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은 육체가 없는 삶을 위한 도구이다

VIII
죽음은 육체가 없는 삶을 위한 도구이다

고생은 하느님으로부터의 벌-즉 거역하려들지 말고 깊은 신앙심을 발휘해서 지고 가야하는 짐으로 간주하는 것이 대세를 이루었던 시대도 있었다. 불행의 희생자를 돕는 유일한 생각은 그들에게 피난처를 제공하고 그림자의 골짜기에서 묵상하며 가능한한 고생도 만족해하며 살게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이해하는 바, 포부가 없는 격리된 삶은 영을 약해지게 한다는 것이다. 이는 육체의 경우에도 똑같다. 근육은 사용되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힘을 잃는다. 여하튼 우리는 제한된 자신의 경험으로부터 빠져나와 자신의 기억, 이해함, 동정심을 사용하지 않으면, 그것들은 불활동적이 되어간다. 한계성, 시험들, 세상의 실패들과 싸울 때만이 각자의 가장 높은 가능성들에 도달된다. 이럴 때 우리는 하느님을 예배하는 것이고 세상적인 것을 포기함이라고 스위든볽은 말하고 있다.
자신이 아픈 상태이든 건강하든, 소경이든, 보고 있든, 억매인 상태이든 자유하든, 우리는 어떤 목적에 충당되려고 여기 지금 존재한다. 다시 말해 우리가 하느님을 기뻐하시게 하는 방법이 신앙의 힘에 의지해 뭔가를 포기하거나, 반대로 강력히 간구하는 기도를 수단으로 함이 아닌 유용한 행위, 남에게 도움이 되는 일을 가지고 그분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더 낫다는 말이다. 생활의 선이 성전이나 교회를 채우지 않으면 영적 측면에서 그것들은 텅 빌 것이다. 교회가 크든 작든 교회를 만드는 것은 엄청난 돌 벽이 아닌 교회 주위에서 빛을 발하는 용감한 혼의 빛이다. 제단은 거룩하다. 그러나 제단이 우리의 심정의 제단을 표현하고 우리가 언제나 바치도록 명령된 제물 만을 바칠 때 거룩하다. 그 제물은 미움보다 더 강한 사랑을, 의심을 극복하는 신앙이다.
하느님을 신성한 친구로서 느끼는 단순하고 어린이 같은 믿음은 땅이든 바다이든 우리에게 오는 모든 문제들을 해결한다. 곤경들은 언제나 우리가 만나고야 만다. 이것은 인생의 동반자나 다름 없다. 이것은 고난의 특성과 개개인의 특성을 결합시킨 결과이다. 고난에 대처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우리는 불멸하다는 것, 우리는 “졸지도, 주무시지도 않으며” 지켜주시는 신성한 친구가 있다는 것, 만일 모든 것을 그분께 맡기면 우리를 지켜주시고 안내해주신다는 것을 당연히 받아들이면 된다. 이 생각이 우리의 가장 깊은 존재 안에서 강하게 지반을 형성하고 있다면, 우리는 자신이 원하는 어떤 것도 거의 할 수 있고, 우리의 생각함도 제한할 필요가 없다. 또한 우리는 우리가 끌어 안을 수 있는 우주의 모든 아름다움을 자신에게 보탬이 되게 할 수 있을런지 모른다. 상한 것을 위해 부드러운 동정심이라는 보답이 있다. 아픔으로부터 끈기와 달콤함의 제비꽃이 피어나고, 이사야의 입술에 닿아 그의 생명이 영 안에서 불켜지게 한 거룩한 불의 선견(vision)도 있게 되고, 저녁 별과 더불어 오는 만족함도 있는다. 만일 고난을 극복하는데 아무런 제한도 받지 않는다면 경이롭고 풍부한 인간 경험도 극복에 대한 보상인 기쁨을 상실하고 말 것이다. 횡단해야만 할 어두운 계곡이 없는 등반이라면 언덕 꼭대기에서 즐기는 기쁨도 절반밖에 안될 것이다.
나의 한계점을 두고 나는 그것이 벌이나 사고라고는 결코 믿지 않았다. 만일 내가 그렇다고 믿었다면, 나는 그것들을 극복할 힘을 결코 발휘하지 못했을 것이다. 히브리인에게 보내는 바울의 편지를 보면, “우리가 징벌을 받은 것 같으나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아들과 같이 취급하신다”가 있는데, 이 대목은 특별한 의미가 나에게 있는듯 여겨왔다. 스위든볽의 가르침이 내 생각을 받쳐주는 듯하다. 그는 징벌 또는 응징이란 단어가 크게 잘못 이해되었는 바, 이 단어는 혼의 단련, 훈련, 제련으로 이해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의 책 “진정한 기독 종교”는 하느님께서 주신 힘에서의 신앙과 자주적 활동을 격려하는 것으로 가득해 있다. “신앙”과 “자유 의지”편은 우리는 불행이나 주위 환경 또는 우리의 과오들이 아무 희망도 없고 끌려가야 하는듯 굴복해서는 결코 안된다는 것이다. 마치 손으로 깍아 만든 인형 조각 밖에 안되어서 하느님이 뭔가 조치를 취해주기만을 기다리는 모양새가 되어서는 안된다는 말이다. 우리가 영적 노예 상태로 되어가는 상황에는 어떤 이유에서이든 맞서야한다. 우리는 진취적 기상을 취해서, 두려움 없이 자신을 들여다 보고, 해야 할 것에 대한 새로운 생각을 찾아보고, 우리의 의지력을 발달시키는 방법도 강구해야 한다. 그러면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필요를 위해 충분한 빛과 사랑을 주실 것이다.
모든 종류의 취약점은 자기 발달과 참 자유에 용기를 북돋아 주어 세련되게 하는 형체들이다. 이것은 우리의 존재 안에서 더 높은 선물이 꼭꼭 감추이게 한 단단한 돌을 깍아 들추어 내기 위해 우리에게 주어진 연장들이다. 이것은 우리의 눈에 붙어있던 무관심의 붕대를 찢어 낸다. 그리고 우리는 타인이 운반하는 짐들을 바라본다. 그리고 우리는 동정심의 지령이 발동되면서 그들을 돕는 것을 배운다.
소경된지 얼마 안 된 사람을 전 인생 훈련에 대한 예로 사용하면 대단히 구체적일 듯 싶다. 그가 시력을 잃은 처음에는 자기에게 남은 것이라곤 심적 고통과 자포자기 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자기는 인간적인 모든 것으로부터 닫혀 있다고 느낀다. 그에게 삶은 다 식은 난로에 있는 재나 다름없다 판단한다. 야망의 불은 꺼져 있다. 희망의 빛은 어두워져 있다. 그가 한 때 기쁨을 취했던 대상들이 이제 자신이 더듬거려 길을 찾아갈 때 날카로운 모서리가 되어 자신을 찌를 것 같이 생각된다. 그를 사랑하는 이들까지도 그가 더는 노동 같은 것으로 도와 주지 못하기 때문에 그들도 무의식 중에 그의 느낌을 상하게 하는 때도 발생된다. 그럴 즈음 몇몇 슬기 있는 선생이나 친구가 그에게 와서 시력 대신 청력을 수준 높게 훈련하면 일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조언한다. 괴로움을 당한 당사자로서는 그것을 믿지 않으려하고 심지어 자기를 조롱하는 말로 들리기도 한다. 마치 물에 빠진 사람이 자기를 구하려 뛰어든 사람인 줄도 모르고 무턱대고 그를 때리는 격이다. 그럼에도 고통자는 자신의 의지와는 별도로 앞을 향해 재촉해야만 한다. 그리고 자신이 세상과 연결되어 다시 놓여질 수 있다는 것, 인간으로서의 가치있는 업무 수행이 가능도 함을 한번 실감할 때, 그는 이전에 꿈꾸지 않았던 존재가 자신 안에서 그 자체 벗겨져 모습을 보인다. 그가 슬기롭다면, 그는 행복이란 바깥쪽 환경과 절대적 관계가 있는 것은 아니다는 것을 끝내 발견한다. 그리고 그는 빛 안에서 느꼈던 것 보다 더 확고한 의지로 그의 어두운 길을 밟아 간다.
“이 세상 시련의 용광로 안에서” 정신적으로 소경되어 왔던 이들도 위와 마찬가지로 새로운 가능성들을 찾을 수 있고 찾아야만 하며, 행복으로의 새로운 방법들을 실행하려 자신을 밀어붙여야 한다. 때로 이들은 자기에게서 더 고상한 것을 기대하는 신의에 분함을 표출할런지 모른다. 그래서 내뱉는 말인즉, “나는 나 그대로, 그것이 멍청하고 야비하고 이기적인 것일지라도 그대로 인정해주면 만족할 것이야…”하기도 한다. 이런 그를 수긍하는 것은 당사자에게, 그리고 인간의 영원한 존엄에 대한 모욕이다. 우리 안에는 아주 가까운 친구도 알지 못한 많은 것, 즉 도전적이거나 관심있어 신경 쓰거나 적나나하게 드러내는 것 이상으로 더 느끼고 더 힘있고 더 인간다운 것이 많다는 것을 확인하는 경우가 얼마나 자주 있는지 모른다. 우리는 자신을 너무나 적게 알고 있지 않던가! 우리는 자신의 내적 자아를 열기 위해, 우리의 무지를 내쫓기 위해, 가면을 찢어버리기 위해, 옛 우상들을 내던지기 위해, 거짓 표준들을 파괴하기 위해 취약점과 시험도 필요하다. 이런 거친 일깨움에 의해서만이 우리는 언제나 강요하는 외적인 것을 떠나 덜 방해받고, 덜 조임을 당하는 장소에 거주하도록 인도되어진다. 이때서야 우리는 새로운 수용력을 발견하고 선량함과 아름다움과 진리의 진가도 발견한다.
이런 경험으로부터 우리는 주님의 이 말씀, “참으로 참으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내가 누구를 보내든지 받는 사람은 나를 받는 사람이다”에 관한 경이로운 해석을 얻을런지 모른다. 우리가 극복한 취약점 안에, 우리가 도달한 이상향 안에 사랑과 지혜의 전체 왕국이 현존함을 알게 된다. 이런 방법에서 우리가 배우는 바, 성장 쪽으로의 진짜 방법은 우리의 한계점을 넘어 열망함에 의해, 위대한 것을 고상하게 원함에 의해서, 그리고 그것을 위해 분투 노력함에 의해서이다는 것이다. 우리가 항상 살고 있는 바깥쪽 생활에 더 깊은 의미가 있음을 더 의식해감에 비례해 영적 성장도 한다.
눈은 특수한 물체를 보는 것을 더 배움으로 성장한다. 인간 육체의 눈에서 지구는 평평하게 보인다. 그리고 별들은 고대인에게 보여졌던 것과 똑같이 우리에게도 보여진다. 이런 현상을 두고 과학은 무한히 새로운 경이로움과 영광들을 알 수 있게 했지 않았던가! 어린아이는 자기가 원하는 것, 원치 않는 것을 자기 주위에 있는 것들에서 보고 있다. 그러나 뉴톤(Newton)은 사과가 떨어지는 것은 자연에 있는 보편적 힘의 표현으로서 인식하고 있었는 바, 그는 보통의 시야 훨씬 멀리 보고 있었다. 이는 우리 영에 관련해서도 똑같다. 우리는 매일 접촉되는 것 안에 감싸여있는 새로운 생명의 가능성을 더 충분하게 인식할 때 (영적) 성장을 한다. 그러나 우리가 이런 생명의 원천을 이루는 사실들을 무시하거나 망각할 때, 감각들은 우리를 엉뚱한 쪽으로 인도한다. 이는 우리들 삶의 환경에서 제공된 내적 생명의 위대함을 우리로 알게 하는데, 그리고 하느님께서 주신 기회들을 우리로 보여지게 하는데, 취약점이 왜 우리에게 필요한지에 대한 이유이다.
스위든볽의 다음과 같은 생각들은 우리를 위해 꾸준히 봉사하고 있다. 모든 사건에서 그리고 모든 한계점에서 우리는 선택을 가진다는 것, 그리고 선택하는 것은 곧 창조하는 것이다는 생각이다. 우리는 시련이 우리를 짓밟아 뭉개도록 놔두는 것을 선택할 수 있고, 또는 우리가 시련들을 선에 속한 새 힘으로 개조하는 것을 선택할 수 있다. 우리는 일반적 의견 내지 전통적인 것에 따라 흘러가는 것을 선택할 수 있다. 또는 우리는 내부 혼의 안내에 자신을 맡기고 진리를 향하여 용기있게 나아갈 수도 있다. 우리는 자신의 경험들이 진짜 복인 것인지 아닌지를 바깥쪽 근거들로부터는 말할 수 없다. 우리 자신이 경험들 안으로 무엇을 놓느냐에 따라 그것은 독이 든 잔이 되거나, 보약의 잔도 된다. 한계에 부딪치고 훼방받을 때 이것은 해야 하고 저것은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선택하기 앞서 어떤 원리로부터 행동할 것이냐의 선택이 먼저 있어야 한다. 땅은 분노의 장소인듯 하면서도 기쁨의 장소로도 설계되어 있다. 토양은 가시나무를 내고 장미도 가시를 가지고 있는데, 왜 인간의 삶에 시련이 없겠는가? 따라서 시련은 잔인한 것, 또는 이상한 것도 아니다. 시련은 땅의 한계 내에서는 성취되어질 수 없는 더 높은 운명을 위해 우리의 생활을 확장하고 강건하게 간직하도록 하시려고 우리를 재촉하는 하느님의 간절하심 이다. 우리 넘어 있는 것을 위해 노력할 때만이 우리는 확장과 기쁨을 쟁취한다. 이제 각자가 가지는 취약점을 집어들자. 그리고 빛이 되고 영감을 주는 영향력이 되기 위해, 약하고 시험받고 의기소침한 사람들에게 생명을 주는 생각과 바램이 소통되도록 해주기 위해, 유약한 인간적 어깨 위에 세상의 십자가를 짊어지신 그분의 실예를 따라가자.
내가 소유하고 있는 것이 “신비적(mystic)” 감각인지 아닌지 나는 모른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나는 배워서 깨닫고 있다(지각, perceptive)는 것이다. (영적) 감각은 마치 머나 먼 거리에 있는 별이 내 문 앞에 있는듯 보는 식으로 소경의 인식 안에 먼 거리의 물체(object)를 가져다 주는 능력이다. (영적) 감각은 나를 영계와 연결되게 한다. (영적) 감각은 나의 불완전한 촉각의 세계로부터 획득한 제한된 경험을 유심히 관찰하고 영적으로 바뀌도록 해주기 위해 내 마음에 관찰한 것들을 제출한다. (영적) 감각은 신성을 내 안에 있는 인간에게 밝히 보여 알게(계시) 한다. 영적 감각은 땅과 장엄한 저편을, 지금과 영원을, 하느님과 인간을 묶어준다. 영적 감각은 사색적이고, 직관적이고, 회상(추억)적이다. 세계에는 두 가지, 객관적 물질 세계와 객관적 정신 세계가 있다. 물질에 안과 밖이 있듯, 정신에도 안과 밖이 있다. 이 둘 각각은 실체를 위한 각각 고유의 위상(phase)을 가지고 있다. 물질이 그 내부 또는 그 위에 놓여 있는 정신에 전혀 관심을 두지 않은채 사용될 경우를 제외하면, 물질과 정신이라는 두 가지 생명에는 대립적인 것은 없다. 이 둘은 따로따로의 등차(discrete degrees, 불연속 등차)에 있다고 스위든볽은 설명하고 있다. 그는 더 설명하기를, 물질 세계를 위한 지각 장치가 우리에게 있듯, 정신 세계를 위해서도 지각 장치가 있다는 것이다.
나의 생활은 세 가지 장애, 즉 눈멀고, 귀먹고, 그리고 불완전한 발표력 때문에 상당히 복잡하게 얽혀 있기에, 나는 내 경험들을 합리적으로 다루기 위한 노력과 사고 없이는 지극히 단순한 것도 행할 수 없다. 만일 내가 바깥 세계를 이해해보려는 노력 없이 나의 신비적 감각을 꾸준히 고용했다면, 나의 발전은 저지되었을 것이고, 만사는 혼돈으로 빠져 있었으리라. 꿈과 현실, 또는 내가 적절하게 마음에 떠오르게 하지 못했던 물질과 정신을 혼합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그리고 내적(영적) 감각 없이 나는 이 두 가지 세계를 분리시켜 간직할 수 없었다. 따라서 내가 색깔, 소리, 빛, 그리고 만질 수 없는 현상에 대한 개념을 형성하는데 잘못들을 저지를 때 조차에서도 나는 나의 바깥쪽과 안쪽의 생활에 균형을 보존하려고 언제나 노력해야만 한다. 나는 남의 경험에 관심을 기울이고 그 경험을 존중함 없이는 내 촉감을 사용할 수 없다. 그렇지 않으면 나는 엉뚱한 쪽으로 가 버리든지 둥근 원을 맹목적으로 빙빙 돌기나 할 것이다. 나는 스위든볽의 “천국의 비밀들”이라는 책의 아래 문장으로부터 특별한 도움을 받아 왔었다:
“자기 밖에서 진행되는 것을 보고 지각하는 내면의 인간이 있다. 이 내면의 근원으로부터 감각적 경험은 생명을 지닌다; 그 이유가 느끼고 감동하는 어떤 능력도 이 주관적 근원 외에 또 다른 근원은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감각의 생명은 외부로부터 있다는 오류는 너무 일반화된 관계로 자연적 수준의 마음을 지닌 사람은 이 오류를 스스로는 제거할 수 없고, 합리적 수준의 마음을 지닌 사람 조차도 감각으로부터 알려진 내용을 간추리고 정리하여 핵심 만을 생각할 수 있을 때까지는 이 오류를 벗어나지 못한다.”
의식의 태양이 처음 내 위에서 비추어졌을 때, 어떤 기적이 보여졌는지! 사멸되었던 내 젊은 인생 나무의 밑동은 지식의 물에 적셔져 다시 자라나, 다시 싹을 내면서 어린시절의 꽃들로 다시 달콤해졌다. 내 존재의 깊음 아래로부터 나는 소리쳤다. “살아있다는 것은 정말 좋은 것이다.” 그리고 나는 떨리는 두 손을 생명 쪽으로 내밀었다. 그 이후 내게 떠 맡겨졌던 말못함도 쓸데없는 침묵일 뿐이었다! 내가 깨어났던 세계는 아직 신비적이었다; 그러나 그 안에는 사랑과 희망과 하느님이 있었다.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었다. 천국 안으로의 입장이 나의 이런 경험 같지 않을까?
몇년 후 내가 말하기를 배운 이후, 내 인생은 확대되어졌다. 나의 36년 전의 사건으로 인해 가졌던 흥분과 놀라움은 지금도 중단되지 않고 있다. 이 사건은 아주 따로 독립적으로, 기적적인 일로, 나로 하여금 좌절하지 않도록 내 앞에 언제나 서있다. 한 밤중 같은 침묵 안에서 벙어리이고, 혼도 없는 공기가 언어로 변형되는 것을 생각해보라. 글자 뜻 그대로, 나는 언어에 대한 개념이 없었다. 그리고 내 촉감은 말해지는 단어들의 수천의 세세한 진동들을 나에게 운반해 주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청각 없는 나로서는 상대방이 나의 말을 듣게 하는 것 뿐아니라 나자신을 이해하도록 만드는데 성공할 때까지 할 수 있는 한 최대 한도의 사고력을 발휘해야만 했다! 지금의 경우에서도 내가 좀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내 말을 하려면 마음의 순전한 힘에만 의존해야 한다. 설사 내가 말을 잘하고 있는 때에도, 나는 내 입술로부터 나가는 어조를 하나도 느낄 수 없기 때문에 언어 구사가 꽤 완전한데도 그것을 수정하느라 어쩔줄 모르기도 한다. 사실 나를 놀라게 하는 것은 내가 실패할 때가 아니라, 어렴풋이 의식하는 부분, 또는 영혼이 내 솜씨 없는 말에 끼어드는 것, 다시 말해 내 친구들이 “왜 너는 지난번 말 잘했듯이 지금 잘 할 수 없느냐?”하고 진지하게 말하는 것 같이 생각될 때이다. 만일 내가 이런 정신력을 더 충분히 발달시켰더라면, 보다 완전한 언어 구사가 가능했을 것이라 여겨진다. 내가 견뎌낸 고통과 실망은 수없이 많다; 그러나 그것들은 나자신과 바깥 세계와의 살아 있는 끈을 간수할 수 있게 해서 나에게 가져다 주는 기쁨을 위해 치룰만한 값이다. 내가 음절과 말하는 것 안에 느낌을 놓는 것을 배웠을 때, 나는 모든 시간과 영원의 기적-생각의 실체를 더욱 더 느끼게 되었다. 생각, 이로부터 책들이, 철학이, 문명들이, 그리고 인류의 기쁨과 화가 만들어지지 않던가! 컴컴한 밤중을 수년동안 여행했던 외로운 소경이 태양과 햇빛 세계의 모든 영광에 갑자기 노출되는 것 같은 상태가 나에게서는 이해성의 빛이 내 마음에 홍수로 밀려 들었을 때의 경우이다. 그리고 나는 단어들이 지식, 생각, 행복의 귀중한 상징이다는 것을 실감했다. 정상적인 사람의 경우 단어들의 사용에는 매우 친숙하다. 따라서 그는 자기가 언제 단어들을 사용하기 시작했는지 기억 못한다. 나의 경험은 아주 다르다. 나는 일곱 살이 거의 다 되어서야 언어를 획득하기 시작했다. 따라서 나는 내가 경험했던 것을 똑똑히 기억한다. 내가 단어의 소리를 배우기 전 여러 해 동안은 손 감각으로 각 단어를 배웠다. 내 상상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단어의 의미는 소리를 들으면서 거의 동시에 지각할 것이다 이었다. 다시말해 생각-상응들의 의미가 갑자기 나에게 온 것이다.
내 선생님, 애니 맨스휠드 설리반(Anne Mansfield Sullivan)은 나와 함께 한달 가까이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나에게 여러 물체의 이름들을 가르쳤다. 그녀는 물건들을 내 손에 놓고 자기 손가락에 물건의 이름들의 철자를 써보도록 하였다. 그리고 글자의 형체를 만드는 나를 도왔다; 그러나 그 때 나는 내가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어렴풋한 생각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리고 내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역시 모르고 있다. 단지 어떤 움직임을 통하여 가고, 이 위치에서 저 위치로 바뀌는 내 손가락의 촉감만 기억하고 있다. 어느날 그녀는 나에게 컵을 건네면서 단어의 철자를 썼다. 그런다음 그녀는 어떤 액체를 컵 안에 부었다. 그리고 글자 w-a-t-e-r 를 만들었다. 나중에 그녀는 말하기를, 그 당시 내가 어리둥절 하여 컵에는 물의 철자를, 물에는 컵의 철자를 혼동하면서도 그것이 맞다고 고집부렸었다고 한다. 드디어 나는 화를 냈는데 그이유는 설리반 선생이 이 단어들을 반복했기 때문이다. 자포자기된 상태로 그녀는 나를 담쟁이덩굴로 덮혀 있는 펌프 집으로 데리고 가서 자기가 펌프하는 동안 펌프 물꼭지에 컵을 대고 있으라고 했다. 그리고 그녀는 또 한손으로 w-a-t-e-r 의 철자를 힘차게 썼다. 나는 조용히 서있었고, 내 온 몸의 주의력은 찬 물이 내 손 넘어 흐를 때 철자를 쓰는 그녀의 손가락의 동작에 모아져 있었다. 딱 한차례 내 안에 이상한 휘저음, 안개낀 의식이었고, 어떤 것의 느낌은 기억된다는 것이었다. 마치 내가 죽었다가 다시 삶으로 되돌아 온 것 같았다! 내 선생님이 자기 손가락으로 하던 무엇은 내 손 넘어 흐르는 찬 어떤 것을 뜻했다는 것, 이런 표시들을 가지고 다른 사람들과 소통하는 것이 가능함을 이해했다. 이 날은 경이로운 날, 내가 결코 잊을 수 없는 날이었다! 내 앞뒤를 달려 다니는 생각들이 빠르게 나에게 왔다-내 두뇌에서 출발한 생각이 내 전체에 퍼져 갔다. 이것은 나의 정신적 깨어남이었다고 지금 생각들고 있다. 계시의 속성 안에 있는 경험도 이런 것과 비슷할 것 같다. 나는 내 안에서 일어난 이 큰 변화를 여러 방법으로 즉시 그녀에게 보였다. 나는 내가 만지는 모든 물체의 이름들을 배우기를 원했다. 그리하여 밤이 오기 전까지 나는 서른 단어를 익혔다. 존재하지 않음은 나로부터 삭제되었다! 나는 내 취약점에 반비례되는 강함과 기쁨을 느꼈다! 상큼한 감정이 나를 통하여 잔물결을 일으키고 있었다. 내 가슴에서 잠궈져 있었던 달고 오묘한 어떤 것이 노래하기 시작했다. 이 첫 계시(밝히 앎)는 그동안 내가 어둡고 소리 없는 감옥에서 소비한 모든 세월 그 이상의 가치가 있었다. 단어 “물”은 태양이 꽁꽁 얼은 세상에 내려 쪼이듯 내 마음 안으로 떨어졌다. 이 최고도의 사건 이전, 내 안에는 먹고 입고 잠자는 것 외에 아무 것도 없었다. 내 하루 하루들은 과거, 현재, 미래가 없는, 희망도 예상함도 없는, 흥미와 기쁨도 없는 그야말로 백지상태 그대로였다. 즉,

이전 나의 생활은 밤이 아니었다-낮도 아니었다.
그러나 공간을 빨아들이는 공허였다,
그리고 고정됨, 그런데 장소가 없다:
거기에는 별이 없고-땅도 없고-시간도 없고-
제지받음도 없고- 변화도 없고-선도 없고-죄지음도 없었다

나에게 온 이 변화는 자연의 경이로움으로부터 영의 경이로움으로 가는 한 계단에 불과했다. 스위든볽의 메시지가 나에게 밝히 알려졌을 때, 또 하나의 귀중한 선물이 내 삶에 보태졌다. 나는 이 감격을 말로 옷입히려 노력할 것이다. 이 감격은 마치 빛이 없던 곳에 빛이 온 것 같고, 만질 수 없는 세계가 확실히 있는 세계로 빛을 발하게 했다. 내 마음의 수평선은 동작을 더 빠르게, 전투는 더 강하게 치루는 머리가 좋은 인간 운명 쪽으로 넓혔다.
천국, 이는 방사된(radiant) 견해들을 수집한 곳이 아니라 실제로 살 수 있는 세계이다고 스위든볽은 초상화했다. 결단코 잊혀져서는 안되는 것, 죽음은 삶의 끝장이 아니고 살아감의 경험 중에서 가장 중요한 삶을 경험하는 것일 뿐이다는 것이다. 내 생각들의 큰 침묵 안에는 내가 땅에서 사랑했었던 모든 이들, 그들이 가까운 사이었든지, 먼 사이 이었든지, 살아 있거나 죽었거나 관계 없이 모두가 살고 있고, 그들 고유의 개성도 가지고 있고, 그들 자신의 습관과 매력도 잃지 않고 있다. 어떤 순간, 나는 외로움에 힘을 보태고 싶으면 내 주위로 그들을 데려올 수 있다. 만일 어떤 장벽이 그들이 나에게로 오는 사이에 있어 방해 한다면 내 가슴은 터질런지 모른다. 나는 두 세계가 있다는 것을 안다. 하나는 줄자로 잴 수 있고 규범이 지배하는 세계, 또 하나는 심정으로 느낄 수 있고 직관적 통찰이 있는 세계이다. 스위든볽은 나로 하여금 미래의 삶을 마음에 품어 보게 해주었을 뿐아니라 바랄 수 있는 삶으로 만들어 주었다. 분리와 슬픔을 가지고 죽음의 힘을 만나야 하는 생명있는 사람에 주는 그의 메시지는 하느님의 현존하심에서 불어오는 어떤 시원한 미풍처럼 되어 인간성의 가슴을 가로질러서 말끔히 청소해준다. 자연이 자신을 금색과 에머랄드색과 진홍색 옷으로 치장하고 죽음을 만나듯, 우리도 죽음을 만나되 가장 빛나는 생각들과 가장 빤짝이는 기대함으로 차려 입고 영광의 불꽃 안에서, 쾌활한 걸음으로 무덤으로 행진하여 마치 영원불멸을 나에게서 강탈하려는 죽음에 도전장을 내밀 수 있다.
사람이 위 사항을 믿기 힘든 경우가 발생하는 것은 그것이 입증 되지 않아서라기 보다는 그것을 자신이 불신하는 태도 때문에서 이다. 이기주의적 욕구는 영적 분투 노력을 궤멸시키려는 경향이 있다. 바꾸어 말해, 그의 내적 능력들이 의식하는 경험의 지점에까지는 아직은 도달되지 못했다고 말하는 것이 사실에 더 가까울 것이다. 그들의 내적 기능들이 결과를 가져다 주기에는 너무나 유약한 편이다는 말도 된다. 그는 과도하게 얻고자 하는 것(탐욕)이 자신의 품성에 얼마나 유해한 영향력을 행사하는지를 실감할 수 없다. 그는 자기의 영적 존재의 참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다. 그는 물질적인 것만이 진짜라고 믿는다. 우리의 문명은 스위든볽 같은 철학자의 가르침이나 위대한 사상가의 선견에 무관심한 정도에 비례하여 실패하고 만다.
우주 같이 넓고 신중한 생각들을 지니고, 자기 손에 지혜를 쥔 스위든볽은 천사들이 영계의 이 구역으로부터 저 구역으로 인도하여 사후 우리가 맞는 삶과 불멸한 것들의 실체를 어떻게 자기에게 보였는가를 말하고 있다. 천사들은 그의 선생이요 안내자였다. 그는 천국에 자기 혼을 맡겼다; 그는 신성한 섭리의 방대함, 영원한 삶의 굉장한 환경을 감지했다. 그는 창공과 별들의 감겨지는 진로를 걷는 것도 허락되어졌다.
나도 알아차리는 것은, 어떤 실력있는 비평가는 나를 경멸의 자기들 수레바퀴에서 부수어뜨리려 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내 빈약한 철학을 그들의 날카로운 환락의 모루 위에서 과학으로부터 추려낸 이성의 망치로 수정하려 노력할 것이다. 즉 “모든 창조는 물질 속의 보이지 않는 원자 안에서 그 자체에게 왕관을 씌운다. 이것이 시작과 끝이다.” 아마….; 그러나 백합의 꽃받침(cup)에 이슬방울이 아직은 있다; 장미의 가슴에 향기가 있다, 그리고 나뭇잎 아래 새들이 날개를 접고 있다! 나는 죽음의 눈을 찬찬히 들여다 보는 것을 두려워하는 가련한 신앙을 이해할 수 없다. 죽는 것을 보고 상처받는 신앙은 허물허물한 갈대에 (몸을) 기댄 것이나 흡사하다. 불변의 생각을 가지고 나는 보고있는 모든 것을 넘어야 보이는 것을 뒤쫓고 있다. 내가 영적 빛 안에 서서 “생명과 죽음은 하나이다 ”라고 외칠 때 까지 나는 불변의 생각들을 뒤따를 것이다. 내 삶을 뒤돌아 볼 때, 나의 가장 값있는 은덕(obligation)은 내가 결코 보지 않았던 분들인 것 같다. 나의 아주 절친한 사람들은 지성(mind) 속에 있는 이들이고, 나의 충성스럽고 도움 주는 친구들은 영(spirit) 속에 있는 이들이다.
나는 종교 없는 나자신은 상상할 수 없다. 만일 종교 없는 나를 말하는 것보다, 심장 없이 육체가 살아 있다고 상상하는 것이 더 쉬울 것이다. 출생 때부터 눈 멀고 귀 먹은 이들에게 영계를 설명하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다. 대부분의 정상적 사람에게는 영적인 것들이 거리도 먼 것 같고 어렴풋하듯, 나에게는 자연적인 것들 중 많은 것들이 그러하다. 나는 스위든볽의 가르침을 담고 있는 내 큰 점자책 안으로 내 손을 깊이 던져 넣는다. 그리고 이 책에서 물러날 때 내 가슴은 (밝히 안) 영계의 비밀들로 가득하다. 내적 감각(inner sense),(혹시 당신이 내적 감각이 무엇인지 잘 몰라서 그냥 “신비적(mystic)” 느낌(sense)이라 말하고 싶다면 말해도 괜찮다) 이 감각은 (자연인에게) 보이지 않는 것을 미리 보게(선견, vision)해준다. 나의 신비한 세계 안에는 내가 결코 “보지 못했던” 나무와 구름과 별과 소용돌이 치는 시냇물이 사랑스럽게 있다. 자연계의 사물을 보고 있는 나의 동료들이 거기에는 아무 것도 없다 하는 그 곳에 아름다운 꽃들과 새들과 웃고 있는 어린이들이 있는 것을 자주 의식한다. 내 동료들은 내가 “바다에도, 땅에도 있지 않았던 빛”을 보고 있다 하여 회의적 분위기에서 나를 대할 것이다. 그러나 내가 아는 바, 그들의 신비적 감각은 잠들어 있다는 것, 따라서 그들의 삶에는 메마른 장소가 많다는 것이다. 그들은 미리 볼 수 있는(vision) 것들 보다 이미 보았던(fact) 것들을 선호한다. 그들은 과학적 증명을 원한다. 그들은 그 증명을 가질 수 있다. 지칠줄 모르는 인내가 그 속성인 과학은 인간의 뿌리를 원숭이에게 까지로 되돌아가 추적하여 인간의 뿌리를 증명해냈다고 만족해 한다. 그럴지라도 하느님은 이 원숭이로부터 미래의 삶을 미리 보고 깨닫고 사는 사람을 창조하신다. 삶이 죽음을 결국은 만나듯, 과학도 그렇게 영을 만난다. 그 이유가 삶과 죽음은 하나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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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은 기쁨 속에 있다

