의 선들에 관하여 말씀에서 가르치신다, 그리고 야곱의 이 아들, 저 아들에 의해 의미되는 이런 저런 진리와 선에 관하여 그분이 예언하신 것들을 가르치신다; 그리고 그분은 선행으로부터 분리된 신앙, 여기서 “르우벤,” “시므온,” “레위”에 의해 의미되는 신앙에 관한 것을 가르치시고 예언하신다; 그리고 “유다”에 의해 의미되는 천적 선에 관하여도, “요셉”에 의해 의미되는 영적 선에 관하여도, 나머지 아들들에 의해 의미되는 이것저것 모두를 가르치시고 예언하시고 있다.

3, 4절. 르우벤, 내 장자, 너는 내 강함이다, 그리고 내 기세의 시작이다, 탁월함이 우수하고 힘도 우수하다. 4 물 같이 가벼운 바 너는 우수하지 않을 것이다, 그 이유는 네가 네 아버지의 침대(bed) 위에 갔고, 그 다음 너는 그것을 모독했기 때문이다. 그는 내 침상(couch)에 올라 갔다.

르우벤, 내 장자. 이는 신앙이 외견상으로 앞의 위치에 있음을 의미한다. 이는 르우벤의 표현함이 이해력에 있는 신앙이다로부터, 그리고 일반적 측면에서 교회의 신앙을 고백함이다로부터; 그리고 “첫 출생”의 의미가 앞의 위치(prior place)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너는 내 강함이다. 이는 신앙을 통하여(수단으로) 선에 힘(power)이 있다를 의미한다. 이는 여기서 “너”인 르우벤의 표현함이 이해력에 있는 신앙이다로부터; 그리고 “강함(strength)”의 의미가 선 안에 있는 힘(power)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힘(power)에 주목해보자: 즉 생각하는 힘, 뜻하는 힘, 지각하는 힘, 선인 것을 행하는 힘, 거짓들과 악들을 흩뜨리는 힘, 등등인데, 이것은 진리를 통하여 선으로부터의 모든 것이다; 선이 주체이고, 진리는 도구적인 것이다. 본문의 강함(세기, strength)이 선 안에 있는 힘(power)을 의미함에 비해 “기세(기력, forces)”는 진리의 힘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내 기세의 시작”이 바로 뒤를 이어 말해지고, 이는 진리에 있는 첫 힘을 의미한다. 그 이유가 말씀의 원어에서 “기세”는 진리를, “강함”은 선을 서술하기 때문이다.
말씀이 거룩하다는 것, 그리고 말씀의 내면은 가장 거룩하다는 것은 말씀의 모든 세부 사항들 안에 천국의 결혼이 있다는 것, 즉 선과 진리의 결혼이 있다는 것, 고로 천국이 있다는 사실로부터 분명해진다; 그리고 가장 깊은 의미에서의 모든 세부 사항에서는 주님의 신성한 인간과 그분의 왕국과 교회의 결혼이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 최고 의미에서 주님 안에서의 신성 자체와 신성한 인간의 합일이 있다는 것이다. 이런 가장 거룩한 사항들이 말씀의 모두 각각의 세부 사항 안에 있다. 이는 말씀이 신성으로부터 내려왔다는 명백한 증거이다. 이것이 그러한지를 보여주는 또 다른 것은, 선을 언급하는 곳에서는 진리의 언급 또한 있다는 것; 내적 부분이 말해지는 곳에서는 외적 부분도 말해지고 있다는 것이다. 선을 꾸준히 의미하는 단어들이 있는가 하면 진리를 꾸준히 의미하는 단어가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선과 진리를 의미하는 단어도 있다; 만일 그것들이 선과 진리를 의미하지 않는다 해도 그것들은 여전히 선과 진리를 서술하거나 그것들을 포함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단어들이 서술하고 의미함으로부터 분명해지는 바, 이미 말했듯이, 모두 각각의 세부 사항 안에 선과 진리의 결혼, 즉 천국의 결혼이 있다는 것, 그리고 가장 깊은 의미, 최고 의미에서 주님 안에서 있는 신성의 결혼, 고로 주님 자신이 있다는 것이다.
이 결혼은 모든 곳에서 나타나는데, 여기서의 경우,“너는 나의 강함이다, 그리고 내 기세의 시작이다”, 또는 “탁월함이 우수하고 힘도 우수하다”라고 표현하여 결혼을 포함하고 있다. 여기서 “강함”은 선에 관련되고, “기세”는 진리에 관련된다; 그리고 “탁월함이 우수하다”는 진리에, “힘이 우수하다”는 선에 관련된다. 르우벤에 관해 이어지는 말에서, “너는 네 아버지의 침대에 올라갔다; 너는 그것을 모독했다; 그는 내 침상에 올라갔다.” 시므온과 레위에 관한 말에서: “그들의 성냄은 저주받을지라, 그 이유는 격렬하기 때문이다; 그들의 분노는 저주받아야 한다, 그 이유는 단단했기 때문이다; 나는 그들을 야곱에서 나누어낼 것이다, 그리고 이스라엘에서 그들을 흩뜨릴 것이다” (7절); 여기서 “성냄”은 선으로부터 돌아섬을, “분노”는 진리로부터 돌아섬을 의미한다; 그리고 “야곱”은 교회의 외적 부분을, “이스라엘”은 교회의 내적 부분을 의미한다. 유다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네 형제가 너를 찬양할 것이다, 네 아버지의 아들들이 네게 절할 것이다” (8절); 다시: “그는 자기의 어린 나귀를 포도나무에 맨다, 그리고 그는 배들의 정박소에서 있을 것이다” (13절). 단에 관하여: “그는 길에 있는 뱀일 것이다, 작은 길에 있는 독사일 것이다” (17절).
똑같은 것이 시편서와 예언서들에서 발생한다, 이사야서에서: “바벨은 영원히 거주하지 못할 것이다, 대대로 거주하지 못할 것이다. 그녀의 때는 가까이 있다, 그리고 그것은 올 것이다, 그리고 그녀의 날들은 길어지지 않을 것이다 (13:20, 22). 다시: 너희는 여호와의 책에서 찾으라, 너희는 읽으라; 이것들 중의 하나도 빠진 것이 없어 이쪽이 다른쪽을 갈망하지 않는다; 그 이유가 그분이 입으로 명령하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분의 영이 그것들을 그러모으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똑같은 분이 그들을 위하여 제비를 뽑으셨다, 그리고 그분의 손이 재어서 그들에게 분배하셨다. 그들은 그것을 영원까지 소유할 것이다, 대대로 그들은 거기에서 거주할 것이다” (이. 34:16, 17); 이외에도 예로 들 수 있는 구절은 수천 절도 족할 것이다. 말씀에 있는 표현들이 영적이고 천적인 사항들을 의미한다는 것, 그리고 어떤 것은 선을, 어떤 것은 진리를 말한다는 것을 모르는 이들은 위의 예로 든 구절만 가지고도 거기서 거의 비슷한 말을 왜 반복했는지를 모를 수밖에 없다. 하여 지면만 낭비하는 듯 지루하게 여길지 모른다. 이럼으로 말씀에 관하여 잘못 생각하는 이들은 이런 대목에서는 경멸적인 느낌을 내비친다. 그들의 속내야 어찌 되어가든 이런 반복된 대목 안에 참으로 신성한 사항들이 저장되고 있다. 즉 천국의 결혼, 이는 천국 자체이다; 그리고 신성의 결혼, 이는 주님 자신이다. 이 의미가 주님이 계시는 “영광”이다, 그리고 글자 의미에서는 이 영광이 있는 “구름”이다.

그리고 내 기세(氣勢)의 시작이다. 이는 이 신앙을 통하여 진리에 첫 힘(개시하는 힘)이 있다를 의미한다. 이는 “기세의 시작”의 의미가 처음의(개시하는) 힘이다로부터; 그리고 “기세”는 진리를 서술하는 바, 진리에서의 첫 힘이 의미된다, 이와 같은 의미가 이사야서에서:
여호와께서는 지쳐버린 자에게 강함을 주신다, 그리고 기세가 없는 자에게 그분은 힘이 불어나게 하신다 (이. 40:29)
위에서 “강함”은 선을 서술하고, “기세”는 진리를 서술한다, 그리고 “힘”은 양쪽 모두를 서술한다. 신앙을 통하여 선에 힘이 있고 진리에 첫 힘이 있다는 것을 어떻게 이해하여야 할 것인지, 그리고 이것이 “르우벤, 너는 나의 첫 출생, 너는 나의 강함, 나의 기세의 시작이다”에 의해 의미되는 지를 조금 더 말하고 지나가야 할 것 같다. 영계에 있는 모든 힘은 진리를 통하여 선으로부터 있다, 선 없이 진리는 무엇이든 힘을 가지지 못한다, 그 이유가 진리는 몸 같기 때문이다, 그래서 선은 이 몸의 혼 같다. 혼이 무언가를 행하기 위하여 몸을 수단으로 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명백한 바, 선이 없는 진리는 무엇이든 힘을 가지고 있지 않다, 혼이 없는 육체 같다는 말이다, 이때의 육체는 송장이다, 진리도 선 없이는 마찬가지 형국이다.
선을 통하여 진리의 신앙이 처음 출생할 때, 힘이 진리 안에 있다고 나타난다. 이 힘이 “신앙을 통하여 진리에 있는 첫 힘”이라 불리운다, 그리고 “기세의 시작”에 의해 의미되어진다. “생득권(장자권)”이 취급되는 다른 구절을 읽어보자:
그분은 이집트에 있는 모든 첫 출생을, 함의 천막들에서 기세의 시작을 쳐죽이셨다 (시. 78:51).
다시:
그분은 그들의 토지에서 모든 첫 출생을, 모든 그들의 기세의 시작을 쳐죽이셨다 (시. 105:36).
신명기서에서:
그는 미움받는 자의 첫 출생의 아들을 인정하여, 그에게 그를 위하여 발견되는 모든 것의 두 부분을 줄 것이다; 그는 그의 기세의 시작이고, 생득권의 권리가 그의 것이다 (신. 21:17).
첫 출생에 의해 진짜 의미에서 선행 속에 있는 선이 의미되나, 나타남(외관)에 따른 의미에서는 신앙 속에 있는 진리이다, 그리고 이 둘은 교회의 기초들이기에, 고대인들에 의해 “아버지의 강함, 그의 기세의 시작”이라 불리웠다. 이와같은 것을 의미한다는 것은 이런 사실로부터도 분명해진다: 즉 모두 각각의 첫 출생은 여호와, 또는 주님에 속해 있다는 것, 그리고 모든 첫 출생 대신, 레위 지파가 받아졌고, 성직이 그들에게 주어졌다.
이 세상의 거의 누구도 선으로부터 진리에 힘이 있음의 본성을 아는 자는 없다; 그러나 다른 삶에 있는 이들에게는 익히 아는 사항들이다; 고로 이런 의미는 거기로부터의 밝히 알게 해주심(계시)에 의한 것이다. 선으로부터 진리에 있는 이들은, 즉 선행으로부터 신앙에 있는 이들은 선으로부터 진리를 통하여 힘 안에 있다. 이 힘 안에 모든 천사들이 있고, 이로부터 천사들은 말씀에서 “힘들(권능들)”이라 불리운다; 그 이유가 그들은 악령들을 제지하는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 한 명의 천사가 수 천의 악령들을 단번에 제압할 수 있다. 그들이 이런 힘을 주로 발휘하는 때는 인간과 더불어 있을 때, 그를 많은 지옥들로부터 방어할 때이고, 그것은 수 천천의 방법에서 실행된다.
그들은 선행 속에 있는 선으로부터 신앙 속에 있는 진리를 수단으로 이 힘을 가진다; 그러나 그들이 주님으로부터 그들의 신앙을 가지는 바, 주님만이 그들 안에 있는 힘이다. 주님으로부터 신앙을 통하여 있는 이 힘이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하신 말씀에 뜻하여 있다:
이 바위 위에 나는 나의 교회를 건축할 것이다; 그리고 지옥의 큰 문들이 그것에 맞서 세력을 떨치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나는 너에게 천국들의 왕국의 열쇠들을 줄 것이다, 그리고 네가 땅에서 묶는 자는 누구든지 천국들에서 묶일 것이다, 그리고 네가 땅에서 푸는 자는 누구든지 천국들에서 풀릴 것이다 (마. 16:18, 19);
위 구절이 베드로에게 말해졌다, 그 이유는 배드로에 의해 신앙이 표현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베드로”에 의해, “베드로”라고 불리우는 말씀의 어디에서 이든, 내적 의미에서 신앙이, 최고 의미에서 신앙에 관한 주님이 의미된다.

탁월함이 우수하고 힘도 우수하다. 이는 영광과 거기로부터 파생된 주권을 의미한다. 이는 “탁월함이 우수하다”의 의미가 영광이다로부터, 그 이유가 탁월하면 영광 안에 있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힘이 우수하다”는 주권(sovereignty)이 의미되는데, 그 이유는 힘있는 자가 주권을 쥐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이 구절에서의 “영광(glory)”은 신앙 속에 있는 진리에 관련되고 있다, 그리고 “주권”은 선행 속에 있는 선에 관련되고 있다; 그러므로 영광과 주권이라 말해진다, 즉 선행의 선과 신앙의 진리로부터 이다.

물 같이 가벼운 바. 이는 신앙 만으로는 이와 같은 영광과 주권들을 가지지 못한다를 의미한다. 그 이유는 “물 같이 가볍다”의 의미가 무게가 없다, 또는 힘이 없다 이기 때문이다. 신앙만이, 즉 선행으로부터 분리된 신앙이 뜻해지는 이유는 이어지는 대목에서, 즉 르우벤, 시므온, 레위에 관하여 이어지는 대목으로부터 분명해지기 때문이다; 그 대목에서 그들의 이름 아래 신앙만, 또는 분리된 신앙이 취급된다.

너는 우수하지 않을 것이다. 이는 그것은 영광도, 주권도 가지고 있지 않다를 의미한다. 이는 탁월함에서, 힘에서 “우수하지 않다”의 의미로부터 알게 되는데 이는 앞에서 살폈다. 이런 신앙에서는 영광도 주권도 없다.

그 이유는 네가 네 아버지의 침대 위에 갔기 때문이다. 이는 신앙이 선행으로부터의 선에서 분리될 때 신앙은 더러운 결합을 가진다를 의미한다. 이는 “아버지의 침대 위에 갔다”의 의미가 더러운 결합을 가지는 것이다로부터, 즉 선행의 선으로부터 분리된 신앙이 이런 짓을 한다는 말이다. 그 이유가 만일 여기서와 같이 르우벤에 의해 표현되는 신앙인 교리에 있는 신앙, 또는 이해력에 있는 신앙이 선 쪽으로 개시되지 않거나 선과 결합하지 않거나 한다면, 그것은 흩터지거나, 효력이 없거나 되어 있든지, 또는 악하고 거짓인 것 쪽으로 개시하거나 결합해버리는데, 이것이 여기서 의미된 더러운 결합이다, 그 이유는 이때 이것은 모독이 되기 때문이다. 이것이 이러하다는 것은, 신앙은 선밖에 어느 곳에도 거처할 곳이 없다는 사실로부터 이다, 고로 만일 거기에 거처할 장소를 가지지 않는다면, 신앙은 무익해지거나 악에 들러붙는다. 이는 다른 삶에서 선행 없이 신앙만 있을 경우 그들의 신앙은 흩터지고 마는 것에서 분명해진다; 그런데 그것이 악과 결합했다면, 그들의 몫은 모독과 더불어 있다.
말씀의 내적 의미에서 “간음(adultery)”은 선에 섞음질하는 것을, “매춘(whoredom)”은 진리를 거짓화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더러운 결합은 금지된 수준들이라 불리워져 (레. 18:6-24), 모독의 다양한 종류가 의미된다. 이 본문 역시 모독이 의미되는 것이 분명하다, 즉 “너는 네 아버지의 침대 위에 갔다, 그때 너는 그것을 모독했다; 그는 내 침상 위에 갔다.” 이것이 분리된 신앙을 수단으로 선을 모독함을 뜻하는 것은 르우벤의 사악한 행위가 벌어졌던 (창. 35:22) 대목에서 이미 살핀 바 있다.
신앙만, 또는 선행에서 분리된 신앙과 더불은 경우는 이렇다: 만일 이것이 악과 결합한다면 (이는 누군가가 처음에 신앙 속에 있는 진리를 믿고, 후에 그것을 부정하고, 그것에 반대되게 생활할 때 발생된다), 이때 이것은 모독이 된다; 그 이유가 신앙 속에 있는 진리와 선행 속에 있는 선이 처음에는 교리와 생활을 수단으로 내면들에 뿌리를 박았는데, 그 후에 거기에 악을 불러들여 악과 결합했기 때문이다. 다른 삶에서 최악의 장소가 이런 부류의 인간이 오는 것을 위해 대기하고 있다; 그 이유가 이런 자와 더불은 악은 그로부터 떼어내질 수가 없기 때문, 그래서 다른 삶에서도 그들은 특별 분리되어 관리된다; 이런 인간은 그의 내면들에 저장된 어떤 리메인스도 없다, 그 이유가 (그의 내면들에 악이 들러붙었기에) 그들은 악 안에서 깡그리 멸해졌기 때문이다. 이런 자의 지옥은 먼 거리에서 앞쪽 왼쪽에 있다, 이들이 천사의 시각에서는 해골 같이 보여 생명이 거의 없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러므로 선과 진리를 모독함을 예방하기 위하여 (주님이 미리 보신 바) 거듭남의 싹수가 전혀 없는 자들의 경우, 악 안에, 이로부터 거짓 안에 있는 것이 허용된다, 이때 그는 모독할 수는 없다.

그 다음 너는 그것을 모독했다. 이는 만일 그것이 악과 결합했다면 모독함은 존재했다를 의미한다. 이는 이미 살핀 바 있다.

그는 내 침상(couch)에 올라 갔다. 이는 그것이 자연 평면에 있는 영적 선을 오염시켰다를 의미한다. 이는 “침상에 감”의 의미가 모독함으로 오염시킴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표현함이 자연 평면에 있는 영적 선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5-7절. 시므온과 레위는 형제이다. 폭력의 도구들이 그들의 칼들이다. 6 그들의 비밀 안으로 내 혼은 가지 말지라. 그리고 그들의 회합에 내 영광은 연합하지 말지라. 그 이유는 그들이 분노하자 그들은 사람을 죽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기분이 유쾌하면 그들은 수소를 느슨해지게 했다. 7 그들의 성냄은 격렬한 바 저주받아야 하고, 그들의 분노는 단단한 바 저주 받아야 한다. 나는 그들을 야곱 안에서 나누어 낼 것이고 이스라엘 안에서 그들을 흩뜨리라.

시므온과 레위는 형제이다. 이는 의지에 있는 신앙, 그리고 선행을 의미하는데 여기서의 선행은 거꾸로의 선행이다. 그 이유는 그들이 선행으로부터 분리된 신앙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는 시므온의 표현함이 의지에 있는 신앙 이다로부터; 그리고 레위의 표현함이 선행이다로부터, 그러나 여기서 거꾸로의 것들이다, 그 이유는 그들이 선행으로부터 분리된 신앙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이 신앙이 르우벤에 의해 표현될 때(4절), 이에 뒤잇는 것이 시므온과 레위에 의한 의지에 신앙이 없음, 고로 선행도 없음이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이것들이 그것들의 시작으로부터 시리즈에서 뒤잇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시므온에 의해서는 의지에 있는 거짓이, 레위에 의해서는 행동에 있는 악이 의미된다. 그 이유는 이것들은 의지에 있는 신앙, 선행에 반대되기 때문이다. 이것이 의미되는 이유는 그들이 저주받음으로부터 분명하다.

폭력의 도구들이 그들의 칼들이다. 이는 교리적인 것이 선행의 일들, 이리하여 선행 자체를 파괴하는데 충당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는 “폭력의 도구들”이 선행을 파괴하는 것을 돕는 것이다로부터 (“도구들”이 섬김 속에 있는 것들을 표시하고, 그리고 “폭력”이 선행의 파멸을 표시함에 대하여는 아래에서 살핀다); 그리고 “검들”의 의미가 교리적인 것들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 이유가 “검들(swords, gladius)”은 신앙의 진리들을 표시하고, 이를 수단으로 거짓들과 악들에 맞서 전투가 치러진다(2799항), 고로 “검(machaera)”은 교리적인 것들(종교적 가르침)이다. 여기서는 교리적인 것을 수단으로 진리와 선에 맞서 전투가 치뤄짐, 이리하여 진리와 선이 소멸됨이다, 그 이유는 선행에서 분리된 신앙에 있는 이들이 거꾸로 세력을 떨치기 때문이다.
신앙만에 있는 종교적 지식들(교리들)이 선행을 파괴하는 주된 이유는 이런 것들을 가르치기 때문이다: 즉 인간은 선행의 일들 없이 신앙만을 수단으로 구원된다는 것, 그리고 선행의 일은 필요 요건이 아니다는 것, 설사 그의 전 인생이 어떤 식으로 살아와졌던지 이에는 마지막 한 시간 전까지도 포함된다는 것, 게다가 간음자였던, 잔인했던 자이든, 모독을 일삼았던 자이든 모두가 구원될 수 있다는 것, 구원은 천국으로의 입장 승인이고, 이는 각자 삶의 마지막에서라도 입장 승인의 은총을 받는다면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다. 하여 어떤 자는 자비로부터 뽑혀지고, 어떤 자는 무자비함으로부터 지옥에 떨어진다는 것 등등이다. (아마 이 책이 쓰여진 이전으로 계산하면 한 5백년 전 이상은 족히 넘는데 그때의 경우는 문맹 시대여서 성직자가 위 같이 말해도 먹혀들었지만, 인터넷으로 성직자가 한 말을 조사하고 비교하고 재검토가 가능한 시대가 열린 지금이야 신앙만으로 구원은 가능함이라는 교리로 점철된 신학교를 나왔다 해도 무리수를 두어 억지 주장을 대놓고 할 수준 이하의 성직자는 없을 것이다고 생각해본다. 역자주) 설사 간음자가 천국에 왔다 할지라도, 거기는 생명과 생명의 교류가 그 당사자를 거기서 거주할 수 없게 하고 만다. 그 이유는 그가 거기서 자기 생명의 악으로 말미암아 고통을 견디기 어렵기 때문, 따라서 자기 생명을 드넓게 발휘하여 속이 시원할 가장 깊은 지옥으로 가기를 소원할 것이기 때문이다.
“검”이 싸우고 살육하는 거짓을 의미하는 것을 말씀에서 읽을 수 있다:
붉은 또 다른 말이 나왔다, 그리고 그 위에 앉은 자에게 땅으로부터 평화를 가져가는 것이 주어졌다, 하여 그들은 서로를 죽일 것이다, 그러므로 그에게는 큰 검이 주어졌다 (계. 6:4).
다시:
만일 누군가가 검으로 죽인다면, 검을 가지고 그가 죽여질 것이다 (계. 13:10, 14).
“폭력”이 선행에 타격을 가한 폭력이다는 것은 말씀의 많은 구절로부터 분명해진다:
폭행자는 중지될 것이다, 조롱자는 소진 될 것이다, 불법을 영글게 한 모든 자는 절멸될 것이다, 이런 자들이 말을 가지고 사람을 죄짓게 만든다, 그리고 큰 문에서 사람을 꾸짖어 올가미를 씌웠다, 그리고 의로운 자를 텅빔으로 들어서게 했다 (이. 29:20, 21);
위 구절에서 “폭행자”는 원어에서는 또 다른 단어로 표현하나 의미는 거의 같다; “폭행자”는 선행에 상해를 입힌 자이다는 것이 “사람을 말을 가지고 죄짓게 만든다”, 그리고 “의로운 자를 텅빔으로 들어서게 하다”에 의해 의미되고 있다.
다시:
그들의 일들은 불법의 일들이다, 그리고 폭력의 행위가 그들의 손 안에 있다. 그들의 발은 악쪽으로 내달린다, 그리고 그들은 순진한 피를 서둘러 흘리게 만든다 (이. 59:6, 7);
위에서 “폭력”은 선행에 가한 폭력이다, 이것 또한 “피를 흘림”에 의해 의미되고 있다. 다시:
폭력이 네 토지에 더 이상 있지 않을 것이다, 네 경계내에서 황폐해짐과 파괴가 없을 것이다 (이. 60:18);
위에서 “폭행”은 선행의 파멸을 표시한다, 그 이유가 이 파멸로부터 “토지, 즉 교회의 황폐함과 파괴”가 오기 때문이다.
예레미야서에서:
나는 폭력과 황폐를 외칠 것이다; 그 이유는 여호와의 말이 나를 꾸짖어 내가 온종일 수치함에 있기 때문이다 (예. 20:8);
위에서 “폭력”은 영적인 것들에 있는 폭력을 표시한다, 고로 선행의 파멸과 신앙의 파멸을 표시한다. 에스겔서에서:
토지가 피들의 심판으로 가득하다, 그리고 도성은 폭력이 가득하다 (겔. 7:23);
위에서 “피들의 심판”은 신앙의 파멸, “폭력”은 선행의 파멸을 표시한다.
다시:
만일 그가 아들을 낳았는데, 폭행하는 것, 피를 뿌리는 것, 이런 짓들을 누군가에게 행하는 자이다면: 만일 그가 산들 위에서 먹었고, 그의 동료의 아내를 더럽혔다면,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를 핍박했다 면, 약탈품을 가로채고, 저당물을 내주지 않는다면, 자기 눈을 우상들에게로 들어 올리고, 역겨운 짓을 한다면, 돈놀이에 주어서 이자를 받아 먹었다면, 그는 살 것이냐? 그는 살지 못할 것이다, 정녕 그는 죽는다 (겔. 18:10-13);
위에서 “폭행하고 피를 뿌리는 아들”이 묘사되어 있다, 그리고 그것이 파괴하는 선행의 모든 일들이 열거되고 있다; 고로 “폭행하고 피를 뿌리는 아들”은 선행과 신앙의 파괴자이다.
다윗서에서:
오 여호와시여 저를 악인으로부터 구출하소서, 저를 폭행자로부터 보전되게 하소서, 그들은 그들의 심정에서 악들을 생각합니다, 온종일 그들은 전쟁을 위해 함께 모이고 있습니다; 그들은 뱀 같이 그들의 혀를 날카롭게 합니다, 그들의 입술 아래에는 독사의 독이 있습니다. 사악한 자의 손으로부 터 저를 지키소서 오 여호와여; 저를 폭행자로부터 보전해주소서. 혀의 사람이 땅위에서 존속 못하게 하소서; 악으로 그를 뒤엎도록 폭력의 사람을 사냥하게 하소서 (시. 140:144, 11);
“폭력의 사람”은 신앙의 진리들과 선행의 선들을 파괴하는 이들을 표시한다; 그들이 이 진리들과 선들에 맞서 싸우는 것이 그들이 “전쟁을 위헤 온종일 함께 모인다, 뱀같이 혀를 날카롭게 한다, 그들의 입술 아래 독사의 독이 있다, 그리고 악이 그를 뒤엎으려고 그를 사냥한다”에 의해 의미되고 있다. (위 구절 외에, 겔. 12:19; 욜. 4:19; 말. 2:16, 17; 습. 3:4; 시. 18:48; 55:9-11; 58:3-6; 신. 19:16 도 더 찾아 읽을 수 있다.)

그들의 비밀(스런 장소) 안으로 내 혼은 가지 말지라. 이는 영적 선은 그들의 의지 속에 있는 악들을 알고 싶어하지 않음을 의미한다. 이는 이를 자신에게 말하는 이스라엘의 표현함이 영적 선이다로부터; 그리고 “비밀함으로 가지 않음”의 의미가 알기를 바라지 않음, 즉 “시므온과 레위”에 의해 의미된 의지 속의 악들을 알기를 바라지 않음이다로부터: “내 혼”이라 말해지는 이유는 여기서 영적 선을 갈망하는 선의 생명이 의미되기 때문; 그것의 진리의 생명은 이어지는 말에서 있는 “영광”에 의해 의미되어진다.

그리고 그들의 회합에 내 영광은 연합하지 말지라. 이는 영적 선으로부터의 진리는 거기서 파생된 그들의 생각 속의 거짓들을 알고 싶어 하지 않음을 의미한다. 이는 이스라엘의 표현함이 영적 선이다로부터; “그들의 회합에 연합하지 않다”의 의미가 그들의 생각 속의 거짓들과 결합하기를 바라지 않음, 고로 그것들을 알기를 바라지 않음이다 (생각 속의 거짓이 “회합”에 의해 의미된다, 이것은 마치 “무리들” 같이 진리들을 서술하나 반대 의미에서는 거짓들이다); 그리고 “영광”의 의미로부터, 이것은 진리를 서술한다, 그 이유가 진리는 영적 선에 있는 이들에게 영광이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그들이 분노하자 그들은 사람을 죽였기 때문이다. 이는 그들은 자신들을 깡그리 돌아서게 했다, 이렇게 방향을 틀어 버리는 와중에 신앙을 소멸되게 했음을 의미한다. 이는 “성냄”의 의미가 선행으로부터 퇴조함, 그리고 돌아섬이다로부터; 그리고 “죽이다”의 의미함이 소멸되게 하다 이다로부터; 그리고 사람(남자, vir)의 의미가 신앙의 진리이다로부터 알려진다.

그리고 기분이 유쾌하면 그들은 수소를 느슨해지게 했다. 이는 타락된 의지로부터 그들은 선행의 외적인 선을 완전히 쇠약해지게 했다를 의미한다. 이는 “유쾌하다(good pleasure)”의 의미함이 의지이다, 여기서는 타락된 의지이다로부터; “느슨해짐(unstring)”이 약해지는 것이다로부터; 그리고 “수소”의 의미가 선행의 자연적, 또는 외적인 선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수소”가 여기서 말해지는 이유, 그리고 방금 앞에서 “사람”이 말해지는 이유는, “사람(남자)”에 의해 신앙의 진리가, “수소”에 의해 선행의 선이 의미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선이 취급될 때, 진리 역시 취급되도록, 그 이유는 말씀의 모두 각각에서 천국의 결혼이 있기 때문이다.

그들의 성냄은 격렬한 바 저주받아야 한다. 이는 선으로부터 비극적으로 돌아 섬을, 결과적으로 정죄됨을 의미한다. 이는 “저주되다”의 의미가 정죄(定罪)되다 이다로부터, 그 이유는 저주되어져 버린 자는 정죄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성냄”의 의미가 선으로부터 돌아섬이다로부터; 고로 “격렬한 성냄”은 비극적 돌아섬을 표시한다.

그리고 그들의 분노가 단단하였기 때문이다. 이는 파생된 진리로부터 돌아 섬, 그것이 확증되어 버리고 마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분노(wrath)”의 의미가 진리로부터 돌아섬이다로부터; 그리고 “단단하다”의 의미가 확증하는 것이다로부터, 그 이유가 확증되어진 거짓들은 설득되기 까지 하기 때문에 단단해서 이다. 이 단단함이 경험으로부터 알도록 내게 허락되었다. 영들과 천사들 사이에서 선으로부터의 진리는 부드러운 것으로 나타나고 시야에 표출되어진다, 그러나 악으로부터의 거짓은 단단한 것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이 단단함은 악으로부터의 거짓이 확증됨에 비례해서이다. 설득이 많은 것들로부터 확증함들을 수단으로 야기 되었을 때, 이 단단함은 거기서 마치 뼈의 단단함 같이 나타난다. 이런 단단함은 마치 세상의 단단함 같다, 세상에 있는 단단함은 빛의 광선을 되튕긴다. 고로 주님으로부터 천국의 빛이 단단함 에 낙하할 때 악과 거짓에 의해 생산되는 것은 되튕기는 것이다; 그러나 주님으로부터 천국의 빛이 부드러움에 낙하할 때, 선으로부터 진리에 의해 생산되는 것은 받아들임이다.

나는 그들을 야곱 안에서 나누어 낼 것이다. 이는 그들은 자연 평면 안에서 추방되어야 마땅함을 의미한다. 이는 “나누다”의 의미가 진리와 선으로부터 분리함과 제거함이다로부터, 고로 추방함이다; 그리고 유다의 표현함이 자연 평면 또는 외적 인간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스라엘 안에서 그들을 흩뜨리라. 이는 그들은 영적 인간 안에서도 추방되어야만 한다를 의미한다. 이는 “흩뜨리다”의 의미가 추방하다 이다로부터; 그러나 “흩뜨림”은 “나누다”와 구별되는데, 후자는 외적 인간 또는 진리를 서술하나, “흩뜨림”은 내적 인간 또는 선을 서술한다. 이상 살핀 것들, 즉 이스라엘에 의해 르우벤, 시므온, 레위에 관련하여 말해진 사항들은 (1절의) 날들의 끝에서 그들의 후손들은 저주받지 않았고, 그리고 야곱 안에서 나누고, 이스라엘 안에서 흩어지지 않았다는 것은 이런 사실만 보아도 짐작된다: 즉 시므온 지파는 지파들 중의 하나로서 여전히 건재했다는 것, 레위의 경우는 저주가 아닌 오히려 축복이라 말해도 괜찮게 그들은 성직 직분을 수행하게 되었다는 것, 르우벤 지파 또한 다른 지파 보다 시시하거나 천박하지 않았다는 것 등등이다. 그러므로 분명한 것은, 날들의 끝에서 그들에게 닥칠 것이라고 하여 야곱의 아들들에 대해 이 장에서 말해지는 것은 그들에게 닥치는 것이 아니라. 그들에 의해 내적 의미에서 뜻해진 것들에 닥치는 것들이라는 말이다; 5-7절의 경우, “르우벤”, “시므온”, “레위”에 의해 내적 의미에서 뜻해진 이들, 즉 선행으로부터 분리된 신앙에 있는 이들에게 닥치는 것들이다는 말이다. 이로부터 분명해지는 것은, 말씀의 내적 의미는 글자에서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 자연적인 것들과 영적인 것들 사이에 있는 상응 관계를 알지 못하는 이들에게 나타나지 않는 의미이다는 것, 그리고 영적인 것이 무엇이며, 천적인 것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하는 이들에게 내적 의미는 완전 어둠이다는 것이다.

8-12절. 너 유다야, 네 형제들이 너를 경축할 것이다, 네 손이 네 원수의 목에 있을 것이다, 네 아버지의 아들들이 너에게 절할 것이다. 9 유다는 사자의 새끼이다. 먹이됨으로부터 내 아들 너는 올라 갔다. 그는 구부렸다, 어떤 사자 같이, 늙은 사자 같이 웅크렸다. 누가 그를 일으켜지게 할까? 10 (임금의) 홀이 유다로부터 옮겨지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법률 제정자가 그의 발 사이로부터 실로가 올 때 까지 조차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에게 백성들이 순종한다. 11 그는 그의 젊은 나귀를 포도나무에 맨다, 그리고 그의 나귀 새끼는 특선한 포도나무에 맨다. 그는 자기 옷을 포도주로 씻는다, 그리고 그의 덮개는 포도의 피로 빤다. 12 그의 눈은 포도주로 인하여 붉다, 그리고 그의 이는 우유로 인하여 희다.

너 유다야. 이는 천적 (수준의) 교회(the celestial church), 최고 높은 의미에서 신성의 천적 부분 측면에서의 주님 (the Lord as to the Divine celestial)을 의미한다. 이는 유다의 표현함이 최고 의미에서 사랑의 신성 측면에서의 주님, 또는 신성의 천적 부분 측면에서의 주님이다로부터; 그러나 관계적 의미에서는 주님의 천적 왕국, 고로 천적 (수준의) 교회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네 형제들이 너를 경축할 것이다. 이는 이 교회는 여타 나머지 교회를 넘어서 특출하다를 의미한다. 이는 “경축되어짐”이 특출해 있다 이다로부터; 여기서 “너”인 유다의 표현함이 천적 수준의 교회이다로부터: “형제들”의 의미가 이 교회의 진리들, 고로 또한 이 진리들에 있는 교회들이다로부터; 이것은 유다의 형제들이 표현한다, 그 이유가 진리들과 선들이 교회를 구성하기 때문에서 이다. 천적 교회의 진리들이 “네 형제들”, 즉 유다의 형제들에 의해 의미된다; 한편 영적 (수준의) 교회의 진리들은 “그의 아버지의 아들들”에 의해 의미된다.

네 손이 네 원수의 목에 있을 것이다. 이는 지옥적이고 악마적인 패거리들은 그의 현존에서 혼비백산할 것이다를 의미한다. 이는 “적들(원수들)”의미가 지옥적인 악마적인 패거리들이다로부터, 그 이유가 이것들이 영적인 적들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의 목에 네 손이 있다”의 의미가 도망가는 중에 있는 자들을 추격함이다, 그 이유가 적들이 도망할 때, 정복자의 손이 그의 목에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의 현존에서 그들이 도망할 것이다 라고 말해진 이유는 지옥의 어떤 패거리가 주님의 천적 왕국의 천사에게 접근할 때, 그는 천사가 현존만 해도 견디지 못해 도망하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그는 천적 사랑, 즉 주님을 사랑함의 기운에 버텨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 기운은 지옥의 패거리들에게는 태워버리고, 고통을 주는 불이 되기 때문이다. 더욱이 천적 천사들은 결코 싸우지 않는다, 더욱이 제아무리 원수라 해도 그의 목에 자기 손을 놓지 않는다, 실로 그가 관심을 두는 누구도 원수로서 간주하는 일이 없다; 그럼에도 이렇게 표현되는 이유는 이 세상의 조건 때문이다; 그러나 진짜의 의미는 지옥의 것들이 자기들을 그의 원수로 간주하여 그가 나타나자 혼비백산 달아나는 것이다.

네 아버지의 아들들이 너에게 절할 것이다. 이는 진리들은 자발적으로 자신들을 복종시킬 것이다. 이는 “절하다”가 자신들을 복종하게 하다 이다로부터; 그리고 “아버지의 아들들”의 의미함이 영적 선으로부터 있는 진리들이다로부터, 그 이유가 “이스라엘의 아들들”이 영적 진리들을 표시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스라엘”이 영적 선이다에서 알게 된다. 이 진리들이 자진해서 복종하는 이유는, 유다에 의해 표현된 천적 수준의 사랑이 이스라엘의 아들들에 의해 표현된 영적 진리들 안으로 흘러들 때, 그것을 질서에로 배치하기 때문, 고로 그것들을 주님에게 복종되게 하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천적 부분은 영적 진리 안으로 유입을 통하여, 즉 선이 유입을 통하여 진리 안에서 이런 효력을 가지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주님의 천적 왕국은 가장 깊은(안쪽, inmost) 천국, 또는 셋째 천국인 것, 고로 다른 천국 보다 주님에 가장 가까운 천국이다. 이에 비해 주님의 영적 천국은 중간, 또는 둘째 천국인데, 주님으로부터 좀 멀리 떨어져 있다. 이 질서로부터 주님은 영적 왕국 안으로 천적 왕국을 통하여 간접적으로, 그리고 직접적으로 모두에서 흘러드신다. 영적 왕국은 천적 왕국을 수단으로 질서 안에 보존된다, 그리고 이 질서에서 주님에게 복종한다. 천적 왕국으로부터의 유입은 이웃을 향한 사랑을 수단으로 결과되어진다, 그 이유가 이 사랑이 천적 왕국에게는 외적 부분이고, 영적 왕국에게는 내적 부분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두 왕국의 결합이 있다.

유다는 사자의 새끼이다. 이는 타고난 힘(force, strength, 氣勢)을 지닌 순진을 의미한다. 이는 “사자”의 의미함이 사랑의 선과 거기로부터 파생하는 진리가 그것들의 힘 안에 있다이다로부터 (아래에서 살핀다); 고로 “사자의 새끼”는 힘들을 가진 순진을 표시한다. “타고난 힘을 가진”이라고 말한 이유는 여기서 “유다”는 사랑의 천적 부분이고, 사랑의 천적 부분은 의지 부분에 있기 때문이다; 고로 타고난 힘들을 가지고 있다; 그 이유가 인간이 의지 부분의 것들 쪽에서 태어나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태고 교회에 속했던 이들은 천적 부분에 속했고, 자기들이 의지 부분에 선을 가졌던 만큼에서 사랑의 선 안으로 태어나진다. “사자의 새끼”가 순진을 표시하는 이유는 “사자”가 천적 수준의 사랑의 선을 표시하고, “새끼”는 마치 그것의 유아이듯 하여 순진을 표시하기 때문이다.
“사자”가 천적 수준의 사랑의 선을 표시하는 것, 그리고 파생되는 진리, 그것의 힘 안에 있는 것, 그리고 반대적 의미에서는 자아 사랑의 악이 그것의 힘 안에 있는 것을 표시하는 것은 “사자”가 언급되는 말씀의 많은 구절들로부터 분명해진다. 우선 천적 사랑의 선이 표시되는 구절이다:
보라 유다의 지파 속에 있는 사자, 다윗의 뿌리가 승리를 하시어 그 책을 여시고, 거기의 일곱 인들을 푸신다(떼신다) (계. 5:5);
여기서 주님이 그분 자신의 신성의 사랑과 거기서 파생되는 신성한 진리에 속하는 전능하심으로부터 “사자”라고 불리우신다. 말씀의 다른 구절들에서, 여호와, 또는 주님이 “사자”에 비교되어진다; 즉
그들은 여호와의 뒤를 따라 갈 것이다; 그분은 사자 같이 표호하실 것이다; 그 이유는 그분이 표호하시고, 아들들은 바다로부터 영예와 더불어 오기 때문이다 (호. 11:10).
이사야서에서:
고로 여호와께서 나에게 말하셨다, 사자가 표호할 때 같이, 그리고 젊은 사자가 자기 먹잇감 위에 있을 때 같아, 만일 많은 목자들이 그에게 달려왔다해도, 그는 그들의 음성에서 당황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야단법석에서 괴로워하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여호와 체바욷께서는 싸우시기 위해 시온 산 위에, 거기로부터의 언덕 위애 오실 것이다 (이. 31:4);
위에서 신성한 선의 전능하심이 “사자”에 비교되고 있다, 그리고 거기서 파생되는 신성한 진리의 전능함이 “어린 사자”에 비교된다, 그 이유가 “여호와 체바욷께서 싸우시기 위해 시온 산과 거기로부터의 언덕들에 오신다”라고 말해지기 때문, 여기서 “시온산”은 신성의 사랑의 선을 의미하고, 그리고 “거기로부터의 언덕”은 거기서 파생되는 신성한 진리이기 때문 이다.
같은 이유로 에스겔서와 계시록서에서 동물들, 이를 수단으로 거룹들이 의미되는데, 사람, 사자, 수소, 독수리의 얼굴들을 가졌다. 에스겔서에서:
네 동물들의 얼굴들의 닮음이다: 오른쪽에서 사람의 얼굴과 사자의 얼굴을 그들 넷이 가졌다; 그리고 왼쪽에서 수소의 얼굴을 그들 넷이 가졌다; 그리고 그들 넷은 독수리의 얼굴을 가졌다 (겔. 1:10; 10:14).
그리고 계시록서에서:
왕좌 앞에 앞과 뒤에 눈들이 가득한 네 동물들이 있었다. 그리고 첫째 동물은 사자 같았았다, 그리고 둘째 동물은 송아지 같았다, 셋째 동물은 사람으로서의 얼굴을 가졌다, 넷쩨 동물은 날고 있는 독수리 같았다 (계. 4:6, 7).
이 동물들이 거룹들이라고 에스겔서 10장에서 말해진다, 그리고 계시록서에서 그것들의 묘사됨으로부터 분명해진다, 즉 그들은 앞과 뒤에 눈들을 가졌다; 그 이유가 “거룹들”에 의해 주님의 미리 보셨음과 섭리하심이 의미되기 때문이다: 그들이 사자의 얼굴을 가졌다는 것은 신성한 선으로부터 신성한 진리의 전능하심으로부터 이었다는 것, 이것은 섭리 속에 있다. 새로운 성전에 관련하여 있는 거룹들도 비슷하였다 (겔. 41:19).
천적 수준의 인간, 그는 선과 파생된 진리로부터, 즉 주님으로부터 있는 힘 안에 있다는 것이 “사자들”에 의해 뜻해진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그들에게 부족함이 없다. 젊은 사자가 결핍되고 배고픔을 견딘다; 그러나 여호와를 찾는 그들은 어떤 선도 부족하지 않을 것이다 (시. 34:9, 10).
다시:
사자들이 그들의 먹잇감을 따라 으르렁댄다, 그리고 하느님으로부터 그들의 식품을 찾으려 한다. 태양이 올라온다, 그들은 함께 모일 것이다, 그리고 그것들은 그들의 거처들에 누울 것이다 (시. 104:21, 22).
그리고 발람의 예언에서:
그 때에 야곱과 이스라엘에게 말해질 것이다, 하느님이 어떻게 역사하셨는지! 보라 백성들이 늙은 사자로서 일어날 것이다, 그리고 젊은 사자로서 그는 자신을 일으킬 것이다; 그는 먹잇감을 먹을 때까지 쉬지 않을 것이다 (민. 23:23, 24).
그리고 다시:
발람이 자기들의 지파들에 따라 거주하는 이스라엘을 보았을 때 말했다, 그는 구부리고 있다, 그는 사자 같이 웅크린다, 그리고 늙은 사자 같아 누가 그를 일어나게 하는가? (민. 24:2, 9).
위에서 천적 수준의 인간이 묘사된다, 그 이유가 발람이 이스라엘이 지파들에 따라 거주하는 것을 영 안에서 보았을 때, 지파들이 그들의 진영에 의해 표현된 천적 수준의 질서이었기 때문이다. 이 질서는 주님으로부터 신성한 진리를 통하여 신성한 선으로부터 이다, 그리고 이 질서 안에 모든 권능이 있다, 이것이 여기서 “구부리고 웅크린 사자”에 의해 표시되고 있다.
미가서에서:
야곱의 남은 자들이 나라들 사이에, 많은 백성들 사이에 있을 것이다, 마치 사자가 숲속의 들짐승 사이에 있듯, 젊은 사자가 양떼들 사이에 있듯 이다; 그가 통과하고, 짓밟고 흩뜨린다, 구출될 자 아무도 없다. 너희의 손이 너희의 적들 위에서 의기양양해지게 하라, 그리고 모든 네 적들이 멸절되게 하라 (미. 5:8, 9).
위에서 “사자”와 “젊은 사자”는 천적 수준의 선과 천적 수준의 진리를 표시하고, 이것이 “야곱의 남은 자들”이다. 이 의미와 비슷한 의미를 지닌 구절로는 이. 21:8; 예. 25:38; 겔. 32:2; 슥. 11:3도 있다. 이와 같은 의미가 솔로몬의 왕좌 양쪽에서, 여섯 계단들의 열두 사자들에 의해서도 표현되어 있다 (왕상. 10:18-20); 또한 열 놋쇠 받침들의 가장자리에 있는 사자들에 의해서도 표현되었다 (왕상. 7:29, 36).
반대적 의미에서 “사자”는 자아 사랑의 악이 그것의 힘 안에 있는 것을 의미한다. 즉:
거기에 사자가 있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굶주린 짐승이 그 위에 올라가지 않을 것이다, 그것이 거기서 발견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자유로이 갈 것이다; 고로 여호와께서 되찾은 자들이 돌아와 노래하며 시온에 올 것이다 (이. 35:9, 10).
예레미야서에서:
왜 이스라엘이 먹잇감이 되었느냐? 젊은 사자가 그에 맞서 으르렁댄다, 그들은 자기들의 음성을 발음한다, 그것들은 그들의 토지를 황폐해짐으로 환원되게 한다 (예. 2:14, 15).
다시:
사자가 그의 덤불로부터 올라온다, 그리고 나라들을 파괴하는 자가 여행했다, 그는 토지를 황폐쪽으 로 되돌리기 위해 그의 궁전으로부터 나갔다 (예. 4:7)
다시:
그들은 여호와의 길을, 그들의 하느님의 정의를 알지 못해왔었다. 그러므로 숲으로부터의 사자가 그들을 쳐죽이며, 그리고 들판의 이리가 그들을 황폐해짐에 눕게 할 것이다 (예. 5:4, 6).
그리고 나훔서에서:
사자의 주택(사자굴)이 어디 있느냐? 젊은 사자들의 풀밭(먹는 장소)이 어디이냐? 어디서 사자, 늙은 사자, 사자의 새끼가 성큼성큼 걷더냐? 그리고 아무도 (그것들이) 두려워 떨게 하지 못했지 않느냐? 사자는 그의 새끼들을 위하여 (먹이를) 충분히 잡았다, 그리고 그의 늙은 암사자를 강건하게 했다. 보라 나는 너에 맞서 있다, 여호와 체바욷께서 말하신다, 그리고 나는 너의 병거를 태워 연기 안에 있게 할 것이다, 그리고 검이 젊은 사자들을 삼킬 것이다; 그리고 나는 땅으로부터 먹잇감을 절멸할 것이다 (나. 2:11-13).
니느웨에 관하여 말하고 있다. 위 구절에서 “사자”는 자아 사랑의 악이 파괴하고 황폐하게 할 때 그것이 소유한 힘을 표시한다; 이와 비슷한 구절이 예. 12:8; 49:19; 50:17, 44; 51:38; 겔. 19:2-11; 33:2; 욜. 1:6; 습. 3:3; 시. 57:5; 58:6; 91:13; 계. 13:2도 있다.

먹이감이 됨으로부터 내 아들 너는 올라 갔다. 이는 주님으로부터 천적 수준의 것을 통하여 많은 사람들이 지옥으로부터 해방됨이 있다를 의미한다. 이는 “먹잇감이 됨으로부터 올라갔다”의 의미가 지옥으로부터 해방됨이 있다 이다로부터 (아래에서 살핀다); 그리고 여기서 “내 아들”인 유다의 표현함이 신성의 천적 부분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먹잇감이 됨에서 올라감”이 지옥으로부터의 해방됨을 표시하는 이유는 인간은 그 스스로부터서는 지옥 안에 있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자기 자신으로부터 의지와 생각은 악과 거짓밖에 없기 때문, 이를 수단으로 그는 지옥에 붙들인 바 되고 있어 폭력 없이 거기로부터 떼어내질 수가 없다. 이 떼어냄과 해방됨(구출됨)이 “먹잇감”이라 불리운다; 그리고 이것이 주님의 신성한 선으로부터 행해지기 때문, 하여 천적 수준의 것을 통하여 주님으로부터 많은 이들이 지옥으로부터의 해방됨이 있다고 말해진 것이다.
그러나 알아야하는 것은, 육체의 삶에서 그가 영적 선 안에, 즉 신앙을 통하여 선행 안에 있었지 않으면 지옥으로부터 떼어냄이나 해방됨이 없다는 것이다; 그 이유가 그가 신앙을 통하여 이 선 안에 있었지 않으면, 주님으로부터 흘러드는 선을 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주님의 선은 통과하여 흐르는 바, 이를 받을 그릇이 없다면, 주님의 선은 어느 곳에서도 안착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럴 경우의 인물들은 지옥들로부터 떼어내지거나 해방될 수 없다. 그 이유가 인간이 육체의 삶에서 획득한 모든 상태들이 다른 삶에 고스란히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이 그를 채우고 있다; 다시 말해 그들이 지니고 온 선의 상태들에 주님의 선이 채워져(보완되어) 천국으로 올려지는 것이다, 또는 그들이 지니고 온 악의 상태들에 악이 보충되어 지옥으로 내려진다. 이것이 인간이 죽을 때, 그와 같이 그는 남는다고 말함의 뜻이다. 이상 살핀 것으로부터, 신성의 천적 부분을 수단으로 지옥으로부터 주님에 의해 해방될 수 있는 자가 누구인지 분명해졌을 것이다. (이 대목은 영계에서의 사건임을 미리 감지하며 읽는 것도 이해에 도움이 될지 모른다 역자주.)

그는 구부렸다, 어떤 사자 같이, 늙은 사자 같이 웅크렸다. 이는 사랑의 선과 거기서 파생된 진리가 그들의 능력 안에 있음을 의미한다. 이는 “구부리다”의 의미가 자기 힘을 뻗치는 것이다로부터, 그 이유가 사자가 (먹잇감을 보고) 웅크릴 때, 이 자세는 힘줄을 단단히 조이고, 힘을 모으는 것이기 때문이다; “웅크리다(couch)”의 의미가 두려움 없이 안전하게 눕다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자”와 “늙은 사자”의 의미가 사랑의 선과 파생되는 진리가 그것들의 힘 안에 있다 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젊은 사자”는 선으로부터 진리를 통하여 힘 안에 있는 자이고, “늙은 사자”는 선을 통하여 힘 안에 있는 자이다. 그 이유가 천적 수준의 사랑 안에 있는 자는 결코 싸우지 않고 선을 통하여 안전하게 있기 때문이다; 그들이 가는 곳에서는 악들이 도망한다, 그 이유는 악은 그들의 현존을 견뎌낼 수 없기 때문이다; 이것이 “늙은 사자”에 의해 의미되는 이들이다.

누가 그를 일으켜지게 할까? 이는 그는 지옥 안에 있는 모든 것 사이에서 안전하다를 의미한다. 이는 “누가 그로 일어나게 할까”의 의미가 안전하게 있다 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것이 지옥들에 있는 모든 이들 사이에서 임을 표시하는 이유는 그가 모든 악들 사이에서 안전해 있기 때문, 설사 지옥들 한 가운데에서 조차 그렇다는 말이다; 그 이유가 주님을 사랑함과 이웃을 향한 사랑이 이 결과를 가지기 때문인데, 이 사랑에 있는 이들은 주님과 아주 밀접하게 결합해있고, 주님 안에 있기 때문, 그 이유는 그들이 그분으로부터 진행하는 신성 안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어떤 악도 그에게 접근조차 시도할 수 없다. 우리가 알아야하는 것은, 무수한 지옥들이 있다는 것, 이 지옥들은 종과 속에 따라 등차별로 구분되어 있다는 것, 이 종과 속은 그 세부 사항적으로 무수하다는 것이다; 각 지옥 안은 이런 질서로 있다는 것; 이 질서는 천적 수준의 천사들을 통하여, 직, 간접적으로 주님에 의해 보존된다는 것; 상황에 따라서는 천사들이 그들의 무질서를 질서로 가져다 놓기 위해 지옥 이리저리로 보내진다는 것; 이 수준의 천사들은 그들의 임무 수행에서 안전해 있다는 것이다. 이러므로 천적 수준의 것 안에 있는 이들은 지옥들에 있는 모든 이들 사이에서 안전하다고 말한 것이다.

홀(지휘봉)이 유다로부터 옮겨지지 않을 것이다. 이는 주권은 천적 수준의 선으로부터 떠나지 않을 것이다를 의미한다. 이는 “옮긴다”의 의미가 떠나다 이다로부터; “홀(scepter)”의 의미가 주권이다로부터, 실로 선으로부터 진리의 주권이다, 그 이유가 지휘봉은 왕권의 표지이기 때문, 그리고 왕권에 의해 진리가 의미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유다의 표현함이 천적 왕국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글자의 의미로부터 나타나는 대로라면, 이 구절에 포함되는 것은, 왕국이 주님이 오실 때까지 유태 백성으로부터 옮겨지지 않을 것이다가 뜻해진다. 이것 역시 맞다, 이런 역사적 진리 안에서도 내적 의미가 있다; 그 이유가 왕국이 유태 백성으로부터 옮겨지지 않는 것은 세상의 문제이다; 그러나 내적 의미의 영적 진리는 “홀”을 주권으로 이해할 때, 그리고 “유다”가 천적 왕국으로 이해할 때 나타난다. 그러나 이 주권이 주님이 오실 때까지 천적 왕국으로부터 떠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은 계시로부터 알지 않으면 누구도 알 수 없는 비밀이다. 이러하다: 주님께서 세상에 오시기 이전, 여호와, 또는 주님으로부터 인간과 영들에게 생명을 유입하심은 천적 왕국을 통하여, 즉 이 왕국에 있는 천사들을 통하여 있었다. 그러므로 그들이 주권을 가졌다. 그러나 주님이 세상 안으로 오셨을 때, 그리고 그분 자신 안에서 인간을 신성으로 만드셨기 때문에, 그분은 천적 왕국의 천사들과 더불어 있었던 것을 입으신 것이다, 고로 그분은 이 주권을 입으신 것이다. 그 이유가 이전의 신성은 신성한 인간이 되어주었던 이 천국을 통하여 내려와졌다; 이것은 여호와께서 나타나셨을 때 시야에 표출되어진 신성한 사람(Man, Person)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 신성한 인간은 주님 자신이 자신 안에서 인간을 신성으로 만드셨을 때 중지되었다. 이는 이 경우가 어떻게 비밀한지를 보여준다. 이 왕국의 천사들은 실로 큰 주권을 지금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들이 그분을 사랑함을 통하여 주님의 신성한 인간 안에 있는 만큼에서이다.

그리고 법률 제정자가 그의 발 사이로부터. 이는 더 낮은 것들에서 이 선으로의 진리들이다로부터 (아래에서 살핀다); 그리고 “발”의 의미함이 자연 수준의 것이다로부터, 고로 보다 수준 낮은 것들이다. 그 이유가 자연 평면은 아래쪽에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천적인 것들은 위쪽에 있기 때문이다. “법률제정자가 그의 발 사이로부터”라고 말해졌는데, 이는 천적 평면의 영적 부분이 의미되도록 하기 위하여, 또는 선으로부터 있는 진리가 의미되도록 하기 위하여서이다. 그 이유가 그때 당시 영적 왕국은 주님의 오심 이후 같이 천적 왕국과 구별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천적 왕국과 하나로 되어 있었고, 단지 천적 왕국의 외적 부분으로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의 발 사이로부터”라고 말해져서 선으로부터의 진리가 의미되도록 말해졌다; 그 이유가 그의 발 사이에 라는 말이 발의 안쪽 측면이 뜻해졌고, 이것이 그의 허리와 교통함으로부터 임이 의미되었기 때문이다, 이 진리로부터 “실로가 올 때 옮겨짐”도 말해지고 있다, 즉 그것의 주권이 옮겨질 것, 즉 천적 왕국의 것과 같은 주권이 옮겨진다는 말이다; 그 이유가 그때 당시 천적 왕국은 이 진리를 수단으로 그것의 주권을 행사했었기 때문; 그리고 이것이 그러했기 때문에 이 진리가 “법률제정가”라고 불리운 것이다. 이 진리가 이사야서에서 “법률제정가”에 의해 내적 의미에서 뜻해져 있다:
여호와는 우리의 재판관이시다, 여호와는 우리의 법률제정가 이시다, 여호와는 우리의 왕이시다 (이. 33:22);
위에서 “재판관”은 그분이 선으로부터 행하신다를 표시한다; “법률제정가”는 그분이 이 선으로부터의 진리로부터 행하신다를 표시한다; “왕”은 그분이 진리로부터 행하신다를 표시한다; 고로 그것들은 질서에 따라서 이다. 다윗서에서:
길르앗은 나의 것이다, 그리고 므낫세는 나의 것이다, 그리고 에브라임은 내 머리의 강함이다, 유다는 나의 법률제정가이다 (시. 60:7; 108:8);
위에서 “유다는 법률제정가”란 천적 선과 그것의 천적 진리이다. 모세의 책에서:
샘, 제 1 인 자들이 그것을 팟다, 백성의 귀인들이 그것을 팟다, 법률제정가를 수단으로, 그들의 장대들을 가지고 이다 (민. 21:18).
다시:
갓은 자신을 위한 첫 열매들을 보았다, 그 이유가 감추인 법률제정가의 지분이 있었기 때문이다; 거기로부터 백성의 머리들이 왔다; 그는 여호와의 정의를 일했다, 그리고 그분의 공정을 이스라엘 과 더불어 (신. 33:21);
위에서 “법률제정가”는 선으로부터의 진리를 표시한다.

실로가 올 때까지. 이는 주님의 오심, 그리고 그 다음 평화의 고요함을 의미한다. 이는 “실로”의 의미가 주님이시다로부터; 이 분이 실로라고 불리우신 것은 그분이 평화를 회복시켜 모든 것들을 고요하게 하신다는 사실로부터이다. 원어에서 “실로”는 고요함을 뜻하는 단어로부터 파생되고 있다. 주님이 여기서 실로라고 불리우신 이유는 이미 말해진 천적 왕국과 그것의 주권에 관하여로부터 명백해진다; 그 이유가 신성이 이 왕국을 통하여 시야에 표출되어질 때, 거기에 비고요함이 있었는데, 천국에 있든, 지옥에 있든 모든 것은 질서 안으로 환원되어질 수 없었기 때문, 그 이유는 이 천국을 통하여 흐르는 신성이 순수해 있을 수 없었기 때문인데, 이 천국이 순수하지 않기 때문에서 이다. 이 천국은 자체적으로 모든 것이 질서에로 완전 환원될만큼의 강함은 없었다, 하여 지옥적이고 악마적인 영들이 지옥으로부터 올라올 수가 있었고, 세상으로부터 도착하는 혼들을 통치하였다. 그 결과 천적 수준이 아니면 아무도 구원될 수 없었다. 드디어 거의 누구도 구원이 가능하지 못할 정도에 이르자, 주님께서 인간을 입으시고, 이 인간을 신성으로 만드신 것이다; 이것 때문에 그분은 모든 것들을 질서로 환원되게 하셨는데, 첫째는 천국을, 둘째는 지옥들이었다, 그후 평화의 고요함이 생산되었다. 영적 수준의 인간, 즉 영적 왕국의 교회에 있는 이들이 주님의 오심으로 해서 구원되어졌다. 즉 여호와, 또는 주님으로부터의 신성한 진리가 인류 안으로 천국을 통하여 흘러들었다는 것, 그러나 인간이 선으로부터 자신을 옮겼을 때 이 흘러듦은 만족할 성과가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주님은 세상에 오셨고, 자신 안에서 인간을 신성으로 만드셨는데, 이는 주님의 신성한 인간 자체로부터 신성한 진리가 진행되도록 하시기 위함이었고, 이로 인해 진리를 통해 선을 받는 인간이 구원되도록 하시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그에게 백성들이 순종한다. 이는 그분의 신성한 인간으로부터 받아질 수 있는 진리들이 진행되어 나갈 것이다를 의미한다. 이는 “순종”의 의미가 주님으로부터 진행하는 진리들을 받아들임이다로부터; 그리고 “백성들”의 의미가 진리들 안에 있는 이들, 고로 진리들이다로부터, 그리고 그러므로 영적 교회 속에 있는 이들이다.

그는 그의 젊은 나귀를 포도나무에 맨다. 이는 외적인 교회를 위한 자연 평면에 있는 진리[를 통한 결합]을 의미한다. 이는 “맨다, 묶는다”의 의미가 결합되는 것이다로부터; “포도나무”의 의미가 영적 교회이다로부터, 여기서는 영적 교회의 외적 부분 (external spiritual church, 외적 영적 교회)인데, 그 이유는 곧이어 말해지는 “특선한 포도나무”가 내적 교회를 의미하기 때문에서 이다; 그리고 “나귀”의 의미가 자연 평면에 있는 진리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러므로 “그는 그의 젊은 나귀를 포도나무에 맨다”에 의해 자연 평면에 있는 진리를 통하여 외적 교회와 결합함이 의미됨이 분명하다.

그리고 그의 나귀 새끼는 특선한 포도나무에 맨다. 이는 내적 교회를 위한 합리성으로부터의 진리를 [통하여를] 의미한다. 이는 “포도나무”의 의미함이 영적 교회이다로부터, 고로 “특선한 포도나무”는 내적 교회이다, 그 이유가 교회의 내적 부분은 외적 부분 보다 더 우수하기 때문이다; “나귀 새끼”의 의미함이 합리적 진리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교회의 외적 부분은 그것의 내적 부분과 구별된다; 전자는 자연 평면에, 고로 외적 인간 안에 있고; 후자는 합리성에, 고로 내적 인간 안에 있다. 교회의 외적 부분에 있는 이들은 진리 안에 있으나, 내적 부분에 있는 이들은 선 안에 있다; 전자는 신앙의 진리에 비해 선행의 선에 많이 감동되지 않으나, 후자는 선행의 선에 감동되고 이로부터 신앙의 진리와 더불어도 있다. 후자는 “특선한 포도나무”에 의해 의미되는 이들이나 전자는 “포도나무”에 의해 의미된다.

그는 자기 옷을 포도주 안에서 씻는다. 이는 그분의 자연 평면은 그분의 신성한 선으로부터의 신성한 진리이다를 의미한다. 이는 “씻다”의 의미함이 순수해지는 것이다로부터; “포도주”의 의미함이 이웃을 향한 사랑의 선, 그리고 신앙의 선, 그리고 최고 의미에서 주님의 신성한 선으로부터 신성한 진리이다 (아래에서 살핀다); 그리고 “옷(clothing)”의 의미가 내면의 것을 덮는 외면의 것이다; 고로 자연 평면, 그 이유가 이것이 외면이기 때문, 그리고 내면인 합리성을 덮는다; 그러므로 “옷”은 진리를 표시한다, 그 이유는 진리는 외면이기 때문, 그리고 내면인 선을 덮는다.
“포도주”가 이웃을 향한 사랑과 신앙의 선이다는 것은 성찬 예식에서의 빵과 포도주에 관련하여 이미 살핀 바 있다; 즉 “빵”은 천적 사랑의 선, “포도주”는 영적 사랑의 선이다. 이는 제물을 바침에서 식사 제물과 음료 제물로부터도 알는지 모른다, 즉 “식사 제물”은 사랑의 선을, “음료 제물”은 신앙의 선을 의미하는 바, 사랑의 선에 속하는 이런저런 것들로 식사 제물은 구성되고, 음료 제물인 포도주는 신앙의 선이 의미되어진다; 더욱이 제물들 자체가 “빵”이라 불리우기도 한다. 포도주의 음료 제물이 제물 바침에서 고용되어진 것에 대하여는 출. 29:40; 레. 23:12, 13, 18, 19; 민. 15:2-15; 28:6, 7, 18-끝절까지; 29:1-7을 더 살피면 더 도움이 될 것이다.
“포도주”가 이웃을 향한 사랑과 신앙의 선을 의미하는 것은 아래 구절에서 분명해진다:
목마른 모든 이여, 너희는 물들쪽으로 오라, 그리고 은을 가지지 않은 자; 너희는 오라, 사서 먹으라; 그렇다 오라, 은 없이 그리고 값을 치룸 없이 포도주와 젖을 사라 (이. 55:1);
위 구절에서 모든 이가 알아야 하는 것은, 모든 이로 포도주와 젖을 사라는 것이 아니다는 것, 그러나 포도주와 젖에 의해 의미되는 것은 이웃을 향한 사랑과 신앙이다는 것이다; 이것들이 은 없이, 값을 치룸 없이 주님에 의해 주어진다는 뜻이다.
호세아서에서:
타작마당과 포도즙틀이 그들을 먹이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새로운 포도주는 그들을 속일 것이다. 에브라임이 이집트로부터 되돌아올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앗시리아에서 불결한 것을 먹을 것이다. 그들은 여호와께 포도주를 붓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제물들을 그분이 반기시지 않을 것이다 (호. 9:2-4).
위 구절 역시 내적 의미에서 사랑의 선과 신앙의 진리가 뜻해진다, 이것을 그들은 중단되게 했다; 사랑의 선은 “타작마당”이다; 신앙의 선은 “포도즙틀”, “새로운 포도주”, 그리고 “제주 (술을 따라 바침)”이다; “에브라임이 이집트로부터 돌아온다”란 지적 부분이 신앙의 비밀들에 관하여 기억 속의 지식들과 상담하는 것이다; “그들이 앗시리아에서 불결한 것을 먹을 것이다”는 그 결과 추론함으로부터 결과하는 것을 표시한다. 더욱이 연결 자체는 글자들에서 보다 말들에서 더 잘 나타나고 있다. 그 이유가 내적 의미는 시종일관성이 있으나 외적 의미는 그렇지가 못하기 때문이다; 즉 “타작 마당과 포도즙틀이 그들을 먹이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새로운 포도주가 그들을 속일 것이다”, 그리고 이내 이어진 “에브라임은 이집트로부터 돌아올 것이다, 그들은 앗시리아에서 불결한 것을 먹을 것이다”인데, 내적 의미로가 아니면 무엇을 뜻할 것인가?
상호 사랑과 신앙의 선의 중지가 “포도즙틀”과 “포도주”에 의해 묘사되는데, 예레미야서에서 이다:
너의 포도원 위에 황폐자가 닥쳤다; 그리하여 즐거움이 그러모아졌다, 그리고 기쁨은 갈멜로부터이 다, 그리고 모압의 토지로부터 이다, 그 이유가 내가 포도주가 포도즙틀로부터 중단되게 저주했기 때문이다; 그가 환호하는 소리를 짓밟을 것이다 (예. 48:32, 33).
“포도주”가 상호 사랑의 선과 신앙의 선을 의미하는 것은 계시록서에서 분명해진다:
나는 네 동물들의 한가운데로부터 말하는 음성을 들었다, 기름과 포도주를 다치게 말라
(계. 6:6)
위에서 “기름”은 천적 사랑의 선이다; 그리고 “포도주”는 영적 사랑의 선이다.
“기름과 포도주”에 의한 같은 의미가 주님의 사마리아인에 관한 비유에 있다:
어떤 사마리아인이 여행했을 때, 그는 도둑들에 의해 상처받은 자를 보았다, 하여 그의 측은함 마음이 움직여졌다, 그래서 그에게 가서, 그는 그의 상처들을 싸매고, 기름과 포도주를 부었다 (눅. 10:33, 34);
위에서 “기름과 포도주를 붓다”는 그가 사랑의 일들과 선행의 일들을 수행하였다를 의미한다. 같은 것이 고대인들이 어떤 것을 성별할 때 기둥에 기름과 포도주를 붓는 것에 의해서도 뜻해졌다 (창. 35:14).
“포도주”가 사랑의 선과 신앙의 선을 표시한다는 것은 주님께서 성찬 예식을 제정하시던 때에 말하셨던 아래 구절로부터도 분명해진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내가 내 아버지의 왕국에서 너희와 더불어 포도나무의 생산물을 새로이 마실 때까지 나는 그것을 이후로부터 마시지 않을 것이다 (K. 26:29; 눅. 22:17, 18);
모든 이가 알 수 있는 것은, 그분이 거기서 포도주를 마시지 않으시리라는 것, 그러나 사랑의 선과 신앙의 선이 의미되었다는 것, 이것을 그분은 그분의 왕국 속에 있는 이들에게 나누어주시리라는 것이다. 같은 의미가 “포도주”에 의해 의미되는 구절로는 이. 24:9, 11; 애. 2:11, 12; 호. 14:7; 암. 9:13, 14; 슥. 9:15, 17; 눅. 5:37-39 에서도 더 읽어볼 수 있다.
“포도주”가 사랑의 선과 신앙의 선을 의미하기에, 최고 의미에서는 주님의 신성한 선으로부터의 신성한 진리를 의미한다, 그 이유가 이로부터 유입을 수단으로 그것을 받는 인간은 사랑의 선과 신앙의 진리를 가지기 때문이다.
말씀에서 대부분의 표현들이 반대적 의미 또한 지니는데, 여기서의 “포도주”도 예외는 아니다, 즉 악으로부터의 거짓을 의미하는데, 이사야서에서:
새벽 아래 아침에서 일어나서, 독주를 뒤따라서, 황혼 까지 머무는 그들에게 화있을 것인 즉, 포도주가 그들을 불태울런지 모른다! 포도주를 마시는 영웅들에게 화있을 것이다, 그리고 독주를 섞는 용사에게 화있을 것이다 (이. 5:11, 22).
다시:
이들은 포도주를 통하여 실수한다, 그리고 독주를 통하여 엉뚱한데로 간다; 성직자와 예언자는 독주를 통하여 길을 잘못 든다, 그들은 포도주를 들이켰다, 그들은 독주를 통하여 배회한다; 그들은 보는 사람(seer)들 사이에서 실수하고 있다, 그들은 재판에서 걸려넘어지고 있다
(이. 28:7).
다시:
목자들이 이해하려고 알려 하지 않는다, 그들 모두는 그들 자신의 길쪽으로 뒤쪽을 쳐다본다. 너희는 오라, 나는 포도주를 가져올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독주로 취할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 내일도, 오늘 같이, 큰 풍부함이 있게 하라 (이. 56:11, 12).
위 구절 외에, 예. 13:12; 호. 4:11; 7:5; 암. 2:8; 미. 2:11; 시. 75:8; 신. 32:33도 더 찾아 읽을 수 있다. 악으로부터의 거짓이 “분노의 포도주의 잔”에 의해서도 의미되고 있다 (예. 25:15, 16; 계. 14:8, 10; 16:19); 그리고 “하느님의 성내심의 격노함의 포도주의 포도즙틀”에 의해서도 의미된다 (계. 19:15); 그리고 “매춘의 포도주”에 의해서도 의미된다 (계. 17:2; 18:3).

그리고 그의 덮개는 포도의 피에서 (빤다). 이는 그분의 지적 부분은 그분의 신성한 사랑으로부터의 신성한 선이다를 의미한다. 이는 “포도들의 피”의 의미가 사랑의 선이다로부터, 그리고 최고 의미에서 그분의 신성한 사랑으로부터의 주님의 신성한 선이다로부터 (아래에서 살핀다); 그리고 “덮개(covering)”의 의미가 지적 부분이다로부터, 그 이유가 지적 부분이 그릇이기 때문이다, 받는 것이 그릇인데, 이는 덮는 경우와 같다. “덮개”에 의해서는 지적 부분이 의미되지만, “옷(clothing)”에 의해서는 자연 평면이 의미된 이유는 거기서 취급된 주제가 외적 부분이기 때문, 그러나 여기서는 내적 부분이다; 그 이유가 말씀에는 천국의 결혼이 모든 곳에 스며있기 때문이다. 즉, 외적인 것이 취급되면 내적인 것이 뒤잇고, 진리가 취급되면 선이 그 뒤를 잇기도 하여 짝을 맞춘다. 때로는 똑같은 것이 반복되는 경우도 있다, 즉 “그는 자기 옷을 포도주에서 빤다, 그리고 그의 덮개를 포도들의 피에서 빤다”에서 포도주나 포도들의 피나 거의 똑같은 것이도록 나타난다, 또한 “옷”과 “덮개”도 거의 같게 나타난다. 그렇지만 완전 똑같은 것은 아니다, 그 이유는 외적인 것과 내적인 것이 표현되었기 때문이다.
“포도들의 피”가 주님의 신성한 사랑으로부터 신성한 선을 표시하는 것은 “피”의 의미가 주님의 신성한 선으로부터 신성한 진리이다로부터 분명해진다; 그리고 “포도들”이 최고 의미에서 그분의 영적 왕국에 있는 이들이 가지는 주님의 신성한 선을 의미한다; 그리고 관계적 의미에서 선행의 선이 의미된다. “포도의 피”에 의해 모세의 책에서 같은 의미로 있는 구절이다:
목축의 버터와 양떼의 젖, 어린 양들과 바산의 아들들의 숫양들의 지방과 더불어, 그리고 숫염소들, 밀의 콩팥의 지방과 더불어; 그리고 너는 혼합하지 않은 포도의 피를 마실 것이다 (신. 32:14)

그의 눈은 포도주로 인하여 붉다. 이는 지적 부분, 또는 주님의 인간의 내적 부분은 선밖에 더 다른 것은 없다를 의미한다. “붉다(red)”의 의미가 사랑의 선이다로부터, 그리고 이것은 붉은 것인 불로부터와 피로부터 이다. 그러므로 “포도주로 붉다”는 선밖에 더 이상은 없다; 그리고 “눈”의 의미가 지적 부분이다로부터; 그리고 여기서 주님이 취급되는 바, “지적 부분”에 의해 뜻해지는 것은 그분의 인간의 내적 부분이다, 그 이유가 주님의 인간의 외적 부분이 “그의 이는 젖으로 희다”에 의해 의미되기 때문이다. 아래에서 이어진다.

그리고 그의 이는 우유로 인하여 희다. 이는 신성의 자연 평면은 진리의 선밖에 더 아니다를 의미한다. 이는 “희다(white)”가 진리를 서술한다로부터; 그리고 “이”의 의미가 순수 의미에서 자연적인 것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 이유가 인간 육체에 있는 것들 중 단단한 것, 뼈, 이, 연골은 가장 낮은 자연 평면 속에 있는 진리들과 선들에 상응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젖”의 의미가 영적 평면의 천적 부분 (celestial spiritual), 또는 진리로부터의 선(진리의 선)이다로부터 알려진다. 주님의 신성한 자연 평면이 진리의 선이다는 것을 인간에 비교해 말하면, 주님을 사랑함에서 신앙 안에 있는 이들이다; 그 이유가 외적 교회에 있는 이들은 주님의 신성한 자연 평면 보다 더 높게 생각을 승강하게 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내적 교회 속에 있는 이들은 생각을 자연 평면을 넘어 내적인 것 쪽으로 승강하게 할 수 있다. 그 이유가 주님에 대한 신앙 안에 있는 이들은 자기 생각들을 승강되게 하는 수용력에 따라 그분에 대한 생각도 가지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내적인 것의 본성을 아는 자가 내적인 것에 대한 생각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적인 것의 본성을 모르는 자는 외적인 것만에 대한 생각을 가질 뿐이다. 그러므로 주님의 신성한 자연 평면이 “진리의 선”이라 불리워진다, 그럼에도 그분의 전체 인간은 신성한 사랑의 신성한 선이다.

지금까지 유다에 관해 말했던 것으로부터 아주 분명해지는 것은, 말씀에는 내적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의미가 포함되었다는 것이 알려지지 않으면, 유다에 괸해 쓰여진 것들의 의미 또한 알아질 수 없다. 즉 그는 “사자의 새끼이다”는 것, 그는 “약탈품으로부터 가버렸다”는 것, 그는 “사자 같이 구부렸고 웅크렸다”는 것, “늙은 사자 같이”; 그리고 “그의 발 사이의 법률제정가”가 의미한 것, “실로”가 의미한 것, “그의 젊은 나귀를 포도나무에 맨다, 그의 나귀새끼를 특선한 포도나무에 맨다”가 의미한 것, “그의 옷을 포도주에, 그의 덮개를 포도들의 피에서 빤다”가 의미한 것, “그의 눈은 포도주로 붉다, 그의 이는 젖으로 희다”가 의미한 것을 모른다는 말이다. 이 모든 것들의 의미는 완전하게 감추여 뉘여 있다, 하여 더 깊이 놓인 의미들을 수단으로 알아내야 한다.

13절. 스불론은 바다들의 정박소에서 거주할 것이다, 그리고 그는 배들의 정박소에서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의 옆은 시돈 쪽을 향해 있을 것이다.

스불론. 이는 선과 진리가 동거함을 의미한다. 이는 스불론의 표현이 천국의 결혼이다로부터, 고로 선과 진리의 결합이다, 그 이유는 이 결합이 천국의 결혼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선과 진리가 동거함이다”라고 말한 이유는 원어에서 “스불론”이 동거함(cohabitation)을 뜻하기 때문에서 이다. 여기서는 “스불론”의 이름 아래 기억 속의 지식들로부터 영적 진리들에 관하여 결말을 만들어내는 교회에 있는 이들, 고로 이 결말들을 가지고 자신과 더불어 튼튼한 성벽을 쌓아둔(fortify) 교인들이 취급된다. 그러나 알아야 하는 것은, “스불론”에 의해 기억 속의 지식들과 감각적인 것들이 그것을 위한 증거들을 보여주지 않으면 믿지 않는 이들을, 그리고 부정적인 것(마음의 소극적 태도) 안에 있는 이상 믿지 않는 이들을 뜻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실 누구이든 이런 마음의 태도에 있다면 누구도 결코 믿지 않는다, 그 이유는 부정적인 것, 소극적 마음의 태도가 보편적으로 그를 통치하기 때문이다. 이럴 경우, 부정적인 것들이 흘러들고, 기억 속의 지식들에 함께 모아지나, 확증하는 것들은 아니다; 사실상 후자는 한쪽 측면으로 내몰려 있거나, 그나마 내몰리는 형편이 아니다면 부정적인 것에 박수를 쳐대는 박수부대로서 전락하여 있다. 그러므로 해서 부정적인 것은 더욱 요새화 된다. 그러나 여기서 “스불론”에 의해서는 말씀으로부터 교리적인 것들을 믿는 이들, 고로 이들과 더불어서는 확증하는 어떤 것이 보편적으로 통치하고 있다; 그렇지만 그들의 신앙은 진리들 안에 있지는 않고, 기억 속의 지식들 안에 있다, 그 이유가 그들은 기억 속의 지식들을 교리적인 것들에 적용하기 때문, 하여 그들이 확증한 것을 요새화 한다. 그러므로 “스불론”에 속하는 이들은 자신들을 기억 속의 지식들로부터 승강되게 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이 신앙의 어떤 진리를 듣거나 생각할 때, 그들은 즉시 기억 속의 지식들 쪽으로 뒤쪽으로 낙하한다. 이 세상에는 이런 부류에 속하는 이들이 허다하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기억 속의 지식들과 감각적인 것들이 이런 사용을 위헤 그들을 섬기게 장치해두신 바 있다.

바다들의 정박소에서 거주할 것이다. 이는 기억 속의 지식들로부터 진리의 결말이 있는 생활을 의미한다. 이는 “정박소(haven)”의 의미가 기억 속의 지식들의 종착지이자 그것들이 출발(시작)하는 주소지(residence, 주거)이다로부터; 여기서는 기억 속의 지식들로부터 진리의 결말이 있는 주소지이다. 그 이유가 “스불론”의 이름 아래 이 주소지 안에 신앙의 진리들이 있는 이들이 취급되기 때문이다; “바다들(seas)”의 의미가 복합체(complex, 전체, entirety)에 있는 기억 속의 지식들이다 (28항); 그리고 “거주하다(dwell)”의 의미가 생활하다(삶, life)로부터 알게 된다. 이로부터 분명한 바, “바다들의 정박소에서 거주함”에 의해 기억 속의 지식들로부터 진리의 결말이 있는 생활을 함이 의미된다는 것이다. 더 알아야 하는 것은, 이 생활은 외적 인간, 또는 자연적 인간, 그리고 어떤 이와 더불어서는 가장 낮은 자연 평면에서, 또는 감각적 수준에서 있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그들이 신앙의 진리를 가지고 있어 보아야 기억 속의 지식들에 묶인 바 되어 승강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영적 수준의 교회의 여타 다른 이들 보다 더 희미함 안에 있다, 그 이유가 그들은 지적 부분으로부터 아주 조금의 빛밖에 더 가지지 못하기 때문, 그 이유는 지적 부분이 기억 속의 지식들과 감각적인 것들 안에 침수되어버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긍정적인 것 안에 있는 이들, 그리고 기억 속의 지식들을 수단으로 신앙의 진리들을 요새화한 이들의 경우는 매우 다르다; 이들은 이런 지식들로부터 승강되어질 수 있다, 즉 이것들이 있는 자연 평면으로부터 승강되어질 수 있다는 말이다. 이 사람들의 지적 부분은 계발되어져왔다, 그리고 이로부터 영적 진리에 대하여 어떤 지각함을 지니고 있다, 이 지각함에 기억 속의 지식들은 신앙의 진리와 선행의 진리를 비추어 보아 나타나게 하고 인정되게 하는 거울 같은 섬김을 한다. 마치 애착들이 얼굴에서 나타나는 것과 같다.

그는 배들의 정박소에 있을 것이다. 이는 말씀으로부터의 교리적인 것들이 있는 곳을 의미한다. 이는 “정박소”의 의미가 주소지이다로부터, 고로 그들이 있는 곳이다; 그리고 “배(ship)들”의 의미가 말씀으로부터의 교리적인 것들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배들”이 이 의미를 가지는 이유는 배들은 바다들과 강들을 통과하여 생활에 유익한 것을 운반하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바다들”과 “강들”에 의해 지식들과 기억 속의 지식들이 의미되기 때문; 이것들을 통해 운반되는 삶의 유용한 것들은 교리적인 것들이다, 또한 “배들”에 의해 의미되는 말씀으로부터의 진리들 자체임이 아래 구절에서 확인된다:
섬들이 나를 신뢰할 것이다, 그리고 다시스의 배들이 우선적으로 멀리로부터 네 아들들을, 그들과 더불어 자기들의 은과 금을 가져오려 (한다) (이. 60: 9);
“다시스의 배들”은 교리적인 것들과 말씀으로부터의 진리들을 표시한다, 그러므로 말해진다, 그들은 “그들의 아들들, 그들의 은과 금을 가져온다”; 그 이유는 “아들들”에 의해 진리들에 있는 이들이; “은”에 의해 진리 자체가; “금”에 의해 선이 의미되기 때문이다. 모든 이가 아는 바, 다시스의 배들이 여기서 뜻해지지 않는다는 것, 아들들도, 은도 금도 뜻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에스겔서에서:
너의 경계들은 바다의 심장 안에 있다, 너의 설계자가 너의 아름다움을 완전하게 했다, 그들은 스닐의 전나무의 모든 판자로 건축되었다; 그들은 너를 위한 돛대를 만들기 위하여 레바논으로부 터 삼나무를 가져왔다. 바산의 상수리나무로 그들은 노들을 만들었다; 그들은 너의 들보를 상아로 만들었다; 깃딤의 섬들로부터 층계의 딸(회향목, 황양목)을 (가져와서 만들었다); 이집트로부터 수를 놓은 일로 만든 고운 아마포가 너의 돛이었다, 하여 그것은 너에게 기(ensign, 깃발)일는지 모른다; 엘리사아섬으로부터의 푸르고 진홍색 (천)은 너의 덮개이었다. 시돈과 아르왓의 주민들이 너의 노잡이 이었다:너의 현자들, 오 두로여, 네 안에 있다, 너의 수로 안내인들 이었다. 그발의 원로들과 현자들이 네 안에서 너의 배를 틀어막는 자 이었다; 바다의 모든 배들과 그들의 선원들이 네 안에 있어 상거래를 했다 (겔. 27:4-9). (층계의 딸이라 번역되었는데, 이는 배의 어떤 부분을 말하는 것으로 추정되나 확실치 않고 회향목과 황양목은 한역 성경의 것을 옮겨놓은 것임, 역자주.)
위는 두로에 관하여 말하고 있다, 이를 수단으로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이 의미된다, 이것이 배에 속하는 용어들로 묘사되고 있다; 즉 “널판자”, “돛대”, “노”, “들보”, “돛”, “덮개”, “노젖는 자”, “수로안내인(키잡이)” 등등이다. 이런 사항들이 글자대로 이해되어서는 안될 것임은 누구에게나 자명할 것이다; 그러나 “두로”가 진리와 선에 관한 지식으로, “배들”에 의해서는 말씀으로부터의 교리적인 것들을 더불은 모두라고 이해할 때, 위 구절 모두는 아름답게 이해할 수 있다.
다윗서에서:
오, 여호와, 당신의 일들은 얼마나 다양한지요! 지혜 안에서 당신은 그것들 모두를 만들었습니다. 이 바다는 공간들에서 크고 넓습니다; 거기에 배들이 갑니다; 당신이 만들어내신 고래가 거기 안에서 놉니다 (시. 104:24-26).
다시:
그들로 고백함의 제물을 바치게 하라; 그리고 기뻐환호하여 여호와의 일들을 선포하여라. 배들로 바다로 내려가는 그들은, 많은 물들에서 일하는 그들, 이것들이 여호와의 일들과 그분의 경이하심들 을 깊음 안에서 본다 (시. 107:22-24).
위에서 “배들”은 지식들과 교리적인 것들을 표시한다; “고래”는 기억 속의 지식들의 일반성들(일반적 측면에서의 기억 속의 지식들)을 표시한다; 그리고 “배들”이 지식들과 교리적인 것들이기에, 그러므로 말해지기를, “배로 바다로 내려가는 그들은 깊음 안에서 여호와의 일들과 그분의 경이함들을 본다 이다; 그 이유가 이런 것들은 말씀으로부터 지식들과 교리적인 것들 안에 있는 이들이 보기 때문이다.
계시록에서:
두 번째 천사가 소리를 냈다, 그리고 불로 타고 있는 큰 산인 듯한 것이 바다로 내던져졌다, 그리고 바다의 삼분의 일이 피가 되었다, 그러므로 바다에 있는 창조물의 삼분의 일이, 그리고 혼들을 가졌던 것이 죽었다; 그리고 배들의 삼분의 일이 파괴되었다 (계. 8:8, 9)
“불타고 있는 큰 산”은 자아 사랑을 표시한다 (1691항); 이 “바다”는 기억 속의 지식들이 있는 자연 평면이다; “피”는 폭행이 선행에 있어졌음이다; “혼들을 가진 바다의 창조물들”이란 선들을 지닌 기억 속의 지식들의 진리들이다; “삼분의 일”은 아직 완성되지 않은 어떤 것이다; 그들이 “죽는다”란 그들은 영적 생명을 가지지 않았다 이다; 그러므로 “배들의 삼분의 일이 파괴됨”이란 말씀으로부터의 교리적인 것들 속의 진리들과 선들이 거짓화되었다를 표시한다. 이 모두로부터 이 예언을 수단으로 뜻하는 것을 알았으리라 본다.
그러나 반대적 의미에서 “배들”은 거짓과 악인 것에 관한 지식들과 교리적인 것들을 의미하는 것을 아래 구절에서 읽을 수 있다:
끝의 때에서 남쪽의 왕이 그와 겨룬다; 그러므로 북쪽의 왕이 회오리 바람 같이, 병거와 마병, 그리고 많은 배들을 거느리고 그에게 돌진할 것이다, 그리고 그가 토지들 안으로 올 것이다, 그리고 뒤엎고 꿰뚫을 것이다 (단. 11:40);
“남쪽의 왕”은 선으로부터의 진리를 표시한다; “북쪽의 왕”은 악으로부터의 거짓들을; 마병과 더불은 “병거들”과 배들은 거짓의 교리적인 것들을; “토지들”은 교회들을, 끝의 때에 악들로부터의 거짓들이 교회들을 꿰뚫고 뒤엎을 것이 예언되어 있다.
계시록에서:
모든 키잡이와 배들에 고용된 모든 이, 그리고 선원들, 그리고 바다에서 일하는 많은 자들이 멀찍이 떨어져 섰다, 그리고 그들은 바빌론을 불태우는 연기를 보았을 때 외쳤다, 말하기를, 어느 도성이 이 큰 도성과 비슷할 수 있는가? 슬픔, 슬픔이 있다, 이 큰 도성아, 바다에서 배들을 가졌던 모든 자들은 그녀의 호화로움 때문에 부자로 만들어졌다! (계. 18:17-19).
위에서 “배들”이 거짓과 악의 교리적인 것들과 지식들을 표시함은 분명하다, 그 이유는 “바빌론”이 바깥쪽으로만 거룩할 뿐 내향적으로는 모독적인 예배를 표시하기 때문이다. 더욱이 위의 배들이 배가 아닌 그밖의 어떤 것을 뜻하는지를 모를 자는 없을 것이다. 이사야서에서:
고로 너희를 되찾으신 분,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 여호와께서 말하신다, 너희를 위하여 나는 바빌론쪽으로 보냈었다, 하여 나는 모든 그녀의 빗장들을 내던질는지 모른다, 그리고 갈대아인들, 이들의 외침은 배들 안에 있다 (이. 43:14).
위에서의 의미도 (앞 구절과) 비슷하다. 더욱이 악으로부터의 거짓들이 “배들”에 의해 의미되어지는 것을 이. 2:11, 16; 23:1, 14; 시. 48:7에서 더 읽을 수 있다.

그리고 그의 옆은 시돈 쪽을 향해 있을 것이다. 이는 한 쪽에서는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들에로 확장됨을 의미한다. 이는 “옆, 측면(side)”의 의미가 어느 한 쪽에서 확장됨이다로부터; 그리고 “시돈”의 의미함이 선과 진리에 관한 외면의 지식들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스불론이 취급되는 곳, 여기서의 경우 같이, 지식들, 교리적인 것들, 기억 속의 지식들에 관한 언급이 만들어진다, 그리고 선과 진리에 관하여 이쪽에서 확장됨이 있다고 말해지고, 또한 말씀으로부터 교리적인 것들이 있는 기억 속의 지식들로부터 진리의 결말이 있다고 말했다. 그러므로 말해둘 필요가 있는 것은 위 용어들 사이의 차이점이다. 교리적인 것들은 말씀으로부터 있는 이런저런 것들이다; 지식들은 이쪽에서는 교리적인 것들로부터, 다른 쪽에서는 기억 속의 지식들로부터 있는 이런저런 것들이다; 그리고 기억 속의 지식들은 경험을 통해 알아진 것들, 다시 말해 자신의 경험이든 타인의 경험이든, 경험에 속하는 이런저런 것들이다.

14, 15절. 잇사갈은 무거운 짐들 사이에 드러누운 뼈만 앙상한 나귀이다. 15 그리고 그는 쉼을 보고 그것이 좋다 하고, 토지를 보고 그것이 즐거움이다 할 것이다. 그리고 그는 짐을 메기 위해 그의 어깨를 구부릴 것이다, 그리고 공물에는 종이리라.

잇사갈. 이는 일들로부터 얻은 보답(recompense, 보상 reward)을 의미한다. 이는 잇사갈의 표현함이 보상 또는 보답, 삯(hire)으로서 획득되는 상호간의 사랑(mutual love)이다로부터, 여기서는 일들로부터 획득되는 보상임이 분명한데, 이는 여기서 잇사갈에 관한 예언의 내적 의미에서 취급되는 세부 사항으로부터 확실해진다. 더욱이 잇사갈은 원어에서 보상(reward, hire)을 뜻한다. 잇사갈이 여기서는 일들로부터 얻어지는 보상을 의미하고, 앞 장에서는 상호간의 사랑도 뜻한다고 말한 이유는 여기서의 “잇사갈”에 의해서는 상호간의 사랑의 어떤 종류와 나타남 안에 있는 이들, 즉 어떤 종류의 이웃을 향한 사랑, 또는 선행 속에 있다고 나타나지는 이들, 그리고 자기들이 행한 선들 때문에 보상되어지기를 바라는 이들이 뜻해지고 있기 때문에서 이다. 고로 이런 이들은 진짜 상호간의 사랑, 또는 선행을 더럽힐 뿐만 아니라 악용하거나 뒤집거나 곡해하고 타락시킨다. 그 이유가 진짜 상호간의 사랑 안에 있는 이들은 자기들로 해서 이웃이 이롭게 될 때, 그것 자체가 자기들에게 기쁨이고 행복이 되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그들은 이 일들로 보상은 커녕 어떤 바램도 갖지 않기 때문이다. 이 기쁨과 복됨(bliss)이 말씀에서 “삯, 보상”에 의해 뜻해진다; 그 이유가 기쁨과 복됨이 보상 자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른 삶에서의 경우(영들의 세계에서), 이것이 그들을 위한 천국이 된다. 그 이유가 이 사랑에 있는 이들이 쓸모 있어짐(use)들을 수행할 때, 그리고 타인들에게 선을 행할 때, 그들은 이런 환희와 행복함에 있으므로 처음 동안에서는 그들이 천국 안에 있다라고 자신들에게 여겨진다; 이것은 주님에 의해 각자의 선용의 등차에 따라 그들에게 주어진다; 그러나 그들이 보상을 생각하자마자 이 행복은 사라진다, 그 이유가 보상에 관한 생각은 사랑을 불순해지게 하게 때문, 그리고 그것을 타락쪽으로 기울게 하기 때문이다. 그 이유인 즉, 이때 그가 이웃에 관하여가 아닌 자신에 관하여 생각하기 때문, 즉 타인이 아니고 자신을 행복하게 만드는 것을 생각하기 때문이다; 고로 그들은 이웃을 향한 사랑을 자신들을 향한 사랑 쪽으로 전환한다. 그들이 이를 행하는 만큼에서 천국으로부터의 환희와 행복은 그들에게 교통되어질 수가 없다, 그 이유는 그들이 천국으로부터의 행복의 유입을 자신들에게 집중해두었기 때문이다, 즉 타인들에게 보내지는 쪽으로 배치하지 않았다는 말이다. 마치 빛의 광선을 전도하지 않고 흡수만 하는 대상물 같다. 빛을 전도하는 대상물들은 빛 안에서 나타나고 반짝거리지만, 그것들을 흡수해버리는 물체는 불투명하고 전혀 반짝거리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런 본성 속에 있는 이들은 천사의 사회로부터 분리되어진다, 그리고 마치 천국과는 공통된 것이 하나도 없는 이들 같다. 이런 이들이 여기서 “잇사갈”이라는 이름 아래 묘사되어 있다.

뼈만 앙상한 나귀. 이는 가장 수준 낮은 섬김을 의미한다. 이는 “나귀”의 의미가 섬김(service, 봉사함)이다로부터; 그리고 “뼈”의 의미가 생명을 거의 가지고 있지 않다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고로 “뼈만 앙상한 나귀(bony ass)”는 가장 수준이 낮은 섬김이다. 그 이유가 보상을 위하여 선인 것을 행하는 자, 그 사람도 실로 쓸모 있음을 수행하고 섬김 속에 있는 것은 분명하나 가장 낮은 장소에 있는 주님의 왕국에 있는 이들 사이에 있다, 그 이유가 그들은 자신들에게 교통되는 선을 분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은 가장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들 옆을 지나쳐간다, 혹시 이들에게 선을 행한다면, 이것을 주님에게 반드시 보상을 청구한다. 그러므로 그들은 자기들이 실시한선에 대한 공적을 확실히 챙긴다. 고로 주님의 자비가 자신들에게 마땅히 베풀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런 도중에서 그들은 굴종의 상태로부터 퇴조한다, 그리고 주님으로부터 천국을 통하여 복되고 행복한 것을 받는 상태에 비례하여 선을 베풀려 한다. 이런 모두로부터 분명해지는 바, 다른 삶에서 이런 부류의 사람들도 쓸모 있는 일에 참여는 하나 가장 수준이 낮은 섬김에 속한다.

무거운 짐들 사이에 누워 있다. 이는 일들에 둘러 싸여 있는 생활을 의미한다.
이는 “누워 있다”의 의미가 생활(life)이다로부터, 그러나 불명료한 생활이다; 그리고 “짐들(burdens)”의 의미가 일들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짐들”이 이런저런 일들을 표시하는 이유는 여기서 취급된 이들은 이웃을 향한 사랑의 애착으로부터 선들을 행하지 않고, 자아를 향한 사랑의 애착으로부터 선을 행하는 이들이기 때문이다. 이 사랑의 애착으로부터 흐르는 일들은 초라한 나귀에 의해 운반되는 짐들 같다, 그 이유가 그들의 일은 가장 낮은 섬김들에 해당되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억지적 섬김(servitude)은 자아 사랑과 세상 사랑의 애착으로부터 있고, 자유적 섬김은 주님을 사랑함과 이웃을 향한 사랑의 애착으로부터 있기 때문이다. 그 이유인 즉, 전자의 사랑으로부터의 애착은 지옥으로부터 흘러들고, 이것은 폭력과 더불어 명령되나, 후자의 사랑으로부터의 애착은 주님으로부터 흘러들고, 명령되지 않고 이끌리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다시 분명한 것은, 보상을 예상하고 선인 것을 행하는 이들은 가장 수준 낮은 섬김들이다는 것, 그리고 그들의 일들은 (고달프게 하는 수준의) “짐들”이다. 같은 것이 아래 구절의 “짐들”에 의해 의미되고 있다:
잇사갈의 제 1 인 자들이 드보라와 함께 있었다; 그리고 잇사갈은 바락과도 그러했다; 골짜기에서 그는 그의 발 아래 놓일 것이다, 르우벤의 부류(class)들에서 심정의 결심들이 대단했다. 당신은 양떼의 쉿하는 소리(hissing)를 들으려고 왜 짐들 사이에 앉아 있는가? (사. 5:15, 16)
위에서 “잇사갈”은 일들에 대해 보상되어지기를 바라는 이들을 표시한다; “발 아래 계곡에서 놓여지는” 것은 가장 수준이 낮은 것들에서 섬김을 담당하는 것이다; “르우벤 부류”는 신앙의 진리들에 관한 지식들에 있는 이들을 표시한다, 이들 사이에 여기서 “잇사갈”에 의해 의미되는 이들이 있는데, 그들 아래의 장소에서 이다; “양떼들의 쉿하는 소리를 듣는” 것은 “양떼들”인 선행의 선에 있는 이들로부터 경멸됨을; “짐들 사이에 앉다”는 자아 공적의 일들 사이에 있다를 표시한다. (쉿하는 소리란 연설을 듣다가 거기에 불만을 표할 때 내는 야유소리라고 생각하면 될지 모른다; 또한 짐들 사이에 있다란 내가 이렇게 선행을 많이 베푸는데 왜 알아주지 않나하고 푸념하는 누군가의 모습을 연상하면 될지 모른다. 역자주.)

그는 쉼을 보고 그것이 좋다. 이는 보상 없는 선으로부터의 일들, 그것들은 행복으로 꽉 차있다를 의미한다. 이는 “쉼(rest)”의 의미가 천국에 속하는 것들, 고로 선행의 선 안에 있는 것들, 또는 보상 없는 선으로부터의 일들이다로부터 (아래에서 살핀다); “이것이 좋다”의 의미는 그것들은 행복으로 가득하다 이다. “쉼”이 보상 없는 선으로부터의 이들을 표시하는 이유는 가장 높은 의미에서 “쉼”, 또는 “평화”는 주님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관계적 의미에서는 천국을 의미한다; 고로 주님으로부터 있는 선을 의미한다; 그리고 “쉼” 또는 “평화”에 의해 의미되는 것들에 있는 이들은 선행의 선 안에 있는 이들 외애 더 다른 사람은 없는 바, 고로 보상 없이 선으로부터의 일들 안에 있는 이들이고, 이들이 “쉼”에 의해 의미되고 있다; 이것은 본문의 내적 의미에서 연결되는 사항들로부터 뒤이어지고 있다.
주제 자체에 주목해보자: 보상을 목적으로 선을 행하는 이들은 어떤 보상도 없이 선을 행함에 천국의 행복 자체이다는 크나큰 행복이 있다라고 아는 것은 가능할 수가 없다. 그들이 무지한 이유는 그들이 행복을 자아 사랑의 기쁨에서 지각하기 때문이다; 인간이 이 사랑에서 기쁨을 지각하는 한, 그는 그만큼에서 천국의 사랑에 있는 기쁨을 지각하지 못한다, 그 이유는 그것은 반비례하기 때문이다. 자아 사랑으로부터 흐르는 기쁨은 천국의 사랑으로부터 있는 기쁨을 완전 소멸되게 한다, 하여 이 사람에게는 천국의 기쁨이 무엇인지가 절대적으로 알려지지 않는다; 만일 이런 본성이 말해주어봤자, 믿지 않고, 도리어 부정해버린다.
다른 삶에서 이것을 나로 악령들로부터 알게 해주신 적이 있었다. 이들은 지상 삶에서 보상 없이는 선을 타인들을 위하여서나, 또는 나라를 위하여서나 행한 적이 없던 자들이었다; 이런 자들은 보상의 목적 없이 선을 행하고 기쁨을 가지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보상이 없으면 모든 기쁨이 중지된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들에게 이 기쁨이 중지될 때, 천국의 기쁨이 시작된다라고 말을 덧붙였더니, 그들은 이 말에 놀라는 눈치였다; 그리고 그들이 여전히 놀라워하는 것은, 이 천국의 기쁨이 인간의 가장 안쪽을 통하여 흘러든다는 것, 하여 그의 내면들은 표현할 수 없는 행복으로 감동된다는 말을 들었을 때 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말하기를 자기들은 이를 납득할 수 없다는 것, 그렇게 되는 것도 바라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이유가 그들이 믿는 것은, 만일 자기들이 자아 사랑의 기쁨을 잃는다면, 매우 비참해질 것이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이때 자기들의 생명의 모든 환희가 박탈되기 때문이다는 것이다. 이들 또한 자아 사랑의 상태와 다른 상태에 있는 이들을 단순한 자, 천진난만한 자라고 부른다. 어쨌든 본문이 말하려는 이들은 보상을 목적으로 일을 하는 이들을 닮지 않은 대목은 하나도 없다; 그 이유가 그들은 섬김에 따라 자신들에게 그 섬김에 보상해줄 자가 아니면 이웃이든, 나라이든, 천국이든, 주님이든 모든 것에 관계가 없고 오로지 자신을 중요시하기 때문이다. 이상 살핀 것이 본문의 잇사갈에 관하여 내적 의미에서 서술된다.

토지를 보고 그것이 즐거움이다. 이는 주님의 왕국 안에 있는 그들은 이 행복 안에 있다를 의미한다. 이는 “토지”의 의미가 교회, 고로 또한 주님의 왕국이다로부터; “토지”가 이 의미를 지니는 이유는 이것이 가나안의 토지이기 때문이다. 말씀에서 가나안의 토지에 의해 주님의 왕국이 표현된다, 그 이유는 거기에 교회가 태고 때로부터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즐거움(pleasant, 유쾌함)이었다”로부터, 이것은 보상 없이 선으로부터의 일들 안에 있는 행복을 의미한다. 본문이 이렇게 말한다, 즉 “그가 쉼을 보고 그것이 좋다, 그리고 토지를 보고 그것은 즐거움이다.” 이 두 표현들에 의해 주님의 왕국에 있는 행복이 의미된다; 그 이유는 “쉼을 보니 좋다”는 천적 수준의 것에 관련되어 선 측면에서; “토지를 보니 유쾌하다”는 영적 수준의 것에 관련되어 진리 측면을 서술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두 표현이 연달아 (반복되듯) 있는 이유는 선과 진리의 결혼 때문이다. 보상 없는 선으로부터의 일들 안에 행복이라는 주제를 한번 더 관심을 가져보자: 오늘날, 보상의 목적 없이 선들을 행함 안에 천국의 행복이 있다는 것을 아는 자는 매우 적은 편이다; 그 이유가 명예를 발전시키는 것에, 타인의 섬김을 받는 것에, 재물을 풍부히 지니는 것에, 쾌락들 안에서 생활하는 것 말고는 행복이 있는 곳은 없다고 알기 때문이다. 허나 이런 것들을 뛰어넘어 인간의 내면들에 감동을 주는, 내면들을 훈훈하게 하는 행복이 있다는 것, 고로 천국의 행복이 있다는 것, 이 행복이 진짜 선행의 행복이다는 것에 너무나 깊이 무지해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현자라고 칭송되는 자에게 이것이 천국의 행복인지 여부를 물어보라. 많은 이들이 선한 일들을 거절하는 이유는 자기 공적을 인정받음 없이 선한 일은 있을 수가 없다고 믿는데서 비롯된다. 이들이 모르는 것은 주님에 의해 인도됨 안에 있는 이들은 선한 일을 행하는 것 자체 외에 더 바라는 것이 없다는 것, 이들은 선한 일의 공적을 자신에게 돌리는 것보다 더 어리석은 짓은 없다고 알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새로운 의지 안에 있다, 이 의지는 거듭나져가는 이들에게 주님에 의해 주어진다, 그 이유는 이것이 인간 안에서 주님의 의지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짐을 메기 위해 그의 어깨를 구부릴 것이다. 이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온 노력으로 노동한다를 의미한다. 이는 “어깨”의 의미가 모든 힘, 또는 모든 노력이다로부터; 그리고 “짐을 멘다”의 의미가 공적을 위하여 일들을 행하는 것이다로부터; 그러므로 “메기 위해 어깨를 구부린다”에 의해서는 공적을 위하여 온 노력으로 일을 하는 것이다가 의미된다. 이것이 “멘다(bear)”라고 말해진 이유는 그들이 선에 애착함이 있어 선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 자아에 애착함으로부터 마지못해 선을 행하기 때문이다.
자기들이 수행한 선에 보상을 바라는 이들에 한번 더 주목해보자: 우리가 알아야 하는 바, 그들에게는 만족이라는 것이 결코 없다는 것이다; 게다가 타인 보다 더 큰 보상이 없을 경우 그들은 분노한다. 자기 보다 더 축복받았다고 보여지는 자를 발견하면, 슬퍼지고 불평을 늘어 놓는다. 그들은 내향의 행복에 존재하는 행복은 결코 만들지 못하고 외향의 것만에서, 즉 특출하다 칭송받는 것에서, 지배권을 쥐는 것에서, 천사들의 섬김을 받는 것에서, 천사들 수준을 넘는 것에서, 결과적으로 천국에서 제 1 인 자요 위대한 자이다가 되는 것에서 이다; 허나 여전히 존재하는 천국의 행복은 통치하기를 바라는데 있지 않고, 타인이 나를 섬겨주는데 있지 않다는 것, 가장 작은 자가 되는 것에 있다는 것이 아래 구절에 있다:
그런데,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이 말하기를, 당신의 영광 안에서 우리가 하나는 당 신의 오른쪽에, 하나는 왼쪽에 앉을 자리를 수여 하십시오 하고 말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너희는 네가 구하는 것을 모르고 있다. 내 오른편과 내 왼편에 앉는 것은 내가 주는 것이 아니다. 너희는 아는 바, 이방인들을 지배한다고 자처하는 자들은 그들 위에서 왕권을 휘두른다; 그리고 그들의 큰 자는 그들 위에서 권위를 행사한다. 그러나 너희 사이 에서는 그것이 그렇게 있지 않을 것이다: 즉 너희 사이에 크다 일컫는 자는 누구든지, 너희 를 섬기는 자 일 것이다. 그리고 최고이다 하는 너희 속의 누구든지 모두의 종일 것이다. 그 이유가 사람의 아들 조차도 섬김을 받기 위해 오지 않았다, 그러나 섬기기 위해 왔다 (막. 10:35-45).
그리고 보상의 목적 없이 선인 것을 행하는 이들이 천국을 가진다는 것을 가르치신다:
그 이유가 자신을 추켜세우려 드는 자는 누구든지 깎아내려 질 것이고, 자신을 낮추는 자 는 드높여 질 것이기 때문이다. 너는 정찬이나 만찬을 만들 때, 네 친구들을, 네 형제들을, 네 친척들을, 네 부유한 이웃들을 부르지 말라; 그들 역시 다시 너를 초대해서, 초대했던 너에게 보답을 만들지 않게 하라. 그러나 너는 잔치를 만들 때, 가난한 자, 불구자, 절음 발이, 소경을 부르라. 그리고 너는 복되어질 것이다; 그 이유는 그들은 네게 보답할 수 없 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너는 정의로운 자의 부활에서 보답 받아 질 것이기 때문이다
(눅. 14:11-14).
“정의로운 자의 부활에서 보답된다”는 보상 없이 잘 행동함으로부터 향유하는 내적인 행복함이다, 그들은 이 행복을 자기들이 쓸모 있음을 수행할 때 주님으로부터 받는다; 보수 없이 섬김을 사랑하는 이들, 그들이 더 사랑하면, 그들이 수행하는 쓸모 있음은 더욱 고귀해진다, 사실상 그들은 타인들 보다 더 위대하고 더 힘있는 것이다.
보수를 위하여 선한 일들을 하는 자도 똑같이 말한다, 그 이유는 그들도 말씀으로부터 아는 바, 천국에서 작은 자이기를 바래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때 그들은 자기들이 이렇게 말하면 큰 자가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결국 큰 자가 되는 것이 목적인 셈이다, 그러나 보수 없이 선을 행하는 자는 실지로 저명해진다는 것을 염두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섬김만을 수행할 뿐이다.
이들로부터 공적을 챙기려 드는 자들, 그들의 품질을 위에서 살폈는데, 다른 삶에서 어떠한지는 여러번 살핀 바도 있는데, 이렇다: 그들은 나무를 패고 풀을 깍는다; 어떻게 그들이 표현하는지; 자아와 세상을 위해 선인 것을 행한 자는 다른 삶에서 보상이 없다는 것; 이들에 공적을 놓는 자는 자기들 입맛에 따라 말씀의 글자를 해석한다는 것, 그리고 그들은 내면의 내용이 있다에 비웃는다; 진정한 선행에는 자기 공적은 통째로 빠져 있어야 한다는 것; 선행으로부터 신앙을 분리하는 자는 그들이 행한 일들을 자아 공적으로 만든다는 것; 천국으로 들어가는 자는 그들 자신의 것과 자아 공적을 벗어야 한다는 것; 그들이 자신으로부터 선행한다고 믿는 것, 그리고 이 선을 수단으로 그들은 공적을 가지는 것은 개혁 초기의 대부부의 인물들이 가지는 경우이다, 그러나 그들은 거듭남으로 해서 이것을 벗는다.

그리고 그는 공물에는 종이리라. 이는 그는 공적을 가질지도 모른다를 의미한다. 이는 “공물에 종이다”의 의미가 종속되는 것과 섬기는 것이다로부터; 그리고 그들은 “뼈만 앙상한 나귀이다, 짐들 사이에 누운” 자들이 일들을 통하여 공적을 가지기를 바라는 이들이 라고 말해지고, 그리고 “그는 짐을 메려고 어깨를 구부린다”와 “공물에는 종이다”에 의해서도 역시 일들을 통하여 공적을 가지기를 바라는 이들이 의미된다고 말해진다; 그 이유가 그것들이 가장 수준이 낮은 섬김이기 때문이다. “공물을 섬기는 것”이 종속되고 섬기는 것이다를 아래 구절에서 읽을 수 있다:
너희가 그것에 맞서 싸우려고 도성쪽으로 가까이 다가설 때, 너희는 그들을 평화에 초대하라; 그리고 그들이 평화를 위하여 그렇게 응답하여, 너희에게 문을 연다면, 그 안에서 발견되는 모든 백성은 너희에게 공물을 위하여 있을 것이다, 그리고 너희를 섬길 것이다 (신. 20:19, 11).
예레미야서에서:
사람들이 복작거리던 이 도성이 어찌하여 적막하게 되었는지! 그녀는 과부 같이 되어졌다. 나라들 사이에 위대했던 그녀, 제 1 인 자들을 통치했던 그녀가 공물을 바치는 자가 되었다 (애. 1:1).
위에서 “조공자가 되었다”는 섬김이 의미된다. 마태복음서에서:
예수께서 말하셨다, 너는 무엇을 생각하느냐, 시몬아? 땅의 왕들은 누구로부터 관세나 공물 을 거두느냐? 자기들 자녀로부터, 또는 외국인으로부터? 베드로가 그분에게 말한다, 외국 인들로 부터. 예수께서 그에게 말하신다, 그러면 자녀들은 자유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 리가 그들에게 반칙 하지 않도록, 너는 바다로 가라, 그리고 갈고리를 던져라, 그리고 먼저 올라오는 물고기를 집어 올려라; 그리고 네가 그것의 입을 열었을 때, 너는 돈 한 조각을 발견할 것이다; 가져 가라, 그리고 나와 너희를 위하여 그들에게 주거라 (마. 17:25-27).
위에서 “공물을 주는 것” 또는 세금에 의해 섬기는 이들이 뜻해진다, 그러므로 “외국인들이 내고 아들들은 자유하다”라고 말해진다, 그 이유가 (포로로 잡아 온) 외국인들은 종들이기 때문이다. 베드로가 바다로부터 물고기를 취하고 그것의 입에서 그가 바쳐야하는 돈 조각을 발견하는 것은 가장 수준이 낮은 자연 평면은 섬김을 마땅히 해야함을 표현했다; 그 이유가 “물고기들”이 이 자연 평면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16-18절. 단은 그의 백성을 이스라엘의 한 지파로서 판결할 것이다. 17 단은 길에 있는 뱀, 작은 길의 독사이고, 말의 뒤꿈치를 물것이다, 그리고 그의 기수는 뒤를 향해 떨어질 것이다. 18 오 여호와여, 나는 당신의 구원을 기다립니다.

단. 이는 진리 가운데 있으나 선 가운데는 아직 있지 않은 이들을 의미한다.
이는 단의 표현함이 생활의 선이다로부터; 그러나 여기서는 진리로부터 생활의 얼마간의 선 안에 있는 이들, 그러나 선으로부터서는 아직 아닌 이들이다. 그 이유가 주님에 의해 거듭나지는 인간은 이런 등차에서 있다: 그는 처음에 진리 안에 있는다; 그러나 진리로부터 생활의 어떤 선 안에 있지는 않는다; 그 다음 그는 진리로부터 생활의 선 안에 있는다, 그러나 선으로부터는 아직 아니다; 후에, 그가 거듭나져갔을 때, 그는 선으로부터 생활의 선 안에 있다, 이때 그는 선으로부터 진리를 지각한다, 그리고 자신 안에서 진리를 불어나게 한다: “단”에 의해 진리로부터 생활의 선 안에 있는 이들, 그러나 선으로부터는 아직 아닌 이들이 뜻해진다; 그들과 더불은 선은 진리 안에 깊숙이 감추여 뉘여져 있다, 그리고 그들에게 진리에 애착함을 주고 있다, 그리고 그들을 진리에 따라 살도록 부채질하고 있다. 이런 이들이 주님의 왕국 안에 있다; 그러나 그들은 선으로부터 선을 행함이 아닌, 진리로부터 인 바, 즉 새로운 의지로부터가 아닌 지적 부분으로부터 인 바, 고로 사랑으로부터가 아닌 그렇게 행하도록 명령되었기에 행동되는 것, 순종함으로부터 인 바, 그들은 첫 천국, 또는 최말단 천국 (천국의 외곽 부분)에 있다.
이들이 단에 의해 표현되는 이들이다, 그 이유가 그의 열두 아들을 수단으로 내적 의미에서 있는 이스라엘의 예언적 말함에서 그들의 품질 측면에서 주님의 왕국에 있는 모든 이들이 일반적 측면에서 묘사되었기 때문이다. “단”에 의해 의미된 이들이 최말단 천국 안에, 또는 주님의 왕국의 최말단 부분이 의미되는 이유는 진리 안에 있기는 하나 아직 선 안에 있지 않기 때문인데, 이것이 가나안의 토지를 지파들의 상속분으로 분배할 때, 단의 몫(lot. 부지, 제비뽑기)은 마지막에서 할당됨에 의해 표현되었기 때문이다 (여. 19:40-48); 그리고 그들의 상속분은 이 토지의 맨끝 지경에 놓였다 (사. 18); 제비는 여호와 앞에서 뽑혔다 (여. 18:6), 그러므로 그들의 표현함에 따라 각각에게 할당된 것이다. 가나안의 토지는 주님의 왕국을 표현했다, 그리고 모든 경계선들은 표현적이었다; 고로 이 토지의 최말단들은 주님의 왕국에 있는 최말단들을 표현했다; 그러므로 단은 거기서 최말단들에 있는 이들을 표현했다; 그 이유가 진리들이 선과 결합하기 이전에서는 그것들은 최말단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일 진리가 선으로부터 완전 분리된다면, 그것은 주님의 왕국의 어떤 경계선 안쪽에는 있지 않는다, 경계선 밖에 있는다.
단의 상속분이 가나안의 토지의 최말단이었다는 것은 이 토지의 전체를 묘사할 때 말해진 것, 즉 “브엘세바로부터 단까지”로부터도 분명해진다 (삼하. 3:10; 17:11; 24:15; 왕상 4:25). 이 인용 구절에 등장하는 “브엘세바”는 토지의 가장 안쪽을 의미했다, 그 이유가 시온과 예루살렘이 토지의 중심이 되기 전 아브라함과 이삭이 거주했던 곳이기 때문이다.
진리 안에는 있으되, 선 안에는 아직 있지 않은 이들의 품성이 사. 18장에서 묘사되고 있다: 즉 그들이 거주할 곳을 확보하기 위하여 쳐들어갔을 때, 미가의 집으로부터 레위인을 데리고 나오고, 그의 에봇, 데라빔, 새긴 우상도 가져왔다; 이것 때문에 진리 안에는 있으나 선 안에 아직 있지 않은 이들의 예배가 의미되었다; 그 이유가 그들은 외적인 것을 숭배하나 내적인 것을 무시했기 때문이다. 선 안에 있는 자 외에는 내적인 것을 알 자는 아무도 없다. 이것이 단 지파에 의해 표현되어진 것은 말씀의 모든 역사물들, 즉 모세의 책, 여호수아, 사사기, 사무엘, 열왕기서들이 주님의 왕국의 천적, 영적인 것들을 표현하고 있다는 사실로부터 분명해진다; 마찬가지가 단 지파에 관한 사사기서의 줄거리도 포함된다. 진리 안에 있으나 선 안에 아직 있지 않은 이들에 관하여는 이어지는 단에 관한 아래의 내적 의미에서 묘사되고 있다.

그의 백성을 이스라엘의 지파 중의 하나로서 판결할 것이다. 이는 그는 이스라엘의 지파들이 표현하는 일반적 측면에서의 진리들 중의 하나이다를 의미한다. 이는 “판결하다”의 의미가 공적 측면에서의 진리이다로부터 (아래에서 살핀다); “백성”의 의미가 진리들에 있는 이들이다로부터, 여기서는 진리 안에 있으나 아직 선 안에 있지 않은 이들 이다, 그 이유가 이들이 “단”, 또는 단의 “백성”이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의 지파”의 표현함이 일반적 측면에서의 모든 신앙의 진리들과 선들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러므로 “그는 이스라엘의 지파의 하나로서 그의 백성을 판결할 것이다”에 의해 단에 의해 표현되는 이 진리가 이스라엘의 지파들이 표현하는 일반적 진리들 사이에 있다가 의미되는 것이다. “자기 백성을 판결함”에 의해 공적 측면에서의 진리를 표시하는 이유는 이스라엘의 지파에 의해 일반적 측면의 모든 진리들이 표현되기 때문인데, 이 지파가 언급되는 많은 구절로부터 알는지 모른다, 그리고 심판하는 것은 진리이다; 고로 “자기 백성을 심판함”에 의해서는 공적 수행에서의 진리가 의미된다.
이에 관련하여 우리가 말씀에서 읽게 되는 대목으로는, 24원로들이 왕좌에 앉아 나라들과 백성들을 심판한다는 것; 그리고 열두 사도들이 마찬가지로 왕좌에 앉아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심판한다는 대목이다. 말씀의 내적 의미를 모르는 이들은 글자대로 심판한다고 (억지로라도) 알고 있으려 할는지 모른다. 그러나 “24 원로들”, “12 사도들”, “왕좌들”에 의해 의미된 것을 알게 될 때, 이런 대목이 어떻게 이해되어야 하는지를 내적 의미로부터 알게 된다; 즉 하나의 복합체(complex, 전체, entirety)로서 있는 모든 진리들이다. 이에 따라 심판이 있다는 말이다. 마찬가지가 여기서인, “이스라엘의 지파중의 하나로 자기 백성을 판결함”에서 뜻해진다; 그러나 그들, 또는 그들의 어떤 원로들이 판결한다가 아니라 그들에 의해 의미된 진리들 자체가 판결한다는 것, 고로 주님 만이 판결하신다는 것이 의미된다, 그 이유는 그분으로부터 모든 진리가 진행되기 때문이다. 24원로들이 왕좌에 앉아서 심판하는 대목이 아래 구절에 있다:
왕좌를 빙둘러 24 왕좌들이 있었다, 그리고 나는 왕좌 위에 24 원로들이 앉은 것을 보았다, 그들은 흰 의복을 입었고, 그들의 머리에는 금 왕관이 있었다 (계. 4:4: 11:16).
다시:
나는 왕좌들을 보았다, 그리고 그들은 그것 위에 앉았다, 그리고 심판이 그들에게 주어졌다
(계. 20:4).
열두 사도들에 관하여는 아래 대목에서 읽을 수 있다:
예수께서 말하셨다, 거듭남에서 나를 따랐던 너희는 사람의 아들이 그분의 영광의 왕좌 위에 앉을 때, 너희 역시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들을 심판하는 열두 왕좌에 앉을 것이다 (마. 19:28).
그리고 누가복음서에서:
나는 내 아버지께서 나에게 약속하신 것 같이 왕국을 너희에게 약속한다, 너희는 내 왕국에서 내 식탁에서 먹고 마시고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들을 심판하는 왕좌에 앉을는지 모른다
(눅. 22:29, 30).
위 구절들에서 24 원로들, 열두 사도들이 뜻해지는 것이 아니다는 것은 인간이든, 천사들이든 누구도 심판할 자격이 없다는 사실로부터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이는 일반적 측면에서의 모든 진리들과 선들이 뜻해진다; 즉 주님밖에 인간의 내면들을 알 수 있는 분은 없기 때문이다. 이 모두로부터 지금 명백한 바, “단이 이스라엘의 지파 중의 하나로 그의 백성을 판결할 것이다”에 의해 단에 의해 표현된 진리가 일반적 진리들 사이에서의 하나로서 심판이 있다가 의미된다는 것이다.

단은 길에 있는 뱀일 것이다. 이는 선이 아직 까지는 인도하지 않기 때문에 진리에 관하여 그들이 추론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단의 표현함이 진리 안에 있으나 선 안에는 아직 있지 않은 이들이다로부터; “뱀(serpent)”의 의미함이 감각적인 것으로부터 추론하는 것이다로부터 (아래에서 살핀다); 그리고 “길”의 의미가 진리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고로 “단은 길에 있는 뱀일 것이다”에 의해 진리에 관하여 그들이 추론함, 그 이유는 선이 아직 인도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추론함의 품질, 그 결과 진리의 품질에 관한 것은 이어지는 것에서 말해질 것이다.
“뱀”이 감각적인 것으로부터 추론함을 표시하는 이유는 천국에서 인간의 내면들이 다양한 동물들에 의해 표현되기 때문, 이로부터 말씀에서도 마찬가지로 표현되기 때문이다. 인간의 감각적인 것들이 뱀에 의해 표현되는 이유는 감각적인 것들이 인간 안에서 가장 수준이 낮은 것들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관계적으로 지상적인 것들, 그리고 마치 기어다니 듯 하기 때문이다. 이는 감각적인 것들을 통하여 흐르는 형체들로부터 알는지 모른다, 이에 관하여는 주님의 신성한 자비로부터 그밖의 장소에서 살필 것이다. 그러므로 이런 감각적인 것들이 뱀들에 의해 표현되어졌고, 주님의 신성한 감각적 부분 조차 광야에서 구리뱀에 의해 표현되기까지 하였다; 그리고 외적 부분들에서는 신중함과 용의주도함이 “뱀”에 의해 의미되었음을 아래 구절에서 읽을 수 있다:
너희는 뱀 같이 슬기롭고 비둘기 같이 악의가 없어라 (마. 10:16).
그러나 인간이 감각적인 것 안에 있을 때, 내적인 것과 멀리 떨어진다, 마치 진리 안에 있고, 선 안에 있지 않은 경우와 같다, 그리고 감각적인 것으로부터 말한다, 이때 “뱀”에 의해 추론이 의미된다; 그러므로 단이 취급되는 여기서는 진리에 관하여 추론함이 의미된다, 그 이유는 선이 아직 인도하지 않기 때문이다. 다른 경우에서 뱀에 의해서는 악의, 교활, 사기가 뱀에 의해 의미된다, 그러나 독 있는 뱀, 독사 같은 경우는 독성 있는 추론이 의미된다

작은 길의 독사. 이는 선에 관하여 진리로부터 추론함을 의미한다. 이는 “독사(arrow-snake)”의 의미가 선에 관하여 추론함이다로부터 (아래에서 살핀다); “작은 길(path)”의 의미가 진리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작은 길의 독사”가 선에 관하여 진리로부터 추론함을 표시하는 이유는 “뱀”에 의해 추론함이 의미되고, 고로 “독사”에 의해서는 (추론) 자체를 계획하는 추론함, 즉 선을 향하여 진리로부터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단에 의해 표현되는 이들과 더불어 진리는 아래쪽에 있고, 선은 위쪽에 있기 때문이다.

말의 뒤꿈치를 문다. 가장 낮은 자연 평면으로부터의 오류를 의미한다. 이는 “문다(bite)”의 의미가 달라붙는(유착, adhere) 것, 그렇게 해서 상해를 입히는 것이다로부터; 그리고 “말의 뒤꿈치”의 의미가 가장 낮은 자연 평면으로부터의 오류들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 이유가 “뒤꿈치(heel)”는 가장 낮은 자연 평면과 육체 수준의 것을 표시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말”은 지적 부분을 표시한다; 여기서의 “말”은 오류들을 표시하는데, 그 이유는 이것이 가장 낮은 자연 평면, 또는 감각적 수준의 것에 속하는 지적 부분이기 때문이다. 진리에 있는 이들, 그러나 선 안에 아직 있지 않은 이들이 가장 낮은 자연적인 것으로부터 오류 안에 있는 이유는 선이 진리와 함께 있지 않으면, 진리는 어떤 빛 안에도 있지 못한다는 사실로부터 알는지 모른다; 그리고 선이 어떤 진리를 만날 때, 선은 진리를 계몽할 뿐만아니라, 선 자신의 빛 안으로 진리 자체를 가져다 놓는다. 그러므로 진리 안에 있기는 하나 아직 선 안에 있지 못한 이들은 그늘과 어둠 안에 있을 수밖에 없다; 그 이유는 진리는 자체로부터 빛을 가지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이 선으로부터 가지는 빛은 어렴풋한 수준의 빛, 마치 틈새로 새어나온 빛의 수준일 뿐이다. 이런 수준의 인물이 진리에 관하여 생각하고 추론할 때, 그리고 진리로부터 선에 관하여 추론하고 생각할 때, 그들은 어둠에서 유령을 보는 이들과 비슷하다, 그리고 유령들을 진짜 신체들이라고 믿는다; 또는 침침한 장소에서 벽에 있는 표시들을 보고 공상 안에서 이것들이 어떤 인간 또는 동물로 만들어 버리는 이들과 비슷하다; 여기서 취급되는 진리와 더불은 경우가 이런 수준의 경우이다. 그 이유가 그들은 진리들이 아닌 것을 진리들이라고, 즉 유령을 신체라고, 벽의 어떤 표시가 사람이라고 우기는 것이다. 더욱이 교회의 모든 이설(이단, heresy)들은 말씀으로부터의 어떤 진리 안에 있어왔던 이들, 그러나 선 안에 있지 않았던 이들로부터 발생되어져 왔다; 그들에게 이설은 진리 같이 정확하게 나타났다; 같은 방식에서 교회 안의 오류들도 그러하다. 이런 자신들만의 진리(오류)들을 선포해왔던 이들이 선 안에 있지 않아왔었다는 것은 그들이 신앙의 진리 뒤쪽 멀찍이 구석으로 선행의 선을 처박아 두거나, 이 선에 전혀 일치하지 않는 기발난 비꼬기 논리로 돌려 부분적으로 자동으로 거절되게 한다는 사실로부터 알는지 모른다.
진리 안에 있으나 아직 선 안에 있지 않은 이들이 가장 낮은 자연 평면의 수준으로부터의 오류들로부터 선과 진리에 관하여 추론한다고 말했는 바, 이제는 오류가 무엇인지 짚어보고 가야할 것 같다. 예로 사후의 삶을 가지고 생각해보자. 가장 낮은 자연적 수준으로부터의 오류 안에 있는 이들, 즉 진리 안에 있으나 아직 선 안에 있지 않은 이들은 자기 신체 외에는 인간 안에서 살아 있는 어떤 것이 있다는 것을 믿지 않는다, 하여 그가 죽을 때, 그가 다시 육체를 받지 않으면, 다시 일어날 수 없다고 믿는다. 이런 이들에게 이렇게 말해주면, 즉 우리의 육체 안에는 육체라는 것이 살아 있는 것 말고 또 다른 인간이 살고 있다는 것, 즉 내면의 인간이 있다는 것, 우리가 죽을 때 이 인간이 주님에 의해 들리워진다는 것, 들리워지면 인간은 영들과 천사들이 가지는 것과 같은 몸을 가진다는 것, 그리고 그는 보고, 듣고, 말하면서 어느 집단 안에 있다는 것, 이는 그가 세상에서의 자기와 같은 인간 자신으로 나타나 있다는 것이다. 허나 그들은 이것을 납득하지 못한다. 가장 수준 낮은 자연적인 것으로부터의 오류들이 그들로 이런 일들은 불가능하다고 믿게 만든다, 그 이유는 그들의 신체가 그들로 보지 못하게 하기 때문이다.
더욱이 이런 인물들이 영 또는 혼에 관하여 생각할 때, 이것마저 자연에서 보여질 수 있는 것이 아니면 이에 관한 생각도 여하간 오리무중해 있다, 하여 누구는 에테르이라고, 누구는 숨이라고, 누구는 불꽃이라고 얼버무린다; 어떤 이는 그것이 육체에 다시 결합할 때까지 그것은 거의 어떤 생명력도 가지지 못하는 단지 생각하는 힘이다고 말한다. 그들이 이런 식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그들에게 모든 내면의 것들이 그늘 안에, 어둠 안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오직 바깥쪽의 것들 만 빛 안에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야말로 그들이 실수 안으로 쉽게 빠져들게 하는 요인인 것이다; 하여 그들은 혼이 육체와 다시 함께 하는 것만에 몰두한다. 특히 세상의 파멸 때의 경우는 더욱 그러하다, 하여 지금까지 세상의 종말을 기다리고 있다. 누군가는 이렇게 생각할지 모른다. 인간의 생명은 들짐승의 생명과는 완전히 같지가 않다, 그리고 죽은 자의 누구도 인간에게 나타나서 생명의 상태를 알려주지 않는다는 것, 이렇게만 간단히 초점을 바꾸어 생각해도 그들은 항간에서 말해온 부활에 관한 교리로부터 물러나 앉고 만다. 이런 경우는 너무나 예가 많지만 지면 관계상 생략해야 할 것이다. 한마디로 본문과 연결해 생각을 정리하면, 그들이 선 안에 있지 않아서, 즉 선을 통하여 빛 안에 있지 않은 이유 때문이다. 위의 예를 든 경우 같은 수준에 머물고 막무가내로 그것을 당차게 고집하는 이들에 관하여 말해진다: “그리고 그의 기수는 뒤쪽을 향하여 떨어질 것이다; 나는 당신의 구원을 기다립니다, 오 여호와여.” 이는 주님이 도움을 가져다 주시지 않으면 퇴조함이 온다가 의미되고 있다.

그리고 그의 기수는 뒤를 향해 떨어질 것이다. 이는 그러므로 물러남이 온다를 의미한다. 이는 “뒤를 향해 떨어짐”의 의미가 멀어짐(recrde), 즉 진리로부터 멀어짐이다; “기수”의 의미가 가장 낮은 자연 평면으로의 오류들 안에 있는 이들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단”에 의해 위에서 서술한 이런저런 상태로 교회 내에 있는 이들이 의미되고, 그리고 주님의 왕국에서 마지막째(가장 바깥 경계선)에 있는 이들이 의미되기에, 그러므로 “단”에 의해 거짓들을 부화하고 퍼뜨리는 거짓 안에 있는 이들도 의미된다. 그들의 거짓들이 “말”이라 불리우고, 진리와 선에 관해 그들의 추론함이 “뱀”이라고 아래 구절에서 불리운다:
그의 말들이 코를 불며 거칠게 숨쉼이 단으로부터 들려졌다; 그의 강한 말들의 울음 소리에 온 토지가 와들와들 떨었다; 그리고 그들이 오고 토지와 거기 가득한 것, 도성과 그 안에 거주하는 이들을 삼켰다. 보라 내가 너희 사이에 뱀들을, 독사들을 보낸다, 이것은 마법에 걸려들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너희를 물을 것이다 (예. 8:16, 17).

나는 당신의 구원을 기다립니다, 오 여호와여. 이는 주님께서 도와주시지 않으면을 의미한다. 이는 “구원을 기다림”의 의미가 도움을 가져오는 것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진리 안에서 물러나고 선 안에서 아직 인도되지 않을 때 주님께서 가져오시는 도움에 관하여 주목해보자, 이것이 “기수가 뒤쪽으로 떨어지고, 나는 당신의 구원을 기다립니다, 오 여호와시여”에서 의미되고 있다. 우리가 알아야 하는 것은, 그들이 아래쪽, 또는 바깥쪽을 쳐다보고 있다는 점이다, 그 이유가 그들이 아직 선 안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에 비해 선 안에 있는 이들은 마치 거듭나는 이들 같이 위쪽 또는 안쪽을 쳐다보고 있다; 그 이유가 인간이 거듭나질 때, 질서는 이 길로 바뀌기 때문이다. 진리 안에, 그리고 선 안에 아직 있지 않은 이들이 아래쪽과 바깥쪽을 쳐다보는 바, 그들은 웅대한 사람에서 바깥쪽의 피부의 영역에 속하는 이들 사이에 있다; 그 이유가 바깥쪽 피부는 신체의 내면들로부터 바깥쪽으로 돌아서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밖인 것으로부터 그것의 닿음(접촉)을 가진다, 그러나 내부로부터의 닿음을 가지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이런 인물이 주님의 왕국 안에 있는 것은 분명하다, 그 이유가 웅대한 사람에 있기 때문, 그러나 최말단들에 있다.

19절. 갓, 군대가 그를 파괴할 것이다, 그리고 그는 뒤꿈치를 파괴할 것이다. “갓”이란 진리로부터의 일들 일 뿐, 아직은 선으로부터의 일들은 아님을 의미한다. “군대가 그를 파괴할 것이다”란 사려분별함 (판단함)이 없이 진행된 일들, 이것은 진리로부터 질주할 것임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는 뒤꿈치를 파괴할 것이다”란 그러므로해서 자연 평면에 있는 무질서를 의미한다.

갓. 이는 진리로부터의 일들 일 뿐, 아직은 선으로부터의 일들은 아님을 의미한다.
이는 “갓”의 표현함이 일들(works)이다로부터; 여기서의 경우, 진리로부터의 일들, 그러나 아직 선으로부터는 아닌 일들이다. 이는 내적 의미에서의 묘사됨으로부터 알게 된다. 또한 시리즈의 질서적 순서에 따라서 이기도 하다. 앞의 “단”의 경우는 진리 안에 있되 아직 선 안에 있지 않은 것, 그 뒤를 이어 진리들로부터의 일들이기는 하되, 아직 선으로부터의 일들은 아니다, 하여 순서적으로 이 일들의 품질이 이어진다.

군대가 그를 파괴할 것이다. 이는 사려분별함 (판단함)이 없이 진행된 일들, 하여 그들은 진리로부터 질주할 것이다를 의미한다. 이는 “군대(troop)”의 의미가 일들이다로부터, 여기서는 사려분별 없는 일들이다; 그 이유가 진리로부터 이되 아직 선으로부터가 아닌 일들을 행하는 이들은 불명료한 이해력을 지니기 때문이다, 이에 비해 선으로부터 일들을 행하는 이들은 계발된 이해력을 가진다, 그 이유는 선이 계발해주기 때문이다. 주님으로부터의 진리의 빛은 선을 통하여 지적 부분으로 흘러든다, 고로 진리 안으로, 그러나 진리 안으로 직접적으로는 아니다. 여기서는 경우는 태양의 빛과 같다, 이 빛은 열을 통하여 식물 왕국의 주체들 안으로 흘러든다, 그리고 그것들로 성장하고 꽃피우나, 직접적으로는 아니다; 그 이유가 빛이 열 없이 흘러든다면, 그것은 겨울의 경우인 바, 자라거나 꽃피우거나 하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더욱이 “그를 파괴한다”란 진리로부터 내몰아낸다를 표시한다.
그러나 여기서 “갓”에 의해 의미되는 이들이 누구인지가 말해질 것이다. 진리에 관련하여환영에 빠진 이들, 그럼에도 이로부터 일들을 하는 이들; 고로 진리로부터가 아니고, 선으로부터는 더 더욱 아닌 이들이 있다. 이런 일들을 수단으로 그들은 진리로부터부터 내몰린다, 그 이유가 진리 안에 있으나 아직 선 안에 있지 않은 이들은 어떤 것을 자기의 종교적 어떤 확신(광신적 신앙, religiousity)으로부터 행동 안으로 가져온 그 후 그는 마치 그 확신이 진리 자체인 듯 둔갑하여 그것을 방어하는데 골몰하고 그것 안에 웅크린다, 이런 상태의 당사자는 선 안으로 오지 않고서는 자신의 확신 자체를 수정하려 어떤 것도 받지 않으려 한다; 그 이유가 그렇게 행동함을 수단으로 그는 그것에 물들여져 있고 그것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고로 일들이 그를 진리에서 내몰리게 하는 셈이다. 이 외에도, 그는 이런 것들이 진리가 아닌데도 진리이다고 믿는다, 그 이유가 이런 인물들 또한 “단”에 의해 의미되는 이들 같이, “감각적인 것으로부터, 고로 사려분별함 없이 판단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생각해보자. 모든 이는 이웃으로 동등하게 세어져야 한다는 것을 진리로 삼는 이들이 있다. 따라서 그는 악한 자이든 선한 자이든 똑같은 혜택이 돌아가게 하는 것에 그의 관심이 모아져 있다. 고로 그는 사려 분별 없이 일들을 진행하는 셈이다. 또한 진리 자체에도 반대된다; 그 이유가 진리 자체인 즉, 모든 이는 이웃이다, 그러나 모든 이웃은 각기 다른 등차에 있다, 그리고 선 안에 있는 이웃이 더 등차가 높은 이웃이다.
또한 “갓”에 의해 모든 구원받음은 일들 만에 있다고를 만드는 이들도 의미한다, 이를 염두하시고 주님께서 바리새인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셨다:
고로 바리새인들은 스스로 서서 기도했다, 하느님, 저는 당신에게 감사합니다, 즉 제가 다른 이들 같지 않기 때문, 즉 저는 강탈자가 아니고, 부정한 자도 아니고, 간음자도 아니고, 심지어 세리조차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저는 일 주에 두 번 금식합니다, 저는 제가 소유한 모든 것의 십일조를 바칩니다 (눅. 18:11, 12);
그야말로 위 구절은 진리들 자체로서 외적인 것을 붙들고 있는 형국이다. 주님의 왕국에도 이런 이들이 있는데, 문지방에 서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말하신다, “내가 네게 말한다, 세리가 다른 이들(바리새인) 보다 (더) 의롭다여김을 받고 집으로 내려갔다”(눅. 18:14). 또한 바리새인도 의롭다여김을 받고 내려갔다, 그 이유는 그는 명령되었기에 순종함으로부터 일들을 했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갓에 의해 진리 아닌 것을 진리라고 부르면서 일들을 행한 이들이 표현되어진다; 어쨌든 그들의 일들은 진리들과 같다, 그 이유가 일들은 의지와 이해력이 행동선상에 있는 것밖에 더 아니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들을 구원하는 것은 선인 것을 행하겠다는 의도심을 지니는 것, 그리고 그들의 무지함 안에 순진의 어떤 것이 있는 것이다.
진리이지 않은 것으로부터 일하는데도 진리이다고 믿어 외적 일들 안에 있는 이들이 아래 구절에서 “갓”에 의해 의미된다:
여호와를 버린 너희, 나의 거룩함의 산을 잊은 너희, 갓을 위해 식탁을 차리고, 므니에게 음료 제물 (제주)을 따른 너희 (이. 65:11).
“갓에게 식탁을 차린다”는 것은 일들만에 있다 임을 표시한다.
그리고 예레미야서에서:
암몬의 아들들에게 향하여, 고로 여호와께서 말하신다: 이스라엘에 [아들들이 없느냐]? 그에게 상속자가 없느냐? 어찌하여 그의 왕이 갓을 물려 받고, 그의 백성들이 도성들에 거주하느냐? (예. 49:1);
“갓을 물려 받는”것은 진리이지 않은 것으로부터의 일들 안에서 살고 있는 이들을 표시한다; “암몬의 아들들”은 진리들을 거짓화하는 이들, 거짓화 해놓고 그것에 따라 사는 이들 이다, 갓에 관한 이런 사항들이 예언자에 의해 그들에게 적용되고 있다.

그리고 그는 뒤꿈치를 파괴할 것이다. 이는 그러므로 해서 자연 평면에 있는 질서의 결핍을 의미한다. 이는 “파괴하다(ravage)”의 의미가 진리로부터 내몰려지는 것이다로부터, 고로 질서가 혼란한 것, 또는 질서가 결핍되는 것이다; 그리고 “뒤꿈치”의 의미가 가장 낮은 자연 평면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러므로 분명한 바, “그는 뒤꿈치를 파괴할 것이다”에 의해 자연 평면에 있는 질서의 궁핍이 의미된다는 것이다. 진리로부터 일들을 하되, 아직 선 안에 있지 않은 이들은 그들의 자연 평면에 질서의 궁핍이 초래될 수밖에 없다, 그 이유는 일들이 자연 평면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그들은 영향을 미친 만큼에서 그들의 내면들이 닫힐 수밖에 없다; 그 이유가 내면들이 종결되는 평면이 자연 평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만일 이것이 질서의 결핍이다면, 내면들로부터 흘러드는 모든 것도 질서의 결핍 안에 있게 된다; 질서의 결핍은 어둠이고 불명료함이다, 하여 그들은 진리인 것을 볼 수 없고, 어둠과 불명료함 때문에 그들은 진리 아닌 것을 진리로 붙잡고, 비 진리로부터 일들을 하고 있다. 사실상 일들이 가장 필요한 것이 진리이다, 그 이유는 일들은 결과와 삶 안에 있는 선행과 신앙이기 때문이다, 하여 진리 없이 선행도 없다는 것을 누가 알지 못할까? 일들은 바깥쪽 형체로 있는 선과 진리밖에 더 아니다; 그 이유는 선은 의지력으로부터, 진리는 이해력으로부터 있고, 이것들이 행동 안으로 놓여질 때, “일들”이라 불리우는 것인 바, 선과 진리가 이러이러하면, 일들 역시 이러이러함이 분명하지 않을까?

20절. 아셀로부터 그의 빵은 지방이 있다, 그리고 그는 왕의 기쁨들을 산출할 것이다. “아셀로부터”란 애착들은 행복이다를; “그의 빵은 지방이 있다”란 선으로부터의 기쁨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는 왕의 기쁨들을 산출할 것이다”란 진리로부터 오는 즐거움(유쾌함)을 의미한다.

아셀로부터. 이는 애착들은 복됨(blessedness, 행복, 은총 입음)이다를, 즉 주님을 사랑함과 이웃을 향한 사랑으로부터 있는 천적 수준의 애착들의 복됨을 의미한다. 이는 “아셀”의 표현함이 영원한 생명(삶)으로부터의 행복(happiness), 그리고 애착들로부터의 복됨(blessedness)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더욱이 아셀은 복됨(blessedness)으로부터 그렇게 불리우는 이름이다. (이 대목에서 복됨이라는 단어는 역자가 사전에도 없는데 사용하고 있다. 그 이유가 영한 사전은 다른 두 영어 단어를 행복으로 모두 번역하나 영어 단어는 구분해 사용해서 이 구분을 표시하기 위해 약간 다른 단어로 복됨이라는 표현을 사용했을 뿐 실상 모두 행복이다. 그러나 단어의 괄호에 두 다른 영어 단어를 삽입해두어서 혹시 혼란을 야기하지 않을까 하여 덧붙인다. 영어 단어는 자연적 차원에서만, 영적 차원에서만, 또는 자연적과 영적을 혼동해 사용하거나 할 때 각각의 표현에 각각의 단어를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어휘는 많고 복잡하지만 일단 그 단어나 어휘를 알면 차후 구분이 완전히 자동적으로 잘되므로 읽는 자로 혼돈을 줄 염려가 사라지게 되어 있다, 예를 들면, 하늘을 성경에서 heaven이라고 표현하지, sky라는 단어를 거의 사용하지 않는데, 그 이유가 성경은 인간의 자연적 행복 보다는 영적 행복을 추구하는 책이기 때문이다. 감정의 표현인 기쁨의 경우도 joy는 가장 높은 수준의 영적 기쁨(천적 수준의 기쁨, 환희)을, delight은 보통의 영적 기쁨을, pleasure는 자연적, 육체적 수준의 기쁨, 하여 쾌락 같은 것을 말한다. happiness는 일반적, 또는 자연적, 영적 모두를 아우르되 자연적 수준이 강조되는 행복이나, blessedness는 영적 수준의 행복일 것으로 여겨진다. 역자가 언어학자가 아닌 이상, 위에 말한 것이 정확하다고 말할 수는 없으므로 아이디어 제공 수준에서 참조하기 바란다. 역자주) 아셀로 표현되는 행복은 쉽게 묘사되어질 수는 없다, 그 이유는 그것이 내적 부분에 있기 때문이다. 하여 누구와도 당사자의 육체 자체와 더불어 이 행복은 좀처럼 보여지지 않는다, 더욱이 감각 부분에도 그러하다. 그 이유가 육체에서 그의 삶 동안 (두 감각들을 지니는데), 인간은 자기 육체에서 거행되는 감각들에 대해서는 100% 명료하나, 그의 영에서 거행되는 감각 부분에서는 매우 불분명해 있다. 그 이유는 육체에 있는 동안 세상적 그의 관심사가 영적 감각을 방해하는 형국으로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자연적, 감각적인 것이 내향의 것들과 일치하는 정도만큼에서만 애착들의 복됨은 흘러들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겨우 흘러든 것마저도 실상 아주 희미한 수준, 하여 마음이 만족함으로부터 있어지는 고요함 정도에서만 감지 된다; 그러나 이 세상을 떠난 이후, 그것은 자체를 완전 명명백백하게 한다, 하여 그때는 복되고 행복한 어떤 것으로 지각되어진다, 그리고 이때 그것은 내면들과 외면들 모두에게 영향을 미친다. 한 마디로, 천적 수준의 애착들로부터의 복됨은 내적 경로를 수단으로 흘러드는 혼 또는 영 자체에 관한 것이다, 그리고 육체를 향하여도 꿰뚫는다, 그러나 자연적, 감각적인 것으로부터의 즐거움들이 길에 버티지 않는 만큼에서일 뿐이다.
그나마 이 복됨의 조금(whit, 조각)일지라도 자아 사랑과 세상 사랑의 즐거움에 있는 자에게는 가능하지 않다; 그 이유는 이 사랑들은 완전 반대 국면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런 사랑들에 있는 자들은 위엄을 드높이는 것, 재물이 풍부해지는 것, 누구보다 더 잘났다 칭송받는 것 등등을 벗어나 복됨이라는 단어는 납득조차 불가능해 있다. 이들에게 이렇게 말해본다면, 즉 이런 사랑들로부터의 즐거움들은 외적이다는 것, 하여 육체와 더불어 사라진다는 것, 그리고 사후 마음에 남는 것은 슬픔과 우울함으로 변하여진다는 것, 이런 것이 지옥들을 지배한다는 것; 그리고 천국에 있는 이들에 의하여 향유되는 만족함과 행복이 있는 내적 즐거움이 있다는 것, 등등이다. 이런 사항들을 그들은 전혀 납득하지 못한다, 그 이유는 외적 부분이 그들을 지배하고 내적 부분은 닫혀 있기 때문이다. 이 모두로부터 “아셀”에 의해 의미된 애착의 복됨이 무엇인지 알았으리라 본다.

그의 빵은 지방이 있다. 이는 선으로부터의 기쁨을 의미한다. 그 이유는 “지방이 많음, 살쪘음(fstness)”이 천적인 것, 또는 사랑의 선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단어 “지방”이 사용되되 빵에 결합되어 사용될 경우, 이는 사랑의 선을 의미하고, 이때 “지방”에 의해서는 이 사랑의 기쁨이 의미된다.

그리고 그는 왕의 기쁨들을 산출할 것이다. 이는 진리로부터 오는 유쾌함을 의미한다. 이는 “기쁨(delight)들”의 의미가 유쾌함이다로부터; 그리고 “왕”의 의미가 진리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고로 “왕의 기쁨들을 산츨할 것이다”는 진리로부터 유쾌한 것을 표시한다. 위에서 “선으로부터의 기쁨”과 “진리로부터 유쾌함”이 언급되었는데, 그 이유는 말씀의 모든 곳에 천국의 결혼이 있기 때문에서 이다. 천국의 복됨으로부터인 선으로부터 기쁨과 진리로부터의 유쾌함은 게으름에 있지 않고, 활동적임에 존재한다; 또한 활동적 임에서 기쁨과 유쾌함은 항구적이고 꾸준히 위쪽을 향하는 바, 복됨을 유발한다. 천국에 있는 이들과 더불어, 활동적임은 쓸모 있어짐을 수행함에 존재한다 (이들에게 이것은 선으로부터의 기쁨이다), 그리고 쓸모 있어짐의 목적에 풍미를 더한다 (이것은 그들에게 진리로부터의 유쾌함이다).

21절. 납달리는 풀어 놓은 암사슴이라, 세련된 강연을 한다.

납달리. 이는 시험들 이후의 상태를 의미한다. 이는 납달리의 표현함이 시험이다로부터; 또한 시험들 이후의 상태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더욱이 납달리는 “씨름함”을 뜻하는 단어로부터 명명되어졌다, 이는 영적 의미에서 시험들을 의미한다.

풀어 놓은 암사슴. 이는 자연적 애착의 자유를 의미한다. 이는 “암사슴”의 의미가 자연적 애착이다로부터 (아래에서 살핀다); 그리고 “풀려 있다”의 의미가 자유하다이다로부터, 그 이유가 붙잡힌 암사슴이 풀어나진다면, 이는 자유를 가지기 때문이다. 시험의 상태로부터 해방됨이 “풀어나진 암사슴”에 비교되는 이유는 암사슴이 숲의 동물이고, 여느 짐승 보다 자유함을 사랑하는 짐승이기 때문, 이것은 또한 자연 평면과도 닮은 데가 있다; 그 이유가 이것(자유함을 사랑함)은 그것의 애착들의 기쁨 안에서 있기를 사랑하기 때문, 결과적으로 자유함 안에 있기를 사랑한다는 말이다, 그 이유가 자유함은 애착에 속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암사슴”이 자연적 애착을 의미하는 이유는 암사슴이 [선한] 애착들 중의 하나를 의미하는 짐승이기 때문이다, 즉 쓸모 있음과 식품을 위해 있는 짐승들, 어린 양, 양, 염소, 염소새끼, 수소, 거세한 수소, 암소 등과 비슷한 대목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축화된 이런 짐승들은 태워바침이나 제물로 사용되기 때문에 영적 수준의 애착들을 의미함에 비해, 암사슴은 이런 쓰임새에는 있지 않는 바, 자연적 수준의 애착밖에 더 의미하지 않는다.
자연적 애착들이 “암사슴”에 의해 의미되는 것을 아래 구절에서 읽을 수 있다:
여호와께서는 내 발을 암사슴들의 것 같게 만드신다, 그리고 나를 내 높은 장소에 서게하신다 (시. 18:33).
그리고 하박국서에서:
여호비 주님은 나의 강함이시다, 그분은 내 발을 암사슴의 것 같게 놓으신다, 그리고 나를 내 높은 장소 위에서 행군하게 만드신다 (합. 3:19).
“암사슴들의 것 같게 발을 만드는” 것은 애착들의 자유함에 있는 자연 평면을 표시한다. “암사슴들의 것 같이 발을 놓는” 것이 이 의미를 가지는 것은 발이 암사슴들의 것 같이 달리기 위해 재빠르고 행동적인 발을 만드는 것이 영적 어떤 것이 아니다는 사실로부터 알런지 모른다; 그럼에도 영적인 어떤 것이 포함한다는 것은 즉각 이어지는 말이, “여호와께서는 그를 놓아서 그가 그의 높은 장소 위에서 행군하게 하신다” 임에서 분명해진다. 이것이 자연적 애착 넘어 있는 영적인 애착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가 아래 구절에 있다:
절름발이가 숫사슴 같이 뛸 것이다 (이. 35:6);
그 이유가 “절름발이”에 의해 선 안에 있는 이, 그러나 아직 진짜 선 안에 있지는 않는 이가 의미되기 때문이다.
다윗서에서:
숫사슴이 물있는 시내를 갈구함 같이 제 혼이 당신을 갈구합니다 (시. 42:1);
위에서 “숫사슴”은 진리에 애착함이다; “물있는 시내를 갈구함”은 진리들을 갈망함을 표시한다.
예레미야서에서:
시온의 딸로부터 그녀의 모든 영예는 가버렸다; 그녀의 제 1 인 자들은 숫사슴들 같이 되어진다, 그들은 풀밭을 발견하지 못했다 (애. 1:6)
위에서 “시온의 딸”은 선에 애착함을 표시한다, 이 애착함은 천적 수준의 애착함으로부터 이다; “제 1 인 자”들은 이 교회의 제 1 의 진리들을 표시한다, 이는 숫사슴들에 비교되어진다, 그러므로 자연적 진리의 애착들이 의미된다; 그리고 “숫사슴들이 풀밭을 발견 못함”에 의해서는 진리들과 그것들의 선 없이 있는 자연적 애착들을 의미된다.
마찬가지로 “암사슴”에 관한 것을 아래 구절에서 읽을 수 있다:
땅이 조각으로 갈라져버렸다, 토지에 비가 내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농부는 부끄러워지고 말았다, 그들은 자기들의 머리들을 덮었다, 그 이유는 새끼를 낳은 암사슴조차도 들판에 풀이 없어 새끼를 포기했기 때문이다 (예. 14:4, 5)
“암사슴”은 자연적 선에 애착함을 표시한다; “들판에서 새끼를 낳았다”란 자연적 애착들이 교회의 영적인 것들과 결합함을 표시한다; 그러나 이 애착들이 진리들과 선들이 결핍되어졌기 때문에, 말해지는 바, 그녀는 “포기했다(내버렸다), 풀이 없기 때문이다.” 아마 모든 이는 이 구절에서 “암사슴”에 어떤 내적 의미가 있을 것임을 눈치챘을 것이다; 그 이유가 내적 의미 없이는 “암사슴이 들판에 새끼를 낳고 풀이 없어 그것을 포기했다”에 의해 뜻해지는 바를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다윗서에서:
여호와의 음성이 암사슴들로 낳게 만드신다, 그리고 숲을 발가벗기신다; 그러나 그분의 성전에서 모든 이는 말한다, 영광 (시. 29:9);
“암사슴들로 낳게 만드는 여호와의 음성”이라는 말에 영적인 내적 의미가 있다는 것은 이 뒤를 이은 말, “그러나 그분의 성전에서 모든 이들이 말한다, 영광”이 이어짐에서 분명해진다. 이 말은 영적 의미 없이는 앞의 암사슴들과 숲과 일치되지 않는다.

강연을 세련되게 한다. 이는 마음(mind)이 기뻐함(gladness)을 의미한다. 이는 “세련된 강연”의 의미함이 마음이 기뻐함이다로부터; 그 이유는 모든 강연이 마음(지성)으로부터 진행되기 때문, 하여 마음이 기쁘고 기운차 있을 때, 세련된 강연을 만들기 때문이다.

이상 살핀 바로부터 단, 갓, 아셀, 납달리에 관한 이스라엘의 예언적 말함에는 내적 의미가 있다는 것, 이 의미 없이 그의 발언은 이해될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해진다. 즉, “단은 길 위의 뱀, 작은 길의 독사이다, 말의 뒤꿈치를 문다, 그의 기수는 뒤쪽으로 떨어질 것이다”; 또한 “군대가 갓을 파괴할 것이다, 그는 뒤꿈치를 파괴할 것이다”; 또한 “아셀의 빵은 지방이 있다, 그는 왕에게 기쁨들을 줄 것이다”; 또한 “납달리는 풀려진 암사슴이다, 세련된 강연을 한다”에 대해서이다. 내적 의미라는 열쇠 없이 누가 이런 사항들이 뜻하는 것을 알 수 있을까? 사실 이런 사항들은 야곱의 아들들, 또는 지파들에 관해 말해진 것이 아님은 “날들의 끝에서” 그들에게 떨어지는 말들이 아니었다는 사실로부터도 간단히 파악된다. 따라서 그들에 의해 표현되는 이런저런 것들이다는 것을 이미 살핀 바로 분명해졌을 것이다.

22-26절. 요셉은 결실이 풍부한 자의 아들인데, 아들이다는 점에서는 샘 가까이 결실이 풍부한 자이고, 딸이다는 점에서는 성벽 위에서 행진하는 딸이다. 23 활쏘는 자가 그를 더 비참하게 하고, 그를 향해 쏘고, 그를 미워한다. 24 그러나 그는 자기 활의 강함 안에 앉아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의 손들의 무기들은 강력한 야곱의 손들에 의해 힘세지게 만들어졌다. 거기로부터 목자, 이스라엘의 돌이 있다. 25 너의 아버지의 하느님으로 말미암아, 그분이 너를 도울 것이다, 그리고 솨다이와 더불어, 그리고 그분은 위의 천국의 복됨을 가지고 너를 복되게 하실 것이고, 아래에 드러 누운 깊음 속의 복됨과, 가슴들과 자궁의 복됨을 내리실 것이다. 26 네 아버지의 복됨은 네 선조들의 복됨 보다 더 우세하여 시대의 언덕들의 바램과 맞먹을 것이다.그것은 요셉의 머리 위에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의 형제의 나지르인의 머리의 관 위에 있을 것이다.

요셉은 결실이 풍부한 자의 아들이다. 이는 영적 왕국의 교회, 최고 높은 의미에서 신성한 영적 부분에 관련되는 주님을 의미한다. 이는 요셉의 표현함이 최고 의미에서는 신성한 영적 부분에 관련한 주님을, 내적 의미에서는 영적 왕국과 신앙의 선을, 그리고 외적 의미에서는 열매가 풍성함과 번성함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리고 “요셉”이 선의 열매가 풍성해짐과 진리의 번성함을 표시하기 때문에 그는 “결실이 풍부한 자의 아들이다”라고 불리운다. 여기서 요셉에 의해 주님의 영적 왕국이 묘사되나, 앞의 유다에 의해서는 주님의 천적 왕국이 묘사된다고 말해진 바 있다; 그 이유는 천국을 구성하는 두 왕국이 천적, 영적 왕국이기 때문이다. 천적 왕국은 셋째 천국, 또는 가장 안쪽 천국이고, 영적 왕국은 둘째 천국, 또는 중간 천국을 구성한다. 영적 왕국에서 주님은 달 같이, 천적 왕국에서는 태양 같이 나타나신다. 요셉과 유다에 의한 두 왕국의 차이는 단지 받는 그릇의 차이나 다름이 없다. 주님은 선밖에 그 외는 아니시다. 그분의 신성한 선으로부터 진행하는 것이 천국 안으로 흐르는데, 그분의 천적 왕국으로 흐를 경우, “신성의 천적 부분”이라 말하고, 영적 왕국으로 흐를 경우, “신성한 영적 부분”이라 말할 뿐이다. 즉 받는 그릇에 따른 상대적, 관계적 표현일 뿐이다.

아들이다는 점에서는 샘 가까이 결실이 풍부한 자이다. 이는 말씀으로부터 오는 진리로부터 결실이 있음을 의미한다. 이는 “아들”의 의미가 진리이다로부터; 그리고 “결실이 풍부한 자”의 의미가 진리로부터 결실이 풍부함이다; 그 이유가 영적 의미에서 결실이 풍부함은 출생, 태생 같이 진리와 선의 결실이 풍부함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샘(fountain, 원천)”의 의미가 말씀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러므로 분명한 바, “아들이다는 점에서는 샘 가까이에 있는 결실이 풍부한 자이다”에 의해 말씀으로부터의 진리로부터 결실이 풍부함이 의미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요셉에 의해 표현되는 교회, 즉 영적 수준의 교회 속에 있는 이들은 말씀의 진리로부터 선인 것을 아는 것을 배운다, 고로 진리를 통하여 선 안으로 들어감이 있어진다; 그러므로 그들은 “결실이 풍부한 자”에 의해 의미된 열매가 풍성함을 가진다.

딸이다는 점에서는 성벽 위에서 행진하는 딸이다. 이는 거짓들에 맞서 싸우기 위하여를 의미한다. 이는 “딸”의 의미가 교회이다로부터; 여기서는 영적 수준의 교회, 그 이유는 이것이 여기서 취급되는 주제이기 때문; 그리고 “성벽 위에서 행진함”의 의미가 거짓과 싸우기 위하여를 의미하는데, 이는 이어지는 말로부터 분명해진다, 즉 “사수가 그를 비참해지게 한다, 그리고 그를 향해 쏜다, 그리고 그를 미워한다, 그리고 그는 그의 활의 강함 안에서 앉을 것이다.” 그러므로 진리에 맞서 거짓들이 싸우는 것이 의미된다.
“담 위에서 행진한다”라고 말해진 이유는 내적 의미에서 취급되는 주제가 거짓들에 의해 진리가 공격받음, 그리고 진리가 거짓에 맞서 방어함이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요셉에 의해 표현되는 영적 수준의 교회는 계속적으로 공격을 받고, 주님에 의해 이것이 방어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말씀에서 이 교회에 속하는 것들이 도성에 비교되어, 그 안에 성벽, 외루, 성문, 빗장 등을 지닌 성에 비교되고 있다; 그리고 이 도성이 공격당함에 의해서는 거짓들에 의해 진리가 공격 당함이 묘사되고 있다; 그러므로 “도성”은 교리적인 것들이 의미된다, 그리고 그것의 “성벽”은 그것을 방어하는 신앙의 진리들이다, 그리고 반대적 의미로는 그것을 파괴하는 거짓들이다. “성벽”이 방어하는 신앙의 진리를 의미하는 것을 아래 구절에서 읽을 수 있다:
우리는 강한 도성을 가지고 있다; 구원을 그분께서는 성벽들과 성채들을 위하여 임명하실 것이다. 너희는 성문을 열어라, 하여 신의를 지키는 정의로운 나라가 들어갈는지 모른다 (이. 26:1).
다시:
너희는 너희 성벽들을 구원이라 부를 것이다, 그리고 너희의 성문은 찬양(이라 부를 것이다) (시. 60:18).
다시:
보라 나는 너희에게 손 위에 새겼었다, 너희 성벽들은 내 앞에서 계속적으로 있다 (이. 49:16);
“성벽들”이 신앙의 진리들을 표시한다. 다시:
나는 너희 성벽들 위에 경비병들을 놓을 것이다, 오 예루살렘이여; 그들은 마음에서 여호와를 간직하면서 낮과 밤 내내 침묵하지 않을 것이다 (이. 62:6);
위도 의미는 앞과 같다. 예레미야서에서:
고로 여호와 체바욷께서 말하신다, 나는 너희가 바빌론과 싸우려 지닌 전쟁의 무기들을 되돌릴 것이고, 성벽 없이 너희가 포위되게 할 것이다. 나 자신 내뻗은 선으로 너희에 맞서 싸울 것이다 (예. 21:4, 5).
다시:
여호와께서는 시온의 딸의 성벽을 파괴하기로 작정하셨다; 그분은 누벽과 성벽이 통곡하게 만드셨 다; 그들은 함께 쇠약해질 것이다. 그녀의 성문은 땅 안으로 가라앉을 것이다; 그분은 그녀의 빗장들을 파괴하시고 부수셨다 (애. 2:8, 9).
에스겔서에서:
아르왓의 아들들과 너의 군대가 내 성벽 위 빙둘러 있었다; 그리고 가마딤이 너의 망루에 있었다; 그들은 그들의 방패들을 네 성벽 빙둘러 걸어두었다, 그들은 너의 아름다움을 온전하게 했다 (겔. 27:11);
두로에 관하여 말하고 있다, 이를 수단으로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들이 의미되고 있다.
선과 진리에 관한 것들이 “성벽”과 “도성”에 의해 의미되는 것은 요한에 의해 보여진 천국으로부터 내려오는 거룩한 성 예루살렘에 대한 묘사로부터 매우 분명해진다. 거기서 새로운 교회가 의미되는 것은 모든 세부 사항들로부터 명백하다; 그리고 거기의 “성벽”에 의해 주님으로부터 진행하는 신성한 진리가 의미되어진다: 즉
천국으로부터 내려오는 거룩한 예루살렘, 크고 높은 벽을 가지고 있고, 열두 문들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도성의 벽은 열 두 기초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것들에 어린 양의 열 두 사도들의 이름들(이 있다). 그리고 나에게 말하고 있었던 그는 도성과 그곳의 문들과 벽을 측량하였다. 그리고 그가 도성의 벽을 쟀는데, 일백 사십 사 큐빗이었고, (이는) 천사에 속하여 있는 사람의 치수이다. 그리고 도성의 벽의 구조물은 벽옥이었다, 그리고 도성은 순수한 유리 같은 순금이었다. 그리고 도성의 벽의 기초들은 모두 각각 귀중한 돌로 장식되어 있었다. (계. 21:10-19);
“성벽”은 주님으로부터 진행하는 신성한 진리이다, 그리고 그러므로 선행의 선으로부터의 신앙의 진리이다는 것은 성벽에 관하여 말해지는 모든 것으로부터 분명해진다, 즉 그것은 “열두 기초들을 가졌고, 그것에는 어린 양의 열두 사도들의 이름이 있다.” “열둘”에 의해 모두가 의미된다; 그리고 “성벽”과 그것의 “기초들”은 신앙의 진리들, 마찬가지가 “열두 사도들”이다; 또한 “성벽은 144큐빗이었다.” 이 숫자에 의해 “12”와 같은 것이 의미된다, 그 이유가 12×12=144 이기 때문이다. 이 숫자가 성벽에 적용될 때 이는 신앙의 모든 진리들과 선들을 의미하기에 덧붙여진 말은 “사람의 치수, 즉 천사의 치수”이다는 것이다; 또한 “성벽의 기초는 벽옥이었다, 그리고 그것의 기초들은 모두 각각의 보석들로 장식되었다,” 그 이유가 “벽옥”에 의해, 그리고 “보석”에 의해 신앙의 진리들이 의미되기 때문이다.
반대적 의미에서 “성벽”은 파괴시키는 거짓들이 의미되는데 아래 구절에 있다:
환상의 골짜기에 떠들썩함의 날; 주 여호비 체바욷께서 성벽을 파괴하신다, 그리고 산을 향하여 외침이 있다; 그 이유가 엘람이 화살통을 메고, 사람의 병거와 더불어, 마병과 더불어 이기 때문, 마병들은 성문에서조차 그 자신을 놓이게 했다 (이. 22:5-7).
다시:
네 성벽들의 피난의 요새를 그분은 풀이 죽게 하시고, 내던지시고, 땅으로 날려보시고, 먼지로 되게 조차 하실 것이다 (이. 25:12).
예레미야서에서:
너희는 그녀의 성벽들에 가라. 그리고 던져라 (예. 5:10).
다시:
나는 벤하닷의 궁전을 삼킬 불을 다마스커스의 벽에 지필 것이다 (예. 49:27).
다시:
바빌론의 성벽들을 향하여 기를 들어올려라, 경계를 계속하라, 경비병을 세워라 (예. 51:12).
에스겔서에서:
그들은 두로의 성벽들을 전복할 것이다, 그리고 그녀의 탑들을 파괴할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녀로 부터 그녀의 먼지를 긁어낼 것이다, 그리고 그녀를 바위의 마름(dryness)으로 만들 것이다
(겔. 26:4).

그를 더 비참하게 한다. 이는 거짓들을 수단으로 저항함을 의미한다. 이는 “더 비참하다”의 의미가 저항하다이다로부터, 그 이유가 싸움이 지금 취급되는 동안 저항이 큼에 비례하여 비참함도 더해지기 때문이다. 저항함이 거짓을 수단으로 한다는 것은 이어지는 말로부터 분명해진다.

그를 향해 쏜다. 이는 그들은 이런 거짓들로부터 싸운다를 의미한다. 이는 “쏘다”의 의미가 거짓들로부터 싸우는 것이다로부터 분명하다; 그 이유가 “활”이 교리를 의미하고, “화살”, 또는 “표창(dart)”은 교리 속에 있는 이것저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고로 진리들 안에 있는 이들과 더불어서는 교리의 진리들을, 그리고 거짓들에 있는 이들과 더불어서는 교리의 거짓들을 의미한다. “쏘는”것이 여기서 거짓들로부터 싸우는 것인 이유는 여기서 취급된 주제가 거짓들 안에 있는 이들이기 때문이다.

그를 미워한다, 활쏘는 자. 이는 모든 적개심을 동원하여를 의미한다. 이는 “미워한다”의 의미가 모든 적개심이다로부터, 그 이유가 누군가를 미워함에서 붙들고 있는 자는 그가 할 수만 있다면 최대한 모든 적개심으로 박해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활쏘는 자”의 의미가 여기서는 영적 교회의 사람들에 반대하는 이들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 이유가 “활로 쏘는 자”, 또는 “궁수”가 영적 인간을 표시하는 이유는 “활”이 영적 교회의 교리적인 것들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반대적 의미에서 “활로 쏘는 자” 또는 “궁수”는 영적 인간을 적으로 삼는 자들을 표시한다. 그러므로 분명해지는 바, “궁수가 그를 미워한다”는 거짓에 있는 이들이 모든 적개심으로 영적 교회인을 박해한다가 의미된다.

그러나 그는 자기 활의 강함 안에 앉아 있을 것이다. 이는 그는 교리 속의 싸우는 진리를 수단으로 안전하다를 의미한다. 이는 “앉아 있다”의 의미가 안전하다이다로부터, 그 이유가 자기 활의 강함에 앉은 자는 안전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활”의 의미가 교리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교리의 강함이 진리이다, 그 이유가 교리 안에서 진리가 아닌 것은 아무 소용도 없기 때문이다. 진리가 강한 이유는 선이 진리를 통하여 행동하기 때문에서 이다; 선에는 악 또는 거짓이 접근할 수 없는 특성을 선 자체가 보유하기 때문, 고로 지옥의 어떤 패거리의 접근도 불가능하기 때문, 오히려 선이 접근하면, 또는 선 안에 있는 천사가 접근하면 이들은 흠칫 달아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선이 지옥으로부터 인간과 더불어 있는 이 패거리들과 싸우기 위하여, 또한 세상으로부터 도착하는 영들을 보호하기 위하여, 마찬가지로 더 낮은 땅에 있는 이들을 보호하기 위하여, 선은 진리를 통하여 행동한다, 그 이유가 이 방법에서 선이 그것들에 접근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얼마나 많은 힘이 진리 안에 있는지를 나로 분명히 알도록 다른 삶에서 보는 것이 주어졌다. 자연적 진리에 있었던 어떤 영의 경우, 이 세상에서 그의 삶 동안 그는 의로운 자이었는데, 많은 지옥들을 통과해갔다, 그리고 거기로부터 나와 이야기를 했다, 그리고 그것들을 서술했다; 그가 힘과 강함에 있었고, 아주 대단했으므로 지옥의 영들이 그에게 감염시키는 것이 전혀 불가능했다는 것, 하여 그는 이 지옥으로부터 저 지옥으로 건너갔지만 안전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진리 안에 있지 않은 이들에게는 불가능한 것이다. 이 모두로부터 분명한 바, “활의 강함에 앉음”이 교리의 진리를 수단으로 안전해 있다를 의미함이다: 이것이 싸우는 진리를 수단으로 이다는 것은 전에 진행된 것으로부터 뒤이어진다, 즉 “궁수가 그를 향해 쏘고, 그를 미워한다”에 뒤이어진다.

그리고 그의 손들의 무기들은 힘세어지게 만들어졌다. 이는 싸우기 위한 기세의 힘을 의미한다. 이는 “무기”와 “손”의 의미함이 힘(power)들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것이 싸움을 위한 기세(force)의 힘이 분명한 이유는 취급되는 주제가 싸움이기 때문이다.

강력한 야곱의 손에 의해. 이는 주님의 신성한 인간의 전능하심을 의미한다. 이는 “손”의 의미가 힘이다로부터, 그리고 주님이 취급되는 최고 의미에서 전능하심이다. 그리고 “강력한 야곱”의 의미가 주님의 신성한 자연 평면, 고로 그분의 신성한 인간이다로부터; 이것이 “강력한 야곱”에 의해 뜻해지는 주님이시다는 것은 아래 구절로부터 알게 된다:
그가 여호와에게 맹세하고 강력한 야곱에게 서원했다, 나는 내가 여호와를 위한 장소, 강력한 야곱의 주택을 발견할 때까지 내 집의 천막 안으로 가지 않을 것이다 (시. 132:2, 3, 5).
그리고 이사야서에서:
모든 육체가 알는지 모른다, 즉 나 여호와가 너의 구세주, 너의 되찾는 자, 강력한 야곱이시다는 것이다 (이. 49:26).
다시:
들어라 오 야곱 나의 종아, 그리고 내가 선택한 이스라엘아, 나는 내 영을 너희 씨 위에 쏟을 것이다, 그리고 나의 축복을 네 아들들 위에; 누군가가 말할 것이다, 나는 여호와의 것이다, 그리고 누군가는 그분 자신을 여호와의 이름을 수단으로 부를 것이다, 그리고 또 다른 자는 그의 손으로 여호와의 것임을 적을 것이다, 그리고 자신을 이스라엘의 이름으로 별칭하여 부를 것이다
(이. 44:1, 3, 5).
“이스라엘”이 최고 의미에서는 주님을 표시함을 아래에서 읽는다:
이스라엘이 어린 아이였을 때, 그때 나는 그를 사랑했다, 그리고 나의 아들을 이집트로부터 불렀다 (호. 11:1);
주님이 “이스라엘”에 의해 뜻해짐이 아래에서 분명하다:
요셉은 소년과 더불어 이집트로 갔다, 하여 예언자에 의해 말해진 것, 즉 이집트로부터 나는 나의 아들을 불렀다가 성취되었다 (마. 2:14).

거기로부터 목자, 이스라엘의 돌이 있다. 이는 이로부터 영적 왕국 속의 모든 선과 진리가 있다를 의미한다. 이는 “목자”의 의미가 신앙의 진리를 수단으로 선행의 선으로 인도하는 자이다로부터; 여기서 최고 의미에서 주님이 취급되는 바, 이는 선과 진리 자체를 의미한다; “돌”의 의미가 진리이다로부터; 그리고 이스라엘의 표현함이 영적 교회이다로부터; 그 이유가 “이스라엘”은 영적 선, 또는 진리의 선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진리의 선이 영적 교회의 본질 자체이다로부터, 그러므로 “이스라엘”에 의해 영적 교회가 의미된다, 그리고 보다 높은 의미에서는 주님의 영적 왕국이 의미된다.
이 모두로부터 분명한 바, “거기로부터 목자, 이스라엘의 돌”에 의해 주님의 영적 왕국의 모든 선과 진리가 있다가 의미됨이다. 가장 높은 의미에서 “이스라엘의 돌”은 그분의 영적 왕국에 있는 진리 측면에서의 주님이신데, 그 이유는 “돌”이 일반적 의미에서 성전을, 특수적 의미에서는 성전의 기초를 의미하기 때문, 그리고 “성전”에 의해 주님의 신성한 인간이 의미되고 (요. 2:19, 21), 그리고 또한 성전의 기초 (마. 21:42, 44, 이. 28:16)도 의미한다. 가장 높은 의미에서 “돌”은 그분의 영적 왕국 속에 있는 신성한 진리 측면에 관련한 주님을 표시하는 구절을 아래에서 읽을 수 있다:
건축가들이 거절한 돌이 모퉁이의 머리가 되었다. 이것은 여호와로부터 행해졌다: 이것은 우리의 눈에 놀라웁다 (시. 118:22, 23).
“돌”이 여기서 주님이시다는 것이 아래에서 분명해진다:
쓰여진 바, 건축가들의 거절한 돌, 같은 돌이 모퉁이의 머리가 되었다; 이 돌 위에 떨어지는 자는 누구든지 부셔질 것이다; 그러나 그 위에 누가 떨어지든, 그 돌은 그를 가루로 만들 것이다 (눅. 20: 17, 18);
위는 주님께서 자신에 관하여 말하신 말들이다. 이사야서에서:
그분이 너의 두려워함이 되게 하라, 그분이 너의 경외함이 되게 하라; 그 이유가 그분은 성소를 위해 있을 것이다, 비록 이스라엘의 두 집들에게 걸려 넘어지는 돌, 그리고 위반케 하는 돌일지라도; 그들 사이에 많은 이들이 걸려 넘어질 것이다, 그리고 추락한다, 그리고 부셔질 것이다
(이. 8:13-15);
위에서 주제는 주님이시다. 다시:
고로 주 여호비께서 말하셨다, 보라 나는 시온에 반석을 위하여 돌을, 연단된 돌을 귀중한 모퉁이의 돌로, 견고한 반석의 돌로 놓을 것이다; 믿는 자는 서두르지 않을 것이다 (이. 28:16).
스가랴서에서:
여호와 체바욷께서 그분의 양떼를, 유다의 가문을 방문하실 것이다, 그리고 그들을 전쟁애서 영광의 말(horse)로서 만들 것이다; 그분으로부터 모퉁이돌이 있다. 그분으로 못(nail)이 있다, 그분으로부터 전쟁의 활이 있다 (슥. 10:3, 4)
다니엘서에서:
당신은 손으로 행해지지 않고 잘라내진 돌을 보셨습니다, 그리고 그 돌이 상의 발을, 즉 철과 진흙이었던 발을 쳤습니다, 그리고 그것들을 조각으로 부셨습니다. 상을 부순 돌은 큰 바위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온 땅을 채웠습니다. 천국들의 하느님이 영원히 파괴되지 않을 왕국을 일으키실 것입니다, 그분의 왕국은 또 다른 백성에게 돌아가 있지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이 왕국은 모든 왕국들을 가루로 부수고 살라버릴 것입니다, 그러나 그 자체는 영원히 설 것입니다. 이와같이 당신은 보셨은 즉, 사람의 손이 뜨지 않은 돌이 철, 동, 진흙, 은, 금을 부순 것을 보신 것입니다 (단. 2:34, 35, 44, 45);
위 구절에서 “돌”은 가장 높은 의미에서 주님이 뜻해진다, 그리고 관계적 의미에서 그분의 영적 왕국이 뜻해진다; 돌이 “바위로부터 떼어져 나왔다”는 것은 이것이 신앙의 진리로부터 이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이유가 이것이 말씀에서 “바위”에 의해 의미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신앙의 진리가 “돌” 또는 “바위”에 의해 의미되기에, 주님의 영적 왕국 또한 의미된다, 그 이유가 이 왕국은 신앙의 진리 안에 있기 때문, 그리고 이로부터 선 안에 있기 때문이다.
야곱이 베고 잤던 돌, 그 후에 그가 기둥으로 놓은 돌, 마찬가지가 의미되어 있다:
야곱이 그의 잠에서 깨어났다, 그리고 그는 말했다, 정녕 하느님이 이 장소에 계신다, 그리고 나는 그것을 알지 못했다; 그리고 그는 두려워졌다, 그리고 말했다, 이 장소는 얼마나 떨리는 곳인가! 이것은 하느님의 집밖에 더 아니다, 그리고 이것은 천국의 문이다. 그리고 야곱은 아침에 일찍이 일어났다, 그리고 그가 베게로 삼았던 돌을 가져왔다, 그리고 그것을 기둥으로 세웠다, 그리고 기둥의 머리에 기름을 부었다; 그리고 그는 말했다, 내가 기둥으로 세운 이 돌은 하느님의 집일 것이다 (창. 28:16-18, 22).
고대인들은 돌을 수단으로 가장 높은 의미에서는 주님을, 표현 의미에서는 그분의 영적 왕국을 이해했다. 아래 구절을 읽어보자:
여호수아는 여호와의 성소에 있었던 돌을 상수리나무 아래 세웠다. 그리고 여호수아는 전체 백성에 게 말했다, 보라, 이 돌이 우리에게 증거를 위해 있을 것이다; 그 이유가 이 돌이 여호와의 모든 강연들, 그분이 우리에게 말하셨던 것을 들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돌은 너희를 향하여 증거로서 있을 것이다, 너희가 너희의 하느님을 부인하지 않도록 (여. 24:26, 27).

요셉에 관련한 앞 세 절 (22-24절, 라틴 원문은 “앞 두 절”이라 말하고 있음 역자주) 의 내용들이 내적 의미에서 있다는 것은 이미 살핀 내용들로부터 분명할 것이다. 이 내용들은 영적 왕국의 본성이 알려지지 않으면 여전히 불분명해 있을 수밖에 없다. 이 왕국은 신앙의 진리 안에 있고, 이 진리로 생활의 진리를 만들고 이로부터 선을 만드는 이들로 구성되는 왕국이다. 그 이유가 신앙의 진리가 살아내질 때, 이것이 선이 되고, 이 선은 “진리의 선”이라 불리운다, 그러나 그것의 본질 측면에서 이것은 행동에 있는 진리이다, 주님의 영적 왕국에서 신앙의 진리는 다양하다, 그 이유는 예를 들면, 이 교회에서는 이것이 진리라고 말하지만, 저 교회에서는 진리가 아니라고까지 말하는 경우도 흔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은 각 교회의 교리에 따른 것이다; 고로 사실상 이 교리들이 진리라고 불리운 셈이다. 이런 진리들이 선과 결합되어져서 영적 교회의 선을 만든다; 고로 그것의 선은 그것의 진리가 어떠한지가 관건인 셈이다. 그 이유는 선이 진리들로부터 그것의 품질을 가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분명한 바, 영적 교회의 선은 불순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불순하기 때문에, 영적 수준의 인간들은 신성한 수단이 아니면 천국 안으로 받아들여질 수가 없다. 주님께서는 세상에 오시고, 자신 안에서 인간을 신성으로 만드심으로 해서 신성한 인간 구원의 수단 자체를 만드신 것이다; 이를 수단으로 영적 수준의 인간은 구원되어진다. 그러나 (다른 삶에서) 그들과 더불은 선은 불순하기 때문에 그들은 악과 거짓들에 감염될 수밖에 없는 처지이다, 고로 전투들이 있는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이 전투들을 수단으로 그들 안의 불순한 것들을 점진적으로 깨끗해지게 설비해두신 것이다, 그 이유가 주님이 그들을 위해 싸우실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딸이 성벽 위에서 행진한다”에 의해, 그리고 “궁수들이 그를 비참하게 하고, 그에게 쏘고, 그를 미워한다, 그리고 그는 그의 활의 강함에 앉을 것이다, 그리고 그의 손의 무기는 강력한 야곱의 손에 의해 강하게 만들어 진다, 이로부터 목자, 이스라엘의 돌이 있다”에 의해 의미되고 있다.
영적 교회 속에 있는 이들에 관해 이미 말해진 바를 되살피면, 그들은 진리와 그로부터 파생되는 선의 측면에서 희미함 안에 있다는 것; 이 희미함은 주님의 신성한 진리에 의해 계발된다는 것; 주님의 오심 이전, 그분의 오심 이후와 같은 영적 왕국은 있지 않았다는 것; 주님이 (영계에서의) 영적 수준의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세상에 오셨다는 것; 그리고 그들은 주님의 신성한 인간을 수단으로 구원되어진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분명한 바, “그의 손의 무기는 강력한 야곱의 손에 의해 상하게 만들어진다, 이로부터 목자, 이스라엘의 돌이 있다”에 의해 싸움의 힘은 주님의 신성한 인간의 전능하심으로부터 파생된다는 것, 이로부터 영적 왕국에 있는 모든 선과 진리가 있다.

너의 아버지의 하느님으로 말미암아, 그분이 너를 도울 것이다. 이는 그분은 고대 교회의 하느님이시다를 의미한다. 이는 여기서 “아버지”인 야곱의 표현함이 고대 교회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 교회가 영적 수준의 교회이었다, 그리고 이 안에서 주님이 예배되었다, 이 분이 여기서 “고대 교회의 하느님”에 의해 뜻해진다. 이 분으로부터 위에서 말해진 전투에서 도움이 있다.

그리고 솨다이와 더불어. 이는 시험들 후에 은혜를 베푸는 사람, 주님을 의미한다.
이는 “솨다이”의 의미가 주님이 시험들에 관련하여 그렇게 불리우심, 그리고 시험들 후에 은혜를 베푸시는 분이심 이다.

그분은 위의 천국의 복됨(blessing)들을 가지고 너를 복되게 하실 것이다 . 이는 내부로부터의 선과 진리를 가지고를 의미한다. 이는 “복됨”이 진리의 번성함과 선의 열매가 풍성함이다로부터; “복됨”은 영적 의미에서 이밖에 더 없다; 그리고 “위의 천국”의 의미가 내부로부터 인데, 그 이유가 인간 속의 천국이 그의 내면들이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생활의 선 안에 있는 이들은 그의 내면의 측면에 관련하여 보면, 그는 천사들과 더불은 사회 안에, 고로 천국 안에 있기 때문이다. 한편 그의 외면들은 인간의 사회들과. 고로 세상과 함께하고 있다. 그러므로 인간이 주님으로부터 내부로부터 있는 천국을 통하여 흘러드는 선과 진리를 받을 때, 그는 “위의 천국의 복됨들을 가지고 복되고 있다.”

아래에 드러 누운 깊음 속의 복됨들을 가지고. 이는 자연 평면에 있는 기억 속의 지식을 가지고를 의미한다. 이는 “복됨들을 가지고 복되어 있다”의 의미가 영계로부터 있는 이런저런 것들을 수여받음 이다로부터; 그리고 “아래 드러누운 깊음”이 자연 평면의 기억 속의 지식들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천국”인) 그의 내면에 비해 자연 평면은 “아래 드러누운 깊음”이라 불리운다; 그리고 자연 평면이 “아래 드러누운 깊음”에 의미되는 바, 기억 속의 지식들 또한 의미되어진다, 그 이유가 이것들 모두는 기쁨들과 더불어 자연 평면에 있기 때문, 그리고 자연 평면의 생명을 만들기 때문, 특히 영적 인간과 더불어 그것의 생명을 만들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기억 속의 지식들을 수단으로 그는 진리들 안으로 받아들여지고, 진리들을 수단으로 선 안으로 받아들여지기 때문이다. “깊음”에 의해 자연 평면에 있는 기억 속의 지식의 진리들이 의미되는 다른 구절이 아래에도 있다:
여호와의 복됨이 그의 토지이다; 하늘의 귀중한 것들 때문에, 이슬 때문에, 또한 아래 들어누운 깊음 때문에 (신. 33:13).

가슴들의 복됨을 가지고. 이는 선과 진리에 애착함들을 가지고를 의미한다. 이는 “가슴들”의 의미가 선과 진리에 애착함들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가슴들”이 선과 진리에 애착함들인 이유는 가슴의 신체 기관이 자손 (번식)과 관련되기 때문, 그러므로 해서 부부의 사랑(conjugial love, 결혼의 사랑)의 범주(province)에 속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부부의 사랑은 선과 진리의 결혼인 천국의 결혼에 상응한다; 그 이유가 부부의 사랑이 이 결혼으로부터 내려오기 때문이다. (결혼이라는 단어로 한역되는 영어 단어는 주로 marriage이다. 이 책에서는 두 단어를 사용한다. conjugial과 marriage이다. 둘 모두 영한 사전을 참조하면 결혼으로 번역함이 대세일지 모르나, 이 책의 주인(원저자)이 두 단어를 잘 모르거나 혼동해서 마구잡이로 단어 선택을 하지 않았으리라를 염두한다면 분명 역자로서는 두 영어 단어를 가능한 다른 한역을 선택해야 하지 않을까하는 고민에 빠질 수밖에 없다. 물론 라틴어로부터 영역에서도 둘을 가능한 구분하고 있다. 하여 역자는 conjugial은 “부부의”로, 간혹 “결혼의”로 번역하기로 작정했는데, “부부의”가 더 순수해진 결합을 표시하지 않나 하는 역자의 개인적 소견으로 선택된 한역임을 덧붙여둔다, 역자주.) (원저자의 저서에 결혼애로 흔히 번역해 말해지는 “conjugial love”가 있는데, 역자는 이 책의 제목을 부부의 사랑, 부제로는 선과 진리의 결혼, 또는 천국의 결혼이라 말하려 한다. 역자가 이 책까지 번역할 의도는 아직은 없다. 그 이유가 이 책이 성경 글자를 바탕으로 깔지 않기 때문이다. 역자의 관심은 성경 읽기와 이해에 있어서 이다.) 그러므로 “가슴들”에 의해서 선과 진리에 애착함이 의미된다. 마찬가지인데, 유아들이 가슴(유방)들을 수단으로 자양분을 공급받는다는 사실로부터도 더 분명해진다, 그리고 이 애착을 통하여 “가슴들”은 자손을 향한 사랑과 더불은 부부의 사랑의 결합이 의미된다.
이 애착들이 “가슴들”에 의해 의미되는 다른 구절이 아래에 있다:
너는 나라들의 젖을 빨 것이다, 그리고 왕들의 가슴들을 빨 것이다. 나는 놋쇠를 위하여 금을, 철을 위하여 은을 가져온다 (이. 60:16, 17);
“왕들의 가슴들을 빠는” 것은 진리로부터의 선을 표시한다, 그 이유가 “왕들”에 의해 진리들이 의미되기 때문이다. “나라들의 젖”에 의해, 그리고 “왕들의 가슴들”에 의해 어떤 감추인 의미, 즉 영적 의미가 있을 것임은 누구에게나 예상될 것이다. 그 이유가 성경이 의미함도 없이 괜히 이런 예언을 했을 리가 만무하기 때문이다; 선과 진리가 의미된다는 것은 바로 이어진 말로부터 분명해진다: 즉 “나는 놋쇠를 위해 금을, 쇠를 위해 은을 가져올 것이다.” “놋쇠”는 자연적 선을, “금”은 천적인 선을, “철”은 자연적 진리를, 그리고 “은”은 영적 진리를 의미한다.
그리고 에스겔서에서:
불어남을 말한다면 나는 들판의 싹같이 너를 만들었다, 이로부터 너는 불어나게 했다, 그리고 성장했다, 그리고 너는 장식품으로 꾸몄다; 너의 가슴들은 견실하게 만들어졌다, 그리고 너의 머리털은 자랐다 (겔. 16:7);
이것은 예루살렘을 두고 말한 것이다, 이를 수단으로 고대 영적 교회가 의미된다; “가슴들”이 “견실하게 만들어짐”에 의해 선과 진리에 내면의 애착함이; “그들의 머리털이 자랐다”에 의해 자연 평면 속에 있는 외면의 애착함이 표시된다. 이 말들 안에 글자에서 나타나지 않는 것이 있음은 분명하다; 그 이유가 이것 없이 “그녀의 가슴들은 견실하게 만들어졌다, 그녀의 머리털은 자랐다”라고 예루살렘을 두고 말해질 수 없기 때문이다.
에스겔서에서:
이집트에서 매춘짓을 한 두 여인이 있는데, 한 어머니의 딸들이다; 그들은 그들의 젊은 시절에 매춘짓을 했다, 매춘짓에서 그들의 가슴들은 눌려졌다, 그리고 그들은 그들의 처녀임의 젖꼭지가 접촉되었다 (겔. 23:2, 3);
“두 여인들”은 예루살렘과 사마리아이다. 이들을 수단으로 내적 의미에서 교회들이 의미된다; 그들이 “젊은 시절에 이집트에서 매춘짓을 했다”에 의해 그들은 기억 속의 지식들을 수단으로 교회의 진리들을 왜곡되게 했다가 의미된다. 그러므로 “그들의 가슴들이 눌려졌다”에 의해서는 선과 진리에 애착함들이 거짓화함을 수단으로 타락되어졌다가 의미된다. 이런저런 사항들이 “여인의 매춘”에 의해, 그리고 “그들의 가슴들이 눌림”에 의해 의미된다는 것은 이 여인들에 대한 묘사에서 의미를 찾고저 하는 이들이다면 분명해질 것이다.
호세아서에서:
너는 너의 어머니에게 탄원(변론, plead)하여, 그녀로 그녀의 얼굴로부터 그녀의 매춘들을, 그리고 그녀의 가슴들 사이로부터 그녀의 간음들이 중단해지게 하라, 하여 내가 그녀를 발가벗기지 않도록, 그리고 그녀를 광야로서 만들지 않도록, 그리고 그녀를 가믐의 토지로 놓지 않도록, 그리고 목마름 으로 그녀를 죽이지 않도록 하라 (호. 2:2, 3);
“어머니”는 교회를 표시한다; “매춘들”은 진리를 거짓화 함들을 표시한다; 그러므로 “가슴들 사이로부터 간음함”은 선과 진리에 애착함들이 섞음질 됨을 ; “발가벗겨짐”은 모든 진리가 박탈됨을; “그녀를 광야로 만들고, 그녀를 가믐의 토지로 놓는 것, 그리고 목마름으로 죽게 하는 것”은 모든 진리가 소멸함을 표시한다.
다시:
유산하는 자궁과 마른 가슴을 그들에게 주소서 (호. 9:14);
“마른 가슴들‘은 애착들이 진리와 선에 관해 있지 않은 것을 표시한다. 이사야서에서:
걱정거리 없는 너희 여인들아 일어나 내 음성을 들어라, 자신만만한 너희 딸들아, 네 귀로 내 강연을 들어라; 네 자신을 발가벗겨 알몸으로 만들어라, 그리고 허리에 띠를 두르라; 그들은 순수한 포도주의 들판들과 열매가 풍성한 포도나무를 위하여 가슴들 위에서 자신을 칠 것이다 (이. 32:9, 11, 12);
위에서 “딸들”은 애착들을 표시한다; “알몸으로 만드는”것은 진리가 결핍됨이다; “허리에 띠를 두름”은 잃어진 선 때문에 슬퍼함에 있다를 표시한다; “가슴들 위에서 칠 것이다”는 잃어진 진리로부터의 선 때문에 슬픔에 있다를 표시한다; 이런 사항들이 의미되기에, “순수한 포도주와 열매가 풍성한 포도나무를 위하여”가 말해진다; 그 이유가 “들판”은 선 측면에서의 교회를, 그리고 “포도나무”는 영적 교회를, 결과적으로 진리로부터의 선을 표시하기 때문이다.
계시록에서:
나는 일곱 금빛의 등불대들을 보았고, 그리고 일곱 등불대들의 한가운데에 사람의 아들 같은데, 발까지 내려오는 흰 의복을 입고, 금빛의 띠로 가슴들에서 띠를 매신 분이셨다 (계. 1:12, 13);
“금빛의 등불대들”은 선으로부터의 진리들을 표시한다; “사람의 아들”은 신성한 진리를 표시한다; “금빛의 띠로 가슴들에서 띠를 두르심”은 사랑의 선을 표시한다. 요한에 의해 보여진 이런저런 사항들은 주님의 왕국과 그분의 교회 속에 있는 이런저런 것들을 포함한다는 것을 모든 이들은 말씀은 신성하다로부터 결말지을는지 모른다; 그 이유가 이 세상의 왕국들에 관하여 위의 예언들이 있는 것이다면 이 말씀에 무슨 신성함이 있을 것인가? 하고 되물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천국의 사항들이 “등불대”에 의해, 그리고 “발 까지 내려오는 의복을 차려입고, 가슴에 금띠를 매신 사람의 아들“에 의해 의미된다는 것을 알는지 모른다.
누가복음서에서:
군중들로부터 어떤 여인이 목청을 돋구워 예수에 관해 말했다, 당신을 밴 자궁은 복 있다, 당신에게 젖을 물린 가슴은 복있다, 그러나 예수께서 말하셨다, 그렇다 오히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것을 지키는 자가 복있다 (눅. 11:27, 28);
주님의 답변으로부터 “복된 자궁”과 “가슴”에 의해 의미된 것이 분명해진다; 즉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것을 행하는 이들이다; 고로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것은 진리에 애착함이고, 들은 말씀을 행하는 것은 선에 애착함이다.

그리고 자궁의. 이는 그들의 결합을 의미한다. 즉 선과 진리의 결합을 의미한다. 이는 “자궁”의 의미가 가장 안쪽에서의 부부의 사랑이다로부터; 부부의 사랑이 선과 진리의 결합인 천국의 결혼으로부터 출시되는 바, 그러므로 이 결합이 “자궁”에 의해 의미되어진다.

네 아버지의 복됨이 네 선조들의 복됨 보다 더 우세할 것이다. 이는 이 교회는 합리성으로부터가 아닌 자연 평면으로부터 영적 선을 가지고 있다를 의미한다. 이는 요셉의 표현함이 영적 수준의 교회이다로부터; 여기서 “아버지”인 이스라엘의 표현함이 자연 평면으로부터의 영적 선이다로부터; 그리고 여기서 “선조들”인 이삭과 아브라함의 표현함이 최고 의미에서는 주님의 신성의 내적 부분이다로부터; 즉 “이삭”은 주님의 신성한 인간의 내적 부분, 또는 주님의 신성한 합리성이고, “아브라함”은 주님의 신성 자체이다; 그러나 관계적 의미에서 “아브라함과 이삭”은 주님의 왕국과 교회의 내적 부분을 표시한다. 이 모두로부터 “네 아버지의 복됨은 네 선조들의 복됨 보다 더 우세할 것(prevail, 널리 보급될 것, 크게 유행할 것) 이다”에 의해 뜻해지는바가 짐작되었으리라 본다. 즉 영적 수준의 교회는 자연적, 또는 외적 인간으로부터 선을 가져야 할 것, 그러나 합리성 또는 내적 인간으로부터서는 아니다 이다; 그 이유가 영적 수준의 교회인의 선은 자연 평면에 있기 때문, 그리고 그것은 더 이상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천적 수준의 교회의 선은 합리성에 있다. 이런 의미가 이 말에 포함된 것은 이스라엘과 아브라함과 이삭이 무엇을 표현하는지와 영적 교회의 선은 어디에서, 어디로부터 인지가 알려지지 않으면 알아질 수가 없다.

시대의 언덕들의 바램에 맞먹는다. 이는 천적 수준인 서로의 사랑을 향하여를 의미한다. 이는 “시대의 언덕들”이 서로의(mutual 상호간의) 사랑이다로부터 (아래에서 설명한다) 알게 된다. 영적 수준의 교회가 이 사랑에 도달할는지 모른다는 것이 “시대의 언덕들의 바람에 맞먹기 조차”에 의해 의미되어 있다. “시대의 언덕들”이 서로의 사랑을 의미한다는 것을 다른 구절들로부터 살피기에 앞서, 서로의 사랑에 의해 뜻해지는 것이 먼저 말해져야 할 것 같고, 이 사랑 쪽으로 요셉에 의해 표현되는 영적 수준의 교회인이 도달하느라 분주하다는 것이다. 이미 말해져서 알고 있는 것은, 천국을 구성하는 두 왕국이 있다는 것, 즉 천적 왕국과 영적 왕국이 있다는 것이다. 이런 차이가 두 왕국에 있다. 천적 왕국의 내면의 선은 주님을 사랑함의 선이고, 이 왕국의 외면의 선은 서로의 사랑함의 선이다; 이 왕국에 있는 이들은 사랑의 선 안에 있고, 신앙의 진리라 불리우는 진리 안에 있지는 않다, 그 이유가 이 진리는 이 왕국의 선 안에 있기 때문이고, 이 진리는 선으로부터 분리되어 보여질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왕국에 속하는 이들은 신앙은 언급조차 할 수 없다, 그 이유가 그들에게는 신앙의 진리 대신 있는 것이 서로의 사랑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적 왕국의 경우, 내적 부분은 이웃을 향한 선행의 선이고 외적 부분은 신앙의 진리이다.
이런 모두로부터 분명해지는 바, 이 왕국들의 차이점이다, 또한 천적 왕국의 외적 부분은 “영적 평면의 천적 부분”이라 불리우는 중매를 통하여 영적 왕국의 내적 부분과 일치한다는 사실이다. 그 이유는 이미 말한 대로 천적 왕국의 외적 부분이 서로의 사랑의 선이고, 영적 왕국의 내적 부분이 이웃을 향한 선행의 선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서로의 사랑의 선은 이웃을 향한 선행의 선 보다 더 내면적이다, 그 이유는 전자는 합리성으로부터, 후자는 자연 평면으로부터 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천적 수준의 교회의 외적 부분인) 서로의 사랑의 선이 더 내면적일지라도, 그리고 이웃을 향한 선행의 선은 더 외면적이라 할지라도, 주님께서는 중매를 통하여 이 선들을 결합하신다, 고로 두 왕국들은 결합하고 있다.
천적 교회의 선과 영적 교회의 선의 차이를 만들기 위하여 이어지는 페이지들에서 우리는 전자의 선을 서로의 사랑의 선이라 부르고, 후자의 선은 이웃을 향한 선행의 선이라 부를 것인데, 지금까지에서는 이 차이를 관찰하지는 않았었다. 이 차이들을 먼저 알고 있어야 이 영적 교회에 관한 이스라엘의 복있음인 “시대의 언덕들의 바램과 맞먹기 조차”에 의해 의미하는 것인, 영적 왕국은 천적 왕국 속에 있는 서로의 사랑의 선에 까지 선행의 선을 끌어올릴 수 있을는지 모른다에 대해 말하는 것도 쉬워질 것이다. 이런 방법에서 두 왕국들은 친밀하게 결합할는지 모른다: 이것이 이런 말들(“산들과 언덕들”)에 의해 의미되고 있다.
예언의 말씀의 아주 많은 구절들에서, “산들과 언덕들”이라는 말의 언급이 있는 편이다. 이 말들에 의해 내적 의미에서 사랑의 선이 의미된다: 즉 “산들”에 의해서는 주님을 사랑함의 선이, 하여 천적 왕국의 내적 부분이, “언덕들”에 의해서는 서로의 사랑함이, 하여 이 왕국의 외적 부분이 의미된다; 그러나 영적 왕국이 취급될 경우, “산들”에 의해서는 이웃을 향한 선행의 선이, 하여 이 왕국의 내적 부분이, “언덕들”에 의해서는 신앙의 진리가, 하여 외적 부분이 의미된다. 우리가 알아야하는 것은, 주님의 모두 각각의 교회에는 내적 부분과 외적 부분이 있다는 것, 마찬가지로 그분의 왕국도 그러하다는 것이다.
“언덕들”이 위와 같은 의미를 가지는 것을 아래 구절에서 읽을 수 있다:
후자의 날에서 여호와의 산은 산들의 머리를 위해 있을 것이고, 그리고 언덕들의 넘어로 드높여질 것이다 (이. 2:2; 미. 9:1);
“여호와의 산”은 시온 인데, 주님의 천적 왕국을 표시한다, 고로 이 왕국의 선, 이는 주님을 사랑함으로부터 있는 선이다; 고로 최고 의미에서 이는 주님 자신이시다, 그 이유가 천적 왕국에 있는 모든 사랑과 모든 선은 주님에 속하기 때문이다.
이와 비슷한 것이 말씀의 다른 구절에서 “시온의 산”에 의해 의미되어진다, 그리고 “거기의 언덕들”에 의해서는 서로의 사랑의 선이 의미되어진다. 이사야서에서:
여호와 체바욷께서 시온의 산 위에, 그리고 거기의 언덕 위에 싸우시기 위해 내려오실 것이다 (이. 31:4);
위에서 “언덕”은 서로의 사랑의 선을 표시한다; 그리고 “언덕”에 의해 서로의 사랑의 선이 의미되어진다, 그리고 “산”에 의해 주님을 사랑함의 선인 천적 사랑의 선이 의미된다, 하여 “여호와께서는 시온의 산, 거기의 언덕들 위에 싸우시기 위해 내려오실 것이다”라고 말해지는 것이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자연계의) 시온의 산과 거기의 언덕들에 내려오신다는 뜻이 아니고, 사랑의 선이 있는 곳을 위하여, 즉 이 선 안에 있는 이들을 위하여 주님(여기서는 여호와)께서 싸우신다는 말이다. 하여, 만일 그분이 시온을 위해, 그리고 예루살렘을 위해 싸우셨다면, 그들이 천적 교회를 표현했기 때문이 된다. 그러므로 시온 산은 거룩하다고 불리우고 예루살렘 역시 거룩하다 불리운다. 이 일컬어짐은 예언서들에서 예루살렘의 역겨운 것들이 취급되는 상황에서, 하여 그 자체 더러움이었던 때에서 조차도 거룩하다 불리웠다.
다윗서에서:
산들이 평화를 가져올 것이다, 그리고 언덕들은 정의에 (있을 것이다) (시. 72:3).
다윗서에서:
여호와를 찬양하라, 너희 산들아, 그리고 모든 언덕들아 (시. 148:9).
다윗서에서:
산들이 숫양들 같이 깡충깡충 뛴다, 언덕들은 양떼의 아들들 같이 (뛴다) (시. 104:4, 6).
다시:
하느님의 산은 바산의 산이다; 언덕들의 산은 바산의 산이다. 왜 너희는 껑충 뛰느냐? 너희 산들아, 너희 산들의 언덕들아. 하느님께서는 그것 안에서 거주하시기를 바라신다, 여호와께서는 영원히 거주하실 것이다 (시. 68:15, 16).
이런 구절들에서 “산들”은 천적 사랑을 표시한다, 그리고 “언덕들”은 영적 사랑을 표시한다; 여기서 산들이, 언덕들이, 산이나 언덕에 있는 이들을 뜻하지 않음은 분명할 것이다.
이사야서에서:
모두 각각의 높은 산 위애, 들어올려진 모두 각각의 언덕, 시내들, 물들의 수로들 위에 있을 것이다 (이. 30:25);
“물들의 수로들”은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들을 표시한다, 이것이 “모두 각각의 높은 산과 들어올려진 언덕”에 있다 라고 말해진 이유는 이 지식들은 천적 평면의 선들과 영적 수준의 사랑으로부터 흘러들기 때문이다.
하박국서에서:
여호와께서 서시어 땅을 측량하셨다; 그분이 보시고 나라들을 흩으셨다. 그 이유는 영원의 산들이 흩어졌기 때문, 그리고 시대의 언덕들이 자신을 낮추었기 때문이다 (합. 3:6);
“영원의 산들”은 태고 교회의 사랑의 선을 표시한다, 이 교회는 천적 수준이었다; “시대의 언덕들”은 이 교회에 속했던 서로의 사랑의 선을 표시한다; 전자는 내적 부분이고, 후자는 외적 부분이다. 이 교회가 말씀에서 뜻해질 때, 태고적의 이들이 암시되게 “영원”이라는 단어가 때때로 첨가된다, 여기서는 “영원의 산들”인데, 다른 구절에서는 “영원의 날들”이 첨가된다; 그리고 “시대” 또한 첨가되는데, 여기서는 “시대의 언덕들”이다, 또한 이스라엘의 예언적 발음에서, “시대의 언덕들의 바램에까지 조차”이다. 그러므로 분명한 바, “시대의 언덕들”에 의해 서로의 사랑이 의미된다는 것, 이것은 천적 수준의 교회, 또는 주님의 천적 왕국 속에 있다는 것이다.
마찬가지가 모세의 책에서 요셉에 관련한 모세의 예언적 말함에도 있다:
동쪽의 산들의 첫 열매들에 관한 것으로부터, 영원의 언덕들의 귀중한 것들에 관한 것으로부터, 그것들로 요셉의 머리 위에 오게 하라 (신. 33:15, 16).
이사야서에서:
산들과 언덕들이 노래로 다시 소리낼 것이다, 그리고 들판의 모든 나무들이 손으로 박수칠 것이다 (이. 55:12).
요엘서에서:
그 날에 산들이 새로운 포도주를 떨어트릴 것이다, 그리고 언덕들이 젖으로 흐를 것이다, 그리고 유다의 모든 시내들이 물로 흐를 것이다 (욜. 3:18; 암. 9:13).
에스겔서에서:
나의 양이 모든 산들에서, 그리고 모두 각각의 언덕에서 방황하고, 그리고 땅의 모든 얼굴 위에서 그들은 흩어졌다. 나는 그것들을 내 언덕의 범위에 있게, 복있게 만들 것이다; 그리고 나는 철따라 비를 내려보낼 것이다 (겔. 24:6, 26).
예레미야서에서:
황폐케 하는 자들이 광야에 있는 모든 언덕들에 들이닥칠 것이다; 그 이유가 여호와의 검이 삼키기 때문이다 ( 예. 12:12).
이 구절들에서 천적 사랑의 선들이 “산들”에 의해 의미되어진다; “언덕들”에 의해서도 마찬가지이나, 보다 낮은 등차에서 이다.
이상 살핀 바와 같이 “산들”과 “언덕들”에 의해 의미되기 때문에. 고대 교회에서 그들의 신성한 예배 또한 산과 언덕에서 있어졌다; 그 후에 히브리 나라가 산과 언덕 위에 제단을 쌓고, 거기서 제물을 바치고 향을 태웠다; 그리고 언덕이 없는 지역에서는 높은 장소를 건축했다. 그러나 이 예배가 우상화가 되어갔는데, 그 이유는 산이나 언덕 자체를 거룩한 것으로 여겨 예배했기 때문, 하여 이스라엘이나 유태나라에서 이런 예배가 금지되어졌다, 그 이유는 여타 다른 나라보다 더 쉽게 우상화로 변질되었기 때문이다. 어쨌든 고대 시대에서 있었던 이런저런 표현들은 유지되어야하는 질서에서 시온 산은 선택되고, 이를 수단으로 최고 의미에서 주님의 신성한 사랑의 신성한 선이, 표현 의미에서 그분의 왕국에 있는 신성의 영적 부분과 천적 부분이 표현되어졌다.
이와 같은 것들이 의미되었기에 아브라함으로 모리아의 토지의 어느 산으로 가서 이삭을 제물로 바치도록 명령되었기도 하다, 그리고 주님이 산 위에서 모세에 의해 보여지셨다, 그리고 법이 산의 정상에서 선포되어졌다, 그 이유가 그분은 호렙산 위에서 모세에 의해 보여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법이 시나이 산 위에서 선포되어졌다; 예루살렘의 성전이 산 위에 지어졌다.
고대 의식으로부터 거룩한 예배는 산위와 언덕 위에서 개최되었다는 것, 그 후에 이방인들과 우상화된 이스라엘족들과 유태인들이 그 위에서 제물을 바치고 향을 태운 것이 아래 구절로부터 분명해진다:
너의 간음들, 요상한 소리들, 매춘의 사악함이 들판의 언덕 위에서, 나는 너희의 역겨운 짓을 보았었다 (예. 13:27);
위는 예루살렘에 관해 말해진다. 에스겔서에서:
그들의 찌름당해진 자들이 그들의 우상들 한가운데에서, 제단을 빙둘러서, 모든 높은 언덕에서, 산들의 모든 머리들에서, 그리고 모두 각각의 푸른 나무 아래에서, 그리고 모두 각각의 엉켜진 상수리나무 아래에서 뒹굴 것이다 (겔. 6:13).
예레미야서에서:
모두 각각의 높은 언덕 위에, 모두 각각의 푸른 나무 아래에서, 너는 음행을 저지르고 있다
(예. 2:20; 3:6; 그리고 왕상. 14:23; 왕하 16:4; 17:10).
우상적인 예배가 산들과 언덕 위에서 자행되었기 때문에 그것들에 의해 반대적 의미인 자아 사랑에 속하는 악들이 의미된다. 예레미야서에서:
산들, 그리고 보라 그것들이 흔들려졌다, 그리고 모든 언덕들이 뒤엎어졌다. 나는 바라보았다 그리고 보라 거기에 사람이 없었다, 그리고 하늘의 모든 새들이 날아가버렸다 (예. 4:24, 25).
이사야서에서:
모든 계곡이 들어올려질 것이다, 그리고 모든 산과 언덕이 낮추어질 것이다 (예. 40:4).
이사야서에서:
보라 나는 너를 긴 못을 가진 새로운 타작기로 놓을 것이다; 너는 산 위에서 타작할 것이다, 그리고 언덕을 겨 같이 만들 것이다 (이. 41:15).
다시:
나는 산들과 언덕들을 황폐된 채로 놓을 것이다, 그리고 모든 그것들의 초본들을 말리울 것이다 (이. 42:15).
그리고 미가서에서:
너희는 여호와께서 말하시는 것을 듣기를 바란다; 일어나라, 너는 산들과 쟁변하라 , 그리고 너의 음성을 언덕들이 듣게 하라 (미. 6:1).
예레미야서에서:
내 백성이 잃어진 양이 되고 말았다, 그들의 목자들은 그들을 잘못 이끌고 있다, 반역적인 산들아, 그들은 산으로 언덕 위로 가버렸다, 그들은 그들의 (양)우리를 잃어버렸다
(예. 50:6; 또는 예16:6; 나. 1:5, 6).
“산들”과 “언덕들”이 사랑의 선들과 영적 사랑을 의미하는 이유는 산이나 언덕이 땅 보다 돌출되어 있었기 때문인데, 이런 돌출되고 높은 것들에 의해 천국 속에 있는 이런저런 것들, 최고 의미에서는 주님에 속해 있는 것도 표현되어졌다. “가나안의 토지”는 주님의 천국의 왕국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이 토지에 있는 모든 것들은 의미적이었다, 따라서 “산들”과 “언덕들”이 이런저런 높은 어떤 것들을 의미하게 되었다. 그 이유가 천적 수준에 있던 태고인들은 자기들이 산으로 올라갔을 때, 높음으로부터 거룩한 것을 생각했다, 그 이유는 여호와 또는 주님이 “가장 높은 곳에서” 거주하신다고 말하셨기 때문, 또한 영적 의미에서 “높다”는 사랑의 선을 표시했기 때문이다.

