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제 2장 상응 요약

창세기 제 2 장

1절. 그리고 하늘들과 땅이 마무리되어졌다, 그리고 그것들의 모든 군대.
이 구절은 이제 인간이 “여섯째 날”을 통과하여 영적 수준에 이르렀음을 의미하고 있다. “하늘”은 그의 내적 인간이고, “땅”은 그의 외적 인간이다. “그들의 군대”란 사랑, 신앙, 그리고 사랑과 신앙에 관한 지식이다. 이 세 가지는 앞 장에서 “큰 발광체”와 “별”로 의미되었었다.
인간이 “여섯째 날”이 되어갔을 때, “하늘들과 땅과 그것들 속의 모든 군대”가 “마무리되어졌다”라고 말해지고 있다. 그 이유는 그때 사랑과 믿음이 하나를 만들기 때문이다. 이렇게 하나를 이루면 신앙이 아닌 사랑이, 바꿔말하면 영적 수준의 원리가 아닌 천적 수준의 원리가 그의 제일가는 원리가 된다. 즉 천적 (평면의) 인간(a celestial man)이 되는 것이다.

2,3절. 그리고 일곱째 날에 하느님께서는 만들어 가시던 그분의 일을 끝내셨다; 그리고 그분은 일곱째 날에 만드시던 그분의 모든 일로부터 쉬셨다. 3.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일곱째 날에 복을 주셨고, 그 날을 거룩하게 하셨다. 그 이유는 그분이 만드시고 창조하셨던 그분의 모든 일로부터 쉬셨기 때문이다.
천적 인간이 “일곱째 날”이다. 주님께서 육 일 동안 일하셨기 때문에 “그분의 일”이라 불리워진다. 모든 전투가 중단되었으므로 주님은 “그분의 모든 일로부터 쉬신다”라고 말해지고 있다. 이렇기에 일곱째 날은 성별되었고 안식일이라고 불렀다. 히브리어에서 안식일은 쉼을 의미하고 있다. 이리하여 인간은 창조되었고, 형태를 갖추었고, 만들어졌다.
천적 인간이 “일곱째 날”이다는 것, 그러므로 일곱째 날은 거룩하게 하셨다는 것, 그리고 안식일이라 불렀다는 것은 지금까지 발견되지 않았던 신비이다. 그 이유는 누구도 천적 인간의 본성에 관해 친숙해 있지 않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영적 인간의 본성에 친숙한 자는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친숙치 못한 결과 영적 인간과 천적 인간의 본성은 같은 것으로 만들어져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두 인간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
여기서 취급되는 태고 교회는 이 교회 뒤를 이었던 모든 교회를 능가하는 주님의 안식일이었다. 물론 여기서의 교회에 뒤이어 있는 주님의 가장 깊은 (수준의) 교회 역시 안식일이다; 그리고 거듭나는 모두 각각의 인물도 천적 수준이 되어갈 경우, 역시 그러하다, 그 이유는 그 인물은 주님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이런 것들이 유대 교회 안에서 노동의 날들, 그리고 안식일이었던 일곱째 날을 수단으로 표현되어졌다; 그 이유가 이 교회 안에 설립된 모든 것은 주님과 그분의 왕국에 관련한 표현물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같은 것이 전진하고 쉬었을 때의 궤에 의해서도 표현되어졌다. 그 이유가 광야에서 궤의 여행들은 전투들과 시험들을, 궤가 쉼은 평화의 상태가 표현되어졌기 때문이다.
“여섯째 날”이 된 영적 인간이 천적 수준이 되기를 시작할 때, 이 상태가 여기서 취급되고, 이것이 “안식일의 전야(eve)”로서, 유대 교회에서 (안식일 이전 날) 저녁으로부터 안식일의 거룩함을 지킴에 의해 표현되었다. 천적 인간은 이제 말해지게 되는 “아침”이다.
천적 인간이 “안식일”, 또는 “쉼”인 이유는 영적 인간이 천적 인간이 될 때 전투는 중지되기 때문이다. 이때 악령들은 물러가고, 선한 영들, 뿐 아니라 천적 천사들이 접근한다; 이것이 표출되면 악령의 잔존은 가능치도 않아 멀리멀리 떠난다. 사실 전투를 수행한 것은 인간 자신이 아닌 주님이셨는 바, 본문에서 주님께서 “쉬셨다”라고 말해지는 것이다.
영적 인간이 천적 수준이 될 때, 그는 “하느님의 일”이라 불리워진다, 그 이유는 주님만이 그를 위해 싸우시고, 창조하시고, 모양을 내시고 그를 만드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하느님께서는 일곱째 날에 그분의 일을 마치셨다” 말해진다; 그리고 “그분은 그분의 모든 일로부터 쉬셨다”는 두 번 언급되고 있다. 예언자들에 의해 반복적으로 말해지는 것은 사람이 “여호와의 손가락의 일, 또는 손의 일”이라 일컫는 것이다.

4절. 하늘들과 땅의 태생은 이러하다. 즉 여호와 하느님께서 땅과 하늘을 만드셨던 날, 그분이 그들을 창조하셨을 때이다.
“하늘들의 태생과 땅의 태생”은 천적 인간을 형성함(formation)들이다. 여기서 천적 인간의 형성함이 취급된다는 것은 뒤이어지는 모든 세부 사항들로부터 분명하다. 즉 풀잎이 아직 자라지 않는다는 점, 지면을 경작할 사람이 없다는 점, 사람의 모양을 내신 분이 여호와 하느님이신 점, 이 후에 그분은 모두 각각의 짐승과 하늘들의 새를 만드셨는데, 이 만드심은 이미 앞장에서 있었다는 점; 이런 앞뒤 상황으로 미루어 또다른 사람이 여기서 취급된다는 것은 분명하다. 하나 더 구별되는 점은, 영적 인간을 취급하는 앞 장에서는 주님이 단순하게 “하느님”으로 불리셨는데, 여기서는 처음 동안은 “여호와 하느님”으로 불리신다는 점이다; 더 나아가, 지금은 “지면” 그리고 “들판”이 언급되는 반면, 앞 장의 경우는 오직 “땅”만이 언급되었다. 이 구절에서도 역시 “땅”에 앞서 “하늘”이 먼저 언급되고, 후에 “땅”이 먼저 언급된다; 이런 이유는 “땅”은 외적 인간을, 그리고 “하늘”은 내적 인간을 의미하기 때문, 그리고 영적 인간에서의 재형성(reformation)은 “땅”으로부터, 즉 외적 인간으로부터 시작하는 반면, 여기서 취급되는 천적 인간은 내적 인간으로부터, 또는 “하늘”로부터 시작하기 때문이다.

5,6절. 땅에는 들판의 관목이 아직 없었고, 그리고 성장하는 들판의 풀잎이 아직 없었다. 그 이유는 여호와 하느님께서 땅에 비를 내리지 않아서였다. 그리고 지면을 경작할 사람이 없었다. 6. 그리고 그분께서 땅으로부터 안개가 올라오게 하시자, 지면의 모든 얼굴은 적시워졌다.
“들판의 관목” 그리고 “들판의 풀잎”을 수단으로 외적 인간이 생산하는 일반적 측면에서의 모두가 뜻해진다. 영적 인간의 수준에 남아있는 동안, 영적 (평면의) 인간의 외적 인간은 “땅”이라 불리우나, 천적 (평면의) 인간이 될 때, 천적 (평면의) 인간의 외적 인간은 “지면(ground)” 그리고 또한 “들판(field)”이라 불리운다. “비”, 이는 곧 이어 “안개”라 불리우는데, 전투가 중지될 때 있는 평화로부터의 고요함이다.
그러나 이런 것들이 포함하는 것을 지각함은 인간의 상태가 영적 수준으로부터 천적 수준으로 되는 동안의 상태를 알지 않으면 가능할 수 없다. 그 이유는 그것들은 깊게 감추여 있기 때문이다. 인간이 영적 수준인 동안, 그의 외적 인간은 내적 인간에 순종하거나 내적 인간을 섬기는데 기꺼이 하려 들지 않는다. 따라서 전투는 상존한다; 그러나 그가 천적 수준이 될 때, 외적 인간의 내적 인간에의 순종과 섬김은 기꺼이 있는다. 그러므로 전투는 중지되고, 고요함이 결과된다 (87항 참조). 이 고요함이 “비”와 “안개”를 수단으로 의미되어진다. 이 둘은 비슷한 수증기여서, 이것으로 외적 인간은 내적 인간으로 물을 공급 받거나 적시어진다; 평화의 산물, 이 고요함이 “들판의 관목” 그리고 “들판의 풀잎”이라 불리는 것을 생산한다. 이것은 특별하게는 천적 수준으로부터의 영적 근원(a celestial spiritual orgin, 사랑, 또는 선으로부터의 영적 근원. 역자주)으로부터의 기억 속의 것들과 합리적 마음 속의 것들이다.
전투의 정지, 또는 탐욕들과 거짓들로 야기된 쉼 없음의 정지에서 있는 외적 인간의 평화 속의 고요함에 대한 본성은 평화의 상태에 친숙해 있는 이들에게만 알려질 수 있다. 이 상태의 기쁨은 매우 깊은 수준이어서 기쁨이라는 여하한 생각의 범주를 넘는다: 이것은 전투의 정지 뿐 아니라 내면의 평화로부터 진행하는 생명이고, 감히 묘사할 수 없을 정도의 방식 안에서 외적 인간에게 감명을 안긴다; 신앙으로부터의 진리, 사랑으로부터의 선, 이것들은 평화의 기쁨으로부터 그것들의 생명을 끌어내고, 그때 출생되어진다.
천적 인간의 상태는 평화의 고요함을 선물받고,-비에 의해 새로워짐-그리고 악과 거짓인 것의 노예됨으로부터 해방된다.

7절. 그리고 여호와 하느님께서 지면으로부터의 먼지(로) 사람을 만들어 내셨다(formed), 그리고 그의 콧구멍에 생명들의 숨을 불어 넣으셨다, 그래서 사람은 살아있는 혼이 되었다.
“지면의 먼지로 사람을 만들어 내시는 것”은 천적 평면의 외적 인간을 만들어내시는 것이다. 이 인간은 이전에는 사람이지 않았다: 그 이유는 5절에서 “지면을 경작할 사람이 없었다” 라고 말해졌었기 때문이다. “생명들의 숨을 그의 콧구멍 안으로 불어넣는 것”은 그에게 신앙과 사랑의 생명을 주는 것이다; 그리고 ”사람은 살아있는 혼이 되었다“에 의해 천적 평면의 외적 인간은 살아있게 만들어졌음이 의미되어 있다.
외적 인간의 생명이 여기서 취급되는데, 앞 두절에 있는 이해함 또는 신앙의 생명, 그리고 이 절에 있는 의지 또는 사랑의 생명이다. 지금까지의 외적 인간은 내적 인간과 더불어 전투에 임함에서 기꺼이 내적 인간에 굴복하고 섬기려 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외적 인간은 “사람”이 아니었다. 어쨌든 천적 (평면의) 외적 인간으로 만들어진 지금, 내적 인간에 순종하고 섬기기를 시작한다, 그래서 신앙의 생명과 사랑의 생명을 수단으로 “사람”을 만든다. 신앙의 생명이 그를 준비시키고, 그를 “사람”이 되게 하는 것은 사랑의 생명이다.
“여호와 하느님께서 그의 콧구멍 안으로 숨을 불어 넣으셨다”에 관하여는 이러하다: 고대 시대에서, 그리고 말씀에서, “콧구멍”을 수단으로 냄새 때문에 있는 감사히 여긴 것은 무엇이든, 이것은 지각을 의미한다고 이해되어졌다. 이런 중요성 때문에 여호와에 관련해 반복적으로 쓰여 있는 대목은, 태워바치는 제물로부터, 또는 그분과 그분의 왕국을 표현하는 여러 가지 것들로부터 “그분은 쉼의 냄새를 맡으셨다”이었다; 그리고 사랑과 신앙에 관련되는 것들은 그분에게 최고로 감사해야 하는 바, “그분은 그분의 콧구멍을 통하여 생명들의 숨을 쉬셨다”라고 말해진다. 이로부터 여호와의 기름부은 자, 즉 주님에 관하여 “콧구멍의 숨”이라 불리어진다 (애4:20). 그리고 주님 자신 “그분의 제자들에게 숨을 내뿜으시면서” 이 구절과 같은 것을 의미해두셨다. 그분은 그들에게 숨을 내뿜으시며 말하셨다, 너희는 성령을 받으라 (요. 20:22).
생명이 “숨을 쉼”을 수단으로, 그리고 “숨”을 수단으로 묘사되어진 이유는 태고 교회의 사람들은 사랑과 신앙의 상태를 호흡의 상태들을 수단으로 지각하였기 때문인데, 이것이 그들의 후손에서는 변화되었던 것이다. 이 호흡에 관해서는 아직까지는 말해진 바 아무 것도 없다. 그 이유는 오늘날 이와 같은 것은 깡그리 모르게 되었기 때문이다. 어쨌든 태고 교회인들은 이것에 매우 친숙해 있었다. 그리고 다른 삶 안에 있는 이들에게는 그렇게 있다. 그러나 이 땅 위에서는 더 이상 누구에게도 존재하지 않는다. 사람들이 영 또는 생명을 “바람”에 비교하는 것도 이런 흔적 때문이다.

8절. 여호와 하느님께서 에덴 안에 동쪽으로 동산을 창설하셨다, 그리고 거기에 그분은 그분께서 만드신 사람을 두셨다.
“동산”에 의해 총명이, “에덴”에 의해 사랑이, “동쪽”에 의해 주님이 의미되어진다; 결과적으로 “동쪽 에덴의 동산”은 천적 인간의 총명이 의미되고, 이 총명은 사랑을 통하여 주님으로부터 흐른다.
생명, 또는 생명의 질서가 영적 (평면의) 인간과 더불어서 일 경우, 비록 그것들이 주님으로부터 신앙을 통하여 그의 이해력, 추론력, 그리고 기억력 안으로 흐르고 있지만, 영적 (평면의) 인간의 외적 인간은 내적 인간과 다툰다. 고로 마치 총명이 주님으로부터 흘러드는게 아니라 자신으로부터 기억력이나 추론력 안으로 흐르는 듯 나타난다. 그러나 천적 (평면의) 인간과 더불은 생명, 또는 생명의 질서는 주님이 사랑을 통하여 흘러들고, 사랑으로부터의 신앙이 그의 이해력, 추론력, 그리고 기억 속의 것들 안으로 흘러간다. 그래서 내적 인간과 외적 인간 사이에 다툼이 없는 바, 그는 이것이 실지로 그렇다고 지각한다. 고로 영적 인간과 더불어 거꾸로 되어 있어 왔던 질서가 천적 인간과 더불어 원위치를 찾은 바가 지금 묘사되어 있다. 이 질서, 또는 사람이 “동쪽 에덴에 있는 동산”이라 불리어진다. “동쪽에서 에덴 안에 여호와 하느님에 의해 창설된 동산”은 최고의 의미에서는 주님 자신이시다. 가장 깊은 의미(inmost sense)에서, 마찬가지인 보편적 의미에서, 이는 주님의 왕국이다, 그리고 인간이 천적 수준이었을 때 그가 위치되는 천국이다. 이런 그 사람의 상태는 그가 천국에 있는 천사들과 더불어 있다. 마치 그들 사이에 하나의 천사인 듯하다; 그 이유는 인간은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도 동시에 천국 안에 있도록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이 상태 안에서 그의 모든 생각들, 그리고 생각들로부터의 관념들, 그의 말들과 행동들에 이르기까지 열려있고, 주님으로부터조차도 열려있다. 그리고 그것들 안에는 천적 수준인 것과 영적 수준인 것을 포함하고 있다; 그 이유가 이런 것들의 각각 모두는 그것 내에 주님의 생명을 가지고 있어 그 사람으로 지각할 수 있게 하기 때문이다.

9절. 여호와 하느님께서는 지면으로부터 바라보기에 바람직하고 식품으로 좋은 모든 나무가 자라게 하셨다. 또한 동산 중앙에는 생명들의 나무가 있었고, 그리고 선과 악에 관한 지식의 나무도 있었다.
“나무”는 지각을; “바라보기에 바람직한 나무”는 진리를 지각함을; “식품으로 좋은 나무”는 선을 지각함을; “생명들의 나무”는 사랑과 사랑으로부터 파생된 신앙을; “선과 악에 관한 지식의 나무”는 감각적인 것으로부터, 즉 기억 속의 지식으로부터 파생된 신앙을 의미한다.
여기서 “나무”가 지각들을 의미하는 이유는 천적 인간이 취급되기 때문에서 이다. 그러나 주제가 영적 인간일 경우는 달라진다. 그 이유는 주제의 본성에 서술 부분이 의존되기 때문이다.
오늘날 지각(perception)이 무엇인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이것은 진리와 선인 것인지의 여부에 관하여 주님만으로부터 있는 어떤 내적인 감각이다; 그리고 이것은 태고 교회에게는 아주 잘 알려져 있었다. 이 지각은 천사들에게는 아주 완전한 바, 그것을 수단으로 그들은 진리이고 선인 것에 관하여 알아채고 지식을 얻는다; 또한 주님으로부터 있는 것도, 그리고 자신으로부터의 것도; 뿐 아니라 자기들에 다가오는 누군가의 품질도 단지 그가 접근만 해도, 그의 사상들의 딱 하나만으로부터도 그의 품질을 알아챈다. 영적 인간은 지각을 가지고 있지 않고, 양심을 가지고 있다. 죽은 사람은 양심조차 없다; 그리고 매우 많은 사람이 양심이 무엇인지 모른다, 지각이 무엇인지는 더더욱 모른다.
“생명들의 나무”는 사랑과 사랑으로부터 파생된 신앙이다; “동산의 중앙에”는 내적 인간의 의지 안에 있다. 의지(will), 이는 말씀 안에서 “심정(heart)” 이라 불리우는데, 인간과 천사들과 더불어 주님의 제일가는 소유물(possession)이다. 그러나 누구나 자신으로부터서는 선을 행할 수 없는 바, 설사 의지가 인간이라 단정할지라도, 의지, 또는 심정은 인간의 것이 아니다; 인간이 의지라 부르는 것인 탐욕은 인간의 것이다. 그 다음 의지가 “동산의 중앙에” 있고, 거기에 생명들의 나무가 놓여져 있다, 그리고 인간은 의지를 가지고 있지 않고, 단지 탐욕만 가지고 있기에, “생명들의 나무”는 주님의 자비이고, 주님으로부터 모든 사랑과 신앙이 오는 바, 결과적으로 모든 생명이다.
그러나 “동산의 나무”의 본성, 또는 지각; “생명들의 나무”, 또는 사랑과 사랑으로부터 파생된 신앙의 본성; 그리고 “지식의 나무”, 또는 감각적인 것만에서, 또는 기억 속의 지식만에서 근원되는 신앙의 본성은 뒤를 잇는 페이지들에서 보여질 것이다.

10절. 강이 에덴으로부터 나와서 동산을 적셨고, 거기서부터 갈라져서 네 머리가 되었다.
“에덴으로부터의 강”은 사랑으로부터의 지혜를 의미한다. 그 이유는 “에덴”이 사랑이고, “동산을 적시는 것”은 총명이 수여되는 것; “거기서부터 네 머리로 갈라졌다”는 것은 뒤 구절에 이어지는 바 같이 네 강들을 수단으로 총명을 묘사함이기 때문이다.
태고 사람들은 사람을 “동산”에 비교할 때, 지혜 역시, 그리고 지혜에, “강들”에 관련되는 것들도 비교했다. 그들은 그것들을 단지 비교하는데 그치지 않고, 실제적으로 그렇게 일컬었다. 그 이유가 이런 방법이 그들이 이야기하는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후에 예언자들 안에도 똑 같은 것이 있었다. 그들은 때로는 그것들을 비교했고, 때로는 그렇게 불렀다.

11,12절. “첫째 강의 이름은 비손이다. 이 강은 금이 있는 곳, 하윌라 온 토지를 에워싸고 있다. 12. 이 토지의 금은 선(good)이다. 거기에는 벧엘리움과 호마노 돌(onyx stone)도 있었다.
“첫째” 강, 또는 “비손”은 사랑으로부터 있는 신앙으로부터의 총명을 의미한다; “하윌라 토지”는 마음(mind)을 의미한다; “금”은 선을 의미한다; “벧엘리움과 호마노 돌”은 진리를 의미한다. “금”은 두 번 언급되었는데, 그 이유는 이것이 사랑으로부터의 선과 사랑으로부터의 신앙의 선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벧엘리움과 호마노 돌”은 하나는 사랑으로부터의 진리와 다른 하나는 사랑으로부터의 신앙의 진리이기 때문에 언급되었다. 이와 같은 (상태가) 천적 인간이다.
어쨌든 이런 것들이 내적 의미 안에 있는 바, 이것들을 서술해낸다는 것은 무척 어려운 문제이다. 그 이유는 오늘날 사랑으로부터의 신앙에 의해 뜻해지는 것, 그리고 지혜와 지혜로부터 파생된 총명에 의해 뜻해지는 것이 무엇인지 아무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외적 인간들은 기억 속의 지식밖에는 거의 알지 못한 바, 그들은 총명과 지혜, 그리고 신앙을 기억 속의 지식이라 부르기 때문이다. 외적 인간들은 사랑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조차 없다, 그리고 많은 이들이 의지력과 이해력이 무엇인지 모른다, 그리고 그것들은 한 개의 마음을 구성한다고 알고 있다. 그럼에도 이것들의 각각은 구분된다, 그렇다, 아주 확실히 구분된다, 그리고 천국 전체는 주님에 의해 사랑과 신앙에 의거 최고로 구분이 잘되는 방식 안에서 정돈되어 있다. 이것은 무수하기도 하다.
더 나아가 (천국 전체에) 알려져 있는 바, 사랑으로부터, 고로 주님으로부터 있지 않은 지혜는 없다는 것, 신앙으로부터, 고로 주님으로부터가 아닌 어떤 총명도 있지 않다는 것; 그리고 사랑으로부터, 고로 주님으로부터가 아니고는 선은 없다는 것; 그리고 신앙으로부터, 고로 주님으로부터가 아니면 진리는 없다는 것이다. 사랑과 신앙으로부터, 고로 주님으로부터 있지 않은 것이 실지로 이런 이름들에 의해 불려지는데, 그것들은 가짜이다.
말씀 안에서 지혜로부터의 선, 또는 사랑으로부터의 선이 “금”을 수단으로 의미되고 표현되어진다는 것보다 더 공통적인 것은 없을지 모른다. (언약)궤에, 성전에, 금빛의 탁자에, 촛대에, 그릇들에, 그리고 아론의 의복 위에 있는 모든 금은 지혜로부터의 선 또는 사랑으로부터의 선을 의미했고 표현했다.
신앙으로부터의 진리가 말씀 안에서 귀중한 “돌들”에 의해 의미되고 표현되었는데, 이는 판단(judgment)의 가슴받이에 있는 것들, 그리고 아론의 에봇의 어깨 위에서와 같다. 가슴받이에서, “금, 푸른색 (실), 빛나는 심홍색 (실), 두 번 물들인 진홍색 (실), 그리고 꼬아만든 고운 아마포”는 사랑으로부터 있는 것들을, 귀중한 “돌들”은 사랑으로부터의 신앙 속에 있는 것들을 표현했다; 마찬가지로 에봇의 어깨 위, 두 개의 “기억함의 돌들”, 이는 호마노 돌인데, 금으로 박아 끼워 놓였다 (출 28:9-22).
태고 사람들은 “토지들”에 관해 이야기했을 때, 그들은 그것들에 의해 의미된 것을 이해했다. 예를 들면, 오늘날, 가나안의 토지나 시온 산이 천국을 의미한다는 관념을 가지는 것과 같다. 태고인들은 이런 장소들이 언급될 때, 어떤 토지나 산 자체를 생각하는 비중보다는 그것들이 의미하는 것만에 더 생각이 쏠려 있었다. 이 구절의 “하윌라 토지”에서도 마찬가지 이다. 이는 창세기 25:18에서 다시 언급되는데, 거기서 이스마엘의 아들들에 관해 말해지는 대목, 즉 그들은 “하윌라로부터 앗시리아로 향하는 , 이집트 앞 수르(Shur)에 이르기까지에서 거주했다” 이다. 천국의 관념 안에 있는 이들은 이런 말들로부터 총명, 그리고 총명으로부터 흐르는 것밖에 더 지각하는 것이 없다. 비손 강이 “하윌라의 온 토지를 에워싸고 있다”에서 말한 “에워 쌈”의 경우도 마찬가지 이다. 그들은 안으로 흐름을 지각한다; 이와 비슷한 모습이 아론의 어깨 위 호마노 돌들인데, 이 돌들은 금으로 에워싸 박아끼워져 있다 (출. 28:11). 그들은 사랑으로부터의 선이 신앙의 진리 안으로 흐른다는 것을 지각한다. 많은 다른 예들의 경우도 있다.

13절. 그리고 둘째 강의 이름은 기혼이고. 구스 온 토지를 에워싸고 있다.
“둘째 강”은 “기혼”이라 불리우는데, 선한 것과 참된 것, 또는 사랑과 신앙에 속하는 모든 것들에 관한 지식을 의미한다, 그리고 “구스의 토지”는 마음(mind) 또는 능력(faculty)을 의미한다. 마음은 의지력과 이해력으로부터 구성된다;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들은 이해력에 속해 있다.
“구스의 토지”, 또는 에티오피아, 더 나아가, 금, 귀중한 돌들, 그리고 향신료들이 풍부함은 앞서 말했듯이, 선, 진리, 그리고 이 둘로부터 파생되는 감사히 여기는 것들, 말하자면, 사랑과 신앙에 관한 지식들의 것들 같은 것을 의미한다.

14절. 셋째 강의 이름은 힛데겔이고, 이 강은 앗수르를 향하여 동쪽으로 가고 있다. 그리고 넷째 강은 유브라데이다.
“힛데겔 강”은 추론함(reason)이다, 또는 추론으로부터의 명민함(clearsightness)이다. “앗수르”는 합리적인 마음이다; “앗수르를 향하여 동쪽으로 가는 강”은 추론의 명민함은 주님으로부터 내적 인간을 통하여 외적 인간 속에 있는 합리적인 마음 안으로 옴을 의미한다; “브라데”, 또는 “유브라데”는 기억 속의 지식이고, 이 지식은 최말단(ultimate), 또는 경계선(boundary)이다.
“앗수르”는 합리적인 마음, 또는 인간의 합리적인 것을 의미한다.
“이집트”에 의해서와 같이 “유브라데” 역시 기억 속의 지식들, 또한 감각적인 것들이 의미된다. 이 감각적인 것들로부터 기억 속의 지식들이 얻어진다.
천적 질서의 본성, 또는 생명 속의 것들이 어떻게 진행되는가는 이런 강들로부터 분명하다. 즉 “동쪽”이신 주님으로부터, 그리고 그분으로부터 지혜가 진행되고, 지혜를 통하여 총명이, 총명을 통하여, 추론함이, 추론함을 수단으로 기억 속의 지식들은 생기 있어진다. 이것이 생명의 질서이고, 천적 인간들은 이와 같은 바, 그들은 “슬기롭고, 총명하며, 그리고 지식이 있는 자”이다 (신. 1:13,15).

15절. 여호와 하느님께서는 동산을 경작하고 돌보도록 사람을 데려다가 에덴의 동산에 놓으셨다.
이미 상술했듯, “에덴의 동산”을 수단으로 천적 인간의 모든 것이 의미되었다; “이 동산을 경작하고 돌보는 것”을 수단으로 모든 것을 즐기도록 천적 인간에게 허락되어졌다가 의미되어 있다. 그러나 그것들은 주님의 것이므로 그것을 자신의 것으로 소유해서는 안되었다.
천적 인간은 인정한다. 그 이유는 모든 것들, 일반적, 세부적 측면에서 모두는 주님의 것임을 지각하기 때문이다. 영적 인간도 천적 인간과 참으로 똑같게 인정하나, 그 인정은 입을 가지고서 이다. 그 이유는 그가 그것을 주님으로부터 배웠기 때문이다. 세상적이고 육체적인 인간은 그것을 인정하지 않고 승인도 없다; 그러나 그가 가진 것은 무엇이든 그는 그것이 자기 것이라 부른다, 그리고 그것을 잃는 것은 자신을 멸하게 한다고 상상한다.
지헤, 총명, 추론, 지식은 인간으로부터 있지 않고, 주님으로부터 있다는 것은 주님께서 가르치신 모두로부터 분명하다; 마태복음에서, 주님이 집주인, 즉 포도원을 창설하고, 그것 주위에 울타리를 치고, 농부들에게 세를 준 주인에 비유되고 있다 (21:33).

16절. 여호와 하느님께서는 사람에게 명령하여, 말하시기를. 너는 동산의 모든 나무로부터 먹어도 된다.
“모두 각각의 나무를 먹는 것”은 선하고 참된 것을 지각함으로부터 아는 것이다. 그 이유가, 이미 주목했던 바 같이, “나무”는 지각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태고 교회의 사람들은 계시들을 수단으로 진정한 신앙에 관한 지식들을 가졌다. 그 이유는 그들은 주님과, 그리고 천사들과 대화했기 때문이다, 또한 환상과 꿈에 의해서도 가르쳐졌다. 이 가르침은 그들에게는 최고의 기쁨이자, 낙원의 기쁨이었다. 그들은 주님으로부터 계속적으로 지각을 가졌다, 하여 그들은 기억 안에 쌓아둔 것으로부터 꺼내 되새겨 봄으로 어떤 것이 참되고 선한지의 여부를 즉시 지각했고, 거짓된 어떤 것 자체가 표출될 때, 그것을 피할 뿐 아니라 공포가 엄습하는 바 그것을 아예 무시해버렸다; 이것이 천사들의 상태이다. 후에, 태고 교회의 이 지각 대신, 이전에 계시되어 왔었던 것으로부터 선하고 참된 것에 관한 지식이 계승되어졌다, 그 후에는 말씀 안에 선하고 참된 것에 관한 지식이 계승되어져 (지금까지에) 이르고 있다.

17절. 그러나 너는 선과 악에 관한 지식의 나무로부터는 먹지 말라, 그 이유는 그것을 먹는 그 날에 너는 죽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 설명해 온 것까지 취합해보면, 이 구절의 말들은 자아와 세상으로부터가 아니다면 모두 각각의 지각을 수단으로 주님으로부터 파생된 참되고 선한 것과 친숙해지는 것은 허용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즉, 우리는 감각으로부터의 것들과 기억 속의 것들을 수단으로 신앙의 신비를 파헤쳐 보겠다해서는 안된다. 그 이유는 이럴 경우, 신앙의 천적인 것(천적 등급)이 파괴될 것이기 때문이다.
감각과 기억으로부터의 것들을 수단으로 신앙의 신비를 탐사하고 싶은 바램(desire)이 다음 장에서 취급되듯이 태고 교회의 후손들이 타락하는 원인이었을 뿐 아니라, 모두 각각의 교회의 타락의 원인이기도 하다; 그 이유가 이로부터서는 (생각에는) 거짓들만, 생활에는 악만이 출현하기 때문이다.
세상적이고 육체적인 인간은 자기 심정에서 말한다. 만일 내가 신앙에 관해, 그리고 신앙에 관련한 모든 것에 관해 가르침을 받지 않았다면, 내가 보기 위해 감각적인 것을 수단으로 했을 것이고, 내가 이해하기 위해 기억 속의 것들을 수단으로 했을 것이니, 나는 믿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이 사람은 자연적인 것들이 영적인 것들과 반대되어져 있을 수 없다는 판단 아래 자신을 확증한다. 고로 이 사람은 천적인 것과 신성인 것이 감각적인 것으로부터 가르쳐지기를 바란다. 그러나 이 바램의 실현은 낙타가 바늘귀를 통과하는 것보다 더 불가능하다; 그 이유는 그가 이런 식을 수단으로 더 바랄수록 그는 더 눈먼 자가 되기 때문이다. 결국 그는 모든 것이 아무 것도 없는 수준, 급기야는 영적인 것, 영원한 생명, 어떤 것이든 믿지 않게 되고 만다. 이런 것은 당사자가 당연하다고 여기는 원리로부터 온다. 그리고 이것이 “선과 악에 관한 지식의 나무로부터 먹는 것” 이다. 누군가가 이로부터 더 먹을 수록 그는 더 죽은 자가 된다. 그러나 세상으로부터가 아닌, 주님으로부터 슬기로워진 사람은 자기 심정에서 이렇게 말한다. 주님은 반드시 믿어져야만 한다는 것, 즉 주님이 말씀에서 이야기 하신 것은 반드시 믿어져야 한다는 것, 그 이유는 그것들이 진리들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원리에 따라 그는 자기 생각들을 규율한다. 그는 (이 원리를 원칙으로) 추론으로부터의 것들, 지식으로부터의 것들, 감각으로부터의 것들, 자연으로부터의 것들을 수단으로 자신을 확증한다. 그리고 확증이 있지 않은 것들은 한쪽으로 내던진다.
인간은 자기가 당연하다고 여기는 원리들을 수단으로 통치되어진다는 것은 모든 이가 알고 있는 사항이다. 이는 거짓된 것조차도, 그리고 그의 모든 지식과 추론함은 그의 원리들을 찬성하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으리라 본다; 그 이유가 무수한 생각들은 자기 마음에 표출된 것을 지지하는 쪽으로 구부려드는 경향이 있기 때문, 고로 인간은 거짓된 것 안에서도 확증이 가능하다. 그러므로 (자기 눈에) 보여지고, 이해될 때까지 믿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원리로 당연시하는 사람은 결코 믿을 수 없다. 그 이유는 영적인 것과 천적인 것들은 눈으로 보여질 수 없고 상상 같은 것 가지고 마음에 품어볼 수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정한 질서는 인간이 주님으로부터, 즉 말씀으로부터 슬기로워지는 것이다, 모든 것은 이 뒤를 따르는 것이다. 하여 그는 추론에 관한 문제들, 기억 속의 지식들에 관한 문제들조차도 계발되어진다. 그 이유가 과학들을 배우는 것이 금지된다는 것은 결코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들은 인간의 삶에 유익하고 삶을 기쁘게 할 것이기 때문. 또한 신앙 안에 있는 사람도 세상의 지식을 습득하고 생각하고 말하는 것이 금해지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이것도 이 원리로부터, 즉 주님의 말씀을 믿는 것으로부터 있어야 한다. 가능한 한, 영적이고 천적인 진리들을 세상 지식 속의 친근해진 말 안에서 자연적 진리들을 수단으로 확증하는 것이다. 어쨌든 그의 출발점은 주님이어야지, 자신이 아니다; 그 이유가 전자는 생명이고, 후자는 죽음이기 때문이다.
세상으로부터 슬기로워지기를 바라는 사람은 자기 “동산”을 감각적인 것들과 기억 속의 것들로부터 가진다; 자아를 사랑함과 세상을 사랑함이 그의 “에덴”이다; 그의 “동쪽”은 서쪽, 또는 자신이다; 그의 “유브라데 강”은 그의 모든 기억 속의 지식이고, 이것은 정죄되어진다; 그의 “둘째 강”, “앗시리아”인 곳, 거짓들을 대량으로 생산하는 얼빠진 추론들이다; 그의 “셋째 강”, “유브라데”인 곳, 거기로부터 파생된 악과 거짓으로부터의 원리들이다. 이것들이 그의 신앙에 관한 지식들이다; 그의 “네째 강”은 거기서 파생된 지혜이다. 이것은 말씀에서 “마술”이라 불리운다. 그러므로 “이집트”-이는 기억 속의 지식을 의미하는데-후에 이 지식은 마술이 되었는 바, 그런 인간도 의미한다. 이는 말씀으로부터 알 것이다. 이 사람은 자아로부터 슬기로워지기를 바라고 있다.

18절. 그리고 여호와 하느님께서 말하시기를, 사람이 홀로 있는 것은 좋지 않으니; 내가 그와 함께 있을 도움을 만들리라.
“홀로(alone)”를 수단으로 의미된 바, 그는 주님에 의해 인도되는 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자기(자아, self)와 세상에 의해 인도되기를 바랐다는 것이다; “그와 함께 있을 도움”은 인간의 자기 자신을 의미하고, 이것은 동시에 “여인으로 건축된 갈빗대”라 불리웠다.
고대 때에 천적 인간 같이 주님의 안내 아래 있었던 이들을 두고 “홀로 거주함”이라 말했었다. 그 이유는 이들은 악들, 또는 악령들에 의해 있는 (악과 거짓에) 감염됨이 더 이상 없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이스라엘 자손들이 (가나안 토지에서) (타)민족들을 몰아내었을 때, 그들 만이(alone) (그 토지에서) 거주함을 수단으로도 유대 교회 안에서 표현되어졌다. 이런 연유로, 이것이 말씀에서 주님의 교회에 관해 말해질 때 그녀는 “홀로”이다 하고 때로는 말해진다.
“그와 함께 있을 도움”이 인간의 자기 자신을 의미한다는 것은 이 자기 자신의 본성, 그리고 뒤이어지는 것, 둘 다로부터 분명해진다. 어쨌든 여기서 취급된 교회의 사람이 호의를 가졌던 바, (주님의) 자기 자신(an own)이 그에게 수여되었는데, 이런 종류의 자기 자신이 마치 그의 자기 자신 같이 나타났는 바, “그와 함께 있을 도움”이라 말해졌다.
인간의 자기 자신에 관하여, 세분하면, 육체적, 세상적 인간과 더불은 인간의 자기 자신, 영적 인간과 더불은 인간의 자기 자신, 천적 인간과 더불은 인간의 자기 자신, 이런 것들의 본성을 (말로) 설명하려면 무수한 것들을 열거해야 할 지 모른다. 육체적이고 세상적인 인간과 더불어서, 그의 자기 자신은 그의 모든 것이다. 그는 그의 자기 자신밖에 아는 것이 더 없다. 앞서 말했듯이 이 인간은 만일 자기 자신을 상실하면 자기는 멸해지고 말 것이다 라고 상상한다. 영적 인간과 더불어서도 외관은 앞의 인간과 비슷하다. 그 이유가 비록 그가 주님이 모든 것의 생명이시다는 것, 지혜와 이해함을 주신다는 것, 결과적으로 생각하고 행하는 힘을 주신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해도, 그는 자기 심정의 신조로부터라기보다는 입술로부터의 고백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천적 인간은 주님이 모두의 생명이시다는 것, 생각하고 행하는 힘을 주신다는 것을 식별한다, 그 이유는 그는 그것이 그렇게 실제로 있음을 지각하기 때문이다. 그는 그의 자기 자신을 결코 바라지 않는다, 그럼에도 자기 자신(an own)이 주님에 의해 그에게 주어진다, 이 자아는 선하고 참된 것에 관한 모든 지각과 결합되어 있다, 그리고 모든 행복과도 결합되어 있다. 천사들은 이와 같은 (주님의) 자기 자신(an own) 안에 있다, 그리고 동시에 최고 높은 평화와 고요함 안에 있는다. 그 이유가 그들의 자기 자신 안에 주님의 것이 있기 때문이다. 하여 주님은 그들의 자기 자신을 통치하시고, 그들의 자기 자신을 수단으로 그들을 통치하신다. 이 자기 자신은 더할나위 없는 천적 자체이다. 이에 반해 육체적 인간의 것은 지옥적이다. 이 자기 자신은 이후 더 취급할 것이다.

19,20절. 여호와 하느님께서는 지면으로부터 들판의 모든 짐승과 하늘의 모든 새들을 만들어 내셨다. 그리고 사람이 그것들을 어떻게 부를 것인지를 보시기 위해 그에게 데려왔다. 그래서 사람이 모든 살아있는 혼을 부르자, 그것이 이름이 되었다. 20 그리고 사람은 모든 짐승에게, 하늘의 새에게, 들판의 모든 야생 동물에게 이름을 주었다. 그러나 사람과 함께 할 도움은 발견되지 않았다.
“짐승들”을 수단으로 천적인 애착들이, 또는 의지 측면의 애착들, “하늘들의 새들”을 수단으로 영적 애착들이, 또는 이해함 측면의 애착들이 의미되어진다. “그가 그것들을 부르는 것을 보시기 위해 그것들을 그에게 데려 옴”에 의해 그 사람으로 그것들의 품질을 아는 것이 가능하게 하심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가 그것들에게 이름들을 주는 것”은 그가 그것을 알았다를 의미한다. 그러나 그는 주님에 의해 그에게 주어진 선에 대한 애착들과 진리에 관한 지식에 애착함들의 품질을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는 그의 자아에 기울어져 있었다. 이것이 앞 절에서와 같은 표현, 즉 “그와 함께 있을 도움이 발견되지 않았다”에 표현되어 있다.
“짐승들”과 “동물들”을 수단으로 고대에서는 애착들과 인간 안에 이와 비슷한 것들을 의미했다는 것은 오늘날의 경우에서는 낯설지 모른다; 그러나 이 때의 사람들은 천적인 관념 안에 있었는 바, 그리고 이와 같이 동물들을 수단으로 영들의 세계에서 표현하였는 바, 그리고 사실상, 그들이 이런 동물과 닮았는 바, 그들이 이야기했을 때, 그들은 그밖의 것을 뜻하지 아니했다. 마찬가지로 짐승들이 언급되는 말씀 안에서도 일반적 측면이든, 특수적 측면이든, 위의 방식 외의 방법으로 의미를 뜻하는 곳은 없다. 예언적 말씀 전체는 위와 같은 방식으로 가득 차 있다. 그러므로 각각의 짐승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알지 못하면, 내적 의미를 포함하는 말씀의 이해는 불가능하다. 앞서 주시했던 바같이 짐승은 두 종류로 있다. 하나는 악하고 유해한 짐승들, 그리고 선하고 해가 없는 짐승들이 있다. 선한 짐승들에 의해서는 선한 애착이 의미되는데, 이런 짐승으로는 양, 어린 양, 비둘기 등등이다; 이것이 이미 취급한 천적 인간, 또는 천적인 영적 인간인 바, 같은 것이 여기서도 뜻해지고 있다.
“이름을 수단으로 부름”이 품질(quality)을 아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은 고대인들이 “이름”을 수단으로 어떤 것의 본질을 이해했기 때문에서이다. 그리고 “이름을 수단으로 보는 것과 부르는 것”에 의해 그들은 품질을 안 것을 이해했다. 이런 이유에서 그들은 자기들의 아들, 딸들에게 의미된 것에 따라 이름들을 주었다. 그 이유는 모두 각각의 이름은 그것 안에 특유한 어떤 것을 가졌기 때문이다. 이름으로부터, 이름을 수단으로, 그들은 자기들의 어린이들의 본성과 근원을 알런지 모른다. 이 부분은 미래의 책, 즉 야곱의 열 두 아들을 다루는 때 주님의 자비로부터 알게 될 것이다. 이름들이 이름 불러진 것의 근원과 품질을 함축하는 바, “이름으로 부름” 역시 같은 이해의 범주이다. 이것은 고대인들 사이에 말하는 관습적 양식이었으나 이를 이해하지 못하는 자들은 이런 것들이 의미되는 것에 의아해 할지 모른다.
말씀 안에서도 “이름”이 어떤 것의 본질을 의미했고, “이름으로 부르고 보는 것”에 의해서도 품질을 아는 것을 의미했다.
서술되어 왔었던 것으로부터, 의미된 것의 연결이 알려질런지 모른다. 18절에서, “사람이 홀로 있는 것은 좋지 않다, 나는 그에게 그와 함께 있을 도움을 만들겠다”, 그리고 현재, “짐승”들과 “새들”이 이야기되어지고 있다. 이는 앞서 (1장에서) 취급되어졌었다, 그리고 즉시 반복되는 것은 “사람을 위해 그와 함께 있을 도움이 발견되지 않았다” 이다. 이는 비록 그가 선에 대한 애착과 진리에 관한 지식을 알게 허용되었을 지라도 그는 그의 자기 자신에 여전히 기울어 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 이유가 자기들의 자기 자신인 것을 바라는 이들은 주님의 것들을 경멸하기 시작하고, 어쨌든 그들은 그것을 표현도 하고 보여주기도 하기 때문이다.

21절. 여호와 하느님께서 깊은 잠이 사람에게 떨어지게 하자, 그는 잤다. 그리고 그분은 그의 갈빗대 중 하나를 취하셨고, 그 대신 그 곳을 살로 폐쇄하셨다(메우셨다). 가슴의 뼈인 “갈빗대”를 수단으로 인간의 자기 자신이 뜻해진다, 이 안에는 생명력이 거의 없으나 인간이 친애하는 자기 자신(an own)이다; “갈빗대의 자리에 있는 (빠져나간 갈빗대를 메우는) 살”에 의해 생명력이 있는 자기 자신(an own)이 뜻해진다; “깊은 잠”에 의해 그가 그의 자기 자신인 것을 가진 듯 자신에게 비쳐지게 놓이는 상태가 뜻해진다. 이 상태는 잠이 든 것과 닮아있다. 그것 안에 있는 동안 그는 살고,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함이 자신으로부터라는 것밖에 아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이 거짓이다는 것을 알기 시작할 때, 그러면 그는 마치 잠에서 깨듯 일어난다, 그리고 깨어 있는다.
인간의 자기 자신(그리고 실로 그가 친애하는 것)이 가슴의 뼈인 “갈빗대”라 불린 이유는, 고대 사람들 사이에서, 가슴이 선행(charity)을 의미했다는 것, 그리고 갈빗대는 심장과 폐 모두를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뼈는 천한 것을 의미했는데, 그 이유는 그것들은 생명력이 조금이기 때문이다; 그 반면 살(flesh)은 생명력을 가진 것과 같은 것을 명시했다. 이 의미의 바탕은 태고 교회의 사람들에게 알려진 가장 깊은 신비 중의 하나이다. 이에 관하여는 주님의 신성한 자비로부터 이후 살핀다.
말씀에서도 역시 인간의 자기 자신이 “뼈들”에 의하여 의미되어지고 있다, 그리고 실로 자아는 주님에 의해 생기가 있어 진다.
인간의 자기 자신, 천국으로부터 관조할 때, 전체적으로 뼈만 앙상한, 생명 없는 어떤 것 같이 나타난다. 그래서 매우 추하고, 결과적으로 그 자체 죽은 것 같다. 그러나 주님에 의해 생기있어질 때, 그것은 살같이 보인다. 그 이유가 인간의 자기 자신은 인간에게는 그것이 어떤 것이나 되는 듯, 참으로 자신의 모든 것으로 보일지라도 그것은 단지 죽은 어떤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 안에 살아있는 것은 무엇이든 주님의 생명으로부터 이다. 만일 이 생명이 철회된다면, 그는 돌 만큼이나 죽은 자 되어 내동댕이 쳐진다; 그 이유가 인간은 오직 생명의 기관(organ), 그리고 기관이라 말해주어야 할 정도, 그리고 생명의 애착 같은 것일 뿐이다. 주님만이 그분의 자기 자신을 가지고 있으시다. 이 자기 자신을 수단으로 그분은 인간을 되찾으셨다. 그리고 이 자기 자신을 수단으로 그분은 인간을 구원하신다. 주님의 자기 자신은 생명이다. 그리고 그분의 자기 자신으로부터, 인간의 자기 자신, 그 자체 죽은 것이지만, 살아있게 만들어진다. 주님의 자기 자신이 주님의 말들로부터도 의미되어지고 있다. 누가복음서에서: 영은 살과 뼈들을 가지고 있지 않으나 너희가 보는 바대로 나는 가지고 있다 (눅. 24:39). 또한 유월절 어린 양의 뼈는 부러뜨리지 않아야 한다에 의해서도 뜻해져 있다 (출. 12:46).
인간이 자기 자신 안에 있을 때, 또는 자기는 자기 자신으로부터 살고 있다고 가정할 때 이 인간의 상태는 “깊이 잠듦”에 비교되어진다. 고대인들은 실지로 깊이 잠듦이라 불렀었다; 이사야 29:10의 경우, 그들은 “깊은 잠의 영을 그들 위에 쏟았다”, 그리고 예레미야 51:57의 경우, 그들은 깊이 잠들어 있다(sleep a sleep) 등등으로 말해지고 있다. 인간의 자기 자신은 그 자체에서는 죽어 있다는 것, 그리고 스스로로부터 생명을 가질 자는 아무도 없다는 것은 영들의 세계 안에서 아주 분명하게 보여져 왔었는 바, 거기서 자신들밖에 더 사랑하는 자가 없는 악령들, 자기들은 자신들로부터 살고 있다고 억지 주장하는 악령들은 감지할 수 있는 경험에 의해 (그렇지 않음이) 확신시켜졌다, 그리고 자기들은 자신들로부터서는 살지 못함을 고백하도록 강요 당했다. 수 년 동안 나는 특별한 방법에서 인간의 자아와 더불어 있는 경우가 어떤지를 알도록 허락되어졌었다, 그래서 나는 나 자신으로부터는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다는 것, 생각 속의 모든 관념은 (우리에게) 흘러들고 있다는 것을 명확하게 지각하는 것이 나에게 수여되었다. 그리고 때로는 나는 그것이 어떻게, 어디로부터 흘러드는지를 지각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자기가 자신으로부터 산다고 상상하는 인간은 거짓인 것 안에 있다; 그리고 자기는 자신으로부터 산다고 믿는 것을 수단으로 악하고 거짓인 모든 것을 자신의 것이 되게 한다. 만일 그의 믿음이 어떤 경우 속의 진짜의 진리에 일치하고 있다면, 이 사람은 악하고 거짓된 모든 것을 자신의 것이 되게 실행하는 일은 결코 없었을 것이다.

22절. 여호와 하느님께서 사람으로부터 취한 갈빗대로 그분께서는 여자를 건축하셨고, 그녀를 사람에게 데려왔다.
“건축하는 것”은 (땅에) 뒹굴고 있는 것을 일으켜 세우는 것을 의미한다; “갈비”를 수단으로, 인간의 자기 자신은 살아있지 않다는 것; “여인”을 수단으로 인간의 자기 자신은 주님에 의해 살았다는 것; “그분이 그녀를 사람에게 데려 옴”을 수단으로 그의 자기 자신인 것이 그에게 수여되었다는 것이 의미되어지고 있다. 이 교회의 후손은 자기들의 부모 같이 천적 인간이기를 원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의 자기 자신이 스스로 안내함 아래에서 있기를 원했는 바, 즉 이 후손들은 그들의 자기 자신으로 기울고 있는 바, (주님의) 자기 자신(an own)이 그들에게 수여되었고, 계속 이 자기 자신(an own)은 주님에 의해 살아 있었다. 그러므로 (이것이) “여인”이라 불리었고, 후에 “아내”라고 불리었다.
여인이 사람의 갈빗대로부터 만들어내지지 않았다라고 (글자로부터) 식별하는 것, 하여 이 대목에는 지금까지 누군가들이 알아채린 것보다 더 깊은 비밀들이 함축되어져 있다는 것을 식별하는 데는 주의력이 요구되지만 누군가의 경우들은 거의 이 대목에 집중력을 발휘하지 않는다. 그리고 “여인”을 수단으로 사람의 자기 자신이 의미되어진다는 것은 (먹도록) 유혹되어진 자가 여인이었다는 사실로부터 알아질런지 모른다; 그 이유가 유혹하는 것은 그의 자기 자신, 똑 같은 것으로, 자기를 사랑함과 세상을 사랑함밖에 더 없기 때문이다.
갈빗대가 “여인으로 건축”되어진다고 말해지고, 앞 장에서 거듭남이 취급될 때 사용한 단어인, “창조되어졌다”, 또는 “형성되어졌다(formed),” 또는 “만들어졌다(made)”가 본문의 여인에게는 사용되지 않고 있다. 그런 이유는 “건축하는 것”은 (땅에) 뒹굴고 있었던 것을 일으켜 세우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의미 안에서 이 단어가 사용되는 구절을 찾아 읽으면, “건축”하는 것이 악들에 관해 서술되고, “일으켜 세우는” 것은 거짓들에 관해 서술되고 있다. 그리고 “새롭게 하는(renew)” 것은 악과 거짓 모두에 관련되어 사용되고 있다.
인간의 자기 자신은 악과 거짓을 빼면 자기 자신으로 가능해질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 이유가 인간의 자기 자신은 악 자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인간은 악과 거짓밖에 더 아니다. 이 대목은 인간 자아 속의 것들이 영계에서 관조하도록 표출되어졌을 때, 분명히 알게 되었는데, 그것들은 모양 없이 나타나서 더 흉측하게 그려내보는 것도 불가능했다. 그럼에도 자기 자신의 본성에 따라 차이는 있는데, 눈에 보이게 진열된 자기 자신 속의 것들은 공포를 일으켰다, 마치 악마로부터는 도망치고 싶듯, 자신으로부터 도망하기를 바랄 뿐이었다. 그러나 주님에 의해 살아있는 인간의 자기 자신 속의 것들은 아름답고 사랑스럽게, 주님의 천적인 것이 응용되는 생명에 따라 다양하게도 나타난다; 실로 선행을 증여받았던 이들, 또는 선행으로 해서 생명 있는 이들은 최고의 아름다운 모습을 지닌 소년소녀들 같이 나타난다; 그리고 순진 안에 있는 이들, 벌거벗고 있는 유아들 같고, 그들의 가슴을 빙둘러 화환으로 꾸미고, 머리에는 왕관을 쓰고, 다이아몬드 같은 분위기에서 살고 놀고 있다, 그리고 진짜 가장 깊은 데로부터 행복을 지각하고 있다.
“갈빗대가 여인으로 건축되어졌다”는 대목에는 누군가가 글자로부터 발견했다는 것 너머에 아주 깊게 감추인 것들이 있다; 그 이유가 주님의 말씀에서 가장 깊은 내용은 주님 자신, 그분의 왕국, 이로부터 말씀의 모든 생명이 온다는 것을 중요시하기 때문이다. 이 구절은 이 말씀의 가장 깊은 내용 안에서 천국의 결혼을 중요시하고 있다. 천국의 결혼은 주님에 의해 살아있는 인간의 자기 자신 같은 본성 속에 존재하는 바, 이것은 주님의 “신부와 아내”라 불리운다. 고로 생기 있는 인간의 자기 자신은 사랑의 선과 신앙의 진리 모두를 지각한다, 결과적으로 형언할 수 없는 행복과 결합된 모든 지혜와 총명을 소유하고 있다. 그러나 살아있는 이 자기 자신의 본성, 즉 주님의 “신랑과 아내”라 불리는 자기 자신은 간결하게는 설명되어질 수 없다. 그러므로 천사들이 자신으로부터 살고 있다는 것 외에 달리 알지 못한다는 것이 이 주제에서 반영되고 있지는 않다 하더라도, 천사들은 주님으로부터 살고 있다는 것을 지각한다는 것을 주목하는 것만을 이해함에서 만족해야 할 것 같다. 천사들은 사랑의 선과 신앙의 진리로부터 아주 조금만 떠나도 그들은 변화를 지각하는 애착의 본성을 지녔기에, 그들은 형언할 수 없는 자기들의 평화와 행복을 향유함 속에 있다.

23절. 그리고 사람이 말했다. 지금 이는 지금 내 뼈들 중의 뼈요 내 살 중의 살이다. 그러므로 그녀는 아내라 불리울 것인데 그 이유는 그녀가 사람(남자, vir)으로부터 취해졌기 때문이다.
“뼈들 중의 뼈, 살 중의 살”은 외적 인간의 자기 자신을 의미한다; “뼈”라는 자기 자신은 생명이 그리 많지 않다, 그리고 “살”이라는 자기 자신은 생기 있어진 자기 자신이다. 더 나아가 사람(남자)은 내적 인간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의 존재로부터(내적 인간으로부터) 외적 인간과 이렇게 짝을 이루는 바, 뒤이어지는 구절에서 이전에 “여인”이라 불리던 자기 자신이 여기서 “아내”라 명명되어졌다. “지금”은 상태가 바뀌었기 때문에 이때에 결과되었음을 의미한다.
“뼈들 중의 뼈와 살 중의 살”이 내적 인간이 안에 있는 외적 인간의 자기 자신을 의미했던 연유로, 그들의 자기 자신이라 일컬을 수 있는 모든 이들, 나아가 한 가문 속의 이들, 한 가족 속의 이들, 꽤 가깝다 하는 이들까지도 “뼈들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일컬어 말했다.
남자가 내적 인간, 또한 총명하고 슬기 있는 자를 의미한다.
그러나 천적 인간의 상태가 이해되고 있지 않으면, 이런 경우가 어떻게 이런 것들과 더불어 있는지를 지각하는 것은 쉽지 않다. 천적 인간 안에서 내적 인간은 외적 인간으로부터 구분되어 있다. 실로 이 구분은 아주 잘되어 있어 천적 인간은 내적 인간에 속하는 것을, 외적 인간에 속하는 것을, 그리고 어떻게 외적 인간이 주님에 의해 내적 인간을 통하여 통치하시는지를 지각한다. 그러나 천적 인간의 후손의 상태는, 외적 인간에 속하는 그들의 자기 자신을 바란 결과로, 아주 바뀌어져, 그들은 외적 인간으로부터 구분되는 내적 인간을 더 이상 지각하지 못했다. 하여, 이 후손들은 내적 인간은 외적 인간과 하나이다고 상상했는데, 그 이유는 이런 식의 지각은 인간이 그의 자기 자신 쪽으로 기울 때 거행되기 때문이다.

24절. 그러므로 남자는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날 것이고, 그리고 그의 아내와 굳게 결합할 것이고, 그리고 그들은 한 몸이리라.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는 것”은 내적 인간으로부터 물러나는 것이다. 그 이유는 내적 인간이 외적 인간을 임신하고 낳기 때문이다; “그의 아내와 굳게 결합하는 것”은 내적 인간이 외적 인간 안에 있을런지 모른다는 것이다; “하나의 몸이다”는 것은 두 인간들은 거기서 함께 있다는 것; 이전에 내적 인간과 내적 인간으로부터의 외적 인간은 영(spirit)이었는데, 지금 그것들은 몸(육, flesh)이 되었다. 고로 천적 생명과 영적 생명은 자아에 결합되어 있다, 하여 그것들은 하나로서 있을지 모른다.
태고 교회의 이 후손은 악은 아니었고, 여전히 선 이었다; 그리고 그들이 외적 인간 안에서, 또는 그들의 자아 안에서 살기를 바랐기 때문에, 이것이 주님에 의해 그들에게 허락되어진 것 뿐이다; 어쨌든, 영적인 것과 천적인 것이 자비로 거기 안에 주입되어져 있다. 어떻게 내적인 것과 외적인 것이 하나로서 행동하는지, 또는 어떻게 그것들이 하나로서 나타나는지는, 이것이 저것 안으로의 유입(influx)이 알려지지 않으면, 알아질 수 없다. 이것에 대한 생각을 품어보기 위해 행동이라는 것을 예로 취해보자. 행동 안에 선행(charity)이, 즉 사랑과 신앙이, 그리고 이것들 안에 주님이 있지 않으면, 행동은 선행의 일, 또는 신앙의 열매 라고 불려질 수 없다.
진리와 올바름에 관한 모든 법칙들은 천적인 시작들로부터, 또는 천적 인간의 생명의 질서로부터 흐른다. 그 이유가 전체 천국은 주님만이 천적 인간이시기 때문, 그리고 그분이 천국의 모든 것 안에 모두이시고 천적 인간이신 바, 이로부터 그들이 천적이라 불리우기 때문이다. 진리와 올바름의 모두 각각의 법칙이 천적 시작들로부터, 또는 천적 인간의 생명의 질서로부터 내려오는 바, 마찬가지로 특별한 방식에서 결혼의 법칙이 실행된다. 천적 결혼으로부터, 이 결혼에 의거, 땅 위 모든 결혼들이 파생되어 있음에 틀림이 없다; 그리고 이 결혼은 하나의 하느님, 하나의 천국, 또는 주님이 머리되는 하나의 교회와 같다. 이로부터 파생된 결혼의 법칙은 하나의 남편과 하나의 아내가 있다는 것이다. 이럴 경우, 그들은 천적인 결혼을 표현하고, 천적 인간의 본보기이다. 이 법칙은 태고 교회의 사람들에게 밝히 알려졌을 뿐 아니라, 그들의 내적 인간 안에 새겨져 있었다. 그러므로 그 당시 남자는 하나의 아내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들은 하나의 집을 구성했다. 그러나 그들의 후손이 내적 인간이기를 중단하고, 외적 인간이 되었을 때, 그들은 여러 아내들과 결혼했다. 태고 교회의 사람들이 결혼 문제에서 천적인 결혼을 표현했기 때문에, 결혼의 사랑은 그들에게 있어 일종의 천국과 천국의 행복이었다, 그러나 교회가 기울었을 때, 그들은 결혼의 사랑에서 행복의 어떤 것도 더 이상 지각하지 못했다. 그러나 숫자로부터의 쾌락 안에 있었는데, 이 쾌락은 외적 인간의 즐거움이다. 이것이 주님에 의해 “심정의 완악함”이라 불려졌다. 이것 때문에 그들은 여러 아내와 결혼하는 것이 모세에 의해 허용되어졌다.

25절. 그리고 그들, 남자와 그의 아내 모두는 벌거벗고 있었고,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그들이 “벌거벗고 있었고 부끄러워 하지 않았음”은 그들은 순진하였음을 의미한다. 그 이유가 주님께서는 순진을 받아들이기 어려움을 방지하시기 위해 그들의 자기 자신 안으로 순진을 주입하셨기 때문이다.

인간의 자기 자신, 앞서 서술했듯이, 단지 악이다, 그리고 관조해보도록 자아가 진열될 경우, 어떤 모양인지 알 길이 없는 그야말로 흉칙하다. 그러나 선행과 순진이 주님으로부터 자기 자신 안으로 주입될 때, 이 자기 자신은 선하고 아름답게 나타난다. 선행과 순진은 인간의 자기 자신(즉, 인간 안의 악하고 거짓인 것)을 너그러이 봐 줄 뿐아니라, 마치 그것이 철폐되기라도 한 듯 하여 있게 해준다. 이를 놓고 어린 아이들을 관찰해보자. 어린 아이들 안에서 악과 거짓은 아이들이 자기들의 부모와 서로를 사랑하고 있는 한, 감추여 있지 않을 뿐 아니라 즐거움이기까지 한다. 그리고 그들의 유아적 순진은 그 자체를 보인다. 이로부터 그가 순진의 어느 수준이라도 소유하지 않으면 천국 안으로의 입장을 허락받을 자는 아무도 없는 이유를 알런지 모른다.
“벌거벗음으로부터 그들은 부끄러워하지 않았다”는 것이 순진을 의미한다는 것은 뒤이어지는 것을 수단으로 입증되어진다. 그 이유가 성실과 순진이 떠났을 때 그들은 자기들의 벌거벗음을 두고 부끄러워했다. 그리고 그것이 자기들에게 수치스러운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므로 그들은 자신을 숨겼다. 이와 같은 것이 영들의 세계에 있는 표현들로부터도 분명해진다. 그 이유가 그들이 자신의 무죄를 증명하기를 원하여 자기의 죄없음을 증명할 경우, 그들은 자기들의 순진을 증명하려고 벗은 자신을 표출했기 때문이다. 특별하게는 천국에 있는 순진한 자로부터 분명해진다. 그들은 자신들의 순진의 본성에 따라 화환으로 장식하고 벗은 유아들로서 나타난다. 한편, 순진을 그리 많이 가지지 않은 이들은 그 (수준에) 어울리고 빛나는 의복 안에서 있는데, 이 천사들은 예언자들에 의해 가끔 보여진 바 있다.
위의 예는 말씀의 이 장 안에 포함된 것들의 몇에 불과하다. 여기서 발표되는 것은 극히 적을 뿐이다. 천적 인간을 취급했는 바, 이 인간은 현재로서는 거의 누구에게도 알려진 바 없기에, 여기서 설명하는 미미한 것 마저 불명료해 할 수 밖에 없을지 모른다.
만일 누군가가 각 구절에 얼마나 많은 신비가 포함되고 있는지를 안다면, 그는 깜짝 놀랄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 이유가 포함된 수많은 신비를 말하지 않고 지나쳐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이 글자에 보여진 바는 미미하기 때문이다. 이 문제를 짧게 서술하기 위하여, 글자의 말들은, 그것들이 있는 그대로 정확하게, 영들의 세계 안에서 아름다운 질서에서, 생생하게 표현되어진다. 그리고 거기서 생생하게 표현된 것은 무엇이든 표현물 안에 있는 세세한 것들에 이르러 두 번째 천국 안에 있는 천사와 같은 영들에 의해 지각되어진다; 천사와 같은 영들에 의해 지각된 것들은 세 번째 천국 안에 있는 천사들을 수단으로 형언할 수 없는 천사와 같은 관념 안에서 풍부하고 가득차게 지각되어진다. 그리고 이것은 주님의 선하신 기쁨에 일치되어 끝없는 다양함 안에 있다. 이와 같음이 주님의 말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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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1장 요약

** 이 뒤를 잇는 일(책) 안에서, 주님 이라는 이름은 세상의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 그분 만을 뜻함을 주지해두기 바란다; 그리고 그분은 다른 이름들의 첨가 없이 “주님”이라 불리우게 된다. 전체 천국 두루에서 그분은 주님으로서 인정되고 숭배되시는데, 그 이유는 그분이 천국들과 땅 위에서 최상의 모든 권능을 가지시기 때문이다. 또한 그분은 그분의 제자들에게도 그렇게 부르라고 명령하셨는데, 말하시기를, “너희는 나를 주님이라 부른다, 그리고 너희는 적절히 말하고 있다, 그 이유는 나는 (스스로) 있다 이기 때문이다” (요. 13:13). 그리고 그분의 부활 후 그분의 제자들은 그분을 “주님”으로 불렀다.

창세기 1 장 요약

1. 시작에서 하느님께서 하늘(들)과 땅을 창조하셨다.

1절. 최 고대의 시간이 “시작”이라 불리운다. 이는 예언자들에 의해 여러 구절들에서 “옛(것)의 날들”, 그리고 또한 “영원의 날들”로 불리우고 있다. “시작”은 또한 인간이 거듭나지고 있는 때에서 첫 기간을 포함하는데, 그 이유는 그 때 인간은 새로이 태어나지고 생명을 받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거듭남 자체는 인간의 “새로운 창조”라고 불리운다. 예언서의 거의 모든 부분들에 있는 “창조”, “형성”, “만듦”이라는 단어가 의미에서는 약간씩 차이는 보이지만 대체로 거듭남을 의미하고 있다.
“하늘”은 내적 인간을, “땅”은 외적 인간을 의미한다.

2. 땅은 공허하고 텅비었고, 그리고 짙은 어둠이 깊음의 얼굴들 위에 있었다. 그리고 하느님의 영이 물들의 얼굴들 위에서 움직이셨다.

2절. 인간의 거듭남 이전, 그는 “공허하고 텅빈 땅”이라 불리우는데, 또한 선과 진리가 전혀 씨뿌려지지 않았던 “지면”이라고도 불리운다; “공허하다”는 선에 관한 것이, “텅비다”는 진리에 관한 것이 씨뿌려지지 않았다는 말이다. 이로 인해 “짙은 어둠”이 오는데, 즉 우둔함, 그리고 주님에 관한 신앙에 속하는 모든 것에 무지함, 그 결과 영적 측면에 속하는 모든 것과 천국의 생명에 무지함(이다).
“깊음의 얼굴들”은 거듭나지 않고 있는 인간의 욕망들(craving, 또는 탐욕들). 그리고 거기로부터 근원하는 거짓들이다. 거듭나지 않고 있는 자는 이 욕망들과 거짓으로 되어 있고, 이 안에 완전히 침수되어 있다. 이 상태는 빛을 가지지 못하는 바, 그는 “깊음”, 또는 불명확하고 혼돈된 어떤 것과 같다. 또한 이런 인물들은 말씀의 여러 구절들에서 “깊은 곳”, 그리고 “바다의 깊은 곳”이라 불리는데, 이것은 인간이 거듭나기 전, “말라붙어 있다,” 또는 “황폐되어 있다.” 위와 같은 사람이 천국으로부터 보여질 경우, 생명력이 결여된 검은 덩어리같이 나타난다. 같은 방식의 표현들이 예언자들에 의해 자주 말해지는데, 인간의 황폐함을 포함한다. 이것은 거듭남에 앞서 있다; 그 이유가 인간이 참된 것을 알고, 선인 것으로 감동 받기 전, 참된 것과 선인 것이 들어옴에 저항하고 방해하는 이것 저것들이 반드시 제거되어 있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새 인간이 임신되어질 수 있기 앞서, 반드시 옛 인간은 죽을 필요가 있다.
“하느님의 영”을 수단으로 주님의 자비가 뜻해진다. 이 영이 “움직인다,” 또는 암탉이 자기의 알들을 품듯이 “품으신다” 라고 말해지고 있다. 하느님의 영을 움직이게 하는 것은 주님께서 인간 안에 감추여 있게 하신 것, 또는 소중히 보관하시는 것에 해당하는 것이다. 이것은 말씀 안에서 두루 리메인스(remains, 아껴두신 것), 남아 있게 하신 것(remnant)이라 일컬어지는데, 이것은 참된 것과 선인 것에 관한 지식들이다. 이것은 인간의 외적인 것들이 깡그리 피폐될 때까지 빛 또는 낮 안으로 결코 와지지 않는다, 이 지식들이 이 구절에서 “물들의 얼굴들”이라 불리운다.

3. 하느님께서 말하셨다, 빛이 있으라, 그리고 빛이 있었다.

3절. 첫 상태는 선인 것과 참된 것이 더 높은 어떤 것임을 알기 시작할 때이다. 인간의 외적 측면은 선하고 참된 것이 무엇인지를 알려고도 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그것들은 자아를 사랑함과 세상을 사랑함에 속하는 모든 것들을 두고도 선이라고; 자아 사랑과 세상 사랑에 호의를 보이는 모든 것들을 참된 것이라고 공상하기 때문이다; 하여 (공상한) 이런 선들이 악들이고, 이런 진리들이 거짓들임은 눈치채지도 못한다. 그러나 인간이 새로운 것을 마음에 품을 때, 그는 먼저 자기의 선들이 선들이 아님을 알기 시작한다, 그리고 또한, 그가 빛 안으로 올 때, 주님이 계신다는 것, 그리고 그분이 선과 진리 자체이심을 (알게 된다). 인간들은 주님이 실재하심을 알아야 한다.

4. 그리고 하느님께서 빛을 보셨더니, 그것은 선이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빛과 어둠 사이를 구별하셨다. 5.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빛을 낮이라 부르시고 어둠을 그분은 밤이라 부르셨다. 그리고 저녁과 아침은 첫째 날 이었다.

4,5절. 빛이 “선”이라 불리운다, 그 이유는 빛이 선 자체이신 주님으로부터 있기 때문이다. “어둠”은 인간에게 새로운 것이 임신되어 태어나기 전, 빛인 듯 나타났던 이런 저런 모든 것들을 뜻한다. 그 이유는 악이 선인 듯, 거짓이 진리인 듯 나타났었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어둠인데, 인간 자신에 어울리는 것들로만 구성되어 있고, 인간에게 여전히 남아있는 것들이다. 주님으로부터 있는 것은 무엇이든 “낮”에 비교되는데, 그 이유는 낮은 빛 속에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인간 고유에 속한 것은 무엇이든 “밤”에 비교되는데, 그 이유는 밤은 어둠 속에 있기 때문이다. 이런 비교함들은 말씀 안에서 자주 발생한다.

5절. “저녁”, “아침”을 수단으로 뜻해지는 것이 지금 식별되어질 수 있다. “저녁”은 앞서 있는 모두 각각의 상태를 뜻하는데, 그 이유는 저녁이 그늘의 상태, 또는 거짓으로부터와 신앙 없음으로부터의 상태이기 때문이다; “아침”은 이후의 모두 각각의 상태, 빛 속의 것, 또는 진리로부터와 신앙에 관한 지식으로부터의 것이다. 일반적 의미에서 “저녁”은 인간 고유에 속해 있는 모든 것들을 의미한다; 그러나 “아침”은 주님으로부터 있는 것 모두를 말한다. “저녁”은 신앙이 없을 때, 그리고 “아침”은 신앙이 있는 때인 바, 세상에 주님의 오심이 “아침”이라 불리운다; 그리고 그분이 오시는 때에 신앙이 없기 때문에, “저녁”이라 불리웠다. 아침은 새로운 창조에 관한 표현이다.
“날”이 때 자체를 표시하기 위해 말씀에서 사용된다. “날”이 때를 표시하기 위해 사용되는 바, 때는 그 때의 상태 또한 표시하는데 사용되어지고 있다.

6. 그리고 하느님께서 말하셨다, 물들 한가운데 광활한 공간이 있고, 그것이 물들 안에서 물들 사이를 구별되게 하라.

6절. 하느님의 영, 또는 주님의 자비가 낮 안에 참된 것에 관한 지식들과 선인 것에 관한 지식들을 낳고, 그리고 주님이 계시다는 것, 그분이 선 자체, 진리 자체 이시다는 것, 그분으로부터가 아니면 선과 진리는 없다는 첫째가는 이 빛들이 주어진 후, 그 다음 그분은 내적 측면과 외적 측면 사이에, 결과적으로 내적 인간 안에 있는 지식들과 외적 인간 안에 있는 기억 속의 지식들 사이에 구별을 만드신다. 내적 인간은 또한 “광활한 공간”이라 불리운다; 내적 인간 안에 있는 지식들이 “광활한 공간 위쪽의 물들”이라 불리운다; 그리고 외적 인간의 기억 속의 지식들은 “광활한 공간 아래쪽의 물들”이라 불리운다.
인간은 거듭나지고 있음 이전 일 경우, 그는 어떤 내적 인간이 존재하는지조차 모르고, 그는 내적 인간의 본성과 품질에 대하여는 아주 많이 덜 친숙해 있다. 그는 내적 인간과 외적 인간이 서로로부터 구분되어 있지 않다고 상상한다. 그 이유가, 육체적이고 세상적인 것들 안에 침수된 상태에서 그의 내적 인간 역시 그것들 안에 침수되어 있기 때문이다. 하여, 구분된 것이 혼동되고 불명료한 단일체를 구성하고 있다. 그러므로 첫 번째 말해졌다, “물들 한가운데 광활한 공간이 있어라,” 그리고 그 다음, “물들 안에서 물들 사이에 구별이 있게 하자”; 그 뿐만이 아니다, “광활한 공간 아래 있는 물들과 광활한 공간 위에 있는 물들 사이에 구별이 있게 하자,” 이는 다음 7,8절에서 말해진다.

7.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광활한 공간을 만드셨다, 그리고 광활한 공간 아래에 있는 물들과 광활한 공간 위에 있는 물들 사이에 구분이 있게 하셨다. 그리고 그것은 그렇게 있었다.8. 하느님께서는 광활한 공간을 천국이라 부르셨다. 그리고 저녁과 아침은 둘째 날 이 었다.

7,8절. 인간 거듭남의 과정에서 주목하는 다음 것은 그가 내적 인간이 있다는 것, 또는 내적 인간 안에 있는 것들은 선들과 진리들이고, 이것들은 주님 만으로부터 있다는 것을 알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거듭나아져 가고 있는 때에도, 외적 인간은 여전히 선들은 자신으로부터 행해진 것, 진리들은 자신으로부터 말해지고 있다고 상상하는 본성 속에 있다. 인간이 주님의 그것들을 수단으로 인도되어지나 마치 자신 속의 것들을 수단으로 인도되는 듯 하여 선인 것을 행하고, 진리인 것을 말하는 까닭에, 7절에서도 광활한 공간 아래의 물들에 관한 구분이 먼저 언급되고, 그 뒤에 광활한 공간 위의 물들에 관한 언급이 있다. 인간은 자신 속의 것들을 수단으로, 감각들의 오류들을 수단으로, 뿐 아니라 탐욕들을 수단으로 인도되어지고, (그것이) 주님에 의해 참되고 선한 쪽으로 구부려진다는 것은 천국의 신비이다, 하여 거듭남의 모든 움직임의 순간 하나하나, 일반적, 세부적으로 공히 저녁으로부터 아침까지, 고로 외적 인간으로부터 내적 인간으로, 또는 “땅”으로부터 “하늘”로 진행된다. 그러므로 광활한 공간, 또는 내적 인간이 지금은 “천국”이라 불려진다.
“땅을 뻗는 것과 천국들을 뻗치는 것”이라 말하는 것은 거듭남을 취급할 때 예언자들이 흔히 사용하는 형체이다.

9. 그리고 하느님께서 말하셨다. 하늘 아래에 있는 물은 모두 한 장소로 모이고, 마른 [토지]가 나타나게 하자. 그리고 그렇게 되었다.

9절. 내적 인간과 외적 인간이 있다는 것, 진리들과 선들이 주님으로부터, 내적 인간으로부터, 내적 인간을 통하여 외적 인간에게 흘러든다는 것이 알려질 때, 비록 그것이 그렇게 나타나지지 않을지라도, 그 다음 이런 진리들과 선들, 또는 거듭나고 있는 인간 안에 있는 선하고 참된 것에 관한 지식들은 인간의 기억 안에 저장된다, 그리고 기억 속의 지식들 안에 분류되어져 저장된다; 그 이유가 외적 인간의 기억 안으로 은근히 심어진 것, 그것이 자연적 수준이든, 영적 수준이든, 천적 수준이든, 무엇이든 (일단은) 기억 속의 지식들로서 거기에 머무른다, 그리고 거기로부터 주님에 의해 (꺼내져) 나와진다. 이런 지식들이 “한 장소로 다함께 모아진 물들”이고, “바다들”이라 불리운다. 그러나 외적 인간 자신은 “마른 [토지]”로 불리우나, 다음 절에서 즉시 “땅”이라 불린다.

10.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마른 [토지]를 땅이라 부르셨다. 그리고 물들이 함께 모인 것을 바다들이라 부르셨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보셨더니 그것은 선 이었다.

10절. “물들”이 지식들을 의미하는 것은 말씀에서는 매우 흔히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로 “바다”는 지식들이 수집됨을 의미한다.

11. 하느님께서 말하셨다, 땅은 부드러운 풀잎을 내고, 풀잎은 씨를 산출하라, 그리고 과일 나무는 땅에서 본질적으로 씨가 있는 과일을 그 종류대로 맺으라. 그리고 그것은 그렇게 있었다. 12. 그래서 땅은 부드러운 풀잎, 그 종류대로 씨를 산출하는 풀잎을, 본질적으로 씨가 있는 열매를 맺는 나무를 내놓았다. 하느님께서 보셨더니 이것은 선 이었다.

11,12절. “땅” 또는 인간이 주님으로부터인 천국의 씨들을 받고 선하고 참된 것으로부터의 어떤 것을 생산할 준비가 되었을 때, 그 다음 주님께서는 먼저 부드러운 것이 솟아오르게 하시는데, 이것이 “부드러운 풀잎”이라 불리운다; 그 다음 더 쓸모있는 어떤 것, 이는 그 자체 안에 씨를 다시 맺는데, “씨를 산출하는 풀잎”이라 불리운다; 그리고 드디어 열매가 많이 열리게 되는 선으로부터의 어떤 것이 그것의 종류에 따라 각각 “자체 안에 씨를 가진 과일을 맺는 나무”라 불리운다. 거듭나아지고 있는 인간이 처음 가지는 품질은, 자기가 행하는 선, 자기가 말하는 진리가 자기로부터 이다 라고 상상하는 것, 실제로 모든 선과 모든 진리는 주님으로부터 있어도 그는 그렇게 상상한다. 하여 그것들이 자신으로부터 있다고 상상하는 누구이든지 그는 아직까지는 진정한 신앙으로부터의 생명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럼에도 그는 이후에 (생명을) 받을런지 모른다; 그 이유는 그가 아직까지는 그것들이 주님으로부터 있다 라고 믿을 수 없기 때문에, 그는 신앙으로부터의 생명을 받도록 준비하는 상태에 아직은 머물고 있기 때문이다. 이 상태가 여기서 생명 없는 것들을 수단으로 표현되어져 있다, 그리고 신앙으로부터의 생명의 계속됨이 생명 있는 것들을 수단으로 표현된다.
씨뿌리시는 그분은 주님이시고, “씨”는 그분의 말씀이다, 그리고 “땅”은 인간이다. 이에 대하여는 그분 자신이 선포해주셨다 (마 13:19-24, 37-39; 막 4:14-21; 눅 8:11-16).

13. 그리고 저녁과 아침은 셋째 날 이었다.

14. 그리고 하느님께서 말하셨다. 하늘들의 광활한 공간에 발광체들이 있어 낮과 밤이 구별되게 하라, 그리고 그것들을 표시와 계절과 날과 해를 위해 있게 하라. 15. 그리고 그것들이 하늘의 광활한 공간에 있는 발광체들을 위해 있게 하여 땅에 빛을 주게 하라. 그리고 그것은 그렇게 있었다. 16.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두 개의 큰 발광체를 만드시고, 더 큰 발광체는 낮을 규율하고, 보다 작은 발광체는 밤을 규율하게 하셨다. 그리고 별들도(만드셨다).
17.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그것들이 땅에 빛을 주도록 하늘의 광활한 공간에 두었다.

14-17절. 큰 발광체들을 수단으로 뜻해지는 것은 우선 신앙의 본질인 것과 새로이 창조
어가는 이들과 더불어 신앙의 본질이 진보하는 것을 알지 않으면 명료하게 이해되어질 수 없다. 신앙의 참 본질과 생명은 주님 뿐 이시다. 그 이유는 주님을 믿지 않는 자는 생명을 가질 수 없기 때문이다.
새로이 창조되어가는 이들과 더불어 있는 신앙의 진보는 다음과 같다. 첫째, 그들은 생명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 이유는 생명은 선인 것과 참된 것에만 있고 악과 거짓 안에는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 후에 그들은 신앙을 수단으로 주님으로부터 생명을 받는다. 첫 번째, 지식일 뿐인 기억 속의 신앙을 수단으로; 다음에 지적인 신앙인 이해력으로부터의 신앙을 수단으로; 마지막으로 사랑으로부터의 신앙, 또는 구원을 가능케 하는 신앙인 심정으로부터의 신앙을 수단으로 생명을 받아간다. 이 세 종류 중 첫 두 종류는 3절로부터 13절에서 생명 없는 것들을 수단으로 표현되어져 있다. 그러나 사랑을 수단으로 생명을 주는 신앙은 20절부터 25절 까지에서 생명 있는 것들에 의해 표현되어져 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사랑, 그리고 사랑에서 파생된 신앙이 지금 여기서 먼저 취급되어지고, “발광체들”이라 불리운다; 사랑은 “낮을 규율하는 보다 더 큰 발광체”이다; 사랑으로부터 파생된 신앙은 “밤을 규율하는 보다 더 작은 발광체”라 불리운다; 그리고 이 두 발광체들은 하나를 만들고 있어야 하는 바, 그것들에 관해 말해질 때, 복수가 암시되지 않게 단수 표현으로 “발광체들이 있어라”라고 말해지고 있다.
내적 인간에 있는 사랑과 신앙은 육체상의 외적 인간에 있는 열과 빛과 비슷하다. 이런 이유로 해서 전자는 후자를 수단으로 표현되어진다. 이런 연유에서 발광체들이 “하늘의 광활한 공간 안에 있다,” 또는 내적 인간 안에 있다 라고 말해지는 것이다; 큰 발광체는 내적 인간의 의지 안에, 그리고 작은 발광체는 내적 인간의 이해함 안에 놓인다; 그러나 그것들은 태양의 빛이 그 빛을 받는 대상 안에서 오로지 있어지듯 의지와 이해함 안에서만 나타난다. 의지는 사랑을 가지고 감동되고, 이해함은 진리 또는 신앙을 가지고 감동되는데 이는 주님의 자비로 가능해지는 영역에 속한다.
“큰 발광체들”이 사랑과 신앙을 의미한다는 것, 그리고 “태양, 달, 그리고 별들”이라고도 불리운다. 하여 “발광체들”이 주님을 향하여 있는 사랑과 신앙을 표현하고 의미했기 때문에 유태 교회 안에서 영구적으로 발광체가 저녁으로부터 아침까지 계속 불타고 있어야함을 엄히 명령해두셨는데, 그 이유는 이 교회 안에 있는 명령 사항들이 주님을 표현했기 때문이다. 이것들이 사랑과 신앙을 의미한다는 것, 이것들에 주님께서는 불붙이시어 내적 인간 안에 빛이 드리우게 하시고, 내적 인간을 통하여 외적 인간 안에도 빛을 드리우시는데, 이는 신성한 주님의 자비에 속하는 바, 적당한 장소에서 알릴 것이다.
사랑과 신앙이 처음 “큰 발광체들”이라 불리우고, 후에 사랑은 “더 큰 발광체”, 그리고 신앙은 “더 작은 발광체”라 불리운다; 그리고 사랑에 관해서는 “낮을 규율한다”고 말해지고, 신앙에 관해서는 “밤을 규율한다”라고 말해진다.
각자의 능력에서도 쉽게 알아지는 것은, 얼마간의 사랑도 없이 가능할 생명은 없다는 것, 그리고 사랑으로부터 흐르는 것이 아니고도 가능할 환희(joy)는 없다는 것이다. 어쨌든 사랑이 이러하고, 생명도 이러하고, 환희도 이러하다: 만일 당신이 사랑들, 바램들(desires, 이것도 사랑으로부터 있기 때문)을 제거한다면, 생각함은 즉시로 중지될 것이고, 당신은 죽은 인물 같이 되어 있을 것이다. 이는 생명에 대하여 나에게 보여졌던 바와 같다. 자아 사랑들과 세상 사랑들도 생명과 환희와 유사한 어떤 것을 그것들 안에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것들 모두는 진정한 사랑, 즉 인간은 모든 것들 위 너머에 주님을 사랑함이, 그리고 자신 같이 이웃을 사랑함이 존재하는 진정한 사랑에 반대되기에, 그것들은 사랑들이 아닌 미워함들 임이 분명해질 것은 틀림 없다. 그 이유가 누군가가 자신과 세상을 사랑하는 정도에 비례하여 그는 자기 이웃을 미워하고, 그러므로 주님도 미워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진정한 사랑은 주님을 사랑함이고, 진정한 생명은 그분으로부터의 사랑 속의 생명이다, 그리고 진정한 기쁨은 이 생명으로부터의 기쁨이다. 진정한 사랑, 진정한 생명은 한분으로부터 밖에 있을 수 없다, 이로부터 진정한 기쁨들과 더없는 진정한 행복들이 흐른다, 천국들 안에 있는 천사들의 경우가 이와 같다.
사랑과 신앙은 분리를 허용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그것들은 하나로 구성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둘은 똑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발광체들”에 관해 말해지는 처음 대목에서, 그것들은 하나로서 간주된 바, “하늘들의 광활한 공간 안에 발광체들(sit luminaries)이 있어라” 하고 말해진다.
여기에서 명백해지는 바는, 사랑 안에 있는 이들은 신앙 안에도 역시 있고, 그것에 의해서 천국의 생명 안에도 있다는 것, 그러나 신앙 안에 자기들은 있다 라고 말하는 이들이 사랑의 생명 안에도 있는 것은 아니다는 것이다. 사랑 없는 신앙의 생명은 마치 열이 없는 태양의 빛 같고, 겨울철과 같은 바, 아무 것도 자라지 못하고, 모든 것들이 움직이지 못하고 죽은 듯 있다; 이와 반대로 사랑으로부터 진행하는 신앙은 봄철의 태양의 빛 같아, 태양의 열매 풍성하게 하는 열의 결과로 모든 것들은 성장하며 번성한다. 이것은 영적인 것과 천적인 것들에 관련하여서도 거의 비슷하다.
인간은 두 능력들을 가지고 있다: 의지력(뜻함, will)과 이해력(이해함,underrstanding)이다. 이해함이 뜻함에 의해 통치되어질 때, 그것들은 함께 한 개의 마음(one mind)을 구성한다, 고로 한 개의 생명을 구성한다. 그 이유가 인간이 뜻하고 행동하는 것을 그는 생각하고 의도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해함이 뜻함에 일치하지 않을 때 (신앙을 가지고 있다 말하면서 그 신앙에 정반대되어 사는 이들의 경우 같이), 그러면 한 개의 마음은 둘로 분리되어진다. 즉 한 개는 천국 안으로 자체를 드높이려는 바램을 지니고, 다른 하나는 지옥을 향하여 간다; 의지가 모두 각각의 행동 안에서 행위자 일 경우, 전체 인간은 만일 주님의 자비가 그 인간 위에 드리워 있지 않다면 지옥 안으로 빠지고 말 것이다.
신앙이 사랑으로부터 분리된 이들은 신앙이 무엇인지조차 모르고 있다. 신앙에 관해서 생각하고 있을 때, 어떤 이들은 이는 단지 생각하기이다 라고, 어떤 이는 주님을 향하여 방향을 잡은 생각하기 이다 고 상상하고, 그것은 신앙으로부터의 교리이다 라고 하는 자는 거의 없다. 그러나 신앙은 신앙으로부터의 교리가 함유하는 모든 것들에 대한 지식과 인정함, 뿐만 아니라 특별하게 신앙으로부터의 교리가 가르치는 모든 것들에 순종하는 것이다. 신앙으로부터의 교리가 가르치고 사람들로 순종하라 하는 첫째가는 것들은 주님을 사랑함과 이웃을 향한 사랑이다, 그 이유가 만일 인간이 이 두 교리 안에 있지 않다면, 그는 신앙 안에 있지 않다.
광명체들이 “표시들을 위해, 그리고 계절들을 위해, 그리고 날들을 위해, 그리고 햇수들을 위해” 있을 것이다 라고 말해졌다. 이 말들 안에는 현재 펼쳐 볼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비밀들이 포함되어져 있다. 물론 글자 의미 안에는 신비한 종류의 어떤 것도 나타나 있지는 않다. 여기서는 영적, 천적인 것들의 교체함들(alternations)이 일반적, 세부적 측면에서 있다는 것, 이것들이 날들과 햇수들에 비교되어진다는 것을 주목해보는 것으로 만족해야 할 것 같다. 날들의 변화는 아침으로부터 정오로, 그로부터 저녁으로, 그리고 밤을 통과하여 아침으로 이다; 햇수들의 변화도 이와 유사하다, 즉 봄으로부터 여름으로, 가을로, 그리고 겨울을 통하여 봄으로 이다. 하여, 열과 빛의 교체가, 그리고 땅의 생산물의 교체가 있다. 이 변화들에 영적, 천적인 것들의 교체가 비교되어진다. 이와 같은 교체와 다양함 없는 생명은 불변할 것인 바, 결과적으로 생명이 전혀 없다; 선과 진리는 식별되고 구별되어질리 없을 것이고, 지각됨은 더 더욱 없을 것이다. 이런 교체들이 예언서들에서 “법칙들, ordinances, 정해놓은 질서”로 불리었다.

18. 낮을 규율함, 그리고 밤을 규율함, 그리고 빛과 어둠 사이를 구분함;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그것이 선 이었음을 보셨다.

18절. “낮”에 의해 선이 뜻해지고, “밤”에 의해 악이 뜻해진다; 그러므로 선들은 낮의 일들이라 불리우나, 악들은 밤의 일들이라 불린다; “빛”에 의해 진리가 뜻해진다, 그리고 “어둠”에 의해 거짓이 뜻해진다.

19. 저녁과 아침은 넷째 날 이었다.

20. 하느님께서 말하셨다. 물들은 기는 것(동물),(과) 살아있는 혼(soul)을 기게 하 는 원인이 되라. 그리고 새(fowl)는 하늘들의 광활한 공간의 얼굴들의 위쪽, 땅 위에서 날으라.

20절. 큰 발광체들이 불을 밝혀오고 내적 인간 안에 장소를 두고, 이로부터 외적 인간도 빛을 받은 이후, 인간은 처음으로 살아 있기를 시작한다. 지금까지의 인간은 자신이 행한 선을 놓고 그것은 자신으로부터 있어진 것, 자기가 말한 진리를 두고서는 그것은 자신으로부터 였다고 상상하는 까닭에 그는 살아 있어 왔다고 말해지기는 거의 힘들다; 그리고 인간은 자신으로부터는 죽어 있다, 자신 안에 있는 것은 악과 거짓인 것밖에 아무 것도 없다, 그러므로 그가 자신으로부터 생산하는 것은 무엇이든 살아 있지 않다, 그 까닭은 그는 그 자체가 선인 선을 행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인간은 선인 것을 생각조차 할 수 없고, 선인 것을 뜻할 수도 없고. 결과적으로 주님으로부터가 아니면 선인 것을 행할 수 없다는 것은 신앙으로부터의 교리로부터 모든 이 각각에게 명백해져야만 할 것이다. 어떤 선도 선의 진짜 원천으로부터가 아니면 와질 수 없는데, 이 선의 원천은 오직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 생명 쪽으로 인간을 소생시키실 때, 즉 그를 거듭나게 하실 때, 먼저 그분은 그에게 그가 자신으로부터 선인 것을 행하고, 참인 것을 이야기하는 것을 허용하신다. 그 이유가 최초 시기의 인간은 자신으로부터인 듯 하는 것 외 다른 것은 마음에 품어질 수도 없기 때문, 그리고 믿는 쪽으로 인도되는 길, 후에 모든 선과 진리는 그분만으로부터 있다는 것을 지각하도록 인도되는 길은 먼저 자신으로부터인 듯 하는 방법밖에 없기 때문이다. 인간이 (주님의 허용하심에서) 이와 같은 길(방도, way)에서 생각하는 동안, 그의 진리들과 선들은 “부드러운 풀”에, 또한 “씨를 산출하는 풀잎”에, 그리고 마지막으로 “과일을 맺는 나무”에 비교되어진다. 이 모두는 생명이 없다; 그러나 지금 그는 사랑과 신앙을 수단으로 생생해지고, 주님이 자기가 행하는 모든 선, 자기가 말하는 모든 진리를 역사하심을 믿는다. 하여 그는 먼저 “물의 기는 것들”에, 그리고 “땅 위에서 나는 새들”에, 또한 짐승에 비교되어진다. 이것들은 모두 생명 있는 것들이다. 그리고 “생 혼들”이라 불리운다.
“물들이 생기게 한 기는 것들”을 수단으로 외적 인간에 속하는 기억 속의 지식들이 의미되어진다; 일반적으로 “새들”은 합리적, 지적인 것들이 의미된다. 이로부터 후자는 내적 인간에 속한다. “물들의 기는 것들”, 또는 “물고기들”은 기억 속의 지식들을 의미한다
인간에게 어울리는 것은 무엇이든 그 자체 안에 생명이 없다, 그래서 그것이 명백하게 만들어질 때는 언제나, 그것은 딱딱한 (느낌), 마치 뼈만 앙상한 물체나 검은 물질 같다; 그러나 주님으로부터인 것은 무엇이든 생명을 가지고 있고, 그 안에는 영적인 것과 천적인 것을 포함하고 있다. 이것이 모습을 보일 때 인간적이고 생생함이 나타난다. 이것은 신용할 수 없는 듯 보일런지 모르나 지독하게도 진실되다. 하여 천사들의 영 안에 있는 단 하나인 모두 각각의 사상, 생각하기, 표현은 그것의 미세한 세부 사항들 안에도 생명 자체이신 주님으로부터 진행하는 애착을 포함하고 있다. 그리하여 주님으로부터 있는 것은 무엇이든 생명을 가진다, 그 이유가 그것들은 그분을 향한 신앙을 포함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이) 이 구절에서 “생 혼”에 의해 의미되어져 있다; 그것들은 신체의 한 특성(species)이라 할 수 있는 것 역시 가지고 있는데, 이 구절에서는 “자체를 움직이는 것”, 또는 “기어다닌다(creeps)”에 의해 의미되어져 있다. 어쨌든 이런 진리들은 인간에게는 아직까지는 깊은 수준의 비밀들일 뿐이다. 그리고 지금은 “생 혼”, 그리고 “자체를 움직이는 것”만이 언급되어 취급되어지고 있다.

21.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큰 고래들, 그리고 물들이 각 종류에 따라 기게 한, 기는 모든 살아있는 혼, 그리고 날개 달린 모든 새들을 그 종류대로 창조하셨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보셨더니 그것은 선 이었다.

21절. “물고기들”은, 앞서 말했던 바 같이 기억 속의 지식들을 의미하는데, 지금은 주님으로부터의 신앙을 수단으로 생명이 있다, 고로 살아 있다. “고래들”은 기억 속의 지식들에 종속됨 안에 있는 그 지식들의 일반적 원리들이다, 그리고 일반적 원리들로부터 세부적인 것들이 있다; 그 이유가 세부적인 것들이 존재하되 일반적 원리 아래 있지 않은 것은 우주 안에 없기 때문이다. “고래들”, 또는 “큰 물고기들”은 때로는 예언자들에 의해서도 언급되기도 하는데, 거기서도 그것들은 기억 속의 지식들 속의 일반적인 것들을 의미한다.

22. 그리고 하느님께서 이것들에 복주셨고 말하시기를, 열매를 많이 맺고 번성하라, 그리고 바다들에 있는 물들을 채우라, 그리고 새는 땅에서 번성할 것이다.

22절. 주님으로부터 자체 안에 생명을 가지는 모든 것은 그 자체 열매를 많이 맺고 광대하게 번성한다; 이는 육체 안에서 살 때보다 다른 삶에서는 깜짝 놀라는 수준에서 (전개된다). 말씀에서 “열매를 맺는 것”은 사랑으로부터 있는 것들을, 그리고 “번성하는 것”은 신앙으로부터 있는 것들을 단정하고 있다. 말씀에서 있는 주님의 “복 주심” 역시 열매를 많이 맺음과 번성함을 의미하는데, 그 이유는 복 주심이 사랑과 신앙으로부터 진행되기 때문이다.

23. 저녁과 아침은 다섯째 날 이었다.

24. 그리고 하느님께서 말하셨다, 땅은 그 종류대로 살아 있는 혼을 내라; 그리고 짐승, 그리고 그 자체 움직이는 것, 그리고 땅의 야생 동물을 그 종류대로 내라; 그리고 그것은 그렇게 있었다.25.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땅의 야생 동물을 그 종류대로, 그리고 짐승을 그 종류대로, 그리고 지면에서 기는 모든 것을 그 종류대로 만드셨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보셨 더니 그것은 선 이었다.

24,25절. 인간, 땅 같아서, 신앙에 관한 지식들이 그 인간 안에 먼저 뿌려지지 않으면 선으로부터의 어떤 것도 생산할 수 없는 바, 무엇에 의하여 인간은 믿어지고 행함이 있는지를 알아야 할런지 모른다. 말씀을 듣는 것은 이해력의 직무이고, 그것을 행하는 것은 의지력의 직무이다. 말씀을 들었는데, 그것을 행하지 않는 것은 마치 우리가 믿노라고 말하는데, 자기의 신조에 따라 살지 않을 때의 경우와 같다; 이럴 경우 우리는 들음과 행함을 분리하고 있다, 고로 분단된 마음(mind)을 가진다, 하여 주님께서 “어리석은 자”라 부르시는 자가 되어 간다.
이해함에 속하는 것들은, 앞서 보였던 바 같이, “물들이 생기게 한 기는 것들”, 그리고 또한 “땅위에 있는 새”, 그리고 “광활한 공간의 얼굴들 위에”에 의해 의미되어져 있다; 그러나 뜻함 속에 있는 것들은 여기서 “땅이 생산하는 생 혼”, 그리고 “짐승”, 그리고 “기는 것”, 또한 “그 땅의 야생 동물”에 의해 의미되어져 있다.
고로 태고 때에 살았던 이들은 이해함과 뜻함에 관련되는 것들을 (한꺼번에) 의미했다; 그러므로 예언서들에서, 구약 성경의 말씀 안에서 비슷한 것들이 여러 다른 동물들을 수단으로 꾸준히 표현되어져 있다. 짐승(beast)들은 두 종류가 있다; 악한 짐승, 그렇게 부르는 이유는 그것들이 피해를 입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선한 짐승, 그것들은 피해를 주지 않기 때문이다. 인간 안에 있는 악은 악한 짐승들에 의해 의미되는데, 예를 들면, 곰들, 이리들, 개들 등등이다; 그리고 선하고 온화한 것들은, 어린 암소, 양, 어린 양이 지닌 본성을 수단으로 의미되어지고 있다. 이 구절에서 참조되는 짐승들은 선하고 온화한 것들이다, 그런고로 애착(affection)들을 의미하는데, 그 이유는 창세기 1장이 거듭나지고 있는 이들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 안에서 보다 더 수준 낮은 것(애착)들, 이것들은 신체와 더 잘 연결되는데, “그 땅의 야생 동물들”이라 불리우고, 그리고 탐욕들(cupidities)과 쾌락들(pleasures)이다.
“짐승들”이 인간의 애착들, 악한 자의 경우는 악한 애착, 선한 자의 경우는 선한 애착을 의미한다.
예언자들은 “짐승들”과 “땅의” “야생 동물들”, 그리고 “짐승들”과 “들판의” “야생 동물들”을 조심스럽게 구별해 놓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 안에 있는 선들이 “짐승들”이라 불리는데, 천국에서 주님에게 가장 가까이 있는 이들이 “동물들”이라 불리는 것과 같다.
이런 말들이 거듭남에 관련하여 비밀들을 포함하고 있다는 것은 앞 구절(24절)에서 말해졌던 바와 뒷 구절(25절)로부터 분명하다, 즉 땅은 “생 혼, 짐승, 그리고 땅의 야생 동물”을 낳았다, 이에 반해 다음 절에서는 순서가 바뀌고 있다. 즉 하느님께서는 “땅의 야생 동물을” 만드셨다 라고 말해졌다, 그리고 “짐승”의 순서는 마찬가지이다; 그 이유는 첫째로, 그리고 그후 그가 천적 수준이 되어갈 때까지, 인간은 자신에 관한 것을 만들어 가고 있다; 고로 거듭남은 외적 인간으로부터 시작하여, 내적 인간 쪽으로 진행한다; 그러므로 여기서(25절)는 또 다른 순서가 있다, 그리고 외적인 것들이 먼저 언급되었다.
그 다음 인간이 이해력에 속하는 신앙의 원리로부터 이야기할 때, 그리고 그것에 의해서 자신이 참된 것 안에 있음과 선인 것 안에 있음을 확증할 때 그는 거듭남의 다섯 번째 상태 안에 있음이 나타난다. 그러면 그 사람에 의해 낳는 것들은 생명이 있음이다, 그래서 “바다의 물고기들”, 그리고 “하늘들의 새들”이라 불리운다. 그가 이해함에 속하는 신앙으로부터, 그리고 뜻함에 속해 있는 신앙에서 파생된 사랑으로부터 진리들을 이야기하고, 선들을 행할 때, 그는 여섯째 상태 안에 있다; 그 다음 그가 낳는 것은 “생 혼”, 그리고 “짐승”이라 불린다. 그리고 그 다음 그가 신앙으로부터 뿐 아니라, 사랑으로부터 행동하기를 시작할 때, 그는 “하느님의 형상(image)”인 영적 (평면의) 인간(a spititual man)이 되어 간다. 이것이 제 1장의 주제이다.

26. 하느님께서 말하셨다, 우리가 우리의 모습에 따라 우리의 형상에서 사람을 만들자. 그리고 그것들로 바다의 고기와 하늘들의 새와 짐승과 모든 땅, 그리고 땅 위에서 기는 모든 기는 것들을 다스리게 하자

26절. 태고 교회 안에서 주님께서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대화하셨던 이 교회인과 더불어, 주님께서는 사람(a Man) 같이 나타나셨다; 이 대목에 관련하여서는 많은 말을 한참 더 해야 하겠지만, 때가 아직 도착한 것 같지는 않다. 어쨌든 태고 교회인들은 자기들을 두고 아무도 사람이라는 표현을 쓰지 않고 단지 주님 자신, 그리고 그분으로부터 있는 것들에 국한해 사용했다; 그들이 자신을 “사람들”이라 부르지 않았으나 단지 자신들 안에 있는 어떤 것들, 즉 사랑으로부터의 모든 선과 신앙으로부터의 모든 진리를 두고 (“사람” 칭호를 붙였는데), 자기들이 이것을 주님으로부터 가졌음을 지각했다. 그들이 “사람으로부터” 있었다고 말했는데, 그 이유는 그것들이 주님으로부터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고로 해서 예언서들 안에서, “사람”과 “사람의 아들”을 수단으로 주님이 뜻해진다; 그리고 내적 의미에서, 지혜와 총명; 고로 거듭나지는 모든 이(까지도 뜻해진다). 주님 역시 자신을 “사람의 아들”, 즉 사람이라 부르신다, 그리고 다니엘서와 같이, 영광 안에서 그분이 오심을 미리 말하시고 있다: 그때 그들은 사람의 아들이 권능과 큰 영광과 더불어 하늘의 구름들 안에서 오는 것을 볼 것이다. (마. 24:30). “하늘의 구름들”은 말씀의 글자적 의미이다; “권능과 큰 영광”은 말씀의 내적 의미이다. 이 의미는 주님과 그분의 왕국만에 관련되는 일반적, 세부적 측면 모두에서 있는 의미이다; 그리고 이로부터 내적 의미는 그것의 권능과 영광을 파생시킨다.
태고 교회는 “주님의 형상”을 수단으로 표현될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이) 이해했다. (오늘날의) 인간은 자기가 천사와 영들을 통하여 주님의 통치하심 아래 있다는 것, 모든 이 각각과 더불어 최소한 두 영들과 두 천사들이 있다는 것에 무지해 있다. 영들을 수단으로 인간은 영들의 세계와, 천사들을 수단으로 천국과 교통한다. 영들을 수단으로 영들의 세계와, 천사들을 수단으로 천국과, 그리하여 천국을 통해 주님과의 교통이 없으면, 인간은 전혀 살 수 없다; 인간의 삶은 이 결합에 전적으로 의존된다. 고로 만일 영들과 천사들이 물러가 버린다면, 그는 그 즉시 사멸되고 말리라.
그런데 인간이 타락하고 있다면, 거듭날 때와 전혀 딴판이다. 타락하는 동안 악령이 그와 함께 있고, 악령이 그를 좌지우지 하는 바, 비록 천사가 현존하지만, 천사는 그가 최고로 수준 낮은 악에 빠지지 않도록, 그가 어떤 선 쪽으로 구부려지도록 해보는 것 이상 다른 어떤 것도 할 수 없다. 사실상 그가 선 쪽으로 구부려지게 하는 것은 탐욕들을 수단으로, 진리 쪽으로는 감각들의 오류들을 수단으로 해서 이다. 이때에도 인간은 그와 함께 있는 영들을 통하여 영들의 세계와 교통을 한다, 그러나 천국과의 교통은 그다지 많지 않다, 그 이유는 악령이 통치하고 천사들은 악령들의 통치를 막으려 하는 수준, 소극적 자세를 취해야 하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이 거듭날 때, 천사가 통치하고, 그래서 그는 모든 선들과 진리들로 감화된다, 그리고 악들과 거짓들에 관련해서는 그것들에 대한 걱정과 공포 수준에서만 그치고 있다. 실로 천사들이 그를 인도하나, 오직 봉사할 뿐인데, 그 이유는 주님 만이 천사들과 영들을 통하여 인간을 통치하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이 천사들의 섬김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바, 이 구절에서 “우리가 우리의 형상 안에서 사람을 만들자”라고 복수로 말해지지만, 여전히 주님만이 통치하시고 배치하시기 때문에, 다음 절에서는 “하느님께서 그분의 형상 안에서 그를 창조하셨다”라고 단수로 말해진다. 이것을 주님께서는 이사야서에서 분명하게 선포하신다: 그런고로 여호와, 너를 되찾으신 자, 그리고 너를 자궁으로부터 만들어내신 그분, 나 여호와가 모든 것들을 만들고, 천국들을 펼치시며,나 자신에 의해 땅을 퍼트린다 (이. 44:24).
“형상”에 주목해보자. 형상(image)은 모습(likness)은 아니나, 모습에 따라 있는다; 그러므로 “우리가 우리의 모습에 따라서(after) 우리의 형상 (안)에서 만들자”라고 말해지고 있다. 영적 인간이 형상이고, 천적 인간은 “모습”, 또는 유사함(similitude)이다. 이 장에서는 영적 (평면의) 인간이 다루어진다; 다음 장에서는 천적 (평면의) 인간이 다루어진다. “형상”인 영적 (평면의) 인간이 주님에 의해 “빛의 아들”이라 불리운다. 그분은 또한 “친구”라고 일컬으신다. 그러나 천적 (평면의) 인간, 이 인간은 “모습(likeness)”인데, “하느님의 아들”이라 불리 운다.
인간이 영적 (평면)에 있는 한, 그의 통치권은 외적 인간으로부터 내적 인간 쪽으로 진행된다. 하여 26절에서 말해지는 바: “그것들로 바다의 고기 위에서, 그리고 하늘들의 새 위에서, 그리고 짐승 위에서, 그리고 모든 땅 위에서, 그리고 땅에서 기는 모든 기는 것들 위에서 통치권을 가지게 하자.” 그러나 그가 천적 (평면의) 인간이 되어갈 때, 그래서 그가 사랑으로부터 행할 때, 그러면 그의 통치권은 내적 인간으로부터 외적 인간 쪽으로 진행한다.

27.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그분 고유의 형상으로 창조하셨고, 하느님의 형상 안 에서 그분은 그를 창조하셨다; 남성과 여성(으로) 그분은 그들을 창조하셨다.

27절. “형상”이 여기서 두 번 언급된 이유는 이러하다. 즉 신앙, 이해력에 속하는 것은 “그분의 형상”이라 불리운다; 사랑, 의지력에 속하는 것은 영적 인간에서는 뒤에 따라 온다, 그러나 천적 인간에서는 의지 측면인 사랑이 앞에 오는 바, “하느님의 형상”이라 불리운다.
남성과 여성(으로) 그분은 그들을 창조하셨다. 내적 의미에서 “남성과 여성”을 수단으로 뜻해지는 것이 무엇인지는 태고 교회에게는 잘 알려져 있으나, 말씀의 내면의 의미가 이 교회의 후손 사이에서 잃어져 버렸을 때, 이에 따른 비밀들 역시 멸해졌다. 그것들의 결혼들은 행복과 즐거움의 최고의 근원들이었다. 그리고 무엇이든 그들은 결혼에 비교했었는데, 이렇게 함으로 결혼의 더없는 행복을 지각하기 위해서였다. 또한 내적 인간인 그들은 내적인 것만으로 기뻐했다. 외적인 것들을 그들은 눈으로 단지 볼 뿐이고 (외적인 것이) 표현한 것만을 생각했다. 따라서 그들에게 외적인 것들은 별 것이 아니었고, 단지 내적인 것 쪽으로 자기들의 생각을 돌리게 하는 어느 정도의 수단이 되어주는데 불과했다.하여 천적인 것 쪽으로, 그리고 자기들의 전부되시는 주님 쪽으로, 그 결과 천국의 결혼 쪽으로, 이로부터 그들은 그것의 결혼들로부터의 행복이 와진다는 것을 지각했다. 영적 인간에게 있는 이해함을 그들은 남성이라 부르고, 뜻함을 여성이라 부른다, 그리고 이것들이 하나로서 행동할, 그들은 그것을 결혼이라 불렀다. 이 교회로부터 관례가 된 말(speech)의 형체가 왔는데, 이 관례 때문에 교회 자체는 선으로부터 있는 교회의 애착으로부터 마치 “시온의 처녀”, “예루살렘의 처녀” 등등의 말 같이, “딸”, 그리고 “처녀”, 그리고 “아내”라 불리웠다. 이 주제를 놓고 살피는 것은 2:23과 3:15에서 있을 것이다.

28.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그들에게 복을 주셨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그것들에게 말하셨다. 열매를 많이 맺으라, 그리고 번성하라, 그리고 땅을 계속 채우라(replenish), 그리고 땅을 정복하라; 그리고 바다의 물고기, 하늘들의 새, 땅위에서 기는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을 다스려라.

28절. 태고 사람들은 이해함과 뜻함, 또는 신앙과 사랑의 결합(conjunction)을 결혼이라 불렀던 바, 이 결혼으로부터 생산된 선에 관한 모든 것을 그들은 “열매를 많이 맺음”, 그리고 진리에 관한 모든 것을 “번성함”이라 일컬었다. 이리하여 그것들은 예언서들 안에서 그렇게 불리워진다.
땅은 “계속 충전되어진다”, 또는 “채워진다(replenish)”; 그 이유는 주님께서 (거듭나는) 인간에게 복 주시며 이야기하실 때, 즉 그 인간 위에서 일하실 때, 선과 진리의 광대한 증가가 있어지기 때문이다.

29. 그리고 하느님께서 말하셨다, 보라, 나는 너에게 온 땅의 얼굴들에 있는 씨를 맺 는 모든 풀잎, 그리고 열매있는 모든 나무를 준다; 씨를 산출하는 나무, 그것은 너에게 양식을 위하여 있을 것이다.

29절. 천적 인간은 천적인 것들만으로 기뻐해진다. 그 이유는 그것들이 자기 생명과 일치하기 때문이다. 하여 이것들은 천적 식품(food)이라 불리운다. 영적 인간은 영적인 것들을 가지고 기뻐해진다. 그 이유는 이것들이 자기 생명과 일치하기 때문, 하여 영적 식품이라 불리운다. 자연적 인간도 위와 마찬가지로 자연적인 것들 가지고 즐거워해진다. 이것이 그의 생명 속에 있는 바, 식품이라 불리는데, 간략히 말해 기억 속의 지식들에 존재한다. 영적 인간이 여기서 다루어지는 바, 그의 영적 식품이 표현물을 수단으로 묘사되는데, “씨를 맺는 풀잎”, 그리고 “열매가 있는 나무”와 같다. 일반적으로는 “씨를 산출하는 나무” 이다. 그의 자연적 식품은 다음 절에서 묘사되어 있다.
“씨를 맺는 풀잎”은 사용을 중요시하는(주목해서 보는, regards) 각각 모두의 진리이다; “열매가 있는 나무”는 신앙으로부터의 선이다; “열매”는 주님께서 천적 인간에게 주시는 식품, 그러나 “열매를 생산하는 씨”는 그분이 영적 (평면의) 인간에게 주는 식품이다. 그러므로 “씨를 산출하는 나무, 네게 그것은 식품을 위해 있을 것이다”라고 말해진 것이다. 천적 식품이 나무로부터의 열매라 불리우는 것은 천적 인간이 취급되는 다음 장으로부터 분명해진다.

30. 그리고 땅의 모든 야생 동물에게, 그리고 하늘들의 모든 새에게, 그리고 살아 있 는 혼이 있는 땅 위에서 기는 모든 것에게, 푸른 모든 풀잎은 양식을 위하여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그렇게 있었다.

30절. 동일한 인간의 자연 평면의 음식물이 여기서 묘사되어져 있다. 그의 자연물이 “땅의 야생 동물”과 “하늘들의 새”를 수단으로 의미되어져 있고, 이것에 야채와 풀잎의 푸른 것이 식품을 위해 주어져 있다.
“야채와 풀잎의 푸른 것” 만이 자연적 인간을 위한 식품으로 묘사된 이유는 이러하다. 거듭남의 과정에서, 인간이 영적으로 만들어질 때, 그는 전투를 꾸준히 실시해간다, 이렇기 때문에 주님의 교회는 “전투원”이라 불리우기도 한다; 그 이유가 거듭나기 전, 탐욕들이 통치권을 가지는데, 그 이유는 전체 인간은 오로지 탐욕들과 이 탐욕들로부터 파생된 거짓들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거듭나는 동안 이런 탐욕들과 거짓들이 한방에 폐지되어질 수 없다, 그 이유는 한방에 폐지되면 그가 획득하고 있는 생명의 전부가 탐욕들과 거짓들인데, 한방에 그의 모든 생명이 파괴되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악령들이 인간과 더불어 계속하는 짓을 내버려두다 보면, 악령들은 인간의 탐욕들을 흥분시키는데, 이 흥분으로 인해 이것들이 느슨해지는 틈이 생기는데, 이는 무수한 방법들에서 있고, 그것들이 주님에 의해 선쪽으로, 하여 개혁되어질 수 있는 쪽으로 구부려질 수 있다. 전투 시기에서, 악령들은 선하고 참된 것 모두에 맞서, 즉 주님을 향하고 있는 사랑과 신앙, 이것들이 영원한 생명을 가지게 하기 때문에 극도의 미움을 결과 맺는 바, 풀잎의 푸른 것과 야채에 비교되는 식품밖에 그 인간에게 남기는 것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는 그에게 씨를 맺는 풀잎, 그리고 열매 있는 나무에 비교되는 식품 역시 주신다. 이 식품읔 기쁨과 더불어 있는 고요와 평화의 상태들이다. 이 식품을 주님께서는 간헐적으로 인간에게 주신다.
주님께서 인간을 매 순간, 어쩌면 각각 모두의 순간의 지극히 작은 것에 이르기까지에서 방어해주시지 않으면, 인간은 주님을 향한 사랑과 신앙에 관련되는 것들에 맞서는 영들의 세계 안에서 우세를 떨치는 형언할 수 없는 격렬함과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의 미워함의 결과로 곧바로 사멸될 수밖에 없다.

31.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그분이 만드신 모든 것을 보셨고, 바라보셨더니 그것은 참 선 이었다. 그리고 저녁과 아침은 여섯째 날 이었다.

31절. 이 상태는 “참 선(very good, 선 자체)”이라 불린다. 앞의 상태에서는 단지 “선”이라 불리웠다; 그 이유는 지금 신앙으로부터 있는 것들이 사랑으로부터 있는 것들과 하나(one)를 만들기 때문이다. 고로 결혼이 영적인 것들과 천적인 것들 사이에 결과되어져 있다.
인간 거듭남의 때들과 상태들은 일반적, 세부적 측면에서 여섯으로 나뉘어진다.
그리고 그의 창조의 날이라 불리어진다; 그 이유가, 점차로, 전혀 인간이지도 않음으로부터, 그는 처음 한 가지씩 어떤 것이 되어간다. 그렇게 해서 조금씩 그는 여섯째 날까지 도달한다. 여섯째 날 안에서 그는 하느님의 형상이 되어간다.
한편 주님께서는 그를 위해 악들과 거짓들에 맞서 계속적으로 싸우신다. 그리고 전투들을 수단으로 진리와 선 안에서 그를 확증하신다. 전투의 때는 주님께서 일하시는 때이다; 그러므로 예언서들에서 거듭남은 하느님의 손가락의 일이라 불리어진다. 그분은 우리가 사랑을 원리로하여 행동할 때까지 쉬시지 않는다; 그 다음 전투가 중지된다, 일이 꽤 많이 진전되어 갔을 때, 신앙이 사랑과 결합되어지는 바, 이것이 “참 선”이라 불리워 진다; 그 이유는 그 때 주님께서 그분의 모습으로서 그를 움직이시기 때문이다. 여섯째 날의 끝에서 악령들은 떠난다. 그리고 선한 영들이 악령들의 자리에 들어 앉는다. 그리고 인간은 천국 안으로 입문되어진다. 또는 천적인 낙원 안으로 입문되어진다. 이에 관하여는 다음 장의 몫이다.
이상 살핀 내용은 말씀의 내적 의미이고, 말씀 속의 최고의 생명이며, 글자의 뜻으로부터는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사실 여기에 담긴 비밀들은 너무나 많아 이 작은 몇 페이지로 그것들을 펼쳐 전개하는 것은 무리였을 것은 의심치 않는다. 따라서 매우 작은 한, 두 가지, 즉 거듭남이 이 장에서 취급된다는 것, 이 거듭남은 외적 인간으로부터 내적 인간으로 진행한다는 것 정도 뿐이다. 천사들이 말씀을 지각하는 것은 이러하다: 그들은 글자 안에 있는 것의 어떤 것도 전혀 알지 못하는데, 단 하나의 단어를 놓고서도 그러하다; 더욱이 그들은 말씀의 역사적 예언적 부분들에서 자주 오르내리는 나라들, 성들, 강들, 인물들의 이름은 더 더욱 모른다. 그들은 단어들과 이름들에 의해 의미된 것들로부터서만 생각(idea)을 가진다. 고로 낙원에 있는 아담을 수단으로 그들은 태고 교회를 지각하는데, 그럼에도 그 교회가 아닌, 그 교회 속의 주님에 대한 신앙을 지각한다. 노아를 수단으로 그들은 태고 교회의 후손들과 더불어 잔존하여 아브람의 때까지 계속되었던 교회를 지각한다. 아브라함을 수단으로 그들은 그 개인을 결코 지각하지 않고, 그가 표현했던 것, 즉 구원해주는 신앙을 지각할 뿐이다; 이 외 훨씬 많다. 한마디로 그들은 이름들과 단어들과는 완전히 동떨어진 영적인 것들과 천적인 것들을 지각하고 있다.
말씀 안에는 일반적으로 네 가지의 문체가 있다. 첫 번째 문체는 태고 교회로부터의 문체이다. 표현의 이 형식은 지상적이고 세상적인 것이 언급될 때, 영적이고 천적인 것에 관해 생각하는 것과 같은 방식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자신들을 표현물을 수단으로 표현할 뿐만 아니라 이것들이 자기들에게 더 생명을 주도록 하기 위하여 어떤 종류의 역사적 시리즈들로 만들어 나갔다; 그리고 이것은 그들에게 아주 높은 등급에서 기쁨을 주었다. 이 문체로부터 한나가 예언했다, 말하기를: 높고, 높은 것을 말하라! 고대의 것이 네 입으로부터 나오게 하라 (삼상 2:3). 이런 표현들이 다윗서에서 “옛 (시절)로부터의 어두운 말들”이라 일컬어졌다. 창조에 관한 세부 사항들, 에덴의 동산, 등등, 아브람의 때까지 내려온 것들을 모세가 태고 교회의 후손들로부터 가졌다.
두 번째 문체는 역사물이다. 이는 안쪽으로는 아브람의 때로부터 있는 모세의 책들에서 발견된다. 그리고 여호수아, 사사기, 사무엘, 열왕기로부터의 말씀에서 발견된다. 이 책들 안에서 역사적 사실들은 그것이 글자의 의미에서 나타내는 것과 같다; 그럼에도 그것들 모두는 내적 의미에서는 아주 다른 것들을 일반적, 세부적 측면 모두에서 포함하고 있다. 이 책의 의미는 주님의 신성한 자비로부터 뒤이어지는 페이지들에서 그것들 순서 안에서 (열거 된다).
세 번째 문체는 예언적인 것이다. 이것은 태고 교회에서 아주 높게 받들어 모시다시피 해 왔던 말들로부터 태어났다. 어쨌든 이 문체는 태고 교회 문체처럼 연결되거나 역사적 형체 안에 있지 않고, 깨어져 있고, 내적 의미 안에서가 아니면 이해는 불가능에 가까웁다. 그러나 그 안에는 가장 깊은 비밀들이 있다. 그리고 이 비밀들은 아름답게 연결되는 질서를 따르고 있다. 그러면서 외적 인간과 내적 인간에; 교회의 많은 상태들에; 천국 자체에; 그리고 가장 깊은 의미에서 주님에 관련되고 있다.
네 번째 문체는 다윗의 시편들의 것이다. 이는 예언적 문체와 통상적 (우리의) 언어 사이인 중간에 해당되는 문체이다. 여기서 주님은 왕으로서의 다윗이라는 인물 아래, 내적 의미 안에서 취급되시고 있다.

창세기 제 38 장

창세기 제 38 장

1-5절. 그리고 이 때에서 있었다. 그리고 유다는 그의 형제들로부터 아래쪽으로 갔다, 그리고 남자, 아둘람족에게로 까지 길을 잘못 들어섰다, 그리고 그의 이름은 히라였다. 2 그리고 유다는 거기서 가나안족 남자의 딸을 보았다, 그리고 그녀의 이름은 수아였다. 그리고 그는 그녀를 데려왔다, 그리고 그녀에게 왔다. 3 그리고 그녀는 임신했고 아들을 낳았다, 그리고 그는 그의 이름을 엘이라 불렀다. 4 그리고 그녀는 다시 임신했고 아들을 낳았다, 그리고 그녀는 그의 이름을 오난이라 불렀다. 5 그리고 그녀는 다시 더 임신해서 아들을 낳았다, 그리고 그녀는 그의 이름을 셀라라고 불렀다. 그리고 그는 그녀가 그를 낳을 때 그집에 있었다.