VII
생명은 기쁨 속에 있다

기쁨과 행복에 관련해 스위든볽이 말한 것은 마치 만개한 과일 나무의 꽃과 잎 만큼이나 많은듯 하다; 따라서 그가 선포한 인간의 생명은 그가 사랑한 것의 기쁨 안에 있다고 하는 대목에는 별로 놀랄 일은 아닌 것 같다. 흥미가 없으면 가슴도 차다. 그리고 자극 오는 것이 없으면 기쁨도 없다. 인간의 행복은 작지만 셀 수 없이 많은 기쁨들로 구성되어 있다. 마치 시간이 분과 초로 만들어진 것과 비슷하다; 이런 것을 생각해 보려고 다섯 감각을 다 지닌 사람들이 멈추어 서는 일은 별로 많지 않은듯 하다. 게다가 자기에게 내려진 복을 세어 보려고 앉은 사람은 더욱 적은 것 같다. 다행히 세어 본 사람이 있다면, 그는 의무에 충실하라는 듣기 싫은 소리도 귀를 매혹하는 음악처럼 그에게 들려와 그의 삶은 계속 분주해질 것이다.
나는 이 책에서 쾌락주의는 언급하고 싶지 않다. 그 이유가 쾌락주의는 목적으로서 행복을 추구할 뿐, 유용성(쓸모 있음, usefulness)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가 “우주는 혼에게 잔치를 베풀어 주려고 신성한 은혜에 의해 펼쳐진 식탁이다” 라고 말할 때, 이 책을 읽는 어느 진지한 사람에게 가벼이 느껴지지 않기를 바란다. 마음의 각각 모두의 능력, 그리고 육체의 모두 각각의 욕구는 각기 기쁨을 가지고 있다. 이 기쁨이 갱신과 재건설의 수단이다. 인간의 본성에 있는 물질적, 정신적 각각 모두의 힘은 같은 성질이고 만족을 주는 것을 선택할 기회를 가지고, 선택된 그것이 자신의 일부가 되게 한다. 흔히 상상해버리고 마는 것은 우리가 영적인 것을 얻을 수 있기까지, 자연적 쾌락은 단념해야 한다인데 그럴 필요는 없다. 반대로, 우리가 내적 삶 안에서 일어나 사는 만큼 더 오묘하게 자연적인 것을 즐겨야 할 것이다. 사랑하는 친구가 보낸 포도 한송이는 그 얼마나 미묘한지! 둥글둥글함의 아름다움, 색깔, 시큼달큼한 향기, 이에 더하여 사랑이, 상상함이, 시적 구상까지 연달아 주렁주렁 매달려 있지 않는가? 두뇌를 활기 띄게 하고 심정으로부터 꽃을 피게 하는 기쁨을 향기 있는 꽃에서 발견하는 일은 그 얼마나 풍요하고 다채로운지! 창공과 물과 땅의 끝없는 변화는 우리의 신앙과 꿈의 중심이 되는 더 높은 세계의 사랑스러운 거울이 되어 우리 속에 간직되는 바 얼마나 매력적인지!
이 세상은 걱정과 슬픔이 가득하다는 것은 부인 못하나, 칙칙한 주위 환경과 짜증나는 업무 안에 감추인 기쁨의 반짝이는 수정들을 발견하는 일은 어쩌면 우리가 서로에게 지불해야할 의무가 있는 은혜스러운 빚이다. 스위든볽 또한 매일 별 변화 없는 하루의 스케줄로 말미암아 짜증나서 그만두었을법 한데, 오히려 그는 그 속에서 무한정으로 저장된 기쁨의 창고들을 보았다. 그는 심정으로부터, 그리고 천국의 심정으로부터 “진정한 기독 종교”라는 책에 이렇게 썼다:
“사랑으로부터의 기쁨(joy)들, 이것은 또한 선행(charity)으로부터의 기쁨들인데, 선인 것이 선이라 불리우게 하는 원인이 된다; 그리고 지혜로부터의 매력들, 이는 또한 신앙으로부터의 매력들인데, 참된 것을 참되다라고 불리게 하는 원인이 된다; 그 이유가 다양한 종류들의 기쁨과 매력이 그것들의 생명을 만들고, 그리고 이것들로부터의 생명 없이는 선들과 진리들은 생명 없는 것과 같다. 그리고 또한 열매 없음과 같다.”
“본질이 선인 사랑의 기쁨은 태양의 열과 같아서 비옥한 토양 위에서, 과일 나무와 옥수수 들판에서 그것들을 번성하도록, 생기 있도록, 작용한다. 그래서 햇볕이 작용하는 곳에는 생산이 있다. 말하자면 낙원, 여호와의 동산, 그리고 가나안의 토지 같다; 그리고 진리로부터의 매력은 봄철의 태양의 빛과 같이, 그리고 향기로운 냄새를 발산하는 꽃을 담은 수정 그릇 안으로 흐르는 빛과 같다.”
이기심과 불평은 마음을 상도에서 벗어나게 하고 흐리게 한다. 반면 기쁨을 지닌 사랑은 상상력(vison)을 맑게 하고 또렸해지게 한다. 이 사랑은 과거 무디고 하찮게 여겨졌던 것 안에서 경이로운 것들을 보도록 지각에 섬세함을 준다. 이 사랑은 영감의 샘들을 다시 채운다. 그리고 이 사랑의 기쁨은 물질 만능으로 꽉 막힌 능력들을 꿰뚫고 흐르는 피와도 같이 생명의 새로운 강을 내보낸다.
즐거움(delight)은 가치 증대와 자아 개선 그리고 더 고상한 본능의 습득에 필수이다…가 사려 깊은 사람들 사이에 긍정적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앎이 주는 기쁨 외에 어느 방법으로 어린아이를 공부하도록 유도할 수 있을까? 맛의 쾌락이 신체로 하여금 음식을 소화흡수 가능하게 하지 않을까?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않는 것은 본체 만체하고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선택하지 않는 마음이 있다고 생각되는가? 자기를 꾀는 엘도라도(황금의 나라, Eldorado)에 자기의 내적 의지를 고정시키고, 자기가 그것을 실현할 때까지 기다리면서 이 사람은 그의 내적 의지와 더불어 무엇을 할까? 용감한 자와 모험가로 인간의 자연적 자원을 새로이 발견하고 불리는 쪽으로 인도하는 것은 그것으로 인해 얻을 기쁨을 미리 꿈꾸도록 하는 것 말고 무엇이 있을까? 새로운 진리들을 이해함에서 느끼는 기쁨, 새로운 봉사를 타인에게 줄 수 있어 느끼는 기쁨을 위해서가 아니다면 왜 과학자가 정신적 산고의 고통과 짜증나는 일들을 자주 견뎌야만 할까? 슬기로운 선생 또는 친구 또는 진정한 개혁자는 나쁜 행위자를 무력으로 올바른 길로 질질 끌고 가려 시도하지 않는다. 그는 고집센 의지를 부드럽게 하고 부루퉁한 마음이 올바른 생각에 매력을 두게 할 유쾌한 영향력을 가진 훈련을 기술적으로 병합한다. 누군가, 그가 자기 심정의 선함으로부터, 도움되는 말을 하고, 유쾌한 미소를 던지고, 또는 또 다른 길에 있는 거친 장소를 평탄해지게 하고 있다면 그는 자기가 느끼는 즐거움이 자신의 일부임을 넌지시 암시받는 바, 그는 그 즐거움으로 말미암아 살아감을 눈치챈다. 한 때 제거 불가능인 것처럼 보였던 장애물을 넘어섬으로 가지는 기쁨, 그리고 성취함을 한걸음씩 성취함 쪽으로 더 전진하는 개척자의 추진력으로부터의 기쁨-이와 비슷한 기쁨이 어디에 또 있을까? 만일 행복을 추구하는 이들이 잠깐 멈추어 서서 위 사항을 생각한다면, 그들은 자기들이 실지로 경험하는 즐거움은 아침 꽃 위에 앉아 반짝이는 이슬방울이나 그들 발 아래 풀들 만큼 셀 수 없이 많음을 볼 것이다.
그럼에도 내가 만나는 사람들 중 기쁨을 재산으로 실감하는 이들은 많지 않은 것 같다. 그들이 행복을 추구함에서 곁길로 멀리 간 것을 관찰할 때 나에게 그것은 이상스럽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다. 그들은 아주 이상한 장소에서 행복을 찾고 있다. 그들은 행복을 찾는 일환으로 왕과 여왕을 방문하고 그들에게 굽신거린다; 그들은 여행이나 여흥에서 행복을 추구한다; 그들은 행복이 감추여 있는 보물 안에 드러누워 있을 거라 생각하면서 땅 깊이 파헤치고 있다. 여러 많은 사람들은 종파나 대표자 회의, 또는 정당의 정책을 위하여 자기들의 지성을 미신에 사로잡히듯 족쇄를 채움으로 자신들로부터 기쁨을 강탈당하고 있다. 아마 가장 애처로운 것이라면, 자기의 심정과 지성에 복을 줄 준비가 되어 있는 달콤한 재산의 세계가 언제나 자신 안에 있는데 이것에 눈은 못 보게 하고, 귀는 못 듣게 하고, 배는 굶주려 허덕이게 한다. 각 사람 속의 이 재산은 하느님의 행복으로부터 나와 각자에게 나누어 준 그분의 귀한 선물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모르고 있다.
남을 돕다가 자신을 발견하는 일은 새로이 찾은 기쁨과 더불어 자신을 놀라게 한다. 그 이유가 즐거움은 자각의 수단으로도 일하기 때문이다. 스위든볽은 이렇게 말한다. 만일 사람이 자기 자신의 즐거움들을 검사한다면, 자기 중심이었다는 것을 실감하는데, 그 이유는 자기의 대부분의 에너지를 자신의 삶을 모양짓는데 쏟고 있거나 자기의 사적 목적들을 위한 지식을 획득하는데 소비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참고 견디는 기쁨들은 타인을 위해 일하고 세상에 새 생명을 창조하는 이타적 목적이 출생되도록 그를 몰아 부친다. 이기심 없는 즐거움들은 그에게 승인하라고 속삭인다. 그리하여 승인된 이후 그는 세 배나 더 강한 사람으로 일어난다. 그 이유는 그가 새 힘들과 새 자아 통찰력들을 의식하기 때문이다. 영의 즐거움들의 고향으로 향한 자신의 영의 발자국을 밟고 갈 때 만이 당신은 자신의 형상과 얼굴을 바라볼 것이고 생명의 책에서 자신의 운명을 읽을 것이다.
그러나 스위든볽은 또 말한다. 만일 사랑스럽지 못한 즐거움을 가진 사람이 자신의 못된 즐거움을 인정하는 지적 정직함을 가지고 있고, 그리고 뭔가 더 가치 있는 쪽으로 자신의 심정을 들어 올리려 진지하게 애쓴다면, 그는 자포자기할 필요가 없고 실망하여서도 안된다. 옛 자기를 홀린 것을 빨리 떠나는 만큼, 순수한 행복들이 그의 혼 안으로 돌진해 올 것이다. 마치 오랫동안 닫혀 있던 주택의 문을 열 때 압도적인 센 기류가 빨려 드는 상태 같다. 그가 더 행복해질수록, 그는 더 강해져 그의 바램쪽으로 그의 바깥 환경도 개조될 것이다. 한 때 부셔졌던 성벽에서 깨진 틈만을 찾으려는 적에 대한 두려움을 마음에 받아들이는 것은 실수를 저지르는 셈이다. 각각의 두려움 대신, 그는 새 즐거움을 건설하고 호된 시련이 지나갈 때까지 그 즐거움에 머물러야 한다. 이것이 근대 사상에서는 “취미(hobby)”라는 단어로 풀어 말해진다. 그리고 얼마나 많은 불운한 남,녀들이 희망이 전혀 없는 악한 경향성으로부터 나와 미처 꿈도 꾸어보지 않았던 자기 발달로 도움을 얻었는지 모른다. 한마디로 천국이 주는 정신 요법이다. 죄를 용서받음이란 당사자가 나쁜 바램과 악한 생각들을 몰아내고, 선으로부터의 힘에 하모니를 이루어 일할 때, 상한 심정을 채우는 위로부터 있는 기쁨의 수원(well-spring)이다.
5분 만이라도 잠간 틈을 만들어 사랑스러운 꽃이나 구름, 별을 찾아보고, 혹은 시를 배운다든가, 또는 다른 사람의 지루한 업무를 빤짝이게 해줄 수 있다면, 누구나 자기만의 특별한 어떤 즐거움을 가지리라는 것은 하등 의심할 필요가 없다. 그런데 만일 아름다움과 기쁨의 미소들을 주고 받는 것은 포기하고 넌더리나는 의무들과 이해 관계들에 언제나 집착한다면, 녹초가 되는 지경까지 지독하게 근면했던 것도 그 무슨 쓸모가 있겠는가? 그들이 아름답고 신선하고 영원한 존재를 자기들 생활 속에 할 수 있는 데까지 입장시키지 않는다면 그들은 반드시 천국으로부터의 문은 닫고 대신 회색 먼지가 그들 모든 존재 위에 내내 있게 될 것이다. 하늘(sky)이 땅 보다 더 빛남을 느끼려면 땅 자체도 진가가 인정되고 즐겨져야 한다. 땅 자체의 아름다움을 사랑했었어야 해돋이와 별들의 광선을 품을 권리도 있다.
성인들이나 천재들은 매우 드물다; 그러나 그렇게 되어봤으면 하는 희망은 모든 사람 안에 언제나 있을 수 있다. 이런 사람들이 흠모한 순수한 모든 즐거움은 “선한 의지의 중심점”이 되어 있다. 그리고 우리가 거주하는 사랑스러운 모든 현장, 우리가 듣는 모든 하모니, 우리의 경건한 손으로 만져지는 우아하고 부드러운 것은 근심이나 가난이나 고통이 파괴할 수 없는 달콤한 생각들을 지닌 많은 사람에게 날개를 달아준다. 기쁨은 결국에 가서는 “잘 하였다”라는 영원한 생명의 단어를 발음하게 하는 사랑과 신앙의 소리이다.
기쁨이라는 단어는 스위든볽에 의해 설명되는 교리들로부터 분리될 수 없다. 그 시대에서 그의 철학은 중세 시대의 고행주의나 철과 같이 냉랭함 뒤를 이어 나온듯 여기게 하는 철학의 새로운 분파였다. 그의 가르침 중 사람들이 놀란 것 중 하나는 즐거움의 보편성, 즉 즐거움은 생명을 섬긴다는 것이다. 결혼의 행복을 증대시키고 어린 시절의 삶을 아름답게 하는 인간의 능력 안에 있는 탁월한 신앙은 겁많은 불신용, 하급의 이상향, 어리석은 방법으로 지식을 나누어 주는 것 보다 훨씬 뛰어나다. 한마디로 진정한 삶은 기쁨을 가득채우는 심정의 수용 능력이다.
우리는 사랑의 기쁨의 위대함에 일치하는 고상한 생각들, 즉 스위든볽이 아주 큰 원 안에서 기술한 것 처럼 신성한 섭리를 지각하기 시작한다. 지금까지 하느님의 섭리는 여느 독단적 주장의 모순으로 인해서 어두워져 왔었다. 그리고 그것의 의미는 특별히 소홀시함(neglect)들을 함축하는 특별한 설비(provison, 예정론) 안으로 자주 퇴화되었다. 그러나 스위든볽의 가르침에서 하느님의 섭리는 하느님의 사랑과 지혜의 나라, 쓸모 있음(use)들을 창조하는 나라(government)임을 보여주고 있다. 그분의 생명은 이 사람이나 저 사람이나 같은 양과 질이어야 하고, 그분의 사랑 역시 모든 이에게 다 같아야 하는 바, 그분의 섭리는 반드시 보편적이어야 함이 필수이다.
소홀시함 중에서 늘 지적되곤 했던 것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축복으로부터 방대한 군중이 제외된 것이다. 어쨋거나 이 생각은 하느님은 “그분의 음성을 듣고, 그분께 순종하는 다른 양”도 가지고 있으시다는 더 편견 없는 이해에 길을 터주고 있다. 그분은 사방 각처에 여러 종류의 종교를 설비해주셨다. 그리고 올바른 생활이 이상향이고 그것에 신실하는 한, 무슨 인종이든, 무슨 신조이든 문제가 되지 않는다. 모든 이에 의해 기억되어야 하는 한 가지 원리는 종교는 교리를 살아내는 것이지 교리를 단지 믿기만 하는 것은 아니다는 것이다. 모하멭이 우상 숭배를 뒤엎으려고 일어난 것도 하느님의 섭리 속에 있었다. 이 위대한 예언자는 동양의 천성에 어울리는 종교 형태를 가르쳤다. 그리고 선을 위하여 강한 영향력을 행사한 이 신앙은 제국과 왕국에서 실행되었다. 종교 사상의 역사는 하느님께서 증거도 없이 그냥 두시는 일은 결코 없다는 것을 나팔 소리로 외치고 있다.
전통적 예배 풍조가 있는 곳은 어디이든, 한 나라의 독단적 주장이 사악한 쪽으로 돌아서도, 이들에 의해서도 해를 입지 않고 남아 있는 단순한 선한 사람들이 많은데, 그 이유는 순박한 사람들은 부패함에서 아주 먼 높은 장소에 있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가 마음에 있는 천국으로부터 신성한 섭리를 관조한다면, 과거의 경험들은 도움되는 것과 지혜의 귀중한 교훈들을 가져다 줄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인생의 하모니를 느낀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하느님의 방법을 우연이나 운수, 갈등 같은 세계로부터 찾는다면 우리는 그 교훈들을 엉뚱하게 이해할 것이다. 즉 우리는 그분께서는 마음에 들면 상을 주고, 비위에 거슬리면 복수나 벌을 주시는 하느님, 상과 벌을 임의적으로 분배하시는 분이다고 간주하고 만다는 말이다. 우리는 그분의 광대하심을 우리의 대단찮은 애국심을 가지고 추정하고 자기 나라의 승리를 그분께 간구한다. 그러면 우리 각각은 서로 대립하는 분파로 돌아서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하느님은 어디 계신가? 나는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만일 하느님이 계셨다면, 그분은 인간이 절대로 죄를 짓지 않도록 창조하였을 것이다.” 이는 마치 우리 모두가 자동 인형이라도 되기를 원한 것처럼 비친다. 어쩌면 죄를 범할 수 없게 하는 것은 독재자 만 만족시킬지 모른다; 이런 개념 앞에서 영은 와들와들 떨지 않을까? 사실상, 하느님을 부인함은 자유와 인간성을 부인함에서 발견되고 만다. 믿음의 살아 있는 가치는 우리 자신의 제한된 경험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인류에 얼마나 유익했는지에 의존된다; 위압적인 하느님의 큰 혜택(Beneficence)은 우리의 지식의 정당함을 증명하는 유일한 가르침으로 있고, 문명(사회)의 체면을 유지하게 하는 유일한 가르침으로도 있다. 이 혜택은 많은 선물을 포함하고 있다. 그 중에서도 대표적인 것은 우리로 하여금 자아 (이익)만으로부터 빠져나오게 하는 힘의 선물, 어느 인간 안에 있든 고귀한 것은 내 것 되게 하는 힘을 향유하고 우주 안의 경이로움을 이해하는 힘의 선물 등등이다.
스위든볽의 “신성한 섭리”라는 책은 하느님께서 생명과 기쁨을 주시는 그분의 속성의 무한한 필요 때문에 우주를 창조하셨다는 진리에 대한 강력한 개인적 증거이다. 이 책은 너무나 멀고 접근 불가능한 신성을 믿는 것은 무익하고 속이 빈 신앙이다는 불평에 위안이 되는 말을 여러 문단에서 보여주고 있다. 이 책의 저자는 “하느님의 사랑의 본질은 타인을 사랑하고, 그들과 하나 되기를 바라고, 그분 자신으로부터 그들을 행복하게 만든다”라고 선포한다. 어쩌면 이 선포가 신성한 섭리의 전체일 것이다. 우리가 그분의 영적 재건 사업의 일에서 우리의 할당된 몫을 완성하기를 원한다면, 그분의 취향에 발맞추어 따라가게 해서 자신을 (다시)태어나게 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신성한 섭리는 늘 변화하는 우리 생활에서 일시적인 복 만이 아닌 영원한 복지와 행복이 되는 것을 더 찾으신다. 그분은 우리 손을 거쳐가는 수도 없이 많은 작은 일들, 날마다 가지는 작은 기회들을 어떻게 사용하든지 자유하게 놓아두시고 언제나 침묵으로 일관 하신다; 그럼에도 언제나 그분은 모든 이 각각이 이성에 따라 자유 안에서 행동하는 권리를 지키신다. 그 이유가 자유와 합리성은 그분이 인류에게 선물한 불멸함에 대한 표(token)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자칫하면 이기적으로 살려 하기 때문에 이런 경향성을 상쇄할 뭔가가 우리 안에 있어야 할 필요가 있다. 더 나은 생활을 만들어 보려 선택하는 것은 그런 생활에 대해 사전에 어떤 지식이 있었다는 말이다. 만일 더 고상한 종류의 다른 경향성이 우리 안에 현존하지 않는다면, 무엇이 우리가 동물 같이 되어가는 것으로부터 구해내 줄 수 있을까? 선과 악, 양쪽을 다 알지 못하면 우리는 자신을 위한 올바른 선택을 자유롭고 슬기있게 선택할 수 없다.
아래에서 말하려는 전부는 스위든볽의 교리, “유물(reliquiae)”을 설명하는 것이다. 이것은 생명을 형상짓는데 강력한 요인이다. 이 단어는 흔히 “남아 있는 것(remains)”으로 번역되는데, 유아기 시절로부터 우리 안에 저장되어 인생 마지막까지 남아 있는 사랑과 진리와 미에 대한 감명을 의미한다. 우리가 태어남은 우리의 의지에 의해서 된 것은 아니다. 우리의 유전적 악한 경향성들은 어린 시절까지에서는 침묵하고 있다. 어린아이는 천국에 가까이 있고 우리로 하여금 가끔은 천사들이 어린아이를 시중들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한다. “어린아이의 천사는 천국에 계신 나의 아버지의 얼굴을 언제나 바라보고 있다.” 진실로 어린아이는 어떤 다른 존재와 다른 특성과 잠재성을 가지고 “영광의 길게 늘어지는 구름들” 안에 온다. 어린아이는 주님만으로부터 선량함과 지혜의 수용능력을 받는다. 참 진정한 의미에서 천국은 어린아이를 태양의 햇빛 처럼 에워싼다. 스위든볽은 아름다운 순진과 신뢰를 어린아이로 설명한다. 우리는 어린아이 시절 속의 순진과 신뢰를 완전하게 잃는 일은 결코 없다. 쌓아두는 곳인 우리의 수용능력은 신성과 내가 친척 관계임을 느끼게 하는 거룩한 장소 이다. 이 거룩한 장소(holy place)는 희생(sacrifice)의 장소,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과 영원히 죽지 않는 운명이 공통으로 이용하는 지식의 영역, 인생의 위대한 영적 전투를 수행하는 시련의 천막이다. 여기에 눈물과 고민과 겟세마니의 피나는 땀 흘림이 있다. “여기서, 역시, 승리하였다”하고 자신에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행복하다! 여기는 우리가 선택했던 삶의 성지(shrine)이다.