그것들이 요셉의 머리 위에 있을 것이다. 이는 내면들에 관련되는 이런저런 것들을 의미한다. 이는 “머리”의 의미가 내면들이다로부터, 그 이유는 인간의 모든 것들은 머리에서 그들의 첫 원리들 안에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은 또한 내면의 것들이 머리에 의해 의미되는 상응으로부터 이다. 그러므로 “목”은 중매적인 것을 의미한다; “몸”은 외면의 것들을; “발바닥”과 더불어 “발”은 가장 바깥쪽의 것들을 의미한다. 이 상응은 천국이 웅대한 사람과 관계하기 때문이다; 가장 깊은 천국, 즉 주님의 천적 왕국이 있는 곳은 웅대한 사람의 머리에 관계한다; 중간 또는 둘째 천국, 즉 영적 천국이 있는 곳은 몸에 관계한다; 그리고 최말단, 또는 첫째 천국은 발에 관계한다.

그리고 그의 형제의 나지르인의 머리의 관 위에 있을 것이다. 이는 외면들에 관련하여를 의미한다. 이는 “나지르인의 머리의 관”의 의미가 외면의 것들이다로부터 (아래에서 살핀다); 그리고 “그의 형제”인 이스라엘의 아들들을 표현함이 자연 평면에 있는 영적 진리들이다로부터, 이것 역시 상대적으로 외면이다, 그 이유가 영적 교회인은 진리의 선 안에 있고, 이 선은 내면인데, 이것이 자연 평면의 내면이기 때문이다. “나지르인”이 외면의 것들을 의미하는 이유는 나지르인들이 신성의 자연 평면 측면에서의 주님을, 이것은 주님의 신성한 인간의 외적 부분을 표현하기 때문이다. 이것을 그들이 표현했다는 것은 나지르인 됨은 털에 있다는 것, 신성 있음이 털에 존재했다는 것, 이것은 언급되어져 왔던 표현을 위하여서 이었다는 사실로부터 분명해진다; 그 이유가 (머리)털이 자연적인 것에 상응하고, 의미도 하기 때문이다. 또한 이것은 나지르인 됨을 서약하는 이들로부터도, 즉 이들에게는 자기들의 털을 면도하는 것을 금지했다는 것, (민. 6:5); 그리고 이후에 그들이 나지르인 됨을 끝냈을 때, 그들은 천막의 문에서 머리를 밀고, 그 털을 평화 제물의 바침 아래 불 안에 놓도록 되어 있었다는 것 (민. 6:13, 18) 등등으로부터도 분명해진다. 더 분명해지는 대목으로는 나지르인 이었던 삼손, 그의 힘셈이 그의 머리털에 있었다는 사건으로부터 일 것이다 (사. 13:3, 5; 16; 3301항). 그러므로 예레미야서에 쓰여진 바:
네 나지르인됨의 머리털을 잘라내어라, 그리고 그것을 내던져라, 그리고 언덕들 위에서 통곡을 하여라 (예. 7:29).
이 구절들로부터 “나지르인의 머리의 관”에 의해 외면의 것들이 의미됨이 분명해진다, 그 이유가 나지르인의 머리의 관은 그의 머리털이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말씀에서 나지르인에 의미된 비밀이다.

이상 살핀 이스라엘이 요셉에 관해 예언한 모두로부터도 분명해지는 것은, 모든 세부 사항에서 내적 의미가 있다는 것, 이 의미 없이 거의 어떤 것도 이해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글자만으로부터 이 구절들을 들여다보는 이는 이런 사항들이 요셉에 관해 예언된 것인 바, 요셉의 두 아들에서까지에 이르러 발생할 것이라고 믿을지 모른다 (창. 48:1). 그러나 그들의 역사에서, 즉 모세의 책으로부터 여호수아, 사사기, 사무엘, 열왕기서에 이르기까지에서 예언한 말과 비슷하게도 발생된 것이 없다; 그 이유가 그들이 나머지 지파들 보다 더 축복된 것이 없다는 것, 그들도 포로로 끌려가고 이방인들 사에에서 영영 흩어지고 말았다; 이로부터도 분명한 바, 이 구절이 글자 의미에서 서술된 것을 의미하고 있지 않다는 것, 고로 내적 의미에서의 어떤 것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또한 내적 의미 없이 요셉에 관한 이 구절이 포함한 것을 아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즉 요셉은 “결실이 풍부한 자의 아들, 아들이란 점에서는 샘 가까이 결실이 풍부한 자이고, 딸이란 점에서는 성벽 위에서 행진하는 딸이다. 활쏘는 자가 그를 더 비참하게 하고, 그를 향해 쏘고, 그를 미워한다. 그러나 그는 자기 활의 강함 안에 앉아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의 손들의 무기들은 강력한 야곱의 손들에 의해 힘세지게 만들어졌다. 거기로부터 목자, 이스라엘의 돌이 있다. 너의 아버지의 하느님으로 말미암아, 그분이 너를 도울 것이다, 그리고 솨다이와 더불어, 그리고 그분은 위의 천국의 복됨을 가지고 너를 복되게 하실 것이고, 아래에 드러 누운 깊음 속의 복됨과, 가슴들과 자궁의 복됨을 내리실 것이다. 네 아버지의 복됨은 네 선조들의 복됨 보다 더 우세하여 시대의 언덕들의 바램과 맞먹을 것이다. 그것은 요셉의 머리 위에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의 형제의 나지르인의 머리의 관 위에 있을 것이다.” 이런 말들의 각각이든 전체적이든 내적 의미가 아니고서는 이 말이 뜻하는 것을 알 수 없다.

27절. 베냐민은 이리이다. 그는 아침에 붙잡을 것이다, 그는 전리품을 게걸스럽게 먹을 것이다, 그리고 저녁에 그는 약탈품을 나눌 것이다.

베냐민. 그는 “요셉”인 영적 교회의 선으로부터의 진리를 의미한다. 이는 “베냐민”의 표현함이 천적 평면의 영적 부분(the spiritual of the celestial)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천적 평면의 영적 부분은 선으로부터 진리이다, 여기서는 이스라엘의 예언적 말함에서 있는 요셉에 의해 표현되는 것인 영적 교회 속에 있는 선으로부터의 진리이다. 그 이유가 요셉에 의해 영적 교회가 표현되는 바, 베냐민에 의해서는 이 교회의 선이 표현되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교회는 선으로부터 교회이기 때문이다; 이 선의 진리가 “베냐민”이다.

이리이다. 이는 선을 구출하고 구해내려는 강한 욕망(avidity, 탐욕, 갈망)을 의미한다. 이는 “이리”가 사로잡고 흩트리는 것이다로부터; 그리고 말씀에서 “짐승들”이 탐욕(욕망, cupidity)들을 의미하는 바, 이리 또한 사로잡으려 하는 강한 욕망을 의미한다. 이는 아래 말씀으로부터도 분명해진다:
너희는 거짓 예언자들을 조심하여라, 이들은 양의 의복을 입고 너희에게 온다, 그러나 내향적으로 그들은 약탈하는 이리들이다 (마. 7:15).
그리고 요한복음서에서:
목자가 아닌 품꾼인 자, 양이 자기의 소유가 아닌 자,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들을 떠나 도망한다, 그리고 이리는 양들을 사로잡는다, 그리고 양들을 흩어진다 (요. 10:12; 이와 비슷한 구절로는 눅. 10:3; 예. 5:6; 겔. 22: 27; 습. 3:3도 있다).
그러므로 분명한 바, 이리는 사로잡으려는 이들이다는 것, 그러나 여기서는 사로잡혀져 있어 왔던 이들을 지옥으로부터 구출하려는 자를 의미한다, 여기서의 이리는 앞의 사자의 경우와 비슷한 범주에 있다. 즉 사자의 경우 말해진 것은, “약탈한 것을 움킴”, “전리품을 그러모움”, “약탈에 약탈을 더한다” 등등 같은 말인데, 여기서의 이리에 대한 표현과 유사하다. 그럼에도 좋은 의미에서 “사자”는 선으로부터 힘을 지닌 진리를 의미한다. 이는 약탈적인 짐승인 표범, 독수리 등에서도 같다.

그는 아침에 붙잡을 것이다, 그는 전리품을 게걸스레 먹을 것이다. 이는 주님이 현존할 때 그것이 행해질 것임을 의미한다. 이는 “아침”의 의미가 최고 의미에서 주님이시다로부터, 그러므로 “그는 아침에 붙잡을 것이다”는 주님이 현존하실 때, 이때 선을 구출함과 구해냄이 있을 것이다를 표시한다; 그리고 “전리품을 게걸스레 먹을 것이다”의 의미가 그분이 구출하고 구조해낸 이들을 그분 자신의 것으로 삼는다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붙잡음”, “약탈함”, “전리품”, 그리고 “약탈품”이 말씀에서 주님에 관련되어 말해지는 이유는 그분이 선을 구출하고 구조하심 때문이다는 것은 이미 살핀 9절로부터 분명해진다: 즉 “유다는 사자의 새끼이다; 먹이됨(prey, 약탈품됨)으로부터, 나의 아들, 너는 가버렸다.” 이를 수단으로 주님으로부터 천적인 것을 통하여 지옥으로부터 해방됨(구조됨)이 있다가 의미되어 있다. 또한 말씀의 다른 구절로 아래에 있다:
여호와의 표호하심은 사자의 것과 비슷하시다. 그분은 젊은 사자 같이 표호한다, 그리고 으르렁 소리를 내신다, 그리고 먹이감을 꽉 붙드신다, 하여 그것을 빼앗을(구출할) 자 아무도 없다
(이. 5:29)
다시:
사자가 표호하고, 젊은 사자가 강탈한 것 위에 있듯, 여호와께서 시온의 산 위에 싸우시기 위해 내려오신다 (이. 31:4).
예레미야서에서:
나는 그 날에 너를 구출할 것이다, 정녕 나는 너를 구출할 것이다; 그러나 네 혼은 너에게 전리품을 위해 있을 것이다, 그 이유는 너는 나를 신뢰했기 때문이다 (예. 39:17, 18).
스바냐서에서:
너는 나를 기다려라, 여호와께서 말하신다, 내가 약탈품 쪽에서 일어나는 날까지 조차에서 (기다리 라) (습. 3:8).
이사야서에서:
나는 많은 것들 사이에서 그분과 나눌 것이다, 하여 그분은 강한 자들과 전리품을 나눌지 모른다 (이. 53:12);
위 이. 53장 전체는 주님에 관련하여 말하고 있다.
“강탈품 또는 전리품을 게걸스레 먹는 것”은 악들에 의해 붙잡아져왔던 선을 자기 것이 되게 하는 것임이 아래 발람의 예언적 말함으로부터 분명해진다:
보라, 백성이 늙은 사자 로서 일어날 것이다, 그리고 젊은 사자 같이 그는 자신을 들어올릴 것이다; 그는 전리품을 먹을 때까지 쉬지 않을 것이다 (민. 23:24).
이 모두로부터 “강탈품”, “전리품”, “약탈품” 등의 단어가 주님에 의해 선을 구출하고 구조함을 표시함이 분명하다. 이 단어들이 베냐민에 의해 표현된 진리를 서술하는 이유는 힘이 진리의 속성이고, 이 힘은 선으로부터 가지기 때문이다는 것이다.

그리고 저녁에 그는 약탈품을 나눌 것이다. 이는 아직은 그들이 희미함 가운데 있을 때 주님의 왕국 안에서 그들이 소유함을 의미한다. 이는 “저녁”의 의미가 희미한 것이다로부터; “약탈품을 나눈다”의 의미함이 천국에서 소유함을 주는 것이다로부터; 그 이유가 “약탈품”이 주님에 의해 구출되고 구조되어왔던 이들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약탈품을 나눈다”의 의미는 천국에 있는 이들 사이에 분배됨이 의미되는데, 이는 주님의 왕국에서 소유함을 가지는 것과 같은 의미이다. 이것이 “저녁”에 행해진다 라고 말해지는 이유는 천국으로 승강되는 이들이 처음에는 희미함에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는 그들이 천국의 어떤 사회에 보내지기 위해 천사들을 통하여 주님에 의해 진리들에 관한 가르쳐짐을 받아서 명료한 상태에 와져야 하기 때문이다. 즉 거짓들이 사라지기 위하여서는 시간의 간격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위 사항들은 “베냐민”에 의해 의미되는 것들이다; 그러나 내적 의미 없이, 베냐민에 관해 말해진 것, 즉 “이리”, “그는 아침에 붙잡을 것이다”, “그는 전리품을 게걸스럽게 먹을 것이다, 저녁에 약탈품을 나눌 것이다” 같은 말에 포함된 것이 무엇인지를 누가 말할 수 있을까? 이런 구절들은 내적 의미에 의한 밝힘 없이는 완전히 감추인 대목들이다. 이런 종류의 구절들은 예언서들에 다량으로 있다. 이 구절들 역시 글자로부터 이해하려들면 거의 납득될 수 있는 것이 없다. “야곱의 아들들”에 의해, 그리고 이들의 이름으로 명명된 “지파들”에 의해 주님의 교회와 왕국 속에 있는 이런저런 사항들이 의미된 것이다.

28절. 이 모든 것은 이스라엘의 열 두 지파들이다. 그리고 이것은 그들의 아버지가 그들에게 말한 것이다, 그리고 그들을 복있게 했다. 그는 각자에게 걸맞는 그의 복됨에 의거 그들에게 복을 빌었다.

이 모든 것은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들이다. 이는 복합체(complex, 전체, entirety) 안에 있는 모든 진리들과 선들을 의미한다. 이는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들”의 의미가 복합체에 있는 모든 진리들과 선들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것들이 “지파들”에 의해 의미된 것은 각 지파들을 살핀 앞 장의 구절과 이 장에서 말해진 사항으로부터 분명해졌을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그들의 아버지가 그들에게 말한 것이다. 이는 영적 선으로부터 유입을 통하여 교통함을 의미한다. 이는 “말하다(speak)”의 의미가 유입(inflow)이다로부터, 여기서는 유입(influx)을 통하여 교통함이다로부터; 그리고 여기서 그들의 “아버지”인 이스라엘의 표현함이 영적 선이다로부터 알려진다.

그리고 그들을 복있게 했다. 그는 각자에게 걸맞는 복됨에 의거 그들에게 복을 빌었다. 이는 영적 삶에 관한 예언, 이와 같은 상태에서 각각의 인간에게 일어날 것에 관한 예언을 의미한다. 이는 “복됨”의 의미가 예언이다로부터; 그리고 “각자에게 걸맞는 복됨에 의거 그는 그들에게 복을 빌었다”의 의미가 각각의 인간에게 발생하리라는 것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런저런 상태에서 있는 각각의 인간의 영적 삶에 관한 것이 이 장의 이스라엘의 아들들, 또는 그들의 이름에 따른 지파들에 관해 말해진 것으로부터 분명해진다; 그 이유가 그들에 의해 선들과 진리들에 관한 교회의 모든 상태들이, 고로 교회 내에 있는 모두 각각의 인간의 영적 생명(삶)에 관하여 서술되어 있다.

29-33절. 그리고 그는 그들에게 명령했다, 그리고 그들에게 말했다, 나는 내 백성들에게로 거두어지려 하고 있다. 나를 헷사람 에브론의 밭에 있는 굴에, 우리 선조에게 매장하라. 30 이 굴은 가나안의 토지 마므레 앞 막벨라 밭에 있는 것이다. 아브라함이 그의 매장지를 소유하기 위해 헷사람 에브론에게 밭과 함께 샀다. 31 그들은 아브라함과 그의 아내 사라를 거기에 매장하였고, 이삭과 그의 아내 리브가도 거기 매장하였으며, 나는 레아를 그곳에 매장하였다. 32 이 밭과 거기 있는 굴은 헷사람에게서 산 것이다. 33 야곱이 아들들에게 명하기를 마치고 그의 발을 침대에 거두어 들이고 만기가 되니 그의 백성에게로 거두어 졌다.

그리고 그는 그들에게 명령했다, 그리고 그들에게 말했다. 이는 은근히 심어줌을 의미한다. 이는 이어지는 말로부터 이다, 즉 이스라엘이 자기 아들들에게 막벨라 동굴에, 거기 아브라함과 이삭의 매장지에 자기를 매장할 것을 말할 때, 이 말에 의해 자연 평면에 있는 선들과 진리들에 있는 생명, 자연 평면 안에 내면의 것들과 가장 안쪽의 것들이 있음이 의미된다; 그리고 이런 것들이 이어지는 것 안에서 취급되기 때문에, “그들에게 명령하여 그들에게 말했다”에 의해 위의 사항들이 은근히 심어짐이 의미된다

나는 내 백성들에게로 거두어지고 있다. 이는 그는 자기로부터 있는 자연 평면 속의 선과 진리 안에 있을 것을 의미한다. 이는 여기서 “내 백성”인 이스라엘의 아들들, 이들 이름으로 명명된 지파들의 표현함이 자연 평면에 있는 선들과 진리들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리고 이것들이 이스라엘로부터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리고 “이 백성에게 거두어짐”의 의미가 이러저런 것들 안에 있다 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여기서와 뒤이어 취급되는 주제가 거두어짐, 또는 이스라엘의 “아들들”, 또는 그들 이름에 따른 “지파들”인 자연 평면에 있는 선들과 진리들 안에서 “이스라엘”인 영적 선이 출시됨(cming forth, 세상 밖으로 공표됨) 이기에, 이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를 말하고 지나가야 할 것 같다.
인간 안에는 가장 안쪽의 것, 이것 아래 내면의 것, 외면의 것이 있다. 이 세 개의 부분들은 완전 구분이 되는 것들로서 있다; 그것들은 질서 안에서 계속적이다, 고로 가장 안쪽으로부터 가장 바깥쪽으로 내려간다; 그것들이 연속되는 질서에 따라서 그것들 역시 흘러든다; 고로 생명은 가장 안쪽을 통하여 내면들 안으로, 그리고 내면들을 통하여 외면들 안으로 이다; 고로 질서에 따라 그것들은 연속된다; 그리고 흐름이 멈추는 최말단 외에서는 이 흐름은 계속된다. 그리고 내면의 것들이 질서에 따라 최말단 쪽으로 흘러 내려가는 바, 내면의 것들은 최말단 안에서 함께 있으나 유입의 이런 질서에 따라서 있다: 즉 흘러든 가장 안쪽의 것은 중앙 부분을 붙들고(점유하고) 있다; 그다음 가장 안쪽의 것 아래 있는 내면의 것들은 중앙을 에워싸고 있다; 그리고 외면의 것들이 주변(외곽, circumference)을 만든다; 그리고 이런 형국은 일반적 측면에서, 그리고 낱개적 측면에서도 동일하다. 전자의 질서를 “연속적인 질서”라고, 후자의 질서는 “동시에 일어나는 질서”라고 불리운다; 그리고 후자의 질서는 전자의 질서로부터 기원하고 있다; 그 이유가 모두 각각의 경우에서 동시에 일어나는 질서는 연속적인 질서에 그것의 근원을 가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렇게 근원되어야 그렇게 존재할 수 있다.
모든 내면들이 최말단 안에서 함께 있는 바, 그러므로 생명이 마치 최말단 안에 있는 것처럼, 즉 육체 안에 있는 것처럼 나타난다; 그러나 생명은 (육체가 아닌) 내면의 것(혼)에 있으나, 그렇다고 근원적인 생명이 거기 있는 것은 아니고 가장 높은 것 안에, 즉 주님 안에 있을 뿐이고, 이 분으로부터 생명의 모든 것이 존재하고 근원된다. 그러므로 외면에 있는 생명은 내면의 생명에 비교해 매우 희미하다; 그 이유가 외면에서 생명은 일반적 수준에서 있고, 많은 것들의 유입으로, 즉 내면의 무수한 것들의 유입으로부터 출시된 생명이기 때문이다. 이 무수한 것들이 함께 (연속적, 동시적 질서에 따라) 함께 나타나고 일반적 측면에서 있는 것이다. 이제 본문의 주제와 연결해 생각해보자. 즉 “이스라엘”인 영적 선이 그의 아들들, 또는 지파들인 자연 평면의 선들과 진리 안에 있어야만 한다는 것; 그 이유가 영적 선은 자연 평면의 내면에 해당되고 그의 아들들인 선들과 진리들은 자연 평면의 외면들에 해당되기 때문이다. 하여 영적 선이 이것들 안에 있음이 틀림이 없다는 것이 “나는 내 백성에게로 거두어지고 있다”에 의해 의미되어 있다.

나를 내 조상에게 매장하라. 이는 그 안에는 내면의 것들과 가장 깊은 것이 있다를 의미한다. 이는 여기서 “조상들”인 아브라함과 이삭의 표현함이 내면의 것들과 가장 안쪽의 것이다로부터; 즉 아브라함은 가장 안쪽의 것, 그리고 이삭은 가장 안쪽인 것 아래 있는 내면의 것이다

굴에. 이는 희미함이 있는 곳을 의미한다. 이는 “동굴”의 의미가 희미함인 것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더욱이 이스라엘의 아들들과 지파들에 의해 표현되는 자연 평면의 진리들과 선들이 있는 자연 평면의 외면들에 희미함이 있다, 그 이유는 거기에는 일반적 수준의 것이 있기 때문이다.

헷사람 에브론의 밭에 있는. 이는 그럼에도 명료해질 수 있음을 의미한다. 이는 “들판”의 의미가 교회이다로부터; 그리고 “헷사람 에브론”의 표현함이 진리와 선이 받아질 수 있는 이들, 고로 신앙의 희미함이 명료해질 수 있는 이들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여기서의 경우는 이렇다: 자연 평면에 있는 것은 무엇이든, 특히 자연 평면의 외면에 있는 것은 무엇이든, 자연 평면의 내면에 있는 것에 비교하면 희미하다, 더욱이 합리성에 있는 것에 비하면 더더욱 희미함에 있다. 그러나 이 희미함은 두 방법에서 명료해진다: 첫째는 만일 외면들이 내면의 것들에 굴종함에 가져다 놓인다면, 고로 상응함 안으로 가져다 놓이는 경우이다; 둘째로, 만일 인간이 외면으로부터 내면의 것들 쪽으로 승강할 수 있다면, 고로 내면의 것들로부터 외면의 것들을 볼 수 있는 경우이다. 이 후자의 경우는 교회의 내적 부분에 있는 이들에게 가능하고, 전자는 외적 부분에 있는 이들에게 가능하다; 그러나 이것이든 저것이든 주님으로부터 거듭남을 통하지 않고는 획득되어지지 않는다. 이로부터 분명한 것은, 희미함이 명료해질 방법은 있다는 것이다.

막벨라 밭에 있는 굴에. 이는 이 희미함 안에를 의미한다. 이는 “동굴”, 그리고 “막벨라”의 의미가 희미한 것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마므레 앞. 이는 그것에 관한 양과 질을 의미한다. 이는 “마므레”의 의미함이 인접된 것 쪽으로 어떤 것의 양과 질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가나안의 토지에 이는 교회가 있는 곳을 의미한다. 이는 “가나안의 토지”가 교회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아브라함이 헷사람 에브론에게 밭과 함께 샀다. 이는 되찾음(redemption)을 의미한다. 이는 “사다”의 의미가 자기 소유로 만드는 것이다로부터, 고로 또한 되찾는 것이다로부터, 그 이유가 되찾아지는 것은 자신 소유로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의 표현이 최고 의미에서 주님이시다로부터; “들판”의 의미가 교회이다로부터; 그리고 에브론 헷 사람의 표현이 선과 진리가 받아질 수 있는 이들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러므로 이 본문의 뜻이 무엇인지 분명해진다, 즉 선과 진리가 받아질 수 있는 교회인을 주님께서 되찾으실 수 있다는 것이다.

그의 매장지를 소유하기 위해. 이는 거듭남을 의미한다. 이는 “무덤”의 의미가 거듭남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들은 아브라함과 그의 아내 사라를 거기에 매장하였고, 이삭과 그의 아내 리브가도 거기에 매장하였으며 나는 레아를 그곳에 매장하였다. 이는 모든 내면의 것들은 자연적인 것 안에 있는 선과 진리 안에 질서적으로 있다를 의미한다. 이는 이미 앞에서 살핀 바 있다.

이 밭과 거기 있는 굴은 헷사람에게서 산 것이다. 이는 진리를 받는 이들, 그리고 진리를 통하여 선을 받는 이들을 되찾는다를 의미한다. 이는 “산 것, 매입, purchase”의 의미가 되찾음이다로부터; “들판”의 의미가 교회이다로부터, 고로 교회인이다, 그 이유가 교인이 교회이기 때문이다. “동굴”의 의미가 희미한 것이다로부터; 그리고 헷의 아들들의 표현이 고대 교회로부터 있었던 영적 교회이다로부터; 그리고 “헷의 아들들”이 고대 교회로부터의 영적 교회이기 때문에 그들은 진리를 받는 이들, 그리고 받은 진리를 통하여 선을 받는 이들을 표시한다, 그 이유가 이로부터 영적 교회가 있기 때문이다. 이런 모두로부터 분명해지는 바, “밭과 거기에 있는 동굴을 헷사람의 아들들로부터 매입함” 은 진리를 받고, 받은 진리를 통하여 선을 받는 교회인들, 비록 그들이 아직은 희미함의 수준이지만 되찾으신다는 것이다.

야곱이 아들들에게 명하기를 마쳤다. 이는 은근히 심음의 결과를 의미한다. 이는 “아들들에게 명령하여 그들에게 말하다”의 의미가 은근히 심어짐이다로부터. 그리고 “그들에게 명하기를 마치다”는 은근히 심어짐의 결과를 표시한다.

그리고 그는 그의 발을 침대에 거두어 들였다. 이는 내면에 있던 보다 낮은 수준의 것들이 보다 더 수준 낮은 자연 평면 속의 선과 진리 쪽으로 향함에 관하여를 의미한다. 이는 “발을 거두어들이다”의 의미가 자신을 더 낮은 것들 쪽으로 향하게 하다 이다로부터; 그리고 내면의 것인 보다 낮은 것들이 뜻해지는 것은 이미 살핀 대목으로부터 분명해진다; 그리고 “침대”의 의미가 자연 평면이다로부터, 고로 자연 평면의 선과 진리이다, 그 이유가 이것들이 인간과 더불어 자연 평면을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더 낮은 자연 평면의 선과 진리인 이유는 이 자연 평면이 자신을 향하게 하고 있기 (침대로 거두어 들임) 때문이다; 이스라엘에 의해 자연 평면으로부터의 영적 선이, 야곱에 의해서는 자연 평면의 영적 진리가, 그리고 그의 아들들에 의해서는 자연 평면의 선들과 진리들이 표현되는 바, 이것들이 엄밀히 말하면 각기 다른 종류별로 구별될 수 있기에, 그러나 단어 “침대(bed)”도 자연 평면을 의미하기 때문에 이 장의 여러 군데에서 삽입된 것을 볼 수 있다; 즉 이 구절의 경우, “그가 말하기를 마치자, 그의 발을 침대로 거두어 들였다” 라든가, 요셉이 그에게 왔을 때, 말해지기를, “그는 기운을 차리고 침대 위에 앉았다” 라든가; 그가 요셉에게 자기를 매장하는 것에 관하여 말하고, “이스라엘은 침대의 머리에서 자신을 구부려 절했다” 라든가 하는 경우들이다. 이런 언급이 있어진 이유는 야곱이 생각되어질 경우, 영들의 세계에서는 침대에 누워있는 인간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이것은 머리 위 먼 거리에서, 오른쪽 앞쪽에서 나타난다. 이런 나타남은 천국에서 야곱에 대한 생각이 자연 평면에 관하여로 바뀐다는 사실에서 비롯된다; 그 이유가 천국에서는 야곱이라는 인물이 지각되지 않고 야곱에 의해 표현된 것, 즉 자연 평면이 지각되기 때문, 이 자연 평면이 침대에 의해서도 간단히 의미된다, (하여 여러 구절에 침대가 등장하는 일이 발생된 것이다.)

만기가 되었다(expired). 이는 거기서의 새로운 삶을 의미한다. 즉 그의 아들들과 지파들에 의해 표현되는 보다 낮은 평면의 선들과 진리들 안에서의 새로운 생명을 의미한다. 이는 “만기가 되다(숨을 내쉬다, expire)”, 또는 “죽다(die)”의 의미가 새로운 삶(생명)이다 .

그의 백성에게로 거두어 졌다. 이는 영적 선은 영적 선 자체로부터 있는 자연 평면 속의 선과 진리 안에 있었다를 의미한다. 이는 같은 말이 등장한 구절(29절)에서 살핀 바로부터 분명해진다. (거기서 살핀 것이 영적 선의 출시됨과 삶에 관하여서인데, 이것이 그의 아들들과 지파들인 더 낮은 자연 평면의 선들과 진리들 안에 있는 “이스라엘”이다.) 외면의 것 안에서 내면의 것의 출시됨에 관하여 더 알아둘 것이 있다: 즉 모든 것들, 인간 뿐만 아니라 보편적 자연계의 것들은 연속적인 만들어짐(형성, formation)을 수단으로 세상에 모습을 나타낸다는 것, 고로 후자의 것은 전자의 것으로부터 연속된 만들어짐이다. 그러므로 각각의 만들어짐은 다른 것들로부터 분리되어 출시된다, 그러나 사실상 여전히 후자는 전자에 의존되고 있다. 다시 말해 후자는 전자 없이 존재할 수 없다; 그 이유가 후자는 전자와 연결됨이 보존되면서 전자를 수단으로 만들어짐이 있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분명한 바, 후자 안에 이 후자 앞의 모든 것들이 질서적으로 있다는 것이다. 이는 전자를 본체(substance)라고 간주할 경우에서 전자로부터 진행하는 양식(mode)과 힘(force)의 경우와도 비슷하다. 이것은 인간에 속하는 내면의 것들과 외면의 것들과 같은 경우이고, 또한 인간의 생명 속에 있는 이런저런 것들의 경우이다.
위와 같은 만들어짐에 따라 인간에 있는 내면의 것들과 외면의 것들이 있다고 생각을 해보지 않은 이들은 인간의 내면과 외면에 대한 어떤 생각을 가지는 것이 가능할 수가 없다, 또한 이것이 다른 것 안으로 유입됨에 관한 생각도 아예 가능하지 않다. 더욱이 육체적인 것인 외적 부분(외적 인간)은 죽음에 의해 분리될 때, 외면의 인간의 품질이기도 한 내면의 인간이 출시되어 살아간다는 것에 대한 생각이 가능하지 않다. 내면의 것들과 외면의 것들을 놓고 이런 생각을 품는 다른 경우도 있다; 즉 이 두 가지 것들은 계속적으로 더욱 더 순수해져 가고 있다는 생각, 고로 계속성을 수단으로 이 둘은 대단히 밀착되어져 있다는 것, 고로 후자의 만들어짐이 전자의 것과 구분됨이 없다는 것, 이런 생각을 품는다면, 외적 부분이 죽을 때 내적 부분도 죽는다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다. 그 이유가 그것들이 밀착되고 시종일관하기 때문, 그것들의 연속성과 밀착함을 이유로 이것이 죽으면 저것도 죽어야 한다고 결론낼 수밖에 없는 지경이다. 하여 (이 책에서는) 이 본문 말고도 수 없이 반복적으로 말해온 것은 내적 부분(내적 인간)과 외적 부분(외적 인간)은 서로로부터 완전 분리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내면의 것과 외면의 것은 질서 안에서 계속된다는 것; 또한 모든 내면의 것들은 외면의 것 안에서 함께 있다는 것, 다른 말로 모든 전자의 것들은 후자의 것들 안에 함께 있다는 것이다. 이 내용이 이 구절의 내적 의미에서 취급되고 있다. .
**************************************

창세기 제 50 장

성경: 창세기 50장

1. 요셉이 아버지의 얼굴에 엎드려졌다, 그리고 그 위에서 울었다, 그리고 그에게 키스했다.
2. 그리고 요셉은 그의 종, 의사에게 그의 아버지를 방부 처리를 하도록 명령했다. 그리고 의원들은 이스라엘을 방부 처리했다.
3. 그리고 그를 위하여 사십 일을 채웠는데, 그 이유는 방부 처리하는 기간이 사십 일이 걸리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집트 사람들은 그를 위하여 칠십 일 동안 곡을 했다.
4. 그리고 그를 위하여 곡하는 날들이 지나갔다, 그리고 요셉은 바로의 집에 말했다, 말하기를, 만일 제가 당신의 눈에서 은혜를 발견하였다면 부디 바로의 귀에 말합니다, 말하기를,
5. 나의 아버지는 나에게 맹세하게 하고, 말하기를, 보라, 나는 죽는다. 내가 가나안의 토지에 나를 위하여 파둔 내 매장지에 너는 나를 매장하여라. 그리고 지금 청하옵건대 나로 올라 가게 하소서, 그리고 나의 아버지를 매장하게 하소서, 그리고 나는 돌아오겠습니다.
6. 그리고 바로는 말했다, 올라 가라, 그리고 네 아버지가 너에게 맹세 시킨대로 그를 매장하라.
7. 그리고 요셉은 그의 아버지를 매장하러 올라 갔다. 그리고 그와 함께 바로의 모든 종들이 올라 갔다. 그의 집의 원로들, 그리고 이집트 토지의 모든 원로들,
8. 그리고 요셉의 모든 집안, 그리고 그의 형제들, 그리고 그의 아버지의 집안이 함께 올라 갔다. 오직 아기들, 그리고 그들의 양떼, 그들의 목축떼 만이 고센의 토지에 남았다.
9. 그리고 그와 함께 병거와 기병도 함께 했다. 그리고 군대는 심히 많았다.
10. 그리고 그들은 요단 강 건너편에 있는 아닷의 타작 마당에 왔다, 그리고 그들은 거기서 대단하게 소리내어 울었고 슬피 울었다. 그리고 그는 그의 아버지를 위하여 칠 일 동안 애곡하였다.
11. 그리고 그 토지의 주민인 가나안 족이 아닷의 타작마당에서 애곡하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말했다, 이것은 이집트 사람들에게 비통한 슬픔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것의 이름을 아벨미스라임이라 불렀다, 이곳은 요단 강 건너편이다.
12. 그리고 그의 아들들은 그가 그들에게 명령했던 대로 그에게 행했다.
13. 그리고 그의 아들들은 그를 가나안의 토지로 운반했다, 그리고 그를 아브라함이 매장지를 소유하기 위해 마므레 앞, 헷족 에브론으로부터 들판과 함께 매입한 막벨라의 들판에 있는 굴에 매장했다.
14. 그리고 요셉은 이집트로 돌아 갔다, 그와 그의 형제들, 그리고 그와 함께 그의 아버지를 매장하러 올라 갔던 모든 이들이 그가 그의 아버지를 매장한 뒤 돌아 갔다.
15. 요셉의 형제들은 그의 아버지가 죽었다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그들은 말했다, 요셉이 혹시 우리들을 미워하여 우리가 그에게 행한 모든 악을 다 갚지나 아니할까 하고
16. 요셉에게 말을 전하여 이르되 당신의 아버지가 돌아 가시기 전에 명령하여 이르시기를
17. 너희는 이같이 요셉에게 이르라 네 형들이 네게 악으로 갚았을 지라도 이제 바라건대 그들의 잘못과 죄를 용서하라 하셨나니 당신 아버지의 하느님의 종들인 우리 죄를 이제 용서하소서 하매 요셉이 그들이 그에게 하는 말을 들을 때에 울었더라.
18. 그의 형들이 또 친히 와서 요셉의 앞에 엎드려 이르되 우리는 당신의 종들이니이다.
19.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하느님을 대신하리이까?
20. 당신들은 나에 대하여 악을 생각했으나 하느님은 그것을 선을 위하여 생각하셨다, 하여 오늘과 같이 하시어 많은 사람들을 살아있게 만드시었다.
21. 당신들은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당신들을 떠받쳐주리다, 그리고 당신의 아기들도 하고 그들을 위로하였더라.
22. 요셉은 그와 그의 아버지의 집안과 함께 이집트에서 거주했다. 그리고 요셉은 일백 십 년을 살았다.
23. 그리고 요셉은 에브라임의 아들들의 삼 대를 보았다. 므낫세의 아들 마길의 아들들도 그의 무릎에서 태어났다.
24. 그리고 요셉은 그의 형제들에게 말했다, 나는 죽는다. 그리고 방문하시는 하느님이 너희를 방문할 것이다, 그리고 너희로 이 토지로부터 그분께서 아브라함에게, 이삭에게, 그리고 야곱에게 맹세하셨던 토지에로 올라 가게 만드실 것이다.
25. 그리고 요셉은 이스라엘의 아들들에게 맹세하라고 하고, 말하기를, 방문하시는 하느님이 너희를 방문하실 것이다, 그리고 너희는 내 뼈를 여기로부터 올라 가게 만들어라.
26. 그리고 요셉은 죽었고, 일백 십 년의 아들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그를 방부 처리했다, 그리고 그는 이집트에 있는 궤 안에 놓여졌다.,

각 절의 내적 의미

1-3절. 요셉이 아버지의 얼굴에 엎드려졌다, 그리고 그 위에서 울었다, 그리고 그에게 키스했다. 2 그리고 요셉은 그의 종, 의사에게 그의 아버지를 방부 처리를 하도록 명령했다. 그리고 의원들은 이스라엘을 방부처리했다. 3 그리고 그를 위하여 사십 일을 채웠는데, 그 이유는 방부 처리하는 기간이 사십 일 걸리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집트 사람들은 그를 위하여 칠십 일 동안 곡을 했다.

요셉이 아버지의 얼굴에 엎드려졌다. 이는 내적 부분이 선에 애착함 쪽으로 유입됨을 의미한다. 이는 누군가의 “얼굴에 엎드려짐”의 의미가 유입됨이다로부터; 요셉의 표현함이 내적 부분이다로부터; “얼굴”의 의미함이 애착이다로부터; 그리고 여기서 “아버지”인 이스라엘의 표현함이 영적 선, 또는 진리의 선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로부터 분명한 바, “요셉은 자기 아버지의 얼굴에 엎드려졌다”에 의해 내적 부분이 영적 선에 애착함 안으로 유입됨이 의미된다는 것이다. 내적 부분이 영적 선에 애착함 안으로 유입된다가 의미되는 이유는 내적 의미에서 취급되는 주제가 영적 (수준의) 교회 (the spiritual Church, 영적 평면의 교회, 영적 수준의 인간을 위한 교회, 둘째 천국의 교회)이고, 이 교회가 주님에 의해 설립되어졌다 이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이스라엘”에 의해 진리의 선, 또는 영적 선이 의미되고, 이 선이 영적 (수준의) 교회를 만들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에 의해 이 교회가 의미되어진다. 이 선이 존재 안으로 오기 위하여 요셉에 의해 표현되는 내적 부분의 천적 평면(the internal celestial)의 유입이 반드시 있어야 함이 틀림이 없다; 그 이유가 이 유입 없이 영적 선은 선이 아니기 때문, 그 이유는 이 선이 애착 없음으로부터 있어지기 때문이다. 이어지는 구절의 내적 의미에서 이 교회의 설립이 계속되어진다. 죽고, 매장되어지는 이스라엘에 의해 이 교회가 의미되는 이유는 내적 의미에서 “죽음”에 의해 죽음이 의미되지 않기 때문, “매장”에 의해 매장이 의미되지 않기 때문, 그러나 “죽음”에 의해 새로운 생명 (삶)이 의미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매장”에 의해서는 거듭남이 의미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위에서 울었다. 이는 슬픔을 의미한다. 여기서 “울다”에 의해 외적 부분에서와 같은 죽음 때문에 야기되는 슬픔 같은 것이 내적 의미에서는 뜻해지지 않는다, 그러나 영적 (수준의) 교회의 선 때문에 야기되는 슬픔이다: 즉 이 교회의 선이 자연적인 것 넘어 승강되어질 수 없기 때문에 야기되는 슬픔이다; 그 이유가 주님께서는 이 선을 완전해지게 하시어 그분 쪽으로 끌어당기시려 계속적으로 유입을 통하여 흘러드시기 때문, 그러나 여전히 천적 (수준의) 교회에 속하는 첫째가는 선의 등차로 승강되게 하실 수 없으시기에 야기되는 슬픔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는 영적 교회인은 상대적으로 희미함에 있기 때문; 즉 그들은 진리들인지 아닌지를 추론한다; 또는 진리들을 교리라고 불리우는 것으로 확증한다; 확증한 것이 진짜인지 아닌지를 지각함이 없다; 그가 그것을 자신과 더불어 확증했을 때, 그것이 진리이다고 완전히 믿어버린다. 설사 거짓일지라도 믿어 굳히고야 만다; 그 이유가 기발난 착상으로 이리저리 꿰맞춘 교리일 뿐, 총명으로부터가 아닌 것, 지혜로부터는 더 더욱 아닌 것일지라도 확증되어질 수 없다 하는 것은 세상에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아마 거짓된 것이 진짜인 것보다 더 쉽사리 이의 없이 확증될는지 모른다, 그 이유는 그것들은 인간의 강한 욕망들을 흡족하게 하는 대목이 삽입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더욱이 인간의 감각들의 오류들과 일치해놓기 때문이다. 영적 교회인의 속성이 위 같을 진대, 그는 자연적인 것 넘어로 승강되어질 수 없다; 이런 등등이 “요셉은 그(이스라엘) 위에서 울었다”에 의해 의미되는 슬픔이다.

그리고 그에게 키스했다. 이는 첫 결합을 의미한다. 이는 “키스함”의 의미가 애착으로부터의 결합이다로부터; 이 경우 첫 결합이다, 그 이유는 더 밀착된 결합이 이어지는 것에서 취급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요셉은 그의 종, 의사에게 명령하였다. 이는 결합을 방해한 악으로부터 보호함을 의미한다. 이는 “명령하다”의 의미가 흘러듦이다로부터; 요셉의 표현함이 내적 부분이다로부터; “의원”의 의미가 악들로부터 보존함이다로부터 알려진다. 이 보존함이 방금 앞에서 말한 결합을 방해한 악들로부터를 표시하는 것은 문맥의 연결로부터 나타나고 있다. 그러므로 “요셉이 그의 종, 의원에게 명령했다”에 의해 결합을 방해한 악들로부터 보존함에 관련되는 내적 부분으로부터의 유입이 있음이 분명해진다. “의원”의 의미가 악들로부터 보존함인 이유는 영계에서 질병들이 악들과 거짓들이기 때문, 영적 질병은 악들과 거짓들밖에 더 아니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악들과 거짓들이 내적 인간으로부터 건강을 거두어가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음에 병듦을 유발한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고통들을 일으킨다; 말씀에서도 “질병들”에 의해 의미되는 것은 이밖에 더 없다.
“의사(physician)”, 또는 “의술”, “약”이 말씀에서 악들과 거짓들로부터 보호되게 함을 의미하는 것은 그것들이 언급되는 아래 구절에서 알게 된다:
만일 너희가 하느님의 음성을 귀기울인다면, 그리고 내가 보기에 선인 것을 행한다면, 그리고 나의 명령들에 청종하여 모든 그분의 규례들을 지킨다면, 나는 이집트인들에게 내렸던 질병의 어느 것도 내리지 않을 것이다; 그 이유가 나는 너희의 의사 여호와이기 때문이다 (출. 15:26);
“의사 여호와”는 악들로부터의 보호자(보존자)를 표시한다, 그 이유가 이것들이 “이집트인들에 의해 내려진 질병”에 의해 의미되기 때문이다. “이집트인에게 내려진 질병”이란 기억 속의 지식들로부터 추론함에 근원을 둔 악들과 거짓들, 그리고 신앙의 비밀들에 관한 오류들을 의미한다는 것은 주님의 신성한 자비로부터 질병들을 취급하는 대목에서 더 말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영적인 질병들이 의미된다는 것은 바로 위 인용구절, “만일 그들이 하느님의 말씀을 청종하고 선을 행하고, 그분의 명령에 귀기울인다면, 이 질병들은 그들 위에 내려오지 않는다”에서도 분명해진다.
같은 의미에서 주님은 자신을 의사라고 일컬으신다, 누가복음서에서:
온전한 자는 의사가 필요 없으나, 병든 자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로운 자가 아닌 회개할 죄인을 부르러 왔다 (눅. 5:31, 32);
위 구절에서 역시 “의사”는 악들로부터의 보호자를 표시한다, 그 이유가 “온전한” 자는 정의로운 자를, “병든” 자는 죄인을 뜻하기 때문이다. 예레미야서에서:
길르앗에 향유(香油, balm)가 없더냐? 거기에 의사가 없더냐? 왜 내 백성의 딸의 건강이 회복되지 않느냐? (예. 8:22);
“의사”는 교회에서 거짓들로부터 보호함을 표시한다, 그 이유가 “내 백성의 딸의 건강”이 교회에 있는 교리의 진리를 표시하기 때문이다.
“고치다(heal),” “치료하다(cure),” “치료(remedy),” 그리고 “약(medicine)”이 말씀에서 자연 측면에서 언급되는 것이 아니라 영적 측면에서 이다는 것이 아래 구절에서 분명해진다:
왜 당신께서는 우리를 치시고, 치료해주시지 않습니까? 그들은 평화를 기다리나 선은 없습니다; 치료의 때, 그러나 바라보니 공포(의 때입니다) (예. 14:19; 8:15).
다시:
나는 그로 하여금 건강과 고쳐짐이 있게 하겠다, 그리고 나는 그들을 치료할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들에게 평화와 진리의 왕관을 밝히 알릴 것이다 (예. 33:6).
다시:
건강을 위하여 네 판단을 판결할 자는 아무도 없다, 너는 회복의 약들을 가지고 있지 않다 (예. 46:11).
에스겔서에서:
거기로부터의 강둑의 이쪽과 저쪽에 식품의 모두 각각의 나무가 올라온다, 그들의 잎은 시들지 않는다, 거기로부터의 열매는 다 소비되는 일이 없다, 그것은 그것의 달들에서 다시 열매맺 는다, 그 이유는 거기로부터의 물들은 성소로부터 나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거기의 열매는 식품을 위해 있고, 거기의 잎은 치료약을 위해 있다 (겔. 47:12);
위 예언서에서 취급한 주제는 하느님의 새로운 집, 또는 새로운 성전이다, 이를 수단으로 새로운 교회가, 내적 의미에서 주님의 영적 왕국이 의미된다; 그러므로 : “식품을 위한 모두 각각의 나무가 올라오는 둑을 가진 강”은 총명과 지혜에 속하는 것들을 의미한다; “나무들”은 지각들과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들을 의미한다; “성소로부터 나가는 물들”은 총명을 만드는 진리들을 의미한다; “성소”는 천적 수준의 사랑, 즉 최고 의미에서인 주님의 신성한 인간으로부터의 사랑이다; “식품을 위한 열매들”은 사랑의 선들이다; “치료약을 위해 있는 잎”은 신앙의 진리이다. 이로부터 분명한 바, “치료약”이 의미하는 것, 즉 악들과 거짓들로부터 보호되는 것이다; 그 이유가 신앙의 진리가 생활의 선쪽으로 인도할 때, 이것이 보호해준다, 그 이유는 이것이 악들로부터 물러나게 하기 때문이다.

그의 아버지를 방부 처리를 하도록. 이는 어떤 접촉 전염으로 감염되지 않도록을 의미한다. 이는 “방부 처리함”의 의미가 접촉 전염으로부터 보호함이다로부터; 그리고 이스라엘의 표현함이 영적 교회의 선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러므로 “그의 아버지를 방부 처리를 함”에 의해 영적 교회에 속하는 선이 어떤 접촉 전염으로 감염되지 않도록 보호함의 수단이 의미되어진다. “방부 처리”가 접촉 전염으로부터 보호의 수단인 이유는 신체를 방부 처리하는 목적이 썩음으로부터 보호하기 때문이다. 접촉 전염으로부터 영적 선의 보호의 수단이 이어지는 구절에서 취급된다.

그리고 의사들은 이스라엘을 방부 처리했다. 이는 진리로부터 있는 선의 보호를 위해 행해지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방부 처리함”의 의미가 접촉 전염으로부터 보호하는 수단이다로부터, 여기서는 보호를 위해 행해지는 것이다; 그 이유는 “그들이 방부 처리를 했다”하고 말해지기 때문이다; “의사”의 의미가 악들로부터 보호함이다 이다로부터; 그리고 이스라엘의 표현함은 영적 선, 즉 진리로부터 있는 선이다.

그리고 그를 위하여 사십 일을 채웠다. 이는 시험들을 수단으로 있는 준비함의 상태들을 의미한다. 이는 숫자 “40”의 의미함이 시험들이다로부터; 그리고 “날들”의 의미가 상태들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것들이 준비의 상태들이다는 것이 “날들이 그를 위하여 채워짐”에 의해 의미되고 있다. 그 이유가 이 날들이 채워짐으로 시체가 썩음에서 보호됨이 준비되어지기 때문인데, 영적 의미에서는, 혼들이 악의 접촉 전염됨으로부터 보호되도록 하는 것이다.

그 이유는 방부 처리하는 기간이 사십 일이 걸리기 때문이었다. 이는 이러함이 보존의 상태들이다를 의미한다. 이는 “날들”의 의미가 상태들이다로부터; 그리고 “방부 처리를 함”의 의미가 보호의 수단이다로부터 알려진다.

그리고 이집트 사람들은 그를 위하여 곡을 했다. 이는 교회의 기억 속의 지식들이 슬퍼함을 의미한다. 이는 “울다”의 의미함이 슬픔의 극치이다, 그리고 내적 슬퍼함의 표현이다로부터; 그리고 이집트인의 표현함이 교회의 기억 속의 지식들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교회의 기억 속의 지식의 슬퍼함이 “이집트인들이 이스라엘을 위하여 울다”에 의해 의미된 것이 그의 죽음 때문에 있어진 슬퍼함을 뜻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이것은 글자의 의미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서 그들의 슬퍼함은 교회의 선 때문에 있는 슬퍼함을 뜻한다, 즉 이스라엘에 의해 표현된 선이 교회의 외적 부분인 기억 속의 지식들을 남겨 두고, 그것들로부터 교회의 내적 부분으로, 즉 진리의 선으로 승강했다. 이럴 경우 기억 속의 지식들은 이전 같이 있는 그 자체에서 더 이상 중요시되지 않는다, 그러나 진리의 선 아래쪽에 있는다. 그 이유가 영적 교회의 진리가 선이 될 때, 혁명이 거행된다, 즉 인간은 진리들로부터 진리를 바라보지 않고 선으로부터 진리들을 바라본다는 말이다, 이 혁명은 이미 몇 번 설명해왔었다. 이로부터 슬퍼함이 오고, 또한 다른 질서가 기억 속의 지식들 사이에 결과되어진다, 이것은 고통 없이 결과되지 않는다.

칠십 일 동안. 이는 충만한 상태를 의미한다. 이는 “70”의 의미로부터 분명해진다; 그 이유가 이 숫자는 “7”과 같은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7”은 시작으로부터 끝까지의 전체 기간, 고로 충분한 상태를 의미한다.
“70”이 전체 기간, 고로 충만한 상태를 표시하는 것은 아래 구절로부터도 분명해진다:
두로가 한 왕의 날들에 따라서 칠십 년을 잊혀 있는 때가 올 것이다; 칠십 년의 끝으로부터 두로는 음녀의 노래 같이 있을 것이다; 그 이유가 칠십 년의 끝으로부터 여호와께서는 두로를 방문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이. 23:15, 17);
“두로”는 교회의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들을 표시한다, 이것이 잊혀져 있을 것이다; “칠십 년”은 시작부터 끝까지의 전체 기간이다; “한 왕의 날들에 따라서”란 상태들을 표시한다, 그리고 “왕”은 진리들을 표시한다. 위 구절의 주제가 무엇인지를 생각해보려 하는 이들이다면, 눈치채는 것은, “두로”가 두로를 뜻하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내적 의미 없이 “두로가 칠십 년을 잊혀져 있는다”는 것을 납득할 수 없다는 것, “한 왕의 날들에 따라서”가 뜻하는 것도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예레미야서에서:
온 땅이 황무해질 것이다, 그리고 황페함이다, 그리고 이 나라들이 칠십 년을 바빌론을 섬길 것이다; 그리고 칠십 년이 찰 때, 내가 바빌론 왕에, 이 나라에 있는 그들의 불법을 방문할 것이다 (예. 25:11, 12; 29:10);
“칠십 년”은 황무함과 황폐함이 충만되는 상태를 표시한다, 그리고 이것은 유태 백성이 견뎌야 하는 칠십 년의 포로됨에 의해 의미되어져 있다.
다니엘서에서:
칠십 주가 네 백성과 네 거룩함의 도성 위에 포고된 것은 위법함이 절정에 이르기 위하여, 그리고 죄들을 가두기 위하여, 그리고 불법이 벌을 받기 위하여, 그리고 시대들의 정의로운 자를 데려다 놓기 위하여, 그리고 환상과 예언을 밀봉하기 위하여, 그리고 지극히 거룩함에 기름을 붓기 위하여 서 이다 (딘. 9:24);
위에서 “70”은 충만된 상태, 즉 주님이 오시기 이전 전체 기간을 분명하게 표시한다; 그러므로 그분에 관해서 말해지는 것은, 그분은 “시간의 충만해짐(때가 차자)”에서 오셨다 이다. “칠십 주”가 충만한 상태를 표시하는 것은 이 구절의 세부 사항들로부터 명백하다, 즉 많은 주들이 “위법함이 절정에 이르기 위하여”, 또한 “불법이 벌을 받기 위하여”, 또한 “시대들의 정의로운 자를 데려다 놓기 위하여”, 또한 “환상과 예언을 밀봉하기 위하여”, “지극히 거룩한 자에게 기름붓기 위하여 포고되어졌다”의 각 세부사항들은 충만함을 포함하고 있다는 것이다. 같은 것이 인용구절의 다음 구절에 포함되어 있다:
그러므로 알고 지각하라, 예루살렘을 회복하고 건설하라는 말이 나감으로부터 제 1 인 자 메시아에 게 (이르기) 조차 (하는데) 칠 주 일 것이다 (단. 9:25);
위의 “7”은 충만한 상태를 표시한다. (“7”, 또한 “70”은 충만한 상태를 의미한다) “예루살렘”이 이 구절에서 새로운 교회를 분명하게 표시한다, 그 이유가 예루살렘은 그때 건축되지 않았고, 파괴되어졌기 때문이다.

4-6절. 그리고 그를 위하여 곡하는 날들이 지나갔다, 그리고 요셉은 바로의 집에 말했다, 말하기를, 만일 제가 당신의 눈에서 은혜를 발견하였다면 부디 바로의 귀에 말합니다, 말하기를, 5 나의 아버지는 나에게 맹세하게 하고, 말하기를, 보라, 나는 죽는다. 내가 가나안의 토지에 나를 위하여 파둔 내 매장지에 너는 나를 매장하여라. 그리고 지금 청하옵건대 나로 올라 가게 하소서, 그리고 나의 아버지를 매장하게 하소서, 그리고 나는 돌아오겠습니다. 6 그리고 바로는 말했다, 올라 가라, 그리고 네 아버지가 너에게 맹세 시킨대로 그를 매장하라.

그리고 그를 위하여 곡하는 날들이 지나갔다. 이는 슬픔의 상태들이 완성되어졌다를 의미한다. 이는 “지나갔다”의 의미가 완성되어졌다 이다로부터; 그리고 “곡하는 날”의 의미가 슬픔의 상태들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리고 요셉은 바로의 집에 말했다. 이는 내적 부분이 자연적 마음에 유입됨을 의미한다. 이는 “말함”의 의미가 유입됨이다로부터; 요셉의 표현함이 내적 부분이다로부터; 집의 표현함이 마음이다로부터; 그리고 바로의 표현함이 자연 평면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러므로 분명한 바, “요셉이 바로의 집에 말하였다”에 의해 자연적 마음 안으로 내적 부분이 유입됨이 의미된다는 것이다.

말하기를, 만일 제가 당신의 눈에서 은혜를 발견하였다면. 이는 그것이 잘 받아들여질지 모른다를 의미한다. 이는 “당신의 눈에서 은혜를 발견한다”의 의미가 은근히 심어짐이다로부터, 고로 잘 받아질는지 모른다 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부디 바로의 귀에 말합니다. 이는 동의를 구하는 탄원을 의미한다. 이는 “부디”의 의미가 탄원함이다로부터; 그리고 “귀”의 의미가 순종함이다로부터, 여기서는 동의함인데, 그 이유는 왕에게 말하기 때문이다. 순종함 또한 동의함이다; 그러나 하위 등급에 대하여는 순종함, 상위 등급에 대하여는 동의함이다.

말하기를, 나의 아버지는 나에게 맹세하게 했다. 이는 그는 심정에 교회를 가지고 있다를 의미한다. 이는 “아버지”인 이스라엘의 표현함이 영적 교회이다로부터; 그리고 “맹세를 만든다”가 내향적으로 묶는다, 고로 심정에서 가지는 것이다로부터, 그 이유가 내향적으로 묶는 자, 고로 양심을 수단으로 묶는 자가 이것을 가지는 이유는 그가 심정에서 그것을 가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것이 여기서 “맹세를 만든다”에 의해 의미된다.

말하기를, 보라, 나는 죽는다. 이는 교회가 존재되는 것이 중지됨을 의미한다. 이는 “죽는다”의 의미가 더 이상 있지 않는다이다로부터; 그리고 교회가 만기가 될 때, 이것은 교회의 마지막 때이다.

내가 가나안의 토지에 나를 위하여 파둔 내 매장지에 너는 나를 매장하여라. 이는 교회는 이전의 교회가 있어 왔던 곳에서 소생되어야함을 의미한다. 이는 “매장지” 또는 “매장하다”의 의미가 소생되는 것이다로부터; 그리고 “가나안의 토지”의 의미가 주님의 왕국과 교회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야곱이 여타 다른 곳이 아니고, 아브라함과 이삭이 매장되어진 곳, 가나안의 토지에 매장되기를 바랬던 이유는 그의 후손들이 그 토지를 소유해야 하고, 그리하여 자신도 그들 사이에 누워 있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어쨌든 내적 의미는 이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밖의 어떤 것, 즉 거듭남과 부활의 어떤 것이다, 그 이유가 이 안에 교회가 있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내적 의미에서 “매장”에 의해 거듭남과 부활이 의미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가나안의 토지”에 의하여 교회가 의미되고, “아브라함, 이삭, 야곱”에 의해 신성 자체와 신성한 인간 측면에서의 주님, 그리고 관계적 측면에서 주님의 왕국의 내적, 외적 부분이 의미되기 때문이다. 거기 그들의 매장지의 내적 의미가 이러한 바, 그러므로 부활을 믿는 유태인들과 더불어 비록 자기들이 가나안 외의 지역에 매장된다 해도 자기들은 거기서 다시 일어날 것이라는 견해를 간직하고 있다.
“이전의 교회가 있어왔던 곳”에서 교회가 다시 일어나야 한다고 말한 이유는 태고 때로부터 주님의 교회가 가나안의 토지에 있어왔었기 때문이다. 이 이유 때문에 아브라함은 거기로 가도록 명령받았고, 야곱의 후손들이 그곳으로 데려와진 것이다; 그렇다고 가나안의 토지가 여타 다른 토지들 보다 더 거룩하다 해서가 아니고, 태고 때로부터 거기의 모든 장소들, 지역들, 도성들, 산들, 강들 등등이 주님의 왕국에 속하는 이런저런 것을 표현하였기 때문이다; 그것들에게 주어진 이름들 자체가 이런저런 것들을 포함했다. 그 이유가 천국으로부터 주어진 모두 각각의 이름이 어떤 장소에, 그리고 어떤 인물에 주어져서 천적인 것과 영적인 것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이 천국으로부터 주어졌는 바, 천국에서도 그렇게 지각되어졌다; 이것은 천적 수준이었고 천국과 교통을 가졌던 태고 교회가 이름들을 주었을 경우이다. 그러므로 교회가 거기서 다시 일어나야 하는 이유는 말씀이 거기서 주어지고, 말씀 안에서 그 토지의 모든 것들은 영적이고 천적인 것들을 의미하고 표현하여, 말씀은 땅에서 뿐만 아니라 천국에서도 이해되어진다; 이렇게 장소와 인물의 이름들이 의미적이지 않으면 이해됨은 가능해질 수가 없다. 이런 이유로 야곱의 후손들이 이곳으로 데려와져야 했고, 거기서 예언자들이 일어나서 그들을 수단으로 말씀들이 쓰여졌다; 이런 이유로 교회의 표현이 야곱의 후손들 사이에 설립되었다. 이상 살핀 바로 왜 이전의 교회가 있었던 곳에서 교회가 일어나야 한다고 말해졌는지가 납득되었을 것이다.
말씀에 있는 이름들이 어떤 것들을 의미한다는 것은 이름들의 의미가 설명되는 대목에서 살펴진 바 있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말씀의 이름들이 의미 측면에서 지각되어진다는 사항은 아직 알려진 바 없어 말해두고 가야 할 것 같다. 말씀이 읽혀질 때, 주님께서는 흘러드시고 가르치신다. 경이롭다 말할 것은 영계에도 쓰기, 저술이 있다는 것이다, 나는 이것을 때때로 보았었다, 그리고 읽을 수가 있었는데,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그것들은 선한 영들과 천사들을 수단으로 하면 명료하게 이해된다, 그 이유는 그것들이 그들의 보편적 언어와 일치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로 알도록 해준 것은, 거기서의 모든 단어는 음절 자체쪽으로 내려가는데, 그 세계에 속한 것, 즉 영계의 것을 포함한다; 그리고 거기서 그것들은 숨쉼으로부터, 말함으로 결과하는 애착으로부터, 고로 더 부드럽거나 더 거칠거나 하게 변경되어진다; 그러나 이것을 아마도 누구도 믿지 못할 것이다. 이런 것을 열어 보여주신 이유는 말씀에 있는 이름들이 천국 안에서 기록되어져 왔었다는 것, 거기서는 의미 측면에서 지각되었다는 것을 알게 해주시려는 이유 때문이다.

그리고 지금 청하옵건대 나로 가게 하소서, 그리고 나의 아버지를 매장하게 하소서. 이는 내적인 것을 수단으로 거기에 교회의 소생함이 있음을 의미한다. 이는 “묻다”의 의미가 소생하다 이다로부터; 여기서 “아버지”인 이스라엘의 표현이 교회이다로부터; 그리고 이를 말하는 요셉의 표현함이 내적 부분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리고 나는 돌아오겠습니다. 이는 자연적 마음에 현존함을 의미한다. 이는 “돌아오다”의 의미함이 현존함이다로부터 분명해진다; 그 이유가 내적 의미에서 “발표하는 것(set forth)”, 그리고 “가는(go) 것”은 사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되돌아 오다”, “다시 오다”는 떠남 대신에 생명의 현존이다, 그 이유가 마음이 여전히 거기에 있기 때문이다. 현존함이 자연적 마음에 있는 이유는 되돌아 오는 곳이 이집트이고, 이집트는 자연적 마음을 의미하기 때문에서 이다.

그리고 바로가 말했다, 올라 가라, 그리고 네 아버지를 매장하라. 이는 교회가 소생될 것임을 확증함을 의미한다. 이는 앞에서 살핀 바 있다. 확언함이 표시되어지고 있음은 분명하다.

그가 너에게 맹세 시킨 것에 따라. 이는 이것이 심정에 존재하기 때문이다를 의미한다. 이는 “맹세를 만든다”가 심정에서 가지는 것이다 (6514)에서 알게 된다.

7-9절. 그리고 요셉은 그의 아버지를 매장하러 올라 갔다. 그리고 그와 함께 바로의 모든 종들이 올라 갔다. 그의 집의 원로들, 그리고 이집트 토지의 모든 원로들, 8 그리고 요셉의 모든 집안, 그리고 그의 형제들, 그리고 그의 아버지의 집안이 함께 올라 갔다. 오직 아기들, 그리고 그들의 양떼, 그들의 목축떼 만이 고센의 토지에 남았다. 9 그리고 그와 함께 병거와 기병도 함께 했다. 그리고 군대는 심히 많았다.

그리고 요셉은 그의 아버지를 매장하러 올라 갔다. 이는 내적인 것이 교회를 다시 설치하려는 쪽으로 향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는 요셉의 표현함이 내적 부분이다로부터; “매장함”의 의미가 소생함이다로부터, 고로 다시 설치함인데, 그 이유는 교회에 관해서 말해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기서 “아버지”인 이스라엘의 표현함이 교회이다로부터 알려진다.

그리고 그와 함께 바로의 모든 종들이 올라 갔다. 이는 그것은 자연 평면 속의 기억 속의 지식을 자체에 인접되게 했다를 의미한다. 이는 “그와 함께 올라감”이 자신에게 인접되게 함이다로부터; 그 이유가 이들이 올라가게 된 것은 명령에 의한 것인 바, 요셉이 이들을 자신 쪽에 인접되게 한 셈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로의 종들”의 의미가 자연 평면의 기억 속의 지식들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바로에 의해 일반적 측면에서의 자연 평면이 표현된다; 그리고 자연 평면에 기억 속의 지식들이 있기 때문에, 이것이 바로의 “종들”에 의해서, 또는 “이집트인들”에 의해서 의미된다.

그의 집의 원로들. 선에 일치된 가운데 있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원로들”의 의미함이 지혜의 제일의 것들, 고로 선과 일치하는 것들이다로부터 (아래에서 살핀다); 그리고 “집”의 의미가 선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원로들”이 지혜의 제일의 것들을 표시하는 이유는 말씀에서 “노인”들이 슬기로운 자를, 그리고 인물로부터 추상화된 의미에서는 지혜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들”이 복합체에 있는 모든 진리들과 선들을 의미하고, 백성들 위에 임명된 제 1 인 자들은 총명 속에 있는 제 1의 진리들을, 그리고 “원로들”은 지혜의 제일의 것들, 고로 선 속에 있는 제일의 것들이 의미되어진다.
“제 1 인 자”가 총명 속에 있는 제 1의 진리들을 의미함에 대하여는 이미 살폈다; “원로들”은 지혜의 제일의 것들, 그리고 “노인”이 지혜를 의미함에 대하여는 아래 구절로부터 분명해진다:
그들로 여호와를 벡성의 회중에서 격찬하게 하라, 그리고 그분을 원로들의 집회에서 (격찬하게 하라) (시. 107:32);
위에서 “백성의 회중(모임, 집합)”은 총명에 속하는 진리들에 있는 이들을 표시한다, “회중”은 진리들을 서술하고, “백성” 또한 진리들을 서술한다; 그리고 “원로들의 집회”는 선에 있는 이들을 서술하는데, 이는 지혜 속에 있다; 그 이유가 지혜는 생명(삶) 속에, 고로 선 속에 있고, 총명은 지식들 속에, 고로 진리 속에 있다. 다시:
나는 원로들 보다 더 지혜롭습니다, 그 이유는 내가 당신의 명령들을 준행하기 때문입니다
(시. 119:100);
위에서 “원로들”은 슬기로운 자를 분명하게 표시한다. 마찬가지로 욥기서에서:
노인 안에 지혜가 있다, 그리고 날들의 길이 안에 총명이 있다 (욥. 12:12).
모세의 책에서:
너는 백발의 머리 앞에서 일어설 것이다, 그리고 노인의 얼굴을 존경하라 (레. 19:32);
이것이 명령된 이유는 노인들이 지혜를 표현했기 때문이다.
계시록서에서:
왕좌 위에 나는 24 원로들이 앉은 것을 보았다, (그들은) 흰옷을 입었다, 머리에 금빛의 왕관을 가졌다 (계. 4:4);
“원로들”은 지혜에 속하는 것들을 표시한다, 고로 선에 속하는 것들이다; “원로들”이 이런 것들을 표시하는 것은 그들을 묘사한 것으로부터: 즉 그들은 “왕좌 위에 앉았다, 흰옷을 입었다, 그리고 머리에 금의 왕관을 가졌다”에서 분명해진다; 그 이유가 “왕관”은 지혜의 선으로부터 있는 총명의 진리들을 표시한다; 흰옷”도 마찬가지이다. “머리에 금빛의 왕관”은 지혜의 선들을 표시한다; 그 이유가 “금”은 사랑의 선이다, 그리고 “머리”는 천적 평면(부분), 여기에 지혜가 있다. 셋째 천국, 즉 가장 안쪽 천국에 있는 이들이 “슬기롭다” 라고 불리우고, 주님에 가장 가까운 이들이다; 그러나 중간 천국, 즉 둘째 천국에 있는 이들은 “총명하다”라고 불리우고 주님에 가까이 있지는 않다.
다시:
모든 원로들이 왕좌를 빙둘러 섰다, 그리고 원로들, 그리고 네(4) 동물들 (계. 7:11);
위에서 역시 “원로들”은 지혜에 속하는 것들을 표시한다. 아래 구절도 마찬가지 이다:
아이가 노인을 향하여 으쓱대었다, 경멸하는 자가 존경받는 자를 향하여 우쭐대었다 (이. 3:5);
다시:
여호와 체바욷이 시온 산에서, 그리고 예루살렘에서 통치할 것이다; 그리고 그분의 원로들 앞에서 영광되실 것이다 (이. 24:23).
예레미야서에서:
나의 성직자들과 나의 원로들이 도성에서 숨을 내쉴 것이다, 그 이유는 그들이 그들의 혼에 원기를 주겠다고 식품을 찾아 헤멨기 때문이다 (애. 1:19).
다시:
그녀의 왕과 그녀의 제 1 인 자들이 법이 없는 나라들 사이에 있다; 시온의 딸의 원로들이 땅에 앉아 있다, 그들은 침묵하고 있다 (애. 2:9, 10).
다시:
그들이 시온에서 여인들을 강탈했다, 유다의 성들에서 처녀들을 강탈했다; 제 1 인 자들이 자기들 손으로 목을 매었다; 노인의 얼굴이 존경되지 않고 있다; 원로들이 성문으로부터 끊어졌다
(애. 5:11, 12, 14).
에스겔서에서:
불행에 불행이 겹치고, 소문이 소문에 겹쳐 더해질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예언자로부터 환상을 추구할 것이다; 그러나 성직자로부터 법이 멸해졌고, 원로들부터 묘략이 멸해졌다. 왕은 슬퍼할 것이고, 제 1인 자는 놀람으로 옷입을 것이다 (겔. 7:26, 27).
스가랴서에서:
예루살렘의 거리들에 남노인과 여노인들이 거주할 것이다, 그리고 나이가 많은 탓에 모두 각각은 자기 손에 지팡이를 가질 것이다 (슥. 8:4).
원로들은 지혜에 속하는 것들을 표현한다는 것은 모세에게 내려졌던 하느님의 영이 원로들에게도 내려져서 이로부터 그들이 예언하게 하신다는 기록으로부터도 알게 된다 (민. 11:16-17). 반대적 의미에서 “원로”는 지혜에 반대되는 것들을 표시한다 (겔. 8:11, 12).

그리고 이집트 토지의 모든 원로들. 이는 진리에 일치됨에 있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원로들”의 의미가 지혜의 제일의 것들, 고로 선에 일치함에 있는 것들을 의미한다, 여기서는 진리에 일치함에 있는 이들을 의미하는데, 그 이유는 선에 일치함에 있는 이들은 진리에 일치함에도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집트의 토지”의 의미가 기억 속의 지식들이 있는 자연적 마음이다로부터, 고로 또한 진리들이 있는 자연적 마음이다로부터; 그리고 기억 속의 지식들이 참일 때, 그것들은 기억 속의 지식들의 진리들이라 불리운다.

그리고 요셉의 모든 집안. 이는 영적 평면 속의 천적인 것들을 의미한다. 이는 요셉의 표현함이 영적 평면 속의 천적 부분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러므로 “요셉의 집안”이란 영적 평면 속의 천적인 것들을 표시한다.

그리고 그의 형제들. 이는 그로부터 파생된 진리들을 의미한다. 여기서 “요셉의 형제들”인 이스라엘의 아들들은 영적 진리들이다; 이 진리들은 “요셉”인 내적 부분의 천적인 것으로부터 있다, 그러나 “이스라엘”인 영적 선을 통하여서 이다.

그리고 그의 아버지의 집안. 이는 영적인 선을 의미한다. 이는 여기서 “아버지”인 이스라엘의 표현함이 영적인 선이다로부터; 그러므로 그의 “집안”은 이 선에 속하는 복합체에 있는 모든 이런저런 것들을 표시한다.

오직 아기들. 이는 순진을 의미한다. 이는 살핀 바 있다.

그리고 그들의 양떼. 이는 선행을 의미한다. 이는 “양떼”의 의미가 선행의 내면의 선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들의 목축떼. 이는 선행의 실제들을 의미한다. 이는 “목축떼”의 의미가 선행의 외면의 선들이다로부터; 고로 거기로부터의 실제들이다, 그 이유가 이것들이 선행의 외면의 선들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고센의 토지에 남았다. 이는 이것들은 교회의 기억 속의 지식의 가장 안쪽에 있었음을 의미한다. 이는 “고센의 토지”가 자연 평면의 한가운데 또는 가장 안쪽이다로부터, 거기는 교회의 기억 속의 지식들이 있다. 순진과 선행의 선들, 내면과 외면 모두가 이것의 가장 안쪽에 있었다는 것이 그들의 “어린 아이들, 양떼들, 목축떼들을 고센의 토지에 남겨두었다”에 의해 의미되어 있다, 그 이유가 어떤 것이 어디에 있든지, 그것들이 거기 있다고 말해지기 때문에서 이다. 고로 “그들이 남았다”에 의해 내적 의미에서 남았다가 의미되지 않고, 그러나 거기 있다, 즉 “고센의 토지”인 교회의 기억 속의 지식들의 가장 안쪽에 있다가 의미된다는 말이다.

그리고 그와 함께 병거가… 함께 했다. 이는 교리적인 것들을 의미한다. 이는 “병거”의 의미가 교리적인 것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기병도. 이는 지적인 것들을 의미한다. 이는 “기병”의 의미가 지적 부분에 속하는 것들이다로부터, 그 이유가 “말”에 의해 지성이 의미되기 때문이다. “기병”이 지성, 또는 이해력에 속하는 것들을 표시한다는 것을 아래 구절들로부터 더 알 수 있다:
여호와만이 그들을 인도하셨다; 그분은 그를 땅의 높은 장소들을 타게 만드셨다
(신. 32:12, 13);
위는 고대 교회에 관하여 이다; “그를 땅의 높은 장소들을 타게 만드심”은 더 높은 이해력을 수여하심을 표시한다.
다윗서에서:
당신의 영예 안에서 오르시고 진리로부터의 말씀, 관대하심으로부터 말씀, 정의로부터의 말씀을 타소서, 그리고 당신의 오른 손이 당신에게 경이로운 것을 가르칠 것입니다 (시. 45:4);
주님에 관해서 말해지고 있다; “진리로부터의 말씀을 탄다”는 진리로부터 이해함 자체에서 이다를 표시한다. 다시:
하느님을 노래하라, 너희는 그분의 이름을 찬양하라; 그분의 이름 야(Jah)를 수단으로 구름들을 타시는 그분을 드높여라 (시. 68:4);
위 구절 또한 주님을 말하고 있다; “구름들”은 말씀의 글자 의미를 표시한다; “그것들을 탄다”란 내적 의미에서 있는 것이다, 이 의미에서 진리는 총명과 지혜 안에 있다.
스가랴서에서:
그 날에 나는 놀람으로 모두 각각의 말을 쳐죽일 것이다, 그리고 그의 기수는 미침으로 쳐죽일 것이다, 그리고 나는 나의 눈을 유다의 집안에 열 것이다; 그러나 소경됨으로 백성의 모두 각각의 말을 쳐죽일 것이다 (슥. 12:4);
위에서 “말”은 지적 부분(지적인 것)을 표시한다; 그리고 “기수”는 지력을 표시한다. 위 구절의 “말”이 동물인 말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 “기수”가 기수를 뜻하지 않을 것임을 누가 짐작하지 못할까? 이것이 이해력에 속한다는 것은 너무나 확실하다.
“말”과 “기병”에 의해 지적인 것들이 의미되는 것, 반대적 의미에서 추론함과 이로부터의 거짓들을 의미함을 아래에서 알는지 모른다:
그리고 나는 보았다, 그리고 잘 보니, 흰 말, 그리고 그 위에 앉은 그는 활을 가졌다; 그리 고 왕관이 그에게 주어져 있었다, 그리고 그는 정복하며 정복하려고 나아 갔다. 그리고 거 기서 또 다른 말이 나오는데 붉었다, 그리고 그 위에 앉은 그에게 땅으로부터 평화를 가져 가는 것이 주어졌다, 그리고 그들은 서로를 죽이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에게는 큰 검이 주 어졌다. 그리고 나는 보았다, 그리고 잘 보니, 검은 말; 그리고 그 위에 앉은 그는 그의 손 에 저울을 가졌다. 그리고 나는 보았다, 그리고 잘 보니, 창백한(pale) 말; 그리고 그 위에 앉은 그의 이름은 죽음이었다 (계. 6:2-8);
위에서 “말”, 그리고 “말 위에 앉은 자”는 진리를 이해함에 속하는 이런저런 것들을 의미한다, 그리고 반대적 의미에서 거짓에 속하는 이런저런 것들을 의미함이 세부 사항들로부터 분명해진다. “흰말과 그 위에 앉은 자”는 말씀으로부터 진리를 이해함을 표시한다. “흰말 위에 앉은 자”가 말씀 측면에서의 주님이시다는 것이 분명한 말들로 말하여지고 있다 (계. 19:11, 13, 16). “붉은 말과 그 위에 앉은 자”는 악의 탐욕들로부터 추론함을 표시한다, 이로부터 폭력이 말씀으로부터의 진리들에 저질러진다; “검은 말과 그 위에 앉은 자”는 진리로부터의 지적인 것을 소멸시킴을 표시한다; 그리고 “창백한 말과 그 위에 앉은 자”는 결과적으로 지옥에 떨어짐을 표시한다.
반대적 의미에서 “말”과 “기병”은 타락된 지력을 표시한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거짓들이다. 에스겔서를 읽어보자:
오홀라는 내 앞에서 매춘짓을 했다, 그리고 그녀는 그녀의 애인에 홀딱 빠졌다, 이들은 통치자요 지도자이며, 그들의 모두는 잘생긴 젊은 이들이고, 말을 타는 기병이었다. 그녀의 자매 오호리바는 앗수르의 아들들을 사랑했다, 이들은 통치자이고 지도자들이고, 그녀의 이웃들인데, 잘 차려입고 말을 타는 기병이었고, 그들 모두가 잘생긴 젊은이 이었다 (겔. 23:5, 6, 12);
“오홀라”는 타락한 영적 교회를 표시한다, 이는 “사마리아”이다; 그리고 “오홀리바”는 타락한 천적 교회이다, 이는 예루살렘이다; 그 이유가 사마리아 지역에 있던 이스라엘족들이 영적 교회를 표현했고, 예루살렘 속에 있던 유태인은 천적 교회를 표현했기 때문이다. “앗시리아인”, “앗수르의 아들들”은 신앙의 진리들에 맞서 추론함을 표시한다; “말을 타는 기병”은 타락한 이해력을 표시한다, 이로부터 거짓들이 온다.
하박국서에서:
나는 갈대아인들을 휘저을 것이다, 이들은 모질고 성급한 민족이다, 땅의 넓이로 가서 자기의 소유가 아닌 주택을 상속받기 위하여서이다; 그들의 말은 표범보다 빠르다, 저녁의 이리보다 더 날카롭다, 그들의 기병들은 멀리로부터 와서 자신들을 펼쳐놓는다 (합. 1:6, 8)
“갈대아인”들은 거짓들 안에 있는 이들이다, 그러나 외형상으로는 진리들에 있는 것같이 나타난다, 고로 진리의 모독이다, 그리고 “바빌론”은 선의 모독이다. “땅의 넓이로 가는” 것은 진리들을 파괴함이다. 그러므로 분명한 것은, 멀리로부터 와서 자신들을 펼치는 기병“은 타락된 이해력에 속하는 것들, 고로 거짓들을 표시한다.

그리고 군대는 심히 많았다. 이는 진리들과 선들이 결합했음을 의미한다. 이는 “군대”가 선들과 진리들이다로부터; 그리고 여기서는 진리들과 선들이 “바로의 집안의 원로들”, “이집트의 토지의 원로들”, 그리고 “요셉의 집안”, 그리고 “그의 형제들”, 그리고 “그들의 아버지의 집안”에 의해 모두 의미되고, 이 모두가 함께 있기에, “심히 큰 군대”에 의해서는 진리들과 선들이 결합되었다가 의미된 것이다.

10-11절. 그리고 그들은 요단 강 건너편에 있는 아닷의 타작 마당에 왔다, 그리고 그들은 거기서 대단하게 소리내어 울었고 슬피 울었다. 그리고 그는 그의 아버지를 위하여 칠일 동안 애곡하였다. 11 그리고 그 토지의 주민인 가나안 족이 아닷의 타작마당에서 애곡하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말했다, 이것은 이집트 사람들에게 비통한 슬픔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것의 이름을 아벨미스라임이라 불렀다, 이곳은 요단 강 건너편이다.

그리고 그들은 아닷의 타작 마당에 왔다. 이는 첫 상태를 의미한다. 이는 “타작 마당”의 의미가 진리의 선이 있는 곳이다로부터, 그 이유가 타작 마당에 낟알이 있기 때문, 그리고 “낟알(grain)”에 의해 진리로부터 있는 선이 의미된다, 또한 선으로부터의 진리도 의미된다; 그리고 “아닷”의 의미로부터 이 상태의 품질이 의미된다. 고로 “아닷의 타작 마당”에 의하여 교회의 진리와 선에 관한 상태가 의미되는데, 그 이유는 이곳이 (가나안 토지쪽에서 볼 때) 요르단 건너편(요르단강을 건너서)에서 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건너감(통과함, passage)에 의해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들의 가르쳐짐이 개시됨이 의미된다 (아래에서 살핀다). 그 이유가 “요르단(강)”은 가나안 토지의 첫 경계선에 해당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가나안의 토지”에 의해 교회가 의미되는 바, “요르단”에 의해서는 교회가 시작됨의 처음에 있는 이런저런 것들, 또는 이런저런 것들로 해서 교회로 입장함이 열려지는 것이 의미된다.
그러므로 “아닷의 타작 마당”에 의해서는 처음 상태가 의미된다; 그리고 처음 상태가 의미되기에, 슬퍼함이 타작마당 가까이에서 있어졌다, 그 이유는 이곳이 요르단 이쪽이었기 때문, 그리고 교회를 의미하는 가나안이 시야 안에서 거기 있었기 때문이다. “타작 마당”이 진리의 선과 선의 진리가 있는 곳, 고로 교회 속의 것들이 있는 곳임이 아래에서 분명해진다:
너희 시온의 아들들아 기뻐환호하라, 그리고 너의 하느님 여호와 안에서 즐거워하라; 타작 마당들 이 낟알로 가득하다, 그리고 압착틀은 새로운 포도주와 기름으로 넘쳐흐른다 (욜. 2:23, 24);
위에서 “시온의 아들들”은 선으로부터의 진리들을 표시한다; “낟알로 가득한 타작 마당”은 진리들과 선들로 풍부함을 표시한다.
호세아서에서:
즐거워하지 마라, 오 이스라엘아, 그 이유는 너희가 너희 하느님 아래로부터 매춘짓을 범했기 때문이다, 너희는 모든 낟알 마당들에서 매춘 삯을 사랑했다; 타작 마당과 포도즙틀이 그들을 먹이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새로운 포도주는 그녀를 속일 것이다 (호. 9:1, 2);
“매춘짓을 범하고 매춘 삯을 사랑하는” 것은 진리들을 왜곡하는 것과 왜곡한 것을 사랑하는 것을 표시한다; “곡식 마당들”은 왜곡된 선의 진리들을 표시한다.
“타작 마당”이 선을 의미했고, 또한 진리도 의미했기에, 낟알들이 마당으로부터 모아질 때, 그들은 성막들의 축제를 벌였는데, 모세의 책을 읽어보자:
너희가 너희의 타작 마당으로부터, 그리고 포도즙틀로부터 그러모을 때, 너희는 칠 일 동안 성막의 절기(잔치)를 너희에게 만들 것이다 (신. 16:13);
“성막 절기”는 거룩한 예배를 의미했다, 고로 선과 진리로부터의 예배이다.

요르단(강) 건너편에 있는…(이집트에서 보는 요르단강이 아니고 가나안의 쪽에서 보아서 말해진다 따라서 통곡함이 강을 건너기 전에 있었다로 생각한다 역자 주.) 이는 선과 진리에 관하여 인지(認知, 인정하고 앎)함이 개시되는 상태를 의미한다. 이는 “요르단”의 의미함이 선과 진리를 인지하기를 개시함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 인지함이 주님의 왕국과 교회로의 입장의 처음에 해당되고 마지막 나감에 해당된다. 그러므로 “요르단 건너”는 선과 진리의 인지함을 개시함이 의미된다, 그 이유는 선과 진리를 인지함이 인간이 교회에 속하는 것들을 받아들임에서 첫째로 해야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거기서 대단하게 소리내어 울었고 슬피 울었다. 이는 통탄함을 의미한다. 이는 “소리내어 운다”가 통탄함 임에서 분명해진다. 여기서 의미된 통탄함은 개시함의 통탄함이다; 그 이유가 처음의 시기에서 있는 선과 진리를 인지함이 선 안에 심어져서 교회의 선이 되기 전 통탄함이 있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또 다른 상태가 자연 평면에서 유발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거기서 기억 속의 지식들은 또 다른 질서 안에 놓여짐이 틀림 없기 때문이다; 고로 인간이 이전에 사랑해왔던 이것저것은 파괴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그는 시험들을 수행해야만 한다. 그러므로 이 통탄함이 소리내어 울 정도의 통탄함으로 표현되고 있다.

그리고 그는 그의 아버지를 위하여 칠 일 동안 애곡하였다. 이는 슬픔의 끝을 의미한다. 이는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들이 심어지기 전, 통탄함이다로부터; 그리고 “칠 일”의 의미가 시작으로부터 끝까지의 전체 시기이다로부터; 여기서는 그러므로 끝을 의미하는데, 그 이유는 이 날들이 끝났을 때, 그들은 요르단을 건넜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토지의 주민인 가나안 족이 아닷의 타작마당에서 애곡하는 것을 보았다. 이는 교회 속의 선을 수단으로 슬픔을 지각함을 의미한다. 이는 “보다”의 의미가 지각이다로부터; “주민”의 의미함이 선이다로부터; “애곡함”의 의미가 통탄함이다; 그리고 “아닷의 타작 마당”의 의미가 처음의 상태, 즉 개시함의 상태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러므로 분명한 바, “토지의 주민, 가나안족, 아닷의 타작 마당에서 크게 통곡하는 것을 보았다”에 의해 교회의 선을 수단으로 통탄함이 지각됨이 의미된다.

그리고 말했다, 이것은 이집트 사람들에게 비통한 슬픔이다. 이는 기억 속의 지식들은 그것이 교회 속의 진리 안으로 입장하기 전, 슬픔을 가진다를 의미한다. 이는 앞에서 살핀바 있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것의 이름을 아벨미스라임이라 불렀다. 이는 통탄함의 품질을 의미한다. 이는 “이름”, 그리고 “이름을 부름”의 의미가 품질이다로부터, 그리고 고대 시대 때는 어떤 것이다와 그것이 어떤 상태이다를 의미하기 위해 이름이 주어졌는 바, 여기서는 품질이 의미된다; 그러므로 품질 자체가 “아벨미스라임”에 의해 의미된다, 이 이름의 원어는 “이집트인들이 통곡한다”를 뜻한다.

12, 13절. 그리고 그의 아들들은 그가 그들에게 명령했던 대로 그에게 행했다. 13 그리고 그의 아들들은 그를 가나안의 토지로 운반했다, 그리고 그를 아브라함이 매장지를 소유하기 위해 마므레 앞, 헷족 에브론으로부터 들판과 함께 매입한 막벨라의 들판에 있는 굴에 매장했다.

그리고 그의 아들들은 그가 그들에게 명령했던 대로 그에게 행했다. 이는 유입에 따른 결과를 의미한다. 이는 “행하다”의 의미가 결과이다로부터; “명령하다”의 의미가 유입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리고 그의 아들들은 그를 가나안의 토지로 운반했다. 이는 교회가 저쪽에로 이동했음을 의미한다. “그들이 운반했다”의 의미함이 이동했다 이다로부터, 즉 교회가 이동했다 이다, 그 이유는 이것이 “가나안의 토지”에 의해 의미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를 매장했다. 이는 거기서 소생함을 의미한다. 이는 “매장함”이 소생함이다로부터 분명해진다.

막벨라의 들판의 굴에. 이는 거듭남을 시작함을 의미한다. 이는 “막벨라의 들판의 굴”의 의미함이 희미함에 있는 신앙이다로부터; 그리고 “막벨라”는 거듭남을 표시한다; 고로 거듭남의 시작이 의미된다, 그 이유가 이때 신앙이 희미함에 있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이 들판과 함께 샀다. 이는 주님께서 도로 찾은 이들을 의미한다. 이는 “사다”의 의미가 되찾다 이다로부터; 아브라함의 표현함이 주님이시다로부터; 그리고 “들판”의 의미가 교회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러므로 분명한 바, “아브라함이 들판과 더불어 샀다”에 의해 주님께서 되찾은 교회 속에 있는 이들이 의미된다는 것이다.

매장지를 소유하기 위해 헷족 에브론으로부터. 이는 신앙으로부터 진리와 선을 받고 거듭나지려고 자신이 고통하는 이들을 의미한다. 이는 “매장지”의 의미가 거듭남이다로부터; 그리고 에브론 헷족의 표현함이 선과 진리가 받아질 수 있는 이들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마므레 앞. 이는 질과 양을 의미한다. 이는 “마므레”의 의미가 결합되는 것들의 질과 양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아브라함이 마므레 앞 막벨라의 들판의 동굴을 매입한 것이 무엇인가 특별한 어떤 것이 의미되리라는 것은 이 말이 거의 똑같게 나열되어 여러 군데의 구절에서 언급되어 있다는 것으로부터 짐작할 수 있다. 아래에 모아 보았다:
마므레 앞 막벨라에 있는 에브론의 들판을 확실히 (자기 것임을) 만들었다 (창. 23:17-18).
이후, 아브라함은 그의 아내 사라를 마므레의 얼굴 위 막벨라 들판의 동굴에 매장했다. 그리고 들판과 거기 있는 동굴이 헷의 아들들로부터 매장지로 아브라함의 소유가 된 것을 확실히 해두었다 (창. 23:19, 20).
그들은 아브라함을 마므레의 얼굴 위쪽인 헷족 소알의 아들 에브론의 들판에 있는 막벨라의 동굴에 아브라함을 매장했다; 아브라함이 헷의 아들들로부터 샀던 들판이었다 (창. 25:9, 10).
나를 헷사람 에브론의 밭에 있는 굴에 매장하라, 이 굴은 가나안의 토지 마므레 앞 막벨라 밭에 있는 것이다. 아브라함이 그의 매장지를 소유하기 위해 헷사람 에브론에게 밭과 함께 샀다. 이 밭과 거기 있는 굴은 헷사람에게서 산 것이다 (창. 49:29-32)..
그리고 이 장에서
그들은 그를 막벨라의 동굴에 매장하였다, 이것은 아브라함이 매장지의 소유를 위해 들판과 더불어 헷족 에브론으로 샀다, 마므레에 있다.
위 구절들에서 읽듯 거의 비슷한 단어의 반복됨에 의해 의미되는 특별한 어떤 것은 아브라함, 이삭, 야곱을 수단으로 주님이 표현되어졌다는 것; 그들의 매장이 부활과 소생을 표현했다는 것; 막벨라 동굴에 의해 거듭남의 시작이; 헷족 에브론에 의해 신앙의 선을 받는 이들, 그리고 거듭나지기 위해 자신에게 있는 고통을 감내하는 이들을; 헷족의 아들들에 의해 영적 교회가 표현된다는 것이다. 하여 비록 여러 군데에서 반복되었을 뿐 실상 한 줄밖에 안되는 정도의 말만 가지고도 영적 교회(a spiritual Church)를 다시 설립(시작, set up, establish)하는데 필요한 요건이 다 충족되어 의미되어 있다.

14절. 그리고 요셉은 이집트로 돌아 갔다, 그와 그의 형제들, 그리고 그와 함께 그의 아버지를 매장하러 올라 갔던 모든 이들이 그가 그의 아버지를 매장한 뒤 돌아 갔다.

그리고 요셉은 이집트로 돌아 갔다, 그와 그의 형제들. 이는 기억 속의 지식들에서 내적 부분의 천적인 것과 신앙의 진리가 살아가는 것(삶)을 의미한다. 이는 “되돌아 오다”의 의미가 사는 것이다로부터; 요셉의 표현함이 내적 부분의 천적 평면이다로부터; 여기서 “그의 형제들”인 이스라엘의 아들들의 표현함이 복합체에 있는 신앙의 진리들이다로부터; 그리고 “이집트”의 의미가 기억 속의 지식들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기억 속의 지식들 안에서 내적 부분의 천적인 것과 신앙의 진리들이 살아 감이 창세기 몇 장에 걸쳐 있는 셈이기는 하다; 즉 요셉이 이집트의 토지의 통치자와 바로의 집안의 주인으로 만들어짐, 그리고 야곱의 아들들이 요셉에게 오는 여행에서, 그리고 이집트로 이들과 더불어 아버지까지 오게 됨에서 취급되어져 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의 아버지를 매장하러 그와 함께 올라 갔던 모든 이들. 이는 거듭남에 도움이 되는 모든 것들을 의미한다. 이는 “매장하다”의 의미가 거듭남과 부활함이다로부터; 그리고 소생함과 다시 교회가 설립됨이다로부터; 이러한 것에 도움이 되는 것들이 “그와 함께 올라갔던 모든 이들”에 의해 의미된다. 그 이유가 이 모든 이들은 요셉의 전체 집안, 또한 그의 아버지의 집안, 마찬가지로 바로의 집안의 원로들, 그리고 이집트의 토지의 원로들이기 때문; 하여 “요셉의 집안”에 의해서는 영적 평면의 천적인 것들이 의미되고, “그의 아버지의 집안”에 의해서는 영적 선의 모든 것들이 의미되고; “바로의 집안의 원로들”은 선과 일치하는 것들이 의미되고; “이집트의 토지의 원로들”에 의해서는 진리와 일치하는 것들이 의미된다. 그러므로 분명한 바, “그와 함께 매장하려 올라갔던 모든 이들”은 거듭남에 도움이 되는 모든 것들이 의미된다. “매장하는” 것이 거듭남과 부활함을 의미하고, 또한 소생함과 교회가 다시 설립됨(시작함)도 의미한다고 말하는 이유는 이 의미들이 결국은 같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거듭남이 부활함인 이유는 인간이 거듭나질 때, 그는 죽은 자로부터 살아 있게 되어 다시 일어나기 때문이다. 같은 방식에서 교회가 소생되어 인간 안에서 다시 설립될 때도 그러하다; 그 이유가 이것도 거듭남에 의해, 고로 죽음으로부터 생명으로인 부활함에 의해 결과되기 때문이다.

그가 그의 아버지를 매장한 후… 이는 교회를 소생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매장되어짐”의 의미가 교회가 소생함이다로부터; 이스라엘의 표현함이 영적 (평면의, 천국의) 교회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15-21절. 요셉의 형제들은 그의 아버지가 죽었다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그들은 말했다, 요셉이 혹시 우리들을 미워하여 우리가 그에게 행한 모든 악을 다 갚지나 아니할까 하고 16 요셉에게 말을 전하여 이르되 당신의 아버지가 돌아 가시기 전에 명령하여 이르시기를 17 너희는 이같이 요셉에게 이르라 네 형들이 네게 악으로 갚았을 지라도 이제 바라건대 그들의 잘못과 죄를 용서하라 하셨나니 당신 아버지의 하느님의 종들인 우리 죄를 이제 용서하소서 하매 요셉이 그들이 그에게 하는 말을 들을 때에 울었더라. 18 그의 형들이 또 친히 와서 요셉의 앞에 엎드려 이르되 우리는 당신의 종들이니이다. 19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하느님을 대신하리이까? 20 당신들은 나에 대하여 악을 생각했으나, 하느님은 그것을 선을 위하여 생각하셨다, 하여 오늘과 같이 하시어, 많은 사람들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셨다. 21 당신들은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당신들을 떠받쳐주리다, 그리고 당신들의 아기들도 하고 그들을 위로하였더라.

요셉의 형제들은 그의 아버지가 죽었다는 것을 보았다. 이는 선과 진리로부터 멀리해지는 것, 그리고 교회가 소생되어졌음을 지각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보다”의 의미가 이해하는 것과 지각하는 것이다로부터; 여기서 “형제들”인 야곱의 아들들의 표현함이 진리와 선으로부터 멀리해지는 것이다로부터, 그 이유가 과거 그들이 요셉을 죽이기를 바랬었고, 그를 팔리게 만들었을 때, 그들은 진리와 선으로부터 멀리해지려는 것을 표현했기 때문이다. 이런 상태가 이어지는 구절에서 “혹 요셉이 우리를 미워하기라도 한다면, 그리고 우리가 그에게 앙갚음했던 모든 악을 우리에게 되갚는다면”의 말로부터도 분명해진다. “죽어 있다”의 의미가 소생되어지는 것이다로부터, 즉 교회가 소생되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아버지”인 이스라엘의 표현함이 교회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러므로 분명한 바, “요셉의 형제들은 자기들의 아버지가 죽었다는 것을 보았다”에 의해 교회가 소생되어졌던 진리와 선으로부터 멀리해졌던 것을 수단으로 지각함이 의미되고 있다.

그리고 그들은 말했다, 혹 요셉이 우리를 미워하기라도 한다면. 이는 그들은 내적 부분을 거절했다를 의미한다. 이는 “미워한다(증오함을 갖고 있다)”의 의미가 반대되는 것, 그리고 거절하는 것이다로부터; 그리고 요셉의 표현함이 내적 부분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사실상 요셉이 그들을 거절한 것이 아니라 그들이 요셉을 거절했다. 즉 외적 부분(“형제들”)의 탓을 내적 부분(“요셉”)의 탓으로 돌리고 있는데, 이는 외관에 따라 말하면 그런 식이 된다. 즉 미워함 복수함 같은 것들은 실상 인간에게 속한 특성일 뿐인데, 말씀 안에서 여호와께서 복수하시는 듯 쓰여 있는 경우와 같다.

우리가 그에게 앙갚음했던 모든 악을 우리에게 되갚는다. 이는 응분의 상벌에 따라 임박해진 처벌을 의미한다. 이는 “우리가 그에게 징벌한 모든 악이 되돌려진다”의 의미가 응분에 따른 처벌이다로부터; 그 이유가 누군가에게 행하여진 악을 되돌림은 그 악을 저질른 것으로부터의 처벌이기 때문이다. 처벌함, 악을 되돌림이 영계에서는 어떻게 있는지를 말해야만 할 것 같다, 그 이유는 이로부터 본문의 내적 의미가 분명해지기 때문이다. 만일 악령들이 영들의 세계에서 어떤 악을 행하려 할 때, 그들이 세상에서 저질렀던 악을 넘어서 저지르려고 하면, 처벌자들이 초과되어 행해지는 악에 대하여는 응징을 한다. 처벌 당한 자는 어떻게 처벌자들이 자기가 초과된 악을 했는지를 알아냈는지를 말할 수 없다. 또한 그에게 알려주는 것은, 이것이 다른 세계에서의 질서이다는 것, 즉 악 자체는 그것과 동등한 처벌을 꼭함께 동반한다는 사실이다. 하여 행위로부터의 악은 처벌로부터의 악과 완전히 결합되어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그것의 벌은 악 자체 안에 있다는 것이다. 고로 징벌자가 즉시 있는 셈이다.
위의 경우는 악령들이 영들의 세계에서 악을 행할 때이고, 그들의 세계인 지옥에서는 그들이 이 세상에서 품어왔던 악들로 행동된 악에 따라 서로가 서로를 응징한다; 그 이유가 그들이 자기들과 더불어 악을 가져왔기 때문이다. 이상 살핀 바로부터, 처벌이 응분의 상벌에 따라 임박하다는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가 분명해졌을 것이다; 즉 “우리가 그에게 징벌한 모든 악이 되돌아 온다”에 의해 의미된 것이다. 그러나 선한 영들의 경우는 다르다, 그들이 악을 말하거나 행한다면, 그들은 처벌되지 않는다, 그러나 용서된다, 변명을 인정해준다. 그 이유는 그들의 목적이 악을 말하거나 행하는데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은 지옥에 의해 자기들 안에서 악을 흥분되었기 때문임을 알고 있다, 하여 그들은 자기들의 과오로서 인정되기까지로 이어지지 않는다; 그리고 그들에게서 목격되는 것은 이런 악들에 저항하려 애쓴다는 것, 또한 벌어진 악들에 슬퍼한다.

그들은 요셉에게 전하여 말하기를. 이는 내적 부분으로부터의 유입과 그 결과 지각함을 의미한다. 이는 “전하다(command, 명하다)”의 의미가 유입이다로부터; 요셉의 표현함이 내적 부분이다로부터; 그리고 “말하다(say)”의 의미가 지각하다 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러므로 “그들이 요셉에게 명하여, 말하기를”에 의해 내적 부분으로부터의 유입이 의미된다, 그 결과 지각함이 결과된다. 요셉에게 대한 그들의 명령함이 내적 부분으로부터 외적 부분으로의 유입인 이유는 유입은 언제나 내적 부분에서 외적 부분으로 만 있기 때문이다. 이 반대로의 흐름은 없다.

당신의 아버지는 그가 죽기 전, 명령하시어 말하기를. 이는 그것은 교회의 명령을 수단으로 하여 있다를 의미한다. 이는 여기서 “아버지”인 이스라엘의 표현함이 교회이다로부터; “명령함”의 의미가 유입이다로부터, 여기서의 명령하다는 교회로부터 오는 명령, 고로 신성으로부터 이다; 그리고 “그가 죽기 전”의 의미함이 교회가 아직 존재하는 동안이다로부터 알려진다. 이것이 교회의 명령을 수단으로 이다는 것은 모든 이는 그의 형제, 또는 이웃을 용서해야 한다는 주님의 아래 말씀으로부터 분명해진다;
베드로가 예수께 말했다, 저에게 죄를 진 형제를 몇 번 용서하면 됩니까? 일곱 번 까지 입니까? 예수께서 그에게 말하신다, 나는 네게 일곱 번까지 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일흔 번씩 일곱 번이다 (마. 18:21, 22).
유태 나라에 각인된 것은, 그들은 결코 용서하지 않는 것, 자신에게 상해를 입힌 자는 적으로서 간주한다는 것, 그러므로 그들로 누군가를 미워하는 것이 당연하듯 허용된 셈이었다, 하여 급기야는 그를 죽여도 되는 쪽을 선택하는 것이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들이 이렇게 된 이유는 그들에게는 내적 측면이라는 것이 하나도 없이 외적인 것 뿐이었기 때문이다, 고로 그들에게는 내적 교회의 명령은 없었다. 이것이 왜 요셉의 형제들이 요셉이 자기들을 미워하고 자기들에게 악을 행할까 매우 두려워했던 이유이다. (이 민족들이 완전 외적이었기 때문에 그들은 보고 들은대로 적는 것이 어느 민족 보다 꼼꼼해서 성경을 만드는 인간 도구로는 최적이었다 역자주.)

그러므로 너희는 요셉에게 말하라. 이는 행해져야 한다는 것을 내적 부분으로부터 지각함을 의미한다. 이는 “말하다(say)”가 역사적 말씀에서 지각하다이다로부터; 그리고 요셉의 표현함이 내적 부분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행해져야 하는 것이 “고로 너희가 말하라”에 의해 의미되어 있다.

바라건대 네 형제들의 잘못, 그리고 그들의 죄를 부디 용서해라. 이는 청원과 회개를 의미한다. 이는 “부디 용서하라”가 청원함을 의미한다로부터; 그리고 이것은 회개함 또한 의미한다는 것은 그들이 잘못하고 죄지었다는 것을 고백함으로부터, 그리고 이어지는 것, 즉 그들은 자신들을 요셉에게 종들로서 바치는 모습에서 분명해진다. “잘못함”과 “죄지음”이라는 중복된 듯한 언급이 있는 이유는 말씀의 세부적 측면에는 선과 진리의 결혼이 있기 때문이다; 하여 “잘못(transgression)”은 진리에 대한 악행을, 고로 보다 덜 악한 것을; “죄(sin)”는 선에 대한 악을, 고로 보다 더 큰 악행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이것 모두가 언급되는 것인데, 다른 구절들에서 이를 읽어보자:
야곱은 라반에게 말했다, 나의 잘못이 무엇입니까? 나의 죄가 무엇입니까? 당신은 내 뒤를 따라 추격해왔다 (창. 31:36).
이사야서에서:
나는 너의 잘못들을 구름 같이 지워없앨 것이다, 그리고 너의 죄들을 구름 같이 (지울 것이다) (이. 44:22)
에스겔서에서:
그가 잘못한 그의 잘못함에서, 그가 죄지은 그의 죄 안에서, 이것들 안에서 그는 죽는다
(겔. 18:24).
다시:
당신의 잘못들이 밝혀지는 한편, 모든 너의 일들 안에서 너의 죄들이 나타날는지 모른다
(겔. 21:24).
다윗서에서:
잘못되어짐이 용서되는 자는 복있다, 죄지은 것이 덮어지는 자는 복있다 (시. 32:1).

그 이유는 그들이 너에게 악으로 갚았기 때문이다. 이는 그들이 흘러드는 선과 진리로부터 돌아서 버렸기 때문이다를 의미한다. 이는 “악”의 의미가 돌아서 버림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리고 선과 진리로부터 라고 말한 이유는 “그들이 요셉에게 갚았다”고 말해졌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요셉”은 천적 부분(평면), 그리고 내적 선이고, 이를 통하여 주님으로부터 선과 진리가 흘러들기 때문이다. 내적 부분을 통하여 있는 유입에 주목하면 이렇다: 주님께서는 선과 진리를 가지시고 인간의 내적 부분을 통하여 계속적으로 흘러드신다, 하여 선은 생명과 그것의 열을 주는데 이것은 사랑이고, 진리는 계발함과 그것의 빛을 주는데, 이것은 신앙이다. 그러나 이 유입함이 더 전진할(advance) 때, 즉 외면들 쪽으로 발전할 때, 거기서는 거절함, 타락시킴, 질식시키는 악들과 더불어 있게 된다; 이때 거절, 타락, 질식시킴의 정도에 따라서 내면들은 그 정도만큼 닫혀진다, 그리고 결국 남는 것은 여기저기 흩으러져 조금씩 남고 유입의 통로 역시 갈라진 틈새 수준으로만 열려 있다; 이로부터 거기에 인간에게 생각하는 것과 뜻하는 능력이 남아 있으나 진리와 선에 대하여는 맞서 있다. 어쨌든 이 닫힘은 악의 정도에 따라서 외면의 것들을 향하여 더욱 더 꿰뚫는다 (스며든다, 통과해간다, penetrate), 하여 이것은 감각적 수준 쪽으로 내려간다, 이로부터 이때 생각함이 온다. 그다음 쾌락(pleasure)들과 열망(craving)들이 모든 것을 빼앗아 간다. 이런 상태에 지옥들이 있다; 그 이유가 이익과 명예와 명성을 위하여 생각했었던 선하고 고귀한(올바른) 것에 대한 것은 다른 삶에 오는 악한 자로부터서는 그것 모두를 떼어내버리기 때문이다. 이때 이 악한 자는 감각적인 것 안에 있는다.

그리고 지금 바라건대 당신의 아버지의 하느님의 종들의 잘못을 용서 하소서. 이는 회개, 그리고 교회 속에 신성한 것들이 있음을 인정함을 의미한다. 이는 “부디 잘못을 용서하소서”의 의미가 잘못을 저질렀음을 고백함, 그리고 회개함이다로부터; 그리고 “당신의 아버지의 하느님의 종들”의 의미가 교회 속의 신성한 것들을 인정함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 이유가 자신들을 “그의 아버지의 하느님의 종들”이라 일컬음으로 그들은 자기들이 교회의 하느님을 섬길 것임을, 결과적으로 교회 안에 신성한 것들이 있음을 인정함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이스라엘”, 여기서 “아버지”에 의해 교회가 의미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요셉은 그들이 그에게 말했을 때 울었다. 이는 사랑으로부터 수용함을 의미한다. 이는 “울다”의 의미가 슬픔과 사랑 모두를 의미한다로부터; 요셉의 표현함이 내적 부분의 천적 측면이다로부터; 그리고 “말하다(speak)”의 의미가 유입이다로부터, 이로부터 수용함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 이유가 유입이 “요셉”인 내적 부분의 천적 측면으로부터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수용함은 요셉의 “형제들”인 자연 평면에 있는 진리들을 수단으로 있다. 그러므로 “그들이 요셉에게 말했을 때, 그는 울었다”에 의해 사랑으로부터 수용함이 의미됨이 분명하다.

그리고 그의 형제들은 와서 그 앞에 엎드렸다. 이는 내적 부분 아래 자연 평면에 있는 것들이 복종함을 의미한다. 이는 여기서 “형제들”인 이스라엘의 아들들의 표현함이 자연 평면에 있는 영적 진리들이다로부터; “요셉 앞에 엎드림”의 의미가 복종함이다로부터; 그리고 요셉의 표현함이 내적 부분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로부터 분명해지는 바, 그의 “형제들이 가서 요셉 앞에 엎드렸다”의 의미가 내적 부분 아래 자연 평면에 있는 것들이 복종함이다가 분명해진다. 이 장의 주제는 영적 교회(a spiritual Church)를 다시 설립하심이다, 그리고 이 구절에서는 자연 부분(평면)의 것들이 내적 부분(평면)에 복종함이다; 따라서 분명해지는 것은, 자연 평면의 것, 또는 외적 인간에 속하는 것들이 영적 평면, 또는 내적 인간에 (완전) 복종함이 있지 않으면, 어느 누구에게도 (주님의) 영적 교회(a spiritual Church)의 설립은 가능할 수 없다는 것이다. 신앙에 속한 진리만이 인간을 선점하고, 선행에 속하는 선이 그 하위 등차에서 있는 한, 그 만큼에서 자연적, 외적 인간은 영적 또는 내적 인간에게 복종하지 않고 있다는 말이다. 그러나 선이 지배력을 확보하자마자, 자연적, 외적 인간이 자신을 복종하게 내놓아지고, 이때 인간은 영적 교회가 된다. 이는 인간은 진리가 가르치는 것을 애착으로부터 행한다는 것, 그리고 그의 자연적 인간(평면)이 애착과 반대되는 것을 바란다 할지라도 그것과는 상관 없이 자기가 애착하려는 것과 반대되는 쪽으로는 절대 행동하지 않는다는 사실로부터 알는지 모른다. 애착 자체, 애착함의 요구에 따라서 있어지는 추론력이 지배력을 가진다, 그리고 이것은 자연 평면에 있는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의 기쁨들을 조절하여 그것에 너무 흠뻑 취하지 않게 경감되게 하거나, 억제하거나, 제압하거나 심지어 완전히 눌러버리기까지 (정복) 할 수 있다(subdue). 또한 자연 평면에 있는 기억 속의 지식들을 채우고 있는 오류들의 경우도 마찬가지 이다. 이것이 거듭되다 보면, 차츰 자연 평면의 많은 사항들을 점유하여 마지막에는 완전 정복하는 것, 즉 자연 평면 전체가 복종하는 경지에까지 다다른다. 하여 이 복종함이 인간의 쾌락들(pleasure, 기쁨들) 사이에 있어진다. (즉 사사건건에서 주님의 말씀에 복종할 때 마다, 즉 선행의 선과 신앙의 진리에 따른 생활이 기쁨이 되어 있다. 역자주) ; 이후 자연 평면은 쉼에 있고, 일치함에 놓여 있는다. 그리고 일치함에 놓일 때, 내적 부분의 유쾌함에 동참한다. 이상 살핀 바로부터, 자연 평면에 있는 것들이 내적 부분에 복종함이 뜻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는지 모른다. 이것이 “그의 형제들이 그 앞에 엎드려 절하고, 말하기를, 우리는 당신의 종들입니다”에 의해 의미되고 있다.

그리고 그들은 말했다, 보라, 우리는 당신의 종들입니다. 이는 그들은 자신들 마음대로 처신하지 않을 것임을 의미한다. 이는 “종들”의 의미가 자신의 자유함 없이 있는다 이다로부터, 고로 자신의 자유 의사대로 하지 않는다 이다.

요셉이 그들에게 말했다, 두려워 마시오. 이는 내적 부분을 수단으로 재-창조됨을 의미한다. 이는 요셉의 표현함이 내적 부분이다로부터; 그리고 “두려워 말라”의 의미가 그들은 근심에 있지 않아도 된다 이다로부터; 그리고 이어지는 말로부터, 즉 그들을 위로하여 걱정을 떨치게 하고 있다. 그러므로 “두려워 말라”에 의해서는 재 창조가 의미된다.

내가 하느님을 대신하리이까? 하느님이 설비하실 것임을 의미한다. 이는 “내가 하느님을 대신할까?”가 하느님이 있으심이 아니고, 하느님이 설비하신다는 것이 의미되는 질문 형식의 말투이다.

그리고 당신들은 나에게 악을 생각했다. 이는 멀어진 것들은 악밖에 더 의도하는 것이 없다를 의미한다. 이는 여기서 “당신들”인 야곱의 아들들의 의미함이 진리와 선으로부터 멀어진 것들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 이유가 그들이 요셉에 대해 악을 생각했을 때, 그때 그들은 멀리되어진 것들을 표현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 위에 악을 생각함”의 의미가 악을 의도하는 것이다로부터; 그 이유가 누군가에 맞서 생각함은 악을 의도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멀어진 것들은 선을 의도할 수 없기에 악밖에 더 의도되는 것은 없다라고 말해진 것이다. 이 경우를 조금 더 주목하면 이렇다: 선과 진리로부터 멀어진 이들은 악밖에 더 의도하는 것이 없다, 그 이유는 그가 선을 의도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가 의도한 것들은 실상 그를 통치하는 셈이다, 그러므로 그것들은 그의 모든 생각들 안에, 그의 지극히 작은 것(행동) 안에도 있다; 그 이유가 의도나 목적이 인간의 생명 자체이기 때문, 목적은 그의 사랑이기 때문, 그리고 그의 사랑은 그의 생명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인간은 그가 가진 목적과 똑같고, 천국의 빛에서 있는 그의 형상이다; 그리고 일반적(전체적) 측면에서의 그의 형상은 그의 의지의 사소한 것에서도 똑같다. 고로 그의 목적이 이러이러하면, 전체 인간 또는 그러그러하다.
이로부터 분명한 바, 악한 목적이 있는 자는 선한 목적들이 있는 이들 사이에 있는 것이 가능할 수가 없다; 고로 지옥에 있는 자가 천국에 있는 것이 가능할 수가 없다; 그 이유가 목적들이 충돌하기 때문, 그리고 (거기서는) 선한 목적들이 언제나 대승한다, 그 이유는 선한 목적들은 주님으로부터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분명한 바, 누구이든 자비만으로부터 천국으로 입장 승인이 있는다고 믿는 것이 올바르지 않다는 것이다. 즉 악한 목적을 자신 안에 지닌 자가 천국 안으로 들어오면, 그는 마치 육체의 죽음의 고통을 겪는 것 같이 그의 생명은 노동을 한다; 게다가 그는 심한 고통을 느끼고야 만다; 이외에도 그는 천국의 빛에서는 악마로서 나타난다. 그러므로 진리와 선에서 멀어진 이들이 하는 짓이라고는 악밖에 없다고 말한 것이다. 그리고 이 악은 당사자의 생각과 의지의 매우 작은 사항 안에도 있다는 것은 이런 영들이 뿜어내는 기운이 멀리로부터 방산됨으로부터 분명해진다, 그 이유가 이것 때문에 그들의 품질이 지각되기 때문이다. 이 기운은 생명의 모든 세부 사항으로부터 있는 영적 증기(evaporation)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그것을 선을 위하여 생각하셨다. 이는 신성은 그것을 선으로 돌려 놓으신다를 의미한다. “선을 위해 생각함”의 의미가 의도하는 것이다; 그러나 하느님에 관련해 말해질 경우, 이것은 선으로 돌려 놓으신다 이다; 그 이유가 하느님이 의도하시는 것을 그분은 행하시기 때문이다.

오늘 이렇게 있는 것 같이 하시려고. 이는 이것은 영원으로부터 질서에 의거 있다를 의미한다. 이는 “행하심”의 의미가 신성에 관련해 말해질 경우, 질서 이다로부터; 그 이유가 신성이 행하시는 것은 무엇이든 질서 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오늘과 같이 있다”의 의미가 영원으로부터 있다를 의미한다.

많은 사람들을 살아 있게 만드시려고. 이는 이로부터의 생명이 선으로부터의 진리들 안에 있는 이들에게 있다를 의미한다. 이는 “살아있게 만드심”의 의미가 영적 생명이다로부터; 그리고 “사람들”의 의미가 진리이다로부터, 여기서는 선으로부터의 진리이다, 그 이유는 “많은 백성(great people)” 이라 말해졌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선으로부터의 진리는 진리로부터 선이 있는 것에 비교해서 크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선으로부터의 진리는 사실상 그 자체가 선이기 때문, 그 이유는 선으로부터 만들어내졌기 때문이다; 고로 그것 형체에서도 선이다.
여기서 요셉이 그의 형제들에게 한 말인 즉: “당신들은 나에 대하여 악한 것을 생각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선을 위하여 그것을 생각하셨다, 하여 오늘과 같이 하시어, 많은 사람들로 살아있게 만드시었다” 인데, 이 말 안에는 천국의 비밀을 포함하고 있다. 이러하다: 다른 삶에서 주님께서는 지옥의 영들이 선한 자를 시험 안으로 유인하는 것을 허용하신다, 결과적으로 악들과 거짓들을 쏟는 것을 허용하신다는 말이다. 게다가 악령들은 전력을 다해 쏟아 붓는다; 이러는 이유는 이러할 때, 그들은 기쁨을 가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님 자신 시험에 있는 이들과 더불어 직접적으로, 간접적으로는 천사들을 수단으로 현존하신다, 그리고 지옥의 악령의 거짓들이 끽소리 못하게 논박하시고, 그것들의 악들이 사라지게 하신다, 고로 새로움, 희망, 승리감을 주시딘다. 고로 선의 진리들 안에 있는 이들과 더불어, 신앙의 진리들과 선행의 선들은 더욱 내향적으로 심어져서 더욱 강하게 확증되어진다. 이리하여 영적 생명이 수여된다.
이런 모두로부터 분명해지는 바, 이 구절의 내적 의미에서 의미된 것인 즉, 진리와 선으로부터 멀어진 이들이 시험들을 유발한다는 것, 악밖에 더 행해지는 것은 없다는 것, 그러나 신성은 그 악을 선으로 돌려 놓으신다는 것, 그리고 이것은 영원으로부터 있는 질서에 따라서 이다는 것, 이로부터 선으로부터의 진리 안에 있는 이들에게 생명이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인식해야 하는 것은, 선한 자를 곤경에 몰아 넣는 것은 허용된 지옥의 영들이 하는 짓인 악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들은 온힘을 쏟아 누구이든 천국으로부터 지옥으로 끌어내기기를 바라고 있다, 그 이유는 그들의 생명의 즐거움은 누군가의 혼을 파괴하는 것에서 얻어내기 때문이다; 고로 영원으로까지이다. 그러나 선이 그 시험으로부터 나오도록 해주시는 것 외에는 누구도 그들로 해서 지옥으로 빠지는 일은 없다. 즉 선한 자가 지닌 진리와 선이 이 시험들로 해서 더욱 튼튼해지고 모양새를 확실히 가져오는 것만 있기 때문이다. 주님으로부터 진행하는 목적이 영계를 보편적으로 통치한다. 하여 제 아무리 작은 것이라 할지라도, 선이 그것으로부터 나오게 하심 뿐이다. 그러므로 주님의 왕국은 목적(end)들과 쓸모 있어짐(use)의 왕국이라 불리운다.

그리고 이제 두려워 마시오. 이는 그들은 걱정하지 말라를 의미한다.

내가 당신들을 떠받쳐 주리다, 그리고 당신들의 아기들도 (기르리이다). 이는 그들은 이해력에 있는 진리와 의지력에 있는 선을 수단으로하여 신성으로부터 내적 부분을 통하여 살 것임을 의미한다. 이는 “떠받치다(sustain)”의 의미가 선과 진리의 유입이다로부터, 고로 진리와 선을 통하여 생명이 있다; 그리고 요셉의 표현함이 내적 부분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러나 꼼꼼히 말하면 생명은 내적 부분으로부터가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내적 부분을 통하여서 있다, 하여 “신성으로부터 내적 부분을 통하여”라고 말한 것이다. “당신들과 당신들의 아기들”에 의해 자연 평면에 잇는 영적 진리들, 그리고 그것들 안에 있는 순진이 의미되고, 이것들은 진리와 선을 수단으로 신성으로부터 내적 부분을 통하여 살아가진다. “떠받침”이 진리와 선을 수단으로 살아감을 표시하는 이유는 영적 식품이 지식, 총명, 지혜, 고로 진리와 선이기 때문이다. 진리가 이해력에 있고, 선은 의지력에 있다라고 말한 이유는 모든 진리는 이해력에 속하기 때문, 그리고 선은 의지력에 속하기 때문이다. 즉 이해력은 진리의 저장소이고, 의지력은 선의 저장소이다.

그리고 그는 그들을 위로했다. 이는 희망을 의미한다. 이는 “위로함”의 의미가 희망을 가지고 마음의 불안을 달래는 것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리고 그들의 심정에 말했다. 이는 신뢰를 의미한다. 이는 “심정에 말하다”의 의미가 신뢰를 나누어주다, 즉 악이 닥치지 않는다는 신뢰를 나누어주는 것이다; 그 이유가 “말하다(speak)”가 유입을 표시하기 때문, 그리고 “심정”은 의지를 표시한다; 고로 “심정에 이야기 하는 것”은 의지 안으로 유입됨을 표시한다, 그 결과는 신뢰함이다. 이런 모두로부터 다시 분명해지는 것은, 말씀의 세부 사항 안에 선과 진리의 결혼이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의 경우, “위로함”은 이해력에 속하고, “심정에 말함”은 의지에 속하기 때문; 그러므로 그가 “그들을 위로함”이 희망을 의미하는 이유가, 이것이 선을 수단으로 의지로부터 있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진짜 신뢰함은 선행의 선 안에 있는 자들에게서만 가능하고, 진짜 희망은 신앙의 진리들에 있는 이들에게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22, 23절. 요셉은 그와 그의 아버지의 집안과 함께 이집트에서 거주했다. 그리고 요셉은 일백 십 년을 살았다. 23 그리고 요셉은 에브라임의 아들들의 삼 대를 보았다. 므낫세의 아들 마길의 아들들도 그의 무릎에서 태어났다.

그리고 요셉은 이집트에서 거주했다. 이는 내적 부분으로부터 교회의 기억 속의 지식들이 살아간다(생명이 있다)를 의미한다. 이는 거주하다의 의미가 살아간다 이다로부터; 요셉의 표현함이 내적 부분이다로부터; 그리고 “이집트”의 의미함이 교회의 기억 속의 지식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 장의 앞 구절들에서 취급된 주제는 다시 설립되어지는 영적 교회이다; 그리고 외적 또는 자연적 인간이 내적 또는 영적 인간에 완전히 복종한 이후-즉 자신들이 요셉의 종이라고 말하며 엎드린 요셉의 형제들의 모습에서 의미된 것들 이후, 지금 취급되는 주제는 다시 설립된 영적 교회이다, 이것이 바로 이 구절에서, 요셉은 이집트에서 거주함에 의해, 그리고 에브라임으로부터 출생한 아들들, 그리고 므낫세의 아들 마길에 의해 묘사되어 있다. 영적 교회인 인 이들이 교회의 기억 속의 지식들 안에서 내적 부분으로 살아감이다. 그 이유가 이 교회인과 더불은 기억 속의 지식들은 종속됨이 만들어져 있다, 그리고 이런 종속됨의 질서를 위하여 그들은 선과 진리의 유입을 받아들인다, 하여 이 선과 진리는 내적 부분으로부터의 유입의 저장소들이다. 그러나 영적 교회이지 않은 이의 경우는 아주 다르다; 이들과 더불은 기억 속의 지식들은 진리와 선의 확증물들을 주변으로 거절해버리는 경향이 너무 강하다, 고로 천국의 빛으로부터 멀리 옮겨져 있다; 하여 그것들의 빈 자리를 거짓과 악을 저장하는데 사용한다.

그와 그의 아버지의 집안. 이는 내적 부분으로부터, 그리고 그것의 선을 의미한다.
이는 여기서 “그”인 요셉의 표현함이 내적 부분이다로부터; 그리고 “집”의 의미함이 선이다로부터 알려진다.

그리고 요셉은 일백 십 년을 살았다. 이는 상태와 질을 의미한다. 이는 말씀에서 숫자들의 의미함이 실제의 어떤 것들(real things)이다로부터; 그리고 뾰족하게 말하면, 실제의 어떤 것의 상태와 품질이다로부터알게 된다. “110”의 경우도 마찬가지인데, 이 숫자는 내적 부분으로부터 기억 속의 지식들이 살아감의 상태와 품질을 포함한다.

그리고 요셉은 에브라임의 아들들의 삼 대를 보았다. 이는 지력 측면에 관련하여 교회가 다시 설립됨, 그리고 그것의 파생물을 의미한다. 이는 에브라임의 표현함이 교회의 지력 측면이다로부터; 그리고 “삼 대의 아들들”의 의미함이 파생물들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 이유가 부모로부터의 아들, 아들의 아들인 바, 그들은 부모에 의해 표현되는 것의 파생물을 표현하기 때문이다. 내적 부분으로부터, 즉 주님으로부터 내적 부분을 통하여 교회를 다시 세우심(설립하심)이 “요셉이 보았다”에 의해 의미되어지고 있다.

므낫세의 아들 마길의 아들들 역시. 이는 의지력 측면에 관련하여 교회가 다시 설립됨, 그리고 그것의 파생물을 의미한다. 이는 므낫세의 표현함이 교회의 의지력이다로부터; 그리고 그의 “아들들”과 아들들의 아들들의 의미로부터, 여기서는 “마길의 아들들”인데, 파생물들이다로부터; 즉 교회의 의지력 측면의 파생물들인데, 이는 마길의 아들들에 의해 의미된다, 즉 진리들과 결합한 선들, 고로 선으로부터의 진리들이다, 그 이유가 선으로부터 파생되어져 왔었던 진리들이 선의 형체들이기 때문이다. “마길의 아들들”이 진리들과 결합한 선들을 표시함이 그들이 “요셉의 무릎에서 태어났다”에 의해 의미되고 있는데, 뒤이어 있다; 그리고 그들이 선으로부터의 진리들을 표시함이 사사기서의 책에서 이렇게 의미되어 있다: “마길로부터 입법자들이 내려왔다” (5:14); “입법자들”은 선으로부터의 진리들을 표시한다.

요셉의 무릎에서 태어났다. 이는 그들은 내적 부분으로부터 진리의 선과 합쳐진 선으로부터 있었다를 의미한다. 이는 “무릎에서 낳다”의 의미함이 선과 진리의 결합이다로부터; 그리고 요셉의 표현함이 내적 부분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요셉의 무릎에서 태어난 마길의 아들들은 요셉이 그들을 그의 자기 자신으로 인정했음을 포함하고 있다. 그 이유가 이렇게 말해질 경우, 이것은 그들이 그의 자기 자신으로 채택했다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를 라헬의 하녀 빌하로부터 출생한 아들로부터 알는지 모른다. 이 아들을 두고 라헬이 말한다:
보라 내 하녀 빌하가 있다, 그녀에게로 가라, 그리고 그녀가 내 무릎에 낳을 것이다, 그리고 나 역시 그녀로 말미암아 건축할 것이다 (창. 30:3).
이 아들들이 요셉에 의해 자기 자신으로 인정된 이유는 므낫세에 의해 교회의 의지력 측면, 즉 교회의 선이 표현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요셉에 의해 표현되는 내적 부분은 선과 더불어서만 흘러들 뿐, 선을 통하지 않는 진리와 더불어서는 흘러들지 않는다; 이런 이유로 말씀은 그들이 “요셉의 무릎에서 태어난” 자라고 말한 것이다.

24-26절. 그리고 요셉은 그의 형제들에게 말했다, 나는 죽는다. 그리고 방문하시는 하느님이 너희를 방문할 것이다, 그리고 너희로 이 토지로부터 그분께서 아브라함에게, 이삭에게, 그리고 야곱에게 맹세하셨던 토지에로 올라 가게 만드실 것이다. 25 그리고 요셉은 이스라엘의 아들들에게 맹세하라고 하고, 말하기를, 방문하시는 하느님이 너희를 방문하실 것이다, 그리고 너희는 내 뼈를 여기로부터 올라 가게 만들어라. 26 그리고 요셉은 죽었고, 일백 십년의 아들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그를 방부 처리했다, 그리고 그는 이집트에 있는 궤 안에 놓여졌다.

그리고 요셉은 그의 형제들에게 말했다, 나는 죽는다. 이는 교회 속의 내적 부분이 중지된다고 예언함이다. 이는 요셉의 표현함이 내적 부분이다로부터, 여기서는 교회의 내적 부분이다, 그 이유는 이 장의 앞 부분에서 취급된 주제는 교회를 내적 부분을 수단으로, 즉 주님에 의해 내적 부분을 통하여 다시 설립함이었었다; 그리고 “죽는다”의 의미가 이와 같이(영적 교회)로 있는 것이 중지되는 것이다. 이 때에 관한 예언이 “요셉이 그의 형제들에게 말했다”에 의해 의미되고 있다; 지금 이어지는 것에서, 마지막에까지 조차에서 취급되는 주제는 교회의 더 나아간 상태이다. 그러므로 “요셉이 그의 형제들에게, 나는 죽는다라고 말했다”에 의해 교회의 내적 부분이 중지될 것이 의미된다.
여기서의 경우는 이렇다: 교회가 존재를 하려면 내적, 외적 부분이 반드시 있음에 틀림이 없다, 그 이유는 교회의 내적 부분(domain, 범위) 안에 있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교회의 외적 부분 안에 있는 이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전자는 매우 적고, 후자는 매우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적 부분에 있는 이들과 더불어 내적 교회가 있는데, 이들 또한 외적 부분이 있어야 한다, 그 이유가 이 둘은 분리되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 후자인 외적 교회의 경우도 내적 교회와 분리되어져서는 안된다. 그러나 이 교회와 더불어 존재하는 내적 부분은 매우 희미함 안에 놓여 있다.
교회의 내적 부분은 심정으로부터 선을 뜻하고, 선에 감동되어 있음에 존재한다; 그리고 내적 부분에 속하는 외적 부분은 심정으로부터의 뜻함을 행동 안에 존재하게 한다, 그리고 이 행동은 인간이 선으로부터 아는 신앙의 진리들에 따라서 이다; 그러나 교회의 외적 부분은 대체로 의식들을 경건하게 수행함에, 교회의 가르침에 따라서 선행의 일들을 행함에 존재한다. 이로부터 분명해지는 것은, 교회의 내적 부분은 의지력에 있는 선행의 선이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선이 중지될 때, 교회 자체 또한 중지된다, 그 이유가 선행의 선이 교회의 근본(essential, 가장 중요한 것)이기 때문이다. 내적 부분이 중지된 이후라 해도 외적 예배는 실로 이전 같이 여전히 남아 있다. 그러나 이때의 예배는 예배가 아니고 의식 준행이다. 즉 이러이러하게 하라고 틀이 짜여졌기 때문에 그냥 보존되는 것일 뿐이다. 예배 같이 나타나는 이 (예배) 의식은 알맹이가 없는 깍지일 뿐이다. 그 이유가 이것은 내적 부분이 없이 남은 외적 부분이기 때문이다. 교회의 상태가 이러할 경우, 이 교회는 마지막에 있다.

그리고 방문하시는 하느님이 너희를 방문하실 것이다. 이는 마지막 때가 올 것이다를 의미한다. “방문하심이 있다”의 의미가 마지막 때이다로부터, 역사적 측면에서는 이스라엘의 아들들이 압제당함의 마지막의 시기이다; 그리고 내적 의미 측면에서는 옛 교회의 마지막 때, 그리고 새로운 교회의 처음의 때이다. 말씀에서 이 마지막 때가 “방문하심(visitation)”이라 불리우고, 이 방문은 일반적 측면에서는 교회를 방문하심, 특수적 측면에서는 교회인을 방문하심, 하여 양쪽 모두를; 그리고 태어나지는 새로운 교회를 방문하심, 만기가 되는 옛 교회를 방문하심을; 특별하게는 구원되어지는 교회인을 방문하심, 그리고 지옥에 떨어져야 하는 자를 방문하심, 모두를 서술한다.
위의 사항들이 말씀에서 “방문하심”, “방문의 날”에 의해 의미되는 것을 아래 구절들로부터 알는지 모른다. 누가 복음서에서:
이스라엘의 주 하느님을 찬양할지라; 그 이유는 그분은 방문하시어 그분의 벡성을 해방되게 하셨기 때문이다. 우리의 하느님의 자비의 동정심(bowel)을 통하여, 그럼으로서 높음 위로부터 동틀녘에 우리를 방문하셨다, 하여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은 그들에게 나타나실는지 모른다
(눅. 1:68, 78, 79);
위 구절은 주님이 탄생하실 즈음, 주님에 관한 사가랴의 예언적 말함이다; 이 구절의 “방문하시는” 것은 새로운 교회의 일어남을 표시한다, 그리고 신앙의 진리와 선에 무지한 이들을 계발하심, 고로 무지함에서 해방되게 하심을 표시한다; 그러므로 말해지는 바, “그분은 방문하시어 그분의 백성이 해방되게 하셨다”, 그리고 “그분은 방문하셨는 바, 어둠에, 죽음의 그늘에 앉은 그들에게 나타나실는지 모른다.”
모세의 책에서: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하셨다, 이스라엘의 원로들을 함께 모우라, 그리고 그들에게 말하라, 여호와 너희 조상의 하느님, 아브라함의, 이삭의, 야곱의 하느님이 나에게 나타나셨다, 말하시기를, 나는 너희를 꼭 방문할 것이다, 그리고 이집트에서 너희에게 행해진 것(을 방문할 것이다)
(출. 3:16).
다시:
백성은 믿었다; 그리고 그들은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아들들을 방문하셨다를 들었다 (출. 4:31).
여기서 “방문하는 것”은 교회가 중지되는 때인 마지막 때를, 그리고 교회가 시작하는 때인 처음의 때를; 이집트인들과 더불어서는 마지막 때가, 이스라엘의 아들들과 더불어서는 처음의 때를 표시한다; 고로 후자의 해방됨이 있다.
예레미야서에서:
그들은 바빌론으로 끌려가질 것이다; 거기서 그들은 내가 방문하는 때까지조차 있을 것이다; 그때 나는 하느님의 집의 집기들이 오게 만들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들을 이 장소로 도로 데려다 놓을 것이다 (예. 27:22).
다시:
칠십 년이 바빌론에서 충족되었을 때, 나는 너희를 방문할 것이다, 그리고 나는 나의 선한 말을 너희 위에서 확고히 굳힐 것이다, 그리고 너희를 이 장소로 도로 데려다 놓을 것이다 (예. 29:10);
위에서 “방문하는” 것은 해방을 표시한다; 일반적 측면에서는 포로됨과 황무해짐의 마지막 때이다.
“방문하심”과 “방문의 날”이 교회의 마지막 때를 표시함을 아래에서 읽는다:
방문하심과 황폐하심의 날에서 너희는 무엇을 할 것이냐? 이것은 멀리로부터 올 것이다; 너희는 도움을 위하여 누구에게로 도망할 것이냐? (이. 10:3)
다시:
보라 여호와의 날이 온다, 잔인, 그리고 분노함, 성냄, 격노함이 땅을 황폐해지게 만들어지게 하신다. 나는 세상에 있는 악을 방문할 것이다, 그리고 사악한 자 위의 그들의 불법(을 방문할 것이다) (이. 13:9, 11).
예레미야서에서:
그들은 추락하는 그들 사이에서 추락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방문하심의 때에 그들은 곱드러질 것이다 (예. 8:12).
호세아서에서:
방문하심의 날들이 와진다, 보답(대갚음)의 날들이 와진다 (호. 9:7).
모세의 책에서:
그리고 지금 가라, 백성을 내가 너에게 말했던 곳으로 인도해라. 보라 내 천사가 네 앞에 갈 것이다. 그리고 내 방문의 날에 나는 그들 위에 있는 그들의 죄를 방문할 것이다 (출. 32:34).
누가복음서에서: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관하여 말하셨다, 그들은 네 안에서 돌 위에 돌 하나도 남아있지 않게 할 것이다; 그 이유는 너는 네 방문의 때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눅. 19:44).
“방문의 날”은 주님의 오심을 표시한다, 그리고 그때 계발됨을 표시한다; 그러나 유태 나라에 관하여서일 경우, 그들은 이것을 인정하지 아니했는 바, 그들과 더불은 교회의 표현의 마지막 때를 표시한다; 그 이유가 예루살렘이 파괴되었을 때, 제물 바침이 중지되었기 때문, 그리고 그 나라는 산산히 조각나고 말았기 때문이다.
에스겔서에서:
큰 음성이 내 귀에서 외쳤다, 도성을 방문하심이 가까이 와있다, 그리고 사람은 자기 손에 파멸의 자기 도구를 가지고 있다 (겔. 9:1);
위도 의미는 비슷하다. 이사야서에서:
르바임은 일어나지 못할 것이다, (그들을) 당신은 방문하셨다, 당신은 그들을 소멸되게 하셨다 (이. 26:14);
“르바임”은 홍수 이전인 태고 교회의 후손을 표시한다, 이들은 또한 “느빌림”과 “아낙”이라 불리운다; “당신이 르바임을 방문하시고 소멸되게 하셨다”는 이 교회의 마지막 때, 그리고 그들을 지옥으로 내던지심을 표시한다. “방문”은 보답(앙갚음), 고로 지옥에 떨어짐을 표시한다. 예레미야서에서:
내가 이것을 방문하지 않을 것이냐? 내 혼이 이런 나라에 앙갚음하지 않겠느냐? (예. 49:8).
다시:
나는 내가 그를 방문하는 때에 그 자 위에 에서의 파멸을 가져올 것이다 (예. 49:8).
그리고 호세아서에서:
나는 그를 그의 길(방법)들에서 방문할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의 일들에 앙갚음할 것이다
(호. 4:9).

그리고 너희로 하여금 이 토지로부터 그분께서 아브라함에게, 이삭에게, 그리고 야곱에게 맹세하셨던 토지에로 올라 가게 만드실 것이다. 이는 그들은 고대인들이 있었던 교회의 상태에로 갈 것을 의미한다. 이는 그들이 떠나 올라가야 하는 “이집트의 토지”의 의미가 황폐된 교회이다로부터; 이 교회가 이집트인들이 이스라엘의 후손들을 압제함으로 표현되었다; 그리고 그것의 파멸은 수프 바다(홍해)에서 그들이 익사됨으로 표현되었다; 그리고 “가나안의 토지”, 즉 이스라엘 후손이 올라가야 한다는 토지의 의미가 주님의 왕국과 교회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것이 고대 교회, 또는 고대인들이 있었던 교회의 상태이다는 것은 “하느님께서 아브라함, 이삭, 야곱에게 주겠다고 맹세하신” 토지라고 지목하심에 의해 의미되어져 있다; 그 이유가 최고의 의미에서 이들에 의해 주님이 뜻해지기 때문, 그리고 표현 의미에서 천국들에 있는 그분의 왕국, 땅 위의 그분의 왕국, 즉 교회가 뜻해지기 때문이다. 고로 “그들에게 주신다고 맹세하는” 것은 고대인들이 있던 교회의 상태 안으로 그들이 온다를 확증하는 것이다. 사실상 야곱의 후손들은 이런 교회의 수준에 오지 못했다, 뿐만 아니라, 아예 외적인 것만에 국한되었다, 즉 표현만 했을 뿐, 즉 내용 없는 형식적 교회일 뿐이었다. 그럼에도 그들이 그 토지에 와야 하는 이유는 지금까지 있어 왔고, 앞으로도 있게 될 영적 교회 속에 있는 모든 이들을 표현해야 했기 때문이다. (“맹세”가 신성으로부터 확증하는 것이다에 대하여는 2842, 3375항을 보라.) 또한 가나안의 토지가 야곱의 후손에게 약속되고 주어진 이유는 그들이 교회를 표현하도록 하시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그곳에는 고대 때로부터 교회가 있어 왔기 때문에 그곳의 모든 장소의 이름들은 (천국에서 이미) 명명되고 표현 의미를 이미 가졌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요셉은 이스라엘의 아들들에게 맹세하라고 했다. 이는 묶음을 의미한다.

방문하시는 하느님이 너희를 방문하실 것이다. 이는 교회의 이런 마지막이 올 때를 의미한다. 이는 “방문함”이 교회의 마지막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리고 너희는 내 뼈를 여기로부터 올라 가게 만들어라. 이는 거기에 교회를 표현함이 있을 것임을, 그러나 내적 부분 또한 반드시 있어야 하는 표현 교회는 아님을 의미한다. 이는 요셉의 표현함이 교회의 내적 부분이다로부터; 그리고 요셉에 의해 교회의 내적 부분이 표현되기에, 그의 “뼈”에 의해서는 (교회의) 가장 외적인 것, 또는 교회의 최말단의 것, 고로 교회를 표현함 만을 의미한다. 그 이유가 고대 교회에서 있어왔었던 표현들, 또한 야곱의 후손들과 더불어 제정되어진 표현들은 교회의 최말단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 해도 그 표현물들(장소, 인물, 건물 등등)이 표현하고 의미한 것들은 교회의 내적 부분들이었다. 이 내적 부분들은 “영이 있는 살”에 의해 의미되어진다, 그러나 “뼈”에 의해서는 최말단들이 의미되어진다. 그러므로 분명해지는 것은, 내적 부분 없는 외적 부분만으로 교회가 있을 때, 이런 교회의 품질은 살이 없는 뼈로만 된 인간과 같다는 것이다.

그리고 요셉은 죽었다. 이는 교회의 내적 부분의 존재함이 중지됨을 의미한다. 이는 “죽는다”가 이전 같이 있는 상태가 중지됨이다로부터; 그리고 요셉의 표현함이 내적 부분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일백 십 년의 아들. 이는 그때의 상태를 의미한다. “110 년”의 의미는 내적 부분으로부터 기억 속의 지식들의 생명의 상태와 품질이다.

그리고 그들은 그를 방부 처리를 했다. 이는 여전히 보존되고 있다를 의미한다. 이는 “방부 처리를 하다”의 의미가 악의 접촉 전염으로부터 보존됨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여기서 취급되는 주제가 교회의 마지막이기에, “교회가 있기를 중지할 때 (내적 부분은) 여전히 보존되고 있다”에 대하여 좀 더 말해야 할 것 같다. 이는 인간과 더불은 교회의 내적 부분이 중지할 때 거행된다. 이때에도 외적 부분은 여전히 과거 내적 부분이 있었을 때와 같이 그대로 남아 있다; 그렇지만 이때 내적 부분은 인간 당사자와 더불어 실제로는 있지는 않다, 그 이유는 그가 그것에 관하여 생각하지 않기 때문, 설사 생각한다 해도 그것에 감동되지 않기 때문; 그러나 이 내적 부분은 인간 당사자와 함께 하는 천사와 더불어 있다. 그리고 황폐된 교회 속의 인간은 내적 부분에 관하여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는다, 그것에 감동되는 일도 없다, 그리고 내적 부분이 존재하는지조차 모를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므로 내적 부분은 당사자로 인해 상해를 받아 질 수가 없다. 그 이유가 인간이 알고 있는 것, 특히 그가 믿었던 것이 당사자에 의해 피해를 입을 수가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그가 모르거나, 존재하는 것을 믿지 않거나 하고 한다면 피해를 입힘 자체를 생각해볼 여지도 없기 때문이다. 이 방식에서 교회의 내적 부분은 보존되어진다, 하여 어떤 악도 영향을 줄 수 가 없다. 이렇게 하여 교회의 내적 사항들은 야곱의 후손들 사이에서 보존되어졌다; 그 이유는 그들은 내적인 것이 없는 외적인 것 안에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그들은 내적인 것을 알려 하지도 않았다; 고로 교회의 내적인 것들은 그들에게 밝히 알려지지 않았다. 이상 말한 것들이 “보존되어짐”에서 뜻해지고 있다.

그리고 그는 이집트에서 궤 안에 놓여졌다. 이는 교회의 기억 속의 지식 안에 숨었음을 의미한다. 이는 “궤”의 의미가 저장하는 것, 숨겨지게 하는 어떤 것이다로부터; 그리고 “이집트”의 의미함이 교회의 기억 속의 지식이다로부터; 그리고 그때 당시 교회의 기억 속의 지식들은 고대 교회에 있어왔던 표현과 의미들에 관한 지식들이다. 이것들 안에 내적 부분이 숨겨 놓임이 전술한 말들에 의해 의미되어지고 있다. “궤”가 어떤 것이 저장됨, 또는 어떤 것이 숨겨 놓임을 표시하는 것은 증거의 궤로부터 알는지 모른다, 이 궤 안에 십계, 또는 법이 저장되었다.

지금까지 창세기에서 포함되는 내적 의미가 취급되어 왔다. 그러나 이 책 안에서 모든 것들은 48, 49장의 예언적 부분들 말고는 대체로 역사적이다. 예언적 부분은 내적 의미 없이는 거의 파악이 불가능하게 글자 자체가 나타나지고 있다. 역사적 형체로 된 글자의 경우는 그것의 내적 의미로부터 떼어낼 수 도 있다. 내적 의미가 글자 의미와 완전히 다른 구절의 경우는 분리하려는 경향이 더욱 강해진다. 그 이유가 내적 의미는 영적, 천적인 것들을 (주제로) 취급하고, 글자 의미는 세상적, 지상적인 것들을 (주제로) 취급하기 때문이다. (이 두 의미들은 사실상 불연속적, 등차가 다른 평면에 있기 때문, 마치 상응이라는 층계가 없으면 오가지 못하는 윗층과 아래 층의 경우와 유사할지 모른다 역자주) 지금까지 내적 의미가 각 절의 단어 하나하나로부터 설명되어 왔다, 특히 천국으로부터 나에게 이런 내적 의미를 이해하도록 받아쓰게 해주셨기에 가능했을 뿐이다.

End

부록
(Appendix)

선각자 신학 관련 도서들 목록…3
영계 관련 용어 도표로 스케치…4
선각자의 용어 풀이…6
선각자에게만 유일한 기본 생각들…25
도서 구입 안내…38

산각자 (에마뉴엘 스웨덴볽)의 신학 관련 저서들

1. 직접 출판한 저서들 2. 출판되지 않고 발견된 그의 기록 내지 저술인 것들.

천국의 비밀들 (1749-1756년) 영의 일기(또는 영적 경험) (1745-1765)
천국과 지옥 (1758년) 요한계시록 설명 (1757-1759년)
새 예루살렘과 그곳의 교리 (1758년) 아타나시안 신조 (1759-1763년)
마지막 심판 (1758년) 주님에 관하여 (1759-1763년)
백마 (1758년) 예언서들과 시편의 내적 의미(1759-1763년)
우주에 있는 지구들 (1758년) 마지막 심판 (1759-1763년)
주님에 관한 교리 (1763년) 신성의 사랑 (1759-1763년)
거룩한 성경에 관한 교리 (1763년) 신성의 지혜 (1759-1763년)
삶에 관한 교리 (1763년) 선행의 교리 (1766년)
신앙에 관한 교리 (1763년) 5 기억할만한 관련들 (1766년)
마지막 심판에 관한 계속 (1763년) 결혼에 관해서 (1766년)
신성의 사랑과 지혜 (1763년) 정경들 (1769-1772년)
신성한 섭리 (1764년) 새 교회에 관한 교회의 역사 (1769-1772년)
요한계시록 밝힘 (1766년) 부속물(coronis) (1769-1772년)
부부의 사랑 (1768년) 새 교회로 초대함 (1769-1772년)
간략한 해설 (1769년)
유입, 또는 혼과 몸 사이의 상호 작용 (1769년)
진정한 기독 종교 (1771년)

영계(the Spiritual World)

**천국의 비밀들의 책에 흔히 등장하는 단어들을 그림으로 생각해본다**

1. 평면(plane) 또는 수평(level)에서 생각할 경우:

가장 안쪽(inmost) 부분
내부(internal)
내면(interior)
외면(exterior)
외부(external)
가장 바깥쪽(outmost) 부분

2. 높, 낮이에서 생각할 경우

3층 천국 또는 셋째 천국
가장 높은 천국, 천적 수준의 천사들이 거주한다
주님을 사람함의 천사들

2층 천국, 둘째 천국
중간 천국, 영적 수준의 천사들이 거주한다
이웃을 사랑함의 천사들

1층 천국, 첫째 천국
최말단 천국, 자연적 수준의 천사들이 거주한다
주님의 명령에 순종함을 사랑한 천사들

영들의 세계

가장 온건한 악마들

사탄들

악마들

3. 겹층(layer)으로 생각할 경우

세 다른 크기의 그릇을 포개 놓은 것, 또는
겹으로 이루어진 식물인 양파, 배추 등등을 연상해도 도움이 된다.
가장 정확히 말하려면 세 덩어리의 케익(cake)이 포개진 상태일지 모른다.
이에 대해 선각자의 저서에서 두 용어가 등장하는데
잇따르는 질서(successive order), 끊이지 않는 질서 (continuous order)이다

(1) 잇따르는 질서(successive order)

천적 천국 (셋째 천국, 가장 안쪽 천국) ——————

영적 천국 (둘째 천국, 중간 천국)——————-

자연적 천국 (첫째 천국, 가장 바깥 천국)————-

(2) 끊이지 않는 질서 (continuous order)

천적 천국————————————-
영적 천국———————————–
자연적 천국———————————–

(3) 말씀 안에서의 등차(수준)들

가장 깊은 의미 (최고 의미)
천적 수준의 의미
영적 수준(또는 내적 수준)의 의미
내적 역사적 의미
글자 의미
선각자의 용어 풀이
(Glossary)

** 참고: (commercium) 식의 표기된 것은 라틴어임
이 풀이는 간결해서 좋지만, 한편 너무나 간결해서 어떤 단어의 경우는 이해함에 불리할 수 있는 단점도 있다. 어쨌든 아래의 글들은 Swedenborg Resercher’s Manual by William Ross Woofenden으로부터 발췌되었다. 정확한 이해를 위해 영역본이 필요할 경우 역자에게 연락하기 바란다 (인터넷에서 헌 책은 구매가 가능할지 모른다, 검색해보기 바란다).

감각적인 (Sensuous)
관능적인, 감각의, 그리고 감각 지향의. 섹스적인 것만을 함축하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감각들에서 집중함에 의해 특색을 이루는 것, 감각들에 의해 납득되는 것. 마음의 자연적 수준에서도 가장 낮은 평면.

개혁 (Reformation)
거듭남의 과정 중의 일부를 묘사하는데 사용되었다, 즉 당사자의 바깥쪽 생활을 질서 안에 놓는 것이다. 당사자는 진리가 우세한 순종의 상태에서 진리를 수단으로 선 쪽으로 인도된다. 이것은 주님으로부터 새 의지를 받기 위한 준비단계이다.

거듭남 (Regeneration)
넓은 의미에서 재출생의 모든 과정. 좁은 의미에서 개혁에 뒤이어지는 과정. 주님이 각 개인 안에서 새로운 의지를 만들어가시는 과정, 또는 (삶의) 과정의 목적(goal).

결혼의 (부부의, connubial)
결혼에 관련되는 단어이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것은 결혼에 연계
된 외적인 것들 만에 관련하여, 또는 부정적 측면에서 사용되는 편이다. 새나 동물의 짝짓기에 사용되었다.

고대 교회 (ancient church)
성경에서 노아와 그의 자손들에 의해 표현된 고대 시대 성경 속의 사람들의 종교.

과학물들 (Scientifics)
과학적 진리들을 보라. 지식들, 사실들, 자료들.

과학적 진리들 (Scientific truths)
위 표현은 빈약한 번역일지 모른다, 그 이유는 이 용어가 우리가 아는 “과학(science)”을 가리키는 경우가 매우 드물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연을 연구함으로부터, 그리고 성경의 글자 그대로의 의미로부터 획득한 사실들, 자료들, 진리들이다.

공적 (Merit, meritorious)
흔한 사용법에서 이 단어가 함축하는 것은 긍정적(건설적) 측면이 대세이다. 그러나 선각자가 이 단어를 사용할 때의 경우, 거의 언제나 뜻하는 것은, 공적 추구(merit-seeking), 즉 자비롭게 여겨질 수 있다 싶은 어떤 행위 또는 친절한 어떤 행동에 대하여 돈 또는 명성을 보상을 은근히 기대함이다.

광적 신앙 (Religiosity)
외적, 또는 미신적 믿음 체계, 신봉자의 편에서 내적 약속의 깊이를 갖지 않은 종교를 묘사하는데 사용하였다.

교류 (Intercourse)
왕래함 (commercium)에 대한 오래전의 번역, 상호 작용 (interact)을 뜻한다, 이는 개인들 또는 어떤 것들을 연합시키는 것이다. 개인의 혼과 몸이 어떻게 교통하고 일반적으로 상호 작용하는지를 언급할 때도 사용된다.

교리 (Doctrine)
세 가지를 뜻하려고 사용된다: 1. 배움의 과정, 2. 학식 또는 과학의 분과, 또는 3. 특별한 취지에서 교회의 가르침. 일반적으로 이것은 진실로 종교 생활을 꾸려가기 위하여 절대로 필요한 가르침일 것이다, 그리고 고로 본질적으로 실용적일 것이다.

교회 (church)
이 단어는 흔한 보통의 단어 사용에서도 어떤 영적 생활만도 아니고, 그렇다고 어떤 종파나 조직체만을 지칭할 때도 아닌 것이 뜻해지게 보통이 아닌 의미에서 사용되어진다, 즉 조직체에서이든, 개인적으로 이든, 영적 생활을 사실로 깨달음이다. 고로 개인(person, 개인)은 영적인 교회이다.

균형 (balance)
(평형을 보라.) 천국 세력과 지옥 세력이 균등하게 인간에게 영향을 미치도록 하는 섭리적 상태를 염두해서 사용된다, 하여 당사자가 악의 영향력에 휘둘리는 듯 외관상 나타남에도 불구하고 실상 그는 자유한 상태에서 도덕에 관한 결정들을 만들게 됨을 말할 때 이 단어가 사용되고 있다.

그릇 (Vessel)
인간은 하느님으로부터 생명을 받는 “그릇”이다고 말해진다, 단지 담는 용기라는 말이 아니고 유기적 형체로서 이다.

기억해둘만한 관련 사항들 (Memorable relations)
기억해둘만한 사건(memorabilia, memorable occurrences)라고도 말한다. 선각자가 그의 후기 저서들의 장들에 첨부하는 식으로, 또는 군데군데에 흩뿌리는 식으로 해서 기록했는데, 다른 세계에서의 그의 경험들에 관한 이야기들이다.

기운 (영역, sphere)
모두 각각의 사람들은 자신의 총체적 사랑들로부터 되튀긴 유출물에 에워싸여 있다고 말해진다. 일반적으로 이것은 땅 위에서는 감지될 수 없다. 누군가의 기운이 어떤지는 천국에 있는 모든 이에 의해서는 확연히 감지된다, 하여 상대방과 연계되어도 되는지, 피해야 하는지를 결정하는 기초이다.

길들여진 선 (Domestic good)
개인이 부모로부터 유전적으로 끌어낸 선을 뜻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이것은 당사자가 (선택의) 자유함 안에서 그것을 자기 것이 되게 하지 않으면 “저축”되지 않는다. 또한 “가정의 자연적 선”, 그리고 “자연적 선”이라고도 불리운다. (천국의 비밀 3518항의 창. 27:9에 대한 해석을 참조하라.)

김나지움 (Gymnasium)
유럽에서 공통적으로 사용함에서는 두 번째의 학교 (중고등학교). 선각자는 이 단어를 그룹들의 멤버들이 생각들을 토의하고 그들의 마음들을 실행해보는 영계의 모임들이나 거기의 학교들을 언급하는데 사용했다.

끊이지 않는 등차들 (continuous degrees)
수준들(levels) 또는 단계들(gradations), 마치 찬 것으로부터 따뜻한 것까지, 또는 어둠으로부터 빛으로까지의 경우와 유사하다. 또한 “넓이의 등차들” 또는 “수평적인 수준들”이라 불리운다.

나머지 상태들 (Remnant states)
“리메인스”를 보라.

논리를 더듬어 사고함 (Ratiocination, 합리화함)
“추론(reasoning)”으로만 번역되면 약간 유감스럽다. 이는 거짓 추정들, 거짓 추론, 거짓 연역을 끌어내는 과정을 함축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아마 “합리화 함(rationalizing)”의 뜻을 지닌 최근의 심리학적 용어에 매우 가까울지 모른다.

능력(Faculty)
이런 것을 뜻하는데 사용되었다, 1. 신체적 수단(resource), 2. 가능성, 기회, 3. 타고난 경향(propensity) 또는 능력(ability), 그리고 4. 정신의 품질. 이 마지막 의미에서 보면, 이것은 하느님으로부터 수여됨이다. 이 수여된 것을 올바로 사용함에 의해 당사자는 자기 안에서 주님의 현존하심을 보증받는다.

다써버림(고갈, exinanition)
영이 텅빔, 영적 황무함의 상태. 주님의 경우, 이것은 그분의 인간 부분이 내부의 신성으로부터 분리된 듯 여겨져 있는 겸허의 상태이었다.

담는 어떤 것(용기, containant)
초기 번역자들에 의해 만들어진 단어, 또한 “포용함(continent)”으로도 번역하나 통상적인 수준은 못된다. 이것은 콘테이너, 저장소를 언급하는 것인데, 때로는 마음이 생각들의 “저장소”이다를 서술함에서 심령 연구적 측면에서 사용된다.

더 낮은 땅(Lower earth)
영계에 관한 선각자의 세부적 묘사에서, 더 낮은 땅은 영들의 세계에서는 그 아래쪽 영역이고, 지옥 쪽에서는 그 위쪽 영역이다.

동물 영 (animal spirit)
갈렌(Galen)의 관념에 있는 세 신체 영들 중의 하나. 선각자는 더 순수한 종류의 피를 뜻하기 위해 사용했다. 돌(Dole)의 “신성의 사랑과 지혜” 423쪽에서는 “혼-영”으로 번역하였다.

동물 왕국 (동물 왕국의 경제)
“인간의 혼의 영역의 역학”을 다룬 선각자의 1740년의 저서 Oeconomia Regni Animalis 에 대한 미흡한 번역어 이다.

되풀이하는 결혼들 (Iterated marrages)
반복된 결혼들, 재결혼.

되찾음 (구속, Redemption)
보통의 의미에서 사용되지 않는다, “되사는 것”, 되찾음은 그리스도의 생애 전 과정의 결과로 얻어진 지옥을 복종케 함과 천국의 질서를 다시 세운 것을 뜻한다. 하여 믿는 자에게 가능할 수 있는 개개인의 구원을 만드신 것이다.

리메인스 (Remains)
사랑과 진리에 관한 감명들이 인간에게는 알려지지 않은 신비한 방법에서 주님에 의해 개개인 안에 심어진 사랑과 진리에 관한 깊은 감명들, 이것은 유아로부터 모든 삶을 통하여 각 개인과 더불어 계속 “남아” 있으면서, 재출생을 위한 기초가 되어주고 있다. 이 단어는 “나머지들(remnants)” 또는 “나머지 상태들”으로도 번역하고 있다.

림버스(Limbus, 가장자리, 변방)
“봉투, 덮개(envelope)” 또는 “테두리, 가장자리(border)”로도 번역되었다. 각자의 특질(본성, nature)로부터 끌어내진 가장자리를 뜻하기 위해 사용되었는데, 사후에도 이것은 존속하여 영계에서 (어떤 형체라고 분명하게 묘사할 수는 없지만) 하나의 불변성(fixity), 안정성(stability), 영속성(permanence)을 주고 있다. 이 단어는 쉽게 정의를 내리기가 힘든 복잡한 개념에 있다.

맥시머스 호모 (Maximus Homo)
“웅대한 사람”과 “보편적 인간”을 보라

메디아 (Media)
종종 단수의(유일한, singular), 매개(중간, medium). 이는 사이에서 가는 것들을 뜻한다. 두 실체의 각각으로부터 어떤 것을 도출하는 중간의 것(intermediary), 그리고 개인을 이쪽 편으로 끌어낼 때, 다른 쪽은 종속시키는 효과를 갖게 된다.

모양 (Form)
유기체(organization) 또는 본질이 나타나게 하는 유기적 저장소(organic receptacle)를 철학적 의미로 사용했다. 이것은 외형(shape, 모양)에 관련되지 않고, 질서, 의향, 배열과 실재물의 부분들과 관련된다. 기능 또는 사용과 밀접하게 연합하고 있다.

목적, 원인, 결과 (End, Cause, Effect)
목표(goal) 또는 의도(purpose)의 철학적 의미에서 사용되는데, 목적은 의지력의 사랑 또는 의향(intention)이고, 원인은 의도(purpose)를 성취하려고 이해력을 통하여 있는 수단들이다, 결과는 초래하는 행동, 말함, 감각 또는 생산, 고로 성취됨이다.

묶는 것들(속박됨, bonds)
이는 족쇄를 채우는 식의 뜻에서는 아니고, 어떤 개인이 유독 사랑하는 특별난 것을 뜻한다. 즉 너무나 사랑하기에 그것에 묶인 상태인 듯 되는 것, 하여 사랑된 것의 반대되는 것에 대하여는 금하게 한다(아랑곳하지 않는다). 외적 묶임들은 시민 생활에, 내적 묶임들은 영적 생활에 영향을 준다..

방계적인 선(Collateral good, 부수적인 선, 서자 출신의 선)
자연적 선함과 영적 선함 사이에 놓인 선함, 하여 일부는 자연적 선함, 일부는 영적 선함이 섞인 상태의 선함, 즉 본질적으로는 영적인 것들에 대한 자연적 수준의 사랑, 고로 진짜의 선함은 아니나 진짜의 선함에 관련되고 있다.

별개의 하나 (구분되는 하나, distinctly one)
선각자에게서의 단일성(하나임, oneness)은 단순함이 아니고 목적(의도, purpose)의 통일성(unity)이다. 사랑과 진리는 행동 안에서 분리되어 존재할 수가 없다, 그러나 여전히 그것들의 하나임 안에서 구분될 수 있다, 고로 “별개의” 또는 더 나은 표현으로는 “구분할 수 있게 있는 하나”이다.

부가적인 (adscititious)
때로는 “외래의(adventitious)”로도 번역할 때도 있다, 부가적인(additional), 외적 측면에서 첨가됨

부끄러히 여김 (창피함, 굴욕, Humiliation)
당황함이나, 근대적 의미에서는 그렇게 사용되지 않고, 겸손의 상태를 뜻하기 위하여 사용하고 있다, 이 겸손 안에서 개인은 자기에게 있는 듯 여겨지는 어떤 선 또는 진리가 실제로는 주님의 것이 자기 안에 있는 것임을 인정한다. 이 단어는 주님께서 그분의 영적 텅빔의 상태를 두고 사용하셨다.

부부의 (결혼의, conjugial)
이는 선각자가 철자를 기록함에서 (conjugalis 대신) conjugialis를 더 좋아했다는 점을 반영하기 위해 초기 번역자들이 개발한 단어이다. 이 단어는 결혼에 속하는 것들, 그리고 결혼한 양쪽(부부)가 서로를 위하여 가지는 사랑들에 관련되고 있다. 일반적으로 적극적 자세를 취한다.

불연속 등차들 (discrete degrees)
구분되는 수준들, 이쪽이 저쪽 보다 더 높다, 마치 목적, 원인, 결과의 관계와 같다. 또한 수직적 수준들이라 불리운다, 고도(altitude)의 등차들, 높이의 등차들.

보편적 인간 (Universal Human)
맥시무스 호모에 대한 돌씨의 번역어이다. “웅대한 사람”을 보라.

보편적 교회 (Universal church)
“우주로부터의 교회(the church universal)”, 모든 곳에 존재하는 교회를 말한다, 교회 조직체를 초월한 교회이다. 진실로 전기독교적인 개념, 이 세상의 모든 종교에서 각 종교의 신앙으로부터 있는 신실한 개인들.

사람 (Man, homo, vir)
라틴어는 “사람”을 위해 두 단어들을 가진다: 호모(homo)-개인(person, 남자와 여자 모두), 인류(mamkind), 본질적 개인으로서의 주님; 그리고 버(vir)-남자 인간의 존재.

사정관(assessor, 재산 평가인)
1716년 선각자는 광산 왕립 대학에 “비범한 사정관”으로 위촉되어졌다, 즉 그는 스웨덴 광산국의 협력 멤버로 명명되어졌다. 그는 1724년 사정관 정회원이 되었다. (그때 당시 광산국은 국왕 직속 감시 아래에 있었는데, 그 이유가 왕의 중요한 자금 조달이 금을 비롯한 광산 채굴에 있었기 때문이다 역자주)

사탄 (Satan)
악마를 보라. 악의 욕망들을 지적으로 확증하는 악령. “악한 자”의 이름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항간에서 말해지는 것, 즉 하나의 제 일의 악마 또는 어둠의 제 일 인 자가 있다는 식으로 선각자는 믿지 않는다)

사회 (Society)
연계된 사람들의 그룹, 함께 생활하는 사람의 그룹, 공동체, 다음 세계에서 천사들 또는 영들의 그룹. 또한 스웨덴볼지언들이 자기들의 지역 교회 조직이나 모임을 지칭할때에도 사용했다.

상응 (correspondence)
스웨덴볼기안이즘에 기초되는 개념, 신성과 모든 보다 낮은 생명의 등차들 사이에 있는 원인적인 관계와 기능적인 관계이다, 이것은 신성이 창조의 모든 것 안으로 흘러가는 방식, 또는 법칙이다.

상응물들(correspondences)
응답하고, 걸맞고, 동의하고, 또는 서로에게 유추되는 어떤 것들, 또는 실재물들, 마치 태양의 열과 빛이 하느님의 사랑과 지혜에 상응하는 것과 같다. 고로 열과 사랑, 그리고 빛과 진리는 상응물인 것이다.

새 교회 (New Church) (1)
하느님-인간 관계들의 어떤 새로운 상태를 놓고 일반적으로 사용되었다, 또한 주님만을 인정하고 예배하고, 그분의 말씀을 거룩하게 붙들고, 신성의 진리들을 사랑하고, 그리고 선행으로부터 분리된 신앙을 거절하는 교회 시대를 언급할 때 사용되었다.

새 교회 (New Church) (2)
스웨덴볽의 신학 저서들에서 발견한 교리들에 접착된 어떤 조직화된 종교 그룹을 대중적으로 규정하려고 사용된 명칭이다. 이런 그룹의 개개인들은 새 교회인(a New Churchman)이라 종종 불리운다

새 예루살렘 (New Jerusalem)
성경의 계시록서의 뒷 부분에서 묘사된 상징적 도성이다. 초기 스웨덴볽지언들이 천국의 도성을 수단으로 상징화되고 의미된 교회를 자기들의 교회로서 삼기 위해 이 이름을 채택하였었다.

새 예루살렘의 교회 (Church of the New Jerusalem)
선각자께서 기독교 교리의 본질되는 주석을 이끌어낸 교회들 중에서 가장 일반적으로 사용한 교회의 이름인데, 약식으로 말하면, “새 교회(New Church)” 이다.

선 (Good)
선함 또는 선한 것을 뜻하려고 사용한다, 이것은 신성의 질서에 따라서 생각하고 행동함에 애착함이라고 일반적으로 정의된다. 고로 이것은 쓰임(use)이 포함된 주님과 이웃을 사랑함이 그 품질이다. 인간에 있는 선은 하느님의 신성의 선에 관련이 있다.

선으로부터 진리에 애착함 (Affection of truth from good)
정밀하게 정의를 내린다면 “선행(charity)”이다, 즉 (이웃에) 쓸모있는 행동들을 있게 하는 각 개인들에 있는 선으로부터 만들어내진 진리를 사랑함이다.

선의 진리 (Truth of Good)
이 관용구의 또 다른 대체할 수 있는 어구는 “사랑의 지혜”가 있다. 이는 누군가가 지혜있기를 바램, 또는 지혜 있기를 사랑함을 가지지 않으면 지혜에 도달될 수 없다를 알아채게 한다. 이 사랑으로부터 결과할 수 있는 지혜가 “선의 진리”이다.

선행 (charity)
흔한 대중적인 사용법에서일 경우, 이 단어는 물질적 궁핍을 경감되게 해주는 것(자선 행위)을 뜻한다. 선각자는 이 단어를 영의 측면에서 관심을 갖는 것, 영의 복지를 향상되게 하는 것, 사욕이 없이 주어진 업무에 매진함, 이웃에 선을 행함에서 어떤 보수도 예상되지 않는다해도 심정에서 기쁨을 느끼고 있는 것을 뜻하는데 사용하고 있다.

수정 (변경, Modification)
선각자의 신학 저서 이전의 그의 어떤 저서에서, 본성을 통하여 교통하는 모든 방식을 함축하는 개념으로 사용하였다. 이 생각은 그의 후기 교리 또는 상응물에 관한 개념 안에 통합되고 포함시켜졌다.

순결한 (chaste)
흔히 이해되는 것은 순진한, 순수한, 독신(주의) 따위이다. 선각자는 결혼한 자가 섹스에 대하여 순수하고 깨끗한 자세를 가지는 것을 뜻하는데 사용하였다. 진정한 결혼의 사랑은 “순결함 자체”이다 말하고 있다.

순수 지력 (Pure intellect)
선각자의 신학 저서가 있기 전에서인 이성 심리학(Rational Psychology)이라는 책에서, 그는 순수 지력이란 개인들에게 생각하고 추론하는 힘을 주는 능력이다라고 정의하고 있다, 그리고 이 순수 지력은 하느님으로부터 파생된 직각적인 지혜와 함께 유기체의 모든 과정들을 통치한다.

순진 (Innocence)
라틴어의 뿌리에서는 해가 없음(harmlessness)을 뜻한다. 영적 순진은 자아에 의해 인도되기 보다 주님에 의해 인도되기를 내향적으로 기뻐함이다. 이 특성은 각 개인에 인접되어 있으면서 당사자가 천국으로 인도되는 것을 돕는다.

스톨지 (Storge)
유아를 사랑함을 뜻하는 그맄어로부터 빌려온 단어, 특별히 그들의 부모들에 의해 유아들을 위해 느끼는 사랑. “어버이다운 사랑”, “어버이다운 애정”으로 번역되었다.

시대의 종말 (consummation of the age)
잘못 번역된 킹제임스 성경의 “세상의 끝”을 대체할 수 있는 어구. 이 어구는 시대, 또는 년대의 마감, 또는 끝을 언급한다.

시리즈(Series)
연결된 순서, 생각함의 열차. 선각자의 신학 저서 이전의 시기의 저서에 “시리즈들과 사회” 그리고 “시리즈들과 등차들”의 용어들이 가설로 언급되었는데, 이후 등차에 관한 신학적 개념에 포함시켜졌다.

시험 (Temptation)
나쁜 것을 하도록 부추킴 또는 자극함의 의미에서 사용되지 않는다. 이것은 각 개인의 지배하는 사랑을 공격하여 개인을 심리하고 테스트한다- 당사자의 특성을 밝히 드러내주고, 그 특성이 더 힘세어질 기회를 제공하는 내적 투쟁이다.

신앙의 진리 (Truth of faith)
누군가의 신앙의 부분에 있는 진정한 생각, 그러나 당사자의 삶에서 사용하게 놓여져 있지는 않은 진리이다. 이는 “신앙의 선”에 대조되어 사용된다, 이것은 누군가의 살아있는 신조들로부터 와지는 선함이다.

신성이 되심 (Glorification)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분의 있음의 모든 평면들에 있는 인간적일 뿐인 것을 벗기 위해 그것들을 신성으로 만드시는 과정. 또한 주님의 마음 안에 신성한 의식을 건립하심, 그리하여 그분이 생명 자체가 되셨다를 뜻하는데에도 사용되었다.

신성의 인간 (Divine Human)
새 교회 신학의 중심을 차지하는 생각, 이 용어는 주님의 인간이 신성이 되신 이후의 주 예수 그리스도에 적용된다, 고로 인간의 형체에 있는 신성의 사랑이다-즉 “신위(Deity)”의 모든 충만함이 신체의 형체 안에 살고 있으심”이다. (골. 2:9)

신성의 자연 평면 (Divine Natural)
신성이 되심, 또는 신성으로 만들어진 예수의 마음, 또는 내부의 본성의 자연적 수준, 또는 가장 낮은 수준.

신성이 진행함 (Divine proceeding)
진행함의 행동에 있는 신성, 고로 그분으로부터 방산되는 하느님의 품질들, 성경의 어떤 문맥에서는 성령과 필적되고 있다.

신하 (Subject, 종속하는)
평범한 사용법에 추가하여, 철학적 의미에서는 활동 또는 행위에 기초가 되는 것을 말하는데 사용하였다. 예를 들면, 선행은 “신하”를 가져야만 한다, 즉 선행을 구체화하고, 느끼고, 실시하는 개성.

쓰임 (사용, Use)
쓸모 있는 활동, 목적을 섬기는 기능, 종종 선과 같은 뜻의 선상에 놓이기도 한다. 섬기기를 진짜로 바램이 들어있는 수고함을 정규적으로 함축하고 있다. 고로 “쓰임으로부터의 선, good of use”이 목적이다. 이 목적에 잘 어울리는 알맹이나 동기를 가지고 있는 마음가짐이나 행위.

아니마 (anima, 영혼, 내적 개성, 남성의 여성적 요소)
인간의 혼(soul), 이 단어는 다양한 전통적인 의미선상에 있어 한마디로 통일된 정의는 힘들다. 사후 살게되는 개인의 부분이다. 선각자는 분석 심리학자로 유명한 융(Jung) 보다 훨씬 먼저 이 단어를 사용했지만, 융이 이 단어에 여성의 특성을 할당했으나 선각자의 경우에서는 그런 추가된 의미는 보여지지 않는다.

아니뮤스(animus, 왕성한 정신, 외적 개성, 여성의 남성적 요소)
때로는 “의향(desposition)”으로 번역된다. 이 단어는 (만일 아니마와 대비하여 사용된다면 보다 수준이 낮은 마음,) 일반적으로 마음(mind)에 관련된다. 각자의 기질, 개성.

악 (Evil)
악, 자체만에 주목하면, 선으로부터 절단(severance) 또는 무질서된 선, 하느님으로부터 분리(disunion)와 주님과 천국에 반대함. 고로 개인 안에 있는 악은 그 개인 내부에 있는 지옥이다.

악귀들 (인간의 일생 동안 따라 다닌다는 귀신, Genii)
선각자는 이 용어를 가장 나쁜 종류의 악령들을 지칭하는데 사용하고 있다, 이것은 개인의 의지에 들어붙어 악의에 차서 행동하게 하고, 당사자의 선한 바램들을 악한 의도들 쪽으로 비튼다. 진리를 만들려고 노력하는 자가 이런 악령에게서는 그것이 거짓이고 반대적인 것으로 나타난다.

악마 (devil)
선각자를 위하여서 단어 “악마(devil)”는 지옥들 전체를 뜻한다. 악마는 사후에 있는 악한 개인이다. “사탄”에 대비해볼 때, 사탄은 자신들 안에 있는 악들의 욕망들을 지성적으로 확증한다, 악마들은 그것들을 살아내려 뜻한다.

악의 거짓 (Falsity of evil)
이는 “악으로부터의 거짓(falsity of evil)”라고도 불리운다. 거짓 생각 또는 악한 바램이 원인이 되어 진리가 비뚫어짐.

…안에 (In)
“종사함 안에” 또는 “상태 또는 조건 안에”의 의미에서 자주 사용된다. 선각자의 책에서 우리는 읽는 바, 어떤 개인이 “선 안에”, 또는 “선에 애착함 안에” 있다 등등이라고 읽는다. 이는 그가 선인 것을 사랑함의 상태 안에, 또는 선함의 상태 안에 있다를 뜻한다.

알카넘 (알캐이넘, arcanum)
비밀, 감추인 어떤 것. 이 단어의 복수는 알카나(알캐이너, arcana)이다. “알카나 세레스티아(arcana coelestia), 즉 천국의 비밀들”은 선각자의 가장 방대한 저서 명이다.

양심 (conscience)
선을 악으로부터 구별하는 능력-선천적인 것이 아니고 배워서 획득한 능력인 바 모든 이에게 균일하게 똑같을 수 없다. 선한 자만이 진정한 양심을 가진다. 가짜 양심이 선의로 의도될 수도 있을지 모르나, 신조의 오류들에 부분적으로 기초하고 있다.

양심 장사치들 (conscience mongers)
지나치게 양심적인 인간들, 타인을 혹평하는 인간들.

역사적인 신앙 (Historical faith)
전통에 기초한 “신앙” 또는 타인들의 신조들(믿음들)에 기초한 “신앙”, 고로 진실된 신앙은 아닌 것이 확실하고, 신앙 같이 나타남(껍데기 신앙)일 뿐이다 (“가정의 선”도 참조해보라.)

영계 (영적 세계, Spiritual world)
다음 세계, 또는 사후 개인들의 거처를 일반적으로 아우러서 언급하는 용어이다. 영들의 세계, 즉 사후 들어가는 첫 상태를 위해 선각자가 이름 지은 영들의 세계, 천국과 지옥의 중간에 있는 영들의 세계와 혼동하지 말라.

오류(잘못된 생각, Fallacy)
현혹시키는 나타남. (태양이 “올라온다” 같은 식에서의) 감각들의 오류들이 가장 작은 중대한 것이다. 보다 나쁜 것은 당사자의 보다 수준 낮은 본성으로부터 파생되어진다, 즉 악과 결합된 거짓들이다, 이는 개인의 부분에 신앙의 부족에 기인된다.

외관 (나타남, appearance)
순수한 진리, 또는 신성의 진리를 그 진리가 숙박한 형체들로부터 구별하려고 사용되는 단어이다. 고로, 모든 이는 자기의 유한한 상태에 따라 진리를 볼 때의 그 진리이다. 진리의 이런 나타남을 당사자가 선한 의도로 사용한다면, 이 나타남을 진리로서 주님께서 받아주시기 때문에, 망상(잘못 생각함, illusion)은 아니다.

웅대한 사람 (Grand Man)
라틴어의 맥시무스 호모(maximus homo, 가장 큰 사람, greatest man), 돌(Dole)에 의해서는 “보편적인(우주적인) 인간”으로 번역되었는데, 주님의 “몸”으로서의 천국들 전체, 또는 천국과 땅 위의 교회를 아우르는 주님의 왕국에 관련된다. 때로는 주님 자신을 뜻하는 데에도 사용된다.

유입 (Influx)
흘러듦(inflow), 또는 입력(input) 또는 영향력 (influence)를 뜻한다. 이 단어는 행동하는 모든 힘은 하느님으로부터 창조의 모든 것 안으로 변함없고 중단 없이 흐르고 있다는 근본적인 개념을 묘사하는데 사용된다.

유전적 악 (Hereditary evil)
이 용어는 선각자에 의해 별도의 제한됨도 없이 무조건식으로 사용되는 편이기는 하나, 사실상 그는 전통적 견해는 사절하고, 우리는 실제의 악을 유전적으로 상속하는 것이 아니고 악을 향하려는 경향성들을 상속한다고 주장한다. 우리는 성인들이 되어서는 이것을 확증하거나 채택하거나, 또는 거절하거나 거부할는지 모른다.

유출 (Efflux)
산출(output), 밖으로 흐름. 하느님으로부터 개인들 안으로 흘러든 선과 진리는 되돌아서 이웃을 사랑함의 행동들의 형체로 세상 안으로 흘러나간다. 하느님의 보편적 법은 유입은 언제나 유출에 의거 있게 된다는 것이다.

육체의 (coporeal)
실재를 나타내는데 자주 사용되어 신체적 부분, 또는 신체에 부착된 마음의 부분을 뜻하였다. 신체적, 육체적인 것은 감각과 육체적 쾌락들과 더불어 선취되어 있다.

은근히 주입하다 (Insinuate)
기초되는 라틴어의 의미에서 이 단어는 어떤 것을 노골적 방법이 아닌 미묘하게 받아들여지게 또는 스며들게 하는 것을 뜻한다. 수용자가 주입 과정을 충분히 알아챔이 없이 내면의 위치를 할당하는 것이다.

음란 (간통, scortatory)
성관계가 문란한 것을 묘사한 것이다, 음행, 매춘.

의미함 (Significative)
영적 뜻을 운반하고 가리키는 어떤 것. 특별한 뜻, 뜻있음. 현재는 표현함과 상응함과 구분되어 사용된다.

의지력과 이해력 (Will and understanding)
“의도력과 식별력(intentionality and discernment)”, “자발력과 지력(the voluntary and the intellectual)”. 이것들은 인간의 개성 속의 포괄적인 두 양상들 또는 능력들이다. 의지력은 의지력의 모든 기능들을 포함하고, 신성의 영향력에 반응을 보이고, 수용하는 부분을 섬긴다. 이해력은 식별하는 모든 기능들을 포함하고, 의지력을 가르치고, 그것의 의향들을 집행하는 것을 섬긴다.

이성이 있는 (합리적인, rational)
이 단어는 실명사로 사용하는 경우가 매우 흔해졌다. 천국으로부터의 빛이 세상의 빛 안에 있는 것을 계발하는 정신적 평면이다. 의식되는 마음 중에서 가장 높은 수준이다. 합리적 진리는 자연적인 것들에 관한 영적 진리이다.

이웃 (Neighbor)
내 집 아닌 다음 집에 있는 사람이면 이웃이다가 절대로 아니다. 이런 독특한 생각선상에 있다, 즉 주님으로부터의 선이 이웃인 것이다, 고로 각 개인이 나의 이웃이 되는 척도는 상대방이 주님으로부터의 선을 받아들인 양과 질에서 이다. 고로 가장 비중이 큰 이웃의 순서를 차례로 열거한다면, 주님-교회-나의 나라 등등으로 내려간다.

인식함들(cognitions)
때로는 “지식들”로도 번역된다. 이는 사실들(facts)을 관념들(ideas), 또는 앎의 보다 깊은 수준들 안으로 조직화 함을 뜻하기 위해 사용된다. 엘리엇씨는 그의 새 번역서인 “알카나 세레스티아”에서 “내면의 것들에 관련되는 지식의 항목들”이라 정의하고 있다.

있음 (being, ens)
실재(entity) 또는 구별되는 어떤 것을 뜻하기 위해 사용되는데 선각자는 이 단어를 매우 드물게 사용했다, 또한 순수하게 정신적 건설을 뜻하기 위한 합리성, 이성적 인 것에 대한 어구인 “ens rationis”에서 사용되었다. 이를 있음인 esse, 즉 “혼” 또는 어떤 것의 본질되는 속성과 대비해보라.

있음 (being, esse)
어떤 것에 있는 본질되는 품질, 실체(reality) 자체, 예를 들면, 하느님의 근본적 본질은 신성한 사랑이다.

자기 것이 되게 하다 (appropriate, 사유)
이 단어는 선각자에 의해 형용사로는 한번도 사용되지 않고 동사로만 사용된 특별한 단어인데, 자신에게 고유한 것으로 주장함, 또는 소유하는 것이다.

자기 자신 (Own)
자기 자신은 라틴어 suus 와 proprium 모두를 번역하는데 몇 번역자에 의해 사용되었다. 자아(self), 자아를 위해, 자아로부터 살아감, 이기심이라는 자아를 느낌, 인간의 거듭남에서 자아가 인도함이라는 망상은 필수적이다.

자아 (Proprium)
자기 자신을 보라. 이기심을 느낌이라는 기초적 의미에 추가하여 많은 다른 의미들을 가지는 경우도 있다, 즉 천사적인 자아, 악마적인 자아, 인간 자아, 신성한 자아, 지옥적 자아, 지적 자아, 자발적 자아 등등이다.

자아로서 같이 (as of self)
마치 자기 고유의 힘을 수단으로처럼, 컽으로 보기에 자신 스스로인 듯 하는 것. 선각자의 신학에서 비평적 개념인데, 즉 누군가가 “마치” 자아의 힘에서 인 듯 행동하는 것, 그러나 동시에 모든 힘은 하느님으로부터 온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다.

자연적 인간 (Natural man)
세상적인 것들에 집중적으로 흥미를 가지는 어떤 개인을 뜻한다 할지라도, 그 개인의 전체를 뜻하여서는 일반적으로 사용되지 않는다. 단지 어떤 개개인에게서 가장 수준이 낮은 인간의 마음을 언급할 때 가장 흔히 사용되고 있다.

자연주의자 (Naturalist)
하느님을 믿는 대신 자연을 믿는다는 어떤 개인을 경멸적 의미에서 만 사용되었다, 즉 물질주의자와 비슷하다. 자연주의도 이와 비슷한데, 모든 종교적 개념들의 근원을 자연에 신뢰를 둔 것이라 정의된다.

자유 (Freedom)
애착으로부터 생각하고 뜻하고, 이치에 맞다고 여겨지는 것에 따라서 자유하게 행동하는 것이다. 만일 이것들이 천국적이다면, 자유는 진짜이다; 만일 지옥적이다면, 이것은 외관적일(껍데기적일) 뿐, 실제로는 비 자유함이다. 진정한 자유는 당사자로 자아 강요(self-compulsion)를 사용하는 것을 허용한다.

지배하는 사랑 (Ruling love)
삶을 좌지우지하는 각 개인에 있는 가장 강력한 사랑. 가능할 수 있는 지배하는 사랑은 네 가지로 함축해볼 수 있다: 1. 하느님을 사랑함. 2. 이웃을 사랑함. 3. 자아를 사랑함. 4. 세상을 사랑함이다. 이 중 첫 둘째 만이 거듭나지는 개인을 위하여 받아져야 하는 지배하는 사랑들이다.

지혜 (Wisdom)
많은 지식을 소유함을 언급하는 데에는 거의 사용되지 않는다, 이 용어는 통상 삶에 관한 것만을 서술하는데 사용되고 있다. 지혜는 사랑으로부터 진정한 것을 지각함, 뜻함, 행동함으로 구성된다. 슬기로운 개인은 진리에 기초한 선을 행함을 위한 변동없는
바램을 가지고 있다.

진실한 (True)
절대적 의미에서 진실함은 신성한 사랑의 형체와 수단들이다. 관계적 의미에서, 이것은 개개인의 사랑 속에 있는 지각하고 결과를 있게 하는 기능이다.

진리의 선 (Good of truth)
개개인 안에서 진리를 수단으로 도달되는 상태인데, 이 상태는 사랑의 행동들 안에서 자체를 표현한다, 이를 수단으로 그 진리는 선이 된다. 이것은 영적인 선이라고도 불리운다.

질투 (Jealousy, zelotypia)
선각자는 부부의 사랑의 첫 장에서만 사용하였는데, 귀중한 것을 보호함을 사랑함, 특히 결혼의 사랑을 보호하기를 사랑함을 뜻하기 위해 사용했다. 그는 나쁜 질투가 있다는 것도 인정하고 있으나, 그가 강조하고 싶은 점은 질투의 긍정적 측면에서 이다. 그는 이것을 열정들 중의 열정이라 일컫는다-즉 열정의 진정한 모양새이다.

천사 (angel)
천국에 있는 개인(person). 선각자의 신학에서 모든 천사들은 처음에 자연계에 살았고, 사후 천국에 입장한 사람들이다. 선각자는 천사의 개념을 놓고, 창조로부터의 분리된 계층으로 말하는 것을 거절한다.

천성 (타고난 자질, Genius)
개인의 기질, 특성, 재능, 경향성, 개인과 개인들 집단의 영 또는 품질.

첩 (pellicacy, concubine, mistress)
이 단어는 pellex로부터 인데, 첩을 두고 사는 상태이다

최말단 (Ultimate)
연결 고리의 마지막, 수준이 가장 낮은 것, 가장 외적인 것, 가장 먼 것. “가장 큰 것”을 뜻하기 위해 선각자에 의해 사용되지 않았다.

충격(자극, conatus)
종종 “애씀(endeavor)”으로 번역된다. 일반적으로 행동들 뒤에 놓인 에너지를 두고 사용된다. 특별한 목적들을 쟁취하게 하는 꾸준한 충격을 받는 생활 자세일 수 있다.

타고난 (선천적인, connate)
글자대로 말하면, “출생으로부터 존재하고 있음”이다, 이것은 때로는 유전적 경향성들을 부정하는데 관련되어 사용되고 있다. 또한 자주 비슷한 단어인 생득의(innate, 타고난), 천부의 (inborn), 같은 성질의(congenial)와 더불어 사용된다

탐욕 (cupidity, 강력한 욕망)
(현세에의 욕망을 보라.) 자연적 마음으로부터 일어나는 강력한 욕구, 갈망, 그리워함. 이 단어의 라틴 뿌리는 현세에의 욕망의 뿌리만큼 강한 부정적인 것을 함축하여 운반하지는 것은 아닌 듯 비쳐진다.

태고 교회 (Most ancient church)
선각자는 이 용어를 대문자로 자주 표기했다. 하여 이 이름이 매우 지당하다 싶어서인 듯한 느낌을 우리로 갖게 한다. 이 용어는 신성에 관련하여서 일 경우, 가장 이른 유사 이전(역사 문명 이전)을 언급하는 전문어이다. 이 용어는 창조와 에덴의 동산을 언급하는 창세기서의 사건에 상징적으로 결합되어 있다.

트란스훌럭스 (Transflux)
관통하여 흘러가버림. 주님으로부터의 선이 아무런 효과도 보지 못하고 어떤 개인을 관통하여 흘러가버리는 것을 부정적으로 언급함에 사용되었다. 마치 물이 조리채를 빠져나가는 경우 같다. 이런 개인은 양심 없이 있다라고 말해진다.

평형 (Equilibrium)
(균형을 보라.) 가장 널리 가능할 수 있는 선각자의 번역에서 용어 “평형”이 발견될 것이다. 현재까지에서, 보다 단순하고 충분하게 어울리는 번역문은 돌(Dole)의 번역에서의 “균형”에 번역어의 한계가 그어지고 있는 실정이다.

표현 (Representative)
영적 생각(idea)을 상징하려고 사용되는 자연의 대상물, 개인, 행동, 또는 이 영적 생각 자체. 또한 영계에서 보일 수 있는 형체에서 생각이 표출됨.

합리적인 것 (이성적인 것, Ens rationis)
순수하게 정신적 건축물, 마음 안에서만 존재하는 어떤 것. 어떤 문맥에서는 도깨비불(will-o-the-wisp, ignis fatuus, 환영)에 대충 견주기도 한다. 있음 [ens]를 보라.

허용 (Permission)
이는 신성한 섭리의 한 부분이라 선각자는 규정하고 있다. 허용된 것, 관용(묵인)된 것은 허락된 것, 묵인되어진 어떤 것이나 그렇다고 하느님이 바라는 어떤 것은 아니다. 바람직하지 않은 어떤 행동들을 묵인하는 것은 인간의 자유를 침해하지는 않는다.

현세에의 욕망(concupiscence, 강한 욕망)
몇몇 번역자들에 의해 존속되어 온 라틴어풍의 단어이다. 동사 형체는 어떤 것을 강하게 바램(desire), 또는 갈망함(lust)을 뜻한다. 명사는 강한 욕구를 뜻하는데, 통상적으로는 악, 또는 (섹스 쪽이거나 아니거나 할는지 모르는) 욕망이다. 때로는 탐욕(cupidity)이라는 단어와 분간할 수 없는 경우도 많다.

황폐됨 (Vastation)
황무한 상태, 극점(종말), 다빠져나가 텅빔. 영들의 세계에서 벌어지는 과정, 즉 외적인 악들과 거짓들이 선한 자로부터 제거됨, 그리고 위선적으로 있는 선들과 단지 지식들인 것이 악한 자로부터 제거됨, 하여 어정쩡하게 선과 악이 뒤섞여 있던 세상에서의 인간의 상태가 선과 악이 선명한 상태로 확실히 구분되는 과정에서 사용되는 단어이다.

회개 (Repentance)
재출생에서의 첫 단계, 여기에는 하느님에게 죄들을 고백함, 자기가 용서되기를 간구함이 포함되고, 진정한 선행과 신앙의 교훈들에 따라 새로운 생활을 이끌려는 진실한 노력이 뒤따르는 것이다.

(외부쪽에) 흘러듦 (afflux)
…쪽으로 흐름, 또는 …쪽을 향하여 흐름. 이 방식을 수단으로 주님께서는 악을, 악한 자를 통제하신다. 선과 진리는 악한 자 쪽으로(to) 흐를 수는 있으나, 그렇다고 악이나 악한 자 안쪽으로(into)는 흐르지 않는다. 고로 악이나 악한 자를 통치하는 것은 내부(within)로부터가 아닌 외부(without)로부터 이다. 이 단어는 (내부쪽에) 유입됨(influx, 흘러듦)과 날카롭게 대비되어 선각자의 책에서는 사용되나 한국어에서는 같은 말로 번역되고 있어 가로에 영어를 추가로 기입해서 (역자는) 구별해보고 있다.

선각자에게만 유일한 기본적 생각들(concepts)

1. 하느님에 관하여 선각자에게 밝혀진 기본적 생각들

신성한 생명은 하나이고, (사실) 생명은 이 생명밖에 없다. 주님 만이 생명 자체이시다, 그 이유는 그분이 생명 자체이시기 때문이다. 땅 위 인간과 영계에 있는 인간은 이 생명의 그릇들일 뿐이다.

(참고: 선각자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뜻하기 위해 단어 “주님”을 시종일관하게 사용한다. 또한 이 글 내지 역자의 번역서에서 사용되는 단어 중 개인(個人, 때로는 인물, 人物, person)이 있는데, 그러나 역자가 이 단어를 영한 사전에서 같이 사람 등의 알기 쉬운 단어로 번역하지 않고 조금은 껄끄러운 개인으로 표기하는 이유는 지상에 태어나 아무개라는 이름으로 살았던 물질인 인간, 즉 개인(예를 들면, 예수)을 뾰족이 암시하고 싶어서 이다.)

하느님의 본질에는 두 구성 요소가 있는데, 그것은 사랑과 지혜이다. 하느님의 사랑을 구성하는 세 고유 특성이 있는데, 그것은 그 자체의 바깥쪽 다른 이들을 사랑하는 것, 다른 이들과 하나이기를 바라는 것, 그리고 다른 이들을 자체로부터 복되게 하여주는 것이다.

신성의 사랑과 지혜를 본질 자체 측면에서 일 경우, 우리는 생각조차 할 수 없다. 그 이유는 그것은 무한이어서 우리의 사고력을 초월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랑과 지혜가 상응적(correspondential) 외관에서 일 경우, 우리는 생각해볼 수 있다. 천사의 눈에서, 주님은 태양으로서 나타난다, 이로부터 영적인 열과 빛이 나아가는 바, 유추해봄(analogy)을 수단으로 천사들은 자기들이 유지 지탱할 수 있는 이유는 이 영적 빛과 열, 즉 하느님으로부터 꾸준히 방산되는 신성의 사랑과 지혜에 의해서 이다를 생각하고 알 수 있다.

상응을 수단으로, 이 유추해봄은 땅 위 개인들도 사용할 수 있다. 즉, 자연이 물질적 태양의 열과 빛을 수단으로 매 순간을 유지 지탱하듯, 인간인 나는 주님의 신성한 사랑과 지혜를 수단으로 영적으로 유지 지탱되고 있다는 것을 생각해보고 알 수 있다.

주님(the Lord)은 보편적(우주적) 인간(universal human)이시다. 주 예수 그리스도, 이 분만이 충분하게(fully, 결여됨이 없는) 인간이시다. 이 분으로부터 천사들, 영들, 그리고 지상의 거주민들은 집합적으로 “사람들(men)”이라 불리운다. 이 분이 천국 안으로 유입되심으로 전체 천국은 하나의 인간을 표현하고 닮아 있게 하고 있다. 유추를 수단으로, 땅 위 개인들의 (인간) 본성 안에 있는 천국의 것 만이 진실로 인간(human)이다

새로운 기독 세계의 하느님은 하나의 보일 수 있는 하느님이 계시고, 이 분 안에 보일 수 없는 하느님이 계시는데, 마치 혼이 그의 신체 안에 있는 것과 같다. 만일 누군가가 그렇지 않다라고 판단했다면, 그는 이 하느님과 결합되어질 수 없을 것이다, 그 이유는 하느님과 개인들의 사이에 있는 모든 결합은 상호적(reciprocal) 임이 틀림이 없기 때문이다. 이런 상호성은 보일 수 있는 하느님이 아니면 불가능하다.
위와 비슷하게, 모든 천국들 안에서, 하느님에 관하여 이런 생각밖에 없다: 즉, 그분은 개인이시다는 것, 그리고 이 개인이 주님이시다는 것이다. 골로새서에서 바울의 통찰력이 선각자의 견해가 진실임을 이렇게 증명하고 있다: 즉, 일어나시고 신성이 되신(risen and glorified) 예수 그리스도 안에, 하느님(Godhead)의 모든 충만함이 육체적으로 거주하시고 있다. 땅 위와 천국 안에 있는 사람(people)은 이를 알 수 있다.
하느님 안에 있는 삼위일체(trinity, 三位一體)에 관하여서 성경의 구절들은 상징적 언어에서 말하고 있다. 신성의 삼위일체는 주님의 한 개인 안에 있다, 이 셋을 구별해 알 수 있는 것은 혼, 신체, 그리고 이 둘의 결과인 활동(activity, 행동)으로 이해할 경우에서 이다. 유추를 수단으로 각각의 개인 안에도 삼위일체가 있다. 셋을 한꺼번에 취합하면 하나의 개인을 구성한다: 즉 혼, 신체, 그리고 혼이 신체를 이용한 결과인 행동이다. 그러나 이것은 유한한 삼위일체이다, 그 이유는 인간은 그릇들, 또는 생명의 “기관들(organs, 유기체들)”이기 때문이다. 주님 안에서의 삼위일체는 무한이고, 고로 신성인 이유는 주님은 그분의 인간(human)조차도 생명 자체이시기 때문이다.
아버지이든, 아들이든, 그리고 성령이든, 이 단어의 언급이 있는 말씀 안의 어디에서 이든, 이는 하느님의 속성을 구별해 말해보는 양상일 뿐이다. 다시 말해 하느님의 통일성(unity, 여럿이 아닌 하나) 안에 삼위가 있는 바, 아버지, 또는 성령(님) 같은 식으로 분리적으로는 존재하지 않고, 주님 만으로 존재한다는 말이다. (우리는 하느님을 주님으로만 부르는 것이 합당할지 모른다 역자주) “아버지”, 또는 하느님의 “혼(soul)”과 “영(Spirit)”, 또는 하느님의 활동은 주님 만으로부터 존재하고 출현(coming forth, 존재 안으로 옴)된다. 그러므로 하느님, 그리스도, 또는 성령으로 분리된 존재들로 말하는 듯 여겨지는 성경의 사건들이다 해도 상징적, 유추적으로 이해되어져야 한다. 고로 통찰력은 분리된 둘, 또는 셋의 신성의 존재들로서가 아닌 유일한 하나의 하느님의 속성과 활동의 어떤 양상(면모, aspect)들 쪽으로 있어야 할 것이다.

신성의 사랑은 모든 창조의 근원이고 지탱자이다. 영적인 존재들은 사랑 외에 다른 근원으로부터 존재 안으로 와질 수가 없다; 그리고 창조하는 사랑은 사랑 자체 이신 주님으로부터만 존재 안으로 와질 수가 있다 (세상 밖으로 나타나짐).

모든 창조의 보편적 목적(purpose, 의도)는 창조자가 창조된 우주와 영원히 합류하는(join) 것이다. 이 합류는 이 창조 안에 신성의 본성이 “거주”할 수 있는 존재들이 있어야 가능해진다. 다시 말해 신성에 걸맞는 성질이 각 개인들 안에 있어야 합류가 가능하다는 말이다. 고로 모든 것은 각 개인들의 사용을 위해서 창조되어왔었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모든 창조된 것들의 사용은 가장 바깥 부분들로부터 개인들 쪽으로 등차적으로 올라간다, 그리고 개인들을 통하여 하느님 쪽으로 올라간다. 이것은 “생명의 순환”이라고도 불리운다.
창조의 특별한 목적은 하느님의 사랑을 받고 되돌림을 영원히 계속함으로, 인류로부터 천사들의 천국을 영원히 부풀려감일는지 모른다.

하나의 끈덕진 신학적 관념에 반대하여 있는 것은 이것이다, 즉 하느님은 무로부터 우주를 창조하지 않았다. 무로부터 만들어진 어떤 것도 있을 수가 없다. 모든 것들은 실체(substance, 물질) 자체인 실체로부터 창조되어져 왔다. 이 실체는 신성의 사랑이다. 이 근원으로부터 만 모든 것들은 만들어내지고 지탱되어진다.

하느님은 물질의 우주를 창조하셨는데, 이는 영적 실재(reality)들에 “옷을 주는(clothing)” 것, 그리고 개인들이 원하면, 그들 고유의 자유의지로부터 영적이고 잠재적인 천사의 존재들이 되는 평면(plane)을 제공하기 위하여서 이다.

자연 평면에서 더 이상 진짜 인간 다움(humanity)이 있지 않게 되었을 때, 그리고 인류가 바야흐로 파멸에 직면하려고 했을 때, 즉, 천국으로부터 생명과 빛을 받는 역량을 거의 잃었을 때, 하느님은 그분의 무한성을 유한성으로 만드셨다, 즉 예수 그리스도 라는 개인 안에서 세상 안으로 오셨다. 이때 쾌히 받아들심으로부터 주님이 “입으신” 인간 다움은 인류를 괴롭히는 허약함과 동일한 것을 지닌 지극히 평범한 인간의 어머니 마리아로부터의 것이었다. 그러나 (예수의) 내부에 잠재적인 신성의 거주하심에서 끌어냄을 수단으로 예수는 지상 평면에서 개인들에게 영향을 주는 천국과 지옥의 세력 사이에 있는 균형을 언제나 회복되게 하시면서, 점진적으로, 질서있게(순서적으로), 그리고 완전하게 지옥들의 힘들에 정면으로 맞서 이겨내셨다. 주님의 삶의 모든 과정은 되찾음을 구성하는 것, (즉) 개개인의 구원이 지금 그리고 언제나 가능하게 만드심이다.

2. 영적 세계에 관하여 선각자에게 밝히 알린 기본 생각들

진짜이고 영원한 영적 세계가 있다. 그 세계는 셋으로 구분되는데, 천국, 지옥 그리고 영들이 있는 중간 세계이다.

죽음은 삶에 있는 질서적, 필수적 단계이다. 인간의 신체가 그것의 생각들과 애착들에 상응하는 자연계에 있는 기능들을 더 이상 수행할 수 없을 때, 그 개인은 “죽는다”라고 말해진다, 그러나 개인은 죽지 않는다, 단지 지상 평면에서 사용을 위해 주어진 육체라는 부분들로부터 분리되어질 뿐이다, 개인은 살기를 계속하는데, 그 이유는 개인이 개인인 이유는 신체 때문이 아니라 영 때문, 즉 개인 안에 있는 생각하는 혼, 또는 영이 당사자 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애착과 더불은 생각이 그 개인을 구성한다. 고로 죽음은 이 세계로부터 저 세계로 건너가는 (다리 역할을 하는) 것일 뿐이다.

(자연계) 생명의 모두가 중단되자 마자, 개인은 영들의 세계에서 즉각적으로 소생되어진다. 이것은 가장 높은 천사들의 조력을 받아 주님에 의해 행해진다. 그 다음, 개인은 자기 검증과 자기 인식의 과정을 통하여 안내되어진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 또는 그녀 자신의 결단력이 영원한 집을 천국이든 지옥이든 선택할 수 있다. 어느 누구도 천국으로 입장이 주어지는 수단으로서의 “보상”이라는 것은 없다, 누구도 지옥으로 정죄됨을 수단으로 “처벌”되지 않는다. 천국과 지옥 안에서 모든 이는 자기 자신의 선택을 수단으로 각자의 영역에 있다.

죽음 후에 모두 각각의 개인에게는 자신의 생각들과 애착들을 수정할 충분한 수단들이 수여된다. 모두는 천사들을 수단으로 주님에 의해 가르쳐지고 인도되어진다; 그리고 모두는 자기들이 생명을 따라서 생명을 살아감이다는 것, 그리고 천국과 지옥이 있다는 것을 의식할 때, 그들은 첫째로 모든 진리들을 받아들임에 있다. 그러나 지상에서 (하느님을) 인정하지 않았고, 하느님에 맞서 악들을 죄들로서 금하는 노력을 만들지 않았던 이들은 이내 진리들을 듣는 것에 진저리를 내고 그것은 선택의 문제라고 여기고 물러나버린다. 짧게 말해, 섭리는 모두가 구원되는 쪽으로, 즉 천국을 선택함이 가능해지도록 그것을(진리의 선택을 하도록) 만들고 있다. 그리고 그렇게 선택하지 않은 개인은 홀로 책임질 수 있게 만들어져 있다.

용어 “영”은 영들의 세계라 불리우는 사후 첫 상태에서 일시적으로 있는 자를 뜻하기 위해 사용할 뿐이다. 용어 “천사”는 교육받고 자기 수정을 끝내서 천국에서 자기 자리를 찾아갈 수 있게 된 이들을 뜻한다. 지옥에 자신의 장소를 발견하는 이들은 사탄들 또는 악마들이라 불리워진다.

개인로부터의(각자의) 영이 영들의 세계 안으로 진입하였을 때, 그녀 또는 그의 얼굴과 음성의 음질은 그들이 세상에서 가졌었던 것들에 대단히 비슷하다. 그러나 그 후 얼굴과 여타 얼굴의 생김새들과 행동들은 점차적으로 각자의 애착(affection)들과 당사자를 지배했던 사랑(ruling love)에 일치하도록 바뀌고 있다. (지상에서는 가면을 씀이 가능하나 여기서는 가면이 허용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과거 신체 안에서 영의 생명의 외면의 것들의 사용함이 끝나서, 이 외면의 것들이 곁에 놓여진 지금, 바깥쪽으로의 나타남과 이전의 애착들은 바뀐다, 하여 바뀐 그의 상태란 그가 보여지는 것과 행동하는 것은 그의 내면의 존재와 완전 일치되고 있는 상태의 것이다.