그리고 이 때에서 있었다. 이는 뒤따라오는 것들의 상태를 의미한다. 이는 “때(time)”의 의미가 상태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뒤이어지는 것들의 상태이다가 “이 때에서 있었다(it came to pass in this time)”라고 말해짐에 의해 의미되고 있다; 그 이유가 …있었다는 것은 뒤이어지는 것과 관련이 있다는 말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시리즈에서 뒤이어지는 것들은 앞의 시리즈로부터 흐르고 있다. 즉 앞 장에서의 것은 대체로 야곱의 아들들이 요셉을 판 것, 그를 팔아버리자고 설득한 자가 유다였다는 것; 이 말을 했다, “유다가 그의 형제들에게 말했다, 우리가 우리의 형제를 죽이고, 그의 피를 감춘다고 무슨 이득이 있는가? 가서 그를 이스마엘 사람에게 팔자” (26, 27절), 이 구절에 의해 신성한 진리가 그들에 의해, 특히 유다에 의해 멀어진 것이 의미되었고, 대략적 의미에서 유다에 의해서는 유다 지파가 의미되고, 일반적으로는 선이라면 무엇이든 모든 선에 반대하도록 자신을 타락되게 해버린 교회인을 의미한다. 이것들이 “이 때에서”라고 말해짐을 수단으로 관련되고 있다; 그 이유가 지금 취급되려는 주제가 유다이고, 가나안족 여인에 의해 그의 아들들의 출생에 관련된 것, 그리고 그 후에 자기 며느리 다말에 의한 아들의 출생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사항들을 수단으로 이 지파와 더불어 설립되는 교회의 것들에 관련되는 유다 지파가 내적 의미에서 서술된다.
“때”에 의해 상태가 의미된다는 것, 이로부터 “이 때에서 있었다”에 의해서는 뒤이어지는 것들의 상태가 의미된다고 말한 것을 두고 아마 의아히 여겼을지 모른다; 그 이유는 “때(time)”라고 생각한 것이 어떻게 상태(state)로 바꾸어질 수 있는지를 납득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는 말씀에서 흔히 등장하는 “때”가 상태에 관련되는 어떤 것으로 어떻게 이해되어지는 가를 모르고 있어서 이다. 우선 알아야 하는 것은, 천사들의 생각들은 시간 또는 공간으로부터 어떤 것을 끌어내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그들이 천국에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우리들(인간)이 세상을 떠날 때, 더불어 우리들은 시간과 공간의 관념도 떠나고 (시간과 공간을 근거로 하여 생각할 수 없고), 그 대신 우리들은 상태의 관념을 (옷)입는다. (거기는 시간과 공간이 없고 상태밖에 없기 때문이다.); 입게 되는 상태는 (천국에서의 경우) 선과 진리의 상태에 관한 관념이다. 그러므로 인간이 말씀을 읽을 때, 그때 시간에 관해, 또는 시간에 속한 것들에 관해 생각하는 동안, 당사자와 더불은 천사들은 시간의 어떤 것을 지각하지 못하고, 그 대신 그것에 상응하는 상태 속의 어떤 것을 지각한다. 인간의 경우도 그의 내면의 생각들로부터는 시간을 지각하지 않고, 그의 외면의 생각들로부터만 시간의 관념 속에 있다. 예를 들면, 인간의 외면의 생각이 상대적으로 많이 누구러뜨려져 있는 때가 잠자는 때임을 여러분 스스로 집념해보면 납득될 것이다. 이외 더 많은 경험도 (나에게는) 있다.
이쯤해서 알아야 하는 한 가지 것은 상태에는 두 가지, 즉 선의 상태와 진리의 상태가 있다는 것이다. 선의 상태는 있음(being, 존재 자체)의 상태라 불리우고, 진리의 상태는 존재 안으로 옴(공표, 公表, 보이도록 세상에, 자연계에 나타남, 영계에서 나타남이 아님)의 상태라고 불리운다. 그 이유가 있음은 선 속에 있고, 이로부터 존재 안으로 옴이 진리 속에 있기 때문이다. 공간은 있음의 상태와 상응하고, 때(시간)는 존재 안으로 옴의 상태와 상응한다. 그러므로 인간이 “이 때에 있었다”라고 읽을 때, 천사들은 인간이 생각하는 것을 결코 생각하지 않는다. 이는 다른 구절들에서도 마찬가지 이다. 말씀에서 쓰여진 것은 무엇이든 천사와 더불어서는 상응하는 의미로 바뀌는 속성을 당연히 지니고 있어, 천사의 성경(내적 의미로 읽히는 성경)은 인간이 읽는 성경(글자 의미에서의 성경)에서는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그 이유는 글자 의미로부터의 세상적인 것이 내적 의미의 영적인 것으로 변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유다는 그의 형제들로부터 아래쪽으로 갔다. 이는 야곱의 후손, 특히 유다 지파가 그 나머지 지파로부터 분리되었음을 의미한다. 이는 유다의 표현함이 보편적 의미에서 야곱의 후손이다로부터, 그리고 특별한 의미에서는 유다 지파라고 불리게 되는 지파이다로부터; 그리고 “형제들로부터 아래쪽으로 감”의 의미가 나머지 지파들로부터 분리되어진다는 것, 여기서는 자기 형제들의 악보다 더 센 악 안으로 가는 것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 이유가 “아래쪽으로 감, going down”은 악쪽인 아래로 던져지는 것을 포함하기 때문, 마치 그 반대인 “위쪽으로 감, going up”이 선쪽으로 승강함인 것과 같은 논리이다(3084, 4539항). 이에 대한 이유는 이미 말했듯이, 가나안의 토지가 주님의 왕국, 그리고 이 토지의 가장 안쪽인 예루살렘과 시온을 표현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토지의 경계선 바깥 지역들은 주님의 왕국의 바깥쪽인 것들, 즉 거짓과 악을 표현했다. 그러므로 시온과 예루살렘으로부터 경계선쪽을 향하여 감은 “아래쪽으로 감, 내려 감”이라 불리웠고; 경계선으로부터 예루살렘과 시온으로 감은 “위쪽으로 감, 올라 감”이라 불리웠다. 그러므로 “위쪽으로 감”은 참되고 선인 것쪽으로 승강함을, “아래쪽으로 감”은 거짓되고 악한쪽으로 아래로 내던져지는 것을 포함한다. 여기서 유다 지파가 자체를 거짓과 악쪽인 아래쪽으로 던졌다가 취급되기에, 말해지는 바, 유다는 “아래쪽으로 갔다”라고, 그때 그는 “인간, 아둘람족쪽으로 길을 잘못 들어섰다”라고 말해진다; “길을 잘못 들어섬”에 의해 거짓쪽으로 돌아섬, 그리고 그 후에 악쪽으로 돌아섬이 의미된다.
유다 지파가 나머지 지파들로부터 분리되었는데, 그 이유는 이 지파가 주님의 천적 왕국을, 나머지는 그분의 영적 왕국을 표현하도록 하시려는 때문이었다. 이런 이유로 유다는 표현적 의미에서 천적 인간, 보편적 의미에서 주님의 천적 왕국; 그리고 나머지 지파들은 한 개의 이름으로, 즉 “이스라엘족, 이스라엘 지파”에 의해 불리우고. 이스라엘은 표현적 의미에서 영적 인간, 보편적 의미에서 주님의 영적 왕국이다.
유다 지파가 나머지 지파들보다 더 센 악쪽으로 아래로 간 것이 이 말들에 의해 특별히 의미되었다: “유다는 그의 형제들로부터 아래쪽으로 갔다, 그리고 길을 잘못 들어섰다.” 유다 지파가 나머지들 보다 더 악하게 된 것은 다른 구절로부터도 알게 된다. 즉:
그녀의 불충한 자매 유다는 이스라엘이 다시 잘못하는 갖은 방법을 동원해 간음을 범할 때, 내가 그녀를 떠나보내고, 그녀에게 이혼 증서를 준 것을 보았다; 그럼에도 불충한 유다 그녀의 자매는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 역시 가서 매춘을 범했다, 하여 매춘의 음성을 수단으로 토지가 모독되었다, 그녀는 돌과 나무로 간음을 범했다; 그럼에도 모든 이런 것을 위하여 불충한 유다는 나에게 되돌아오지 않았다; 불충한 이스라엘이 불충한 유다보다 그녀의 혼을 더 정당하게 하였다 (예.3:7-11).
그리고 에스겔서에서:
그녀의 자매는 정말로 보았다, 그럼에도 그녀는 그녀보다 그녀의 사랑을 더 썪게 했다, 그리고 그녀의 매춘은 그녀의 자매의 매춘 위 이었다 (겔. 23:11-끝절);
예루살렘과 사마리아에 관해서, 또는 유다와 이스라엘에 관해서 말하고 있다.
내적 의미에서 어떻게 지파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거짓으로, 이로부터 악 안으로, 마지막으로 우상 안으로 빠져드는 지를 묘사하고 있다. 이것은 이 지파가 나머지 지파로부터 분리되기 이전, 그렇게 되었기 이전을 내적 의미에서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내적 의미에서 있는 것은 신성이고, 신성한 미래의 것들 쪽이 표출되고 있다 (이 민족에 관해 미리 말해진 것에 관하여는 신. 31:16-22; 32:15-44를 보라.)

그리고 아둘람족, 남자에게로 길을 잘못 들었다. 이는 거짓을 의미한다. 이는 “길을 잘못 들어 섬”의 의미가 잘못된 것쪽으로 가버림이다로부터 알게 되는데, 그 이유는 “길을 잘못 들어서다”가 “아래로 가다” 같이 선으로부터 악으로 멀리 옮겨짐, 그리고 진리로부터 거짓으로 멀리 옮겨짐을 서술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남자(vir)”의 의미가 총명한 자, 추상적 의미에서는 진리이다로부터, 그 이유는 진짜 지적인 것은 진리들로부터 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반대적 의미에서 총명하지 않은 자, 결과적으로 거짓이 의미된다. 이 거짓이 아둘람족에 의해 의미된다, 그 이유가 아둘람은 유다의 상속분의 경계에 있었기 때문 (여. 15:35), 그러므로 해서 선으로부터 있는 진리가 의미된다; 미가서에서:
그럼에도 나는 네게 상속인을 데려올 것이다, 오 마렛사 거주민아, 아둘람에게조차 이스라엘의 영광이 올 것이다 (미. 1:15);
그러나 말씀에 있는 대부분의 것들이 반대적 의미 또한 가지는 바, 아둘람 역시 그러한 바, 이 때는 악으로부터의 거짓을 의미한다. 대부분의 것들이 반대적 의미 또한 가지는 이유는 토지를 누가 차지하고 거주하느냐에 의존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의 이름은 히라였다. 이는 그것의 품질을 의미한다. “이름”과 “이름을 부름”의 의미가 품질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방금 위에서 말해진 거짓의 품질이 의미된다; 그 이유가 말씀에서 장소와 인물 모두의 이름은 상태와 어떤 것들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유다는 거기서 가나안족 남자의 딸을 보았다. 악의 거짓으로부터 악에 애착함을 의미한다. 이는 “딸”의 의미가 선에 애착함이다로부터, 그리고 반대적 의미로는 악에 애착함이다로부터; 그리고 “남자”의 의미가 총명한 자, 추상적 의미에서, 그러나 반대적 의미에서는 총명하지 않은 자, 거짓이다로부터; 그리고 “가나안족”의 의미가 악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로부터 분명해지는 바, “가나안족 남자의 딸”에 의해 악의 거짓으로부터 있는 악이 의미된다는 것이다. 악의 거짓으로부터의 악이 무엇인지는 아래에서 살핀다.
여기서 먼저 말해두어야 하는 것은 유다 지파의 근원에 관하여이다; 그 이유는 그들이 이 장에서 묘사되기 때문이다. 이 지파, 또는 유태 민족의 근원은 셋이다: 즉 셀라로부터, 그리고 유다의 며느리 다말에 의한 유다의 아들들, 베레스가 둘째 근원이고, 셋째 근원은 세라이다. 유태 민족 전체가 유다의 이 세 아들들로부터 이었다는 것은 야곱과 더불어 이집트로 간 야곱의 아들들과 손자들이 열거된 구절로부터(창. 46:12); 또한 가문들에 따른 그들의 분류로부터 분명한데, 모세의 책에서:
그들의 가문들에 따른 유다의 아들들은 이렇다: 셀라로부터, 셀라족의 가문; 베레스로부터, 베레스 족의 가문; 세라로부터, 세라족의 가문 (민. 26:20; 역상 4:21);
이것은 이 민족의 근원이 무엇이었는지를, 즉 삼분의 일은 가나안족의 어머니로부터; 삼분의 이는 며느리로부터 였다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모두는 불법적 연결로부터 였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가나안족의 딸들과의 결혼은 엄격히 금지되었기 때문이다 (창. 24:3; 출. 34:16; 신. 7:3; 왕상. 11:2; 스. 9: 10), 그리고 며느리와 눕는 것은 사형에 처할만한 위반이었음이 모세의 책으로부터:
만일 누가 그의 며느리와 눕는다면, 그들 둘 다 정녕 죽음에 놓일 것이다; 그들은 혼동을 작업했다; 그들의 피는 그들 위에 있을 것이다 (레. 20:12).
유다가 자기 며느리와 있었던 행위를 형제에 관련해 만들어 놓은 역연혼 법에 관련시키고, 아버지에 관련해서는 이에 관련시켜서가 결코 아닐 경우, 다말에 의한 자기 아들들은 그의 장자 엘, 즉 가나안의 어머니로부터 태어났고, 여호와의 눈에 보이기에 악이었고, 그러므로 죽게 되었던 아들의 아들들로서(7절) 인정되어야 할 것임을 함축하고 있다; 그 이유가 남편의 형제에게 처음 출생한 이들은 임신되게 한 자의 것이 아니고, 형제의 씨를 일으킨 것 뿐이다가 신. 25:5, 6와 본문 8, 9절에서 분명해진다. 더욱이 다말로부터 출생한 이들은 간통(간음)으로부터 였다; 그 이유가 유다가 그녀에게 접근했을 때, 그는 그녀를 매춘부(harlot)로 생각했었기 때문이다(15, 16, 21절). 위의 사항들은 유다 민족의 근원이 어디서, 그리고 무슨 품질 속에 있었는지를, 그리고 그들이 “우리는 간음(fornication)으로부터 태어나지 않았다”하고 말했을 때 (요. 8:41)의 경우까지도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이 근원이 포함하고 표현하는 것은 그들의 내면들이 이런 품질 속에 있었다는 것, 또는 이런 근원을 가졌다는 것을 이어지는 구절들이 보여준다. 유다가 가나안족과 결혼함은 악의 거짓으로부터인 악의 근원을 포함한다, 그 이유는 이것이 “가나안족 남자의 딸”에 의해 내적 의미에서 의미되기 때문이다; 그가 며느리와 눕는 것은 악으로부터 왜곡된 진리로부터 저주됨을 포함하고 표현한다, 그 이유가 말씀 어디에서나 매춘(whoredom)은 진리를 거짓화함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악의 거짓으로부터의 악은 자기 사랑의 악에 의해 부화되어 왔던 거짓 교리로부터 있는 생활 속의 악이다; 그리고 이 생활 속의 악을 말씀의 글자 의미를 수단으로 확증한 악이다. 이와 같은 악이 유태 민족과 더불은 악의 근원이다, 그리고 이와 같은 악이 기독 세계의 어떤 이들과 더불은 그것의 악, 특히 바빌론에 의해 뜻해진 말씀 안에 있는 이들과 더불어서의 악이다. 이 악은 내적 인간을 닫아지게 하는 속성을 지녔으므로, 닫아진 만큼 양심의 어떤 것도 거기에서 형성되어질 수 없다; 그 이유가 한 인물이 거짓 교리로부터 행동된 악은 당사자가 그것을 선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허용되기만 하면, 그는 자유로이 기쁨으로 그것을 실행한다. 고로 천국은 그에게서 닫혀져 있어 그것이 열릴 수가 없다.
이 악의 품질은 예를 들어야 알게 될는지 모른다. 자기 사랑의 악으로부터 있는 이들과 더불어 믿어지는 것은, 여호와께서는 단 하나의 민족을 선택하셨다는 것, 그리고 나머지 민족들은 상대적으로 노예들이다는 것, 또한 심히 무가치한 바, 죽여도 되고, 잔인하게 취급해도 된다; 이렇게 유태 민족은 믿어 왔던 바, 오늘날 바빌론식의 민족도 그러한 바, 그들은 이 신조를 말씀의 글자로부터 확증한다. 하여 만들어진 거짓 교리를 기초로 해서 그들은 무슨 악행이든 실행한다. 이것이 악의 거짓으로부터의 악이다, 그리고 내적 인간을 파괴한다, 그리고 어떤 양심도 거기에서 만들어지는 것을 방해한다. 이들이 말씀에서 “피들에서”라고 말해지는 이들이다. 그 이유가 그들은 자기들의 신앙의 조항들을 찬양하지 않는 인류에 대하여 잔인한 격노 안에 있기 때문이다.
다른 예를 더 살펴보자: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의 악으로부터 있는 이들과 더불어 믿어지는 것은, 땅 위에서 주님의 대행자가 있음에 틀임 없다는 것, 그가 천국을 열고 닫는 권능을 지닌다는 것, 고로 모든 이의 마음과 양심을 통치한다는 것, 이 거짓을 말씀의 글자로부터 확증하고, 이로부터 실행되는 악은 무엇이든 그것은 악의 거짓으로부터의 악이다. 이 악도 이 악과 더불어 있는 이들의 내적 인간을 파괴한다. 게다가 이 악은 대단한 파괴력이 있어 그들은 더 이상 내적 인간이 무엇인지도 모른다, 결과적으로 누구도 양심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들은 사후 어떤 삶이 있다는 것, 천국과 지옥을 어떻게 말하든 더 이상 믿지 않는다.
이 악을 품질만에 주목하면, 세상의 인간들은 이 악을 다른 악들로부터 구별해낼 수 없다, 그러나 다른 삶에서는 청명한 날 보듯 천사들에 의해 알려진다; 그 이유가 악들과 거짓들은 다른 삶에서는 근원과 품질로부터 구분되어 명백해지기 때문이다, 이것의 무수한 종과 속으로의 구분이 지옥의 것들이기 때문이다. 이 무수한 차이를 인간은 거의 알지 못하고 단지 악이 존재한다고만 알 뿐, 그것의 품질을 알지는 못한다. 이런 이유는 단 하나, 그가 선이 무엇인지를 모르기 때문, 선행이 무엇인지를 모르기 때문이다; 만일 그가 선행의 선을 알았다면 그는 그와 반대되는 것, 또는 악들을 구분지어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녀의 이름은 수아였다. 이는 그것의 품질을 의미한다. 이는 “이름”이 품질이다로부터, 여기서는 악의 거짓으로부터의 악의 품질이다.

그리고 그는 그녀를 데리고 갔다, 그리고 그녀에게 왔다. 이는 유다 지파는 그 자체를 이러한 것들에, 즉 악의 거짓들로부터의 악들에 결합되게 했다를 의미한다. 이는 “그녀를 데리고 감”, 즉 여인으로 데리고 감, 그리고 “그녀에게 옴”, 또는 “그녀에게 들어감”의 의미가 결합되어지는 것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는 여러 차례 설명했다. 내적 의미에서 결혼들은 선과 진리의 결합을 표현하는데, 이것이 그것들의 (영계에서의 결혼들의) 근원이다, 그러나 반대적 의미에서는 악과 거짓의 결합, 여기서는 유다 지파가 악과 거짓과 결합함이다; 그 이유가 이것이 유다를 놓고 말해지기 때문, 그리고 유다를 따라 명명된 지파가 유다 지파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유의할 것은, 그가 그녀를 아내로서 데려갔다가 아니라 막연히 그가 그녀를 데려갔다, 그리고 그녀에게 왔다 라고 말해진 것이다. 그 이유는 이 결합은 불법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은 결혼이 아니었다, 그러나 매춘이었다, 고로 그녀로부터 출생한 아들들은 매춘으로부터 출생되었다는 것을 암묵적으로 암시하고 있다. 악이 거짓과 결합함은 이런 것밖에 더 아니다. 이 후에 그녀는 그의 아내라고, 즉 12절에서 “그리고 날들이 많이 불어났다, 그리고 수아의 딸, 유다의 아내는 죽었다”라고 서술되고 있다. 이는 그 구절에서 살핀다.

그리고 그녀는 임신했고 아들을 낳았다. 이는 교회의 거짓이 거기서부터 파생되었음을 의미한다. 이는 “임신하고 낳는다”의 의미가 신앙과 행동으로 인정하는 것이다로부터; 그리고 “아들”의 의미가 교회의 진리이다로부터, 여기서는 반대 의미인 바, 거짓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러므로 그녀에 의해 “아들을 임신하고 낳는다”는 유다 지파와 더불은 교회가 신앙과 행동으로 거짓을 인정함이 의미된다. 이 아들에 의해 교회의 신앙이 의미되는 이유는 그가 첫 출생이었기 때문, 그리고 고대 교회에서 “첫 출생”에 의해 신앙의 진리가 의미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반대적 의미에서 거짓이 의미되는데, 이것은 이집트에서 인간과 짐승의 첫 출생에 의해서도 마찬가지로 의미된다. 진리 아닌, 거짓이 의미되는 이유는 이어지는 7절에 말해진 것 때문인데, 즉 “엘, 유다의 첫 출생, 여호와 눈에서 악이었다, 그리고 여호와께서는 그를 죽게 하셨다” 때문이다. 이 아들의 이름, 엘은 이런 품질을 포함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둘째 아들 오난 또한 그의 품질은 잘못된 것, 또는 악인 것을 포함한다.

그리고 그는 그의 이름을 엘이라 불렀다. 이는 그것의 품질을 의미한다. 이는 “이름을 부름”의 의미가 품질이다로부터, 즉 교회의 거짓의 품질이다. 거짓의 품질이다고 말해진 이유는 거짓들이 서로로부터 다르기 때문이다, 진리들의 경우도 마찬가지 이다. 각기 다른 수준의 것들이 각기 다른 종류로 열거된다. 각기 다른 종류는 서로로부터 구별된다. 모두 각각의 교회에서 교회들을 타락시키는 일반적인 거짓들이 있다, 그리고 거짓은 모든 이 각각의 생명에 따라 교회 안에서 다양해진다. 여기서는 유태 교회 안에서 있었던 거짓이 취급되고, 이는 자기 사랑과 이 사랑에서 파생되는 세상 사랑의 악으로부터의 거짓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다시 임신했고 아들을 낳았다. 이는 악을 의미한다. 이는 아들의 의미가 진리, 그리고 또한 선이다로부터; 고로 반대 의미에서는 거짓, 또한 악이다, 이 악은 거짓으로부터 있는 악이다. 이 악은 그것의 본질 측면에서는 거짓이다; 그 이유가 거짓 교리로부터 악인 것을 행하는 자는 거짓인 것 또한 행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행동에서 행해지기 때문에 이것은 악이라 불리운다. 첫 출생에 의한 아들에 의해 거짓이 의미되고, 이 거짓을 수단으로 악이 의미된 것이 행동에서 악을 행한 둘째 아들, 즉 “그는 그의 형제에게 씨를 주지 않으려고, 땅쪽으로 씨를 파괴했다”와 연관되고 있다. “그리고 그가 행한 것은 여호와의 눈에서 악이었다; 그래서 그분은 그 또한 죽게 하셨다” (9, 10절). 여기서도 역시 이 악은 거짓으로부터 이었음이 분명해진다. 더욱이 고대 교회에서 둘째 아들에 의해서는 행동에 있는 신앙의 진리가 의미되어졌다; 그러므로 둘째 아들에 의해서는 행동에 있는 거짓이, 즉 악이 의미되었다. 악이 엘에 의해 의미된 것은 첫 출생 엘이 그의 아버지, 유다에 의해 이름지어졌다는 사실로부터; 한편, 오난은 그의 어머니, 수아의 딸에 의해 이름지어졌다는 사실로부터도 알게 된다. 이는 원어에서 알는지 모른다. 말씀에서 “남자(man)”에 의해 거짓이, “여인”에 의해 거짓으로부터의 악이 의미된다. 수아의 딸에 의해 악이 의미되는 것은 앞에서 말했다. 그러므로 엘, 아버지에 의해 이름지어졌기 때문에 거짓을 의미하고, 오난, 어머니가 이름지었기 때문에 악을 의미한다; 전자는 마치 아버지의 아들인 듯하게, 후자는 어머니의 아들인 듯하게 있다.
말씀에서 “남자와 아내”, 또한 “남편과 아내”는 종종 언급된다; 그리고 “남자와 아내”가 언급될 때, “남자”에 의해 진리가, “아내”에 의해 선이; 반대적 의미에서는 남자는 거짓을, 아내는 악을; “남편과 아내”의 경우에서는 “남편”에 의해 선이, “아내”에 의해 진리가, 반대 의미에서는 남편은 악을, 아내는 거짓이 의미된다. 이 신비함에 대한 이유는 이렇다: 천적 교회에서 남편은 선 안에 있고, 아내는 선으로부터의 진리 안에 있다; 영적 교회에서 남자는 진리 안에 있고, 아내는 이 진리로부터의 선 안에 있다. 이렇게 그때 있었던 것이 지금도 그렇게 있는 것이다, 그 이유는 인간의 내면들이 이 바뀜을 수행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말씀에서 천적인 선과 그것으로부터의 천적 진리가 취급되는 곳에서는 “남편과 아내”라고 말해진다; 그러나 영적 선과 그것으로부터의 영적 진리가 취급될 경우, “남자와 아내”, 오히려 “남자와 여인”이라고 말해진다. 표현들 자체로부터도 알려지는 것은 어떤 선과 어떤 진리가 말씀의 내적 의미에서 취급되는지 이다.
이것 역시 결혼들은 선과 진리, 그리고 진리와 선의 결합을 표현한다고 때때로 서술해왔던 이유이기도 하다. 더욱이 부부의 사랑은 그것의 근원을 선이 진리와 결합함으로부터 있다는 것, 영적 평면과 더불은 부부의 사랑은 진리가 선과 결합함으로부터 있다는 것이다. 결혼들 역시 이 결합들에 실제로 상응한다. 이상 모두로부터 분명해지는 바, 아버지가 첫아들의 이름을 짓는 것, 어머니가 둘째의 이름을 짓는 것, 셋째 또한 이름을 짓는 것에서 포함된 것은 원어에서 나타나듯, 즉 아버지가 첫째를 이름진 것은 그에 의해 거짓이, 둘째는 악이 의미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녀는 그의 이름을 오난이라 불렀다. 이는 그것의 품질을 의미한다. 즉 이는 위에서 말한 대로 악의 품질을 의미한다. 이는 “이름을 부름”이 품질이고, “오난”은 악의 품질을 의미하고 포함한다.

그리고 그녀는 추가로 임신해서 아들을 낳았다. 이는 우상적인 것을 의미한다. 이는 여기서의 “아들”의 의미가 우상적인 것이다로부터 인데, 그 이유는 앞서 태어났던 아들들이 거짓과 악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셋째 아들은 우상적인 것을 뜻하는데, 그 이유는 거짓과 악이 다함께 생산하는 것이 우상적인 것들을 생산하고 그것 안에 있기 때문이다. 가나안족의 여인으로부터 유다에게 출생한 셋째 만이 생존한 유일한 아들이고, 이로부터 유다 민족의 삼분의 일이 왔다; 그리고 이 민족이 우상적인 것으로부터 그것의 일어남을 가졌다는 것이 내적 의미에서 여기서 뜻해진다. 이 민족이 우상숭배쪽으로 아주 쉽게 돌아섰다는 것은 말씀의 글자 의미에 따른 역사적, 예언적 부분에서 분명해진다; 그리고 이것이 계속적으로 우상 숭배를 하였다는 것이 내적 의미로부터 분명해진다. 그 이유가 우상숭배는 우상들, 새긴 형상들, 여타 신들 뿐만 아니라, 내적인 것 없는 외적인 것만을 예배함에 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이 민족은 계속적으로 우상숭배를 하였고, 외적인 것만을 숭배하고, 내적인 것들은 통째로 제거하고 아예 알고 싶어하지도 않았다. 참으로 그들은 그들과 더불어 거룩한 것들을 가졌다, 즉 만남의 천막, 궤와 더불어, 그 위에 자비석, 빵덩어리가 진열된 식탁, 등잔대, 향, 천막 바깥의 제단, 그 위에서 태워바침과 제물 바침이 있었다, 이런 모든 것은 거룩하다 불리웠다; 그리고 천막의 가장 안쪽은 거룩들 중의 거룩이라 불리웠다, 또한 성소라고 불리웠다. 그들은 아론과 그의 대성직자들에 속한 의복들을 가졌다; 거기에 우림과 둠밈이 있었던 가슴받이와 더불은 에봇이 있었다, 이 외에도 많은 다른 것들이 있었다. 그럼에도 이런 것들은 그 자체로 거룩하지 않았다, 그러나 거룩한 것들을 표현함으로부터, 즉 주님의 왕국의 천적, 영적인 것들을, 또한 주님 자신을 표현함으로서 거룩하였다. 그들은 자신들과 더불어서는 더욱 덜 거룩하였는데, 그 이유는 백성들이 표현된 것의 내적인 것들로부터서는 전혀 감동되지 않고 오직 외적인 것만에 감동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외적인 것들만에 의해 감동되는 것이 우상 숭배이다; 그 이유가 나무나 돌, 이것들을 덮은 은이나 금을 예배하는 것이 그들이 그것 자체로 거룩하다는 몽상으로부터 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것이 그 민족인데, 오늘날도 그렇다.
그러나 아직도 그들과 더불어 있을는지 모르는 것은 교회의 표현물이다, 그 이유는 표현물은 인물을 중요시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것을 중요시하기 때문이다. 그들의 예배는 그들을 복되고 행복하게 만들지 못했다, 그러나 그들이 표현함 안에 있는 한, 세상에서의 번영만이었다, 그리고 이방인들의 우상들쪽으로 길을 바꾸지도 않았다, 고로 우상숭배자가 되었다; 그 이유가 그때 교회의 어떤 것도 이 민족과 더불어 더 이상 표현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것들이 가나안족 여인에 의한 유다의 셋째 아들에 의해 의미된 우상숭배적인 것에 의해 뜻해진 것들이다. 이 민족과 더불은 이 우상 숭배는 그것들의 근원이 내적 우상 숭배로부터 이다, 그 이유가 그들은 여타 민족들보다 더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 안에 있었기 때문; 그리고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 있는 이들이 내적 우상 숭배 안에 있기 때문, 그 이유가 그들은 자신들과 세상을 예배하고, 거룩한 의식 준행을 자기 숭배와 이득을 위하여 수행하기 때문, 즉 목적으로서 자아를 놓기 때문, 주님의 교회와 왕국이 목적이 아니다, 고로 주님을 위하여가 아니다.

그리고 그의 이름을 셀라라고 불렀다. 이는 그것의 품질을 의미한다. 이는 “이름을 부름”의 의미가 품질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우상 숭배의 품질이 셀라에 의해 의미된다, 그 이유는 거기에 많은 우상 숭배들이 있기 때문, 이에는 외적 우상 숭배와 내적 우상 숭배가 있다, 일반적으로는 모두 거짓과 악으로부터 예배함이다.

그리고 그는 그녀가 그를 낳을 때 그집에 있었다. 이는 상태를 의미한다. 이는 “그집(Chezib)”의 의미가 상태이다로부터 , 즉 셀라에 의해 의미된 우상 숭배의 상태이다, 이 안에 유태 민족이 있었다; 그리고 “낳다”의 의미가 행동에서 결합되는 것이다로부터; 그리고 결합이 우상 숭배 안에 있는 악과 더불어 있었기 때문에 말해지는 바 “그녀”가 그의 이름을 셀라라고 불렀다, 이는 원어에서 나타나는 바이다; 그 이유가 “그녀”, 즉 수아의 딸에 의해 악의 거짓으로부터의 악이 의미되기 때문이다.

6-10절. 그리고 유다는 그의 장자 엘을 위하여 여인을 데려왔다, 그리고 그녀의 이름은 다말이었다. 7 그리고 유다의 장자, 엘은 여호와의 눈에서 악이었다; 그리고 여호와께서는 그를 죽게 하셨다. 8 그리고 유다는 오난에게 말했다, 네 형의 아내에게 오라, 그리고 그녀에게 남편의 동생된 의무를 수행하라, 그리고 네 형의 씨를 일으키거라. 9 그리고 오난은 그 씨가 자기 것일 수 없음을 알았다; 그리고 그가 그의 형의 아내에게 왔을 때이다, 그는 그것을 땅쪽으로 파괴하여서, 그의 형에게 씨를 주지 않도록 했다. 10 그리고 그의 이 짓은 여호와의 눈에서 악이었다. 그리고 그분께서는 그 또한 죽게 하셨다.

그리고 유다는 여인을 데려왔다. 이는 그의 후손을 위하여 있었던 교회를 의미한다. 이는 다말, 여기서는 “여인”의 표현함이 교회이다로부터, 이는 아래에서 살핀다. 이것이 유다의 후손을 위하여 있었다는 것은 유다가 그의 첫 출생 엘을 위하여 그녀를 데려옴, 그리하여 그가 거기로부터 자손을 가지도록 함에 의해 의미되어져 있다.

그의 첫 출생 엘을 위해서. 이는 신앙 속의 거짓을 의미한다. 이는 엘의 표현함이 거짓이다로부터; 그리고 “첫 출생”의 의미가 신앙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리고 그녀의 이름은 다말이었다. 이는 그 교회의 품질, 영적이고 천적인 것들을 표현하는 교회를 의미한다. 이는 “이름”의 의미가 품질이다로부터, 여기서는 교회의 품질이다, 그 이유는 이 장에서 다말에 의해 교회가 표현되기 때문, 그리고 유다의 후손 사이에 설립되어지기로 되어 있었던 영적이고 천적인 것들을 표현하는 교회가 표현되기 때문이다. 이 교회가 다말에 의해 표현되는 것은 뒤이어지는 구절로부터 분명해진다. 이 38장 전체는 내적 의미에서 유태 교회가 취급되고, 이 교회는 고대 교회가 지녔던 것 같이 주님의 왕국의 천적, 영적인 것들을 표현하게 되어야 한다는 것을 취급한다; 그리고 이것은 외적 형체에서 뿐만 아니라 내적 형체에서도 그러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 이유가 교회는 외적인 것들부터, 즉 의식들로부터 교회가 아니고, 외적인 것들이 형식을 취하는 한편, 본질인 내적인 것들로부터 교회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야곱의 후손은 내적인 것들을 받기를 기꺼워하지 않는 상태 속에 있었다; 그러므로 그들과 더불어 고대 교회는 갱신되어질 수 없었고, 오직 그 교회의 껍데기(표현물)만을 이어갈 수 있었다. 여기서 교회의 내적인 것이 다말이다, 그리고 교회의 외적인 것은 유다와 가나안 여인에 의한 세 아들이다.

그리고 엘, 유다의 장자는 여호와의 눈에서 악이었다. 이는 그것은 악의 거짓 안에 있었음을 의미한다. 이는 엘의 표현함과 첫 출생의 의미가 신앙의 거짓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 거짓이 악의 거짓이었다는 것은 앞에서 말했다; 그러나 이 아들에 있는 악의 거짓의 본성은 교회의 껍데기조차도 그로부터의 후손 사이에 설립되어질 수 없었다; 그러므로 그는 “여호와의 눈에서 악이었다. 그리고 여호와께서는 그를 죽게 하셨다”라고 말해진다. 이 민족 전체는 그것의 근원, 특히 유다로부터 악의 거짓인즉, 생활의 악으로부터의 거짓 교리가 있었는데, 유다의 이 아들과 저 아들에게서는 조금씩 달랐다. 쓸모 있을는지 모르는 것이 예견되어졌다, 그런데 첫 출생 엘의 것은 아니었고, 둘째 오난의 것도 아니었고, 셋째인 셀라에 있는 것만이 쓸모 있다 말할 수는 없으나 보존은 가능했다. 그러므로 첫 둘은 파괴되었고, 마지막 것이 보존되어졌다. 악의 거짓이 이 전체 민족과 더불어 있었다는 것은 아래 모세의 책에 명백하게 묘사되어 있다:
그들은 자신들을 타락시켰다, 그들은 그분의 아들들이 아니다, 이것은 그들의 흠이다; 그들은 성미가 비꼬이고 꼬부라진 세대이다. 그리고 여호와께서 보시고 그들의 분노함 때문에 그분의 아들들과 그분의 딸들을 책망하셨다. 그리고 그분은 말하셨다, 나는 내 얼굴을 그들로부터 감출 것이다, 나는 그들의 후손이 무엇일 것인지를 볼 것이다; 그 이유가 그들은 심술궂음의 세대, 신의가 없는 아들들이다; 나는 그들 위에 악들을 더할 것이다, 나는 나의 화살을 그들 위에 소비할 것이다. 그들은 배고픔으로 지쳐 빠질 것이다, 그리고 타는 숯으로 살라질 것이다, 쓰라린 뒤집힘이 있을 것이다. 그들은 상담함들이 결여된 민족이다, 그리고 그들 안에 총명이 없다. 그들의 포도나무 는 소돔의 포도나무이고, 고모라의 들판의 것이다. 그들의 포도는 쓸개의 포도들이다, 그들의 포도송이는 쓴맛으로 있다; 그들의 포도주는 용들의 독이다, 그리고 독사의 잔인한 독이다. 이것이 나와 더불어 창고 안에 쌓여 있고, 내 보물들 안에 봉인되어 있지 않던가? 그들이 파괴되는 날이 임박해 있다, 그리고 그들 위에 와야 하는 것들이 성급함을 만든다 (신. 32:5, 1-24, 28, 32-35);
위 말들의 내적 의미에 의해 이 민족이 있었던 악의 거짓이 묘사되고 있다, 그리고 이것이 그들 안에 뿌리박혀 있다.

그리고 여호와께서는 그를 죽게 하셨다. 이는 거기에는 교회를 표현하는 것이 없음을 의미한다. 이는 “죽다”의 의미가 어떤 것이 있기를 중단하다 이다로부터, 또한 표현함의 끝이다로부터, 그러므로 여기서는 엘로부터의 어떤 후손 사이에서는 교회를 표현함이 있을 수 없었음이 의미된다.

그리고 유다가 오난에게 말했다. 이는 교회의 표현을 보존하기 위하여를 의미한다.
이는 뒤이어지는 구절로부터 분명해진다. 그 이유가 유다가 오난에게 형제의 의무를 수행하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이를 수단으로 교회의 계속과 보존이 표현되었다.

네 형의 아내에게 오라, 그리고 그녀에게 남편의 동생된 의무를 수행하라. 이는 그가 그것, 즉 교회의 표현을 계속해야 할 것임을 의미한다. 이는 형제의 아내에게 “오다” 또는 “들어가다”, 그리고 그녀에게 남편의 형제의 의무를 수행하는 것의 의미가 교회 속에 있는 것을 보존하고 계속하는 것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모세의 법에서의 명령은 만일 어떤 남자가 아이 없이 죽었다면, 그의 형제가 과부를 아내로 데려가서 그의 형제에게 씨를 일으키라고, 그리고 첫 출생은 죽은 형제의 이름에 의해 불리우고, 나머지 아들들은 그의 자신이 된다는 것이 “남편의 형제의 의무”라고 불리웠다. 이 규례는 유태 교회에서 발원한 새로운 규례는 아니었고, 이전에 사용되어 왔던 규례임은 이 역사로부터 분명해진다, 그리고 모세에 의해 이스라엘족들에게 명령된 많은 다른 규례들도 더 있다: 즉 그들은 가나안족의 딸들로부터 아내를 데려오지 말 것, 그들은 그들의 가문들 안에서 결혼해야 한다는 것 (창. 24:3, 4; 28:1, 2). 이런 것들로부터 분명해지는 사항은, 거기에 이전에 교회가 있어 왔다는 것, 이 교회 안에서 설립되어 왔던 규례들이 이 후에 야곱의 아들들 위에도 명령되고 선포되기도 했다는 것이다. 제단과 제물이 고대 시대로부터 사용되고 있었다는 것은 창. 8:20, 21; 22:3, 7, 8, 13으로부터도 분명해진다. 이로부터도 또 하나 명백한 것은 유태 교회가 새로운 교회는 아니었다는 것, 이것은 사멸된 고대 교회가 소생되었다는 것이다.
남편의 형제에 관련된 법이 있어 왔다는 것은 모세의 책에서 분명해진다:
만일 형제들이 함께 거주한다면, 그리고 그들 중의 하나가 죽는다면, 그리고 아들이 없다면, 죽은 자의 아내는 밖의 낯선 자에게 시집가지 말라; 그녀의 남편의 형제가 그녀에게로 들어갈 것이다, 그리고 그녀를 그에게 아내로 데려갈 것이다. 그 다음 그녀가 낳은 첫 출생은 그의 죽은 형제의 이름 위에 설 것이다, 하여 그의 이름은 이스라엘로부터 지워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만일 남자가 자기 형제의 아내에게 장가들지 않는다면, 그의 형제의 아내는 성문으로 원로들에게 갈 것이다, 그리고 말하라, 내 남편의 형제가 그의 형제에게 이스라엘에서 이름을 일으키기를 거절한다; 그는 나에게 남편의 형제의 의무를 수행하지 않는다. 그때 그의 도성의 원로들은 그를 부를 것이다, 그리고 그에게 말할 것이다; 그리고 만일 그가 서서 말하기를, 나는 그녀를 데려가기를 바라지 않는다; 그때 그의 형제의 아내가 원로들이 보는 앞에서 그에게 가까이 갈 것이다, 그리고 그의 신을 그의 발로부터 벗길 것이다, 그리고 그의 얼굴에 침을 뱉을 것이다; 그리고 그녀가 답하여 말하기를, 자기 형제의 가문을 건설하지 않는 남자에게 이렇게 대접하라; 이때로부터 그의 이름은 이스라엘에서, 자기 신발을 벗기운 자의 가문, 이렇게 불리울 것이다 (신. 25:5-10).
남편의 형제의 의미가 표현하는 것을 모르는 이들은 이 법이 이름을 보존하고, 상속을 위하여서만 있었던 법이라는 것 외의 다른 생각은 갖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형제가 형제의 아내와 결혼으로 들어가는 것은 이름을 보존하고 상속분을 보존하는 것 보다 더 중요한 것은 교회의 보존과 계속이다. 그 이유가 여기서의 결혼은 내적 의미에서 선과 진리의 결혼을, 즉 천국의 결혼을, 결과적으로 교회 또한 표현했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교회는 선과 진리의 결혼으로부터 교회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교회가 이 결혼 안에 있을 때, 교회는 천국과 하나를 만든다, 이것은 천국의 결혼 자체이다. 결혼이 이 표현을 가지는 바, 그러므로 아들들과 딸들은 진리들과 선들을 표현하고 의미했다; 그러므로 아이가 없는 것은 선과 진리의 결핍을, 고로 그 가문에서는 더 이상 교회의 표현이 없는 것, 결과적으로 그들 사회(종교 단체)로부터 나가는(왕따당하는) 것이 된다. 더욱이 형제는 혈연의 선을 표현했는 바, 이 선 가지고 과부된 아내에 의해 표현된 진리와 결합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 이유가 진리가 진리이어야 하는 것, 즉 생명을 가지고 열매를 맺고, 교회 속에 있기를 계속하려면, 진리는 그것 자신의 선(남편)이나 (차선책으로) 혈연의 선 외에 다른 선과는 결합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이상의 내용은 남편의 형제에게 처방된 의무를 수단으로 천국에서 지각되는 의미이다.
만일 남자가 남편의 형제의 의무를 수행하지 않는다면, 형제의 아내는 그의 신을 발에서 벗길 것이고, 얼굴에 침을 뱉을 것이다에 의해서는, 선과 진리의 외적, 내적인 것이 결여된 자인 바, 그는 교회 속의 것을 파괴하리라는 것이 의미되었다. 그 이유가 “신”은 외적인 것을; “얼굴”은 내적인 것을 말하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남편의 형제된 의무에 의해 교회의 보존과 계속이 의미됨이 분명해진다. 그러나 내적인 것들의 표현들이 주님의 오심에 의해 멈추었을 때, 위의 법은 폐지되었다. 이런 상황은 마치 혼 또는 인간의 영과 그의 육체가 되어가는 상황과 흡사하다. 혼, 또는 인간의 영은 당사자의 내적인 것이고, 그의 몸은 외적인 것이다; 또는 같은 말로, 혼, 또는 영은 인간의 형체 자체이나 육체는 (자연계에서) 그를 표현하는 형상이다; 그래서 인간이 다시 일어날 때, 그를 표현한 몸은 벗어진다; 그 이유가 다시 일어날 때, 그는 자기의 내적인 것으로만, 즉 그의 형체 자체로만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다른 상황을 가지고도 말해볼 수 있다. 어둠에 있는 자가 어둠을 수단으로 빛 속에 있는 것을 보는 경우이다. 또는 세상의 빛 안에 있는 자가 천국의 빛 안에 있는 것을 세상의 빛을 수단으로 보는 것이다. 그 이유가 세상의 빛은 천국의 빛과 비교하면 상대적으로 어둠 같기 때문이다. 어둠 안에서, 또는 세상의 빛 안에서 천국의 빛 속에 있는 것들은 그 안에 있는 그대로는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나 표현하는 형상으로서만 가능한데, 마치 인간의 마음이 얼굴에 나타나는 정도에서 이다; 그러므로 천국의 빛이 그 빛의 명료함에서 나타날 때, 어둠, 또는 표현하는 형상은 사라진다. 이것이 주님의 오심에 의해 결과되었다.

그리고 네 형에게 씨를 일으켜 주어라. 이는 교회가 멸해지지 않도록을 의미한다. 이는 “씨”의 의미가 선으로부터의 진리, 또는 선행으로부터의 신앙이다로부터 분명해진다. 같은 의미가 죽은 형의 이름 위에 선다는 것에 의해서도 의미되었다. “형제에게 씨를 일으키는 것”은 교회가 멸해지지 않도록 방금 위에서 말해진 것에 따라 교회 속에 있는 것이 계속되어야 함이다.

그리고 오난은 그 씨가 그의 것이 아님을 알았다. 이는 혐오함과 증오함을 의미한다. 이는 오난의 표현함이 악이다로부터 분명해진다; 그리고 형제에게 씨를 주지 않는 것, 또는 남편의 형제된 의무를 수행하지 않는 것은 교회의 선과 진리를 뜻하지 않는 것, 이것의 계속됨을 뜻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본문에 의해 혐오함과 증오함이 의미된다; 그 이유가 악은 교회의 선과 진리를 향하여 혐오함과 증오함을 갖는 것밖에 더 이상은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가 그의 형의 아내에게 왔을 때였다, 그리고 그는 그것을 땅쪽으로 파괴했다. 이는 부부의 사랑에 반대되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지금 이어지는 사항으로부터 분명해진다. 유다의 첫 출생 엘에 의해 유태 민족이 처음에 있었던 악의 거짓이 묘사되었다; 오난에 의해서는 악의 거짓으로부터의 악이 묘사되었는데, 이 악은 이후 유태 민족이 있었던 악이었다; 그리고 셋째 아들인 셀라에 의해서는 그 악으로부터 파생된 우상숭배가 묘사되었다, 이 안에서 유태 민족은 계속적으로 있었다. 악의 거짓으로부터 있는 악은 오난이 행동한 것에 의해 묘사되어졌다; 즉 그는 그의 형제에게 씨를 주고 싶지 않았던 바, 그는 그것을 땅쪽으로 파괴했다. 이것에 의해 부부의 사랑에 반대되는 것이 의미된 이유는 내적 의미에서 부부에 의해 교회 속에 있는 것이 뜻해지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교회는 선과 진리의 결혼이기 때문, 그리고 이 결혼에 악의 거짓으로부터의 악은 완전 반대로 있기 때문, 즉 이런 악 안에 있는 이들은 이 결혼에 반대한다는 말이다.
이 민족이 부부적인 어떤 것도 가지지 않았다는 것은 영적 의미에서 이해해보든지, 자연적 의미에서 생각해보든지, 그들에게는 하나 이상의 아내를 허용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족히 분명해진다. 그 이유가 영적 의미에서 이해되는 바 그대로의 부부적인 것이 있는 곳, 결과적으로 교회가 있는 곳에서는 하나 이상의 아내를 둠은 결코 허용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진짜 부부적인 것은 교회, 또는 주님의 왕국에 있는 이들 외에서는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둘 그 이상에서는 결코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진짜 부부의 사랑 안에 있는 두 인물 사이에 있는 결혼은 천국의 결혼, 즉 선과 진리의 결혼에 상응한다; 즉 남편은 선에, 아내는 이 선으로부터의 진리에 상응한다; 더욱이 그들이 진짜 부부의 사랑 안에 있을 때, 그들은 이 천국의 결혼 안에 있다. 그러므로 교회가 어디에 있든, 하나 이상의 아내를 가지는 일은 결코 허용되지 않는다. 그러나 야곱의 후손들 사이에는 교회가 없었고, 교회의 껍데기(표현물)만이, 교회의 내적인 것 없는 외적인 것만이 존재했기에, 그들에게는 일부다처가 허용된 것이다. 더 나아가 한 남편이 여러 아내들과 결혼함이 천국에서 표출되면 마치 하나의 선에 이 선에 일치하지 않는 여러 가지의 진리들이 결합된 듯 한 것, (고로 이게 뭐야? 하는 식의 물음이 있게 하는 것,) 선이 없다 라는 생각, 형상 뿐이다; 그 이유가 서로 일치하지 않는 진리들로부터의 선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고 말기 때문,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는 선의 품질은 이 선과 일치하는 진리로부터 있기 때문이다.
교회의 경우, 마치 교회가 하나가 아닌 듯 하게 표출되기도 한다, 그리고 이 교회들의 구분은 신앙의 진리들에 따라, 또는 교리물들에 따라서 이다; 그럼에도 하나의 선이 그것 안에 있는 본질일 때, 이 선은 진리들에 의해 변형되고 품질도 갖는다. 교회는 천국의 형상이다; 그 이유가 교회는 땅에 있는 주님의 왕국이기 때문이다. 천국은 많은 일반적 사회들로, 그리고 이 사회에 종속되는 더욱 많은 작은 사회들로 구별되어진다; 그러나 여전히 그것들은 선을 통하여 하나이다; 그 이유가 거기서 신앙의 진리들은 선에 따라 일치함 안에 있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신앙의 진리들은 선에 관련되고 선으로부터 있기 때문이다. 만일 천국이 신앙의 진리들에 따라 구별되어지고, 선에 따라서가 아니다면, 천국은 존재할리 만무한데, 그 이유는 생명이 없기 때문이다. 또한 천사들은 주님으로부터 생명의 하나됨, 또는 하나의 혼을 가질 수 없다. 이것은 선 안에서만, 즉 주님을 사랑함과 이웃을 향한 사랑 안에서만 가능하다. 그 이유가 사랑은 모든 것을 결합하기 때문이다. 선과 진리의 결합은 소위 이웃을 향한 사랑이다; 그 이유가 이웃은 선 안에 있고, 이 선으로부터 진리 안에 있는 자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추상적 의미에서 선 자체와 그것의 진리이다. 이상 살핀 바로부터, 왜 교회 안에서 결혼이 한 남편과 한 아내 사이에 반드시 있어야만 하는지를, 그리고 야곱의 후손에게 여러 아내를 허용했는지를 알았으리라 본다; 이런 이유로 야곱의 후손 사이에는 교회가 없었는 바, 결과적으로 교회의 표현이 결혼을 수단으로 그들 사이에 설립되어질 수 없었던 이유는 그들이 부부의 사랑에 반대되는 상태 안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형에게 씨가 주어지지 않도록. 이는 그러므로 거기에는 계속됨이 없음을 의미한다. 이는 “형제에게 씨를 주는 것”, 또는 남편의 형제된 의무를 수행하는 것의 의미가 교회 속에 있는 것의 계속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러므로 “씨를 자기 형제에게 주지 않음”이란 계속됨이 없음이다.

그리고 그의 이 짓은 여호와의 눈에서 악이었다. 이는 그것은 신성한 질서에 반대되는 것이었음을 의미한다. 이는 “여호와의 눈에서 악”, 또는 그분에 반대하는 악의 의미가 그분으로부터 있는 신성한 질서에 반대하는 것이다로부터 알려진다. 이는 행위로부터, 그리고 마찬가지로 남편의 형제에 관한 규례로부터, 즉 그의 형제의 아내는 그의 신을 그의 발로부터 벗기고, 얼굴에 침을 뱉고, 그의 이름은 이스라엘에서 자기 신을 벗기운자의 가문이라 불리운다는 것으로부터(신. 25:8-10) 알려진다. 이 규례가 의미한 것은, 그가 외적, 또는 내적 선 없이 있었다 이다; 그리고 선이 없고, 그 대신 악 안에 있는 그들은 신성한 질서에 반대하여 있다. 내면의 악으로부터 튀어나오거나 흐르는 모든 악, 즉 악한 의도나 악한 목적으로부터, 마치 본문의 오난의 경우 같은 악은 신성한 질서에 반대되어 있다; 그러나 내면의 악으로부터, 즉 악한 의도나 목적으로부터 튀어나오거나 흐르지 않는 악은 비록 그것이 내면의 악이나 별반 차이가 없는 악으로 나타난다 할지라도 목적 측면이 악이 아닌 바, 내면의 악과는 다르다. 그 이유가 목적이 모든 행위에 품질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생명은 그의 목적 안에 있다, 그 이유가 그가 사랑하여 생각하는 것을 그는 자기의 목적으로 가지기 때문이다; 인간의 혼은 이 이상 더 없다.
모든 이가 아는 바, 악은 신성한 질서에 반대된다는 것, 이 질서에 따른 선에도 반대 된다는 것이다; 그 이유가 신성한 질서는 천국에서 주님 자신이기 때문인데, 그분으로부터 있는 신성한 선과 질서가 질서를 구성하고, 이 질서에 있는 만큼에서 그는 신성한 선이 본체이고, 신성한 진리는 형체이다. 신성한 진리가 형체로 표현될 때, 이것은 사람으로 나타난다; 그 이유가 주님이 그분으로부터 계실 경우, 그분만이 유일한 사람이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천사들, 영들, 인간들이 그분으로부터 받는 만큼에서, 즉 그들이 선 안에, 이 선으로부터 진리 안에 있는 만큼에서, 고로 그분의 신성한 질서 안에 있는 만큼에서 그들은 사람이다. 이로부터 보편적 천국은 하나의 사람으로 표현되고, 웅대한 사람이라 불리운다, 그리고 인간의 전체와 각 부분은 이 웅대한 사람에 상응한다. 이는 각 장의 끝에서 살피고 있다. 이로부터 역시, 천국의 천사들 모두도 인간의 형체에서 나타난다; 그리고 그 반면, 지옥의 악령들은 몽상으로부터 서로에게 사람 같이 나타난다, 그러나 천국의 빛에서는 그들의 악에 따라 어떤 괴물 같이 나타난다; 이런 이유는 악 자체는 질서에 반대되기 때문이다, 고로 인간의 형체에 반대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분은 그 또한 죽게 하셨다. 이는 거기에도 역시 교회의 표현은 없었음을 의미한다. 이는 앞에서 살핀 바 있어 설명은 생략한다.

11절. 그리고 유다가 그의 며느리 다말에게 말했다, 내 아들 셀라가 젊은 성인이 될 때까지 네 아버지 집에서 과부로 남아 있거라. 그 이유는 그가 그의 형제들 같이 죽지 않도록 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말은 가서 그녀의 아버지의 집에서 머물렀다.

그리고 유다가 말했다. 이는 일반적 측면에서 야곱의 후손, 특별하게는 유다로부터 있는 야곱의 후손을 의미한다. 말씀에서 유다와 이스라엘을 구분해 일컫는 경우가 많다. 역사적 의미에서 “유다”에 의해서는 유다 지파가, “이스라엘”에 의해서는 분리된 열 지파가 뜻해진다. 그러나 내적, 영적 의미에서, “유다”에 의해 천적 평면, 또는 교회의 선이, 그리고 “이스라엘”에 의해서는 영적 평면, 또는 교회의 진리가 표현된다. 한편 반대적 의미에서 유다에 의해 교회의 악, 이스라엘에 의해서 교회의 거짓이 표현된다. 말씀의 영적, 내적 의미는 보편적인 바, 지파들로 구분하는 것이 아니라 외적 또는 역사적 의미로서 구분된다. 이로부터 “유다”에 의한 대략적인 의미는 야곱으로부터 있는 민족, 특별하게는 유다에 의한 야곱으로부터 있는 민족이 의미된다.

그의 며느리 다말에게. 이는 영적인 것들과 천적인 것들을 표현하는 교회를 의미하고, 이는 진리로부터 “며느리”라 불린다. 이는 다말의 표현함이 영적이고 천적인 것을 표현하는 교회이다로부터; 그리고 “며느리”의 의미가 영적 평면, 또는 교회의 진리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며느리”가 내적 의미에서 이 의미를 가지는 것은 결혼에 속하는 모든 것들, 결혼으로부터 출생하는 모든 것은 천국의 결혼 속에 있는 것을, 그리고 결과적으로 선과 진리 속에 있는 것을 표현하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이것들이 천국의 결혼 속에 있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말씀 안에서, 남편은 선을, 아내는 진리를 의미한다; 또한 아들과 딸은 그들로부터 있는 진리와 선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남편이 된 아들의 아내인 며느리는 선과 결합한 교회의 진리가 의미된다. 그러나 천적 교회 속에 있는 이들과 영적 교회 속에 있는 이들은 다르다; 즉 영적 교회에서는 남편은 남자라고 불리워서 진리를, 아내는 여인이라고 불리워서 선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말씀의 내적 의미에서 “며느리”에 의해 교회의 선에 결합된 진리가, 반대적 의미에서는 교회의 악과 결합된 거짓이 의미된다; 이는 “며느리”가 등장하는 말씀에서 분명해진다:
그들은 산의 머리에서 제물을 바친다, 그리고 언덕 위, 상수리나무, 포플러나무, 테레빈나무 아래에 서 향을 태운다, 그 이유는 거기로부터의 그늘이 좋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너희의 딸들이 매춘을 범하고, 너희의 며느리가 간통을 한다. 딸들이 매춘을 범하기 때문에 그들을, 며느리들이 간통을 범하기 때문에 그들을 내가 방문하지 않겠느냐? (호. 4:13, 14);
취급된 주제는 악과 거짓을 예배함이다, 악을 예배함이 “산의 머리에서 제물을 바친다”로, 거짓을 예배함이 “언덕에서 향을 태운다”로 의미되고 있다. 악한 생활이 “딸들이 매춘을 범한다”로, 악한 생활로부터의 거짓된 교리가 “며느리들이 간통을 한다”에 의해 의미된다. 말씀에서 간통과 매춘은 선의 섞음질과 진리의 거짓화를 의미한다; 그리고 그러므로 여기서 “며느리”는 거짓에 애착함을 표시한다.
미가서에서:
큰 자는 제 혼의 외고집을 말한다; 그리고 그는 그것을 비튼다. 그들의 좋은 것은 가시로서 있다; 직바른 것은 가시나무로서 있다. 아들은 아버지를 가볍게 평가하고, 딸은 자기 어머니에 맞서 일어난다, 며느리는 그녀의 시어머니와 맞서 일어난다; 인간의 적들은 그의 집안 식구 속에 있다 (미. 7:3, 4, 6);
위에서 취급한 주제는 악으로부터 있는 거짓인데, 황폐되는 때인 마지막 때의 교회가 이 안에 있다, 그리고 대략적 의미에서 유태 교회 역시 이 안에 있었다. “자기 어머니에 맞서 일어난 딸”은 악에 애착함이 진리에 반대된 것을; 그리고 “자기 시어머니에 맞서 일어난 며느리”는 거짓에 애착함이 선에 반대된 것을 의미한다.
위의 경우는 시험들에 있는 인간의 경우와도 비슷한 대목이 있다; 그 이유가 시험 안에서 악이 진리와, 거짓이 선과 전투함이 있고, 영적 시험은 인간 안의 거짓과 악을 황폐시킴밖에 더 다른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시험, 또는 영적 전투가 위 미가서와 아주 흡사하게 주님에 의해 묘사되어 있다:
예수께서 말하셨다, 내가 땅 위에 평화를 보내려고 온 것으로 생각하지 말라; 나는 평화를 보내려 온 것이 아니라 검을 보내려 왔다. 그 이유는 내가 온 것은 인간이 불일치하여 아버지와 맞서고, 딸은 자기 어머니와 맞서고, 며느리는 그의 시어머니와 맞서 있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인간의 적들은 그의 집안 식구 속의 그들이다 (마. 10:34-36);
예언서로부터 방금 위에서 인용한 같은 말들은 교회의 황폐해짐을 의미하는데, 여기서의 그것들은 교회에 있는 이들의 시험들을 의미한다, 그 이유는 이미 말했듯, 시험은 악과 거짓을 황폐시킴, 제거함밖에 더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이유 때문에 시험과 황폐함 모두가 물의 범람과 홍수에 의해 의미되고 묘사되었다. 여기서 역시 “불일치하여 자기 어머니와 맞선 딸”은 악에 애착함이 진리에 반대하는 것을; “며느리가 시어머니에 맞서는 것”은 거짓이 선에 반대하는 것을 표시한다. 그리고 시험에 있는 인간 안에서, 악들과 거짓들이 내부에 있고 그의 것인 바, 그것에 대해서, 그의 집안 식구라고 말해지고, “집안의 그들이 자기 적이다”라고 말해진 것이다. 시험이 묘사되었다는 것은 주님의 말하심, 즉 그분은 땅에 평화를 보내려가 아니고 검을 보내려고 오셨다 라고 말하신 대목에서 이다; 그 이유가 “검”에 의해 전투하는 진리가, 반대적 의미에서는 전투하는 거짓이 의미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그분은 평화를 주시려고 오셨다 (요. 14:27; 16:33). 위 마태복음서에서의 인용 구절에서 시험이 그렇게 묘사되었다는 것은 그 장에서 이어지는 대목에서(마. 10:38) 더 분명해진다; 즉 “자기 십자가를 짊어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는 나에게 가치가 없다.”
누가복음서 역시:
너희는 내가 땅에 평화를 주려고 온 것으로 상상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아니다; 그러나 분열이다; 그 이유가 이 후로부터 한 집에 다섯이 갈라져 있을 것이다, 셋이 둘에 맞서고, 둘이 셋에 맞서 있을 것이다. 아버지가 아들에 맞서, 그리고 아들이 아버지에 맞서 분열될 것이다; 어머니는 딸에 맞서, 그리고 딸은 어머니에 맞서; 시어머니는 며느리에 맞서, 그리고 며느리는 시어머니에 맞서 갈라져 있을 것이다 (눅. 12:51-53);
위 말들로부터 분명해지는 바, “아버지,” “어머니,” “아들,” “딸,” “며느리,” “시어머니”가 천국의 결혼으로부터 있는 이런저런 것들을 의미한다는 것, 즉 그것들의 질서에서 선들과 진리들, 또한 반대적 의미를 의미한다는 것이다; 마가복음서에서:
예수께서 말하셨다, 나와 복음을 위하여 집 또는 형제들 또는 자매들 또는 아버지 또는 어머니 또는 아내 또는 자녀들 또는 들판들을 떠난 사람은 이 때에서 집들과 형제들과 자매들과 어머니들과 자녀들과 들판들을 핍박들과 더불어 백배로 받을 것이다; 그리고 오는 시대에서 영원한 생명을 받을 것이다 (막. 10:29, 30);
말씀의 내적 의미에 친숙하지 않은 자는 집, 형제들, 자매들, 아버지, 어머니, 아내, 자녀들, 그리고 들판들이라는 것밖에 여기서 더 이상 의미되는 것이 없다고 상상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인간에게, 자기 자신에게 속한 것, 그가 포기해야 하는 것이 있고, 그는 그것을 포기한 대신 그가 주님에게서 반드시 받아서 그것의 빈 자리를 채워야 하는 것 영적, 천적인 것들이 있다는 것, 이러려면 반드시 시험을 수단으로 해야 한다는 것이 “핍박들”에 의해 뜻해지고 있다. 또한 누구나 위 구절을 두고 글자 의미대로 믿겠다고 각오해도, 어머니 한명을 포기했는데 어머니가 하나가 아닌 여러 어머니들을, 게다가 백배로 받는다는 말이 말도 안되는 소리인 것을 눈치 못채는 자는 없을 것이다.

네 아버지 집에서 과부로 남아 있어라. 이는 그 자체로부터 멀어짐을 의미한다.
이는 그가 그녀를 떠나보내고, 그에게 더 이상 되돌아 오기를 원하지 않았다는 사실로부터 분명해진다. 그는 실제로는 셀라, 자기 아들이 성장할 때까지 그녀의 아버지 집에서 남아있으라고 말했다; 그러나 여전히 그는 그녀가 셀라에게 주어지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 이유가 그는 자신에게 “그의 형들 같이 그가 죽지 않도록”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유다의 이 생각함은 14절에서, “다말은 셀라가 성장한 것, 그리고 자기가 그에게 아내로 주어지지 않는 것을 보았다”에서 유다의 생각이 행동으로 나타난 것에서도 입증되었다. 이상으로부터 그는 그녀를 자신으로부터 멀어지게 했다는 것이 의미되었음이 분명해진다; 이를 내적 의미에서 살피면, 다말에 의해 표현된 것, 즉 영적, 천적인 것들을 표현하는 교회가 유다에 의해 표현된 유태 교회로부터 멀어졌다는 것이다. 그 이유가 그들은 서로 일치하지 않았기 때문, 즉 유태주의는 교회의 껍데기(표현물)일 뿐이었고, 표현(적인) 교회는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그들은 외적인 것은 인정했으나 내적인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과부(widow)” 역시 선이 없는 교회의 진리를, 그리고 “남편”은 선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남편 없는 아내는 선이 없는 교회의 진리이다. 그리고 그녀에게 그녀는 “자기 아버지의 집에서 머물러라”고 말해질 때, 이것은 교회의 진리는 멀어져 있을 것, 그리고 자기 집에서 받아지지 않아야 할 것을 의미한다; 유태 민족은 이것을 받을 수 없었는데, 그 이유는 그들이 선 안에 있지 않고 악 안에 있었기 때문이다.
“과부”는 말씀에서 자주 등장하는 단어이기도 하다. 그러나 내적 의미에 친숙하지 않은 이들은 과부에 의해 과부가 의미된다고 믿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내적 의미에서 “과부”는 선이 없는 교회의 진리를 의미한다, 즉 선이 없는 교회의 진리 안에 있는 이들, 그러나 선 안에 있기를 바라는 이들, 결과적으로 선에 의해 인도받기를 사랑하는 이들; 그리고 “남편”은 인도하는 선이다. 이런 인물들이 고대 교회에서 과부에 의해, 그들이 남자이든, 여인이든 모두 과부의 좋은 의미에 해당된다고 이해되었다. 고대 교회에서 선행을 실시해야할 이들을 몇 계층으로 분류했는데, 그들을 가난한 자, 불쌍하고 역경에 처한 자, 묶인 자와 감옥에 있는 자, 소경과 절름발이, 낯선 자, 고아, 과부 등등이다. 그들은 선행의 일을 그들의 품질에 따라 그들에게 배분했다. 그들의 교리물들이 그들에게 이런 것들을 가르쳤다; 이 교회는 다른 교리물들이 없었다. 그러므로 이때 당시에 살았던 이들은 그들의 교리물에 따라 가르치고 적었다; 그들이 과부에 관해 가르쳤을 때, 과부에 대한 그들의 생각은 선이 없이 진리 안에 있으나 여전히 선에 의해 인도되기를 바라는 이들 외에 더 다른 과부에 대한 생각은 없었다.
위 살핀 바로부터 또한 분명해지는 것은, 고대 교회의 교리물이 선행과 이웃에 관련된 것을 가르쳤다는 것, 그리고 그들의 지식들은 외적인 것들이 의미하는 것을 앎에 있었다는 것이다. 그 이유가 교회는 영적, 천적인 것들의 표현이었으므로 그들이 교리물과 지식들을 수단으로 배운 것은 의미되고 표현된 영적, 천적인 것들이었다. 그러나 이런 교리물이나 지식들은 오늘날 완전히 말살되었다, 그야말로 그것들이 존재하지도 않았다는 정도로까지 말살되었다; 그 이유가 신앙의 교리물들이 선행의 교리물의 자리를 대신 꿰찾기 때문이다. 만일 신앙의 교리물이 과부가 되는 것, 즉 선행의 교리물로부터 분리된다면, 거의 아무것도 가르치는 것이 없다. 그 이유가 선행의 교리물이 무엇이 선인지를 가르치고, 신앙의 교리물은 진리가 무엇인지를 가르치기 때문이다. 선이 없는 진리를 가르치는 것은 소경이 길을 걷는 것과 같다. 그 이유는 가르치고 인도하는 것이 선이고, 가르쳐진 것, 인도된 것이 진리이기 때문이다. 이 두 교리물은 빛과 어둠 같이 큰 차이가 있다; 그리고 어둠이 빛에 의해 계몽되지 않는다면, 즉 진리가 선에 의해, 또는 선행에 의한 신앙에 의해 계발되지 않는다면, 어둠밖에 더 있는 것은 없다. 그러므로 누구도 어떤 것이 진리인지 아닌지를 진리를 슬쩍 보는 것으로, 지각으로부터도 알지 못하고, 오직 어린 시절에 흡수되고, 성인 시절에 확증된 교리로부터서만 아는 것이 가능하다. 이로 미루어 알게 되는 것은, 교회는 아주 폭넓게 교리를 지닌다는 것, 하여 이 교회는 진리라고, 저 교회는 거짓이라 불리우고, 이것들은 결코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좋은 의미에서 “과부들”에 의해서는 선이 없는 진리들에 있으나 여전히 선에 의해 인도되기를 갈망하는 이들이 의미된다는 것이 아래 구절에서 분명해진다:
여호와, 이 분은 억눌린 자를 위하여 심판을 집행하신다, 이 분은 배고픈 자에게 식품을 주신다, 이 분은 묶인 자를 푸신다, 이 분은 소경[의 눈을] 여신다, 이 분은 구부려 절하는 자를 일으키신다, 이 분은 공정한 자를 사랑하신다, 이 분은 체류자를 보전하신다, 이 분은 고아와 과부를 지지하신다 (시. 146:7-9);
위 구절의 내적 의미에서 주님에 의해 진리들 안에서 가르침을 받고 선으로 인도되는 자들이 뜻해진다; 이런 이들 중 얼마는 “억눌린 자,” “과부,” “배고픈 자,” “묶인 자,” “소경,” “아래로 엎드려 절하는 자,” “체류자,” “고아,” “과부,” 등등이다. 이것은 품질에 따라서 이다; 그러나 이것이 무엇인지는 내적 의미로부터가 아니면 아무도 알 수 없다. 고대 교회의 교리물들이 이를 가르쳤다. 위 구절, 내지 다른 몇 구절에서 체류자, 고아, 과부는 연합하여 명명된다, 그 이유는 “체류자”에 의해 신앙의 진리들 안에서 가르침을 받기를 원하는 이들을, 고아에 의해서는 진리 없이 선 안에 있어 진리를 수단으로 선쪽으로 인도되기를 바라는 이들을, 과부는 선 없이 진리 안에 있어 선을 수단으로 진리쪽으로 인도되기를 바라는 이들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 세 부류가 여기서, 그리고 다른 구절에서도 한 세트(set)인 듯 명명되어지는 이유는, 이들이 내적 의미에서 하나의 부류를 구성하기 때문이다, 이 셋을 한꺼번에 말하면, 선과 진리에 대하여 가르침을 받기를 원하고 선과 진리쪽으로 인도되기를 바라는 이들이 의미된다.
다시:
고아들의 아버지, 과부들의 재판관은 그분의 거룩함의 주택 안에 계신 하느님이시다 (시. 68:5);
“고아”는 작은 아이들 같이 순진의 선 안에 있는 이들, 그러나 진리 안에 있지 않은 이들을 표시하고, 이들의 아버지가 주님이시다고 말해진다, 그 이유는 그분이 아버지로서 그들을 인도하시어 진리를 통하여 선 안으로, 즉 생활의 선 안으로, 또는 지혜의 선 안으로 인도하시 기 때문이다. “과부”는 성인들이 진리 안에 있듯, 그러나 선 안에 있지 않은 이들을 표시하고, 이들의 재판관이 주님이시다고 말해진다, 그 이유는 그분이 그들을 인도하시기 때문, 즉 선을 통하여 진리 안으로, 즉 총명의 진리 안으로 인도하시기 때문이다. “고아”인 진리 없는 선은 진리의 교리를 통하여 지혜의 선이 되어 간다; 그리고 “과부”인 선이 없는 진리는 선의 생활을 통하여 총명의 진리가 되어 간다.
이사야서에서:
재판에서 가난한 자를 외면하는 불의한 법령을 포고하는 자, 그리고 뺏기 위하여 내 백성의 비천한 자를 재판 안으로 끌어들이는 자, 즉 과부들이 그들의 약탈품이 되고, 고아들을 털어가는 자에게 화있을 것이다 (이. 10:1, 2);
위에서 “비천한 자,” “가난한 자,” “과부”, 그리고 “고아”는 자연계의 그들이 아니라 영계에서 의미되는 그들이다. 유태 교회도 고대 교회에서와 같이 모든 것들은 표현적이었다, 고아와 과부에게 선을 행하는 것 역시 표현적이다. 그 이유가 영적 의미에서 이와 같이 있는 이들을 향한 선행이 천국에서 표현되기 때문이다.
예레미야서에서:
너희는 공평과 공정을 행하라, 그리고 약탈된 자를 압제자의 손에서 구출하라; 그리고 체류자, 고아, 과부로부터 사취하지 말며, 폭력을 행사하지 말며, 이 장소에서 순진한 자의 피를 흘리지 말라 (예. 22:3);
위에서 “체류자, 고아, 과부”에 의해 영적으로 그와 같은 이들이 의미된다; 그 이유가 영계에서 또는 천국에서는 지상에서 있는 것과 같은 그들이 거기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말들이 인간에 의해 읽힐 때, 천사들에 의해서 그들은 그들의 내적, 영적 의미에서 지각된다.
에스겔서에서:
보라 이스라엘의 제 일인 자들아, 너희 각각은 자기의 무력에 따라 피를 흘리기 위하여 너희 안에 있어 왔다. 너희 안에서 그들은 아버지와 어머니를 우습게 여겼다; 너희 한가운데에서 그들은 체류자를 압제를 수단으로 취급했다; 너희 안에서 그들은 고아와 과부에게서 사취했다
(겔. 22:6, 7).
말라기서에서:
나는 심판하러 너에게 가까이 올 것이다; 그리고 나는 신속한 증인을 마술사에 맞서서, 거짓 맹세자에 맞서서, 품삯을 놓고 삯꾼을, 그리고 고아와 과부를 압제하는 이들에 맞서, 그리고 체류자를 외면하는 이들에 맞서, 나를 두려워하지 않는 이들에 맞서 있을 것이다 (말. 3:5).
모세의 책에서:
너는 체류자에게 해를 끼치지 말라, 그를 압제하지 말라. 너희는 어떤 과부나 고아도 괴롭히지 말라. 만일 너희가 여하튼 그들을 괴롭혀서 그들이 나에게 외치면, 나는 그들의 음성을 반드시 들을 것이다; 그리고 나의 노염이 끓어오를 것이다, 그리고 나는 너희를 검으로 죽일 것이다, 그리고 너희 아내는 과부가 되고 너희 자녀는 고아가 될 것이다 (출. 22:21-24).
위 구절, 여타 다른 가르침과 같이, 유태 교회에서의 공정과 규례는 표현적이었다; 그리고 그 교회에서 그들이 외적으로 그렇게 행하도록 보존되었다, 그리고 이와 같은 것들을 수단으로 선행의 내적인 것들을 표현하기 위해, 비록 그들이 선행의 아무것도 가지지 않았을 지라도, 또한 내적 애착으로부터 그것들을 준행하지 않았을지라도 표현은 되어 있었다. 내적인 것은 애착으로부터 무지 안에 있는 이들을 진리들 안에서 가르치고, 선쪽으로 진리를 수단으로 인도하기 위해 있었다; 그럼으로 해서 그들은 체류자와 고아, 과부에게 영적 의미에서 선을 행할 것이다. 그럼에도 외적인 것은 표현을 위하여 남아있어야 하기에, 체류자나 고아, 과부를 억울하게 하는 이들에게 저주가 있으리라고 에발 산에서 발표되었다 (신. 27:19). “그들의 공정함을 외면하는 것(억울하게 하는 것)”란 반대되는 짓을 행하는 것, 즉 거짓과 악한 것쪽으로 생활과 가르침을 수단으로 인도하는 것이다. 그리고 타인들로부터 선들과 진리들을 빼앗고, 자기 명예나 이득을 위하여 자기 것 삼는 자에게 저주가 있기 때문에 주님께서 말하셨다:
너희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에게 화있을 것이다! 그 이유가 너희는 과부의 집을 삼키기 때문, 체면을 위해 기도를 길게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더 철저한 심판을 받을 것이다
(마. 23:14; 눅. 20:47);
“과부의 집을 삼키는 것”은 진리들을 바라는 이들로부터 진리들을 가져가고 거짓들을 가르치는 것을 뜻한다.
들판에, 올리브원에, 포도원에 남겨진 것은 체류자, 고아, 과부를 위해서 였다는 것도 표현적 이었다 (신. 24:19-22); 그리고 그들이 삼 년째 해의 소출의 십일조 바치기를 끝냈을 때, 그들은 그것을 체류자에게, 고아, 과부에게 주어야 한다고, 하여 그들의 성문에서 그들의 배를 채우도록 했다 (신. 26:12). 가르치고 선으로 인도하는 분은 주님뿐이기 때문에 예레미야서에서 말해진다:
네 고아들을 남겨두어라, 내가 그들을 살아 있게 만들 것이다; 그리고 과부들은 나를 신뢰할 것이다 (예. 49:11);
모세의 책에서:
여호와께서 고아와 과부의 재판을 집행하신다, 그리고 체류자를 사랑하시어, 그에게 빵과 의복을 주신다 (신. 10:18);
“빵”은 사랑의 선을; “의복”은 신앙의 진리를 표시한다.
엘리야에 관련된 사건: 토지에 비가 내리지 않아 가믐이 있었을 때, 그는 사렙다로 과부에게로 보내졌다, 그리고 그는 그녀에게 케잌 조금을 요구하고, 그녀가 만들어서 자기에게 먼저 가져오고 그 다음 그녀와 아들이 먹도록 했다, 그때 곡식가루 통은 다 소비되지 않았고, 기름병의 기름 역시 떨어지지 않았다 (왕상. 17:1-16)는 것 역시 표현적이다. 이는 엘리야에 관련된 다른 사건도 마찬가지로 표현적이다. 비가 내리지 않아서 가믐이 있는 토지는 교회에 진리가 황폐함을 표현했다; 사렙다의 과부는 진리를 바라는 교회 바깥에 있는 이들을 표현했다; 그녀가 그를 위해 먼저 만든 케잌(cake)은 주님을 사랑함의 선을 표현했다, 그분을 그녀는 자기가 가졌던 조금으로부터 자신과 아들 위에서 사랑하였다; 곡식가루통은 선으로부터의 진리를 의미한다, 그리고 기름병은 선행과 사랑을 의미한다; 엘리야는 위와 같은 일이 행해진 수단인 말씀을 표현한다.
이것이 주님의 말씀에 의해 내적 의미에서 뜻해진다:
자기 자신의 고향에서 예언자는 받아지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하나의 진리에 관해 말한다, 이스라엘에서 엘리야의 시대에, 하늘이 삼 년 육 개월 동안 닫히어, 모든 토지 위에 가믐이 있었던 때에 많은 과부들이 있었다. 그러나 과부였던 여인인 그들 중에서 오직 시돈의 사렙다로 엘리야는 보내졌다 (눅. 4:24-26);
엘리야는 진리를 바라는 교회 밖의 이들에게 보내진 것이다. 그러나 황폐된 교회 안의 과부들에게 엘리야는 보내지지 않았다. 이 교회인은 선 안에 있지 않기 때문에 진리 안에 있지 않은 이들이; 그 이유가 제아무리 많은 진리가 바깥쪽 형체에서 그들과 더불어 진리 같이 나타난다 할지라도, 선이 없는 곳에서는 어디든지 진리도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즉 알맹이가 없는 쭉정이 같이 있을 뿐이다는 말이다.
이런 진리 안에 있는 이들, 그리고 또한 거짓 안에 있는 이들은 “과부”의 반대적 의미에서 의미된다: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로부터 하루만에 가지와 골풀, 머리와 꼬리를 절단하실 것이다. 원로와 얼굴에서 존경된 자는 머리이고, 거짓말의 선생인 예언자는 꼬리이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그들의 젊은 이들 위에서 기뻐하시지 않을 것이다, 그는 그들의 고아와 과부에게 동정심을 가지시지 않을 것이다 (이. 9: 14, 15, 17).
예레미야서에서:
나는 토지의 큰문(성문)에서 꺄부르는 키를 가지고 그들을 꺄부를 것이다; 나는 그들로부터 자녀를 빼앗을 것이다, 나는 내 백성을 파괴할 것이다; 그들은 자기들의 길로부터 돌아서지 않았다. 그들의 과부들은 바다의 모래 이상으로 나에게 불어나졌다; 나는 그들에게, 젊은 이의 어머니 위에 정오에 황폐하게 하는 자를 데려올 것이다. 일곱을 낳은 여인은 녹초가 되고; 그녀는 졸도하고, 그녀의 태양은 낮인데도 저물 것이다 (예. 15:7-9).
다시:
우리의 상속분이 낯선 자에게로 돌아가졌다, 우리의 집들은 외국인에게 돌아갔다. 우리는 아버지 없는 고아들이다, 우리의 어머니들은 과부들 같이 있다 (애. 5:2, 3).
“과부들”에 의해 선 안에 있지 않기 때문에 진리 안에 있지 않은 이들이 의미되기에, 이들은 악으로부터의 거짓들 안에 있는 이들이나 매한가지 라고, 과부로 불리워져야 한다 라고 교회들을 질책한 것이 계시록서에서:
그녀는 자기 심정에 말했다, 나는 여왕으로 앉을 것이다, 그리고 과부가 아니다, 그리고 나는 슬픔을 보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하루에 그녀에게 재앙, 죽음과 슬퍼함이, 가믐이 올 것이다; 그리고 그녀는 불로 태워질 것이다 (계. 18:7, 8);
위 모두로부터 말씀에서 “과부”에 의해 뜻해진 것이 분명해졌을 것이다; 그리고 과부가 선 없는 교회의 진리를 표현하고 의미하고- 아내는 진리를, 남편은 선을 의미하기 때문에- 그러므로 고대 교회에서 일반적, 특수적 모든 것들은 표현적이었기에, 성직자는 성직자의 과부가 아닌 과부와 결혼하는 것을 금했다:
대성직자는 처녀에서 아내를 데려올 것이다. 과부, 또는 이혼녀, 또는 오염된 여인, 또는 간음녀, 이들을 데려오지 말 것이다; 그러나 자기 자신의 백성의 처녀를 그는 자기 아내로 데려올 것이다 (레. 21:13, 14);
그리고 새로운 성전과 새로운 성직 직분에 관하여:
성직자인 레위인은 자기 아내로 과부, 이혼녀를 데려오지 말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스라엘 가문의 씨의 처녀를 데려올 것이다; 그럼에도 성직자의 과부인 과부는 데려와도 좋다 (겔. 44:22).
위와 같이 명령된 이유는 그들이 결혼하는 처녀가 진리에 애착함을, 성직자의 과부는 선으로부터의 진리에 애착함을 표현하고 의미했기 때문이다; 또한 “성직자”는 표현적 의미에서 교회의 선이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아이 없고, 과부가 된 성직자의 딸은 거룩한 것, 또는 제물을 먹도록 허용되었다 (레. 22:12, 13).
이것이 “과부”의 의미인 것은 고대 교회 속에 있던 이들에게 그들의 교리물로부터 알려졌다; 그 이유가 그들의 교리물들은 사랑과 선행의 교리물들이었는데, 이 교리물은 오늘날에는 말살된 무수한 것들을 담고 있었다. 이런 교리물로부터 그들은 무슨 선행이 실시되어야 하는 지를, 자기들은 무슨 의무를 이웃에게 빚지고 있는 지를 알았고, 고로 자기들은 고아들, 과부들, 체류자들이라 불리워진다는 것을 알았다. 진리에 관한 그들의 지식과 기억 속의 지식들은 자기들의 교회의 의식들이 무엇을 표현하고 의미하는 지를 알았다; 그들 사이에 학식이 있는 자들은 땅 위와 세상에 있는 것들이 표현한 것을 알았다; 그 이유가 그들은 보편적인 자연계는 천국 왕국을 표현하는 극장무대이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지식들이 그들의 마음을 천국의 것들 쪽으로 승강되게 했고, 그 교리물은 그들의 생활을 인도해 주었다. 그러나 교회가 선행으로부터 신앙쪽으로 길을 잘못 들어선 이후, 더욱이 신앙이 선으로부터 분리된 이후, 그리고 선행과 선행의 일 없이도 신앙이 구원한다고 만들어버린 이후, 인간의 마음은 지식들을 수단으로 천국의 것들 쪽으로 더 이상 승강하지 못했고, 교리물에 의해서도 삶을 인도받지 못했다; 그리하여 사후 삶이 있다는 것을 믿는 자가 거의 없어지고, 거의 누구도 천국이 무엇인지를 아는 자가 없게 되었다. 동시에 말씀 안에는 글자 의미에서 나타나지 않는 영적 의미가 있다는 것은 믿어질 수 없게 되었다. 이런 길에서 인간의 마음은 닫혀져 있어 왔다.

내 아들 셀라가 성장될 때 까지. 이는 (시간이 찰) 때까지를 의미한다. 이는 “성장됨”의 의미가 어떤 나이에 있는 것이다, 즉 시간이 채워지다로부터; 그리고 셀라, 아들의 표현함이 우상적인 것이다로부터, 고로 유태 종교인데, 이들과 더불은 이 종교는 우상숭배였다. 이로부터 “셀라 나의 아들이 성장될 때까지”는 유태 종교가 내적인 것, 또는 다말인 표현 교회의 영적, 천적인 것들을 받을 수 있는 (시간이 찰) 때까지가 의미된다.

그가…말했기 때문이다. 이는 생각함을 의미한다. 이는 말씀의 역사적 부분에서 “말하다”의 의미가 지각하다와 생각하다 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러므로 여기서 “그가 말했다”에 의해 그가 자신 안에서 다말은 아내로 그의 아들 셀라에게 주어지지 않는다 라고 말했다, 또는 생각했다가 의미된다. 이는 내적 의미에서 표현 교회 속의 내적인 것들은 멀어지리라는 것이다.

그 또한 그의 형들 같이 죽지 않도록. 이는 그것이 멸해질까 걱정함을 의미한다. 즉 야곱으로부터 내려와 후손들과 더불어 있었던 교회의 표현, 특별하게는 야곱으로부터 유다를 통하여 내려가는 교회의 표현이 멸해질까 걱정함을 의미한다. 이는 “그가 죽지 않도록”의 의미가 멸해질까 걱정함이다로부터 분명해진다. 여기서 이런 점에 대해 주목해보자. 즉 만일 진짜 표현 교회의 내적인 것들이 야곱의 후손들에 인접되었다면, 야곱의 후손과 더불어 있었던 교회의 표현은 멸해졌을 것이다는 점에 대하여 이다. 이 경우는 다음과 같다. 표현 교회, 즉 고대인들 사이에 존재했었던 것과 같은 교회가 야곱의 후손과 더불어 설립되어 가기로 되어 왔었다. 그러나 이 민족의 특성은 외적인 것들만을 예배하고 숭배하기를 원했고, 내적인 것들이라면 여하튼 어떤 것도 원하지 않았다; 그 이유가 그들은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 안에, 이 사랑으로부터 거짓 안에 침수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 민족은 이방인들보다 한술 더 떠서 많은 하느님들이 있다고, 그러나 여호와라는 하느님은 여타 하느님들보다 더 위대하시다는 것, 그 이유는 그분은 더 큰 기적들을 일으키시기 때문이다고 믿었다; 그러므로 기적 사실들이 뜸해진다든가, 여호와를 자주 부르다보니 그분에게 친구 같은 느낌이 들 때 (요즘 말로 잘 대해주니까 올라타려 든다는 식, 역자주), 하여 그분을 조금 낮게 평가할 경우, 그들은 금새 다른 신들에게로 방향을 틀었는데, 이는 말씀의 역사서나 예언서에서 흔히 목격된다.
이런 이 민족의 특질 때문에, 고대인들 사이에 존재했던 것 같은 표현 교회(a representative church)는 설립되어질 수 없었고, 대신 교회의 표현물(교회의 껍데기, the representative of church)만이 존재하였다; 이렇게 라도 주님께서 설비해두신 것은 그것에 의해서 천국과의 어떤 교통이 결과될런지도 모르기 때문에서 였다; 그 이유가 표현인 것은 악한 자와 더불어서도 가능하다, 그 이유는 이것은 인물(person)이 아니라 어떤 것(thing)이기 때문이다. 비록 그들의 의식들(예배들) 안쪽에 거룩한 신성의 것들이 포함되고 있다 할지라도 이 민족들에게는 우상숭배를 하고 있었음이 분명해진다(4825항). 이런 우상숭배적인 예배와 더불어 내적인 것은 결합되어질 수 없었다, 그 이유가 만일 결합이 있다면, 즉 그들이 내적인 것을 인정했다면, 그들은 그것들을 모독하고야 말았을 것이기 때문; 그 이유가 거룩한 것이 우상적인 외적인 것과 결합된다면, 필시 모독되어지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이 민족에게는 내적인 것이 열려지지 않았고, 만일 열려졌다면, 이 민족은 멸해지고 말았을 것이다.
이 민족이 내적인 것들을 받을 수 없었고, 인정할 수도 없었다는 것은 그들에게 얼마나 내적인 것들이 밝혀졌을런지는 모르나, 어쨌든 오늘날의 그들을 보아도 분명해진다; 그 이유가 그들이 기독인들 사이에서도 살지만, 여전히 그들은 그것들을 거절하고 조소하기 때문이다. 전환하였다는 이들조차도 심정으로는 그들의 뿌리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고로 영적, 천적인 것들을 표현하는 교회가 이 민족과 더불어 있지 않다는 것, 그러나 내적인 것 없는 외적인 것, 그 자체 우상숭배인 것인 교회의 표현물만이 존재했음이 분명하다. 게다가 어떤 기독인들의 경우, 이 민족이 선택된 민족인지라 마지막 날에는 전향되고 아마 기독인들에 앞서 천국으로 불려질 것이라 착각하고 있다, 또한 더 착각하는 것은, 마지막 날 메시아, 또는 주님이 그들에게 더 큰 기적을 베푸시며 나타나서 그들을 가나안의 토지로 데려가실 것이라고 상상한다. 이런 망상적 오류가 일어나는 주요한 원인은 말씀의 예언서 부분들에 있는 “유다,” “이스라엘,” “가나안의 토지,” 등등을 단순히 유다, 이스라엘, 가나안의 토지로 이해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말씀의 내적 의미에 아무런 관심을 두지 않고 막연히 글자 의미만을 믿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말은 가서] 그녀의 아버지의 집에서 머물렀다. 이는 그 자체로부터 멀어짐을 의미한다. 이는 앞에서 살핀 바 있어 설명을 생략한다.

12-14절. 그리고 날들이 늘어나졌다, 그리고 유다의 아내 수아의 딸이 죽었다. 그리고 유다는 위로 받아졌다, 그리고 그의 양떼의 털을 깎는 자 쪽으로 그와 그의 동료 아둘람족 히라는 딤나로 올라 갔다. 13 그리고 [누가] 다말에게 말하기를, 너의 시아버지가 그의 양털을 깎으러 딤나로 가더라. 14 그리고 그녀는 그녀의 과부의 옷을 벗고, 자신을 너울로 덮고, 그리고 자신을 둘둘말았다, 그리고 딤나로 가는 길에 있는 샘들의 문에 앉았다. 그 이유가 그녀는 셀라가 성장한 것을 보았고, 그리고 자기가 여인으로 그에게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날들이 늘어나졌다. 이는 상태의 변화를 의미한다. 이는 내적 의미에서, “날” 또는 “때”가 상태이다로부터; 그리고 “늘어남”이 날, 때를 서술할 경우, 변화됨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것이 상태의 변화됨을 의미하는 것은 아래로부터 분명해진다. 이것이 “늘어나졌다, were multiplied”라고 말해진 이유는 상태의 변화가 진리들 측면을 포함했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늘어남, 불어남”이 진리들을 서술하기 때문이다. 상태와 상태의 변화는 자주 언급되기에, 그리고 이것이 뜻하는 것을 아는 자가 적기에, 설명이 보충되어야 할 것 같다. 시간과 시간의 계속, 또는 공간과 공간이 넓혀짐이 인간의 내면들, 즉 생각들과 애착들을 서술할 수가 없다, 그 이유는 이런 내면의 것들은 시공 안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비록 인간에게 시공 안에 있는 듯 나타나고 있다 할지라도 엄밀히 말해 이것은 착각일 뿐이다. 그러나 내면의 것들은 시공에 있는 것들과 상응한다. 상응하는 내면의 것들을 우리는 상태(state)라고 부른다. 그 이유가 상응하는 것들을 상태라는 단어 외에는 표현할 수 있는 단어가 없기 때문이다. 마음 또는 심정이 애착들과 생각들 측면에서 바뀔 때, 즉 슬픔이 기쁨, 또는 기쁨이 슬픔으로, 또는 불경함에서 경건함으로 등등 같이 바뀔 때 상태가 변한다 라고 말해진다. 그리고 이 변화들이 상태의 변화들이라 불리우고, 애착을 서술한다, 또한 이 애착에 의해 통치되는 만큼에서 생각들을 서술한다. 생각 속의 상태의 변화는 애착 속에 있는 것과 같은데, 마치 특별 사항들이 일반적인 것들 안에 있는 경우와 같다, 고로 서로 비교하여 다양해진다.

그리고 수아의 딸이 죽었다. 이는 거짓으로부터의 악에 관련하여를 의미한다. 이는 “죽다”의 의미가 이런 품질 속에 있기를 중단함이다로부터; 그리고 “수아의 딸”의 의미가 거짓으로부터의 악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러므로 날들이 늘어진 이후 수아의 딸이 죽다에 의해 거짓으로부터의 악 측면의 상태의 변함이 의미되고, 이는 이전 같은 상태가 아니었다가 의미된다.

유다의 아내. 이는 야곱으로부터, 특히 유다로부터 내려오는 민족들과 더불은 광신적 신앙을 의미한다. 이는 “아내”의 의미가 교회이다로부터, 여기서는 광신적 신앙, 그 이유는 내적인 것으로부터 분리된 교회의 외적인 것이다로부터, 이것이 광신적 신앙이라 불리울 수밖에 없는 이유는 그들은 거룩한 외적인 것 안에 있을 수 있는데도, 거룩한 내적인 것은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유다의 표현함이 야곱으로부터, 특별하게는 유다로부터 내려온 민족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리고 유다는 위로되어졌다란 휴식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의 양떼의 털을 깎는 자 쪽으로 올라 갔다. 이는 교회를 위해 상담하려는 어떤 승강을 의미한다. 이는 “올라감”의 의미가 승강함, 즉 외면의 것으로부터 내면의 것쪽으로 승강함이다로부터; 그리고 “털을 깍는 자”의 의미가 사용중에 있음, 고로 사용할 것임, 또는 그것을 위해 상담을 함이다로부터; “양떼”의 의미가 교회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와 그의 동료 아둘람족 히라. 이는 그것이 아직도 거짓 안에 있었음을 의미한다. 이는 아둘람족 히라의 표현함이 거짓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가 여기서 “동료”라고 말해졌는 바, 이는 거짓이 그것에 인접하였다, 또는 그것이 아직도 거짓 안에 있다가 의미된다.

딤나로. 이는 그 상태를 의미한다. 즉 교회를 위해 상담을 하는 상태를 의미한다. “딤나”가 이 상태를 의미하는 것은 사사기서에서 삼손이 딤나로 내려가서 불레셋의 딸들로부터 아내를 데려오는 대목(사. 14:1-4, 7)에서, “딤나”에 의해 본문과 같이 교회를 위해 상담을 하는 상태가 의미되는 것에서 알게 된다. 삼손이 불레셋의 딸들로부터 데려온 아내는 표현적 의미에서 선이 아닌 것으로부터의 진리, 고로 불명확한 진리인데, 이것이 여기서 딤나에 의해 표현되어지고 있다; 그 이유가 “불레셋”은 신앙의 교리 안에는 있으나 그것에 따른 생활이 없는 이들이다. 더구나 딤나는 단 지파의 상속분의 장소들 사이에서 언급되고 있다 (여. 19:43). 말씀에 있는 장소들의 모든 이름들은 어떤 것과 어떤 상태를 의미한다.

그리고 [누가] 다말에게 말하기를. 이는 영적인 것들과 천적인 것들을 표현하는 교회와의 어떤 교통을 의미한다. 이는 “말해짐”의 의미가 지각함이다로부터, 고로 교통함, 여기서는 교통함의 어떤 것; 그리고 다말의 표현함이 영적, 천적인 것들을 표현하는 교회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상태가 바뀔 때 교회와 더불은 교통함, 즉 교회를 위하여 상담하는 어떤 승강함이 있다.

네 시아버지가 그의 양떼의 털을 깎으러 딤나로 가더라. 이는 유태 교회가 자체를 위해 상담받기를 원했음을 의미한다. 이는 유다의 표현함이 야곱, 특히 여기서 “시아버지”라고 불리우는 유다로부터 내려가는 민족과 더불은 교회이다로부터, 그 이유는 “며느리”인 영적, 천적인 것을 표현하는 교회와 교통하는 어떤 것이 있었다 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올라감”의 의미가 어떤 승강함이다로부터; 그리고 “양털을 깍는다”의 의미가 교회를 위해 상담함이다로부터, “딤나” 역시 그것을 위해 상담하는 상태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런 내적 의미들이 이런 말들 안에 포함되었다는 것에 대해 여러분은 의아해 여길지 모른다; 그 이유가 이런 의미를 글자로부터서는 어떤 느낌 징후조차 감지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그 이유가 우리가 이 구절들을 읽을 때, 우리의 마음이 유다, 딤나, 양털을 깍음의 영적인 것이 아닌 것만을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천사들의 경우는 다르다, 즉 그들은 영적인 것들 안에 있기 때문에, 우리와 달리 세상적인 것들을 전혀 지각하지 못한다. 즉 우리가 글자를 읽을 때, 그들은 영적인 것으로 건너간다. 세상의 장소, 인물 등등은 멸해지고, 대신 교회에 관련되는 것, 교회의 상태, 교회 안에서 사용되는 것을 지각한다.
어쨌든 인간에게 위와 같은 얘기는 거짓말 같은 소리로밖에 나타나지 않을지 모른다. 그 이유가 인간은 세상에 사는 한, 자기가 속한 자연계에 있는 것으로부터 생각할 수밖에 없다는 것은 그가 육체적 세상적인 것들 안에 침수되어 있음에서 비롯된 엄연한 사실인 바, 그가 영적이고 천적인 것을 모르는 것이 당연할지 모른다, 더욱이 영적, 천적인 것들이 세상적, 육체적인 것들과 구분된다는 것, 즉 영과 몸이 같이 있지만 이를 따로따로 말해도 누구나 이해하지 않던가? 인간의 영이 육체 안에서 살 듯, 영적 의미가 글자 의미 안에서 살고 있다는 것, 또한 글자 의미가 멸해질 때, 영적 의미는 생존한다는 것; 고로 내적 의미는 말씀의 혼이라고 말하면 기독인들 조차 고개를 까우뚱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그리고 그녀는 자기의 과부 차림의 옷을 벗었다. 이는 선으로부터 있는 진리인체 속임을 의미한다. 이는 “과부”의 의미가 선 없이 진리 안에 이들, 그러나 선에 의해 인도되기를 바라는 이들이다로부터. 옷이 진리들을 의미하기 때문에, 과부가 입는 옷은 위의 진리를 표현했다. 그러므로 “이 옷을 벗는 것”은 과부의 표현을 중단하는 것, 즉, 선이 없는 진리이기를 중단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녀가 자신을 너울(veil)로 덮었기 때문에 선으로부터 있는 진리인체 속이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을 너울로 덮었다. 이는 진리가 불명료했음을 의미한다. 이는 “자신을 덮음” 또는 “너울로” 그녀의 얼굴을 가림의 의미가 감추는 것, 선으로부터 있는 체 하는 진리가 불명확해지게 하는 것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리고 이것은 유다와 결합하기 위해서 이었다. 옛부터의 관습에서, 신랑이 신부에게 처음 접근할 때, 그녀는 너울로 자신을 가렸다(덮었다). 이는 리브가에게 이삭이 다가왔을 때의 대목에서 살핀 적이 있다 (창. 24:65); 그리고 이를 수단으로 진리의 나타남이 의미되었다. 그 이유가 아내는 진리를 의미하고, 남편은 선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진리는 그 진리의 선과 결합할 때까지 진리의 품질이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를 표현하기 위하여 신부는 자신의 남편을 처음 볼 때, 너울로 자신을 덮었던 것이다. 이런 경우는 다말의 경우도 비슷하다. 여기서는 다말이 자기의 남편으로 유다의 아들 셈을 기다려왔는데, 정작 그녀가 셈에게 주어지지 않자, 그 대신 남편의 형제된 의무를 수행할 자로 그의 아버지를 남편으로 간주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녀는 신부가 사용하는 너울로 자신을 덮었는 바, 이는 매춘부가 아니다는 표시이기도 하다. 물론 유다의 입장에서는 그녀를 매춘부로 간주했을지라도 다말의 입장에서는 매춘부가 아닌 것이다. 유다가 그녀를 매춘부로 간주한 이유는, 유태 민족, 여기서 “유다”로 의미되는데, 그들은 표현 교회의 내적 진리들을 매춘부로밖에 달리 간주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유다는 매춘부로서의 그녀와 결합되었으나, 다말이 유다와의 결합은 그렇지 않았다. 내적 진리들은 이 민족들과 더불어서는 이렇게밖에 나타날 수 없었다. 그러므로 불명확한 진리가 다말이 자신을 덮은 너울에 의해 의미되는 것이다. 교회의 진리가 그들에게 불명확해져 있다는 것은 오늘날 그들의 회당에서 너울로 자신을 덮는 것에 의해서도 표현되고 있다.
너울이 모세에 관련된 대목도 있다. 그가 시내산에서 내려왔을 때 그의 얼굴이 빛났으므로 그는 백성들과 말을 할 때는 너울로 가려야 했다 (출. 34:28-끝절). 모세는 율법이라 불리우는 말씀을 표현했다 (창. 18장 서문 참조); 그 이유가 이런 이유에서 “율법과 예언서”라고 말해졌기 때문이다 (마. 5:17; 11:13; 22:36, 40); 때로는 “모세와 예언자”라고 말해지기도 했다 (눅. 16:29, 31; 24:27, 44). 그의 얼굴의 피부가 빛남에 의해 말씀의 내적 측면이 표현되었는데, 그 이유는 “얼굴”이 내적 측면이기 때문이다; 영적인 내적인 것은 천국의 빛 안에 있다. 모세가 백성과 말할 때는 언제나 너울로 얼굴을 가렸는데 이는 내적 진리가 그들에게는 덮인 채로 있었다는 것, 하여 불명확한채로 있어 그들은 그것으로부터의 어떤 빛을 감내하지 않아도 되게 되어 있었다.

자신을 둘둘말았다. 이는 그러므로 해서 인정되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이는 “둘둘 말다”의 의미가 감추는 것이다로부터, 고로 인정되어지지 않았다 이다.

그리고 딤나로 가는 길에 있는 샘들의 큰문(gate)에 앉았다. 이는 교회의 진리들과 거짓들의 중간에 있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샘들”의 의미가 말씀으로부터 있는 교회의 진리들이다로부터; 그 이유가 “샘”은 보편적 의미에서 말씀이기 때문이다. “샘들의 큰문”은 이런 진리들 쪽으로의 입구이다; 그리고 말씀의 글자 의미의 외적 진리들이 입구를 제공해주기 때문에, 그것들은 “큰문(성문, gate)”이다. 그러나 이 진리들이 내적 진리들에 의해 계발되지 않으면, 그것들은 악 안에 있는 이들과 더불어 거짓들을 표현한다. 그러므로 교회의 진리들과 거짓들의 중간에 있는 것이 여기서 “샘들의 큰문”에 의해 의미되는 것이다. “딤나로 가는 길 위에”란 교회가 사용함쪽으로 이다, 그 이유는 “딤나”가 교회를 위해 상담하는 상태이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그녀는 셀라가 장성한 것을 보았고, 자기가 여인으로 그에게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는 [표현 교회의 진리는] 야곱의 후손, 특히 유다로부터의 후손에 있었던 광신적 신앙과 합쳐지는 도리밖에 더 다른 방도가 있을 수 없다고 식별함을 의미한다. 이는 “보다”의 의미가 식별하다(discernment)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여기서의 식별하는 것은 표현 교회의 진리가 야곱, 특별히 유다로부터 내려오는 광신적 신앙과 결합되는 도리밖에 더 다른 방도가 없다고 판단함인 이유는 “유다”에 의해 이 후손이 의미되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그들의 광신적 신앙이고, 이것에 결합되어졌다. 그 이유는 셀라와 결합되어질 수 없었기 때문이다. 셀라에 의해서는 우상적인 것이 표현되었는데, 다말인 표현 교회의 진리는 결합될 수 없었다.

15-18절. 그리고 유다가 그녀를 보았다, 그리고 그녀가 창녀라고 생각했다, 그 이유는 그녀가 자기 얼굴들을 덮어 놓고 있었기 때문이다. 16 그리고 그는 길가에 있는 그녀에게로 길을 잘못들었다, 그리고 말했다, 청컨대 내가 너에게 들어가도록 허락하라. 그 이유는 그는 그녀가 자기의 며느리인 것을 몰랐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녀가 말했다, “당신이 나에게 들어 온다면 나에게 무엇을 주시렵니까?” 17 그리고 그는 말했다, “나는 너에게 양떼로부터 염소들 중에서 새끼를 보낼 것이다.” 그리고 그녀는 말했다, “당신이 그것을 보낼 때까지 어떤 담보물을 주시렵니까?” 18 그리고 그는 말했다, “무슨 담보물을 내가 너에게 주랴?” “당신의 손에 있는 도장과 머리 수건(kerchief)과 지팡이 입니다.” 그리고 그는 그녀에게 그것들을 주었다, 그리고 그녀에게 왔다, 그리고 그녀는 그로부터 임신하였다.

그리고 유다는 그녀를 보았다. 이는 어떻게 그때 당시 유태 민족의 광신적 신앙이 표현 교회의 내적인 것들을 주목해서 보았는지를 의미한다. 이는 “보다”의 의미가 주목하여 이해하는 것이다로부터, 고로 곰곰이 생각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녀”인 다말의 표현함이 영적, 천적인 것들을 표현하는 교회이다로부터, 여기서는 교회의 내적인 것들, 그 이유는 취급된 주제가 내적인 것이 유태 민족에 광신적 신앙에 의해 주목되고 받아들인 방법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유다의 표현함이 특별하게는 유태 민족이다로부터, 결과적으로 이 민족의 광신적 신앙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 이유가 이 민족이 말씀에서 언급되는 곳에서 그것의 교회와 관련된 어떤 것이 내적 의미에서 뜻해지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내적 의미는 자연계의 어떤 민족의 사건들이나 역사에 관심이 없고, 오직 교회의 품질에 속한 것에만 관심이 있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분명한 바, 유다가 그녀를 봄에 의해 어떻게 유태 민족의 광신적 신앙이 그때 당시 표현 교회의 내적인 것들을 주목해서 보았는지를 의미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녀가 창녀라고 생각했다. 이는 거짓 외에는 더 달리 주목한 것이 없었음을 의미한다. 이는 “창녀”의 의미가 거짓이다로부터; 고로 이로부터 뜻하는 바, 유태 민족의 광신적 신앙으로부터 그들은 교회의 내적 측면을 거짓으로밖에 더 달리 주목하지 않았다 이다. “창녀”가 거짓을 표시하는 이유는 결혼이 천국의 결혼을 표시하기 때문, 즉 천국의 결혼은 선과 진리의 결혼, 남편은 선을, 아내는 진리를 표현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아들은 진리들을, 딸은 선을; 그리고 사위와 며느리, 그리고 시아버지와 시어머니, 그리고 이런저런 친척임은 각각의 등차들에 따라 천국의 결혼 속에 있는 이런저런 것들을 표현한다. 그러므로 간통과 매춘은 반대적인 바, 악과 거짓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것들은 실제 자연계에서조차 반대적이다; 즉 자기들의 삶을 간통과 매춘에 소비하는 이들은 선과 진리를 위해서는 아무것도 돌보지 않는다; 간통과 매춘은 악과 거짓의 결합으로부터 발생한다, 이는 지옥으로부터 이다.
유태 민족이 과거에도 지금에도 내적인 것을 거짓으로 간주한다는 것은 유다가 자기 며느리 다말을 창녀로서밖에 더 달리 간주하지 않아서 자신을 창녀로서의 그녀와 결합시킨 것에 의미되어 있다. 이 민족의 이런 근원에 의해 그들의 광신적 신앙의 근원과 품질이 표현되어졌다. 이 민족이 교회의 내적인 것을 창녀로서 간주한다는 것은 아주 분명하다. 예를 들면, 어떤 이가 그들에게 이렇게 말한다면, 즉 메시아의 오심이 말씀의 예언서 부분에서 예견되었는데, 이 분이 바로 주님이시다는 교회의 내적인 것을 말하면, 그들은 그것을 거짓으로 완강하게 거절한다. 또는 메시아의 왕국은 세상적, 일시적이 아니고, 천국적이고 영원적이다고 교회의 내적인 것을 말하면, 그들은 이것 역시 거짓이라고 발표한다. 만일 누가 그들에게 교회의 의식들은 메시아와 그분의 왕국을 표현했다고 말하면, 그들은 이것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모른다.
만일 누가 그들에게 교회의 내적인 것은 선행의 선, 그리고 교리와 생활에서 동시에 있는 신앙의 진리이다고 말하면, 그들은 거짓으로 간주한다. 이외 더 많은 예가 있다. 한마디로 그들은 내적인 것을 가진 교회를 상상만 해도, 픽 웃어넘긴다. 이런 이유는 그들이 외적인 것들만에, 참으로 가장 낮은 외적인 것들 안에, 즉 지상의 것을 사랑함 안에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누구보다 뛰어난 탐욕, 철저히 지상적인 탐욕 안에 있다. 이런 인간은 교회의 내적인 것을 여하한 다른 방법에서 주목하는 것이 가능하지 않다; 그 이유가 그들은 여타 인류들보다 천국의 빛으로부터 더 멀리 있고, 여느 누구보다 더 짙은 어둠에 있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그녀가 자기 얼굴들을 덮었기 때문이다. 이는 내면의 것들이 그들에게 감추여 있었기 때문임을 의미한다. 이는 다말의 표현함이 표현 교회이다로부터 분명해진다; 그리고 “덮다”의 의미가 감추이는 것이다로부터; 그리고 “얼굴들”의 의미가 내적인 것들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로부터 그녀가 자기 얼굴을 덮음의 의미가 교회의 내면의 것들이 그들에게 감추여져 있었다 이다.

그리고 그는 길가에 있는 그녀에게로 길을 잘못들었다. 이는 [유태 민족의 광신적 신앙이] 표현 교회의 내적인 것이 거짓 같이 보여 자기와 같기 때문에 그 자체를 표현 교회의 내적인 것에 인접되게 했음을 의미한다. 이는 “길”의 의미가 진리이다로부터, 고로 반대적 의미로부터는 거짓인데, 여기서는 그가 그녀를 창녀로 간주했기에 있는 거짓이다. 이렇기에 그는 길가에로 길을 잘못 들었다고 말해진다; 그 이유가 “길을 잘못 들다, turn aside”가 거짓을 서술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말했다, 청컨대 내가 너에게 들어가도록 허락하라. 이는 결합을 위한 욕망을 의미한다. 이는 “누군가에게로 옴, 또는 들어감”의 의미가 결합되는 것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욕망이 창녀와 더불은 결합을 위해, 내적 의미에서는 거짓과 더불은 결합을 위해 있는 것을 뜻하는 것은 분명하다. 여기서 “유다”에 의해 뜻해진 유태 민족은 표현 교회의 내적 진리를 거짓으로밖에 더 달리 간주하지 않았다는 것은 앞에서 살폈다. 지금 여기서 취급되는 것은 위와 같음에도 불구하고, 이 민족은 자체를 이 진리와 결합되게 했다는 것, 물론 아내로서가 아니고, 창녀로서, 즉 진리와 더불어가 아니고 거짓과 더불어 결합되게 했다는 것이다. 욕망(lust)은 거짓과 결합함을, 즉 창녀와의 결합함을 서술하고 있다.
말씀의 외적 의미, 즉 말씀의 글자 의미만을 믿는 모든 이들은 내적 진리를 창녀 수준에서 자신들과 결합시킨다. 이들은 말씀의 내적인 것, 영적 의미를 통째로 거절한다; 이런 자들보다 더 특별한 이들은 말씀의 외적, 또는 글자 의미를 자신의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이 강력히 바라는 것들을, 또는 이득과 지배함을 옹호하도록 응용해간다. 이런 짓을 위해서는 내적 진리를 창녀 수준으로 취급하는 도리밖에 더 없다. 이것은 유태 민족으로부터 있는 이들에 의해 특별하게 실행되어졌다, 또한 말씀 안에서 바빌론이라 불리운 이들에 의해서도 실행되었다; 그러나 말씀의 글자 의미를 정말로 단순히 믿는 이들, 그럼에도 내적 의미로부터 있는 것들, 즉 사랑과 선행 안에 있는 것들, 이로부터의 신앙 안에 있는 것들에 따라 사는 이들에 의해서는 아니다. 그 이유가 이들은 사실상 말씀의 내적 의미 속에 있기 때문, 그리고 이런 사항은 (글자를 정성들여 읽는다면) 글자 의미로부터도 배울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실예의 하나인 즉, 내적 의미와 외적 의미가 다함께 와닿는 가르침으로는 무엇보다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자신 같이 사랑하라는 명령이 이에 해당된다. (요나서 끝장 끝절도 곁들여 생각해보라 역자주)
유태 민족이 내적 진리를 창녀로 간주했다는 것, 그리고 만일 그들이 내적 진리와 결합했다면, 그것은 창녀와의 결합에 관한 욕망으로부터 그렇게 했을 뿐이다는 것은 이런 예를 가지고 예증될지 모른다. 만일 그들에게 말씀은 거룩하다, 그야말로 점 하나에 이르러서도 거룩하다 라고 말해진다면, 그들 역시 인정하고, 자신을 그것에 결합한다; 그러나 이것은 욕망으로부터 이다; 그 이유가 그들이 그것을 믿는 것은 글자에서 거룩하다는 것이지, 선과 진리 안에 있는 이들이 말씀을 읽을 때 그들에게 흘러드는 거룩함으로부터 거룩하다고 여기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만일 그들에게 말씀에 있는 많은 이들, 즉 아브라함, 이삭, 야곱, 모세, 아론, 다윗 등등의 인물도 거룩한 것으로 존경해야 한다고 말한다면, 그들은 그것을 인정하고, 자신을 그 말에 결합시킨다; 그러나 어떤 욕망 때문에서 이다. 그 이유가 그들은 이런 인물들은 여타 다른 이들에 앞서 선택되었다고 믿어서 그들이 거룩하다 라고 믿는 것이기 때문, 게다가 이들은 신의 위치에서 예배되어야 한다고까지 치닫는다. 그렇지만 이런 인물들이 존경되는 것은 그들이 주님을 표현하기 때문에서 일 뿐이고, 거룩한 표현물 자체가 우리에게 감동을 주는 것은 결코 아니다. (즉 그들도 성경에서의 표현을 빼면 우리 같은 인간이었을 뿐이다 역자주) 더욱이 구분이 없는 모든 이의 삶 역시 사후 당사자와 더불어 남아 있는다.
만일 그들에게 그들과 더불어 있었던 많은 것들, 즉 궤, 성전, 태워바침의 제단, 분향 제단, 식탁 위의 빵, 등불을 지닌 등잔대, 영구히 타는 불, 제물, 향, 기름, 또한 아론의 의복, 특별하게 우림과 둠밈이 있던 가슴받이 등등이 거룩하였다고 말해주면, 그들도 인정하고 그 말에 결합하나, 이는 욕망으로부터 이다; 그 이유가 그들은 이것들 자체 안에 거룩함이 있다고 믿기 때문, 고로 돌, 나무, 금, 은, 빵, 불이 거룩하다는 것은 여호와께서 그것들 안에 내면적으로 계셨기 때문인데, 그들은 거룩함이 그것들에 실제로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이것은 그들이 말하는 내적 진리이나, 이것은 상대적으로 거짓이다; 그 이유가 거룩함은 선과 진리 안에만 있기 때문이다. 선과 진리는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향한 사랑 안에서, 이 사랑으로부터의 신앙 안에서 그분으로부터 있다; 고로 살아 있는 주체들 안에서만, 즉 주님으로부터 이런 것들을 받는 인간들 안에서만 거룩함이 있다.
다시 만일 그들에게 기독 교회는 그들과 더불어 설립된 교회와 더불어 하나이다, 단지, 기독 교회는 안쪽에, 당신들의 교회는 바깥쪽일 뿐이다, 하여 바깥이라는 껍질을 벗기면 기독 교회가 시야에 잡힌다 하고 말하면 그들은 그것을 인정하지 않고 창녀, 즉 거짓으로밖에 인정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유태주의로부터 기독교로 전향한 일부는 자신을 위 진리와 결합시킨다, 그러나 같은 욕망으로부터 이다. 말씀에서 이런 것들이 “매춘부들, whoredoms”이라고 자주 언급된다. 말씀에서 “바빌론”으로 의미되는 이들이 교회의 내적 진리들을 위와 같은 유태 민족의 방식에서 있다; 그러나 그들은 내적인 것들에 친숙해져 있었고, 그것들을 어린 시절에는 인정했으나, 성년기에 그것들을 부정했기 때문에 말씀에서 그들은 더러운 간통들과 역겨웁게 성교함(교접함)에 의해 묘사되고 있다; 그 이유가 그것들은 모독들이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그는 그 여자가 자기의 며느리인 줄을 몰랐기 때문이다. 이는 그것이 표현 교회의 진리이다 라고 지각하지 못했음을 의미한다. 이는 “며느리”의 의미가 교회의 선에 인접한 교회의 진리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것이 표현 교회의 진리가 의미되었다는 것은 여기서 며느리인 다말에 의해서 영적, 천적인 것을 표현하는 교회가 표현되었기 때문이다. 이는 앞에서 말했다.

그리고 그 여자는 말했다, “당신을 나에게 오게 한다면, 무엇을 나에게 주시렵니까?” 이는 조건 있는 상호간의 결합을 의미한다. 이는 “나에게 옴”의 의미가 결합함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리고 그는 말했다, “나는 너에게 양떼로부터 염소들 중에서 새끼를 보낼 것이다.” 이는 결합에 관한 담보를 의미한다. 이는 “염소들 중의 새끼”의 의미가 외적, 또는 자연적 인간의 순진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리고 이것이 순진이기 때문에, 이것은 부부의 사랑의 담보, 또는 결합의 담보이다. 그 이유는 진짜 부부의 사랑은 순진이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고대인들이 받아들였던 관습의 하나가 그들이 자기들의 아내에게 새로이 갈 때, 미리 염소들 중의 새끼를 보냈다. 이는 삼손에 관한 기록에서도 발견된다:
날들이 지나, 밀 수확철의 날들에서, 삼손은 염소들 중의 새끼를 가지고 그의 아내를 방문했다; 그 이유가 그는 말하기를, 나는 침실로 내 아내와 들어갈 것이다 (사. 15:1).
위 구절과 본문의 경우는 비슷하다; 그러나 본문의 경우, 말해진 염소 새끼가 미리 받아진 것이 아니기에 다말은 담보물을 요구했다. 이 담보물은 결합을 위한 담보물이지, 결혼을 위한 담보물이 아니다. 그 이유는 유다쪽에서는 창녀와의 결합을 위한 담보물이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여자는 말했다, “당신이 그것을 보낼 때까지 당신은 담보물을 주시렵니까?” 서로에게 확실함이 있는지 여부를 의미한다. 이는 앞 구절에서 다말이 나에게 오면 무엇을 줄 것이냐고 묻는 것의 의미가 조건이 있는 결합을 의미함에서 알게 된다. 여기서는 서로에게 확실함이 있는 것, 그 이유는 담보물이 약속된 것이 주어진다는 확실함을 위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말했다, “무슨 증거물을 내가 너에게 주랴?” 이는 그것은 확실했음을 의미한다. 이는 “담보물”의 의미가 확실함이다로부터; 이것이 확실하였다는 것은 담보물이 주어지는 이어지는 구절로부터 분명하다.

그리고 그 여자는 말했다, “당신의 도장.” 이는 동의함의 표시(token)를 의미한다. 이는 “도장”의 의미가 동의함의 표시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도장(signet)”이 동의함의 표시이다는 것은 고대 시대에서 칙령들이 도장을 찍음으로 확증되었기 때문인데, 하여 도장은 이것이 그렇다는 것에 대한 확증 자체, 증명함이었다. 다말이 그의 도장, 머리수건, 지팡이를 염소들의 새끼를 보내기로 한 것에 대한 담보로 요구한 것을 그녀는 이후에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것은 내적 의미 없이는 알려지는 것이 가능하지 않다는 신비함들을 포함하고 있기도 하다. 이 신비함들은 이렇다; 염소들의 새끼는 진짜 부부의 것을, 결과적으로 내적인 것을 의미했다- 그 이유가 진짜인 모든 것은 동시에 내적인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그리고 이 염소 새끼가 유다의 쪽에서는 진짜 결합, 즉 결혼은 아니었기에, 다말은 염소 새끼를 수납하지 않았다. 그러나 염소 새끼 대신 “다말”에 의해 표현된 교회의 내적인 것이 결합될지 모를 외적인 것을 가져갔다. 교회의 외적인 것들이 도장, 머리수건, 지팡이에 의해 의미되었는데, 즉 “도장”에 의해서는 동의함 자체가, “머리수건”에 의해서는 외적 진리가, “지팡이”에 의해서는 이 진리의 힘이 의미되었다; 더욱이 이런 것들은 외적 또는 자연적 인간의 결합의 담보물이다.
내적 진리가 외적인 것과 더불어, 또는 유태 민족의 광신적 신앙과 결합함이 남편의 형제된 의무 수행이라는 구실로 며느리와 시아버지의 결합, 다말과 유다의 결합에 의해 표현되었다. 그리고 유태 민족의 광신적 신앙이 교회의 내적인 것과 결합함이 유다가 창녀로서의 다말과 결합함에 의해 의미되었다. 더욱이 이 두 결합의 본성은 각기 아주 정밀하게 일치하지만, 그것들의 품질에 대해서는 우리의 납득력에 얼른 다가오게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천사들이나 선한 영들에게 이 품질은 적나나 하다. 그 이유는 이 품질이 천국의 빛 안에서 표출되기 때문, 이 빛에서 말씀 속의 신비함들은 대낮 같이 열려 있기 때문이다. 이와 대비되는 경우가 인간이 존재하는 자연계의 빛으로 말씀을 읽는 경우일지 모른다. 간략히 말하면: 야곱의 후손들과 더불어 설립된 표현들은 고대 교회의 것들 같이 정밀하지는 않다; 그러나 이 표현들은 히브리 교회 라고 불리우는 에벨(Eber)에 의해 설립된 이들에게 대부분이 있었다. 이 교회에서 예배에 관하여 새로운 종류들이 생겨났다, 즉 태워바침, 제물, 등등인데, 이는 고대 교회는 알려지지 않았었다. 따라서 교회의 내적인 것은 고대 교회의 경우에서 결합되는 방식으로 이 교회와 더불은 표현에서는 있지를 않았다. 대신 거꾸로의 방식으로 인데, 이것이 다말쪽에서는 남편의 형제된 의무 수행이라는 핑계로 며느리와 시아버지의 결합을 수단으로 ; 또한 유다의 쪽에서는 창녀와의 결합이라는 수단으로 이고, 이것들의 내적 의미에서 묘사되어 있다.