생명은 사랑 속에 있다

VI

생명은 사랑 속에 있다

종교는 하느님과 나의 관계, 그리고 동료되는 사람과 나의 관계, 그리고 내가 나에게 빚진 것 (나의 의무)에 관한 과학이라고 정의되어져 왔다. 기독교 신앙이 올바르게 이해되었다면, 이 종교는 사랑의 과학이다. 정녕 그렇다. 주님께서 육체의 눈으로도 볼 수 있는 지상에 거주 하셨을 때, 죽어야 할 운명들에게 이 두 계명을 선포하셨다. 즉 “하느님을 사랑하라와 이웃을 사랑하라”이다. 그리고 이 두 계명에 “모든 율법과 예언서가 매달려 있다”는 것도 말씀하셨다. 누가 신성한 사명으로 가득차 있었던 다정한 나사렛 사람 만큼이나 심오하게 성경을 알 수 있었을까? 그리고 위 성경 내용을 향한 모든 인간의 생각을 알 수 있었을까? 그분은 복음서 모두를 망라해 사랑은 신성하게 필요함을 강조하셨다. “하느님은 사랑이시다, 하느님은 사랑이시다, 하느님은 사랑이시다!”는 다음의 구절들에 대한 불변의 의미이다. “만일 네가 나를 사랑하면 내 계명을 지켜라”; “이것이 영원한 생명이니 유일한 참된 하느님, 그분이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너희가 아는 것이다”;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왕국과 그분의 정의를 추구하라, 그러면 이런 모든 것(물질과 물질적 복)이 네게 보태질 것이다”; “나는 길이고, 진리이고, 생명이다.” 그분께서는 미워함은 그것이 크든 작든, 모든 세세한 것에서이든 하느님에 반대되는 것임이 우리의 마음에 언제나 떠오르게 하셨다. 그리고 지옥은 하느님에 의한 벌의 차원에서가 아니라, 미워함이나 불타는 욕망과 상처난 교만의 잔인한 고통과 심술궂은 자기 본위 안으로 자신들을 던지는 이들에게 되돌아 오는 피할 수 없는 악의 법칙에 따른 결과이다가 주님의 교훈에 담긴 의미이다. 그분이 어느 각도에서 시작하셨든지 상관 없이, 그분은 다음 사실들로 되돌아 가셨다. 즉 그분이 세상의 재건축을 맡기신 대상은 재물이 아니고, 특권 계급도 아니고, 권력도 아니고, 학식도 아니었고, 그러나 인류의 더 나은 직관(instinct)에…-사람들의 더 고상한 이상향과 감정에…-의지의 운반자요 행동 속 동력의 힘인 사랑에 맡기셨다. 그분은 가능한 방법을 동원해 그분의 말씀을 바꾸어 말해오셨다. 그리고 의심자들에게 사랑은 선한 사랑이든, 악한 사랑이든 자기들 삶의 생명이다는 것, 자기들 생각 속의 연료이다는 것, 자기들 콧구멍 속의 숨이다는 것, 자기들의 천국 또는 파멸이다는 것, 등등을 확신하도록 모든 가능한 일을 해주셨다. 그분은 거룩한 분이시다 이든, 그분은 무시무시한 분이시다 이든, 그분은 최고이신 분이다 이든…그 무엇에 있어서나 사랑의 복음이심에는 어떤 수식어도 필요 없고 예외도 없다.
그럼에도 이 천 년 동안 소위 믿는 자들은 “하느님은 사랑이시다”를 반복해왔다. 그러나 자신들을 자극하는 힘을 느껴봄도, 이 짧은 문장 안에 포함된 진리의 보편성을 감지함도 없이 구호에 그친 것이다. 사람들이 인간의 생명에 관한 것을 사실 상의 문제로 여겨 철학적으로 연구를 시작한 이래 가장 고상한 주제인 “사랑이 생명이다”는 주제에는 불행하게 침묵이 있어 왔다. 그래서였는지 모르나 참으로 하느님이 그분 자신을 알게 하도록 어떻게 오셔야 했는지, 그러나 오신 그분 자신이 하느님 그분인 줄을 알지 못하는 비극이 초래되었다. 주 전 5세기경 원자론을 주창한 그맄의 철학자 엠피도클스(Empedocles)는 자기가 사랑의 본성을 이해하려 한 첫 번째 사람이라고 자각하고, 인간 각종 일에서 사랑의 진정한 위치를 인식하였다. 그는 세상이 구성된 요소들을 발견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리고 어떤 과정을 수단으로 각 요소들이 결합하고 있는지를 알려고 하였다. 그는 그 요소 목록이 불, 물, 땅, 공기라고 명명한 다음, 계속해서 말하기를, “그리고 그것들 사이 사이에 사랑이 있다. 그런데 사랑은 길이와 넓이가 같다. 너는 정신적 환상 안에 그녀를 고정해두고 멍청한 눈을 가지고 앉아 있지 마라. 죽을 운명의 부분들 안에 이식되어 있다고 생각된 그녀는 죽을 운명의 사람으로 쓸모 있는 것들을 생각하게 만들고, 우호적인 행위들을 행하게 한다 그들은 그녀를 기쁨(Joy)과 아프로디테(Aphrodite)라 부르고 있다. 죽을 운명은 그녀에게 없는데도 세상의 요소들 사이에서 관찰되고 있다.” 한 세기가 지나 그리스에서 철학의 가장 빛나는 시대에서 플라토의 혼은 엠피도클스의 말들로 말마암아 진한 의분이 지펴졌다. 그래서 그는 열띤 웅변으로 그 시대 지식층의 무정함에 맞서 이렇게 이의를 제기했다: “다른 신들은 그들의 영예로 만든 시나 찬양 노래를 가지고 있는데, 위대하고 영광되는 신, 사랑에게 예찬자가 없는 것은 이상하지 않는가! 현자들은 헤라클레스나 다른 영웅들의 미덕을 두고 긴 산문을 썼고, 소금의 유용함을 감동적 대화의 줄거리로 만들고, 하여 이런 저런 것들을 창조하는데 열의 있는 관심이 있어 왔다. 그럼에도 오늘까지 사랑의 찬미를 노래하고저 대담하게 시도한 자는 아무도 없다. 고로 이 위대한 신은 매우 등한시되어 왔다.” 나는 용기를 취급한 그의 강연인 운명(Lachesis) 안에 있는 것으로 기억하고 있는데 거기서 그는 말했다, 누군가에게 피해를 주는 것, 그 대상이 가장 천한 노예라 해도 그것은 하느님과 인간과 우정관계 안에 있는 것들을 결합시킨 거룩한 인연(bond)을 모욕하는것이다고 말했다. 그런다음 신성한 사랑의 음성은 그것의 메시지를 미워함에 무딘 인간의 귀에 말하는 것을 제외하면, 그리고 여기 저기 천국의 말투에 귀를 기울인 몇몇 용감한 지성과 사랑의 음성을 땅의 거친 말로 바꾸어 보려고 시도한 몇몇을 제외하면 이천 년은 그냥 지나가고 말았다. 성 어거스틴(St. Augustine),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켐피스(a` Kempis), 스피노자(Spinoza), 제이곱 보헤미(Jacob Boehme), 그리고 이외 여러 다른 신비주의자, 그리고 후렌시스 베이컨(Francis Beacon) 등등은 자기들 시대의 변두리에 용감하게 우뚝 서서, 이해되지 않은 말들의 어둠 아래에서 굴러다니는 광대하고 알려지지 않은 느낌의 바다 안을 깊이 응시했다. 그들은 사랑의 방식, 사랑의 일, 타인을 사랑함, 자기를 사랑함을 꿰뚫어 보는 통찰력을 가졌다. 보헤미는 이기심의 불태우는 욕구와 바램을 “지옥의 어두운 벌레”라고 불렀다; 이 벌레를 성경은 “그것들의 벌레는 아직 죽지 않는다, 그리고 그것들의 불은 꺼져지지 않는다”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18세기 이성의 냉혹한 시대로부터 스위든 볽이 일어났을 때, 사랑은 교리 차원으로 승격되어 만물의 중심과 생명, 만물의 아름다움과 보존자로서 다시 빛을 발한다. 교리 차원의 사랑을 위한 근거를 성경으로부터 찾아 이 교리를 발전시켰는데, 어느 정도까지는 그의 책 “천국의 비밀들(Arcana Coelestia)”에서, 그리고 더 완전하고 체계있는 교리는 그의 책 “하느님의 사랑과 지혜”에서 이다. 그는 사랑의 상태들-사랑의 활동들, 힘들, 기능들, 사랑의 건설적, 예방적, 용기를 불러일으키는 명령들 등등의 사랑의 용어를 가지고 인간 경험의 전체 세계를 해석하였다. 더 나아가 이 선각자가 발견한 바, 가장 탁월한 측면에서의 사랑은 신성 자체와 일치하고 있다는 것, “주님은 천사와 인간의 영 안으로 흘러든다”는 것, 물질적 우주는 하느님의 사랑이 생명의 사용에 알맞은 형체로 작업된 것, 그리고 하느님의 말씀이 올바르게 이해되었다면, 인간이라는 모든 어린이를 향한 그분의 사랑의 충만과 경이로움을 밝히 알려주는 책이다는 것, 등등이다. 이리하여 드디어 신성한 혼으로부터 무한을 통하여 여행하는 희미한 광선이 귀먹은 마음, 눈먼 인간성에 다달았다. 이러면 주님의 두 번째 오심이 (당신에게) 가까왔다.
생명에 관한 스위든볽의 가르침은 우리가 생명과 실체(existence) 사이를 조심스럽게 구분한다면 가장 잘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주님은 우리에게 생명을 나누어 주시는 명백한 목적을 위하여 각자에게 실체를 부여하신다. 그분의 무한한 사랑은 그분을 창조자 되도록 재촉한다. 그 이유가 사랑은 사랑의 풍부한 선한 의지와 은혜를 줄 수 있는 대상을 가져야만 하기 때문이다. 주님의 생명인 사랑에서 우리는 창조의 근원을 발견한다. 그분의 무한히 원하심은 그분 자신의 행복을 담는 유한한 그릇일 수 있는 있음의 실체 외에 어떤 것으로도 만족되어질 수 없다. 동시에 이와 같은 있음들은 참된 자유와 참된 자유에 동반하는 합리성을 가지고 있어야만 한다. 즉 인간에 대한 그분의 생명의 선물은 만일 이것이 인간 자신의 것이 되어진다면 이 선물은 자유와 합리성을 수단으로 자발적이고 사려 깊게 받아져야 함이 틀림없다. 이것이 인간 존재들이 두 개의 구분된 경험, 즉 실체 안으로 태어남과 생명 안으로 태어남을 통과하여 가는 이유이기도 하다.
우리가 육으로 태어날 때, 우리는 지독하게 무력하고 의존적일 뿐이나, 영으로 태어날 때 우리는 적극적이고, 어떤 의미에서는 창조자이기도 하다. 우리가 실체로 태어날 때 실체를 위해 일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 이유가 자신에게 어떤 것을 만들 수 있기 전, 실체가 있는 것이 우선 순위이기 때문이다. 이와달리 생명 안으로의 출생은 선택의 문제인 바, 우리는 이 출생에 직접적으로 관여한다; 그 이유가 진짜 영적 생명은 우리의 의지에 반대하여 강제로 우리 안에 밀어 넣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그분의 말씀을 통하여 우리 모두에게 그분의 사랑의 초대장을 꾸준히 보내 그분께 와서 생명을 선택하라고 하신다. 이는 또한 선택한 생명을 악이 강탈하지 않도록 경계하라 하신 대목의 의미이기도 하다. 우리는 생각하는 능력을 십분 발휘하고 언제나 따뜻하고 순수한 심정을 간직할 때 만이 진실로 살아 있는다. 이런 재창조의 아름다운 일은 관찰함에 의해서가 아닌, 혼의 비공식 깊은 곳에서 작업되어진다. 이는 주님께서 말하신 바와 같다. 즉 “바람은 자기 좋아할 대로 분다, 그리고 너는 그로부터 그 소리를 듣는다, 그러나 너는 바람이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말할 수 없다; 성령으로부터 태어난 사람은 이와 같다”
전환(conversion)이라는 단어를 생각할 때, 이는 어느 특정한 신조를 받는 것으로 그 의미를 축소하지 말고, 넓고도 단순한 의미 즉 심정의 변화로 생각해야 하리라 여겨진다. 특히 지금 말하는 전환이란, 혼이 자아 이익만을 위해 느끼고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게 유혹하는 비천한 본능들로부터 돌아서고, 대신 세상의 좋은 의견에 귀기울이고, 하느님의 이타적인 사랑 안에서 그리고 무엇보다 먼저 타인에게 유익을 주는 자신의 삶 안에서 기쁨을 발견하는 쪽의 전환이다. 우리가 생명을 선택할 때 이런 기쁨이 있다. 즉 심정과 지성이 달콤하게 확장되는 기쁨이다. 이것이 없다면 인간 차원에서는 애쓴 것만큼 손해일지 모른다.
어떤 사람들은 다시 태어남이 단 번에, 예를 들면 “믿습니다. 아멘”이라는 간단한 두마디에 성사되는듯 여기지기도 하지만, 나의 견해는 그렇지 않다. 중생은 우리가 신성한 십계명에 의거한 삶의 길을 희망하고 열망하고 유지보전해 갈 때, 우리에게 건너온다. 한동안 우리는 천사 같겠다고 결의를 굳혀보지만 막상 세상 문제에 부딪치면 옛 것으로 되돌아가 이전에 했었던 것을 곧바로 실행한다. 다시말해 평범한 죽을 수 밖에 없는 운명의 처지로 있는다는 말이다. 그렇지만 이렇게 생각한다면, 즉 우리가 늘 이렇게 해왔는데…그리고 모든 사람이 그것을 했는데…그리고 우리의 선조도 그렇게 했는데…그렇다고 나까지도 그것을 해야 하는 이유는 아니지 않는가?라고 반문을 제기할 경우 어쩌면 절반 이상 전환은 성공의 길에 들어선 셈일 것이다. “길이요, 진리 그리고 생명”이신 그분을 자신의 가장 높고 가장 도움주는 이상향으로 추구하면서 나 이외의 사람들을 돌봄을 수단으로 우리의 생활을 풍부히 해나가는 것이 불가능하게 보여지는 삶은 없다. 한 번 우리가 이것을 해야겠다고 작정을 했을 때, 모든 외적 환경과 한계는 우리 앞에서 길을 내어줄 것이다. 우리는 더 강한 심정, 동시에 생명과 행복의 더 밝은 미래를 확신하며 매일 십자가를 져야할 것이다.
스위든볽 자신의 마음은 더 높은 빛으로 천천히 팽창되어 갔다. 그리고 그런 그에게 깊은 고통도 뒤따랐다. 그 시대 신학 체계는 모순덩어리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다시말해서 그 체계는 머리털을 길게 늘어뜨린 후 흐트러놓은 양상으로 꽉 차있었다. 따라서 그것들은 한 번 들어가면 다시는 출구를 찾지 못하는 동굴 같았다. 스위든볽은 진리, 혼, 의지, (심정)상태, 신앙 같은 중요한 핵심어에 정의를 내려두어야만 했다. 그리고 많은 단어들 역시 더 많은 영적 생각을 공통의 언어로 바꾸기 위해 새로운 의미를 주었다. 사랑에 관한 그의 교리를 위하여 그는 특수한 어휘를 발견해야만 했다; 참으로 이런 노력은 마치 그가 다른 언어를 독학하는듯 보일 정도였다. 어떤 사람이 육체의 눈으로 본 것을 신뢰하는데 익숙해진 상태에서 아주 단단해진 감각적 사고를 깨트리려면 큰 용기가 요구되는 경우 같이 그도 생각의 습관들로 해서 좌절도 많이 겪었다. 그로서는 생명을 지탱시키는 영적 힘을 유리를 통하여 보는 것처럼 어둑하게 보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자기가 본 것들을 아름다운 근원지인 사랑의 심장에 되돌아가 명백하게 추적해보고, 그것들을 냉정한 이성의 시대, 즉 논쟁적 신조들과 회의적 질문과 소통되게도 해야 했다. “그분의 뒤를 따라 하느님의 생각을 생각하라”는 케프라(Keplar)가 말했는데, 이는 초인간적인 과업이다. 여러분에게 스위든볽이 직면했던 것에 대한 어떤 생각을 줄 수 있는 나의 방법은 어떤 맹인이 자기와 같은 맹인을 돕고 싶을 때 마주쳐야 하는 굉장한 장애물이 무엇인지를 상상해보라 권하는 것이다. 그는 보는 사람에게 보지 못하는 사람의 필요한 것이 특별히 무엇인지를 이해하게 만들기 위해 그의 삶을 소비해야만 한다. 동시에 우정관계, 일, 그리고 행복을 가지고 맹인들의 부셔진 생활을 수리할 수 있는 올바른 방법도 추구해야 한다. 어쨌든 한가지 놀라운 것은 맹인, 그들의 느낌, 바램, 가능성 등에 꽤 유식하다고 여겨지는 사람들 조차도 맹인에 대한 무지함은 아직도 대단하다는 것이다. 보는 사람은 맹인, 특히 귀멀고 눈먼 사람이 햇볕을 쬘 경우나 꽃피는 자연의 모습이 듣고 보는 자와 완전히 같지 않고, 그들의 느낌과 감정도 보는 자의 것과 본질적으로 다를 것이고, 이들의 정신적 의식도 그들의 약점에 근본적으로 영향받았을 것이라고 쉽게 결론내릴 수 있다. 보는 눈을 가진 자가 더 실수하여 상상하는 것은 맹인들은 색깔, 음악, 그리고 형태 같은 모든 아름다움으로부터 닫혀져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맹인은 아름다움, 질서, 형태, 비율(조화) 같은 요소들을 촉감으로 알 수 있다는 것, 아름다움과 리듬은 감각 보다 더 깊은 영적 법칙의 결과이다는 것 등을 볼 수 있는 눈을 가진 자에게 수없이 반복해서 말해야만 겨우 납득이 가능하다. 어쨌든 듣고 보는 눈을 가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위 진리를 가슴으로 받을까? 눈멀고 귀먹은 사람도 오관을 지닌 보고 듣는 사람으로부터 두뇌를 상속받았다는 사실, 그들의 영은 그들 자신의 햇빛과 하모니로 침묵의 어둠을 채우고 있다는 사실을 보고 듣는 이들이 자신에게 확인시키는데 얼마나 많은 곤란을 겪을까?
물질로 꽉 막히고 망상으로 채워진 그 시대 감각적 사람에게 선각자로서의 그의 감명을 운반해 주는데 위와 같이 보는 자와 보지 못하는 자의 경우와 매우 유사한 곤경을 스위든볽은 가져야만 했다. 귀를 가진 귀머거리와 눈을 가진 소경의 취약점들이 아마도 인간의 무지와 무감각의 가장 어두운 장소에 하느님의 메시지를 운반하는 수단일지 모른다는 것을 그 누가 알겠는가? 주제넘는 것은 단 한 조각도 있지 않기를 희망하면서 내가 바라는 것은, 어둠 안에서 가지는 삶의 체험을 남을 돕는 쪽으로 사용할 수 있는 어떤 기술을 가졌으면 하는 것이다. 마치 스위든볽이 자기에게 허락되었다고 말했던 두 세계의 경험을 구, 신약 성서의 감추인 의미들을 밝히는데 사용한 것 같이 말이다. 하느님의 사랑과 이 사랑의 창조물인 인간의 사랑의 잠재력, 이 잠재력은 나와 완전 격리된 세계 사이에 위치하는 바, 나의 불행이 타인에게 선한 의지와 도움을 주는 매체로 만드는 힘이고, 이에 대한 기록을 남기는 것은 나에게 특별한 행복이라 생각된다. 스위든볽의 저서 “하느님의 사랑과 지혜”의 서두에 있는 비극을 실감할 때마다 나에게는 언제나 새로운 슬픔이 있다: “인간은 사랑 같은 것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그는 사랑이 무엇인지는 모른다…그리고 그가 사랑에 관한 생각의 어떤 관념을 자신에게 형성해보려 사랑을 곰곰이 생각할 때, 그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으므로 그는 그것이 어떤 것도 아니다, 또는 보고 듣고 만지고, 또는 타인과의 교제로부터 흘러들어 상대에게 영향을 미치는 어떤 것이라고 말한다. 인간은 사랑이 참 생명이다는 것을 아예 알아채지 못하고 있다; 그의 전체 육체의 공통의 생명, 그리고 그의 모든 생각들의 공통의 생명, 뿐아니라 그것들의 세부적인 것들의 생명이기도 하다. 식별력 있는 사람은 이렇게 말해질 때, 즉 만일 당신이 사랑으로부터 있는 것인 애착을 제거한다면 당신은 어떤 것을 생각하고 행할 수 있는가? 라는 질문으로도 사랑이 생명인지를 지각할 수 있다. 사랑으로부터인 애착이 식어지는 만큼 생각, 말, 행동도 식어지지 않던가? 그리고 이 애착이 따뜻하게 자라는 만큼 생각, 말, 행동도 따뜻해지지 않던가? 그러나 이런 경우를 식별력 있는 사람이 지각하는 것은 관찰에 의해서이지, 사랑이 인간의 생명이다는 이론적 지식으로부터는 아니다.”
사람들이 실수하는 대목은 말함, 미소, 흘긋 봄, 그리고 사랑의 온화한 행위가 사랑 자체인 줄 아는 것이다. 마치 내가 상상하기를, 두뇌는 그것 고유의 힘으로부터 생각하고, 몸은 저절로 행동하고, 음성과 혀는 자기들 고유의 진동이 있고, 내 손은 나와는 독립되게 어떤 것을 인식하는 것 같지만, 실상은 위 모든 것이 의지와 마음에 의해 이리저리 작동하는 것이다. 혹은 내가 내 손을 아름다운 백합 위에 놓고 그것의 향기를 코로 마실 때, 그리고는 촉각과 후각이 꽃 안에 있다고 고집부리는 것, 실제는 이런 감정을 갖게 한 주체는 꽃이 아닌 내 피부가 아닌가? 이런 것을 외관(appearance)이라 하는데, 사랑, 생명, 그리고 정신적 활동들이 논의될 때 유의해야 하는 대목이다. 사랑에 대한 대중적인 생각은 사랑은 인간의 바깥의 어떤 것-이리저리 표류하는 실재물-어렴풋한 감정-말하여질 수 없는 추상 작용의 하나이다는 것인데, 그 이유는 사랑은 딱 떨어지게 독립적으로는 생각되어질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스위든볽은 사랑은 원인, 주체, 또는 형체 없는 추상 작용이 아니다고 가르치고 있다. 사랑은 영혼을 통하여 떠도는 것이 아니고, 또한 물체를 만지거나 볼 때 존재 안으로 와지는 것도 아니다. 사랑은 인간의 가장 깊은 본질이고 이로부터 인간의 영적 유기체가 형성되어진다, 그리고 우리가 사랑으로서 지각하는 것은 이 실체의 표시일 뿐이다. 사랑은 그것의 능력들을 살아 있게 간직한다. 마치 대기가 촉각, 후각, 미각, 시각, 그리고 청각이라는 감각들에 감각력이 있는 생명을 주는 것과 같다.
나는 사랑과 사랑의 표(token)사이를 구분해 보기 위해 예증을 들어보겠다. 그 이유가 이 둘은 자주 실수되기 때문이다. 우리가 사랑의 실체에 대한 생생한 느낌을 가지지 않으면, 우리는 우리의 애착이 더 수준 높아지거나 우리의 기쁨이 더 증가되도록 사랑의 실체에 도달할 수 없고, 또한 그 실체를 바꾸거나 깊이 있게 하거나 순수해지게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별 다른 생각 없이 사악한 동아리 안에 있는 사랑 주변으로 가게 되고, 우리의 경향을 바꾸고, 나와 타인들을 재건축하겠노라고 노력해보면서 그 사랑 주위를 맴돈다. 한편 진짜 사랑은 쫓겨난채 흐느끼고 있다. 그나마 그 악한 사랑은 우리를 비웃고 그 자체 만족스럽게 기뻐하고 있다. 불완전한 언어와 더불은 나의 투쟁으로부터, 나는 이미 손상된 것을 고쳐 만드는데 따른 잘못되고 간접적일 뿐인 방법에 대한 나의 실예를 가지고 있다. 소리가 방출되면 그것은 공기를 통하여 떠도는 바, 떠도는 이 소리를 조작하여 내 음성을 개선하려는 것은 터무니 없는 일일 것이다. 그렇다 나는 그 조작을 내 음성 기관들에서 먼저 연습하여야만 한다. 그나마 이것도 내가 나의 내적, 또는 정신적 언어 개념을 개선할 때까지는 이것이든 저것이든 아무 소용이 없을 것이다. 목소리는 본질적으로 신체에 속해 있지 않다. 그것은 생각이 그 자체를 들을 수 있게 만드는 것이다. 음성은 마음에 의해 글자 뜻 그대로 모양짓고, 색을 칠하고, 조절되는 것이다. (음성을) 실습함에서 내 최고도의 노력은 내 육체의 귀는 닫혀 있으므로 나의 내적 귀에 있었던 것과 같은 소리와 말들의 진짜 형상들을 얻는 것이다. 언어 도구로서 마음의 올바른 사용에 더 가까이 접근 할수록 나는 다른 사람에 의하여 더 바르게 이해될 것이다. 이것은 음성으로부터 사랑에 이르기까지인 바, 실예로 사용하기에는 먼 외침 같이 여겨진다; 그러나 원리는 정확히 똑같다. 생명은 그것의 모든 감동들, 즉 좋음, 싫어함, 흥미 있음, 흐름 등과 더불어 인간의 가장 깊은 속의 사랑에 의해 형상짓고, 착색되고, 최말단에서는 생명의 흥망 성쇠가 조절된다. 따라서 누군가가 더 고귀한 느낌들, 더 세련된 이상향들을 얻기를 원한다면, 그리고 행복으로의 그의 열망이 아주 애처러워 이를 만족하게 하겠다면, 그는 사랑의 진짜 정신적 개념이 능동적이고, 창조적이며, 그리고 능력을 명령하는 것으로 형성되도록 분투노력해야 할 것이다.
사랑은 혼 또는 기관, 자질, 기능과는 별개의 결과로서 관조되어서는 안된다. 사랑에는 의식 있는 생각, 의도, 목적, 노력, 동기, 그리고 충동 같은 몸 전체가 포함되고, 이것들은 흔히 억눌러져 있다. 그러나 언제나 잠재하여 있어 어느 순간 행동으로 그 자체를 체현할 준비가 되어 있다. 사랑은 능력들과 기관을 통하여 얼굴, 손, 발을 고용한다; 사랑은 일하고 말한다. 그리고 사랑은 한 번 목적물을 향하여 움직이면 어떤 외적 환경에 의해서도 제지되지 않을 것이다.
참으로 진짜 거듭남은 당사자가 자기의 영적 능력들을 의식하게 될 때 인간 안에서 시작하는 변화와 더불어 온다. 이와 같은 변화는 사별과 슬픔의 시기들 이후, 뿐아니라 당사자만이 알아채릴런지 모르는 경험 이후 거행된다. 이리하여 그의 눈의 흐림이 없을 때 그는 자신과 자기의 현 환경, 더 나아가 자기와 주어진 환경 등의 진정한 관계들에서의 미래까지 보게 된다. 이기심의 저울 눈이 떨어져 나가고, 그는 그 자신의 생명을 진지하게 바라본다.
사람들이 거듭남에 관하여 아주 많이 썼었고 이야기도 아주 많이 했는데 비해 그 저자나 강연자들이 거듭남의 목적에 관련해서는 그 자료가 매우 빈약해 있는 형편인 것은 의아할 일이다. 자아 수양은 완전함의 모든 이상향을 위해 충분하다고 소리 높여 공포해왔었다. 그러나 우리가 어느 곳에서이든 최상의 남자나 여자에게 귀기울여 본다면, 그들의 한결같은 대답은 꼭 그렇지 않다는 부정적 답변일 것이다. 어떤 이는 지식의 방대한 보물을 축적했다, 그리고 과학이 가장 지독한 악들을 위한 치료(법)을 발견해냈을지 모른다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과학은 이들 중 가장 나쁜 것-인간 존재의 무감각을 위한 치료약을 찾지 못했다. (항간에서) 지적되어지는 것, 이는 스위든볽의 견해도 비슷한데, 사랑과 동정(심)에 관하여 정식 교육을 받지 않은 사람은 짐승 보다 더 나쁘다는 것이다. 이런 사람은 뿔과 꼬리만 없을 뿐이다; 이런 사람은 풀을 먹지 않는다; 게다가 그는 분별 없는 사색력으로 제멋대로 파괴한다. 그는 전쟁에서 그의 형제에게 손상을 입히고 죽이기 위하여 갈수록 더 흉측한 무기들을 발명한다; 그는 유행에 발맞는 스포츠를 위해 무기력한 동물을 병신으로 만들기도 한다; 그는 자기 지배를 넘어 서 있는 사람들의 흠이나 추문을 캐내려 안달을 한다. 여타 다른 악들도 그의 무지에서 추적할 수 있을 것은 의심할 바 없다. 그러나 위와 같은 악들이 무지에서만 나와졌다고도 말할 수 없다. 그의 구원은 자기 수련을 통하여 가되 올바른 바램이 꼭 필요하다.
인간은 환경의 변화로 크게 개혁되어질 수 있다는 논지를 붙들고 있는 선의의 사람들도 상당히 많은 편이다; 이 논지도 그럴법하고 매혹적이기도 한 진리는 충분히 있다. 그러나 이 논지는 환경 문제를 지나치게 강조했고, 이 논지는 나쁜 쪽으로 쉽게 응용되는 경우가 많다. 인간 존재를 바꾸는 것은 환경이 아니고. 그 사람 안에 있는 힘이다. 소경, 귀먹어리, 양심을 위하여 죄수된 자, 심지어 건전한 이상향을 지닌 아주 가난한 사람까지도 포함해 모두가 입증한 것은 자기들은 바깥쪽 환경이 어찌됐든 자기들 바램에 더 가까이 생명의 형태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우리 안에는 어린아이 같이 참지 못하는 속성이 많이 남아 있기 때문에, 쉽게 이렇게 중얼거린다. “오, 만일 내가 운좋은 내 이웃들의 대열에 끼어 있다면, 나는 더 낫고, 더 행복하고, 더 유용한 생활을 누릴 수 있었을 것이다.” 이런 식의 젊은 이들의 하소연 같은 말도 자주 듣는다. “만일 내가 내 사장의 아들로 태어났더라면, 나는 대단한 성공을 성취했을 것이다.” “내가 저런 저질의 녀석과 섞이지 않았다면, 나는 도덕적으로 건재했을 것이다.” 이런 세 번째 탄식도 있다. “만일 내가 내 부유한 친구의 돈을 가졌더라면, 나는 세상의 향상을 위해 내 몫을 기쁘게 실천할 수 있었을 것이다.”
지금 나는 필요 없는 가난과 타락하는 영향력에 맞서 여느 누구보다 더 적극적으로 반대쪽에서 팔을 들 것이다. 동시에 인간 경험이 가르치는 바, 즉 우리가 현 위치에서 성공할 수 없다면 우리는 어느 다른 위치에서도 성공할 수 없다는 것을 나도 믿는다. 백합 같이 더러운 주위 환경 위에서도 순수하고 강하게 일어날 수 있지 않으면, 아마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도 도덕적인 약한 사람일 것이다. 지금 있는 세상에 도움을 줄 수 없다면 어느 세상에 태어나도 마찬가지 이리라. 가장 중요한 질문은 처한 환경의 종류가 무엇이냐가 아니라, 날마다 생각하는 종류가 무엇이냐, 내가 따라가고 있는 이상향이 무엇이냐, 한마디로 내가 어떤 사람이냐 이다. 아랍 속담에, “네 자신을 발견하는 그 곳이 네 세계 이다”는 실지 꼭들어 맞는다.
인간 존재는 자기 마음과 자존(만)심에 무서운 폭력이 가해짐이 없이 갑자기 거듭나질 수 없다는 것에 대해 스위든볽 자신이 명백해졌을 때 그는 아래와 같은 다른 이론을 가졌다. 즉 인간 존재는 새로운 진리들의 눈부심을 견딜 수 있기 전, 그는 더 예리한 빛에 그의 내적 눈을 익숙해지게 하면서 조금씩 나아가야만 한다. 그리고 그는 그의 기쁨(delight)들을 수단으로 하지 않고서는 선한 생활 쪽으로 돌아 서 질 수 없다. 그 이유가 그의 기쁨들이 그를 자유하도록 하고 결국은 선택할 힘도 그 기쁨이 주기 때문이다. 주님과 협동하고, 지칠줄 모르는 그분의 도움을 신뢰하면서, 말씀에서 더 많은 진리들을 이해하려고 공부하고, 터득한 그 진리에 따라 살면서, 선을 위해 선을 행하는 것-이런 것들이 옛 자아로부터 빠져나와 자신의 세계를 재건하겠다고 하는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mortal)들을 위한 유일하고 건전한 방법들이다. 주님의 공적들을 훔치고 싶어하고, 천국을 “보상” 차원에서 요구하는 자들이야말로 참으로 애석할 뿐이다. 따라서 자신의 심정을 들여다보고 그 속의 이기심이라는 용을 몰아내야 더 고귀한 자기를 만드는 지름길이다; 물론 이 회개를 빠르게 성취할 수 없는 것은 아니나, 회개 후 신앙은 천천히 성장한다는 것을 감지하되 즐거운 마음이 언제나 수반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그는 인격 속에 강건함도 함께 머물게 하지 못하고 만다. 실상, 인간은 이 세상이든, 다음 세상이든 거듭나는 작업을 결코 멈추지 않을 것이다. 그 이유가 사랑하는 것, 더 알아가는 것, 더 완성되는 쪽으로 나아가는 것은 인간에게 영원하기 때문이다.

하느님은 어떤 분이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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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은 어떤 분이신가?

신성한 말씀의 빛에 의해 안내된 스위든볽은 본질과 인물에서 하느님의 단일성을 보았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는 지상에서 인간성을 입으신 하느님이시고, 성령은 선인 것과 복된 것을 창조하고 유지하는 무한한 힘이다. 이 진리는 건전한 모든 기독교의 가르침의 중심이다. 그리고 이 진리를 명료하게 지각하지 않으면, 성경은 합리적으로 설명되어질 수 없다. (따라서 이 진리를 깨닫게 되는) 누군가는 지금까지 수세기 동안 수백만도 넘는 심정들이 동경해왔던 아름다운 인품-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함이 없이 오히려 무한하게 드높이면서 한분 하느님을 즐겁게 흠모할 수 있다.

모든 사람은 인간 형체,
그가 이교도이든, 터키인이든, 또는 유대인이든
사랑하여야만 한다.
자비, 사랑, 그리고 동정이 살고 있는 곳
거기에 하느님 역시 살고 계신다.