천국의 생활을 세부적인 것까지 말하고저 이 책의 페이지를 할당하기에는 너무나 많은 바, 여기서는 윤곽만을 그리고 지나간다; 우선 그 곳의 삶이 진짜 삶이다는 것, 진짜 당신의 가족들이 거주한다는 것, 직업들(각자 할 일들)이 매우 다양하다는 것, 기쁨만을 언제나 선사하는 공동체와 모임들이 있다는 것이다. (특별한 것은), 거기에 많은 어린 아이들이 있다는 것, 그 이유는 유아기나 어린 아이 시절에 죽은 모두는 천국 안으로 직접 오고 거기서 성장하기 때문이다.

지옥은 기본적으로 천국에 반대되는 것들, 거기를 선택한 이들의 특성이 악인지라 그들의 파괴적 힘에 의해 (모두는) 총체적으로 (언제나) 찡그려져 있다. 거기에는 (주님께서 악한 자를 징벌하려 만든) 불, 유황(불), 또는 기분내키는대로의 임의적 처벌 등등이 없다; 악은 그것 고유의 사용료(toll)를 부담할 뿐이다; 지옥은 객관적으로 불행의 상태이다. 그러나 지옥에 있는 이들은 자신들을 위해 최고의 선택이었음을 자랑하고 있다.

3. 우리에게 있는 하느님의 말씀에 관하여 선각자에게 밝히 알린 기 본 생각들

하느님이 언제나 설비해두시는 것은, 어느 시대를 무론하여 그 시대의 인간다움에 걸맞을 수 있는 신성한 진리의 밝힌(계시) 것을 관리하는 책무에 봉사하는 교회를 인류와 더불어 있게 하신 것이다. 우리가 아는 이 계시는 말씀(Word)이고, 이 말씀은 성경에서 발견되었다. 이 말씀을 수단으로 인류는 천국들과 계속적으로 연결된다. 그러므로 이 말씀에 있는 모두 각각의 표현들 안에 천국의 것들과 연관되는 내적 의미가 있다. 말씀이 내적 의미를 지닌 특성 때문에 말씀은 천국의 마음들과 인간의 마음들을 결합하게 한다.

많은(아마 대부분의) 기독인들이 이의 없이 이구동성 말하는 것은, 말씀은 신성의 호흡이 담겨 있다는(영감되어 있다, inspired) 것, 그러므로 거룩하다 이다. 그렇지만 선각자를 통한 이 계시 앞의 (시대에서) 경우, 말씀 안에서 어디에 말씀의 거룩함 또는 신성이 존재하는지를 알지 못했다. 그 이유가 말씀을 여느 책을 읽듯 평범히 읽는다면 (즉 글자 그대로의 의미에서의 경우라면), 여느 촌뜨기 작가의 저술 같고, 때로는 문체상 (문법도 모르고 씌어진 듯하여) 엇박자인 냥 보이고, 심지어는 현 시대의 저술 보다 수준이 미천한 듯까지 깍아서 평가할 수도 있는 책인 듯 비쳐지게 나타나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하느님을 예배하기를 선택하지 않든지, 또는 하느님 보다 세상의 것들을 존경하는 쪽을 선택하든지 하는 이들은 말씀에 관련해 거룩한 어떤 것이 있을 수 있다는 것마저 부정하는 오류 안으로 쉽사리 추락할는지 모른다. 짧게 말해, 이렇든 저렇든 각자는 말씀을 신성이 거주하는 책임을 수긍하던지 부정하던지는 그의 선택(의 잣대) 안에 있다는 말이다.

어쨌든, (순위에서) 자연 앞에 하느님을 두는 이들, 그리고 진짜로(순수하게) 진리를 찾는 이들은 글자에 있는 많은 서술문들이 주님의 말씀으로서 확인하여 그 글자들을 꾸준히 받아들이고 있다. 사실상 이들의 마음들은 계시(밝히 앎)의 필요와 실재 쪽으로 통찰력이 열려져 있다. 그 이유가 계시 없이 지식은 없고, 결과적으로 하느님을 인정함도 없기 때문이다. 사실상 주어져왔었던 계시를 통하여서만 사람들은 하느님에게 접근할 수 있어, 그분으로부터의 유입을 받고, 자연적 존재로부터 영적 존재로 되어질 수가 있었다.

말씀의 책들은 계속적이고 연결된 내적 의미를 가지는 모든 책들이다. 구약 성서 부분에 있는 이 말씀의 책들은 모세의 다섯 책들, 여호수아, 사사, 사무엘상하, 열왕기상하, 시편, 이사야, 예레미야, 애가, 에스겔, 다니엘, 호세아, 요엘, 아모스, 오바디야, 요나, 미가, 나훔, 하박국, 스바냐, 학개, 스가랴, 말라기; 그리고 신약 성서 부분에서는 마태, 마가, 누가, 요한, 계시록이다.

복음서들은 주님 자신의 말들을 포함한다, 이 말들 안에는 영적 의미들이 숨겨져 있고, 이 영적 의미들을 통하여 천국과의 교통이 가능하다. 사도들의 저술들(서간문)은 교회를 위해 유용하나, 내적 의미를 포함하고 있지는 않다.

말씀의 가장 바깥쪽, 또는 글자적 의미로부터의 모든 세부사항들은 감각 기관(sensory)에 의존하고 싶어하는 이들의 납득력에 적합해 있다, 고로 어린이들과 단순한 이들에게 (특별히) 안성마춤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글자 그대로의 의미의 대부분은 진리의 외관 (측면)들이다, 따라서 그것들이 계발된 이해력으로부터 지각되지 않으면, 그것들이 실제적으로 진리이다고 믿어져버림에 의해 거짓화 되어갈 수 있다. (단순한 자나 어린이들이 아닌 이들, 특히 지식인이라 자부하는 이들이다면) (마음만 먹으면) 거짓화 할 수 있는 위험성이 글자로 있는 많은 서술문의 도처에 산재해 있다. 예를 들면, 하느님은 성내신다, 그분은 시험하신다, 그분이 지옥으로 내던지신다 등등이다; 또한 마지막 심판에서 주님은 글자에 박힌 그대로 구름을 타고 땅 쪽으로 내려오신다… 태양과 달이 빛을 주지 않을 것… 별들은 추락할 것이다 등등도 있다. 이런 서술들은 자연계의 재난을 예보함들이 아니고, 어느 누구 안에서 거행될 수 있는 내적 바뀜들에 대한 상징들임을 알아볼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영적 투시 화법(perpective, 상관 관계, 견지, 시각, 원근법) 뿐이다.

글자 그대로의 의미가 이런저런 방법들에서 잘못 이해되어질 수 있기 때문에, 이 의미는 어떤 상해받음도 허용 않을는지 모르는 글자 안쪽에 숨겨 놓인 진짜 진리들 쪽으로 안내하는 역할로 봉사하고 있다. 이 개인은 이런 식으로 해서, 저 개인은 저런 식으로 해서 글자의 의미를 이해할 때라 해도 영속되는 피해는 있지 않다; 그러나 피해가 가해지는 때이다면, 신성한 진리에 반대하는 거짓들을 첨가할 때이다. 이 짓은 거짓들 안에 있는 자신이 정당하다 하여 그것을 입증하고자 말씀의 서술들을 선택하는 이들에 의하여 자행된다.

말씀 안에 있는 모두 각각의 개인, 장소, 어떤 것, 어떤 사건 등등은 어떤 영적 실재(reality)를 상징하고, 이 실체(reality)와 상응하고 있다. 이런저런 상응을 통한 의미들이 말씀의 영적 의미를 구성한다. 따라서 영적 의미는 글자 안에 나타나 있지 않다. 그것은 글자 그대로의 의미 내부에 있다. 마치 혼이 신체 안에 있는 경우, 지성의 생각이 눈 안에 있는 경우, 사랑의 애착이 얼굴 안에 있는 경우 같다. 말씀을 영적으로 만들어주는 것이 영적 의미이다. 영적 의미야 말로 진실로 주님의 말씀이다.
어쨌든, 글자 그대로의 의미 안에서 말씀은 그것의 충만함으로, 그것의 거룩함에서, 그리고 그것의 힘을 지니고 있다. 그 이유가 글자 그대로의 말씀은 안쪽에 있는 영적 의미들의 거처이자. 그릇들이고, 받침기둥이기 때문이다.

말씀 안에 있는 표현들은 그것들의 시리즈 안에 영적인 생각들을 포함하도록 씌어 있다. 이 영적 생각들은 글자를 읽는 자가 상응 지식에 친숙해 있지 않으면 그 사람에게 나타나지 않는 생각들이다. 이 방법에서 신성은 말씀 안에 감추여 놓여 있다.
상응들이 모든 힘을 가진다, 하여 상응에 따라서 땅 위에서 행하여진 것은 천국 안에서 직접적인 결과를 가진다, 그 이유는 상응은 신성으로부터 있기 때문이다. 사랑의 선과 신앙의 선 안에서 살아가는 이들은 “상응 안에” 있다 라고 말해진다, 그리고 신성은 이 당사자를 통하여, 그리고 당사자 안에서 행동하실 수 있다.

주님의 말씀은 목마른 개인, 생명을 바라는 개인에게 생명을 주고 있다. 이것은 요한의 복음서에서 가르치고 있다. 말씀은 살아 있다, 그래서 생명을 준다, 그 이유는 최고 의미에서 말씀은 주님과 그분의 왕국을 다루기 때문이다. 말씀에 있는 생명은 말씀을 읽는 당사자가 거룩함의 느낌을 갖게 하면서 당사자의 마음 안으로 흘러든다. 이렇기 때문에, 주님은 그분으로 있는 말씀 측면에서, 자신이 영원한 생명 안으로 솟아오르는 물의 원천이다고 선포하신다.

4. 우리 자신과 우리가 의도했던 운명에 관하여 선각자에게 밝히 알 린 기본적 생각

사랑과 지혜, 그러므로 의도력과 분별력이 각자의 생명 자체를 구성한다. 생명이 무엇인지를 아는 자는 드문 편이다. 사람들이 그것에 관하여 생각할 때, 그것은 파악하기 어려운 것, 그것은 개념화에 도전하는 어떤 것인 듯하게 여긴다. 이렇게 응답하는 이유는 하느님 만이 생명이시다는 것, 그리고 그분의 생명은 신성한 사랑과 신성한 지혜이다를 실감 못 하기 때문이다. 이쯤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우리들 자신의 생명은 하느님의 생명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 그 이유는 우리가 그분으로부터 생명을 받는 만큼에서 우리가 생명을 가지기 때문이다. 사랑이 누군가로부터 쇠하여질 때 그는 나태해진다, 지혜가 쇠하여져 갈 때, 그는 무디어져 있다. 만일 이 두 가지가 동시에 쇠하여지면, 그는 말살되고 있다.

신성의 사랑은 이 사랑이 사랑하는 다른 존재들 안에서 이 사랑을 사랑한 당사자를 수단으로 현재의 것이 존재하고 있음과 되어감을 도울 수는 없다. 어쨌든 만일 이런저런 인간의 존재들이 자신들 안에 무한의 어떤 것, 또는 본질적 사랑으로부터의 실체와 생명의 어떤 것, 또는 신성으로부터의 어떤 것을 가졌다면 위의 말함이 발생할 수 없었다. 만일 우리들 안에 무한하고 신성으로부터의 어떤 것이 실제로 있었다면, 하느님은 타인들에 의해 사랑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타인들)는 자신들만을 사랑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 이유가 무한 또는 신성은 특이하고 나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이유 때문에 서로의 사랑은 본질적 사랑으로부터의 어떤 것도 있지 않은 타인들과 더불어서만 발생할 수 있을 뿐이다.

인간의 존재, 본질적으로와 자아 측면 만에 집중한다면, 짐승으로부터 별반 다를 것이 없다. 즉, 오각도 매우 비슷하다, 식욕도, 자연적 수준의 바램들도, 뿐만 아니라 애착들도 피장파장일지 모른다. 개인의 최선의 사랑들조차 매우 비슷하다, 즉 동료를 사랑함, 자식을 사랑함, 결혼한 짝을 사랑함 등등에서 이다. 어쨌든 인간은 내면의 생명을 가지고 있음 덕분에 짐승 보다 상위에 있는다. 이 생명은 주님으로부터 파생된 사랑의 생명과 신앙의 생명이다. 만일 이것이 출석되지 않고 있다면, 그 개인은 결코 인간일 리가 없을 것이다. 더욱이 주님으로부터 이 생명을 통하여 그 개인은 사후 살고 있다.

모든 사람들은 각자의 마음에 속해 있는 내면들의 것에 관련되는 물질의 신체로 이 세계 안에서 옷을 입고 있는 영이다. 신체는 영의 생각함들의 방향과 영의 애착함들의 조절 아래 있다.

인간 종족, 위에서 명기한 대로, 천국이 설립되는 기초이다. 이런 이유로 인간의 창조는 마지막 번째에서 이었다, 그 이유가 마지막 번째가 앞서 창조한 것을 아우르는 기초이기 때문이다. 모든 창조가 하느님으로부터 오기에, 개인들은 신성의 질서의 형체들로 창조되어졌다.

사람들은 자연계와 영계가 외면적으로 결합(join)하게 하는 수단이다. 사실상, 개인이 영적 존재로 되는 정도에서, 그는 두 세계가 외면적, 내면적 결합(conjunction)을 위한 매체가 되어져 있는다.

인간의 혼(soul)은 당사자의 가장 깊고 가장 순도 높은 본질이다. 그러나 본질은 형체를 가져야만 한다, 그리고 혼은 사랑의 모든 것들의 형체로부터 애착(affection)들이라 불리우고, 지혜로부터의 모든 것들의 형체로부터 지각(perception)들이라 불리운다.

개인은 어떤 지식 안으로 태어나지 않는다, 총명 또는 지혜 안으로 태어나지는 것은 더더욱 아니고, 오직 그런 것들을 받는 수용력, 그리고 그것들을 빨아들이는 능력만을 지니고 태어난다. 이것은 두 겹의 방법에서 결과되어진다: 신성이 흘러드는 내적인 방법에 의해서; 세상이 흘러드는 외적인 방법에서 이다. 이것들이 개인 내부에서 만난다, 그리고 그때 개인이 신성에 의해 계발되기를 선택하는 정도에서 개인은 지혜의 상태 안으로 점진적으로 들어간다.

모두 각각의 개인은 자기를 성화(聖化, sanctification)함에서 자아가 인도할 수 있다 라는 환영(幻影, 착각, 잘못 생각함), 자아(selfhood, 이기심)로부터의 느낌, 감각을 가진다. 선각자는 이기심으로부터의 이런 저런 느낌을 “자아(proprium)”라는 단어로 언급하고 있다; 사실 개인을 두고 성화함이라는 단어 보다는 “거듭남”이 더 어울릴 것이다.

신성의 섭리인 것은, 개인은 이성에 일치하여 자유함으로부터 행동하는 것; 또한 개인이 생각하고, 뜻하고, 행동하는 것의 모두는 온전히 자아로부터 있게 나타나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나타남이 없다면, 어떤 것이 그의 것, 또는 자기 자신의 것임을 아무도 느낄 수 없을 것이고, 따라서 개인은 자신 고유의 개인일 수도 없게 되고 만다. 자아로부터의 이런저런 감각 없이 개인에게 귀속되는 것은 어떤 것도 있어질리 만무하고, 고로 개인은 선이든, 악이든 무엇을 행하든지 무관심, 또는 하느님을 믿든, 지옥의 꼬드김을 따라가든 무관심으로 일관되어지고 만다. 줄여 말해, 개인은 개인 당사자될 리 없고, 진실로 인간일 수도 없다는 말이다.

개혁되고 영적으로 되어가는 모든 이의 처음 상태는 그들이 주님에 의해 개혁됨을 믿지 않는 것, 그 대신 자신들에 의해 개혁됨을 믿는 것이다; 즉 선에 대한 모든 뜻함과 진리에 대한 모든 생각함이 자신으로부터 근원되었다고 믿는 것이다. 이 보다 한 술 더 떠진 것은, 주님께서 그들이 이런 상태 안에 있게 배려하시고 있으시다는 점이다. 그 이유는 만일 그가 자신 스스로 하고 있다 하지 않으면, 그는 개혁되어 질 수가 없기 때문이다. 실로, 만일 그들이 거듭남 이전에 너희들 스스로 선을 행할 수 없고, 진정한 어떤 것도 생각할 수 없다고 (주님으로부터) 말해졌었다면, 자기들은 의지와 생각 안으로의 유입을 기다려야 한다고 상상하는 실수로 붕괴되든지, 또는 만일 선과 진리가 자신들 안에서 근원되지 않는다면, 자신들은 기계 같은 처지이다고 상상하는 실수로 어떤 시도도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선과 진리가 자신들로부터 근원된다고 생각하는 것이 첫째로 허용되어야 한다.

그러나 거듭남의 과정이 한참 진행되면서 점차로 조금씩 가르쳐짐이 있어지는 것은, 예전의 자기 느낌과 생각함과 다른 것이 있다는 것, 즉 선하고 진정한 모든 것은 주님으로서만 100% 존재한다는 것이 당사자에게 슬금슬금 비쳐온다. 그리고 거듭남의 과정이 더 한참, 즉 완전함에 거의 접근하다시피 할 때, 당사자에게 주입되는 가르침은, 주님으로부터 있지 않는 것은 악이고 거짓이다는 것이다. 거듭나지고 있는 이들이라면, 그들의 이 세상의 삶 동안 가르쳐짐을 많이 깨닫지 못한 채 기한이 다 찰 경우, 다음 삶에서 이를 깨닫고, 그것을 지각함으로 보도록 인도 받는다.

인간의 자유 의지는 거듭남에 필수적이다. 개인이 모든 애착들과 모든 생각함들에 관련하여 내면적으로 자유함 안에 있지 않으면, 개인은 선과 진리가 뿌리내릴 수 있는 질서 안에 결코 놓여질 수 없다. 이 자유함은 양쪽에 놓여지는 무게가 평형을 이루는 천칭(저울)에 유추되는 방식에서 주님에 의해 유지되어진다. 비슷한 방식에서 주님은 모두 각각의 개인에 대한 선과 악의 영향력이 균형을 맞추고 있게 유지하신다. 그러나 개인은 이에 대해 의식하지 못 한다, 하느님의 선물 중의 하나인 것은, 개인은 자신의 생명을 두고 그것은 자신 고유의 것이다라고 느껴야 한다는 것, 우리가 그것을 그렇게 느끼는 것이 하느님의 뜻이다는 것이다. 이러한 즉, 우리가 말씀에 있는 질서의 법들에 일치하여 살기를 선택할 때, 고로 하느님의 사랑을 받아들이기로 작정함이 온전히 우리 자신으로부터 임을 우리가 느낄는지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은 그분의 손가락을 천칭 위쪽에서 직각으로 세우시어 유지하시면서 선택의 우리의 자유함을 알맞아지도록 조절해주시지만, 그렇다고 강제적 수단으로 자유를 침범하시는 일은 결코 없으시다.

하느님은 악을 창조하시지 않으셨다, 그러나 질서 안에서 실제의 선택들이 인류로 그것을 받아들이도록 허용해버렸을는지 모른다. 만일 사람들이 하느님이 처음 그들을 창조했던 사랑 안으로 태어나졌다면, 어떤 악도 있지 않았을 뿐 아니라, 사람들은 악이 무엇인지도 모르기조차 하여 있었을 것이다. (애당초) 우리가 창조되어진 사랑은 이웃을 사랑함으로부터의 사랑이다. 고로 우리는 우리 자신 만큼, 아니 그보다 더 많이 이웃을 사랑하는 것을 배울는지 모른다, 그리고 이웃에 선을 행함에서 기쁨을 발견할 것이다. 이 사랑이 진실로 인간이다, 그 이유는 이 사랑 안에 짐승으로부터 발견되는 자연적 수준의 사랑과 구별되는 영적 수준의 요소들이 있기 때문이다.

“원죄” 또는 “유전적 악” 같은 것은 없다. 누구도 실제의 악들 안으로 태어나지지 않는다, 그러나 특별한 악들을 향한 다소의 경향과 더불어 악들을 향한 경향성만 지니고 태어난다. 결과적으로, 사후 개인은 악들을 향한 어떤 유전적 경향성으로부터 판단되어지지 않고, 개인이 동의함에서 받아들이고 행동했던 실제의 악들로부터 만 이다.

우리가 실제의 선을 상속하지 않고, 선이 되어질 경향성만이 상속 가능하다는 것도 위와 동일하게 진정하다. 천성적으로 자연적 선과 친절함을 향유한 듯 여겨지는 이들, 그리고 타인에게 선을 행함을 타고난 듯 실행하는 이들이라 여기지는 이들을 목격하는 때도 있다. 그러나 이런 이들이라 해도 그들이 말씀으로부터 선을 행함에 관한 원리들을 동시에 흡입하지 않으면, 그들은 양심을 발달시키지 못한다, 그 이유는 양심은 자연적 선, 또는 유전적 선에 대한 경향성과 그것에 일치하는 생명으로부터 오지 않기 때문이다. 만일 어떤 개인들이 이런 상태에서 영적 세계 안으로 온다면, 그들은 자기들에게 강하게 인상지우는 선과 진리의 원리들을 가지는 것을 포함하여, 테스트되고 심리되는 어려운 과정을 통과해야만 한다. 이 방법에서만이 그들은 천국의 양심을 받을 수 있다.

이른 바, 천국행의 삶을 사는 것은 여느 사람들이 믿는 것 만큼 고되고 힘든 삶이 아니다. 혹 자는 생각한다, 영적 삶을 영위하는 것은 힘든 것이다, 그 이유는 세상을 포기함이 필요하기 때문, 신체와 육에 연합된 식욕들을 포기해야 하기 때문, 그리고 영적 존재들 같이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이들은 이것은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을 거절함을 뜻하는 것으로 받는다, 뾰족하게는 재물과 명성을 거절하는 것, 그리고 하느님, 구원, 영원한 생명에 관하여 꾸준히 경건하게 묵상하는 것, 그들의 생활은 기도함과 말씀을 읽는 것, 여타 경건하다는 저서들을 읽는데 있다고 생각한다는 말이다.

그러나 선각자는 말한다, (그가 저 세계로부터의) 풍부한 경험과 천사들과의 토론은 그로 하여금 위와 상황이 완전 다르다는 것을 알게 해주었다. 사실상, 이 세상을 포기하고, 포기하는 식으로 살았던 사람들이 천국의 환희를 받지 못하는 자신들 때문에 슬픔에 잠긴 삶을 저 세상에서 건설하고 있다. 모두 각각의 개인의 (이 세상에서의) 삶은 그 개인과 더불어 (저 세상에서도 당사자에게) 머물고 있다. 그 이유가 천국의 삶을 받아들이려면 개인은 이 세상에서 그것과 대등한 삶을 살고 있었어야만 했었기 때문이다. 이 세상 삶의 과정에서 있는 시민적, 도덕적 생활을 수단으로 개인은 영적 생명을 획득한다, 사실상, 이 방법만이 영적 생명이 개인 안에서 만들어지게 할 수 있다, 또는 개인의 영이 천국을 위하여 준비되게 해줄 것이다.

천국행으로 인도하는 생활은 실제로 놀라우리만치 단순하다. 당신이 부정직하고 불공정하다고 아는 방법으로 어떤 것을 얻을 때, 특히 당신의 영이 그런 쪽으로 향하여 움직이려 들 때, 당신에게 필요한 딱 하나는 그것이 하느님의 가르침에 반대되기 때문에 행해져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런 방식으로 대수롭지 않다 여겨지는 사소한 악과 거짓으로부터의 것을 부딪치더라도 대수롭지 않은 것이라 여기지 않고 오히려 중요하게 여기며 하나하나를 처리해 소화해나간다면, 점차 당신은 천국 쪽에 당신의 발을 디밀고 있다. 이러할 때 당신의 더 높은 수준의 마음들이 열리어져서 어떤 것이 부정직하고 불공정한 것인지를 뚜렷이 보게 된다; 그리고 그런 것들을 보았을 때, 단번에 그것들을 부수어버릴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모든 이가 인간의 자유 의지 때문에 획득할 수 있는 영적 상태 쪽으로 당신을 인도한다.

** 도서 구입 안내 **

아래 도서들의 대부분은 발행자, 역자가 출판의 모든 과정을 직접 완료한 책이므로 우선 많은 책이 쌓여 있지 않고 부족할 때마다 몇 십권씩 추가로 출판하고 있습니다. 또한 책의 단가는 여느 시중의 책의 단가와는 달리 순수 재료비만을 계상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여느 복사 비용보다 저렴할지 모릅니다. 따라서 이 출판사의 책은 팔릴 때마다 조금씩 적자를 볼 수밖에 없지만, 이 출판사의 바램은 이익 창출이 아니라 이 귀중한 지식을 공유하는 것, 더불어 이 귀중한 지식이 많은 분들의 손 안에, 책꽃이에 있어 필요시 언제나 읽기를 바램에서, 또한 이 지식의 습득은 여느 소설이나 수필집을 대하듯 하여서는 즉각 이해에 와닿지 않는 결점이 있기에, 어쩌면 시험 공부하듯 노력함이 곁들여야 하기에 전자책이나 전화기나 컴퓨터 다운에 앞서 종이책 구입을 권장하는 차원에서 출판 사업을 펴고 있습니다.

펴내는 자: 한광숙, 배제형
펴낸곳: 도서 출판 벽옥
등록: 제 2016-000002호
주소: 전남 화순군 화순읍 안양산로 31-5
전화: (한국) 010-4738-1711 (미국) 1-917-923-9825
홈페이지: baysidechurch.org
biblestudynoteblog.wordpress.com
역자 E-mail : jeandsook@gmail.com

각 도서와 가격

** 각 도서는 대체로 양장본으로 제본하려 노력하고 있습니다. 또한 위 인터넷 주소에서 책을 만나볼 수 있고 다운받아 직접 제본도 가능할 것입니다.

1. 번역 서적

말씀의 합리적 이해 (전 6권. 각 430여쪽) 값 각 권 12000원
비유 (796쪽) 값 25000원
신약 비유 해석 (516쪽) 값 15000원
구약 비유 해석 (394쪽) 값 15000원
이스라엘의 첫 세 왕 (576쪽) 값 15000원
마태복음 해석 (736쪽) 값 15000원
요한복음 해석 (640쪽) 값 15000원
요한계시록 해석 (513쪽) 값 15000원
바이블 스터디 노트 (전 4권, 각 권 평균 650여쪽) 값 각 권 15000원
성경 공과 (전 24권, 각 권 평균 234쪽) 값 각 권 5000원
레위기 해석 (526쪽) 값 15000원
영, 한글 구약 성경 (창세기, 출애굽기 340쪽) 값 5000원
영, 한글 신약 성경 (4 복음, 계시록 406쪽) 값 5000원
성경 상응 사전 (1082쪽) 값 25000원
헬렌 켈러의 신앙 간증 (126쪽) 값 5000원
죽음 그 이후 영들의 세계 그리고 천국과 지옥 (132쪽) 값 5000원
새 예루살렘 그리고 그곳의 교리 (100쪽) 값 5000원
천국의 비밀들 (전 12권 각 500여쪽) 값 각 권 20000원
창세기 요약 해석 (401쪽) 값 15000원
창세기 해석 (전 5권 각 550-630여쪽) 값 각 권 15000원
성경 연구 (전 6권 각 430-480여쪽) 값 각 권 15000원

2. 원서

선각자의 필적이 담긴 쉬밑의 라틴 성경 (900쪽) 값 25000원
알카나 세레스티아 (쟌 엘리엇 영역)
알카나 세레스티아 (쟌 클라우 영역, 쟌 폿스 수정) 값 각 권 20000원
* 이 외의 원서의 종이책 재출판도 준비 중에 있습니다.
* 위 엘리엇 영역본은 copyright이 있을 것 같아서 출판을 미루고 있는 바, 필요한 분은 인터넷 검색이 가능하므로 연락바랍니다.

사무엘상 15장 해석

8
사무엘상 제15장

사울이 아말렉을 쳐부수러 보내지다

신약성서가 지니는 두 번째 가는 중요한 축복이라면 그것은 구약성서를 올바르게 해석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 그리고 기독교라는 처방에 살아있는 특전의 두 번째 가는 것이라면 기독교 출발 이전에 있던 교회의 진정한 본성을 알 수 있게 해준다는 것이다. 그런데 유대교 처방과 기독교 처방의 차이점, 그리고 각 처방에 속해 있게 된 성경을 엄밀하게 구별하지 않음으로 해서 기독교는 유대인이 행했던 실제의 일을 채택하기도 하고 그 영을 흡수하기도 했다. 이스라엘 족들이 하느님의 선택된 백성이요, 그분의 총애를 받은 백성이라고 가정해버리면, 그 민족들이 했던 것은 전부는 아니다 해도 어느 정도까지는 하나님의 뜻과 일치한다고 생각되어 신성한 권위 아래 있다고 간주해버리면서 그들의 행동들은 하느님의 허가로 하느님의 뜻을 모방한 듯 여기고 만다. 어떤 이들은 가상하기를, 유대인의 성경은 유대교의 처방이 끝남과 더불어 그것도 중단되어야 하는바, 기독교를 위해서는 유대인이 말하는 성경은 어떤 권위도 없고 가치도 없다고 까지 잘라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지금 우리를 기쁘게 해주는 빛으로 비쳐본다면, 구, 신약은 큰 차이가 있다는 것, 그런데도 두 성경은 완전한 하모니를 이루고 있다는 것을 알게 해준다. 유대인의 성경과 기독교의 성경은 바깥쪽 형태에서는 폭넓게 다르나, 안쪽인 영적 의미에서는 완전하게 하나를 이루고 있다. 두 처방은 같은 게 없지만 그들은 서로 유사성을 지니고 있다. 유대교는 기독교와 대칭 되는 형으로 되어있다. 그래서 유대인에게 자연적인 것들은 기독교에서는 영적인 것이 되고 있다. 유대인에게 에집트는 그들의 세계였고, 사막을 횡단한 뒤의 가나안은 그들의 천국이었다. 번성하는 것이 그들의 행복이요, 장수하는 것은 그들에게 불멸에 해당되었다. 그들의 적이란 자기들의 일시적일 뿐인 세상적 성취를 가로막고 서는 이들이요, 그들의 전쟁이나 무기는 육욕인 것, 세상적인 것뿐이었다. 이런 그들 역사를 영적으로 통역해놓는다면, 그들 역사는 기독인의 체험을 언어로 묘사해놓은 것이다. 이런 방법으로 우리는 그들의 역사를 읽어야 한다. 그러면 우리는 그 역사 속에서 신성하게 훈육되는 어떤 것, 영적인 가르침을 보게 되리라 확신한다. 가나안의 일곱 나라를 멸절시키는 전쟁은 깊은 도덕적 원인을 가지고 있었다. 그 이유는 한 나라가 통째로 부패될 때 지상에서 제거되어야 마땅한 그 민족이 보존되고 복지를 되찾으려면 그 도덕적 결함의 제거는 꼭 필요하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이 교전한 나라들이 우리의 새로운 본성을 구성하는 선함과 진리의 원리에 상반되는 악하고 거짓된 원리를 표현한다고 생각하게 되면 유대인이 치른 전쟁에 어떤 영적인 교훈이 우리를 위해 담겨있게 된다. 유대인의 적대 국가들은 감각, 특별한 어떤 악이나 거짓원리를 표현하고 있다. 암몬족이나 불레셋 족이 표현하는 것들은 이미 앞 장에서 살핀바 있다. 이제 또 다른 악의 성격, 아주 유한한 것 중의 하나를 이제 살피고자 한다.
아말렉은 가나안 땅 경계선 주변에 거주하는 흉폭한 민족들이다. 이스라엘은 홍해를 건넌 뒤 그들로부터 처음 공격받았다. 이 때 그들은 이스라엘을 정면에서 공격하지 않고 이스라엘이 매우 목말라 허덕거리고 지쳐있는 기회를 틈타 공격을 감행했다. 그럼에도 우리가 기억해보아야 할 것은, 이스라엘이 심히 범죄 하였을 때 그들은 자기들이 위반한 악에 상응하는 속성을 지닌 국가들에 의해 처벌되어졌다는 것이다. 갈증으로 고통 받을 때 그들은 자기들과 함께 하시는 신성을 부정해버리는 정도까지 불평했다. 불평해대는 이스라엘과 그에 앙갚음하듯 공격하는 아말렉 사이에는 표현적 유사함이 있다. 선견자는 이스라엘의 세 왕을 설명하는 가운데 특별히 아말렉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해주고 있다. “어떤 종류의 인격이 아말렉이 표현하는 내면의 악에 근거를 두는지 살펴보는 것이 보다 쉬울 것이라고 본다. 내면의 악(interior evil)은 인간 안에 내향으로 감추어 놓인 것, 그 사람의 의지 안에 축적되어 있는 악, 그로부터 생각 안에도 있게 되는 악, 언어나 행동, 용모 같은 바깥쪽에서 전혀 추적되지 않는 악이다. 이와 같은 악 가운데 있는 사람은 갖가지 방법을 동원하는데, 특히 정직이나 정의, 이웃 같은 사랑의 가상(껍질)속에 그 악을 감추어 숨겨놓는다. 그러면서 계속 그는 악행만을 생각하고 가능하면 타인을 수단으로 그 악을 행하여 자신으로부터 악을 행하지 않았던 냥 한다. 그들은 악 자체를 변장시켜놓아 악처럼 보이지 않게 하고 있다. 이들 삶의 큰 기쁨은 어떤 음모를 꾸미는데 있고 계략도 은밀하게 감행한다. 이것을 우리는 내면의 악이라 부른다. 이 악 가운데 있는 이들은 마귀(genii)라 불리고, 저 세상에서 이것들은 영(spirit)이라 불리는 외면의 악과는 분리되어있다. 이 악귀(evil genii)는 사람 뒤쪽 즉 등쪽에 그들의 지옥을 가지고 있고 그 곳에는 다양한 동굴이 있다. 그러나 악령(evil spirit)은 인간 앞쪽 또는 옆쪽에 그들의 지옥을 가지고 있다. 큰 사람(grand man)측면에서 이 마귀들은 소뇌(cerebellum)의 영역에 소속되고 있고 또한 무의식 부분에 신경과 섬유질을 내보내는 척추 부분에도 있다. 더 주목해 보아야 하는 것은, 이 악에서 비롯되는 거짓은 악령들에게서 비롯되는 거짓과 같지 않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그 자체가 악이기 때문이다. 이 악 가운데 있는 이들은 진리들을 공격하지 않고 신앙의 선들을 공격한다. 그이유가 그들은 타락한 애착들을 수단으로 행동하여 선한 생각까지 뒤집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악들은 거의 인지할 수 없는 방법 안에 숨어있다. 이런 특성을 지녔으므로 그들의 지옥은 악령과 완전히 분리되어 거의 어떤 고통도 있지 않는다. 이렇게 되어있는 이유는 영적 교회의 사람들로부터 격리될 수 있게 하기 위해서이다. 만일 이 악이 그들 지옥에서 흘러나온다면 영적 교회의 사람들은 지독하게 썩어지고 마는데 그 이유는 이 악들이 영적 교회인의 양심에 비밀리 작용하기 때문이고, 타락한 애착들을 흥분시킴으로 양심을 뒤엎기 때문이다. 이 지옥적인 악귀는 인간을 공개적으로는 결코 공격 않는다. 더구나 인간이 그것에 저항할 경우도 절대 공격 않는다. 그러나 인간이 굴복하던가 양보 할 것 같은 지점에 다다른 것 같을 때 모습을 드러내어 그 인간을 완전히 무너지게 한다. 아말렉이 공격하는 모습이 이런 악귀의 공격 수법을 표현하고 있다. 민수기 14장 45절을 보면, 이스라엘 자손이 주님께 등을 돌리고 가나안 국가들에게 겁을 먹었을 때, ‘그 산에서 살던 아말렉 사람들과 가나안 사람들이 달려 내려와 호르마까지 쫓아오며 그들을 무찔렀다.’ 위 구절로부터서도 아말렉이 표현하는 이들의 성격은 명백해지리라고 보고, 아말렉에 내린 주님의 심판에서 그들과 항구적으로 싸워야한다고 왜 그러셨는지, 그들은 천국 아래서부터, 일찌감치 기억 속에서까지 삭제되어야 한다고 하셨는지를 납득하리라 본다.” 이상의 모습은 이스라엘이 르비딤에 도착하였을 때 섭리하시는 하느님, 함께 하시는 하느님을 부정하는 시험에 빠졌을 때 이들을 공격한 아말렉의 모습이다. 이와 같은 시험은 이 세상과 인간 만사에 하느님의 통치가 있음을 부정할 때만 공개적으로 드러난다. 이 악은 불신앙에 뿌리를 두고 있다. 너나나나 할 것 없이 우리들 속에 이 뿌리를 가지고 있다. 우리가 천상천하의 통치자 되시는 분이 하느님이심을 부정한다는 것을 생각만 해도 몸서리쳐진다고 말할지라도, 우리는 신성한 통치인 하느님의 섭리에 진정 의존하지 않고 있음을 보여주기 위해 느끼고 행동하는 경우가 많다. 이 방식이 기독인 이라고 고백하는 이들 사이에 이 악이 거점을 확보하는 형체이다. 이 형체는 하느님을 드러내놓고 부정하는 것보다 더 내향적이고 더 사기성이 강한 형체이다. 이것이 바로 아말렉이 표현한 내면의 악에 바탕을 둔 거짓 원리인 것이다. 르비딤에서 이스라엘 자손이 빠진 시험의 본성 역시 이러한데 뿌리를 두고 있다. 이 때 아말렉의 공격은 여호수아에 의해 격퇴되었다. 그런 다음 신성한 판단은 이렇게 지시하고 있다. 그리고 내가, 아무도 아말렉을 기억하는 사람이 없도록 하늘 아래에서 전멸시키겠다…야훼께서 대대로 아말렉과 싸워 주시리라”(출애굽기 17:14-16). 사울은 지금 이 구절을 실행하도록 위촉되고 있다. 사무엘은 먼저 그에게 상기시키기를 야훼께서 기름 부은 자라는 것, 그러므로 주님의 소리에 순종해야 한다고 했다. 그 다음 이렇게 이어진다. “만군의 야훼께서 하시는 말씀이오. ‘아말렉 사람들이 이스라엘에게 한 짓 즉, 에집트에서 올라오는 이스라엘을 공격한 그 일 때문에 나는 그들에게 벌을 내리기로 하였다. 그러니 너는 당장에 가서 아말렉을 치고 그 재산을 사정보지 말고 모조리 없애라. 남자와 여자, 아이와 젖먹이, 소 떼와 양 떼, 낙타와 나귀 할 것 없이 모조리 죽여야 한다’.” 사실 사울에게는 아말렉을 위와 같이 해치워야할 특별한 건수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위의 사건은 하느님의 기억 속에서 사백여 년 간 남아있던 죄악상들이다. 하느님이 기억하셨다는 말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그분은 과거와 미래 모두가 현재 일 뿐이므로 뭔가를 마음에 되불러 올 이유가 하나도 없다. 따라서 이 표현은 인간의 상태와 관련시켜 신성을 이해해야 한다. 주님이 기억하신다고 말하실 때의 경우란, 그분의 진리를 우리 기억에서 새삼 떠오르게 하실 때 사용된다. 지상에 계셨을 때 주님은 성령을 약속하셨다. 이 성령은 그분께서 제자들에게 말한 것은 무엇이든지 그들 기억에 모두 가져다주게 된다. 그러나 이 약속은 과거의 말들을 재 수집하게 해주시는 것뿐 아니라 이전의 상태를 재생산 하는 것까지 의미한다. 영적으로 기억함이란, 사실을 기억하는 게 아니라 원리를 기억하는 것이다. 그 이유는 내적 삶에 받아들여졌던 것만이 내적 기억 속에 새겨져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영적 으로 기억함이란 내향에 있는 것을 바깥쪽 삶에도 산출하려는 노력과 더불어 이전에 획득된 원리의 재생산밖에 더 다르게 있을 수 없다. 이와 같이 행동과 노력이 주님께서 과거 사막에서 아말렉이 했던 짓을 기억하신다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아말렉은 거의 반복적으로 이스라엘을 공격해왔고 격퇴되었다. 그러나 이제 명령은 그들을 참혹하게 파괴하라는 것이다. 이 파괴가 지금 시도되어지는 이유는 공격할 수 있는 도구가 마련되었기 때문이다. 왕은 선함에서 파생된 진리를 표현하는바, 이는 악에서 파생된 거짓에 정반대 된다. 완벽하게 극을 이루는 원리, 즉 극과 극이 대치하지 아니하면 상대쪽을 완벽하게 제압하지 못한다. 악과 거짓이 선함과 진리에 정반대 된다는 것을 기억나게 함으로 전투의 원인이 되는데 이는 반대되는 악과 거짓이 시험에 의해 흥분 될 때 발생된다. 그리하여 전투는 상대 쪽을 처절하게 파괴하도록 거행된다. 사울이 이러한 하느님의 위탁된 업무를 충실히 집행 못한 것은 사실이다. 그 이유는 신성으로부터의 진리(truth Divine)은 대과업에 합당할만한 자격을 못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신성한 의지를 표현한 하느님의 명령은 부분적이 되었긴 해도 일부 성취되었다. 이 명령을 미숙하게 처리한 탓에 사울은 자기 왕위를 잇지 못하게 되었다 할지라도 그가 성취해야 했던 것은 다윗의 통치와 권력에 의해 더 쉽게 더 확실하게 아말렉의 완전한 정복을 이루게 된다. 이제 사울의 행동사항들에 시선을 모아 보자.
사울이 사무엘을 통해 주님의 메시지를 받고 그는 총동원령을 내려 델라임에서 점호해보니 보병이 이십만 이었고 유다 측에서도 일만이 가담했다. 진리와 선함에 속한 원리들을 다 모아 신성한 질서의 법칙에 의거 정렬해지는 것이 바로 이스라엘과 유다 사람들이요, 델라임에서 수를 세는 모습이다. 지역 이름 델라임은 성경에서 두 번 언급될 뿐인데, 오늘 본문과 이사야 40장 11절에서이다. 이 구절에 연결되어 그 단어가 지닌 의미는 이 본문의 영적 의미에 대해 좋은 착상을 주고 있다. 단어 자체는 아주 어린 양, 새끼 양(young lamb)이라는 뜻이다. 이 단어는 주님의 강림에 관한 아름다운 예언과 연결되어 언급되고 있다. “너, 시온아. 높은 산에 올라 기쁜 소식을 전하여라. 두려워 말고 소리를 질러라. 유대의 모든 도시에 알려라. 너희의 하느님께서 저기 오신다. 주 야훼께서 저기 권능을 떨치시며 오신다. 팔을 휘둘러 정복하시고 승리하는 보람으로 찾은 백성을 데리고 오신다. 목자처럼 당신의 양떼에게 풀을 뜯기시며, 새끼 양(lamb)들을 두 팔로 안아 가슴에 품으시고 젖먹이 딸린 어미 양을 곱게 몰고 오신다.”(40:9-11) 여호와께서 권능을 가지고 오시고 그분의 인성인 팔을 휘둘러 통치하신다. 그분은 원수들 가운데서도 왕권을 행사하실 정도로 강력한 사람으로 오시지만 (시편110:2) 한편 그분은 목자처럼 오시어 새끼 양을 두 팔로 안아 가슴에 품어주시기도 한다. 이와 같은 모습은 영적 싸움에 종사하고 사랑의 영에 감화 받기도 한다. 이 사람들은 델라임에 자기 힘을 모아 계량해야 한다. 델라임은 유다의 땅인바, 그 지역은 지혜의 순진을 상징하고 있다.
사울이 자기 군인들과 함께 아말렉 성이 있는 골짜기에 이르러 먼저 이들과 섞여 사는 켄족들에게 전갈을 보내어 그들에게서 떨어져 나와 이스라엘의 옛 적을 칠 때 불상사를 입지 않도록 했다. 이렇게 켄족이 다치지 않도록 의도한 이유는 과거 이스라엘이 에집트에서 나올 때 이스라엘에게 베푼 친절 때문이었다. 켄족은 미디안 족과 같은 것으로 이해될 수 있는데 모세의 장인 이드로가 미디안의 제사장 이기도 했다(판관기 1:16). 그리고 그는 광야에서 모세를 만나러 왔었다(출애굽기 18:1). 이스라엘이 사막에 진입한 후 아말렉은 그들을 공격한 첫 민족이 된 반면, 켄족은 이스라엘 편을 든 첫 민족이기도 하다. 그리고 우리는 여기에서 아말렉과의 전투에 즉각 뒤따라 켄족의 언급을 발견하게 된다. 그러나 사울의 친절한 연락으로 켄족은 아말렉의 파멸에서 유보되어졌다. 위와 비슷하게 두 민족이 붙어있는 모습이 판관 기드온 시대에서도 언급되고 있다. “미디안 사람과 아말렉 사람과 모든 동방의 백성들이 메뚜기 떼처럼 거기 평지를 덮고 있었다”(7:12). 이렇게 많은 군대들이 개처럼 물을 핥아먹은(튕겨 먹은, lapped) 삼 백명의 군대에 의해 무찔러졌다는 것은, 악은 병치(apposition)상황에서 뿐 아니라 그 반대(opposition)상황에서도 극복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모습이다. 아말렉이란 이름 자체는 개처럼 핥다(lick up)라는 뜻이다. 켄족을 미디안 족과 비슷하게 간주해본다면, 선한 자연적 기질을 지녔으나 그 자체로서는 진리에 관심이 없는 이들을 표현한다. 그러면 왜 이들이 날카롭고 뒤집혀진 이해성을 가진 아말렉 사이에서 발견되고 있을까? 그 이유가 단순히 선한 것은 교묘한 추론에 쉽게 빨려들고, 계획적인 설득에 쉽게 녹아들고 마는 약함이 있기 때문이다. 단순한(멍청한) 선함은 선보다는 악에 더 쉽사리 끌려갈 수 있는 성향이다. 그 이유는 악은 비둘기의 순진(해가 없음)은 없고 오로지 뱀의 신중함 만을 지녔기 때문이다. 그래서 악은 그 사용함에 있어 나쁜 짓을 하는 것이 예사로 되어 있어 “설마 인간이 그럴 리가,” 라고 말하는 단순한 선함의 기대를 쉽게 유혹해내지만, 선은 재촉하여 뭔가를 하도록 독촉하려 들기보다는 뭔가를 확신시키려는 쪽에서 더 강하게 작용할 뿐이다. 위 두 민족이 거듭나고 있는 마음 안에서 표현하는 원리까지 생각해보자. 마음 속에 위 두 원리들이 서로 모여있는 모든 가능한 경우에서도 주님께서는 이 두 원리가 뒤섞이지 않게 설비해 놓으시어 장차 싸움이 있을 경우 선이 악과 더불어 멸해지는 일이 없게 배려하신다. 그러므로 마음은 그 둘을 식별할 수 있게 훈육된다. 켄족이 떨어져 나오자 사울은 아말렉을 공략해서 “하윌라에서 시작하여 에집트 동쪽에 있는 수르까지 따라가며 쳐죽였다.” 수르 광야는 과거 하갈이 자기 여주인의 얼굴을 피해 달아날 때 고생한 장소이다. 지금 아말렉이 거주하는 이 구역은 창세기 25장 18절에서 언급되고 있다. 이 절을 읽어보면 이 구역은 하갈의 아들 이스마엘과 그의 자손이 소유했었던 곳 임을 알게 된다. “이스마엘 사람들은 하윌라에서 수르에 이르는 지방에 퍼져 살았다. 수르는 에집트 동쪽 아시리아로 가는 도중에 있다.” 이 지역은 과학과 추론 사이에 놓이는 표현적 특성을 말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과학, 지식, 추론은 등급별 시리즈를 형성한다. 과학은 기억 속에, 지식은 생활 속에, 추론은 이해성 속에 각기 존재한다. 과학과 추론 사이에 놓인 것이 지식이다. 달리 말하면, 기억과 이해성 사이에 놓인 것이 생각이다. 하윌라와 수르는 에집트와 아시리아와 비슷한 의미를 가지고 있으나 차이점은 에집트와 아시리아는 넓은 측면인 반면 하윌라와 수르는 좁은 측면 즉, 세부 측면에 한정된다. 아말렉을 하윌라에서 수르까지 쫒아가 쳐부순다는 것은 내면의 악에 바탕을 둔 거짓 위에 진정한 진리의 판결이 집행될 때, 과학이 기초를 둔 기억에서부터 추론이 자리를 두고 있는 이해성에까지 이르러 판결은 집행된다는 말이다.
넓은 측면에서 볼 때 아말렉이 쳐 부셔지긴 했지만 완전한 하느님의 목적은 덜 성취된 채 남아있다. “사울이 거느리는 이스라엘 군은 아각 뿐 아니라 양과 소 중에서도 좋은 놈, 기름진 짐승과 새끼 양들과 그밖에 모든 탐스러운 것들을 없애버리기가 아까워 그대로 살려두고 쓸모 없고 하찮은 것들만 없애버렸다.” 싹 쓸어 없애야 하는데 뭔가를 남겨둘 때, 사울이 불순종이라는 죄를 짓게 될 것은 생각해 볼 여지도 없다. 그럼에도 그 죄는 그를 심각하게 벌할 만큼 확대되어 부각되고 있지 않은 듯 보여지고 있다. 이럴 경우 죄는 행동의 본성에만 반드시 존재하는 게 아니라 명령의 위반에 있다고 우리가 인정한다면 그 죄는 행동이 무엇이든 간에 똑같게 된다. 그러나 이 원리는 건전한 것이라고 생각되지 않는다. 이 원리는 말씀의 글자에 국한된 것만을 받쳐 줄 수는 있다. 예를 들면 아담이 금지된 과일을 먹은 것을 생각해보면, 사실 그에게는 불순종이라는 것 외에 악은 없는 듯 나타난다. 그러나 이런 종류의 모든 예들은 글자가 표현하는 것 보다 더 깊은 의미가 있다. 신성한 정의는 너무나 순수해서 해를 주지도 않는 본성 속에 있지도 않은 것을 죄 있는 행동으로 만들지 못한다. 만일 사울의 죄가 영원한 결과를 수반하는 영적 행동을 표현하지 않고 있다면 그의 죄는 그렇게 심각하게 견책되고 처벌되지도 않았을 것이다. 아각을 살려둔 채 잡아 놓고, 기름진 가축 떼를 살려둔 것, 이런 것이 그 소유자의 도덕적 부패나 죄와 관계되지 않은 이상 탐욕에서 진행되지 않으면 그 자체 악에 속한 성격은 아무 것도 없다. 따라서 파괴하라는 명령 역시 아예 없었을는지 모른다. 그러나 사울에게 주님이 내리신 행동 강령은 미래의 모든 세대에 있게 될 교회 소속인들에 대한 영적 교훈을 가르치고 또 그들로 하여금 영적 진리를 탐사할 수 있게 하시려는 목적에서 있어진 명령이다. 몰살시키라고 내린 명령에 포함된 진리, 가르치시고자 의도된 교훈들을 살펴보기로 하자. 우선 우리는 사울의 불순종에서 따른 결과를 곰곰이 생각해 보아야 한다. “이 일이 있은 후 야훼의 말씀이 사울에게 내렸다. ‘나는 사울을 왕으로 삼은 것을 후회한다. 그가 나에게 등을 돌렸고 내가 시키는 대로 하지 않았다.’” 주님이 후회하신다는 것, 그분이 사울을 왕으로 세우신 것을 후회하신다는 말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될까? 인간이 후회한다면 그것은 견해가 바뀐다던가 목적이 변하는 것, 그것이 이해성에 속하든 의지에 속하든 어느 쪽이 변한다는 것을 함축하는 말이다. 이해나 의지가 바뀌는 것은 하느님께 대한 후회(회개)로 성경에 두루 있다. 이 변화들은 불완전한 존재, 죄 있는 존재에게만 있어지는 후회일 뿐 하느님에게는 하등 해당사항이 없는 항목이다. 그런데 사무엘은 이 사항을 명백해지도록 주님께서는 사울로부터 왕국을 찢어내시어 동족 가운데서 그대보다 훌륭한 사람을 주신다는 것을 선포하고 있다. “이스라엘을 비추시는 이는 빈말을 하시거나 변심하시는 분이 아니오.. 그는 사람처럼 변덕을 부리는 분이 아니시오..” 시작에서 끝을 이미 보시는 그분은 결코 실수를 만드시지 않는다. 그러므로 후회할 건수가 전혀 없으신 분이시다. 하느님께서는 후회할 수도 없는 분이라도 해도 성경에서 후회의 탓을 그분께 돌리는 듯 기록되어 있는 구절에도 우리를 가르치는 의미는 가득 차 있다. 그분을 위협해대는 악에 대해 주님이 후회하신다고 말해 질 경우, 이 후회는 자비를 의미한다. 그러나 그분이 행하신 것들, 예를 들면 인간을 만드신 것, 사울을 왕으로 세우신 일들을 후회하신다고 말해질 경우, 거기에는 자비 외에도 어떤 의미를 더 포함하고 있다. 가장 깊은 측면, 천적 의미에서 말씀 전체는 육을 입으신 하느님으로서의 주님을 취급하고 있다. 이 사항은 앞에서 일부 살핀바 있듯이, 사울의 역사는 그분이 입으신 인성이 신성한 진리(Divine truth)로 만드시기 전에 있던 신성으로부터의 진리(truth Divine)으로서의 주님을 표현하고 있다. 여호와께서는 그분이 인성을 입으셨으되 타락한 본성에 든 인간 공통적인 약한 부분까지 입으셨는데 대해 후회할 수 없으셨다. 그럼에도 인간 후회와 아주 비슷한 어떤 것이 일어나는 항목들이 그분의 어린 시절 상태나 경험 안에 있었다. 인간으로서의 주님은 여느 사람들처럼 죄의 상태로부터 의로운 상태로 건너가지 않았고 따라서 회개(후회)가 있으신 적도 결코 없었다. 그러나 회개와 거의 닮은 인간 상태나 그 상태의 변화를 통과하셨다. 참으로 주님은 그분이 영화하시는 과정에서 통상적 인간이 거듭나는 과정의 모든 단계들을 거치셨다. 인간은 자연적, 영적 양면에서 상태의 변화를 거친다. 그분도 유아, 어린 시절, 젊은이 시절, 성인시절 이라는 상태들을 통과하셨다. 더욱이 그분은 삶의 자연적 상태로부터 영적 상태로, 영적 상태로부터 천적 상태에 이르는 더 큰 과정들을 통과하셨다. 게다가 주님은 하느님과 인간 모두로부터 사랑을 받으면서 날로 지혜와 총명을 더 하셨다. 그분은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똑같이 자라셨다. 그래서 신성한 자연적 존재로부터 신성한 영적 존재와 천적 존재가 되셨다. 통상적으로 인간은 자연적, 영적 삶의 낮은 상태에서 더 높은 상태로 건너가면서 자기가 털고 일어선 그 자리(수준)에서 자기의 불완전했던 것을 보게 된다. 그래서 인간은 시험이나 시련 속에 있는 동안 그가 체험하는 것은 고작 그 시련이나 시험의 피상적 본성만을 알 수 있을 뿐이다. 거듭나는 삶의 초기 상태에서 있게 되는 시험은 악의 더 낮은 깊이까지 도달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더 낮은 깊음은 초기 상태에 있는 당사자에게는 느껴지거나 눈치 채이지 않고 더욱이 흥분시킨 악의 진정한 속성을 이해한다는 것은 더욱 불가능하다. 한마디로 그 사람에게 있어서의 악은 일반적인 것일 뿐 세부적인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따라서 그에게는 자신이 생각한 것에 반대되는 것이 일반적 사항에 해당될는지 모른다. 사울은 아말렉 사람들을 다 죽였지만 왕 아각은 살려져 있었고 좋게 보이는 것도 그대로 보존했었다. 이런 것들과 상응되는 상태를 주님은 통과하시면서 그것에 상응하는 경험을 가지셨다. 이런 사항들이 그분의 모형을 그려내는 이들의 행동에 나타나 있는 것이다. 특별히 사울은 이런 모형들 중 더 부각된 모형이라 할 수 있다. 사울과 그의 군인들의 죄들은 그분의 시험을 표현하고 있다. 여느 사람들과 달리 그분은 악의 권세나 악과의 싸움에서 결코 실패하지 않으셨다. 그러나 그분의 초기 삶에 있던 시험이 그분을 공격하는 악의 가장 깊음에까지 접근되셨던 것은 아니다. 주님의 영화하심과 인간의 거듭남은 서로 닮음 꼴을 형성한다는 내용을 취급한 선견자의 저서에서 위 사항을 잘 알게 해 준다. “모든 사람은 지식으로 자기가 획득한 선과 진리에 의해 우선적으로 영적 전투에서 버텨간다. 그리고 그 지식으로부터 그는 악과 거짓들을 판단해 간다. 모든 사람들, 그가 영적 전투에 처음 임하게 될 때 자기를 버티게 해준 선과 진리들이 자기 것, 즉 그것들이 제 잘난데서 비롯되었다고 상상한다. 따라서 그는 자기가 저항해낸 힘이 자기에게 근원 되었다고 생각한다. 인간이 거듭나기 전, 선과 진리는 자신으로부터 있는 게 아니라 모든 선함과 진리는 주님으로부터임을 알고 인정하고 믿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자신의 힘으로는 어떤 악이나 거짓에 저항할 수 없다는 것은 어느 누구도 모른다. 악령이 악과 거짓을 흥분시키고 주입한다는 것, 더구나 악령을 수단으로 자신이 지옥과 교통하고 있다는 것, 지옥은 전력을 다해 자신을 누른다는 것, 마치 파도에 부딪치는 모든 것에 파도가 밀어붙이는 힘과도 같은 악에 저항할 수 있는 힘이 자신에게는 지독하게도 없다는 것을 아무도 모르고 있다. 어찌됐든 거듭나기 이전일 경우 그 사람은 자신의 능력으로 싸우고 있다고 상상할 수밖에 없고 또 그렇게 상상하도록 허용되지만 그 후에 차츰 그는 계발되어진다. 선함과 진리가 자신으로부터 발생되었다고 생각하고, 저항하는 힘 역시 자신의 힘이라고 여기면서 선과 진리를 수단으로 악과 거짓에 맞서는 상태에 있을 경우, 비록 그에게서 선과 진리가 나타나 보인다고 해도 진정한 선과 진리는 아니다. 그 이유는 그의 이기심이 그들 안에 있고 그는 승리의 공적을 자신에게 돌리고, 주님만이 싸워 정복해 주실 수 있는 악과 거짓에 대한 싸움을 자기가 똑똑해서 그런 줄로 떠벌린다. 이런 경우에 있는 진리는 시험에 의해 거듭나는 이들에게만 알 수 있는 것들이다. 주님의 아주 어린 시절 그분이 가장 비통한 악과 거짓의 싸움에 소개되었을 때 그분도 위와 같은 상상을 마음에 품을 수밖에 더 다른 도리가 없으셨다. 뿐만 아니라 그분의 인간성은 계속적인 전투에 소개되고 그분의 신성은 계속 승리해 가서 서로 하나되는 것이 신성한 질서이기 때문에 선과 진리를 수단으로 그분 역시 외적 인간에 소속되어 있는 악이나 거짓과 싸워 가셨던 것이다. 이런 선과 진리들이 모두 신성은 아닌 까닭에 가상적인 선과 진리들이라고 불린다. 그분의 신성 측면이 정복 할 수 있도록 인성 측면에 소개되었던 것이다. 한마디로, 그분의 첫 전투에서 가지고 싸우셨던 선과 진리들은 어머니 쪽에서 받은 유전적인 것의 얼마로 얼룩져 있는 한 그것들은 신성은 아니다. 그러나 점차로 악과 거짓이 정복되어감과 동시에 그것들은 완전해져 신성을 만들었던 것이다. 가상의 선과 진리들을 신성 같이 착각되는 선과 진리들일 뿐 신성한 선과 진리는 아니다. 다시 말해 그것들은 신성으로부터 존재할 뿐 그 자체 스스로 신성은 아니라는 말이다. 이것들은 천사나 인간의 마음 안에 존재하는 것과 같은 형태로서 유한한 자질 안에 받아들여짐으로 유한한 그대로 이다. 이와 같은 것이 주님의 초기 싸움에서 어둠에 맞서졌을 때 가졌던 선과 진리들이고 이를 신성한 진리로 만드시는 준비물로 삼으셨는 바, 이를 수단으로 그분은 그분의 인성을 신성으로부터의 진리로 만드셨다. 이 유한한 것, 즉 눈에 보이게는 선과 진리 같은 것은 어머니 쪽에서 얼마 정도가 유전되어 얼룩져 있었는바, 이것이 사울로 표현되어 있고 우리는 그의 바둑판 같은 역사를 통해 믿기 어려울 정도인 현실 자체를 봄으로서 주님의 내적 삶과 경험 중 초기 부분의 역사를 짐작할 수 있게된다. 주님의 초기 시절 어둠의 권세와의 싸움은 그분의 인간적 어머니로부터 상속받은 불완전을 벗고 그분의 신성한 아버지로부터 상속받은 무한한 완전을 입으셨을 때와 비교한다면 보다 덜 완전하다고 할 수 있다. 이제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본문에서 왜 사울이 아말렉과의 싸움에서 백성은 죽였는데 왕은 살려주었는지, 왜 하찮은 것은 다 없애면서 좋은 것은 아껴두었는지에 대한 이유를 가늠하리라 본다. 악과 거짓의 넓은 측면의 원리들, 백성들은 파괴되었지만, 왕 같은 통치하는 원리는 아직 극복되지 못하고 있다. 시험과 승리가 결국 악의 뿌리 까지 뽑는 마지막 까지 달성하는 것은 이상형일 뿐 아직은 그 뿌리에 접근도 못하고 있다. 내적 인간에 있는 것, 본문의 하찮은 것들, 눈에 보이는 악과 거짓은 무엇이든지 다 없애버렸지만 선하고 진정한 듯 눈에 보이는 것은 보존되었던 것이다. 이제 더 살펴볼 것은, 사울을 왕으로 세우신 데 대해 후회하신 것, 한 걸음 더 나아가 이를 사울이 표현한 그분에 관련하여 생각해 보는 것이다. 후회는 어느 경우라 해도 신성한 마음을 바꾼다는 것을 의미치 않는다. 그러나 이는 모든 경우에서 주님의 신성과 인간본성 사이에 하모니가 있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본문에서도 주님의 신성과 인성 사이에 하모니가 있기를 원하심을 표현하는 것이다. 절대적인 것과 가상적인 것 사이에 있는 선과 진리는 비록 주님 안에 있다해도 그것은 하느님과 인간이었을 뿐 아직 하느님-인간(God-man)은 아니었다. 사울을 왕으로 세운데 후회하시는 신성한 존재란, 연약한 인간성을 입지 않았던 것이 더 나을 뻔 했지 않았을까 라던가, 약한 인간성 속의 불완전함이 악의 권세에 맞서 그분의 초기 싸움부터 명백히 드러나야만 하신데 대한 후회 같은 것이 아니라 인간 속의 불완전함은 신성한 완전함과 도저히 조화되지 않는다는 것, 따라서 그것은 반드시 제거되어야만 한다는 것, 달리 말해 본다면, 신성으로부터의 진리(truth Divine)는 영원할 수 없고 단지 주님의 인성 앞에서 일시적으로 통치하는 원리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그럼에도 어머니 쪽의 인성에 있는 이기심은 통상적 인간 존재 같이 어린 예수 안에서, 즉 그분 속의 유전적 악들이 적극적으로 일하기 시작할 때 그 자체는 명백해지기 시작했다. 이는 정신 발달의 과정 중에 흥분시켜주는 매체에 의해 깨어날 때까지 아담의 모든 아이들의 가슴 안에서 휴면 상태에 있다. 그런고로 해서 주님이 사울을 선택하시고 후회하시는 데에는 불일치 같은 게 우리에게 비쳐질 수밖에 없다. 사울이 왕이 되는 초기에는 그에게 없었는 듯 보인 악한 자질들이 드러나기 전 까지 에서는 그를 왕으로 세우신데 대해 주님이 후회하신 것은 아니었다. 이를 풀어 말하면, 유전적 악이 주님의 어머니 쪽 인성 안에서 그 자체로 전개될 때까지 신성과 인간 사이의 대비되는 사항들은 신성한 존재가 후회하심으로 표현되는 실제가 지각되는 것, 그 자체는 드러내어지지 않았었다.
“주님의 말씀이 사무엘에게 내렸다. ‘나는 사울을 왕으로 삼은 것을 후회한다. 그가 나에게 등을 돌렸고 내가 시키는 대로 하지 않았다.’ 사무엘은 애가 타서 밤새도록 야훼께 부르짖었다.” 주님의 초기 상태와 경험에 관해 선견자의 저서에서 살펴보면 우리가 그분을 상상해보는데 큰 도움이 된다. 그분은 선과 진리를 수단으로 악과 거짓에 대항하는 전투를 수행하셨고, 이 수행의 결과로 나오는 능력으로 그분의 도구인 선과 진리들은 그분 자신의 것이 되어 외적 인간 속에 있었다. 이제 본문은 내적 인간 쪽으로 향하면서 외적 인간의 조건을 감지하게 해주고 있다. 그 결과는 내적 비통함, 그런고로 신성 자체와 더욱 가까운 하나를 이루어야 한다는 더욱 강한 바람이 오고 있다. 복음서에서 우리가 읽는바, 주님께서는 산에 오르시어 하느님께 밤새 기도하셨다. 사람의 아들을 수단으로 경험되는 정신적 고난의 어두운 상태가 본문에서 사무엘이 애가 타서 밤새 울부짖는 것으로 비쳐지고 있다. 이와 상응되는 주님의 말씀 “마음은 간절하나 몸이 말을 듣지 않는구나.” 이 내적 담화는 더 간절한 기도로 더 강화되어 외적인 것에도 가져다 놓게 되었다. 그러므로 사무엘이 사울을 만나러 일찍 일어났다는 것은 새로운 상태라는 새벽에 내적 인간에 전달된 진리는 바깥쪽에도 역시 전달되고 있다. 그래서 “누가 그에게 이런 말을 전해주었다. ‘사울 왕은 오는 길에 가르멜에다 자기의 승전비를 세워놓고 그 곳을 떠나 길갈로 내려갔읍니다.’” 본문의 가르멜은 그 이름 자체에서 파생되는 열매 풍성함이나 아름다움을 말해주는 이름은 아니다, 산으로서의 가르멜 이라기 보다는 성읍으로서의 가르멜로 참작하여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따라서 그 뜻은 이해성에 있는 원리는 의지에 있는 원리와 같은 것을 가진다는 것이 되고 자연히 내적인 선과 진리에 관한 교리를 뜻한다. 사울이 승전비를 가르멜에다 세운 것은 아말렉과의 싸움에 관한 것이었다. 이와 비슷한 모습이 사무엘하 18장 18절에도 있다. “그런데 압살롬은 살아 있을 때 자기 이름을 이어 갈 아들이 없다고 해서 왕의 계곡에 돌기둥을 세운 일이 있었다. 그는 그 돌기둥을 자기 이름을 따서 불렀는데 그것을 오늘날까지도 압살롬의 비석이라 부른다.” 사울의 상태나 그가 표현하는 것은 승리로 자기를 추켜세우는 어떤 것에 관한 생각을 지지하는 모습이다. 사울은 가르멜을 떠나 길갈로 내려갔다. 사무엘은 아말렉의 수모를 “벗기기”위해 그의 뒤를 따라가고 있다.
위의 성경 줄거리를 가장 깊은 의미, 즉 인성 가운데 계신 주님에 관련하여 생각해보자. 그러면 우리 자신에 관련되는 내적 의미, 그분의 신성화 하심의 형상인 거듭남이라는 주제를 좀 더 실감 있게 알게 되고, 그분이 연약한 인간 본성, 타락된 인간 본성을 입으신 목적은 인간이 고통 받고 겪게 되는 것을 거쳐가심으로 그분이 이룩하시는 신성으로 만들어 가심에 우리도 참가되도록 하시기 위함이었음을 더 확실히 알게 된다. 말씀 안에 담긴 가장 깊은 의미를 관조 하게 되면 더 심오한 가르침과 영향을 받을 것은 두 말할 여지가 없다. 육을 입으신 상태에서 주님이 행하신 위대하고 자비로운 일들 하나하나는 우리 자신을 위한 원형이요. 근원임이 틀림없다. 그러나 우리가 그 경지에 다가가거나 그 안에 머물기에는 너무 멀고 원대하다. 인간 거듭남의 거울 안에 비쳐지는 모습 같이 라도 주님의 신성화 하심을 관조해간다면 그 정도 만에서도 우리에겐 유익하고 충분해지리라고 본다.
“사무엘이 사울을 찾아 만나자 사울은 이렇게 말했다. ‘야훼께 복을 받으십시요. 저는 야훼께서 시킨신대로 다 하였읍니다.’ 하며 인사를 하였다. 사무엘이 ‘양이 우는 소리가 들리는데 어찌된 일이오? 또 소 우는 소리도 들리는데 어찌된 일이오?’ 하고 물었다. 사울이 ‘군인들이 아말렉에서 빼앗아 온 것입니다. 양떼, 소떼 중에서도 좋은 놈을 살려두었다가 선생께서 모시는 야훼 하느님께 잡아 바치려고 끌어 온 것입니다. 그밖의 것은 모조리 없애 버렸읍니다.” 사울의 즉각적인 응답에서 보여지듯 자기가 주님께 전적으로 순종치 않았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있다. 그럼에도 그는 자기가 주님의 명령을 잘 이해했다는 것이 저절로 보증되도록 사무엘을 만나자 야훼께 복을 받으시라는 말과 자기 행동의 결과를 결합시키고 있다. 사무엘이 묻는 말, 양이나 소가 우는 소리는 어찌된 것이오 라는 질문에 자기에게는 책임이 없도록 교묘하게 대답하고 있는바, 빼앗아 온 것은 군인들의 짓이고 모조리 없애라는 명령의 말에는 자기를 포함시키고 있다. 자연적 수준의 인간이 댓가를 얻어내느라 열심이듯, 사울은 책임을 피하려고 분주하고 있다. 그가 선에 대한 공적이 자기에게 있다고 주장하는 만큼 악에 대해서는 책임지기를 거절하고 있다. 이런 모습에도 영적 진리가 있어 우리를 가르친다. 거듭나는 삶의 초기 수준에서 자연적 마음은 공적과 책임을 알면서도 알지 못하고 있다. 다시 말해 피상적으로 알 뿐 실제적으로는 모른다는 말이다. 종교적 가르침 중 가장 쉽고 가장 먼저 있게 되는 것 중 하나는 하느님은 만물의 창조자 이신 바 자신의 선함을 자기 공로로 돌릴 수 없다는 것, 우리가 자유로운 가운데 악을 행할 경우 그 죄에 대해 변명할 여지가 없다는 것, 그럼에도 자신의 미덕은 자랑하려 들고 악덕에 부끄러워 할 줄 모른다는 것 등등이다. 이 주제에는 가장 중요하고 가장 실용적인 교회의 교리가 있다. 만일 모든 선을 천국으로부터, 모든 악은 지옥으로부터 온다고 우리가 믿고 있다면, 우리는 선을 자기 것 삼지도 않아야 하고 악에 대해 죄의식도 없어야 한다. 선이 자기 것이라고 간주함으로 해서 우리는 자신 속의 선이 자기 것이라고 주장하게 되고, 악이 자기 것이라고 간주함으로 해서 우리는 악을 정당화시키려들게 된다. 그러므로 해서 그 속에서 발생되는 죄과는 거절된다. 이런 상태 속에 있는 자연적 마음을 사울이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영적 마음을 통해 주님의 빛이 들어 올 때 이런 상태는 드러나져 이런 상태가 어떠한 것들인지 자연적 마음 자체가 밝혀진다. 사울이 사무엘에게 변명을 늘어놓자, 사무엘은 지난 밤 야훼께서 내리신 말씀을 전한다. “그대는 본래 자신을 하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했었지만 야훼께서 그대를 기름 부어 이스라엘 위에 왕으로 세우시고 이스라엘 지파의 우두머리로 삼으셨소…” 거듭나는 삶의 초기 과정에 있는 마음은 의지가 이해성의 방향 아래 조절되게 하려드는 것이다. 이 의미가 위의 구절 “사울은 본래 하찮은 사람” 이라는 것에 담겨있다. 그런 다음 사무엘은 주님의 명령을 받은 사울임을 그에게 상기시켜주고 그가 얼마나 불완전하게 임무를 마쳤는지 꼬집고 있었다. 그런데도 사울은 여전히 주님의 명령에 잘 순종해서 주님이 시킨 대로 다 수행했다고 뻐기면서 아말렉왕 아각만 사로잡고 나머지는 다 파괴했다고 우긴다. 단지 군인들이 길갈에서 주님께 바치기 위해 양떼 소떼 중 좋은 놈만 남겼다고 핑계 대고 있었다. 이에 대해 사무엘은 우리에게 기억되는 다음의 말을 해주고 있다. “야훼께서, 당신의 말씀을 따르는 것보다 번제나 친교제 바치는 것을 더 기뻐하실 것 같소? 순종하는 것이 제사드리는 것보다 낫고, 그분의 말씀을 명심하는 것이 염소의 기름보다 낫소.” 예배는 우리가 하나님께 빚지고 있는 의무 중의 하나이다. 그러나 그 의무는 목적에 대한 수단일 뿐이다. 하느님께 드리는 모든 예배의 목적은 우리가 하느님의 뜻을 더욱 잘 수행하기 위해 힘을 더 얻으려는데 있다. 하느님은 자비를 요구하시지 제물이 아니다. 그리고 번제를 바치는 것보다 더 요구하시는 것은 그분에 대한 지식이다. 정규 축제에 관한 율법은 정신적인 율법을 위하여 주어져 있는 것이다. 더욱이 구약 시대의 것보다 신약 시대에 주어진 예배는 정신적 법에 관한 의미를 수행하는데 더 도움을 주고 있다. 예배 속에서 주님을 섬기는 것은 유일한 일임은 틀림없지만 순종이 제사보다, 그분께 경청하는 것이 염소의 기름보다 더 나음을 우리는 잊지 않아야 한다.
만일 순수하고 거룩한 상태의 예배가 순수하고 거룩한 삶을 보조해 주는 두 번째 것이라고 한다면, 하느님의 명령을 위반한 것에 기초한 예배에 대해서는 뭐라고 말해야 될까? 때로 하느님의 뜻을 따르지 않은 것을 예배드림으로 때움질 할 수 있을까? 뉘우침이 심정 속에 존재하면서 기도가 입술에 담겨져야 순서가 맞는다. 그 이유는 심정 속에 든 것이 입으로 말해지기 때문이다. 바쳐지는 제물 자체도 순수해야 한다. 율법 아래의 제물들은 흠 없는 것만을 요구하고 있다. 그 이유는 제단 위에 바쳐지는 동물들은 인간 마음 속의 선한 애착들을 표현했기 때문이다. 이런 제물들은 세상적인 것, 육적인 것으로 얼룩지지 않은 상태에서 하느님께 바쳐져야 할 것이다. 아말렉의 양과 소들은 순수하고 순진한 애착들을 표현할 수 없는 동물들이다. 그 동물 자체만을 두고 생각한다면 얼핏 보기에는 흠이 없는 듯 여겨질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것들의 소유주들은 이미 도덕적인 부패 속에 있어 왔다. 따라서 소유주와 그들의 동물 모두는 완전히 파괴했었어야만 했다. 어떻게 그것들이 주님께 제물로 바쳐질 수 있단 말인가? 탐욕으로 물든 옛 사람은 반드시 십자가형에 처해져야 한다. 새 애정의 새 사랑만이 주님께 바쳐지는 제물이 될 수 있다. 이것들은 영적 삶의 최말단에 있어야 할 조건이요, 영적 싸움에 있어야 할 두 개의 큰 목표물이다. 이것들은 주님 자신의 지상 삶에서의 목표물이기도 했다. 그분은 옛 사람, 마리아로부터 상속받은 연약한 인간성을 십자가에 처해지게 하시어 신성으로부터 오는 인성, 새 사람을 산 제물로 바치셨던 것이다. 이와같은 완전한 신성화 하심, 이와 상응되는 인간의 완전한 거듭남이 위와 같은 사울의 행동에서 표현될 수 없고 더욱이 그의 통치로도 표현될 수 없다는 것은 당연할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을 거절한 사울을 향해 주님께서도 그가 왕으로 있는 것을 거절하셨다고 사무엘은 발표하고 있다. 이 발표는 처음이 아니다. 예언자가 그의 왕국을 몰수하리라는 발표는 두 번 째에 해당된다. 처음의 경우, 사울이 불레셋과의 전투를 앞두고 주님께 제사를 드리기 위해 사무엘을 칠 일간 기다리다가 참지 못하여 성직자가 해야 할 제물 바치는 거룩한 임무를 가로챈 죄를 범했을 때였고, 지금의 경우, 그는 주님께서 받으실 수 없는 제물을 가지고 제사를 올리라고 건의함으로서 주님을 혐오하시게 하고 있다. 왕위에서 물러나게 하겠다는 사무엘의 발표가 있자, 그는 갑자기 자신을 낮추어 빌었다. “내가 죄를 지었습니다. 군인들이 무서워서 야훼의 명령과 선생의 말씀을 무시하고 그들이 하자는 대로 하였습니다.” 이 사울의 말은 왕의 뜻이 군인들에 의해 위압받은 두 번째에 해당된다. 왕의 성급한 명령 때문에 야기된 명령 불복종의 죄에서 요나단을 살리고자 하여 있어진 군인들의 탄원은 옳았다. 그러나 모든 것을 파괴해야 한다는 명령을받고도 쓸만한 것을 유보해둔 본문의 경우는 잘못되었다. 이는 더 낮은 원리가 더 높은 것을 통치할 경우 우리의 마음 상태를 표현하고 있다. 또는 열정이 지성을 통치할 경우와 바람이 의무 측면을 제압할 경우를 말해주고 있다. 본문의 경우에서 아각 왕과 가축떼를 살려두는 결과가 사울에게서 발견된다. 가장 높은 것과 가장 낮은 것, 또는 첫째가는 것과 최말단에 해당되는 것은 아주 중요하다. 이 두 개의 양 극에 있는 원리가 파괴해버려야 할 것을 남겨둘 때 검증하는 작업이 제아무리 정밀히 있어졌다 해도 거기에는 지독하게 불완전한 게 남아 있기 마련이다. 사울은 사무엘에게 죄를 지었다고 고백하면서 같이 예배드릴 수 있게 해달라고 사정했다. “같이 갈 수 없소 그대가 야훼의 말씀을 저버렸으니, 야훼께서도 그대를 이스라엘 왕위에서 밀어내실 것이오.” 이 말을 남기고 돌아서 가려고 하자, 사울이 도포를 붙잡는 바람에 도포자락이 찢어졌다. 사무엘이 그에게 일렀다. “야훼께서는 오늘 이스라엘 나라를 그대에게서 찢어내시어 동족 가운데에서 그대보다 훌륭한 사람에게 주셨소.” 사울이 사무엘의 도포자락을 찢듯이 자기의 심정을 찢었더라면 그의 죄는 용서되고 왕국 역시 그에게 계속 유보되었을는지 모른다. 그러나 이 뒤의 구절에서 알 수 있듯 그의 회개는 깊지 않았고 자기 죄를 느끼는 정도는 그가 지은 죄의 수준에 미치지 못하고 있다.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내가 죄를 지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그는 하느님께로부터 죄를 용서 받게 해 달라고 하지 않고 사람들 앞에서 체면을 세워 달라고 애원하고 있다. “이스라엘과 내 백성의 장로들 앞에서 내 체면을 한번만 보아 주십시오. 내가 선생께서 모시는 야훼 하느님께 예배드릴 수 있도록 선생께서 저와 함께 돌아가 주시지 않겠습니까? 그리하여 사무엘은 사울을 따라 갔다. 사울은 야훼께 예배를 드렸다.” 이상의 구절에서 우리는 사울이 표현하는 진리의 외적 특성, 그것이 영화하시는 주님의 과정에 관련해서 이든지, 거듭나는 인간의 과정에서 이든지 양 쪽 모두에 있게 되는 상태를 알 수 있게 된다. 주님의 측면에서 후회라 불리는 것에 관한 예를 사무엘을 통해 보게 된다. 그는 처음에 사울과 함께 가는 것을 거절했다. 그러나 그가 간절히 애원하는 바람에 응낙하고 있다. 이 모습은 자비에 관한 표시이다. 그러나 이것은 두 번째 간구에 대한 결과였는바, 이는 인간 마음에 있는 상태의 변화는 신성한 마음에 있는 의도가 바뀐 듯 인간의 눈에 비쳐지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진실된 진리는 이러하다. 주님은 자비 자체이시다. 그러나 그분의 자비는 그 자비를 받을 수 있는 준비가 될 때까지 그 인간 안에서 역사할 수 없다는 것이다. 마지막 문단에서 알 수 있듯 사무엘이 사울과 같이 간 중요한 이유가 있다. 즉각 처리되었어야 할 일이 미결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서 사무엘은 아말렉왕 아각을 데려 오라고 하였다. 아각은 마침내 죽을 고비를 넘겼나 보다고 생각하며 좋아서 사무엘 앞으로 나왔다. 그러자 사무엘이 ‘너의 칼에 얼마나 많은 여자가 자식을 잃었는지 아느냐? 네 어미도 그 여자들 처럼 자식을 잃어야 마땅하다.’ 하며 야훼 앞에서 아각을 난도질 하였다.” 아각은 아말렉으로 모형화 된 내면에 있는 것, 내면의 악에 바탕을 둔 거짓을 표현했다. 그러므로 사무엘이 아각을 난도질 했다는 것은 악 또는 거짓 원리는 그것에 정반대 되는 선 또는 진리에 의해서만 파괴될 수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다. 이스라엘의 진정한 왕이라면 그 왕은 아말렉의 왕과 정반대되는 것, 내면이 차있는 외면을 표현해야 마땅하다. 그러나 명확한 것은 사울은 그렇지 못했다는 것, 그래서 그는 아각을 살려두고 있었다.
이상의 줄거리는 오늘날 또 다른 양상으로 늘 나타나고 있다. 옛 것을 다 포기하라는 명령을 받은 기독교의 제자들, 그런데도 한쪽 부분은 아껴두고 싶어하는 기독인들, 그래서 하느님과 세상 것 둘을 함께 섬기려고 발버둥치는 우리들에게서 위의 성경 역사는 되풀이되고 있지 않을까? 불의한 방법으로 얻은 소득의 일부를 주님께 바침으로 신성의 비위를 맞춰보려고 하는 일을 얼마나 쉽게 해버리는지 우리는 알고 있을까? 자신이 하느님과 화해하려 않고 하느님이 자기와 화해하도록 예배하고 그분을 섬기려 드는 일, 얼룩진 죄에서 깨끗해지려 하기 보다 죄를 면제 받으려 그분께 묻는 일이 있지는 않을까? 이런 등등에 더 추가하고야 마는 것은 하느님을 찬양하면서 자기가 찬양되게 부추키는 행위들일 것이다. 이런 결과의 발생은 성경을 글자대로 마구잡아 사용하는데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흔하다. 그러나 글자 속에 내재하는 영적 의미를 살필 때, 우리는 성경 역사의 세부사항들에서 영적 전투에 있게 되는 마음의 작용이나 상태를 추적해 볼 수 있게 된다. 깡그리 파괴하라고 명령된 심정 속에 든 악들은 교활해서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 심정을 얼마나 썩게 하는지 모른다. 이런 악들이 본문에서 모조리 없애라는 것들, 즉 “남자와 여자, 아이와 젖먹이, 소떼와 양떼, 낙타와 나귀” 로 의미되고 있다. 남자와 여자, 아이와 젖먹이는 안쪽 인간 속에 있는 애착과 생각들이다. 양떼와 소떼, 낙타와 나귀는 바깥쪽 인간 영역에 있는 애착과 생각, 지식, 과학들이다. 이보다 더 격렬하고 몰인정한 듯 생각되는 명령을 주님께서는 기독인들에게 복음서에서 부과하시고 있다. “누구든지 나에게 올 때 자기 부모나 처자나 형제자매나 심지어 자기 자신마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누가복음 14:26). 율법과 복음서 양 쪽에 의해 부과된 영적 의무는 옛 사람에 속한 애착이나 욕망은 십자가에 매달아서 새 사람이 살 수 있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의무를 실제에 응용할 때 얼마나 힘든지 모른다. 자기를 즐기게 해줄 것 같은 생명, 자신이 생각할 때 참 생명인 듯 여겨지는 것을 내던지는 것 보다 더 하기 싫은 것은 없을는지 모른다. 이렇게 포기해야만 하는 생명, 부패된 이기심이라는 생명은 거듭남으로 받게 된 생명과 정반대되는 생명이다. 그러나 거듭남으로 얻게 되는 생명 만이 현재이든, 미래이든 진정한 행복을 붙잡게 해준다. 우리 속의 자연적인 의지나 이해성이 자신을 철저하게 검증 못하도록 유인하던가, 자신이 은근히 좋아하는 어떤 특질을 아껴두거나, 더욱이 자연적인 사랑이나 기쁨을 흠모하는 쪽으로 기울게 하는 어떤 영향이나 암시에 우리가 노출되는 것은 과히 이상하게 여길 필요는 없을 것이다. 좋은 게 좋은 거다는 식의 편리주의나 자기에게도 이익이 있다는 것을 암시하는 자연적인 애정이나 생각의 영향에 자연적 마음은 쉽게 누구러뜨려지고 흔들거려 같이 춤춘다. 이것이 소떼, 양떼를 다 죽이지 않은 군인들에 은근히 동조하는 사울의 모습이다. 그러나 영적인 마음, 내적 인간은 사무엘 처럼 더 높은 수준에서 사물을 직시하므로 낮은 수준의 자연적 애정이나 생각의 영향을 받지 않는바 흔들거리는 연약한 자연적 마음의 행동지침에 슬퍼한다. 바깥쪽 인간이 불완전에 허덕이고 연약함을 노출하지만 안쪽 인간은 완전무결 속에 남아 있는다. 그래서 안쪽 인간을 통해 주님은 바깥쪽 인간에게 말하시어 그 인간의 무력함이나 불쾌해지는 결과를 말해준다. 이런 마음의 진짜 본성과 그 작용은 경험을 통해 알 수 있기도 하다. 우리가 이렇게 알 수 있는 이유는 동물적 본성과 구별되게 하는 특성을 지녔기 때문이다. 동물은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 볼 수 없다. 그 이유는 동물적 마음은 설사 그 마음이 어떤 능력을 지녔다 해도 반사적 행동 (반성하는 행동)은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 본성이 지닌 신성의 창조 구성은 우리 자신을 곰곰히 반성해 볼 수 있게 장치되어 있어 자신의 수준 낮은 경향이나 상상등을 판단하여 조절이 가능하게 되어 있다.
사울의 애원을 받아 들인 사무엘은 그를 따라 가서 예배를 드렸다. 그러나 그 제물은 아말렉에게서 빼았은 더러운 것일 수는 없었으리라. 그 제물은 진정한 예배에서 바쳐지는 진정한 애착을 표현하는 이스라엘의 가축떼에서 조달되었을 것이 틀림없다. 이렇게 해서 사무엘과 사울, 내적 인간과 외적 인간이 하나로 움직였을 때, 한 가지 덜 완성된 것, 미결의 행동 하나가 있었다. 예배를 마친 후 사무엘은 아말렉왕 아각을 데려오라고 하였다. “아각은 마침내 죽을 고비를 넘겼나 보다고 생각하며 좋아서 사무엘 앞으로 나왔다. 그러자 사무엘이 ‘너의 칼에 얼마나 많은 여자가 자식을 잃었는지 아느냐? 네 어미도 그런 여자들 처럼 자식을 잃어야 마땅하다’ 하며 야훼 앞에서 아각을 난도질 하였다. 길갈에서 있었던 일이다.” 이 절에 대해 우리의 해설자는 이렇게 알려주고 있다. “아각에 대한 사무엘의 말 속에는 아말렉에 내려진 신성의 저주에 대한 그 원인이 깊게 감추여 놓여 있다. 즉 주님은 그들과 영원히 싸우실 거라는 것, 그들의 이름은 하늘에서 삭제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아각이 좋아하며 앞으로 나오는 모습은 아말렉이 표현하는 악의를 품은 영들이 타인들 앞에서 실지로 해대는 외적인 매력이나 유혹이다. ‘네 칼이 많은 여인들을 자식 없게 만들었다’ 는 사무엘의 말은 위의 악령은 지성에서 나오는 게 아니라 의지로부터 파생되는 악한 애착들이 주도권을 쥐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무엘이 주님 앞에서 아각을 난도질 하였다는 것은 지성으로부터 파생되어 악의 거짓 속에 있는 자들을 따로 분리했다는 말이다. 이리하여 마귀(genii)가 영들로부터 분리되어 졌다.” 위 인용문이 이 세상 사람들에게 어떻게 적용되는지 알아보는 것은 어렵지는 않다. 그러나 그것이 정작 자신에게 어떻게 응용되는지를 찾아 보는 것이 더욱 필요한 일이다. 내면의 악, 그것이 인간에게서 제아무리 감추여 놓여 있다 해도 그 악의 원리는 하느님의 보좌에 정반대 된다는 것, 주님은 그 악에 영원히 맞서고 계신다는 것을 우리가 아는 이상, 우리 역시 그것이 절멸될 때까지 싸움을 멈추어서는 안된다. 이스라엘 역사에서 우리가 배울 수 있듯이 그 악은 우리 속 아주 깊이 자리잡고 있어서 한번의 투쟁으로 뿌리뽑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그것이 뿌리뽑혔다 하여 한숨 돌릴 때, 그 즉시 그 악은 고개를 쳐든다. 따라서 그 악을 계속 발바닥 밑에 두고 밟고 있으려는 끈질긴 노력만이 그 악의 힘을 약화 시키게 될 것이고, 결국 거듭나는 마음의 천국에서 그 이름조차 모두 삭제되어 지리라 본다.
사무엘과 사울은 이제 서로 제 갈길로 갔고 다시는 육적으로 만나지 않았다. 각자는 자기 출생지로 되돌아 갔다. 두 사람 각각이 표현한 진리들은 각 진리가 소속된 영적 마음과 자연적 마음 속에서 은거하게 된다. 비록 그들 사이에 바깥쪽 왕래는 중단되었다 해도 동정적인 연결까지 완전히 절단되었던 것은 아니다. 사무엘은 사울 때문에 통곡하여 마지 않았다. 내향에 있는 애착과 생각은 외향에 있는 부족함과 연약함 때문에 통곡은 그치지 않는다. 통곡한다 해서 외향에 있는 상태가 개선되지는 못한다 할지라도 외향의 연약함으로 잃는 것 때문에 내향의 것들은 통곡 않을 수가 없다. 이렇게 사무엘이 주님 앞에 울부짖음에도 불구하고 그분께서는 사울을 왕으로 세우신 일에 대한 후회를 계속하시고 있다. 어머니쪽 인간성에 있는 신성으로부터의 진리, 사울이 표현한 이 진리는 신성한 사랑의 선과는 일치 않는 가운데 있어 신성한 사랑이 거할 영원한 거주지를 제공하지 못한다. 더구나 천국을 정돈하며, 지옥을 완전히 정복하여 지상에 천국을 건설해줄 매개체 역할은 더더욱 힘들다. 항구적인 거주지와 매개체가 또 다른 원리, 더 수준 높은 원리에서 발견되고 있다. 이 원리를 주님 스스로 설비해두시고 계신다. 이 원리의 취임식이 다음 장에서 거론되는 주제이다.

천국 -그 곳의 가르침-

차례

역자의 말
선각자 소개

서문-새 천국과 새 땅, 그리고 새 예루살렘에 의해 의미된 것…9
1 선과 진리…12
2 의지와 이해성…15
3 내적 인간과 외적 인간…18
4 총괄적 측면에서의 사랑…23
5 자아를 사랑함과 세상을 사랑함…26
6 이웃을 향한 사랑, 또는 선행…33
7 신앙…42
8 경건함…48
9 양심…52
10 자유…55
11 공적…58
12 회개와 죄의 용서…61
13 거듭남…65
14 시험…69
15 세례…72
16 성찬…74
17 부활…76
18 천국과 지옥…78
19 교회…81
20 신성한 성경, 또는 말씀…83
21 섭리…85
22 주님…89
23 교회 정부와 시민 정부…97

부록

선각자의 서적 안내
선각자의 용어 풀이
선각자에게만 유일한 생각들
도서 구입 안내

역자의 말

어느 누군가가 ‘당신이 말하는 새교회는 무엇입니까?’…더 정확히 질문받아서 ‘스위든볼지언(Swedenborgian)이 갖고 있는 교리는 무엇입니까?’라고 질문 받는 스위든볼지언의 답변을 위한 준비물로서 이 책이 적절하지 않을까 하여 번역을 시도했다. 그 이유는 이 책이 선견자의 책 중에서 가장 간단하면서도 무게 있지 않나하는 생각 때문이다.
45년 전쯤 대학 시절에 이 책을 만나는 기회도 가져었지만 아마 그 시절의 만남은 어쩌면 책을 관광하는 수준이었다고 판단된다. 물론 지금도 이 책의 내용에 대해서는 버벅거리는 수준이라 말해야 정확한 내 지식 수준의 칫수이리라 생각된다.
역자의 판단에서, 이 책의 장점이라면 2-30여권이나 되는 선견자의 중심 저서 중 어쩌면 정수리에 해당되는 내용이 아주 짧은 문단으로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역자의 이 책의 단점이라면, 원서에 비해 너무나 간결하게 해서 독자의 이해함에 부족함이 발생하지 않을까 염려된다. 따라서 간결하지만 집약적인 이 교리를 반복해서 읽고 숙고함으로 가슴에 새겨지길 바랄 뿐이다.
이 책의 내용에 대해 더 충분한 이해는 주님의 자비하신 허락의 범주인 바, 해맑은 심정으로 주님에게 간절히 간구하는 자세로 옷깃 여미고 좌정한다면 여러분을 늘 수호하는 두 천사의 도움으로부터 가능하리라 확신한다.
2013년 추수감사절에, 뉴욕 베이사이드에서…

에마뉴엘 스웨덴볽
(Emanuel Swedenborg, 1688-1772)

그는 비상한 재능들을 부여받았었는데, 이 재능은 아주 독특하고 다양하기도 해서, 저명한 학자들은 다방면에서 천재이다 라고 평가되는 아주 희귀한 몇 사람들 사이에 그를 끼여 넣어 분류했다. 백과사전들은 많은 주요한 과학적 발견과 발명을 그의 비옥한 지성의 잘 익은 열매들로 진열하고 있기도 하다. 그는 물질에 관한 근대 역학 개념을 예상했다. 혹성의 형성에 관한 성운설을 암시했다. 야금술 분야에서 처음 포괄적 작업들을 일궈낸 광산 엔지니어였다. 대수학에 관한 스웨덴의 교과서를 처음 준비한 수학자였다. 그리고 두뇌의 몇 구역의 기능과 관이 없는 선(glands)들을 발견하였다.
이렇게 과학의 가장 바깥 영역들에 까지 이르는 한편, 그는 혼(soul)이 어떻게 일하는지를 합리적으로 설명하기 위한 탐구에도 몰두했다. 이 탐구는 그가 영(spirit)의 아주 방대한 영역으로 돌아서고 직접적이고 강렬하게 영적 실재를 알아 채게 될 때 까지 해결의 실마리를 잡지 못했었다. 그는 이 영적 실재를 “영적 시각” (영적으로 봄) 이라 불렀다. 그는 인간 혼의 발단과 성장에 관한 가장 완전한 서술이 성서에 있음을 발견했다.
그가 우리에게 매우 조심스럽게 상기시켜주는 것은, 자기가 기록한 것들은 그 곳에 실제로 있는 것의 파편 조각에 불과할 뿐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 파편 조각의 실재를 움켜쥔 애독자, 자신의 생명과 그것의 성장이 이 저술 안에서 반사(mirrored)되고 있음을 찾아내는 독자들은 성서를 위한 가장 드높은 이름인 “하느님의 말씀”에 새로운 의미를 주는 인간의 진행에 대한 자비로운 이해를 발견할 것이다.

서문

새 천국과 새 땅, 새 예루살렘에 의해 의미된 것
(The New Heaven and The New Earth, and What is meant by The New Jerusalem)

계시록은 이렇게 서술하고 있다. (21:1,2,12-24) “나는 새 천국과 새 땅을 보았다. 그 이유는 처음의 천국과 처음의 땅이 끝났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느님으로부터 천국의 안으로부터 밖으로 내려오는 것을 보았는데, 마치 자기 남편을 위해 준비된 신부 같았다. 이 성은 크고 높은 벽을 가지고 있고, 열 두 문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문 위에 열 두 천사들이 있고, 거기에 이름들이 쓰였는데, 그것은 이스라엘의 아들들의 열 두 지파의 것들이다. 그리고 도성의 벽은 열 두 기초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것들에 어린 양의 열 두 사도의 이름들(이 있다). 도성 자체는 정사각으로 놓여 있다, 그리고 길이는 넓이와 같다: 그리고 그가 갈대로 도성을 쟀더니 일만 이천 펄롱(스타디온)이였다. 그리고 도성의 길이와 넓이와 높이는 같았다. 그리고 그가 도성의 벽을 쟀는데, 일백 사십 사 큐빗이었고, (이는) 천사에 속하는 사람의 측량이다. 그리고 도성의 벽의 구조물은 벽옥이었다. 그리고 도성 자체는 순수한 유리 같은 순금이었다. 그리고 도성의 벽의 기초들은 모두 각각 귀중한 돌로 장식되어 있었다. 열 두 문들은 열 두 진주들이었다. 도성의 거리는 투명한 유리 같은 순금이었다. 하느님의 영광이 그것을 밝게 했다.
그리고 그 곳의 등은 어린 양이었다. 그리고 구원되어진 나라들이 도성의 빛 안에서 걸을 것이다, 그리고 땅의 왕들이 도성 안으로 영광과 영예를 가져 올 것이다.”
위 구절을 읽는 사람이 글자 의미에 따라서만 이해할 경우 이럴 것이다. 즉 눈에 보이는 땅과 하늘이 멸해지고 새 하늘이 올라온다는 것, 그리고 거룩한 성 예루살렘이 새 땅에 내려 올 것이고, 상술한 바대로 측량될 것이다. 그러나 천사들은 위 구절을 다르게 이해하고 있다. 천사들은 사람들이 자연적으로 이해하는 것을 영적으로 이해한다. 천사들이 위 말을 이해할 때, 그 이해는 그 말의 의미이다. 이 의미는 말씀의 내적 부분, 즉 말씀의 영적 의미이다. 내적 또는 영적 의미에서 새 천국과 새 땅은 천사들이 이해할 경우, 천국들 안에 있는 새로운 교회와 지상에 있는 새로운 교회이다. 양쪽 세계에 있는 새로운 교회가 이제 우리가 살필 논제의 중심이다. 하느님으로부터 천국의 안에서 밖으로 내려오는 도성 예루살렘은 새로운 교회의 천국적 교리를 뜻한다. 각 치수가 동등한 길이, 넓이, 높이란 총체적 측면에서 이 교리 속의 모든 선들과 진리들을 뜻한다. 성벽이란 새 교회를 보호하는 진리들을, 성벽의 치수, 이는 144큐빗이고, 이는 천사에 속하는 사람의 측량이다란 총체적 측면에서 모든 보호하는 진리들과 이 진리들의 품질을 의미한다. 진주로 된 열 두 문은 천국 입장을 위한 진리들을 뜻하고, 문에 있는 천사 역시 같은 의미이다. 귀중한 돌로 된 성벽의 기초들은 새로운 교회의 교리에 기초가 된 지식들을 뜻한다. 이스라엘의 열 두 지파들이란 일반적, 세부적 측면에서 새로운 교회 속의 모든 것들을 뜻한다. 열 두 사도들 역시 같은 의미이다.
도성과 거리를 만든 순수한 유리 같은 금이란 사랑의 선, 이 선의 진리와 더불은 교리는 반투명하다(translucent)를 뜻한다. 구원되어
지는 나라들, 그리고 도성 안으로 영광과 영예를 가져 올 땅의 왕들이란 선들과 진리들 안에 있는 새로운 교회에 속하는 모든 이들을 뜻한다. 하느님과 어린 양이란 신성 자체와 신성한 인간에 관련된 측면에서의 주님을 뜻한다. 이상 간략하지만 살핀 내용이 말씀의 영적 의미이고 이 의미에 기초를 제공하는 것이 글자 의미, 또는 자연적 의미이다; 더 나아가 이 두 의미, 즉 자연적, 영적 의미는 상응을 통하여 하나를 만든다. 이렇게 대단히 간략하나마 살펴 본 이유는 성경의 글자 의미 너머 영적 의미가 있다는 것 정도만을 확인해보려 해서였을 뿐이고, 구절과 구절이 담는 세세한 의미는 이 책의 목적하는 바가 아니다.

1

선과 진리
(Good and Truth)

우주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은 신성한 질서에 따라 있는 바, 선과 진리에 관련 맺고 있다. 이 둘에 관련되지 않는 것은 천국이든 이 세상이든 어디에도 없다. 이유인 즉, 선과 진리 모두는 신성으로부터 진행되고, 이로부터 만물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위로부터 명백해지는 바, 인간은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진리인가를 알아둘 필요가 절실하다는 것이다. 즉 선이 진리에 어떻게 관련을 가지는지…어떻게 선이 진리와 결합하는지 등등이다. 이런 것에 대한 지식은 교인에게는 더 더욱 절실한 지식이기도 하다. 그 이유가 천국의 모든 것들이 선과 진리에 관련되는 것과 꼭 같게 교회의 모든 것과도 관련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이 내용이 책의 여러 항목 중 우선적으로 취급되고 있다.
신성한 질서에 의거 선과 진리는 결합되고 분리되지 않는다. 고로 그것들은 하나이고 둘이 아니다. 그 이유가 결합된 그것들이 신성으로부터 진행되기 때문, 그리고 그것들은 천국 안에서 결합되어 있다. 그리고 이 이유 때문에 선과 진리들은 교회 안에서도 결합되어 있어야
만 한다. 천국 안에서의 선과 진리의 결합을 천국의 결혼이라 부른다. 그 이유가 천국에 있는 모든 이들이 이런 결혼 상태에 있기 때문이다.
이런 근거로 말씀에서 있는 천국도 결혼에 비교되어져서 주님은 신랑과 남편이라 불리우고, 한편 천국과 교회는 신부와 아내라 부르고 있다. 천국과 교회가 위와 같이 불리는 이유는 천국과 교회 안에 있는 이들은 진리 안에서 신성한 선을 받기 때문이다.
천사들이 소유한 모든 총명과 지혜는 이 결혼으로부터 이다. 그리고 거기에는 선으로부터 떼어져 진리만으로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고, 진리로부터 떼어져 선으로 있는 것도 아무것도 없다. 이런 경우는 교회 속의 사람들에게도 똑같다.
선과 진리가 결혼 같은 바, 명백해지는 것은, 선은 진리를 사랑하고 진리는 선을 사랑한다는 것, 이것이 저것과 결합하기를 서로 갈망한다는 것이다. 이런 사랑, 이런 열망을 가지지 않은 교회 속의 사람은 천국의 결혼 안에 있는 것이 아니다. 고로 교회가 그 사람 안에 아직은 있는 것이 아니다. 그 이유가 선과 진리의 결합이 교회를 구성하기 때문이다.
선은 여러 겹이다. 일반적으로, 영적 선과 자연적 선이 있고, 둘 모두는 순수한 도덕적 선 안에서 결합되어 있다. 선이 이러하듯 진리도 원리는 마찬가지이다. 그 이유가 모든 진리는 선에 속해 있고, 선의 형체들이기 때문이다.
선과 진리의 경우가 위와 같은데 비해 정반대되는 경우는 악과 거짓의 관계이다. 즉 신성한 질서에 따라 있는 우주의 모든 것들이 선과 진리에 관계를 가지듯, 신성한 질서에 반대되는 모든 것들은 악과 거짓에 관계를 가진다. 그리고 선이 진리와, 진리가 선과 결합하기를 사랑하듯, 악은 거짓과, 거짓은 악과 결합하기를 사랑한다. 그리고 다시, 모든 총명과 지혜가 선과 진리의 결합으로부터 튀어나오듯, 모든 어리석음과 아둔함은 악과 거짓의 결합으로부터 발생된다. 악과
거짓의 결합을 지옥의 결혼이라 부른다.
악과 거짓이 선과 진리에 반대되어 있다는 여건으로부터, 명백해지는 바, 진리는 악과 결합될 수 없고, 선이 악으로부터의 거짓과 결합할 수 없음이다. 그 이유가 진리가 악에 결합했다면, 그것은 더 이상 진리가 아니고 거짓이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진리가 이미 거짓화되어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선이 악의 거짓과 결합되었다면, 그것은 더 이상 선이 아니고 악이다. 그 이유는 그것이 섞음질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직 악으로부터의 거짓이 아니다면 선과 더불어 결합될 수 있을지 모른다.
생활 안에서 확증함으로부터 악 안에, 그리고 이 악으로부터의 거짓 안에 있는 자들은 선과 진리가 무엇인지 전혀 모른다. 그 이유는 자신의 악을 선이다고, 자신의 거짓을 진리이다고 굳건히 믿기 때문이다. 그러나 생활 안에서 확증함으로부터 선 안에, 그리고 선으로부터의 진리 안에 있는 모든 이 각자는 악과 거짓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 그 이유는 모든 선은 그것의 진리와 더불어 본질적 차원에서 천국적이기 때문이다. 설사 아직 본질 차원에서 천국적이지 않다해도 이는 천국에 그 근원을 두고 있다. 그러나 모든 악, 그것의 거짓과 더불어 본질 차원은 지옥적이다. 그리고 아직은 본질 차원에서 지옥적이다 고는 말하기가 꺼끄럽다해도 그것은 여전히 그 근원을 지옥에 두고 있다. 그리고 천국으로부터의 모든 것은 빛 안에 있으나, 지옥으로부터의 모든 것은 어둠 안에 있다.

2

의지력과 이해력
(The Will and Understanding)

인간은 자기의 생명을 구성하는 두 능력(faculty)을 가지고 있다. 하나는 의지력이라 불리우고, 또 하나는 이해력이라 불린다. 이 두 능력들은 서로로부터 확실히 구분되나, 하나의 형체로 있도록 창조되어 있다. 그리고 이 둘이 하나일 때, 이 둘은 마음(mind)이라 불리워진다. 이것이 인간의 마음이다. 그리고 인간의 전체 생명은 그것들 안에 있다.
신성한 질서에 따른 우주의 모든 것이 선과 진리에 관계를 맺듯, 인간과 더불은 모든 것은 의지력과 이해력에 관계되고 있다. 그 이유는 인간과 더불은 선은 그의 의지에 속하고, 그 인간과 더불은 진리는 그의 이해력에 속하기 때문이다. 또한 이 두 능력들, 곧 인간의 이 두 생명들은 선과 진리를 위한 그릇(receptacle)과 신하(subject)이다. 의지는 선에 관계되는 모든 것들의 그릇과 신하되고, 이해함은 진리에 관계하는 모든 것들의 그릇과 신하가 되고 있다. 인간과 더불은 선들과 진리들은 이 밖에 어느 곳에도 있지 않다. 선들과 진리들이 이 외 어느 곳에도 있지 않듯 사랑과 신앙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그 이유가 사랑은 선에 속하고, 선은 사랑에 속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신앙은 진리에, 진리는 신앙에 속한다.
우주의 모든 것이 선과 진리에 관련되고, 교회의 모든 것 역시 사랑의 선과 신앙 속의 진리와 관련을 가지기에, 그리고 인간은 이 두 능력으로부터 사람이기에, 이 두 능력으로부터 선과 진리에 관하여 자기만의 또렷한 관념을 가질 수 있고, 이 능력 위에서 그것을 자신이 생각한다는 것도 발견하기에. 이런 중요함 때문에 여기서 이 능력들이 다루어지는 것이다.
또한 의지와 이해성은 인간의 영(spirit)을 구성한다. 그 이유가 인간의 지혜와 총명, 그의 생명 전체가 이 둘 안에 주재하기 때문이다. 몸은 그저 순종만 할 따름이다.
그러므로 어떻게 의지력과 이해력이 한 마음을 만드는지를 아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을 것이다. 그것들은 마치 선과 진리가 하나를 만들듯 한 마음을 만든다. 그 이유가 의지력과 이해력 사이에도 선과 진리 사이에 있는 결혼과 똑같은 결혼이 있기 때문이다. 이 결혼의 품질이 무엇인지는 선과 진리 편에서 언급했었던 것으로부터도 충분히 나타날런지 모른다; 즉 선은 어떤 사물의 실재(esse) 자체이고 진리는 실재 자체로부터의 실체(existere) 이듯, 인간과 더불은 의지는 그의 생명의 참 실재이고, 그의 이해는 이 실재로부터의 참 실체이다. 그 이유가 의지력에 속하는 선은 이해력 안에서 모양을 갖추고 그 자체를 볼 수 있게 진열하기 때문이다.
선과 진리 안에 있는 이들은 의지와 이해함을 가지고 있으나, 악과 거짓 안에 있는 이들은 의지와 이해함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러나 그들은 의지 대신 욕망을, 이해함 대신 지식을 가지고 있다. 그 이유가 진실로 인간의 의지는 선의 저장소이고, 이해성은 진리의 저장소이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의지는 악을 내포할 수 없고, 이해성은
거짓을 내포할 수 없다. 각 둘은 반대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각 반대되는 것은 상대를 파괴하기 때문이다. 이는 왜 악 안에 있고, 악으로부터의 거짓 안에 있는 이들을 두고는 그들이 합리적이다, 슬기롭다, 총명하다 등의 말을 하지 않는가의 이유이기도 하다. 악한 자와 더불어서는 의지와 이해성이 주재하는 마음에 속하는 내면들은 닫혀있다. 악한 자 역시 자기들 스스로는 나는 뜻하고 이해하고 있다라고 말하기 때문에 의지와 이해를 가졌다고 상상하고 있다. 그들의 의지는 오로지 지독히 탐냄이고, 그들의 이해는 오로지 지식이다.

3

내적 인간과 외적 인간
(The Internal and The External Man)

인간은 영계와 자연계에 동시에 있을 수 있도록 창조되어져 있다. 영계는 천사들이 있는 곳이고, 자연계는 인간이 있는 곳이다. 이렇게 양쪽에 있을 수 있게 창조되었기에 인간에게는 내적 부분과 외적 부분이 주어져 있다. 내적 부분, 이를 통하여 그는 영계 안에 있을 수 있다. 그리고 그의 외적 부분, 이를 통해 그는 자연계 안에 있을 수 있다. 그의 내적 부분은 내적 인간, 그의 외적 부분은 외적 인간이라 불리운다.
모든 인간 각각은 내적, 외적 부분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는 선한 자와 악한 자의 경우는 다르다. 선한 자와 더불은 내적 부분은 천국 안에, 천국의 빛 안에 있고, 외적 부분은 세상에, 세상의 빛에 있다. 그리고 선한 자의 외적 부분의 빛은 천국의 빛에 의해 계발되어진다. 그러므로 선한 자의 내적, 외적 부분은 마치 원인과 결과 같이, 또는 앞서 오는 것에 그 뒤를 당연히 따르듯 하나로 행동한다. 그러나 악한 자와 더불은 내적 부분은 세상 안에 그리고 세상의 빛 안에 있다. 그리고 이와 같은 빛이 외적 부분에 있다. 그러므로 악한 자는 천국의 빛으로부터서는 볼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고 오직 세상의 빛으로만 가능하다. 이 빛은 그들에 의해 자연의 발광체라 불리운다. 이것은 왜 천국에 속한 것이 그들을 위해서는 짙은 어둠이고 세상에
속하는 것만이 빛 안에 있다라고 하는 이유인가 이다. 이로부터 명백한 바, 선한 자는 내적, 외적 인간을 가지나, 악한 자는 내적 인간은 없고 단지 외적 인간만 있다.
내적 인간은 영적 인간이라고도 부르는데, 그 이유는 이 인간은 영적인 빛인 천국의 빛 안에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외적 인간은 자연적 인간이라 불리는데, 그 이유는 이 인간은 자연적인 빛인 세상의 빛 안에 있기 때문이다. 내적 부분이 천국의 빛 안에 있고, 외적 부분은 세상의 빛 안에 있는 사람은 양쪽 세계 모두에서 영적 인간이나, 내적 부분이 천국의 빛 안에 있지 않고, 외적 부분은 세상의 빛에서만 있는 경우 그는 양쪽 세계에서 자연적이다. 말씀에서, 영적 인간은 살아있는 인간, 자연적 인간은 죽어 있는 인간이라 불리우고 있다.
자기의 내적 부분이 천국의 빛 안에 있고, 그의 외적 부분이 세상의 빛 안에 있는 사람은 영적, 자연적 양쪽으로 생각하는 바, 그의 영적인 생각은 그의 자연적 생각 안으로 흘러서 거기서 지각된다. 그러나 자기의 내적 부분과 함께 외적 부분이 세상의 빛 안에 있는 사람은 영적으로는 생각하지 못하고 물질적으로만 생각함이 가능하다. 그 이유는 그가 물질 뿐인 세상의 것들로만 생각하기 때문이다. 영적으로 생각함이란 사물의 그 본래 취지대로 생각함, 즉 진리를 진리의 빛으로부터 보는 것, 선을 사랑함으로부터 선을 지각하는 것을 뜻한다. 또한 사물의 품질을 보고 그것들의 애착을 지각하고, 물질로부터서는 추상적으로 생각함을 뜻하기도 한다. 그러나 물질적으로 생각함이란 어떤 사물을 물질과 더불어, 물질 안에서 생각하고 보고 지각함을 뜻한다. 고로 이 방법은 매우 조잡하고 희미한 수준이다.
내적, 영적 인간은 그 자체로만 간주해보면, 천국의 천사이다. 더욱이 몸 안에서 살고 있는 동안에서 조차 비록 그가 알아채리지는 못하겠지만 천사들과 연계되고 있다. 언제인가 그가 몸에서 분리될 때, 이 인간은 천사 사이에 와서 있는다. 그러나 내적, 자연적 인간은 그 자체로만 간주하면 영이고 천사는 아니다. 이 인간 역시 몸 안에서 사는 동안 영들과 연계되어 있으나 그 연결은 지옥의 영들과 더불어서 이다. 그가 몸에서 분리되는 때 지옥의 영들 사이에 있게 된다.
영적 인간들과 더불어 있는 내면의 것들은 실제로 천국을 향하여 끌어 올리어진다. 그 이유는 이 내면의 것들의 주요 관심사가 천국에 속한 것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단지 자연적일 뿐인 인간과 더불은 마음에 속한 내면의 것들은 세상 쪽을 향해 실제로 돌아 선다. 그 이유는 그것의 주된 관심은 세상 것이었기 때문이다. 마음에 속한 내면의 것들은 당사자가 우선적으로 사랑하는 것 쪽으로 돌아 선다. 더불어 보다 수준 낮은 마음에 속하는 외면의 것들 역시 같은 방향으로 돌아 선다.
내적, 외적 인간에 대하여 단지 총괄적 차원에서만 생각하는 이들은 생각하고 뜻하는 것은 내적 인간이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은 외적 인간이다 라고 상상한다. 그 이유는 생각하고 뜻함은 볼 수 없고, 말함과 행동은 보여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음 안에서 태어나는 것은 이렇다. 즉 인간이 총명하게 생각하고, 슬기 있게 뜻할 경우, 그러면 그는 영적 내적 부분으로부터 생각하고 뜻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가 총명하게 생각하지 않고 슬기롭게 뜻하지 않을 경우, 그는 자연적 내적 부분으로부터 생각하고 뜻할 뿐이다. 그러므로 인간이 주님과 주님에 속하는 것들을 올바르게 생각할 때, 그리고 이웃과 이웃에 속한 것들을 올바르게 생각할 때, 그리하여 주님과 이웃을 향하여 올바르게 처신할 때, 그는 영적인 내적 부분으로부터 생각하고 뜻하고 있는 것이다. 그 이유는 그가 진리로부터의 신앙으로부터, 그리고 선을 사랑함으로부터, 고로 천국으로부터 생각하고 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이 주님과 이웃에 관해 잘못되게 생각하고 뜻할 경우, 그는 자연적 내적 부분으로부터 생각하고 뜻한다. 그 이유는 거짓인 것으로부터의 신앙으로부터, 그리고 악인 것을 사랑함으로부터, 고로 지옥으로부터 생각하고 뜻하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인간이 주님을 사랑함과 이웃을 사랑함 안에 있는 만큼, 그는 영적 내적 부분 안에 있는 것이고, 또한 그로부터 생각하고 뜻하고, 말하고 행동한다. 그러나 인간이 자아를 사랑함과 세상을 사랑함 안에 있는 만큼, 그는 자연적 내적 부분 안에 있고, 그것으로부터 생각하고 뜻하고, 그것으로부터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다.
이상과 같이 주님에 의해 질서 잡혀 설비되었는 바, 인간이 천국으로부터 생각하고 뜻하는 한, 그의 내적, 영적 인간은 열려있도록 형성되어 있다. 그 열림은 천국 쪽으로, 주님 쪽으로 있다. 그리고 그 형성은 천국 속에 있는 것에 따라서 있는다. 한편 인간이 천국으로부터 생각하지도, 뜻하지도 않고 세상적으로만 일 경우, 그의 내적, 영적 인간은 닫혀져 있고, 그의 외적 인간은 열려져 있다. 그래서 그 열림은 세상 쪽에 있고, 그 형성됨은 세상 속에 있는 것에 의거해 있다.
내적, 영적 인간이 천국 안으로 주님을 향해 열려져 있는 이들은 천국의 빛 안에 있고, 주님으로부터 계발되는 중인 바, 그는 총명과 지혜 안에 있다. 이들은 진리가 진리이기에 진리를 본다. 그들은 그것이 선이기에 선을 지각한다. 그러나 내적, 영적 인간이 닫혀 왔던 이들은 내적 인간이 있는지 조차 모르고, 내적 인간이 무엇인지는 더 더욱 모른다. 이들은 신성이 존재함을, 사후에 삶이 있다는 것을 믿지 않는다. 따라서 천국과 교회에 속하는 여러 사항들 역시 믿지 않는다. 그들은 세상의 빛 안에서만 있고, 그것으로부터서만 계발되
었기 때문에, 그들은 자연이 신성이다고, 거짓을 진리라고, 악을 선이라고 간주해버린다.
자기 눈으로 볼 수 있고, 그의 손이 만질 수 있는 만큼만을 그의 내적 부분이 자기의 외적 부분이라고 할 경우, 이를 감각적 인간이라 부른다. 이 인간은 가장 수준 낮은 자연적 인간이고, 교회의 신앙에 속하는 모든 것들에 관한여 오류 속에 있다.
지금까지 살핀 인간의 내적 부분과 외적 부분은 인간의 영의 내적 부분이고 외적 부분이다; 그의 몸은 단지 덧붙여진 외적 부분일 따름이나 이 몸 안에 두 부분이 실존하고 있다; 그 이유가 몸 자체만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오직 몸 안에 주재하는 몸의 영으로부터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한 가지 주목해둘 것은, 인간의 영이 몸으로부터 분리된 후에도 여전히 생각하고 뜻함을 계속하고, 말하고 행동한다는 점이다. 생각함과 뜻함은 그의 내적 부분이고, 말함과 행동함은 그의 외적 부분이다. 이에 관해 더 살피겠다면 “천국과 지옥”이라는 책을 읽어 살피기 바란다.

4
총괄적 측면에서의 사랑
(Love in general)

인간의 참 생명은 그의 사랑이다. 사랑이 존재하는 것과 꼭 같게 그의 생명도 존재한다. 정확히 그의 전부이다라고 말해도 무난하다. 그런데 인간에게는 자신을 지배하는 사랑, 또는 통치하는 사랑이 있다. 이 사랑은 많은 사랑들을 그 휘하에 거느리고 있다. 사실 많은 사랑들은 이 통치하는 사랑의 작은 갈래들이라 말하는 편이 나을 듯 하다. 이 많은 사랑들은 여러 다른 모양 아래 나타나나 여전히 통치하는 사랑 안에 포함되고, 한 왕국을 구성한다. 통치하는 사랑은 마치 몸의 경우 머리에 해당되고, 왕국의 경우 왕에 해당된다. 이 사랑은 그 외 사랑들을 지휘하고, 그것들을 통하여 목적들을 꼼꼼히 따져봄으로 여러 사랑들과 관계를 가지며, 결국 그 사랑 자신의 목적을 의도한다. 이 목적은 모든 사랑들이 중요시하는 궁극적 목적이다. 그리고 이 사랑은 직, 간접적으로 실행한다. 통치하는 사랑에 속한 것은 무엇보다 먼저 사랑되고야 만다.
인간이 우선적으로 사랑한 것은 그의 생각 안에, 그의 의지 안에 꾸준히 현존하고, 이것이야 말로 자기만의 진짜 생명을 구성한다. 예를 들면, 재물을 최고라 여겨 우선적으로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재물이 돈이든 어떤 취득물이든 그것을 어떻게 획득할 것이냐에 그의 관심은 온통 집중한다. 그리하여 그것을 달성했을 때, 그는 내향적으로 심히 기뻐하고, 그것을 잃었을 때 내향적으로 무척 슬퍼한다. 그 이유가 그의 심정이 그것 안에 있기 때문이다. 만사에 앞서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은 만사에서 시시콜콜 자신만을 염두하여,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할 뿐이다. 그 이유가 그의 생명은 자아를 위한 생명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자기가 그 무엇보다 먼저 사랑하는 것을 목적으로 가지고 있고, 모든 것들 각각에서도 그 목적을 중시하고 있다. 이것은 그의 의지 안에 있는데, 제아무리 어떤 것에 바빠 있다해도 마치 그 흐름이 보이지 않는 듯 여전히 있다 해도 흐르고 있는 시냇물 처럼 그를 끌어 당기고 끌고 가고야 만다. 그 이유가 그 사랑만이 그에게 생명을 불어넣기 때문이다. 이것은 한 인간이 추구하는 것인 바, 또 다른 것에서도 여전히 같은 것을 보고 있다. 이것에 따라 그는 자기를 이끌든지, 또는 행동을 펼치든지 한다.
요컨대 인간은 자기 삶을 통치하는 것과 꼭 같은 품질 속에 있는다. 이를 수단으로 그는 타인과 차별된다. 만일 그가 선한 자라면, 그의 천국의 품성에 따라 그의 통치하는 사랑이 형성되어진다. 이와 반대로 그가 악한 자라면, 그의 지옥의 본성에 따라 형성될 것이다. 이것이 그의 의지 자체, 그의 고유의 자아, 그리고 그의 인격을 구성한다. 그 이유가 이것이 그의 생명의 참 실재이어서 이것은 사후 바뀌어질 수 없다. 그 이유는 그것이 그 인간 자신이기 때문이다.
즐거움, 만족함, 행복함으로부터의 모든 느낌은 그의 통치하는 사랑으로부터 이 사랑에 의거 각자에게 파생되어진다. 그 이유가 인간이 사랑하는 것을 두고 그는 즐겁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그가 그것으로부터 즐거움을 느끼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생각한 것, 그리고 사랑하지 않는데도 그는 즐겁다 할 수도 있을런지 모르나 어쨌든 이것은 그의 생명으로부터의 즐거움은 아니다. 사랑으로부터의 즐거움은 인간의 평가에서 선인 것이다. 그러나 즐겁지 않을 경우
그는 악으로 간주한다.
두 사랑이 있다. 이 사랑들은 모든 선들과 진리들의 참 원천이고 이 사랑으로부터 존재한다. 악과 거짓의 원천이 되는 두 사랑들도 있다. 모든 선들과 진리들이 근원을 삼는 두 사랑들은 주님을 사랑함과 이웃을 향한 사랑이다. 그리고 모든 악들과 거짓들이 발생하는 두 사랑들은 자아를 사랑함과 세상을 사랑함이다. 이 후자의 사랑들은 전자의 사랑들에 직반대되고 있다.
두 사랑으로부터 모든 선들과 진리들이 존재하는데 이는 위에서 말한 바대로 주님을 사랑함과 이웃을 사랑함이고, 인간과 더불은 천국을 구성하는 바, 이 두 사랑은 천국을 통치한다. 그리고 이 두 사랑이 인간과 더불은 천국을 구성하는 바, 두 사랑은 인간과 더불은 교회를 구성한다. 모든 악들과 거짓들이 진행되는 두 사랑은 위에서 말한 바대로 자아를 사랑함과 세상을 사랑함인데 인간과 더불어 지옥을 구성한다. 그러므로 이것들이 지옥 역시 통치한다.
모든 선들과 진리들이 있는 두 사랑들, 이미 주목한 바 같이 천국의 사랑들이고, 내적, 영적 인간을 형성하고 열리어 있다. 그 이유가 그 사랑들은 내적, 영적 인간 안에 주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든 악들과 거짓들을 발생하게 하는 두 사랑들, 이것들이 강세해질 경우, 내적, 영적 인간을 닫히게 하고 파괴한다. 그리고 그것들의 통치력과 범위에 비례하여 인간을 자연적, 감각적으로 되게 한다.

5

자아 사랑과 세상 사랑
(The Love of Self and The Love of The World)

자아 사랑은 자신만이 잘되기를 바라고 자아를 위해서 타인이 잘되기를 바라는 것을 뺀다면 타인의 잘됨은 바라지 않는다. 이 범주에는 교회나 자기 나라, 사회나 동료들에 이르기 까지 광범위하다. 이 사랑이 선을 행할 경우도 있는데, 그 목적은 자신의 명성, 영예, 존경 따위를 얻으려는 절차상의 선행일 뿐이다. 그래서 이 사랑은 선행을 실시하는 가운데 위와 같은 영예나 명성이 예상되지 않을 경우, 자기 심중에 이렇게 말한다. ‘결과가 고작 이것이냐?’,,,‘왜 내가 그것을 해야 한다는 말이냐?’…‘도대체 내게 올 이득이 뭐란 말인가?’ 곧이어 그는 실시하던 선행을 집어치운다. 이로부터 명백한 바, 자아를 사랑함에 있는 자는 교회도, 나라도, 사회도, 동료도, 어떤 것도 사랑하지 않고 오로지 자기 것만 챙긴다는 것이다.
인간이 자아를 사랑함 안에 있으면서 뭔가를 생각하고 뜻할 경우, 그는 이웃을 배려하지 않는다, 그 결과 공동의 최상의 것을 생각지도 않는 바, 주님에 관련한 것은 더 더욱 아니고 오로지 자신과 자신에 속하는 것에만 집착한다. 그러므로 그가 행하는 모든 것은 사사건건 자신과 자신에 속한 것을 위해서 이다. 그래서 만일 그가 공공의 최상의 것과 이웃을 위하여 했다면, 그것은 단지 겉모양새를 갖추려해서 이었을 뿐이다.
위에서 자신을 위하여, 그리고 자신에 속한 것을 위하여 라고 말해졌는데, 그 이유는 자신을 사랑하는 자는 누구든지 그에게 딸린 것들까지 사랑하려들기 때문에서 이다. 여기서 그에게 속한 것들이란 세부적으로 나열하면, 자식, 손자 등등, 자신과 하나를 만드는 것, 그리고 자기 스스로 자기 것이다고 부르는 것들을 뜻한다. 이런 것들을 사랑함은 자아를 사랑함이나 별반 차이가 없다. 그 이유가 인간은 그것들을 바라보건대 마치 자신 안에 있는 냥, 자신이 그것들 안에 있는 듯 바라보기 때문이다. 자신의 것이라 부르는 것들 사이에서 그는 아첨하는 말을 달콤히 듣고, 존경도 받고 숭배받기도 한다.
자아를 사랑함 안에 있는 자는 이웃을 자신과 비교하여 경멸하고, 이웃이 자기의 환심을 사려들지 않는다거나, 자기를 존경하는 눈빛이 없을 경우, 자기를 존경하지 않는 것 같으면 그 이웃을 적으로 간주해버린다. 더욱 더 자아 사랑에 깊이 빠져 있을 경우, 위와 같은 것을 빌미로 이웃을 미워하고 박해한다. 심할 경우, 복수심에 불타고 이웃을 파멸로 치닫게 한다. 이런 인물은 결국은 잔인함에서 즐거움을 찾고야 만다.
자아 사랑의 품질은 천국의 사랑과 비교해 봄으로부터 나타난다. 천국의 사랑은 선용을 위해 선용을 사랑함에, 즉 사람이 교회나 사회, 동료에 선을 실시하되 선 자체를 사랑함에 있다. 그러나 자신을 위함 때문에 선을 사랑하는 자도 위와 마찬가지로 자기 하인들을 사랑하지만, 그 목적은 자기를 잘 섬기게 하려는데 있다. 이로부터 다음 사항이 수반되는 바, 자아 사랑 안에 있는 이들은 교회나 사회나 자기 동료가 자기를 섬기기를 바랜다, 그리고 자신이 그들을 섬기는 것이 아니다. 그는 그들 위에 자신을 둔다. 그리고 자기 아래 그들의 위치를 정한다.
누군가가 천국의 사랑 안에 있는 한, 즉 그가 선용과 선들을 사랑하
는 가운데 있고, 그리고 그것들을 실시함에서 심정으로 일의 즐거움을 느끼고 있다면 그만큼 그는 주님에 의해 인도되어 진다. 그 이유가 이것은 주님이 계시는 사랑이요 그분으로부터 있는 사랑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누군가가 자아를 사랑하는 가운데 있다면, 있는 정도 만큼 그는 자신에 의해 인도된다. 그리고 누군가가 자신에 의해 인도되는 만큼 그는 그의 고유 자아에 의해 인도되는 셈이다. 그리고 인간의 자아는 악 밖에 더 없다. 그것은 인간의 유전적 악이고, 이 악은 하느님보다 자신을, 천국 보다 세상을 사랑하는데 있다.
자아를 사랑함이 위와 같은 특성을 지녔기에 행여 이 사랑에 지배권이 주어질 경우, 또는 바깥쪽 여건에서 그 사랑을 제약하던 것이 제거될 경우, 다시 말해 법이나 그에 따른 처벌이 없다면, 혹은 명성이나 영예, 이득 등등에 대한 손실이 없다면, 이 사랑은 곤두박질치듯 하는 모습으로 돌진하여 온 세상 뿐 아니라 천국도, 아예 신성 위에 까지 군림하려 든다. 그 이유가 그런 짓에는 경계선이 없고 끝이 없기 때문이다. 이 모든 것은 비록 자연계에서는 위에 언급했듯 지배력이나 바깥쪽 제약 같은 것으로 튀어나오지 못해서 눈에 보여지지 않지만 어쨌든 자아 사랑 안에 있는 자들 안에 깊숙이 감추여 놓여 있다. 더 나아가 이런 인물이 제약하는 것에 마주치면, 그는 그 제약이 풀릴 때까지 멈추기는 한다. 이런 사랑에 있는 사람은 자기가 사악하고 무절제한 욕망을 자신 안에 비밀리에 숨겨 놓고 있는지 조차 알아채지 못한다. 위 내용이 실지의 경우이다는 것은 세상의 이런 부류들, 즉 권력을 휘두는 이들, 왕으로부터, 바깥쪽 제약이나 불가능이 존재 하지 않는 자, 즉 어떤 재갈도 물려지지 않은 자로부터, 또는 성공으로 면류관을 쓰고 있는 한, 돌진하여 성읍과 왕국들을 복종시키려한 바, 무제한의 권력과 영광을 열망하는 왕 같은 자들로부터 미루어
이를 짐작할 수 있을런지 모른다. 한걸음 더 나아가, 천국 안으로 자기의 통치를 밀어 넣고 아예 주님의 신성한 권능을 내놓으라 하기 조차 한다. 그러고도 이를 넘어 돌격하기를 갈망한다.
통치를 실행하는데는 두 가지 양식이 있다. 하나는 이웃을 향한 사랑의 방식이고, 또 하나는 자아를 사랑하는 방식이다. 통치의 이 두 종류는 그것들의 본질상 서로 직반대되어 있다. 이웃을 향한 사랑으로부터 통치를 실시하는 사람은 모든 이에게 선을 의도한다; 그리고 그는 유용한 목적을 완성하는 것 외 바랄 것이 없다. 고로 그는 타인에게 봉사하는 것을 사랑한다. 타인에게 봉사함은 선을 행함을 뜻한다, 그리고 이웃이 잘되기를 기꺼이 바라는 것을 바탕으로 타인에게 선용을 수행한다. 이것이 그의 사랑이요 그의 심정을 즐거웁게 하는 일들이다. 이런 인물은 또한 자기가 존경받는 높은 지위로 드높혀질 때도 영예의 높은 자리 때문이 아닌 더 큰 선용이 실시되었음이 증명됨에 즐거워 할 뿐이다. 이런 종류의 통치가 천국들 안에서 실행되고 있다. 그러나 자아를 사랑함으로부터 통치를 실시하는 자는 자신과 자기에게 속하는 이들에게 외에는 누구에게도 선을 의도하고 싶은 생각이 없다. 그가 성취하는 선용이란 고작 자신의 영예와 영광에 초점을 맞추었을 뿐이다. 이 선용이 그가 아는 선용의 기준이다. 그러므로 그가 타인에게 봉사하는 목적은 봉사함의 신세를 진 그들이 이 봉사에 감사해 행여 자기를 떠받들지 모른다는 계산이 깔려 있다. 그는 영예를 추구한다, 이는 그가 행할지 모르는 선 자체를 위하여가 아니다. 단지 그가 높은 지위를 점령하고 영광을 긁어 모으고, 이것으로 그의 심정에 즐거움을 생산하고 싶어서이다.
이 통치하는 사랑은 사후에도 모든 이에게 남아 있는다. 이웃을 향한 사랑을 바탕으로 통치를 실행한 사람은 천국들 안에서 그에게
통치가 위탁된다. 그럼에도 거기서는 통치란 단어는 그들에게 어울리지 않는다. 그 이유가 그들은 공익과 선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이들이 통치할 때, 주님께서 통치하신다. 그러나 세상에서 자아 사랑을 바탕으로 삼아 통치를 실시했던 이들은 사후 지옥 안에 있고, 그들은 천박한 노예로 산다.
자아 사랑에 있는 사람에 관해서는 위로부터 알았으리라 생각된다. 한 가지 더 보탤 것은 누가 자아 사랑을 자기의 동력원으로 삼고 있는지는 그의 외관 가지고는 판단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즉 그가 오만하다거나 온유하다거나 하는 외관으론 결정이 쉽지 않다는 말이다. 그 이유가 위에서 언급된 속성은 그의 내적 인간 안에 들어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서 자기들의 내면들은 감추여져 있다. 그리고 외적 인간은 공동의 최상의 것과 이웃을 사랑함에 속하는 것들로 덮혀 씌워져 있는 경우가 흔하다. 따라서 내면과 외면은 반대되고 있다. 자아만을 사랑하는 자라해도 자기를 위해 이웃에 선을 베풀 수 있다. 그 이유가 그들도 모두에게 최상이 되는 것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만인에게 감명을 준다는 것을 눈치채고 있기 때문, 고로 자기들이 선행을 베풀면 그에 비례해 자기들이 사랑받고 좋은 평가를 받을 것이라는 계산이 깔려 있다. 어쨌든 그런 선행일지라도 감명을 주는 이유는 천국은 이런 사랑 안으로 흘러들기 때문에서 이다.
자아 사랑 안에 있는 이들에게 속하는 악들을 일반적으로 몇 개 나열한다면, 타인을 경멸함, 시기함, 자기를 예쁘게 보지 않는 이들을 적대시함, 갖가지 미워함, 복수, 사기, 무자비함, 잔인함 등등이 있다. 이런 악들이 존재하는 곳에는 신성을 경멸함, 신성한 것, 즉 교회의 선들과 진리들을 우습게 여김도 늘 따라붙어 있다. 그리고 이런 신성
한 것들이 교회 안에서 존경받아야 하는데, 이들은 입술로만 그럴 뿐 심정은 그렇지 않다. 이런 악들이 자아 사랑으로부터 진행되듯, 비슷한 거짓들 역시 그것으로부터 근원된다.
세상을 사랑함은 갖가지 술책을 써서라도 타인의 재산을 자기 것으로 만들기를 바램에 존재한다. 그리고 재물 위에 자신을 자리잡아 앉히고, 자신의 자아가 영적 사랑으로부터-이웃 사랑-즉 천국으로부터 물러나는 것을 방관하고 그 대신 세상적인 것에 의해 자신을 이끌어 간다. 세상을 사랑하는 가운데 있는 이들은 다양한 계략을 써서 타인들의 선들을 자신들의 것으로 삼기를 바라고 있다; 특히 이웃의 선을 가볍게 여기고 잔꾀와 사기를 동원해 타인의 선을 가로채려 고심한다. 이 사랑 안에 있는 자들은 타인의 선들을 몹시 탐낸다. 그래서 타인의 선을 가로채는데 따른 범법 행위가 듵키지 않게 안전망이 쳐지고, 명성을 잃을 염려도 없게 되면 실제로 강도짓을 하고 약탈도 서슴치 않는다.
세상을 사랑함은 자아를 사랑함 만큼이나 천국적 사랑에 반대되어 있지는 않다. 그 이유는 자아 사랑만큼 규모적으로 크게 감추여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 사랑도 종류가 많다. 존경받는 지위에 도달하려고 재물을 사랑한다. 순서를 바꾸어 재물을 얻고저 영예와 명성의 지위부터 사랑한다. 다양한 용도로 재물을 사용하여 그로부터 즐거움을 얻고자 재물을 사랑한다. 재물 자체가 좋아 재물을 사랑한다. (이와같은 것이 수전노의 사랑이다.) 그러나 우리가 재물의 도움으로 도달해야 하는 목적지는 유용함(use)이다. 이 목적 또는 유용함으로부터 사랑의 품질은 존재한다. 그 이유는 사랑은 사랑이 존재하기 위한 목적과 똑같은 품질을 지니기 때문이다. 그 외 다른 것들은 수단들에 불과하다.
한마디로 자아 사랑과 세상 사랑은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에 직반대되고 있다. 그러므로 자아 사랑과 세상 사랑은 지옥의 사랑들이다. 이 사랑들이 지옥을 통치한다, 동시에 인간 안에서 지옥을 구성한다. 그러나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천국적 사랑들이다. 이 사랑들이 천국을 통치하고, 인간과 더불은 천국을 구성한다.
이상 말해 온 것으로부터 알게되는 바, 모든 악들은 위 두 사랑들 안에 포함되어 있다는 것, 그리고 두 사랑으로부터 존재한다는 것이다. 앞 문단에서 나열한 악들은 일반적 악들이고 세세한 악들은 열거되지 않았으나 세세한 것들은 일반적 악들로부터 파생된다. 이로 미루어 알게되는 것은, 인간이 이 두 사랑들 안에서 태어난 바, 그는 모든 종류의 악들 안에서 태어나진다는 것이다.
인간이 악들을 알기 위하여서 그는 악들의 근원을 알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가 악들을 알지 않으면 선이 무엇인지도 알지 못한다. 그러면 그는 자신의 품질도 알지 못한다. 이런 까닭에 악들의 두 근원이 여기에서 취급된 것이다.

6

이웃을 향한 사랑, 또는 선행
(Love towards the Neighour, or Charity)

‘이웃’ 이라는 단어에 의해 무엇이 의미되는지를 우선적으로 설명해야 할 것 같다. 그 이유가 사랑되어지게 되는 것이 ‘이웃’이고, ‘이웃’을 향하여 선행이 실시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알지 않으면, 선행은 분별 없이 실시될 것이다. 그래서 악한 자나 선한 자에게 똑같은 방식을 적용할런지 모른다. 그러면 선행은 선행이 아닌 것이 되고야 만다. 즉 악한 자는 받은 혜택을 수단으로 이웃에게 더욱 악을 행하고, 선한 자는 선을 행할 것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흔히 상상하는 것은, 모든 사람 각각은 똑같은 수준에서 이웃이다는 것, 선은 도움을 요구하는 모든 이에게 행해져야한다는 것이다. 기독인은 인간의 생명의 품질을 검사하는데 있어 매우 신중해야 하고 그 검사 결과에 맞추어 선행을 실시해야 한다. 내적 교회인은 분별력을 가지고 행동한다. 고로 총명하다. 그러나 외적 교회인은 구별하는 능력이 뒤떨어지기 때문에 분별없이 행동한다.
이웃 안에 있는 것을 구분함에 교인들은 잘 익숙해 있어야 하고 이 구분함은 이웃 각자와 더불어 있는 선에 의거 실시되어야 한다. 모든 선은 주님으로부터 진행되기에, 주님 자신은 최고의 의미에서, 그 무엇과 비교 안되는 탁월한 수준에서 이웃이시고, 이 이웃으로부터 이웃이라는 관계가 근원된다. 이로부터 뒤따르는 것은, 각 사람은
주님의 어떤 것을 가진 만큼에서 이웃이다는 것이다. 그리고 한 가지
방식으로 모두가 주님으로부터 진행되는 선을 받지 않는다. 즉 이 사람이 받는 선과 저 사람이 받는 선은 차이가 있다는 말이다. 그 이유가 천국들에 있는 모든 사람, 땅 위의 선을 지닌 모든 사람은 선에 관한 한,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어떠한 두 사람도 완전히 똑같은 선을 결코 가지지 않는다. 선은 다양하기 때문에서 이다. 그래야 각각의 선이 단독으로도 생존 가능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모든 다양함들, 즉 이웃에 있는 구분되는 모든 선들, 이것들은 주님을 영접함에 따라, 즉 그분으로부터 선을 받음에 따라 있어지는 바, 이는 어느 인간도, 어느 천사도 아주 총체적 방식 외에는 세세한 방식은 결코 알지 못한다. 주님께서는 교회인이 자기에게 익숙한 방식에 따라 사는 것 외에 더 어떤 것을 요구하시지 않는다.
모든 이 각자의 선은 다양한 바, 선의 품질은 이웃의 등급을 결정하고 이것에 맞추어 누군가는 이웃이 된다. 이것이 왜 그러한지는 주님의 비유로부터도 쉽게 감지된다. 즉 누군가가 강도를 만났는데 이 강도는 그를 절반쯤 죽여 놓았다, 때마침 거기를 지나는 성직자와 레위인이 그를 못본척 했으나 그를 발견한 사마리아인은 그의 상처에 포도주를 붓고, 기름을 바르고, 싸매서 자기 짐승에 태워 여관으로 데려왔다. 그리고 그를 잘 돌볼 것을 여관 주인에게 부탁까지 했다. 이 사마리아인, 그가 선행의 선을 실행했기 때문에 강도 당한 자의 이웃이라 불리우고 있다 (누가 10:29-37). 이로부터 사마리아인은 선 안에 있는 이웃이다. 그가 상처에 부은 기름과 포도주 역시 선과 선으로부터의 진리를 의미한다.
지금 위에서 말한 바로부터 명백해지는 것은 보편적 의미에서의 선이 이웃이다는 것이다. 즉 인간은 주님으로부터 그와 더불어 있는 선의 품질에 따라 이웃이다는 말이다. 선이 이웃인 까닭에, 사랑이
이웃이다. 그 이유는 모든 선은 사랑에 속하기 때문에서 이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 각자는 그가 주님으로부터 가지는 사랑의 품질에 따라 이웃인 것이다.
누군가를 이웃이 되게하는 것이 사랑이다는 것, 모든 이 각자는 그의 사랑의 품질에 따라 이웃이다는 것은 자아 사랑 안에 있는 이들의 경우를 생각해보면 오히려 더 선명해질지 모른다. 이들은 자기들을 가장 많이 사랑한 이들, 또한 이 사랑의 정도에 비례해 누군가를 자기들에 속하는 이웃으로 인정한다. 그들은 이들을 포옹한다. 그들에게 키스한다. 그들에게 선을 행한다. 그리고 그들을 형제라고 부른다. 아니, 악이 있는 그들을 타인들에 앞서 있는 이웃이라 부른다. 여타 사람들은 자기들을 사랑한 정도에 비례해 이웃으로 인정한다. 즉 자기를 향한 그들의 사랑의 크기와 품질에 따라 이웃으로 인정한다는 말이다. 이런 인물은 이웃의 근원을 자신에게 놓고 있다. 이와 달리 타인에 앞서 자신을 먼저 사랑하지 않는 이들, 즉 주님의 왕국 속에 있는 이들의 경우, 그들은 무엇보다 먼저 사랑해야 할 그분으로부터, 주님으로부터 이웃의 근원을 가진다. 그들은 모든 이 각자를 상대가 지닌 주님을 사랑함의 품질에 따라, 곧 주님으로부터 어떤 이웃인지를 가늠한다. 이리하여 분명해지는 것은, 교인은 주님으로부터 이웃의 근원을 끌어내야 하리라는 것이다. 그리고 모든 이 각자는 주님으로부터 있는 선에 따라 이웃이다는 것, 결과적으로 선 자체가 이웃이다는 것이다.
주님께서 이렇게 가르치신다 (마태 25:34-40); 그분은 선 안에 있는 이들에게, ‘너희들은 그에게 먹을 것을, 마실 것을, 입을 옷을 주었고, 그를 방문했었고, 그리고 그가 감옥에 있을 때도 거기까지도
왔었다.’ 그리고 그 후에 ‘그들이 그의 형제 중 지극히 작은 자에게
그것을 행했기에 그들은 그것을 나에게 행한 것이다.’ 이 구절에 담긴 선의 여섯 종류는 영적 의미에서 이해해 보건대, 이웃의 다양한 모든 종류들이 내포되어 있다. 이로부터서도 확실한 바, 선이 사랑되어질 때, 주님 자신 역시 사랑되어진다는 것이다. 그 이유가 주님은 선 자체이시고, 선 안에 계시며 그분으로부터 선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웃은 단 한 사람을 두고 말해진듯 여겨지지만 여러 사람, 즉 단체 차원에서의 이웃도 있다. 즉 보다 작은 사회, 상대적으로 규모가 큰 사회, 나라, 교회, 주님의 왕국, 무엇보다 주님 자신 역시 이웃이다. 열거한 위의 모두는 선을 사랑함으로부터 실시되어야 하는 이웃이다. 그들 역시 승강하는 등급의 서열에 있다. 숫자가 적은 사회는 상대적으로 숫자가 많은 사회보다 등급이 낮다. 그러나 한 개인 보다는 훨씬 높다. 사회 보다 나라는 더 높은 등급이다. 교회는 이보다 더 높다. 주님의 왕국은 교회보다 더 높고, 최고의 등급에는 주님이 계신다. 이렇게 승강하는 등급은 마치 사다리의 층계와 비슷하다. 이 사다리 꼭대기에 주님이 계신다.
한 사회는 한 개인 보다 더 큰 이웃이 된다. 그 이유는 다수로 구성되었기 때문이다. 선행은 한 개인에게 실시되는 것 같은 방식으로, 즉 사회 안에서 널리 우세한 선의 품질에 따라 실시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곧바른 사회와 그렇지 못한 사회에 대한 선행은 분명 방식이 달라야 할 것이다. 선을 사랑함으로부터 사회의 선이 돌보아질 때 그 사회는 사랑되어진다.
각자의 나라는 사회보다 더 큰 이웃이 된다, 그 이유는 부모와 자식의 관계 같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각자는 나라 안에서 태어나고 먹여지고 보호되기 때문이다. 선은 각자의 나라의 필요에 부응해
사랑으로부터 실시되어야 한다. 간략히 말해 나라의 지탱 유지와
나라 안의 사람들의 시민적 영적 생활에 관심을 맞추어 실시되어야 할 것이다는 말이다. 자기 나라를 사랑하는 자, 자기 나라에 유용한 도움을 기꺼이 제공하려 할 때, 그는 나라를 향해 선을 행하는 것이 된다. 그가 저 세상에 올 때, 그는 주님의 나라를 사랑한다. 그 이유가 거기서의 그의 나라는 주님의 왕국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주님의 왕국을 사랑하는 자는 주님을 사랑한다. 그 이유가 주님은 그분의 왕국에서 모든 것 중의 모든 것이 되시기 때문이다.
교회는 각자의 나라 보다 더 큰 이웃이 된다. 그 이유가 교회를 돌보는 사람은 영혼들을 돌보는 것이고, 나라 안에 있는 사람들의 영원한 생명을 보살피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랑으로부터 교회를 사랑하는 자는 누구든지 한 단계 더 높은 수준의 이웃을 사랑하고 있는 셈이다. 그 이유가 천국과 영원으로 이어지는 생명의 행복은 타인을 위해 바래야 하고 뜻해야 하기 때문이다.
주님의 왕국은 한 단계 더 높은 수준의 이웃이다. 그 이유가 주님의 왕국은 선 안에 있는 모든 이들이 천국에서이든 지상에서이든 그 구성원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주님의 왕국은 다양한 품질의 선의 집합, 즉 총체적인 선이다. 그래서 이 선이 사랑되어질 때 선 안에 있는 모든 이도 역시 사랑되어지는 셈이다.
이상 살핀 내용이 이웃에 관한 등급이다. 그리고 이웃을 사랑하는 모든 이들과 더불어 그들의 사랑은 위와 같은 등급에 따라 승강한다.
이 등급은 연속적인 질서로 되어 있다. 이 질서에서 앞서는 것, 또는 보다 높은 것이 낮은 것, 또는 뒤에 있는 것에 우선하여 실시된다. 최고 높은 등급에 주님이 계신다. 그리고 어느 등급이든 각 등급의 목적은 주님이어야 한다. 그러므로 그분은 무엇보다 우선 사랑되어져야 한다. 이로부터 더 알 수 있는 바, 주님을 사랑함은 어떤 방법에서이
든 이웃 사랑과 그 자체 결합하여 있다는 것이다.
흔히 하는 말, 모든 이 각자는 자신에게 이웃이다는 것, 그러므로 모든 이 각자는 자신을 우선 돌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어쨌든 선행에 관한 교리는 이것을 어떻게 이해해야하는지가 가르치고 있다. 모든 이는 자신과 자신에게 딸린 사람들의 필요한 것, 즉 음식, 의복 , 주거지, 여타 여러 가지 것들을 준비하여 자신을 돌봄도 게을리해서는 안될 것이다. 이런 것들은 그가 있는 곳에서의 시민 생활의 필수일 것이다. 이 준비는 며칠 뿐 아니라 먼훗날 것 까지도 포함해 이르는 말이다. 만일 그가 위와 같이 자신을 위해 준비하지 않는다면 그는 선행을 실시할 조건에 있을 수도 없다. 그 이유는 자기부터 필요하니까 말이다.
무슨 방법에서이든, 모든 이는 자신에게 이웃이 되어야 한다는 것은 아래 비교 고찰로 나타날런지 모른다. 모든 이는 각자의 육체를 위해 음식과 의복을 준비해야 한다. 건전한 마음이 건강한 몸 안에 있기 위해 몸 관리가 먼저 실시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모든 이는 그의 마음을 위한 마음의 음식을 준비해야 할 것이다. 즉 그는 총명과 지혜에 속하는 것들로 마음에 음식을 공급해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 그는 자기 동료나 사회, 나라, 교회, 주님에게 까지 쓸모 있는 인간의 자격을 갖추어야 할 것이다. 그렇게 하는 사람은 영원한 복지 까지도
돌보는 셈이다. 이로부터 명백한 바, 첫째 일은 목적이 어디에 있는지, 이 목적을 위하여 행동되어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 파악하는 것이다. 그 이유가 모든 것은 목적과 관계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는 집을 지을 때 기초를 먼저 놓는 사람의 경우와도 비슷할 것이다. 기초는 집을 위해 반드시 놓아져야만 한다. 그리고 그 집은 거주를 목적으로 하고 있어야 한다. 자기를 첫 번째 이웃으로 찾는 사람은
자기를 기초로서 간주한 것은 맞으나 목적으로서의 집도, 거주지도 아닌 것과 같다. 그렇지만 거주함이 첫째 목적이자 긍극의 목적 일 때, 기초와 더불은 그 집은 목적을 향한 수단일 따름이다.
목적(end)은 어떻게 모든 사람이 자신을 이웃이라 생각해도 좋은지와 어떻게 자신을 첫째로 돌보아야 하는 가를 설명한다. 만일 누군가의 목적이 타인 보다 더 부자가 되는 것이라면, 재물 자체의 축적만이 목적이라면, 또는 쾌락만을 위하여라면, 타인 위에 최고 실력자가 되는 것이라면, 그의 목적은 악이다. 그러나 만일 누군가의 목적이 자기 동료나 사회, 또는 나라, 교회에 유익하게 쓸 목적으로 재물을 쌓았다면, 공익을 목적으로 공직을 획득했다면, 그는 자기 이웃을 사랑하는 셈이다. 인간을 행동하게 하는 참 목적이 인간을 만든다. 그 이유가 그의 목적이 그의 사랑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모든 이는 그의 첫째요 마지막 째의 목적으로 그가 무엇보다 먼저 사랑한 것을 가지기 때문이다.
이렇게 장황하게 우리는 이웃에 관해 말해보았다. 이제 우리는 이웃을 향한 사랑, 즉 선행(charity)에 관해 말할 것이다.
많은 이들에 의해 생각되어지는 이웃을 향한 사랑은 가난한 자에게
뭔가를 주는 것, 궁핍한 자를 돕는 것, 누구에게나 선행을 실시하는 것이다. 어쨌든 선행은 신중함을 가지고 행동되어야 한다. 그리고 목적을 위하여 선은 선행으로부터 결과되어야 한다. 가난한 악행 자나 악행 자의 필요한 것을 채워준다는 것은 그를 통하여 이웃에게 악을 실시한 셈이 된다. 그가 악한 자에게 제공하는 도움을 통해 그는 악 안에 있음을 그에게 확증시켜 주는 셈이다. 게다가 그에게 타인을 향해 악을 행할 수단을 공급하는 셈이다. 그러나 선한 자에게 도움을 주는 것은 이와는 아주 다르다.
선행은 위의 경우 같이 물질적으로 가난한 자에게 대한 것 보다
훨씬 더 범위가 넓다. 그 이유가 선행은 모든 일에서 올바른 것을
행하는데, 각자의 공직에서 임무를 충실히 행하는데에도 있기 때문이다. 고로 만일 판사가 정의를 위하여 정당하게 판결을 실시했다면, 그는 선행을 실시한 것이다. 만일 그가 죄인을 처벌하고, 순진한 자를 석방한다면, 그는 선행을 실행하고 있다. 그 이유가 그렇게 행함에서 그는 동료들의 시민의 복지를, 나라의 복지를 돌본 셈이다. 진리를 가르치고 선으로 인도하는 성직자는 진리와 선을 위해 선행을 실시하는 것이다. 그러나 자신과 세상을 위해 이러한 것들을 행할 경우 그는 선행을 실시한 것이 아니다. 그 이유는 그가 이웃을 사랑함이 아닌 자신을 사랑함이기 때문이다.
위와 같은 경우는 판사가 아니더라도, 혹은 그가 공직에 있든, 아니 있든 원칙은 동일하다. 고로 자녀와 부모, 부모와 자녀의 관계에서도, 하인과 주인, 주인과 하인의 관계에서도, 또는 신하와 왕, 왕과 신하의 관계에서도 동일한 원칙이 적용된다. 의무의 견지에서 의무에 충실한 것, 정당함의 견지에서 올바름을 고수하는 것, 이 모두가 선행의 실시
이다.
이웃 사랑에 속하는 이런 것들, 즉 선행에 속하는 것들은 위에서 말했던 바대로 모든 사람이 이웃이되 그 이웃을 대접하는 방법은 천차만별이다. 상대적으로 작든, 혹은 크든 사회는 개인 보다 더 높은 등급에 있다. 나라는 사회 보다 더 높다. 주님의 왕국은 나라 보다 더 높다. 주님 자신은 모든 것보다 더 높은 수준에서 이웃이다. 그리고 보편적 의미에서 주님으로부터 진행되는 선은 이웃이다. 결과적으로 성실과 정의가 이웃이다. 그러므로 어떤 종류의 선을 행하든 선을 위해서라면, 성실과 공정함을 위하여 성실하고 정의롭게 행동한다면,
이 사람은 이웃을 사랑하고 선행을 실시하고 있다. 그는 선인 것, 진실인 것, 정의로운 것을 사랑함으로부터 행동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그는 선, 성실, 정의가 들어 있는 사람을 사랑함으로 선행을 실행한다.
그러므로 선행은 내적 애착이고, 이 애착으로부터 인간은 선을 뜻하고 참으로 어떤 댓가도 없이 선을 행한다. 내적 애착으로부터 선을 행하는 이들과 더불어서의 선행은 그가 생각하고 말하고 뜻하고 행하는 모든 것 안에 있다. 선이 자기에게 이웃이 되어 있을 때, 사람이든 천사이든 그의 내면에 관련해 선행이다. 이렇게 선행의 범주는 그 폭이 대단히 넓다.
자아 사랑과 세상 사랑을 목적으로 지닌 이들이 선행 안에 있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들은 선행이 무엇인지 조차 모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들은 인간 안에 있는 천국은 어떤 보상과는 관계없이 선을 이웃에 뜻하고 행할 때, 행복이 있어진다는 것, 천국에 있는 천사들에 속해 있는 선행에 대한 애착 안에는 더 할 수 없는 행복이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이다는 것을 전혀 납득하지 못한다. 그 이유가 그들은 영예와 재물의 결과인 영광으로부터 발생하는 즐거움을 박탈 당하면 자기들에게 남아 있을 기쁨은 더 이상 없을 것이 없을 것이라 믿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런 기쁨이 사라진 후에야 천국의 기쁨은 시작되고 무한하게 넘친다는 것을 그들은 전혀 모른다.

7

신앙
(Faith)

본질적 측면에서 신앙이 무엇인지는 그가 선행이 무엇인지 먼저 알지 않으면 누구도 알 수 없다. 그 이유가 신앙은 선행이 있지 않는 곳에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언제나 선행은 신앙과 하나를 이룬다. 마치 이는 선이 진리와 하나를 이루는 것과 같다. 인간은 사랑하는 것, 즉 그가 귀히 여겨 애지중지하는 것은 당사자의 눈에서는 선이고, 그가 믿는 것 역시 자기 눈에서는 진리이다. 어쨋든 선과 진리의 합일이 있듯, 선행과 신앙에서도 그와 꼭 같은 합일이 있다는 것은 확실하다. 이 합일에 관한 속성은 제1장의 선과 진리 편에서 이미 상술했다.
선행과 신앙의 합일은 인간과 더불은 의지력과 이해력의 합일과 동일하다. 그 이유가 이 두 능력이 선과 진리를 받기 때문이다. 즉 의지력은 선을 받고, 이해력은 진리를 받는다. 마찬가지로 이 두 능력들은 선행과 신앙을 받는다. 그 이유가 선은 선행에 속하고, 진리는 신앙에 속하기 때문이다. 선행과 신앙이 사람과 더불어 있다는 것, 그리고 그것들이 자기 안에 있다는 것을 모든 사람은 눈치채고 있다. 그리고 그것들이 자기와 더불어 있고, 자기 안에 있기에 그것들은 그의 의지력과 이해력, 그 외에 어느 곳에도 있지 않다. 그 이유가
인간의 생명 전체가 이 능력 안에 있고, 그것들로부터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인간은 기억들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단지 바깥뜰에 불과하여 거기에는 의지력과 이해력 안으로 이제 막 들어가려고 하는 것들이 수집되어 있다. 이로부터 명백한 바, 신앙과 선행의 합일은 의지력과 이해력의 합일과 똑같다는 점이다. 이 합일에 관한 속성은 의지력과 이해력 편에서 이미 상술했다.
인간이 자기가 알고 지각한 것을 뜻할 때, 선행은 사람 안에서 신앙과 결합되어 있는다. 뜻함은 선행에 속하고, 앎과 지각함은 신앙에 속한다. 인간이 자기가 알고 지각한 것을 뜻하고 사랑할 때 신앙은 사람 안으로 들어가고 그의 것이 되어간다. 그러나 한 동안 그것은 사람 밖에 있다.
신앙이 영적이지 않으면, 그 신앙은 인간과 더불어 신앙이 아니다. 그리고 신앙이 그의 사랑의 신하가 되지 않으면 신앙은 영적으로 되지 않는다. 그가 진리와 선을 살아내는 것을 사랑할 때, 즉 말씀에서 명령한 일련의 것들에 따라 사는 것을 사랑할 때, 신앙은 인간에게 사랑의 신하가 되어간다.
신앙은 진리가 진리이기에 진리를 뜻함으로부터 발생하는 진리에 애착함이다. 그리고 진리가 진리이기에 진리를 뜻함은 인간의 영적 평면을 구성한다. 이것은 인간의 자연적 평면과 아주 동떨어져 있다. 인간의 자연적 평면은 진리가 진리이기에 진리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적 영예나 명성과 이득을 위하여 진리를 뜻할 뿐이다. 이와 같은
것들로부터 추상적으로 진리는 영적 평면을 구성하는데, 그 이유는 이것이 신성으로부터 이기 때문에서 이다. 신성으로부터 진행하는 것은 영적 평면이다. 그리고 이것은 사랑을 통하여 인간에게 결합되어진다. 그 이유가 사랑은 영적 결합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많은 것을 알고 생각하고 이해할런지 모른다. 그러나 자기 사랑에 일치하지 않는 것은 스스로 묵상할 때 자신으로부터 내 던진
다. 육체의 삶 이후 그가 영일 때 역시 마찬가지로 내 던진다. 그 이유가 인간의 사랑 안으로 들어간 것 만이 그의 영 안에 남기 때문에서 이다. 그 외 나머지는 사후 이상한 것(모르는 것)으로 간주하는데, 그 이유는 그것이 인간의 사랑에 속하지 않은 이유 때문이다. 따라서 집 밖으로 내 던진다. 여기서 ‘영 안에’ 라고 말해졌는데, 그 이유는 사후 인간은 영으로서 살기 때문에서 이다.
태양의 열과 빛의 예를 가지고 선행에 속하는 선과 신앙에 속하는 진리에 관련해 어떠한 관념을 형성해 볼 수 있다. 태양으로부터 생긴 빛이 열과 결합되어 있을 때, 마치 봄철과 여름 같이, 지상의 표면의 모든 것은 싹이 트고 꽃을 피운다. 그러나 빛 안에 열이 없을 때, 지상의 만물은 활기가 없고 죽게 된다. 영적 빛은 신앙의 진리이고 영적 열은 사랑이다. 이를 가지고 교회인을 놓고 어떤 생각을 형성해 볼 수 있다. 즉 그 사람과 더불은 신앙이 선행과 결합되고 있을 경우, 그는 정원이나 낙원 같다. 그러나 그와 더불은 신앙이 선행에 결합되어 있지 않을 경우, 그는 사막이나 눈으로 덮힌 토지 같다.
확신함, 또는 신뢰함은 신앙 측면에 속하고 구원받는데 필수 요소임은 확실하다. 그렇다고 신앙만(faith alone)이 절대 요소일 뿐 선행을 배제한다면 그 확신과 신뢰는 영적이 아닌 자연적 수준의 것일 뿐이다. 영적 확신과 신뢰는 그것의 본질과 생명을 사랑의 선으로부터 끌어낼 뿐 분리되어 홀로 있는 신앙의 진리로부터는 아니다. 이런 신앙의 확신은 죽어 있다. 그러므로 진정한 확신은 악한 생활을 하는 이들에게는 불가능하다. 구원은 아버지와 더불은 주님의 공로의 탓으로 돌려야 할 뿐, 인간 삶의 품질과는 별 상관이 없다는 신앙 논리의
확신은 진리로부터 흘러나온 것이 아니다. 그러나 영적 신앙을 가진 모든 이들은 주님께서 명령하신 삶의 지침을 실행해야 구원되어질
수 있다고 확신하고 있다.
말씀, 즉 교회의 교리가 가르치는 일련의 것들을 믿는데도 그에 따른 삶의 모습은 없을 경우도 겉모양새로는 신앙이 있는 듯 나타난다. 어떤 이의 경우는 자기는 이런 신앙을 통하여 구원되어졌다고 상상조차 하고 있다. 그러나 신앙 한쪽만으로 구원될 자 아무도 없다. 그 이유는 이것은 설득에 의한 신앙이기 때문인데, 아래에서 추가 설명한다.
설득에 의한 신앙, 이것은 말씀과 교회의 교리가 믿어지고 사랑되어지는 이유가 진리를 위하여, 그리고 진리에 의거 살기 위하여서가 아닌, 말씀과 교리를 연구해 학식을 쌓아 명성을 날리기 위하여, 소득의 한 수단으로, 여느 직업 같이 생계수단 등등이 목적이 되어 있을 경우 야기된다. 이런 신앙을 가지는 이들은 실지로는 주님을 찾지 않고 천국에 대해서도 궁금한 것이 없고 오로지 현실에 집착해 자신의 이득에 관심을 집중할 뿐이다. 세상의 위대한 것들에 대망을 품은 이들, 그래서 많은 것들에 군침을 흘리는 이들은 세상적인 것에 욕심이 없고 그래서 타인의 것에 탐냄이 없는 이들보다도 교회의 교리가 가르치는 것이 진리이다고 상대방을 설득하는데 훨씬 더 강력할 때가 많다. 그 이유인즉 전자에 속한 무리들은 교회의 교리가 자신들의 목적 달성의 한 수단일 뿐이어서 이다. 목적이 탐욕스러운 만큼, 그
수단들은 더 사랑되고 더욱 믿어지기 마련이다. 이를 본질적으로 들여다 볼 경우 다음과 같다. 위의 인물들이 자아와 세상 사랑의 불 안에 있는 만큼, 그리고 그 불로부터 말하고 설교하고 행동하는 만큼, 그들은 설득의 위 원리 안에 있는 셈이다, 게다가 그들은 어떤
것이 그렇다는 것 외에 아는 것이 없다. 설사 그들이 이러한 사랑의 불에 있지 않는다 해도 그들은 믿는 것마저도 거의 없다. 많은 자들이
전혀 믿지도 않는다. 이로부터 분명한 바, 설득에 의한 신앙은 입술의 신앙이고 심정의 신앙이 아니다. 고로 본질적으로 신앙이 없다고 해야 타당할 것이다.
설득에 의해 신앙 안에 있는 이들은 자기들이 가르치는 것이 진짜인지 가짜인지를 어떤 내적 계발로부터도 알지 못한다. 아니, 이들은 만일 대중이 자기들의 설득력에 먹혀 자기들의 말을 믿는다면 진리이든 거짓이든 상관이 없다. 그 이유가 이들은 진리가 진리이기에 진리를 위한 진리에 애착함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들은 자기들이 확보한 명예나 이권을 빼앗기지 않는다면, 즉각 믿음 마저 내 팽개치는 것이 어렵지 않다. 그 이유가 설득에 의한 신앙은 인간과 더불어 내향적으로 있지 않고, 외향적, 즉 기억에만 머물고 있을 뿐이고 이 기억으로부터 가르침도 도출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고로 이러한 신앙은 그것이 지닌 진리와 더불어 사후 사라진다. 그 이유가 인간 안에서 내향적으로, 즉 선 안에 뿌리를 내렸던 신앙에 속한 것, 고로 그의 삶 속의 실상이 되어갔던 신앙만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설득에 의한 신앙 안에 있던 이들이 마태복음 7장 22, 23절에서 이렇게 서술되고 있다. “그 날에 많은 자들이 나에게, 주여, 주여 우리가 당신의 이름으로 예언했고, 당신의 이름으로 악마를 내 쫓았고, 당신의 이름으로 경이로운 일들을 하지 않았습니까? 라고 말할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들에게 나는 너희들을 결코 알지 못한다고 잘라 말할 것이다.” 그리고 누가복음 13장 26, 27절에서, “그러면 너희는 이렇게 말하기를 시작할 것이다. ‘우리가 당신 앞에서 먹고, 마셨으며 당신께서는 우리의 도로에서 가르치셨습니다’ 그러나 그는
말할 것이다, ‘내가 네게 말하는 바, 나는 네가 어디서 왔는지 모른다. 불법을 일삼는 자들아 나로부터 떠나라.’” 위 인물들은 자기들의 등불에 기름을 지니지 않은 다섯 아둔한 처녀에 의해서도 의미되고 있다. “마침내 다섯 처녀가 와서, 말하기를, 주여, 주여, 우리에게 문을 열어 주십시오. 그러나 그분은 대답하여 말하셨다, 참으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너희를 모른다.” (마태 25:11, 12) 등불 안에 있는 기름은 신앙 안에 있는 사랑으로부터의 선을 의미한다.

8

경건함
(Piety)

많은 이들은 영적인 삶, 즉 천국으로 인도하는 생활은 경건함에, 바깥쪽 거룩함에, 세상을 단념함에 있다고 믿는다. 하지만 선행과 동떨어진 경건함, 내향의 거룩함을 제외한 외향의 거룩함, 세상에서의 일반적 생활을 별도의 문제로 치부한 세상을 단념함은 영적 삶의 구성요소가 아니다. 선행으로부터 흐르는 경건함. 내적 거룩함이 풍겨내는 외향의 거룩함. 세상과 짝을 이루는 세상적인 것을 단념함이 영적 삶의 구성요소라 말할 수 있다.
경건함은 신앙심 깊게 생각하고, 말함에 존재하고 있다. 주도면밀하게 기도함에도 있다. 겸손을 가지고 처신하는데에도 있다. 교회에 출석하는데도 있다. 그리고 교회의 설교를 독실하게 경청하는 데에도 있다. 성찬에 자주 참가하는데에도 있다. 신성한 예배에 참석하듯 교회의 의식도 같은 수준에서 참석하는데에도 있다. 그러나 선행의 삶은 이웃에 선을 뜻하고 행하는데에 있다. 그리고 정당하고 공정한 것의 원리로부터 행동함 안에, 그리고 선하고 참된 것을 모든 일에서, 모든 업무에서 실행함에 있다. 한마디로 선행의 삶은 홍익인간을 목표로 공익을 도모하는데 있다. 신성한 예배는 일차적으로 선행의 삶 안에, 이차적으로 경건함에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과
저것을 떼어놓는 사람, 즉 경건한 생활은 하면서 선행의 삶은 뒷전에 머물게 하는 사람은 하느님을 예배하는 것이 아니다. 그가 하느님을 생각하고 있는 것은 맞는 얘기인 것 같지만 하느님으로부터 생각하고 있지는 않다. 오히려 자신으로부터 생각할 뿐이다. 그 이유가 그는 끊임없이 자신에 관해서 골몰할 뿐 이웃에 대하여는 고민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가 이웃을 생각하고 있다면, 그가 이웃의 품질과 꼭 같지 않는 이상, 그는 자기와 관련을 맺지 않는다. 또한 그는 천국을 보상 차원에서 생각한다. 이런 이유로 그의 마음 안에는 공적에 관한 생각이 있다. 또한 자아 사랑 뿐 아니라 선용을 경멸하거나 무시하기 까지 한다. 이웃에 관한 것도 예외일 리 없다. 이제 그는 자신은 죄없음이 되었다는 의식 안에서 신앙을 지닌다. 이상으로부터 나타날런지 모르는 것은 선행의 삶으로부터 분리된 경건한 생활은 신성한 예배에 있어야 하는 영적인 삶이 아니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마태복음 6장 7, 8절을 읽어보자.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해야 들으실 줄 생각한다. 그러므로 그들을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느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신다.”
바깥쪽 거룩함 역시 경건함과 같다. 그러나 내적 부분이 거룩하지 않으면 인간과 더불은 이 거룩함은 거룩하지 않다. 그 이유가 인간의 외적 부분의 품질은 그의 내적 부분의 품질에 따라 있어지기 때문이다, 전자는 후자로부터 생겨난다. 마치 행동이 그의 영으로부터 발생하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바깥쪽 거룩함은 내적 거룩함에서 분리될 경우 자연적일 뿐, 영적이지 않다. 이런 이유로 자연적 거룩함은 선한 자에게 있는 만큼 사악한 자에게도 존재한다. 그리고 예배 전체를 이런 외적 의식에 두는 이들의 예배는 텅빈 예배,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이 결여되어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선들과 진리들은 인간이 알아야하고 믿어져야하며 사랑되어야하는 참으로 거룩한 것들이다. 그 이유는 이것들은 신성으로부터 있고 신성은 그것들 안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내향의 거룩함은 선과 진리를 사랑함 안에 있는데, 그 이유는 선과 진리는 선이고 진리이기 때문, 그리고 내향의 거룩함은 정의와 성실함 안에 있는데, 그 이유는 그것이 정의와 성실이기 때문이다. 인간이 위 같은 태도에서 위의 것을 사랑하는 만큼, 그 자신, 그의 예배는 영적이다. 그 이유는 그가 그것들을 알려하고 뜻하고 그것들을 행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위와 같은 태도에서 사랑하지 않는 만큼, 그와 그의 예배는 자연적이다. 그리고 그만큼 그는 알려하지 않고 행하지도 않는다. 내적 예배로부터 분리된 외적 예배는 심장과 분리된 호흡이나 비슷할 것이다. 그러나 내적 예배로부터 흐르는 외적 예배는 심장과 긴밀히 결합된 호흡작용과 비슷하다.
세상을 단념함의 경우를 살펴보자. 많은 이들에 의해 믿어진 바, 세상을 포기함, 그리고 육 안에서가 아닌 영 안에서 생활함은 재물이나 명예 같은 세상적인 것들을 내 던지는데 있다고 한다. 하여, 꾸준하게 이리저리 배회하고, 하느님, 구원, 영원한 삶에 관해 경건히 묵상한다. 그리고 자신의 삶을 기도하면서, 말씀을 읽으면서, 경건한 책들을 많이 읽고, 참회도 거르지 않는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세상을 단념함이 뜻하는 바가 아니다. 실지로 세상을 단념함은 하느님을 사랑함과 이웃을 사랑함을 뜻한다. 그리고 사람이 그분의 계명들에 따라 살 때 하느님은 사랑받아진다. 인간이 공익(uses)을 수행할 때 이웃이 사랑되어진다. 그러므로 인간이 천국의 생명을 받기 위하여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은 그가 세상 업무나 다양한 의무들을 이행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세상의 일들로부터 격리된 삶은 생각 속의 삶이고,
사랑과 선행의 삶으로부터 분리된 신앙 속의 삶이다. 이런 삶 안에서는 선을 뜻하고 이웃에게 선을 행함은 사멸한다. 이렇게 후자가 사멸할 때, 영적 생명은 기초없는 집 같아 점차 가라앉고, 균열이 생기며 비틀거리다 무너져 내린다.
주님을 예배한다는 것은 선을 행하는 것임은 주님의 아래 말씀으로부터 분명할 것이다. “그러므로 내 말들을 듣고 그것들을 행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나는 그를 바위 위에 자기 집을 지은 신중한 사람에게 비유할 것이다. 그러나 내 말들을 듣고, 그것들을 행하지 않는 사람을 나는 모래 위에 자기 집을 지은 어리석은 사람에게 비유할 것이다; 또는 어떤 기초도 없이 지면 위에 짓는 자에 비유할 것이다.”
경건한 생활이 선행의 삶에 결합되어 있는 한, 경건한 생활은 쓸모가 있고, 주님에 의해 받아진다는 것은 명백하다. 그 이유가 선행의 삶이 제1순위의 삶이고, 이 삶이 경건한 삶의 품질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경건한 생활이 내향의 거룩함으로부터 진행하는 한, 바깥쪽 경건함도 주님에 의해 받아지고 쓸모 있다. 그 이유가 내향의 거룩함이 경건함의 품질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세상의 포기가 쓸모 있고 주님에 의해 받아지는 것은 세상의 포기가 세상 안에서 일을 수행하는 경우이다. 그 이유가 세상은 자아 사랑과 세상 사랑을 치워내는 이들에 의해 포기되어진다. 그리고 어느 직책에서 이든, 어느 사업을 하든, 자기에게 할당된 모든 일에서 내면으로부터 정의롭게, 성실하게 실시하는 이들에 의해 포기되어진다. 이 근원은 그가 올바르게, 신실하게, 정의롭게 행동할 때. 그 사람의 생명 안에 주재한다. 그 이유는 이것이 신성한 법들에 일치하기 때문이다.

9

양심
(Conscience)

양심은 특정한 종교를 자신 안에서 내향적으로 받아 들임에 따라 그 종교로부터 인간에게 형성되어진다.
교회인과 더불은 양심은 말씀으로부터 신앙 속의 진리들을 통하여, 또는 말씀으로부터 파생된 교리로부터 심정에 이것들을 받아들임에 따라 형성되어진다. 인간이 신앙 속의 진리들에 친숙해지고, 그것들을 납득하고, 후에 그것을 뜻하고 행동할 때, 그는 양심을 받는다. 심정에 받아들임은 의지에 받음을 뜻한다. 그 이유가 인간의 의지는 소위 심정(heart)이라 불리기 때문이다. 그런고로 양심을 가지는 이들을 두고 흔히 하는 말은, 그들이 말하는 것은 심정으로부터 이다 든가, 그들은 심정으로부터 행동한다 하고 말한다. 그들 역시 나뉘지 않은 마음을 가지고 있다. 그 이유가 그들은 자기들이 이해한 것에 따라 행동하고 그것이 선과 진리이다고 믿기 때문이다.
한층 더 완전한 양심은 신앙 속의 진리들 안에서 다른 사람들보다 더 계발된 이들과 더불어, 그리고 확실히 지각함에서 다른 사람들을 능가하는 이들은 상대적으로 덜 계발되거나 불분명하게 지각하는 이들에 비해 가능성이 더 크다.
인간의 진짜 영적 생명은 진정한 양심 안에 주재한다. 그 이유가 선행과 결합된 신앙이 양심 안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런 인물
이 양심으로부터 행동한다는 것은 자기 자신의 영적 생명으로부터 행동한다는 것을 뜻한다. 그리고 양심에 반대되어 행동한다는 것은 자기의 참 생명에 반대되어 행동하고 있다를 뜻한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인물이 양심에 일치하여 행동할 때, 그는 내적 복됨 안에, 평화의 고요함 안에 있는다. 그리고 그가 양심에 거스르게 행동할 때, 그는 불안함 속에, 고통 속에 있는다. 이 고통은 소위 양심을 갉아먹는 고통이라 부른다.
인간은 선인 것으로부터의 양심, 올바른 것으로부터의 양심을 가지고 있다. 선인 것으로부터의 양심은 내적 인간의 양심이고, 올바른 것으로부터의 양심은 외적 인간의 양심이다. 선인 것으로부터의 양심은 내적 애착으로부터 신앙의 명령들에 따라 행동하는데 있다; 그러나 올바른 것으로부터의 양심은 외적 애착으로부터 시민적이고 도덕적인 법들에 따라 행동하는데 있다. 선인 것으로부터의 양심을 가지는 이들은 올바른 것으로부터의 양심 역시 지니고 있다. 그러나 올바른 것으로부터서만 양심을 가지는 이들은 선인 것으로부터의 양심을 받을 능력을 소유하고 있다. 그래서 이들 역시 훈육 받음을 통해 그것을 받는다.
이웃을 향한 선행 안에 있는 이들과 더불은 양심은 진리로부터의 신앙을 통하여 형성되는 바, 이들은 진리로부터의 양심을 가진다. 그러나 주님을 사랑함 안에 있는 이들과 더불은 양심은 진리를 사랑함을 통하여 형성되어진다. 후자의 양심은 더 높은 질서 안에 있고, 선으로부터 진리를 지각함이라 불리워진다. 진리로부터 양심을 가지는 이들은 주님의 영적 왕국으로부터 이다. 그러나 지각이라 불리는 더 높은 양심을 가지는 이들은 주님의 천적 왕국으로부터 이다.
이 문단에서는 양심이 무엇인지를 예증하는 보기를 들어 보자.
만일 어떤 사람이 다른 누군가의 물건을 소유했다면, 그런데 이 사실을 눈치챈 사람이 없을 경우, 그리하여 법 위반이라는 공포도 염려할 필요가 없고, 들킬 경우 명예나 명성이 실추될 걱정을 놓아도 되는 상황이었다고 가정해 보자. 그런데도 이 사람이 그 취득물은 자신의 소유가 아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원 주인의 것으로 되돌려 놓는다면, 그는 양심을 가진 것이다. 그는 선인 것을 위하여 선을 행했고, 정의를 위하여 정당한 것을 실천했기 때문이다. 한가지 더 예를 열거해 보자. 만일 어떤 사람이 공직 자리를 두고 누군가와 경쟁할 때, 상대방이 자신에 비해 그 공직 업무에 더 합당하다 판단될 경우, 그가 나라의 복지 향상을 위해 상대에게 자리를 양보한다면, 그는 선한 양심을 가진 것이다.
이상으로부터 양심이 없는 이들에 관한 것도 추측 가능하리라 생각된다. 양심을 지닌 이들의 거꾸로가 이에 해당된다. 즉 자신의 이권을 확보하려고 부정한 것을 정당한 것인 냥, 악한 것을 선인 냥 위장하는 이들은 양심이 없다. 이런 자들은 양심이 무엇인지조차 모른다. 그리고 만일 이들에게 양심이 무엇인지 조금이라도 가르치려들면, 그 말을 믿지도 않을 뿐더러 알려고 하지도 않는다. 이런 속성을 지닌 이들은 자신들과 세상 것을 위하여 집중할 뿐이다.
이 세상에서 양심을 받지 못한 이들은 저 세상에서도 양심을 받을 수 없다. 그러므로 그들이 구원될 수 없다. 그 이유인 즉, 이들은 천국이 놓여질 평면, 즉 천국을 통하여 주님이 흘러들고, 이 흘러듬을 통하여 그분이 역사를 펼치실 평면, 그리하여 그분 자신에게 끌어당기는 평면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양심은 천국이 유입됨을 위한 그릇이요 평면이기 때문이다.

10

자유
(Freedom)

모든 자유는 사랑에 속한다. 그 이유가 인간은 자기가 사랑하는 것을 자유로이 행동에 기꺼이 옮기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모든 자유는 의지에도 속한다. 그 이유가 인간은 자기가 사랑하는 것을 뜻하기 때문에서 이다. 이상으로부터 자유가 무엇인지 드러났을 것이다. 즉 자유는 사랑, 의지, 고로 인간의 생명에 속하는 것이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인간이 자유함으로부터 행동한 것은 마치 그것이 자아로부터 온 듯 당사자에게 나타난다.
자유함에서 악을 행함도 비록 그것이 노예 신분이다 해도 자유 같이 나타난다. 그 이유는 그것이 자아와 세상 사랑으로부터 발생했기 때문이다. 이 사랑들은 지옥으로부터 이다. 사후 이와 같은 자유는 실제로 노예 같이 되어 있다. 그 이유가 이 세상에서 이런 자유 속에 있어 왔던 이들이 사후 지옥에서 천한 노예가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유로부터 선을 행하는 이들은 자유 자체의 구성요소가 되어 있다. 그 이유는 이러한 자유는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부터 진행되기 때문이다. 이 사랑들은 천국 사랑들이다. 이 자유는 사후에도 남아 진짜 자유가 된다. 이것을 소유해왔던 사람은 아래 구절의 “집의 아들” 같이 천국에서 되어간다. 이렇게 주님께서 가르치신다, “죄를 범하는 자는 누구든지 죄에 묶인 종이다. 죄에 묶인 종은 집에 영원히
거주하지 못한다. 아들은 영원히 집에 머문다. 그러므로 만일 아들이 너를 자유하게 만든다면, 너희는 실로 자유할 것이다.” (요한복음8:34-36) 모든 선은 주님으로부터, 모든 악은 지옥으로부터 있기에, 자유는 주님에 의하여 인도받음에, 묶임은 지옥에 의하여 인도됨에 있다고 당연히 귀결된다.
인간은 악과 거짓을 생각하는 자유, 그리고 법의 제한이 없는 한, 악과 거짓들을 행할 자유를 가진다. 이것은 인간으로 개혁되어질 능력을 갖게 한다. 그 이유가 선들과 진리들이 그의 사랑 안에, 그의 의지 안에 이식되어 그의 생명의 부분이 되어가야 하는데, 이것은 그가 악과 거짓, 선과 진리 모두를 생각할 자유를 갖지 않으면 가능치 않기 때문이다. 이 자유는 주님에 의해 만인에게 수여되어 있다. 그래서 그가 악과 거짓을 거절하고 선과 진리를 생각하는 만큼에서 주님께서는 선과 진리들을 그의 사랑 안에, 그의 의지 안에, 결과적으로 그의 생명 안에 이식해 주시어 그를 개혁한다. 자유함에서 뿌려진 것은 남는다. 그러나 강제적으로 뿌려진 것은 남지 않는다. 그 이유는 강제적인 것은 그 사람의 의지로부터가 아닌 제3자의 의지로부터 뿌려졌다고 해야 마땅하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역시, 자유로부터의 예배는 주님을 기쁘시게 하나 강제성이 동원된 예배는 그렇지 않다. 그 이유가 자유로부터의 예배는 사랑으로부터의 예배이나 강제성을 띤 예배는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비록 선을 행하는 자유와 악을 행하는 자유가 바깥 모양새로는 비슷한 듯 나타날지 모르나 이 둘은 완전히 다르다. 마치 천국이 지옥과 다른 것과 비교될 수 있을 것이다. 선을 행하는 자유는 천국으로부터인 바, 천국의 자유라 불리운다. 그러나 악을 행하는 자유는 지옥으로부터인 바, 지옥의 자유라 불리운다. 따라서 인간이 이쪽
편에 있는 만큼에서 그는 저쪽 편에 있지 않는 셈이다. 그 이유가 아무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기 때문이다. (마태 6:24) 위 사항을 이렇게 바꾸어 생각해 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 자기들을 즐겁게 하는 악을 뜻하고 거짓을 생각하는 것이 허용되지 않을 경우, 지옥의 자유에 있는 이들에 의해서는 이것이 노예 신세요 강제 당함이라고 믿어진다. 한편 천국의 자유에 있는 이들은 악을 뜻하고 거짓을 생각하게 하면 몸을 부들부들 떨고, 그렇게 하도록 밀어붙이면 그들은 고문당하는 느낌을 받고야 만다.
자유로부터 행동함이 인간에게는 자아로부터인 듯 나타나는바, 천국의 자유는 인간의 천국적 자아(Self, Proprium), 지옥의 자유는 인간의 지옥적 자아라 불린다. 인간은 지옥적 자아로부터 태어나는데, 이 자아는 악이다. 그러나 개혁됨을 수단으로 천국적 자아가 인간에게 소개되고, 이 자아는 선이다.
이상으로부터 미루어 선택의 자유가 의미하는 것도 알고 있을런지 모른다. 이것은 선택함으로, 즉 의지로 선을 행함을 뜻한다. 주님에 의해 인도되는 이들은 이 자유 안에 있는다. 주님에 의해 인도되는 이들은 선과 진리를 위하여 선과 진리를 사랑한다.
우리는 자기가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고, 듣고, 볼 때 자신이 느끼는 즐거움으로부터 자신의 자유의 품질을 알런지 모른다. 그 이유가 모든 즐거움은 사랑에 속하기 때문이다.

11

공적
(Merit)

공적을 확보할 목적으로 선을 행하는 사람은 선을 사랑함으로부터 선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 보상을 사랑하여 선을 행하는 것이다. 그 이유가 공적을 획득하기를 바라는 사람은 보상받는 것 역시 기대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행하는 사람은 자기들의 기쁨을 보상받음에서 발견하고 선 안에서 발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것은 영적이지 않고 자연적이다.
선 자체인 선을 행함은 선을 사랑함으로부터 흘러야 한다. 고로 이는 선을 위하여 선을 행하는 것이다. 이 사랑 안에 있는 이들은 공적 같은 말은 들으려조차 하지 않는다. 그 이유가 그들은 행함을 사랑함 안에 있고, 행함 안에서 만족을 지각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거꾸로 만일 그들이 공적을 생각하거나 자기들이 행한 어떤 것이 자기를 위하여서 인듯 여겨지면 대단한 슬픔에 빠지고야 만다. 이것은 친구 관계를 위하여 친구에게 선을 행하는 경우나, 또는 형제 관계를 위해 형제에게, 아내나 아이를 위하여 아내와 아이에게, 나라를 위하여 나라에 선을 실시하는 경우나 비슷할 것이다. 이들은 사랑으로부터 선을 행하고 있다. 올바르게 생각하고 그것을 고집하는 이들은 자신을 위하여서가 아닌 타인을 위하여서 이다.
보상을 기대하고 선을 행하는 이들은 주님으로부터 선을 행하는 것이 아니고, 자신으로부터 이다. 그 이유가 그들의 일차적 관심은
자신들, 자신에게 선인 것에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웃에 대한 선, 동료에 대한 선, 사회나 나라, 교회에 대한 선은 그들에게는 자기들 목적을 위한 수단들일 뿐이다. 이런 근거에서 공적의 선 안에는 자아 사랑과 세상 사랑의 선이 잠복하고 있다. 이 후자의 선은 인간으로부터 이고 주님으로부터가 아니다. 그리고 인간으로부터 있는 모든 선은 선이 아니다. 자아와 세상 사랑이 이 안에 잠복하는 정도에 비례해 그것은 악이다.
순수한 선행, 순수한 신앙은 공적이라는 단어 조차 모른다. 그 이유가 선행으로부터의 즐거움은 선 자체이고, 신앙으로부터의 즐거움은 진리 자체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와같은 선행과 신앙 안에 있는 이들은 공적에 대한 생각이 결여된 선이 무엇인지 알고 있으나 선행과 신앙 안에 있지 않은 이들은 그렇지 않다.
선은 보상을 기대하여 행해져서는 안됨을 주님 자신께서 이렇게 가르치신다. “만일 네가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사랑한다면, 무슨 감사함이 네게 오겠느냐? 죄인 역시 이런 것은 행하고 있다. 그러나 오히려 네 원수를 사랑해라, 그리고 선을 행하라, 그리고 빌려주되, 다시 아무것도 희망하지마라. 너희 보상은 클 것이다. 그리고 너희는 최고 높으신 분의 아들일 것이다.” (누가 6:32-35) 자신으로부터의 선인 선을 행할 자는 아무도 없다는 것을 주님께서 가르치신다. “사람은 천국으로부터 그에게 주어지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받을 수 없다.”(요한3:27) 그리고 예수께서 말하셨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들이다: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않으면 가지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듯, 내 안에 거하지 않으면 더 이상 너희는 열매 맺지 못한다. 내 안에 거하라, 나는 너희 안에 거하리라. 그러면 열매를 많이 맺는다; 나를 떠나서 너희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요한
15:4-8).
모든 선과 진리는 주님으로부터 이고, 인간으로부터 서는 아니기에, 그리고 인간으로부터 오는 선은 선이 아닌 바, 공적은 어떤 인간에게도 속한 것이 아니고 주님 만에 속한다는 귀결이 뒤따른다. 주님의 공적은 그분 자신의 힘에서 인류를 구하셨다는 데에, 그리고 그분은 그분으로부터 선을 행하는 이들을 구원하신다에 있다. 이를 바탕으로 말씀에서, 주님의 공적과 정의 탓에 자신은 구원되고 있다는 사람은 정당한 사람이고, 구원받는 것이 자아에서 비롯된 공적과 정의 탓이라고 하는 자는 부정한 사람이라 부르고 있다.
보상을 기대하지 않고 선을 행함을 사랑함 안에 거주하는 참 즐거움은 영원히 남는 보상이다. 그 이유가 천국과 영원한 행복은 주님에 의해 이 선 안으로 스며들기 때문이다.
누군가가 천국으로 들어가려면 선은 실행되어야 한다는 것, 선을 실행한 사람들이 천국 안으로 들어온다는 것을 생각하고 믿는 것은 보상을 목적으로 중요시한다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일에서 공적을 내세운다는 것도 뜻하지 않는다. 그 이유가 주님으로부터 선을 실시하는 이들은 위와같이 생각하고 믿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하고 믿고 행동하기는 하되, 선을 위해 선을 사랑하지 않는 이들은 목적의 자리에 보상을 놓고 중시하고 자기들의 일 안에 공적을 놓는다.

12

회개와 죄의 용서
((Repentance, and the Remission of Sins)

구원되기를 바라는 사람은 자기 죄들을 고백하고 회개를 실행해야 한다.
자신의 죄들을 고백함이란 악을 알고 있음, 자기 자아 안에 있는 악들을 봄, 그 악을 인정함, 자아가 죄있음을 선포함, 그래서 자아를 규탄함을 뜻한다. 이것이 하느님 앞에서 행해질 때, 죄들을 고백함이있어진다.
남들이 통상 하는 방식으로 자기도 죄인이다고 인정하고, 모든 악들에서 자신에게 죄있다고 선포하는 사람, 그런데 아직 자신을 검사하지 않고 있는 사람, 즉 자기 악들을 보았고 그래서 고백까지 했음에도 회개의 고백이 없는 사람, 이와 같은 사람은 자신에게 자기 악들을 숙지시키지 않았기에, 그는 이전에 살았던 그대로 사후에도 살아간다.
선행과 신앙의 생활을 이끄는 사람은 매일 회개를 실시한다. 그는 자신과 더불어 있는 악들이 무엇인지 곰곰이 따져본다. 그는 그 악들을 인정하고 그것에 맞서려 애쓴다. 그래서 주님께 도움을 구한다. 그 이유는 인간은 자신 스스로일 경우 꾸준히 타락할 수 밖에 없고, 그러나 주님에 의해 그는 꾸준히 들어올려지고 선으로 인도되어지기 때문이다. 위와 같은 모습이 선 안에 있는 상태이다. 그러나 악 안에 있는 이들은 꾸준히 타락한다. 그리고 이들도 주님에 의해 꾸준히 들어 올려진다. 그럼에도 그들은 엉뚱한데로 인도되어 아주 비통한
악들에 빠져들고 만다.
회개를 실행할 의도로 자신을 점검하는 사람은 그의 생각들, 그의 의지 속의 의도들을 조사해야 한다. 즉 자신의 명성이나 이득에서 손실의 위험이 없을 경우, 그런 상황에서도 자기가 무엇을 행해야 하는지를 검사해야 한다는 말이다. 인간의 악들은 그 사람의 생각들과 의도들 안에 있기 때문이다; 인간이 육체와 더불어 행하는 악들은 모두 거기로부터 있다. 따라서 자기의 생각들과 의지 속의 악들을 조사하지 않는 사람은 회개를 실행할 수 없다. 그는 사후에도 세상에서 했던 것과 꼭같게 생각하고 뜻한다. 악을 뜻함이 악을 행함인 바, 자신 스스로가 자신을 사전에 검증해야 한다는 말이다.
생활로가 아닌 입술로의 회개는 회개가 아니다. 죄들은 입술로 고백했다고 청산되지 않고, 생활로 회개할 때 청산이 가능해진다. 참으로 죄들은 주님에 의해 꾸준히 용서되고 있다. 그 이유는 주님은 자비 자체이시기 때문이다. 허지만 죄들은 인간에게 너무나 착 달라붙어 있는데, 인간은 그것들이 청산되었다고 생각할런지 모른다. 악들은 진정한 신앙의 가르침들에 의한 삶 외의 수단으로는 당사자로부터 제거되지 않는다. 인간이 진정한 가르침에 의해 사는 만큼에서 그의 죄는 옮겨져 간다. 그리고 그것들이 옮겨진 만큼, 그것들은 삭제되어져 간다.
죄들이 청산되었을 때, 죄들은 닦아내지거나 물로 오물을 씻듯 되어진다고 생각했다. 어찌됐든 죄들은 닦아지는게 아니라 옮겨진다. 즉 그가 주님에 의해 선 안에서 보존될 때, 그것들은 그 사람으로부터 억제되고 있다는 말이다. 인간이 선 안에 보존될 때, 죄들은 그에게 마치 죄없는 듯, 그리하여 씻어내 없는 듯 나타난다. 인간은 개혁된 만큼에서 선 안에 보존되어질 수 있다. 어떻게 인간이 개혁되는가는
다음 장인 거듭남 편에서 보여질 것이다. 죄들이 이 외 다른 방식에서 청산된다고 상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누구의 설득에서 사기당한 것이나 다름 없다.
죄들이 용서되었다는 표시들, 즉 옮겨졌다는 표시들은 다음과 같다. 하느님을 위하여 하느님을 예배함에서 즐거움이 지각된다. 이웃을 위하여 이웃을 섬김 안에 있다. 그리고 선을 위하여 선을 행함 안에 있다. 그리고 진리를 위하여 진리를 말함 안에 있다. 선행과 신앙에 속하는 어떤 것을 수단으로 공적을 거두어 들이는 짓은 마냥 싫어진다. 악들이 금하여지고 예를 들면, 적개심, 미워함, 복수, 간음들, 그리고 그것들의 의도들에 함께 악들로부터의 생각들을 아주 싫어한다. 위와 반대로 용서되지 않았다는 표시, 즉 옮겨지지 아니했다는 표시는 다음과 같다. 하느님을 위하여 하느님이 예배되지 않는다. 이웃을 위하여 이웃을 섬기지 않는다. 선과 진리를 위하여 선이 행해지지 않는다. 진리가 말해지지 않는다. 그러나 자아와 세상을 위하여서만 말해지고 행동한다. 자신의 행동에 의해 공적을 모아들이는 것에 느낌이 좋다. 적개심, 미움, 복수, 간음질 같은 악들이 지각될 때 불유쾌한 것이 전혀 없다. 그리고 이런 악들로부터 사람들은 제한 없는 자유로 그것들을 생각한다.
자유의 상태에서 실시된 회개는 쓸모가 있다. 그러나 강박 충동의 상태에서 실시되어진 회개는 쓸모가 없다. 강박충동의 상태는 아픔의 상태, 불행으로 마음이 우울한 상태, 죽음이 다가오는 상태. 그리고 더 나아가, 이해력의 사용을 박탈당해 두려운 모든 상태들이다. 이런 강박충동의 상태 아래 있게 되면 악인이라도 회개를 하고 선을 행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위기를 벗어났다 싶으면 악한 인간은 이전에 즐기던 악한 생활로 되돌아 간다. 그러나 선한 사람의 경우는 다르다.
인간이 자신을 검토한 후에, 자기 죄들을 인정했고, 그가 회개를 실시했다면, 그는 선 안에 있으려 꾸준히 노력해야 한다. 그것도 생애 마지막까지 말이다. 그런데 그가 자기의 악한 이전 생활로 거슬러 되돌아가서 이전 삶을 끌어안는다면, 그는 모독의 신하가 되는 것이다. 그 이유는 악이 선과 결합하는 꼴이기 때문이다. 그럴 경우 그의 후자의 상태는 전자의 상태보다 더 나빠지게 된다. 이를 두고 주님께서 가르치신다. “깨끗지 않은 영이 사람으로부터 나갔을 때, 그는 마른 장소를 지나고, 쉴 곳을 찾고, 그것을 발견치 못한다. 그러면 그는 말한다, 나는 내가 나왔던 내 집으로 돌아 갈 것이다: 그리고 그가 왔을 때, 그는 그 집이 텅비고, 청소되어 있고, 수리되어 있음을 발견한다. 그러면 그는 가서 자신과 함께 자기보다 더 악한 일곱 영들을 데리고 와서 안에 들어가 거기 거주한다; 그래서 이 사람의 마지막 상태는 처음 상태 보다 더 나빠지게 된다.” (마태 12:43-45) 모독이 의미하는 것은 다음 편에서 다룰 것이다.

13

거듭남
(Regeneration)

영적 생명을 받지 않는 사람, 즉 주님에 의해 새로이 태어나지 않는 사람은 천국으로 들어 갈 수 없다. 주님께서 이를 가르치신다. “참으로, 참으로 나는 네게 말한다, 사람이 다시 태어나는 것 외에는 그는 하느님의 왕국을 볼 수 없다.” (요한 3:3)
인간은 자기 부모로부터 영적 삶이 아닌 자연적 삶을 살도록 태어나진다. 영적 삶은 무엇보다 먼저 하느님을 사랑함에, 이웃을 자신 같이 사랑함에 있다. 참으로 주님께서 말씀에서 가르치신 신앙의 가르침에 따라 사는데 있다. 자연적 삶은 자아와 세상을 사랑함이 이웃을 사랑함과 하느님을 사랑함 보다도 자신을 더 사랑하는데 있다.
부모로부터 인간 존재 모두는 자아와 세상을 사랑함이라는 악 안에서 태어나진다. 습관을 수단으로 자연적인 것이 되어간 모든 악은 후손에게 전해진다. 즉 부모로부터, 조부모로부터, 그리하여 뒤로뒤로 거슬러 가면 옛 선조로부터 계속적으로 물려 내려온 악들이다. 이러하기에 아래로 건네 준 악들은 규모상 심히 커서 인간 자신의 생명 전체는 악밖에 없게 되었다. 이런 계속적인 악의 갈래들이 깨어지고 변화되는 것은 주님으로부터의 신앙과 선행의 생활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인간은 유전을 수단으로 이어받은 악을 향해 계속적으로 기울고, 그것 안으로 빠져든다. 그리고 이 근원으로부터 그는 악 안에서 자신
을 확증한다. 또한 자신으로부터 악을 더 추가한다. 이런 악들은 영적 생명에 반대되어 있고 파괴적이다. 그러므로 인간이 주님으로부터 새로운 생명을 받지 않으면, 즉 영적 생명을 받지 않으면, 그러므로 그가 새로이 임신되고, 새로이 태어나지 않으면, 그리고 새로이 교육되지 않으면, 즉 그가 새로이 창조되지 않으면, 그는 지옥에 사는 무리에 끼여 있게 된다. 그 이유가 그는 자아와 세상에 속하는 것, 어쩌면 지옥에 있는 이들이 하는 짓 외는 어떤 것도 뜻하거나 생각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새로운 삶에 속하는 것들, 즉 영적 삶에 속하는 것들에 정통해지지 않으면 아무도 거듭나질 수 없다. 새로운 삶, 즉 영적 삶에 속하는 것들은 믿어져야하는 진리들, 행해져야 하는 선들이다. 전자는 신앙에 속하고, 후자는 선행에 속한다. 이런 것들은 누구도 자신으로부터서는 알 수 없다. 그 이유가 인간은 그의 감각들에 부딪치는 것들 만을 납득하기 때문이다. 이런 것들로부터 그는 자연적 발광체라 불리는 빛을 자신을 위해 포획한다. 이를 수단으로 그는 세상과 자신에 속하는 것 만을 볼 뿐, 천국과 하느님에 속하는 것까지 보는 것은 아니다. 그는 이 후자의 것을 계시(밝히 알게 해주심)로부터 배워야만 한다. 예를 들면, 영원으로부터 하느님이신 주님이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세상에 오셨다는 것, 그분은 천국 안에서와 지상 위에서 모든 권능을 가지고 있으시다는 것, 신앙과 선행의 전체, 고로 진리와 선 모두는 그분으로부터 이다는 것, 천국과 지옥이 있다는 것, 그리고 인간은 만일 자기가 선을 행하였으면 천국에서, 악을 행하였다면 지옥에서 영원히 산다는 것, 등등에 관해 배워야 한다는 말이다.
위의 사항 그리고 신앙에 속하는 이 외 더 많은 것들이 거듭나아져갈 사람에게 알려져야 하고 알아야 한다. 그 이유가 이런 것들에 정통해진 사람이어야 그것들을 생각해볼 수 있고, 그래서 그것들을 뜻할 수 있어, 마지막으로 그것들을 실시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해서 그는 새로운 생명, 새 삶을 가질 수 있다. 이와는 달리 그가 주님이 인류의 구세주이시다는 것을 알지 못한 사람일 경우, 그는 그분에 대한 어떤 신앙도 가질 수 없고, 그분을 사랑하지 못하며, 그분을 위하여 선을 실시할 수도 없다. 그리고 모든 선은 주님으로부터 이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그의 구원이 그분으로부터 있다는 것을 생각할 수 없다. 게다가 이런 생각을 뜻해 본다는 것은 더더욱 가능치 않다. 고로 그는 주님으로부터 살 수 없다. 그리고 지옥이 있다는 것, 천국이 있다는 것, 영원한 삶이 있다는 것을 모르는 한 그는 천국의 삶도, 천국을 받기 위해 자신을 정립함 같은 것을 생각하는 것 조차 가능치 않다. 아마 이 외 더 많은 사항의 전체적 윤곽도 이와 비슷하다.
모든 사람은 내적, 외적 인간을 가지고 있다: 내적 인간은 소위 영적 인간이라 불리고, 외적 인간은 소위 자연적 인간이라 불린다. 인간이 거듭나지기 위해서는 위 두 인간 각각은 거듭나야 한다. 거듭나지 않은 사람의 경우, 그의 외적 인간이 통치하고, 그의 내적 인간은 외적 인간을 추종할 뿐이다. 그러나 거듭난 사람의 경우, 내적 인간, 즉 영적 인간이 통치하고, 그의 외적 인간은 내적 인간을 추종한다. 이로부터 분명해지는 바, 인간의 삶의 질서는 출생 때부터 거꾸로 있다는 점이다. 즉 통치해주어야 하는 것이 추종하는 위치에, 추종만 해야 하는 것이 통치하는 위치에 있다는 말이다. 따라서 인간이 구원되려면 이 질서를 거꾸로 해야 한다. 이 거꾸로의 삶은 주님에 의해 거듭남을 통하지 않고서는 결단코 가능치 않다.
내적 인간이 통치하고 외적 인간은 이를 따르기만 하는 것, 또는 이와 반대의 경우가 의미하는 것은 이런 예증으로 살필 수 있을 것이
다. 만일 인간이 자기의 선 전체를 육욕적인 것에, 이권에, 자만에 놓아두고, 그리고 그가 미워함, 복수함에서 즐거움을 느낀다면, 게다가 이런 자기의 모습을 이성으로 합리화하여 내면적으로 확증까지 한다면, 분명 이것은 그의 외적 인간이 통치하고 그의 내적 인간은 복종하는 것이다. 그러나 만일 인간이 그의 선과 즐거움을 선량하게, 진솔하게, 정의롭게 생각하고 뜻함에서 발견한다면, 그리고 이와 같은 태도로 바깥쪽에서도 행동하고 있다면, 분명 그는 그의 내적 인간이 통치하고 외적 인간은 굴종하고 있다.
내적 인간이 주님에 의해 먼저 거듭나지고, 그 후 외적 인간도 거듭난다, 이 후자는 전자에 의해 거듭난다. 그 이유가 신앙과 선행에 속하는 것들을 생각함으로 내적 인간이 거듭나고, 이에 따라 생활함으로 외적 인간이 거듭나기 때문이다. 이를 주님께서 이렇게 가르치신다. “인간이 물과 성령으로 태어나지 않고는 하느님의 왕국에 들어 갈 수 없다.” (요한 3:5) 물은 영적 의미에서 신앙으로부터의 진리를, 성령은 이 진리에 따른 생활을 의미한다.
거듭나고 있는 사람의 내적 인간은 천국 안에 있다, 그리고 그는 거기서 천사들과 더불어 천사로 있고, 사후 그는 이 천사들 무리에 온다. 그리하여 그는 천국에서 살면서 주님을 사랑하며, 이웃을 보살피며, 진리를 이해하며, 선을 즐기며, 복됨을 지각한다.

14

시험
(Temptation)

거듭나아가고 있는 이들만이 영적 시험들을 겪는다. 그 이유는 영적 시험은 선들과 진리들 안에 있는 이들과 더불어 악령에 의해 촉발된 마음의 고통이기 때문이다. 악령들이 거듭나는 이들에게 있는 악들을 흥분시킬 때, 거기서 심통의 느낌이 일어난다. 이 심통은 시험에 속한다. 이 근원을 모르는 사람은 심통이 어디서 오는지 모른다.
악령과 선한 영 둘 다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있다. 악령들은 그 사람의 악들 안에 있고, 선한 영들은 그의 선들 안에 있다. 악령이 가까이 올 때, 이 영들은 그의 악들을 산출한다. 그리고 반대로 선한 영들은 그의 선들을 산출한다. 이로부터 충돌과 전투가 발생하고, 이로부터 인간은 내면의 고통을 경험하는데, 이것이 시험에 의해 의미된다. 이로부터 분명한 바, 시험은 지옥에 의해 야기되고 천국에 의해서가 아니다는 것이다. 이는 하느님은 아무도 시험하시지 않는다는 교회의 신앙과도 일치한다.
내면의 고통의 느낌은 선들과 진리들 안에 있지 않는 이들과도 역시 존재한다. 그러나 이는 자연적 고통이지 영적 고통의 범주는 아니다. 이 두 고통은 이렇게 구별된다. 즉 자연적 고통은 그 대상이 세상적인 것 때문이나 영적 고통은 천국적인 것 때문이다.
선이 악을 지배할 것인지, 악이 선을 지배할 것인지가 시험들 안에
서 경쟁한다. 통치를 바라는 악은 자연적 인간 또는 외적 인간 안에 있고, 선의 경우, 이는 영적 인간, 또는 내적 인간 안에 있다. 만일 악이 우세하다면, 자연적 인간이 통치하고, 선이 우세하다면, 영적 인간이 통치한다.
이 전투들은 말씀으로부터 있는 신앙 속의 진리에 의해 야기되어진다. 이 진리들로부터 인간은 악과 거짓들에 맞서 싸워야 한다. 그가 말씀 외 여느 다른 진리로부터 싸운다면 그는 시험을 정복할 수 없다. 그 이유는 주님은 어느 다른 것 안에 계시지 않기 때문이다. 전투는 신앙 속의 진리들을 수단으로 수행되기 때문에 인간은 그가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을 소유할 때까지, 그리고 그것들을 수단으로 그가 어떤 영적 생명을 획득할 때까지 영적 시험에 들어가는 것이 허락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성년이 되기 전, 인간은 자기 안에 전투 장소를 가지지 않는다.
만일 인간이 굴복하면, 시험 후 그의 상태는 이전 보다 더 악화된다. 그 이유는 악이 선을 압도하는 힘을, 거짓은 진리를 압도하는 힘을 획득하기 때문이다.
오늘날은 신앙이 희귀한데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선행이 신앙 안에 없기 때문 -그 이유는 교회가 그것의 끝에 와 있기 때문 -그러므로 어떤 영적 시험들 안으로 들어가도록 허락된 사람은 많지 않다. 이렇기에 이 시험들이 무엇인지, 시험의 사용은 무엇인지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시험의 용도는 선이 악을 지배하는 힘을, 진리가 거짓을 지배하는 힘을 획득하는데 있다. 더 나아가 시험은 진리들을 확실히 함에, 그리고 진리가 선과 결합함에, 동시에 악들과 거짓들을 흐트러 버림에 사용된다. 영적 시험은 내적 영적 인간을 열리게 하고 영적 인간에 자연적 인간을 복종하게 하는데 사용된다. 동시에 자아 사랑과 세상 사랑을 깨트려버리고, 그 사랑으로부터 튀어나오는 욕망들을 억제하는데 사용된다. 이런 것들이 다 꺼내어진 후 인간은 진리와 선, 거짓과 악이 무엇인지에 관한 계발과 지각을 획득한다. 이것이 인간을 위한 총명과 지혜의 경우이다. 이것은 이 후 날마다 증가한다.
주님 만이 시험 안에 있는 사람을 위해 싸워주신다. 그리고 주님 만이 그를 위해 싸워주시고, 그를 위해 정복해주신다는 것을 그가 믿지 않으면, 그는 외적 시험 만을 수행한다. 그에게 영적 시험은 어떤 유익함도 주지 못한다.