“그리고 당신의 머리 수건(머리띠)”. 이는 동의함의 표시인 진리를 수단으로를 의미한다. 이는 “머리수건(kerchief)”의 의미가 진리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머리수건”이 진리를 표시하는 이유는 이것이 옷에 관련되고 있기 때문이고, 옷은 일반적으로 진리들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의복이 육체를 옷입히듯, 진리는 선을 옷입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고대인들 사이에서 자기들을 옷입힌 모든 것은 어떤 특별하고 세세한 진리를 의미했다; 그러므로 튜닠(웃옷, tunic, 속옷)은 이 진리를, 바깥쪽 의복(chlamys)은 저 진리를, 가장 바깥쪽 의복(toga)은 또다른 진리를; 머리의 덮개들 또한 그러해서, 대성직자의 관(miter)과 터번 (turban), 또한 넓적다리와 발의 덮개인 짧은 바지(승마용 바지, breeches), 스타킹(긴양말, stocking) 등등을 분류해서 특별한 진리를 의미하였다. “머리수건”은 가장 바깥, 또는 가장 낮은 진리를 의미했는데, 이 수건은 실들을 다함께 꼬아서 만들었다, 하여 이를 수단으로 이 진리의 단호한 결정이 의미되었다. (아마 T.V등에서 요구 사항 관철을 위해 노조 파업 결의를 발표하고 구호를 외칠 때 머리에 띠(머리 수건)를 두른 것을 목격하는데, 이때 머리띠가 자기들의 결정이 단호함을 표시하는데 한몫을 한다 역자주) “머리수건”이 이런 진리를 의미하는 것은 다른 책에서 보면:
덮개로 사용하는 헝겊이 그 위에 있지 않은 열려진 모든 그릇은 불결하다 (민. 19:15);
이 구절을 수단으로 결정되지 않고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어야 한다는 것이 의미된다; 그 이유가 결정되지 않은 것은 무엇이든 열려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가장 바깥쪽 진리들쪽으로 내적 진리들의 결정됨이 있어야 한다는 것, 다시 말해 내적 진리들은 가장 바깥쪽 진리들에 종결되어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당신의 손에 있는 지팡이.” 이는 이 진리로부터의 힘을 수단으로를 의미한다.
이는 “지팡이(staff)”의 의미가 힘이다로부터, 이는 아래에서 살핀다; 그리고 “손”의 의미가 힘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여기서 “…당신의 손에 있는”이라고 말해진 이유는 가장 낮은 진리의 힘이 여기서 “유다”인 유태 민족의 광신적 신앙에 속한 것과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힘이 진리를 서술하는 것은 이미 살폈다. “지팡이”가 말씀에서는 자주 언급되는 단어에 속하는데도 불구하고 그것에 의해 영계에 있는 어떤 것이 표현된다는 것을 아는 이가 거의 없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마치 모세가 그의 지팡이를 들어 올려 기적을 수행했던 대목을 읽지만 지팡이의 영적 의미에는 무관심하다는 말이다. 또한 어린이들의 동화책 같은 곳에서도 지팡이로 마술을 발휘하는 대목에서도 지팡이는 등장하고 있다. “지팡이”가 힘을 의미하는 이유는 그것이 받침, 지지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손과 팔을 받친다, 그리고 그것들을 통하여 온 신체를 받치기도 한다; 그러므로 지팡이는 그것이 받치는 부분의 의미를 가져온다. 즉 손이나 팔의 의미를 지닌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진리의 힘이 의미된다. 각 장의 끝에서 열거하는 웅대한 사람 안에서 손과 팔은 이 힘에 상응하고 있다.
지팡이에 의해 힘(능력)이 발휘된 것은 위 모세에 관련한 대목들로부터 쉽게 알아진다. 즉, 그는 기적을 행하기 위해 지팡이(막대)를 가져오도록 명령받았다; 그리고 그는 자기 손에 하느님의 막대를 가졌다 (출. 4:17, 20); 막대로 쳤을 때, 이집트의 물들이 피가 되었다 (출. 7:15, 19, 20); 막대를 시내에 뻗쳤을 때, 개구리들이 튀어 올라 왔다 (출. 8:1-11); 막대로 먼지(흙)를 쳤을 때, 이가 되었다 (출. 8:16-20); 막대를 하늘을 향하여 뻗치자, 우박이 있었다 (출. 9:23); 막대를 토지 위에 뻗치자, 메뚜기떼가 나왔다 (출. 10:3-21). 손이 제 1 이기에 이를 수단으로 권능이 의미되고, 그리고 막대는 도구적이어서, 그의 손이 뻗쳤을 때, 기적들이 수행되었다 (출. 10:12, 13); 그의 손이 하늘을 향하여 뻗쳐졌을 때, 이집트의 온 토지에 짙은 어둠이 깔렸다 (출. 10:21, 22); 그리고 그의 손이 수프(Suph) 바다를 향하여 뻗쳤을 때, 동풍에 의해 바다는 마른 토지로 만들어졌다; 다시 그의 손을 뻗치자 바다는 원래대로 되돌아 왔다 (출. 14:21, 26, 27).
더욱이 호렙 바위를 막대로 쳤을 때, 물들이 흘러나왔다 (출. 17:5, 6; 민. 20:7-10). 여호수아가 아말렉과 전투할 때, “모세가 여호수아에게 말했다, 내일 남자들을 뽑아 아말렉과 싸우러 나가라. 나는 언덕 위에서 내 손에 하느님의 막대를 들고 서 있을 것이다. 하여 모세가 손을 들고 있는 동안에는 이스라엘이 승리했으나 손이 내려오면 아말렉이 승리했다” (출. 17:9, 11). 이런 위의 구절들로부터 분명해지는 것은 막대, 지팡이, 손이 힘을 표현했다는 것, 최고 의미에서 주님의 신성한 전능을 표현했다. 이때 당시에는 표현들이 교회의 외적인 것을 구성했고, 천국에 있는 것과 같은 영적, 천적인 것인 교회의 내적인 것이 이 외적인 것과 상응했다는 것이다. 이 상응함으로부터 그들에게 위와 같은 권능의 효력이 있었다. 따라서 모세의 지팡이 자체에 어떤 능력이 있다고 믿으면 얼마나 불합리한 지가 분명해진다.
영적 의미에서 “지팡이”가 힘이다는 것은 예언서들의 많은 구절에서 나타난다:
보라 주 여호와 체바욷께서 예루살렘으로부터 지팡이와 지주(버팀, stay)를, 즉 빵의 온 지팡이를, 그리고 물의 온 지팡이를 거두어가신다 (이. 3:1);
“빵의 지팡이”는 사랑의 선으로부터의 지지와 힘을 표시한다, 그리고 “물의 지팡이”는 신앙의 진리로부터의 지지와 힘을 표시한다. “빵”이 사랑의 선이다는 것은 이미 살핀 바 있다; 그리고 “물”이 신앙의 진리이다도 이미 살핀 바 있다. 에스겔서에도 “빵의 지팡이”가 언급된다 (겔. 4:16; 5:16; 14:13; 시. 105:16).
이사야서에서:
고로 주 여호비 체바욷께서 말하셨다, 시온에 거주하는 나의 백성들아, 이집트로의 길에서 너를 막대로 치고, 너희 위에 지팡이를 들어올리는 앗수르를 두려워 말라. 여호와께서는 그를 채찍으로 휘저으실 것이다, 마치 오렙(Oreb)의 바위에서 미디안에게 재앙이 덮친 것과 같다; 그리고 그분의 지팡이가 바다 너머 있을 것이다, 그분은 이집트로의 길에서 그것을 들어올리실 것이다
(이. 10:24, 26);
위에서 “지팡이”는 추론함과 기억 속의 지식으로부터의 힘을 표시한다. 이는 신앙의 진리들에 맞서 기억 속의 지식으로부터 추론하는 이들의 힘과 같다, 그리고 이 진리들을 악용하든지, 쓸모없게 만든다. 이것이 앗수르가 지니고 친 “막대”에 의해, 그리고 이집트로의 길에서 들어올린 “지팡이”에 의해 의미된다. “앗수르”에 의해 추론함이 뜻해짐에 대하여는 1186항을; “이집트”에 의해 기억 속의 지식이 뜻해짐에 대하여는 1164, 1165, 1186, 1462항을 보라.
스가랴서에서:
아시리아의 교만이 아래로 끌어 내려지고, 이집트의 지팡이가 멀리 떠날 것이다 (슥. 10:11).
이사야서에서:
너희는 부러진 갈대의 지팡이에, 이집트의 지팡이에 의지했다; 만일 인간이 그것에 의지하면, 그의 손 안으로 들어가서 손을 찌를 것이다 (이. 36:6);
“이집트”는 기억 속의 지식을 표시하고; 그것들로부터의 힘이 영적인 것들에서 “부러진 갈대로부터의 지팡이”이다; 그것이 들어가 찌르는 “손”은 말씀으로부터의 힘이다.
다시:
여호와께서는 사악한 자의 지팡이를 부러트리실 것이다, 치수를 재는 막대 (이. 14:5);
위에서 “지팡이”와 “막대는 힘을 분명하게 표시한다.
예레미야서에서:
탄식하라, 모압 주위의 모든 자들이여, 그리고 말하라, 어떻게 힘센 지팡이가 부러지고, 아름다움의 지팡이가 부러졌는가! (예. 48:17);
“힘센 지팡이”는 선으로부터의 힘을 표시하고, “아름다움의 지팡이”는 진리로부터의 힘을 표시한다.
호세아서에서:
나의 백성은 자기들의 나무에게 질문하고, 그들의 지팡이가 그들에게 대답할 것이다; 그 이유가 매춘의 영이 그들을 엉뚱한 쪽으로 인도했기 때문이다 (호. 4:12);
“나무에게 질문함”은 악들을 상담함을 뜻한다; “지팡이가 대답함”은 거짓이 거기로부터 있음을 뜻한다. 이 거짓은 그들이 확증하는 악으로부터 힘을 가진다; “매춘의 영”은 악으로부터 있는 거짓의 생명을 표시한다. 다윗서에서:
그렇다, 내가 죽음의 골짜기를 걸을 때, 나는 나에게 있을 어떤 악도 겁내지 않을 것이다; 그 이유가 당신이 나와 더불어 계시기 때문이다; 당신의 막대와 지팡이가 나를 위로한다
(시. 23:4);
“막대와 지팡이”는 신성한 진리와 선을 표시하고, 이것이 힘을 가진다. 다시:
사악한 자의 지팡이는 의로운 자의 구역에서 안주하지 못할 것이다 (시. 125:8).
[9] 다시:
당신은 쇠 막대로 그들을 짓부수실 것이다; 당신은 옹기장이의 그릇들 같이 그들을 흩으실 것이다 (시. 2:9);
“쇠 막대”는 자연 평면에 있는 영적 진리의 힘을 표시한다, 그 이유는 영적 진리가 들어 있는 모든 자연적 진리는 힘을 가지기 때문이다; “쇠”는 자연적 진리를; 계시록서에서도:
극복하는 자, 그리고 끝까지 내 일들을 준행하는 자, 그에게 나는 민족들을 다스리는 힘을 줄 것이다; 그는 쇠 막대로 그들을 풀을 뜯게 할는지 모른다; 옹기장이의 그릇 같이 그들은 조각들로 부셔질 것이다 (계. 2:26, 27; 또한 12:5; 19:15).
지팡이가 진리의 힘을, 즉 진리를 통한 선의 힘을 표현했기에, 왕은 짧은 지팡이 같은 홀을 지녔다; 그 이유가 왕에 의해 진리 측면에서의 주님이 표현되었기 때문이다; 신성한 진리는 왕권 자체이시다. 홀이 그것들에 속하는 힘을 의미하는데, 이는 위엄에 의해서가 아니라 진리에 의해, 즉 통치하는 진리에 의해, 이 진리는 선으로부터 있는 것 외의 다른 진리는 아니다; 고로 원칙적으로 신성한 진리, 그리고 기독인들과 더불어서는 주님, 이분으로부터 모든 신성한 진리가 있다.

그리고 그는 그것들을 그녀에게 주었다. 이는 이러므로 해서 그것은 확실해졌음을 의미한다. 이는 그녀가 요구하고 주어진 담보물의 의미가 확실함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리고 그녀에게 왔다. 이는 결합을 의미한다. 이는 누군가에게 “오다”, 또는 “들어가다”의 의미가 결합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리고 그 여자는 그로부터 임신하였다. 이는 이렇게 해서 받아졌음을 의미한다.
이는 “임신함”의 의미가 받아졌음 이다로부터; 그러나 받음의 품질은 앞 항을 보라.

19-23절. 그리고 그 여자는 일어났다, 그리고 너울을 벗었다, 그리고 그녀의 과부 옷을 입었다. 20 그리고 유다는 그의 동료 아둘람족의 손에 염소 새끼를 들려서 여인의 손에서 담보물을 받아오도록 보냈다. 그리고 그는 그녀를 발견하지 못했다. 21 그리고 그는 그곳의 사람들에게 물었다, 말하기를, 길가 샘들에 있었던 창녀는 어디에 있소? 그리고 그들이 말했다, 거기에 창녀는 없었다. 22 그리고 그는 유다에게 되돌아 와서 말했다, 나는 그녀를 발견하지 못했다. 그리고 또한 그곳의 사람들이 말했다, 거기에 창녀는 없었다.
23 그리고 유다는 말했다, 그녀로 그것을 자기에게 가져가게 하라, 그렇지 않으면 필시 우리가 책임을 뒤집어 쓸지 모른다. 보라 나는 이 새끼를 보냈다, 그리고 너는 그녀를 찾지 못했다.

그리고 그 여자는 일어났다. 이는 승강을 의미한다. 이는 “일어남”의 의미가 어떤 승강함이다로부터 분명해진다. 일어남에 의해 의미된 승강함은 영적 의미에서는 희미한 상태로부터 명료한 상태로 승강함이다; 이는 마치 무지의 상태로부터 총명의 상태로의 승강함과 비슷하다; 그 이유가 이런 길에서 인간은 세상의 빛의 상태로부터 천국의 빛의 상태로 승강되어진다.

그리고 갔다. 이는 생활을 의미한다. 이는 “가다”의 의미가 사는 것이다로부터 분명해진다. “가는” 것이 내적 의미에서는 사는 것이다는 말이 실로 인간이 존재하는 생각들의 관념들로부터서는 추상적인 듯, 또는 멀리 떨어진 듯 나타날런지 모른다. 그런 이유는 인간은 시간과 공간 안에 있기 때문, 이 시공으로부터 생각 속의 관념도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가다, 발전하다, 여행하다, 이동하다 같은 것에 대한 생각을 말한다. 이런 행동들이 공간 안에서, 또한 시간 안에서 존재하기에, 그리고 공간과 시간이 그것들에 관한 그의 생각과 짜깁어저 있기에, 삶의 상태들이 그것들에 의해 의미된다는 것을 얼른 납득하는 것이 쉽지 않다. 그러나 그것들에 관한 시공으로부터의 생각을 벗을 때, 또는 분리될 때, 의미된 영적인 것이 결과된다. 그 이유가 영계, 또는 천국에서는 시공에 관한 생각은 전혀 없고, 대신 생명의 상태에 속하는 것들만이 생각 속에 있기 때문이다. 천사나 영들의 경우도 인간의 경우 같이 자기들이 이 장소로부터 저 장소로 전진하고 이동하는 것이 나타난다; 그러나 이런 나타남을 생산하는 것은 삶(생명)의 상태들의 변화이다. 그들도 인간의 경우와 같이 자신들로부터 살아간다, 그럼에도 여전히 그들은 자신들로부터 살지 않고 생명의 전부이신 주님의 신성으로부터 살아간다. 천사들과 더불은 이런 나타남들이 진짜, 진실, 현실로 존재함(real)이라 불리운다, 그 이유는 마치 그것들이 (우리가 자연계의 생활을 보듯) 실제로 있는 것처럼 나타나기 때문이다.
때로 나는 이 나타남들에 관하여 영들과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다; 그리고 선 안에 있지 않은 이들, 결과적으로 진리 안에 있지 않은 이들은 자기들이 자신들로부터 산다는 것이 나타남이라고 하는 것을 듣고 싶어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그들은 자신들로부터 살고 싶어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신들로부터 살지 않는다는 것, 장소로부터 장소로의 발전은 변화이고, 생명의 상태의 발전이다는 것을 생생한 경험에 의해 그들에게 보여진 것 외에 말해진 것은, 그들은 자신들로부터 생명을 가진다는 것밖에 더 아는 것이 없음에 만족했을지 모른다는 것, 마치 그들은 자기들 안의 생명이 실제로 자신들로부터 있었는지조차 더 이상 가질 수 없듯 한 것과 같다; 그래도 여전히 더 나은 것은 어떻게 이런 경우가 실제로 있는지를 아는 것이다, 그 이유는 그때 그들이 진리 안에 있기 때문에서 이다, 만일 진리 안에 있다면, 그들은 천국의 빛 안에도 있는다; 그 이유가 천국의 빛은 주님의 신성으로부터 있는 진리 자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고로 그들은 자신들을 위해 선을 주장하지 못하고, 악이 그들에게 달라붙지도 못한다. 천사들은 지식을 수단으로, 뿐만 아니라 지각을 수단으로 이런 진리 안에 있다.
영계에 있는 시간들과 공간들은 생명의 상태들, 그리고 생명의 모든 것은 주님으로부터 이다는 것이 아래 경험으로부터 보여질는지 모른다. 모든 영과 천사는 오른쪽에서 선을, 왼쪽에서 악을 본다. 그리고 이 보는 것은 그가 어느쪽으로 방향을 틀든지 마찬가지이다. 다시 말해 선과 악이 그에게 나타나는 것은 그가 동쪽을, 서쪽을, 남쪽을, 북쪽을 향하여 쳐다보든지 그렇게 나타난다는 말이다. 이것은 영과 천사 모두 각각에게 진실이다; 하여 만일 둘이 쳐다보고 있는데, 하나는 동쪽을, 하나는 서쪽을 쳐다본다 해도, 둘에게 여전히 선은 오른쪽에서, 악은 왼쪽에서 나타난다. 이런 나타남은 보여지는 영들로부터 아주 멀리 떨어져 있어도, 설사 자기 뒤에 있어도 그러하다. 이상의 살핌으로부터 넌지시 암시되는 것은, 생명의 모든 것이 주님으로부터 이다는 것, 또는 주님은 모든 이의 생명 안에 계신다는 것이다; 그 이유가 주님은 거기서 태양으로서 나타나시고, 그분의 오른쪽에 선, 또는 양이 있고, 그분의 왼쪽에 악, 또는 염소가 있다. 그러므로 모든 이와 더불어 비슷해 있는 것은 이미 말한 대로 주님이 생명의 모든 것 이시기 때문이다. 아마 이런 사항은 인간에게는 역설적인 듯 보여질 수밖에 없다, 그 이유는 인간이 세상에 있는 한, 그는 세상적인 것들로부터 생각들을 가져야 하기 때문, 결과적으로 시공으로부터 생각을 가져야 하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영계에서, 위에서 말한 대로, 생각들은 시공으로부터가 아니고, 애착들과 이 애착으로부터의 생각들의 상태들로부터 이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말씀에 있는 시공 역시 상태들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녀 위로부터 너울을 벗었다. 이는 불명료했던 것이 흩으려졌음을 의미한다. 이는 “자신을 너울로 덮음”의 의미가 불명확한 진리쪽에 있음이다로부터; 여기서는 “너울을 벗음”이므로 이 불명확함이 흩으려짐이 된다.

그리고 그녀의 과부 차림새의 옷을 입었다. 이는 총명을 의미한다. 이는 “과부”의 의미가 선이 없이 진리 안에 있으나, 여전히 선에 의해 인도되기를 바라는 이들이다로부터 (4844항); 그리고 “옷”의 의미가 진리들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를 모두 취합하면 총명이 의미되는 이유는 진리들은 총명을 구성하는 것밖에 더 없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지적 마음은 선으로부터 진리들을 통하여 천국의 빛 안에 있고, 천국의 빛은 총명인데, 총명은 신성한 선으로부터 신성한 진리이기 때문이다. 과부차림새의 옷을 벗는 것이 총명을 의미하는 더 많은 이유는, 일반적 의미에서 진리 안에 있는 자가 선을 수단으로 총명의 진리, 고로 총명 안으로 인도되기를 바라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래에 간략히나마 설명을 더 한다면 어떻게 이 본문에서 이런 의미가 있는지를 알는지 모른다. 인간에 있는 진리는 그 진리가 선에 의해 인도될 때까지 총명의 진리는 아니다; 그리고 이 진리가 선에 의해 인도될 때, 그것은 처음 동안은 (진짜라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총명의 진리가 되어 있는다. 그 이유가 진리는 자체로부터 생명을 가지지 않고 선으로부터 가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후 인간이 진리에 따라 살 때, 그 진리는 선으로부터 생명을 (진짜로) 가진다. 그 이유가 이 때야말로 진리의 생명이 인간의 의지 안으로 주입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의 의지로부터 그의 행동 안으로, 고로 인간 전체에 주입된다. 인간이 알기만 하거나 또는 납득만 하는 진리는 그의 의지의 바깥쪽에 머무르고 있다, 따라서 그의 생명의 바깥쪽에 있는 셈이다; 그 이유가 인간의 의지가 그의 생명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이 진리를 뜻할 때, 이 진리는 그의 생명의 문턱 위에 있는다; 그리고 뜻함으로부터 그가 행할 때, 그때 진리는 그의 전체 인간이 되어 있다; 그리고 그가 이를 반복적으로 행할 때, 이것은 그가 습관으로부터 되돌아 가는 것 뿐만 아니라 애착으로부터 되돌아 가는 것이고, 자유함에서 되돌아 가는 것이다. (아마 자신 스스로 어떤 것을 행하고 기뻐 흡족해 하는 경우 그것 자체가 자신의 일부인 듯 여겨지는 자신의 경험을 예로 생각해보라 역자주) 이와 반대로 생각만 하고 행하지 않는 것, 더 나아가 생각은 했으나 행하고 싶지 않은 것은 자신 바깥쪽에 있고, 이는 자그마한 바람만 불어도 기다렸다는 듯이 날려가는 겨일 뿐이다. 이는 다른 삶에서 사실상 있는 일이다; 이로부터도 일함들이 없는 신앙이 이런 겨에 불과하다고 생각되지 않는가? 이로부터 총명의 진리가 무엇인지도 분명해진다. 즉 이것은 선으로부터 있는 진리이다. 진리는 이해력이라 단언되고, 선은 의지력이라 단언된다. 같으나 다른 말로, 진리는 교리 속에, 선은 생활 속에 있다.

그리고 유다는 염소들 중의 새끼를 보냈다. 이는 결혼의 담보물을 의미한다. 이는 “염소들 중의 새끼”가 부부의 사랑의 담보물, 또는 결합의 담보물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의 동료 아둘람족의 손을 수단으로. 이는 거짓을 수단으로를 의미한다. 이는 “유다의 동료”인 아둘람족 히라의 표현함이 거짓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여인의 손으로부터 담보물을 받아 가기 위하여. 이는 외적인 담보물 대신에를 의미한다. 이는 담보물인 “도장, 머리수건, 지팡이”의 의미가 외적 또는 자연적 인간의 결합의 담보물 이었다로부터, 고로 외적인 담보물 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러나 그는 그녀를 찾지 못했다. 이는 자기 쪽에서, 즉 유다쪽에서 결혼(부부)에 관한 어떤 것도 있지 않았기 때문에를 의미한다. 그 이유는 그가 그녀에게 온 것은 아내로서가 아니라 창녀로서 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줄을 아는 다말이기에 그녀는 염소 새끼를 바라지 않았는 바, 이를 수단으로 결혼 담보물이 의미되었다. 실로 다말쪽에서도 진짜(순수한) 결혼의 어떤 것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 이유가 그녀의 결합은 남편의 형제됨의 의무 수행을 빌미로 해서 시아버지와 며느리 사이의 결합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사항들이 유다가 그녀를 발견하지 못함에 담겨 있다.

그리고 그는 그 장소의 사람들에게 물었다, 말하기를. 이는 이 진리들이 상담되어졌음을 의미한다. 이는 “묻다”의 의미가 상담하다 이다로부터; 그리고 “사람들”의 의미가 진리들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장소의 사람들”은 이것의 상태에 관한 진리들인데, 그 이유는 “장소”가 상태이기 때문이다.

창녀는 어디에 있소? 이는 그것이 거짓이었는지 여부를 의미한다. 이는 “창녀”의 의미가 거짓이다로부터 알려진다.

길가 샘들에 있었던. 이는 그것이 진리 같이 나타났음을 의미한다. 이는 “샘들”의 의미가 교회의 진리들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길가”라고 말해지는데, “길”은 진리를 서술하고, 반대적 의미에서는 거짓을 서술한다; 그리고 묻는 말, “길가 샘들에 있었던 창녀는 어디 있는가?”에 의해서는 진리 같이 나타났던 거짓이었는 지가 의미된다.

그리고 그들은 말했다. 이는 진리들로부터의 지각을 의미한다. 이는 말씀의 역사 부분에서 “말하다”의 의미가 지각하다 임으로부터 알게 된다. 진리들로부터 지각함이 의미된 이유는 “장소의 사람들이 말했기” 때문, 그리고 “장소의 사람들”은 진리들이기 때문이다.

거기에 창녀는 없었다. 이는 그것은 거짓이 아니었다를 의미한다. 이는 “창녀”의 의미가 거짓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단어들의 의미에 관하여 펼쳐보인 이런저런 사항들이 시리즈들 안에 포함되었다는 것은 앞에서 말해온 것으로부터 어느 정도는 나타날는지 모른다; 그리고 더욱이 그것들은 유태 교회의 내적, 외적 진리, 즉 다말에 의해 표현된 내적 진리와 유다에 의해 표현된 외적 진리 사이의 결합의 본성이 알려지지 않으면 납득되어질 수 없는 사항들이다. 이런 사항들이 미리 알려져야 이 장 안의 단어들의 의미 파악도 그늘 안으로 빠져들지 않게 된다. 그 이유가 내적 인간의 시각인 이해력이 빛이든, 그늘이든 가지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런 사항들은 앞서 가졌던 개념에 일치하지 못하면 그늘 아래 있어질 수밖에 없게 된다. 어쨌든 시리즈에 등장하는 이런저런 세부 사항들, 너무나 무수해서 인간에 의해서는 혼돈과 더불어 납득조차 힘들어도 천사들의 이해력의 빛 안으로 명료하게 들어 간다. 이것만 보아도 인간의 총명은 천사의 총명과는 비교조차 안될지 모른다.

그리고 그는 유다에게 되돌아 왔다. 이는 반성함(곱씹어봄, reflection)을 의미한다. 이는 “유다의 동료 아둘람족”에 의해 거짓이 의미된다는 사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리고 발생한 것에 관련되어 되돌아 온 것은 거짓이라고 말해질 때, 이는 유다의 동료로부터 말해진 바, 이는 마음에 상기하는 것, 그리고 어떻게 이 경우가 있는지를 곰곰이 셍각하는 것밖에 더 아니다.

그리고 말했다, 나는 그녀를 찾지 못했다. 이는 이것은 거짓을 수단으로 밝혀질 수 없음을 의미한다. 이는 “발견하지 못함”의 의미가 밝혀질 수 없음이다로부터 분명해진다; 그리고 아둘람족이 이를 말하기 때문인데, 그에 의해 거짓이 의미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어진 말은 “나는 그녀를 찾지 못했다”에 의해 거짓은 그것을 밝힐 수 없었다, 또는 그것은 거짓을 수단으로 밝혀질 수 없다가 의미된다.

그리고 또한 그 장소의 사람들이 말했다, 거기에 창녀는 없었다. 이는 그것이 거짓이 아니었음을 진리로부터 지각했음을 의미한다. 이는 앞의 설명을 참조하라.

그리고 유다가 말했다, 그녀로 그것을 그녀에게 가져 가게 하라. 이는 이것은 그에게 무관심이었다를 의미한다. 이는 이 말들에 있는 애착으로부터 알게 되는데, 분개함과 이로부터의 무관심이다.

필시 우리는 책임을 면치 못할런지 모른다. 이는 비록 그것이 망신거리였다 해도를 의미한다. “책임을 짐, 수치스러움을 면치 못함”의 의미가 불명예, 망신거리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보라 나는 새끼를 보냈다. 이는 담보물이 있으니 충분하다를 의미한다. 이는 “염소들 중의 새끼”의 의미가 부부 사랑의 담보물, 또는 결합의 담보물이다로부터, 그러나 여기서는 오직 담보물만을 의미하는데, 그 이유는 이것을 다말이 수령하지 않았기 때문, 즉 부부의 사랑 따위는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이 이유이기에, “그는 그녀를 찾지 못했다”에 의해 만일 부부적인 어떤 것이 있지 않다면이 의미되어 있다; 이것 또한 무관심으로부터 흐르고 있다. 사실 이런 사항들은 반복 설명할 이유조차 없기는 하다, 그 이유가 이것들이 이해력의 그늘에 가리워질 수밖에 없는 탓이다. 또한 이해력의 그늘에 빠져든 것은 불신앙의 늪에 빠져든다. 예를 들면, 교회는 부부적인 것, 즉 선과 진리의 부부적 임이 있어야만 한다는 것; 또한 외적인 것 안에 내적인 것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는 것; 그리고 이 둘 없이 교회는 아무것도 아니다 등등이다. 현재의 단어들 안에서 유태 교회에 있는 내적인 것과 외적인 것들이 내적 의미에서 묘사되고 있다. 그런데도 보여지는 결과란, 이 민족에 관한 한, 외적인 것 안에 어떤 내적인 것도 전혀 없었다는 것, 이 민족들로부터 추상화된 율법과 규례만 거기에 있었다는 점이다.
유태 민족과 더불어 교회가 있었다는 것, 그들은 여느 다른 민족에 앞서 뽑히고 사랑된 민족이다고 믿으며 당차게 (설교 강단에서조차) 말해지는 것을 (요즈음의 교회에서도) 심심찮게 목격하기도 한다; 이들의 항변인즉, 그들이 이렇게 선택된 백성이기에 그렇게도 많은 기적들이 그들 앞에서 있었고, 많은 예언자들이 그들에게 보내진 것이고, 더구나 그들로 말씀을 소유하게 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이 민족 자체는 교회로부터의 어떤 것도 지니지 않았다; 그 이유가 그들의 교회가 선행 안에 있지 않았기 때문, 그들은 무엇이 진짜 선행인지를 모른다, 고로 주님에 대한 신앙도 없었다; 실로 그들은 그분이 오시리라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그분이 오시면, 자신들을 다른 민족 위에 우뚝 서게 해줄 것이라고만 상상했는데, 오셨다는 그분이 그렇지 않자, 그분을 철저히 거절했다; 게다가 그분의 천국 왕국에 관하여는 귀를 여는 것조차 지겨워했다. 교회의 내적인 사항들이라면 교리 측면 뿐만 아니라 생활 측면에서도 배제했다. 이 정도만 가지고도 이 민족에 있는 교회 속에는 아무것도 있지 않았다고 결말지을 수 있을 것이다.
교회가 사람들과 더불어 있는 방식이 있고, 교회가 사람들 안에 있는 방식이 있다. 예를 들면, 기독 교회는 말씀을 가지는 이들과 더불어 있다, 그리고 교리로부터 주님을 설교한다; 그러나 그들이 선과 진리의 결혼 안에 있지 않으면, 즉 그들이 이웃을 향한 선행과 이로부터의 신앙 안에 있지 않으면, 고로 교회라는 외적인 것들 안에 내적인 것들을 담고 있지 않으면, 그들 안에는 교회에 관한 어떤 것도 있지 않은 것이다. 교회는 내적인 것들로부터 분리된 외적인 것들 안에 있는 이들 안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또한 선행으로부터 분리된 신앙 안에 있는 이들 안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또한 교리로부터 주님을 인정하는데 생활로부터 인정함이 나타나지 않는 이들 안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교회가 민족과 더불어 있는 경우가 있고, 민족 안에 있는 경우가 있다는 말이다. 이 둘은 경우가 아주 다르다.
이 장은 내적 의미에서 유태 민족과 더불어 있는 교회와 유태 민족 안에 있는 교회를 묘사하고 있다. 이 민족과 더불은 교회의 품질은 남편의 형제된 의무를 수행한다는 빌미 아래 다말이 유다와 결합함에 의해서 묘사되어졌고; 이 민족 안에 있는 품질은 유다가 창녀로서의 다말과 결합함에 의해 묘사되었다. 이 이상의 세부적 설명은 생략한다, 그 이유는 그 이상의 것에 대한 이해는 인간의 경우 이해력의 그늘 아래로 빠져들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천사의 몫일지 모른다 역자주); 이해력의 그늘이라 말한 이유는 오늘날에도 교회의 내적인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자가 너무나 적기 때문이다. 이웃을 향한 선행이 뜻함 안에 존재한다는 것, 그리고 뜻함으로부터 행동함 안에 존재한다는 것, 그리고 이로부터 신앙이 지각함 안에 존재한다는 것을 누가 아는가? 이것을 모를 때, 특히 부정될 때, 마치 선행의 일함 없이 신앙만으로 구원받음이 있다고 함으로 선행을 부정해버릴 때, 이 장에서 묘사되는 것, 즉 유태 민족과 더불은, 유태 민족 안에 있는 교회의 외적인 것과 내적인 것의 결합에 관한 내적 의미로부터의 이해함은 그늘 아래 추락되고 만다. 선행이 내적인 것이고 교회의 본질이다는 것을 모르는 이들은 본문의 문맥을 이해함을 위한 첫 단계부터 너무나 멀어지고 만다. 따라서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향한 사랑에 관련되는 것들이 생명의 모든 것이 되어 있는 곳, 결과적으로 지혜의 모든 것, 총명의 모든 것이 있는 곳, 천국에 있는 무수한 사항들로부터는 아주 멀리 떨어져 있다.

24-26절. 그리고 석 달이 지나갔다, 그리고 누군가 유다에게 말했다, 말하기를, 당신의 며느리 다말이 음란하게 놀아났다. 그리고 더구나 그녀는 매춘으로 아이와 함께 있다. 그리고 유다가 말했다, 그녀를 끌어내라, 그리고 그녀를 태워라. 25 그 여자는 끌려나갔다, 그리고 그 여자는 그녀의 시아버지에게 보내졌다, 말하기를, 이것들이 있는 사람에 의해서 나는 아이와 함께 있다. 그리고 그 여자는 말했다, 청컨대 이것들, 도장과 머리 수건과 지팡이가 누구의 것인지 인정하라. 26 그리고 유다는 그것들을 인정했다, 그리고 말했다, 그 여자가 나보다 더 정당하다. 내가 그녀에게 내 아들 셀라를 주지 않은 까닭이다.

그후 석 달이 지났다. 이는 새로운 상태를 의미한다. 이는 “3”의 의미가 완전인 것, 이로부터 마지막과 처음 다함께, 또는 끝과 시작 모두이다로부터; 그리고 “달”의 의미가 상태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내적 의미에서 시간의 모든 기간들, 시간, 날, 주, 달, 년, 시기, 시대 같은 것들은 상태들을 의미한다; 또한 이것들이 더 세분해져 있는 경우도 마찬가지 이다; 즉 하루의 때들인 정오, 저녁, 밤, 아침; 그리고 한 해의 계절인, 여름, 가을, 겨울, 봄; 그리고 인생의 구분되는 시기인 유아, 어린 시절, 젊은 이, 성년, 노년; 등등인데, 이런 것들 모두가 각각의 상태를 의미한다. 어떤 상태들인지는 이미 살폈다.
때들이 상태들을 의미하는 이유는 때들이 다른 삶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영들과 천사들의 삶의 발전은 실로 때들에서 같이 나타난다; 그러나 그들은 인간이 때들을 생각하듯하는 때들에 관한 생각은 없다; 그들의 생각은 생명의 상태들로부터 이고, 이것은 때들에 관한 관념 없이 있다. 이런 이유로 그들 삶의 발전은 다른 시기들로 구별되지 않는다, 그 이유가 거기서 그들은 늙는 쪽으로 성장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날들이나 햇수들 같은 것이 없다, 그 이유는 그들의 태양인 주님은 언제나 떠 있고, 지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때에 관한 관념이 그들의 생각들 안으로 들어가지 않는다, 그러나 오직 상태와 상태의 발전에 대한 관념만이 그들의 생각 안으로 들어간다. 그들의 관념들은 감각 이전에 존재한 것들로부터 가져가진 것들이다.
이런 사항들은 제아무리 설명해도 역설적이다고 느낄 수밖에 없는데, 그런 이유는 인간의 생각 속의 모든 관념이 여하튼 시공에 관한 것이 섞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인간은 시공으로부터 그의 기억과 재수집이 있고, 그의 더 낮은 생각, 즉 물질이라 부르는 것도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이런 관념들을 오게 하는 기억은 다른 삶에서는 정지된 채로 있다. 다른 삶에 있는 그들은 내면의 기억 안에 있다, 그리고 그것의 생각 속의 관념들 안에 있다; 그리고 이 후자의 기억으로부터의 생각은 시간을 가지고 있지 않고 그것에 인접한 공간도 없다. 그 대신 상태들과 상태들의 발전들이 있다. 이로부터 역시 그것들은 상응하고, 이와 같은 상응의 결과 말씀에 있는 시간은 상태들을 의미한다.
“약 석 달 후”에 의해서 새로운 상태가 의미되는 이유는 “달”에 의해 상태가 의미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미 말한 바대로, “3”에 의해 마지막 그리고 처음 다 함께가, 또는 마지막 그리고 시작 모두가 의미된다. 이런 이유는 영계에서 이 상태로부터 저 상태로의 계속적인 발전이 있기 때문, 결과적으로 모두 각각의 상태의 마지막 또는 끝에서 처음 또는 시작이 있다. 그러므로 계속적이다, 고로 “석 달 후”에 의해 새로운 상태가 의미된다. 땅 위 주님의 왕국 또는 영계인 교회에도 역시 비슷해서, 한 민족과 더불은 교회의 끝에서는 저 민족과 더불은 새로운 교회의 시작이 언제나 있다. 고로 마지막은 처음으로 이어지기에, 주님에 관련해서 몇 번씩 말해지는 것은, 그분은 마지막과 처음이시다는 것이다 (이. 41:4; 44:4; 계. 21:6; 22:13); 관계적 의미에서 항구적인 것, 최고 의미에서 영원한 것이 의미된다.

그리고 이런 말이 유다에게 말해졌다. 이는 전달됨을 의미한다. 이는 “말해짐”의 의미가 어떤 소식이 전달됨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말하기를, 당신의 며느리 다말이 음란하게 놀아났다. 이는 부부적인 어떤 것이 그들 사이에 존재한다는 것은 거짓임을 지각함을 의미한다. 이는 “말하다”가 역사 부분의 말씀에서는 지각하다 이다로부터; “음란하게 놀다”의 의미가 거짓이다로부터; 다말의 표현함이 표현 교회의 내적인 것이다로부터; 그리고 “며느리”의 의미가 교회의 진리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러므로 “말하기를, 다말, 당신의 며느리가 음란하게 놀았다”는 말에 의해 부부적인 어떤 것이 그들 사이에 존재한다는 것은 거짓임을 지각함이 의미된다. 어떻게 시리즈에서 이런 것들이 있는지에 대하여는 앞에서 살핀 바도 있다, 즉 자기들의 광신적 신앙으로부터의 유태 민족은 교회의 내적인 것을 창녀로서 지각했다, 그리고 내적인 것으로부터 설교함이나 생활함은 매춘으로서 지각했다. 그 이유는 내적인 것 없이 외적인 것에만 있는 이들은 교회의 내적인 것을 창녀나 매춘으로밖에 달리 간주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즉 그들은 참된 것을 거짓이라고, 거짓을 참되다고 부른다.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는 외적인 것만으로는 무엇이 진짜인지, 가짜인지를 누구도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외적 시각으로부터 있는 것들을 판단할 내적 시각이 반드시 있어야만 한다, 이렇기 위해서 내적 시각은 반드시 천국의 빛에 있어야 한다. 주님에 대한 신앙 안에 있고, 이 신앙으로부터 말씀을 읽지 않으면, 우리의 내적 시각은 천국의 빛 안에 있지 않는다.
유태 민족이 내적인 것 없이 외적인 것 안에 있었다는 것, 그러므로 진리가 거짓이다고, 거짓이 진리이다고 믿었다는 것은 그들의 가르침만 엿보아도 판별된다. 즉 그들은 원수를 미워함을 허용할 수 있다는 것, 자기들의 광신적 신앙으로부터 있지 않은 이들을 미워하는 삶을 꾸렸다는 것 등등이다. 그들은 이렇게까지 조차 믿었는데, 즉 자기들이 이방인들을 야만적이고 잔인하게 처우하는 것을 여호와께서 흡족해 하신다는 것, 하여 그들을 죽인 후 시체를 새나 짐승이 먹게 노출시켜 놓거나, 그들을 데려다 톱질과 써레질과 벽돌구이를 시켰다. (삼하. 12:31). 더욱이 어떤 원인으로 적이라고 선포되면 동료였던 자도 위와 같은 식으로 처리했다. 고로 그들의 광신적 신앙 안에 내적인 것은 하나도 없었다는 것이 분명하다. 만일 누가 그들에게 위와 같은 짓이 교회의 내적인 것에 반대된다고 말해지면, 그들은 그것은 거짓이다고 응수했다. 그들이 외적인 것들 안에만 있고, 내적인 것에는 완전히 무지했다는 것, 그리고 내적인 것에 반대되는 생활을 했다는 것은 주님의 가르침에서도 분명해진다 (마. 5:21-48).

그리고 더구나 그 여자는 매춘으로 아이와 함께 있다. 이는 거기에서 어떤 것이 생산되어질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자궁 안에서 운반함” 또는 “아이와 더불어 있음”의 의미가 어떤 것을 생산하는 것이다로부터, 그 이유가 “씨”에 의해 신앙의 진리가 의미되기 때문, 그리고 “임신”에 의해 신앙의 진리를 받아들임이 의미되기 때문, 이로부터 “자궁 안에서 운반함” 또는 “아이와 더불어 있음”에 의해 생산함이 의미된다; 그리고“매춘”의 의미가 거짓이다로부터, 즉 그들의 광신적 신앙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위 각각의 의미로부터, 이 말, 즉 “말하기를, 다말, 당신의 며느리가 음란하게 놀아났다”; 그리고 더욱이 보라, 그녀는 매춘으로 아이와 함께 있다“에 의해 부부적인 어떤 것이 그들 사이에 존재하는 것은 거짓이다는 것, 그리고 거기로부터 어떤 것이 생산되어질 수 있다는 것을 지각함에 의미되어진다. 생산되는 것, 이를 교회에 응용하면, 진리를 수단으로 생산되는 선을 표시한다; 그리고 이것은 진리가 이해력을 통과해서 의지력 안으로 건너갈 때, 그 다음 의지력으로부터 행동 안으로 건너갈 때 생산되어진다. 그 이유가 앞에 말한 바, ”씨“는 신앙의 진리이고, ”임신“은 받음이다, 그리고 받음이 결과되는 것은 이해력 속에 있는 진리가 의지력 속에 있는 선 안으로 건너갈 때, 또는 신앙 속에 있는 진리가 선행 속에 있는 선으로 건너갈 때이다; 그리고 이것이 의지 안에 있을 때가 자궁 안에 있을 때이고, 이때 처음 생산되어진다; 그리고 인간이 행동에서 선 안에 있을 때, 즉 그가 의지로부터 선을 생산할 때, 고로 자유함과 기뻐함으로부터 선을 생산할 때, 자궁 밖으로 나가는 것, 또는 출생됨이다. 이것 역시 재출생, 또는 거듭남에 의해 뜻해진다. 이로부터도 “아이와 함께 있다”에 의해 영적 의미에서 의미되는 것이 분명해진다. 어쨌든 여기서는 반대적인 것, 즉 어떤 선도 생산되어질 수 없다가 의미되어진다; 그 이유가 여기서 묘사되는 이 민족은 어떤 진리 안에도 있지 않았기 때문, 그런 이유는 그들은 교회의 어떤 내적인 것도 없었고, 오직 거짓 안에 있었기 때문이다.
내적 인간을 만드는 재탄생 또는 거듭나지는 것이 이 민족에게는 통째로 알려지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이런 주제는 그들에게는 창녀처럼 여겨졌다. 이는 유태인의 지도자 중의 한사람인 니고데모로부터도 알게 된다 (요. 3:1-13). 즉 그가 말했다, “어떻게 인간이 늙었는데, 다시 태어날 수 있습니까? 그가 두 번째로 자기 어머니의 자궁 안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까?” 이 대목에서 주님께서 그분의 왕국과 교회 속의 내적인 것을 여셨다는 것은 아마 대체로 기독교계에 알려져 있다, 그러나 사실 이런 내적인 것들은 고대인들에게 이미 알려져 있었다; 즉 이런 것이다- 인간이 생명 안으로 들어가기 위하여 재탄생되어야 한다는 것; 그때 그는 옛 인간을, 즉 자기의 악한 바램들과 더불어 자기와 세상을 사랑함을 벗고, 새 인간을, 즉 이웃을 향한 사랑과 하느님을 사랑함을 입어야 한다는 것; 천국은 거듭난 인간 안에 있다는 것 등등이다. 이런 사항들은 고대 교회에 속해 있던 이들에게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이런 사항들을 표현하는 외적인 것들에 의해 인도되었다. 그러나 이런 사항들은 유태 민족과 더불어서는 완전히 잊혀지고 말았다; 하여 주님께서는 그것들을 가르치셨고, 표현물 자체를 폐지하셨다, 그 이유는 그들이 표현물에 그분 자신을 연계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형상(image, 허상, 거울 속의 것)은 형체(form, 실상, 거울 밖의 것)가 나타날 때 사라져야만 하기에 표현물을 폐지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그분은 새로운 교회를 설립하셨다, 이 교회는 과거 표현들을 수단으로 내적인 것쪽으로 인도되던 교회와는 같지가 않다; 이 새로운 교회는 표현(물)들 없이 그것들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그분은 외적 의식으로 두 가지만을 명령하셨다-세례와 성찬이다- 세례식은 거듭남을 상기하기 위해서 이고, 성찬식은 그분을 상기하는 것, 즉 온 인류에 대한 그분의 사랑과 그분의 이런 사랑에 감사하여 그분께 되돌리는 인간의 상호적인 사랑을 상기하기 위하여서 이다. 사실 이런 두 가지 사항 역시 고대인들에게 알려져 왔었지만, 유태 민족과 더불어서 완전히 상실되어 이런 사항들이 이 후손들에게 말해지면 그것은 거짓이라고 판단해버린다.

그리고 유다가 말했다. 이는 유태 민족이 있었던 광신적 신앙으로부터의 판결(sentence)을 의미한다. 이는 유다의 표현함이 유태 민족의 광신적 신앙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로부터의 판결이 의미되는 것은 아래 구절로부터 분명해진다.

그녀를 끌어오라, 그리고 그녀를 태워라. 이는 다말에 의해 표현된 교회의 내적인 것은 근절되어져야 한다를 의미한다. “그녀를 끌어오라, 그녀를 태워라”는 근절해버리기 위함이다. “끌어오라”는 진리 측면에서, “태워라”는 선의 측면에서 근절해버림 이다. “태워라”가 선을 근절함이라 단언되는 것은 말씀의 많은 곳에서 분명해진다; 그리고 그 이유인즉, “불”, “불꽃”이 영적 의미에서 선을 표시하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열(heat)”은 선에 애착함을 표시하고, 반대적 의미로는 악에 애착함이다. 더욱이 선은 실제로 영적인 불이고, 이 불로부터 생기를 주는 영적인 열이 온다; 그리고 악도 불이다, 이로부터 살라 없애는 열이 온다. 사랑의 선이 영적인 열인 것은 이를 곰곰이 추스려 생각하는 이라면 누구나 아는 (설명이 요구되지 않는) 너무나 자명한 사실이다. 그 이유가 만일 우리가 (절대로 필요한) 생명의 불과 열을 어디서 가지는 지를 잠깐만 곰곰이 추스르면 그것은 사랑으로부터 이다는 것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사랑이 중단되자 마자, 인간은 차갑게 되기 때문에, 반대로 그가 사랑 안에 더 있으면, 그 만큼 그의 따뜻함은 성장한다. 인간의 생명력이 이 근원으로부터 있지 않으면, 그는 생명을 지닐 수 없다. 그러나 생명을 생산하는 영적인 불 또는 열이 악한 자와 더불어서는 태워 없애버리는 불로 바뀐다. 이성이 결핍된 동물들에서도 영적인 불이 흘러서 생명을 생산해주기는 인간의 경우와 비슷하나, 이 생명은 그들의 유기체의 형체 안에 받아들임에 따라서일 뿐이다; 이런 이유로 그들의 지식들과 애착들은 선천적(본능적)이다.

그녀는 끌려 나갔다. 이는 그것이 결과를, 즉 근절됨을 이제 막 보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이는 “끌려나가 태워짐”의 의미가 근절해버림 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고로 여기서는 이 상황이 이제 막 벌어지는 찰나임을 암시한다.

그리고 그 여자는 그녀의 시아버지에게 보내졌다. 이는 은근히 뭔가를 심어줌을 의미한다. 이는 시리즈로부터 암시되는 것이 그녀의 시아버지에게 당신이 아이의 아버지임을 은근히 심어주는 결과가 있으리라 예상하게 한다.

말하기를, 이것들이 있는 사람으로 말미암아 나는 아이와 함께 있다. 이는 이와 같은 품질이 그들의 광신적 신앙 안에 있음을 의미한다. 이는 여기서 “사람”에 해당하는 자가 유다이고, 유다는 유태 민족의 광신적 신앙을 표현한다로부터; 그리고 “자궁에서 운반함” 또는 “아이와 함께 있다”가 생산되어지는 것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러나 여기서는 생산된 것은 아니고 안에 있는 것, 따라서 생산될 것이 예상되는 상태이다. 이 생산물은 첫 결과, 이 결과는 유효하기 때문에 원인이라 불리우고, 이로부터 는 더욱 결과인 셈이다.

그리고 그 여자는 말했다, 청컨대 이것들, 도장과 머리 수건과 지팡이가 누구의 것인지 인정하라. 이는 이것은 담보물로부터 알게 되어야함을 의미한다. 이는 “도장, 머리수건, 지팡이”가 외적 또는 자연적 인간의 결합에 관한 담보물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리고 유다는 그것들을 인정했다. 이는 그들의 것임을 그들이 확증했음을 의미한다. 이는 “인정함”의 의미가 확언함이다로부터, 그리고 이 확언은 그가 담보물이 그의 것임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이다. 이 구절에는 이 민족의 특질(genius)이 담겨 있다; 즉 그들은 교회의 내적인 것을 거짓으로 여겨 거절했음에도, 이것이 그들의 것들임이 그들 안으로 은근히 심어져 있을 때, 그들은 그것을 받아들이고 확언한다는 것이다. 이 민족의 경우 같이, 더러운 사랑들 안에 있고, 탐욕(avarce) 안에, 그리하여 자아 사랑 안에 있는 이들은 마음의 시선을 위쪽으로 향하게 해서 자아 외의 어떤 다른 근원으로부터 진리를 볼 수 없다; 그러므로 이것이 자신들에게서 비롯되었다고 할 때, 그들은 그것을 확언한다(확언할 수밖에 없다). 예를 들면, 그들에게 말씀은 그 자체가 신성하다, 그리고 천국의 비밀들을 포함하고 있다, 그리고 이런 비밀들은 천사들에 의해서만 납득되어질 수 있다 라고 말하면, 그들은 그것이 진리이다고 확언한다; 그 이유는 그들은 말씀을 자신들의 것으로 간주한다, 그 이유는 이것이 그들 위에, 그들 사이에 있었고, 글자에서 자신들을 취급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적 진리들, 또는 비밀들이 그들에게 알려지면 그들은 이것을 거절한다.
만일 그들에게 그들의 교회의 의식들이 자체 안에서 거룩하다고 말하면, 그들은 이것이 그렇다고 확언하는데, 그 이유는 그들이 의식들을 자신의 것으로 간주하기 때문; 그러나 거룩한 것은 그들로부터 떨어져 있는 의식들 안에서 이다고 말하면, 그들은 이것을 부정한다. 다시, 만일 그들에게 유태 교회는 천적이고 이스라엘 교회는 영적이다고 말하면, 그들은 이것 역시 그렇다고 확언한다; 그러나 그들이 영적이고 천적이다 불리우는 이유는 그 교회의 세부적인 것들이 영적이고 천적인 것을 표현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표현물은 어떤 것일 뿐 인물이 아니다고 말하면, 그들은 이것을 부정한다. 다시, 만일 그들에게 모세의 지팡이에는 여호와의 힘이 있었다, 그러나 신성한 명령에서만 힘이 있었다고 말하면, 그들은 그것을 부정하고 거짓이라 부른다.
만일 그들에게 모세에 의해 세워진 놋뱀이 뱀에 물린 자들을 치료했다, 그리고 그것은 기적이었다고 말하면 그들은 그것을 확언한다; 그러나 놋뱀 자체가 치료한 것이 아니라는 것, 그 자체 기적은 아니다, 이것은 그렇게 표현된 주님으로부터 치료된 것이다 라고 말하면, 그들은 부정하고 거짓이다고 말한다. (뱀에 관련된 것은 민. 21:7-9; 왕하. 18:4; 요. 3:14, 15를 참조하라.) 이와 같은 것들이 유다의 인정함에 의해 의미되어 있다, 그리고 유다에 의해 의미된 민족의 부분에서 다말에 의해 표현된 교회의 내적인 것과 결합되어 있다; 그리고 그들이 이와 같기 때문에, 유다는 남편의 형제된 의무 수행을 위해서 다말에게 온 것이 아니라 매춘자로서 창녀에게 간 것이다.

그리고 말했다, 그 여자는 나보다 더 정당하다. 이는 거기에 외적인 것이 내적인 것과 결합함은 없고, 단지 내적인 것이 외적인 것과 결합함 만이 있었음을 의미한다. 이는 앞에서 유태 민족의 교회에 관하여 살피기도 했다; 즉 이 백성과 더불은 교회, 이는 내적인 것이 외적인 것과 결합되어져 있다; 그러나 그들 안에는 교회가 없었다, 즉 외적인 것이 내적인 것과 결합하지 않았다. 교회는 상호적이어야만 존재한다.

내가 내 아들 셀라를 그녀에게 주지 않은 까닭에서 이다. 이는 외적인 것이 이와 같은 품질 속에 있었기 때문에를 의미한다. 이는 앞의 설명들로부터 분명해진다; 즉 다말이 유다의 아들, 셀라에게 주어질 수 없었던 이유는 주어질 경우, 즉 남편의 형제된 의무 수행의 법에 일치하여 다말이 아내로서 주어지는 것인데, 이에 반해 유태 민족의 광신적 신앙이 표현되려면, 합법적이 아닌 것에 의한 결합이어야 했기에, 즉 시아버지와 창녀로서의 며느리 사이의 결합이어야 그 광신적 신앙이 적절히 표현되기 때문에서 이다.

그리고 그는 그녀를 알려는 것을 더 추가하지 않았다. 이는 더 이상 결합은 없었음을 의미한다. 이는 “안다”는 것이 결합되는 것이다로부터; 그리고 “더 이상 추가하지 않다”의 의미가 교회의 내적인 것과의 결합은 더 이상 없었다 이다로부터; 그 이유가 교회의 내적인 것이 다말에 의해 표현되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유다는 더 이상 아들들을 갖지 못했다.

27-30절. 그리고 산고를 겪는 때가 오고 있었다, 그리고 보라, 쌍둥이가 그녀의 자궁에 있었다. 28 그리고 그 여자는 해산하고 있을 때, 한 아이가 손을 내밀었다. 그리고 산파가 잡고 그의 손에 두 번 물들인 것을 매었다, 말하기를, 이것이 먼저 나왔다. 29 그리고 그는 자기 손을 뒤로 당겼다, 보라 그의 형제가 나왔다, 그리고 그 여자는 말했다, 어찌하여 너는 깨뜨려서 네 위에 깨뜨림(위반)이 있느냐? 그리고 그는 그의 이름을 베레스라고 불렀다. 30 그리고 그 뒤에 두 번 물들인 (것을) 맨 그의 형제가 나왔다. 그리고 그는 그의 이름을 제라라고 불렀다.

때가 오고 있었다. 이는 뒤따르는 상태를 의미한다. 이는 “때”의 의미가 상태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때가 옴”이 뒤이어지는 상태인 것은 분명하다, 그 이유는 뒤따르기 때문이다.

그녀의 해산. 이는 내적 진리쪽에서 인정함을 의미한다. 이는 “해산함”이 신앙과 행동에서 인정함이다로부터; 그리고 그녀, 즉 다말의 표현함이 표현 교회의 내적인 것, 결과적으로 내적 교회이다로부터 알려진다.

그리고 보라, 쌍둥이가 그녀의 자궁에 있었다. 이는 교회의 두 가지 모두의 것들을 의미한다. 이는 “쌍둥이”의 의미가 선과 진리 모두이다로부터; 그리고 “자궁”의 의미가 임신된 선과 진리가 놓이는 곳, 결과적으로 교회 속에 있는 것이 있는 곳이다. “자궁”은 진짜 의미에서 순진이 있는 가장 깊은 부부의 사랑을 의미한다, 그 이유는 웅대한 사람 안에서 자궁은 이 사랑과 상응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천국의 결혼에 속하는 선과 진리를 사랑함에 그것의 근원을 가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결혼이 천국 자체 또는 주님의 왕국이기에, 그리고 땅 위 주님의 왕국이 교회이기에, 그러므로 교회 역시 “자궁”에 의해 의미된다; 그 이유가 선과 진리의 결혼이 있는 곳이 교회이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자궁을 염”은 교회의 파생되는 교리들을 표시하고, 그리고 교회의 진리들과 선들을 받는 수용력을 표시한다; 그리고 “자궁으로부터 세상밖으로 나옴”은 재탄생 또는 거듭남, 즉 교회가 만들어짐을 표시한다, 그 이유는 재탄생, 거듭나는 자는 누구든지 교회를 만들기 때문이다.
재탄생, 그러므로 교회가 “자궁으로부터 나감”에 의해 의미되기에, 그러므로 주님은 말씀에서, “자궁으로부터 형체를 만들어 내신 분”, “자궁으로부터 낳게 되신 분”이라 불리운다; 그리고 거듭나는 이들과 교회를 만드는 이들은 “자궁으로부터 운반됨”이다고 말해진다;
고로 여호와 너를 만드신 분, 자궁으로부터 형체를 만들어 내시는 분, 그분이 너를 돕는다
(이. 44:2).
다시:
고로 여호와 너를 되찾으신 분, 그리고 자궁으로부터 너를 만들어 내신 분 (이. 44:24).
다시:
자궁으로부터 나를 만들어 내신 여호와깨서 그분의 종이 되기 위하여, 야곱을 그분에게 다시 데려오기 위하여, 그리고 이스라엘이 그분에게 모아들이기 위하여 말하셨다 (이. 49:5).
다윗서에서:
나를 자궁으로부터 데려오신 여호와 (시. 22:9).
다시 이사야서에서:
나에게 경청하라, 야곱의 가문아, 그리고 이스라엘의 가문의 남은 모든 자들아, 자궁으로부터 운반했고 모체(자궁, matrix)로부터 태어난 (너희들아) (이. 46:23).
다윗서에서:
사악한 자들은 자궁으로부터 이간질을 한다; 그들은 뱃속으로부터 엉뚱한 곳으로 간다, 온갖 거짓말과 더불어 (시. 58:3);
위에서 “자궁으로부터 이간질 함”은 교회 속에 있는 선으로부터를 (이간질을 함을) 뜻하고, 그리고 “뱃속으로부터 엉뚱한 곳으로 감”은 진리로부터 엉뚱한 곳으로 감을 뜻한다. 호세아서에서:
해산하는 여인의 격심한 아픔이 그에게 닥칠 것이다; 그는 슬기롭지 못한 아들이다, 그 이유가 그가 아들들의 자궁에서 서있지 않아야 하는 때이기 때문이다 (산고가 시작되고 자궁이 열리면 최대한 빨리 자궁을 빠져나오는 것이 상책인데, 자궁문에서 나오지 않고 서있어 어리석다는 말인 것 같다 역자주).
위에서 “아들들의 자궁에서 서있지 않아야 한다”는 교회 속에 있는 진리의 선에 있지 않음을 뜻한다.
다시:
그들의 영광은 새 같이 출생으로부터, 뱃속으로부터, 그리고 임신함으로부터 날아가버릴 것이다 (호. 9:11);
교회의 진리가 통째로 멸해질 것을 뜻한다; “출생으로부터”는 태어난 것을 뜻하고; “뱃속으로부터”는 섭취한 것을 뜻하고; “임신으로부터”는 시작된 것을 뜻한다. 이사야서에서:
나는 네가 아주 불충하게 행동하였다는 것, 그래서 자궁으로부터 위법자라고 불리워졌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 48:8);
위와 같은 것이 교회의 시작으로부터 그들(유태 교회)의 품질이었다는 것을 뜻한다. 계시록 서에서:
큰 표시가 하늘에서 보여졌다, 여인이 태양을 휘감고, 그녀의 발 아래 달이, 그리고 그녀의 머리 위에는 열두 별들의 왕관이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뱃속에서 낳으려, 소리쳤고, 출생에서 산고를 겪고 있다, 그리고 분만하기 위하여 고통 안에 있다 (계. 12:1, 2);
“여인”은 교회이다 (252, 253, 255항); “그녀가 휘감은 태양”은 사랑의 선이다; “그녀의 발 아래 있는 달”은 신앙의 진리이다; “별들”은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이다; “열두 별들”에서 “열둘”은 모든 것을 뜻한다, 고로 신앙의 모든 것들을 뜻한다; “뱃속에서 낳음”은 교회의 진리가 임신됨을 뜻한다; “출생에서 산고를 겪음과 분만하려 고통 안에 있다”란 그것은 어려움과 더불어 받아졌다를 뜻한다.

그 여자에게 산고를 겪는 때가 왔다. 이는 생산을 의미한다. “산고를 겪음”이 신앙과 행동에서 인정하는 것이다; 그리고 신앙에서 인정하고 행동하는 것은 무엇이든 생산하는 바, 그러므로 “산고를 겪음” 역시 생산함이 의미된다, 즉 선과 진리를 생산함이 의미되는데, 이는 교회 속에 있다.

그리고 손이 나왔다. 이는 힘(능력, power)을 의미한다. 이는 “손”의 의미가 힘이다로부터알게 된다.

그리고 산파가 잡았다. 이는 자연 (평면)을 의미한다. 이는 “산파”의 의미가 자연 (평면)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어떻게 이 경우가 있는 지는 이어지는 것들로부터 알게 된다. 영계에서의 산파는 자연계에서의 산파와는 다른 의미를 가진다; 그 이유가 그곳에서는 자연계에서 같은 출생에 관련되는 것는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산파의 직능(직업 분야)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인간들이 이런 단어를 말씀으로부터 읽을 때, 당사자와 더불은 천사들은 산파 대신에 어떤 것, 참으로 영적으로부터의 어떤 것을 지각한다. 결과적으로, 천사는 자기들의 생각들을 영적인 출생에 관련되는 이런저런 것들에 놓아두고 있다; 고로 산파를 수단으로 그들은 이 출생을 조력하고 받아주는 것을 지각한다; 이것이 자연 (평면)인데, 이미 언급한 적도 있다.

그리고 그의 손에 두 번 물들인 것을 매었다. 이는 그 여자가 그것(선)에, 즉 힘에 표를 해놓았다는 것, 그리고 “두 번 물들임(double-dyed)”은 선을 표시한다. 이는 “손에 맴”의 의미가 힘(power)에 표(mark)를 놓는 것이다로부터, 그 이유가 “손”이 힘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두 번 물들인”의 의미가 선이다로부터, 참으로 영적 선이다에서 알려진다. “두 번 물들임”이 영적 선을 표시하는 것은 이것이 주홍색(진홍색, scarlet color)에 속하기 때문이다. 주홍의 색깔이 다른 삶에서 보여질 때, 영적 (평면의) 선을, 즉 이웃을 향한 선행의 선을 의미한다. 다른 삶에서 보일 수 있는 모든 색깔들은 선과 진리로부터의 어떤 것을 의미하는데, 그 이유는 그것들이 천국의 빛으로부터 존재 안으로 오기 때문이다. 천국의 빛 자체는 주님의 신성으로부터의 지혜와 총명이다. 이 빛의 다양해짐과 변형되어짐은 결과적으로 지혜와 총명의 다양함과 변형됨, 결과적으로 선과 진리의 다양함과 변형됨이다. 천국에 있는 빛은 거기서 태양으로 계신 주님으로부터의 신성한 지혜와 총명으로부터 이다는 것에 대하여는 (우리가 기억하고 있어야 하기에) 많은 장소에서 말해왔다. 색깔들이 이 근원으로부터 이다는 것, 그리고 그들이 이 빛의 다양함들과 변형됨들 이다는 것, 결과적으로 총명과 지혜의 다양해짐과 변형됨이다는 것에 대하여도 여러 번 언급하였다.
“두 번 물들임”이 영적 선을 표시하는 것을 말씀의 다른 구절로부터 확인해보자:
네가 황폐해져 있다면 너는 무엇을 할 것이냐? 만일 네게 두 번 물들인 것으로 옷입고, 금 장신구로 치장한다면, 너는 헛되이 네 자신을 아름답게 꾸미는 것일 것이다; 애인이 너를 몹시 싫어할 것이다 (예. 430);
위에서 유다가 취급된다; “너 자신을 두 번 물들인 것으로 옷입고”가 영적 선을 표시한다, 그리고 “금장신구로 너 자신을 치장한다”는 천적 선을 표시한다. 사무엘하서에서:
다윗은 사울과 요나단을 두고 통곡했다, 그리고 유다의 아들들을 가르치기 위해 활(의 노래)을 썼다(작곡했다). 너희 이스라엘의 딸들아, 사울을 위해 슬퍼하라, 그는 기쁨으로 두 번 물들인 것으로 너희를 옷입혔고, 너희 의상에 금 장신구를 놓아주신 분이시다 (삼하. 1:17, 18, 24);
위에서 “활”을 가르침은 사랑과 선행의 교리를 가르침이다; 그 이유는 “홀”이 이 교리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두 번 물들인 것을 입는 것”은 영적 선을 표시한다; 그리고 “의상에 금장신구를 놓는다”는 천적 선을 표시한다.
이것이 두 번 물들인 것의 의미이기 때문에 두 번 물들인 진홍색이 성막의 커튼들에, 베일들에, 천막의 문을 위한 덮개에, 바깥뜰의 큰 문을 위한 덮개에, 그들이 여행할 때 얼굴들의 식탁에, 그리고 거룩함의 아론의 의복에, 판단의 가슴받이 에봇에, 그리고 에봇의 도포의 가장자리(술)에서 사용하게 명령되었다. 아래에서 살핀다:
너는 성막을 위하여 열 커텐들을 만들어라; 곱게 꼬아 만든 아마로, 그리고 청색 (실), 그리고 심홍색 (실), 그리고 두 번 물들인 진홍색 (실) (출.26:1).
너는 베일을 청색, 심홍색, 두 번 물들인 진홍색 (실)로 만들어라 (출. 26:36).
바깥뜰의 큰 문을 위하여 너는 청색, 심홍색, 두 번 물들인 진홍색 (실)로 덮개를 수공예 자의 일로 만들어라 (출. 27:16).
진영이 출발할 때, 얼굴들의 식탁 위에 두 번 물들인 진홍색 천을 펴놓아라, 그리고 오소리 가죽 덮개와 함께 덮어라 (민. 4:5, 7, 8).
너는 금, 청색(실), 심홍색 (실), 두 번 물들인 진홍색 (실)과 고운 아마포로 기술공의 일로 에봇을, 마찬가지로 벨트도 만들어라 (출. 28:6, 8).
너는 기술공의 일로 판단의 가슴받이를 만들어라; 마찬가지로 에봇을 금, 청색, 심홍색, 두 번 물들인 진홍색, 고운 아마포로 만들어라 (출. 27:15).
에봇의 도포의 가장자리(술)에 [너는] 청색, 심홍색, 두 번 물들인 진홍색의 석류[를 만들어라] (출. 27:33).
궤와 더불은 회중의 천막이 천국을 표현했기에, 그러므로 위에 언급된 색깔들을 사용하도록 명령되었다; 그리고 그것들은 천국의 질서 안에서 천국의 천적, 영적인 것들을 의미한다, 즉 “청색, 심홍색”은 천적 선들과 진리들을, 그리고 “두 번 물들인 진홍색과 고운 꼬아만든 아마”는 영적 선과 진리들을 의미한다. 말씀이 거룩하다고 믿는 모든 이라면, 위의 구절 안에 있는 모든 것이 어떤 의미를 가진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리고 말씀은 주님으로부터 천국을 통하여 보내져 내려왔기 때문에 거룩하다고 믿는 자는 누구든지 그분의 왕국의 천적, 영적인 것들이 의미되었다는 것을 안다. 마찬가지로 삼나무, 진홍색, 히솝이 나병을 깨끗하게 함을 위해 사용하도록 명령되었다 (레. 14:4, 6, 52); 그리고 삼나무, 히솝, 두 번 물들인 심홍색을 붉은 어린 암소를 태울 때 거기에 던지도록 명령했다, 이로부터 분리함의 물을 준비하기 위하여서 이었다 (민. 19:6, 9).
선과 진리를 모독함이 유사한 표현에 의해 묘사되었다. 계시록서에서:
나는 진홍색 짐승 위에 앉아 있는 여인을 보았는데, 모독의 이름들로 가득하여 있고, 일곱 머리들과 열 뿔들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여인은 심홍색과 진홍색으로 옷입혀져 있고, 금빛으로 칠해져 있고, 보석과 진주들로, 그녀의 손에는 그녀의 매춘들로부터의 역겨움과 더러움을 가득채운 금빛의 잔을 들고 있었다 (계. 17:3, 4).
그리고 그 후에:
화, 화가 있다, 큰 도성이여, 고운 아마, 심홍색과 진홍색, 금빛으로 칠해졌고, 보석과 진주들로 치장한 그녀여 (계. 18:16);
위는 바빌론에 관해서이다, 이를 수단으로 선의 모독이 의미되어 있다, 여기서는 선과 진리의 모독이다, 이것이 바빌로니아인이다. 구약 성경의 예언서들에서 “바빌론”은 선을 모독함, 그리고 “갈대아”는 진리를 모독함이다.
“진홍색”은 반대 의미에서 영적 선에 반대되는 악을 의미한다;
너의 죄들이 진홍 같이 있을지라도, 그것들은 눈 만큼 희게 있을 것이다; 그것들이 심홍 같이 있을지라도, 그것들은 양털 같이 있을 것이다 (이. 1:18).
“진홍색”이 이 악을 의미하는 것은 빨간색으로부터의 “피” 때문이다. 이 빨간색(redness)은 좋은 의미에서는 영적 선, 또는 이웃을 향한 선행을 의미하지만, 반대 의미에서는 선행에 가한 폭력이 의미된다.

말하기를, 이것이 먼저 나왔다. 이는 이것이 (시간, 순서에서) 먼저임(앞임, priority)을 가졌다를 의미한다. 이는 “먼저 나왔다, coming out first”, 또는 첫 출생이다의 의미가 앞임(priority), 우위임(superiority)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여기서와 이 장의 끝까지에서 취급되는 주제는 장자임(primogeniture)이다. 말씀의 내적 의미에 관한 지식을 가지지 못한 이들은 취급되는 것이 장자임 뿐이다고, 첫 출생의 법에 따라 가지게 될 특권만을 상상하게 된다; 그러나 내적 의미의 어떤 것을 아는 자는 이런 말들 안에 더 특별한 어떤 것이 감추여 놓여 있다는 것을 짐작 못할 자는 없을 것이다. 여기서의 경우, 아이 중 하나가 자기 손을 내밀었다가 다시 뒤로 끌어당겼고, 그때에 다른 하나가 나왔다는 것, 이로부터 그들의 이름이 명명되었다는 것, 그리고 산파는 첫째의 손에 두 번 물들인 것을 매었다는 것; 성경 앞쪽으로 가보면, 이와 비슷한 사건으로 연상되는 것은 에서와 야곱이다; 이들은 자궁 안에서 다투었고, 에서가 먼저 나왔을 때, 야곱은 그의 뒤꿈치를 잡고 나왔다 (창. 25:22, 26); 이 사건 뒤쪽에서도 유사한 것이 더 있다; 즉 요셉의 두 아들에게 야곱이 축복하는 경우인데, 그는 오른손이 더 젊은 아들에게, 그의 왼손은 다른 아들에게 올려놓고 축복한 것이다 (창. 48:14, 17-19).
유태인들과 일부 어떤 기독인들이 참으로 믿는 것은, 이 본문 안에, 그리고 위의 다른 두 사건 안에 어떤 의미가 저장되어 있다는 것, 이것을 그들은 신비적이라 부르고, 이런 이유로 말씀에 관련하여 거룩함에 대한 생각이 아주 어린 시절로부터 그들 위에 각인되어 있다; 그러나 이 신비적인 것이 무엇인지를 그들에게 물으면, 그들은 모르고 있다. 그래서 그들에게 이런 사항을 미리 알지 않으면 이 대목의 의미 또한 납득되지 않는다는 것: 즉 말씀은 신성하므로, 이 의미는 천국에 있는 천사들이 이해하는 것과 반드시 같아야만 할 것이다; 말씀 안의 의미가 이러한 바, 여타 다른 신비적이다 여겨지는 대목 또한 이런 수준이고, 만일 그렇지 않다면, 말씀 속의 이런 사건들은 전설적, 마술적, 또는 우상적 수준에 머물고 말지 모른다는 것; 더욱이 천사들 사이에서 천국에 있는 이런 신비적 의미는 영적, 천적이라 불리운다는 것; 그리고 영적, 천적 의미들은 우선적으로 주님만을, 그 다음 그분의 왕국에 관한 것을, 그 다음 교회에 관한 것을, 결과적으로 선과 진리에 관해서 이다는 것; 그리고 만일 그들이 선과 진리, 또는 신앙과 사랑이 무엇인지를 알았다면, 그들은 자기들이 상상하는 신비적 의미 또한 알 수 있다는 것 등등이다. 이런 사항만 말해주어도 그들로부터 되돌아오는 응답은 이를 믿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렇다, 오늘날 이런 무지 안에 있는 이들은 영적, 천적 의미를 거의 납득하지 못한다. 아예 이런 단어에 생소해 있다. 어쨌든 세상적 상황이 이럴지라도 주님의 신성한 자비로부터 나에게는 영으로서는 천국 안에, 땅에서는 인간으로서 동시에 있게 해주셨다. 그러므로 천사들과 수 년을 계속적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이렇지 않으면 말씀의 이런 신비적 대목을 나 스스로 라면 열어보이는 것이 가능할 수 없다. 그 이유가 이 대목의 내면들, 이것들은 주님의 왕국 속의 영적, 천적 사항들이기 때문이다. 다말의 두 아들에 관련된 내적 의미가 무엇인지 아래에서 살핀다.

그리고 그는 그의 손을 끌어 당겼다. 이는 그것은 그것의 힘(능력)을 감추었음을 의미한다. 이는 “손”의 의미가 힘이다로부터 분명해진다. “끌어 당김”에 의해 감추여짐이 의미된다.

보라, 그의 형제가 나왔다. 이는 선으로부터의 진리를 의미한다. 이는 “형제”의 의미가 선으로부터 친족인 것이다로부터, 고로 선으로부터의 진리이다; 선으로부터의 진리(선의 진리)는 선으로부터 있는 진리, 또는 선행으로부터 있는 신앙이다. 여기로부터 내적 의미에서 취급되는 주제는 주님에 의해 거듭나는 이들, 또는 재탄생되는 이들의 경우에서 있는 장자임(premogeniture), 결과적으로 교회 안에서 장자임에 관해서이다. 태고 시대로부터 논쟁되어온 것이 첫 출생에 관련된 것; 즉 어느 것이 먼저인지, 첫째인지, 또는 형이고 동생인지, 구체적으로 선행으로부터 있는 선과 신앙으로부터 있는 진리에서 어느 것이 우위인지에 관하여 논쟁되어 왔다는 말이다. 선은 인간이 재탄생 또는 교회를 만드는 동안 나타나지 않고, 그 자체를 내면의 인간 안에 감추이고 있다, 그래서 선은 당사자가 재탄생되어질 때까지 외적 또는 자연적 인간의 감각(sensation) 안으로는 명료하게 와닿지 않는 어떤 애착 안에서만 명백해 있다. 이에 반해, 진리는 그 자체가 명명백백 (당당)하다; 이런 이유가 진리는 감각들(오각, senses)을 통하여 들어가서 외적 또는 자연적 인간의 기억 안에 자체를 저장해놓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많은 인물들이 진리가 첫 출생이다는 오류에 빠져들고 만다, 이 빠져듦이 좀 더 깊어지면, 진리가 교회의 본체(essential)이다고 착각해버리고 마는 수준에 이른다; 이러면 본체라고 말하는 진리를 그들은 신앙이라 부르고, 신앙은 선행 속에 있는 선 없이도 구원하는 힘을 가진다는 결론에 이르른다.
위 한가지 결론으로부터 많은 것들이 파생되는데, 이 결론은 자기들이 작성한 교리 뿐만 아니라 생활까지 감염되어 있다; 간단한 예로 대단히 사악하게만 살아왔던 자라 해도 만일 마지막 한 시간 전에 신앙 속에 있는 이런 사항들에 관한 고백을 만든다면 천국 안으로 받아진다고 말한 대목이다. 그리고 모든 이는 은총(grace)으로부터만 천국 안으로 받아질 수 있다는 것, 그의 삶에 관계없다는 것이다. 이 교리를 만들어 굳히다보니, 그들은 선행(charity)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하고, 자기들 입장에서는 알려고 애쓸 이유가 하나도 없다. 여기서 더 진전된 인물은 선행이라는 단어조차 기억에서까지 지워버린 듯해 있다; 결과적으로 천국과 지옥이 있다는 것에, 내가 가야 하는 그곳이 어떤 곳인지 알 이유도 없다. 선행 없는 신앙, 또는 선이 없는 진리는 가르치는 것이 사실상 아무것도 없기에 위와 같은 일이 벌어진다. 게다가 선으로부터 퇴조하는 정도에 비례하여 그의 어리석음은 증가한다. 그 이유가 선 안에서, 선 안으로, 선을 통하여 주님께서는 총명과 지혜를 주시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더 높은 곳에서 정신적으로 조망하게 해주신다, 더불어 이것이 그런지, 그렇지 않은지에 관한 지각도 주신다.
위의 말들은 본문의 주제인 장자임을 두고 묘사된 것이 어떤 경우인지를 보여준다: 즉 장자권은 실제적으로는 선에 속한다는 것, 그리고 가상적으로 진리에 속해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다말의 두 아들들의 출생에 의해 내적 의미에서 묘사되어져 있다; 그 이유가 산파가 손에 묶은 “두 번 물들인 것(끈, 또는 실)”이 선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먼저 나왔다”에 의해서는 우위임, 먼저임, 앞섬(priority)이 의미되기 때문; 그리고 “자기 손을 끌어당김(뒤로 당김, draw back)”에 의해 선이 그것의 힘을 감추었다가 의미되기 때문; 그의 “형제가 나옴”에 의해 진리가 의미된다; “너는 깨뜨려서 네 위에 깨뜨림을 있게 했다”에 의해 선으로부터 진리의 가상적인 분리가 의미된다; 그의 “형제가 그 뒤에 나왔다”에 의해 선이 실제로는 먼저임(priority)이 의미된다; 그리고 “두 번 물들인 것을 손에 가진 것”에 의해 이것이 선이다를 인정함이 의미된다; 그 이유는 선은 인간이 재탄생할 때까지 먼저임 이다는 것이 인정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재탄생 이후, 선이 먼저가 되어 있다, 즉 그는 선으로부터 행동하고, 선으로부터 진리를 주목해서 보고 진리의 품질을 가늠하기 때문이다.
이상의 내용들은 내적 의미에서 포함되어진 것들이고, 이것은 새로이 태어나는 이들 안에서 선과 진리가 어떻게 관련을 맺는지를 가르치고 있다; 즉 선은 실제적으로는 먼저이고, 진리는 가상적으로 먼저이다는 것이다. 따라서 선은 거듭나는 동안 첫째 자리에 있지 않다, 그러나 거듭나졌을 때 이후 선은 첫째 자리에서 명명백백해져 있다. (만일 거듭나는 동안에서 선이 앞에 있다고 가정해본다면, 아마 대부분의 인간들이 이 선을 짓밟아 모독해버릴 위험이 100%이고, 이럴 경우 그 인간의 구원은 너무나 힘들지 모르는 바, 선의 모독을 예방해주시는 섭리 차원이 중요함을 선이 자기 손을 끌어당기고, 진리가 먼저 나오는 모습에서 우리를 가르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본다 역자주.) 사실 위의 내용들에 대해서는 이미 많은 설명이 있어 왔기에 더 설명은 필요하지 않다. 선과 진리, 또는 선행과 신앙, 어느쪽이 형이고 아우인지, 또는 앞이고 뒤인지, 첫째이고 둘째인지에 대하여는 고대 시대로부터 있어온 논쟁거리 이다.
최고 의미에서 주님이 “첫 출생”이시다, 결과적으로 주님을 사랑함과 이웃을 향한 선행이 첫 출생이다는 것, 하여 첫 출생이 여호와의 것임을 표현 교회에서 법으로 정해 놓았다:
모든 첫 출생, 즉 이스라엘의 아들들 사이에서 자궁을 연 것은 그것이 인간이든 짐승이든, 그것들이 나의 것이 되도록 나에게 바쳐라 (출. 13:2).
너는 자궁을 연 모든 것, 그리고 짐승의 새끼를 연 모든 것을 여호와에게로 건너가게 하라 (양도하 라), 너희에게 있는 숫컷들은 여호와의 것이다 (출. 13:12).
자궁을 연 모든 것은 나의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가축에 관련하여 너희가 숫컷을 줄 것인데, 수소와 작은 가축을 여는 것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출. 34:19).
모든 육의 자궁을 여는 모든 것, 이것을 그들은 여호와께 가져올 것이다, 즉 인간들과 짐승들로부터 너의 것들인 것으로부터 이다; 그럼에도 인간의 모든 첫 출생을 그들은 확실히 되찾을 것이다 (민. 18:15).
보라 나는 이스라엘의 아들들 사이에서 레위 지파를 데려왔는데, 이는 이스라엘의 아들들의 자궁을 연 첫 출생을 대신해서 이다; 고로 레위 지파는 나의 것이다 (민. 3:12).
자궁을 연 것이 첫 출생이기에, 그러므로 단어 “첫 출생”이 언급되는 곳에서는 “자궁을 여는 것”이 말해진다; 이는 선이 의미되기 위하여서 이다. 이것이 선을 의미하는 것은 세부 사항이 내적 의미에서 의미하는 것을 살피면 알게 된다; 즉 제라가 자기 손을 가지고 자궁을 열었다, 그를 수단으로 선이 표현되었는데, 그가 자기 손에 두 번 물들인 것을 매었다는 것으로부터 분명해진다. 더욱이 열려진다고 말해지는 “자궁”은 선과 진리가 있는 곳, 결과적으로 교회가 있는 곳이다; 그리고 “자궁을 여는” 것은 진리가 태어나지도록 힘을 주는 것이다.
주님만이 첫 출생이신 바, 그 이유는 그분이 선 자체이시고, 그분의 선으로부터 모든 진리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야곱은 첫 출생은 아니었지만, 그분의 첫 출생을 표현하도록 그는 자기 형제 에서로부터 장자임을 사는 것이 허용되어졌다; 그리고 이것 가지고는 충분하지 않았기에, 후에 그는 이스라엘이라 불리웠는데, 이 이름에 의해 그는 진리로부터의 선을 표현하였다. 그 이유가 표현적 의미에서 이스라엘은 진리를 수단으로 오는 선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여자는 말했다, 어찌하여 너는 깨뜨려서 네 위에 어김(깨뜨림)을 있게 했느냐? 이는 그것이 선으로부터 가상적으로 분리됨을 의미한다. 이는 어김(breach)의 의미가 선으로부터 분리됨에 의해 진리가 악용됨(perversion)과 진리를 위반함(infraction)이다로부터 알게되는데 아래에서 더 살핀다. 이는 “깨뜨려서 어김이 있는” 것이 여기서는 끌어당겨서 손으로부터 두 번 맨 것을 벗기는(pull off) 것, 고로 선을 분리하는 것임이 분명하다, 그 이유가 “두 번 맨” 것이 선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가상적으로 그러했다는 것은 그렇게 산파에게 나타난 사실로부터 이어진 말이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깨뜨려 어김이 있는 자는 두 번 물들인 것을 맨 자가 아니었기 때문, 그러나 그의 형제, 즉 진리를 표현한 형제였기 때문이다. 즉 선이 실제의 첫 출생이고, 진리는 가상적으로 첫 출생이다. 이는 예를 들어 생각하면 더 나을지 모른다. 즉 신체의 사지(손, 발 등등)들이 마치 앞임 것처럼 나타난다; 그 이유가 전자가 눈에는 먼저 표출되기 때문이다, 그것을 사용할 필요성 앞에 알려진다. 그럼에도 사용할 필요성은 사지의 움직임에 앞서 있다. 그러므로 사용의 필요성에 따라 사지의 움직임은 만들어진다. 그렇다, 사용함 자체가 사지의 움직임을 만들어 사지로 사용함 자체에 적응되게 한다. 이렇게 되지 않는다면, 인간 안의 모든 것은 하나로 만장일치하여 공모할 수 없다. 이것은 선과 진리와 더불어서도 비슷하다; 마치 진리가 앞임 인 것처럼 나타나나, 앞임 인 것은 선이다, 그 이유가 선이 진리를 만들어내기 때문, 선 자체에 어울리게 진리를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진리들 자체만에 주목하면, 진리는 선들이 만들어 낸 것, 선의 형체들밖에 더 아니다. 선에 관련하여 있는 진리들은 마치 신체에서 사용의 필요성에 사지나 기관의 관계와 같다. 그 자체에 주목하면, 선은 사용함(use)밖에 더 아니다.
“어김(깨뜨림)”이 선으로부터 분리함에 의해 진리를 위반함과 진리를 악용함을 의미한다는 것을 말씀의 다른 구절로부터 찾아보자:
우리의 곳간들은 가득해서 식품으로부터 식품까지 여유가 있다; 우리의 양떼들은 천천 만만으로 우리의 거리들에 있다; 우리의 수소들에 짐이 가득하다; 거기에는 어김이 없다
(시. 144:13, 14);
위는 고대 교회의 젊은 이 시절 같은 것을 취급하고 있다; “식품으로 곳간이 가득하다”는 영적 식품, 즉 진리와 선을 표시한다; “양떼들”과 “숫소들”은 내적 선들과 외적 선들이다; “거기에 어김이 없다”는 진리가 선과 분리함으로 위반함과 깨뜨림 않고 있다를 표시한다.
아모스서에서:
나는 무너진 다윗의 천막을 일으켜 세울 것이다, 그리고 거기로부터의 위반함에 울타리를 칠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것의 파멸들을 회복할 것이다, 그리고 나는 영원의 날들에 따라 그것을 건축할 것이다 (암. 9:11).
위는 선 안에 있는 교회를 묘사한다, “무너진 다윗의 천막”은 주님으로부터의 사랑의 선과 선행의 선이다. “위반함에 울타리를 치는” 것은 진리가 선으로부터 분리함으로 해서 들어와진 거짓을 수리하는 것을 뜻한다; “영원의 날들에 따라 그것을 건축한다”란 고대 시대에서 교회의 상태에 따라를 표시한다; 이 상태와 이 때들이 말씀에서 “영원의 날들”, “시대의 날들”, 또는 “대대로”이라 불리운다:
시대의 황폐된 것, 대대로부터의 기초들이 너로부터 건설될 것이다; 그래서 너는 위반함을 수리하는 자, 작은 길을 거주할 곳으로 회복하는 자라 불리울 것이다 (이. 58:12);
교회 안에서 선행과 생활이 본질임을 묘사하고 있다. “위반함을 수리함”은 진리로부터 선이 분리됨에 의해 기어다니게 된 거짓들을 수리함을 표시한다, 모든 거짓은 이 근원으로부터 있다; 그리고 “거주하게 작은 길을 회복하는 것”은 선으로부터 있는 진리들을 표시한다, 그리고 “거주함”은 선을 서술한다.
다시:
너희는 다윗성의 위반들, 그것들이 많다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너희는 더 낮은 못의 물들을 모두 그러모았다 (이. 22:9);
“다윗성의 위반들”은 교리 속의 거짓들을 표시한다, 그리고 “더 낮은 못의 물들”은 전통들을 수단으로 그들은 말씀에 있는 진리의 위반을 만들어 냈다를 표시한다 (마. 15:1-6; 막. 7:1-14). 에스겔서에서:
너희는 위반 안으로 가는 것을 포기하지 않았다, 너희는 이스라엘의 가문을 위해 울타리를 건설하지 도 않았다, 하여 너희는 여호와의 날에 전쟁에 서 있을는지 모른다 (겔. 13:5).
다시:
나는 내가 토지를 파괴하지 않도록 토지를 위하여 내 앞에 있는 위반에 서서 울타리를 건설할 사람을 찾았었다; 그러나 나는 아무도 발견하지 못했다 (겔. 22:30);
“위반에 서있다”란 거짓들의 깨뜨림이 있지 않도록 경청하고 방어함을 표시한다. 다윗서에서:
그분의 선택하신 모세가 위반에서 그분 앞에 서있지 않으면, 그분은 백성들을 파괴하시리라고 여호와께서 말하셨다 (시. 106:23);
위에서 “위반에 서있다”는 것은 거짓들이 깨뜨리지 않도록 경청하는 것을 표시한다. “모세”는 말씀이다.
아모스서에서:
그들은 낚시로 너의 후손을 끌어낼 것이다. 너희는 위반들을 관통하여 나갈 것이다, 모든 이가 그녀 앞에서 곧바로 이다; 그리고 너희는 궁전 아래로 던져질 것이다 (암. 4:2, 3);
“위반들을 관통하여 나감”은 추론들로부터 거짓들을 관통함을 표시한다; “궁전”은 말씀이다, 결과적으로 선으로부터 있는 교리의 진리이다. 그리고 “위반들”에 의해 진리로부터 선의 분리됨에 의해 존재 안으로 오는 거짓이 의미된다; 같은 것이 표현적 의미에서, “여호와의 집의 위반들(부셔진 곳)을 튼튼하게 하고 수리하는 것”에 의해서도 있다 (왕하. 12:6-8, 12; 22:5). 사무엘하서에서:
여호와께서 웃사 위에 깨뜨림이 있어 위반함을 있게 하셨기 때문에 슬퍼했다; 그러므로 그는 그 장소를 베레스-웃사 라고 불렀다 (삼하. 6:8);
위 구절은 궤를 만졌기 때문에 죽은 웃사에 관한 기록이다; 궤에 의해 천국이 표현되어졌다, 최고 의미에서 주님이 표현되어졌다, 결과적으로 신성한 선이 표현되어졌다; 웃사에 의해서는 섬기는 것, 고로 진리가 표현되었는데, 그 이유는 진리가 선을 섬기기 때문이다. 위에 묘사된 분리함은 “웃사 위에 위반함이 있다”에 의해 의미되어 있다.

그리고 그는 그의 이름을 베레스라 불렀다. 이는 그것의 품질을 의미한다. 이는 선으로부터 진리가 가상적으로 분리함의 품질이다; 이는 “이름을 부름”의 의미가 품질이다로부터. 품질 자체는 “베레스”이다; 원어에서 “베레스”는 “위반”을 뜻한다.

그 후에 그의 형제가 나왔다. 이는 실지로는 선이 우위임을 의미한다. 이는 여기서 “형제”인 제라의 표현함이 선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 이유가 자궁을 연 자가 제라이고, 따라서 그가 첫 출생이었다, 하여 그의 손에 두 번 물들인 것이 매어졌는데, 이것은 선이다. 그의 형제가 그 뒤에 나왔다에 의해 의미되는 바, 선이 실제적으로는 앞임 이다는 것; 단지 거듭나는 동안 선이 나타나지 않기 때문에서일 뿐이다; 또한 선은 자체를 내면의 인간 안에 숨기고 있다; 그리고 이 선과 더불어 진리가 결합하는 정도에 따라 애착을 통하여 진리 안으로 흘러들 뿐이다. 그러나 진리가 선과 결합되어졌을 때, 즉 인간이 거듭나졌을 때, 선은 자체를 드러낸다; 그 이유가 이때 인간은 선으로부터 행동하고, 진리를 선으로부터로서 가늠하기 때문이다, 이때 그는 진리를 교리로부터 더 알고 싶어 하기보다 생활에 더 사용하기를 바라고 있다.

그의 손에 두 번 물들인 것을 가졌던 것. 이는 그것이 선임을 인정함을 의미한다. 이는 그가 지금 두 번 물들인 것을 손에 매고 있었다로부터 인정되었다는 사실로부터 분명해진다. 고로 자궁을 연 것이 선이었다는 것, 또는 선이 첫 출생이다가 인정되어진 것이다. 산파가 그의 손에 두 번 물들인 것을 맴에 의해 그녀는 누가 첫 출생인지를 표를 했고, 이로부터 여기서 인정함이 의미되었다.

그리고 그는 그의 이름을 제라 라고 불렀다. 이는 그 품질을 의미한다. 이는 “이름을 부름”의 의미가 품질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제라”에 의해 의미된 품질은 지금까지 내적 의미에서 취급해왔던 것, 즉 선이 실제로 첫 출생이고 진리는 가상적으로 첫 출생이다는 것이다. 품질 자체는 아주 무수한 것들을 그것 안에 포함하지만 세상의 빛에서는 보여질 수 없고, 오직 천국의 빛에서만, 고로 천사들 앞에서만 보여질 수 있다. 만일 인간이 천사들 앞에 나타난 딱 하나만 본다 해도, 그는 너무나 놀라 의아해 하여 그것을 도리어 믿지 못하겠다고 고백할지 모른다. 단언컨대, 그는 거의 어떤 것도 알지 못한다. “제라”는 원어에서 “일어남(rising, 떠오름)”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 말은 태양을 염두해야 적절한 말이고, 태양의 빛의 처음 나타남들에 어울린다. 그가 이로부터 제라 라고 이름된 이유는 거듭나지는 인간 안에서의 선이 이와 비슷하게 (서서히 태양의) 떠오름 같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이것은 처음에 떠오르고 빛을 주고, 이 빛으로부터 자연적 인간에 있는 것들이 계발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것들(영적인 것들과 천적인 것들)이 보여질는지 모르고 , 인정될는지 모르고, 믿어질는지 모른다. 다시 말해, 인간 안에 내향적으로 선으로부터 빛이 있지 않으면, 그는 그것들을 인정하고 믿어지기 위한 진리들을 볼 수 없다; 그 대신 아마 항간의 사람들에 통용되는 정도의 진리 라고, 또는 거짓으로밖에 부를 수 없을 것이다.

창세기 제 37 장

창세기 제 37 장

1-3절. 그리고 야곱은 그의 아버지가 체류한 토지에서, 가나안의 토지에서 거주했다. 2 이들은 야곱의 출생들이다. 십칠 세 된 요셉은 그의 형제들과 함께 양떼를 돌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그의 아버지의 여인인 빌하의 아들들과 질바의 아들들과 더불어 소년이었다. 그리고 요셉은 그들의 아버지에게 그들의 나쁜 사건들을 가져다 주었다. 3 그리고 이스라엘은 그의 모든 아들보다 더 요셉을 사랑했다, 그 이유는 그가 고령에 얻은 아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그에게 여러 색갈로 된 옷을 만들어 입혔다.

그리고 야곱은 그의 아버지가 체류한 토지, 가나안의 토지에서 거주하고 있었다. 이는 주님의 신성한 자연 평면이 신성한 합리적 선 아래 일치되어졌음을 의미한다. 이는 “거주함”의 의미가 사는 것이다로부터; 야곱의 표현함이 최고 의미에서 주님의 신성한 자연 평면이다로부터; 여기서 “아버지”인 이삭의 표현함이 선 측면에서 주님의 신성한 합리성이다로부터; 그리고 “가나안의 토지”의 의미가 최고 의미에서 주님의 신성한 인간이다로부터. 이상을 종합하면, “가나안의 토지에서, 그의 아버지가 체류한 토지에서 야곱이 거주한다의 의미는 주님의 자연 평면이 신성한 인간 안에서, 신성한 선 아래 일치되게, 또는 함께 살아감을 표시한다. 주님의 자연 평면은 앞에서 취급되었다 (창. 35:22-26에서); 즉 자연 평면 안에 있는 모든 것이 지금 신성이었다; 그리고 (창. 35:27-29에서) 주님의 신성한 자연 평면이 그분의 신성한 합리성과 결합함. 여기서 결론적인 것이 이어진다: 신성한 자연 평면이 신성한 합리적 선 아래 이 선에 일치하는 생활을 영위했다.
위에서 “신성한 합리적 선 아래”라고 말한 이유는 자연 평면이 이것 아래에서 살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합리성(합리적 평면)은 높다, 내면이다, 또는 관습적 표현을 빌리면, (시간, 순서에서) 앞이다(prior), 상석(上席)이다, 중요하다 (prior) 인 반면, 자연 평면은 낮다, 외면이다, 결과적으로, (시간, 순서에서) 뒤이다(posterior) 이기 때문이다; 고로 후자는 전자에 종속된다. 게다가 그것들이 일치할 때의 경우, 자연 평면은 합리성의 일반적 측면밖에 더 아니다; 그 이유가 자연 평면이 가지는 것은 무엇이든 합리성에 속하기 때문이다. 차이점이라면, 개별적인 측면과 그것들의 일반적인 측면, 또는 개별적 측면과 그것들의 형체 측면에 있다는 차이뿐이고, 이 안에서 낱개적인 것은 하나로서 나타난다. 학식자들이 아는 사항은 목적은 원인 안의 모두이고, 원인은 결과 안의 모두이다는 것이다; 고로 원인은 목적이 형체로 있는 목적이고, 결과는 원인이 형체로 있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만일 당신이 원인을 제거하면, 결과는 통째로 멸해지고, 만일 목적을 제거하면, 원인이 통째로 제거된다. 더 나아가 원인은 목적 아래, 결과는 원인 아래 있다. 이와 같은 경우가 자연 평면과 합리적 평면이다.

이들은 야곱의 출생들이다. 이는 뒤따라오는 것들을 의미한다. 이는 “출생들”의 의미가 교회 속에 있는 이런저런 것들로부터의 갈래들, 즉 선의 진리로부터의 갈래들, 또는 사랑의 신앙으로부터의 갈래들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 이유가 말씀의 내적 의미에서 출생들의 다른 의미는 없기 때문이다. 이들이 이어지는 것 안에서 취급된다, 그러므로 “야곱의 출생들”이 뒤따라오는 것들을 표시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것이 “출생들”의 의미인 것은 이 말 뒤를 곧 이어 가계를 말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말해지는 것은 요셉- 그의 꿈들- 요셉에 대한 형제들의 음모- 그가 이집트로 끌려가짐이기 때문이다.

요셉. 이는 주님의 영적 평면에서의 신성한 인간을 의미한다. 이는 요셉의 표현함이 최고 의미에서 신성한 영적 평면에서의 주님이다에서 알게 된다. 주님이 요셉에 의해 표현되었다는 정도는 교회에도 널리 알려져 있다; 그 이유가 천국적인 요셉이 말해질 경우, 막연히 주님을 표현한다 외에 별다른 생각을 사람들이 갖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님의 무엇이 표현되는지와 같은 구체적인 사항은 알고 있지 않다; 그 이유는 이 사항이 주님의 신성한 인간으로부터 진행하는 신성한 영적 평면이기 때문이다. 주님의 신성한 인간으로부터 진행하는 신성한 영적 평면은 천국과 교회 안에 있는 그분으로부터의 신성한 진리이다. 영적 평면의 본질은 신성한 진리 외에 더 다른 것은 없다. 신성한 영적 평면, 또는 신성한 진리는 주님의 왕권적 측면이라 불리운다, 그리고 다른 말로 그리스도, 또는 메시아라고도 불리운다. 이 이유 때문에 요셉은 이집트에서 마치 왕인 듯 만들어져, 그에 의해 주님의 왕권으로부터 있는 것이 표현되어졌다.

십칠 년의 아들. 이는 주님의 영적 평면에서의 신성한 인간의 상태를 의미한다. 이는 말씀에서 언급되는 나이들의 햇수로부터 분명해진다. 즉 다른 숫자들 역시 어떤 것과 상태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마치 햇수, 또는 나이 속의 숫자들이 마치 숫자 계산 그 이상의 어떤 의미가 없는 듯 여겨지는 이유는 이것의 숫자는 여느 다른 숫자보다 시간이라는 개념이 후광으로 있어 역사성이 더 짙게 풍겨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숫자들 역시 어떤 것들과 상태들을 포함한다는 것은 이미 살폈다; 즉 창. 5장과 창. 17:1; 25:7에서, 그리고 창. 35:28에서 이다; 더욱이 천국의 것을 포함하지 않는 말씀의 어떤 역사물도 없다는 사실로부터 이다; 즉 말씀의 이런 숫자들을 읽는 인간의 생각으로부터 당사자와 더불은 천사들은 그 생각을 건너가서 바뀌는 바, 천국에는 천사들로부터 말씀의 역사물의 영적 의미가 생산된다.
십칠 세 된 요셉에 의해 의미된 것은 말씀의 다른 구절에 있는 의미로부터 보여질는지 모른다; 즉 시작(beginning), 그러나 여기서는 요셉에 의한 표현의 시작이다. 더 나아가 일반적 측면과 잠재적 측면에서일 경우, 이 숫자는 요셉에 의해 표현되는 모든 것을 포함하고 있다; 그 이유가 “7”은 거룩함을, 그리고 “10”은 리메인스(remains, 아껴두신 것, 남은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의 형제들과 더불어 양떼를 기르고 있었다. 이는 주님의 영적 평면에서의 신성한 인간은 신앙 안에 있는 이들과 더불어 현존하면서 그들을 가르쳤음을 의미한다. 이는 “양떼를 먹임”의 의미가 가르치는 것이다로부터, 특히 교인들을 교리로부터 가르치는 것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여기서는 가르쳐진 이들과 현존함이 의미되는데, 그 이유는 “요셉은 자기 형제들과 더불어 양떼를 먹이고 있다”라고 말해지기 때문이다; 그의 형제는 이 장에서 선행으로부터 신앙쪽으로 기운 교회, 그리고 마지막으로 신앙만으로 기울려 버린 교회, 고로 거짓들을 표현하는데, 이는 아래에서 나타날 것이다.

그리고 그는…소년이었다. 이는 처음에를 의미한다. 이는 “소년(boy)”이 새로운 교회를 서술할 경우, 이 교회의 처음에서 인 것, 또는 새로운 교회의 처음의 상태인 것을 의미함에서 알게 된다. 그 이유가 인간이 인생의 여러 단계들을 지나가듯, 교회도 유아, 소년, 성년, 노년의 단계를 가지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교회 역시 인간들 같이 일반적 측면에서는 그렇게 불리운다. 특히 이 단계 중에서 소년이라 불리우는 이 (새로운) 교회에서, 이 교회는 아주 빠르게 (주님을) 외면해버린다. 즉 주님이 처음에는 가르치는 이들과 배우는 이들과 더불어 현존해 계시지만, 그 후에 그분은 이 새로운 교회에 의해 떠나보내지고 만다; 즉 이것이 요셉이 그의 형제들에 의해 구덩이에 쳐넣어지고 팔리워 멀리 보내짐을 당하는 것에 의해 표현되어지고 있다.
이와 같은 모습은 신앙으로부터 시작하는 모두 각각의 교회이지만, 선행으로부터 시작하는 교회는 아주 다르다. 신앙으로부터의 교회는 이 교회가 가야할 방향을 지시해줄 것은 이해력밖에 없다; 그런데 이해력의 방향을 제시하는 것은 인간의 유전적인 것밖에 없고, 인간의 유전적인 것은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 뿐이다. 이 사랑들이 이해력에게 자신들의 사랑을 확증할 근거를 말씀에서 찾아보라고 설득하여 꼬드기고, 확증물이 안되는 말씀은 기막힌 아이디어로 이 말씀을 설명하여 교묘히 발뺌하도록 유도한다. 그러나 선행으로부터 시작하는 교회는 이와는 아주 다르다: 선이 이 교회의 지도자(director), 그리고 선 안에 계신 주님이 지도자이시다; 그 이유는 주님과 신앙 사이에 선행의 선과 사랑의 선이 끼어 있기 때문이다; 이 중재하는 것 없이 영적 교통(교제, 왕래, communication)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만일 악이 선의 장소 안에 있다면, 이 악은 주님을 몰아내는 바, 그분으로부터 있는 것, 고로 신앙으로부터 있는 모든 것을 거절하든지, 악용하든지 한다. 그 이유가 제대로 말하자면, 신앙은 선을 통하여 그분으로부터 있기 때문이다.

그의 아버지의 여인 빌하의 아들들과 질바의 아들들과 더불어. 이는 주님의 영적 평면에서의 신성한 인간이 그들에 의해 거절되어졌음을 의미한다. 이는 “빌하의 아들들과 질바의 아들들”의 의미가 수단을 제공하여 도움을 주는 외면들과 보다 수준이 낮은 진리에 애착함들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고로 “빌하의 아들들과 질바의 아들들과 더불어”는 “요셉”인 신성한 진리가 상대적으로 섬김 속에 있는 낮은 것들쪽으로 거절되어졌다를 의미한다. 신앙이 선행 앞에 놓여지는 때, 또는 신앙이 심정에서 제 일의 것이 되어 있는 때, 그리하여 선행이 그 다음 자리, 심정에서 둘째 자리에 있는 때, 신성한 진리가 낮은 쪽으로 거절된다고 말해진다; 그 이유가 모든 신성한 진리는 신성한 선으로부터 있고, 거기서부터 진행되기 때문이다. 인간의 경우도 만일 선으로부터 진리가 진행되지 않으면, 그는 주님 안에 있지 않다. 이 신성한 진리는 주님으로부터 진행하는 영의 거룩함 자체이다, 그리고 이것이 “보혜사(Paraclete, 중재자, 위안자),” 그리고 “진리의 영”이라 불리운다 (요. 14:16, 17).

그리고 요셉은 그들의 나쁜 사건들을 그들의 아버지에게 가져다 주었다. 이는 그것으로부터 그들의 품질이 나타남을 의미한다. 이는 요셉의 표현함이 주님으로부터 있는 신성한 영적 평면, 또는 신성한 진리이다로부터; “아버지”의 의미가 선이다로부터, 여기서는 야곱에 의해 표현되는 고대 교회의 선이다. 이는 이 장의 끝부분에서 알려질 것이다; 그리고 “나쁜 사건”의 의미가 요셉의 형제들에 의해 의미된 이들의 과실과 악덕이다로부터, 이들은 이미 말했듯 선과 진리로부터 돌아선 교회인들을 표시한다. 이는 이 단어들의 대략적인 내적 측면에서의 의미들이다. 즉 요셉의 형제들에 의해 의미된 과실과 악덕은 그것들을 고대 교회의 선으로부터 주목해서 본다면 신성한 진리에 의해 나타나게 만들어지거나 눈에 보이게 노출되는 것이다; 또는 같은 말로, 이 진리(신성한 진리)로부터 그들의 품질이 나타나지는 것이다.
이것들에 주목하면 이런 경우이다: 교회의 거짓들과 악들 (즉, 교회 안에 있는 이들의 거짓들과 악들)은 그것 안에 있는 이들에게 들어나지 않는다; 그 이유는 거짓의 원리들이 거짓들로부터, 악들이 악들로부터 보여지지 않기 때문, 그 이유는 거짓의 원리들이 진리들을 완전하게 안개로 덮기 때문, 그리고 악한 생활이 진리들을 꺼져버리게 하기 때문이다. 거짓의 원리와 악한 생활 모두는 거짓들이 진리들이고 진리들이 거짓들이라고. 그리고 선이 악, 악이 선이라고 나타나게 유도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그러한 것은 다양한 경험으로부터 분명해진다. 그러나 교회, 또는 교회인들은 천국 안에서 전혀 다르게 나타난다; 그 이유가 천국 안에 주님으로부터의 신성한 진리가 있다, 그리고 천국 안의 신성한 진리는 빛이다, 그리고 이 빛 안에서 그들의 품질은 나타난다. 그 이유가 모든 이 각각은 자기의 혼, 또는 영의 측면에서는 어떤 사회 안에, 천국의 사회이든, 지옥의 사회이든 소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생각은 거기 있고, 그의 말함과 행동들은 거기에 있는 그의 생각들과 더불은 다양한 교류 안에서 인간 사이에 있다.
더 나아가 어떻게 교회인들의 품질이 신성한 진리에 의해, 또는 신성한 빛 안에서 나타나지게 만들어지는 가에 주목해보자. 최근 세상으로부터 있는 악한 영들이 자신들을 지옥으로 내던지기 앞서, 그들이 우선적으로 상상하고 있는 것은 자신들이야말로 천국에 당연히 받아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천국으로 받아들임에 유일하게 필요한 것은 각자의 품질에 관련되지 않고 그분의 은총이 우선적으로 중요하다는 것, 따라서 그분의 은총이 있다면, 천국은 누구에게나 입장하도록 열려있다는 것을 믿고 있다. 하여 그들 중의 일부가 첫 사회들이 있는 곳, 즉 천국의 입구에로 들려졌다; 그러나 그들이 거기로 오자, 그들은 고통이 느껴지고, 질식될 지경이고, 그들의 생각함과 뜻함은 괴로움에 시달리고 만다; 즉 세상으로부터 있는 거짓의 원리로부터의 그들의 생각의 생명, 그리고 악한 생활로부터의 그들의 의지의 생명이 심통을 겪고 있다는 말이다. 그들이 거기 있는 빛 안에서 자신들을 쳐다볼 때, 그들은 악마들로, 송장으로, 괴물로 나타난다; 그러므로 그들은 이 사회로부터 아래쪽으로 자신을 머리를 처박듯 내던진다; 그 빛으로부터 어두운 지옥의 안개 안으로 내던짐으로 거기서 이전의 자신들의 호흡을 되찾는다; 거기서 몽상으로부터 그들의 영이 악이 아닌 것으로 자신들에게 나타난다. 이런 방식에서 그들은 자신들의 품질을 배운다. 이상의 경험으로부터 신성한 진리로부터 그들의 품질이 나타남이 어떤 방식에서 인지가 분명해졌으리라 본다.

지금 이스라엘은 요셉을 그의 모든 아들들보다 더 사랑하였다. 이는 합리성의 신성한 영적 평면이 자연 평면 속의 신성한 영적인 것과 결합함을 의미한다. 이는 야곱의 표현, 그가 “이스라엘”로 불리울 때, 자연 평면의 신성한 영적 부분, 또는 자연으로부터 영적 평면의 천적 부분이다로부터; 요셉의 표현함이 합리적 평면의 신성한 영적 부분, 또는 합리성으로부터 영적 평면의 천적 부분이다로부터; 그리고 “사랑함”의 의미가 결합되어지는 것이다로부터, 그 이유가 사랑함은 영적인 결합이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이스라엘이 요셉을 사랑함의 의미는 합리성의 신성한 영적 평면이 자연의 신성한 영적 평면과 결합함임이 분명해진다. 이 결합이 취급되기 때문에, 여기서 야곱은 1-2절에서 “야곱”이 아닌 “이스라엘”로 불리우는 것이다. 이름이 바뀜으로부터 어떤 비밀한 것들이 여기의 내적 의미 안에 포함되었다는 것이 추리된다. 그러나 자연의 신성한 영적 평면과 합리성의 신성한 영적 평면의 결합의 본성이 무엇인지에 여기서 취급할 필요가 없는데, 그 이유는 이후 자연스레 뒤이어지기 때문이다; 즉 다음 장에서 어느 정도 나마 펼쳐 보여질 것이다. 이 장에서는 오직 이 정도에서, 즉 영적 평면이 합리성과 자연 평면의 모두에서 서술되어진다는 것이다; 그 이유가 영적 평면은 주님으로부터 있는 신성한 진리이기 때문; 그리고 이 진리가 합리성 안에서, 또는 내적 인간 안에서 빛을 발할 때, 합리성의 영적 평면이라 불리운다; 신성한 진리가 자연적 인간 안에서, 또는 외적 인간 안에서 빛을 낼 때, 이 진리는 자연의 영적 평면이라 불리운다.

그 이유는 그가 그의 고령에 얻은 아들이었기 때문이다. 이는 그 안에 있는 그것 자신의 생명을 의미한다. 이는 “고령”의 의미가 이전의 상태를 벗고, 새로운 상태를 입는 것, 또는 삶(생명)의 새로움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 이유가 내적 의미에서 “고령”은 나이가 많다를 의미하지 않는데, 그 이유는 내적 인간, 또는 인간의 영은 고령이 무엇인지를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체, 또는 외적 인간이 늙게 될 때, 내적 인간은 삶의 새로움 안으로 건너가기에, 신체적 힘이 사그라들기에 나이를 수단으로 인간의 영은 완전해져 간다. 완전해져 감은 다른 삶에서도 있는 바, 천국에 있는 이들은 주님에 의해 더 완전한 삶 안으로 계속적으로 데려가진다. 그리고 결국 최고령에 죽은 이들조차, 젊은 이의 꽃피는 건강한 시절 안으로 데려가진다. 위로부터 “고령”에 의해 내적 의미에서는 삶(생명)을 의미함을 알았으리라 본다. 그것 안에 있는 그것 고유의 생명에 의해 뜻해진 것은 앞에서 설명했다.
인간의 영 또는 내적 인간은 고령이 무엇인지를 모른다고 앞에서 말했다, 그렇지만 이 영이 육체 안에서 생각하고, 이 영으로부터 육체는 생명을 가진다. 영의 이 생각이 육체에 전달될 수 없는 이유, 고로 인간은 죽음 이후 자기가 산다는 것을 아는 이유는 그의 영이 육체 안에 남아 있는 한, 그는 자기의 자연적 인간이 빨아들이게 된 원리로부터밖에 더 달리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원리를 받는 것과 그것에 대한 확신은 신체가 살아 있을 때 만에서 이다는 것, 그리고 이 신체가 죽을 때, 인간의 모든 것은 죽는다고 결론을 가지기 때문에 이 진실성의 유입이 받아지지 않는다. 그러나 여전히 유입됨이 그 자체를 분명히 할 수 있는 사실 중의 하나는 대부분의 인물들이 사후 자기들의 매장에 관하여, 동시에 사후인데도 자기가 찬사받는 것에 관심이 많다는 현실, 게다가 좀 더 특별하다 싶은 이들은 자기들의 명성에 관하여 까지도 생전에 챙겨 놓고 죽음을 맞이하려 한다는 사실, 이런 사실의 확인은 그가 생전에 살아 있는 자들로부터 자기에 대한 기억이 멸해지지 않도록 하고 싶어 대단한 기념비나 화려한 기념물(건축물)을 세워두려 한다는 사실로부터 알게 된다. 이런 것들 안으로 삶은 영원히 지속된다는 점에 관련하여 천국으로부터의 유입은 이 점에 별다른 신앙을 가지지 않고 다른 것에 관심을 두는 이들에게도 있게 (섭리) 된다. 이런 유입마저 있지 않으면 사후 자기들의 기억이 살아 있다는 사실에 관련되는 모든 것에 완전히 무관심 상태에 있어질 것이다.

그리고 그는 그에게 여러 색깔로 된 웃옷을 만들어 입혔다. 이는 거기서부터 있는 진리의 나타남, 이것 때문에 자연 평면의 영적인 것이 알려지고 구별된다. 이는 “웃옷(튜닉, tunic, 여성들이 멋으로 걸치는 무릎까지 내려오는 긴 웃옷)”의 의미가 자연 평면의 진리이다로부터, 이는 더 설명한다; 그리고 “여러 색깔”의 의미가 자연 평면의 영적인 것이 알려지고 구별되게 하는 수단인 진리의 나타남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것들이 “여러 색깔들”에 의해 의미된다는 것은 다른 삶에서도 이 세상과 같은 색깔이 나타난다는 것을 알지 않으면 납득될 수 없다. 특히 거기서의 색깔은 이 세상의 색깔을 아름다움이든 다양함에서 이든 훨씬 능가한다. 그리고 이 색깔들의 근원을 알지 않으면 납득되지 못한다. 다른 삶에서 보여진 색깔들은 거기 있는 빛의 다양함으로부터 이다, 다시 말해 지혜와 총명이 변경된 것이다; 그 이유가 거기서 나타나는 빛은 주님으로부터 있는 신성한 진리로부터, 또는 그분으로부터의 신성한 영적인 것, 같은 말로, 신성한 총명과 지혜이다; 이것이 천사들과 영들의 눈 앞에서 빛으로 나타난다. 그러므로 이 빛으로부터의 색깔들에 의해 의미된 것, 즉 진리의 품질들, 고로 진리의 나타남은 선과 진리에 애착함들로부터 나타난다는 것이다.
“웃옷”이 자연 평면의 진리이다에 대하여는 이미 살피기도 했다, 그러나 거기서 미처 살피지 않은 대목을 나는 여기서 말씀의 다른 구절로부터 확증해보려 한다. 유태 교회에서 왕들은 신성의 영적 평면, 또는 신성한 진리 측면에서의 주님을 표현했다, 그러므로 왕들의 딸들은 여러 색깔로 지은 웃옷으로 입혀졌다, 그 이유가 “딸들”에 의해 선과 진리에 애착함들이 의미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교회들이 의미되었다; 이들에 관해 이렇게 읽는다:
다윗의 딸, 다말 위에 다양한 색깔의 웃옷이 있었다(입혀졌다), 그 이유가 이런 도포는 처녀인 왕의 딸들에게 입혀진 의상이었기 때문이다 (삼하. 13:18).
대 성직자들이 신성의 천적 평면, 또는 신성한 선 측면에서의 주님을 표현했기 때문에, 아론에게는 주님의 신성한 선으로부터 있는 신성한 진리를 표현한 웃옷으로 입혀졌다; 그 이유가 신성한 선이 주님 안에 있고, 신성한 진리는 그분으로부터 진행하기 때문, 그리고 이런 의복들에 의해 표현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주님께서 세 제자, 베드로, 야고보, 요한 앞에서 변모하셨을 때, 신성한 선은 태양으로 나타났고, 신성한 진리는 빛 같이 나타난 의복으로 표현되어졌다 (마. 17:2).
아론과 그의 아들들에게 입혀진 의복들이 이렇게 묘사되어 있다:
너는 아론을 위해 고운 아마포로 튜닉(웃옷, tunic)를 만들어라, 그리고 고운 아마포 관을 만들어라, 그리고 너는 수를 놓는 자의 일로 벨트 (belt)를 만들어라. 그리고 아론의 아들들을 위해 너는 튜닉을 만들고, 그들을 위해 벨트들을 만들고, 그들을 위해 머리끈을 만들어라, 이는 영광과 장식을 위해서이다 (출. 28:39, 40).
여기서의 세부 사항들은 주님의 신성한 선으로부터의 신성한 진리에 속하는 어떤 것이 의미되는데, 특히 “고운 아마포 튜닉”는 신성한 영적인 것을 의미한다. 다른 구절에서:
너는 의복들을 가져오라, 그리고 아론 위에 튜닉, 그리고 에봇의 도포, 그리고 에봇, 그리고 가슴받이를 놓아라 (입혀라), 그리고 그가 에봇의 허리띠를 두르게 하라; 그 후에 너는 그의 아들들에게 접근해서 그들 위에 튜닉을 놓을 것이다 (출. 29:5, 8; 40:14).
이런 세부 사항들에서 의미되는 것들은 주님의 신성한 자비로부터 출애굽기 편에서 취급될 것이다.
예언자들 역시 튜닉으로 입혀졌는데, 그러나 머리에 관해서 이다. 그 이유는 예언자들에 의해 교리의 진리들 측면에 관련하여 주님을 표현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교리의 진리들은 자연 평면, 또는 외적 인간 속에 있기 때문에 예언자들은 머리에 튜닉을 가졌는데, 그 이유는 “머리털”이 자연 평면인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 튜닉(tunic)에 대한 역자의 지식이 짧아서 이에 대한 번역으로 긴 웃옷, 속옷 또는 영어 발음 그대로 옮기거나 하였는데 이에 대한 더 정확한 번역은 독자에게 맡긴다
“튜닉 (긴 속옷)”이 주님으로부터의 신성한 진리를 의미한다는 것은 신약 성서에서 “튜닉”이 언급된 구절로부터 더욱 명확해진다:
군인들은 그분의 의복들을 가져다가 각 군인에 한 부분씩으로 네 부분들로 만들었고, 튜닉 역시; 지금 튜닉은 솔기가 없이, 위로부터 통째로 짜깁었다. 그러므로 그들이 서로에게 말했다, 이것을 나누지 말자, 하여 성경이 말한 것, 즉 그들은 내 의복들을 그들 사이에서 나누었다, 그리고 내 튜닉 위에 그들은 제비를 던졌다 하고 말한 것이 성취되어졌다 (요:19:23, 24). 위 구절을 읽는 이들의 경우, 이 구절 그대로 그들이 의복을 나누어 갖고, 튜닉은 제비뽑아 군인 누구 한 사람이 가져갔다 했는데, 제아무리 성경 구절들이 거룩하다 해도 이런 사건 세부사항에 이르러서까지 무슨 위대한 신비가 포함되었다고 상상조차 해보지도 않고 지나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그럼에도 위 구절의 세부 사항은 신성으로부터의 어떤 것이 표현되고 의미되고 있다. 그 이유가 “튜닉”에 의해 주님의 신성한 진리가 의미되었기 때문, 이 진리는 유일한 하나(one only)이자, 선으로부터 있는 진리이기에 이 튜닉은 솔기 없다고, 통째로 위로부터 짜깁어져 있다고 표현되고 있다.
같은 것이 “아론의 튜닉”에 의해 의미되고 있다; 즉 이 옷은 짜깁어진 옷, 짜는 사람의 일에 의한 옷이었다:
그들은 고운 아마포로 튜닉를, 짜는 사람의 일로, 아론과 아론의 아들들을 위해 만들었다
(출. 39:27).
주님은 신성한 진리가 부분들로 교회의 수준 낮은 진리들을 가진 유대인들에 의해 행해지듯 찢어지는 것을 허용하지 않으셨다.
신성한 선으로부터 있는 신성한 진리가 유일한 하나이기 때문에, 왕국의 복음을 전도하기 위해 보내질 때, 두 벌의 튜닉을 지니지 않도록 명령되어졌다;
예수께서는 하느님의 왕국을 전파하기 위해 열 두 제자들을 보냈다; 그리고 그는 그들에게 말했다, 길을 위해 아무것도 가져가지 말라, 장대도 아니고, 자루도 아니고, 빵도 아니고, 은도 아니다; 각 사람이 두 벌의 튜닉을 가져가지 말라 (눅. 9:2, 3);
그리고 마가복음서에서:
그분은 그들에게 명령하셨다, 그들은 길을 위해 지팡이만을, 그들의 벨트에 자루도, 빵도, 놋쇠도 가져가지 말라; 그러나 신발을 신어라; 그리고 두 튜닉을 입지 말라 (막. 6:8, 9);
그리고 마태복음서에서:
네 벨트에 금도, 은도, 놋쇠도 소유하지 말라, 길을 위해 자루도, 두 (벌의) 튜닉, 신발, 장대도 아니다 (마. 10:9, 10).
위의 모든 세부 사항들은 제자들로 전도하도록 보낸 주님의 왕국 속의 천적이고 영적인 것들에 대한 표현물이다. 그들이 자신들과 더불어 금, 은, 놋쇠, 자루, 그리고 빵까지도 지참하지 말라고 하신 이유는 이런 사항들이 주님만으로부터 있는 선들과 진리들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즉 “금”은 선을 의미하고; “은”은 거기로부터 있는 진리를; “놋쇠”는 자연적 선을; “빵”은 사랑의 선, 또는 천적인 선을 의미한다. 그러나 “튜닉”와 “신발”은 위의 사항들을 입히는 진리들을; “지팡이”는 선으로부터의 진리의 힘을 의미한다. “튜닉”은 내면의 자연적 진리이다, 그리고 이것들이 이중적으로 있어서는 안되고 단 하나로 있어야 하기에, 두 장대도, 두 벌의 신발도, 또는 두 벌의 튜닉을 가지는 것을 금하셨다. 이런 신비함들이 위 주님의 명령 안에 있다, 그리고 이 신비함들은 내적 의미로부터가 아니면 알려지지 않는다.
주님께서 말하신 모두와 각각은 신성한 사항들의 표현이다, 결과적으로 그분의 왕국 속의 천적이고 영적인 것들을 표현하고 있다, 고로 인간의 납득력에도 적합하고 동시에 영들과 천사들의 이해력에도 적합하고 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말하신 이런 사항들은 온 천국을 채우고, 계속 채우고 있다. 따라서 말씀의 내적 의미를 아는 것, 그리고 이를 사용하는 것이 중요함이 분명해진다. 더 나아가 이 의미 없이 자기가 기뻐하는 독단적 주장이 무엇이든 말씀으로부터 확증할 수 없다; 그리고 말씀의 나타남만 가지고 말한다면, 악 안에 있는 이들에게 글자 의미는 조롱할 빌미를 많이 제공한다, 하여 그들은 말씀이 신성하다라고 여기기는커녕 아예 어떤 요상한 발상을 하여 그것을 믿을 준비만 갖추고 있다.