위와 같은 주님에 관한 개념에 의해 영감받아 누리는 기쁨은 따뜻함, 빛, 활동이라는 세 겹의 영광을 지닌 태양과 비슷하다. 또는 누군가가 혼과 마음, 몸의 행복한 균형으로 이룬 아름다운 인간 존재를 바라보고 만족해 하는 것과도 견주어 볼 수 있다. 혹은 씨가 발아해서 꽃을, 그리고 꽃에서 감미로운 열매로 되는 연속의 완전함과도 비교 생각해 볼 수 있다. 이 개념은 모든 것들의 본성에 얼마나 꼭 들어맞는지…얼마나 이해가 쉬운지…얼마나 온전한지…! 그렇지만 이 개념이 심어지고 자라며 풍성해지기까지 스위든볽의 수고는 얼마나 컷을까! 우선 그는 삼위일체에 관한 널리 퍼진 이론과 믿음만으로 의로워진다는 “칭의관”이 야기하는 논쟁과 추론이라는 거대한 장애물을 뿌리째 뽑아냈다. 이는 마치 후렌시스 베이컨(Francis Bacon)이 연역적 추리라는 학자들의 방식을 자연을 직접 관찰함이라는 것으로 대체한 것과 같다. 실로 스위든볽과 베이컨, 그들 모두 영원히 있는 진리의 부름에 순종했다. 그들 모두 새 시대 속에서 맞는 곤경과 고독함에 자신을 내맡겼다. 그들은 다가오는 세대들을 위해 더 신뢰되고 확고할 수 있는 안내서를 제공한다는 희망을 가지고 그 당시 다수의 지지를 받는 의견이 내뱉는 적대 행위에 홀연히 맞서 자신들의 의견들을 떠받혔다. 그들은 “대중이 가장 애호하는 교리들은 말다툼을 즐기는 것이나 툭하면 싸우는 것, 혹은 허울좋은 것이나 텅빈 것들” 임을 발견했다. 동시에 “가장 지력있다는 자는 그 시대나 그 당시 대중의 판단에 동조함으로 명성을 끌어내는 쉬운 방식을 좋아하는 자들”임도 알았다.
베이컨과 더불어 스위든볽 역시 이렇게 말할 수 있었다. “이 퇴보된 학문 종류(연역법)는 주로 대학 교수들 사이에서 군림했었다. 이 학교 선생들은 날카롭고 강한 지력과 풍부한 여가 시간을 즐긴 자들이나 그들이 확보한 학문 재료는 부피로도 많지 않았다. 그런데 이 적은 부피의 학문 재료에 갖은 지력을 다 쏟았다. 이제 그들은 자기들 책들에 존재하는 땀흘린 학문의 거미줄을 우리에게 이야기하고 있다.”
스위든볽이 제공한 하느님의 통일성에 관한 새로운 생각들이 귀중한 이유는 이 생각이 말씀을 잘못 읽어 비롯되는 성경 글자로부터의 불쾌함, 그리고 과격한 사람이 그분에게 인간 속성을 덮어씌우는 방식으로 세운 신론에서 진짜 신위(Deity)를 식별하는 통찰력을 주기 때문이다. 아래 인용문은 그의 “진실된 기독 종교”로부터 추출하였는데, 이 글은 얼마나 그가 더 고상한 신앙으로 위 같은 비기독교도의 개념을 대신하려 노력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하느님은 전능하시다. 그 이유는 그분은 그분 자신으로부터 모든 능력을 가지시고, 그 외 사람들은 그분으로부터 능력을 가지기 때문이다. 그분의 능력과 그분의 의지는 하나이다. 그분은 선인 것 외에는 어떤 것도 뜻하지 아니하시기 때문에 선인 것 외에는 어떤 것도 하실 수 없다. 영계에서 그분의 의지에 반대되는 것을 할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다; 이것을 그들은 능력과 의지가 하나이신 하느님으로부터 획득한다. 또한 하느님은 선 자체이시다; 그러므로 그분이 선을 행하시는 동안, 그분은 그분 자신 안에 계시고 그분 자신으로부터 떠나가실 수 없다. 이로부터 명백한 것은 그분의 전능은 선이 확장되는 영역 내에서 진행되고 작용하는데, 이것은 무한이다.”
“하느님이 누군가를 정죄 하실 수 있고, 누군가를 저주하시고, 누군가를 지옥으로 던지시고, 누군가의 혼은 영원히 죽어야 한다고 미리 예정하시고, 상해자에게 되갚고, 화내고 벌 주실 수 있다 라고 생각하고, 믿고 나아가 가르치는 것은 얼마나 황당한지 명백해질 것이다. 그 이유가 그분은 인간으로부터 그분의 얼굴을 돌리시는 것, 또는 엄한 얼굴로 그를 쳐다보는 것 조차 하실 수 없으신 분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이런 의견이 대세를 이루고 있다. 하느님의 전능은 마치 세상에서 자기가 뜻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자기 좋을대로 할 수 있는 왕의 절대적 권력이 죄를 면제하기도하고, 정죄도 하고, 죄지은 자를 무고한 자로 만들고, 신뢰못할 자를 신뢰할 자로 선포하고, 무가치한 자를 높이 추켜세우고, 당연히 상받을만한 자 위에 당연히 상받지 않아야 할 자를 내세우는 왕의 권세; 그 뿐만이 아니라 무슨 핑계든 만들어 자기 신하들의 물품을 뺏고, 심지어 그를 죽음에 처하게 하는 왕의 권세와 같다고 말한다. 신성한 전능에 관련하여 있는 위 같은 불합리한 의견, 신앙, 교리로부터 이에 맞먹는 많은 거짓들, 오류들, 그리고 흉측한 망상들이 교회 안으로 흘러들었고, 그만큼 교회 안에는 신앙 문제들, 신앙 갈래들, 신앙 분열이 돌출되어졌다. 어쩌면 이런 오류와 망상이 큰 호수로부터 항아리들에 물을 채우듯 철철 넘치고 있을지 모르고, 어쩌면 아라비아 사막에서 구멍으로부터 기어나와 햇볕에 몸을 녹이는 뱀들 보다 더 많을지 모른다. 이런 오류나 망상은 전능과 믿음, 이 두 단어 밖에 더 중요한 단어는 없었다. 설교나 신앙 강연은 사람들 앞에 육체의 감각들에 발생하는 추측과 우화와 하찮은 이야기들로 채워지고 있다. 그런 이유가 이성이 전능과 믿음이라는 단어 모두로부터 추방되어졌기 때문이다; 이렇게 이성이 추방되어지면, 인간의 생각은 자기 머리 위를 나는 새의 이성보다 과연 얼마나 더 수준이 높을까?”
그러나 스위든볽의 가르침들은 맑게 개인 하늘 아래서는 산 정상을 볼 수 있듯 우리의 생각을 들어 올린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신성한 존재의 본성은 사랑과 지혜와 누군가에게 쓸모 있음(use)이다는 것, 그리고 그분은 어느 때이든 누군가를 향해서이든 그분의 태도를 결코 바꾸지 않으시는 분이다는 것을 지각할 수 있다. 모든 사람들이 모두 다 좋은 사람이 되어질 수 없는데, 그 이유는 당사자가 자기 개선에 무능하기 때문임도 알게 된다. 어떤 사람은 하느님을 결코 발견할 수 없다. 자신만에 생각을 꾸준히 집중시키는 사람은 선견(vision)을 결코 가져 보지 못한다. 이들의 혼은 자기 주위에서 홍수 같이 일어나 자기 수준을 초과해 휩쓰는 실질적인 것(materiality)에 깊이 빠져 있다. 이들은 자기들 같이 어두운 물 속에서 허우적대는 사람 밖에 보이는 것이 없다. 이들은 자신을 구원하는 것 또는 누군가를 돕는 것에 무관심하다. 그러나 스위든볽의 책들을 통하여 모든 사람은 모든 인간 존재를 포옹하는 영원한 사랑의 형상을 빛나게 하고, 더 깊은 죄로 빠지려는 자신을 억제하려 노력한다. 이사야서에서 주님이 “귀머거리요 소경이시다”라고 불리운 이유는 그분은 인간의 죄를 보지 않은 듯 계시기 때문이라 설명한다; 그 이유가 그분은 자기의 자녀를 꺽거나 징벌하시지 않고, 그들이 그분께 협력하고 감화 받는 한, 그들을 살짝이 구부려 방향을 바꿀 수 있게 해주시는 분이기 때문이다.
이 시대에서 혁명적이라 할 수 있는 또 다른 교리가 있다. 지옥에 보내기로 예정됨 따위는 없다는 것, 모든 사람은 천국을 위해 태어난다는 것, 마치 씨가 꽃이 되기 위해 태어나듯, 작은 개똥지빠귀가 노래하는 새가 되도록 작정되어 있듯, 물론 이 모두가 생명의 법칙에 순종한다는 조건에서 임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말을 바꾸어 보면, 모든 이는 구원의 섭리 속에 있어 왔다는 것, 모든 이는 거듭나질 수 있다는 것, 그리고 만일 그가 천국으로부터 떠나 자신을 생각하고 살고 있다면 이는 그의 과오 이다는 것, 그럼에도 그가 고귀한 생각을 생각할 때마다 그는 그곳으로에 가고 있다; 그리고 그가 타인을 섬기는데에서 행복을 즐길 때 그는 거기에 머물고 있다 등등이다.
혹자는 다윈(Darwin)이 천국과 지옥에 관련하여 웃음거리를 만들었다고 말했었다; 그러나 스위든볽의 저술에서 천국과 지옥은 웃음거리라는 단어와는 하등 관계가 없다. 이것은 인간 당사자가 죄를 지을 수 있고 동시에 양심의 가책을 느낄 수 있는 한 천국과 지옥이라는 주제가 제 삼자의 견해 수준으로 밀려나는 일은 결코 없다. 그의 저술을 통해 우리는 중세기 식의 지옥은 없다는 것을 배운다; 그러나 악을 스스로 확증하여 사랑하는 자, 자기 심정에서 하느님을 고집적으로 부인하는 자가 가야하는 정신적 지옥이 있다. 이들이 글자 그대로의 불 속으로 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이들이 자신들을 너무 심하게 벌할 때, 하느님께서는 양심의 번민 조차도 거두어 가신다. 이렇게 조치를 취해주시므로 해서 이들은 천국적 느낌의 상태들 안으로 자신들을 놓도록 강제 당하는 일은 결코 없게 된다. 다시 말해 이들은 천국적 기쁨으로는 숨막힐 뿐이고, 자기들이 가진 유일한 쾌락들을 강도 당했다고 아우성이다. 오로지 이들은 지배욕과 이기적 본능들로 “불타고” 있다. 이들은 올빼미나 박쥐 같이 자기들이 생각하는 것을 보고 있다. 이들은 토론하고 소송하고 싸운다; 이들은 마술을 끝도 없이 실시하여 “가짜를 만들어” 내고 있다. 이들은 공기와 음식을 위해 고되게 노동해야만 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래서 그들 중 어떤 자는 언제나 나무를 자르고 풀을 깍기만 하고 있다. 그 이유가 지상에서 이들은 보상을 위해 대단히 맹렬하게 일했기 때문이다. 구두쇠들은 자기들 심정에 상상의 돈자루를 꼭 껴안고 있다. 싸이렌(Siren, 바다의 요정)들은 자기들의 천한 모습을 미화하려 고통스럽게 애쓰며 석탄불의 침침한 빛에서 비쳐진 자기들의 형상을 즐기고 있다. 사기꾼들의 각 파들은 저마다 다른 사기파의 약점을 찌를 수 있다하여 온갖 재주를 다 발휘하면서, 적수에 대한 불길 같은 쾌락이 그들의 상처 있는 얼굴에서 소름끼치게 빛을 내고 있다. 잔인하고 어리석은 의견들을 집요하게 붙잡고 있는 그들은 자기들의 백치같은 성질과 바보같은 영혼에 시간가는 줄도 모르고 지꺼린다. 이들이 쓸데 없는 자기들의 노력 끝에 녹초가 되면, 모든 악귀, 땅신령, 마법사, 강도들은 손을 잡고 춤을 춘다. 마치 열병을 앓는 꿈인 미친 몽상이다.
위와 같은 불행한 존재들이라 해도 주님으로부터 경멸 받거나 주님께서 방치해두시지는 않는다. 그분은 그들을 외적인 질서에 데려다 놓는다. 그리고 그들이 자기들의 애착에 의해 인도함이 가능할 수 있는 한, 그분은 자기만 위함이 타인을 위함 속에 있어지도록 그들을 유도해보신다. 사람들은 자기가 선택해야 하는 것이 선일 뿐 아니라 피해야 할 것이 악임도 보게 하신다. 이들이 숭고한 목적인 공적인 복지 보다 오히려 명성과 영예에 관심을 둘 때 그들 안에 있는 야망의 불을 살아있게 해두신다. 빛의 자녀들이 한 사람이든 다수에 의해서이든 압제의 모든 형태와 야수같은 세력에 맞서 인간성을 수호하려는 것을 돕겠다면 필시 배워야만 하는 진리를 이들은 불쾌한 진리들이라고 자기들 마음을 날카롭게 세운다. 최악의 악마들 조차도 그분만이 자기들 가까이 계시고, 자기들의 어리석음을 잘 배려해주는 신성한 은총을 가지신 것을 억지로 부인하면서도 그분을 향해 느껴지는 매혹적인 감각 만큼은 결코 피해갈 수 없다. 자기 동료가 바보요 악행자라고 격분하는 누군가가 있다면 설사 자기의 의로움을 증거까지 들이댈 수 있다해도 격분만큼은 하지 않게 자신을 경계해야 할 것이다. 진실로 발잨(Balzac)이 이렇게 주장했다. “하느님은 온유한 영혼들이 어쩌다 저지른 죄를 벌하시기 위해 원수 갚는 식의 잔인한 방법으로 영원토록 복수하신다는 비난으로부터 하느님이 빠져 나올 기틀을 스위든볽이 제공하였다.”
스위든볽의 모든 증거에 따르면, 사후 우리는 이 장소 저 장소를 가는 여행자 같이, 갖가지의 흥미있는 대상에 친해지고, 여러 종류의 사람들을 만나고 도중에 각 개인으로부터 뭔가를 받기도 한다고 한다. 우리는 관찰하고, 판단하고, 비평하고, 그리고 지혜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의 말들을 듣기도 한다. 우리는 의견을 내놓기도 하고 , 타인의 의견을 챙겨 가서 우리의 정신적 도가니에서 그것을 걸러내고 테스트도 한다. 각각의 새로운 경험으로부터 우리는 지식의 더 세련된 종류와 모든 것의 자산인 더 진실된 지적 개념을 추출한다. 지상에서 인간은 비록 홀로는 아니지만 어쨌든 서로 떨어져 있다. 그리고 누군가가 아주 경이로운 생각들을 지녔다 하더라도 듣는 자가 없기에 결코 말해지지 않기도 한다. 그러나 저세상은 이와 많이 다르다. 모든 자는 함께 살고, 함께 배운다. 모든 영의 존재들은 좋은 존재이든 나쁜 존재이든 마음(mind)들이다. 그래서 그들은 지상의 경우 납득하는데 오랜 시간이 요구되는 많은 부피의 생각들도 즉각적으로 서로 교통한다. 그리고 앞쪽으로 더 여행해서 자기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동무들을 선택하고, 흥미를 더하고 더 슬기로워지고 더 분별력 있어지고 더 행복해져 간다. 죽어야 할 운명이라는 자연적 수준의 사실들에 의해 영혼의 날개가 부러진 이들에게 위와 같은 전망이 열려 있다는 것은 그 얼마나 대단한지! 드높은 우정 관계와 생명 있는 교제에 굶주린 이들에게 위 전망은 그 얼마나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위로가 되는지! 내가 믿는 바, 천국에서도 지상에서와 같이 우정은 꾸준히 지속됨에 의해서, 또는 바뀌기도 함에 의해서 지탱해간다. 그 이유가 의식의 분야에 들어가는 생각이나 정서를 다양해지게 하고 생기를 주는 것이 우정의 본성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닮은 것에는 관심을 많이 두려하고 나와 다른 것에는 소홀히 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천국에서, 때로는 여기 우리 사이에서도 영혼이 비슷한 친구들은 마치 태양의 떠오름에 있는 다양해지고 아름다운 색깔들 같이 서로를 차감계산하거나 메워 보충하기도 한다. 그들은 서로가 서로를 발견하고, 그들 안에 있는 최선의 것을 주고 받는다. 우리의 친지들이 유아 시절의 우리의 몸을 먹이고 입힐 때 같이 서로의 혼을 위해 일한다. 나는 내 경험으로부터 위 내용을 실감하여 가져 보았던 놀라운 느낌이 있다. 나는 과거 어둠과 침묵으로 대부분의 사람들로부터 감추어져 있게 되고 말았던 내 안에서 접히어 포개져 있었던 가능성의 선각자로 내 선생님과의 우정 관계를 만들었던 매우 드문 행복한 사람이다. 나와 선생님과의 생활에는 너무나 사랑스러웠던 대목이 있다. 이것들은 땅을 초월하여, 우리를 위해 천국에서 미리 대기하고 있다. 영원 속의 것을 미리 맛봄이 나로 명확하게 해준 것은 항구적이고 모두를 포옹하는 봉사가 우정에 언제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성경은 말한다. 천국에서 우리는 “우리의 수고함으로부터 쉰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가 슬픔이나 실패나 시험을 통하여 자기의 구원을 성취해 평화와 순진의 안식에 도달한 경우일 때를 뜻할 뿐이다. 우리가 쉬게 된다는 그 “수고함들”은 육 속의 장애물, 빵이나 옷, 안식처, 전쟁을 위한 투쟁, 그리고 소득과 권력을 위해 서로 물리쳐 이기려는 더러운 술책들 등등이다. 그러나 영광스러운 일의 거대한 분야와 서로가 지지 않으려고 열심을 내는 것과 끝이 없는 흥미가 이 세상에서 몇 개의 일에만 충실했던 우리 모두를 기다리고 있다. 천국은 유용함(use)의 왕국이라 부르기도 하는데 이곳에서의 직종은 실로 방대해서 여기서 일일이 열거할 수는 없다; 그 이유가 그것들은 무한하게 다양하기 때문이다. 몇 가지라도 말해보자. 이타심 강한 부모같은 사랑을 지닌 이들은 세상으로부터 온 어린아이들을 양자로 삼고 돌본다. 어떤 이는 소년소녀들을 가르치고 있다. 또 어떤 이는 배우기를 원하는 단순하고 진지한 사람에게 가르침을 주고 있다. 이방 국가의 모든 이는 그들이 지녔던 한정된 믿음들을 확대하고 더 세련되도록 새 진리들로 가르쳐진다. 죽음을 통하여 참 생명으로 일어나는 모든 이 각각을 돌보는 특별한 사회도 있다. 이 사회는 영들의 중간 영역으로 오는 신입자를 불친절한 악령들로부터 방어해주고, 지옥에 거주하는 이들을 제압하면서 계속 안내를 맡고, 서로의 아귀다툼으로부터 그들을 보호해주어 가능한 한 신입자가 비참함을 덜 느끼게 해준다. 모든 인간 존재들은 자연계와 영적 왕국에 동시에 살기 때문에 천사들은 각 사회로부터의 인간을 지키기 위해 뽑혀지고, 천사들은 인간의 욕망과 생각의 나쁜 습관을 조금씩 거두어지게 하고 어두운 행위를 사랑했었던 것으로부터 빛의 행위의 기쁨 안으로 부드럽게 돌아설 수 있도록 한다. 그러나 오로지 인간 안의 내키지 않는 자세는 천사들이 사랑하여 섬기는 일을 제지하려든다. 그런 상황에서 조차도 천사들은 인내와 확고한 신앙이 있어 그들에게 되돌아 간다. 이 천사들이야 말로 신성한 충성스러움의 형상이요 그분의 메신저 아닐까? 이 천사들은 누군가의 과오를 거의 보지 않으며 더욱이 그 결점을 깊이 논하지도 않는다. 그대신 이 천사들은 마음 속의 아름다움들을 연구하고 반대 경향까지 선으로 해석해보려 한다. 이런 그들의 재능을 밀접하게 따라붙음으로 천사들이 되어져가는 남자와 여자는 계속적으로 더 고상한 업무를 담당하고, 그럴 때마다 있게 되는 새로운 상태는 그들에게 새 힘의 유입을 가져온다. 이것이 주님에 의한 약속, “충분히 채우고 흔들어 채우고, 눌러 담고, 넘치게 담아서” 라는 구절에 해당된다. 금빛의 하프들과 끝이 없는 찬양의 노래들 같은 말씀의 표현은 (성서 조소론자에게) 반대 논평을 불러 일으키는 근거를 제공했고, 게으른 성인들이라는 이런 바람직하지 못한 인상까지 주었지만 이는 그림으로 나타난 외관일 뿐, 천사의 일이 더 아름다워지고 더 만족스러워질 때 심정이 기쁨으로 부드럽게 수금을 연주하고 노래하는 것을 뜻한다.
이렇게 스위든볽의 가르침의 빛으로 볼 때, 천국의 삶은 진실된 인간의 삶이다. 그래서 거기에는 모든 종류의 봉사, 가사일, 시민적, 사회적 일, 그리고 영감된 일 등등이 수행되고 그로 인해 즐거워하고도 있다.
우리에게 통보되는 것이 있다. 세 부류의 천사들이 있다는 것이다. 첫 번째 부류의 주요한 흥미는 지식과 실제적 일, 즉 지옥의 침입에 맞서 천국의 전진 기지를 보호한다. 둘째 부류는 새 사상을 철학적으로 다루고 시작을 하게 하는 이들이다. 셋째는 추론이 필요 없다, 그 이유는 그들은 타인을 느낌으로 알 수 있고 그 사람의 위치에 자신들을 놓되 지각의 힘과 빠르고 직접적으로 그 사람을 위해 행동한다. 이 마지막 째의 부류가 무화과 나무에 비교된다. 이 나무는 꽃 피는 것을 중단하지 않는 바 그것의 잎을 내고 동시에 열매 맺는다. 그곳에서 똑같은 자는 아무도 없다. 그러므로 무수한 그룹들과 사회들이 있다. 그런데 거기에는 한 개의 천국이 있을 뿐이다. 또는 천국은 하나이다. 이는 인간의 몸이 수많은 세포나 기관, 수족, 혈관, 신경 내지 섬유 등등으로 구성되나 하나인 것과 같다. 보다 작은 모든 목적들은 공통의 선에 종속되어진다. 한마디로 모든 영광, 모든 이상향, 모든 높은 바램-가장 고상한 마음들의 꿈들이 귀에 속삭였었던 모든 것, 그리고 미처 생각에도 없었던 무한하게 많은 가능성들이 불멸의 영원한 햇빛에서 실질적인 실체가 되어간다.
천국에서 우리는 여인의 아름다움, 남자의 건장함, 섹스(sex)들 사이에 있는 이기심 없는 사랑, 아이들이 장난치는 것, 교우관계의 기쁨, 그리고 위로함과 감동함의 절묘한 감촉의 생생한 힘 등도 발견하게 된다.
모든 물질적 한계로부터 자유해져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는 천국의 생활을 스위든볽이 명료하고 권위있게 밝혀주는 것이 참말일진대 우리는 한걸음 더 나아가 거기서의 교육 목적에 대한 뚜렸한 생각을 가질 수 있다. 천국의 세계는 영체로 옷입혀진 혼들의 방대한 왕국이고, 모든 이들은 하나의 장대한 선용함 안에서 상호관계를 가지는 바, 함께 묶여 있는 셈이다. 거기에는 자신의 더 높은 발달, 그럼으로해서 모든 이의 더 큰 선을 위한 가능성이나 흥미, 그리고 발달을 위한 특별한 종류의 지식을 가지지 않은 사람은 그 많은 무리들 중에 단하나의 개개인도 없다. 그들은 이런 발달을 서로서로에게 의존하는 한편, 각각의 존재는 자기 고유의 길에서 더 완전하게 성장한다. 그리하여 자신에게 더욱 많이 수여된 행복에 더 응답하여간다.
만일 우리가 지상의 생활을 지적으로 검사한다면, 천국을 규율하는 선용의 법칙이 지상에서도 똑같이 규율하고 있음을 발견할 것이다. 과학이 우리를 가르치는 바, 몸의 각각의 부분은 각각 다른 부분의 복지를 위해 존재하게 한다는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자연 안으로도 위와 꼭같은 법칙을 불어 넣어 두셨다. 광물 왕국은 연합하여 식물이 지탱하는 것을 섬긴다. 식물은 인간에게 생명을 준다. 그리고 광물, 식물 둘 다는 인류를 섬긴다. 각자가 모두에게 그리고 모두가 각각에게 유익을 주는 이 법칙은 인간의 생활을 규율하도록 되어 있다. 많은 사람들이 이 법칙을 악용해서 타인의 두뇌와 수고함으로 살고 있다; 그러나 빠르던 늦던 응보가 그들 뒤를 따라 간다. 그리고 그들은 일반인의 복리 증진이라는 선함의 제단에 섬김의 제물을 놓아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가치있는 인간의 대열로부터 낙오되어야 할 것이다. 이 섬김의 제물은 세 가지 방법, 즉 손으로, 지성으로, 그리고 우리의 정서적이면서 미적 능력을 가지고 제공되어야 할 것이다.
물론 우리가 사람을 주관적으로 관조한다면, 경우가 달라질지 모른다. 어떤 인물은 자기의 사용의 법칙을 그의 이기심으로 말미암아 망쳐놓는다; 그러나 그런 사람에게도 남아있게 되는 사실은 있다. 즉 객관적 차원에서, 우리의 전체 생활과 그 주변환경은 사용의 법칙을 가르친다는 것, 그리고 이 법칙이야말로 우리가 우리의 적절한 이상향을 현실화하는데 최선의 가능한 수단이라는 것이다. 우리의 안내자 되는 이 법칙을 어떻게 사용하느냐의 방법은 배워야 할 것이다. 예를 들면, 우리는 각자의 취미와 만족감을 채우면서도 자기 외 많은 사람의 선에 하모니를 이루는 특별한 활동을 선택하는 것이다. 그런다음 각자는 사용의 법칙 속의 영원한 삶 안에 자기의 자리가 있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이것은 아마 이세상 또는 저세상 모두에서 살아가는 제대로된 방법일 것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교육 형태, 그리고 사려 깊은 사람들이 지금 재촉하는 것은 이 사용의 법칙의 좋음을 잘 이해하도록 우리를 도와주는 것, 그 법칙에 우리 자신이 익숙해지게 하고, 이 법칙에 맞는 우리의 할 일을 선택하는 것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교육 체계는 이러할지 모른다. 즉 우리 주변을 에워싼 다양한 사용 법칙의 모든 것을 가능한 한 모두 가르치는 것, 동시에 실제적 차원과 정신적 차원, 그리고 우리가 돌려주어야 할 영적 섬김들 사이의 차이점을 보여 주어야 할 것이다. 그 뒤 각자는 자신을 매우 강력하게 끌어 당기는 업무를 선택하여 밀고 가는 것이다.
우리 생활의 모형으로 천국의 생활을 스위든볽이 내세우는 이유는 천국의 생활이 지상의 교육을 위해 일하기 때문이다. 항간에서 늘 말한 것은, 우리는 천국을 위해 준비하도록 지상에 주어졌다는 것이다. 이를 한바퀴 돌려 말하면 이런 진리도 발견된다. 즉 우리에게는 지상에서의 더 나은 삶을 영위하도록 천국에 관한 지식이 주어진 것이다. 아름다운 환상이 나사렛 동네의 일터 안으로 와야만 한다. 나는 스위든볽이 천국에서 어린이를 가르치는 것에 대해 말한 것이 지상의 학교들을 위해서도 적합하다고 말하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거기서 어린이들은 주로 “표현물”을 수단으로 가르쳐지고 있다. 더 설명하면 가르치는 도구는 그림이나 교훈적인 연극, 그들이 방문하는 풍경 등으로 이것은 예증과 실예를 수단으로 가르치는 셈이다. 그들은 서로 돕는 일 중 자기가 가장 좋아하는 것을 선택하고 그 일을 위하여 교육도 받도록 인도된다. 어쩌면 이 방법은 근대의 교수법이 지향해야 하는 목표가 아닐까 싶다. 우연히 나 역시 이와 유사한 교육 방법으로 지식을 쌓고 성취감을 맛보아 행복했었다고 회상된다. 더 나아가 이 방법을 수정 보완한다면 일반적 교수 방법에도 커다란 효용이 있을 것으로 확신한다.
내가 어렵지 않게 믿을 수 있었던 것이 있다. 저세상에서 눈으로 보고 만져서 알 수 있는 현상은 그곳의 거주민들의 정신적 상태가 직접 체현된 것이다고 스위든볽이 우리에게 알려준 대목이다. 우리가 근본이 되고 필수적인 의미가 이해되지 않으면 천국의 가장 경이로운 광휘를 아는 것이 별 소용이 없다는 것이다. 게다가 이런 사항은 지상의 육체와 내적 자아가 분리된다는 것을 느끼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이해가 쉽지 않다는 것도 나는 알고 있다. 중간 영계는 그가 잘 아는 사물과 그에게는 너무나 신기하여서 알 수 없는 사물이 뒤섞여 있다. 그래서 거기는 새로운 언어를 배우는 것 같고 또 언어가 표현하는 기초되는 많은 사실들을 습득하는 것 같은 모양이기도 하다.
누군가가 소름끼치는 꿈을 꾸며 자다가 깨어났을 때 무엇이 그에게 달콤한 편안함을 줄까? 아마도 사랑하는 이의 웃는 얼굴이 깨어나는 자기를 바라볼 경우일 것이다. 나는 이와 같은 상황이 지상에서 잠들고 천국에서 깨어날 때와 거의 같을 것이라고 강력히 믿고 싶다. 또한 내가 “잃어버린” 사랑하는 나의 친구 하나하나가 나로 하여금 이 세계와 아침의 저쪽 더 행복한 땅 사이를 연결 가능하게 하는 고리들이라고 믿는 내 신앙은 흔들려 본 적이 결코 없다. 한순간이긴 하지만 어쨌든 나는 그들의 손의 감촉을 느끼기를 중단하거나 그들로부터의 상냥스런 말 듣기를 중단할 경우 내 혼은 슬픔과 더불어 고개를 떨군다; 그러나 내 신앙의 빛은 내 창공으로부터 흐릿해지는 일은 결코 없다. 그리고 나는 다시 용기를 내어 “잃은” 내 친구들이 자유한 것에 즐거워한다. 나는 누군가가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을 이해할 수 없다. 여기서의 삶은 죽음 보다 더 잔인하다-삶 속에는 사람 사이를 쪼개지게 하는 것도 있고 이간질도 있게 한다. 그 반면 죽음은 실제로는 영원한 삶이고, 다시 합쳐지고 재회하게 해준다. 내가 믿는 바, 내 육체의 눈 속의 눈은 다가 올 세계에서 열릴 것이라고…나는 내 심정의 나라에서 의식하는 생활을 단순하게 꾸려 가리라는 것이다. 내 확고부동한 생각은 지상의 일시적인 것을 보고 말하는 물질의 눈을 거슬러 물질 세계 너머에 있는 시야를 뒤따르고저 일어나고 있다. 이미 가서 있는 내 사랑하는 사람이 살아 있다는 한 가지 사실에 반대할 이유가 많이 있다고 상상해보라. 그러나 그것은 상관없지 않는가? 나는 내 의심함들이 먼저 간 영혼들을 슬프게 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실수라는 위험과 한 개의 주장만을 택하고 싶다. 내 택함이 맞는지 틀렸는지는 나중에 파악될 것이다. 불멸함이라는 한 가지 진리가 있기에 나는 나를 떠난 사람의 기쁨 위에 의구심이라는 그림자를 드리우지 않으려 노력할 것이다. 이곳에서 아래쪽을 더듬거리는 사람과 하느님의 빛에서 진실로 보기를 올바르게 배우는 사람 중 누가 더 많은 격려가 필요한지에 대해 나는 가끔은 궁금해 한다. 보이지도 않는 태양에서 그림자를 추측만 하는 사람에게 어둠은 실로 어떠할까? 지상의 마지막 순간까지 우리를 사랑해왔던 이들을 영적으로 접촉하는 노력은 그 얼마나 가치있는가! 확실한 것이 있다. 우리가 어떤 고귀한 애착이나 순수한 기쁨에 의해 접촉될 때, 우리는 죽은 사람을 아주 부드럽게 회상하고, 그들에게 강력하게 빨려드는 경험의 아주 달콤함이다. 신앙을 항상 이와같이 의식함은 죽어야 할 운명의 얼굴을 바꿀 수 있는 힘을 가지게 되고, 불운과 싸워 이긴다. 그리고 그들로부터 거두어진듯 여겨지는 기쁨을 계속 지지하는 이들을 위해 용기의 횃불을 제공한다. 우리가 천국은 우리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있다는 것에 확신이 있을 경우, 저 세상이 “또다른 세상임” 같은 생각은 사그라든다. 우리가 아주 많이 주장해야 하는 것은 오로지 행동하는 것, 사랑하는 것, 소망에 소망을 더해가는 것, 그리고 우리 주위의 어둠을 우리 속에 내재하는 천국의 아름다운 색깔로 물들여 가자는 것이다. 특히 지금, 이곳에서 말이다
나는 험프리 다뷔(Humphrey Davy)경의 말을 감동을 가지고 읽었다. 그에게서 과학과 신앙과 이타심은 놀랄만한 수준에서 결합되고 있다: “나는 타인들에 있는 수준 높은 지성과 마음의 품질을 부러워하지 않는다; 그들의 천부적 재능, 능력, 지력, 공상력도 부러워 하지 않는다. 그러나 만일 나더러 가장 기쁜 것, 그리고 나에게 가장 유용하다고 믿어지는 것을 선택하라고 한다면, 나는 어떤 다른 축복 조항보다 확고한 종교적 신앙을 선택할 것이다; 그 이유가 확고한 신앙은 삶을 선량해지게 하는 훈련장으로 만들고, 지상의 모든 희망이 사라지려할 때 새 희망들을 창조하기 때문에, 그리고 부패와 존재의 파멸을 내던지고 모든 빛들의 가장 우아함을 드리우게 할 것이기 때문에, 죽음에서 조차도 생명을 일깨운다, 그리고 퇴폐와 부패로부터도 아름다움과 신성함을 상기시킨다; 시달림과 치욕이라는 도구를 낙원에로 승강하는 사다리로 만든다; 지상의 희망들의 모든 결합들 넘어의 먼 곳, 즉 쾌락주의자와 회의주의자가 어둑어둑하고, 부패하고, 전멸되어짐과 자포자기라 하는 곳으로부터 종려나무와 시들지 않는 꽃에 관한 가장 즐거운 환상, 복됨의 동산들, 영원히 지속되는 기쁨들이 보장되는 곳을 상기하도록 만든다.” 인류를 사랑하는 자, 고요하고 과학적인 사람인 험프리 다뷔씨의 강한 손을 내 손에서 느끼는 것은 마치 오순절 다락방의 경험 같다. 그는 자기 생각을 후원하는 조정자를 가지지 않았다. 그런데도 그는 옛 믿음들 속에서 많은 모순들을 보았다. 처음에 그는 가난한 가운데 고생하며 지내왔는데도 (돈을 벌 수 있는) 그의 발명품인 안전등을 세상에 무료로 주었다. 그도 자연적 존재 인지라 심한 고통을 느꼈다. 그럼에도 그는 하느님과의 흔들리지 않는 교제를 간직했다.
진실로 나는 어둠의 깊은 곳을 들여다 보았었다. 그리고 그것에 평행하는 영향력을 산출하는 것을 거절했다. 그보다 영 안에 있는 나는 아침을 걷는 이들 중의 하나이다. 인간 마음의 어둡고 낙심된 분위기가 가을의 마른 잎 만큼이나 두껍게 내 길에 깔린 것을 뜻밖에 마주친다면 어떠할까? 다른 사람이 내 앞서 그 길을 여행했다. 나는 사막이 하느님께로 인도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다시 말해 하느님께 가는데는 사막일지라도 푸르고 기운나게하는 들판과 열매 풍성히 열리는 과수원 만큼이나 확실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나 또한 심오하게 부끄러워해 왔고, 광대한 창조 사이에서 나의 보잘 것 없음도 실감하기도 했었다. 더 배울 수록 덜 생각하려 든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내가 내 감각-경험을 더 이해할 수록 내가 더 지각하는 것은 그 경험이 생명의 기초로서 부적당하고 부족하다는 것이다. 때로는 염세주의자와 낙천주의자의 견해의 요점이 아주 기술적으로 균형을 이루어 내 앞에 자리잡는 때가 있다. 이럴 경우 나는 영의 순전한 힘만을 수단으로 실제적이고 함께 살 수 있는 생활 철학을 꽉 붙잡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내 의지를 사용한다, 삶을 선택한다, 그리고 그것의 반대인 허무는 거절한다. 에드윈 맠햄(Edwin Markham)은 그의 시, “너의 선택을 손에 잡으라” 안에 서로 손가락질하는 분위기와 오늘날 주도권을 놓고 경쟁하는 두 다른 신념을 이렇게 오묘하게 써내려 갔다:

장미나무의 큰 가지에 따끔따끔 찌르는 가시가 있다:
우아한 백합은 습지에서 살아야만 한다;
나비의 색깔들은 한번 호흡함에서 소멸하고 있다:
도로의 끝에 죽음의 집이 있다.

아니다, 아니다! 가시에 우아한 장미가 있다;
강의 습지에서 백합이 바람에 날리고 있다;
나방도 잔디의 꽃 만큼 아름답다;
도로의 끝에 하느님께로 가는 문이 있다!

성경은 어떤 책인가?

IV
성경은 어떤 책인가?

성경은 하느님을 발견하고 그 하느님의 법에 일치하는 삶을 배우려는 인간 노력에 관한 기록이다. 신학자들은 하느님에 대한 순간적으로 가졌던 인간의 감명과 아주 빠르게 지나치고 바뀌기도 하는 그분의 세계에 대한 모습을 불변의 형체 안에 붙잡아두려 꾸준히 노력해왔다. 이 노력의 과정에서 성경의 글자 의미 안에는 많은 모순들과 하느님의 본성과 그분의 목적에 대한 오해가 발생했다. 따라서 성경은 절룩거리며 걷기를 시작해서 그 걸음이 발달되어 급기야 그리스도-복음에서 완전으로 절정을 이루고 있다. 나는 이 책을 영적 “일리아드(Iliad)”라고 마음에 품어본다. 이 책은 수천 년의 시간으로 덮힌 책, 그래서 많은 나라들이 있고, 화려하되 얼룩얼룩해진 이야기, 어떤 지점에서는 영감 없는 한 개인의 상상들이나 물질주의의 어두운 시기들이 가로지난다. 그러나 하느님의 얼굴이 세상에 비칠 때 계몽된 시기들도 있다. 그리고 들판과 창공과 물 위에 그리고 인간의 마음에 빛이 있었다. 인간 체험의 혼돈을 빠져나온 어떤 한 개인이 때로는 영적 자각의 절정에 들려졌다. 인간이 발달되어 접혀 있던 그의 총명을 펼 때, 이들의 개인적 절정은 더 자주 보여지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엄밀히 보면 똑같지 않다. 각각 모두는 빛을 가져 온 자들이다; 그러나 빛은 (중간)매체에 의해 무한하였다 할 정도로 다양해졌다. 이 매체를 통해 때로는 신성한 근원을 지각하는데 어려움을 주는 것도 전달되고 말았다.
땅 위의 만물이 또다른 세계의 모든 실체들을 표현하고 묘사하듯이, 성경은 인간의 영적 모든 삶을 대표하는 권위 있는 한 권의 책이다. 이 책 속에서 많은 인물들이 우리에게 오고 지나간다. 법을 준 사람, 왕들, 예언자들 등등이 여러 페이지를 통해 우리 앞을 지나가고 있다. 산과 시내, 세대들이 끝없는 과정 속에서 지나간다. 그들은 기도하고, 울고, 기뻐하는 소리로 성읍들을 채우고, 심정을 악한 상상으로 채우고, 새긴 우상을 자신들에게 만들고, 창검에 의해 죽고, 법을 위반했기에 포로신세에서 탄식하고, 자기들의 머리를 여호와 앞에 굽힌다. 그러자 그들의 적들 위에 저주가 퍼부어진다. 건설하고, 결혼하고, 파괴하고, 찬양의 노래를 부르고, 희생제를 바치고, 위로 받고, 그들의 구세주를 십자가에 처형했다.
성경은 이 세대로부터 저 세대에까지 계속되면서 만들어진 한 권의 책인 바, 불일치와 혼동은 피할 수 없었던 것 같다. 그렇다 해도 성경은 인간 영을 더듬어 보는데 있어 인류가 소유한 가장 중요한 기록이다. 찌꺼기와 금을 분리하는 것, 즉 인간의 말로부터 하느님의 말씀을 분리하는 작업, 이 작업이 스위든볽이 감당한 몫이다. 그는 성경의 거룩한 상징성을 해석하는 천부적 재능을 지녔다. 마치 요셉이 포로된 땅에서 바로에게 꿈의 의미를 알려 주었을 때 그가 발휘했던 천부적 재능과 비슷하다. 스위든볽 시대 때 신학자들은 지식 없는 모호한 말들로 문의나 상담하러 오는 사람들을 오히려 어두운 구석으로 내몰았다. 그들이 성당(Shrine)의 휘장 앞에서 도움을 주지 못할 때, 스위든볽은 예리한 통찰력으로 휘장을 한쪽으로 제끼고 모든 영광으로 차 있는 지성소를 밝히 보여 주었다.
지상의 교회는 주님께서 눈에 보이는 옷을 입고, 사람들 사이에서 사람으로 거주하셨다는 단순하고 직접적이며 영감 있는 이야기들로부터 떠나 버렸다. 불가사의한 실체를 성직자들은 형이상학적 그물로 얽어맨 망상들로 대체했는 바, 결국 자신들도 구해낼 수 없었다. 신성한 인간성 속의 아름다운 진리는 찌그러지고 분리되어 인식을 넘어 해부되고 말았다. 결국 우리 주님 자신은 치명적인 방언들 안에서 잊혀졌다. 스위든볽은 깨트려지고 부셔진 부분들을 모두 가져다가 정상적 형체와 의미를 주어,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과 더불은 새로운 교제”를 건립했다. 스위든볽은 파괴자가 아닌 신성하게 영감된 해석자였다. 그는 하느님께서 보낸 예언자였다. 그의 말 자체가 이를 더욱 확신 있게 해주기에, 후대의 똑똑한 여느 후배의 증언 보다 낫다. 우리는 그의 책에서 그의 힘찬 개성을 비켜가지 못한다. 우리가 그의 메시지를 읽을 때, 우리의 마음은 이해함과 기쁨으로 채워진다. 그는 새로운 성경을 만들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성경을 새로이 했다. 그를 받아들일 경우 영적 재산을 얻게 되는 셈이다.
그의 저술 모두를 망라해 있는 그의 첫 번째요 마지막 번째 되는 생각은 성경을 올바르게 읽고 해석할 경우, 하느님의 가장 진실되고 가장 고상한 개념이 성경 안에서 발견된다는 것이다. 인간의 마음은 신학적 주제들을 저장하는 밀실이 있도록 구성되어 있는데, 그 주제의 중심은 하느님에 대한 생각이다. 허나 이 생각이 왜곡되고 잔인한 쪽일 경우 그것의 뒤를 잇는 모든 것은 논리적 연속성에 의해 똑같은 품질로 치닫게 된다. 가장 높은 것은 가장 깊은 것도 된다. 따라서 가장 깊은 것, 즉 중심되는 생각은 그것으로부터 파생되는 모든 믿음, 생각, 제도 등의 참 본질이다. 이 본질은 마치 영혼 처럼 모든 것을 만들고 형상이 되어 그 안으로 들어 간다; 왜곡된 본질일 경우 그것이 일상 생활이라는 평면으로 내려오면 마음에 있는 진리들을 붙들어 본질 속의 잔인함과 오류로 물들인다. 고대 인도에서의 하느님에 대한 생각 중에 이런 것이 있다. 어떤 고위 지식층의 사람이 내놓은 원리인즉, 사람이 하느님 같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인간적 애착과 의무와 (가족, 친척) 관계들을 모두 부수어야 한다는 것, 그러면 그와 동시에 그는 지독하리만큼 열정이 식고 외적인 것들에 대해 생각도, 흥미도 없게되는 바, 급기야 하느님 같이 되어져 무한 안으로 흡수되고, 또다른 세계를 위한 준비가 완료된다는 것이었다. 물론 이 이야기는 극단적인 경우이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인간성을 적으로 간주한 신조의 한 부류이다. 이와 연결해 생각되는 신념도 있다. 즉 가공된 어떤 특출함을 내세워 감정들을 불러일으켜 인류의 선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 예식 자체에 골몰하여 결국 가공된 특출함을 올바르고 유용한 삶과 대체해 놓는 경우이다. 이런 신조들은 모두 도덕성을 어둡게 하고, 도덕적인 것 마저 아첨으로 숭배해지게 하는 최고 존재의 도구로 전락한다. 그러나 진리 안에 있는 선한 자나 슬기 있는 자에게는 역겨운 짓일 뿐이다.
스위든볽이 그의 독자에게 자주 경고하는 위험함이 있는데 그것은 하느님에 대한 애매모호한 생각이다. 그가 여러 번 말하는 바, 겸손한 사람은 하느님이나 영혼, 그리고 불멸함에 대하여 실수나 미신적인 점이 있을 수 있지만, 대단한 지식을 가졌다고 하는 자들이 하느님의 창조나 자기들의 마음을 들여다 보고 결국 거기에는 신성한 진리가 없다고 말하는 것 보다는 더 슬기 있는 생각이라고 말한다. 더듬거리며 찾고 있는 신앙인을 떠받쳐 주기 위한 예레미야의 아래 구절은 우리를 얼마나 의미심장하게 하는지 모른다.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신다, 지혜로운 자는 그의 지혜를 자랑하지 말라; 용사는 그의 용맹을 자랑하지 말라; 부자는 그의 부함을 자랑하지 말라; 자랑하는 자는 이것으로 자랑할지니 곧 명철하여 나를 아는 것과 나 여호와는 사랑과 정의와 공의를 땅에 행하는 자인 줄 깨닫는 것이다, 나는 이 일을 기뻐한다, 여호와의 말씀이다.” (9:23-24)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에 대해 방황하는 생각이 있다. 그는 이렇게 선언한다. “이 생각은 어떤 것도 결정짓지 못하는 것, 따라서 이 생각은 이내 중지되고 멸해진다. 하느님을 영으로서 생각하고 영은 에테르(ether)나 바람일 거라고 생각하면 이는 텅빈 생각이다; 그러나 하느님을 사람으로 생각할 경우 이는 올바른 생각이다; 그 이유가 하느님은 신성한 사랑과 신성한 지혜이시기 때문, 모든 품질은 이 두 본질에 속하고 있는 바 이것들의 주체는 사람이고 에테르나 바람이 아니다.”
다시 더 그의 책을 읽어보자: “만일 누구가 신성한 사람에 대한 생각 없이 신성 자체를 생각한다면, 그는 모호한 것을 생각하고, 모호한 생각은 아무 것도 아닌 생각이다; 또는 그가 신성에 대한 생각을 경계 없는 우주로부터 품으면 이 생각은 희미함에서 끝나고, 이런 생각은 자연의 숭배자에 대한 생각과 하나를 만든다; 이것은 자연 안으로 떨어지고, 결국 생각 없는 것이 된다.”
인간 존재 속의 세겹 본성인 영과 지력, 그리고 육체를 올바르게 이해할 경우, 인간이 지각하는 모든 형체는 상상 안을 통과한다는 것, 그리고 그의 혼은 상상에 생명과 의미를 부여한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사람과 우주는 신성한 마음(Mind) 안에 그려져 있다. 하느님은 인간을 그분 자신의 형상과 모습으로 창조하셨다. 이 창조를 인간 측면에서 보면 인간은 자신의 모든 개인적 특질로 각인된 생각-형체들을 자기의 마음과 육체와 세상에 내보낸다. 이는 화가가 아름다운 그림을 페인트하기 전 먼저 그의 마음에 그림을 그려 본다는 것을 상상해보면 간단히 이해될 것이다. 이런 식으로 영은 사상(idea)들을 생각-형상(thought-image)들, 또는 상징들로 설계한다; 생각-형상들 내지 상징들은 보편적 언어, 유일한 진짜 언어이다. 예를 들어 누군가가 우리가 볼 수 있는 형체인 태양을 가지고 자신의 기쁨, 신앙, 내지 자기의 정신적 그림을 다른 사람에게 전달할 수 있다면 통상 많은 단어나 어구를 사용한 경우 보다 간단히 더 만족스럽게 전달될 것이다. 언제인가 나는 돋을 새김하여 만든 행복을 표현한 중국 상징화를 만지고는 소리친 적이 있다. 어쩌면 많은 언어로 행복을 묘사한 글을 읽는다 해도 소리칠 정도의 감동(effect)이 나에게서 발출되지 않았을 것이다. 이 그림은 어느 사람이 입을 꼭 다문채 벼농사 들판을 응시하는 그림이었다. 중국인들이 벼농사 작황에 지독하리만치 (생사를) 의존하고 있다는 것, 따라서 들판에 홍수라도 덮쳐 작물이 파괴될 경우 수많은 인간 존재가 굶주림에 시달릴 것임은 피할 수 없다는 느낌이 순간적으로 내 마음에서 얼마나 사무쳤는지 모른다. 프랑스인들은 말하기를, “단어들은 생각들을 감추기 위해 고용된다.” 러스킨(Ruskin)의 “참깨와 백합”에 웅변적인 문단이 있는데, 거기서 단어들은 마음의 진짜 문제(issue)들을 바깥으로 내모는 바, 마치 가면 같다고 말하고 있다.
현재의 성경은 보편적 언어로 광범위하게 기록되어 있다. 기독교인 역시 이것을 스위든볽 시대 전에 알고 있었다. 그들은 “알기 어려운 말”이나 “비유”와 친숙하다; 그러나 그들도 우리들 같이 성경의 많은 부분들이 알기 어렵다. 특히 “계시록”의 경우 더욱 그러하다. “참으로 당신은 자신을 감추시는 하느님이시다. 이스라엘의 하느님 구주시여” 라는 구절은 말씀에 감추어 놓인 진리가 있음을 정확히 묘사하고 있다. 이스라엘은 구름과 불기둥에서, 내지 그분의 권능의 지팡이를 통해서가 아니고는 그분을 알지 못했다. 그분이 자신을 지상 위 사람으로 보이셨을 때, 그분은 악마의 왕자와 동맹한 자로 불리우기도 했다. 그분 자신의 제자들 조차 그분의 목적을 제대로 알지 못해 그분의 왕국이 세워지면 누가 가장 큰 자가 되는지를 놓고 서로 다투기도 했다. 그들은 그분의 사랑의 일을 정복이나 개인의 영화를 도모하는 일환으로 오판했다. 이렇게 그분의 모든 길을 가리운 어떤 것이 있지 않는가! 그분의 참 계시는 구름 안에서 가리운채 있었다. 우리에게 그분을 보이시려 공언한 말씀은 유한한 인간 본성의 한계로 그분을 옷입혀 놓았다. 그리하여 우리는 그분의 속성에 대한 가장 모순된 인상을 획득하고 있다. 그분은 무한과 영원이시다. 그럼에도 우리의 격정이나 무지를 그분의 탓으로 돌리고 있다. “격분은 내 안에 없다.” “나는 성내지 않는다. 너는 네 자신에게 분노를 유발시키고 있다.” 이렇게 그분은 말하시면서도 한편으로는 땅 위에 그분의 분노를 맹렬히 쏟으신다. 그분은 “후회 하지 않으시는” 하느님으로 표출되시고 있다. 그런데 그분은 후회하신다. 그분은 각자의 행적에 따라 (상,벌을) 각 사람에게 주신다. 그런데 그분은 아버지의 죄를 자식에게 물으신다. 이와 같이 성경에는 외관 상 모순되는 긴 시리즈도 있다. 물론 많은 사람들이 조화되지 않은 생각의 혼돈 아래 깔려 있는 어떤 질서를 볼 수 없다는 것은 당연할지 모른다. 만일 우리가 사랑에 가치의 모든 무게를 두고 하느님을 믿을 경우, 우리는 성내시거나 변덕스러워 쉽게 변하시는 분으로서의 그분을 생각할 수 없다. 이런 모순의 발생이 생긴 연유에는 성경이 쓰여질 때의 시대 상황이 미개한 상태인 것도 한 몫하고 있다.
스위든볽은 이치에 맞는 신성한 계시에 관한 철학을 발전시키고 있다. 과학 분야의 특성 같이 하느님으로부터의 새로운 사상에 관한 모든 계시는 그것을 받는 이들의 상태나 수용력에 알맞아야만 한다는 것을 스위든볽은 지적하고 있다. 그가 떠맡은 업무는 성경의 글자적 서술은 아주 단순하거나 감각적이거나 외고집인 사람들의 지성에 걸맞게 신성한 진리가 순응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는 증명하기를, 글자 의미 안에 영적 의미가 있다는 것, 이 의미는 비록 우리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우리와 함께 하느님의 진리를 읽고 생각하는 천사들이 지닌 더 높은 총명에는 잘 어울린다. 신성한 진리는 이런 상급의 의미에서 완성된다. 예를 들어 내 친구가 내 말을 100% 글자대로 언제나 받는다면 결과는 어떠해지겠는가? 즉 지구는 평평하다…나에게 밤은 없다 등등의 내가 내뱉은 말을 단어 그대로 생각하면 나는 그에게 미친 사람 처럼 여겨질지 모른다. 다시 말해 내 친구가 귀를 기울여야 하는 대목은 의미를 운반하는 단어의 겉모습이 아닌 속 뜻이다는 것이다.
말씀의 깊은 의미를 파악하는데 있어서도 위와 비슷한 바, 스위든볽이 사용한 방법과 비슷하다. 만일 우둔한 사람, 또는 나쁜 성미를 지닌 사람이 성경에서 하느님은 사악한 자들에게 매일 화를 내신다는 대목을 읽는다면 그에게 하느님은 소심하고 비신성한 분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이 구절을 분별력 있고 심정이 훈훈한 사람이 읽을 경우, 그것은 하느님의 겉모습일 뿐이다는 것, 우리는 그분 위에 덮어 씌운 서로에게 성내는 것이나 우리 자신이 자초한 벌을 벗겨 드려야 한다는 것을 뜻하는 것으로 이해하여 받아들인다. 이런 화냄도 있을 것이다. 의로운 자가 돌발적으로 화를 냈다가 가라 앉는 경우이다. 그리고 이는 그를 연마시키려는 사랑의 분노라고 이해하게 될 때도 있다. 그러나 하느님은 강경함 자체를 실행할 수 없으신 분이시다. 그래서 그분은 이런 부분을 누차 그분의 백성에게 말하시곤 하셨다. 우리가 신성한 말씀에 덮힌 가리개를 한쪽으로 밀어내고 꿰뚫어 볼 때, 우리는 그분의 본성에 (더욱 가까운) 참되고 참된 말씀을 발견한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만드시고 내쳐서 에덴에서 추방하시지 않는다. 하느님께서는 법을 가르치시고 그것을 깨트리는 것을 보고, 그 죄과를 그분의 창조물에 전가하시지 않는다. 그분은 경고는 하시나 그를 돌보지 않는다거나 지옥으로 내던지지 않으신다. 납득 가능한 언어로 계명을 주시어 실행할 수 있게 해달라고 졸라댄 것은 하느님이 아니라 인간이었다. 스윈버니(Swinburne)는 아래와 같이 글을 쓰다가 그분의 현존하심을 무의식적으로 느꼈다:

나 아닌 신들을 향하여 너무도 충실한
오 나의 아들아,
내 아름다움이 다른 신들만 못하더냐?
네가 자유롭게 있고 싶은데 내가 너를 힘들게 하더냐?
잘보아라, 나는 너와 함께, 네 안에, 너 때문에 있다는 것을;
지금 내다 보라 그리고 깨달으라