15
세례
(Baptism)

세례는 어떤 인물이 교회 속에 있다는 표시를 위해, 그리고 그가 거듭나지게 된다는 것을 기념하기 위해 제정되어졌다. 그 이유가 세례의 씻음은 거듭남인 영적 씻음 외에 더 다른 것을 의미하지 않기 때문이다.
모든 거듭남은 신앙 속의 진리들을 통하여, 그리고 이 진리에 일치된 생활을 통하여 주님에 의해 결과를 가진다. 그러므로 세례는 어떤 인물이 교회 속에 있다는 사실, 그리고 그는 거듭날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한 증거를 낳는다. 그 이유가 거듭나게 하는 이가 주님이심이 교회에서 인정되어지기 때문, 그리고 교회 안에 신앙 속의 진리들이 있는 말씀이 있기 때문, 이 진리들을 통하여 거듭남은 결과되기 때문이다.
이를 주님께서 이렇게 가르치신다. “사람이 물과 영으로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의 왕국에 들어갈 수 없다.” (요한 3:5) ; 물은 영적 의미에서 말씀으로부터 있는 신앙 속의 진리를 뜻하고, 영은 이 진리에 따른 생활을 뜻한다. 그리고 태어남은 신앙과 생활을 수단으로 거듭나짐이다.
거듭나고 있는 모든 이 각자는 시험들, 즉 악들과 거짓들에 맞선 영적 전투를 실시하는 바, 세례의 물 역시 이와 같은 것을 의미하고 있다.
세례는 위 같은 것들에 대한 표시와 기념물로 존재하기에 삶을 살아보지 않은 유아도 세례를 받게 된다. 이렇지 않다면 성인이 되어 세례를 받아야 마땅할 것이다.
그러므로 세례받은 이들은 세례 의식 자체가 신앙이나 구원을 나누어 주는 것이 아님을 주지하면서, 더 나아가 신앙을 획득하고 거듭나면, 구원될 것임을 증거해야 한다.
하여 이 말씀에 의해 의미된 것을 알게 된다. “믿고 세례받았던 사람은 구원될 것이다. 그러나 믿지 않는 자는 정죄될 것이다.” (마가16:16) 믿는 사람이란 주님을 인정한 사람, 그분으로부터 말씀을 통하여 신성한 진리들을 받는 사람을 의미한다. 그리고 세례를 받은 사람은 이런 진리들을 통하여 주님에 의해 거듭나지고 있는 사람을 의미한다.

16

성찬
(Holy Supper)

성찬은 주님에 의해 제정되었다. 이를 통하여 교회는 천국, 고로 주님과 결합이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성찬은 예배에서 최고로 거룩한 행동이다.
그러나 성찬을 통하여 결합이 어떻게 결과하는지는 말씀의 내적 또는 영적 의미에 관한 어떤 것을 모르는 이들에 의해서는 납득되지 않는다. 그 이유가 이들은 글자의 외적 의미 너머에 있는 의미는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말씀의 내적, 영적인 의미로부터, 몸과 피의 의미, 그리고 빵과 포도주의 의미, 그리고 먹는 것의 의미가 알려진다.
영적 의미에서 주님의 몸, 또는 살, 마찬가지로 빵은 사랑으로부터의 선을 표시한다. 그리고 주님의 피, 그리고 마찬가지로 포도주는 신앙으로부터의 선을 표시한다. 그리고 먹는 것은 자기 것이 됨, 그리고 결합을 표시한다. 사람과 더불어 성찬 의식에 참가중인 천사들은 위의 의미 외에 달리는 이해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천사들은 모든 것을 영적으로 지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랑의 거룩함과 신앙의 거룩함이 천사들로부터, 고로 천국을 통하여 주님으로부터 그 사람 안으로 흐른다. 이렇게 하여 결합이 이루어진다.
이상으로부터 분명한 바, 인간이 주님의 몸인 빵을 먹는 의식에 참가할 때, 그는 주님을 사랑함으로부터의 선을 통하여 그분으로부터 주님과 결합되어진다. 그리고 그가 주님의 피인 포도주를 마시는
의식에 참가할 때, 그는 그분에 대한 신앙으로부터의 선을 통하여 그분으로부터 주님과 결합된다. 그러나 마음 안에 꼭 새겨둘 일은 성찬 예식을 통한 주님과의 결합은 주님을 사랑함으로부터의 선과 주님에 대한 신앙으로부터의 선을 통하여 주님으로부터 있는 이들에게만 거행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사람과 더불어 성찬을 통한 결합이 있다. 그 외 사람들 역시 성찬에 참가하겠지만 결합은 없다.
더 나아가 성찬은 이스라엘 교회 처방에서 제정된 신성한 예배의 전체를 포함하고 아우르고 있다. 그 이유가 번-제물과 희생 제물, 이 안에 이 교회 예배의 제일가는 사항이 있는데, 한 마디 표현으로 “빵”이다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성찬은 위 예배의 요약이다.

17
부활
(Resurrection)

인간은 그의 내적 인간에 관련해서는 그가 죽을 수 없도록 창조되어져 있다. 그 이유가 그는 하느님을 믿을 수 있고, 또한 하느님을 사랑할 수 있기 때문, 그러므로 그는 신앙과 사랑을 수단으로 하느님과 결합할 수 있다. 하느님과 결합함은 영원한 삶을 뜻한다.
내적 인간은 태어나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있다. 그의 외적 인간은 내적 인간을 수단으로 신앙과 사랑에 속하는 것들을 행한다. 내적 부분은 소위 영이라 불리우고, 외적 부분은 몸이라 불리운다. 몸이라 불리는 외적 부분은 자연계에서 사용하기에 적합하다. 이것은 인간이 죽을 때 벗어 던진다. 그러나 영이라 불리는 내적 부분은 영계에서 사용하기에 적합하다. 이것은 죽지 않는다. 만일 당사자가 세상에서 선한 쪽에 있어 왔다면 그의 내적 부분은 선한 영과 천사이다. 그러나 세상에 있는 동안 악한 쪽에 있어 왔다면 그것은 악령이다.
몸이 죽은 후, 인간의 영은 영계에서 인간 형체로, 마치 자연계에서 있던 그대로의 모양으로 나타난다. 또한 그는 자연계에서 했었던 그대로 보고, 듣고, 말하기를 즐긴다. 그리고 그는 자연계에 있었을 때 같이 생각하는 능력, 뜻하는 능력, 행동하는 능력을 부여받는다. 한마디로, 그는 세상에서 입고 있었던 몸 전체를 입고 있지 않다는 것 외에는 각각 그리고 모든 것들에서 사람이다. 그는 죽을 때 세상을 위한 몸을 남기고 다시는 그것을 되찾지 못한다.
삶의 이런 연속이 부활에 의해 의미되고 있다. 사람들은 죽게 되면, 눈에 보이는 온 세상이 멸망하는 때인 마지막 심판 이전에는 일어나지 못한다고 믿고 있다. 이렇게 믿는 이유는 그들이 말씀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서 비롯된다. 그리고 감각적 인간이 몸 안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 그러므로 이것이 다시 생명을 얻지 않으면 인간 전부는 끝장일 것이다고 믿고 있다.
사후 인간의 삶은 그의 사랑의 삶과 그의 신앙의 삶이다. 그러므로 그가 자연계에서 지니고 살아왔었던 그의 사랑과 신앙의 삶이 그대로 그를 기다리고 영원까지 이어진다. 자신만을, 세상의 것만을 위해 자연계의 삶을 소비한 사람은 지옥이 기다리고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하느님을 사랑했고 자신인 듯 이웃을 살핀 이들은 천국의 삶을 이어받는다. 이 후자가 신앙을 지닌 이들이다. 전자는 신앙을 가진 것이 아니다. 천국의 삶은 소위 영원한 삶이라 불린다. 그리고 지옥의 삶은 영적인 죽음이라 부른다.
사후에도 인간은 산다는 것을 말씀이 가르치고 있다. 예를 들면, “하느님은 죽은 자의 하느님이 아니시고 산 자의 하느님이시다는 것” (마태 22:31), “라사로는 사후 천국으로 운반되었으나 부자는 지옥에 던져졌다는 것” (누가 16:22, 23), 그리고 “아브라함, 이삭, 야곱이 천국 안에 있다는 것” (마태 7:11, 12:31, 32, 누가 20:37, 38), 예수께서 강도에게 “오늘 너는 낙원에서 나와 함께 있을 것이다” 라고 말하신 것 (누가 23:43), 등등이다.

18

천국과 지옥
(Heaven and Hell)

인간 영의 생명을 구성하는 두 가지 것이 있다. 사랑과 신앙이다. 사랑은 그의 의지력의 생명을 구성하고, 신앙은 그의 이해력의 생명을 구성한다. 선을 사랑함, 그리고 이 사랑으로부터 진리의 신앙이 천국의 생명을 구성한다. 그리고 악을 사랑함, 이 사랑으로부터 거짓의 신앙은 지옥의 생명을 구성한다.
주님을 사랑함과 이웃을 향한 사랑은 천국의 구성 요소이다. 그리고 신앙 역시 위와 마찬 가지이나 단지 위 두 사랑들로부터 존재하는 한 그러하다. 이 사랑들, 그리고 이 사랑으로부터의 신앙 모두는 주님으로부터 인 바, 주님이 천국을 만들고 계심도 분명할 것이다.
각 사람과 더불은 천국은 그가 주님으로부터 사랑과 신앙을 받음에 따라 있다. 그리고 세상에 사는 동안, 주님으로부터 천국을 받는 이들이 사후 천국에 들어간다.
주님으로부터 천국을 받는 이들은 자신들 안에 천국을 가지는 이들이다. 그 이유가 천국은 인간 안에 있기 때문, 주님께서도 이를 가르치시고 있다. “하느님의 왕국이 여기 있다, 저기 있다 말하지 마라. 그 이유는 하느님의 왕국은 네 안에 있기 때문이다.” (누가 17:21)
인간과 더불은 천국은 인간의 내적 부분, 고로 사랑과 신앙으로부터 그의 의지력과 사고력에 주재한다. 그리고 그의 외적 부분은 사랑과 신앙으로부터 말하고 행동하는데 있다. 천국은 내적 부분과 떨어진 외적 부분에는 있지 않다. 그 이유가 위선자의 경우 속과 겉이 다르기 때문이다.
인간이 사후 저 세상으로 올 때는 천국이 그 사람과 더불어 있는지 여부는 즉각 판명되지만, 세상에 사는 동안은 누구도 그렇지 않다. 그 이유가 세상에서는 외적 부분만 나타날 뿐, 내적 부분은 나타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저쪽 삶에서 내적 부분은 분명히 드러나진다. 그 이유가 거기서는 그가 영으로 있기 때문이다.
주님으로부터 주님을 사랑함 안에, 그리고 그분에 대한 신앙 안에 있는 이들은 영원한 행복을 누린다. 이것을 천국의 기쁨이라고도 부른다. 이 기쁨은 이 사랑 안에, 이 신앙 안에 함유되어 있다. 그리고 자신 안에 천국을 지닌 이들은 사후 이 기쁨을 향유한다. 한편 이것은 그의 내적 부분 안에 감추여 있다. 천국들 안에서는 모든 선들을 공유함도 있다. 모든 사람 속의 평화, 총명, 지혜, 행복은 거기서 각자에게 소통되어진다. 허나 이것은 주님으로부터 사랑과 신앙을 받는 정도에 따라 가능하다. 이로부터 분명한 바, 천국에 있는 평화나 총명, 지혜 그리고 행복은 그 얼마나 큰지!
주님을 사랑함과 이웃을 향한 사랑이 인간과 더불은 천국의 구성 요소이듯, 자아 사랑과 세상 사랑은 그것들이 인간 안에서 우세해질 경우, 지옥의 생명의 구성 요소가 된다. 그 이유가 이 후자의 두 사랑은 전자의 두 사랑에 직반대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자아 사랑과 세상 사랑이 지배권을 쥐게 한 사람은 천국으로부터 오는 어떤 것도 받을 수 없고 지옥으로부터 오는 것만을 받을 수 있다. 그 이유가 인간이 사랑하는 것은 무엇이든, 그가 믿는 것은 무엇이든 천국이나 지옥이나 어느 한 쪽으로부터 오기 때문이다.
자아 사랑과 세상 사랑이 득세하고 있는 이들은 천국과 천국적
행복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그리고 그들은 자아 사랑과 세상 사랑 외에 어느 사랑 안에서 행복함이 가능할지 조차도 가늠하지 못하는 듯 여겨진다. 어쨌든 자아 사랑과 세상 사랑이 목적하는 것에서 제거되는 정도에 비례해 천국의 행복은 그 사람에게 들어갈 수 있다. 이 옮겨짐에 뒤 따르는 행복은 실로 너무나 커서 인간의 모든 납득력을 초월한다.
인간의 생명은 사후에는 바뀔 수 없다. 이 생명은 지금까지 있어 왔던 그대로 그곳에서도 남아 있는다. 그 이유가 인간의 영은 자기 사랑들의 품질에 따라 전적으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옥의 사랑은 결단코 천국의 사랑으로 변형시켜질 수 없다. 그 이유는 그 둘은 직반대되기 때문에서이다. 이것이 성경에서 지옥에 있는 부자에게 아브라함이 한 말에서도 의미되고 있다. “너와 우리 사이에는 큰 구렁텅이가 있어 여기서 네게 건너가고자 해도 갈 수 없고, 거기서 우리에게 건너오고자 해도 갈 수 없다.” (누가 17:21) 이로부터 확실한 바, 지옥에 가는 이들은 거기서 영원히 머물러야 한다는 것, 천국에 가는 이들은 거기서 영원히 머무르게 된다는 것이다.

19

교회
(Church)

인간과 더불어 천국의 구성요소가 되는 것은 또한 교회의 구성요소이기도 하다. 그 이유가 사랑과 신앙이 천국을 구성하듯, 마찬가지로 사랑과 신앙은 교회를 구성한다. 따라서 천국에 관해 이미 상술했었던 것으로부터 교회가 무엇인지가 분명해졌을 것이다.
교회는 주님이 인정되어진 곳이다고, 그리고 말씀이 존재하는 곳이다고 말해진다. 그 이유가 교회의 필수 요소는 주님을 사랑함과 그분을 믿는 것이고, 이 둘은 모두 그분으로부터 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말씀은 인간이 주님으로부터 사랑과 신앙을 받기 위하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가르친다.
교회가 존재한다란 거기에 말씀으로부터의 교리가 있다는 말과 같다. 그 이유는 교리 없이 말씀이 이해될 리 만무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인간과 더불어 교회를 구성하는 것은 교리 만이 아니라 교리에 따른 생활도 필수이다. 이로부터 분명한 바, 믿음 만으로 교회가 구성되는 것이 아니라 선행인 믿음으로부터의 생활도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순수한 교리는 선행에 관한 교리, 동시에 신앙에 관한 교리이다. 즉 신앙의 교리가 선행의 교리에서 떨어져 나가서는 절대 안된다는 말이다. 그 이유가 선행의 교리와 동시에 신앙의 교리는 생명의 교리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앙의 교리가 선행의 교리로부터 떨어진 것은 생명의 교리가 아니다.
교회 밖에 있다 해도 한분 하느님을 인정하고 이웃을 향한 선행
안에서 그들 나름대로의 종교에 따라 살아가는 이들은 교회 속에 있는 이들과 교제하는 가운데 있다고 생각해야 한다. 그 이유는 하느님을 믿으며 선한 생활을 이끌어 가는 사람이라면 그 누구도 지옥에 갈 수 없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분명한 바, 주님의 교회는 세상 두루 어느 곳에도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다. 비록 특수한 측면에서는 조금씩 차이가 있을지라도, 일반적 측면에서의 경우 거기서 주님은 인정되고, 거기에도 말씀은 존재한다.
교회가 존재하는 모든 이는 구원되나 교회가 존재하지 않는 모든 이들은 지옥에 간다.

20

신성한 성경, 또는 말씀
(The Sacred Scripture, or Word)

신성으로부터의 참 계시 없이 인간은 영원한 삶에 관한 어떤 것, 또는 하느님에 관하여 조차도 알 수 없다. 그리고 그는 하느님을 사랑함과 그분에 대한 신앙에 관한 것은 더 더욱 모른다. 그 이유가 인간은 지독하게 무지한 상태로 태어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간은 자기 이해력을 형성되게 하는 모든 것을 세상의 물체로부터 배워야 한다. 또한 유전적으로 그는 자아 사랑과 세상 사랑으로부터 일어나는 모든 악 안에서 태어나진다. 거기로부터 발생되는 즐거움은 계속적으로 우세하다. 그리고 이 즐거움은 신성에 직반대되어 있다는 것을 당사자에게 암시한다. 이것은 인간이 영원한 삶에 관해서 아는 것이 없다고 말한 이유이기도 하다. 그러기에 참 계시의 필요성이 대두되고, 참 계시로부터 인간은 여러 지식을 가질 것이다.
자아 사랑과 세상 사랑의 악들이 사람들을 설득하여 영원한 삶에 속하는 것들에 관하여 무지해 있게 한다는 것은 교회 내에 있는 이들의 경우로부터 오히려 분명해진다. 그 이유가, 비록 그들이 계시로부터 하느님은 계신다…천국과 지옥이 있다…영원한 삶이 있다…이 삶은 사랑과 신앙의 선을 통하여 획득해야만 한다…등등을 알아채고 있는 듯 해도, 그들이 학식이 있든 없든 별 상관 없이 위 사항들을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부정하는 오류에 빠져 있기 때문이다. 이런 예를 가정해 보건대 참 계시가 전혀 없다면 그 부정함의 심각성은 어떠할까?
인간은 사후 살기에, 그리고 영원히 살기에, 이 삶은 그의 사랑과 신앙에 따라 그를 기다리고 있기에, 수반되는 것은, 인류를 향한 사랑으로부터 신성은 이런 삶으로 인도해줄 것들을 계시하였고 이것이 인간의 구원에 이바지하고 있다. 신성이 계시해온 것이 우리와 더불어 있는 말씀이다.
말씀이 신성으로부터의 계시인 바, 말씀의 각각의 것들, 그리고 모든 것들은 신성하다; 그 이유가 신성으로부터 있는 것은 다른 방도로는 존재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신성으로부터 있는 것은 천국들을 통하여 인간에게 내려온다; 그러므로 천국들 안에서는 거기 있는 천사들의 지혜가 편의를 제공하고, 지상의 경우는 거기 있는 사람들의 납득력이 편의를 제공한다. 이 때문에, 말씀 안에는 천사들을 위해서는 영적인 것인 내적 의미가 있고, 지상의 인간을 위해서는 자연적인 것인 외적 의미가 있다. 고로 인간이 천국과 결합하려면 말씀을 통하여야만 가능하다.
계발되어온 이들이 아니면 말씀의 순수한 의미를 이해할 자는 아무도 없다. 그리고 주님을 사랑함 안에서 그분에 대한 신앙을 지닌 이들은 주님에 의해 계발되어진다. 그 이유가 이들의 내면들은 주님에 의해 천국의 빛 안으로 들려지기 때문이다.
글자로 있는 말씀은 말씀으로부터 있는 교리를 수단으로 해서만 납득될 수 있다. 단순한 사람들에게서 조차도 말씀의 글자적 의미는 그들의 이해력이 편의를 제공해준다. 그러므로 말씀으로부터의 교리는 글자 의미를 위해 등불 역할을 담당한다,

21

섭리
(Providence)

천국에서, 그리고 지상에서의 주님의 통치는 섭리라 불리워진다. 사랑 속에 있는 모든 선, 신앙 속에 있는 모든 진리, 이로부터 구원이 있고, 이는 그분으로부터 이고 사람으로부터서는 절대 아닌 바, 명백한 사항은 주님의 신성한 섭리는 인류의 구원에 이바지하는 모든 것, 그리고 각각의 것 안에 있다는 점이다. 이를 주님께서 이렇게 가르치신다. “나는 길이고 진리이며 생명이다.” (요한 14:6) 그리고 다시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있지 않으면 가지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지 않으면 너희는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나 없이 너희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요한 15:4,5)
주님의 신성한 섭리는 인간 삶의 지극히 작은 세세한 것들에까지 이르른다. 그 이유가 생명의 유일한 한 개의 원천이 주님이시기 때문, 이 분으로부터 우리는 살고 행동하기 때문이다.
세상적인 것들로부터 신성한 섭리에 관하여 생각하는 이들은 섭리는 단지 보편적인 사항에 국한되고 세세한 것들은 인간과 더불어 있을 뿐이다고 결말 짓는다. 이들의 헛점은 자기들이 천국의 신비함에 정통하지 않은 것이다. 그 이유가 그들은 자기들의 추론을 자아와 세상 사랑, 그리고 그 사랑으로부터의 쾌락으로부터서만 도출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들이 선한 자 보다는 사악한 자가 영예로운
지위에, 그리고 재물도 더 많이 축적하는 것을 볼 때, 더우기, 그들의 구상을 밀어붙여 성공하는 것을 볼 때, 자기들의 심중에 말하는 바, 신성한 섭리가 모든 것, 그리고 각각에 존재한다면 이런 경우가 발생해서는 안될 것이다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들은 신성한 섭리는 순간적으로 지나가는 지상의 것인 인간의 생명과 더불어 종지부를 찍는 것들은 중시하지 않고 영원히 지탱할 것들, 끝이 없는 것들에 깊은 관심을 둔다는 것을 고려하지 않는다. 끝이 없는 것이 존재를 가진다는 것, 그러나 끝이 있는 것은 상대적으로 존재를 가지지 않는다는 것도 간과하고 있다. 혹은 그들로 하여금 수 천 년과 영원을 비교해 생각하게 해보자. 아마 그들은 그 둘이 같지 않다는 것을 지각할 것이다. 그러니 한 백년 남짓한 세상에서의 인생 기간과 영원으로 이어지는 저세상 인생 기간은 어떠할 것인가?
정직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세상에서의 재물과 등급은 비록 인간이 그것들로부터 있는 쾌락으로부터 그것들이 신성한 축복이다고 순간적으로 생각할지 몰라도 실상 그것은 진짜 신성한 축복들이 아니다는 것을 알런지 모른다. 그 이유는 그것들은 소멸해 버리고, 뿐아니라 많은 것들을 부추켜 천국으로부터 돌아서게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원한 삶, 그것의 더 없는 행복이야말로 신성으로부터 있는 진정한 복들이다. 이를 주님께서 이렇게 가르치신다. “네 기대에 어긋나는 일이 없는 천국들 안에 네 자신을 위하여 보물을 준비하라. 거기는 도둑의 접근이 없고, 썪는 일도 없다. 네 보물이 있는 곳에 네 심정 역시 거기에 있다.” (누가 12:33, 34)
사악한 자가 자기들의 계획을 추진함에서 성공이라는 왕관을 쓰는 이유는 이러하다. 그들의 계획한 바가 신성한 질서에 일치했기 때문이다. 즉 인간이 행하는 것은 무엇이든 이성으로부터 실행되어야 한다는 것, 마찬가지로 자유함으로부터 행동이 있어야 한다는 것. 그러므로 그의 이성에 따라 자유로부터 행동하도록 인간을 놓아두어야 한다는 것, 결과적으로 신성한 질서에 일치되는 쪽에서 창안된 것들은 사악한 자의 창안이다 해도 성공되어야 그나마 사악한 자라도 영원한 생명을 받는데 적합해 질 기회를 만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영원한 생명은 당사자가 자유할 때, 그리고 그의 이성이 계발될 때 인간 안으로 조금씩이라도 스며들기 때문이다. 강제성이 동원된 것은 그 사람의 것으로 남아 있지 않는 바, 어느 누구도 선 쪽으로 강요 당하지 아니한다. 그 이유는 강요당할 경우 그의 것이 안되기 때문이다. 그의 것이 되는 것은 그의 이성에 따라 자유함에서 행동된 것들이다; 그리고 자유함으로부터 행동된 것은 그의 의지로부터, 즉 그의 사랑으로부터 행해진 것이다. 그의 의지, 즉 그의 사랑은 인간 자신이다. 만일 인간이 뜻하지 않은 것을 강제로 하게 해도, 그는 꾸준히 그의 의지가 뜻하는 쪽으로 기울고 있다. 대체로 모든 이는 금해진 것을 얻으려 애쓰는 경향이 짙다, 게다가 감추여 놓인 원인으로부터 더욱 그러하게 애쓴다. 그 이유가 모든 이는 자유를 쟁취하려 노력하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명백한 바, 인간이 자유 안에 보존되지 않으면 선은 그를 위해 준비되어질 수 없을 것이다.
인간으로 하여금 자신의 자유로부터 생각하고 뜻하라고 내버려두는 것, 법들이 그것을 금하지 않는 한, 인간은 자유함에서 생각하고 뜻하게, 설령 악을 행할지라도 유보하시는 것을 허용하심(permission)이라 부른다.
세상의 복된 것 쪽으로 노련한 계획에 의해 이끌어가는 것이 인간에게는 마치 당사자의 신중함의 결과인냥 나타난다. 그런 가운데서도 여전히 허용함에 의해 신성한 섭리는 그를 거들어, 계속적으로 악으로부터 그가 멀리 떨어지도록 이끌고 있다. 결국 천국의 복된 것들 쪽으로 인도하는 것은 인간 자신의 신중함의 결과가 아님이 알려지게 되고 지각되어진다. 그 이유가 이것은 주님으로부터 이고, 그분의 신성한 섭리에 의해 야기되고, 배열되고, 계속적으로 선 쪽으로 인간을 이끌어 가기 때문이다.
위와같은 경우를 인간은 자연의 빛으로부터는 납득할 수 없다. 그 이유가 이 빛으로부터서는 신성한 질서의 법칙에 관하여 알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섭리와 예견이 있다는 것은 마음 안에 출생되도록 되어 있다. 선은 주님에 의해 설비되나, 악은 그분에 의해 예견되는데, 선과 악이 마음 안에서 함께 있는 것은 사실이다. 인간으로부터 나오는 것은 악밖에 없으나, 주님으로부터 나오는 것은 선밖에 없다.

22
주님
(The Lord)

한 분 하느님이 계시고, 그분이 우주의 창조자이시며 우주의 보존자이시다. 또한 그분이 천국의 하느님이시고 지상의 하느님이시다.
인간과 더불어 천국 생명의 구성 요소에는 두 가지가 있다. 그것은 사랑의 선과 신앙의 진리이다. 이 생명을 인간은 주님으로부터 끌어낸다. 그리고 이 생명에 관한 것은 무엇이든 인간으로부터서 끌어 내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러므로 교회의 제 1의 것은 하느님을 인정하고, 하느님을 믿는 것, 그리고 그분을 사랑하는 것이다.
교회 내에서 태어난 이들은 주님, 그리고 그분의 신성과 인간을 인정해야 한다. 그리고 그분을 믿고 그분을 사랑해야 한다. 그 이유가 모든 구원은 주님으로부터 있기 때문이다. 이를 주님께서 가르치신다. “아들을 믿는 자는 영원한 생명을 가진다. 그러나 아들을 믿지 않는 자는 생명을 보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하느님의 진노하심이 그 사람에게 거한다” (요한 3:36). 다시, “이것은 나를 보내신 그분의 뜻인즉, 아들을 보고 그분을 믿는 모든 이는 영원한 생명을 가질 것이다. 그리고 나는 마지막 날에 그를 들어올릴 것이다.” (요한 6:40) 그리고 다시, “예수께서 그녀에게 말하셨다, 나는 부활이고 생명이다. 나를 믿는 자는 비록 그가 죽더라도 살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요한 11:25, 26).
그러므로 교회 내에서 주님과 그분의 신성을 인정하지 않는 이들은 하느님과 결합될 수 없고, 고로 그들은 천국에서 천사들이 거주하는 어떤 장소도 할당 받을 수 없다. 그 이유는 누구도 주님으로부터, 주님 안에서가 아니면 하느님과 결합될 수 없기 때문이다. 주님으로부터가 아니면 아무도 하느님과 결합될 수 없음을 주님께서 이렇게 가르치신다. “하느님을 본 사람은 없다. 독생자이신 그분이 하느님을 나타내었다” (요한 1:18). 다시, “너희는 어느 때이든 아버지의 음성을 들은 적이 없고, 그분의 모양을 본적도 없다” (요한 5:37). 다시, “아들, 그리고 아들이 그분을 계시할 사람 외에는 아버지를 알 사람은 없다” (마태 11:27). 그리고 다시, “나는 길이고 진리이며 생명이다. 나를 수단으로 하지 않고서는 아버지께로 올 자는 아무도 없다” (요한14:6). 누구도 주님 안에서가 아니면 하느님에게 결합되어질 수 없는 이유는 아버지는 아들 안에 계시고, 그 두 분은 하나이기 때문에서이다. 그분이 이렇게 가르치신다. “만일 네가 나를 알았다면, 너는 내 아버지 역시 알았을 것이다. 나를 보는 사람은 아버지를 보고 있다. 내가 아버지 안에, 아버지가 내 안에 있는 것을 너는 믿지 못하느냐?” (요한14:7-11). 그리고 다시, “아버지와 나는 하나이다…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있다는 것을 너희는 알고 믿을 것이다” (요한 10:30, 38).
아버지가 주님 안에 계시고, 주님과 아버지는 하나이시기에, 그리고 주님은 믿어져야하고, 그분을 믿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가지는 바, 명백한 것은 주님이 하느님이시다는 것이다. 주님이 하느님이시다는 것을 말씀 역시 이렇게 가르친다,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 그리고 말씀은 하느님과 더불어 있었다. 그리고 하느님은 말씀이셨다. 모든 것들은 말씀을 통하여 만들어졌다. 그리고 말씀 없이 만들어진 것은 어떤 것도 있지 않았다. 그리고 말씀이 육을 만들었다. 그리고 우리 사이에 거주하셨다. 그리고 우리는 그분의 영광, 아버지의 독생자의 것과 같은 영광을 바라보았다” (요한1:1, 3, 14). 그리고 이사야서에서(9:6), “우리에게 어린 아이가 태어나, 우리에게 한 아들을 주셨다. 그리고 통치가 그의 어깨 위에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의 이름은 하느님, 영웅, 영원의 아버지, 평화의 왕자라 불릴 것이다.” 그리고 다시 “보아라, 처녀가 임신하고 낳을 것이다, 그리고 그분의 이름은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느님이라 불릴 것이다” (이사야7:14, 마태1:23). 그리고 예레미야에서(23:5, 6, 33:15. 16), “보라, 때가 이르면, 나는 다윗으로부터 의로운 가지를 들어 세울 것이다. 그리고 한 왕이 통치하고 번창할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그의 이름인즉 그들은 그분을 여호와 우리의 정의라 부를 것이다.”
교회 속에 있는 모든 사람, 천국으로부터의 빛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은 주님 안에 있는 신성을 본다. 그러나 천국의 빛으로부터가 아닌 이들은 주님 안에서 인간밖에 더 이상의 것은 보지 못한다. 어쨌든 신성과 인간은 주님 안에서 하나되어 있는 바, 그 둘은 하나이다. 주님께서 이렇게 이를 가르치신다. “아버지, 나의 모든 것이 당신의 것이고, 당신의 모든 것이 나의 것입니다” (요한17:10).
교회에 알려져 있는 바, 주님은 아버지 여호와로부터 임신되셨다는 것, 고로 임신으로부터서도 그분은 하느님이셨다는 것, 또한 그분은 몸 전체와 더불어 다시 일어나셨다는 것, 그 이유는 그분은 무덤에서 그분 뒤에 남긴 것이 하나도 없었기 때문. 이 주제에서 역시 그분은 후에 제자들에게 확증하시어 말하시기를, “보라, 내 손과 발을, 이것은 나 자신이다. 나를 만져라 그리고 보아라. 영은 살과 뼈가 없지만 너희 보는 바 같이 나는 가지고 있다” (누가24:39). 그리고 비록
그분이 살과 뼈에 관한 점에서 사람이셨다 할지라도, 그분은 여전히 닫힌 문으로 들어오셨다. 그리고 그분이 자신을 명백히 하신 후에 그분은 눈에 보일 수 없게 되셨다 (요한20:19, 26, 누가 24:31). 이런 경우의 것은 모든 사람과 더불어 모두 다르다. 그 이유가 그분은 그분의 몸에 관하여가 아닌 영에 관하여서는 단독으로 다시 일어나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분은 어떤 영 같이 있지 않았다고 말하심에서 주님은 자신은 또 다른 사람 같이 있지 않았다고 말하셨다. 이로부터 주님 안에 있는 인간 역시 신성임이 분명하다.
모든 사람은 인간 아버지로부터 혼(soul)이라 불리는 것 , 즉 그의 생명의 실재를 가진다. 이 실재로부터 몸이라 불리는 것, 즉 생명의 실체가 있다. 그러므로 몸은 혼의 인형(effigy, 초상)이다. 혼은 이 인형을 통하여 저 좋을대로 자신의 생명을 활동하게 한다. 그러므로 인간 존재는 부모를 닮아 태어나지고, 가족들은 서로서로 구별되는 것이다. 이로부터 몸의 어떤 종류, 즉 주님이 가지셨던 인간은 어떤 종류이었냐가 드러난다. 즉 그것은 그분의 생명의 실재(esse)인 신성 자체와 같았다는 것, 또는 아버지로부터의 혼 같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분은 말하셨다,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는 것이다” (요한 14:9).
주님의 신성과 인간이 한 분 인물(one Person)이다는 것은 기독교계에 두루 받아진 신조와 일치하고 있다. 다음과 같다: “비록 그리스도가 하느님과 인간일지라도, 그분은 아직 둘이 아닌 한분 그리스도이다; 인물의 통일성을 수단으로 전부가 하나이다. 몸과 혼이 한 사람이듯, 그렇게 하느님과 인간은 한 분 그리스도이다.” 이 말들은 아타나시안(Athanasian) 신조로부터 취해진 것이다.
신위(Deity)에 관련하여 세 인물들이다는 생각을 견지하는 이들은
하느님이 한 분이시다는 생각을 지닐 수 없다. 입술을 가지고 그들이 하나라고 말한다 해도 여전히 그들은 셋을 계속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신위에 관련해 한 분 인물 안에 세 가지 신위가 있다고 생각하는 이들은 한 분 하느님을 생각할 수 있고, 역시 하느님은 한 분이시다고 생각한다.
한 분 인물 안에 셋에 관한 생각은 아버지가 주님 안에 있음으로서, 그리고 성령은 그분으로부터 진행하는 것으로서 생각할 때 윤곽이 잡힌다. 그러면 삼위일체가 주님 안에 있다; 즉, 아버지라 불리는 신성 자체, 아들이라 불리는 신성한 인간, 그리고 성령이라 불리는 신성한 진행(Proceeding, 역사하심)이다.
신성 전체가 주님 안에 있기에 그분에게 천국들 안에서와 땅 위에서 모든 권능이 속해 있다. 이를 그분께서 이렇게 선포하신다. “아버지께서는 아들의 손에 모든 것을 주셨다” (요한 3:25). 다시, “아버지는 아들에게 모든 육을 제압하는 힘을 주셨다” (요한17:2). 그리고 마태복음 11장 27절에서, “아버지의 모든 것이 나에게 전달되었다.” 다시, “모든 권능이 천국과 땅에서 나에게 주어졌다” (마태 28:18). 이 권능은 신성이다.
주님의 인간(성)을 또 다른 사람의 것과 비슷하게 만드는 이들은 참 신성으로부터 그분에 관한 개념을 가질 수 없다. 그들은 모든 이의 몸이 그의 혼의 인형이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은 그분의 부활이 그분의 몸 전체를 가지고 있어졌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분의 얼굴이 태양 같이 빛난 그분의 변모하심이 어떻게 그렇게 나타나게 되셨는가 하는 것에도 관심이 없다. 주님께서 그분에 대한 신앙에 관해 말하신 것들, 아버지와 하나된 주님의 존재에 관하여도, 그분의 신성이 되심에 관하여도, 그리고 천국과 땅의 모든 권능에 관해서도,
즉 이런 것들이 신성하다는 것, 그리고 그분의 인간에 관해 말해진 것도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은 주님이 그분의 인간에서 조차 편재하신다는 것을 기억하지 않는다 (마태 28:20). 그럼에도 성찬에서 그분이 편재하신다는 믿음은 일으켜 세웠다. 그러나 편재함(omnipresence)은 신성이다. 뿐만아니라 그들은 성령이라 불리는 신성이 주님의 인간성으로부터 진행된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 같다. 그럼에도 성령은 그분의 신성이 되신 인간(His Glorified Human)으로부터 진행된다. 그 이유가 이렇게 말해졌기 때문이다. “성령은 아직 있지 않았다, 그 이유는 예수는 아직 신성화되시지 않았기 때문이다” (요한 7:39).
주님께서는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세상에 오셨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인간은 영원한 죽음에서 멸해졌을 것이다. 그리고 그분은 세상에 태어나는 모든 사람에게, 세상을 떠나는 모든 사람에게 만연되어 있었던 지옥들의 세력들을 복종하게 하심으로, 동시에 그분의 인간을 신성이 되게 하심으로 인류 구원이 작업되게 하셨다. 이렇게 하셨기에 그분은 지옥을 영원한 복종 아래 묶어 둘 수 있으셨다. 지옥을 복종하게 함, 동시에 그분의 인간을 신성이 되게 하심은 그분이 어머니로부터 가졌던 인간 안으로 침입한 시험들을 극복해가심을 통하여 결과되었다. 십자가 위에서의 그분의 수난은 마지막 시험이었고 (마무리 짖는) 완전한 승리였다.
주님이 지옥들을 정복하셨다는 것을 그분 자신이 가르치셨다. 십자가의 수난이 가까워졌을 때 그분은 말하셨다, “지금은 이 세상의 심판이다. 지금 세상의 제1인자가 내던져질 것이다” (요한 12:31). 다시, “힘내어라, 내가 세상을 정복했다” (요한16:33). 그리고 이사야서에서, “에돔으로부터 오는 이가 누구냐? 아주 큰 그분의 힘 안에서 여행하신다. 구원하는 힘이다. 나 자신의 팔이 나에게 구원을 가져왔다. 이렇게 그분은 그들의 구세주가 되셨다” (63장, 59:16-21). 주님이 그분의 인간을 신성이 되게 하셨다는 것, 그리고 십자가의 고난은 마지막 시험이었다는 것, 그리고 완전히 승리하셨다는 것, 이를 통하여 그분은 신성이 되심을 이루셨다는 것을 주님께서 요한복음(13:31, 32)에서도 마찬가지로 가르치신다. “유다가 나갔을 때, 예수께서 말하셨다, 이제 사람의 아들은 신성이 된다. 그리고 하느님은 자신 안에서 그분을 신성이 되게 하실 것이다. 그리고 곧 그분을 신성이 되게 하실 것이다.” 다시, “아버지, 시간이 오고 있습니다. 당신의 아들을 신성이 되게 하시고, 아마 당신의 아들도 당신을 신성이 되게 할런지 모릅니다” (요한 17:1, 5). 그런 다음 다시, “지금 내 혼이 괴로워하고 있다. 아버지, 당신의 이름을 영광되게 하소서. 그런다음 천국으로부터의 음성이 있어 말하기를, 나는 둘 다를 영광되게 하였다, 그리고 다시 그것을 영광되게 할 것이다” (요한 12:27, 28). 다시 누가복음(24:26)에서,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겪어 그분의 영광 안으로 들어가야 하지 않겠느냐?” 이런 말들은 주님의 수난에 관해 말해졌다. 영광되게 함은 신성으로 만듦을 뜻한다. 이로부터 나타나는 바, 주님이 세상에 오시어 사람이 되시지 않으면, 그리고 이를 수단으로 그분을 믿고 사랑하는 모든 이들을 지옥으로부터 해방되게 하시지 않으면,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의 구원은 있어질 수 없었을 것이다. 고로 이해되는 것은, 주님 없이는 구원도 없다는 것이다.
주님은 그분의 인간을 충분하게 영광되게 하셨을 때, 그분은 어머니로부터 입었던 인간을 벗으셨다, 그리고 아버지로부터의 인간을 입으셨다, 이것이 신성한 인간이다. 그러므로 더 이상 그분은 마리아의 아들이 아니었다.
교회에서 첫째이자 맨 먼저인 것은 한 분 하느님을 알고 인정하는 것이다. 이 지식과 인정함을 떠나서는 결합도 없다. 주님을 인정함 없이 있는 교회의 경우를 주님께서 이렇게 가르치신다. “아들을 믿는 자는 영원한 생명을 가질 것이다. 그러나 아들을 믿지 않는 자는 생명을 보지 못할 것이다. 게다가 하느님의 진노가 그 사람에게 주재한다” (요한 3:36). 그리고 또 다른 장소에서 “너희는 내가 있다는 것을 믿지 않으면, 너희는 너희 죄들 안에서 죽을 것이다” (요한. 8:24).
주님 안에 삼위(trinity)가 있다는 것, 즉 신성 자체, 신성한 인간, 진행되는 신성이 있다는 것은 천국으로부터 있는 신비이다. 그리고 거룩한 예루살렘 안에 있을 이들을 위하여 계시되었다.

23

교회의 통치와 시민의 통치
(Ecclesiastical and Civil Government)

사람들 사이에서 질서 안에 있어야 하는 두 가지 것이 있다. 천국에 속한 것과 세상에 속한 것이다. 천국에 속하는 것은 교회에 속한 것이고 세상에 속한 것은 시민에 속한 것이다.
질서가 유지되려면, 권위를 지닌 인물이 있어, 질서에 따라 발생하는 모든 것들, 질서에 반대될 경우 초래되는 것들을 주지시키고, 질서에 따라 사는 이들에게는 보상을, 질서에 거스리는 삶을 사는 자에게는 형벌을 가해야 유지 존속된다. 이것이 실시되지 않으면 인류는 멸망할지 모른다. 그 이유가 유전성에 의해 타인을 지배하고 싶은 욕구, 타인의 좋은 것을 갈취해 내 것 삼고 싶은 욕망은 모든 이에게 대체로 선천적으로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거기로부터 적개심, 시기, 미워함, 복수, 사기, 잔인함, 이외 수많은 악들이 발생된다. 그러므로
인간은 법에 의해 제한된 상태에 놓이고, 각기 자기들의 사랑에 걸맞는 보상을 수단으로, 즉 선한 자에게는 영예와 이득을 보장하고, 악한 자에게는 형벌을 내리는 방식 속에 살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인류는 멸망을 자초할지 모른다.
그러므로 권위가 부여된 인물은 인간 집단을 질서 안에서 보존하는데 필요하게 된다. 이 인물은 법률에 노련해야 하고, 슬기 있으며 특히 하느님을 경외하는 사람이면 최상일지 모른다. 질서는 권위가 부여된 이들 사이에도 물론 있어야 한다. 이들이 좋아해서 이든 무지함으로해서 이든 질서에 거스르는 악들을 허용하지 않도록, 그럼으로 질서가 파괴되지 않도록 함이 필수일 것이다. 이는 공직 지위가 더 높거나 더 낮거나 하는 계열을 수단으로 종속 관계에서 관리 감독됨으로 보호될 수도 있다.
천국에 속하는 사람들, 또는 교회 조직 사회에 속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권위를 갖도록 앉혀진 사람들을 성직자라 부른다. 그들의 직능은 성직이다. 그러나 세상에 속하는 사람들, 즉 시민들 사이에 앉혀져 권위가 부여된 사람들은 행정 장관, 그리고 그들의 최고직은 왕이라 부른다.
성직자의 경우, 그들은 사람들에게 천국 가는 방법을 가르치고 또한 그 길로 인도해가야 한다. 그들은 말씀으로부터 자기들의 교회의 교리에 의거 그들을 가르쳐야 한다. 그리고 그들이 그 교리에 따라 살도록 그들을 인도해야 한다. 진리들을 가르치고, 진리들을 통하여 생활의 선으로, 고로 주님에게로 인도하는 성직자는 양떼의 선한 목자이다. 그러나 가르치기는 하나 생활의 선으로 인도하지 않는 성직자라면, 그는 나쁜 목자이다.
성직자는 인간의 혼을 지배하는 어떤 힘이 자기들에게 있다고 공언
해서는 안될 것이다. 그 이유는 그들은 인간의 내면들이 어떤 상태인지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더욱이 그들은 천국의 문을 열고 닫는 권능이 자기들에게 있다고 주창해서는 안된다. 그 이유는 이 권능은 주님 만에 속하기 때문이다.
위엄과 영예는 그들이 집행하는 거룩한 사항들 때문에 성직자들에게 일치되어야 한다. 그러나 슬기 있는 성직자는 거룩한 것들이 주님으로부터 인 바 주님께 영예를 돌린다. 한편 슬기롭지 못한 이들은 영예를 자기 탓으로 돌리고, 때로는 그것을 주님으로부터 갈취하기도 한다. 자기들이 집행하는 거룩한 것 때문에 자신에게 영예가 있다고 주장하는 성직자는 그들이 돌보아야 할 혼들의 구원보다는 영예나 이득을 더 좋아하고 있다. 그러나 영예를 자신들이 아닌 주님에게 돌리는 이들은 영예나 이득에 앞서 혼들의 구원을 돌보고 있다. 어떤 직능으로부터의 영예는 사람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가 집행하는 공직의 위엄에 따라 사람에게 붙어져 있을 뿐이다. 고로 접합된 것은 그 사람 자신에게 속한 것이 아니다. 그리고 역시 공직과 더불어 분리되어진다. 사람에게 천부적으로 있는 영예는 지혜의 영예, 그리고 주님을 경외함으로부터의 영예이다.
성직자는 사람들을 가르쳐야 하고 진리들을 통하여 사람들을 생활의 선으로 인도해야 하지만, 그렇다고 그 누구도 강요하려 들어서는 안된다. 사람은 자기가 진리이다고 생각하여 자기 심정에 담아놓은 것에 거슬러 믿도록 강요될 수 없다. 성직자와 다르게 믿는 사람, 그런데 어떤 혼란함도 만들지 않는 사람은 평화로이 놓아두어야 한다. 그러나 혼란함들을 만드는 사람은 그 혼란에서 그가 분리되게 해주어야 할지 모른다. 그 이유는 이것 역시 성직 신분이 감당해야 하는 질서일 수 있기 때문이다.
성직자는 신성한 법과 예배에 속하는 것들을 집행하는데 권위가 부여된 사람들이다. 이에 비해 왕이나 행정관들은 시민적 법들과 재판에 속하는 것들을 집행하는데 권위를 부여받은 사람들이다.
왕 한사람이 모든 것을 집행할 수 없는 바, 왕 아래 권위를 이양받은 사람들이 서열별로 내려가며 위치하고 있다. 이들은 왕으로서도 실시하기에는 능력이 부족한 업무를 왕 대신 처리한다. 이런 사람들이 모두 집합해 왕정의 구성 요소가 되고 있다. 그러나 왕 자신은 권위 측면에서 최고이다.
진짜 왕정은 사람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에게 붙어있을 뿐이다. 왕권이 자신 고유에 속한 것이라고 믿는 왕, 그리고 자기 직권의 위엄이 자기 고유의 것에 속한다고 착각하는 행정관은 슬기롭지 못하다.
왕정은 공정의 원리로부터 왕국의 법들에 따라 집행함에, 그리고 이 법들에 의거 재판함에 있다. 법을 자기보다 더 높은 위치에 두는 왕은 슬기롭다. 그러나 자신이 법 위에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어리석다. 법이 자신 위에 있는 것으로 간주하는 왕은 법 안에 왕정을 둔다. 그리고 법들이 그 자신마저 통치한다. 그 이유가 그는 법이 정의를 뜻하고 모든 정의는 신성이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신이 법 위에 있다고 간주하는 사람은 자신 안에 왕정을 놓고 있다. 그는 자신이 법이라고 믿거나 정의인 법이 자신으로부터 나왔다고 착각하고 있다. 신성 아래 자신을 두어야 할 그가 오히려 신성인
것 마저 자신에게로 가로챈다
정의인 법은 슬기롭고 하느님을 경외하는 입법자에 의해 왕국 안에서 제정되어야 한다. 그리고 왕과 신하 모두 그 법에 따라 살아야 한다. 제정된 법에 따라 사는 왕은 그의 신하들에게 본을 보이는
바 진실로 왕이다.
자기에게 절대적 권력이 있다고 믿는 왕, 그리고 그의 신하는 자기의 노예나 다름 없는 바, 그들의 소유물이나 삶을 좌지우지할 권리가 있다고 상상하는 왕은 만일 그가 이런 권리를 행사한다면 그는 왕이 아닌 폭군이다.
순종은 왕국의 법들에 따라 왕에게 하기로 예정되어 있다, 그리고 시민은 순종 때문에 말에 의해서 이든 행위에 의해서 이든 결단코 상처받아져서는 안된다. 그 이유가 이것 위에 공공의 안전이 의존되기 때문이다.

부록
(Appendix)

선각자의 출판 서적, 비 출판 서적 소개
선각자의 용어에 대한 간결한 풀이
선각자에게만 유일한 기본 생각들
도서구입 안내

선각자의 신학 관련 저서들

1. 직접 출판한 저서들 2. 출판되지 않고 발견된 그의 기록 내지 저술인 것들.

천국의 비밀들 (1749-1756년) 영의 일기(또는 영적 경험)(1745-1765)
천국과 지옥 (1758년) 요한계시록 설명 (1757-1759년)
새 예루살렘과 그곳의 교리 (1758년) 아타나시안 신조 (1759-1763년)
마지막 심판 (1758년) 주님에 관하여 (1759-1763년)
백마 (1758년) 예언서들과 시편의 내적의미(1759-1763년)
우주에 있는 땅들 (1758년) 마지막 심판 (1759-1763년)
주님에 관한 교리 (1763년) 신성의 사랑 (1759-1763년)
거룩한 성경에 관한 교리 (1763년) 신성의 지혜 (1759-1763년)
삶에 관한 교리 (1763년) 선행의 교리 (1766년)
신앙에 관한 교리 (1763년) 5 기억할만한 관련들 (1766년)
마지막 심판에 관한 계속 (1763년) 결혼에 관해서 (1766년)
신성의 사랑과 지혜 (1763년) 정경들 (1769-1772년)
신성의 섭리 (1764년) 새 교회에 관한 교회의 역사 (1769-1772년)
요한계시록 밝힘 (1766년) 부속물(coronis) (1769-1772년)
부부의 사랑 (1768년) 새 교회로 초대함 (1769-1772년)
간략한 해설 (1769년)
유입, 또는 혼과 몸 사이의 상호 작용 (1769년)
진정한 기독 종교 (1771년)

선각자의 용어 풀이
(Glossary)

** 참고: (commercium) 식의 표기된 것은 라틴어임
이 풀이는 간결해서 좋지만, 한편 너무나 간결해서 어떤 단어의 경우는 이해함에 불리할 수 있는 단점도 있다. 어쨌든 아래의 글들은 Swedenborg Resercher’s Manual by William Ross Woofenden으로부터 발췌되었다. 정확한 이해를 위해 영역본이 필요할 경우 역자에게 연락하기 바란다 (인터넷에서 헌 책은 구매가 가능할지 모른다, 검색해보기 바란다).

감각적인 (Sensuous)
관능적인, 감각의, 그리고 감각 지향의. 섹스적인 것만을 함축하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감각들에서 집중함에 의해 특색을 이루는 것, 감각들에 의해 납득되는 것. 마음의 자연적 수준에서도 가장 낮은 평면.

개혁 (Reformation)
거듭남의 과정 중의 일부를 묘사하는데 사용되었다, 즉 당사자의 바깥쪽 생활을 질서 안에 놓는 것이다. 당사자는 진리가 우세한 순종의 상태에서 진리를 수단으로 선 쪽으로 인도된다. 이것은 주님으로부터 새 의지를 받기 위한 준비단계이다.

거듭남 (Regeneration)
넓은 의미에서 재출생의 모든 과정. 좁은 의미에서 개혁에 뒤이어지는 과정. 주님이 각 개인 안에서 새로운 의지를 만들어가시는 과정, 또는 (삶의) 과정의 목적(goal).

결혼의 (부부의, connubial)
결혼에 관련되는 단어이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것은 결혼에 연계
된 외적인 것들 만에 관련하여, 또는 부정적 측면에서 사용되는 편이다. 새나 동물의 짝짓기에 사용되었다.

고대 교회 (ancient church)
성경에서 노아와 그의 자손들에 의해 표현된 고대 시대 성경 속의 사람들의 종교.

과학물들 (Scientifics)
과학적 진리들을 보라. 지식들, 사실들, 자료들.

과학적 진리들 (Scientific truths)
위 표현은 빈약한 번역일지 모른다, 그 이유는 이 용어가 우리가 아는 “과학(science)”을 가리키는 경우가 매우 드물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연을 연구함으로부터, 그리고 성경의 글자 그대로의 의미로부터 획득한 사실들, 자료들, 진리들이다.

공적 (Merit, meritorious)
흔한 사용법에서 이 단어가 함축하는 것은 긍정적(건설적) 측면이 대세이다. 그러나 선각자가 이 단어를 사용할 때의 경우, 거의 언제나 뜻하는 것은, 공적 추구(merit-seeking), 즉 자비롭게 여겨질 수 있다 싶은 어떤 행위 또는 친절한 어떤 행동에 대하여 돈 또는 명성을 보상을 은근히 기대함이다.

광적 신앙 (Religiosity)
외적, 또는 미신적 믿음 체계, 신봉자의 편에서 내적 약속의 깊이를 갖지 않은 종교를 묘사하는데 사용하였다.

교류 (Intercourse)
왕래함 (commercium)에 대한 오래전의 번역, 상호 작용 (interact)을 뜻한
다, 이는 개인들 또는 어떤 것들을 연합시키는 것이다. 개인의 혼과 몸이 어떻게 교통하고 일반적으로 상호 작용하는지를 언급할 때도 사용된다.

교리 (Doctrine)
세 가지를 뜻하려고 사용된다: 1. 배움의 과정, 2. 학식 또는 과학의 분과, 또는 3. 특별한 취지에서 교회의 가르침. 일반적으로 이것은 진실로 종교 생활을 꾸려가기 위하여 절대로 필요한 가르침일 것이다, 그리고 고로 본질적으로 실용적일 것이다.

교회 (church)
이 단어는 흔한 보통의 단어 사용에서도 어떤 영적 생활만도 아니고, 그렇다고 어떤 종파나 조직체만을 지칭할 때도 아닌 것이 뜻해지게 보통이 아닌 의미에서 사용되어진다, 즉 조직체에서이든, 개인적으로 이든, 영적 생활을 사실로 깨달음이다. 고로 개인(person, 개인)은 영적인 교회이다.

균형 (balance)
(평형을 보라.) 천국 세력과 지옥 세력이 균등하게 인간에게 영향을 미치도록 하는 섭리적 상태를 염두해서 사용된다, 하여 당사자가 악의 영향력에 휘둘리는 듯 외관상 나타남에도 불구하고 실상 그는 자유한 상태에서 도덕에 관한 결정들을 만들게 됨을 말할 때 이 단어가 사용되고 있다.

그릇 (Vessel)
인간은 하느님으로부터 생명을 받는 “그릇”이다고 말해진다, 단지 담는 용기라는 말이 아니고 유기적 형체로서 이다.

기억해둘만한 관련 사항들 (Memorable relations)
기억해둘만한 사건(memorabilia, memorable occurrences)라고도 말한다. 선각자가 그의 후기 저서들의 장들에 첨부하는 식으로, 또는 군데군데에 흩뿌
리는 식으로 해서 기록했는데, 다른 세계에서의 그의 경험들에 관한 이야기들이다.

기운 (영역, sphere)
모두 각각의 사람들은 자신의 총체적 사랑들로부터 되튀긴 유출물에 에워싸여 있다고 말해진다. 일반적으로 이것은 땅 위에서는 감지될 수 없다. 누군가의 기운이 어떤지는 천국에 있는 모든 이에 의해서는 확연히 감지된다, 하여 상대방과 연계되어도 되는지, 피해야 하는지를 결정하는 기초이다.

길들여진 선 (Domestic good)
개인이 부모로부터 유전적으로 끌어낸 선을 뜻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이것은 당사자가 (선택의) 자유함 안에서 그것을 자기 것이 되게 하지 않으면 “저축”되지 않는다. 또한 “가정의 자연적 선”, 그리고 “자연적 선”이라고도 불리운다. (천국의 비밀 3518항의 창. 27:9에 대한 해석을 참조하라.)

김나지움 (Gymnasium)
유럽에서 공통적으로 사용함에서는 두 번째의 학교 (중고등학교). 선각자는 이 단어를 그룹들의 멤버들이 생각들을 토의하고 그들의 마음들을 실행해보는 영계의 모임들이나 거기의 학교들을 언급하는데 사용했다.

끊이지 않는 등차들 (continuous degrees)
수준들(levels) 또는 단계들(gradations), 마치 찬 것으로부터 따뜻한 것까지, 또는 어둠으로부터 빛으로까지의 경우와 유사하다. 또한 “넓이의 등차들” 또는 “수평적인 수준들”이라 불리운다.

나머지 상태들 (Remnant states)
“리메인스”를 보라.

논리를 더듬어 사고함 (Ratiocination, 합리화함)
“추론(reasoning)”으로만 번역되면 약간 유감스럽다. 이는 거짓 추정들, 거짓 추론, 거짓 연역을 끌어내는 과정을 함축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아마 “합리화 함(rationalizing)”의 뜻을 지닌 최근의 심리학적 용어에 매우 가까울지 모른다.

능력(Faculty)
이런 것을 뜻하는데 사용되었다, 1. 신체적 수단(resource), 2. 가능성, 기회, 3. 타고난 경향(propensity) 또는 능력(ability), 그리고 4. 정신의 품질. 이 마지막 의미에서 보면, 이것은 하느님으로부터 수여됨이다. 이 수여된 것을 올바로 사용함에 의해 당사자는 자기 안에서 주님의 현존하심을 보증받는다.

다써버림(고갈, exinanition)
영이 텅빔, 영적 황무함의 상태. 주님의 경우, 이것은 그분의 인간 부분이 내부의 신성으로부터 분리된 듯 여겨져 있는 겸허의 상태이었다.

담는 어떤 것(용기, containant)
초기 번역자들에 의해 만들어진 단어, 또한 “포용함(continent)”으로도 번역하나 통상적인 수준은 못된다. 이것은 콘테이너, 저장소를 언급하는 것인데, 때로는 마음이 생각들의 “저장소”이다를 서술함에서 심령 연구적 측면에서 사용된다.

더 낮은 땅(Lower earth)
영계에 관한 선각자의 세부적 묘사에서, 더 낮은 땅은 영들의 세계에서는 그 아래쪽 영역이고, 지옥 쪽에서는 그 위쪽 영역이다.

동물 영 (animal spirit)
갈렌(Galen)의 관념에 있는 세 신체 영들 중의 하나. 선각자는 더 순수한 종류의 피를 뜻하기 위해 사용했다. 돌(Dole)의 “신성의 사랑과 지혜” 423쪽에서는 “혼-영”으로 번역하였다.

동물 왕국 (동물 왕국의 경제)
“인간의 혼의 영역의 역학”을 다룬 선각자의 1740년의 저서 Oeconomia Regni Animalis 에 대한 미흡한 번역어 이다.

되풀이하는 결혼들 (Iterated marrages)
반복된 결혼들, 재결혼.

되찾음 (구속, Redemption)
보통의 의미에서 사용되지 않는다, “되사는 것”, 되찾음은 그리스도의 생애 전 과정의 결과로 얻어진 지옥을 복종케 함과 천국의 질서를 다시 세운 것을 뜻한다. 하여 믿는 자에게 가능할 수 있는 개개인의 구원을 만드신 것이다.

리메인스 (Remains)
사랑과 진리에 관한 감명들이 인간에게는 알려지지 않은 신비한 방법에서 주님에 의해 개개인 안에 심어진 사랑과 진리에 관한 깊은 감명들, 이것은 유아로부터 모든 삶을 통하여 각 개인과 더불어 계속 “남아” 있으면서, 재출생을 위한 기초가 되어주고 있다. 이 단어는 “나머지들(remnants)” 또는 “나머지 상태들”으로도 번역하고 있다.

림버스(Limbus, 가장자리, 변방)
“봉투, 덮개(envelope)” 또는 “테두리, 가장자리(border)”로도 번역되었다. 각자의 특질(본성, nature)로부터 끌어내진 가장자리를 뜻하기 위해 사용되었는데, 사후에도 이것은 존속하여 영계에서 (어떤 형체라고 분명하게 묘사할 수는 없지만) 하나의 불변성(fixity), 안정성(stability), 영속성(permanence)을 주고 있다. 이 단어는 쉽게 정의를 내리기가 힘든 복잡한 개념에 있다.

맥시머스 호모 (Maximus Homo)
“웅대한 사람”과 “보편적 인간”을 보라

메디아 (Media)
종종 단수의(유일한, singular), 매개(중간, medium). 이는 사이에서 가는 것들을 뜻한다. 두 실체의 각각으로부터 어떤 것을 도출하는 중간의 것(intermediary), 그리고 개인을 이쪽 편으로 끌어낼 때, 다른 쪽은 종속시키는 효과를 갖게 된다.

모양 (Form)
유기체(organization) 또는 본질이 나타나게 하는 유기적 저장소(organic receptacle)를 철학적 의미로 사용했다. 이것은 외형(shape, 모양)에 관련되지 않고, 질서, 의향, 배열과 실재물의 부분들과 관련된다. 기능 또는 사용과 밀접하게 연합하고 있다.

목적, 원인, 결과 (End, Cause, Effect)
목표(goal) 또는 의도(purpose)의 철학적 의미에서 사용되는데, 목적은 의지력의 사랑 또는 의향(intention)이고, 원인은 의도(purpose)를 성취하려고 이해력을 통하여 있는 수단들이다, 결과는 초래하는 행동, 말함, 감각 또는 생산, 고로 성취됨이다.

묶는 것들(속박됨, bonds)
이는 족쇄를 채우는 식의 뜻에서는 아니고, 어떤 개인이 유독 사랑하는 특별난 것을 뜻한다. 즉 너무나 사랑하기에 그것에 묶인 상태인 듯 되는 것, 하여 사랑된 것의 반대되는 것에 대하여는 금하게 한다(아랑곳하지 않는다). 외적 묶임들은 시민 생활에, 내적 묶임들은 영적 생활에 영향을 준다..

방계적인 선(Collateral good, 부수적인 선, 서자 출신의 선)
자연적 선함과 영적 선함 사이에 놓인 선함, 하여 일부는 자연적 선함, 일부는 영적 선함이 섞인 상태의 선함, 즉 본질적으로는 영적인 것들에 대한 자연적 수준의 사랑, 고로 진짜의 선함은 아니나 진짜의 선함에 관련되고 있다.

별개의 하나 (구분되는 하나, distinctly one)
선각자에게서의 단일성(하나임, oneness)은 단순함이 아니고 목적(의도, purpose)의 통일성(unity)이다. 사랑과 진리는 행동 안에서 분리되어 존재할 수가 없다, 그러나 여전히 그것들의 하나임 안에서 구분될 수 있다, 고로 “별개의” 또는 더 나은 표현으로는 “구분할 수 있게 있는 하나”이다.

부가적인 (adscititious)
때로는 “외래의(adventitious)”로도 번역할 때도 있다, 부가적인(additional), 외적 측면에서 첨가됨

부끄러히 여김 (창피함, 굴욕, Humiliation)
당황함이나, 근대적 의미에서는 그렇게 사용되지 않고, 겸손의 상태를 뜻하기 위하여 사용하고 있다, 이 겸손 안에서 개인은 자기에게 있는 듯 여겨지는 어떤 선 또는 진리가 실제로는 주님의 것이 자기 안에 있는 것임을 인정한다. 이 단어는 주님께서 그분의 영적 텅빔의 상태를 두고 사용하셨다.

부부의 (결혼의, conjugial)
이는 선각자가 철자를 기록함에서 (conjugalis 대신) conjugialis를 더 좋아했다는 점을 반영하기 위해 초기 번역자들이 개발한 단어이다. 이 단어는 결혼에 속하는 것들, 그리고 결혼한 양쪽(부부)가 서로를 위하여 가지는 사랑들에 관련되고 있다. 일반적으로 적극적 자세를 취한다.

불연속 등차들 (discrete degrees)
구분되는 수준들, 이쪽이 저쪽 보다 더 높다, 마치 목적, 원인, 결과의 관계와 같다. 또한 수직적 수준들이라 불리운다, 고도(altitude)의 등차들, 높이의 등차들.

보편적 인간 (Universal Human)
맥시무스 호모에 대한 돌씨의 번역어이다. “웅대한 사람”을 보라.

보편적 교회 (Universal church)
“우주로부터의 교회(the church universal)”, 모든 곳에 존재하는 교회를 말한다, 교회 조직체를 초월한 교회이다. 진실로 전기독교적인 개념, 이 세상의 모든 종교에서 각 종교의 신앙으로부터 있는 신실한 개인들.

사람 (Man, homo, vir)
라틴어는 “사람”을 위해 두 단어들을 가진다: 호모(homo)-개인(person, 남자와 여자 모두), 인류(mamkind), 본질적 개인으로서의 주님; 그리고 버(vir)-남자 인간의 존재.

사정관(assessor, 재산 평가인)
1716년 선각자는 광산 왕립 대학에 “비범한 사정관”으로 위촉되어졌다, 즉 그는 스웨덴 광산국의 협력 멤버로 명명되어졌다. 그는 1724년 사정관 정회
원이 되었다. (그때 당시 광산국은 국왕 직속 감시 아래에 있었는데, 그 이유가 왕의 중요한 자금 조달이 금을 비롯한 광산 채굴에 있었기 때문이다 역자주)

사탄 (Satan)
악마를 보라. 악의 욕망들을 지적으로 확증하는 악령. “악한 자”의 이름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항간에서 말해지는 것, 즉 하나의 제 일의 악마 또는 어둠의 제 일 인 자가 있다는 식으로 선각자는 믿지 않는다)

사회 (Society)
연계된 사람들의 그룹, 함께 생활하는 사람의 그룹, 공동체, 다음 세계에서 천사들 또는 영들의 그룹. 또한 스웨덴볼지언들이 자기들의 지역 교회 조직이나 모임을 지칭할때에도 사용했다.

상응 (correspondence)
스웨덴볼기안이즘에 기초되는 개념, 신성과 모든 보다 낮은 생명의 등차들 사이에 있는 원인적인 관계와 기능적인 관계이다, 이것은 신성이 창조의 모든 것 안으로 흘러가는 방식, 또는 법칙이다.

상응물들(correspondences)
응답하고, 걸맞고, 동의하고, 또는 서로에게 유추되는 어떤 것들, 또는 실재물들, 마치 태양의 열과 빛이 하느님의 사랑과 지혜에 상응하는 것과 같다. 고로 열과 사랑, 그리고 빛과 진리는 상응물인 것이다.

새 교회 (New Church) (1)
하느님-인간 관계들의 어떤 새로운 상태를 놓고 일반적으로 사용되었다, 또한 주님만을 인정하고 예배하고, 그분의 말씀을 거룩하게 붙들고, 신성의 진리들을 사랑하고, 그리고 선행으로부터 분리된 신앙을 거절하는 교회 시대를 언급할 때 사용되었다.

새 교회 (New Church) (2)
스웨덴볽의 신학 저서들에서 발견한 교리들에 접착된 어떤 조직화된 종교 그룹을 대중적으로 규정하려고 사용된 명칭이다. 이런 그룹의 개개인들은 새 교회인(a New Churchman)이라 종종 불리운다

새 예루살렘 (New Jerusalem)
성경의 계시록서의 뒷 부분에서 묘사된 상징적 도성이다. 초기 스웨덴볽지언들이 천국의 도성을 수단으로 상징화되고 의미된 교회를 자기들의 교회로서 삼기 위해 이 이름을 채택하였었다.

새 예루살렘의 교회 (Church of the New Jerusalem)
선각자께서 기독교 교리의 본질되는 주석을 이끌어낸 교회들 중에서 가장 일반적으로 사용한 교회의 이름인데, 약식으로 말하면, “새 교회(New Church)” 이다.

선 (Good)
선함 또는 선한 것을 뜻하려고 사용한다, 이것은 신성의 질서에 따라서 생각하고 행동함에 애착함이라고 일반적으로 정의된다. 고로 이것은 쓰임(use)이 포함된 주님과 이웃을 사랑함이 그 품질이다. 인간에 있는 선은 하느님의 신성의 선에 관련이 있다.

선으로부터 진리에 애착함 (Affection of truth from good)
정밀하게 정의를 내린다면 “선행(charity)”이다, 즉 (이웃에) 쓸모있는 행동들을 있게 하는 각 개인들에 있는 선으로부터 만들어내진 진리를 사랑함이다.

선의 진리 (Truth of Good)
이 관용구의 또 다른 대체할 수 있는 어구는 “사랑의 지혜”가 있다. 이는 누군가가 지혜있기를 바램, 또는 지혜 있기를 사랑함을 가지지 않으면 지혜에
도달될 수 없다를 알아채게 한다. 이 사랑으로부터 결과할 수 있는 지혜가 “선의 진리”이다.

선행 (charity)
흔한 대중적인 사용법에서일 경우, 이 단어는 물질적 궁핍을 경감되게 해주는 것(자선 행위)을 뜻한다. 선각자는 이 단어를 영의 측면에서 관심을 갖는 것, 영의 복지를 향상되게 하는 것, 사욕이 없이 주어진 업무에 매진함, 이웃에 선을 행함에서 어떤 보수도 예상되지 않는다해도 심정에서 기쁨을 느끼고 있는 것을 뜻하는데 사용하고 있다.

수정 (변경, Modification)
선각자의 신학 저서 이전의 그의 어떤 저서에서, 본성을 통하여 교통하는 모든 방식을 함축하는 개념으로 사용하였다. 이 생각은 그의 후기 교리 또는 상응물에 관한 개념 안에 통합되고 포함시켜졌다.

순결한 (chaste)
흔히 이해되는 것은 순진한, 순수한, 독신(주의) 따위이다. 선각자는 결혼한 자가 섹스에 대하여 순수하고 깨끗한 자세를 가지는 것을 뜻하는데 사용하였다. 진정한 결혼의 사랑은 “순결함 자체”이다 말하고 있다.

순수 지력 (Pure intellect)
선각자의 신학 저서가 있기 전에서인 이성 심리학(Rational Psychology)이라는 책에서, 그는 순수 지력이란 개인들에게 생각하고 추론하는 힘을 주는 능력이다라고 정의하고 있다, 그리고 이 순수 지력은 하느님으로부터 파생된 직각적인 지혜와 함께 유기체의 모든 과정들을 통치한다.

순진 (Innocence)
라틴어의 뿌리에서는 해가 없음(harmlessness)을 뜻한다. 영적 순진은 자아
에 의해 인도되기 보다 주님에 의해 인도되기를 내향적으로 기뻐함이다. 이 특성은 각 개인에 인접되어 있으면서 당사자가 천국으로 인도되는 것을 돕는다.

스톨지 (Storge)
유아를 사랑함을 뜻하는 그맄어로부터 빌려온 단어, 특별히 그들의 부모들에 의해 유아들을 위해 느끼는 사랑. “어버이다운 사랑”, “어버이다운 애정”으로 번역되었다.

시대의 종말 (consummation of the age)
잘못 번역된 킹제임스 성경의 “세상의 끝”을 대체할 수 있는 어구. 이 어구는 시대, 또는 년대의 마감, 또는 끝을 언급한다.

시리즈(Series)
연결된 순서, 생각함의 열차. 선각자의 신학 저서 이전의 시기의 저서에 “시리즈들과 사회” 그리고 “시리즈들과 등차들”의 용어들이 가설로 언급되었는데, 이후 등차에 관한 신학적 개념에 포함시켜졌다.

시험 (Temptation)
나쁜 것을 하도록 부추킴 또는 자극함의 의미에서 사용되지 않는다. 이것은 각 개인의 지배하는 사랑을 공격하여 개인을 심리하고 테스트한다- 당사자의 특성을 밝히 드러내주고, 그 특성이 더 힘세어질 기회를 제공하는 내적 투쟁이다.

신앙의 진리 (Truth of faith)
누군가의 신앙의 부분에 있는 진정한 생각, 그러나 당사자의 삶에서 사용하게 놓여져 있지는 않은 진리이다. 이는 “신앙의 선”에 대조되어 사용된다, 이것은 누군가의 살아있는 신조들로부터 와지는 선함이다.

신성이 되심 (Glorification)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분의 있음의 모든 평면들에 있는 인간적일 뿐인 것을 벗기 위해 그것들을 신성으로 만드시는 과정. 또한 주님의 마음 안에 신성한 의식을 건립하심, 그리하여 그분이 생명 자체가 되셨다를 뜻하는데에도 사용되었다.

신성의 인간 (Divine Human)
새 교회 신학의 중심을 차지하는 생각, 이 용어는 주님의 인간이 신성이 되신 이후의 주 예수 그리스도에 적용된다, 고로 인간의 형체에 있는 신성의 사랑이다-즉 “신위(Deity)”의 모든 충만함이 신체의 형체 안에 살고 있으심”이다. (골. 2:9)

신성의 자연 평면 (Divine Natural)
신성이 되심, 또는 신성으로 만들어진 예수의 마음, 또는 내부의 본성의 자연적 수준, 또는 가장 낮은 수준.

신성이 진행함 (Divine proceeding)
진행함의 행동에 있는 신성, 고로 그분으로부터 방산되는 하느님의 품질들, 성경의 어떤 문맥에서는 성령과 필적되고 있다.

신하 (Subject, 종속하는)
평범한 사용법에 추가하여, 철학적 의미에서는 활동 또는 행위에 기초가 되는 것을 말하는데 사용하였다. 예를 들면, 선행은 “신하”를 가져야만 한다, 즉 선행을 구체화하고, 느끼고, 실시하는 개성.

쓰임 (사용, Use)
쓸모 있는 활동, 목적을 섬기는 기능, 종종 선과 같은 뜻의 선상에 놓이기도 한다. 섬기기를 진짜로 바램이 들어있는 수고함을 정규적으로 함축하고 있
다. 고로 “쓰임으로부터의 선, good of use”이 목적이다. 이 목적에 잘 어울리는 알맹이나 동기를 가지고 있는 마음가짐이나 행위.

아니마 (anima, 영혼, 내적 개성, 남성의 여성적 요소)
인간의 혼(soul), 이 단어는 다양한 전통적인 의미선상에 있어 한마디로 통일된 정의는 힘들다. 사후 살게되는 개인의 부분이다. 선각자는 분석 심리학자로 유명한 융(Jung) 보다 훨씬 먼저 이 단어를 사용했지만, 융이 이 단어에 여성의 특성을 할당했으나 선각자의 경우에서는 그런 추가된 의미는 보여지지 않는다.

아니뮤스(animus, 왕성한 정신, 외적 개성, 여성의 남성적 요소)
때로는 “의향(desposition)”으로 번역된다. 이 단어는 (만일 아니마와 대비하여 사용된다면 보다 수준이 낮은 마음,) 일반적으로 마음(mind)에 관련된다. 각자의 기질, 개성.

악 (Evil)
악, 자체만에 주목하면, 선으로부터 절단(severance) 또는 무질서된 선, 하느님으로부터 분리(disunion)와 주님과 천국에 반대함. 고로 개인 안에 있는 악은 그 개인 내부에 있는 지옥이다.

악귀들 (인간의 일생 동안 따라 다닌다는 귀신, Genii)
선각자는 이 용어를 가장 나쁜 종류의 악령들을 지칭하는데 사용하고 있다, 이것은 개인의 의지에 들어붙어 악의에 차서 행동하게 하고, 당사자의 선한 바램들을 악한 의도들 쪽으로 비튼다. 진리를 만들려고 노력하는 자가 이런 악령에게서는 그것이 거짓이고 반대적인 것으로 나타난다.

악마 (devil)
선각자를 위하여서 단어 “악마(devil)”는 지옥들 전체를 뜻한다. 악마는 사후에 있는 악한 개인이다. “사탄”에 대비해볼 때, 사탄은 자신들 안에 있는 악들의 욕망들을 지성적으로 확증한다, 악마들은 그것들을 살아내려 뜻한다.

악의 거짓 (Falsity of evil)
이는 “악으로부터의 거짓(falsity of evil)”라고도 불리운다. 거짓 생각 또는 악한 바램이 원인이 되어 진리가 비뚫어짐.

…안에 (In)
“종사함 안에” 또는 “상태 또는 조건 안에”의 의미에서 자주 사용된다. 선각자의 책에서 우리는 읽는 바, 어떤 개인이 “선 안에”, 또는 “선에 애착함 안에” 있다 등등이라고 읽는다. 이는 그가 선인 것을 사랑함의 상태 안에, 또는 선함의 상태 안에 있다를 뜻한다.

알카넘 (알캐이넘, arcanum)
비밀, 감추인 어떤 것. 이 단어의 복수는 알카나(알캐이너, arcana)이다. “알카나 세레스티아(arcana coelestia), 즉 천국의 비밀들”은 선각자의 가장 방대한 저서 명이다.

양심 (conscience)
선을 악으로부터 구별하는 능력-선천적인 것이 아니고 배워서 획득한 능력인 바 모든 이에게 균일하게 똑같을 수 없다. 선한 자만이 진정한 양심을 가진다. 가짜 양심이 선의로 의도될 수도 있을지 모르나, 신조의 오류들에 부분적으로 기초하고 있다.

양심 장사치들 (conscience mongers)
지나치게 양심적인 인간들, 타인을 혹평하는 인간들.

역사적인 신앙 (Historical faith)
전통에 기초한 “신앙” 또는 타인들의 신조들(믿음들)에 기초한 “신앙”, 고로 진실된 신앙은 아닌 것이 확실하고, 신앙 같이 나타남(껍데기 신앙)일 뿐이다 (“가정의 선”도 참조해보라.)

영계 (영적 세계, Spiritual world)
다음 세계, 또는 사후 개인들의 거처를 일반적으로 아우러서 언급하는 용어이다. 영들의 세계, 즉 사후 들어가는 첫 상태를 위해 선각자가 이름 지은 영들의 세계, 천국과 지옥의 중간에 있는 영들의 세계와 혼동하지 말라.

오류(잘못된 생각, Fallacy)
현혹시키는 나타남. (태양이 “올라온다” 같은 식에서의) 감각들의 오류들이 가장 작은 중대한 것이다. 보다 나쁜 것은 당사자의 보다 수준 낮은 본성으로부터 파생되어진다, 즉 악과 결합된 거짓들이다, 이는 개인의 부분에 신앙의 부족에 기인된다.

외관 (나타남, appearance)
순수한 진리, 또는 신성의 진리를 그 진리가 숙박한 형체들로부터 구별하려고 사용되는 단어이다. 고로, 모든 이는 자기의 유한한 상태에 따라 진리를 볼 때의 그 진리이다. 진리의 이런 나타남을 당사자가 선한 의도로 사용한다면, 이 나타남을 진리로서 주님께서 받아주시기 때문에, 망상(잘못 생각함, illusion)은 아니다.

웅대한 사람 (Grand Man)
라틴어의 맥시무스 호모(maximus homo, 가장 큰 사람, greatest man), 돌(Dole)에 의해서는 “보편적인(우주적인) 인간”으로 번역되었는데, 주님의 “몸”으로서의 천국들 전체, 또는 천국과 땅 위의 교회를 아우르는 주님의 왕국에 관련된다. 때로는 주님 자신을 뜻하는 데에도 사용된다.

유입 (Influx)
흘러듦(inflow), 또는 입력(input) 또는 영향력 (influence)를 뜻한다. 이 단어는 행동하는 모든 힘은 하느님으로부터 창조의 모든 것 안으로 변함없고 중단 없이 흐르고 있다는 근본적인 개념을 묘사하는데 사용된다.

유전적 악 (Hereditary evil)
이 용어는 선각자에 의해 별도의 제한됨도 없이 무조건식으로 사용되는 편이기는 하나, 사실상 그는 전통적 견해는 사절하고, 우리는 실제의 악을 유전적으로 상속하는 것이 아니고 악을 향하려는 경향성들을 상속한다고 주장한다. 우리는 성인들이 되어서는 이것을 확증하거나 채택하거나, 또는 거절하거나 거부할는지 모른다.

유출 (Efflux)
산출(output), 밖으로 흐름. 하느님으로부터 개인들 안으로 흘러든 선과 진리는 되돌아서 이웃을 사랑함의 행동들의 형체로 세상 안으로 흘러나간다. 하느님의 보편적 법은 유입은 언제나 유출에 의거 있게 된다는 것이다.

육체의 (coporeal)
실재를 나타내는데 자주 사용되어 신체적 부분, 또는 신체에 부착된 마음의 부분을 뜻하였다. 신체적, 육체적인 것은 감각과 육체적 쾌락들과 더불어 선취되어 있다.

은근히 주입하다 (Insinuate)
기초되는 라틴어의 의미에서 이 단어는 어떤 것을 노골적 방법이 아닌 미묘하게 받아들여지게 또는 스며들게하는 것을 뜻한다. 수용자가 주입 과정을 충분히 알아챔이 없이 내면의 위치를 할당하는 것이다.

음란 (간통, scortatory)
성관계가 문란한 것을 묘사한 것이다, 음행, 매춘.

의미함 (Significative)
영적 뜻을 운반하고 가리키는 어떤 것. 특별한 뜻, 뜻있음. 현재는 표현함과 상응함과 구분되어 사용된다.

의지력과 이해력 (Will and understanding)
“의도력과 식별력(intentionality and discernment)”, “자발력과 지력(the voluntary and the intellectual)”. 이것들은 인간의 개성 속의 포괄적인 두 양상들 또는 능력들이다. 의지력은 의지력의 모든 기능들을 포함하고, 신성의 영향력에 반응을 보이고, 수용하는 부분을 섬긴다. 이해력은 식별하는 모든 기능들을 포함하고, 의지력을 가르치고, 그것의 의향들을 집행하는 것을 섬긴다.

이성이 있는 (합리적인, rational)
이 단어는 실명사로 사용하는 경우가 매우 흔해졌다. 천국으로부터의 빛이 세상의 빛 안에 있는 것을 계발하는 정신적 평면이다. 의식되는 마음 중에서 가장 높은 수준이다. 합리적 진리는 자연적인 것들에 관한 영적 진리이다.

이웃 (Neighbor)
내 집 아닌 다음 집에 있는 사람이면 이웃이다가 절대로 아니다. 이런 독특한 생각선상에 있다, 즉 주님으로부터의 선이 이웃인 것이다, 고로 각 개인이 나의 이웃이 되는 척도는 상대방이 주님으로부터의 선을 받아들인 양과 질에서 이다. 고로 가장 비중이 큰 이웃의 순서를 차례로 열거한다면, 주님-교회-나의 나라 등등으로 내려간다.

인식함들(cognitions)
때로는 “지식들”로도 번역된다. 이는 사실들(facts)을 관념들(ideas), 또는 앎의 보다 깊은 수준들 안으로 조직화 함을 뜻하기 위해 사용된다. 엘리엇씨는 그의 새 번역서인 “알카나 세레스티아”에서 “내면의 것들에 관련되는 지식의 항목들”이라 정의하고 있다.

있음 (being, ens)
실재(entity) 또는 구별되는 어떤 것을 뜻하기 위해 사용되는데 선각자는 이 단어를 매우 드물게 사용했다, 또한 순수하게 정신적 건설을 뜻하기 위한 합리성, 이성적 인 것에 대한 어구인 “ens rationis”에서 사용되었다. 이를 있음인 esse, 즉 “혼” 또는 어떤 것의 본질되는 속성과 대비해보라.

있음 (being, esse)
어떤 것에 있는 본질되는 품질, 실체(reality) 자체, 예를 들면, 하느님의 근본적 본질은 신성한 사랑이다.

자기 것이 되게 하다 (appropriate, 사유)
이 단어는 선각자에 의해 형용사로는 한번도 사용되지 않고 동사로만 사용된 특별한 단어인데, 자신에게 고유한 것으로 주장함, 또는 소유하는 것이다.

자기 자신 (Own)
자기 자신은 라틴어 suus 와 proprium 모두를 번역하는데 몇 번역자에 의해 사용되었다. 자아(self), 자아를 위해, 자아로부터 살아감, 이기심이라는 자아를 느낌, 인간의 거듭남에서 자아가 인도함이라는 망상은 필수적이다.

자아 (Proprium)
자기 자신을 보라. 이기심을 느낌이라는 기초적 의미에 추가하여 많은 다른 의미들을 가지는 경우도 있다, 즉 천사적인 자아, 악마적인 자아, 인간 자아, 신성한 자아, 지옥적 자아, 지적 자아, 자발적 자아 등등이다.

자아로서 같이 (as of self)
마치 자기 고유의 힘을 수단으로처럼, 컽으로 보기에 자신 스스로인 듯 하는 것. 선각자의 신학에서 비평적 개념인데, 즉 누군가가 “마치” 자아의 힘에서 인 듯 행동하는 것, 그러나 동시에 모든 힘은 하느님으로부터 온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다.

자연적 인간 (Natural man)
세상적인 것들에 집중적으로 흥미를 가지는 어떤 개인을 뜻한다 할지라도, 그 개인의 전체를 뜻하여서는 일반적으로 사용되지 않는다. 단지 어떤 개개인에게서 가장 수준이 낮은 인간의 마음을 언급할 때 가장 흔히 사용되고 있다.

자연주의자 (Naturalist)
하느님을 믿는 대신 자연을 믿는다는 어떤 개인을 경멸적 의미에서 만 사용되었다, 즉 물질주의자와 비슷하다. 자연주의도 이와 비슷한데, 모든 종교적 개념들의 근원을 자연에 신뢰를 둔 것이라 정의된다.

자유 (Freedom)
애착으로부터 생각하고 뜻하고, 이치에 맞다고 여겨지는 것에 따라서 자유하게 행동하는 것이다. 만일 이것들이 천국적이다면, 자유는 진짜이다; 만일 지옥적이다면, 이것은 외관적일(껍데기적일) 뿐, 실제로는 비 자유함이다. 진정한 자유는 당사자로 자아 강요(self-compulsion)를 사용하는 것을 허용한다.

지배하는 사랑 (Ruling love)
삶을 좌지우지하는 각 개인에 있는 가장 강력한 사랑. 가능할 수 있는 지배하는 사랑은 네 가지로 함축해볼 수 있다: 1. 하느님을 사랑함. 2. 이웃을 사랑함. 3. 자아를 사랑함. 4. 세상을 사랑함이다. 이 중 첫 둘째 만이 거듭나지는 개인을 위하여 받아져야 하는 지배하는 사랑들이다.

지혜 (Wisdom)
많은 지식을 소유함을 언급하는 데에는 거의 사용되지 않는다, 이 용어는 통상 삶에 관한 것만을 서술하는데 사용되고 있다. 지혜는 사랑으로부터 진정한 것을 지각함, 뜻함, 행동함으로 구성된다. 슬기로운 개인은 진리에 기초한 선을 행함을 위한 변동없는
바램을 가지고 있다.

진실한 (True)
절대적 의미에서 진실함은 신성한 사랑의 형체와 수단들이다. 관계적 의미에서, 이것은 개개인의 사랑 속에 있는 지각하고 결과를 있게 하는 기능이다.

진리의 선 (Good of truth)
개개인 안에서 진리를 수단으로 도달되는 상태인데, 이 상태는 사랑의 행동들 안에서 자체를 표현한다, 이를 수단으로 그 진리는 선이 된다. 이것은 영적인 선이라고도 불리운다.

질투 (Jealousy, zelotypia)
선각자는 부부의 사랑의 첫 장에서만 사용하였는데, 귀중한 것을 보호함을 사랑함, 특히 결혼의 사랑을 보호하기를 사랑함을 뜻하기 위해 사용했다. 그는 나쁜 질투가 있다는 것도 인정하고 있으나, 그가 강조하고 싶은 점은 질투의 긍정적 측면에서 이다. 그는 이것을 열정들 중의 열정이라 일컫는다-즉 열정의 진정한 모양새이다.

천사 (angel)
천국에 있는 개인(person). 선각자의 신학에서 모든 천사들은 처음에 자연계에 살았고, 사후 천국에 입장한 사람들이다. 선각자는 천사의 개념을 놓고, 창조로부터의 분리된 계층으로 말하는 것을 거절한다.

천성 (타고난 자질, Genius)
개인의 기질, 특성, 재능, 경향성, 개인과 개인들 집단의 영 또는 품질.

첩 (pellicacy, concubine, mistress)
이 단어는 pellex로부터 인데, 첩을 두고 사는 상태이다

최말단 (Ultimate)
연결 고리의 마지막, 수준이 가장 낮은 것, 가장 외적인 것, 가장 먼 것. “가장 큰 것”을 뜻하기 위해 선각자에 의해 사용되지 않았다.

충격(자극, conatus)
종종 “애씀(endeavor)”으로 번역된다. 일반적으로 행동들 뒤에 놓인 에너지를 두고 사용된다. 특별한 목적들을 쟁취하게 하는 꾸준한 충격을 받는 생활 자세일 수 있다.

타고난 (선천적인, connate)
글자대로 말하면, “출생으로부터 존재하고 있음”이다, 이것은 때로는 유전적 경향성들을 부정하는데 관련되어 사용되고 있다. 또한 자주 비슷한 단어인 생득의(innate, 타고난), 천부의 (inborn), 같은 성질의(congenial)와 더불어 사용된다

탐욕 (cupidity, 강력한 욕망)
(현세에의 욕망을 보라.) 자연적 마음으로부터 일어나는 강력한 욕구, 갈망, 그리워함. 이 단어의 라틴 뿌리는 현세에의 욕망의 뿌리만큼 강한 부정적인 것을 함축하여 운반하지는 것은 아닌 듯 비쳐진다.

태고 교회 (Most ancient church)
선각자는 이 용어를 대문자로 자주 표기했다. 하여 이 이름이 매우 지당하다 싶어서인 듯한 느낌을 우리로 갖게 한다. 이 용어는 신성에 관련하여서 일 경우, 가장 이른 유사 이전(역사 문명 이전)을 언급하는 전문어이다. 이 용어는 창조와 에덴의 동산을 언급하는 창세기서의 사건에 상징적으로 결합되어 있다.

트란스훌럭스 (Transflux)
관통하여 흘러가버림. 주님으로부터의 선이 아무런 효과도 보지 못하고 어떤 개인을 관통하여 흘러가버리는 것을 부정적으로 언급함에 사용되었다. 마치 물이 조리채를 빠져나가는 경우 같다. 이런 개인은 양심 없이 있다라고 말해진다.

평형 (Equilibrium)
(균형을 보라.) 가장 널리 가능할 수 있는 선각자의 번역에서 용어 “평형”이 발견될 것이다. 현재까지에서, 보다 단순하고 충분하게 어울리는 번역문은 돌(Dole)의 번역에서의 “균형”에 번역어의 한계가 그어지고 있는 실정이다.

표현 (Representative)
영적 생각(idea)을 상징하려고 사용되는 자연의 대상물, 개인, 행동, 또는 이 영적 생각 자체. 또한 영계에서 보일 수 있는 형체에서 생각이 표출됨.

합리적인 것 (이성적인 것, Ens rationis)
순수하게 정신적 건축물, 마음 안에서만 존재하는 어떤 것. 어떤 문맥에서는 도깨비불(will-o-the-wisp, ignis fatuus, 환영)에 대충 견주기도 한다. 있음 [ens]를 보라.

허용 (Permission)
이는 신성한 섭리의 한 부분이라 선각자는 규정하고 있다. 허용된 것, 관용(묵인)된 것은 허락된 것, 묵인되어진 어떤 것이나 그렇다고 하느님이 바라는 어떤 것은 아니다. 바람직하지 않은 어떤 행동들을 묵인하는 것은 인간의 자유를 침해하지는 않는다.

현세에의 욕망(concupiscence, 강한 욕망)
몇몇 번역자들에 의해 존속되어 온 라틴어풍의 단어이다. 동사 형체는 어떤 것을 강하게 바램(desire), 또는 갈망함(lust)을 뜻한다. 명사는 강한 욕구를 뜻하는데, 통상적으로는 악, 또는 (섹스 쪽이거나 아니거나 할는지 모르는) 욕망이다. 때로는 탐욕(cupidity)이라는 단어와 분간할 수 없는 경우도 많다.

황폐됨 (Vastation)
황무한 상태, 극점(종말), 다빠져나가 텅빔. 영들의 세계에서 벌어지는 과정, 즉 외적인 악들과 거짓들이 선한 자로부터 제거됨, 그리고 위선적으로 있는 선들과 단지 지식들인 것이 악한 자로부터 제거됨, 하여 어정쩡하게 선과 악이 뒤섞여 있던 세상에서의 인간의 상태가 선과 악이 선명한 상태로 확실히 구분되는 과정에서 사용되는 단어이다.

회개 (Repentance)
재출생에서의 첫 단계, 여기에는 하느님에게 죄들을 고백함, 자기가 용서되기를 간구함이 포함되고, 진정한 선행과 신앙의 교훈들에 따라 새로운 생활을 이끌려는 진실한 노력이 뒤따르는 것이다.

(외부쪽에) 흘러듦 (afflux)
…쪽으로 흐름, 또는 …쪽을 향하여 흐름. 이 방식을 수단으로 주님께서는 악을, 악한 자를 통제하신다. 선과 진리는 악한 자 쪽으로(to) 흐를 수는 있으나, 그렇다고 악이나 악한 자 안쪽으로(into)는 흐르지 않는다. 고로 악이나 악한 자를 통치하는 것은 내부(within)로부터가 아닌 외부(without)로부터 이다. 이 단어는 (내부쪽에) 유입됨(influx, 흘러듦)과 날카롭게 대비되어 선각자의 책에서는 사용되나 한국어에서는 같은 말로 번역되고 있어 가로에 영어를 추가로 기입해서 (역자는) 구별해보고 있다.

선각자의 신학에서만 유일한 기본적 생각들(concepts)

1. 하느님에 관하여 선각자에게 밝혀진 기본적 생각들

신성한 생명은 하나이고, (사실) 생명은 이 생명밖에 없다. 주님 만이 생명 자체이시다, 그 이유는 그분이 생명 자체이시기 때문이다. 땅 위 인간과 영계에 있는 인간은 이 생명의 그릇들일 뿐이다.

(참고: 선각자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뜻하기 위해 단어 “주님”을 시종일관하게 사용한다. 또한 이 글 내지 역자의 번역서에서 사용되는 단어 중 개인(個人, 때로는 인물, 人物, person)이 있는데, 그러나 역자가 이 단어를 영한 사전에서 같이 사람 등의 알기 쉬운 단어로 번역하지 않고 조금은 껄끄러운 개인으로 표기하는 이유는 지상에 태어나 아무개라는 이름으로 살았던 물질인 인간, 즉 개인(예를 들면, 예수)을 뾰족이 암시하고 싶어서 이다.)

하느님의 본질에는 두 구성 요소가 있는데, 그것은 사랑과 지혜이다. 하느님의 사랑을 구성하는 세 고유 특성이 있는데, 그것은 그 자체의 바깥쪽 다른 이들을 사랑하는 것, 다른 이들과 하나이기를 바라는 것, 그리고 다른 이들을 자체로부터 복되게 하여주는 것이다.

신성의 사랑과 지혜를 본질 자체 측면에서 일 경우, 우리는 생각조차 할 수 없다. 그 이유는 그것은 무한이어서 우리의 사고력을 초월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랑과 지혜가 상응적(correspondential) 외관에서 일 경우, 우리는 생각해볼 수 있다. 천사의 눈에서, 주님은 태양으로서 나타난다, 이로부터 영적인 열과 빛이 나아가는 바, 유추해봄(analogy)을 수단으로 천사들은 자기들이 유지 지탱할 수 있는 이유는 이 영적 빛과 열, 즉 하느님으로부터 꾸준히 방산되는 신성의 사랑과 지혜에 의해서 이다를 생각하고 알 수 있다.

상응을 수단으로, 이 유추해봄은 땅 위 개인들도 사용할 수 있다. 즉, 자연이 물질적 태양의 열과 빛을 수단으로 매 순간을 유지 지탱하듯, 인간인 나는 주님의 신성한 사랑과 지혜를 수단으로 영적으로 유지 지탱되고 있다는 것을 생각해보고 알 수 있다.

주님(the Lord)은 보편적(우주적) 인간(universal human)이시다. 주 예수 그리스도, 이 분만이 충분하게(fully, 결여됨이 없는) 인간이시다. 이 분으로부터 천사들, 영들, 그리고 지상의 거주민들은 집합적으로 “사람들(men)”이라 불리운다. 이 분이 천국 안으로 유입되심으로 전체 천국은 하나의 인간을 표현하고 닮아 있게 하고 있다. 유추를 수단으로, 땅 위 개인들의 (인간) 본성 안에 있는 천국의 것 만이 진실로 인간(human)이다

새로운 기독 세계의 하느님은 하나의 보일 수 있는 하느님이 계시고, 이 분 안에 보일 수 없는 하느님이 계시는데, 마치 혼이 그의 신체 안에 있는 것과 같다. 만일 누군가가 그렇지 않다라고 판단했다면, 그는 이 하느님과 결합되어질 수 없을 것이다, 그 이유는 하느님과 개인들의 사이에 있는 모든 결합은 상호적(reciprocal) 임이 틀림이 없기 때문이다. 이런 상호성은 보일 수 있는 하느님이 아니면 불가능하다.
위와 비슷하게, 모든 천국들 안에서, 하느님에 관하여 이런 생각밖에 없다: 즉, 그분은 개인이시다는 것, 그리고 이 개인이 주님이시다는 것이다. 골로새서에서 바울의 통찰력이 선각자의 견해가 진실임을 이렇게 증명하고 있다: 즉, 일어나시고 신성이 되신(risen and glorified) 예수 그리스도 안에, 하느님(Godhead)의 모든 충만함이 육체적으로 거주하시고 있다. 땅 위와 천국 안에 있는 사람(people)은 이를 알 수 있다.
하느님 안에 있는 삼위일체(trinity, 三位一體)에 관하여서 성경의 구절들은 상징적 언어에서 말하고 있다. 신성의 삼위일체는 주님의 한 개인 안에 있다, 이 셋을 구별해 알 수 있는 것은 혼, 신체, 그리고 이 둘의 결과인 활동(activity, 행동)으로 이해할 경우에서 이다. 유추를 수단으로 각각의 개인 안에도 삼위일체가 있다. 셋을 한꺼번에 취합하면 하나의 개인을 구성한다: 즉 혼, 신체, 그리고 혼이 신체를 이용한 결과인 행동이다. 그러나 이것은 유한한 삼위일체이다, 그 이유는 인간은 그릇들, 또는 생명의 “기관들(organs, 유기체들)”이기 때문이다. 주님 안에서의 삼위일체는 무한이고, 고로 신성인 이유는 주님은 그분의 인간(human)조차도 생명 자체이시기 때문이다.
아버지이든, 아들이든, 그리고 성령이든, 이 단어의 언급이 있는 말씀 안의 어디에서 이든, 이는 하느님의 속성을 구별해 말해보는 양상일 뿐이다. 다시 말해 하느님의 통일성(unity, 여럿이 아닌 하나) 안에 삼위가 있는 바, 아버지, 또는 성령(님) 같은 식으로 분리적으로는 존재하지 않고, 주님 만으로 존재한다는 말이다. (우리는 하느님을 주님으로만 부르는 것이 합당할지 모른다 역자주) “아버지”, 또는 하느님의 “혼(soul)”과 “영(Spirit)”, 또는 하느님의 활동은 주님 만으로부터 존재하고 출현(coming forth, 존재 안으로 옴)된다. 그러므로 하느님, 그리스도, 또는 성령으로 분리된 존재들로 말하는 듯 여겨지는 성경의 사건들이다 해도 상징적, 유추적으로 이해되어져야 한다. 고로 통찰력은 분리된 둘, 또는 셋의 신성의 존재들로서가 아닌 유일한 하나의 하느님의 속성과 활동의 어떤 양상(면모, aspect)들 쪽으로 있어야 할 것이다.

신성의 사랑은 모든 창조의 근원이고 지탱자이다. 영적인 존재들은 사랑 외에 다른 근원으로부터 존재 안으로 와질 수가 없다; 그리고 창조하는 사랑은 사랑 자체 이신 주님으로부터만 존재 안으로 와질 수가 있다 (세상 밖으로 나타나짐).

모든 창조의 보편적 목적(purpose, 의도)는 창조자가 창조된 우주와 영원히 합류하는(join) 것이다. 이 합류는 이 창조 안에 신성의 본성이 “거주”할 수 있는 존재들이 있어야 가능해진다. 다시 말해 신성에 걸 맞는 성질이 각 개인들 안에 있어야 합류가 가능하다는 말이다. 고로 모든 것은 각 개인들의 사용을 위해서 창조되어왔었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모든 창조된 것들의 사용은 가장 바깥 부분들로부터 개인들 쪽으로 등차적으로 올라간다, 그리고 개인들을 통하여 하느님 쪽으로 올라간다. 이것은 “생명의 순환”이라고도 불리운다.
창조의 특별한 목적은 하느님의 사랑을 받고 되돌림을 영원히 계속함으로, 인류로부터 천사들의 천국을 영원히 부풀려감일는지 모른다.

하나의 끈덕진 신학적 관념에 반대하여 있는 것은 이것이다, 즉 하느님은 무로부터 우주를 창조하지 않았다. 무로부터 만들어진 어떤 것도 있을 수가 없다. 모든 것들은 실체(substance, 물질) 자체인 실체로부터 창조되어져 왔다. 이 실체는 신성의 사랑이다. 이 근원으로부터 만 모든 것들은 만들어내지고 지탱되어진다.

하느님은 물질의 우주를 창조하셨는데, 이는 영적 실재(reality)들에 “옷을 주는(clothing)” 것, 그리고 개인들이 원하면, 그들 고유의 자유의지로부터 영적이고 잠재적인 천사의 존재들이 되는 평면(plane)을 제공하기 위하여서 이다.

자연 평면에서 더 이상 진짜 인간 다움(humanity)이 있지 않게 되었을 때, 그리고 인류가 바야흐로 파멸에 직면하려고 했을 때, 즉, 천국으로부터 생명과 빛을 받는 역량을 거의 잃었을 때, 하느님은 그분의 무한성을 유한성으로 만드셨다, 즉 예수 그리스도 라는 개인 안에서 세상 안으로 오셨다. 이때 쾌히 받아들심으로부터 주님이 “입으신” 인간 다움은 인류를 괴롭히는 허약함과 동일한 것을 지닌 지극히 평범한 인간의 어머니 마리아로부터의 것이었다. 그러나 (예수의) 내부에 잠재적인 신성의 거주하심에서 끌어냄을 수단으로 예수는 지상 평면에서 개인들에게 영향을 주는 천국과 지옥의 세력 사이에 있는 균형을 언제나 회복되게 하시면서, 점진적으로, 질서있게(순서적으로), 그리고 완전하게 지옥들의 힘들에 정면으로 맞서 이겨내셨다. 주님의 삶의 모든 과정은 되찾음을 구성하는 것, (즉) 개개인의 구원이 지금 그리고 언제나 가능하게 만드심이다.

2. 영적 세계에 관하여 선각자에게 밝히 알린 기본 생각들

진짜이고 영원한 영적 세계가 있다. 그 세계는 셋으로 구분되는데, 천국, 지옥 그리고 영들이 있는 중간 세계이다.

죽음은 삶에 있는 질서적, 필수적 단계이다. 인간의 신체가 그것의 생각들과 애착들에 상응하는 자연계에 있는 기능들을 더 이상 수행할 수 없을 때, 그 개인은 “죽는다”라고 말해진다, 그러나 개인은 죽지 않는다, 단지 지상 평면에서 사용을 위해 주어진 육체라는 부분들로부터 분리되어질 뿐이다, 개인은 살기를 계속하는데, 그 이유는 개인이 개인인 이유는 신체 때문이 아니라 영 때문, 즉 개인 안에 있는 생각하는 혼, 또는 영이 당사자 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애착과 더불은 생각이 그 개인을 구성한다. 고로 죽음은 이 세계로부터 저 세계로 건너가는 (다리 역할을 하는) 것일 뿐이다.

(자연계) 생명의 모두가 중단되자 마자, 개인은 영들의 세계에서 즉각적으로 소생되어진다. 이것은 가장 높은 천사들의 조력을 받아 주님에 의해 행해진다. 그 다음, 개인은 자기 검증과 자기 인식의 과정을 통하여 안내되어진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 또는 그녀 자신의 결단력이 영원한 집을 천국이든 지옥이든 선택할 수 있다. 어느 누구도 천국으로 입장이 주어지는 수단으로서의 “보상”이라는 것은 없다, 누구도 지옥으로 정죄됨을 수단으로 “처벌”되지 않는다. 천국과 지옥 안에서 모든 이는 자기 자신의 선택을 수단으로 각자의 영역에 있다.

죽음 후에 모두 각각의 개인에게는 자신의 생각들과 애착들을 수정할 충분한 수단들이 수여된다. 모두는 천사들을 수단으로 주님에 의해 가르쳐지고 인도되어진다; 그리고 모두는 자기들이 생명을 따라서 생명을 살아감이다는 것, 그리고 천국과 지옥이 있다는 것을 의식할 때, 그들은 첫째로 모든 진리들을 받아들임에 있다. 그러나 지상에서 (하느님을) 인정하지 않았고, 하느님에 맞서 악들을 죄들로서 금하는 노력을 만들지 않았던 이들은 이내 진리들을 듣는 것에 진저리를 내고 그것은 선택의 문제라고 여기고 물러나버린다. 짧게 말해, 섭리는 모두가 구원되는 쪽으로, 즉 천국을 선택함이 가능해지도록 그것을(진리의 선택을 하도록) 만들고 있다. 그리고 그렇게 선택하지 않은 개인은 홀로 책임질 수 있게 만들어져 있다.

용어 “영”은 영들의 세계라 불리우는 사후 첫 상태에서 일시적으로 있는 자를 뜻하기 위해 사용할 뿐이다. 용어 “천사”는 교육받고 자기 수정을 끝내서 천국에서 자기 자리를 찾아갈 수 있게 된 이들을 뜻한다. 지옥에 자신의 장소를 발견하는 이들은 사탄들 또는 악마들이라 불리워진다.

개인로부터의(각자의) 영이 영들의 세계 안으로 진입하였을 때, 그녀 또는 그의 얼굴과 음성의 음질은 그들이 세상에서 가졌었던 것들에 대단히 비슷하다. 그러나 그 후 얼굴과 여타 얼굴의 생김새들과 행동들은 점차적으로 각자의 애착(affection)들과 당사자를 지배했던 사랑(ruling love)에 일치하도록 바뀌고 있다. (지상에서는 가면을 씀이 가능하나 여기서는 가면이 허용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과거 신체 안에서 영의 생명의 외면의 것들의 사용함이 끝나서, 이 외면의 것들이 곁에 놓여진 지금, 바깥쪽으로의 나타남과 이전의 애착들은 바뀐다, 하여 바뀐 그의 상태란 그가 보여지는 것과 행동하는 것은 그의 내면의 존재와 완전 일치되고 있는 상태의 것이다.

천국의 생활을 세부적인 것까지 말하고저 이 책의 페이지를 할당하기에는 너무나 많은 바, 여기서는 윤곽만을 그리고 지나간다; 우선 그 곳의 삶이 진짜 삶이다는 것, 진짜 당신의 가족들이 거주한다는 것, 직업들(각자 할 일들)이 매우 다양하다는 것, 기쁨만을 언제나 선사하는 공동체와 모임들이 있다는 것이다. (특별한 것은), 거기에 많은 어린 아이들이 있다는 것, 그 이유는 유아기나 어린 아이 시절에 죽은 모두는 천국 안으로 직접 오고 거기서 성장하기 때문이다.

지옥은 기본적으로 천국에 반대되는 것들, 거기를 선택한 이들의 특성이 악인지라 그들의 파괴적 힘에 의해 (모두는) 총체적으로 (언제나) 찡그려져 있다. 거기에는 (주님께서 악한 자를 징벌하려 만든) 불, 유황(불), 또는 기분내키는대로의 임의적 처벌 등등이 없다; 악은 그것 고유의 사용료(toll)를 부담할 뿐이다; 지옥은 객관적으로 불행의 상태이다. 그러나 지옥에 있는 이들은 자신들을 위해 최고의 선택이었음을 자랑하고 있다.

3. 우리에게 있는 하느님의 말씀에 관하여 선각자에게 밝히 알린 기본 생각들

하느님이 언제나 설비해두시는 것은, 어느 시대를 무론하여 그 시대의 인간다움에 걸맞을 수 있는 신성한 진리의 밝힌(계시) 것을 관리하는 책무에 봉사하는 교회를 인류와 더불어 있게 하신 것이다. 우리가 아는 이 계시는 말씀(Word)이고, 이 말씀은 성경에서 발견되었다. 이 말씀을 수단으로 인류는 천국들과 계속적으로 연결된다. 그러므로 이 말씀에 있는 모두 각각의 표현들 안에 천국의 것들과 연관되는 내적 의미가 있다. 말씀이 내적 의미를 지닌 특성 때문에 말씀은 천국의 마음들과 인간의 마음들을 결합하게 한다.

많은(아마 대부분의) 기독인들이 이의 없이 이구동성 말하는 것은, 말씀은 신성의 호흡이 담겨 있다는(영감되어 있다, inspired) 것, 그러므로 거룩하다 이다. 그렇지만 선각자를 통한 이 계시 앞의 (시대에서) 경우, 말씀 안에서 어디에 말씀의 거룩함 또는 신성이 존재하는지를 알지 못했다. 그 이유가 말씀을 여느 책을 읽듯 평범히 읽는다면 (즉 글자 그대로의 의미에서의 경우라면), 여느 촌뜨기 작가의 저술 같고, 때로는 문체상 (문법도 모르고 씌어진 듯하여) 엇박자인 냥 보이고, 심지어는 현 시대의 저술 보다 수준이 미천한 듯까지 깍아서 평가할 수도 있는 책인 듯 비쳐지게 나타나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하느님을 예배하기를 선택하지 않든지, 또는 하느님 보다 세상의 것들을 존경하는 쪽을 선택하든지 하는 이들은 말씀에 관련해 거룩한 어떤 것이 있을 수 있다는 것마저 부정하는 오류 안으로 쉽사리 추락할는지 모른다. 짧게 말해, 이렇든 저렇든 각자는 말씀을 신성이 거주하는 책임을 수긍하던지 부정하던지는 그의 선택(의 잣대) 안에 있다는 말이다.

어쨌든, (순위에서) 자연 앞에 하느님을 두는 이들, 그리고 진짜로(순수하게) 진리를 찾는 이들은 글자에 있는 많은 서술문들이 주님의 말씀으로서 확인하여 그 글자들을 꾸준히 받아들이고 있다. 사실상 이들의 마음들은 계시(밝히 앎)의 필요와 실재 쪽으로 통찰력이 열려져 있다. 그 이유가 계시 없이 지식은 없고, 결과적으로 하느님을 인정함도 없기 때문이다. 사실상 주어져왔었던 계시를 통하여서만 사람들은 하느님에게 접근할 수 있어, 그분으로부터의 유입을 받고, 자연적 존재로부터 영적 존재로 되어질 수가 있었다.

말씀의 책들은 계속적이고 연결된 내적 의미를 가지는 모든 책들이다. 구약 성서 부분에 있는 이 말씀의 책들은 모세의 다섯 책들, 여호수아, 사사, 사무엘상하, 열왕기상하, 시편, 이사야, 예레미야, 애가, 에스겔, 다니엘, 호세아, 요엘, 아모스, 오바디야, 요나, 미가, 나훔, 하박국, 스바냐, 학개, 스가랴, 말라기; 그리고 신약 성서 부분에서는 마태, 마가, 누가, 요한, 계시록이다.

복음서들은 주님 자신의 말들을 포함한다, 이 말들 안에는 영적 의미들이 숨겨져 있고, 이 영적 의미들을 통하여 천국과의 교통이 가능하다. 사도들의 저술들(서간문)은 교회를 위해 유용하나, 내적 의미를 포함하고 있지는 않다.

말씀의 가장 바깥쪽, 또는 글자적 의미로부터의 모든 세부사항들은 감각 기관(sensory)에 의존하고 싶어하는 이들의 납득력에 적합해 있다, 고로 어린이들과 단순한 이들에게 (특별히) 안성마춤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글자 그대로의 의미의 대부분은 진리의 외관 (측면)들이다, 따라서 그것들이 계발된 이해력으로부터 지각되지 않으면, 그것들이 실제적으로 진리이다고 믿어져버림에 의해 거짓화 되어갈 수 있다. (단순한 자나 어린이들이 아닌 이들, 특히 지식인이라 자부하는 이들이다면) (마음만 먹으면) 거짓화 할 수 있는 위험성이 글자로 있는 많은 서술문의 도처에 산재해 있다. 예를 들면, 하느님은 성내신다, 그분은 시험하신다, 그분이 지옥으로 내던지신다 등등이다; 또한 마지막 심판에서 주님은 글자에 박힌 그대로 구름을 타고 땅 쪽으로 내려오신다… 태양과 달이 빛을 주지 않을 것… 별들은 추락할 것이다 등등도 있다. 이런 서술들은 자연계의 재난을 예보함들이 아니고, 어느 누구 안에서 거행될 수 있는 내적 바뀜들에 대한 상징들임을 알아볼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영적 투시 화법(perpective, 상관 관계, 견지, 시각, 원근법) 뿐이다.

글자 그대로의 의미가 이런저런 방법들에서 잘못 이해되어질 수 있기 때문에, 이 의미는 어떤 상해받음도 허용 않을는지 모르는 글자 안쪽에 숨겨 놓인 진짜 진리들 쪽으로 안내하는 역할로 봉사하고 있다. 이 개인은 이런 식으로 해서, 저 개인은 저런 식으로 해서 글자의 의미를 이해할 때라 해도 영속되는 피해는 있지 않다; 그러나 피해가 가해지는 때이다면, 신성한 진리에 반대하는 거짓들을 첨가할 때이다. 이 짓은 거짓들 안에 있는 자신이 정당하다 하여 그것을 입증하고자 말씀의 서술들을 선택하는 이들에 의하여 자행된다.

말씀 안에 있는 모두 각각의 개인, 장소, 어떤 것, 어떤 사건 등등은 어떤 영적 실재(reality)를 상징하고, 이 실체(reality)와 상응하고 있다. 이런저런 상응을 통한 의미들이 말씀의 영적 의미를 구성한다. 따라서 영적 의미는 글자 안에 나타나 있지 않다. 그것은 글자 그대로의 의미 내부에 있다. 마치 혼이 신체 안에 있는 경우, 지성의 생각이 눈 안에 있는 경우, 사랑의 애착이 얼굴 안에 있는 경우 같다. 말씀을 영적으로 만들어주는 것이 영적 의미이다. 영적 의미야 말로 진실로 주님의 말씀이다.
어쨌든, 글자 그대로의 의미 안에서 말씀은 그것의 충만함으로, 그것의 거룩함에서, 그리고 그것의 힘을 지니고 있다. 그 이유가 글자 그대로의 말씀은 안쪽에 있는 영적 의미들의 거처이자. 그릇들이고, 받침기둥이기 때문이다.

말씀 안에 있는 표현들은 그것들의 시리즈 안에 영적인 생각들을 포함하도록 씌어 있다. 이 영적 생각들은 글자를 읽는 자가 상응 지식에 친숙해 있지 않으면 그 사람에게 나타나지 않는 생각들이다. 이 방법에서 신성은 말씀 안에 감추여 놓여 있다.
상응들이 모든 힘을 가진다, 하여 상응에 따라서 땅 위에서 행하여진 것은 천국 안에서 직접적인 결과를 가진다, 그 이유는 상응은 신성으로부터 있기 때문이다. 사랑의 선과 신앙의 선 안에서 살아가는 이들은 “상응 안에” 있다 라고 말해진다, 그리고 신성은 이 당사자를 통하여, 그리고 당사자 안에서 행동하실 수 있다.

주님의 말씀은 목마른 개인, 생명을 바라는 개인에게 생명을 주고 있다. 이것은 요한의 복음서에서 가르치고 있다. 말씀은 살아 있다, 그래서 생명을 준다, 그 이유는 최고 의미에서 말씀은 주님과 그분의 왕국을 다루기 때문이다. 말씀에 있는 생명은 말씀을 읽는 당사자가 거룩함의 느낌을 갖게 하면서 당사자의 마음 안으로 흘러든다. 이렇기 때문에, 주님은 그분으로 있는 말씀 측면에서, 자신이 영원한 생명 안으로 솟아오르는 물의 원천이다고 선포하신다.

4. 우리 자신과 우리가 의도했던 운명에 관하여 선각자에게 밝히 알린 기본적 생각

사랑과 지혜, 그러므로 의도력과 분별력이 각자의 생명 자체를 구성한다. 생명이 무엇인지를 아는 자는 드문 편이다. 사람들이 그것에 관하여 생각할 때, 그것은 파악하기 어려운 것, 그것은 개념화에 도전하는 어떤 것인 듯하게 여긴다. 이렇게 응답하는 이유는 하느님 만이 생명이시다는 것, 그리고 그분의 생명은 신성한 사랑과 신성한 지혜이다를 실감 못 하기 때문이다. 이쯤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우리들 자신의 생명은 하느님의 생명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 그 이유는 우리가 그분으로부터 생명을 받는 만큼에서 우리가 생명을 가지기 때문이다. 사랑이 누군가로부터 쇠하여질 때 그는 나태해진다, 지혜가 쇠하여져 갈 때, 그는 무디어져 있다. 만일 이 두 가지가 동시에 쇠하여지면, 그는 말살되고 있다.

신성의 사랑은 이 사랑이 사랑하는 다른 존재들 안에서 이 사랑을 사랑한 당사자를 수단으로 현재의 것이 존재하고 있음과 되어감을 도울 수는 없다. 어쨌든 만일 이런저런 인간의 존재들이 자신들 안에 무한의 어떤 것, 또는 본질적 사랑으로부터의 실체와 생명의 어떤 것,또는 신성으로부터의 어떤 것을 가졌다면 위의 말함이 발생할 수 없었다. 만일 우리들 안에 무한하고 신성으로부터의 어떤 것이 실제로 있었다면, 하느님은 타인들에 의해 사랑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타인들)는 자신들만을 사랑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 이유가 무한 또는 신성은 특이하고 나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이유 때문에 서로의 사랑은 본질적 사랑으로부터의 어떤 것도 있지 않은 타인들과 더불어서만 발생할 수 있을 뿐이다.

인간의 존재, 본질적으로와 자아 측면 만에 집중한다면, 짐승으로부터 별반 다를 것이 없다. 즉, 오각도 매우 비슷하다, 식욕도, 자연적 수준의 바램들도, 뿐만 아니라 애착들도 피장파장일지 모른다. 개인의 최선의 사랑들조차 매우 비슷하다, 즉 동료를 사랑함, 자식을 사랑함, 결혼한 짝을 사랑함 등등에서 이다. 어쨌든 인간은 내면의 생명을 가지고 있음 덕분에 짐승 보다 상위에 있는다. 이 생명은 주님으로부터 파생된 사랑의 생명과 신앙의 생명이다. 만일 이것이 출석되지 않고 있다면, 그 개인은 결코 인간일 리가 없을 것이다. 더욱이 주님으로부터 이 생명을 통하여 그 개인은 사후 살고 있다.

모든 사람들은 각자의 마음에 속해 있는 내면들의 것에 관련되는 물질의 신체로 이 세계 안에서 옷을 입고 있는 영이다. 신체는 영의 생각함들의 방향과 영의 애착함들의 조절 아래 있다.

인간 종족, 위에서 명기한 대로, 천국이 설립되는 기초이다. 이런 이유로 인간의 창조는 마지막 번째에서 이었다, 그 이유가 마지막 번째가 앞서 창조한 것을 아우르는 기초이기 때문이다. 모든 창조가 하느님으로부터 오기에, 개인들은 신성의 질서의 형체들로 창조되어졌다.

사람들은 자연계와 영계가 외면적으로 결합(join)하게 하는 수단이다. 사실상, 개인이 영적 존재로 되는 정도에서, 그는 두 세계가 외면적, 내면적 결합(conjunction)을 위한 매체가 되어져 있는다.

인간의 혼(soul)은 당사자의 가장 깊고 가장 순도 높은 본질이다. 그러나 본질은 형체를 가져야만 한다, 그리고 혼은 사랑의 모든 것들의 형체로부터 애착(affection)들이라 불리우고, 지혜로부터의 모든 것들의 형체로부터 지각(perception)들이라 불리운다.

개인은 어떤 지식 안으로 태어나지 않는다, 총명 또는 지혜 안으로 태어나지는 것은 더더욱 아니고, 오직 그런 것들을 받는 수용력, 그리고 그것들을 빨아들이는 능력만을 지니고 태어난다. 이것은 두 겹의 방법에서 결과되어진다: 신성이 흘러드는 내적인 방법에 의해서; 세상이 흘러드는 외적인 방법에서 이다. 이것들이 개인 내부에서 만난다, 그리고 그때 개인이 신성에 의해 계발되기를 선택하는 정도에서 개인은 지혜의 상태 안으로 점진적으로 들어간다.

모두 각각의 개인은 자기를 성화(聖化, sanctification)함에서 자아가 인도할 수 있다 라는 환영(幻影, 착각, 잘못 생각함), 자아(selfhood, 이기심)로부터의 느낌, 감각을 가진다. 선각자는 이기심으로부터의 이런 저런 느낌을 “자아(proprium)”라는 단어로 언급하고 있다; 사실 개인을 두고 성화함이라는 단어 보다는 “거듭남”이 더 어울릴 것이다.

신성의 섭리인 것은, 개인은 이성에 일치하여 자유함으로부터 행동하는 것; 또한 개인이 생각하고, 뜻하고, 행동하는 것의 모두는 온전히 자아로부터 있게 나타나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나타남이 없다면, 어떤 것이 그의 것, 또는 자기 자신의 것임을 아무도 느낄 수 없을 것이고, 따라서 개인은 자신 고유의 개인일 수도 없게 되고 만다. 자아로부터의 이런저런 감각 없이 개인에게 귀속되는 것은 어떤 것도 있어질리 만무하고, 고로 개인은 선이든, 악이든 무엇을 행하든지 무관심, 또는 하느님을 믿든, 지옥의 꼬드김을 따라가든 무관심으로 일관되어지고 만다. 줄여 말해, 개인은 개인 당사자될 리 없고, 진실로 인간일 수도 없다는 말이다.

개혁되고 영적으로 되어가는 모든 이의 처음 상태는 그들이 주님에 의해 개혁됨을 믿지 않는 것, 그 대신 자신들에 의해 개혁됨을 믿는 것이다; 즉 선에 대한 모든 뜻함과 진리에 대한 모든 생각함이 자신으로부터 근원되었다고 믿는 것이다. 이 보다 한 술 더 떠진 것은, 주님께서 그들이 이런 상태 안에 있게 배려하시고 있으시다는 점이다. 그 이유는 만일 그가 자신 스스로 하고 있다 하지 않으면, 그는 개혁되어 질 수가 없기 때문이다. 실로, 만일 그들이 거듭남 이전에 너희들 스스로 선을 행할 수 없고, 진정한 어떤 것도 생각할 수 없다고 (주님으로부터) 말해졌었다면, 자기들은 의지와 생각 안으로의 유입을 기다려야 한다고 상상하는 실수로 붕괴되든지, 또는 만일 선과 진리가 자신들 안에서 근원되지 않는다면, 자신들은 기계 같은 처지이다고 상상하는 실수로 어떤 시도도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선과 진리가 자신들로부터 근원된다고 생각하는 것이 첫째로 허용되어야 한다.

그러나 거듭남의 과정이 한참 진행되면서 점차로 조금씩 가르쳐짐이 있어지는 것은, 예전의 자기 느낌과 생각함과 다른 것이 있다는 것, 즉 선하고 진정한 모든 것은 주님으로서만 100% 존재한다는 것이 당사자에게 슬금슬금 비쳐온다. 그리고 거듭남의 과정이 더 한참, 즉 완전함에 거의 접근하다시피 할 때, 당사자에게 주입되는 가르침은, 주님으로부터 있지 않는 것은 악이고 거짓이다는 것이다. 거듭나지고 있는 이들이라면, 그들의 이 세상의 삶 동안 가르쳐짐을 많이 깨닫지 못한 채 기한이 다 찰 경우, 다음 삶에서 이를 깨닫고, 그것을 지각함으로 보도록 인도 받는다.

인간의 자유 의지는 거듭남에 필수적이다. 개인이 모든 애착들과 모든 생각함들에 관련하여 내면적으로 자유함 안에 있지 않으면, 개인은 선과 진리가 뿌리내릴 수 있는 질서 안에 결코 놓여질 수 없다. 이 자유함은 양쪽에 놓여지는 무게가 평형을 이루는 천칭(저울)에 유추되는 방식에서 주님에 의해 유지되어진다. 비슷한 방식에서 주님은 모두 각각의 개인에 대한 선과 악의 영향력이 균형을 맞추고 있게 유지하신다. 그러나 개인은 이에 대해 의식하지 못 한다, 하느님의 선물 중의 하나인 것은, 개인은 자신의 생명을 두고 그것은 자신 고유의 것이다라고 느껴야 한다는 것, 우리가 그것을 그렇게 느끼는 것이 하느님의 뜻이다는 것이다. 이러한 즉, 우리가 말씀에 있는 질서의 법들에 일치하여 살기를 선택할 때, 고로 하느님의 사랑을 받아들이기로 작정함이 온전히 우리 자신으로부터 임을 우리가 느낄는지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은 그분의 손가락을 천칭 위쪽에서 직각으로 세우시어 유지하시면서 선택의 우리의 자유함을 알맞아지도록 조절해주시지만, 그렇다고 강제적 수단으로 자유를 침범하시는 일은 결코 없으시다.

하느님은 악을 창조하시지 않으셨다, 그러나 질서 안에서 실제의 선택들이 인류로 그것을 받아들이도록 허용해버렸을는지 모른다. 만일 사람들이 하느님이 처음 그들을 창조했던 사랑 안으로 태어나졌다면, 어떤 악도 있지 않았을 뿐 아니라, 사람들은 악이 무엇인지도 모르기조차 하여 있었을 것이다. (애당초) 우리가 창조되어진 사랑은 이웃을 사랑함으로부터의 사랑이다. 고로 우리는 우리 자신 만큼, 아니 그보다 더 많이 이웃을 사랑하는 것을 배울는지 모른다, 그리고 이웃에 선을 행함에서 기쁨을 발견할 것이다. 이 사랑이 진실로 인간이다, 그 이유는 이 사랑 안에 짐승으로부터 발견되는 자연적 수준의 사랑과 구별되는 영적 수준의 요소들이 있기 때문이다.

“원죄” 또는 “유전적 악” 같은 것은 없다. 누구도 실제의 악들 안으로 태어나지지 않는다, 그러나 특별한 악들을 향한 다소의 경향과 더불어 악들을 향한 경향성만 지니고 태어난다. 결과적으로, 사후 개인은 악들을 향한 어떤 유전적 경향성으로부터 판단되어지지 않고, 개인이 동의함에서 받아들이고 행동했던 실제의 악들로부터 만 이다.

우리가 실제의 선을 상속하지 않고, 선이 되어질 경향성만이 상속 가능하다는 것도 위와 동일하게 진정하다. 천성적으로 자연적 선과 친절함을 향유한 듯 여겨지는 이들, 그리고 타인에게 선을 행함을 타고

난 듯 실행하는 이들이라 여기지는 이들을 목격하는 때도 있다. 그러나 이런 이들이라 해도 그들이 말씀으로부터 선을 행함에 관한 원리들을 동시에 흡입하지 않으면, 그들은 양심을 발달시키지 못한다, 그 이유는 양심은 자연적 선, 또는 유전적 선에 대한 경향성과 그것에 일치하는 생명으로부터 오지 않기 때문이다. 만일 어떤 개인들이 이런 상태에서 영적 세계 안으로 온다면, 그들은 자기들에게 강하게 인상지우는 선과 진리의 원리들을 가지는 것을 포함하여, 테스트되고 심리되는 어려운 과정을 통과해야만 한다. 이 방법에서만이 그들은 천국의 양심을 받을 수 있다.

이른 바, 천국행의 삶을 사는 것은 여느 사람들이 믿는 것 만큼 고되고 힘든 삶이 아니다. 혹 자는 생각한다, 영적 삶을 영위하는 것은 힘든 것이다, 그 이유는 세상을 포기함이 필요하기 때문, 신체와 육에 연합된 식욕들을 포기해야 하기 때문, 그리고 영적 존재들 같이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이들은 이것은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을 거절함을 뜻하는 것으로 받는다, 뾰족하게는 재물과 명성을 거절하는 것, 그리고 하느님, 구원, 영원한 생명에 관하여 꾸준히 경건하게 묵상하는 것, 그들의 생활은 기도함과 말씀을 읽는 것, 여타 경건하다는 저서들을 읽는데 있다고 생각한다는 말이다.

그러나 선각자는 말한다, (그가 저 세계로부터의) 풍부한 경험과 천사들과의 토론은 그로 하여금 위와 상황이 완전 다르다는 것을 알게 해주었다. 사실상, 이 세상을 포기하고, 포기하는 식으로 살았던 사람들이 천국의 환희를 받지 못하는 자신들 때문에 슬픔에 잠긴 삶을 저 세상에서 건설하고 있다. 모두 각각의 개인의 (이 세상에서의) 삶은 그 개인과 더불어 (저 세상에서도 당사자에게) 머물고 있다. 그 이유가 천국의 삶을 받아들이려면 개인은 이 세상에서 그것과 대등한 삶을 살고 있었어야만 했었기 때문이다. 이 세상 삶의 과정에서 있는 시민적, 도덕적 생활을 수단으로 개인은 영적 생명을 획득한다, 사실상, 이 방법만이 영적 생명이 개인 안에서 만들어지게 할 수 있다, 또는 개인의 영이 천국을 위하여 준비되게 해줄 것이다.

천국행으로 인도하는 생활은 실제로 놀라우리만치 단순하다. 당신이 부정직하고 불공정하다고 아는 방법으로 어떤 것을 얻을 때, 특히 당신의 영이 그런 쪽으로 향하여 움직이려 들 때, 당신에게 필요한 딱 하나는 그것이 하느님의 가르침에 반대되기 때문에 행해져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런 방식으로 대수롭지 않다 여겨지는 사소한 악과 거짓으로부터의 것을 부딪치더라도 대수롭지 않은 것이라 여기지 않고 오히려 중요하게 여기며 하나하나를 처리해 소화해나간다면, 점차 당신은 천국 쪽에 당신의 발을 디밀고 있다. 이러할 때 당신의 더 높은 수준의 마음들이 열리어져서 어떤 것이 부정직하고 불공정한 것인지를 뚜렷이 보게 된다; 그리고 그런 것들을 보았을 때, 단번에 그것들을 부수어버릴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모든 이가 인간의 자유 의지 때문에 획득할 수 있는 영적 상태 쪽으로 당신을 인도한다.

** 도서 구입 안내 **

아래 도서들의 대부분은 발행자, 역자가 출판의 모든 과정을 직접 완료한 책이므로 우선 많은 책이 쌓여 있지 않고 부족할 때마다 몇 십권씩 추가로 출판하고 있습니다. 또한 책의 단가는 여느 시중의 책의 단가와는 달리 순수 재료비만을 계상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여느 복사 비용보다 저렴할지 모릅니다. 따라서 이 출판사의 책은 팔릴 때마다 조금씩 적자를 볼 수밖에 없지만, 이 출판사의 바램은 이익 창출이 아니라 이 귀중한 지식을 공유하는 것, 더불어 이 귀중한 지식이 많은 분들의 손 안에, 책꽃이에 있어 필요시 언제나 읽기를 바램에서, 또한 이 지식의 습득은 여느 소설이나 수필집을 대하듯 하여서는 즉각 이해에 와닿지 않는 결점이 있기에, 어쩌면 시험 공부하듯 노력함이 곁들여야 하기에 전자책이나 전화기나 컴퓨터 다운에 앞서 종이책 구입을 권장하는 차원에서 출판 사업을 펴고 있습니다.

펴내는 자: 한광숙, 배제형
펴낸곳: 도서 출판 벽옥
등록: 제 2016-000002호
주소: 전남 화순군 화순읍 안양산로 31-5
전화: 010-4738-1711
홈페이지: baysidechurch.org
biblestudynoteblog.wordpress.com
역자 E-mail : jeandsook@gmail.com

각 도서와 가격

** 각 도서는 대체로 양장본으로 제본하려 노력하고 있습니다. 또한 위 인터넷 주소에서 책을 만나볼 수 있고 다운받아 직접 제본도 가능할 것입니다.

1. 번역 서적

말씀의 합리적 이해 (전 6권. 각 430여쪽) 값 각 권 12000원
비유 (796쪽) 값 25000원
신약 비유 해석 (516쪽) 값 15000원
구약 비유 해석 (394쪽) 값 15000원
이스라엘의 첫 세 왕 (576쪽) 값 15000원
마태복음 해석 (736쪽) 값 15000원
요한복음 해석 (640쪽) 값 15000원
요한계시록 해석 (513쪽) 값 15000원
바이블 스터디 노트 (전 4권, 각 권 평균 650여쪽) 값 각 권 15000원
성경 공과 (전 24권, 각 권 평균 234쪽) 값 각 권 5000원
창세기 요약 해석 (401쪽) 값 15000원
레위기 해석 (526쪽) 값 15000원
영, 한글 구약 성경 (창세기, 출애굽기 340쪽) 값 5000원
영, 한글 신약 성경 (4 복음, 계시록 406쪽) 값 5000원
성경 상응 사전 (1082쪽) 값 25000원
헬렌 켈러의 신앙 간증 (126쪽) 값 5000원
죽음 그 이후 영들의 세계 그리고 천국과 지옥 (132쪽) 값 5000원
새 예루살렘 그리고 그곳의 교리 (100쪽) 값 5000원
천국의 비밀들 (전 12권 각 500여쪽) 값 각 권 20000원
창세기 해석 (전 5권 각 550-630여쪽) 값 각 권 15000원
성경 연구 (전 6권 각 430-480여쪽) 값 각 권 15000원

2. 원서

선각자의 필적이 담긴 쉬밑의 라틴 성경 (900쪽) 값 25000원
알카나 세레스티아 (쟌 엘리엇 영역)
알카나 세레스티아 (쟌 클라우 영역, 쟌 폿스 수정) 값 각 권 20000원
* 이 외의 원서의 종이책 재출판도 준비 중에 있습니다.
* 위 엘리엇 영역본은 copyright이 있을 것 같아서 출판을 미루고 있는 바, 필요한 분은 인터넷 검색이 가능하므로 연락바랍니다.

천국 -그 곳의 이모저모-

천국

– 그 곳의 이모저모-

차례

원서 표지
역자의 글
선각자 소개
원 저자 서문

제 1부 죽음, 그 이후…….9

제 2부 천국의 모양……….44

제 3부 천국의 삶…………..68

제 4부 지옥의 삶……………119

부록

선각자 저서 안내
선각자 용어 풀이
선각자에게만 유일한 기본 생각들
도서구입 안내

THE SHORTER

Heaven and Hell

by
Emanuel Swedenborg
Abridged by Julian Duckworth and Trevor Moffat

** 원서 표지**

SEMINAR BOOKS
LONDON

역자의 말

이 책은 원서 “천국과 지옥”을 1/6의 분량으로 줄인 책이다. 따라서 원저자 자신의 영적 체험 내지 성경의 인용 구절, 혹 문장에서 반복되는 듯한 대목은 생략되어 있어 원서 보다 더 이해가 안될지 걱정이 앞선다. 그러나 책의 분량이 적은 것은 장점이다.
역자가 선각자의 천국과 지옥이라는 책을 처음 접할 때가 1969년도 였다. 그때나 지금이나 사실 역자의 관심사는 내세의 이모저모 보다는 수많은 교파와 인간들에 의해 찢겨진 성경 해석을 선각자의 지식을 통해 전달된 상응학으로 나를 위해 정립해보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지금은 성서 상응 사전을 마무리해 보았다.
그렇다해도 되돌아보면 선견자의 신학의 기초서라 할 수 있고, 유럽 사회를 포함, 그리고 칸트나 궤테, 에머슨, 타골 등등 역사에 발자취를 남긴 인물들이 애독했던 이 책을 정독하는 것이 스위든볽지언(swedenborgian)이 향유하는 축복이자, 동시에 의무도 아닐까 하는 생각이 최근 들어 이를 성취하고자 이 책의 번역을 시도했다.
역자의 번역인 이상 부족한 부분이 많을 것이라 사료된다. 그렇게 판단하는 독자는 완역본인 정인보 번역과 김은경 번역을 직접 읽는 것도 더 나은 방법일 줄 믿는다. 이 소책은 위 완역본의 입문서 정도로 생각하기 바란다.

에마뉴엘 스웨덴볽

(Emanuel Swedenborg, 1688-1772)
그는 비상한 재능들을 부여받았었는데, 이 재능은 아주 독특하고 다양하기도 해서, 저명한 학자들은 다방면에서 천재이다 라고 평가되는 아주 희귀한 몇 사람들 사이에 그를 끼여 넣어 분류했다. 백과사전들은 많은 주요한 과학적 발견과 발명을 그의 비옥한 지성의 잘 익은 열매들로 진열하고 있기도 하다. 그는 물질에 관한 근대 역학 개념을 예상했다. 혹성의 형성에 관한 성운설을 암시했다. 야금술 분야에서 처음 포괄적 작업들을 일궈낸 광산 엔지니어였다. 대수학에 관한 스웨덴의 교과서를 처음 준비한 수학자였다. 그리고 두뇌의 몇 구역의 기능과 관이 없는 선(glands)들을 발견하였다.
이렇게 과학의 가장 바깥 영역들에 까지 이르는 한편, 그는 혼(soul)이 어떻게 일하는지를 합리적으로 설명하기 위한 탐구에도 몰두했다. 이 탐구는 그가 영(spirit)의 아주 방대한 영역으로 돌아서고 직접적이고 강렬하게 영적 실재를 알아 채게 될 때 까지 해결의 실마리를 잡지 못했었다. 그는 이 영적 실재를 “영적 시각” (영적으로 봄) 이라 불렀다. 그는 인간 혼의 발단과 성장에 관한 가장 완전한 서술이 성서에 있음을 발견했다.
그가 우리에게 매우 조심스럽게 상기시켜주는 것은, 자기가 기록한 것들은 그 곳에 실제로 있는 것의 파편 조각에 불과할 뿐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 파편 조각의 실재를 움켜쥔 애독자, 자신의 생명과 그것의 성장이 이 저술 안에서 반사(mirrored)되고 있음을 찾아내는 독자들은 성서를 위한 가장 드높은 이름인 “하느님의 말씀”에 새로운 의미를 주는 인간의 진행에 대한 자비로운 이해를 발견할 것이다.

원저자의 서문

마태복음 제 24장에서, 주님께서 ‘시대의 끝’에 관하여 이렇게 말하시고 있다.

“이런 날들의 환난 후 즉각적으로, 태양은 어두워질 것이고, 달은 그것의 빛을 주지 않을 것이다; 별들은 하늘로부터 떨어질 것이고 하늘들의 힘(권능)들이 흔들릴 것이다. 그런다음 사람의 아들에 관한 표시가 하늘에 나타날 것이고 땅의 모든 지파들이 통곡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힘(능력)과 큰 영광과 더불어 하늘의 구름들에 오시는 사람의 아들을 볼 것이다. 그분은 나팔의 큰 소리를 지닌 천사들을 보낼 것이고, 그리고 그들은 하늘의 이쪽 끝으로부터 다른 쪽 끝까지, 네 방위들로부터 그의 뽑은 자를 함께 모을 것이다.”

위 구절의 말들이 글자 그대로가 진리이다고 믿는 이들은 위 사건들이 때가 차면 거행될 것이라고 믿고 있다. 그들은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대체되기 위해 온 세상의 사라짐을 예상하고 있다. 허나 말씀은 그 하나하나의 문구와 세부사항 안에 더 깊은 영적 의미를 담아두기 위하여 위와 같이 표현하고 있다. 그 이유가 말씀은 순수한 상응물로, 또는 영적 형상들로 쓰여 있기 때문이다.
마태복음으로부터 발췌된 위 문단은 간단히 말해 인간들이 주님을 향한 사랑과 신앙을 잃어버릴 때 ‘교회’ 또는 인간의 영적인 자각이 어떻게 하강하는지를 상징적으로 묘사해놓은 것이다.

다수의 인간들은 죽은 이후 삶의 참 모습, 또는 사후 삶이 있는지 조차도 눈치채지 못하고 있다. 그들은 말한다, ‘누가 되돌아와 우리에게 말했던가?’ 허나 이에 관련된 진리들은 말씀 안에 이미 포함되어 있다. 나는 주님의 허락을 받아 수 년 동안 천사와 영들을 만나고, 그들과 대화하고, 심지어 지옥에 있는 영들과도 만나 대화하였는데, 이는 나에게 불신과 혼동이 있지 않도록 하시려는 주님의 배려 때문이었다. 이 책은 이런 교통함의 결과인 바, 여러분은 이 책을 통해 사후 삶의 참 모습을 알게 될 것이다.

제 1 부
죽음, 그 이후

영들의 세계

사후, 모든 인간은 어떤 장소-또는 상태-안으로 온다. 이곳을 영들의 세계라 부르는데, 이 세계는 천국도 지옥도 아닌 이 둘 사이 중간쯤에 있는 장소 또는 상태이다. 인간이 죽을 때, 그는 먼저 영들의 세계 안으로 오고, 그 다음 거기서 한동안 있다가, 천국으로 들어 올려지든지, 아래 지옥으로 끌어 당겨진다. 그 향방은 세상에서의 각자 삶의 품질에 달려 있다.
영들의 세계, 이 세계가 천국과 지옥 사이의 중간 장소이듯, 사후 인간은 중간 상태에 놓인다. 지옥은 아래에, 천국은 위에 있다. 인간이 영들의 세계에 있는 한, 그는 천국에 있는 것도, 지옥에 있는 것도 아직 아니다.
위와 같은 이유가 인간 안에 있는 천국은 그 인간 안에 있는 선인 것과 진리인 것이 하나로 됨, 그리고 지옥은 그 인간의 악인 것과 거짓인 것의 하나됨이기 때문이어서 이다. 영이 된 인간 안에서 선인 것이 진리인 것과 충분하게 통합될 때면 언제든지, 그는 천국으로 가고, 악하고 거짓인 것이 충분히 통합될 때는 언제든지 지옥으로 간다.
위 과정은 영들의 세계에서 거행되는 단일화의 과정인데, 그 이유는 이곳의 인간은 중간 상태에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의지와 이해함이 분리된 채로 있는 한, 이 중간 상태에 머물게 된다. 대부분의 인간들은 진리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음에도 이것에 대한 지식은 얼만큼, 또는 아주 조금, 또는 아주 없거나 한다.
인간이 죽을 때 그를 천국에, 또는 지옥에 있도록 해주기 위해, 그를 영들의 세계에 데려다가 그 인간 안에 있는 분리된 상태의 이해함과 의지의 마지막 화합이 성취되도록 한다. 그 이유가 천국과 지옥에서는 누구도 나뉜 마음, 즉 이렇게 생각하고 저렇게 행동하는 것이 허용되지 않기 때문이다. 오로지 모든 이는 자기가 의도하는 것들을 이해해야 하고, 자기가 이해하는 것만을 행해야 한다.
천국에서의 경우, 선을 행하기를 바라는 인간은 진리를 이해한다. 한편, 지옥에서의 경우, 악을 행하기를 의도하는 이들은 거짓을 이해한다. 고로 영들의 세계에서 거짓 생각과 사상들은 기본적으로 선한 이들로부터 제거되고 그들의 선과 하모니를 이루는 진정한 생각들로 대체된다. 이와 반대로, 진정한 생각들은 악한 인간들로부터 제거되고 그들의 악한 의도에 걸맞는 거짓 사상들로 대체된다.
영들의 세계에는 엄청난 숫자의 인간들이 있다.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모든 인간이 거쳐야 하는 첫 번째 장소이기 때문이다. 또한 이곳에서 모든 이는 매우 자세히 조사를 받고 천국이든 지옥이든 떠날 준비를 한다. 영들의 세계에서 보내는 시간은 고정되어 있지 않다. 어떤 인간은 거의 즉각적으로 천국, 또는 지옥으로 간다; 그런가 하면 어떤 이는 몇 주를, 어떤 이는 몇 년을 지체하나 그렇다고 30년을 넘지는 않는다. 체류 기간은 그 인간의 생명의 안쪽과 바깥쪽 수준들 사이의 상응에 의존된다.
인간이 영들의 세계로 들어오면 즉각 주님께서는 그가 세상에 있었던 동안 자기를 주도했던 사랑과 똑같은 사랑을 가진 공동체와 연결되도록 설비하신다. 악한 인간은 지옥에 있는 공동체들 중 어느 하나와 즉각 연결되고, 선한 인간은 천국의 공동체들 중 하나와 연결된다. 이런 식으로 그들이 구별된다 할지라도, 영들의 세계의 신입자는 자기가 만나기를 원하는 자와 누구든지 자유로이 섞일 수 있다. 즉 친구들, 친척들, 남편과 아내이든, 그가 원하면 언제든 만나고 이야기할 수 있다. 나는 여섯 아들을 가진 아버지를 보았다. 이 아버지는 그들 각각을 알아보았다. 그러나 그들은 세상에서의 자기들 삶의 결과로 아주 다른 본성 속에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이내 헤어졌다. 영들의 세계로부터 천국이나 지옥으로 이동하는 인간은 자기와 사랑의 품질이 거의 갖지 않는 이상, 더 이상 서로를 보지도 못하고, 보아도 알아보지 못한다. 그들은 영들의 세계에서 서로를 볼 수 있다. 그 이유는 거기서 인간들은 세상에서 가졌던 상태와 같은 상태, 즉 자기의 상태가 이랬다 저랬다 했듯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후에, 모든 인간은 과거 자기를 가장 주도한 사랑에 의해 영구적인 상태로 진입한다. 이 상태에서 서로를 인식하는 것은 서로 유사한 사랑을 지녔을 경우 뿐이다. 그 이유가 비슷한 것은 결합하고 비슷하지 않은 것은 분리되기 때문이다.
영들의 세계가 각 개인과 더불어 천국과 지옥 사이의 중간 상태에 있듯, 이 세계 위는 천국이고, 아래는 지옥이다. 지옥의 모든 공동체들은 영들의 세계로부터 닫혀있다. 그리고 오로지 구멍이나 바위의 갈라진 틈 정도만 열려 있다. 물론 활짝 열릴 수도 있지만 이럴 경우는 대단한 감시가 동반되고 허락 없이 누구도 나올 수 없다. 이것 마저 대단히 특별한 때에만 적용된다. 천국 역시 영들의 세계로부터 모든 측면이 닫혀 있다. 천국으로의 비좁은 길 외에는 천국의 어떤 공동체로 가는 열린 출입구는 없다. 이 출입구 역시 감시가 철저하다.
영들의 세계는 산들과 절벽들 사이에 있는 계곡 같이 보인다. 여기 저기가 더 높거나 더 낮거나 하다. 천국의 공동체들로의 입구는 천국에 들어갈 준비를 마친 인간에게만 보여진다. 영들의 세계로부터 각 천국 공동체로 가는 단 하나의 입구가 있고, 이 입구는 단 하나의 길로 이어지고 이 길은 몇 개의 더 좁은 길로 나뉘고 이 길은 가파르게 올라가야 한다.
지옥의 공동체들로의 출입구 역시 들어갈 준비를 완료한 자 외에는 볼 수 없다. 입구가 열릴 때 인간은 어둡고, 검댕이로 휘감은 동굴을 볼 수 있는데, 이 동굴은 깊이 아래로 빠져들게 인도한다. 거기에 다시 많은 문들이 있다. 구역질나는 냄새가 이 동굴로부터 휩쓸리듯 밖으로 밀려 뿜어나온다. 선한 영들은 도망했는데, 그 이유는 그들이 구토를 일으켰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악령들은 걸신들린 듯 이 냄새에 끙끙거린다. 그 이유는 그들이 이 냄새에서 쾌감을 발견했었기 때문이다. 각 악령은 과거 세상에 있었을 때 자기 고유의 악한 품질에서 즐거움을 발견했듯이, 사후에도 그는 자기 악과 상응하는 특별한 악취에 즐거워한다. 언제인가 나는 어떤 인간이 천국의 숨(breath)이 자기에게 도달하자 크게 외쳐 통곡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는데, 그에게 지옥의 숨이 도착하자 조용해지고 흡족해 하고 있었다.
각 인간은 자기 안에 두 출입구를 가지고 있다-하나는 지옥을 향해 열리고 거기로부터 악과 거짓된 영향력이 온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천국을 향해 열리고 거기로부터 선하고 참된 영향력이 온다. 지옥 문은 악한 어떤 것에 빠져있고 거짓 사상에 몰입된 인간들 안에서 열려진다. 천국으로부터의 빛은 위쪽 갈라진 틈새를 통해 들어 올 수 있고 이 인간들이 논리적으로 생각하고 말하는 것을 가능하게 하고 있다. 한편 천국 문은 선한 것과 참된 사상에 깊이 몰두한 인간에게 열리어 있다. 인간에게 합리적 마음으로 인도하는 두 길이 있다-더 높은 길, 또는 내향의 길, 이 길을 수단으로 선하고 참된 것이 주님으로부터 흐른다. 그리고 더 낮은 길, 또는 외향의 길, 이를 수단으로 악하고 거짓인 것이 지옥으로부터 기어오를 수 있다. 인간의 합리적 마음은 위 두 길을 인도하는 중심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자기 마음 안으로 놓여지게 허락하는 천국의 빛의 양에 비례하여 합리적이다.
이 빛이 안에 있도록 허락하지 않는 만큼 그의 합리성은 시드는데, 설사 그가 자신을 보건대 합리적인 듯 여겨질지라도 그렇지 않다.
위 모든 것은 인간과 천국과 지옥의 상응을 보여주기 위하여 여기서 언급되어진 것이다. 합리적 마음이 형성될 때, 이 마음은 영들의 세계 자체, 즉 이 세계 위에 천국이, 이 세계 아래 지옥이 있는 영들의 세계와 상응한다. 천국 입장이 준비된 이들은 그의 합리적 마음은 위쪽은 열리고 아래쪽으로는 닫혀 있다. 그 반면, 지옥을 위해 준비를 마친 이들은 아래쪽으로는 열리고 위쪽으로는 닫힌 합리적 마음을 가지고 있다. 그 다음 아래쪽만을 쳐다볼 수 있는 이들은 지옥을 향하고, 위쪽만을 보는 인간은 천국을 향한다.
위를 쳐다봄은 주님을 찾고 있음을 뜻한다. 그의 중심은 모든 천국이 쳐다보는 중심이기도 하다. 아래를 쳐다봄은 지옥에 초점을 두는 반대편 중심을 향하여 주님으로부터 돌아섬을 뜻한다. 지옥 전체가 주님으로부터 얼굴을 돌리고 있다.

모든 인간 각각은 영이다

불멸하는 인간의 혼(soul)은 그가 생각하고 살고 있는 그의 부분, 즉 그의 영(spirit)이다. 몸은 인간이 자연 안에서, 물질 세계에서 유용한 삶을 이끌 수 있는 수단이고 영에 비해 부속품에 불과하다. 영이 실제로 인간 자신이다. 그런 이유는, 인간의 몸이 그의 영으로부터 분리될 때, 소위 그가 죽을 때, 여전히 그는 인간이고 살아 있기 때문이다. 내가 천국으로부터 들은 바, 죽은 자는 소생하기 이전 차디찬 몸 안에, 두꺼운 관 안에 있는 동안에도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들은 신체의 아주 미세한 부분도 움직일 수 없다는 점을 빼고는 자신이 살아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영이 인간 자신인 바, 뒤따르는 명제는 인간의 영은 그의 몸이 인간 모양으로 있는 것과 똑같은 모양이다는 것이다. 그래서 영이 몸 안에 있었을 때 만큼이나 같게 그의 몸으로부터 분리되어도 감각들을 즐긴다. 이것은 인간이 행동하는 수단-주체 또는 본체, 즉 이로부터 뭔가의 진행이 있고, 이 안에서 뭔가가 발생하는 본체 없이 어떤 것을 생각하거나 뜻할 수 없다는 사실로부터 알 수 있다. 본체 없이 존재한다고 생각되어진 어떤 것에는 현실성이 없다. 시각 기관 없이 본다는 것은 없다. 청각 기관 없이 듣는다는 것은 없다. 생각의 경우도 시력이나 청력의 이치와 똑같다; 생각이 본체-기관 형체-안에서 그리고 그로부터 발생하지 않으면 생각도 전혀 발생할 수 없다.
이것이 왜 영들이 몸에서 해방된 후에도 인간과 완전 똑같이 보고, 듣고, 느끼는지에 대한 이유이다; 이는 자연계가 아니라 영계에서 그렇다는 말이다. 영이 육체 안에서 가졌던 자연적 감각들은 영에 추가되었던 물질 부분으로부터 왔다; 그러나 그때 조차에서도 영은 영적으로 생각하고 뜻하는 것을 느꼈고 감지했다.
두 상황이 여기서 보태질 수 있는데, 이는 내적 수준에 관련된 인간이 영이다는 것, 그리고 이 영은 실질의 몸의 형체 안에 있다는 점이다.
모든 인간은, 그가 몸 안에서 사는 동안, 그의 고유의 영이 관심을 가졌던 영들의 공동체 안에 있다. 설사 그가 이 사실을 눈치 못 챈다 해도 그러하다. 선한 인간은 천사의 공동체 안에, 악한 인간은 지옥의 공동체 안에 있다. 그리고 각 인간은 그가 죽을 때 예전에 있어 왔던 공동체에 들어간다. 어쨌든 그는 세상에서 사는 동안 이 공동체를 볼 수 없다. 그 이유는 자연계에 사는 동안은 자연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이 육체로부터 물러나 영 안에 있는 방식에서 생각할 때, 그는 때로 자기의 공동체에서 나타난다. 그리고 그가 보여질 때, 그는 거기 있는 영들과는 쉽게 구별된다. 그 이유는 그는 조용한 묵상과 생각만을 열심히 하고, 그 외 두리번 거리는 것도 없고, 굳이 자기를 보이려하지 않기 때문이다. 어떤 영이 그에게 말을 걸면 즉시 그는 사라진다.
몸으로부터 물러난 경우의 또 다른 예는 이러하다. 인간이 잠자는 상태와 깨어있는 중간 상태로 데려다 놓인다. 그리고 그가 그 상태 안에 있을 때, 그는 완전히 깨어 있다고 자신을 간주한다. 그가 충분히 깨어있을 때, 모든 감각-시력, 청력 등등-은 방심하지 않는다. 게다가 촉각은 정상적 몸이 깨어 있을 때 보다 더 예민하다. 이 상태에서, 천사들과 영들은 확실하게 보여지고 듣고 만지기 조차 가능하다. 이 상태에서 육체의 몸이 간섭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이것이 ‘몸 밖으로 나감’이라 부르는데, 이때 그는 자기가 몸 안에 있는지, 몸 밖으로 나갔는지 알지 못한다.

사후 인간은 어떻게 깨어나 영원한 삶에 들어가는가?

육체의 몸이 자연계에서 더 이상 기능을 발휘하지 못 할 때, 인간은 죽는다. 죽을 때, 심장과 폐의 움직임은 멈춘다. 그럼에도 인간은 죽지 않는다. 단순히 그는 세상에서 자기를 섬겼던 몸으로부터 분리되는 것 뿐이다. 인간 자신은 계속 살아있다. 그가 영이기 때문이다. 그는 단순히 이 세계로부터 저 세계로 건너갈 뿐이다. 성경에 등장하는 단어 ‘죽음’은 내적 의미에서는 실제로 부활과 삶의 계속을 염두해서 사용된 단어이다.
호흡함과 심장 박동은 영과 매우 친밀한 관계이다. 즉 생각은 호흡함과, 느낌은 심장 박동에 관련된다. 따라서 이 두 기관의 움직임들이 몸에서 일하는 것을 멈출 때, 영의 즉각적 분리가 있게 된다. 다시 말해 이 둘은 실제로 묶여 있는 상태이나 이것이 깨질 때 몸의 영이 떠나는 셈이다. 몸의 영이 박탈된 그 몸은 차거워지고 부패하기 시작한다.
이 분리 후, 인간의 영은 한 동안 그의 몸 안에 있기를 계속한다. 그러나 오직 심장의 박동이 마지막 뛸 때까지 이다. 이것은 죽음을 일으킨 아픔에 따라 다양해진다. 심장이 멈추는 순간, 인간은 깨어나진다. 그러나 이것은 주님 만에 의해 행해질 뿐이다. 여기서 말한 깨어남은 영이 몸으로부터 영계 안으로 끌어 당겨짐을 뜻한다. 흔히 이를 두고 ‘부활’이라 말한다.
나 자신에게 위의 깨어남을 경험해보도록 허락되었었기에 지금 그것이 어떻게 일어나는가를 기술하는 것을 가능케 한다.
나는 내 육체의 감각들이 염려되어질 정도 만큼에서 무의식 상태 안으로 데려가졌다. 그래서 나는 흡사 죽은 인간 같았다. 그럼에도 나의 모든 내적 감각들은 손상받지 않은 채 남아 있어 나는 모든 것- 사후 인간들이 깨어나질 때 인간들에게 일어나는 것들을 볼 수 있고 기억할 수 있었다.
내가 주목한 것은 내 호흡함이 거의 작동하지 않았다는 것, 그러나 영은 더 내향의 호흡함을 계속했다는 것, 이것이 미약하나마 몸의 호흡함과 연결되어져 있는 것이다. 이후, 내 심장 박동과 천적 왕국이 왕래하는 관계가 형성되어 졌다. 그 이유는 이 왕국은 심장과 상응하기 때문이다. 나는 나와 더불어 있는 이 왕국으로부터의 천사들을 보았다. 어떤 천사는 나와 거리를 두고 있었고, 두 천사가 내 머리에 앉아 있었다. 그러자 애착으로부터의 내 고유의 느낌은 제거되었다. 그럼에도 내 생각과 지각은 계속되었다. 나는 몇 시간을 이런 상태에 있었다.
그때, 내 주위에 있었던 영들이 내가 죽었다고 말하며 떠났다. 거기에는 흡사 방부 처리된 몸에서 나는 냄새 같은 것, 약간은 상쾌한 냄새가 맴돌았다. 천적 천사들이 현존할 때, 시체와 더불어 행해지는 모든 것들은 방향성 있는 어떤 것으로 지각되어진다. 이는 영들이 이 향내를 지각할 때 그들의 접근을 막아준다. 이것은 인간이 깨어나질 때, 인간의 영으로부터 악령을 멀리 있게 하는 방법도 된다.
내 머리 옆에 있었던 천사들은 침묵했다. 오직 그들의 생각들과 내 생각들 사이에만 소통함이 있었다. 이런 생각들이 죽어가고 있는 인간에 의해 받아질 때, 그때 천사들은 인간의 영이 이제야 몸을 떠나 인도될 상태에 있다는 것을 안다. 그들의 생각들이 소통하는 동안, 천사들은 내 얼굴을 쳐다보았다. 이것은 천국에서 생각을 주고 받는 방식이기도 하다.
나 역시 감지한 것은 천사들이 내가 생각하고 있는 것을 발견하려고, 그리고 나의 생각이 죽는 인간이 대체로 가지는 영원한 삶의 생각과 같은지 여부를 보려고 애쓰고 있었다는 것이다. 나는 그들이 죽는 인간이 가지는 생각을 내가 간직하기를 원했다는 것도 감지했다. 후에, 내게 말해진 바, 인간의 영은 몸이 죽을 때 가진 마지막 생각 안에 간직되고, 이는 그가 세상에 있는 동안 자신을 가장 강하게 이끌었던 사랑으로부터 오는 생각들로 되돌아 갈 때 까지이다. 특별하게 내가 느껴보도록 허락된 것은, 내 마음 -즉 내 영-안으로부터 나오는 끌어 당김이었다. 내게 말해진 바, 이것은 주님에 의해 행해진다는 것, 이것이 부활의 실제적 근원이다는 것이다.
천적 천사들은 인간이 깨어날 때, 언제나 현존한다. 그들은 인간을 떠나지 않는데, 그 이유는 그들이 모든 이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이 이 사랑스러운 천사와 있는 것이 부담스러워 더 이상 버티지 못할 경우, 그는 이 천사가 떠나주기를 원한다. 이것이 발생할 때, 영적 왕국으로부터의 천사가 그에게 빛을 주기 위해 가까이 온다. 이 단계 까지를 그는 볼 수는 없고 단지 생각하는 것만 가능하다. 이 바꿈이 발생할 때, 인간은 그의 왼쪽 눈으로부터 코 쪽을 향하여 한 꺼풀이 둘둘 말아져 내려 왔음을 느낀다. 이리하여 눈은 열리고 볼 수 있다. 이것이 실제로 당사자에게 발생하고 있는 듯 인간에게 나타난다. 이것이 행해질 때, 어떤 것은 빛나나, 안개같은 것이 보여지는데, 어쩌면 그가 처음 깨어날 때, 반쯤 감겨진 눈꺼풀을 통해 보는 것 같다고 말하는 편이 나을 듯 싶다. 이후 나는 내 얼굴이 부드럽게 벗겨지는 것을 느꼈다. 이것은 더 영적인 방법으로 생각하는 쪽으로 인도했다. 이런 벗겨짐은 나로 하여금 인간이 자연적 생각함으로부터 영적 생각함 안으로 오는 것을 보여 주는 것, 그리고 인간의 마음 안에서 어떤 생각이 사랑을 동반하지 않고 튀어 나오는 것을 천사들은 매우 크게 걱정하여 이를 예방해준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그들은 이제 그가 영이다는 것을 그 인간에게 말한다.
지금 인간이 볼 수 있는 것은, 영적 천사가 새롭게 깨어나는 인간에게 할 수 있는 모든 도움- 즉 영계에 관하여 그리고 거기 있는 것들에 관하여, 그러나 그가 이해할 수 있는 한도에서 그에게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만일 그가 말해지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면, 인간은 이 천사가 자기로부터 떠나가기를 갈망할 것이다. 그러나 떠나는 것은 천사가 아니다. 오히려 인간이 그 천사들로부터 자신을 분리한다. 그 이유가 모든 천사들은 사랑만을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특수한 예에서, 이 천사들은 도와 주기를 사랑하고, 가르쳐 인도해 천국으로 이끌기를 사랑한다.
인간이 이런 천사들로부터 이동할 때, 그는 선한 영들에 의해 받아들여지고, 이 영들은 그가 이들과 더불어 있는 한 그를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해준다. 그러나 만일 이 세상에서의 그의 삶이 선한 영과 친구 관계를 갖는 것이 불가능한 종류의 삶이었다면, 그는 선한 영들로부터 멀어지기를 갈망한다. 이런 모형은 필요하다면 더 오래, 더 자주 발생하는데, 이는 그 인간이 세상에서 살았던 삶의 종류와 걸맞는 영이 등장할 때까지 이다. 그런다음 놀라웁게도 그는 세상에서 자기를 이끌었던 같은 종류의 삶으로 인도된다.
이런 입문적 국면은 며칠 정도만 지속될 뿐이다. 후에, 그는 자기 영의 진정한 본성을 밝히 알게 하기 위해 이 상태로부터 저 상태로 인도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는 천국 또는 지옥으로 간다. 이상 모든 것은 모든 이를 위한 아주 일반적인 과정을 대단히 짧게 기술한 것이다. 어떤 인간은 사후 자기가 살아 있다는 것을 발견함으로 해서 완전히 당혹해 한다. 이런 사건은 세상에 사는 동안 사후의 혼에는 어떤 생명도 없다고 믿었던 이들이 접하는 사건이다. 이와 같은 부류의 인간들은 사후 자기와 의견을 같이하는 인간들과 친구한다. 그들은 생명이 있다고 믿는 이들과는 분리되어진다. 일반적으로, 이 인간들은 지옥의 어떤 공동체와 연결 고리를 형성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그들은 교회가 가르치는 것을 경멸하고 신성한 것을 부인하는 일을 자주 했기 때문이다.

사후에도 인간은 완전한 인간 모양 안에 있다

모든 영 각각은 인간의 모양이다. 이 모양을 또 다른 방식으로 놓으려 해도, 각 영은 인간으로서 나타난다. 이런 까닭은 인간이 인간인 것은 그의 몸 때문이 아닌 영 때문에서 이다. 이 문제는 이미 거론 했었다.
사후 인간이 영들의 세계로 먼저 들어갈 때, 그의 얼굴과 음성은 그가 세상에 있었던 동안 지녔던 것과 아주 비슷하다. 이런 이유는 그의 삶은 보다 더 외적 상태에 있고, 그의 내향의 수준들은 아직 열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상태는 인간이 죽은 후에 가지는 첫 번째 상태이다. 그 후에, 얼굴은 바뀌기 시작하고 아주 다르게 되어간다. 그리하여 그가 세상에 사는 동안 무엇보다 우선시 하여 자기를 이끈 사랑, 자기 영이 몸 안에 있는 동안 그 영을 먼저 차지했던 사랑으로부터 오는 외관을 입는다. 이 사랑이 진짜 인간이다. 인간의 영의 얼굴은 그의 몸의 얼굴과는 딴판이다. 그의 육체의 얼굴은 부모로부터 이다. 반면 그의 영의 얼굴은 그가 사랑한 것으로부터 이다. 그리고 이 사랑은 영적 형상 안에 있다. 사후 바깥쪽 모양새들이 시들어질 때, 동시에 인간의 내면의 생명이 열려질 때 발생하는 바는, 영은 안쪽에서 사랑하는 것이 바깥쪽에서도 닮아진다는 것이다. 나는 세상으로부터 방금 도착한 인간을 보았다. 그리고 나는 그들의 얼굴과 음성을 수단으로 그들을 인식했다. 그러나 후에 내가 그들을 보았을 때, 나는 그들을 인식하지 못했다.
얼굴이 바뀌는 또 다른 이유는 이렇다. 사후 삶에서는 자기들이 가지지 않은 애착으로 겉을 꾸미는 것이 허용되지 않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위선은 있을 수 없다는 말이다. 위선자의 얼굴이 바뀌려면 더 많은 시간이 걸려야 하는데, 그 이유는 그들이 세상에서 선하게 나타나도록 오래 있었던 만큼이나, 그들의 삶은 선한 애착들의 사본 같이 보이게 하기 위하여 오래 연습해왔기 때문이다. 결과로 그들은 한동안 아주 매력적인 냥 보여지나, 그런체하는 것을 고수하는 그들의 능력은 그들로부터 점차적으로 거두어지고, 그들의 내면의 수준은 그들이 사랑한 것들로 옷입는다. 그 후에, 그들은 여느 타인 보다 더 일그러지기 까지 한다.
인간이 신성한 것을 더 내향적으로 사랑해왔고, 그의 생애 동안 그것들에 의해 살았다면, 사후 그는 더 아름다워진다. 이런 이유는 사후 모든 이의 내면의 수준은 열리되, 그들의 사랑과 생명의 품질에 의거 모양을 갖추기 때문이다. 그 결과로, 내향의 애착이 더 많으면, 그는 천국의 형태를 더 갖춘다. 그래서 그의 얼굴은 더 아름답다. 사실상,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하고 참된 모든 것, 천국을 만드는 모든 것은 인간의 모양 안에 있다. 이것은 일반적 차원에서 뿐 아니라 아주 미세한 부분, 아주 상세한 측면에서 그러하다. 이 모양은 천국에 있는 모든 이로 인간의 모양 안에 있게 하는 원인이다. 또한 그가 주님을 받아들인 방법을 반사하는(mirror) 것이기도 하다.

사후에도 모든 감각, 기억, 생각, 애착은 존재한다.

인간이 죽을 때, 그는 육체의 몸을 빼고는 그와 더불어 있는 자신 속의 모든 것을 영계 안으로 운반한다. 그때 그는 자기의 자연적 몸과 다르다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는 영적 몸을 가진다. 이 몸은 자연적 요소가 아닌 영적 본질들로 구성되어 있다. 더 나아가, 영적인 어떤 것을 만질 때, 영적 어떤 것을 볼 때, 이는 자연적 어떤 것을 보고 만질 때와 똑같다. 그래서 인간은 영이 되었을 때, 그는 자기가 세상에서 가졌던 몸 안에 있지 않다 라고 말할 수 없다. 한마디로 그는 자기가 죽었다는 것을 모른다.
영이 된 인간들은 그들이 세상에 있는 동안 가졌던 모든 감각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본다, 그들은 듣는다, 그들은 말한다, 그들은 냄새 맡고 맛을 볼 수 있다; 그들은 만짐으로부터 있는 압력 조차 느낄 수 있다. 이에 더하여, 이전에 가졌던 것들, 즉 갈망함, 생각들, 되새겨봄, 애착과 느낌, 사랑, 노력함, 의도함을 가지고 있다. 학문과 연구를 즐겼던 인간들은 전과 같이 읽고 쓸 수 있다. 한마디로, 인간이 이쪽 삶에서 저쪽 삶으로 건너갈 때, 이는 마치 이 장소에서 저 장소로 간 것과 같고, 건너 갈 때 자신의 권리로 행동했었던 모든 것도 가져 가는 것이다.
그는 자기와 더불은 세상적인 것들의 기억-그가 보았고, 들었고 읽었고, 배웠던 것들, 또는 그의 유아 시절로부터 생애 마지막 순간까지 세웠던 생각들까지 가져간다. 그러나 그의 기억 안에 있는 위의 세상적인 것들은 영적 환경에서는 재생산되어질 수 없기 때문에, 그것들은 마치 우리가 기억 안의 것을 생각하지 않을 경우 그대로 기억 안에 있듯 일종의 휴식 상태가 되어 있다. 그러나 주님이 원하시면 그것들은 마음에 되돌아 올 수 있다.
오로지 육체의 감각만으로 자신을 통치했던 인간들은 사후 인간의 삶이 위와 같다는 것을 전혀 믿을 수 없다. 그 이유는 그는 어떻게 그렇게 있을 수 있는지를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영적인 것들에 관하여 생각할 때 조차도 자연의 용어 안에서만 생각할 뿐이다. 손으로 만져서 느낄 수 있는 것 외에는 어떤 것도 그들을 위해서 존재가 가능할 수 없다.
그들이 영적 세계에서 가지는 영적 감각들은 이 세상의 감각들 보다 더 예민하고 정밀하다. 천국에 있는 이들은 그들이 이 세상에 있었을 때 보다 더 뚜렷하게 보고, 듣고 더 슬기롭게 생각한다. 이제 그들은 천국의 빛으로 보고, 많은 등차를 수단으로 세상의 것을 훨씬 능가하는 영적 대기를 통하여 듣는다. 이 차이는 수정 같은 맑은 것과 구름으로 덮인 것의 차이 같다. 신성한 진리가 천국의 빛이고 이것이 천사들에게 아주 세세한 세부사항을 볼 능력을 준다. 이에 더하여, 천사들의 시력은 그들의 이해력과 완전히 일치한다. 그들의 듣고 지각함은 하나로서 행동하는 바, 연설자의 음성의 소리와 똑같게 그의 애착과 생각을 알 능력을 주고 있다.
한편, 지옥에 있는 이들의 감각들은 불완전하다. 그리고 악령은 그의 악한 행동들을 보여줄 수 있다. 그 이유는 그들도 그의 기억으로부터 끌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간음, 도둑, 뇌물주는 것, 부패한 짓 등이 발생했던 그때와 같은 상세함으로 열려 보여진다. 이런만큼, 악한 사건에 시치미를 떼는 일은 가능치 않다. 이 모든 것은 주님 자신이 말하셨던 다음 구절 안에서 준수되고 있다. 즉 “폭로되지 않을 감추인 것은 아무것도 없고, 알아보지 못 할 숨겨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 너는 어두움 안에서 말해진 것을 빛 안에서 들을 것이고, 너는 귀에 대고 말해진 것을 지붕에서 선포할 것이다.” (누가 12:2, 3)
사후 인간의 행동들이 그에게 보여질 때, 이 정보를 꺼낼 책임을 가진 천사들은 그의 얼굴을 쳐다본다. 그 다음 이 검사는 몸 전체에서 보여질 때까지 그의 온 몸을 통해 모두 퍼진다. 이와 같은 일이 발생하는 까닭은 기억 속의 것들이 뇌 안에 씌였을 뿐 아니라 인간 전체에 씌여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간이 생각했던 것, 하기를 원했던 것, 말한 것, 행동된 것은 파괴되어질 수 없다. 그 이유는 그것들이 그의 영에 적혔기 때문이다.
인간의 세상적 기억이 영적 세계 안으로 운반되었다 해서, 자연적 요소들 자체가 다시 저쪽 삶으로 가져다 놓아 지는 것은 아니다. 각자의 장소에서 영적인 물건들이 상응을 수단으로 자연적 물건들과 연결되어져 보여진다. 이렇게 보여질 때, 그것들은 자연적 요소들 만큼 똑같은 모양을 가지고 나타난다. 이런 이유는 영적 세계에 있는 보일 수 있는 모든 것들은 그것이 영적일지라도 자연적으로부터 있는 어떤 것 같이 보이기 때문이다.
만일 인간이 자료와 사실에 입각한 지식들에 의하여 자기 마음을 발달 시켰다면, 그러고서 그가 영적 세계, 즉 외적 지식들로부터가 아닌 자기들의 애착들로부터 이야기 하는 곳으로 올 때, 이런 인간들은 단순하거나 어리석은 자 같이 나타난다. 그가 긁어 모았던 것은 더 이상 표출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그런 것은 세상에 속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인간이 세상의 자료와 언어를 수단으로 그의 마음을 발달시킨 만큼에서 합리적 인간이었을 뿐이었기 때문이다.

사후 인간의 품질은 세상에서 가졌던 품질과 똑같다

성경에서, 인간은 자기 삶 동안의 행동들에 따라 판결받아질 것이고 보상받아질 것이다고 자주 말해진다. 진실된 방식으로 생각하고 착하게 사는 자는 천국에 갈 것이고, 사악하게 산 자는 지옥에 간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다. 그럼에도 악한 인간은 사후 자기의 상황이 세상에서의 자기 자신의 삶에 의존된다는 것을 기꺼이 믿으려하지 않는다. 그는 천국 입장은 자비로부터서만 증여 받는다고 생각하고 생활로부터 분리된 신앙에 기대는데 어떠한 거리낌도 느끼지 않는다.
반드시 알아야만 하는 것은, 인간의 품성은 그의 행동들 내에 포함되어 있다는 것, 그의 내적 태도는 그가 행하는 것에 일치되지 않으면 진짜로서 만들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런 행동들은 인간의 바깥쪽 삶이고 그의 내적 삶의 품질은 바깥쪽 삶을 통하여 표현되어진다. 그럼에도 행동들은 바깥쪽으로 표출하는 방법 만을 뜻하는 것은 아니고, 인간 내부에 있는 방법 까지를 뜻한다. 그 이유가 모든 행동들은 인간의 의도와 생각으로부터 튀어나오기 때문이다. 행동이 이 근원으로부터 오지 않으면, 행동은 기계 같은 단지 움직임 자체일 것이다. 고로, 행동은 내적 원인으로부터 오는 결과이다.
위 문단은 사후 인간이 들어가야 하는 삶이 무엇인지를 우리로 알 수 있게 한다. 이것은 그의 사랑, 잠재성 안에 있는 사랑 뿐아니라 행동 안에 있는 사랑에 기초된 삶, 즉 그가 행동한 것들인데, 그 이유는 행동 안에 그가 사랑하는 것, 그가 믿는 것의 모든 요소들이 포함되고 있기 때문이다.
각 인간은 ‘통치하는 사랑’-각 인간을 지배하는 사랑-이라 불리는 것을 가지고 있다. 사후 그는 이 사랑을 간직하고 영원히 바뀌지도 않는다. 모든 인간은 서로 다른 꽤 많은 사랑들을 가지고 있으나 이것들을 거꾸로 추적해보면 결국 그 뿌리는 통치하는 사랑이고 이 사랑과 하나를 만들고, 함께 어우러져 삶을 구성하고 있다. 이 사랑의 어떤 것은 그것의 본성상 더 바깥쪽이고, 또 어떤 것은 더 안쪽이다. 어떤 것은 보다 가까이 있고, 다른 어떤 것은 멀리 있다. 그러나 이 사랑들 모두는 한 인간 안에서 어떤 종류의 왕국을 만들고 있다. 그리고 인간이 이것을 눈치채지 못할지라도 뚜렷한 질서에서 정리정돈되어 있다. 그러나 전부는 아니겠지만 일부는 당사자도 알게 된다. 그 이유는 인간이 자기 주위의 삶의 영역을 확장하는 방식은 내부에 있는 자기를 통치하는 사랑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사후에는, 그가 사랑했었던 것이 그 인간이다. 죽음 자체는 인간을 통치하는 사랑과 일치하지 않는 모든 것의 제거를 야기한다. 만일 인간이 기본적으로 선하다면, 이런 그의 기본적 품성에 적절치 않은 어떤 부분은 제거되어진다. 또는 그것이 어디론가 실려가버리는 듯 된다. 이 방식으로 그는 자기 고유의 사랑 안으로 놓여진다. 이런 일은 악한 인간에게도 발생하는데, 악한 인간의 경우, 그가 알고 있는 진정한 생각들은 제거되거나 운반되어진다. 마침내 각 인간은 자기 고유의 사랑으로 되어가고, 한번 이것이 발생된 이상, 인간은 자기를 사랑함 쪽으로 자기 얼굴을 돌려서, 그가 어느 방향으로 틀든지 그 사랑이 자기 눈 앞에서 전개되는 셈이다.
모든 영은 그가 자기를 통치하는 사랑을 간직하는 한 어느 곳으로도 인도될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은 어떤 일이 발생한 것을 알고 그것에 저항해야겠다고 생각한다 해도 저항할 수 없다. 어떤 영은 저항하려고 자기를 통치하는 사랑에 반대되는 행동을 해보려 노력하지만 언제나 헛수고로 끝난다. 이런 이유는 그들의 사랑은 그들이 끌어 당길 수 있는 그들을 둘러싸고 있는 사슬이나 밧줄과 같아서 이다. 이로부터 그들은 자신들을 자유롭게 할 수 없다.
세상에 있는 인간들 조차도 똑같다; 그들 고유의 사랑이 그들을 이끈다. 그리고 그들은 자기 고유의 사랑을 수단으로 타인도 이끈다. 서로 각자 다른 삶에서 보여지는 모든 모양들은 인간의 영이 그를 통치하는 사랑이다는 이 사실이 진리임을 보여준다. 그곳에서는 누군가가 어떤 인간의 사랑을 간직하면서 어떤 것에 관하여 이야기 하거나 행동을 할 때, 그 인간은 생기가 있고 기쁜 얼굴을 지닌 모습이 거기서 눈에 보여진다. 그러나 누군가가 자기의 통치하는 사랑에 반대되어지도록 하는 대화가 있기만 해도 그 인간의 얼굴은 변하기 시작하고 일그러져 불분명해진다. 결국 그 인간은 마치 거기 있지 않았던 듯 사라지고 만다.
위와 같은 몇 요점들은 통치하는 사랑의 중요성을 보여주는데 보탬이 되었으리라 생각한다. 인간이 영원히 있게되는 방식은 그를 통치하는 사랑이 관련되는 한도 까지에서 이다. 인간은 만일 그가 지닌 신앙, 믿음이 천국의 사랑으로부터 생겨지지 않으면 그것을 간직할 수 없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존속하는 사랑은 행동 안에 있는 사랑이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이 사랑이 그 인간 자신의 생명이기 때문이다.

사후 인간의 삶의 즐거움은 그것에 상응하는 것들로 바뀐다.

인간이 즐거웁다 하는 모든 것들은 그를 통치하는 사랑으로부터 온다. 그 이유는 인간은 그가 사랑하는 것들, 특히 무엇보다 중요시하여 사랑하는 것에서만 즐거움을 취하기 때문이다. 즐거움을 가져오는 모든 것을 거꾸로 추적해보면, 천국에 있는 인간을 통치하는 사랑은 주님을 사랑함이고, 지옥의 경우는 자아를 사랑함이다.
인간의 자연적 즐거움이 사후 그의 영적 대응물로 어떻게 바뀌는지를 보기 위하여서는 상응에 관한 지식이 요구되어진다. 상응(학)이 기본적으로 가르치는 바는, 자연적인 것은 그것에 상응하는 영적인 것 없이 존재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다. 특별히 상응학은 상응하는 그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이 어떤 종류의 것에 속하는지를 가르쳐준다. 고로, 이를 알아챈 인간은 만일 자기가 자기의 사랑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면 사후 자신의 상태가 무엇 같을 것일지를 가늠할 수 있다. 악한 인간들은 이런 것을 보도록 준비되지 않는다. 설사 그들이 준비되었다 해도, 그들은 그것을 수용하기를 거절할 것이다. 그러나 천국의 사랑 안에 있는 인간은 가르쳐질 수 있다. 그들은 자기들이 태어나면서 지닌 악해지려는 경향성들을 보게끔 준비되어진다. 그들은 이런 모든 것을 진정한 것을 기초로 하여 보고 있다. 그 이유는 사실상 진리가 악한 것을 들추어 보이기 때문이다.
상응 지식의 기초 위에서라면, 인간의 삶의 즐거움들이 사후 그것들에 상응하는 것들로 어떻게 바뀌는지를 아는 것도 완전 가능하다. 이에 대해 몇 예증들을 열거해 보겠다.
악한 사랑들과 거짓 사상들 안에서 즐거움을 발견해왔던 인간들은 천국의 시야로부터 멀리 도망한다. 그들은 동굴이나, 바위 틈의 열린 곳 안으로 허둥지둥 급히 들어가고 거기 숨는다. 이런 동굴이나 열린 곳은 거짓 사상들이나 악한 바램들과 상응한다, 그리고 이 인간들은 자기들이 노골적으로 매우 불유쾌한 여건에서 살고 있는데도 거기서 즐거움을 발견한다. 비밀스런 인간들은 서로를 볼 수도 없는 캄캄한 방의 한 구석에서 서로의 귀에 대고 속삭이는 것을 즐긴다. 영리함을 나타내려고 정보를 수집하기를 사랑했던 인간들의 경우, 그들은 모래가 많은 장소를 들판이나 정원보다 더 선호한다. 정작 자기의 삶에는 제대로 응용하지도 못하는 종교적인 가르침이나 교리에서 즐거움을 만끽하는 인간들은 자신들을 위해 바위투성이의 장소를 선택한다. 그리고 둥근 돌들 더미 사이에서 사는 것을 즐긴다. 위와 같은 것 내지 여타 다른 것도 악한 인간들이 사후 영적 세계 안으로 입장할 때 그들이 가진 즐거움에 상응하는 것들이다.
이와 대조적으로, 세상에서 천국적인 종류의 사랑 안에서 살았던 인간들의 즐거움은 천국에서 그것에 상응하는 것들로 바뀐다. 그들은 드높게 자리잡은 장소에서 살고, 그들의 눈 앞에는, 들판과 작물들과 포도원들이 봄철 기후 아래 있다. 어떤 이는 귀중한 돌들로 만든 듯 보이는 집에서, 또는 아름답게 잘 가꾼 정원 있는 집에서, 또는 모든 것이 웃고 있는 듯, 들떠서 떠드는 듯 여겨지는 장소에서, 또는 투명한 곳에서, 또는 매우 넓게 열려진 장소에서, 등등 같은 곳에서 살고 있다. 위의 예는 자기의 사랑이 천국의 사랑인 인간들의 즐거움에 대한 몇가지 예에 불과할 뿐이다.
이상으로부터, 모든 인간의 즐거움들은 사후 그것들에 상응하는 것들로 바뀌었다는 것, 그리고 똑같은 사랑이 영원히 지속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결혼적 사랑, 공정을 사랑함, 정직, 선량함, 진리, 지식과 지각을 사랑함, 지혜와 이해함을 사랑함, 등등의 사랑은 천국의 사랑 범주이다. 이런 사랑들로부터 흐르는 것들은 물의 원천으로부터 형성된 시내와 같다.

사후 인간의 첫 번째 상태

인간은 죽은 후 그가 천국이나 지옥을 들어가기 전 세 가지 상태를 통과한다. 첫 번째 상태는 그의 바깥쪽 삶에 더 관련되어져 있고, 두 번째는 그의 내적 삶에, 그리고 세 번째는 준비하는 상태이다. 인간은 그가 영들의 세계에 있는 동안 이 세 상태들을 통과한다. 그럼에도 이 단계들을 거치지 않고 즉각적으로 천국이나 지옥으로 직행하는 인간들도 있다. 천국으로 즉각 입장하는 인간들은 그가 세상 삶 동안 거듭나아져 와서 천국 입장의 준비가 완료된 인간들이다. 이런 인간들에게 필요한 준비는 그들이 천사에 의해 들려지기 전, 육체에 딸려 붙어 있었던 자연적 불순물들을 떨구는 일 뿐이다. 나는 사후 한 시간 만에 들림을 받은 몇 인간을 보았었다.
한편, 내부적으로는 완전 사악함인데도 선한 것으로 밖을 덧칠한 인간도 있다. 그들은 지옥 안으로 즉각 데려가진다. 나는 죽은 뒤 즉각 지옥으로 직행한 인간들을 보았었다-그들 중 하나, 사기성 지독한 인간은 그의 머리가 먼저 갔다. 그러나 이런 극단적 부류의 인간들은 영들의 세계에서 보존되며 준비하는 방대한 숫자에 비교한다면 아주 미미한 숫자이다.
사후 첫 번째 상태는 이 세상에서의 삶과 너무나 비슷하다. 인간들은 타인에게 세상에서와 아주 똑같은 외관을 보인다. 행위 역시 그러하다. 이 상태에서 인간은 죽음에서 깨어나질 때 자기가 영이다고 천사가 말해준 것을 깨닫지 못한 이상, 자기가 더 이상 세상에 있지 않음을 전혀 눈치채지 못할런지 모른다. 이 상태에서 그는 이 세상으로부터 온 친척이나 친구들도 알아 본다. 다른 삶에 있는 인간들은 거기서 친구나 친척이 아닐지라도 누군가에 대해 생각할 때는 언제든지 그의 생각함 안에서 그 인간의 얼굴을 여러 상황과 연계하면서 붙잡고 있는다. 그가 이렇게 할 때, 상대방은 마치 그가 호출이라도 받은 듯 현존한다.
이 첫 상태에서, 모든 이는 인간들을 만나고 자기들이 함께 있어주기를 원하는 인간이 있다면 그들은 짧든 길든 함께 머문다. 만일 그들이 함께 머물 이유가 실지로 없다면 이내 그들은 분리되는데, 마치 서로 만난 친구가 떠나는 듯 하다. 더구나 서로 만나 다툼이 있었다면 이는 공개적으로 발발하여 인간들은 서로 싸움질하기 조차 한다. 인간들은 자기가 죽어 있다는 것, 그런데 세상에서 지녔던 몸 안에 있다는 것에 놀란 이상, 그들은 천국과 지옥이 무엇 같은지, 자기들은 어디에 있을 것인지에 대해 알려는 호기심이 더 많아진다. 그러면 그들은 가르쳐지고 데리고 다녀져 사후 삶에 관하여 생각하도록 부추켜진다. 대부분의 인간들은 자기가 천국에 갈 것인지를 알아보려 열심을 낸다. 그들은 자기가 세상에서 선한 인간이었으니 분명 천국에 입장한다고 믿는다. 그러나 그들 중 대다수가 삶의 더 깊은 것들, 또는 더 내향의 수준들에 관한 생각은 가지고 있지 않다. 어쨌든 이런 인간들은 선한 영들에 의해 검사되어 그들의 삶의 품질이 정녕 무엇인지 보여진다. 그리고 어떤 것들은 그 자신을 보여주기 시작한다. 악한 인간은 삶의 바깥쪽에 해당하는 모든 것에는 열심을 내어 듣지만 더 깊은 것들에 관하여 말해지는 것에는 하등 관심이 없다. 그들은 듣지만 묵묵답답이다. 게다가 그들은 어떤 지역으로 향하여 가고 싶어 한다. 그래서 그들을 혼자 놔두면 그쪽 방향으로 난 길을 따라 가고 만다. 그들의 삶의 품질은 그들이 가고 싶어한 지역들로부터, 그들이 따라 걸어간 그 길로부터도 감지된다.
인간들은 이 첫 상태에서 며칠을, 몇 달을, 혹 일 년을 머문다. 머무는 시간의 길이는 바깥쪽 삶과 안쪽 삶이 얼마나 많이 일치하느냐에 달려 있다. 그 이유는 모든 인간은 자기의 바깥쪽 삶의 대부분을 먼저 벗겨내고, 얼마큼인지 모르나 내향의 것들에 상응하는 바깥쪽 삶의 평면에 있기 위해 그 자신 고유의 사랑의 형상이 되어가야 하기 때문이다.

사후 인간의 두 번째 상태

두 번째 상태를 내면의 상태라고 부르는 이유는 지금 인간은 그의 마음 안에 있는 것 안에, 또는 그의 의지와 그의 생각함에 놓이고, 그 반면 첫 번째 상태에서 작동되었던 바깥쪽에 속한 것들은 잠들어 있기 때문이다. 이 두 번째 상태는 세상에서 인간이 어떤 제약 조건 없이 자기 혼자 있었을 경우, 또는 자기 주위에 아무도 없는 상황과 엇비슷할 것이다. 인간이 세상에서 있을 경우, 자기가 말하는 것을 자극하는 그가 지닌 생각에 전권을 넘기듯, 인간은 이 상태 안으로 완전 무의식 상태로 미끄러든다. 인간이 이 상태 안에 있을 때 그는 자기 고유의 자아, 그 자신의 생명 안에 잠긴다. 그리고 그의 진정한 본성이 밝히 드러내진다. 이제 인간은 그가 실제로 사랑하는 것으로부터 생각하기 시작하고 그럴 것 같다 생각되는 것은 거의 없고 의도함과 뜻함만이 작동하고 있다. 단지 그의 의도함들에 관한 생각들이 적나나해짐에 따르는 두려움 같은 것을 제외하고는 그가 말하는 것과 똑같다.
모든 인간이 이 두 번째 상태를 통과하는 이유는 이것이 그의 영의 실제의 상태이기 때문이다. 첫 번째 상태는 그가 다른 인간들과 함께 있었을 때, 그의 영이 어떠했는지 이였는바, 엄밀히 말해 이것은 그의 진정한 상태는 아니다.
지금 그가 세상에 있었던 동안 어떤 종류의 인간이었는지가 명확해진다. 그 이유는 이쯤에서 그는 그에게 실제로 속해 있는 것, 그의 부분이 된 것을 기초로 처신하기 때문이다. 만일 그가 세상에서 진짜 선 안에 있었다면, 지금 그는 합리적으로, 슬기롭게-아마 사실상 더 슬기롭다. 그 이유는 구름으로 덮듯 어둡게 만든 육체의 묶임에서 자유하기 때문이다. 그런 반면, 만일 그가 세상에 있는 동안 악 안에 있었다면, 지금 미친 듯 발광적으로 행동하여 더 사악해진다. 그 이유는 자유함 아래, 제한 없음에 있기 때문이다.
양심에 따라 살아왔던 인간들이 이 두 번째 상태에 있을 때, 잠으로부터 깨어나는 듯 여겨진다. 그 이유가 지금 그는 천국의 빛으로부터, 전보다 더 깊은 지혜로부터 생각하기 때문이다. 깨어나자 그는 천국의 지각이 그들의 마음에 열리기 시작하는 방식에 의해 영향받게 된다. 그들은 큰 즐거움과 천사들과의 연합으로부터 오는 내적 복됨으로부터의 새 감각을 느낀다. 이쯤에서 이와 같은 영들은 주님을 인식할 수 있고, 그들 자신의 삶을 통하여 그분을 예배할 수 있다. 그들은 이 예배가 어떻게 완전한 자유 안에서 행해지는지를 알 수 있다. 그 이유가 자유에 관한 이 느낌은 그들의 가장 깊은 애착 안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외적 예배는 그들의 생활에서 중요한 부분을 더 이상 담당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내부로부터의 진정한 예배가 외적 예배의 자리에 들어 앉았기 때문이다.
위와 대조되는 것, 세상에서 완전한 악 안에서, 양심은 전혀 없이, 그러므로 신성으로부터의 모든 것을 부인했던 많은 이들이 있다. 이 같은 인간들은 두 번째 상태인 삶의 내적 수준으로 진입하자마자, 그들은 우둔한 인간들 같이 되어지는 바-폭력, 미워함, 복수와 경멸함이 돌발하고, 어떤 것은 너무나 사악해서 이런 것이 인간 내부에 과연 존재할까 의심될 정도이다. 그들은 사실상 자기들이 행하기를 원하면 무엇이든 가능한 완전한 자유 안에 있다. 그 이유는 그들이 세상에 있을 때 자기들을 점검했던 어떤 제약된 외적인 것이 떠나버렸기 때문이다.
그들이 위와 같은 상태에 있을 때, 그들은 때때로 자기들이 있었던 첫 번째 상태를 회상한다. 그들 중 어떤 이는 자신을 부끄러워하고, 어떤 이는 부끄럼을 전혀 느끼지도 않는다. 어떤 이는 첫 번째 상태에 더 머물게 하지 않게 했다고 화를 낸다. 이런 모습만 보아도 만일 그들에게 이를 허용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필시 그들은 자신들을 더 지독하게 파괴했을 것이다. 그 이유는 비밀스럽고 사기로 범벅된 바깥쪽 삶이 그와 똑같은 방식으로 그들의 내적 생명을 불살라 결국 사라지게 까지 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두 번째 상태에서, 인간들은 그가 세상에 있었던 동안 자신 안에 가지고 있었던 것, 그때 그가 가졌던 것, 그 당시 비밀리 말해진 것이 공개적으로 보여지고 그것과 정확히 같아지게 됨을 눈으로 본다. 이 시점에서는 바깥쪽 요인들이 좌지우지하지 않는 바, 영들은 이와 같은 것들을 노골적으로 이야기하고 과거 세상에서는 자기들의 명성에 흠집이라도 생길까 하는 걱정을 하였는데, 이런 걱정 같은 것이 없는 채 그것들을 행동에 옮긴다. 따라서 이 상태에 있는 동안 그들은 자기들의 많은 악들을 가져다 놓는 바, 천사들과 선한 영들에게 자기들이 진짜로 무엇인지를 드러내고야 만다.
악령들은 이 두 번째 상태에 있는 동안, 모든 종류의 악 안으로 돌진한다. 그 결과, 그들은 자주 처벌받고 때로는 대단히 무거운 처벌도 뒤따른다. 영들의 세계에는 여러 다른 종류의 처벌이 있고, 당사자가 세상에서 왕이었는지, 노예이었는지에 따라 있을법한 차별은 없다. 모든 악은 그것에 따른 고유의 처벌을 가져오는데, 그 이유는 행동과 그것의 결과는 분리되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 고로 이런 악, 저런 악 안에 있는 인간은 그것의 처벌 역시 내포하고 있다. 설사 그렇다 해도, 이 벌은 그가 세상에 있는 동안 저지른 악 때문이 아니라 다른 삶인 지금 행하는 악 때문에 자초한 벌이라고 말해야 마땅하다. 어쨌든 인간은 사후 그 자신 고유의 삶으로, 이는 육체를 지녔던 시절의 삶과 같다.
처벌이 있어야하는 이유는 이 상태에서 악을 조절하는 수단이 형벌 뿐이기 때문이다. 격려함은 더 이상 일하지 않는다, 가르침도 없다, 법을 두려워 할 일이 없다, 명성을 잃을 일도 없다. 그 이유는 바깥쪽의 행위가 지금은 인간의 실제적 본성으로부터 뻗어나오고, 그리고 이것은 극심한 처벌을 수단으로 하지 않으면 조절도, 부서질 조짐도 없기 때문이다.
그 반면, 선한 영들은 처벌이 전혀 없다. 설사 그가 세상에서 악한 어떤 것을 했을지라도 처벌은 없다. 그 이유는 그들의 이런 악이 사후 그들에게 되돌아 오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의 악은 앞 문단의 악과는 근본이 다르다. 그들의 악은 진정한 것을 고의적으로 심각히 반대하여 야기된 악이 아니다. 그들의 악은 부모로부터 상속된 악 외 어느 다른 악은 아니다.
모든 인간은 그가 세상에 있었던 동안 그의 영이 있었던 공동체에로 온다. 그의 영은 조금씩 거기로 안내되어진다. 결국은 거기에 당도하고 들어간다. 악한 영이 그의 삶의 내적 상태에서 붙잡혀졌을 때, 그는 그의 공동체를 향하여 점차로 돌아선다. 결국 그는 이 두 번째 상태가 마무리짓기도 전에 자기 공동체를 향하여 일직선으로 돌아선다. 그리고 이 상태가 끝났을 때, 그는 자신을 자신 같은 이들이 있는 지옥 안으로 내던진다. 이 내던짐은 마치 곤두박질하는 모양, 즉 머리는 아래로, 발은 위로 한 채 꼴아박는 격이다. 이같은 모습이 보여지는 이유는 그때의 이 인간은 거꾸로 된 질서 안에 있어 지옥의 것은 사랑하되 천국의 것은 거절하기 때문이다.
이 두 번째 상태 동안에도 역시 악한 영과 선한 영은 서로가 갈라선다. 첫 번째 상태 동안에서는 이 두 영은 함께 있었는데, 그 이유는 영들이 바깥쪽 것들에 포함되는 한, 세상에서 악한 자와 선한 자가 함께 있듯 여기서도 똑같기 때문이다. 이 분리됨은 다각도에서 발생한다. 이를 한꺼번에 묶어 말하면, 악령이 첫 번째 상태에 있는 동안 그들의 선한 생각들과 애착들을 통하여 접촉한 공동체로 악령을 데려감으로 성사된다. 이 방식에서 그들은 자기들이 악하지 않다는 것을 그들의 바깥쪽 모양새에 의해 설득되어졌던 공동체로 데려가진다. 지금 악령들은 이 공동체의 영들에게 자기들의 진짜인 것을 노출하는 바, 이 영들은 그들을 보자마자 돌아서버리고, 그들이 이러하자마자 악령 역시 그들의 얼굴을 이 선한 공동체로부터 그들의 마지막 예정지인 지옥의 공동체를 향하게 한다.

사후 인간의 세 번째 상태

세 번째 상태는 일종의 가르침이다고 말하는 편이 나을지 모른다. 이 상태는 천국에 들어가려는 인간들만을 위한 상태, 그래서 천사가 되려는 인간들만을 위한 상태, 지옥에 들어가는 인간들을 위한 상태는 아닌데, 그 이유는 그들은 가르쳐질 수 없기 때문이다. 지옥에 들어갈 이들을 위하여서는 두 번째 상태가 그들의 사랑쪽으로 완전히 돌아서고, 그들이 들어갈 지옥의 공동체를 향하는 바 세 번째 상태까지 마무리해 준 셈이 된다.
선한 인간들은 가르침을 수단으로 천국을 위한 준비의 하나인 세 번째 상태로 데려와진다. 선하고 진정한 것에 관한 통찰력을 수단으로 하지 않고 천국을 위해 준비될 자 아무도 없다. 이 통찰력에 가르침이 포함되고 있다. 물론 세상에서의 삶 동안 세상적인 태도에서 있는 공정과 정직에 관하여 아는 것은 가능하다. 그 이유는 그곳에도 옳고 그름에 속한 것을 가르치는 법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적 수준에서 진리인 것과 선인 것은 세상으로부터 배워질 수 없고 오직 천국으로부터만 배워진다. 설사 인간들이 성경으로부터, 교회 가르침으로부터 뭔가를 알고 있다 해도 이런 것들은 그가 천국 안에 있지 않는 이상 인간의 내적 삶 안으로 들어갈 수 없다. 인간은 그가 신성인 것을 인식하고 이것 때문에 공정과 정직을 행동에 옮길 때 천국 안에 있는다. 그러나 누구도 위와 같이 있으려면 먼저 가르쳐져야만 한다. 예를 들면, 하느님은 계시다는 것, 천국과 지옥이 있다는 것, 사후에도 삶이 있다는 것, 무엇보다 우선적으로 하느님은 사랑되어야 한다는 것, 타인은 자기가 자신을 사랑하듯 사랑되어야 한다는 것, 그리고 또한 성경은 그것이 하느님의 말씀이므로 믿어야 한다는 것 등등이 가르쳐져야 한다는 말이다. 이런 사항이 참이다고 믿을 때까지 그는 영적으로 생각할 수 없고, 그것들을 의도할 수도 없다. 그러나 그가 그것들을 행할 때, 그 다음 천국이 그의 삶에 내재한다. 즉 주님이 천국을 통하여 인간의 삶에 내재하신다. 그런고로 가르침이 필요하다. 인간이 전에 도덕적으로 정직과 공정이다고만 보았던 것이 지금 그의 영적 삶의 기초가 되어가고 있다.
이 세 번째 상태에서의 가르침은 다양한 천사의 공동체에 의해 주어진다. 특별히 북쪽과 남쪽 지역의 천사들에 의해 가르쳐지는데, 그 이유는 이들은 총명과 지혜에 속한 것에 관심이 많기 때문이다. 가르치는 장소가 있는데 주님은 그곳으로 영들의 세계에서 두 번째 상태를 마친 가르쳐져야 할 선한 영들을 데려온다. 이 장소들은 가르쳐져야 할 천국의 선한 품질의 유형에 따라 배열되고 배치되어 있다. 이 방식에서 모든 이는 그 자신의 지각과 품성에 꼭 맞는 방법으로 가르쳐질 것이다.
인간들은 대단히 많은 다양한 방식에서 가르쳐지는데, 그 이유는 그들은 아주 다양하고 다른 종류의 삶의 배경과 상황으로부터 오기 때문이다. 각각 그들에 꼭 맞는 선생이 모두를 위해 찾아진다. 그리고 모든 가르침이 교리와 동떨어진 말씀으로부터가 아니고, 말씀으로부터 끌어낸 교리의 기초 위에서 행해진다.
모든 이는 각기 이해할 수 있는 방식에서 가르쳐지는데, 즉 각자의 특별한 종교에 따라, 그리고 그들이 세상에서 자기 삶의 기초가 되었던 그들만의 특별한 종교의 가르침에 따라 진행된다. 그리고 천국들에 있는 가르침은 이런 점에서 세상적 가르침과 다르다. 즉 통찰력이 기억에 위임되는 것이 아니라 삶에 위임되는 것이다. 그들은 가르침을 받아 그들 자신의 삶과 일치하는 모든 것 안에 가져다 놓는다. 이것이 그들의 본성인 바, 그들은 삶에 유용해짐을 위해 진정한 것을 사랑함으로 계속적으로 영감되어진다. 그리고 주님은 모든 이가 자기의 본성에 걸맞는 유용성을 사랑하도록 설비해주신다. 이 사랑은 꼭 천사가 되겠다는 인간의 희망에 의해 더욱 강렬해진다.
훈육이 마무리되고 영들이 천국을 위해 준비되어졌을 때, 그들은 천국의 옷으로 차려 입는다. 이 옷은 대체로 고운 모시 같은 흰색이다. 이렇게 잘 차려입고 그들은 천국으로 안내하는 길로 데려와지고 거기서 수호 천사에게 인계된다. 그 다음 그들은 천국 공동체 안으로, 많은 종류의 행복 안으로 환영받는다.
각 천사는 주님에 의해 그 자신의 공동체로 인도된다. 이것은 여러 다른 갈래의 길에 의해 실시된다. 영들이 인도되는 이 길을 아는 천사는 없다. 아는 분은 오직 주님뿐이시다. 천사같은 영이 자기 고유의 공동체에 도착할 때, 그들의 가장 깊은 삶의 수준이 공개된다. 그 이유는 공개됨이 그 공동체와 완전한 조화를 달성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은 즉각 인식되고 큰 기쁨으로 환영받는다.

자비 만으로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

많은 인간들이 어떤 천국이 있는지, 또는 그 천국에 도달하는 방법은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에, 그리고 인간 안에 있는 천국의 삶에 무지하기 때문에 그들 중 대단히 많은 이들이 천국 입장 허가 여부의 결정은 신앙을 가지고 있어 주님의 중재를 받은 이들을 위한 주님의 자비에 국한된 문제라고 믿는다. 고로 그들은 인간은 신성한 호의로부터 나오는 은총에 의해서 구원될 수 있다고 상상한다. 어떤 이는 이것은 지옥에 있는 이들에게도 적용된다고 생각하기 까지 한다.
위 문단에서와 같이 생각하는 인간들은 인간이 실지로 무엇인지에 관하여 아는 것이 하나도 없다. 그들은 인간의 품질은 그가 살아온 것과 꼭같다는 것, 그의 삶은 그의 사랑과 꼭같다는 것, 그의 물질적 모양은 그의 내향적 삶이 행동들을 통하여 그 자체를 표현할 수 있는 바깥쪽 모양일 뿐이다는 것을 모르고 있다. 그들은 몸은 그 자체로부터 사는 것이 아니라 영으로부터 산다는 것, 그가 사랑한 것으로부터 사는 것임을 모른다. 인간이 위 같은 사항들에 무지한채로 있는 한, 그들은 구원은 자비와 은총이라 불리는 주님이 선심쓰신 결과일 뿐 그 이상은 아니다고 계속 믿고 있다.
따라서 이 신성한 자비(mercy)가 무엇인지 꼼꼼히 헤아려두는 것이 필요하다. 신성한 자비는 인류 전체를 향한 순수한 자비이다. 그리고 단 한 인간도 이 자비로부터 취소 받는 일은 결코 없다. 고로, 구원되어질 수 있는 모든 이 각각은 구원된다. 허나 누군가가 구원될 수 있는 방법은 주님께서 밝히 알려주시고 있는 신성한 수단에 의해서이다. 이것은 인간이 구원되어지기 위해 어떻게 살아야하는지를 가르치고 있다. 그것들을 수단으로 주님께서는 인간을 천국을 향한 쪽으로 인도하시고, 천국의 생명을 주실 수 있다. 주님께서는 모든 이를 위해 이를 실시하신다. 그러나 인간 자신이 악을 억제하지 않으면 주님은 천국의 생명을 주실 수 없다. 그 이유는 악이 장애물이기 때문이다. 인간이 악을 그만두는 만큼, 주님은 그를 그분의 신성한 수단을 통해, 그리고 순수한 자비로부터, 그의 유아기로부터 세상 삶의 마지막까지, 그리고 영원히 인도하신다, 위 모든 것은 주님의 자비는 자비 만이 아닌 순수한 자비이다는 것-즉 어떻게 살아왔는지는 하등 관계가 없이 호의로부터만 인간 각각이 구원되는 것은 아니다는 것을 보여준다. 주님은 그분의 질서에 반대되는 것은 절대 실시하실 수 없다. 그 이유는 그분 자신이 질서이시기 때문이다. 위로부터 더 알아지는 것은, 사후 인간의 삶은 바뀌지 않는다는 것-즉 악한 삶이 선한 삶으로 바뀔 방법은 없다는 것, 더구나 지옥의 삶이 천사의 삶으로 바뀌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 이유가 각 개인의 영은 머리로부터 발끝까지 그의 사랑과 꼭같고, 그의 삶과도 꼭같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에 반대되게 변한다는 것은 각 인간의 영의 완전한 파멸을 뜻한다.

천국으로 인도하는 삶을 사는 것은 어렵지 않다

인간들이 자주 착각하는 것은 천국으로 인도하는 삶을 살아내는 것은 대단히 힘들다는 것이다. 그들이 들어왔던 바는, 인간이 천국으로 가려면 세상을 단념할 필요가 있다는 것, 즉 육체와 더불어 있는 모든 즐거움을 포기하고 영적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이것이 뜻하는 바가, 세상과 더불어 그에 딸린 재물, 명예 등등을 반드시 금하고, 쉴틈 없는 기도와 성경 읽기 등등을 하면서 하느님에 관하여, 구원에 관하여, 그리고 영생에 관하여 계속 묵상하는 것이다고 상상한다. 간단히 말해 어불성설이다. 사실상, 위와 같이 세상을 포기한 인간들이 자신을 위해 비참한 삶만을 만들고, 정작 그가 죽을 때 천국의 기쁨을 받을 수 없는 인생으로 점철하는 경우가 많다.
만일 인간이 천국의 생명을 받고 싶다면, 그는 세상에 살고 세상의 업무나 사업에 가담하고 있어야 한다. 그 이유가 도덕적, 시민적인 삶을 통하여 그는 영적 생명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외 영적 삶이 인간 안에서 형성되어질 수 있는 다른 방법은 없다. 다시 말해 그의 영이 천국을 위해 준비될 수 있는 다른 방편은 없는 말이다. 그 이유는 내면적 삶을 산다는 것은 이 삶과 동시에 있어야 하는 외향의 삶이 없는 것은 마치 기초 없는 집에서 사는 것과 흡사한 바, 이 삶은 점차 가라앉고 균열이 생기고 비틀거리다가 결국 붕괴되기 때문이다. 영적으로 살고 있음은 자연적으로 살고 있음, 또는 세상에서 살고 있음에서 옮겨가지지 않는다. 오히려 두 가지의 살고 있음은 함께 묶여 있다. 혼이 몸과 함께 있는 것과 같다.
삶은 세 겹, 즉 영적 삶, 도덕적 삶, 시민적 삶이다. 도덕적, 영적 삶으로 이어지지 못한 채 시민적 생활을 영위하는 인간이 있다. 아직 영적 삶까지는 아니더라도 도덕적 삶을 사는 인간이 있다. 그리고 사회적, 도덕적, 영적, 이 셋을 동시에 사는 인간도 있다. 어쨌든 이것들은 천국의 삶으로 인도 가능한 삶들이다.
도덕적, 시민적 삶은 영적 삶의 활동적 측면이다. 만일 영적인 것이 이 활동적 측면에서 분리되면, 생각함과 말함 밖에 더 아니고 기초 없는 영적 삶에 불과하다.
모든 이는 도덕적, 시민적 삶을 살 수 있다. 모든 이는 세상에서의 그의 삶으로부터 위 두 삶이 무엇인지에 친숙해 있다. 모든 이는, 좋게 이든 나쁘게 이든 이 두 삶을 꽤 잘 이끌어간다. 그 이유는 어느 누구도 자신이 정직하고 공정한 인간이라 불러주는 것을 마다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영적인 인간도 자연적 인간이나 꼭같게 사는 것이 필요하다. 한 가지 차이는, 영적 인간의 경우, 시민적 도덕적 법들을 준수하는 것은 그것이 신성한 법에 관한 문제이기 때문에 준수한다는 것이다. 누군가가 이렇다면 그는 그것을 현실화함 없이 주님에 의해 인도되어진다. 이때 그가 시민적, 도덕적 삶의 차원에서 행해졌어도 그것은 당연히 영적 근원으로부터이다. 십계명은 영적, 도덕적, 시민적 삶에 관한 모든 법칙들을 포함하고 있다. 이 계명은 인류 전체를 위해 주님에 의해 주어져 있다. 계명의 첫 셋은 영적 삶과 더불어 행해지고, 그 다음 넷은 시민 생활과 더불어, 마지막 셋은 도덕적 삶에 관련된다.
위 모든 것이 말하는 것은 천국으로 인도하는 삶은 세상으로부터 분리될 경우 성취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것이다. 사랑의 행동 없는 신앙심 깊은 삶은 천국으로 인도해주지 못한다. 차라리 쓸모 있는 활동-즉 모든 업무, 일에서 공정과 정직으로 처리해가는 것 등이 천국으로 인도하는 것들이다. 그리고 신성한 법들을 지키려 정당하게 행동할 때, 이 행동은 내면적 동기, 또는 천국적 동기로부터 이다.
천국으로 인도하는 삶은 고되지 않다. 오히려 사랑하는 활동과 분리된 경건하다는 삶이 살아내기에 더 고달프고, 그런 경건 생활이 천국으로 인도한다고 믿는 정도 만큼 천국에서 멀어지게 할 뿐이다.