4-11절. 그리고 그의 형제들은 그의 아버지가 그의 모든 형제보다 요셉을 더 사랑하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그들은 그를 미워했다, 그리고 그에게 평화로이 말할 수 없었다. 5 그리고 요셉은 꿈을 꾸었다, 그리고 그는 그것을 그의 형제들에게 말했다, 그리고 그들은 그를 더 미워하였다. 6 그리고 그는 그들에게 말했다, 바라건대 내가 꾼 꿈을 들어 보시오. 7 그리고 우리는 들판 한가운데에서 단을 묶고 있었소, 그리고 내 단이 일어났소, 그리고 직바로 섰소. 그리고 당신들의 단들이 내 주변에 왔소, 그리고 내 단에 절을 하였소.
8 그리고 그의 형제들이 그에게 말했다, 참으로 네가 우리를 통치할 것이냐? 또는 네가 참으로 우리 위에 군림할 것이냐? 그리고 그들은 그의 꿈 때문에, 그리고 그가 한 말들 때문에 그를 더 더욱 미워했다. 9 그리고 그는 또 다른 꿈을 꾸었다, 그리고 그것을 그의 형제들에게 말했다, 그리고 말했다, 보라 나는 꿈을 꾸었다, 그리고 해와 달과 열한 별들이 스스로 나에게 절을 했소. 10 그리고 그는 그것을 그의 아버지에게, 그리고 그의 형제들에게 말했다. 그리고 그의 아버지는 그를 나무랬다, 그리고 그에게 말했다, 네가 꾸었다는 그 꿈은 대체 무엇이더냐? 나와 네 어머니와 네 형제들이 참으로 너에게 와서 몸을 땅으로 구부려 절한다는 말이냐? 11 그리고 그의 형제들은 그를 시기하였다, 그러나 그의 아버지는 이 말을 간직하였다.

그리고 그의 형제들은…보았다. 이는 신앙 속에 있는 것들, 대략적 의미에서는 야곱의 후손을 의미한다. 이는 “보다”의 의미가 주목하고 이해하다 이다로부터; 그리고 요셉의 형제들의 표현함이 신앙 속에 있는 이런저런 것들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 이유가 이 장에 있는 요셉은 주님의 신성한 영적 평면, 또는 신성한 진리를 표현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의 형제들은 선행으로부터 돌아서서 신앙쪽으로, 그 다음 선행에서 분리된 신앙에, 결국은 거짓들쪽에 있는 교회를 표현한다. 고로 여기서 요셉의 “형제들”에 의해 신앙 속에 있는 이런저런 것들이 의미된다; 그리고 이와 같은 처지에 있는 것이 야곱의 후손이었기 때문에 대략적 의미에서는 이 후손이 의미되는 것이다.

그들의 아버지는 그의 모든 형제보다 그를 더 사랑했다. 이는 주님의 신성한 영적 평면이 신성한 자연 평면과 합쳐졌음, 대략적 의미에서는 “아버지”인 고대 교회와 합쳐졌음을 의미한다. 이는 비슷한 단어들이 등장했던 곳에서 설명한 적이 있다. 대략적 의미에서 이는 고대 교회와 결합되어졌음이 의미된다; 이 교회가 “아버지”에 의해 뜻해진 이유는 이 의미에서 앞 항목에서, 요셉의 “형제들”에 의해 야곱의 후손이 의미되었기 때문, 결과적으로 그들 사이에서 표현된 교회가 의미된다. 이런 사항들이 어떻게 이렇게 이해되는지는 이미 반복적으로 서술해왔었다; 그러나 이어지는 시리즈를 위해 반복적이지만 다시 몇 마디 보탤까 한다.
홍수 이후 주님에 의해 건립된 고대 교회는 표현 교회였다; 그래서 이 교회 예배의 외적인 것 모두 그리고 각각은 주님의 왕국의 천적인 것과 영적인 것을 표현했고, 최고 의미에서 주님의 신성한 것들 자체를 표현했다; 또한 예배의 내적인 것 모두와 각각은 선행에 관련되어 출생되고 있었다. 이 교회는 아시아쪽 세계로 대규모로 퍼져나갔다, 그리고 거기 있는 많은 왕국들을 통하여 퍼져갔다; 비록 그들 사이에 신앙의 교리적인 것들에서는 차이점은 있지만, 여전히 교회는 하나였는데, 그 이유는 교회의 각 부분에 있는 모든 것은 선행을 교회의 본질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때 당시에 신앙을 선행으로부터 분리시키고, 신앙을 교회의 본질로 만든 이들이 생겨났는데, 이들이 “함”이라 불리운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이 교회는 우상숭배로 전락했다, 그리고 이집트, 바빌론, 그와 다른 장소들에서 마술로도 전락했다; 그 이유가 그들은 내적인 것 없는 외적인 것을 예배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이 선행으로부터 퇴조했을 때, 천국 역시 그들로부터 퇴조했다, 그리고 천국 대신 그들을 인도했던 지옥으로부터 영들이 왔다.
이 교회가 황폐해졌을 때, 일종의 새로운 교회가 에벨로부터 시작되었고, 이것이 히브리 교회라고 불리웠다. 이 교회는 시리아와 메소포타미아 지역에 존재했다, 또한 가나안의 몇몇 민족 사이에도 존재했다; 그러나 이 새로운 교회는 고대 교회와는 사뭇 달랐는데, 그 이유가 이 교회는 외적 예배의 본질을 제물을 바침에 두었기 때문이다. 실로 이 교회는 예배의 내적인 것은 선행이다고 인정은 했다, 그러나 이 인정함이 고대 교회의 경우 같이 심정 측면에서가 아니었다; 고로 이 교회 역시 우상 숭배로 전락했다.
마지막 주님을 기쁘시게 한 것은 아브라함의 후손, 야곱으로부터 교회의 어떤 새로운
종류를 건립하시는 것, 그래서 고대 교회의 예배의 외적인 것들을 도입하시는 것이다. 그러나 이 민족의 특성상 그들은 교회의 어떤 내적인 것도 받을 수가 없었다, 그 이유는 그들의 심정은 선행에 완전 반대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교회가 건립되되 완전 껍데기만의 교회, 즉 표현 교회가 아닌 교회의 표현물이 그들 사이에 조직되었다. 야곱의 아들들, 또는 요셉의 형제들이 대략적 의미에서 이런 교회를 의미하게 되었다, 그리고 야곱, 그들의 아버지가 고대 교회를 의미한 이유이기도 하다. 말씀의 많은 장소들, 특히 예언서들에서 고대 교회가 “야곱”에 의해 뜻해진다; 또한 때때로 고대 교회가 “아버지와 어머니”라고 불리운다. 즉 “아버지”는 선 측면에서, “어머니”는 진리 측면에서 고대 교회를 의미한다. 이상 살핀 바로부터, 그들의 아버지가 모든 요셉의 형제들보다 요셉을 더 사랑하였다가 주님의 신성한 진리가 고대 교회와 결합되어졌다를 의미한 이유를 알았으리라 본다.

그리고 그들은 그를 미워했다, 그리고 그에게 평화로이 말할 수 없었다. 이는 경멸과 증오를 의미한다. 즉 요셉에 의해 표현된 신성한 진리를 경멸함과 그것을 증오함인데, 이는 “미워함”의 의미가 통상 미워하는 누군가가 지니는 미워한다가 아니다는 것, 그 이유는 경멸함, 증오함 같이 미워한다는 단어보다 더 센 표현도 천국에서는 좀 더 온순한 표현으로밖에 표현할 수 없기 때문이다; 즉 천국은 미워함이 무엇인지, 경멸, 증오함이 무엇인지를 모르는 곳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강한 표현인 경멸함이 미워한다는 수준에서 표현될 뿐이다; 그리고 “그에게 평화로이 말할 수 없다”의 의미가 아주 싫어함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 이유가 “평화로이 말한다”가 누군가가 잘되기를 원한다를 뜻하기 때문, 하여 고대인들은 평화라는 단어를 수단으로 최고 의미에서 주님 자신을, 내적 의미에서 그분의 왕국과 거기 안에서의 생명을, 또는 구원을, 그러나 외적 의미에서는 세상에서의 건강함과 안전함으로 이해했다. 이 의미의 반대가 누군가에 평화로이 말할 수 없음, 즉 그가 잘되기를 바라지 않음, 고로 아주 싫어하는 것, 여기서는 신성한 진리를 아주 싫어하는 것이다.

그리고 요셉은 꿈을 꾸었다. 이는 그것에 관하여 설교함을 의미한다. 이는 “꿈을 꾸다”의 의미가 설교하는 것이다로부터; 그리고 꿈이 요셉을 취급하기 때문에 주님의 신성한 인간에 관하여 설교함이 의미된다. 여기서 “꿈”이 설교함을 의미하는 이유는 요셉의 두 꿈 안에 요셉에 관련하여 설비되고 예견되는 모든 것들, 또는 요셉의 형제들에 의해 표현되는 교회, 또는 신앙으로부터 시작하는 교회 내에서 신성한 진리에 관련하여 설비되고 예견되는 모든 것들이 요약적으로 들어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신성한 진리들은 꿈이든, 환상이든, 말함에 의해서이든 고대 시대에서 명명백백해졌다는 것, 그리고 이로부터 설교함들이 있었다; 결과적으로 말씀에서는 “예언자”들에게 신성한 진리가 말함에, 환상에, 또는 꿈에 의해서 명명백백해졌고, 이들에 의해 진리들을 가르치는 이들이 의미되었다, 그리고 추상적 의미에서 교리의 진리들이 의미되었다.
그러므로 같은 것이 “환상을 봄”, 그리고 “꿈을 꿈”에 의해 의미된다. 즉:
나는 내 영을 모든 육 위에 쏟을 것이다, 그리고 너희 아들들과 너희 딸들은 예언할 것이다, 너희 노인들은 꿈을 꿀 것이다, 너의 젊은 이들은 환상들을 볼 것이다; 그리고 또한 남종들과 여종들 위에, 이 날에 나는 내 영을 쏟을 것이다 (욜. 2:28, 29);
위 구절에서 “그들 위에 영을 쏟는 것”은 진리들에 관하여 가르침이 있다를 표시하고, “예언하는 것”은 그들을 가르치고 그들에게 설교하는 것을 표시한다, 그리고 같은 것이 “꿈을 꿈”에 의해 의미된다. “노인”은 슬기로운 자이다, “젊은 이”는 총명한 자, “종들”은 아는 이들을 표시한다.
예레미야서에서:
고로 여호와 체바욷께서 말하신다, 네게 예언하는 예언자들의 말들을 경청하지 말라; 그들은 너희를 헛되게 만든다, 그들은 자기들 심정의 환상을 말한다, 그리고 여호와의 입으로부터가 아니다. 나는 예언자들이 말하는 것을 들었었다, 내 이름으로 거짓을 예언한다, 말하기를, 나는 꿈을 꾸었다, 꿈을 꾸었다. 꿈을 가진 예언자는 꿈을 말하게 하라; 그러나 내 말을 가진 자는 진리 안에서 내 말을 말하게 하라. 보라 나는 거짓으로 꿈을 예언하는 그들에 맞서 있다, 여호와께서 말하신다; 그들이 그들에게 말한다, 그리고 내 백성을 그들의 거짓말로 내 백성을 타락하는 쪽으로 인도한다 (예. 23:16, 25, 28, 32);
위 구절에서 “예언한다”란 가르치고 전도하는 것을 표시한다. 그러나 거짓말의 꿈으로부터, 이로부터 그들의 설교함이 있다.
이외 다른 구절로서 예레미야 29:8, 9; 스가랴. 10:2도 있다. 모세의 책에서:
너희 한가운데에서 예언자가 일어난다면, 또는 꿈을 꾸는 꿈장이가 일어난다면, 그가 너희에게 표시와 경이로움을 줄 것이다, 그리고 표시와 경이로움이 와서, 그것 가지고 그가 너희에게 말하기 를, 너희가 알지 못해왔던 다른 신들을 따라가자, 그리고 그를 섬기자; 너희는 이 예언자, 또는 꿈장이의 말들에 순종하지 말라. 그리고 이 예언자, 또는 꿈장이를 너희는 죽일 것이다, 그 이유는 그가 여호와 너희 하느님에 맞서 반역질하도록 말했기 때문이다 (신. 13:1-3, 5);
위의 “예언자,” “꿈장이”는 가르치고 전도하는 자를 표시하는데, 여기서는 거짓들이다.

그리고 그는 그것을 그의 형제들에게 말했다. 이는 분리된 신앙 속에 있는 이들의 현존에서를 의미한다. 이는 요셉의 형제들의 표현함이 선행으로부터 신앙쪽으로 돌아선 교회, 또는 추상적 의미에서 신앙 속의 것들이다로부터; 여기서는 선행으로부터 분리된 신앙 속에 있는 이들인데, 그 이유는 “그들은 그를 미워함을 추가했다”는 말이 이어지기 때문이고, 이 말에 의해 더 크게 경멸하고 증오함이 의미되기 때문이다. 이 교회에 주목하면, 이 교회의 시작에서는 선행이 설교되어졌다, 그러나 그나마 이론에 불과한 것, 즉 (생활은 없는) 교리만에 국한된 선행, 고로 기억 속의 지식으로만 있는 선행, 따라서 선행 자체로부터가 아닌, 애착으로부터가 아닌, 또는 심정으로부터가 아닌 선행이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선행과 애착이 심정에서 폐지되어지자, 신앙이 설교되어졌다; 그리고 마지막 어떤 선행도 더 이상 있지 않고, 신앙만이 있고, 이 신앙은 일함 없이 구원이 있다라고 말한다; 그러자 일들은 선행의 일들이라 더 이상 말해지지도 않고, 신앙의 일들, 신앙의 열매들이라 말한다.
이런 방법에서 실로 인간들은 선행과 신앙이 결합하고는 있다, 그러나 교리만으로부터일 뿐, 생활로부터가 아니다. 그리고 그들이 신앙의 생활에, 또는 선에 구원함의 어떤 것이 있다고 하지 않고, 오직 신앙만이 구원한다 라고 말했기에, 그들은 신앙이 구원하는 힘을 지닌다 라고 확정해버리는 가운데, 그들은 신앙이 열매라는 단어와는 거리를 두게 되면서 결국 일함이라는 단어는 천국 입장과는 슬그머니 무관하게 되고 만다. 어쨌든 진짜 확신함은 선 안에서가 아니면 가능할 수 없다, 그러나 가짜 확신이나 거짓 확신은 악 안에서조차도 가능하다. 그리고 그들은 신앙을 선행으로부터 더욱 분리하기 위하여, 그들은 이런 주장도 서슴치 않는다; 즉 딱 한 번의 확신, 즉 “예수를 인정함”만 가져도, 또는 죽기 직전 믿노라고 고백함만 가져도, 이전 삶은 어찌되었건 그는 구원되었다 라고 단정짓는 방식이다. 이들도 모든 인간은 자신의 삶의 결과에 따라 심판된다는 것, 사후 인간의 삶의 결과는 남아 있는다는 것을 성경이 말한다는 것은 알지만, 이런 대목을 슬쩍 비껴가는 것 뿐이다. 이런 간단한 몇 마디 말만 생각해보아도 선행으로부터 분리된 신앙의 품질이 무엇일지, 신앙의 삶이 아닌 신앙만으로 만들어지는 교회의 품질이 어떨지 짐작될 것이다. 그들의 근원되는 것으로부터 흐르는 거짓들에 관하여는 주님의 신성한 자비로부터 다음 페이지에서 더 살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그를 더 미워하였다. 이는 경멸과 증오가 더 크게 보태졌음을 의미한다. 이는 비슷한 단어가 등장한 앞에서 이미 살폈기에 생략한다.

그리고 그는 그들에게 말했다, 청컨대 내가 꾼 꿈을 들어 보시오. 이는 설교의 내용들을 의미한다. 이는 “꿈을 꾸다”가 설교함이다로부터, 여기서는 설교의 내용들인데, 그 이유가 그의 꿈에 대한 서술이 이어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라보니 우리는 들판의 한가운데에서 단을 묶고 있었다. 이는 그들이 교리로부터 가르쳐지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이는 “단”의 의미가 교리이다로부터; “단을 묶다”의 의미가 교리로부터 가르쳐진다 이다; 그리고 “들판”의 의미가 교회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들판의 한가운데”란 교회의 내면인 것, 고로 이것은 얼만가의 선행의 신앙 안에 있는 이들이다; 그 이유가 “한가운데”가 내적 의미에서 내면인 것과 가장 내면(가장 안쪽)인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교회의 한가운데, 또는 교회의 가장 안쪽에 있는 이들은 선행 안에 있는 이들, 여기서는 어떤 선행의 신앙 안에 있는 이들이다. 이들과 더불어 주님께서 현존하신다, 그 이유는 주님은 선행 안에 계시기 때문, 그리고 선행을 통하여 신앙 안에도 계시기 때문이다. 이렇게 의미되는 이유는 이어지는 말로부터 이다; 즉 요셉의 단이 일어났고, 그리고 다른 단들이 그것 주위를 빙둘러 일어났다고 말해지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요셉의 단에 의해서는 주님의 신성한 진리로부터의 교리가 의미되기 때문이다.
“단”이 교리를 의미하는 이유는 들판이 교회를 의미하기 때문, 그리고 들판에 서있는 곡식(corn)은 교회에 있는 진리이다; 그러므로 곡식이 있는 단은 진리가 있는 교리를 의미한다. 아래 구절 역시 비슷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눈물로 씨를 뿌리는 그들은 노래하며 수확할 것이다; 씨의 던짐을 낳으려 꼭 가고 우는 자, 그는 노래하며 올 것이고, 그의 단을 낳을 것이다 (시. 126:5, 6);
위는 영적 포로됨에 있다가 자유해진 이들에 관해서 말해진다. “씨의 던짐을 낳는” 것은 진리들로 가르침을 받는 것, “노래하며 오는” 것은 진리에 애착함으로부터의 기쁨을 표시한다, 그리고 “단을 낳는” 것은 이 진리로부터의 교리적인 것들을 표시한다.

그리고 보라, 내 단이 일어났다, 또한 직바로 서있었다. 이는 주님의 신성한 인간에 관한 교리적인 것을 의미한다. 이는 “단”의 의미가 교리이다로부터; 그리고 “일어남과 직바로 섬”의 의미가 통치할 최고의 존재, 그들이 숭배할 최고의 존재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 존재가 주님의 신성한 인간이시다는 것은 이어지는 말로부터 분명해진다; 즉 열한 단들이 자신들을 이 단쪽에 엎드려 절했다는 것; 그리고 두 번째 꿈에서, 해와 달과 열한 별들이 자신을 엎드려 요셉에게 절했다 라고 말해지기 때문, 이로 인해 통치할 최고의 존재, 그들이 경배할 최고의 존재가 의미되고, 또한 이 의미는 야곱이 말하기를, “나와 네 어머니와 네 형제들이 실로 자신들을 땅쪽으로 구부려 네게 절하란 말이냐?”에서도 분명해진다. 이미 말했던 바 같이, 주님의 신성한 진리가 요셉에 의해 표현되어진다; 이 진리의 최고의 존재는 주님 자신이시다; 그리고 교리적인 것들에서 최고의 사항은 그분의 인간이 신성이시다는 것이다.
교리적인 사항들 속의 최고 사항의 경우는 이렇다: 태고 교회, 이 교회는 천적 (수준의) 교회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특히 이 교회는 사람이라 불리웠고, 무한한 존재를, 무한으로부터 세상 밖으로 나온 파생물(deriverative)을 숭배했다; 그리고 자기들의 내적 인간 안에서 지각될 수 있는 것들과 자기들의 외적 인간에서 느낄 수 있었던 것들로부터, 그리고 세상 안에서 (육체의 눈으로) 보일 수 있는 것들로부터, 이 교회인들은 무한한 있음(존재, being)을 지각할 수 없었으나, 무한으로부터 세상 밖으로 나온 파생물에 관하여는 어떤 지각을 가질 수 있었기 때문에, 그러므로 그들은 무한한 있음이 있는 이 파생물을 숭배했다. 무한한 있음이 들어있는 세상에 출시된 무한한 있음을 그들은 신성한 사람으로 지각했는데, 그 이유는 세상에 출시된 무한한 있음은 무한한 있음으로부터 천국을 통하여 세상에 낳아졌다고 그들은 알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천국이 웅대한 사람이고, 인간 안에 있는 모두와 각각은 이 사람에 상응하기에, 그러므로 그들은 무한한 있음으로부터 세상에 출시된 무한한 있음에 관하여 신성한 사람 외에 더 다른 지각을 가질 수 없었다; 그 이유가 무한한 있음으로부터 웅대한 사람으로서의 천국을 통과하는 것은 무엇이든 거기로부터 각각 그리고 모든 것 안에서 형상(image)을 동반하기 때문이다. 이런 천적 수준의 교회가 타락하기를 시작했을 때, 이들이 내다본 것은, 세상에 출시된 무한한 것은 더 이상 인간의 마음 안으로 유입되어질 수 없다는 것, 고로 인류는 멸해지고야 말리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밝히 알려진 것은, 그분 자신 안의 인간을 신성으로 만들게 할 누군가가 태어나야 할 것이다는 것; 이 방법에서 전에 있어 왔었던 똑같은 세상에 출시된 무한한 있음이 되어 가는 것, 그리고 마지막에서 전에 있어 왔었던 무한한 있음과 하나가 되는 것이다. 이로부터 주님에 관한 이 예언이 창세기 3장 15절에 있게 되었다.
이것이 요한복음서의 아래 말씀에 서술되어 있다:
시작에서 말씀이 있었다, 그리고 말씀이 하느님과 더불어 있었다, 그리고 하느님은 말씀이셨다. 동일하게 하느님과 더불어 시작에서 있었다. 모든 것들이 그분에 의해 만들어졌다, 그리고 그분 없이 만들어졌던 어떤 것도 만들어지지 않았다. 그분 안에 생명이 있었다, 그리고 생명은 인간의 빛이었다. 그리고 말씀이 육으로 만들어졌다, 그리고 우리들 사이에 거주하셨다; 그리고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바라보았다, 이 영광은 아버지의 독생자에 관하여 이고 은총과 진리가 가득하다 (요. 1:1-4, 14);
“말씀”은 신성한 진리이다, 이 진리는 본질 측면에서 무한한 있음으로부터 세상에 출시된 무한한 있음, 그리고 주님의 인간 측면에서의 주님 자신이시다. 이 인간 자체로부터 신성으로부터의 진리가 지금 진행되어 천국 안으로 흘러든다, 그리고 천국을 통하여 인간들의 마음 안으로도 흘러든다; 결과적으로 이 진리가 우주를 규율하고 통치하는데, 마치 영원으로부터우주를 규율하고 통치하는 것과 같다; 그 이유가 이것은 무한한 있음과 하나이고 똑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그분은 인간을 신성과 결합되게 하셨기 때문, 이렇게 행해진 결과, 그분은 자신 안에 있는 인간을 신성으로도 만드신 것이다. 이로부터 신성으로부터의 진리의 최고인 것은 주님의 신성한 인간임이 분명해진다, 그리고 이로부터 교회의 신성한 사항 사이에서 최고인 것은 그분의 인간이 신성이시다는 사항이다.

그리고 바라보니, 당신들의 단이 와서 둘러섰다. 이는 신앙 속에 있던 이들, 즉 얼만가의(약간의, some) 선행으로부터 있는 신앙 안에 있던 이들을 의미한다. 이는 “와서 빙둘러 섰다”의 의미가 여기서는 숭배하기 위해 접근함이다 인데, 그 이유는 이어지는 말이, “그들은 자신들을 구부려 그의 단에 경배했다”이기 때문에서 이고, 이를 수단으로 숭배함이 의미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단”의 의미가 교리이다로부터, 여기서는 교리의 모든 사항들, 또는 신앙의 모든 것들이다. 여기서 “단”이 이런 의미를 가지는 이유는 진짜 의미에서 신앙의 모든 것들이 야곱의 아들들에 의해 표현되기 때문, 꿈에서 야곱의 아들들 역활을 “단”이 대신해 주었기 때문이다; 또한 꿈의 무대가 들판의 한가운데에서 이었는 바, 이는 내면인 것, 또는 교회의 내면에 있는 이들을 의미한다. (교회의 내면에 해당하는 것은 선행인 바,) 얼만가의 선행으로부터 신앙 안에 있는 이들이 의미되는 것이다. 이것들이 “와서 빙둘러 서고, 자신들을 구부려 요셉의 단에 절을 한” 것이다. 이것들이 한가운데로부터 보다 멀리 떨어진 것, 또는 외면의 것을 뜻하지 않고 적당한 의미에서 “요셉의 형제들”이 뜻해짐이 분명한 이유는 진행되고 이어지는 말로부터 이다; 즉, 그들이 더욱 더 그를 미워했다, 즉 그를 경멸하고 증오심을 가졌다는 것; 즉 “미워함”, “평화로이 말하지 못함”, 그리고 “시기함” 같은 단어들이 그의 형제들에 대한 것이고, 이것이 경멸과 증오심을 의미하기 때문에서 알게 된다.

그리고 자신들을 구부려 내 단에 절을 했다. 이는 숭배함을 의미한다. 이는 “자신들을 구부려 절을 함”의 의미가 굴종의 결과, 고로 숭배함이다로부터; 그리고 “요셉의 단”의 의미가 여기서는 주님의 신성한 인간에 관한 교리이다로부터, 고로 이것은 교회의 내면쪽에 있는 이들이 숭배하는 신성한 인간을 의미한다. 그러나 외면에 있는 이들, 즉 분리된 신앙 속에 있는 이들은 숭배함으로부터 가능한한 멀리 있다. 선행으로부터 분리된 신앙이 이런 결과를 빚는 이유는 이미 말한 대로 주님은 선행 안에 현존하시기 때문, 그리고 선행을 통하여 신앙 안에 현존하시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선행은 결합되게 하는 매체이기 때문이다. 선이 없는 진리는 무엇일까? 그리고 의지력 없는 지성은 무엇일까? 고로 선행 없는 신앙은 무엇일까? 확신함에서 그것의 본질 없이 맹목적 확신(믿습니다)함은 무엇일까?
선행으로부터 분리된 신앙 안에 있는 이들이 주님의 신성한 인간을 전혀 숭배하지 않는다는 것이 이런 품성을 지니고 기독교계로부터 다른 삶에 와서, 나와 이야기를 했던 많은 이들로부터 분명해졌다; 그 이유가 그 삶에서는 이 세상의 경우처럼, 즉 심정이 말하는데, 입이 말하지 않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고로 거기서는 모든 이의 생각들이 이 세상의 어떤 말함 보다 더 명료하게 소통되어진다. 다시 말해 누구도 자기가 생각하고 믿는 대로만 말하는 것이 허용된다는 말이다. 이 세상에서 주님을 설교했던 이들 중의 많은 이들이 그분을 통째로 부정한다; 그래서 어떤 이유로 지상에서 그분을 설교하고, 바깥쪽 형체일지언정 그분을 경배했는지를 물었더니, 자기들에게 직책의 의무로 지워진 것이기 때문이다는 것, 그 덕분에 명예와 소득도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분을 설교는 하지 않았지만 그분을 고백했던 이들이 있어 물었더니, 자기들은 교회 안에서 출생했기에, 자동적으로 그런 분위기에 있게 되었고, 만일 이런 자기들이 태어나진 종교에 반대하면 “왕따” 당할 것이기에 고백했을 뿐이다고 응답했다. 기독교계로부터 온 대다수가 주님의 인간이 신성이시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그리고 그분만이 천국과 우주를 규율하신다는 것을 거의 대다수가 알지 못했다; 더욱이 그분의 신성한 인간이 천국에 있는 모든 것이시다를 모르고 있다. 이것이 그러하다는 것은 노골적으로 밝히 나타나질 수 없었던 이유는 기독 교회가 선행으로부터 신앙쪽으로 돌아서리라는 것, 결과적으로 그분으로부터 그 자체 분리되리라는 것, 그리하여 거절할 뿐만 아니라 그분의 신성한 인간으로부터 있는 거룩함을 모독하리라는 것이 주님에 의해 예견되었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선행에서 분리된 신앙은 이와 달리 있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
오늘날 신앙이 선행으로부터 분리되어져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 이유가 교회들이 자기들의 독단적 주장들에 따라 서로를 분리하기 때문, 그리고 자기들의 주장이 가르치는 것과 다르게 믿는 자들은 누구이든 자기들의 종교 단체로부터 축출하고 비방도 한다. 이들은 노골적이지 않을 뿐 타인의 (영적) 소유물을 일말의 자비심도 없이 갈취하려드는 날강도 같아서, 교묘하게 이웃의 선행의 일마저 폄하하여 영적 간음을 범한다. 그럼에도 자기 교회의 원칙만 준행하면 된다는 식이다. 다시 말해, 교회를 구성하는 것이 생활로부터가 아니라 교리만으로부터 이다. 신앙에 인접한 열매들은 자기들의 교리 안에만 있을 뿐, 그들의 마음 안에는 전혀 없다.

그리고 그의 형제들이 그에게 말했다. 이는 분리된 신앙 속에 있는 이들을 의미한다. 이는 요셉의 형제들의 표현함이 선행으로부터 신앙쪽으로 돌아서고, 결국 선행으로부터 신앙을 분리한 교회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러나 이 교회에서 내면인 이들이 꿈에서의 “(곡식)단들”에 의해 의미되어진다. 요셉의 형제들이 이 교회를 표현하는 이유는 대략적 의미에서 그들이 교회의 표현물을 의미했기 때문, 또는 야곱의 후손 사이에 조직된 광신적 신앙을 의미했다. 이 후손들은 기독교회에서 이해된 신앙 같은 것은 전혀 아는 바 없었고, 오직 진리만 알았었다. 그들에게 진리는 기독인들에게 신앙과 견줄만하다. 더욱이 히브리어에서는 한 단어로 진리와 신앙 모두에 사용되고 있다. 그러나 유태 교회는 진리라는 단어를 십계명의 가르침으로 이해했다; 이를 조금 더 확장하면 모세에 의해 내려받은 율법, 심판들, 증거들, 규례들 까지도 포함할 수 있다. 그들은 진리의 내면들을 알지 못했다, 아마 알기를 원하지도 않았다가 더 적절할지 모른다.
기독 교회의 경우, 이 교회는 자기들이 말하는 교리적 주제들에 신앙이라는 이름을 주고, 이 신앙이 교회의 내면의 것들로 반드시 믿어져야만 하는 사항들로 굳혀놓았다. 그 이유가 신앙이라는 단어를 수단으로 보통의 사람들에서 이해되는 것은 교의들(신조들, creeds)이기 때문, 또는 신조들의 책들이 가르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앙에 관한 교리적인 것들, 또는 그것들에 관한 지식이 누군가를 구원할 수 없다고, 신앙의 생활 안에 있는 자가 거의 없다고 생각하는 이들은 확신을 신앙이라 부른다. 이들은 보통의 사람 너머 있고, 타인들보다 더 학식이 있다. 이런 사항들로부터 보건대, 여기서 취급된 주제는 내적 의미에서 야곱의 후손들 사이에서 조직된 교회의 표현물일 뿐 아니라, 유태 교회에 이어지는 기독 교회까지 아우르고 있다는 것이다; 그 이유가 주님의 말씀은 보편적이기 때문, 일반적으로 모두 각각의 교회에 이르기까지 아우른다고 납득되기 때문이다. 하여 주님에 의해서는 기독 교회이든, 유태 교회이든 공히 예견되고 있다는 것, 그러므로 유태 교회는 대략적 의미에서, 또는 내적 역사적 의미에서, 그리고 기독 교회는 내적 의미에서 취급된다.

네가 참으로 우리를 통치할 것이냐? 또는 네가 참으로 우리 위에 군림하겠다는 것이냐? 이는 그들은 이해력과 의지력 속의 것들에 관하여 복종 당해지고 말리라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통치함”이 이해력 속의 것들이 복종당해지는 것, “군림함”은 의지력 속의 것들이 복종 당해지는 것을 의미함에서 분명해진다. “우리를 통치함”과 “우리 위에 군림함”이 그들이 복종당해지고 말 것임을 표시할 뿐 아니라, 여기서 사용된 두 표현들은 이것은 이해력 측면에, 다른 하나는 의지력 측면에 관련되고 있다. 이런 표현은 말씀, 특히 예언서들에서 두드러진 표현들인데, 하나가 두 방법에서 표현되는 것이다; 이런 표현 방법 안에 있는 신비함들을 알지 못하는 이들은 이런 표현이 아마도 강조를 위한 중복적 표현일 것이라고 밖에 생각하지 못한다. 그러나 이것은 그렇지가 않고, 말씀의 모두 각각의 세부적인 것 안에서도 천국의 결혼, 즉 진리가 선과, 선이 진리와 결혼함이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인간 안에서의 이해력과 의지력의 경우도 있다. 이 표현은 진리에 관련되고, 저 표현은 선에 관련된다; 고로 이것은 지성에, 그 이유가 지성은 진리에 속하기 때문, 저것은 의지력에, 그 이유가 이것은 선에 속하기 때문이다. 더욱이 말씀에 있는 표현들은 이런 의미를 꾸준히 가지는 용어들로 구성된다. 이것은 하나를 위해 두 표현들이 사용된 것 안에 감추인 비밀들이다. 이와 마찬가지인 것이 여기서의 “우리를 통치함”과 “우리 위에 군림함”의 경우이다. 하여 “통치함(reigning)”은 이해력 속에 있는 진리와 관계되고, “군림함(having dominion)”은 의지력 속에 있는 선에 관련되고 있다. 아래 다니엘서에서도 “왕국”은 진리를 서술하고, “군림함”은 선을 서술하는데, 이 구절의 주제 역시 주님의 신성한 인간이다:
그분에게 군림하심과 영광과 왕국이 주어졌다, 하여 모든 백성, 나라들, 그리고 언어들이 그분을 예배할 것이다; 그분의 군림하심은 영원히 지속되는 군림하심이다, 이 군림하심은 사라지지 않는 다, 그분의 왕국은 멸해지지 않는다 (단. 7:14);
그리고 다윗서에서:
당신의 왕국은 모든 영원함들의 왕국입니다, 그리고 당신의 군림하심은 모든 세대에 있습니다 (시. 145:13).

그리고 그들은 그를 그의 꿈과 그의 말들 때문에 더욱 미워하였다. 이는 진리에 관한 설교 때문에, 여기서는 주님의 신성한 인간에 관한 설교 때문에 한층 더 강해진 증오와 경멸을 의미한다. 이는 “더욱…하였다(보탰다, added)”가 더욱 그러했다 임에서; 그리고 “미워함”의 의미가 경멸하고 증오하는 것이다로부터; “꿈”의 의미가 설교함이다로부터; 그리고 “말들”의 의미가 진리들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말들”이 진리들을 표시하는 이유는 천국에의 모두 각각의 단어는 주님으로부터 있기 때문이다; 하여 내적 의미에서 “말들”은 진리들을 의미하고, 일반적으로 “말씀”은 모든 신성한 진리를 의미한다.
주제 자체에 주목하면, 이것은 모든 것 중에서 최고의 진리인 것, 즉 주님의 인간이 신성이시다는 진리이고, 이것을 특히 선행으로부터 분리한 신앙을 가진 교회가 경멸하고 증오한다. 고대 교회 속에 있던 이들, 그리고 신앙을 선행으로부터 분리하지 않은 이들은 우주의 하느님이 신성한 사람이셨다는 것을, 그분은 신성한 있음(being)이셨다는 것을 믿었다; 이로부터 그들은 그분을 “여호와”라고 명명하였다. 그들은 이것이 태고 교회로부터 이었다고 알았다, 그리고 그분이 그들의 형제들 중의 얼만가에게는 사람으로 나타나기도 하셨기 때문이다. 그들이 또한 알았던 것은, 자기들의 교회의 모든 의식들과 외적인 것들이 그분을 표현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선행에서 분리된 신앙 속에 있던 이들은 그렇게 믿을 수 없었는데, 그 이유는 어떻게 인간이 신성일 수 있느냐를 납득할 수 없었기 때문, 또한 신성한 사랑이 이를 결과되게 했다는 것을 납득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고 만 이유는 그들은 자기들의 외적 감각들을 통하여 받은 어떤 생각(관념)들로부터 납득하지 못한 것은 무엇이든 아무것도 아니다로 간주했기 때문이다. 선행으로부터 분리된 신앙이 이런 대목을 소중하게 간직해버렸는데, 그렇게 한 이유는 지각의 내적 측면이 닫혀졌기 때문이다, 마치 이는 유입을 가능하게 하는 중간의 것인 매체가 없는 경우와 같다.
이어져온 유태 교회는 여호와가 사람이셨다는 것, 또한 하느님이셨다는 것을 실로 믿었다, 그 이유는 그분이 모세와 예언자들에게 사람으로 나타나셨기 때문, 이런 이유로 유태인들은 자기들에게 나타난 모든 천사를 “여호와”라고 불렀다, 그럼에도 그들은 그분에 관하여 이방인들이 자기들의 신들을 가졌던 그 수준의 범주를 넘어서 생각하지를 못했는데, 그 이유는 자기들에게 기적을 수행하신 여호와 하느님을 선호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들은 여호와가 말씀에 있는 “주님”이시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그리고 자기들의 모든 의식들이 주님의 신성한 인간을 표현한 것도 전혀 몰랐다. 그들이 지니는 메시아, 또는 그리스도에 관한 생각은 오로지 모세보다 더 위대한 예언자로 오시리라는 것, 또는 다윗보다 더 위대한 왕으로 오시어 엄청난 기적들을 가지고 자기들을 가나안의 토지 안으로 데려다놓으시리라는 것 뿐이다. 그들은 그분의 천국 왕국에 관하여 어떤 것도 듣기를 원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그들은 세상적인 것밖에 납득되는 것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는 그들은 선행에서 분리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기독인의 교회, 어쨌든 외적 예배에서 실로 주님의 인간을 신성으로서 숭배한다, 특히 성찬식에서 더욱 두드러진다, 그 이유는 그분께서 빵은 그분의 몸이고, 포도주는 그분의 피라고 말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은 자기들의 교리에서 그분의 인간을 신성으로 만들지 않고 있다, 그 이유는 그들은 신성의 속성과 인간의 속성 사이에 구분이 있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해서 이 교회 역시 선행으로부터 신앙쪽으로 방향을 틀었고, 마지막으로 신앙이 선행에서 분리되었다. 그리고 그들은 주님의 인간은 신성이다고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많은 이들이 넘어지거나 심정에서 그분을 부정하고 있다. 어쨌든 진리인즉, 주님의 신성한 인간은 신성한 있음으로부터 세상으로 출시된 신성한 있음이시다는 것이다. 이 두 분은 한 분이시다는 것을 주님께서 분명히 가르치신다:
예수께서 빌립에게 말하셨다, 내가 너희에 이토록 오래 있어 왔는데, 너희는 나를 알지 못했다는 말이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본 자이다. 내가 아버지 안에, 아버지가 내 안에 있는 것을 너희는 믿지 못하느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그리고 내 안에 아버지가 계시는 것을 믿어라
(요. 14:9-11);
이 외에도 다른 구절들이 더 있다. 세상에 출시된 신성한 있음은 (본래의) 신성한 있음으로부터 진행한 신성 자체, 그리고 형상에서는 사람이시다; 천국, 그 속의 모든 것은 웅대한 사람을 표현한다; 이 웅대한 사람에 관하여는 각 장의 끝에서 살펴왔다, 그 안에서 인간 안의 모든 것이 상응한다.
실로 주님께서는 또 다른 인간이신 것으로 태어나셨고, 어머니로부터 유약한 인간을 가지셨다; 그러나 이 인간(human)을 주님께서는 통째로 내던지셨다, 하여 그분은 더 이상 마리아의 아들이 되지 않으셨다, 그리고 자신 안의 인간(Human)을 신성으로 만드셨다, 이것이 그분이 신성이 되심에 의해 뜻해진다; 그리고 또한 그분은 그분이 변모하심으로 그분이 신성한 사람이신 것을 베드로, 야고보, 요한에게 보이셨다.

그리고 그는 또 다른 꿈을 꾸었다. 이는 다시 설교함을 의미한다. 이는 “꿈”의 의미가 설교함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리고 그것을 그의 형제들에게 이야기했다, 그리고 말했다. 이는 분리된 신앙 속에 있는 이들의 현존에서를 의미한다. 이는 요셉의 형제들의 표현함이 분리된 신앙에 있는 이들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내가 아직 더 꿈을 꾸었다. 이는 설교의 내용들을 의미한다.

바라보니, 해와 달. 이는 자연적인 선과 자연적인 진리를 의미한다. 이는 “해”가 천적 (평면의) 선, “달”은 영적 (평면의) 선, 또는 진리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해”는 최고 의미에서 주님을 의미하는데, 그 이유는 그분이 영적 사랑에 있는 천국에 있는 이들에게 해로 나타나시기 때문; 그리고 “달” 역시 최고 의미에서는 주님을 의미한데, 그 이유는 그분은 영적 사랑에 있는 천국에 있는 이들에게 달로 나타나시기 때문이다; 천국에 있는 모든 빛은 이 둘로부터 이다. 그러므로 해로부터의 빛에 의해 사랑의 천적 평면, 또는 선이 있다; 그리고 달로부터의 빛에 의해 사랑의 영적 평면, 또는 진리가 있다; 그러므로 이 구절에서 “해”가 자연 평면의 선, “달”이 자연 평면의 진리인 이유는 여기서의 해와 달은 야곱과 레아를 서술하기 때문이다; 이는 10절로부터 분명해지는데, 거기서 야곱이, “나와 네 어머니와 네 형제가 실로 와서 땅으로 자신을 굽혀 네게 절한다는 말이냐?” 라고 말하기 때문, 그리고 야곱과 레아는 자연 평면의 선과 자연 평면의 진리를 표현하기 때문인데, 이는 앞에서 자주 언급해왔다. 주님으로부터 오는 신성함이 최고 의미에서 그분에 있는 신성이다; 그러나 관계적 의미에서 그분으로부터의 신성이다. 그분으로부터의 신성한 선이 소위 천적 평면(수준)이고, 그분으로부터의 신성한 진리는 소위 영적 평면(수준)이다. 합리성이 이를 받을 때, 의미되는 것은 합리적 평면의 선과 진리이다; 그러나 자연 평면이 이것들을 받을 때, 의미되는 것은 자연 평면 의 선과 진리이다. 여기서 해와 달은 자연 평면의 선과 진리인데, 그 이유는 야곱과 레아를 두고 말해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열한 별들. 이는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을 의미한다. 이는 “별들”의 의미가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들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별”이 말씀에서 이 의미를 가지는 이유는 별이 밤에 빛을 내는 작은 발광체로 어렴풋한 빛을 내보내기 때문, 마치 지식들이 선과 진리에 어렴풋한 빛을 내보내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이런 지식들이 “별”에 의해 의미되는 것은 말씀의 많은 구절로부터 분명해진다. 예레미야서에서:
고로 낮의 빛을 위해 태양을, 밤의 빛을 위해 달과 별들의 운행을 주시고, 파도들이 요동치는 바다를 휘저으시는 여호와께서 말하셨다 (예. 31:35);
위 구절은 새로운 교회가 취급된다, 그리고 “낮의 빛을 위해 태양을 주심”에 의해 사랑과 선행의 선이 의미된다, 그리고 “밤의 빛을 위해 달과 별들의 운행을 주심”에 의해 진리와 지식들이 의미된다.
다윗서에서:
여호와께서는 큰 발광체들을 만드시고, 낮은 태양이 규율하고, 밤은 달과 별들이 규율하게 하셨다 (시. 136:7-9);
말씀의 내적 의미에 관해서 무지한 이들이 믿게 되는 것은, “태양”은 세상의 태양, “달과 별들” 또한 세상의 달과 별들이다는 그 이상은 없다; 하여 이로부터 영적이고 천국적 의미는 아무것도 발생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말씀은 모두 각각의 단어들에서 천국적일 뿐이다; 이로부터 분명해지는 것은 사랑과 선행의 선들, 그리고 신앙의 진리들, 이들에 관한 지식들 모두가 의미된다.
창세기서의 첫 장, 거기에서 천국 인간에 관한 새로운 창조에서 이렇게 서술되어 있다:
하느님께서 말하셨다, 낮과 밤이 구별되기 위해 하늘의 광활한 공간에 발광체들이 있어라; 그리고 그것들로 표시를 위해서와 때들을 위해서, 그리고 날들과 햇수들을 위해서 있게 하자; 땅 위에 빛을 주기 위해 하늘의 광활한 공간에 발광체를 위해 그것들로 있게 하자; 그리고 그렇게 있었다. 그리고 하느님은 두 큰 발광체를 만드셨다; 더 큰 발광체는 낮을 규율하도록, 작은 발광체는 밤을 규율하기 위해 있다; 그리고 별들이 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땅위에 빛을 주기 위하여, 그리고 낮을 규율하고, 밤을 규율하고, 그리고 빛과 어둠 사이를 구별하기 위하여, 그것들을 하늘의 광활한 공간에 놓으셨다 (창. 1:14-18, 30-38항).
마태복음서에서:
이 날들의 환난 후에 즉시 태양은 어두워질 것이고, 달은 그녀의 빛을 주지 않을 것이고, 별들은 하늘로부터 떨어질 것이다, 그리고 하늘의 힘들이 흔들릴 것이다 (마. 24:29);
위에서 “태양과 달”에 의해 사랑과 선행이, 또는 선과 진리가 의미된다, 그리고 “별들”에 의해 지식들이 의미된다, 이는 앞에서 살폈다; 그리고 마지막 날, 또는 교회의 마지막 상태가 여기서 취급되기에, “태양이 어두워짐과 달이 빛을 주지 않음”에 의해서는 그때에 사랑의 선과 선행의 선이 멸해짐이 의미된다; 그리고 “별이 하늘로부터 떨어짐”에 의해서는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들 역시 사멸함을 의미한다.
이런 것들이 의미되는 것은 위 구절 말고도 예언서들에서 같은 단어가 등장하는 구절에서 더 확인된다. 이사야서에서:
잘 보라 여호와의 날이 잔인하게 온다, 땅을 황폐해지게 만들기 위해서이다, 그리고 그분은 그것의 안에서 밖으로 죄인들을 파괴하실 것이다. 하늘의 별들과 별자리들이 그들의 빛으로 빛을 내지 않을 것이다; 태양은 그것의 떠오름에서 어두워질 것이다, 그리고 달은 그녀의 빛이 빛을 내게 하지 않을 것이다 (이. 13:9, 10).
요엘서에서:
여호와의 날이 가까이 있다. 태양과 달이 검게 되어졌다, 그리고 별들은 그들의 빛을 냄에서 철수했다 (욜. 3:14, 15).
에스겔서에서:
내가 너희를 꺼지게 할 때, 나는 하늘을 덮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거기로부터의 별들을 검어지게 할 것이다; 나는 구름으로 태양을 가릴 것이다, 그리고 달은 그녀의 빛이 빛나게 만들지 않을 것이다, 하늘에 있는 모든 빛의 발광체들을 나는 네 너머에서 검게 만들 것이다, 그리고 네 토지 위에 어둠을 놓을 것이다 (겔. 32:7, 8).
그리고 계시록서에서:
넷째 천사가 소리를 냈다, 그리고 태양의 삼분의 일 부분이 쳐부심을 당했다, 그리고 달의 삼분의 일 부분, 그리고 별들의 삼분의 일 부분; 그것들의 삼분의 일 부분이 어두워질 것이다, 그리고 낮은 그것의 삼분의 일을 위하여 빛을 내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밤도 마찬가지 방식에서 이다
(계. 8:12).
더욱이 “별들”이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들임이 아래 다니엘서에서 분명해진다:
숫염소의 뿔 중의 하나로부터 작은 뿔이 생겨났다, 그리고 그것은 남쪽을 향하여, 동쪽을 향하여, 그리고 광채를 더함을 향하여 극도로 자랐다. 그리고 그것은 하늘의 군대와 별들에까지 이르게 자랐다; 그리고 군대와 별들의 얼마를 땅 아래로 내던졌고 그것들을 짓밟았다 (단. 8:9, 10);
그리고 계시록서에서:
꼬리를 가진 큰 용이 하늘의 별들의 삼분의 일을 잡아당겼다, 그리고 그것들을 땅쪽으로 내던졌다 (계. 12:4).
위 구절들에 있는 “별들”이 자연계의 별을 뜻하지 않는다는 것은 누구나 짐작되고도 남을 것이다. 위 다니엘서와 계시록서에서는 교회의 마지막 때에서의 교회의 상태를 묘사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다윗서에서:
여호와께서는 별들의 숫자를 세신다; 그분은 모든 것에 이름을 주신다 (시. 147:4).
다시:
너희 태양과 달이여 여호와를 찬양하라, 너희 빛의 별들아 그분을 찬양하라 (시. 148:3).
그리고 계시록서에서:
큰 표시가 하늘에서 보여졌다; 여인이 태양을 두르고, 달은 그녀의 발 아래에, 그리고 그녀의 머리 위에는 열두 별의 왕관이 있었다 (계. 12:1).
“별들”이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들을 의미하기에, 그것들은 교회의 교리물도 의미한다, 그 이유가 이것들은 지식들이기 때문이다. 마지막 때에서 선행으로부터 분리된 신앙에 관한 교리물이 계시록서에서 별에 의해 이렇게 묘사되고 있다:
셋째 천사가 소리를 냈다, 그리고 하늘로부터 횃불같이 타는 큰 별이 떨어졌다, 그리고 그것은 강들의 삼분의 일 부분 위에, 그리고 물의 샘들 위에 떨어졌다; 그리고 별의 이름은 쑥이라 불리우고, 많은 이들이 물들로 인해 죽었다, 그 이유는 그것들이 쓰게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계. 8:10, 11);
이 별에 의해 쓰게 만들어진 물들은 진리들이다, 그리고 “강들과 물들의 샘들”은 말씀으로부터의 총명과 지혜이다.

나에게 굽혀 절을 했다. 이는 숭배함을 의미한다. 이는 굽혀 절함의 의미가 숭배함이다로부터 알게 되는데 앞에서 살폈다.

그리고 그는 그것을 그의 아버지에게 그리고 그의 형제들에게 말했다. 이는 그것이 알 수 있도록 주어졌음을 의미한다. 이에 대하여는 별도의 설명이 필요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의 아버지는 그를 나무랬다, 그리고 그에게 말했다, 네가 꾸었다는 꿈은 대체 무었이란 말이더냐? 이는 분개함을 의미한다. 이는 “나무램”의 의미가 분개하다 이다로부터; 그리고 이 분개함의 원인은 주님의 신성한 인간에 관한 진리를 설교함 때문인데, 이것이 “꿈을 꿈”에 의해 의미되었다. 아버지와 요셉의 형제들은 고대의 것으로부터 파생된 유태인의 종교를 표시한다. 이 종교의 외적 측면은 고대 교회의 외적 측면과 대부분 같다. 고대 교회 속에 있는 이들과 더불어서는 그들의 외형물 안에 내적인 것이 있었으나, 유태인의 종교 속에 있는 이들의 경우는 그렇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그들은 어떤 내적인 것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 이는 지금의 경우도 변함이 없다; 그럼에도 안쪽에 내적인 것이 있었다. 이렇게 내적인 것을 지닌 외적인 것이 여기서 “아버지”라고 불리우고, 내적인 것 없는 외적인 것이 “형제들”이라 불리운다; 그러므로 이런 서술이, 즉 “그의 형제들은 그를 시기했고, 그의 아버지는 그의 말을 마음에 간직했다”가 뒤이어진다. 이어진 이 말의 앞 부분은 내적인 것 없는 외적인 것에 있는 이들의 증오함이, 뒤 부분에서는 진리가 아직은 그들의 종교 안에 남아 있었다가 의미된다.
이것은 기독 교회에서도 별반 차이가 없다. 이 교회에서도 내적인 것 없이 외적인 것에만 머무르는 이들이 성찬식에 참석하여 빵을 먹고 포도주를 마시나, 그들에게는 이 의식이 준행하라는 명령 때문에, 그리고 교회가 이를 받아들였기에 무작정 아무 생각 없이 참석을 한다. 그러나 이들보다 조금 더 나은 그들 중의 얼만가는 빵과 포도주가 거룩하다는 것을 믿는다, 그러나 그들 안에 있게 된 거룩함이 “빵”은 천국에 있는 사랑과 선행의 거룩함으로부터, “포도주”는 거기 있는 선행과 신앙의 거룩함으로부터 이다는 사실로부터 내려오고 있다고 믿는 것은 아니다. (아예 그런 지식조차 없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이에 반해, 외적 예배에 있되 동시에 내적 예배에도 있는 이들은 빵과 포도주를 숭배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것들이 표현하는 주님을 경배한다, 그리고 그분으로 사랑의 거룩함, 선행의 거룩함, 그리고 신앙의 거룩함이 있음을 믿는다; 그리고 이 거룩한 의식을 준행하되, 교리로부터가 아닌 자신의 삶에 어울려진 사랑과 선행, 그리고 신앙으로부터 이다.

나와 네 어머니와 네 형제들이 실로 와서 땅쪽으로 자신을 구부려 네게 절한다는 말이더냐? 이는 교회가 숭배하리라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와서 절을 함”의 의미가 이제 막 숭배하려 드는 것이다로부터; 그리고 여기서 “나”인 “아버지”, 그리고 “어머니”, 그리고 “형제들”의 의미가 교회, 여기서는 유태인의 교회이다로부터 알려진다.

그리고 그의 형제들은 그를 시기했다. 이는 그들이 증오함을 의미한다. 이는 “시기함”이 증오함이다로부터, 이 의미는 앞에서 살핀 “미워함”, “평화로이 말하지 못함”과도 같다; 그 이유가 “시기함”이 원어에서 일 경우, 시기적이고 말다툼질을 함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시기하고 다툼은 미워함의 결과이기에 증오함이 같은 단어에 의해 의미된 것이다.

그리고 그의 아버지는 이 말을 간직하였다. 이는 이 진리가 그들의 광신적 신앙에 남아 있었다를 의미한다. 이는 여기서 “아버지”의 의미가 고대의 것으로부터 파생된 유태인의 종교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리고 “간직함”의 의미가 내향적으로 보존함이다로부터, 고로 남아 있다가 의미된다; 그리고 “말”의 의미가 진리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광신적 신앙에 남아 있는 진리에 의해 뜻해진 것은 앞의 항목을 살피면 된다.

12-17절. 그의 형제들은 세겜에서 그들의 아버지의 양떼를 먹이러 밖으로 나갔다.
13 그리고 이스라엘은 요셉에게 말했다, 네 형제들이 세겜에서 양떼를 먹이고 있지 않느냐? 오너라, 그리고 나는 그들에게 너를 보낼 것이다. 14 그리고 그가 그에게 말했다, 나를 바라보라! 그리고 그는 그에게 말했다, 청컨대 가서 네 형제들의 평화를, 양떼들의 평화를 보거라, 그리고 다시 나에게 그 말을 가져오너라. 그리고 그는 그를 헤브론의 골짜기로부터 보냈다, 그리고 그는 세겜에 왔다. 15 그리고 어떤 사람이 그를 발견했다, 그리고 바라보니 그는 들판에서 방황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 사람이 그에게 물었다, 말하기를, 너는 무엇을 찾느냐? 16 그리고 그는 말했다, 나는 내 형제들을 찾고 있습니다, 바라건대 그들이 어디서 양떼를 먹이고 있는지 말해주십시오. 17 그리고 그 사람이 말했다, 그들은 여기로부터 떠났다, 그 이유가 나는 그들이 도단으로 가자 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요셉은 그의 형제들을 뒤쫒아 갔다, 그리고 그들을 도단에서 찾았다.

그리고 그의 형제들은 양떼를 먹이러 밖으로 나갔다. 이는 신앙으로부터 가르치는 이들을 의미한다. 이는 요셉의 “형제들”의 의미가 신앙으로부터 있는 교회인들 이다로부터; 그리고 “양떼를 먹임”의 의미가 가르치는 것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들의 아버지의… 이는 고대인들의.., 그리고 원시 교회의…를 의미한다. 이는 “아버지”, 또는 야곱의 의미가 고대 교회이다로부터, 또한 원시 기독 교회도 의미한다. 이 원시 교회는 시작에서 있었던 기독 교회를 뜻한다. 크게 네 교회가 말씀 안에서 취급되었다. 홍수 이전 존재했고, 사람이라 명명된 교회가 있었는데, 이는 태고 교회라고 불리운다. 다음은 홍수 이후에 존재한 교회로 고대 교회이다. 그 다음 야곱의 후손에게 이어진 교회인데, 실로 이 교회는 교회는 아니고 교회의 표현물이다; 이 표현물은 광신적 신앙이라고도 불리운다. 그리고 주님이 오신 이후 설립된 것, 이는 기독 교회라고 불리운다. 이 교회의 처음에서는 원시 교회라고 불리웠다.

세겜에서. 이는 첫 조짐들을 의미한다. 이는 “세겜”의 의미가 고대의 신성한 지주로부터 파생된 진리이다, 그리고 교리 측면에서는, 여기서 신앙에 관한 교리의 첫 기본 원리이다; 그 이유가 이름의 서술은 시리즈에서 주제에 따라 있기 때문이다. 첫 기본 원리는 교리물의 일반적인 사항이기도 하다; 일반적인 사항은 처음 받아진 것이고, 특별한 것들은 이어져서 받아지는 것들이다.

그리고 이스라엘이 요셉에게 말했다. 이는 신성한 영적 평면으로부터 지각함을 의미한다. 이는 말씀의 역사물에서 “말함”의 의미가 지각함이다로부터; 그리고 요셉의 표현함이 신성한 영적 평면이다로부터 알려진다.

네 형제가 세겜에서 양떼를 먹이고 있지 않느냐? 이는 그들이 가르치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는 “양떼를 먹임”의 의미가 가르치는 것이다로부터; 그리고 “세겜”의 의미가 신앙에 관한 교리의 첫 기본 원리(rudiments)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오너라, 그리고 나는 너를 그들에게 보낼 것이다. 이는 그것은 신성한 영적인 선들을 가르쳐야 할 것이다를 의미한다. 이는 요셉의 표현함이 주님의 신성한 영적 평면이다로부터 분명해진다. 여기서 “보내짐”이라고 말해질 경우, 이는 신성한 영적 선들을 가르치는 것을 표시한다; 그 이유가 내적 의미에서 “보내지는” 것은 앞으로 나가는 것과 진행하는 것이기 때문, 또한 동시에 가르치는 것이다; 여기서의 경우는 주님의 신성한 영적 평면으로부터 진행하는 신성한 영적 선들을 가르치는 것이 된다. 신성한 영적 선들은 사랑과 선행으로부터 있는 것들이다; 그러나 신성한 영적 진리들은 거기로부터의 신앙 속에 있는 것들이다. 전자를 가르치는 이는 후자 역시 가르치고 있는 셈이 된다; 그 이유가 후자는 전자로부터 있고 전자에 관하여서 이기 때문이다. 내적 의미에서 “보내어짐”이 진행하는 것과 가르치는 것임은 말씀의 많은 구절로부터 분명해지고, 특히 주님의 경우에서, 그분은 아버지에 의해 “보내졌다”라고 말하신다, 이를 수단으로 그분은 그분으로 진행하셨다, 즉 신성한 선으로부터 진행하셨다가 의미된다; 또한 주님께서는 위로자 또는 진리의 영을 “보낸다”하고 말하신다; 이를 수단으로 거룩한 진리가 그분으로부터 진행한다가 의미된다. 예언자들 또한 “보내졌는데,” 이를 수단으로 그들은 주님으로부터 진행되는 것을 가르쳤다가 의미된다. 보내지다 라는 말은 말씀에서 아주 많이 등장하기에 아마도 웬만큼 말씀을 읽은 이라면 이 의미의 확증은 어렵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가 그에게 말했다, 나를 보아라. 이는 확언함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는 그에게 말했다, 청컨대 가서 네 형제들의 평화를 보아라. 이는 주님의 모두 각각의 오심에서, 그리고 (이 오심을) 지각함이 가르친 이들과 더불어 어떻게 있었는지를 의미한다. 이는 “말함”의 의미가 지각함이다로부터; 그리고 “평화”의 의미가 안전함이다로부터, 고로 어떻게 이것이 그들과 더불어 있는지를; 그리고 형제들의 의미가 여기서의 경우 신앙으로부터 가르치는 이들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로부터 명백한 바, 이 말들에 의해 가르친 이들과 더불어 지각함이 어떻게 있었는지 이다. 주님의 모두 각각의 오심 또한 의미되는 이유는 요셉에 의해 신성한 영적 평면에서의 주님이 표현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가서 네 형제들의 평화를 보라고 말해질 때, 주님의 오심이 의미된다. 모두 각각의 오심에 의해서는 말씀으로부터의 진리가 생각 안으로 흘러들 때면 언제든지가 뜻해진다.

그리고 양떼의 평화. 이는 어떻게 신성한 영적인 선들이 배움을 받고 있는 이들, 또는 교회와 있었는지를 의미한다. 이는 “평화”의 의미가 그들과 더불어 그것이 어떻게 있었는지 이다로부터; 그리고 “양떼”의 의미가 배우고 있는 이들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 이유가 “목자” 또는 양떼를 먹이는 자는 선행의 선을 가르치고 그쪽으로 인도하는 자를 표시한다; 그리고 “양떼”는 배우는 자, 인도받는 자를 표시하고, 교회 또한 표시한다.

나에게 다시 말을 가져오너라. 이는 지식을 의미한다. 이는 “말을 다시 가져옴”의 의미가 사건들이 어떻게 되었나를 보고하는 것, 고로 지식이다로부터 알려진다.

그리고 그는 그를 헤브론의 골짜기로부터 보냈다. 이는 자연적이고 감각적인 신성으로부터를 의미한다. 이는 “보내어짐”의 의미가 진행되는 것과 가르치는 것이다로부터; 그리고 “골짜기”의 의미는 아래쪽에 있는 이것, 저것이다로부터; 그리고 “헤브론”의 의미가 선 측면에서의 주님의 교회이다로부터 알려진다. 고로 이 말들에 의해 교회의 보다 낮은 것을 가르쳤다가 의미된다, 그리고 이런 이유는 그들이 보다 높은 것들을 납득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선행 없이 신앙만을 가르치는 자는 교회의 보다 높은 것, 또는 내면의 것들에 주목할 수가 없다; 그가 그런 이유는 자기를 내면쪽으로 인도하는 어떤 것도 가지지 않았기 때문, 그래서 이것이든, 저것이든 자기에게 명령되는 것은 신앙으로부터만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일 그가 선행을 가르친다면, 그때 그는 선을 가진다, 그리고 선이 그에게 명령하고 인도한다; 그 이유가 모든 진리는 선으로부터 있고, 선을 취급하기 때문이다, 또는 같은 말로, 신앙의 모든 것은 선행으로부터 있고, 선행을 취급하기 때문이다. 누구나 상식적 수준에서도 아는 바는 교리의 모든 것이 (선한) 생활에 초점을 맞추어 짜여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 구절의 말에 의해 자연적이고 감각적인 신성으로부터를 의미하는 것은 보다 높은 감각이다; 그 이유가 교회의 보다 낮은 것들이 주님의 자연적이고 감각적인 신성으로부터 있다 라고 말해지기 때문이지만, 그렇다고 주님 안에서 이런 것들이 보다 낮다 라는 말은 아닌데, 그 이유는 주님 안에서, 그리고 그분의 신성한 인간 안에서 모든 것은 무한이기 때문, 마찬가지로 그분은 각 본질 측면에서도 여호와 이시다, 따라서 여기서는 인간 안에서 일 경우가 해당된다. 그 이유가 감각적인 인간은 주님 안에 있는 것, 그분으로 있는 것, 모든 것을 감각적으로만 납득이 가능할 뿐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자연적인 인간이라면 자연적으로만 만사가 납득될 뿐이다. 즉 받는 당사자의 품질 때문에 본문에서도 그렇게 의미된다. 천적 수준의 인간의 품질을 지닌 이다면, 그래서 진실로 합리적이다면, 그는 내면의 것들을 지각한다, 그리고 그들을 두고는 주님의 합리적 신성으로부터 가르쳐진다 라고 말해질 것이다. 이것은 말들에 의해 의미된 보다 높은 감각이다.
“골짜기”가 교회의 보다 낮은 것들을 뜻한다는 것은 다른 구절로부터도 분명해진다:
환상의 골짜기로부터의 예언이다. 네가 어쩌자고 지붕꼭대기까지 올라가느냐? 요동치는 날, 짓밟 힘의 날, 난감해지는 날이 환상의 골짜기에서 주 여호비 체바욷께 있다 (이. 22:1, 5);
“환상의 골짜기”는 감각적인 것으로부터, 고로 보다 낮은 것들로부터 있는 영적인 것들에 관한 몽상들을 표시한다. 다시:
네 아름다운 골짜기들은 병거들로 가득하였다, 그리고 마병들이 성문에서 정렬하였다 (이. 22:7);
“아름다운 골짜기들”은 자연적, 또는 외적 인간에 있는 선하고 참된 것들을 표시한다. 다시:
누군가의 음성이 광야에서 외치기를, 너희는 여호와의 길을 준비하라, 우리의 하느님을 위하여 작은 길을 열심히 편편하게 만들어라; 모두 각각의 골짜기가 찬양될 것이다 (이. 40:3, 4);
“골짜기”는 낮은 것들을 표시한다.
예레미야서에서:
너희는 어찌하여 나는 더럽게 하지 않았다, 나는 바알림을 따라 가지 아니했다 라고 말하느냐? 골짜기에 있는 네 길을 보아라, 네가 무엇을 했는지를 인정하라 (예. 2:23);
위의 “골짜기”는 기억 속의 것들과 감각으로부터의 것들을 표시한다. 이것들은 보다 더 낮은 것들인데, 이를 가지고 그들은 진리들을 타락시킨다. 다시:
나는 너희에 맞서 있다 오 골짜기, 그리고 평지의 반석의 거주민아, 여호와께서 말하신다; 누가 말한다, 누가 우리에 맞서 내려올 것이냐? (예. 21:13)
“골짜기와 평지의 반석의 거주민”은 선행이 안에 없는 신앙을 표시한다. 다시:
황폐케하는 자가 모든 도성에 올 것이다, 그리고 어느 도성도 피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골짜기는 멸망할 것이다; 그리고 평지는 파괴될 것이다 (예. 48:8);
이 구절도 앞 구절과 비슷한 의미를 가진다. 다시:
너는 골짜기들에서 자랑 못할 것이다; 네 골짜기는 흘러가 버렸다 오 성미가 비꼬인 딸들아 (예. 49:4);
“골짜기”는 예배에 있는 외적인 것들을 표시한다, 이것 역시 최고로 낮은 것이다.
에스겔서에서:
나는 곡에게 이스라엘에서 매장을 위한 장소를 줄 것이다, 통과하는 그들의 골짜기 (이다), 그리고 거기에 그들은 곡과 모든 그의 무리들을 묻을 것이다; 이로부터 그들은 그것을 부를 것이다, 곡의 무리들의 골짜기 (겔. 39:11, 15);
“곡”은 내적인 것 없이 외적 예배에 있는 이들을 표시한다, 이로부터 그의 매장할 장소는 “통과하는 그들의 골짜기”, 그리고 “곡의 무리들의 골짜기”라고 불리운다. 다윗서에서:
그렇다, 내가 그늘의 골짜기를 통과하여 걸을 때, 나는 어떤 악도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다
(시. 23:4);
“그늘의 골짜기”는 보다 더 낮은 것들을 표시하는데, 통상 이것들은 그늘 안에 있는 경우가 많다.
골짜기들이 산들과 언덕들 사이에 있기에, 그리고 산과 언덕 아래에 있기에, “골짜기들”은 교회의 더 낮은 것, 또는 외면의 것이 의미되는데, 그 이유는 언덕과 산이 교회의 더 높은 것, 또는 내면의 것이 의미되기 때문, 하여 “언덕”은 선행 속의 것들을, “산”은 주님을 사랑함 안에 있는 이들이다; 그리고 가나안의 토지에 의해 주님의 왕국과 그분의 교회가 의미되기에, 그러므로 그것은 “산들과 골짜기들의 토지”라고 불리운다, 즉 하늘의 비로부터 물을 마시는 (토지)라고 불리운다 (신. 11:11). 여기서 요셉이 헤브론의 골짜기로부터 보내졌다고 말해진 이유는 선교가 신앙에 관한 것을 가르친 이들에게 있었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신앙 안에 있되 선행 안에는 있지 않은 이들은 보다 낮은 것들 안에 있기 때문이다; 그들과 더불어 신앙은 기억 안에, 이로부터 입 안에만 있고, 심정 안에, 그리고 일함 안에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세겜에 왔다. 이는 일반적 교리물들에 관한 지식을 의미한다. 이는 세겜의 의미가 첫 기본 원리, 또는 교리물들에서 일반적인 것들이다로부터 분명해진다.

그리고 어떤 사람이 그를 발견했다, 그리고 보니, 그는 들판에서 방황하고 있었다. 이는 그것들은 교회의 일반적인 진리로부터 멀어져 버렸음을 의미한다. 이는 “들판에서 방황함”이 교회의 일반적인 진리로부터 멀어져 버렸음을 의미함에서 알게 된다; 그 이유가 “들판”이 선 측면에서의 교회이기 때문, 그리고 “들판의 사람”이 교리물들로부터 있는 생활의 선 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말해진 “사람(남자, vir)”은 교회의 진리가 의미된다. 주님을 인정은 하나 그분의 인간을 신성으로 인정하지는 않는 것, 또한 신앙을 교회의 필수 요소로서 인정은 하나 선행을 필수 요소로 인정은 하지 않는 것이 교회의 일반적 진리로부터 멀어져 버렸다고 말해진다. 사실 이 두 필수 요소, 즉 주님의 인간이 신성임, 선행이야말로 교회의 핵심 진리, 즉 일반적 진리(포괄적 진리, 또는 모든 교리를 아우르는 진리)이다; 다시 말해 (기독 종교의 어느 교파라고 자칭하든 그들이 내세운) 진리가 위 두 진리로부터 퇴각할 때, 이는 핵심 진리로부터 멀어져버리고 만다는 말이다. (이러면 그 기독 종교는 진정한 기독 종교(True Christian Religion)가 아니게 된다.) 이를 행하는 자는 누구이든 그는 이내 특수적인 진리들로부터도 멀어지고 만다. 예를 들면, 누군가가 기발난 착상을 해서 출생된 거짓 원리로부터 출발해서, 그 원리로부터 연역하여 결말(중요한 것, 핵심)을 갖게되면, 이것 역시 거짓 원리로부터인 바, 거짓임이 틀림 없다는 말이다. 그러나 거짓 원리는 이 세상에서 이런 식으로 하여 세력을 확장해간다.

그리고 그 사람이 그에게 물었다, 너는 무엇을 찾고 있느냐? 이는 예견을 의미한다.
이는 이 시리즈가 예견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말했다, 나는 내 형제들을 찾고 있습니다, 청컨대 그들이 어디서 양떼를 먹이는지 말해주십시오. 이는 어떻게 이런 경우가 있었는지에 관한 지식, 그리고 그들이 어떤 상태에 있었는지에 관한 지식을 의미한다; 대략적으로, 단어들에 따르면, 일반적 진리(핵심 진리)가 신앙으로부터 가르친 이들과 더불어서 어떻게 있었는지, 그리하여 그들의 상태는 어떠했는지를 배우는 것이다; 그 이유가 “형제들”에 의해 신앙으로부터 가르친 이들이 의미되기 때문; (일반적 진리가) 가르친 이들과 더불어 어떻게 있었는지는 “그들을 찾고 있음”, 또는 “그들의 평화를 보려함”에 의해 의미되고 있다; “어디서”에 의해서는 상태가 의미된다, 그 이유가 내적 의미에서 (천국에서) 장소에 관련되는 모든 것은 상태를 표시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먹이는 이들”은 가르치는 이들이 의미된다.

그들은 여기에서 떠났다, 그 이유가 나는 그들이 도단으로 가자 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기 때문이다. 이는 그들은 일반적인 교리(핵심 교리)로부터 특수한 어떤 교리로 자신들을 향하게 했음을 의미한다. 이는 “떠나다”의 의미가 자신들을 어디로 향하게 하다 이다로부터; 그들이 떠난 장소인 “세겜으로부터”의 의미가 교리의 일반적 사항 (핵심 사항)이다로부터; “도단”의 의미가 교리의 특수적 사항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도단”이 이런 의미를 가지는 이유를 말씀의 다른 구절로부터 확증하기는 힘들 것 같다; 그 이유는 도단이 언급되는 구절이 한 군데밖에 없기 때문이다 (왕하 6:13); 즉 시리아왕이 엘리사를 잡으려 도단으로 병거와 마병과 큰 군대를 보냈는데, 오히려 엘리사에 의해 군대들의 눈이 멀어 사마리아까지 이끌려와서 결국 자기 나라로 허겁지겁 도망하고 마는 역사에만 등장했을 뿐이기 때문이다.
말씀의 모든 역사물들은 주님의 왕국의 천적, 영적 평면의 모든 것들을 표현하는 바, 위 엘리사의 기적 사건도 예외는 아니다. 시리아 왕에 의해 진리에 관한 지식 안에 있는 이들이 표현되었다; 여기서는 반대적 의미인바, 진리 아닌 것에 관한 지식 안에 있는 이들이 표현되었다; 엘리사에 의해서는 주님의 말씀이 표현되었다; 도단에 의하여는 말씀으로부터의 교리물들이 표현되었다; 시리아 왕이 보낸 병거와 마병과 큰 군대는 교리의 거짓들을 표현했다; 엘리사의 사환이 본 엘리사를 에워싼 산에 불병거와 말들이 가득함은 말씀으로부터 있는 교리 속의 선하고 진정한 것들을 의미했다; 눈이 멀므로 해서 처부숨을 당해 시리아왕에게 되돌려 보내진 이들에 의해서는 거짓들 자체가 의미되었다; 그리고 그들이 엘리사에 의해 사마리아로 이끌려지고, 거기서 그들의 눈이 열려짐에 의해서는 말씀을 수단으로 가르침이 의미된다. 이상의 설명은 이 기적 사건에 대한 것인데, 이 사건 안에, 엘리사가 있었던 도단은 말씀으로부터 있는 선하고 진정한 것에 관한 교리적인 것들이 의미된다. 본문의 도단 역시 이 의미와 거의 같아서, 교리의 특수적인 것들밖에 더 다른 의미는 없다; 그러나 여기서의 특수적인 교리란 거짓 원리들로부터의 특수적인 교리를 말한다, 그 이유는 취급되는 주제가 신앙으로부터 시작하는 교회이기 때문, 이 교회의 특징은 교회의 시작 당시, 출발 당시, 애당초, 선행으로부터 분리되고 있다는 점이다. 형성되는 모든 교리물들에 풍미를 주는 것이 일반적 원리인데, 선행 없는 신앙이 이 교회에 (특별한) 맛을 내고 있다.
사실 모든 교회가 시작에서는 대체로 교리 속의 일반적 사항만 알고 출발한다. 다시 말해 지극히 단순함에서 출발하는데, 어린 아이 같다; 그러나 시간의 과정에서, 특별 사항들이 보태져 간다; 이 특별 사항은 부분적으로는 일반적 원리를 확증하는 사항일 수 있고, 어떤 사항은 일반적 원리에 반대는 아니지만 어느 정도는 상반되는 원리가 추가되기도 한다; 또한 명백히 일반 원리에 반대되는 특별 사항들을 추가하면서 이것이 일반 원리와 충돌하지 않도록 설명(변명, excuse)을 위한 사항이 겹친다. 어쨌든 이런 모든 것들이 거짓 원리로부터의 특별한 것들이다; 한 아버지로 일반적 원리를 인식하는 모든 교리 속의 모든 것들은 서로서로가 동료, 친구, 동아리임의 관계에 있는데 마치 혈연이나 결혼을 통한 인척 관계 같이 끈끈하게 있다. 이로부터 분명해지는 것은, 일반적 원리가 거짓일 때, 모든 것들은 거짓으로 맛을 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요셉은 그의 형제들의 뒤를 따라갔다, 그리고 그들을 도단에서 찾았다. 이는 그들은 거짓 원리들로부터의 특이한 것들 안에 있었음을 의미한다. 이는 요셉의 표현함이 신성한 진리 측면에서의 주님이시다로부터; “그의 형제”의 표현함이 선행으로부터 신앙으로 돌아서버린 교회, 결국에는 분리되어 신앙만 있는 교회이다로부터; 그리고 “도단”의 의미가 거짓 원리로부터의 특별한 것들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거짓 원리들로부터의 특수적인 것들에 관하여를 알기 위해 그것들의 몇 가지만이라도 예로 삼아 살피는 것이 나을지 모른다. 즉 원리로서 신앙만을 인정하는 교회의 교리물들은 이렇다. 신앙만으로 인간은 의롭다해짐을 받는다는 것, 따라서 신앙만으로 그의 모든 죄는 씻어진다는 것, 설사 그가 죽기 몇 분전 일지라도 믿습니다 라는 고백만으로도 당사자의 구원은 가능하다는 것, 구원은 은총을 통하여 천국 안으로 입장을 허가받는 것이다는 것, 또한 아이들은 신앙에 의해 구원될 수 있다는 것, 이방인들은 신앙이 없기 때문에 구원되지 못한다는 것; 이 외에 더 있으나 생략한다. 이런 것들이 신앙만으로 라는 원리를 지주로 하여 갈라져나온 특수적인 것들이다. 그러나 만일 교회가 신앙의 생활을 원리로서 인정한다면, 이웃을 향한 선행과 주님을 사랑함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결과적으로 선행과 사랑의 일들을 인정해야 한다는 말이다, 이러면 앞에 열거한 신앙만으로에서 출발한 특수적인 것들은 산산조각되어 지고 말 것이다. 즉 의롭다 되어짐이라는 말 대신 거듭남을 인정한다, 하여 주님께서 “너희가 새로이 출생되지 않으면, 그는 하느님의 왕국을 볼 수 없다”(요. 3:3)라는 말씀을 중요시한다는 말이다; 그러면 그는 거듭남이 신앙의 생활에 의해 결과된다는 것, 분리된 신앙에 의해서가 아님을 인정한다. 더불어 자신의 모든 죄들이 나로부터 씻어져 없어져 깨끗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자비 덕분에 나로부터 나의 죄를 멀리 있게 억눌러주신다는 것, 그리하여 상대적으로 선 안에, 이 선으로부터 진리 안에도 있게 해주신다는 것; 고로 모든 선은 주님으로부터 이다는 것, 모든 악은 자신으로부터 이다는 것도 인정한다. 단 한 번의 “믿습니다”라는 고백으로 구원이 가능해지는 것이 아니라, 고백 이후 꾸준한 신앙으로부터의 생활에 의해 내 안에 쌓여진 신앙에 의해서 이다는 것; 구원은 은총을 통하여 천국 안으로의 입장 허가증을 받듯 하는 것이 아니다는 것, 그 이유가 천국은 주님에 의해 누구에게나 열려져 있으나, 그가 천사가 될 수 있는 생명의 본질을 갖추지 않으면, 그가 자신의 의지로 천국으로부터 달아나는 것이다. 어린 아이가 신앙에 의해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삶에서 그들은 주님에 의해 선행의 선과 신앙의 진리를 배운다는 것, 그렇게 해서 천국으로 받아진다는 것이다. 이방인들이 신앙이 없기 때문에 그들이 구원되지 못한다가 아니라, 그들도 다른 이들 같이 자기들의 삶이 사후에도 남아 있고, 하여 서로의 사랑에서 살아온 이들은 신앙의 선들을 거기서 배우게 되고, 여느 기독인들이나 마찬가지로 천국 안으로 받아진다. 즉 생활의 선 안에 있는 이들이 바라고 믿는 것과 같다.
원리로서 신앙만을 인정하는 교회는 선행이 무엇인지를 알 수 없다. 이웃이 무엇인지 조차도 모른다, 고로 천국이 무엇인지도 모른다; 따라서 누가 이렇게 말하면 의아히 여길 것이다. 즉 사후 삶의 행복과 천국에서의 기쁨은 타인이 행복하기를 바라고, 타인에게 선처하는 것 안으로 흐르는 신성이다는 것, 그리고 거기로부터의 행복과 복됨은 모든 지각을 능가한다는 것, 이 유입을 받음은 신앙의 생활을 하지 않은 자에게는, 즉 선행의 선 안에 있어 오지 않았던 이들에게는 주어질 수 없다는 것을 들었을 때이다. 신앙의 생활이 구원한다는 것을 주님께서 마태복음 25장 31부터 끝절에 이르러 분명하게 가르치신다; 이외 많은 구절이 있다; 그러므로 아타나시안 신조라고 불리우는 신조(신경)도 끝 부분에서 이렇게 가르치고 있다; 즉 “모든 이는 그의 일들의 결과로 보답받을 것이다; 선하게 산 자는 영원한 생명으로 들어갈 것이고, 악하게 산 자는 영원한 불로 들어갈 것이다.”

18-22절. 그리고 그들은 멀리 저쪽에 있는 그를 보았다, 그리고 그가 그들에게 가까이 오기 전, 그들은 그를 죽이자고 음모를 꾸몄다. 19 그리고 그들은 남자 그의 형제에게 말했다, 보라 꿈의 주인이 온다. 20 그러므로 지금 오고 있으니 그를 죽여서 구덩이에 던지자, 그리고 우리는 말할 것이다, 악한 들짐승이 그를 삼켰다. 그리고 우리는 그의 꿈이 무엇일지를 보게 되리라. 21 그리고 르우벤이 들었다, 그리고 그를 그들의 손에서 구출하려고 말했다, 그를, 그 혼을 치지는 말자. 22 그리고 르우벤은 그들에게 말했다, 피를 흘리게 하지 말자. 그를 광야에 있는 이 구덩이에 던지자. 그러나 그에게 손을 대지 말자. 이는 그가 그들의 손에서 그를 구출해서, 그의 아버지에게로 되돌려 보내려 해서 였다.

그리고 그들은 멀리 저쪽에 있는 그를 보았다. 이는 주님의 신성한 인간을 아주 다르게 지각함을 의미한다. 이는 “보다”의 의미가 지각함이다로부터; “멀리 저쪽”의 의미가 아주 다르게(remotely) 이다로부터; 멀리 있는 것이 요셉이었는데, 요셉의 표현함이 신성한 진리 측면의 주님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여기서 “요셉”에 의해 주님의 신성한 인간이 뜻해진 이유는 이것이 신성한 진리의 최고 원리이기 때문이다. 교회를 구성하는 두 핵심 원리 (일반 원리, 제 일의 두 원리)는 주님의 인간이 신성이시다는 것, 그리고 주님을 사랑함과 이웃을 향한 선행이 교회를 만든다는 것, 그리고 사랑과 선행으로부터 분리된 신앙은 아니다는 것이다. 이것들이 신성한 진리의 제 일 가는 것들이기에 이것이 요셉에 의해 표현되어지고 있다; 그 이유는 일반적 측면에서 신성한 진리를 표현하는 같은 인물이 신성한 진리의 특별한 것도 표현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특별하게 표현한 것은 시리즈로부터 분명해진다.

그리고 그가 그들에게 가까이 오기 전, 그들은 그를 죽이자고 음모를 꾸몄다. 이는 그들은 주님의 신성한 인간으로부터 있는 신성한 영적 평면이 소멸되기를 원함을 의미한다. 이는 “음모함”이 타락된 마음으로부터 뜻하는 것이다로부터; “죽이자”의 의미는 소멸함이다로부터; 그리고 “요셉”의 표현함이 신성한 영적 평면, 또는 신성한 진리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신성한 진리는 주님의 신성한 인간으로부터 진행되기 때문에, 신성한 평면은 주님의 신성한 인간으로부터 이다고 말해진다.
여기서의 경우는 이렇다: 천국 전체를 망나해 있는 신성한 진리는 주님의 신성한 인간 외의 다른 근원으로부터서는 진행되지 않는다. 신성 자체로부터 있는 것은 어떤 천사에게도 직접적으로 흐를 수 없는 이유는 신성 자체가 무한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님의 신성한 인간을 통하여 간접적으로만 흐를 뿐이다. 이 사항이 주님의 이 말씀에 의해 뜻해진다: 즉 “여하튼 하느님을 본 자는 없다; 독생자, 아버지의 품 안에 있는 자, 그분이 그분임을 분명히 하셨다(set forth, declared).” 이런 이유로 신성한 인간 측면에서의 주님이 중보자(중재자, Mediator)라고도 불리우신다.
이 분 역시 영원으로부터 있으셨고, 신성한 있으심이기에, 천국을 통하여, 천국에서 신성이 밖으로 나타나심 없이 어떤 천사와도, 어떤 영과도, 어떤 인간과도 교통될 수 없었다. 신성 자체 측면에서의 주님이 신성한 있음이고, 신성한 인간 측면에서의 주님은 신성의 밖으로 나타나심이다에 대하여는 앞에서 살핀 것을 참조하기 바란다. 주님 안에서 그분의 인간이 신성으로 만들어지지 않으면, 주님의 인간 자체는 신성한 있음으로부터 어떤 유입도 받을 수 없었다; 그 이유가 신성을 받는 것은 반드시 신성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알게 되는 바, 신성한 진리는 신성 자체로부터 직접 진행되지 않고, 주님의 신성한 인간으로부터 진행된다는 것이다.
이 사항을 신앙의 생활을 하지 않고, 신앙만을 위해 끝까지 싸우는 이들은 자신 안에서 소멸해버린다; 그 이유가 그들은 주님의 인간이 여느 평범한 인간, 자기와 별반 다르지 않는 인간으로 믿기 때문이다; 비록 입술로 주님을 고백하지만 이로 인해 그들은 주님의 신성을 많은 사항들로부터 부정하는 결과를 야기한다. 그러나 신앙의 생활을 실현해가는 이들은 구세주 하느님으로서의 주님에게 무릎을 꿇고 경배하고, 신성 본질과 인간 본질을 교리에서 따로 구분하지 않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들은 성찬에서도 그렇게 행한다. 이리하여 그들과 더불어서는 주님의 신성한 인간이 그들의 심정 안에 계신다.

그들은 남자 그의 형제에게 말했다. 이는 그들의 서로의 생각들을 의미한다. 이는 “말하다”가 지각하다와 생각하다를 의미함으로부터; 그리고 “남자 그의 형제에게, man to his brother”의 의미가 서로적으로 (mutually)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고대인들이 서로적인 것을 의미할 때 쓴 관습적 말이 본문에 등장하고 있다; 즉 “남자 그의 형제에게” 이다; 이런 관습적 표현이 사용된 이유는 “남자(man, vir)”가 진리를 의미하고, “형제”가 선을 의미하고, 이 둘 사이에는 최고로 친밀한 서로의 관계가 사이에 끼어 있기 때문이다; 또한 진리와 선, 그리고 선과 진리의 결합은 서로적으로, 상호적으로 거행되기 때문이다.

보라 꿈의 주인이 온다. 이는 이런 것들은 텅비었음을 의미한다. 이는 “꿈”이 설교함을 의미한다로부터, 여기서는 신성한 진리에 관하여 설교함이다, 그 이유는 이것이 요셉에 관하여서 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본질적 측면에 관련되는 신성한 진리는 신앙만에 있는 이들에 의해 거절되어진다, 그러므로 여기서의 “꿈”은 텅빈 것들이 의미된다; 그 이유가 이런 인물들에게 거짓들은 진리들로, 진리들은 거짓들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만일 거짓들로서가 아니다면, 텅빈 것들로서 이다; 그리고 “꿈의 주인”은 이에 대한 설교자이다. 신성한 진리가 이런 인물들에게 텅빈 것들로 나타나는 것은 많은 것들에서 분명해진다; 예를 들면, 말씀은 거룩하다, 하여 말씀의 점 하나도 신성한 영감이 들어 있다, 이렇게 말씀이 신성하고 거룩한 이유는 말씀 안에 주님의 왕국의 천적이고 영적인 사항들이 표현되고 의미되어 있기 때문이다는 것, 이런 사항들이야말로 신성한 진리이다고 입을 모은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즉 말씀이 내적 의미에서 열려질 때, 그리고 말씀의 세부 사항들이 표현하고 의미하는 것을 배우게 될 때, 신앙만에 있는 이들은 이런 것들이 텅빈 것, 즉 무슨 쓸모가 있느냐고 말하며 거절한다; 비록 이런 천적이고 영적인 사항들이야말로 외적 인간이 세상적, 물질적인 것으로 흠뻑 만족하는 수준의 기뻐함보다 훨씬 더 위대한 기쁨을 내적 인간에게 선물하는데도 그렇다는 말이다.

지금 오고 있으니 그를 죽이자. 이는 교리의 본질인 주님의 신성한 인간에 관한 사항이 소멸됨을 의미한다. 이는 “죽이다”가 소멸시키다를 의미함으로부터; 그리고 그들이 죽이기를 원했던 자, 요셉의 표현함이 주님의 신성한 진리, 특별하게는 주님의 신성한 인간에 관한 교리이다로부터, 이는 교리의 본질임에 관하여는 앞에 살폈다. 신앙만을 인정하는 교회가 이 본질되는 진리를 소멸시켰다는 것은 알려진 바이다; 그 이유가 그들 속의 어느 것이 주님의 신성한 인간을 신성이다고 믿는 것일까? 그들은 자기들의 주장 자체로부터 돌아서지 못하는가? 그럼에도 고대 교회에서 세상에 오시기로 되신 주님이 신성한 사람이시다는 것이 믿어졌고, 그분이 여호와라고 불리셨다는 것이 많은 말씀의 구절들에서 보여지지만, 여기서는 한 대목만 살펴보겠다:
광야에서 소리치는 자의 음성이 있다, 너희는 여호와의 길을 준비하라, 우리 하느님을 위하여 작은 길을 평평하게 하라 (이. 40:3).
위 구절이 주님에 관하여 말해진다는 것, 그리고 세례자 요한에 의해 이 길이 준비되고, 작은 길이 그분을 위해 편편해졌다는 것은 복음서로부터 분명해진다 (마. 3:3; 막. 1:3; 눅. 3:4; 요. 1:23); 더 나아가 주님 자신의 말씀으로부터도 있다; 즉 그분은 아버지와 더불어 하나이시다는 것, 그리고 아버지는 그분 안에, 그분은 아버지 안에 있다는 것; 또한 그분에게 하늘과 땅의 권능이 주어졌다는 것, 그리고 심판은 그분에 속한다는 것 등등이다. 하늘과 땅의 권능, 심판에 관하여 조금만 아는 자라 해도 그분이 인간 측면 역시 신성이시지 않으면 이런 것들이 그분에게 있어질 수 없다는 정도를 모를리 없다.
신앙만으로 안에 있는 이들은 인간을 새로이 만드는 것, 또는 그를 정화하는 것, 더욱이 주님의 인간을 신성으로 만드시는 것을 알 수 없다; 그 이유는 그들이 사랑과 선행에 관해 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향한 선행이 인간을 새로이 만들고 정화한다는 것, 한편 신성한 사랑 자체가 주님을 신성으로 만든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사랑이 인간의 있음 자체, 그러므로 그의 생활이다. 그리고 사랑은 인간을 사랑 자체의 형상에 따라 모양을 만들어 낸다; 즉 사랑은 인간의 혼 같은 것, 그의 내면의 본질이어서 이것이 그 자체의 형상쪽으로 육체를 창조하고 모양있게 만드는 것과 같다. 이런 방식에서 사랑은 그것이 뜻하고 생각하는 것과 같게 육체를 수단으로 행동하고 감각작용을 가진다. 고로 육체는 결과로서 있고; 혼은 안에 목적이 있는 원인으로서 있다; 결과적으로 혼은 육체의 모든 것, 마치 목적으로부터의 원인이 결과에 있는 모든 것인 것과 같다. 혼이 여호와 자신이었던 그분의 인간은 신성으로밖에 더 달리 신성이 되실 수 없으셨다. 그러므로 주님의 인간을 신성으로 만드신 이후 그분의 인간을 여느 인간의 인간 같이 여기는 것은 얼마나 큰 실수인지 모른다. 그분의 신성한 인간으로부터 천국에 있는 모든 지혜가, 모든 총명이, 또한 모든 빛이 진행된다. 그분으로부터 진행하는 것은 무엇이든 거룩하다; 그리고 신성으로부터 이지 않은 거룩함은 거룩함이 아니다.

그리고 그를 구덩이 중 하나에 던지자. 이는 거짓들 사이에를 의미한다. 이는 “구덩이”의 의미가 거짓들이다로부터 분명해진다. “구덩이들”이 거짓들인 이유는 거짓의 원리들 안에 있어 왔던 이들이 사후 더 낮은 땅 아래 한동안 보관되면서 거짓들이 그들로부터 제거되어 마치 한쪽으로 거절되어 있는 듯 할 때까지 있기 때문이다. 이 장소들이 “구덩이들”이라 불리우고, 그것들 안으로 가는 자는 반드시 황폐됨 안에 있어야 한다. 이런 이유 때문에 “구덩이들”은 추상적 의미에서 거짓들이 의미된다. 보다 더 낮은 땅은 발 아래 다음이고 짧은 거리에서 빙둘러 있는 구역이다. 여기에 사후 천국으로 들리우기 이전, 대부분의 인물들이 있다. 이 땅 또한 말씀에서 자주 언급된다. 이것 아래쪽에 황폐함의 장소들이 있다, 이것이 “구덩이”라 불리운다, 그리고 그것들 아래 적당한 넓이에서 지옥들이 있다.
이로부터 “지옥”에 의해 뜻해지는 것, “더 낮은 땅”에 의해 뜻해지는 것, 그리고 “구덩이”에 의해 뜻해지는 것이 분명해질 것이고 말씀에서 언급되는 구절을 읽어보자:
너는 지옥으로, 구덩이의 측면으로 아래로 데려가졌었다. 너는 네 무덤 밖으로 내던져졌는데, 마치 역겨운 어린 가지, 검으로 찔리워 살해당한 자들의 의복 같고, 구덩이의 돌들에로 아래로 내려간다 (이. 14:15, 19);
위는 바빌론의 왕에 관해서 말했다, 이 왕에 의해 진리를 모독함이 표현되었다; 그 이유가 “왕”이 진리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빌론”은 모독이다. “지옥”은 저주받은 자가 있는 곳, 그리고 그들의 저주됨이 역겨운 어린 가지에, 그리고 검에 찔리워 살해당한 자들의 의복에, 구덩이의 돌에로 아래로 간 것에 비교된다. “살해당한 자의 의복”은 진리가 모독됨이다; “검으로 찔리움”은 자기 안에서 진리가 꺼져버린 이들이다; “구덩이”는 황폐함이 반드시 있어야 하는 거짓이다. “돌들”은 테두리들, 그러므로 그것들은 “측면들”이라 불리우는데, 그 이유는 구덩이가 빙둘러 있는 곳이 지옥들이기 때문이다. 이상 살핀 바로부터 짐작되는 것은 위 구절이 내적 의미를 알지 못하면, 이 구절이 뜻하는 것을 아는 것이 불가능해짐이다.
구덩이가 등장하는 위와 비슷한 구절이 에스겔서에도 있다:
내가 구덩이로 내려가는 그들과 더불어 너를 아래로, 시대의 백성에게로 데려갈 때, 그리고 너를 시대로부터 황무함에 있는, 더 낮은 구역의 땅에서 거주하게 만들 것이고, 하여 너는 구덩이로 내려간 그들과 거주하지 못할 것이다; 그 다음 나는 산 사람의 토지에서 꾸밈을 놓을 것이다 (겔. 26:20);
“구덩이로 내려 간 그들”은 황폐함쪽으로 보내진 이들을 표시한다; “구덩이 안으로 간 그들과 거주하지 않음”은 거짓들로부터 배달되어지는 것을 뜻한다.
다시:
물들로부터의 모든 나무들의 어느 것도 자기의 키 때문에 자신을 뽐내지 못할 것이고, 자기의 가지를 뒤엉킨 굵은 가지 사이로 보내지 못하고, 자기의 높음 때문에 물들을 마시는 모든 자들, 그들 너머에 서지 못한다; 그들 모두는 죽음쪽으로, 인간들의 아들들 한가운데에 있는 더 낮은 땅으로, 구덩이 안으로 내려가는 그들에게 배달될 것이다. 나는 민족들을 그의 황폐하는 소리에서 흔들게 만들 것이다, 이때 나는 그를 구덩이로 내려가는 그들과 더불어 지옥 안으로 내려가게 만들 것이다; 그리고 에덴의 모든 나무들, 레바논의 아름답고 제일 가는 것, 물들을 마시는 모든 것이 더 낮은 땅에서 위로될 것이다 (겔. 31:14, 16);
위는 이집트에 관해서 이다, 이를 수단으로 지식 자체로부터 신앙의 신비함들 안으로 들어가는 것, 즉 그렇게 들어간 이들이 의미된다. 앞에서 말해진 바로부터 이 구절의 의미도 짐작될 것이다; 즉 여기서 예언자에 의해 언급된 것인 “지옥”에 의해, “구덩이”에 의해, 그리고 “더 낮은 땅”에 의해 의미된 것이 분명해져 있을 것이다. 위의 구절에 있는 “물들의 나무들”, “에덴의 나무들”, “뒤엉킨 굵은 가지들 사이로 보내진 가지”, “레바논의 아름답고 제 일 가는 것”, 그리고 “물들을 마시는 모든 것”에 의해 의미되는 것은 내적 의미로부터가 아니면 파악되지 않는다.
다시:
사람의 아들아, 이집트의 무리를 위해 소리내어 울어라, 그리고 그녀로 내려가게 하라, 그녀조차도, 그리고 당당한 민족들의 딸들, 더 낮은 지역의 땅으로, 구덩이 안으로 내려 간 그들과 더불어, 앗수르가 거기 있다, 이들의 무덤들이 구덩이의 측면들에 놓여 있다, 검으로 살해된 모두
(겔. 32:18, 22, 23);
위 구절의 의미는 앞의 구절의 설명에서 알려질지 모른다. 다윗서에서:
오 여호와여, 당신은 지옥으로부터 제 혼을 데려왔습니다; 당신은 저를 구덩이로 내려간 그들 사이로부터 살아있게 보존하셨습니다 (시. 30:3).
다시:
저는 구덩이로 내려간 그들과 더불어 세어졌습니다; 저는 힘이 없는 사람으로 세어졌습니다. 당신은 저를 더 낮은 구역에, 어둠에, 깊음에 놓으셨습니다 (시. 88:4, 6).
요나서에서:
나는 산들의 베어내짐 아래로 갔습니다; 땅의 빗장들이 제 위에 영원히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당신은 구덩이로부터 제 목숨을 꺼내왔습니다 (욘. 2:6);
위에서 취급된 주제는 주님이 겪으신 시험들, 그것들로부터 해방됨이다. “산들의 베어내짐”은 최고로 저주된 이들이 있는 곳, 그것들 빙둘러 나타난 어두운 구름들은 “산들”이다.
“구덩이”는 거짓의 황폐함이고, 추상적 의미에서 거짓인데, 아래 이사야서에서:
그들은 구덩이에 묶임 같이 정녕 모아질 것이다, 그리고 감옥에서 잠금당해 있을 것이다; 날들이 많은 후에 그들은 방문받을 것이다 (이. 24:22).
다시:
궁핍함을 일으킨 자의 분노는 어디 있느냐? 전방으로 인도하던 자가 급하게 열 것이다; 그리고 그는 구덩이에서 죽지 않을 것이다, 빵이 떨어지지 않을 것이다 (이. 51:13, 14).
에스겔서에서:
보라 나는 네 위에 낯선 자들을 데려올 것이다, 민족들의 광폭, 그가 네 지혜 위에 검을 빼어들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너의 빛남을 모독할 것이다. 그들은 너를 구덩이로 내려다 놓을 것이다. 그리고 너는 바다들의 심장에서 찔려진 그들의 죽음들을 죽을 것이다 (겔. 28:7, 8);
위는 두로의 제 일인 자에 관해서이다, 이들로 해서 거짓의 원리들에 있는 이들이 의미된다.
스가랴서에서:
크게 기뻐하라 오 시온의 딸아; 소리내라, 오 예루살렘의 딸아; 보라 왕이 네게로 오신다; 그분은 공정하시고, 가엾으시고, 그리고 나귀를 타신다, 그리고 암나귀의 망아지 위에. 네 언약의 피를 수단으로 나는 너의 묶인 자를 물이 없는 구덩이로부터 파견할 것이다 (슥. 9:9, 11);
위에서 “물이 없는 구덩이”란 진리가 전혀 없는 거짓을 표시한다; 이어지는 본문에서, 요셉을 물이 없는 구덩이에 던졌다와 같다 (24절). 다윗서에서:
당신에게 저는 소리칠 것입니다 오 여호와여, 저의 반석이신 당신은 제게 잠잠하지 마소서, 그렇지 않고 당신이 제게 잠잠해 있으신다면, 저는 구덩이로 내려가는 그들 같이 보여집니다 (시. 28:1).
다시:
여호와께서는 황폐함의 구덩이로부터, 진흙 수렁으로부터 나를 꺼내 올리셨다; 그리고 그분은 내 발을 반석 위에 놓으셨다 (시. 69:15).
다시:
그분은 그분의 검을 보내셨다, 그리고 그들을 치료했다, 그리고 그들의 구덩이들로부터 그들을 구조하셨다 (시. 107:20);
“그들의 구덩이들로부터”란 거짓들을 표시한다. 다시:
서둘러, 저에게 대답해주소서, 오 여호와여; 제 영이 소진되어집니다, 당신의 얼굴을 나로부터 숨기지 마소서, 그렇지 않으면 저는 구덩이로 내려가는 그들 같을 것입니다 (시. 143:7).
“구덩이”는 거짓을 의미하고, “소경”은 거짓들 안에 있는 이들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말하신다; “그들을 내버려 두어라, 그들은 소경의 소경 인도자들이다. 만일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면, 모두 구덩이에 빠질 것이다” (마. 15:14; 눅. 6:39). 요셉에 의해 표현된 것과 비슷한 것이 예언자 예레미야에 의해 표현되었다, 즉:
그들은 예레미야를 데려갔다, 그리고 그를 경비원의 뜰에 있는 구덩이 안으로 그를 던졌다; 그리고 그들을 끈을 가지고 예레미야를 아래로, 물이 없는 구덩이 안으로 내려가게 했다 (예. 38:6);
즉, 그들은 진리가 하나도 없는 거짓들 사이에서 신성한 진리들을 거절했다.

그리고 우리는 악한 들짐승이 그를 삼켰다고 말할 것이다. 이는 탐욕의 삶으로부터의 거짓말을 의미한다. 이는 “들짐승”이 애착과 탐욕을 의미함으로부터; 그 이유가 “들짐승”이 진짜 의미에서 살아있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악한 들짐승”은 여기서 탐욕들의 생활이 의미된다; 이것이 거짓말인 것은 분명하다. 이는 앞에서 살핀 것과도 관련이 있다; 즉 거짓들 사이에서 신성한 진리는 탐욕의 생활로부터서는 거짓말에 불과하여 (즉 탐욕의 삶 안에 있는 자의 견해에서는 신성한 진리가 거짓말이므로) 그들이 거절한다는 것이다. 거짓의 근원은 세 가지가 있다; 하나는 교회의 교리, 또 하나는 감각들의 오류, 또하나는 탐욕의 삶이다. 교회의 교리로부터의 거짓은 대체로 인간의 지적 부분만에 달라붙어 있다. 이 거짓은 당사자의 유아 시절로부터 이것이 이렇다 하는 것을 권유받고 있다가 나중에 어떤 확증물을 통해 그 거짓을 견고하게 한다. 감각의 오류로부터 있게 되는 거짓 안에 있는 이들은 이해력으로부터의 통찰력은 거의 없는 편이다, 그 이유는 그들은 수준 낮고 감각적인 것들로부터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탐욕의 삶으로부터 있는 거짓은 의지 자체로부터, 같은 말로 심정으로부터 튀어나온다 (솟구친다); 그 이유가 인간이 심정으로부터 뜻하는 것이야말로 그의 바라는 것, 즉 그의 소원 사항이라 말해도 되기 때문이다. 이 거짓은 셋 중에서 가장 지독하다, 그 이유는 그것은 본래부터 타고나기(inhere) 때문, 따라서 주님으로부터 새 생명으로 새 삶 (완전 거듭남, 완전 새 삶, 과거의 삶과 완전 다른 삶, 새 술이 새 부대에 담긴 것, 새 옷에 어떤 헌 옷이 깁어지지 않은 것, 요즈음의 스위든볼지언에게 요구되는 삶일지 모른다 역자 주.)이 아니면 그 뿌리는 뽑혀나가지 않기 때문이다.
널리 알고 있는 것, 즉 인간에게는 두 능력이 있다는 것, 그것은 이해력과 의지력이다. 이해력이 흡수하거나 빨아들이는 것들은 의지 안으로 자동적으로 건너가지지 못한다; 그러나 의지가 흡수하는 것은 이해력 안으로 어렵지 않게 건너간다. 그 이유는 인간이 뜻하는 것은 무엇이든, 그가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만일 그가 탐욕으로부터 악을 생각한다면, 그는 그 악을 생각하고 그 악을 확증한다. 생각함을 수단으로 악을 확증함이 탐욕들의 생활로부터의 거짓들이라 불리우는 것이다. 이 거짓들은 당사자에게는 진리들로 나타난다; 그리고 그가 자신 안에서 그것들을 확증했을 때, 진리들은 그에게 거짓들로 나타난다; 그 이유가 이때 그는 빛의 유입을 차단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일 그가 자신 안에서 이런 거짓들을 확증하지 않았다면, 그의 이해력이 이전에 빨아드렸던 진리들이 이 거짓들에 저항하고 그것들이 확증되어지는 것을 허용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의 꿈들이 무엇일지를 볼 것이다. 이는 그것에 관한 설교가 거짓일 것과, 그렇게 나타날 것임을 의미한다. 이는 “꿈”의 의미가 설교함이다로부터; 그리고 그들의 눈에서 이런 것들이 거짓으로 나타났기에, 그러므로 “꿈”에 의해 여기서는 신성한 진리에 관한, 특히 주님의 신성한 인간에 관한 설교가 의미되는데, 이것이 그들의 견해에서는 거짓이었다. 이것이 그들의 말, “그의 꿈들이 무엇일지를 볼 것이다”에 의해 의미되어 있다. 주님의 신성한 설교에 관한 설교들이 나타났다는 것, 더욱이 그들에게 거짓으로 나타났다는 것에 대하여는 방금 앞에서 살폈다; 그 이유가 탐욕의 생활로부터 확증한 것은 다른 나타남을 가지고 있지 않다.
거짓들이 탐욕의 생활로부터 확증된 것은 이런 원인으로부터도 있는다; 즉 그들은 천국이 무엇인지를, 지옥이 무엇인지를, 이웃을 향한 사랑이 무엇인지를, 자기와 세상을 사랑함이 무엇인지를 모르는데에도 원인이 있다. 만일 그들이 이런 사항들을 알았다면, 또는 기꺼이 알려고 하기만 했어도 그들은 아주 다르게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오늘날 말해주는 이웃을 향한 선행의 정의가 물질이 없어 가난한 이웃에게 재물을 나누어주는 것, 그가 악하든 선하든 관계없이 그들을 돕는 것으로만 알고 있다. 이렇기 때문에 선행의 교리는 거절되고 신앙만의 것을 얼싸안는다; 더 나아가 이들은 많은 것들을 수단으로 선행에 맞서 자신을 확증한다; 예를 들면, 자신은 죄들 안에서 태어났으니 자신으로부터서는 선을 행할 수 없다는 것, 설사 자신이 선을 행한다면 결국 그 공적을 자신 안에 놓아야 한다는 식이다. 그리고 그가 한편에서 이렇게 생각하면서, 다른 한편에서는 탐욕의 생활로부터 생각한다, 하여 그는 신앙만으로 구원한다는 쪽으로 기우는 것이 득이 된다는 생각이 들어 그쪽을 향한다. 하여 그가 거기 있을 때, 그는 선행의 일이 구원받음에 불필요하다고 믿을 때까지 자신을 더욱 더 굳힌다. 이런 것들이 방출될 때 그는 이런 새로운 관념에로 빠져 있는다; 즉 인간의 본성은 이렇기 때문에, 구원의 수단은 주님에 의해 설비되었는데, 이것이 신앙이라 불리운다; 그리고 인간이 마지막 순간에 임했다 해도, 그를 위해 고통받으셨던 아들을 생각함을 통하여 하느님께서 그 사람 위에 자비를 가지신다는 신뢰, 확신을 고백하면 그때도 구원의 길은 그에게 열려있다고 말한다, 하여 요한복음(1:12, 13)에서, 그 외 많은 장소에서 말하신 대목으로 부터서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는다. 이런 추론으로 신앙만이 교회에 필수인 것으로 인정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모든 곳에서 이 방식에서 인정되지 않는 이유는 교구 목사가 신앙만을 설교함으로 어떤 것을 얻을 수 없고, 오직 일들에 관한 설교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웃을 향한 선행의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지가 알려져 있었다면 그들은 교리의 거짓 안으로 결코 추락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선행의 기본은 자신의 의무, 직장, 직업 등의 모든 것에서 올바르고 공정하게 행동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악행자를 법에 따라 재판하는 판사가 열정으로부터 이를 행하는 것, 그는 악행이 수정되기를, 그의 선을 기대하면서 재판을 한다. 또한 사회와 나라에 유용함을 기대하며 업무를 수행한다. 이것이 그에게는 일반적으로 이웃이 되어 있다. 이에 대하여는 주님의 신성한 자비로부터 별도로 살필 기회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르우벤이 들었다. 이는 일반적인 측면에서 교회의 신앙으로부터의 고백을 의미한다. 이는 르우벤의 표현함이 이해력 또는 교리에서의 신앙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는 거듭남의 첫 번째의 것이기도 하다. 사실 이는 복합체에서 교리의 진리를 수단으로 생활의 선이 달성할 수 있는 것을 말하는 바, 여기서의 경우는 그렇지 못한 바, 일반적 측면에서 교회의 신앙으로부터의 고백이 의미된다. 이 구절에서 르우벤이 중간에 끼여있는 격이 되고 있는데, 그 이유는 신앙으로부터 시작하는 교회가 이 신성한 진리, 즉 주님의 인간이 신성이시다는 진리가 그 신앙 안에 남아있지를 않으면, 교회이기를 중단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 진리야말로 교회의 핵심 원리요 최고의 진리이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르우벤은 이 진리를 표현한 요셉을 살려 그의 형제의 손에서 빼내어 아버지에게 보내기를 원했던 것이다. 따라서 이 줄거리 속에는 교회를 위해서 이 진리를 요구하기를 원했다가 담겨 있다. 더욱이 르우벤이 구덩이로 되돌아갔을 때, 요셉이 거기에 있지 않은 것을 보고 자기 옷을 찢으며 그의 형제에게 말하기를 아이가 없다, 그리고 나, 어디로 나는 가야 하는가? 라고 (29, 30절) 말했는데, 이것에 의해 더 이상 주님에 대한 신앙이 없다, 고로 교회도 없다가 의미된다.
이 최고 또는 핵심 진리, 즉 주님의 인간이 신성이시다가 신앙만에 있는 교회에 있는 이들에 의해 부정되어진다. 그럼에도 그들은 말씀으로부터 주님 안에 신성이 있다는 것을 알고는 있다, 그렇지만 어떻게 인간이 신성일 수 있는 지에 대하여는 납득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그들은 주님의 속성을 신성 본질과 인간 본질로 구분을 만들었다. 어쨌든 신앙의 생활 안에, 또는 선행 안에 있는 이들은 자기들의 하느님, 구세주로 주님을 경배한다; 그리고 경배함에서 그들은 주님의 신성과 그분의 인간을 구분함 없이 생각한다, 고로 그들은 주님에 있는 모든 것이 신성이다고 심정에서 믿는다. 그러나 그들이 교리로부터 생각할 때, 그들 역시 교리로부터서는 어떻게 인간이 신성일 수 있는지를 납득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들은 자기들의 교리에 따라서 말한다.

그리고 그를 그들의 손에서 구출하려고. 이는 해방을 의미한다. 이는 설명이 필요 없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그를, 그 혼을 치지는 말자 라고 말했다. 이는 그것은 소멸되어서는 안된다, 그 이유는 그것은 종교의 생명이기 때문이다. 이는 “치다”의 의미가 소멸해버리는 것이다로부터; 그리고 “혼”의 의미가 생명이다로부터, 여기서는 종교의 생명이다. 주님의 인간을 인정하고 경배하는 것이 종교의 생명인 것은 앞에서 말해진 바로부터 분명해진다; 또한 인간에게는 이런 속성이 있다; 즉 자기가 지각할 수 있고 생각해볼 수 있는 어떤 것을 예배하기를 바란다는 것, 이는 감각적 인간조차도 그러해서 자기의 감각으로 어느 정도라도 지각할 수 있는 어떤 것을 예배해야 예배드린 느낌을 갖는 것, 다시 말해 자기가 지각하고 생각되는 어떤 것에 신성이 있지 않으면 기꺼이 예배하지 않는 속성을 인간이 지녔다는 사실로부터도 분명해진다. 이것은 인류에게 공통적이다. (더 부연 설명을 하면, 많은 이들이 관광을 할 때 흔히 목격하는 것은 과거 대단한 종교 건축, 그것이 불상이든, 교회 예배당이든 불가사이하다 말할 정도로 규모나 방법에서나 대단한 것들을 보게 된다. 현재의 경우도 이는 예외가 아니다. 거대한 예배당, 세상에서 가장 큰 성가대, 어마어마한 헌금 액수 발표 등등을 심심찮게 듣고 목격한다. 요즈음은 인터넷 세상이라 더욱 그 광고 파장은 대단하다. 한마디로 세력 과시이기도 하다. 이런 곳에서 설교를 듣고 찬송을 불러야 뭔가 신성이 와닿은 느낌, 또는 내 기도 소원이 성취될 것 같은 기대가 용트림 한다. 다시 말해, 수천 년 전이나 지금이나 아마도 미래에도 인간이 신성을 생각하고 지각하는 각도는 변치 않을지 모른다. 역자주) 이런 이유로 이방인들은 우상들을 예배하고, 이 예배 안에 신성이 있다고 믿는다, 이와 비슷하게 어떤 신앙인들은 자기들이 신들, 또는 성인들이라고 믿어지는 죽은 인간들에 자신의 소원을 빌기도 하고 심지어 어떤 이는 예배한다. 이러는 이유는 인간은 자기의 감각에 와닿는 어떤 것이 없으면 뭔가 허전해 있기 때문이다. (다시말해, 절뚝거리던 자가 어떤 목사의 기도 몇 마디에 벌떡 일어나 걸어가는 현장을 목격하며 예배를 보아야 세상을 다 삼킬 것 같은 믿음이 생겨 예배드린 맛을 느끼는 것과 같을지 모른다 역자주.)
최고 있음(존재)을 인정하면서도 이 최고 있음을 지각하지 못하는 이들의 경우, 그들의 대부분은 하느님이 없다를 인정하고, 대신 자연을 인정한다. 그 이유는 자연계는 오각을 통해 자신들에게 납득되는 것 같기 때문이다. 기독교계의 배웠다 하는 많은 이들의 경우도 이런 오류에서 허우적대는데, 그 이유 역시 그들이 주님의 인간이 신성이심을 믿지 않기 때문이다. 하여 자신을 신성으로부터 아주 멀어지게 옮겨다놓은 이들, 또는 지독하게 육체적이 되어간 이들이 자연계의 우람한 나무나 요상하게 우뚝 선 돌을 예배하지 않도록; 그들이 죽은 어떤 인간을 예배하지 않도록; 그리하여 그가 하느님 자신이 아닌, 어떤 악마에게 들러붙지 않도록, 인간의 속성이 위와 같아서 그렇지 않으면, 어떤 방법으로도 그분을 지각하지 못하기 때문에 교회의 모든 것이, 교회와 더불어 인류가 멸해지고 말기에, 신성 자체가 인간인 체 하시기로 뜻하셨다, 다시 말해 인간의 옷(몸)을 입으시기로 뜻하셨다. 이 대목에서 학식자가 경청해야 할 것은, 그들은 신성이 입으신 인간, 즉 주님의 인간을 생각하면서 동시에 그것이 신성이심을 인정하는 것이다. 이렇지 않고 주님의 인간의 신성을 부인해버리면 그들은 자신들을 위해 스스로 장애물을 자기 앞에 두고 마는 바, 결국 아무것도 믿지 않는 결과를 야기한다.

그리고 르우벤은 그들에게 말했다. 이는 권면함을 의미한다. 대략적 의미에서, 이는 일반적 측면에서의 교회의 신앙이 자기들이 폭력을 행하지 말자고 권면하는 고백을 의미한다. 이는 아래에서 더 이어진다.