아름다우시고, 모든 것을 참아주시는 신성 위에 집어 던져서 천국에 산더미 같이 쌓여진 혹독한 말들을 실감해본 적이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그분은 실지로 자신을 감추이지 않으신다; 결심 굳힌 이기심의 악한 언어가 그분을 감추어 놓는다.
내가 위와 같이 여러가지 것을 말한 이유는 만일 우리가 그분의 말씀을 시종 일관하게 읽겠다면 하느님의 본성에 관하여 구름 한점 없듯 매우 명료한 생각을 가질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이런 견지에 의거하면, 영적 의미는 혼 만을 집중적으로 취급한다는 것, 따라서 시대나 장소 개인적 인물이 아닌 혼에 필요한 것, 그 시련, 그것의 변화와 갱신 등등 만을 다룬다는 것이다. 우리가 산, 강, 어린 양과 비둘기, 천둥과 번개, 금으로된 성과 보석 그리고 치료해주는 생명 나무의 잎과 같은 말들을 읽을 때, 이 말들은 그 말 뒤에 놓인 영적 원리에 대한 정확한 상징이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다시 말해 애착과 사상이 상징물(표현물)을 수단으로 의미되어 있다. 그리고 그것들이 혼에 사용되는 것은 자연적 표현물이 육체에 사용되는 것과 비슷하다. 해석의 이런 방식이 스위든볽에 의해 27년 동안 고용되어졌다. 그리고 그는 그의 첫 출판 서적에 있는 한 개의 서술까지도 되돌아가 고치거나 바꿀 필요를 못느꼈다. 그는 성경 전체에서 같은 자연적인 것(단어)에 대체로 비슷한 영적 의미를 주고 있다. 그리고 그 의미는 성경 어디서 응용되든 꼭 맞고 있다. 나도 꼭 맞는지 이 열쇠를 시험해본 적이 있다. 이것은 스위든볽이 상응의 법칙이라고 부르고 있다. 즉 자연의 형체와 영의 형체 사이를 유추함이다. 성경은 하느님이 인간에게 유한한 인간 수준에서 말하심, 뿐 아니라 세상에 관한 시라고 부를 수 있을지 모른다.
스위든볽의 저서들 중 특히 “천국의 비밀들”은 잉거솔(Ingersoll)과 여타 성서 비평가들이 글자적인 서술은 신용할 수 없다고 말한 것의 많은 부분을 확증하고 있다; 이와 동시에 그런 성경 부분에 대한 가치 판단에서 그들의 판단에 잘못이 있다는 것도 역설하고 있다. 나는 성경 글자 의미가 근대 과학의 빛으로 보면 얼마나 결함이 있는지, 어떤 이야기들은 얼마나 이상한지, 안과 밖이 일치되지 않는 서술이 얼마나 자주 있는지를 배울 기회가 풍부했었다. 그럼에도 나 역시 주목한 것은 단어로는 읽혀질 수 없으나 상징 안에 들어 있는 의미, 즉 글자 아래 놓인 의미가 있다는 것, 그리고 이 의미는 상징성이 발생되는 모든 부분들을 잘 붙들고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해 아래 시편 78편의 경우가 좋은 보기가 될 것 같다:
“나는 비유 안에서 내 입을 열 것이다; 나는 옛 것으로부터의 알기 어려웠던 전해 오는 말을 발음할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들었었고 알았었던 말이고, 우리의 선조들이 우리에게 말했던 것들이다.” 이 뒤를 이어 이집트에서의 이스라엘 후손의 경험, 그리고 가나안으로의 그들의 순례기가 있다. 이 기록은 실지 역사이다; 그런데 위 시편은 말씀의 의미 파악의 방법을 깨달은 사람만이 확실히 납득할 수 있는 비유이다고 발표도 하고 있다. 따라서 이 비유에는 얼마나 깊은 의미를 담고 있는지! 이 역사는 물질주의와 무지로부터 탈출해서, 가나안의 아름답고 비옥한 땅이 표현하는 것, 즉 더 행복한 삶을 향한 느리고 힘든 발전을 완전하게 묘사하고 있다. 출애굽에 관련한 대단히 간략한 위 설명을 제시한 이유는 스위든볽이 성경을 신성한 진리의 수송 수단으로 어떻게 간주하고 있는지를 여러분께 예증해주려는 때문에서 이다.
1753년에 아스트맄(Astruc)이 모세 오경에 관련된 두 세 문서를 발견하여 일약 유명해지던 그즈음, 스위든볽은 창세기와 출애굽기를 설명하는 “비밀들, Arcana”을 런던에서 익명으로 출판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상기해보는 것도 흥미 있는 일이다. 후자의 경우, 성경은 물질적 창조 또는 대홍수 같은 것과 무관하고, 창세기 첫 11장 까지에서도 아담과 노아로 명명된 어떤 개인들에 관련이 있다고 믿지 않았다. 이 주제에 관한 그의 관심은 아주 다른 국면에서 였다. 그는 히브리어에 관한 공부와 그의 정신적 계몽을 수단으로 창세기의 첫 장으로부터 유대인 시대가 열리는 지점 까지는 인간 종족의 영적 생활이 고대의 우화적 스타일로 된 전말서(account)로 주어졌다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가 지적해주는 바, 창세기 첫 장은 인간 마음의 진화의 단계들을 포함한다는 것, 처음에 흑암과 혼돈 뿐인 마음이 단순한 진리와 행복의 에덴에 도달될 때 까지 발달되었다는 것이다. 이 시대는 자아 이익이 힘의 원천이 되고 어린 시절의 순진이 상실될 때까지 계속되었다. 결국 잘못된 생각들이 세상을 홍수 같이 휩쓸었다. 그런 다음 인간들 중 명민한 종족, 즉 방주에 있는 노아로 나타냈는데, 이 종족이 새 시대를 시작했다. 총명은 빠르게 성장했다. 그리고 양심의 지팡이가 순수한 혼의 음성을 대신 했다. 상징물은 더 이상 에덴이 아닌 포도원 이었다. 인류는 대망을 품은 젊은 이 같아, 해마다 기록이 갱신되는 위대한 동쪽의 제국을 건설하였다. 이 시기의 문명은 광범위하게 되었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그것은 타락되었다. 다신교와 우상 숭배가 존재 안으로 왔다. 전쟁과 폭력이 땅의 얼굴을 파멸로 덮겠다고 위협했다. 그러자 또 다른 처방(dispensation)이 내려져야만 했다. 이 처방이 유대 교회의 시작이었고, 이 교회는 시간이 차서 기독교가 세상에 도래할 때 까지 일신교를 살아있게 보존했다. 첫 기독 교회 또는 첫 기독 문명은 모세의 것이 연속된 수준이었다. 따라서 그 안에는 임시변통하던 것, 즉 수지 양초라든가 몹시 거친 사회에나 걸맞을 깜박이는 횃불의 신앙 등등이 여전히 존속되고 있었다. 고로 말씀의 가장자리의 여백이나 채워야 할 감각-그림이나 예식 광경이나 권위의 지휘봉 같은 것이 오히려 미신적으로 존경을 받았다: 정작 읽어 알아내야만 하는 신성한 의미는 읽히지도 못한채 밀려나 있었다. 이런 상태에서 외고집적인 세상의 성년기는 지나갔다. 그리고 감정에 지배되어 발발하는 것들을 계속 느낀다. 그리고 몰락하고 불행한 마음의 상태가 있게 된다. 그러나 지금 더 계몽된 신앙의 서광이 인간 위에서 비치고 있다. 그리고 새 사람의 창조가 한걸음씩 계속되고 있다; 그렇다, 모든 심정과 바깥 세계에서 평화의 안식이 도래하고 이기심의 지배와 맹목적 본능은 영원히 사라질 것이다. 이런 식으로 성경은 하나의 광대한 영광스러운 비유로서 초상화되어져 있다. 성경을 읽는 자 누구이든 읽는 구절마다에서 그는 삶을 공부하고 현재의 자기 삶에 적합한 상황도 얻는다. 즉 인생 초기의 순진함, 유년기의 제멋대로 함, 중년기의 삶의 구원을 위한 전환, 그리고 계산할 수 없는 섬김의 가능성과 그로 인한 기쁨이다. 이것은 낙원으로부터 낙원 까지의 완전한 궤도-“주님께서 영원히 앉아 계시는 땅의 궤도”-이다. 지나간 오랜 세월 속의 한정된 단어와 불완전한 사고 방식은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며, 새롭고 더 높은 선물과 능력을 나누어 주신다는 천국의 메시지의 겉모양일 뿐이다.
성경에 대한 더 높은 비평은, 스위든볽이 암시하듯, 성경의 본질적 의미를 조금이라도 거두어 가는 것은 아니고. 초기 유대교 저자들의 잘못된 견해들을 고친다.
이 관점의 경우, 고고학이나 지질학의 축적된 자료, 그리고 다른 (성경 관련) 문서들의 연구와 충돌되지 않는다. 성경은 이전 보다 더 높은 수준으로 들려졌다. 그리고 거룩함으로 옷입혀져 있다. 옛 견해는 모든 혼들 속의 위대한 하느님을 대부분 무가치해지게 했다. 옛 견해 속에서는 이러했다. 즉 그분은 시나이 산에 당도할 때까지 아무 말씀도 없었던 분으로 상상되어 계셨다. 그분은 과학이 신앙과 어떤 마찰 없이 연구를 진행해 갈 여지를 남겨두시지 않았던 분으로 낙찰되어 계셨다. 즉 인류에 대한 그분의 가르침은 좁고 배타적인 빛의 광선을 통하여 모세에게 있어 졌을 뿐이었다. 고로 그분의 섭리는 대체로 무정하고 소홀함들 뿐이었다. 이스라엘을 제외한 모든 백성들은 저주와 추방의 쓰라린 운명에 있었는 바 수백만의 사람들은 지옥 안으로 휩쓸려 졌다고 판단했다. 그런데 “사랑받는 아들”이 중재했고, 이 아들은 파멸되고야말 인류를 위해 자신을 십자가 위에 희생 제물로 바쳤다. 그 다음 “아버지”와 화해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이는 “아들”이 중보한 특별한 사람 만에 해당된다. 이런 저런 옛 견해는 스위든볽의 주된 적이었다; 그 이유가 이 견해는 학교에서 꾸준히 가르쳐져 왔고, 설교되었고, 최고의 열정과 웅변으로 선포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견해의 거인 같은 그림자는 아기의 요람 위에까지 누워 있고, 감옥과 죽음의 자리도 덮었고, 급기야 이것은 일상 생활의 작은 행동이나 흔한 언행에 까지 침투했다. 결국 회의론과 무신론이 사방에서 튀어 나온 것은 당연할 것이다. 주님과 그분의 말씀에 대한 신앙은 과학과 철학을 내려누르고 모든 관대한 감정을 묵살할 것을 요구하는듯 보였다.
그러나 스위든볽은 성경의 진가를 재 발견하여 새 희망을 가져온 새 견해로 이 거인과 맞붙었다. 그와 동행한 하느님은 모든 국가들과 모든 시대의 하느님이시다. 무한하게 인내하시고 이타적일 뿐인 그분은 온 세상을 지켜보셨다. 애초에 그분은 아름다운 나무가 성장하는 법칙과 동일한 방법으로 어린아이 같은 인간을 인도하셨다; 그런 다음 그분은 그를 에덴, 홍수, 포도원, 그리고 탑으로, 그후 모세의 책들과 예언서들로 가르쳤다. 지질학이나 과학으로부터의 그림들은 인간의 거듭남을 상징화하는데 사용되어졌다. 사람 사는 모든 토지에는 언제나 정의의 법칙이 있어왔다; 즉 우리에게 잘 알려진 하무라비(Hammurabi) 법전 같은 경우가 있다. 이는 창세기 14장 1,9절에 등장하는 암라펠(Amraphel)이었다. 그러나 십계명이 시나이 산에서 특이한 방법으로 주어졌는데, 그 이유는 수세기가 지나 지혜와 과학이 밝히 알려지게 할 영적 법칙들의 윤곽을 보이기 위함 때문이었다. 우리의 기억들에 도장찍혀 확실해진 생명의 그림을 수단으로해서만 우리는 더 아름다운 것을 상상하는 것을 배울 수 있고 또한 그것들을 살아있는 실체들로 만들 수 있다. 유대인들은 자기들이 신뢰해야 할 만인을 위한 십계명을 외면했을 때, 그들은 말씀을 책으로는 들고 있지 않지만 고결하고 지혜있는 심정에 금으로 된 글자로 새겨 지닌 다른 백성의 실예를 가지고 예리하게 견책되어졌다. 스위든볽은 기독교국이 응당 보여야할 진지함과 덕행의 실예로서 자기 시대에 있던 많은 이방인들을 내세우고 있다. 오! 그들은 지금도 형제애의 덕목을 실현하려 결심 굳힌 용기를 내보여 준다. 한편 우리는 다음 전쟁에서 상대를 죽이는데 가장 치명적인 방법이 무엇인지 궁리해내고 있다. 진실로 주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 있고, 글자주의의 옛 하늘과 땅은 녹아 사라질 것이다.
진화는 창조하시는 하느님의 방법이다고 스위든볽의 가르침에서 암시되고 있다. 이와 더불어 먼저 있어야할 진화, 즉 내적인 것의 “진화” 없이 그 진화는 완전하지 못하다는 것도 그는 보여주고 있다. 하느님은 생명 자체 또는 혼이시기 때문에 그분의 손으로부터 있는 모든 것 안으로 혼의 형체를 놓을 수 밖에 없고, 혼은 물질을 붙잡아 그 혼에 하느님이 생각하셨던 어떤 것의 형상 안으로 형태를 잡는다. 플라토(Plato)가 말한 것, 즉 어떤 것이 없음으로부터 만들어질 수 없다. 그리고 총명은 존재의 다른 평면에 놓여 있기 때문에 그것은 물질로부터 진화될 수 없다. 이는 아직도 진리이다. 비록 인간이 보다 낮은 수준의 모양으로부터 보다 높은 수준의 모양으로 발달해 나간 것은 사실이나 시작에서부터 그는 불멸하는 상태였다. 어쨌든 자기 안의 혼을 의식할 때까지 인간은 자기의 보다 높은 수용력을 즐기지 못했다. 그는 또 주장하기를, 인간은 거대한 물질적 발전을 이룩해 갔지만 그 반면 어린아이 같은 단순함과 순진함으로부터 타락되어 갔다는 것, 그리고 길고 가파른 방법을 수단으로 하느님이 계신 높은 곳, “모든 혼들이 그분을 만나는 장소”로 되돌아 오고 있다고 말한다.
나로 하여금 밝히 알게 한 스위든볽의 가르침은 무덤으로부터 그 무덤이 주던 공포를 가져간다. 천국 안으로 들려지기 전, 대부분의 “기독인들”은 미래의 삶이 궁금증을 넘어 어떤 공포들로 차있었다. 생명 또는 죽음 어느 것이 더 좋은 기회가 되는지, 즉 죽음은 삶의 끝인지 아니면 또 다른 존재 안으로 들어가는 문인지 라는 질문은 토론의 대상이었다. 더 크고 더 고상한 삶이 죽음 건너에 있다는 것은 지금은 확실해졌다. 어머니의 팔에서 죽은 아이가 견디기 힘든 억지 논리에 휘말려 있었다. 그러나 지금 내가 아는 바, 달콤하게 향기를 품는 어린아이다움이 그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 빛나는 거처에서 천사는 그에게 말하는 것, 창의적인 사고를 생각하는 것, 그에게 꼭 맞는 일을 하게 한다는 것, 그런 곳에서 그는 아름답게 성장하고 어쩌면 지상에서 발휘할 능력 보다 더 많은 능력 발휘가 그를 위해 준비되고 있다는 것이다. 지금 내가 아는 바, 지상에서 방해받아왔던 진실된 모든 사랑은 저쪽 세계에서는 열배나 더 큰 기쁨을 누린다. 천국과 지옥은 우리의 더 깊은 의식 안에서 사실들로 되어갔는 바 더 이상 논쟁의 여지가 없다. 우리는 그것들에 대한 직관적 확실함을 가지고 있다. 이 확증은 받느냐 거절하느냐 하는 선택을 위해 이성이나 논쟁으로 추론된 절뚝거리는 지식으로부터가 아니다. 정면으로 마주 보는 지식만이 사물에 실재함을 준다. 그 이유가 실재함은 생명으로부터 튀어나오기 때문이다. 그리고 스위든볽의 살아있는 증거의 빛이 우리 혼의 경험의 “구석진 곳”의 어둠에 비하면 처음에는 약한 빛일지 모르나 확실한 것은 그 빛은 점점 더 밝아진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불멸하는 목적을 더듬거려 찾는 우리의 수고에 대담무쌍의 힘으로 보강해줄 것이다.
저 세상 이야기를 하는 것은 멍청한 짓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야 그럴 수도 있겠지만, 그 사람들이 그 멍청한 짓 없이 살려고 노력했으나 비극적 실패로 끝나버렸다. 우리 중의 극소수만이 그 길이 벗어난 길이라고 알고 있다; 그런데 스위든볽은 이런 말을 받아 쓰라고 명령받았다. “선으로부터 파생된 진리들이 모든 능력을 가진다.” 주님이 그분의 신성한 진리로부터 우리에게 영감을 주신다면, 정신적으로 삼손의 그 강한 힘이 우리 안을 지나갈 것이고, 우리는 수많은 인류의 발달 가능성의 문을 누르고 있는 엄청난 무게를 들어 올릴 수 있을 것이다. 에머슨은 여러가지 신념에서 스위든볽과는 먼 거리에 있다고 생각되는데 그는 스위든볽이 이기심이 전혀 없는 마음가짐으로부터 근본적인 진리를 보았다하고 말한 것은 의미심장하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적었다: “의지의 약함은 그 개인이 자신으로부터 어떤 것을 하게하려 들 때 시작된다. 지성의 소경됨은 지성이 그 자체로부터 어떤 것을 하게하려 들 때 시작된다.” 다시 말해 신성한 생명이 우리를 통하여 그 길을 갈 수 있도록 하는 것 밖에는 세상을 구원할 방도가 없다는 말이다.
위 말은 “우리를 도우려 저 언덕들”로부터 오는 스위든볽의 메시지의 참 의미이다. 그가 강조한 것은 영원불멸이 아니라 우리에게 부과된 책임이었다. 그는 천사들과의 특별한 교제를 목적 자체로서 간주하지 않고, 그의 이해성을 여는 수단으로 간주했고, 그리하여 하느님의 말씀의 참된 해석, 그리고 이 해석을 인류의 공동 유산으로 만드는 수단으로 삼았다.
따라서 우리는 지상을 떠난 영들과 교통할 가능성은 인정하되, 그들과 교통하려 허둥대서는 절대 안된다는 것도 명심해야 하는 대목이다. 예언자들, 사도들, 그리고 선견자들이 인간의 잠자는 심정을 깨울 필요가 있어졌을 때, 그들이 천사들이나 악마들과 제휴된 관계를 의식하고 있는 것은 유용하다. 그 이유는 이런 경우 주님께서 친히 이 일을 감찰하시고 혼동 없게 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통상적으로 위와 같은 영적 교통은 인간을 큰 위험에 노출되게 한다. 그 이유는 인간의 약점을 아는 현혹하는 영들에게 쉽게 빨려들어 그것들의 이기적 목적을 위해 이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스위든볽이 서술하기를, 모든 인간 존재에게는 최소한 천국으로부터의 두 천사와 지옥으로부터의 나쁜 두 영이 동행한다는 것이다. 고로 마음의 평화와 삶의 질서가 있어짐은 우리가 의식 못하는 두 아군과 두 적군에 의존되어 평형을 유지한다고 서술한다. 쟌 웨스레는 말하기를, 계시 안에서 우리는 알 필요가 있는 모든 것을 가지고 있는 바, 우리는 그분의 안내와 보호하심을 신뢰하면서 주님 만을 따라가면 된다 라고 했는데, 이 말은 정확히 그러하다.
주 예수 그리스도는 계시록의 첫 절과 마지막 절에서 명명되어지고 있다; 이 분은 이 책의 중심되는 인물이시다. 이 분은 신약 성서의 예수이시다. 책 “계시록”은 지상 위 주님의 일, 그분의 십자가에 달리심, 그분의 부활에 관해 말하고 있는 복음서의 계속이다. 계시록은 어떻게 그분이 그분의 영광되신 인간성- 최고의 본보기 되심과 영감주시는 분의 힘 안에서 그분의 일을 계속하셨는가를 말해주고 있다. 복음서에서 그분은 말하셨다. “보라, 나는 너와 함께 시대 끝날까지 언제나 있는다”; 그리고 그분은 아직도 인간들에게 가져다 주려는 위로함과 계몽에 관하여 자주 말하셨다.
위 약속은 무엇이 되어 있는가? 오순절 성령의 오심, 제자들이 잠깐 동안 이지만 느꼈던 가르칠 지혜와 용기와 기쁨을 제외한다면 그분의 약속은 아주 잊혀진듯 여겨진다.
그러나 스위든볽이 보여주는 바는, “계시록”은 이 약속을 취급한다는 것, 그리고 그 약속의 완성을 예언한다는 것이다. 계시록은 상징을 수단으로 일어나신 주님의 본성을, 그리고 그분의 현존하심으로부터 흐르는 축복들, 우리가 그분을 위하여 우리의 마음을 준비하는데 해야만 하는 것들을 애매한 점이 하나도 없게 그리고 있다. 이 책은 영광으로 현존하시는 그분 주위에서 별들 같이 빛을 내는 기독인의 삶의 이상향들을 충분하게 제공하고, 이런 이상향이 사도들에 의해서도 희미하지만 그런대로 윤곽을 보여 주었다는 것도 그려놓고 있다; 이 책은 이런 이상향이 우리 자신의 일부가 될 수 있기 전 반드시 정복해야 하는 잔인한 신앙과 생활 속의 악들을 나열해놓고 있다. 이 책은 참 기독교 신앙에 중요한 걸림돌도 보여준다, 그것은 선행 없는 신앙, 그리고 예식이나 미신적인 것들, 그리고 겁주는 것들을 수단으로 지배하려드는 탐욕이다. 바다와 바닥 없는 구덩이로부터 올라오는 짐승들은 위와 같은 정신적 괴물들, 즉 예정론, 지적인 속박, 세 하느님들에 관한 생각 같은 것을 표현한다. 특히 삼신론 같은 경우는 힌두교도의 말인 즉, 사람의 마음을 분열시키고 “하나를 향한” 행위가 불가능해지게 한다는 것. 그 이유가 이와같은 신관은 영적 집중의 모든 힘을 파괴하고, 균형 없는 정서를 낳고, 예의범절의 짜임새를 갈갈이 찢고, 하느님의 통일성에서만 생명이 있는 철학을 내몰아친다. “계시록”의 용은 주님의 신성과 그분의 계명들을 지켜야 할 필요성을 교묘히 비트는 추론으로 헛되게 하려는 파렴치한 인간들의 모든 노력이다. 바빌론은 그분을 인정하고 그분의 진리에 따른 삶을 방해하는 모든 자만심과 자부심이다.
계시록의 여러 장들은 영들의 세계에서 있어지는 심판의 광경으로 가득하다. 봉인들이 떼어졌다, 그리고 나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는 쇠퇴하는 교회 속의 어둠과 위선이 폭로됨을 뜻한다. 광경들 모두를 망라해 신성한 인성 안에 계신 주님이 움직이시고 있다. 즉 그분의 사랑의 힘, 그분의 지혜의 순수함, 그리고 그분의 섭리의 열정이 그분의 가슴 주위를 맨 금빛의 띠, 눈 같은 그분의 머리, 불꽃 같은 그분의 눈, 태양 같이 빛을 내어 영광으로 있는 그분의 얼굴이 상징되어 있다. 많은 물들 같은 그분의 음성은 새로운 생각들이 퍼져나감 그리고 더 높은 신앙들이 땅의 체계들 안으로 퍼져감이다. 그분은 이 책 안에서 그분의 현존이 지상에서 걸으셨던 그 이후 유한한 인간의 눈에 보여지기로는 왜 그렇게 작게 느껴졌는지, 그리고 왜 그분의 영으로부터의 위로가 이렇게도 작다고 느꼈었는지를 명백하게 말하고 있다. 지배함과 압제는 우리로부터 그분을 강탈했다. 과거 시대들 속의 교회는 아주 편협한 교육을 했기 때문에 인간의 생각이 그분으로부터의 새로운 메시지를 위해 필요한 지식 수준에 이르는데 오래 걸리게 했다.
심판하심으로부터 그분은 그분의 미소로 하늘과 땅을 기쁘게하는 쪽으로 방향을 트신다. 즉 새 예루살렘이 내려 오는 것-새 처방이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읽는다. “하느님의 성막은 사람들과 함께 있다.” 그리고 다시 “내가 보았는데 그 안에 성전이 없다; 그 이유가 주 하느님 전능하신 분과 어린 양이 도성의 성전이기 때문이다.” 주님 자신의 인간 본성이 “사람들과 더불은 하느님의 성막,” 그분의 현존하심의 성전이다.
거룩한 성의 치수는 가득하고 넉넉한 치수, 세상에서 주님에 의해 달성된 완전한 성년의 치수라고 스위든볽은 해석한다. 하느님의 보좌로부터 흐르는 물들은 자기의 생활을 그분이 생활하셨던 것으로 진실로 통일되게 하는 이들을 위해 그분의 말씀으로부터 오는 새롭게 해주는 풍부한 진리들이다. 그 이유가 주님의 신성한 인성을 인정함은 구약 성서, 비유들, 시편들, 예언들, 복음서들, 특히 오랫동안 봉해졌던 책 “계시록”에 있는 무진장한 진리를 알게 하는 지혜이기 때문이다.
말씀이 올바르게 이해될 때 그 얼마나 신성하고 아름다운지! 일곱 촛대와 그 촛대 사이의 사람의 아들 같은 분에 대한 그림은 표지 그림으로 계시록의 책 권두에 서있다. 그리고 영감되어진 스위든볽의 마음은 이 책을 더 빛나게, 더 풍부해지게 발전시킨다. 그리하여 이 책은 생명의 강과 모든 나라들을 위한 치료하는 잎을 가진 나무가 자라는 도성의 환상에서 절정을 이룬다. 그리고 주님 자신의 현존하심의 햇빛은 그분의 자녀들로부터 감추여지는 일은 결코 없다.
계시록을 설명하는 스위든볽의 두 권의 책은 오랫동안 미루어져 왔던 예언, 즉 “힘과 영광을 지니고 구름들 안에 오시는 사람의 아들”, 그분을 뵙는 것이 스위든볽의 지성 안에서 성취되고 있다. 그 이유가 “본다”란 깨닫는 것, 이해하는 것이고, “하늘의 구름들”이란 성서 말씀의 글자이고, “오시는 사람의 아들”이란 성서 글자를 통하여 빛을 내는 영적 의미, 이 의미가 힘과 영광에서 계신 주님이시기 때문이다. 십자가 위에 놓여졌던 명패에는 “유대인의 왕 나사렛 예수”라 쓰였는데, 이 명패는 세 언어, 즉 히브리, 그맄, 라틴어로 쓰였다. 이는 마치 주님께서 그분의 모습을 가지고 그분을 오래 갈망한 혼들을 만족하게 하셨을 그 때를 예시하는 듯한 인상을 우리에게 준다. 즉 그분의 모습은 구약 성서에서는 히브리어로, 신약 성서에서는 그맄어로, 이 두 언어로 된 책에 감추였던 의미를 밝혀주심에서는 라탄어로 되어지고 있다. 주님께서는 인류가 선용함으로 행복을 얻도록 하시려고 성경의 상징성을 실용적 생활의 원리들로 해석할 수 있도록 스위든볽을 가르치셨는데 그는 배운 것을 라틴어로 썼다. 그는 겸허하여 그의 여러 책들에 자기 이름을 적는 것 조차 하지 않았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 그의 필명이었다. 그는 말했다. “사람이 육체를 지니고 있는 이상 천사들과 영들과 결코 이야기할 수 없다, 그것은 몽상이다 하고 많은 이들이 말하리라는 것, 게다가 나의 상태를 두고 그가 남의 신용을 얻으려 획책한 짓, 또는 이 사람은 이렇게…, 저사람은 저렇게… 생각 되는대로 말하리라는 것은 나자신도 족히 예상하는 바이다; 그러나 나는 이 전말서에 그런 나에 대해 쓰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내가 보았었고, 들었었고, 만졌었기 때문이다.”
나는 오리버 랃지(Oliver Lodge) 경과 같은 심령 생활 연구자들이 자기들이 다루는 주제와 비슷한 것을 많이 담고 있는 스위든볽의 부피 많은 책들을 거의 언급하지 않는 것을 의아히 여기며 그의 책을 읽은 적이 있다. 오리버 랃지경은 그의 “죽은” 아들, 레이몬드(Raymond)와의 회견, 즉 영원 속의 거주민들이 자기들이 가장 좋아하는 일을 어떻게 하고 있는지, 자기가 제일 좋아하는 친구들과는 어떻게 사는지, 그들은 어떻게 먹고 입고 있는지, 등등에 관한 대담 내용을 출판하였다. 그러나 그 내용은 빈약하고 단편적이었다. 그것은 매우 애써서 겨우 얻어낸 조금의 내용인데 비해 스위든볽의 것은 아주 다른 수준이다. 그의 책은 그가 천사들과 영인들과 정면에서 이야기한 것, 또는 초인적 균형 감각에서 듣고 본 것의 기록이다. 그는 다이아몬드 같이 반짝이는 눈에 보일 수 있는 진리들과 합리적으로 발생되는 것들의 많은 양을 적어 내려갔다. 그는 기억이란 것은 뼈같이 딱딱해짐을 보았다. 그는 악령들이 천국을 들여다 보니 그곳은 암흑이라고 불평하는 것을 들었다. 그는 천사들은 자기들의 생각이 자신들을 일으켜 세우지 않는 분위기에서는 숨을 쉬지 못함을 발견했다. 그리고 그는 마음과 몸 양쪽에 자양분을 공급하는 상큼한 과일이 선행(charity)임을 보았다
우리가 내가 사랑했던 누군가가 가있는 보이지 않는 저 세계의 색깔있는 세부도를 가지는 것에 환호할 사람들을 머리에 떠올려 볼 때, 그들의 의문 많은 심정을 만족하게 해야 하는 것이 나의 거룩한 의무임은 분명하다. 175년 전, 잘 훈련된 과학자가 자기 진로에 대한 어머니의 소망과는 무관하게, 또한 자기의 기대와 계획과는 정반대되는 쪽에서 홀연히 일어났고, 자신이 선각자임도 발견했다. 그는 자신에게 아무런 이익도 주지 않는데도 영적 우주와의 뚜렷한 접촉의 상세한 내용을 27권의 두툼한 팔절판으로 제본하여 세상에 주었다. 그는 자기 주장에 직바로 섰고 세상 부귀나 명예는 뒤로 밀치고, 단순하게 살면서, 모든 그의 저작물들을 인쇄하여 겸손하나 위엄을 갖춘 태도로 그 책들을 나누어 주었다. 그는 자기가 했고 말했던 모든 것을 고찰하면서 침착함도 유지해갔다. 그는 초자연적 같은 상태로 야기되는 어떤 흥분이나 자극, 열정에 의해 괴로워 했던 어떤 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귀납적으로 생각하는 습관을 견지했고, 어떤 감각적 진리들을 부인하지 않았으며, 대수롭지 않은 것을 놓고 기뻐하는 친구의 모습에 냉소하지 않았다. 그는 자기의 사명이 제아무리 비틀거리는 걸음 자세 같을지라도 일상 생활에서 자기의 도움이 필요한 경우 즉각 그 요구에 응답했다. 그가 임종할 때, 그는 자기가 쓴 모든 것이 엄밀히 진리인가, 혹은 제외했으면 하는 대목이 있는지를 질문받았을 때, 그는 확고하고 정다운 어조로 이렇게 응답했다. “나는 진리만을 썼다. 아마 당신이 주님께 더 가까이 있으려 노력하고, 그분만을 진실로 섬기고, 모든 종류의 악들을 그분에 반대되는 죄로서 금하면서, 그분의 말씀을 열심히 찾는다면 이후 당신의 생애 내내 내 말이 진리임을 더 확증하게 될 것이다. 그분의 말씀은 처음부터 끝까지 내가 세상에 전달하는 교리 속의 진리에 논의의 여지가 없는 증거를 낳게 할 것이다.”