제 2 부

천국의 모양

천국에서는 주님이 하느님이시다

천국과 지옥에 관한 어떤 생각을 해보기 앞서 우선 필요한 것은 하느님의 본성을 이해하는 것이다. 그 이유가 그 외 모든 것은 이 근본적인 요점에 의존되고 있기 때문이다. 모든 천국들에서 주님 만이 하느님으로 예배되어진다. 천사들은 주님이신 한분 하느님만을 생각할 수 있다고 말한다. 천사들이 이에 덧붙여 말하기를, 만일 자기들이 따로따로 있는 세 인물이 세 하느님이다고 행여 믿어지기라도 한다면, 자기들은 혼동을 일으키고 마는데, 이 혼동 자체는 이것을 말하면서 저것을 뜻하는 것이 불가능한 천국에 들어감으로부터 예방해준다 한다. 천국에서 각자 속의 확신과 생각은 모두에게 알려지게 되어 있고 천사들의 얼굴에서 보여지기 까지 한다. 그래도 여러분에게 한 가지 알려져야 할 것은, 선한 이들, 그런데 하느님에 관하여 잘못된 사상을 믿게 되었던 이들은 결국에는 천국 안으로 영접되고 거기서 주님이 하느님이시다는 진리의 가르침을 받는다는 것이다.
주님이 하느님이심을 부정하는 이들은 만일 이를 신앙으로 스스로 확증해왔다면 천국 밖에서 자신을 발견한다. 이런 인간들은 끝내는 명백하게 생각하는 능력을 상실한다. 이 진리는 이렇게 간단하다. 즉 천국은 주님을 영접하는 이들, 주님이 보편적인 하느님이다고 알고 있는 이들만이 있는 곳이라는 말이다.
죽은 아주 어린 아이-그들은 셋째 천국을 구성하고 이들은 그들의 아버지로서 주님을 사랑하고 이 아버지가 모든 이의 주님이심을 아는 (셋째) 천국에서 양육되어진다.

주님의 신성한 생명이 천국을 만든다

천사들은 모두 함께 ‘천국’이라 불리워진다. 그 이유는 그들이 천국을 구성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님의 신성한 생명이 천사들 안으로 흘러들고 이를 천사들이 받아들여 그것이 천국을 만든다. 모든 사랑과 이해함은 주님으로부터 오는데, 천사들은 자신 안으로 이것을 받아 들인 만큼에서 천국 안에 있는다.
각각의 천사들은 주님 없이 자기들이 선을 행할 수 있다거나 선을 행하기를 원해서는 안됨을 은연중에 깨닫는다. 그들은 생각이나 느낌이 주님으로부터가 아님을 보게 되면 자신의 생각과 느낌을 무시해버린다. 모든 천사들 중 가장 높은 수준의 천사들은 이를 지각하고 대단한 사건으로까지 간주하여 느낀다. 이를 그들이 더 할 수록 자신들이 천국 안에 있음을 더욱 느낀다. 이런 까닭은 그들이 심오한 이해와 강렬한 기쁨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천사들은 생명 자체는 주님으로부터만 올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들은 말한다. 저절로 존재한 것은 아무것도 없고 오로지 그 존재에 앞서 있는 어떤 것으로부터 존재할 뿐이다고… 모든 것은 천사들이 생명의 존재 자체라 부르는 첫 근원으로부터 존재한다. 그리고 모든 것은 이 근원으로부터 존재를 계속한다. 그 이유는 존재가 계속 태어나기 때문이다. 만일 생명의 이 흐름이 한순간이라도 멈춘다면, 모든 것은 즉각 존재함을 중단하고 만다. 천사들은 말한다. 생명에는 하나의 원천만 있고 이로부터 모든 생명이 진행하고 있다. 이를 받아들이는 자들은 자신 안에서 천국을 발견한다. 그러나 이 사실을 억압하거나 부정하는 이들은 지옥으로 들어가 생명을 죽음으로 바꾼다.
창조된 세계는 유입하는 생명의 근원의 본성을 비춰주고 보여준다는 것을 근거로 삼아 천사들은 위의 진리를 지지한다. 천사들이 위의 모든 것을 믿기 때문에, 그들은 자기들이 행한 선 때문에 자기에게 돌아오는 어떤 감사도 무시하고 받지 않는다. 따라서 만일 자기들이 ‘선’이라 불려진다면 그들은 실망하고 떠나버린다.
자신의 선함에 신뢰를 두는 이들 그리고 자기가 행한 것 때문에 영예를 취하는 영은 천국의 어느 한 구석에도 있을 수 없다. 천사들은 위 영을 어리석은 도둑으로 밖에 여기지 않는다. 요한복음 15장에서, 주님께서는 천국에 있는 이들은 그들이 그분 안에, 그리고 그분이 그들 안에 있다고 말씀하신다. 그때서야 주님은 자신 속에 있는 것들 안에서 천사들과 더불어 거주하신다.

천국의 신성한 생명은 주님과 이웃을 향한 사랑이다

사랑과 진리는 빛과 열이 태양으로부터 올 때와 같은 방법으로 주님으로부터 천국 안으로 흘러든다. 태양에서 빛과 열은 확실히 구분되지만 그것들이 땅에 생명을 가져오기 위해서는 결합하고 있다. 이런 방법으로 주님의 사랑과 진리도 천국에 생명을 주고 있다. 그 이유가 불은 사랑의 형상이고, 빛은 사랑으로부터 오는 진리의 형상이기 때문이다.
사랑은 인간들을 하나되게 합친다. 이렇게 해서 사랑은 천국을 만든다. 사랑은 천사들을 주님과 그리고 서로서로에게 함께 하게 한다. 또한 사랑은 생명의 본질이어서 천사와 인간들을 사랑으로부터 자기들의 생명을 가지게 한다. 이것은 사랑하는 자와 사랑받는 자의 따뜻함과 생명력에서, 사랑이 없을 경우 그들의 차가움에서 보여질 수 있다. 모든 이 각자의 생명은 각자의 사랑의 품질과 똑같다.
천국에는 두 개의 확실히 구분되는 사랑이 있다; 주님을 사랑함과 이웃을 사랑함이다. 자기의 사랑을 주님에게 우선적으로 초점을 맞추는 이들은 천국의 중앙에 있다. 자기의 사랑이 이웃이라는 용어에 그 자체를 나타내 보이는 이들은 중앙으로부터 더 멀리 있다. 이 사랑들 모두 주님으로부터 나오고 각각의 사랑은 천국을 만든다. 천국에 잘 알려진 바, 주님을 사랑함은 단순히 그분을 하나의 인물로 숭배함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으로부터 나오는 선을 사랑함을 뜻한다. 그리고 그분의 선을 사랑함이란 그분의 선을 행하려 작정하여 사랑으로부터 그것을 실천함이다. 마찬가지로 이웃을 사랑함이란 어떤 인물을 뜻하는 게 아니라 그와 더불어 있는 말씀으로부터의 진리와 선을 자신의 삶의 수단으로 작정하여 그것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천사들은 누군가가 원하는 것을 행하기를 바라고 그들을 위해 그것을 실제로 행동하는 인물을 수단으로 이 두 사랑들이 그 자체를 어떻게 보여주는지를 계속 묘사하고 있다. 이 방법을 응용하는 가운데 그는 역으로 사랑받아지고 상대방과 결합되어진다. 그들 역시 말하는 바,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은 주님 자신의 모습에 있고, 이 선을 자기 생명의 참 원리로 만드는 이들은 주님의 모습이 되어가서, 그분과 결합되어진다고 한다. 이 사랑은 극도로 아름다운 천사의 외관으로 보여지기까지 하는데, 이 아름다움은 그들에게 끼친 주님의 영향으로부터 이다. 사랑은 그들의 얼굴에서, 그들의 대화에서, 그리고 그들 각각의 행동을 통하여 빛난다. 각자 지닌 사랑의 품질로부터 나오는 영적 활동 영역이 천사 주위에 있다. 그리고 이 영역은 먼 거리에서 조차 인식되어질 수 있다. 이 영역은 사랑으로 꽉차있으므로 그들은 타인의 아주 깊은 것들에까지 당도한다.
영계에서 각 영은 자기 고유의 사랑의 방향으로 자신을 돌아 세운다.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이들은 계속적으로 주님을 향하여 돌아서는 반면 자신을 사랑하는 이들은 계속 그분으로부터 떠난다. 이 회전은 몸의 각 움직임에 적용되고 있다. 그 이유는 천국에서의 공간이란 각자의 내부의 상태에 걸맞게 행동하는 것이고, 방향은 각자의 생각의 초점을 따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천사가 주님을 향하여 돌아서는 것은 만일 천사가 그분으로부터 오는 것들을 행하기를 사랑하면 주님께서 천사들을 돌아서게 해주시는 바, 돌아섬의 주체는 실상 천사가 아닌 주님이시다.
사랑 자체가 천국의 신성한 생명인 이유는 사랑은 사랑 안에 천국적인 모든 것을 포함하고 있어서이다. 즉 평화, 총명, 지혜와 행복 등이다. 사랑은 풍요로워지고 완전해지기를 추구한다. 그래서 사랑은 자기와 하모니를 이루는 모든 것을 받아들인다. 각 인간의 사랑은 기억 안으로 깊이 들어가 수색하여 자기와 일치하는 모든 것을 끌어내고 사용을 위해 모으고 분류하나 자기와 일치 않는 것은 거절한다. 따라서 이 세상에서의 삶 동안 선한 것을 행하기를 단순히 바래왔던 인간은 사후 아주 슬기로워질 수 있다. 그 이유는 그는 천국을 영접하는 수단을 획득했었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 이기적이고 세욕에 집중한 이는 사후 점차적으로 무지해가고 선한 것을 몹시 싫어하여 움츠리고 만다. 결국 그는 지옥을 향하여 자신을 떼어내 거기서 자기와 유사한 이들과 결합한다.

천국은 구분되는 두 왕국을 가지고 있다

천국은 무한하게 변화함과 다양함으로 구성되고 있다. 그 이유는 거기에는 동일한 두 천사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전체를 만들어 가는 각기 다른 부분들로 구별되어진다. 천국은 하느님의 왕국이다. 이 왕국은 구분되는 두 부분들로 나뉘어져 있다. 그런 다음 이 두 부분들은 각각 세 등차로 구별되어진다. 거기에는 각기 다른 무수한 천사들의 공동체와 그룹들이 있다.
어떤 천사의 경우 그는 다른 천사보다 더 깊은 수준과 상이한 방법에서 주님을 알아채린다. 이 사실은 ‘천적’ 왕국과 ‘영적’ 왕국으로 불리울 수 있는 두 천국의 왕국을 구분짓는 기초가 되고 있다. 천적 수준의 천사들은 영적 수준의 천사들이 사용하는 기억을 통하거나 추론하는 과정을 통하기 보다는 오히려 직접적으로 주님으로부터 그들의 생명 안으로 진리를 받는다. 천적 천사들은 진리를 심정에 적어 소유한다. 지각적인 이 천사들은 어떤 것이 진리인지 아닌지를 즉각 알고 그것을 사용해보기를 바라고 있다. 영적 천사들은 어떤 것이 진리인가를 알려면 자기들의 추론력을 사용하여 곰곰이 생각하는 것이 필요하다. 위와 같은 기본적인 구별 때문에 위 두 형태의 천사들은 서로 자유롭게 혼합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은 어떤 중개하는 천사 공동체를 수단으로 교통한다. 따라서 비록 천국이 두 개의 확실히 구분되는 왕국을 형성하고 있다 해도 (교통함을 통해) 하나의 전체를 만들고 있다.

천국은 명백한 세 등급을 가지고 있다

천국은 각기 다른 세 등급으로 구별되어질 수 있다; 즉 가장 높은 등급, 또는 가장 안쪽; 중간, 또는 둘째 등급; 그리고 가장 낮고, 바깥쪽, 또는 제 3 등급. 아마 3층 집의 3층-2층-1층을 연상해보면 쉽게 이해될 것이다.
인간의 마음도 위와 유사한 구조로 배열되어 있다. 그 이유는 인간의 마음 역시 주님에 의해 창조되었기에 위와 동일한 질서와 디자인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각 인간은 아주 작은 규모의 천국의 모양 안에 있다. 이는 각 인간이 보다 깊은 수준에서 천국들과 어떻게 소통되어질 수 있는지를 알게 한다. 사후, 각 인간은 자기가 지상 삶에서 주님을 어떤 방법으로 영접했었는지에 따라 세 등급 중 하나에 속하는 천사들 사이에 있게 된다.
천국의 위 세 등급은 천사들이 주님을 영접하는 방법들로부터 천적, 영적, 자연적 등급이라 불리워진다. 천국의 자연적, 또는 가장 낮은 등급은 그 안에 천사들의 천적 유형과 영적 유형, 어느 유형이든 또한 가지고 있다. 따라서 어쩌면 천적-자연적 등급과 영적-자연적 등급이라고 말하는 편이 더 정밀할 것이다.
각 천국의 등급 안에는 다른 천사들 보다 더 깊게 알아챔을 지닌 천사들이 있다. 지각(perception)이라는 이 등급은 천사들을 중앙 쪽으로 더 가까이 있게 하거나 천국의 특수한 등급에 해당하는 주변 쪽에 각 인간을 있게 한다. 천사의 마음이 주님을 향하여 열리는 정도 만큼에서 중앙 쪽으로 각 천사의 위치는 정해진다.
진리를 수단으로 해서 움직이되 진리를 즉각 사용하고 싶어하는 천사들은 천국의 가장 높은 등급, 또는 가장 안쪽 등급에 있게 된다. 그 반면 진리를 자기의 기억 안으로, 그 다음 이해력 안으로 가져가고, 거기로부터 진리를 사용하려 하는 이들은 두 번째 또는 중간 등급에 있다. 그리고 적당한 삶, 직바른 삶, 그리고 신성한 존재가 있다고 믿는 이들, 그러나 이를 굳이 더 배워 알려 하지 않는 이들은 제 3의 등급, 또는 바깥쪽 등급에 위치한다.
천국의 지각은 각 인간이 가장 높은 것, 또는 중앙을 향하여 이동할 때 증가한다. 그 이유는 이럴 때 신성에 더 가까워지기 때문이다. 천사의 완전함은 총명, 지혜와 사랑, 그리고 이것들로부터 오는 행복에 있다. 가장 깊은 천국의 천사들은 다른 두 등급의 천사들 보다 더 주님께 자신들의 가락을 맞춘다. 고로 그들의 완전함은 더 크다.
위 등급은 확실히 차별되므로 이 천국의 천사가 저 천국의 천사와 쉽게 연계하지 못한다. 만일 어떤 천사가 낮은 천국으로부터 보다 높은 천국으로 승강한다면 그는 고통을 느끼기 시작한다. 그는 거기 있는 이들을 볼 수 없고 그들과 대화도 할 수 없다.
만일 어떤 천사가 높은 천국으로부터 그 보다 낮은 천국으로 하강한다면 그는 자기 지혜를 상실하고, 말더듬고, 결국은 거기를 떠나야 하는 지경에 이른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간혹 예외로 허용해주는 때가 있다. 예를 들면, 그의 복지를 위해 더 높은 천국의 영광을 보는 것이 허용될 경우이다. 그렇다 해도 이런 천사들은 완전한 소통을 가능하게 하는 중매하는 천사들에 둘러싸여 조심스럽게 준비되는 절차를 거쳐야만 한다.
같은 천국 안에 있는 천사들은 각자의 애착이 비슷하다면 거기 있는 모두와 섞일 수 있고 다함께 즐길 수 있다.
위와 같은 구분함이 존재할지라도, 여전히 전체로서의 천국들은 주님 때문에, 그리고 이 천국이 저 천국에 영향을 주기 때문에 하나를 만든다. 이런 방법들에서 세 천국들은 철두철미하게 연결 되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게 하여 하나를 만든다.
천국의 모양에 대한 명백한 생각을 가져 보겠다면 천국의 세 등급들이 영적인 것들 안에서 어떻게 작동하는 가를 우선 이해하는 것이 필수이다. 인간들은 등급이라는 용어를 두고 생각할 때 이는 점진적 변화로 생각하려는 경향이 있다. 마치 어둠으로부터 빛으로, 또는 뜨거움으로부터 차거움으로 이어지는 점진적 변화같이 말이다. 그러나 영적 등급은 이와 다른 방법, 즉 불연속적 방법에서 작동한다. 이 수준 또는 등급으로부터 또 다른 등급은 분명 다르나 그럼에도 그것들은 연결되어 있다. 마치 원인과 결과의 관계와 같다. 그리고 이로부터 제 3의 등급이 있다. 빠져나오는 둘은 첫 번째 안에 포함되어 있는데, 마치 인간의 마음과 몸이 그의 영의 생산물이긴 하나 그 자체 영의 부분은 아닌 것과 같다. 만일 이 원리를 납득하지 않으면 많은 사항들, 즉 천국의 모양, 인간의 마음, 영계와 자연계 사이의 관계에 대한 이해가 있을 수 없고, 상응의 본성과 근원도 이해될 수 없다. 각각의 천사와 인간은 주님의 생명이 직접 흐르는 모든 것 중에서 가장 높은 등급, 또는 내부의 가장 안쪽 등급을 가지고 있다. 이를 수단으로 주님은 모든 것을 그 뒤를 이어 적절한 질서 안으로 배열하신다. 이것은 영혼 자체이고, 주님께서 각 인간과 더불어 있는 주님 자신의 ‘주거지’이다. 위 가장 안쪽 수준이야말로 이 수준을 가지지 않는 동물과는 아주 달리 각 인간을 진정 인간으로 만든다. 이 수준 때문에 각 인간은 주님에 의해 천국의 빛 안으로 들어 올려질 수 있고, 주님을 믿을 수 있고, 주님에 의해 움직여질 수 있고, 그분을 볼 수 있다. 이 수준을 수단으로 각 인간은 총명과 추론함을 가질 수 있고, 마지막에는 영원히 살 수 있게 된다. 그럼에도 언제나 그것의 존재를 알아챔이 있지 않는데 그 이유는 그것은 주님 만에 속한 것이기 때문이다.

천국은 셀 수 없이 많은 공동체로 구성되어 있다

세 등급의 천국 각각 안에서 천사들은 아주 다양한 크기의 공동체들로 그룹짓고 각 그룹은 거기 있는 이들의 특별한 품질을 반사하고 있다. 비슷한 품질들을 가지는 이들은 함께 하나의 공동체를 형성한다. 그리고 거기에 있는 좋은 품질들의 무한한 다양성들 때문에 거기에는 셀 수 없이 많은 공동체들이 있다.
천국의 공동체들은 선에 대한 특별한 품질에 따라 서로서로가 관계하여 위치하고 있다. 영계에서의 거리는 내부 상태에 있는 다양함의 결과라는 사실에서 비롯된다. 크게 차이 나는 인간들은 더 멀리 떨어진다; 덜 차이 나는 이들은 더 가깝게 위치한다, 즉 유사함이 접근함을 가져다 준다.
다시 동일한 공동체 내에 있는 이들도 위와 유사하게 배열되어진다. 보다 더 완전해지면 중앙에 더 가까워지고 있음이 발견된다; 덜 완전하면 그 덜한 정도에 따라 주변 쪽으로 향한다. 각 경우에서, 공동체 내에서의 배열은 빛이 더 멀어지면 더 희미해지는 것과 비교될 수 있다. 중앙에 있는 이들은 가장 큰 빛에 있다. 천국의 보편적인 법칙의 하나는 같은 것은 같은 것에 끌린다는 것이다. 자신과 비슷한 타인과 더불어 있는 인간들은 마치 자기 집에서 가족들과 있는 듯 느낀다. 그래서 그들은 자유함과 평화, 극도의 행복함을 느낀다.
그 다음 알게 되는 바, 천국들을 전체로서 결속하는 것은 선의 품질이다는 것, 또한 인간들은 선에 대한 자기들의 특별한 품질에 의해 구별된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배열을 하는 것은 천사가 아닌 선의 근원이신 주님이시다. 그분은 인도해주고 결합되게 하고 구별해주시고 자유를 가져다 주며 각자의 특별한 사랑과 신앙, 그리고 기쁨으로부터의 생활을 영위하도록 모든 이 각각을 관리해주신다.
지상의 인간들이 가족, 친구, 친척을 알아보듯 천국에서도 자기와 비슷한 선을 지닌 인간을 서로 인식한다. 설령 단 한번도 서로 본 적이 없다 해도 알아보는 것에 실패하지 않는다. 천국에서의 유일한 관계는 사랑과 신앙으로 이루어지는 영적 관계 뿐이다. 나는 나자신을 위하여 위 상황을 겪은 적이 있다. 내가 본 어떤 천사들은 나의 어린 시절로부터의 나에 대한 전부를 아는 것처럼 여겨졌다. 나를 알아보았던 이들은 나의 영적 상태와 비슷한 상태였다.
같은 공동체에서 사는 천사들은 대체로 비슷한 것을 찾고 있는데, 그렇다고 세부사항에서까지 똑같은 것을 찾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서로가 닮고 있다. 그 이유는 그들의 사랑의 품질이 그들의 얼굴에 빛을 내고 모양새에서까지 비슷해져 있기 때문이다. 내가 어떤 천사의 얼굴을 보았는데, 그는 단 하나의 천국의 공동체 안에서조차도 그 안에 애착의 다양한 형태가 표현되기 위해 얼굴의 표현이 어떻게 바뀌는지를 나에게 증명이라도 해주는 것 같았다. 이것은 얼마 동안 지속되었는 바, 그때 내가 주목한 것은 표현이 계속 바뀐다 해도 똑같은 일반적인 얼굴을 배경으로 거기에 언제나 있었다는 점이다. 천사들은 또 다른 천사가 무엇 같은지를 그의 얼굴을 쳐다봄으로 즉각 알 수 있다. 천국에서는 자기가 느끼는 것, 생각하는 것을 감추는 것, 또는 있는 그대로가 아닌 다른 것인 체 하는 것들이 불가능하다.
천국에 있는 모든 공동체들은 비록 자신의 공동체로부터 다른 공동체로 가지 못하기 때문에 직접적인 어떤 교환을 수단으로 해서는 아니지만 서로가 접촉하고 있다. 직접적인 교환에 의한 접촉은 아마 자신을 떠나 올바른 느낌이 안 드는 그 외의 어떤 장소에 가는 것과 비슷할 것이다. 그 대신 그들은 자기들로부터 나오는 영역(sphere)들을 수단으로 접촉한다. 이 영역은 더 멀리 더 넓게 뻗칠 수 있고 더 깊게 타인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이런 방법에서, 가장 높은 천국의 천사들은 천국 전체를 통하여 강한 영향력을 가지는 바, 마치 그들의 영역은 모든 곳에 침투하는 듯하다. 그리고 이 영역의 결과로 천국의 각 천사는 그 외의 모든 이와 소통한다.
천국에서 천사들의 크고 작은 공동체들은 수만, 수천 수백의 천사들로 형성되어 있다. 그리고 마치 집 옆에 집, 가족 옆에 가족이 사는 듯한데, 여타 공동체와 따로 떨어져 사는 천사들도 있다. 이 인간들은 더 직접적으로 주님의 관찰하심과 안내 아래 있고 최상의 천사들이다.

각 공동체는 소형의 천국이고 각 천사는 최소 규모의 천국이다.

선의 품질이 천국을 만드는 바, 이 품질은 모든 천국 공동체로서의 안에, 또한 각각의 천사 안에 있다. 이 선은 아무리 다양해진다 해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래도 이 선은 천국의 선이다. 그 차이는 이 장소에 이런 종류, 저 장소에 저런 종류의 선의 품질이 있다는 것 뿐이다.
각 천국의 공동체는 소형의 천국이다. 그 이유는 전체로서의 천국과 똑같은 틀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중심에 더 가까이 있는 공동체는 그만큼 더 영적이고, 덜 영적인 공동체는 주변 쪽에서 그룹지어 위치하고 있다. 이는 어떻게 주님께서 마치 그들이 하나의 천사인 것처럼 천국에 있는 모든 이를 인도하시나를 보여준다. 그분은 각 공동체에 있는 이들과도 똑같게 행하신다. 천사의 공동체는 때로는 하나의 천사인 듯 그 존재의 외관을 취하기도 한다.
천국 전체를 망라해 있는 이 큰 동일하지 않음 때문에 천사들이 주님께 응답하는 방법들에서도 폭넓은 다양함이 있다. 예를 들면 그들은 각기 다른 방법으로 그분을 예배한다는 점이다. 천국의 완전함 자체는 다양함이 증가하는데 놓여있기에 이런 다양해짐 역시 신성한 질서 안에 있다. 원리는 이것 아닐까 싶다; 즉 어떤 것이 완전해지려면 가지각색의 다양한 부분들로부터 형성되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것이 그러하다는 것을 아름다움, 즐거움, 기뻐함이 우리의 감각을 움직이는 방법들과 일치하는 모든 것의 하모니로부터 완전함의 느낌을 가져다준다는 것을 가지고도 이해해 볼 수 있다. 이것은 우리가 천국의 어떤 것을 볼 수 있는 우리를 위한 일종의 거울이다. 참으로 여기 이 세상에서 발생하는 것들은 영계에 있는 것들의 거울이다.
위 사항은 교회를 놓고서도 똑같다; 그 이유가 만일 선의 품질이 교회 안에 있다면 그것이 교회이기 때문이다. 이는 교회 안의 각 인간을 두고도 동일하다. 그 이유는 각 개인은 소형의 ‘교회’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자기 속에 천국을 지니고 있는 각 인간과 천사 사이에 차이가 나는 것은 실지로 없다는 말이다. 그들 모두 최소 규모에서 천국의 모양들이다. 주님은 인간들이 천국 안으로 와서 천사가 되도록 인간들을 창조하셨다. 주님으로부터 선을 소유하는 인간은 ‘천사 같은 인간’이다. 그러나 이런 차이는 있다; 인간의 내부 모양이 천사의 것과 같이 천국의 모형에 있는 동안 그의 바깥쪽 모양은 세상의 모형에 따라 형체를 이룬다는 점이다. 그는 이 수준을 천사가 가진 것 그 이상의 수준을 가진다. 그리고 그가 선 안에 있는 한, 세상적 수준은 천국에 종속되고 천국을 섬긴다. 그러면 주님은 마치 그가 천국 안에 있는 것처럼 그와 더불어 양쪽 수준 모두에서 현존해주신다.
끝으로 주목해둘만한 것이 있다. 자신 안에 천국을 소유하는 인간은 자기와 관련되어 가장 중요한 것들과 일반적인 것들 뿐아니라 자기 삶의 아주 작은 세부사항에서도 천국을 소유한다는 것이다. 이것들은 가장 큰 것들의 모형을 형상(작은 모형) 안에서도 마찬가지로 반복한다. 이런 이유는 천국에서 모든 각 인간은 자신의 사랑의 모양 안에 있으면서 그의 사랑은 그가 지닌 모든 것 안으로 흐르고, 그것을 자기의 모형으로 배열하기 때문이다. 천국을 만드는 것이 주님을 사랑함이듯, 주님은 각각 그리고 모든 것들 안으로 흘러드시고, 그들을 그분 고유의 모습으로 옷입히시고, 그가 어디에 있든 거기에 천국을 가져다 주신다.

전체로서의 천국은 사람의 모양과 비슷하다

천사들은 천국을 ‘큰 사람(Great Human)’이라 부른다. 이것은 각자의 공동체를 포함하는 전체로서의 천국이 단 한명의 인간의 모양과 비슷하다는 것을 아는 천사들에 의해서 보편적으로 이해되고 있다. 중요한 많은 생각들이 이 개념 뒤를 잇는 바, 그들은 이 개념을 이해함 없이는 (여타 다른 사항을) 명백하게 알 수 없다.
어떤 인간이 순전히 물질적인 것으로만 말하고 있다 해도 그 인간이 누구인지는 그가 참된 생각들을 이해하는 능력과 선행을 원하는지의 여부로부터 가늠된다. 물질적인 신체는 위 내부 능력을 단순히 섬길 뿐인 바, 내적 능력들에 종속되어 있다. 육체는 그 자체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천사들이 어떤 인간을 생각하는 방법은 이렇다. 그들은 인간이 자기 몸으로 무엇을 하고 있는지에는 관심이 없다. 그 대신 그들은 그 인간의 행동 뒤에 숨겨져 있는 바램들과 의도들에 관심을 집중한다. 그들은 이 수준을 그 인간 자신이라고 부른다. 천국을 전체적으로 본 천사는 한 명도 없다. 그 이유는 이것이 그들의 납득력 넘어에 있기 때문이다. 때때로, 어쨌든, 천사들은 수많은 천사들로 구성된 완전한 공동체를 볼 수 있고, 이 완전한 공동체가 모양 측면에서는 한 명의 사람임을 보게 된다. 이로부터 천사들은 천국들의 전체는 인간의 모양과 비슷하다는 것을 추론해낸다. 그러나 이 모양은 천국의 외형(shape)이 아닌 천국의 조직체로서 이다.
천국이 사람의 모양에서 존재한 이래, 천국은 마치 한 명의 인간인 듯, 마치 인간이 뭔가를 할 때 신체의 기관과 세포가 하나로 함께 일하는 것과 같은 방법에서 전체로서 하느님에 의하여 통치되어진다. 몸의 각 부분은 그것의 복지에 기여하고 각 부분은 각기 특별한 용도를 가진다. 전체로서의 몸은 각 부분의 몸이 요구하는 것을 제공하고, 각 부분은 전체로서의 몸을 위해 각기 특별한 방법들에서 제공한다. 이 상호 봉사함 안에 통일성이 담겨져 있다. 천국에서는 제공된 용도에 따라 동일한 모형의 조직체가 있다. 유용함(usefulness)은 모든 이의 선을 위하여 타인의 복지를 추구하는 것이다; 그리고 천국에 있는 모든 이 각자는 근원으로서 주님을 먼저 바라보고, 그다음 전체 복지가 추구되어야 할 공동체로서 그분의 왕국을 주시한다.
천국이 신체의 구성됨과 비슷한 바, 천국은 다양한 기관들과 부분들로 배열되어 있고 명칭도 비슷하다. 천사들은 어느 공동체가 천국의 ‘머리’ 부분, ‘가슴’ 부분, ‘허리’ 부분 등등을 형성하는지 알고 있다. 총괄적으로 요약해 말하면, 가장 높은 천국들은 머리부터 목 까지를 형성하고, 중간, 또는 둘째 천국들은 가슴에서 허리와 무릎 까지를 형성하고, 가장 낮은 천국 또는 세 번째 천국들은 발에서 발바닥, 그리고 팔에서 손 끝 까지를 형성하는데, 그 이유는 인간에게서 발이나 손은 가장 바깥쪽에 속한 부분들이기 때문이다.
‘큰 사람’에 관계되는 위 원리들은 만일 누군가가 천국에 관해, 그리고 천국이 어떻게 인간들과 연결되는지에 관해 올바른 생각을 확실히 가져보겠다면 꼭 필요한 본질적 요소이다.

천국의 각 공동체는 인간의 모양과 비슷하다

천국의 각 공동체는 주님이 그 공동체 안에 현존할 때 단 하나의 인간의 모양으로 나타난다. 이것은 불일치하는 것이 제거되는 만큼 더 선명하게 보여진다. 그렇다해도 서로 완전히 똑같은 공동체는 단 하나도 없다. 그것들은 한 가족 내의 인간들이 다르듯 각각은 다르고, 전체로서 모양을 결정하는 선의 다양함들에 따라 그 다름이 결정된다. 각 공동체 안의 인간들은, 공동체를 단 한명의 인간 같이 나타나지게 만들면서, 그 공동체의 특별한 선에 포함되어 있다. 가장 높은 천국들의 중앙에 있는 공동체들은 모든 공동체 중에서 가장 완전하고 아름다운 모양을 가진다. 한 공동체 안에 인간들이 더 많으면 더 완전한 모양의 공동체가 되어간다. 그 이유는 다양함이 불어나기 때문이다. 이런 결과로, 전체로서의 천국은 천국의 숫자들이 매일 증가하는 만큼에서 더 완전을 달성해간다. 따라서 천사들에게는 새로운 천사가 자기들 사이에 도착하는 것 이상 더 반가운 사건이 없다.

각 천사는 완전한 인간의 모양이다

단 한명의 천사라 해도 그 천사 안에 천국의 전체와 부분들의 형상이 있기 때문에 최소 규모에서의 천국이다. 천국은 천사들이 공유(communion) 하고 있다, 그 이유는 천국 속의 모든 것을 각 천사가 함께 나누기 때문, 그리고 각 천사는 자기가 가지는 모든 것을 전체적인 공유 관계로부터 받기 때문이다. 이러한 바 각 천사는 받는 자, 고로 최소 규모의 천국이다. 많은 인간들이 가지는 잘못된 생각은 영들은 육체가 없는 생각들과 느낌들에 불과하다는 것이나, 나는 영계에서의 내 경험으로부터 그러하다고 암시받을 만한 어떤 것을 본 적이 결코 없다. 나는 개개인의 영과 집단으로 있는 영들을 만났었고 그들과 이야기 했지만 집단으로 있든, 개인으로 있든, 다르다는 것을 보질 못했다. 단순하고 맑은 신앙을 가진 인간들은 천사를 언제나 인간으로 생각하는데, 그 이유는 그들은 천사에게 모양이 없거나 실체가 없는 어떤 것으로 생각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천사들은 모든 측면에서 인간이다, 그래서 그들은 얼굴, 귀, 몸, 손과 발, 등등 인간들이 지닌 것과 같다. 그들은 서로 보고 듣는다. 그리고 그들은 스스로 말한다. 그들은 인간들이 가진 어떤 것도 빠진 것이 없다. 단 하나 차이점이 있다; 물질적 몸 대신, 천사들은 영적 실체로 이루어진 영체를 가진다는 점이다.
우리는 인간들이 신체의 감각들이 아닌 영의 눈을 통하여서만이 천사들을 볼 수 있다는 점의 진가를 인정할 필요가 있다. 이 수준은 영계 안에 있다. 그 반면 물질적 모든 것은 자연계에 있다. 같은 것이 같은 것을 보는데, 그 이유는 비슷한 실체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만일 육체의 눈으로 하여금 자연의 많은 것들을 볼 수 없게 할 경우, 그 눈은 영계의 것도 얼마나 더 보지 못할까? 라고 추측해 질문할는지 모르나 영계의 것들은 육체의 시야는 철수하고 영적 시야를 열리게 할 때에만 인간에게 보일 수 있게 된다.

전체로서, 부분으로서의 천국이 인간의 모양과 비슷한 이유는 그것이 주님의 신성한 인간으로부터 이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말해왔던 모든 것은, 주님의 신성이 천국을 만들고 그 신성의 모양은 인간이다 라는 가장 중요한 진리로부터 생겨난 줄기들이다. 신성에 관하여 천사들은 이와 다르게는 어떤 식으로든 생각할 수 없다. 그들이 이같이 생각하는 이유는 그들 안으로 흐르는 신성 자체에 의해 자기들이 인도받기 때문, 그리고 이에 따라 그들의 생각들은 그들 주변 모든 곳에 도달할 수 있기 때문에서 이다. 천사들이 더 지혜롭다면, 그들은 이것이 진리임을 더 명확하게 이해한다; 이 지각함의 결과에 맞추어 주님은 그에게 나타나신다. 실지로 주님은 볼 수 없는 신성을 믿는 것이 아닌 보일 수 있는 신성을 인정하고 믿는 인간들에게 인간의 모양으로 ‘천사’로서 나타나신다. 전자는 볼 수 없고 후자는 볼 수 있다.
천사들은 주님 만이 ‘인물(Person)’이시고 자기들 자신은 그분 때문에 인간일 뿐이다고 계속 말한다. 그들이 덧붙이는 말은, 그들의 각각은 각자가 주님을 받는 등차에서만 인간이다는 것이다. 이것은 무엇보다 우선 주님을 자신 안에 영접하는 가장 높은 천국에서 천사의 외모로부터도 보여진다. 그들의 이해함과 지혜는 인간 자체의 모양을 하고 있기 때문에 그들은 모든 천사들 중에서도 가장 아름답다.
천국으로부터 어떤 영향을 받는 인간은 하느님이 인간의 모양으로 계신다고 생각하는데, 그 이유가 이 생각은 하느님이 천국에서 지각되는 방법에 해당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신들로부터 생각할 뿐인 인간들은 이 생각을 파괴하는 바, 그들은 볼 수 없는 하느님만을 생각할 수 있을 뿐이다. 삶의 악한 길을 고집해왔던 인간들은 하느님은 확실히 없다라고 생각한다. 신성에 관한 어떤 개념이 없으면 누구도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
신성에 관한 어떤 생각 없이, 어떤 영도 천국의 문지방에 접근 조차 할 수 없다. 설사 그가 그 곳 가까이 왔다 해도 그는 안쪽으로부터의 저항을 느낄 것인데, 그 이유는 그의 내적 마음이 닫혀져 있고 천국의 모양으로 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세욕에 찌든 마음을 지닌 인간은 하느님이 ‘사람’이시다는 것을 이해하는데 대단히 어렵다. 그의 견지는 온통 그의 감각들이 자기에게 말하는 것에만, 그리고 자기 주변의 공간에 나타나는 것에만 기초를 두고 있다. 세상에 있는 공간의 확장 따위는 천국에 없다. 그 대신 경계선 없는 공간이 있는데, 그 이유는 천국의 공간은 경계가 없는 것인 내적 시야 또는 생각으로부터 비롯하기 때문이다. 천국에서 모든 것은 각 개인에 소통되는데, 그 이유는 생각이 일하기 때문이다.

천국과 인간의 모든 것 사이에 상응 관계가 있다

천국과 인간의 것 사이에 존재하는 관계의 본성은 오늘까지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럴만한 몇 이유들이 있다. 중요한 이유는 인간들이 자신과 세상을 사랑함에 의해 자신들을 천국으로부터 철수 시키기 때문이다. 이 사랑은 인간들로 신체 감각에 호소하는 세상적인 것들에 집중하게 하려는 경향이 짙은 바, 세상의 것들에 기뻐하고 그 다음 그는 영적 것들에는 눈감아버리고, 곰곰이 생각해보기에는 그것들은 너무 추상적일 뿐이라 단정하여 내버린다.
최 고대 시대의 인간들은 위와 같은 것들에 관해 다르게 느꼈다. 그들은 천국과 인간인 것 사이의 관계, 또는 상응을 이해함은 모든 지식 중 가장 고귀한 것이다고 믿었다. 이 믿음은 그들을 슬기 있게 만들었고, 그들에게 상응에 관한 이해를 주었고, 그래서 그들은 상응을 수단으로 천국과 소통하고 있었다. 그 이유는 이 지식은 천사들의 지식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것들에 무지한 오늘날, 이 무지가 인간들이 영계에 관하여, 또는 영계가 자연계와 인간의 생활에 미치는 것들을 알게 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들고 있다. 또한 이 지식이 없으면 인간의 영 또는 혼이 육체에 행하는 것, 사후 인간의 삶에 관한 어떤 것도 이해되어질 수 없다. 이러할진대, 관계의 본성은 차후 더 많은 문제들을 말끔히 설명하기 위해 꼭 필요하다.
첫째로, 상응 자체의 본성이다. 자연계의 모든 것은 영계로부터 존재한다. 마치 결과가 그것을 산출한 원인으로부터 도래한 것과 같다. 이렇기 때문에 자연계에 있는 모든 것은 영계의 어떤 것과 상응하거나 또는 그것의 형상이다. 인간은 최소 규모에서 천국이자, 최소 규모에서의 세상 양쪽에 해당되는 바, 그는 자기 안에 영계와 자연계를 가지고 있다. 그의 자연계-그의 몸, 몸의 감각들과 행동들의 수준에서 발생하는 모든 것은 그의 영계- 그의 마음, 마음의 이해함과 마음이 의도하는 것으로부터 존재 안으로 와진다. 이 두 세계는 상응 관계에 있다.
인간의 얼굴은 위의 사항을 훌륭하게 예증해준다. 짐짓 흉내내거나 꾸며지지 않은 솔직한 얼굴에서 인간의 참된 생각들과 느낌들은 투명하게 보일 수 있다. 이는 얼굴이 왜 마음의 색인 목록이라 부르는지에 대한 이유이다; 인간의 영계는 그의 자연계 안에 포함되고 있다. 이제는 인간의 모든 것과 더불어 전체로서의 천국의 상응으로 이동해 보자. 천국은 인간의 모양을 반사하고 있다. 그 이유는 천국이 ‘큰 사람’ 또는 사람의 모양에서 조직되고 배열되기 때문이다. 천국을 만드는 공동체들은 몸의 부분들 처럼, 어떤 공동체는 머리에, 가슴에, 팔에 이것 중의 더 특별한 부분에, 등등으로 배열되고 있다. ‘큰 사람’의 특별한 부분에 있는 공동체들은 인간 자신 안의 어떤 부분에 상응한다. 예를 들면, 머리 부분에 있는 이들은 인간의 머리에 상응한다. 인간만이 천국의 내적 유입으로부터 존재하는 바, 각 인간은 이 상응으로부터 이 땅에서 자기 존재를 가지기에 이런 연결 관계에 관한 지식은 매우 중요하다.
천국에 두 왕국이 있다는 것은 이미 상술했다. 천적 왕국은 심장, 그리고 몸 전체를 망라해 심장과 관련되는 모든 것과 상응한다. 마찬가지 방법에서 영적 왕국은 폐와 상응한다. 심장과 폐는 인간 안에서 두 왕국을 만든다. 심장은 동맥과 정맥을 통하여 활동하고, 폐는 신경과 근육에 영향을 미친다. 이 둘은 모두 육체의 노력 또는 운동에 포함되고 있다. 이와 같은 방법에서 각 인간의 영적 구성에도 두 왕국들이 있고, 이는 그의 의도함과 이해함이다. 그의 의도함은 선인 것을 위해 사랑함을 통하여 행동하는 반면 그의 이해함은 진리인 것을 사랑함을 통하여 행동한다. 이들은 몸에 있는 심장과 폐에 상응한다.
전체로서의 천국 역시 위와 정확히 같다. 천적 왕국, 사랑이 통치하는 곳, 천국의 의지력 측면이다. 영적 왕국, 진리가 통치하는 곳, 천국의 이해력 측면이다. 이들은 몸에 있는 심장과 폐와 상응한다. 이 상응은 왜 ‘심장’이, 성서에서 언급될 때, 사랑의 것들을 뜻하는지, 그리고 왜 ‘숨’이 이해함의 것들을 뜻하는지를 보여준다. 또한 왜 애착이 심장으로부터 또는 심장 안에 있는 것이 아님에도 심장 속에 있다 라고 말해지는 이유이다.
이것은 또한 성서에서 몸의 부위들이 영적인 것을 뜻하도록 언급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성서에 있는 모든 것은 이런 상응성을 지니고 있다. ‘머리’는 이해함과 지혜를 뜻하기 위해 사용되어진다; ‘가슴’은 사랑과 애착을, ‘허리’들은 결혼적 사랑을, ‘팔’들과 ‘손’들은 참인 것의 힘을, ‘발’은 자연적인 것을, ‘눈’들은 이해성을, ‘콧구멍’들은 지각을, ‘귀’들은 순종함을, ‘콩팥’들은 진리인 것을 검사함을, 등등을 뜻한다.
일상 생활 속의 언어에서 인간들은 총명을 뜻하는 말로 ‘좋은 머리’라 말한다. 몇 개 더 열거하면, ‘가슴의 친구’, ‘예리한 코를 가지고 있음’, 날카로운 시력’ 등등 대단히 많은데, 이 모든 표현들은 이 상응으로부터 유래되고 있다. 사실상, 그것들은 영계로부터 근원하고 있다. 단지 인간들이 실감나게 깨닫지 못할 뿐이다.
인간의 육체적 몸과 더불어 행해지는 모든 것이 천국의 어떤 것과 상응한다 할지라도, 인간이 자기의 바깥쪽 모양에 관심을 갖는 한 그는 천국을 표현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의 안쪽 모양에 관심을 두는 만큼에서 그 표현은 가능해질 뿐이다. 천국을 받는 것은 안쪽의 몸이고, 바깥쪽의 몸은 세상으로부터만 받는다.
이와 같이 인간의 육체적 몸은 천국의 모양이 마지막 안주하는 곳, 이 몸은 천국이 세워지는 기초이다. 다시 한번 진가를 인정해야만 하는 대목은 천국과 더불은 몸의 모든 상응은 주님의 ‘신성한 인간’ 때문이다는 점이다. 천국은 그분으로부터 있고 그분이 천국이시다. 이 대목은 왜 주님이 인간으로서 세상에 오셨는지를 설명해준다. 강림이 발생한 이유인즉, 주님이 오시기 이전 천국을 그곳의 질서대로 관리하셨던 ‘신성한 인간’이 더 이상은 천국을 보존하실 수 없었는데, 그 이유는 천국의 기초를 이루는 인간들이 (천국의) 모형을 약화시키고 파괴했기 때문이다.

천국은 자연의 모든 것과도 상응한다

자연계에 있는 모든 것은 영계의 어떤 것과 상응한다. 그 이유가 자연적인 것들은 그것들의 존재를 영적 원인들로부터 가지기 때문, 그리고 이 두 세계는 신성으로부터 유래한다. 땅 위 모든 것은 세 왕국들로 나뉘어 있다. 즉 동물, 식물, 광물 왕국이다. 각 왕국은 일반적으로 영계의 다른 수준에 상응한다. 그리고 각 왕국은 특수한 상응을 가지는 다양한 것들을 내포하고 있다. 한마디로, 자연의 모든 것, 큰 것부터 미미한 것까지, 상응 범주에 있다. 이에 대한 예증으로, 동물 왕국에 있는 사실을 들추어 보자. 이 왕국에는 본능적인 지식을 가진 많은 창조물들이 있다. 예를 들면, 벌은 어떻게 꿀을 수집하는지, 어떻게 꿀을 벌집에 저장하는지, 다가오는 겨울에 맞서 자신과 어린 것들을 위해 양식을 어떻게 예비해야 하는지를 알고 있다. 그것들은 자기들이 본능적으로 가지는 질서적인 모형 안에서 살고 있다.
식물 왕국에서도 씨를 가지고 예증을 해보자. 나무가 잎을 내고, 꽃을 피우고, 안에 새로운 씨가 든 열매를 산출한다. 이런 발달 과정은 질서적인 연속성에서 일어난다. 이는 어떤 묘사도 불가능한 불가사이한 질서에서 다함께 발생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동물은 다양한 애착에 상응한다. 즉 보다 온순하고 더 유용한 동물은 선한 애착에, 맹렬한 동물은 악한 애착에 상응한다. 특수적으로, 암소나 송아지는 유용함과 더불어 행동하려는 인간의 마음에 있는 자연적 애착에 상응한다. 한편 어린 양은 영적 애착에 상응한다. 여러 종류의 새들은 마음에 있는 생각의 수준들, 즉 자연적 생각들과 영적 생각들에 상응한다. 식물 왕국과 광물 왕국도 앞의 동물 왕국과 똑같다. 천국과 땅 사이의 연결은 상응을 수단으로 하여 있다. 이 상응은 다음의 방법으로 일한다. 주님의 왕국은 쓸모 있음을 목적(useful purpose)으로 삼는다, 그래서 전체 우주는 이와 같은 방법에서 창조되었는바, 유용함이 있는 곳은 어디이든 그것을 창조함에서 주님의 목적이 충만해짐이 가능하도록 하는 모양으로 옷입혀질 수 있다. 이 원리는 천국에서 먼저 작동되고 그다음 창조된 세계에서 작동하는데, 자연 자체의 물질적 실체에 까지 내려간다.
영적인 것과 자연적인 것 사이, 또는 천국과 땅 사이의 상응은 유용함을 통하여 존재한다. 이 유용함 자체가 연결을 만든다. 이 유용함을 옷입히는 다양한 모양들이 상응들이다. 그리고 이 상응이 특수한 유용함의 모양에까지 폭을 늘려 연결을 만든다.

제 3 부

천국의 삶

천국의 태양

이 세상의 태양은 천국에서는 보여지지 않는다. 그 이유는 그 태양은 온전히 자연적이기 때문이다. 그렇다 해도 천국에도 태양이 있다. 이 태양 역시 자연계의 태양 같이 빛과 따뜻함이 있다. 천국의 태양은 주님이시다. 천국의 빛은 신성한 진리이고 따뜻함은 신성한 선인데, 마치 태양으로부터 있는 따뜻함 같이 주님으로부터 유출된다. 주님이 천국의 태양이신 이유는 그분이 신성한 사랑, 영적 모든 것의 근원이시기 때문이다. 이 사랑이 태양 같이 천국에서 빛을 낸다.
천국에서 주님이 태양으로 보여질 수 있기에, 즉 그분 안에 있고 그분으로부터 흐르는 그분의 신성한 사랑 때문에 천국에 있는 모든 인간은 언제나 그분을 향하고 있다. 그러나 지옥들에 있는 인간들은 지옥 자체인 어둠을 향하고 있는 바, 그들은 주님에게 등을 보이는 셈이다. 이런 돌아섬이 거행되는 이유는 저세상의 인간들은 자기 고유의 사랑인 내향적 동기만을 바라보기 때문이다. 영계에서는 자연계에 있는 고정된 나침반의 끝점(point)은 없다. 영계에서 방향을 결정하는 것은 초점(focus)이다.
인간들 역시, 영 안에서, 이 세상에서 위와 유사하게 자신들을 돌아서게 한다. 자아 사랑과 세상 사랑이 동기가 되어 움직이는 이들은 자신들을 주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쪽으로 향한다. 이와 반대로 주님과 자기의 이웃을 사랑하는 이들은 그분을 향하여 자신을 돌린다. 섭섭한 대목은 이 세상은 나침반의 고정된 끝점이 있기 때문에 인간들이 이 사실을 알아채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주님은 천국의 태양이시고 그분으로부터 모든 것이 유래하는 바, 그분을 향하여 돌아서기 때문에, 주님은 모든 것의 중심이고 모든 이 각각의 방향과 목적의 근원이시다. 이런고로 그분 아래 있는 모든 것은 그분의 현존 안에, 그리고 그분의 인도하심 아래 있다. 이는 천국과 땅 위에서도 마찬가지 이다.

천국의 빛과 열

자연으로부터서만 사물을 생각하려 고집하는 인간은 자연계의 정오의 태양 보다 훨씬 밝은 빛이 천국에 있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그곳의 빛은 세상의 빛인 자연적인 빛이 아니고, 영적인 빛이다. 이 빛은 실지로 태양이신 주님으로부터 공표되고, 신성한 사랑인 이 태양으로부터 신성한 진리가 빛으로 공표된다. 진리는 천사들에게 빛인데, 그 이유는 그들은 자기들의 태양으로부터 뭔가를 지각하는 영적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천사들은 신성한 진리로부터 삶에 관한 모든 것을 이해한다, 그리고 그들의 이해함은 안쪽의 시각이다. 이 시각이 그들의 바깥쪽 시각 안으로 흐르는 바, 이것이 보는 것을 산출한다.
천국에서 빛의 근원이 위와 같고, 그 다음 이 빛은 주님으로부터 신성한 진리를 받는 방법에 따라, 그리고 천사들과 더불은 지혜와 총명의 등급에 따라 다양하게 바뀐다. 간략히 말해, 천적 왕국에 있는 빛은 영적 왕국에 있는 빛과 다르고, 같은 왕국 안에서도 각 공동체마다, 심지어 각 개인 마다에서도 차이가 있다.
천국의 빛은 어떤 것이 실지로 있는 그대로를 확실히 보이게 한다. 따라서 제아무리 작은 조각도 감추이지 못한다. 보다 높은 등급의 천사들은 자신들을 공개적으로 보여주는 것을 사랑하는데, 그 이유는 자기들에게는 선한 의도들만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천국 아래 있는 이들은 천국의 빛에서 보여지는 것 자체를 두려워한다. 지옥의 이들은 자기들 등급의 인간들끼리는 확실히 인간으로 쳐다보고 있지만, 그들이 천국의 빛에서 보여질 때 그들은 자기들의 악의 실지의 모양인 흉측한 괴물 같이 보인다. 천사들이 이 세상 인간의 영적 상태를 볼 경우 위 같은 현상은 천사들에게 마찬가지로 나타난다. 따라서 만일 그들이 내향적으로 선하다면, 그들은 아름다운 인간 같이 보이고, 그들이 내향적으로 악하다면, 그들은 모양 없는 괴물 같이 보여진다.
열-또는 따뜻함은 천국에서 태양으로서 주님으로부터 공표되는 사랑이다. 그 이유는 그분은 신성한 사랑이시기 때문이다. 이 사랑도 빛의 경우 같이 천사들의 공동체 내의 사랑의 등급에 따라 천국에서 다각도로 받아진다. 선(goodness, 선량), 이는 사랑이다. 그리고 진리(truth), 이는 빛이다. 이 둘은 오직 하나로 발산되는 것으로서 주님으로부터 공표된다. 그 이유는 그 둘은 진실로 하나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천사들은 그 둘을 따로 떼어 보는데, 그 이유는 천사들의 등급에 차이가 많은 이유로 어떤 천사는 빛 보다 열을 많이, 또 다른 천사는 열 보다 빛을 더 많이 받는 경우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빛과 열을 동등하게 받는 것과 완전해짐은 비례한다.

천국의 네 지역들

천국도 세상에서 같이, 중요한 4 지역들이 있다; 동, 남, 서, 북이다. 세상에서 이것들은 태양의 위치에 의해 결정되어지나, 천국에서 그것들은 주님의 현존으로부터 결과되어진다. 태양으로서 주님이 보여지는 방향을 ‘동’쪽이라 부른다. 그 반대 방향은 ‘서’쪽이다; ‘남’쪽은 오른쪽에 있고 ‘북’쪽은 왼쪽에 있다. 이 방위는 인간들이 자기들의 얼굴, 내지 몸을 어느 방향으로 돌린다 하더라도 진실을 붙잡게 한다. 그 이유는 천국에서 모든 방향들은 동쪽으로부터 결정되어지기 때문이다. 주님이 보여지는 방향이 ‘동’쪽이라 불리우는데, 그 이유는 그분이 생명의 근원이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따뜻함과 빛-즉 사랑함과 이해함이 천사들에 의해 받아지는 만큼에서 주님은 그들 사이에서 일어나졌다고 말해진다. 또한 동쪽은 천사들이 자기들의 얼굴이나 몸을 어느 쪽 방향으로 돌리든지 천사들 앞에 계속적으로 있는다. 천사들은 땅 위 인간들의 것으로부터 여러 다른 방향으로 돌아 선다. 그 이유는 돌아서는 그들의 이유가 다르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기들이 사랑하는 것 쪽으로 향하여 선다. 그리고 결과로서 그들의 사랑은 그들 앞에 계속적으로 있는다. 천국에서, 주님은 그들 사랑의 근원이시다. 그리고 주님이 그분의 사랑 안에서 그들과 더불어 있는 한, 그분은 그들이 어느 방향으로 얼굴을 보이고 있든 그분을 바라보게 해주신다.
이에 대한 결과로, 놀라운 상황이 천국에서 일어난다. 많은 인간들은 거기서 한 장소에 있을 수 있고, 이 인간은 자기 얼굴과 몸을 이쪽으로 돌아서고, 저 인간은 저쪽으로 돌아 설 수 있다. 그럼에도 그들의 모두는 자기들 앞에서 주님을 뵙는다. 그리고 각자는 남쪽을 그의 오른쪽에, 북쪽은 그의 왼쪽에, 그리고 서쪽은 자기 뒤에 위치한다. 천국에서 또 다른 놀랄만한 사실은 천사들의 얼굴이 동쪽을 향해 있는 때 조차에서도 그들은 다른 세 지역들도 관찰한다는 것이다. 이는 생각과 더불어 행해지는 그들의 한층 더 깊은 내적 시력으로부터 와진다.
천국에서 인간들은 위 네 지역에 따른 여러 다른 면적에서 살고 있다. 사랑과 선함에 포함되어진 인간들은 동쪽과 서쪽에 사는데, 그들 중에서 보다 더 지각적인 이들은 동쪽에, 상대적으로 덜 지각적인 이들은 서쪽에 분포하고 있다. 한편 지혜의 빛 안에 있는 이들은 남쪽, 상대적으로 빛이 약한 인간들은 북쪽이다. 이 배열은 천적, 영적 왕국에서 전체 공동체, 또는 단 하나의 공동체 모두에게 참 질서이다. 일반적으로, 동쪽을 향하는 공동체들은 서쪽을 향하는 공동체들 보다 더 낫다. 그리고 남쪽을 향하는 공동체들은 북쪽을 향하는 공동체들 보다 낫다.

천국에서 천사들의 상태는 변화한다

이는 천사들과 더불은 사랑, 지혜 그리고 이해함으로부터 있는 것들, 또한 그들 삶 자체가 변화, 또는 교차한다는 말이다. 천사들은 똑같은 상태에 계속적으로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변화들을 통과해간다. 각 천사의 사랑과 지혜는 어떤 특정한 때의 그의 특별한 상태에 따라 다양해진다. 그래서 천사는 강렬하게 사랑할 때도 있지만 그렇지 않을 때도 있다. 이런 사랑함의 농도는 대단히 진한 것으로부터 아주 옅은 것에 이르기까지 등급별로 다양하다. 그들이 최고로 사랑하고 있다고 느낄 때, 그들은 자기들 사랑의 완전 충만된 빛과 따뜻함 안에 있는다. 그러나 자기들의 사랑함이 미미할 때 그들은 상대적으로 차거나 그늘 안에 있고, 불유쾌한 상태나 희미한 상태 안에 머물기도 한다. 그럼에도 그들은 이런 상태들로부터 첫 단계로 되돌아 온다. 이 변화들은 마치 이 세상의 빛과 그늘, 따뜻함과 차거움, 아침과 저녁이라는 하루의 주기 같이 이 상태에 저 상태가 뒤를 잇는다. 이런 것들은 실지로 상응한다. 아침은 천사들의 사랑이 진할 때와. 정오는 지혜가 아주 밝은 빛에 있을 때와, 저녁은 사랑과 지혜가 상대적으로 그늘 상태에 있을 때, 밤은 사랑과 지혜의 어떤 것도 없을 때와 상응한다. 그런데 밤 자체는 천국에 있는 인간들의 상태와 상응하는 것이 없고 오로지 지옥에 있는 인간들과만 상응할 뿐임을 주목해두자. 천국에서는 ‘저녁’ 상태가 다가오는 새 아침에 앞서 있는 새벽으로 인도해준다.
천사들은 자기들의 내적 상태의 변화, 뿐아니라 자기들 주위에서 보는 여러 다른 것들의 외관도 변한다. 이에 대한 설명은 차후 있을 것이다.
위와 같은 변화가 있어야 하는 이유가 있다. 천사들은 영적 생활에서 다양함에서 계속 있을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그들이 천국의 진가를 인정함이 언제나 똑같은 상태에만 있다면 그 진가의 가치가 줄어드는데, 마치 지상에서 누군가가 제한 없이 계속 편안함이나 쾌락들에 푹 빠져 있다면 시간이 지날수록 그것들로 인한 즐거움의 강도가 약해지고 마는 경우와 같다. 또 하나 이유는 여기 인간들 같이 천사들도 자기 인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 때문에 너무 많은 시간을 자신들에 관해 생각하려드는 경향이 있다. 천국의 모든 이 각각은 자아 사랑으로부터 오는 힘은 쓰지 못한다. 그들이 주님에 의해 자아 사랑이 억제 되면 그들은 사랑과 지혜에 관한 것을 경험하지만, 그들이 자아 사랑 안에 푹 빠지면, 또는 그것 안으로 빠져드는 것을 방치하면 그들은 그 사랑을 경험한다.

천국의 시간

천국에 있는 모든 것도 세상에서 있어지는 똑같은 방식으로 연속성과 발달이라는 것이 발생되고 있음에도, 천사들은 시간과 공간에 대한 실지 개념은 없다. 이것은 당연시되어 있는 바, 그들은 이것들이 이와 같다는 것을 이해 못한다. 이 세상의 시간은 눈에 보이는 태양의 운동에 기초하여 때와 계절들을 산출하고 있다. 천국의 태양은 어떤 연속성이나 궤도 운동 같은 것에 의해 날이나 해가 산출되지 않는다. 그러나 고정된 간격들에서 발생하지 않는 상태의 변화로 생산된다. 이는 천사가 왜 시간 개념이 없고 오직 지나가는 상태 개념만 지니는 가에 대한 이유이다. 그리고 그들은 이런 방식에서 시간과 더불어 있어지는 모든 것을 이해한다. 천사들이 시간에 대한 생각이 없기 때문에 영원이 무엇을 뜻하는 가에 대한 이해가 지상의 인간들의 것과는 아주 다르다. 천사들은 영원을 시간의 무한한 길이가 아닌 무한한 상태를 뜻한다고 보고 있다. 만일 누군가가 시간, 공간 그리고 물질을 용어에 국한해 생각한다면, 그 생각은 한계에 부딪치나, 만일 생각의 더 높은 평면으로, 이런 것들 넘어로 간다면, 한계에 부딪치는 일은 없다.

천국에 있는 표현과 나타남

천국에서 천사들이 자기 주위에 있는 것들을 어떻게 보는지를 서술하는데 간단한 방법은 없다. 한가지 말할 수 있는 것은 천국의 것들은 세상에 있는 것보다 더 완전하고 더 풍부하다는 점이다. 천국에 물건과 사물이 실지로 있다는 것은 성경의 예언자들이 자기들의 환상에서 본 것에 의해서도 확증되어진다. 천국이 예언자들에게 열려졌을 때 이런 것들을 예언자들에게 보일 수 있게 되었는데, 이는 내향 또는 영적 시력이 열릴 때 발생한다. 이렇게 열리는 것은 주님의 허락이 있을 때이다. 마치 어떤 인간이 육체의 감각으로부터 있는 자연적 지각을 거두어들이고 영적 빛과 이해함으로 들려질 때와 같다.
천국의 것들은 일반적으로는 지상의 것과 같은 한편, 많은 방법들에서 아주 다르기도 하다. 기본적 차이는 천국의 것들은 영적 태양으로부터 존재하나, 지상의 것은 이 세상의 태양으로부터 존재한다는 점이다. 천국의 것들은 지상의 것에서 행하는 똑같은 방법에서 발생하지 않는다. 천국에서, 모든 것은 거기 있는 천사들과 더불은 그것의 상응에 따라서 주님으로부터 온다. 내부의 상태들에 상응하는 천국에 있는 모든 것은 실제로 그것들을 재연(re-present)하는 것인 바, 그것들은 그것들의 ‘표현(represent)’이라 일컫는다. 게다가 천국에 있는 것들은 천사들의 상태에 따라 다양해지기도 하는 바, 그것들은 ‘가상(appearance, 나타남, 외관)’이라 일컫는다. 이는 이 세상에 있는 것만큼 사실로서 완전하게 보일 수 있고 보여짐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말한다. 천국에서, 물체들은 여기 이곳 보다 아주 더 선명하게 보여진다.
천국에서의 나타남은 ‘진실로 나타남’이라 불리우는데, 그 이유는 그것들이 실지로 발생하기 때문이다.
상응의 결과로 천사들이 보는 것에 대한 예를 한가지 들어보자; 나무와 꽃들이 가득찬 공원과 정원이 총명한 천사들 앞에, 그들 주위에 나타난다. 그리고 그것들은 완전한 질서로 배열되어 있다. 거기에는 아취형의 출입구와 작은 길이 여기 저기에 있다. 거기를 산책하는 인간들의 이해함은 완전에 가깝다. 그들은 꽃들을 꺽어 화환을 만든 다음 작은 어린 아이에게 씌워준다. 거기에는 이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나무들과 꽃들이 있고, 그리고 나무에 있는 열매는 이 천사들이 지닌 사랑에 있는 선함이다. 그들은 공원과 정원 때문에 이 풍경을 보는데, 열매 열린 나무들과 꽃들은 총명과 지혜에 상응한다.

천국에서 천사들의 옷

천사들도 옷을 입고 있는데, 그 이유는 그들은 지상의 인간들 같이 함께 사는 인간들이기 때문이다. 또한 그들은 집과 그와 유사한 것들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구분짓는 차이점은 이렇다: 그들이 가진 모든 것은 더 완전한데, 그 이유는 그들이 더 완전한 상태에 있기 때문이다. 천사들의 지혜가 인간의 지혜를 훨씬 더 능가하듯, 그런 수준으로 천국에서는 모든 것이 지각되고 있다. 천사들의 옷은 여타의 것들이 상응하듯 상응한다. 그리고 그것들이 상응하기 때문에 그것들은 실제로 존재한다. 그들의 옷은 그들의 총명에 상응한다. 천국에 있는 인간들은 자기들의 총명을 간수하도록 잘 차려입은 상태로 보여진다. 총명의 수준에서 이 인간이 저 인간을 능가할 경우 이 인간은 더 세련된 옷을 차려 입고 있다. 가장 총명한 천사들의 옷은 마치 자기들이 불 속에 있는 것 처럼 이글거리는 불빛이다. 총명이 덜한 천사는 빛나는 흰 옷을 가진다. 더욱 덜 총명한 천사는 여러 다른 색깔로 된 옷을 가진다. 모든 천사들 중 최고의 천사는 벗고 있다.
천사들의 옷이 자기들의 총명에 상응하기 때문에 의복 자체는 특별한 진리들에 상응하는데, 마치 모든 총명이 신성한 진리로부터 오는 것과 같다.
불타는 듯한 옷과 빛나는 의복의 나타남은 불이 사랑에, 빛이 진리인 것에 상응함으로부터 오고 있다. 이 나타남들의 크기는 천사들이 주님을 얼마나 영접하느냐에 비례한다. 다양한 색깔의 옷 역시 다양하게 영접함에 상응한다. 최고의 천사들이 벗고 있는 이유는 그들 만이 순진 안에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순진은 벌거벗고 있음으로 표현되어진다. 천사들은 이 옷들을 볼 수 있을 뿐 아니라 그것들을 느낄 수 있다. 그들은 갈아 입을 옷도 많이 가지고 있다. 그래서 그들은 이 옷들을 밀쳐두거나 입으려고 다시 꺼내기도 한다. 그들은 이 옷들이 주님으로부터 주어진 것이라고 말한다. 때때로 그들은 그런 줄도 모르고 옷입고 있기도 한다.
영계에서의 옷은 언제나 거기 인간들의 품질을 간직하기 때문에, 지옥에 있는 이들, 진리를 알고 싶지 않은 이들은 찢어지고 더럽고 불쾌하기 조차한 옷을 입고 각자 자기의 사악함을 간직하고 있다. 그들은 이런 옷 외에 어떤 옷도 입을 수 없다. 그들의 발가벗은 것이 보이지 않도록 주님은 그들에게 그들의 옷을 주신다.

천국에 있는 집(house)들과 자기 집(home)

천사들은 공동체 안에서 살고 있다. 그리고 그들은 자기 만의 집을 지닌다. 이는 마치 자기 생명의 개인적 품질에 따라 다양한 옷을 입는 것과 비슷하다. 보다 수준 높은 상태에 있는 천사들을 위해서는 웅대한 집이 있다. 이 보다 덜 높은 수준의 상태의 천사를 위해서는 정성들여 만든 집이 있다. 그들의 거주지는 자기 집이라 불리는 땅 위의 것들과 거의 같다. 단지 그곳의 집이 더 아름답다는 것만 차이가 난다. 그 집은 방들, 곁방, 여러 침실을 가지고 있다. 정원과 화단과 잔디로 둘러싸인 안뜰도 있다.
거기 인간들은 아주 가깝게 붙어 살고 있다. 집들은 이 세상의 집들이 큰 도로나 작은 도로, 광장을 따라 배열된 도시의 집 같이 이 집과 다음 집이 아주 가깝다. 천국에 있는 건물의 도안은 아주 완전한 바, 그것들은 예술의 참 본체를 표현한다고 여러분은 말할지 모른다. 사실 그럴 수 밖에 없는 이유는 설계 자체에 관한 예술이 천국으로부터 오기 때문이다. 천사들은 자기들 눈 앞에 펼쳐지는 이런 아름다운 것들-게다가 더 완전한 것들은 주님이 놓아두신 것이라고 말한다. 더구나 천사들은 이런 것들을 볼 때 즐거움을 눈으로 보다는 마음으로 더 향유한다. 그 이유는 그들이 모든 것에 있는 상응을 보기 때문, 더 나아가 이를 통하여 신성한 것을 보기 때문이다.
집 안에 있는 여러 다른 것들 까지도 상응한다. 집 자체는 거기 사는 이들의 선에 상응한다. 집 안의 특별한 것들은 이 선을 만들어 가는 다양한 품질과 상응한다. 집 밖은 이 선으로부터 발생하는 진리들에 상응하는 것들이고, 또한 지각과 통찰력에 상응한다.
천사들의 자기 집은 이 세상에서 지어지는 집들과 같은 식으로가 아니다. 천사들의 자기 집은 주님에 의해 천사들에게 자유로이 주어지되, 그가 어떻게 선과 진리인 것을 받는지에 일치하는가에 따라 모든 이에게 주어진다. 천사들은 자기들이 소유하는 모든 것을 주님으로부터의 선물로서 간직하고 있다. 주님은 그들이 필요한 모든 것을 주시고 있다.

천국에 있는 공간

비록 천국에 있는 모든 것이 이 세상에 있는 것들과 아주 똑같은 공간에, 장소에 있도록 나타난다 할지라도, 천사들은 장소와 공간에 대한 개념이 없다. 이것이 역설적 이론처럼 비쳐질 것인 바, 설명이 필요하다.
영계에서 장소가 바뀌는 것은 상태의 내부 변화를 수단으로 일어난다. 장소가 바뀌는 것, 또는 여행은 단순히 상태의 바뀜이다. 이는 천사들이 어떻게 여행하는지를 알게 한다. 그들은 움직임을 위해 거리나 공간을 가지지 않는다. 그 이유는 그들은 상태로 만들어진 또 다른 치수(dimension)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위의 사실은 천국에서 어떻게 장소의 바뀜이 발생하는지를 알려주는 바, 한 가지 명백해지는 것은, 서로 비슷한 상태에 있는 이들은 서로 가깝게 위치하고, 한편 다른 상태에 있는 인간들은 멀리 떨어져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비슷한 것은 가깝고 비슷하지 않으면 멀리 있다. 내적 상태에 상응하는 바깥쪽 상태가 아니면 천국에는 공간이 없다. 이런 이유 때문에 천국의 왕국들과 등급들은 서로 서로로부터, 각 천국에 있는 공동체들도, 또한 각 공동체 안의 천사들 사이도 구분이 있다. 이는 지옥이 반대되는 상태에 있는 이래 천국으로부터 완전하게 분리된 이유를 설명해준다.
위의 사실에서 또 하나 알려준다. 영계에서 누군가와 함께 있기를 갈망하는 인간이 있다면 그 누군가가 그 인간에게 나타난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그가 타인에 관해 생각하고, 자신을 그의 상태에 놓기 때문이다. 한편, 인간들은 자기가 상대로부터 돌아서는 만큼 그 인간으로부터 멀리 있게 된다. 이 돌아섬은 불일치하는 생각으로부터 발생하기에, 몇 인간이 한 장소에 있다 해도 자기들이 일치하는 정도 만큼 서로를 보는 경우가 발생한다. 더구나 불일치가 있는 순간 서로는 사라지고 만다.
누군가가 이 장소에서 저 장소로 갈 때, 그가 거기에 있기를 원하는 정도의 강약에 따라 더 빠르게 도착하거나 더 느리게 도착한다. 여행의 경우도 같은 이치인 바 같은 거리를 여행해도 더 오래 걸리거나 더 빨라지거나 한다.

천국의 모양이 천국의 연합과 교제를 위한 방식을 정한다.

다소 차이는 있겠지만, 지금까지 말해온 것으로부터 천국의 전반적인 조직도 알 수 있게 될지 모른다. 요점은 이렇다. 그곳에서의 그룹짓는 것이나 교제하는 모든 것을 위한 방식을 만드는 어떤 모양이 있다는 것이다. 이 뿐만 아니라 천사들의 모든 총명과 지혜, 그리고 (밖으로) 나가는 생각들과 애착들 모두를 위한 방식도 있다. 누군가가 천국의 모양 안에 있는 정도 만큼 그는 슬기로워져 있다. 천국의 모양은 영계를 움직이는 질서의 특별한 법칙들에 의존하고 있다. 천국의 모양 안에 있음은 이 질서에 살고 있음과 같은 말이다. 지상에서의 인간은 천국의 형상으로 창조되었지만, 바깥쪽으로는 세상의 형상이다. 인간들이 자기들 마음에 악한 바램과 거짓 사상들의 입장을 허용함으로 해서 자기들 안의 천국의 형상은 파괴되었기 때문에, 인간 안에 있는 더 깊은 것들은 그가 태어나는 그 때로부터 굳게 닫혀져 있다. 이는 왜 인간은 동물과 달리 완전한 무지에서 태어나지는지에 대한 이유도 된다. 사실상, 만일 인간의 천국의 모양이 아무리 보아도 회복될 기미가 없다고 한다면, 질서 속의 것들을 가르치는 것이 하나의 방법이다. 그 이유는 모양 자체 역시 질서로부터 오기 때문이다.
성경은 그것을 통해 주어진 다양한 명령 안에 신성한 질서의 모든 법칙을 담고 있다. 인간이 이 법칙들을 알고 그것들로 사는 만큼, 자기 안에 굳게 닫힌 것들이 자유해진다. 그 다음 천국의 형상은 그 인간과 더불어 새롭게 모양을 만든다. 그러므로 우리는 천국의 형체 안에 있음, 즉 성경 안에 있는 것들에 의해 사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 수 있다.
천사들이 그룹 안에서 서로를 끌어 당기는 방법은 그들의 영적 친척 관계에 기초를 두고 있다. 이는 전체로서의 천국, 각 공동체 안에서, 그리고 각 가족 단위에서 역시 마찬가지 이다. 서로 비슷한 상태에 있는 천사들은 이 세상 친척들이 서로를 알아보듯 한다. 그리고 서로의 마음을 아주 잘 이해한다.
각 천국에 있는 모양은 각 천사의 생각과 느낌을 나누는 형태이다. 그러나 여러 다른 천국들 사이에서는 다른 소통 방식이 있는데, 이는 소통함이라기 보다는 영향을 줌이라고 일컫는 것이 나을 듯 싶다. 천사들은 자기들 안으로 흘러드는 주님에 의해 함께 연합되므로, 더 높은 천국의 천사들이 더 낮은 천국으로 들어가 거기 천사들과 대화하지 않도록 각별한 조심스러움이 있다. 그 이유가 만일 이런 일이 발생한다면 더 높은 천사는 즉각 자기의 모든 이해력을 잃기 때문이다. 이런 일이 발생하리라고 여겨지는 이유는 전체로서의 천국에 세 수준이 있듯, 각 천사에게 자기 생명의 세 수준을 가지기 때문이다. 가장 높은 천국에 있는 천사들은 가장 높은 생명의 수준이 열려져 있다, 그리고 나머지 낮은 것에는 닫혀 있다. 중간 천국에 있는 천사들은 두 번째 수준에 열려 있고, 가장 낮은 천사들은 가장 낮은 수준에 열려 있고, 나머지 두 수준은 닫혀 있다. 가장 높은 천국으로부터의 천사가 더 낮은 천국의 누군가와 대화하려 들어가는 순간, 그 천사 자신의 생명의 수준은 닫혀지고 만다. 그리고 한번 닫혀지면, 그가 되돌아 올 때까지 가장 높은 수준의 지혜는 잃고 있게 된다.
보다 낮은 수준으로부터 보다 높은 수준의 천국들 안으로는 흐르지 않는데, 그 이유는 이것이 질서에 반대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영향력은 언제나 더 높은 곳에서 더 낮은 천국들로 미친다.
더 높은 천국으로부터 오는 천사들의 지혜는 어쩌면 수 천 배의 비율로 더 낮은 천국들에 있는 천사의 것을 능가한다. 이것이 왜 낮은 천국의 천사가 더 높은 천사와 대화 할 수 없는 이유이다. 사실, 그들은 자기들이 쳐다볼 때 보는 것조차 안된다. 그들의 천국은 그들 위에 안개 같은 것이 보인다. 반면, 더 높은 천국의 천사는 더 낮은 천국들의 천사를 볼 수 있으나, 그들이 대화하는 것은 허용되지 않는데 그 이유는 자기들이 지닌 지혜의 수준을 잃게 되기 때문이다.

천국이 통치되는 방법

천국이 공동체들로 구성되었기에 그 각각의 공동체는 그 안에 수 백, 수 천의 천사들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각 공동체 안에 있는 이들은 같은 종류의 선 안에 포함되어 있지만, 그럼에도 거기에 통치함은 필요한데, 그 이유가 질서는 반드시 유지되어야 하고, 질서에 관한 문제들은 보살펴져야 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아무리 위와 같다 해도 상호적인 사랑으로부터 오지 않는 천국의 통치는 없다. 그래서 통치의 종류는 각 공동체에 잘 어울리는 것에 따라 다양해진다: 이것은 보편적으로 똑같지 않다.
천적 왕국에서, 통치는 삶 속의 것들에서 자기들을 가르치고 인도하는 주님 만으로부터 온다. 진리인 것은 그들의 심정 안에 있다. 그래서 그들은 진리인 것을 즉시 알고 이해한다. 그곳에는 법적 다툼이 없고, 오로지 공의를 위한 사랑만 있다. 그들 중 보다 덜 슬기로운 인간은 보다 더 슬기로운 인간에게 묻고, 더 슬기로운 인간은 주님에게 문의하여 답을 받는다. 그들의 천국, 이와 대등하게 그들의 가장 큰 기쁨은 주님으로부터 정의롭게 살아가는 것이다.
영적 왕국 안에 있는 이들은 이웃을 향한 사랑, 그리고 이 사랑이 포함하는 것에 더 관심이 있다. 이 품질은 의사 결정에 필요한 진리와 이해함에 기초를 두고 있다. 이 천사들은 주님에 의해 안내를 받지만, 더 간접적이다. 그들은 공무원들을 가지고 있고 그 숫자는 공동체의 필요에 따라 다르다. 그들 역시 하모니를 지키기 위해 법들을 가지고 있다. 공무원들은 이 법들에 의해 모든 것을 통치한다. 그들은 슬기롭기 때문에 그 법들을 이해하고 있다. 혹 그들에게 어떤 의심되는 점이 발생하면 그들은 주님에 의해 계발되어 의구심은 걷힌다.
영적 왕국에는 다양한 통치가 있어, 이 공동체와 저 공동체의 통치에 차이가 있다. 그리고 여러 기능들을 가지고 있는데, 마치 몸의 부분들이 다양한 것과 같고, 이것에 그들 각각은 상응한다. 그럼에도 통치의 모든 모양은 그들이 자기들의 목적으로서의 공통된 선에, 그리고 공동체에 있는 각 개인의 선에 초점을 두고 일치하고 있다. 모든 이 각각은 주님의 돌보심 아래 직접 있다. 그리고 그는 개인들이 그들 자신의 선을 받는 근원이 공통의 선임을 확실히 한다. 각 천사는 자기가 전체로서의 선을 사랑하는 만큼 선인 것을 받는다.
통치하는 이들은 최고의 사랑과 지혜를 가진 이들이다: 이들은 모든 것 중에서 선을 제일 먼저 추구하고 이 선을 위해 무엇을 갖추어야 하는지도 알고 있다. 이 같은 인간은 타인 위에 지배권을 행사하려 들지 않고 명령도 내리지 않는다; 그들은 섬기고 봉사한다. 즉 선인 것을 사랑함으로부터 타인에게 선을 행하고 있다. 그렇다 하더라도, 그들에게 영예와 영광이 주어진다. 그들은 공동체의 중앙에 살고, 타인 보다 더 높은 곳에, 웅대한 집에 살고 있다. 그들 모두는 이를 인정함이 비록 자신을 위한 것도 아니고, 순종의 범주를 떠난 것은 아니라 해도 기쁘게 수용한다. 모든 이가 아주 잘 아는 바, 이 영예는 주님에 의해 그들에게 주어진다는 것,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순종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공익 업무들을 처리하는 것이 모든 이의 삶이다. 명확하게 주님의 왕국은 공익을 위한 직업의 천국이다.

천국에 있는 예배

외관상, 천국에 있는 예배는 세상에 있는 예배나 별반 차이가 없는 듯하나, 내향적으로는 아주 다르다. 땅 위와 흡사하게 예배 의식이나 교회 건물도 있다. 그리고 그들은 가르침을 이용하는데, 이와 함께 설교도 빠지지 않는다. 이런 것들이 천국에서 발생하는 이유는 천사들의 사랑과 지혜가 계속 성장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천국에서의 예배는 이곳 교회들의 진행이나 설교를 열심히 경청하는 문제 등에서 똑같지는 않다. 그곳의 예배는 사랑으로부터의 생활, 진정한 가르침들에 기초한 이웃다움과 신앙으로부터의 생활이다. 교회 예배 의식은 생활에 관한 문제들을 위해 더 많이 가르치기 위한 수단 일 뿐이다.
모든 설교가 기초를 둔 가르침은 생활과 직접 관계되고 있다.
그들 중 누구도 생활로부터 신앙의 문제를 분리하지 않는다. 그리고 각 천국에는 가르침들이 주어지는데, 이는 거기 있는 천사들의 특별한 지각에 어울리는 수준에서 이다. 모든 가르침의 필수 요소는 주님의 ‘신성한 인간(Divine Human)’을 인정함이다.
설교자 모두는 영적 왕국에 소속되어 있고 천적 왕국은 아니다. 이런 이유는 예배 의식에서 인간들이 선한 것으로부터 오는 참된 생각에 관심이 모아져 있고, 모든 설교는 진리로부터 행해지기 때문이다. 아무리 위와 같다 해도 천적 왕국 역시 설교를 가지고 이것을 수단으로 진리에서 빛을 받고, 그들에게 주어지는 새로운 진리들을 청종함으로 더 완전해지기까지 한다. 그들은 설교를 들을 때, 그 내용의 것들을 보고, 사랑하고, 그것들로 생활하여 자기 생명의 한 부분을 만든다.
설교자들은 동쪽을 향한 설교단에 서 있다. 설교자 앞에는 더 큰 지혜의 빛 안에 있는 천사들이 앉고, 그들의 오른쪽과 왼쪽에 보다 덜 큰 지혜의 빛에 있는 이들이 앉는다. 그들은 설교자가 모두를 볼 수 있도록 원형 방식으로 앉게 되어 있다. 새로 오는 자는 문쪽에 더 가까이 앉는데, 교회의 동쪽을 향한다. 설교자 뒤쪽에 앉는 자는 누구도 없다. 누군가가 의견을 말하면, 설교자는 혼동에 빠지고 만다. 모든 설교자는 주님에 의해 임명되고, 그 결과 그들은 설교 라는 선물을 받아 가지고 있다

천국에 있는 천사들의 힘(power)

영계의 영향력이 이 세상 안으로 온다는 것, 아예 영계 자체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 인간들은 천사들이 실지로 힘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납득할 수 없다. 이들이 생각하는바, 천사들은 실체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 그러므로 결과를 주는 어떤 것도 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를 더 깊게 생각하는 이들의 경우는 판이하다. 그들은 인간은 자기의 동기와 이해력으로부터 가지는 힘 없이는 자기의 근육 하나도 움직일 수 없음을 실감한다.
인간에게 있는 동기와 이해함은 영인들과 천사들의 영향력을 통해 그 인간의 움직임이나 몸짓에 이르기까지 주님에 의해 규율되어진다. 이를 믿든, 아니 믿든, 인간은 천국의 이 영향력 없이 단 한걸음도 내디딜 수 없다. 영적 인간이 생각하는 것, 그의 입이 말하는 것; 그가 의도하는 것, 그의 몸이 행하는 것, 자기 바램에 따라 몸에 힘을 주는 강약에 이르기까지 모두이다.
천사들은 수 백, 수 천의 악령을 내던져 그들을 지옥으로 되돌려 보낼 힘을 가지고 있다. 이 힘의 진가를 인정할 필요는 있지만, 그렇다고 힘이 그들 자신으로부터 나온 것은 아니다. 모든 그들의 힘은 주님으로부터 그들에게 온다.
사실, 그들 자신들도 이 힘의 근원을 인식하는 만큼에서만 힘이 발휘된다. 힘이 자신으로부터라고 약삭빠르게 믿는 인간은 그 힘이 약해져 악령 앞에 버티고 서있지도 못한다. 이런 이유로 천사들은 자기들이 행한 것에 대한 칭찬이나 영예를 거절하고 자신에게 그 공로의 탓을 절대로 돌리지 않는다. 그들은 그 모두를 주님의 공로의 탓으로 돌리고 그분께 칭찬과 영예를 돌리기만 할 뿐이다.

천국에 있는 언어와 말

천사들도 지상의 인간이 말하는 방식으로 서로 대화한다. 그들은 갖가지 것들, 즉 집식구 문제, 친근하게 말도 주고 받고, 도덕적인 문제, 그리고 영적 생활을 토의한다. 그들이 지상의 인간 보다 더 깊은 생각으로부터 더 총명함으로부터 라는 것 외에는 별 차이가 없다.
천사들의 말, 인간의 말 같이, 분리된 단어들의 형태를 취한다. 크게 이야기 한다, 그리고 천사들은 말해진 모든 것을 듣는다. 그 이유는 그들은 입과 혀와 귀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의 말을 운반하는 대기(공기)가 있다. 이 대기는 영적 존재들에 적합한 영적 대기이다. 영적 존재들은 이 대기를 수단으로 숨쉬고 이야기 한다.
천국에는 한 개의 보편적 언어가 있어 모든 이는 자기의 공동체가 어디로부터 이든, 멀리 있든 가까이 있든 상관 없이 아주 완전하게 모든 이를 이해한다. 이 언어에는 학식이 필요 없다. 그 이유는 이것은 모든 이에게 주어지는 모태 언어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실제로는 그들의 애착과 생각함으로부터 흐른다. 언어의 소리는 애착에 상응한다. 그리고 단어들 자체는 이 애착으로부터 오는 생각에 상응한다. 이 상응이 언어를 영적 차원으로 만든다; 소리냄은 애착에, 사고는 이야기함이다. 이는 천사들이 상대가 이야기하는 방식으로부터 단순하게 그가 실지로 무엇 같은지를 아는 방법이기도 하다.
천사들의 언어는 애착에 근원된 소리로부터 파생된 몇 단어들 말고는 인간의 언어와 공통된 것이 없다. 두 언어의 차이 때문에 인간의 어떤 언어의 한 단어 조차 발음해 내는데 천사들은 무능력을 보여준다. 사실 그들도 발음해보려 여러 차례 시도했었지만 말할 수 없었는데, 그 이유는 그들이 자기들 애착에 일치하는 것만을 발음할 수 있기 때문이다.
천적인 천사들은 더 깊은 수준의 애착으로부터 대화하는데, 그 이유는 그들이 주님을 더 크게 사랑하고 있기 때문이다. 영적인 천사들은 총명으로부터 말하는데, 그 이유는 그들이 이웃을 향한 사랑에 있기 때문에서 이다. 천적인 천사들의 언어는 마치 시냇물 흐르듯, 따라서 부드럽고 깨어지지 않은 소리 형태인데 비해, 영적인 천사들은 파삭파삭하되 맑은 소리 형태이다.
그리고 그곳에서의 모든 교제를 위해 모형(pattern)을 만드는 천국의 모양(form)으로부터 오는 전체로서의 천사들의 언어에는 일종의 하모니가 있다.

천사들이 인간과 이야기 하는 방법

천사들이 인간들과 담화할 때, 그 때의 언어는 천사들의 것이 아닌 인간의 언어이다. 이런 이유는 천사들이 누구와 대화할 때 그들은 그를 향하여 돌아서고 자신을 그에게 결합시키기 때문이다. 이것은 둘을 비슷한 종류의 생각함 안으로 가져다 준다. 그리고 인간의 생각함이 그의 기억에 연결되어져 있고, 거기서 말이 나오는 바, 천사와 인간, 이 둘은 똑같은 언어를 사용할 수 있다. 천사 또는 영이 인간과 이 연결을 만들 때, 천사나 영은 인간의 기억 전체에 들어가고, 그가 알아채는 한 그는 인간이 아는 모든 것을 알고 있다.
인간과 더불은 천사의 말은 두 인간 사이에서는 청취가 가능하나, 오로지 그 한 인간뿐 근처 인간까지 청취되지는 않는다.
영들과 대화하는 것, 비록 요즘 시대에서는 매우 드믄데, 그 이유는 위험하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는 인간은 누구와 함께 있는 것을 모르고 있는데 영들은 알고 있기 때문이다. 악령들은 인간들을 향한 살인적인 느낌들에 피난처를 제공하는 자연적 영들 곁에 있다. 그리고 그 영들은 영과 몸을 파괴하는 것 외에 원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사실 그것들은 어떤 정상적 자연적 쾌락으로부터 자신들을 차단해버리는 극점에까지 환상의 과도한 탐익에 몰입하는 이들과 더불어 발생한다.
고독한 생활을 꾸리는 인간의 경우, 영들이 자기들끼리 대화하는 것을 때로는 들을런지 모르나 피해가 일어나지는 않는다. 그런 이유가 이 영들이 대화할 때 자기들과 함께 인간이 있는 것을 그 영들이 알지 못하도록 주님께서 철수 시켜 놓고 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영들은 자기들이 있는 곳 외 다른 곳에 인간들이 있다는 것, 또는 또 다른 세계가 있다는 것도 눈치채지 못한다. 고로 인간이 그들과 대화하려는 것은 허용되지 않는데, 그 이유는 만일 그가 대화한다면 악령들이 위 사항이 있음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
종교적인 문제들을 언제나 생각하는 인간들, 그리고 자기 안을 직관하는 고점까지 종교적 문제를 압축한 인간들 역시 영들이 대화하는 것을 듣기 시작한다. 종교 자체가 목적이고 종교가 인간의 모든 것을 빨아들이고, 생활과 남에게 유익해짐에 응용해보려는 것과 균형을 맞추지 않을 때, 인간의 관심된 것을 선점하면서 그 인간의 온 영을 건네받는다. 그들은 영계에 들어가기까지 해서 거기 영들에게 영향을 끼치기도 한다. 이와 같은 인간이 도취되어 얻는 것은 환상물이다. 그들은 자기들이 성령으로부터 들었다고 믿는다. 사실, 이 영은 인간의 영을 도취시켜 즐거워하는 그 곳의 영일 뿐이다.
천사들과의 대화는 누구도 허용되지 않으나, 예외는 있다. 천사의 표준에 의해 사는 인간, 주님을 그분의 ‘신성한 인간‘ 안에서 인식하는 인간이다. 그리고 대화가 허용된 이들은 천국에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들은 자기들의 내적 생각들이 있는 천국의 빛으로부터 보고 있기 때문이다.

천국에 있는 글쓰기

천사들이 단어를 사용하여 이야기 하는 것과 거의 같게 그들은 글을 쓴다. 그들의 마음은 말 뿐만 아니라 글을 통하여 생각들과 의미들을 운반한다. 천국에 책들이 있는데 주님께서 준비해두셨다. 이것들은 우선적으로 말씀을 위하여 있다, 신성한 진리로서의 말씀은 천국의 모든 지혜의 참 근원이다. 이는 천사나 인간에게나 공히 같다. 말씀 자체는 주님에 의해 직접 주어져 있다. 그리고 말씀은 질서적인 방법에서 천국들을 통하여 걸러지고, 마지막으로 인간들과 더불어 쉼에 이른다. 그러므로 말씀은 천사와 인간의 지각에 잘 어울리게 되어 있다.
이것은 왜 천사들이 말씀을 가지고 있고, 지상의 인간이 읽듯 그들도 읽는 가에 대한 이유이다. 천사들은 말씀으로부터 그들의 모든 믿음들, 가르침, 설교를 이끌어 낸다. 말씀은 지상의 것과 아주 같은데, 한가지 예외는 우리에게 있는 글자 의미인 자연적 의미가 천국에는 없다는 것이다. 대신 영적 의미가 있고, 이것은 말씀의 내적 의미이다. 말씀은 신성이 맨 마지막인 글자에 내려와 존재하는 곳이다는 것은 세상에서 폭넓게 생각되고 있다. 그러나 그 안에 이 신성의 속성이 놓여 있다는 것은 알려져 있지 않다. 가장 높은 천국에서, 글쓰기는 천국의 모양을 간직하는 굽어진 글자나 둥그런 글자로부터 형태를 지어간다. 경이로운 대목 하나는, 천사들에게 언어가 주어진 방법과 같이 위와 같은 글 쓰는 방법은 가르쳐질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이런 글쓰기가 천국의 글쓰기이다. 지상 최초의 인간들은 글자들이 창안되기 전 이런 종류의 글쓰기를 지녔다. 이 글쓰기가 언어 안으로 이어졌고, 이 글쓰기는 말씀이 근원적으로 씌어진 방식이다. 이런 이유로 근원적 글자들의 세세한 모양들에서 조차 감추인 의미와 신성한 것이 있는 이유이다.
천사들은 천국적 필기체인 이 글쓰기를 통해 아주 정밀하게 자기들의 생각들과 애착들을 표현할 수 있다. 이 글쓰기는 단지 생각만으로부터서는 가늠할 수 없는 많은 감추인 것을 함유한다. 그러나 낮은 천국들에는 이런 종류의 글쓰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낮은 천국에는 세상의 글자 종류만큼이나 많고 유사한 글자가 있다. 그렇다 해도 이 글자가 인간들에게는 납득될 수 없는데, 그 이유는 이것 역시 천국의 천사들의 언어이기 때문이다. 이 글쓰기는 인간들이 많은 페이지들에서 기술할 수밖에 없는 것도 몇 단어들로 표현할 수 있다.
하나 더 언급할 만한 것은, 천국의 이런 글쓰기는 아주 자연스럽게 천사들의 생각함으로부터 별 노력함 없이, 어떤 주저함도 없이 흐른다는 것이다. 생각이 객관화 된다. 그리고 단어들 자체는 천사의 생각과 상응하므로 이는 동시적으로 와진다.

천국에 있는 천사들의 순진

순진이 무엇인지 아는 인간은 이 세상에는 거의 없다, 그리고 악한 자는 순진에 관해 전혀 모른다. 순진은 얼굴에서, 말투에서, 동작에서, 특별히 어린이에게서 보여질 수 있는 가시적인 특성이 있다. 인간들은 순진이 무엇인지 모른다. 더구나 순진은 천국 자체가 있는 곳 이다는 것, 인간 내에 저장되어 있다는 것을 모른다. 순진에는 어린 아이의 순진과 지혜의 순진이 있다. 전자는 진짜 순진은 아니고 바깥쪽 모양에서만 순진일 뿐이다. 그럼에도 우리가 그 순진으로부터 진정한 순진에 관하여 배우는 것은 가능하다. 이 순진은 작은 어린이의 얼굴에서, 어느 정도는 그들의 움직임에서, 그리고 그들의 아주 어린 시절의 말투로부터 빛을 발하고 있다. 작은 어린이 자신들은 더 깊은 생각들을 가지지 못하는데, 그 이유는 그들이 선과 악 사이의 차이를 모르기 때문이다. 그 결과 그들은 어떤 자아 동기, 또는 악한 의도를 가지지 않는다. 이 아이들은 자신들에게 어떤 공로도 돌리지 않는데, 그 이유는 모든 것이 부모로부터 임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기에게 주어진 조그만 것들 가지고도 만족하고 행복해 한다. 그들은 먹는 것, 입는 것, 미래를 위한 것에 걱정하지 않는다. 그들은 세상을 시샘하며 쳐다보지 않는다. 그들은 자기들의 양친을 사랑하고 또 자기들 주위의 인간들을 사랑한다. 그들은 자기들을 인도해가도록 자신들을 허용한다. 그들은 행복하게 귀기울이고, 순종한다. 이런 어린 아이의 순진은 그들로 예법이나 말씨, 기억함, 생각을 배우는 수단이고, 이를 수단으로 위와 같은 것을 그들 안에 저장한다. 그렇다해도 이 순진은 바깥쪽 만에 속하는데, 그 이유는 몸에 속할 뿐, 마음에 속하지 않기 때문이다.
지혜의 순진은 진짜 순진이다. 그 이유는 그것이 내부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이 순진은 마음에 있는 의도와 생각으로부터 오고 있다. 순진이 있는 것들 안에 지혜도 있다. 그래서 천국에서는 순진은 지혜 안에 있다라고 말해진다. 또한 천사는 자기가 얼마나 순진한지에 따라 슬기롭다. 그다음 천사들은 자신 안에 있는 어떤 선을 두고 자신의 공로 때문이라고 하지 않는다. 오로지 자기들은 주님으로부터 받은 것들이므로 주님의 공로임을 인정한다. 그들은 주님에 의해 인도되고 싶어한다.
그들은 선인 것을 사랑하고 진리 안에서 즐거워 한다. 그들은 자기가 가진 것이 많든 적든 만족하며 살고 있다. 그들은 자기들이 가진 것이 자신이 받을 수 있는 최대한도의 것임을 알고 있다. 그들은 미래에 관하여 근심이 없다. 그리고 그들이 원하는 모두는 주님의 인도를 받는 것, 자기들이 받는 모든 것의 공로를 그분께 돌리는 것이기 때문에 그들은 그들 자신의 이기적 경향성으로부터 안전하게 보호되고, 그들이 더 그럴수록 더욱 주님으로부터 흘러온다. 순진은 천국의 참 본질이다. 이런 이유로 순진의 특성을 자기 내부에 가지지 않으면 아무도 천국에 입장하지 못하는 것이다.

천국에 있는 천사들의 평화

천사들이 천국에서 가지는 평화가 어떤 종류인지를 서술한다는 것은 조금 힘들 것 같다. 따라서 하느님 안에서 만족하는 인간들의 ‘마음의 평화’에 비교해보는 것만이 가능할 것이다.
천국에는 두 개의 근본되는 특질이 있다: 순진과 평화이다. 이 둘은 모두 주님으로부터 온다. 순진은 천국에 있는 모든 선의 근원이고, 평화는 선인 것의 모든 기쁨의 근원이다. 모든 선은 그 선 자신의 기쁨을 가지고 그들 모두 사랑으로부터 온다. 순진과 평화 모두 주님의 신성한 사랑으로부터 오고, 그것들은 그것들의 참 심정으로부터 천사들에게 영향을 끼친다.
평화의 근원은 주님 자신 안에 있는 신성한 평화이다. 이는 신성 자체와 주님에 있는 ‘신성한 인간’의 합일로부터 온다. 이와 같이 평화는 신성의 어떤 것인 바, 천국에 있는 모든 것에 행복을 가지고, 특히 기쁨을 가지고 더 깊숙이 영향을 준다. 평화는 천국과 더불어 그리고 거기 각 개인과 더불어 있는 주님의 연결 고리이다. 이로부터의 결과로서 천사들은 모든 것을 축복으로 받고, 인간들이 천국의 기쁨이라 부르는 것을 느낀다.
이 특성들은 인간들이 세상에서 사는 한, 인간들 안에서 감추여 놓인채 그 인간과 동떨어져 있다. 그리고 그가 자기 몸을 떠나 모든 것이 벗겨져 있는 곳인 영계에 들어가서야 밝히 들어나게 된다.
신성한 평화는 선인 것과 진리인 것이 하나될 때 도래하기 때문에 천사들은 자기들이 사랑하는 상태에 있을 때 평화 안에 있게 된다. 그 이유가 사랑하는 상태에서만 그들 안의 모든 것은 하나로 가능하기 때문이다. 세상에서의 평화는 적대적인 것의 중지 또는 문제가 있는 것들이 제거될 때 라고 말하는 것을 듣는 천사는 말하기를, 그들 자신 안에서 이것들은 평화가 전혀 아니다고 한다. 진짜 평화, 천사들은 말한다, 천국의 선 안에 있는 인간에게 있다고… 그 이유는 이 선 안에만 평화의 존재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평화는 실제로 주님으로부터 천국의 선에 있는 인간의 중심 안으로 흘러들어 그들의 낮은 수준 아래로 흐르고, 그들의 내적 마음에 평화를 가져다 주고, 그들의 바깥쪽 마음에 고요함을, 결과적으로 기쁨을 가져온다.

천국과 인류 사이의 연결 고리(link)

많은 인간들이 아는 바, 선한 모든 것은 하느님으로부터 있고, 인간으로부터서는 하나도 있지 않다는 것, 그리고 악은 악마로부터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위의 어떤 것도 인간과 천국 사이에 연결 고리(link), 그리고 지옥과의 연결 고리가 있지 않으면 있을 수 없다. 이 연결고리는 인간의 의도와 생각과 더불어 있다.
각 개인과 더불어 선한 영들과 악령들이 있다. 이 영들을 통하여 인간은 천국과 지옥과 연결된다. 이런 영들은 천국과 지옥 사이 중간쯤에 있는 영들의 세계 안에 있다. 이 세계의 자세한 설명은 이미 앞 편에서 취급했다.
영들은 자기들이 어떤 인간과 연결되어 있는지를 결코 알지 못한다; 그러나 그들이 누군가와 더불어 있을 때 그들은 그 인간의 기억들과 생각들이 자기 것이라고 믿는다. 인간과 더불어 있는 영들은 그 인간 자신의 사랑과 똑같은 품질 속에 있다; 그러나 인간 자신은 악한 영들을 초대하는 것과는 반대로 선한 영들은 주님에 의해 그 인간에게 연결되어져 있다. 인간과 더불은 영들이 그렇다 해도 있는 그대로의 생명은 변해지고 그가 사랑하는 것이 바뀐다. 이렇게 인간은 자기와 더불어 아주 어린 시절부터, 어떤 이는 후기 어린 시절부터, 누구는 청년기부터, 성년기부터, 혹은 노년 시절에야 이러한 어떤 영들을 가지고 있다.
순진한 영들은 초기 어린 시절에 현존하고, 이들은 순진의 천국과 자신들을 연결해놓고 있다; 학식을 사랑함을 가진 영들은 후기 어린 시절에 현존한다. 진리와 유용함에 애착하는 영들은 젊은 성년기와 만숙기에 현존한다. 그리고 노령기의 영들은 지혜와 순진에 포함되어 있는 인간에게 현존한다.
천사들과 인간들 사이의 연결 고리는 자기들의 이해함이 개혁되어질 수 있고 그리하여 거듭나질 수 있는 인간들과 더불어서만 존재한다. 이것은 바뀌어질 수 없는 인간들과 더불어서는 다르다. 허지만 그들 역시 선한 영을 수단으로 악으로부터 제지되어지도록 선한 영들이 그들과 함께 있는 것은 확실하다. 그러나 그들의 직접적 연결은 지옥을 왕래하는 악령들과 더불어 있다. 결과적으로, 영들은 자기와 연결된 인간과 같은 종류의 영을 가지게 된다. 만일 그들이 자신들을, 또는 돈, 복수, 간음을 사랑하면, 그다음 이런 것을 사랑하는 이와 비슷한 영들이 그 인간과 있게 된다. 이런 영들은 악한 바램 안에 거처를 정한다. 인간이 선한 영들에 의해 악한 어떤 것을 행함으로부터 간직될 수 없는 만큼 이 악령들은 불 가운데 자신을 놓는다. 그리고 이 바램이 그 인간을 지배하는 한 그 영들은 착 들러붙어 떠나질 않는다. 이렇게 악한 인간은 지옥과, 선한 인간은 천국과 연결되어져 있다.
영들을 수단으로 주님에 의한 인간의 통치는 영들이 행하는 방식 안에서 일어난다. 그 이유는 세상에 있는 인간은 천국의 모형(pattern) 안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인간은 지옥에 속하는 악한 것들을 향하려는 경향성들을 가지고 태어난다. 이 경향성은 신성한 질서에 정 반대이다. 따라서 인간은 위와 같은 영들과의 간접적 연계를 수단으로 가능할 뿐인 천국의 모형(pattern) 안으로 되돌려질 필요가 있다. 만일 인간들이 천국의 모형 안으로 태어나졌다면 상황은 아주 달랐을 것이다. 그 이유가 그럴 경우 인간은 영들을 통하여 주님에 의해 통치되어질 필요가 없고, 그들은 일반적으로 흐르는 질서 자체를 수단으로 인도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지상의 인간은 자기의 생각함과 바램으로부터 언어와 말함이라는 행동 안으로 오는 것과 같은 일반적 영향력에 의해 통치되어진다. 이것 모두는 직접적으로 흐르는 바, 그렇게 해서 그 인간과 더불어 연결된 영들이 그 인간과 공통되는 것이 없도록 한다.
주님 자신이 천국의 모형을 유지하는 개개인 안으로 흘러 인간의 가장 깊은 수준, 뿐아니라 그의 더 바깥쪽 수준 안으로 흐르고 있으시다는 것을 실감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리고 이 인간은 천국을 받기 위하여 이런 것들을 배열한다. 이 영향은 직접적인 것이라 불리우고, 이에 비해 영들의 영향은 간접적이다. 두 번째 영향은 첫 번째 영향에 의해 가능해진다.
영들은 자신의 생각들을 인간들 안으로 도입하지 않는다, 그러나 오히려 선과 진리인 것, 또는 악과 거짓인 것을 위한 사랑의 애착 안으로 도입한다. 이런 까닭에 인간은 선인 것, 악인 것 사이에 기본적 선택(권)을 가진다. 인간은 이 둘 사이에서 선택하되 자유로운 상태에서의 선택함만이 있다.
인간은 이 둘을 곰곰이 생각해봄으로 선인 것은 받고 악인 것은 거절할 수 있다. 그리고 그가 수용하는 것은 그의 일부가 되어가고, 그가 거절하는 것은 그의 것이 되지 않는다.

인간을 천국에 연결하는 것은 말씀이다

깊이 생각하는 인간이라면, 모든 것은 그것의 근원과 연결되어 있고, 그렇지 않은 것은 분해될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저절로 존재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말이다. 모든 것은 그것에 앞서 거기에 있었던 어떤 것으로부터 온다. 생각이 깊은 인간이라면, 실체란 존재 안으로 계속 들어옴이다는 것 또한 실감하고 있다. 이것이 어떻게 그렇게 되는지를 서술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우리는 자연계가 모든 것의 근원인 영계와 상응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 또한 인간과 더불어 행해지는 모든 것과 천국의 모든 것 사이에도 상응이 있어 연결되었다고 말할 수는 있다..
인류가 천국으로부터 돌아서 자아와 세상을 향함으로 천국과의 연결은 절단되나 그 후, 주님은 천국과 인류 사이의 연결을 보존하는 수단을 설비하셨다. 이 중간 고리가 말씀이다.
말씀은 그 안에 있는 모든 말들과 그것의 의미가 상응관계에 놓여 있게 하는 방식에서 씌어졌다. 그리하여 이 의미는 천사가 연루되는 영적 또는 내부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인간이 말씀을 읽고 말씀의 글자 의미를 이해할 때, 그 인간과 함께 하는 천사들은 동시에 내부 의미를 이해하고 있다. 천사들은 영적으로 생각하고 인간들은 자연적으로 생각한다. 이 둘은 다르게 보일런지 모르나 그럼에도 그 둘은 하나인데, 그 이유는 그 둘은 상응하기 때문에서이다. 이 둘은 연설자의 말들 같이 거의 하나를 만들고, 그것의 효과는 연설의 말들이 아닌 의미에 초점을 맞추어 이해한 청중자와 같다.
또한 말씀은 교회 밖에 있는 인간과 천국을 연결한다. 주님의 교회는 보편적인 바 어떤 것이 신성으로부터임을 인식하고, 그들의 이웃을 사랑하며 사는 모든 인간 안에 존재한다. 이 인간들이 죽을 때, 그들은 천사에 의해 가르침을 받고, 기쁘게 신성한 진리들을 받는다. 이 보편적인 교회는 주님이 보시기에 마치 천국이 그러하듯, 하나의 인간 같다. 그러나 말씀이 발견되는 교회, 말씀을 수단으로 주님이 알려진 교회는 인간 속의 모든 기관과 몸에 생명을 가져다 주는 ‘심장과 폐’와 같이 개인, 즉 하나의 인간 같다.
만일 인간이 이 내부 의미가 존재함을 알았고, 그가 말씀을 읽을 때 이 의미에 대한 어떤 지식으로부터 생각하려 노력했다면, 그는 더 슬기로워지고 천국과의 연결은 더 밀접하고 더 단단한 연결 고리를 형성해 있을 것이라고 천사들은 말한다. 이를 통하여 그는 천사들과 같은 종류의 생각들 안으로 와질 것이다.

천국과 지옥에는 인류로부터 온 인간들이 산다

천국에 미리 창조해둔 천사는 없다. 그리고 빛의 천사로 창조되고 그다음 내던져진 악마도 지옥에 없다. 천국과 지옥에 있는 모든 이들은 어떤 예외 없이 인류로부터 온다. 이것은 천사들의 마음과 인간의 마음 사이의 유사성을 가지고 확증되어질 수 있다. 두 마음 모두는 이해하는 능력, 지각하는 능력, 다각적인 것을 추론하는 능력, 의도함, 또는 뜻하는 능력을 공히 가지고 있다; 마음의 두 형태들은 천국이 받아지도록 모양지어져 있다. 인간 마음은 천사의 마음 만큼이나 슬기로움을 성장하게 할 수 있는 잠재성을 지니고 있다. 그런데 이 세상에서 그렇지 않는 이유는 마음이 자연적으로 생각하는 물질적 수준에 한정되어져 있기 때문이다.
허나 사후에는 아주 다르다, 그 이유는 그 때에는 마음은 더 이상 자연적으로 생각하지 않기 때문, 그리고 인간의 자연적 마음이 표현할 수 없고 이해될 수 없는 사상들을 영적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때에는 천사 같이 생각하고 이해한다. 이것은 인간의 안쪽 부분-그의 영-은 천사와 인간 모두에서 잠재성 안에 있었지만 그가 지상의 몸에서 해제 될 때, 사실 그는 천사이었다는 것을 확증해준다.
그런데 인간의 이 안쪽 부분이 더 높은 것을 향해 열리지 못하고 더 낮은 것만을 쳐다 볼 경우, 그 상황에서 그의 영이 몸으로부터 석방되면 그 영은 인간 모양 안에 있고 악마적으로 된다. 그것은 천국을 쳐다 볼 수 없고 오로지 아래쪽인 지옥을 좋아할 뿐이기 때문이다.
신성한 질서가 어떻게 일하는지를 이해하는 이들은 인간이 천사가 되어지도록 창조 되었다는 것도 지각할 것이다. 그 이유가 천국의 생명과 천사의 생명의 기초가 그 인간 안에 형성되어 질 수 있기 때문이다. 신성한 질서는 마무리함 없이 결코 멈추지 않는다. 이 질서는 그것 자체가 자기의 모양을 옷입고 번성하는 수준에까지 진보해간다. 천국의 씨앗판은 인간의 이 수준에서 천국에서 천사가 되도록 하기 위해 인간 속에 미리 창조되어 있다.

교회 밖에서 태어난 인간의 경우

교회 밖에서 태어난 인간은 구원되어질 수 없다는 것이 일반적인 사고이다. 그 이유는 구원받으려면 말씀과 주님에 관한 지식이 있어야 하는데, 그들에게 이것이 없기 때문이다 라고 말한다. 그럼에도 그들이 구원되어짐을 보여주는 한가지 사실은 주님의 자비는 보편적 진리이다는 것, 그분의 자비는 개별적인 모든 인간에게 뻗쳐나간다는 사실이다. 교회 밖에서 태어난 이들은 교회 안에서 태어난 인간 만큼 인간으로 태어난다. 그들이 주님에 관한 지식을 가지지 못한 것은 그들의 과오가 아니다.
이성은 우리에게 말한다. 아무도 지옥에 가도록 태어나지 않는다고…그 이유는 주님이 실지로 사랑 자체이시고, 그분의 사랑은 모든 이를 구원하고 싶은 바램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고로 그분은 모든 인간이 종교에 관한 어떤 생각을 가지고, 이를 수단으로 그들이 신성으로부터 있는 어떤 것에 대한 느낌을 가져 더 높은 생명의 수준을 가지는 것을 보증하신다. 어떤 종교에 의해 산다는 것은 생명을 더 깊게 고찰함으로부터 산다는 것을 단순히 뜻한다. 그 다음 인간은 주님 속에 있는 것에 초점을 맞춘다. 이것에 집중하는 만큼, 인간은 세상에 그의 초점이 없고 그의 사고는 생명의 바깥쪽 사고로부터 더 멀리로 이동한다.
우리는 알 수 있다. 즉 모든 이 각자는 자기 안에서 무엇이 천국을 만드는지 이해할 때 구원되어질 수 있을런지 모른다는 것이다. 천국은 당사자 안에 있고, 자기와 더불어 천국을 가진 인간은 천국 안으로 입장한다는 것이다. 인간 안에 있는 천국은 신성을 인식하고 신성에 의해 인도되고 있다. 모든 종교의 첫째가는 필수는 신성인 것에 관한 인식이다. 이 인식함이 없으면 종교도 없다. 모든 종교의 법들은 예배에-즉 예배가 인간들에게 수긍되도록 어떻게 주님을 예배하느냐에 중심을 두고 있다. 그리고 이것이 각 개인의 마음 안에서 바램이 될 때, 그때에 그는 주님에 의해 인도되어진다.
교회 밖의 인간들도 교회 안의 인간들 만큼이나, 때로는 더 낫게 도덕적인 생활, 올바른 삶을 영위한다. 도덕적인 생활에는 두 가지가 수반된다. 신성으로부터의 어떤 것을 위함, 또는 세상에 있는 인간을 위함이다. 이 둘은 똑같지 않다; 외견상 이 둘은 같아 보이지만 내향적으로는 아주 다르다. 전자는 인간을 구하나 후자는 그렇지 않다. 신성인 것을 위하여 도덕적 삶을 사는 인간은 주님에 의해 인도되어지고, 한편 세상 인간 앞에 보이기 위한 도덕적 삶은 자신에 의해 인도되어진다.
위의 뚜렷한 구분을 위해 예를 드는 것도 유용할 듯 싶다. 이웃에게 잘못을 하지 않는 이유가 그것이 종교에 반대되기 때문이라면 그 인간은 영적 동기로부터 자제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달리 법이 두려워서, 자기 명성을 잃을까봐, 자신의 이득을 위하여 자제하는 인간은 자연적 동기로부터의 자제이고 자신에 의해 인도되어 간다. 도덕적 생활이 영적인 인간은 자기 안에 천국을 가지나, 영적이지 않은 인간은 자기 안에 천국을 가지지 못한다. 이런 이유로 천국은 더 높은 수준으로부터 안으로 흘러들고, 그 인간의 내부 수준들을 열고, 이를 통하여 그의 바깥쪽 생활 안으로 흐른다; 이에 비해 세상적인 것은 더 낮은 수준으로부터 흘러들고 삶의 안쪽이 아닌 더 바깥쪽 수준들에 영향을 미친다.
이 인간에 있는 천국의 상태와 저 인간에 있는 천국의 상태는 광대하게 다양하다. 이것은 인간 안에 있는 천국의 생각들의 품질에 따라 다양해진다. 그 다음 교회 밖에 있는 이들, 그들이 진정한 생각들을 직접적으로 눈치채지 못했을런지 몰라도 그들이 가진 사랑 때문에 다른 삶에서는 궁극적으로 그것들을 받을 것이다.
주님으로부터 떨어져서는 구원이 없다는 것은 진실인데, 이를 더 꼼꼼히 말하면 주님을 제외하고는 구원이 없다를 뜻한다고 이해해두어도 무방할 것이다.

천국에 있는 어린 아이들

혹 어떤 인간들은 이렇게도 믿는다. 교회 내에서 태어난 아이들 만이 천국에 갈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인간들은 더 말한다. 교회 내에서 태어난 아이들은 세례를 받았는 바, 교회의 신앙에 입문한 것이나 다름없다고 한다. 그러나 이런 인간이 모르는 바, 단지 세례를 통해서만이 신앙을 획득하고 천국에 들어가는 자는 아무도 없다는 것이다. 세례는 인간이 재탄생되어야 할 필요가 있음을 기억하라는 단순한 표시 역할을 수행할 뿐이다는 것이다.
모든 아이들, 어디서 그들이 태어났든 그들이 죽을 때는 주님에 의해 영접된다는 것, 그리고 그들은 천사들에 의해 양육되어진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이 세상에서 죽는 아이들은 다른 삶에 있는 많은 아이들과 같고 지상에서 가졌었던 품성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똑같은 어린아이 같은 마음, 같은 순진, 같은 상냥함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이 단계에서 잠재적으로만 천사일 뿐이나, 천사가 되는 과정을 밟고 있고 때가 차면 예외 없이 천사가 된다. 이 세상 삶을 통과한 모든 이는 저 곳에서 이곳에서와 비슷한 상태에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젊은이였으면 젊은이 상태를 발견하고 어린이는 어린이 상태를 발견한다. 이후 각 인간의 삶의 외관의 상태는 바뀐다. 이 때 어린아이는 타 연령층에 비해 장점이 크다. 즉 그들은 아직 순진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자기들 삶에 의한 악은 아직 기반도 제대로 되어있지 않다. 그들의 순진은 모든 천국의 특성들이 그들 안에 이식될 수 있게 한다. 그 이유는 순진은 천국의 저장소이기 때문이다. 저 세상에 있는 어린이의 상태는 이 세상 어린이의 것 보다 더 낫다. 그 이유는 저곳의 어린 아이들은 모든 제한들을 지닌 육체로 옷입혀 있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천사 누구와 닮았다. 이 세상에서 작은 어린이는 걷기를 배워야 하고, 자기 움직임에 협조하는 법을 배워야 하고, 어떻게 말하는지를 배워야 한다. 자기의 감각들 조차 연습에 의해 점차적으로 발달시켜야만 한다. 육체의 몸은 그 자체 딱딱하다; 육체의 몸은 그것의 감각을 내부가 아닌 외부로부터 받는다. 이것도 저 세상 어린이와는 다르다. 영인 바, 그들은 자기들 내에 있는 것과 일치하여 동시적으로 행동한다. 비록 처음에는 생각들의 연속성이 없다 할지라도 연습 없이 걷고, 이야기한다. 이런 능력 조차 머지 않아 발달한다. 그 이유는 그것들의 바깥쪽 형태가 내적 상태와 하나되어 있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죽은 후 그들을 소생시킴은 즉각 있고 이후, 그들은 천국으로 데려와져 이 세상에서 아이들을 사랑했고 또한 하느님을 사랑했던 여성 천사의 보살핌 아래에 있는다. 이 여인은 자기의 특유한 품성 때문에 어린이를 자신의 아이인 냥 받는다. 그리고 아이들은 그들의 안쪽 출생 본성으로부터 이 여인들을 비록 그들 고유의 어머니가 있다 해도 사랑한다. 각 여인들은 자기들이 원하는 만큼의 여러 어린이들을 자기들의 영적인 부모 사랑으로부터 돌본다.
천국에 있는 어린이들은 천사가 주님을 쳐다보는 선(line)을 따라 오른 쪽에 있다. 그들은 직접적인 주님의 시야와 돌보아주심 아래 있는 천국의 영역에 있다.
이제 천국의 어린이들이 어떻게 양육되는지 기술해보자. 그들은 자기들의 보호자로부터 말하기를 배운다, 그리고 자기들의 말을 시작하는데 이는 그들의 애착으로부터의 단순한 소리들이고, 이것은 발달하기 시작하는 생각들로서 더 맑게 점진적으로 되어간다. 천사의 모든 말은 애착으로부터 튀어나오는 생각-형체들(thought-forms)이다.
무엇보다 먼저 어린이들을 둘러싸고 있는 사랑스러운 것들이 그들의 애착 안으로 부드럽게 스며들고 아이들이 보도록 주어진다. 이 대상물은 근원에서 영적이기 때문에, 어린이가 그것들을 봄과 동시에 천국의 것들이 흘러든다. 이 방식에 어린이의 내적 수준들은 열려지고, 날마다 그들은 더 완전해져 간다. 이 첫 단계가 설립될 때, 어린이는 자기들이 가르침을 받는 또 다른 천국으로 데려가지는데, 이 과정은 계속된다. 아이들이 가르쳐지는 주요 수단은 각자의 특별한 이해 수준에 적합할 수 있는 것들의 표현들이다. 이 표현은 너무나 아름답고 지혜로 꽉 차 있어 그들은 묘사해보는 것조차도 거부한다.
아이들이 지혜와 이해함을 획득했을 때, 그들은 천사들이 되어가는 바, 이제 더 이상 어린아이 같이 보이지 않고, 성인들 같은, 성인의 지혜와 완전함이다. 아이-천사들이 지혜 안에서 자랄 때 더 만숙하게 보이게 되는 이유는 지혜가 영적 자양분이기 때문이다. 그들의 마음에 먹이가 되는 진짜의 것들은 그들의 몸에게도 먹이가 된다. 이것은 상응으로부터 있다. 그 이유가 그들의 몸의 모양은 그들 내부의 바깥쪽 표현 밖에 더 아니기 때문이다.
한가지 더 알만한 가치가 있는 것은 천국에 있는 어린이는 젊은 성인 시절이 개시되지만 이 시기를 넘는 노년기는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들은 영원히 젊은 성년기에 머문다.

천국에 있는 슬기로운 자와 단순한 자

세상에서 상식화 되다시피 한 것이 있다. 총명은 학자와 학문의 문제이다는 것, 그러므로 현자는 단순한 자 보다 천국에서 더 영광되고 상위에 있을 것이다 라고 단정한다. 그러나 천국의 총명은 이런 속성에 있지 않다. 천국의 총명은 진리인 것을 사랑함으로부터 오는 내부의 총명이다. 이 총명은 세상이나 천국의 영광을 위함이 아니고, 진리 자체를 위하여서 이다. 이 총명은 천사들을 더 깊은 감정과 기쁨으로 채운다. 진리인 것에 의해 움직여지고 기쁨을 갖는 인간들은 천국의 빛에 의해 영향받아진다. 그리고 만일 그들이 이것을 수단으로 움직인다면, 그 다음 그들은 신성한 진리, 사실상 주님 자신에 의해 움직여진다. 이런 이유는 천국의 빛이 천국에 계신 주님이기 때문이다.
천국의 빛은 이 빛을 받도록 특별히 모양을 갖추어 온 마음의 더 깊은 수준에 들어갈 수 있고 영향을 줄 수 있다. 천국의 빛은 마음에 영향을 주고 마음을 기쁨으로 채우는 방식으로 들어간다. 그 이유가 천국으로부터 흘러들고 받아지는 어떤 것은 자체 내에 즐거워하고 유쾌한 어떤 것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진리인 것에 대한 순수한 애착의 근원이다. 이 애착을 가지고 진리를 받는 인간은 천국에서 빛을 낸다고 말해진다. 그러나 자신의 영광을 위해 진리를 추구하는 이들은 천국에서 빛을 낼 수 없다. 그 이유는 그들이 그 자체 어둠인 세상적 빛에서만 있기 때문이다. 실로, 자아-영광이 그들의 주된 동기이고 그들이 기대하는 유일한 목적이다. 이럴 경우, 의문을 지닌 인간은 우선 자신에 초점을 맞추고 목적에 대한 수단으로 진리를 단순히 사용한다. 그 결과 그는 자기의 눈을 천국으로부터 세상으로, 주님으로부터 자신에게로 향하게 한다. 외관상, 이런 종류의 인간도 진실로 빛 안에 있는 인간 만큼 학식 있어 보인다. 그 이유가 그들도 똑같이 말하기 때문이다. 때로 바깥쪽일 경우, 그들이 더 슬기로운 자 같은데, 그 이유는 자아-영광에 의해 재빠르고, 천국을 모방함에 더 숙달되었기 때문이다. 허지만 그들의 내부는 판이하고, 이런 것들은 천사들에게는 환히 보인다.
인간이 이 세상에서 획득하고 발달시키는 품질들은 당사자와 함께 머문다; 그는 죽을 때 자기와 더불어 그 품성들을 가져간다. 그들은 사후에도 계속 발달 시킨다. 그러나 그것을 선한 용도에 놓으려는 그의 바램과 진리인 것에 대한 그의 애착의 크기에서 일 뿐이다. 바램이 작으면 발달함도 미미하고, 크면 발달도 규모가 있다. 어쨌든 각자는 그가 받을 수 있는 만큼만 받는다. 그 이유가 사랑은 그 자체와 일치하는 모든 것을 끌어당기기 때문이다.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가진 모든 자에게, 그것은 주어질 것이다. 그렇게 해서 그는 더 큰 풍부함을 누릴 것이다” (마태 13:12).
진정한 총명과 지혜는 선과 진리인 것을 지각하고, 그 결과 악과 거짓인 것을 보고, 그리하여 내면의 지각으로부터 이 둘 사이를 명백하게 구별함에 놓여 있다. 총명하고 슬기로워지기 위해, 인간은 많은 것, 즉 천국과 영적인 것, 뿐만 아니라 세상의 방법들을 계속 배워갈 필요가 있다. 인간이 계속 배우고 배웠던 것을 생활에 응용하는 만큼, 그는 슬기로워지고 총명해진다. 그 이유는 완전에 더 가까워지기 때문이다.
단순한 인간은 내적 수준들이 열려있는 이들이지만 영적 진리나 자연적 진리들을 수단으로 발달되지 않는다. 그들은 들을 때 어떤 것이 진리인지를 지각한다. 그러나 그들은 그 자체로는 그것들을 보지 못한다. 슬기로운 자는 내부의 수준이 열려있을 뿐 아니라 발달되는 이들이다. 이 두 부류의 인간 모두 자신 안의 진리를 보고 지각한다.

천국에 있는 부자와 가난한 자

누가 천국 안으로 받아들여지는가에 관한 생각은 여러 가지로 난무한다. 어떤 이는 가난한 자는 들어가고, 부자는 아니다고 상상한다; 어떤 이는 부자든 가난한 자든 공히 받아들여진다고 믿는다; 한편 또 어떤 이는 부자는 자기의 재물을 포기해서 가난해질 때까지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고 믿는다. 위 같은 이런 저런 견해들은 성경의 어떤 문단에 기초를 두는 일이 흔하다.
그러나 부자와 가난한 자의 천국 입장 여부를 놓고 말하는 인간들이 대체로 실패하는 대목은 이와 관련된 성경의 의미를 이해함에서 이다. 성경은 어느 문제이든 그것이 자연적 형상들을 가지고 표현되었을 뿐 성경은 영적 문제들에 관한 것을 취급한다.
글자 직역주의자들은 아래와 같은 성경 구절의 요점을 놓치기 십상이다.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귀를 통과하는 것만큼 힘들다”, 또는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 그 이유가 천국의 왕국이 그들의 것이기 때문이다.” 성경을 영적으로 이해하는 이들은 다른 방법으로 의미를 본다. 이들은 알고 있다. 즉 천국은 각자가 부자든 가난하든 어찌되었든 신앙과 사랑에 기초를 두고 생활하는 모든 인간을 위해 존재한다는 것이다. 또한 자기가 부유하다고 해서 무턱대고 천국을 부인하는 자 아무도 없고, 자기가 가난하다는 이유로 천국에 받아지지 않는 자 아무도 없다. 부자나 가난한 자 모두 천국 안에 있다. 그리고 많은 부자들이 가난한 자보다 거기서 더 큰 영광과 행복 안에 있다. 이 말을 이해하려면 성경에서 ‘부자’와 ‘가난한 자’가 누구를 의미하는지를 정밀하게 살펴야 한다.
어떤 인간이 세상의 인간 같이 외향적으로 살런지 모른다. 그는 부자가 되고, 삶의 좋은 것들을 즐긴다. 이런 것의 어떤 것도 그의 천국 입장에 걸림돌은 아닐 것이다. 단지 조건이라면, 그가 자신 안에서 하느님에 관해 잘 생각하고, 그의 이웃을 공정히 대우해야 한다는 점이다.
인간의 행동들, 이것 가지고 인간은 판결받는다고 말씀에서 말해지는데, 실지로는 그로 하여금 행동하게 하는 것인 그의 생각과 애착에 의해 판결받는다. 다시 말해 인간의 삶의 바깥쪽 것이 아닌, 그의 내부의 삶의 조건만이 구원 여부를 결정한다. 부자의 헌금과 가난한 자의 헌금은 자연적 규모에서는 차이가 클지언정, 영적 규모에서는 전혀 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자신 안에서 하느님에 관해 생각하고 이웃에게 친절을 베풀기를 원하는데, 바깥쪽으로는 여러 방식에서 또 다른 인간 같이 살 수 있다. 이럴 경우 그는 많은 인간들이 믿는 천국 가는 진행절차에 별 어려움이 없다. 유일한 어려움은 자아와 세상 사랑에 저항하고, 이 사랑이 자신을 선점하는 것을 멈추게 할 수 있느냐 이다. 그 이유는 이것이 모든 악의 원인이기 때문이다. 인간이 자아와 세상적 바램들로부터 오는 악들에 저항하는 만큼 그는 자신이 아닌 주님에 의해 인도된다. 하여 그 다음 주님은 인간이 저항해왔던 이런 것들을 인간 안에서 제거하실 수 있다.
사랑과 선용의 삶-공의와 공정인 것을 행함이 천국으로 인간을 인도한다; 이것은 경건의 생활 또는 세상을 단념함이 아니다. 그 이유가 인간은 일반적 활동 안에 포함되어져 있을 때 만이 자기 삶이 무엇을 표현하는지 알 수 있고, 천국을 위한 훈련 안에서 성장이 시작된다. 만일 그가 세상으로부터 철수한다면, 이 발달은 발생할 수 없다. 각 개인의 삶은 그와 더불어 사후 남는다. 이것은 그가 부자이건 가난하든 상관 없는 일이다. 이 인간이 저 인간 보다 더 특별하다 말할만한 허가 조항 따위는 없다. 착하게 살았던 인간이 천국 안으로 온다. 그리고 악하게 살았던 인간은 그렇지 않다.
부유함은 세상에서 상대적으로 규모가 큰 공익(use)을 일궈낼 수도 있다. 그리고 부유한 인간은 가난한 인간이 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복지를 제공할 수 있을런지 모른다. 만일 재물이 이런 방편에서 사용되어진다면, 그들 역시 게으름(무익함)으로부터 인간의 마음이 물러나게 하는 일을 가능하게 한다. 이 게으름은 해로운데, 그 이유는 이 게으름 안에서 인간은 그가 지니고 태어난 악으로부터 악질적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재물 자체를 목적으로 사랑되어졌던 부유함과 더불어서는 아주 판이하다. 사후 이런 것들은 혼 없는 몸 같이 더러워지고 부패해진다.
가난한 인간은 가난함을 이유로 해서 천국에 입장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의 삶의 품질에 따라서 가능하다. 경우에 따라 가난 자체가 인간을 천국으로부터 더 멀어지게 할 수 있다. 이는 부자도 마찬가지이다. 많은 가난한 인간들은 불만족해할 수 있고, 부자를 시기할 수 있고, 심지어 재물이야말로 진정한 축복이다고 믿을 수도 있다. 게다가 그들이 재물을 얻지 못할 때, 성을 내고, 특히 섭리에 맞서려 든다. 그러나 위와는 반대의 가난한 자도 흔하다. 그들은 자기 몫에 만족한다. 그는 책임 있고 열심히 일하고, 게으름 보다는 일을 선호한다. 그리고 그는 조심스럽게 잘 살고 있다.
‘부자’와 ‘가난한 자’의 운명을 놓고 혼란해지는 이유는 대체로 이 두 단어가 자주 언급되는 성경 구절을 잘못 이해함 때문에 발생한다. 거기서 ‘부자’는 선과 진리인 것에 대한 영적 지식을 많이 소유한 인간들-즉 말씀이 존재하는 곳인 교회 내에 있는 이들을 일반적으로 상징하고 있다. ‘가난한 자’는 이런 지식이 결핍되어 있으나 그 지식을 갈망하는 이들을 상징 한다.

천국에 있는 결혼들

천국이 인류로부터 형성된 이후, 그리고 천국 안에 두 성별의 천사들이 있은 이래, 그리고 남자는 여자를 위해, 여자는 남자를 위해 있게 된 이래, 이에 뒤따르고 있는 것은 천국 안에 결혼 관계가 있다는 것이다. 이는 세상의 결혼을 참고해도 된다. 천국 안에 존재하는 결혼 방식에서 결혼은 두 개인이 한 마음으로 함께 자라감이다. 이 합일은 설명되어질 필요가 있다. 인간 마음 자체는 두 부분들로 구성되어 있다. 하나는 ‘이해함’이고 다른 하나는 ‘뜻함(의지)’이다. 이 둘이 결합하여 일하고 있을 때 그 둘은 하나의 마음을 만든다. 천국에서 남편은 ‘이해함’의 부분에, 여인은 ‘의지’ 부분이다. 이 두 부분의 합일은 그들의 내적 묶임이고, 바깥쪽으로 그리고 육체적으로도 묶임의 표현을 발견한다. 이 때 그것은 사랑으로 느껴진다. 이 사랑은 진정한 결혼의 사랑이다. 이 사랑은 두 개인들이 한 마음으로 합일함으로부터 온다. 천국에서 이것은 ‘함께 생활함’이라 부르고, 이 둘은 하나로, 한 천사라고 까지 불리워진다. 이 합일은 남자와 여자가 창조된 모양으로부터 온다. 남자는 식별력, 이해력으로부터 반영하도록, 이에 비해 여자는 애정 깊도록, 의지로부터 반영(reflect)하도록 태어나졌다. 이는 그 둘 고유의 기질에서, 그리고 그들의 육체적 모양과 나타남에서 보여진다. 즉 남자는 더 억센 외관, 더 깊은 음성, 더 다부진 신체를, 여자는 모양새가 더 부드럽고, 더 상냥스런 음성, 더 큰 아름다움을 지니는 등등이다. 이와 똑같은 차이가 이해력과 의지력에도 있다. 이런 이유로 성경에서 ‘젊은 남자’ 그리고 ‘동정녀’, 또는 ‘남자’와 ‘여자’에 관련하는 영적 의미가 이해함과 뜻함, 또는 애착함의 특별한 속성으로부터 있는 이유이다.
남자와 여자는 이해력과 애착의 두 능력을 각자 가지고 있다. 그러나 남자 안에서는 이해력이 이끌고, 여자 안에서는 의지가 이끈다. 그리고 인간의 품성은 당사자 안에 있는 최상의 것으로부터 온다. 그럼에도 천국의 결혼들에서는 지배한다는 느낌은 없다. 아내의 의도함은 실지로 그녀의 남편에 속해 있다. 그리고 남자의 이해력은 그의 아내에 속해 있다. 그 이유는 그 각각은 상대의 목적과 생각들을 분배하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어떻게 하나를 만들었는지는 이러하다. 이 합일은 충만된 느낌 안에 있는 실제적인 합일이다. 그 이유는 아내의 의지가 그녀의 남편의 이해력에 들어가고, 남자의 이해력은 그녀의 의지력에 들어간다. 그리고 이것은 특히 그들이 서로의 얼굴을 쳐다 볼 때 발생한다. 천국에는 생각과 느낌의 충만되고 열려 놓인 나눔이 있다. 거기서 남편과 아내 사이에는 모든 것이 서로에게 더 보태진다. 그 이유는 그들은 서로 사랑하기 때문이다.
진정한 결혼 사랑의 근원은 주님으로부터 있는 진리와 선의 합일이다; 이것이 왜 천국에 있는 선과 진리의 합일이 ‘천국의 결혼’이라 불리는 가에 대한 이유이다. 인간 내에 있는 진리가 그 인간 안에 있는 선에 밀접히 하나되어(unite) 있는 한, 그는 주님과 천국에 결합(join)되어 있다. 결혼 사랑은 이에 대한 가장 큰 표현이다. 결혼으로부터 마음들이 함께 옴(화합함)에-그리고 결과로서 일어나는 사랑 안에-자신의 것이 상대방의 것이기를 소원하는 상호 바램이 있다. 이것은 한 개인 안에도 있다. 즉 그가 뜻하는 것을 생각할 때, 그리고 그가 생각한 것을 뜻할 때, 그러면 그는 한 마음 속에 있는다.

천사들이 천국에서 하는 일

천사들에 의해 행해지는 일은 너무나 많고 다양한 바 세부적으로 다루기는 쉽지 않다. 따라서 일반적으로 취급하고자 한다. 천국의 각 공동체들은 행할 각기 특별한 일을 가지는데, 그 이유는 공동체들 사이의 구별이 그들의 선의 품질에 의거하듯, 일 역시 각자에게 제공되는 유용함에 의해 구별되는데, 마치 선이 행동을 통하여 보이게 되듯, 유용함(use)도 같은 논리이다. 천국에서 모든 이 각각은 적극적인 쓸모 있음(use)이다. 그 이유는 주님의 왕국은 쓸모 있음으로부터의 왕국이기 때문이다.
천국에 관하여 지금까지 말해왔던 모든 것-즉 천국의 예배, 통치, 집과 나의 집, 결혼들-으로부터 명백한 것은 천국의 각 공동체 안에는 많은 직업들과 책임들이 있다는 것이다.
천국 안에 있는 모든 것은 신성의 모형에 따라 조직되어져 있다. 이것은 천사들에 의해 수행되는 책임들을 통하여 유지되어진다. 공동의 선함의 문제들은 더 슬기로운 천사의 관심사이다. 한편 더 세부적인 유용함은 덜 슬기로운 천사가 취급한다. 이 유용함은 각자가 신성의 설계도의 어느 부분을 형성한 것에 정확히 일치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각 직업의 가치는 그 직업이 섬기는 유용함 안에서 보여진다. 그렇지만 천사들은 자기들이 일한 것에 대한 가치를 들먹거리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 모두를 유용함 자체의 탓으로 여긴다. 그리고 유용함이 행해진 선함 안에 있을 때, 그리고 모든 선은 주님으로부터 인 바, 그들은 자기들이 한 모든 것을 주님에게로 돌린다.
위의 원리로부터, 우리는 천국에 있는 천사들의 계급의 속성을 알 수 있다. 천국에서는 세부적인 유용함에 얼마나 더 무게를 두어 더 사랑하느냐에 따라 그 유용함을 수행한 인간은 존경되고 사랑되어진다. 즉 작은 씀씀이라 해도 큰 씀씀이와 동등하게 귀히 여겨 실행함에 따라 계급이 결정된다는 말이다.
또한 이 존경은 각 인간이 자기가 행한 유용함을 자신이 아닌 주님의 탓으로 얼마만큼 돌리느냐에 비례해서 있어진다. 천국에서 타인에 대한 존경은 유용함의 기초 위에 있지 인간 위에 있지 않다. 타인을 존중함 또한 위와 같은 원리로부터 이다. 한 인간은 그가 크게 중요하든, 작게 중요하든 여타 모든 이와 비슷하게 있도록 보여진다. 유일한 차이는 그의 지혜 속에 있다. 그러면 지혜는 무엇인가? 유용한 것을 사랑함, 즉 동료나 공동체, 진정한 교회(the Church)를 사랑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아기들을 돌봄이 포함된 일을 하는 공동체들이 있다. 어떤 공동체들은 성장하는 어린이들을 가르치고 훈련시킨다. 어떤 이들은 기독교 배경으로부터 온 단순한 인간, 그들의 선을 훈육하여 그들을 천국 쪽으로 인도한다. 물론 비기독교 배경의 출신이라도 단순한 선을 지닌 이들은 앞의 기독교 출신이나 마찬가지 이다. 어떤 공동체는 방금 도착한 영들을 악령들로부터 보호한다. ‘낮은 땅’의 단계에 붙들린채 있는 인간들을 돕는 직업도 있다. 또한 지옥들에 있는 인간들을 도와서 그곳의 인간들이 도가 지나치게 서로를 헐뜯지 않도록 하는 이도 있다. 그리고 사후 소생한 인간을 돕는 공동체도 있다.
땅 위 인간들을 도우려고 파견되는 천사들도 있다. 이들은 인간들이 자기들의 도움을 기꺼이 수락하면 악한 생각과 느낌들로부터 떠나, 선한 것을 주입해주어 그들을 지키고 인도한다. 천사들이 땅 위 인간들과 함께 있을 때, 천사들은 그들의 애착과 느낌 안에 살고 있다. 그리고 언제나 그 인간이 지닌 생명의 본성에 따라 조금 멀리, 조금 더 가까이 있는다. 이런 모든 직업들은 천사들에게는 당연한 활동들이다. 그럼에도 각 개인의 천사는 각자 고유의 천국에 이바지하고 있다. 이 이바지함(기부함)이 신성의 설계의 한 부분을, 공동의 선의 한 축을 이룩한다.

천국적인 기쁨과 행복함

천국의 기쁨(joy)은 자기 고유의 행복함과 복됨을 다른 인간과 나눔에 따른 즐거움(delight)으로부터 온다. 그리고 천국에 있는 모든 이는 이와 같이 느끼는 바, 천국에 얼마나 많은 기쁨이 있을 것인지 짐작될 것이다.
온 천국에 널리 퍼져 있는 타인과의 나눔의 느낌은 천국에 있는 두 개의 우선하는 최고의 사랑들, 즉 주님을 사랑함과 이웃을 향한 사랑으로부터 유래한다. 주려고 서두름이라는 속성은 위 두 사랑들의 선천적 속성이다. 주님의 사랑은 모든 타인에게 그 자체의 모든 것을 주려는 사랑이다. 그 이유가 이 사랑이야말로 가장 보편적 행복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사랑이 그분을 사랑하는 인간들 안에 존재한다. 그 이유는 주님이 그들 안에 계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아를 사랑함은 위 두 사랑에 찡그리고 그것을 다른 쪽으로 돌려, 마치 자아 단독의 생각인 듯 자아 쪽을 향해 홈을 판다. 세상의 것들을 사랑함은 타인에 속한 것을 탐내도록 다그친다. 이 두 사랑들은 타인에 있는 즐거움과 행복함을 파괴하는 것을 선천적으로 지니고 있다. 따라서 나눔이 실시된다면, 오직 이기적 목적들을 위한 나눔의 행동이 있을 뿐이다.
세상에 사는 동안 무엇보다 우선 자신과 세상을 사랑하는 인간은 그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서는 이 사랑은 즐거움으로 가득하고 짙은 쾌락이 있다고 느낀다. 그럼에도 주님과 자기 이웃을 사랑하는 인간은 그가 세상에 사는 동안 이런 사랑들에 즐거움이 충만되어 있다고 느끼지 않는다. 그리고 이런 세상적인 것들이 자기들의 축복이라는 느낌을 전혀 감지하지 못한다. 그 이유는 이것들이 그 인간 내부 아래 깊숙이 처박혀 있고 매일의 생활 관심사로 덮혀 있기 때문이다.
위 모든 것은 사후 바뀐다. 그 때에 자아 사랑과 세상 사랑은 고뇌와 고통으로 가득 채워진다. 이것이 이 사랑들의 본성이기 때문이다. 사후 그들은 소위 ‘지옥-불’이라 불리는 것으로 바뀐다. 또는 그 때에 그들은 상응에 따라 추잡하고 구역질나는 어떤 것으로 변해진다. 이럼에도 이런 것에 관심있었던 이들에게는 즐거운 것이라고 느껴진다.
이 세상에서 감지할 수 없어 감추여졌던 기쁨이 사후 천국의 아주 충만된 즐거움으로 바뀌어 가능한 모든 방법 안에서 지각되고 느껴진다. 이것은 영적인 즐거움에서 기인하기 때문이고 천국에서의 삶은 영의 삶이기 때문이다. 천국의 기쁨과 행복함은 인간에 있는 육체의 감각들에 비교해봄으로 보여질 수 있다. 각각의 감각은 각 감각의 용도에 걸맞는 위치를 지킬 때 즐거움의 느낌을 가져다 준다. 시력은 아름다운 것, 색깔, 모양새들을 봄으로 기쁨을 가져다 준다; 듣는 것은 달콤하고 하모니 있는 소리를 들음으로 기쁨을 가져온다; 냄새맡음은 향기로부터 즐거움을 가져온다; 맛을 봄은 향미로부터 즐거움을 가져온다. 시력이 즐거움을 가져다 주는 이유는 시력이 이해력을 섬기는 유용성(use)으로부터 온다. 들음이 즐거움을 가져오는 이유는 들음이 그것의 특수한 감수성을 수단으로 이해력과 의지 모두를 섬기는 유용함 때문이다. 다른 감각 기관도 위와 비슷하다. 촉각, 이 감각은 가장 순수하고 가장 절묘한 바, 결혼 사랑을 표현한다. 그리고 이 감각은 인류의 증가와 아울러 천국에 있는 이들의 숫자 증가라는 유용함 때문에 모든 감각 중에서도 더욱 무게가 있는 감각이다.
모든 이런 즐거움들이 감각들에 채워져 있는데, 그 이유는 천국 자체가 그것들 안으로 흘러들기 때문이다. 천국에 있는 각 천사의 삶은 봄철을 향해 계속적으로 진보해간다. 수 천 년 살았다면, 진보는 더 크고 더 가득해지고 있다. 그리고 이것은 영원히 계속된다. 이 진보는 인간 안에서 관심 받아진 사랑, 선량함, 신앙의 성장에 따라 언제나 있게 된다.
늙고 지치고 하여 죽은 여인, 그러나 천국의 방식 안에서 살아왔었다면 그녀는 시간이 지나면서 꽃다운 여성으로, 과거 이 세상에서 결코 본 적이 없는 아름다움을 더욱 더 꽃피운다. 이 아름다움을 산출하는 것은 그녀의 내부의 품질이고, 이 품질이 그들의 바깥쪽 나타남이 되고, 그녀의 얼굴에서도 상세하게 나타난다. 이와 같은 여인들은 사랑 그 자체의 모양들이다. 한마디로 천국에서 늙는다는 것은 젊어진다는 말이다.

천국의 크기는 무제한이다

천국의 크기와 넓이가 무제한이다는 진리는 지금까지 말해왔었던 많은 것들로부터 명백하게 보여질 수 있다. 우선 천국은 인류로부터, 즉 교회의 안으로부터 이든 밖으로부터 이든 세상에서 사는 동안 선인 것을 수단으로 살았던 인간들이 구성원이다는 사실이다. 세상에 지금 살고 있는 인간만 계산해도 어마어마하고 하루에도 엄청난 인간이 죽고 있다. 게다가 이것은 수 천 년 이상되는 인간 삶의 시작 이래 계속되어 왔다. 이 모든 인간이 죽을 때 저 세계로 들어 간다. 아직도 이는 계속 중이다. 아주 이른 시기에 살았던 대부분의 인간은 천국에서 천사가 되었다. 그 이유는 그때 당시의 인간들은 더 내향적으로, 더 영적으로 생각했었기 때문이다.
모든 어린이는 천사가 되는데, 땅 위 그들의 숫자는 총 인구의 20-25%에 달한다는 사실로부터도 천국의 크기를 가늠해 볼 수 있다. 크기를 두고 추측을 더 보탠다면, 태양계에서 눈에 보일 수 있는 모든 행성이 땅이다는 것, 이를 넘어 우주에는 셀 수 없는 더 많은 땅들이 있고, 거주민으로 채워져 있다는 사실 등등이다. 전체 우주에서 주님 만이 천국과 땅의 하느님으로서 인식되고 있다.
전체로서의 천국은 인간 모양을 닮았고, 인간에 있는 모든 것에 상응하는 바, 가늠되는 것은 이 상응은 다 채워지는 것이 가능할 수 없다는 점이다. 그 이유는 상응은 개개의 기관들과 조직 뿐아니라 모든 아주 작은 부분, 분비선, 단섬유에 이르기까지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인간에 있는 더 내향의 수준들과도 상응이 있다- 즉 그의 개성을 구성하는 것들인데, 이것 역시 숫자를 초월한다.
이 상응이 채워지는 것이 가능할 수 없는 이유는 몸의 특수한 부분에 상응하는 공동체의 수가 더 커질 수록 천국은 더 완전해지기 때문이다. 고로 무한이다.
나에게 천국의 거주하는 부분과 비거주 부분이 보여졌는데, 비 거주 부분은 너무나 커서 결코 채워질 수 없을 것 같았다. 설사 우리의 거주민 같이 행성들에 있는 모든 거주민을 가지고 채워도 채워질 수 없을 것이다.
혹자는 이렇게 믿는다. 천국은 작은 크기이고 어떤 유형의 범주에 있는 인간들, 즉 ‘뽑힌 자’, 또는 ‘가난한 자’, 또는 주님께서 중재한 자로 한정되었다는 것이다. 이런 방편을 이유로 해서 천국은 닫히지 않는다. 게다가 다 채워져 만원사례가 되는 일도 결코 없다. 주님께서는 그분을 받아들이고 사랑과 신앙의 규율인 신성한 계획 속의 법칙에 의해 생활하는 모든 개개인을 인도하신다. 모든 개인은 천국을 위해 태어나고, 그가 세상에서 자신 안으로 천국을 받는다면 천국에 입장되고 그렇지 않으면 닫혀진다. 간단하다.

제 4 부

지옥의 삶

주님께서 지옥들을 통제하신다

앞의 천국을 취급하는 대목에서 이미 살핀 바는, 주님은 천국의 하느님이시다는 것과 천국의 전체 조직은 그분으로부터이다는 것이다. 천국과 지옥의 관계는 서로를 향하여 일하는 두 반대되는 세력의 관계, 이로부터 완전한 균형(balance)이 모든 존재하는 것에서 보존되는 결과를 가져온다는 것을 받아들인다면, 이에 수반되는 것은, 이것을 조절하시는 그분은 저것 역시 조절하셔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 이유가 주님께서 지옥으로부터의 폭발에 한계를 정하고 지옥의 미친 바램을 점검해 주시지 않으면, 이 평형 상태(equilibrium)는 파괴될 것이고 이 평형과 더불은 모든 것도 파괴될 것이다.
잘 알려진 사실은, 두 반대되는 힘이 똑같은 크기로 서로를 향하여 일할 때 각 쪽이 동등한 세력으로 있을 경우 둘 중 이쪽이 저쪽보다 더 강한 힘을 가지지 않는 바, 마치 정지한 듯 보여진다는 것이다. 이 때 균형은 마치 어느 쪽에서도 어떤 이의제기도 할 수 없는 듯 아주 쉽게 제 3 의 당사자에 의해 결정되어질 수 있다. 이 때 제 3 의 당사자의 행동은 완전한 조절을 가능케 한다.
천국과 지옥 사이의 평형 상태는 여러분이 싸움 중에 있는 두 용사 사이에서 발견되리라 예상하는 그런 종류는 아니다. 오히려 거짓인 것이 진리인 것에, 악인 것이 선인 것에 맞서 있는 영적인 균형이다. 이 균형은 인간이 자유로운 상태로 생각하고 의도하는 것을 가능하게 한다. 그 이유는 인간이 생각하고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악과 거짓, 선과 진리, 그 어느 것과 더불어 실시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고로 누군가가 이 균형에 있을 때, 그는 이쪽이든 저쪽이든 선택하는데, 이는 자유하다.
각 인간은 주님에 의하여 이 균형 안에서 계속 유지되고 있다. 그 이유는 그분은 천국과 지옥 모두를 통치하시는 바, 그들의 영향력도 조절하시기 때문이다. 악의 영향력은 선인 것을 파괴하려고 하는 끈질긴 노력을 결코 끝내지 않는다. 성사되지 않을 경우 분함과 폭행이 뒤따른다. 선의 영향력은 지옥이 사납게 날뛰는 것에 재갈을 물려 자제시킨다. 이리하여 균형이 창조되어진다.
영계에서의 힘(power)은 선하고 참된 것과 더불어서만 존재한다. 그 이유는 영계의 힘은 신성으로부터 오고 모든 힘은 신성에 속하기 때문이다. 악과 거짓은 진짜 힘을 가지지 않는데, 그 이유는 그것들 안에는 선하고 참된 것은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고로 모든 힘은 천국 안에 있고 지옥에는 없다.
영들의 세계에 있는 인간들도 위와 똑같은 균형, 또는 평형 상태에 있다. 그 이유가 영들의 세계는 천국과 지옥의 중간쯤에 있기 때문이다. 그 결과 세상에 있는 모든 인간들도 똑같은 균형 안에서 계속 유지되고 있다. 그 이유가 그들은 주님에 의해 영들의 세계에 있는 영들을 통하여 통치되기 때문이다.
이 균형은 만일 주님이 천국과 지옥 위에서 조절하시지 않고 양쪽을 규율하시지도 않는다면 전혀 존재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분이 이를 실시 않았다면, 악은 단순히 선한 인간을 그릇 인도하고, 자유의 균형은 파괴되었으리라.
지옥도 천국이 존재하는 방식에서 여러 다른 공동체들로 구성되고 있다. 그리고 지옥과 천국은 정반대이기 때문에 천국에 있는 공동체와 꼭 반대되는 공동체가 지옥에 있다. 반대됨이 없이 존재하는 것은 하나도 없다. 그래서 어떤 것의 본성을 알려면 그 반대에 있는 것의 본성을 보면 알 수 있다. 고로, 평형 상태를 위하여, 주님은 천국의 각 공동체는 그것과 짝을 이루는 지옥의 공동체를 가지도록 설비하신다.
더 보태고자 하는 것은, 지옥에 있는 각 공동체는 소규모의 지옥이다는 것, 마치 천국의 공동체가 소규모의 천국이듯 한다는 것은 주목해둘 만한 가치가 있다. 그리고 세 천국들이 있듯 세 지옥들이 있다. 가장 낮은 지옥은 가장 안쪽 또는 가장 높은 천국에, 중간 지옥은 중간 또는 둘째 천국에, 가장 높은 지옥- 또는 가장 온순한 지옥-은 가장 바깥쪽 천국 또는 첫 번째 천국에 반대된다.

주님이 지옥들을 조절하시는 방법

지옥들은 천국들과 거기의 공동체들을 통하여 진행되는 주님 자신의 영향력에 의해 조절되어진다. 이것은 악을 근원적 차원에서 제어한다. 특별히, 지옥을 조절함은 지옥을 점검하고 거기서 폭발하는 것을 조절하는 능력이 주어진 천사들을 통하여 실시된다. 항시 천사들이 지옥으로 보내져 그들이 거기에 주재함을 수단으로 잠잠케 한다.
일반적으로 말하면, 지옥의 인간들은 그들 고유의 두려움들에 의해 간단히 조절되어진다.
어떤 이들은 비록 그들의 두려움이 조만간 덜해질지라도 어쨌든 세상에 있는 동안 가졌던 두려움들에 의해 조절되어진다. 그리하여 처벌에 대한 두려움은 그들 중 많은 자로 악행을 단념하게 한다. 대체로 더 악한 인간이 덜 악한 인간 위에 군림하는 힘이 주어진다. 그들은 이리저리 돌려대고 획책하고 처벌과 공포감을 조성하여 아랫 것들을 노예화하고 복종케 한다. 그럼에도 소위 그곳의 통치자들도 자기들에게 그어진 범주를 넘어 가는 것에는 두려움이 앞선다. 어쨌든 형벌에 대한 두려움은 지옥에 있는 인간의 광폭함을 조절하는 특효약이다. 그 외 방법은 없다.
세상에 있는 인간들은 이렇게 믿었다; 지옥을 통치한 악마는 한 명이다는 것, 이 악마는 과거 빛의 천사였는데, 반역질 이후 그의 패거리와 함께 지옥으로 내쳐졌다는 것이다. 게다가 인간들이 이를 믿는 이유는 성경에서 악마와 사탄, 그리고 루시퍼(Lucifer)가 언급되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를 성경글자 그대로 취했다. 그러나 간단히 말해 ‘악마’와 ‘사탄’은 여러 등급의 악에서 있는 지옥을 뜻하는 것이고, ‘루시퍼’는 천국에서 나와 지옥에 가서 영향력을 행사하는 인간을 뜻한다. 지옥에 있는 모든 이가 복종해야 하는 한 명의 악마는 없다. 지옥에 있는 모든 이도 인류로부터 이다. 그리고 그들 각각은 그가 세상에 있는 동안 신성에 완전 반대됨으로부터 있었던 악마이었다.

주님이 인간을 지옥으로 던지는 것이 아니라 인간 스스로 던진다

어떤 이는 이런 생각을 하고 있다; 인간이 악할 경우, 하느님은 화내시고, 그 인간으로부터 얼굴을 돌리시고, 거절하시고, 그를 지옥으로 내던지신다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믿는 이들도 있다; 하느님은 인간을 처벌하시고 그에게 해굿이까지 하신다는 것이다. 그들이 이렇게 생각한 것은 그들로부터가 아니라 성경의 글자 서술로부터이기에 이에 대해 그들은 고집스럽다. 그러나 그들은 그 성경 글자 서술의 영적 의미는 아주 다르다는 것을. 교회의 진정한 가르침은 하느님은 어느 인간으로부터서도 그분의 얼굴을 돌리시지 않는다는 것을, 한마디로 그를 내치시지 않으신다는 것을, 어느 누구라해서 지옥으로 던지거나 화를 내는 일은 결코 없으시다는 것을 실감 못하고 있다.
계발된 어떤 인간이라면 그가 성경을 읽을 때, 하느님은 선량함 자체, 사랑 자체, 자비 자체이시다는 것, 그분은 누구에게나 악을 행하실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랑은 그 자체로부터 인간을 내던질 수 없다. 그 이유는 내칠 경우 이는 사랑의 참 본성에 반대되고, 고로 신성한 본성 자체에 반대되기 때문이다. 어떤 인간이 계발된 마음을 가지고 생각한다면, 그는 하느님은 인간들을 선량함과 사랑과 자비로 다루시고, 그들을 위하여 선인 것을 원하시고, 그들을 사랑하시고, 그들 위에 자비를 두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그들은 선과 악은 반대적이므로 선인 것이 나오는 것은 오로지 천국밖에 없고, 또는 주님으로부터 흘러들어 계속 그 인간으로 악으로부터 멀어지게, 그리고 선인 것 쪽으로 인도하심을 알게 된다. 그리고 천국과 지옥은 균형을 이루는 바, 주님이 뒤돌아 떠나신다면 인간에게 남는 것은 오로지 악인 것 뿐인 바, 그는 더 이상 인간일 수가 없다.
위로부터 우리가 알 수 있는 바, 주님은 선인 것 가지고 모든 인간 안으로 흘러드신다는 것, 악한 인간 안으로도 선한 인간에게와 동등하게 흘러드신다는 점이다. 그러나 이런 차이는 발생된다; 그분은 계속적으로 악한 인간으로 악에서 멀어지게, 선한 인간은 선인 것을 향하게 인도하신다. 이런 차이는 주님 때문이 아니라 인간 때문이다. 그 다음 명백해지는 것은, 인간은 지옥 때문에 악인 것을, 주님 때문에 선인 것을 행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인간은 자기가 하는 것이 자신으로부터 라고 여길 경우, 그가 악을 행하면 그 악은 그에게 마치 그의 것인냥 착 달라붙어 있다. 이것이 왜 주님이 아닌 당사자가 자기의 악을 책임질 수밖에 없는가에 대한 이유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지옥으로 인도하는 자는 주님이 아닌 바로 자기 자신이다. 주님은 어느 인간이든 지옥으로부터 멀어지게 하고 싶으신 바, 만일 그가 악을 행하기를 원치 않는다든가, 악 안에 있기를 바라지 않는 만큼, 주님은 인간들을 지옥으로부터 자유하게 하신다.
인간의 의도함과 사랑함은 사후 그와 더불어 머문다. 따라서 세상에서 악을 사랑한 자는 다른 삶에서 똑같은 악을 사랑하고, 자신이 악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고로 악한 인간은 그의 영이 관심을 둔 만큼 지옥에 매여 있다. 그는 이미 거기에 있다. 그리고 사후 그가 원하는 것은 그의 악이 있는 곳에 있는 것 외에 원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결과적으로 사후 주님이 아닌, 인간 자신이 자기를 지옥에 던진다.
사후 발생하는 것을 간략히 이렇게 기술해볼 수 있다. 인간이 영들의 세계로 들어갈 때, 그는 자기를 갖가지 방법으로 돕는 천사들에 의해 환영된다. 그들은 주님에 관하여, 천국에서의 삶에 관하여 말해준다. 그러나 만일 인간이 이런 사항을 알았고, 거기서 있는 것들을 부인했고, 비웃었다면, 그는 곧바로 어디론가 떠나기를 갈망한다. 천사들이 그를 주시했을 때, 그는 천사들을 떠난다. 결국 그는 자기와 꼭 같은 인간과 결합한다. 그리고 주님으로부터 돌아서 그가 세상에 있는 동안 연결 고리를 맺었던 지옥에 얼굴을 내민다. 천국의 어떤 협력도 그에게 가능함에도 이와 같은 영은 자신의 악을 따르고, 종국에는-자유로이-자신을 자신의 지옥으로 내던진다.

지옥에 있는 이들은 자기의 자아 사랑과 세상 사랑의 결과로 악과 거짓 안에 있다

지옥에 있는 모든 이는 악과 거짓인 것들 만에 붙잡혀져 있다. 거기에서 악과 참된 것 안에 동시에 있는 자는 아무도 없다. 악한 인간들도 그들이 세상에 있는 동안 영적인 것을 듣고 말하고 배우고 읽기도 하여 매우 친숙해져 있을 수 있다. 그들 중 어떤 이는 자기들의 유창한 말과 선행을 수단으로 자기는 마음으로부터의 기독인이다고 믿도록 타인을 속이고 강요하기까지 한다.
그러나 이와 같은 모든 인간들은 심정에서 악하다. 그래서 그들의 바깥쪽 삶이 벗겨질 때, 그들은 자기들의 진짜 색깔을 드러내고야 만다. 그들에게서 외관적으로 있었던 선과 진리인 것은 그들의 기억에만 머문다. 마치 수집된 정보 수준이다. 과거 그들은 이 정보들을 의지에서 꺼낼 수 있었고, 자기들 목적 성취를 위해 쓸 수 있었다. 이런 인간들이 그들의 진정한 본성에 놓이게 될 때, 그들은 더 이상 진리인 것으로부터는 어떤 것도 말할 수 없고, 오직 거짓인 것만 가능하다. 그 이유는 그들이 악으로부터 말하기 때문이다. 악을 기초로 해서 진리를 이야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오직 거짓 생각만 튀어나올 뿐이다.
사후 인간이 위 같을진대, 그의 몸과 얼굴은 그 인간 안에 들어 있는 것에 상응한다. 그래서 인간들은 상대를 쳐다봄으로 그가 무엇 같은지를 정확히 말할 수 있다; 이는 그의 얼굴만을 쳐다봄이 아니라 그의 몸과 그의 말씨, 그가 처신하는 방법 등을 쳐다봄으로부터 이다. 지옥에 있는 영들이 천국의 어떤 빛 안에서 검사되어질 때, 그들은 자기들의 악한 품질과 꼭 같게 보인다. 각 인간은 자기 악의 복제이다. 그들은 경멸, 협박, 미워함, 복수함, 격렬함과 잔인함이 눈에 보일 수 있는 모양으로 바뀐다. 그럼에도 누군가가 자기들을 칭찬하거나 어떤 이유로 자기들을 우쭐거리게 해주면, 그들의 얼굴은 더 부드러워지고 그들이 느끼는 쾌락으로부터 오는 행복한 표정 같은 어떤 것도 나타난다.
이런 악령의 나타남은 보기에도 섬뜩하다. 어떤 이는 얼굴이 부풀어 있다. 어떤 이는 터진 종기가 가득하다. 많은 인간들이 실제의 얼굴을 가지고 있지 않고 털만 무성하거나 뼈만 앙상하다. 어떤 이는 이빨만 눈에 띈다. 그들의 몸은 기괴하다. 천사의 빛으로는 위와 같이 보이지만 그들 끼리에서는 정상적인 참 인간 같이 보인다. 이는 주님의 배려하심에서 비롯되는 바, 그들 자신의 상태는 그들을 위해 천사에게 보여지는 방식으로부터 있지 않는다.
이런 영들의 모든 것은 자아 사랑이나 세상 사랑의 구체화이다.
위 두 사랑은 지옥을 최고 높은 자리에서 통치하고 또한 지옥을 만든다. 이 두 사랑은 두 천국 사랑, 즉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에 완전 반대된다. 인간들은 이 두 사랑-자아 사랑과 세상 사랑-이 왜 그렇게도 극악무도한지에 대한 이유를 알 수 없다. 그들은 교만함, 이것은 가시화될 때, 훨씬 더 나쁜 어떤 것이다고 말한다. 그리고 더 첨가해서 하는 말, 모든 이는 찬양받기 위하여, 자아 영광을 위하여 뭔가를 행하려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들은 자아 사랑이 지옥을 조절하는 사랑이다는 것, 이것이 인간 안에서 지옥을 만든다는 것을 모르고 있다.
고로 자아 사랑은 좀 더 상세히 설명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 이유는 이 사랑이 여느 다른 악한 사랑들의 원천이기 때문이다. 자아 사랑은 자신이 잘되기를 원하는 것, 타인이 자신의 복지에 기여하지 않을 경우 그 인간이 잘되기를 원치 않는다. 자아 사랑도 선행을 베푸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자신의 영광과 영예라는 목적이 존재할 경우 뿐이다. 그가 타인을 위해 하고 있는 것 안에 자신의 영예 같은 것이 보이지 않으면, 자신에게 ‘이로부터 내가 얻는 것이 무엇인가?’ 라고 묻고, 선행을 멈춘다. 그의 행복함은 순수하게 자아 사랑의 행복함이다. 사랑으로부터의 즐거움이 인간의 생명을 만드는 바, 그의 생명은 자아의 생명이다. 이와같은 인간도 그에게 소속된 인간, 즉 아내나 자식들, 자신의 것이라 부르는 이들을 사랑할 수 있다. 이런 사랑의 범주에는 자기를 칭찬하고 자기에게 순종하는 모든 인간들만 포함된다.
위와 대조적으로, 천국의 사랑은 유용함 자체를 위하여 유용한 것을 사랑함이다. 이 사랑은 실지로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함이다. 그러나 만일 인간이 자신의 이득을 위하여서만 유용한 것을 사랑한다면, 그는 이런 것을 자기를 위해 일하는 노예 수준에서 사랑한다. 그는 모든 인간, 모든 것이 자기를 위해 일하기를 원한다. 그에게 다른 길은 대체로 없다. 자신의 자아 이익으로 둘둘말아진 누군가는 자기가 행하는 어떤 선마저도 자신의 이득에 초점을 맞추게 한다. 이것이 발생한 이유는 그가 행함 안에서 자신을 챙기려들기 때문, 그리고 정작 진짜 자신은 원하지 않은채 선행을 실시했기 때문이다.
자아 사랑은 인간을 위쪽이 아래쪽이 되게 거꾸로 세운다. 그래서 그들은 영계에서 그들의 발은 천국 쪽으로 하고 지옥을 향해 추락하는 듯 나타난다. 이 때문에 자유로이 지옥을 들어간 인간들이 머리를 먼저 떨어뜨리면서 입장하는 듯 보여진다.
세상 사랑은 자아 사랑 만큼 천국 사랑에 반대되어 있지는 않다. 그 이유는 세상 사랑은 자아 사랑보다는 덜 유해하기 때문이다. 세상 사랑은 자기를 위해 타인의 부를 차지하려는 바램이다. 그리고 여하한 수단을 강구해서라도 이것을 가능하게 하려든다. 이것은 자신의 심정을 재물에 두고 세상이 어떤 영적 사랑으로부터도 멀어지게끔 유도해도 내버려둔다. 따라서 이것은 많은 모양새를 취한다. 개인의 발전을 위해 재물을 사랑함, 한층 더 재물을 손에 넣기 위해 지위를 사랑함이 있다; 세상적 쾌락을 가지려는 수단으로 재물을 사랑함이 있다; 재물 자체가 사랑스러워 재물을 사랑함, 인간들이 가지는 탐욕 같은 것이 있다. 이를 열거하자면 끝이 없을지 모른다.
재물은 실로 대단한 유용함을 지닐런지 모른다. 재물의 뒤에서 마음이 확실히 정한 목적(purpose)이 재물의 유용함(use)이다. 시야에 잡히는 목적(end)은 재물을 사랑함의 품질을 결정한다. 위 두 목적은 정확히 똑같다. 이외 모든 것은 목적 달성을 위한 수단일 뿐이다

지옥 불과 이를 갊

대부분의 인간들은 성경에서 언급되는 지옥 불과 이를 갊은 글자 그대로 지옥에 있는 것들이라는 것만, 그 외 무엇을 의미하는 지는 모르고 있다. 어떤 이는 불이 실지로 있다고, 또는 아마 양심의 고통 비슷한 종류의 고통이 아닐까 생각한다. 어떤 이는 지옥 불은 사악한 인간들을 겁주기 위해 사용한 어구이다고 생각한다. 어떤 이는 이를 갊은 실지로 발생한다고, 또는 이를 가는 소리를 들을 때 섬뜩한 바, 두려움 같은 종류를 표시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어쨌든 위 두 가지 모두는 영적으로 이해해야 한다. 그 이유가 영적인 것을 인간에게 말하려면 인간들이 알고 있는 자연적 형상들을 통하여 표현되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지옥 불과 이를 갊은 사후 악한 인간의 영의 삶의 부분 임이 확실하다. 또는 이것을 또 다른 방식으로 놓기 위해, 그들은 영계에서 이런 것들을 수행할 것이다. 고로 그것들은 적절히 이해되어져야 할 필요가 있다. 먼저 지옥 불에 관하여이다. 열에는 두 근원이 있다; 하나는 주님 자신이신 천국의 태양으로부터 이다. 또 하나는 이 세상의 태양으로부터이다. 영적 태양으로서 주님으로부터 오는 열은 사랑인 영적 열이다. 우리가 세상의 태양으로부터 느끼는 열은 순수하게 자연적이다. 그것은 자연계의 성장함을 가져다준다. 이 성장은 천국 열, 또는 사랑이 그들의 전체 존재를 활성화하는 인간의 영 안으로의 영적 흐름을 반영하고 있다. 자연적 현상은 그것이 영적 원인의 결과, 또는 영적 원인과 상응한 결과이지 않으면 발생하거나 존재할 수 없다. 자연계에 있는 것들 조차도 영적 세계의 영향력으로부터 싹틔우고 성장하는 자기들의 능력을 가진다.
인간들을 위해서, 영적 열은 그것이 본질적으로 사랑이기 때문에 그들의 생명의 열이다. 이 열이 성경에서 ‘불’에 의해 의미된다. 천국적 불은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고, 지옥적인 불은 자아 사랑과 세상을 사랑함이다. 지옥적인 불도 실제로 천국의 불과 똑같은 근원, 즉 천국의 태양, 또는 주님으로부터 이다. 단지 천국의 불은 받는 인간에 의해 찌그러지고 지옥적이 되어질 뿐이다. 그 이유가 영계로부터 안으로 흘러드는 모든 것은 그것을 어떻게 받느냐, 또는 그것이 유입되는 형체가 무엇이냐에 의존되기 때문이다. 이것은 세상의 태양으로부터 있는 열과 빛과도 똑같다. 이 열이 나무나 작물에 의해 받아질 때, 이 열은 식물을 자라게 하고 향기를 내품게 한다. 그러나 이 열이 시체나 더러운 물질에 의해 받아질 때 부패를 일으키고 악취를 진동케 한다. 사랑이 선한 인간들, 영들, 천사들의 생명 안으로 흘러들 때 이 사랑은 그들의 선으로 열매를 맺게 한다. 그러나 악한 인간들과 더불어서는 그 반대 효과가 발생한다. 그것은 다툼과 부패이다.
지옥 불이 자아와 세상을 사랑함인바, 이것은 이 사랑들에 속하는 염원이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또한 이것은 그것들로부터의 쾌락도 보여준다. 이것이 영계에서, 지옥이 열릴 때, 불과 연기가 그것들로부터 나오는 것이 실제로 보여지는가에 대한 이유이다. 그래서 그것들이 닫힐 때, 불은 연기를 냄이 있기 위해 보여진다. 이것은 상응으로부터 이다.
그럼에도 지옥에 있는 인간들은 위 같은 불 안에 실제로 있지는 않다; 이 불은 외관이다. 그들은 불타는 어떤 것도 의식하지 못하고 있다. 단지 자기들이 세상에서 있었던 동안 느꼈던 같은 종류의 열만을 느낄 뿐이다.
이 지옥 불은 지옥에 있는 고통의 어떤 종류를 뜻한다. 이 고통은 다른 인간에게 피해를 주려는 염원으로부터 오는 고통, 이와 동행하는 분노이다. 한 가지 궁금해지는 것은, 이런 고통이 거기 있다는데 왜 악령들은 기꺼이 자신들을 거기에 내던지는가 이다. 모든 지옥 각각은 그것 자신의 영역(sphere)-그것 고유의 염원-을 토해낸다. 이것은 거기 있는 이들로부터 오고 있다. 이 염원 사항이 똑같은 염원 내용을 지닌 누군가에 의해 감지될 때, 그는 즐거움으로 가득해지고 그것을 향하여 돌아서며 그것을 얻기를 염원한다. 이러하다 해도 사실 그는 거기 있는 고통의 종류를 실지로는 실감 못하고 있다. 아마 미리 실감했다 하더라도 그는 계속 그것을 염원할 것이다. 그가 자신의 지옥에 있을 때, 그는 따뜻하게 환영받아졌고, 자기는 친구들 사이에 있다고 믿는다. 어쨌든 이것은 몇 시간 정도만 지속된다. 이제 친구라는 자들은 그가 얼마나 영리한지, 얼마나 센지 아주 가까이서 관찰하고 파악되면 그들은 그를 여러 방법으로 공격하는데, 점차 가혹함과 폭력의 강도를 높여 간다. 그들은 그를 더욱 멀리 지옥 안으로 유도함으로 이를 실시한다. 그 이유는 더 깊은 지옥으로 갈수록 더 사악한 영들이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그를 공격한 후, 그들은 그가 노예로 전락할 때까지 그에게 형벌을 가한다. 그럼에도 반역질은 언제나 거기서 더 튀어나온다. 그 이유는 모든 이는 자기가 가장 중요한 인간이 되어 있기를 원하고, 모든 다른 것들에는 미움으로 맞서 불사르고 하여 언제든지 새로운 반란이 끊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이런 상황은 저런 상황에 길을 내준다, 노예된 인간들은 타인을 정복하기 위하여 새로운 지도자에게 도움을 주는 것에서 자유롭다. 그런데 순종을 거절한 이들은 다시 고통당한다. 그리고 이것은 계속된다. 이런 지옥의 고통이 지옥-불이라 불려진다.
한편, 이를 갊은 각자의 거짓 사상을 가지고 서로 다투고 충돌함의 계속이다. 이 인간들이 지닌 것은 타인을 경멸함, 증오, 조롱함, 비웃음, 모독함이다. 이런 악들은 상처, 자름, 발톱을 내밈, 긁음 같은 것으로 돌발한다. 그 이유가 모든 이는 자기의 거짓 사상이 진리라고 불러주기를, 그것이 매우 가치 있는 것이기에 그것을 위해 싸우기 때문이다. 이 다툼은 진리인 것이 천국으로부터 유입될 때면 언제든지 지옥 밖에서는 이를 가는 소리로 들려진다.
이 지옥에 사는 인간들은 자연만을 믿고 주님을 부정하는 이들이다. 그들은 천국으로부터의 어떤 빛도 수용할 수 없다. 대부분의 그들은 자기 눈이 보고 자기 손이 만지지 않은 것은 하나도 믿지 않는다. 이것이 왜 그들이 하는 논쟁들이 이를 가는 소리 같이 들리는가에 대한 이유이다. 또한 영계에서 모든 거짓 사상들은 삐꺽거리는 소리를 낸다. 그리고 이를 갊 그 자체는 자연의 가장 낮은 것들, 그리고 인간의 가장 바깥쪽의 것들에 상응한다.

지옥적 영들의 악의와 교활함

무엇인가를 깊이 생각하고 자신의 마음이 어떻게 작동하는가를 얼마라도 이해하는 인간이라면 영들이 능력 면에서 얼마나 많이 인간을 능가하는지를 볼 수도 있다. 인간은 반 시간 동안 말하거나 글로 써 내려 갈 것들을 자신의 마음 안에서는 잠간 만에 더 많이 판명하고 분류해서 결말까지도 도출해 낼 수 있다. 그가 영으로 생각할 때 그는 위와 같이 더 많은 것을 할 수 있게 되어간다. 그 이유가 생각하는 것이 영이고 생각을 언어나 글로 표현하는 것은 몸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후 천사가 되는 인간은 그가 세상에서 지녔던 것에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총명과 지혜를 누린다. 세상에서의 그의 영은 그의 몸에 매여 있어, 그가 곰곰이 생각했던 어떤 것이라 해도 상대적으로 조잡하고 불분명한 그릇 안에 담겨 있을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영이 몸으로부터 석방되고, 그 고유의 삶 안으로 진입할 때, 완전히 달라진다. 그의 여건은 이전 보다 더 방대하게 능가한다. 이것이 천사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생각들, 인간의 마음에 결코 들어 갈 수 없는 종류의 생각들을 가질 수 있는 이유이다. 이럼에도 천사들은 인간 존재로서 태어났었고, 자신이 자신을 생각하건대 자기는 여느 인간보다 더 현명하지 않다 여긴다.
지옥의 영들의 악의와 교활함은 천사들의 지혜와 총명 만큼 대단하다. 이 둘의 여건은 똑같다. 인간이 죽은 후, 그의 영은 그 자신의 선 또는 악 안에 완전하게 빨려든다. 그것에 일치되게 생각함도 존재한다.
허나 인간이 세상에 있었던 동안은 판이 했다. 그 이유가 세상에서의 경우, 인간의 영의 악한 부분은 어떤 제약 아래 놓여있어 노골적으로는 될 수 없었다. 그의 악한 것은 선한 행위와 애착들의 바깥쪽 나타남에 의해 철저히 덮혀 있었다. 당사자 조차도 어떤 악의와 교활함이 자기 영 안에 상존했는지 조차 거의 모를 정도였다. 게다가 그의 영이 그 본성을 드러내야 하는 때, 즉 사후 그가 되어져야 할 악마라는 것은 더 더욱 알지 못하고 있었다.
이런 악의는 인간들의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다는 것을 그 자체로 보여준다. 수 천의 악들이 그 악 자체로부터 발발한다. 그런데 아마 수천의 악 중의 하나도 설명하기 힘들다. 게다가 그것들은 너무나 악질이어서 만일 주님께서 모든 인간을 보호해주시지 않는다면, 인간들은 지옥으로의 빠짐을 결코 피하지 못했으리라. 그 이유가 지옥으로부터의 영들도 천국으로부터의 천사들 같이 각 인간과 더불어 있기 때문이다. 주님은 인간이 신성을 인식하고 신앙과 사랑하는 행동들에 기초된 삶을 살지 않으면 그를 보호하실 수 없다. 만일 인간이 이런 삶을 꾸리지 않으면 그는 주님으로부터 돌아서서 지옥의 영들을 향하고 자신의 악의와 가장 비슷한 종류의 악의를 취한다. 그럴 때조차도 그는 주님에 의해 그 자신의 악으로부터 멀어지도록 인도받고는 있다, 그리고 만일 주님이 양심의 이 내적 제한에 의해 그를 인도하실 수 없다면, 주님은 법과 처벌의 두려움 같은 바깥쪽 제재 수단에 의해 그를 인도해주신다.
그런데 그가 다른 곳으로 가버릴 경우, 그는 영적으로부터의 어떤 것에 의해 인도되어질 수 없다. 그 이유는 이럴 경우, 그는 정직과 공정인 체하는 것으로 위장하는 사기치는 방법을 창안하기 때문이다. 이런 상태의 모든 것은 그의 영의 악을 쉽게 증가하게 하고 그 악으로 하여금 형태를 갖추게 하여 자기 본성 속의 악과 다를 바 없게 만든다.
가장 나쁜 상황은 자아 사랑에서 가지쳐 나온 악을 지니는 이들이다. 그들의 속임수는 철저한 바, 삶을 통째로도 파괴할 수 있는 독으로 꽉 차있다. 이런 영들은 ‘악귀(genni)’라 불리는데, 그것들은 지옥들의 뒤쪽 부분을 향해 있다. 세상을 사랑함의 결과로 악한 이들은 지옥의 앞쪽 부분을 향하고 있다. 그들은 ’영들‘이라 불린다. 그들은 심각한 악질은 아니고 상대적으로 온순하다.
악귀들은 인간의 생각 측면이 아닌 애착 측면에서 술책을 벌인다. 악귀들은 애착들을 감시하고 냄새 맡고 있다. 그것들이 선한 애착들임을 간파했을 때, 그들은 선한 애착을 인도하되 비트는 수단으로 악한 것이 되게 돌려 놓는다. 악귀들의 이런 짓은 너무나 은밀해서 인간은 전혀 눈치채지 못한다. 악귀들은 이에 관한 어떤 것도 인간의 생각 안으로 오지 않도록 대단한 주의를 기울임으로 그것의 술책을 진행시키고 있다. 생각 측면에 올 경우 노출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악귀들이란 인간의 쾌락과 바램을 악용함으로 그 인간을 흔들어 꾀어서 인간의 마음을 올가미에 묶어둔다.
그러나 악귀들은 변화의 희망이 엿보이는 어떤 인간들을 위해 주님에 의해 그 인간 뒤쪽에 붙잡혀 있다. 악귀는 인간의 양심을 파괴하는 능력을 가졌을 뿐아니라 양심 안의 유전적인 것들, 사실 그대로라면 그냥 그 상태로 멀리 떨어져 있을 유전적인 것들마저 휘젖는 재주까지 겸비하고 있다. 고로 주님께서는 인간이 이런 악귀로부터의 피해를 막아주시기 위해 이런 지옥들은 밀봉해두셨다. 따라서 악귀 비슷한 인간이 다른쪽 삶의 세계로 올 때, 이 인간은 그들의 지옥으로 순간적으로 내던져진다.
지옥적 영의 사기침은 아주 복잡 다양해서 그것들을 나열하자면 책 몇 권 분량은 되지 않을까 싶다. 그것들은 세상에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한 종류는 상응학들을 남용하는 것이다; 또 다른 것은 신성한 질서의 보다 수준 낮은 것들을 오용함이다; 셋째는 전환, 수색을 이용해 생각의 흐름과 소통함의 다른 종류를 내세우는 것, 즉 다른 영들을 그들 자신으로부터 떼어 그들 스스로 파견자를 자처하는 방식을 이용한다; 넷째는 몽상을 이용하는 것; 다섯 째는 영을 영사하여(spirit-projection), 하나 아닌 여럿인 듯 보이게 하는 것; 여섯째는 흉내냄, 설득함 그리고 속임수 등이다.
지옥의 영들은 자기들의 갖가지 기술을 이용해서 서로에게 고통을 안긴다. 만일 그것들이 그가 죽는 시점에서 그의 고유의 악의 부분이었다면, 악령은 사후 그것들 안으로 온다.
지옥의 고통들을 주님이 묵인하신 이유는 이것만이 악을 점검하고 조절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이다. 주님의 조절 아래 지옥의 패거리들을 보존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은 처벌과 공포이다; 그 외의 방법은 없다. 그 이유가 형벌과 고통에 대한 두려움이 없다면 악은 폭력으로 사납게 날뛰어 모든 것은 파편 조각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마치 이 세상의 나라에 법이 없고 형벌도 없다면… 을 상상해보면 가늠된다.

지옥들의 출현, 장소, 그리고 숫자

영적 세계에서도 자연계에 존재하는 똑같은 종류들을 볼 수가 있다. 이것들은 너무나 흡사해서 외관상으로는 차이가 없다. 거기서도 평야와 산 그것들 사이의 계곡, 호수, 강 등등 세상에서 보이는 것들을 볼 수 있다. 그렇다 해도, 이런 모든 것들은 영적 근원으로부터 이다. 그래서 그것들은 영인이나 천사들에만 보여질 수 있고 인간들은 아니다. 따라서 인간들은 그가 죽어 영인이 되거나, 특별한 허락을 받지 않으면 영계에 있는 것들을 자신의 눈으로 결코 보지 못한다. 역으로 천사나 영인은 자기들과 더불어 이야기 하도록 특별히 허락된 인간과 더불어서가 아니면 자연계에 있는 어떤 것도 볼 수 없다. 영적 세계와 자연적 세계 사이에 이런 유사함이 있기에, 사후 인간은 자기가 방금 자연계를 떠났다는 것, 자기가 세상 안에 있지 않다는 것을 거의 알아채지 못한다. 이러기에 죽음은 이 세계로부터 그것과 비슷한 저 세계로 건너감이라고 대다수의 인간들이 말하고 있다.
천국들은 보다 높은 지역들에 있고, 영들의 세계는 보다 낮은 지역에, 그리고 지옥들은 위 둘 아래 지역에 있다. 천국 자체는 내적 시력이 열리지 않는 이상 영들의 세계에 있는 영인들에게 보이지 않는다; 물론 가끔 그들은 안개나 빛나는 구름을 통해 볼 수는 있다. 이런 이유는 천사들이 다른 인간들 보다 더 높은 지혜를 가지고 있어 영들의 세계 안에 있는 이들의 시력 그 넘어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평야나 계곡에 있는 이들은 서로 볼 수 있다. 이렇긴 해도 그들이 자기들의 진짜 본성으로 분류가 되면, 악령들은 선한 영들을 더 이상 볼 수가 없다. 그러나 선한 영들은 아직은 악한 것들을 볼 수 있다. 그러나 그것들로부터 자신들을 돌아서게 한다. 그리고 이들이 돌아서자 마자 그것들은 보일 수 없게 된다. 지옥들은 보여질 수 없는데, 그 이유는 닫혀있기 때문이다. 단지 거기 있는 이들과 비슷한 인간이 열 때 입구 정도는 보여지기도 한다. 지옥으로의 입구는 오로지 영들의 세계로부터만 열릴 수 있다. 천국으로부터가 아니다.
지옥들은 각 처, 즉 산 아래, 언덕 아래, 바위 아래에 있다; 평야나 계곡 아래에도 있다. 그 지옥들 각각은 어둠침침하다. 거기 있는 지옥의 영들은 타고있는 횃불이 던져주는 듯한 빛 안에 있다. 그들의 눈은 이런 빛에 매우 익숙해 있다. 게다가 이들은 천국의 빛을 놓고는 그것은 의미심장한 암흑이라 간주한다. 만일 그들이 자기들의 동굴을 떠난다면, 그들은 전혀 볼 수 없다.
지옥 쪽으로의 열림 모두는 감추어져 있어, 악령들이 영들의 세계로부터 안으로 가는 때를 제외하고는 시력을 초월해 있다. 그럼에도 주님이 허락하실 때, 지옥 너머에 있는 영 또는 천사는 자기의 시력으로 마치 뚜껑이 열려서 보듯, 지옥의 것들이 무엇과 비슷한지를 꿰뚫어 볼 수 있다. 어떤 지옥들은 동굴 같아 보이고, 다른 지옥은 짐승의 굴과 도둑의 소굴 같아 보이고, 어떤 것은 바닥에 동굴을 가진 광산의 통로 같이 보인다. 어떤 지옥에서는 마치 큰 화재 이후 생겨난 듯한 돌더미를 볼 수 있는데 거기에 지옥의 영들이 살고 숨어 있다. 보다 온순한 지옥에서는 금방이라도 찌그러질듯한 오두막집, 거기에 인간이 혼잡하게 운집한 것이 보여진다. 오두막집 안에 지옥의 영들이 있고, 멈춤이 없는 말다툼, 두둘겨팸, 발톱으로 할큄, 강도질과 불화가 있다. 지옥들의 어떤 것 안에는 지저분한 곳(갈봇집) 밖에 없고, 다른 지옥들의 경우 침침한 숲 안에, 거기서 영들이 맹수의 소리지름 같이 으르렁거리고 있다. 거기에는 다른 영의 추격을 피해 달아날 수 있도록 아래쪽에 터널도 있다. 거기에는 갖가지 형벌을 당하고 있는 영들이 도망하는 사막도 있다.
지옥의 정확한 장소는 주님만이 아신다. 물론 악령이 들어간 지역들로 미루어 보면 대충은 그 위치를 추정해볼 수는 있다. 지옥들도 천국이 있는 지역이나 거기 있는 사랑의 종류에 따라 구역이 나뉘는 것과 원리는 똑같다. 모든 영적 지역은 동쪽에 있는 태양이신 주님에 관련하여 위치가 정해진다. 지옥들은 천국의 반대인 바, 그들의 지역들은 서쪽으로부터 출발하는데 그들이 더 악할 수록 동쪽으로부터 더욱 더 멀어진다. 지옥이 어떻게 배열되는지를 아는 것은 실지로 가능치 않다. 우리가 알 수 있는 전부란 단지 아주 끔직한 악은 북쪽 측면에, 덜 끔직한 악은 남쪽 측면에 자리잡았을 것이다는 정도뿐이다. 또한 동쪽 측면은 보다 더 온순한 지옥들이, 말하자면 잘난체해대나 그렇다고 집요한 미움으로 차 있지 않은 이들이다.
지옥의 숫자는 단지 천국의 공동체 만큼이나 많다라고 말하는 것으로 만족해야하지 않나 싶다. 그 이유가 각 천국의 공동체는 그에 상응하여 반대되는 지옥의 공동체를 가지기 때문이다. 지옥의 숫자는 셈을 넘어 있다. 지옥들 아래 지옥들도 있다.
만일 인간들이 경멸함, 적개심, 미움, 복수함, 사기 같은 것들이 악이다는 식으로 아주 단순하게 생각해버린다면 정작 중요한 지옥에 대한 진가를 놓고서는 아무것도 인정하지 못한다. 어쨋든 모든 악 중의 어느 한 개의 악이라 해도 그 자체는 수많은 형태의 악을 함유하고 이 형태 하나는 다시 여러 다른 종류들로 세분화되어가는 양상을 보이는바, 책 전체를 그런 것들의 목록으로 나열만 해도 책 한권을 채우는 것은 쉬운 일이 될지 모른다.

천국과 지옥 사이의 균형

천국과 지옥 사이에 있는 균형(balance)-또는 평형상태(equilibrium)-의 존재는 ‘지옥’편의 초두에서 이미 언급했다. 그런데도 그것에 관하여 더 말할 필요가 있는 이유는 이것에 대한 이해는 전체로서의 천국과 지옥을 이해하는 열쇠에 해당되기 때문이다.
만일 어떤 것이 결과되어 존재한다면 모든 것은 균형 안에 있어야만 한다. 균형 없이 작용과 반작용은 없다. 그 이유가 평형 상태는 두 세력 사이에 있고, 이쪽이 작용하고, 저쪽은 반작용하기 때문이다. 작용과 반작용의 동등함으로부터 야기되는 쉼의 상태가 평형 상태라 불리운다.
자연계에는 자연계 전체로서, 그리고 그 안의 각각의 것 안에 균형이 있다. 예를 들면, 보다 낮은 대기는 보다 높은 대기가 아래로 누르는 작용에 비례해 반작용하고 저항한다. 자연계에는 열과 차거움, 빛과 그늘, 마름과 습함, 등등에도 균형이 있다. 그것들 사이의 중간 지점이 균형을 이룬다. 모든 것은 안으로 흘러드는 어떤 세력(force)이 있고 다른 것은 그것을 수용하거나 수용을 마다하거나 한다. 자연계에서는 이런 것을 두고 세력과 노력이라 부르지만, 영계에서는 생명과 의지, 또는 의도함이라 부른다. 저 세계에서 생명은 살아 있는 세력이고, 의지는 살아있는 노력이다. 균형은 자유라 불리운다.
고로, 영적 균형, 또는 자유함이 존재 안으로 오고, 이쪽에서 선의 작용이 있으면 저쪽에는 악의 반작용이, 또는 이쪽에서 악의 작용이 있으면 저쪽에서 선의 반작용이 있다. 다시 말해, 선한 인간에서는 선이 작용하고 악이 반작용하여 균형이 발생하고, 악한 인간에서는 악의 작용이 있고 선이 반작용하여 균형이 발생한다. 이러한 이유는 인간의 삶의 모든 부분은 선인 것과 악인 것이 더불어 실시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각 인간의 의지는 그릇과 같다.
천국과 지옥 사이에는 영구한 균형이 있다. 그래서 악인 것을 행하려는 노력이 지옥으로부터 위쪽으로 숨쉰다. 그리고 선한 것을 행하려는 노력이 천국으로부터 아래쪽으로 숨쉰다. 영들의 세계는 완전한 균형 안에 있다. 그 이유는 천국과 지옥 한 중간에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완전한 균형을 유지해야 사후 영계로 입장하는 인간의 상태의 종류에 걸맞게 각 인간을 보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완전한 균형이 없다면 이는 불가능하리라. 이 균형을 수단으로 인간은 세상에 있을 때나 똑같은 자유 아래 있게 되는 바, 모든 이는 그가 무엇 같았는지 조심스럽게 검사되어진다.
악은 지옥으로부터 숨쉬고 선은 천국으로부터 숨쉬는 이유는 각 개별적인 인간은 인간의 애착과 생각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영적 영역(sphere)에 에워싸여 있기 때문이다. 각 개인이 이러하듯 천국과 지옥의 공동체 전부에게도 마찬가지 이다; 그들의 병합된 영역은 앞으로 흘러나오는데 전체 천국으로부터 그리고 전체 지옥으로부터 이다.
선은 천국으로부터 흐른다. 그 이유는 거기 모든 이는 선인 것 안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악은 지옥으로부터 흐른다. 그 이유는 거기 모든 이는 악인 것에 포함되어져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천국으로부터 흐르는 선은 모든 천사들을 그들의 이기심으로부터 지켜주고 그분의 형상 안에 간직되게 해주시는 주님으로부터 온다. 이에 비해, 지옥들에 있는 이들은 그들 자신의 이기심에만 포함되고 있다, 그리고 이것 자체에는 악 밖에 없다. 악만 있기에 그것은 지옥이다.
위 논지로 알 수 있는 바는, 천국에 있는 천사들과 지옥에 있는 영들을 보존되게 하는 균형은 영들의 세계에서 발견되는 균형과 같지 않다는 것이다. 천국에 있는 천사들을 위한 균형은 그들이 선인 것에 포함되기를 원했던 정도 만큼의 문제- 또는 그들이 세상에서 있었는 동안 선을 행하면서 살았던 정도 만큼의 문제- 그리고 얼마나 많이 악인 것으로부터 돌아섰는가의 정도 만큼의 문제이다. 그리고 지옥에 있는 영들을 위한 균형은 그들이 악인 것 안에 포함되기를 원했던 정도 만큼- 또는 그들의 생애 동안 악하게 살았던 정도 만큼-그리고 그들이 자기들의 심정과 영에서 선을 반대했던 정도 만큼의 문제이다.
만일 주님이 천국과 지옥 둘 다를 규율하시지 않거나 통치하시지 아니했다면 균형은 있지 않았을 것이고 만일 균형이 없다면 천국과 지옥은 없었을 것이다. 천국과 지옥 사이의 균형은 거기에 들어가는 인간들의 수효에 의해 영향받는다. 이 수효는 하루에도 수 천에 달할지 모른다. 이 수효가 얼마인지, 그것에 관하여 아는 천사는 없다. 주님만이 이를 헤아리실 수 있다. 그 이유는 신성은 어디에나 현존하시고, 주어진 상황이 어느 방법에 기대어야 하는가를 아시기 때문이다. 고로 주님은 주어진 지옥의 공동체가 너무나 강해지는 것을 방지하려 감독하시고 있다. 어느 지옥 공동체가 강해질 경우 그것을 억제하려 어떤 방도가 취해져 균형을 이루도록 되돌린다. 이런 방도들 중 하나는 주님이 자신을 더 가깝게 현존하게 해주시는 것이다; 또 다른 방도로는 이 공동체가 다른 공동체와 더 밀접해지는 것이다. 또 다른 방도는 초과된 악령들을 사막이나 다른 지옥들로 추방하는 것, 이런 등등이다. 요점은 균형이 있는지 여부를 판단하는 것은 주님이시다는 것, 천국과 지상에서 모든 인간의 구원은 이 균형 안에서 쉼을 얻는다는 것이다. 지옥은 천국을 꾸준히 공격하고 천국을 파괴하려 하는 한편, 주님은 천국에 있는 인간으로하여금 자기들의 이기심으로부터 멀어지게 하고 그분으로부터 오는 선 안에 간수하심으로 보호하신다. 그 반면 천국은 지옥을 공격할 방법이 없다. 그 이유는 주님으로부터 오는 영역은 모든 이를 구원하시려는 중단 없는 노력이기 때문이다. 지옥에 있는 인간들은 구원되어질 수 없는 바, 그들은 악인 것에 붙잡혀 있고 주님에 반대되어 있는 고로 그들은 자기들이 그렇게 있는 만큼 억제되고, 그들이 어떤 한계를 넘어 서로가 맞서 충돌하지 않도록 제한되고 있다.

천국과 지옥 사이의 균형 때문에 인간들은 자유함에 있다

영적 균형은 자유함 자체이다. 그 이유는 그것이 선인 것과 악인 것 사이에 있는 균형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의미되는 자유함은 선이든, 악이든 의도하는 능력, 그리고 이것 보다는 저것을 선택하는 능력이다.
이 자유함은 주님에 의해 각 인간에게 주어진다. 그리고 이 자유함은 거두어지는 일은 결코 없다. 이것은 주님에 속한 어떤 것일 뿐이지 인간에 속한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마치 인간의 것인 듯 그의 생명과 더불어 인간에게 주어져 있다. 그러므로 인간은 개혁되고 구원된다; 이 자유함 없이 개혁이든 구원이든 가능하지 않다. 확실한 바, 자유함이 인간으로 나빠지게 생각하게 만들든지, 좋아지게 생각하게 하든, 정직하게 이든, 또는 비정직하게 이든, 공정하게 이든, 불공정하게 이든, 선의로 이야기 하게 하든 또는 잘 행동하게 하든 어떤 상황에서 이든 자유함은 그 인간의 선택의 범주 안에 놓여 있다.
인간이 이 영적 자유함 없이 개혁되어질 수 없는 이유는 그가 구원되고자 한다면 이와 동시에 반드시 내다버려야 할 온갖 종류의 악들과 더불어 인간은 태어났었기 때문이다. 구원될 이들은 자신 안에 있는 갖가지 악들을 보고 인식하지 않으면 그 악들을 내다버리지 못할 것은 당연하다. 따라서 그는 그것들의 정체를 반드시 규명해야 한다; 그 다음 그는 그것들을 행하기를 원치 않아야 한다. 마지막으로 그것들로부터 돌아서야 한다. 그리고 그것들과 확실히 이별해야 한다. 이 사건은 당사자가 선한 것 안에 있는 만큼 악 안에도 포함되어 있어야 발생된다. 우리는 악으로부터 선을 볼 수 없고 오직 선으로부터 악을 볼 수 있다. 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 선은 그가 어린 시절에서 배워진 것들로부터, 성경을 읽음으로부터, 성경의 해설을 들음으로부터 형성된다. 또한 인간은 세상의 삶으로부터 도덕적으로 선인 것을 배운다.
자유 안에 있어야 할 필요가 있는 이유는 인간이 뭔가를 실시하되 이는 그의 사랑과 행동하는 애착의 결과로서 발생하지 않으면 그 뭔가는 그 인간의 부분이 되지 않기 때문에서 이다. 뭔가에 대한 모든 방법이 그 인간 안으로 온다. 그러나 그것들은 그의 생각함을 넘어 그의 의지로 들어가지 못한다. 인간의 의지 안으로 정당하게 들어가지 않은 것은 그에게 속한 것이 아니다. 그 이유는 생각은 기억으로부터 도출되는 한편, 의지 또는 의도함은 생명 자체로부터 도출되기 때문이다. 인간의 영은 그가 개혁되고 구원되어질 수 있는 자유 안에서의 있음이 유지되도록 천국과 지옥 모두와 연결되고 있다. 천국으로부터의 천사와 지옥으로부터의 영들이 각 인간과 더불어 있다. 이런 방식을 통해 인간은 영적 균형 안에 있다. 그러므로 자유 안에도 있다. 한 가지 이해해두어야 하는 것은, 천국과 지옥과 더불은 인간의 연결은 직접적 수단이 아니고 간접적 수단, 즉 영들의 중간 세계에 있는 영들을 통하여 연결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 영들이 인간과 더불어 있다; 천국 자체나 지옥 자체로부터의 누구와도 그는 함께 있는 것은 아니다. 다시 말해 인간은 영들의 세계에 있는 악한 영들을 통하여 지옥과, 영들의 세계에 있는 선한 영들을 통하여 천국과 연결되어지고 있다.
이상의 내용은 모든 것이 배열되어지는 방법인 바, 영들의 세계는 천국과 지옥 중간에 있고, 실제의 균형이 거기서 발생한다. 인간들에게 붙은 영들은 특정한 공동체로부터 인간에게 파견된 것이다. 이 특별한 영은 그룹(group)의 ‘지배를 받는(subject)’ 영이라 불리운다. 전체 공동체는 다른 공동체, 또는 개인과 위의 방법으로 교통할 수 있다. 이것은 영계에서의 왕래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이다; 아마 이 세상 인간 사이에 놓인 서로 간에 있는 오감, 의사를 서로 타진함과도 동일할 것이다. 영들의 세계로부터의 공동체의 지배를 받는 영들이 각 인간에게 붙어 있다.
마지막으로 사후 삶에 대한 인간들의 개념(notion), 천부적인 개념, 즉 천국으로부터 인간 안으로의 흐름으로부터 오는 개념에 대해 몇 마디 말을 보탤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천국과 연결된 모든 인간과 더불어 있는 사후 삶에 관한 타고난 생각이 있다. 이 생각의 발단과 출처는 천국의 영향력, 좀 더 꼼꼼히 말하면, 영들의 세계로부터 와서 인간에게 붙어있는 영들을 수단으로 주님으로부터 천국을 통하여 있는 영향력이다. 인간들이 만일 생각에 관한 그들의 자유가 잘못된 생각들에 의해 있다면, 예를 들면, 혼은 단지 생각 차원에 불과 할뿐이다 든가, 단지 몸 안에 존재하는 어떤 것 밖에 더 이상은 아니다는 식으로 인간 혼에 관한 잘못된 생각들에 의해 삭제되지 않았다면 천부적 개념을 가진다. 그 이유가 사실 혼은 인간의 생명 외 다른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영이 실제의 인간이다. 그가 세상에서 끌고 다니는 육체라는 몸은 영이 자연계에서 행동할 수 있게 해주는 몸종에 불과할 뿐이다.

후기(postscript)

이 책에서 말해진 모든 내용들은 영적 내용물에서 즐거움을 발견하지 못하는 분들에게는 이상한 듯 여겨질지 모르나, 그와 반대인 분들에게는 영적 내용에 대한 그들의 개념을 더 명료해지게 하는데 도움을 줄 것이다. 특히 진리를 위하여 진리인 것을 사랑하는 분들을 위하여 이 책은 더 각별할 것이다. 사실 사랑되어진 것이 그것 고유의 빛을 마음 안으로 가져다 주기 때문이다. 특히 진리가 사랑 받을 때 더욱 그러하다. 그 이유는 진실로부터의 모든 것은 빛 안에 있기 때문이다.

부록
(Appendix)

선각자의 출판 서적, 비 출판 서적 소개
선각자의 용어에 대한 간결한 풀이
선각자에게만 유일한 기본 생각들
도서구입 안내

선각자의 신학 관련 저서들

1. 직접 출판한 저서들 2. 출판되지 않고 발견된 그의 기록 내지 저술인 것들.

천국의 비밀들 (1749-1756년) 영의 일기(또는 영적 경험)(1745-1765)
천국과 지옥 (1758년) 요한계시록 설명 (1757-1759년)
새 예루살렘과 그곳의 교리 (1758년) 아타나시안 신조 (1759-1763년)
마지막 심판 (1758년) 주님에 관하여 (1759-1763년)
백마 (1758년) 예언서들과 시편의 내적의미(1759-1763년)
우주에 있는 땅들 (1758년) 마지막 심판 (1759-1763년)
주님에 관한 교리 (1763년) 신성의 사랑 (1759-1763년)
거룩한 성경에 관한 교리 (1763년) 신성의 지혜 (1759-1763년)
삶에 관한 교리 (1763년) 선행의 교리 (1766년)
신앙에 관한 교리 (1763년) 5 기억할만한 관련들 (1766년)
마지막 심판에 관한 계속 (1763년) 결혼에 관해서 (1766년)
신성의 사랑과 지혜 (1763년) 정경들 (1769-1772년)
신성의 섭리 (1764년) 새 교회에 관한 교회의 역사 (1769-1772년)
요한계시록 밝힘 (1766년) 부속물(coronis) (1769-1772년)
부부의 사랑 (1768년) 새 교회로 초대함 (1769-1772년)
간략한 해설 (1769년)
유입, 또는 혼과 몸 사이의 상호 작용 (1769년)
진정한 기독 종교 (1771년)

선각자의 용어 풀이
(Glossary)

** 참고: (commercium) 식의 표기된 것은 라틴어임
이 풀이는 간결해서 좋지만, 한편 너무나 간결해서 어떤 단어의 경우는 이해함에 불리할 수 있는 단점도 있다. 어쨌든 아래의 글들은 Swedenborg Resercher’s Manual by William Ross Woofenden으로부터 발췌되었다. 정확한 이해를 위해 영역본이 필요할 경우 역자에게 연락하기 바란다 (인터넷에서 헌 책은 구매가 가능할지 모른다, 검색해보기 바란다).

감각적인 (Sensuous)
관능적인, 감각의, 그리고 감각 지향의. 섹스적인 것만을 함축하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감각들에서 집중함에 의해 특색을 이루는 것, 감각들에 의해 납득되는 것. 마음의 자연적 수준에서도 가장 낮은 평면.

개혁 (Reformation)
거듭남의 과정 중의 일부를 묘사하는데 사용되었다, 즉 당사자의 바깥쪽 생활을 질서 안에 놓는 것이다. 당사자는 진리가 우세한 순종의 상태에서 진리를 수단으로 선 쪽으로 인도된다. 이것은 주님으로부터 새 의지를 받기 위한 준비단계이다.

거듭남 (Regeneration)
넓은 의미에서 재출생의 모든 과정. 좁은 의미에서 개혁에 뒤이어지는 과정. 주님이 각 개인 안에서 새로운 의지를 만들어가시는 과정, 또는 (삶의) 과정의 목적(goal).

결혼의 (부부의, connubial)
결혼에 관련되는 단어이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것은 결혼에 연계
된 외적인 것들 만에 관련하여, 또는 부정적 측면에서 사용되는 편이다. 새나 동물의 짝짓기에 사용되었다.

고대 교회 (ancient church)
성경에서 노아와 그의 자손들에 의해 표현된 고대 시대 성경 속의 사람들의 종교.

과학물들 (Scientifics)
과학적 진리들을 보라. 지식들, 사실들, 자료들.

과학적 진리들 (Scientific truths)
위 표현은 빈약한 번역일지 모른다, 그 이유는 이 용어가 우리가 아는 “과학(science)”을 가리키는 경우가 매우 드물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연을 연구함으로부터, 그리고 성경의 글자 그대로의 의미로부터 획득한 사실들, 자료들, 진리들이다.

공적 (Merit, meritorious)
흔한 사용법에서 이 단어가 함축하는 것은 긍정적(건설적) 측면이 대세이다. 그러나 선각자가 이 단어를 사용할 때의 경우, 거의 언제나 뜻하는 것은, 공적 추구(merit-seeking), 즉 자비롭게 여겨질 수 있다 싶은 어떤 행위 또는 친절한 어떤 행동에 대하여 돈 또는 명성을 보상을 은근히 기대함이다.

광적 신앙 (Religiosity)
외적, 또는 미신적 믿음 체계, 신봉자의 편에서 내적 약속의 깊이를 갖지 않은 종교를 묘사하는데 사용하였다.

교류 (Intercourse)
왕래함 (commercium)에 대한 오래전의 번역, 상호 작용 (interact)을 뜻한
다, 이는 개인들 또는 어떤 것들을 연합시키는 것이다. 개인의 혼과 몸이 어떻게 교통하고 일반적으로 상호 작용하는지를 언급할 때도 사용된다.

교리 (Doctrine)
세 가지를 뜻하려고 사용된다: 1. 배움의 과정, 2. 학식 또는 과학의 분과, 또는 3. 특별한 취지에서 교회의 가르침. 일반적으로 이것은 진실로 종교 생활을 꾸려가기 위하여 절대로 필요한 가르침일 것이다, 그리고 고로 본질적으로 실용적일 것이다.

교회 (church)
이 단어는 흔한 보통의 단어 사용에서도 어떤 영적 생활만도 아니고, 그렇다고 어떤 종파나 조직체만을 지칭할 때도 아닌 것이 뜻해지게 보통이 아닌 의미에서 사용되어진다, 즉 조직체에서이든, 개인적으로 이든, 영적 생활을 사실로 깨달음이다. 고로 개인(person, 개인)은 영적인 교회이다.

균형 (balance)
(평형을 보라.) 천국 세력과 지옥 세력이 균등하게 인간에게 영향을 미치도록 하는 섭리적 상태를 염두해서 사용된다, 하여 당사자가 악의 영향력에 휘둘리는 듯 외관상 나타남에도 불구하고 실상 그는 자유한 상태에서 도덕에 관한 결정들을 만들게 됨을 말할 때 이 단어가 사용되고 있다.

그릇 (Vessel)
인간은 하느님으로부터 생명을 받는 “그릇”이다고 말해진다, 단지 담는 용기라는 말이 아니고 유기적 형체로서 이다.

기억해둘만한 관련 사항들 (Memorable relations)
기억해둘만한 사건(memorabilia, memorable occurrences)라고도 말한다. 선각자가 그의 후기 저서들의 장들에 첨부하는 식으로, 또는 군데군데에 흩뿌
리는 식으로 해서 기록했는데, 다른 세계에서의 그의 경험들에 관한 이야기들이다.

기운 (영역, sphere)
모두 각각의 사람들은 자신의 총체적 사랑들로부터 되튀긴 유출물에 에워싸여 있다고 말해진다. 일반적으로 이것은 땅 위에서는 감지될 수 없다. 누군가의 기운이 어떤지는 천국에 있는 모든 이에 의해서는 확연히 감지된다, 하여 상대방과 연계되어도 되는지, 피해야 하는지를 결정하는 기초이다.

길들여진 선 (Domestic good)
개인이 부모로부터 유전적으로 끌어낸 선을 뜻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이것은 당사자가 (선택의) 자유함 안에서 그것을 자기 것이 되게 하지 않으면 “저축”되지 않는다. 또한 “가정의 자연적 선”, 그리고 “자연적 선”이라고도 불리운다. (천국의 비밀 3518항의 창. 27:9에 대한 해석을 참조하라.)

김나지움 (Gymnasium)
유럽에서 공통적으로 사용함에서는 두 번째의 학교 (중고등학교). 선각자는 이 단어를 그룹들의 멤버들이 생각들을 토의하고 그들의 마음들을 실행해보는 영계의 모임들이나 거기의 학교들을 언급하는데 사용했다.