피를 흘리지 마라. 이는 그들은 거룩한 것에 폭력을 휘둘러서는 안된다를 의미한다. 이는 “피”의 의미가 거룩한 것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러므로 “피를 흘린다”는 거룩한 것에 폭력을 휘두른 것이다. 천국에 있는 모든 거룩함은 주님의 신성한 인간으로부터 진행한다, 그러므로 교회 안에 있는 모든 거룩함도 신성한 인간으로부터 있다. 그러므로 거룩한 것에 폭력이 휘둘러져서는 안된다는 것, 그러므로 성찬식이 주님에 의해 제정되었다, 이 예식 안에서 빵은 그분의 살이고, 포도주는 그분의 피 이다는 말씀을 (열두 제자 이하 대부분의 인간이 위와 같은 인간 속성에서 탈피하지 못하기에, 일부러, 또렷이 심정에 담아지기를 원하시어) 명백한 어조로 말하셨다. 고로 거룩함이 오는 근원은 그분의 신성한 인간이심을 확실히 가슴에 담아두기를 뜻하신 것이다. 고대인들과 더불어, 살과 피는 인간의 자신을 의미했다, 그 이유는 인간이 살과 피로 구성되기 때문이다; 고로 주님께서 시몬에게, “너는 복되다, 그 이유는 살과 피가 네게 그것을 밝히 알게 한 것이 아니라 천국들에 계신 내 아버지이시기 때문이다” 하고 말하셨다 (마. 16:17). 살과 피, 그러므로 성찬에서 빵과 포도주에 의해 의미된 살과 피는 주님의 인간 자신(Lord’s Human own)을 표시한다. 주님의 자신 자체 (Lord’s own itself), 즉 그분이 그분의 자신의 힘을 수단으로 자신에게 획득하신 주님의 자신 자체가 신성이다. 임신으로부터의 그분의 자신은 그분이 여호와 그분의 아버지로부터 가졌던 것이다, 그리고 여호와 자신 이셨다. 그러므로 그분이 인간 안에서 자신에게 획득한 자신은 신성이었다. (주님의) 인간(Human) 안에 있는 이 신성한 자신이 그분의 살과 피라고 불리우는 것이다; “살”은 그분의 신성한 선이고, “피”는 신성한 선으로부터의 신성한 진리이다.
주님의 인간이 신성이 되신 이후, 또는 신성으로 만들어진 이후의 주님의 인간은 여느 자연계에 존재한 자연적 인간 수준으로 생각되어질 수 없고, 인간 형체 안에 있는 신성한 사랑으로만 생각되어야 한다. 이 생각은 천사들에게는 아주 대단해서 그들이 나에게 나타날 때, 그들은 인간 차림새를 한 사랑과 선행의 형체로서 이다. 그리고 이 근원은 주님으로부터 이다; 그 이유가 주님께서 신성한 사랑으로부터 그분의 인간을 신성으로 만드셨기 때문이다; 인간의 경우도 이와 같아서, (지상 삶에서 지녀왔던) 천국의 사랑을 통하여 사후에도 그는 천사가 되고, 위에서 말한 대로 인간의 모양새 아래 사랑과 선행의 형체로서 나타난다. 이로부터 분명한 바, 주님의 신성한 인간에 의해, 천적 의미에서, 신성한 사랑 자체, 인류를 향한 사랑, 모든 이를 구원하여 영원히 복되고 행복하게 하시기를 뜻하시는 사랑, 당사자가 받을 수 있는 한 그들 자신의 것으로 삼게 해주시는 사랑이 의미된다. 이 사랑과 주님에 대한 인간의 상호적인 사랑, 또한 이웃을 향한 사랑이 성찬식에 표현되고 의미되어져 있다; 즉 신성한 천적 사랑은 살, 또는 빵에 의해, 신성한 영적 사랑은 피, 또는 포도주에 의해 의미되고 있다.
이로부터 주님의 살을 먹고 그분의 피를 마심에 의해 요한복음서에서 의미되는 것이 분명해진다:
나는 천국으로부터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만일 누군가가 이 빵을 먹으면, 그는 영원히 살 것이다; 그리고 내가 줄 빵은 나의 살이다. 참으로, 참으로, 내가 네게 말한다, 너희가 사람의 아들의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지 않으면, 너희는 너희 안에 생명을 가지지 못한다. 내 살을 먹는 자는 누구든지,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누구든지 영원한 생명을 가질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를 마지막 날에 일으킬 것이다. 그 이유가 실로 내 살은 음식이고, 내 피는 실로 음료이기 때문이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주하고, 그리고 나는 그 사람 안에 거주한다. 이것은 천국으로부터 내려온 빵이다 (요. 6:51-58).
“살과 피”는 이미 말한 대로, 주님의 신성한 인간으로부터 있는 신성한 천적 평면과 신성한 영적 평면을 의미하기에, 다른 말로 하면, 그분의 사랑으로부터의 신성한 선과 신성한 진리를 의미하기에, “먹고 마심”에 의해서는 자신의 것으로 만듦이 의미된다; 그리고 이것은 사랑과 선행의 삶에 의해, 또는 신앙의 삶에 의해 결과되어진다.
“피”가 주님의 신성한 인간으로부터 진행하는 신성한 진리, 또는 신성한 영적 평면을 의미하기에, 그러므로 진행되는 거룩함도 의미한다; 그 이유가 주님의 신성한 인간으로부터 진행하는 신성한 진리가 거룩함 자체이기 때문이다.
거룩함은 신성한 진리 외의 다른 근원은 없다. “피”가 이 거룩함을 의미한다는 것은 말씀의 많은 구절로부터 확인되지만 아래 한 대목만 살펴본다:
고로 사람의 아들에게 주 여호비께서 말하신다, 하늘의 모든 새들에게 말하라, 들판의 모든 들짐승 에게 말하라, 네 자신들이 모이게 오너라; 사방으로부터 네 자신을 내가 너희를 위하여 바치는 내 제물 위에, 이스라엘의 산 위에 큰 제물조차 그러모으라, 하여 너희는 살을 먹고 피를 마실는지 모른다. 너희는 용사의 살을, 그리고 땅의 제 일인 자들의 피를, 숫양들로부터, 염소들로부 터, [어린 거세 수소로부터], 바산의 살진 그것들의 모두로부터 이다. 그리고 너희는 너희가 배부를 때까지 지방을 먹을 것이다, 그리고 너희가 취할 때까지 피를 마실 것이다, 내가 너희를 위하여 바친 내 제물로부터 이다. 그리고 너희는 내 식탁에서 말과 병거와 강한 자와 전쟁의 모든 사람과 더불어 앉을 것이다 (겔. 39:17-21).
여기서 취급된 주제는 주님의 왕국으로 모든 이를 다 부르심이다, 그리고 특별하게는 이방인들 사이에 교회를 다시 설립하심이다; 그리고 그들이 “살을 먹고 피를 마심”에 의해서는 신성한 선과 신성한 진리를 자기 것으로 만듦, 고로 주님의 신성한 인간으로부터 진행하는 거룩함이 의미된다. 위 구절에서 “살”이 살을, “피”가 피를 뜻하지 않을 것은 두뇌가 수준 이하이지 않은 이상 누가 알지 못할까? 또는 용사의 살을 먹는다, 땅의 제 일인 자의 피를 마신다, 말과 병거, 강한 자, 전쟁의 모든 자와 더불어 식탁에 앉는다, 이런 것이 실제 있을 수 있다고 굳게 믿을 자 어디에 있을까?
계시록서에서:
나는 태양에 서있는 천사를 보았다; 그리고 그는 큰 음성으로 외쳐, 하늘 사이를 나는 모든 새들에게 말하기를, 다 모여 위대한 하느님의 만찬에 오너라; 하여 너희는 왕들의 살을, 대장들의 살을, 그리고 강한 자의 살을, 그리고 말들의 살을, 그리고 그것 위에 앉은 그들의 살을, 모든 남자들의 살을, 자유한 자, 억매인 자, 작은 자, 큰 자 모두의 살을 먹을는지 모른다 (계. 19:17, 18);
위 구절을 이해하려면, “살,” “왕들,” “대장들,” “강한 자,” “말들,” “그 위에 앉은 자,” “자유한 자,” “억매인 자”의 단어들의 내적 의미를 알지 못하면 가능하지 않다.
스가랴서에서:
그는 민족들에 평화를 말할 것이다; 그리고 그분의 주권은 바다로 바다에 이를 것이다, 그리고 강으로부터 땅의 끝에 까지 이를 것이다. 너에 관하여 말하면, 네 언약의 피를 통하여 나는 네 묶인 자를 구덩이로부터 파견할 것이다 (슥. 9:10, 11);
위는 주님이 말해진다; “너의 언약의 피”는 그분의 신성한 인간으로부터 진행하는 신성한 진리, 그리고 그분이 신성이 되신 이후 그분으로부터 나가는 거룩함 자체이다. 이 거룩함은 성령이라 흔히 불리운다. 요한복음서에서:
예수께서 말하셨다, 만일 어떤 자가 목마르다면, 그로 하여금 나에게 오게 하라, 그리고 마시게 하라. 나를 믿는 자는 누구든지 성경이 말한 대로, 그의 뱃속으로부터 살아 있는 물의 강들이 흐를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영으로부터의 그분을 말하셨다, 이것을 그분을 믿는 그들이 받을 것이다; 그 이유는 성령이 아직 있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예수께서 아직 신성이 되시지 않았기 때문이다 (요. 7:37-39).
주님으로부터 진행하는 거룩함이 “영”이다는 것은 요. 6:63로부터도 알는지 모른다.
더욱이 “피”가 주님의 신성한 인간으로부터 진행되는 거룩함인 것에 대하여:
사기와 폭행으로부터 그들의 혼을 도로 가져다 놓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피는 그분의 눈에서 귀중할 것이다 (시. 72:14);
“귀중한 피”는 그들이 받을 거룩함을 표시한다. 계시록서에서:
이들은 큰 환난으로부터 나온 이들이다, 그리고 그들은 자기들의 도포를 빨았다, 그리고 그것들을 어린 양의 피로 희게 만들었다 (계. 7:14).
그리고 다시:
그들은 어린 양의 피로 용들을 정복했다, 그리고 그들의 증거의 말로 정복했다; 그리고 그들은 죽기까지에서 자기들의 혼을 사랑하지 않았다 (계. 12:11).
오늘날 교회가 아는 “어린 양의 피”란 주님의 십자가의 고난(죽으심)을 의미한다는 것 뿐이다. 그렇게 믿는 그들의 이유인즉, 주님께서 이 고통을 당하심으로만 자기들은 구원되었다는 것, 이를 위해 그분이 보내졌다고 믿어서이다; 그러나 이 십자가의 고난은 주님이 시험을 정복해가시는 과정의 마지막 단계이고, 이를 수단으로 그분은 그분의 인간을 충분히 신성이 되게 하셨다 (눅. 24:26; 요. 12:23, 27, 28; 13:31, 32; 17:1, 4, 5); “어린 양의 피”는 신성한 진리와 같다, 또는 주님의 신성한 인간으로부터의 거룩한 진행이다; 고로 방금 위에서 말한 “언약의 피”와 같다. 이에 관해 모세의 책에서:
모세는 언약의 피를 가져왔다, 그리고 백성들의 귀에 읽었다; 그리고 그들이 말했다, 여호와께 서 말하신 모든 것을 우리는 행하고 들을 것입니다. 그러자 모세는 피를 가져와서, 백성 위에 뿌렸다, 그리고 말했다, 잘 보라, 여호와께서 이 모든 말들 위에서 너희와 만든 언약의 피이다 (출. 24:7, 8);
“언약의 책”은 그때 당시 그들이 가졌던 신성한 진리였다, 이것이 그분의 신성한 인간으로부터 이었음을 증명하는 피에 의해 확증되어졌다.
유태 교회의 의식에서 피는 주님의 신성한 인간으로부터의 거룩한 진행밖에 더 다른 의미는 없었다, 그러므로 그들이 신성시되어졌을 때, 이것이 피를 수단으로 행해졌다; 즉 아론과 그의 아들들이 신성시되어졌을 때, 피가 제단의 뿔 위에서 뿌려졌고, 나머지 피는 제단의 밑부분에, 또한 오른쪽 귀 끝에, 오른 손의 엄지에, 그리고 오른 발의 엄지에, 그리고 그의 의복에 뿌려졌다 (출. 29:12, 16, 20; 레. 8:15, 19, 23, 30). 그리고 아론이 휘장 안쪽 자비석으로 들어갔을 때, 피는 동쪽을 향하여 일곱 번 손가락으로 자비석 위에 뿌려졌다 (레. 16:12-15). 또한 신성시 됨의 나머지 의식에서, 속죄함과 깨끗하게 함의 의식에서도 그러했다 (출. 12:7, 13, 22; 30:10; 레. 1:5, 11, 15; 3:2, 8, 13; 4:6, 7, 17, 18, 25, 30, 34; 5:9; 6:27, 28; 14:14-19, 25-30; 16:12-15, 18, 19; 신. 12:27).
“피”의 진짜 의미에 의해 거룩함이 의미되기에, 반대 의미에서는 “피”와 “피들”에 의해 그것에 폭력을 제공하는 것들이 의미된다, 그 이유는 순진한 자의 피를 뿌림에 의해 거룩한 것에 폭력을 가함이 의미되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생활 속의 사악한 것들과 예배의 모독적인 것들이 “피”라 불리운다. “피”와 “피들”이 이런 의미를 가지는 것을 아래 구절들로부터 확인해보자:
주님께서 심판의 영을 수단으로, 그리고 삭제함의 영을 수단으로 시온의 딸들의 배설물을 씻으실 때, 그리고 예루살렘의 피들을 씻으실 때 (이. 4:4).
다시:
디몬의 물들은 피로 가득하다 (이. 15:9).
다시:
너의 손은 피로 더러워 있다, 그리고 너의 손가락은 불법으로 (더러워 있다). 그들의 발은 악쪽으로 달려간다, 그리고 그들은 순진한 피를 흘리려 성급해 있다; 그들의 생각들은 불법의 생각들이다 (이. 59:3, 7).
예레미야서에서:
또한 네 치마에서 순진한 가난한 자의 혼의 피가 발견된다 (이. 2:34).
다시:
이것은 그녀의 예언자들의 죄 때문이다, 그리고 그녀의 성직자들의 불법 ( 때문이다), 즉 예루살렘 의 한가운데에서 의로운 자의 피를 뿌렸다. 그들은 거리들에서 눈멀어 방황했다, 그들은 피로 오염되었다; 그들이 [오염되게] 할 수 없는 것들을 그들은 의복을 가지고 접촉한다
(애. 4:13, 14).
에스겔서에서:
내가 네 옆을 지나쳐갔다, 그리고 네 피 아래에서 짓밟힌 너를 보았다, 그리고 나는 너에게 말했다, 네 피들 안에서 살아라, 그리고 나는 너에게 말했다, 네 피들 안에서 살아라. 나는 물들로 너를 씻었다, 그리고 네 위로부터 네 피들을 씻었다, 그리고 나는 기름으로 기름부었다
(겔. 16:6, 9).
다시:
너 사람의 아들아, 너는 피들의 도성과 논쟁을 벌이려 하느냐? 그녀에게 그녀의 모든 역겨운 짓을 알게 만들어라. 너는 네가 흘린 피를 통하여 죄있게 되었다, 그리고 네가 만든 우상들을 통하여 더렵혔다. 이스라엘의 제 일인 자들을 잘 보라, 자기의 무장한 것에 따라 모든 이가 있어 왔고 피를 흘렸다; 중상자들이 피를 뿌리기 위해 네 안에 있어 왔다; 그리고 네 안에서 그들은 산들에서 먹었다 (겔. 22:2-4, 6, 9).
모세의 책에서:
만일 누군가가 천막에서 제단 위에보다 다른 곳에서 제물을 바치겠다면, 그것은 피일 것이다; 그리고 마치 그는 피를 흘렸던 것처럼 (레. 17:1-9).
거짓되고 모독된 진리가 아래 구절에서 의미되어 있다:
나는 하늘과 땅에서 경이로움들을, 피, 그리고 불, 그리고 연기 기둥들을 놓을 것이다. 태양은 어둠으로 변해질 것이다, 그리고 달은 피로 변해질 것이다, 크고 두려운 날이 오기 전이다
(욜. 2:30, 31).
계시록서에서:
태양은 머리털로 짠 삼베옷 같이 검게 되었다, 그리고 달 전체는 피 같이 되었다 (계. 6:12).
다시:
두 번째 천사가 소리를 냈다, 그리고 마치 불로 타는 큰 산이 바다로 내던져졌다; 그리고 바다의 삼분의 일이 피가 되었다 (계. 8:8).
다시:
두 번째 천사가 바다 안으로 그의 대접을 쏟았다; 그리고 그것은 마치 죽은 자의 것 같은 피가 되었다, 그리고 모두 각각의 살아 있는 혼이 바다에서 죽었다. 그리고 세 번째 천사가 그의 대접을 강들 안으로, 물들의 샘들 안으로 쏟았다, 그리고 거기는 피가 되었다 (계. 16:3, 4).
비슷한 대목이 출. 7:15-22에서도 말해진다, 즉 이집트의 강들과 연못들, 그리고 물들의 못들이 피로 변해진 것이다; 그 이유가 “이집트”에 의해 기억 속의 지식들, 이 지식 자체로 천국의 신비들 안으로 들어감을 의미하기 때문, 하여 이로부터 신성한 진리들을 악용함, 부정함, 모독함이 있다. 이집트에서의 모든 기적들은 신성이고, 아래와 같은 것을 포함했다: 즉 피로 변한 “강들”은 총명과 지혜로부터의 진리들이다; “물들”도 비숫한 의미이다, 그리고 “샘들”도 그렇다; “바다들”은 기억 속의 주제라 할 수 있는 복합체에 있는 진리들이다; “피로 변한다”고 말해진 “달”은 신성한 진리이다. 이상으로부터 분명한 바, 달, 바다, 샘, 물, 강이 피로 변함에 의해 거짓으로 되고 모독되어진 진리가 의미된다는 것이다.

그를 광야에 있는 이 구덩이에 던지자. 이는 그들은 그것을 그들의 거짓들 사이에 한동안 감출 것임을 의미한다. 즉 그들은 그것을 거짓으로 간주할 것이다는 것, 그러나 여전히 그것을 존속시키고 있는데, 그 이유는 그것이 교회에 중요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구덩이”의 의미가 거짓들이다로부터; 그리고 “광야”의 의미가 진리가 없는 곳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단어 광야는 사람이 살지 못하는 토지라는 측면에서는 교화(계몽)되지 않은 것을 의미하고, 이 광야가 교회를 서술할 때는 선이 없는 것, 결과적으로 진리가 없는 것을 표시한다. 고로 “광야에 있는 구덩이”는 여기서 선이 없기 때문에 진리가 없는 거짓들을 뜻하다. 여기서 선이 없기 때문에 진리가 없다 라고 장황한 듯 하게 말한 이유는 누군가가 일함 없는 신앙이 구원한다고 믿을 때, 진리가 실로 존재할는지 모르나 여전히 그 사람 안에 진리가 없기 때문, 그 이유는 그가 선을 찾지 않기 때문에, 선으로부터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 진리는 살아 있지 않다, 그 이유는 그것 안에 거짓의 원리를 가지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이와 같은 진리를 가진 자의 진리는 그것을 통치하는 것으로부터 거짓밖에 더 아니다. 다른 한편, 진리들 같이 받아들여지는 거짓이 있다. 이는 그들 안에 선이 있을 때이다. 특히 이것이 순진의 선일 경우인데, 이는 교회 내에 있는 많은 이들, 이방인들과 더불어서 있는 경우이다.

그러나 그에게 손을 놓지 마라. 이는 그들은 그것에 폭력을 행사해서는 안된다를 의미한다. 이는 설명이 필요 없다.

그는 그를 그들의 손에서 구출해서 그를 그의 아버지에게 데려다 주려고. 이는 교회를 위하여 그것을 요구하도록을 의미한다. 이는 “그들의 손에서 구출함”의 의미가 자유하게 놓아둠이다로부터; “그의 아버지에게 되돌려 보냄”의 의미가 교회를 위해 요구함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 이유가 야곱, 여기서 “아버지”인데, 고대 교회로부터 갈라져 나온 유태 종교를 표현했기 때문이다. 주님의 신성한 인간에 관한 신성한 진리는 교회를 위해 요구되어야 마땅하였는데, 그 이유는 특별한 측면에서는 야곱에 의해 이 진리가 의미되기 때문이다.
이 진리에 더 주목해보자; 이 진리를 고대 교회가 인정했다는 것, 그리고 원시 기독교회도 그러했다는 것은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나 교황의 휘두름이 모든 인간의 혼들 위에 있게 되었을 때, 그리고 교황권 자체를 드높혔을 때, 마치 이사야서에서 바빌론왕에 관해 말해진 바 같이, “너는 네 심정에서 말한다, 나는 하늘의 별들 너머로 승강할 것이다, 그리고 나는 회합의 산에 앉을 것이다, 나는 구름의 높이 너머로 승강할 것이다, 나는 지극히 높은 자 같이 될 것이다”(14:13, 14)와 유사 했다; 그 다음 신성은 주님의 인간으로부터 거두어졌다, 즉 그분의 신성과 그분의 인간 사이에 구분을 만들었다는 말이다.
이것이 어떤 회의에서 어떻게 포고되었는 지가 나에게 밝히 알려졌다. 어떤 영이 나에게 나타났는데, 그는 나와 어느 정도 간격을 두고, 평평한 발바닥의 왼쪽으로의 앞에서 나타났고, 대화를 했으나, 내가 듣지 못했던 것에 관하여 이었다. 그때 내가 말한 영은 과거 주님의 두 본성, 즉 신성과 인간에 관하여 포고문을 만든 회의를 주도했던 이들 중에 속했던 자들이었다. 지금 그들과 대화하는 것이 나에게 수여되었다. 그들이 말했다, 회의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서열 1, 2위에 있는 이들이 컴컴한 방에 함께 와서 결말을 본 것은, 신성과 인간 본질을 주님의 속성으로 돌려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결론이 있어야 하는 주된 것 중 하나는 그렇지 않고서는 교황의 권세가 유지되어질 수 없어서 였다는 것이다. 만일 그들이 주님이 말하신 바 그대로 나는 아버지와 더불어 하나이시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교황이) 땅위에서 (그리스도의) 대목(대리자, vicar)으로서 인정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럴 경우 교황의 권세는 땅에 추락하고 사라지고 말아 종파들이 우후죽순격으로 일어날 것인 바, 신성과 인간을 분리함은 절대적이다 싶이 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기발난 발명품을 강화시킬 목적으로 그들은 말씀으로부터 확증될 구절들을 끌어내었다, 그리고 나머지 포고령도 설득되게 했다.
영들이 내게 더 말했다, 이 포고령을 수단으로 그들은 하늘과 땅을 통치할 수 있었다, 그 이유는 (마. 28:18에서) 주님에게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주셨는 바, 주님의 대리자가 교황이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그분의 인간이 신성이다고 인정되어진다면, 어느 인간도 하느님과 동등하게 자신을 만들자는 없다는 것, 만들 수도 없다는 것은 지극히 단순하고 무식한 자도 다 아는 이치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교황이 그리스도(예수)의 대물림을 위해서는 그리스도의 인간도 우리 인간과 동등한 위치에 놓이게 하는 것을 고안해낸 것이다. 한마디로 주님의 신성과 인간 속성을 구분한 것은 교황의 절대 권력을 위해서 이었다는 말이다. 따라서 그들은 하늘과 땅에서 주님에게 주어진 권능 역시 신성이다는 것을 들추어내고 싶어하지 않는다. 대신 주님께서 하늘의 열쇠를 (인간) 베드로에게 주셨다고… 이 열쇠가 베드로에 이어 교황에게…식으로 논리를 유도해간다. 그러나 마. 16:19에서의 베드로는 선행으로부터의 신앙을 뜻하고 인간 베도로가 아닌 것은 삼척동자도 짐작할 것이다. 이 신앙은 주님만으로부터 있기 때문에, 주님만에 속한 권능인데, 이에 대하여 창. 22장의 서문을 다시 읽어보라.

23-30절. 그리고 요셉이 그의 형제들에게 왔을 때, 그들은 요셉에게서 그의 웃옷, 그가 입고 있는 여러 색깔로 된 웃옷을 벗겼다, 24 그리고 그들은 그를 데려가서 구덩이에 그를 던졌다. 그리고 그 구덩이는 그 안에 물이 없이 텅 비어 있었다. 25 그리고 그들은 빵을 먹으며 앉아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그들의 눈을 들고 보았다, 그리고 바라보니 이스마엘 사람의 집단이 길르앗으로부터 왔는데, 그들은 낙타에 양념과 수지(향유)와 소합향을 싣고 이집트로 운반하려 내려가고 있었다. 26 그리고 유다가 그의 형제들에게 말했다, 우리가 우리의 형제를 죽이고, 그의 피를 덮는다 한들 그것이 무슨 이득이 있을까? 27 가서 그를 이스마엘 사람들에게 팔아버리자, 그리고 우리의 손을 그에게 대지 말자, 그 이유는 그는 우리의 형제이고, 우리의 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의 형제들은 그에게 귀기울였다. 28 그리고 거기를 사람들, 미디안 사람들, 상인들이 지나갔다, 그리고 그들은 요셉을 구덩이에서 끌어내 들어 올렸다, 그리고 요셉을 이스마엘 사람들에게 은 이십에 팔았다. 그리고 그들은 요셉을 이집트로 데리고 갔다. 29 그리고 르우벤이 구덩이로 돌아왔다, 그리고 보라, 요셉이 구덩이에 없었다. 그리고 그는 자기 옷을 찢었다. 30 그리고 그는 그의 형제들에게 돌아 왔다, 그리고 말했다, 아이가 없다, 그리고 나는 어디로 가야 할꼬?

요셉이 그의 형제들에게 왔을 때. 이는 그것이 이제 막 설교되었을 때를 의미한다.
이는 요셉의 표현함이 신성으로부터의 진리, 특히 주님의 신성한 인간에 관한 진리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것이 “그들에게 왔을 때”란 이것이 그들에게 설교되었을 때를 뜻한다; 그 이유가 그의 형제가 분리된 신앙 안에 있는 교회를 표현하고 이 교회에 이 진리가 설교된 것이다.

그들은 요셉에게서 그의 웃옷을 벗겼다. 그들은 진리의 나타남들을 쫓아버리고 절멸시켰음을 의미한다. 이는 “벗김”의 의미가 여기서 “요셉”인 신성한 진리를 서술할 때, 쫓아버림과 절멸해버리는 것이다로부터; 그리고 “웃옷(튜닠, tunic)”의 의미가 진리의 나타남들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진리의 나타남들을 쫓아버리고 절멸해버림은 진리 자체가 거절된 후에 거행된다; 그 이유가 진리 자체는 마음에서 스스로 빛을 발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소멸되었을런지 몰라도 여전히 나타나는데, 특히 선 안에 있는 이들에게는 더욱 그렇다. 이런 현상은 자신들 안에서 진리를 절멸시켜버리는 이들에 의해서도 보여진다, 그러므로 그들은 이런 나타남들을 쫓아내고 절멸시키려 부단히 노력해댄다.
예를 들어 더 생각해보자: 남에게 호의적으로 뜻하고 행동하는 것이 기독인의 생활의 핵심이다 라고 말한다면 누가 반대할 것인가? 그리고 만일 누군가가 이것이 선행이다 라고 말한다면, 그는 그것을 확언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것을 확언한 이들은 자기들은 이것이 무엇인지를 안다고 조차 말할 것이다, 그 이유는 이것이 삶으로부터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이 진리이다고 생각하는 이, 더 나아가 확신조차 하는 이들에 주목해보면, 그들은 말할 것이다, 자기들은 그것이 무엇인지 모른다는 것, 그 이유는 그들이 이것을 자취를 감추는 연기 같은 것 외의 다른 것으로는 지각하지 못하기 때문이다고 말한다. 신앙만으로와 이 교리로부터 확신함이 위와 같은 특성 속에서 진리의 나타남들에 관하여 심각하게 생각하는 모든 이, 특히 선한 자에게 나타나기에, 신앙만으로 확신하는 자는 이 신성한 진리의 나타남들에 가까이 접촉하는 무엇이든, 이 신성한 진리를 빙둘러 있는 무엇이든 껍질 벗기는 방식으로 이 진리의 나타남들을 쫓아버리고 절멸시키려 고된 노동도 서슴없이 해댄다. 이것이 요셉에 있던 그의 튜닉을 벗김에 의해 의미되고 있다.
위와 동일한 인물들이 믿는 바, 신앙만으로에 있는 자들은 여느 다른 이들보다 더 현명한 자이다는 것이다. 즉 이들은 독단적 교의가 무엇이었든 한 번 받아들였으면, 다양한 것들을 수단으로 그것을 확증하고, 다양한 추론들을 수단으로 요상한 교의도 진리같이 만든다. 그러나 이것은 슬기로운 자의 몫은 절대 아니다. 이것은 어떤 교묘함을 소유하는 모든 이가 할 수 있는 것들이다. 그리고 악한 자가 직바른 자보다 더 기술적으로 해내는 부분일 것이다. 이것을 행하는 것은 합리적 인간의 몫도 아니다. 합리적 인간은 확증하는 것이 거짓이든, 진리이든 위로부터 보아 있기 때문이다. 합리적 인간은 거짓을 무익한 것으로 확증한다, 그리고 그것들은 제 아무리 지혜 자체의 학교로부터 가져왔다고 누군가가 그로 믿게 하려들어도 그에게는 우스개감 수준의 것, 텅빈 것일 뿐이다. 한마디로 현자의 몫에 해당되는 것은 하나도 없다는 말이다. 어떤 것에 대해 진리인지를 보는 것, 그 다음 그것을 확증하는 것이 합리적 인간, 내지 현자의 몫이다. 사실상 진리인 것을 보는 것은 천국의 빛으로부터 보는 것이다, 이는 주님으로부터 이다; 그러나 거짓인 것을 진리로서 보는 것은 얼빠진 빛으로부터 보는 것이고, 이것은 지옥으로부터 이다.

그가 입고 있는 여러 색깔로 된 웃옷. 이는 선으로부터의 진리에 관한 나타남의 품질을 의미한다. 이는 “다양한 색깔로 된 튜닠”의 의미가 진리의 나타남들이다로부터, 이를 수단으로 자연 평면의 영적인 것이 알려지고 구별되어진다, 여기서는 나타남들의 품질이다; 그 이유로 여기서 튜닠이라는 단어가 두 번 사용되고 있다; 즉 “그들은 그의 튜닠, 다양한 색깔로 된 튜닠을 요셉으로부터 벗겼다.” 나타남들의 품질이 선으로부터의 진리들에 따라서 있다는 것은 다른 삶에서, 천국의 빛에서 보여져 표출될 때, 진리의 나타남들로부터 알는지 모른다. 거기서는 주님으로부터 천국을 통하여 오는 빛 외의 다른 빛은 없기 때문이다; 이것이 천사들의 눈 앞에서 빛으로 나타난다. 이 빛은 받는 그릇에 따라 모든 이와 더불어 다양해진다. 천사들의 모든 생각은 이 빛의 다채로움을 통하여 결과되어진다; 인간의 생각 역시 마찬가지이다, 단지 그가 그것을 알아채지 못할 뿐이다; 그 이유는 인간과 더불어 이 빛은 세상의 빛으로부터 있는 그의 자연 평면, 또는 외적 인간인 물질적 형상들, 또는 생각들 안으로 떨어지기 때문이다. 고로 천국의 빛은 그의 지적인 빛과 시각이 그것으로부터 있다는 것을 거의 알지 못하는 수준으로까지 희미해져 있다. 그러나 다른 삶에서, 눈의 시각은 세상의 빛에서는 더 이상 있지 않고 천국의 빛에 있기에, 그의 생각이 천국의 빛으로부터 근원함이 명백해진다.
이 빛이 천국으로부터 영들의 세계 안으로 건너갈 때, 거기서 다양한 색깔들 아래 표출되어진다, 이 색깔들은 아름다움에서, 다채로움에서 사랑스러움에서 세상의 빛으로부터 있는 색깔들을 무한정 능가한다. 다른 삶에서의 색깔들이 이 근원으로부터 있기에, 그것들은 선으로부터의 진리 외의 다른 근원은 없다. 그 이유가 진리는 그 자체로부터 빛을 발하지 않기 때문인데, 그런 이유는 진리 자체 안에 불꽃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리는 선으로부터 빛을 낸다, 그 이유는 선은 빛을 내보내는 불꽃 같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선이 이러이러하면, 진리의 나타남도 이러이러하여 있다; 그리고 진리가 이러이러하다면, 같은 방식에서 진리는 선으로부터 빛을 낸다. 이상 살핀 바로부터, “다양한 색깔로 된 튜닠에 의해 내적 의미에서 선으로부터의 진리들에 관한 나타남의 품질이 의미됨이 분명해졌을 것이다; 그 이유가 이 웃옷이 주인인 요셉에 의해 신성한 진리가 표현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은 그를 데리고 가서 구덩이에 그를 던졌다. 이는 거짓들 사이에가 의미된다. 이는 앞에서 살핀 것 가지고도 충분하므로 설명은 생략한다.

그리고 그 구덩이에는 물이 없어 텅 비어 있었다. 이는 그때에 참된 것은 하나도 없었다를 의미한다. 이는 “구덩이”의 의미가 거짓들이다로부터; 그리고 “텅비어 있다”의 의미가 선이 없기 때문에 진리도 하나도 없다이다로부터; 그리고 “물”의 의미가 진리이다로부터 분명해진다. “텅 비어 있음”이 선이 하나도 없기에 진리가 하나도 없다를 표시하는 것은 아래 구절들로부터 분명해진다:
그들의 큰 자들이 그들의 작은 자를 물을 위하여 보냈다; 그들이 구덩이들에 왔다, 그리고 물들을 발견하지 못했다; 그들은 자기들의 그릇들을 빈채로 되돌아갔다; 그들은 부끄러움과 수치스럼에 빠졌다, 그리고 자기들의 머리를 가렸다 (예. 14:3);
위의 “텅빈 그릇들”은 선으로부터의 진리가 없는 진리들을 표시한다. 다시:
바빌론왕 느부갓네살이 나를 삼켰다, 그는 나를 괴롭혔다, 그는 나를 텅빈 그릇으로 만들었다, 그는 나를 꿀꺽 삼켰다 (예. 51:34);
위의 “텅빈 그릇”은 진리가 없는 곳을 표시한다; 그리고 “바빌론”, 황폐케 한 이들, 즉 다른 이들로부터 진리들을 빼앗은 이들이다. 다시:
나는 땅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오 그것은 공허하고 텅빔이었다; 그리고 하늘들, 그리고 그것들은 빛을 가지지 않았다 (예. 4:23).
이사야서에서:
가마우지와 알락해오라기가 그것을 소유할 것이다; 그리고 올빼미와 까마귀가 거기 안에 거주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그것 너머로 공허의 줄을 뻗칠 것이다, 그리고 텅빔의 낚시봉 (이. 34:11).
다시:
텅빔의 도성이 깨질 것이다; 모든 집이 닫힐 것이다, 하여 아무도 안에 오지 못할런지 모른다. 포도주 위 거리들에는 외침이 있다, 토지의 기쁨이 추방될 것이다, 도성에 남은 것은 황폐함일 것이다 (이. 24:10-12);
위의 “텅빔”의 단어가 원어에서는 다른 단어로 표현되고 있으나 어쨌든 비슷한 의미의 범주에 있다. “텅빔”은 선이 없기 때문에 진리가 없는 곳이다는 것은 내적 의미에서 언급된 세부 사항에서 분명해진다; 즉 “도성”, “외침”, “포도주”, “거리들”이다. 에스겔서에서:
주 여호비께서 말하셨다, 이들의 도성에 화있을 것이다! 나 역시 난로를 크게 만들고, 뜨거워질 석탄 위에 텅빈 냄비를 놓는다, 그리고 그것의 놋쇠는 뜨겁게 될는지 모른다, 그리고 거기의 불결함이 그 안에서 녹여질는지 모른다, 거기의 더깽이가 태워질 것이다 (겔. 24:9, 11).
위에서 “텅 비다”가 의미하는 것이 분명해진다; “텅빈 냄비”는 그것 안에 더깽이와 불결한 것이 있다, 즉 악과 거짓이 있다.
마태복음서에서:
불결한 영이 인간의 안으로부터 밖으로 나갔을 때, 그는 마른 장소들을 걷다가, 쉴 곳을 찾으나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하자, 그는 말한다, 나는 내가 나왔던 내 집으로 되돌아갈 것이다; 그리고 그가 오니, 그는 그것이 텅비고, 청소되고, 그리고 자기를 위하여 준비된 것을 발견한다. 그때 그는 나가서, 자기보다 더 사악한 다른 일곱 영들을 자신과 결합한다, 그리고 그들은 안으로 들어가서, 거기 거주한다 (마. 12:43-45);
“불결한 영”은 인간에 있는 생명의 불결함을 표시한다, 그리고 그와 더불은 불결한 영들 또한 그렇다, 그 이유는 불결한 영들은 인간의 생명의 불결함에서 거주하기 때문이다; “마른 장소들”, 또는 물이 없는 곳은 진리들이 없는 곳을 표시한다; “텅빈 집”은 불결함으로, 즉 악으로부터의 거짓들로 다시 채워진 인간의 내면들을 표시한다. 누가복음서에서:
하느님께서는 배고픈 자를 좋은 것들로 채우셨다, 그리고 부자를 그분은 텅 빈채로 떠나보냈다 (눅. 1:53);
“부자”는 많은 것들을 아는 이들을 표시한다; 그 이유가 “재물”이 영적 의미에서 기억 속의 지식들, 교리적인 것들, 그리고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들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런 것들을 아는데, 행하지 않기에 “텅빈 부자”라고 불리운다; 그 이유가 그들에게 진리들은 진리들이 아닌데, 선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은 빵을 먹으려고 앉았다. 이는 거짓으로부터의 악을 제 것 삼음을 의미한다. 이는 “먹다”의 의미가 자기 것이 되게 함이다로부터; 그리고 “빵”의 의미가 사랑의 선이다로부터, 그리고 일반적으로는 모든 식품이다. 여기서는 “빵”의 의미가 반대적이어서 악을 의미한다; 그 이유가 누구나 아는 바, 성찬에서 빵을 무가치하게 먹는 자는 자신에게 선이 아닌 악을 자기 것이 되게 하는 자이다는 것 때문이다. 고대인들이 자기들의 중대한 결정을 내려야 할 때 함께 식사를 함으로 허가됨이 의미되었다. 하여, 그들은 서로가 자신의 것이 되게 했다. 에스겔서에서:
잘 보라, 이스라엘의 제 일인 자들아, 자기 무력에 따라 모든 이가 너희 안에 있었고, 피를 흘렸다; 중상꾼들이 피를 흘리기 위하여 너희 안에 있어 왔다; 그리고 너희 안에서 그들은 산에서 먹었었다 (겔. 22:6, 9).
다 잘 알려진 바, 일반적으로 악의 근원은 둘이다는 것, 하나는 생활로부터, 다른 하나는 교리로부터 이다. 거짓의 교리로부터 있는 악은 거짓으로부터의 악이라 불리우고, 이것이 여기서 뜻해지는 악이다.

그리고 그들이 눈을 들어 보았다. 이는 더 생각했음을 의미한다. 이는 “눈을 들어 올려 봄”의 의미가 의도함과 생각함인데, 여기서는 시리즈로부터 더 생각함이 의미된다

그리고 바라보니 이스마엘 사람들의 집단이 길르앗으로부터 왔다. 이는 단순한 선 안에 있는 이들을 의미하는데, 마치 단순한 선 안에 있는 이방인들 같다. 이는 이스마엘 사람들의 표현이 생활에서 단순한 선 안에 있는 이들, 이로부터 교리 측면에서도 자연적 진리 안에 있는 이들이다로부터; 그리고 “길르앗”의 의미가 외면의 선이다로부터, 인간이 거듭나질 때, 인간은 이 외면의 선에서 처음 거듭남을 시작한다. 이로부터 “길르앗으로부터 이스마엘 사람들의 집단”에 의해 이방인들과 더불어 있는 것과 같은 선, 즉 그런 단순한 선 안에 있는 이들이 의미됨이 분명해진다.
어떻게 이런 상황들이 있게 되었는지에 대하여는 이미 말했던 바에서 알는지 모르나 아래에서 조금 더 살핀다. 여기서는 이미 살핀 내용보다 조금 더 발전된 것일지 모른다: 교회 내에 있고, 자신을 신성한 진리들, 특히 이런 진리들, 즉 주님의 인간이 신성하다는 것, 그리고 선행의 일들이 구원에 기여한다는 진리에 맞서서 자신을 확증한 이들, 이들이 만일 교리 측면에서 뿐만 아니라 생활 측면에서도 이렇게 확증한다면, 그들은 이 후에 자신들이 이 진리들을 받을 수 없는 상태쪽으로 그들의 내면들은 굳혀져 있다. 그 이유가 한 때 교리에 의해 확증된 것, 동시에 생활로 확증한 것은 영원히 남아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내면의 상태를 알지 못하는 이들이 상상하는 것, 즉 제아무리 위의 진리들에 정반대로 확증해오고 있었다 해도, 그가 다시 깨닫게 되었다면, 위의 진리들을 받아들임이 뭐 그렇게 어려운 일일 것이냐고 상상할지 모른다. 그러나 이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이 다른 삶에서 이런 인물들에 관련한 경험을 통해 나로 하여금 알도록 수여되었다. 교리에 의해 확증된 것은 무엇이든 지적 부분에 의해 흡수되어진다, 그리고 생활에 의해 확증한 것은 의지 부분에 의해 흡수된다; 그리고 인간의 양쪽 생명들 안에 뿌리내린 것, 즉 이해력의 생명과 의지력의 생명에 박혀진 뿌리는 뽑혀나갈 수 없다. 사후 살아가는 인간의 혼 자체는 이 두 생명에 의해 형성되어진다, 또한 이 생명은 거기서 멀어지는 일은 결코 없다. 이런 근거로 해서, 교회 내에 있는 이들이 교회 밖에 있는 이들보다 때로는 상황이 더 심각할 수 있다고 말해왔던 것이다; 그 이유가 교회 밖에 있는 이들, 흔히 이방인이라 불리운 이들은 위의 진리들에 맞서서 자신들을 확증하지는 않고 살아가는데, 그 이유는 그들이 위의 진리들을 아예 몰랐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의 많은 부류들은 서로의 선행 안에서 살았기 때문에 만일 시간과 공간이 존재하는 자연계가 아닌 다른 삶에서의 경우, 신성한 진리들을 받는 것이 어렵지 않다 (2589-2604항).
[3] 이런 이유로 어떤 새로운 교회가 주님에 의해 설립될 때, 교회 내에 있는 이들이 아닌, 교회 밖, 이방인들과 세워지곤 했던 것이다. 이런 사항들은 말씀에서 자주 취급되고 있다. 이 대목이 책의 머리말 형식 같이 놓여진 이유는 이 대목 뒤에 이어지는 사건들, 즉 요셉이 그의 형제들에 의해 구덩이에 내던져지고, 구덩이에서 미디안족에 의해 건져내지고, 이스마엘족들에 팔려지는 사건을 이해하기 위함 때문이다. 그 이유가 요셉의 형제들에 의해 신성한 진리, 특히 두 진리, 즉 주님의 인간이 신성하다는 것, 그리고 선행으로부터의 일들이 구원을 있게 한다는 진리, 그리고 이것을 교리 뿐만 아니라 삶에 의해서 자신을 굳힌 교회인들을 표현했기 때문; 그 반면, 이스마엘족들은 단순한 선 안에 있는 이들을, 그리고 미디안 족들은 이 선으로부터의 진리 안에 있는 이들이 표현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후자는 요셉을 구덩이로부터 끌어낸 것에, 전자는 요셉을 산 것에 관련되었다. 그러나 이들에 관련되어 이어지는 것, 즉 요셉을 이집트로 데려오고, 이집트의 경호 대장에게 그를 파는 대목은 차후 거기서 살핀다.

그들은 낙타들에 양념(향료)과 수지(향유)와 소합향을 싣고 있었다. 이는 내면의 자연적 진리들을 의미한다. 이는 “낙타들”의 의미가 영적인 것을 섬기는 자연적 인간 속의 것들이다로부터, 특히 자연적 인간에 있는 일반적인 기억 속의 지식들이다; 그리고 “양념, 수지, 소합향”의 의미가 자연적 인간에 있는 선과 결합된 내면의 자연적 진리들인데, 아래에서 더 살핀다. 고대인들은 거룩한 예배에서 달콤하게 냄새를 풍기는 것과 냄새 좋은 것들을 사용했는데, 유향이나 향들이 이에 속한다; 그리고 그들이 기름부음을 위한 기름에도 혼합하여 사용했다. 그러나 실제의 제조 방법은 오늘날 알려져 있지 않은데, 그 이유는 고대인들이 예배에서 사용된 모든 것들은 천국들에 있는 영적이거나 천적인 것들에 근원을 두었다는 것, 그리고 그것들에 상응하고 있다는 것이 통째로 알려져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인간은 자신들을 천국의 것들로부터 대단히 멀리 옮겨 놓았다, 그 대신 자연적, 세상적, 육체적인 것들에는 대단히 가까이 옮겨 놓았다, 하여 인간은 영적, 천적인 존재에 관련하여서는 매우 희미함 안에, 심하게는 부정적인 자세로 일관한다.
유향과 향들이 고대인들 사이에서 거룩한 의식들에 사용된 이유는 냄새가 지각에 상응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향긋한 냄새, 즉 다양한 종류의 향료들 같은 것은 선으로부터의 진리, 또는 선행으로부터의 신앙의 것을 지각함에서 가지는 감사함과 만족함에 상응한다. 하여 다른 삶에서 주님으로부터의 선한 기쁨이 있을 때면 언제든지 지각 자체가 냄새들로 바뀐다. “양념(향료), 수지, 소합향”에 의해 각각 의미함에 관한 것은 그것들이 언급되는 다른 페이지들에서 살필 것이다. 여기서는 세 가지 모두에 공통되는 일반적 측면만 살피는데, 이것은 자연 평면에 있는 내면의 진리들을 의미하나 그것들 안에 있는 선으로부터 이다; 그 이유가 진리들 자체가 자연 평면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진리들을 수단으로 선을 만들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자연 평면의 다양함들은 선과 결합된 진리의 품질에 따라서, 결과적으로 선의 품질에 따라서 이다; 그 이유가 선은 진리들로부터 선의 품질을 가지기 때문이다. “길르앗”은 외면의 선을 의미하는데, 이 선은 감각으로부터 있고, 쾌락(pleasure)이라 불리운다, 그리고 “이집트”에 의해서는 좋은 의미에서일 경우, 외면의 선에 상응하는, 또는 이 선에 일치하는 자연적 인간의 외적 진리들인 기억 속의 지식들이 의미된다, 그러므로 이런 향품들을 낙타에 싣고 이집트로 운반하는 길르앗으로부터 오는 이스마엘 사람들에 의해 의미되는 것은, 그들이 자기들 고유의 기억 속의 지식들로부터의 내면의 진리들을 이집트에 의해 의미된 기억 속의 지식들쪽으로 운반했다 이다. 내면의 진리들은 외면의 진리들로부터의, 또는 기억 속의 지식들로부터의 결말들이다; 그 이유가 자연적 인간의 기억 속의 지식들은 어떤 것에 관하여 결말들을 끌어내기 위한 수단들을 제공한다, 고로 내면의 것들을 바라보고 있다; 이와 마찬가지 방법에서 우리들은 누군가의 용모에서 그의 마음을 바라본다, 또는 그의 눈빛의 파장 안에서, 그의 음성의 음질 안에서, 그의 제스츄어나 행동 안에서 그의 마음을 바라본다.
이런 진리들을 수단으로 인간의 자연 평면이 완전해지고 수정되기에, 이런 종류의 향료로 치료됨이 있다; 예레미야서에서 수지에 관하여:
길르앗에는 수지 나무(balsamic gum)가 있지 않던가? 거기에 의사가 있지 않던가? 그런데 왜 내 백성의 치료가 오르지 않는가? (예. 8:22).
다시:
길르앗으로 올라가라, 그리고 유향을 가져오라, 오 이집트의 딸아; 헛되이 너는 약들을 불렸다; 너를 위한 치료는 없다 (예. 46:11).
다시:
바빌론이 갑자기 붕괴되고 박살났다, 그녀 위에 아우성소리가 있다, 그녀의 고통을 위해 수지를 가져오라, 그렇게 하여 그녀는 치료될는지 모른다 (예. 51:8).
이와 같은 사항들이 영적 의미를 가지는 것은 아주 분명하다. 계시록서에서:
그리고 땅의 상인들이 그녀를 위하여 슬퍼하고 애곡할 것이다, 그 이유는 자기들의 상품을 사는 자는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그 상품은 금과 은, 그리고 귀한 돌과 진주들, 그리고 고운 아마포와 심홍색 (옷감), 그리고 비단과 주홍색 (옷감), 그리고 각종 향나무(thyine wood), 각종 상아 그릇, 귀한 재목, 그리고 놋쇠와 철, 그리고 대리석으로 만든 그릇들. 그리고 계피와 향, 그리고 연고와 유향, 그리고 포도주, 그리고 기름, 그리고 고운 곡식가루와 밀, 그리고 가축과 양, 그리고 말들, 그리고 병거, 그리고 인간의 몸들과 혼들이다 (계18:11-13);
위의 것들 각각이 주님의 왕국과 그분의 교회 안에 있는 것을 의미하지 않았으면, 결코 이렇게 지루할 정도로 특별하게 일일이 열거되지 않았을 것이다; 즉 이 단어들은 의미 없이 나열된 상품 목록이 아니다는 말이다. 다 아는 바, “바빌론”은 주님을 예배함에서 비껴서서 자기를 예배하는 이들, 그리고 거룩한 외적인 것들을 예배하면서 한편으로 거룩한 내적인 것들을 모독하는 이들이다; 그러므로 그들의 상품들은 그들이 자기 숭배를 위해 교묘하고 끈질기게 창안한 것들, 그리고 자기들 입맛에 맞게 악용한 말씀으로부터의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들과 교리들이다. 고로 여기서 언급되는 세부 사항들은 특별한 것들이 의미된다, “심홍색”, “향”, “연고”에 의해서는 선으로부터의 진리들이 의미되나, 여기서는 그것들에 관련하여 악용한 진리들과 악으로부터의 거짓들이 의미된다.
이와 비슷한 것이 에스겔서에서 두로의 상품에 관련하여 있다:
유다와 이스라엘의 토지는 무역상들이다; 민닛의 밀, 과자(Pannag), 꿀과 기름, 수지인데, 이것으로 그들은 거래했다 (겔. 27:17);
위에서도 “수지(향유, balsam)”는 선으로부터의 진리가 의미된다. 그러나 모든 말씀 단어 하나하나, 점 하나도 모두 거룩하다 말하면서도 위와 같이 내적 의미의 설명을 들을 때, 그들은 말씀 속에 내적 의미가 있다는 것을 믿지 않고 싶어 딴짓을 하는 이들에게, 위에 인용된 구절들에서 등장하는 단어들은 안에 아무것도 담지 않은 그릇, 벌거벗은 단어에 불과할 것이다; 그럼에도 그들 말대로 단어들은 거룩해서, 그 안에 신성이나, 천적인 것, 또는 영적인 것들을 담고 있다.

그것들을 이집트로 운반하려 내려가고 있었다. 이는 기억 속의 지식들 안에서의 가르침을 의미한다. 이는 “이집트”의 의미가 기억 속의 지식들이다로부터; 그리고 “그것들”인 “양념, 수지, 소합향”에 의해서는 이방인 같은 단순한 선 안에 있는 이들의 기억 속의 지식들로부터의 내면의 진리들이 의미된다, 그러므로 “그것들을 그쪽으로 운반하여 감”은 가르침에 있는 것이다가 의미된다. 이에 대해 더 주목하면 이렇다: “이집트”에 의해 의미되는 기억 속의 지식들은 영적 삶에 도움이 되는 것들, 그리고 이것들은 영적 진리들과 상응한다. 그 이유가 이전에는 고대 교회가 이집트 지역에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이 마술로 변해진 뒤, 영적인 것들을 악용한 기억 속의 지식들이 “이집트”에 의해 의미되었다. 이로부터 말씀 안에서 “이집트”는 좋은 의미에서와 반대적 의미에서의 기억 속의 지식이 (시리즈에 따라) 의미하게 되었다. 여기서는 좋은 의미에서 일 경우이다. 이집트에 의해 의미된 기억 속의 지식들로부터의 진리들은 진짜 교회로부터의 기억 속의 지식들에 의해, 고로 이 지식들 안에서 가르침을 받는 수단에 의해서가 아닌 여느 다른 수단으로는 정정되거나 건전하게 만들어지지 않는다. 이것이 여기서 의미되어 있다.

그리고 유다는 그의 형제들에게 말했다. 이는 선이다면 무엇이든지 반대하는 교회 안의 타락된 자를 의미한다. 이는 “유다”의 표현함이 좋은 의미에서는 천적인 사랑으로부터의 선, 그러나 반대 의미에서는 선이면 무엇이든 모든 선에 반대하여 있는 것을 의미하는데, 아래에서 살핀다. 그리고 그의 “형제들”의 의미가 분리된 신앙 안에 있는 교회에 있는 이들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여기서 유다에 의해 선이면 무엇이든 반대하는 이들이 표현되는 이유는 좋은 의미에서는 말씀에서 천적 사랑의 선 안에 있는 이들이 표현되기 때문이다. 천적 (수준의) 사랑은 주님을 사랑함과 이 사랑에서 파생된 이웃을 향한 사랑이다. 이 사랑 안에 있는 이들은 주님과 최고로 가깝게 결합되어 있다; 그러므로 그들은 가장 안쪽의 천국 안에 있다; 이 천국은 순진의 상태 안에 있다, 고로 여기 있는 이들은 이런 순진의 상태로부터 어린 아이로서, 형체에서는 전체적으로 사랑들로서 여타 다른 천국들에게 나타난다. 다른 이들은 그들에게 가까이 갈 수 없다, 그러므로 그들이 다른 이들에게 보내어질 때, 그들은 다른 천사들에 의해 에워싸이게 된다, 이리하여 에워싼 이들을 수단으로 그들의 사랑의 기운은 경감되어지는데, 이렇지 않으면 정작 그들이 보내진 영역에 있는 이들이 그들로 해서 졸도해버리고 만다. 그 이유가 그들의 사랑의 기운은 뼈골까지 꿰뚫기 때문이다.
천적이라 불리우는 이 사랑, 또는 이 사랑의 선이 좋은 의미에서 유다에 의해 표현되어진다, 마찬가지로 반대 의미에서 천적인 선에 반대되는 이들이 표현되어진다, 고로 선이라면 무엇이든 반대하는 이들이 표현된다. 말씀에 있는 대부분의 것들은 두 겹의 의미를 지닌다, 즉 좋은 의미와 이에 반대되는 의미이다. 좋은 의미로부터 이에 반대되는 의미 역시 알려진다; 그 이유가 반대 의미에서 포함되는 것은 무엇이든 좋은 의미의 것과 직반대되어 있다.
사랑으로부터의 선들은 일반적으로는 둘이 있다, 천적 사랑의 선과 영적 사랑의 선이다. 천적 사랑의 선에 직반대되는 것이 자기 사랑으로부터의 악이다; 그리고 영적 사랑의 선에 직반대되어 있는 것이 세상을 사랑함의 악이다. 이 악은 자기를 사랑함의 악 같이 모든 선에 직반대 되어 있지는 않다. 유다에 의해서는 반대 의미에서 자기를 사랑함에 있는 이들이 표현되고, 이스라엘에 의해서는 세상을 사랑함에 있는 이들이 표현된다. 이런 이유는 유다에 의해 주님의 천적 왕국이, 이스라엘에 의해서는 주님의 영적 왕국이 표현되었기 때문이다.
지옥들 역시 위 두 사랑들에 따라 구분되어진다. 자기를 사랑함에 있는 이들은 무슨 선이든 모두 반대하는 바, 가장 깊은 지옥 안에, 그러므로 가장 비통한 지옥들에 있다; 그러나 세상을 사랑함에 있는 이들은 무슨 선이든 지에 꼭 반대하는 것은 아닌 바, 아주 깊은 지옥들 안에 있지는 않은 바, 상대적으로 덜 비통하다.
자기를 사랑함의 악은 일반적으로 생각하기에는 외적 뽐냄인 교만이라 불리우는 정도가 아니고, 이웃을 향한 증오, 복수하려 불타는 바램, 잔인함으로 기뻐함이다. 이것들은 자기를 사랑함의 내면들이다. 이 사랑의 외면들은 자신과 비교해 타인을 경멸함, 영적 선 안에 있는 이들을 혐오함이고, 때로는 뽐냄, 교만으로, 때로는 이런 것 없이도 그 모습을 드러낸다; 이런 증오심에서 이웃을 붙드는 자는 내면적으로는 자신 외에 아무도 사랑하지 않고 있다; 그런데도 그들은 이웃과 하나로 결합하고 있다고 간주한다; 고로 그들은 자기로부터의 단 하나의 목적을 위하여 자신 안에서 이웃을, 이웃 안에서 자신을 사랑하고 있다. [6] 이와 같은 상태가 반대적 의미에서의 유다에 의해 표현되고 있다. 유태 국가는 처음부터 이런 사랑 안에 있어 왔다; 그들은 온 세상의 모든 이들을 천박한 노예들로, 그리고 자신들에 비교하건대 무가치한 자들로 간주했고; 그들을 증오함 안에서 붙들고 있었다. 더욱이 자기를 사랑함과 세상을 사랑함이 상호적으로 결합하지 않았을 때, 그들은 자신들의 협회나 형제들까지 비슷한 증오로 박해했다. 이 기질은 이 나라와 여전히 남아 있다; 그러나 그들이 묵인 아래 외국의 토지들에서 거주하기 때문에, 그들은 이런 그들의 사랑을 감추고 있다.

우리가 우리의 형제를 죽이고 그 피를 덮는다 한들 그것이 무슨 이득이 있을까? 이는 만일 이것이 완전히 소멸된다 해도 이익도, 유명해지는 것도 아무것도 없을 것임을 의미한다. 이는 “무슨 이득이 있을까?”의 의미가 이득도 유명해질 것도 아무것도 없을 것이다로부터, 이는 아래에서 살핀다; 그리고 “죽이다”의 의미가 여기서는 신성한 진리를, 특별하게는 여기서 “형제”인 요셉에 의해 뜻해진 것, 즉 주님의 신성한 인간을 소멸하는 것이다로부터; 그리고 “피를 덮는다”의 의미가 통째로 거룩한 진리를 감추여지게 하는 것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런 것들에 관련되는 경우가 어떠한지는 아래에서 분명해진다.
여기서의 “이득(gain)”이 이익과 유명해짐 뿐만아니라, 또는 “무슨 이득이 있을까?”가 이득과 유명해짐에 관하여 아무것도 있지 않을 것을 의미하는 이유는 이것이 물욕, 또는 탐욕으로부터 말해졌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이득의 물욕과 탐욕은 그것 내부에 온 세상을 소유할 뿐만 아니라 약탈과 자기들을 위하여라면 누구이든 죽이기까지 하는 것도 바라는 것을 가지고 있다; 실로 이를 방해하는 법들이 없다면 이런 물욕의 몰아침은 살인도 마다 하지 않을 것이다. 더욱이 이런 인간이 금이나 은을 소유하는 자신을 놓고서는 힘에서 가장 위대한 자로 간주하기까지 한다, 어쨌든 이런 자도 외형적 나타남에서는 자기 내부와는 다르게 나타날는지 모른다. 그리하여 이것은 오히려 탐욕에 있는 것이 세상을 사랑함 뿐만아니라 자기를 사랑함, 심지어 자기를 사랑함의 가장 더러운 것까지도 보여준다. 심보가 더럽게 탐욕하는 이들 안에 있는 뽐냄, 교만은 바깥쪽으로는 그렇게까지 눈에 띄게 있지 않은데, 그 이유는 부를 나열하는데 별로 관심 없는 듯하게 때로는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쾌락과 통상적으로 결합하는 자기를 사랑함의 종류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이런 것은 육체에 관하여, 식품이나 의복에 거의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지상의 것들로부터 통째로 있는 사랑, 돈 외에 다른 목적이 없는 사랑, 여느 다른 것보다 돈을 소유함 자체를 믿는 것이 실제적이지는 않으나 잠재성으로 있는다. 이로부터 분명한 바, 탐욕 안에 가장 낮고 비열한 자기를 사랑함이 있다는 것, 그런 이유로 다른 삶에서 탐욕자들은 돼지떼 사이에서 나타난다; 그리고 그들은 무엇보다 선이면 무엇이든 반대하고 있다. 결과적으로 그들은 짙은 어둠 안에 있어 그들은 선한 것과 진리인 것을 볼 수가 없다; 그들은 사후 인간에 속하는 어떤 내적인 것도 전혀 납득할 수가 없다; 오히려 사후 삶을 말하는 이들을 그들은 심정에서 비웃는다.
유태 나라가 시작에서 이런 본성 속에 있었다, 그러므로 그들에게는 어떤 내적인 것도 열리어지는 것이 불가능했는데, 이는 구약 성경의 말씀으로부터 분명해진다; 그리고 그들은 자기를 사랑함의 가장 나쁜 종류에 뿌리를 내렸다. 그들은 내면의 선들과 진리들을 더럽힌다, 고로 여느 사람보다 그것들을 더 모독한다, 고로 탐욕을 수단으로 그들은 내적인 것들로부터 아주 멀리 있어야 하고, 그 덕분에 짙은 어둠에 싸여 있어야 한다. 그 이유가 그들이 인정하지 않는 만큼이라도 모독할 수 없게 해주기 위함에서 이다. 이런 이유로 주님께서 그들에 관해 말하신다, “너희는 너희 아버지로부터 악마이다, 그리고 너희 아버지의 바램을 너희는 행동하기를 뜻한다. 그는 시작으로부터 살인자였다.” (요. 8:44); 그리고 유다 이스가리옷 (가롯 유다)에 관하여, 그는 유태 교회를 표현했는데, “내가 너희 열둘을 뽑지 않았더냐? 그리고 너희 중의 하나는 악마이다” (요. 6:70). 이스가리옷 유다 역시 주님을 팔므로 해서 “가서 요셉을 팔자”라고 말한 본문의 유다와 같은 것을 표현하고 있다.

가서 우리가 그를 이스마엘 사람들에게 팔자. 이는 단순한 선 안에 있는 이들은 그것을 인정함을 의미한다. 이는 “판다”의 의미가 자신들로부터서는 멀리함(소원해짐), 고로 다른 이들에 의해서 받아지는 것이다로부터, 이것이 진리를 서술할 때, 여기와 같이 그들에 의해 인정되어짐을 표시한다; 그리고 이스마엘 사람들의 표현함이 단순한 선 안에 있는 이들이다로부터 알려진다. 단순한 선 안에 있는 이들은 신성한 진리를 인정한다는 것, 특히 주님의 신성한 인간에 관한 신성한 진리를 인정한다는 것은 앞에서 이미 살폈다.

그리고 우리의 손을 그에게 대지 말자. 이는 그들은 책임질 일 없이 있을런지 모른다를 의미한다. 이는 “누군가에게 손을 놓지 않음”의 의미가 폭력을 제공하지 않음이다로부터; 그리고 폭력을 제공하지 않기 때문에 그들은 책임질 없이 있을런지 모른다를 표시하게 된다. 이것은 아래 구절에서도 의미되어진다.

그 이유가 우리의 형제요, 우리의 살이기 때문이다. 이는 그들로부터 있는 것이 받아졌기 때문에를 의미한다. 이는 “형제”의 의미가 선으로부터의 혈족 관계이다로부터; 그리고 “살”의 의미가 양쪽 의미, 즉 좋은 의미, 반대 의미 모두에서 누군가의 자기 자신, 고로 그것이 받아들여졌음 인데, 그 이유는 교회 속에 있는 이들로부터 이고, 이것이 단순한 선 안에 있는 이들에 의해서 받아들여지게 되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이스마엘 사람들은 단순한 선 안에 있는 이들을, 요셉의 형제들은 선행으로부터 분리된 신앙 안에 있는 교회를 표현하기 때문이다. 단순한 선 안에 있는 이들은 주님의 인간이 신성이심을 인정하고, 또한 인간이 구원되어지는 것은 선행의 일이 행해져야 하는 것을 인정한다. 물론 분리된 신앙에 있는 이들이 이를 모르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모든 이 앞에서 신앙만을 이라고 표면적으로 주장하지 않는다, 게다가 단순한 선에 있는 이들 앞에서는 거의 주장하지 않는다; 더욱이 그들은 상식적 논리 앞에서 감히 그들의 교리를 내놓지 않는다, 그 이유는 그렇게 했다가는 자신의 위엄과 이익 모두가 감소할 것이 불보듯 뻔하기 때문이다. 만일 그들이 이런 진리들을 부정한다고 말할 것 같으면, 단순한 선 안에 있는 자가 그들을 두고 그들은 어리석다고 말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단순한 선에 있는 이들은 사랑이 무엇인지를, 사랑의 이들이 누구인지를 알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것들로부터 분리된 신앙이 무엇인지를 모른다. 신앙을 옹호하는 논쟁은 일들에 반대되어 있다, 그리고 주님의 인간과 신성을 구분함에 관하여도 그들은 자기들이 납득 못하는 궤변이라 부른다. 그러므로 신앙만에 있는 이들이 자기들도 받아들여지게 하기 위하여 자기들의 주장을 소극적 태도 안에 놓는 식으로 기꺼이 양보하는 것도 서슴치 않는다. 그 이유가 이런 진리들이 소멸되는 것이야말로 자기들의 명예와 이득에 도움될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의 형제들은 그에게 귀기울였다. 이는 승낙함을 의미한다.

그리고 거기를 사람들, 미디안 사람들, 상인들이 지나갔다. 이는 이 선으로부터의 진리 안에 있는 이들을 의미한다. 이는 미디안 사람들의 표현함이 단순한 선으로부터의 진리 안에 있는 이들이다로부터; 그리고 “상인들”의 의미가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들을 가진 이들이다로부터; 그 이유가 이것들은 영적 의미에서는 “부자”, “재물”, “상품”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장사하는 것”은 이런 지식들을 포획하고 교통하는 것이다. 여기서의 경우는 선에 관한 지식들이 아니고 진리에 관한 지식들이 의미된다; 그 이유가 “미디안 사람”은 단순한 선으로부터의 진리 안에 있는 이들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이 “사람들(men, veri, 남자들)”이라 불리우기 때문, 이들 또한 진리들 안에 있는 이들이라 불리우기 때문이다. 역사적 시리즈로부터 보건대, 요셉이 이스마엘 사람들에게 팔리워졌는데, 그를 구덩이에서 끌어낸 것은 미디안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마지막 구절을 읽으면 이집트에서 보디발에게 판 이들도 미디안 사람들이었다. 아마 성경을 읽는 많은 이들이 상상하는 것은 요셉을 이집트에서 판 이들이 이스마엘일 것이다는 것, 그러나 성경은 미디안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 이유가 내적 의미에서 요셉, 즉 신성한 진리는 선 안에 있는 이들에 의해서는 팔리울 수 없고 선으로부터의 진리 안에 있는 이들에 의해서만 팔리워져야 하는데, 이에 대한 설명은 그 구절로 미룬다.

그리고 그들은 구덩이에서 요셉을 끌어내 들어 올렸다. 이는 최소한 거짓 가운데에는 있지 않을 것 같은 그들로부터의 도움을 의미한다. 이는 “끌어내 들어 올림”의 의미가 자유해 있는 것, 고로 도움을 제공하는 것이다로부터; 그리고 “구덩이”의 의미가 거짓들이다로부터. 여기서 끌어내 들어 올림이 도움을 제공함인 이유는 진리는 선을 돕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힘은 진리쪽에 있기 때문, 하여 선은 진리를 수단으로 힘을 발휘하기 때문이다; 더욱이, 거짓이 알려지는 수단이 진리이다, 고로 누군가가 거짓들 사이에 있지 않기 위하여 진리의 도움을 받는다. 그러므로 요셉을 구덩이에서 끌어 올린 이들은 미디안 사람들이고, 그를 산 이들은 이스마엘 사람들인 것이다.

그리고 요셉을 이스마엘 사람들에게 팔았다. 이는 단순한 선 안에 있는 이들에 의해 받아짐, 그리고 분리된 신앙 안에 있는 이들의 부분과는 멀어짐을 의미한다. 이는 “팔다”의 의미가 요셉의 형제인 분리된 신앙에 있는 이들의 측면에서는 멀어지고, 이스마엘 사람들인 단순한 선 안에 있는 이들의 측면에서는 받아지는 것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은 이십에. 이는 평가를 의미한다. 이는 “20”의 의미가 내면의 인간 안에 주님에 의해 저장된 선과 진리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것이 리메인스(remajns)라고 불리운다, 고로 거룩한 선 또는 진리, 여기서는 거룩한 진리인데, 그 이유가 “은 이십 조각”이라 말해지기 때문; “은”은 진리이다. 똑같은 숫자가 거룩하지 않은 것도 의미하는데, 그 이유는 말씀에서 사용되는 표현은 양쪽 의미를 지니기 때문, 따라서 반대 의미인 경우, 신성한 진리를 멀리한 이들 측면에서는 거룩하지 않은 것, 그러나 이 진리를 받은 이들 측면에서는 거룩한 것을 의미하게 된다. 고로 요셉의 형제들 측면, 즉 분리된 신앙에 있는 교회인들 측면에서는 거룩하지 않은 것, 그러나 이스마엘 측면, 즉 단순한 선 안에 있는 이들 측면에서는 거룩한 것을 표시한다. 이것이 평가에 의해 뜻해진 것들이다.
“20”이 거룩하지 않은 것도 의미하는 이유는 “20”은 리메인스를 표시하기 때문이다. 그들의 내면의 인간 안에서 선과 진리에 관한 리메인스를 가지지 않고, 그 대신 악과 거짓을 지닌 이들 안에서 이 거룩함은 거룩함이 아니고, 악과 거짓의 종류에 따라 더러운쪽이든지, 모독함쪽이든지 한다. “20”이 거룩하지 않은 것 역시 표시함을 말씀에서 찾아 볼 수 있다:
내가 보았는데, 날고 있는 두루마리가 바라보였다. 그리고 그가 나에게 말했다, 너는 무엇을 보느냐? 그리고 나는 대답했다, 저는 날고 있는 두루마리를 봅니다; 그것의 길이는 20엘, 넓이는 10엘이다. 그때 그가 나에게 말했다, 이것은 온 땅의 얼굴 너머로 가고 있는 저주이다 (슥. 5:1-3).
학개서에서:
누군가가 포도주즙틀로부터 50을 퍼올리려고 포도주즙틀에 왔다, 거기에 20이 있었다. 나는 폭파함으로 너를 칠 것이다, 그리고 흰가루병으로 네 손의 모든 일을 (칠 것이다)
(학. 2:16, 17).
위 구절들에서 “20”은 거룩하지 않은 것, 불결한 것, 모독한 것을 표시한다. 20세 이상의 모든 이들은 광야에서 죽게 된 것(민. 14:29; 32:11)은 햇수에서 20 이상인 것은 불경한 것을, 20 이하는 거룩한 것을 표현했다.

그리고 그들은 그를 이집트로 데리고 갔다. 이는 기억적 지식으로부터 상담함을 의미한다. 이는 “이집트”의 의미가 기억 속의 지식들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리고 신성한 진리가 기억 속의 지식들에게로 가져다 놓일 때, 이것은 그것들과 상담하는 것이다; 그 이유가 앞에서 보여준 바대로 요셉에 의해 신성한 진리가 표현되기 때문이다. 기억 속의 지식들로부터 신성한 진리에 관하여 상담함에 의해 뜻해진 것에 관하여는 더 설명이 있어야 할 것 같다. 신성한 진리에 관하여 기억 속의 지식들로부터 상담하는 것은 그것이 그런지를 그것들로부터 보는 것이다. 이렇게 보게 되는 것은 양면을 지닌다. 먼저 진리가 진리임을 확인하는 긍정적 측면이 있다; 이들은 기억 속의 지식들과 상담할 때 (즉 기억 속의 지식을 자료로 삼아 검토할 때), 그것들을 수단으로 진리를 확증하는 바, 그들의 신앙은 강화된다; 그러나 부정적인 측면도 발생한다; 즉 부정적 측면에 있는 이들이 기억 속의 지식으로부터 상담할 때, (빌미를 교묘히 만들어) 진리를 더욱 거짓쪽으로 몰아붙이는 것이다. 이것은 모든 인간의 지적 능력에 따라 있다. 만일 보다 높은쪽인 내면의 통찰력을 지니지 않은 이들이 기억 속의 지식들의 의견을 듣는다면, 그들은 그것들 안에서 진리의 확증을 보지 못한다, 그러므로 그들은 부정적인 쪽으로 기억 속의 지식들에 의해 끌려가진다; 그러나 내면의 통찰력을 지닌 이들은 확증을 보게 되는데, 이들이 보는 방법이 상응을 수단으로 하는 것이다.
인간은 사후 산다는 진리가 있다. 이 진리가 과연 진정한지를 놓고, 부정적 측면에 있는 이들이 기억 속의 지식의 의견을 듣는다면, 그들은 셀 수 없는 잡다한 생각들에 의해 이 진리에 반대되는 확증을 하게 된다. 예를 들면, 짐승들도 별반 차이가 없이 산다는 것, 즉 감각을 지니고 행동하고, 때로는 이 감각이 인간의 것보다 더 정밀하기도 한다는 것; 인간이 일반 동물보다 한 수 위에 있는 이유는 그가 성숙해질 때 획득하는 것들 때문이다는 것; 따라서 넓은 측면에서 볼 때 인간은 동물의 한 종류일 뿐이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외에도 많은 그들의 생각이 더 있다. 어쨌든 이렇게 부정적 측면에 있는 이들은 결국은 자신들을 거짓들 쪽으로 내던진다. 하여 끝내 그는 영원한 삶에 관련되는 것은 무엇이든 아무것도 믿지 않는다.
그러나 이 진리에 관하여 긍정적 측면에 있는 이들이 기억 속의 지식의 의견을 들을 때, 그는 그것들을 수단으로 자신을 확증한다, 그리고 이것 역시 셀 수 없이 많다; 그 이유가 그들은 자연에 있는 많은 것들은 인간 아래 있다고 본다; 짐승들은 본능으로부터 행동한다는 것, 한편 인간은 이성으로부터 행동한다는 것, 짐승들은 아래쪽만을 볼 수밖에 없으나, 인간은 위쪽을 볼 수 있고, 생각함을 수단으로 그는 영계의 것들을 납득하고, 그것들에서 감명을 받는다는 것, 그리고 사랑을 수단으로 하느님 자신과 결합되기까지 한다는 것, 그리하여 신성으로부터의 생명을 자신에게 어울리게, 자신의 것이 되게 한다는 것; 그리고 질서 안에서 인도되고 승강되는데, 아주 늦은 만숙에 이른다는 것을 안다. 더욱이 그는 자연에 속한 것 이 외의 모든 것에서도 확증을 발견한다, 마지막 그는 천국 왕국의 표현물을 보편적 속성 안에서 발견한다.
잘 알려진 공통적인 것은, 학식자들이 단순한 이들보다 사후 삶을 덜 믿는다는 것; 일반적으로 신성한 진리들에 대해서도 덜 명료하게 본다는 점이다. 이런 이유가 발생하는 것은 그들이 기억 속의 지식에 의견을 구하기 때문이다는 것이다. 즉 학식자들이 단순한 자들보다 대부분이 더 많은 기억 속의 지식들을 가지고 있어 부정적인 견지를 구축하기가 더 용이하기 때문이다. 그것 때문에 그들은 더 높은, 또는 내면의 것으로부터의 통찰력을 자신들 안에서 파괴한다. 하여 그들은 천국의 빛으로부터는 더 이상 어떤 것도 볼 수 없고, 단지 세상의 빛으로만 볼 뿐이다; 그 이유가 기억 속의 지식들은 세상의 빛 안에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만일 이것들이 천국의 빛에 의해 조명을 받지 못하면, 그것들은 제아무리 자신들에게 다르게 나타날지라도 어둠을 야기할 뿐이다. 이런 이유로 단순한 이들은 주님을 믿었으나, 유태 나라에서 학식 있다는 부류인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들은 믿지 않았다. 즉:
그들이 이 말들을 들은 많은 무리들이 말했다, 이 분은 진정으로 예언자이시다. 다른 이들은 이분은 그리스도 (메사아)이시다고 말했다. 바리세인들이 그들에게 대답했다, 통치자들이나 바리 새인 중의 누가 그를 믿느냐? (요. 7:40, 41, 47, 48).
그리고 누가복음서에서:
예수께서 말하셨다, 저는 오 아버지여, 하늘과 땅의 주님, 당신에게 고백합니다, 당신은 슬기롭고 총명하다는 이들로부터는 감추이게 하시고, 아기들에게 밝히 보이셨습니다 (눅. 10:21);
“아기(baby)”는 단순한 자를 표시한다. 마태복음서에서도:
그러므로 나는 비유로 그들에게 이야기를 한다; 그 이유는 그들이 보고도 보지 못하고, 듣고도 듣지 못하며, 깨닫지도 못하기 때문이다 (마. 13:13)

그리고 르우벤은 구덩이로 돌아 왔다. 이는 일반적인 측면에서 교회 속의 신앙을 의미한다. 이는 르우벤의 표현함이 일반적 측면에서 교회의 신앙을 고백함이다로부터; 그리고 “구덩이”의 의미가 거짓들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러므로 르우벤이 구덩이로 되돌아 옴은 일반적인 교회의 신앙이 분리된 신앙에 속하는 거짓들을 바라보려고 왔다가 의미된다.

그리고 보라, 요셉이 구덩이에 있지 않았다. 이는 어떤 신앙도 더 이상 있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이는 요셉의 표현함이 신성한 진리이다로부터 분명해진다; 그리고 이것이 “구덩이”로 의미된 거짓들 사이에서 나타날 때, 거기에는 더 이상 어떤 신앙도 없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그의 옷을 찢었다. 이는 크게 슬퍼함을 의미한다. 이는 “옷을 찢음”이 크게 슬퍼함, 즉 진리가 파괴되었기 때문에, 거기에 신앙이 없었기 때문에 크게 슬퍼함이다. 우리가 말씀에서 자주 읽게 되는 것 중 하나, 특히 역사적 부분에서, 어떤 인물이 옷을 찢는 광경이다; 그러나 이것의 근원은 오늘날 알려져 있지 않다, 그리고 이것이 잃어진 진리 때문에 있는 슬퍼함의 표현물이다는 것은 더 더욱 알려져 있지 않다. 이미 말했던 바 대로, 이런 행동은 “옷”이 진리를 의미했다는 사실로부터 표현물이 되었다. 더욱이 이 장에서 야곱이 자기 아들의 웃옷임을 인식했을 때, 그는 자기 옷을 찢었다고 말해지고 있다 (34절); 하여 이를 수단으로 진리가 파괴되었음에 슬퍼함이 의미되어 있다. 또는 말씀의 다른 장소에서의 몇 사건을 말해보면, 아시리아왕 산헤립이 보낸 랍사게가 예루살렘에 모욕을 퍼부었을 때, 이를 들었던 궁내대신 엘리야킴과 서기관 세바와 사관 요아가 자기 옷을 찢으며, 이 일들을 히즈키야왕에게 말했고, 이를 들은 히즈키야왕도 옷을 찢고 베옷을 걸쳤다 (이. 36:22; 37:1; 왕하. 18:37; 19:1). 랍사게가 내뱉은 모욕은 하느님, 왕, 그리고 예루살렘을 향한 것인 바, 이는 신성한 진리를 향한 것임은 이 대목들의 내적 의미로부터 더 분명해진다.
여후디가 예레미야가 쓴 책을 왕 앞에서 읽었을 때, 왕은 그 책을 불에 던졌다, 그리고 이 말씀의 낭독을 들은 왕과 그의 종들은 자기들 옷을 찢지 않았다 (예. 36:23, 24); 그들이 옷을 찢지 않음은 신성한 진리가 회복되지 않았을 때 슬퍼하지 않았다가 표시된 것이다
눈의 아들 여호수아와 여둔네의 아들 갈렙이 가나안 토지를 염탐한 자들의 악한 보고에 맞서 말할 때 그들은 옷을 찢었다 (민. 14:6); 이것도 같은 의미이다; 그 이유가 가나안의 토지가 주님의 왕국을 의미하고, 이 토지에 맞서 말하는 것은 신성한 진리에 맞서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궤가 불레셋인들에게 빼앗기고, 엘리의 두 아들이 죽임을 당하였을 때, 군인 중의 하나가 실로로 달려왔는데, 그는 자기 옷을 찢고 머리에 먼지를 뒤집어썼다 (삼상. 4:11, 12); 이는 신성한 진리와 신성한 선을 잃음에 통곡함이 의미되었다; 그 이유가 궤가 주님의 왕국을, 최고 의미에서 주님 자신을 표현하였기에, 이로부터 교회의 거룩함을 표현하였기에, 옷을 찢음은 신성한 진리를 잃음에 통곡함을; 머리에 뒤집어쓴 먼지는 신성한 선을 잃음에 통곡함이 의미되었다.
사무엘과 사울에 관해 이렇게 읽는다:
사무엘이 돌아서 갔을 때, 사울이 그의 웃옷 자락을 붙들자, 그것은 찢어져 나갔다. 그리고 사무엘이 그에게 말했다, 여호와께서 오늘 당신 위로부터 이스라엘의 왕국을 찢으셨다, 그리고 그것을 당신의 동료에게 주었다. 나는 네게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그 이유는 당신이 여호와의 말들을 거절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의 왕 위로부터 당신을 거절하셨다
(삼상. 15:26-28);
사울이 사무엘의 웃옷 자락을 찢음은 사무엘이 말한 것, 즉 왕국은 그로부터 몰수되는 것, 그는 이스라엘의 왕이 더 이상 아닐 것을 표현했다; 그 이유가 내적 의미에서 “왕국”은 신성한 진리를; 그리고 마찬가지로 “왕”과 “왕권”도 그러하다; 특별히 왕국과 이스라엘의 왕에 의해서는 주님의 왕국이 표현되었다. 마찬 가지로 여로보암과 예언자 아히야에 관련한 대목도 있다:
여로보암이 예루살렘 밖으로 나갔을 때, 그리고 예언자 아히야가 길에서 그를 발견했다, 그때 그는 새 옷을 입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 둘만이 들판에서 있었다, 아히야가 새 옷을 붙잡고 열두 조각으로 찢었다; 그리고 그가 여로보암에게 말했다, 당신이 열 조각을 가져가라; 그 이유가 고로 이스라엘의 하느님 여호와께서 말하신다, 잘 보라 나는 솔로몬의 손으로부터 왕국을 찢을 것이다, 그리고 너에게 열 지파를 줄 것이다 (왕상. 11:29-31).
사무엘하서로부터:
사울이 전쟁터에서 죽은 지 삼일 후 옷을 찢은 사람이 진영으로부터 왔다; 그리고 다윗이 사울의 죽음을 들었을 때, 다윗은 그의 옷을 붙잡고 그것들을 찢었다; 그와 더불어 있던 그의 신하들도 그렇게 했다 (삼하. 1:1, 2, 11)
위 구절에 의해 분리된 신앙에 있는 이들에 의해 신성한 진리가 내던져지고 잃은 것 때문에 슬퍼함이 표현되었다; 그 이유가 이미 말한 대로 신성한 진리가 왕권에 의해 의미되었다, 분리된 신앙에 있던 이들이 불레셋에 의해 표현되고, 그들을 수단으로 사울이 죽임을 당했다; 이는 같은 삼하 1장의 다윗의 애곡(17-27절)으로부터도 분명해진다.
압살롬이 그의 형제 암논을 죽였을 때, 그리고 그 소식이 압살롬이 왕의 모든 아들을 죽였다는 식으로 전해졌을 때, 다윗왕은 “자기 옷을 찢고, 땅위에 누웠다, 그리고 그의 신하들도 자기 옷을 찢으며 그 곁에 섰다” (삼하. 13: 28, 30, 31); 이 대목 역시 신성으로부터의 진리들이 파괴되었음을 표현하기 위하여 행해진 것이다, 신성으로부터의 진리들이 내적 의미에서 왕의 아들들에 의해 의미된 것이다. 다윗이 압살롬 앞에서 도망했을 때, 그는 자기 옷을 찢은 아렉 사람 후새를 만났다 (삼하. 15:32); 말씀에서 왕, 특히 다윗왕은 신성한 진리를 표현했다. 엘리야가 여호와의 말씀을 이스라엘 왕 아합에게 말하여, 그는 그가 행했던 악 때문에 절멸될 것이라고 했을 때, 그는 자기 옷을 찢고, 그의 살에 베옷을 걸쳤다 (왕상. 21:27).
옷을 찢거나 조각내는 것은 잃어진 진리 때문에 슬퍼함을 표현했다는 것이 아래 구절에 더 있다:
사제 힐기야가 여호와의 집에서 율법의 책을 발견하였다; 그리고 사반이 왕 요시아 앞에서 그것을 읽었다. 그리고 왕이 율법책의 말들을 들었을 때, 그는 그의 옷을 찢었다 (왕하. 22:11).
위 구절은 말씀, 즉 신성한 진리가 이토록 오랫동안 잃어진 채로, 심정과 삶에서 말살되어 왔기 때문에 옷을 찢음이 있었음이 분명하다. 주님께서 나는 그리스도, 하느님의 아들이다고 고백하셨을 때, 대사제가 자기 옷을 찢으며, 말하기를, 그가 하느님을 모독했다는 기록 (마. 26:63-65; 막. 14:63, 64)은 대사제가 주님이 말씀을 거슬러 말했다는 것, 그는 신성한 진리에 반대하여 말했다는 신앙 그 이상의 것은 없었음을 의미했다.
엘리야가 회오리바람 안에서 올라갔을 때, 엘리사가 그것을 보았고, 그는 자기 옷을 붙잡고 두 조각으로 찢었다; 그리고 그는 자기 앞에 떨어진 엘리야의 웃옷을 추켜들었다, 그리고 물을 쳤다, 그리고 강물은 이쪽, 저쪽으로 나뉘었다, 그리고 엘리사는 건넜다 (왕하. 2:11-14); 이때 엘리사가 자기 옷을 두 조각으로 찢은 것은 말씀(신성한 진리)이 잃어진 것을 슬퍼함 때문이었다; 그 이유가 엘리야에 의해 말씀, 즉 신성한 진리 측면에서의 주님이 표현되었기 때문이다. 웃옷 (튜닉)이 신성한 진리인 것은 이미 살핀 바 있다, 그러므로 이런 슬픔에서 찢은 옷(garment)은 튜닠(tunic)이었음은 위에 인용한 구절들로 분명해진다. “옷”이 교회의 진리를, 최고 의미에서 신성한 진리를 의미했기에, 그러므로 위와 같은 슬퍼함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옷을 찢음으로 불명예가 표현되기도 했는데, 즉 다윗의 신하들이 암논의 아들의 왕 하눈에 의해 턱수염이 반으로 잘리우고, 옷이 궁둥이까지에서 잘린 사건이 있다; 이로 인해 그들은 다윗에게 인정받지 못했다 (삼하. 10:4, 5).

그리고 그는 그의 형제들에게 돌아 왔다. 이는 가르치는 사람들을 의미한다. 이는 요셉의 형제들이 분리된 신앙 속에 있는 이들이다로부터; 그리고 그들은 목자들이었기 때문에, 신앙으로부터 가르치는 이들이기도 하다.

그리고 말했다, 이 아이가 없다. 이는 그 안에 신앙이 없음을 의미한다. 이는 “아이”의 의미가 신앙 속의 진리이다로부터, 그 이유가 진리가 “아들”에 의해 의미되기 때문, 고로 “아이”에 의해, 여기서 요셉에 의해 신성한 진리가 표현된다. 고대 교회에서 진리라고 불리운 것이 새로운 교회에 의해서는 신앙이라 불리우고 있다; 그러므로 “아이가 없다”에 의해서는 교회 안에 신앙이 없다가 의미된다.

그리고 나는, 내가 어디로 가야 할꼬? 이는 지금 교회는 어디에 있는가?를 의미한다. 이는 르우벤의 표현함이 일반적으로 교회의 신앙이다로부터; 그리고 르우벤이 자신을 두고 “그리고 나는, 어디로 가야 하는가?”라고 말하는 바, 이는 다른 표현으로 지금 교회는 어디에 있는가?이다. 천국적인 요셉이 있지 않는 곳에 교회는 없다는 것, 즉 신성한 진리 측면에서의 주님, 특별하게 말하면, 주님의 인간이 신성이시다는 신성한 진리, 그리고 선행은 교회의 필수이다는 것, 결과적으로 선행의 일은 필수적이다는 신성한 진리가 없으면 교회가 없는 것이다. 이는 앞에서 누누이 살피고 강조되어 왔다.
만일 이 신성한 진리, 즉 주님의 인간이 신성이심이 받아지지 않는다면, 필연적으로 따라 붙는 것은 삼위 (세 인물들)가 경배되어져야 하나, 그분의 인간은 경배되지 않는다, 그 이유는 신성이 아닌 인간은 경배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셋이 하나이다고 부른다 할지라도, 여전히 생각은 셋으로 구분하고 셋을 만든다, 오직 입만이 하나라고 말할 뿐이다. 그가 한분 하느님을 인정하고 믿는다고 말할 때, 그가 셋을 생각하지는 않는지를 그로하여금 자신 안에서 생각해보게 하자; 그리고 그가 아버지이신 하느님(성부님), 아들이신 하느님(성자님), 성령이신 하느님 (성령님)이라고 말할 때, 그리고 이를 세 인물들로 구분하고 기능 측면에서도 구분하는데, 한 분 하느님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가? 세 하느님들이 경배될 때, 교회는 어디 있는가?
그러나 주님만이 경배될 때, 주님 안에서 완전한 삼위가 있어, 그분이 아버지 안에, 아버지가 그분 안에 있는 바, 그분 자신께서 말하신다: “비록 너희가 나를 믿지 않을지라도 일들을 믿어라; 하여 너희는 아버지가 내 안에, 그리고 나는 아버지 안에 있는 것을 알고 믿을런지 모른다” (요. 10:38);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본 것이다; 빌립보야, 너는 내가 아버지 안에, 아버지가 내 안에 계신다는 것을 믿지 못하느냐? 내가 아버지 안에, 아버지가 내 안에 계시는 것을 믿어라” (요. 14:9-11); “나를 보는 자는 나를 보내신 그분을 보고 있다” (요. 7:45); “나의 모든 것은 당신의 것, 그리고 당신의 것은 나의 것입니다” (요. 17:10). 이때 기독인의 교회가 있다. 즉 주님께서 말하신 것 안에 거주할 때이다: 즉 “모든 명령들의 첫째이다, 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의 하느님은 한분 주님이시다; 그리고 너희는 네 모든 심정으로부터, 네 모든 마음으로부터, 네 모든 힘으로부터 주 너희 하느님을 사랑할 것이다; 이것이 첫째 명령이다; 그리고 둘째는 같다, 즉 이것, 너희는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이보다 더 위대한 명령은 없다” (막. 12:29-31). “주 우리의 하느님”이 주님이시다에 대하여는 다른 장소에서도 알는지 모른다 (마. 4:7, 10; 22:41-45; 눅. 1:16, 17; 요. 20:28), 또한 구약 성경의 “여호와”가 신약 성경에서는 “주님”이라 불리운다.
만일 이 신성한 진리가 교리에서와 생활에서 받아지지 않는다면, 즉 이웃을 향한 사랑, 그리고 이로부터 선행의 일들이 교회의 필수 요소가 되지 않는다면, 필수적으로 이어지는 것은, 교회에서 진정한 것을 생각하나 선인 것을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고로 교회인의 생각은 그 자체 반대적일는지 모른다; 즉 악인 것을 생각하며 동시에 진정한 것을 생각하는 것이다; 고로 악마와 더불어 악인 것을 생각하며, 주님과 더불어 진리를 생각할는지 모른다; 그럼에도 진리와 악은 전혀 일치되지 않는다, 그 이유는 “아무도 두 주인들을 섬길 수 없다, 그 이유는 그는 이쪽을 미워하고 다른쪽을 사랑할 것이기 때문이다 (눅. 16:13). 분리된 신앙이 이것을 건립하고 생활에서 이를 확증할 때, 제아무리 신앙의 열매들을 말한들, 교회는 어디 있는가?

31-35절. 그리고 그들은 요셉의 웃옷을 가져왔다, 그리고 염소 중에서 숫염소를 죽였다, 그리고 웃옷을 피에 담그었다. 32 그리고 그들은 여러 색깔로 된 웃옷을 보냈다, 그리고 그들은 그것을 그들의 아버지에게 가져왔다, 그리고 말했다, 이것을 우리는 발견했습니다. 그것이 당신의 아들의 것인지 아닌지 지금 알아보십시오. 33 그리고 그는 그것을 알았다, 그리고 말했다, 이것은 내 아들의 웃옷이다. 악한 들짐승이 그를 삼켰다. 요셉이 찢겨진 것이 확실하다. 34 그리고 야곱은 그의 옷을 찢었다, 그리고 그의 허리에 삼베옷을 둘렀다, 그리고 많은 날 동안 그의 아들 때문에 통곡했다. 35 그리고 그의 모든 아들들과 그의 딸들이 그를 위로하려고 일어났다. 그러나 그는 자신을 위로 받기를 거절했다, 그리고 말했다, 나는 통곡하면서 내 아들이 있는 무덤으로 내려가야 한다. 그리고 그의 아버지는 그를 위하여 울었다.

그리고 그들은 요셉의 웃옷을 가져 왔다. 이는 나타남을 의미한다. 이는 “웃옷”, 즉 다양한 색깔의 웃옷(tunic)의 의미가 진리의 나타남이다로부터. 이어지는 구절들에서 취급되는 주제는 그들이 범죄한 사악한 행위에 대해 무죄임을 증명함이다; 그리고 내적 의미에서 신성한 진리들에 맞서 거짓을 확증함, 그리고 이 확증함은 외관(나타남)들을 수단으로, 즉 이것은 말씀의 글자 의미로부터 추론함으로 표출되고 있다. 말씀의 글자 의미로부터 해석함에 의한 거짓의 모든 확증들은 나타남들 이고, 이로 인해 단순한 자들은 자칫 잘못 인도되기가 쉽고, 거짓이 진리로, 그리고 진리가 거짓으로 표출되는 것도 용이하다. 이 나타남들이 이어지는 구절들의 내적 의미에서 취급되어진다.

그리고 염소들 중에서 숫염소를 죽였다. 이는 기쁨들로부터의 외적 진리들을 의미한다. 이는 말씀 안에서 “염소들 중의 숫염소”의 의미가 자연적 진리들, 즉 생활의 기쁨들이 있는 외적 인간의 진리들이다로부터; 또한 외적 진리들은 기쁨들(delights)로부터 파생되어지는데 이후 살핀다. 외적 인간의 진리들, 이로부터 생활의 진리들이 있는데, 이는 말씀의 글자 의미 같은 신성한 진리들이다; 이 진리들로부터 진짜 교회의 교리물들이 파생된다; 이 진리들이 여기서 “숫염소”에 의해 의미된다, 그리고 그것들로부터의 기쁨들은 “염소들”에 의해 의미된다; 고로 “염소들 중의 숫염소”는 진짜 의미에서 이와 같은 진리들 안에 있고, 그 진리들로부터의 기쁨들 안에 있는 이들을 의미한다. 그러나 반대적 의미에서, “염소들 중의 숫염소”에 의해 외적 진리들에 있는 이들 (즉 글자 의미로부터 파생된 진리의 나타남들에 있는 이들)이 의미된다; 이 진리들은 자기들 생활 속의 기쁨들과 일치하여 있다; 고로 자기의 육체의 기쁨들인데, 일반적으로 쾌락(육체적 기쁨, pleasure)이라 불리운다; 이 쾌락은 보다 낮은 마음의 기쁨들이다; 예를 들면 명예, 이득 같은 것으로부터 얻어지는 기쁨들이다. 이런 것에서 기쁨을 가지는 인물들이 반대적 의미에서 “염소들 중의 숫염소”에 의해 의미된다. 한마디로, 이 의미에 있는 “염소들 중의 숫염소”에 의해 선행으로부터 분리된 신앙 안에 있는 이들이 의미된다. 그 이유가 이들은 자기들 생활과 일치하는 것, 즉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을 옹호하는 진리들만을 말씀으로부터 축출해내기 때문이다. 그들은 다른 진리들 마저 해석이라는 것을 수단으로 자신이 선발한 진리들에 일치하도록 가져다 놓는다. 그러므로 거짓들이 진리가 나타난 듯 하여 표출되고 있다.
“염소들 속의 숫염소”가 분리된 신앙에 있는 이들을 의미하는 구절은 아래에 있다:
보라 염소들 중의 숫염소가 온 땅의 얼굴들 위 서쪽으로부터 왔다, 그리고 땅에 닿지 않았다; 그리고 숫염소는 그의 눈 사이에 괄목할만한 뿔을 가졌다. 네 뿔들 중의 하나로부터 작은 뿔이 나왔다, 그리고 그것은 남쪽을 향하여, 그리고 동쪽을 향하여, 그리고 잘생김을 향하여 자랐다. 그렇다 그것은 하늘들의 군대에까지 자랐다; 그리고 군대의 얼마, 별들의 얼마가 땅으로 내던져졌 다, 그리고 그것들 위에서 짓밟았다; 그리고 이것은 진리를 땅으로 내던졌다
(단. 8:5, 9, 10, 12);
위에서 취급한 주제는 일반적인 교회의 상태인데, 이는 유태 교회 뿐만 아니라 이 교회의 뒤를 잇는 기독 교회의 상태까지를 다루고 있다; 그 이유가 주님의 말씀은 보편적이기 때문이다. 유태 교회의 측면에서, “염소들 중의 숫염소”는 내적 진리들로부터는 아무것도 만들지 않고, 자기들의 사랑을 옹호하는 만큼에서 외적 진리들을 받아들인 이들을 의미한다. 이 진리야말로 그들에게 가장 위대하고 가장 부유해짐으로 있을는지 모른다. 이렇게 말한 이유는 그들이 그리스도, 또는 메시아를 인식하되, 그들이 기대한 것은 단순히 왕의 차원에서, 자신들에게 왕이 된 다음, 자신들을 온 세상에 있는 나라나 민족 위에 우뚝서게 하고, 자기들 아래 모든 사람들이 노예 같은 신하로 있게 만들어 주는 왕이었다. 이것이 메시아를 향한 자기들 사랑함의 근원이었다. 그들은 이웃을 향한 사랑이 무엇이었는지 전혀 몰랐다; 단지 명예나 이득 같은 것을 나눈다는 차원에서 결합하는 정도에서 이웃이라는 것을 알았다.
기독 교회의 측면에서 “염소들 중의 숫염소”에 의해 기쁨들로부터 외적 진리들에 있는 이들, 즉 분리된 신앙에 있는 이들이 의미된다; 그 이유가 이들은 내적 진리들을 돌보지 않는 이들, 즉 관심이 별로 없는 이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만일 그들이 내적 진리들을 가르친다면, 성경 지식 차원에서 명성을 높이는 것, 하여 존경을 받는 것, 이득을 획득하는 만큼에서 일 뿐이다. (즉 맛보기 수준, 사탕발림의 수준이다는 말이다, 사실 그 이상은 그들 자신도 모르고 있을지 모른다 역자주.) 즉 이 기쁨들이 자기들의 입에서 진리들이 있는 동안 자기들의 심정에서 있다. 더욱이 잘못된 해석들을 수단으로 그들은 진짜 신앙으로부터 있는 진리들마저 자기들의 사랑들을 옹호하는 쪽으로 향하게 밀어 붙인다. 이는 위의 다니엘서의 말씀들의 내적 의미에서 의미된 것들로부터도 분명해진다; 즉 “염소들 중의 숫염소”에 의해 분리된 신앙에 있는 이들이 의미된다. 서쪽으로부터 오는 숫염소는 악으로부터 임을 표시한다. 온 땅의 얼굴 위에 오되 땅에 닿지 않음은 그가 온 교회 위에 왔다를 표시한다; 그 이유가 말씀에서 “땅”은 교회가 있는 토지, 고로 교회를 뜻하기 때문이다. 그가 가진 “뿔들”은 거짓으로부터의 힘들이다 (2832항). “눈 사이에 괄목할만한 뿔”은 신앙의 진리들에 관하여 추론함으로부터의 힘들이다. 이에 대하여는 눈에 관해 살핀 대목을 참조하기 바란다. “남쪽, 동쪽, 잘생김을 향하여 자란 뿔 하나”란 천국의 빛의 상태들인 것들을 향하여서 조차, 그리고 선과 진리의 상태들에 까지로 조차 뻗쳐가는 분리된 신앙으로부터의 힘이다. “남쪽”이 빛의 상태이다는 것; 그리고 “동쪽”이 선의 상태인 것; 그리고 “잘 생김”이 진리의 상태이다는 것도 말씀의 여기 저기로부터 알는지 모른다. 그것이 “하늘들의 군대에까지 자라고, 군대의 얼마, 별들의 얼마를 땅으로 내던졌다”란 그것(분리된 신앙)이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들을 가지고 그렇게 했다를 표시한다. 이로부터 ”진리를 땅으로 내던짐“에 의해 뜻해진 것을 알게 된다, 즉 진짜 신앙, 즉 선행을 내던짐이다. 신앙은 선행을 중요시 해야 하는데, 그 이유는 신앙이 선행으로부터 진행되기 때문이다. 고대 교회에서 진리라고 불리운 것이 새로운 교회에서는 신앙이라 불리운다.
“숫염소”가 이와 같은 의미를 가지는 것을 에스겔서에서 읽어보자;
보라 내가 작은 가축과 작은 가축 사이를, 숫양들과 숫염소들 사이를 판결한다. 너희가 좋은 초장을 먹은 것이, 그리고 남은 풀밭을 짓밟은 것이 너희에게는 작은 것이더냐? 너희가 맑아진 물들을 먹고, 그 나머지 물을 너희 발로 휘저어 놓는다; 너희는 뿔들로 유약한 모든 자들을 받아서 그들이 해외로 흩으려질 때까지이다. (겔. 34:17, 18, 21);
이 구절에서도 “숫염소들”에 의해 분리된 신앙에 있는 이들, 즉 생활 앞에 교리를 놓고, 결국 생활에 관하여는 주목하지 않는 이들이 의미된다; 그럼에도 생활, 그리고 교리가 분리되지 않을 때 인간을 만든다; 그리고 생활한 것은 사후 남는다, 그러나 교리는 그것이 생활에 가담하지 않았다면 남지 않는다. 이로부터 그들은 “좋은 초장을 먹고, 남은 초장을 발로 뭉개었다”라고 말해진다; 그리고 그들은 “맑아진 물을 마시고 남은 물을 발로 휘젖는다”라고 말해진다; 또한 “유약한 자들이 흩으러질 때까지 그들을 뿔로 받는다”라고 말해진다.
이로부터 지금 “숫염소들”에 의해 뜻해진 이들, 그리고 “양들”에 의해 뜻해진 자가 누구인지 분명해졌을 것이다. 마태복음서에서:
그분 앞에 모든 민족들이 모아질 것이다, 그리고 그분은 그들을 목자가 숫염소들로부터 양떼들을 분리하듯 서로로부터 그들을 분리할 것이다; 그리고 그분은 그분의 오른 쪽에 양떼들을, 그러나 왼쪽에는 숫염소들을 놓으실 것이다 (마. 25:32, 33);
“양들”은 선행 안에, 이로부터 신앙의 진리에 있는 이들이고, “숫염소들”은 비록 신앙의 진리에는 있을지라도 선행 없이 있는 이들, 즉 분리된 신앙에 있는 이들이다는 것은 세부 사항들로부터 분명하고, 이 안에서 그런 인물들이 묘사되어져 있다
분리된 신앙에 누가 있는지, 무슨 품질을 지녔는지, 그리고 “숫염소들”에 의해 뜻해진 것은 이 두 구절로 한 번에 보여질는지 모른다; 즉 “선한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모두 각각의 나무는 잘리워서 불에 던져진다. 그러므로 너희는 그들의 열매들을 수단으로 그들을 알게 될 것이다. 나에게, 주여, 주여, 말하는 모든 이가 천국들의 왕국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천국들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자가 들어간다. 그 날에 많은 이들이 나에게, 주여, 주여, 당신의 이름으로 예언하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당신의 이름으로 악마들을 내쫓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당신의 이름으로 능력있는 많을 일들을 행하지 않았습니까? 그때 나는 그들에게 나는 너희를 모른다 하고 고백할 것이다; 나로부터 떠나라 너희 불법을 일한 자들아” (마. 7:19-23). 그리고 누가복음서에서: “그때 너희는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며 이렇게 말하기를 시작할 것이다, 주여, 주여, 우리에게 여소서; 그러나 그분은 대답하여 너희에게 말할 것이다, 나는 네가 어디서 있는지를 모른다; 나로부터 떠나라 너희 불법의 일꾼들아” (눅. 13:25-27). 그러나 “숫염소”가 좋은 의미에서 의미하는 것, 특히 제물로 사용될 경우, 때로는 예언서들에서의 경우에 대하여는 차후 주님의 신성한 자비로부터 다시 살필 것이다.

그리고 그 웃옷을 피에 담갔다. 이는 그들은 그것을 악들로부터 온 거짓들로 더럽혔음을 의미한다. 이는 “피에 담그다”의 의미가 거짓들로 더럽히는 것이다로부터 분명해진다; 그 이유가 “피”는 반대 의미에서 거짓화된 진리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숫염소의 피인 바, 이를 수단으로 기쁨들로부터의 외적 진리들, 즉 분리된 신앙에 있는 이들이 가지는 진리들 같은 것이 의미되는 바, 이것이 악들로부터의 거짓들이 뜻해짐은 이어지는 구절의 야곱의 말들, 즉 “악한 짐승이 그를 삼켰다; 요셉은 정녕 갈기갈기 찢기운 것이 분명하다”로부터 확실하다; 그 이유가 이 말들에 의해 악의 물욕이 그것을 소멸되게 했다는 것, 고로 거짓들로부터 그것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었다가 의미되었기 때문이다. 거짓의 근원에는 셋이 있다; 즉 교회의 교리, 감각의 오류, 물욕으로부터의 생활인데, 마지막 것이 가장 지독하다.

그리고 그들은 여러 색깔로 된 웃옷을 보냈다. 이는 그러므로 해서 더럽혀져 나타남을 의미한다. 이는 “여러 색깔로 된 웃옷”의미가 나타남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들이 더럽혀져 있었다는 것은 피에 웃옷이 담가짐에 의해 뜻해진다.

그리고 그들은 그것을 그들의 아버지에게 가져다 주었다. 이는 고대인과 원시 교회 속의 선들과 진리들과 비교해봄을 의미한다. 이는 여기서 “아버지”인 야곱의 표현함이 고대 교회, 또한 원시 교회, 즉 시작 당시의 기독 교회이다로부터 알려진다. 이와 같은 웃옷을 이 교회에 가져오는 것은 내적 의미에서 진짜 교회의 선들과 진리들에 왜곡된 선들과 진리들을 비교함을 실시하는 것이다. 위에서 야곱이 고대 교회와 더불어 원시 교회, 시작때의 기독교회를 표현한다고 말한 이유는 모두가 내적 측면에서는 같고 오직 외형에서만 다를 뿐이어서이다. 고대 교회의 외적인 것들은 주님에 대한 표현물, 그리고 그분의 왕국의 영적, 천적인 것들에 대한 표현물, 즉 사랑과 선행, 이로부터 파생된 신앙에 대한 표현물이 전부이였다; 결과적으로 이와 같은 것들이 기독 교회 속에 있다. 고로 고대 교회의 외적인 것들, 또한 유태 교회의 외적인 것들이 벗겨질 때, 즉 포장을 풀면, 기독 교회가 드러나진다. 이것이 성전의 휘장이 갈라짐으로도 의미되었다 (마. 27:51; 막. 15:38; 눅. 23:45). 이런 이유로 아버지 야곱은 고대 교회, 뿐만아니라 원시 기독교회도 표현했다.

이것을 우리는 발견했습니다. 이는 이것이 그들에게 그렇게 나타난다를 의미한다. 이는 시리즈의 내적 의미로부터 알려진다; 그 이유가 그들은 이것이 요셉의 웃옷이라고 말하지 않고 그것을 발견했다고만 말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을 그의 아들의 것인지, 아닌지를 알도록 그 웃옷을 남겨두었다. 이로부터 이것은 그들에게 그렇게 나타나고 있다를 의미하게 되는 것이다.

바라건대 이것이 당신의 아들의 웃옷인지 아닌지 알아 보십시오. 이는 거기에 비슷함이 있었는지 여부를 의미한다. 이는 “그것이 무엇인지 여부를 아는 것”은 그것이 무엇과 비슷할지를 의미함에서 알게 된다. 이것은 앞에 진행된 것과 관련이 있고, 그리고 그것 뒤를 잇는다, 즉 비교해봄이 교회의 진짜 선들과 진리들과 왜곡된 선들과 진리들 사이에 실시되는 것이다; 이는 피에 담근 웃옷을 아버지에게 가져옴의 의미와도 의미가 상통한다. 그러므로 이 구절의 “당신의 아들의 웃옷인지를 알아보십시요”에 의해 그것이 무엇 같은지를 비교해보아야 함이 의미된다.

그리고 그는 그것을 알았다. 이는 참으로 그것이었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들은 요셉의 웃옷을 가져 왔다란 그것은 교회 속의 진리였음을 의미한다. 이는 “웃옷”의 의미가 교회 속의 진리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러나 그것이 더럽혀졌을 때, 그것은 [교회 속의 진리] 이었으나, 고대와 원시 교회의 것과 같은 진리는 아니었다; 그러므로 참으로 그것이었다라고 의미된다.

악한 들짐승이 그를 삼켰다. 이는 악 속의 탐욕들이 그것을 소멸시켰음을 의미한다. 이는 “악한 들짐승”의 의미가 탐욕들의 생명으로부터의 거짓말이다로부터; 결과적으로 탐욕들이다; 그리고 “삼키다”의 의미가 소멸시킴이다로부터, 그 이유는 교회의 진리를 서술하기 때문이다. 교회의 핵심 진리는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함이 제 일이 되는 것이다 (막. 12:29-31). 탐욕들이 이 진리를 소멸되게 한다; 그 이유가 탐욕의 생명에 있는 이들은 사랑과 선행의 생명 안에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이 두 생명은 정확히 반대되기 때문이다. 탐욕들의 생명은 자기를 사랑함에만 존재한다, 그리고 자기로부터, 또는 자기를 위하여가 아니면 이웃이 없다. 그러므로 이 생명 안에 있는 이들은 자기들 안에 있는 선행을 소멸되게 한다; 그리고 선행을 소멸한 이들은 주님을 사랑함 또한 소멸되게 한다; 그 이유가 선행 외에 주님을 사랑하는 수단이 없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주님은 선행 안에 계시기 때문이다. 선행에 애착함은 천국의 애착함 자체이고, 이는 주님만으로부터 오고 있다. 이상으로부터 악의 탐욕들이 교회의 핵심 생명을 소멸되게 한다는 것, 이 소멸을 위한 수단으로 고안된 것이 신앙이 구원함이라는 교리이다; 그리고 이것이 선행과 분리될 때, 진리 자체는 더럽혀진다, 그 이유가 이때는 선행이 무엇인지, 이웃이 무엇인지조차도, 결과적으로 인간의 내적인 것이 무엇인지, 천국이 무엇인지 등등이 더 이상 알려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인간의 내적인 것, 그리고 인간 안의 천국이 선행이기 때문, 즉 타인에게, 사회에, 나라에, 교회에, 주님의 왕국에, 주님 자신에게 호의적으로 기꺼이 해보려 함이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우리에게 오는 결말은, 필수적인 이런 것들이 알려지지 않을 때, 그리고 이 필수적인 것들에 반대될 때, 또는 탐욕이 우리를 통치할 때, 교회의 진리의 품질이 무엇일 것인지에 대하여 이다. 탐욕들의 생명이 이런 진리들에 관하여 말할 때, 진리가 더 이상 인식되지 않을 정도의 수준에서조차 더럽혀지지 않을까?
그가 선행의 선 안에 있지 않으면 아무도 구원될 수 없다; 다시 말해 그는 선행의 애착에 감명받아져 있어야 한다; 감명된 자는 타인에게 호의적일 수밖에 없고, 호의적 자세로 타인을 대한다. 선행에 있는 자만이 신앙의 진리를 받아서 자신의 것이 되게 할 수 있다. 이것은 천국에 있는 이들로부터 확실히 알았는데, 이들과 더불어 나는 대화하는 것이 허락되어졌다. 거기서는 모든 이가 자신들의 선행의 품질에 따른 선함과 아름다움과 더불은 선행의 형체들이다; 그들의 기쁨, 만족, 행복은 선의(호의, 친절, good-will)로부터 타인에게 선을 행할 수 있음으로부터 있게 된다. 선행으로부터 살아오지 않았던 이들은 천국과 천국의 환희(joy, 기쁨)가 호의적이려 애씀과 이로부터 적절히 잘 행함에 존재한다는 것을 아는 것이 가능할 수 없다; 그 이유는 그의 천국은 자신에게 잘 해주려는 태도 안에 있다고 생각하고, 이 생각으로부터 타인에게 적절히 행동하기 때문이다. 사실상, 이것이 지옥이다. 천국과 지옥은 이미 말한 대로 이런 사항으로부터 구별된다; 즉 천국은 선의로부터 선을 행함이고, 지옥은 악의(ill-will)로부터 악을 행함이다. 이웃을 향한 사랑 안에 있는 이들은 선의로부터 선을 행한다; 그러나 자기를 사랑함 안에 있는 이들은 악의로부터 악을 행한다. 이에 대한 이유는 이렇다, 즉 자신밖에 누구도 사랑하지 않는 이들은 자신 안에서 상대를 보는 만큼에서, 또는 상대 안에 자신이 들어 있는 만큼에서 타인을 사랑한다; 또한 그들은 이것들 안에 증오심을 담고 있어, 그나마 이런 상황에서 퇴조되자 마자, 기다렸다는 듯, 이 증오심은 튀쳐나온다. 이것은 흡사 강도들 같다; 그들은 약탈함이 성공되면, 서로를 죽이려는 바램을 심정에 품고 있다.
이런 사항들로부터 알게 되는 것은, 천국이 무엇인지, 그것은 이웃을 향한 사랑이다는 것; 지옥이 무엇인지, 그것은 자기를 사랑함이다는 것이다. 이웃을 향한 사랑에 있는 이들은 신앙의 모든 진리들을 받을 수 있다, 동시에 이 진리들에 감화되고 그 진리들을 자신으로 만든다; 그 이유가 이웃을 향한 사랑 안에 신앙의 모든 것이 있기 때문, 천국도, 주님도 그 안에 계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기를 사랑함 안에 있는 이들은 신앙의 진리들을 결코 받을 수 없다, 그 이유는 지옥이 자기 사랑 안에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기 영예와 이익을 위하여서가 아닌 여하한 방법으로는 신앙의 진리를 받지를 않는다; 고로 그들이 신앙의 진리들로 감동되어 자신의 것으로 만들리 만무하다; 그들이 감동되는 것은 신앙의 진리를 부정하는 때이다. 그들은 자신의 명예와 이득을 위한 형편상 입으로 신앙의 진리를 설파할 뿐, 심정으로는 천국과 지옥이 있는 것, 사후 산다는 것, 말씀으로부터 말해지는 모든 것, 고로 사랑과 신앙에 관한 모든 것마저 믿지 않는다. 이들이 예배드릴 때 그들 역시 자신들에게 믿는다고 나타난다; 그러나 이렇게 나타나는 이유는 그들이 어릴적부터 이런 믿음이라는 분위기에서 양육되어 왔기에 몸에 배어서 자동적으로 느끼는 믿음일 뿐이다; 따라서 이런 예배 분위기를 벗어나 자신 안에서 골몰해지면, 그는 아무것도 믿지 않는다, 고로 자기 사랑이 좋아하는 것쪽으로 고안해낸 삶을 따라간다, 게다가 이런 삶의 원리들을 그는 진리들이라 부른다, 더 나아가 이런 자기 삶의 원리를 뒷받침할 근거를 말씀의 글자 의미로부터 찾거나, 뾰족한 수가 없으면, 글자들을 이리저리 꿰맞추기도 한다. 하여 얼핏보면 성경의 몇 장 몇 절로부터 등등을 나열한 듯 해도 실상 이것의 출발지는 거짓들이다. 이런 것들이 분리된 신앙에서 출발한다는 말이다.
더욱이 알아야 하는 것은, 모든 것들은 사랑들 안에 있다는 점이다; 그 이유가 사랑들이 생명을 만들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주님의 생명은 사랑들 안으로만 흐르고 있다; 고로 사랑이 이러이러하면, 생명도 이러이러하다, 그 이유는 사랑이 생명의 그릇이기 때문이다. 이웃을 향한 사랑은 천국의 생명을 받는다; 이웃을 향한 사랑 안에 천국의 모든 것이 있다, 그리고 자기를 사랑함 안에 지옥의 모든 것이 있다. 모든 것들이 사랑들 안에 있다는 것은 자연계의 많은 것들로부터도 예증될는지 모른다. 동물들, 땅 위를 걷든, 공중을 날든, 바다에서 헤엄을 치든, 모두는 자기들의 사랑들에 따라 재촉되어진다; 그리고 그들의 생활에 도움이 되는 것은 무엇이든, 즉 자기들의 생계, 거처, 출산, 번식에 도움이 되는 것들은 그들의 사랑들 안으로 들어가 있는다. 그러므로 각 종류의 동물들은 자기들의 식품, 거처, 결혼에 관한 것, 즉 짝짓는 것, 둥우리를 짓는 것, 알을 놓는 것, 자기들의 새끼를 양육하는 것 등등을 알고 있다.
꿀벌 또한 작은 방을 어떻게 짓는지, 꽃으로부터 꿀을 어떻게 빨아야 하는지를, 그것을 벌집에 어떻게 채워야 하는지를, 겨울을 대비해 어떻게 꿀을 저장해야 하는지를 알고 있다, 그리고 여왕 아래 어떤 통치의 형태를 갖추어야 하는지 조차 알고 있다; 이 외에도 경이로움은 훨씬 많다. 이 모든 것들은 그들의 사랑들 안으로 유입을 수단으로 결과되어진다; 생명의 결과는 그들의 애착들의 형체들을 수단으로 다양해진다. 인간 역시 이 범주에 있는 바, 천국의 사랑 안에 있지 않은 것은 무엇이 있을까? 천국 안에 있는 것이 지혜와 총명의 모든 것이 아닐까? 이로부터도 선행 안에 있는 자 외에는 천국에 받아지지 않는다는 것, 선행으로부터 그들은 모든 진리들을 받는 수용력과 이 진리들, 즉 신앙의 모든 것에 감화될 수 있다. 그러나 이 반대적인 것은 분리된 신앙에 있는 이들, 즉 얼마 만큼의 진리들 안에 있으나 선행 안에 있지 않은 이들에게 발생한다. 다시 말해 그들의 사랑들은 자기들의 사랑, 즉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 일치하는 정도만큼에서만 받아들임 있다. 이와 같은 것은 지옥들이다.

요셉이 찢겨진 것이 분명하다. 이는 모두가 거짓으로부터 임을 의미한다. “찢겨 지다”의 의미가 거짓들로 해서 사라지다, 또는 모든 것이 거짓들로부터임 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악으로부터의 거짓들, 또는 탐욕들로부터의 거짓들이 여기서 뜻해진 것이다; 이에 관하여는 앞에 살핀 것도 다시 보기 바란다.

그리고 [야곱은] 그의 옷을 찢었다. 이는 파괴된 진리 때문에 슬퍼함을 의미한다.
이는 “옷을 찢음”의 의미가 파괴된 진리 때문에 슬퍼함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리고 삼베옷을 그의 허리에 둘렀다. 이는 파괴된 선 때문에 통곡함을 의미한다. 이는 “허리에 삼베옷을 두름”의 의미가 파괴된 선을 위하여 통곡함에 대한 표현이다로 알게 된다. 그 이유가 “허리”는 부부의 사랑, 그러므로 천적, 영적인 모든 사랑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은 상응으로부터 이다; 그 이유가 모든 기관, 사지, 내장 등의 신체 부위는 웅대한 사람에 상응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하여는 각 장의 끝을 참조하면 될 것이다. 이와 같이 허리도 웅대한 사람, 또는 천국과 상응하는데, 진짜 부부의 사랑 안에 있어 왔던 이들과 상응한다; 그리고 부부의 사랑이 모든 사랑들의 기초이고 근본되기에, “허리”에 의해서는 일반적으로 모든 천적, 영적 사랑이 의미된다. 이로부터 고대인들은 파괴된 선을 두고 슬퍼할 때 허리에 삼베를 둘렀다, 그 이유가 모든 선은 사랑 속에 있기 때문이다. 이 슬픔을 증명하기 위하여 허리에 삼베를 두르는 것에 대하여 말씀의 역사, 예언 부분에서 읽어볼 수 있다. 아모스서에서:
나는 너희 축제를 슬퍼함으로, 그리고 모든 너의 노래들을 애곡함으로 바꾸어놓을 것이다; 고로 나는 네 허리에 삼베옷을 두르게 할 것이다, 그리고 모든 이의 머리를 대머리가 되게 할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것을 독생자를 잃은 슬픔 같이 만들 것이고, 거기로부터 결국 쓴 날들 같을 것이다 (암. 8:10);
위에서 “허리에 삼베옷을 두름”은 파괴된 선들 때문에 있는 슬픔을 표시한다; “모든 허리”는 사랑의 모든 선들을 표시한다. 요나서에서:
니느웨 사람들은 하느님을 믿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단식을 선포했다, 그리고 그들의 가장 큰 자로부터 가장 작은 자까지 삼베옷을 입었다. 그리고 말씀이 니느웨 왕에게 왔을 때, 그는 그의 왕좌로부터 일어났다, 그리고 자기 위로부터의 도포를 내려놓고, 자기를 삼베옷으로 덮었다, 그리고 재 위에 앉았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선포했다, 사람과 짐승은 삼베옷으로 덮어지게 하라 (욘. 3:5-8);
위는 니느웨를 멸해지게 하는 악 때문에, 고로 파괴된 선 때문에 있는 슬픔을 표현하려는 표시임이 분명하다.
에스겔서에서:
그들은 자기들의 음성으로 네 위에 외쳐 발음할 것이다, 그리고 통렬하게 외칠 것이다, 그리고 먼지가 자기들 머리 위에 오게 할 것이다, 그들은 재에서 자신을 굴릴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너희를 위하여 자신들을 대머리로 만들 것이다, 그리고 삼베 옷으로 띠를 두를 것이다
(겔. 27:30, 31);
위는 두로를 두고 말해졌다, 세부 사항들은 거짓들과 악들을 위해 슬퍼함, 고로 파괴된 진리들과 선들 때문에 슬퍼함을 표현하고 있다. “외쳐 발음하고 통렬히 외치는 것”은 거짓, 또는 파괴된 진리 때문에 통곡함을 표시한다; “먼지가 머리 위에 오게 함”은 악 때문에 저주되었음을 표시한다; “재에서 자신을 굴림”은 거짓 때문에 지옥에 떨어짐을 표시한다; “자신을 대머리로 만듦”은 자연적 인간이 진리를 가지지 않았기 때문에 슬퍼함을 표시한다; “삼베옷으로 자신에게 띠를 두름”은 선을 가지지 않았기 때문에 슬퍼함을 표시한다. 예레미야서에서:
오 내 백성의 딸은 삼베옷으로 네 자신에 띠를 두르라, 그리고 재에서 네 자신을 굴려라; 너로 독생자의 슬픔을, 통렬하게 소리내어 울어라; 그 이유가 약탈자가 우리에게 갑자기 닥쳤기 때문이 다 (예. 6:26).
다시:
시온의 딸의 원로들이 땅에 앉을 것이다, 그들은 침묵할 것이다, 그들은 먼지가 자기들 머리에 오게 할 것이다, 그들은 삼베옷으로 자신들에 띠로 두를 것이다, 예루살렘의 처녀들은 그들의 머리를 땅으로 내려가게 할 것이다 (애. 2:10);
위 구절 역시 파괴된 선과 진리의 종류에 따른 비슷한 표현들이다.
이사야서에서:
모압에 관한 예언이다; 그들은 울려고 바윗과 디본으로, 높게 해놓은 장소 안으로 올라갈 것이다; 모압은 느보 때문에, 므드바 때문에 소리내어 악쓸 것이다; 모든 그의 머리들은 대머리이다, 모두 각각의 턱수염이 밀어졌다. 그의 거리들에서 그들은 삼베옷으로 띠를 둘렀다, 지붕꼭대기와 그의 거리들에서 그는 완전히 소리내어 악쓸 것이다, 울면서 아래로 갈 것이다 (이. 15:2, 3);
“모압”은 선들에 섞음질하는 이들을 표시한다. “모압”에 의해 의미된 이 섞음질함 때문에 있는 슬퍼함이 이 종류의 악에 상응하는 것과 같은 것으로 묘사되고 있다; 그러므로 거의 같은 것이 예레미야서에서 발생한다:
모든 머리는 대머리이다, 그리고 모든 턱수염은 밀려졌다; 손이 베어졌고, 삼베옷으로 허리를 둘렀다. 모압의 지붕꼭대기와 거리들에서 통째로 슬퍼함이 있다 (예. 48:37, 38).
히즈키야왕이 랍사게가 예루살렘을 향하여 뱉은 말을 들었을 때, 그는 자기 옷을 찢고, 자신을 삼베옷으로 덮었다 (이. 37:1; 왕하. 19:1);
그가 여호와를 향하여, 왕과 예루살렘을 향하여 말했기 때문에, 그러므로 슬퍼함이 있었다; 이것이 진리에 맞서 있었다는 것은 그가 자기 옷을 찢음에 의해 의미되었다; 그리고 이것이 선을 향하여 있었다는 것은 자신을 삼베옷으로 덮었다에 의해 의미되었다. 그 이유가 말씀에서 진리가 취급되는 곳에서는 선 역시 취급되어지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모든 세부 사항에서 선과 진리, 진리와 선의 천국의 결혼이 있기 때문이다; 다윗서에서:
당신께서는 나의 슬픔을 춤추는 것으로 바뀌게 하셨습니다; 당신은 내 삼베옷을 풀으시고, 나로 기쁨으로 띠를 두르게 하셨습니다 (시. 30:11);
위에서 “춤추는 것”은 진리들을, “기쁨”은 선들을 서술하고 있다. 이는 말씀의 다른 구절에서도 그러하다; 고로 “삼베옷을 푸는 것”은 파괴된 선 때문에 슬퍼함을 제거하는 것을 표시한다.
사무엘하서에서:
다윗이 요압에게, 그리고 자기와 더불어 있는 모든 백성에게 말했다. 너희의 옷을 찢어라, 그리고 너자신을 삼베옷으로 띠를 두르라, 그리고 아브넬 앞에서 통곡하라 (삼하. 3:31);
선하고 참된 것에 맞서 범해진 사악한 행위 때문에, 그들은 자기들의 옷을 찢고, 삼베옷으로 띠를 둘러야 한다고 다윗에 의해 명령된 것이다.
이와 같이 아합이 공평하고 정당한 것에 반대하여 행동했기 때문에, 그가 절멸할 것이라는 말을 엘리야에게서 들었을 때, 그는 자기 옷을 찢고, 그의 살 위에 삼베옷을 놓고, 단식했고, 삼베 위에 누웠고, 천천히 걸었다 (왕상. 21:27).
삼베옷이 파괴된 선을 서술한다는 것은 계시록서에서 분명해진다:
그가 여섯째 봉인을 떼었을 때에, 오 큰 지진이 있었다, 그리고 태양이 삼베옷 같이 검게 되었다, 그리고 달은 온통 피 같이 되었다 (계. 6:12);
“지진”은 선과 진리에 관련하여 교회의 상태의 바뀜을 표시한다; “태양”은 사랑의 선을 표시한다, 그리고 이 선이 파괴되었을 때, 삼베옷이 이를 서술한다; “달”은 신앙의 진리를 표시한다; 이 달을 피가 서술한다, 그 이유는 “피”가 왜곡되고 모독된 진리이기 때문이다.
삼베옷을 입고 재에서 굴름이 악들과 거짓들 때문에 통곡함을 표현했기에, 이것은 면목 없음도 표현한다, 따라서 회개함도 표현한다; 그 이유가 면목 없음의 제일 가는 항목은 자신에게는 악과 거짓밖에 없음을 인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똑같은 것이 회개의 진정한 것이다, 이것은 면목 없음을 통하여서만 결과되어진다, 다시 말해, 이것은 자신으로부터의 것이 고작 이런 본성 속에 있다는 것을 심정의 고백을 통하여 결과되어진다. 삼베옷을 두름이 면목 없음에 대한 표시이다에 대하여는 왕상. 21:27-29; 그리고 이것이 회개함 속에 있었다에 대하여는 마. 11:21; 눅. 10:13에서 살펴볼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이 표현물에 불과하고, 하여 오직 신체의 외적인 표시밖에 더 아무것도 없고, 심정으로부터의 내적인 것이 아닌 것에 대하여는 이사야서에서:
이것이 그의 머리가 큰고랭이(갈대) 같이 아래로 숙이는 것, 삼베옷과 재에 눕는 것이냐? 너희는 이것을 단식이라 부르고 여호와께서 열납하는 날이라 부르느냐? 이것은 내가 선택한 단식이 아니잖느냐? 사악한 자에게 묶여 있는 자를 푸는 것, 굶주린 자에게 빵을 떼는 것이 내가 선택한 단식이 아니냐? (이. 58:5-7).