타인이 증언하는 스위든볽

III
타인이 증언하는 스위든볽

누군가가 나를 두고 이런 말을 할런지 모른다. “그녀는 눈멀고 귀먹었는 바, 작은 집단에 갇혀진 의견이나 독단적 주장 내지 정치적 이상향을 지닌 이들에게 쉽게 속아 넘어 갈 것이다.” 세상에 발표되자 세상을 놀라게 한 스위든볽의 주장들을 생각하기 앞서, 나는 독자들 앞에 스위든볽의 작품들에 관심을 많이 가졌던 잘 알려진 문인들을 소개하고 싶다. 물론 이들 대부분은 스위든볽의 종교적 가르침들을 소중히 비축한 교회와는 관계를 맺고 있지 않은 줄로 안다.
우선 에머슨(Emerson)이 그가 뽑아 내세운 “대표적인 사람들” 중의 한 사람으로 스위든볽을 선택했다는 것을 기억해보아야 할 것 같다. 이렇게 그는 말한다:
“이 사람은 동 시대 사람들에게는 선견자요 달빛으로부터의 만병통치약으로 비쳐졌으나, 그 당시 세상에 있는 여느 사람보다 참다운 진짜 인생을 엮어 갔다는 것은 의심할 바 없다…거대한 혼을 지닌 그는 그 시대에는 아주 먼 해외에 살고 있는듯 해서 그의 주변 사람들은 그를 파악하지 못했다. 따라서 멀리 앞선 그를 보려면 먼거리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필요하다.” 이 대단한 에머슨도 스위든볽이 말하는 지옥이나 성경의 상징성을 이해할 눈은 가지지 않았던 것 같다는 것을 여기에 덧붙이고 지나가고 싶다.
토마스 칼라일(Thomas Carlyle)은 빈틈없는 스코트(Scot) 사람이어서 쉽게 남의 말에 이끌려가지 않았는데, 이것은 스위든볽에 대한 그의 평가이다:
“논란의 여지가 없는 위대한 교양을 갖춘 사람, 그는 강하고 수학적 재능을 지닌 사람, 그리고 아주 경건하고, 마음이 천사의 마음으로 바뀐 사람; 아름다워 사랑해야 할 사람, 그리고 나에게는 비극적인 사람…여느 누구의 저술에 있는 진리보다 더 많은 진리가 그의 저술에 있다…마음의 실체 안에서 가장 고상한 마음을 지닌 이들 중의 한 사람…세월이 가면 갈수록 더욱 빛을 비추는 영적 태양들 중의 한 사람.”
알버트 후바드(Albert Hubbard)가 스위든볽과 세잌스피어를 비교해 말한 대목은 특별한 흥미를 더해 준다. 그는 아주 딴판의 정신적 관점에서 이 주제에 접근하고 있다:
“그들 둘 다 타이탄(Titan)이다. 이런 거인 앞에서는 소인들은 시들어져지고 훅 불면 금방 날려질 것이다. 스위든볽은 영웅적 금형(틀)에 부어만든 사람이다. 그래서 역사가 시작된 이래 이 사람 만큼 자신을 아주 많은 자연 과학물로 에워싸게 했던 사람은 없는 것 같다. 게다가 이렇게 많은 과학적 배경을 등에 지고 구름들 안으로 대담무쌍하게 항해한 사람도 없다. 통상 아주 높은 차원에 날아 오른 사람, 또는 또 다른 세계를 아주 많이 안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의 경우 자연 과학에는 무지한 때가 많은데, 그는 이 대목에서 절대 예외이다. 아마 그 당시 스위든볽과 견줄 과학자는 없었을 것이다. 더구나 천국 왕국의 지도를 아주 세세하게 만들어 준 사람은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아무도 없었다.”
“세잌스피어(Shakespeare)의 발은 지상을 떠나 본 적이 진짜로 없었다. ‘템페스트(The Tempest)’에서 있은 그의 (수학)여행은 붙잡은 벌룬(balloon, 기구) 안에서 일 뿐이었다. 그가 획득한 아리엘(Ariel)과 카리반(Caliban)은 옛 우화 책으로부터 였다.”
“세잌스피어는 물리학을 거의 몰랐다; 경제학과 사회학이 그를 괴롭힌 적도 없었다; 그는 라탄어를 조금 알았고 그나마 그맄어는 덜 알았다; 그는 먼 여행을 다녀보지 않았다, 그리고 암석들의 역사는 그에게는 백지 상태였다.”
“스위든볽은 많은 방법들에서 다윈을 앞질렀다; 그는 고전어를 알았고 근대어도 대부분 알았다; 그는 많은 곳을 여행했다; 그는 실용적인 경제 전문가였다. 그리고 그 시대 최고의 사회 공학자였다.”
헨리 제임스(Henry James)가 말했다: “이매뉴얼 스위든볽은 이 시대에 알려진 최고의 분별력에 아주 광범위한 분야에서 지능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리고 헨리 워드 비쳐(Henry Ward Beecher)는 아주 딱 자르듯 이렇게 주창하였다; “스위든볽의 저술을 읽지 않았다면 19세기 신학을 안다고 말할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다.”
스위든볽의 가르침들에 의해 감명을 받은 이들이 남긴 흥미 있는 증거들 중 몇 개 더 살펴보자. 그것들 중에, 아름다운 혼과 우미한 시적 감각을 지녀 어디서나 칭송을 불러낸 여인 엘리자베스 바렡 브라우닝(Elizabeth Barrett Browning)의 증거이다. “나는 내 마음으로 다른 세계에 시선을 보내게 해준 단 하나의 빛을 스위든볽의 철학에서 발견하였다. 이 철학은 내가 납득할 수 없었던 많은 것을 설명하고 있다,”
대영 백과 사전이 “가장 괄목할만한 시인들과 사상가들 중의 한 사람”으로 등기한 사무엘 테이러 콜릿지(Samuel Taylor Coleridge)는 자기가 받은 이런 찬사를 누군가에 의해 미친 사람이라 성급히 불리운 사람에게 이렇게 돌리고 있다.
“내가 단연코 주장하고 싶은 것은 스위든볽은 도덕주의자로서 모든 찬사를 받아야 한다; 그리고 자연주의자로서, 심리학자로서, 신학자로서 그는 감사와 감탄을 자아내는 전문적이고 철학적인 능력 위에 강력하고 다양한 주장을 한 사람이다….만일 오늘날의 학식 있는 선생들이 그와 같은 열정을 선물받았다고 하면 우리는 아마 세배는 더 행복해졌을지 모른다.”
위와 같이 출중한 사람들에 의한 평가는 천재 스위든볽이 소유했던 개성과 위풍당당함에 관한 어떤 생각을 만들어 보는데 도움이 되었을 줄로 안다. 그분에 관한 내 자신의 판단에 있을런지 모르는 어떤 결함은 내 신체적 한계들로 인해 발생된 것이 아님은 분명하다. 그들 자신 학자인 이들과 영적 선물을 존중하는 다른 사람들이 판단하건대, 그는 놀라우리만큼 잘 훈련된 지성, 에머슨이 지적한 바, “천문학상의 정밀함을 가지고 일하는” 지성을 가졌었다는 것이다. 만일 그가 무식한 사람이었다면, 제아무리 그의 체험이 경이롭다해도, 그의 주장이 제아무리 믿을만했다 해도, 그는 합법적인 질문 공세라는 인정 사정 없는 포열 사격 앞에 발도 디디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자기 시대를 훨씬 앞서간 학자이다. 그는 예술과 과학을 전공했다. 그는 바위의 조그만 이끼로부터 대단히 복잡한 뇌의 구조까지 자연의 경이로운 것을 많은 책으로 펴냈다. 그러면서도 그는 자기 홀로만 올라가야 했던 아득히 높은 학문의 경지에서도 훌륭한 균형을 언제나 유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남들 같이 대담함, 조용함, 침착함을 지니고, 영계의 깊음과 심연을 건너는 길들을 걸으려면 위험을 무릅써야 함을 감지하면서, 마음과 물질, 영원과 시간, 하느님과 인간 사이에 있는 미묘한 연결들, 그럼에도 끊어질 수 없는 연결 고리를 겁내지 않는 권위로 밝히 알려주었다.
내 친한 친구들 중 세명은 그분에 관해 말했었다. 그들은 이것을 정신 이상이나 편협한 열광자 입장에서 말했던 것은 아니다. 나는 에드워드 에버렡 해일(Edward Everett Hale) 박사를 아주 오랫동안 알고 지내 왔다. 그분은 만사에서 흥미를 새롭게 하고 주제가 다양해도 이를 깊이 숙고하셨는 바 나는 이를 언제나 감탄했다. 아래는 그분이 판단한 스위든볽이다.
“스위든볽지언이즘(Swedenborgianism)은 지난 세기에 자유를 선물하는 일을 완성되게 했다. 스위든볽이 시작한 이 파도와 같은 움직임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그의 종교에 관한 책들 속의 서술은 신학에 혁명을 가져왔다.”
비숍 브룩스(Bishop Brooks)를 사랑했던 많은 이들과 마찬가지로, 나도 그의 공식 강연이 얼마나 무게있고 의미심장한지를 실감한다. 스위든볽에 관한 그의 견해는 확실히 심사숙고 해 볼만 하다.
“나는 이매뉴얼 스위든볽의 인격과 업적에 최고로 심오한 경의를 표한다…나는 줄곳 그의 저서들로부터 많은 것을 얻어 왔다. 아주 큰 주제를 짧은 몇 마디로 말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렇다, 진짜 의미에서 보면 우리 모두는 새 빛과 새 희망을 가지고, 그리스도 안에 계신 하느님과 새로운 교제를 하는 새 교회인(New Churchmen)이다”
친애하는 신비적인 시인 윗티어(Whittier)는 이렇게 말했다. “미래 삶에 바탕을 둔 장대하고 아름다운 생각이 스위든볽의 책 안에 있다.”
스위든볽을 평가해 볼 또다른 방법으로는 그를 세상의 여타 위대한 지도자들과 비교해 보는 것이다. 고대 시대로부터 흘러온 이런 이야기 하나가 있다. 어떤 왕이 피로에 지치고 낙담한 채 회의실을 떠났다. 그는 화가 이리프(Iliff)를 불러서 이렇게 명령했다: “나에게 이런 참된 사람의 그림, 즉 은혜스럽고 슬기 있으며, 영웅들의 힘과 여인들의 아름다움을 갖춘 사람을 그려라. 그리고 그 그림을 나의 가장 깊은 방에 걸어 둘 것이다. 그리하여 내가 피곤해 그 방에서 쉴 때 그 그림은 내 혼을 성스러운 불을 지니고 웅대함과 따뜻함으로 채울 것이다.” 이 그림은 그려져서 궁전 홀(hall)에 걸렸다. 그는 이 그림을 황홀한 기쁨 속에서 응시했는데, 돌연 그 그림은 자기를 당황하게 했고, 곧 이어 그는 당황해진 이유를 알았다. 이 그림의 외형은 각각 모두의 분야에서 완전한 가장 품위 있는 자기의 신하의 것이었지 않는가! 그 자세는 자기를 위하여 잔을 채운 겸손히 시중드는 신하의 것이었다; 그 이마는 거룩한 환상 속의 성직자의 이마였다; 그 눈은 자기의 피곤해진 영을 노래로 황홀케 하는 방랑의 음유 시인의 것이었다. 그 미소는 아주 달콤하고 변함 없는 자기 아내의 것이었다. 그러므로 이 그림은 각각 모두의 사람들의 매력들로 아름답게 꾸며졌다. 고로 그 그림 속의 모든 이는 새로운 빛 안에서 영광 받은 셈이다. 이렇게 스위든볽의 그림도 많은 위대한 사람들의 생애로부터의 고상함의 빛을 그림 자체 안에 모아 놓은듯 여겨진다. 그 그림 안에 들어와진 사람들 또한 스위든볽과의 비교에서 새로운 의미심장함을 획득하고 있다. 과학, 문학, 철학에서, 자기가 처음의 광선을 붙잡은 새 날을 선포하면서 산 정상 위에서 선구자 처럼 서 있는 이들이 있다. 자기들 나라를 잔인한 멍에로부터 해방되게 한 애국자, 또는 백성들을 더 참다운 자유 쪽으로 이끈 사람도 있다. 땅의 보물들을 수색하고 빛과 열의 새로운 창고들을 발견한 사람도 있다; 셀 수 없는 별들과 먼 거리의 혹성들을 설명해준 사람도 있다. 많은 바다들을 항해하고 발견하되 북서쪽 항로가 아니고 오히려 아메리카를 발견한 사람도 있다. 마지막으로 종교에서 모범이 됨과 교훈을 수단으로 수백 만 명을 가르친 지도자도 있었다. 그들은 우상을 부수었고 미신과 위선으로부터 교회와 성전을 일깨웠다. 웨슬레(Wesley) 같은 사람은 물질적인 시대의 차가움 안으로 사랑을 쏟아부었다.
위와 같이 우리가 스위든볽을 잘 생각해 볼 때, 이 위대한 인물의 모습에 이어 저 위대한 인물의 품새가 연이어 나타난다. 미켈란젤로(Michael Angelo)는 돌에서 천사를 보고 자기가 그 환상을 붙잡을 때까지 많은 날카로운 칼자국으로 새겼다. 이에 비해 스위든볽의 내적 눈들은 살아 있는 천사들을 바라보도록 아예 열려졌다. 그리고 하느님의 말씀의 글자적 진리들의 범주를 넘어 말씀이라는 돌들에 그는 사랑의 천국 메시지를 새겨 하느님의 자녀들을 도왔다.
우리가 베토벤, 모차르트, 와그너를 생각할 경우 스위든볽의 초상화에 주어지는 또다른 감촉도 있다. 이들은 인간의 가슴을 하늘로 높게 올리는 하모니들을 세상에 쏟았던 사람들이다. 그 반면 스위든볽은 우주에 있는 신성한 하모니를 지각했다. 그래서 자기는 천사 집단이 노래한 아주 감미로운 음악을 실지로 들었다고 말했다.
우리는 어린 시절 때부터 나폴레온, 웰링톤, 와싱톤 그리고 그랜트 등등의 인격, 그리고 패배의 두려움이 가득했던 전투를 승리로 이끈 그들의 이야기들에 친숙해 있다. 그러나 스위든볽의 몫은 영계에서의 선과 악의 세력 다툼을 증거하는 것이다; 그는 천국의 무기인 말씀 속의 진리들과 지상의 검인 자연에 관한 진리들로 무장했던 바 그는 20세기 순수 기독교 신앙의 최고 참피온이다.
러시아의 알렉산더 1세는 농노들에게 자유를 주었고, 미국의 링컨은 노예제도를 폐지했다. 종교의 성전 넘어에 “이제 믿음의 신비에 지적으로 들어가는 것이 허용되어졌다”라고 쓰인 것을 스위든볽은 보았다. 그는 인류에게 그들의 지성을 자유하게 하는 영적 철학을 주었고, 교회의 독재 권력을 뒤집었다.
아가시즈(Agassiz)가 동물학과 고생물학에서, 칼 막스(Karl Marx)가 경제학에서, 다윈(Darwin)이 진화론에서 했던 것을 스위든볽은 종교에서 했다. 부피가 큰 논쟁과 우레치는 증오를 가지고 그는 염세 사상과 정죄와 불성실한 대륙의 문학을 짓부수어 심연으로 내려보냈다.
아리스톨(Aristotle), 플라토(plato), 후렌시스 베이컨(Fransis Beacon), 칸트(Kant)는 모든 사물들의 원인을 오랫동안 그리고 인내함으로 찾아나선 찬란히 빛나는 철학자들이었다. 우리의 선견자는 “스위든의 아리스톨”이라 불렸을 뿐아니라 그는 29년 동안 원인의 참 세계에 의식 있는채 들어가도록 허용되었고 그 빛에서 살았다고 선포했다.
콜럼버스의 불굴의 신념은 새 대륙의 발견으로 실감되어졌고, 코테즈(Cortez)는 그의 눈 앞에 광대한 태평양이 보이는 “다리엔(Darien)의 정상에 섰다. 지금 우리 앞에는 ”발견되지 않은 나라“를 여행하고, 자기 귀로 그 나라의 언어를 들었고, 그곳의 거주민들과 대화를 했고, 그곳의 생활과 기후와 문명을 우리의 세상에 서술해준 탐험가가 있다. 그의 탐험에 대한 예를 들면 이러한 바 그는 ”천국과 지옥“에 다음과 같이 썼다:
“사후 인간의 행동들이 당사자에게 나타내질 때, 수색 작업을 담당하는 천사가 그의 얼굴을 들여다 보고, 그 수색은 온 몸, 즉 각 손의 손가락을 시작으로 전체적으로 더듬는 바, 온 몸의 수색으로 확대되어진다. 나는 이렇게 하는 이유에 궁금했었는데, 그 이유를 나로 알게 해주었다. 즉 생각과 의지 속의 모든 것은 뇌에 새겨진다는 것, 그 이유가 생각과 의지의 시작이 뇌였기 때문이다는 것, 이와 꼭같이 그것들은 온 몸에도 새겨진다는 것이다; 생각과 의지 속의 모든 것들은 그것들의 시작으로부터 저쪽으로 넓혀가는데 그 종결 지점은 온 몸이 된다는 것이다….이것들로부터 말씀에서 말하는 인간 생명의 책이 의미하는 것도 명백해질 것이다. 즉 인간이 생각했고 행동하였던 것은 몸 전체에 새겨진다는 뜻이다. 따라서 그것들이 기억으로부터 불려내질 때, 그것들은 마치 책을 읽듯 되어지고, 영이 천국의 빛에서 보여질 경우 마치 지상의 눈에 나타나는듯 된다는 것이다.”
아이삭 뉴톤(Issac Newton)은 감정이 순수하고 경건하기로는 스위든볽을 닮았는 바, 그는 물질계에 인력의 법칙을 보도록 영감되어졌다. 스위든볽은 자연계에 인력의 법칙이 있듯이 영계에서는 사랑이 이와 상응하는 끌어당기는 법칙임을 지각했다. 그리고 그는 태양 같은 실지로 사랑을 방사하는 근원이 모든 영혼에 생명을 주고 모든 피조물을 아름답게 하는 것을 바라보았다고 증언했다. 그의 “하느님의 사랑과 지혜”라는 책으로부터 그가 내적 실체라 부르는 법칙과 사실들을 예증했는데 아래에 한, 두 문단을 인용해본다.
“자연계의 태양 외에 다른 태양이 있다는 것은 지금까지 알려지지 아니했다. 그 이유는 인간의 영적인 것이 인간의 자연적인 것으로 너무 많이 변해 버렸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간은 무엇이 영적인지 모르게 된 것이다. 그 결과 영계가 있다는 것, 그 안에 영들과 천사들이 있다는 것, 영계는 자연계와 다른 세계이다는 것을 모른다. 영계가 자연계에 있는 이들로부터 아주 깊숙이 감추여져 왔는 바, 주님께서는 내 영의 시야가 열리는 것을 기뻐하셨다. 그 이유는 내가 자연계에서 보듯 영계에 있는 것들을 보게 하시어 차후 나로 그 세계를 상술하게 하려는 그분의 목적 때문에서 였다. 이 작업은 ”천국과 지옥“이라는 책에서 있게 되었는데, 나는 그 책의 한 단원을 영계의 태양에 관한 것에 할애했다. 그 이유가 그 태양이 나에게 보여졌기 때문이다. 그 태양은 자연계의 것과 크기가 같았고 맹렬히 불타는 것 역시 같았다. 그러나 더 붉게 이글거렸다. 그리고 천사들의 천국 전체가 이 태양 아래 있는 것이 나에게 보여졌다; 삼층 천국의 천사들은 이 태양을 언제나 보고 있고, 이층 천국의 천사들은 이 태양을 자주 보고, 첫 번째, 또는 가장 아래쪽 천국의 천사들은 가끔씩 이 태양을 보고 있었다.”
“사랑과 불이 서로 상응하기 때문에 천사들은 자기들의 눈으로 사랑을 볼 수 없다. 사랑 대신 사랑에 상응하는 것들을 본다. 그 이유가 천사들은 인간과 마찬가지로 내적인 것과 외적인 것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의 내적인 것은 생각하고, 사려분별하고, 사랑한다. 그리고 그들의 외적인 것은 느끼고, 보고, 말하고, 그리고 행동한다; 그리고 그들의 모든 외적인 것들은 내적인 것들에 상응한다. 그러나 이 상응은 영적인 상응이지 자연적 상응은 아니다. 신성한 사랑 역시 영적인 존재들에 의해 불 같이 느껴진다; 그러므로 말씀에서 불이 언급될 경우 그것은 사랑을 의미하고 있다. 이스라엘 교회의 거룩한 불은 이 의미를 가졌다; 이 교회에서 하느님에게 기도할 때 관습적으로 천국의 불을 간구하였는데, 이는 신성한 사랑이 심정에서 불켜지기를 소망함이다.”
“인간은 그의 생각 속에서 자연계의 순수한 것 또는 자연계의 내면인 것 보다 더 깊은 것을 꿰뚫어 보려 하지 않았다; 이런 이유로 많은 사람들은 천사들과 영들의 거주지가 에테르(ether)에 있거나 별들에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므로 그들의 거처는 자연의 밖이나 그 넘어가 아닌 자연 안에 있었다; 허나 천사나 영들은 완전히 자연의 밖 내지 그 넘어에 있고, 그들의 세계는 또 다른 태양 아래 있다. 그리고 이 세계에서 공간은 출현(appearance)이므로 그들이 에테르에 있다거나 별들에 있다고 말해질 수 없다; 그런 이유가 그들은 사람과 더불어 있고 자기 영 속의 애착과 생각에 결합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인간은 하나의 영이고 이 영으로부터 인간은 생각하고 뜻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영계는 인간이 있는 곳일 뿐 인간으로부터 떨어진 곳이 전혀 아니다. 한마디로 모든 사람 각자의 내면들에 국한시켜 본다면 그는 이 세계 안에, 그곳 천사들과 영들의 한가운데에 있다; 그리고 영계의 빛으로부터 생각하고, 영계의 열로부터 사랑한다.”
“천사들에게 빛과 열을 주는 태양은 천사들이 거주하는 토지 넘어 중간 고도인 약 45도 정도 각도의 높이에서 나타나고 있다; 또한 세상의 태양이 인간으로부터 멀리 있듯, 그곳의 태양도 천사들로부터 먼데서 나타난다. 태양이 이 고도와 이 거리에서 언제나 나타나지만 그것은 움직이지 않는다. 그런고로 천사들에게는 날과 해로 나뉘어진 시간이 없다. 따라서 아침으로부터 정오를 통과하여 저녁으로 그리고 밤으로 들어가는 하루의 진행이 없다; 또한 봄으로부터 여름을 통하여 가을로 그리고 겨울 안으로 가는 일 년의 진행도 없다. 오로지 영구적인 빛과 영구적인 봄이 있다.“
끝으로 세상의 삶에 대한 사상에서 스위든볽의 위치가 어디인지에 대한 생각을 해보고, 인류 속의 종교적 선생들을 상기해보면 도움이 우리에게 될 것 같다. 석가는 동양 사람 앞에서 모범을 비춘 자기의 품위 있는 인생을 살았다. 공자는 교훈을 수단으로 가르쳤다. 모하멭은 우상숭배에 빠진 토지에 불과 칼을 가지고 한분 하느님에 대한 자기 메시지를 운반했다. 스위든볽은 무지, 짐승 같은 무력, 그리고 종교를 압제의 수단으로 사용하는 이들의 속임수로부터 유일하게 종교를 보호할 수 있는 합리적 진리들-건전하고 명민한 신앙을 나누어주려 노력했다. 진지하고 열렬한 측면은 위 모두의 지도자들에게 공통점일 수 있으나 그들 모두는 과학 지식을, 인간의 동기들에 관한 지각을, 그리고 사회를 인간의 마음과 육체에 족쇄를 채움으로부터 예방할 수 있는 전투적 진리들을 소유하지 않았다.
마틴 루터(Martin Luther)는 미신적 관행에 항의를 했다. 그리고 개혁이 시작되었다. 웨스레(Wesley)는 형식에 억매인 영국 교회의 틀을 깨뜨렸다. 그리고 그의 추종자들의 열렬한 봉사는 전 세계에서 이뤄지고 있다. 그러나 근본적 가르침들 속의 많은 부분들이 (옛것 그대로) 남아 있다. 나는 수 년 전에 캐토릭 교회의 훌륭한 옹호자 카디날 뉴맨(Cardinal Newman)의 “변증론”을 주의깊게 읽었었는데, 그는 거기에 모든 신교도들에 의해 정면으로 반박되고야 말 불일치한 것을 적나나하게 적어 놓았다. 스위든볽은 기독교계의 모든 교파들에게 새로운 진리들을 풍부하게 가져다 주었다. 그는 새 처방(new dispensation)의 선구자였다. 이 점에 대해서라면 로마 캐토릭의 신학자요 교수인 요한 요셉 본 고레스(Johann Joseph von Gorres)의 논평을 읽어두는 것도 보람있는 일이다:
“스위든볽의 많은 저서를 망라해 모든 것은 단순하고 일관성 있게 나타난다. 특히 그가 쓴 필치의 어조에 관련해서 그러하다. 이 어조 안에는 가상적 능력들을 나열하려 애쓴 흔적이 없고, 과도한 표현도 없고, 몽상적인 것도 없다…과학을 계발해감에서, 심정의 진지함과 단순함은 지속적인 성공을 달성하는데 필요한 요구 사항이다. 우리는 명성 높은 많은 사람들을 타락으로 빠지고야 말게 하는 자만심 같은 것을 그에게서는 관찰할 수 없다; 그는 언제나 잘 통솔되고 온건해진 마음을 간직해왔다; 그리고 성공적이든 또는 어떤 심각함에 의해서이든 언제나 자기의 정신적 균형을 잃지 않았다.”
스위든볽의 주장들에 관련해 독자들이 어떤 견해를 만들어 보든지 간에, 한 가지 명확한 것은 그의 경험이 특이하다는 것이다. 그 시대에서 과학 분야에 능통했다는 여느 사람들 누구도 자기들이 인간 본래의 자질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반세기 이상 동안 또 다른 세계와 꾸준히 교류했노라 주장하지 않았다. 모세는 하느님과 생명에 관한 환상을 가졌다. 그를 통하여 유대인의 처방(Jewish dispensation)에 신성한 상징어로 된 말씀(모세 오경)이 주어졌다. 그리고 그는 자기 백성을 노예 신세로부터 새로운 문화 세계로 이끄는 것이 중요함을 깨달았다; 그러나 그는 신성한 메시지가 인류를 위해 말씀 안에 뉘여 있음을 감지하지 못했다. 예언자들 또한 환상을 가졌고 음성을 들었다. 그러나 이사야, 예레미야, 다니엘은 자기들이 모든 나라들에 상징적으로 운반하고 있는 더 높은 진리들을 알아차리지 못했음은 분명하다; 그들 대부분은 메시지의 좁은 의미인 역사적 의미만을 보았다.
사도 바울은 말씀 속의 많은 진리들을 영적으로 납득했다. 그래서 그의 편지는 다른 사도들의 것 보다 더 빛을 내는 듯하다. 그는 삼층 천국 안으로 붙들려졌다. 그러나 그는 자기가 본 것을 말할 수 없었다. 참으로 자기가 육체 안에 있었는지 또는 육체 밖으로 나갔었는지를 몰랐다고 말했다. 이런 예들은 이를테면 낮선 나라를 조금 알게 하는 매우 작은 사건들이다. 그 반면 스위든볽은 의식을 가진채 저 이상한 나라에 갔고, 오랜 동안의 관찰로 천국과 영계와 지옥의 법칙과 그곳의 생활을 알리는 준비를 했다. 사랑의 사도라 하는 요한은 환상 중에 기독교 세계의 미래 상태와 새로운 인간성의 영예를 바라보았다. 그가 상징으로 본 것을 스위든볽은 실제로 보았다. 그는 예언적 그림들의 성취에 목격자가 되었고, 그 광경을 설명했다. 그리하여 계시록은 더 이상 봉인된 책이 아니게 되었다; 이 책은 열려서 놓여 있다, 그 책의 봉인들은 떼어졌다. 그 책의 메시지는 주님의 두 번째 오심 속의 화려함으로 빛나고 있다.
“믿을 수 없는 주장이다!”하고 누군가가 외치는 것을 나는 들을지 모른다. 그럼에도 스위든볽의 주장은, 스트랕포드(Stratford) 출생의 어느 누가 정통적인 교육도 받지 않고 게다가 쓸만한 학력도 전무한데 그가 27권의 불멸의 연극 각본을 창출했다고 주장하는 경우와는 상황이 너무나 판이한 바, 최소한 나에게는 믿을 수 있는 주장이다. “방대하고 논의의 여지가 없는 교육 배경”을 지닌 이매뉴얼 스위든볽이 주장하는 것은 이것이다. 자기는 섭리적으로 선택되었다는 것, 말씀 속의 비유들과 상징물들, 여타 다른 신비적인 것들의 해석자로 준비되었다는 것, 이는 우리가 가끔 아주 생생하게 “느끼는” 또 다른 세계의 영향력들을 인류에게 나타내 보이기 위해, 그리고 삶의 사막을 의지의 새로운 생각들, 지혜, 능력, 기쁨을 가지고 윤택해지게 하기 위해서이다. 그는 주님의 두 번째 오심을 예고하고 오셨음도 선포했는데, 이 오심은 참된 생각과 올바른 생활의 교리 안에 있는 사람에게 있게 된다는 것이다. 이 선포가 믿을 수 없는 듯 여겨진다면, 회상해보아야 하는 것은 이런 정도의 말은 보통 사람의 상식적인 차원에서 나오는 말에 불과 하다는 것이다.
1880년도에 어떤 사람이 하늘을 나는 기계는 만들어질 수 있고 안전도 하리라고 말했었다. 그러나 매우 적은 사람들만이 그들의 말을 경청했는데, 그 이유는 이런 일은 한 번도 있어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주 적고 신실한 소수파가 주위의 비웃음을 받으며 노력한 끝에 결실을 보았지만 결국 그 성취는 느리게 왔다. 또 다른 지식의 축적이 건설하는 것도 있다. 예를 들면, 우리가 아는 바, 세상에서 경제 체계를 잘 계획하면 오늘날 우리가 향유하는 것보다 편안함과 즐거움을 생산함에서 더 부유해지고, 더 자유해지고 더 행복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 모두는 적어도 동등한 확실함을 가지고 아는 바, 전체 교육 체계를 재 조직하면 대량의 사람들이 창조적 서비스를 위해 더 행복하게 준비되며 성장해 나갈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아는 바, 우리 시대의 국제적 알력 다툼, 민족들의 적대감, 전쟁 위협, 등등은 인간성에 암시와 끈덕짐, 훈련, 그리고 순전한 헌신을 수단으로 바뀔 수 있는 정신적 개념들에 주로 기인된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소위 교육을 받았다는 사람들은 많은 이들에게 혜택이 돌아가는 것을 자기들이 보기 위해, 나누기 위해 살고 있다 하면서도 이것이 근본적으로는 사회적, 정치적, 영적 발달에 기인된다는 것을 믿지 않는다. 이를 아는 작은 집단들은 투쟁하고, 학교나 법정, 일터나 사무실, 입법 활동 같은 분야에서 자기들의 진리에 대한 증거를 꾸준히 만들고 있다. 이들이야말로 각자의 위치와 방법에서 주님의 재림에 대한 메신저가 아닌가?
세계의 사건들, 역시 막대한 의미심장함으로 차 있는듯 여겨진다. 국가들은 생존을 위해 서로서로에게 더 의존하는 바 전쟁은 지금까지의 미친짓 그 이상이 되었다. 외적 압력은 인류에게 평화의 형제애 안에서 살 필요를 보게 하고 있다. 약 1세기 전 인간은 대량의 상품을 만드는 공장과 이 상품을 바다와 철도로 수송하기 위해 석탄과 증기의 사용법을 발견했다. 이 뒤를 이어 전신전화, 그리고 각종의 기계들을 개량했다. 그리고 지금 라디오와 공기와 바다 아래를 통하여 움직이는 배가 나오고 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 주위에 석탄과 철 그리고 전기라는 세 개의 큰 받침을 뿌리셨는 바, 이것은 모든 사람들을 일의 형제애 안으로 휩쓸어 넣고 있다.
누군가가 다시 “그러나 내가 지금까지 관찰해왔던 것에 반대되는 것 같은데 어떻게 내가 대담하고 특이한 그의 주장을 수긍할 수 있을까?”라고 되물을지 모른다. 타당한 질문이다. 우리가 누군가의 책을 읽을 때 우리는 비평의 결과로 규칙이나 규범을 우리의 안내서로 받는다. 그런데 스위든볽의 경우 우리는 그로부터 거의 아무 것도 가지지 못한다. 이와 같은 경우의 참 본성으로부터 우리는 스위든볽 자신이 말해주지 않는 이상 그가 통과해 간 심리적 상태들에 관하여 매우 조금 알거나 거의 알지 못한다. 스위든볽 자신의 증거가 할 수 만 있다면 우리를 확신시켜야만 한다.
나 스스로 내 경험을 새로이 하는 경우는 하나도 없다고 확신한다. 날마다 나는 눈과 귀를 가진 내 친구들의 말을 절대로 신뢰한다. 그런데 그들은 자기들의 감각에 현혹되어 엉뚱한 데로 자신을 끌고 가는 일이 자주 있다고 나에게 말한다. 그럼에도 그들의 증거로부터 나는 내 세계를 건축하는 무수히 많은 귀중한 진리들을 수집한다. 그리고 수집된 진리들은 내 혼으로 하늘(sky)의 아름다움을 그려 볼 수 있게하고 새들의 노래를 들을 수 있게 해준다. 나에 관한 모든 것은 침묵과 어둠일지 모른다. 그럼에도 내 안, 내 영에 음악과 빛남, 그리고 색깔이 있고 이것은 내 모든 생각들을 통하여 번개 같이 전달된다. 이렇게 나는 지상 맨 끝 넘어로부터 가져온 스위든볽의 증거로부터 나를 감금할 뿐인 진흙의 이 이상한 집(몸)을 떠날 때 내 영의 요구에 딱 어울리는 세계를 지금 세워나가고 있다.
나는 여러분이 스위든볽의 주장들을 고찰하는데 도움이 될 또다른 방법을 제시해 볼까 한다. 과학은 우리에게 뇌 안에 있는 이상하고 어두운 아주 작은 방에 관해 말해준다. 이 방 안으로 태양과 별, 땅과 대양이 빛의 날개를 타고 들어간다. 그리고 뇌의 신비스러운 처소로부터 혼이 나오고, 몽롱한 상태에서 그것(세포)들은 함께 친하게 교제한다. 만물을 만드신 그분 만이 그것들의 베일이 벗겨진 영광을 직시할 수 있다. 우리는 그것들의 조절되지 않은 광채를 바라보고 생존할 수 없다. 이는 왜 인간이 어둑한 유리 같은 것을 통해 보고, 작고, 침침한 불이 밝혀지는 방에서 그림자만을 응시해야 하는지에 대한 이유이다. 자기가 땅에 관하여 납득하는 것은 조금이고, 그나마 베일쳐진 감각 만으로 실지로 납득한다고 말하는데 어째서 그는 천국의 “어둑한 신비”에 관하여 말하는가? 왜 평등한 자유를 가진 혼이 그것의 처소를 나와 육체의 조악한 렌즈를 폐기하고 진리의 망원경을 통하여 불멸이라는 무한의 도착 지점을 자세히 볼 수 없을까? 좌우간 위 두 질문은 스위든볽의 다른 세계에 관한 기록들을 이해하는 열쇠를 주고 있다. 스위든볽은 말하기를, 내적 인간이 자기 주위에서 진행되는 것을 보고 지각한다는 것, 이 내면의 근원으로부터만 느낌과 감각은 생명을 가진다는 것이다. 그러나 모든 감각 경험이 인간의 바깥쪽에 있다는 망상은 우리에게는 너무나 당연시되어 버려서 집중하는 수련이 아니고서는 그 망상을 제거할 수 없다. 특별히 나는 이런 망상 때문에 괴로움을 당한 적은 없는 것 같다. 그 이유는 나는 내 생각과 상상에 내 정신을 쏟기 때문이다; 내가 꽃과 음악, 그리고 사랑스러운 경치에 관한 묘사를 즐길 수 있다는 것에 사람들이 놀라움을 표현할 때, 오히려 그 놀라워함은 나에게 감각 경험은 그 근원이 몸 밖에 있지 않다를 입증해준다. 만지거나 냄새 맡는 능력에 관한 이 간단한 사실을 이해하는 것이 믿기 어려울 정도로 힘들진대, 이런 사람의 상황, 즉 육체적으로 보고 들을 뿐 아니라 자기의 영적 능력을 예외적인 수준에 사용하고, 느낄 수 있는 것을 에워싼 좁은 고리(ring, 한계)를 거의 한계 없는 지평선으로 넓히는 사람(스위든볽)을 놓고 여러분은 어떤 근거에서 확실한 판단을 내릴 수 있는가?