끊이지 않는 등차들 (continuous degrees)
수준들(levels) 또는 단계들(gradations), 마치 찬 것으로부터 따뜻한 것까지, 또는 어둠으로부터 빛으로까지의 경우와 유사하다. 또한 “넓이의 등차들” 또는 “수평적인 수준들”이라 불리운다.

나머지 상태들 (Remnant states)
“리메인스”를 보라.

논리를 더듬어 사고함 (Ratiocination, 합리화함)
“추론(reasoning)”으로만 번역되면 약간 유감스럽다. 이는 거짓 추정들, 거짓 추론, 거짓 연역을 끌어내는 과정을 함축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아마 “합리화 함(rationalizing)”의 뜻을 지닌 최근의 심리학적 용어에 매우 가까울지 모른다.

능력(Faculty)
이런 것을 뜻하는데 사용되었다, 1. 신체적 수단(resource), 2. 가능성, 기회, 3. 타고난 경향(propensity) 또는 능력(ability), 그리고 4. 정신의 품질. 이 마지막 의미에서 보면, 이것은 하느님으로부터 수여됨이다. 이 수여된 것을 올바로 사용함에 의해 당사자는 자기 안에서 주님의 현존하심을 보증받는다.

다써버림(고갈, exinanition)
영이 텅빔, 영적 황무함의 상태. 주님의 경우, 이것은 그분의 인간 부분이 내부의 신성으로부터 분리된 듯 여겨져 있는 겸허의 상태이었다.

담는 어떤 것(용기, containant)
초기 번역자들에 의해 만들어진 단어, 또한 “포용함(continent)”으로도 번역하나 통상적인 수준은 못된다. 이것은 콘테이너, 저장소를 언급하는 것인데, 때로는 마음이 생각들의 “저장소”이다를 서술함에서 심령 연구적 측면에서 사용된다.

더 낮은 땅(Lower earth)
영계에 관한 선각자의 세부적 묘사에서, 더 낮은 땅은 영들의 세계에서는 그 아래쪽 영역이고, 지옥 쪽에서는 그 위쪽 영역이다.

동물 영 (animal spirit)
갈렌(Galen)의 관념에 있는 세 신체 영들 중의 하나. 선각자는 더 순수한 종류의 피를 뜻하기 위해 사용했다. 돌(Dole)의 “신성의 사랑과 지혜” 423쪽에서는 “혼-영”으로 번역하였다.

동물 왕국 (동물 왕국의 경제)
“인간의 혼의 영역의 역학”을 다룬 선각자의 1740년의 저서 Oeconomia Regni Animalis 에 대한 미흡한 번역어 이다.

되풀이하는 결혼들 (Iterated marrages)
반복된 결혼들, 재결혼.

되찾음 (구속, Redemption)
보통의 의미에서 사용되지 않는다, “되사는 것”, 되찾음은 그리스도의 생애 전 과정의 결과로 얻어진 지옥을 복종케 함과 천국의 질서를 다시 세운 것을 뜻한다. 하여 믿는 자에게 가능할 수 있는 개개인의 구원을 만드신 것이다.

리메인스 (Remains)
사랑과 진리에 관한 감명들이 인간에게는 알려지지 않은 신비한 방법에서 주님에 의해 개개인 안에 심어진 사랑과 진리에 관한 깊은 감명들, 이것은 유아로부터 모든 삶을 통하여 각 개인과 더불어 계속 “남아” 있으면서, 재출생을 위한 기초가 되어주고 있다. 이 단어는 “나머지들(remnants)” 또는 “나머지 상태들”으로도 번역하고 있다.

림버스(Limbus, 가장자리, 변방)
“봉투, 덮개(envelope)” 또는 “테두리, 가장자리(border)”로도 번역되었다. 각자의 특질(본성, nature)로부터 끌어내진 가장자리를 뜻하기 위해 사용되었는데, 사후에도 이것은 존속하여 영계에서 (어떤 형체라고 분명하게 묘사할 수는 없지만) 하나의 불변성(fixity), 안정성(stability), 영속성(permanence)을 주고 있다. 이 단어는 쉽게 정의를 내리기가 힘든 복잡한 개념에 있다.

맥시머스 호모 (Maximus Homo)
“웅대한 사람”과 “보편적 인간”을 보라

메디아 (Media)
종종 단수의(유일한, singular), 매개(중간, medium). 이는 사이에서 가는 것들을 뜻한다. 두 실체의 각각으로부터 어떤 것을 도출하는 중간의 것(intermediary), 그리고 개인을 이쪽 편으로 끌어낼 때, 다른 쪽은 종속시키는 효과를 갖게 된다.

모양 (Form)
유기체(organization) 또는 본질이 나타나게 하는 유기적 저장소(organic receptacle)를 철학적 의미로 사용했다. 이것은 외형(shape, 모양)에 관련되지 않고, 질서, 의향, 배열과 실재물의 부분들과 관련된다. 기능 또는 사용과 밀접하게 연합하고 있다.

목적, 원인, 결과 (End, Cause, Effect)
목표(goal) 또는 의도(purpose)의 철학적 의미에서 사용되는데, 목적은 의지력의 사랑 또는 의향(intention)이고, 원인은 의도(purpose)를 성취하려고 이해력을 통하여 있는 수단들이다, 결과는 초래하는 행동, 말함, 감각 또는 생산, 고로 성취됨이다.

묶는 것들(속박됨, bonds)
이는 족쇄를 채우는 식의 뜻에서는 아니고, 어떤 개인이 유독 사랑하는 특별난 것을 뜻한다. 즉 너무나 사랑하기에 그것에 묶인 상태인 듯 되는 것, 하여 사랑된 것의 반대되는 것에 대하여는 금하게 한다(아랑곳하지 않는다). 외적 묶임들은 시민 생활에, 내적 묶임들은 영적 생활에 영향을 준다..

방계적인 선(Collateral good, 부수적인 선, 서자 출신의 선)
자연적 선함과 영적 선함 사이에 놓인 선함, 하여 일부는 자연적 선함, 일부는 영적 선함이 섞인 상태의 선함, 즉 본질적으로는 영적인 것들에 대한 자연적 수준의 사랑, 고로 진짜의 선함은 아니나 진짜의 선함에 관련되고 있다.

별개의 하나 (구분되는 하나, distinctly one)
선각자에게서의 단일성(하나임, oneness)은 단순함이 아니고 목적(의도, purpose)의 통일성(unity)이다. 사랑과 진리는 행동 안에서 분리되어 존재할 수가 없다, 그러나 여전히 그것들의 하나임 안에서 구분될 수 있다, 고로 “별개의” 또는 더 나은 표현으로는 “구분할 수 있게 있는 하나”이다.

부가적인 (adscititious)
때로는 “외래의(adventitious)”로도 번역할 때도 있다, 부가적인(additional), 외적 측면에서 첨가됨

부끄러히 여김 (창피함, 굴욕, Humiliation)
당황함이나, 근대적 의미에서는 그렇게 사용되지 않고, 겸손의 상태를 뜻하기 위하여 사용하고 있다, 이 겸손 안에서 개인은 자기에게 있는 듯 여겨지는 어떤 선 또는 진리가 실제로는 주님의 것이 자기 안에 있는 것임을 인정한다. 이 단어는 주님께서 그분의 영적 텅빔의 상태를 두고 사용하셨다.

부부의 (결혼의, conjugial)
이는 선각자가 철자를 기록함에서 (conjugalis 대신) conjugialis를 더 좋아했다는 점을 반영하기 위해 초기 번역자들이 개발한 단어이다. 이 단어는 결혼에 속하는 것들, 그리고 결혼한 양쪽(부부)가 서로를 위하여 가지는 사랑들에 관련되고 있다. 일반적으로 적극적 자세를 취한다.

불연속 등차들 (discrete degrees)
구분되는 수준들, 이쪽이 저쪽 보다 더 높다, 마치 목적, 원인, 결과의 관계와 같다. 또한 수직적 수준들이라 불리운다, 고도(altitude)의 등차들, 높이의 등차들.

보편적 인간 (Universal Human)
맥시무스 호모에 대한 돌씨의 번역어이다. “웅대한 사람”을 보라.

보편적 교회 (Universal church)
“우주로부터의 교회(the church universal)”, 모든 곳에 존재하는 교회를 말한다, 교회 조직체를 초월한 교회이다. 진실로 전기독교적인 개념, 이 세상의 모든 종교에서 각 종교의 신앙으로부터 있는 신실한 개인들.

사람 (Man, homo, vir)
라틴어는 “사람”을 위해 두 단어들을 가진다: 호모(homo)-개인(person, 남자와 여자 모두), 인류(mamkind), 본질적 개인으로서의 주님; 그리고 버(vir)-남자 인간의 존재.

사정관(assessor, 재산 평가인)
1716년 선각자는 광산 왕립 대학에 “비범한 사정관”으로 위촉되어졌다, 즉 그는 스웨덴 광산국의 협력 멤버로 명명되어졌다. 그는 1724년 사정관 정회
원이 되었다. (그때 당시 광산국은 국왕 직속 감시 아래에 있었는데, 그 이유가 왕의 중요한 자금 조달이 금을 비롯한 광산 채굴에 있었기 때문이다 역자주)

사탄 (Satan)
악마를 보라. 악의 욕망들을 지적으로 확증하는 악령. “악한 자”의 이름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항간에서 말해지는 것, 즉 하나의 제 일의 악마 또는 어둠의 제 일 인 자가 있다는 식으로 선각자는 믿지 않는다)

사회 (Society)
연계된 사람들의 그룹, 함께 생활하는 사람의 그룹, 공동체, 다음 세계에서 천사들 또는 영들의 그룹. 또한 스웨덴볼지언들이 자기들의 지역 교회 조직이나 모임을 지칭할때에도 사용했다.

상응 (correspondence)
스웨덴볼기안이즘에 기초되는 개념, 신성과 모든 보다 낮은 생명의 등차들 사이에 있는 원인적인 관계와 기능적인 관계이다, 이것은 신성이 창조의 모든 것 안으로 흘러가는 방식, 또는 법칙이다.

상응물들(correspondences)
응답하고, 걸맞고, 동의하고, 또는 서로에게 유추되는 어떤 것들, 또는 실재물들, 마치 태양의 열과 빛이 하느님의 사랑과 지혜에 상응하는 것과 같다. 고로 열과 사랑, 그리고 빛과 진리는 상응물인 것이다.

새 교회 (New Church) (1)
하느님-인간 관계들의 어떤 새로운 상태를 놓고 일반적으로 사용되었다, 또한 주님만을 인정하고 예배하고, 그분의 말씀을 거룩하게 붙들고, 신성의 진리들을 사랑하고, 그리고 선행으로부터 분리된 신앙을 거절하는 교회 시대를 언급할 때 사용되었다.

새 교회 (New Church) (2)
스웨덴볽의 신학 저서들에서 발견한 교리들에 접착된 어떤 조직화된 종교 그룹을 대중적으로 규정하려고 사용된 명칭이다. 이런 그룹의 개개인들은 새 교회인(a New Churchman)이라 종종 불리운다

새 예루살렘 (New Jerusalem)
성경의 계시록서의 뒷 부분에서 묘사된 상징적 도성이다. 초기 스웨덴볽지언들이 천국의 도성을 수단으로 상징화되고 의미된 교회를 자기들의 교회로서 삼기 위해 이 이름을 채택하였었다.

새 예루살렘의 교회 (Church of the New Jerusalem)
선각자께서 기독교 교리의 본질되는 주석을 이끌어낸 교회들 중에서 가장 일반적으로 사용한 교회의 이름인데, 약식으로 말하면, “새 교회(New Church)” 이다.

선 (Good)
선함 또는 선한 것을 뜻하려고 사용한다, 이것은 신성의 질서에 따라서 생각하고 행동함에 애착함이라고 일반적으로 정의된다. 고로 이것은 쓰임(use)이 포함된 주님과 이웃을 사랑함이 그 품질이다. 인간에 있는 선은 하느님의 신성의 선에 관련이 있다.

선으로부터 진리에 애착함 (Affection of truth from good)
정밀하게 정의를 내린다면 “선행(charity)”이다, 즉 (이웃에) 쓸모있는 행동들을 있게 하는 각 개인들에 있는 선으로부터 만들어내진 진리를 사랑함이다.

선의 진리 (Truth of Good)
이 관용구의 또 다른 대체할 수 있는 어구는 “사랑의 지혜”가 있다. 이는 누군가가 지혜있기를 바램, 또는 지혜 있기를 사랑함을 가지지 않으면 지혜에
도달될 수 없다를 알아채게 한다. 이 사랑으로부터 결과할 수 있는 지혜가 “선의 진리”이다.

선행 (charity)
흔한 대중적인 사용법에서일 경우, 이 단어는 물질적 궁핍을 경감되게 해주는 것(자선 행위)을 뜻한다. 선각자는 이 단어를 영의 측면에서 관심을 갖는 것, 영의 복지를 향상되게 하는 것, 사욕이 없이 주어진 업무에 매진함, 이웃에 선을 행함에서 어떤 보수도 예상되지 않는다해도 심정에서 기쁨을 느끼고 있는 것을 뜻하는데 사용하고 있다.

수정 (변경, Modification)
선각자의 신학 저서 이전의 그의 어떤 저서에서, 본성을 통하여 교통하는 모든 방식을 함축하는 개념으로 사용하였다. 이 생각은 그의 후기 교리 또는 상응물에 관한 개념 안에 통합되고 포함시켜졌다.

순결한 (chaste)
흔히 이해되는 것은 순진한, 순수한, 독신(주의) 따위이다. 선각자는 결혼한 자가 섹스에 대하여 순수하고 깨끗한 자세를 가지는 것을 뜻하는데 사용하였다. 진정한 결혼의 사랑은 “순결함 자체”이다 말하고 있다.

순수 지력 (Pure intellect)
선각자의 신학 저서가 있기 전에서인 이성 심리학(Rational Psychology)이라는 책에서, 그는 순수 지력이란 개인들에게 생각하고 추론하는 힘을 주는 능력이다라고 정의하고 있다, 그리고 이 순수 지력은 하느님으로부터 파생된 직각적인 지혜와 함께 유기체의 모든 과정들을 통치한다.

순진 (Innocence)
라틴어의 뿌리에서는 해가 없음(harmlessness)을 뜻한다. 영적 순진은 자아
에 의해 인도되기 보다 주님에 의해 인도되기를 내향적으로 기뻐함이다. 이 특성은 각 개인에 인접되어 있으면서 당사자가 천국으로 인도되는 것을 돕는다.

스톨지 (Storge)
유아를 사랑함을 뜻하는 그맄어로부터 빌려온 단어, 특별히 그들의 부모들에 의해 유아들을 위해 느끼는 사랑. “어버이다운 사랑”, “어버이다운 애정”으로 번역되었다.

시대의 종말 (consummation of the age)
잘못 번역된 킹제임스 성경의 “세상의 끝”을 대체할 수 있는 어구. 이 어구는 시대, 또는 년대의 마감, 또는 끝을 언급한다.

시리즈(Series)
연결된 순서, 생각함의 열차. 선각자의 신학 저서 이전의 시기의 저서에 “시리즈들과 사회” 그리고 “시리즈들과 등차들”의 용어들이 가설로 언급되었는데, 이후 등차에 관한 신학적 개념에 포함시켜졌다.

시험 (Temptation)
나쁜 것을 하도록 부추킴 또는 자극함의 의미에서 사용되지 않는다. 이것은 각 개인의 지배하는 사랑을 공격하여 개인을 심리하고 테스트한다- 당사자의 특성을 밝히 드러내주고, 그 특성이 더 힘세어질 기회를 제공하는 내적 투쟁이다.

신앙의 진리 (Truth of faith)
누군가의 신앙의 부분에 있는 진정한 생각, 그러나 당사자의 삶에서 사용하게 놓여져 있지는 않은 진리이다. 이는 “신앙의 선”에 대조되어 사용된다, 이것은 누군가의 살아있는 신조들로부터 와지는 선함이다.

신성이 되심 (Glorification)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분의 있음의 모든 평면들에 있는 인간적일 뿐인 것을 벗기 위해 그것들을 신성으로 만드시는 과정. 또한 주님의 마음 안에 신성한 의식을 건립하심, 그리하여 그분이 생명 자체가 되셨다를 뜻하는데에도 사용되었다.

신성의 인간 (Divine Human)
새 교회 신학의 중심을 차지하는 생각, 이 용어는 주님의 인간이 신성이 되신 이후의 주 예수 그리스도에 적용된다, 고로 인간의 형체에 있는 신성의 사랑이다-즉 “신위(Deity)”의 모든 충만함이 신체의 형체 안에 살고 있으심”이다. (골. 2:9)

신성의 자연 평면 (Divine Natural)
신성이 되심, 또는 신성으로 만들어진 예수의 마음, 또는 내부의 본성의 자연적 수준, 또는 가장 낮은 수준.

신성이 진행함 (Divine proceeding)
진행함의 행동에 있는 신성, 고로 그분으로부터 방산되는 하느님의 품질들, 성경의 어떤 문맥에서는 성령과 필적되고 있다.

신하 (Subject, 종속하는)
평범한 사용법에 추가하여, 철학적 의미에서는 활동 또는 행위에 기초가 되는 것을 말하는데 사용하였다. 예를 들면, 선행은 “신하”를 가져야만 한다, 즉 선행을 구체화하고, 느끼고, 실시하는 개성.

쓰임 (사용, Use)
쓸모 있는 활동, 목적을 섬기는 기능, 종종 선과 같은 뜻의 선상에 놓이기도 한다. 섬기기를 진짜로 바램이 들어있는 수고함을 정규적으로 함축하고 있
다. 고로 “쓰임으로부터의 선, good of use”이 목적이다. 이 목적에 잘 어울리는 알맹이나 동기를 가지고 있는 마음가짐이나 행위.

아니마 (anima, 영혼, 내적 개성, 남성의 여성적 요소)
인간의 혼(soul), 이 단어는 다양한 전통적인 의미선상에 있어 한마디로 통일된 정의는 힘들다. 사후 살게되는 개인의 부분이다. 선각자는 분석 심리학자로 유명한 융(Jung) 보다 훨씬 먼저 이 단어를 사용했지만, 융이 이 단어에 여성의 특성을 할당했으나 선각자의 경우에서는 그런 추가된 의미는 보여지지 않는다.

아니뮤스(animus, 왕성한 정신, 외적 개성, 여성의 남성적 요소)
때로는 “의향(desposition)”으로 번역된다. 이 단어는 (만일 아니마와 대비하여 사용된다면 보다 수준이 낮은 마음,) 일반적으로 마음(mind)에 관련된다. 각자의 기질, 개성.

악 (Evil)
악, 자체만에 주목하면, 선으로부터 절단(severance) 또는 무질서된 선, 하느님으로부터 분리(disunion)와 주님과 천국에 반대함. 고로 개인 안에 있는 악은 그 개인 내부에 있는 지옥이다.

악귀들 (인간의 일생 동안 따라 다닌다는 귀신, Genii)
선각자는 이 용어를 가장 나쁜 종류의 악령들을 지칭하는데 사용하고 있다, 이것은 개인의 의지에 들어붙어 악의에 차서 행동하게 하고, 당사자의 선한 바램들을 악한 의도들 쪽으로 비튼다. 진리를 만들려고 노력하는 자가 이런 악령에게서는 그것이 거짓이고 반대적인 것으로 나타난다.

악마 (devil)
선각자를 위하여서 단어 “악마(devil)”는 지옥들 전체를 뜻한다. 악마는 사후에 있는 악한 개인이다. “사탄”에 대비해볼 때, 사탄은 자신들 안에 있는 악들의 욕망들을 지성적으로 확증한다, 악마들은 그것들을 살아내려 뜻한다.

악의 거짓 (Falsity of evil)
이는 “악으로부터의 거짓(falsity of evil)”라고도 불리운다. 거짓 생각 또는 악한 바램이 원인이 되어 진리가 비뚫어짐.

…안에 (In)
“종사함 안에” 또는 “상태 또는 조건 안에”의 의미에서 자주 사용된다. 선각자의 책에서 우리는 읽는 바, 어떤 개인이 “선 안에”, 또는 “선에 애착함 안에” 있다 등등이라고 읽는다. 이는 그가 선인 것을 사랑함의 상태 안에, 또는 선함의 상태 안에 있다를 뜻한다.

알카넘 (알캐이넘, arcanum)
비밀, 감추인 어떤 것. 이 단어의 복수는 알카나(알캐이너, arcana)이다. “알카나 세레스티아(arcana coelestia), 즉 천국의 비밀들”은 선각자의 가장 방대한 저서 명이다.

양심 (conscience)
선을 악으로부터 구별하는 능력-선천적인 것이 아니고 배워서 획득한 능력인 바 모든 이에게 균일하게 똑같을 수 없다. 선한 자만이 진정한 양심을 가진다. 가짜 양심이 선의로 의도될 수도 있을지 모르나, 신조의 오류들에 부분적으로 기초하고 있다.

양심 장사치들 (conscience mongers)
지나치게 양심적인 인간들, 타인을 혹평하는 인간들.

역사적인 신앙 (Historical faith)
전통에 기초한 “신앙” 또는 타인들의 신조들(믿음들)에 기초한 “신앙”, 고로 진실된 신앙은 아닌 것이 확실하고, 신앙 같이 나타남(껍데기 신앙)일 뿐이다 (“가정의 선”도 참조해보라.)

영계 (영적 세계, Spiritual world)
다음 세계, 또는 사후 개인들의 거처를 일반적으로 아우러서 언급하는 용어이다. 영들의 세계, 즉 사후 들어가는 첫 상태를 위해 선각자가 이름 지은 영들의 세계, 천국과 지옥의 중간에 있는 영들의 세계와 혼동하지 말라.

오류(잘못된 생각, Fallacy)
현혹시키는 나타남. (태양이 “올라온다” 같은 식에서의) 감각들의 오류들이 가장 작은 중대한 것이다. 보다 나쁜 것은 당사자의 보다 수준 낮은 본성으로부터 파생되어진다, 즉 악과 결합된 거짓들이다, 이는 개인의 부분에 신앙의 부족에 기인된다.

외관 (나타남, appearance)
순수한 진리, 또는 신성의 진리를 그 진리가 숙박한 형체들로부터 구별하려고 사용되는 단어이다. 고로, 모든 이는 자기의 유한한 상태에 따라 진리를 볼 때의 그 진리이다. 진리의 이런 나타남을 당사자가 선한 의도로 사용한다면, 이 나타남을 진리로서 주님께서 받아주시기 때문에, 망상(잘못 생각함, illusion)은 아니다.

웅대한 사람 (Grand Man)
라틴어의 맥시무스 호모(maximus homo, 가장 큰 사람, greatest man), 돌(Dole)에 의해서는 “보편적인(우주적인) 인간”으로 번역되었는데, 주님의 “몸”으로서의 천국들 전체, 또는 천국과 땅 위의 교회를 아우르는 주님의 왕국에 관련된다. 때로는 주님 자신을 뜻하는 데에도 사용된다.

유입 (Influx)
흘러듦(inflow), 또는 입력(input) 또는 영향력 (influence)를 뜻한다. 이 단어는 행동하는 모든 힘은 하느님으로부터 창조의 모든 것 안으로 변함없고 중단 없이 흐르고 있다는 근본적인 개념을 묘사하는데 사용된다.

유전적 악 (Hereditary evil)
이 용어는 선각자에 의해 별도의 제한됨도 없이 무조건식으로 사용되는 편이기는 하나, 사실상 그는 전통적 견해는 사절하고, 우리는 실제의 악을 유전적으로 상속하는 것이 아니고 악을 향하려는 경향성들을 상속한다고 주장한다. 우리는 성인들이 되어서는 이것을 확증하거나 채택하거나, 또는 거절하거나 거부할는지 모른다.

유출 (Efflux)
산출(output), 밖으로 흐름. 하느님으로부터 개인들 안으로 흘러든 선과 진리는 되돌아서 이웃을 사랑함의 행동들의 형체로 세상 안으로 흘러나간다. 하느님의 보편적 법은 유입은 언제나 유출에 의거 있게 된다는 것이다.

육체의 (coporeal)
실재를 나타내는데 자주 사용되어 신체적 부분, 또는 신체에 부착된 마음의 부분을 뜻하였다. 신체적, 육체적인 것은 감각과 육체적 쾌락들과 더불어 선취되어 있다.

은근히 주입하다 (Insinuate)
기초되는 라틴어의 의미에서 이 단어는 어떤 것을 노골적 방법이 아닌 미묘하게 받아들여지게 또는 스며들게하는 것을 뜻한다. 수용자가 주입 과정을 충분히 알아챔이 없이 내면의 위치를 할당하는 것이다.

음란 (간통, scortatory)
성관계가 문란한 것을 묘사한 것이다, 음행, 매춘.

의미함 (Significative)
영적 뜻을 운반하고 가리키는 어떤 것. 특별한 뜻, 뜻있음. 현재는 표현함과 상응함과 구분되어 사용된다.

의지력과 이해력 (Will and understanding)
“의도력과 식별력(intentionality and discernment)”, “자발력과 지력(the voluntary and the intellectual)”. 이것들은 인간의 개성 속의 포괄적인 두 양상들 또는 능력들이다. 의지력은 의지력의 모든 기능들을 포함하고, 신성의 영향력에 반응을 보이고, 수용하는 부분을 섬긴다. 이해력은 식별하는 모든 기능들을 포함하고, 의지력을 가르치고, 그것의 의향들을 집행하는 것을 섬긴다.

이성이 있는 (합리적인, rational)
이 단어는 실명사로 사용하는 경우가 매우 흔해졌다. 천국으로부터의 빛이 세상의 빛 안에 있는 것을 계발하는 정신적 평면이다. 의식되는 마음 중에서 가장 높은 수준이다. 합리적 진리는 자연적인 것들에 관한 영적 진리이다.

이웃 (Neighbor)
내 집 아닌 다음 집에 있는 사람이면 이웃이다가 절대로 아니다. 이런 독특한 생각선상에 있다, 즉 주님으로부터의 선이 이웃인 것이다, 고로 각 개인이 나의 이웃이 되는 척도는 상대방이 주님으로부터의 선을 받아들인 양과 질에서 이다. 고로 가장 비중이 큰 이웃의 순서를 차례로 열거한다면, 주님-교회-나의 나라 등등으로 내려간다.

인식함들(cognitions)
때로는 “지식들”로도 번역된다. 이는 사실들(facts)을 관념들(ideas), 또는 앎의 보다 깊은 수준들 안으로 조직화 함을 뜻하기 위해 사용된다. 엘리엇씨는 그의 새 번역서인 “알카나 세레스티아”에서 “내면의 것들에 관련되는 지식의 항목들”이라 정의하고 있다.

있음 (being, ens)
실재(entity) 또는 구별되는 어떤 것을 뜻하기 위해 사용되는데 선각자는 이 단어를 매우 드물게 사용했다, 또한 순수하게 정신적 건설을 뜻하기 위한 합리성, 이성적 인 것에 대한 어구인 “ens rationis”에서 사용되었다. 이를 있음인 esse, 즉 “혼” 또는 어떤 것의 본질되는 속성과 대비해보라.

있음 (being, esse)
어떤 것에 있는 본질되는 품질, 실체(reality) 자체, 예를 들면, 하느님의 근본적 본질은 신성한 사랑이다.

자기 것이 되게 하다 (appropriate, 사유)
이 단어는 선각자에 의해 형용사로는 한번도 사용되지 않고 동사로만 사용된 특별한 단어인데, 자신에게 고유한 것으로 주장함, 또는 소유하는 것이다.

자기 자신 (Own)
자기 자신은 라틴어 suus 와 proprium 모두를 번역하는데 몇 번역자에 의해 사용되었다. 자아(self), 자아를 위해, 자아로부터 살아감, 이기심이라는 자아를 느낌, 인간의 거듭남에서 자아가 인도함이라는 망상은 필수적이다.

자아 (Proprium)
자기 자신을 보라. 이기심을 느낌이라는 기초적 의미에 추가하여 많은 다른 의미들을 가지는 경우도 있다, 즉 천사적인 자아, 악마적인 자아, 인간 자아, 신성한 자아, 지옥적 자아, 지적 자아, 자발적 자아 등등이다.

자아로서 같이 (as of self)
마치 자기 고유의 힘을 수단으로처럼, 컽으로 보기에 자신 스스로인 듯 하는 것. 선각자의 신학에서 비평적 개념인데, 즉 누군가가 “마치” 자아의 힘에서 인 듯 행동하는 것, 그러나 동시에 모든 힘은 하느님으로부터 온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다.

자연적 인간 (Natural man)
세상적인 것들에 집중적으로 흥미를 가지는 어떤 개인을 뜻한다 할지라도, 그 개인의 전체를 뜻하여서는 일반적으로 사용되지 않는다. 단지 어떤 개개인에게서 가장 수준이 낮은 인간의 마음을 언급할 때 가장 흔히 사용되고 있다.

자연주의자 (Naturalist)
하느님을 믿는 대신 자연을 믿는다는 어떤 개인을 경멸적 의미에서 만 사용되었다, 즉 물질주의자와 비슷하다. 자연주의도 이와 비슷한데, 모든 종교적 개념들의 근원을 자연에 신뢰를 둔 것이라 정의된다.

자유 (Freedom)
애착으로부터 생각하고 뜻하고, 이치에 맞다고 여겨지는 것에 따라서 자유하게 행동하는 것이다. 만일 이것들이 천국적이다면, 자유는 진짜이다; 만일 지옥적이다면, 이것은 외관적일(껍데기적일) 뿐, 실제로는 비 자유함이다. 진정한 자유는 당사자로 자아 강요(self-compulsion)를 사용하는 것을 허용한다.

지배하는 사랑 (Ruling love)
삶을 좌지우지하는 각 개인에 있는 가장 강력한 사랑. 가능할 수 있는 지배하는 사랑은 네 가지로 함축해볼 수 있다: 1. 하느님을 사랑함. 2. 이웃을 사랑함. 3. 자아를 사랑함. 4. 세상을 사랑함이다. 이 중 첫 둘째 만이 거듭나지는 개인을 위하여 받아져야 하는 지배하는 사랑들이다.

지혜 (Wisdom)
많은 지식을 소유함을 언급하는 데에는 거의 사용되지 않는다, 이 용어는 통상 삶에 관한 것만을 서술하는데 사용되고 있다. 지혜는 사랑으로부터 진정한 것을 지각함, 뜻함, 행동함으로 구성된다. 슬기로운 개인은 진리에 기초한 선을 행함을 위한 변동없는
바램을 가지고 있다.

진실한 (True)
절대적 의미에서 진실함은 신성한 사랑의 형체와 수단들이다. 관계적 의미에서, 이것은 개개인의 사랑 속에 있는 지각하고 결과를 있게 하는 기능이다.

진리의 선 (Good of truth)
개개인 안에서 진리를 수단으로 도달되는 상태인데, 이 상태는 사랑의 행동들 안에서 자체를 표현한다, 이를 수단으로 그 진리는 선이 된다. 이것은 영적인 선이라고도 불리운다.

질투 (Jealousy, zelotypia)
선각자는 부부의 사랑의 첫 장에서만 사용하였는데, 귀중한 것을 보호함을 사랑함, 특히 결혼의 사랑을 보호하기를 사랑함을 뜻하기 위해 사용했다. 그는 나쁜 질투가 있다는 것도 인정하고 있으나, 그가 강조하고 싶은 점은 질투의 긍정적 측면에서 이다. 그는 이것을 열정들 중의 열정이라 일컫는다-즉 열정의 진정한 모양새이다.

천사 (angel)
천국에 있는 개인(person). 선각자의 신학에서 모든 천사들은 처음에 자연계에 살았고, 사후 천국에 입장한 사람들이다. 선각자는 천사의 개념을 놓고, 창조로부터의 분리된 계층으로 말하는 것을 거절한다.

천성 (타고난 자질, Genius)
개인의 기질, 특성, 재능, 경향성, 개인과 개인들 집단의 영 또는 품질.

첩 (pellicacy, concubine, mistress)
이 단어는 pellex로부터 인데, 첩을 두고 사는 상태이다

최말단 (Ultimate)
연결 고리의 마지막, 수준이 가장 낮은 것, 가장 외적인 것, 가장 먼 것. “가장 큰 것”을 뜻하기 위해 선각자에 의해 사용되지 않았다.

충격(자극, conatus)
종종 “애씀(endeavor)”으로 번역된다. 일반적으로 행동들 뒤에 놓인 에너지를 두고 사용된다. 특별한 목적들을 쟁취하게 하는 꾸준한 충격을 받는 생활 자세일 수 있다.

타고난 (선천적인, connate)
글자대로 말하면, “출생으로부터 존재하고 있음”이다, 이것은 때로는 유전적 경향성들을 부정하는데 관련되어 사용되고 있다. 또한 자주 비슷한 단어인 생득의(innate, 타고난), 천부의 (inborn), 같은 성질의(congenial)와 더불어 사용된다

탐욕 (cupidity, 강력한 욕망)
(현세에의 욕망을 보라.) 자연적 마음으로부터 일어나는 강력한 욕구, 갈망, 그리워함. 이 단어의 라틴 뿌리는 현세에의 욕망의 뿌리만큼 강한 부정적인 것을 함축하여 운반하지는 것은 아닌 듯 비쳐진다.

태고 교회 (Most ancient church)
선각자는 이 용어를 대문자로 자주 표기했다. 하여 이 이름이 매우 지당하다 싶어서인 듯한 느낌을 우리로 갖게 한다. 이 용어는 신성에 관련하여서 일 경우, 가장 이른 유사 이전(역사 문명 이전)을 언급하는 전문어이다. 이 용어는 창조와 에덴의 동산을 언급하는 창세기서의 사건에 상징적으로 결합되어 있다.

트란스훌럭스 (Transflux)
관통하여 흘러가버림. 주님으로부터의 선이 아무런 효과도 보지 못하고 어떤 개인을 관통하여 흘러가버리는 것을 부정적으로 언급함에 사용되었다. 마치 물이 조리채를 빠져나가는 경우 같다. 이런 개인은 양심 없이 있다라고 말해진다.

평형 (Equilibrium)
(균형을 보라.) 가장 널리 가능할 수 있는 선각자의 번역에서 용어 “평형”이 발견될 것이다. 현재까지에서, 보다 단순하고 충분하게 어울리는 번역문은 돌(Dole)의 번역에서의 “균형”에 번역어의 한계가 그어지고 있는 실정이다.

표현 (Representative)
영적 생각(idea)을 상징하려고 사용되는 자연의 대상물, 개인, 행동, 또는 이 영적 생각 자체. 또한 영계에서 보일 수 있는 형체에서 생각이 표출됨.

합리적인 것 (이성적인 것, Ens rationis)
순수하게 정신적 건축물, 마음 안에서만 존재하는 어떤 것. 어떤 문맥에서는 도깨비불(will-o-the-wisp, ignis fatuus, 환영)에 대충 견주기도 한다. 있음 [ens]를 보라.

허용 (Permission)
이는 신성한 섭리의 한 부분이라 선각자는 규정하고 있다. 허용된 것, 관용(묵인)된 것은 허락된 것, 묵인되어진 어떤 것이나 그렇다고 하느님이 바라는 어떤 것은 아니다. 바람직하지 않은 어떤 행동들을 묵인하는 것은 인간의 자유를 침해하지는 않는다.

현세에의 욕망(concupiscence, 강한 욕망)
몇몇 번역자들에 의해 존속되어 온 라틴어풍의 단어이다. 동사 형체는 어떤 것을 강하게 바램(desire), 또는 갈망함(lust)을 뜻한다. 명사는 강한 욕구를 뜻하는데, 통상적으로는 악, 또는 (섹스 쪽이거나 아니거나 할는지 모르는) 욕망이다. 때로는 탐욕(cupidity)이라는 단어와 분간할 수 없는 경우도 많다.

황폐됨 (Vastation)
황무한 상태, 극점(종말), 다빠져나가 텅빔. 영들의 세계에서 벌어지는 과정, 즉 외적인 악들과 거짓들이 선한 자로부터 제거됨, 그리고 위선적으로 있는 선들과 단지 지식들인 것이 악한 자로부터 제거됨, 하여 어정쩡하게 선과 악이 뒤섞여 있던 세상에서의 인간의 상태가 선과 악이 선명한 상태로 확실히 구분되는 과정에서 사용되는 단어이다.

회개 (Repentance)
재출생에서의 첫 단계, 여기에는 하느님에게 죄들을 고백함, 자기가 용서되기를 간구함이 포함되고, 진정한 선행과 신앙의 교훈들에 따라 새로운 생활을 이끌려는 진실한 노력이 뒤따르는 것이다.

(외부쪽에) 흘러듦 (afflux)
…쪽으로 흐름, 또는 …쪽을 향하여 흐름. 이 방식을 수단으로 주님께서는 악을, 악한 자를 통제하신다. 선과 진리는 악한 자 쪽으로(to) 흐를 수는 있으나, 그렇다고 악이나 악한 자 안쪽으로(into)는 흐르지 않는다. 고로 악이나 악한 자를 통치하는 것은 내부(within)로부터가 아닌 외부(without)로부터 이다. 이 단어는 (내부쪽에) 유입됨(influx, 흘러듦)과 날카롭게 대비되어 선각자의 책에서는 사용되나 한국어에서는 같은 말로 번역되고 있어 가로에 영어를 추가로 기입해서 (역자는) 구별해보고 있다.

선각자의 신학에서만 유일한 기본적 생각들(concepts)

1. 하느님에 관하여 선각자에게 밝혀진 기본적 생각들

신성한 생명은 하나이고, (사실) 생명은 이 생명밖에 없다. 주님 만이 생명 자체이시다, 그 이유는 그분이 생명 자체이시기 때문이다. 땅 위 인간과 영계에 있는 인간은 이 생명의 그릇들일 뿐이다.

(참고: 선각자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뜻하기 위해 단어 “주님”을 시종일관하게 사용한다. 또한 이 글 내지 역자의 번역서에서 사용되는 단어 중 개인(個人, 때로는 인물, 人物, person)이 있는데, 그러나 역자가 이 단어를 영한 사전에서 같이 사람 등의 알기 쉬운 단어로 번역하지 않고 조금은 껄끄러운 개인으로 표기하는 이유는 지상에 태어나 아무개라는 이름으로 살았던 물질인 인간, 즉 개인(예를 들면, 예수)을 뾰족이 암시하고 싶어서 이다.)

하느님의 본질에는 두 구성 요소가 있는데, 그것은 사랑과 지혜이다. 하느님의 사랑을 구성하는 세 고유 특성이 있는데, 그것은 그 자체의 바깥쪽 다른 이들을 사랑하는 것, 다른 이들과 하나이기를 바라는 것, 그리고 다른 이들을 자체로부터 복되게 하여주는 것이다.

신성의 사랑과 지혜를 본질 자체 측면에서 일 경우, 우리는 생각조차 할 수 없다. 그 이유는 그것은 무한이어서 우리의 사고력을 초월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랑과 지혜가 상응적(correspondential) 외관에서 일 경우, 우리는 생각해볼 수 있다. 천사의 눈에서, 주님은 태양으로서 나타난다, 이로부터 영적인 열과 빛이 나아가는 바, 유추해봄(analogy)을 수단으로 천사들은 자기들이 유지 지탱할 수 있는 이유는 이 영적 빛과 열, 즉 하느님으로부터 꾸준히 방산되는 신성의 사랑과 지혜에 의해서 이다를 생각하고 알 수 있다.

상응을 수단으로, 이 유추해봄은 땅 위 개인들도 사용할 수 있다. 즉, 자연이 물질적 태양의 열과 빛을 수단으로 매 순간을 유지 지탱하듯, 인간인 나는 주님의 신성한 사랑과 지혜를 수단으로 영적으로 유지 지탱되고 있다는 것을 생각해보고 알 수 있다.

주님(the Lord)은 보편적(우주적) 인간(universal human)이시다. 주 예수 그리스도, 이 분만이 충분하게(fully, 결여됨이 없는) 인간이시다. 이 분으로부터 천사들, 영들, 그리고 지상의 거주민들은 집합적으로 “사람들(men)”이라 불리운다. 이 분이 천국 안으로 유입되심으로 전체 천국은 하나의 인간을 표현하고 닮아 있게 하고 있다. 유추를 수단으로, 땅 위 개인들의 (인간) 본성 안에 있는 천국의 것 만이 진실로 인간(human)이다

새로운 기독 세계의 하느님은 하나의 보일 수 있는 하느님이 계시고, 이 분 안에 보일 수 없는 하느님이 계시는데, 마치 혼이 그의 신체 안에 있는 것과 같다. 만일 누군가가 그렇지 않다라고 판단했다면, 그는 이 하느님과 결합되어질 수 없을 것이다, 그 이유는 하느님과 개인들의 사이에 있는 모든 결합은 상호적(reciprocal) 임이 틀림이 없기 때문이다. 이런 상호성은 보일 수 있는 하느님이 아니면 불가능하다.
위와 비슷하게, 모든 천국들 안에서, 하느님에 관하여 이런 생각밖에 없다: 즉, 그분은 개인이시다는 것, 그리고 이 개인이 주님이시다는 것이다. 골로새서에서 바울의 통찰력이 선각자의 견해가 진실임을 이렇게 증명하고 있다: 즉, 일어나시고 신성이 되신(risen and glorified) 예수 그리스도 안에, 하느님(Godhead)의 모든 충만함이 육체적으로 거주하시고 있다. 땅 위와 천국 안에 있는 사람(people)은 이를 알 수 있다.
하느님 안에 있는 삼위일체(trinity, 三位一體)에 관하여서 성경의 구절들은 상징적 언어에서 말하고 있다. 신성의 삼위일체는 주님의 한 개인 안에 있다, 이 셋을 구별해 알 수 있는 것은 혼, 신체, 그리고 이 둘의 결과인 활동(activity, 행동)으로 이해할 경우에서 이다. 유추를 수단으로 각각의 개인 안에도 삼위일체가 있다. 셋을 한꺼번에 취합하면 하나의 개인을 구성한다: 즉 혼, 신체, 그리고 혼이 신체를 이용한 결과인 행동이다. 그러나 이것은 유한한 삼위일체이다, 그 이유는 인간은 그릇들, 또는 생명의 “기관들(organs, 유기체들)”이기 때문이다. 주님 안에서의 삼위일체는 무한이고, 고로 신성인 이유는 주님은 그분의 인간(human)조차도 생명 자체이시기 때문이다.
아버지이든, 아들이든, 그리고 성령이든, 이 단어의 언급이 있는 말씀 안의 어디에서 이든, 이는 하느님의 속성을 구별해 말해보는 양상일 뿐이다. 다시 말해 하느님의 통일성(unity, 여럿이 아닌 하나) 안에 삼위가 있는 바, 아버지, 또는 성령(님) 같은 식으로 분리적으로는 존재하지 않고, 주님 만으로 존재한다는 말이다. (우리는 하느님을 주님으로만 부르는 것이 합당할지 모른다 역자주) “아버지”, 또는 하느님의 “혼(soul)”과 “영(Spirit)”, 또는 하느님의 활동은 주님 만으로부터 존재하고 출현(coming forth, 존재 안으로 옴)된다. 그러므로 하느님, 그리스도, 또는 성령으로 분리된 존재들로 말하는 듯 여겨지는 성경의 사건들이다 해도 상징적, 유추적으로 이해되어져야 한다. 고로 통찰력은 분리된 둘, 또는 셋의 신성의 존재들로서가 아닌 유일한 하나의 하느님의 속성과 활동의 어떤 양상(면모, aspect)들 쪽으로 있어야 할 것이다.

신성의 사랑은 모든 창조의 근원이고 지탱자이다. 영적인 존재들은 사랑 외에 다른 근원으로부터 존재 안으로 와질 수가 없다; 그리고 창조하는 사랑은 사랑 자체 이신 주님으로부터만 존재 안으로 와질 수가 있다 (세상 밖으로 나타나짐).

모든 창조의 보편적 목적(purpose, 의도)는 창조자가 창조된 우주와 영원히 합류하는(join) 것이다. 이 합류는 이 창조 안에 신성의 본성이 “거주”할 수 있는 존재들이 있어야 가능해진다. 다시 말해 신성에 걸 맞는 성질이 각 개인들 안에 있어야 합류가 가능하다는 말이다. 고로 모든 것은 각 개인들의 사용을 위해서 창조되어왔었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모든 창조된 것들의 사용은 가장 바깥 부분들로부터 개인들 쪽으로 등차적으로 올라간다, 그리고 개인들을 통하여 하느님 쪽으로 올라간다. 이것은 “생명의 순환”이라고도 불리운다.
창조의 특별한 목적은 하느님의 사랑을 받고 되돌림을 영원히 계속함으로, 인류로부터 천사들의 천국을 영원히 부풀려감일는지 모른다.

하나의 끈덕진 신학적 관념에 반대하여 있는 것은 이것이다, 즉 하느님은 무로부터 우주를 창조하지 않았다. 무로부터 만들어진 어떤 것도 있을 수가 없다. 모든 것들은 실체(substance, 물질) 자체인 실체로부터 창조되어져 왔다. 이 실체는 신성의 사랑이다. 이 근원으로부터 만 모든 것들은 만들어내지고 지탱되어진다.

하느님은 물질의 우주를 창조하셨는데, 이는 영적 실재(reality)들에 “옷을 주는(clothing)” 것, 그리고 개인들이 원하면, 그들 고유의 자유의지로부터 영적이고 잠재적인 천사의 존재들이 되는 평면(plane)을 제공하기 위하여서 이다.

자연 평면에서 더 이상 진짜 인간 다움(humanity)이 있지 않게 되었을 때, 그리고 인류가 바야흐로 파멸에 직면하려고 했을 때, 즉, 천국으로부터 생명과 빛을 받는 역량을 거의 잃었을 때, 하느님은 그분의 무한성을 유한성으로 만드셨다, 즉 예수 그리스도 라는 개인 안에서 세상 안으로 오셨다. 이때 쾌히 받아들심으로부터 주님이 “입으신” 인간 다움은 인류를 괴롭히는 허약함과 동일한 것을 지닌 지극히 평범한 인간의 어머니 마리아로부터의 것이었다. 그러나 (예수의) 내부에 잠재적인 신성의 거주하심에서 끌어냄을 수단으로 예수는 지상 평면에서 개인들에게 영향을 주는 천국과 지옥의 세력 사이에 있는 균형을 언제나 회복되게 하시면서, 점진적으로, 질서있게(순서적으로), 그리고 완전하게 지옥들의 힘들에 정면으로 맞서 이겨내셨다. 주님의 삶의 모든 과정은 되찾음을 구성하는 것, (즉) 개개인의 구원이 지금 그리고 언제나 가능하게 만드심이다.

2. 영적 세계에 관하여 선각자에게 밝히 알린 기본 생각들

진짜이고 영원한 영적 세계가 있다. 그 세계는 셋으로 구분되는데, 천국, 지옥 그리고 영들이 있는 중간 세계이다.

죽음은 삶에 있는 질서적, 필수적 단계이다. 인간의 신체가 그것의 생각들과 애착들에 상응하는 자연계에 있는 기능들을 더 이상 수행할 수 없을 때, 그 개인은 “죽는다”라고 말해진다, 그러나 개인은 죽지 않는다, 단지 지상 평면에서 사용을 위해 주어진 육체라는 부분들로부터 분리되어질 뿐이다, 개인은 살기를 계속하는데, 그 이유는 개인이 개인인 이유는 신체 때문이 아니라 영 때문, 즉 개인 안에 있는 생각하는 혼, 또는 영이 당사자 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애착과 더불은 생각이 그 개인을 구성한다. 고로 죽음은 이 세계로부터 저 세계로 건너가는 (다리 역할을 하는) 것일 뿐이다.

(자연계) 생명의 모두가 중단되자 마자, 개인은 영들의 세계에서 즉각적으로 소생되어진다. 이것은 가장 높은 천사들의 조력을 받아 주님에 의해 행해진다. 그 다음, 개인은 자기 검증과 자기 인식의 과정을 통하여 안내되어진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 또는 그녀 자신의 결단력이 영원한 집을 천국이든 지옥이든 선택할 수 있다. 어느 누구도 천국으로 입장이 주어지는 수단으로서의 “보상”이라는 것은 없다, 누구도 지옥으로 정죄됨을 수단으로 “처벌”되지 않는다. 천국과 지옥 안에서 모든 이는 자기 자신의 선택을 수단으로 각자의 영역에 있다.

죽음 후에 모두 각각의 개인에게는 자신의 생각들과 애착들을 수정할 충분한 수단들이 수여된다. 모두는 천사들을 수단으로 주님에 의해 가르쳐지고 인도되어진다; 그리고 모두는 자기들이 생명을 따라서 생명을 살아감이다는 것, 그리고 천국과 지옥이 있다는 것을 의식할 때, 그들은 첫째로 모든 진리들을 받아들임에 있다. 그러나 지상에서 (하느님을) 인정하지 않았고, 하느님에 맞서 악들을 죄들로서 금하는 노력을 만들지 않았던 이들은 이내 진리들을 듣는 것에 진저리를 내고 그것은 선택의 문제라고 여기고 물러나버린다. 짧게 말해, 섭리는 모두가 구원되는 쪽으로, 즉 천국을 선택함이 가능해지도록 그것을(진리의 선택을 하도록) 만들고 있다. 그리고 그렇게 선택하지 않은 개인은 홀로 책임질 수 있게 만들어져 있다.

용어 “영”은 영들의 세계라 불리우는 사후 첫 상태에서 일시적으로 있는 자를 뜻하기 위해 사용할 뿐이다. 용어 “천사”는 교육받고 자기 수정을 끝내서 천국에서 자기 자리를 찾아갈 수 있게 된 이들을 뜻한다. 지옥에 자신의 장소를 발견하는 이들은 사탄들 또는 악마들이라 불리워진다.

개인로부터의(각자의) 영이 영들의 세계 안으로 진입하였을 때, 그녀 또는 그의 얼굴과 음성의 음질은 그들이 세상에서 가졌었던 것들에 대단히 비슷하다. 그러나 그 후 얼굴과 여타 얼굴의 생김새들과 행동들은 점차적으로 각자의 애착(affection)들과 당사자를 지배했던 사랑(ruling love)에 일치하도록 바뀌고 있다. (지상에서는 가면을 씀이 가능하나 여기서는 가면이 허용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과거 신체 안에서 영의 생명의 외면의 것들의 사용함이 끝나서, 이 외면의 것들이 곁에 놓여진 지금, 바깥쪽으로의 나타남과 이전의 애착들은 바뀐다, 하여 바뀐 그의 상태란 그가 보여지는 것과 행동하는 것은 그의 내면의 존재와 완전 일치되고 있는 상태의 것이다.

천국의 생활을 세부적인 것까지 말하고저 이 책의 페이지를 할당하기에는 너무나 많은 바, 여기서는 윤곽만을 그리고 지나간다; 우선 그 곳의 삶이 진짜 삶이다는 것, 진짜 당신의 가족들이 거주한다는 것, 직업들(각자 할 일들)이 매우 다양하다는 것, 기쁨만을 언제나 선사하는 공동체와 모임들이 있다는 것이다. (특별한 것은), 거기에 많은 어린 아이들이 있다는 것, 그 이유는 유아기나 어린 아이 시절에 죽은 모두는 천국 안으로 직접 오고 거기서 성장하기 때문이다.

지옥은 기본적으로 천국에 반대되는 것들, 거기를 선택한 이들의 특성이 악인지라 그들의 파괴적 힘에 의해 (모두는) 총체적으로 (언제나) 찡그려져 있다. 거기에는 (주님께서 악한 자를 징벌하려 만든) 불, 유황(불), 또는 기분내키는대로의 임의적 처벌 등등이 없다; 악은 그것 고유의 사용료(toll)를 부담할 뿐이다; 지옥은 객관적으로 불행의 상태이다. 그러나 지옥에 있는 이들은 자신들을 위해 최고의 선택이었음을 자랑하고 있다.

3. 우리에게 있는 하느님의 말씀에 관하여 선각자에게 밝히 알린 기본 생각들

하느님이 언제나 설비해두시는 것은, 어느 시대를 무론하여 그 시대의 인간다움에 걸맞을 수 있는 신성한 진리의 밝힌(계시) 것을 관리하는 책무에 봉사하는 교회를 인류와 더불어 있게 하신 것이다. 우리가 아는 이 계시는 말씀(Word)이고, 이 말씀은 성경에서 발견되었다. 이 말씀을 수단으로 인류는 천국들과 계속적으로 연결된다. 그러므로 이 말씀에 있는 모두 각각의 표현들 안에 천국의 것들과 연관되는 내적 의미가 있다. 말씀이 내적 의미를 지닌 특성 때문에 말씀은 천국의 마음들과 인간의 마음들을 결합하게 한다.

많은(아마 대부분의) 기독인들이 이의 없이 이구동성 말하는 것은, 말씀은 신성의 호흡이 담겨 있다는(영감되어 있다, inspired) 것, 그러므로 거룩하다 이다. 그렇지만 선각자를 통한 이 계시 앞의 (시대에서) 경우, 말씀 안에서 어디에 말씀의 거룩함 또는 신성이 존재하는지를 알지 못했다. 그 이유가 말씀을 여느 책을 읽듯 평범히 읽는다면 (즉 글자 그대로의 의미에서의 경우라면), 여느 촌뜨기 작가의 저술 같고, 때로는 문체상 (문법도 모르고 씌어진 듯하여) 엇박자인 냥 보이고, 심지어는 현 시대의 저술 보다 수준이 미천한 듯까지 깍아서 평가할 수도 있는 책인 듯 비쳐지게 나타나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하느님을 예배하기를 선택하지 않든지, 또는 하느님 보다 세상의 것들을 존경하는 쪽을 선택하든지 하는 이들은 말씀에 관련해 거룩한 어떤 것이 있을 수 있다는 것마저 부정하는 오류 안으로 쉽사리 추락할는지 모른다. 짧게 말해, 이렇든 저렇든 각자는 말씀을 신성이 거주하는 책임을 수긍하던지 부정하던지는 그의 선택(의 잣대) 안에 있다는 말이다.

어쨌든, (순위에서) 자연 앞에 하느님을 두는 이들, 그리고 진짜로(순수하게) 진리를 찾는 이들은 글자에 있는 많은 서술문들이 주님의 말씀으로서 확인하여 그 글자들을 꾸준히 받아들이고 있다. 사실상 이들의 마음들은 계시(밝히 앎)의 필요와 실재 쪽으로 통찰력이 열려져 있다. 그 이유가 계시 없이 지식은 없고, 결과적으로 하느님을 인정함도 없기 때문이다. 사실상 주어져왔었던 계시를 통하여서만 사람들은 하느님에게 접근할 수 있어, 그분으로부터의 유입을 받고, 자연적 존재로부터 영적 존재로 되어질 수가 있었다.

말씀의 책들은 계속적이고 연결된 내적 의미를 가지는 모든 책들이다. 구약 성서 부분에 있는 이 말씀의 책들은 모세의 다섯 책들, 여호수아, 사사, 사무엘상하, 열왕기상하, 시편, 이사야, 예레미야, 애가, 에스겔, 다니엘, 호세아, 요엘, 아모스, 오바디야, 요나, 미가, 나훔, 하박국, 스바냐, 학개, 스가랴, 말라기; 그리고 신약 성서 부분에서는 마태, 마가, 누가, 요한, 계시록이다.

복음서들은 주님 자신의 말들을 포함한다, 이 말들 안에는 영적 의미들이 숨겨져 있고, 이 영적 의미들을 통하여 천국과의 교통이 가능하다. 사도들의 저술들(서간문)은 교회를 위해 유용하나, 내적 의미를 포함하고 있지는 않다.

말씀의 가장 바깥쪽, 또는 글자적 의미로부터의 모든 세부사항들은 감각 기관(sensory)에 의존하고 싶어하는 이들의 납득력에 적합해 있다, 고로 어린이들과 단순한 이들에게 (특별히) 안성마춤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글자 그대로의 의미의 대부분은 진리의 외관 (측면)들이다, 따라서 그것들이 계발된 이해력으로부터 지각되지 않으면, 그것들이 실제적으로 진리이다고 믿어져버림에 의해 거짓화 되어갈 수 있다. (단순한 자나 어린이들이 아닌 이들, 특히 지식인이라 자부하는 이들이다면) (마음만 먹으면) 거짓화 할 수 있는 위험성이 글자로 있는 많은 서술문의 도처에 산재해 있다. 예를 들면, 하느님은 성내신다, 그분은 시험하신다, 그분이 지옥으로 내던지신다 등등이다; 또한 마지막 심판에서 주님은 글자에 박힌 그대로 구름을 타고 땅 쪽으로 내려오신다… 태양과 달이 빛을 주지 않을 것… 별들은 추락할 것이다 등등도 있다. 이런 서술들은 자연계의 재난을 예보함들이 아니고, 어느 누구 안에서 거행될 수 있는 내적 바뀜들에 대한 상징들임을 알아볼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영적 투시 화법(perpective, 상관 관계, 견지, 시각, 원근법) 뿐이다.

글자 그대로의 의미가 이런저런 방법들에서 잘못 이해되어질 수 있기 때문에, 이 의미는 어떤 상해받음도 허용 않을는지 모르는 글자 안쪽에 숨겨 놓인 진짜 진리들 쪽으로 안내하는 역할로 봉사하고 있다. 이 개인은 이런 식으로 해서, 저 개인은 저런 식으로 해서 글자의 의미를 이해할 때라 해도 영속되는 피해는 있지 않다; 그러나 피해가 가해지는 때이다면, 신성한 진리에 반대하는 거짓들을 첨가할 때이다. 이 짓은 거짓들 안에 있는 자신이 정당하다 하여 그것을 입증하고자 말씀의 서술들을 선택하는 이들에 의하여 자행된다.

말씀 안에 있는 모두 각각의 개인, 장소, 어떤 것, 어떤 사건 등등은 어떤 영적 실재(reality)를 상징하고, 이 실체(reality)와 상응하고 있다. 이런저런 상응을 통한 의미들이 말씀의 영적 의미를 구성한다. 따라서 영적 의미는 글자 안에 나타나 있지 않다. 그것은 글자 그대로의 의미 내부에 있다. 마치 혼이 신체 안에 있는 경우, 지성의 생각이 눈 안에 있는 경우, 사랑의 애착이 얼굴 안에 있는 경우 같다. 말씀을 영적으로 만들어주는 것이 영적 의미이다. 영적 의미야 말로 진실로 주님의 말씀이다.
어쨌든, 글자 그대로의 의미 안에서 말씀은 그것의 충만함으로, 그것의 거룩함에서, 그리고 그것의 힘을 지니고 있다. 그 이유가 글자 그대로의 말씀은 안쪽에 있는 영적 의미들의 거처이자. 그릇들이고, 받침기둥이기 때문이다.

말씀 안에 있는 표현들은 그것들의 시리즈 안에 영적인 생각들을 포함하도록 씌어 있다. 이 영적 생각들은 글자를 읽는 자가 상응 지식에 친숙해 있지 않으면 그 사람에게 나타나지 않는 생각들이다. 이 방법에서 신성은 말씀 안에 감추여 놓여 있다.
상응들이 모든 힘을 가진다, 하여 상응에 따라서 땅 위에서 행하여진 것은 천국 안에서 직접적인 결과를 가진다, 그 이유는 상응은 신성으로부터 있기 때문이다. 사랑의 선과 신앙의 선 안에서 살아가는 이들은 “상응 안에” 있다 라고 말해진다, 그리고 신성은 이 당사자를 통하여, 그리고 당사자 안에서 행동하실 수 있다.

주님의 말씀은 목마른 개인, 생명을 바라는 개인에게 생명을 주고 있다. 이것은 요한의 복음서에서 가르치고 있다. 말씀은 살아 있다, 그래서 생명을 준다, 그 이유는 최고 의미에서 말씀은 주님과 그분의 왕국을 다루기 때문이다. 말씀에 있는 생명은 말씀을 읽는 당사자가 거룩함의 느낌을 갖게 하면서 당사자의 마음 안으로 흘러든다. 이렇기 때문에, 주님은 그분으로 있는 말씀 측면에서, 자신이 영원한 생명 안으로 솟아오르는 물의 원천이다고 선포하신다.

4. 우리 자신과 우리가 의도했던 운명에 관하여 선각자에게 밝히 알린 기본적 생각

사랑과 지혜, 그러므로 의도력과 분별력이 각자의 생명 자체를 구성한다. 생명이 무엇인지를 아는 자는 드문 편이다. 사람들이 그것에 관하여 생각할 때, 그것은 파악하기 어려운 것, 그것은 개념화에 도전하는 어떤 것인 듯하게 여긴다. 이렇게 응답하는 이유는 하느님 만이 생명이시다는 것, 그리고 그분의 생명은 신성한 사랑과 신성한 지혜이다를 실감 못 하기 때문이다. 이쯤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우리들 자신의 생명은 하느님의 생명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 그 이유는 우리가 그분으로부터 생명을 받는 만큼에서 우리가 생명을 가지기 때문이다. 사랑이 누군가로부터 쇠하여질 때 그는 나태해진다, 지혜가 쇠하여져 갈 때, 그는 무디어져 있다. 만일 이 두 가지가 동시에 쇠하여지면, 그는 말살되고 있다.

신성의 사랑은 이 사랑이 사랑하는 다른 존재들 안에서 이 사랑을 사랑한 당사자를 수단으로 현재의 것이 존재하고 있음과 되어감을 도울 수는 없다. 어쨌든 만일 이런저런 인간의 존재들이 자신들 안에 무한의 어떤 것, 또는 본질적 사랑으로부터의 실체와 생명의 어떤 것,또는 신성으로부터의 어떤 것을 가졌다면 위의 말함이 발생할 수 없었다. 만일 우리들 안에 무한하고 신성으로부터의 어떤 것이 실제로 있었다면, 하느님은 타인들에 의해 사랑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타인들)는 자신들만을 사랑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 이유가 무한 또는 신성은 특이하고 나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이유 때문에 서로의 사랑은 본질적 사랑으로부터의 어떤 것도 있지 않은 타인들과 더불어서만 발생할 수 있을 뿐이다.

인간의 존재, 본질적으로와 자아 측면 만에 집중한다면, 짐승으로부터 별반 다를 것이 없다. 즉, 오각도 매우 비슷하다, 식욕도, 자연적 수준의 바램들도, 뿐만 아니라 애착들도 피장파장일지 모른다. 개인의 최선의 사랑들조차 매우 비슷하다, 즉 동료를 사랑함, 자식을 사랑함, 결혼한 짝을 사랑함 등등에서 이다. 어쨌든 인간은 내면의 생명을 가지고 있음 덕분에 짐승 보다 상위에 있는다. 이 생명은 주님으로부터 파생된 사랑의 생명과 신앙의 생명이다. 만일 이것이 출석되지 않고 있다면, 그 개인은 결코 인간일 리가 없을 것이다. 더욱이 주님으로부터 이 생명을 통하여 그 개인은 사후 살고 있다.

모든 사람들은 각자의 마음에 속해 있는 내면들의 것에 관련되는 물질의 신체로 이 세계 안에서 옷을 입고 있는 영이다. 신체는 영의 생각함들의 방향과 영의 애착함들의 조절 아래 있다.

인간 종족, 위에서 명기한 대로, 천국이 설립되는 기초이다. 이런 이유로 인간의 창조는 마지막 번째에서 이었다, 그 이유가 마지막 번째가 앞서 창조한 것을 아우르는 기초이기 때문이다. 모든 창조가 하느님으로부터 오기에, 개인들은 신성의 질서의 형체들로 창조되어졌다.

사람들은 자연계와 영계가 외면적으로 결합(join)하게 하는 수단이다. 사실상, 개인이 영적 존재로 되는 정도에서, 그는 두 세계가 외면적, 내면적 결합(conjunction)을 위한 매체가 되어져 있는다.

인간의 혼(soul)은 당사자의 가장 깊고 가장 순도 높은 본질이다. 그러나 본질은 형체를 가져야만 한다, 그리고 혼은 사랑의 모든 것들의 형체로부터 애착(affection)들이라 불리우고, 지혜로부터의 모든 것들의 형체로부터 지각(perception)들이라 불리운다.

개인은 어떤 지식 안으로 태어나지 않는다, 총명 또는 지혜 안으로 태어나지는 것은 더더욱 아니고, 오직 그런 것들을 받는 수용력, 그리고 그것들을 빨아들이는 능력만을 지니고 태어난다. 이것은 두 겹의 방법에서 결과되어진다: 신성이 흘러드는 내적인 방법에 의해서; 세상이 흘러드는 외적인 방법에서 이다. 이것들이 개인 내부에서 만난다, 그리고 그때 개인이 신성에 의해 계발되기를 선택하는 정도에서 개인은 지혜의 상태 안으로 점진적으로 들어간다.

모두 각각의 개인은 자기를 성화(聖化, sanctification)함에서 자아가 인도할 수 있다 라는 환영(幻影, 착각, 잘못 생각함), 자아(selfhood, 이기심)로부터의 느낌, 감각을 가진다. 선각자는 이기심으로부터의 이런 저런 느낌을 “자아(proprium)”라는 단어로 언급하고 있다; 사실 개인을 두고 성화함이라는 단어 보다는 “거듭남”이 더 어울릴 것이다.

신성의 섭리인 것은, 개인은 이성에 일치하여 자유함으로부터 행동하는 것; 또한 개인이 생각하고, 뜻하고, 행동하는 것의 모두는 온전히 자아로부터 있게 나타나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나타남이 없다면, 어떤 것이 그의 것, 또는 자기 자신의 것임을 아무도 느낄 수 없을 것이고, 따라서 개인은 자신 고유의 개인일 수도 없게 되고 만다. 자아로부터의 이런저런 감각 없이 개인에게 귀속되는 것은 어떤 것도 있어질리 만무하고, 고로 개인은 선이든, 악이든 무엇을 행하든지 무관심, 또는 하느님을 믿든, 지옥의 꼬드김을 따라가든 무관심으로 일관되어지고 만다. 줄여 말해, 개인은 개인 당사자될 리 없고, 진실로 인간일 수도 없다는 말이다.

개혁되고 영적으로 되어가는 모든 이의 처음 상태는 그들이 주님에 의해 개혁됨을 믿지 않는 것, 그 대신 자신들에 의해 개혁됨을 믿는 것이다; 즉 선에 대한 모든 뜻함과 진리에 대한 모든 생각함이 자신으로부터 근원되었다고 믿는 것이다. 이 보다 한 술 더 떠진 것은, 주님께서 그들이 이런 상태 안에 있게 배려하시고 있으시다는 점이다. 그 이유는 만일 그가 자신 스스로 하고 있다 하지 않으면, 그는 개혁되어 질 수가 없기 때문이다. 실로, 만일 그들이 거듭남 이전에 너희들 스스로 선을 행할 수 없고, 진정한 어떤 것도 생각할 수 없다고 (주님으로부터) 말해졌었다면, 자기들은 의지와 생각 안으로의 유입을 기다려야 한다고 상상하는 실수로 붕괴되든지, 또는 만일 선과 진리가 자신들 안에서 근원되지 않는다면, 자신들은 기계 같은 처지이다고 상상하는 실수로 어떤 시도도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선과 진리가 자신들로부터 근원된다고 생각하는 것이 첫째로 허용되어야 한다.

그러나 거듭남의 과정이 한참 진행되면서 점차로 조금씩 가르쳐짐이 있어지는 것은, 예전의 자기 느낌과 생각함과 다른 것이 있다는 것, 즉 선하고 진정한 모든 것은 주님으로서만 100% 존재한다는 것이 당사자에게 슬금슬금 비쳐온다. 그리고 거듭남의 과정이 더 한참, 즉 완전함에 거의 접근하다시피 할 때, 당사자에게 주입되는 가르침은, 주님으로부터 있지 않는 것은 악이고 거짓이다는 것이다. 거듭나지고 있는 이들이라면, 그들의 이 세상의 삶 동안 가르쳐짐을 많이 깨닫지 못한 채 기한이 다 찰 경우, 다음 삶에서 이를 깨닫고, 그것을 지각함으로 보도록 인도 받는다.

인간의 자유 의지는 거듭남에 필수적이다. 개인이 모든 애착들과 모든 생각함들에 관련하여 내면적으로 자유함 안에 있지 않으면, 개인은 선과 진리가 뿌리내릴 수 있는 질서 안에 결코 놓여질 수 없다. 이 자유함은 양쪽에 놓여지는 무게가 평형을 이루는 천칭(저울)에 유추되는 방식에서 주님에 의해 유지되어진다. 비슷한 방식에서 주님은 모두 각각의 개인에 대한 선과 악의 영향력이 균형을 맞추고 있게 유지하신다. 그러나 개인은 이에 대해 의식하지 못 한다, 하느님의 선물 중의 하나인 것은, 개인은 자신의 생명을 두고 그것은 자신 고유의 것이다라고 느껴야 한다는 것, 우리가 그것을 그렇게 느끼는 것이 하느님의 뜻이다는 것이다. 이러한 즉, 우리가 말씀에 있는 질서의 법들에 일치하여 살기를 선택할 때, 고로 하느님의 사랑을 받아들이기로 작정함이 온전히 우리 자신으로부터 임을 우리가 느낄는지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은 그분의 손가락을 천칭 위쪽에서 직각으로 세우시어 유지하시면서 선택의 우리의 자유함을 알맞아지도록 조절해주시지만, 그렇다고 강제적 수단으로 자유를 침범하시는 일은 결코 없으시다.

하느님은 악을 창조하시지 않으셨다, 그러나 질서 안에서 실제의 선택들이 인류로 그것을 받아들이도록 허용해버렸을는지 모른다. 만일 사람들이 하느님이 처음 그들을 창조했던 사랑 안으로 태어나졌다면, 어떤 악도 있지 않았을 뿐 아니라, 사람들은 악이 무엇인지도 모르기조차 하여 있었을 것이다. (애당초) 우리가 창조되어진 사랑은 이웃을 사랑함으로부터의 사랑이다. 고로 우리는 우리 자신 만큼, 아니 그보다 더 많이 이웃을 사랑하는 것을 배울는지 모른다, 그리고 이웃에 선을 행함에서 기쁨을 발견할 것이다. 이 사랑이 진실로 인간이다, 그 이유는 이 사랑 안에 짐승으로부터 발견되는 자연적 수준의 사랑과 구별되는 영적 수준의 요소들이 있기 때문이다.

“원죄” 또는 “유전적 악” 같은 것은 없다. 누구도 실제의 악들 안으로 태어나지지 않는다, 그러나 특별한 악들을 향한 다소의 경향과 더불어 악들을 향한 경향성만 지니고 태어난다. 결과적으로, 사후 개인은 악들을 향한 어떤 유전적 경향성으로부터 판단되어지지 않고, 개인이 동의함에서 받아들이고 행동했던 실제의 악들로부터 만 이다.

우리가 실제의 선을 상속하지 않고, 선이 되어질 경향성만이 상속 가능하다는 것도 위와 동일하게 진정하다. 천성적으로 자연적 선과 친절함을 향유한 듯 여겨지는 이들, 그리고 타인에게 선을 행함을 타고

난 듯 실행하는 이들이라 여기지는 이들을 목격하는 때도 있다. 그러나 이런 이들이라 해도 그들이 말씀으로부터 선을 행함에 관한 원리들을 동시에 흡입하지 않으면, 그들은 양심을 발달시키지 못한다, 그 이유는 양심은 자연적 선, 또는 유전적 선에 대한 경향성과 그것에 일치하는 생명으로부터 오지 않기 때문이다. 만일 어떤 개인들이 이런 상태에서 영적 세계 안으로 온다면, 그들은 자기들에게 강하게 인상지우는 선과 진리의 원리들을 가지는 것을 포함하여, 테스트되고 심리되는 어려운 과정을 통과해야만 한다. 이 방법에서만이 그들은 천국의 양심을 받을 수 있다.

이른 바, 천국행의 삶을 사는 것은 여느 사람들이 믿는 것 만큼 고되고 힘든 삶이 아니다. 혹 자는 생각한다, 영적 삶을 영위하는 것은 힘든 것이다, 그 이유는 세상을 포기함이 필요하기 때문, 신체와 육에 연합된 식욕들을 포기해야 하기 때문, 그리고 영적 존재들 같이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이들은 이것은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을 거절함을 뜻하는 것으로 받는다, 뾰족하게는 재물과 명성을 거절하는 것, 그리고 하느님, 구원, 영원한 생명에 관하여 꾸준히 경건하게 묵상하는 것, 그들의 생활은 기도함과 말씀을 읽는 것, 여타 경건하다는 저서들을 읽는데 있다고 생각한다는 말이다.

그러나 선각자는 말한다, (그가 저 세계로부터의) 풍부한 경험과 천사들과의 토론은 그로 하여금 위와 상황이 완전 다르다는 것을 알게 해주었다. 사실상, 이 세상을 포기하고, 포기하는 식으로 살았던 사람들이 천국의 환희를 받지 못하는 자신들 때문에 슬픔에 잠긴 삶을 저 세상에서 건설하고 있다. 모두 각각의 개인의 (이 세상에서의) 삶은 그 개인과 더불어 (저 세상에서도 당사자에게) 머물고 있다. 그 이유가 천국의 삶을 받아들이려면 개인은 이 세상에서 그것과 대등한 삶을 살고 있었어야만 했었기 때문이다. 이 세상 삶의 과정에서 있는 시민적, 도덕적 생활을 수단으로 개인은 영적 생명을 획득한다, 사실상, 이 방법만이 영적 생명이 개인 안에서 만들어지게 할 수 있다, 또는 개인의 영이 천국을 위하여 준비되게 해줄 것이다.

천국행으로 인도하는 생활은 실제로 놀라우리만치 단순하다. 당신이 부정직하고 불공정하다고 아는 방법으로 어떤 것을 얻을 때, 특히 당신의 영이 그런 쪽으로 향하여 움직이려 들 때, 당신에게 필요한 딱 하나는 그것이 하느님의 가르침에 반대되기 때문에 행해져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런 방식으로 대수롭지 않다 여겨지는 사소한 악과 거짓으로부터의 것을 부딪치더라도 대수롭지 않은 것이라 여기지 않고 오히려 중요하게 여기며 하나하나를 처리해 소화해나간다면, 점차 당신은 천국 쪽에 당신의 발을 디밀고 있다. 이러할 때 당신의 더 높은 수준의 마음들이 열리어져서 어떤 것이 부정직하고 불공정한 것인지를 뚜렷이 보게 된다; 그리고 그런 것들을 보았을 때, 단번에 그것들을 부수어버릴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모든 이가 인간의 자유 의지 때문에 획득할 수 있는 영적 상태 쪽으로 당신을 인도한다.

** 도서 구입 안내 **

아래 도서들의 대부분은 발행자, 역자가 출판의 모든 과정을 직접 완료한 책이므로 우선 많은 책이 쌓여 있지 않고 부족할 때마다 몇 십권씩 추가로 출판하고 있습니다. 또한 책의 단가는 여느 시중의 책의 단가와는 달리 순수 재료비만을 계상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여느 복사 비용보다 저렴할지 모릅니다. 따라서 이 출판사의 책은 팔릴 때마다 조금씩 적자를 볼 수밖에 없지만, 이 출판사의 바램은 이익 창출이 아니라 이 귀중한 지식을 공유하는 것, 더불어 이 귀중한 지식이 많은 분들의 손 안에, 책꽃이에 있어 필요시 언제나 읽기를 바램에서, 또한 이 지식의 습득은 여느 소설이나 수필집을 대하듯 하여서는 즉각 이해
에 와닿지 않는 결점이 있기에, 어쩌면 시험 공부하듯 노력함이 곁들여야 하기에 전자책이나 전화기나 컴퓨터 다운에 앞서 종이책 구입을 권장하는 차원에서 출판 사업을 펴고 있습니다.

펴내는 자: 한광숙, 배제형
펴낸곳: 도서 출판 벽옥
등록: 제 2016-000002호
주소: 전남 화순군 화순읍 안양산로 31-5
전화: 010-4738-1711
홈페이지: baysidechurch.org
biblestudynoteblog.wordpress.com
역자 E-mail : jeandsook@gmail.com

각 도서와 가격

** 각 도서는 대체로 양장본으로 제본하려 노력하고 있습니다. 또한 위 인터넷 주소에서 책을 만나볼 수 있고 다운받아 직접 제본도 가능할 것입니다.

1. 번역 서적

말씀의 합리적 이해 (전 6권. 각 430여쪽) 값 각 권 12000원
비유 (796쪽) 값 25000원
신약 비유 해석 (516쪽) 값 15000원
구약 비유 해석 (394쪽) 값 15000원
이스라엘의 첫 세 왕 (576쪽) 값 15000원
마태복음 해석 (736쪽) 값 15000원
요한복음 해석 (640쪽) 값 15000원
요한계시록 해석 (513쪽) 값 15000원
바이블 스터디 노트 (전 4권, 각 권 평균 650여쪽) 값 각 권 15000원
성경 공과 (전 24권, 각 권 평균 234쪽) 값 각 권 5000원
창세기 요약 해석 (401쪽) 값 15000원
레위기 해석 (526쪽) 값 15000원
영, 한글 구약 성경 (창세기, 출애굽기 340쪽) 값 5000원
영, 한글 신약 성경 (4 복음, 계시록 406쪽) 값 5000원
성경 상응 사전 (1082쪽) 값 25000원
헬렌 켈러의 신앙 간증 (126쪽) 값 5000원
죽음 그 이후 영들의 세계 그리고 천국과 지옥 (132쪽) 값 5000원
새 예루살렘 그리고 그곳의 교리 (100쪽) 값 5000원
천국의 비밀들 (전 12권 각 500여쪽) 값 각 권 20000원
창세기 해석 (전 5권 각 550-630여쪽) 값 각 권 15000원
성경 연구 (전 6권 각 430-480여쪽) 값 각 권 15000원

2. 원서

선각자의 필적이 담긴 쉬밑의 라틴 성경 (900쪽) 값 25000원
알카나 세레스티아 (쟌 엘리엇 영역)
알카나 세레스티아 (쟌 클라우 영역, 쟌 폿스 수정) 값 각 권 20000원
* 이 외의 원서의 종이책 재출판도 준비 중에 있습니다.
* 위 엘리엇 영역본은 copyright이 있을 것 같아서 출판을 미루고 있는 바, 필요한 분은 인터넷 검색이 가능하므로 연락바랍니다.

헬렌 켈러

차례

역자의 글
한국의 독자에게 보내는 헬렌 켈러의 원문과 싸인
헬렌 켈러의 시 “스웨덴볽”

I…스웨덴볽, 그는 누구인가?……….9
II…스웨덴볽의 사상을 만나다……..25
III…타인이 증언하는 스웨덴볽…….38
IV…성경은 어떤 책인가?…………….55
V…하느님은 어떤 분이신가?……….77
VI…생명은 사랑 속에 있다…………..94
VII…생명은 기쁨 속에 있다………….109
VIII…죽음은 육체가 없는 삶을 위한 도구이다…..119

부록
선각자의 저서 안내
선각자의 용어 풀이
선각자에게만 유일한 기본 생각들
도서 구입 안내

역자의 글

이 번역서는 켈러 여사의 중반기 (47세)에 뉴욕타임즈의 부탁으로 그 신문에 기고했던 “나의 종교”가 책으로도 출간되었는데, 역자가 그 원문에 소제목을 추가한 것 외에는 다른 수정 없이 직역을 원칙으로 번역을 시도했다. 따라서 소제목과 일치하지 않거나 여러 번 정독 한다면 내용이 뒤섞인 듯한 느낌을 받을지 모른다. 이렇게 된 이유는 이 원고는 그녀의 20-30대 시절 자신의 신앙을 정리하는 차원에서 조금씩 써두었던 글도 일부 포함된 데다가 그녀의 중반기 시절에는 많은 봉사활동 내지 강연 일정을 소화하느라 바쁘기도 했던 연유에서가 아닌가 싶다. 오히려 역자는 이 점이 마음에 더 흡족했다. 그 이유가 이 책은 신학 강의서가 아니라 간증서이기 때문이다.
아마 웬만한 미국인이라면 초등학교 과정을 거치면서 쟈니 애플 씨드(Johnny Appleseed)와 헬렌 켈러 만큼은 기억하게 된다. 이 초등학교 과정에서 앞 사람은 미 개척 초기의 전설적 인물로, 뒤 사람은 삼중고의 슬픔을 기쁨으로 승화한 인물로 칭송되고 있다. 칭송을 일궈낸 일을 한 것은 육체이지만 정작 그들의 육체를 움직인 것은 그들이 스웨덴볽을 통해 얻은 내적 세계이다.
이 책은 그녀의 내적 세계가 어떤 계기에서, 어떻게, 누구의 도움이 컷었는지, 그리하여 기쁨으로 영글어진 내적 생명이 무엇인지를 말하고 있다. 즉 자신의 종교를 진정한 반석 위에 세운 구체적 내용을 열거하고 있다.
그녀는 스웨덴볼지언(Swedenborgian)임을 그녀의 삶 자체에서 천명하고 있다. 역자가 번역을 시도한 것은 이 때문이다. 그런데 켈러 여사 내지 스웨덴볼지언을 신비주의자라 말하는 일이 많다. 최근 “나는 신비주의자 입니다”라는 제목을 붙여 출간한 그녀의 한국어판 자서전도 보았기 때문이다. 그녀가 “나는 신비주의자”라 공언해서가 아니라, 그녀가 내세를 상세히 말하기 때문에서가 아닌가 싶다. 어쨌든 신비주의의 공식 풀이를 국어 사전을 빌리면, “순수한 내면적 직관과 직접적 체험에 의해 최고 실재자를 인식하려는 종교 철학 문학상의 경향”이라 정의하고 있다. 역자 더러 간단히 말해보라 하면, “하늘로부터 오는 삶의 원리를 배워 깨달아 이를 지상에서 응용해가려 노력함” 이다.
스웨덴볼지언은 신비주의자라고 하기 보다는 합리주의자라 하는 편이 18세기가 아닌 20세기를 위해서는 더 합당할지 모른다. 그들은 하느님에 관한 것, 저쪽 세계의 원리들을 스웨덴볽의 가르침을 참고하여 합리적 사고를 수단으로 성경으로부터 알아 내기 때문이다. 이 합리적 수단의 하나가 상응(correspondence) 해석이다.
다시 말해 기독 신앙에의 접근 방법을 합리성에 기초한다는 말이다. “내가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회사는 회사의 모든 것을 알 때까지 투자를 유보하라.” 이는 몇 년 전 미국의 유명한 투자가 워렌 버핏이 후배 투자가에게 실패 없는 투자를 위해 조언한 글 한토막이다. 소문에 따라 투자하지 말라는 경고일 것이다. 이 경고는 영원한 삶의 품성을 지상에서 선택, 획득해야 하는 우리에게도 꼭 필요하다. 어마어마한 교인 숫자와 돈냄새가 물씬 풍기는 거대하고 화려한 건물 안에서 울려 퍼지는 찬양과 설교 내용이라 해서 합리적 검증 없이, 내 합리성의 되새김 없이 무조건의 아멘…은 재고해야 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스웨덴볼지언은 믿음의 신비를 지적으로 접근한다. 다시 말해 신앙심을 키우는 방식이 산기도나 철야기도, 내지 방언 은사 등등에 의존하기 보다는 성경을 합리적으로 더욱 더 이해해 감에 있다는 말이다. 그 이유가 “사람의 아들은 큰 영광과 능력을 가지고 하늘의 구름들에 오신다…(The Son of Man coming on the clouds of heaven with power and great glory)”(마24:30) 라는 구절에서 그분의 재림 수단을 직접 언급해두셨는데, 재림 수단인 “하늘의 구름들”이 거룩한 말씀의 글자들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성경 안의 하느님의 말씀에 그분의 출현이 있고 동시에 능력과 영광(천적, 영적 의미)이 그 글자 안에 드리워 있기에 말씀의 합리적 이해 (계시록 22:2)는 대단히 중요하다는 말이다.
스웨덴볼지언이즘(swedenborgism)은 스웨덴볽에게 주어졌던 사명을 뒤따르는 것이다. 그의 사명(mission)은 성경의 영적 의미, 또는 거룩한 상징 측면을 찾아내고 해석하는 것, 그리하여 말씀 속의 사랑 가득한 많은 진리들을 인류에게 날라다 주시려는 주님의 재림 섭리에서 그분의 도구로 사용되는 것이었는 바, 우리 역시 작은 도구가 되어 그의 사명을 뒤따르려 노력해가는 것이다.
스웨덴볼지언의 삶은 미래에 보게 되는 것을 지금 보며 사는 것이다. 이들은 내적 감각을 활발히 응용하는 사람이다. 내적 감각에 선견(vision)이 있다.
이 책의 번역에서 한글 표기는 평범한 영어 사전에 있는 어휘를 일차로 선정했다. 가능한 신학적 냄새가 풍기는 용어는 피하고 싶어서였다. 이 책을 접하고 그녀의 신앙을 이룬 밑거름에 관한 더 많은 내용이 궁금하신 분은 아래 사이트를 검색하면 도움이 될지 모른다.

WWW.BAYSIDECHURCH.ORG 또는
BIBLE STUDY NOTES BLOG. WORDPRESS. COM

…To Koreans who read “My Religion”

It is with affectionate spiritual friendship that I greet you in Korea who read ”My Religion”. It makes me indeed humble and proud, too, that in the East, whence have come the great religions of mankind, even a thought should be bestowed upon my testimony to the inner light and the unutterable happiness which the teachings of Emanuel Swedenborg have afforded me.
Swedenborg’s interpretation of the book I hold most precious-the Bible-has revealed to me many new treasures and given wings to my soul in the struggle for accomplishment. In the desert of silence and darkness it has planted conception of inner sight and hearing that have powerfully influenced my thought and experiences. From Swedenborg I have gained ever firmer assurance in the faith that my blindness and deafness are not punishments or accidents, but rather tools which I can use to bring service and gladness to others. He has enlarged my sympathy with all perceptions of God and attempts to live nearer to Him in other creeds. Braced by an unwavering confidence that God’s personality works for the freedom of all, I move unafraid to a new day when all people that have spoken in diverse tongues shall understand each other’s souls and live side by side in unbroken peace.
Helen Keller

“나의 종교”를 읽는 한국분들에게…

나는 “나의 종교”를 읽는 한국의 여러분에게 사랑 가득한 영적 친구가 되어 인사를 드립니다. 인류의 위대한 종교들이 발상된 곳, 동쪽에서, 에마뉴엘 스웨덴볽의 가르침들이 나에게 제공한 내적 빛과 말로 다할 수 없는 행복을 이 책을 통해 증언하게 되었는 바, 이는 나로 하여금 더욱 겸허해지게 만들면서 동시에 (내 종교 원리에 대한) 자부심도 갖게 해줍니다.
내가 가장 귀히 여기는 책-성경-에 관한 스웨덴볽의 해석은 나에게 많은 새로운 보물들을 밝히 보여 주었고, (인격) 완성을 위해 투쟁하는 내 영혼에 날개들을 달아 주었습니다. 무소식과 무지함이라는 사막에 내적으로 보는 것과 듣는 것에 관한 개념이 심어졌고, 그것은 내 생각과 경험들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스웨덴볽으로부터 나는 나의 소경인 것과 귀먹은 것이 벌을 받아서, 또는 사고들로 인해서가 아니다는 믿음에 더 확고한 보증들을 얻어왔습니다. 오히려 내 어려움은 타인들에게 봉사하고 즐거움도 가져다 주는 유용한 도구들이다는 확신도 얻었습니다. 그는 하느님에 관한 모든 지각들을 가지고 내 헤아림을 확장되게 해주었고, 또 다른 신념 안에서 그분에게 더 가까이 가게 하는 노력을 할 수 있게 했습니다. 모든 사람의 자유를 위해 역사하심이 하느님의 개성(personality)이다는 흔들릴 수 없는 신념을 버팀목 삼아, 나는 가지각색의 언어들로 말하는 모든 사람들이 서로의 영혼들을 이해하고 깨지지 않는 평화 안에서 나란히 살아가는 새 날(new day) 쪽으로 두려움없이 이동하고 있습니다.

헬렌 켈러

* 헬렐 켈러가 스웨덴볽에게 바치는 시*

스웨덴볽

“천국의 드높은 문들을 그에게 열어 주셨다”

당신은 내 무지함에 빛을 가져다 주었다.
당신의 영이 나에게서 멀리 옮겨진 적은 결코 없었다.
당신은 내 진통의 시간이 깊어가는 때는 언제나
내 가까이 있었다;
당신의 이야기 속의 거룩한 의미는 빛나는 보석들로
내 영혼 안에 새겨져 있으면서,
죽음이 그의 부드러운 손으로 내가 사랑해왔던
그분께로 데려다 줄 때 까지-
이 곳에서는 내 어둠에 횃불로,
저 곳에서는 내 기쁨으로 영원하리.

헬렌 켈러

SWEDENBORG

“Heaven unbarred to him her lofty gates”

O light-bringer of my blindness,
O spirit never far removed!
Ever when the hour of travail deepens,
Thou art near;
Set in my soul like jewels bright
Thy words of holy meaning,
Till Death with gentle hand shall lead me
to the Presense I have loved-
My torch in darkness here,
My joy eternal there.

Helen Keller

I

스웨덴볽, 그는 누구인가?

한스 안데르센(Hans Andersen)의 아름다운 이야기 중 하나이다. 어느 동산에서 자기들을 위해서는 너무나 작았던 화분을 결국 벗어나 자란 우람한 나무에 관한 묘사에서 이런 대목이 있다. 그들의 뿌리는 그 화분 안에서 잔인하게 옥죄어 엉켜있었다; 그럼에도 그 나무는 태양쪽으로 자신들을 용감하게 쳐들고, 가지들을 내뻗어, 그들의 꽃들을 만발하게 한 결과, 답답해 죽을 수 밖에 없는 운명은 자기들의 황금빛 열매와 더불어 새로와졌다. 그들의 붙임성 있는 팔들에는 노래하는 많은 새들이 찾아왔다. 그리고 그 나무의 가슴 깊은 곳에는 언제나 기쁨의 노래가, 재생의 즐거움이 그치지 않았다. 마침내 그 나무는 자기들을 감금했던 단단하고 차거운 쇠고랑을 부수고, 자기들의 힘있는 뿌리들은 자유의 달콤함을 만끽하며 동산으로 뻗어나갔다.
나의 생각에서 이 이상한 동산은 타이탄의 천재 에마뉴엘 스웨덴볽을 자라게 한 18세기를 상징한다고 여겨졌다. 어떤 이는 이 18세기를 이성의 시대라 부른다, 그리고 이 시대의 특성을 매우 냉혹한 시대, 인류 역사에서 가장 의기소침한 때로 특정지우고 있다. 사실인즉, 진보는 사방 각처에서 놀라울만큼 있어졌다. 위대한 철학자들, 그리고 정치가들, 그리고 두려움 없는 탐구가 과학에 있었다. 정부의 조직은 더 향상되었고, 봉건제도는 저지되었으며, 큰 도로들은 여느 이전 보다 훨신 안전해졌다. 중세 사상에 대한 불길 같은 열정은 엄한 예법과 이성의 쇠지휘봉에 의해 억제 당하고 말았다.
그러나 이 시대 앞의 암흑 시대에서 같이 이 시대에서도, 사악하고 압제하는 슬픔의 분위기와 찌무룩한 권력이양도 있었다. 테인(Taine) 같은 유능한 작가들은 그의 문학에 관한 역사 안에 어떻게 쓴맛의 신학이 인간을 마치 혐오스러운 죄의 후손으로 간주했고, 이 세상을 하느님의 분노에 내던졌는지를 적어두고 있다. 옛날 성인들이 중요시했었던 온화한 천사인 선행(Charity)이 대수롭지 않은 차원으로 격하되어 내밀렸다; 그리고 믿음 만(faith alone)을 추켜세웠다. 엄밀히 보면 신앙은 선행으로부터 출현해야 진짜 신앙일진대 그들이 내세운 신앙은 신앙이 아니고. 오히려 믿음 만이 천국 입장의 필수요건이라 억지부리는 자아 중심적 가설이라 말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이 신학은 사람들로 하여금 유용한 모든 일은 무익한듯, 신체적 모든 불행들은 벌받아서 그렇게 된듯 간주하게 만들어버렸다. 결국 여느 밤중들 보다 가장 깜깜한 밤, 무식함과 무감각함이 사랑에 굶주린 가슴을 지닌 세계를 덮어 씌웠다.
위와 같은 거친 사회적 분위기로부터 떠나 스웨덴볽의 천재성은 자랐고, 이 천재성은 사회에 족쇄를 채운 이 신학의 궤변을 부수도록 운명지어져 있었다. 마치 동화 속의 우람한 나무가 자기들을 옥죄었던 화분을 파열한 것과 대등하다. 깊이 생각하는 사람이 “옥죄인 세상을 풀어”주는 경우가 많을진대, 스웨덴볽의 시대 주위에 있던 몇 명의 인물들과 역사적 사건들 몇 개 정도는 다시 짚어보는 것도 도움이 될 것이라 여겨진다.
스웨덴볽이 태어난 것은 오랫동안 옛 세계를 주름잡았던 거인이라 할 수 있는 스콜라 철학에 처음으로 효과적인 펀치를 날린 영웅적 챔피언 쟌 아모스 코메니우스(John Amos Comeius)가 죽고 얼마되지 않아서였다. 스웨덴볽이 출생했던 1688년은 비록 무혈 혁명이다해도 영국의 운명을 가름하는 해였다. 그는 루이(Louis) 14세의 통치 기간 중에서도 가장 세력을 과시한 시기 동안 살았다. 그리고 그는 라 로쉘(La Rochelle)에 관한 기억이 아직도 모든 신교도들의 마음에 생생하게, 쓰라림 그대로 있었던 시기에 살았다. 그는 스웨덴의 광적인 왕, 챨스(Chales)의 놀랄만한 원정을 목격하였다. 그는 스웨덴의 식물학자 린네(Linnaeus)와 동시대 사람이었다. 그의 마지막 여러 년도에 프랑스에서는 루소(Rousseau)가 자연에 의거한 교육 원리를 부르짖었고, 디데롯(Diderot)은 감각들에 관한 자기 철학을 발전시켜 맹인도 가르쳐질 수 있다고 선포하였다. 기존의 전통적 사회 관습이 무너져내리고, 앞을 향하고 있는 그의 마음이 그리워한 시대가 갑작스럽게 돌진하는 시대를 인생으로 맞이한 스웨덴볽 같은 사람도 흔치 않을 것이다. 그가 처했던 주변 여건을 더 고려할 수록 그가 어떻게 그의 교회, 또는 그의 시대의 표준들과 공통되는 것이 아주 적었다는 상반된 결론에 이르게하는 바, 이런 스웨덴볽의 성장 배경은 기적으로 처리할 수 밖에 없는 듯하다. 나는 그로하여금 가장 독립적인 종교적 생각을 출발하게 한 것을 설명해줄 것같이 보이는 어떤 것도 그의 출생 환경과 어릴적 훈련에서는 발견하지 못해왔다. 여타 수많은 사람들이 경건한 부모로부터 태어나 스웨덴볽이 그러했듯 내노라하는 교육을 받았지만, 그들은 새로운 생각 내지 인류의 행복을 증진되게 하는데 이바지한 경우가 극히 적은 것이 아닌가! 이와달리 천사가 우리들로 하여금 눈치채지 않게 하면서 환대한 저 천재의 경우는 위 사람들과는 너무나 판이했다.
스웨덴볽의 고향은 스웨덴의 스톡호름(Stockholm)에 있었다. 그의 부모는 성실한 사람들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루터교파의 감독이면서 신학교의 교수였고, 영적 통찰력이 있었다. 알려진 바, 마틴 루터가 수도 생활 때에 영들을 보았고 영들의 음성을 들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그의 많은 추종자들이 자기들도 또다른 세계의 무엇인가를 한웅큼 쥐어 보겠다하여 격렬한 단식과 밤샘을 시도하기도 했다. 소년 이매뉴얼도 위와 비슷한 경험들을 가졌다고 전해지고 있기도하다. 그의 후반기 인생에서 그가 친구에게 이런 편지를 보낸 적이 있다; “네 살부터 열 살까지 나는 하느님에 관한 생각, 구원과 인간의 영적 경험들에 관련된 것에 몰두했었다; 그리고 몇 번의 경우 나는 나의 부모가 기이히 여긴 것들에 관한 사항들을 밝히 알아냈는 바, 내 부모는 이를 두고 필시 천사가 너를 통하여 말했음이 확실하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비록 그의 아버지가 그의 경험을 잘 헤아렸다 할지라도 그의 어머니는 단호하게 이의를 제기했다. 그래서 그녀는 남편에게 그가 “천국을 여행하는 것은 반드시 멈추어지게 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그 뒤 에마뉴엘은 그가 56세 될 때까지 영계로부터 어떤 빛도 보지 않았고, 어떤 소리도 듣지 않았다. 그의 종교적 저술을 참고해보면 위와 같은 영적 체험은 어린아이나 부적당한 남자나 여자에게 쓸모 없다는 것, 이런 환상들을 보려 애쓰는 것, 등은 매우 유해하다고 그의 독자들에게 경고하고 있다.
그의 어린 시절은 그의 불가사이한 삶을 위해 바람직한 아름다운 시작에 해당되었다. 그와 그의 아버지는 꾸준한 동료 관계였다. 그들 둘은 스톡호름 주위의 언덕들을 올라갔다. 그리고 협만(fjord)을 탐사했고, 이끼나 꽃, 그리고 빛을 내는 색깔 있는 돌들을 수집하기도 했다. 그들이 집에 돌아왔을 때, 이 어린아이는 옥외 경험들에 관하여 긴 보고서들을 쓰곤 했다. 그런 이유가 그는 어린 시절부터 학자였기 때문이다. 그의 마음은 언제나 자기 신체의 한계점을 넘어 내달렸다. 그렇다해도 여느 조숙한 젊은 이 같지 않게 그는 강하고 건강하게 성장했고, 그의 고상하고 남자다운 태도는 호평을 받았다.
그는 그 시대 그 나라에서 가능할 수 있는 최고의 교육을 받았다. 그는 웁살라(Upsala) 대학에 출석했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그의 초기 작품들은 그의 시적 재능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가 집중한 학문은 수학과 기계학이었다. 그는 미적분학의 아주 곤란한 풀이 과정을 단순하게 처리하여 그의 지도 교사를 놀라게 했다. 그리고 그의 급우들은 학문의 미로를 꿰어 헤쳐나가는데 매우 빠른 그의 지성을 뒤쫓지 못하는 경우가 자주 있었다고 말해진다. 그래서인지 그들은 그를 자기들과는 매우 다른 사람으로 간주하고 그에 관해 말할 때는 작은 어조로 했다 한다. 그는 엄격한 신조와 엄숙한 예법 속에서 양육되었는 바 이런 근엄함이 밖으로 노출되었지만 그런 자신을 본인은 의식하지 못한 듯 보여진다. 그의 얼굴은 준엄한 것으로 묘사되었는데 실상은 누구의 접근을 제지하고자 하는 의도는 그의 심중에 전혀 없다. 그의 얼굴형은 조각상 타입이었지만 그의 인물됨에서는 잘생기고 위풍당당하였다. 그는 젊은이들이 좋아하는 스포츠나 어떤 오락 같은 것에 빠져 있는 때가 없었던 것 같다. 그런 탓에서인지는 모르나 그에게 유일하게 열정을 느끼게 했던 수줍은 소녀와의 관계를 한참 뒤 이성간의 사랑으로 진전시킬 수 없었던 것 같다. 그는 그녀 대신 그녀의 아버지, 저명한 폴헤임(Polheim)에게 갔다. 그리하여 자기의 사랑을 도표들을 수단으로 입증했었을는지 모른다. 그래서인지 그녀의 아버지는 소녀가 삼년 내에 돌아갈 수 있게 보증하겠노라고 이 젊은 이에게 약속해주기도 했다. 그러나 이 소녀는 심히 놀랬고, 그녀의 오빠는 마지막으로 그녀를 포기하라고 스웨덴볽을 설득했다. 그녀에 대한 그의 사랑은 그 후에도 잊은 적이 없었다 한다.
그는 우수한 성적으로 웁살라 대학을 졸업했고, 1709년, 그의 나이 21세 때에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 뒤 그는 외국 나라들을 여행했는데, 그 목적은 여가를 즐기기 위함이 아니라 배우기 위해서였다. 랍삼(Robsahm)은 자기 메모 수첩에서 스웨덴볽에 관해 이렇게 말한다. “그는 배워 익힌 언어들에 더하여 잘 이해했던 외국 언어에는 프랑스, 영어, 네델란드어, 독일어, 이탈리아어가 있었는데, 그런 이유는 그가 이런 나라들을 여행했기 때문이다.”
그의 아버지는 그가 외교 업무에 종사하기를 원했으나, 그 대신 그는 과학의 길을 선택했다. 그는 유럽 군주국에게 자기를 소개하는 편지도 지니고 있었지만 조용히 그것들을 무시해버리고 대신 그 시대 저명한 학자들을 찾아 나섰다. 간혹 그는 미리 통보함도 없이 학자들을 찾아가 면담을 요청하기도 했다. 어쨌든 그에게는 그들의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어떤 것이 있었다. 그래서인지 그들은 그의 요청을 묵살한 적이 없었다. 그의 한가지 바램, 그의 사명은 배움, 즉 알아가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그는 자기에게 나누어 줄 새로운 사상들, 방법들, 또는 발달 과정을 가졌던 많은 사람에게서 공물을 거두듯 흡수했다.
그의 심오한 학식은 그를 스웨덴의 찰스 12세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던 듯 보이는 크리스토퍼 폴헤임(Christoper Polheim)과 가까운 협력 관계를 맺어지게 했다. 이런 관계에서 스웨덴볽은 왕에게 소개되어졌고, 왕은 그를 스웨덴의 광산 대학의 분석관으로 임명했는데, 이 공직의 주 임무는 채광과 제련에 관한 최고의 방법을 연구하고 권면하는 것이었다. (이 당시 광산의 채굴은 왕권에 직속되어 있었다. 그 이유가 국가 재원 확보에 매우 중요한 부서로 어쩌면 요즈음 재무부나 한국 은행 수준에 걸맞을지 모른다) 이 임명과 더불어 스웨덴볽은 그의 활동 영역이 놀라울 정도로 커지고 다양해진 시기로 진입하였다. 그는 자기 직책을 성실함에 지혜를 추가해 마무리지어 갔다. 그뿐 아니라 그는 과학의 전 분야에서 연구를 진행했다. 독립적으로 깊이 생각하는 사람다웁게 그는 발견을 위한 강력하고 독창성이 풍부한 비범한 재능의 충동을 따라갔다. 그리하여 가능만하다면 자연의 가장 깊은 비밀들까지 밝혀보려 했다. 그는 아침의 새의 노래들과 별들과 친숙했던 만큼, 조선소나 작업장, 용광로, 채석장과도 친밀했다. 그가 어스레한 구석에서 활짝 핀 꽃들을 발견했을 때, 그 꽃들은 그의 발걸음이 묻었던 위엄있는 산들이 지닌 경이로움 만큼이나 큰 비밀들을 그에게 말해주었다. 그의 재능은 실용성과 아름다움, 수학과 시, 발명과 문필력 등이 함께 어우러진 매우 드문 특징을 지녔다.
1718년, 그는 프레디맄샬(Frederickshall)을 포위 공격함에서 직책을 수행하고자 그의 기계학적 기술을 참조했다. 이 때 그는 기계들을 만들어서 몇 척의 군함을 언덕과 계곡을 가로질러 육지 이 끝에서 저 끝으로 14 마일의 거리를 운반한 적도 있었다. 그는 기계를 이용한 탈 것들, 즉 내부가 복잡히 얽힌 탈 것들, 비행하는 도구, 바다 밑을 항해하는 배 같은 것을 도안했다. 따라서 그는 자동차나 비행기, 잠수함의 출현을 예고한 셈이었다. 그는 물을 이용해 공기를 응축하고 빼내는 새로운 기계들을 만들기도 했다. 그는 음악에 친숙하지 않은 사람도 악보에 명기된 모든 종류의 곡조들을 연주하도록 해 줄 보편적인 음악 도구를 만들려 노력하기도 했다. 그는 인간의 욕구와 애착들을 분석을 수단으로 알아내는 방법을 연구했다.
그는 일 분에 수천 발을 발사할 수 있는 공기총을 고안했다. 그는 들어 올리는 다리들, 여타 기계학적인 도구들을 위한 계획들을 세웠다. 근대에 이르러서야 가능했던 과학과 예술이 서로 밀접하게 관계를 가지는 경이로운 시스템(system)의 모양들이 스웨덴볽의 머리 안에서는 이미 그려져 있었다. 그는 십진법이 실제에서 어떻게 이용되어질 수 있는가를 보여주기도 했다. 그는 수은 자력(mercurical magnetism), 고생물학(palaeontology), 생물학 분야 등에서도 1.5세기 이후에야 발달될 이론과 지식의 한웅큼을 이미 손에 쥐고 있었다; 그는 라플레이스(Laplace) 보다 앞서 성운설과 원자 이론을 약술하였다.
스웨덴볽은 자기의 재능이 가져다 줄 수 있는 당연한 큰 부유함이나 명성에 소경일리 만무했겠지만, 그는 자기 입술까지 들어 올렸던 행복의 잔을 거절했다. 인류의 슬픔들과 압제받는 것이 그의 가슴을 무겁게 짓누르며 놓여 있었다. 겸허하고 부끄러워함을 지닌 그의 영혼은 수천 만의 인간 존재들에 저주를 비가 쏟아내리듯 퍼붓는 신학의 잔인함들을 바라보게 되었다. 그 당시 때맞추듯 영국에서 요나단 에드워드(Jonathan Edwards)가 지옥불과 공포를 설교했고, 회개 없이 죽은 셀 수 없는 아기들은 영원히 고통을 받는다고도 설교했다. 하느님의 말씀을 저주로 바꾸어 놓는 악의 교묘함, 근대인인 우리로서는 감히 상상조차도 불가능하지 않을까? 그들의 신학 이론은 천국이란 괴상한 곳, 지옥은 말할 필요도 없는 지독한 곳, 인간 삶은 그저 기나긴 고난의 행렬일 뿐이라고 결론짓게 만들 뿐이었다. 그래서 스웨덴볽은 이렇게 중얼거렸다. “이 섬뜩한 그림자가 온 세상을 뒤덮고 있는 이 때 내가 애써 획득한 이 모든 지식들이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그는 자기가 이룩한 명성을 다 뒤로 밀치고, 자기 인생의 삼분의 일에 해당하는 29년을 비교적 가난한 살림을 꾸렸지만, 자비로움으로 자기 주위 동료의 상처받은 영혼들을 위로하면서 (그들에게) 신앙과 생활의 합리적 교리(를 전해주었다).
위와 같은 애씀 외에, 틈틈이 그는 자기에게 밀려들어오는 많은 생각들을 글로 썼다. 그리하여 종교 분야에서의 탐구를 시작하기 앞서 이미 60권이 넘는 책들과 팜플릿들을 제작했다. 이 시기에 있은 위대한 작품 사이에는 “자연적인 것들 속의 첫째 원리들”, “뇌”, “동물 왕국의 경제”, 그리고 “합리적 심리학” 등이 있다.
이러한 과학적 제작물에 관해 에머슨(Emerson)은 이렇게 말한다. “그는 19세기에나 있음직할 과학물들을 미리 내다본 듯 여겨진다…그의 저술들은 고되게 독학하는 학생에게 만족스런 도서관이 되어줄 수 있을지 모른다; 이 도서관의 책들 중 하나로 ‘동물 왕국의 경제’가 있는데, 이 책은 생각함에 위엄을 받쳐주는 스타일에 의해 쓰여 인류를 명예롭게 하고 있다. 한마디로 ‘동물 왕국’은 경이로운 가치를 지닌 책이다. 이 책은 과학과 영혼이 서로에게 오랫동안 뒤엉킨 상태였을 뿐인 것을 다시 하나로 놓는 아주 높은 목적을 지닌 책이다. 이 책은 해부학자가 인간 신체를 아주 수준 높은 시적 형태로 기록한 책이다. 통상 대단히 무미 건조하고 불쾌감을 줄 뿐인 주제가 대담하고 찬란히 빛나게 하는 방식으로 취급되었는 바 이런 측면에서 이를 능가할 책은 없을 것이다.”
알버트 후바드(Albert Hubbard)는 “자연적인 것들 속의 첫째 원리들”에 관련해 다윈(Dawin)은 이 책을 아주 꼼꼼히 읽었는 듯 여겨진다 라고 말한다. 여하튼 그는 바위에 붙은 조그만 이끼에서 숲의 시작을 보았는 바, 진화의 어떤 것을 미리 예측하고 있었다. 또한 그는 성경의 글자 뜻 그대로의 창조 사건이 과학적 사실들과 비추어 모순되는 바, 한쪽으로 내밀치기도 했다. 창세기에 관한 그의 태도는 이 후 그의 어떤 종교 저술들에서도 바꾼 적이 없음을 이 대목에 첨부해두어야 독자들에게 보탬이 될 것 같다. 사실 그는 오랫동안 존경받아 온 글자 직역(해석)주의에 냉소를 보내고 뜯어내었다. 동시에 그가 성경에서 발견한 것은 이 창조 이야기는 물리적 창조와는 아무 연관이 없다는 것, 대신 인간 영혼의 창조에 관한 비유인데, 이것은 인류에게 아주 오랜 세월 잊혀진채 있었던 대화체이다는 것, 소위 태고적 스타일(설화체)에 속한다는 것이다.
수학, 기계학, 광산학 등등 외에 스웨덴볽은 그의 작품들에서 화학, 해부학, 지질학에서도 깊은 지식이 있음을, 그리고 음악을 애호했음도 보여준다. 그의 철학적 주제들은 위와 대등하게 다각도에 걸처 있었다. 그럼에도 그는 “사회에 유익할 모든 일에 자신을 내놓기 위해” 시간을 배정하고 있었는 듯 하다. 여러 해 동안 그는 스웨덴의 국회 회원이었고, 국가에 대한 괄목할 만한 그의 봉사 정신 때문에 그는 아주 높은 영예를 받았다. 많은 명예직이 그에게 수여되었다. 한 예로 1724년 웁살라 대학 이사회는 그를 순수 수학 교수로 임용하고자 초대했다. 그러나 그는 사양했다. 그는 세인트 피러스버그, 웁살라, 스톡호름에 있는 여러 학회의 회원으로 초대되었다. 그의 초상화는 명예 회원의 일원으로 스톡호름의 왕실 과학 아카데미의 회관, 리내어스의 초상화 근처에 걸려있다.
스웨덴볽의 일생, 한마디로, 일, 일, 오로지 일 뿐인 듯 보여진다. 그는 재정적으로 자립하였는데, 오히려 이것은 그로 하여금 더욱 일을 완성하도록 자극제 역활을 해주었을 뿐이다. 지위여하를 막론하고 모든 이 각자는 이기심 없는 헌신이나 자신의 고상한 인격에 대한 증거들을 낳기 마련이다. 그는 나이 많아짐에 따라 그의 상냥한 예절은 그와 절친한 모든 친구들에게 사랑받는 계기가 되었고 그의 젊은 시절 그의 얼굴에 나타난 엄중함도 눈녹듯 사라지고 말았다. 그러나 그는 실감나는 우정 관계는 가져보질 못했던 것 같다. 그렇게 된 이유가 그는 자기와 친숙했던 어떤 주제를 두고 그의 동료들과 대화할 때 조차도 그의 생각은 이미 사다리 높은 곳에 올라 앉은 격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의 저서를 타인에게 추천은 하였으나 정작 자신들은 읽으려 시도하지 않았다. 이 거대한 발자국을 뒤쫓아 사색의 위쪽 영역 안으로 들어가려하는 자는 아무도 없었고, 아마 들어갈 수도 없었을런지 모른다. 그는 소경에게는 눈이었고, 귀먹어리에게는 귀였고, 그들이 이해할 수 없었던 언어로 광야에서 외치는 목소리였다. 빛과 소리의 세계로부터 고립된 내 신체 조건은 그의 특이한 상황을 예리하게 느끼게한듯 여겨진다. 어쨌든 나는 그가 지상의 고독감 그 이상으로 외로워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세상은 그에게 생소한듯 비쳐졌을지 모른다. 그 이유는 그가 타인에 비해 과잉 성장해갔기 때문이다. 영혼의 급속한 성장에 비해 육체의 성장은 너무 느린 셈이어서 육체는 감옥의 가로장이 되어 영혼을 내려눌렀다. 아마 이를 견뎌낼 자 아무도 없었을 것이다. 그의 짐을 가볍게 해주도록 그와 비슷한 총명을 지녔다고 보증되는 자가 그의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는 자기 인생을 배움에 내던졌었다. 그는 그의 거대한 지식을 가지고 무엇을 할 수 있었을까? 그는 자신이 어려운 날들을 맞이했을 때 더 많은 기회가 주어지고 더 많은 빛을 받게되어 오히려 그 곤경을 반겼을지도 모른다. 한 가지 나로서 의문된 것은 그가 영적 계발이 있은 이 후에도 집에서 꾸준히 평온을 유지해 나갔을지 이다.
1744년도 쯤에서 큰 변화가 스웨덴볽에게 왔다. 자연계의 사실들을 예리하게 뚫어보는 관찰자, 마음 속의 것들을 분석하는 이 사람은 사물 속의 영적인 것을 관찰하는 높은 능력들을 받게 되었다; 그의 영의 감각들은 영적 세계에 있는 실제들을 인식하는 생명이 주어졌다. 그와 동시대 사람인 랍삼(Robsahm)은 자기가 스웨덴볽에게 물어보았던 것, 즉 “어디서, 어떻게, 천국에서, 지옥에서, 영들의 세계에서 거행되는 것들을 보고 듣도록 당신에게 수여되었소?” 라는 질문을 기록해두고 있다. 이 질문의 대답인즉, 밤에 어떤 이가 나에게 와서 말했다는 것, “그분은 주 하느님, 세상의 창조자, 그리고 구속자이시다는 것, 그리고 그분은 인간에게 성경의 영적 의미를 설명하려고 나를 선택했다는 것, 그리고 내가 이 주제에 관해 쓰게 될 때 그분 자신이 나에게 이 주제를 설명하시겠다는 것; 같은 날 밤에 내가 그것들의 실제, 즉 영들의 세계, 천국과 지옥을 통째로 나에게 열어주어 나로 확신하게 하셨다는 것, 그리고 그분은 내가 거기서 서로 다른 생활 조건에 있었던 내가 아는 사람들을 인식하게 하셨다는 것. 이 날로부터 나는 세상적인 모든 과학 연구를 포기했고, 주님께서 나에게 쓰라고 명령하신 것에 따라 영적인 것들에 온 힘을 모았다. 그 후 주님은 날마다 아주 자주, 내 눈을 열어 주셨는데, 때로는 한낮에도 나는 다른 세계를 볼 수 있었다, 더구나 완전히 깨어 있는 상태에서도 천사들과 영인들과 대화할 수 있었다.” 1766년 9월, 스웨덴볽은 시. 에프. 오이팅거(C.F. Oetinger)에게 이렇게 적어 보냈다. “주님 자신께서 나에게 나타나셨다. 그리고 그분은 내가 지금 하고 있는 것들을 하시기 위해 나를 보냈다. 그리고 이 목적을 위해 그분은 내 마음의 내면들, 곧 내 영 속의 것들을 여셨다. 그리하여 나는 영계에 있는 것들을 보게 되었고, 거기 있는 이들의 소리를 듣는다. 나는 이 특전을 20년 동안 지녀왔었음을 엄숙히 증거한다.” 이 특별한 영들의 교제(intercourse)는 그가 런던에 일시 체류한 때인 1772년 3월 29일 그가 죽음을 맞는 날까지 계속되었다.
위와 같은 스웨덴볽의 경험을 숙지해보면서 나도 매우 작은 부분일지라도 위 그의 편지가 의도한 바가 무엇인지 감지할 수 있는 능력이 특이하게 있는 것 같음을 나는 느끼고 있었다. 거의 6년 동안 나는 자연 또는 마음 또는 죽음 또는 하느님, 무엇에 관한 것이든 그에 대한 개념들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나는 내 몸이 지시하는 그대로 생각했다. 단 하나의 예외도 없이 그 때의 내 기억들은 촉감을 수단으로 한 것 뿐이었다. 30년 동안 나는 새 이론의 빛에서 있게 된 내 발달 국면을 검사했고 또 검사했는 바, 나는 내가 말하는 것에서 틀렸다고 여겨지는 것이 없음을 확신했다. 나는 내가 먹을 것이나 따뜻한 곳을 찾는데 있어 동물처럼 재촉했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나는 울었던 것을 기억하는데, 그 울음은 내가 눈물이 나서 야기된 슬픔이 아니었다; 나는 발로 찼다, 그리고 나는 그것을 신체적으로 상기했기 때문에 그 행동은 내가 화났다는 것을 알게 해주었다. 나는 내 주변에 있는 것들을 흉내 냈었는데, 즉 내가 먹을 것을 윈했을 때를 위한 표시, 또는 내 어머니의 농장에서 달걀을 찾는 것을 도왔던 때를 기억해두기 위한 표시들을 만들어 두려 했었다. 오로지 육체적 기억들 뿐인 이 별난 행동에는 정서적이거나 합리적 생각 같은 것의 자잘한 한 조각도 있지 않았다. 나는 땅 속의 의식 없는 흙덩이 수준에 불과했다. 그 다음 갑작스러웠기 때문에 나는 언제, 어디서 어떻게 인지 알지 못했지만, 어쨌든 내 두뇌가 또 다른 마음과 충돌했다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나는 언어에, 지식에, 사랑에, 자연에 관한 통상적 개념들에, 선과 악의 일반 개념에 대해 깨어나졌다. 나는 존재하지 않았음으로부터 인간의 삶으로 실제로 들리워졌다. 나는 스웨덴볽이 지상 경험과 동시에 신체 감각들의 인식 범위를 너머 있는
영역과 접촉하였듯 서로 양립할 수 없는 두 평면들을 경험한 셈이었다. 나는 텅 빈 여러 해 동안 나 자신 또는 자연으로부터 아주 수준 낮은 개념들조차 받지 않았기에 나는 비록 유한한 마음으로부터 이다 해도 내 경험을 일종의 계시로 간주하고 있었다. 스웨덴볽은 그의 가장 높은 개념들을 무한한 마음으로부터의 계시로 간주했다. 사실 그 자신의 말로부터서도 명확해지는 바, 자기가 영계에서 의식있는 채로 현존해 보는 것이 그의 목표가 아니라, 그것은 우리 안의 두 통치 기능인 의지와 이해성 중 이해 측면을 발달시키는 수단일 뿐이다는 것, 그리고 선과 악, 영과 물질에 대한 각기 다른 개념들을 더 납득력 있게 보려는 수단으로 삼으려해서인 것, 또한 말씀을 번역함에서 단지 단어나 어구 번역이 아닌 원리들로 번역해가는 것을 알기 위한 수단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는 자신만이 이런 종류의 환상을 가지게 되었다고는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과는 거리가 먼 것, 그가 말하려했던 것은, 자기는 모든 사람들이 거주하는 땅에 자기도 거주하면서 동시에 지상을 떠난 모든 사람들이 살고 있는 진짜 세계도 충분히 의식하면서 29년을 살아왔다는 것이다. 그가 믿었던 바, 자기의 사명은 성경의 “영적 의미” 또는 거룩한 상징 측면을 찾아내고 해석하는 것, 그가 다른 세계에서 가진 경험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참되게 이해하려는 자신을 돕기 위함이었다는 것, 더불어 가장 경이롭고 인정 많은 진리들을 인류에게 날라다 주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스웨덴볽은 영혼의 영역에서의 법칙들과 사실들을 탐사하는데 모든 정력과 용기를 바쳤다. 그는 히브리어의 연구에 착수했다. 그 목적은 자신이 원어로 구약 성서를 읽고 종교의 형체들과 비유들 그리고 고대 시대 때의 “신비들”에 관한 직접적인 지식을 얻기 위한 것이었다. 그는 여러 해 동안 의미가 불명확한 많은 성경 구절을 파헤치느라 무척 애를 많이 썼다. 허나 꾸준히 돌아오는 것은 좌절감 뿐이었다. 많은 것들이 그를 곤란하게 했는데, 특히 전통, 즉 거의 억누를 수 없는 종파별 성경 해석, 사랑이 기독교 신앙의 심장에 해당되는 것 같은데 이를 벗어난 시대의 냉냉함, 여느 예언자나 사도가 꿈도 꾸어보지 않은 교묘하고도 재기 넘치는 변호를 위한 신조로 포장된 교회 문학이 발휘하는 마법, 끝으로 감각들 속에 늘 붙어다니는 것을 충분히 감지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스웨덴볽도 그들의 입맛에 너무 거스르지 않도록 어느 서술의 부분을 삭제하거나 우물쭈물 적당히 돌려댈 수도 있었을 것이다. 허지만 그는 자기가 매우 중시하는 것들을 문장의 외곽으로 밀쳐내거나 꽁무니를 빼는 짓은 결단코 하지 않았다. 그가 높이 올라가는 마음에 심히 고통을 주는 육체를 벗어났을 때, 찬란해야 할 그의 이름 위에 욕설까지 퍼부어졌다; 그리하여 참 기독교 신앙이 알려진 이래 가장 고귀한 챔피언들 중의 하나인 그는 한참 동안 세상에서 잊혀져 있었다. 지상에서 외롭게 살았던 그가 내내 알았던 유일한 보람은 모든 사람들의 복지와 행복을 위해 자신의 역량을 다 바쳤다는 것을 의식으로 알고 있다는 것이었다. 링컨(Lincoln)에 관한 쟌 드링크워러(John Drinkwater)의 몇 줄의 시가 아래에 있다. 이 시는 언제나 스웨덴볽을 내 앞에 생생하게 가져다 준다.

“깨달은 사람은 외롭다.
어떤 사람을 목장으로부터,
옥수수 고랑과 갈색의 건초 더미로부터
산 쪽으로,
그의 모든 모험들이
넓은 계곡들에 있는 파종자들과 경작자들 사이에 한 개의 융합된 경험이라고 깊게 생각하게 하는
높은 장소로
인도해가는 그의 선견은 외롭다.
이 선견이 그의 영혼의 진로를 지배하고,
그의 손에 용기와 절제함을 주고 있다.”

“Lonely is the man who understands.
Lonely is vision that leads a man away
From the pasture-lands,
From the furrows of corn and the brown loads of hay
to the mountain-side,
To the high places where contemplation brings
All his adventurings
Among the sowers and the tillers in the wide
Valleys to one fused experience,
That shall control
The course of his soul,
And give his hand
Courage and continence.”

그렇다, 무엇과도 비교해 볼 필요 없는 불변함을 지닌 채, 이 선각자는 그의 영혼을 고독함과 선견(vision) 안에서 소유했다.
그가 죽은지 150년이 흘렀다. 지금 천천히 그의 업적은 세상에 알려지고 있다. 그의 교리들에 반감을 표했던 사람들이 태도를 바꿔 이 교리를 더 알고저 문의하고 있다. 총명한 많은 사람들이 그의 가르침들을 문명의 중심지에서 변호했고, 우리가 꿈에서도 몰랐던 구석진 세상에까지 운반해 주었다. 그의 메시지는 빛 처럼 여행했다. 그리하여 그의 가르침은 인류의 삶에서 자신들을 실현해내려 투쟁하는 새로운 사회, 새로운 자유, 새로운 과학과 나란히 하고 있다. 나는 불구자나 절망에 빠져 있던 사람들이 이 위대한 메시지를 수단으로 자신의 인생을 풍요하게 빛을 내게 한 실예를 보아왔다. 나 역시 이 실예 속의 범주에 있다. 고로 이런 나의 간증을 통하여 누군가 한사람 만이라도 하느님이 자기와 현존함을 더 달콤하게 느껴본다거나 바깥쪽 환경의 난관을 지배하기
위한 더 예리한 묘미를 획득하게 해준다면 나는 더할나위 없이 행복할 것이다.
나는 어둠에서 배회하고 난관과 마주 칠 때, 영의 영역으로부터 속삭여 오는 격려의 음성을 듣고 있다. 나는 무한(이신 분)의 샘으로부터 쏟아져 내려오는 거룩한 열정을 느끼고 있다. 나는 하느님의 맥박을 가지고 연주하는 음악에 짜릿함을 느끼고 있다. 나는 보이지 않는 법칙에 의해 서로 묶인 태양과 혹성 같이 내 영혼에 묶여 있는 영원한 불꽃을 느껴내고 있다. 나는 여기 내가 매일 마시는 공기 한가운데에서 영의 비가 쏟아지고 있음을 느끼고 있다. 나는 땅 위의 모든 것은 천국의 모든 것과 얽매어 있다는 그 멋진 진리를 잘 알아채리고 있다. 비록 여기서 침묵과 어둠에 의해 감금된 나 이지만 죽음이 나를 자유하게 할 때 어두운 내 눈에 수천 배의 시력을 나에게 줄 빛을 지금 소유하고 있다.

II

스웨덴볽의 사상을 만나다

내가 18세기 스웨덴의 위대한 선견자의 저술에 처음 접촉되었을 때 받은 느낌을 말하려면 이는 30년 전의 사건인 바, 하느님에 관한 나의 최초 의문들로 되돌아 가보지 않으면 아무 의미 없는 사건 같이 되어 버릴런지 모른다. 그 당시 어린아이였던 내가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은 누가 만들었는지 알고 싶어 했다는 것은 당연할 것이다. 그리고 내게 말해진 답은 자연이 땅과 하늘과 물과 모든 생물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이것을 어머니 자연이라 일컬었다) 한 동안 이 대답은 나를 만족시켰다. 그리고 나는 내 어머니의 정원의 장미 나무 사이에서, 강둑에서, 혹은 데이지(daisy)가 만개한 들판에서 마냥 행복했다. 이곳에서 나의 선생님은 나에게 씨와 꽃, 새와 곤충 그리고 강 속의 물고기에 관하여 진짜 “아라비안 나잍스(Arabian Nights)” 이야기들을 들려주었다. 여느 아이들 같이 나도 내가 만졌던 모든 물건은 살아 있고 자아 의식이 있다고 믿었다. 그리고 우리 모두는 어머니 자연의 자녀라 상상했다. 그러나 내가 더 나이들어 갔을 때, 나는 내가 만질 수 있었던 자연의 이런 저런 것들에 관하여 따져보기 시작했다. 자명한 것은, 지금의 나는 성숙해진 단어들과 나이 많아진 이후 가진 생각들을 사용하여 나의 어린 시절 모습인 손으로 더듬고, 엉성하여 적당히 둘러대던 것에 관한 인상을 여러분으로 하여금 알기 쉽게 만들고 있다는 것이다. 나는 인간 존재들이 일을 한 것과 자연의 경이로움들이 만든 것 사이에 놓인 차이점에 주목했다. 나는 내 어머니가 뜨거운 케익
(cake)을 뒤섞는 것 같이, 강아지, 꽃, 돌, 아기, 폭풍 등이 함께 어우러진 것은 아님을 알았다. 나를 당혹케 했던 나무와 들판에 있는 것들에는 질서와 순서가 있었다. 동시에 나를 겁먹게 했던 자연력으로 해서 뒤숭숭한 때도 있었다. 아름다운 것이 까닭 없이 파괴되는 것, 못생긴 것, 쓸모 있는 것, 밉살스러운 것, 정의로운 자와 사악한 자, 또는 지진과 홍수, 토네이도(tornado)에 의한 (파괴) 등을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즉 무책임하게 힘을 과시하는 분별없는 집단이 어떻게 파괴된 것을 언제나 재생하면서 창조하고 살아 있게 간직하는지…!, 봄, 여름, 가을, 겨울, 파종과 수확, 낮과 밤, 밀물과 썰물, 이어져가는 인간 세대 등등을 의아하게 여길 수밖에 없었다. 여하튼 나는 자연이 나와 내가 사랑한 것들에 더 이상 관심이 없어 파리나 작은 가지 보다 못한 것으로 여긴다고 느꼈다. 이 느낌은 나에게 분함 같은 어떤 것, 즉 자연의 영혼은 자기의 거대한 요구를 교묘하게 빗대어 말함으로 일을 저지르고, 그리하여 자연 속의 사건들과 사물들을 통치할 특권을 가졌다고 선포하는가 보다 하는 생각도 돌출되기도 했다.
이 결과 나는 자연이라는 것에서 돌아섰고, 대신 하느님에 관하여 묻기 시작했으나 다시 좌절을 맛보았다. 친구들은 나에게 하느님은 창조자이시다는 것, 그분은 어디에나 계신다는 것, 그분은 모든 인간 삶에 필요한 것, 기쁨들, 슬픔들을 아신다는 것, 그분이 미리 아시고 섭리하심 없이 발생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등등이었다. 관대한 성품을 지닌 어떤 사람이, 그분은 모든 사람에게 자비로우시고, 그분의 태양을 정의로운자이든, 불의한자이든 공평히 비추이게 하신다고 말했다. 나는 이런 거룩하시고 사랑스러우신 존재에게 빨려들어갔다. 그리고 나는 그분에 관한 어떤 것을 이해하기를 정말로 갈망했다. 그 뒤 나는 필립스 브룩스(Phillips Brooks)를 만났는데, 그는 하느님은 사랑이시고 그분의 사랑은 “만인의 빛이다” 라고 말하여 그분에 대한 중심되는 진리를 붙잡도록 나를 도왔는데, 이 간단한 몇 마디는 내 영혼을 휘저었다.
그러나 나는 이 신성한 사랑과 물질 세계 사이의 관계에 대한 명료한 생각을 만들어 볼 수 없었다. 나는 불확실함과 그늘진 구석에 처박혀 나 자신을 잃었던 때가 많았다. 이 때 말로 표현할 필요도 없이 재 보증되어 주었던 참 빛과 눈 앞의 실제이기에 부인하기 힘든 자연의 어둠과 영혼 사이를 이리저리 배회하였다. 그러던 어느날 나는 빛나는 행복을 만들게 되었다. 그리고 하느님에 대한 느낌을 더 가깝게 가져오는 계기가 있었다. 나비가 누에고치로부터 나와, 태양에서 날개를 말리는 절묘함을 “내가 지켜 본 것”, 그 뒤 그 나비가 철쭉(arbutus) 더미 위에서 펄럭이는 것을 만졌다. 누군가가 나에게 어떻게 고대 이집트인들이 나비를 불멸의 상징으로 간주했었는지 말해주었던 적이 있었다. 나는 기뻐하였다. 이런 생명의 형체들은 아직 더 사랑스러운 것들에 관한 교훈을 그것들 안에 가지고 있을 것인 바, 그것은 나에게도 의당 있을 것처럼 보였다. 그럼에도 둥근 큰 톱(buzzsaw)이 계속 나를 괴롭혔는데, 이는 어느날 직관의 번쩍임이 나에게 무한한 경이를 밝히 보여주었던 때까지 이였다.
내가 반 시간 동안 도서관에서 조용히 앉아 있었던 적이 있었다. 나는 내 선생님에게 돌아서며 말했다.“어떤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나는 지금 내내 멀리 떠나 있었다. 그러나 내가 이 방을 떠난 것은 아니다”… “그게 무슨 뜻이야, 헬렌?” 하고 그녀가 놀래면서 물었다. “그 이유가” 나는 소리쳤다. “나는 아테네에 있었다.” 이 말이 내 입으로부터 나왔을 때 빛나고 놀라게 하는 사실을 깨달음이 내 마음을 휘어잡고 불태우는듯 여겨졌다. 나는 내 영혼(soul)의 실체(realness)를 지각했다. 동시에 영혼은 육체와 공간이라는 조건들로부터서 독립되어 있다는 것을 지각했다. 이렇게 지각한 이유는 내가 영(spirit)이었기 때문이고 영은 수천마일 떨어져 있는 것을 생생하게 “보고” 감지할 수 있었다는 사실이 나를 명료하게 했다. 공간이라는 것은 영에게는 아무것도 아니구나! 이 개념에서 나의 새 의식은 하느님이 현존하신다는 것, 그분 자신이 영 자체(Spirit)이셔서 순간적으로 모든 곳에, 단 번에 어디에나 거주하실 수 있는 창조자이시다는 진리로 번쩍거렸다. 따라서 내 조그만 영도 나의 소경되고 귀먹은 장애를 초월해 대륙과 바다를 건너 그리스에 도달할 수 있었구나 하는 사실은 또 하나의 기뻐날뛰는 감동으로 나에게 돌진해 들어 왔다. 나는 내 한계점들을 몽땅 부수었다. 그리고 내 촉감 안에서 눈을 발견했다. 나는 현인들의 생각들-죽을 수밖에 없는 그들의 생명을 세세토록 살아남게 했던 생각들을 읽어낼 수 있었다. 동시에 그것을 나 자신의 일부로 소유할 수 있었다. 하느님, 환경 제약을 받지 않는 영 자체는 자연 속의 상해들인 사고나 고통, 파괴를 취소되게 하고 그분의 자녀들에게 연락을 취하려 하신다. 귀가 멀고 눈이 먼 것이 진짜 사건은 아니었다. 그런 장애들은 내 인생의 외곽 영역으로 좌천 당하고 말았다. 물론 이런 과정이 내 어린 시절의 마음과 더불어서 진행되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비록 어린 나이인지라 어렴풋했지만 나는 진짜 “나”, 즉 내적인 “나”가 도서관을 떠나 내가 원했던 장소를 정신적으로 방문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야말로 나는 행복했다. 이것은 나의 조그만 씨였고, 이 씨로부터 영적 주제들에 관한 내 관심은 자라갔다.
이 때 당시 나는 성경의 이야기들에 관한 것들은 온유한 나사렛 사람의 이야기 빼고는 관심이 없었다. 창조 이야기, 특별한 과일을 먹은 아담과 이브가 에덴에서 쫓겨남, 대 홍수와 분노와 주님의 앙갚음은 내가 읽었던 그맄-로마 신화들과 매우 비슷한 듯 나에게 비쳐졌다. 게다가 이런 신화들 안에도 내가 찬양을 보내고 싶은 신이나 여신은 그리 많지 않았다는 것 역시 성경과 유사한 듯 비쳐졌다.
나는 나의 착하신 아주머니(aunt)가 나에게 신성한 책으로 쥐어주었던 성경에서 빛나고 아름답고 온화한 얼굴을 지닌 존재의 모습을 내 심정 안에서 발견하지 못해 실망했었다. 그녀는 나에게 계시록의 이야기들을 말해 주었는데, 여전히 나는 내가 설명할 수 없는 공허감을 느꼈다. 도대체 나는 하느님과 용과 뿔달린 짐승 사이의 전쟁에서 무엇을 볼 수 있었을까? 불못에 던져져 영원히 고통받는 이들과 그리스도께서 사랑이시다고 하는 하느님을 어떻게 동시에 생각해 볼 수 있을까? 천국은 산이나 들판, 대양, 달콤한 열매가 많은 땅, 피곤해진 발들이 쉬는 곳, 이런 장려함이 있는 곳이라 생각되는데, 왜 계시록에 있는 하느님의 성은 금으로 포장된 길과 성벽을 보석으로 지었는지 너무나 이상했다. 이와 달리 슬픈 자를 위로하고 아픈 자를 고쳐주시고 눈먼 자에게 새 빛을 주시고 벙어리 입술이 열변을 토하게 하신 그리스도에 관한 감촉있는 이야기는 내 깊은 곳을 휘저었다; 그런데 어찌하여 내가 세 인물들, 즉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님을 예배할 수 있단 말인가? 세 인물을 인정하는 예배는 구약 시대라면 혹독한 처벌이 즉각 따른 거짓 예배의 한 종류가 아닌가?
위와 같이 성경에 대한 당혹감과 불만족이 내 마음을 점유하고 있을 즈음, 내 삶 안으로 쟌 힛즈(John Hitz)씨가 들어 왔다. 그는 내가 가장 사랑했던 친구들 중의 한 분이었다. 그는 워싱톤에서 스위스 총영사직을 맡고 있었다. 후에 그는 벨 박사가 전화를 발명한 이유로 수상한 볼타(Volta) 상금으로 벨 박사가 설립한 볼타의 국장이 되어 있었다. 이 사무국은 귀먹은 이들에게 정보를 수집해 나눠주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었고, 이 목적 실천의 일환으로 볼타 잡지(Volta Review)도 발행하고 있었다.
1893년, 나는 힛즈씨를 처음 만났는데, 그 때 내 나이는 13세 였던 것 같다. 이 때 나는 내 인생에서 가장 사랑 넘치고 아름다운 친구 관계가 시작되었다. 이것은 어쩌면 내 인생 속의 가장 귀중한 기억들로 자리 매김되고 있다. 그분은 내가 했던 모든 것, 즉 내 공부, 소녀적인 나의 즐거움, 나의 꿈, 대학에서의 나의 노력, 맹인을 위한 나의 일, 등등에 깊은 관심을 가져주었다. 그분은 내 선생님의 진가를 온전히 인정하시고 그녀의 일은 나를 향해서 뿐만 아니라 세상 모든 이에게도 중대한 일임을 인정해준 몇 안되는 사람 중의 한 분 이시기도 했다. 그분의 편지들은 내 선생님에 대한 애정과 선생님이 나에게 해준 것, 곧 이는 어두운 모든 장소에 드리운 빛이라고 이해하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그분은 보스톤(Boston)과 캠브릿지(Cambridge)에 있는 우리들을 자주 방문하셨다. 그리고 선생님과 내가 남쪽의 고향을 오고 갈 때는 와싱톤의 그에게 들려 머물었기에 우리의 여행은 늘 유쾌 했다.
내 선생님과 내가 매사츄세쓰 주의 렌샘(Wrentham)에 정착했을 때, 그분은 매 여름 우리들과 6주를 보냈는데, 이는 그분이 돌아가시기 전 해까지 이어졌었다. 그분은 이슬이 아직 풀과 나무에 놓여 있고 대기가 새들의 노래로 즐거워하는 이른 아침에 나를 데리고 산책하는 것을 사랑하셨다. 우리는 나무들과 상큼하여 냄새 좋은 초원을 시간 가는 줄 모른채 왔다 갔다 하였고, 때로는 렌샘의 그림같은 돌벽을 지나가기도 했다. 그때마다 그분은 나로 하여금 자연의 아름다움과 자연이 지닌 깊은 의미에 더 가까워지게 했다. 그분이 이야기 해줄 때 위대한 세상은 불멸의 영광 안에서 나를 위하여 번쩍였다. 그분은 자연에 대한 사랑에 나를 일깨워 주셨는데, 이 자연을 사랑함은 내 침묵에 음악으로, 내 어둠에 빛으로 아주 귀중한 나의 일부가 되었다. 이 글을 쓰면서도 내가 그분과 함께 즐겼던 고요 속의 빛나고 향기나는 순간들, 웃고 있는 개울들과 꽃들을 회상하면 너무나 달콤할 뿐이다. 매일 나는 그분의 눈을 통하여 새롭고 매혹적인 풍경을 바라보았는데, 그 풍경은 “절묘한 소낙비로 포장된” 상상 속의 영적인 아름다움이었다. 그분은 대화를 자주 멈추었는데, 그 이유는 내가 나무들이 흔들리며 기우는 것이나 꽃들의 구부림, 옥수수의 파도 물결 같이 흔들 거리는 것을 감지하려 했기 때문이다. 이 때 그분은 이렇게 말하곤 했다. “자연 안으로 이 모든 생명을 놓는 바람은 하느님의 영에 대한 놀라운 상징이다”
내 14번째 생일에 그분은 자기가 30년 이상 차고 다녔던 금시계를 나에게 선물하셨다. 나는 그 시계의 낡은 부품을 교체하려고 스위스에 보냈던 때 말고는 내 품을 떠나본 적이 없다. 이 시계에 관련해 기묘한 것은 이 시계는 애당초 맹인을 위해 만들어진 시계는 아니었다는 점이다. 이 시계는 한 때 독일 대사가 소유했었는데, 그는 자기가 아주 중요한 약속을 정확히 지키려고 이 시계를 다시 만들었다. 그는 카이서(Kaiser) 황제의 아주 높은 고관을 어쩔수 없이 방문해야 하는 일이 자주 있었다. 그런데 이 고관을 방문하여 그를 기다리되 시계를 쳐다본다거나 그렇다고 너무 오래 거기에 머무른다거나 하는 것은 그 고관의 입장에서는 예의에 어긋나는 행동이었다. 따라서 이 대사는 궁리 끝에 보석 세공인에게 가서 자기가 호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로 시간을 “감지”할 수 있도록 이 시계를 만들어 달라고 부탁했다. 그리하여 이 시계의 얼굴은 크리스탈(crystal)이고, 뒤쪽에 금 시계 바늘이 있는데, 이 바늘은 시계의 분침과 연결되어 있어, 뒤쪽의 바늘과 함께 서거나 가거나 한다. 그리고 시계의 둘레에는 시간을 말해주는 금 눈금들이 있었다. 나는 이 시계를 내 가슴 앞에 달고 있었다. 그리하여 이 시계는 내 친구 자신이 나를 위해 일하고 사랑해주듯 충실하게 나를 위해 째깍째깍 소리를 내주었다. 내 앞에 자기의 사랑을 간직하게 한 그분이 작고하신지 근 20년이 되었다. 그러나 시계의 째깍 소리는 나를 그분에게 더 가까이 데려다 주는 달콤한 의식을 늘 지니고 있다. 진실로 이 시계는 유한의 시간을 영원의 시간과 연결해놓는 값을 초월한 보물 아닌가!
힛즈씨와 나는 여러 해 동안 서신 왕래를 했었다. 그분은 나에게 자주 보낸 긴 편지들을 나 혼자 읽을 수 있도록 하려고 점자 철자법을 배우셨다. 이 편지들은 그분과 내가 영적 친척임을 보여주는 기록이다. 이 기록은 내가 그분의 손을 만져보고 싶을 때나 내 일로 고민하는 나에게 용기를 북돋아 주는 현자들의 말들에 갈급할 때 다시 읽게 해주어 나를 위로해준다. 나에 대한 그분의 첫 생각이자 마지막 생각은 어떻게 하면 내가 직면하는 장애물들을 줄여줄 수 있을까 였다. 그분이 재빠르게 지각하신 것은 내가 관심을 가진 주제들과 관련있는 책에 얼마나 굶주려 하고 있는가에 비해 내가 읽기 가능한 점자책은 대단히 제한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8년 동안 그분은 매일 일정한 시간을 내게 기쁨을 줄 것 같은 책들, 즉 이야기들, 위대한 사람의 전기들, 시집, 자연 연구, 그 무엇이든 타이핑하는데 바쳤다. “천국과 지옥”을 읽은 후 내가 스웨덴볽의 저술들에 관해 더 알고 싶다는 표현을 했을 때, 그분은 내 읽기가 촉진되도록 책들을 요약하고 편집도 하시는 등 수고를 많이 하셨다. 이 모든 것은 그가 볼타 국장직과 여러 허드레 업무를 마친 뒤의 여가를 틈내어 해주신 것이 아니던가! 그분은 편지에서, 그분이 나를 위하여 책을 베끼는 시간을 보낸 “아침 식사 전의 조용한 시간들”, 그리고 이 시간 “나의 사랑하는 헬렌과 마주 대하는 나의 기쁨”이라는 표현을 자주 쓰셨다. 많은 나의 친구들이 나를 위해 대단하게 일하여 주었다. 그러나 이런 일들도 힛즈씨가 그의 침묵의 여러 해들을 채워왔던 내적 햇빛과 평화를 나에게 나누어주려 한 지칠줄 모르는 노력들에는 비교할 바 못된다. 해가 더할수록 나는 그분에게 더 가까이 당겨져 갔고, 그분은 날들이 지날수록 더 꾸준하게 편지를 써주셨다. 그런데 큰 슬픔이 나에게 닥쳤다. 나는 내가 내 선생님 다음으로 가장 사랑했던 친구와 분리되어야 했다. 내가 고향의 어머니를 방문하고 랜샘으로 돌아가는 도중 평상 때와 같이 나는 와싱톤에 들렸고 힛즈씨는 나를 만나러 열차로 왔다. 그분은 나를 안고 기쁨이 가득한 채, 네가 도착하기를 기다리느라 얼마나 지루했었는지 모른다고 말하셨다. 그분은 나를 열차로부터 데리고 나가셨는데, 그 때 그분에게 갑자기 심장마비가 일어났고 돌아가시고 말았던 것이다. 임종 직전까지 그분은 내 손을 잡아주셨다. 그래서인지 나는 이 어두운 순간을 생각하면 언제나 그분의 맥박을 느낀다. 만일 내가 이 분이 참으로 죽었다고 생각했다면 이렇게도 친절하시고 온유하신 친구를 잃은 것을 참아내지 못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분의 고귀한 철학과 장차 오게되는 삶에 대한 확실성은 나로 하여금 비록 그분이 떠났어도 내가 꿈꾸는 어떤 것 보다 더 아름답고 더 행복한 세계에서 우리는 다시 만나고야 말리라는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가지고 버티게 해주었다. 매우 드문 그분의 인물됨에 관한 기억은 언제나 나를 도우며 나와 더불어 있다.
그분은 고결한 인격과 나누어줄 영적 선물까지 지닌 분이셨다. 그분의 심정은 순수하고 따뜻했으며 그의 동료를 향하여 최선을 강구하는 어린아이 같은 신앙으로 가득 찬 그런 분이셨다. 그래서 타인을 위하여서는 사랑스럽고 아껴주려는 어떤 배려함에서 언제나 행동하셨다. 그의 매사는 “네 몸 처럼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에 기초되어 있었다. 80세의 연세인데 그분은 언제나 푸른 상태의 심정을 지니셨고, 즐거움으로부터 있는 그의 무진장한 힘은 그를 여느 보통의 인간성을 훨씬 넘게 들어 올려주었다. 그는 젊은이들과 더불어서는 젊은이였다. 그분은 나에게 나이 많은 사람이 결코 아니었다. 나는 그분에게 눈멀고 귀먹은 사람이 아니었다. 그분은 자기 손가락 위에서 간신히 철자를 말했다. 그리고 그가 알아 듣는 것이 아주 힘들 때, 나는 내 불완전한 말솜씨의 문장을 여섯 번씩 반복해 말할 경우도 있었지만 끝내 들어주셨다. 우리의 사랑들은 이런 어려움들을 다 덮어 주었다. 그리고 우리의 교제는 노력의 댓가 그 이상의 값어치가 있었다.
우리가 이런저런 이야기 꽃을 피웠을 때, 힛즈씨가 감지한 것은 문학에 대한 나의 배고픔이었다. 그분은 내가 특별히 흥미를 갖는 주제들을 읽을 수 있도록 하여 주었다. 그분 자신도 귀가 안 들리는 상태에서 성장했기에 그의 성장 배경은 감각 세계에 관한 나의 비뚤어진 사고방식을 빨리 감지할 수 있게 해주었다. 그분은 나에게 말했다. 만일 내가 시각과 청각을 지닌 이들의 자리에, 그리고 사물로부터 그들이 받는 종교적 감명의 자리에 나 자신을 놓으려 노력한다면 그들의 감각은 나의 것과 하나로 연합할 것인 바, 바깥 세계에 관한 나의 즐거움은 경이롭게 증가할 것이라고 했다. 그분은 나에게 어떻게 내가 그들의 생활을 이해하는 열쇠를 발견할 수 있는지와 또 그들이 이해심을 가지고 나 자신을 조사할 수 있는 기회를 줄 수 있는가를 말해주기도 했다. 그분은 내 손에 점자로 된 스웨덴볽의 “천국과 지옥” 사본을 놓아 주셨다. 그리고 내가 처음에는 이 책의 많은 부분을 이해못하리라는 것도 자기는 알고 있다고 말하셨다. 그러나 이 독서는 내 마음을 위한 좋은 연습이 될 것이고, 내 마음에 계신 대단히 사랑하는 하느님의 모습으로 나를 만족시켜 줄 것이라고도 말해주었다. 그분은 나에게 이해가 어려운 책을 읽을 때는 그 책에서 무엇이 진리이냐 보다는 무엇이 선이냐를 찾는 것이 더 낫다는 것을 언제나 상기하라고 말해 주었다. 그 이유는 스웨덴볽도 말했다. 즉 “선은 빛을 주는 작은 불꽃 같은 바, 선은 인간으로 보게하고 지각하게 하고 그리고 믿게 한다.”
내가 “천국과 지옥”을 읽기 시작했을 때, 나는 과거 내 선생님을 기다리면서 광장 계단에 있던 수년 동안 가져보았던 기쁨같이 내 삶 안으로 오고 있는 새로운 기쁨을 거의 눈치채지 못하였다. 독서를 사랑하는 어린 소녀가 호기심 만의 충동으로 무슨 책이나 마구 읽듯, 나는 이 큰 책을 열었는데, 보라 내 손가락들은 어둠을 지닌 눈먼 여인이 스웨덴볽의 저술 속의 아름다운 진리들로 계몽되었다는 서문의 한 문단 위에 불을 켰다. 그녀가 믿고 있는 바, 이 책은 잃어버린 지상의 빛 보다 더 많은 빛을 자기 마음에 나누어 주었다는 것이다. 그녀가 결단코 의심치 않은 것은 물질적 몸 안에 완전한 감각들을 지닌 영체가 있다는 것, 그리고 어두운 얼마의 햇수가 지나면 자기 눈 안의 눈은 더 경이롭고, 완전하여 이 세계 보다 더 만족을 주는 세계에로 무한하게 열린다는 것이다. 나의 심장은 기쁨으로 마구 뛰었다. 바로 이 책에 내가 그토록 날카롭게 느꼈던 것을 강조하는 신앙이 있었다. 즉 영혼과 육체는 분리된다는 것, 전체로서 내가 그려보았던 실체는 한계있는 내 신체의 감각들이 매 번 만났던 불합리한 우발 사건과 미완성적인 것들의 혼돈과 분리된다는 것이다. 이리하여 나는 내 자신으로 건강하고 행복한 젊은 의지로서 가도록 내버려 두었다. 그리고 스웨덴(sweden)의 현자의 무게있는 생각들과 긴 단어들을 꿰맞추어 내려 노력했다. 여하튼 나는 한 분, 유일하신 분으로 내가 사랑했던 그분의 모습을 감지했다. 그리고 나는 더 이해하기를 원했다. 사랑과 지혜라는 단어가 내 손가락들을 이 문단으로부터 저 문단으로 어루만져가게 하여 주는 것 같았다. 더불어 이 단어들은 나의 나태한 본성을 자극하여 더욱 앞으로 나아가라고 종용하는 새 동력이 내 안에서 방출되게 했다. 나는 줄곳 책을 앞뒤로 오가면서 여기서 한 줄, 저기서 한 줄 하는 식으로 뽑아내어 “교훈에 교훈을” 보태면서 글자적 서술의 구름들에 감추여 있는 신성한 말씀 속의 또 다른 것을 한 웅큼 쥐기도 했다. 나는 내가 읽은 것의 의미를 깨달았을 때, 내 영혼이 팽창되는듯 여겨졌고 나를 괴롭혔던 고민거리 한가운데에서 확신을 얻게 했다. 그 책의 다른 세계에 관한 묘사들은 나를 먼 곳, 측량 불가능한 먼 영역, 초인적인 아름다움과 경이함으로 가득채워진 곳으로 데려갔다. 이 곳에서는 천사들의 도포가 빛나고 있다. 이 곳은 위대한 생명들과 창의적 마음들이 가장 어두운 환경에 광채를 던지는 곳이다. 이 곳은 별난 대사건들과 내노라 하는 큰 전투들이 끊임없이 청소되는 곳이다. 이 곳은 하느님의 미소를 수단으로 밤이 영원의 낮으로 불 밝히는 곳이다. 이런 영혼의 분위기에 앉아서 고상한 남녀가 위풍있는 행렬로 지나가는 것을 지켜볼 때 내 마음은 통째로 빨갛게 탔다. 그 이유가 처음으로 불멸함이 나를 위해 알기 쉬움이라는 옷을 걸쳤고, 땅은 사랑스러움과 의미 있음이라는 새로운 곡선을 그렸기 때문이다. 나는 하느님의 도성이 유리 길이나 사파이어 벽 등등으로 된 시시한 것이 아니라, 도움을 주는 생각들과 고귀한 감화력 등 슬기로움의 체계적인 보물 창고임을 발견하고 무척 기뻤다. 나는 성경을 과거 나를 괴롭게 한 책이라 여겼으나 이제는 귀중한 진리들을 파내기 위한 도구로서, 즉 내 영의 지고한 명령을 위해서라면 내 불완전하고 머뭇거리는 육체를 사용할 수 있듯이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을 보게 되었다.
편협된 생각을 지닌 누군가가 기독인들이 아니면 처벌되어진다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 당연히 내 영혼은 불쾌했는데, 그 이유는 나는 진리를 위해 살다가 죽은 경이로운 사람들은 이교도 땅에도 많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책 “천국과 지옥”에서 “예수”는 신성한 선을 뜻하고, 선은 행위에 삽입되어 있다는 것, 그리고 “그리스도”는 신성한 진리를 뜻하고 이 진리는 인간의 지성 안으로 새로운 생각, 새로운 생명과 기쁨을 내보낸다는 것을 찾아냈다; 그러므로 하느님을 믿고 올바르게 사는 사람은 정죄되는 일이 결코 없다. 이런 개념 속에서 나는 성년의 여성이 되었다. 그리하여 칸래드(Conrad)가 까닭도 모르게 자기가 선택할 언어를 영어에서 발견해갔 듯, 나도 모르게 새 교회 교리들을 내 종교로서 하나하나 더 받아들였다. 이 교리를 선택해감에서 나에게 용기를 돋구어준 사람은 없다. 그리고 나는 이 교리를 설명할 수 있는 누군가 보다 더 설명을 잘 해낼 자신도 없다. 내가 오로지 말할 수 있는 것은 (스웨덴볽을 통한) 하느님의 말씀은 미개한 신조들의 얼룩과 더러움에서 (내 영혼을) 자유하게 했고, 즉시 그 말씀은 내 인생의 선과 환희가 되었다는 것, 더구나 내 선생님의 일에 대한 나의 증대하는 진가와 섬김을 위한 내 자신의 책임감, 투쟁과 외로움의 시간들, 아주 깊은 환희의 시간들, 정면으로 마주쳤던 거친 진리들, 쉽고 안심됨이라는 유쾌할듯한 미끼를 무는 것보다는 높은 꿈들을 더 귀중히 여겨 붙드는 것, 이런 등등과 경이롭게
연결되고 있지 않는가! 이런 진리들은 마치 빛과 색깔, 음악이 눈과 귀에 밀접하게 관련있듯 내 정신 기능에 그러하였다. 이 진리들은 더 충만된 감각-생활을 탐낼 듯 갈망한 나 자신을 내 안의 완전한 존재를 생생하게 의식하도록 들어 올렸다. 날마다 가능함으로 가득한 두 손이 나에게 오고 있다. 그리고 이 짧은 과정에서 나는 내 존재함 속의 모든 참인 것과 실재인 것, 축복이 자라나는 것, 행동에 따른 뿌듯함, 아름다운 영을 식별해 내고 있다.

III

타인이 증언하는 스웨덴볽

누군가가 나를 두고 이런 말을 할런지 모른다. “그녀는 눈멀고 귀먹었는 바, 작은 집단에 갇혀진 의견이나 독단적 주장 내지 정치적 이상향을 지닌 이들에게 쉽게 속아 넘어 갈 것이다.” 어쨌든 세상에 발표되자 세상을 놀라게 한 스웨덴볽의 주장들을 생각하기 앞서, 나는 독자들 앞에 스웨덴볽의 저술들에 관심을 많이 가졌던 잘 알려진 문인들을 소개하고 싶다. 물론 이들 대부분은 스웨덴볽의 종교적 가르침들을 소중히 비축한 교회와는 관계를 맺고 있지 않은 줄로 안다.
우선 에머슨(Emerson)이 그가 뽑아 내세운 “대표적인 사람들” 중의 한 사람으로 스웨덴볽을 선택했다는 것을 기억해보아야 할 것 같다. 이렇게 그는 말한다:
“이 사람은 동 시대 사람들에게는 선견자요 달빛으로부터의 만병통치약으로 비쳐졌으나, 그 당시 세상에 있는 여느 사람보다 참다운 진짜 인생을 엮어 갔다는 것은 의심할 바 없다…거대한 영혼을 지닌 그는 그 시대에는 아주 먼 해외에 살고 있는듯 해서 그의 주변 사람들은 그를 파악하지 못했다. 따라서 멀리 앞선 그를 보려면 먼거리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필요하다.” 이 대단한 에머슨도 스웨덴볽이 말하는 지옥이나 성경의 상징성을 이해할 눈은 가지지 않았던 것 같다는 것을 여기에 덧붙이고 지나가고 싶다.
토마스 칼라일(Thomas Carlyle)은 빈틈없는 스코트(Scot) 사람이어서 쉽게 남의 말에 이끌려가지 않았는데, 이것은 스웨덴볽에 대한 그의 평가이다:
“논란의 여지가 없는 위대한 교양을 갖춘 사람, 그는 강하고 수학적 재능을 지닌 사람, 그리고 아주 경건하고, 마음이 천사의 마음으로 바뀐 사람; 아름다워 사랑해야 할 사람, 그리고 나에게는 비극적인 사람…여느 누구의 저술에 있는 진리보다 더 많은 진리가 그의 저술에 있다…마음의 실체 안에서 가장 고상한 마음을 지닌 이들 중의 한 사람…세월이 가면 갈수록 더욱 빛을 비추는 영적 태양들 중의 한 사람.”
알버트 후바드(Albert Hubbard)가 스웨덴볽과 세잌스피어를 비교해 말한 대목은 특별한 흥미를 더해 준다. 그는 아주 딴판의 정신적 관점에서 이 주제에 접근하고 있다:
“그들 둘 다 타이탄(Titan)이다. 이런 거인 앞에서는 소인들은 시들어져지고 훅 불면 금방 날려질 것이다. 스웨덴볽은 영웅적 금형(틀)에 부어만든 사람이다. 그래서 역사가 시작된 이래 이 사람 만큼 자신을 아주 많은 자연 과학물로 에워싸게 했던 사람은 없는 것 같다. 게다가 이렇게 많은 과학적 배경을 등에 지고 구름들 안으로 대담무쌍하게 항해한 사람도 없다. 통상 아주 높은 차원에 날아 오른 사람, 또는 또 다른 세계를 아주 많이 안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의 경우 자연 과학에는 무지한 때가 많은데, 그는 이 대목에서 절대 예외이다. 아마 그 당시 스웨덴볽과 견줄 과학자는 없었을 것이다. 더구나 천국 왕국의 지도를 아주 세세하게 만들어 준 사람은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아무도 없었다.”
“세잌스피어(Shakespeare)의 발은 지상을 떠나 본 적이 진짜로 없었다. ‘템페스트(The Tempest)’에서 있은 그의 (수학)여행은 붙잡은 벌룬(balloon, 기구) 안에서 일 뿐이었다. 그가 획득한 아리엘(Ariel)과 카리반(Caliban)은 옛 우화 책으로부터 였다.”
“세잌스피어는 물리학을 거의 몰랐다; 경제학과 사회학이 그를 괴롭힌 적도 없었다; 그는 라탄어를 조금 알았고 그나마 그맄어는 덜 알았다; 그는 먼 여행을 다녀보지 않았다, 그리고 암석들의 역사는 그에게는 백지 상태였다.”
“스웨덴볽은 많은 방법들에서 다윈을 앞질렀다; 그는 고전어를 알았고 근대어도 대부분 알았다; 그는 많은 곳을 여행했다; 그는 실용적인 경제 전문가였다. 그리고 그 시대 최고의 사회 공학자였다.”
헨리 제임스(Henry James)가 말했다: “에마뉴엘 스웨덴볽은 이 시대에 알려진 최고의 분별력에 아주 광범위한 분야에서 지능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리고 헨리 워드 비쳐(Henry Ward Beecher)는 아주 딱 자르듯 이렇게 주창하였다; “스웨덴볽의 저술을 읽지 않았다면 19세기 신학을 안다고 말할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다.”
스웨덴볽의 가르침들에 의해 감명을 받은 이들이 남긴 흥미 있는 증거들 중 몇 개 더 살펴보자. 그것들 중에, 아름다운 영혼과 우미한 시적 감각을 지녀 어디서나 칭송을 불러낸 여인 엘리자베스 바렡 브라우닝(Elizabeth Barrett Browning)의 증거이다. “나는 내 마음으로 다른 세계에 시선을 보내게 해준 단 하나의 빛을 스웨덴볽의 철학에서 발견하였다. 이 철학은 내가 납득할 수 없었던 많은 것을 설명하고 있다,”
대영 백과 사전이 “가장 괄목할만한 시인들과 사상가들 중의 한 사람”으로 등기한 사무엘 테이러 콜릿지(Samuel Taylor Coleridge)는 자기가 받은 이런 찬사를 누군가에 의해 미친 사람이라 성급히 불리운 사람에게 이렇게 돌리고 있다.
“내가 단연코 주장하고 싶은 것은 스웨덴볽은 도덕주의자로서 모든 찬사를 받아야 한다; 그리고 자연주의자로서, 심리학자로서, 신학자로서 그는 감사와 감탄을 자아내는 전문적이고 철학적인 능력 위에 강력하고 다양한 주장을 한 사람이다….만일 오늘날의 학식 있는 선생들이 그와 같은 열정을 선물받았다고 하면 우리는 아마 세 배 이상 더 행복해졌을지 모른다.”
위와 같이 출중한 사람들에 의한 평가는 천재 스웨덴볽이 소유했던 개성과 위풍당당함에 관한 어떤 생각을 만들어 보는데 도움이 되었을 줄로 안다. 그분에 관한 내 자신의 판단에 있을런지 모르는 어떤 결함은 내 신체적 한계들로 인해 발생된 것이 아님은 분명하다. 자신이 학자이다는 이들과 영적 선물을 존중하는 다른 사람들이 판단하건대, 그는 놀라우리만큼 잘 훈련된 지성, 에머슨이 지적한 바, “천문학상의 정밀함을 가지고 일하는” 지성을 가졌었다는 것이다. 만일 그가 무식한 사람이었다면, 제아무리 그의 체험이 경이롭다해도, 그의 주장이 제아무리 믿을만했다 해도, 그는 합법적인 질문 공세라는 인정 사정 없는 포열 사격 앞에 발도 디디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자기 시대를 훨씬 앞서간 학자이다. 그는 예술과 과학을 전공했다. 그는 바위의 조그만 이끼로부터 대단히 복잡한 뇌의 구조까지 자연의 경이로운 것을 많은 책으로 펴냈다. 그러면서도 그는 자기 홀로만 올라가야 했던 아득히 높은 학문의 경지에서도 훌륭한 균형을 언제나 유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남들 같이 대담함, 조용함, 침착함을 지니고, 영계의 깊음과 심연을 건너는 길들을 걸으려면 위험을 무릅써야 함을 감지하면서, 마음과 물질, 영원과 시간, 하느님과 인간 사이에 있는 미묘한 연결들, 그럼에도 끊어질 수 없는 연결 고리를 겁내지 않는 권위로 밝히 알려주었다.
내 친한 친구들 중 세 명은 그분에 관해 말했었다. 그들은 이것을 정신 이상이나 편협한 열광자 입장에서 말했던 것은 아니다. 나는 에드워드 에버렡 해일(Edward Everett Hale) 박사를 아주 오랫동안 알고 지내 왔다. 그분은 만사에서 흥미를 새롭게 하고 주제가 다양해도 이를 깊이 숙고하셨는 바, 나는 이를 언제나 감탄했다. 아래는 그분이 판단한 스웨덴볽이다.
“스웨덴볼지언이즘(Swedenborgianism)은 지난 세기에 자유를 선물하는 일을 완성되게 했다. 스웨덴볽이 시작한 파도와 같은 이 움직임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그의 종교에 관한 책들 속의 서술은 신학에 혁명을 가져왔다.”
비숍 브룩스(Bishop Brooks)를 사랑했던 많은 이들과 마찬가지로, 나도 그의 공식 강연이 얼마나 무게있고 의미심장한지를 실감한다. 스웨덴볽에 관한 그의 견해는 확실히 심사숙고 해 볼만 하다.
“나는 에마뉴엘 스웨덴볽의 인격과 업적에 최고로 심오한 경의를 표한다…나는 줄곳 그의 저서들로부터 많은 것을 얻어 왔다. 아주 큰 주제를 짧은 몇 마디로 말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렇다, 진짜 의미에서 보면 우리 모두는 새 빛과 새 희망을 가지고, 그리스도 안에 계신 하느님과 새로운 교제를 하는 새 교회인(New Churchmen)이다”
친애하는 신비적인 시인 윗티어(Whittier)는 이렇게 말했다. “미래 삶에 바탕을 둔 장대하고 아름다운 생각이 스웨덴볽의 책 안에 있다.”
스웨덴볽을 평가해 볼 또다른 방법으로는 그를 세상의 여타 위대한 지도자들과 비교해 보는 것이다. 고대 시대로부터 흘러온 이런 이야기 하나가 있다. 어떤 왕이 피로에 지치고 낙담한 채 회의실을 떠났다. 그는 화가 이리프(Iliff)를 불러서 이렇게 명령했다: “나에게 이런 참된 사람의 그림, 즉 은혜스럽고 슬기 있으며, 영웅들의 힘과 여인들의 아름다움을 갖춘 사람을 그려라. 그리고 그 그림을 나의 가장 깊은 방에 걸어 둘 것이다. 그리하여 내가 피곤해 그 방에서 쉴 때 그 그림은 내 영혼을 성스러운 불을 지니고 웅대함과 따뜻함으로 채울 것이다.” 이 그림은 그려져서 궁전 홀(hall)에 걸렸다. 그는 이 그림을 황홀한 기쁨 속에서 응시했는데, 돌연 그 그림은 자기를 당황하게 했고, 곧 이어 그는 당황해진 이유를 알았다. 이 그림의 외형은 각각 모두의 분야에서 완전한 가장 품위 있는 자기의 신하의 것이었지 않는가! 그 자세는 자기를 위하여 잔을 채운 겸손히 시중드는 신하의 것이었다; 그 이마는 거룩한 환상 속의 성직자의 이마였다; 그 눈은 자기의 피곤해진 영을 노래로 황홀케 하는 방랑의 음유 시인의 것이었다. 그 미소는 아주 달콤하고 변함 없는 자기 아내의 것이었다. 그러므로 이 그림은 각각 모두의 사람들의 매력들로 아름답게 꾸며졌다. 고로 그 그림 속의 모든 이는 새로운 빛 안에서 영광 받은 셈이다. 이렇게 스웨덴볽의 그림도 많은 위대한 사람들의 생애로부터의 고상함의 빛을 그림 자체 안에 모아 놓은듯 여겨진다. 그 그림 안에 들어와진 사람들 또한 스웨덴볽과의 비교에서 새로운 의미심장함을 획득하고 있다. 과학, 문학, 철학에서, 자기가 처음의 광선을 붙잡은 새 날을 선포하면서 산 정상 위에서 선구자 처럼 서 있는 이들이 있다. 자기들 나라를 잔인한 멍에로부터 해방되게 한 애국자, 또는 백성들을 더 참다운 자유 쪽으로 이끈 사람도 있다. 땅의 보물들을 수색하고 빛과 열의 새로운 창고들을 발견한 사람도 있다; 셀 수 없는 별들과 먼 거리의 혹성들을 설명해준 사람도 있다. 많은 바다들을 항해하고 발견하되 북서쪽 항로가 아니고 오히려 아메리카를 발견한 사람도 있다. 마지막으로 종교에서 모범이 됨과 교훈을 수단으로 수백 만 명을 가르친 지도자도 있었다. 그들은 우상을 부수었고 미신과 위선으로부터 교회와 성전을 일깨웠다. 웨슬레(Wesley) 같은 사람은 물질적인 시대의 차가움 안으로 사랑을 쏟아부었다.
위와 같이 우리가 스웨덴볽을 잘 생각해 볼 때, 이 위대한 인물의 모습에 이어 저 위대한 인물의 품새가 연이어 나타난다. 미켈란젤로(Michael Angelo)는 돌에서 천사를 보고 자기가 그 환상을 붙잡을 때까지 많은 날카로운 칼자국으로 새겼다. 이에 비해 스웨덴볽의 내적 눈들은 살아 있는 천사들을 바라보도록 아예 열려졌다. 그리고 하느님의 말씀의 글자적 진리들의 범주를 넘어 말씀이라는 돌들에 그는 사랑의 천국 메시지를 새겨 하느님의 자녀들을 도왔다.
우리가 베토벤, 모차르트, 와그너를 생각할 경우 스웨덴볽의 초상화에 주어지는 또 다른 감촉도 있다. 이들은 인간의 가슴을 하늘로 높게 올리는 하모니들을 세상에 쏟았던 사람들이다. 그 반면 스웨덴볽은 우주에 있는 신성한 하모니를 지각했다. 그래서 자기는 천사 집단이 노래한 아주 감미로운 음악을 실지로 들었다고 말했다.
우리는 어린 시절 때부터 나폴레온, 웰링톤, 와싱톤 그리고 그랜트 등등의 인격, 그리고 패배의 두려움이 가득했던 전투를 승리로 이끈 그들의 이야기들에 친숙해 있다. 그러나 스웨덴볽의 몫은 영계에서의 선과 악의 세력 다툼을 증거하는 것이다; 그는 천국의 무기인 말씀 속의 진리들과 지상의 검인 자연에 관한 진리들로 무장했던 바, 그는 20세기 순수 기독교 신앙의 참피온이다.
러시아의 알렉산더 1세는 농노들에게 자유를 주었고, 미국의 링컨은 노예제도를 폐지했다. 종교의 성전 넘어에 “이제 믿음의 신비에 지적으로 들어가는 것이 허용되어졌다”라고 쓰인 것을 스웨덴볽은 보았다. 그는 인류에게 그들의 지성을 자유하게 하는 영적 철학을 주었고, 교회의 독재 권력을 뒤집었다.
아가시즈(Agassiz)가 동물학과 고생물학에서, 칼 막스(Karl Marx)가 경제학에서, 다윈(Darwin)이 진화론에서 했던 것을 스웨덴볽은 종교에서 했다. 부피가 큰 논쟁과 우레치는 증오를 가지고 그는 염세 사상과 정죄와 불성실한 대륙의 문학을 짓부수어 심연으로 내려보냈다.
아리스톨(Aristotle), 플라토(plato), 후렌시스 베이컨(Fransis Beacon), 칸트(Kant)는 모든 사물들의 원인을 오랫동안 그리고 인내함으로 찾아나선 찬란히 빛나는 철학자들이었다. 우리의 선견자는 “스웨덴의 아리스톨”이라 불렸을 뿐아니라 그는 29년 동안 원인의 참 세계에 의식 있는 채 들어가도록 허용되었고 그 빛에서 살았다고 선포했다.
콜럼버스의 불굴의 신념은 새 대륙의 발견으로 실감되어졌고, 코테즈(Cortez)는 그의 눈 앞에 광대한 태평양이 보이는 다리엔(Darien)의 정상에 섰다. 지금 우리 앞에는 발견되지 않은 여행하고, 자기 귀로 그 나라의 언어를 들었고, 그곳의 거주민들과 대화를 했고, 그곳의 생활과 기후와 문명을 우리의 세상에 서술해준 탐험가가 있다. 그의 탐험에 대한 예를 들면 이러한 바, 그는 “천국과 지옥”에 다음과 같이 썼다:
“사후 인간의 행동들이 당사자에게 나타내질 때, 수색 작업을 담당하는 천사가 그의 얼굴을 들여다 보고, 그 수색은 온 몸, 즉 각 손의 손가락을 시작으로 전체적으로 더듬는 바, 온 몸의 수색으로 확대되어진다. 나는 이렇게 하는 이유에 궁금했었는데, 그 이유를 나로 알게 해주었다. 즉 생각과 의지 속의 모든 것은 뇌에 새겨진다는 것, 그 이유가 생각과 의지의 시작이 뇌였기 때문이다는 것, 이와 꼭같이 그것들은 온 몸에도 새겨진다는 것이다; 생각과 의지 속의 모든 것들은 그것들의 시작으로부터 저쪽으로 넓혀가는데 그 종결 지점은 온 몸이 된다는 것이다….이것들로부터 말씀에서 말하는 인간 생명의 책이 의미하는 것도 명백해질 것이다. 즉 인간이 생각했고 행동하였던 것은 몸 전체에 새겨진다는 뜻이다. 따라서 그것들이 기억으로부터 불려내질 때, 그것들은 마치 책을 읽듯 되어지고, 영이 천국의 빛에서 보여질 경우 마치 지상의 눈에 나타나는 듯 된다는 것이다.”
아이삭 뉴톤(Issac Newton)은 감정이 순수하고 경건하기로는 스웨덴볽을 닮았는 바, 그는 물질계에 인력의 법칙을 보도록 영감되어졌다. 스웨덴볽은 자연계에 인력의 법칙이 있듯이 영계에서는 사랑이 이와 상응하는 끌어당기는 법칙임을 지각했다. 그리고 그는 태양 같은 실지로 사랑을 방사하는 근원이 모든 영혼에 생명을 주고 모든 피조물을 아름답게 하는 것을 바라보았다고 증언했다. 그의 “하느님의 사랑과 지혜”라는 책으로부터 그가 내적 실체라 부르는 법칙과 사실들을 예증했는데 아래에 한, 두 문단을 인용해본다.
“자연계의 태양 외에 다른 태양이 있다는 것은 지금까지 알려지지 아니했다. 그 이유는 인간의 영적인 것이 인간의 자연적인 것으로 너무 많이 변해 버렸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간은 무엇이 영적인지 모르게 된 것이다. 그 결과 영계가 있다는 것, 그 안에 영들과 천사들이 있다는 것, 영계는 자연계와 다른 세계이다는 것을 모른다. 영계가 자연계에 있는 이들로부터 아주 깊숙이 감추여져 왔는 바, 주님께서는 내 영의 시야가 열리는 것을 기뻐하셨다. 그 이유는 내가 자연계에서 보듯 영계에 있는 것들을 보게 하시어 차후 나로 그 세계를 상술하게 하려는 그분의 목적 때문에서 였다. 이 작업은 ”천국과 지옥“이라는 책에서 있게 되었는데, 나는 그 책의 한 단원을 영계의 태양에 관한 것에 할애했다. 그 이유가 그 태양이 나에게 보여졌기 때문이다. 그 태양은 자연계의 것과 크기가 같았고 맹렬히 불타는 것 역시 같았다. 그러나 더 붉게 이글거렸다. 그리고 천사들의 천국 전체가 이 태양 아래 있는 것이 나에게 보여졌다; 삼층 천국의 천사들은 이 태양을 언제나 보고 있고, 이층 천국의 천사들은 이 태양을 자주 보고, 첫 번째, 또는 가장 아래쪽 천국의 천사들은 가끔씩 이 태양을 보고 있었다.”
“사랑과 불이 서로 상응하기 때문에 천사들은 자기들의 눈으로 사랑을 볼 수 없다. 사랑 대신 사랑에 상응하는 것들을 본다. 그 이유가 천사들은 인간과 마찬가지로 내적인 것과 외적인 것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의 내적인 것은 생각하고, 사려분별하고, 사랑한다. 그리고 그들의 외적인 것은 느끼고, 보고, 말하고, 그리고 행동한다; 그리고 그들의 모든 외적인 것들은 내적인 것들에 상응한다. 그러나 이 상응은 영적인 상응이지 자연적 상응은 아니다. 신성한 사랑 역시 영적인 존재들에 의해 불 같이 느껴진다; 그러므로 말씀에서 불이 언급될 경우 그것은 사랑을 의미하고 있다. 이스라엘 교회의 거룩한 불은 이 의미를 가졌다; 이 교회에서 하느님에게 기도할 때 관습적으로 천국의 불을 간구하였는데, 이는 신성한 사랑이 심정에서 불켜지기를 소망함이다.”
“인간은 그의 생각 속에서 자연계의 순수한 것 또는 자연계의 내면인 것 보다 더 깊은 것을 꿰뚫어 보려 하지 않았다; 이런 이유로 많은 사람들은 천사들과 영들의 거주지가 에테르(ether)에 있거나 별들에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므로 그들의 거처는 자연의 밖이나 그 넘어가 아닌 자연 안에 있었다; 허나 천사나 영들은 완전히 자연의 밖 내지 그 넘어에 있고, 그들의 세계는 또 다른 태양 아래 있다. 그리고 이 세계에서 공간은 출현(appearance)이므로 그들이 에테르에 있다거나 별들에 있다고 말해질 수 없다; 그런 이유가 그들은 사람과 더불어 있고 자기 영 속의 애착과 생각에 결합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인간은 하나의 영이고 이 영으로부터 인간은 생각하고 뜻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영계는 인간이 있는 곳일 뿐 인간으로부터 떨어진 곳이 전혀 아니다. 한마디로 모든 사람 각자의 내면들에 국한시켜 본다면 그는 이 세계 안에, 그곳 천사들과 영들의 한가운데에 있다; 그리고 영계의 빛으로부터 생각하고, 영계의 열로부터 사랑한다.”
“천사들에게 빛과 열을 주는 태양은 천사들이 거주하는 토지 넘어 중간 고도인 약 45도 정도 각도의 높이에서 나타나고 있다; 또한 세상의 태양이 인간으로부터 멀리 있듯, 그곳의 태양도 천사들로부터 먼데서 나타난다. 태양이 이 고도와 이 거리에서 언제나 나타나지만 그것은 움직이지 않는다. 그런고로 천사들에게는 날과 해로 나뉘어진 시간이 없다. 따라서 아침으로부터 정오를 통과하여 저녁으로 그리고 밤으로 들어가는 하루의 진행이 없다; 또한 봄으로부터 여름을 통하여 가을로 그리고 겨울 안으로 가는 일 년의 진행도 없다. 오로지 영구적인 빛과 영구적인 봄이 있다.”
끝으로 세상의 삶에 대한 사상에서 스웨덴볽의 위치가 어디인지에 대한 생각을 해보고, 인류 속의 종교적 선생들을 상기해보면 도움이 우리에게 될 것 같다. 석가는 동양 사람 앞에서 모범을 비춘 자기의 품위 있는 인생을 살았다. 공자는 교훈을 수단으로 가르쳤다. 모하멭은 우상숭배에 빠진 토지에 불과 칼을 가지고 한분 하느님에 대한 자기 메시지를 운반했다. 스웨덴볽은 무지, 짐승 같은 무력, 그리고 종교를 압제의 수단으로 사용하는 이들의 속임수로부터 유일하게 종교를 보호할 수 있는 합리적 진리들-건전하고 명민한 신앙을 나누어주려 노력했다. 진지하고 열렬한 측면은 위 모두의 지도자들에게 공통점일 수 있으나 그들 모두는 과학 지식을, 인간의 동기들에 관한 지각을, 그리고 사회를 인간의 마음과 육체에 족쇄를 채움으로부터 예방할 수 있는 전투적 진리들을 소유하지 않았다.
마틴 루터(Martin Luther)는 미신적 관행에 항의를 했다. 그리고 개혁이 시작되었다. 웨스레(Wesley)는 형식에 억매인 영국 교회의 틀을 깨뜨렸다. 그리고 그의 추종자들의 열렬한 봉사는 전 세계에서 이뤄지고 있다. 그러나 근본적 가르침들 속의 많은 부분들이 (옛것 그대로) 남아 있다. 나는 수 년 전에 캐토릭 교회의 훌륭한 옹호자 카디날 뉴맨(Cardinal Newman)의 “변증론”을 주의깊게 읽었었는데, 그는 거기에 모든 신교도들에 의해 정면으로 반박되고야 말 불일치한 것을 적나나하게 적어 놓았다. 스웨덴볽은 기독교계의 모든 교파들에게 새로운 진리들을 풍부하게 가져다 주었다. 그는 새 처방(new dispensation)의 선구자였다. 이 점에 대해서라면 로마 캐토릭의 신학자요 교수인 요한 요셉 본 고레스(Johann Joseph von Gorres)의 논평을 읽어두는 것도 보람있는 일이다:
“스웨덴볽의 많은 저서를 망라해 모든 것은 단순하고 일관성 있게 나타난다. 특히 그가 쓴 필치의 어조에 관련해서 그러하다. 이 어조 안에는 가상적 능력들을 나열하려 애쓴 흔적이 없고, 과도한 표현도 없고, 몽상적인 것도 없다…과학을 계발해감에서, 심정의 진지함과 단순함은 지속적인 성공을 달성하는데 필요한 요구 사항이다. 우리는 명성 높은 많은 사람들을 타락으로 빠지고야 말게 하는 자만심 같은 것을 그에게서는 관찰할 수 없다; 그는 언제나 잘 통솔되고 온건해진 마음을 간직해왔다; 그리고 성공적이든 또는 어떤 심각함에 의해서이든 언제나 자기의 정신적 균형을 잃지 않았다.”
스웨덴볽의 주장들에 관련해 독자들이 어떤 견해를 만들어 보든지 간에, 한 가지 명확한 것은 그의 경험이 특이하다는 것이다. 그 시대에서 과학 분야에 능통했다는 여느 사람들 누구도 자기들이 인간 본래의 자질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반세기 이상 동안 또 다른 세계와 꾸준히 교류했노라 주장하지 않았다. 모세는 하느님과 생명에 관한 환상을 가졌다. 그를 통하여 유대인의 처방(Jewish dispensation)에 신성한 상징어로 된 말씀(모세 오경)이 주어졌다. 그리고 그는 자기 백성을 노예 신세로부터 새로운 문화 세계로 이끄는 것이 중요함을 깨달았다; 그러나 그는 신성한 메시지가 인류를 위해 말씀 안에 뉘여 있음을 감지하지 못했다. 예언자들 또한 환상을 가졌고 음성을 들었다. 그러나 이사야, 예레미야, 다니엘은 자기들이 모든 나라들에 상징적으로 운반하고 있는 더 높은 진리들을 알아차리지 못했음은 분명하다; 그들 대부분은 메시지의 좁은 의미인 역사적 의미만을 보았다.
사도 바울은 말씀 속의 많은 진리들을 영적으로 납득했다. 그래서 그의 편지는 다른 사도들의 것 보다 더 빛을 내는 듯하다. 그는 삼층 천국 안으로 붙들려졌다. 그러나 그는 자기가 본 것을 말할 수 없었다. 참으로 자기가 육체 안에 있었는지 또는 육체 밖으로 나갔었는지를 몰랐다고 말했다. 이런 예들은 이를테면 낮선 나라를 조금 알게 하는 매우 작은 사건들이다. 그 반면 스웨덴볽은 의식을 가진채 저 이상한 나라에 갔고, 오랜 동안의 관찰로 천국과 영계와 지옥의 법칙과 그곳의 생활을 알리는 준비를 했다. 사랑의 사도라 하는 요한은 환상 중에 기독교 세계의 미래 상태와 새로운 인간성의 영예를 바라보았다. 그가 상징으로 본 것을 스웨덴볽은 실제로 보았다. 그는 예언적 그림들의 성취에 목격자가 되었고, 그 광경을 설명했다. 그리하여 계시록은 더 이상 봉인된 책이 아니게 되었다; 이 책은 열려서 놓여 있다, 그 책의 봉인들은 떼어졌다. 그 책의 메시지는 주님의 재림 속의 화려함으로 빛나고 있다.
“믿을 수 없는 주장이다!”하고 누군가가 외치는 것을 나는 들을지 모른다. 그럼에도 스웨덴볽의 주장은, 스트랕포드(Stratford) 출생의 어느 누가 정통적인 교육도 받지 않고 게다가 쓸만한 학력도 전무한데 그가 27권의 불멸의 연극 각본을 창출했다고 주장하는 경우와는 상황이 너무나 판이한 바, 최소한 나에게는 믿을 수 있는 주장이다. “방대하고 논의의 여지가 없는 교육 배경”을 지닌 에마뉴엘 스웨덴볽이 주장하는 것은 이것이다. 자기는 섭리적으로 선택되었다는 것, 말씀 속의 비유들과 상징물들, 여타 다른 신비적인 것들의 해석자로 준비되었다는 것, 이는 우리가 가끔 아주 생생하게 “느끼는” 또 다른 세계의 영향력들을 인류에게 나타내 보이기 위해, 그리고 삶의 사막을 의지의 새로운 생각들, 지혜, 능력, 기쁨을 가지고 윤택해지게 하기 위해서이다. 그는 주님의 두 번째 오심을 예고하고 오셨음도 선포했는데, 이 오심은 참된 생각과 올바른 생활의 교리 안에 있는 사람에게 있게 된다는 것이다. 이 선포가 믿을 수 없는 듯 여겨진다면, 회상해보아야 하는 것은 이런 정도의 말은 보통 사람의 상식적인 차원에서 나오는 말에 불과 하다는 것이다.
1880년도에 어떤 사람이 하늘을 나는 기계는 만들어질 수 있고 안전도 하리라고 말했었다. 그러나 매우 적은 사람들만이 그들의 말을 경청했는데, 그 이유는 이런 일은 한 번도 있어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주 적고 신실한 소수파가 주위의 비웃음을 받으며 노력한 끝에 결실을 보았지만 결국 그 성취는 느리게 왔다. 또 다른 지식의 축적이 건설하는 것도 있다. 예를 들면, 우리가 아는 바, 세상에서 경제 체계를 잘 계획하면 오늘날 우리가 향유하는 것보다 편안함과 즐거움을 생산함에서 더 부유해지고, 더 자유해지고 더 행복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 모두는 적어도 동등한 확실함을 가지고 아는 바, 전체 교육 체계를 재 조직하면 대량의 사람들이 창조적 서비스를 위해 더 행복하게 준비되며 성장해 나갈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아는 바, 우리 시대의 국제적 알력 다툼, 민족들의 적대감, 전쟁 위협, 등등은 인간성에 암시와 끈덕짐, 훈련, 그리고 순전한 헌신을 수단으로 바뀔 수 있는 정신적 개념들에 주로 기인된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소위 교육을 받았다는 사람들은 많은 이들에게 혜택이 돌아가는 것을 자기들이 보기 위해, 나누기 위해 살고 있다 하면서도 이것이 근본적으로는 사회적, 정치적, 영적 발달에 기인된다는 것을 믿지 않는다. 이를 아는 작은 집단들은 투쟁하고, 학교나 법정, 일터나 사무실, 입법 활동 같은 분야에서 자기들의 진리에 대한 증거를 꾸준히 만들고 있다. 이들이야말로 각자의 위치에서 주님의 재림에 대한 메신저가 아닌가?
세계의 사건들, 역시 막대한 의미심장함으로 차 있는듯 여겨진다. 국가들은 생존을 위해 서로서로에게 더 의존하는 바 전쟁은 지금까지의 미친짓 그 이상이 되었다. 외적 압력은 인류에게 평화의 형제애 안에서 살 필요를 보게 하고 있다. 약 1세기 전 인간은 대량의 상품을 만드는 공장과 이 상품을 바다와 철도로 수송하기 위해 석탄과 증기의 사용법을 발견했다. 이 뒤를 이어 전신전화, 그리고 각종의 기계들을 개량했다. 그리고 지금 라디오와 공기와 바다 아래를 통하여 움직이는 배가 나오고 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 주위에 석탄과 철 그리고 전기라는 세 개의 큰 받침을 뿌리셨는 바, 이것은 모든 사람들을 일의 형제애 안으로 휩쓸어 넣고 있다.
누군가가 다시 “그러나 내가 지금까지 관찰해왔던 것에 반대되는 것 같은데 어떻게 내가 대담하고 특이한 그의 주장을 수긍할 수 있을까?”라고 되물을지 모른다. 타당한 질문이다. 우리가 누군가의 책을 읽을 때 우리는 비평의 결과로 규칙이나 규범을 우리의 안내서로 받는다. 그런데 스웨덴볽의 경우 우리는 그로부터 거의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다. 이와 같은 경우의 참 본성으로부터 우리는 스웨덴볽 자신이 말해주지 않는 이상 그가 통과해 간 심리적 상태들에 관하여 매우 조금 알거나 거의 알지 못한다. 스웨덴볽 자신의 증거가 할 수 만 있다면 우리를 확신시켜야만 한다.
나 스스로 내 경험을 새로이 하는 경우는 하나도 없다고 확신한다. 날마다 나는 눈과 귀를 가진 내 친구들의 말을 절대로 신뢰한다. 그런데 그들은 자기들의 감각에 현혹되어 엉뚱한 데로 자신을 끌고 가는 일이 자주 있다고 나에게 말한다. 그럼에도 그들의 증거로부터 나는 내 세계를 건축하는 무수히 많은 귀중한 진리들을 수집한다. 그리고 수집된 진리들은 내 영혼으로 하늘(sky)의 아름다움을 그려 볼 수 있게하고 새들의 노래를 들을 수 있게 해준다. 나에 관한 모든 것은 침묵과 어둠일지 모른다. 그럼에도 내 안, 내 영에 음악과 빛남, 그리고 색깔이 있고 이것은 내 모든 생각들을 통하여 번개 같이 전달된다. 이렇게 나는 지상 맨 끝 넘어로부터 가져온 스웨덴볽의 증거로부터 나를 감금할 뿐인 진흙의 이 이상한 집(몸)을 떠날 때 내 영의 요구에 딱 어울리는 세계를 지금 세워나가고 있다.
나는 여러분이 스웨덴볽의 주장들을 고찰하는데 도움이 될 또다른 방법을 제시해 볼까 한다. 과학은 우리에게 뇌 안에 있는 이상하고 어두운 아주 작은 방에 관해 말해준다. 이 방 안으로 태양과 별, 땅과 대양이 빛의 날개를 타고 들어간다. 그리고 뇌의 신비스러운 처소로부터 영혼이 나오고, 몽롱한 상태에서 그것(세포)들은 함께 친하게 교제한다. 만물을 만드신 그분 만이 그것들의 베일이 벗겨진 영광을 직시할 수 있다. 우리는 그것들의 조절되지 않은 광채를 바라보고 생존할 수 없다. 이는 왜 인간이 어둑한 유리 같은 것을 통해 보고, 작고, 침침한 불이 밝혀지는 방에서 그림자만을 응시해야 하는지에 대한 이유이다. 자기가 땅에 관하여 납득하는 것은 조금이고, 그나마 베일쳐진 감각 만으로 실지로 납득한다고 말하는데 어째서 그는 천국의 “어둑한 신비”에 관하여 말하는가? 왜 평등한 자유를 가진 영혼이 그것의 처소를 나와 육체의 조악한 렌즈를 폐기하고 진리의 망원경을 통하여 불멸이라는 무한의 도착 지점을 자세히 볼 수 없을까? 좌우간 위 두 질문은 스웨덴볽의 다른 세계에 관한 기록들을 이해하는 열쇠를 주고 있다. 스웨덴볽은 말하기를, 내적 인간이 자기 주위에서 진행되는 것을 보고 지각한다는 것, 이 내면의 근원으로부터만 느낌과 감각은 생명을 가진다는 것이다. 그러나 모든 감각 경험이 인간의 바깥쪽에 있다는 망상은 우리에게는 너무나 당연시되어 버려서 집중하는 수련이 아니고서는 그 망상을 제거할 수 없다. 특별히 나는 이런 망상 때문에 괴로움을 당한 적은 없는 것 같다. 그 이유는 나는 내 생각과 상상에 내 정신을 쏟기 때문이다; 내가 꽃과 음악, 그리고 사랑스러운 경치에 관한 묘사를 즐길 수 있다는 것에 사람들이 놀라움을 표현할 때, 오히려 그 놀라워함은 나에게 감각 경험은 그 근원이 몸 밖에 있지 않다를 입증해준다. 만지거나 냄새 맡는 능력에 관한 이 간단한 사실을 이해하는 것이 믿기 어려울 정도로 힘들진대, 이런 사람의 상황, 즉 육체적으로 보고 들을 뿐 아니라 자기의 영적 능력을 예외적인 수준에 사용하고, 느낄 수 있는 것을 에워싼 좁은 고리(ring, 한계)를 거의 한계 없는 지평선으로 넓히는 사람(스웨덴볽)을 놓고 여러분은 어떤 근거에서 확실한 판단을 내릴 수 있는가?

IV

성경은 어떤 책인가?