그리고 많은 날 동안 그의 아들 때문에 슬퍼했다. 이는 상태를, 즉 파괴된 선과 진리 때문에 슬퍼하는 상태를 의미한다. 이는 “아들”인 요셉의 표현함이 신성한 진리, 특히 앞에서 살핀 진리이다로부터; 그리고 “날들”의 의미가 상태들이다로부터, 여기서는 크게 슬퍼함의 상태, 그 이유는 슬퍼함이 “많은 날”이라 말해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의 모든 아들들. 이는 거짓들에 있는 이들을 의미한다. 이는 “아들들”의 의미가 진리들, 반대 의미로는 거짓들, 또는 진리들, 또는 거짓들에 있는 이들이다로부터, 여기서는 거짓들에 있는 이들인데, 그 이유는 야곱의 아들들, 또는 요셉의 형제들에 의해 분리된 신앙에 있는 이들이 표현되었기 때문, 고로 신성한 진리를 소멸되게 한 이들, 고로 거짓들 안에 있는 이들이 의미되기 때문이다.

그의 모든 딸들이…일어났다. 이는 악 가운데 있는 이들을 의미한다. 이는 “딸들”의 의미가 선들이다로부터, 반대적 의미에서는 악들이다로부터, 또는 선들, 또는 악들 안에 있는 이들이다로부터 분명해진다.

그를 위로하려고. 이는 말씀의 글자 의미로부터 해석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위로함”의 의미가 어떤 것에 대한 희망을 수단으로 마음의 불편한 것, 슬픈 것을 가라앉히는 것, 여기서는 파괴된 선과 진리 때문에 슬퍼함, 또는 불편함이다; 그리고 이 슬퍼함이 말씀으로부터의 해석함들이 아니고서는 가라앉혀질 수 없기에, 그리고 야곱의 아들들과 딸들이 여기서 취급되기에, 이들에 의해 거짓들과 악들에 있는 이들이 의미되었기에, 그러므로 “위로함”에 의해서 글자의 의미로부터 만들어진 해석들이 의미된다. 그 이유가 글자 의미는 일반적인 것들을 가지기 때문, 이것들은 그릇들과 같아서, 진리 또는 거짓들로 채워질 수 있다; 고로 어떤 것을 옹호하기 위해 설명되어질 수 있다; 그리고 그것들이 일반적인 것이기 때문에, 그것들은 상대적으로 희미한 바, 내적 의미로부터 빛을 가지지 않으면 너무나 희미하다; 그 이유가 내적 의미는 천국의 빛 안에 있기 때문, 그리고 내적 의미는 천사들을 위한 말씀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글자 의미는 세상의 빛 안에 있고, 인간을 계발해주는 주님으로부터의 천국의 빛 안으로 오기 이전의 사람들을 위한 것이다. 따라서 글자 의미는 내적 의미 안으로 들어와 계발이 개시되기 이전의 단순한 이들에게 도움을 준다.
글자 의미로부터 해석함에 의해 말씀이 어떤 것을 옹호하는 쪽으로 설명하게 유도할 수 있다는 사실은 흔히 우리 주변에서 듣고 목격되기도 하는 수많은 종류의 독단적 교조, 이교들도 성경의 글자로부터, 또한 말씀의 글자로부터 확증을 갖는다는 사실로부터도 알게 된다; 예를 들면, 분리된 신앙도 주님의 아래 말씀을 가지고 확증되어진다:
하느님께서 세상을 심히 사랑하시어 그분은 그분의 독생자를 주셨다, 하여 그분을 믿는 자는 누구든지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가진다 (요. 3:16);
위 구절로부터, 또는 다른 구절들로부터도 결말을 볼 수 있는 것은 일들 없이 신앙만으로 영생이 주어진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신앙만에 집착해버리면, 주님께서 자주 말하신 것, 그분을 사랑함에 관하여, 선행과 일들에 관하여를 더 이상 주의하지 않는 쪽으로 유도되고 만다, 고로 이 요한복음의 구절에서 말해진 것쪽으로는 아니다: 즉 “받아들인 많은 이들, 그들에게 그분은 하느님의 아들이 되는 능력을 주었다, 그분의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조차 (주셨다). 이는 피로부터가 아니고, 인간의 의지로부터도 아니고, 하느님으로부터 태어나진 것이다” (요. 1:12, 13). 인간이 선행 안에 있지 아니하면 아무도 주님을 믿을 수 없다 라고 이들에게 말한다면, 그들은 곧바로 이런 해석들 안에서 피난처를 가진다; 즉 율법은 폐지되었다는 것, 우리는 죄악에서 태어난다는 것, 그러므로 우리 자신들로부터서는 선을 행할 수 없다는 것, 실행하는 이들은 자신들을 위하여 공적을 주장할 수밖에 없다는 것, 등등이다; 또한 그들은 말씀의 글자 의미로부터 이런 사항들을 확증도 한다, 마치 바리새인 과 세리의 비유에서 말해졌던 것으로부터 (눅. 18:10-14)와 다른 구절로부터 이다; 비록 이런 사항들이 위 경우 모두에 적용되지는 않을지라도 들이댄다면 변명조항으로 사용은 가능하다.
분리된 신앙 안에 있는 이들은 인간이 어떻게 살았든 은총으로부터 천국 안으로 입장될 수 있다는 것말고는 달리 믿을 수가 없다. 고로 사후 인간과 더불어 남는 것은 신앙 뿐이다. 이것을 그들은 말씀의 글자 의미로부터 확증할 수 있다. 사실상 말씀의 영적 의미 자체로부터 논리를 편다면, 주님은 모든 이를 향하여 자비를 가지신다, 고로 만일 천국이 자비 또는 은총으로부터 있고, 어떻게 살아왔느냐는 것과는 무관하다면, 모든 이가 구원된다는 논리가 됨에도 그들은 이에 대하여는 안하무인격인 태도를 보일 뿐이다. 분리된 신앙에 있는 이들이 그렇게 믿는 이유인즉, 그들이 천국이 무엇인지를 완전히 모르기 때문이다. 이렇게 모르는 이유는 선행이 무엇인지를 모르기 때문이다. 만일 그들이 얼마나 많은 평화와 기쁨, 행복이 선행 안에 있는지를 알았다면, 그들은 천국이 무엇인지를 알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사항들, 이에 대한 지식들이 그들로부터 온통 감추여 있다.
다시, 분리된 신앙에 있는 이들은 자기들이 육체와 더불어 다시 일어날 것이라는 방식 외에 달리 믿을 수가 없다. 그리고 이것은 오직 심판의 날에서 이다는 것이다; 그들은 이것도 글자 의미에 따라 설명하는 말씀의 많은 구절로부터 확증도 한다, 이런 확증과 동시에, 주님께서 말하신 부자와 나사로에 관한 말씀(눅. 16:22-31), 또는 그분이 강도에게 말하신 것, 즉 “참으로 내가 네게 말한다, 오늘 너는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눅. 23:43), 이 외에 다른 구절들에 대한 생각을 전혀 곁들이지 않는다. 신앙만에 있는 이들이 이렇게 믿는 이유는 만일 그들에게 육체는 다시는 일어나지 않는다 라고 말하면, 그들은 이런 식의 부활이라면 모두 부정한다; 그 이유는 그들은 내적 인간을 알지 못하고 납득하지도 못하는 바, 사후 내적 인간이 살아간다는 것, 선행 안에 있는 이들이 구원된다는 것, 그 이유는 내적 인간이 선행 속에 있기 때문이다는 것 또한 모르고 납득도 못한다.
분리된 신앙에 있는 이들은 선행의 일이란 가난한 자에게 주는 것, 불구자를 돕는 것 등등에만 존재한다고 밖에 달리 믿을 수가 없다, 게다가 이것을 말씀의 글자로부터 확실히 확증해 쥐고 있다. 그러나 선행의 일들이란 간단히 말해서 자신의 직업 분야에서 선하고 참된 것을 사랑함으로부터, 또는 올바르고 공평한 것을 사랑함으로부터, 올바르고 공평한 것을 행하는 것이다.
분리된 신앙에 있는 이들은 자기들의 특별난 교조를 확증하는 것밖에 다른 것을 볼 수가 없다; 그 이유는 그들은 내면의 통찰력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선행에 애착함 안에 있지 않은 이들은 외적 시각, 또는 보다 낮은 통찰력만을 가지는 바, 이로부터서는 더 높은 것들을 보는 것이 가능할 수 없다, 그 이유는 그들에게는 어둠 같이 더 높은 것이 나타날 뿐이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그들은 거짓들을 진리들로, 진리들을 거짓들로 본다, 고로 글자 의미로부터 해석함으로 해서 그들은 푸른 초장(선한 풀밭)을 짓뭉개고, 말씀의 신성한 샘의 맑은 물, 또는 말씀을 더럽힌다, 이 말씀들 같이 이다:
너희가 푸른 초장을 먹은 것, 그리고 너희 발로 남은 너의 초장을 짓뭉갠 것이 너희에게는 작은 일이더냐? 너희가 맑아진 물들을 마시고, 너희는 나머지 물을 너의 발로 휘저은다; 너희는 너희가 모든 유약한 자들이 해외로 흩어질 때까지 그들을 너희 뿔들로 치고 있다 (겔. 34:18, 21).

그리고 그는 자신이 위로되는 것을 거절했다. 이것은 있을 수 없었다를 의미한다.

그리고 그는 말했다, 나는 통곡하면서 내 아들에게로, 무덤으로 내려가야 할 것이다. 이는 고대 교회는 멸해질 것이다를 의미한다. 이는 야곱 자신이 자신에게 말하는데, 그가 고대 교회를 표현함으로부터 분명해진다; 그리고 여기서 “나의 아들”인 요셉의 표현함이 신성한 영적 평면, 또는 신성한 진리이다로부터; 그리고 “슬퍼하며 무덤으로 내려감”의 의미가 죽어짐이다. 그리고 이 죽어짐이 교회, 또는 신성한 진리를 서술할 때, 이는 멸해지다 이다.

그리고 그의 아버지는 그를 위하여 눈물을 흘렸다. 이는 내면의 슬퍼함을 의미한다. 이는 “눈물을 흘림”의 의미가 마지막 수준까지 이른 슬픔이다로부터, 고로 내면의 슬픔이다. 고대인들의 경우, 그들은 죽은 자를 놓고 외적 슬픔인 눈물을 흘림을 가지고 내면의 슬퍼함을 표현했다. 이에 대한 참고 구절로 아래를 읽어보자:
그들이 요단 건너인 아닷의 타작마당에 왔을 때, 그들은 크고 비탄에 잠겨 통곡을 했다; 그리고 그는 칠일 동안 자기 아버지를 위하여 슬퍼함을 만들었다. 그리고 토지의 주민, 가나안족이 아닷의 마당에서 슬퍼함을 보았다, 그리고 그들이 말했다, 이것은 이집트인들에게는 비탄에 잠기는 슬퍼함 이다 (창. 50:10, 11);
그리고 아브넬을 두고 다윗이 눈물을 흘림에 관하여:
그들은 헤브론에 아브넬을 매장했다; 그리고 왕은 그의 음성을 높혀 아브넬의 무덤에서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모든 백성이 울었다 (삼하. 3:32).

36절. 그리고 미디안 사람들은 그를 이집트, 바로의 신하, 친위대장 보디발에게 팔았다.

그리고 미디안 사람들이 그를 이집트에 팔았다. 이는 단순한 선으로부터의 어떤 진리 속에 있는 이들이 기억 속의 지식에 의견을 구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미디안 사람”의 표현함이 단순한 선으로부터의 진리 안에 있는 이들이다로부터; 그리고 “이집트”의 의미가 기억 속의 지식들이다로부터; 그리고 “판다”의 의미가 멀리하다 이다로부터; 그리고 요셉의 표현함이 신성한 진리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것이 단순한 선으로부터의 진리에 있는 이들에 의해 “이집트”인 기억 속의 지식들에게 팔리운다, 또는 멀어지게 된다 라고 말해질 때, 이것은 그들이 그것들에 의견을 구했음(상담했음)을 표시한다; 그 이유가 단순한 선으로부터 진리에 있는 이들은 자신들이 감각들의 오류들에 의해, 고로 이로부터 있는 기억 속의 지식들에 의해 아주 많이 인도되는 것을 허용하기 때문이다. (이를 이용하면 이상한 교파, 즉 논리상 맞지 않는 교리, 얼토당토 않는 교리, 한마디로 제멋대로 지껄이는 부흥 설교인데도 수많은 인파가 몰린다. 이때의 이 인파의 대다수가 미디안 사람, 즉 단순한 선으로부터 진리 안에 있는 자 일지 모른다. 역자주.)
28절에서 잠간 언급한 것은, 미디안 사람에 의해 요셉은 구덩이로부터 꺼내어졌고, 이스마엘 사람들에 팔리웠다; 이 정황으로 보건대, 요셉이 이집트에서 팔리려면 이스마엘 사람이어야 할 것이라 추정된다. 그러나 요셉이 이스마엘 사람이 아니고, 미디안 사람에 의해 팔리웠다고 기록된 이유는 이스마엘 사람이 단순한 선 안에 있는 이들을, 미디안 사람은 단순한 선으로부터의 진리 안에 있는 이들을 표현하기 때문이다. 요셉, 또는 신성한 진리는 선 안에 있는 이들에 의해서는 팔리울 수 없었다, 그러나 진리 안에 있는 이들에 의해서만 팔리울 수 있다; 그 이유가 선 안에 있는 이들은 신성한 진리가 무엇인지를 선으로부터 알고 있으나, 진리 안에 있는 이들은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교회인들은 대체로 두 종류로 구별된다; 즉 선 안에, 그리고 진리 안에 있는 이들이다; 선 안에 있는 이들은 천적 부류들이고, 진리 안에 있는 이들은 영적 부류들이다. 이 둘 사이는 큰 차이가 있다. 선 안에 있는 이들은 선을 위하여 선을 행함에 애착하는 이들이다; 게다가 다른 이들로부터 자기들의 선행에 어떤 보답을 기대함이 심정 속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들이 기대하는 보답이라면 자기들이 선을 행할 수 있게 허락되는 것이다; 그들은 이렇게 행함 안에서 환희(기쁨, joy)를 지각한다. 그러나 진리 안에 있는 이들 역시 선을 행함의 애착 안에 있다; 그러나 선 자체를 위하여서가 아니고, 선을 행함이 명령된 사항이기 때문에서이다. 게다가 대부분의 사람들이 보답을 기대한다; 그들의 환희는 이 보답으로부터, 그리고 영광됨으로부터 있어진다.
이상 살핀 결과, 분명해지는 것은, 선으로부터 선을 행하는 이들은 그것을 내적 애착으로부터 행한다는 것, 한편, 진리로부터 선을 행하는 이들은 그것을 얼마의 외적 애착으로부터 행한다는 것이다. 이로부터 차이가 분명해지는 것은, 전자는 내적 인간이다는 것, 후자는 외적 인간이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내적 인간인 이들은 요셉에 의해 표현되는 신성한 진리를팔 수 없다, 즉 멀리할 수 없다; 그 이유는 이들은 선으로부터 진리를 지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들은 감각들의 오류들, 고로 기억 속의 지식들에 인도당하지 못한다(끌려가지 않는다). 그러나 외적 인간인 이들은 그것을 팔 수 있고 멀리할 수 있다; 그 이유는 그들이 선으로부터 진리를 지각하지 못하고, 그것을 교리나 교리 선생들(목사들)로부터 알기 때문이다; 그리고 만일 그들이 기억 속의 지식에서 의견을 듣는다면, 그들은 오류들에 의해 한방에 자신들을 끌어가게 내놓는다; 그 이유가 그들이 내향의 명령(dictate)을 가지지 않고 있어서이다. 이런 이유로 요셉은 이스마엘에 의해 팔리우지 않고 미디안에 의해 팔린 것이다.

바로의 신하 보디발. 이는 내면의 기억 속의 지식들을 의미한다. 이는 신하 (chamberlain, 시종)의 의미가 내면인 것이다로부터, 이는 아래에서 말한다; 그리고 “바로”의 표현함이 기억 속의 지식들이다로부터; 그 이유가 “이집트”에 의해 일반적 측면에서의 기억 속의 지식들이 의미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로” 역시 같은 의미 선상에 있다; 그 이유는 말씀에서 토지, 나라에 의해 의미되는 것은 거기의 왕에 의해서도 의미되기 때문이다. 내면의 기억 속의 지식들이 “바로의 신하”에 의해 의미되는 이유는 신하 (시종)의 업무가 왕의 내무적인 것들에 연결되기 때문이다. 이 신하들은 신하들 중 더 뛰어난 자들인데, 이는 원어에서의 이 단어의 의미로부터도 분명해진다.

친위대장. 이는 해석을 위해 제일에 속하는 것들을 의미한다. 이는 제 일인 자(prince)의 의미가 제 일인 것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여기서 “친위 대장”이 해석을 위해 제일인 것을 표시하는 이유는 취급된 주제가 신성한 진리이기 때문이고, 이 진리가 단순한 선으로부터의 진리 안에 있는 이들이 기억 속의 지식들에 의견을 구함에 의해 팔리웠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말씀의 글자 의미로부터 해석함들 이다; 그리고 “친위대들(guards)”에 의해서는 섬기는 것들이 의미된다.

창세기 제 36 장

창세기 제 36 장

1. 그리고 이것들은 에서의 출생들이다; 그는 에돔이다. “그리고 이것들은 에서의 출생들이다”란 자연 평면에서의 주님의 신성한 선에 있는 갈래들을 의미한다. “그는 에돔이다”란 자연적인 것과 육체적인 것에 관련하여 있는 주님의 신성한 인간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것들은 에서의 출생들이다. 이는 자연 평면에서의 주님의 신성한 선에 있는 갈래들을 의미한다. 이는 “출생들”의 의미가 선과 진리의 갈래들이다로부터; 그리고 에서의 표현함이 자연 평면에서의 주님의 신성한 선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 선이 이 장에서 취급되는 주제이다; 그러나 이 선의 본질에 관하여서는 누구의 이해력에도 와닿지 못하고, 어떤 천사의 이해력에도 거의 와닿지 못하기에, 이 선에 관하여는 단지 이름들만을 수단으로 기술될 뿐이다. 그 이유가 에서에 의해 표현되어진 자연 평면에서의 주님의 신성한 선은 그분이 탄생하심으로부터 신성을 가졌던 것으로부터의 선, 이는 그분이 여호와로부터 임신되고, 그러므로 그분은 그분의 혼으로서 가지셨던 신성한 있으심을 탄생시로부터 가지셨는 바, 결과적으로 그분의 가장 깊은 생명으로서 가지셨던 선에 해당된다.
이 선이 그분께서 어머니로부터 입게 된 것을 수단으로 바깥쪽으로 옷입혀졌다; 그리고 이것은 선이 아니었고, 그 자체 악이었기에, 그러므로 그분은 그 악을 그분 자신의 힘으로, 특별히 시험들과의 전투를 수단으로 추방하셨다; 그리고 이 인간을 그분은 자신 안에서 새로이 만드셨다, 그 다음 그분은 그분이 탄생시로부터 가지셨던 선과 결합되게 하셨다. 야곱은 그분이 그분 자신의 힘으로 그분 자신에게 포획한 선을 표현했다, 이 내용들은 앞 장에 다루어져 왔다. 이것은 그분이 신성한 선과 결합시킨 선이다, 그리고 고로 그분은 자신 안에서 인간을 모두 신성으로 만드셨다. 에서가 표현한 선은 내적 경로로 해서 흘러들었다, 그리고 합리적 선을 통하여 자연 평면으로 흘렀다; 그러나 야곱과 이스라엘이 표현한 선은 외적 경로로 해서 흘러들었다, 그리고 신성이 합리적 선을 통하여 그것을 만나러 나갔다, 그러나 간접적으로는 합리성의 진리를 통하여 자연 평면으로 흘러들었다. 이삭은 이 합리적 선을, 리브가는 이 합리적 진리를 표현한다.

그는 에돔이다. 이는 자연적인 것과 육체적인 것에 관련하여 있는 주님의 신성한 인간을 의미한다. 이는 에돔의 표현함이 자연적 선 측면에서 주님의 신성한 인간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 선에 진리의 교리적인 것들이 인접하여 있다, 고로 자연적, 육체적 측면에 관련되어 있다. 그 이유가 교리적인 것들은 진리에 육체 같이 있다, 또는 영적 의미에서 자연적 진리가 육체적으로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에돔에 의해 자연적, 육체적인 것에 관련하여 있는 주님의 신성한 인간이 표현되고 있다. 교리는 진리가 구체화되어 있는 것과 같다, 그 이유는 교리는 그 자체로는 진리가 아니기 때문, 그러나 진리가 영혼이 육체 안에 있듯 교리 안에 있는 것이다.
이어지는 구절들 안에서 주님의 자연 평면에서의 신성한 선이 취급되나, 그것의 갈래들이 위에 상술한 이유로 해서 이름들만 기술되고 있다; 즉 이 선으로부터의 갈래들은 모든 이의 이해력을 초월해 있다, 천사의 이해력도 초월해 있다. 그 이유가 천사는 유한하기 때문, 유한한 것은 무한한 것을 납득하지 못한다. 그럼에도 이 장이 읽혀질 때, 이름들 안에 포함된 갈래들이 아주 일반적인 방법에서 주님으로부터 신성한 사랑의 유입을 수단으로, 그리고 신성한 선과 더불어 그들을 감동하게 하는 천적 불꽃을 수단으로 있는 유입에 의해 천사들에게 표출되어진다.
말씀은 작은 점에 이르기까지에 영감된 것이 없다고 믿는 자, 또는 각각의 시리즈가 신성한 사항들을 표현한다는 것 외에, 그러므로 천적, 영적인 것들을 표현한다는 것 외에, 각 단어가 이런 사항들을 의미한다는 것 외에 다른 방법으로 말씀은 영감된다고 믿는 자가 이 36장을 읽고 상상해버리고야 마는 것은 이것은 에서의 가계(족보) 그 이상의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말씀이라는 단어보다 더 포괄적 표현인 성경을 두고도 모두가 신성하다 라고 대체로 말하고 있는데, 그 안에 있는 이런 가계 기록은 무엇일까? 더 나아가 가계 안에 있어야할 신성은 무엇인가? 라고 생각해보아야 하지 않을까?

2-5절. 에서는 가나안의 딸들로부터 그의 여인을 데려왔다. 헷 족속 엘론의 딸인 아다, 그리고 히위 족속 시브온의 딸인 아나의 딸 오홀리바마, 3 그리고 이스마엘의 딸, 느비욧의 누이 바스맛이다. 4 그리고 아다는 에서에게 엘리바스를 낳았다, 그리고 바스맛은 르우엘을 낳았다. 5 그리고 오홀리바마는 여우스, 그리고 알람, 그리고 고라를 낳았다. 이들은 가나안의 토지에서 에서에게 출생한 그의 아들들이다. “에서는 가나안의 딸들 중에서 그의 여인을 데려왔다”란 자연적인 선이 가상적인 진리에 애착함과 첫 결합함을 의미한다. “헷 족속 엘론의 딸인 아다, 그리고 히위 족속 시브온의 딸인 아나의 딸 오홀리바마”란 고대 교회로부터 있었던 품질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스마엘의 딸, 느비욧의 누이 바스맛”이란 신성한 지주로부터의 진리에 애착함과 두 번째 결합함을 의미한다. “그리고 아다는 에서에게 엘리바스를 낳았다, 그리고 바스맛은 르우엘을 낳았다”란 거기로부터의 첫 갈래들을 의미한다. “그리고 오홀리바마는 여우스와 얄람과 고라를 낳았다”란 두 번째 갈래를 의미한다. “이들은 가나안의 땅에서 그에게 낳아진 에서의 아들들이다”란 주님의 왕국의 선으로부터를 의미한다.

여기서 취급된 주제는 주님께서 탄생 때로부터 주님 안에서 신성이었던 선, 그리고 이 선에 인간으로 탄생하시어 그분이 자신에게 획득한 진리와 선, 또한 이로부터의 갈래들이 결합함이다; 그리고 이미 말했듯, 이런 사항들의 본질은 누구의 이해력, 천사의 이해력에도 와닿지 못하게 초월해 있는 바, 이를 세부적으로 설명될 수는 없다. 더욱이 이 구절들은 단지 이름들 뿐이고, 이 이름을 수단으로 이 신성한 선이 그것의 갈래들과 함께 묘사되어 있다; 그리고 게다가 이름들에 빛을 드리우는데 한몫을 하는 역사적 의미를 여타 구절로부터 살펴봄 없이, 오직 이름만을 펼쳐보인다는 것은 오히려 의심만 조장할지 모른다; 그 이유가 설사 설명이 완벽하다 가정해도 실제의 것들이 말씀에 있는 이름들에 의해 의미된다는 것을 믿을 자가 거의 없을 것이다. 이런 이유로 나는 이 장의 내용들을 단지 복사하듯 베끼는 수준에서 머물 것이다, 그리고 납득력에 잘 적응될만한 일반적인 사항을 대략적인 윤곽의 수준에서 서술하고 말 것이다. 그 이유가 신성 안에 있는 것들은 누군가에게 결코 나타나지 않으나, 신성으로부터의 것은 각자의 이해력에 따라서 아주 일반적인 방법에서 나타난다, 이것 역시 오직 미미한 윤곽에서 일 뿐이다. 더 알고 있어야 하는 것은, 선 안으로 태어나는 인간은 없다는 것, 인간은 악 안으로 태어난다는 것, 즉 그의 아버지로부터는 내면의 악 안으로, 그의 어머니로부터는 외면의 악 안으로 태어난다는 것이다; 그 이유가 모든 이의 유전성은 악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님만이 아버지쪽에서는 선 안으로, 그리고 신성한 선 자체 안으로 탄생하셨다; 주님이 탄생된 이 신성한 선이 여기서 취급된다. 이것의 갈래들은 그분이 인간을 신성으로 만드셨을 때, 그리고 그분이 그것을 신성이 되게 하신 것을 수단으로 세상에 나타나게 출시되었다. 이러므로 해서 일반적 설명도 여기서 가능해 있는 것이다.

6-8절. 그리고 에서는 그의 여인들, 그리고 그의 아들들, 그리고 그의 딸들, 그리고 자기 집의 모든 혼들, 그리고 그의 획득물, 그리고 모든 그의 짐승, 그리고 그가 사들인 것들, 즉 그가 가나안의 토지에서 획득했던 것을 챙겼다, 그리고 그의 동생 야곱의 앞으로부터 어떤 토지로 떠나갔다. 7 그 이유가 그들의 물질은 함께 거주하기에는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이 체류하는 그 토지는 그들이 지닌 획득물 때문에 더는 지탱할 수 없었다.
8 그리고 에서는 세일 산에서 거주하였다. 에서인 그가 에돔이다. “그리고 에서는 그의 여인, 그리고 그의 아들들, 그리고 그의 딸들, 그리고 자기 집의 모든 혼들, 그리고 그의 획득물, 그리고 그의 모든 짐승, 그리고 그가 가나안 토지에서 획득한 것인 그의 구입 물품을 챙겼다, 그리고 그의 동생 야곱의 앞으로부터 어떤 토지로 떠나갔다”란 신성한 선에 속한 모든 것들과 천국에 상응되었던 것, 천국인 것으로부터 파생된 진리들을 의미한다. (표현을 위하여 야곱으로부터 물러나고 있다) “그 이유가 그들의 물질이 너무나 많아서…”란 무한함 때문에를 의미한다. “…그들이 함께 거주할 수 없었다”란 표현물들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들이 체류하는 그 토지는 그들이 가진 것 때문에 지탱할 수 없었다”란 모든 곳이 묘사될 수 없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에서는 세일 산에 거주하였다”란 자연적 선으로부터의 진리를 의미한다. “에서, 그가 에돔이다”란 주님의 신성한 인간을 의미한다.

9-14절. 이들은 세일 산에서의 에돔의 조상, 에서의 출생들이다. 10 이들은 에서의 아들들의 이름들이다. 엘리바스는 에서의 아내 아다의 아들이다. 르우엘은 에서의 아내 바스맛의 아들이다. 11 그리고 엘리바스의 아들들은 데만과 오말과 스보와 가담과 그나스이었다. 12 그리고 딤나는 에서의 아들 엘리바스의 첩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엘리바스에게 아말렉을 낳았다. 이들은 에서의 아내의 아들들이다. 13 그리고 이들은 르우엘의 아들들이다. 나핫과 세라와 삼마와 미사이다. 이들은 에서의 아내 바스맛의 아들들이었다. 14 그리고 이들은 에서의 아내, 시브온의 딸, 아나의 딸 오홀리바마의 아들들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에서에게 여우스와 얄람과 고라를 낳았다. “그리고 이들은 에돔의 조상 에서의 출생들이다”란 자연 평면에 있는 신성한 선에서의 갈래들을 의미한다. (“에돔의 조상”이란 여타 다른 것들이 갈라져 나오는 신성한 선이다) “세일 산에서”란 선으로부터의 진리들에 관하여를 의미한다.
“이들은 에서의 아들들의 이름들이다”란 갈래들의 품질을 의미한다. “엘리바스는 에서의 아내 아다의 아들이다, 르우엘은 에서의 아내 바스맛의 아들이다”란 선과 진리의 결혼으로부터 온 이 갈래들의 상태를 의미한다. “그리고 엘리바스의 아들들은 데만과 오말과 스보와 가담과 그나스였다”란 선으로부터의 첫 갈래들을 의미한다. “그리고 딤나는 에서의 아들 엘리바스의 첩이었다”란 그들을 섬기는 것들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녀는 엘리바스에게 아말렉을 낳았다”란 감각적인 것을 의미한다. “이들은 에서의 아내 아다의 아들들이다”란 두 번째 갈래를 의미한다. “그리고 이들은 르우엘의 아들들이다, 나핫과 세라와 삼마와 미사이다. 이들은 에서의 아내 바스맛의 아들들이다”란 세 번째 갈래들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들은 에서의 아내, 시브온의 딸, 아나의 딸 오홀리바마의 아들들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에서에게 여우스와 얄람과 고라를 낳았다”란 그와 동시에 있는 갈래를 의미한다.

15-19절. 이들은 에서의 아들들의 족장들이다. 에서의 장자 엘리바스아들들이다. 데만 족장, 오말 족장, 스보 족장, 그나스 족장, 16 고라 족장, 가담 족장, 아말렉 족장이다. 이들은 에돔의 토지에 있는 엘리바스의 족장들이다. 이들은 아다의 아들들이다. 17 그리고 이들은 에서의 아들 르우엘의 아들들이다. 나랏 족장, 세라 족장, 삼다 족장, 미사 족장이다.이들은 에돔의 토지에 있는 르우엘의 족장들이다. 이들은 에서의 아내 바스맛의 아들들이다.
18 그리고 이들은 에서의 아내 오홀리바마의 아들들이다. 여우스 족장, 얄람 족장, 고라 족장이다. 이들은 아나의 딸 오홀리바마로부터의 족장들이다. 19 이들은 에서의 아들들이다. 그리고 이들은 족장들이다. 그 자신이 에돔이다. “이들은 에서의 아들들의 족장들이다”란 선으로부터의 제 1의 진리들을 의미한다. “에서의 장자 엘리바스아들들이다. 데만 족장, 오말 족장, 스보 족장, 그나스 족장, 고라 족장, 가담 족장, 아말렉 족장이다”란 주님의 왕국 안에서 어떤 품질을 지닌 첫 번째 분류에 속한 것을 의미한다. “이들은 에돔의 토지에 있는 엘리바스의 족장들이다. 이들은 아다의 아들들이다”란 첫 분류된 것 속의 제 1의 진리들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들은 에서의 아들 르우엘의 아들들이다. 나랏 족장, 세라 족장, 삼다 족장, 미사 족장이다”란 천국 안에서 두 번째 분류된 것, 그리고 그들의 품질을 의미한다. “이들은 에돔의 토지에 있는 르우엘의 족장들이다”란 두 번째 분류를 의미한다. “이들은 에서의 아내 바스맛의 아들들이다”란 선과 진리의 결혼으로부터를 의미한다. “그리고 이들은 에서의 아내 오홀리바마의 아들들이다”란 세 번째 분류 속의 제 1의 진리들을 의미한다. “여우스 족장, 얄람 족장, 고라 족장이다”란 그들의 품질, 이로부터 주님의 왕국 안에서 그들의 품질인 것을 의미한다. “이들은 아나의 딸 오홀리바마로부터의 족장들이다”란 선과 진리의 결합으로부터 일어나는 제 1의 진리들을 의미한다. 이 열둘 족장들은 열두 지파와 같이 선을 수단으로 그들이 배열되고 있다. “이들은 에서의 아들들이다. 그리고 이들은 족장들이다”란 이들은 선으로부터의 진리들 속의 제 1의 것들이다. “그 자신이 에돔이다”란 주님의 신성한 인간 안에서를 의미한다.

20-28절. 이들은 그 토지의 거주민, 호리족 세일의 아들들이다. 로단과 소발과 시브온과 아나와 21 다손과 에셀과 디산이다. 이들은 에돔의 토지에 있는 세일의 아들들, 호리족의 족장들이다. 22 그리고 로단의 아들들은 호리와 헤맘이었다. 그리고 로단의 누이는 딤나였다. 23 그리고 이들은 소발의 아들들이다. 알완과 마나핫과 에발과 오남이다. 24 그리고 이들은 시브온의 아들들인데, 아야와 아나이다. 아나는 자기 아버지 시브온을 위해 나귀를 먹일 때에 광야에서 노새를 발견했다. 25 그리고 이들은 아나의 아들들이다. 디손과 아나의 딸 오홀리바마이다. 26 그리고 이들은 디손의 아들들이다. 헴단과 에스반과 이드란과 그란이다. 27 그리고 이들은 에셀의 아들들이다. 발한과 사아완과 이간이다. 28 이들은 디손의 아들들이다. 우스와 아란이다. “이들은 그 토지의 거주민, 호리족 세일의 아들들이다”란 그들의 순서대로 거기로부터 나온 진리들이다. “로단과 소발과 시브온과 아나와 다손과 에셀과 디산이다”란 그들의 품질을 의미한다. “이들은…세일의 아들들, 호리족의 족장들이다”란 이전의 선으로부터 오는 선 속의 주요한 진리들을 의미한다. “…에돔의 토지에 있는..”이란 주님의 신성한 인간 안에서를 의미한다. “그리고 로단의 아들들은 호리와 헤맘이었다. 그리고 로단의 누이는 딤나였다”란 진리의 두 번째 분류를 의미한다. “그리고 이들은 소발의 아들들이다. 알완과 마나핫과 에발과 오남이다”란 진리의 세 번째 분류와 그 품질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들은 시브온의 아들들인데, 아야와 아나이다”란 세 번째 분류와 품질을 의미한다. “아나는…광야에서 노새를 발견했다”란 기억 속의 지식들로부터를 의미한다. “…자기 아버지 시브온을 위해 나귀를 먹일 때에…”란 그가 기억적 지식 안에 있었을 때에를 의미한다. “그리고 이들은 아나의 아들들이다. 디손과 아나의 딸 오홀리바마이다”란 세 번째 분류와 그들의 품질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들은 디손의 아들들이다. 헴단과 에스반과 이드란과 그란이다”란 네 번째 분류와 그들의 품질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들은 에셀의 아들들이다. 발한과 사아완과 이간이다”란 네 번째 분류와 그들의 품질을 의미한다. “이들은 디손의 아들들이다. 우스와 아란이다”란 다섯 번째 분류와 그들의 품질을 의미한다.

29, 30절. 이들은 호리족의 족장들이다. 로단 족장, 소발 족장, 시브온 족장, 아나 족장, 30 디손 족장, 에셀 족장, 디산 족장이다. 이들은 세일 의 토지에 있는 그들의 족장들에 따른 호리족의 족장들이다. “이들은 호리족의 족장들이다”란 이어지는 것들로부터 온 주요한 진리들을 의미한다. “로단 족장, 소발 족장, 시브온 족장, 아나 족장, 디손 족장, 에셀 족장, 디산 족장이다”란 그들의 품질을 의미한다. “이들은 세일의 토지에 있는 그들의 족장들에 따른 호리족의 족장들이다”란 계속되는 것들에 있는 주요한 진리들을 의미한다.

31-39절. 그리고 이들은 거기서 어떤 왕이 이스라엘의 아들들을 다스리기 전, 에돔의 토지에서 통치했던 왕들이다. 32 그리고 브올의 아들 벨라가 에돔에서 통치했다. 그리고 그 성의 이름은 딘하바였다. 33 그리고 벨라가 죽었고, 보스라 사람 세라의 아들 요밥이 그를 대신하여 통치하였다. 34 그리고 요밥이 죽었다, 그리고 데만 족속의 토지의 후삼이 그를 대신하여 통치하였다. 35 그리고 후삼이 죽었다, 그리고 브닷의 아들, 즉 모압의 들판에서 미디안 족속을 쳐부순 하닷이 그를 대신하여 통치하였다. 그리고 그의 성의 이름은 아윗이었다. 36 그리고 하닷이 죽었다, 그리고 마스레가의 삼라가 그를 대신하여 통치하였다.
37 그리고 삼라가 죽었다, 그리고 (유브라데)강의 르호봇의 사울이 그를 대신하여 통치하였다. 38 그리고 사울이 죽었다, 그리고 악볼의 아들 바알하난이 그를 대신하여 통치하였다.
39 그리고 악볼의 아들 바알하난이 죽었다, 그리고 하달이 그를 대신하여 통치하였다. 그리고 그 성의 이름은 바우였다. 그리고 그의 아내의 이름은 메사합의 딸인 마드렛의 딸, 므헤다벨이다. “그리고 이들은… 에돔의 토지에서 통치했던 왕들이다”란 주님의 신성한 인간에 있는 제일의 진리들을 의미한다. “…거기서 어떤 왕이 이스라엘의 아들들을 다스리기 전…”이란 자연적 진리 안에서 내면의 영적인 것이 아직은 일어나지 않았을 때를 의미한다. “그리고 브올의 아들 벨라가 에돔에서 통치했다”란 첫 진리를 의미한다. “그리고 그 성의 이름은 딘하바였다”란 거기로부터 온 교리를 의미한다. “그리고 벨라가 죽었고, 보스라 사람 세라의 아들 요밥이 그를 대신하여 통치하였다”란 그것의 본질적인 것 같이 거기로부터 있는 것, 그리고 그것의 품질을 의미한다. “그리고 요밥이 죽었다, 그리고 …그를 대신하여 통치하였다”란 거기로부터 였던 것을 의미한다. “…데만 족속의 토지에서…”란 그것이 있었던 근원을 의미한다. “그리고 후삼이 죽었다, 그리고 브닷의 아들…하닷이 그를 대신하여 통치하였다”란 그 다음부터 였던 것을 의미한다. “모압의 들판에서 미디안을 쳐부순…”이란 거짓으로부터 순수해짐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의 성의 이름은 아윗이었다”란 그 다음부터 있는 교리적인 것들을 의미한다. “그리고 하닷이 죽었다, 그리고 마스레가의 삼라가 그를 대신하여 통치하였다”란 그 다음부터 파생되어 있던 것, 그리고 그것의 품질을 의미한다. “그리고 삼라가 죽었다, 그리고… 사울이 그를 대신하여 통치하였다”란 거기로부터 였던 것을 의미한다. “(유브라데)강의 르호봇이…”이란 그것의 품질을 의미한다. “그리고 사울이 죽었다, 그리고 악볼의 아들 바알하난이 그를 대신하여 통치하였다”란 거기서부터 였던 것과 그 품질을 의미한다. “그리고 악볼의 아들 바알하난이 죽었다, 그리고 하달이 그를 대신하여 통치하였다”란 거기서부터 였던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 성의 이름은 바우였다”란 교리를 의미한다. “그리고 그의 아내의 이름은 메사합의 딸인 마드렛의 딸, 므헤다벨이다”란 그것의 선을 의미한다.

40-43절. 그리고 이들은 에서의 족장들의 이름들인데, 그들의 가문들에 따라서, 그들의 장소에 따라서, 그들의 이름들에서 이다. 딤나 족장, 알와 족장, 여뎃 족장, 41 오홀리바마 족장, 엘라 족장, 비논 족장, 42 그나스 족장, 데만 족장, 밉살 족장, 43 막디엘 족장, 이람 족장이다. 이들은 그 구역과 거처를 따른 에돔 족장들이다. 에서 자신이 에돔의 조상이다. “그리고 이들은 에서의 족장들의 이름들인데, 그들의 가문에 따라, 그들의 장소에 따라, 그들의 이름들에서 이다”란 그들로부터 온 선 속의 교리적인 것들, 그들의 일어남, 상태, 그리고 품질을 의미한다. “딤나 족장, 알와 족장, 여뎃 족장, 오홀리바마 족장, 엘라 족장, 비논 족장, 그나스 족장, 데만 족장, 밉살 족장, 막디엘 족장, 이람 족장이다”란 그들의 교리적인 것들의 품질을 의미한다. “이들은 에돔의 족장들이다”란 제1의 교리적인 것들을 의미한다. “그들의 거주지에 따라, 그들이 점유한 토지에 따라”란 진리들과 선들에 관하여를 의미한다. “에서 자신이 에돔의 조상이다”란 주님의 신성한 인간에 있는 자연 평면의 신성한 선을 의미한다.

창세기 제 35 장

창세기 제 35 장

1-4절. 그리고 하느님께서 야곱에게 말하셨다, 일어나라, 벧엘로 올라 가라, 그리고 거기서 거주하라. 그리고 거기에 네가 네 형 에서를 피해 도망할 때 너에게 나타난 하느님께 제단을 만들어라. 2 그리고 야곱은 그의 집안 식구들에게, 그리고 그와 함께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말했다, 너희 가운데 있는 이방인들의 신들을 내던져라, 그리고 자신들을 깨끗하게 하여라, 그리고 너희들의 의복을 갈아 입어라. 3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자, 그리고 나는 거기에 내 곤경의 날에 나에게 대답하셨고, 내가 걷는 길에서 나와 함께 해주셨던 하느님께 제단을 만들 것이다. 4 그리고 그들은 야곱에게 그들의 손에 있었던 이방인들의 모든 신들을, 그리고 그들의 귀에 달았던 귀걸이를 주었다. 그리고 야곱은 그것들을 세겜 근처였던 상수리나무 아래에 숨겼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야곱에게 말하셨다. 이는 야곱이 지금 표현하는 것과 같은 신성으로부터 자연적 선이 지각함을 의미한다. 말씀의 역사물에서 “말하다, to say”는 지각하다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 말하셨다”는 신성으로부터 지각함을 표시한다; 그리고 야곱의 표현함이 여기서 최고 의미에서는 자연적 선 측면에서의 주님이시다. 야곱이 등장하는 앞 페이지들에서 그가 말씀 안에서 표현하는 것들을 살펴왔는데, 그는 여러 가지 것들을 표현해 왔는데, 이를 간략히 정리해보자:
최고 의미에서 야곱은 일반적 측면에서의 주님의 신성한 자연 평면을 표현한다. 그분이 그분의 자연 평면을 신성이 되게 하셨을 때, 이 때는 처음의 때와는 다르셨다. 그러므로 야곱은 다양한 것들을 표현했다; 즉 처음에는 진리 측면에서의 주님의 자연 평면을, 그 다음 발전해가는 중간 선상에서는 선으로부터의 진리 측면에서의 주님의 자연 평면을, 마지막으로는 선 측면에서의 주님의 자연 평면을 표현했다. 그 이유가 주님의 신성이 되심은 진리로부터 진리의 선으로,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선이 되심이셨기 때문인데, 이는 자주 언급했던 대목이다. 지금은 이 세 부분 중에서 마지막에 해당되는 부분, 즉 자연적 선 측면에서의 주님을 표현한다. 야곱이 선 측면에서 주님의 신성한 자연 평면을 표현하는 이유는 이것이 마지막 단계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주님께서 그분의 자연 평면을 신성으로 만드셨을 때의 발전 단계였는데, 이는 그분이 인간을 거듭나게 하실 때도 비슷하다; 그 이유는 주님은 그분의 인간을 신성으로 만드신 질서와 같은 질서로 인간을 새로이 만드심을 기뻐하시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인간의 거듭남은 주님의 신성이 되심의 형상인데, 이는 반복적으로 서술해오고 있다. 주님이 인간을 새로이 만드실 때, 처음에 인간에게 신앙의 진리들을 가르치신다, 그 이유가 신앙에 관한 진리 없이 인간은 주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천국과 지옥이 어떠한지를, 그것들이 존재하는지를 아예 알지도 못하고 있기에, 더욱이 그는 주님에 관련한 무수한 사항들을, 천국과 땅에 있는 그분의 왕국에 관하여, 게다가 지옥에 관련된 사항에 관하여 알지 못한 채로 있기 때문이다.
그가 위와 같은 사항들을 배우기 이전, 그는 신앙의 진리로부터의 선이 무엇인지를 알 수 없다; 그 이유는 이 선은 시민적, 도덕적 규례나 법들로부터 알게 되는 시민적, 도덕적 선과 다르기 때문이다. 이런 선은 교회 밖의 민족들이나 나라들도 알 수 있는 선이다; 신앙의 진리로부터의 선은 영적 선이다; 이 선은 말씀에서 선행이라 불리운다; 이 선은 일반적으로 보면, 이기적인 이유 없이, 고로 애착의 기쁨으로부터 타인에게 선을 뜻하고 행하는 것이다. 이 선이 영적 선이고, 이 선은 신앙의 진리들을 수단으로 하지 않고는 이 선의 수준에 도달할 수 없다. 따라서 이 진리들은 말씀을 수단으로, 말씀을 설교함으로 주님에 의해 가르쳐진다. 인간이 신앙의 진리들을 배운 이후, 그는 진리를 뜻하는 쪽으로, 진리를 기꺼이 행하려는 쪽으로 주님에 의해 점진적으로 인도되어진다. 이 진리는 진리로부터의 선이라고 불리운다; 그 이유는 진리로부터의 선은 의지와 행동에 있는 진리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이 진리의 선이라 불리우는 이유는 교리 속에 있어 왔던 진리가 생활 속에 있기 때문이다. 마지막 단계는, 인간이 선을 뜻함에서, 즉 의지로부터 선을 뜻함으로부터 기쁨을 지각할 때, 이 선은 진리로부터의 선(진리의 선)이라 더 이상 불리우지 않고, 선이다. ; 그 이유가 그 때 그는 거듭나진 상태여서, 그는 진리로부터 선을 더 이상 뜻하지 않고, 오히려 선으로부터 진리를 실현해간다; 그리고 이때 그가 행한 진리는 마치 선인 것처럼 있다; 그 이유가 이 진리는 근원을 선으로부터 가지고 진리의 본질을 파생시키기 때문이다. 이상의 설명으로부터 야곱이 최고 의미에서 선 측면에서 주님의 자연 평면을 표현하는 이유를 알았을 것이다. 여기서 야곱이 이 선을 표현하는 이유는 내적 의미에서 더 전진함이 취급되기 때문, 즉 “이스라엘”인 자연 평면의 내면의 것들을 향하여 전진함이 취급되기 때문이다 (4536항). 인간과 더불은 진리가 선이 될 때까지 주님에 의해 거듭나지는 누구도 이 내면의 것들 쪽으로 인도되어질 수 없다.

일어나라, 벧엘로 올라 가라. 이는 신성한 자연 평면에 관하여 지각함을 의미한다. 이는 “일어남”의 의미가 승강함이다로부터, 여기서는 신성쪽으로 자연 평면이 승강함이다; 그리고 “올라가는” 것의 의미가 더욱 내면들을 향함인데 이는 아래에서 설명한다; 그리고 “벧엘”의 의미가 자연 평면에 있는 신성, 또는 질서의 최말단에 있는 신성이다로부터. 그 이유가 원어에서 “벧엘”이 “하느님의 집”을 뜻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느님의 집은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이 있는 곳이기에, 대략적 의미에서 “벧엘”은 이런 지식들을 의미한다. 그러나 내면들은 질서의 최말단들에서 마감되고 종결되고, 거기서 다함께 있어, 마치 한 집 안에 다함께 거주하듯 하여 있기에, 그리고 인간에 있는 자연 평면은 그의 내면들이 종결되는 그의 최말단이기에, “벧엘”, 또는 “하느님의 집”은 자연 평면도 의미한다, 그리고 꼼꼼히 말하면 자연 평면에 있는 선을 의미한다; 그 이유가 “집”은 내적 의미에서 선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더욱이 지식들은 자연 평면에, 또는 질서의 최말단에 있다.
“올라감”이 내면들을 향하여를 표시하는 이유는 내면의 것들이 보다 더 높은 것들이라 불리우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러므로 내면의 것들을 향하여 발전함이 내적 의미에서 취급될 때, “올라감”이라는 말이 채용되는데, 마치 이집트로부터 가나안으로 “올라감”의 경우와 같다, 그리고 가나안의 토지 자체 안에서 “올라감”은 내면의 부분들쪽으로 향하는 것, 내면의 부분들로부터 예루살렘으로, 그리고 예루살렘 자체에서는 거기 있는 하느님의 집으로 향하여 올라가는 것이다. 이집트로부터 가나안으로 “올라감”에 관한 구절로는 모세의 책에서:
바로가 요셉에게 말했다, 올라가서 네 아버지를 매장하라; 그리고 요셉은 올라갔다, 그리고 바로의 모든 종들도 그와 함께 올라갔다; 그리고 그와 더불어 병거와 마병들도 올라갔다
(창. 50:6, 7, 9).
사사기서에서:
그리고 여호와의 천사가 길갈로부터 보김으로 올라갔다, 그리고 그는 말했다, 나는 너를 이집트로부 터 올라가게 만들었다 (사. 2:1);
위에서 “이집트”는 내적 의미에서 기억 속의 지식을 의미한다. 이 지식은 주님의 왕국 속의 것들을 납득하는데 도움을 준다; 그리고 “가나안의 토지”는 주님의 왕국을 의미한다. 그리고 기억 속의 지식들은 보다 낮은 것들, 같은 말로 외면의 것들이고, 주님의 왕국의 것들은 보다 높은 것들, 같은 말로 내면의 것들이기에, “이집트로부터 가나안의 토지로 올라간다”라고 말해지고 있다, 그 반대의 경우는 “가나안으로부터 이집트로 내려감”이다 (창. 42:2, 3; 43:4, 5, 15 등등).
가나안의 토지 자체 안에서 “올라감”은 그것의 내면의 부분쪽으로 인데, 여호수아서에서:
여호수아가 말했다, 가서 토지를 정탐하라; 그리고 사람들이 올라가서 아이(성)을 정탐했다; 그리고 그들이 여호수아에게 되돌아와서 말했다, 모든 백성들이 올라가지 않아도 된다; 약 이천 명, 또는 삼천 명의 남자들이면 됩니다; 그리하여 삼천 명의 남자들이 그쪽으로 올라갔다
(여. 7:2-4);
“가나안의 토지”는 주님의 왕국을 의미하고, 가나안의 최말단 경계들로부터 더 멀리 떨어진 부분들은 내면의 것들이 의미된다, 그러므로 “올라감”이라는 말이 여기서 사용된다. 그리고 둘러싸인 부분들로부터 예루살렘까지; 그리고 예루살렘에서 하느님의 집까지의 경우도 마찬가지 이다 (왕상 12:27, 28; 왕하. 20:5, 8; 마. 20:18; 막. 10:33; 눅. 18:31; 등등). 그 이유가 예루살렘에 의해 가나안의 가장 깊은 곳이 의미되기 때문, 고로 주님의 영적 왕국이 의미되기 때문; 그리고 하느님의 집은 예루살렘의 가장 깊은 곳이기 때문에 하느님의 집에 의해서는 주님의 천적 왕국이 의미된다, 그리고 최고 의미에서는 주님 자신이 의미된다. 이로부터 사람들은 그것들쪽으로 “올라간다”라고 말했다. 이상으로부터 “일어나라, 벧엘로 올라가라”에 의해 내면들을 향하여 발전함이 의미됨을 알게 되는데, 이 주제가 이 장에서 다루어지고 있다.

그리고 거기서 거주하라. 이는 생활(삶)을 의미한다.

그리고 거기에 너에게 나타나셨던 하느님에게 제단을 만들어라. 이는 거기 있는 거룩한 것을 의미한다. 이는 “제단”이 주님을 표현하는 제일의 표현물이다로부터; 그러므로 “하느님께 제단을 만드는” 것은 예배의 거룩한 것을 의미한다로부터 알게 된다.

네가 네 형 에서를 피해 달아날 때. 이는 진리가 선 앞에 놓여있었을 때를 의미한다. 이는 에서의 표현함이 주님의 신성한 자연 평면에서의 신성한 선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여기서의 의미가 진리가 선 앞에 놓였을 때이다는 것은 야곱에 관하여 설명한 대목의 일부로부터 보여진다 (창. 27장); 즉 그가 에서 앞에서 도망하는 대목인데, 그 도망한 원인은 그가 에서로부터 생득권을 가져 갔기 때문이다. 이것에 의해 진리가 자체를 선 앞에 놓은 것이 의미되었다; 그 이유가 거기서 야곱은 주님의 자연 평면 속의 진리를, 에서는 선을 표현했기 때문이다. 진리가 선 앞에 자체를 놓는 이유는 누군가가 거듭나질 때, 진리가 외관상으로는 첫째 자리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거듭나진 이후 선이 첫째 자리에, 진리는 둘째 자리에 있는다. 이로부터 , “네가 네 형 에서를 피해 도망할 때”가 진리가 선 앞에 놓였을 때를 의미함을 알게 된다.

그리고 야곱은 그의 집안 식구들에게, 그리고 그와 함께 있는 모든 이들에게 말했다. 이는 당시 있었던 것 같이 자연적 선에 의해 배열됨을 의미한다. 이는 “자기 집안 식구들에게, 그리고 그와 함께 있는 모든 이들에게”의 의미가 배열함이다로부터; 그리고 여기서 야곱의 표현함이 자연적 선이다로부터 알게 되는데, 그 이유는 지금 취급되는 주제가 선에 의해 진리가 배열됨을 취급하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영적 선이 자연적 마음에서 첫 부분에서 행동하기를 시작할 때, 거기 있는 진리들을 질서 안으로 배열하기 때문이다.

너희들 가운데 있는 이방인들의 신들을 내던져라. 이는 거짓들은 거절해야 함을 의미한다. 이는 “내던짐”의 의미가 거절함이다로부터; 그리고 “이방인들의 신들”의 의미가 거짓들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말씀에서 “신들”은 진리들을 의미하나, 반대적 의미에서는 거짓들을 의미한다; 그리고 교회 밖에 있는 이들이 이방인들이라 불리우고, 결과적으로 거짓들과 악들 안에 있는 이들인 바, “이방인들의 신들”은 거짓들을 표시한다.

그리고 자신들을 깨끗이 하라 그리고 의복을 갈아 입으라. 이는 거룩함이 입혀지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깨끗이함”, “순수해짐”의 의미가 성별되어짐 이다로부터; 그리고 “의복을 갈아 입음”의 의미가 입는 것, 여기서는 거룩한 진리들을 입는 것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 이유가 말씀의 내적 의미에서 “의복들”은 진리들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의복을 갈아 입는 것이 교회에서 받아진 표현물이다는 것은 분명하나, 내적 의미에서 의복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알지 않으면 의복이 표현하는 것을 알 수 없다. 여기서 취급된 주제가 거짓의 거절과 자연 평면에서 선에 의해 진리들이 배열됨인 바, 그들이 옷을 갈아 입는 것이 야곱에 의해 명령되었다.
의복을 갈아 입는 것이 거룩한 진리들이 입혀지는 표현물이다는 것은 말씀의 다른 구절로부터 알는지 모른다. 이사야서에서:
깨어라, 깨어라, 오 예루살렘아, 네 강함을 입으라, 오 시온아, 치장된 네 옷을 입으라. 오 예루살렘, 거룩한 성아; 그 이유는 할례받지 않은 자들과 불결한 자들이 더 이상 네게로 계속 오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52:1);
“시온”이 천적 교회이고, “예루살렘”이 영적 교회이고, 천적 교회는 주님을 사랑함으로부터 선 안에 있는 교회이고, 영적 교회는 신앙과 선행으로부터 진리 안에 있는 이들이기에, “강함”은 시온을 서술하고, “의복”은 예루살렘을 서술한다; 그리고 그것으로 그들이 깨끗해진다가 의미된다.
스가랴서에서:
여호수아가 더러운 옷을 입고, 천사 앞에 섰다; 그리고 [천사가]가 대답하여 자기 앞에 서있는 이들에게 말했다, 말하기를, 여호수아로부터 더러운 것을 제거하라; 그리고 그에게 말했다, 보라, 나는 너희가 의복을 갈아 입음으로 너희의 불법이 너희를 지나가게 했다 (슥. 3:3, 4);
위 구절로부터 분명해지는 바, 의복을 제거하고, 의복을 갈아 입음이 거짓들로부터 순수해짐을 표현했다는 것이다, 그 이유가 “나는 너희의 불법이 너희를 지나가게 했다”고 말해지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사람들은 의복을 갈아 입는 대목이 말씀에서 간혹 있는데, 그 이유는 이로 인해 표현물이 진열되기 때문이다.
내적 의미에서 새 교회를 의미하는 새 성전을 취급하는 에스겔서에서 의복을 갈아 입음에 의해 표현되는 것을 아래에서 알게 된다:
성직자가 안으로 들어갈 때, 그들은 거룩한 장소의 안에서 바깥뜰로 나가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자기들을 섬긴 의복을 놓아두어야 하는데, 그 이유는 그 의복은 거룩함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른 의복을 입을 것이다, 그리고 백성들에 속한 것들에 접근할 것이다 (겔. 42:14).
그리고 다시:
그들이 바깥뜰로 백성에게로 나갈 때, 그들은 거룩한 장소에서 자기들을 섬긴 의복을 벗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들을 거룩함의 방에 놓아둘 것이다, 그리고 다른 의복들을 가지고 백성들을 성별되게 할 것이다 (겔. 44:19).
모든 이가 알 수 있는 것은, 여기서 새 성전과 거룩한 성과 토지에 의해, 위 44장 전, 후에서의 묘사와 예언자에 의해 서술되는 것에 의해 어떤 새로운 성전이나 새로운 토지의 언급함을 뜻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이유가 이것은 의식이나 의례들이 폐지되지 않은 채로 새로운 것이 설립되는 듯한 언급이기 때문; 또한 그들 사이에 유업으로 상속되는 토지를 나눔이 이스라엘 지파의 이름에 의해 언급되나 이 지파들은 북쪽으로 끌려가서 영영 되돌아 오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이로 미루어 볼 때, 여기서 언급되는 의식들에 의해서는 교회의 영적, 천적 사항들을 의미한다는 것, 이와 비슷한 것으로는 아론이 성직 임무를 수행할 때 의복을 갈아 입음에 의해 의미된 것과도 비슷하다; 모세의 책에서:
그는 태워 바침을 만들 때, 그는 자기 의복, 그리고 그의 고운 아마포 반바지를 입을 것이다, 재를 그는 제단 옆에 놓을 것이다. 후에 그는 자기 의복을 벗을 것이다, 그리고 다른 의복을 입을 것이다, 그리고 재를 진영 밖 깨끗한 장소에 가져다 놓을 것이다, 이렇게 하여 그는 태워 바침을 만들어라 (레. 6:9-11).
깨끗해지는 것이 성별되어짐을 표시한다는 것은 명령되어졌던 깨끗해짐으로부터, 즉 그들은 자기들의 살과 의복을 씻어야 한다는 것, 그리고 그들은 분리함의 물로 뿌려져야 한다는 것으로부터 알는지 모른다. 이런 행동들로부터 누구도 성별되어지지 않는다는 것은 영적 인간에 관하여 어떤 지식을 가진 자는 알는지 모른다; 인간을 입힌 의복과 불법과 죄는 무엇에서 같은 것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그럼에도 그들이 자신들을 깨끗이 한 후, 그들은 거룩해질 것이라고 때때로 말해지고 있다. 이로부터 분명해지는 바, 이스라엘족에게 강요된 의식들이 단순하게 거룩하였던 이유는 그것들이 거룩한 것들을 표현했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표현물이었던 그들은 그들의 개인 인물 차원에서는 거룩하게 된 것이 아니다는 것, 단지 표현물에 의해 추상적으로 표현된 거룩함이 그들과 더불어 있는 영들을 감동시킨 것, 그리고 천국에 있는 천사들을 감동되게 한 것 뿐이다.
인간이 생존하기 위하여 천국과 교통함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는 필요성, 그리고 이것은 교회를 수단으로 한다는 것, 이와 달리해서는 그들은 짐승 같이 되어진다는 것, 그러면 내적, 외적 묶음이 결핍된다는 것; 고로 타인을 파괴하려드는 데에 어떤 제한도 없어 결국 서로는 파멸되고 만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교통함이 어떤 교회를 수단으로 가능하지 않자, 주님에 의해 설비된 것은 표현물을 수단으로 교통함이 기적 같이 결과되게 하셨다. 성별됨 (성화, sanctification)이 씻음과 깨끗해짐의 의식을 수단으로 표현되어진 것은 말씀의 여러 구절로부터 분명해진다. 여호와께서 시내산에 내려오셨을 때, 그분은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오늘과 내일 그들을 성별되게 하라, 그리고 그들로 자기들의 의복을 빨게 하라, 그리고 셋째 날을 준비하라 (출. 19:10, 11).
에스겔서에서:
나는 네 위에 깨끗함의 물을 뿌릴 것이다, 그리고 너는 모든 네 불결함으로부터 깨끗해질 것이다, 그리고 나는 네 모든 우상들로부터 너를 깨끗하게 할 것이다, 그리고 나는 네게 새로운 심정을 줄 것이다, 그리고 나는 네 한가운데에 새로운 영을 놓을 것이다 (겔. 36:25, 26);
위에서 “깨끗한 물을 뿌리는” 것은 심정이 순수해짐을 표현했음이 분명하다; 고로 “깨끗해지는” 것은 성화되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일어나 벧엘로 올라 가자. 이는 신성한 자연 평면을 의미한다.

그리고 나는 거기서 하느님께 제단을 만들 것이다. 이는 거룩함에서 내면의 것들이 종결되어짐을 의미한다. “하느님께 제단을 만듦”의 의미가 예배의 거룩함이다로부터; 그 속에서 내면의 것들이 종결됨이라고 말한 이유는 그가 “거기서”, 즉 벧엘에서 제단을 만들게 되었기 때문이다. “벧엘”에 의해 자연 평면이 의미되고, 이 안에서 내면의 것들이 종결되어진다.

내 곤경의 날에 나에게 대답하셨던 분. 이는 진리를 선 앞에 놓고 있는 상태에서를 의미한다. 이는 “날”의 의미가 상태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내 곤경의 날”에 의해 선 앞에 진리를 놓는 상태가 의미되어진다는 것은 앞에서 설명한 대목으로부터 알는지 모른다; 그 이유가 “곤경의 날”이 “네가 네 형 에서를 피해 도망할 때”의 구절에서와 같은 의미를 포함하기 때문이다.

내가 걷던 길에서 나와 함께 계셨던. 이는 그분의 신성한 섭리를 의미한다. 이는 “그가 걷는 길에서 누군가와 더불어 있다”에서 누군가가 신성, 또는 주님이시라고 단언될 경우, 신성한 섭리가 의미된다; 그 이유가 설비하심은 누군가와 더불어 현존하는 것, 그리고 그를 악들로부터 방어하시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은 야곱에게 그들의 손에 있었던 이방인들의 모든 신들을 주었다. 이는 가능한한 많은 모든 거짓들을 거절했음을 의미한다. 이는 “이방인들의 신들”의 의미가 거짓들이다로부터; 그리고 “그들의 손에 있었던”의 의미가 가능한한 많이 있다로부터; 그 이유가 “손”은 힘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손에 있다”는 그들의 힘으로부터 있다는 의미이다. “그것들을 야곱에게 줌”은 선이 그것들을 거절했음을 표시한다, 그 이유는 이 장에서 야곱에 의해 자연 평면의 선이 표현되기 때문이다.

그들의 귀에 달았던 귀걸이들. 이는 실제적인 것들을 의미한다. 이는 “귀걸이”의 의미가 순종을 표현하는 휘장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귀”가 순종을 의미하는 이유 때문인데, 그리고 순종으로부터의 것들은 실제적인 것들인데, 그 이유는 순종함은 행동에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실제의 것들이 여기서는 거절되어져야 하는 거짓들이라 단언된다. 여기서 내적 의미에서 취급되는 거짓들을 거절함, 실제에 있는 것들조차 거절함에 대해 조금 더 살펴보자; 인간이 주님으로부터 거듭남을 수단으로 선으로 와서, 선으로부터 진리를 행하기 이전, 그는 진리들과 더불어 혼합된 아주 많은 거짓들을 가지고 있다; 그 이유가 그는 그의 인생 첫 시기인 유아와 어린 시절에서는 신앙의 진리들을 수단으로 그의 생각들이 이끌여 들여진다; 그러나 이 후에는 세상의 외적인 것과 육체의 감각적인 것들로부터 발생하는 생각들을 이끌여 들이는데, 이때 이런 것들은 오류들과 뒤섞여 있어, 결과적으로 거짓들 사이에 뒤섞여 있다. 이런 것들이 실제적으로 사용되는데, 그 이유는 인간이 믿는 것을 행하기 때문이다. 이런 거짓들이 여기서 뜻해진다. 이것들은 인간이 거듭날 때까지, 즉 그가 선으로부터 행동할 때까지 남아 있는다, 그리고 그 다음 선, 즉 선을 통하여 주님께서는 그가 습득한 진리들을 질서 안으로 내려 보낸다, 그리고 이것이 행하여질 때, 거짓들은 진리들로부터 분리되고 제거된다.
이런 사항에 관해서 인간은 아주 무지하다, 그럼에도 그의 초기 시절로부터 그의 마지막 시기에 이르기까지에서 거짓들의 거절과 제거함은 진행된다, 그리고 이것은 모두 각각의 인간에게 해당되고, 특별하게는 거듭나는 이들과 더불어서의 경우이다. 이것은 거듭나지 않는 이들에서조차 거행된다, 그 이유가 그가 성년이 되고, 그의 판단력이 성숙될 때, 그는 어린 시절의 판단들을 무익하고 불합리한 판단으로 간주한다, 고로 자기로부터 아주 멀리 떼어 놓는다. 그러나 거듭나는 자와 거듭나지 않는 자의 차이는 이렇다, 즉 거듭나는 자는 신앙과 선행의 선과 일치하지 않는 것들을 자기로부터 제거한다; 그러나 거듭나지 않는 자는 자기의 사랑의 기쁨과 일치하지 않는 것들을 자기로부터 제거한다. 그러므로 후자는 진리들을 거짓들로, 거짓들을 진리들로 간주한다. 귀걸이에 주목해보자; 이것에는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이마쪽으로 있는 코걸이가 있고, 귀에 매다는 귀걸이가 있다. 이마쪽으로 있는 코에 매다는 것은 “코 보석”이라 불리우고, 선을 표현하는 휘장(배지, badge)이다, 한편 귀에 매다는 것은 순종을 표현하는 휘장이고 “귀걸이”라고 불리운다. 그러나 원어에서는 이 두 종류를 같은 단어로 표현하고 있다.

그리고 야곱은 그것들을 세겜 근처 상수리나무 아래에 숨겼다. 이는 영원히 거절함을 의미한다. 이는 “숨기다”의 의미가 거절하고 죽은 것으로 여겨 매장함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리고 “상수리나무 아래”의 의미가 영원쪽으로 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 이유가 상수리나무는 수명이 매우 긴 나무인 바, 어떤 것을 그것 아래 숨길 때, 영구적인 것이 의미되기 때문이다; 이것은 휩쓸려지는(엉클어지는) 것도 의미한다, 더욱이 불합리적이고 거짓인 것과 엉클어지는 것도 의미된다. 그 이유가 자연 평면의 가장 낮은 수준의 것들은 그것의 지식과 기쁨을 육체의 감각적인 것들로부터, 고로 오류들로부터 파생되게 하는 만큼에서 상대적으로 엉키고 오류적으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상수리나무(oak)”에 의해 자연 평면의 가장 낮은 수준의 것이 의미되는데, 좋은 의미에서는 가장 낮은 수준에 있는 진리와 선들; 반대적 의미에서는 가장 낮은 수준에 있는 거짓들과 악들이 의미된다.
더욱이 거짓들이 거듭난 인간 안에서 제거될 때, 그것들은 자연 평면의 가장 낮은 쪽으로 거절되어진다; 그러므로 인간이 성숙한 판단력과 명민함을 지닐 때, 특히 그가 총명하고, 슬기로울 때, 그것들은 그의 내면의 시각으로부터 더 제거된다. 진리들은 거듭나는 인간과 더불어서는 그의 자연 평면의 가장 깊은 쪽, 거기서 작은 태양 같이 있는 선 근처에 있다; 그리고 이 진리들은 선과의 유사성(혈족 관계)과 친근성(친족 관계)에 따라서 멀리, 또는 보다 가까이의 거리가 정해진다. 오류적인 진리들은 보다 더 바깥쪽 주변에, 거짓들은 가장 바깥쪽으로 거절된다.
“상수리나무”가 자연 평면의 가장 낮은 것인 거짓들을 표시하는 이유는 고대 교회에서, 주님의 왕국을 표현하는 외적 예배가 있었을 때, 어떤 종류의 나무이든 모든 나무들은 영적 또는 천적인 어떤 것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올리브나무와 그것으로부터의 기름은 천적 사랑으로부터 있는 것들을 의미했다; 포도나무와 그것으로부터의 포도주는 선행과 선행애서 파생되는 신앙으로부터 있는 것들을 의미했다; 다른 나무들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즉 삼나무, 무화과나무, 포풀러나무, 너도밤나무, 상수리나무, 등등의 나무는 이 나무들이 구절에서 발견될 때 때때로 그 의미를 설명해왔다. 이런 이유로 나무들의 언급은 말씀에서 자주 있는 편이다; 또한 일반적 측면에서 동산, 작은 숲, 삼림도 그러한데, 사람들은 어떤 특정한 나무 아래에서 자기들의 예배를 가졌다. 그러나 이런 예배가 우상숭배로 돌아섰을 때, 그리고 야곱의 후손과 더불어 교회의 표현물(표현뿐인 교회)이 설립되었을 때는 자칫하면 우상숭배로 전락되기 일쑤였는 바, 나무들, 숲 안에 아주 많은 우상들이 세워졌다. 하여 그들에게는 동산이나 작은 숲, 그 안의 나무 아래에서 예배를 가지는 것을 금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무들은 그것들의 의미함을 지녔다, 그러므로 보다 더 고상한 나무들, 즉 올리브나무, 포도나무, 삼나무 뿐만 아니라, 포풀러, 너도밤나무, 상수리나무 역시 말씀에서 언급될 경우, 고대 교회에서와 같은 의미를 지닌다.
좋은 의미에서 “상수리나무”는 자연 평면의 가장 낮은 수준에 있는 진리들과 선들을 의미하고, 반대적 의미에서는 거짓들과 악들을 의미함이 이 나무가 언급되는 다른 구절에서 의 내적 의미에서 분명해진다. 이사야서에서:
여호와를 버린 자들은 살라질 것이다, 그 이유는 그들은 자기들이 기대했던 상수리나무로부터 부끄러움을 당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너희는 잎들을 내던진 상수리나무 같이, 그리고 물 없는 동산 같이 있을 것이다 (이. 1:28-30).
이사야서에서:
여호아 체바욷의 날이 오만한 자와 비천한 자 모두 위에, 그리고 레바논의 삼나무 위에, 그리고 바산의 모든 상수리나무 위에 있을 것이다 (이. 2:12, 13);
모든 이는 여호와의 날이 삼나무와 상수리나무 위에 있을리 만무하다는 것, 그러나 그것들에 의해 의미된 것들 위에 있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 다시:
신들을 만들어내는 자들이 삼나무를 찍어내고, 너도밤나무와 상수리나무를 가져온다, 그리고 숲의 나무들에서 자신을 위해 힘을 돋운다 (이. 44:14).
에스겔서에서:
그들의 찌름을 당한 자들이 모든 언덕 위에, 산들의 모든 머리 위에, 모두 각각의 푸른 나무 아래, 모두 각각의 엉클어진 상수리나무 아래, 그들이 모든 우상들에게 쉼의 냄새를 주었던 장소에 서 그들의 제단들을 빙둘러 우상들의 한가운데에서 있을 때 너희는 내가 여호와이신 것을 인정할 것이다 (겔. 6:13).
더욱이 고대인들이 언덕들과 산들 위에서 예배를 가졌는 이유는 산과 언덕이 천적인 사랑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배가 우상숭배자들에 의해 집전되었을 때, 여기서와 같이 그것들은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들은 이 예배를 나무 아래에서 드렸던 이유는 이것들이 각 종류에 따라 의미를 지녔기 때문이다. 위 구절의 “엉클어진 상수리나무 아래”는 예배가 거짓들로부터 있었음을 표시한다, 이것은 자연 평면의 가장 낮은 것인데, 그 이유는 가장 낮은 것은 상태가 엉클어져 있기 때문이다. 호세아서에서:
그들은 산들의 머리 위에서 제물을 바친다, 그리고 언덕들 위에서, 상수리나무, 포풀러나무, 그리고 단단한 상수리나무 아래 향을 태운다, 그 이유는 거기로부터의 그늘이 좋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너의 딸들이 매춘을 범하고, 너의 며느리가 간음을 범한다 (호. 4:13);
“매춘을 범하는” 것은 진리들을 거짓화하는 것, 그리고 “간음을 범하는” 것은 선을 악용하는 것이다. 스가랴서에서:
네 문들을 열어라, 오 레바논아, 그리고 불이 삼나무를 삼키게 하라, 그 이유는 장대한 것들이 황폐해 있기 때문이다; 울부짖거라, 너 바산의 상수리나무여, 그 이유는 바잘(Bazar)의 숲이 내려 앉았기 때문이다 (슥. 11:1, 2).

5-7절. 그리고 그들은 여행했다. 그리고 하느님의 공포가 그들 주위에 있는 성들을 덮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야곱의 아들들을 추격하지 아니했다. 6 그리고 야곱은 루즈에 왔다, 이곳은 가나안의 땅 안에 있다, 이것은 벧엘이다, 야곱과 그와 함께 있는 모든 사람이 왔다. 7 그리고 그는 거기에 제단을 건축했다, 그리고 그 장소를 엘-벧엘이라 불렀다. 그 이유는 그가 그의 형 앞에서부터 도망할 때 신들(the gods)이 그에게 밝히 알려졌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은 여행했다. 이는 계속적인 것을 의미한다. 이는 “여행하다”가 잇따르는 것, 고로 계속되는 것, 고로 내면의 것을 향하여 발전함이 계속되는 것이다.

그리고 하느님의 공포가 그들 주위에 있던 성들을 덮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야곱의 아들들을 추격하지 아니했다. 이는 거짓들과 악들이 가까이 올 수 없었음을 의미한다. 이는 “하느님의 공포”의 의미가 방어함이다로부터 인데, 이는 아래에서 살핀다; “그들 주위에 있던 성들”의 의미가 거짓들과 악들이다로부터, “성”은 진짜 의미에서 교리의 진리이고, 반대적 의미에서는 교리의 거짓들이다; 여기서 “성”이 악을 의미하는 이유는 성의 거주민들이 좋은 의미에서는 선을, 반대 의미에서는 악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을 추격하지 않았다”의 의미가 가까이 올 수 없음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하느님의 공포”가 방어함이다는 것은 다른 삶에서 거행되는 것을 가지고 예증해보여야 할 것 같다; 그 이유가 거기에서 지옥들이 천국 가까이 오는 것, 악령들이 천국의 어떤 사회에 접근하는 것이 가능할 수 없기 때문인데, 그 이유는 그들은 하느님의 공포 안에 있기 때문이다. 악령들이 천국의 어떤 사회에 접근할 때, 그들은 근심과 고통 안으로 갑자기 빠져들고 만다. 그들이 감히 대들지 못하는 것이 “하느님의 공포”에 의해 뜻해진다. 하느님 또는 주님이 그들을 공포로 몰아넣는 것이 아니나, 그들이 거짓들과 악들 안에 있기 때문에, 고로 선들과 진리들에 반대되어 있기 때문에 공포가 야기되는 것이다.

그리고 야곱은 루즈에 왔다, 이곳은 가나안의 토지 안에 있다. 이는 이전 상태에서의 자연 평면을 의미한다. 여기는 벧엘이다 이란 신성한 자연 평면을 의미한다. 이는 “루즈”의 의미가 이전의 상태에서의 자연 평면, 또는 인간이었던 자연 자체이다, 그리고 이것이 신성으로 만들어짐이 “이것은 벧엘”에 의해 의미된다. “벧엘”이 명명되는 다른 구절에서도 마찬가지로 언급됨을 볼 수 있다. 즉 여호수아서에서: “유다의 아들들과 요셉의 아들들 사이에 있는 베냐민에게 제비뽑혀진 (토지의) 경계는 루즈쪽으로 나아가서, 루즈 남향 측면, 이것은 벧엘이다” (여. 18:11, 13). 그리고 사사기서에서: “요셉의 가문은 벧엘로 올라갔다, 그리고 벧엘을 정탐했다; 그리고 성의 이름은 옛날에는 루즈였다” (사. 1:22, 23).

4557. 그와 그와 함께 있는 모든 사람들. 이는 거기에 있었던 모든 것과 더불어를, 즉 자연 평면에 있었던 모든 것과 더불어를 의미한다. 이는 “야곱”의 표현함이 거기에 있는 선이다로부터; 그리고 “사람들”의 의미가 진리들이다로부터; 고로 “그와 더불어 있는 사람들”은 이 선으로부터의 진리들을 표시한다. 자연 평면에 있는 모든 것들은 선과 진리에 관련된 것을 낳기에, 본문의 말들에 의해 거기에 있는 모두와 더불어가 의미된다.

그리고 그는 거기에 제단을 건축했다. 이는 신성화됨에 의해를 의미한다. “제단”은 주님을 표현하는 제일의 표현물이다; 그렇기 때문에 예배의 거룩함, 그리고 주님을 서술할 경우, 그분의 신성한 인간, 그리고 이 인간으로부터 진행하는 거룩함 이다. 교회에서 주님을 표현하는 제일의 표현물이 제단이다는 말은 최고 의미에서는 주님의 신성한 인간 측면에서 주님 자신이기도 하다; 이런 의미에서 제단은 주님의 인간 자체이다. “그가 거기에(벧엘에) 제단을 건축함”이 그분의 자연 평면이 신성이 되심을 의미한다; 그 이유가 “벧엘”에 의해 신성한 자연 평면이 의미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그곳을 엘-벧엘이라 불렀다. 이는 거룩한 자연 평면을 의미한다. 이는 “벧엘”이 신성한 자연 평면이다로부터, 그러나 “엘-벧엘”이라 불리울 경우, 이는 신성이 아닌, 거룩한 자연 평면을 의미하게 된다; 그 이유가 주님께서 그분의 인간을 신성으로 만드셨을 때, 먼저 그분은 인간을 거룩하게 만드셨기 때문이다. 인간을 신성으로 만드심과 거룩하게 만드심의 차이는 이렇다: 신성한 것은 여호와 자신이나, 거룩한 것은 여호와로부터 이다. 전자는 신성한 있으심, 후자는 거기로부터 출시됨 이다. 주님께서 자신을 신성이 되게 하셨을 때, 그분은 그분의 인간 또한 신성한 있으심, 또는 여호와로 만드셨다; 그러나 그분이 이를 행하시기 이전, 그분은 그분의 인간을 거룩하게 만드셨다. 이것은 주님의 인간이 신성이 되시는 과정이었다. 그러므로 또한 벧엘은 “엘-벧엘”이라고도 불리우는데, 이는 “엘”에 의해 의미된 것, 즉 “신들이 그에게 밝히 알리었기 때문에”가 더하여진 것이다. 그 이유가 “엘”이 원어에서 “하느님(God)”을 뜻하나 여기서는 복수인 “신들(gods)”인데, 신들은 내적 의미에서 거룩한 진리들을 표시한다. 그러나 이어지는 구절, 15절에서, 야곱은 장소의 이름을 벧엘이라 불렀다고 말해진다, 그리고 첨가되는 말, “하느님께서 그에게 이야기 하셨던”이라고 말하여 단수의 하느님이 말해진다. 그 이유가 “벧엘”은 원어에서 “하느님의 집”이기 때문; 그러나 “엘-벧엘”은 “하느님 하느님의 집”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엘-벧엘”은 거룩한 자연 평면을, 그리고 “벧엘”은 신성한 자연 평면을 표시한다.

그 이유는 거기서 신들이 그에게 밝히 알려졌었기 때문이다. 이는 거룩한 진리들을 의미한다. 이는 “신들”이 거룩한 진리들을 의미함으로부터 알게 된다. 이것들이 야곱에 의해 표현된 선에 인접하여졌다는 것이 “신들이 거기서 그에게 밝히 알려졌다”에 의해 의미된다. 이 장소가 “엘-벧엘”이라 불리운 것, 그럼에도 창. 28:19에서와 창 35:15에서 벧엘로 불리운 것, 여기서 “엘-벧엘”이라 불리울 때는 “신들이 그에게 밝히 알려졌기 때문에”라고 말해져서 복수의 하느님이, 이후 15절에서는 “하느님이 그에게 이야기 하셨던 곳”이라 말하여 단수의 하느님이 언급되는 것은 신비적이다. 이 신비함은 내적 의미로부터가 아니면 알아질 수 없다. 더욱이 많은 다른 신비함들이 여기에도 감추여 있지만, 이것들은 열려질 수 없다.

그가 그의 형 앞에서부터 도망할 때. 이는 진리들이 선 앞에 놓여진 후에를 의미한다. 이는 앞 절에서 같은 말의 언급에서 이미 살폈다.

8절. 그리고 리브가의 유모 드보라가 죽었다, 그리고 그녀는 벧엘 아래로부터 상수리나무 아래 매장되었다; 그리고 그는 그것을 알론-바굿이라 불렀다.

그리고 리브가의 유모가 죽었다. 이는 유전적 악이 추방되었음을 의미한다. 이는 “죽다”의 의미가 끝나다 이다로부터; 여기서는 추방되는 것, 그 이유는 취급되는 주제가 유전적 악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리브가의 유모 드보라의 표현함이 유전적 악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유아에게 자양분을 공급함, 젖을 물림에서 유모(nurse)는 천적 영적인 것(영적 평면의 내적 부분, what is celestial spiritual)을 수단으로 순진이 은근히 심어짐을 의미한다; 그 이유가 젖(milk)이 천적 영적 (평면)을 표시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녀가 젖을 물린 유아는 순진을 표시한다. 그러나 여기서 “리브가의 유모 드보라”에 의해 어머니로부터 받아진 것, 그리고 유아 때에 자양분으로 받아진 것이 의미된다. 이것은 주님께서 싸우셨던 어머니로부터 받으신 유전적 악이었다는 것은 이 유전적 악에 관해 살폈던 대목으로부터 알는지 모른다, 그리고 그분이 이 악을 추방하심으로부터, 그리하여 마지막으로 그분은 마리아의 아들이 아니게 되셨다.
인간은 자기 부모 양쪽으로부터 악을 내려받는다는 것, 이 악이 유전적 악이라 불리운다는 것은 알려진 사실이다. 이렇게 그가 이런 악을 지니고 태어나나, 이 악은 인간이 성년이 되어 그의 이해력과 의지력으로 행동할 때까지 모습을 확실히 드러내지 않는다; 더욱이 유아 시절의 경우에서는 아주 깊이 숨겨져 있다. 주님의 신성한 자비 덕분에 누구도 유전적으로 받아진 것에 대해서는 책임이 없다, 그러나 그가 행한 것, 즉 실제적이 되는 것에서만 그 책임을 물으신다, 그리고 유전적인 것은 인간이 자신의 이해력과 의지력으로 행동할 때까지 실제적이 되어질 수 없다; 그러므로 유아들은 그분으로부터의 유아들과 천사들을 수단으로 인도받는다, 그러므로 유아들은 유전적 악들이 유아들이 행동하는 모든 것에서 잠복하여 있는 동안이라 해도 순진의 상태에서 나타난다. 이 유전적 악은 유아들에게 자양분을 가져다준다, 또는 유모로서 있는다, 그러나 이는 유아들이 자신 스스로 판단할 때 까지이다; 그 다음 그들이 거듭나지고 있다면, 그는 주님에 의해 새로운 유아의 상태 안으로, 그리고 마지막으로 천국의 지혜 안으로 가져다 놓여진다; 그 이유가 진짜 유아, 또는 순진은 지혜 안에 거주하기 때문이다. 차이는 이렇다: 유아의 순진은 밖에 있고, 유전적 악은 안에 있다; 이에 반해 지혜의 순진은 안에 있고, 악은 실제적, 유전적 악 모두 밖에 있다. 이로부터, 그리고 이미 서술해왔던 바로부터 알게 되는 바, 유전적 악은 초기 유아로부터 새로운 유아의 시기까지에서 유모로서 행동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유모”가 유전적 악을 의미하는 것, 또한 천적 영적인 것을 수단으로 순진이 은근히 심어짐 또한 의미한다.
이 장은 내적 의미에서 주님의 자연 평면에서 선을 수단으로 진리들이 배치되고 배열됨을 취급하기에, 그리고 결과적으로 내면의 것들쪽으로 발전함이 취급되기에, 유전적 악의 추방 또한 취급되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리브가의 유모, 드보라가 죽고 상수리나무 아래 매장되었다는 갑작스런 언급이 이 구절에 삽입된 것이고, 위의 설명들을 포함하지 않으면 이 구절에서 드보라의 등장은 시리즈를 훼방놓는 듯한 인상만 풍길 뿐 우리의 이해함과는 너무나 동떨어질 뿐일 것이다.
“리브가의 유모”에 의해 특별하게 의미된 신비함 자체는 아직은 열어질 수 없는데, 그 이유는 열어보이기 전, 알아야 할 사항이 있기 때문이다; 즉 합리성이 자연 평면 안으로 유입됨의 본성, 즉 이것은 두 가지 경로, 하나는 직접적인 경로, 즉 합리성의 선으로부터 자연 평면의 선 안으로 유입되는 것, 또 하나는 간접적인 경로, 즉 합리성의 선으로부터 거기 있는 진리를 통하여 자연적 진리의 선 안으로 유입되는 것이다. “리브가”는 합리성 속의 진리이다; 그리고 “이삭”은 합리성의 선이다; “에서”는 “이삭”인 합리성의 선으로부터 직접적인 유입을 수단으로 있는 자연 평면의 선; “야곱”은 “리브가”인 합리성의 진리를 통한 간접적인 유입을 수단으로 있는 자연 평면의 진리의 선, 또는 자연 평면의 선이다. 이런 사항은 이 구절에서 왜 “리브가의 유모”가 여기서 유전적 악을 의미하고 서술하는지에 대한 신비함을 알기 전에 알고 있어야만 하는 사항들이다. 그 이유는 이런 사항들로부터 이 악의 본성이 알려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녀는 벧엘 아래로부터 상수리나무 아래 매장되어졌다. 이는 영원히 거절했음을 의미한다. 이는 “매장됨”의 의미가 거절되어지는 것이다로부터, 그 이유가 매장된 것은 거절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상수리나무 아래”의 의미가 영원히 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벧엘 아래로부터”가 자연 평면의 바깥을 의미하는데, 그 이유는 아래쪽에 있다는 것의 내적 의미는 바깥이기 때문이다. “벧엘”은 신성한 자연 평면이다.
여기서의 경우는 이렇다: 거듭나아가는 인간에 있는 악, 유전적이든 실제적이든 모두는 무효화되도록 사라져버리는 식의 박멸됨은 있지 않고, 오직 분리되어질 뿐이다, 그리고 주님이 처분하심에 의해 그것들은 주변쪽으로 거절되어진다; 그리고 이 악은 인간과 더불어 영원히 남아 있다; 그러나 주님께서 그의 악을 보류되게 하심으로 그가 선 안에 보존되게 해주신다. 이것이 거행될 때, 이는 마치 악들이 내던져지고 인간은 악들로부터 순수해진 것처럼, “죄 없다고 (justified)” 말해지는 듯 나타난다. 천국의 모든 천사들이 고백하는 바, 자기들로부터서는 악과 악에서 파생되는 거짓밖에 더 없다고, 그러나 주님으로부터서는 선과 선에서 파생하는 진리만 있다고 고백한다.
위 주제를 두고 어떤 다른 견해를 품는 이들, 그리고 세상에서 사는 동안, 자기의 교리로부터 자기들은 의로워졌기에, 자기들은 거룩하다는 것, 유전적이든, 실제적이든 자기들의 악을 청산했다고 자신을 확증한 이들은 그들로부터 있는 것은 악밖에 없다는 것, 그들이 자신들로부터 라고 생각되는 선이 자신들의 것이 아닌 주님으로부터 있는 것임을 생생한 경험으로부터 알 때까지 이 상태 안에 간직된다. 이와 같은 경우는 천사들과 인간 사이에서 거듭나는 이들에 해당된다.
그러나 주님의 경우는 다르다. 그분은 어머니로부터 온 모든 유전적 악을 자신으로부터 제거해서 추방하시고, 내던지셨다. 그 이유가 그분은 그분의 아버지로부터 상속됨에 의해 어떤 악도 가지시지 않았다, 그 이유는 그분은 여호와로부터와 어머니로부터 임신되어졌기 때문이다. 이것이 다른 점이다; 이것이 주님이 정의를 만드심, 거룩함 자체, 신성에 의해 뜻해진 것이다.

그리고 그는 그것을 알론-바굿이라 불렀다. 이는 추방되어진 유전적 악이 있는 자연 평면의 품질을 의미한다. 이는 “이름을 부름”의 의미가 품질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알론-바굿”은 원어에서 “상수리나무가 울다”를 뜻하고, 이 장소가 그렇게 불리운 이유는 “상수리나무”가 가장 낮은 자연 평면을 표시하는데, 이 평면 안으로 유전적 악이 내던져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울다”는 마지막 작별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비록 죽은 육체가 매장을 수단으로 거절되어진다 해도, 그 육체 안에 있던 내면의 것들은 살아 있다 함을 알면서도, 죽은 자를 매장했을 때 죽은 자를 위해 우는 것은 관습화 되어졌다. 그러므로 “알론-바굿”, 또는 “우는 상수리나무”에 의해 의미된 것을 알았을 것이다.

9-13절. 그리고 하느님은 그가 밧단-아람에 왔을 때 야곱에 의해 다시 보여졌다, 그리고 그에게 복을 주셨다. 10 그리고 하느님께서 그에게 말하셨다, 네 이름은 야곱이다. 네 이름은 야곱이라 더 이상 부르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네 이름일 것이다. 그리고 그분은 그의 이름을 이스라엘이라 부르셨다. 11 그리고 하느님께서 그에게 말하셨다, 나는 전능한 하느님이다. 열매를 많이 맺고 번성하라. 나라들과 나라들의 단체가 너로부터 있을 것이다, 그리고 왕들이 네 허리에서 나오리라. 12 그리고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준 토지를 나는 너에게 줄 것이다, 그리고 나는 네 이후 네 씨에게 이 토지를 줄 것이다. 13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그와 더불어 말하셨던 장소에서 그의 위쪽으로부터 올라 가셨다.

하느님은 그가 밧단-아람에서 왔을 때 야곱에 의해 다시 보여졌다, 그리고 그에게 복을 내리셨다. 이는 내면의 자연적 지각을 의미한다. 이는 “하느님이 보여짐”의 의미가 내면의 지각함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러므로 “하느님이 보여짐”이 주님에 관한 것을 서술할 경우, 신성으로부터 지각함을 표시하는데, 이는 내면의 지각함과 같은 말이다. 자연 평면이 이 지각을 가졌다는 것이 하느님이 야곱에 의해 보여짐에 의해 의미된 이유는 야곱이 주님의 자연 평면을 표현하기 때문, 이에 대한 것은 자주 언급해온 편이다. “다시 그가 밧단-아람으로부터 왔을 때”란 그가 “밧단-아람”에 의해 의미된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들을 획득한 이 후를 의미한다. “그리고 그에게 복을 내리셨다”란 자연 평면의 더 내면의 것쪽으로 발전함, 그리고 거기서 선과 진리가 결합함을 의미한다; 그 이유가 “복을 내림”은 주님께서 누군가에게 선물하시는 모든 선이라고 단정되기 때문이다, 특히 선과 진리의 결합이라 단언된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그에게 말하셨다, 네 이름은 야곱이다. 이는 주님의 외적인 신성한 자연 평면의 품질을 의미한다. 이는 “이름”의 의미가 품질이다로부터; 그리고 야곱의 표현함이 주님의 신성한 자연 평면이다로부터 알려진다. 이것이 외적이라 말한 이유는 “이스라엘”이 주님의 내적 자연 평면이기 때문인데, 아래에서 살핀다.

네 이름은 더 이상 야곱이라 부르지 않을 것이다. 이는 더 이상 외적인 것 만으로 있지 않을 것임을 의미한다. 이는 위에 말한 것과 아래에서 살피는 이스라엘 관한 사항에서 알게 된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네 이름이리라. 이는 그분의 내적 자연 평면, 또는 “이스라엘”인 자연 평면의 영적 측면의 품질을 의미한다. 그분은 그의 이름을 이스라엘이라 불렀다란 그분의 내적 자연 평면, 또는 자연 평면의 천적 영적인 것(the celestial spiritual of the natural)을 의미한다. 이는 “이름”의 의미가 품질이다로부터; 그리고 “이스라엘”의 의미가 주님의 자연 평면의 내적 측면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야곱이 이스라엘이라 불리운 이유를 알려면 내적 자연 평면이 무엇인지, 외적 자연 평면이 무엇인지를 알아야만 하고, 더 나아가 자연 평면의 천적 영적인 것이 무엇인지도 알아야 한다. 사실 이런 사항들은 야곱이 천사에 의해 이스라엘이라 불렸던 구절에서 설명한 바 있지만, 거기서의 설명이 매우 적은 것 같아 여기서 추가로 설명을 보태어볼 것이다.
인간 안에는 완전히 구분되는 두 가지 것, 즉 합리성(합리적 평면)과 자연 평면이 있다. 합리적 평면은 내적 인간을, 자연 평면은 외적 인간을 구성한다; 자연 평면은 합리적 평면 같이 그것 자체의 내적 측면과 외적 측면을 가진다. 자연 평면의 외적 측면은 육체의 감각으로부터, 즉 이 감각을 통하여 직접적으로 세상으로부터 흘러드는 것으로부터 있다. 이 외적 인간을 수단으로 인간은 세상적인 것, 육체적인 것과 교통한다. 이 자연 평면에서 독점적으로 있는 것들이 감각적 인간들이라 불리운다; 독점적으로 있다고 말한 이유는 생각 안에서 이 인간들은 감각과 세상의 것을 넘어서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연 평면의 내적 측면은 외적 측면에 있는 것들로부터 분석적으로, 유추적으로 끌어낸 결론들로 구성되고 있다. 더욱이 이 결론은 감각들로부터 끌어당기고 연역(추론)한 것이다. 고로 자연 평면은 감각들을 가지고 세상의 것과 육체의 것과 교통하고, 분석적, 유추적으로 해서 있는 것들을 통하여 합리성과, 고로 영계의 것들과 교통한다. 고로 자연 평면은 외적인 것과 내적인 것의 교통함이 직접적이다. 그 이유는 외적 측면을 가지고는 자연계와, 내적 측면을 가지고는 영계와 교통하기 때문이다. 자연 평면에서 외적 측면을 야곱이 특별히 표현하고, 내적 측면을 이스라엘이 표현하고 있다. 이 경우는 합리적 평면도 마찬가지여서, 거기에도 외적 측면과 내적 측면이 있어 이것 역시 직접적이다; 이 합리적 평면은 요셉의 경우에 해당되므로 주님의 신성한 자비로부터 요셉을 집중적으로 말하는 대목에서 살필 것이다, 그 이유는 요셉이 합리적 평면의 외적 측면을 표현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천적 영적인 것이 무엇인지에 대하여는 이미 서술한 바도 있다, 즉 천적인 것은 선으로부터 있는 것, 그리고 영적인 것은 진리로부터 있는 것이다; 고로 천적 영적인 것은 진리로부터 선에 속한 것(진리의 선으로부터 있는 것)이다. 주님의 교회 또한 내적 측면과 외적 측면이 있는데, 야곱의 후손들을 수단으로 교회의 내적 측면이 외적인 것을 수단으로 표현되어야만 하기에, 야곱은 더 이상 야곱이라 불리울 수 없고, 이스라엘이라 불리워야만 하는 것이다. 여기에 더 알면 좋을 것은, 합리적 평면과 자연 평면 모두에서도 천적과 영적이라 불리우는 것에 대해서이다. 즉 천적인 것은 주님으로부터 선을 받을 때, 영적인 것은 주님으로부터 진리를 받을 때, 그렇게 일컬어진다; 그 이유가 주님으로부터 천국 안으로 흘러드는 선은 천적이라고, 진리는 영적이라 불리운다. 야곱이 이스라엘이라 불리움은 최고 의미에서 주님께서 내면의 것들쪽으로 발전하심, 그분 자신 안의 자연 평면의 외적, 내적 측면을 신성으로 만드심을 의미한다; 그 이유가 최고 의미에서는 표현된 것이 그분에 관련을 가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그에게 말하셨다. 이는 신성으로부터 지각함을 의미한다. 이는 “말하다”의 의미가 말씀의 역사물에서는 지각하다 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것이 신성으로부터 이었다는 것은 “하느님께서 말하셨다”에 의해 의미되고 있다; 그 이유가 신성은 임신 때로부터 주님 안에 있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그분의 있음 이었다, 그 이유가 그분은 여호와로부터 임신되셨기 때문, 그러므로 그분의 지각하심은 신성으로부터 이었기 때문, 그러나 이것은 그분의 인간에 의해 받아들임의 상태에 따라서 이었다, 그 이유는 그분은 계속적인 단계들을 수단으로 그분 자신 안에 있는 인간을 신성으로 만드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신성, 또는 하느님은 그분 안에 있었기에, “하느님이 그에게 말하셨다”의 말에 의해 신성으로부터 지각하심이 의미된 것이다.

나는 하느님 사다이 (전능한 하느님) 이다. 이는 과거에는 시험의 상태, 그리고 지금은 신성으로부터의 위로가 있는 상태를 의미한다. 이는 “하느님 사다이”의 의미가 시험 있음과 이후 위로가 있음이다로부터 분명해진다. 그 이유가 여호와, 또는 주님이 고대인들에 의해 시험과 위로에 관련하여 “하느님 사다이”라 불리웠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하느님 사다이”는 과거에 있는 시험, 지금은 신성의 위로가 있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이 “과거”라고 말한 이유는 시험들이 야곱에 의해, 뾰족하게는 야곱이 천사와 씨름함에 의해, 그리고 그가 에서를 만났을 때 (창. 33장) 표현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시험들을 수단으로 자연 평면 안에서 선과 진리의 결합이 결과되었다. 이 결합 자체가 위로됨인데, 그 이유는 결합은 시험들의 끝이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그가 끝에 도착할 때, 그가 수단들 안에서 허용했던 고된 것들에 따라서 위로를 가지기 때문이다.
우리가 알고 있어야 하는 것은, 일반적 측면에서 선이 진리와 결합함은 모든 결합함에서 반드시 시험들을 수단으로 결과된다는 것; 이런 이유로 악들과 거짓들의 저항에 부딪치고, 마치 반역을 일으키기라도 하듯, 악들과 거짓들은 선이 진리와, 진리가 선과 결합함을 막기 위해 발버둥을 친다. 이 전투는 인간과 더불어 있는 영들 사이에서, 즉 악과 거짓에 있는 영과 선과 진리에 있는 영 사이에서 벌어지는데, 이것이 인간 자신 안에서의 시험으로서 인간에 의해 지각되는 것이다. 하여 악들과 거짓들에 있는 영들이 선들과 진리들에 있는 영들에 의해 정복되어져, 당사자로부터 떠나도록 강요당할 때, 후자는 주님으로부터 천국을 통하여 기쁨을 가진다, 그리고 이 기쁨이 위로 받음으로, 그리고 자신 안에서 이듯 인간에 의해 지각된다. 그러나 기쁨과 위로를 받음은 승리함 때문이 아니라, 선과 진리의 결합 때문이다; 그 이유가 선과 진리의 모든 결합은 자체 내에 기쁨을 가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결합은 천국의 결혼 안에 신성이 있기 때문이다.

열매 맺고 번성하라. 이는 선과 선으로부터의 진리, 신성을 의미한다. 이는 “열매를 맺음”이 선을 서술하고, “번성함”이 진리를 서술함에서 알게 된다.

나라들과 나라들의 단체가 너로부터 있을 것이다. 이는 선과 선의 신성한 형체들을 의미한다. 이는 “나라”의 의미가 교회의 선이다로부터; 그리고 “나라들의 단체”의 의미가 선으로부터 있는 진리들이다로부터, 다른 말로, 선의 형체들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리고 최고 의미에서 주님이 취급되는 바, 이는 선의 신성한 형체들이다 에서 알게 된다.
나는 선의 형체들이 무엇인지를 먼저 서술하고, 그 다음 “나라들의 단체”가 그것들을 의미하는 것을 서술해본다. 선으로부터 있는 진리들이 선의 형체들이라 말해지는 이유는 진리들은 선이 모양을 만들어낸 것밖에 더 아니기 때문이다. 어떤 다른 방법에서 진리를 받는 자, 특히 진리들을 선으로부터 분리하여 받는 자는 진리들이 무엇인지를 모른다. 실로 진리들은 선으로부터 분리된 듯하여 나타난다, 그러나 이는 선 안에 있지 않은 이들에게서만 그럴 뿐이다, 또는 자신들이 뜻하고 행동하려는 것과 달리 생각하고 이야기하는 이들에게서만 분리된 듯 나타날 뿐이다. 인간은 자기 이해력과 의지력이 한 마음을 구성하도록 창조되었다, 그래서 이해력이 의지와 하나로 행동할 때, 즉 인간이 생각하고 말하는 대로 뜻하고 행동할 때, 그것들은 한 마음을 구성한다, 그 이유가 이럴 경우, 그의 이해력의 것들이 그의 의지력의 형체들이기 때문이다. 이해력의 것들이 진리들이라 불리운다, 그 이유는 진리들은 이해력 속에 있기 때문이다; 이에 비해 의지력의 것들은 선들이라 불리우는데, 그 이유는 선들이 의지 속에 있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알게 되는 것은, 그 자체에 국한해서 본다면, 이해력은 의지력이 모습을 만들어낸 것밖에 더 아니다.
그러나 단어 “형체(form)”는 인간의 철학의 냄새를 풍기는 단어인 바, 이 주제를 예를 수단으로 예증해보자. 이로부터 진리들은 선의 형체들임이 보여질 것이다. 시민 생활과 도덕 생활에서는 존경할만한 것과 어울리는 것이 존재한다. 전자는 시민적 업무에서 심정으로부터 타인에게 잘 해주려 뜻하는 것이고, 후자는 말이나 제스추어에서 이를 증명하는 것이다. 고로 그 자체로만에 주목하면, 후자는 전자의 형체밖에 더 아니다, 그 이유가 전자는 후자의 근원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전자가 후자를 수단으로 자체를 보일 때, 전자는 후자의 세세한 측면에서도 나타난다, 하여 말에서 발음된 것, 제스추어로 보여준 것이 무엇이든 존경할만한 것이다, 즉 존경할만한 것들이 형체나 형상을 통하여 빛을 발한다는 말이다. 이 방법에서 두 가지 것, 이해력과 의지력은 본질과 형체로서 같이 하나를 만든다. 그러나 만일 누군가가 전자를 후자로부터 분리해버린다면, 즉 누군가가 동료에게 악을 뜻하려 하면서도 그를 향해 호의를 비치고 있다면, 그가 존경할만한 것의 형체를 어울리는 것을 수단으로 보여주려 골몰해도 그의 언어나 제스추어 같은 것에서 존경할만한 것은 더 이상 어떤 자취도 없다. 그 이유가 이것은 실제로 비존경할만 것이라고 이를 식별하는 이들이 부를 것이기 때문, 하여 이것은 거짓 꾸밈, 또는 사기일 뿐이기 때문이다.
이런 모두로부터 진리들과 선들과 더불어서도 이런 경우가 어떻게 있을 것인가를 우리는 알 수 있다; 그 이유가 영적 생활에 있는 진리들은 시민 생활에 있는 어울리는 것과 입장이 비슷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진리들이 선의 형체들일 때, 그리고 선으로부터 분리되어 있을 때의 각 경우에서 진리의 품질이 무엇인지가 분명해진다; 그것들이 선으로부터 있지 않을 때, 그것들은 어떤 악으로부터 있고, 악의 형체들이다, 이는 이것들이 제아무리 선의 형체를 가장해도 그러하다. “나라들의 단체”가 선의 형체들이다는 것은 “나라들”의 의미가 선들이다로부터 알려진다. 그러므로 “단체(company)”, 또는 그것들의 모임은 그것들을 모음을 표시하는데, 이는 형체밖에 더 아니다; 그리고 이것이 진리이다는 것은 이미 살폈다. 그리고 진리들이 의미된 것이기에, 그리고 “나라”를 수단으로 선이 의미되었기에, 그러므로 “나라”가 야곱으로부터 있을 뿐 아니라 “나라들의 단체”도 있을 것이라 말해진 것인 바, 만일 이렇게 의미되지 않았다면 하나의 표현으로도 충분했을 것이다. 더욱이 말씀에서 “단체”, “모임”, “군중”은 진리들에 관해 말해지고 있다.

그리고 왕들이 네 허리로부터 나오리라. 이는 신성한 결혼으로부터의 진리들을 의미한다. 이는 “왕들”의 의미가 진리들이다로부터; 그리고 “허리”의 의미가 부부의 사랑으로부터의 것들, 결과적으로 천국의 결혼으로부터의 것들, 최고 의미에서 신성한 결혼으로부터의 것들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신성한 결혼으로부터의 진리들은 주님의 신성한 인간으로부터 진행되는 것들, 그래서 거룩함이라 불리우는데, 그 이유는 주님의 신성한 인간은 신성한 결혼 자체이시기 때문, 그리고 이로부터 진행하는 것들은 거룩하기 때문, 그리고 천적, 그리고 영적이라 불리우고, 천국의 결혼을, 즉 진리가 선과, 선이 진리와 결합함이 결과되게 하기 때문이다. 이 결혼이 천국 안에 존재하고, 천국에 있는 모든 이 하나하나에서, 또한 교회 안에 있는 모든 이 각각이 선 안에, 동시에 진리 안에 있는다면 그들 안에서도 이 결혼은 존재한다.

그리고 내가 아브라함에게, 이삭에게 주었던 이 토지를 나는 너에게 주리라. 이는 자연 평면에 있는 신성한 선을 내 것 되게 해주심을 의미한다. 이는 “토지”의 의미가 선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여기서 “토지”라고 말해진 토지는 가나안의 토지인 바, 이는 내적 의미에서 주님의 왕국을 표시한다, 그러므로 땅에 있는 주님의 왕국인 교회도 표시한다, 그리고 이렇게 표시하는 바, 이것은 선을 표시한다, 그 이유는 이것이 주님의 왕국과 교회의 필수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고 의미에서 “가나안의 토지”는 주님의 신성한 선을 표시하는데, 그 이유는 천국과 땅에 있는 주님의 왕국에 있는 선은 주님으로부터 있기 때문이다. 이는 아브라함과 이삭의 표현함이 주님의 신성이다로부터, 즉 아브라함은 신성 자체를, 이삭은 신성한 인간을, 특히 주님의 신성한 합리성을 표현함으로부터도 분명해진다; “네게 토지를 줌”의 의미가 자연 평면에 그것을 어울리게 함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 이유가 야곱이 여기서 주님의 신성한 자연 평면을 표현했기 때문이다. 이 모두로부터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주기로 한 토지를 나는 네게 줄 것이다”가 신성한 선이 자기 것이 되게 함이다 임이 분명해진다.

그리고 네 이 후 네 씨에게 나는 토지를 줄 것이다. 이는 자연 평면으로부터의 신성한 진리가 자기 것이 되게 하심을 의미한다. 이는 “씨”의 의미가 신앙의 진리이다로부터, 그리고 최고 의미에서 신성한 진리이다; 그리고 “네 씨에게 토지를 줌”의 의미가 최고 의미에서 신성한 선이 신성한 진리에 어울리는 것(자기 것이 되게 함)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러나 이것이 자기 것이 되어진 신성한 진리인 이유는 그분이 신성이 되시기 이전에서, 그분은 자기의 인간 측면에서는 신성한 진리이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로부터 주님께서 자신을 두고 말하시기를, 나는 “진리”이다고 하셨다 (요. 14:6), 그러므로 그분은 “여인의 씨”라 불리우신다 (창. 3:15). 그러나 주님께서 그분의 인간 측면에서 신성이 되신 뒤에, 그분은 신성한 선이 되셨다; 그 다음 신성한 선으로서의 그분으로부터 신성한 진리가 진행되었고 진행되고 있다; 이것이 주님께서 보내시기로 하셨던 “진리의 영”이다 (요. 14:16, 17; 15:26, 27; 16:13-15; 또는 3704항도 보라.) 위 모두로부터 분명해지는 바, “네 뒤의 네 씨”의 말에 의해 최고 의미에서 그분에게 어울려진 신성한 진리가 의미된다; 그리고 또한 신성한 진리는 그분 자신인 신성한 선으로부터 진행한다, 그리고 선 안에 있는 이들, 이 선으로부터 진리 안에도 있는 이들에게 자기 것이 되게 하여 주신다.

그리고 하느님은 그와 더불어 말하셨던 장소에서 그의 위쪽으로부터 올라 가셨다. 이는 이 상태 안에 있는 신성을 의미한다. 이는 “하느님이 그의 위쪽으로부터 올라 가셨다”의 의미가 신성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 이유가 “올라가는” 것은 내면의 것들쪽으로 승강함을 포함하기 때문, 그리고 주님을 서술할 경우, 즉 여기서 “하느님”인 바, 이는 신성쪽으로 승강함을 표시한다; 그리고 “그분이 그와 더불어 이야기하신 장소”의 의미가 이 상태이다로부터도 알게 된다. 그러므로 “그분이 그와 더불어 이야기하신 장소”는 그분이 있으셨던 상태를 표시한다.

14, 15절. 그리고 야곱은 그분께서 자기에게 말하셨던 장소에 기둥, 돌 기둥을 세웠다. 그리고 그는 그 위에 음료 공물을 부었다, 그리고 그 위에 기름을 부었다. 15 그리고 야곱은 하느님께서 자기에게 말하셨던 이곳의 이름을 벧엘이라 불렀다.

그리고 야곱은 그분께서 자기에게 말하셨던 장소에 기둥, 돌 기둥을 세웠다. 이는 이 신성한 상태 안에 있는 진리의 거룩함을 의미한다. 이는 “기둥”의 의미가 진리의 거룩함이다로부터 알게 되는데 아래에서 살핀다; 그리고 “그분이 자기에게 말하셨던 장소에”의 의미가 이 상태 안에 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기둥을 세움, 그리고 그 기둥에 음료 공물을 부음, 그리고 그 기둥 위에 기름을 부음의 기원에 관하여 우선 몇 마디 거들어야 할 것 같다.
고대 시대 때에 세운 기둥들은 표시를 위해, 또는 증거를 위해, 또는 예배를 위해서 이었다. 예배를 위해 세운 기둥은 기름부어, 거룩해졌는데, 예배 역시 거기서 개최했다, 고로 예배는 성전에서, 작은 숲에서, 나무 아래 작은 숲에서, 다른 장소들에서도 개최되었다. 이 의식의 표현은 태고 시대에서 돌들이 민족들의 가문들 사이에 경계선이 되게 세워둠으로 서로에게 악을 행하려고 서로가 이 경계선을 넘지 않게 하려는 목적에서 세워진 것에서 유래되었다 예를 들면, 창. 31:52에서 라반과 야곱이 쌓은 돌무더기일 것이다. 악을 행하려고 서로가 이 경계선을 넘지 않아야 함이 민족들(나라들)의 법이었다. 그리고 태고인들은 경계선에 세워진 돌들을 보았을 때, 그들은 질서의 최말단에 있는 진리들에 관하여 생각을 했다; 그 이유가 이들은 땅 위에 있는 모든 것들은 천적이고 영적인 것들과 상응함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의 후손들로 내려가면서, 이들이 대상물을 볼 때, 그들은 천적, 영적인 것과의 상응 관계에는 덜 중요시하고, 대신 세상적인 것에 더 중점을 두기 시작했는 바, 그들은 이런 상응적인 사항들은 선조로부터 파생된 것을 존경하는 수준에서만 거룩하게 생각했다. 드디어 홍수 직전 살았던 태고인의 후손들, 그리고 지상적, 세상적인 것들을 천적, 영적인 어떤 것에 대한 목적물로서 더 이상 보지 않았던 이들은 돌들을 거룩한 것으로 간주하여 그것들에 제주를 붓고, 기름을 부었다; 그리고 그들은 “기둥들”이라 부르고, 예배를 위해 사용했다
이것이 홍수 이후 고대 교회에 남아 있었고, 대상물들은 표현적이 되어서, 그들이 내적 예배를 달성하는데 섬김 역할을 했다. 즉 그들은 대상물을 바라보며 그것들이 표현한 것을 자녀에게 가르쳤는 바, 대상물은 거룩한 사항들을 알기 위해 가져다 놓인 셈이었다. 따라서 그들은 대상물을 보고 그것이 표현한 사항에 감동되었다. 이런 이유로 고대인들은 그들의 성전에, 작은 숲에, 숲에, 언덕이나 산에 예배를 위한 기둥들을 가졌다. 그러나 예배의 내적인 것이 고대 교회에서 완전히 멸해졌을 때, 그리고 그들이 외적인 것들을 거룩하고 신성한 것으로 붙잡았을 때, 고로 그것들을 우상적으로 예배하기를 시작했을 때, 그들은 자기들의 몇몇 신들을 위해 기둥들을 똑바로 세웠다. 그리고 야곱의 후손들은 우상적인 사항들에 매우 쉽게 빠져들었기에, 그들에게는 기둥들을 똑바로 세우는 것, 그리고 작은 숲을 가지는 것, 또는 언덕이나 산에서의 어떤 예배도 금했다; 그러나 그들이 하나의 장소에 함께 모여들게 되었는데, 이 장소는 궤가 있었던 곳, 후에는 성전이 있는 곳, 고로 예루살렘이었다. 이렇지 않았다면 각 가문들은 자기들이 예배할 외적인 것, 우상들을 가졌을 것이고, 그러면 교회의 표현물 또한 그 민족 사이에서 설립되었을리 만무했을 것이다. (기둥에 관하여는 3727항도 보라.) 위 사항은 기둥의 근원이 무엇인지를, 그것들이 의미하는 것을, 그리고 그것들이 예배에서 채용되었을 때, 그것들은 거룩한 진리를 표현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 이유가 “돌”은 질서의 최말단에 있는 진리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에 더 알게 되는 것은, 거룩한 것은 특별하게는 신성한 진리를 서술한다는 것; 그 이유가 신성은 주님 안에 있고, 그리고 신성한 진리는 그분으로부터 진행하고, 거룩함이라 불리우기 때문이다.

그는 그 위에 음료 공물을 부었다. 이는 진리로부터의 신성한 선을 의미한다. 이는 “음료 공물(제주 祭酒)”의 의미가 진리로부터의 신성한 선이다로부터 알게 되는데, 이에 관해 아래에서 살핀다. 그러나 먼저 내가 서술할 것은 진리로부터의 선이 무엇인지 이다. 진리로부터의 선은 다른 장소에서는 신앙으로부터의 선, 그리고 이웃을 향한 사랑, 또는 선행이라 불리웠다. 선에는 두 개의 보편적 종류가 있다; 신앙으로부터의 선과 사랑으로부터의 선이다. 신앙의 선이 “음료 공물”에 의해, 사랑의 선은 “기름”에 의해 의미된다. 내적 경로로 해서 주님에 의해 선으로 데려와지는 이들은 사랑의 선 안에 있고, 외적 경로로 해서 주님에 의해 데려와지는 이들은 신앙의 선 안에 있다. 천적 교회의 사람들, 마찬가지로 가장 깊은 천국, 또는 셋째 천국의 천사들은 사랑의 선 안에 있다; 그러나 영적 교회의 사람들, 마찬가지로 중간 천국, 또는 둘째 천국의 천사들은 신앙의 선 안에 있다. 이런 이유로 전자는 천적 선, 후자는 영적 선이라 불리운다. 그 차이는 선을 뜻할 때, 선한 의지로부터 인지, 선한 이해력으로부터 인지 이다. 그러므로 후자, 영적 선, 또는 신앙의 선, 또는 진리의 선이 “음료 공물”에 의해 의미되고, 전자, 즉 천적 선, 또는 사랑의 선은 내적 의미에서 “기름”에 의해 의미된다.
이와 같은 것이 “음료 공물”과 “기름”에 의해 의미되는 것은 내적 의미가 아니고서는 알려질 수 없다, 또한 이렇게 의미됨이 모든 이에게 알려져야 하는 이유는 그렇지 않으면 돌 위에 음료 공물을 붓고 기름을 붓는 행위가 그야말로 말씀이 우상 숭배적인 행위가 기록된 것으로 비신앙자에게는 조롱거리 건수밖에 더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왕을 만드는 과정들, 그의 머리 위에 왕관을 씌우고, 뿔에 담은 기름으로 그에게 붓는 것, 그의 손에 홀을 쥐게 하는 것, 검과 열쇠를 차게 하고, 심홍색 도포를 두르게 하고, 장식을 한 말을 타고, 고위급에 속하는 이들에 의해 식탁에서 섬겨지고, 등등 같은 모든 축하식이 거룩한 것을 표현하지 않으면, 그리고 그것들이 천국과 교회와의 상응을 통하여 존경되지 않으면, 이는 어린아이의 장난 수준이 규모에서만 커진 것밖에 더 아닐 것이다.
어쨌든 이런 의식들은 그것들의 근원을 태고 시대에, 즉 의식들이 거룩한 것들을 표현하던 시대에 두고 있다. 더욱이 그것들이 오늘날 존경할만한 것으로 간주된 것은 그것들이 표현하는 것, 또는 그것들이 상응하는 것 때문이 아니라, 해석을 수단으로 현재 통용되는 상징성 때문이다. 그러나 위의 것들, 즉 왕관, 기름, 뿔, 홀, 검, 열쇠, 흰말을 탐, 고관의 섬김을 받음 등등의 것이 무엇을 표현하는지를, 그것들이 무엇에 상응하는지를 알고 있다면, 아마 더욱 존경할만 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을 그들은 알지 못한다, 경이로운 것은, 그들이 알기를 바라지 않는다는 것, 즉 말씀에 있는 이런 사항들이 표현하고 의미하는 것을 어떤 수준에서 이든 알기를 바라지 않는다는 것, 하여 오늘날, 이런 사항들은 인간의 마음 안에서 파괴되어져 있다는 것이다.
“음료 공물”이 진리의 선, 또는 영적인 선을 의미하는 것은 음료 공물이 채용된 제물을 바치는 의식으로부터 알는지 모른다. 제물은 목축, 또는 양떼로부터 만들어지고, 이는 주님에 대한 내적 예배의 표현물이었다. 이 제물 바침에 음료 공물과 식사 공물이 더하여졌다. 식사 공물은 고운 곡식가루에 기름을 섞어 만들었는데, 천적 선, 또는 사랑의 선을 의미한다, 그리고 “기름”은 주님을 사랑함을, “고운 곡식가루”는 이웃을 향한 선행을 의미한다. 그러나 포도주로 구성되는 음료 공물은 영적 선, 또는 신앙의 선을 의미했다. 그러므로 음료 공물과 식사 공물 모두는 성찬식에서의 빵과 포도주와 같은 것을 의미했다.
이것들이 태우는 공물과 제물에 더하여졌다. 모세의 책에서:
너는 날마다 계속적으로 일 년된 두 어린 양을 바칠 것이다; 하나는 아침에, 다른 하나는 저녁 사이에 바친다; 그리고 찧어 만든 기름 사분의 일 힌을 섞은 고운 곡식가루 십분의 일 (에바), 그리고 처음 어린 양을 위한 사분의 일 힌의 포도주의 음료 공물을; 그리고 두 번째 어린 양을 위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출. 29:38-41).
레위기서에서:
수확의 첫 열매들의 곡식단을 흔드는 날에, 너는 여호와께 태움의 공물을 위해 일 년된 흠없는 어린 양을, 식사 공물은 기름을 섞은 고운 곡식가루 십분의 이를, 그리고 음료 바침은 포도주로 하되, 사분의 일 힌을 바쳐라 (레. 23:12, 13, 18).
민수기서에서:
그의 나지르인됨의 의무의 날들이 충만되는 날에서, 그는 그의 선물을 여호와께 바칠 것이다, 그리고 고운 곡식가루의 누룩 없는 것의 바구니, 기름을 섞은 과자들, 기름을 부은 누룩 없는 웨이퍼들(wafers), 그것들의 식사 공물과 음료 공물과 더불어 바쳐라 (민. 6:13-15, 17).
민수기서에서:
매일의 제물의 태움의 공물 위에 너는 어린 양을 위한 음료 공물 사분의 일 힌; 거룩한 장소에서 너는 포도주의 음료 공물을 여호와께 부을 것이다 (민. 28:6, 7).
더욱이 다양한 종류의 제물에 식사 공물과 음료 공물에 관하여는 민. 28:7-31; 29: 1-40을 더 읽으면 될 것이다.
식사 공물과 음료 공물이 이런 의미를 가졌다는 것은 사랑과 신앙이 예배의 모든 것을 결과한다는 사실로부터도 알는지 모른다; 그리고 성찬의 빵과 포도주가 사랑과 신앙을 의미한다는 것, 고로 예배의 모든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사람들이 주님을 예배함에 대한 진짜 표현함으로부터 타락되었을 때, 그리하여 다른 신들로 눈을 돌렸을 때, 하여 그들에게 음료 공물을 부었을 때, 이때의 음료 공물은 선행과 신앙에 반대되는 것들을 의미했다, 즉 세상을 사랑함으로부터의 악들과 거짓들을 의미했다. 이사야서에서:
너희는 푸른 모든 나무 아래에서 신들과 더불어 뜨거워졌다, 너는 또한 음료 공물을 그것들에 쏟아부었다, 너는 식사 공물을 바쳤다 (이. 57:5, 6);
“신들과 더불어 뜨거워지는” 것은 거짓으로부터의 현세에의 욕망을 표시한다; “푸른 모든 나무 아래”란 모든 거짓들로부터의 믿음을 표시한다; “그것들에 음료 공물을 붓고, 식사 공물을 바치는 것”은 그것들을 예배함을 표시한다. 이사야서에서:
여호와 등진 너희, 내 거룩함의 산을 잊은 너희, 갓(Gad) 위한 식탁을 마련하고, 므니(Meni)에게 음료 공물을 채우는 너희 (이. 65:11).
예레미야서에서:
아들들은 장작을 모은다, 아버지들은 불을 지핀다, 여인들은 가루를 반죽한다, 이는 하늘의 여왕을 위하여 이고, 다른 신들에게 음료 공물을 쏟아부은다 (예. 7:18).
다시:
우리가 우리 입에서 뱉은 말을 확실히 실행하여 하늘의 여왕에게 향을 태우고, 우리의 아버지들이 하던 대로, 그리고 우리의 제 일인 자들이 유다의 성읍과 예루살렘의 거리에서 하던 대로 그녀에게 음료 공물을 쏟는 것이다 (예. 44:17-19);
“하늘의 여왕”은 모든 거짓들을 표시한다, 그 이유는 “하늘의 군대들”이 진짜 의미에서 진리들이나, 반대 의미에서는 거짓들이기 때문이다; “왕과 여왕”도 마찬가지인데, 여왕은 그것들의 모두를 표시하고, “그녀에게 음료 공물을 붓는 것”은 예배하는 것이다.
다시:
갈대아인들이 도성을 불태울 것이다, 그리고 집의 지붕에서 그들은 바알에게 향을 바쳤다, 그리고 다른 신들에게 음료 공물을 부었다 (예. 32:29);
“갈대아인들”은 거짓이 있는 예배 안에 있는 이들을 표시한다; “도성을 태우는 것”은 거짓인 것으로부터의 교리적인 것들 안에 있는 이들을 파괴하고 황폐해지게 하는 것을 표시한다; “집의 지붕에서 바알에게 향을 바치는 것”은 악인 것을 예배함을 표시한다; “다른 신들에게 음료 공물을 붓는 것”은 거짓인 것을 예배함을 표시한다.
호세아서에서:
그들은 여호와의 토지에서 거주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에브라임은 이집트로 돌아갈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아시리아에서 불결한 것을 먹을 것이다; 그들은 여호와께 포도주를 붓지 않을 것이다 (호. 9:3, 4);
“여호와의 토지에서 거주하지 않는 것”은 사랑의 선 안에 있지 않다를 표시한다; “에브라임은 이집트로 돌아갈 것이다”란 교회의 지적 측면이 단지 지식적이고 감각적일 뿐임을 표시한다; “그들이 아시리아에서 불결한 것을 먹을 것이다”란 추론으로부터의 불순하고 모독적인 것들을 표시한다; “그들은 여호와께 포도주를 붓지 않을 것이다”란 진리로부터 예배함이 없다를 표시한다.
모세의 책에서:
이것이 말해질 것이다, 제물의 지방을 먹었고, 음료 공물의 포도주를 마셨던 그들이 신뢰했던 바위, 그들의 신들은 어디 있는가? 그것들을 일어나게 해서 그들을 돕게 하자 (신. 33:37, 38);
“신들”은 앞 구절들에서 같이 거짓들을 표시한다; “제물의 지방을 먹은 것”은 그들이 예배의 선을 파괴했음을 표시한다; “그들의 음료 공물의 포도주를 마신 것”은 그들이 예배의 진리를 파괴했음을 표시한다. 음료 공물은 피라고도 단언된다. 다윗서에서:
그들은 자기들의 슬픔들을 불어나게 할 것이다, 그들은 또 다른 것(신들)쪽으로 서두른다, 나는 피의 그들의 음료 공물을 붓지 않도록, 그리고 내가 내 입술에 그들의 이름들을 담지 않도록 할 것이다 (시. 16:4);
위 말들에 의해 진리의 모독들이 의미된다; 그 이유는 이 의미에서 “피”는 선행에 가해진 폭력을 표시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모독.