스위든볽의 사상을 만나다

II

스위든볽의 사상을 만나다

내가 18세기 스위든의 위대한 선견자의 저술에 처음 접촉되었을 때 받은 느낌을 말하려면 이는 30년 전의 사건인 바, 하느님에 관한 나의 최초 의문들로 되돌아 가보지 않으면 아무 의미 없는 사건 같이 되어 버릴런지 모른다. 그 당시 어린아이였던 내가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은 누가 만들었는지 알고 싶어 했다는 것은 당연할 것이다. 그리고 내게 말해진 답은 자연이 땅과 하늘과 물과 모든 생물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이것을 어머니 자연이라 일컬었다) 한 동안 이 대답은 나를 만족시켰다. 그리고 나는 내 어머니의 정원의 장미 나무 사이에서, 강둑에서, 혹은 데이지(daisy)가 만개한 들판에서 마냥 행복했다. 이곳에서 나의 선생님은 나에게 씨와 꽃, 새와 곤충 그리고 강 속의 물고기에 관하여 진짜 “아라비안 나잍스(Arabian Nights)” 이야기들을 들려주었다. 여느 아이들 같이 나도 내가 만졌던 모든 물건은 살아 있고 자아 의식이 있다고 믿었다. 그리고 우리 모두는 어머니 자연의 자녀라 상상했다. 그러나 내가 더 나이들어 갔을 때, 나는 내가 만질 수 있었던 자연의 이런 저런 것들에 관하여 따져보기 시작했다. 자명한 것은, 지금의 나는 성숙해진 단어들과 나이 많아진 이후 가진 생각들을 사용하여 나의 어린 시절 모습인 손으로 더듬고, 엉성하여 적당히 둘러대던 것에 관한 인상을 여러분으로 하여금 알기 쉽게 만들고 있다는 것이다. 나는 인간 존재들이 일을 한 것과 자연의 경이로움들이 만든 것 사이에 놓인 차이점에 주목했다. 나는 내 어머니가 그녀의 뜨거운 케잌(cake)을 뒤섞는 것 같이, 강아지, 꽃, 돌, 아기, 폭풍 등이 함께 어우러진 것은 아님을 알았다. 나를 당혹케 했던 나무와 들판에 있는 것들에 질서와 순서가 있었다. 동시에 나를 겁먹게 했던 자연력으로 해서 뒤숭숭한 때도 있었다. 아름다운 것이 까닭 없이 파괴되는 것, 못생긴 것, 쓸모 있는 것, 밉살스러운 것, 정의로운 자와 사악한 자, 또는 지진과 홍수, 토네이도(tornado)에 의한 (파괴) 등을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즉 무책임하게 힘을 과시하는 분별없는 집단이 어떻게 파괴된 것을 언제나 재생하면서 창조하고 살아 있게 간직하는지…!, 봄, 여름, 가을, 겨울, 파종과 수확, 낮과 밤, 밀물과 썰물, 이어져가는 인간 세대 등등을 의아하게 여길 수밖에 없었다. 여하튼 나는 자연이 나와 내가 사랑한 것들에 더 이상 관심이 없어 파리나 작은 가지 보다 못한 것으로 여긴다고 느꼈다. 이 느낌은 나에게 분함 같은 어떤 것, 즉 ”자연의 혼은 자기의 거대한 요구를 교묘하게 빗대어 말함으로 일을 저지르고, 그리하여 자연 속의 사건들과 사물들을 통치할 특권을 가졌다고 선포하는가 보다 하는 생각도 돌출되기도 했다.
이 결과 나는 자연이라는 것에서 돌아섰고, 대신 하느님에 관하여 묻기 시작했으나 다시 좌절을 맛보았다. 친구들은 나에게 하느님은 창조자이시다는 것, 그분은 어디에나 계신다는 것, 그분은 모든 인간 삶에 필요한 것, 기쁨들, 슬픔들을 아신다는 것, 그분이 미리 아시고 섭리하심 없이 발생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등등이었다. 관대한 성품을 지닌 어떤 사람이, 그분은 모든 사람에게 자비로우시고, 그분의 태양을 정의로운자이든, 불의한자이든 공평히 비추이게 하신다고 말했다. 나는 이런 거룩하시고 사랑스러우신 존재에게 빨려들어갔다. 그리고 나는 그분에 관한 어떤 것을 이해하기를 정말로 갈망했다. 그 뒤 나는 필립스 브룩스(Phillips Brooks)를 만났는데, 그는 하느님은 사랑이시고 그분의 사랑은 “만인의 빛이다” 라고 말하여 그분에 대한 중심되는 진리를 붙잡도록 나를 도왔는데, 이 간단한 몇 마디는 내 혼을 휘저었다.
그러나 나는 이 신성한 사랑과 물질 세계 사이의 관계에 대한 명료한 생각을 만들어 볼 수 없었다. 나는 불확실함과 그늘진 구석에 처박혀 나 자신을 잃었던 때가 많았다. 이 때 말로 표현할 필요도 없이 재 보증되어 주었던 참 빛과 눈 앞의 실제이기에 부인하기 힘든 자연의 어둠과 혼돈 사이를 이리저리 배회하였다. 그러던 어느날 나는 빛나는 행복을 만들게 되었다. 그리고 하느님에 대한 느낌을 더 가깝게 가져오는 계기가 있었다. 나비가 누에고치로부터 나와, 태양에서 날개를 말리는 절묘함을 “내가 지켜 본 것”, 그 뒤 그 나비가 철쭉(arbutus) 더미 위에서 펄럭이는 것을 만졌다. 누군가가 나에게 어떻게 고대 이집트인들이 나비를 불멸의 상징으로 간주했었는지 말해주었던 적이 있었다. 나는 기뻐하였다. 이런 생명의 형체들은 아직 더 사랑스러운 것들에 관한 교훈을 그것들 안에 가지고 있을 것인 바, 그것은 나에게도 의당 있을 것처럼 보였다. 그럼에도 둥근 큰 톱(buzzsaw)이 계속 나를 괴롭혔는데, 이는 어느날 직관의 번쩍임이 나에게 무한한 경이를 밝히 보여주었던 때까지 였다.
내가 반 시간 동안 도서관에서 조용히 앉아 있었던 적이 있었다. 나는 내 선생님에게 돌아서며 말했다.“어떤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나는 지금 내내 멀리 떠나 있었다. 그러나 내가 이 방을 떠난 것은 아니다”… “그게 무슨 뜻이야, 헬렌?” 하고 그녀가 놀래면서 물었다. “그 이유가” 나는 소리쳤다. “나는 아테네에 있었다.” 이 말이 내 입으로부터 나왔을 때 빛나고 놀라게 하는 사실을 깨달음이 내 마음을 휘어잡고 불태우는듯 여겨졌다. 나는 내 혼(soul)의 실체(realness)를 지각했다. 동시에 혼은 육체와 공간이라는 조건들로부터서 독립되어 있다는 것을 지각했다. 이렇게 지각한 이유는 내가 영(spirit)이었기 때문이고 영은 수천마일 떨어져 있는 것을 생생하게 “보고” 감지할 수 있었다는 사실이 나를 명료하게 했다. 공간이라는 것은 영에게는 아무 것도 아니구나! 이 개념에서 나의 새 의식은 하느님이 현존하신다는 것, 그분 자신이 영(Spirit)이셔서 순간적으로 모든 곳에, 단 번에 어디에나 거주하실 수 있는 창조자이시다는 진리로 번쩍거렸다. 따라서 내 조그만 영도 나의 소경되고 귀먹은 장애를 초월해 대륙과 바다를 건너 그리스에 도달할 수 있었구나 하는 사실은 또 하나의 기뻐날뛰는 감동으로 나에게 돌진해 들어 왔다. 나는 내 한계점들을 몽땅 부수었다. 그리고 내 촉감 안에서 눈을 발견했다. 나는 현인들의 생각들-죽을 수밖에 없는 그들의 생명을 세세토록 살아남게 했던 생각들을 읽어낼 수 있었다. 동시에 그것을 나 자신의 일부로 소유할 수 있었다. 하느님, 환경 제약을 받지 않는 참 영은 자연 속의 상해들인 사고나 고통, 파괴를 취소되게 하고 그분의 자녀들에게 연락을 취하려 하신다. 귀가 멀고 눈이 먼 것이 진짜 사건은 아니었다. 그런 장애들은 내 인생의 외곽 영역으로 좌천 당하고 말았다. 물론 이런 과정이 내 어린 시절의 마음과 더불어서 진행되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비록 어린 나이인지라 어렴풋했지만 나는 진짜 “나”, 즉 내적인 “나”가 도서관을 떠나 내가 원했던 장소를 정신적으로 방문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야말로 나는 행복했다. 이것은 나의 조그만 씨였고, 이 씨로부터 영적 주제들에 관한 내 관심은 자라갔다.
이 때 당시 나는 성경의 이야기들에 관한 것들은 온유한 나사렛 사람의 이야기 빼고는 관심이 없었다. 창조 이야기, 특별한 과일을 먹은 아담과 이브가 에덴에서 쫓겨남, 대 홍수와 분노와 주님의 앙갚음은 내가 읽었던 그맄-로마 신화들과 매우 비슷한듯 나에게 비쳐졌다. 게다가 이런 신화들 안에도 내가 찬양을 보내고 싶은 신이나 여신은 그리 많지 않았다는 것 역시 성경과 유사한듯 비쳐졌다.
나는 나의 착하신 아주머니(aunt)가 나에게 신성한 책으로 쥐어주었던 성경에서 빛나고 아름답고 온화한 얼굴을 지닌 존재의 모습을 내 심정 안에서 발견하지 못해 실망했었다. 그녀는 나에게 계시록의 이야기들을 말해 주었는데, 여전히 나는 내가 설명할 수 없는 공허감을 느꼈다. 도대체 나는 하느님과 용과 뿔달린 짐승 사이의 전쟁에서 무엇을 볼 수 있었을까? 불못에 던져져 영원히 고통받는 이들과 그리스도께서 사랑이시다고 하는 하느님을 어떻게 동시에 생각해 볼 수 있을까? 천국은 산이나 들판, 대양, 달콤한 열매가 많은 땅, 피곤해진 발들이 쉬는 곳, 이런 장려함이 있는 곳이라 생각되는데, 왜 계시록에 있는 하느님의 성은 금으로 포장된 길과 성벽을 보석으로 지었는지 너무나 이상했다. 이와 달리 슬픈 자를 위로하고 아픈 자를 고쳐주시고 눈먼 자에게 새 빛을 주시고 벙어리 입술이 열변을 토하게 하신 그리스도에 관한 감촉있는 이야기는 내 깊은 곳을 휘저었다; 그런데 어찌하여 내가 세 인물들, 즉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님을 예배할 수 있단 말인가? 세 인물을 인정하는 예배는 구약 시대라면 혹독한 처벌이 즉각 따른 거짓 예배의 한 종류가 아닌가?
위와 같이 성경에 대한 당혹감과 불만족이 내 마음을 점유하고 있을 즈음, 내 삶 안으로 쟌 힛즈(Mr. John Hitz)씨가 들어 왔다. 그는 내가 가장 사랑했던 친구들 중의 한 분이었다. 그는 워싱톤에서 스위스 총영사직을 맡고 있었다. 후에 그는 벨 박사가 전화를 발명한 이유로 수상한 볼타(Volta) 상금으로 벨 박사가 설립한 볼타의 국장이 되어 있었다. 이 사무국은 귀먹은 이들에게 정보를 수집해 나눠주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었고, 이 목적 실천의 일환으로 볼타 잡지(Volta Review)도 발행하고 있었다.
1893년, 나는 힛즈씨를 처음 만났는데, 그 때 내 나이는 13세 였던 것 같다. 이 때 나는 내 인생에서 가장 사랑 넘치고 아름다운 친구 관계가 시작되었다. 이것은 어쩌면 내 인생 속의 가장 귀중한 기억들로 자리 매김되고 있다. 그분은 내가 했던 모든 것, 즉 내 공부, 소녀적인 나의 즐거움, 나의 꿈, 대학에서의 나의 노력, 맹인을 위한 나의 일, 등등에 깊은 관심을 가져주었다. 그분은 내 선생님의 진가를 온전히 인정하시고 그녀의 일은 나를 향해서 뿐만 아니라 세상 모든 이에게도 중대한 일임을 인정해준 몇 안되는 사람 중의 한 분 이시기도 했다. 그분의 편지들은 내 선생님에 대한 애정과 선생님이 나에게 해준 것, 곧 이는 어두운 모든 장소에 드리운 빛이라고 이해하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그분은 보스톤(Boston)과 캠브릿지(Cambridge)에 있는 우리들을 자주 방문하셨다. 그리고 선생님과 내가 남쪽의 고향을 오고 갈 때는 와싱톤의 그에게 들려 머물었기에 우리의 여행은 늘 유쾌 했다.
내 선생님과 내가 매사츄세쓰 주의 렌샘(Wrentham)에 정착했을 때, 그분은 매 여름 우리들과 6주를 보냈는데, 이는 그분이 돌아가시기 전 해까지 이어졌었다. 그분은 이슬이 아직 풀과 나무에 놓여 있고 대기가 새들의 노래로 즐거워하는 이른 아침에 나를 데리고 산책하는 것을 사랑하셨다. 우리는 나무들과 상큼하여 냄새 좋은 초원을 시간 가는 줄 모른채 왔다 갔다 하였고, 때로는 렌샘의 그림같은 돌벽을 지나가기도 했다. 그때마다 그분은 나로 하여금 자연의 아름다움과 자연이 지닌 깊은 의미에 더 가까워지게 했다. 그분이 이야기 해줄 때 위대한 세상은 불멸의 영광 안에서 나를 위하여 번쩍였다. 그분은 자연에 대한 사랑에 나를 일깨워 주셨는데, 이 자연을 사랑함은 내 침묵에 음악으로, 내 어둠에 빛으로 아주 귀중한 나의 일부가 되었다. 이 글을 쓰면서도 내가 그분과 함께 즐겼던 고요 속의 빛나고 향기나는 순간들, 웃고 있는 개울들과 꽃들을 회상하면 너무나 달콤할 뿐이다. 매일 나는 그분의 눈을 통하여 새롭고 매혹적인 풍경을 바라보았는데, 그 풍경은 “절묘한 소낙비로 포장된” 상상 속의 영적인 아름다움이었다. 그분은 대화를 자주 멈추었는데, 그 이유는 내가 나무들이 흔들리며 기우는 것이나 꽃들의 구부림, 옥수수의 파도 물결 같이 흔들 거리는 것을 감지하려 했기 때문이다. 이 때 그분은 이렇게 말하곤 했다. “자연 안으로 이 모든 생명을 놓는 바람은 하느님의 영에 대한 놀라운 상징이다”
내 14번째 생일에 그분은 자기가 30년 이상 차고 다녔던 금시계를 나에게 선물하셨다. 나는 그 시계의 낡은 부품을 교체하려고 스위스에 보냈던 때 말고는 내 품을 떠나본 적이 없다. 이 시계에 관련해 기묘한 것은 이 시계는 애당초 맹인을 위해 만들어진 시계는 아니었다는 점이다. 이 시계는 한 때 독일 대사가 소유했었는데, 그는 자기가 아주 중요한 약속을 정확히 지키려고 이 시계를 다시 만들었다. 그는 카이서(Kaiser) 황제의 아주 높은 고관을 어쩔수 없이 방문해야 하는 일이 자주 있었다. 그런데 이 고관을 방문하여 그를 기다리되 시계를 쳐다본다거나 그렇다고 너무 오래 거기에 머무른다거나 하는 것은 그 고관의 입장에서는 예의에 어긋나는 행동이었다. 따라서 이 대사는 궁리 끝에 보석 세공인에게 가서 자기가 호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로 시간을 “감지”할 수 있도록 이 시계를 만들어 달라고 부탁했다. 그리하여 이 시계의 얼굴은 크리스탈(crystal)이고, 뒤쪽에 금 시계 바늘(hand)이 있는데, 이 바늘은 시계의 분침(minute hand)과 연결되어 있어, 뒤쪽의 바늘과 함께 서거나 가거나 한다. 그리고 시계의 둘레에는 시간을 말해주는 금 눈금들이 있었다. 나는 이 시계를 내 가슴 앞에 달고 있었다. 그리하여 이 시계는 내 친구 자신이 나를 위해 일하고 사랑해주듯 충실하게 나를 위해 째깍째깍 소리를 내주었다. 내 앞에 자기의 사랑을 간직하게 한 그분이 작고하신지 근 20년이 되었다. 그러나 시계의 째깍 소리는 나를 그분에게 더 가까이 데려다 주는 달콤한 의식을 늘 지니고 있다. 진실로 이 시계는 유한의 시간을 영원의 시간과 연결해놓는 값을 초월한 보물 아닌가!
힛즈씨와 나는 여러 해 동안 서신 왕래를 했었다. 그분은 나에게 자주 보낸 긴 편지들을 나 혼자 읽을 수 있도록 하려고 점자 철자법을 배우셨다. 이 편지들은 그분과 내가 영적 친척임을 보여주는 기록이다. 이 기록은 내가 그분의 손을 만져보고 싶을 때나 내 일로 고민하는 나에게 용기를 북돋아 주는 현자들의 말들에 갈급할 때 다시 읽게 해주어 나를 위로해준다. 나에 대한 그분의 첫 생각이자 마지막 생각은 어떻게 하면 내가 직면하는 장애물들을 줄여줄 수 있을까였다. 그분이 재빠르게 지각하신 것은 내가 관심을 가진 주제들과 관련있는 책에 얼마나 굶주려 하고 있는가에 비해 내가 읽기 가능한 점자책은 대단히 제한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8년 동안 그분은 매일 일정한 시간을 내게 기쁨을 줄 것 같은 책들, 즉 이야기들, 위대한 사람의 전기들, 시집, 자연 연구, 그 무엇이든 타이핑하는데 바쳤다. “천국과 지옥”을 읽은 후 내가 스위든볽의 저술들에 관해 더 알고 싶다는 표현을 했을 때, 그분은 내 읽기가 촉진되도록 책들을 요약하고 편집도 하시는 등 수고를 많이 하셨다. 이 모든 것은 그가 볼타 국장직과 여러 허드레 업무를 마친 뒤의 여가를 틈내어 해주신 것 아니던가! 그분은 편지에서, 그분이 나를 위하여 책을 베끼는 시간을 보낸 “아침 식사 전의 조용한 시간들”, 그리고 이 시간 “나의 사랑하는 헬렌과 마주 대하는 나의 기쁨”이라는 표현을 자주 쓰셨다. 많은 나의 친구들이 나를 위해 대단하게 일하여 주었다. 그러나 이런 일들도 힛즈씨가 그의 침묵의 여러 해들을 채워왔던 내적 햇빛과 평화를 나에게 나누어주려 한 지칠줄 모르는 노력들에는 비교할 바 못된다. 해가 더할수록 나는 그분에게 더 가까이 당겨져 갔고, 그분은 날들이 지날수록 더 꾸준하게 편지를 써주셨다. 그런데 큰 슬픔이 나에게 닥쳤다. 나는 내가 내 선생님 다음으로 가장 사랑했던 친구와 분리되어야 했다. 내가 고향의 어머니를 방문하고 랜샘으로 돌아가는 도중 평상 때와 같이 나는 와싱톤에 들렸고 힛즈씨는 나를 만나러 열차로 왔다. 그분은 나를 안고 기쁨이 가득한 채, 네가 도착하기를 기다리느라 얼마나 지루했었는지 모른다고 말하셨다. 그분은 나를 열차로부터 데리고 나가셨는데, 그 때 그분에게 갑자기 심장마비가 일어났고 돌아가시고 말았던 것이다. 임종 직전까지 그분은 내 손을 잡아주셨다. 그래서인지 나는 이 어두운 순간을 생각하면 언제나 그분의 맥박을 느낀다. 만일 내가 이 분이 참으로 죽었다고 생각했다면 이렇게도 친절하시고 온유하신 친구를 잃은 것을 참아내지 못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분의 고귀한 철학과 장차 오게되는 삶에 대한 확실성은 나로 하여금 비록 그분이 떠났어도 우리는 내가 꿈꾸는 어떤 것 보다 더 아름답고 더 행복한 세계에서 다시 만나고야 말리라는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가지고 버티게 해주었다. 매우 드문 그분의 인물됨에 관한 기억은 언제나 나를 도우며 나와 더불어 있다.
그분은 고결한 인격과 나누어줄 영적 선물까지 지닌 분이셨다. 그분의 심정은 순수하고 따뜻했으며 그의 동료를 향하여 최선을 강구하는 어린아이 같은 신앙으로 가득 찬 그런 분이셨다. 그래서 타인을 위하여서는 사랑스럽고 아껴주려는 어떤 배려함에서 언제나 행동하셨다. 그의 매사는 “네 몸 처럼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에 기초되어 있었다. 80세의 연세인데 그분은 언제나 푸른 상태의 심정을 지니셨고, 즐거움으로부터 있는 그의 무진장한 힘은 그를 여느 보통의 인간성을 훨씬 넘게 들어 올려주었다. 그는 젊은이들과 더불어서는 젊은이였다. 그분은 나에게 나이 많은 사람이 결코 아니었다. 나는 그분에게 눈멀고 귀먹은 사람이 아니었다. 그분은 자기 손가락 위에서 간신히 철자를 말했다. 그리고 그가 알아 듣는 것이 아주 힘들 때, 나는 내 불완전한 말솜씨의 문장을 여섯 번씩 반복해 말할 경우도 있었지만 끝내 들어주셨다. 우리의 사랑들은 이런 어려움들을 다 덮어 주었다. 그리고 우리의 교제는 노력의 댓가 그 이상의 값어치가 있었다.
우리가 이런저런 이야기 꽃을 피웠을 때, 힛즈씨가 감지한 것은 문학에 대한 나의 배고픔이었다. 그분은 내가 특별히 흥미를 갖는 주제들을 읽을 수 있도록 하여 주었다. 그분 자신도 귀가 안 들리는 상태에서 성장했기에 그의 성장 배경은 감각 세계에 관한 나의 비뚤어진 사고방식을 빨리 감지할 수 있게 해주었다. 그분은 나에게 말했다. 만일 내가 시각과 청각을 지닌 이들의 자리에, 그리고 사물로부터 그들이 받는 종교적 감명의 자리에 나 자신을 놓으려 노력한다면 그들의 감각은 나의 것과 하나로 연합할 것인 바, 바깥 세계에 관한 나의 즐거움은 경이롭게 증가할 것이라고 했다. 그분은 나에게 어떻게 내가 그들의 생활을 이해하는 열쇠를 발견할 수 있는지와 또 그들이 이해심을 가지고 나 자신을 조사할 수 있는 기회를 줄 수 있는가를 말해주기도 했다. 그분은 내 손에 점자로 된 스위든볽의 “천국과 지옥 ” 사본을 놓아 주셨다. 그리고 내가 처음에는 이 책의 많은 부분을 이해못하리라는 것도 자기는 알고 있다고 말하셨다. 그러나 이 독서는 내 마음을 위한 좋은 연습이 될 것이고, 내 마음에 계신 대단히 사랑하는 하느님의 모습으로 나를 만족시켜 줄 것이라고도 말해주었다. 그분은 나에게 이해가 어려운 책을 읽을 때는 그 책에서 무엇이 진리이냐 보다는 무엇이 선이냐를 찾는 것이 더 낫다는 것을 언제나 상기하라고 말해 주었다. 그 이유는 스위든볽도 말했다. 즉 “선은 빛을 주는 작은 불꽃 같은 바, 선은 인간으로 보게하고 지각하게 하고 그리고 믿게 한다.”
내가 “천국과 지옥”을 읽기 시작했을 때, 나는 과거 내 선생님을 기다리면서 광장 계단에 있던 수년 동안 가져보았던 기쁨같이 내 삶 안으로 오고 있는 새로운 기쁨을 거의 눈치채지 못하였다. 독서를 사랑하는 어린 소녀가 호기심 만의 충동으로 무슨 책이나 마구 읽듯, 나는 이 큰 책을 열었는데, 보라 내 손가락들은 어둠을 지닌 눈먼 여인이 스위든볽의 저술 속의 아름다운 진리들로 계몽되었다는 서문의 한 문단 위에 불을 켰다. 그녀가 믿고 있는 바, 이 책은 잃어버린 지상의 빛 보다 더 많은 빛을 자기 마음에 나누어 주었다는 것이다. 그녀가 결단코 의심치 않은 것은 물질적 몸 안에 완전한 감각들을 지닌 영체가 있다는 것, 그리고 어두운 얼마의 햇수가 지나면 자기 눈 안의 눈은 더 경이롭고, 완전하여 이 세계 보다 더 만족을 주는 세계에로 무한하게 열린다는 것이다. 나의 심장은 기쁨으로 마구 뛰었다. 바로 이 책에 내가 그토록 날카롭게 느꼈던 것을 강조하는 신앙이 있었다. 즉 영혼과 육체는 분리된다는 것, 전체로서 내가 그려보았던 실체는 한계있는 내 신체의 감각들이 매 번 만났던 불합리한 우발 사건과 미완성적인 것들의 혼돈과 분리된다는 것이다. 이리하여 나는 내 자신으로 건강하고 행복한 젊은 의지로서 가도록 내버려 두었다. 그리고 스위든(sweden)의 현자의 무게있는 생각들과 긴 단어들을 꿰맞추어 내려 노력했다. 여하튼 나는 한 분, 유일하신 분으로 내가 사랑했던 그분의 모습을 감지했다. 그리고 나는 더 이해하기를 원했다. 사랑과 지혜라는 단어가 내 손가락들을 이 문단으로부터 저 문단으로 어루만져가게 하여 주는 것 같았다. 더불어 이 단어들은 나의 나태한 본성을 자극하여 더욱 앞으로 나아가라고 종용하는 새 동력이 내 안에서 방출되게 했다. 나는 줄곳 책을 앞뒤로 오가면서 여기서 한 줄, 저기서 한 줄 하는 식으로 뽑아내어 “교훈에 교훈을” 보태면서 글자적 서술의 구름들에 감추여 있는 신성한 말씀 속의 또 다른 것을 한 웅큼 쥐기도 했다. 나는 내가 읽은 것의 의미를 깨달았을 때, 내 혼이 팽창되는듯 여겨졌고 나를 괴롭혔던 고민거리 한가운데에서 확신을 얻게 했다. 그 책의 다른 세계에 관한 묘사들은 나를 먼 곳, 측량 불가능한 먼 영역, 초인적인 아름다움과 경이함으로 가득채워진 곳으로 데려갔다. 이 곳에서는 천사들의 도포가 빛나고 있다. 이 곳은 위대한 생명들과 창의적 마음들이 가장 어두운 환경에 광채를 던지는 곳이다. 이 곳은 별난 대사건들과 내노라 하는 큰 전투들이 끊임없이 청소되는 곳이다. 이 곳은 하느님의 미소를 수단으로 밤이 영원의 낮으로 불 밝히는 곳이다. 이런 혼의 분위기에 앉아서 고상한 남녀가 위풍있는 행렬로 지나가는 것을 지켜볼 때 내 마음은 통째로 빨갛게 탔다. 그 이유가 처음으로 불멸함이 나를 위해 알기 쉬움이라는 옷을 걸쳤고, 땅은 사랑스러움과 의미 있음이라는 새로운 곡선을 그렸기 때문이다. 나는 하느님의 도성이 유리 길이나 사파이어 벽 등등으로 된 시시한 것이 아니라, 도움을 주는 생각들과 고귀한 감화력 등 슬기로움의 체계적인 보물 창고임을 발견하고 무척 기뻤다. 나는 성경을 과거 나를 괴롭게 한 책이라 여겼으나 이제는 귀중한 진리들을 파내기 위한 도구로서, 즉 내 영의 지고한 명령을 위해서라면 내 불완전하고 머뭇거리는 육체를 사용할 수 있듯이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을 보게 되었다.
편협된 생각을 지닌 누군가가 기독인들이 아니면 처벌되어진다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 당연히 내 혼은 불쾌했는데, 그 이유는 나는 진리를 위해 살다가 죽은 경이로운 사람들은 이교도 땅에도 많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책 “천국과 지옥”에서 “예수”는 신성한 선을 뜻하고, 선은 행위에 삽입되어 있다는 것, 그리고 “그리스도”는 신성한 진리를 뜻하고 이 진리는 인간의 지성 안으로 새로운 생각, 새로운 생명과 기쁨을 내보낸다는 것을 찾아냈다; 그러므로 하느님을 믿고 올바르게 사는 사람은 정죄되는 일이 결코 없다. 이런 개념 속에서 나는 성년의 여성이 되었다. 그리하여 칸래드(Conrad)가 까닭도 모르게 자기가 선택할 언어를 영어에서 발견해갔듯, 나도 모르게 새 교회 교리들을 내 종교로서 하나하나 더 받아들였다. 이 교리를 선택해감에서 나에게 용기를 돋구어준 사람은 없다. 그리고 나는 이 교리를 설명할 수 있는 누군가 보다 더 설명을 잘 해낼 자신도 없다. 내가 오로지 말할 수 있는 것은 (스위든볽을 통한) 하느님의 말씀은 미개한 신조들의 얼룩과 더러움에서 (내 혼을) 자유하게 했고, 즉시 그 말씀은 내 인생의 선과 환희가 되었다는 것, 더구나 내 선생님의 일에 대한 나의 증대하는 진가와 섬김을 위한 내 자신의 책임감, 투쟁과 외로움의 시간들, 아주 깊은 환희의 시간들, 정면으로 마주쳤던 거친 진리들, 쉽고 안심됨이라는 유쾌할듯한 미끼를 무는 것보다는 높은 꿈들을 더 귀중히 여겨 붙드는 것, 이런 등등과 경이롭게 연결되고 있지 않는가! 이런 진리들은 마치 빛과 색깔, 음악이 눈과 귀에 밀접하게 관련있듯 내 정신 기능에 그러하였다. 이 진리들은 더 충만된 감각-생활을 탐낼듯 갈망한 나 자신을 내 안의 완전한 존재를 생생하게 의식하도록 들어 올렸다. 날마다 가능함으로 가득한 두 손이 나에게 오고 있다. 그리고 이 짧은 과정에서 나는 내 존재함 속의 모든 참인 것과 실재인 것, 축복이 자라나는 것, 행동에 따른 뿌듯함, 아름다운 영을 식별해 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