성경은 하느님을 발견하고 그 하느님의 법에 일치하는 삶을 배우려는 인간 노력에 관한 기록이다. 신학자들은 하느님에 대한 순간적으로 가졌던 인간의 감명과 아주 빠르게 지나치고 바뀌기도 하는 그분의 세계에 대한 모습을 불변의 형체 안에 붙잡아두려 꾸준히 노력해왔다. 이 노력의 과정에서 성경의 글자 의미 안에는 많은 모순들과 하느님의 본성과 그분의 목적에 대한 오해가 발생했다. 따라서 성경은 절룩거리며 걷기를 시작해서 그 걸음이 발달되어 급기야 그리스도-복음에서 완전으로 절정을 이루고 있다. 나는 이 책을 영적 “일리아드(Iliad)”라고 마음에 품어본다. 이 책은 수천 년의 시간으로 덮힌 책, 그래서 많은 나라들이 있고, 화려하되 얼룩얼룩해진 이야기, 어떤 지점에서는 영감 없는 한 개인의 상상들이나 물질주의의 어두운 시기들이 가로지난다. 그러나 하느님의 얼굴이 세상에 비칠 때 계몽된 시기들도 있다. 그리고 들판과 창공과 물 위에 그리고 인간의 마음에 빛이 있었다. 인간 체험의 영혼돈을 빠져나온 어떤 한 개인이 때로는 영적 자각의 절정에 들려졌다. 인간이 발달되어 접혀 있던 그의 총명을 펼 때, 이들의 개인적 절정은 더 자주 보여지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엄밀히 보면 똑같지 않다. 각각 모두는 빛을 가져 온 자들이다; 그러나 빛은 (중간)매체에 의해 무한하였다 할 정도로 다양해졌다. 이 매체를 통해 때로는 신성한 근원을 지각하는데 어려움을 주는 것도 전달되고 말았다.
땅 위의 만물이 또다른 세계의 모든 실체들을 표현하고 묘사하듯이, 성경은 인간의 영적 모든 삶을 대표하는 권위 있는 한 권의 책이다. 이 책 속에서 많은 인물들이 우리에게 오고 지나간다. 법을 준 사람, 왕들, 예언자들 등등이 여러 페이지를 통해 우리 앞을 지나가고 있다. 산과 시내, 세대들이 끝없는 과정 속에서 지나간다. 그들은 기도하고, 울고, 기뻐하는 소리로 성읍들을 채우고, 심정을 악한 상상으로 채우고, 새긴 우상을 자신들에게 만들고, 창검에 의해 죽고, 법을 위반했기에 포로신세에서 탄식하고, 자기들의 머리를 여호와 앞에 굽힌다. 그러자 그들의 적들 위에 저주가 퍼부어진다. 건설하고, 결혼하고, 파괴하고, 찬양의 노래를 부르고, 희생제를 바치고, 위로 받고, 그들의 구세주를 십자가에 처형했다.
성경은 이 세대로부터 저 세대에까지 계속되면서 만들어진 한 권의 책인 바, 불일치와 혼동은 피할 수 없었던 것 같다. 그렇다 해도 성경은 인간 영을 더듬어 보는데 있어 인류가 소유한 가장 중요한 기록이다. 찌꺼기와 금을 분리하는 것, 즉 인간의 말로부터 하느님의 말씀을 분리하는 작업, 이 작업이 스웨덴볽이 감당한 몫이다. 그는 성경의 거룩한 상징성을 해석하는 천부적 재능을 지녔다. 마치 요셉이 포로된 땅에서 바로에게 꿈의 의미를 알려 주었을 때 그가 발휘했던 천부적 재능과 비슷하다. 스웨덴볽 시대 때 신학자들은 지식 없는 모호한 말들로 문의나 상담하러 오는 사람들을 오히려 어두운 구석으로 내몰았다. 그들이 성당(Shrine)의 휘장 앞에서 도움을 주지 못할 때, 스웨덴볽은 예리한 통찰력으로 휘장을 한쪽으로 제끼고 모든 영광으로 차 있는 지성소를 밝히 보여 주었다.
지상의 교회는 주님께서 눈에 보이는 옷을 입고, 사람들 사이에서 사람으로 거주하셨다는 단순하고 직접적이며 영감 있는 이야기들로부터 떠나 버렸다. 불가사의한 실체를 성직자들은 형이상학적 그물로 얽어맨 망상들로 대체했는 바, 결국 자신들도 구해낼 수 없었다. 신성한 인간성 속의 아름다운 진리는 찌그러지고 분리되어 인식을 넘어 해부되고 말았다. 결국 우리 주님 자신은 치명적인 방언들 안에서 잊혀졌다. 스웨덴볽은 깨트려지고 부셔진 부분들을 모두 가져다가 정상적 형체와 의미를 주어,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과 더불은 새로운 교제”를 건립했다. 스웨덴볽은 파괴자가 아닌 신성하게 영감된 해석자였다. 그는 하느님께서 보낸 예언자였다. 그의 말 자체가 이를 더욱 확신 있게 해주기에, 후대의 똑똑한 여느 후배의 증언 보다 낫다. 우리는 그의 책에서 그의 힘찬 개성을 비켜가지 못한다. 우리가 그의 메시지를 읽을 때, 우리의 마음은 이해함과 기쁨으로 채워진다. 그는 새로운 성경을 만들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성경을 새로이 했다. 그를 받아들일 경우 영적 재산을 얻게 되는 셈이다.
그의 저술 모두를 망라해 있는 그의 첫 번째요 마지막 번째 되는 생각은 성경을 올바르게 읽고 해석할 경우, 하느님의 가장 진실되고 가장 고상한 개념이 성경 안에서 발견된다는 것이다. 인간의 마음은 신학적 주제들을 저장하는 밀실이 있도록 구성되어 있는데, 그 주제의 중심은 하느님에 대한 생각이다. 허나 이 생각이 왜곡되고 잔인한 쪽일 경우 그것의 뒤를 잇는 모든 것은 논리적 연속성에 의해 똑같은 품질로 치닫게 된다. 가장 높은 것은 가장 깊은 것도 된다. 따라서 가장 깊은 것, 즉 중심되는 생각은 그것으로부터 파생되는 모든 믿음, 생각, 제도 등의 참 본질이다. 이 본질은 마치 영혼 처럼 모든 것을 만들고 형상이 되어 그 안으로 들어 간다; 왜곡된 본질일 경우 그것이 일상 생활이라는 평면으로 내려오면 마음에 있는 진리들을 붙들어 본질 속의 잔인함과 오류로 물들인다. 고대 인도에서의 하느님에 대한 생각 중에 이런 것이 있다. 어떤 고위 지식층의 사람이 내놓은 원리인즉, 사람이 하느님 같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인간적 애착과 의무와 (가족, 친척) 관계들을 모두 부수어야 한다는 것, 그러면 그와 동시에 그는 지독하리만큼 열정이 식고 외적인 것들에 대해 생각도, 흥미도 없게되는 바, 급기야 하느님 같이 되어져 무한 안으로 흡수되고, 또다른 세계를 위한 준비가 완료된다는 것이었다. 물론 이 이야기는 극단적인 경우이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인간성을 적으로 간주한 신조의 한 부류이다. 이와 연결해 생각되는 신념도 있다. 즉 가공된 어떤 특출함을 내세워 감정들을 불러일으켜 인류의 선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 예식 자체에 골몰하여 결국 가공된 특출함을 올바르고 유용한 삶과 대체해 놓는 경우이다. 이런 신조들은 모두 도덕성을 어둡게 하고, 도덕적인 것 마저 아첨으로 숭배해지게 하는 최고 존재의 도구로 전락한다. 그러나 진리 안에 있는 선한 자나 슬기 있는 자에게는 역겨운 짓일 뿐이다.
스웨덴볽이 그의 독자에게 자주 경고하는 위험함이 있는데 그것은 하느님에 대한 애매모호한 생각이다. 그가 여러 번 말하는 바, 겸손한 사람은 하느님이나 영혼, 그리고 불멸함에 대하여 실수나 미신적인 점이 있을 수 있지만, 대단한 지식을 가졌다고 하는 자들이 하느님의 창조나 자기들의 마음을 들여다 보고 결국 거기에는 신성한 진리가 없다고 말하는 것 보다는 더 슬기 있는 생각이라고 말한다. 더듬거리며 찾고 있는 신앙인을 떠받쳐 주기 위한 예레미야의 아래 구절은 우리를 얼마나 의미심장하게 하는지 모른다.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신다, 지혜로운 자는 그의 지혜를 자랑하지 말라; 용사는 그의 용맹을 자랑하지 말라; 부자는 그의 부함을 자랑하지 말라; 자랑하는 자는 이것으로 자랑할지니 곧 명철하여 나를 아는 것과 나 여호와는 사랑과 정의와 공의를 땅에 행하는 자인 줄 깨닫는 것이다, 나는 이 일을 기뻐한다, 여호와의 말씀이다.” (9:23-24)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에 대해 방황하는 생각이 있다. 그는 이렇게 선언한다. “이 생각은 어떤 것도 결정짓지 못하는 것, 따라서 이 생각은 이내 중지되고 멸해진다. 하느님을 영으로서 생각하고 영은 에테르(ether)나 바람일 거라고 생각하면 이는 텅빈 생각이다; 그러나 하느님을 사람으로 생각할 경우 이는 올바른 생각이다; 그 이유가 하느님은 신성한 사랑과 신성한 지혜이시기 때문, 모든 품질은 이 두 본질에 속하고 있는 바 이것들의 주체는 사람이고 에테르나 바람이 아니다.”
다시 더 그의 책을 읽어보자: “만일 누구가 신성한 사람에 대한 생각 없이 신성 자체를 생각한다면, 그는 모호한 것을 생각하고, 모호한 생각은 아무것도 아닌 생각이다; 또는 그가 신성에 대한 생각을 경계 없는 우주로부터 품으면 이 생각은 희미함에서 끝나고, 이런 생각은 자연의 숭배자에 대한 생각과 하나를 만든다; 이것은 자연 안으로 떨어지고, 결국 생각 없는 것이 된다.”
인간 존재 속의 세 겹 본성인 영과 지력, 그리고 육체를 올바르게 이해할 경우, 인간이 지각하는 모든 형체는 상상 안을 통과한다는 것, 그리고 그의 영혼은 상상에 생명과 의미를 부여한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사람과 우주는 신성한 마음(Mind) 안에 그려져 있다. 하느님은 인간을 그분 자신의 형상과 모습으로 창조하셨다. 이 창조를 인간 측면에서 보면 인간은 자신의 모든 개인적 특질로 각인된 생각-형체들을 자기의 마음과 육체와 세상에 내보낸다. 이는 화가가 아름다운 그림을 페인트하기 전 먼저 그의 마음에 그림을 그려 본다는 것을 상상해보면 간단히 이해될 것이다. 이런 식으로 영은 사상(idea)들을 생각-형상(thought-image)들, 또는 상징들로 설계한다; 생각-형상들 내지 상징들은 보편적 언어, 유일한 진짜 언어이다. 예를 들어 누군가가 우리가 볼 수 있는 형체인 태양을 가지고 자신의 기쁨, 신앙, 내지 자기의 정신적 그림을 다른 사람에게 전달할 수 있다면 통상 많은 단어나 어구를 사용한 경우 보다 간단히 더 만족스럽게 전달될 것이다. 언제인가 나는 돋을 새김하여 만든 행복을 표현한 중국 상징화를 만지고는 소리친 적이 있다. 어쩌면 많은 언어로 행복을 묘사한 글을 읽는다 해도 소리칠 정도의 감동(effect)이 나에게서 발출되지 않았을 것이다. 이 그림은 어느 사람이 입을 꼭 다문채 벼농사 들판을 응시하는 그림이었다. 중국인들이 벼농사 작황에 지독하리만치 (생사를) 의존하고 있다는 것, 따라서 들판에 홍수라도 덮쳐 작물이 파괴될 경우 수많은 인간 존재가 굶주림에 시달릴 것임은 피할 수 없다는 느낌이 순간적으로 내 마음에서 얼마나 사무쳤는지 모른다. 프랑스인들은 말하기를, “단어들은 생각들을 감추기 위해 고용된다.” 러스킨(Ruskin)의 “참깨와 백합”에 웅변적인 문단이 있는데, 거기서 단어들은 마음의 진짜 문제(issue)들을 바깥으로 내모는 바, 마치 가면 같다고 말하고 있다.
현재의 성경은 보편적 언어로 광범위하게 기록되어 있다. 기독교인 역시 이것을 스웨덴볽 시대 전에 알고 있었다. 그들은 “알기 어려운 말”이나 “비유”와 친숙하다; 그러나 그들도 우리들 같이 성경의 많은 부분들이 알기 어렵다. 특히 “계시록”의 경우 더욱 그러하다. “참으로 당신은 자신을 감추시는 하느님이시다. 이스라엘의 하느님 구주시여” 라는 구절은 말씀에 감추어 놓인 진리가 있음을 정확히 묘사하고 있다. 이스라엘은 구름과 불기둥에서, 내지 그분의 권능의 지팡이를 통해서가 아니고는 그분을 알지 못했다. 그분이 자신을 지상 위 사람으로 보이셨을 때, 그분은 악마의 왕자와 동맹한 자로 불리우기도 했다. 그분 자신의 제자들 조차 그분의 목적을 제대로 알지 못해 그분의 왕국이 세워지면 누가 가장 큰 자가 되는지를 놓고 서로 다투기도 했다. 그들은 그분의 사랑의 일을 정복이나 개인의 영화를 도모하는 일환으로 오판했다. 이렇게 그분의 모든 길을 가리운 어떤 것이 있지 않는가! 그분의 참 계시는 구름 안에서 가리운채 있었다. 우리에게 그분을 보이시려 공언한 말씀은 유한한 인간 본성의 한계로 그분을 옷입혀 놓았다. 그리하여 우리는 그분의 속성에 대한 가장 모순된 인상을 획득하고 있다. 그분은 무한과 영원이시다. 그럼에도 우리의 격정이나 무지를 그분의 탓으로 돌리고 있다. “격분은 내 안에 없다.” “나는 성내지 않는다. 너는 네 자신에게 분노를 유발시키고 있다.” 이렇게 그분은 말하시면서도 한편으로는 땅 위에 그분의 분노를 맹렬히 쏟으신다. 그분은 “후회 하지 않으시는” 하느님으로 표출되시고 있다. 그런데 그분은 후회하신다. 그분은 각자의 행적에 따라 (상, 벌을) 각 사람에게 주신다. 그런데 그분은 아버지의 죄를 자식에게 물으신다. 이와 같이 성경에는 외관 상 모순되는 긴 시리즈도 있다. 물론 많은 사람들이 조화되지 않은 생각의 영혼돈 아래 깔려 있는 어떤 질서를 볼 수 없다는 것은 당연할지 모른다. 만일 우리가 사랑에 가치의 모든 무게를 두고 하느님을 믿을 경우, 우리는 성내시거나 변덕스러워 쉽게 변하시는 분으로서의 그분을 생각할 수 없다. 이런 모순의 발생이 생긴 연유에는 성경이 쓰여질 때의 시대 상황이 미개한 상태였던 것도 한 몫하고 있다.
스웨덴볽은 이치에 맞는 신성한 계시에 관한 철학을 발전시키고 있다. 과학 분야의 특성 같이 하느님으로부터의 새로운 사상에 관한 모든 계시는 그것을 받는 이들의 상태나 수용력에 알맞아야만 한다는 것을 스웨덴볽은 지적하고 있다. 그가 떠맡은 업무는 성경의 글자적 서술은 아주 단순하거나 감각적이거나 외고집인 사람들의 지성에 걸맞게 신성한 진리가 순응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는 증명하기를, 글자 의미 안에 영적 의미가 있다는 것, 이 의미는 비록 우리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우리와 함께 하느님의 진리를 읽고 생각하는 천사들이 지닌 더 높은 총명에는 잘 어울린다. 신성한 진리는 이런 상급의 의미에서 완성된다. 예를 들어 내 친구가 내 말을 100% 글자대로 언제나 받는다면 결과는 어떠해지겠는가? 즉 지구는 평평하다…나에게 밤은 없다 등등의 내가 내뱉은 말을 단어 그대로 생각하면 나는 그에게 미친 사람 처럼 여겨질지 모른다. 다시 말해 내 친구가 귀를 기울여야 하는 대목은 의미를 운반하는 단어의 겉모습이 아닌 속 뜻이다는 것이다.
말씀의 깊은 의미를 파악하는데 있어서도 위와 비슷한 바, 스웨덴볽이 사용한 방법과 비슷하다. 만일 우둔한 사람, 또는 나쁜 성미를 지닌 사람이 성경에서 하느님은 사악한 자들에게 매일 화를 내신다는 대목을 읽는다면 그에게 하느님은 소심하고 비신성한 분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이 구절을 분별력 있고 심정이 훈훈한 사람이 읽을 경우, 그것은 하느님의 겉모습일 뿐이다는 것, 우리는 그분 위에 덮어 씌운 서로에게 성내는 것이나 우리 자신이 자초한 벌을 벗겨 드려야 한다는 것을 뜻하는 것으로 이해하여 받아들인다. 이런 화냄도 있을 것이다. 의로운 자가 돌발적으로 화를 냈다가 가라 앉는 경우이다. 그리고 이는 그를 연마시키려는 사랑의 분노라고 이해하게 될 때도 있다. 그러나 하느님은 강경함 자체를 실행할 수 없으신 분이시다. 그래서 그분은 이런 부분을 누차 그분의 백성에게 말하시곤 하셨다. 우리가 신성한 말씀에 덮힌 가리개를 한쪽으로 밀어내고 꿰뚫어 볼 때, 우리는 그분의 본성에 (더욱 가까운) 참되고 참된 말씀을 발견한다. 하느님께서는 에덴에서 인간을 만드시고 내쳐서 에덴에서 추방하시지 않는다. 하느님께서는 법을 가르치시고 그것을 깨트리는 것을 보고, 그 죄과를 그분의 창조물에 전가하시지 않는다. 그분은 경고는 하시나 그를 돌보지 않는다거나 지옥으로 내던지지 않으신다. 납득 가능한 언어로 계명을 주시어 실행할 수 있게 해달라고 졸라댄 것은 하느님이 아니라 인간이었다. 스윈버니(Swinburne)는 아래와 같이 글을 쓰다가 그분의 현존하심을 무의식적으로 느꼈다:

나 아닌 신들을 향하여 너무도 충실한
오 나의 아들아,
내 아름다움이 다른 신들만 못하더냐?
네가 자유롭게 있고 싶은데 내가 너를 힘들게 하더냐?
잘보아라, 나는 너와 함께, 네 안에, 너 때문에 있다는 것을;
지금 내다 보라 그리고 깨달으라

아름다우시고, 모든 것을 참아주시는 신성 위에 집어 던져서 천국에 산더미 같이 쌓여진 혹독한 말들을 실감해본 적이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그분은 실지로 자신을 감추이지 않으신다; 결심 굳힌 이기심의 악한 언어가 그분을 감추어 놓는다.
내가 위와 같이 여러가지 것을 말한 이유는 만일 우리가 그분의 말씀을 시종 일관하게 읽겠다면 하느님의 본성에 관하여 구름 한점 없듯 매우 명료한 생각을 가질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이런 견지에 의거하면, 영적 의미는 영혼 만을 집중적으로 취급한다는 것, 따라서 시대나 장소 개인적 인물이 아닌 영혼에 필요한 것, 그 시련, 그것의 변화와 갱신 등등 만을 다룬다는 것이다. 우리가 산, 강, 어린 양과 비둘기, 천둥과 번개, 금으로된 성과 보석 그리고 치료해주는 생명나무의 잎과 같은 말들을 읽을 때, 이 말들은 그 말 뒤에 놓인 영적 원리에 대한 정확한 상징이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다시 말해 애착과 사상이 상징물(표현물)을 수단으로 의미되어 있다. 그리고 그것들이 영혼에 사용되는 것은 자연적 표현물이 육체에 사용되는 것과 비슷하다. 해석의 이런 방식이 스웨덴볽에 의해 27년 동안 고용되어졌다. 그리고 그는 그의 첫 출판 서적에 있는 한 개의 서술까지도 되돌아가 고치거나 바꿀 필요를 못느꼈다. 그는 성경 전체에서 같은 자연적인 것(단어)에 대체로 비슷한 영적 의미를 주고 있다. 그리고 그 의미는 성경 어디서 응용되든 꼭 맞고 있다. 나도 꼭 맞는지 이 열쇠를 시험해본 적이 있다. 이것은 스웨덴볽이 상응의 법칙이라고 부르고 있다. 즉 자연의 형체와 영의 형체 사이를 유추함이다. 성경은 하느님이 인간에게 유한한 인간 수준에서 말하심, 뿐 아니라 세상에 관한 시라고 부를 수 있을지 모른다.
스웨덴볽의 저서들 중 특히 “천국의 비밀들”은 잉거솔(Ingersoll)과 여타 성서 비평가들이 글자적인 서술은 신용할 수 없다고 말한 것의 많은 부분을 확증하고 있다; 이와 동시에 그런 성경 부분에 대한 가치 판단에서 그들의 판단에 잘못이 있다는 것도 역설하고 있다. 나는 성경 글자 의미가 근대 과학의 빛으로 보면 얼마나 결함이 있는지, 어떤 이야기들은 얼마나 이상한지, 안과 밖이 일치되지 않는 서술이 얼마나 자주 있는지를 배울 기회가 풍부했었다. 그럼에도 나 역시 주목한 것은 단어로는 읽혀질 수 없으나 상징 안에 들어 있는 의미, 즉 글자 아래 놓인 의미가 있다는 것, 그리고 이 의미는 상징성이 발생되는 모든 부분들을 잘 붙들고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해 아래 시편 78편의 경우가 좋은 보기가 될 것 같다:
“나는 비유 안에서 내 입을 열 것이다; 나는 옛 것으로부터의 알기 어려웠던 전해 오는 말을 발음할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들었었고 알았었던 말이고, 우리의 선조들이 우리에게 말했던 것들이다.” 이 뒤를 이어 이집트에서의 이스라엘 후손의 경험, 그리고 가나안으로의 그들의 순례기가 있다. 이 기록은 실지 역사이다; 그런데 위 시편은 말씀의 의미 파악의 방법을 깨달은 사람만이
확실히 납득할 수 있는 비유이다고 발표도 하고 있다. 따라서 이 비유에는 얼마나 깊은 의미를 담고 있는지! 이 역사는 물질주의와 무지로부터 탈출해서, 가나안의 아름답고 비옥한 땅이 표현하는 것, 즉 더 행복한 삶을 향한 느리고 힘든 발전을 완전하게 묘사하고 있다. 출애굽에 관련한 대단히 간략한 위 설명을 제시한 이유는 스웨덴볽이 성경을 신성한 진리의 수송 수단으로 어떻게 간주하고 있는지를 여러분께 예증해주려는 때문에서 이다.
1753년에 아스트맄(Astruc)이 모세 오경에 관련된 두 세 문서를 발견하여 일약 유명해지던 그 즈음, 스웨덴볽은 창세기와 출애굽기를 설명하는 “비밀들, Arcana”을 런던에서 익명으로 출판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상기해보는 것도 흥미 있는 일이다. 후자의 경우, 성경은 물질적 창조 또는 대홍수 같은 것과 무관하고, 창세기 첫 11장 까지에서도 아담과 노아로 명명된 어떤 개인들에 관련이 있다고 믿지 않았다. 이 주제에 관한 그의 관심은 아주 다른 국면에서 였다. 그는 히브리어에 관한 공부와 그의 정신적 계몽을 수단으로 창세기의 첫 장으로부터 유대인 시대가 열리는 지점 까지는 인간 종족의 영적 생활이 고대의 우화적 스타일로 된 전말서(account)로 주어졌다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가 지적해주는 바, 창세기 첫 장은 인간 마음의 진화의 단계들을 포함한다는 것, 처음에 흑암과 혼돈 뿐인 마음이 단순한 진리와 행복의 에덴에 도달될 때 까지 발달되었다는 것이다. 이 시대는 자아 이익이 힘의 원천이 되고 어린 시절의 순진이 상실될 때까지 계속되었다. 결국 잘못된 생각들이 세상을 홍수 같이 휩쓸었다. 그런 다음 인간들 중 명민한 종족, 즉 방주에 있는 노아로 나타냈는데, 이 종족이 새 시대를 시작했다. 총명은 빠르게 성장했다. 그리고 양심의 지팡이가 순수한 영혼의 음성을 대신 했다. 상징물은 더 이상 에덴이 아닌 포도원 이었다. 인류는 대망을 품은 젊은 이 같아, 해마다 기록이 갱신되는 위대한 동쪽의 제국을 건설하였다. 이 시기의 문명은 광범위하게 되었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그것은 타락되었다. 다신교와 우상 숭배가 존재 안으로 왔다. 전쟁과 폭력이 땅의 얼굴을 파멸로 덮겠다고 위협했다. 그러자 또 다른 처방
(dispensation)이 내려져야만 했다. 이 처방이 유대 교회의 시작이었고, 이 교회는 시간이 차서 기독교가 세상에 도래할 때 까지 일신교를 살아있게 보존했다. 첫 기독 교회 또는 첫 기독 문명은 모세의 것이 연속된 수준이었다. 따라서 그 안에는 임시변통하던 것, 즉 수지 양초라든가 몹시 거친 사회에나 걸맞을 깜박이는 횃불의 신앙 등등이 여전히 존속되고 있었다. 고로 말씀의 가장자리의 여백이나 채워야 할 감각-그림이나 예식 광경이나 권위의 지휘봉 같은 것이 오히려 미신적으로 존경을 받았다: 정작 읽어 알아내야만 하는 신성한 의미는 읽히지도 못한채 밀려나 있었다. 이런 상태에서 외고집적인 세상의 성년기는 지나갔다. 그리고 감정에 지배되어 발발하는 것들을 계속 느낀다. 그리고 몰락하고 불행한 마음의 상태가 있게 된다. 그러나 지금 더 계몽된 신앙의 서광이 인간 위에서 비치고 있다. 그리고 새 사람의 창조가 한걸음씩 계속되고 있다; 그렇다, 모든 심정과 바깥 세계에서 평화의 안식이 도래하고 이기심의 지배와 맹목적 본능은 영원히 사라질 것이다. 이런 식으로 성경은 하나의 광대한 영광스러운 비유로서 초상화되어져 있다. 성경을 읽는 자 누구이든 읽는 구절마다에서 그는 삶을 공부하고 현재의 자기 삶에 적합한 상황도 얻는다. 즉 인생 초기의 순진함, 유년기의 제멋대로 함, 중년기의 삶의 구원을 위한 전환, 그리고 계산할 수 없는 섬김의 가능성과 그로 인한 기쁨이다. 이것은 낙원으로부터 낙원 까지의 완전한 궤도-“주님께서 영원히 앉아 계시는 땅의 궤도”-이다. 지나간 오랜 세월 속의 한정된 단어와 불완전한 사고 방식은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며, 새롭고 더 높은 선물과 능력을 나누어 주신다는 천국의 메시지의 겉모양일 뿐이다.
성경에 대한 더 높은 비평은, 스웨덴볽이 암시하듯, 성경의 본질적 의미를 조금이라도 거두어 가는 것은 아니고. 초기 유대교 저자들의 잘못된 견해들을 고친다.
이 관점의 경우, 고고학이나 지질학의 축적된 자료, 그리고 다른 (성경 관련) 문서들의 연구와 충돌되지 않는다. 성경은 이전 보다 더 높은 수준으로 들려졌다. 그리고 거룩함으로 옷입혀져 있다. 옛 견해는 모든 영혼들 속의 위대한 하느님을 대부분 무가치해지게 했다. 옛 견해 속에서는 이러했다. 즉 그분은 시나이 산에 당도할 때까지 아무 말씀도 없었던 분으로 상상되어 계셨다. 그분은 과학이 신앙과 어떤 마찰 없이 연구를 진행해 갈 여지를 남겨두시지 않았던 분으로 낙찰되어 계셨다. 즉 인류에 대한 그분의 가르침은 좁고 배타적인 빛의 광선을 통하여 모세에게 있어 졌을 뿐이었다. 고로 그분의 섭리는 대체로 무정하고 소홀함들 뿐이었다. 이스라엘을 제외한 모든 백성들은 저주와 추방의 쓰라린 운명에 있었는 바, 수백만의 사람들은 지옥 안으로 휩쓸려 졌다고 판단했다. 그런데 “사랑받는 아들”이 중재했고, 이 아들은 파멸되고야말 인류를 위해 자신을 십자가 위에 희생 제물로 바쳤다. 그 다음 “아버지”와 화해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이는 “아들”이 중보한 특별한 사람 만에 해당된다. 이런 저런 옛 견해는 스웨덴볽의 주된 적이었다; 그 이유가 이 견해는 학교에서 꾸준히 가르쳐져 왔고, 설교되었고, 최고의 열정과 웅변으로 선포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견해의 거인 같은 그림자는 아기의 요람 위에까지 누워 있고, 감옥과 죽음의 자리도 덮었고, 급기야 이것은 일상 생활의 작은 행동이나 흔한 언행에 까지 침투했다. 결국 회의론과 무신론이 사방에서 튀어 나온 것은 당연할 것이다. 주님과 그분의 말씀에 대한 신앙은 과학과 철학을 내려누르고 모든 관대한 감정을 묵살할 것을 요구하는듯 보였다.
그러나 스웨덴볽은 성경의 진가를 재 발견하여 새 희망을 가져온 새 견해로 이 거인과 맞붙었다. 그와 동행한 하느님은 모든 국가들과 모든 시대의 하느님이시다. 무한하게 인내하시고 이타적일 뿐인 그분은 온 세상을 지켜보셨다. 애초에 그분은 아름다운 나무가 성장하는 법칙과 동일한 방법으로 어린아이 같은 인간을 인도하셨다; 그런 다음 그분은 그를 에덴, 홍수, 포도원, 그리고 탑으로, 그 후 모세의 책들과 예언서들로 가르쳤다. 지질학이나 과학으로부터의 그림들은 인간의 거듭남을 상징화하는데 사용되어졌다. 사람 사는 모든 토지에는 언제나 정의의 법칙이 있어왔다; 즉 우리에게 잘 알려진 하무라비(Hammurabi) 법전 같은 경우가 있다. 이는 창세기 14장 1, 9절에 등장하는 암라펠(Amraphel)이었다. 그러나 십계명이 시나이 산에서 특이한 방법으로 주어졌는데, 그 이유는 수세기가 지나 지혜와 과학이 밝히 알려지게 할 영적 법칙들의 윤곽을 보이기 위함 때문이었다. 우리의 기억들에 도장찍혀 확실해진 생명의 그림을 수단으로해서만 우리는 더 아름다운 것을 상상하는 것을 배울 수 있고 또한 그것들을 살아있는 실체들로 만들 수 있다. 유대인들은 자기들이 신뢰해야 할 만인을 위한 십계명을 외면했을 때, 그들은 말씀을 책으로는 들고 있지 않지만 고결하고 지혜있는 심정에 금으로 된 글자로 새겨 지닌 다른 백성의 실예를 가지고 예리하게 견책되어졌다. 스웨덴볽은 기독교국이 응당 보여야할 진지함과 덕행의 실예로서 자기 시대에 있던 많은 이방인들을 내세우고 있다. 오! 그들은 지금도 형제애의 덕목을 실현하려 결심 굳힌 용기를 내보여 준다. 한편 우리는 다음 전쟁에서 상대를 죽이는데 가장 치명적인 방법이 무엇인지 궁리해내고 있다. 진실로 주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 있고, 글자주의의 옛 하늘과 땅은 녹아 사라질 것이다.
진화는 창조하시는 하느님의 방법이다고 스웨덴볽의 가르침에서 암시되고 있다. 이와 더불어 먼저 있어야할 진화, 즉 내적인 것의 “진화” 없이 그 진화는 완전하지 못하다는 것도 그는 보여주고 있다. 하느님은 생명 자체 또는 영혼이시기 때문에 그분의 손으로부터 있는 모든 것 안으로 영혼의 형체를 놓을 수밖에 없고, 영혼은 물질을 붙잡아 그 영혼에 하느님이 생각하셨던 어떤 것의 형상 안으로 형태를 잡는다. 플라토(Plato)가 말한 것, 즉 어떤 것이 없음으로부터 만들어질 수 없다. 그리고 총명은 존재의 다른 평면에 놓여 있기 때문에 그것은 물질로부터 진화될 수 없다. 이는 아직도 진리이다. 비록 인간이 보다 낮은 수준의 모양으로부터 보다 높은 수준의 모양으로 발달해 나간 것은 사실이나 시작에서부터 그는 불멸하는 상태였다. 어쨌든 자기 안의 영혼을 의식할 때까지 인간은 자기의 보다 높은 수용력을 즐기지 못했다. 그는 또 주장하기를, 인간은 거대한 물질적 발전을 이룩해 갔지만 그 반면 어린아이 같은 단순함과 순진함으로부터 타락되어 갔다는 것, 그리고 길고 가파른 방법을 수단으로 하느님이 계신 높은 곳, “모든 영혼들이 그분을 만나는 장소”로 되돌아 오고 있다고 말한다.
나로 하여금 밝히 알게 한 스웨덴볽의 가르침은 무덤으로부터 그 무덤이 주던 공포를 가져간다. 천국 안으로 들려지기 전, 대부분의 “기독인들”은 미래의 삶이 궁금증을 넘어 어떤 공포들로 차있었다. 생명 또는 죽음 어느 것이 더 좋은 기회가 되는지, 즉 죽음은 삶의 끝인지 아니면 또 다른 존재 안으로 들어가는 문인지 라는 질문은 토론의 대상이었다. 더 크고 더 고상한 삶이 죽음 건너에 있다는 것은 지금은 확실해졌다. 어머니의 팔에서 죽은 아이가 견디기 힘든 억지 논리에 휘말려 있었다. 그러나 지금 내가 아는 바, 달콤하게 향기를 품는 어린아이다움이 그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 빛나는 거처에서 천사는 그에게 말하는 것, 창의적인 사고를 생각하는 것, 그에게 꼭 맞는 일을 하게 한다는 것, 그런 곳에서 그는 아름답게 성장하고 어쩌면 지상에서 발휘할 능력 보다 더 많은 능력 발휘가 그를 위해 준비되고 있다는 것이다. 지금 내가 아는 바, 지상에서 방해받아왔던 진실된 모든 사랑은 저쪽 세계에서는 열배나 더 큰 기쁨을 누린다. 천국과 지옥은 우리의 더 깊은 의식 안에서 사실들로 되어갔는 바 더 이상 논쟁의 여지가 없다. 우리는 그것들에 대한 직관적 확실함을 가지고 있다. 이 확증은 받느냐 거절하느냐 하는 선택을 위해 이성이나 논쟁으로 추론된 절뚝거리는 지식으로부터가 아니다. 정면으로 마주 보는 지식만이 사물에 실재함을 준다. 그 이유가 실재함은 생명으로부터 튀어나오기 때문이다. 그리고 스웨덴볽의 살아있는 증거의 빛이 우리 영혼의 경험의 “구석진 곳”의 어둠에 비하면 처음에는 약한 빛일지 모르나 확실한 것은 그 빛은 점점 더 밝아진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불멸하는 목적을 더듬거려 찾는 우리의 수고에 대담무쌍의 힘으로 보강해줄 것이다.
저 세상 이야기를 하는 것은 멍청한 짓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야 그럴 수도 있겠지만, 그 사람들이 그 멍청한 짓 없이 살려고 노력했으나 비극적 실패로 끝나버렸다. 우리 중의 극소수만이 그 길이 벗어난 길이라고 알고 있다; 그런데 스웨덴볽은 이런 말을 받아 쓰라고 명령받았다. “선으로부터 파생된 진리들이 모든 능력을 가진다.” 주님이 그분의 신성한 진리로부터 우리에게 영감을 주신다면, 정신적으로 삼손의 그 강한 힘이 우리 안을 지나갈 것이고, 우리는 수많은 인류의 발달 가능성의 문을 누르고 있는 엄청난 무게를 들어 올릴 수 있을 것이다. 에머슨은 여러가지 신념에서 스웨덴볽과는 먼 거리에 있다고 생각되는데 그는 스웨덴볽이 이기심이 전혀 없는 마음가짐으로부터 근본적인 진리를 보았다하고 말한 것은 의미심장하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적었다: “의지의 약함은 그 개인이 자신으로부터 어떤 것을 하게하려 들 때 시작된다. 지성의 소경됨은 지성이 그 자체로부터 어떤 것을 하게하려 들 때 시작된다.” 다시 말해 신성한 생명이 우리를 통하여 그 길을 갈 수 있도록 하는 것밖에는 세상을 구원할 방도가 없다는 말이다.
위 말은 “우리를 도우려 저 언덕들”로부터 오는 스웨덴볽의 메시지의 참 의미이다. 그가 강조한 것은 영원불멸이 아니라 우리에게 부과된 책임이었다. 그는 천사들과의 특별한 교제를 목적 자체로서 간주하지 않고, 그의 이해성을 여는 수단으로 간주했고, 그리하여 하느님의 말씀의 참된 해석, 그리고 이 해석을 인류의 공동 유산으로 만드는 수단으로 삼았다.
따라서 우리는 지상을 떠난 영들과 교통할 가능성은 인정하되, 그들과 교통하려 허둥대서는 절대 안된다는 것도 명심해야 하는 대목이다. 예언자들, 사도들, 그리고 선견자들이 인간의 잠자는 심정을 깨울 필요가 있어졌을 때, 그들이 천사들이나 악마들과 제휴된 관계를 의식하고 있는 것은 유용하다. 그 이유는 이런 경우 주님께서 친히 이 일을 감찰하시고 혼동 없게 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통상적으로 위와 같은 영적 교통은 인간을 큰 위험에 노출되게 한다. 그 이유는 인간의 약점을 아는 현혹하는 영들에게 쉽게 빨려들어 그것들의 이기적 목적을 위해 이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스웨덴볽이 서술하기를, 모든 인간 존재에게는 최소한 천국으로부터의 두 천사와 지옥으로부터의 나쁜 두 영이 동행한다는 것이다. 고로 마음의
평화와 삶의 질서가 있어짐은 우리가 의식 못하는 두 아군과 두 적군에 의존되어 평형을 유지한다고 서술한다. 쟌 웨스레는 말하기를, 계시 안에서 우리는 알 필요가 있는 모든 것을 가지고 있는 바, 우리는 그분의 안내와 보호하심을 신뢰하면서 주님 만을 따라가면 된다 라고 했는데, 이 말은 정확히 그러하다.
주 예수 그리스도는 계시록의 첫 절과 마지막 절에서 명명되어지고 있다; 이 분은 이 책의 중심되는 인물이시다. 이 분은 신약 성서의 예수이시다. 책 “계시록”은 지상 위 주님의 일, 그분의 십자가에 달리심, 그분의 부활에 관해 말하고 있는 복음서의 계속이다. 계시록은 어떻게 그분이 신성이 되신 인간- 최고의 본보기 되심과 영감주시는 분의 힘 안에서 그분의 일을 계속하셨는가를 말해주고 있다. 복음서에서 그분은 말하셨다. “보라, 나는 너와 함께 시대 끝 날까지 언제나 있는다”; 그리고 그분은 아직도 인간들에게 가져다 주려는 위로함과 계몽에 관하여 자주 말하셨다.
위 약속은 무엇이 되어 있는가? 오순절 성령의 오심, 제자들이 잠깐 동안 이지만 느꼈던 가르칠 지혜와 용기와 기쁨을 제외한다면 그분의 약속은 아주 잊혀진 듯 여겨진다.
그러나 스웨덴볽이 보여주는 바는, “계시록”은 이 약속을 취급한다는 것, 그리고 그 약속의 완성을 예언한다는 것이다. 계시록은 상징을 수단으로 일어나신 주님의 본성을, 그리고 그분의 현존하심으로부터 흐르는 축복들, 우리가 그분을 위하여 우리의 마음을 준비하는데 해야만 하는 것들을 애매한 점이 하나도 없게 그리고 있다. 이 책은 영광으로 현존하시는 그분 주위에서 별들 같이 빛을 내는 기독인의 삶의 이상향들을 충분하게 제공하고, 이런 이상향이 사도들에 의해서도 희미하지만 그런대로 윤곽을 보여 주었다는 것도 그려놓고 있다; 이 책은 이런 이상향이 우리 자신의 일부가 될 수 있기 전 반드시 정복해야 하는 잔인한 신앙과 생활 속의 악들을 나열해놓고 있다. 이 책은 참 기독교 신앙에 중요한 걸림돌도 보여준다, 그것은 선행 없는 신앙, 그리고 예식이나 미신적인 것들, 그리고 겁주는 것들을 수단으로 지배하려드는 탐욕이다. 바다
와 바닥 없는 구덩이로부터 올라오는 짐승들은 위와 같은 정신적 괴물들, 즉 예정론, 지적인 속박, 세 하느님들에 관한 생각 같은 것을 표현한다. 특히 3 신론 같은 경우는 힌두교도의 말인 즉, 사람의 마음을 분열시키고 “하나를 향한” 행위가 불가능해지게 한다는 것. 그 이유가 이와 같은 신관은 영적 집중의 모든 힘을 파괴하고, 균형 없는 정서를 낳고, 예의범절의 짜임새를 갈갈이 찢고, 하느님의 통일성에서만 생명이 있는 철학을 내몰아친다. “계시록”의 용은 주님의 신성과 그분의 계명들을 지켜야 할 필요성을 교묘히 비트는 추론으로 헛되게 하려는 파렴치한 인간들의 모든 노력이다. 바빌론은 그분을 인정하고 그분의 진리에 따른 삶을 방해하는 모든 자만심과 자부심이다.
계시록의 여러 장들은 영들의 세계에서 있어지는 심판의 광경으로 가득하다. 봉인들이 떼어졌다, 그리고 나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는 쇠퇴하는 교회 속의 어둠과 위선이 폭로됨을 뜻한다. 광경들 모두를 망라해 신성한 인성 안에 계신 주님이 움직이시고 있다. 즉 그분의 사랑의 힘, 그분의 지혜의 순수함, 그리고 그분의 섭리의 열정이 그분의 가슴 주위를 맨 금빛의 띠, 눈 같은 그분의 머리, 불꽃 같은 그분의 눈, 태양 같이 빛을 내어 영광으로 있는 그분의 얼굴이 상징되어 있다. 많은 물들 같은 그분의 음성은 새로운 생각들이 퍼져나감 그리고 더 높은 신앙들이 땅의 체계들 안으로 퍼져감이다. 그분은 이 책 안에서 그분의 현존이 지상에서 걸으셨던 그 이후 유한한 인간의 눈에 보여지기로는 왜 그렇게 작게 느껴졌는지, 그리고 왜 그분의 영으로부터의 위로가 이렇게도 작다고 느꼈었는지를 명백하게 말하고 있다. 지배함과 압제는 우리로부터 그분을 강탈했다. 과거 시대들 속의 교회는 아주 편협한 교육을 했기 때문에 인간의 생각이 그분으로부터의 새로운 메시지를 위해 필요한 지식 수준에 이르는데 오래 걸리게 했다.
심판하심으로부터 그분은 그분의 미소로 하늘과 땅을 기쁘게 하는 쪽으로 방향을 트신다. 즉 새 예루살렘이 내려 오는 것-새 처방이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읽는다. “하느님의 성막은 사람들과 함께 있다.” 그리고 다시 “내가 보았는데 그 안에 성전이
없다; 그 이유가 주 하느님 전능하신 분과 어린 양이 도성의 성전이기 때문이다.” 주님 자신의 인간 본성이 “사람들과 더불은 하느님의 성막,” 그분의 현존하심의 성전이다.
거룩한 성의 치수는 가득하고 넉넉한 치수, 세상에서 주님에 의해 달성된 완전한 성년의 치수라고 스웨덴볽은 해석한다. 하느님의 보좌로부터 흐르는 물들은 자기의 생활을 그분이 생활하셨던 것으로 진실로 통일되게 하는 이들을 위해 그분의 말씀으로부터 오는 새롭게 해주는 풍부한 진리들이다. 그 이유가 주님의 신성한 인간을 인정함은 구약 성서, 비유들, 시편들, 예언들, 복음서들, 특히 오랫동안 봉해졌던 책 “계시록”에 있는 무진장한 진리를 알게 하는 지혜이기 때문이다.
말씀이 올바르게 이해될 때 그 얼마나 신성하고 아름다운지! 일곱 촛대와 그 촛대 사이의 사람의 아들 같은 분에 대한 그림은 표지 그림으로 계시록의 책 권두에 서있다. 그리고 영감되어진 스웨덴볽의 마음은 이 책을 더 빛나게, 더 풍부해지게 발전시킨다. 그리하여 이 책은 생명의 강과 모든 나라들을 위한 치료하는 잎을 가진 나무가 자라는 도성의 환상에서 절정을 이룬다. 그리고 주님 자신의 현존하심의 햇빛은 그분의 자녀들로부터 감추여지는 일은 결코 없다.
계시록을 설명하는 스웨덴볽의 두 권의 책은 오랫동안 미루어져 왔던 예언, 즉 “힘과 영광을 지니고 구름들 안에 오시는 사람의 아들”, 이 분을 뵙는 것이 스웨덴볽의 지성 안에서 성취되고 있다. 그 이유가 “본다”란 깨닫는 것, 이해하는 것이고, “하늘의 구름들”이란 성서 말씀의 글자이고, “오시는 사람의 아들”이란 성서 글자를 통하여 빛을 내는 영적 의미, 이 의미가 힘과 영광에서 계신 주님이시기 때문이다. 십자가 위에 놓여졌던 명패에는 “유대인의 왕 나사렛 예수”라 쓰였는데, 이 명패는 세 언어, 즉 히브리, 그맄, 라틴어로 쓰였다. 이는 마치 주님께서 그분의 모습을 가지고 그분을 오래 갈망한 영혼들을 만족하게 하셨을 그 때를 예시하는 듯한 인상을 우리에게 준다. 즉 그분의 모습은 구약 성서에서는 히브리어로, 신약 성서에서는 그맄어로, 이 두 언어로 된 책에 감추였던 의미를 밝혀주심에서는 라틴어로 되어지고 있다. 주님께서는 인류가 선용함으로 행복을 얻도록 하시려고 성경의 상징성을 실용적 생활의 원리들로 해석할 수 있도록 스웨덴볽을 가르치셨는데 그는 배운 것을 라틴어로 썼다. 그는 겸허하여 그의 여러 책들에 자기 이름을 적는 것 조차 하지 않았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 그의 필명이었다. 그는 말했다. “사람이 육체를 지니고 있는 이상 천사들과 영들과 결코 이야기할 수 없다, 그것은 몽상이다 하고 많은 이들이 말하리라는 것, 게다가 나의 상태를 두고 그가 남의 신용을 얻으려 획책한 짓, 또는 이 사람은 이렇게…, 저사람은 저렇게… 생각 되는대로 말하리라는 것은 나자신도 족히 예상하는 바이다; 그러나 나는 이 전말서에 그런 나에 대해 쓰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내가 보았었고, 들었었고, 만졌었기 때문이다.”
나는 오리버 랃지(Oliver Lodge) 경과 같은 심령 생활 연구자들이 자기들이 다루는 주제와 비슷한 것을 많이 담고 있는 스웨덴볽의 부피 많은 책들을 거의 언급하지 않는 것을 의아히 여기며 그의 책을 읽은 적이 있다. 오리버 랃지경은 그의 “죽은” 아들, 레이몬드(Raymond)와의 회견, 즉 영원 속의 거주민들이 자기들이 가장 좋아하는 일을 어떻게 하고 있는지, 자기가 제일 좋아하는 친구들과는 어떻게 사는지, 그들은 어떻게 먹고 입고 있는지, 등등에 관한 대담 내용을 출판하였다. 그러나 그 내용은 빈약하고 단편적이었다. 그것은 매우 애써서 겨우 얻어낸 조금의 내용인데 비해 스웨덴볽의 것은 아주 다른 수준이다. 그의 책은 그가 천사들과 영인들과 정면에서 이야기한 것, 또는 초인적 균형 감각에서 듣고 본 것의 기록이다. 그는 다이아몬드 같이 반짝이는 눈에 보일 수 있는 진리들과 합리적으로 발생되는 것들의 많은 양을 적어 내려갔다. 그는 기억이란 것은 뼈같이 딱딱해짐을 보았다. 그는 악령들이 천국을 들여다 보니 그곳은 암흑이라고 불평하는 것을 들었다. 그는 천사들은 자기들의 생각이 자신들을 일으켜 세우지 않는 분위기에서는 숨을 쉬지 못함을 발견했다. 그리고 그는 마음과 몸 양쪽에 자양분을 공급하는 상큼한 과일이 선행(charity)임을 보았다
우리가 내가 사랑했던 누군가가 가있는 보이지 않는 저 세계의 색깔있는 세부도를 가지는 것에 환호할 사람들을 머리에 떠올려 볼 때, 그들의 의문 많은 심정을 만족하게 해야 하는 것이 나의 거룩한 의무임은 분명하다. 175년 전, 잘 훈련된 과학자가 자기 진로에 대한 어머니의 소망과는 무관하게, 또한 자기의 기대와 계획과는 정반대되는 쪽에서 홀연히 일어났고, 자신이 선각자임도 발견했다. 그는 자신에게 아무런 이익도 주지 않는데도 영적 우주와 뚜렷하게 접촉했던 것의 상세한 내용을 27권의 두툼한 팔절판으로 제본하여 세상에 주었다. 그는 자기 주장에 직바로 섰고 세상 부귀나 명예는 뒤로 밀치고, 단순하게 살면서, 모든 그의 저작물들을 인쇄하여 겸손하나 위엄을 갖춘 태도로 그 책들을 나누어 주었다. 그는 자기가 했고 말했던 모든 것을 고찰하면서 침착함도 유지해갔다. 그는 초자연적 같은 상태로 야기되는 어떤 흥분이나 자극, 열정에 의해 괴로워 했던 어떤 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귀납적으로 생각하는 습관을 견지했고, 어떤 감각적 진리들을 부인하지 않았으며, 대수롭지 않은 것을 놓고 기뻐하는 친구의 모습에 냉소하지 않았다. 그는 자기의 사명이 제아무리 비틀거리는 걸음 자세 같을지라도 일상 생활에서 자기의 도움이 필요한 경우 즉각 그 요구에 응답했다. 그가 임종할 때, 그는 자기가 쓴 모든 것이 엄밀히 진리인가, 혹은 제외했으면 하는 대목이 있는지를 질문받았을 때, 그는 확고하고 정다운 어조로 이렇게 응답했다. “나는 진리만을 썼다. 아마 당신이 주님께 더 가까이 있으려 노력하고, 그분만을 진실로 섬기고, 모든 종류의 악들을 그분에 반대되는 죄로서 금하면서, 그분의 말씀을 열심히 찾는다면 이후 당신의 생애 내내 내 말이 진리임을 더 확증하게 될 것이다. 그분의 말씀은 처음부터 끝까지 내가 세상에 전달하는 교리 속의 진리에 논의의 여지가 없는 증거를 낳게 할 것이다.”

v

하느님은 어떤 분이신가?

신성한 말씀의 빛에 의해 안내된 스웨덴볽은 본질과 인물 측면에서 하느님의 단일성을 보았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는 지상에서 인간을 입으신 하느님이시고, 성령은 선인 것과 복된 것을 창조하고 유지하는 무한한 힘이다. 이 진리는 건전한 모든 기독교의 가르침의 중심이다. 그리고 이 진리를 명료하게 지각하지 않으면, 성경은 합리적으로 설명되어질 수 없다. (따라서 이 진리를 깨닫게 되는) 누군가는 지금까지 수세기 동안 수백만도 넘는 심정들이 동경해왔던 아름다운 인품-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함이 없이 오히려 무한하게 드높이면서 한분 하느님을 즐겁게 흠모할 수 있다.

모든 사람은 인간 형체,
그가 이교도이든, 터키인이든, 또는 유대인이든
사랑하여야만 한다.
자비, 사랑, 그리고 동정이 살고 있는 곳
거기에 하느님 역시 살고 계신다.

위와 같은 주님에 관한 개념에 의해 영감받아 누리는 기쁨은 따뜻함, 빛, 활동이라는 세 겹의 영광을 지닌 태양과 비슷하다. 또는 누군가가 영혼과 마음, 몸의 행복한 균형으로 이룬 아름다운 인간 존재를 바라보고 만족해 하는 것과도 견주어 볼 수 있다. 혹은 씨가 발아해서 꽃을, 그리고 꽃에서 감미로운 열매로 되는 연속의 완전함과도 비교 생각해 볼 수 있다. 이 개념은 모든 것들의 본성에 얼마나 꼭 들어맞는지…얼마나 이해가 쉬운지…얼마나 온전한지…! 그렇지만 이 개념이 심어지고 자라며 풍성해지기까지 스웨덴볽의 수고는 얼마나 컷을까! 우선 그는 삼위일체에 관한 널리 퍼진 이론과 믿음만으로 의로워진다는 “칭의관”이 야기하는 논쟁과 추론이라는 거대한 장애물을 뿌리째 뽑아냈다. 이는 마치 후렌시스 베이컨(Francis Bacon)이 연역적 추리라는 학자들의 방식을 자연을 직접 관찰함이라는 것으로 대체한 것과 같다. 실로 스웨덴볽과 베이컨, 그들 모두 영원히 있는 진리의 부름에 순종했다. 그들 모두 새 시대 속에서 맞는 곤경과 고독함에 자신을 내맡겼다. 그들은 다가오는 세대들을 위해 더 신뢰되고 확고할 수 있는 안내서를 제공한다는 희망을 가지고 그 당시 다수의 지지를 받는 의견이 내뱉는 적대 행위에 홀연히 맞서 자신들의 의견들을 떠받혔다. 그들은 “대중이 가장 애호하는 교리들은 말다툼을 즐기는 것이나 툭하면 싸우는 것, 혹은 허울좋은 것이나 텅빈 것들” 임을 발견했다. 동시에 “가장 지력있다는 자는 그 시대나 그 당시 대중의 판단에 동조함으로 명성을 끌어내는 쉬운 방식을 좋아하는 자들”임도 알았다.
베이컨과 더불어 스웨덴볽 역시 이렇게 말할 수 있었다. “이 퇴보된 학문 종류(연역법)는 주로 대학 교수들 사이에서 군림했었다. 이 학교 선생들은 날카롭고 강한 지력과 풍부한 여가 시간을 즐긴 자들이나 그들이 확보한 학문 재료는 부피로도 많지 않았다. 그런데 이 적은 부피의 학문 재료에 갖은 지력을 다 쏟았다. 이제 그들은 자기들 책들에 존재하는 땀흘린 학문의 거미줄을 우리에게 이야기하고 있다.”
스웨덴볽이 제공한 하느님의 통일성에 관한 새로운 생각들이 귀중한 이유는 이 생각이 말씀을 잘못 읽어 비롯되는 성경 글자로부터의 불쾌함, 그리고 과격한 사람이 그분에게 인간 속성을 덮어씌우는 방식으로 세운 신론에서 진짜 신위(Deity)를 식별하는 통찰력을 주기 때문이다. 아래 인용문은 그의 “진실된 기독 종교”로부터 추출하였는데, 이 글은 얼마나 그가 더 고상한 신앙으로 위 같은 비기독교도의 개념을 대신하려 노력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하느님은 전능하시다. 그 이유는 그분은 그분 자신으로부터 모든 능력을 가지시고, 그 외 사람들은 그분으로부터 능력을 가지기 때문이다. 그분의 능력과 그분의 의지는 하나이다. 그분은 선인 것 외에는 어떤 것도 뜻하지 아니하시기 때문에 선인 것 외에는 어떤 것도 하실 수 없다. 영계에서 그분의 의지에 반대되는 것을 할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다; 이것을 그들은 능력과 의지가 하나이신 하느님으로부터 획득한다. 또한 하느님은 선 자체이시다; 그러므로 그분이 선을 행하시는 동안, 그분은 그분 자신 안에 계시고 그분 자신으로부터 떠나가실 수 없다. 이로부터 명백한 것은 그분의 전능은 선이 확장되는 영역 내에서 진행되고 작용하는데, 이것은 무한이다.”
“하느님이 누군가를 정죄 하실 수 있고, 누군가를 저주하시고, 누군가를 지옥으로 던지시고, 누군가의 영혼은 영원히 죽어야 한다고 미리 예정하시고, 상해자에게 되갚고, 화내고 벌 주실 수 있다 라고 생각하고, 믿고 나아가 가르치는 것은 얼마나 황당한지 명백해질 것이다. 그 이유가 그분은 인간으로부터 그분의 얼굴을 돌리시는 것, 또는 엄한 얼굴로 그를 쳐다보는 것 조차 하실 수 없으신 분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이런 의견이 대세를 이루고 있다. 하느님의 전능은 마치 세상에서 자기가 뜻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자기 좋을대로 할 수 있는 왕의 절대적 권력이 죄를 면제하기도하고, 정죄도 하고, 죄지은 자를 무고한 자로 만들고, 신뢰못할 자를 신뢰할 자로 선포하고, 무가치한 자를 높이 추켜세우고, 당연히 상받을만한 자 위에 당연히 상받지 않아야 할 자를 내세우는 왕의 권세; 그 뿐만이 아니라 무슨 핑계든 만들어 자기 신하들의 물품을 뺏고, 심지어 그를 죽음에 처하게 하는 왕의 권세와 같다고 말한다. 신성한 전능에 관련하여 있는 위 같은 불합리한 의견, 신앙, 교리로부터 이에 맞먹는 많은 거짓들, 오류들, 그리고
흉측한 망상들이 교회 안으로 흘러들었고, 그만큼 교회 안에는 신앙 문제들, 신앙 갈래들, 신앙 분열이 돌출되어졌다. 어쩌면 이런 오류와 망상이 큰 호수로부터 항아리들에 물을 채우듯 철철 넘치고 있을지 모르고, 어쩌면 아라비아 사막에서 구멍으로부터 기어나와 햇볕에 몸을 녹이는 뱀들 보다 더 많을지 모른다. 이런 오류나 망상은 전능과 믿음, 이 두 단어밖에 더 중요한 단어는 없었다. 설교나 신앙 강연은 사람들 앞에서 육체의 감각들에 발생하는 추측과 우화와 하찮은 이야기들로 채워지고 있다. 그런 이유가 이성이 전능과 믿음이라는 단어 모두로부터 추방되어졌기 때문이다; 이렇게 이성이 추방되어지면, 인간의 생각은 자기 머리 위를 나는 새의 이성보다 과연 얼마나 더 수준이 높을까?”
그러나 스웨덴볽의 가르침들은 맑게 개인 하늘 아래서는 산 정상을 볼 수 있듯 우리의 생각을 들어 올린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신성한 존재의 본성은 사랑과 지혜와 누군가에게 쓸모 있음(use)이다는 것, 그리고 그분은 어느 때이든 누군가를 향해서이든 그분의 태도를 결코 바꾸지 않으시는 분이다는 것을 지각할 수 있다. 모든 사람들이 모두 다 좋은 사람이 되어질 수 없는데, 그 이유는 당사자가 자기 개선에 무능하기 때문임도 알게 된다. 어떤 사람은 하느님을 결코 발견할 수 없다. 자신만에 생각을 꾸준히 집중시키는 사람은 선견(vision)을 결코 가져 보지 못한다. 이들의 영혼은 자기 주위에서 홍수 같이 일어나 자기 수준을 초과해 휩쓰는 실질적인 것(materiality)에 깊이 빠져 있다. 이들은 자기들 같이 어두운 물 속에서 허우적대는 사람밖에 보이는 것이 없다. 이들은 자신을 구원하는 것 또는 누군가를 돕는 것에 무관심하다. 그러나 스웨덴볽의 책들을 통하여 모든 사람은 모든 인간 존재를 포옹하는 영원한 사랑의 형상을 빛나게 하고, 더 깊은 죄로 빠지려는 자신을 억제하려 노력한다. 이사야서에서 주님이 “귀머거리요 소경이시다”라고 불리운 이유는 그분은 인간의 죄를 보지 않은 듯 계시기 때문이라 설명한다; 그 이유가 그분은 자기의 자녀를 꺽거나 징벌하시지 않고, 그들이 그분께 협력하고 감화 받는 한, 그들을 살짝이 구부려 방향을 바꿀 수 있게 해주시는 분이기 때문이다.
이 시대에서 혁명적이라 할 수 있는 또 다른 교리가 있다. 지옥에 보내기로 예정됨 따위는 없다는 것, 모든 사람은 천국을 위해 태어난다는 것, 마치 씨가 꽃이 되기 위해 태어나듯, 작은 개똥지빠귀가 노래하는 새가 되도록 작정되어 있듯, 물론 이 모두가 생명의 법칙에 순종한다는 조건에서 임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말을 바꾸어 보면, 모든 이는 구원의 섭리 속에 있어 왔다는 것, 모든 이는 거듭나질 수 있다는 것, 그리고 만일 그가 천국으로부터 떠나 자신을 생각하고 살고 있다면 이는 그의 과오 이다는 것, 그럼에도 그가 고귀한 생각을 생각할 때마다 그는 그곳으로에 가고 있다; 그리고 그가 타인을 섬기는데에서 행복을 즐길 때 그는 거기에 머물고 있다 등등이다.
혹자는 다윈(Darwin)이 천국과 지옥에 관련하여 웃음거리를 만들었다고 말했었다; 그러나 스웨덴볽의 저술에서 천국과 지옥은 웃음거리라는 단어와는 하등 관계가 없다. 이것은 인간 당사자가 죄를 지을 수 있고 동시에 양심의 가책을 느낄 수 있는 한 천국과 지옥이라는 주제가 제 삼자의 견해 수준으로 밀려나는 일은 결코 없다. 그의 저술을 통해 우리는 중세기 식의 지옥은 없다는 것을 배운다; 그러나 악을 스스로 확증하여 사랑하는 자, 자기 심정에서 하느님을 고집적으로 부인하는 자가 가야하는 정신적 지옥이 있다. 이들이 글자 그대로의 불 속으로 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이들이 자신들을 너무 심하게 벌할 때, 하느님께서는 양심의 번민 조차도 거두어 가신다. 이렇게 조치를 취해주시므로 해서 이들은 천국적 느낌의 상태들 안으로 자신들을 놓도록 강제 당하는 일은 결코 없게 된다. 다시 말해 이들은 천국적 기쁨으로는 숨막힐 뿐이고, 자기들이 가진 유일한 쾌락들을 강도 당했다고 아우성이다. 오로지 이들은 지배욕과 이기적 본능들로 “불타고” 있다. 이들은 올빼미나 박쥐 같이 자기들이 생각하는 것을 보고 있다. 이들은 토론하고 소송하고 싸운다; 이들은 마술을 끝도 없이 실시하여 “가짜를 만들어” 내고 있다. 이들은 공기와 음식을 위해 고되게 노동해야만 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래서 그들 중 어떤 자는 언제나 나무를 자르고 풀을 깍기만 하고 있다. 그 이유가 지상에서 이들은 보상을 위해 대단히 맹렬하게 일했기 때문이다. 구두쇠들은 자기들 심정에 상상의 돈자루를 꼭 껴안고 있다. 싸이렌(Siren, 바다의 요정)들은 자기들의 천한 모습을 미화하려 고통스럽게 애쓰며 석탄불의 침침한 빛에서 비쳐진 자기들의 형상을 즐기고 있다. 사기꾼들의 각 파들은 저마다 다른 사기파의 약점을 찌를 수 있다하여 온갖 재주를 다 발휘하면서, 적수에 대한 불길 같은 쾌락이 그들의 상처 있는 얼굴에서 소름끼치게 빛을 내고 있다. 잔인하고 어리석은 의견들을 집요하게 붙잡고 있는 그들은 자기들의 백치같은 성질과 바보같은 영혼에 시간가는 줄도 모르고 지꺼린다. 이들이 쓸데 없는 자기들의 노력 끝에 녹초가 되면, 모든 악귀, 땅신령, 마법사, 강도들은 손을 잡고 춤을 춘다. 마치 열병을 앓는 꿈인 미친 몽상이다.
위와 같은 불행한 존재들이라 해도 주님으로부터 경멸 받거나 주님께서 방치해두시지는 않는다. 그분은 그들을 외적인 질서에 데려다 놓는다. 그리고 그들이 자기들의 애착에 의해 인도함이 가능할 수 있는 한, 그분은 자기만을 위함이 타인을 위함 속에 있어지도록 그들을 유도해보신다. 사람들은 자기가 선택해야 하는 것이 선일 뿐 아니라 피해야 할 것이 악임도 보게 하신다. 이들이 숭고한 목적인 공적인 복지 보다 오히려 명성과 영예에 관심을 둘 때 그들 안에 있는 야망의 불을 살아있게 해두신다. 빛의 자녀들이 한 사람이든 다수에 의해서이든 압제의 모든 형태와 야수같은 세력에 맞서 인간성을 수호하려는 것을 돕겠다면 필시 배워야만 하는 진리를 이들은 불쾌한 진리들이라고 자기들 마음을 날카롭게 세운다. 최악의 악마들 조차도 그분만이 자기들 가까이 계시고, 자기들의 어리석음을 잘 배려해주는 신성한 은총을 가지신 것을 억지로 부인하면서도 그분을 향해 느껴지는 매혹적인 감각 만큼은 결코 피해갈 수 없다. 자기 동료가 바보요 악행자라고 격분하는 누군가가 있다면 설사 자기의 의로움을 증거까지 들이댈 수 있다해도 격분만큼은 하지 않게 자신을 경계해야 할 것이다. 진실로 발잨(Balzac)이 이렇게 주장했다. “하느님은 온유한 영혼들이 어쩌다 저지른 죄를 벌하시기 위해 원수 갚는 식의 잔인한 방법으로 영원토록 복수하신다는 비난으로부터 하느님이 빠져 나올 기틀을 스웨덴볽이 제공하였다.”
스웨덴볽의 모든 증거에 따르면, 사후 우리는 이 장소 저 장소를 가는 여행자 같이, 갖가지의 흥미있는 대상에 친해지고, 여러 종류의 사람들을 만나고 도중에 각 개인으로부터 뭔가를 받기도 한다고 한다. 우리는 관찰하고, 판단하고, 비평하고, 그리고 지혜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의 말들을 듣기도 한다. 우리는 의견을 내놓기도 하고 , 타인의 의견을 챙겨 가서 우리의 정신적 도가니에서 그것을 걸러내고 테스트도 한다. 각각의 새로운 경험으로부터 우리는 지식의 더 세련된 종류와 모든 것의 자산인 더 진실된 지적 개념을 추출한다. 지상에서 인간은 비록 홀로는 아니지만 어쨌든 서로 떨어져 있다. 그리고 누군가가 아주 경이로운 생각들을 지녔다 하더라도 듣는 자가 없기에 결코 말해지지 않기도 한다. 그러나 저세상은 이와 많이 다르다. 모든 자는 함께 살고, 함께 배운다. 모든 영의 존재들은 좋은 존재이든 나쁜 존재이든 마음(mind)들이다. 그래서 그들은 지상의 경우 납득하는데 오랜 시간이 요구되는 많은 부피의 생각들도 즉각적으로 서로 교통한다. 그리고 앞쪽으로 더 여행해서 자기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동무들을 선택하고, 흥미를 더하고 더 슬기로워지고 더 분별력 있어지고 더 행복해져 간다. 죽어야 할 운명이라는 자연적 수준의 사실들에 의해 영혼의 날개가 부러진 이들에게 위와 같은 전망이 열려 있다는 것은 그 얼마나 대단한지! 드높은 우정 관계와 생명 있는 교제에 굶주린 이들에게 위 전망은 그 얼마나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위로가 되는지! 내가 믿는 바, 천국에서도 지상에서와 같이 우정은 꾸준히 지속됨에 의해서, 또는 바뀌기도 함에 의해서 지탱해간다. 그 이유가 의식의 분야에 들어가는 생각이나 정서를 다양해지게 하고 생기를 주는 것이 우정의 본성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닮은 것에는 관심을 많이 두려하고 나와 다른 것에는 소홀히 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천국에서, 때로는 여기 우리 사이에서도 영혼이 비슷한 친구들은 마치 태양의 떠오름에 있는 다양해지고 아름다운 색깔들 같이 서로를 차감계산하거나 메워 보충하기도 한다. 그들은 서로가 서로를 발견하고, 그들 안에 있는 최선의 것을 주고 받는다. 우리의 친지들이 유아 시절의 우리의 몸을 먹이고 입힐 때 같이 서로의 영혼을 위해 일한다. 나는 내 경험으로부터 위 내용을 실감하여 가져 보았던 놀라운 느낌이 있다. 나는 과거 어둠과 침묵으로 대부분의 사람들로부터 감추어져 있게 되고 말았던 내 안에서 접히어 포개져 있었던 가능성의 선각자로 내 선생님과의 우정 관계를 만들었던 매우 드문 행복한 사람이다. 나와 선생님과의 생활에는 너무나 사랑스러웠던 대목이 있다. 이것들은 땅을 초월하여, 우리를 위해 천국에서 미리 대기하고 있다. 영원 속의 것을 미리 맛봄이 나로 명확하게 해준 것은 항구적이고 모두를 포옹하는 봉사가 우정에 언제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성경은 말한다. 천국에서 우리는 “우리의 수고함으로부터 쉰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가 슬픔이나 실패나 시험을 통하여 자기의 구원을 성취해 평화와 순진의 안식에 도달한 경우일 때를 뜻할 뿐이다. 우리가 쉬게 된다는 그 “수고함들”은 육체 속의 장애물, 빵이나 옷, 안식처, 전쟁을 위한 투쟁, 그리고 소득과 권력을 위해 서로 물리쳐 이기려는 더러운 술책들 등등이다. 그러나 영광스러운 일의 거대한 분야와 서로가 지지 않으려고 열심을 내는 것과 끝이 없는 흥미가 이 세상에서 몇 개의 일에만 충실했던 우리 모두를 기다리고 있다. 천국은 유용함(use)의 왕국이라 부르기도 하는데 이곳에서의 직종은 실로 방대해서 여기서 일일이 열거할 수는 없다; 그 이유가 그것들은 무한하게 다양하기 때문이다. 몇 가지라도 말해보자. 이타심 강한 부모같은 사랑을 지닌 이들은 세상으로부터 온 어린아이들을 양자로 삼고 돌본다. 어떤 이는 소년소녀들을 가르치고 있다. 또 어떤 이는 배우기를 원하는 단순하고 진지한 사람에게 가르침을 주고 있다. 이방 국가의 모든 이는 그들이 지녔던 한정된 믿음들을 확대하고 더 세련되도록 새 진리들로 가르쳐진다. 죽음을 통하여 참 생명으로 일어나는 모든 이 각각을 돌보는 특별한 사회도 있다. 이 사회는 영들의 중간 영역으로 오는 신입자를 불친절한 악령들로부터 방어해주고, 지옥에 거주하는 이들을 제압하면서 계속 안내를 맡고, 서로의 아귀다툼으로부터 그들을 보호해주어 가능한 한 신입자가 비참함을 덜 느끼게 해준다. 모든 인간 존재들은 자연계와 영적 왕국에 동시에 살기 때문에 천사들은 각 사회로부터의 인간을 지키기 위해 뽑혀지고, 천사들은 인간의 욕망과 생각의 나쁜 습관을 조금씩 거두어지게 하고 어두운 행위를 사랑했었던 것으로부터 빛의 행위의 기쁨 안으로 부드럽게 돌아설 수 있도록 한다. 그러나 오로지 인간 안의 내키지 않는 자세는 천사들이 사랑하여 섬기는 일을 제지하려든다. 그런 상황에서 조차도 천사들은 인내와 확고한 신앙이 있어 그들에게 되돌아 간다. 이 천사들이야 말로 신성한 충성스러움의 형상이요 그분의 메신저 아닐까? 이 천사들은 누군가의 과오를 거의 보지 않으며 더욱이 그 결점을 깊이 논하지도 않는다. 그대신 이 천사들은 마음 속의 아름다움들을 연구하고 반대 경향까지 선으로 해석해보려 한다. 이런 그들의 재능을 밀접하게 따라붙음으로 천사들이 되어져가는 남자와 여자는 계속적으로 더 고상한 업무를 담당하고, 그럴 때마다 있게 되는 새로운 상태는 그들에게 새 힘의 유입을 가져온다. 이것이 주님에 의한 약속, “충분히 채우고 흔들어 채우고, 눌러 담고, 넘치게 담아서” 라는 구절에 해당된다. 금빛의 하프들과 끝이 없는 찬양의 노래들 같은 말씀의 표현은 (성서 조소론자에게) 반대 논평을 불러 일으키는 근거를 제공했고, 게으른 성인들이라는 이런 바람직하지 못한 인상까지 주었지만 이는 그림으로 나타난 외관일 뿐, 천사의 일이 더 아름다워지고 더 만족스러워질 때 심정이 기쁨으로 부드럽게 수금을 연주하고 노래하는 것을 뜻한다.
이렇게 스웨덴볽의 가르침의 빛으로 볼 때, 천국의 삶은 진실된 인간의 삶이다. 그래서 거기에는 모든 종류의 봉사, 가사일, 시민적, 사회적 일, 그리고 영감된 일 등등이 수행되고 그로 인해 즐거워하고도 있다.
우리에게 통보되는 것이 있다. 세 부류의 천사들이 있다는 것이다. 첫 번째 부류의 주요한 흥미는 지식과 실제적 일, 즉 지옥의 침입에 맞서 천국의 전진 기지를 보호한다. 둘째 부류는 새 사상을 철학적으로 다루고 시작을 하게 하는 이들이다. 셋째는 추론이 필요 없다, 그 이유는 그들은 타인을 느낌으로 알 수 있고 그 사람의 위치에 자신들을 놓되 지각의 힘과 빠르고 직접적으로 그 사람을 위해 행동한다. 이 마지막 째의 부류가 무화과 나무에 비교된다. 이 나무는 꽃 피는 것을 중단하지 않는 바 그것의 잎을 내고 동시에 열매 맺는다. 그곳에서 똑같은 자는 아무도 없다. 그러므로 무수한 그룹들과 사회들이 있다. 그런데 거기에는 한 개의 천국이 있을 뿐이다. 또는 천국은 하나이다. 이는 인간의 몸이 수많은 세포나 기관, 수족, 혈관, 신경 내지 섬유 등등으로 구성되나 하나인 것과 같다. 보다 작은 모든 목적들은 공통의 선에 종속되어진다. 한마디로 모든 영광, 모든 이상향, 모든 높은 바램-가장 고상한 마음들의 꿈들이 귀에 속삭였었던 모든 것, 그리고 미처 생각에도 없었던 무한하게 많은 가능성들이 불멸의 영원한 햇빛에서 실질적인 실체가 되어간다.
천국에서 우리는 여인의 아름다움, 남자의 건장함, 섹스(sex)들 사이에 있는 이기심 없는 사랑, 아이들이 장난치는 것, 교우관계의 기쁨, 그리고 위로함과 감동함의 절묘한 감촉의 생생한 힘 등도 발견하게 된다.
모든 물질적 한계로부터 자유해져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는 천국의 생활을 스웨덴볽이 명료하고 권위있게 밝혀주는 것이 참말일진대 우리는 한걸음 더 나아가 거기서의 교육 목적에 대한 뚜렸한 생각을 가질 수 있다. 천국의 세계는 영체로 옷입혀진 영혼들의 방대한 왕국이고, 모든 이들은 하나의 장대한 선용함 안에서 상호관계를 가지는 바, 함께 묶여 있는 셈이다. 거기에는 자신의 더 높은 발달, 그럼으로해서 모든 이의 더 큰 선을 위한 가능성이나 흥미, 그리고 발달을 위한 특별한 종류의 지식을 가지지 않은 사람은 그 많은 무리들 중에 단하나의 개개인도 없다. 그들은 이런 발달을 서로서로에게 의존하는 한편, 각각의 존재는 자기 고유의 길에서 더 완전하게 성장한다. 그리하여 자신에게 더욱 많이 수여된 행복에 더 응답하여간다.
만일 우리가 지상의 생활을 지적으로 검사한다면, 천국을 규율하는 선용의 법칙이 지상에서도 똑같이 규율하고 있음을 발견할 것이다. 과학이 우리를 가르치는 바, 몸의 각각의 부분은 각각 다른 부분의 복지를 위해 존재하게 한다는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자연 안으로도 위와 꼭같은 법칙을 불어 넣어 두셨다. 광물 왕국은 연합하여 식물이 지탱하는 것을 섬긴다. 식물은 인간에게 생명을 준다. 그리고 광물, 식물 둘 다는 인류를 섬긴다. 각자가 모두에게 그리고 모두가 각각에게 유익을 주는 이 법칙은 인간의 생활을 규율하도록 되어 있다. 많은 사람들이 이 법칙을 악용해서 타인의 두뇌와 수고함으로 살고 있다; 그러나 빠르던 늦던 응보가 그들 뒤를 따라 간다. 그리고 그들은 일반인의 복리 증진이라는 선함의 제단에 섬김의 제물을 놓아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가치있는 인간의 대열로부터 낙오되어야 할 것이다. 이 섬김의 제물은 세 가지 방법, 즉 손으로, 지성으로, 그리고 우리의 정서적이면서 미적 능력을 가지고 제공되어야 할 것이다.
물론 우리가 사람을 주관적으로 관조한다면, 경우가 달라질지 모른다. 어떤 인물은 자기의 사용의 법칙을 그의 이기심으로 말미암아 망쳐놓는다; 그러나 그런 사람에게도 남아있게 되는 사실은 있다. 즉 객관적 차원에서, 우리의 전체 생활과 그 주변환경은 사용의 법칙을 가르친다는 것, 그리고 이 법칙이야말로 우리가 우리의 적절한 이상향을 현실화하는데 최선의 가능한 수단이라는 것이다. 우리의 안내자 되는 이 법칙을 어떻게 사용하느냐의 방법은 배워야 할 것이다. 예를 들면, 우리는 각자의 취미와 만족감을 채우면서도 자기 외 많은 사람의 선에 하모니를 이루는 특별한 활동을 선택하는 것이다. 그런다음 각자는 사용의 법칙 속의 영원한 삶 안에 자기의 자리가 있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이것은 아마 이세상 또는 저세상 모두에서 살아가는 제대로된 방법일 것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교육 형태, 그리고 사려 깊은 사람들이 지금 재촉하는 것은 이 사용의 법칙의 좋음을 잘 이해하도록 우리를 도와주는 것, 그 법칙에 우리 자신이 익숙해지게 하고, 이 법칙에 맞는 우리의 할 일을 선택하는 것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교육 체계는 이러할지 모른다. 즉 우리 주변을 에워싼 다양한 사용 법칙의 모든 것을 가능한 한 모두 가르치는 것, 동시에 실제적 차원과 정신적 차원, 그리고 우리가 돌려주어야 할 영적 섬김들 사이의 차이점을 보여 주어야 할 것이다. 그 뒤 각자는 자신을 매우 강력하게 끌어 당기는 업무를 선택하여 밀고 가는 것이다.
우리 생활의 모형으로 천국의 생활을 스웨덴볽이 내세우는 이유는 천국의 생활이 지상의 교육을 위해 일하기 때문이다. 항간에서 늘 말한 것은, 우리는 천국을 위해 준비하도록 지상에 주어졌다는 것이다. 이를 한바퀴 돌려 말하면 이런 진리도 발견된다. 즉 우리에게는 지상에서의 더 나은 삶을 영위하도록 천국에 관한 지식이 주어진 것이다. 아름다운 환상이 나사렛 동네의 일터 안으로 와야만 한다. 나는 스웨덴볽이 천국에서 어린이를 가르치는 것에 대해 말한 것이 지상의 학교들을 위해서도 적합하다고 말하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거기서 어린이들은 주로 “표현물”을 수단으로 가르쳐지고 있다. 더 설명하면 가르치는 도구는 그림이나 교훈적인 연극, 그들이 방문하는 풍경 등으로 이것은 예증과 실예를 수단으로 가르치는 셈이다. 그들은 서로 돕는 일 중 자기가 가장 좋아하는 것을 선택하고 그 일을 위하여 교육도 받도록 인도된다. 어쩌면 이 방법은 근대의 교수법이 지향해야 하는 목표가 아닐까 싶다. 우연히 나 역시 이와 유사한 교육 방법으로 지식을 쌓고 성취감을 맛보아 행복했었다고 회상된다. 더 나아가 이 방법을 수정 보완한다면 일반적 교수 방법에도 커다란 효용이 있을 것으로 확신한다.
내가 어렵지 않게 믿을 수 있었던 것이 있다. 저세상에서 눈으로 보고 만져서 알 수 있는 현상은 그곳의 거주민들의 정신적 상태가 직접 체현된 것이다고 스웨덴볽이 우리에게 알려준 대목이다. 우리가 근본이 되고 필수적인 의미가 이해되지 않으면 천국의 가장 경이로운 광휘를 아는 것이 별 소용이 없다는 것이다. 게다가 이런 사항은 지상의 육체와 내적 자아가 분리된다는 것을 느끼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이해가 쉽지 않다는 것도 나는 알고 있다. 중간 영계는 그가 잘 아는 사물과 그에게는 너무나 신기하여서 알 수 없는 사물이 뒤섞여 있다. 그래서 거기는 새로운 언어를 배우는 것 같고 또 언어가 표현하는 기초되는 많은 사실들을 습득하는 것 같은 모양이기도 하다.
누군가가 소름끼치는 꿈을 꾸며 자다가 깨어났을 때 무엇이 그에게 달콤한 편안함을 줄까? 아마도 사랑하는 이의 웃는 얼굴이 깨어나는 자기를 바라볼 경우일 것이다. 나는 이와 같은 상황이 지상에서 잠들고 천국에서 깨어날 때와 거의 같을 것이라고 강력히 믿고 싶다. 또한 내가 “잃어버린” 사랑하는 나의 친구 하나하나가 나로 하여금 이 세계와 아침의 저쪽 더 행복한 땅 사이를 연결 가능하게 하는 고리들이라고 믿는 내 신앙은 흔들려 본 적이 결코 없다. 한순간이긴 하지만 어쨌든 나는 그들의 손의 감촉을 느끼기를 중단하거나 그들로부터의 상냥스런 말 듣기를 중단할 경우 내 영혼은 슬픔과 더불어 고개를 떨군다; 그러나 내 신앙의 빛은 내 창공으로부터 흐릿해지는 일은 결코 없다. 그리고 나는 다시 용기를 내어 “잃은” 내 친구들이 자유한 것에 즐거워한다. 나는 누군가가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을 이해할 수 없다. 여기서의 삶은 죽음 보다 더 잔인하다-삶 속에는 사람 사이를 쪼개지게 하는 것도 있고 이간질도 있게 한다. 그 반면 죽음은 실제로는 영원한 삶이고, 다시 합쳐지고 재회하게 해준다. 내가 믿는 바, 내 육체의 눈 속의 눈은 다가 올 세계에서 열릴 것이라고…나는 내 심정의 나라에서 의식하는 생활을 단순하게 꾸려 가리라는 것이다. 내 확고부동한 생각은 지상의 일시적인 것을 보고 말하는 물질의 눈을 거슬러 물질 세계 너머에 있는 시야를 뒤따르고저 일어나고 있다. 이미 가서 있는 내 사랑하는 사람이 살아 있다는 한 가지 사실에 반대할 이유가 많이 있다고 상상해보라. 그러나 그것은 상관없지 않는가? 나는 내 의심함들이 먼저 간 영혼들을 슬프게 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실수라는 위험과 한 개의 주장만을 택하고 싶다. 내 택함이 맞는지 틀렸는지는 나중에 파악될 것이다. 불멸함이라는 한 가지 진리가 있기에 나는 나를 떠난 사람의 기쁨 위에 의구심이라는 그림자를 드리우지 않으려 노력할 것이다. 이곳에서 아래쪽을 더듬거리는 사람과 하느님의 빛에서 진실로 보기를 올바르게 배우는 사람 중 누가 더 많은 격려가 필요한지에 대해 나는 가끔은 궁금해 한다. 보이지도 않는 태양에서 그림자를 추측만 하는 사람에게 어둠은 실로 어떠할까? 지상의 마지막 순간까지 우리를 사랑해왔던 이들을 영적으로 접촉하는 노력은 그 얼마나 가치있는가! 확실한 것이 있다. 우리가 어떤 고귀한 애착이나 순수한 기쁨에 의해 접촉될 때, 우리는 죽은 사람을 아주 부드럽게 회상하고, 그들에게 강력하게 빨려드는 경험의 아주 달콤함이다. 신앙을 항상 이와같이 의식함은 죽어야 할 운명의 얼굴을 바꿀 수 있는 힘을 가지게 되고, 불운과 싸워 이긴다. 그리고 그들로부터 거두어진듯 여겨지는 기쁨을 계속 지지하는 이들을 위해 용기의 횃불을 제공한다. 우리가 천국은 우리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있다는 것에 확신이 있을 경우, 저 세상이 “또다른 세상임” 같은 생각은 사그라든다. 우리가 아주 많이 주장해야 하는 것은 오로지 행동하는 것, 사랑하는 것, 소망에 소망을 더해가는 것, 그리고 우리 주위의 어둠을 우리 속에 내재하는 천국의 아름다운 색깔로 물들여 가자는 것이다. 특히 지금, 이곳에서 말이다
나는 험프리 다뷔(Humphrey Davy)경의 말을 감동을 가지고 읽었다. 그에게서 과학과 신앙과 이타심은 놀랄만한 수준에서 결합되고 있다: “나는 타인들에 있는 수준 높은 지성과 마음의 품질을 부러워하지 않는다; 그들의 천부적 재능, 능력, 지력, 공상력도 부러워 하지 않는다. 그러나 만일 나더러 가장 기쁜 것, 그리고 나에게 가장 유용하다고 믿어지는 것을 선택하라고 한다면, 나는 어떤 다른 축복 조항보다 확고한 종교적 신앙을 선택할 것이다; 그 이유가 확고한 신앙은 삶을 선량해지게 하는 훈련장으로 만들고, 지상의 모든 희망이 사라지려할 때 새 희망들을 창조하기 때문에, 그리고 부패와 존재의 파멸을 내던지고 모든 빛들의 가장 우아함을 드리우게 할 것이기 때문에, 죽음에서 조차도 생명을 일깨운다, 그리고 퇴폐와 부패로부터도 아름다움과 신성함을 상기시킨다; 시달림과 치욕이라는 도구를 낙원에로 승강하는 사다리로 만든다; 지상의 희망들의 모든 결합들 넘어의 먼 곳, 즉 쾌락주의자와 회의주의자가 어둑어둑하고, 부패하고, 전멸되어짐과 자포자기라 하는 곳으로부터 종려나무와 시들지 않는 꽃에 관한 가장 즐거운 환상, 복됨의 동산들, 영원히 지속되는 기쁨들이 보장되는 곳을 상기하도록 만든다.” 인류를 사랑하는 자, 고요하고 과학적인 사람인 험프리 다뷔씨의 강한 손을 내 손에서 느끼는 것은 마치 오순절 다락방의 경험 같다. 그는 자기 생각을 후원하는 조정자를 가지지 않았다. 그런데도 그는 옛 믿음들 속에서 많은 모순들을 보았다. 처음에 그는 가난한 가운데 고생하며 지내왔는데도 (돈을 벌 수 있는) 그의 발명품인 안전등을 세상에 무료로 주었다. 그도 자연적 존재 인지라 심한 고통을 느꼈다. 그럼에도 그는 하느님과의 흔들리지 않는 교제를 간직했다.
진실로 나는 어둠의 깊은 곳을 들여다 보았었다. 그리고 그것에 평행하는 영향력을 산출하는 것을 거절했다. 그보다 영 안에 있는 나는 아침을 걷는 이들 중의 하나이다. 인간 마음의 어둡고 낙심된 분위기가 가을의 마른 잎 만큼이나 두껍게 내 길에 깔린 것을 뜻밖에 마주친다면 어떠할까? 다른 사람이 내 앞서 그 길을 여행했다. 나는 사막이 하느님께로 인도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다시 말해 하느님께 가는데는 사막일지라도 푸르고 기운나게하는 들판과 열매 풍성히 열리는 과수원 만큼이나 확실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나 또한 심오하게 부끄러워해 왔고, 광대한 창조 사이에서 나의 보잘 것 없음도 실감하기도 했었다. 더 배울 수록 덜 생각하려 든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내가 내 감각-경험을 더 이해할 수록 내가 더 지각하는 것은 그 경험이 생명의 기초로서 부적당하고 부족하다는 것이다. 때로는 염세주의자와 낙천주의자의 견해의 요점이 아주 기술적으로 균형을 이루어 내 앞에 자리잡는 때가 있다. 이럴 경우 나는 영의 순전한 힘만을 수단으로 실제적이고 함께 살 수 있는 생활 철학을 꽉 붙잡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내 의지를 사용한다, 삶을 선택한다, 그리고 그것의 반대인 허무는 거절한다. 에드윈 맠햄(Edwin Markham)은 그의 시, “너의 선택을 손에 잡으라” 안에 서로 손가락질하는 분위기와 오늘날 주도권을 놓고 경쟁하는 두 다른 신념을 이렇게 오묘하게 써내려 갔다:

장미나무의 큰 가지에 따끔따끔 찌르는 가시가 있다:
우아한 백합은 습지에서 살아야만 한다;
나비의 색깔들은 한번 호흡함에서 소멸하고 있다:
도로의 끝에 죽음의 집이 있다.

아니다, 아니다! 가시에 우아한 장미가 있다;
강의 습지에서 백합이 바람에 날리고 있다;
나방도 잔디의 꽃 만큼 아름답다;
도로의 끝에 하느님께로 가는 문이 있다!

VI

생명은 사랑 속에 있다

종교는 하느님과 나의 관계, 그리고 동료되는 사람과 나의 관계, 그리고 내가 나에게 빚진 것 (나의 의무)에 관한 과학이라고 정의되어져 왔다. 기독교 신앙이 올바르게 이해되었다면, 이 종교는 사랑의 과학이다. 정녕 그렇다. 주님께서 육체의 눈으로도 볼 수 있는 지상에 거주 하셨을 때, 죽어야 할 운명들에게 이 두 계명을 선포하셨다. 즉 “하느님을 사랑하라와 이웃을 사랑하라”이다. 그리고 이 두 계명에 “모든 율법과 예언서가 매달려 있다”는 것도 말씀하셨다. 누가 신성한 사명으로 가득차 있었던 다정한 나사렛 사람 만큼이나 심오하게 성경을 알 수 있었을까? 그리고 위 성경 내용을 향한 모든 인간의 생각을 알 수 있었을까? 그분은 복음서 모두를 망라해 사랑은 신성하게 필요함을 강조하셨다. “하느님은 사랑이시다, 하느님은 사랑이시다, 하느님은 사랑이시다!”는 다음의 구절들에 대한 불변의 의미이다. “만일 네가 나를 사랑하면 내 계명을 지켜라”; “이것이 영원한 생명이니 유일한 참된 하느님, 그분이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너희가 아는 것이다”;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왕국과 그분의 정의를 추구하라, 그러면 이런 모든 것(물질과 물질적 복)이 네게 보태질 것이다”; “나는 길이고, 진리이고, 생명이다.” 그분께서는 미워함은 그것이 크든 작든, 모든 세세한 것에서이든 하느님에 반대되는 것임이 우리의 마음에 언제나 떠오르게 하셨다. 그리고 지옥은 하느님에 의한 벌의 차원에서가 아니라, 미워함이나 불타는 욕망과 상처난 교만의 잔인한 고통과 심술궂은 자기 본위 안으로 자신들을 던지는 이들에게 되돌아 오는 피할 수 없는 악의 법칙에 따른 결과이다가 주님의 교훈에 담긴 의미이다. 그분이 어느 각도에서 시작하셨든지 상관 없이, 그분은 다음 사실들로 되돌아 가셨다. 즉 그분이 세상의 재건축을 맡기신 대상은 재물이 아니고, 특권 계급도 아니고, 권력도 아니고, 학식도 아니었고, 그러나 인류의 더 나은 직관(instinct)에…-사람들의 더 고상한 이상향과 감정에…-의지의 운반자요 행동 속 동력의 힘인 사랑에 맡기셨다. 그분은 가능한 방법을 동원하시고 그분의 말씀도 여러 방식으로 말해오셨다. 그리고 의심자들에게 사랑은 선한 사랑이든, 악한 사랑이든 자기들 삶의 생명이다는 것, 자기들 생각 속의 연료이다는 것, 자기들 콧구멍 속의 숨이다는 것, 자기들의 천국 또는 파멸이다는 것, 등등을 확신하도록 모든 가능한 일을 해주셨다. 그분은 거룩한 분이시다 이든, 그분은 무시무시한 분이시다 이든, 그분은 최고이신 분이다 이든…그 무엇에 있어서나 사랑의 복음이심에는 어떤 수식어도 필요 없고 예외도 없다.
그럼에도 이 천 년 동안 소위 믿는 자들은 “하느님은 사랑이시다”를 반복해왔다. 그러나 자신들을 자극하는 힘을 느껴봄도, 이 짧은 문장 안에 포함된 진리의 보편성을 감지함도 없이 구호에 그친 것이다. 사람들이 인간의 생명에 관한 것을 사실 상의 문제로 여겨 철학적으로 연구를 시작한 이래 가장 고상한 주제인 “사랑이 생명이다”는 주제에는 불행하게 침묵이 있어 왔다. 그래서였는지 모르나 참으로 하느님이 그분 자신을 알게 하도록 어떻게 오셔야 했는지, 그러나 오신 그분 자신이 하느님 그분인 줄을 알지 못하는 비극이 초래되었다. 주 전 5세기경 원자론을 주창한 그맄의 철학자 엠피도클스(Empedocles)는 자기가 사랑의 본성을 이해하려 한 첫 번째 사람이라고 자각하고, 인간 각종 일에서 사랑의 진정한 위치를 인식하였다. 그는 세상이 구성된 요소들을 발견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리고 어떤 과정을 수단으로 각 요소들이 결합하고 있는지를 알려고 하였다. 그는 그 요소 목록이 불, 물, 땅, 공기라고 명명한 다음, 계속해서 말하기를, “그리고 그것들 사이 사이에 사랑이 있다. 그런데 사랑은 길이와 넓이가 같다. 너는 정신적 환상 안에 그녀를 고정해두고 멍청한 눈을 가지고 앉아 있지 마라. 죽을 운명의 부분들 안에 이식되어 있다고 생각된 그녀는 죽을 운명의 사람으로 쓸모 있는 것들을 생각하게 만들고, 우호적인 행위들을 행하게 한다 그들은 그녀를 기쁨(Joy)과 아프로디테(Aphrodite)라 부르고 있다. 죽을 운명은 그녀에게 없는데도 세상의 요소들 사이에서 관찰되고 있다.” 한 세기가 지나 그리스에서 철학의 가장 빛나는 시대에서 플라토의 혼은 엠피도클스의 말들로 말마암아 진한 의분이 지펴졌다. 그래서 그는 열띤 웅변으로 그 시대 지식층의 무정함에 맞서 이렇게 이의를 제기했다: “다른 신들은 그들의 영예로 만든 시나 찬양 노래를 가지고 있는데, 위대하고 영광되는 신, 사랑에게 예찬자가 없는 것은 이상하지 않는가! 현자들은 헤라클레스나 다른 영웅들의 미덕을 두고 긴 산문을 썼고, 소금의 유용함을 감동적 대화의 줄거리로 만들고, 하여 이런 저런 것들을 창조하는데 열의 있는 관심이 있어 왔다. 그럼에도 오늘까지 사랑의 찬미를 노래하고저 대담하게 시도한 자는 아무도 없다. 고로 이 위대한 신은 매우 등한시되어 왔다.” 나는 용기를 취급한 그의 강연인 운명(Lachesis) 안에 있는 것으로 기억하고 있는데 거기서 그는 말했다, 누군가에게 피해를 주는 것, 그 대상이 가장 천한 노예라 해도 그것은 하느님과 인간과 우정관계 안에 있는 것들을 결합시킨 거룩한 인연(bond)을 모욕하는것이다고 말했다. 그런다음 신성한 사랑의 음성은 그것의 메시지를 미워함에 무딘 인간의 귀에 말하는 것을 제외하면, 그리고 여기 저기 천국의 말투에 귀를 기울인 몇몇 용감한 지성과 사랑의 음성을 땅의 거친 말로 바꾸어 보려고 시도한 몇몇을 제외하면 이천 년은 그냥 지나가고 말았다. 성 어거스틴(St. Augustine),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켐피스(a` Kempis), 스피노자(Spinoza), 제이곱 보헤미(Jacob Boehme), 그리고 이외 여러 다른 신비주의자, 그리고 후렌시스
베이컨(Francis Beacon) 등등은 자기들 시대의 변두리에 용감하게 우뚝 서서, 이해되지 않은 말들의 어둠 아래에서 굴러다니는 광대하고 알려지지 않은 느낌의 바다 안을 깊이 응시했다. 그들은 사랑의 방식, 사랑의 일, 타인을 사랑함, 자기를 사랑함을 꿰뚫어 보는 통찰력을 가졌다. 보헤미는 이기심의 불태우는 욕구와 바램을 “지옥의 어두운 벌레”라고 불렀다; 이 벌레를 성경은 “그것들의 벌레는 아직 죽지 않는다, 그리고 그것들의 불은 꺼지지 않는다”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18세기 이성의 냉혹한 시대로부터 스웨덴 볽이 일어났을 때, 사랑은 교리 차원으로 승격되어 만물의 중심과 생명, 만물의 아름다움과 보존자로서 다시 빛을 발한다. 교리 차원의 사랑을 위한 근거를 성경으로부터 찾아 이 교리를 발전시켰는데, 어느 정도까지는 그의 책 “천국의 비밀들(Arcana Coelestia)”에서, 그리고 더 완전하고 체계있는 교리는 그의 책 “하느님의 사랑과 지혜”에서 이다. 그는 사랑의 상태들-사랑의 활동들, 힘들, 기능들, 사랑의 건설적, 예방적, 용기를 불러일으키는 명령들 등등의 사랑의 용어를 가지고 인간 경험의 전체 세계를 해석하였다. 더 나아가 이 선각자가 발견한 바, 가장 탁월한 측면에서의 사랑은 신성 자체와 일치하고 있다는 것, “주님은 천사와 인간의 영 안으로 흘러든다”는 것, 물질적 우주는 하느님의 사랑이 생명의 사용에 알맞은 형체로 작업된 것, 그리고 하느님의 말씀이 올바르게 이해되었다면, 인간이라는 모든 어린이를 향한 그분의 사랑의 충만과 경이로움을 밝히 알려주는 책이다는 것, 등등이다. 이리하여 드디어 신성한 영혼으로부터 무한을 통하여 여행하는 희미한 광선이 귀먹은 마음, 눈먼 인간에 다달았다. 이러면 주님의 두 번째 오심이 (당신에게) 가까운 것이다.
생명에 관한 스웨덴볽의 가르침은 우리가 생명과 실체(existence) 사이를 조심스럽게 구분한다면 가장 잘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주님은 우리에게 생명을 나누어 주시는 명백한 목적을 위하여 각자에게 실체를 부여하신다. 그분의 무한한 사랑은 그분을 창조자 되도록 재촉한다. 그 이유가 사랑은 사랑의 풍부한 선한 의지와 은혜를 줄 수 있는 대상을 가져야만 하기 때문이다. 주님의 생명인 사랑에서 우리는 창조의 근원을 발견한다. 그분의 무한히 원하심은 그분 자신의 행복을 담는 유한한 그릇일 수 있는 있음의 실체 외에 어떤 것으로도 만족되어질 수 없다. 동시에 이와 같은 있음들은 참된 자유와 참된 자유에 동반하는 합리성을 가지고 있어야만 한다. 즉 인간에 대한 그분의 생명의 선물은 만일 이것이 인간 자신의 것이 되어진다면 이 선물은 자유와 합리성을 수단으로 자발적이고 사려 깊게 받아져야 함이 틀림없다. 이것이 인간 존재들이 두 개의 구분된 경험, 즉 실체 안으로 태어남과 생명 안으로 태어남을 통과하여 가는 이유이기도 하다.
우리가 육으로 태어날 때, 우리는 지독하게 무력하고 의존적일 뿐이나, 영으로 태어날 때 우리는 적극적이고, 어떤 의미에서는 창조자이기도 하다. 우리가 실체로 태어날 때 실체를 위해 일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 이유가 자신에게 어떤 것을 만들 수 있기 전, 실체가 있는 것이 우선 순위이기 때문이다. 이와달리 생명 안으로의 출생은 선택의 문제인 바, 우리는 이 출생에 직접적으로 관여한다; 그 이유가 진짜 영적 생명은 우리의 의지에 반대하여 강제로 우리 안에 밀어 넣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그분의 말씀을 통하여 우리 모두에게 그분의 사랑의 초대장을 꾸준히 보내 그분께 와서 생명을 선택하라고 하신다. 이는 또한 선택한 생명을 악이 강탈하지 않도록 경계하라 하신 대목의 의미이기도 하다. 우리는 생각하는 능력을 십분 발휘하고 언제나 따뜻하고 순수한 심정을 간직할 때만이 진실로 살아 있는다. 이런 재창조의 아름다운 일은 관찰함에 의해서가 아닌, 영혼의 비공식 깊은 곳에서 작업되어진다. 이는 주님께서 말하신 바와 같다. 즉 “바람은 자기 좋아할 대로 분다, 그리고 너는 그로부터 그 소리를 듣는다, 그러나 너는 바람이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말할 수 없다; 성령으로부터 태어난 사람은 이와 같다”
전환(conversion)이라는 단어를 생각할 때, 이는 어느 특정한 신조를 받는 것으로 그 의미를 축소하지 말고, 넓고도 단순한 의미 즉 심정의 변화로 생각해야 하리라 여겨진다. 특히 지금 말하는 전환이란, 영혼이 자아 이익만을 위해 느끼고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게 유혹하는 비천한 본능들로부터 돌아서고, 대신 세상의 좋은 의견에 귀기울이고, 하느님의 이타적인 사랑 안에서 그리고 무엇보다 먼저 타인에게 유익을 주는 자신의 삶 안에서 기쁨을 발견하는 쪽의 전환이다. 우리가 생명을 선택할 때 이런 기쁨이 있다. 즉 심정과 지성이 달콤하게 확장되는 기쁨이다. 이것이 없다면 인간 차원에서는 애쓴 것만큼 손해일지 모른다.
어떤 사람들은 다시 태어남이 단 번에, 예를 들면 “믿습니다. 아멘”이라는 간단한 두 마디에 성사되는 듯 여기지기도 하지만, 나의 견해는 그렇지 않다. 중생은 우리가 신성한 십계명에 의거한 삶의 길을 희망하고 열망하고 유지보전해 갈 때, 우리에게 건너온다. 한동안 우리는 천사 같겠다고 결의를 굳혀보지만 막상 세상 문제에 부딪치면 옛 것으로 되돌아가 이전에 했었던 짓을 곧바로 실행한다. 다시 말해 평범한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의 처지로 있는다는 말이다. 그렇지만 이렇게 생각한다면, 즉 우리가 늘 이렇게 해왔는데…그리고 모든 사람이 그것을 했는데…그리고 우리의 선조도 그렇게 했는데…그렇다고 나까지도 그것을 해야 하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라고 반문을 제기할 경우 어쩌면 절반 이상 전환은 성공의 길에 들어선 셈일 것이다. “길이요, 진리 그리고 생명”이신 그분을 자신의 가장 높고 가장 도움주는 이상향으로 추구하면서 나 이외의 사람들을 돌봄을 수단으로 우리의 생활을 풍부히 해나가는 것이 불가능하게 보여지는 삶은 없다. 한 번 우리가 이것을 해야겠다고 작정을 했을 때, 모든 외적 환경과 한계는 우리 앞에서 길을 내어줄 것이다. 우리는 더 강한 심정, 동시에 생명과 행복의 더 밝은 미래를 확신하며 매일 나의 십자가를 져야할 것이다.
스웨덴볽 자신의 마음은 더 높은 빛으로 천천히 팽창되어 갔다. 그리고 그런 그에게 깊은 고통도 뒤따랐다. 그 시대 신학 체계는 모순덩어리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다시말해서 그 체계는 머리털을 길게 늘어뜨린 후 흐트러놓은 양상으로 꽉 차있었다. 따라서 그것들은 한 번 들어가면 다시는 출구를 찾지 못하는 동굴 같았다. 스웨덴볽은 진리, 영혼, 의지, (심정)상태, 신앙 같은 중요한 핵심어에 정의를 내려두어야만 했다. 그리고 많은 단어들 역시 더 많은 영적 생각을 공통의 언어로 바꾸기 위해 새로운 의미를 주었다. 사랑에 관한 그의 교리를 위하여 그는 특수한 어휘를 발견해야만 했다; 참으로 이런 노력은 마치 그가 다른 언어를 독학하는 듯 보일 정도였다. 어떤 사람이 육체의 눈으로 본 것을 신뢰하는데 익숙해진 상태에서 아주 단단해진 감각적 사고를 깨트리려면 큰 용기가 요구되는 경우 같이 그도 생각의 습관들로 해서 좌절도 많이 겪었다. 그로서는 생명을 지탱시키는 영적 힘을 유리를 통하여 보는 것처럼 어둑하게 보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자기가 본 것들을 아름다운 근원지인 사랑의 심장에 되돌아가 명백하게 추적해보고, 그것들을 냉정한 이성의 시대, 즉 논쟁적 신조들과 회의적 질문과 소통되게도 해야 했다. “그분의 뒤를 따라 하느님의 생각을 생각하라”는 케프라(Keplar)가 말했는데, 이는 초인간적인 과업이다. 여러분에게 스웨덴볽이 직면했던 것에 대한 어떤 생각을 줄 수 있는 나의 방법은 어떤 맹인이 자기와 같은 맹인을 돕고 싶을 때 마주쳐야 하는 굉장한 장애물이 무엇인지를 상상해보라 권하는 것이다. 그는 보는 사람에게 보지 못하는 사람의 필요한 것이 특별히 무엇인지를 이해하게 만들기 위해 그의 삶을 소비해야만 한다. 동시에 우정관계, 일, 그리고 행복을 가지고 맹인들의 부셔진 생활을 수리할 수 있는 올바른 방법도 추구해야 한다. 어쨌든 한가지 놀라운 것은 맹인, 그들의 느낌, 바램, 가능성 등에 꽤 유식하다고 여겨지는 사람들 조차도 맹인에 대한 무지함은 아직도 대단하다는 것이다. 보는 사람은 맹인, 특히 귀멀고 눈먼 사람이 햇볕을 쬘 경우나 꽃피는 자연의 모습이 듣고 보는 자와 완전히 같지 않고, 그들의 느낌과 감정도 보는 자의 것과 본질적으로 다를 것이고, 이들의 정신적 의식도 그들의 약점에 근본적으로 영향받았을 것이라고 쉽게 결론내릴 수 있다. 보는 눈을 가진 자가 더 실수하여 상상하는
것은 맹인들은 색깔, 음악, 그리고 형태 같은 모든 아름다움으로부터 닫혀져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맹인은 아름다움, 질서, 형태, 비율(조화) 같은 요소들을 촉감으로 알 수 있다는 것, 아름다움과 리듬은 감각 보다 더 깊은 영적 법칙의 결과이다는 것 등을 볼 수 있는 눈을 가진 자에게 수없이 반복해서 말해야만 겨우 납득이 가능하다. 어쨌든 듣고 보는 눈을 가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위 진리를 가슴으로 받을까? 눈멀고 귀먹은 사람도 오관을 지닌 보고 듣는 사람으로부터 두뇌를 상속받았다는 사실, 그들의 영은 그들 자신의 햇빛과 하모니로 침묵의 어둠을 채우고 있다는 사실을 보고 듣는 이들이 자신에게 확인시키는데 얼마나 많은 곤란을 겪을까?
물질로 꽉 막히고 망상으로 채워진 그 시대 감각적 사람에게 선각자로서의 그의 감명을 운반해 주는데 위와 같이 보는 자와 보지 못하는 자의 경우와 매우 유사한 곤경을 스웨덴볽은 가져야만 했다. 귀를 가진 귀머거리와 눈을 가진 소경의 취약점들이 아마도 인간의 무지와 무감각의 가장 어두운 장소에 하느님의 메시지를 운반하는 수단일지 모른다는 것을 그 누가 알겠는가? 주제넘는 것은 단 한 조각도 있지 않기를 희망하면서 내가 바라는 것은, 어둠 안에서 가지는 삶의 체험을 남을 돕는 쪽으로 사용할 수 있는 어떤 기술을 가졌으면 하는 것이다. 마치 스웨덴볽이 자기에게 허락되었다고 말했던 두 세계의 경험을 구, 신약 성서의 감추인 의미들을 밝히는데 사용한 것 같이 말이다. 하느님의 사랑과 이 사랑의 창조물인 인간의 사랑의 잠재력, 이 잠재력은 나와 완전 격리된 세계 사이에 위치하는 바, 나의 불행이 타인에게 선한 의지와 도움을 주는 매체로 만드는 힘이고, 이에 대한 기록을 남기는 것은 나에게 특별한 행복이라 생각된다. 스웨덴볽의 저서 “하느님의 사랑과 지혜”의 서두에 있는 비극을 실감할 때마다 나에게는 언제나 새로운 슬픔이 있다: “인간은 사랑 같은 것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그는 사랑이 무엇인지는 모른다…그리고 그가 사랑에 관한 생각의 어떤 관념을 자신에게 형성해보려 사랑을 곰곰이 생각할 때, 그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으므로 그는 그것이 어떤 것도 아니다, 또는 보고 듣고 만지고, 또는 타인과의 교제로부터 흘러들어 상대에게 영향을 미치는 어떤 것이라고 말한다. 인간은 사랑이 참 생명이다는 것을 아예 알아채지 못하고 있다; 이는 그의 육체의 공통의 생명, 그리고 그의 모든 생각들의 공통의 생명, 뿐아니라 그것들의 세부적인 것들의 생명이기도 하다. 식별력 있는 사람은 이렇게 말해질 때, 즉 만일 당신이 사랑으로부터 있는 것인 애착을 제거한다면 당신은 어떤 것을 생각하고 행할 수 있는가? 라는 질문으로도 사랑이 생명인지를 지각할 수 있다. 사랑으로부터인 애착이 식어지는 만큼 생각, 말, 행동도 식어지지 않던가? 그리고 이 애착이 따뜻하게 자라는 만큼 생각, 말, 행동도 따뜻해지지 않던가? 그러나 이런 경우를 식별력 있는 사람이 지각하는 것은 관찰에 의해서이지, 사랑이 인간의 생명이다는 이론적 지식으로부터는 아니다.”
사람들이 실수하는 대목은 말함, 미소, 흘긋 봄, 그리고 사랑의 온화한 행위가 사랑 자체인 줄 아는 것이다. 마치 내가 상상하기를, 두뇌는 그것 고유의 힘으로부터 생각하고, 몸은 저절로 행동하고, 음성과 혀는 자기들 고유의 진동이 있고, 내 손은 나와는 독립되게 어떤 것을 인식하는 것 같지만, 실상은 위 모든 것이 의지와 마음에 의해 이리저리 작동하는 것이다. 혹은 내가 내 손을 아름다운 백합 위에 놓고 그것의 향기를 코로 마실 때, 그리고는 촉각과 후각이 꽃 안에 있다고 고집부리는 것, 실제는 이런 감정을 갖게 한 주체는 꽃이 아닌 내 피부가 아닌가? 이런 것을 외관(appearance)이라 하는데, 사랑, 생명, 그리고 정신적 활동들이 논의될 때 유의해야 하는 대목이다. 사랑에 대한 대중적인 생각은 사랑은 인간의 바깥의 어떤 것-이리저리 표류하는 실재물-어렴풋한 감정-말하여질 수 없는 추상 작용의 하나이다는 것인데, 그 이유는 사랑은 딱 떨어지게 독립적으로는 생각되어질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스웨덴볽은 사랑은 원인, 주체, 또는 형체 없는 추상 작용이 아니다고 가르치고 있다. 사랑은 영혼을 통하여 떠도는 것이 아니고, 또한 물체를 만지거나 볼 때 존재 안으로 와지는 것도 아니다. 사랑은 인간의 가장 깊은 본질이고 이로부터 인간의 영적 유기체가 형성되어진다, 그리고 우리가 사랑으로서 지각하는 것은 이 실체의 표시일 뿐이다. 사랑은 그것의 능력들을 살아 있게 간직한다. 마치 대기가 촉각, 후각, 미각, 시각, 그리고 청각이라는 감각들에 감각력이 있는 생명을 주는 것과 같다.
나는 사랑과 사랑의 표(token)사이를 구분해 보기 위해 예증을 들어보겠다. 그 이유가 이 둘은 자주 실수되기 때문이다. 우리가 사랑의 실체에 대한 생생한 느낌을 가지지 않으면, 우리는 우리의 애착이 더 수준 높아지거나 우리의 기쁨이 더 증가되도록 사랑의 실체에 도달할 수 없고, 또한 그 실체를 바꾸거나 깊이 있게 하거나 순수해지게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별 다른 생각 없이 사악한 동아리 안에 있는 사랑 주변으로 가게 되고, 우리의 경향을 바꾸고, 나와 타인들을 재건축하겠노라고 노력해보면서 그 사랑 주위를 맴돈다. 한편 진짜 사랑은 쫓겨난채 흐느끼고 있다. 그나마 그 악한 사랑은 우리를 비웃고 그 자체 만족스럽게 기뻐하고 있다. 불완전한 언어와 더불은 나의 투쟁으로부터, 나는 이미 손상된 것을 고쳐 만드는데 따른 잘못되고 간접적일 뿐인 방법에 대한 나의 실예를 가지고 있다. 소리가 방출되면 그것은 공기를 통하여 떠도는 바, 떠도는 이 소리를 조작하여 내 음성을 개선하려는 것은 터무니 없는 일일 것이다. 그렇다 나는 그 조작을 내 음성 기관들에서 먼저 연습하여야만 한다. 그나마 이것도 내가 나의 내적, 또는 정신적 언어 개념을 개선할 때까지는 이것이든 저것이든 아무 소용이 없을 것이다. 목소리는 본질적으로 신체에 속해 있지 않다. 그것은 생각이 그 자체를 들을 수 있게 만드는 것이다. 음성은 마음에 의해 글자 뜻 그대로 모양짓고, 색을 칠하고, 조절되는 것이다. (음성을) 실습함에서 내 최고도의 노력은 내 육체의 귀는 닫혀 있으므로 나의 내적 귀에 있었던 것과 같은 소리와 말들의 진짜 형상들을 얻는 것이다. 언어 도구로서 마음의 올바른 사용에 더 가까이 접근 할수록 나는 다른 사람에 의하여 더 바르게 이해될 것이다. 이것은 음성으로부터 사랑에 이르기까지인 바, 실예로 사용하기에는 먼 외침 같이 여겨진다; 그러나 원리는 정확히 똑같다. 생명은 그것의 모든 감동들, 즉 좋음, 싫어함, 흥미 있음, 흐름 등과 더불어 인간의 가장 깊은 속의 사랑에 의해 형상짓고, 착색되고, 최말단에서는 생명의 흥망 성쇠가 조절된다. 따라서 누군가가 더 고귀한 느낌들, 더 세련된 이상향들을 얻기를 원한다면, 그리고 행복으로의 그의 열망이 아주 애처러워 이를 만족하게 하겠다면, 그는 사랑의 진짜 정신적 개념이 능동적이고, 창조적이며, 그리고 능력을 명령하는 것으로 형성되도록 분투노력해야 할 것이다.
사랑은 영혼 또는 기관, 자질, 기능과는 별개의 결과로서 관조되어서는 안된다. 사랑에는 의식 있는 생각, 의도, 목적, 노력, 동기, 그리고 충동 같은 몸 전체가 포함되고, 이것들은 흔히 억눌러져 있다. 그러나 언제나 잠재하여 있어 어느 순간 행동으로 그 자체를 체현할 준비가 되어 있다. 사랑은 능력들과 기관을 통하여 얼굴, 손, 발을 고용한다; 사랑은 일하고 말한다. 그리고 사랑은 한 번 목적물을 향하여 움직이면 어떤 외적 환경에 의해서도 제지되지 않을 것이다.
참으로 진짜 거듭남은 당사자가 자기의 영적 능력들을 의식하게 될 때 인간 안에서 시작하는 변화와 더불어 온다. 이와 같은 변화는 사별과 슬픔의 시기들 이후, 뿐아니라 당사자만이 알아채릴런지 모르는 경험 이후 거행된다. 이리하여 그의 눈의 흐림이 없을 때 그는 자신과 자기의 현 환경, 더 나아가 자기와 주어진 환경 등의 진정한 관계들에서의 미래까지 보게 된다. 이기심의 저울 눈이 떨어져 나가고, 그는 그 자신의 생명을 진지하게 바라본다.
사람들이 거듭남에 관하여 아주 많이 썼었고 이야기도 아주 많이 했는데 비해 그 저자나 강연자들이 거듭남의 목적에 관련해서는 그 자료가 매우 빈약한 형편인 것은 의아할 일이다. 자기 수양만 잘 해도 완전함의 모든 이상향을 달성하는데 부족하지 않다고 소리 높여 공포해왔었다. 그러나 우리가 어느 곳에서이든 최상의 남자나 여자에게 귀기울여 본다면, 그들의 한결같은 대답은 꼭 그렇지 않다는 부정적 답변일 것이다. 어떤 이는 지식의 방대한 보물을 축적했다, 그리고 과학이 가장 지독한 악들을 위한 치료(법)을 발견해냈을지 모른다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과학은 이들 중 가장 나쁜 것-인간 존재의 무감각을 위한 치료약을 찾지 못했다. (항간에서) 지적되어지는 것, 이는 스웨덴볽의 견해도 비슷한데, 사랑과 동정(심)에 관하여 정식 교육을 받지 않은 사람은 짐승 보다 더 나쁘다는 것이다. 이런 사람은 뿔과 꼬리만 없을 뿐이다; 이런 사람은 풀을 먹지 않는다; 게다가 그는 분별 없는 사색력으로 제멋대로 파괴한다. 그는 전쟁에서 그의 형제에게 손상을 입히고 죽이기 위하여 갈수록 더 흉측한 무기들을 발명한다; 그는 유행에 발맞는 스포츠를 위해 무기력한 동물을 병신으로 만들기도 한다; 그는 자기 지배를 넘어 서 있는 사람들의 흠이나 추문을 캐내려 안달을 한다. 여타 다른 악들도 그의 무지에서 추적할 수 있을 것은 의심할 바 없다. 그러나 위와 같은 악들이 무지에서만 나와졌다고도 말할 수 없다. 그의 구원은 자기 수련을 통하여 가되 올바른 바램이 꼭 필요하다.
인간은 환경의 변화로 크게 개혁되어질 수 있다는 논지를 붙들고 있는 선의의 사람들도 상당히 많은 편이다; 이 논지도 그럴법하고 매혹적이기도 한 진리는 충분히 있다. 그러나 이 논지는 환경 문제를 지나치게 강조했고, 이 논지는 나쁜 쪽으로 쉽게 응용되는 경우가 많다. 인간 존재를 바꾸는 것은 환경이 아니고. 그 사람 안에 있는 힘이다. 소경, 귀먹어리, 양심을 위하여 죄수된 자, 심지어 건전한 이상향을 지닌 아주 가난한 사람까지도 포함해 모두가 입증한 것은 자기들은 바깥쪽 환경이 어찌됐든 자기들 바램에 더 가까워지게 생명의 형태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우리 안에는 어린아이 같이 참지 못하는 속성이 많이 남아 있기 때문에, 쉽게 이렇게 중얼거린다. “오, 만일 내가 운좋은 내 이웃들의 대열에 끼어 있다면, 나는 더 낫고, 더 행복하고, 더 유용한 생활을 누릴 수 있었을 것이다.” 이런 식의 젊은 이들의 하소연 같은 말도 자주 듣는다. “만일 내가 내 사장의 아들로 태어났더라면, 나는 대단한 성공을 성취했을 것이다.” “내가 저런 저질의 녀석과 섞이지 않았다면, 나는 도덕적으로 건재했을 것이다.” 이런 세 번째 탄식도 있다. “만일 내가 내 부유한 친구의 돈을 가졌더라면, 나는 세상의 향상을 위해 내 몫을 기쁘게 실천할 수 있었을 것이다.”
지금 나는 필요 없는 가난과 타락하는 영향력에 맞서 여느 누구보다 더 적극적으로 반대쪽에서 팔을 들 것이다. 동시에 인간 경험이 가르치는 바, 즉 우리가 현 위치에서 성공할 수 없다면 우리는 어느 다른 위치에서도 성공할 수 없다는 것을 나도 믿는다. 백합 같이 더러운 주위 환경 위에서도 순수하고 강하게 일어날 수 있지 않으면, 아마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도 도덕적인 약한 사람일 것이다. 지금 있는 세상에 도움을 줄 수 없다면 어느 세상에 태어나도 마찬가지 이리라. 가장 중요한 질문은 처한 환경의 종류가 무엇이냐가 아니라, 날마다 생각하는 종류가 무엇이냐, 내가 따라가고 있는 이상향이 무엇이냐, 한마디로 내가 어떤 사람이냐 이다. 아랍 속담에, “네 자신을 발견하는 그 곳이 너의 세계 이다”는 실지로 꼭들어 맞는다.
인간 존재는 자기 마음과 자존(만)심에 무서운 폭력이 가해짐이 없이 갑자기 거듭나질 수 없다는 것에 대해 스웨덴볽 자신이 명백해졌을 때 그는 아래와 같은 다른 이론을 가졌다. 즉 인간 존재는 새로운 진리들의 눈부심을 견딜 수 있기 전, 그는 더 예리한 빛에 자기의 내적 눈을 익숙해지게 하면서 조금씩 나아가야만 한다. 그리고 그는 자기의 기쁨(delight)들을 수단으로 하지 않고서는 선한 생활 쪽으로 돌아서질 수 없다. 그 이유가 그의 기쁨들이 그를 자유하도록 하고 결국은 선택할 힘도 그 기쁨이 주기 때문이다. 주님과 협동하고, 지칠줄 모르는 그분의 도움을 신뢰하면서, 말씀에서 더 많은 진리들을 이해하려고 공부하고, 터득한 그 진리에 따라 살면서, 선을 위해 선을 행하는 것-이런 것들이 옛 자아로부터 빠져나와 자신의 세계를 재건하겠다고 하는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mortal)들을 위한 유일하고 건전한 방법들이다. 주님의 공적들을 훔치고 싶어하고, 천국을 “보상” 차원에서 요구하는 자들이야말로 참으로 애석할 뿐이다. 따라서 자신의 심정을 들여다보고 그 속의 이기심이라는 용을 몰아내야 더 고귀한 자기를 만드는 지름길이다; 물론 이 회개를 빠르게 성취할 수 없는 것은 아니나, 회개 후 신앙은 천천히 성장한다는 것을 감지하되 즐거운 마음이 언제나 수반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그는 인격 속에 강건함도 함께 머물게 하지 못하고 만다. 실상, 인간은 이 세상이든, 다음 세상이든 거듭나는 작업을 결코 멈추지 않을 것이다. 그 이유가 사랑하는 것, 더 알아가는 것, 더 완성되는 쪽으로 나아가는 것은 인간에게 영원하기 때문이다.

VII

생명은 기쁨 속에 있다

기쁨과 행복에 관련해 스웨덴볽이 말한 것은 마치 만개한 과일 나무의 꽃과 잎 만큼이나 많은 듯 하다; 따라서 그가 선포한 인간의 생명은 그가 사랑한 것의 기쁨 안에 있다고 하는 대목에는 별로 놀랄 일은 아닌 것 같다. 흥미가 없으면 가슴도 차다. 그리고 자극 오는 것이 없으면 기쁨도 없다. 인간의 행복은 작지만 셀 수 없이 많은 기쁨들로 구성되어 있다. 마치 시간이 분과 초로 만들어진 것과 비슷하다; 이런 것을 생각해 보려고 다섯 감각을 다 지닌 사람들이 멈추어 서는 일은 별로 많지 않은 듯 하다. 게다가 자기에게 내려진 복을 세어 보려고 앉은 사람은 더욱 적은 것 같다. 다행히 세어 본 사람이 있다면, 그는 의무에 충실하라는 듣기 싫은 소리도 귀를 매혹하는 음악처럼 그에게 들려와 그의 삶은 계속 분주해질 것이다.
나는 이 책에서 쾌락주의는 언급하고 싶지 않다. 그 이유가 쾌락주의는 목적으로서 행복을 추구할 뿐, 유용성(쓸모 있음, usefulness)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가 “우주는 영혼에게 잔치를 베풀어 주려고 신성한 은혜에 의해 펼쳐진 식탁이다” 라고 말할 때, 이 책을 읽는 어느 진지한 사람에게 가벼이 느껴지지 않기를 바란다. 마음의 각각 모두의 능력, 그리고 육체의 모두 각각의 욕구는 각기 기쁨을 가지고 있다. 이 기쁨이 갱신과 재건설의 수단이다. 인간의 본성에 있는 물질적, 정신적 각각 모두의 힘은 같은 성질이고 만족을 주는 것을 선택할 기회를 가지고, 선택된 그것이 자신의 일부가 되게 한다. 흔히 상상해버리고 마는 것은 우리가 영적인 것을 얻을 수 있기까지, 자연적 쾌락은 단념해야 한다인데 그럴 필요는 없다. 반대로, 우리가 내적 삶 안에서 일어나 사는 만큼 더 오묘하게 자연적인 것을 즐겨야 할 것이다. 사랑하는 친구가 보낸 포도 한송이는 그 얼마나 미묘한지! 둥글둥글함의 아름다움, 색깔, 시큼달큼한 향기, 이에 더하여 사랑이, 상상함이, 시적 구상까지 연달아 주렁주렁 매달려 있지 않는가? 두뇌를 활기 띄게 하고 심정으로부터 꽃을 피게 하는 기쁨을 향기 있는 꽃에서 발견하는 일은 그 얼마나 풍요하고 다채로운지! 창공과 물과 땅의 끝없는 변화는 우리의 신앙과 꿈의 중심이 되는 더 높은 세계의 거울이 되어 우리 속에 간직되는 바 얼마나 매력적인지!
이 세상은 걱정과 슬픔이 가득하다는 것은 부인 못하나, 칙칙한 주위 환경과 짜증나는 업무 안에 감추인 기쁨의 반짝이는 수정들을 발견하는 일은 어쩌면 우리가 서로에게 지불해야할 의무가 있는 은혜스러운 빚이다. 스웨덴볽 또한 매일 별 변화 없는 하루의 스케줄로 말미암아 짜증나서 그만두었을법 한데, 오히려 그는 그 속에서 무한정으로 저장된 기쁨의 창고들을 보았다. 그는 심정으로부터, 그리고 천국의 심정으로부터 “진정한 기독 종교”라는 책에 이렇게 썼다:
“사랑으로부터의 기쁨(joy)들, 이것은 또한 선행(charity)으로부터의 기쁨들인데, 선인 것이 선이라 불리우게 하는 원인이 된다; 그리고 지혜로부터의 매력들, 이는 또한 신앙으로부터의 매력들인데, 참된 것을 참되다라고 불리게 하는 원인이 된다; 그 이유가 다양한 종류들의 기쁨과 매력이 그것들의 생명을 만들고, 그리고 이것들로부터의 생명 없이는 선들과 진리들은 생명 없는 것과 같다. 그리고 또한 열매 없음과 같다.”
“본질이 선인 사랑의 기쁨은 태양의 열과 같아서 비옥한 토양 위에서, 과일 나무와 옥수수 들판에서 그것들을 번성하도록, 생기 있도록, 작용한다. 그래서 햇볕이 작용하는 곳에는 생산이 있다. 말하자면 낙원, 여호와의 동산, 그리고 가나안의 토지 같다; 진리로부터의 매력은 봄철의 태양의 빛과 같이, 그리고 향기로운 냄새를 발산하는 꽃을 담은 수정 그릇 안으로 흐르는 빛과 같다.”
이기심과 불평은 마음을 상도에서 벗어나게 하고 흐리게 한다. 반면 기쁨을 지닌 사랑은 상상력(vison)을 맑게 하고 또렸해지게 한다. 이 사랑은 과거 무디고 하찮게 여겨졌던 것 안에서 경이로운 것들을 보도록 지각에 섬세함을 준다. 이 사랑은 영감의 샘들을 다시 채운다. 그리고 이 사랑의 기쁨은 물질 만능으로 꽉 막힌 능력들을 꿰뚫고 흐르는 피와도 같이 생명의 새로운 강을 내보낸다.
즐거움(delight)은 가치 증대와 자아 개선 그리고 더 고상한 본능의 습득에 필수이다…가 사려 깊은 사람들 사이에 긍정적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앎이 주는 기쁨 외에 어느 방법으로 어린아이를 공부하도록 유도할 수 있을까? 맛의 쾌락이 신체로 하여금 음식의 소화흡수를 촉진되게 하지 않을까?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않는 것은 본체 만체하고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선택하지 않는 마음이 있다고 생각되는가? 자기를 꾀는 엘도라도(황금의 나라, Eldorado)에 자기의 내적 의지를 고정시키고, 자기가 그것을 실현할 때까지 기다리면서 이 사람은 그의 내적 의지와 더불어 무엇을 할까? 용감한 자와 모험가로 인간의 자연적 자원을 새로이 발견하고 불리는 쪽으로 인도하는 것은 그것으로 인해 얻을 기쁨을 미리 꿈꾸도록 하는 것 말고 무엇이 있을까? 새로운 진리들을 이해함에서 느끼는 기쁨, 새로운 봉사를 타인에게 줄 수 있어 느끼는 기쁨을 위해서가 아니다면 왜 과학자가 정신적 산고의 고통과 짜증나는 일들을 자주 견뎌야만 할까? 슬기로운 선생 또는 친구 또는 진정한 개혁자는 나쁜 행위자를 무력으로 올바른 길로 질질 끌고 가려 시도하지 않는다. 그는 고집센 의지를 부드럽게 하고 부루퉁한 마음이 올바른 생각에 매력을 두게 할 유쾌한 영향력을 가진 훈련을 기술적으로 병합한다. 누군가, 그가 자기 심정의 선함으로부터, 도움되는 말을 하고, 유쾌한 미소를 던지고, 또는 또 다른 길에 있는 거친 장소를 평탄해지게 하고 있다면 그는 자기가 느끼는 즐거움이 자신의 일부임을 넌지시 암시받는 바, 그는 그 즐거움으로 말미암아 살아감을 눈치챈다. 한 때 넘지 못할 것처럼 여겨졌던 장애물을 넘어섬으로 가지는 기쁨, 그리고 성취함을
한걸음씩 성취함 쪽으로 더 전진하는 개척자의 추진력으로부터의 기쁨-이와 비슷한 기쁨이 어디에 또 있을까? 만일 행복을 추구하는 이들이 잠깐 멈추어 서서 위 사항을 생각한다면, 그들은 자기들이 실지로 경험하는 즐거움은 아침 꽃 위에 앉아 반짝이는 이슬방울이나 발 아래 풀들 만큼 셀 수 없이 많음을 볼 것이다.
그럼에도 내가 만나는 사람들 중 기쁨을 재산으로 실감하는 이들은 많지 않은 것 같다. 그들이 행복을 추구함에서 곁길로 멀리 간 것을 관찰할 때 나에게 그것은 이상스럽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다. 그들은 아주 이상한 장소에서 행복을 찾고 있다. 그들은 행복을 찾는 일환으로 왕과 여왕을 방문하고 그들에게 굽신거린다; 그들은 여행이나 여흥에서 행복을 추구한다; 그들은 행복이 감추여 있는 보물 안에 드러누워 있을 거라 생각하면서 땅 깊이 파헤치고 있다. 여러 많은 사람들은 종파나 대표자 회의, 또는 정당의 정책을 위하여 자기들의 지성을 미신에 사로잡히듯 족쇄를 채움으로 자신들로부터 기쁨을 강탈당하고 있다. 아마 가장 애처로운 것이라면, 자기의 심정과 지성에 복을 줄 준비가 되어 있는 달콤한 재산의 세계가 언제나 자신 안에 있는데 이것에 눈은 못 보게 하고, 귀는 못 듣게 하고, 배는 굶주려 허덕이게 한다. 각 사람 속의 이 재산은 하느님의 행복으로부터 나와 각자에게 나누어 준 그분의 귀한 선물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모르고 있다.
남을 돕다가 자신을 발견하는 일은 새로이 찾은 기쁨과 더불어 자신을 놀라게 한다. 그 이유가 즐거움은 자각의 수단으로도 일하기 때문이다. 스웨덴볽은 이렇게 말한다. 만일 사람이 자기 자신의 즐거움들을 검사한다면, 자기 중심이었다는 것을 실감하는데, 그 이유는 자기의 대부분의 에너지를 자신의 삶을 모양짓는데 쏟고 있거나 자기의 사적 목적들을 위한 지식을 획득하는데 소비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참고 견디는 기쁨들은 타인을 위해 일하고 세상에 새 생명을 창조하는 이타적 목적이 출생되도록 그를 몰아 부친다. 이기심 없는 즐거움들은 그에게 승인하라고 속삭인다. 그리하여 승인된 이후, 그는 세 배나 더 강한 사람으로 일어난다. 그 이유는 그가 새 힘들과 새 자아 통찰력들을 의식하기 때문이다. 영의 즐거움들의 고향으로 향한 자신의 영의 발자국을 밟고 갈 때 만이 당신은 자신의 형상과 얼굴을 바라볼 것이고 생명의 책에서 자신의 운명을 읽을 것이다.
그러나 스웨덴볽은 또 말한다. 만일 사랑스럽지 못한 즐거움을 가진 사람이 자신의 못된 즐거움을 인정하는 지적 정직함을 가지고 있고, 그리고 뭔가 더 가치 있는 쪽으로 자신의 심정을 들어 올리려 진지하게 애쓴다면, 그는 자포자기할 필요가 없고 실망하여서도 안된다. 옛 자기를 홀린 것을 빨리 떠나는 만큼, 순수한 행복들이 그의 영혼 안으로 돌진해 올 것이다. 마치 오랫동안 닫혀 있던 주택의 문을 열 때 압도적인 센 기류가 빨려 드는 상태 같다. 그가 더 행복해질수록, 그는 더 강해져 그의 바램쪽으로 그의 바깥 환경도 개조될 것이다. 한 때 부셔졌던 성벽에서 깨진 틈만을 찾으려는 적에 대한 두려움을 마음에 받아들이는 것은 실수를 저지르는 셈이다. 각각의 두려움 대신, 그는 새 즐거움을 건설하고 호된 시련이 지나갈 때까지 그 즐거움에 머물러야 한다. 이것이 근대 사상에서는 “취미(hobby)”라는 단어로 풀어 말해진다. 그리고 얼마나 많은 불운한 남,녀들이 희망이 전혀 없는 악한 경향성으로부터 나와 미처 꿈도 꾸어보지 않았던 자기 발달로 도움을 얻었는지 모른다. 한마디로 천국이 주는 정신 요법이다. 죄를 용서받음이란 당사자가 나쁜 바램과 악한 생각들을 몰아내고, 선으로부터의 힘에 하모니를 이루어 일할 때, 상한 심정을 채우는 위로부터 있는 기쁨의 수원(well-spring)이다.
5분 만이라도 잠간 틈을 만들어 사랑스러운 꽃이나 구름, 별을 찾아보고, 혹은 시를 배운다든가, 또는 다른 사람의 지루한 업무를 빤짝이게 해줄 수 있다면, 누구나 자기만의 특별한 어떤 즐거움을 가지리라는 것은 하등 의심할 필요가 없다. 그런데 만일 아름다움과 기쁨의 미소들을 주고 받는 것은 포기하고 넌더리나는 의무들과 이해 관계들에 언제나 집착한다면, 녹초가 되는 지경까지 지독하게 근면했던 것도 그 무슨 쓸모가 있겠는가? 그들이 아름답고 신성하고 영원한 존재를 자기들 생활 속에 할 수 있는 데까지 입장시키지 않는다면 그들은 반드시 천국으로부터의 문은 닫고 대신 회색 먼지가 그들 모든 존재 위에 내내 있게 될 것이다. 하늘(sky)이 땅 보다 더 빛남을 느끼려면 땅 자체의 진가가 인정되고 즐겨져야 한다. 땅 자체의 아름다움을 사랑했었어야 해돋이와 별들의 광선을 품을 권리도 있다.
성인들이나 천재들은 매우 드물다; 그러나 그렇게 되어봤으면 하는 희망은 모든 사람 안에 언제나 있을 수 있다. 이런 사람들이 흠모한 순수한 모든 즐거움은 “선한 의지의 중심점”이 되어 있다. 그리고 우리가 거주하는 사랑스러운 모든 현장, 우리가 듣는 모든 하모니, 우리의 경건한 손으로 만져지는 우아하고 부드러운 것은 근심이나 가난이나 고통이 파괴할 수 없는 달콤한 생각들을 지닌 많은 사람에게 날개를 달아준다. 기쁨은 결국에 가서는 “잘 하였다”라는 영원한 생명의 단어를 발음하게 하는 사랑과 신앙의 소리이다.
기쁨이라는 단어는 스웨덴볽에 의해 설명되는 교리들로부터 분리될 수 없다. 그 시대에서 그의 철학은 중세 시대의 고행주의나 철학과 같이 냉랭함 뒤를 이어 나온 듯 여기게 하는 철학의 새로운 분파였다. 그의 가르침 중 사람들이 놀란 것 중 하나는 즐거움의 보편성, 즉 즐거움은 생명을 섬긴다는 것이다. 결혼의 행복을 증대시키고 어린 시절의 삶을 아름답게 하는 인간의 능력 안에 있는 탁월한 신앙은 겁많은 불신용, 하급의 이상향, 어리석은 방법으로 지식을 나누어 주는 것 보다 훨씬 뛰어나다. 한마디로 진정한 삶은 기쁨을 가득 채우는 심정의 수용력이다.
우리는 사랑의 기쁨의 위대함에 일치하는 고상한 생각들, 즉 스웨덴볽이 아주 큰 틀 안에서 기술한 것 처럼 신성한 섭리를 지각하기 시작한다. 지금까지 하느님의 섭리는 여느 독단적 주장의 모순으로 인해서 어두워져 왔었다. 그리고 그것의 의미는 특별히 소홀시함(neglect)들을 함축하는 특별한 설비(provison, 예정론) 안으로 자주 퇴화되었다. 그러나 스웨덴볽의 가르침에서 하느님의 섭리는 하느님의 사랑과 지혜의 나라, 쓸모 있음(use)들을 창조하는 나라 임을 보여주고 있다. 그분의 생명은 이 사람이나 저 사람이나 같은 양과 질이어야 하고, 그분의 사랑 역시 모든 이에게 다 같아야 하는 바, 그분의 섭리는 반드시 보편적이어야 함이 필수이다.
소홀시함 중에서 늘 지적되곤 했던 것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축복으로부터 방대한 군중이 제외된 것이다. 어쨋거나 이 생각은 하느님은 “그분의 음성을 듣고, 그분께 순종하는 다른 양”도 가지고 있으시다는 편견 없는 이해에 길을 터주고 있다. 그분은 사방 각처에 여러 종류의 종교를 설비해주셨다. 그리고 올바른 생활이 이상향이고 그것에 신실하는 한, 무슨 인종이든, 무슨 신조이든 문제가 되지 않는다. 모든 이에 의해 기억되어야 하는 한 가지 원리는 종교는 교리를 살아내는 것이지 교리를 단지 믿기만 하는 것은 아니다는 것이다. 모하멭이 우상 숭배를 뒤엎으려고 일어난 것도 하느님의 섭리 속에 있었다. 이 위대한 예언자는 동양의 천성에 어울리는 종교 형태를 가르쳤다. 그리고 선을 위하여 강한 영향력을 행사한 이 신앙은 제국과 왕국에서 실행되었다. 종교 사상의 역사는 하느님께서 증거도 없이 그냥 두시는 일은 결코 없다는 것을 나팔 소리로 외치고 있다.
전통적 예배 풍조가 있는 곳은 어디이든, 한 나라의 독단적 주장이 사악한 쪽으로 돌아서도, 이들에 의해서도 해를 입지 않고 남아 있는 단순한 선한 사람들이 많은데, 그 이유는 순박한 사람들은 부패함에서 아주 먼 높은 장소에 있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가 마음에 있는 천국으로부터 신성한 섭리를 관조한다면, 과거의 경험들은 도움되는 것과 지혜의 귀중한 교훈들을 가져다 줄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인생의 하모니를 느낀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하느님의 방법을 우연이나 운수, 갈등 같은 세계로부터 찾는다면 우리는 그 교훈들을 엉뚱하게 이해할 것이다. 즉 우리는 그분께서는 마음에 들면 상을 주고, 비위에 거슬리면 복수나 벌을 주시는 하느님, 상과 벌을 임의적으로 분배하시는 분이다고 간주하고 만다는 말이다. 우리는 그분의 광대하심을 우리의 대단찮은 애국심을 가지고 추정하고 자기 나라의 승리를 그분께 간구한다. 그러면 우리 각각은 서로 대립하는 분파로 돌아서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하느님은 어디 계신가? 나는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만일 하느님이 계셨다면, 그분은 인간이 절대로 죄를 짓지 않도록 창조하였을 것이다.” 이는 마치 우리 모두가 자동 인형이라도 되기를 원한 것처럼 비친다. 어쩌면 죄를 범할 수 없게 하는 것은 독재자 만 만족시킬지 모른다; 이런 개념 앞에서 영은 와들와들 떨지 않을까? 사실상, 하느님을 부인함은 자유와 인간성을 부인함에서 발견되고 만다. 믿음의 살아 있는 가치는 우리 자신의 제한된 경험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인류에 얼마나 유익했는지에 의존된다; 위압적인 하느님의 큰 혜택(Beneficence)은 우리의 지식의 정당함을 증명하는 유일한 가르침으로 있고, 문명(사회)의 체면을 유지하게 하는 유일한 가르침으로도 있다. 이 혜택은 많은 선물을 포함하고 있다. 그 중에서도 대표적인 것은 우리로 하여금 자아 (이익)만으로부터 빠져나오게 하는 힘의 선물, 어느 인간 안에 있든 고귀한 것은 내 것 되게 하는 힘을 향유하고 우주 안의 경이로움을 이해하는 힘의 선물이다.
스웨덴볽의 “하느님의 섭리”라는 책은 하느님께서 생명과 기쁨을 주시는 그분의 속성의 무한한 필요 때문에 우주를 창조하셨다는 진리에 대한 강력한 개인적 증거이다. 이 책은 너무나 멀고 접근 불가능한 신성을 믿는 것은 무익하고 속이 빈 신앙이다는 불평에 위안이 되는 말을 여러 문단에서 보여주고 있다. 이 책의 저자는 “하느님의 사랑의 본질은 타인을 사랑하고, 그들과 하나 되기를 바라고, 그분 자신으로부터 그들을 행복하게 만든다”라고 선포한다. 어쩌면 이 선포가 신성한 섭리의 전체일지 모른다. 우리가 그분의 영적 재건 사업의 일에서 우리의 할당된 몫을 다해버리기를 원한다면, 그분의 취향에 발맞추어 따라가게 해서 자신을 (다시) 태어나게 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신성한 섭리는 늘 변화하는 우리 생활에서 일시적인 복 만이 아닌 영원한 복지와 행복이 되는 것을 더 찾는다. 그분은 우리 손을 거쳐가는 수도 없이 많은 작은 일들, 날마다 가지는 작은 기회들을 어떻게 사용하든지 자유하게 놓아두시고 언제나 침묵으로 일관 하신다; 그럼에도 언제나 그분은 모든 이 각각이 이성에 따라 자유 안에서 행동하는 권리를 지키신다. 그 이유가 자유와 합리성은 그분이 인류에게 선물한 불멸함에 대한 표(token)이어서이다.
우리는 자칫하면 이기적으로 살려 하기 때문에 이런 경향성을 상쇄할 뭔가가 우리 안에 있어야 할 필요가 있다. 더 나은 생활을 만들어 보려 선택하는 것은 그런 생활에 대해 사전에 어떤 지식이 있었다는 말이다. 만일 더 고상한 종류의 다른 경향성이 우리 안에 현존하지 않는다면, 무엇이 우리가 동물 같이 되어가는 것으로부터 구해내 줄 수 있을까? 선과 악, 양쪽을 다 알지 못하면 우리는 자신을 위한 올바른 선택을 자유롭고 슬기있게 선택할 수 없다.
아래에서 말하려는 전부는 스웨덴볽의 교리, “유물(reliquiae)”을 설명하는 것이다. 이것은 생명을 형상짓는데 강력한 요인이다. 이 단어는 흔히 “리메인스(remains, 아껴두신 것, 남아있게 하신 것)”으로 번역되는데, 유아기 시절로부터 우리 안에 저장되어 인생 마지막까지 남아 있는 사랑과 진리와 미에 대한 감명을 의미한다. 우리가 태어남은 우리의 의지에 의해서 된 것은 아니다. 우리의 유전적 악한 경향성들은 어린 시절까지에서는 침묵하고 있다. 어린아이는 천국에 가까이 있고 우리로 하여금 가끔은 천사들이 어린아이를 시중들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한다. “어린아이의 천사는 천국에 계신 나의 아버지의 얼굴을 언제나 바라보고 있다.” 진실로 어린아이는 어떤 다른 존재와 다른 특성과 잠재성을 가지고 “영광의 길게 늘어지는 구름들” 안에 온다. 어린아이는 주님만으로부터 선량함과 지혜의 수용능력을 받는다. 참 진정한 의미에서 천국은 어린아이를 태양의 햇빛 처럼 에워싼다. 스웨덴볽은 아름다운 순진과 신뢰를 어린아이로 설명한다. 우리는 어린아이 시절 속의 순진과 신뢰를 완전하게 잃는 일은 결코 없다. 쌓아두는 곳인 우리의 수용력은 신성과 내가 친척 관계임을 느끼게 하는 거룩한 장소 이다. 이 거룩한 장소(holy place)는 희생(sacrifice)의 장소,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과 영원히 죽지 않는 운명이 공통으로 이용하는 지식의 영역, 인생의 위대한 영적 전투를 수행하는 시련의 천막이다. 여기에 눈물과 고민과 겟세마니의 피나는 땀 흘림이 있다. “여기서, 역시, 승리하였다”하고 자신에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행복하다! 여기는 우리가 선택했던 삶의 성지(shrine)이다.

VIII

죽음은 육체가 없는 삶을 위한 도구이다

고생은 하느님으로부터의 벌-즉 거역하려들지 말고 깊은 신앙심을 발휘해서 지고 가야하는 짐으로 간주하는 것이 대세를 이루었던 시대도 있었다. 불행의 희생자를 돕는 유일한 생각은 그들에게 피난처를 제공하고 그림자의 골짜기에서 묵상하며 가능한한 고생도 만족해하며 살게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이해하는 바, 포부가 없는 격리된 삶은 영을 약해지게 한다는 것이다. 이는 육체의 경우에도 똑같다. 근육은 사용되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힘을 잃는다. 여하튼 우리는 제한된 자신의 경험으로부터 빠져나와 자신의 기억, 이해함, 동정심을 사용하지 않으면, 그것들은 불활동적이 되어간다. 한계성, 시험들, 세상의 실패들과 싸울 때만이 각자의 가장 높은 가능성들에 도달된다. 이럴 때 우리는 하느님을 예배하는 것이고 세상적인 것을 포기함이라고 스웨덴볽은 말하고 있다.
자신이 아픈 상태이든 건강하든, 소경이든, 보고 있든, 억매인 상태이든 자유하든, 우리는 어떤 목적에 충당되려고 여기 지금 존재한다. 다시 말해 우리가 하느님을 기뻐하시게 하는 방법이 신앙의 힘에 의지해 뭔가를 포기하거나, 반대로 강력히 간구하는 기도를 수단으로 함이 아닌 유용한 행위, 남에게 도움이 되는 일을 가지고 그분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더 낫다는 말이다. 생활의 선이 성전이나 교회를 채우지 않으면 영적 측면에서 그것들은 텅 빌 것이다. 교회가 크든 작든 교회를 만드는 것은 엄청난 돌 벽이 아닌 교회 주위에서 빛을 발하는 용감한 영혼의 빛이다. 제단은 거룩하다. 그러나 제단이 우리의 심정의 제단을 표현하고 우리가 언제나 바치도록 명령된 제물 만을 바칠 때 거룩하다. 그 제물은 미움보다 더 강한 사랑을, 의심을 극복하는 신앙이다.
하느님을 신성한 친구로서 느끼는 단순하고 어린이 같은 믿음은 땅이든 바다이든 우리에게 오는 모든 문제들을 해결한다. 곤경들은 언제나 우리가 만나고야 만다. 이것은 인생의 동반자나 다름 없다. 이것은 고난의 특성과 개개인의 특성을 결합시킨 결과이다. 고난에 대처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우리는 불멸하다는 것, 우리는 “졸지도, 주무시지도 않으며” 지켜주시는 신성한 친구가 있다는 것, 만일 모든 것을 그분께 맡기면 우리를 지켜주시고 안내해주신다는 것을 당연히 받아들이면 된다. 이 생각이 우리의 가장 깊은 존재 안에서 강하게 지반을 형성하고 있다면, 우리는 자신이 원하는 어떤 것도 거의 할 수 있고, 우리의 생각함도 제한할 필요가 없다. 또한 우리는 우리가 끌어 안을 수 있는 우주의 모든 아름다움을 자신에게 보탬이 되게 할 수 있을런지 모른다. 상한 것을 위해 부드러운 동정심이라는 보답이 있다. 아픔으로부터 끈기와 달콤함의 제비꽃이 피어나고, 이사야의 입술에 닿아 그의 생명이 영 안에서 불켜지게 한 거룩한 불에 대한 선견(vision)도 있게 되고, 저녁 별과 더불어 오는 만족함도 있는다. 만일 고난을 극복하는데 아무런 제한도 받지 않는다면 경이롭고 풍부한 인간 경험도 극복에 대한 보상인 기쁨을 상실하고 말 것이다. 횡단해야만 할 어두운 계곡이 없는 등반이라면 언덕 꼭대기에서 즐기는 기쁨도 절반밖에 안될지 모른다.
나의 한계점을 두고 나는 그것이 벌이나 사고라고는 결코 믿지 않았다. 만일 내가 그렇다고 믿었다면, 나는 그것들을 극복할 힘을 결코 발휘하지 못했을 것이다. 히브리인에게 보내는 바울의 편지를 보면, “우리가 징벌을 받은 것 같으나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아들과 같이 취급하신다”가 있는데, 이 대목은 특별한 의미가 나에게 있는듯 여겨왔다. 스웨덴볽의 가르침이 내 생각을 받쳐주는 듯하다. 그는 징벌 또는 응징이란 단어가 크게 잘못 이해되었는 바, 이 단어는 영혼의 단련, 훈련, 제련으로 이해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의 책 “진정한 기독 종교”는 하느님께서 주신 힘에서의 신앙과 자주적 활동을 격려하는 것으로 가득해 있다. “신앙”과 “자유 의지”편은 우리는 불행이나 주위 환경 또는 우리의 과오들이 아무 희망도 없고 끌려가야 하는듯 굴복해서는 결코 안된다는 것이다. 마치 손으로 깍아 만든 인형 조각 밖에 안되어서 하느님이 뭔가 조치를 취해주기만을 기다리는 모양새가 되어서는 안된다는 말이다. 우리가 영적 노예 상태로 되어가는 상황에는 어떤 이유에서이든 맞서야한다. 우리는 진취적 기상을 취해서, 두려움 없이 자신을 들여다 보고, 해야 할 것에 대한 새로운 생각을 찾아보고, 우리의 의지력을 발달시키는 방법도 강구해야 한다. 그러면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필요를 위해 충분한 빛과 사랑을 주실 것이다.
모든 종류의 취약점은 자기 발달과 참 자유에 용기를 북돋아 주어 세련되게 하는 형체들이다. 이것은 우리의 존재 안에서 더 높은 선물이 꼭꼭 감추이게 한 단단한 돌을 깍아 들추어 내기 위해 우리에게 주어진 연장들이다. 이것은 우리의 눈에 붙어있던 무관심의 붕대를 찢어 낸다. 그리고 우리는 타인이 운반하는 짐들을 바라본다. 그리고 우리는 동정심의 지령이 발동되면서 그들을 돕는 것을 배운다.
소경된지 얼마 안 된 사람을 인생 훈련에 대한 예로 사용하면 대단히 구체적일 듯 싶다. 그가 시력을 잃은 처음에는 자기에게 남은 것이라곤 심적 고통과 자포자기 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자기는 인간적인 모든 것으로부터 닫혀 있다고 느낀다. 그에게 삶은 다 식은 난로에 있는 재나 다름없다 판단한다. 야망의 불은 꺼져 있다. 희망의 빛은 어두워져 있다. 그가 한 때 기쁨을 취했던 대상들이 이제 자신이 더듬거려 길을 찾아갈 때 날카로운 모서리가 되어 자신을 찌를 것 같이 생각된다. 그를 사랑하는 이들까지도 그가 더는 노동 같은 것으로 도와 주지 못하기 때문에 그들도 무의식 중에 그의 느낌을 상하게 하는 때도 발생된다. 그럴 즈음 몇몇 슬기 있는 선생이나 친구가 그에게 와서 시력 대신
청력을 수준 높게 훈련하면 일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조언한다. 괴로움을 당한 당사자로서는 그것을 믿지 않으려하고 심지어 자기를 조롱하는 말로 들리기도 한다. 마치 물에 빠진 사람이 자기를 구하려 뛰어든 사람인 줄도 모르고 무턱대고 그를 때리는 격이다. 그럼에도 고통자는 자신의 의지와는 별도로 앞을 향해 재촉해야만 한다. 그리고 자신이 세상과 연결되어 다시 놓여질 수 있다는 것, 인간으로서의 가치있는 업무 수행이 가능도 함을 한번 실감할 때, 그는 이전에 꿈꾸지 않았던 존재가 자신 안에서 그 자체 벗겨져 모습을 보인다. 그가 슬기롭다면, 그는 행복이란 바깥쪽 환경과 절대적 관계가 있는 것은 아니다는 것을 끝내 발견한다. 그리고 그는 빛 안에서 느꼈던 것 보다 더 확고한 의지로 그의 어두운 길을 밟아 간다.
“이 세상 시련의 용광로 안에서” 정신적으로 소경되어 왔던 이들도 위와 마찬가지로 새로운 가능성들을 찾을 수 있고 찾아야만 하며, 행복으로의 새로운 방법들을 실행하려 자신을 밀어붙여야 한다. 때로 이들은 자기에게서 더 고상한 것을 기대하는 신의에 분함을 표출할런지 모른다. 그래서 내뱉는 말인즉, “나는 나 그대로, 그것이 멍청하고 야비하고 이기적인 것일지라도 그대로 인정해주면 만족할 것이야…”하기도 한다. 이런 그를 수긍하는 것은 당사자에게 모욕적인 것이고, 인간의 영원한 존엄에 대해서도 모욕이다. 우리 안에는 아주 가까운 친구도 알지 못한 많은 것, 즉 도전적이거나 관심있어 신경 쓰거나 적나나하게 드러내는 것 이상으로 더 느끼고 더 힘있고 더 인간다운 것이 많다는 것을 확인하는 경우가 얼마나 자주 있는지 모른다. 우리는 자신을 너무나 적게 알고 있지 않던가! 우리는 자신의 내적 자아를 열기 위해, 우리의 무지를 내쫓기 위해, 가면을 찢어버리기 위해, 옛 우상들을 내던지기 위해, 거짓 표준들을 파괴하기 위해 취약점과 시험도 필요하다. 이런 거친 일깨움에 의해서만이 우리는 언제나 강요하는 외적인 것을 떠나 덜 방해받고, 덜 조임을 당하는 장소에 거주하도록 인도되어진다. 이때서야 우리는 새로운 수용력을 발견하고 선량함과 아름다움과 진리의 진가도 발견한다.
이런 경험으로부터 우리는 주님의 이 말씀, “참으로 참으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내가 누구를 보내든지 받는 사람은 나를 받는 사람이다”에 관한 경이로운 해석을 얻을런지 모른다. 우리가 극복한 취약점 안에, 우리가 도달한 이상향 안에 사랑과 지혜의 전체 왕국이 현존함을 알게 된다. 이런 방법에서 우리가 배우는 바, 성장 쪽으로의 진짜 방법은 우리의 한계점을 넘어 열망함에 의해, 위대한 것을 고상하게 원함에 의해서, 그리고 그것을 위해 분투 노력함에 의해서이다는 것이다. 우리가 항상 살고 있는 바깥쪽 생활에 더 깊은 의미가 있음을 더 의식해감에 비례해 영적 성장도 한다.
눈은 특수한 물체를 보는 것을 더 배움으로 성장한다. 인간 육체의 눈에서 지구는 평평하게 보인다. 그리고 별들은 고대인에게 보여졌던 것과 똑같이 우리에게도 보여진다. 이런 현상을 두고 과학은 무한히 새로운 경이로움과 영광들을 알 수 있게 했지 않았던가! 어린아이는 자기가 원하는 것, 원치 않는 것을 자기 주위에 있는 것들에서 보고 있다. 그러나 뉴톤(Newton)은 사과가 떨어지는 것은 자연에 있는 보편적 힘의 표현으로서 인식하고 있었는 바, 그는 보통의 시야 훨씬 멀리 보고 있었다. 이는 우리 영에 관련해서도 똑같다. 우리는 매일 접촉되는 것 안에 감싸여있는 새로운 생명의 가능성을 더 충분하게 인식할 때 (영적) 성장을 한다. 그러나 우리가 이런 생명의 원천을 이루는 사실들을 무시하거나 망각할 때, 감각들은 우리를 엉뚱한 쪽으로 인도한다. 이는 우리들 삶의 환경에서 제공된 내적 생명의 위대함을 우리로 알게 하는데, 그리고 하느님께서 주신 기회들을 우리로 보여지게 하는데, 취약점이 왜 우리에게 필요한지에 대한 이유이다.
스웨덴볽의 다음과 같은 생각들은 우리를 위해 꾸준히 봉사하고 있다. 모든 사건에서 그리고 모든 한계점에서 우리는 선택을 가진다는 것, 그리고 선택하는 것은 곧 창조하는 것이다는 생각이다. 우리는 시련이 우리를 짓밟아 뭉개도록 놔두는 것을 선택할 수 있고, 또는 우리가 시련들을 선에 속한 새 힘으로 개조하는 것을 선택할 수 있다. 우리는 일반적 의견 내지 전통적인 것에 따라 흘러가는 것을 선택할 수 있다. 또는 우리는 내부 영혼의 안내에 자신을 맡기고 진리를 향하여 용기있게 나아갈 수도 있다. 우리는 자신의 경험들이 진짜 복인 것인지 아닌지를 바깥쪽 근거들로부터는 말할 수 없다. 우리 자신이 경험들 안으로 무엇을 놓느냐에 따라 그것은 독이 든 잔이 되거나, 보약의 잔도 된다. 한계에 부딪치고 훼방받을 때 이것은 해야 하고 저것은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선택하기 앞서 어떤 원리로부터 행동할 것이냐의 선택이 먼저 있어야 한다. 땅은 분노의 장소인듯 하면서도 기쁨의 장소로도 설계되어 있다. 토양은 가시나무를 내고 장미도 가시를 가지고 있는데, 왜 인간의 삶에 시련이 없겠는가? 따라서 시련은 잔인한 것, 또는 이상한 것도 아니다. 시련은 땅의 한계 내에서는 성취되어질 수 없는 더 높은 운명을 위해 우리의 생활을 확장하고 강건하게 간직하도록 하시려고 우리를 재촉하는 하느님의 간절하심 이다. 우리 넘어 있는 것을 위해 노력할 때만이 우리는 확장과 기쁨을 쟁취한다. 이제 각자가 가지는 취약점을 집어들자. 그리고 빛이 되고 영감을 주는 영향력이 되기 위해, 약하고 시험받고 의기소침한 사람들에게 생명을 주는 생각과 바램이 소통되도록 해주기 위해, 유약한 인간적 어깨 위에 세상의 십자가를 짊어지신 그분의 실예를 따라가자.
내가 소유하고 있는 것이 “신비적(mystic)” 감각인지 아닌지 나는 모른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나는 배워서 깨닫고 있다(지각, perceptive)는 것이다. (영적) 감각은 마치 머나 먼 거리에 있는 별이 내 문 앞에 있는듯 보는 식으로 소경의 인식 안에 먼 거리의 물체(object)를 가져다 주는 능력이다. (영적) 감각은 나를 영계와 연결되게 한다. (영적) 감각은 나의 불완전한 촉각의 세계로부터 획득한 제한된 경험을 유심히 관찰하고 영적으로 바뀌도록 해주기 위해 내 마음에 관찰한 것들을 제출한다. (영적) 감각은 신성을 내 안에 있는 인간에게 밝히 보여 알게(계시) 한다. 영적 감각은 땅과 장엄한 저편을, 지금과 영원을, 하느님과 인간을 묶어준다. 영적 감각은 사색적이고, 직관적이고, 회상(추억)적이다. 세계에는 두 가지, 객관적 물질 세계와 객관적 정신 세계가 있다. 물질에 안과 밖이 있듯, 정신에도 안과 밖이 있다. 이 둘 각각은 실체를 위한 각각 고유의 위상(phase)을 가지고 있다. 물질이 그 내부 또는 그 위에 놓여 있는 정신에 전혀 관심을 두지 않은채 사용될 경우를 제외하면, 물질과 정신이라는 두 가지 생명에는 대립적인 것은 없다. 이 둘은 따로따로의 등차(discrete degrees, 불연속 등차)에 있다고 스웨덴볽은 설명하고 있다. 그는 더 설명하기를, 물질 세계를 위한 지각 장치가 우리에게 있듯, 정신 세계를 위해서도 지각 장치가 있다는 것이다.
나의 생활은 세 가지 장애, 즉 눈멀고, 귀먹고, 그리고 불완전한 발표력 때문에 상당히 복잡하게 얽혀 있기에, 나는 내 경험들을 합리적으로 다루기 위한 노력과 사고 없이는 지극히 단순한 것도 행할 수 없다. 만일 내가 바깥 세계를 이해해보려는 노력 없이 나의 신비적 감각을 꾸준히 고용했다면, 나의 발전은 저지되었을 것이고, 만사는 혼돈으로 빠져 있었으리라. 꿈과 현실, 또는 내가 적절하게 마음에 떠오르게 하지 못했던 물질과 정신을 혼합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그리고 내적(영적) 감각 없이 나는 이 두 가지 세계를 분리시켜 간직할 수 없었다. 따라서 내가 색깔, 소리, 빛, 그리고 만질 수 없는 현상에 대한 개념을 형성하는데 잘못들을 저지를 때 조차에서도 나는 나의 바깥쪽과 안쪽의 생활에 균형을 보존하려고 언제나 노력해야만 한다. 나는 남의 경험에 관심을 기울이고 그 경험을 존중함 없이는 내 촉감을 사용할 수 없다. 그렇지 않으면 나는 엉뚱한 쪽으로 가 버리든지 둥근 원을 맹목적으로 빙빙 돌기나 할 것이다. 나는 스웨덴볽의 “천국의 비밀들”이라는 책의 아래 문장으로부터 특별한 도움을 받아 왔었다:
“자기 밖에서 진행되는 것을 보고 지각하는 내면의 인간이 있다. 이 내면의 근원으로부터 감각적 경험은 생명을 지닌다; 그 이유가 느끼고 감동하는 어떤 능력도 이 주관적 근원 외에 또 다른 근원은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감각의 생명은 외부로부터 있다는 오류는 너무 일반화된 관계로 자연적 수준의 마음을 지닌 사람은 이 오류를 스스로는 제거할 수 없고, 합리적 수준의 마음을 지닌 사람 조차도 감각으로부터 알려진 내용을 간추리고 정리하여 핵심 만을 생각할 수 있을 때까지는 이 오류를 벗어나지 못한다.”
의식의 태양이 처음 내 위에서 비추어졌을 때, 어떤 기적이 보여졌는지! 사멸되었던 내 젊은 인생 나무의 밑동은 지식의 물에 적셔져 다시 자라나, 다시 싹을 내면서 어린 시절의 꽃들로 다시 달콤해졌다. 내 존재의 깊음 아래로부터 나는 소리쳤다. “살아있다는 것은 정말 좋은 것이다.” 그리고 나는 떨리는 두 손을 생명 쪽으로 내밀었다. 그 이후 내게 떠 맡겨졌던 말못함도 쓸데없는 침묵일 뿐이었다! 내가 깨어났던 세계는 아직 신비적이었다; 그러나 그 안에는 사랑과 희망과 하느님이 있었다.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었다. 천국 안으로의 입장이 나의 이런 경험 같지 않을까?
몇 년 후 내가 말하기를 배운 이후, 내 인생은 확대되어졌다. 나의 36년 전의 사건으로 인해 가졌던 흥분과 놀라움은 지금도 중단되지 않고 있다. 이 사건은 아주 따로 독립적으로, 기적적인 일로, 나로 하여금 좌절하지 않도록 내 앞에 언제나 서있다. 한 밤중 같은 침묵 안에서 벙어리이고, 영혼도 없는 공기가 언어로 변형되는 것을 생각해보라. 글자 뜻 그대로, 나는 언어에 대한 개념이 없었다. 그리고 내 촉감은 말해지는 단어들의 수천의 세세한 진동들을 나에게 운반해 주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청각 없는 나로서는 상대방이 나의 말을 듣게 하는 것 뿐아니라 나자신을 이해하도록 만드는데 성공할 때까지 할 수 있는 한 최대 한도의 사고력을 발휘해야만 했다! 지금의 경우에서도 내가 좀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내 말을 하려면 마음의 순수한 힘에만 의존해야 한다. 설사 내가 말을 잘하고 있는 때에도, 나는 내 입술로부터 나가는 어조를 하나도 느낄 수 없기 때문에 언어 구사가 꽤 완전한데도 그것을 수정하느라 어쩔줄 모르기도 한다. 사실 나를 놀라게 하는 것은 내가 실패할 때가 아니라, 어렴풋이 의식하는 부분, 또는 영혼이 내 솜씨 없는 말에 끼어드는 것, 다시 말해 내 친구들이 “왜 너는 지난 번에는 말을 잘했는데 지금 잘 할 수 없느냐?”하고 진지하게 말하는 것 같이 생각될 때이다. 만일 내가 이런 정신력을 더 충분히 발달시켰더라면, 보다 완전한 언어 구사가 가능했을 것이라 여겨진다. 내가 견뎌낸 고통과 실망은 수없이 많다; 그러나 그것들은 나자신과 바깥 세계와의 살아 있는 끈을 간수할 수 있게 해서 나에게 가져다 주는 기쁨을 위해 치룰만한 값이다. 내가 음절과 말하는 것 안에 느낌을 놓는 것을 배웠을 때, 나는 모든 시간과 영원의 기적-생각의 실체를 더욱 더 느끼게 되었다. 생각, 이로부터 책들이, 철학이, 문명들이, 그리고 인류의 기쁨과 화냄이 만들어지지 않던가! 컴컴한 밤중을 수 년 동안 여행했던 외로운 소경이 태양과 햇빛 세계의 모든 영광에 갑자기 노출되는 것 같은 상태가 나에게서는 이해성의 빛이 내 마음에 홍수로 밀려 들었을 때의 경우이다. 그리고 나는 단어들이 지식, 생각, 행복의 귀중한 상징이다는 것을 실감했다. 정상적인 사람의 경우 단어들의 사용에는 매우 친숙하다. 따라서 그는 자기가 언제 단어들을 사용하기 시작했는지 기억 못한다. 나의 경험은 아주 다르다. 나는 일곱 살이 거의 다 되어서야 언어를 획득하기 시작했다. 따라서 나는 내가 경험했던 것을 똑똑히 기억한다. 내가 단어의 소리를 배우기 전 여러 해 동안은 손 감각으로 각 단어를 배웠다. 내 상상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단어의 의미를 소리를 들으면서 동시에 지각할 것이다 이었다. 다시 말해 생각-상응들의 의미가 갑자기 나에게 온 것이다.
내 선생님, 애니 맨스휠드 설리반(Anne Mansfield Sullivan)은 나와 함께 한 달 가까이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나에게 여러 물체의 이름들을 가르쳤다. 그녀는 물건들을 내 손에 놓고 자기 손가락에 물건의 이름들의 철자를 써보도록 하였다. 그리고 글자의 형체를 만드는 나를 도왔다; 그러나 그 때 나는 내가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어렴풋한 생각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리고 내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역시 모르고 있다. 단지 어떤 움직임을 통하여 가고, 이 위치에서 저 위치로 바뀌는 내 손가락의 촉감만 기억하고 있다. 어느날 그녀는 나에게 컵을 건네면서 단어의 철자를 썼다. 그런다음 그녀는 어떤 액체를 컵 안에 부었다. 그리고 글자 w-a-t-e-r 를 만들었다. 나중에 그녀는 말하기를, 그 당시 내가 어리둥절 하여 컵에는 물의 철자를, 물에는 컵의 철자를 영혼동하
면서도 그것이 맞다고 고집부렸었다고 한다. 드디어 나는 화를 냈는데 그 이유는 설리반 선생이 이 단어들을 반복했기 때문이다. 자포자기된 상태로 그녀는 나를 담쟁이덩굴로 덮혀 있는 펌프 집으로 데리고 가서 자기가 펌프하는 동안 펌프 물꼭지에 컵을 대고 있으라고 했다. 그리고 그녀는 또 한 손으로 w-a-t-e-r 의 철자를 힘차게 썼다. 나는 조용히 서있었고, 내 온 몸의 주의력은 찬 물이 내 손 넘어 흐를 때 철자를 쓰는 그녀의 손가락의 동작에 모아져 있었다. 딱 한차례 내 안에 이상한 휘저음, 안개낀 의식이었고, 어떤 것의 느낌은 기억된다는 것이었다. 마치 내가 죽었다가 다시 삶으로 되돌아 온 것 같았다! 내 선생님이 자기 손가락으로 하던 무엇은 내 손 넘어 흐르는 찬 어떤 것을 뜻했다는 것, 이런 표시들을 가지고 다른 사람들과 소통하는 것이 가능함을 이해했다. 이 날은 경이로운 날, 내가 결코 잊을 수 없는 날이었다! 내 앞뒤를 달려 다니는 생각들이 빠르게 나에게 왔다-내 두뇌에서 출발한 생각이 내 전체에 퍼져 갔다. 이것은 나의 정신적 깨어남이었다고 지금 생각들고 있다. 계시의 속성 안에 있는 경험도 이런 것과 비슷할 것 같다. 나는 내 안에서 일어난 이 큰 변화를 여러 방법으로 즉시 그녀에게 보였다. 나는 내가 만지는 모든 물체의 이름들을 배우기를 원했다. 그리하여 밤이 오기 전까지 나는 서른 단어를 익혔다. 존재하지 않음은 나로부터 삭제되었다! 나는 내 취약점에 반비례되는 강함과 기쁨을 느꼈다! 상큼한 감정이 나를 통하여 잔물결을 일으키고 있었다. 내 가슴에서 잠궈져 있었던 달고 오묘한 어떤 것이 노래하기 시작했다. 이 첫 계시(밝히 앎)는 그동안 내가 어둡고 소리 없는 감옥에서 소비한 모든 세월 그 이상의 가치가 있었다. 단어 “물”은 태양이 꽁꽁 얼은 세상에 내려 쪼이듯 내 마음 안으로 떨어졌다. 이 최고도의 사건 이전, 내 안에는 먹고 입고 잠자는 것 외에 아무것도 없었다. 내 하루 하루들은 과거, 현재, 미래가 없는, 희망도 예상함도 없는, 흥미와 기쁨도 없는 그야말로 백지상태 그대로였다. 즉,

이전 나의 생활은 밤이 아니었다-낮도 아니었다.
그러나 공간을 빨아들이는 공허였다,
그리고 고정됨, 그런데 장소가 없다:
거기에는 별이 없고-땅도 없고-시간도 없고-
제지받음도 없고- 변화도 없고-선도 없고-죄지음도 없었다

나에게 온 이 변화는 자연의 경이로움으로부터 영의 경이로움으로 가는 한 계단에 불과했다. 스웨덴볽의 메시지가 나에게 밝히 알려졌을 때, 또 하나의 귀중한 선물이 내 삶에 보태졌다. 나는 이 감격을 말로 옷입히려 노력할 것이다. 이 감격은 마치 빛이 없던 곳에 빛이 온 것 같고, 만질 수 없는 세계가 확실히 만질 수 있는 세계로 빛을 발하게 했다. 내 마음의 수평선은 동작을 더 빠르게, 전투는 더 강하게 치루는 머리가 좋은 인간 운명 쪽으로 넓혔다.
천국, 이는 방사된(radiant) 견해들을 수집한 곳이 아니라 실제로 살 수 있는 세계이다고 스웨덴볽은 초상화했다. 결단코 잊혀져서는 안되는 것, 죽음은 삶의 끝장이 아니고 살아감의 경험 중에서 가장 중요한 삶을 경험하는 것일 뿐이다는 것이다. 내 생각들의 큰 침묵 안에는 내가 땅에서 사랑했었던 모든 이들, 그들이 가까운 사이었든지, 먼 사이 이었든지, 살아 있거나 죽었거나 관계 없이 모두가 살고 있고, 그들 고유의 개성도 가지고 있고, 그들 자신의 습관과 매력도 잃지 않고 있다. 어떤 순간, 나는 외로움에 힘을 보태고 싶으면 내 주위로 그들을 데려올 수 있다. 만일 어떤 장벽이 그들이 나에게로 오는 사이에 있어 방해 한다면 내 가슴은 터질런지 모른다. 나는 두 세계가 있다는 것을 안다. 하나는 줄자로 잴 수 있고 규범이 지배하는 세계, 또 하나는 심정으로 느낄 수 있고 직관적 통찰이 있는 세계이다. 스웨덴볽은 나로 하여금 미래의 삶을 마음에 품어 보게 해주었을 뿐아니라 바랄 수 있는 삶으로 만들어 주었다. 분리와 슬픔을 가지고 죽음의 힘을 만나야 하는 생명있는 사람에 주는 그의 메시지는 하느님의 현존하심에서 불어오는 어떤 시원한 미풍처럼 되어 인간성의 가슴을 가로질러서 말끔히 청소해준다. 자연이 자신을 금색과 에머랄드색과 진홍색 옷으로 치장하고 죽음을 만나듯, 우리도 죽음을 만나되 가장 빛나는 생각들과 가장 빤짝이는 기대함으로 차려 입고 영광의 불꽃 안에서, 쾌활한 걸음으로 무덤으로 행진하여 마치 영원불멸을 나에게서 강탈하려는 죽음에 도전장을 내밀 수 있다.
사람이 위 사항을 믿기 힘든 경우가 발생하는 것은 그것이 입증 되지 않아서라기 보다는 그것을 자신이 불신하는 태도 때문에서 이다. 이기주의적 욕구는 영적 분투 노력을 궤멸시키려는 경향이 있다. 바꾸어 말해, 그의 내적 능력들이 의식하는 경험의 지점에까지는 아직은 도달되지 못했다고 말하는 것이 사실에 더 가까울 것이다. 그들의 내적 기능들이 결과를 가져다 주기에는 너무나 유약한 편이다는 말도 된다. 그는 과도하게 얻고자 하는 것(탐욕)이 자신의 품성에 얼마나 유해한 영향력을 행사하는지를 실감할 수 없다. 그는 자기의 영적 존재의 참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다. 그는 물질적인 것만이 진짜라고 믿는다. 우리의 문명은 스웨덴볽 같은 철학자의 가르침이나 위대한 사상가의 선견에 무관심한 정도에 비례하여 실패하고 만다.
우주 같이 넓고 신중한 생각들을 지니고, 자기 손에 지혜를 쥔 스웨덴볽은 천사들이 영계의 이 구역으로부터 저 구역으로 인도하여 사후 우리가 맞는 삶과 불멸한 것들의 실체를 어떻게 자기에게 보였는가를 말하고 있다. 천사들은 그의 선생이요 안내자였다. 그는 천국에 자기 영혼을 맡겼다; 그는 신성한 섭리의 방대함, 영원한 삶의 굉장한 환경을 감지했다. 그는 창공과 운행 중인 별들의 진로를 걷는 것도 허락되어졌다.
나도 알아차리는 것은, 어떤 실력있는 비평가는 나를 경멸의 자기들 수레바퀴에서 부수어뜨리려 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내 빈약한 철학을 그들의 날카로운 환락의 모루 위에서 과학으로부터 추려낸 이성의 망치로 수정하려 노력할 것이다. 즉 “모든 창조는 물질 속의 보이지 않는 원자 안에서 그 자체에게 왕관을 씌운다. 이것이 시작과 끝이다.” 아마….; 그러나 백합의 꽃받침(cup)에 이슬방울이 아직은 있다; 장미의 가슴에 향기가 있다, 그리고 나뭇잎 아래 새들이 날개를 접고 있다! 나는 죽음의 눈을 찬찬히 들여다 보는 것을 두려워하는 가련한 신앙을 이해할 수 없다. 죽는 것을 보고 상처받는 신앙은 허물허물한 갈대에 (몸을) 기댄 것이나 흡사하다. 불변의 생각을 가지고 나는 보고있는 모든 것을 넘어야 보이는 것을 뒤쫓고 있다. 내가 영적 빛 안에 서서 “생명과 죽음은 하나이다 ”라고 외칠 때 까지 나는 불변의 생각들을 뒤따를 것이다. 내 삶을 뒤돌아 볼 때, 나의 가장 값있는 은덕(obligation)은 내가 결코 보지 않았던 분들인 것 같다. 나의 아주 절친한 사람들은 지성(mind) 속에 있는 이들이고, 나의 충성스럽고 도움 주는 친구들은 영(spirit) 속에 있는 이들이다.
나는 종교 없는 나자신을 상상할 수 없다. 만일 종교 없는 나를 말하는 것보다, 심장 없이 육체가 살아 있다고 상상하는 것이 더 쉬울 것이다. 출생 때부터 눈 멀고 귀 먹은 이들에게 영계를 설명하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다. 대부분의 정상적 사람에게는 영적인 것들이 거리도 먼 것 같고 어렴풋하듯, 나에게는 자연적인 것들 중 많은 것들이 그러하다. 나는 스웨덴볽의 가르침을 담고 있는 내 큰 점자책 안으로 내 손을 깊이 던져 넣는다. 그리고 이 책에서 물러날 때 내 가슴은 (밝히 안) 영계의 비밀들로 가득하다. 내적 감각(inner sense), (혹시 당신이 내적 감각이 무엇인지 잘 몰라서 그냥 “신비적(mystic)” 느낌(sense)이라 말하고 싶다면 말해도 괜찮다) 이 감각은 (자연인에게) 보이지 않는 것을 미리 보게(선견, vision)해준다. 나의 신비한 세계 안에는 내가 결코 “보지 못했던” 나무와 구름과 별과 소용돌이 치는 시냇물이 사랑스럽게 있다. 자연계의 사물을 보고 있는 나의 동료들이 거기에는 아무것도 없다 하는 그 곳에 아름다운 꽃들과 새들과 웃고 있는 어린이들이 있는 것을 자주 의식한다. 내 동료들은 내가 “바다에도, 땅에도 있지 않았던 빛”을 보고 있다 하여 회의적 분위기에서 나를 대할 것이다. 그러나 내가 아는 바, 그들의 신비적 감각은 잠들어 있다는 것, 따라서 그들의 삶에는 메마른 장소가 많다는 것이다. 그들은 미리 볼 수 있는(vision) 것들 보다 이미 보았던(fact) 것들을 선호한다. 그들은 과학적 증명을 원한다. 그들은 그 증명을 가질 수 있다. 지칠줄 모르는 인내가 그 속성인 과학은 인간의 뿌리를 원숭이에게 까지로 되돌아가 추적하여 인간의 뿌리를 증명해냈다고 만족해 한다. 그럴지라도 하느님은 이 원숭이로부터 미래의 삶을 미리 보고 깨닫고 사는 사람을 창조하신다. 삶이 죽음을 결국은 만나듯, 과학도 그렇게 영을 만난다. 그 이유가 삶과 죽음은 하나이기 때문이다.

부록
(Appendix)

선각자의 출판 서적, 비 출판 서적 소개
선각자의 용어에 대한 간결한 풀이
선각자에게만 유일한 기본 생각들
도서구입 안내

선각자의 신학 관련 저서들

1. 직접 출판한 저서들 2. 출판되지 않고 발견된 그의 기록 내지 저술인 것들.

천국의 비밀들 (1749-1756년) 영의 일기(또는 영적 경험)(1745-1765)
천국과 지옥 (1758년) 요한계시록 설명 (1757-1759년)
새 예루살렘과 그곳의 교리 (1758년) 아타나시안 신조 (1759-1763년)
마지막 심판 (1758년) 주님에 관하여 (1759-1763년)
백마 (1758년) 예언서들과 시편의 내적의미(1759-1763년)
우주에 있는 땅들 (1758년) 마지막 심판 (1759-1763년)
주님에 관한 교리 (1763년) 신성의 사랑 (1759-1763년)
거룩한 성경에 관한 교리 (1763년) 신성의 지혜 (1759-1763년)
삶에 관한 교리 (1763년) 선행의 교리 (1766년)
신앙에 관한 교리 (1763년) 5 기억할만한 관련들 (1766년)
마지막 심판에 관한 계속 (1763년) 결혼에 관해서 (1766년)
신성의 사랑과 지혜 (1763년) 정경들 (1769-1772년)
신성의 섭리 (1764년) 새 교회에 관한 교회의 역사 (1769-1772년)
요한계시록 밝힘 (1766년) 부속물(coronis) (1769-1772년)
부부의 사랑 (1768년) 새 교회로 초대함 (1769-1772년)
간략한 해설 (1769년)
유입, 또는 혼과 몸 사이의 상호 작용 (1769년)
진정한 기독 종교 (1771년)

선각자의 용어 풀이
(Glossary)

** 참고: (commercium) 식의 표기된 것은 라틴어임
이 풀이는 간결해서 좋지만, 한편 너무나 간결해서 어떤 단어의 경우는 이해함에 불리할 수 있는 단점도 있다. 어쨌든 아래의 글들은 Swedenborg Resercher’s Manual by William Ross Woofenden으로부터 발췌되었다. 정확한 이해를 위해 영역본이 필요할 경우 역자에게 연락하기 바란다 (인터넷에서 헌 책은 구매가 가능할지 모른다, 검색해보기 바란다).

감각적인 (Sensuous)
관능적인, 감각의, 그리고 감각 지향의. 섹스적인 것만을 함축하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감각들에서 집중함에 의해 특색을 이루는 것, 감각들에 의해 납득되는 것. 마음의 자연적 수준에서도 가장 낮은 평면.

개혁 (Reformation)
거듭남의 과정 중의 일부를 묘사하는데 사용되었다, 즉 당사자의 바깥쪽 생활을 질서 안에 놓는 것이다. 당사자는 진리가 우세한 순종의 상태에서 진리를 수단으로 선 쪽으로 인도된다. 이것은 주님으로부터 새 의지를 받기 위한 준비단계이다.

거듭남 (Regeneration)
넓은 의미에서 재출생의 모든 과정. 좁은 의미에서 개혁에 뒤이어지는 과정. 주님이 각 개인 안에서 새로운 의지를 만들어가시는 과정, 또는 (삶의) 과정의 목적(goal).

결혼의 (부부의, connubial)
결혼에 관련되는 단어이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것은 결혼에 연계
된 외적인 것들 만에 관련하여, 또는 부정적 측면에서 사용되는 편이다. 새나 동물의 짝짓기에 사용되었다.

고대 교회 (ancient church)
성경에서 노아와 그의 자손들에 의해 표현된 고대 시대 성경 속의 사람들의 종교.

과학물들 (Scientifics)
과학적 진리들을 보라. 지식들, 사실들, 자료들.

과학적 진리들 (Scientific truths)
위 표현은 빈약한 번역일지 모른다, 그 이유는 이 용어가 우리가 아는 “과학(science)”을 가리키는 경우가 매우 드물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연을 연구함으로부터, 그리고 성경의 글자 그대로의 의미로부터 획득한 사실들, 자료들, 진리들이다.

공적 (Merit, meritorious)
흔한 사용법에서 이 단어가 함축하는 것은 긍정적(건설적) 측면이 대세이다. 그러나 선각자가 이 단어를 사용할 때의 경우, 거의 언제나 뜻하는 것은, 공적 추구(merit-seeking), 즉 자비롭게 여겨질 수 있다 싶은 어떤 행위 또는 친절한 어떤 행동에 대하여 돈 또는 명성을 보상을 은근히 기대함이다.

광적 신앙 (Religiosity)
외적, 또는 미신적 믿음 체계, 신봉자의 편에서 내적 약속의 깊이를 갖지 않은 종교를 묘사하는데 사용하였다.

교류 (Intercourse)
왕래함 (commercium)에 대한 오래전의 번역, 상호 작용 (interact)을 뜻한
다, 이는 개인들 또는 어떤 것들을 연합시키는 것이다. 개인의 혼과 몸이 어떻게 교통하고 일반적으로 상호 작용하는지를 언급할 때도 사용된다.

교리 (Doctrine)
세 가지를 뜻하려고 사용된다: 1. 배움의 과정, 2. 학식 또는 과학의 분과, 또는 3. 특별한 취지에서 교회의 가르침. 일반적으로 이것은 진실로 종교 생활을 꾸려가기 위하여 절대로 필요한 가르침일 것이다, 그리고 고로 본질적으로 실용적일 것이다.

교회 (church)
이 단어는 흔한 보통의 단어 사용에서도 어떤 영적 생활만도 아니고, 그렇다고 어떤 종파나 조직체만을 지칭할 때도 아닌 것이 뜻해지게 보통이 아닌 의미에서 사용되어진다, 즉 조직체에서이든, 개인적으로 이든, 영적 생활을 사실로 깨달음이다. 고로 개인(person, 개인)은 영적인 교회이다.

균형 (balance)
(평형을 보라.) 천국 세력과 지옥 세력이 균등하게 인간에게 영향을 미치도록 하는 섭리적 상태를 염두해서 사용된다, 하여 당사자가 악의 영향력에 휘둘리는 듯 외관상 나타남에도 불구하고 실상 그는 자유한 상태에서 도덕에 관한 결정들을 만들게 됨을 말할 때 이 단어가 사용되고 있다.

그릇 (Vessel)
인간은 하느님으로부터 생명을 받는 “그릇”이다고 말해진다, 단지 담는 용기라는 말이 아니고 유기적 형체로서 이다.

기억해둘만한 관련 사항들 (Memorable relations)
기억해둘만한 사건(memorabilia, memorable occurrences)라고도 말한다. 선각자가 그의 후기 저서들의 장들에 첨부하는 식으로, 또는 군데군데에 흩뿌
리는 식으로 해서 기록했는데, 다른 세계에서의 그의 경험들에 관한 이야기들이다.

기운 (영역, sphere)
모두 각각의 사람들은 자신의 총체적 사랑들로부터 되튀긴 유출물에 에워싸여 있다고 말해진다. 일반적으로 이것은 땅 위에서는 감지될 수 없다. 누군가의 기운이 어떤지는 천국에 있는 모든 이에 의해서는 확연히 감지된다, 하여 상대방과 연계되어도 되는지, 피해야 하는지를 결정하는 기초이다.

길들여진 선 (Domestic good)
개인이 부모로부터 유전적으로 끌어낸 선을 뜻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이것은 당사자가 (선택의) 자유함 안에서 그것을 자기 것이 되게 하지 않으면 “저축”되지 않는다. 또한 “가정의 자연적 선”, 그리고 “자연적 선”이라고도 불리운다. (천국의 비밀 3518항의 창. 27:9에 대한 해석을 참조하라.)

김나지움 (Gymnasium)
유럽에서 공통적으로 사용함에서는 두 번째의 학교 (중고등학교). 선각자는 이 단어를 그룹들의 멤버들이 생각들을 토의하고 그들의 마음들을 실행해보는 영계의 모임들이나 거기의 학교들을 언급하는데 사용했다.

끊이지 않는 등차들 (continuous degrees)
수준들(levels) 또는 단계들(gradations), 마치 찬 것으로부터 따뜻한 것까지, 또는 어둠으로부터 빛으로까지의 경우와 유사하다. 또한 “넓이의 등차들” 또는 “수평적인 수준들”이라 불리운다.

나머지 상태들 (Remnant states)
“리메인스”를 보라.

논리를 더듬어 사고함 (Ratiocination, 합리화함)
“추론(reasoning)”으로만 번역되면 약간 유감스럽다. 이는 거짓 추정들, 거짓 추론, 거짓 연역을 끌어내는 과정을 함축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아마 “합리화 함(rationalizing)”의 뜻을 지닌 최근의 심리학적 용어에 매우 가까울지 모른다.

능력(Faculty)
이런 것을 뜻하는데 사용되었다, 1. 신체적 수단(resource), 2. 가능성, 기회, 3. 타고난 경향(propensity) 또는 능력(ability), 그리고 4. 정신의 품질. 이 마지막 의미에서 보면, 이것은 하느님으로부터 수여됨이다. 이 수여된 것을 올바로 사용함에 의해 당사자는 자기 안에서 주님의 현존하심을 보증받는다.

다써버림(고갈, exinanition)
영이 텅빔, 영적 황무함의 상태. 주님의 경우, 이것은 그분의 인간 부분이 내부의 신성으로부터 분리된 듯 여겨져 있는 겸허의 상태이었다.

담는 어떤 것(용기, containant)
초기 번역자들에 의해 만들어진 단어, 또한 “포용함(continent)”으로도 번역하나 통상적인 수준은 못된다. 이것은 콘테이너, 저장소를 언급하는 것인데, 때로는 마음이 생각들의 “저장소”이다를 서술함에서 심령 연구적 측면에서 사용된다.

더 낮은 땅(Lower earth)
영계에 관한 선각자의 세부적 묘사에서, 더 낮은 땅은 영들의 세계에서는 그 아래쪽 영역이고, 지옥 쪽에서는 그 위쪽 영역이다.

동물 영 (animal spirit)
갈렌(Galen)의 관념에 있는 세 신체 영들 중의 하나. 선각자는 더 순수한 종류의 피를 뜻하기 위해 사용했다. 돌(Dole)의 “신성의 사랑과 지혜” 423쪽에서는 “혼-영”으로 번역하였다.

동물 왕국 (동물 왕국의 경제)
“인간의 혼의 영역의 역학”을 다룬 선각자의 1740년의 저서 Oeconomia Regni Animalis 에 대한 미흡한 번역어 이다.

되풀이하는 결혼들 (Iterated marrages)
반복된 결혼들, 재결혼.

되찾음 (구속, Redemption)
보통의 의미에서 사용되지 않는다, “되사는 것”, 되찾음은 그리스도의 생애 전 과정의 결과로 얻어진 지옥을 복종케 함과 천국의 질서를 다시 세운 것을 뜻한다. 하여 믿는 자에게 가능할 수 있는 개개인의 구원을 만드신 것이다.

리메인스 (Remains)
사랑과 진리에 관한 감명들이 인간에게는 알려지지 않은 신비한 방법에서 주님에 의해 개개인 안에 심어진 사랑과 진리에 관한 깊은 감명들, 이것은 유아로부터 모든 삶을 통하여 각 개인과 더불어 계속 “남아” 있으면서, 재출생을 위한 기초가 되어주고 있다. 이 단어는 “나머지들(remnants)” 또는 “나머지 상태들”으로도 번역하고 있다.

림버스(Limbus, 가장자리, 변방)
“봉투, 덮개(envelope)” 또는 “테두리, 가장자리(border)”로도 번역되었다. 각자의 특질(본성, nature)로부터 끌어내진 가장자리를 뜻하기 위해 사용되었는데, 사후에도 이것은 존속하여 영계에서 (어떤 형체라고 분명하게 묘사할 수는 없지만) 하나의 불변성(fixity), 안정성(stability), 영속성(permanence)을 주고 있다. 이 단어는 쉽게 정의를 내리기가 힘든 복잡한 개념에 있다.

맥시머스 호모 (Maximus Homo)
“웅대한 사람”과 “보편적 인간”을 보라

메디아 (Media)
종종 단수의(유일한, singular), 매개(중간, medium). 이는 사이에서 가는 것들을 뜻한다. 두 실체의 각각으로부터 어떤 것을 도출하는 중간의 것(intermediary), 그리고 개인을 이쪽 편으로 끌어낼 때, 다른 쪽은 종속시키는 효과를 갖게 된다.

모양 (Form)
유기체(organization) 또는 본질이 나타나게 하는 유기적 저장소(organic receptacle)를 철학적 의미로 사용했다. 이것은 외형(shape, 모양)에 관련되지 않고, 질서, 의향, 배열과 실재물의 부분들과 관련된다. 기능 또는 사용과 밀접하게 연합하고 있다.

목적, 원인, 결과 (End, Cause, Effect)
목표(goal) 또는 의도(purpose)의 철학적 의미에서 사용되는데, 목적은 의지력의 사랑 또는 의향(intention)이고, 원인은 의도(purpose)를 성취하려고 이해력을 통하여 있는 수단들이다, 결과는 초래하는 행동, 말함, 감각 또는 생산, 고로 성취됨이다.

묶는 것들(속박됨, bonds)
이는 족쇄를 채우는 식의 뜻에서는 아니고, 어떤 개인이 유독 사랑하는 특별난 것을 뜻한다. 즉 너무나 사랑하기에 그것에 묶인 상태인 듯 되는 것, 하여 사랑된 것의 반대되는 것에 대하여는 금하게 한다(아랑곳하지 않는다). 외적 묶임들은 시민 생활에, 내적 묶임들은 영적 생활에 영향을 준다..

방계적인 선(Collateral good, 부수적인 선, 서자 출신의 선)
자연적 선함과 영적 선함 사이에 놓인 선함, 하여 일부는 자연적 선함, 일부는 영적 선함이 섞인 상태의 선함, 즉 본질적으로는 영적인 것들에 대한 자연적 수준의 사랑, 고로 진짜의 선함은 아니나 진짜의 선함에 관련되고 있다.

별개의 하나 (구분되는 하나, distinctly one)
선각자에게서의 단일성(하나임, oneness)은 단순함이 아니고 목적(의도, purpose)의 통일성(unity)이다. 사랑과 진리는 행동 안에서 분리되어 존재할 수가 없다, 그러나 여전히 그것들의 하나임 안에서 구분될 수 있다, 고로 “별개의” 또는 더 나은 표현으로는 “구분할 수 있게 있는 하나”이다.

부가적인 (adscititious)
때로는 “외래의(adventitious)”로도 번역할 때도 있다, 부가적인(additional), 외적 측면에서 첨가됨

부끄러히 여김 (창피함, 굴욕, Humiliation)
당황함이나, 근대적 의미에서는 그렇게 사용되지 않고, 겸손의 상태를 뜻하기 위하여 사용하고 있다, 이 겸손 안에서 개인은 자기에게 있는 듯 여겨지는 어떤 선 또는 진리가 실제로는 주님의 것이 자기 안에 있는 것임을 인정한다. 이 단어는 주님께서 그분의 영적 텅빔의 상태를 두고 사용하셨다.

부부의 (결혼의, conjugial)
이는 선각자가 철자를 기록함에서 (conjugalis 대신) conjugialis를 더 좋아했다는 점을 반영하기 위해 초기 번역자들이 개발한 단어이다. 이 단어는 결혼에 속하는 것들, 그리고 결혼한 양쪽(부부)가 서로를 위하여 가지는 사랑들에 관련되고 있다. 일반적으로 적극적 자세를 취한다.

불연속 등차들 (discrete degrees)
구분되는 수준들, 이쪽이 저쪽 보다 더 높다, 마치 목적, 원인, 결과의 관계와 같다. 또한 수직적 수준들이라 불리운다, 고도(altitude)의 등차들, 높이의 등차들.

보편적 인간 (Universal Human)
맥시무스 호모에 대한 돌씨의 번역어이다. “웅대한 사람”을 보라.

보편적 교회 (Universal church)
“우주로부터의 교회(the church universal)”, 모든 곳에 존재하는 교회를 말한다, 교회 조직체를 초월한 교회이다. 진실로 전기독교적인 개념, 이 세상의 모든 종교에서 각 종교의 신앙으로부터 있는 신실한 개인들.

사람 (Man, homo, vir)
라틴어는 “사람”을 위해 두 단어들을 가진다: 호모(homo)-개인(person, 남자와 여자 모두), 인류(mamkind), 본질적 개인으로서의 주님; 그리고 버(vir)-남자 인간의 존재.

사정관(assessor, 재산 평가인)
1716년 선각자는 광산 왕립 대학에 “비범한 사정관”으로 위촉되어졌다, 즉 그는 스웨덴 광산국의 협력 멤버로 명명되어졌다. 그는 1724년 사정관 정회
원이 되었다. (그때 당시 광산국은 국왕 직속 감시 아래에 있었는데, 그 이유가 왕의 중요한 자금 조달이 금을 비롯한 광산 채굴에 있었기 때문이다 역자주)

사탄 (Satan)
악마를 보라. 악의 욕망들을 지적으로 확증하는 악령. “악한 자”의 이름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항간에서 말해지는 것, 즉 하나의 제 일의 악마 또는 어둠의 제 일 인 자가 있다는 식으로 선각자는 믿지 않는다)

사회 (Society)
연계된 사람들의 그룹, 함께 생활하는 사람의 그룹, 공동체, 다음 세계에서 천사들 또는 영들의 그룹. 또한 스웨덴볼지언들이 자기들의 지역 교회 조직이나 모임을 지칭할때에도 사용했다.

상응 (correspondence)
스웨덴볼기안이즘에 기초되는 개념, 신성과 모든 보다 낮은 생명의 등차들 사이에 있는 원인적인 관계와 기능적인 관계이다, 이것은 신성이 창조의 모든 것 안으로 흘러가는 방식, 또는 법칙이다.

상응물들(correspondences)
응답하고, 걸맞고, 동의하고, 또는 서로에게 유추되는 어떤 것들, 또는 실재물들, 마치 태양의 열과 빛이 하느님의 사랑과 지혜에 상응하는 것과 같다. 고로 열과 사랑, 그리고 빛과 진리는 상응물인 것이다.

새 교회 (New Church) (1)
하느님-인간 관계들의 어떤 새로운 상태를 놓고 일반적으로 사용되었다, 또한 주님만을 인정하고 예배하고, 그분의 말씀을 거룩하게 붙들고, 신성의 진리들을 사랑하고, 그리고 선행으로부터 분리된 신앙을 거절하는 교회 시대를 언급할 때 사용되었다.

새 교회 (New Church) (2)
스웨덴볽의 신학 저서들에서 발견한 교리들에 접착된 어떤 조직화된 종교 그룹을 대중적으로 규정하려고 사용된 명칭이다. 이런 그룹의 개개인들은 새 교회인(a New Churchman)이라 종종 불리운다

새 예루살렘 (New Jerusalem)
성경의 계시록서의 뒷 부분에서 묘사된 상징적 도성이다. 초기 스웨덴볽지언들이 천국의 도성을 수단으로 상징화되고 의미된 교회를 자기들의 교회로서 삼기 위해 이 이름을 채택하였었다.

새 예루살렘의 교회 (Church of the New Jerusalem)
선각자께서 기독교 교리의 본질되는 주석을 이끌어낸 교회들 중에서 가장 일반적으로 사용한 교회의 이름인데, 약식으로 말하면, “새 교회(New Church)” 이다.

선 (Good)
선함 또는 선한 것을 뜻하려고 사용한다, 이것은 신성의 질서에 따라서 생각하고 행동함에 애착함이라고 일반적으로 정의된다. 고로 이것은 쓰임(use)이 포함된 주님과 이웃을 사랑함이 그 품질이다. 인간에 있는 선은 하느님의 신성의 선에 관련이 있다.

선으로부터 진리에 애착함 (Affection of truth from good)
정밀하게 정의를 내린다면 “선행(charity)”이다, 즉 (이웃에) 쓸모있는 행동들을 있게 하는 각 개인들에 있는 선으로부터 만들어내진 진리를 사랑함이다.

선의 진리 (Truth of Good)
이 관용구의 또 다른 대체할 수 있는 어구는 “사랑의 지혜”가 있다. 이는 누군가가 지혜있기를 바램, 또는 지혜 있기를 사랑함을 가지지 않으면 지혜에
도달될 수 없다를 알아채게 한다. 이 사랑으로부터 결과할 수 있는 지혜가 “선의 진리”이다.

선행 (charity)
흔한 대중적인 사용법에서일 경우, 이 단어는 물질적 궁핍을 경감되게 해주는 것(자선 행위)을 뜻한다. 선각자는 이 단어를 영의 측면에서 관심을 갖는 것, 영의 복지를 향상되게 하는 것, 사욕이 없이 주어진 업무에 매진함, 이웃에 선을 행함에서 어떤 보수도 예상되지 않는다해도 심정에서 기쁨을 느끼고 있는 것을 뜻하는데 사용하고 있다.

수정 (변경, Modification)
선각자의 신학 저서 이전의 그의 어떤 저서에서, 본성을 통하여 교통하는 모든 방식을 함축하는 개념으로 사용하였다. 이 생각은 그의 후기 교리 또는 상응물에 관한 개념 안에 통합되고 포함시켜졌다.

순결한 (chaste)
흔히 이해되는 것은 순진한, 순수한, 독신(주의) 따위이다. 선각자는 결혼한 자가 섹스에 대하여 순수하고 깨끗한 자세를 가지는 것을 뜻하는데 사용하였다. 진정한 결혼의 사랑은 “순결함 자체”이다 말하고 있다.

순수 지력 (Pure intellect)
선각자의 신학 저서가 있기 전에서인 이성 심리학(Rational Psychology)이라는 책에서, 그는 순수 지력이란 개인들에게 생각하고 추론하는 힘을 주는 능력이다라고 정의하고 있다, 그리고 이 순수 지력은 하느님으로부터 파생된 직각적인 지혜와 함께 유기체의 모든 과정들을 통치한다.

순진 (Innocence)
라틴어의 뿌리에서는 해가 없음(harmlessness)을 뜻한다. 영적 순진은 자아
에 의해 인도되기 보다 주님에 의해 인도되기를 내향적으로 기뻐함이다. 이 특성은 각 개인에 인접되어 있으면서 당사자가 천국으로 인도되는 것을 돕는다.

스톨지 (Storge)
유아를 사랑함을 뜻하는 그맄어로부터 빌려온 단어, 특별히 그들의 부모들에 의해 유아들을 위해 느끼는 사랑. “어버이다운 사랑”, “어버이다운 애정”으로 번역되었다.

시대의 종말 (consummation of the age)
잘못 번역된 킹제임스 성경의 “세상의 끝”을 대체할 수 있는 어구. 이 어구는 시대, 또는 년대의 마감, 또는 끝을 언급한다.

시리즈(Series)
연결된 순서, 생각함의 열차. 선각자의 신학 저서 이전의 시기의 저서에 “시리즈들과 사회” 그리고 “시리즈들과 등차들”의 용어들이 가설로 언급되었는데, 이후 등차에 관한 신학적 개념에 포함시켜졌다.

시험 (Temptation)
나쁜 것을 하도록 부추킴 또는 자극함의 의미에서 사용되지 않는다. 이것은 각 개인의 지배하는 사랑을 공격하여 개인을 심리하고 테스트한다- 당사자의 특성을 밝히 드러내주고, 그 특성이 더 힘세어질 기회를 제공하는 내적 투쟁이다.

신앙의 진리 (Truth of faith)
누군가의 신앙의 부분에 있는 진정한 생각, 그러나 당사자의 삶에서 사용하게 놓여져 있지는 않은 진리이다. 이는 “신앙의 선”에 대조되어 사용된다, 이것은 누군가의 살아있는 신조들로부터 와지는 선함이다.

신성이 되심 (Glorification)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분의 있음의 모든 평면들에 있는 인간적일 뿐인 것을 벗기 위해 그것들을 신성으로 만드시는 과정. 또한 주님의 마음 안에 신성한 의식을 건립하심, 그리하여 그분이 생명 자체가 되셨다를 뜻하는데에도 사용되었다.

신성의 인간 (Divine Human)
새 교회 신학의 중심을 차지하는 생각, 이 용어는 주님의 인간이 신성이 되신 이후의 주 예수 그리스도에 적용된다, 고로 인간의 형체에 있는 신성의 사랑이다-즉 “신위(Deity)”의 모든 충만함이 신체의 형체 안에 살고 있으심”이다. (골. 2:9)

신성의 자연 평면 (Divine Natural)
신성이 되심, 또는 신성으로 만들어진 예수의 마음, 또는 내부의 본성의 자연적 수준, 또는 가장 낮은 수준.

신성이 진행함 (Divine proceeding)
진행함의 행동에 있는 신성, 고로 그분으로부터 방산되는 하느님의 품질들, 성경의 어떤 문맥에서는 성령과 필적되고 있다.

신하 (Subject, 종속하는)
평범한 사용법에 추가하여, 철학적 의미에서는 활동 또는 행위에 기초가 되는 것을 말하는데 사용하였다. 예를 들면, 선행은 “신하”를 가져야만 한다, 즉 선행을 구체화하고, 느끼고, 실시하는 개성.

쓰임 (사용, Use)
쓸모 있는 활동, 목적을 섬기는 기능, 종종 선과 같은 뜻의 선상에 놓이기도 한다. 섬기기를 진짜로 바램이 들어있는 수고함을 정규적으로 함축하고 있
다. 고로 “쓰임으로부터의 선, good of use”이 목적이다. 이 목적에 잘 어울리는 알맹이나 동기를 가지고 있는 마음가짐이나 행위.

아니마 (anima, 영혼, 내적 개성, 남성의 여성적 요소)
인간의 혼(soul), 이 단어는 다양한 전통적인 의미선상에 있어 한마디로 통일된 정의는 힘들다. 사후 살게되는 개인의 부분이다. 선각자는 분석 심리학자로 유명한 융(Jung) 보다 훨씬 먼저 이 단어를 사용했지만, 융이 이 단어에 여성의 특성을 할당했으나 선각자의 경우에서는 그런 추가된 의미는 보여지지 않는다.

아니뮤스(animus, 왕성한 정신, 외적 개성, 여성의 남성적 요소)
때로는 “의향(desposition)”으로 번역된다. 이 단어는 (만일 아니마와 대비하여 사용된다면 보다 수준이 낮은 마음,) 일반적으로 마음(mind)에 관련된다. 각자의 기질, 개성.

악 (Evil)
악, 자체만에 주목하면, 선으로부터 절단(severance) 또는 무질서된 선, 하느님으로부터 분리(disunion)와 주님과 천국에 반대함. 고로 개인 안에 있는 악은 그 개인 내부에 있는 지옥이다.

악귀들 (인간의 일생 동안 따라 다닌다는 귀신, Genii)
선각자는 이 용어를 가장 나쁜 종류의 악령들을 지칭하는데 사용하고 있다, 이것은 개인의 의지에 들어붙어 악의에 차서 행동하게 하고, 당사자의 선한 바램들을 악한 의도들 쪽으로 비튼다. 진리를 만들려고 노력하는 자가 이런 악령에게서는 그것이 거짓이고 반대적인 것으로 나타난다.

악마 (devil)
선각자를 위하여서 단어 “악마(devil)”는 지옥들 전체를 뜻한다. 악마는 사후에 있는 악한 개인이다. “사탄”에 대비해볼 때, 사탄은 자신들 안에 있는 악들의 욕망들을 지성적으로 확증한다, 악마들은 그것들을 살아내려 뜻한다.

악의 거짓 (Falsity of evil)
이는 “악으로부터의 거짓(falsity of evil)”라고도 불리운다. 거짓 생각 또는 악한 바램이 원인이 되어 진리가 비뚫어짐.

…안에 (In)
“종사함 안에” 또는 “상태 또는 조건 안에”의 의미에서 자주 사용된다. 선각자의 책에서 우리는 읽는 바, 어떤 개인이 “선 안에”, 또는 “선에 애착함 안에” 있다 등등이라고 읽는다. 이는 그가 선인 것을 사랑함의 상태 안에, 또는 선함의 상태 안에 있다를 뜻한다.

알카넘 (알캐이넘, arcanum)
비밀, 감추인 어떤 것. 이 단어의 복수는 알카나(알캐이너, arcana)이다. “알카나 세레스티아(arcana coelestia), 즉 천국의 비밀들”은 선각자의 가장 방대한 저서 명이다.

양심 (conscience)
선을 악으로부터 구별하는 능력-선천적인 것이 아니고 배워서 획득한 능력인 바 모든 이에게 균일하게 똑같을 수 없다. 선한 자만이 진정한 양심을 가진다. 가짜 양심이 선의로 의도될 수도 있을지 모르나, 신조의 오류들에 부분적으로 기초하고 있다.

양심 장사치들 (conscience mongers)
지나치게 양심적인 인간들, 타인을 혹평하는 인간들.

역사적인 신앙 (Historical faith)
전통에 기초한 “신앙” 또는 타인들의 신조들(믿음들)에 기초한 “신앙”, 고로 진실된 신앙은 아닌 것이 확실하고, 신앙 같이 나타남(껍데기 신앙)일 뿐이다 (“가정의 선”도 참조해보라.)

영계 (영적 세계, Spiritual world)
다음 세계, 또는 사후 개인들의 거처를 일반적으로 아우러서 언급하는 용어이다. 영들의 세계, 즉 사후 들어가는 첫 상태를 위해 선각자가 이름 지은 영들의 세계, 천국과 지옥의 중간에 있는 영들의 세계와 혼동하지 말라.

오류(잘못된 생각, Fallacy)
현혹시키는 나타남. (태양이 “올라온다” 같은 식에서의) 감각들의 오류들이 가장 작은 중대한 것이다. 보다 나쁜 것은 당사자의 보다 수준 낮은 본성으로부터 파생되어진다, 즉 악과 결합된 거짓들이다, 이는 개인의 부분에 신앙의 부족에 기인된다.

외관 (나타남, appearance)
순수한 진리, 또는 신성의 진리를 그 진리가 숙박한 형체들로부터 구별하려고 사용되는 단어이다. 고로, 모든 이는 자기의 유한한 상태에 따라 진리를 볼 때의 그 진리이다. 진리의 이런 나타남을 당사자가 선한 의도로 사용한다면, 이 나타남을 진리로서 주님께서 받아주시기 때문에, 망상(잘못 생각함, illusion)은 아니다.

웅대한 사람 (Grand Man)
라틴어의 맥시무스 호모(maximus homo, 가장 큰 사람, greatest man), 돌(Dole)에 의해서는 “보편적인(우주적인) 인간”으로 번역되었는데, 주님의 “몸”으로서의 천국들 전체, 또는 천국과 땅 위의 교회를 아우르는 주님의 왕국에 관련된다. 때로는 주님 자신을 뜻하는 데에도 사용된다.

유입 (Influx)
흘러듦(inflow), 또는 입력(input) 또는 영향력 (influence)를 뜻한다. 이 단어는 행동하는 모든 힘은 하느님으로부터 창조의 모든 것 안으로 변함없고 중단 없이 흐르고 있다는 근본적인 개념을 묘사하는데 사용된다.

유전적 악 (Hereditary evil)
이 용어는 선각자에 의해 별도의 제한됨도 없이 무조건식으로 사용되는 편이기는 하나, 사실상 그는 전통적 견해는 사절하고, 우리는 실제의 악을 유전적으로 상속하는 것이 아니고 악을 향하려는 경향성들을 상속한다고 주장한다. 우리는 성인들이 되어서는 이것을 확증하거나 채택하거나, 또는 거절하거나 거부할는지 모른다.

유출 (Efflux)
산출(output), 밖으로 흐름. 하느님으로부터 개인들 안으로 흘러든 선과 진리는 되돌아서 이웃을 사랑함의 행동들의 형체로 세상 안으로 흘러나간다. 하느님의 보편적 법은 유입은 언제나 유출에 의거 있게 된다는 것이다.

육체의 (coporeal)
실재를 나타내는데 자주 사용되어 신체적 부분, 또는 신체에 부착된 마음의 부분을 뜻하였다. 신체적, 육체적인 것은 감각과 육체적 쾌락들과 더불어 선취되어 있다.

은근히 주입하다 (Insinuate)
기초되는 라틴어의 의미에서 이 단어는 어떤 것을 노골적 방법이 아닌 미묘하게 받아들여지게 또는 스며들게하는 것을 뜻한다. 수용자가 주입 과정을 충분히 알아챔이 없이 내면의 위치를 할당하는 것이다.

음란 (간통, scortatory)
성관계가 문란한 것을 묘사한 것이다, 음행, 매춘.

의미함 (Significative)
영적 뜻을 운반하고 가리키는 어떤 것. 특별한 뜻, 뜻있음. 현재는 표현함과 상응함과 구분되어 사용된다.

의지력과 이해력 (Will and understanding)
“의도력과 식별력(intentionality and discernment)”, “자발력과 지력(the voluntary and the intellectual)”. 이것들은 인간의 개성 속의 포괄적인 두 양상들 또는 능력들이다. 의지력은 의지력의 모든 기능들을 포함하고, 신성의 영향력에 반응을 보이고, 수용하는 부분을 섬긴다. 이해력은 식별하는 모든 기능들을 포함하고, 의지력을 가르치고, 그것의 의향들을 집행하는 것을 섬긴다.

이성이 있는 (합리적인, rational)
이 단어는 실명사로 사용하는 경우가 매우 흔해졌다. 천국으로부터의 빛이 세상의 빛 안에 있는 것을 계발하는 정신적 평면이다. 의식되는 마음 중에서 가장 높은 수준이다. 합리적 진리는 자연적인 것들에 관한 영적 진리이다.

이웃 (Neighbor)
내 집 아닌 다음 집에 있는 사람이면 이웃이다가 절대로 아니다. 이런 독특한 생각선상에 있다, 즉 주님으로부터의 선이 이웃인 것이다, 고로 각 개인이 나의 이웃이 되는 척도는 상대방이 주님으로부터의 선을 받아들인 양과 질에서 이다. 고로 가장 비중이 큰 이웃의 순서를 차례로 열거한다면, 주님-교회-나의 나라 등등으로 내려간다.

인식함들(cognitions)
때로는 “지식들”로도 번역된다. 이는 사실들(facts)을 관념들(ideas), 또는 앎의 보다 깊은 수준들 안으로 조직화 함을 뜻하기 위해 사용된다. 엘리엇씨는 그의 새 번역서인 “알카나 세레스티아”에서 “내면의 것들에 관련되는 지식의 항목들”이라 정의하고 있다.

있음 (being, ens)
실재(entity) 또는 구별되는 어떤 것을 뜻하기 위해 사용되는데 선각자는 이 단어를 매우 드물게 사용했다, 또한 순수하게 정신적 건설을 뜻하기 위한 합리성, 이성적 인 것에 대한 어구인 “ens rationis”에서 사용되었다. 이를 있음인 esse, 즉 “혼” 또는 어떤 것의 본질되는 속성과 대비해보라.

있음 (being, esse)
어떤 것에 있는 본질되는 품질, 실체(reality) 자체, 예를 들면, 하느님의 근본적 본질은 신성한 사랑이다.

자기 것이 되게 하다 (appropriate, 사유)
이 단어는 선각자에 의해 형용사로는 한번도 사용되지 않고 동사로만 사용된 특별한 단어인데, 자신에게 고유한 것으로 주장함, 또는 소유하는 것이다.

자기 자신 (Own)
자기 자신은 라틴어 suus 와 proprium 모두를 번역하는데 몇 번역자에 의해 사용되었다. 자아(self), 자아를 위해, 자아로부터 살아감, 이기심이라는 자아를 느낌, 인간의 거듭남에서 자아가 인도함이라는 망상은 필수적이다.

자아 (Proprium)
자기 자신을 보라. 이기심을 느낌이라는 기초적 의미에 추가하여 많은 다른 의미들을 가지는 경우도 있다, 즉 천사적인 자아, 악마적인 자아, 인간 자아, 신성한 자아, 지옥적 자아, 지적 자아, 자발적 자아 등등이다.

자아로서 같이 (as of self)
마치 자기 고유의 힘을 수단으로처럼, 컽으로 보기에 자신 스스로인 듯 하는 것. 선각자의 신학에서 비평적 개념인데, 즉 누군가가 “마치” 자아의 힘에서 인 듯 행동하는 것, 그러나 동시에 모든 힘은 하느님으로부터 온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다.

자연적 인간 (Natural man)
세상적인 것들에 집중적으로 흥미를 가지는 어떤 개인을 뜻한다 할지라도, 그 개인의 전체를 뜻하여서는 일반적으로 사용되지 않는다. 단지 어떤 개개인에게서 가장 수준이 낮은 인간의 마음을 언급할 때 가장 흔히 사용되고 있다.

자연주의자 (Naturalist)
하느님을 믿는 대신 자연을 믿는다는 어떤 개인을 경멸적 의미에서 만 사용되었다, 즉 물질주의자와 비슷하다. 자연주의도 이와 비슷한데, 모든 종교적 개념들의 근원을 자연에 신뢰를 둔 것이라 정의된다.

자유 (Freedom)
애착으로부터 생각하고 뜻하고, 이치에 맞다고 여겨지는 것에 따라서 자유하게 행동하는 것이다. 만일 이것들이 천국적이다면, 자유는 진짜이다; 만일 지옥적이다면, 이것은 외관적일(껍데기적일) 뿐, 실제로는 비 자유함이다. 진정한 자유는 당사자로 자아 강요(self-compulsion)를 사용하는 것을 허용한다.

지배하는 사랑 (Ruling love)
삶을 좌지우지하는 각 개인에 있는 가장 강력한 사랑. 가능할 수 있는 지배하는 사랑은 네 가지로 함축해볼 수 있다: 1. 하느님을 사랑함. 2. 이웃을 사랑함. 3. 자아를 사랑함. 4. 세상을 사랑함이다. 이 중 첫 둘째 만이 거듭나지는 개인을 위하여 받아져야 하는 지배하는 사랑들이다.

지혜 (Wisdom)
많은 지식을 소유함을 언급하는 데에는 거의 사용되지 않는다, 이 용어는 통상 삶에 관한 것만을 서술하는데 사용되고 있다. 지혜는 사랑으로부터 진정한 것을 지각함, 뜻함, 행동함으로 구성된다. 슬기로운 개인은 진리에 기초한 선을 행함을 위한 변동없는
바램을 가지고 있다.

진실한 (True)
절대적 의미에서 진실함은 신성한 사랑의 형체와 수단들이다. 관계적 의미에서, 이것은 개개인의 사랑 속에 있는 지각하고 결과를 있게 하는 기능이다.

진리의 선 (Good of truth)
개개인 안에서 진리를 수단으로 도달되는 상태인데, 이 상태는 사랑의 행동들 안에서 자체를 표현한다, 이를 수단으로 그 진리는 선이 된다. 이것은 영적인 선이라고도 불리운다.

질투 (Jealousy, zelotypia)
선각자는 부부의 사랑의 첫 장에서만 사용하였는데, 귀중한 것을 보호함을 사랑함, 특히 결혼의 사랑을 보호하기를 사랑함을 뜻하기 위해 사용했다. 그는 나쁜 질투가 있다는 것도 인정하고 있으나, 그가 강조하고 싶은 점은 질투의 긍정적 측면에서 이다. 그는 이것을 열정들 중의 열정이라 일컫는다-즉 열정의 진정한 모양새이다.

천사 (angel)
천국에 있는 개인(person). 선각자의 신학에서 모든 천사들은 처음에 자연계에 살았고, 사후 천국에 입장한 사람들이다. 선각자는 천사의 개념을 놓고, 창조로부터의 분리된 계층으로 말하는 것을 거절한다.

천성 (타고난 자질, Genius)
개인의 기질, 특성, 재능, 경향성, 개인과 개인들 집단의 영 또는 품질.

첩 (pellicacy, concubine, mistress)
이 단어는 pellex로부터 인데, 첩을 두고 사는 상태이다

최말단 (Ultimate)
연결 고리의 마지막, 수준이 가장 낮은 것, 가장 외적인 것, 가장 먼 것. “가장 큰 것”을 뜻하기 위해 선각자에 의해 사용되지 않았다.

충격(자극, conatus)
종종 “애씀(endeavor)”으로 번역된다. 일반적으로 행동들 뒤에 놓인 에너지를 두고 사용된다. 특별한 목적들을 쟁취하게 하는 꾸준한 충격을 받는 생활 자세일 수 있다.

타고난 (선천적인, connate)
글자대로 말하면, “출생으로부터 존재하고 있음”이다, 이것은 때로는 유전적 경향성들을 부정하는데 관련되어 사용되고 있다. 또한 자주 비슷한 단어인 생득의(innate, 타고난), 천부의 (inborn), 같은 성질의(congenial)와 더불어 사용된다

탐욕 (cupidity, 강력한 욕망)
(현세에의 욕망을 보라.) 자연적 마음으로부터 일어나는 강력한 욕구, 갈망, 그리워함. 이 단어의 라틴 뿌리는 현세에의 욕망의 뿌리만큼 강한 부정적인 것을 함축하여 운반하지는 것은 아닌 듯 비쳐진다.

태고 교회 (Most ancient church)
선각자는 이 용어를 대문자로 자주 표기했다. 하여 이 이름이 매우 지당하다 싶어서인 듯한 느낌을 우리로 갖게 한다. 이 용어는 신성에 관련하여서 일 경우, 가장 이른 유사 이전(역사 문명 이전)을 언급하는 전문어이다. 이 용어는 창조와 에덴의 동산을 언급하는 창세기서의 사건에 상징적으로 결합되어 있다.

트란스훌럭스 (Transflux)
관통하여 흘러가버림. 주님으로부터의 선이 아무런 효과도 보지 못하고 어떤 개인을 관통하여 흘러가버리는 것을 부정적으로 언급함에 사용되었다. 마치 물이 조리채를 빠져나가는 경우 같다. 이런 개인은 양심 없이 있다라고 말해진다.

평형 (Equilibrium)
(균형을 보라.) 가장 널리 가능할 수 있는 선각자의 번역에서 용어 “평형”이 발견될 것이다. 현재까지에서, 보다 단순하고 충분하게 어울리는 번역문은 돌(Dole)의 번역에서의 “균형”에 번역어의 한계가 그어지고 있는 실정이다.

표현 (Representative)
영적 생각(idea)을 상징하려고 사용되는 자연의 대상물, 개인, 행동, 또는 이 영적 생각 자체. 또한 영계에서 보일 수 있는 형체에서 생각이 표출됨.

합리적인 것 (이성적인 것, Ens rationis)
순수하게 정신적 건축물, 마음 안에서만 존재하는 어떤 것. 어떤 문맥에서는 도깨비불(will-o-the-wisp, ignis fatuus, 환영)에 대충 견주기도 한다. 있음 [ens]를 보라.

허용 (Permission)
이는 신성한 섭리의 한 부분이라 선각자는 규정하고 있다. 허용된 것, 관용(묵인)된 것은 허락된 것, 묵인되어진 어떤 것이나 그렇다고 하느님이 바라는 어떤 것은 아니다. 바람직하지 않은 어떤 행동들을 묵인하는 것은 인간의 자유를 침해하지는 않는다.

현세에의 욕망(concupiscence, 강한 욕망)
몇몇 번역자들에 의해 존속되어 온 라틴어풍의 단어이다. 동사 형체는 어떤 것을 강하게 바램(desire), 또는 갈망함(lust)을 뜻한다. 명사는 강한 욕구를 뜻하는데, 통상적으로는 악, 또는 (섹스 쪽이거나 아니거나 할는지 모르는) 욕망이다. 때로는 탐욕(cupidity)이라는 단어와 분간할 수 없는 경우도 많다.

황폐됨 (Vastation)
황무한 상태, 극점(종말), 다빠져나가 텅빔. 영들의 세계에서 벌어지는 과정, 즉 외적인 악들과 거짓들이 선한 자로부터 제거됨, 그리고 위선적으로 있는 선들과 단지 지식들인 것이 악한 자로부터 제거됨, 하여 어정쩡하게 선과 악이 뒤섞여 있던 세상에서의 인간의 상태가 선과 악이 선명한 상태로 확실히 구분되는 과정에서 사용되는 단어이다.

회개 (Repentance)
재출생에서의 첫 단계, 여기에는 하느님에게 죄들을 고백함, 자기가 용서되기를 간구함이 포함되고, 진정한 선행과 신앙의 교훈들에 따라 새로운 생활을 이끌려는 진실한 노력이 뒤따르는 것이다.

(외부쪽에) 흘러듦 (afflux)
…쪽으로 흐름, 또는 …쪽을 향하여 흐름. 이 방식을 수단으로 주님께서는 악을, 악한 자를 통제하신다. 선과 진리는 악한 자 쪽으로(to) 흐를 수는 있으나, 그렇다고 악이나 악한 자 안쪽으로(into)는 흐르지 않는다. 고로 악이나 악한 자를 통치하는 것은 내부(within)로부터가 아닌 외부(without)로부터 이다. 이 단어는 (내부쪽에) 유입됨(influx, 흘러듦)과 날카롭게 대비되어 선각자의 책에서는 사용되나 한국어에서는 같은 말로 번역되고 있어 가로에 영어를 추가로 기입해서 (역자는) 구별해보고 있다.

선각자의 신학에서만 유일한 기본적 생각들(concepts)

1. 하느님에 관하여 선각자에게 밝혀진 기본적 생각들

신성한 생명은 하나이고, (사실) 생명은 이 생명밖에 없다. 주님 만이 생명 자체이시다, 그 이유는 그분이 생명 자체이시기 때문이다. 땅 위 인간과 영계에 있는 인간은 이 생명의 그릇들일 뿐이다.

(참고: 선각자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뜻하기 위해 단어 “주님”을 시종일관하게 사용한다. 또한 이 글 내지 역자의 번역서에서 사용되는 단어 중 개인(個人, 때로는 인물, 人物, person)이 있는데, 그러나 역자가 이 단어를 영한 사전에서 같이 사람 등의 알기 쉬운 단어로 번역하지 않고 조금은 껄끄러운 개인으로 표기하는 이유는 지상에 태어나 아무개라는 이름으로 살았던 물질인 인간, 즉 개인(예를 들면, 예수)을 뾰족이 암시하고 싶어서 이다.)

하느님의 본질에는 두 구성 요소가 있는데, 그것은 사랑과 지혜이다. 하느님의 사랑을 구성하는 세 고유 특성이 있는데, 그것은 그 자체의 바깥쪽 다른 이들을 사랑하는 것, 다른 이들과 하나이기를 바라는 것, 그리고 다른 이들을 자체로부터 복되게 하여주는 것이다.

신성의 사랑과 지혜를 본질 자체 측면에서 일 경우, 우리는 생각조차 할 수 없다. 그 이유는 그것은 무한이어서 우리의 사고력을 초월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랑과 지혜가 상응적(correspondential) 외관에서 일 경우, 우리는 생각해볼 수 있다. 천사의 눈에서, 주님은 태양으로서 나타난다, 이로부터 영적인 열과 빛이 나아가는 바, 유추해봄(analogy)을 수단으로 천사들은 자기들이 유지 지탱할 수 있는 이유는 이 영적 빛과 열, 즉 하느님으로부터 꾸준히 방산되는 신성의 사랑과 지혜에 의해서 이다를 생각하고 알 수 있다.

상응을 수단으로, 이 유추해봄은 땅 위 개인들도 사용할 수 있다. 즉, 자연이 물질적 태양의 열과 빛을 수단으로 매 순간을 유지 지탱하듯, 인간인 나는 주님의 신성한 사랑과 지혜를 수단으로 영적으로 유지 지탱되고 있다는 것을 생각해보고 알 수 있다.

주님(the Lord)은 보편적(우주적) 인간(universal human)이시다. 주 예수 그리스도, 이 분만이 충분하게(fully, 결여됨이 없는) 인간이시다. 이 분으로부터 천사들, 영들, 그리고 지상의 거주민들은 집합적으로 “사람들(men)”이라 불리운다. 이 분이 천국 안으로 유입되심으로 전체 천국은 하나의 인간을 표현하고 닮아 있게 하고 있다. 유추를 수단으로, 땅 위 개인들의 (인간) 본성 안에 있는 천국의 것 만이 진실로 인간(human)이다

새로운 기독 세계의 하느님은 하나의 보일 수 있는 하느님이 계시고, 이 분 안에 보일 수 없는 하느님이 계시는데, 마치 혼이 그의 신체 안에 있는 것과 같다. 만일 누군가가 그렇지 않다라고 판단했다면, 그는 이 하느님과 결합되어질 수 없을 것이다, 그 이유는 하느님과 개인들의 사이에 있는 모든 결합은 상호적(reciprocal) 임이 틀림이 없기 때문이다. 이런 상호성은 보일 수 있는 하느님이 아니면 불가능하다.
위와 비슷하게, 모든 천국들 안에서, 하느님에 관하여 이런 생각밖에 없다: 즉, 그분은 개인이시다는 것, 그리고 이 개인이 주님이시다는 것이다. 골로새서에서 바울의 통찰력이 선각자의 견해가 진실임을 이렇게 증명하고 있다: 즉, 일어나시고 신성이 되신(risen and glorified) 예수 그리스도 안에, 하느님(Godhead)의 모든 충만함이 육체적으로 거주하시고 있다. 땅 위와 천국 안에 있는 사람(people)은 이를 알 수 있다.
하느님 안에 있는 삼위일체(trinity, 三位一體)에 관하여서 성경의 구절들은 상징적 언어에서 말하고 있다. 신성의 삼위일체는 주님의 한 개인 안에 있다, 이 셋을 구별해 알 수 있는 것은 혼, 신체, 그리고 이 둘의 결과인 활동(activity, 행동)으로 이해할 경우에서 이다. 유추를 수단으로 각각의 개인 안에도 삼위일체가 있다. 셋을 한꺼번에 취합하면 하나의 개인을 구성한다: 즉 혼, 신체, 그리고 혼이 신체를 이용한 결과인 행동이다. 그러나 이것은 유한한 삼위일체이다, 그 이유는 인간은 그릇들, 또는 생명의 “기관들(organs, 유기체들)”이기 때문이다. 주님 안에서의 삼위일체는 무한이고, 고로 신성인 이유는 주님은 그분의 인간(human)조차도 생명 자체이시기 때문이다.
아버지이든, 아들이든, 그리고 성령이든, 이 단어의 언급이 있는 말씀 안의 어디에서 이든, 이는 하느님의 속성을 구별해 말해보는 양상일 뿐이다. 다시 말해 하느님의 통일성(unity, 여럿이 아닌 하나) 안에 삼위가 있는 바, 아버지, 또는 성령(님) 같은 식으로 분리적으로는 존재하지 않고, 주님 만으로 존재한다는 말이다. (우리는 하느님을 주님으로만 부르는 것이 합당할지 모른다 역자주) “아버지”, 또는 하느님의 “혼(soul)”과 “영(Spirit)”, 또는 하느님의 활동은 주님 만으로부터 존재하고 출현(coming forth, 존재 안으로 옴)된다. 그러므로 하느님, 그리스도, 또는 성령으로 분리된 존재들로 말하는 듯 여겨지는 성경의 사건들이다 해도 상징적, 유추적으로 이해되어져야 한다. 고로 통찰력은 분리된 둘, 또는 셋의 신성의 존재들로서가 아닌 유일한 하나의 하느님의 속성과 활동의 어떤 양상(면모, aspect)들 쪽으로 있어야 할 것이다.