그리고 그 위에 기름을 부었다. 이는 사랑으로부터의 신성한 선을 의미한다. 이는 “기름”의 의미가 사랑의 신성한 선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돌 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음료 공물과 기름을 붓는” 것은 내적 의미에서 최말단에 있는 진리로부터 내면의 진리와 선쪽으로, 마지막 사랑의 선으로까지 발전하는 과정을 서술하고 있다. 그 이유가 “돌기둥”은 질서의 최말단에 있는 진리이고, “음료 공물”은 내면의 진리와 선이고, 그리고 “기름”은 사랑의 선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것이 주님의 인간을 신성으로 만드심에 있는 주님의 발전 과정이었다, 그리고 이 과정은 거듭남을 수단으로 주님께서 인간을 천국 수준으로 만드실 때 수행되는 과정이기도 하다.

그리고 야곱은 하느님께서 자기에게 말하셨던 그곳의 이름을 벧엘이라 불렀다. 이는 자연 평면 속의 신성과 그것의 상태를 의미한다. 이는 “이름을 부름”의 의미가 품질이다로부터; 그리고 “벧엘”의 의미가 신성한 자연 평면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리고 그것의 상태는 “하느님께서 그에게 말하셨던 장소”의 의미에서 언급되었다.

16-20항. 그리고 그들은 벧엘로부터 여행했다. 그리고 에브라데로 가되 아직은 그 토지에 있을 즈음 라헬이 해산하였다, 그리고 그녀는 출산에서 참기 어려운 것들을 겪었다.
17 그리고 그녀의 해산의 고통이 극에 달할 즈음 산파가 그녀에게 말했다, 걱정하지 말라, 그 이유가 이 또한 당신에게 아들이다. 18 그리고 그녀의 혼이 떠나려 하여 그녀가 죽으려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그의 이름을 베노니라 불렀다. 그리고 그의 아버지는 그를 베냐민이라 불렀다. 19 그리고 라헬은 죽었다. 그리고 에브라데로 가는 길에 매장되었다. 이곳은 베들레헴이다. 20 그리고 야곱은 그녀의 무덤에 기둥을 세웠다. 이것은 오늘날까지 라헬의 무덤의 기둥이다.

그리고 그들은 벧엘로부터 여행하였다, 그리고 에브라데에 당도하기 전 아직 그 토지에 있을 때였다. 이는 이제는 천적 평면 속의 영적인 것이었음을 의미한다. 이는 “벧엘로부터 여행함”의 의미가 신성한 자연 평면으로부터 신성의 발전이 계속됨이다로부터; “당도하기 전 아직 그 토지에 있음”의 의미가 직접적인 것이다로부터, 이에 대하여는 아래에서 살핀다; 그리고 “에브라데”의 의미가 이전 상태에 있는 천적 평면 속의 영적인 것이다로부터 (베들레헴의 경우는 새로운 상태에서의 천적 평면 속의 영적인 것이다), 그러므로 말해진다, “에브라데, 이것은 베들레헴이다” (19절).
이 구절에서 취급되는 주제는 내면의 것들을 향하는 주님의 신성의 발전이다, 그 이유는 주님께서 그분의 인간을 신성으로 만드셨을 때, 그분은 인간을 거듭남에 의해 새로이 만드시는 것도 같은 질서에서 발전되게 하셨다, 즉 외적인 것으로부터 내적인 것들로까지, 고로 질서의 최말단에 있는 진리로부터 내면인 선, 즉 영적인 선으로까지, 이로부터 천적인 선으로까지 발전해가게 하셨다. 그러나 이런 사항들이 누군가의 이해력에 와 닿으려면, 외적 인간과 내적 인간이 무엇인지, 그리고 전자와 후자는 구분된다는 것, 비록 인간이 육체 안에서 사는 동안 하나로서 나타날지라도 구분이 확실하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또한 자연 평면이 외적 인간을 구성한다는 것, 합리적 평면이 내적 인간을 구성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더 나아가 영적 평면(수준)이 무엇인지, 천적 평면(수준)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한다.
[3] 이런 사항들은 지금까지 자주 언급하여 밝히 알게 하려 노력한 것들이다. 그럼에도 영원한 삶에 관해 알고 싶지 않았던 결과로 이런 사항들에 관해 어떤 생각도 사전에 가져보지 못한 이들은 위의 사항들에 대한 어떤 생각을 가지는 것이 불가능함을 발견한다. 하여 어떤 이는 이렇게 말한다, “내적 인간이 누구이냐? 내적 인간이 외적 인간으로부터 구분지음이 가능하단 말인가? 자연 평면이 무엇이냐? 그리고 합리적 평면이 무엇이냐? 그것들은 하나가 아니더냐? 더 나아가, 영적 평면은 무엇이고, 천적 평면은 무엇이냐? 이것은 새로운 구분이 아니야? 우리가 영적이라는 단어는 들어보긴 했지만, 천적이라는 단어는 들어본 적도 없지 않던가?” 등등이다. 어찌되어 있건 이 경우는 이렇다: 이런 주제들에 관해 어떤 생각을 이전에 가져보지 못한 이들, 즉 세상과 육체의 관심과 걱정이 그들의 모든 생각들이 소유했기 때문에, 그 외 어떤 것을 알려는 바램이 없었기 때문이었던 이들; 또는 자기들이 알고 있는 것만 가지고도 자기들의 교리적 주장을 아는 것은 충분하다는 이들, 그 결과로 위의 주제들을 알 필요가 없다는 이들, 이들 모두가 공통적으로 말한다, “우리는 세상을 볼 수 있으나, 다른 세상은 우리가 볼 수 없다, 아마 그것은 있는지, 없는지 나는 알 바 아니다.” 이런 인물들은 이런 모든 주제들이 거추장스런 옷에 불과하다, 하여 이런 주제들이 귀에 들리는 처음 순간에 심정으로 그것들을 내치고 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은 말씀의 내적 의미 안에 포함되고 있다, 그리고 이런 내용들은 그것에 걸맞는 단어나 용어 없이는 말로 설명할 수 없다. 우리가 외면의 것을 표현함에서 자연 평면이라는 용어, 내면의 것을 표현하는데 합리적 평면이라는 용어보다 더 적절한 용어는 없다; 진리로부터 있는 것들에 대해서는 영적 (평면, 수준)이라는 단어가, 선으로부터 있는 것들에 대해서는 천적 (평면, 수준)이라는 용어가 필요한데, 이것 없이는 어떤 것도 서술되고 묘사해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런 용어들이 필요하다고 인정하고 그것을 알기를 바라는 이들만을 위해 이 장에서 등장하는 용어를 간략히 설명한다. 최고 의미에서 취급되어 왔던 주제는 주님의 자연 평면이 신성이 되심, 관계적 의미에서 인간이 그의 자연 평면 측면에서의 거듭남이다. 야곱은 교인에게 있는 자연 평면의 외면 측면을, 이스라엘은 자연 평면의 내면 측면을 표현했다; 그 이유가 영적 인간은 자연 평면으로부터 있고, 천적 인간은 합리적 평면으로부터 있기 때문이다. 주님의 신성이 되심(Lord’s glorification)은 외적인 것들로부터 더 내면의 것들쪽으로 발전해가심 이고, 이와 같은 방식에서 인간의 거듭남도 발전해간다는 것, 이를 표현한 것이 야곱이 “이스라엘”이라 불리우는 것임은 이미 살폈다.
그러나 더욱 내면의 것들을 향한 발전, 즉 합리적 평면으로의 발전이 지금 취급된다, 그 이유는 위에서 말한 대로 합리성이 내적 인간을 구성하기 때문이다. 자연 평면의 내적 측면과 합리적 평면의 외적 측면 사이에 있는 것, 즉 양쪽의 중간에 있는 것이 천적 평면 속의 영적인 것(spititual of celestial)에 의해 뜻해지고, 이것이 “에브라데”, 그리고 “베들레헴”에 의해 의미되고, 베냐민에 의해 표현된다. 이 중간(intermediate)의 것은 얼마쯤은 “이스라엘”인 자연 평면의 내적 부분으로부터, 얼마쯤은 “요셉”인 합리적 평면의 외적 부분으로부터 파생되고 있다; 그 이유가 중간인 것은 각 평면의 맨끝의 어떤 것으로부터 파생되어야 중간에서의 역할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누군가가 영적 수준에서 천적 수준으로 발전하려면 질서상 그는 이 중간의 것을 통과하여야 함이 필수적이다. 그 이유가 이 중간의 것 없이 더 높은 쪽으로 올라감은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어떤 질병에 대단한 치료약이 발견되었다 해도 이 약이 신체에 흡수되지 못하면 먹어보아야 아무 효력이 없기에 이 흡수작용을 원활히 하게 하는 신체와 약 사이의 중간의 것(촉매제)이 치료약 발견 다음으로 중요한 필수적 단계인데, 아마 이 촉매제가 여기서 설명하려는 중간의 것에 대한 실예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역자주)
이 중간의 것을 통과하여 발전함의 본질이 야곱이 에브라데에 옴, 그리고 라헬이 거기서 출산함에 의해 묘사되고 있다. 그러므로 벧엘로부터 여행함, 그리고 에브라데로 당도하기 전 아직 체류해있던 토지에 의해 신성의 자연 평면으로부터 “에브라데”와 “베들레헴”에 의해 의미되고, 베냐민에 의해 표현된 천적 평면 속의 영적인 것쪽으로 주님의 신성의 발전하심이 계속되는 것이 의미되고 있다. 천적 평면 속의 영적인 것이 위에서 말해진 중간의 것인데, 영적 인간으로부터는 “영적”이라 불리우고, 이것 자체만을 관조한다면, 자연적 인간 속의 내면이고, 그리고 천적 인간으로부터서는 “천적”이라 불리우고, 이것 자체만을 관조한다면 합리적 인간이다. “요셉”은 합리적 인간 속의 외면 부분이다, 그러므로 합리적 인간으로부터 영적 평면 속의 천적인 것이 요셉이라 단언된다.

그리고 라헬은 해산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녀는 출산함에서 참기 어려운 것들을 겪었다. 이는 내면의 진리에 대한 시험을 의미한다. 이는 “출산함”의 의미가 진리 속에 있는 영적인 것들과 선 속에 있는 천적인 것들이 세상 밖으로 출시됨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 이유가 내적 의미에서 “출산함”은 영적 출생에 속한 것을 표시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라헬의 표현함이 내면의 진리에 애착함이다로부터; 그리고 “참기 어려운 것들을 겪음”의 의미가 시험을 수행함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렇게 시험을 수행함이다고 말한 이유는 “참기 어려운 것을 겪다”가 진리들과 선들을 서술할 경우, 이는 시험밖에 더 다른 의미는 없기 때문이다. 어느 인간도 시험을 수행하지 않고 거듭남을 달성할 수 없는 이유는 내면의 선들과 진리들이 유전적으로부터, 실제적으로부터 있는 악들과 거짓들과 싸워야 하기 때문, 이 때 인간은 주님에 의해 내부로부터 선들과 진리들 안에 보존되는데, 유전적인 것으로부터 튀어나오는 악들과 거짓들의 공격을 받고, 이것이 실제적인 것으로부터 인간과 더불어 있는 악들과 거짓들 안에 있는 악령과 악귀에 의해 표출되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시험이 오고, 악들과 거짓들이 극복되고 내쫓기고, 제거되는 한편 선과 진리들은 확증된다. 이것들이 라헬이 출산함과 출산함에서 참기 어려운 것을 겪음에 의해 의미되어 있다.
그리고 그녀의 해산의 고통이 극에 달하였다. 이는 시험 후를 의미한다. 이에 대하여는 바로 앞에서 설명이 있었으므로 생략한다.

산파가 그녀에게 말했다, 걱정하지 말라. 이는 자연 평면으로부터의 지각을 의미한다. 이는 “말하다(say)”가 말씀의 역사 부분에서는 지각하다이다로부터; 그리고 “산파”의 의미가 자연 평면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여기서 “산파(midwife)”가 자연 평면을 표시하는 이유는 내면의 시험이 수행될 때, 즉 내면의 인간이 시험을 겪고 있을 때, 자연 평면은 산파 같은 역할을 해주기 때문이다; 자연 평면이 도움을 제공하지 않으면, 내면의 진리로부터의 어떤 출생도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내면의 진리가 태어날 때, 그것들을 품안으로 받는 것이 자연 평면이기 때문, 그리고 내면의 진리가 밖으로 나가 일함을 제공하는 것이 자연 평면이기 때문이다. 내면의 진리를 자연 평면에서 통째로 받아들이는 것은 영적 출생으로부터의 것들에게 언제나 있는 경우이다; 이것은 인간이 거듭나질 때, 첫 순서는 자연 평면이 받을 준비가 되어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자연 평면이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진 만큼에서 내면의 진리들과 선들은 출생되고 번성한다. 또한 이것은 인간이 육체의 삶 동안 신앙의 진리들과 선들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으면, 그는 다른 삶에서 그것들을 받아들일 수가 없어 결과적으로 구원되어질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는 항간에서 하는 속어, 즉 나무가 쓰러지면, 쓰러진 그대로 있다, 또는 인간이 죽을 때, 그는 그런채로 있는다 같은 식의 말에 의해서도 뜻해진다. 인간은 다른 삶에서 그의 자연적 기억 모두를 자기와 더불어 가진다. 또는 그의 외적 인 간의 것 모두를 자기와 더불어 가진다. 이것은 일종의 기초 평면 역할을 하고, 이 안으로 내면의 진리들과 선들이 낙하한다. 그런데 만일 이 평면이 내면의 진리들과 선들을 받을 수 없는 지경이라면, 내면의 것들은 소멸되거나, 악용되거나, 거절되거나 하고 만다. 이상으로부터 분명한 바, 자연 평면이 산파 역할을 한다는 점이다. 내면의 인간이 출생할 때, 자연 평면이 받는 그릇인 만큼에서, 이것은 산파처럼 있다는 것은 출애굽기에서 바로의 명령을 따르지 않은 산파들에 관련된 것들의 내적 의미로부터도 알는지 모른다. 즉:
이집트의 왕이 히브리 여인들의 산파들에게 말했다, 그리고 그가 말했다, 너희가 히브리 여인의 산파 업무를 수행할 때, 변통에서 그들을 보고 만일 아들이거든 죽이고, 딸이거든 살려두어라. 그러나 산파들은 하느님을 두려워했다, 그리고 이집트의 왕이 그들에게 말한 것을 행하지 않았다, 하여 사내 아이를 살려두었다. 그래서 이집트의 왕이 그들을 불렀다, 그리고 그들에게 말했다, 왜 너희는 이 말을 행치 않고 사내 아이들을 살려두었느냐? 그러자 산파들이 바로에게 말했다, 그 이유는 히브리 여인들은 이집트 여인들 같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무척 건강해서 산파가 당도하기 전 출산해버렸습니다. 그리하여 하느님께서는 산파들을 잘 돌보셨다, 그리고 백성들은 불어났다, 그리고 그 숫자가 굉장했다. 산파들이 하느님을 경외하였기 때문에, 그분은 그들에게 집들을 만드셨다 (출. 1:15-21);
히브리 여인이 출산한 딸들과 아들들에 의해 새로운 교회의 선들과 진리들이 표현되었다; 산파에 의해서는 선들과 진리들을 받는 만큼에서의 자연 평면이 표현되었다; 이집트의 왕에 의해서는 일반적 측면에서 기억 속의 지식이 표현되었다; 이 지식이 신앙 속의 것들 안으로 들어갈 때, 거꾸로의 방식에 의해, 즉 감각들과 기억 속의 지식이 지령을 내리는 것 말고는 어떤 것도 믿어서는 안된다는 방식에 의해 진리들을 소멸되게 한다. 여기서 “산파”가 자연 평면에서 진리를 받아들임이다는 것에 대해서는 출. 1장을 밝히 설명하는 때에 주님의 신성한 자비로부터 더 상세히 알려질 것이다.

그 이유가 이 또한 당신에게 아들이기 때문이다. 이는 영적인 진리를 의미한다. 이는 “아들”의 의미가 진리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여기서는 영적 진리이다, 그 이유는 여기서 “아들”이 베냐민이고, 베냐민에 의해 천적 평면 속의 영적인 것이 표현되기 때문이다.

그녀가 죽으려 하여 그녀의 혼이 떠나려 하고 있었다. 이는 시험의 상태를 의미한다. 이는 “혼이 나가고 죽는다”의 의미가 극도의 시험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 시험은 옛 인간이 죽고 새 인간이 생명을 받는 때에 존재한다. 이것이 시험인 것은 진행된 것으로부터, 즉 “출산에서 힘든 것을 겪는다”가 내면의 진리의 시험을 표시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뒤를 잇는 말, “라헬은 죽었다”로부터도 알려진다.

그리고 그녀는 그의 이름을 베노니라 불렀다. 이는 이 상태의 품질을 의미한다. 이는 “이름을 부름”의 의미가 품질이다로부터 아는데, 이는 여러 번 설명했었다. 내적 의미에서 여기서 묘사된 상태는 시험의 상태, 이 상태의 품질이 “베노니”에 의해 의미된 것이다. 원어에서 “베노니”는 “나의 슬픔의 아들”, 또는 “슬퍼함”을 뜻한다.

그리고 그의 아버지는 그를 베냐민이라 불렀다. 이는 천적 평면 속의 영적인 것의 품질을 의미한다. 이는 베냐민의 표현함이 천적 평면 속의 영적인 것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미 설명한 바 같이, 영적 평면과 천적 평면 사이에 존재하는 중간의 것, 또는 영적 인간과 천적 인간 사이에 존재하는 중간의 것이다. 원어에서, “베냐민”은 “오른손의 아들”을 뜻한다; 그리고 “오른손의 아들”에 의해 천적 선으로부터 있는 영적 진리, 결과적으로 힘이 의미된다; 그 이유가 선이 진리를 수단으로 힘을 가지기 때문이다. “아들”이 진리이다, 그리고 “손”은 힘이다; 그러므로 “오른손”은 가장 높은 힘이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오른쪽에 앉음”에 의해서는 선으로부터 있는 진리 덕택에 있는 힘의 상태가 의미되는데, 이것이 주님을 서술할 경우, 전능함, 또한 주님의 신성한 선으로부터 진행하는 신성한 진리이다 (시. 110:1; 마. 22:14; 26:63, 64; 막. 14:61, 62; 16:19; 눅. 22:69); 그리고 이것이 신성한 힘, 즉 전능하심을 표시하는 까닭에 “하느님의” “힘의 오른편에서”라고 말해진다.
이로부터, 진짜 의미에서 “베냐민”에 의해 의미되는 것은 “요셉”인 천적 선으로부터 있는 영적 진리임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둘 모두는 영적 인간과 천적 인간 사이에 있는 중간의 것이다. 그러나 이 선과 이 진리는 “유다”에 의해 표현된 천적 평면, “이스라엘”에 의해 표현된 영적 평면과 구분되어진다. 전자는 더 높고 더 내면적이나, 후자는 더 낮고 더 외면적이다. 그 이유가 이미 말한 대로 이것들은 중간의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천국의 빛을 수단으로 계발되지 않으면, 아무도 요셉에 의해 표현된 선, 베냐민에 의해 표현된 진리에 관한 생각을 가질 수 없다. 천사들은 이것들에 명료한 생각을 가지는데, 그 이유는 그들의 모든 생각들이 주님으로부터 있는 천국의 빛으로부터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 빛 안에서 인간으로서는 납득이 불가능한 무한한 것을 보고 지각할 수 있다. 아래에 예증을 가져보자.
모든 인간은 누구든지 천적 수준으로 이든, 또는 영적 수준으로 이든, 그렇게 되어가는 가능성을 가지고 자연 평면에서 태어나나, 주님만은 영적이고 천적인 수준에서 태어나셨다, 이런 이유로 그분은 베냐민의 토지 경계선인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셨다. 그 이유가 “베들레헴”은 천적 평면 속의 영적 평면이 의미되고, 베냐민에 의해서는 천적 평면 속의 영적인 것이 표현되기 때문이다. 주님만이 영적이고 천적인 수준에서 태어나신 이유는 신성이 그분 안에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사항은 천국의 빛 안에 있지 않고서는 납득될 수 없다; 그 이유가 세상의 빛 안에 있는 자, 그래서 세상의 빛으로부터 자기의 지각을 가지는 자는 진리가 무엇인지, 선이 무엇인지를, 더욱이 진리와 선의 내면의 것쪽으로 등차를 통하여 승강하는 것이 있다는 것을 거의 모르기 때문이다. 고로 천사가 정오의 빛 안에서 명백히 보여지는 각 등차에서 있는 진리와 선의 무수한 것들에 완전히 무지해 있다. 이것만 가지고도 천사의 지혜가 인간의 것과 비교해 어떤 본질에 속하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교회가 취급되는 예언서에서 자주 등장하는 여섯 이름들이 있다. 즉 “유다,” “요셉,” “베냐민,” “에브라임,” “이스라엘,” “야곱”이다. 교회의 선과 진리가 각 이름들에 의해 내적 의미에서 뜻해지는 것을 모르는 이들은 예언서의 각 구절에 신성한 신비함에 관한 어떤 것을 아는 것이 가능할 수 없다. 다시 말해, “유다”가 천적 평면을, “요셉”이 영적 평면 속의 천적인 것을, “베냐민”이 천적 평면 속의 영적인 것을, “에브라임”이 교회의 지적 측면을, “이스라엘”이 영적 평면의 내적 부분을, “야곱”이 영적 평면의 외적 부분을 의미하는 것을 알지 못하면 교회의 무엇이 예언서에서 뜻하여지는 가를 알 수 없다는 말이다.
위 이름 중에서 베냐민만을 특별히 주목해보자. 그는 천적 평면 속의 영적인 것을 표현하고, 요셉은 영적 평면 속의 천적인 것을 표현하는 바, 이 둘은 천적 평면과 영적 평면 사이에 있는 중간의 것을 표현한다, 그래서 이 둘은 아주 밀접하게 결합하기에, 그들의 결합이 요셉의 역사에서 묘사되어 있다. 즉:
요셉이 그의 형제들에게 말했다, 너희들은 가장 어린 동생을 데려와야만 너희가 죽지 않을 것이다 (창. 42:20).
그들이 베냐민과 더불어 되돌아왔을 때, 그리고 요셉은 자기 동생 베냐민을 보았다, 그는 말했다, 이 애가 너희의 가장 어린 동생이냐? 그리고 그가 말했다, 하느님이 네게 은혜를 베푸시기를, 나의 아들아. 그리고 요셉은 성급해졌다, 그 이유가 그의 뱃속이 그의 동생을 향하여 불탔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울 장소를 찾아서, 그의 침실로 들어갔다, 그리고 거기서 울었다
(창. 43:29, 30).
그는 베냐민의 몫을 그들 모두의 지분을 다섯 배나 넘게 불렸다 (창. 43:34).
그가 자신을 그의 형제들에게 알린 이후, 그는 그의 동생 베냐민의 목을 끌어 안고 울었다; 그리고 베냐민도 그의 목에서 울었다 (창. 45:14).
그는 그들 모두에게 의복을 바꿔입게 내주었다, 그러나 베냐민에게 그는 은 삼백 조각을 주었다, 그리고 갈아입을 의복을 다섯 벌을 주었다 (창. 45:22).
위 구절 모두로부터 분명한 바, 요셉과 베냐민이 가장 밀접하게 결합해진다는 것, 이는 그들이 한 어머니로부터 때문이 아니라 그들에 의해 “요셉”인 선과 “베냐민”인 진리 사이에 존재하는 영적 결합이 표현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둘은 천적 인간과 영적 인간 사이에 있는 중간의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요셉은 베냐민을 수단으로 하지 않고서는 그의 형제들과, 자기 아버지와 결합할 수 없었다, 그 이유가 중간의 것 없이 결합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위 인용 구절의 대목에서 요셉이 자신이 누구인지를 베냐민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밝히지 않았다.
더 나아가 말씀, 특히 예언서에서 베냐민에 의해 교회 속에 있는 영적 진리가 의미되는 것을 이스라엘의 아들들에 관한 모세의 예언에서 볼 수 있다:
베냐민에게 그는 말했다, 여호와의 사랑을 받는 자, 그분은 베냐민 위에 확실하게 거주하실 것이고, 모든 날 (동안)을 그의 위를 덮으실 것이다, 그리고 그분은 그의 어깨들 사이에 거주하실 것이다
(신. 33:12)
“여호와의 사랑을 받는 자”란 천적 선으로부터 있는 영적 진리이다; 이 선은 이 진리와 더불어 “확실하게 거주한다”라고, “그것은 온종일을 덮고 있다”고, 또한 “그것의 어깨들 사이에 거주한다”고 말해지고 있다, 그 이유가 “어깨”는 내적 의미에서 모든 힘을, 그리고 선은 진리를 수단으로 모든 그것의 힘을 가지기 때문이다 (3563항).
예레미야서에서:
베냐민의 너희 아들들은 예루살렘의 한가운데로부터 도망하라, 그리고 나팔로 소리를 내고, 포도원 의 집 위에서 예언을 집어들어라; 그 이유가 악이 북쪽으로부터 내다보고, 큰 부서짐이 있기 때문이다 (예. 6:1);
“베냐민의 아들들”은 천적 평면으로부터의 영적 진리들을 표시한다; “예루살렘”은 영적 교회를 표시한다; “포도원의 집”, 또는 “벤학게렘”도 영적 교회를 표시한다; “악이 북으로부터”는 인간의 감각적인 것과 감각에서 파생되는 기억 속의 지식을 표시한다. 다시:
만일 너희가 안식일을 거룩히 여기는 때가 오면, 그들은 유다의 성들로부터, 예루살렘 주변으로부 터, 베냐민의 토지로부터, 평지로부터, 산으로부터, 남쪽으로부터 태움의 공물과 제물, 그리고 식사 공물, 그리고 유향, 그리고 감사함의 공물을 바치러 여호와의 집으로 들어갈 것이다
(예. 17:24, 26).
그리고 다시 다른 구절에서:
산의 성들에서, 평지의 성들에서, 남쪽의 성들에서, 그리고 베냐민의 토지에서, 그리고 예루살렘 주변에서, 그리고 유다의 성들에서 양떼들이 아직은 그것들을 세는 자의 손 옆을 지날 것이다 (예. 33:13);
위에서 “베냐민의 토지”는 교회의 영적 진리를 표시한다; 그 이유가 교회의 모든 것들, 첫 등차로부터 마지막 등차까지가 “유다의 성들,” “예루살렘의 주변들,” “베냐민의 토지,” “평지,” “산,” “남쪽”에 의해 의미되고 있다.
호세아서에서:
너희는 기브아에서 뿔로 소리를 내고, 라마에서 나팔로 소리를 내라, 너희 벧아웬에게 그대 베냐민 을 따라 소리쳐라, 에브라임이 견책의 날에 황무해질 것이다 (호. 5:8, 9).
“기브아,” “라마,” “그리고 벧아웬은”은 “베냐민”인 천적 평면으로부터의 영적 진리 속의 것들을 표시한다, 그 이유가 기브아는 베냐민 안에 (사. 19:14); 그리고 라마도 (여. 18:25), 그리고 벧아웬 (여. 18:12) 역시 베냐민의 토지 안에 있기 때문이다; “뿔로, 나팔로 소리를 내는 것”, 그리고 “소리치는 것”은 “에브라임”인 교회의 지적 평면이 황무하게 만들어짐을 발표하는 것을 표시한다.
오바디야서에서:
야곱의 집은 불이 될 것이고, 요셉의 집은 불꽃이 될 것이다, 에서는 그루터기를 위해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남쪽으로부터의 그들은 에서의 산을 상속받을 것이고, 평지에 있는 이들은 불레셋 을 상속받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에브라임의 들판을 상속받을 것이다, 그리고 사마리아의 들판; 그리고 베냐민은 길르앗을 (상속받을 것이다) (옵. 18, 19);
다른 구절에서 같이, 이름들이 어떤 것을 의미하는 것은 분명하다, 따라서 야곱의 집, 요셉의 집, 에서의 집, 에서의 산, 불레셋, 에브라임의 들판, 사마리아의 들판, 베냐민, 길르앗, 더 나아가, 남쪽의 그들, 집, 평지, 산, 그리고 들판에 의해 의미되는 것을 알지 못하면, 이 구절의 납득은 불가능하다; 또한 역사적으로 관련하여 이 구절에서 행하여진 것을 아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각 표현이 포함하는 것을 아는 자는 이 구절에 있는 천국의 신비함들을 발견할 것이다. 여기서도 베냐민은 천적 평면으로부터의 영적인 것이다.
이와 비슷한 구절이 스가랴서에도 있다
여호와께서 온 땅 위에 왕이실 것이다; 그 날에 한 분 여호와가 계실 것이다, 그리고 그분의 이름은 하나이실 것이다; 온 땅은 평지로서 둘러싸일 것인데, 기브아로부터 림몬에 까지 이다, 그리고 그녀는 자신 아래 거주할 것인데, 베냐민의 문으로부터 첫 문의 장소에 까지, 모퉁이의 문에 까지 조차, 그리고 하나넬의 망대로부터 왕의 포도즙틀에 까지 조차에서 이다
(슥. 14: 9, 10).
마찬가지로 다윗서에서:
귀를 주어라 오 목자여, 요셉을 양떼 같이 인도하는 너희여, 거룹들 위에 앉은 너희여; 에브라임, 그리고 베냐민, 그리고 므낫세 앞에서 네 힘을 휘저으라, 그리고 우리를 구원하시러 오신다
(시. 80:1, 2).
마찬가지로 드보라와 바락의 예언에서:
여호와께서는 나를 위하여 용사 사이에서 통치하실 것이다; 에브라임으로부터 나온 자의 뿌리는 아말렉 안에 있고, 그들 뒤에 베냐민이 네 백성 안에 있다, 마길로부터 입법가가 내려올 것이다, 그리고 스불론으로부터 필기사의 홀을 끌어당기는 그들이 있다 (사. 5:13, 14).
계시록서에서:
나는 봉인된 자의 숫자를 들었는데, 이스라엘의 각 지파로부터 봉인된 십 사만 사천명 이었다; 스불론 지파로부터 일만 이천 명이, 요셉 지파로부터 일만 이천 명이, 베냐민 지파로부터 일만 이천 명이 봉인되었다 (계. 7:4, 8);
위에서 “이스라엘의 지파들”은 선들과 진리들 안에, 그러므로 주님의 왕국 안에 있는 이들을 의미한다; 그 이유가 “지파들”, “12”, “12000” 모두는 사랑과 신앙의 모든 것들, 또는 선과 진리의 모든 것들이기 때문이다. 위 모든 지파들은 네 등급으로 나뉘는데, 이 중의 마지막 번째에 스불론, 요셉, 베냐민의 각 일만 이천 명이 해당되는데, 마지막에 있는 이유는 스불론 지파가 천국의 결혼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 안에 천국이 있다, 고로 이 안에 모든 것들이 있다; “요셉”은 여기서 영적 평면 속의 천적인 것, 또는 진리의 선; 그리고 “베냐민”은 이 선으로부터의 진리, 또는 천적 평면 속의 영적인 것이다. 이것은 천국에 있는 결혼이고, 고로 이것들은 마지막에서 명명된 것이다.
베냐민이 교회에 있는 천적 평면 속의 영적인 것, 또는 선으로부터의 진리를 표현했기에, 이는 천적 선과 영적 진리 사이에 중간의 것이기에, 예루살렘은 베냐민의 아들들의 상속분으로 제비가 뽑아졌다; 그 이유가 시온에 성전이 건축되기 이전, 예루살렘이 일반적으로 교회를 의미했기 때문이다. (예루살렘이 베냐민 지파에 할당된 것에 대하여는 여. 18:28; 사. 1:21을 보라.)

그리고 라헬은 죽었다, 그리고 에브라데로 가는 길에 묻혔다. 이는 이전에 있던 내면의 진리에 애착함이 끝남을 의미한다. 이는 “죽다”의 의미가 어떤 것이 존재하기를 중지하는 것, 즉 끝이다로부터; 라헬의 표현함이 내면의 진리에 애착함이다로부터; “묻힘”의 의미가 이전의 상태를 거절함이다, 그리고 새로운 것이 소생함이다로부터; 그리고 “에브라데”의 의미가 이전 상태에 있는 천적 평면 속의 영적인 것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런 모두로부터, 라헬이 죽고 에브라데로 가는 길에 묻혔다에 의해 내면의 진리에 애착하는 이전의 상태가 끝나고, “베들레헴”인 새로운 상태가 소생함이다가 분명해진다.
진짜 의미에서, 라헬이 죽고 에브라데로 가는 길에 묻혔다에 의해 유전적인 것이 시험을 수단으로 영원히 추방되는 것, 내면의 진리에 인간적 수준의 애착함을 신성한 애착이 추방하는 것이 의미되고 있다. 이런 이유로 낳은 아들은 어머니에 의해서는 “베노니”, 또는 “슬픔의 아들”이라 불리웠으나, 그의 아버지에 의해서는 “베냐민”, 즉 “오른손의 힘”이라 불리운다. 어머니로부터 있는 인간적 애착 안에는 유전적 악이 있으나 신성한 애착에서는 선밖에 더 없다; 그 이유가 인간의 애착 안에는 자기를 위하여 목적으로서 자기와 세상으로부터의 영광이 있으나; 신성한 애착 안에는 인류의 구원을 위해 자기로부터 있을런지 모르는 자기를 위한 목적이 있다. 이에 대한 주님의 말씀을 읽어보자:
나는 너희가 나에게 주었던 이들을 위해 기도한다, 그 이유가 나의 모든 것은 너희의 것, 그리고 너희의 것은 나의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그들 안에서 신성이 되어진다; 그들 모두는 하나일는지 모른다, 마치 너희 아버지가 내 안에 있는 것 같이 이다, 그리고 나는 너희 안에 있어, 그들 역시 우리 안에서 하나일는지 모른다. 너희가 나에게 준 영광을 나는 그들에게 주었다, 하여 그들은 우리가 하나이듯 하나일는지 모른다; 나는 그들 안에, 그리고 너희는 내 안에
(요. 17:9, 10. 21-23).

이는 베들레헴이다. 이는 이 장소에서 천적 평면 속의 새로운 영적인 것의 부활이 있음을 의미한다. 이는 “베들레헴”의 의미가 새로운 상태에 있는 천적 평면 속의 영적인 것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 이유가 “에브라데”는 이전의 상태 안에 있는 천적 평면 속의 영적인 것, 그리고 그녀가 거기에 매장됨에 의해 새로운 상태의 부활이 의미된다. 라헬이 그녀의 둘째 아들, 또는 베냐민을 베들레헴에서 출산하고, 아들을 출산함에서 죽었다는 것, 또한 다윗이 베들레헴에서 출생하였고, 기름부워진 왕이었다는 것, 마지막으로 주님이 거기서 탄생하셨다는 것은 아직은 밝히 알려지지 않은 신비함이고, 이는 “에브라데”, “베들레헴”에 의해 의미되는 것, 그리고 베냐민, 다윗에 의해 표현되는 것, 특히 천적 평면 속의 영적인 것이 무엇인지 등등을 알지 못하면 밝히 알 수 없다; 그 이유는 천적 평면 속의 영적인 것이 이 장소에 의해 의미되고, 이 인물에 의해 표현되었기 때문이다.
주님이 거기서 탄생하시고 다른 장소에서는 탄생하시지 않은 이유는 그분만이 영적, 천적 인간으로 탄생하셨고, 모든 다른 인간은 주님으로부터 거듭남을 수단으로 영적, 또는 천적 인간으로 되어 가는 가능성을 가지고 자연적 인간으로 출생하기 때문이다. 주님이 영적, 천적 인간으로 탄생하신 이유는 그분은 자신의 인간을 신성으로 만드시기 위함 때문인데, 이렇게 만드심은 질서에 따라, 즉 최고로 낮은 수준으로부터 최고로 높은 수준까지에 이르러 있는 모든 인간의 것을 신성으로 만들어 가신 것이다; 이를 바탕으로 하여 천국들과 지옥들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질서 안으로 배치하셨다. (여기서 말하는) 영적, 천적인 것은 자연 평면, 또는 외적 인간과 합리적 평면, 또는 내적 인간 사이의 중간의 것이다; 다시 말해, 중간의 것 아래쪽으로는 자연 평면, 또는 외적 인간이, 위쪽으로는 합리적 평면, 또는 내적 인간이 있다는 말이다.
위의 사항들을 납득할 수 없는 자는 왜 주님께서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셨는가 역시 제 아무리 별난 계시를 수단으로 삼아도 납득할 수 없다. 태고 시대로부터 “에브라데”는 천적 평면 속의 영적인 것을 의미했다; 그러므로 그 후에 “베들레헴”도 같은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이는 다윗 당시에 아래 구절이 말해진 이유이다. 다윗서에서:
그는 여호와께 맹세했다, 그는 야곱의 전능하신 분에게 서약했다, 저는 여호와를 위한 장소를, 야곱의 전능하신 분의 주택을 발견할 때까지 저는 내 집의 천막 안으로, 내 침대의 침상 위로 오르는 것도, 제 눈꺼풀이 꾸벅 조는 것도 하지 않을 것입니다; 오 우리는 에브라데에서 그분(Him) 에 관하여 들었습니다, 우리는 숲의 들판들에서 그분(Him)을 발견했습니다; 우리는 그분(Him)의 주택으로 갈 것입니다, 우리는 그분(Him)의 발판에서 우리 자신을 굽혀 절할 것입니다
(시. 132:2-7);
위의 말들이 주님에 관해서 말해진 것임은 매우 분명하다; 그 이유가 “우리는 그분에 관하여 들었다,” “우리는 그분을 발견했다”는 원어에서의 경우, 이름 여호와(Jehovah)로부터 취한 철자 h가 단어들의 끝에서 표현되어 있기 때문이다.
미가서에서:
너 베들레헴 에브라데여, 수 천의 유다 사이에서 너는 매우 작고, 너로부터 이스라엘의 통치자일 자가 나에게 세상 밖으로 출시될 것인데, 그의 나감은 옛 것으로부터 이고, 영원의 날들로부터 이다 (미. 5:2; 마. 2:6).
이 예언으로부터 유태 사람에게 알려진 것은 메시아 또는 그리스도가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시리라는 것이다. 마태복음서에서:
헤로데는 백성의 대 성직자와 서기관 모두를 모아 놓고, 그들에게 그리스도 (메시아)가 어디서 탄생하는지를 물었다; 그들이 그에게 말했다, 유대의 베들레헴입니다 (마. 2:4, 5).
요한복음서에서:
유태인들이 말했다, 그리스도가 다윗의 씨로부터, 다윗이 있던 성으로부터 나온다고 성경은 말하지 않더냐? (요. 7:42).
그리고 그분이 거기서 탄생하신 것은 마. 2:1; 눅. 2:4-7에서 알게 된다. 이런 이유, 그리고 그분이 다윗으로부터 있으셨기 때문에, 주님은 “이새의 지주로부터의 가지”, 그리고 “이새의 뿌리” (이. 11:1, 10)라고 불리우신다; 그리고 다윗이 베들레헴에서 출생하고, 거기서 기름부워졌다 (삼상. 16:1-14; 17:12). 그러므로 베들레헴은 “다윗의 성”이라 불리워진다 (눅. 2:4, 11; 요. 7:42). 다윗은 특히 주님의 왕권, 또는 신성한 진리 측면에서 그분을 표현했다.

그리고 야곱은 그녀의 무덤에 기둥을 세웠다. 이는 거기서 다시 일어나는 영적 진리의 거룩함을 의미한다. 이는 “기둥”의 의미가 진리의 거룩함이다로부터, 여기서는 천적 평면으로부터 있는 영적 진리의 거룩함인데, 그 이유는 이것이 취급되는 진리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덤”의 의미가 부활함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것은 오늘날까지 라헬의 무덤의 기둥이다. 이는 거룩한 상태가 영원함을 의미한다. 이는 “기둥”의 의미가 진리의 거룩함이다로부터; 그리고 “무덤”의 의미가 부활이다로부터; 그리고 “오늘날까지”의 의미가 영원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21, 22절. 그리고 이스라엘은 여행했다, 그리고 그의 천막을 에델 망대 너머로 펼쳤다. 22 그리고 이스라엘이 그 토지에 머무르고 있는 때였는데 르우벤이 가서 그의 아버지의 첩, 빌하와 누웠다, 그리고 이스라엘이 들었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여행했다. 이는 이 때 당시 자연 평면 속의 천적, 영적인 것을 의미한다. 이는 “여행함”의 의미가 계속적인 것이다로부터, 여기서는 더 내면의 것들을 향하여 계속됨이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표현함이 자연 평면의 천적, 영적인 것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자연 평면의 천적, 영적인 것이 무엇인지는 앞에서 설명했다, 즉 이것은 진리의 선, 또는 신앙의 진리를 수단으로 포획된 선행의 선이다. 내면의 것들을 향하여 발전함이 무엇인지는 세상에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이것은 기억 속의 지식들 쪽으로 발전함은 아니다, 그 이유가 이것은 내면의 것들을 향하여 있는 어떤 발전함도 없이도 자주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은 성년 시절의 판단력 쪽으로 발전함도 아니다, 그 이유는 이것 역시 내면의 것들로부터 떠나 있으면서도 때때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내면의 진리에 관한 지식들 쪽으로 발전함도 아니다, 그 이유가 이 지식들은 인간이 그것들에 감동되지 않으면 아무 소용에도 닿지 않기 때문이다. 내면의 것들을 향하여 발전함은 내면의 것들에 애착함 안에 심어진 진리의 지식들을 수단으로, 고로 애착들을 수단으로 천국과 주님을 향하여 발전함이다.
내면의 것들을 향하여 발전함의 본성이 무엇인지는 이 세상에 있는 누군가에게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나 다른 삶에서는 분명하게 나타난다, 그 이유가 거기서는 안개 같은 종류로부터 빛 안으로의 발전함이 있기 때문이다; 외면의 것들 만에 있는 이들은 상대적으로 안개 안에 있고, 천사들에 의해 하나 안에 있게 보여진다; 이에 반해 내면의 것들 안에 있는 이들은 빛 안에 있고, 결과적으로 지혜 안에 있다, 그 이유가 거기서의 빛은 지혜이기 때문; 경이롭다 말해지는 대목은 안개 안에 있는 이들이 빛에서와 같이 빛 안에 있는 이들을 볼 수 없다는 것, 그러나 빛 안에 있는 이들은 안개 안에서 같이 안개 안에 있는 이들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취급되는 주제가 내면의 것들을 향하여 주님의 신성이 발전함이기에, 여기서의 야곱은 “이스라엘”이라 불리운다, 그러나 다른 경우들에서, 즉 이 장의 앞 장들에서 같이, 그리고 마지막 구절에서 같이, 그는 “야곱”이라 불리운다.

그리고 그의 천막을 에델의 망대 너머로 펼쳤다. 이는 거기서부터의 내면의 것들을 의미한다. 이는 “천막을 펼침”의 의미가 거룩한 것의 발전, 여기서는 내면의 것들을 향함이다로부터; “망대 너머”의 의미가 내면의 것들 안으로 이다로부터 알게 되는데 이는 아래에서 살핀다; 그리고 “에델”의 의미가 상태의 품질, 즉 내면의 것들을 향한 거룩한 것의 발전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고대 때로부터 에델 망대는 이 의미를 가졌으나, 이 에델이라는 이름은 여. 15:21 외에는 말씀의 다른 곳에 등장하지 않기에 비교해보거나 하는 식으로 의미를 확증하는 방식은 가능하지 않다. “망대 너머”가 내면의 것들을 향하여를 표시하는 이유는 내면이 높은 것들을 수단으로, 고로 산, 언덕, 망대, 지붕, 등등 같은 것으로 표현되기 때문이다. 그 이유인즉, 외적 감각들을 통하여 세상의 자연인 것들로부터 자기들의 생각들을 끌어내는 마음에 내면의 것들은 그것들보다 더 높은 것으로 나타나기 때문에서 이다.
“망대들”이 내면의 것들을 의미하는 것은 말씀의 다른 구절들로부터 알는지 모른다. 이사야서에서:
나의 친애하는 자가 기름의 아들의 뿔에 포도원을 가졌다, 이것을 그는 빙둘러 울타리를 치고, 돌을 걷어내고, 그것 위에 고상한 포도나무를 심었다, 그리고 그것의 한가운데에 망대를 건축했다 (이. 5:1, 2);
“포도원”은 영적 교회를; “고상한 포도나무”는 영적 선을; “그것의 한가운데에 건축된 망대”는 진리에 관한 내면의 것을 표시한다. 마찬가지로 주님의 비유에서:
집주인 되는 사람이 포도원을 심었다, 그리고 그것 주변에 울타리를 쳤다, 그리고 그 안에 포도즙틀 을 팟다, 그리고 망대를 건축했다, 그리고 그것을 농사꾼들(소작인들)에게 세로 주었다
(마. 21:33; 막. 12:1).
에스겔서에서:
아르왓의 아들들과 너의 군대가 네 성벽을 빙둘러 있었고, 가마딤들은 네 망대들에 있었다, 그들은 자기들의 방패들을 네 성벽들을 빙둘러 걸었다; 이것들은 네 아름다움을 완전하게 했다
(겔. 27:11);
위는 두로를 취급하는데, 이를 수단으로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들, 또는 이 지식들 안에 있는 이들이 의미된다; “망대들에 있는 가마딤”은 내면의 진리에 관한 지식들을 표시한다.
미가서에서:
여호와께서 시온 산에서 그들을 지금으로부터 영원까지 통치하실 것이다; 그리고 너 양떼의 망대, 시온의 딸의 언덕이여, 그것은 네게로 올 것이다, 그리고 이전의 왕국이 되돌아 올 것이다, 예루살렘의 딸의 왕국이여 (미. 4:7, 8);
위는 주님의 천적 왕국이 묘사되고 있다; 그 왕국의 가장 깊은 쪽은 주님을 사랑함이고, “시온 산”에 의해 의미되고 있다; 이 주님을 사랑함에서 파생된 것이 서로의 사랑이고, 이것이 “시온의 딸의 언덕”에 의해 의미되는데, 이 사랑은 영적 의미에서 이웃을 향한 선행이라 불리운다; 선으로부터의 내면의 진리들이 “양떼의 망대”에 의해 의미된다; 이로부터 천적 왕국의 영적 부분이 온다는 것이 “예루살렘의 딸의 왕국”에 의해 의미된다. 다윗서에서:
시온 산이 기뻐하게 하자, 유다의 딸들이 크게 기뻐하게 하자, 그 이유는 당신의 공의 때문입니다; 너희는 시온을 에워싸라, 그리고 그것 빙둘러 띠를 두르라, 거기서부터 망대를 세어라
(시. 48:11, 12);
위에서 “망대들”은 사랑과 선행으로부터 있는 것을 방어하는 내면의 진리들을 표시한다.
누가복음서에서: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지 않는 자는 누구이든 내 제자일 수 없다; 그 이유가 너희 중 누구가, 망대를 건축하기를 바란다면, 먼저 앉아서 그것을 완성하는데 드는 비용을 계산하지 않더냐? 또는 어떤 왕이 다른 왕과 전쟁을 치러야 한다면, 우선 앉아서, 만 명으로 이만 명을 대적할 수 있을지를 상담하지 않겠느냐? (눅. 14:27, 28, 31, 33);
말씀 속의 내적 의미를 모르는 이들이 상상하는 것은, 위 구절은 주님께서 비교함을 수단으로 말하신 것이라고, 즉 망대를 건축하고, 전쟁을 치루는 것에 의해 더 이상의 뜻해짐은 없다고 상상한다, 이들은 말씀에 있는 모든 비교함들이 뭔가를 표현하고 의미한다는 것을 모른다. 즉 “망대를 건축하는 것”은 누군가가 자아를 위하여 내면의 진리들을 포획하는 것, 그리고 “전쟁을 치루는 것”은 이 진리들로부터 전투를 수행하는 것임을 모르고 있다는 말이다; 이런 의미를 위 구절이 지닌 이유는 취급되는 주제가 교회 안에 있는 이들에 의해 수행되는 시험이기 때문이다; 이들이 여기서 주님의 “제자들”이라 불리운다. 이 시험들은 그들이 반드시 운반해야 하는 “십자가”에 의해 의미되어 있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들로부터, 또는 그들 고유의 것으로부터 결단코 시험을 정복할 수 없다는 것이 “그가 가진 모든 것을 포기하지 않는” 누구든지, 그는 내 제자일 수 없다“에 의해 의미되고 있다. 고로 이 모든 것들은 하나의 주제를 놓고 시종일관 하고 있다; 이에 반해 망대와 전쟁을 내적 의미 없이 비교함으로만 연관하면, 앞, 뒤에 모순이 발생한다.
“망대들”의 반대적 의미, 즉 내면들이 자기와 세상을 사랑함에 있는 이들, 고로 거짓들을 가지고 전투하는 이들, 이 거짓들을 수단으로 자신들의 광신적 신앙을 확증하는 이들이 아래에서 “망대들”에 의해 표현되어 있다. 이사야서에서:
인간들의 거만함이 낮은 데로 가져다놓일 것이다, 그리고 여호와 체바욷께서는 거만하고 높은 모든 자 위에, 도도한 모든 자 위에 높혀지실 것이다, 그리고 그는 겸손해질 것이다; 그리고 높은 레바논의 모든 삼나무 위에, 바산의 상수리나무 위에, 그리고 모든 높은 산 위에, 그리고 드높인 모든 언덕 위에, 그리고 드높인 모든 망대 위에, 견고한 모든 성벽 위에 높혀지신다
(이. 2:11-15);
위는 이런 사랑들의 내면들과 외면들이 “삼나무”, “상수리나무”, “산들”, “언덕들”, “망대”, 그리고 “성벽”에 의해 묘사되고 있다 (“망대”에 의해서는 내면의 거짓들이다)), 고로 내면의 것들은 높이 있는 것들에 의해 묘사되는데, 두 반대되는 것의 이런 차이는 있다; 즉 악들과 거짓들 안에 있는 자들은 자신들이 타인들 보다 높다고 여긴다, 그러나 선들과 진리들에 있는 이들은 자신들은 타인들 보다 낮고 덜 가치 있다고 믿는다 (마. 20:26, 27; 막. 10:44). 그럼에도 선들과 진리들이 높은 것들이다고 (말씀에서) 묘사된다; 그 이유는 천국에서 그것들은 주님에게, 가장 높으신 분에게 더 가까이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말씀에서 “망대”는 진리들을, “산들”은 선들을 서술한다.

이스라엘이 그 토지에 머무르고 있을 때였다. 이는 이 상태 안에 있을 때, 즉 진리로부터의 선 안에 있을 때를 의미한다. 이는 “머무름”의 의미가 사는 것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 이유는 “머무름(abide)”이 “거주하다(dwell)”와 같은 것을 뜻하기 때문이나, 약간의 차이는 있는데, 머무름은 진리 측면을, 거주함은 선 측면을 서술한다; “토지”의 의미가 선 측면에서의 교회이다로부터, 여기서는 진리의 선 측면에서의 교회가 의미되고 있다.

르우벤이 가서 그의 아버지의 첩, 빌하와 누웠다. 이는 분리된 신앙을 수단으로 선을 모독함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들었다. 이는 이 신앙은 거절되었음을 의미한다. 이는 르우벤의 표현함이 교리와 이해력에 있는 신앙이다로부터, 이 신앙은 교회의 첫 번째 것이다, 여기서는 이 신앙이 선행으로부터 분리되고 있는데, 아래에서 살핀다; 그리고 “그의 아버지의 첩 빌하와 누움”의 의미가 선을 모독함이다로부터, 그 이유가 “간통을 범하는 것”은 선을 타락하게 하는 것, 또는 선에 섞음질을 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아버지의 첩과 눕는 것”은 그것들을 모독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스라엘이 들었다”의 의미가 이 신앙은 거절되었다 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스라엘이 들음에 대한 적절한 의미는 영적 교회가 이를 알았고 그것에 동의했다 일 것이다; 그 이유가 “듣다”에 의해 귀기울이다가 의미되고, “이스라엘”에 의해 영적 교회가 의미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짜 교회는 동의하지 않는다는 것이 앞으로 르우벤에 관해 말해지는 것에서 나타날 것이다. 그러나 내적 의미에서 이 신앙은 거절되어졌다가 의미된다, 그 이유가 야곱이 이 악질적인 행위에 관하여 느꼈고 생각했다고 말해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는 그 행위를 지독하게 역겨웁고 혐오했다는 것이 르우벤에 관한 그의 예언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즉:
르우벤, 너는 나의 첫 아들, 나의 힘, 나의 힘의 시작이다; 명예에서 뛰어나고 힘에서 특출하다. 물 같이 불안정한 바, 너는 특출하지 않아, 네 아버지의 침대 위로 갔다, 그때 그것을 모독했다, 그는 내 침상 위에 갔다 (창. 49:3, 4);
이것 때문에 그의 생득권이 박탈되어졌다 (역상. 5:1). 그러므로 “이스라엘이 들었다”에 의해 이 신앙이 거절되었다가 의미됨이 분명해진다
교회의 진리와 선이 인정되고 믿어질 때, 그런데 인간이 그것에 반대되어 살 때, 분리된 신앙에 의해 선을 모독함이 결과되어진다. 그 이유가 이해력 안에서 선행의 것들로부터 신앙의 것들이 분리된 이들, 그로부터 생활 안에 있는 이들과 더불어, 악은 진리와, 거짓은 선과 결합되어진다; 그리고 이 결합 자체가 모독함이라 불리우는 것이다. 이들은 신앙으로부터 진리와 선이 무엇인지를 알지라도, 심정으로는 여전히 믿지 않는 이들이다.
영적 교회 속에 있는 이들이 구원되어질 수 있기 위하여, 주님은 그들의 지적 부분을 의지 부분으로부터 기적적으로 분리하셨다; 그리고 지적 부분이 새로운 의지를 받는 것을 수여하셨다. 그러므로 지적 부분이 신앙 속에 있는 선을 납득하고 지각할 때, 그래서 이 선을 자체에 자기 것에 어울리게 할 때, 그럼에도 인간의 의지(인간 고유의 의지는 악이다)가 아직도 버젓이 통치하고, 명령할 때, 진리와 악, 선과 거짓의 결합이 결과되어진다. 이 결합이 모독이다, 그리고 성찬에서 무가치하게 먹고 마심에 의해 뜻해진다. 즉 이 예식에서 있는 선은 “몸”에 의해, 진리는 “피”에 의해 의미되는 바, 이 둘은 분리될 수 없다, 그 이유는 이런 방식에서 결합된 것들은 영원까지 결코 분리되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 고로 이 모독에는 가장 깊은 지옥이 기다린다. 신앙의 진리와 선이 무엇인지 아는 이들, 그럼에도 심정으로 믿지 않는 이들은 (오늘날의 경우 대부분이 이러하다) 그것들을 모독할 수 없다, 그 이유는 지적 측면이 그것들을 받지 않기 때문, 자체에 그것들을 흡수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분리된 신앙을 거절함이 여기서 취급되고, 뒤어지는 것에서 진짜 질서에서 있는 진리와 선이 등장하고, 그 후 직접적으로 합리성, 또는 지적 부분과의 결합이 있다. 곧바로 명명되는 야곱의 아들들은 진짜 질서에 있는 진리들과 선들이다, 그리고 이삭은 합리성 또는 지적 부분이다. 야곱과 그의 아들들이 이삭에게 옴은 지적 부분과의 이 결합이 내적 의미에서 있는 것이다.

22-26절. 그리고 야곱의 아들들은 열둘이었다. 23 레아의 아들들은 르우벤 야곱의 장자, 시므온, 레위, 유다, 잇사갈, 스불론이다. 24 라헬의 아들들은 요셉과 베냐민이다. 25 그리고 라헬의 하녀 빌하의 아들들은 단과 납달리이다. 26 그리고 레아의 하녀 질바의 아들들은 갓과 아셀이다. 이들은 야곱의 아들들인데, 밧단-아람에서 그에게 출생되어졌다.

그리고 야곱의 아들들은 열둘이다. 이는 지금 신성한 자연 평면에 있는 모든 것들의 상태를 의미한다. 이는 야곱의 표현함이 신성한 자연 평면이다로부터; “열둘”은 모두이다로부터, 그리고 야곱의 아들들을, 그리고 명명되는 지파들을 서술할 경우, 열둘은 진리와 선의 모든 것들이다. 주님의 자연 평면에 주목하면, 열두 아들들은 어떻게 그분께서 그분 자신 안에서 그분의 자연 평면을 신성으로 만드셨는가를 보여준다, 그 이유가 그분의 자연 평면이 야곱에 의해 표현되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서 취급되는 주제는 신성한 자연 평면이 신성한 합리적 평면과 결합함이고, 이 결합이 야곱이 이삭에게 옴에 의해 표현되어졌다; 그 이유가 이삭은 주님의 신성한 합리적 평면을 표현하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야곱의 모든 아들들이 새로이 열거되고 있다. 그 이유가 진리와 선의 모든 것들이 자연 평면에 있어야만 합리성과의 충분한 결합이 가능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자연 평면은 합리성에 그릇 역할을 담당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이 이미 열거된 바 있지만 확실히 있음을 위해 다시 일일이 열거되고 있다. 그러나 한가지 더 알아야 하는 것은 열거되는 순서가 앞의 순서와 다르다는 점이다. 즉 빌하와 질바의 아들들, 즉 단, 납달리, 갓, 아셀이 마지막 순서에 있다는 것, 그렇지만 실제적으로는 그들은 잇사갈, 스불론, 요셉, 베냐민보다 먼저 출생된 아들들이다. 이렇게 순서가 바뀐 이유는 지금의 진리와 선은 신성으로 만들어졌을 때가 취급되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이것들이 언급된 질서는 취급되는 주제에 일치하여 있기 때문이다.

레아의 아들들. 이는 질서적으로 외적 측면에서 있는 신성한 선들과 진리들을 의미한다. 이는 레아의 표현함이 외적 진리에 애착함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러므로 그녀의 “아들들”은 르우벤, 시므온, 레위, 유다, 잇사갈, 스불론에 의해 표현된 선들과 진리들이다. 이는 아래에서 이어진다.

르우벤 야곱의 첫 출생. 이는 신앙의 선을 의미한다. 이는 “첫 출생”의 의미가 신앙이다로부터; 그리고 야곱의 표현함이 자연적 진리로부터의 선이다로부터; 그리고 르우벤의 것으로부터가 신앙의 품질이다에서 알게 된다. 르우벤은 진짜 의미에서 신앙의 진리를 의미한다; 그러나 신앙의 진리가 선으로 만들어진 이후, 그는 신앙의 선을 의미한다. 더욱이 그 자체에 국한해보면, 신앙의 진리는 신앙의 선이다, 그 이유는 신앙은 선행으로부터 있지 않으면 불가능하기 때문, 즉 진리는 선으로부터가 아니면 불가능하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인간이 거듭나질 때, 선이 첫째 자리에, 또는 첫 출생이다. 이로부터 “르우벤 야곱의 첫 출생”에 의해 여기서 신앙의 선이 의미되는 것이다. 같은 것이 다른 구절에 더 있다:
르우벤은 살고 죽지 않게 하자, 그리고 그의 숫자들(그의 동아리들)은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일 것이다 (신. 33:6).
위 구절에서 “르우벤”이 신앙의 선을 표시하는 이유는 그가 첫 장소에, 유다가 둘째 장소에 놓여 있다는 사실로부터 이다. 즉 이스라엘의 아들들에 관한 모세의 예언 때(신. 33장))의 순서는 야곱의 예언 때(창. 49장)의 순서와 다르다. 그런 이유는 그들이 명명되는 순서는 취급되는 주제에 일치하여 놓이기 때문에서이다.
마찬가지로 계시록서에서:
나는 봉인된 숫자를 들었는데, 각 지파로부터의 십 사만 사천 명이었다. 유다 지파로부터는 일만 이천 명, 르우벤 지파로부터는 일만 이천 명, 각 지파로부터는 일만 이천 명이 봉인되어졌다
(계. 7:4, 5)
위에서는 유다가 첫 장소에, 르우벤은 둘째 장소에, 그리고 갓은 셋째 장소에서 명명된다. 이 셋은 첫 분류(등급, class)를 구성하는데, 주님의 왕국이 취급되는 주제이기에 “유다”는 가장 깊은 데에, 즉 셋째 천국에 있는 선, 곧 천적 선, “르우벤”은 영적 선, 이는 신앙의 선과 같은 것, 중간 천국, 또는 둘째 천국에 있는 선이다, 그리고 “갓”은 자연 평면의 선, 이는 첫째 천국에 있는 선이다. 그러나 이것은 드보라와 바락의 예언에서는 다르다:
잇사갈의 제 일인 자들이 드보라와 더불어 있었다, 그리고 잇사갈이 있었듯, 바락도 그러했다; 골짜기 안으로 그는 그의 발을 보내었다, 르우벤의 부류 안에 심정의 큰 판결이 있었다; 왜 너희는 가축떼의 쉿쉿함을 들으려고 두 짐들 사이에 거주하는가? 르우벤의 부류들에게 심정의 큰 수색함이 있었다 (사. 5:15, 16);
위 구절의 의미를 알려면, 먼저 잇사갈, 드보라, 바락, 르우벤이 무엇을 표현하는지를 알아야 한다; 그리고 “제 일인 자들”, “골짜기”, “부류들”, “심정의 판결”, “두 짐들”, “가축떼의 쉿쉿함”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까지 알아야 한다. 여기서 “르우벤”은 신앙을 표시한다.

그리고 시므온, 그리고 레위, 그리고 유다, 그리고 잇사갈, 그리고 스불론. 이는 외적인 신성한 선들과 진리들에 필수적인 것들을 의미한다. 이는 각각의 인물의 표현으로부터 알게 된다; 즉 시므온은 최고 의미에서 섭리, 내적 의미에서 의지에 있는 신앙, 외적 의미에서 순종; 레위는 최고 의미에서 사랑과 자비, 내적 의미에서 선행과 영적 사랑, 외적 의미에서 천적 교회 속에 있는 말씀으로부터의 교리; 잇사갈은 최고 의미에서 신성한 진리의 선과 선의 진리, 내적 의미에서 천적 부부의 사랑, 외적 의미에서 서로의 사랑; 그리고 스불론의 의미가 최고 의미에서 주님의 신성 자체와 그분의 신성한 인간, 내적 의미에서 천국의 결혼, 그리고 외적 의미에서 부부의 사랑. 이상의 것들은 주님의 선들과 진리들이 외적 측면에서 있어야 하는 필수적인 것들이다, 그러나 천국의 빛 안에 있지 않으면, 이것들의 각각이 어떻게 그것들과 더불어 있는지를 알 수 없다, 그 이유가 거기 안에서는 이런 사항들이 빛과 불꽃의 번쩍거림을 수단으로 우림과 둠밈 안에서 주어지는 대답들 같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주님으로부터 지각함이 있다. 그 이유는 우림과 둠밈 안에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들에 따른 열두 귀중한 돌들이 있기 때문이다.

라헬의 아들들은 요셉과 베냐민이다. 이는 내면의 선들과 진리들을 의미한다. 이는 라헬의 표현함이 내면의 진리에 애착함이다로부터, 그러므로 “라헬의 아들들”은 내면의 선들과 진리들이다. 이것들의 필수적인 것들이 요셉과 베냐민에 의해 표현되어진다; 요셉에 의하여 최고 의미에서 신성한 영적 평면, 내적 의미에서 영적 왕국, 외적 의미에서 영적 왕국의 선; 그리고 베냐민에 의하여 신성한 천적 평면 속의 영적 평면(영적인 것). 위 두 필수적인 것들은 내면의 선들과 진리들 안에 있다.

그리고 라헬의 하녀 빌하의 아들들은 단과 납달리이다. 이는 내면의 선들과 진리들을 섬기며 있는 것들을 의미한다. 이는 라헬의 하녀 빌하의 표현함이 내면의 진리에 애착함에 수단이 되어 섬기며 일어나는 차후의 애착함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더욱이 “하녀”는 결합을 위해 봉사하는 수단을 표시한다, 그리고 그녀의 “아들들”은 이와 같은 수단들을 표시한다. 차후의 선들과 진리들에 의해 직접적으로 들어가지 않는 이런 선들과 진리들이 뜻해진다, 그러나 이것들은 이와 같이 행한 바로부터 파생되고, 그것들에 하녀 같이 인접되어 있다, 그리고 이것은 또한 중재하고 촉진도 한다. 이런 필수적인 것들이 단과 납달리에 의해 표현되어 있다; 단에 의해 최고 의미에서는 그분의 정의와 자비를, 내적 의미에서는 신앙의 거룩함을, 외적 의미에서는 생활의 선을; 납달리에 의해서는 최고 의미에서 그분 자신의 힘을, 내적 의미에서는 시험에서 승리가 있음을, 외적 의미에서는 자연적 인간으로부터 저항함을 의미한다. 이것들은 내면의 선들과 진리들을 섬김 속에 있는 수단들에게 필수적인 것들이다.

레아의 하녀 질바의 아들들은 갓과 아셀이다. 이는 외면의 선들과 진리들을 섬기는 것들을 의미한다. 이는 레아의 하녀 질바의 표현함이 외면의 진리에 애착함에 수단이 되어 섬기는 차후의 애착임다로부터 알게 된다. “하녀”는 결합을 위해 섬김 속에 있는 수단을 표시한다: 그리고 그녀의 “아들들”은 이와 같은 수단들, 갓과 아셀에 의해 표현되는 필수적인 것들을 표시한다; 갓은 최고 의미에서 전능하심과 전지하심을, 내적 의미에서는 신앙의 선을, 외적 의미에서는 일들을; 아셀은 최고 의미에서 영원을, 내적 의미에서 영원한 생명의 행복을, 그리고 외적 의미에서 애착의 기쁨을 표현하고 있다. 이상 것들 모두는 이 때에서 야곱의 아들들의 열거함이 포함하는 것들이다; 그러나 어떻게 그것들이 다함께 이것이 저것에 뒤잇고, 이것이 저것 안에 있거나 하는지 등등 같은 서로에 부합하면서 시종일관되는 지에 대하여는 천국의 빛 안에 있지 않으면 세상의 빛으로는 알 수가 없다. 게다가 미력하나마 알게 된 것들 마저 인간의 단어들로는 표현해내기에는 딱히 사용할 만한 만족스런 단어를 찾는 것도 무척 힘들다; 그 이유가 인간의 단어라는 것은 세상의 빛 안에 있는 것으로부터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사실상 천국의 빛으로부터 있는 생각들은 세상의 생각들을 초월해 있어 세상의 생각들은 그것들을 표현할 수 없다. 따라서 감각적인 것들 수준을 떼어낸 상태에 있는 이들이라면 아마 매우 흐릿하고 미미한 정도에서 알 수 있다.

이들은 야곱의 아들들인데, 밧단-아람에서 그에게 출생되어졌다. 이는 그들의 근원과 그들의 현재 상태를 의미한다. 이는 이미 말해왔던 것, 즉 야곱의 아들들을 일반적, 특수적, 개별적으로 말한 것들, 즉 그들에 의해 일반적으로는 주님의 신성한 자연 평면에 있는 모든 것들이 의미된다는 것, 이 모든 것들을 다함께 취합한 상태가 여기서의 “야곱”이다. 그들의 근원은 그들이 밧단-아람에서 출생됨에 의해, 또는 진리와 선에 관한 지식들로부터 있는 것들이 의미된다. 그 이유가 이런 사항들이 “밧단-아람”에 의해 의미되기 때문이다. 열두 아들들의 모든 것들이 야곱 한 명으로 취합되어 있다고 위에서 말한 이유 중의 하나는 원어에서의 표현을 영어로 완전 꼼꼼하게 바꾸어놓으면 아들들임에도 이를 단수로 받고 있다; 즉 These are the sons of Jacob, who were born to him in Paddan-aram이 아니라, These are the sons of Jacob, who was born to him in Paddan-aram로 번역된다. 이후 이어지는 것에서 취급되는 주제는 신성한 자연 평면이 신성한 합리적 평면과 결합함이다. 이 결합함이 야곱이 자기 아버지 이삭에게 당도함에 의해 표현되어진다.

27-29절. 그리고 야곱은 기럇-아르바, 마므레로 가서 그의 아버지 이삭에게 왔다. 이곳은 헤브론이다, 여기서 아브라함과 이삭이 체류했다. 28 그리고 이삭의 날들은 일백 팔십 년이었다. 29 그리고 이삭은 기한이 만료되어 죽었다, 그리고 그는 살만큼 살아 늙고 그의 백성들에게로 거두어졌다. 그리고 에서와 야곱이 그를 매장했다.

그리고 야곱은 그의 아버지 이삭에게 왔다. 이는 지금 신성한 합리적 평면에 신성한 자연 평면이 결합되어지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야곱의 표현함이 방금 위에서 취급한 상태에서의 신성한 자연 평면이다로부터 분명해진다; 그리고 이삭의 표현함이 신성한 합리성(합리적 평면)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결합함이 야곱이 이삭에게 옴에서 의미되고 있다. 뒤이어져 이 장의 끝까지 내려가면서 취급되는 주제는 자연 평면이 합리적 평면과 결합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즉각 진행되는 것 안에는 선과 진리의 모든 것들이 포함되었다, 이 모든 것의 품질들은 야곱의 열두 아들들에 의해 의미되고, 이미 살핀 대로 각 아들은 진리와 선의 어떤 일반적인 측면을 표현한다.
뒤이어지는 구절에서 취급되는 자연 평면과 합리적 평면의 결합에 주목하면, 이내 알게 되는 것은, 합리적 평면은 자연적 평면보다 (천국에 속한 것을) 더 쉽게 더 빨리 받는다는 점이다. 그 이유는 합리성은 자연 평면보다 더 순수하고 더 완전하기 때문, 그런 이유는 합리적 평면은 내면에, 더 높은쪽에 위치하기 때문, 합리성 자체만을 관조하면, 이것은 천국의 빛 안에 있어 천국의 것들에 적응되기 쉽게 있다. 이것이 합리성이 자연 평면보다 더 빨리, 더 쉽게 천국의 빛에 속한 것들, 즉 진리와 선들, 또는 총명과 지혜에 속한 것들을 받는 이유이다. 그러나 자연성은 더 조잡하고, 더 불완전하다, 그 이유는 이것이 외면에, 더 낮은쪽에 위치하기 때문, 이것 자체만을 관조하면, 이것은 세상의 빛 안에 있다; 이 빛은 천국의 빛으로부터 합리성을 통하여 받는 만큼에서만 그것 안에 총명과 지혜를 가질 뿐 그것 자체로는 총명과 지혜의 어떤 것도 없다. 요즈음 학식자들이 이야기하는 것으로부터의 유입(influx)이라는 것은 (본서에서 사용하는 유입과는 정확히 같지는 않지만) 대충 이를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
어쨌든 자연 평면과 더불어서의 경우는 이렇다: 초기 유아와 어린 시절로부터 자연 평면은 외적 감각들을 통하여 세상으로부터 흘러드는 것들로부터 그 평면의 품질을 받는다, 그리고 이것으로부터, 이것을 수단으로 인간은 지적인 것을 획득한다. 그러나 이 시기에서의 인간은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의 기쁨들 안에, 결과적으로 탐욕들 안에, 이는 유전적으로, 실제의 삶 모두에서 그렇게 있기에, 그가 그 시기에 획득하는 지적인 것들은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들로 채워져 있는다. 따라서 자신이 총애하는 것은 무엇이든 그에게는 선들이고 진리들이다, 그 결과, 이 시절의 그의 자연 평면에 있는 선들과 진리들은 거꾸로의 상태, 즉 천국의 질서에 반대되어 있다. 인간이 이 상태에 있을 때, 실로 천국의 빛은 합리적 평면을 통하여 흘러든다, 그 이유가 비록 외견상이지만 당사자가 선량하고 공정한 시민으로 되어 있는 이유가 그나마 그가 합리성으로부터 생각하고, 추론하고 이야기하고 행동하는 능력을 가졌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아직은 그의 자연 평면은 빛에 속한 것들, 그의 영원한 행복에 도움을 줄 수 있는 것들은 없다, 그 이유는 이것을 자연 평면을 통치하는 기쁨들이 반갑게 여기지 않기 때문인데, 그런 이유는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은 이웃 사랑과, 결과적으로 주님을 사랑함에 직선적으로 반대되기 때문이다. 실로 인간은 빛에 속한 것들, 천국에 속한 것들을 알고 있을런지 모른다, 그러나 그것들이 자신의 명예를 드높히는데, 부를 축적하는데, 요약해서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 도움을 주는 것 빼고는, 그것들이 당사자를 감동시키지 못하고 있다.
이로부터도 자연 평면의 질서는 천국 질서에 반대적으로, 거꾸로 나타난다. 그러므로 천국의 빛이 합리성을 통하여 자연 평면 안으로 흘러들 때, 합리적인 것들은 뒤쪽으로 후퇴하든지, 질식되든지, 악용되고 말든지 등등이다. 그러므로 자연 평면이 합리적 평면과 결합하기 전, 반드시 요구되는 조건은 자연 평면이 거듭나야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자연 평면이 거듭나질 때, 주님으로부터 천국을 통하여 흐르는 것들, 고로 합리성을 통하여 자연 평면으로 흐르는 것들은 받아진다, 그 이유는 일치하기 때문이다. 사실 자연 평면은 합리성으로부터의 선과 진리, 또는 합리성을 통하여 주님으로부터 있는 선과 진리를 받는 그릇밖에 더 아니다. 그 이유가 자연 평면에 의해 외적 인간이 뜻해지기 때문, 외적 인간은 자연적 인간이라고도 불리울 수 있기 때문, 그리고 합리성은 내적 인간이라 불리우기 때문이다. 이런 사항들이 지금까지 늘 사용해온 단어들인데, 그렇기에 여기서 취급되는 것, 즉 자연 평면이 합리적 평면과 결합함도 어느 정도나마 납득되고 있을 것이다.

기럇-아르바, 마므레로. 이는 그것의 상태를 의미한다. 이는 “마므레”의 의미가 이것이 인접된 것쪽으로 그것의 질과 양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리고 “기럇-아르바”의 의미가 진리 측면에서의 교회, 고로 진리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로부터 “마므레 기럇-아르바”는 진리 측면에 관한 자연 평면의 상태가 의미된다, 그리고 “헤브론”에 의해서는 선의 상태가 의미되는데 아래에서 이어진다.

여기는 헤브론이다. 이는 그들이 결합되어졌을 때의 상태를 의미한다. 이는 “헤브론”의 의미가 교회의 선이다로부터, 여기서는 주님의 신성한 자연 평면의 신성한 선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내적 의미에서 교회의 어떤 것들을 의미하는 것들은 최고 의미에서는 주님의 신성의 어떤 것을 의미하는데, 그 이유는 교회의 것이 주님으로부터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헤브론”이 그들이 결합되어졌을 때의 상태라고 말한 이유는 거기에 이삭이 있었기 때문, 이삭에 의해 주님의 신성한 합리성이 표현되었기 때문; 그리고 야곱이 그쪽으로 왔고, 야곱에 의해서는 주님의 신성한 자연 평면이 표현되었고, 고로 그가 그쪽으로 옴에 의해 결합이 의미되었기 때문이다. 하여, “마므레, 기럇-아르바, 여기는 헤브론이다”라고 말해진 이유는 신성한 자연 평면이 선을 수단으로 합리성의 선과 결합되었기 때문이다. 이삭은 선 측면에서의 신성한 합리성을, 이에 비해 리브가는 진리 측면에서의 신성한 합리성을 표현한다, 그리고 리브가는 여기서 언급되지 않고 있다.

거기는 아브라함과 이삭이 체류했었던 곳이다. 이는 신성한 삶 모두를 의미한다. 이는 “체류함”의 의미가 생활함이다로부터; 그리고 아브라함의 표현함이 주님의 신성 자체이다로부터; 그리고 이삭의 표현함이 그분의 신성한 합리성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신성한 자연 평면이 신성한 합리적 평면과 결합함이 여기서 취급된 주제이기에, 아브라함과 이삭이 명명되고, 거기서 그들이 체류했다고 말해지는데, 이는 신성한 삶 모두를 의미하기 위함이다. 즉 “야곱”인 신성한 자연 평면의 삶도 다함께 의미되고 있다. 그리고 신성 자체, 신성한 합리성, 그리고 신성한 자연 평면이 주님 안에서 하나이기에, “아브라함과 이삭이 체류했던 곳”이라 말할 때 (한 분 임이 명시되도록) 복수 동사(peregrinati)를 사용하지 않고 단수 동사(peregrinatus)가 사용되고 있다.

4616. 그리고 이삭의 날들은 …이었다. 이는 이 때 당시 신성한 합리성의 상태를 의미한다. 이는 “날들”의 의미가 상태들이다로부터; 그리고 이삭의 표현함이 신성한 합리성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일백 팔십 년. 이는 이 상태의 품질을 의미한다. 이는 말씀에서 모든 숫자들은 어떤 것을 의미한다로부터 알게 된다; 고로 “일백 팔십 년, 180년”은 어떤 것의 품질, 또는 취급되는 상태의 품질을 의미한다. “100”은 충만된 상태를; “80”은 시험들, 여기서는 시험들을 수단으로 이다; 이 외의 다른 것들은 알려질 수 없다. 그 이유가 숫자들은 그들의 의미를 이 숫자보다 더 간단한 숫자들로부터 가지기 때문이고, 큰 숫자 (복잡한 숫자)는 작은 숫자 (단순한 숫자)가 불어난 것이기 때문이다. 180년은 12×15=180으로도 의미를 헤아릴 수 있다. (숫자를 생각해볼 때 수표에 기재하는 방식을 연상하면 도움이 될지 모른다, 즉 우리가 180불을 수표에 적는다면 일백 팔십 불이라고 영어로도 적는데, 이때의 각 단위별 숫자로 간단한 숫자를 해석하면 될 것이다, 즉 일백, 그리고 팔십; 또는 육백 육십 육, 666도 육백, 육십, 육의 각 숫자의 의미를 파악하고 이를 합치면 될 것이다. 더불어 작은 숫자는 역자의 성경 상응 사전을 참조하면 이해가 빨라질 수 있다. 역자주.)

그리고 이삭은 기한이 만료되었다, 그리고 죽었다. 이는 신성한 자연 평면에서 소생함을 의미한다. 이는 (육체의 삶이) “기간이 다 참(expiring)” 그리고 “죽다(dying)”가 (영의 삶이) 소생함(시작함)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말씀에서 어떤 이가 “죽었다”와 관련될 때, 내적 의미에서는 그의 마지막과 또 다른 것에서 새로운 어떤 것, 고로 계속됨이다; 예를 들면, 유다와 이스라엘 왕국의 어떤 왕이 죽었다, 또는 대 성직자가 죽었다와 관련될 때, 이것은 내적 의미에서는 그들의 표현함이 끝난 것, 그리고 또 다른 것에서 그것의 시작이 있는 것, 즉 소생하는 것이다. 더욱이 다른 삶에 있는 이들, 그리고 말씀의 이런 대목을 읽는 인간과 더불어 있는 영들은 죽음에 대한 어떤 생각을 갖지 못한다, 그 이유는 거기서는 그들이 죽음에 관하여 어떤 것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것 대신 그들은 또 다른 것에서 계속됨을 지각할 뿐이다. 더욱이 인간이 죽을 때, 그의 육체적 부분만, 땅에서의 삶을 위해 봉사한 육체만이 죽는 것, 대신 육체를 사용함이 더 이상 없는 세계에서 그의 영은 그의 삶을 계속한다.
이삭이 기한이 다 차서 죽는다가 신성한 자연 평면에서 소생함을 의미하는 이유는 합리성은 그것에 상응하는 자연 평면이 있지 않으면 삶을 가지지 못하기 (생명을 가지지 못하기) 때문이다. 눈의 시각을 예로 들면, 시각은 시각 바깥쪽에 대상물이 존재하지 않으면, 시각은 있으나마나 한 셈인 것과 같다. 같은 경우로서 서로의 위치가(입장이) 반대인 경우도 그러한데, 그 이유는 이것들이 죽음을 유발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수맥의 경우도 흐름이 없으면 막힌다. 합리성 역시 이런 맥락에서 있다; 즉 자연 평면에서 합리성의 빛을 받아들임이 없으면, 그것의 시각은 멸해진다, 그 이유가 자연 평면에 있는 지식들이 합리성에게는 시각의 대상물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만일 이런 대상물이 빛에 반대되어 있다면, 즉 진리의 총명에, 선의 지혜에 반대된다면, 합리성의 시각은 멸해진다, 그 이유는 합리성 자체에 반대되는 것 안으로 흐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악과 거짓 안에 있는 이들에게는 합리성이 닫혀 있다, 하여 천국과의 교통은 열려 있지 못하고, 단지 그들이 생각하고 추론하고 이야기함을 위하여 째진 틈새로만 교통함이 가능해 있을 뿐이다. 결과적으로 자연 평면이 합리성과 결합하려면, 자연 평면은 합리성을 받을 준비가 필요하고, 이를 주님께서는 거듭남을 수단으로 결과되게 하신다. 이 결합이 있을 때, 합리성은 자연 평면 안에서 살아 있다. 그 이유가 이미 말한 대로 합리성은 그것의 대상물을 자연 평면에서 보기 때문이다; 즉 눈의 시각과 세상의 대상물과의 관계와 같은 것이다.
실로 합리성은 자연 평면의 생명과 구분되는 생명을 자체 안에 가지고 있다; 마치 혼이 육체 안에, 인간이 자기 집 안에 있는 것과 같이 있다. 이는 천국들의 경우도 같다. 즉 가장 깊은 천국, 즉 셋째 천국은 그것 아래에 있는 천국들로부터 구분되어 살아 있다, 그럼에도 이 천국이 중간 천국, 즉 둘째 천국에서의 받아들임이 없으면, 그것의 지혜는 사라질 것이다. 둘째 천국의 빛과 총명이 가장 낮은 천국, 즉 첫째 천국에서 받아들임이 없으면, 마지막으로 인간의 자연 평면에서의 받아들임이 없으면, 이 천국의 총명 역시 사라질 것이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밖의 어딘가에서 받아들임이 있게 설비해두셨다. 그러므로 천국들은 이쪽이 다른 쪽을 섬기도록 주님에 의해 만들어졌다; 마지막으로는 인간의 자연 평면과 감각 측면이 가장 낮은 수준에서의 받아들임이 되어 있게 만들어져 있다; 이렇게 하여 신성은 질서의 최말단에 계시고, 세상으로 건너오신다. 그러므로 만일 최말단의 것이 앞서의 것에 일치하고 응답한다면, 앞서의 것들은 최말단 안에 함께 있다; 그 이유가 최말단인 것들은 그것 앞에 있는 것의 그릇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계속적인 모든 것이 다함께 있는 것이다. 이상의 설명으로부터 신성한 자연 평면에서 소생함에 의해 뜻해진 것이 분명해졌을 것이다.

그리고 그의 백성들에게로 거두어졌다. 이는 지금 신성한 합리성은 신성한 자연 평면 속에 있는 것들 사이에 있음을 의미한다. 이는 “그의 백성들에게로 거두어짐”의 의미가 표현함의 역할이 다했음; 고로 여기서는 신성한 자연 평면 속에 있는 것들 사이에 있다 이다. 누군가가 죽었을 때, 고대인들은 “그는 자기 백성들에게 거두어졌다”라고 말했다; 이는 대략적 의미에서 그가 다른 삶에서 그의 자신의 것 사이에 있다는 것을 뜻한다. 그 이유가 그의 육체적 삶 동안, 자신의 영의 측면은 영들과 천사들의 동아리 안에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가 죽으면 당연히 그곳에 그들 사이에 있기 마련이다. 이것이 그가 거두어진다는 “백성”에 의해 뜻해진 것이다. 그러나 말씀의 내적 의미에서, 즉 교회와 주님의 왕국의 선들과 진리들이 취급되는 대목에서 “백성들에게로 거두어짐”에 의해 일치하거나 상응하는 진리들과 선들 사이에 있는다는 것이 뜻해진다. 모든 천국의 사회들은 선들과 진리들 안에 있고, 거기 있는 진리들과 선들은 각기 다른 차이의 그늘과 더불어 땅과 연관되고 연결을 하여 있기에, “백성들”은 이런 진리들 안에 있는 사회들에 있는 진리들이다.

살만큼 살아 늙고. 이는 생명의 새로움을 의미한다. 이는 “늙다”의 의미가 이전의 상태를 벗고 새로운 상태를 입는 것이다로부터, 여기서는 생명의 새로움이다; “살만큼 살다”의 의미는 충만된 상태이다.

그리고 그의 아들들, 에서와 야곱이 그를 매장했다. 이는 신성한 합리성은 자연 평면의 선 안에서 그리고 자연 평면의 진리로부터의 선 안에서 다시 일어났다를 의미한다. 이는 “매장되어짐”의 의미가 부활이다로부터, 그리고 표현함이 또 다른 것 안에서 소생함이다로부터; 에서의 표현함이 선 측면에서의 주님의 신성한 자연 평면이다로부터; 야곱의 표현함이 진리의 선 측면에서의 주님의 신성한 자연 평면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 모두로부터, 그리고 앞에서 말해진 바로부터 그의 아들 에서와 야곱이 그를 매장했다에 의해 그는 자연 평면의 선 안에서와 진리의 선 안에서 다시 일어났다가 의미된다. “매장되어짐”이 내적 의미에서 다시 일어남인 이유는 육체가 죽었을 때 혼은 다시 일어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매장”이 말씀에서 언급될 때, 천사들은 벗어버린 육체를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다시 일어나는 혼만을 생각하고 있다; 그 이유가 그들은 영적 차원의 생각 안에 있기 때문, 고로 생명에 속하는 것들 안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자연계에서 죽음에 속하는 모든 것들은 영계에서 생명에 속하는 것들을 의미한다.

창세기 제 34 장

창세기 제 34 장

1-4절. 그리고 레아가 야곱에게 낳은 딸, 디나가 그 토지의 딸들을 보려고 밖으로 나갔다. 2 그리고 그 토지의 왕자, 히위족 하몰의 아들, 세겜이 그녀를 보았다, 그리고 그녀를 데려왔다, 그리고 그녀와 누웠다, 그리고 그녀를 강탈했다. 3 그리고 그의 혼은 야곱의 딸 디나에게 굳게 결합되었다, 그리고 그는 이 처녀를 사랑했다, 그리고 이 처녀의 심정에 말했다. 4 그리고 세겜은 그의 아버지 하몰에게 말했다, 말하기를 이 소녀를 여인으로 얻게 해주십시오.

그리고 디나는 밖으로 나갔다. 이는 신앙의 모든 것들에 애착함, 그리고 거기에서 파생된 교회를 의미한다. 이는 디나의 표현함이 모든 진리들에 애착함과 이로부터 파생되는 교회이다로부터 분명해진다. 그 이유가 야곱의 열두 아들들이 신앙의 모든 것들, 고로 교회의 모든 것들을 표현했기 때문이다. 고로 레아와 그 하녀들로부터 야곱의 열 아들이 태어난 이후 태어난 디나는 그것들에 애착함, 그러므로 교회를 의미한다. 그 이유가 교회는 진리에 애착함으로부터 있기 때문이다; 즉 우리가 진리에 애착함이라 말하든지 교회라고 말하든지 같은 말이기 때문; 또는 인간은 진리에 애착함으로부터 교회이기 때문이다.

레아가 야곱에게 낳은 그녀의 딸. 이는 외적인 것들 안에서를 의미한다. 이는 레아의 표현함이 외적 진리에 애착함이다로부터 분명해진다; 그리고 야곱의 표현함이 최고 의미에서 자연 평면에 있는 신성한 진리 측면의 주님이다로부터, 그리고 관계적 의미에서 외적 교회를, 또는 같은 말로 교회의 외적인 것들을 표현한다. 이로부터 “그녀가 야곱에게 낳은 레아의 딸”이 외적인 것들에 있는 진리에 애착함임이 분명해진다.

그 토지의 딸들을 보려고. 이는 진리에 애착함들과 그로부터 파생된 교회들과 친숙해지려 함을 의미한다. 이는 “보는” 것의 의미가 (어떤 것)에 친숙해지게 되는 것이다로부터; “딸들”의 의미가 애착들과 그로부터 파생되는 교회들이다로부터; 그리고 “토지”, 여기서는 가나안의 토지의 의미가 교회가 있는 지역, 또한 교회 자체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 구절에 포함된 것들의 의미는 이어지는 사항들로부터 보여질는지 모른다; 그 이유가 취급되는 주제가 야곱의 후손들 사이에 설립되기로 예정된 교회의 표현물이기 때문이다. 이 표현물은 그들이 내면의 진리들 측면에서 완전히 황폐해지기 전에서는, 즉 그들이 더 이상 내면의 진리들을 일체 알지 못해지기 전에서는 설립되어질 수 없었다. 이는 앞에서도 이미 언급했었다. 이 내면의 진리들은 그들에게 명령된 의식들에 의해 모두 표현되고 의미되어져 있다; 그 이유가 모든 의식들은 천국들에 있는 주님의 왕국에 있는 어떤 것, 결과적으로 땅 위 주님의 왕국, 즉 교회에 있는 어떤 것을 표현하고 의미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표현되고 의미된 것들은 여기서 뜻하는 내면의 진리들이다. 야곱의 후손들에게 명령된 사항들의 각각 그리고 모두는 교회의 표현물이 그들 사이에 설립되었을 때 (모세의 책 중에서도 특히 출애굽기서와 레위기서에 기술되고 있다), 주님의 왕국 속의 천적, 영적 사항들을 표현하고 의미했다는 것은 이미 많은 곳의 설명들에서 살펴왔다. 이런 사항들이 야곱의 후손들에게는 알려져 있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만일 그들이 알았다면, 이를 모독했을 것이기 때문에 모독함을 예방해주시기 위함 때문이다; 이런 이유에서 그들은 그들의 내면들 측면에서 완전히 황폐해지기 이전에는 교회의 표현물 안으로 와질 수 없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족들에 의해 내면의 진리들이 의문 선상에 놓이고, 아예 소멸되어버림이 이 장에서 묘사되고 있다.
야곱의 후손들에게 명령된 표현물들은 사실상 새로운 것은 아니고, 대부분이 이미 고대인들 사이에서 사용되어 왔었던 것들이다; 그러나 차이점은 있다; 고대인들은 야곱의 후손들(유태인과 이스라엘족)이 했듯 외적인 것들을 예배하지 않았고 그들은 내적인 것들을 예배했다, 그리고 이를 수단으로 그들은 주님 자신을 인정했다. 그때까지도 가나안의 토지에는 고대 시대의 교회로부터의 것이 남아 있었다; 특히 헷족과 히위족 사이에서 잔존하였다. 이런 이유 때문에 이 나라들을 수단으로 교회 속에 있어 왔던 진리들이 표현되었다. 이상 살핀 바로부터 토지의 딸들을 보려고 나간 레아에 의한 야곱의 딸 디나에 의해 의미된 것이 보여지고 있을 것이다; 그 이유가 디나에 의해 야곱의 후손들 사이에 설립된 외적 교회가 표현되고; 토지의 딸들은 고대인들 사이에 있는 교회들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말씀의 내적 의미에서 “딸들”은 말씀의 어느 곳에서나 교회들을 의미하는데, 이미 살폈다; 그리고 “토지”는 교회가 있는 지역과 나라를, 고로 교회를 의미한다

그리고 세겜이 그녀를 보았다. 이는 진리를 의미한다. 이는 세겜의 표현함이 진리이다로부터, 여기서는 고대 시대로부터 있는 교회 속의 진리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것이 세겜에 의해 표현되는 이유는 세겜이 속한 나라와 더불어 (고대) 교회로부터의 것이 아직 잔존하였기 때문이다. 이 나라가 마음씨 고운 나라들 중의 하나이다는 것은 하몰과 세겜이 야곱과 그의 아들들에게 이야기함에 신실함이 엿보였다는 것(8-12절), 세겜이 디나를 아내로 데려가도록 정중한 태도로 허락을 받으려했다는 것 (18-24절)으로부터 분명해진다; 이런 그들의 품성은 교회 속의 진리가 그들에 의해 표현되어진 이유 중의 하나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 외에도, 세겜 성은 아브람이 시리아로부터 가나안의 토지로 왔을 때 첫 경유지였기도 하다 (창. 12:6); 그리고 지금은 야곱이 시리아로부터 와서 첫 경유지가 되고 있다. 여기에서 그는 자기 천막을 펼쳤다, 그리고 우릿간을 만들었다, 그리고 제단을 건립했다 (창. 33:17-20). 아브라함과 야곱의 여행과 체류함은 최고 의미에서 주님에 관련하여서와 주님에 의해 거듭나지는 인간의 관계적 의미에서 있는 신앙의 진리들과 사랑의 선들 쪽으로 발전해감을 표현하는데, 이는 여러 번 상술했었다. 그러므로 “세겜 성”에 의해 맨처음의 빛이 의미된다, 결과적으로 내면의 진리가 의미된다, 그 이유는 이것이 첫 번째의 빛이기 때문이다.
이 장의 내적 의미에서, 야곱의 후손이 어떻게 자신들 안에서 빛의 첫 번째 되는 것, 즉 내면의 진리를 소멸시키는지가 다루어지고 있다. 내적 역사적 의미에서, 야곱의 아들들은 그들의 모든 후손들을 의미한다; 그 이유가 말씀의 내적 의미에서 주님의 왕국 속의 것들이, 고로 그분의 교회 속의 것들이 집중적으로 취급되기 때문이다. 사실 야곱의 아들들 자신들이 어떤 교회를 구성하지는 않았고, 그들의 후손들에서 구성되었다; 즉 이집트로부터 나온 이 후의 후손들 만이 해당되는데, 실제적으로는 가나안의 토지로 들어간 후손들 이 후의 자손들로부터 이다.
세겜으로부터 그렇게 명명된 이 성읍에 주목해보자. 이 성은 고대적으로는 “살렘(Shalem)”이라 불리운 것은 앞 장으로부터도 분명해진다:
야곱은 세겜의 성 살렘에 왔다, 이곳은 가나안의 토지 안에 있다 (창. 33:18);
“살렘”이 고요함을 의미하고, “세겜 성”은 신앙의 내면의 진리들을 의미한다. 인간이 이런 진리들 쪽으로 와질 때, 그는 고요한 상태 안으로 온다. 그러나 같은 성읍(살렘)이 후에는 “세겜”으로 불리워졌다는 것이 아래에서 확인된다:
요셉의 뼈, 이를 이스라엘의 아들들이 가져와서 그들은 야곱이 이백 크사라를 주고 세겜의 아버지 하몰의 아들들로부터 산 들판의 지분에, 세겜에 매장했다 (여. 24:32).
그리고 사사기서에서:
에벳의 아들 가알이 세겜 성읍 주민들에게 말하기를, 우리가 그를 섬겨야 한다고 하는데, 누가 아비멜렉이고, 누가 세겜인가? 그는 여룹바알의 아들이 아니냐?, 그리고 스볼이 그의 장관이더냐? 너희는 세겜의 아버지 하몰의 사람들을 섬기라, 그리고 왜 우리가 이 사람을 섬기느냐?
(사. 9:28)
이 세겜 성은 한참 후에 수가라고 불리웠다:
예수께서 수가라고 불리운 사마리아의 성에 오셨다, 이곳은 야곱이 그의 아들 요셉에게 준 들판에 가깝다; 그리고 야곱의 우물이 거기 있었다 (요. 4:5, 6).
위 구절로부터 이 성읍이 내면의 진리를 의미한다는 것이 분명해지고 아래 구절도 있다:
길르앗은 불법을 일하는 그들의 성읍이다, 이것은 피로 범벅이 되어 왔다; 그리고 (강도)떼가 사람을 기다림 같이, 성직자들의 동료 떼거리가 사악하였기 때문에 세겜의 길에서 살인한다; 이스라엘의 가문 안에서 나는 더러운 것들을 보았었다 (호. 6:8-10);
위에서 “세겜의 길에서 살인하는” 것은 내면이 있는 이들에게서조차 진리를 소멸하는 것, 고로 모든 외적 진리들을 소멸하는 것을 의미한다. 내면의 진리의 소멸은 아비멜렉이 이 성읍을 파괴하고 소금을 뿌림에 의해서도 의미되고 있다 (사. 9:45).

히위족 하몰의 아들. 이는 고대인들로부터를 의미한다. 이는 여기서 세겜인 “아들”의 의미가 내면의 진리이다로부터 분명해지는데 앞에서 언급했다; 그리고 하몰의 표현함이 이 진리의 아버지, 고로 고대인들로부터 이다에서 알려진다; 그 이유가 표현물과 의식들 안에 내면이 있었던 진리는 고대 때의 교회로부터 방산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하몰은 “히위족”이라고도 명명되었는데, 그 이유는 히위 민족에 이런 진리가 고대 시대로부터 있어 왔기에 그들 사이에서 히위족을 이름 뒤에 붙여 말하므로 이런 진리까지 언급되게 하였었기 때문이다. 하여 여기서도 하몰이 “히위족”이라 불리워진다. 이렇게 가나안에 있는 모든 민족들에 의해 고대 교회의 어떤 선 또는 진리가 의미된 이유는 거기에 천적 평면에 속했던 태고 교회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후에 교회가 있어 왔던 여느 민족들 같이 이 나라들도 우상숭배적으로 변질되었던 바, 반대적 의미인 우상 숭배 역시 의미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히위족은 고대로부터 가졌던 것 때문에 내면의 진리를 의미했고, 특히 그들은 다른 민족들과 달리 마음씨 고운 민족 중의 하나여서 이들과 더불어서는 불법적인 것이 대단하게 오염된 상태는 아니었다; 즉 교회의 진리가 완전히 소멸된 것은 아니다는 말이다. 그 한 예가 히위 민족의 기브온족인데, 특별한 섭리로 그들은 여호수아와 계약을 맺음으로 생존할 수 있었다 (여. 9:15). 그들이 히위족이다는 것은 여. 9:7과 11:19에서 보여진다. 이상으로부터 알게 되는 바, 고대인들로부터의 내면의 진리가 “히위족 하몰의 아들 세겜”에 의해 의미되어진다는 것이다.

그 토지의 왕자. 이는 교회들 사이에서 제 일 가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왕자”의 의미가 제 일 가는 것이다로부터; 그리고 “토지”의 의미가 진리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리고 그는 그녀를 데리고 갔다, 그리고 그녀와 누웠다, 그리고 그녀를 강탈했다. 이는 이 진리가 그녀의 형제들, 야곱의 아들들에 의해 의미된 진리에 애착함과 합쳐질 수 있는 방법은 이외 더 없음을 의미한다. 이는 “그녀를 데리고 감, 그녀와 누움, 그녀를 강탈함”이 결합함이기는 하나 약혼(betrothal) 같은 합법적인 방법에 의해 이루어진 결합은 아니었다를 뜻함으로부터 알게 된다. (혼인에는 두 가지, 즉 하나는 정신적 혼인, 또 하나는 육체적 혼인, 전자는 약혼, betrothal이라 불리우고 후자는 결혼, marriage라고 구분되는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역자주) 이것이 이외 다른 방법에서는 결합되어질 수 없었다가 의미됨에 대하여는 별도의 설명이 필요할 것이다. “히위족 하몰의 아들 세겜”에 의해 의미된 고대인들로부터의 내면의 진리는 고대인들 사이에 있던 교회의 내적인 것이었다; 고로 이것은 그들의 규례들, 재판들, 그리고 법들의 내적인 것이었다; 한 마디로 그들의 의식들, 또는 의식에 준하는 것들의 내적인 것이었다는 말이다. 이 진리들은 그들로 삶을 영위하게 한 교리적인 것들, 실로 선행으로부터의 교리적인 것들 이었다; 그 이유가 고대 때에 진짜 교회에 속해 있던 이들은 선행의 교리 외에 다른 교리는 없었기 때문이다. 선행을 교리에 관계해서 말하면 내면의 진리들이라 불리울 것이고, 생활에 관계해서 말하면 선들이라 불리울 것이다. 만일 어떤 교회가 야곱으로부터 튀어나온 민족들과 개시되기로 한다면, 그들은 필시 이런 진리들과 선들 안에서 개시되어야만 한다; 그 이유는 외적인 것과 더불어 내적인 것이 없으면, 즉 인간이 외적인 것들 안에 있을 때, 내적인 것도 생각하지 않으면, 또는 적어도 내적인 것 때문에 외적인 것에 의해 감명됨이 있지 않으면, 교회의 어떤 것도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내적인 것이 교회를 만들기 때문인데, 이 내적인 것 안에 주님이 계시기 때문이다; 이 내적인 것 안에 그분으로부터의 영적, 천적인 것들이 있다.
그러나 야곱으로부터 튀어나오는 민족, 즉 이스라엘족과 유대족은 약혼에 의해 결과되는 합법적인 방법으로 이런 내적인 것들 안에서 개시할 수 없었다; 그 이유는 그들의 외적 예배가 상응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그들의 아버지들, 즉 아브라함, 이삭, 야곱으로부터 그들은 에벨에 의해 설립된 예배를 받았기 때문이고, 이 예배는 고대 교회의 예배와는 예배의 외적인 것들에서 차이가 많았다. 이런 다른 점들 때문에 고대인들 사이에 존재했던 내면의 진리들은 약혼 같은 식의 합법적인 경로로 해서 결합되어질 수 없었다; 하여 여기서 기술된 방식밖에 없었다. 따라서 “다른 방법으로 해서 이 진리가 디나의 형제들, 즉 야곱의 아들들에 의해 의미된 진리에 애착함과 결합되어질 수 없었다”라는 말이 이해되었을 줄로 안다.
그러나 설사 결합이 고대인들에게 알려진 법에 의거한 방식에서 였다 해도, 이 민족은 이런 특성 속에 여전히 있어 왔다; 즉 고대인들로부터 있었던 내면의 진리가 야곱의 후손들 사이에 존재했던 예배의 외적인 것들과는 결단코 결합되어지지 않아야 하는 특성 속에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이 민족들과 더불어서는 어떤 교회도 설립될 수 없었던 바, 이것 대신 거기에는 교회의 표현물(교회의 껍데기)만 있었을 뿐이다. 이 민족은 내면의 진리들을 받는 것이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자신들 안에서 그것들을 완전히 소멸시켜야 하는 특성 속에 있었기에 본문 13절에서 야곱의 아들들이 하몰과 세겜에게 허위로 대답함에서 이것이 표현되고 있다; 더 나아가 시므온과 레위가 검의 날로 도성을 짓부수고, 하몰과 세겜을 살해하고 (25, 26절), 아들들의 나머지를 조각내고, 도성을 약탈하고, 양떼와 목축떼를 끌고 갔으며, 도성 안에, 들판에, 그리고 집 안에 있는 무엇이든 가져갔던 것이다 (27-29절). 이로부터 야곱, 즉 이스라엘에 의한 예언이 의미하는 것도 분명해진다:
시므온과 레위는 형제들이다, 폭력의 도구들은 그들의 검이다; 내 혼이 그들의 음모 안으로 가게 하지 말자, 내 영광이 그들의 모임에서 하나로 되게 하지 말자; 그 이유는 그들은 격노함에서 사람을 살해했다, 그리고 그들은 쾌락에서 숫소를 느슨해지게 했다; 그들의 성냄은 격렬했기 때문에 저주되어야 하고, 그들의 격노함이 슬퍼졌기 때문에 저주 받을지어다; 나는 그들을 야곱에 서 갈라낼 것이다, 그리고 이스라엘에서 그들을 흩어지게 할 것이다 (창. 49:5-7).

그리고 그의 혼은 디나에게 굳게 결합되었다. 이는 결합쪽으로 기울었음을 의미한다.
이는 “그의 혼이 굳게 결합함”의 의미가 기울어짐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것이 결합하는 것임이 분명한데, 그 이유는 부부의 사랑에 속하는 것들은 내적 의미에서 영적인 결합을 포함하기 때문, 즉 진리가 선과, 선이 진리와 결합함이 포함되고 있다. 내적 의미에서 부부의 사랑에 속하는 것들이 이 결합을 포함하는 이유는 부부의 사랑은 그것의 근원이 진리와 선의 결혼, 그리고 선이 진리와 결혼으로부터 파생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말씀에서 선에 섞음질함이 “간통(adultery)”에 의해, 그리고 진리를 거짓화함이 “매춘(whoredom)”에 의해 뜻해지고 있다. 이상 살핀 바로부터 이 장에서 세겜과 디나와 관련된 것은 내적 의미에서는 세겜에 의해 표현된 진리가 디나에 의해 표현된 진리에 애착함과 결합함밖에 더 다른 의미는 없다는 것을 알는지 모른다; 고로 “그의 혼이 디나와 굳게 결합했다”의 말에 의해서는 결합쪽으로 기울었음이 의미된다.
이 장의 전체가 디나를 향한 부부의 사랑이 취급되고, 어떻게 세겜이 여인으로 그녀를 추구했는지, 그리고 부부의 사랑에 속한 것들에 의해 영적인 결합이 의미되기에, 결혼과 그것들에 속한 것들이 영적 결합밖에 더 다른 뜻이 없음을 다른 말씀에서도 확증해보자:
계시록서에서:
즐거워 기뻐서 날뛰자, 그리고 그분에게 영광을 드리자, 그 이유는 어린 양의 결혼이 오기 때문이고, 그분의 아내가 자신을 준비하였기 때문이고, 마치 어린 양의 결혼식 만찬에 불리운 이들…
(계. 19:7, 9)
계시록서에서:
나는 거룩한, 새 예루살렘을 보았는데, 천국의 안으로부터 밖으로 하느님으로부터 내려오고 있고, 그녀의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신부 같이 준비되었다. 일곱 천사 중의 하나가 나에게 말했다, 오라, 내가 신부, 어린 양의 아내를 보여주겠다; 그리고 그는 나를 영 안에서 크고 높은 산 위로 운반하였고, 그리고 나에게 하느님으로부터 천국의 안에서 밖으로 내려오는 위대한 성, 거룩한 예루살렘을 보였다 (계. 21:2, 9, 10);
위 구절에서 약혼과 결혼에 관련되는 것에 의해 의미되는 것은 주님께서 교회와 결혼하는 것, 이 결혼은 진리와 선을 수단으로 한다는 것밖에 더 없다는 것이 분명한데, 그 이유는 “거룩한 성”과 “새 예루살렘”이 교회 외에 더 다른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말라기서에서:
유다는 불충하게 (일들을) 처리했다, 그리고 이스라엘과 예루살렘에서는 역겨운 짓이 범하여졌다, 그 이유가 유다는 여호와의 거룩함을 모독했기 때문이다, (즉) 그가 사랑했고 그에게 이상한 신의 딸을 약혼시켰기 때문이다. 여호와께서는 불충하게 처리했던 너를 향하여, 너와 네 젊은 이의 아내 사이에 증거를 해오셨었다 (말. 2:11, 14);
위에서 “이상한 신의 딸을 사랑하고 약혼하는 것”은 자신의 자아를 “젊은 이의 아내”인 진리와 결합하는 대신 거짓과 결합하는 것이다.
에스겔서에서:
너는 네가 나에게 낳은 아들들과 딸들을 데려갔다, 그리고 그들을 삼키게 제물로 바쳤다. 네 매춘짓들이 작은 일이더냐? 너는 자기 남편과 아들들을 싫어한 네 어머니의 딸이다; 그리고 너는 그들의 남편들과 아들들을 싫어했던 네 여자 형제들의 누이이다 (겔. 16:20, 45);
위에서는 예루살렘의 역겨운 짓이 취급된다, 이 짓을 한 이유는 그들이 악들과 거짓들 안에 있었기 때문이고, 이 장에서 결혼에 반대되는 짓, 간통과 매춘 같은 것들에 의해 묘사되어 있다. “그들이 싫어한 남편들”은 선들이다, 그리고 “아들들”은 진리들이다; 그리고 “딸들”은 이것에 애착함들이다.
이사야서에서:
노래하라, 애를 낳지 못한 자, 산고를 겪지 않은 자는 노래함으로 다시 소리를 내고, 환희로 외쳐라, 그 이유는 결혼한 이의 아들들보다 홀로된 자의 아들들이 더 많기 때문이다. 너는 과부됨의 치욕을 더 이상 기억하지 않을 것이다, 그 이유는 너를 만드신 자들이 네 남편들이고, 여호와 체바욷이 그분의 이름이고, 그리고 너를 되찾으신 자가 이스라엘의 거룩한 분이시기 때문이다, 그분은 온 땅의 하느님이라 불리우신다; 그 이유가 버림받아 영에서 고뇌하는 여인 같고, 젊은 이의 여인이 이혼되었을 때 같은 너를 여호와께서 부르셨다 라고 네 하느님이 말하셨다. 모든 네 아들들은 여호와로부터 가르쳐진다, 그리고 네 아들들의 평화는 많다 (이. 44:1, 5, 6, 13).
결혼에 의해 진리와 선, 선과 진리의 결합이 있기에, 이것이 위 구절들에서 “남편과 아내”에 의해; “아들들과 딸들”에 의해; “과부들”에 의해; “이혼 자”에 의해; “낳음”, “산고”, “홀로됨”, 그리고 “애를 못낳음”에 의해 의미됨이 분명하다. 그 이유가 이런 것들이 결혼에 관련되기 때문이다. 이런 단어들의 영적 의미는 이미 설명을 거쳤으므로 여기서는 생략한다.
이사야서에서:
시온을 위하여 나는 침묵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예루살렘을 위하여 나는 쉬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너희에게 버려진 자로 더 이상 있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네 토지는 결혼한 자로 불리울 것이다, 그 이유가 여호와께서 네 안에서 흡족해 하실 것이기 때문, 그리고 네 토지는 결혼되어질 것이기 때문; 젊은 자가 처녀와 결혼하기 때문에, 네 아들들이 너와 결혼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신랑이 신부로 해서 기뻐함이 있을 것이고, 네 하느님이 네 위에서 흡족해 하실 것이다 (이. 62:1, 4, 5);
말씀의 내적 의미를 모르는 이들은 위와 같은 말씀 속의 사항들은 일반 언어에서와 같이 비교함들일 뿐이라고 상상하고, 하여 교회가 딸에, 처녀에, 그리고 아내에 비교되는 것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말씀에 있는 모든 것들은 영적이고 천적인 것들의 표현이고, 실지로 상응하고 있다; 그 이유가 말씀은 천국으로부터 내려와 있기 때문, 하여 말씀의 근원이 신성이고, 글자 의미에 속하는 것들이 천적이고 영적인 것들과 상응한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천국들의 왕국 (즉, 천국에 있는 그분의 왕국, 교회인 땅에 있는 그분의 왕국)을 “자기 아들을 위해 결혼식을 만들고, 거기에 많은 이들을 초대한 사람, 왕”에 견주시고(비유하시고) 있다 (마. 22:2-14); 또한 “자기들의 등불을 가지고 신랑을 만나기 위해 나간 열 처녀들” (마. 25:1-13)의 비유도 있다. 그리고 주님은 교회 속에 있는 이들을 “결혼식에 참석한 아들들”이라 부르신다:
예수께서 말하셨다, 결혼식에 참석한 아들들이 신랑이 그들과 더불어 있는 한 슬퍼할 수 있느냐? 그러나 그들로부터 신랑을 데려갈 날이 올 것이다, 그리고 그때 그들은 단식할 것이다 (마. 9:15).
그러므로 또한 선에 애착함과 진리에 애착함이 “신랑과 신부의 기쁨과 즐거움”이라 불리운다, 그 이유는 천국의 기쁨이 이런 애착들로부터, 이런 애착 안에 있기 때문이다.
이사야서에서:
네 아들들이 너와 결혼할 것이다, 그리고 신랑의 기쁨이 신부 위에 있듯, 여호와 네 하느님이 네 위에서 흡족해 하실 것이다 (이. 62:5).
예레미야서에서:
기쁨의 목소리와 즐거움의 목소리, 그리고 신랑과 신부의 목소리, 그들의 목소리가 말하기를, 너희는 여호와에게 고백하라, 그 이유는 선이 여호와이기 때문이다 (예. 33:11).
예레미야서에서:
나는 유다의 성읍들로부터와 예루살렘의 거리들로부터 기쁨의 함성과 즐거움의 함성을, 신랑의 함성과 신부의 함성이 중단되게 할 것이다, 그 이유는 토지가 황폐해짐쪽으로 나아갈 것이기 때문이다 (예. 7:34; 16:9; 25:10).
계시록서에서:
등불의 빛이 바빌론에서 더 이상 비추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신랑의 음성과 신부의 음성이 그녀 안에서 더 이상 들려지지 않을 것이다 (계. 18:23).
사랑을 통하여 진실로 부부이듯, 땅 위의 결혼은 선과 진리의 결혼인 천국의 결혼에 상응한다, 그러므로 약혼과 결혼에 관하여 말씀에서 교부된 법들은 천국의 결혼의 영적인 법들에 완전하게 상응한다, 예를 들면 오직 한 아내만을 배우자로 하라는 것 등등이다 (막. 10:2-8; 눅. 16:18); 그 이유가 이것이 천국의 결혼에서 있는 경우이기 때문이다, 즉 선은 그것 고유에 속하는 진리가 아니면 결합되어질 수 없고, 진리는 그것 고유에 속하는 선이 아니면 결합될 수 없는 것이 천국의 결혼이다. 만일 선이 그것 고유의 것 외의 다른 진리와 결합하면, 그것은 전혀 존재할 수 없어 찢어져 멸해지고 만다. 영적 (평면의) 교회에서 아내는 선을 표현하고, 남자(남편)는 진리를 표현한다, 그러나 천적 (평면의) 교회에서 남편은 선을, 아내는 진리를 표현한다; 이것은 신비함들이다; 그들은 표현할 뿐만아니라 그들의 활동들에서도 그것들에 상응한다.
위 신약 성경 외에 구약 성경에서 결혼에 관련해 교부된 법들도 천국의 결혼의 법들에 마찬가지 방식에서 상응하고 있다. 즉 출. 21:7-11; 22:15, 16; 34:16; 민. 36:6; 신. 7:3, 4; 22:28, 29 이고, 금지되는 것들의 등차에 관한 법들도 있다 (레. 18:6-20); 이에 대한 보다 더 상세한 것은 주님의 신성한 자비로부터 별도로 살핀다. 결혼의 법들과 등차들은 천국의 결혼인 선과 진리의 법들에서 그것의 근원을 가진다는 것, 그리고 그것들에 관련하여 있는다는 것이 에스겔서에서 분명해진다:
성직자 레위인은 자기의 아내를 이혼된 과부로부터 데려와서는 안된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가문의 처녀들로부터, 그리고 성직자의 과부로 있었던 과부를 데려올 것이다 (겔. 44:22);
위 구절에서 취급된 주제는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과 천국의 가나안이다, 그리고 이것들이 주님의 왕국과 그분의 교회임이 분명해진다. 결과적으로, “레위인”에 의해 레위인이 의미되는 것이 아니고, “과부와 이혼된 그녀”가 과부와 이혼되어 있었던 그녀를 의미하지 않고, 이런 것들이 상응하는 것들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는 이 처녀를 사랑했다, 그리고 그녀의 심정에 말했다. 이는 사랑을 의미하는 바 별도의 설명이 필요 없다.

그리고 세겜은 그의 아버지 하몰에게 말했다. 이는 고대인들 사이에 있었던 진리로부터 생각함을 의미한다. 이는 “말하다”가 말씀의 역사물에서는 지각하는 것, 그 결과 생각함이다로부터; 그리고 하몰의 아들, 세겜의 표현함이 고대인들 사이에 있는 진리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러므로 “세겜이 그의 아버지 하몰에게 말했다”란 고대인들 사이에 있던 진리로부터 생각함을 표시한다.

말하기를, 저에게 이 소녀를 여인으로 얻게 해주십시오. 이는 이 진리가 저 진리에 애착함과 결합되기를 바랬다를 의미한다. 이는 여기서 소녀, 즉 디나가 그녀의 형제들인 야곱의 아들들에 의해 의미된 진리에 애착함을 의미함으로부터; 그리고 “여인으로 얻음”은 결합하는 것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5-7절. 그리고 야곱은 그가 그의 딸 디나를 더럽혔다는 것을 들었다. 그리고 그의 아들들은 들판에서 그의 획득물과 함께 있었다. 그리고 야곱은 그들이 올 때까지 잠잠했다.
6 그리고 세겜의 아버지 하몰이 야곱에게 말을 하려고 밖으로 나왔다. 7 그리고 야곱의 아들들이 들판으로부터 와서 그 소식을 들었다. 그리고 사람들은 슬퍼했고, 분노에 찼다, 그 이유는 그가 야곱의 딸과 드러누웠는 바, 하지 말았어야 하는 부끄러운 짓을 이스라엘에게 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야곱은 그가 그의 딸 디나를 더럽혔다는 것을 들었다. 이는 합법적이지 않은 결합을, 즉 여기서 야곱에 의해 표현된 외적 교회에 속한 진리에 애착함과 합법적이지 않은 결합을 의미한다. 이는 “더럽히는” 것이 합법적이지 않게 결합함임을 의미함으로부터 알게 된다; 그 이유가 결혼에 의해서는 합법적인 결합을 의미하기 때문, 그러므로 “더럽힘”은 합법적이지 않은 결합이 의미된다; 디나의 표현함이 신앙의 모든 것들에 애착함, 그러므로 그로부터 파생된 교회이다로부터; 그리고 야곱의 표현함이 여기서는 외적 고대 교회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여기서 “야곱”에 의해 외적 고대 교회가 의미되는 이유는 이 교회가 그의 후손들 사이에서 설립되기로 되어 있었기 때문이고, 만일 그의 후손들이 고대인들 사이에 존재했던 내면의 진리를 받았다면 아마 설립되어졌을 것이다. 이 교회가 여기서 야곱에 의해 표현된 것은 이어지는 이 장의 구절로부터도 분명해진다; 그 이유가 그는 그의 아들들이 도성을 짓부수고, 하몰과 세겜을 살해하는 음모를 꾸미는 자리에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가 시므온과 레위에게 “너희는 나에게 화를 끼쳐 나로 하여금 이 토지의 주민에게 악취를 내게 하였다”하고 말하였다(30절). 그리고 그가 죽음을 앞두고 예언적 말에서, “내 혼이 그들의 비밀 안으로 가지 말지라, 그들의 회합 안에서 내 영광이 하나가 되게 하지 말지라; 그 이유는 그들의 성냄에서 그들은 사람을 죽였다, 그리고 그들의 쾌락에서 그들은 숫소를 느슨해지게 했다” (창. 49:6). 더 나아가 말씀의 다른 구절에서도 외적 고대 교회가 야곱에 의해 표현되어진다. 야곱이 이 교회를 표현하는 이유는 그가 최고 의미에서 주님의 신성한 자연 평면을 표현하기 때문, 이것에 외적 교회가 상응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아들들”에 의해서는 그의 후손들이 의미된다. 이들은 자신들 안에서 고대인들 사이에 존재했던 진리를 소멸했다, 고로 교회 안에 있는 것을 파괴했다, 그 결과 그것의 표현성만 그들과 더불어 남았다.

그리고 그의 아들들은 들판에서 그의 획득물과 함께 있었다. 이는 그의 후손들을 의미하고, 이들은 자신 고유의 광신적인 신앙에 있었다는 것이 그의 “아들들”이 그의 후손들을 의미함으로부터; “획득물”의 의미가 외적 진리들이다로부터; 그리고 “들판”의 의미가 교회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러므로 “그의 아들들이 들판에서 그의 획득물과 함께 있었다”에 의해 그들은 자신들 고유의 광신적 신앙 안에 있었다가 의미된다; 그 이유가 야곱의 후손들 사이에 존재한 그대로의 그들의 교회는 “광신적 신앙”이라 말해야 마땅할 것이기 때문, 그들의 외적 예배는 내적인 것이 하나도 없었다.

그리고 야곱은 그들이 올 때까지 잠잠하였다. 이는 그와 그의 후손들에 속해 있던 진리들로부터 상담함을 의미한다. 이는 “잠잠히 있는” 것의 의미가 조용하게 생각하고 상담을 취함이다로부터; 그리고 “그들(아들들)이 올 때까지”의 의미가 그와 그의 후손들에 속했던 신앙의 진리들로부터 이를 행하는 것이다로부터 알려진다. 상담함이 아들들과 더불어, 고로 야곱의 아들들에 의해 의미된 진리들과 더불어 있었던 바, 이것은 야곱과 그의 후손들에 속했던 진리들로부터 이었음이 뒤따른다.