신성의 사랑은 모든 창조의 근원이고 지탱자이다. 영적인 존재들은 사랑 외에 다른 근원으로부터 존재 안으로 와질 수가 없다; 그리고 창조하는 사랑은 사랑 자체 이신 주님으로부터만 존재 안으로 와질 수가 있다 (세상 밖으로 나타나짐).

모든 창조의 보편적 목적(purpose, 의도)는 창조자가 창조된 우주와 영원히 합류하는(join) 것이다. 이 합류는 이 창조 안에 신성의 본성이 “거주”할 수 있는 존재들이 있어야 가능해진다. 다시 말해 신성에 걸 맞는 성질이 각 개인들 안에 있어야 합류가 가능하다는 말이다. 고로 모든 것은 각 개인들의 사용을 위해서 창조되어왔었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모든 창조된 것들의 사용은 가장 바깥 부분들로부터 개인들 쪽으로 등차적으로 올라간다, 그리고 개인들을 통하여 하느님 쪽으로 올라간다. 이것은 “생명의 순환”이라고도 불리운다.
창조의 특별한 목적은 하느님의 사랑을 받고 되돌림을 영원히 계속함으로, 인류로부터 천사들의 천국을 영원히 부풀려감일는지 모른다.

하나의 끈덕진 신학적 관념에 반대하여 있는 것은 이것이다, 즉 하느님은 무로부터 우주를 창조하지 않았다. 무로부터 만들어진 어떤 것도 있을 수가 없다. 모든 것들은 실체(substance, 물질) 자체인 실체로부터 창조되어져 왔다. 이 실체는 신성의 사랑이다. 이 근원으로부터 만 모든 것들은 만들어내지고 지탱되어진다.

하느님은 물질의 우주를 창조하셨는데, 이는 영적 실재(reality)들에 “옷을 주는(clothing)” 것, 그리고 개인들이 원하면, 그들 고유의 자유의지로부터 영적이고 잠재적인 천사의 존재들이 되는 평면(plane)을 제공하기 위하여서 이다.

자연 평면에서 더 이상 진짜 인간 다움(humanity)이 있지 않게 되었을 때, 그리고 인류가 바야흐로 파멸에 직면하려고 했을 때, 즉, 천국으로부터 생명과 빛을 받는 역량을 거의 잃었을 때, 하느님은 그분의 무한성을 유한성으로 만드셨다, 즉 예수 그리스도 라는 개인 안에서 세상 안으로 오셨다. 이때 쾌히 받아들심으로부터 주님이 “입으신” 인간 다움은 인류를 괴롭히는 허약함과 동일한 것을 지닌 지극히 평범한 인간의 어머니 마리아로부터의 것이었다. 그러나 (예수의) 내부에 잠재적인 신성의 거주하심에서 끌어냄을 수단으로 예수는 지상 평면에서 개인들에게 영향을 주는 천국과 지옥의 세력 사이에 있는 균형을 언제나 회복되게 하시면서, 점진적으로, 질서있게(순서적으로), 그리고 완전하게 지옥들의 힘들에 정면으로 맞서 이겨내셨다. 주님의 삶의 모든 과정은 되찾음을 구성하는 것, (즉) 개개인의 구원이 지금 그리고 언제나 가능하게 만드심이다.

2. 영적 세계에 관하여 선각자에게 밝히 알린 기본 생각들

진짜이고 영원한 영적 세계가 있다. 그 세계는 셋으로 구분되는데, 천국, 지옥 그리고 영들이 있는 중간 세계이다.

죽음은 삶에 있는 질서적, 필수적 단계이다. 인간의 신체가 그것의 생각들과 애착들에 상응하는 자연계에 있는 기능들을 더 이상 수행할 수 없을 때, 그 개인은 “죽는다”라고 말해진다, 그러나 개인은 죽지 않는다, 단지 지상 평면에서 사용을 위해 주어진 육체라는 부분들로부터 분리되어질 뿐이다, 개인은 살기를 계속하는데, 그 이유는 개인이 개인인 이유는 신체 때문이 아니라 영 때문, 즉 개인 안에 있는 생각하는 혼, 또는 영이 당사자 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애착과 더불은 생각이 그 개인을 구성한다. 고로 죽음은 이 세계로부터 저 세계로 건너가는 (다리 역할을 하는) 것일 뿐이다.

(자연계) 생명의 모두가 중단되자 마자, 개인은 영들의 세계에서 즉각적으로 소생되어진다. 이것은 가장 높은 천사들의 조력을 받아 주님에 의해 행해진다. 그 다음, 개인은 자기 검증과 자기 인식의 과정을 통하여 안내되어진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 또는 그녀 자신의 결단력이 영원한 집을 천국이든 지옥이든 선택할 수 있다. 어느 누구도 천국으로 입장이 주어지는 수단으로서의 “보상”이라는 것은 없다, 누구도 지옥으로 정죄됨을 수단으로 “처벌”되지 않는다. 천국과 지옥 안에서 모든 이는 자기 자신의 선택을 수단으로 각자의 영역에 있다.

죽음 후에 모두 각각의 개인에게는 자신의 생각들과 애착들을 수정할 충분한 수단들이 수여된다. 모두는 천사들을 수단으로 주님에 의해 가르쳐지고 인도되어진다; 그리고 모두는 자기들이 생명을 따라서 생명을 살아감이다는 것, 그리고 천국과 지옥이 있다는 것을 의식할 때, 그들은 첫째로 모든 진리들을 받아들임에 있다. 그러나 지상에서 (하느님을) 인정하지 않았고, 하느님에 맞서 악들을 죄들로서 금하는 노력을 만들지 않았던 이들은 이내 진리들을 듣는 것에 진저리를 내고 그것은 선택의 문제라고 여기고 물러나버린다. 짧게 말해, 섭리는 모두가 구원되는 쪽으로, 즉 천국을 선택함이 가능해지도록 그것을(진리의 선택을 하도록) 만들고 있다. 그리고 그렇게 선택하지 않은 개인은 홀로 책임질 수 있게 만들어져 있다.

용어 “영”은 영들의 세계라 불리우는 사후 첫 상태에서 일시적으로 있는 자를 뜻하기 위해 사용할 뿐이다. 용어 “천사”는 교육받고 자기 수정을 끝내서 천국에서 자기 자리를 찾아갈 수 있게 된 이들을 뜻한다. 지옥에 자신의 장소를 발견하는 이들은 사탄들 또는 악마들이라 불리워진다.

개인로부터의(각자의) 영이 영들의 세계 안으로 진입하였을 때, 그녀 또는 그의 얼굴과 음성의 음질은 그들이 세상에서 가졌었던 것들에 대단히 비슷하다. 그러나 그 후 얼굴과 여타 얼굴의 생김새들과 행동들은 점차적으로 각자의 애착(affection)들과 당사자를 지배했던 사랑(ruling love)에 일치하도록 바뀌고 있다. (지상에서는 가면을 씀이 가능하나 여기서는 가면이 허용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과거 신체 안에서 영의 생명의 외면의 것들의 사용함이 끝나서, 이 외면의 것들이 곁에 놓여진 지금, 바깥쪽으로의 나타남과 이전의 애착들은 바뀐다, 하여 바뀐 그의 상태란 그가 보여지는 것과 행동하는 것은 그의 내면의 존재와 완전 일치되고 있는 상태의 것이다.

천국의 생활을 세부적인 것까지 말하고저 이 책의 페이지를 할당하기에는 너무나 많은 바, 여기서는 윤곽만을 그리고 지나간다; 우선 그 곳의 삶이 진짜 삶이다는 것, 진짜 당신의 가족들이 거주한다는 것, 직업들(각자 할 일들)이 매우 다양하다는 것, 기쁨만을 언제나 선사하는 공동체와 모임들이 있다는 것이다. (특별한 것은), 거기에 많은 어린 아이들이 있다는 것, 그 이유는 유아기나 어린 아이 시절에 죽은 모두는 천국 안으로 직접 오고 거기서 성장하기 때문이다.

지옥은 기본적으로 천국에 반대되는 것들, 거기를 선택한 이들의 특성이 악인지라 그들의 파괴적 힘에 의해 (모두는) 총체적으로 (언제나) 찡그려져 있다. 거기에는 (주님께서 악한 자를 징벌하려 만든) 불, 유황(불), 또는 기분내키는대로의 임의적 처벌 등등이 없다; 악은 그것 고유의 사용료(toll)를 부담할 뿐이다; 지옥은 객관적으로 불행의 상태이다. 그러나 지옥에 있는 이들은 자신들을 위해 최고의 선택이었음을 자랑하고 있다.

3. 우리에게 있는 하느님의 말씀에 관하여 선각자에게 밝히 알린 기본 생각들

하느님이 언제나 설비해두시는 것은, 어느 시대를 무론하여 그 시대의 인간다움에 걸맞을 수 있는 신성한 진리의 밝힌(계시) 것을 관리하는 책무에 봉사하는 교회를 인류와 더불어 있게 하신 것이다. 우리가 아는 이 계시는 말씀(Word)이고, 이 말씀은 성경에서 발견되었다. 이 말씀을 수단으로 인류는 천국들과 계속적으로 연결된다. 그러므로 이 말씀에 있는 모두 각각의 표현들 안에 천국의 것들과 연관되는 내적 의미가 있다. 말씀이 내적 의미를 지닌 특성 때문에 말씀은 천국의 마음들과 인간의 마음들을 결합하게 한다.

많은(아마 대부분의) 기독인들이 이의 없이 이구동성 말하는 것은, 말씀은 신성의 호흡이 담겨 있다는(영감되어 있다, inspired) 것, 그러므로 거룩하다 이다. 그렇지만 선각자를 통한 이 계시 앞의 (시대에서) 경우, 말씀 안에서 어디에 말씀의 거룩함 또는 신성이 존재하는지를 알지 못했다. 그 이유가 말씀을 여느 책을 읽듯 평범히 읽는다면 (즉 글자 그대로의 의미에서의 경우라면), 여느 촌뜨기 작가의 저술 같고, 때로는 문체상 (문법도 모르고 씌어진 듯하여) 엇박자인 냥 보이고, 심지어는 현 시대의 저술 보다 수준이 미천한 듯까지 깍아서 평가할 수도 있는 책인 듯 비쳐지게 나타나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하느님을 예배하기를 선택하지 않든지, 또는 하느님 보다 세상의 것들을 존경하는 쪽을 선택하든지 하는 이들은 말씀에 관련해 거룩한 어떤 것이 있을 수 있다는 것마저 부정하는 오류 안으로 쉽사리 추락할는지 모른다. 짧게 말해, 이렇든 저렇든 각자는 말씀을 신성이 거주하는 책임을 수긍하던지 부정하던지는 그의 선택(의 잣대) 안에 있다는 말이다.

어쨌든, (순위에서) 자연 앞에 하느님을 두는 이들, 그리고 진짜로(순수하게) 진리를 찾는 이들은 글자에 있는 많은 서술문들이 주님의 말씀으로서 확인하여 그 글자들을 꾸준히 받아들이고 있다. 사실상 이들의 마음들은 계시(밝히 앎)의 필요와 실재 쪽으로 통찰력이 열려져 있다. 그 이유가 계시 없이 지식은 없고, 결과적으로 하느님을 인정함도 없기 때문이다. 사실상 주어져왔었던 계시를 통하여서만 사람들은 하느님에게 접근할 수 있어, 그분으로부터의 유입을 받고, 자연적 존재로부터 영적 존재로 되어질 수가 있었다.

말씀의 책들은 계속적이고 연결된 내적 의미를 가지는 모든 책들이다. 구약 성서 부분에 있는 이 말씀의 책들은 모세의 다섯 책들, 여호수아, 사사, 사무엘상하, 열왕기상하, 시편, 이사야, 예레미야, 애가, 에스겔, 다니엘, 호세아, 요엘, 아모스, 오바디야, 요나, 미가, 나훔, 하박국, 스바냐, 학개, 스가랴, 말라기; 그리고 신약 성서 부분에서는 마태, 마가, 누가, 요한, 계시록이다.

복음서들은 주님 자신의 말들을 포함한다, 이 말들 안에는 영적 의미들이 숨겨져 있고, 이 영적 의미들을 통하여 천국과의 교통이 가능하다. 사도들의 저술들(서간문)은 교회를 위해 유용하나, 내적 의미를 포함하고 있지는 않다.

말씀의 가장 바깥쪽, 또는 글자적 의미로부터의 모든 세부사항들은 감각 기관(sensory)에 의존하고 싶어하는 이들의 납득력에 적합해 있다, 고로 어린이들과 단순한 이들에게 (특별히) 안성마춤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글자 그대로의 의미의 대부분은 진리의 외관 (측면)들이다, 따라서 그것들이 계발된 이해력으로부터 지각되지 않으면, 그것들이 실제적으로 진리이다고 믿어져버림에 의해 거짓화 되어갈 수 있다. (단순한 자나 어린이들이 아닌 이들, 특히 지식인이라 자부하는 이들이다면) (마음만 먹으면) 거짓화 할 수 있는 위험성이 글자로 있는 많은 서술문의 도처에 산재해 있다. 예를 들면, 하느님은 성내신다, 그분은 시험하신다, 그분이 지옥으로 내던지신다 등등이다; 또한 마지막 심판에서 주님은 글자에 박힌 그대로 구름을 타고 땅 쪽으로 내려오신다… 태양과 달이 빛을 주지 않을 것… 별들은 추락할 것이다 등등도 있다. 이런 서술들은 자연계의 재난을 예보함들이 아니고, 어느 누구 안에서 거행될 수 있는 내적 바뀜들에 대한 상징들임을 알아볼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영적 투시 화법(perpective, 상관 관계, 견지, 시각, 원근법) 뿐이다.

글자 그대로의 의미가 이런저런 방법들에서 잘못 이해되어질 수 있기 때문에, 이 의미는 어떤 상해받음도 허용 않을는지 모르는 글자 안쪽에 숨겨 놓인 진짜 진리들 쪽으로 안내하는 역할로 봉사하고 있다. 이 개인은 이런 식으로 해서, 저 개인은 저런 식으로 해서 글자의 의미를 이해할 때라 해도 영속되는 피해는 있지 않다; 그러나 피해가 가해지는 때이다면, 신성한 진리에 반대하는 거짓들을 첨가할 때이다. 이 짓은 거짓들 안에 있는 자신이 정당하다 하여 그것을 입증하고자 말씀의 서술들을 선택하는 이들에 의하여 자행된다.

말씀 안에 있는 모두 각각의 개인, 장소, 어떤 것, 어떤 사건 등등은 어떤 영적 실재(reality)를 상징하고, 이 실체(reality)와 상응하고 있다. 이런저런 상응을 통한 의미들이 말씀의 영적 의미를 구성한다. 따라서 영적 의미는 글자 안에 나타나 있지 않다. 그것은 글자 그대로의 의미 내부에 있다. 마치 혼이 신체 안에 있는 경우, 지성의 생각이 눈 안에 있는 경우, 사랑의 애착이 얼굴 안에 있는 경우 같다. 말씀을 영적으로 만들어주는 것이 영적 의미이다. 영적 의미야 말로 진실로 주님의 말씀이다.
어쨌든, 글자 그대로의 의미 안에서 말씀은 그것의 충만함으로, 그것의 거룩함에서, 그리고 그것의 힘을 지니고 있다. 그 이유가 글자 그대로의 말씀은 안쪽에 있는 영적 의미들의 거처이자. 그릇들이고, 받침기둥이기 때문이다.

말씀 안에 있는 표현들은 그것들의 시리즈 안에 영적인 생각들을 포함하도록 씌어 있다. 이 영적 생각들은 글자를 읽는 자가 상응 지식에 친숙해 있지 않으면 그 사람에게 나타나지 않는 생각들이다. 이 방법에서 신성은 말씀 안에 감추여 놓여 있다.
상응들이 모든 힘을 가진다, 하여 상응에 따라서 땅 위에서 행하여진 것은 천국 안에서 직접적인 결과를 가진다, 그 이유는 상응은 신성으로부터 있기 때문이다. 사랑의 선과 신앙의 선 안에서 살아가는 이들은 “상응 안에” 있다 라고 말해진다, 그리고 신성은 이 당사자를 통하여, 그리고 당사자 안에서 행동하실 수 있다.

주님의 말씀은 목마른 개인, 생명을 바라는 개인에게 생명을 주고 있다. 이것은 요한의 복음서에서 가르치고 있다. 말씀은 살아 있다, 그래서 생명을 준다, 그 이유는 최고 의미에서 말씀은 주님과 그분의 왕국을 다루기 때문이다. 말씀에 있는 생명은 말씀을 읽는 당사자가 거룩함의 느낌을 갖게 하면서 당사자의 마음 안으로 흘러든다. 이렇기 때문에, 주님은 그분으로 있는 말씀 측면에서, 자신이 영원한 생명 안으로 솟아오르는 물의 원천이다고 선포하신다.

4. 우리 자신과 우리가 의도했던 운명에 관하여 선각자에게 밝히 알린 기본적 생각

사랑과 지혜, 그러므로 의도력과 분별력이 각자의 생명 자체를 구성한다. 생명이 무엇인지를 아는 자는 드문 편이다. 사람들이 그것에 관하여 생각할 때, 그것은 파악하기 어려운 것, 그것은 개념화에 도전하는 어떤 것인 듯하게 여긴다. 이렇게 응답하는 이유는 하느님 만이 생명이시다는 것, 그리고 그분의 생명은 신성한 사랑과 신성한 지혜이다를 실감 못 하기 때문이다. 이쯤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우리들 자신의 생명은 하느님의 생명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 그 이유는 우리가 그분으로부터 생명을 받는 만큼에서 우리가 생명을 가지기 때문이다. 사랑이 누군가로부터 쇠하여질 때 그는 나태해진다, 지혜가 쇠하여져 갈 때, 그는 무디어져 있다. 만일 이 두 가지가 동시에 쇠하여지면, 그는 말살되고 있다.

신성의 사랑은 이 사랑이 사랑하는 다른 존재들 안에서 이 사랑을 사랑한 당사자를 수단으로 현재의 것이 존재하고 있음과 되어감을 도울 수는 없다. 어쨌든 만일 이런저런 인간의 존재들이 자신들 안에 무한의 어떤 것, 또는 본질적 사랑으로부터의 실체와 생명의 어떤 것,또는 신성으로부터의 어떤 것을 가졌다면 위의 말함이 발생할 수 없었다. 만일 우리들 안에 무한하고 신성으로부터의 어떤 것이 실제로 있었다면, 하느님은 타인들에 의해 사랑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타인들)는 자신들만을 사랑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 이유가 무한 또는 신성은 특이하고 나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이유 때문에 서로의 사랑은 본질적 사랑으로부터의 어떤 것도 있지 않은 타인들과 더불어서만 발생할 수 있을 뿐이다.

인간의 존재, 본질적으로와 자아 측면 만에 집중한다면, 짐승으로부터 별반 다를 것이 없다. 즉, 오각도 매우 비슷하다, 식욕도, 자연적 수준의 바램들도, 뿐만 아니라 애착들도 피장파장일지 모른다. 개인의 최선의 사랑들조차 매우 비슷하다, 즉 동료를 사랑함, 자식을 사랑함, 결혼한 짝을 사랑함 등등에서 이다. 어쨌든 인간은 내면의 생명을 가지고 있음 덕분에 짐승 보다 상위에 있는다. 이 생명은 주님으로부터 파생된 사랑의 생명과 신앙의 생명이다. 만일 이것이 출석되지 않고 있다면, 그 개인은 결코 인간일 리가 없을 것이다. 더욱이 주님으로부터 이 생명을 통하여 그 개인은 사후 살고 있다.

모든 사람들은 각자의 마음에 속해 있는 내면들의 것에 관련되는 물질의 신체로 이 세계 안에서 옷을 입고 있는 영이다. 신체는 영의 생각함들의 방향과 영의 애착함들의 조절 아래 있다.

인간 종족, 위에서 명기한 대로, 천국이 설립되는 기초이다. 이런 이유로 인간의 창조는 마지막 번째에서 이었다, 그 이유가 마지막 번째가 앞서 창조한 것을 아우르는 기초이기 때문이다. 모든 창조가 하느님으로부터 오기에, 개인들은 신성의 질서의 형체들로 창조되어졌다.

사람들은 자연계와 영계가 외면적으로 결합(join)하게 하는 수단이다. 사실상, 개인이 영적 존재로 되는 정도에서, 그는 두 세계가 외면적, 내면적 결합(conjunction)을 위한 매체가 되어져 있는다.

인간의 혼(soul)은 당사자의 가장 깊고 가장 순도 높은 본질이다. 그러나 본질은 형체를 가져야만 한다, 그리고 혼은 사랑의 모든 것들의 형체로부터 애착(affection)들이라 불리우고, 지혜로부터의 모든 것들의 형체로부터 지각(perception)들이라 불리운다.

개인은 어떤 지식 안으로 태어나지 않는다, 총명 또는 지혜 안으로 태어나지는 것은 더더욱 아니고, 오직 그런 것들을 받는 수용력, 그리고 그것들을 빨아들이는 능력만을 지니고 태어난다. 이것은 두 겹의 방법에서 결과되어진다: 신성이 흘러드는 내적인 방법에 의해서; 세상이 흘러드는 외적인 방법에서 이다. 이것들이 개인 내부에서 만난다, 그리고 그때 개인이 신성에 의해 계발되기를 선택하는 정도에서 개인은 지혜의 상태 안으로 점진적으로 들어간다.

모두 각각의 개인은 자기를 성화(聖化, sanctification)함에서 자아가 인도할 수 있다 라는 환영(幻影, 착각, 잘못 생각함), 자아(selfhood, 이기심)로부터의 느낌, 감각을 가진다. 선각자는 이기심으로부터의 이런 저런 느낌을 “자아(proprium)”라는 단어로 언급하고 있다; 사실 개인을 두고 성화함이라는 단어 보다는 “거듭남”이 더 어울릴 것이다.

신성의 섭리인 것은, 개인은 이성에 일치하여 자유함으로부터 행동하는 것; 또한 개인이 생각하고, 뜻하고, 행동하는 것의 모두는 온전히 자아로부터 있게 나타나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나타남이 없다면, 어떤 것이 그의 것, 또는 자기 자신의 것임을 아무도 느낄 수 없을 것이고, 따라서 개인은 자신 고유의 개인일 수도 없게 되고 만다. 자아로부터의 이런저런 감각 없이 개인에게 귀속되는 것은 어떤 것도 있어질리 만무하고, 고로 개인은 선이든, 악이든 무엇을 행하든지 무관심, 또는 하느님을 믿든, 지옥의 꼬드김을 따라가든 무관심으로 일관되어지고 만다. 줄여 말해, 개인은 개인 당사자될 리 없고, 진실로 인간일 수도 없다는 말이다.

개혁되고 영적으로 되어가는 모든 이의 처음 상태는 그들이 주님에 의해 개혁됨을 믿지 않는 것, 그 대신 자신들에 의해 개혁됨을 믿는 것이다; 즉 선에 대한 모든 뜻함과 진리에 대한 모든 생각함이 자신으로부터 근원되었다고 믿는 것이다. 이 보다 한 술 더 떠진 것은, 주님께서 그들이 이런 상태 안에 있게 배려하시고 있으시다는 점이다. 그 이유는 만일 그가 자신 스스로 하고 있다 하지 않으면, 그는 개혁되어 질 수가 없기 때문이다. 실로, 만일 그들이 거듭남 이전에 너희들 스스로 선을 행할 수 없고, 진정한 어떤 것도 생각할 수 없다고 (주님으로부터) 말해졌었다면, 자기들은 의지와 생각 안으로의 유입을 기다려야 한다고 상상하는 실수로 붕괴되든지, 또는 만일 선과 진리가 자신들 안에서 근원되지 않는다면, 자신들은 기계 같은 처지이다고 상상하는 실수로 어떤 시도도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선과 진리가 자신들로부터 근원된다고 생각하는 것이 첫째로 허용되어야 한다.

그러나 거듭남의 과정이 한참 진행되면서 점차로 조금씩 가르쳐짐이 있어지는 것은, 예전의 자기 느낌과 생각함과 다른 것이 있다는 것, 즉 선하고 진정한 모든 것은 주님으로서만 100% 존재한다는 것이 당사자에게 슬금슬금 비쳐온다. 그리고 거듭남의 과정이 더 한참, 즉 완전함에 거의 접근하다시피 할 때, 당사자에게 주입되는 가르침은, 주님으로부터 있지 않는 것은 악이고 거짓이다는 것이다. 거듭나지고 있는 이들이라면, 그들의 이 세상의 삶 동안 가르쳐짐을 많이 깨닫지 못한 채 기한이 다 찰 경우, 다음 삶에서 이를 깨닫고, 그것을 지각함으로 보도록 인도 받는다.

인간의 자유 의지는 거듭남에 필수적이다. 개인이 모든 애착들과 모든 생각함들에 관련하여 내면적으로 자유함 안에 있지 않으면, 개인은 선과 진리가 뿌리내릴 수 있는 질서 안에 결코 놓여질 수 없다. 이 자유함은 양쪽에 놓여지는 무게가 평형을 이루는 천칭(저울)에 유추되는 방식에서 주님에 의해 유지되어진다. 비슷한 방식에서 주님은 모두 각각의 개인에 대한 선과 악의 영향력이 균형을 맞추고 있게 유지하신다. 그러나 개인은 이에 대해 의식하지 못 한다, 하느님의 선물 중의 하나인 것은, 개인은 자신의 생명을 두고 그것은 자신 고유의 것이다라고 느껴야 한다는 것, 우리가 그것을 그렇게 느끼는 것이 하느님의 뜻이다는 것이다. 이러한 즉, 우리가 말씀에 있는 질서의 법들에 일치하여 살기를 선택할 때, 고로 하느님의 사랑을 받아들이기로 작정함이 온전히 우리 자신으로부터 임을 우리가 느낄는지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은 그분의 손가락을 천칭 위쪽에서 직각으로 세우시어 유지하시면서 선택의 우리의 자유함을 알맞아지도록 조절해주시지만, 그렇다고 강제적 수단으로 자유를 침범하시는 일은 결코 없으시다.

하느님은 악을 창조하시지 않으셨다, 그러나 질서 안에서 실제의 선택들이 인류로 그것을 받아들이도록 허용해버렸을는지 모른다. 만일 사람들이 하느님이 처음 그들을 창조했던 사랑 안으로 태어나졌다면, 어떤 악도 있지 않았을 뿐 아니라, 사람들은 악이 무엇인지도 모르기조차 하여 있었을 것이다. (애당초) 우리가 창조되어진 사랑은 이웃을 사랑함으로부터의 사랑이다. 고로 우리는 우리 자신 만큼, 아니 그보다 더 많이 이웃을 사랑하는 것을 배울는지 모른다, 그리고 이웃에 선을 행함에서 기쁨을 발견할 것이다. 이 사랑이 진실로 인간이다, 그 이유는 이 사랑 안에 짐승으로부터 발견되는 자연적 수준의 사랑과 구별되는 영적 수준의 요소들이 있기 때문이다.

“원죄” 또는 “유전적 악” 같은 것은 없다. 누구도 실제의 악들 안으로 태어나지지 않는다, 그러나 특별한 악들을 향한 다소의 경향과 더불어 악들을 향한 경향성만 지니고 태어난다. 결과적으로, 사후 개인은 악들을 향한 어떤 유전적 경향성으로부터 판단되어지지 않고, 개인이 동의함에서 받아들이고 행동했던 실제의 악들로부터 만 이다.

우리가 실제의 선을 상속하지 않고, 선이 되어질 경향성만이 상속 가능하다는 것도 위와 동일하게 진정하다. 천성적으로 자연적 선과 친절함을 향유한 듯 여겨지는 이들, 그리고 타인에게 선을 행함을 타고

난 듯 실행하는 이들이라 여기지는 이들을 목격하는 때도 있다. 그러나 이런 이들이라 해도 그들이 말씀으로부터 선을 행함에 관한 원리들을 동시에 흡입하지 않으면, 그들은 양심을 발달시키지 못한다, 그 이유는 양심은 자연적 선, 또는 유전적 선에 대한 경향성과 그것에 일치하는 생명으로부터 오지 않기 때문이다. 만일 어떤 개인들이 이런 상태에서 영적 세계 안으로 온다면, 그들은 자기들에게 강하게 인상지우는 선과 진리의 원리들을 가지는 것을 포함하여, 테스트되고 심리되는 어려운 과정을 통과해야만 한다. 이 방법에서만이 그들은 천국의 양심을 받을 수 있다.

이른 바, 천국행의 삶을 사는 것은 여느 사람들이 믿는 것 만큼 고되고 힘든 삶이 아니다. 혹 자는 생각한다, 영적 삶을 영위하는 것은 힘든 것이다, 그 이유는 세상을 포기함이 필요하기 때문, 신체와 육에 연합된 식욕들을 포기해야 하기 때문, 그리고 영적 존재들 같이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이들은 이것은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을 거절함을 뜻하는 것으로 받는다, 뾰족하게는 재물과 명성을 거절하는 것, 그리고 하느님, 구원, 영원한 생명에 관하여 꾸준히 경건하게 묵상하는 것, 그들의 생활은 기도함과 말씀을 읽는 것, 여타 경건하다는 저서들을 읽는데 있다고 생각한다는 말이다.

그러나 선각자는 말한다, (그가 저 세계로부터의) 풍부한 경험과 천사들과의 토론은 그로 하여금 위와 상황이 완전 다르다는 것을 알게 해주었다. 사실상, 이 세상을 포기하고, 포기하는 식으로 살았던 사람들이 천국의 환희를 받지 못하는 자신들 때문에 슬픔에 잠긴 삶을 저 세상에서 건설하고 있다. 모두 각각의 개인의 (이 세상에서의) 삶은 그 개인과 더불어 (저 세상에서도 당사자에게) 머물고 있다. 그 이유가 천국의 삶을 받아들이려면 개인은 이 세상에서 그것과 대등한 삶을 살고 있었어야만 했었기 때문이다. 이 세상 삶의 과정에서 있는 시민적, 도덕적 생활을 수단으로 개인은 영적 생명을 획득한다, 사실상, 이 방법만이 영적 생명이 개인 안에서 만들어지게 할 수 있다, 또는 개인의 영이 천국을 위하여 준비되게 해줄 것이다.

천국행으로 인도하는 생활은 실제로 놀라우리만치 단순하다. 당신이 부정직하고 불공정하다고 아는 방법으로 어떤 것을 얻을 때, 특히 당신의 영이 그런 쪽으로 향하여 움직이려 들 때, 당신에게 필요한 딱 하나는 그것이 하느님의 가르침에 반대되기 때문에 행해져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런 방식으로 대수롭지 않다 여겨지는 사소한 악과 거짓으로부터의 것을 부딪치더라도 대수롭지 않은 것이라 여기지 않고 오히려 중요하게 여기며 하나하나를 처리해 소화해나간다면, 점차 당신은 천국 쪽에 당신의 발을 디밀고 있다. 이러할 때 당신의 더 높은 수준의 마음들이 열리어져서 어떤 것이 부정직하고 불공정한 것인지를 뚜렷이 보게 된다; 그리고 그런 것들을 보았을 때, 단번에 그것들을 부수어버릴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모든 이가 인간의 자유 의지 때문에 획득할 수 있는 영적 상태 쪽으로 당신을 인도한다.

** 도서 구입 안내 **

아래 도서들의 대부분은 발행자, 역자가 출판의 모든 과정을 직접 완료한 책이므로 우선 많은 책이 쌓여 있지 않고 부족할 때마다 몇 십권씩 추가로 출판하고 있습니다. 또한 책의 단가는 여느 시중의 책의 단가와는 달리 순수 재료비만을 계상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여느 복사 비용보다 저렴할지 모릅니다. 따라서 이 출판사의 책은 팔릴 때마다 조금씩 적자를 볼 수밖에 없지만, 이 출판사의 바램은 이익 창출이 아니라 이 귀중한 지식을 공유하는 것, 더불어 이 귀중한 지식이 많은 분들의 손 안에, 책꽃이에 있어 필요시 언제나 읽기를 바램에서, 또한 이 지식의 습득은 여느 소설이나 수필집을 대하듯 하여서는 즉각 이해
에 와닿지 않는 결점이 있기에, 어쩌면 시험 공부하듯 노력함이 곁들여야 하기에 전자책이나 전화기나 컴퓨터 다운에 앞서 종이책 구입을 권장하는 차원에서 출판 사업을 펴고 있습니다.

펴내는 자: 한광숙, 배제형
펴낸곳: 도서 출판 벽옥
등록: 제 2016-000002호
주소: 전남 화순군 화순읍 안양산로 31-5
전화: 010-4738-1711
홈페이지: baysidechurch.org
biblestudynoteblog.wordpress.com
역자 E-mail : jeandsook@gmail.com

각 도서와 가격

** 각 도서는 대체로 양장본으로 제본하려 노력하고 있습니다. 또한 위 인터넷 주소에서 책을 만나볼 수 있고 다운받아 직접 제본도 가능할 것입니다.

1. 번역 서적

말씀의 합리적 이해 (전 6권. 각 430여쪽) 값 각 권 12000원
비유 (796쪽) 값 25000원
신약 비유 해석 (516쪽) 값 15000원
구약 비유 해석 (394쪽) 값 15000원
이스라엘의 첫 세 왕 (576쪽) 값 15000원
마태복음 해석 (736쪽) 값 15000원
요한복음 해석 (640쪽) 값 15000원
요한계시록 해석 (513쪽) 값 15000원
바이블 스터디 노트 (전 4권, 각 권 평균 650여쪽) 값 각 권 15000원
성경 공과 (전 24권, 각 권 평균 234쪽) 값 각 권 5000원
창세기 요약 해석 (401쪽) 값 15000원
레위기 해석 (526쪽) 값 15000원
영, 한글 구약 성경 (창세기, 출애굽기 340쪽) 값 5000원
영, 한글 신약 성경 (4 복음, 계시록 406쪽) 값 5000원
성경 상응 사전 (1082쪽) 값 25000원
헬렌 켈러의 신앙 간증 (126쪽) 값 5000원
죽음 그 이후 영들의 세계 그리고 천국과 지옥 (132쪽) 값 5000원
새 예루살렘 그리고 그곳의 교리 (100쪽) 값 5000원
천국의 비밀들 (전 12권 각 500여쪽) 값 각 권 20000원
창세기 해석 (전 5권 각 550-630여쪽) 값 각 권 15000원
성경 연구 (전 6권 각 430-480여쪽) 값 각 권 15000원

2. 원서

선각자의 필적이 담긴 쉬밑의 라틴 성경 (900쪽) 값 25000원
알카나 세레스티아 (쟌 엘리엇 영역)
알카나 세레스티아 (쟌 클라우 영역, 쟌 폿스 수정) 값 각 권 20000원
* 이 외의 원서의 종이책 재출판도 준비 중에 있습니다.
* 위 엘리엇 영역본은 copyright이 있을 것 같아서 출판을 미루고 있는 바, 필요한 분은 인터넷 검색이 가능하므로 연락바랍니다.

레위기 27장 해석

레위기 27장

영적 의미 요약

* 의지와 이해함이 함께 심사숙고 하는 가운데 주님을 모시는 모든 이는 주님으로부터 온 진리의 선을 받는 상태 또는 품질에 의거 평가되어진다, 1-8절.
* 주님을 섬기되 내면에 있는 애착을 바침, 그리고 그 품질의 평가에 관하여, 9-13절.
* 위와 같되 외면에 있는 자연적 애착들에 관하여, 14-15절.
* 주님을 섬기되 진리 측면에서의 외면에 있는 자연적 인간을 바침, 그리고 차이가 있는 환경에서의 평가들에 의하여, 16-25절.
* 특히, 어느 누구도 선함을 자기 탓으로 여겨서는 안 된다. 그 이유는 선함은 주님으로부터만 존재하기 때문이다. 불순한 자연적인 선, 이는 주님으로부터가 아닌 바, 순수한 선으로 대체되어야 한다.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은 소외될 수 없고 이기적 용도에 충당되어서도 안 된다. 아껴두신 모든 것은 주님으로부터 임을 인정해야 한다. 인간에게 있는 모든 선과 진리는 자기 속에 주님께서 아껴두신 것들을 수단으로 인정되어야 한다. 어느 누구도 자신에서 비롯되는 총명으로 자신의 품질을 평가해서는 안 된다, 26-33절.
* 위 모든 사항은 신성한 선의 유입으로부터 신성한 진리로 된 신성한 질서의 법칙들이다. 이 모든 것은 영적 인간의 유익을 위해 주님의 순수한 사랑과 자비에서 비롯되어 있다, 34절.

각 절의 영적 의미

1절. 그리고 주님께서 모세에게 이야기하셨다, 말하시기를,

영적 의미

지각을 주는 신성한 진리를 수단으로 주님께서 밝히 알게 하신다.

세부적 영적 의미

주님(여호와)란 사랑 측면에서의 신성한 존재를, 이야기하심은 유입을, 모세는 신성한 진리 또는 말씀을, 말하심은 지각을 뜻한다. (2001, 2951, 7010, 1791, 1822)

2절. 이스라엘의 자손에게 이야기 하라, 그리고 그들에게 말하라, 사람이 서약을 이루려 할 때, 그 인물은 네 평가에 의해 주님을 위해 있을 것이다.

영적 의미

영적 인간은 반드시 가르침을 받아야 한다는 것, 자신의 의지와 이해함이 동의함으로 신중하게 자신을 주님께 바치는 모든 이는 주님으로부터 온 진리의 선을 받는 상태 또는 품질에 의거 평가가 있어진다.

세부적 영적 의미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야기함이란 영적 인간은 가르쳐져야만 함을; 사람이 서약을 성취함이란 의지와 이해함이 동의하는 가운데 심사숙고 해서 주님께 자신을 바치는 사람을; 그 사람이 주님을 위해 “평가, (값을 매김)”이란 주님으로부터 온 진리의 선을 받는 상태나 품질에 의거 평가되어짐을 뜻한다. (3654, 7304, 3732, 3880, 2001, 7010)
이 구절에서 이해하고 넘어갈 것이 있다. 가장 높은 측면에서 신성한 진리만이 예배하는 모든 이의 진짜 품질을 식별할 수 있다. 낮은 측면에서 선은 거듭나는 모든 사람의 본질인 반면, 진리는 그 생명의 형체이다. 그러므로 형체로부터 품질을 밝히 알게 된다.

3절. 그리고 네 추정가는 이십 세부터 육십 세까지의 남성일 경우, 성소의 세겔로 은 오십 세겔이다.

영적 의미

그러므로 진리와 선에 총명한 이들은 그 총명을 통해 신성한 진리에 의거 진리를 충만 되게 받음으로 시험에 견딜 능력을 지니고 있다. 오히려 시험을 수단으로 그 진리는 선과 결합한다.

세부적 영적 의미

이십 세 된 남자의 값이란 진리와 선에 총명한 이들을, 육십 세 까지란 총명을 통해 시험에 견딜 능력이 있음을; 값을 매김이란 신성한 진리에 따라서임을; 은 오십 세겔이란 진리를 충분히 받는 상태를; 성소 세겔에 따라서 란 “시험을 수단으로 선과 결합되어짐을” 뜻한다. (725, 2280, 10225, 3306, 8888, 7010, 2959. 3210)

4절. 만일 여성이면 그다음 네 추정가는 삼십 세겔이다

영적 의미

그러나 지식 없이 애착으로부터서 진리에 총명한 이들은 시험에 견딜 능력을 덜 갖게 되는 바 주님을 온전하게 예배 할 수 없다.

세부적 영적 의미

여자이면 삼십 세겔이다 란 지식 없이 애착으로부터 진리에 총명한 이들은 시험에 견딜 능력이 덜 한 바 주님을 완전히 예배할 수 없다는 뜻이다. (725, 2276)

5절. 그리고 만일 오 세로부터 이십 세까지이다면 네 추정가는 남성은 이십 세겔, 여성은 십 세겔이다.

영적 의미

다시, 진리와 선에 무지한 상태에서 주님을 예배하고 자신을 그분께 바치고자 하는 이들은 선을 사랑하는 마음 때문에 구원된다. 그러나 진리들이 결핍되어서 악과 싸우지 못한다. 그러나 선을 사랑함에 있을 경우의 그들의 품질은 그들 속에 리메인스(remans, 아껴두신 것) 덕택에 구원을 위한 능력을 가진다.

세부적 영적 의미

오 세로부터 이십 세까지란 진리와 선에 무지한 상태에서 주님을 예배하는 이들 또는 그분께 자신을 바치고자 하는 이들을;, 값을 매김이란 신성한 진리에 의거함을; 남자는 이십 세겔이란 어떤 진리를 가진 선 때문에 구원은 되나 전투를 위해서는 충분치 못함을; 여자는 십 세겔이다 란 선에 대한 애착뿐이라면 그 품질은 리메인스(remans, 아껴두신 것) 덕택에 구원받을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다. (2280, 7010, 725)

6절. 그리고 만일 한 달로부터 오 세 까지이다면, 그 다음 네 추정가는 남성은 은 다섯 세겔, 여성은 은 삼 세겔이다.

영적 의미

그러나 유아의 선 속에 있는 이들, 그들의 신앙이 싹틀 조짐만 있고 선행은 아주 조금만 있을 경우, 그들은 영적 생명을 지니되 매우 조금 뿐인데 그 이유는 소량의 진리가 애착과 결합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더욱 작아질 경우 거기에는 진리는 없고 애착만 있게 된다.

세부적 영적 의미

한 달 된 나이로부터 오 세까지란 유아의 선 가운데 있는 바 그 신앙이 싹틀 가능성만 있을 뿐이고 선행은 매우 적은 양을 지닌 이들을, 값을 매김이란 신성한 진리에 의거함을, 사내아이는 은 오 세겔이다란 영적 생명의 품질이 작다는 것을, 그 이유는 애착에 결합된 진리가 적기 때문이다. 여자아이는 은 삼 세겔이란 애착만 있고 진리가 없어 더욱 적음을 뜻한다. (2280, 10225, 7010, 725, 4495-3, 10225)

7절. 그리고 만일 육십 세 그 이상이다면, 네 추정가는 남성은 은 십오 세겔, 그리고 여성은 은 십 세겔이다

영적 의미

지혜의 선 속에 있는 이들, 그들은 시험을 충분히 거친 상태인 바, 그 생명의 품질은 진리가 풍부하면서도 선과 결합되어 있어 새로운 상태, 즉 그들은 진리를 수단으로 사랑으로부터 행동한다. 그러나 조금밖에 안 되는 진리가 선과 결합할 경우 그들의 품질은 리메인스(remans, 아껴두신 것)가 충만된 상태로부터 존재한다.

세부적 영적 의미

육십 세 이상이란 시험의 과정을 충분히 거처 지혜의 선 가운데 있는 이들을, 값을 매김이란 신성한 진리에 의거함을, 남자는 십 오 세겔이다 란 진리가 풍부하고 새 상태에서 선과 결합된 생명의 품질이요 이 품질에서 그들은 진리를 수단으로 사랑으로부터 행동함을, 여자는 십 세겔이란 적은 진리가 애착과 결합될 때 그 품질은 리메인스(remans, 아껴두신 것)가 충만됨으로부터 있게 됨을 뜻한다. (7010, 10225, 8400, 9296-5, 10225, 576)

8절. 그러나 만일 그가 네 추정가 보다 더 가난하다면, 그다음 그는 성직자 앞에 놓여질 것이다, 그리고 성직자가 그를 평가한다.

영적 의미

그러나 진리에서 파생되는 품질이 없는 이들은 그들이 지닌 선의 상태로부터서 가늠해 보아야한다. 그 이유는 선은 선의 품질을 표현하는 진리를 생산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주님께 헌신하려는 그 사람이 지닌 선으로부터의 진리에 의거 위 사람은 평가되어지게 된다.

세부적 영적 의미

매긴 값보다 더 가난한 사람이 성직자 앞에 선다란 진리로부터 파생된 품질을 가지지 않은 이들은 선에 관한 그들의 상태를 가지고 검토됨을, 성직자가 그 사람의 값을 매김이란 선은 그 선의 품질을 표현하는 진리들을 생산함을, 서약하는 자의 능력에 따라 성직자가 값을 매김이란 주님께 자신을 바치려는 사람에게 있는 선으로부터 오는 진리에 의거 위의 사람은 평가되어짐을 뜻한다. (7010, 4459-4, 9946, 4985, 8304, 3732, 3880, 9946)

9절. 그리고 만일 어떤 사람이 주님에게 봉헌물을 바치는 것이 짐승이다면, 이런 것의 모두가 주님에게 거룩하다.

영적 의미

자기는 주님으로부터 있게 되었다고 인정함을 수단으로 내면에 있는 자연적 애착들을 주님을 섬기는데 바치고자 하는 이들은 그것으로 인해 거룩한 상태로 들어간다.

세부적 영적 의미

짐승이란 사람 또는 “혼, soul”에 관련된 것을 명시하는데 내면에 있는 자연적 애착을, 봉헌물로 바침이란 그것이 주님으로부터 이다는 것을, 이런 사람이 드리는 모든 것은 거룩하다란 거룩함의 상태가 예배에서 진실로 인정함에서 비롯된다는 뜻이다. (1823, 349, 5619, 8402)

10절. 그는 그것을 나쁜 것을 좋은 것으로, 좋은 것을 나쁜 것으로 변경하지 못한다. 그리고 만일 짐승을 짐승으로만 바꿀 것이다면, 그다음 그것과 그것과 바꾸어지려는 이것 모두가 거룩하다.

영적 의미

위에 속하는 사람이 선 또는 진리가 우세해 있는 상태에서 다른 데로 건너가는 것, 혹은 악 또는 거짓이 우세해지는 상태는 허용될 수 없다. 내면에 있는 통치하는 애착으로 예배하는 사람이 외면에 있는 애착으로 내려가 예배할 수 없다. 그러나 자신의 의지에 반대되는 시험의 과정에서 선과 악 사이에서 오르내리고 있다면, 승리를 수단으로 선이 확증되고 악이 거절되는데 확증과 거절 모두 거룩하다.

세부적 영적 의미

그것은 변경하지 못하고, 바꾸지도 못한다란 위의 사람이 선 또는 진리가 우세해 있는 상태에서 악 또는 거짓이 우세해지는 상태로 건너가는 것을 허용할 수 없음을, 좋은 것을 나쁜 것과 나쁜 것을 좋은 것과 바꾸지 못함이란 내면에서 통치해주는 애착으로부터 예배하는 사람은 외면에로 내려 갈 수 없고 그 반대도 될 수 없음을, 짐승끼리 맞바꾸려고 하면 그 바꾸려던 둘 다 거룩해진다란 인간이 자기 의지에 반대되는 시험의 과정 중 선과 악 사이에서 흔들거리고 있다면 승리를 수단으로 선이 확증되고 악이 거절되는 바, 확증과 거절 모두가 거룩함을 뜻한다. (1463, 683, 1276, 1377, 1823, 8042, 847)

11절. 그리고 만일 이것이 불결한 짐승이다면, 이것으로부터 그들은 주님에게 봉헌물을 바치지 못할 것이다. 그 다음 그는 성직자 앞에 그 짐승을 놓아야 한다.

영적 의미

누가 자기의 내면에 있는 자연적 애착을 주님께 바치고자 하는데 그 애착이 불순하다면 그는 자기 속에서 우세해 있는 선의 상태로부터 주님께 자기의 불순함을 인정해야 하리라.

세부적 영적 의미

그것이 주님께 제물로 바칠 수 없는 불결한 짐승일 경우 성직자 앞에 세워 둔다란 누가 자신의 내면에 있는 자연적 애착을 주님께 바치고 싶은데 그것이 불순할 경우 그는 자기 속에서 우세해 있는 선이 통치하는 상태로부터 자기의 불순함을 주님 앞에서 인정해야 할 것을 뜻한다. (10130, 9946)

12절. 그리고 성직자가 그것이 좋은지 나쁜지를 평가하라, 네 성직자가 그것을 평가하는 그대로, 그것은 그렇게 있을 것이다.

영적 의미

이로부터 그는 불순한 자연적 애착들의 품질을 알게 되고 동시에 자기 예배의 신실한 상태를 평가할 수 있다.

세부적 영적 의미

성직자가 그것이 좋은지 나쁜지 평가함이란 그런고로 그는 불순한 자연적 애착들의 품질을 알게 될 것임을, 다시 말해 선에 관한 자기 상태로부터 알게 됨을, 성직자가 평가한 그대로 그 값이 결정됨이란 위와 동시에 그는 자기 예배의 신실성을 평가하게 될 것이다를 뜻한다. (9946, 10217)

13절. 그러나 만일 그가 참으로 그것을 되찾겠다면, 그러면 그는 네 추정값에 오분의 일을 보태라.

영적 의미

그래서 그가 자기 예배의 상태에 따라 회개의 일을 진실로 행한다면 자기 속에 아껴 저장된 선한 어떤 것들로부터의 인정도 있게 되리라.

세부적 영적 의미

그것을 되찾고 싶을 경우 그는 그 값에 오분의 일을 더해야 함이란 만일 그가 예배의 자기 상태에 따라 회개의 일을 진실로 행한다면 그는 리메인스(remans, 아껴두신 것) 속에 있는 선으로부터서도 인정함이 있을 것임을 뜻한다. (2996, 6156)

14절. 그리고 사람이 자기 집을 주님에게 거룩해 있도록 신성하게 할 때, 그러면 성직자는 그것이 좋은지 나쁜지, 그것을 추정하라. 성직자가 그것을 추정하는 대로 그렇게 그것은 서있을 것이다.

영적 의미

누가 선의 저장소인 외면에 있는 자연적 애착을 예배에서 주님께 바치겠다면 이런 애착의 품질도 선에 관해 우세해 있는 상태에 따라 있게 된다. 그 이유는 이 선이 예배의 품질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세부적 영적 의미

자기 집을 주님께 바쳐 신성해지게 함이란 선의 저장소인 외면에 있는 자연적 애착들을 예배에서 주님께 바침을, 좋은지 나쁜지를 성직자가 평가함이란 이 애착들의 품질은 선에 관해 우세해 있는 그의 상태에 따라 아직은 있다는 것을, 성직자가 평가한 대로 되어짐이란 이것이 예배에 있는 품질에 관해 결정되는 것이기 때문임을 뜻한다. (1488, 8042, 7724, 10217)

15절. 그리고 만일 그것을 신성하게 한 그가 자기 집을 되찾을 것이다면, 그 다음 그는 그것에 대한 네 추정값의 오분의 일의 돈을 더하라, 그리고 그것은 그의 것이다.

영적 의미

예배자가 주님으로부터 회개의 일을 기쁘게 행하고자 한다면 그는 자신에게 남아 있는 선의 상태로부터 오는 어떤 인정함을 수단으로 행해야 하고 이에 더하여 자신 속에 악이 있음을 인정해야한다. 그러면 그는 선을 자기 것 같이 삼게 되리라.

세부적 영적 의미

신성하게 한 자기 집을 되찾을 경우 매겨진 값의 오분의 일에 해당하는 돈을 더해야 그의 것이 됨이란 만일 예배자가 회개의 일을 주님으로부터 기꺼이 할 경우 그는 선에 관해 아껴두신 자기 상태로부터 어떤 인정함을 수단으로 회개가 있게 되는데 이에 더 보태야 하는 것은 자기가 악 속에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것이 그의 것이다란 그는 자신으로부터 인 듯 선을 자기 것 삼게 될 것을 뜻한다. (2966, 6156, 1488)

16절. 그리고 만일 사람이 주님에게 자기 소유지의 일부를 신성하게 할 것이다면, 그다음 네 추정값은 그것의 씨뿌림에 따라 있다. 보리 한 호멜의 씨뿌림은 은 오십 세겔(로 평가될 것)이다

영적 의미

누가 진리에 관한 외면에 있는 자연적 인간을 그분을 섬기는데 바침으로 주님을 예배하겠다면 이 예배의 품질은 선 안에서 진리를 받는 정도에 따라, 다시 말해 진리의 선에 따라 정해진다. 그리고 그 상태는 그 선에 의거 충만 될 것이다.

세부적 영적 의미

누가 자기 소유의 들판 일부를 주님께 바쳐 신성해지게 함이란 누가 진리에 관한 측면에서의 자연적 인간을 주님을 섬기는데 바침으로 주님을 예배할 경우를; 값을 매김이란 신성한 진리에 의거함을; 거기에 뿌리는 씨앗에 따라서란 위의 예배의 품질은 선 안에 있는 진리를 받는 측면에서 있게 됨을; 보리 한 호멜 뿌리는 양의 값이 은 오십 세겔이다란 진리의 선에 의거해서, 그 선에 따라 충만된 상태가 있을 것임을 뜻한다. (9272, 10262, 7602, 2261, 425, 2959)

17절. 만일 그가 희년의 해로부터 자기 들판을 신성하게 한다면, 네 추정에 따라 그것은 서있을 것이다.

영적 의미

그래서 예배의 이 상태가 자기 생명의 가장 깊은 곳에서 선과 진리의 결혼으로부터 파생되고 있다면 그것은 확증되어 선의 그 상태는 영구적이 된다.

세부적 영적 의미

희년의 해로부터 자기 들판을 신성하게 한다면 네 추정에 따라 그것은 서있는다 란 예배의 상태들이 자기 생명의 가장 깊음에서 선과 진리가 결혼함에서 파생되어진다면 그 상태는 확증되어지고 선의 상태는 영구적일 것이 된다. (4982, 8042, 8802, 7010, 4926)

18절. 그러나 만일 그가 희년 이후 자기 들판을 신성하게 한다면, 그 다음 성직자는 그에게 희년의 해까지 남은 년수에 따라 돈을 계산하라, 그리고 감해지는 액수는 네 추정값으로부터 만들어 질 것이다.

영적 의미

그러나 예배의 이 상태가 위와 같은 가장 깊은 결합에서 파생되지 않고 단지 선으로부터 기대 할 수 있는 정도에 그치고 있다면 그 품질은 거듭나는 과정에서 획득된 진리에 따라 있어진다. 그런고로 시작에서도 덜 완전하리라.

세부적 영적 의미

희년이 지나서 자기 들판을 신성해지게 함이란 예배의 상태가 위와 같이 가장 깊은 결합으로부터 파생되지 않고 기대만 될 뿐이다 면을, 성직자가 희년까지 남은 년수를 세어 그 값을 그에게 세어 줌이란 선으로부터의 품질은 거듭나는 동안 선 안에 이식된 진리를 획득한 정도에 따라 있게 될 것임을 뜻한다. (8802, 9946, 10217, 725, 2966)

19절. 그리고 만일 들판을 신성하게 한 그가 참으로 그것을 되찾을 것이다면, 그 다음 그는 그것에 네 추정값의 오분의 일을 더하라, 그리고 그것이 그에게 보증을 설 것이다.

영적 의미

만일 예배자가 선한 자기 상태로부터 회개의 일을 수행하는 것을 참고 견디지만 회개의 선으로부터 주님을 예배하지 못 할 경우, 그런데 아껴두신 선한 어떤 것으로부터 주님을 인정하고 있다면 그는 주님으로부터 새 생명을 계속 받을 것이고 선한 그의 상태도 확증될 것이다.

세부적 영적 의미

신성해지게 바친 들판을 되찾을 경우, 매겨진 값에 오분의 일을 더 하면 자기 것이 된다란 예배자가 회개의 일을 하는 동안은 선에 관한 자기 상태로부터 버텨내는데도 그가 회개의 선으로부터 주님을 예배하지 못하고 있고, 그러나 자기는 주님으로부터 새 생명을 계속 받고 있다는 것을 아껴두신 선의 상태로부터 인정하고 있다면 선에 관한 그의 상태는 확증된다는 것을 뜻한다. (4982, 8042, 2966, 6156, 4926)

20절. 그리고 만일 그가 들판을 되찾지 않을 것이다면, 또는 만일 그가 또 다른 사람에게 들판을 팔았다면, 그것은 더 이상 되찾지 못한다.

영적 의미

그러나 이와 같은 예배가 일시적일 뿐이고 회개가 따르지 않으면, 다시 말해서 악을 확증함을 통해 그의 선이 소외되고 있다면 그의 구속은 불가능하다.

세부적 영적 의미

들판을 되찾지 않음이란 위와 같은 예배는 일시적일 뿐 회개가 수반되지 않음을, 남에게 그 들판을 팜이란 악을 확증한 결과로 선이 소외됨을, 더 이상 그 들판은 물러내지 못함이란 악이 확증되었으나 아직도 되찾음(구속)은 가능할 수 있다는 뜻이다. (2966, 4758, 4747)

21절. 그러나 들판이 희년에서 나갈 때, 그것은 마치 들판이 헌납된 것 같이 주님에게 거룩하다. 그것의 소유는 성직자이다.

영적 의미

그러나 심판에서 그 사람과 함께 있는 진리의 선으로 예배하는 모든 상태는 가능한 한 그에게 이로운 쪽으로 있어질 것이다. 그 이유는 그것이 진리와 선에 괸한 양면에서 거룩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모든 상태는 주님으로부터 이기 때문이다.

세부적 영적 의미

희년이 될 때 그 들판은 주님에게 거룩하다란 심판에서 진리의 선으로부터 예배한 모든 상태는 예배자에게 이익이 되는 한도에서 있게 된다는 것을, “바쳐진 들판 같이…”란 반대 의미 일경우, 이는 악과 거짓으로 확증되어 완전히 정죄되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좋은 의미일 경우, 이는 진리와 선으로부터 예배되어져 거룩해진 것을 뜻한다. 그 소유가 성직자에게 있다란 위와 같은 모든 상태도 주님으로부터 임을 뜻한다. (4982, 8042, 8802, 9193, 8042, 9946)

22절. 그리고 만일 그가 자기 소유지가 아닌, 자기가 샀던 들판을 주님에게 신성하게 한다면,

영적 의미

더구나 예배의 이런 상태가 단지 외적 동기들로부터 획득되어 옷을 입듯 하고 있을 뿐 순수한 선으로부터가 아니라면,

세부적 영적 의미

자기 소유였던 들판은 아니지만 사들인 들판을 주님께 바쳐 거룩하게 함이란 위와 같은 예배의 상태가 단지 외적인 동기들로부터 획득되고 입혀져 있을 뿐 순수한 선으로부터가 아니면을 뜻한다. (8042, 4982, 2967, 4397)

23절. 그다음 성직자는 그에게 희년의 해까지 네 추정값의 가치를 계산할 것이다. 그리고 그는 주님께 거룩한 것으로 그 날에 네 추정값을 매길 것이다

영적 의미

그러면 이와 같은 예배의 품질은 선으로부터 신성한 진리에 의거 예배자의 가장 깊은 상태가 무엇인지에 관해서, 심판에서 있어질 것이 식별된다. 그래서 순수한 선을 원하도록 그는 강요 당할 것이리라.

세부적 영적 의미

성직자가 네 추정값의 가치를 계산함이란 이와 같은 예배의 품질은 선으로부터 신성한 진리에 의거 식별될 것임을; 희년까지란 예배자가 어떨 것인지 또는 예배자가 심판에서 그의 가장 깊은 상태에 관해 어떨 것인지를, 주님께 거룩한 것으로 당일에 값을 매겨줌이란 그는 이 상태에서 순수한 선을 원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을 인정하도록 강요될 것임을 뜻한다. (9946, 10217, 7010, 8802, 2966, 8802, 7010, 2119)

24절. 희년의 해에 들판은 그것을 팔았던 자에게, 토지의 소유가 속해 있었던 자에게 되돌아 간다.

영적 의미

심판에서 모든 선은 주님으로부터 있고 그 선은 거듭남을 수단으로 획득된다는 것이 보여질 것이다.

세부적 영적 의미

희년이 되면 들판을 팔았다 해도 토지의 상속권을 가진 임자에게 그 들판이 돌아간다란 심판에서 순수한 선은 주님으로부터 임을 알게 될 것이고 거듭남을 수단으로 획득된 모든 선도 주님으로부터 임을 알게 되리라. (8802, 4982, 2028-9, 7833, 3239)

25절. 그리고 모든 네 추정값은 성소의 세겔에 따라서 이다. 즉 이십 게라가 한 세겔이다.

영적 의미

인간의 상태에 괸해 신성한 진리가 평가함은 선에서 파생된 진리에 따라 있게 된다.

세부적 영적 의미

값을 매기는 모든 것은 성소의 세겔에 의거함이란 인간의 상태에 관한 신성한 진리의 평가는 선으로부터 파생되는 진리에 의거 있게 됨을, 이십 게라가 한 세겔이다란 선에 관해 아껴두신 모든 것을 뜻한다. (10221, 2959, 10222)

26절. 짐승 사이에 첫배 새끼 만이 주님에게 첫배 새끼로 만들어지는 바, 아무도 그것을 신성하게 하지 못한다. 그것이 수소이든 양이든 그것은 주님의 것이다.

영적 의미

진리에 앞서서 존재한 선은 주님으로부터 있어진 선인 바, 어느 누구도 선의 존재가 자기 탓이라고 주장해서는 안 된다. 이 선의 수준이 영적 선이든 자연적 선이든 모두 주님으로부터 이다.

세부적 영적 의미

짐승 중 맏배란 진리에 앞서 존재하는 선을, 맏배는 주님에게 첫배 새끼로 돌려야 한다란 주님께로부터 기인된다고 생각해야 함을; 어느 인간도 그것을 신성하게 하지 못함이란 어느 인간도 그 선이 자기 것이라고 해서는 안 됨을; 뿐만아니라 지식만으로 존재하는 진리는 거룩한 상태를 생산하지 않음을, 소든 양이든 그것은 주님의 것이다란 선이 자연적 선이었든 영적 선이었든 모두 주님으로부터 존재함을 뜻한다. (3325-8, 5619, 5913, 6126)

27절. 그리고 만일 그것이 불결한 짐승으로부터 이다면, 그 다음 그는 너의 것 추정값에 따라 그것의 값을 치루라, 그리고 그것에 그것의 오분의 일을 보태라. 또는 만일 그것이 되찾아지지 않는다면, 그 다음 그것은 너의 추정값에 따라 팔리운다.

영적 의미

그러나 주님으로부터가 아닌 불순한 자연적 선은 신성한 진리를 통해 순수한 선으로 대체되어진다. 이리하여 주님께서 각 사람 안에 아껴 두신 것들로해서 인정하는 어떤 것을 수단으로 자연적 인간은 위의 선을 획득한다. 만일 회개가 수행되지 않으면 자연적일 뿐인 선은 거절되는데, 그 이유는 그 선은 신성한 진리와 하모니를 이루지 못하기 때문이다.

세부적 영적 의미

불결한 짐승이란 불순한 자연적 선을, 매겨진 값에 따라 그 값을 치르고 되찾음이란 불순한 자연적 애착도 신성한 진리를 통해 순수한 선으로 대체될 수 있음을; 그 값에 오분의 일을 더 함이란 위 방법 속에서 자연적 인간도 아껴두신 것들로부터 오는 인정함을 수단으로 선을 획득함을; 되찾지 않겠다란 회개의 일이 수행되지 않으면을; 매겨진 값에 판다란 자연적일뿐인 선은 거절되어져야 한다는 것, 그 이유는 신성한 진리와 조화를 이루지 않기 때문이다. (46, 10130, 8078, 7010, 2966, 4758)

28절.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쳐진 것, 즉 그가 가진 모든 것, 그것이 사람이든, 짐승이든, 또는 자기 소유의 들판이든 사람이 주님에게 바친 것은 팔려지거나 되찾지 못한다. 바쳐진 모든 것은 주님에게 최고로 거룩하다.

영적 의미

더구나 자신의 것으로 여겨지는 삶으로부터, 또는 자신의 재량으로 주님께 바치는 애착이나 힘, 그것은 내적이든, 내면이든, 외적이든 소외되어진다거나 또는 이기적이고 세상적인 용도에 충당되지 못한다. 그것도 주님께 모두 돌려드려야 한다.

세부적 영적 의미

가진 것 중에서 주님께 바치기로 결심해서 바쳐진 것은 그것이 사람이든 짐승이든, 소유한 들판이든, 팔거나 물러 내지 못한다란 자기 것처럼 보이는 그 삶으로부터, 또는 자기 재량으로 주님께 바치는 애착이나 능력, 그것이 내적이든, 내면에 있든, 외적이든 소외되어져서는 안 되고, 이기적이고 세상적인 용도에 응용되어서는 안 된다. 바쳐진 것은 모두 주님께 더 없이 거룩하다란 위 사항은 주님으로부터 완전히 비롯된다는 뜻이다. (9193, 8042, 2001, 7424, 4982, 4758, 2966, 8078, 8042)

29절. 바쳐짐이 사람일 경우, 아무도 몸값을 치루고 되찾지 못한다. 그는 정년 죽음에 놓여야 한다.

영적 의미

한마디로 내적으로 인정함으로부터 주님께 헌신하는 것은 이기적 사랑을 수단으로 소외될 수 없다. 모두는 진리가 선과 결합함을 수단으로 주님께 모두 그 원인을 돌려야 한다. 그러므로 옛 생명은 거절되어야 하고 새 생명은 영원해야만 한다.

세부적 영적 의미

완전히 바치기로 해서 바쳐진 사람은 되찾을 수 없고 반드시 죽여야 한다란 내적으로 인정해서 주님께 바치는 것은 어떤 것이든 이기적 사랑으로 소외되어질 수 없다는 것, 그것은 진리가 선과 결합함으로 주님께 온전히 돌려드려야 한다는 것, 그런고로 옛 삶은 거절되어야만 한다는 것, 새로운 삶은 확실히 영원하다는 뜻이다. (9193, 683, 2966, 4758, 1408, 1854)

30절. 그리고 토지의 모든 십분의 일, 토지의 씨뿌림으로부터 이든 나무의 열매로부터 이든, 주님의 것이다. 그것은 주님에게 거룩하다.

영적 의미

진리에 관해 아껴두신 것이든, 선에 괸해 아껴두신 것이든 인간과 함께 있는 모든 아껴두신 것은 주님으로부터 이다. 그것들은 신성한 자비로부터 인간 안에 저장되어 있을 뿐이다.

세부적 영적 의미

씨뿌림에서 나는 곡식이든 나무에 열리는 열매이든 토지에서 난 것의 십분의 일은 주님의 것이다란 사실 인간에게 있는 아껴두신 모든 것, 그것이 진리에 속하든 선에 속하든 모두 주님으로부터 있는 것이다. 그리고 신성한 자비로부터 인간 안에 저장된 것임을 뜻한다. (576, 57, 8042)

31절. 그리고 만일 사람이 십분의 일의 뭔가를 되찾겠다면, 그는 그것에 그것의 오분의 일을 추가할 것이다.

영적 의미

회개의 일을 수단으로 선을 마치 자기 것처럼 삼기 위해서 그 선이 주님으로부터 전적으로 있다는 것을 자기 속에 아껴두신 것 속의 선들로부터 인정해야만 한다.

세부적 영적 의미

자기의 십분의 일 중 어떤 것을 되찾고 싶다면 오분의 일을 더 해야 한다란 인간이 선을 자기 것이 되게 하기 위하여, 회개의 일로 마치 자기 것이듯 되게 하려면 아껴두신 것의 어떤 선으로부터 인정함이 있어야 하고, 더 나아가 모든 선이 주님으로부터 임을 확실히 인정해야 한다. (2966, 6156)

32절. 목축이나 양떼의 모든 십분의 일, 막대기 아래를 지나가는 열 번째는 주님에게 거룩하다.

영적 의미

그러므로 자연적이고 영적인 모든 선은 진리의 힘으로 획득되는데, 자신 스스로 행동하듯 움직이는 사람을 수단으로 하되 위의 선 모두가 아껴주신 것들을 수단으로 주님으로부터 임을 인정해야 하리라.

세부적 영적 의미

목축이든 양떼이든 지팡이 밑에서 오가는 것은 무엇이든 그 십분의 일은 주님께 거룩하다란 자연적이고 영적인 모든 선, 이 선이 진리의 힘으로, 마치 자신 스스로 인 듯 행동함으로 해서 획득되는데 이것 모두는 주님께서 아껴두신 것을 수단으로 있어졌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는 뜻이다. (576, 5913, 6126, 4876, 2001)

33절. 그는 그것이 좋은지, 나쁜지를 헤아리지 못한다, 그는 그것을 바꾸지 못한다. 그리고 정녕 그가 그것을 바꾸겠다면, 그러면 그것과 바꾸려는 그것 둘 다 거룩할 것이다. 그것은 되찾아지지 못한다.

영적 의미

인간이 자기 총명으로 선이든 악이든 자기 품질을 평가하려 들어서는 안되고, 선에서 악으로 되돌아가도록 허용할 수 없고, 시험의 흔들림에서 악에 빠지지 않는다면 악에서 저항하고 선 쪽으로 결정함을 수단으로 주님께 예배해야 한다. 이럴 경우, 두 상태는 거룩해 진다. 인간은 선과 진리의 상태로부터 악과 거짓의 상태로 건너 갈 수 없다.

세부적 영적 의미

좋고 나쁜 것을 헤아리지 못하고 바꾸지도 못한다란 인간은 자기 품질이 선한지 악한지를 자기로부터 파생된 총명으로부터서 평가하지 못하며 또한 선으로부터 악으로 되돌아 가는 것도 허용되지 못함을; 기어이 바꾼다면 바꾸려는 것 모두 거룩하다란 시험이 요동칠 때에 악에 빠진다면 그는 악에 저항하고 선 쪽에서 결심함을 수단으로 주님을 예배해야만 한다는 것을; 되찾지 못함이란 인간은 선과 진리의 상태로부터 악과 거짓의 상태에로 건너 갈 수 없음을; 이를 다른 말로 표현하면, 인간은 구속의 일을 수단으로 주님으로부터 전적으로 있는 아껴두신 것 속의 선과 진리를 자신의 것으로 주장할 수 없다는 뜻이다. (4162, 1276, 1377, 847, 8042, 2966)

34절. 이것들은 명령들이다, 이것을 주님께서는 시내산에서 이스라엘 자손을 위해 모세에게 명령하셨다.

영적 의미

모든 위의 사항은 신성한 질서의 법칙이요, 이는 신성한 선이 신성한 진리에 유입되어서 비롯되고, 이는 주님의 순수한 사랑과 자비로 영적 인간의 유익을 위한 것이다.

세부적 영적 의미

이것들은 명령이요 주님께서 이스라엘 자손을 위해 시내산에서 모세에게 명령 하셨다란 모든 위의 사항들은 신성한 질서의 법칙이요, 이는 신성한 선의 유입이 신성한 진리 안에 있게 되어서 이고, 이는 주님의 사랑과 자비로부터 영적 인간의 유익을 위해서 이다. (2634, 2951, 2001, 7010, 3654, 8753)

27장의 종합적 고찰

우선 주목해 보아야 할 주제는 어떤 사람이나 물건을 평가함(값을 매김)이 모세나 성직자들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에 관해서이다. 글자대로 일 경우 평가란 제한된 의미 즉 값을 매김 그대로 이다. 그러나 영적일 경우는 그렇지 않다. 그 이유가 내적 의미는 보편적 의미 이어서 대체로 인류에 관계되는 바, 특정한 어떤 국가나 개인에 국한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모세의 평가는 신성한 진리로 모든 이에 대한 주님의 평가이다. 누군가에 대해 주님이 하시는 평가에는 미미한 실수조차 결코 없다. 더구나 모든 각 개인은 주님의 평가에 의거 영원까지 자기에게 할당된 위치를 가지게 된다. 이는 너무나 확실한 바, 우리 삶이 건설되는 기초인 이 세상에서 태어나 이루어진 삶에 따라 지옥 이든 천국 이든 우리의 위치는 결정되어 고정되어진다. 이런 생각은 이제 공부하는 본문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주고 있다.
비록 값을 매김이 주님의 권한에 절대적으로 속한다 해서 인간이 그것을 이해 못하도록 장치해두신 게 아니라 그 반대이다. 몇 세겔로 값을 매김, 특히 인간 존재를 몇 세겔의 가치가 있다고 하는 것은 매우 이상한 느낌을 줄런지 모른다. 그러나 수를 세고 물건을 달고, 재는 측량은 내적 의미에서는 사랑과 총명에 관한 우리의 품질을 발견하는 것과 관계된다는 것을 알고 있다면, 주님으로부터 오는 능력을 수단으로 자신을 평가하든 타인을 평가하든 지극히 올바르게 평가하는 것은 모두 가장 가치가 있는 완성(accomplishment)임을 보게 된다. 비록 모든 평가가 주님으로부터, 또는 그분의 말씀으로부터 거행되는 것이 확실하다 해도 자신의 운명을 고정시켜주는 삶은 타인이 아닌 나 자신이다. 지상 마지막 순간에서 우리가 어떤 인격이 되어있든 그 인격이 자신과 꼭 맞고 거기에 자신이 언제나 만족해 있는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이렇게 고백하고 있다. “날수를 제대로 헤아릴 수 있도록 가르치시어 지혜의 심정을 얻게 하소서” (90:12). 이제 우리 모두는 위 구절을 이해하고 있으리라 본다. 설사 상응이라 불리는 지식이 없다 해도 우리가 해야만 하는 것이 어떤 것들인지 그것들의 광대함과 중량감을 느끼리라. 사실 자연계에 사는 동안에도 주님으로부터 오는 힘으로 누구를, 또는 어떤 사물의 값을 매길 수 있다는 것은 아마 최고도로 가치있는 일 임은 틀림없다. 이를 행할 수 있는 사람은 가장 성공적으로 자기 지식을 응용했다고 보아야 하는 바, 최고의 사람이라 생각된다. 이를 행할 수 없는 이들은 상대적으로 값이 덜 나가는 사람이 된다. 그러나 어떤 환경 조건에서도 한 인간 존재의 가치는 너무나 커서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바, 본문의 값을 매김(estimation)이 지닌 의미의 절대적 측면에서는 어느 누구라도 그 값을 잃는 경우를 주님께서는 허락하지 않으신다. 천사와 악마는 대단히 큰 차이가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들이 반대되기 때문이다. 이는 악과 선, 거짓과 진리 사이에 놓인 반대됨과 같다. 그럼에도 이 모든 것, 가장 나쁜 악령 조차도 주님의 견지에서는 돌보아 줄 가치가 있으시다. 물론 어느 누구도 자기가 선택하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악령이 되도록 강요당하지 않는다. 게다가 무한하신 분이 보시는 수준에서 어떤 대상을 우리는 볼 수 없다는 것도 안다. 그럼에도 자신이 자유로이 선택해서 자신이 흡족해 하는 것도 없이, 그 만족이 피할 수 없는 제한을 포함함도 없이 영원한 존재로 살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다는 것을 확실히 해두는 것은 유한한 우리의 능력을 가지고 주님으로부터서 100%가능하다.
주제와 연결되는 일반적인 진리들을 위와 같이 생각해보게 되면 이제 흥미를 주는 본문에 묘사된 목차들의 일반 요점을 살피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첫 문항에 기술된 네 가지 사항들은 「천국의 비밀들 10225항」에서 모두 설명되어 있다. 따라서 한, 두가지 정도의 실용적인 측면 외에 더 확대 해 볼 필요는 없으리라 본다. 첫째로, 거듭남에 있게 되는 발전은 점진적이다는 것, 그래서 인간의 자연계 삶의 각기 다른 시기들로 묘사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마치 이 장소에서 저 장소로 이동하는 여행 또는 토지를 경작하는 과정과도 비슷하다. 성경의 어떤 부분에서는 이를 두고 창조의 일이라 부르고, 다른 곳에서는 새로운 탄생이라고도 일컫고 있다. 이와 같이 여러가지 다른 묘사들을 수단으로 거듭남에 관한 다양한 진리들이 말씀의 영적 의미에서 명백하게 그 모습을 나타내 주고 있다. 그리고 모든 각 경우마다 그것은 점진적이다. 우리는 잎이 돋을 때, 이삭이 패일 때, 그리하여 그 이삭 안에 알곡이 가득찰 때까지를 맞이한다. 한 단계 한 단계를 거쳐서 하늘 나라에 도달해야 하는 것이 우리 인간임을 실감하면 이 세상 삶에 적지 않은 위로를 받게 된다. 본문의 첫 문단에서 꼭 주목해두고 싶은 것이 있다. 모든 이가 유아로부터 노령에로 전진해가는 것과 똑같게 거듭난다고 이해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될 경우도 있지 않느냐고 혹 어떤 이는 반문 할 런지 모른다. 그러나 여러 인간의 삶을 관찰해 본 사람이라면 실질적인 과정은 삶의 초기 또는 후기에도 개시되기도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게다가 극단적인 경우 어떤 이에게는 전혀 개시조차 되지 않는 경우도 발생한다. 어떤 이의 경우 실제 40살을 먹고 있는데도 그의 거듭남은 유아로부터 다섯 살 또는 십대까지로 본문에서 상징화 된 초보적인 상태에 머물고 있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유아라 불리는 자연계의 것과 거듭나는 상태와의 상응 차원에서는 아직 선을 붙들고 있다고 말해지고 있다. 어찌됐든 우리는 위의 사항들을 유념해두면 매우 유익하리라 생각된다.
둘째로, 본문에서 삶의 각기 다른 시기가 정규적인 순서로 언급되고 있지 않다는 것에 관해서이다. 인생의 셋째 시기에 해당되는 나이(이십세)가 시리즈들의 문을 열고 둘째 시기, 첫째 시기 그리고 넷째 시기로 이어지고 있다. 그리고 이 문단은 모세가 아닌 성직자가 가난한 자의 값을 매김으로 마감되고 있다. 왜 이렇게 되는 걸까? 본 장의 전체 주제가 영적 교회의 상태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영적 사항에 관련되는 것, 즉 영적 교회의 내적 상태에 관한 묘사가 선행된 다음, 셋째 시기와 둘째 시기인 영적 교회의 외적 상태가 기술된다. 그 다음 천적 사항에 관련되는 것 즉 무지의 순진에 관해 먼저 기술되고 지혜의 순진이 뒤따르는데 이것이 인생의 첫째 시기와 넷째 시기로 각각 나타내고 있다. 그러나 가난한 이들은 각 층의 사람들, 즉 그들의 상태가 선의 측면에서, 선으로부터 진행된 진리 측면에서 값을 매길 수 있을 뿐인 사람들을 의미하고 있다. 그래서 지금 순서대로 뒤따르는 내용은 자연적 애착들, 그것의 내면과 외면에 있는 것들, 그리고 자연적 수준의 지적 능력들 또는 지식에 대한 애착, 뿐만 아니라 자연적 수준의 기쁨들이 열거되고 있다. 넷째 문단에서 주어지는 세부 사항들을 숙고하게 되면 우리가 상기 할 수밖에 없는 것은 주님의 말씀이 헤아리는 속성에 관한 것이다. 이 품성을 수단으로 모든 이는 그의 삶에 따라 평가되어 판단되어 진다. 따라서 우리가 회개를 하되 가장 좋은 동기, 가장 높은 동기로 이루어지는 순수한 회개가 절대 필요하다는 것을 자연히 느끼게 만든다. 따라서 시편의 말씀을 응용하면 더욱 유익하리라. “하느님, 나를 헤쳐 보시어 내 심정을 알게 해주소서 나를 파헤쳐 내 생각을 알게 하소서, 사악한 길 걷는지 보게 하시고 영원한 길로 나를 인도해 주소서” (시편 139:23-24).
마지막 문단에 포함된 영적 진리를 호기심의 눈초리로 흘겨보기만 해도 그 속에 얼마나 실용적 중요성이 훌륭하게 담겨 있는지 누가 알 수 없을까? 우리 모두가 대단히 성품이 호의적이라 가정해보아도, 흔들거리는 삶의 상태 동안 자신의 총명과 신중성을 한껏 발휘해 얻은 선함들이라 해도 그 선이 주님으로부터 이요 그분이 소유자이심을 망각하는 일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진짜 선함을 행하는데 있어 친절과 관대함이 단지 자연적 수준의 충동에 멈추어 있어 거듭남에서는 실수가 얼마나 연발되는지는 헤아리기 힘들 정도이다. 이런 것들을 식별하고 응용해가기 위해 말씀의 가르침에서 꾸준히 배워 간다면 우리 거듭남은 더욱 정진되어 자연적일 뿐인 애착들의 품질이 과연 무엇인지 지각할 능력을 갖추게 되고 수준 낮고 천한 애착들을 거절하면서 진정한 선함의 공적을 자신에게 돌리지 않으면서 선을 행할 수 있으리라. 더구나 이런 능력이 확실히 있게 되는 조건은 주님을 인정함이 심정으로부터 더욱더 있게 됨에 비례한다는 것, 이에 신성한 진리를 계발된 이해함으로 받아 결합시켜야 한다는 것, 심정과 이해함이 하나되어 결론지은 원리들이 일상 생활에서 적절히 응용되어야 하리라.

레위기 26장 해석

레위기 26장

영적 의미 요약

* 인간이 어떤 이기적인 애착, 어떤 세상적인 애착에 집착되지 않도록, 그리고 무엇보다도 먼저 천적 사랑으로부터 주님을 예배하도록 명령하신다. 그 이유는 그가 순종할 경우 평화와 고요의 상태를 포함하는 모든 영적 축복을 즐기게 되고, 모든 시험들에서 보호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주님께서는 그분의 백성과 함께 계시는 바, 선용으로 작동되는 삶이 우세해진다. 그 이유는 그분께서 구속해 주시는 일을 완성하셨기 때문이다, 1-13절.
* 위와 반대로 영적 교회인이 불순종해서 주님과 그분의 신성한 법도를 거절한다면 본문에 기술된 바 같이 온갖 종류의 재난을 겪게 된다, 14-39절.
* 그러나 타락한 상태에 있다 해도 자신이 사악했다는 것을 고백하고 진실로 회개 할 경우 주님께서는 그를 다시 받아 주실 것이다. 그 이유는 그분께서 구속의 일이 결과되게 하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말씀을 수단으로 각 사람의 삶의 상태에 적용될 수 있는 충분한 진리들을 공급해 주시었다, 40-46절.

각 절의 영적 의미

1절. 너희는 우상들을 만들지 말라, 너희는 새긴 상, 또는 기둥을 곧추세우지 말라, 너희는 너의 토지 안에 석상을 놓지 말라, 이것들에 절하지 말라. 그 이유는 내가 주 너의 하느님이기 때문이다.

영적 의미

영적 인간에게 명령되는 바, 어떤 이기적 애착 또는 그 애착에서 파생되는 거짓들, 그것들이 내적 인간 또는 외적 인간, 설사 교회에 있다 해도 그것들로 예배하는데 자신이 빠져들어 그것에 노예가 되어서는 안 된다. 그 이유는 주님만이 예배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세부적 영적 의미

어떤 우상도 만들지 말라란 영적 인간은 어떤 이기적 애착을 예배하는 데에 자신이 빠지게 해선 안 됨을, 새긴 상을 만들지 말라란 이기적 애착에서 파생된 어떤 거짓도 예배하지 말 것을, 엎드려 절하려고 토지에 기둥을 곧추 세우거나 석상을 놓지 말라란 악과 거짓을 예배하여 악과 거짓에 노예가 되지 말 것을 각기 뜻한다. 우상(idols)과 새긴 상(graven images)은 내적 인간에, 기둥(pillars)과 석상(figured stones)은 외적 인간에 관계된다. “나는 주 너의 하느님”이란 주님만이 예배되어야 함을 말한다. (8869, 10643, 8873, 8106, 2001)

2절. 너희는 내 안식일들을 지켜라, 그리고 내 성소를 공경하라. 나는 주이다.

영적 의미

그러므로 무엇보다 우선적으로 주님은 천적 사랑으로부터 거룩함에서 진행되는 진리를 수단으로 예배되어야 한다. 그 이유는 주님을 사랑함이 모든 예배의 필수이기 때문이다.

세부적 영적 의미

주님의 안식일을 지키고 그분의 성소를 귀하게 여김이란 무엇보다 우선적으로 천적 사랑으로부터, 그리고 그로부터 진행되는 진리를 수단으로 주님이 예배되어져야 하는데, 그 이유는 주님을 사랑함이 모든 예배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87, 3210, 2001)

3절. 만일 너희가 내 법령들에서 걷고, 내 명령들을 지키고, 그것들을 실행한다면.

영적 의미

그래서 교인이 신성한 질서의 법칙에 따라 내향적으로나 외향적으로나 살아간다면,

세부적 영적 의미

주님의 법령대로 걷고, 그분의 명령을 준수해서 그대로 행한다면 이란 만일 교인이 신성한 질서의 법칙에 의거 바깥쪽으로, 안쪽에서도 살아 간다면을 뜻한다. (8420, 3382, 4258)

4절. 그러면 나는 그것들의 때에 맞추어 비들을 내릴 것이다, 그리고 토지는 그녀의 소출을 낼 것이다, 그리고 들판의 나무들은 그것들의 열매를 산출할 것이다.

영적 의미

그러면 그는 주님으로부터 자기 상태에 따라 신성한 진리의 유입을 받게 되고, 그 선으로부터 진리도 불어나 다시 그 선은 진리를 수단으로 열매를 맺게 된다.

세부적 영적 의미

때에 맞추어 비를 주심이란 각 사람의 상태에 따라 주님으로부터 신성한 진리의 유입을 받는 것을, 토지가 소출을 냄이란 진리가 선으로부터 배가됨을, 들판의 나무들이 열매 맺음이란 다시 선이 진리를 수단으로 결실을 갖게 됨을 뜻한다. (8416, 2571, 4981, 983, 3310)

5절. 그리고 너의 타작은 너의 포도 수확에까지 이르고, 그리고 포도 수확은 파종기에까지 이를 것이다. 그리고 너희는 너의 빵을 배불리 먹을 것이다, 그리고 너의 토지에서 안전하게 거주할 것이다.

영적 의미

거듭남을 통하여 선을 실감하게 됨은 신성한 진리들과 공존할 것이다. 선 안에 진리가 주입되는 방식으로 신성한 진리를 수용하는 것이 충만히 이루어지는 바, 천국적 삶의 상태는 악과 거짓이 침입하려드는 데서 안전하리라.

세부적 영적 의미

타작이 끝나면 포도를 수확함이란 거듭남을 통하여 선을 실감함은 진리를 받는 것과 동시에 있게 됨을, 포도 수확이 끝나면 씨를 뿌림이란 신성한 진리를 받는 것은 선 안에 진리가 심어지는 것과 동시에 있게 됨을, 배불리 먹는다란 선을 자기 것이 되게 함이 충만될 것임을, 안전하게 그 땅에 거함이란 천국 삶의 상태는 악 또는 잘못이라는 것들의 습격에서 안전함을 뜻한다. (6377-4, 4482, 9272, 2187, 2165, 2177, 10160)

6절. 그리고 나는 토지에 평화를 줄 것이다, 그리고 너희는 드러누울 것이다, 그리고 아무도 너를 두렵게 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악한 짐승들이 네 토지로부터 중단되게 할 것이다, 검이 네 토지를 통과하지 않으리라.

영적 의미

또한 평화가 마음에 넘치고, 고요가 생활 속에 널리 퍼져 있는 바, 어떤 악과 거짓도 건드리지 못한다. 그 이유는 악한 열정이 완전히 제거되었고 파괴하는 거짓 역시 더 이상 교회를 황폐되게 하는 원인이 못 되기 때문이다.

세부적 영적 의미

그 땅에 평화를 줌이란 평화가 마음에 고루 미칠 것임을, 너희는 드러누울 것이다(걱정이 없음)이란 고요함이 삶 속에 차있는 것, 악과 거짓이 소동을 일으키지 못할 것을; 악한 짐승(맹수)가 그 땅에서 중단됨이란 악한 열정이 전부 제거 될 것임을; 검이 네 토지를 통과하지 않음이란 파괴하는 거짓들이 더 이상 교회를 황폐되게 하는 원인이 안 될 것을 뜻한다. (3696, 2799)

7절. 그리고 너희는 너의 적들을 추격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너희 앞에서 검에 의해 쓰러질 것이다.

영적 의미

따라서 시험이 발생할 때 선을 사랑함이 악들을 흩어지게 하고 진리를 사랑함은 거짓들을 사그라지게 하리라.

세부적 영적 의미

너희 적들을 몰아 붙여 네 앞에서 검에 맞게 하리라란 시험이 발생할 때 선을 사랑함이 악을 흩트고, 진리를 사랑함이 거짓을 종식시킨다는 뜻이다. (2851, 9259, 2799)

8절. 그리고 너희 중 다섯이 백 명을 쫒고, 그리고 너의 백 명은 만 명을 쫒을 것이다. 그리고 너의 적들은 검에 의해 네 앞에서 쓰러질 것이다.

영적 의미

그 이유는 진리가 아무리 적게 남아 있다 해도 풍부한 거짓들보다 더 강한 힘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요, 선을 아무리 적게 실감했다 해도 악의 모든 힘에 저항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신성한 진리는 타락한 자연적 모든 애착의 반발에 승리를 보장 해주리라.

세부적 영적 의미

너희 중 다섯이 백 명을 추격함이란 담고 있는 진리가 아주 조금이어도 풍부한 거짓보다 더 강한 힘이 있을 것을; 백 명이 만 명을 무찌른다란 선을 실감함이 아무리 적어도 악의 모든 권세를 꺾을 수 있다는 것을; 네 앞에서 너의 적이 쓰러진다란 신성한 진리는 타락한 자연적 애착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승리를 보증함을 뜻한다.(5291-2, 2686, 576, 2575, 2686, 683, 2851, 9259, 2799)

9절. 나는 너희에게 관심을 둘 것이다, 그리고 너를 열매 픙성하게 만들고, 그리고 너희를 불어나기 만들 것이다. 그리고 너희와 더불은 내 언약을 확립할 것이다.

영적 의미

그래서 신성한 선은 영혼을 내적으로 채우고 외적으로는 선 자체가 명백해지게 되어 진리들이 풍성해지면서 인간은 주님과 결합하리라.

세부적 영적 의미

주님께서 너희에게 관심을 가진다란 신성한 선이 영혼을 내적으로 채울 것 임을, 열매 풍성하게 함이란 외적으로 선이 명백해짐을, 너희를 불어나게 하리라란 진리들도 풍성해질 것을, 주님이 너희와 맺은 계약이란 인간은 주님과 결합하게 될 것 임을 뜻한다. (2001, 10420, 983, 665)

10절. 그리고 너희는 오래 보관한 묵은 것을 먹을 것이다, 그리고 너희는 새 것 때문에 묵은 것을 내놓을 것이다.

영적 의미

더 나아가 오랫동안 저장되었던 아껴두신 것들에 있는 선을 자기 것으로 삼게 되고, 진리는 변함 없이 실패 없는 정신을 통해 충만 되어짐을 즐기리라.

세부적 영적 의미

오래 보관한 묵은 곡식을 먹음이란 오래 저장되고 있던 아껴두신 것들로부터 선이 자기 것 되는 것을; 새 것 때문에 묵은 것을 퍼냄이란 진리는 꾸준히 충만 되게 즐기게 되고 갱신되는데 결코 실패하지 않음을 뜻한다. (2187, 5299, 5370, 1854, 8400, 3768, 5244)

11절. 그리고 나는 너희 사이에 내 장막을 세워 둘 것이다. 그리고 내 혼이 너를 혐오하지 않을 것이다.

영적 의미

또한 주님은 그분의 백성과 함께 거하시는 바, 상응에 관해 부족하게 앎이 천국 진리를 충분히 지각하는 것을 방해 않으리라.

세부적 영적 의미

주님께서 너희가운데 그분의 장막을 세우고 그분의 혼이 너를 혐오하지 않을 것이다란 주님께서 그분의 백성과 함께 계실 것이고 상응 지식의 결핍으로 천국 진리를 충분히 지각하는데 방해받지 않을 것을 뜻한다. (9668, 9784, 7327)

12절. 그리고 나는 너희 사이에서 걸을 것이다, 그리고 너의 하느님일 것이다, 그리고 너희는 내 백성일 것이다.

영적 의미

적극적인 선용의 삶이 우세해져 천국 축복을 서로 즐기게 됨이 있게 된다.

세부적 영적 의미

주님께서 너희 사이에서 거닐으시어 너희 하느님이 되시고, 너희는 그분의 백성이 된다란 선용이라는 적극적 삶이 천국 축복을 상호 즐김으로 해서 우세해진다는 뜻이다. (519,2001,1259, 2004)

13절. 나는 주 너의 하느님, 너희를 이집트의 토지로부터 데려와서, 너희가 그들의 노예가 되지 않도록 했다. 그리고 나는 네 멍에의 가름대를 부수었다, 그리고 너를 직바로 걷게 만들었다.

영적 의미

이렇게 된 연유는 주님께서 그분의 인간을 신성이 되게 하심을 수단으로 영적 인간을 단지 자연적일 뿐인 것의 속박에서 영원히 구속해주시어 자연적인 것에 노예가 되지 않도록 해주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간 거듭남에 장애가 되는 것은 하나도 남아 있지를 않다. 그래서 처음에는 단지 자연적 인간이었겠지만 후에는 진정으로 영적 인간이 되리라.

세부적 영적 의미

“나는 주 너희 하느님, 너희를 이집트에서 이끌어 냈다”란 주님께서는 그분의 인간을 신성이 되게 하심을 수단으로 영적 인간이 더 이상 자연적일 뿐인 인간의 노예가 되지 않도록 그 속박에서 벗어나게 되찾아 주셨음을; 너희가 맨 멍에의 가름대를 부수어 너희로 떳떳이 살게 하리라란 인간 거듭남에 장애가 되는 찌꺼기들이 없어 자연적일 뿐인 상태에서 후에 진정 영적 인간이 되게 해주시겠다는 뜻이다. (2001, 8866, 1664-2, 9496, 892, 6952)

14절. 그러나 만일 너희가 나에게 귀기울이지 않고 이 모든 명령들을 실행 않는다면.

영적 의미

그러나 위와 반대일 경우, 즉 영적 인간이 바깥쪽에서나 안쪽 측면에서나 불순종하면

세부적 영적 의미

주님의 규정을 귀담아 듣지 않고 그분의 계명을 행치 않는다란 불순종이 바깥쪽으로, 안쪽에서도 있음을 뜻한다.(2542, 3382)

15절. 그리고 만일 너희가 내 법령을 거절한다면, 그리고 너희 혼이 내 판단들을 혐오한다면, 하여, 내 모든 명령들을 행하지 않을 것이다면, 내 언약을 깨트린다면,

영적 의미

그래서 외적 예배에 게을러지고 내면의 진리에 대한 공부를 경멸하여 불순종이 내적으로 확산되어 주님과의 결합이 깨뜨려진다면,

세부적 영적 의미

주님의 법령을 거절함이란 외적 예배를 게을리 함; 그분의 판단을 혐오함이란 내면의 진리에 관한 공부를 경멸함을; 모든 명령들을 행치 않음이란 불순종이 내적으로 확산되었음을; 계약을 깸이란 주님과의 결합이 깨어짐을 뜻한다.(8357, 3382, 665)

16절. 나 또한 너희에게 이것을 행하리라. 즉 나는 너희 위에 공포를 임명할 것이다, 즉 폐병과 열병이다, 하여, 눈이 없어지고, 혼은 한탄하며 지내게 만들 것이다. 그리고 너희는 너의 씨들을 뿌리나 헛될 것이다, 그 이유가 네 적들이 그것을 먹을 것이기 때문이다.

영적 의미

그러면 영적 인간은 그 결과에 고통받게 된다. 그 이유는 그 자신 스스로 신성한 실재의 두려움을 자신 위에 불러오는 바 진리가 황폐해지고 선을 파괴하는 맹렬한 열정의 힘이 덮쳐 모든 진리들을 거두어가 차츰 선에 관한 모든 원리까지 강탈해간다. 그래서 더 이상 진리로부터 선으로의 발전도 없게 되는데 그 이유는 삶 속의 악이 영적 성장을 파괴하기 때문이다.

세부적 영적 의미

“나도 너희에게 이렇게 하리라”란 영적 인간이 위 결과로 고통을 겪게 됨을; 너희 위에 공포, 폐병과 열병이 덮친다란 그는 자신 위에 신성한 실재의 두려움, 진리는 황폐되고 선을 파괴하는 맹렬한 열정을 초래되게 함을; 네 눈이 사그라지고 네 혼은 한탄함이란 모든 진리가 거두어지고, 선에 관한 모든 원리도 차츰 박탈된다는 것을; 씨를 뿌려봐야 헛된 바 그 이유는 네 적들이 그것을 먹어치우기 때문이다란 이 인간은 더 이상 진리로부터 선 쪽으로 인도됨이 없을 것인 바, 그 이유는 삶에 있는 악이 영적 성장을 파괴시키기 때문이다. (696, 986, 8364, 3820, 1436, 7795, 9272, 2851, 5149)

17절. 그리고 나는 내 얼굴을 너와 맞서 놓을 것이다, 그리고 너희는 네 적들 앞에서 쳐죽임을 당할 것이다. 너를 미워하는 그들이 너를 지배할 것이다. 그리고 너희는 추격하는 자가 아무도 없는데 도망 할 것이다.

영적 의미

또한 사람은 내적 선과 진리를 더 이상 납득 못하게 된다. 그는 악이 가져다주는 처벌로 고통받게 된다. 이기적인 지배욕이 강세해지고 신성한 진리에 무지해서 야기될 고통의 두려움이 더욱 격렬해 지리라.

세부적 영적 의미

“주님께서 그분의 얼굴을 너희와 맞서게 놓으리라”란 인간은 더 이상 내적 선과 진리를 납득 못함을; 네 적들 앞에서 쳐죽임을 당한다란 그들은 악이 가져다주는 처벌로 고통을 겪게 됨을; 너를 미워하는 그들이란 이기적인 지배욕이 강세해짐을; 아무도 추격하지 않는데도 도망침이란 신성한 진리에 무지한 바 더욱 강한 두려움에 고통을 겪게 됨을 뜻한다. (222, 358, 7871, 2851, 10814, 1689, 270)

18절. 그리고 만일 너희가 이런 것들로 해서도 나에게 귀기울이지 않는다면, 그다음 나는 너의 죄들을 위해 일곱 배를 더 응징할 것이다.

영적 의미

참으로 영적 인간이 불순종하겠다고 고집 부린다면 그는 악과 거짓의 결합, 완전히 황폐된 상황에 자신을 가져다 놓게 되리라.

세부적 영적 의미

“그런데도 너희가 내 말에 경청 않으면 나는 너희 죄를 일곱 배로 벌하겠다” 란 만일 영적 인간이 불순종을 고집 한다면 악이 거짓과 결합함을 자초해서 완전히 황폐해지리라는 뜻이다. (2542, 696, 433, 10360)

19절. 그리고 나는 네가 자랑해대는 네 힘을 부러뜨릴 것이다. 나는 너의 하늘을 쇠로, 네 땅을 놋쇠로 만들 것이다.

영적 의미

또한 자아 총명을 자랑함을 통해 그의 모든 진리는 박탈된다. 내적 측면은 혼합 안 된 거짓들이 통치하고 외적 측면에는 자연적 기쁨만 있으리라.

세부적 영적 의미

자랑하는 네 힘을 부수리라란 자아에서 나오는 총명을 자랑함으로 해서 그에게서 모든 진리가 박탈될 것임을, 네 하늘을 쇠같이 네 땅을 놋쇠 같이 만든다란 내적 인간 측면에서는 혼합 안 된 거짓들이 통치 할 것이고, 외적 측면에서는 자연적 기쁨만 있게 됨을 뜻한다. 이 구절의 쇠와 놋쇠는 반대적 의미에서 사용되고 있다. (8678, 10481, 4535, 425)

20절. 그리고 너의 강함은 헛되이 소비될 것이다. 그 이유가 네 토지가 그녀의 소출을, 토지의 나무들은 그것들의 열매를 내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영적 의미

거짓이 선하고 참된 것을 생산할 리 만무이다. 악이 선을, 악에 바탕을 둔 거짓이 진리를 생산함은 불가능이다.

세부적 영적 의미

힘을 써 봐야 헛되다란 거짓에서 선하고 참된 것이 생산 될 리 만무함을, 토지가 소출을 내지 않음이란 악이 선을 생산하는 것은 불가능함을, 나무는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이나 지각을 뜻하나 이 구절에서는 반대 의미여서 악하고 거짓된 것에 관한 지식과 지각을 뜻하고 있다. (3727, 2571, 4981, 7690)

21절. 그리고 만일 너희가 나에게 반대적으로 걷는다면, 그리고 나에게 경청 않는다면, 나는 네 죄들에 의거 일곱 배 더 재앙을 네 위에 가져올 것이다.

영적 의미

그래도 영적 인간이 신성한 질서의 법칙에 반대되는 생활을 고집하고 신성한 법칙에 불순종하겠다면 신성한 진리인 말씀에서 표현된 바 같이 완전한 황폐함이 그의 악행 수준에 따라 그를 덮으리라

세부적 영적 의미

주님에 반대되게 걷고 그분께 경청 않는다란 신성한 질서의 법에 반대되게 사는 것을 고집하고 신성한 사랑으로부터 세워진 법들에 불순종하기를 고집함을, 그리고 신성한 진리인 말씀에서 표현된 대로의 순종을 거절함을, 죄에 따라 일곱 배나 더한 재앙을 주님이 내리심이란 완전히 황폐함이 악행 수준에 따라 영적 인간을 타도 할 것임을 뜻한다. (519, 2001, 2542, 696, 433, 10361)

22절. 그리고 나는 너희 사이에 들판의 짐승을 보낼 것이다, 이것들이 너로부터 네 어린이들을 강탈할 것이다, 그리고 네 가축떼를 파괴할 것이다, 그리고 너로 숫자가 적어지게 만들 것이다. 그리고 너의 길들은 황폐해질 것이다.

영적 의미

그이유가 혐오스러운 악한 애착이 그를 소유하게 되어 모든 순진, 모든 선한 자연적 애착, 진리로부터 행동할 능력까지 박탈할 것이다. 결국 진정한 교회의 어떤 교리도 거기에 있지 않으리라.

세부적 영적 의미

너희 사이에 들판의 짐승(맹수)를 보낸다란 지긋지긋한 악한 애착들이 영적 인간을 점유할 것임을; 네 어린아이들을 강탈한다란 모든 순진이 그에게서 박탈됨을; 네 가축을 파괴함이란 모든 선한 자연적 애착까지 그에게서 박탈될 것임을; 소수만이 남게 만든다란 진리로부터 행동할 모든 힘이 그에게서 박탈됨을; 너의 길이 삭막해진다란 그에게는 진정한 것인 교회의 진리도 없을 것임을 뜻한다. (3696, 5342-2, 430, 9135-2, 2227, 2234, 411)

23절. 그리고 만일 이런 것들에 의해 너희가 나에게 개혁되질 않고, 나에 반대로 걷는다면,

영적 의미

그래도 더욱 신성한 법칙에 반대하여 바깥쪽으로도 순종하기를 거절한다면,

세부적 영적 의미

이래도 개혁되지 않고 주님께 반대하여 걷는다란 신성한 법도에 더욱 반대하고 바깥쪽으로 불순종한다면을 뜻한다. (696, 519, 2001)

24절. 그다음 나 또한 너에게 반대로 걸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너를 네 죄들을 위해 일곱 배 세게 칠 것이다.

영적 의미

그러면 더욱 격렬한 황폐가 그 사람 위에 있게 된다. 그 이유는 신성한 기운의 현존으로부터 몸부림치는 고통을 겪게 되고 거룩하고 순진하고 평화스러운 모든 것을 더 심하게 두려워 할 것이기 때문이다.

세부적 영적 의미

너에게 맞선다란 자신에게 더욱 심한 황폐함을 자초한다는 것을; 너를 부수리라란 그는 신성한 기운으로부터 찢기는 고통을 겪음을; 그 이유는 그의 거짓이 신성한 선과 진리에 반대되기 때문이다. 네 죄에 일곱 배 란 거룩하고 순수하고 평화스러울 수 있는 모든 것이 공포의 원인임을 뜻한다. (696, 519, 10510, 433, 10361)

25절. 그리고 나는 네 위에 검을 가져올 것이다, 하여, 언약의 앙갚음을 집행할 것이다. 그리고 너희는 성읍들 안에 함께 모일 것이다. 그리고 나는 너희 사이에 유행병을 보낼 것이다. 그리고 너희는 적의 손 안으로 넘겨질 것이다.

영적 의미

그런 이유가 악으로부터 오는 거짓들이 주님과 결합할 가능성들을 그 사람에게서 파괴시켜 버리고, 거짓이라는 바깥 장벽들이 들러 쳐지며, 어떤 선한 나머지도 없게 되어 악만이 그를 장악하리라.

세부적 영적 의미

계약을 어긴 것을 보복하게 너희에게 검을 가져온다란 악으로부터 온 거짓이 영적 인간을 뒤덮어 주님과 결합 가능한 영적 인간의 모든 것이 파괴 될 것임을, 성 안으로 피해 모이면 이란 그는 거짓의 외적 장벽들로 둘러쳐지게 됨을, 너희 사이에 유행병을 보냄이란 아껴두신 것들이 온통 멸해짐을, 적의 손에 넘어감이란 악이 그 사람을 완전히 장악함을 뜻한다. (2799, 665, 8223, 6463, 402, 2851, 878)

26절. 내가 빵의 네 지팡이를 부러뜨릴 때, 열 여인이 하나의 오븐에서 네 빵을 구울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네 빵을 무게로 달아 다시 전달하리라. 그리고 너희는 먹을 것이다, 그리고 만족하지 않을 것이다.

영적 의미

선한 애착들이 완전히 황폐될 때 가득 찬 거짓들만이 그에게 악한 애착의 수준에 따라 이기적 사랑의 열기로부터 자양분을 공급할 것인 바, 이런 악을 자기 것으로 삼음은 지옥 사랑들의 열망을 채워줄 뿐이다.

세부적 영적 의미

지팡이 같은 빵이 끊어짐이란 선한 애착들이 완전히 황폐됨을; 여인 열 명이 한 오븐(oven)에서 너의 빵을 굽는다란 충만해진 거짓들이 이기적 사랑의 열로 그를 위해 자양분을 공급한다는 것을; 무게로 달아 네 빵을 받는다란 악한 애착의 품질에 의거함을; 먹되 만족치 못함이란 위 같은 악들을 자기 것 삼아 보아야 지옥 사랑들의 계속되는 열망에 흡족하지 않음을 뜻한다. (9163, 9323, 9716, 409, 8496, 9323, 7356, 2187, 8410)

27절. 그리고 너희가 이런 모든 것에서도 나에게 경청하지 않고, 나에게 반대하여 걷는다면,

영적 의미

더 더욱 영적 인간이 순종을 거절하여 신성한 법칙에 계속 반대하려 든다면,

세부적 영적 의미

이렇게 해도 너희가 내 말을 경청 않고 반대쪽으로만 걷겠다면 이란 만일 영적 인간이 순종을 거절하고 신성한 법에 계속 반대할 것이다 면을 말한다. (2542, 519)

28절. 그다음 나는 더 맹렬하게 너와 반대되게 걸을 것이다. 그리고 나 역시 네 죄를 위해 일곱 배를 네게 징계할 것이다.

영적 의미

그러면 이런 반대함의 결과는 더욱 격렬해진다. 선에 관한 모든 것의 황폐해짐은 이런 삶의 당연한 결과가 되리라.

세부적 영적 의미

크게 노하여 맞서겠고 너희 죄의 일곱 배로 징계한다란 위 같은 반대의 결과가 더욱 격렬해질 것 임을, 그 이유는 모든 선의 황폐됨이 위 삶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519, 696, 10618, 433, 10361)

29절. 그리고 너희는 네 아들들의 살을 먹을 것이다, 그리고 네 딸들의 살을 너는 먹을 것이다.

영적 의미

악은 이해함과 의지 또는 생각과 애착 자체 모두를 살라 버리리라.

세부적 영적 의미

네 아들들의 살을 먹고 네 딸들의 살을 먹는다란 악은 이해함과 의지 또는 생각과 애착 양 측면에서 자체가 살라진다는 뜻이다. (5149, 8408, 568)

30절. 그리고 나는 너의 높은 장소들을 파괴할 것이다, 그리고 너의 태양-상들을 잘라 내릴 것이다, 그리고 너의 우상들의 시체 위에 네 시체를 던질 것이다. 그리고 내 혼은 너를 혐오할 것이다.

영적 의미

더 나아가, 이해함에서 온 예배라는 모든 외형, 의지에서 온 예배라는 모든 외형은 파괴되리라. 삶의 죽은 형체만이 주님에게서 돌려서게 만든 악의 탐닉을 통해 영혼도 없이 남아 있으리라.

세부적 영적 의미

네 높은 장소(산당)을 헌다란 이해함으로부터 온 예배 같은 듯 여겨진 모든 외관이 파괴 될 것을; 네 태양-상을 잘라버림이란 의지로부터 온 예배같이 보이는 외관이 파괴될 것임을; 네 우상의 주검 위에 네 주검도 던져진다란 삶의 죽은 형체만이 영도 없이 남게 됨을; “내 혼이 너를 혐오한다”란 비켜 있는 상태를 뜻한다. (2722, 2441, 3900-10, 3605, 693, 694)

31절. 그리고 나는 너의 성읍들을 황폐해지게 만들 것이다, 그리고 너의 성소들을 황량하게 가져다 놓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너의 달콤한 향기의 풍미를 냄새맡지 않을 것이다.

영적 의미

진리로 질서있는 체 했던 것들은 진짜 황폐함으로 본색을 들어낸다. 그럴싸했던 예배의 모든 것은 폐지된다. 평화와 쉼에 관한 더 이상 왜곡된 것도, 흠양될 예배도 더이상 없다.

세부적 영적 의미

너희 성읍들을 폐허로 만든다란 진리로 잘 배열된 듯 보이는 것도 진짜로는 황폐해 있다는 것이 노출될 것임을; 네 성소들이 황량해지게 한다란 예배인 것 같은 모든 것도 포기 될 것임을; 달콤한 향의 풍미를 냄새맡지 않을 것이다란 거기에는 쉼이 왜곡되게 나타나는 것, 예배에서 감사히 여겨 나타나는 어떤 것도 없을 것임을 뜻한다. (402, 411, 9457, 411, 10054)

32절. 그리고 나는 토지를 황무함으로 가져다 놓을 것이다. 그리고 그 안에 거주하는 네 적들이 그것에 깜짝 놀랄 것이다.

영적 의미

황막해짐은 모든 선한 애착에 걸쳐 완전하게 있게 되어 사악한 자들 스스로도 놀랄 수밖에 없으리라.

세부적 영적 의미

네 토지가 황량해지고 그 안에 거주하는 적들이 놀라리라 란 삭막해짐이 선한 애착 모두에서 완전하여 사악한 자들까지도 놀라게 될 것임을 뜻한다. (620, 411, 2851)

33절. 그리고 너를 나는 나라들 사이에 흩어지게 할 것이다, 그리고 나는 네 뒤를 좇아 검을 뺄 것이다. 그리고 너의 토지는 황무해질 것이다, 그리고 너의 성읍들은 황폐해 있을 것이다.

영적 의미

그런고로 뒤집혀져 부패된 영적 인간은 악과 거짓에 온전히 주어질 것이다. 거짓은 끝까지 그를 추격한다. 그래서 모든 선한 애착은 진리를 잃어버리고 진정한 교리에 관한 모든 지식은 선을 상실한다.

세부적 영적 의미

나라 사이에 너희를 흩트리라란 뒤집혀지고 부패된 영적 인간은 악과 거짓까지 모두 포기됨을; 검을 빼들고 네 뒤를 쫓는다란 거짓들이 계속 그들을 추격함을, 네 토지는 황량해짐이란 모든 선한 애착이 삭막해짐을, 네 성읍이 폐허가 됨이란 진정한 교리에 관한 모든 지식이 선에 관하여 황폐해질 것을 뜻한다. (6361, 1259, 2799, 620, 411, 402)

34절. 그다음 토지가 황폐해 있는 한, 토지는 그녀의 안식을 즐길 것이다, 그리고 너희는 너의 적들의 토지 안에 있을 것이다. 그때 조차도 토지는 쉴 것이다, 그리고 그녀의 안식을 즐길 것이다.

영적 의미

그러면 진정한 영적 인간은 모든 악의 억압을 수단으로 천적 사랑의 완전한 천국 상태를 즐기게 되리라. 이는 외적으로 뿐만 아니라 내적으로도 진정하다.

세부적 영적 의미

토지가 황량해 있는 동안 너희가 적의 땅에 있는 동안 그 토지는 안식을 누리리라란 진정한 영적 인간은 모든 악의 억압을 수단으로 천적 사랑의 완전한 천국적 상태를 즐기게 될 것 임을; “그리하여 그 토지는 쉬면서 안식을 즐긴다”란 위 사항은 외적으로 뿐 아니라 내적으로도 또는 이해함 뿐 아니라 의지에서도 참되다를 뜻한다. (620, 87, 411, 2851, 683)

35절. 그것이 황폐한 채 있는 한, 그것은 쉼을 가질 것이다. 너희가 그것 위에 거주할 때 그것이 너의 안식시에 가지지 못했던 쉼까지 가질 것이다.

영적 의미

그 이유는 모든 악의 억압은 교회가 부패된 영적 인간과 더불은 내적인데서 분리된 외적인 것을 수단으로 가질 수 없었던 평화까지 가져다 줄 것이다.

세부적 영적 의미

“너희가 여기에 사는 동안 안식년에도 쉬지 못하던 토지가 황량해 있는 동안 쉬게 되리라”란 악의 모든 억압이 평화를 가져오는데 교회가 가질 수 없었던 평화까지도 갖게 되는데 이는 부패된 영적 인간과 더불어 있는 내적인 것에서 분리된 외적 예배를 수단으로 한다. (411, 620, 87, 제 14-15절)

36절. 너희 중에 남아있는 그들에 관하여, 나는 그들이 적들의 토지에서 겁에 질려 살게 할 것이다. 그리고 떨어지는 잎의 소리가 그들 뒤를 쫓을 것이다, 그리고 누군가가 검을 피해 도망하듯 달아날 것이다. 그리고 아무도 추격하지 않아도 그들은 엎어질 것이다.

영적 의미

진정한 교회에 아주 경미한 수준에서 몰려든 사악함으로 해서 그들은 악을 거절하는 모든 힘을 잃을 것이다. 신앙의 흔적까지도 거꾸로 된다. 그래서 진리가 자기를 파괴하는 듯 여겨 진리를 피하는데 기뻐하고, 선이 재난을 가져오는 듯해서 선으로부터 도망함에 기뻐하게 된다.

세부적 영적 의미

“너희 중 남아 있는 자들에 관하여”란 진정한 교회에 출몰하는 것이 아주 경미한 수준에서 계속되는 사악함에 관하여를; 적들의 토지에서 겁에 질려 산다란 악과 거짓 사이에서 거절됨을 통해 모든 힘을 상실함을; 나뭇잎 떨어지는 소리가 그들 뒤를 쫓는다란 신앙의 아주 작은 자국까지도 반감을 사게 됨을; 아무도 쫓아오지 않는데 넘어지고 검을 피해 도망하듯 달아남이란 그들은 진리가 자기들을 파괴하는 듯 여겨 진리에서 피하는 것을 매우 기뻐함을; 그리고 선 역시 자기들에게 재난을 줄 것 같이 여겨 선에서도 도망함을 매우 기뻐한다는 뜻이다. (7564-5, 6111, 7272, 216, 884, 4555, 1689, 2799, 696)

37절. 그리고 그들은 아무도 뒤쫒지 않는데도, 마치 검 앞에 있기라도 한 듯 서로에게 걸려 넘어질 것이다. 그리고 너희는 네 적들 앞에 서있을 힘도 가지지 못할 것이다.

영적 의미

그이유가 황폐된 상태의 사악한 자는 진리와 거짓을 식별할 수 없다. 그들은 선과 악의 차이점을 납득 못한다.

세부적 영적 의미

뒤쫓아오지도 않는 검 앞에서 엎치락뒤치락함이란 황폐 속의 사악한 자는 진리와 거짓을 식별 할 수 없음을; 너는 적과 대적할 힘이 없다란 그들은 선과 악의 차이를 전혀 납득 못함을 뜻한다. (9163-2, 2799, 696, 7530, 4926-5, 2851)

38절. 그리고 너희는 나리들 사이에서 멸해질 것이다, 그리고 네 적들의 토지가 너를 먹어치울 것이다.

영적 의미

그 이유가 악들은 다른 사람의 것을 파괴한다. 거짓도 거짓끼리의 싸움으로 살라져 버린다.

세부적 영적 의미

나라들 사이에서 망하고 네 적의 토지가 너를 먹어치운다란 악은 서로가 파괴하고 거짓은 거짓들과의 싸움으로 철저히 살라지고 만다는 뜻이다. (1849, 7655, 620, 2851, 5149)

39절. 그리고 너로부터 남은 그들은 네 적들의 토지 안에서 자기들의 불법을 한탄할 것이다. 조상들의 불법으로 한탄 할 것이다.

영적 의미

아주 조금 남은 선까지도 확증한 악들로 해서 흩어지고 만다. 악에서 온 거짓의 확증 역시 모든 진리를 흔들 것이다.

세부적 영적 의미

너희 중 남아있는 자들은 적들의 토지에서 자기들의 불법을 한탄 한다란 겨우 남은 선까지도 악의 확증을 통해 사라져버리고 말 것 임을; 조상들의 불법으로 한탄함이란 악에서 온 거짓으로의 확증은 모든 진리를 사라지게 할 것 임을 뜻한다. (7564, 1460-2, 예레미아4:9, 620, 2581, 7564, 9156, 3703-20)

40절. 그리고 그들은 자기들의 불법을, 자기들 조상들의 불법을, 자기들이 나에 맞서 범칙한 자기들의 법위반을 고백할 것이다, 그리고 또한 그들이 나에게 반대하여 걸었기 때문에,

영적 의미

그러나 부패된 상태의 교회에 있는 선한 이들은 이렇게 인정한다. 자기들은 거짓들 속에 악 가운데 있는 이들의 거짓 속에 있다는 것, 이런 거짓들 때문에 진리에 무지해 있다는 것, 신성한 진리에 반대되게 살고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

세부적 영적 의미

자기들의 죄와 조상의 죄를 고백함이란 영적 교회의 부패된 상태 안에 있는 선도 인정하는 것은 자기들은 악 속에 있는 이들 속의 거짓들로부터 거짓 속에 파묻혀 있다는 것을; 나에 맞서 범칙한 것이란 그들이 신성한 진리에 반대되어 있는 거짓들 때문에 오는 진리에 무지해서 잘못한 것을; 그리하여 주님에 반대되게 걷는다란 그들의 실지 악들 때문에 그들은 진리에 반대되게 살았다는 뜻이다. (9156, 3703-20, 9156, 519)

41절. 나 역시 그들에 반대하여 걸었고, 그들을 그들의 적들의 토지 안으로 데려 왔다. 그다음 만일 그들의 할례받지 아니한 심정이 겸허해지고, 그들이 자기들의 불법에 대한 벌을 받아들인다면,

영적 의미

그러므로 진리가 자기들 원수나 된 듯 나타나 자기들에 있는 악을 괴롭힌다. 그러나 만일 선한 자가 이렇게 고백한다면, 악은 스스로를 벌해 자기들 스스로는 불순한 것밖에 없다는 것을 고백한다면,

세부적 영적 의미

주님이 그들과 맞서고 그들을 적들의 토지에 데려다 놓았다란 진리가 그들에게 적이 된 듯 나타나고, 악이 그들에게 과해짐을, 할례 받지 않은 심정이 겸허해진다란 악은 그 자체가 벌한다라고 그들이 고백함을, 자기 죄벌을 달게 받음이란 자기들 스스로는 불순함밖에 없다는 것을 그들이 고백함을 뜻한다.(7272, 7225, 7418-3, 7225, 3994)

42절. 그 다음 나는 야곱과 더불은 언약을 기억할 것이다. 그리고 역시 이삭과 더불은 언약도, 그리고 또한 아브라함과 더불은 나의 언약도 나는 기억할 것이다. 그리고 나는 토지를 기억할 것이다.

영적 의미

그들은 주님과 결합할 수도 있는데, 먼저 그분으로부터 오는 선을 받은 자연적 수준의 상태를 통해서, 둘째로 그들의 영적 상태를 통해서 세째로 그들의 천국 상태를 통해서 결합될 수 있다.

세부적 영적 의미

야곱과 이삭 그리고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을 기억하고 토지를 기억함이란 그들은 먼저 그분으로부터 선을 받는 자연적 상태를 통해 주님과 결합 할 수 있고, 두 번째로 영적 상태에서, 셋째로 천적 상태에서 결합 할 수 있다는 것, 그 다음 선으로 인도 해주는 진리도 공급될 것임을 뜻한다. (840, 665, 6098, 620)

43절. 토지는 그들 없이 황폐해 있는 동안, 토지 역시 그들로부터 떠나 그녀의 안식들을 즐길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자기들의 불법의 처벌을 받아들일 것이다. 그 이유는 그들이 내 판단들을 거절했고, 그들의 혼이 내 법령을 혐오했기 때문이다.

영적 의미

그러나 악 가운데 있는 모든 이는 진정한 교회로부터 분리될 것인데 이 교회는 악에서 분리될 때 선의 상태를 보호해주게 된다. 악한 자는 자기들 악의 결과대로 살아 견뎌가야 한다. 그 이유는 제 스스로 신성한 진리를 거절했고, 내적인데서 분리된 외적 예배를 바치기까지 했기 때문이다.

세부적 영적 의미

그들 없이 황폐해 있는 토지란 악 가운데 있는 모든 이들은 진정한 교회에서 분리될 것임을; 토지는 폐허가 된 동안에 안식을 누림이란 악이 분리될 때 교회는 선의 측면이 보호될 것임을; 자기들의 불법의 벌을 받아들인다란 자기들 악의 결과대로 살고 견뎌야 함을; 주님의 심판을 거절하고 그분의 법령을 혐오함이란 신성한 진리를 내적으로 거절하고 내적 예배에서 분리된 외적 예배 마저 드리는 것을 거절함을 뜻한다. (87, 620, 411, 9937, 9257, 8357)

44절. 그리고 이런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자기들의 적들의 토지에 있는 동안, 나는 그들을 거절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그들이 깡그리 파괴되라고 그들을 혐오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과 더불은 내 언약을 깨뜨리지 않을 것이다, 그 이유는 나는 주 그들의 하느님이기 때문이다.

영적 의미

주님께서는 사악한 자가 황폐될 때에도 그들을 보호해 주시기를 멈추시지 않는다. 또한 그들이 보호가 없음으로 야기되는 지독한 파괴를 허용치도 않으신다. 그 이유가 그분께서는 비록 열리지는 않은 채 있는 그들 생명 속의 더 높은 수준을 통해 결합을 유지시키고 있으시기 때문이다. 이런 결합 때문에 그들은 영원히 살아가야만 한다. 주님께서 사악한 자와 결합되어 있는 것은 그들도 선해질 수 있도록, 더 높은 수준으로 완전해 질 수 있도록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세부적 영적 의미

적의 땅에 있는 그들이 거절되지는 않는다란 그럼에도 주님께서는 사악한 자들이 황폐될 때 그들을 보호하시는 것까지 중단하시는 것은 아님을; 그들이 깡그리 파괴되도록 혐오하시지는 않을 것이란 보호가 결핍되어 지독하게 파괴되는 것을 허용치 않을 것임을; 그들과 맺은 언약을 깨지 않을 것이다란 그분께서는 그들에게 아직 열리고 있지 않은 더 높은 수준의 생명을 통해 그들과 계속되어 있을 것임을; 이 결합 때문에 그들은 영원까지 계속 살아야만 함을; “나는 주 너희 하느님”이란 주님은 사악한 자들과도 결합되어 있는데 그 이유는 그들도 선해질 수 있도록, 더 높은 수준으로 완전해질 수 있도록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1875, 620, 2851, 3605, 693, 694, 696, 9163, 665, 4364-3, 4525, 2001)

45절. 그러나 나는 그들을 위하여 그들 선조들과의 언약, 곧 내가 그들의 하느님이 되도록 나라들이 보는 앞에서 이집트의 토지로부터 데려 온 것을 기억할 것이다. 나는 주이다.

영적 의미

이런 결합 때문에 주님께서는 사악한 자도 살아 있게 허용하신다. 절대적 악의 속박에서 인류를 구속하심으로 그분께서는 그들을 보호하실 수 있었기 때문에, 그분으로부터 아직도 그들은 영원히 자기들 생명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세부적 영적 의미

주님께서 그들을 위해 그들 선조와 맺은 계약을 기억함이란 이 결합 때문에 주님께서는 사악한 자도 살아 있게 허용하심을; 그분이 그들의 하느님이시도록 나라들이 보는 가운데 이집트 땅에서 선조들을 이끌어 내셨음이란 악의 절대적인 속박에서 인류를 되찾으심으로 그분께서는 인류를 보호하실 수 있으시다는 것을; “나는 주”란 그분으로부터 그들은 영원히 계속 자기 생명을 가진다는 뜻이다. (4525, 2001, 8866, 10152, 2706)

46절. 이것들이 법령들과 판단들과 법들인즉, 이것을 주님께서 자기와 이스라엘 자손 사이에 시내산에서 모세의 손을 수단으로 만드셨다.

영적 의미

이상의 사항들은 영적 인간의 외적 측면, 내면의 측면, 내적 측면에 관련된 질서의 법칙이요, 이를 수단으로 해서 주님과 인간 종족사이의 결합이 유지되는데, 이는 그분의 신성한 사랑으로부터 있고 그분의 신성한 진리를 수단으로 해서 가능해진다.

세부적 영적 의미

주님께서 모세의 손을 수단으로 시내산에서 당신과 이스라엘 자손 사이에 세우신 여러 가지 법령과 판단들과 법들이란 위 사항들은 영적 인간의 외적 측면과 내면, 그리고 내적 측면에 관한 질서의 법칙들이고, 이를 수단으로 주님과 인간 종족이 결합되는데 이는 신성한 진리를 수단으로 그분의 사랑으로부터이다. (8357, 7995, 3654, 8399, 7010)

26장의 종합적 고찰

다시 생각해보는 말씀의 부분에는 일반적으로 세 가지가 명확히 존재한다. 즉 주님과 말씀에 포함된 바와 같은 신성한 질서의 법칙에 순종할 경우의 유리한 것들, 불순할 경우 자신에게 자초하고 마는 재난들, 부패된 교회라는 조건이나 부패된 사람인 것도 아닌데 회개해야 하고 거듭남을 원해야 한다는 것에 대하여서이다.
위 간략한 소개가 의미심장해지는 이유는 인간은 자신과 세상 것을 숭배하려드는 경향이 있지만 그 반면 어떤 상태로든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할 예배의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인류 시작 초부터 있어 왔는데 아마 언제나 그런 상태에 있을 것이다. 그 이유가 인간은 악과 선 사이를 선택할 자유 속에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창조된 맨 처음의 인간은 어떤 것을 행하면 잘못된 것이고, 어떤 다른 것만을 행해야 올바르다는 것에 관해 지각이 없을 경우 위 자유 선택을 행사할 수 없었다. 그들이 거듭나는 상태에서 창조된 게 아니라 거듭날 능력만을 가지고 태어났기 때문이다. 그리고 거듭나지 않은 천사는 천국에 없다. 따라서 그들은 자신들 스스로서는 악밖에 가진 게 없음을 인정하지 않는 천사도 없다. 그래서 최초의 창조된 인간 존재들, 그들이 누구이던, 설사 그들이 영적 질서와 구별되는 천적 질서 속에 있었다 해도 악에 빠졌고, 그들 후손에 자기들 악을 전달해 주었다. 이로부터 지금까지 모든 각 사람은 거듭남을 위한 능력을 가지고 있어 그가 선택만 하면 거듭날 수 있게 되어있다.
따라서 두 문단의 주석으로서 우리가 주목하게 되는 것은, 글자 측면에서의 호소함은 인간의 이기적인 원리까지 쉽게 인지되도록 만들어져 있다는 점, 즉 순종한 사람에게는 이러이러한 좋은 것들이 약속되고, 사악한 자에게는 심한 처벌로 위협되고 있다. 이는 모든 인간이 자연적일 뿐인 상태에서 태어나기 때문에 당연한 것인 바, 각 사람은 자신으로부터 느끼고 생각하고 행동해야 한다는 것을 필수 요건이 되게 해서 차츰 시간의 흐름 속에서 어떻게 자신을 위해 준비해야 하는가, 어떻게 하면 인류에 계속 떨어지기 쉬운 본문 같은 재난들을 피할 수 있는 가를 심각히 생각하게 해준다. 만일 우리가 사회에 짐이 되지 않기 위해 가족이나 자신을 위해 준비할 수 없다면 타인의 복지라 할 수 있는 더 높은 선용을 어떻게 수행할 수 있으며 더 나아가 인간 사이에 주님의 나라가 세워지는 데에 한 몫을 담당할 수 있겠는가? 더 더욱 필수적인 것은, 자신을 위해 준비해 가는데, 설사 근면을 발휘해서 자기 재산을 관리하여 낭비되지 않고 잘 사용된다 해도 그 모든 행동 역시 이기적 동기로부터 있어져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주님께서 특별한 사건에 관련해 언급된 것이지만 위와 같은 신중함을 발휘하신 때도 있으셨다는 것을 다음 구절에서 찾아 볼 수도 있다. 즉 “사람들이 모두 배불리 먹고 난 뒤에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조금도 버리지 말고 남은 조각을 다 모아 들여라’하고 이르셨다”(요한 6:12) 이상과 같이 행동하는데 있어 어떻게 하면 통치하는 동기들을 더 높은 동기를 간직하면서 해낼 수 있는가를 본문 첫 문단에 있는 내적 의미가 보여주고 있다. 사람에게 원기를 주는 나무의 열매, 곡식과 포도주로 표현된 의미들만이 인간으로 이타적이 될 수 있게 하는 참 원리들이다. 그 이유는 주님으로부터 온 천국적 진리, 선한 행동의 다양한 종류들은 자연적 삶의 수준까지도 유용해지게 하기 때문이다. 영혼에 자양분을 주는 생명의 빵, 하느님 나라의 포도주, 이것들은 품성 속에 신뢰되는 힘과 에너지를 주면서 모두 이타적인 것들이다. 그래서 단순한 인간 복지에만 국한되는 게 아니라 형체가 어떠하든 모든 형체 속에서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게 해준다. 다음 사항도 진실이다. 즉 이기적인 사람들이 위 원리들을 이기적인 용도에까지 적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언제든지, 어느 때든지 그들이 남용한 참 진리와 선함은 그들을 단죄하고 그들 본성으로부터 가르쳐지도록 평가하면서 더 나은 쪽을 역설한다. 그 다음으로 이어지는 것들은 피할 수 없는 당연한 결과들, 외관으로는 그 반대같이 보일 수도 있는 결과들이 거론되는데 어찌됐든 선과 진리는 동시에 존재한다는 것, 두 원리의 동시 존재는 언제나 평화와 안전의 확고부동한 거처를 제공한다.
첫 문단을 끝내기 전, 악을 정복하는 진리의 힘에 관하여 곰곰이 생각해야만 할 것이라 본다. 즉 아껴두시는 것들의 이식과 그 이식된 것들을 자기 것으로 삼는 것에 관해, 주님을 진정으로 예배함에 관해, 우리가 그분을 진실로 예배할 수 있는 이유에 대해서이다. 신성한 존재는 전능하시다는 것, 이 사항은 널리 인정된 진리여서 이를 부정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런데 전능하심의 속성에 관해서는 잘 이해되지 않고 있다. 주님은 어떤 것이든 하실 수 있는 분이시다 라고 믿는 반면 그 어떤 것은 신성한 사랑에 일치해야하는 것을 뜻한다는 것을 우리는 잊고 있다. 그러므로 그분이 많은 것을 해주실 수 있기는 불가능하다. 그 이유는 신성한 사랑에 관한 그분의 속성에 반대되는 게 너무나 많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분께서는 인간 영혼을 파괴하실 수 없다. 그분은 사랑 외에는 더 달리 인간 영혼을 향해 행동하실 수 없다. 설사 최악의 악령이라 해도 그들이 삶을 계속 할 수 있는 것은 궁극적으로 그분의 실패할 수 없는 사랑 때문이다. 게다가 주님께서는 잘못된 어떤 것을 행할 수 없다. 그 이유는 잘못된 것은 신성한 지혜에서 나오는 그분의 신성한 법칙에 반대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 하늘 아버지의 전능하심은 모든 것을 행하는 힘을 가지고 있으시다는 것을 뜻하는 게 아니라 그분은 모든 힘의 근원 되신다는 사실에 있는데, 그 이유는 그분이 모든 생명의 근원이기 때문이요 생명 없는 힘이라는 것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사항에 그분이 신성한 사랑이실 뿐 아니라 신성한 질서이시다는 것을 더 첨가 해보면 그분께서는 그분의 질서에 반대되게 행하실 수 없다는 것도 당연지사로 생각 될 수밖에 없다. 모든 힘의 근원 되심이 명백한 바 천사 또는 선한 자는 그분으로부터서만 힘을 가진다는 것, 이와 반대로 사악한 자는 선한 자를 향해 힘을 가진 게 아니라는 것도 명백해진다. 이런 생각들은 방금 위에서 명명한 네 요점 중의 첫째를 예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말씀에서 많이 말해지는 것, 그래서 스웨덴볽의 저서에서도 많이 거론되는 것은 리메인스(아껴두신 것들, remains)에 관해서 이다. 유아 때부터 삶의 마지막까지 주님께서는 인간 안에다 계속적으로 아껴 저장해두시는 것들이 있다. 설사 당사자가 선한 용도로 아껴 두신 것을 사용하든 그렇게 안 되고 말든, 그것들이 절대적으로 파괴되거나 상실되지 않도록 설비해두신다. 그것들은 모든 선하고 참된 영향이나 감명, 모든 거룩한 애착, 생활 속에서 가지게 되는 모든 경건한 생각 등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것들은 주님에 의해 저장되어 보존된다. 이것들은 주님의 영이 작동하는 거듭 나아지는 사람 안에 있는 것들이요, 이것들이 창세기 1장 2절, 요한복음3장 5절에서 물(water)로 상징화되어 있다. 본문이 가르치는바, 인간이 거듭날 때 이것들은 외적 인간 안에 이식되어 명백해져 그 사람의 실제 생명의 일부가 되어 더욱 풍성해지고 더욱 드높여 지게 된다고 말한다. 이와 거듭나는 당사자의 것이 되는 모습이 오랫동안 간직했던 묵은 곡식을 먹는 것, 새 곡식 때문에 묵은 곡식을 꺼내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러면 이 결과는 무엇일까? 그 결과는 하느님의 성막에 인간과 함께 있는 것, 모든 악에서 완전히 해방됨으로 해서 예배가 진실 되고 거룩하고 순수해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억압받은 이집트의 속박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해방되는 말씀에 담겨있다.
두 번째 문단은 비교적 긴데 부패된 교회와 연결되는 많을 요점들을 말하고 있다. 이런 상태는 끝장을 보게 되는 것까지 이어져 가고 있는데 앞의 장들에서 누누이 설명된 바 있으므로 긴 본문에 비해 설명은 간단히 해도 될 것으로 본다. 이런 사항들을 잘 생각해봄에 있어 먼저 상기해둘 필요가 있는 것은, 주님께서는 어떤 인간에게도 악이나 처벌을 가져다주시지 않는다는 것, 실제로 발생하는 끔찍한 고통까지도 그러하다. 그래서 본문에서 명명되는 여러 가지 재난으로 표현된 것 모두는 악한 상태의 자연스런 결과일 뿐이다. 그런고로 사악한 자들 스스로 재난을 불러들인다. 그러므로 본문에서 주님은 이런 재난을 그분 스스로 있게 하신다든가 그런 재난이 그분의 탓인 듯 여겨지게 한 이유는, 그분께서는 자연적, 영적, 모두 포함되는 우주의 만물을 통제하신다는 것, 나쁜 자, 악령들은 거짓과 악 속에 있기 때문에, 그것을 수단으로 그들은 약해지고 어두워져 있는데 그들은 주님께서 자기들을 실제 벌한다고, 자기들 고통의 원인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함 때문이다. 이를 좀더 세심하게 생각해본다면 각자의 처지와 상태에 따라 생각하는 게 각자를 위해 더 나을는지 모른다. 그 이유는 각자가 그렇게 생각함으로 악한 자들도 이 세상에 있는 동안 외적인 회개의 상태로 인도되어, 잘된다면 나중에 외적 회개가 순수한 회개가 될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런데 만일 그들이 저 세상에 있어 악 속에 있는 자기들을 확증한다면 하느님께서는 자기들이 질서에 위반되어서 심한 고통을 겪도록 허용하고 지시를 내렸다는 쪽으로 설득되고 마는바, 그들은 더 강한 억제로 들어가서 그들이 할 수 있는 어떤 쓸모 있음을 기꺼이 수행할 수 있게 배려된다. 그 이유는 각 사람 모두는 결국 쓸모 있어짐의 어떤 형체가 되어가기 때문이요, 이것이 어떤 환경이나 조건 밑에서의 신성한 정부 체제의 목적이기 때문이다.
마지막 문단은 보다 더 세심하게 생각해보아야 할 것인데, 그 이유가 교회의 마지막에서 선 가운데 있는 이들만이 회개의 기회를 가지는 게 아니라, 확증된 악한 상태에 있는 사악한 자들, 비록 주님이 그들과 상반되지만 아직 주님에 의해 보호되고 언젠가 어떤 유용함이 되도록 배려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마지막 문단은 자연스럽게 두 부분, 즉 40-42절과 43-45절로 나뉘어 있다. 이 여섯 절 모두를 하나로 취급하면 한 가지 사실, 즉 신성의 방침에는 마지막 상태에서 선한 자나 악한 자 모두에서 사랑과 자비 중 하나를 포함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이 문항을 보면, 자기들의 불법을 고백하는 이들은 회개의 일을 하는 이들, 그러므로 교회의 마지막에서 선 가운데 있는 이들을, 그 반면 그 땅을 버린 이들, 그들이 없는 그 땅이 안식을 누리는 것은 악한 상태가 확증되었기 때문에 자신을 교회로부터 분리시킨 이들을 명시하고 있다. 따라서 다른 용어들도 위 원칙에 따라 적용되었다. 예를 들면 “자신의 불법에 대한 처벌”이 어느 구절에서는 자신들에게는 불법밖에 없음을 스스로 고백하는 것으로, 또 다른 구절에서는 자신의 악의 결과에 따라 살고 견뎌야 하는 것으로 풀이되고 있다. 이와 같이 44-45절에 있는 사악한 자들에 관해 언급한 주석 역시 43절에 기술된 품성에 의거하고 있다. 영어 번역 성경에 있는 표현 “because, even because”가 포함하는 내적 의미는 그들이 의지와 이해함 양면에서 확증된 상태를 나타내는 말이다.
이상의 마지막 문단의 두 부분의 비교 검토 역시 어떻게 주제를 예증하는지 알게 된다. 그리하여 우리로, 어떻게 주님의 사랑과 자비가 매우 험악한 상태의 인간 존재에 까지 영원히 뻗쳐 가는 가를 미약하나마 실감하게 해 준다. 그리고 누가복음13장 34-35절을 본문의 주제와 함께 생각해보길 바란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너는 예언자들을 죽이고 하느님께서 보내신 사람들을 돌로 치는구나! 암탉이 병아리를 날개 아래 모으듯이 내가 몇 번이나 네 자녀들을 모으려 했던가! 그러나 너는 응하지 않았다. 너희 성전은 하느님께 버림을 받을 것이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찬미 받으소서!’ 하고 너희가 말할 날이 올 때까지 너희는 정녕 나를 다시 보지 못하리라.”

레위기 25장 해석

레위기 25장

영적의미 요약

* 영적 인간에게 가르침이 있다. 주님에 대한 사랑이 완전할 때 쉼과 평화가 있다. 이 상태는 악과 싸워 승리하는 상태가 충만될 때를 전제로 한다. 이 상태 안에 있는 자연적 인간은 합법적인 기쁨을 즐기게 된다, 1-7절.
* 위의 인간의 경우처럼 천적 인간도 마찬가지이다. 거듭남이 완성된 상태에서 그는 선과 진리가 더 강렬하게 된 상태에로 들어간다. 이 안에서 완전한 자유가 있고, 이 안에는 완전한 정의가 있고, 이 안에는 삶에 필요한 모든 것이 공급되어 있어 선이 결핍될 수 없다. 그 이유는 그가 그것들을 계속 간직하고 있어 주님에 의해 악에서 해방되어 있기 때문이다, 8-24절.
* 완전한 천국 상태에 들어가기 위해 정식으로 준비해야 하는 사람이 거듭나는 동안 준수해야 할 법칙에 관하여, 변동하는 상태에 관계되는 것들, 다양한 환경 속에서 그 사람과 함께 있는 선과 진리가 양도되고 되찾음에 관하여, 25-55절.

각 절의 영적 의미

1절. 주님께서 시내산에서 모세에게 이야기하셨다, 말하시기를,

영적 의미

신성한 선으로부터 진행되는 신성한 진리를 수단으로 주님께서 지각을 주시어 밝히 알게 하신다.

세부적 영적 의미

주님께서 시나이 산에서 모세에게 일러 말하심이란 신성한 선으로부터 진행되는 신성한 진리를 수단으로 주님께서 밝히 알게 하심을 뜻한다.(2001, 2951, 7010, 1822, 8399 )

2절. 이스라엘의 자손들에게 이야기하라. 그리고 그들에게 말하라, 너희는 내가 너에게 주는 토지에 오면, 그다음 토지가 주님에게 안식을 지킨다.

영적 의미

영적 교회의 사람에게 유입과 가르침을 수단으로 알게 하시는 바, 주님에 대한 사랑이 천적 상태이면 쉼과 평화가 있게 된다는 것이다.

세부적 영적 의미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야기하라란 영적 교회의 사람에게 유입이 있고 또한 가르침이 있다는 것을; 주님께서 주시는 토지에 옴이란 천국 상태에 들어감을; 주님에게 안식일을 지킴이란 쉼과 평화의 상태를 뜻한다.( 2951, 10355, 3705, 87 )

3절. 육 년 동안 너는 네 들판에 씨를 뿌려라, 그리고 육년 동안 너는 네 포도원을 가지치기를 하라, 그리고 그것의 열매를 그러모아라.

영적 의미

위 상태에 다음 사항이 선행되어진다. 인간의 거듭 나아감은 악과 싸우는 상태가 충만해짐을 수단으로 하는데 이 충만에는 다음 사항이 포함된다. 의지 측면이 시험을 받는 동안 선에 관한 지식이 신장되고, 이해함 측면이 시험받는 동안 진리에 관한 지식이 받아들여진다. 그리고 선한 일들이 선행을 원리로 수행되어진다.

세부적 영적 의미

육 년 동안 들판에 씨를 뿌리고 포도원의 가지치기를 하고 열매를 그러모아라란 거듭나는 동안 이렇게 진행된다는 것, 악과 충분히 싸우는 상태를 수단으로 해서 의지 측면에서는 시험이 포함되는데 이 시험동안 선에 관한 지식이 함양되고, 이해함 측면의 시험에서 진리에 관한 지식이 흡수되고, 선한 일들이 선행의 원리로 수행된다.
(8888, 737, 9272-3, 9277 )

4절. 그러나 칠 년째는 토지를 위한 엄숙한 쉼의 안식, 주님에게 안식이다. 너는 네 들판에 씨를 뿌리지 말고, 네 포도원의 가지치기를 하지 말라.

영적 의미

위의 상태가 완성될 때 사랑으로부터의 선인 천국적 수용은 쉼과 평화를 준다. 이는 신성한 사랑으로부터 온전히 있어 질 뿐, 인간이 내적 측면 이든 외적 측면 이든 진리의 상태로부터 선의 상태로 진행시키는 게 아니다.

세부적 영적 의미

칠 년째에 그 땅을 위해 엄숙히 쉬게 하는 안식년이 되게 해서 주님의 안식년을 지켜, 들에 씨를 뿌리지 말고 포도원의 가지치기를 하지 말라란 위 상태가 완성될 때 사랑으로부터 오는 선을 천국적으로 받게 되어 쉼과 평화가 주어지는데 이는 외적 측면 이든 내적 측면 이든 인간이 진리의 상태에서 선의 상태로 진행시키는 게 아니라 모두 신성한 사랑으로 있어진다는 뜻이다.( 9274, 9272, 9277 )

5절. 저절로 성장한 너의 수확물을 거두지 말라, 그리고 너의 손질하지 않은 포도나무로부터의 포도들을 너는 그러모으지 말라. 이것은 토지를 위한 엄숙한 쉼의 해이다.

영적 의미

위 사람은 이기적 사랑에서 튀어나오는 어떤 애착이나 자아에서 파생되는 총명으로 획득되는 어떤 진리도 자기 것으로 되게 하지 말라. 그 이유가 위 상태는 시험에서 완전히 자유로워진 것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세부적 영적 의미

저절로 성장한 너의 수확물을 거두지 말라, 그리고 너의 손질하지 않은 포도나무로부터의 포도들을 너는 그러모으지 말라. 이것은 토지를 위한 엄숙한 쉼의 해이다란 인간은 이기적 사랑으로부터 나오는 어떤 애착도, 자아 총명으로부터 획득되는 어떤 진리도 자기 것이 되지 못한다는 것, 그 이유가 이 상태는 시험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것 중의 하나이기 때문이다.(9278, 9279 )

6절. 그리고 토지의 안식년은 너를 위한 식품을 위해 있는다. 즉 너를 위해, 그리고 네 종과 여종을 위해, 그리고 네가 고용한 종과 너와 더불어 체류하는 네 낯선 사람을 위해.

영적 의미

위와 같을 경우 선 자체가 영혼 즉 내적 인간, 내면의 이해함과 의지 그리고 외면의 의지와 이해함에 진리를 생산하여 자양분을 공급한다.

세부적 영적 의미

그 토지의 안식은 식품을 위함이란 선 자체는 영혼에 자양분을 공급하는 진리를 생산한다. 그이유가 안식은 진리를 수단으로 형성되는 선의 상태를 의미하기 때문이고 선과 진리는 인간의 순수한 영적 양식이 되기 때문임을; “너희”란 영적 인간 자신 그러므로 내적 인간을; 남종과 여종이란 내면의 이해함과 의지를; 고용한 종(품꾼)이란 보상을 위해 선을 행하는 것, 그러나 이 구절의 경우는 선에 대한 외면의 의지를 나타내는데 그 이유는 좋은 측면에서 사용되기 때문이다. 너와 더불어 체류하는 낯선 자란 낯선 것이면서도 동시에 훈육되는 상태에 있는 것 즉 외면의 이해함을 뜻한다.
(8889, 680, 제2절, 3654, 2541, 2567, 8002 )

7절. 그리고 네 가축떼를 위해, 그리고 네 토지에 있는 짐승들을 위해 그것의 모든 소출은 식품을 위해 있다.

영적 의미

위 같을 때, 외적 감각과 육적 애착도 종속된 상태에서 기쁨과 쾌락을 풍부히 즐긴다.

세부적 영적 의미

가축이란 감각적인 애착을, 그 땅에 있는 짐승 또는 산 짐승이란 육적인 애착을, 여기서 말해지는 감각적 또는 육적이라 함은 시리즈에서의 의미이다. 그것의 모든 소출은 식품을 위해 있다란 거론되는 모든 애착들이 종속된 탓에 기쁨과 즐거움을 풍부히 누린다는 뜻이다.( 6049, 46, 680)

8절. 그리고 너는 네게 일곱 안식의 해를, 칠 년을 일곱 번 셀 것이다. 그리고 일곱 안식년의 날들, 하여, 사십 구년이 네게 있는다.

영적 의미

천적 교회 속의 사람이 지니는 선의 품질은 내, 외적으로 더욱 강도가 높아진다. 또한 진리가 선과 결합하는 것도 내, 외적으로 더 강도가 높아진다.

세부적 영적 의미

일곱 해를 일곱 번 해서 안식년을 세어라. 이렇게 일곱 안식년을 일곱 번 맞아 사십 구 년이 됨이란 천적 교회 사람의 품질은 선의 상태에서 강도가 더 하다는 것, 이는 내적, 외적 측면 모두에서 그러하고, 진리의 상태 역시 내적, 외적 측면 모두에서 더욱 강도 높다는 것, 이는 숫자 일곱이 거룩함을 의미함에서 나타난다. 해들(years)은 세부적인 상태들을, 날들(days)은 일반적인 상태들을, 처음에 표현된 두 겹은 내적 인간에 관련되고, 뒤의 두 겹은 외적 인간에 관련된다. 내적 측면들에 있는 것은 세부적 사항들에 있는 것을, 외적 측면에 있는 것들은 일반 사항들이다. 이중 표현이 두 쌍인 것은 의지와 이해함에 각각 관련된다. 사십 구란 초기에 해당되는 결합을 말한다. (A.C 8802, 716, 488, 3513, 3739, 683, 1988, 2252 )

9절. 그 다음 너는 일곱째 달의 십일에 큰 나팔소리를 널리 보내라. 즉 보상 받는 날에 너희는 네 모든 토지를 망라해 나팔 소리를 널리 보내라.

영적 의미

이로 인해 천적 선의 일반적 지각이 영적 인간에게 파생되어 진다. 이는 영적 인간 속에 아껴 두신 것이 충만될 때 매체 역할을 하는 천사를 통해 이루어지고 그때의 상태는 신앙과 선행이 결합한 상태 중의 하나이다. 이 결합은 악을 제거함으로 외적 인간이 내적 인간과 하모니를 가져올 때 발생한다. 그 이유는 진리의 지각은 천적 선의 지각을 동반하기 때문이다.

세부적 영적 의미

일곱째 달 십 일에 나팔소리를 널리 보냄(크게 울림)이란 천적 선의 지각 또는 주님 사랑에 대한 일반적인 지각이 영적 인간에게 파생되어짐을, 보상 받는 날 이란 악의 제거를 수단으로 외적 인간이 내적 인간과 하모니를 이룰 때를, 그 이유가 진리에 대한 지각은 천적 선의 지각을 동반하기 때문이다. 열(ten)은 아껴두신 것의 충만된 상태를, 일곱째 달은 선행이 신앙과 결합된 상태를 말한다. (716, 8802, 2075, 851, 10042II, 8802, 3107,851 )

10절. 그리고 너희는 오십 년째 해를 거룩하게 하라. 그리고 그곳의 모든 주민들에게 토지를 통털어 자유를 선포하라. 이것은 너희에게 희년이다. 그리고 너희는 모든 사람을 각자의 소유지로 돌아가게 하라, 그리고 너희는 모든 사람을 그의 가족에게로 돌아가게 하라.

영적 의미

그 다음 천적 사랑이 충만 되고 거룩함 속에 있게 된다. 완전히 자유로운 상태가 온 천국에 널리 퍼지는데 이는 가장 깊은 천국에서 선과 진리가 결혼함으로 결과되는 것이고, 이로부터 각자에게 있는 특별한 선과 진리를 실감하게 된다.

세부적 영적 의미

오십 년째 되는 해를 거룩히 여겨 너희 토지의 모든 주민들에게 자유를 선포함이란 참으로 천적 사랑은 충만함과 거룩함 속에 있다는 것, 그 안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상태가 온 천국을 장악한다는 것을, 희년(Jubilee)은 “가장 깊은 천국에서 선과 진리의 결혼으로 결과됨”을 뜻한다. 제 소유지를 찾아 돌아가 제 가족(지파)에게로 돌아감이란 위 상태로부터 각 사람은 각자에 특별한 진리와 선을 실감함을 뜻한다.
(2252, 8042, 892, 8802, 2028-9, 7833, 3239 )

11절. 희년은 너에게 이런 오십 년일 것이다. 즉 너희는 씨뿌리지 말라, 그것 안에서 저절로 성장한 것을 거두지 말라, 가치쳐주지 아니한 포도나무의 포도들을 모우지 말라.

영적 의미

중간 천국 안에서 역시 선행이 충만된 상태에서 받아진다. 거기서 더 이상 진리로부터 선으로의 어떤 진행도 없고 의지나 이해함 측면에서 있는 자연적일 뿐인 선을 자기 것으로 삼는 일도 없다.

세부적 영적 의미

오십 년이 되는 해가 희년이다란 중간 천국에서도 역시 선행이 충만 되게 받아들임이 있다는 것을, 뿌리지도 말고 거두지도 말라란 위 상태에서는 진리로부터 선으로까지의 어떤 진행도 없다는 것을, 저절로 자란 것도 거두지 말고 저절로 자란 포도덩굴의 포도도 따지 말라란 의지 이든 이해함 이든 자연적일 뿐인 선을 자기 것으로 삼는 일이 없음을, 순을 쳐주지 않은 포도나무란 선이 없는 진리를, 거둔다란 자기 것으로 삼음을 뜻한다. (A.C 2252, 9274, 9272, 9277, 3580,1071, 9273 )

12절. 이것이 희년인바, 이것은 너희에게 거룩이다. 너희는 들판의 소출을 먹는다.

영적 의미

최말단 천국에서의 가장 깊은 선은 순종을 사랑함이요. 이 순종이란 진리가 생활 안에서 선과 결합하는 것, 이 천국 사람은 진리를 실제화 할 때 그 선을 자기 것으로 삼는다.

세부적 영적 의미

이 해가 희년이다란 위 상태는 최말단 천국에도 진정 그러하다는 것, 즉 이 천국의 가장 깊은 선은 순종을 사랑하는 것임을, 이 해가 거룩하다란 삶 안에서 선과 진리가 결합함을, 들판에서 난 소출을 먹는다란 이 천국의 사람들이 선으로부터의 진리를 실제 사용할 때 그 선을 자기 것이 되게 한다는 뜻이다.(2252, 9812, 2146, 2187, 3310 )

13절. 희년의 바로 그 해에 너희는 모든 사람을 각자의 소유지로 돌려보내라.

영적 의미

각 천국은 완전한 사랑으로 충만 되어 각자는 자신의 특별한 선을 영원까지 즐기게 된다.

세부적 영적 의미

이 희년에 저마다 자기 소유지로 돌아간다란 완전한 사랑이 충만한 가운데, 각 천국 안에서 모든 이는 자신의 특별한 선들을 영원히 즐긴다는 뜻이다.(2028, 2029, 7833, 3239 )

14절. 그리고 만일 네가 네 이웃에게 어떤 것을 팔거나, 네 이웃의 손으로부터 살 때, 너희는 서로에게 잘못되게 하지 말라.

영적 의미

선이 상호적으로 서로 간에 교통되어 받아진다 해도 각 개인에게 어떤 손실도 없다.

세부적 영적 의미

무엇을 사거나 팔거나 할 때 서로 잘못되게 말라란 선이 교통되어 상호적으로 서로 간에 받게 될 때에 어떤 개별적인 것에서도 손실이 없어야 한다는 뜻이다.
(5886, 2967, 9196 )

15절. 희년 이후의 년수에 따라서 네 이웃으로부터 사라, (그리고) 농작물의 년수에 따라 그는 네게 팔라.

영적 의미

가장 깊은 자기 속에서 선과 진리가 결혼함으로 거듭나는 선의 품질에 의거 모든 것 속의 선을 각기 즐길 수 있다. 그리고 주님으로부터 결합된 선과 진리를 받은 데 따라서 모든 것에 선을 교통시킬 수 있다.

세부적 영적 의미

희년이 몇 해가 지났는지에 따라 이웃에게서 사라란 각자의 가장 깊은 속에서 선과 진리가 결혼함을 수단으로 거듭나는 가운데 있는 선의 품질에 따라 각각은 모든 것 속의 선을 즐길 수 있다는 것을; 농작물의 년수를 세어 팜(소출을 거둘 햇수를 세어 팜)이란 주님으로부터 결합된 선과 진리를 각 인간이 받음에 따라 그는 모든 이에게 있는 선을 교통할 수 있다는 뜻이다.(10217, 8802, 2967, 10217, 5212, 5886 )

16절. 년수가 많음에 따라 그것의 값은 올라가고, 그리고 년수가 적음에 따라 너는 그것의 값을 줄여라. 그 이유가 농작물의 숫자로 그는 네게 팔 것이기 때문이다.

영적 의미

각자는 자기 선으로부터의 진리의 상태에 따라 선용의 능력이 모든 천국에 있게 된다. 각 사람의 진리의 품질은 각 사람의 선에 따라 있어진다.

세부적 영적 의미

햇수가 많으면 값을 많이 치르고 적으면 값을 적게 치룸이란 각자의 선에서 오는 진리의 상태에 따라 그의 힘은 온 천국에 사용된다는 것을, “농작물의 숫자로(소출을 거둘 햇수를 따라) 팔아야 하기 때문”이란 모든 이의 진리의 품질은 그의 선에 의한다는 뜻이다. (6172, 6285, 2966-7, 10217, 5212, 5886)

17절. 그리고 너희는 서로 나쁘게 하지 말라. 그러나 너는 네 하느님을 경외하라. 그이유가 나는 주 너의 하느님이기 때문이다.

영적 의미

누구도 천국에서 불의하게 행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천국 안의 사람은 선으로부터 오는 진리에 의거 행동하기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그와 더불어 진리는 그의 선을 표현한다. 그리고 주님의 인간 역시 신성을 표현하고 있다.

세부적 영적 의미

서로 나쁘게 하지 말라란 천국에서는 어느 누구도 불의하게 행동하지 않음을, 하느님을 경외함이란 선으로부터 진리에 의거 행동함을, “나는 주 너의 하느님”이란 각자에게 있는 진리는 그의 선을 표현한다는 것, 주님의 인간도 신성이 표현된 것임을 뜻한다. (9196,2826-5, 2001, 3049 )

18절. 그러므로 너는 내 법령을 행하라, 그리고 내 판단을 지키고 그것들을 행하라. 그리고 너희는 토지에서 안전하게 거주할 것이다.

영적 의미

그러므로 외적 예배는 내적 상태에 의거 정확히 있어져야 한다. 그리고 바깥쪽 삶은 온전해서 거짓이 침입할 수 없어야 한다.

세부적 영적 의미

주님의 법령을 행함이란 외적 예배는 정확히 내적 예배에 따라야 함을, 주님의 법을 지킴이란 외적 인간에 관련된 서술이고, 그대로 행함은 내적 인간에 관련된 서술이다. 그 토지에서 안전하게 산다란 거짓의 어떤 침입에서도 자유로울 것임을 뜻한다. (2001, 7884, 8357, 4480, 10160 )

19절. 그리고 토지는 그녀의 열매를 산출할 것이다, 그리고 너희는 양껏 먹을 것이다,그리고 그 안에서 안전히 거주할 것이다.

영적 의미

천국에서는 선용의 결핍이 없다. 모든 이는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을 충분히 자기 것으로 삼는다. 어느 누구도 악에 침입 당하는 위험을 받지 않는다.

세부적 영적 의미

그 토지가 열매를 산출함이란 천국에서 사용하는데 어떤 부족함도 없음을, 양껏 먹음이란 모든 이는 힘껏 충만 되게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을 자기 것으로 삼음을, 그 땅에서 안심하고 산다란 어느 누구도 악에 습격 당하는 위험에 처하지 않음을 뜻한다.(3705, 7690, 2187, 4480, 10160, 683 )

20절. 그리고 칠 년째 해에 우리는 무엇을 먹을 것인가? 보라, 우리는 씨를 뿌리지 않을 것이고, 우리의 소출을 그러모으지 아니할 것이다 하고 말한다면.

영적 의미

비록 천사들이 자기들 선의 상태를 알고 있어서 자기들로서는 선을 받거나 자기 것 되게 할 수 없다 할지라도,

세부적 영적 의미

“너희는 혹, 칠 년째 되는 해에는 씨를 심지도 말고 소출을 거두지도 말라면 무엇을 먹을 것인가 라고 말한다면”이란 참으로 천사들이 자기들 선의 상태를 지각해서 자기들 스스로서는 선을 받을 수도 없고 자기 것 삼을 수도 없다 해도를 명시하는데, 그 이유는 “…말한다면”이 선한 인간 또는 천사의 지각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무엇을 먹을 것인가”란 자기들 스스로는 선을 자기 것 삼을 수 없다고 하는 생각을 의미한다. “일곱째 해”란 선이 충만된 상태를, 뿌리지도 거두지도 말라란 그들 스스로서는 진리를 획득하지도, 선을 자기 것으로 삼지도 못함을 말한다. (1822, 2187, 9274, 9272, 9273)

21절. 그다음 나는 육 년째 해에 너희 위에 내 복을 명령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삼 년을 위한 열매를 산출할 것이다.

영적 의미

그럼에도 그들이 아는 것은, 유입해 주심과 상응을 수단으로 거듭나는 일과 그에 따른 깨끗해짐을 통하여 주님과 결합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기들은 천사들의 어떤 상태의 생활에서도 선을 행할 수 있다고 확신한다.

세부적 영적 의미

주님의 명령으로 육 년째 되는 해에는 삼 년 먹을 열매를 산출하게 하리라란 그들이 아는 바, 또 한 가지란 주님과 결합하려면 유입과 상응을 수단으로 해야 되고 거듭남과 그에 따른 깨끗해짐을 통해야 한다는 것, 그리하여 자기들이 천사들의 삶의 모든 상태에서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을 행할 수 있다는 것을 확신하는 것이다.
(5486, 3514, 3017, 8988, 8891, 913 )

22절. 그리고 너희는 팔 년째 해에 씨를 뿌려라, 그리고 옛 창고에 있는 열매들을 먹어라. 구 년째 해까지, 그녀의 열매들이 나오기 까지, 너희는 옛 창고(의 것을) 먹어라.

영적 의미

그들의 영원한 생활은 주님으로부터 계속 갱신되어가기 때문에 그들은 진리를 함양할 힘을 가지고 있어 그분으로부터 오는 선을 자기 것으로 되게 한다. 그 이유가 그들은 그분과 세 겹의 결합을 가지기 때문이고 그 선은 그분과 영구적으로 교통되기 때문이다.

세부적 영적 의미

팔 년째 되는 해란 그들의 영원한 삶은 주님으로부터 계속적으로 갱신된다는 것을, 씨를 뿌리고 옛 창고에 있는 열매들을 먹는다란 위로부터 그들은 진리를 함양할 힘을 갖고 그분으로부터의 선을 자기 것 삼음을, 묵은 곡식이란 주님께서 아껴두신 것들 속의 선은 영원함을, 구 년째란 주님과의 세 겹된 결합을, 소출이 날 때까지 묵은 곡식을 먹음이란 선은 주님에 의해 항구적으로 교통되어짐을 뜻한다. (2044, 9227, 9272, 2187, 5299, 5370, 1854, 2075, 2788-10, 913, 5299, 5370, 1854)

23절. 그리고 토지는 영구히 팔지 말라. 그 이유는 토지는 나의 것이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너희는 낯선 사람들이고 나에게 몸붙여 사는 체류자들이기 때문이다.

영적 의미

주님으로부터 천국 안에서 받게 된 선은 딴 데로 돌려지지 않는다. 그것은 주님이 계속 주시는 선물이다. 천사들은 그분으로부터 내적, 외적인 모든 선을 계속 받는다.

세부적 영적 의미

이 땅은 영구히 팔지 말라 란 천국에서 주님으로부터 받아지는 선은 결코 소외될 수 없음을; 그 토지는 주님의 것이다 란 선은 주님이 계속 주시는 선물임을; 이스라엘 백성은 그분에게 몸붙여 사는 체류자란 천사들은 그분으로부터 내적, 외적인 모든 선을 계속 받음을 말한다. (3705, 4758, 3705, 8002)

24절. 그리고 네 소유의 모든 토지에서, 너희는 토지의 되찾음을 수여할 것이다.

영적 의미

위 사항은 모든 천국의 천사들이 인정하는 바이고, 더불어 자기들은 주님에 의해 악으로부터 억제되고 선 가운데 계속 있게 된다는 것도 인정하고 있다.

세부적 영적 의미

소유하는 토지 어디에서나 제 토지는 되돌려 살 수 있다란 모든 천국에서 위 사항은 그들에 의해 인정되고 있고, 자기들은 주님에 의해 악에서 유보되고 선 안에 있게 된다는 것도 인정한다는 뜻이다. (3705, 8002, 2966, 10218)

25절. 만일 네 형제 중 누가 지독하게 가난하다면, 그리고 그의 소유의 얼마를 판다면, 그다음 그에게 가장 가까운 친척이 올 것이다, 그리고 그의 형제가 판 것을 되찾으라.

영적 의미

더구나 영적 교회의 사람이 비록 선 가운데 있음에도 진리가 부족할 경우, 그리고 시험 상태 동안 그의 선과 진리가 소외되어 있다 해도 그가 선을 원리로 삼은 덕택에 주님에 의해 보호되고 보존되는 바, 소외되었던 선과 진리도 싸움에 승리함으로 회복될 것이다.

세부적 영적 의미

“네 형제 중 누가 지독하게 가난하다면”이란 비록 영적 교회인이 선 가운데 있다 해도 진리가 결핍할 경우를; 제 소유를 판다란 시험이 있는 동안에 선과 진리가 소외됨을,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주님으로부터 온 선이 거듭나고 있는 그 사람과 더불어 실지로는 소외된 게 아니기 때문이다. 그와 가까운 친척이 와서 그의 형제가 판 것을 되돌려 산다란 선을 원리로 삼은 덕택에 주님에 의해 보호되고 보존되며 시험에 승리함을 통해 소외된 선이든 진리든 모두 회복됨을 말한다. (2360, 9207-7,3705, 4758, 제 23 절, 3703-2, 2937, 2966)

26절. 그리고 만일 그것을 되찾을 사람이 없다면, 그리고 그가 지독하게 부자이고 그것을 되찾기에 충분하다면.

영적 의미

그런데 만일 영적 교회인이 선을 원리로 하지 않고 있음에도 풍부한 진리를 갖추고 있다면 나중에 회개의 일을 거쳐 주님으로부터 선을 실지로 받게 된다.

세부적 영적 의미

“되돌려 살 사람이 없다면”이란 선을 원리로 하지 않고 있음을, 부유해짐이란 풍부한 진리들이 공급됨을, 되돌려 살 힘이 생겼다란 그가 회개의 일을 통해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을 실지 받게 되어 감을 뜻한다. (3703-2, 2937, 2966, 10152)

27절. 그다음 그에게 그것의 판 햇수를 계산하게 하고 그는 그것을 판 사람에게 여분을 반환하라. 그리고 그는 자기 소유지로 되돌아 가라.

영적 의미

그의 선의 품질은 거듭남으로 선 가운데 이식된 진리의 품질에 의거 있어진다. 그래서 주님이 자기에게 만들어 주셨던 선, 그가 소외되게 했던 선들은 그 선을 일반적 형체로 한동안 보존하는 천국 사회에 있는 이들을 통해 주님 만으로부터 실지로 있다는 것을 그는 인정할 것이다. 그러면 거듭나는 주제가 자신을 특별한 선 안으로 충분히 오게 해주리라.

세부적 영적 의미

판 햇수를 센다란 그의 선의 품질은 거듭남을 수단으로 선 안에 이식된 진리의 품질에 의거 있어짐을; 나머지는 그 땅을 산 사람에게 물어줌이란 자기가 소외시켰던 선, 자기로 하여금 할 수 있게 주님이 만드신 선, 이 선들이 일반 형태로 한동안 천국 사회 안에서 보존되게 하셨다는 것을 인정함을; “제 소유지로 돌아감”이란 그가 특별한 자기의 선 안으로 충분히 오게 될 것임을 뜻한다. (10217, 3705, 4758, 2037, 9087, 9097, 2966, 3705, 4758)

28절. 그러나 만일 그가 자신을 위해 그것을 되돌려 얻을 수 없다면, 그다음 그가 판 것을 그것을 산 자의 손에서 희년까지 머무를 것이다. 그리고 희년에 그것은 나갈 것이다, 그리고 그는 자기 소유지로 되돌아 간다.

영적 의미

그러나 만일 인간의 상태가 이럴 경우 즉 거듭남이 진리에 관해 또는 선에 관해 소외되어 있어 지연될 경우 그가 밝히 알게 되어 자기 삶의 가장 깊은 수준에서 선과 진리가 충분히 결합하는 결과가 있을 때까지 그를 위해 소외된 선은 주님에 의해 보존 될 것이다. 이 결합으로 해서 선은 주님에게서 흘러 갈 것이고 진리는 그의 외적 인간 안에서 그 선과 결합될 것이다.

세부적 영적 의미

스스로서는 되돌려 살 수 없다란 그의 상태는 거듭남이 지연되는 것과 같음을; 그가 팔았던 것이란 그가 소외되게 한 것, 진리의 결함으로 계속 소외되어 있는 것을, 그가 판 것이 산 사람의 손에서 희년이 올 때까지 남아 있는다란 이와 같이 소외된 선 또는 진리는 그가 밝히 알게 되어 그의 가장 깊은 수준에서 선과 진리가 충분히 결합하는 결과가 있을 때까지 그를 위해 주님에 의해 보존 될 것임을, 희년이 되어 해약이 이루어져 제 소유지로 돌아감이란 위 결합 때문에 선은 주님으로부터 흘러가게 되고 진리는 외적 인간 안에서 그 선과 더불어 즐겨지게 된다. (9087, 9097, 2966, 3705, 4758, 3705, 4758, 878, 2964, 2966, 8802, 2028, 2029, 7833, 3239)

29절. 그리고 만일 벽을 두룬 성에 있는 거주하는 집을 판다면, 그다음 그는 그것을 판 그 해 안에 그것을 되찾을 수도 있다. 한 해 동안 그는 되찾을 권리가 있다.

영적 의미

누가 교회의 교리로 건립되어 그 까닭에 방어 할 수 있는데 선이 한동안 소외 된 채 있다면 시험에 승리함을 수단으로 시련기간 동안 소외된 상태를 회복할 것이다. 그 이유는 그가 선과 악 중 하나를 선택하는 자유 가운데 아직 있기 때문이다.

세부적 영적 의미

누가 성곽 도시 안에 있는 주택을 판 경우란 자기를 방어해주는 교회의 교리가 건립된 누군가에게서 선이 소외될 경우를; 팔린 후 한 해동안 무를 힘을 가진다란 시험에 승리함을 수단으로 비록 수련 기간 동안 선의 상태가 소외되었다 해도 회복 될 수 있음을; 무를 수 있는 유효 기간은 일 년이다란 그는 아직 선과 악 중 하나를 선택할 자유 속에 있기 때문임을 뜻한다. (2233, 4758, 402, 6419, 2966, 2906, 4758, H.H, 479, 480)

30절. 그리고 만일 그것이 한 해 안에 되찾지 못하면, 그 다음 벽이 있는 성에 있는 집은 영구히 그 자손 대대로 그것을 산 자의 것이 된다. 그것은 희년에 나가지 않을 것이다.

영적 의미

그런데 시련 상태 동안 위 같은 결과가 없다면 이 선은 거듭남을 수단으로 획득하는 자에게 확증 될 것이나 그것을 거절하고 소외되게 한 사람에게는 심판에서 그의 것이 되어 질 수 없다.

세부적 영적 의미

한 해 기간 내에 무르지 못함이란 구속은 수련 상태에서는 결과되지 않음을; 성곽 도시에 있는 그 집은 아주 산 사람의 것이 되어버린다란 이 선은 거듭남을 수단으로 그 선을 획득한 사람에게 확증될 것임을; 희년이 되어도 해약이 안 된다란 선을 소외되게 했거나 거절한 사람은 심판에서까지 그 선을 자기 것이 되게 할 수 없다는 뜻이다. (2966, 2906, 2232, 6419, 402, 984, 2964, 1041, 8802)

31절. 그러나 빙두른 벽이 없는 마을의 집은 시골의 들판들과 같은 것으로 간주할 것이다. 그것들은 되찾을 수 있다, 그리고 그것들은 희년에 나갈 것이다.

영적 의미

교회 밖 선 가운데 있어 진정한 교리로 보호되지 않는 선한 이방인 사이에 있는 사람이라면 그는 심판에서 밝히 알게 될 때 진리로 가르쳐 질 수 있다. 그 이유는 그들에게 있는 선은 가장 깊은 수준에서 진리와 결합되기 때문이다.

세부적 영적 의미

성 밖에 있는 시골집은 들에 있는 것으로 간주한다란 교회 밖 선 가운데 있는 이들, 그리고 진정한 교리로 보호되지 않는 이들은 선한 이방인 사이에 있는 것과 같다는 것을; 희년이 되면 해약되고 물러진다란 위의 사람들은 심판에서 밝히 알게 되어질 때 진리로 훈육될 수 있음을 뜻하는데 그 이유는 그들에게 있는 선은 가장 깊은 수준의 진리와 결합되어지기 때문이다. (2233, 3271, 7407, 620, 2966, 8802)

32절. 그럼에도 불구하고 레위인의 성읍들, 그들 소유의 성읍들 속의 집들은 레위인이 언제나 되찾을 수 있다.

영적 의미

그럼에도 선으로부터 진리 가운데 있는 이들, 그리고 진리를 체현 해낸 이들은 소외된 진리 또는 선을 되찾을 능력을 계속 갖고 있다.

세부적 영적 의미

레위인들의 성읍이란 선에서 파생되는 진리들을, 그들이 소유한 성읍의 집이란 진리로 체현되어진 선을, 언제든지 레위인은 무를 수 있다란 그들은 소외된 선과 진리를 구속하는 능력 가운데 계속 있음을 뜻한다. (402, 6716, 2233, 2966, 3705, 9150)

33절. 그리고 만일 레위인들 중의 누가 되찾는다면, 그다음 팔렸던 집, 그리고 그의 소유의 성읍은 희년에 나갈 것이다. 그 이유가 레위인들의 성읍들은 이스라엘 자손 사이에서 그들의 소유이기 때문이다.

영적 의미

선이 진리로 활동하는 곳은 어디서든지 심판에서 선이 진리와 아주 깊숙한 수준에서 결합되는 바 소외된 진리 이든 선 이든 회복되어 진다. 그 이유는 진리로 체현된 선이 확증될 경우, 이 선은 영적 교회인의 필수되는 생명이 되기 때문이다.

세부적 영적 의미

레위인 중의 누가 되물림이란 선이 진리로 말미암아 작동되는 곳은 어디든지를, 팔려진 집 그리고 그의 소유가 된 성은 희년이 되면 무효가 된다란 심판에서 선이 가장 깊게 진리와 충분히 결합될 때 소외된 선 이든 진리 이든 회복된다는 것을, 레위인들의 소유가 된 성은 이스라엘 자손 사이에서 영원히 그들 소유이다란 진리 안에서 체현된 선은 확증되어질 때 영적 교회인의 본질 되는 생명 임을 뜻한다.(6716, 2966, 2233, 402, 2029, 2966, 8802, 2028, 2029, 3654)

34절. 그러나 그들 성읍들의 외곽에 있는 들판은 팔려지지 않을 것이다. 그 이유가 이것은 그들의 영구한 소유지이기 때문이다.

영적 의미

진리와 선이 충분히 결합되어 있는 사람의 외적인 선은 소외될 수 없다. 그 이유는 이런 상태라면 외적 선 역시 주님으로부터 온전히 있게 됨을 지각하기 때문이다.

세부적 영적 의미

그들 성읍들의 외곽에 있는 들판은 영구 소유지로서 사고 팔 수 없다란 진리와 선이 충분히 결합되어 내적으로 있는 사람에게 있는 외적인 선은 그것이 제 탓이라고 하여 소외되어질 수 없다. 그 이유는 그 모든 것이 주님으로부터 임을 그가 지각하기 때문이다. (7407, 6078, 402, 4758, 6148, 2029)

35절. 그리고 만일 네 형제가 지독하게 가난하다면, 그리고 그의 손이 너에게 기대고 있다면, 너는 그를 받쳐줄 것이다. 즉 낯선 자나 체류자로서 그는 너와 함께 살 것이다.

영적 의미

진리가 결핍되어 선을 행할 힘이 부족한 외적 교회에 있는 사람, 그래서 진리 없는 자연적 선을 행하고 있다거나 선과 진리에 대해 가르침을 받는 과정에 있는 사람들을 후원하는 것이 영적 교회인의 의무이다.

세부적 영적 의미

“만일 네 형제가 옹색해져서 의탁해야 할 처지라면”이란 진리들이 부족해서 선을 행할 힘이 결핍된 외적 교회 안에 있는 이들을, 그를 붙들어줌이란 그를 지원해 줌을, 그가 낯선 자나 체류자(식객)로 살아감이란 한 동안 위 같은 사람들은 진리 없는 자연적인 선으로부터 행동하거나 선과 진리에 대한 가르침을 받는 과정에 있게 됨을 뜻한다. (1222, 2360, 9209, 878, 3901-2, 6343, 8002)

36절. 너는 그 사람으로부터 이자를 취하거나 소출을 가져가지 말라. 그러나 네 하느님을 경외하라. 하여, 네 형제는 너와 함께 살 수 있다.

영적 의미

보상을 기대해서라든가 세상적, 이기적 동기로부터 타인에게 선을 행하지 말라. 오로지 외적 인간은 하모니가 유지되게 해서 사랑과 진리에 바탕을 둔 거룩한 두려움을 느껴서 도움을 받아야 할 것이다.

세부적 영적 의미

세나 이자를 그에게서 받지 못함이란 선은 보상을 기대해서, 세상적이거나 이기적 동기로부터 행해져서는 안 된다는 것을, 하느님을 경외함이란 외적 인간은 사랑과 진리에 바탕이 있는 거룩한 두려움을 느낌으로 도움 받아져야 함을, “네 형제는 너와 함께 살 수 있다”란 하모니가 유지될 수 있기 위하여를 뜻한다. (9210, 2826, 1222, 290)

37절. 너는 그에게 이자를 붙이는 돈을 주지 말라, 그리고 그에게 소출을 위하여 네 양식을 주지 말라.

영적 의미

세상적 동기 이든 이기적 이든 어느 것으로부터서 이든 보상을 목적으로 선을 행하는 것은 불법이 되는 바,

세부적 영적 의미

그에게 이잣돈을 놓지 못하고 양식을 장리로 꾸어 주지도 못한다란 세상 동기 또는 이기적 동기로부터이든 보상을 기대해서 선을 행하는 것은 불법이다는 뜻이다.(9210)

38절. 나는 주 너의 하느님이다, 즉 너희의 하느님이기 위해, 가나안의 토지를 네게 주려고, 이집트의 토지로부터 너를 데려왔다.

영적 의미

그 이유는 주님께서는 순수한 사랑과 진리로부터 행동하시고 영적 인간이 주님으로부터 선을 받고 이 선으로 해서 진리까지 받을 수 있게 하시기 위해 위와 같은 모든 동기들로부터 그를 구속해 주셨기 때문이다.

세부적 영적 의미

”나 여호와가 너희를 이집트 땅에서 이끌어낸 너희 하느님이다. 나는 너희에게 가나안 땅을 주어 너희의 하느님이 되리라”란 주님은 순수한 사랑과 진리로 행동하시는 바, 위와 같은 동기들로부터 영적 인간을 구속해주시는 것은 그가 주님으로부터 선을 받을 수 있게, 그럼으로 해서 진리까지 받을 수 있게 해주려는 이유에서이다. (2001, 2966, 3705)

39절. 그리고 만일 네 형제가 지독하게 가난하여, 자신을 네게 판다면, 너는 그를 노예로서 섬기게 만들지 말라.

영적 의미

더구나 외적 인간이 영적 인간에 스스로 복종할 때 진리 없는 외적 인간이라 해도 이기적 동기로 조절되어서는 안 된다.

세부적 영적 의미

“너희 동족 중 누가 옹색해져 너에게 몸을 판다면 그를 노예 부리듯 부리지 못한다”란 진리가 없는 외적 인간도 그 인간이 영적 인간에 스스로 복종할 경우 이기적 동기로부터 통제되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1222, 9209, 6142, 6143, 8074)

40절. 고용한 종 같이, 체류자 같이, 그는 너와 있을 것이다. 그는 희년의 해까지 너를 섬길 것이다.

영적 의미

종교에서 그가 보상을 목적으로, 또한 자연적 수준의 마음이 내켜서 하는 행동은 한동안 허용되고, 또 수련 기간의 상태에서 계속될 지라도,

세부적 영적 의미

그가 품꾼이나 식객처럼 주인과 함께 있음이란 종교에서조차 보상을 기대해서, 또는 자연적 수준의 마음만이 내켜서 행동할지라도를, 희년이 될 때까지 섬김이란 위 행동은 잠시 허용되고 수련 상태에서는 계속 될 수 있다는 뜻이다. (8002)

41절. 그다음 그는 너로부터 나갈 것이다, 그와 더불은 어린이들(이 나갈 것이다). 그리고 자기 원래의 가족으로 되돌아갈 것이다, 그리고 자기 아버지(조상)의 소유지로 그는 되돌아갈 것이다.

영적 의미

그럼에도 선과 진리가 영적 인간에게 가장 깊은 수준에서 충만되게 결합될 때, 자연적 인간도 선의 측면에서 진리의 측면에서 모두 자유로워 질 것이다. 영적 인간처럼 의지와 이해함 모두에서 영적 동기로부터 행동할 것이다.

세부적 영적 의미

희년에 그를 자식들과 함께 내보냄이란 선과 진리가 영적 인간과 더불어 가장 깊은 수준에서 충분히 결합될 때 자연적 인간의 선 이든 진리 측면 이든 자유로워질 것 임을, 자기 지파와 자기 조상의 소유지로 돌아감이란 영적 인간의 경우같이 그는 의지와 이해함 측면에서 영적 동기들로부터 행동할 것이라는 뜻이다. (8802, 489, 2966, 7833, 3239, 2028, 2029)

42절. 그들은 내가 이집트의 토지로부터 데려온 나의 종(servant)들인 바, 그들은 노예로서는 팔려지지 않는다.

영적 의미

그 이유는 자연적 인간도 단지 자연적일 뿐인 애착으로부터 주님에 의해 구속되었기 때문인 바 소외되어서는 안 되고 이기적 사랑으로부터 영적 인간에 의해 규율되어서는 안 되리라.

세부적 영적 의미

그들은 내가 이집트 땅에서 이끌어낸 나의 종들인 바 종이 팔리듯 팔려서는 안 된다란 자연적 인간도 주님에 의해 자연적일 뿐인 애착에서 구속되는 바 소외당해서는 안되고 이기적 사랑으로부터 영적 인간에 의해 통치되어서도 안 된다는 뜻이다. (7038, 8866, 4758, 8974)

43절. 너는 그를 가혹하게 통치하지 말라. 그러나 네 하느님을 경외하라.

영적 의미

자연적 인간은 선에서 떨어진채 있는 진리로 규율되어서는 안 되고 선과 결합된 진리로 규율되어야 하리라.

세부적 영적 의미

심하게 부리지 말고 하느님을 경외 해라란 그는 선에서 분리된 진리로 통치되어서는 안 되며 오로지 선과 결합된 진리로만 통치되어야 한다는 뜻이다.(6148, 4180)

44절. 그리고 너는 남자 노예들과 여자 노예들은 소유할 것이다. 너 주변의 나라들로부터 너는 남종과 여종을 살 것이다.

영적 의미

그러나 악이 있는 애착과 자연적인 능력들, 또는 악 가운데 있는 자들은 처벌이라는 두려움을 수단으로 통제될 수 있을는지 모른다.

세부적 영적 의미

나라 주변에 있는 남자 노예나 여자 노예(bondmen and bondmaid)란 악이 있는 자연적 힘과 애착들을, 그들을 남자 노예와 여자 노예로 사라란 위의 힘과 애착은 처벌의 두려움으로 통제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7998, 7999, 3718)

45절. 더욱이 너 사이에 체류하는 낯선 자의 어린이들로부터 너는 살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네 토지에서 낳은 너와 더불어 있는 그들의 가족들로부터 (살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네 소유물이다.

영적 의미

또한 자연적 인간 속의 악으로부터 오는 거짓 가운데 있는 이들, 그리고 훈육 받고 있는 이들은 자기들의 이기적인 두려움과 동기들에 호소함을 수단으로 통제될는지 모른다. 그 이유가 이것들은 교회와 연결되어 받아지는 선과 진리를 증진되게 하는 수단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은 한동안 종속될 수도 있다.

세부적 영적 의미

몸붙여 사는 외국인의 자손이란 자연적 인간의 악에서 온 거짓 속에 있는 이들, 그리고 가르침 밑에 있는 이들을, “너희 땅에 와서 낳은 자식과 너희와 섞여 사는 그들의 친척들에게서 사라”란 이들은 그들의 이기적인 두려움과 동기에 호소하게 함으로 통제될 수 있음을, 소유로 삼음이란 그들은 교회와 연결됨으로 받게 되는 선과 진리가 증진해 주는 수단이 될 수도 있음을, 그리고 이런 사람은 한동안 종식되어야 함을 뜻한다. (1147, 8002, 7998, 7999, 3718, 1215, 1145, 1708, 2028, 2029)

46절. 그리고 너희는 그들을 너 이후 너의 자손을 위해 소유물로 붙잡도록 상속을 하라. 그들로부터 너는 너의 종을 영원히 취한다. 그러나 네 형제, 이스라엘 자손을 너는 지배하지 말라, 서로가 가혹함을 가지고 지배하지 말라.

영적 의미

그런고로 거듭나는 과정에서 자연적 애착은 영적 힘으로 통제될 수도 있고 진실로 종속될는지 모른다. 참으로 자연적 힘은 계속 종속되어야 하리라. 그러나 영적 동기로부터 자진해서 종속된 자연적 힘은 이기적 동기로부터 또는 선이 없는 진리로부터 통제되어서는 안 된다.

세부적 영적 의미

자손 대대로 물러 준다란 거듭나는 과정 속에서도 역시 자연적 애착들은 영적 힘에 의해 통제되어야 하고 진실로 종속되어야 함을; “그들을 종으로 영원히 부린다”란 참으로 자연적인 힘은 계속적으로 종속되어야 함을; 너희 동족 이스라엘 백성끼리는 아무도 심하게 부릴 수 없다란 영적 동기로부터 기꺼이 종속하는 자연적인 힘은 이기적 동기로부터 라든가 선이 없는 진리로부터 통제되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1799, 1802, 2567-7, 4286, 6148, 4180)

47절. 그리고 만일 너와 더불어 있는 낯선 자나 체류자가 지독하게 부유해지고, 그들 옆의 너는 지독하게 가난해져 있어, 너와 함께 있는 낯선 자나 체류자에게 자신을 판다면, 또는 낯선 자의 가족이 되었다면,

영적 의미

이 외에, 만일 자연적인 수준의 마음이 내켜서 선을 행하는 이들, 또는 선이 없이 진리 가운데 있는 이들이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에 풍부해 있는 데도, 외적 교회 속의 인간이 진리에 결핍되어 있어 선과 진리가 소외된 채 있고, 악과 거짓들이 위 같은 자연적 성향을 통해 힘을 발휘하고 있다면,

세부적 영적 의미

외국 출신 거주자란 가르침 밑에 있는 사람, 그런고로 선이 없는 진리 가운데 있는 사람, 동시에 자연적 수준에서 마음이 내킴으로부터 행동하는 사람을; 부유해짐이란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을 풍부히 가지고 있음을; 너희 동족이란 외적 교회에 속한 사람을; 매우 가난해짐이란 진리에 결핍되어 있음을; 외국인에게 자신을 팜이란 선과 진리가 소외되고 악과 거짓들이 자연적 수준의 마음을 지배함으로 해서 세력을 가지고 있음을 뜻한다. (8002, 10227, 1222, 4758)

48절. 그가 팔려진 이후, 그는 되찾을 수 있다. 그의 형제 중의 하나가 그를 되찾을 수도 있다.

영적 의미

위와 같은 고통 당하는 이들에게도 구속은 가능하다. 그들도 자기들이 사랑하는 단순한 선으로부터의 진리에 순종함으로 구원될 수도 있다.

세부적 영적 의미

팔린 후 이더라도 풀려 날 수 있고 그의 동기 중 누가 물러 낼 수 있다란 위와 같아서 고통받는 이들도 구속 될 수 있다는 것, 그 이유는 그들도 자기들이 사랑하는 단순한 선 속의 진리에 순종함으로 구원될 수 있기 때문이다. (4758, 2966, 1222)

49절. 또는 그의 삼촌, 또는 그의 삼촌의 아들이, 또는 그에게 가까운 친척의 누구가 그를 되찾을 수 있다. 또는 만일 그가 지독하게 부자로 된다면, 그는 자신을 되찾을 수 있다.

영적 의미

또는 방계에 속하는 외적인 선 또는 진리를 수단으로, 또는 자기들 상태에 걸맞은 어떤 종류의 선이든 그 선을 수단으로, 또는 만일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이 그들에게서 증가된다면 그들 스스로 구속 될 수도 있다.

세부적 영적 의미

그의 삼촌 또는 삼촌의 아들이란 방계에 속하는 외적 선 또는 진리를, 가까운 친척 중 누구란 그들 상태에 적합한 어떤 종류의 선을; 만일 그가 부유해진다면 이란 만일 진리와 선에 관한 지식이 그들에게 증가 된다 면을; 물러냄이란 생활에 진리를 응용함으로 악에서 해방됨을 뜻한다.(3612, 489, 3703-2, 10227, 2966)

50절. 그리고 그는 그가 자신을 판 해로부터 희년 까지를 자기를 산 자와 계산하라. 그리고 그의 판매가는 년수에 따라서, 그가 그에게 고용된 종으로서의 시간에 따라서이다.

영적 의미

이렇게 구속됨은 수련 기간의 상태 동안에 해당되는 거듭나는 과정에서 노력함으로 성취되어진다. 자기들 삶의 품질은 계속되는 상태에 있어지는 선과 진리에 의거 있어진다. 그리고 선을 취득함에 있는 이기적 동기들의 세력이 어떠 하느냐에 의거 있어진다.

세부적 영적 의미

팔려진 해에서 희년까지의 햇수를 계산함이란 위와 같은 구속은 수련 상태 동안 거듭나는 과정에서 노력하여 성취 될 수 있다는 것을, 그의 판매가는 년수에 따라서 이다란 그들 삶의 품질은 계속되는 상태에 있는 진리의 선에 따라 정해짐을, 고용된 종으로 침이란 선을 획득하는 것은 이기적 동기가 얼마나 우세해 있었는가에 의해 지연될 것임을 뜻한다. (10217, 2937, 4758, 8802, 2252, 8002)

51절. 만일 아직도 많은 년수가 (남아) 있다면, 년수에 따라 그가 사들여진 값으로부터 그의 되찾음의 값을 되물려라.

영적 의미

이런 영향에 의거 자기들은 주님에 의해 그들에게 자유로이 주어진 신성한 진리를 수단으로 악에서 구원되고 선 안에 보존되었다는 것을 인정하리라.

세부적 영적 의미

희년까지 남은 햇수가 많으면 그 햇수를 따라 그 만큼 많이 내고 무를 수 있다란 악에서 해방되어 선 안에 보존된 것은 주님에 의해 그들에게 자유로이 주어진 신성한 진리를 수단으로 있어졌다는 것을 위의 영향에 따라 인정함을 뜻한다. (2966, 10217)

52절. 그리고 만일 희년까지 몇 년 남았다면, 그러면 그는 그와 셀 것이다. 즉 그의 년수에 따라 그는 자기 되찾음의 값을 도로 줄 것이다.

영적 의미

만일 진리와 가장 깊은 선과의 결합이 덜 떨어진 상태라면 그 품질은 자기들의 생명이 주님으로부터 임을 인정하는 수준에 따라 있어질 것이다.

세부적 영적 의미

희년까지 남은 햇수가 적으면 그만큼 적게 무름이란 선과 더불어 진리의 충분한 결합이 아직 멀리 떨어지지 않고 있다면 자기 생명이 주님으로부터 임을 아직 인정하고 있는 수준에 따라 그의 상태는 정해질 것임을 뜻한다. (2966,10217)

53절. 고용된 종으로 매 해 그는 그와 더불어 있을 것이다. 그는 네가 보기에 가혹하게 그를 다루지 말라.

영적 의미

계속되는 상태들 안에 있는 이기적 동기들의 영향에 비례해서 그들의 일반적 상태가 있어질 것이다. 자연적 인간이 영적 인간을 지배하도록 허용되지는 않으리라.

세부적 영적 의미

그를 한해 한해 고용된 종으로서 대접을 해야 하고 심하게 부리지 못한다란 계속되는 상태 안에 있는 이기적 동기의 영향에 따라 그들의 일반 상태가 있어진다는 것, 자연적 인간은 영적 인간을 누르도록 허용되지 않았다는 뜻이다. (8002, 487, 488, 6148, 4180)

54절. 그리고 만일 그가 이런 (수단)으로 되찾아지지 못한다면, 그다음 그는 자기 어린이와 더불어 희년에 가서야 나갈 것이다.

영적 의미

만일 선 가운데 있는 위와 같은 자연적 인간이 제반 경험들을 수단으로 교회 속의 거짓의 힘에서 구속되지 않는다 해도 그들이 선 가운데 있었던 이유로 심판에서 진리가 선과 가장 깊은 수준에서 상호적으로 서로 결합될 것이다.

세부적 영적 의미

그가 이런 조건으로 물리지 못했으면 희년에야 자식들과 함께 해약이 된다란 만일 위와 같이 선 가운데 있는 자연적 인간이 위 같은 경험에 의해 교회 안에 있는 거짓의 권세에서 충분히 구속되지 않는다 해도 심판에서는 그들이 선하기 때문에 진리는 모든 충만함 속에서 상호적으로, 서로 간에 가장 깊게 그 선과 결합된다는 뜻이다. (2966, 8802, 2252, 489)

55절. 나에게 이스라엘의 자손은 종들이다. 그들은 내가 이집트의 토지로부터 데려온 나의 종들이다. 나는 주 너의 하느님이다.

영적 의미

그 이유는 영적 교회인은 내적으로 이든 외적으로 이든 주님의 종들이요, 주님께서 내적 인간에 있는 것들, 외적 인간에 있는 것들, 모두 구속 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주님은 교회인과 더불어 진리가 모든 선과 결합하는 유일한 근원으로서 예배되어져야 하리라

세부적 영적 의미

이스라엘 백성은 주님의 종이다란 영적 교회인은 내적으로 외적으로도 주님의 종 임을; 이집트 땅에서 데려옴이란 주님께서는 내적 인간 인 것과 외적 인간 모두를 구속해주셨음을; “나는 주 너의 하느님”이란 그분은 교인 속에서 선과 진리를 결합되게 하는 유일한 근원이심을 각기 뜻한다. (3654, 1713, 7038, 8866, 2001)

25장의 종합적 고찰

성경을 세심하게 읽는 독자라면 본문과 다음 두 장은 레위기 전체에 걸쳐 있는 내적 의미의 시리즈에서 정점을 이루는 부분임을 이미 알고 있으리라 본다. 그 이유가 지금 다루어 온 본문이 갖가지 수준에서 갖가지 국면에서 인간 거듭남이 충만 되는 것을 주제로 하기 때문이다. 간단히 살펴보자.
통상적으로 말한다면 안식일 또는 쉼의 날은 모든 영적 싸움이 끝났을 때 있게 되는 거듭남의 완성을 표현한다는 것은 기독교계에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런 이유로 천국 자체가 영원한 안식일이라고도 불린다. 인간이 모든 시험에서 영원히 쉬는 상태, 그 결과 주님을 영원히 예배하는 곳이 천국인 것은 맞는 말이다. 그러나 누군가가 상상했듯, 천국에서의 쉼과 평화라는 상태는 활동 없는 영원한 상태, 천사들의 할 일은 오로지 성소를 돌보는데, 주님을 예배하고 찬양하는데 영원히 고용되고 있다고 생각했다면 그것은 착각일 뿐이다. 천국의 쉼과 평화는 영적 전투로부터 자유로운 것, 그곳에서 영원히 있게 되는 예배는 선한 생활로 이루어진 예배이고, 이 생활은 각종의 선용을 수행함 속에서, 선용을 수행하여 기쁨을 느끼는 가운데서, 순수한 선용의 품질이 무엇인지 식별하는 지혜를 가지고 이루어진다. 천국에서 천사들의 생활에도 계절, 즉 상태의 변화가 있되 그 안의 모든 사람은 그분의 인간을 신성이 되게 하신 주님과 하나가 되고, 신성한 존재에 대한 가르침과 모든 선이 주님으로부터 라고 입을 모아 실감하는 가운데 서로의 사랑을 표현한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그분의 자녀들로부터 찬양을 받는데 그 이유는 그들이 신성한 사랑과 지혜에 진정 감사를 느끼기 때문이요, 이 사랑과 지혜는 그분과 자녀 간에 상호 교통이 가능하게 한다. 게다가 그분이 찬양과 예배에 흡족해 하시는 것은 자아 영광으로 도취하셔서가 아니다. 천사들조차도 자아 영광 같은 것 때문에 찬양과 영예와 영광으로 기뻐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런 일이 있으면 고개를 돌린다. 그 이유는 모든 진짜 축복은 주님으로부터만 가능함을 그들이 너무나 잘 알고 있고, 영예로 단순히 기뻐해지는 것은 자신 속에 잠복된 자아 사랑의 어떤 암시 때문인 것까지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통상의 안식일이 완전한 천국 상태이어야 이치가 맞는다. 한 마디로 안식년, 희년은 천국 상태가 더욱 강렬한 완전함을 명시한다. 다른 측면에서 생각해 본다면 세 가지 안식은 낮은 천국, 중간 천국, 높은 천국을 각기 의미한다는 것을 본 장의 모든 항목들로부터 자세히 나타나고 있다.
안식년에는 세 가지 사항이 지시되고 있다. 그중 두 가지가 본문에서 언급되는데, 그것은 씨를 뿌리고 거둠을 중지하는 것과 가난한 자와 짐승에게 토지의 산물을 주라는 명령이다. 그리고 또 한가지 사항은 신명기 15장 1-3절에 있는데 모든 빚을 삭쳐 주라는 명령이다. 이제 이 세 가지 명령의 영적 취지를 생각해보자. 육 년 동안은 씨를 뿌리고 거두어들이고 들과 포도원에서 열심히 일하게 되어있다. 이 육 년은 영적 전투를 하는 인간의 상태들을 의미하고 칠 년째는 쉼과 평화를 의미하고 있다. 그러나 이에 대한 의미만이 위 사항 만에 포함된 전부는 아니다. 그 이유는 씨를 뿌리고 거두는 육 년은 우리 지성이 진리로 계발되는 쪽으로 인도되고, 심정은 지식을 사랑함으로부터 선한 원리를 채택하여 주님과 이웃을 순수하게 사랑해야 한다는 의무감 밑에 선을 실행해보는 것까지 포함하여 의미되는 용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칠 년째란 사랑을 완전히 실감해서 과거의 상태들이 중지되는 것까지 의미하는 용어이다. 물론 전투의 상태와 계발의 상태는 동시에 존재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천국 상태에서 지성의 계발은 없지 않을까? 라고 생각해 볼 수 있을는지 모른다. 확실히 그러하다. 그러나 천국 상태에서 우리가 선해지기 위해 지식을 획득하고 우리의 능력들을 발달시키려는 것 대신 우리는 선을 세부적으로 사랑하는 결과, 위 사항들이 행해져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자신의 기능 면에서와 일반적 선용 면에서 우리의 목적은 더욱더 완전해져 간다고 표현되어야 할 것이다.
천국 삶에 포함되어 있는 두 번째 사항은 내적, 외적으로 있는 모든 선한 것들을 즐기는 그 속에 자유가 있다는 것, 다른 말로해서 모든 선한 것을 자기 것 삼는데 있어 자연적 인간 안에서 뿐아니라 영적 인간 안에서도 자유가 있다는 것이다. (5-7절) 셋째로, 위 자유의 더 나은 상태가 빚을 사면해주는 것으로 나타내지고 있다. 이는 “주님으로부터 이다고 인정하는 진리에 순종하는 모든 상태가 선을 사랑함으로 해서 순종하는 상태, 즉 진리를 원리로 할 때 있어지는 의무감의 순종이 중단되고 사랑이 지금은 모든 행동의 동기이기 때문이다. 이 상태에서는 선행이 우세해져 자아 강박감으로부터 자유로움이 뒤따른다.” (신명기 15:1-3). 이 셋째 항목은 차후 신명기를 살필 때 더 자세히 거론 할 것이다.
두 번째 항목에서는 희년을 생각해 보아야 하는데 이 희년은 천적 인간의 완전한 상태, 또는 천국, 영적 인간에 속하는 것 또는 어떤 세부적인 측면에서의 천국의 완전한 상태를 표현한다. 이는 시리즈의 배열로부터 알게 된다. 그 이유가 시리즈의 뒷부분은 앞 부분에 의존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이것에 응용되는 것은 다른 것과도 관련되기 때문이고 더 멀리까지 즉 완전한 자연적 인간 또는 최말단 천국에까지 관련을 이룬다. 이것이 일곱째 달 십일, 보상(죄 벗음)받음의 날, 나팔을 분다로 표현되어 있다. 왜 그럴까? 신성한 사항을 더 명백하게 지각하거나 밝히 알게 되면 반드시 악의 제거, 아마 완전한 악의 제거가 따르기 때문이다. 그러면 선이 주님으로부터 흘러들게 되고, 주님께서 우리 속에 아껴둔 것들이 열매를 맺는 바, 신앙의 상태가 충만 되어 완성된다.
위의 결과 기쁨이 어떠한지 실감해 보자. 거기에 전체 인간을 망라해서 완전한 자유가 있는다. 거기에 가장 깊은 수준에서 주님과의 충만된 결합이 있는다. 이로부터 바깥쪽 즉 자연적 평면에 있는 선한 모든 것을 충분히 즐기기까지 한다. 이런 이유 때문에 희년이 세 번 말해진 것이다. 그리고 저마다 제 소유지로 돌아간다는 것에 각자가 지닌 선을 실감하는 것이 상징화되어 있다. 천국은 하나의 장엄한 인간이고, 거기서 각 천사는 자신에게 꼭 맞는 기능을 가진다. 게다가 각 천사는 그 직능을 포기하려는 바램을 갖는 적이 없다. 그들은 삶 전체를 통해 사고 파는 일을 계속한다. 즉 간직하려 했던 것과 헤어지고 한때 자신의 것으로 되어 있던 것이 영구히 자신의 것으로 획득된다. 그래서 모든 것은 내향의 삶 속에 있는 깊은 쉼 속에서 올바른 생각과 느낌이 신비스런 하나됨에 의존한다. 우리는 영적으로 옹색한데 그 이유는 부유한데 부유한지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좌우지간 우리가 고향, 우리의 소유지에로 되돌아 갈 때 우리는 결코 우리의 부자 된 것들을 잃지 않게 된다. 그래서 우리의 희년에 비정의는 없고 어느 형제에게도 잘못하는 일도 없을 것이다. 그 이유는 우리의 삶이 사랑과 총명으로 완성되기 때문이다(17절). 따라서 이 절에 이어지는 두 절은 우리로 하여금 천국에서는 어떤 악과 거짓도 괴롭힐 수 없다는 것, 거기에는 충만된 즐거움만이 있으리라는 것을 보증해주고 있다. 이 항목 끝에 있는 요점은 매우 흥미 있다. 천사들, 또는 각 수준에 있는 모든 천적 인간이 의식하는 바, 자기들이 주님께 의존되어 있다는 것, 그분만이 자기들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주실 수 있는다는 것, 자기들의 선은 어느 누구의 것도 될 수 없고 소외당할 수도 없다는 것, 이 선은 주님의 것이라는 것, 자기들 스스로서는 선을 가지지 못하고, 지식을 지니는 것조차도 불가능하다는 것, 이런 사항들을 자기들은 계속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사항은 완전한 인간에 속하는 모든 상태들이다. 이런 상태로 가기 위해 불완전한 인간에게 분투노력함이 필요한 것이다.
이제 25절 이하에 있는 여러 가지 규정들, 거듭남에 관련된 사항을 살펴보자. 첫 대목에는 두 가지 경우가 있다. 전자는 가까운 친척이 있어 되돌려 살 경우, 후자는 친척이 없어 되돌려 사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그래서 전자는 거듭나는 동안에 선 가운데 있긴 하나 그 선이 소외되게 한 상태이고, 후자는 선이 없이 진리 가운데만 있어 선이 소외되게 한 상태이다. 어찌됐든 악에 어떤 길을 허용할 때 우리는 선과 진리가 소외당하게 만든다. 이런 경우의 발생은 거듭남의 진보가 시작되려할 때 또는 진보해가고 있을 때 자칫 일어나기 쉬운 상태들이다. 그래서 이 구절은 각 경우에 발생하는 것을 가르치고 있다. 그런데 되물려 살 친척은 누구일까? 이 친척이란 자신이 속한 천사들 사회에 있는 일반적 선을 통해서, 그리고 가장 깊은 측면에 있는 선을 통해 역사 하시는 주님이시다. 모든 이는 자신이 선을 행하겠다고 선택만 하면 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 그 이유는 모든 사람은 구속되어 있어 선과 악 사이를 선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고로 두 번째의 경우가 주어지고 있다. 부자가 된 가난한 사람은 위 능력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자기가 소유한 진리를 적절히 사용하는 것, 주님을 인정하고 회개의 일을 수행해 갈 수 있다. 이런 과정 속에서 자신의 구속이 나타나게 된다. 이제 27절에 기술된 과정에 주목해 보자. 이 과정은 천국의 신비 제 2966항에 있는 가르침 즉 “되찾는 값이란 인간이 수용하는 것, 수용하는 정도만큼을 서술하는 용어이다”는 사항과 일반적으로 일치한다. 그가 그것을 팔 사람에게 나머지를 회복시켜주는 것을 “자기로 가능할 수 있게 된 선은 그 선을 일반 형태로 한동안 보존되게 한 천국 사회 안에 있는 이들을 통해 주님 만으로부터임을 인정함”을 뜻한다. 이는 천국의 신비 제 8685항에서 알 수 있는데, 또한 그곳에서 보여주는 것은, 자신의 선한 상태에 오게 될 때 그 사람에게 직, 간접적으로 주님으로부터의 유입이 있는다는 것, 즉 직접적으로는 주님 자신으로부터서, 간접적으로는 천국을 통해 유입이 있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전에, 또한 “한 동안” 직접적인 유입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알게 되는 바, 어떻게 거듭나는 인간이 그의 천국 사회를 통해, 그 사회에서 선에 관한 자기 상태를 실감하게 되는가에 대하여서 이다. 이에 대한 사항은 28절에 기술된 바 같은 거듭남이 지연되는 경우까지 설명해준다.
다음 문단에 관한 검토는 외적 측면에 보다 더 치우쳐 있는 이들과 더불어 있는 소외된 선의 구속함(되찾음)에 관한 것이다. 이에 대한 기본 되는 진리는 유효기간 일 년(whole year)으로 나타내진 것 즉 수련 기간 동안 또는 자연적인 삶 동안에서만 되칮아 질 수 있다는 것이다. 수련 기간 동안 모든 이는 선과 악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 속에 있다는 것, 이 상태는 자연적인 삶에 한정되어 있다. 그 이유는 자연적인 삶이 최말단 삶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언제나 기억하고 있어야 하는 것은, 거듭남은 창조같이 첫 번째 되는 것, 즉 가장 높은 원리들의 작용으로부터 있게 되어 마지막 째 되는 것 또는 가장 낮은 원리가 높은 원리에 협동하는 작용으로 이루어진다는 것, 더 달리는 거듭남이 결과될 수 없다는 것에 대해서다. 이 진리에 관하여는 천국과 지옥 470-483항을 읽기 바란다. 그 항을 보면 성경으로부터, 추론으로부터, 스웨덴볽의 경험으로부터의 확증들이 있다. 그러나 레위인들의 성읍이나 집들은 언제든지 글자대로 보면 약정된 해가 넘었어도 무를 수 있다고 말해지고 있다. 이는 일반 진리와 모순되는 듯 여겨진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그 이유는 레위인들은 어느 정도라도 이미 선 가운데 있는 사람, 또는 진리의 선 가운데 있는 사람, 거듭남의 진보를 만들고 있는 사람을 표현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언제든지, at any time”라는 용어는 수습 기간 동안 어느 상태에서 이든지를 뜻하는 것으로 해석되어야 할 것이라 본다. 이 수습 기간은 하나의 희년으로부터 그 다음의 희년까지의 햇수들로 표현된다. 이는 희년의 의미로부터 알 수 있다. 레위인에 관해 말해지는 한 가지가 더 있다. 그들의 마을에 딸린 들판은 사고 팔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라는 말인데, 이는 외적인 선은 내적으로 선과 진리가 충분히 결합되어 있을 경우 소외 되어질 수 있다는 것을 명시한다.
위 사항 외에도 여러 가지 규정들이 있는데 여기서 상세하게 설명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주님과 종에 관련되는 것, 모두 희년에 관계되고 있다. 이에 대해서는 몇 가지 일반적 관점만을 언급하면 충분할 것으로 본다. 본문에 주어진 지시 사항에서 아주 명확한 것은, 인간이 자기 동족을 노예로 만드는 것은 신성한 사랑의 속성에 일치되지 않는다는 것, 신성한 질서에 따른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자손들은 동족을 노예로 삼아 팔고 사지 않도록 명령받았는데 이래야 주님의 의지에 일치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종으로 부리려는 쪽으로 행동하려는 것은 그들이 지닌 자연적 수준의 마음에 있는 성향이었기 때문에 여기서 기술되는 규정들은 그들이 지닌 오로지 자연적일 뿐인 사랑을 온건하고 부드러워지게 하려는 쪽으로 의도 된 것만은 틀림없다. 이런 경우와 비슷한 성서 구절이 마태복음 19장 8절인데 아내와 이혼하는 것을 허용하는 것을 인용한 대목에서 이다. 이런 허용의 이유까지도 그들 심정이 완악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복음서로부터서도 보다 쉽게 이해되는데 이는 내적 의미를 밝히 알게 되면 확증까지 되어진다.
주인과 종의 관계가 비록 천국에서도 확실히 구분 지어져 있다 할지라도 그곳에서의 모든 통제는 서로 간의 사랑으로 이루어진다. 주인은 종을 사랑하면서 사랑으로부터 지시하고, 종은 주인을 사랑하면서 사랑으로부터 순종해간다. 이는 이기적 사랑에서 발생되는 지배를 사랑하여 통치하는 것과 상반된다. 이기적 사랑은 권력을 사랑하고 세상에 있는 재물 모두를 소유하려드는 욕망으로 만인을 종속되게 하려 든다. 이런 저런 것을 생각해 볼 때 본문에서 거론되는 영적인 모든 규정들이 얼마나 우리를 유익하게 해주는지 감지할 수밖에 없도록 만든다. 세부 사항에서 주목되는 한 가지는, 자신을 통치하는 원리를 이기적 사랑 안에 둔 이들은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는 원리로는 통제 될 수 없다는 것, 그들은 이 사랑을 실감 못할 뿐아니라 결코 실감하길 원치도 않는다는 것, 그러므로 자기들 삶의 평면을 통제하는 법칙에 따라 고통의 두려움으로 강제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렇게 되어질 때 결국 그런 조치에 대한 의심도 없어져 그것에 만족하는 바 고통도 더이상 없게 된다. 그런 이유는 주님 자신이 천국 뿐아니라 지옥도 통제하시기 때문이고 양쪽 모두에서 그분의 통치는 신성한 사랑과 지혜, 통치의 목적은 인류로부터 천국을 형성하고 보존하시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수련 기간인 자연계의 삶에 아직 있는 우리들은 자기를 정녕 천국 사랑으로 통제되도록 선택하는 것, 자신의 상태에 따라 모든 인간 영혼의 영원한 복지를 사랑해 가는 것을 선택해야 하리라. 그리하여 인생 어느 국면에서 이든 주님의 모양과 형상에 가능한 가까이 접근되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