그리고 세겜의 아버지 하몰은 야곱에게 말하려고 밖으로 나갔다. 이는 그 교회의 진리들에 관하여 상담함을 의미한다. 이는 세겜의 아버지 하몰의 표현함이 고대인들로부터의 진리이다로부터; 야곱의 표현함이 외적 고대 교회이다로부터; 그리고 “그와 이야기를 함”이 상담함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러므로 이 말들에 의해 그 진리에 관하여 상담함이 의미된다.
말씀에서 이름이 어떤 것을 의미함을 모르는 이들은 “세겜의 아버지 하몰이 그와 이야기를 하려고 밖으로 나갔다”에 의해 고대인들 사이에 존재했던 교회의 진리가 야곱의 후손들 사이에서 새로이 설립되려 했던 고대 교회와 일치함에 있었던 진리와 상담함이 의미되는 것에 의아해 할는지 모른다; 그러나 이런 설명은 말씀의 내적 의미의 본성을 아는 이들에게는 하등 흥분될 일이 아니고, 고대인들의 책들로부터 배웠던 이들에게서는 이것이 저술의 한 가지 방식일 뿐이다; 그 이유가 지혜, 총명, 지식들, 등등 같은 것을 함께 이야기하려고 어떤 사항을 꺼내드는 것은 고대인들에게는 관습적이기 때문이다; 또한 이야기를 한 후에 그것들이 의미함에 따라 그것들에 이름을 주었다. 고대인들과 더불은 신들(gods)과 반신반인(半神半人, demigods)은 이런 차원에서 있어 왔다, 하여 자기들의 역사적 형체에서 자기들의 주제들을 표현하기 위하여 그것에 걸맞는 인물들을 고안해 내었다. 옛 현인(sage)들은 고대 교회로부터 이런 관습을 가져왔는데, 이것이 아시아권의 세계에 널리 퍼졌다; 그 이유가 고대 교회의 사람들은 표현들과 의미들을 수단으로 신성시되는 것들을 표명하였다. 고대 교회는 홍수 이전에 있었던 태고인들의 입으로부터 이를 받았다; 그리고 천국으로부터도 이것들을 받았다, 그 이유가 그들은 천국과 교통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첫 번째 천국, 이는 세 천국 중 마지막 째(제일 바깥쪽)인데, 이 천국은 표현들과 의미들 안에 있다. 이는 말씀이 표현들과 의미들로 쓰여진 이유이기도 하다. 말씀이 이런 특유한 특징을 가지고 있으나 이것이 고대인들에 의해 소유되지는 않았고, 말씀의 주제 각각은 계속적인 시리즈 안에서 주님의 왕국의 영적, 천적인 사항들을 표현하고, 최고 의미에서는 주님 자신을 표현한다; 역사물 자체에서 조차 이런 특성을 유지하고 있고, 더욱이 그것들은 실재로 상응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이 상응은 주님으로부터 세 천국들을 통하여 계속적이다는 것이다.

그리고 야곱의 아들들이 들판으로부터 왔다. 이는 그들이 자기들의 광신적 신앙으로부터 상담했다를 의미하는데, 이는 “야곱의 아들들”의 의미가 그들로부터 파생된 민족이다로부터, 그들 사이에 교회의 표현이 설립되어졌다로부터; 그리고 “들판”의 의미가 광신적 신앙이다로부터 알려진다; “들판으로부터 오는” 것이 광신적 신앙으로부터 상담함이다는 것은 시리즈로부터, 즉 광신적 신앙인 들판으로부터 “왔다”고 서술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슬퍼했다, 그리고 그들은 심히 분노했다. 이는 그들은 고대인들 사이에 있었던 교회 속의 진리를 향하여 악 안에 있었음을 의미한다. 이는 “슬퍼하고 심히 분노함”의 의미가 악 안에 있음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것이 고대인들 사이에 있는 교회의 진리를 향하여서 였다고 말한 이유는 이것이 하몰의 아들 세겜을 향하여서 였고, 하몰에 의해 고대인들 사이에 있는 진리들이 의미되었기 때문인데, 이는 이미 살폈다. 그들이 악 안에 있었다는 것은 이어지는 사항들로부터 분명한데, 즉 그들이 사기쳐서 이야기 했다는 것 (13절), 그 다음 세겜과 하몰이 그들의 요구에 동의했다는 것, 그 후에 그들이 그들을 살해했다는 것(26-29절)에서 보여진다. 고로 “슬퍼하고 심히 분노함”이 여기서 의미하는 것은 그들이 악 안에 있음이다. 그런데 이 말이 언듯 여겨지기로는 열정인 것처럼 나타난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이어지는 말이 세겜이 이스라엘에게 해서는 안되는 행위를 저질렀기 때문이라는 서술, 슬퍼함이 자기 누이 동생을 두고 있어진 것이기에 열정 같은 것으로 나타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러나 이것은 열정(zeal)이 아니다, 그 이유는 열정은 악 안에 있는 자와 더불어서는 어불성설이기 때문, 즉 선 안에 있는 자에게만 해당될 뿐이다. 그 이유가 열정은 그것 내부에 선을 지니기 때문이다.
그들의 후손과 더불어 존재했던 광신적 신앙이 그것 내부에 선을 가졌던 것은 진실이다, 그 이유가 그 신앙의 각각 그리고 모든 것은 주님의 왕국의 천적 영적인 것을 표현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광신적 신앙에 있는 이들만에 초점을 맞춘다면, 그것 내부에 선이 없었다, 그 이유는 그것의 외적인 것은 내적인 것 없이 있었기 때문인데, 앞에서 언급했었다. 지금의 경우와 같이 이 민족의 광신적 신앙은 이렇게 그들 사이에서 널리 유행하였다: 즉, 그들은 모세와 예언자들을 인정한다, 고로 말씀을 인정한다, 또한 말씀자체가 거룩하다는 것도 인정한다, 그러나 그들에 초점을 맞추면, 말씀은 거룩하지 않다, 그 이유가 말씀 안에 있는 모든 것에서 그들은 자신을 중요시하기 때문이다, 고로 말씀을 세상적으로, 아니 지상적으로 만든다, 그 이유가 말씀 안의 천국적 요소를 그들은 전혀 알지 못하고, 관심도 없기 때문이다. 이런 상태에 있는 이들은 자기의 광신적 신앙 안에 있을 때, 선 안에 있을 수가 없다, 그러나 악 안에 있다, 그 이유가 천국적인 어떤 것도 흐르지 않기 때문, 그들은 자신 안에서 천국적인 것을 소멸해버린다.
더욱이 고대 교회에 알려진 법에 의거 있었던 것은 처녀를 강탈한 자는 혼인지참금을 주고 그녀를 그의 아내로 데려가야 한다는 것인데, 모세의 법에 이렇게 서술되고 있다:
만일 남자가 약혼되지 않은 처녀를 설득하고, 그녀와 누웠다면, 그는 자기 아내이도록 하는 혼인지 참금을 그녀에게 수여할 것이다. 만일 그녀의 아버지가 그녀를 그에게 주기를 정녕 거절한다면, 그는 은을 지불하는데, 처녀의 혼인지참금 만큼이다 (출. 22:15, 16).
다른 모세의 책에서:
만일 남자가 처녀인 소녀를 발견했는데, 그가 약혼해오고 있지도 않았는데, 그녀를 붙잡고, 그녀와 누웠는데, 그들이 (그를) 붙잡았다면, 그녀와 누운 남자는 소녀의 아버지에게 은 오십 조각을 줄 것이다, 그리고 그녀는 그의 아내일 것이다, 그 이유는 그가 그녀를 강탈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그녀를 자기의 모든 날 동안 그녀를 멀리 (방치)해서도 안된다 (신. 22:28, 29).
위 법과 같은 법이 고대인들에게 알려져 있다는 것은 세겜이 소녀의 아버지와 형제들에게 말한 말로부터 분명해진다: 즉, “그리고 세겜은 그녀의 아버지에게 그리고 그녀의 형제들에게 말했다, 나로 당신들의 눈에서 은혜를 발견하게 하라, 그리고 당신들이 무엇을 말하든 나는 줄 것이다. 나에게 혼인지참금과 예물이 몇 곱절이더라도 나는 너희가 말한대로 주리라. 그리고 나에게 이 처녀를 여인으로 주라” (11, 12절). 그래서 세겜이 이 법을 충족하기를 바랬을 때, 그리고 디나의 형제들이 그에게 동의를 하되 그들이 내건 조건은 모든 남성이 할례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즉 그렇지만 우리가 당신에게 동의할 수 있는 조건은 당신들이 우리 같이 당신을 위해 모든 남자가 할례를 받는 것이오. 우리는 당신에게 우리의 딸을 줄 것이고, 당신들의 딸을 우리에게 데려올 것이오. 그리고 우리는 당신과 함께 살 것이고 우리는 한 백성이 될 것이오 (15, 16절). 그러나 디나의 형제들은 이 법으로부터 (선으로부터) 행동하지 않았다, 오히려 법에 반대되는 악으로부터 행동했다.
실로 자기들의 법에 따라 행동한 셈이었다: 즉 그들은 다른 민족들과 결혼해서는 안된다는 자기들의 법에 따른 셈이다. 모세의 법에 이렇게 서술되어 있다: “너희는 네 아들을 위하여 그들의 딸들을 데려오지 말라, 그리고 그들의 딸들은 그들의 신들을 따라 우상숭배의 죄를 범한다, 그리고 네 아들들로 그들의 신들을 따라 우상숭배의 죄를 범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출. 34:16); 그리고 다시: “너는 (타) 민족들과 친척 관계를 체결하지 말라, 네 딸을 너희는 그의 아들에게 주지 말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딸을 네 아들에게 데려오지 말 것이다, 그 이유는 그가 네 아들이 나를 따름으로부터 돌아서게 하여 다른 신들을 섬기게 할 것이기 때문이다” (신. 7:3, 4). 그러나 이 법은 우상숭배하는 민족들에 초점을 맞추어 주어진 법인데, 그들과 결혼함에 의해 이스라엘의 아들들이 진실로 표현적 예배로부터 우상숭배하는 예배로 전락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였다; 그 이유가 그들이 우상숭배자가 되었을 경우, 그들은 주님의 왕국 속의 영적, 천적인 사항들을 더 이상 표현할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 반대인 지옥적인 것을 표현하고, 그러면 그들은 예배하기 위해 지옥으로부터 어떤 악마를 불러일으킬 것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런 것들에 그들은 신성한 표현물들을 적용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이 그(녀)들의 신들을 따라 우상숭배하는 죄를 범하지 않도록”라고 말해져 있는 것이다. 이 법이 주어진 이유에는 또 다른 이유도 있다; 즉 “민족들”은 악들과 거짓들이 의미되는 바, 이것과 이스라엘의 아들들에 의해 표현되는 선들과 진리들이 섞이지 말아야 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악마적이고 지옥적인 것들이 천국적이고 영적인 것들과 혼합되는 일은 없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자기들의 예배를 받아들이고, 할례받고 여호와를 인정하는 이들에게 마저 상호 결혼함이 금지된 것은 결코 아니었다. 이들을 그들은 “자기들과 더불어 우거하는 체류자”라고 불렀는데, 모세의 책에서 이렇게 말해진다:
만일 체류자가 너희 사이에서 체류하겠다면, 그리고 여호와께 대한 유월절을 기꺼이 준수한다면, 그의 모든 남성들로 할례받게 할 것이다, 그때 그를 가까이 오게 하고 그것을 지키게 하라, 그리고 그는 토지의 주민으로 있을 것이다; 거기에는 주민을 위하여와 너희 사이에 체류하는 체류자를 위하여도 하나의 법이 있을 것이다 (출. 12:48, 49).
그리고 다시:
체류자가 너희와 더불어 체류할 때, 그는 여호와께 유월절을 지킬 것이다; 유월절의 규례에 따라, 그리고 거기로부터의 규정들에 따라, 그는 행할 것이다; 하나의 규례가 너를 위하여, 체류자를 위하여와 본토박이를 위하여 있을 것이다 (민. 9:14).
이들이 “그들 한가운데에 체류하는 체류자” 또는 “그들과 더불어 체류하는 체류자”라고 불리운 이유는 “체류하는”것이 가르침을 받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체류자”는 규례와 교리적인 것들로 가르침을 받게 자신을 허용한 이들이 의미된다. 같은 책에서:
만일 체류자가 여호와께 쉼의 냄새를 위하여 불로 살라바치는 제물을 만드는 너희와 체류하겠다면, 너희가 행하듯 그도 행할 것이다: 회합에 관련하여 너희를 위하여와 체류하는 체류자를 위하여 하나의 규례가 있고, 너희 대대손손을 위하여 영원의 규례이다; 너희가 여호와 앞에서 있듯. 그들도 그렇게 있을 것이다; 하나의 법과 하나의 공평함이 너를 위하여와 너희와 더불어 체류하는 체류자를 위하여 있을 것이다 (민. 15. 14-16).
이 규례가 야곱과 그의 아들들 뿐만 아니라 세겜과 하몰에게도 알려져 있었다는 것은 그들의 말들로부터 분명해진다; 그 이유가 이스라엘 민족과 유태 민족에게 주어졌었던 규례, 공정, 법들이 새로운 것이 아니었기 때문, 즉 이런 법은 고대 교회 안에 이미 존재해왔고, 에벨로부터 이고, 히브리라고 이름 불러진 두 번째 고대 교회에 이미 존재했기 때문인데 이는 앞에서 상술했었다. 결과적으로 이 법이 알려져 있다는 것은 이 말로부터 분명하다: 즉 “야곱의 아들들이 하몰과 세겜에게 말했다, 우리는 표피를 가진 남자에게 우리의 누이를 주겠다는 말을 할 수가 없소, 그 이유는 이것이 우리에게 치욕적이기 때문이오; 그럼에도
우리가 당신에게 동의할 수 있는 조건은 만일 우리가 행하듯, 당신의 모든 남성이 할례를 받는 것이오, (그러면) 우리는 우리의 딸들을 당신들에게 줄 것이고, 그리고 당신들의 딸들을 우리에게로 데려오기도 할 것이오, 그리고 우리는 당신들과 더불어 거주하고, 하나의 백성을 위하여 있을 것이오“ (14-16절); 그리고 똑같은 말이 세겜과 하몰로부터도 있다, 하여 자신들 뿐만 아니라 도성의 모든 남성이 할례 받아지게 하였다 (18-24절).
그러므로 세겜이 법에서 이야기하는 체류자가 된 것이 분명하다, 고로 야곱의 딸을 여인으로 데려올 수 있었다; 따라서 그들을 살해하는 것은 사악한 행위였다, 하여 임종을 앞둔 야곱이 이를 증언하였다 (창. 49:5-7). 유다 뿐만아니라 모세, 또한 유태 나라와 이스라엘 나라의 왕들, 또한 많은 백성에 이르기까지 여러 나라들로부터 아내를 데려왔다는 것은 말씀의 역사물로부터 확인된다; 이런 아내들이 그들의 규례들, 공정함들, 법들을 받아들였고, 체류자로서 인정되었다는 것은 의심할 바 없는 사실이다.

그 이유는 그가 야곱의 딸과 누웠는 바, 하지 말았어야 하는 어리석은 짓을 이스라엘에게 했기 때문이다. 이는 이 결합은 그들이 가졌던 진리에 반대되기 때문에 그들의 눈에서 불법적이었다를 의미한다. 이는 “야곱의 딸과 눕는 어리석은 짓을 범함”의 의미가 불법적인 결합이다로부터 분명해진다. 여기서 (야곱이라 말해지지 않고) “이스라엘에게”라고 말해지고 있는 이유는 “이스라엘”에 의해 교회의 내적인 것이 의미되기 때문이다. 그 다음 “야곱의 딸”이라고 말해지는데, 그 이유는 “야곱”에 의해서는 교회의 외적인 것이 의미되기 때문이다. 이 결합이 (할례를 받음으로 해서) 합법적이 된다 하더라도, 이 결합은 야곱의 아들들의 눈에서는 불법으로밖에 나타나지 않고 있는 것은 이미 말해진 사항들로부터 알는지 모르고 방금 앞에서도 보여주었다.

8-12절. 그리고 하몰은 그들에게 이야기했다, 말하기를, 나의 아들 세겜, 그의 혼이 당신의 딸을 열망한다. 청컨대 그녀를 여인으로 그에게 주라. 9 그리고 우리들과 친척 관계를 맺자. 너희의 딸을 우리에게 주고, 그리고 우리의 딸을 너희에게 데려가라. 10 그리고 너희는 우리와 함께 거주하라, 그리고 이 토지가 너희 앞에 있을 것이고, 너희는 거주하며, 여기저기에서 매매를 펼쳐가서 너희의 소유를 얻으라. 11 그리고 세겜은 그녀의 아버지에게 그리고 그녀의 형제들에게 말했다, 나로 당신들의 눈에서 은혜를 발견하게 하라, 그리고 당신들이 무엇을 말하든 나는 줄 것이다. 12 나에게 혼인지참금과 예물을 몇곱절로 요구해도 나는 너희가 말한대로 주리라. 그리고 나에게 이 처녀를 여인으로 주라.

그리고 하몰이 그들에게 이야기했다, 말하기를. 이는 고대인들 사이에 있는 교회의 선을 의미한다. 이는 “하몰”의 표현함이 고대인들로부터 인 것이다로부터, 즉 고대인들 사이에 있었던 교회의 선이다. 그 이유가 교회의 선이 아버지이고 이로부터 파생된 진리(“세겜”)가 아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말씀에서 “아버지”에 의해 선이; “아들”에 의해 진리가 의미된다. 여기서 “고대인들 사이에 있는 교회의 선”이라 말하고, “고대 교회의 선”이라고는 말하지 않은 이유는, 전자는 홍수 이전 태고 교회로부터 파생된 교회를, 후자는 홍수 이후 존재한 교회를 뜻하는 이유 때문이다. 이 두 교회에 관한 것은 앞의 페이지들에서 다루어왔다; 거기서 보여준 바, 홍수 이전이었던 태고 교회는 천적 (수준) 이었고, 홍수 이후인 고대 교회는 영적 (수준) 이었다. 이 둘 사이의 차이점은 여러 번 취급한 바 있다.
천적 수준이었던 태고 교회로부터의 아껴두신 것이 가나안의 토지에 존재했었는데, 특히 히위족과 헷족이라 부른 이들 사이에서 잔존했다. 이 아껴두신 것이 가나안의 지역 외의 다른 곳에는 잔존하지 않은 이유는 “사람.” 또는 “아담”이라 부른 태고 교회가 가나안의 토지 안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러므로 “에덴의 동산”이 이 토지 안에 있었고, 이 동산을 수단으로 이 교회인의 총명과 지혜가 의미되고, 그리고 동산 안의 나무들을 수단으로 그들의 지각이 의미되었다. 그리고 총명과 지혜가 이 “동산” 또는 낙원에 의해 의미되었기 때문에, 교회 자체도 그것에 의해 뜻해졌다; 그리하여 천국 자체도; 천국 자체를 뜻했기 때문에, 최고 의미에서는 주님이셨다; 그리고 그러므로 이 의미에서 “가나안의 토지” 자체는 주님을, 관계적 의미에서는 천국과 교회를, 그리고 개인적 의미에서는 교인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단어, “토지(land)”, 또는 “땅(earth)”이 말씀에서 이 단어만 사용될 경우, 위와 마찬가지 의미를 가진다; “새 하늘(천국)과 새 땅”은 교회의 내적 외적 측면에서 있는 새 교회이다. 태고 교회가 가나안의 토지 안에 있었다; 그리고 이런 결과로 거기 있는 장소들은 표현성을 갖게 되었다, 이런 이유로 아브람으로 하여금 그쪽으로 가도록 명령되었다, 그리고 토지가 그의 후손들, 야곱의 아들들에게 주어져서 장소들의 표현성에 일치하여 말씀이 쓰여지도록 유지되어졌다.
위의 모든 사항들은 “고대인들 사이에 있는 교회”, 즉 태고 교회로부터의 아껴두신 것이 뜻해지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이 아껴두신 것이 히위족과 헷족 사이에서 존재했기에, 아브라함, 이삭, 그리고 야곱, 그리고 이들 모두의 본처들은 히위족의 토지에서 그들과 더불어 매장지를 획득한 것이다 (창. 23:1-20; 49:29-32; 50:13); 그리고 요셉 역시 히위족과 더불어 매장되었다 (여. 24:32). 세겜의 아버지 하몰이 태고 교회의 아껴두신 것들을 표현했다, 그러므로 하몰에 의해 고대인들 사이에 있는 교회의 선이 의미되었다, 결과적으로 신성한 지주(stock)로부터 있는 내면의 진리의 근원이 의미되었다.

나의 아들 세겜. 이는 그 선으로부터 파생된 진리를 의미한다. 이는 세겜의 표현함이 내면의 진리이다로부터 알려진다, 고로 거기로부터 파생된 진리, 즉 “하몰”인 선으로부터의 진리이다; 그 이유가 교회의 모든 진리는 그것의 선으로부터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외 다른 근원으로부터 이 진리는 세상 밖으로 출시되지 않는다. 여기서 세겜에 의해 표현된 이 진리가 내면의 진리라고 불리우는데, 이는 본질적 측면에서는 선행의 선밖에 더 아니다. 그 이유가 천적 수준인 태고 교회는 주님을 사랑함 안에 있었기 때문, 그리고 그로부터 모든 진리를 지각함 안에 있었다; 그 이유가 이 교회인들은 거의 천사들과 같았고, 천사들과 교통했고, 이로부터 자기들의 지각이 왔기 때문, 그러므로 그들은 신앙 속의 어떤 진리를 두고 추론하지 않고, 단지 “그렇다”라는 말만 했다; 그 이유가 그들은 이 진리를 천국으로부터 지각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신앙에 관한 것은 언급조차 하지 않았고, 그 대신 선행에 관해서만 말했다, 이런 이유로 여기서 내면의 진리가 선행의 선을 뜻한다고 말한 것이다.
그러나 영적 수준에 속하는 고대 교회의 경우는 주님을 사랑함에 있던 태고 교회와는 달리 이웃을 향한 선행 안에 있었다; 이들은 신앙의 진리를 통하여가 아니면 선행을 달성할 수 없었는데, 그 이유는 태고인들 같이 지각을 가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신앙의 진리가 그러한지를 알기 위하여 탐구하기를 시작했다.

그의 혼이 당신의 딸을 열망하고 있다, 청컨대 그녀를 그에게 여인으로 주시오. 이는 바깥쪽 형체에서는 고대 교회 같이 나타나는 이 새로운 교회와 결합하기를 바램을 의미한다. 이는 “혼이 갈망함”의 의미가 바램이다로부터; 여기서 “딸”로 칭해지는 디나의 표현함이 진리에 애착함이다로부터; 고로 교회이다, 그 이유가 교회는 진리에 애착함으로부터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기서는 “새로운 교회”가 뜻해진다; 그리고 “여인으로 그녀를 줌”의 의미가 결합이다로부터 알려진다.
야곱의 후손들 사이에 설립되는 새로운 교회가 고대 교회 같이 바깥쪽 형체에서 나타났다에 주목해보면 알게 되는 것은,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족과 유태 민족에게 명령된 규례나 재판, 법 등등이 고대 교회에 존재했던 규례나 재판, 법과도 비교해도 새삼 새로운 것은 아니었는데, 특히 약혼이나 결혼, 종, 먹어도 되고 먹지 않아야 하는 동물이라든가, 깨끗하게 함, 축제들, 성막들, 계속 타는 불, 이외 많은 것들에서 전혀 이상한 것이 없었다는 말이다; 게다가 제단들, 태워바침, 제물, 헌주, 등등에 관해서도, 과거 에벨로부터 있었던 두 번째 고대 교회로부터 받아진 것들이었다. 이런 사항들이 모세로부터 명령되기 전 이미 알려져 있었다는 것은 말씀의 역사물에 있는 제단들, 불로 태워바침, 제물들로부터도 분명해진다.
이 중 한 예가 발람에 관련된 역사물인데, 그는 일곱 제단들을 쌓고, 그리고 거세된 어린 숫소와 숫양의 제물을 제단 위에 정렬해놓았다는 기록이다 (민. 23:1, 2, 14, 15, 29). 또는 많은 구절들에서 나라들에 있는 제단들이 파괴되었다는 기록 같은 것에서도; 또한 엘리야가 살해한 바알 예언자들의 제단들이다 든가, 이들이 제물을 바친 것 등등에서 확인된다. 이런 모두로부터 분명해지는 것은, 야곱의 민족에게 명령된 제물들은 새로운 것이 아니다는 것, 그들의 규례, 법, 등등 역시 그렇다는 것이다. 단지 이런 사항들이 민족들 사이에서 우상숭배적이 되어버린 것인데, 특히 그들이 어떤 모독된 하느님을 예배하는 방식을 통하여, 고로 신성한 것들을 표현한 것들이 지옥적인 것들을 표현하게 바뀜으로 우상숭배적이 된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에는 새로운 어떤 것이 추가된 것이 없어 고대 교회의 표현 예배가 회복됨으로 다시 그때의 것이 불러와지도록 된 것이다. (고대 교회에서의 예배는 신성한 사항들을 표현한 식의 예배, 그래서 이 책에서는 표현 교회라는 용어를 만들어 사용하고, 모세를 통해 주어지는 것들에 의한 야곱의 후손들(유태 나라와 이스라엘 나라)에 의한 교회는 교회의 표현물이라 이 책에서 불리우기도 하므로 혼동하지 않기를 바란다 역자주.) 이상으로부터 분명한 바, 이 새로운 교회, 즉 야곱의 후손들 사이에 조직된 교회는 바깥쪽 형체에서는 고대 교회 같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와 인척 관계를 나누자, 너희의 딸을 우리에게 주라, 그리고 우리의 딸을 너희가 데리고 가라. 이는 선들과 진리들의 합일(union)을 의미한다. 이는 “인척 관계를 나눔”의 의미가 합일이다로부터; 그리고 “딸들”의 의미가 애착들, 고로 선들이다로부터. 합일이 진리들과 더불어 있다는 것은 “우리에게 주고, 너희에게 데려가는” 것에 의미되어 있다; 그 이유가 “세겜”에 의해, 그리고 “야곱의 아들들”에 의해 진리들이 의미되는 것은 이미 살폈다. 그러므로 분명해지는 바, 이 말들이 선들과 진리들의 합일이 의미된다는 것이다, 즉 이 새로운 교회는 이 합일을 수단으로 고대 교회 같이 외적 형체에서 뿐만 아니라 내적 형체에서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너희는 우리와 함께 거주하리라. 이는 생활을 의미한다. 이는 “거주함”이 사는 것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고로 “우리와 함께 거주하는” 것은 함께 사는 것, 그리고 하나의 교회를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토지가 너희 앞에 있을 것이다, 너희는 거주하라. 이는 하나인 교회를 의미한다. 이는 토지의 의미가 교회이다로부터; 그리고 “우리와 함께 거주함”의 의미가 함께 사는 것이다로부터; 고로 교회는 하나일 것이다.

그리고 여기저기에서 매매를 통하여 펼쳐라, 그리고 거기서 네 사업을 얻으라. 이는 서로 동의한 일반적인 것으로부터 오는 교리적인 주장들을 의미한다. 이는 “매매(trading)”의 의미가 누군가가 자기를 위해 지식들을 획득하는 것, 또한 그것들을 교통하는 것이다로부터, 그러므로 “토지 여기저기에서 매매를 펼치는” 것은 하몰의 아들 세겜과 그의 도성에 의해 의미되는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들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표시한다; 그리고 “그 안에서 소유를 얻는 것”은 하나를 만드는 것, 고로 함께 동의하는 것; 그 이유는 한 토지에서 함께 사는 이들은 하나를 만들고 동의하고 있기 때문이다. “매매하는”것이 지식들을 획득하는 것, 또한 그것들을 교통하는 것을 의미하는 이유는 천국에서 말씀은 그것의 내적 의미에 따라서만 지각되기 때문, 다시 말해 그곳에는 지상에서 같은 금, 은 등등의 매매물이 없기 때문에 자연물의 매매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 그러므로 우리가 말씀에서 “매매함”을 읽을 때, 이것은 영적 의미에서 매매인 것, 즉 매매에 상응하는 것, 일반적으로 말하면, 지식들을 획득하고 교통하는 것, 특별하게 말하면, 이름되는 목적물에 의해 가리켜지는 지식들이다. 고로 만일 “금”이 명명된다면, 사랑의 선과 지혜로 이해되고; 만일 “은”이 명명되면, 총명과 신앙으로부터 있는 진리로 이해한다; 만일 “양”, “숫양”, “염소 새끼”, “어린 양”이 말해지면, 이것이 고대 시대 때에 거래되었는데, 이런 것들은 이 동물들이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등등이다.
이에 관련해 대표적인 구절로 에스겔서를 읽어보자:
두로에게 말하라, 오 너희는 바다의 입구에 거주하면서, 많은 섬들에게 백성들의 무역상이었다, 다르싯은 온갖 종류의 재물의 풍부함 때문에 네 상인이었다; (즉) 그들은 은, 철, 주석, 납 같은 (물품)을 그들의 장터에 공급했다. 야완과 두발과 메섹은 사람의 혼과 놋그릇을 가지고 네 무역상이 되어 네게 상품을 조달했다. 드단의 아들들은 네 무역상이 되어, 많은 섬들이 그들의 손의 상품이었 다. 시리아는 네 많은 제조품으로 너의 상인이었다. 유다와 이스라엘은 밀, 민닛과 과자, 그리고 꿀, 기름과 유향을 가지고 네 무역상이 되어 네게 상품을 조달했다. 다메섹은 너의 많은 제조품을 가지고 너의 상인이었는데, 그 이유는 헬본 포도주와 쟈갈(Zachar)의 양털을 가짐에서, 풍부한 재물 때문이다. 단과 야완은 네 장터에 실을 공급하였다. 드단은 병거를 탈 때 사용하는 의복을 가지고 네 무역상이었다. 아라비아 사람과 게달의 모든 제 일인 자들은 어린 양, 숫양, 염소 새끼를 가지고 네 손의 상인이었다, 이것들로 그들은 네 상인들이었다. 스바와 라아마의 무역상들은 각종 우수한 향품을 가지고 네 무역상이었다; 그리고 모든 귀중한 돌과 금을 수단으로 그들은 너와 매매했다. 하란과 간네와 에덴과 앗수르와 길맛은 너의 무역상이었다. 이들은 아주 아름다움을 가지고, 즉 푸른 공(ball)들과 자수품을 가지고서 였다; 그리고 끈으로 묶은 귀중한 의복의 보물과 삼나무로 그것들은 네 상품 안에 있었다; 그러므로 너는 바다의 심장에서 빼어나게 명성이 자자했다
(겔. 27장).
이로부터와 다른 많은 구절로부터 나타나는 것은, “매매”, “상업”, “상품”, 그리고 “세공품(ware)”이 선과 진리에 관련되는 것들밖에 더 아니다는 것이다. 두로의 장사한 내역을 열거한 이 예언적 말씀이 그것들에 의해 영적이고 천적인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면 무엇 때문에 지리멸렬할 듯한 느낌마저 들게 하고, 우리와 전혀 관계가 없는 구절들 같이 여기게 하는 이 구절이 왜 귀중한 말씀의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을까? 그러므로 우리는 이런 물품들에는 다른 것들이 의미됨을 눈치채야 할 뿐만 아니라, 열거되는 민족들에 의해서도 다른 사항들이 의미됨을 감지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내적 의미를 알지 않으면 이런 사항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알 도리가 없다; 예를 들면, “다르싯,” “야완,” “두발,” “메섹,” “드단의 아들들,” “아라비아 사람,” “스바,” “라아마,” “하란,” “간네,” “에덴,” “아시라아,” “길맛,” 그리고 또한 그들의 상품들, 즉 “은,” “철,” “주석,” “납,” “놋그릇,” “밀,” “민닛,” “과자,” “꿀,” “기름,” “유향,” “헬본의 포도주,” “쟈갈의 양털,” “실,” “병거용 깔 옷,” “어린 양,” “숫양,” “숫염소,” “향료,” “귀중한 돌,” “금,” “푸른 볼,” “자수품,” “묶는 끈,” “삼나무”에 의해 의미되는 것을 알 수가 없다는 말이다. 이것들과 비슷한 것들이 교회의 선들과 진리들과 주님의 왕국, 또한 이런 선들과 진리들에 관한 지식들을 의미한다. 이런 이유로 두로가 여기서 다루어진 것이고, 두로에 의해 지식들이 의미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세공품들, 즉 선들과 진리들이 주님의 교회와 왕국 안에 있기 때문에, (주님의 교회와 왕국을 의미하는) 가나안의 토지는 태고 때로부터 “세공품”, “상품”으로부터 파생되는 이름을 갖고 있다. 그 이유가 이름 가나안의 의미도 원어에서는 이와 같기 때문이다. 이런 모두로부터, “토지 여기저기에서 매매를 펼치는” 것에 의미하는 바를 알았을 것이다.

그리고 세겜은 그녀의 아버지와 그녀의 형제들에게 말했다. 이는 고대의 신성한 지주(stock)로부터 있는 진리가 광신적인 신앙 속의 선과 진리와 상담함을 의미한다. 이는 “말하다”의 의미가 여기에서는 상담하다 이다로부터; 세겜의 표현함이 고대의 신성한 지주로부터 있는 진리이다로부터; 여기서 야곱에 해당되는 “아버지”의 의미가 진리의 선이다로부터; 그리고 야곱의 아들들인 “그녀의 형제들”의 의미가 진리들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세겜”이 고대의 신성한 지주로부터 있는 진리이다는 것은 앞에 추가로 설명된 사항으로부터 분명해진다; 그 이유가 히위족 하몰은 그의 민족과 가문을 망나하여 모두가 천적 수준이었던 태고 교회가 가나안 토지에 남도록 아껴진 것이기 때문이다. 온 세상 모든 교회들을 통털어도 이 교회만큼 신성으로부터 있었던 교회는 없었다; 그 이유가 이 교회는 주님을 사랑함으로부터의 선 안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의 자발적 측면과 지성 측면은 하나를 만들었다, 고로 하나의 마음이었다, 이런 이유로 그들은 선으로부터 진리를 지각하였다; 그 이유는 주님께서 그들의 의지의 선 안으로 내적 경로를 수단으로 흘러드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를 통하여 그들의 이해력의 선, 또는 그들의 진리 안으로 흘러드셨다; 그래서 이 교회는 특출하게 “사람(Man)”이라 불리웠다, 그리고 또한 “하느님의 모습(likeness)”이라고도 불리웠다. 그러므로 왜 하몰과 세겜이 고대의 신성한 지주로부터 이다고 말해지는 지가 분명해졌을 것이다. “사람”, 또는 히브리어로 “아담”이라 불리웠던 태고 교회가 가나안의 토지에 있었다는 것은 “느빌림”이라 불리운 그들의 후손으로부터 분명해진다; 이들이 가나안의 토지에 있어 왔다고 민. 13:33에서도 말해진다. 그러나 그때 당시 가나안의 토지로 불리운 것은 이집트의 강으로부터 유브라데강에 거쳐 있는 지역을 아우르고 있다 (창. 15:18).

나로 너희의 눈에서 은혜를 발견하게 하라, 그리고 너희가 나에게 말하는 것을 나는 너희에게 주리라. 이는 자기가 가진 마음과 같은 마음을 저쪽도 가지고 있다면을 의미한다. 이는 “누군가의 눈에서 은총을 발견하는”것의 의미가 기울음을 함축하는 말투임으로부터, 여기서는 이쪽으로 기우는 것, 즉 그들이 자기에게 무엇을 말하든 줄 것이다는 것이다. 이 말에 의해 만일 그들의 쪽에 같은 마음을 지닌다면 그의 쪽에서 그것에 마음을 두고 있다는 것이 의미되는데, 이는 내적 의미의 시리즈에서 분명해진다. 그 이유가 내적 의미에서 “그들이 말하는 것을 주는”것은 진리와 선 측면에서 그들과 하나를 만드는 것을 표시하기 때문이다.

나에게 혼인지참금과 예물을 몇 곱절로 요구해도 나는 너희가 말한대로 주리라. 이는 그는 그들과 함께 있는 것들을 수락할 것이고, 그것들을 그의 자신으로 만들 것임을 의미한다. 즉 그는 그들에게 속해 있는 교회의 외적인 것들을 받아들일 것, 그리고 외적인 것들을 자기에게 속해 있는 내적인 것들과 함께 해서 그의 자신으로 만든다는 것, 고로 그들은 함께 하나의 교회를 구성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너희가 말하는 것을 준다”의 의미가 진리와 선 측면에 관하여서 그들과 하나를 만드는 것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들에게 몇 곱절로 말하라고 그가 말한 혼인 지참금과 선물 자체는 하나 안으로 일치함을 의미한다; 그 이유가 약혼되어지는 처녀에게 주어지는 혼인지참금은 상호 동의 함의 표시였기 때문이다. 그가 그들에게 자기에게 혼인 지참금과 선물을 몇 곱절로 하라고 말한 (이때 당시 은 오십 조각이었는데 이를 훨씬 넘게 요구하라고 한 것) 이유는 그가 광신적 신앙을 받아들이기 이전, 그녀와 누웠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를 야곱이 동의할지 또는 거절할지는 고대인들에게 알려진 법에 따라서이고, 이것이 출. 22장 16절에 서술되어 있다; 특별한 것은, “세겜”인 내면의 진리가 “디나”인 외면의 진리에 애착함과 결합하기를 바램이 있었기 때문이다. 혼인 지참금이 동의함의 표시, 고로 시작함을 확인함이었기 때문에 은을 지불하는 것, 또는 은을 주는 것은 어떤 것이 자신의 것이다에 대한 표시였다; 고로 처녀가 그의 것이다를 표시한다; 그리고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은 상호적인 것이다. 고로 신랑은 신부의 것이 되고, 신부는 신랑의 것이 된다는 말이다.

그리고 나에게 이 처녀를 여인으로 주라. 이는 결합이 조건임을 의미한다. 이는 “여인으로 주다”의 의미가 결합이다로부터, 여기서는 조건이 되어 있는데, 그 이유는 서로의 흥정이 성사된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13-17절. 그리고 야곱의 아들들은 세겜과 그의 아버지 하몰에게 속여 답하였다, 그리고 말했다, 그 이유는 그가 그의 누이 디나를 더럽혔기 때문이다. 14 그리고 그들은 그들에게 말했다, 우리가 포피를 가진 남자에게 우리의 누이를 준다는 말은 할 수가 없다, 그 이유는 그것은 우리에게 치욕이기 때문이다. 15 그렇지만 우리가 당신에게 동의할 수 있는 조건은 당신들이 우리 같이 당신을 위해 모든 남자가 할례를 받는 것이오. 16 우리는 당신에게 우리의 딸을 줄 것이고, 당신들의 딸을 우리에게 데려올 것이오. 그리고 우리는 당신과 함께 살 것이고 우리는 한 백성이 될 것이오. 17 그리고 만일 당신이 할례받으라는 우리의 말에 귀기울이지 않는다면, 우리는 우리의 딸을 데리고 갈 것이오.

그리고 야곱의 아들들이 세겜과 그의 아버지 하몰에게 속여 답했다. 이는 고대인들 사이에 있는 교회의 진리와 선들에 관한 악한 의견과 의도를 의미한다. 이는 세겜의 표현함이 고대인들 사이에 있는 진리들, 또는 고대의 신성한 지주로부터 있는 진리이다로부터; 하몰의 표현함이 이 진리가 와진 선이다로부터; 그리고 “속이다”의 의미가 악한 의견과 의도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 이유가 “사기침, 속임”의 의미가 일반적 의미에서일 경우, 또 다른 자를 향한 악을 함축하는 것, 그리고 자기가 말하고 행동하는 것을 향하여 악을 함축하기 때문, 그 이유는 사기치는 자는 타인을 향해 반대되는 것을 생각하고 의도하기 때문이다. 그 한 예가 이 장에 기술되어 있다. 그러므로 “야곱의 아들들이 세겜과 그의 아버지 하몰에게 속여서 대답했다”에 의해 고대인들 사이에 있는 교회의 선과 진리에 관한 악한 의견과 의도가 의미됨이 분명해진다.
야곱의 아들들, 또는 후손들은 내적 인간의 진리와 선에 관하여 악한 의견과 의도밖에 없었는데, 그 이유는 그들이 내적인 것 없이 외적인 것들 안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한 그들은 내적인 것들을 쓸모 없게도 만들었다, 고로 내적인 것들을 지독하게 경멸했다. 이것은 오늘날의 그들의 민족들과도 여전하고, 그들은 여전히 외적인 것들 만에 있다. 외적인 것들 만에 있는 이들은 내적인 것 안에 있는 것이 무엇이 있는지 조차 모른다; 그 이유는 그들이 내적인 것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이다. 만일 누군가가 그들 앞에서 내적인 것을 언급한다면, 그들은 그렇다고 자기들의 교리로부터 긍정은 한다 (그럼에도 이 긍정함 역시 사기적으로 만들어진다), 그렇지 않을 경우, 그들은 심정과 입술 모두에서 부정해 버리는데, 그 이유는 그들은 외적 인간의 감각적인 것을 넘어서지 않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그들은 사후 어떤 삶이 있다는 것을 믿지 않는다; 또한 자기들의 육체와 더불어 일어나지 않으면 어떤 부활도 가능하지 않다고 믿는다; 그들에게는 부활에 관해 이런 의견을 갖는 것이 허용되었는데, 그 이유는 그외 다른 방도가 없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그들은 모든 생명을 육체 안에 놓아두는데, 육체의 생명은 사후 살게 되는 영의 생명으로부터 이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외적인 것들 만에 있는 이들은 다른 믿음을 가질 수 없다; 그 이유는 그들과 더불어 외적인 것들이 내적인 것들에 관한 모든 생각을 소멸하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그들에게 있는 모든 신앙을 소멸하기 때문이다.
오늘날 이런 종류의 무지함이 최고의 영향력을 떨치기에 내적인 것들과 동떨어져 외적인 것들에 있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한번 더 서술해 짚어보고 가야 할 것 같다. 양심이 결여된 모든 이들이 외적인 것들 만에 있는다; 그 이유는 내적 인간은 양심을 수단으로 자체를 명백히 하기 때문이다; 양심을 가지지 않은 이들이 선하고 참된 것을 생각하고 행할 경우, 이는 그것 자체를 위하여서가 아니라 자신의 이득과 명예가 걸려 있기 때문에서이다. 또는 법에 대한 두려움과 자기의 목숨을 위한 두려움 같은 것 때문인 바. 만일 이런 것의 제한마저 없다면, 그들은 갖가지 사악함을 위해 직진하고 만다. 다른 삶에서 이것은 육체의 삶에서 이런 특성 속에 있어 왔던 이들로부터 분명해진다, 그 이유가 거기서 내면이 열려 있기 때문인데, 하여 그들은 타인을 파괴하려 끝없이 노력하고 있어, 그들은 영적인 방식에서 묶여 있다.
우리가 더 알아야 하는 것 또 하나는, 외적인 것들 안에 있는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내적인 것들 안에 무엇이 있는지, 그리고 외적인 것들 만에 있는 이들은 내적인 것들이 무엇인지를 생각조차 품을 수 없다, 그러므로 그것에 의해 감동되는 일도 없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예를 들어 생각해보자. 천국에서 가장 작은 이가 가장 큰 자이다는 것, 겸비해 있는 것이 높임을 받는다는 것이다; 또한 가난하고 궁핍해 있는 것이 부자이고 풍부함 안에 있는 것이다. 외적인 것들 만에 있는 이들은 이런 사항들을 납득할 수 없다, 그 이유가 그들이 생각하건대, 지극히 작은 자가 큰 자가 되는 것, 겸비한 자가 높혀지는 것, 가난한 자가 부자인 것, 궁핍한 자가 풍부해지는 것을 납득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실상 천국에서는 매우 정밀하게 이 주제가 적용되지만 그들은 이를 납득하지 못한다. 그들이 납득할 수 없기에 그들은 그것들로 해서 감명받는 일도 없고, 따라서 육체적, 세상적인 것들 안에서 안주하고, 그것들로 감명되고, 그들은 내적인 것들에 반대되는 것만을 느낄 뿐이다. 그들은 위와 같은 것이 천국 안에 존재하는 것을 모른다, 그들이 외적인 것들 만에 있는 한, 그들은 그것들을 알려하지 않는다, 정녕 그들은 그것들을 알 수가 없다. 그럼에도 천국에서 알고, 인정하고, 심정으로, 애착으로부터 믿는 것은 이렇다; 즉 자기는 자신으로부터 능력을 가진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 오직 자기가 지니는 능력은 주님으로부터 이다는 것, 하여 자기는 지극히 작은 자이다고 말한다, 그럼에도 큰 자이다, 그 이유는 그가 주님으로부터 능력을 가지기 때문이다. 이 경우는 겸손 안에 있는 이들과도 똑같아서 그는 높임 안에 있다; 그 이유가 자기는 자신으로부터 능력을 가진 것이 없다는 것을, 자신으로 총명과 지혜도 없다는 것을, 자신으로부터 선과 진리가 없다는 것을 알고, 인정하고, 애착으로부터 믿는 겸손한 자는 주님에 의해 능력을, 진리의 총명을, 선의 지혜를 걸출하게 수여받고 있다.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가 부유하고 풍부함에 있는 경우도 위와 마찬가지이다; 그 이유가 자기는 자신으로부터 소유한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음을, 자신으로부터 슬기로워진 것이 없음을 심정으로부터 애착으로부터 믿는 자가 가난하고 궁핍하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천국에서 이와 같은 인간은 부자이고 풍부해 있다, 그 이유는 주님이 그에게 모든 재산을 주시기 때문, 주신 만큼에서 그는 타인들보다 더 슬기롭고 부자이다, 그리고 가장 화려한 궁전에서 거주한다, 그리고 천국의 모든 재물의 창고 안에 거주한다.
이런 예를 더 생각해보자: 즉 외적인 것들 만에 있는 자는 천국의 기쁨이 자신보다 이웃을 더 사랑함에 있다는 것, 무엇보다 주님을 더 사랑하는 것, 행복은 이 사랑의 질과 양에 따라 있는다는 것을 납득하는 것이 가능하지 않다는 것에 대하여서 이다; 그 이유가 외적인 것 만에 있는 이들은 자기 이웃보다 자신을 더 사랑하기 때문; 만일 그가 타인을 사랑한다면, 이는 그들이 자기를 좋아하기 때문에서이다, 하여 그는 자신을 위하여 그들을 사랑한다, 고로 그들 안에 있는 자신을 사랑하는 것, 그리고 자신 안에 있는 그들을 사랑하는 것이다. 이런 특성 속에 있는 자는 자신보다 타인을 더 사랑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다, 그리고 실로 그는 그것을 알려고 뜻하기나 하는지 미지수이다. 그러므로 천국이 이런 사랑 안에 존재한다고 그에게 말해질 때, 그는 그것에 혐오감을 느낀다. 그러므로 육체의 삶에서 이런 특성 속에 살아왔던 이들은 어떤 천국의 사회에도 접근할 수 없다; 그 이유는 그들의 혐오감에서 그들은 지옥으로 머리를 곤두박질하기 때문이다.
외적인 것들 안에 있는 것이 무엇인지, 내적인 것들 안에 무엇이 있는지를 아는 자가 너무나 적기에,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믿는 것은, 내적인 것들 안에 있는 자는 외적인 것들 안에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하여 거꾸로의 것을 들추어 나는 예증을 해볼 것이다. 신체의 자양분과 혼의 자양분을 들추어 보자: 단지 육체적 기쁨만에 있는 자는 자신을 중요시한다, 하여 자기 위장에 탐닉한다, 사치스럽게 사는 것을 사랑한다, 그리고 수준 높은 기쁨을 만드는 것이 먹는 것, 마시는 것에 있다. 내적인 것들 안에 있는 자 역시 이런 것들 안에서 기쁨을 발견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를 통치하는 애착은 육체의 건강에 필요한 식품으로 그의 신체에 자양분을 주는 것뿐이다, 그 목적은 건강한 신체 안에 건강한 마음을 가지도록 하는데 있다, 이것을 위해 신체가 수단으로 섬김을 할 뿐이다. 영적 인간인 자는 이 정도에서 멈추지 않는다. 그의 마음, 또는 혼의 건강은 총명과 지혜를 획득하는 수단으로 중요시한다. 즉 이런 획득함은 지상의 명성, 영예, 이익을 위한 것이 아니고 사후 삶을 위하여서 이다. 이보다 더 깊은 내면의 수준에 있는 영적인 자는 총명과 지혜를 주님의 왕국에서 쓸모 있는 멤버로서 섬김을 다할 수 있는 목적을 위해 중간의 목적으로밖에 중요시할 뿐이다; 하여 천적 수준의 인간은 주님을 섬길는지 모른다. 이런 사람에게 육체의 식품은 영적 식품을 즐기기 위한 수단이다, 그리고 영적 식품은 천적 식품을 즐기기 위한 수단이다; 그리고 그것들이 이런 방식에서 섬길 때, 이런 식품들 역시 상응하고 있다, 그러므로 모두가 식품들이라 불리운다. 그러므로 외적인 것 만에 있는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내적인 것 안에 무엇이 있는지에 대해서 분명해졌을 것이다. 유태 민족과 이스라엘 민족이 이 장에서 내적 역사적 의미에서 취급되어 있다. 그들은 유아기에 죽은 아이들을 제외하고 대부분이 위에서 가리킨 특성 속에 있다, 그 이유는 그들은 여타 다른 이들보다 탐욕 안에 있어 그들은 외적인 것 안에 있다. 금과 은 자체를 위하여서만 이익을 창출하기를 사랑하는 이들은 금과 은을 소유함 안에 자기들의 생명의 기쁨이 존재한다, 이것들은 가장 바깥, 또는 가장 낮은 쪽에 있다, 그 이유가 그들의 사랑의 대상이 단지 지상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어떤 유용함을 위해 금과 은을 사랑하는 이들은 자신을 그 선용함에 따라 지상적인 것 넘어로 들어올린다. 인간이 사랑하는 유용함 자체가 그의 생명을 결정하고, 그를 타인과 구별되게 한다; 악용함은 인간을 지옥적으로 만든다, 그리고 선용함은 그를 천국적으로 만든다. 즉 유용함 자체가 아니라 유용함을 사랑함이 그를 천국인으로 만든다. 모든 이의 생명은 그의 사랑 속에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말했다, 그 이유는 그가 그의 누이 디나를 더럽혔기 때문이다. 이는 결합의 시작은 접근을 수단으로 하지 않고서는 이와 달리 있을 수 없었음을 의미한다. 이는 “그가 그녀를 데려다가 그녀와 눕고, 그녀를 강탈했다”는 말의 설명으로부터 알는지 모른다; 이 말에 의해 이 진리가 그녀의 형제 야곱의 아들들에 의해 의미된 진리에 애착함과 결합될 수 있는 다른 방법은 이와 달리 없었다가 의미된다. 그가 그녀를 “더럽혔다”가 여기서 위에서 인용한 구절과 같은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

그리고 그들이 그들에게 말했다, 우리는 …라는 말은 할 수 없다. 이는 그들이 승인하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우리의 누이를 포피를 가진 남자에게 주는 것. 이는 그들이 교회 속의 선과 진리가 표현물에 존재하게 만들지 않으면, 이들이 의미하는 것들로부터 물러나야 할 것임을 의미한다. 이는 “포피”의 의미가 외적 표현물이다로부터, 즉 그들이 교회 속에 있다는 표시이다; 그러므로 교회 속에 있는 자와 그렇지 않은 자를 구분할 때, 할례와 포피가 늘 말해지곤 했다. 그 이유가 “할례”는 더러운 사랑, 즉 자기를 사랑함과 세상을 사랑함으로부터 후퇴함을, 그리고 주님을 사랑함과 이웃을 향한 사랑함에 접근함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본문에 의해서는 그들의 광신적 신앙에 접근함이 의미되고, 결과적으로 그들 같이 그들도 내적인 것들로부터 물러남으로 해서 교회의 선과 진리를 표현물 안에 있게 만들어야 한다는 것, 이와 달리해서는 자기들 같이 있지 못한다는 것이 의미되는데, 이 말에 따라서, 즉 “이 안에서 우리는 당신에게 동의할 것이오, 만일 당신이 우리 같이 있다면”에 따라서 이다.
할례의 특별한 의미가 무엇인지를 아는 자가 거의 없기에 이에 대하여도 조금 더 짚어두고 가야할 것 같다. 양쪽 성(sex)에 있는 생식기는 선과 진리의 결합에 속하는 것들을 의미한다; 이것들은 결합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실제로 그것들에 상응하고 있다. 인간의 기관이나 부위들 모두는 천국에 있는 영적인 것들과 상응 관계를 가진다고 각 장의 끝에서 살폈었다. 결과적으로 기관과 부위들은 세대에 할당되고 있다. 이것들은 선과 진리의 결혼에 상응한다; 그리고 이 결혼으로부터 부부의 사랑으로 내려간다. 포피가 생식기를 덮고 있기에, 태고 교회에서 이것은 선과 진리에 관하여 불명료함에 상응했으나, 고대 교회에서는 자기들의 더러움에 상응하고 있다. 그 이유가 태고 교회인과 더불어 그들은 내적 인간이었던 관계로 선과 진리가 불명료해 있을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더럽혀져 있지는 않았다; 이에 반해, 고대 교회인과 더불어, 이들은 비교적으로 외적 인간이었기에, 선과 진리가 더럽혀질 수 있었다, 그 이유는 더럽혀지는 것은 외적인 것들, 즉 외적인 사랑들이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태고 교회인들은 할례에 관해 아는 바가 없었고, 오직 고대 교회인 만이 이를 알았다
이 교회로부터 할례가 많은 민족들에게로 퍼뜨려졌다; 그리고 이것은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에게 새로운 어떤 것으로서 명령된 것이 아니었고, 단지 회복되어지기로 되어 있는 불연속적인 의식일 뿐이었다.; 그리고 이것은 그의 후손들이 교회 속에 있다는 표시가 되어진 것뿐이다. 그러나 이 민족은 이 의식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몰랐고 알려고도 하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그들의 광신적 신앙은 표현물 자체, 외적 주제들에만 존재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비록 할례가 자기와 세상 사랑으로부터 순수해짐을 표현하는 표시일지라도, 그들은 하나의 일반적 정죄함 안에 모든 비할례를 포함시켰다. 자기와 세상 사랑으로부터 순수해지는 이들이야말로 영적으로 할례받은 자이다, 이런 자를 “심정에서 할례받은” 자라고 말해진다. 모세의 책에서:
여호와 너희 하느님이 너희 심정, 그리고 네 씨의 심정을 할례받게 할 것이니, 네 모든 심정으로, 그리고 모든 네 혼으로 여호와 네 하느님을 사랑하라 (신. 30:6).
같은 책에서:
너희는 너희 심정의 포피를 할례받을 것이다, 그리고 너의 목은 더 이상 굳어져 있지 않을 것이다 (신. 10:16).
예레미야서에서:
너의 놀리는 지면을 갈아엎어라, 그리고 너의 심정의 포피를 제거하라 (예. 4:3, 4).
그러나 자기를 사랑함과 세상을 사랑함에 있는 이들은 그들이 할례받았음에도 “비할례자”라고 불리운다; 예레미야서에서:
보라 내가 이집트에, 유다에, 에돔에, 암몬의 아들들에, 모압에, 광야에 거주하는 (머리털의) 귀퉁이를 자른 모두에서 포피를 할례받은 이를 방문하는 날이 오고 있다; 그 이유가 모든 민족들이 비할례되었기 때문, 그리고 이스라엘의 모든 가문은 심정에서 비할례되었기 때문이다
(예. 9:25, 26);
이 구절은 많은 다른 민족들이 할례받아졌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 이유는 “나는 포피에서 할례된 모든 이를 방문할 것이다”라고 말해지기 때문이다. 그런고로 이미 서술했듯 할례는 새로운 의식이 아니었다는 것, 또는 타 민족과의 구별의 표시로 야곱의 후손에게만 지정한 의식은 아니었다. 불레셋인들은 할례되지 않았는 바, 그들은 “할례받지 않은 자”라고 통상적으로 말해지고 있다.

그 이유가 이것은 우리에게 치욕이기 때문이다. 이는 이것이 그들에게 반대적 일 것임을 의미한다. 이는 “치욕”의 의미가 그들의 광신적 신앙에 반대됨, 고로 그들에 반대됨이다로부터 알려진다.

그렇지만 우리가 당신에게 동의할 수 있는 것은, 만일 당신들이 우리 같이 있는다면. 이는 그들의 광신적 신앙에 접근함을 의미한다. 이는 “동의함”의 의미가 접근함이다로부터; 그리고 “그들 같이 있는다”의 의미가 그들이 외적인 것만에 있고 내적인 것 안에 있지 않는 것, 이래야 그들 같이 있기 때문이다. 이쯤에서 우리가 한 번 짚고가야 하는 대목은 왜 우리가 내적인 것들 안에 있어야 하는지에 대한 것이다. 곰곰이 되새겨 생각하는 사람이다면 알 수 있는 것은 내적인 것을 수단으로 인간은 천국과 교통하기 때문이다는 것이다, 그 이유가 천국들 전체가 내적인 것들 안에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인간이 그의 생각과 애착, 즉 그의 이해력과 의지력의 측면이 천국 안에 있지 않으면 그는 사후 천국에 갈 수 없다, 그 이유는 그는 천국과 교통함을 가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교통함은 육체적 삶 동안 그의 이해력에 속하는 진리들과 그의 의지력에 속하는 선들을 수단으로 인간에 의해 획득되어진다, 그리고 그가 이 교통함을 획득하지 않으면, 그 후에는 그는 그것을 획득할 수 없다, 그 이유는 사후 그의 마음은 그가 육체의 삶에서 열리어오지 않았으면 내면의 것들을 향하여 열리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
각 인간은 자기의 애착들의 생명에 일치하는 어떤 영적 영역(sphere)으로 에워싸여 있는 줄을 알아채지 못한다. 천사들에게 이 영역은 땅 위 가장 기분을 상큼하게 하는 느낌을 알아채는 냄새의 영역보다 더 지각할 수 있다. 만일 인간의 생명이 단지 외적인 것들에서만 지나쳐가버리고 말았다면, 즉 자기 이웃을 향한 미워함으로부터 오는 쾌락 안에서, 결과적으로 앙갚음이나 잔인함으로부터, 간음질로부터, 자아 드높임과 타인을 경멸함으로부터, 은밀한 도둑질로부터, 탐욕으로부터, 사기침으로부터, 사치행각으로부터, 이외 다른 악들로부터 이었다면, 그때 그를 에워싸고 있었던 영적 영역은 이 세상에서 시체나 분뇨, 쓰레기 등등으로부터 있는 냄새의 영역 만큼 더럽다. 이런 삶을 살았던 이들은 사후 자기와 더불어 이 더러운 영역을 운반한다, 그리고 이것에 상당하는 영역에 반드시 필요한 것은 지옥 안에서 이 특성에 걸맞는 장소이다.
그러나 내적인 것들 안에 있는 이들, 즉 자비심과 이웃을 향한 선행에서 기쁨을 느꼈던 이들, 무엇보다 주님을 사랑함에서 복됨을 느꼈던 이들은 천국 영역 자체인 깊이 감사하고 유쾌한 영역으로 에워싸여 있다, 그러므로 그들은 천국 안에 있다. 다른 삶에서 지각되는 모든 영역들은 인간이 있어 왔던 사랑들과 이에서 파생되는 애착들로부터, 결과적으로 그들의 생명으로부터 근원한다. 그 이유가 사랑과 사랑에서 파생하는 애착들이 생명 자체를 만들기 때문이다; 의문에 있는 영역들도 사랑들과 파생되는 애착들로부터 근원하기에 그것들은 인간 당사자가 뜻하고 행동하는 의도와 목적으로부터 근원한다; 그 이유가 인간은 자기가 사랑하는 것을 목적으로 가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목적들은 그의 생명을 결정하고, 생명의 품질을 구성한다; 그리고 이것은 그의 영역의 주요한 근원이다. 이 영역은 천국에서 최고로 절묘하게 지각되어진다, 그 이유는 보편적인 천국은 목적들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는 내적인 것들 안에 있는 인간의 품질이 어떤 것인지를 볼 수 있다, 또한 외적인 것들 안에 있는 것도 알 수 있다, 또한 외적인 것들 만에 있지 않고 내적인 것들 안에 있을 필요가 있는 이유도 알았을 것이다.
그러나 위의 사항들은 외적인 것들 만에 있는 이들에게는 완전한 무관심의 무제들일 뿐이다. 이는 제 아무리 시민 생활을 처리함에 뛰어나게 명석하다 해도, 아는 것이 남다르게 뛰어나 학식계에서 명성이 자자하다 해도, 당사자가 외적 것들만에 집착한다면 그는 자신이 보고 듣고 만져지지 않는 이상, 어떤 것도 믿지 않는다, 결과적으로 천국이든 지옥이든 믿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리고 만일 그에게 사후 즉시 다른 삶으로 들어간다고 말하고, 그때 당신은 보고, 듣고, 말하고, 만지는 감각을 육체를 지녔던 때보다 더 완전하게 할 수 있다고 말하면, 그는 이 말을 역설이나 공상으로 여겨 단 번에 거절할 것이다; 그리고 사후 살게 되는 혼 또는 영이 인간 자신이고, 그가 세상에서 운반한 신체가 아니다 라고 말해주어도 돌아오는 응답은 같을 것이다.
하여 뒤어지는 것은, 외적인 것들 만에 있는 이들은 내적인 것들에 관하여 말해진 것에 아무 관심도 기울이지 않는다는 것, 설사 내적인 것들이 그들이 장차 맞을 왕국에서, 그가 영원히 살게 되는 왕국에서 당신을 복되고 행복하게 만든다 라고 말해주어도 반응은 마찬가지이다. 많은 기독인들이 이런 불신앙 안에 있다; 이것을 기독교계로부터 다른 삶으로 오는 이들과 이야기 해보고 알도록 허락받았다; 그 이유가 다른 삶에서 그들은 자기들이 생각했던 것을 감출 수 없기 때문, 자기 생각이 자기임을 공개적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기들이 목적으로 가졌던 것을, 즉 그들이 사랑해왔던 것을 감출 수 없는데, 그 이유는 이것이 그들의 영역을 수단으로 자동으로 명백해 있기 때문이다.

당신을 위해 모든 남자가 할례받는 것. 이는 외적인 표현물만을, 그리고 그렇게 해서 그들(세겜쪽인 고대의 것)이 그들(야곱의 아들들)에게 순수하게 있을 것임을 의미한다. 이는 “모든 남성을 할례받게 하는” 것의 의미가 외적인 표현물, 즉 그들이 교회 속에 있다는 표시, 여기서는 그들이 야곱의 아들들의 광신적 신앙 속에 있다는 표시이다로부터(4462항) 알게 된다. 그렇게 해서 그들은 야곱의 아들들의 눈에서 순수하게 있을 것임이 이어지는데, 그 이유는 야곱의 후손이 내적인 것들에서가 아닌 외적인 것들에 존재하는 순수성과 거룩함을 만들었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의 딸을 당신에게 줄 것이고, 우리는 당신의 딸을 데려올 것이오. 이는 이런 방법으로 결합함을 의미한다. 이는 앞에서 말해진 결혼에 관한 사항으로부터 분명해진다; 즉 영적 의미에서의 결혼은 선과 진리의 결합이다는 것이다; 그 이유가 “우리의 딸을 당신에게 주고, 당신의 딸을 데려오는 것”은 상호 결혼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는 당신과 함께 거주할 것이오. 이는 생활에 관련하여 결합함을 의미한다. 이는 “당신과 함께 거주함”의 의미가 함께 사는 것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리고 우리는 한 백성이 될 것이다. 이는 교리에 관련하여서도 결합함을 의미한다. 이는 “백성”의 의미가 교회의 진리이다로부터, 결과적으로 교리이다에서 알게 된다. 고로 “하나의 백성으로 있는 것”은 교리를 수단으로 결합함을 표시한다. 교인과 결합되는 것은 두 가지가 있는데, 그것은 생활과 교리이다. 생활이 교인들을 결합해놓을 때, 교리는 그들을 분리하지 않는다; 그러나 교리만이 그들을 결합하게 하고 있다면, 오늘날의 교회의 경우 같이 그들은 서로로부터 분리하고, 교리들이 있는 만큼에서 교회들도 있는다; 이는 비록 교리가 삶을 위하여 있었다할지라도, 삶이 교리로부터 있었다고 할지라도 그렇다는 말이다. 만일 교리만이 교인들을 결합하게 하고 있다면 교인은 서로로부터 분리하고 마는 이유는 이 교리로부터의 교인은 다른 교리로부터의 교인을 정죄하고, 심지어 지옥으로 가라고 비난하기조차 한다는 때문으로부터 분명해진다. (이 교회가 저 교회를 두고 이단이라 말하고 그 교인은 지옥간다 라고 말하는 경우일지 모른다. 천국가느냐 지옥가느냐는 하느님만의 절대적 판단일 뿐이다. 역자주) 그러나 만일 생활이 그들을 결합되게 하고 있다면 교리가 교인을 분리시키지 않는 이유는 생활의 선 안에 있는 인간은 다른 견해 속에 있는 인간을 비난하지 않고, 상대의 교리를 두고 그것은 그의 신앙과 양심의 주제로 남아있게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은 교회 바깥쪽에 있는 이들에게조차 마찬가지이다; 그 이유가 무지함은 순진과 서로의 사랑 안에서 사는 이들을 비난할 수 없고, 마치 그가 죽을 때 무지 안에 있는 이들은 어린이가 죽는 경우와 비슷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만일 당신이 할례받으라는 우리에게 귀기울이지 않으면. 이는 그들이 그들의 진리들로부터 물러나서 외적 표현물을 계승하지 않으면을 의미한다. 이는 이와 비슷한 것을 앞에서 살핀 바로부터 분명해진다. 이 구절에서 야곱의 아들들에 의해 말해진 것은 하몰과 세겜의 마음에 있는 것과 반대되는 의미를 덮고 있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내적 의미에서도 반대되는 것을 안고 있다. 그 이유는 13절에서 그들이 속임수로 말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말하면서 생각은 다른 것을 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딸을 데리고 가야 하리다. 이는 거기에 결합이 있지 않을 것임을 의미한다. 이는 결혼의 의미가 선과 진리의 결합이다로부터 분명해진다. 그러므로 “딸을 데리고 감”은 결혼으로 그녀를 주는 것이 아니다는 것, 고로 결합이 있지 않을 것이다. 여기서 야곱의 아들들은 자기들이 마치 야곱이나 된 듯하여 말하고 있다. 그 이유가 그들은 “우리는 우리의 누이를 데려간다”고 말해야 마땅한데, “우리의 딸”이라 말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이유는 내적 의미로부터 나타난다, 즉 출. 22:15, 16의 법에 따라 결혼을 거절하고 승낙하는 것은 아버지의 몫이다. 그러나 여기서 취급되는 내용이 야곱의 후손과 그들의 광신적 신앙이기에, 이를 표현하는 아들들이 아버지 대신 대답을 하고 있는 것이다. 야곱 자신은 대답할 수 없었는데, 그 이유는 여기서 그는 고대 교회를 표현하기 때문이다.

18-24절. 그리고 그들의 말들이 하몰의 눈에, 그리고 하몰의 아들 세겜의 눈에 좋게 보였다. 19 그리고 이 젊은이는 이 말을 행하는데 지체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그가 야곱의 딸에 흠뻑 만족해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그의 아버지의 모든 가문에서 가장 귀한 존재였다. 20 그리고 하몰과 그의 아들 세겜은 그들의 성문에로 와서, 그 성의 남자들에게 이야기를 했다, 말하기를 21 이 사람들은 우리들과 평화롭다, 그리고 그들을 이 토지에서 살게 하자, 그리고 매매를 펼치게 하자, 그리고 보라 이 토지는 그들 앞에 공간이 넓다. 우리가 그들의 딸을 여인으로 데려오고, 우리가 우리의 딸을 그들에게 주자. 22 그럼에도 사람들이 우리와 함께 거주하고, 한 백성이 되는데 동의해야 하는 것은, 모든 남자가 그들이 할례된 것 같이 할례받아야 하는 것이다. 23 그러면 그들의 획득물, 그들이 사들인 것, 그들의 짐승이 우리의 것도 되는 것이 아니더냐? 오로지 우리는 그들에게 동의 만 하면 된다, 그리고 그들은 우리와 함께 살 것이다. 24 그리고 성문의 안에서 밖으로 나간 모든 이들이 하몰과 그의 아들 세겜의 말에 귀기울였다. 그리고 그들은 성문을 출입하는 모든 남자에게 할례를 베풀었다.

그리고 그들의 말들이 하몰의 눈에 좋게 보였다. 이는 생활에 관련해 짐짓 겸손해 함을 의미한다. 이는 “그 말들이 좋게 보였다”의 의미가 짐짓 자신을 낮춤이다로부터; 그리고 하몰의 표현함이 고대인들 사이에 있는 교회의 선이나, 여기서는 생활이다로부터; 그 이유가 생활은 선으로부터 있고, 교리는 진리로부터 있기 때문인데, 교리는 이 뒤를 잇는 세겜에 의해 표현된다. 여기서 하몰에 의해 선이 아닌 생활이 표현되는 이유는 그가 야곱의 아들들의 외적인 것들에 짐짓 겸손히 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몰의 아들 세겜의 눈에서도. 이는 교리에 관련해서 짐짓 겸손해 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세겜의 표현함이 고대인들 사이에 있는 교회의 진리이다로부터; 이 진리는 “하몰”인 선으로부터 있다. 그러나 여기서 “세겜”은 교리를 표현하는데 방금 위에서 살폈다.

그리고 이 젊은이는 이 말을 행하는데 지체하지 않았다. 이는 받아들이기를 열망함을 의미한다. 이는 “말해진 것을 행함에 지체하지 않았다”의 의미가 그 말에 짐짓 겸손히 굴기를 열망함이다, 고로 그 말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 이유는 그는 야곱의 딸에 흠뻑 만족해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는 이 교회의 광신적 신앙에 관하여를 의미한다. 이는 “야곱의 딸”인 디나의 표현함이 고대 교회의 진리에 애착함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 이유가 이 교회가 야곱에 의해 여기서 표현되기 때문이다. 거기에 이 교회의 진리에 애착함과 결합되려 하는 열망이 있었다, 그러나 이 교회는 야곱의 후손들 사이에 있었는 바, 이 교회는 오로지 외적일 뿐인데, 하몰과 세겜은 이 외적인 것들을 받아들이기로 동의했다. 고로 “야곱의 딸”에 의해 이 교회의 광신적 신앙이 의미된다.

그리고 그는 그의 아버지의 모든 가문에서 귀한 존재였다. 이는 고대인들 사이에 있는 교회 속의 진리 중에서 제 일인 것을 의미한다. 이는 “귀한 존재”가 제일 가는 것을 의미함에서 분명해진다. “귀한 존재”인 그는 “왕자”와 거의 같은 수준이고, 왕자는 제일 인 것을 표시하는 단어이다. 그러나 그는 자기 아버지의 가문에서 귀한 존재였다고 말해지지 실지로 왕자라고 말해지지 않은 이유는 하몰과 세겜은 태고 교회의 잔류민이 그들의 뿌리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고대 교회에서 “왕자”라고 불리워도 마땅하다. 고대인들 사이에 있는 교회의 진리들에서 제 일인 것이 의미되는 이유는 이것이 세겜을 두고 말하기 때문이고, 그를 수단으로 고대인들 사이에 있는 교회의 진리가 표현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몰과 그의 아들 세겜이 그들의 성문으로 왔다. 이는 고대인들 사이에 있는 교회에 속해 있는 이들의 교리 속의 선들과 진리들을 의미한다. 이는 하몰의 표현함이 고대인들 사이에 있는 교회의 선이다로부터; 세겜의 표현함이 거기로부터 파생된 진리이다로부터; “성문”의 의미가 진리의 교리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들의 성의 남자들에게 이야기를 했다, 말하기를, 이는 설득함을 의미한다. 이는 “이야기를 함”의 의미가 뜻하는 것, 그리고 안으로 흘러드는 것, 여기서는 설득하는 것이다로부터, 그 이유가 뜻하는 자는 설득함 안에 있기 때문, 그리고 거기로부터 흘러듦 안에 있는 자는 설득과 교통하고 있기 때문이다. “성의 사람들”은 교리의 진리들 안에 있는 자들이다, 여기서는 세겜에 의해 표현되는 진리와 비숫한 진리 안에 있는 이들이다. 그 이유가 고대 시대에서 성의 주민은 실상 민족 중의 한 가문 정도에 인척이 가까운 얼마의 사람들이 보태져서 거주하는 정도이고, 이들을 두고 “성”이라는 단어가 사용되고 있다. 그리고 내적 의미에서는 가문으로 이해되는 것이 아니라 생활과 교리 측면에서 있는 가문의 품질로 이해된다. “성”에 의해서는 교리의 진리가; “성의 주민”은 교리의 선이 의미된다, 그러나 성의 주민들이 성의 “남자들”로 불리울 경우, 이는 교리의 선이 아닌 교리의 진리가 의미된다, 그 이유는 말씀에서 남자들(viri)은 진리들을 표시하기 때문이다.

이 사람들은 우리와 더불어 평화롭다. 이는 찬성을 의미한다. 여기서는 교리적인 것들 측면에서의 찬성이다. 이는 “남자들”의 의미가 진리들이다로부터, 고로 교리적인 것들이다; 그 이유가 교회의 진리들이 하나 안으로 수집되고 인정될 때 교리적인 것들이라 불리기 때문이다; 그리고 “평화롭다”의 의미가 그들이 동의한다는 것이다로부터; 그 이유가 교회의 독단적 주장과 교리적인 것들에 관하여 일치하는 경우 영적 의미에서 평화롭다 말해지기 때문이다.

그들을 이 토지에서 살게 하자. 이는 생활에 관련하여를 의미한다. 이는 살게 함의 의미가 생활함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말씀의 다른 구절에서 같이 여기서도 “토지”에 의해 교회가 의미된다, 고로 “토지에서 사는 것”은 교회의 것에 따른 생활의 유사함을 의미한다. 말씀 안에 쓰여진 것은 무엇이든 그 자체 또는 그 본질에서 영적이다는 것을 누구나 알고 있다. 그러나 그것의 영적인 것은 글자에서 나타나지 않는다; 그 이유가 글자는 세상적, 특히 역사적 부분의 경우는 더욱 그렇다; 그러나 말씀이 인간에 의해 읽혀질 때, 그 안의 세상적인 것은 영계에서, 즉 천사들과 더불어서는 영적인 것이 되어 있다; 그 이유는 천사들은 모두 각각의 주제에서 영적으로밖에 더 달리 생각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토지에서 살게 하자”의 경우도 마찬가지, 즉 영적으로 이를 생각하면 주님의 왕국 속의 것들, 고로 교회 속의 것들로 생각하는 것이다.

여기저기에서 매매를 펼치게 하자. 이는 교리에 관하여를 의미한다. 이는 “여기저기에서 매매를 펼침”의 의미가 선과 진리의 지식들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다로부터, 고로 교리 안으로; 그 이유가 교리가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을 함유하고 가르치기 때문이다.

그리고 보라 이 토지는 그들 앞에서 공간이 넓다. 이는 넓힘, 즉 교리의 진리를 넓힘을 의미한다. 이는 “토지”의 의미가 교회이다로부터; 그리고 “공간이 넓다”의 의미가 진리들 측면에 관하여 넓힘, 고로 교리 측면에 관하여 넓힘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말씀에서, 치수, 분량에 속하는 단어는 글자 의미에서 있는 무게, 길이, 폭 같은 것을 의미하지 않고 상태의 품질을 의미한다; 그 이유가 계량함은 공간을 염두에 두고 하는 말이나 다른 삶에서는 시간과 공간이 없고 그것에 상응하는 상태만 있기 때문이다. “길다”는 거룩함을, “높다”는 선을, 그리고 “넓다”는 진리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공간에서 넓은 토지”는 교회에서 교리의 진리를 넓힘이 의미된다. 이런 의미 파악은 글자 의미 외에 다른 영적인 어떤 것이 말씀 안에 있다는 것을 알아채지 못하고 있는 이들에게는 어쩌면 당황스러움을 유발할지 모른다. 그러나 여기서 등장하는 “넓이”의 경우만을 예를 삼아 다른 책의 구절에서 언급되는 것을 살피면 아마 납득될지 모른다; 이사야서에서:
앗시리아는 유다를 통과하여 갈 것이다; 그는 밀어닥쳐 관통할 것이다; 그는 목에까지조차 도달할 것이다, 그리고 그의 날개의 넓힘은 토지의 넓이를 채울 것이다 (이. 8:8).
다윗서에서:
오 여호와 당신은 나에게 적의 손 안으로 감금되게 아니하셨습니다, 당신께서는 제 발이 넓이에서 서게 만드셨습니다 (시. 31:8).
다윗서에서:
곤경으로부터 저는 야(Jah)를 불렀습니다; 그분은 넓이에서 저에게 대답하셨습니다 (시. 118:5).
하박국에서:
나는 갈대아인들을 일으켜세운다, (이 민족은) 모질고 날랜 민족이라 토지의 넓이들에서 걷는다 (합. 1:6);
위 구절에서 “넓이들”에 의해 교회의 진리외의 다른 의미는 없다.
“넓이”가 이 의미를 가지는 이유는 영계에서, 또는 천국에서 주님은 모든 것들의 중심되시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그분은 거기서 태양이시기 때문이다. 선의 상태에 있는 이들은 각자가 지닌 선의 양과 질에 비례하여 내면적이다, 그러므로 “높이”가 선을 서술한다. 선에서 같은 수준에 있는 이들은 진리에서도 같은 수준에서 있다, 그러므로 같은 거리에, 다시 말하면 같은 경계선 내에 있는다, 이로부터 “넓이”는 진리들을 서술한다; 그러므로 인간이 말씀을 읽을 때, 그 사람과 더불어 있는 천사는 “넓이”를 진리로 이해한다. 우리가 말씀의 역사물들에서, 즉 길이, 넓이, 높이를 수단으로 방주, 제단, 성전, 그리고 도성의 바깥쪽 공간들이 취급되는 구절들을 읽게 될 때, (우리와 함께 있는 천사들은) 선과 진리의 상태들로 지각한다. 새 땅, 새 예루살렘, 그리고 새 성전이 취급되는 에스겔서 (40-47장)에서의 경우, 천국과 새로운 교회가 의미되는데, 그때 언급되는 측량함에 의해 모든 세부 사항이 의미됨에서도 위의 내용들을 알는지 모른다. 또한 에스겔서와 유사한 계시록서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이 책에서 새 예루살렘은 정사각형이라 말해지고, 그것의 길이는 그것의 넓이만큼 크다고 말해진다 (계. 21:16).
영계에서 내면쪽으로 있는 것들은 말씀에서는 보다 높은쪽에 있다로 묘사된다, 그리고 외면쪽인 것은 보다 낮은쪽에 있다로 묘사되고 있다; 이렇게 묘사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인간이 이 세상에 사는 동안, 그는 내면의 것, 외면의 것이라는 말을 어떤 방법으로도 납득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그가 시간과 공간 안에 있기 때문, 그리고 시공에 속한 것들이 그의 생각 안으로 들어가기 때문, 하여 그의 생각은 시공의 것들로 착색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런 설명으로 분명해지는 것은, 재는 것에 관련된 것들, 즉 높이, 넓이, 길이 같은 것은 공간이라는 한계를 지녔다는 것, 그러나 영적 의미에서 이것들은 선에 애착함들과 진리에 애착함들이 상태들을 결정한다는 것이다.

그들의 딸을 여인으로 우리에게 데려오자, 그리고 우리의 딸을 그들에게 주자. 이는 결합을 의미한다. 이는 앞에서 이와 비슷한 말을 살핀 대목으로부터 알 것인 바, 설명은 생략한다.

그럼에도 우리와 함께 거주하기 위해 사람들이 동의해야 하는 것. 이는 그들은 생활에 관하여 찬성할 것임을 의미한다. 이는 “동의함”이 찬성하는 것이다로부터 ; “거주함”이 생활하는 것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한 백성이 되는 것. 이는 교리에 관련하여 찬성할 것임을 의미한다. 이는 “백성”의 의미가 교리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들이 할례받은 것 같이 모든 남자가 할례받는다. 이는 그들이 그것에 의해서 외적인 것만에 관련하여 표현하고 의미하도록 시작될 것이다를 의미한다. 이는 “할례를 받음”이 외적인 표현물, 그들이 교회 속에 있다는 표시로부터 알게 되는데, 여기서의 경우는 야곱의 후손들에 있는 광신적 신앙 속에 있다는 표시이다. 그리고 이 남자들이 그들의 광신적 신앙을 수락하였기 때문에, 그리고 이 신앙은 외적인 것들만에 존재하였기 때문에, “그들이 할례받은 것 같이”라고 말해진다. 그러므로 위 구절은 의문에 있음을 수단으로 외적인 것들 만에 관련하여 유태인의 표현물과 의미물 안에서 시작함을 의미한다. 이는 이어지는 것들로부터 그것들 안에 놓여진 것이 더 나타난다.

그들의 획득물, 그리고 그들이 사들인 것. 이는 그들의 진리들을 의미한다. 이는 “획득물”과 “사들인 것”의 의미가 진리들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리고 이 단어는 이런 방법에서 서로 구별된다: “획득물”이 작은 가축일 경우, 진리로부터의 선을 표시한다, 그 이유는 이것이 “작은 가축”의 의미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진리로부터의 선은 뜻함과 행동함에 있는 진리이다; 이에 반해, “사들인 것”은 그 밖의 구절에서는 “은을 주고 산 것”이라 말해지는데, 진리를 표시한다. 전자, 즉 진리로부터의 선은 삶 속에 있는 진리이고; 후자, 또는 영적인 진리는 교리 속에 있는 진리이다.

그리고 모든 그들의 짐승. 이는 그들의 선들을 의미한다. 이는 “짐승”의 의미가 선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우리의 것이 아니더냐? 이는 이것들은 똑같고 하나의 형체 속에 있었음을 의미한다. 이는 시리즈로부터 알게 된다. 하몰과 세겜과 그들의 가문들 사이에 부분적이지만 아직 남은 태고 교회의 선들과 진리들이 야곱의 후손들 사이에 있는 고대 교회의 선들과 진리들과 일치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 이유가 야곱의 후손들 사이에 조직되는 의식(의례)들은 태고 교회의 내적인 것들을 표현하고 의미하되, 단지 외적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것이 아니더냐?”에 의해 그들은 똑같았고, 하나의 형체였다가 의미된다,
이를 예를 들어 더 생각해보자. 그들이 제물을 바쳤던 제단은 주님에 대한 매우 중요한 표현물이었다; 그러므로 이것은 “히브리”라고 불리운 고대 교회에서 예배의 기초이자 근본이 되었다; 결과적으로 건축된 제단의 일반적, 특수적 측면 모두, 즉 제단의 치수들, 즉 높이, 넓이, 길이, 그리고 돌, 놋그물, 뿔, 또한 그 위에서 꺼지지 않고 타는 불, 이 외에 제물과 태워바침에 이르기까지도 표현적이었다, 이것들이 표현한 것은 주님 속에 있는 진리들과 선들, 그리고 주님으로부터 있는 진리들과 선들이고, 이것들은 예배의 내적인 것인데, 이것들이 제단의 외적인 것에서 표현되었기에, 이는 태고 교회의 진리들과 선들과 하나의 형체이고 똑같은 것이다. 치수들, 즉 높이, 넓이, 길이는 일반적으로는 선, 진리, 그로부터 파생되는 거룩함을 의미했다; 특별히 돌은 보다 수준 낮은 진리들을; 제단 주위에 그물을 만든 재료인 놋쇠는 자연적 선을 의미했다; 뿔은 선으로부터 있는 진리의 힘을 의미했다; 제단 위의 뿔은 사랑을 의미했다; 제물과 태워 바침은 각기 종류들에 따른 천적인 것들과 영적인 것들을 의미했다. 그러므로 이런 외적인 표현물 안에 내적인 것들이 함유되어 있는 것은 분명하다, 그리고 내적인 것에 관련하여서는 두 교회가 비슷하다; 그리고 이런 경우는 다른 의례들에서도 비슷하다.
그러나 태고 교회의 사람들은 이런 외적인 것들에는 관심이 없었는데, 그 이유는 그들은 내적 인간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주님은 내적 경로로 해서 그들 안으로 흘러드셨고, 그들에게 선인 것을 가르치셨다. 선의 차이나 다양함이 그들에게 진리들이었다, 그리고 이 진리로부터 세상에 있는 각각 그리고 모든 것들은 주님의 왕국에 있는 것을 표현했다는 것을 알았다; 그 이유가 전체 세계, 또는 보편적 자연계는 주님의 왕국을 표현하는 극장 무대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대 교회인은 내적이지 않고 외적 인간이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흘러드시어 그들과 함께하시는데 내적 경로를 사용하실 수 없었다. 그러나 외적 경로로 해서 그들에게 선한 것을 가르치시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의 첫 번째는 표현적이고 의미적인 것을 수단으로 선인 것을 가르치시는 것이다 (이로부터 표현 교회가 일어났다), 그리고 후에는 표현되어지고 의미되어진 선과 진리에 관한 교리적인 것을 수단으로 선인 것을 가르치시는 것이다 (이로부터 기독 교회가 일어났다). 내적 형체에 관련하여서 기독 교회는 표현 교회와 똑같다; 그러나 표현 교회의 표현적, 의미적인 것들은 주님께서 세상에 오신 이후 폐지되었다, 그 이유는 그것들의 모두와 각각은 주님을, 결과적으로 그분의 왕국 속의 것들을 표현하고 의미했기 때문인데, 그분이 세상에 직접 계신 상태에서는 그런 것들의 표현과 의미는 필요 없어졌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표현하고 의미한 것들 모두이든, 각각이든 그분으로부터 있고 말하자면 그분 자신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태고 교회와 기독 교회의 차이는 마치 대낮의 태양 빛과 한밤의 달빛과 별빛이다; 그 이유가 내적인 방법으로 선들을 보는 것은 대낮의 태양으로 물체를 보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이는 태고 교회와 고대 교회의 차이도 위 기독 교회의 차이나 마찬가지지 이지만 한 가지 예외는, 기독 교회인의 경우, 그들이 내적인 것들을 인정했다면, 또는 주님이 가르치신 진리들과 선들을 믿고 행하였다면, 보다 더 충만된 빛 안에 있을 수 있다는 점이다. 선 자체는 위의 어느 교회이든 같지만, 이를 명료함에서 보느냐와 희미함에서 보느냐에서 차이가 난다. 명료함에서 그것을 보는 이들은 셀 수 없이 많은 신비함들을 보는데, 마치 천국에 있는 천사들이 보고 감동되는 것만큼 일지 모른다; 그러나 희미함 안에서 그것을 보는 이들은 의심에서 자유한 상태로부터 어떤 것을 거의 보지 않는다, 그리고 그들이 보는 것은 밤의 그늘(즉 거짓들)과 혼합되어져 있다, 그리고 어떤 것도 내향적으로 감동되지 않는다. 지금 본문에서 선이 두 교회들에서 똑같고, 진리 역시 그러한 바, “그들의 것이 우리의 것이 아니더냐?”에 의해 선들과 진리들은 똑같고 하나의 형체 속에 있다가 의미되고 있다; 그 이유가 이미 말했듯이, 하몰과 세겜은 태고 교회로부터 남아 있는 것에 속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야곱의 후손은 비록 외적일 뿐이고, “히브리”라고 불리웠을 뿐, 어쨌든 고대 교회에 속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몰과 그의 아들 세겜은 할례받음에서 매우 큰 죄를 범하였다는 것이 아래에서 보여질 것이다.

오직 그들에게 동의만 하면 된다, 그리고 그들은 우리와 함께 거주할 것이다. 이는 만일 우리가 짐짓 겸손히 굴어준다면을 의미한다는 것, 그리고 그렇게 하여 자기들의 생활이 그들과 연합될 것이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동의함”이 짐짓 겸손히 굴어줌을 의미함에서; 그리고 “우리와 거주함”이 함께 사는 것, 또는 자기들의 생활을 연합시키는 것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리고 그들은 하몰과 그의 아들 세겜의 말에 귀기울였다. 이는 동의함을 의미하는데, 별도의 설명은 필요 없을 것이다.

그의 성문의 안에서 밖으로 나간 모든 이. 이는 그들이 고대인들 사이에 있는 교회의 교리로부터 물러날 것임을 의미한다. 이는 “밖으로 나감”의 의미가 여기서는 물러나는 것이다로부터; 그리고 “성문”의 의미가 교리이다로부터, 여기서는 고대인들 사이에 있는 교회의 교리이다로부터, 그 이유가 “그의 성문”이 세겜의 성문이기 때문, 그리고 세겜에 의해 고대인들 사이에 있는 교회의 진리가 의미되기 때문이다; 이미 말한 대로, 고대인들 사이에 있는 교회에 의해서는 태고 교회로부터 이었음이 의미된다. 이에 대하여는 이어지는 것으로부터 분명해진다.

그리고 그들은 그의 성문의 안에서 밖으로 나간 모든 남자에게 할례를 실시했다. 이는 외적인 것들에 접근함을 의미한다. 이는 “모든 남자에게 할례를 실시함”의 의미가 외적인 것만의 측면에서 야곱의 후손들이 가지고 있는 표현들과 의미들 쪽에서 개시함이다로부터; 그리고 “성문의 안에서 밖으로 나감”의 의미가 고대인들 사이에 있는 교회의 교리로부터 물러남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들 자신의 교리로부터 물러나고 외적인 것들에 접근함 모두가 의미가 되었기 때문에, “그의 성문의 안에서 밖으로 나간 모든 이”라는 말이 두 번 언급되었다. 다른 장소에서의 경우, “그것 안으로 간 그들”이라 말해지는데, 이럴 경우, 교리에 접근함, 그리고 외적인 것들로부터 퇴거함이다. 이에 반해 여기서는 그 반대가 의미되고 있다.
위 경우가 어떻게 되는지를 한 번 더 살피고 가야할 것 같다. 하몰과 세겜과 그의 가문들의 선조인 태고 교회인은 고대 교회인과는 천성과 태생적 품질이 완전히 다르다; 그 이유가 태고 교회인은 견실한 의지를 가졌으나 고대 교회인은 그렇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주님은 태고 교회인과 더불어서는 의지를 통하여, 고로 내적인 길을 수단으로 흘러드실 수 있으셨다; 그러나 의지가 파괴되어진 고대 교회인과는 그렇지가 못했다; 하여, 그들과 더불어서는 그분은 내적인 경로가 아닌 그들의 이해력을 통하여 흘러드셨다. 의지력을 통하여 흘러드시는 것은 사랑의 선을 통하여 흘러드시는 것이다, 그 이유가 모든 선은 사랑 속에, 사랑으로부터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해력을 통하여 흐르는 것은 신앙 속의 진리, 신앙으로부터의 진리를 통하여 흘러드시는 것이다, 그 이유가 모든 진리는 지적 부분 속에, 지적 부분으로부터 있기 때문이다. 주님께서 고대 교회인을 거듭나게 하셨을 때, 그분은 그들의 지적 부분에 새 의지를 만들어 주셨다. 위 살핀 바로부터도 알게 되는 것은 태고 교회인과 고대 교회인은 천성과 태생적 품질이 완전히 다르다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해서 태고 교회인은 내적 인간이었고, 그들에게는 예배의 외적인 것들이 없었다; 한편 고대 교회인은 외적 인간이었고, 그들은 예배의 외적인 것들을 가졌다; 전자는 내적 측면으로부터 외적인 것들을 보았는 바, 마치 대낮의 태양빛을 통하여 보는 것과 같다; 그리고 후자는 외적 측면에서 있는 것들을 통하여 내적 사항들을 보았는데, 마치 한밤중의 달빛이나 별빛을 통하여 보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천국 안에서 주님은 전자에게는 태양으로, 후자에게는 달로 나타나신다. 이를 구분해 말하기 위해 우리는 전자를 “천적(celestial)” 수준, 천적 인간이라 일컫고, 후자는 “영적(spiritual)” 수준, 영적 인간이라 일컫는다. (우리의 일상 대화에서 상용하는 자연적, 영적이라는 말과는 의미가 다르다는 점을 유의하기 바란다. 그 이유가 이 책을 정독하지 않은 사람들은 영계 안에 두 왕국과 세 천국이 있다는 말을 들어본 적도, 생각해본 적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일반인들, 교회인들을 포함해서 천국과 지옥이 있다는 막연한 수준, 지극히 일반적 개념밖에 없어 영적이라는 말은 단순히 천국과 지옥을 상상해보는 정도에 그치고 말기 때문이다. 이런 용어 파악이 이 책을 읽기 전에 되어 있지 않으면 이 책의 설명은 매우 혼돈스러워 난해한 책이 되고 만다. 스베덴보리의 책보다 더 육체와 영체를 설명한 책은 지구상에 없을 것이다. 역자주)
위 둘의 차이를 예증해보기 위해 예를 더 들어 볼까 한다: 만일 태고 교회인이 말씀 의 역사적 부분이든 예언적 부분이든 읽을 때, 그는 어떤 가르침이나 해설로 미리 도움 받음 없이 읽는 말씀 속의 내적 의미를 본다: 따라서 그에게는 말씀 속의 천적, 영적 수준의 의미들이 즉시 나타난다, 그 대신 글자 의미의 것들은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 고로 내적 의미는 그에게 명료함에서 있고, 글자 의미는 희미함에서 있다. 아마 그는 누군가가 말할 때, 단어들을 동원하지 않고도 의미를 파악하는 자일 것이다. 다시 말해 상대방이 알지도 못하는 외국어로 말해도 무슨 의미를 전달하려는 지를 파악한다는 말이다. 이에 비해 고대 교회인이 말씀을 읽을 때, 그는 말씀에 대한 가르침이나 해설이 없으면 읽는 말씀의 내적 의미를 볼 수 없다. 고로 그에게 내적 의미는 희미함 안에 있고, 그 대신 글자 의미는 명료함 안에 있다. 그는 타인이 말하는 것을 들을 때, 그는 의미가 동반되지 않는 단어들에 집중되어 있다, 고로 그에게는 의미는 잃어진 상태인 셈이다. 게다가 유태인이 말씀을 읽을 때, 그는 글자 의미를 넘어서는 그야말로 어떤 것도 납득하지 않는다, 그는 어떤 내적 의미가 있다는 것을 알아채지 못한다, 더 나아가 내적 의미가 있음을 부정한다; 오늘날, 기독 교회인의 경우도 비슷하다.
위 모든 차이는 본문에 등장하는 (내적인 것들 안에 있고 외적인 것들 안에 있지 않았던 태고 교회인의 나머지들의 부류에 속하는) 하몰과 세겜, 그리고 (외적인 것들 안에 있고 내적인 것들 안에 있지 않았던) 야곱의 아들들에 의해 표현되는 것들을 보여준다; 더 나아가 하몰과 세겜은 자기들의 내적인 측면이 닫아짐 없이 외적인 것들에 접근할 수도, 야곱의 아들들 사이에 있는 것들을 받아들일 수도 없었다; 그렇게 되었다면 그들은 영원한 파멸을 맞이할 수밖에 없다.
이것은 하몰과 세겜, 그들의 가문들이 살해당한 비밀한 이유이다. (정상적 절차를 밟는 결혼에 이르면 그들은 내적인 것과 외적인 것의 섞음질이 결과되므로 그들의 구원을 위해 이것까지는 허락되지 않은 것이다. 역자주.) 살해당함이 섭리적 차원에서 허락될 수밖에 없었다고 해서 야곱의 아들들이 저지른 매우 중대한 범죄가 무죄이다는 말은 아니다. 단지 그들은 이런 비밀한 이유를 알지 못했다; 그리고 이런 비밀한 이유가 그들이 예상한 목적도 아니었다. 모든 이 각각은 자기의 목적, 또는 의도에 따라서 심판받는다, 그리고 야곱의 아들들의 의도가 사기적이었다는 것은 13절에서 이미 서술되었다; 그리고 이런 범죄가 주님에 의해 허락될 경우, 이것의 주동자는 악한 인간들과 지옥의 선동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악한 자가 선한 자에게 의도하고 실행하는 모든 악은 주님에 의해 선으로 되돌려진다, 본문의 범죄 사건이 이에 해당된다; 하여 하몰과 세겜, 그리고 그의 가문들은 구원받았다.

25-29절. 그리고 삼일이 지났다, 그들이 아파하고 있을 즈음, 야곱의 두 아들, 디나의 오라버니 시므온과 레위가 각기 자기 검을 손에 쥐었다, 그리고 그 성을 대담하게 들어갔다, 그리고 모든 남자를 살육했다. 26 그리고 그들은 하몰과 그의 아들 세겜을 그의 칼 끝으로 살해했다, 그리고 디나를 세겜의 집에서 데려 왔다. 27 그리고 야곱의 아들들이 찔려 죽은 이들에게 왔다, 그리고 그 성을 약탈하였다, 그 이유는 그들이 자기들의 누이를 더럽혔기 때문이다. 28 그들의 양떼, 그리고 그들의 목축들, 그리고 그들의 나귀들, 그리고 그 성에 있는 것은 무엇이든지, 그리고 들판에 있는 것은 무엇이든지 그들은 가져 갔다. 29 그리고 그들의 모든 재물, 그리고 그들의 갓난 아이, 그리고 그들의 여인들, 그 집에 있는 모든 것을 그들은 포로로, 전리품으로 가져 갔다.

그리고 삼일 째가 되었다. 이는 끝맺음이 있을 때까지 계속되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삼일 째”의 의미가 시작으로부터 끝까지 완성인 것이다로부터, 또한 계속적인 것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것이 “삼일 째 날”의 의미이다는 것은 말씀의 역사 부분을 세상적 역사물로만 간주하는 이들, 또는 이 단어가 거룩한 책 안에 있기에 거룩한 단어로만 간주하는 이들에 의해서는 거의 믿어질 수 없다. 그러나 말씀의 역사 부분 자체는 그것 안에 글자에서는 나타나지 않는 영적이고 천적인 것들을 감싸고 있을 뿐만 아니라, 단어들 역시, 숫자들에 이르기까지에서 그러하다는 것은 이미 앞에서 설명했었다; 특히 역사 이야기 형식을 빌리지 않는 예언적 부분들의 경우 더욱 두드러지는데, 이는 주님의 신성한 자비로부터 더 명백해질 것이다. 어쨌든 숫자 “3”, 또한 “7”, 그리고 “12”는 숫자 안에 깊은 비밀들을 내포하고 있다는 것만큼은 말씀의 내면의 사항들에 관심이 있어 말씀을 세심히 살피는 모든 이를 위해서라도 명백히 해주어야 할 것 같다; 그리고 만일 이 숫자들이 의미로 가득 차 있다면, 이 외의 모든 숫자들 역시 각 숫자 안에 깊은 무엇인가를 내포하여야 할 것이다; 그 이유는 말씀은 전체를 망라해 거룩하기 때문이다.
때로 천사들과 이야기를 할 때, 마치 쓰여진 숫자들이 청명한 날 종이 위에 있는 어떤 것 같이 내 눈 앞에 나타났다, 그리고 나는 천사들이 이야기하는 것들 자체가 이런 저런 숫자들 안으로 떨어지는 것을 지각했다; 그리고 이 경험으로부터 나는 말씀 안에서 언급되는 모두 각각의 숫자는 그것 안쪽에 어떤 신비함들을 붙잡고 있다는 것을 배웠다; 아래 구절로부터 명백해진다:
그는 거룩한 예루살렘의 성벽을 측량했는데 144큐빗이었다, 이는 사람의 칫수, 즉 천사의 칫수이다 (계. 21:17).
그리고 다시:
총명을 가진 자로 하여금 짐승의 숫자를 계산하게 하라, 그 이유가 이 숫자는 사람의 숫자이기 때문이고, 그의 숫자는 666이다 (계. 13:18).
처음 언급된 숫자, “144”는 12 자체를 곱하여 결과된 숫자이다는 것, 그리고 숫자 “666”은 3과 6의 산물이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이 숫자들이 그것들 안쪽에 포옹된 거룩한 것이 무엇인지는 “12”의 거룩함으로부터 (577, 2089, 2129, 2130, 3272, 3858, 3913항), 그리고 숫자 “3”의 거룩함으로부터 나타난다 (720, 901, 1825, 2788, 4010항).
나중 숫자 “3”은 끝장을 보기까지에 이르러 완성되는 것, 고로 규모가 크든 작든 어떤 하나의 기간을 의미하는데, 이 숫자는 표현적 교회에서 받아졌다, 그리고 어떤 것이 의미되는 때는 언제든지 이 숫자를 사용했다; 그리고 또한 말씀에서도 사용되었다 (말씀 안에서 모든 것들은 일반적, 특수적 모두에서 의미를 가진다); 아래 인용 구절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그들은 삼일의 여행을 해서 제물을 바칠 것이다 (출. 3:18; 5:3).
그들은 셋째 날을 향해 준비를 해야 한다는 것, 그 이유는 삼일 째 날에 여호와께서 시내산에 내려오시기 때문이다 (출. 19:11, 15, 16, 18).
셋째 날까지 제물의 고기를 남겨두어서는 안된다 (레. 7:16-18; 19:6, 7).
분리함의 물이 삼일 째 날과 일곱 째 날에 불결한 자 위에 뿌려질 것이다 (민. 19:11-22).
전쟁에서 죽임을 당한 자를 만진 자는 삼일 째 날과 일곱 째 날에 순수해질 것이다 (민. 31:19-25).
여호수아는 삼일 째 날에 요단을 건너라고 백성에게 명령했다 (여. 1:11; 3:2).
여호와께서 사무엘을 세 번 부르셨다, 그리고 사무엘은 세 번째 엘리에게 달려갔다, 그리고 엘리는 여호와께서 사무엘을 부른 세 번째를 깨달았다 (삼상. 3:1-8).
요나단이 다윗에게 삼일 째 저녁까지 들판에서 자신을 숨기고 있으라고 말했다는 것, 그리고 요나단이 그에게 삼일 째 날에 그에게 보낸다는 것, 그리고 자기 아버지의 의향을 밝히 알게 하겠다는 것; 그리고 그 때 요나단은 돌쪽에서 세 번 화살을 쏘았다; 그리고 이후 다윗은 요나단 앞에서 세 번 자신을 땅에 엎드렸다 (삼상. 20:5, 12, 19, 20, 35, 36, 41).
세가지 사항 중에서 선택하도록 다윗에게 제공되었다: 칠 년 기근이 오는 것, 그는 그의 적들 앞에서 석 달을 도망해야 하는 것, 또는 토지에 삼일 간의 염병이 있는 것이다 (삼하. 24:11-13).
르호보암이 자기 아버지께서 지운 멍에를 가볍게 해주기를 요청한 이스라엘의 회중에게 말하기를, 그들은 삼일을 떠나 가서 있으라는 것, 그리고 다시 오라는 것; 그리고 왕이 그들에게 삼 일 째 날에 나에게 오라 하고 명한 대로, 그들이 삼일째 날에 르호보암에게 다시 왔다
(왕상. 12:5, 12).
엘리야는 자신을 과부의 아들 위에 세 번 뻗쳤다 (왕상. 17:21).
엘리야는 물을 태워 바침의 제물과 장작에 세 번 붓도록 백성에게 말했다, 그리고 그들은 그것을 세 번 실시했다 (왕상. 18:34).
요나는 고래의 뱃속에서 삼일 낮과 삼일 밤을 있었다 (욘. 1:17; 마. 12:40).
주님께서는 포도원을 심은 사람에 관하여 이야기하셨다, 그는 자기 종을 세 번 보냈다, 그리고 그 후에 자기 아들을 보냈다 (막. 12:2, 4-6; 눅 20:12, 13).
베드로가 세 번 나를 부인할 것이라고 그분은 베드로에 관해 말하셨다 (마. 26:34; 요. 13:38).
그분은 베드로에게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라고 세 번 말하셨다 (요. 21:15-17).
위 구절들과 이 외 많은 다른 구절들에서 숫자 “3”에는 어떤 신비함이 있다는 것, 그러므로 이 숫자는 고대 교회에서 의미를 지닌 숫자로 받아졌다는 것을 알는지 모른다. 이 숫자는 규모가 크든 작든 교회의 전체 기간과 교회 안에 있는 것들의 전체 기간을 의미함이 분명하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이 숫자는 완성하는 것, 또한 끝장으로까지 계속되는 것을 의미함을 아래 호세아서로부터 분명해진다:
여호와께서는 우리에게 이틀 후에 생기를 주실 것이다; 삼일 째에 그분은 우리를 일으켜 세우실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분 앞에서 살 것이다 (호. 6:2).

그들이 아파하고 있을 즈음. 이는 탐욕들을 의미한다. 이는 할례를 받은 후에 “고통함”의 의미가 탐욕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 고통이 탐욕을 의미하는 이유는 할례가 자기를 사랑함과 세상을 사랑함으로부터 순수해짐을 의미하기 때문, 그리고 육의 모든 탐욕은 이 사랑들로부터 이고, 그러므로 탐욕이 이 “고통함”에 의해 의미된다; 그 이유는 인간이 이런 사랑들로부터 깨끗해질 때, 마치 인간이 거듭나질 때의 경우 같이, 그는 고통과 번민 안에 있다, 그리고 고통과 번민 안에 있는 탐욕들의 제거함이 있는다. 어떤 신비함이 의식에 의해 표현되어질 때, 의식의 각각의 세부 사항은 그것이 완성될 때까지 신비함의 어떤 것을 감싸고(포옹하고) 있다. 이런 경우의 실 예가 할례 때에 사용하는 돌로 만들어진 작은 창, 또는 칼의 경우 이고; 이 때 흘리는 피; 수술하는 방식; 결과적으로 상태와 더불은 경우 등등이다. 이 외에도 깨끗해짐들, 취임식, 신성하게 함, 여타 다른 축제들의 경우도 있다. 본문에서 할례 후의 “고통”에 의해서는 하몰, 세겜, 그리고 성의 사람들이 야곱의 후손들에 있는 외적인 것들을 바램에서 야기된 탐욕이 의미되고 있다.

야곱의 두 아들, 시므온과 레위. 이는 신앙과 사랑을 의미한다. 이는 시므온의 표현함이 의지에 있는 신앙이다로부터, 그리고 레위의 표현함이 영적인 사랑 또는 선행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것은 “시므온과 레위”에 관한 일반적 의미, 그리고 그들 뒤를 이어 그 이름으로 불리우는 지파들에 관한 일반적 의미이나, 반대적 의미에서는 거짓된 것과 악을 의미한다; 그 이유가 거짓은 신앙의 진리에, 그리고 악은 선행의 선에 반대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것이 유태 나라라는 측면에서 시므온과 레위의 표현함이다. 이 나라는 자체 안에 있는 (예배의 내적인 것들인) 신앙과 선행의 모든 것을 소멸되게 했다. 이는 이어지는 구절로부터, 즉 그들이 하몰과 세겜, 성의 사람들을 죽였고, 칼로 찌른 사람들에게로 와서 약탈했다는 대목에서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이것을 시므온과 레위가 저지른 이유는 신앙의 진리와 선행의 선이 거짓과 악으로 변했다는 것을 표현하기 위해서 였다; 그 이유가 교회에 있는 진리가 거짓이 되고, 선이 악이 될 때, 교회의 끝장이 있기 때문이다.

디나의 오라버니(형제들). 이는 그 교회 속의 진리들과 선들을 의미한다. 이는 “형제들”의 의미가 진리들과 선들, 또는 신앙과 선행이다로부터; 그리고 디나의 표현함이 진리에 애착함, 결과적으로 교회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각자 자기 검을 손에 쥐었다. 이는 거짓과 악을 의미한다. 이는 “검(sword)”의 의미가 싸우는 진리, 그로부터 진리를 방어함; 그리고 반대적 의미에서는 싸우는 거짓, 그로부터 진리의 황폐됨이 의미됨에서 알게 된다. “검”이 여기서 악도 의미하는 데, 그 이유는 이 범죄 행동에 선행, 선을 표현한 레위가 포함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반대적 의미일 경우, 이것은 악인 바, 악으로부터의 거짓을 수단으로 전투하고, 그 결과는 악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성을 대담하게 들어갔다, 그리고 모든 남자를 살해했다. 이는 그들은 고대인들 사이에 있는 교회의 교리 속의 진리들을 근절시켰음을 의미한다. 이는 “성”의 의미가 교회의 교리이다로부터, 여기서의 경우는 고대인들 사이에 있는 교회의 교리인데, 그 이유는 이 교회가 하몰과 세겜이 있는 성이기 때문이다; “대담하게”의 의미가 보증함이다로부터, 여기서는 악하고 거짓인 것의 보증이다; “남자”의 의미가 진리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로부터 “그 성을 대담하게 들어가서 모든 남자를 살해했다”에 의해 거짓과 악을 보증함으로부터 그들이 고대인들 사이에 있는 교회의 교리 속의 진리를 근절해버렸음이 의미됨이 분명해진다. 이는 야곱의 후손들과 더불어 설립되어 왔었던 (태고 교회의 잔여물이었던) 고대인들 사이에 있던 교회이었다는 것, 그 이유가 고대 교회가 멸망해지기를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에서의 내적 의미에서 그들은 자신들 안에 있는 신앙의 모든 진리와 선행의 모든 선을, 고로 예배의 모든 내적인 것을 소멸되게 해버렸다; 그러므로 어떤 교회도 이 후손들과 더불어 설립되어질 수 없었다. 게다가 그들의 목이 굽어지지 않는 비타협적 기질까지 더하여짐으로 교회의 설립은 완전 불가능하고, 대신 교회의 표현 자체만 (완전한 껍데기)이 그들과 더불어 설립되어진다.

그리고 그들은 검의 끝에서 하몰과 그의 아들 세겜을 살해했다. 이는 그들이 교회 자체를 근절해버렸다를 의미한다. 이는 하몰의 표현함이 선 측면에서의 고대인들 사이에 있는 교회이다로부터; 세겜의 표현함이 진리 측면에서의 고대인들 사이에 있는 교회이다로부터; 그리고 “검의 끝”의 의미가 전투하는 악과 거짓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또한 이를 수단으로 하여 그들은 자신들에 있는 교회를 소멸되게 하고 말았다.

그리고 세겜의 집에서 디나를 데려갔다. 이는 그들이 진리에 애착함을 거두어 갔음을 의미한다. 이는 디나의 표현함이 진리에 애착함이다로부터 분명해진다. 대략적 내적 의미에 의하면, 그들은 태고 교회의 잔여물로부터 있었던 이들로부터 진리에 애착함을 거두어 갔음 인데, 그 이유는 “그녀를 세겜의 집에서 데려갔다”라고 말해지고, “세겜의 집”은 이 교회의 진리로부터의 선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의미되는 이유는, 여기서 취급되는 주제가 야곱의 아들들에 의미되는 야곱의 후손들 사이에 있는 진리와 선이 근절됨, 그리고 모든 것들도 취급된 주제에 적용되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세겜의 집”은 태고 교회인과 더불어 존재했던 것과 같은 진리로부터의 선이 단순하게 의미된다. 그리고 이 선이 야곱으로부터 튀어나오는 나라에서 소멸된 것이다; 그 이유가 말씀의 내적 의미에서 이름이나 단어들의 의미는 그것들이 적용되는 주제에 의해 결정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여기서는 하몰과 세겜과 그의 가문들과 더불은 선과 진리가 깨짐도 동시에 의미한다, 그 이유는 그들이 외적인 것들에 접근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시므온과 레위에 관하여 펼쳐놓은 사항들이 진실로 그러하다는 것은 죽음을 바로 앞둔 야곱의 예언적 발언으로부터 보여질는지 모른다:
시므온과 레위는 형제들이다, 폭력의 도구들은 그들의 검들이다; 내 혼은 그들의 비밀 안으로 들어가게 하지 말자, 그들의 모임 안에 내 영광은 하나되게 하지 말지라, 그 이유는 그들은 자기들의 분노함에서 사람을 살해했고, 자기들의 쾌락 안에서 숫소를 느슨해지게 했기 때문이다; 그들의 분노는 격렬했기 때문에, 그들의 격노함은 슬펐기 때문에 저주받을 지라; 나는 그들을 야곱 안에서 가를 것이다, 그리고 이스라엘 안에서 흩을 것이다 (창. 49:5-7).
“시므온과 레위”에 의해 야곱의 후손들이 거짓으로 변하게 한 신앙 속의 진리, 악으로 변하게 한 선행 속의 선이 의미된다. 그들이 “형제들”이라 불리운 이유는 선은 진리의 형제, 선행은 신앙의 형제이기 때문이다. “폭력의 도구들이 그들의 검들이다”란 거짓들과 악들이 진리들과 선들에 폭력을 감행했음을 의미한다. “내 혼은 그들의 비밀 안으로 가게 하지 말자, 그들의 모임에 내 영광이 하나되게 말지라”는 생활과 교리가 분리됨을 의미하는데, 그 이유는 말씀에서 “혼”은 삶, 생명을 서술하고, “영광”은 교리를 서술하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그들은 자기들의 분노함에서 사람을 살해했고, 자기들의 쾌락 안에서 그들은 숫소를 느슨해지게 했다”란 이미 작심한 악 안에서 그들은 교회의 진리와 교회의 선을 소멸했다가 의미된다; 그 이유가 “사람”은 교회의 진리를, 그리고 “숫소”는 교회의 선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들의 분노는 격렬했기 때문에, 그들의 격노함은 슬펐기 때문에 저주받을 지라”란 진리와 선으로부터 돌아섬에 대한 처벌을 의미한다. 그 이유가 “저주하는 것”은 자신의 자아를 돌려세우는 것을; 그러므로 처벌되어짐을; “분노함”은 진리로부터 돌아섬을, 그리고 “격노함”은 선으로부터 돌아섬이기 때문이다. “나는 그들을 야곱 안에서 가를 것이다, 그리고 그들을 이스라엘 안에서 흩을 것이다”란 진리들과 선들이 그들 교회의 내적, 외적 모두에서 더 이상 있지 않을 것을 의미한다. “가르고”, “흩음”은 그들로부터 분리해서 근절해버림을 표시한다; “야곱”은 교회의 외적 측면, “이스라엘”은 교회의 내적 측면이다.
이런 사항들이 위 예언에서 시므온과 레위에 관련해 말해지는 이유는 그들에 의해 일반적 측면에서는 교회의 진리와 선이 의미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진리와 선이 무익해지고 효능 없게 될 때, 더욱이 거짓과 악이 그것들의 자리를 메울 때, 그때 교회는 사멸한다. 이와 같은 사항이 위 야곱의 예언적 말들의 의미인 것이 분명한 이유는 야곱이 저주했음에도 시므온 지파와 레위 지파는 저주받지 않았다는 것, 특히 레위 지파는 성직 직분을 계승했다는 것, 시므온 지파는 다른 지파들과 같이 대우받았다는 사실 때문이다.

야곱의 아들들은 찔려 죽은 자들에게 왔다, 그리고 그 성을 약탈했다. 이는 이 모든 후손이 교리를 파괴했음을 의미한다. 이는 “야곱의 아들들”의 의미가 야곱의 후손이다로부터; “약탈함”의 의미가 파괴함이다로부터; 그리고 “성”의 의미가 교회의 교리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시므온과 레위가 성에 있는 모든 남자, 그리고 하몰과 세겜 또한 살해한 후, 그들은 나갔다, 그리고 그 다음 야곱의 아들들이 찔려죽은 자들에게 왔고 그 성을 약탈했다는 기록은 신비에 속하는 바, 이는 내적 의미로부터 살피지 않으면 분명해지지 않는다.
이 신비는 이렇다: 시므온과 레위에 의해 표현된 교회의 진리와 선이 소멸된 후, 그리고 거짓과 악이 그것의 자리를 차지한 후, 이때 나머지 야곱의 아들들에 의해 반대적 의미에서 의미되는 거짓들과 악들이 보태어졌다. 교회의 진리와 선이 소멸되자마자, 그들에 의해 표현되었던 일반적 측면에서의 신앙과 선행은 어떤 종류의 악들과 거짓들이 되고 만다, 여기에 거짓들과 악들이 추가되기까지 한다; 그 이유가 거짓들과 악들은 진리와 선이 타락되거나 소멸된 교회 안에서 자라오르기 때문이다. 이것이 시므온과 레위가 성의 남자들, 하몰과 세겜까지 살해하고, 디나를 데려 간 이후 야곱의 나머지 아들들이 찔려죽은 자들에게 와서 약탈하는 대목에 의해 의미되고 있다.
말씀 안에서 “찔려진 이들”이 소멸된 진리들과 선들을 의미하는 것은 아래 구절로부터 분명해진다:
너는 역겨운 싹틈 같이, 돌 구덩이 아래로 내던진 검에 찔려 살해된 자의 의복 같이, 발 아래 짓밟힌 주검 같이, 네 무덤의 안에서 밖으로 내던져졌다 (이. 14:19);
위는 바빌론에 대해서이다; “검에 찔린 이들”은 교회의 진리들을 모독해왔던 이들을 표시한다. 다시:
찔린 자가 밖으로 내던져지고 그들의 시체의 악취가 올라올 것이다 (이. 34:3);
교회에 감염된 거짓들과 악들을 취급하고 있다, 이것이 “찔린” 자에 의해 의미되고 있다.
에스겔서에서:
나라들의 폭력자들이 네 지혜의 아름다움에 맞서 그들의 검을 뽑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네 잘 생김을 모독할 것이다; 그들은 너로 구덩이 안으로 처넣을 것이다, 그리고 너는 바다의 한가운데 에서 찔림을 당한 이들의 죽음들 (같이) 죽을 것이다 (겔. 28:7, 8);
위는 두로의 제 일인 자에 관해서인데, 그들에 의해 진리와 선에 관한 지식들에서 제일 가는 것들이 의미된다; “바다의 한가운데에서 찔림을 당한 이들의 죽음을 죽는 것”은 기억 속의 지식들을 수단으로 거짓들을 부화하는 이들, 그렇게 해서 교회의 진리들을 더럽히는 이들을 표시한다.
다시:
이들은 지옥쪽으로, 검으로 찔려진 이들쪽으로 내려갈 것이다; 네가 에덴의 나무들을 가지고 더 낮은 것들의 땅쪽으로 내려가기를 만들겠다고 할 때, 너는 할례받지 않은 자의 한가운데에서, 검으로 찔려진 이들과 더불어 누울 것이다 (겔. 31:17, 18).
다시:
내려가서 할례받지 않은 자와 함께 눕는다; 그들은 검으로 찔려진 이들의 한가운데에 추락할 것이다; 용사 중의 제 일인 자가 지옥의 한가운데에서 그에게 이야기를 할 것이다 (겔. 32: 19-21);
위는 이집트와 바로에 대해서이다; “검으로 찔려진 이들”은 지식들을 통하여 미쳐버리게 된 이들을 표시한다, 이를 수단으로 그들은 자신들에 있는 교회의 진리의 신앙을 꺼지게 한다.
다윗서에서:
나는 구덩이로 내려가는 이들로 세어짐을 당했다; 나는 힘이 없는 사람 같이, 내버려진 죽은 자 같이, 무덤에 누운 찔린 자 같이, 하여 더 이상 기억되지 않는 자 같이, 당신의 손에 의해 절멸된 자 같이 되어버렸습니다 (시. 88:4, 5);
“지옥 안에 있는 찔리운 자들”, “구덩이 안에”, 그리고 “무덤 안에”는 거짓들과 악들을 수단으로 자신들 안에 있는 진리들과 선들을 파괴해버린 이들을 표시한다. 그들이 검에 찔려 죽었다는 이유만으로 그들이 지옥에 있는 것이 아닌 것만은 분명하다.
이사야서에서:
왁자지껄하던 성, 기뻐외치던 성, 그들이 검으로 찔려진 것이 아니다, 그리고 전쟁에서 죽임을 당한 것이 아니다; 너희 안에서 발견된 모두는 다함께 결박되었는데, 이들은 멀리 도망쳤었다 (이. 22:2, 3);
교회의 진리들이 보여질 수 없게 한 감각적인 것들로부터의 오류들에 관해 말해진다, 이에 관해 그들은 부정적인 의심 안에 있다, 그리고 “찔려지나 검으로가 아니다”라고 말해진다.
에스겔서에서:
나는 네 위에 검을 가져온다, 그리고 나는 너의 높은 장소(산당)들을 파괴한다, 그리고 너의 제단들은 파괴될 것이다, 그리고 너의 규례들은 깨어질 것이다, 그리고 나는 네 우상들 앞에 너의 찢기운 자들을 눕혀지게 할 것이다; 찢기운 자들이 네 한가운데에 엎드려질 때, 너는 내가 여호와임을 알 것이다; 찢기운 자들이 네 우상들 한가운데, 제단을 빙둘러 있게 될 때 너희는 (내가 여호와 임을) 인정할 것이다 (겔. 6:3, 4, 7, 13);
위에서 “찢기운 자들”은 교리의 거짓들 안에 있는 이들을 표시한다.
다시:
집을 더럽힌다, 그리고 찢겨진 자들을 가지고 뜰을 채운다; 그들이 밖으러 나가 성을 짓부셨다 (겔. 9:7);
위는 예언적 환상이다; “집을 더럽히고 찢겨진 자들을 가지고 뜰을 채운다”는 것은 선들과 진리들을 모독함을 표시한다. 다시:
너는 이 성에서 너의 찢기운 자들을 불어나게 했다, 그리고 너희는 찢기운 자로 거리들을 채웠다; 그러므로 주 여호비께서 말하셨다, 너의 찢기운 자들을 너는 그것의 한가운데에 놓았다, 그들은 육이다, 그리고 이것은 가마이다, 그리고 그분은 너희를 그것의 한가운데로부터 데려내오실 것이다 (겔. 6:3, 4, 7, 13);
“찢기운 자”란 거짓들과 악들을 가지고 자신들 안에 있는 교회의 진리들을 소멸해버린 이들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표현 교회에서의 경우, 찢기운 것을 만진 자는 불결했다, 이에 관해 모세의 책에서:
들판의 표면에서 검에 찔리운 자, 죽은 자, 인간의 뼈, 또는 무덤을 만진 자는 누구든지 칠일 동안 불결할 것이다 (민. 19:16, 18).
그러므로 요구 사항이 있고, 속죄(죄를 씻음)가 송아지를 수단으로 만들어졌다, 모세의 책에서:
만일 찔리운 자가 들판에서 뉘여 있는 것을 발견한다면, 그리고 그를 누가 쳐죽인지를 몰랐다면, 그때 성의 원로들과 재판관들이 나가서, 찔리운 자를 빙둘러 앉은 성읍들과의 거리를 재어보고, 가장 가까운 성의 원로들은 일을 시키지 않고, 멍에를 메어본 적이 없는 숫소의 암송아지를 가져오 고, 이것을 골짜기, 또는 강으로 데려가서, 송아지의 목을 벨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손을 송아지의 머리 위에서 씻을 것이다, 그리고 말하라, 우리의 손은 피를 뿌리지 않았다, 그리고 우리의 눈은 그것을 보지 않았다; 당신의 백성 이스라엘을 속죄하소서, 오 여호와시여, 그리고 당신의 백성 한가운데에서 순진한 피를 주지 마십시요; 그리고 피는 그들을 위해 속죄될 것이다 (신. 21:1-8).
위의 법들이 주어진 이유는 “찔린” 자에 의해 거짓과 악을 수단으로 교회의 진리가 왜곡되고, 파괴되고, 모독되는 것이 의미되기 때문인 것은 내적 의미를 살피면 확실해진다. “들판에서 찔려 뉘여 있는 자”라고 말해지는 이유는 “들판”이 교회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노동을 해보지 않은 암송아지란 순진 안에 있는 외적 인간의 순진을 의미한다. 이런 의미들이 알려지지 않으면, 속죄하는 과정에 결부된 것은 얼통당토한 것 같아 이해함은 커녕 놀람을 일으킬 수밖에 없다.

그 이유는 그들이 자기들의 누이를 더럽혔기 때문이다. 이는 그들이 신앙 속의 진리를 더럽혔음을 의미한다. 이는 “(몸을) 더럽힘”의 의미가 (명예를) 더럽힘이다로부터; 그리고 “누이”의 의미가 진리이다로부터, 여기서는 신앙 속의 진리인데, 그 이유는 여기서 누이는 신앙의 모든 것에 애착함이 의미되기 때문, 등등으로부터 알게 된다. 그들의 누이를 세겜이 더럽힘이 그들이 신앙의 진리를 더럽힘을 의미하는 이유는 모든 진리에 애착함, 고로 교회 자체가 그녀에 의해 의미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녀는 형제들에 의해 여인으로 세겜에 주어지지 않았는데, 그들과 더불어 더럽혀져 남아 있었기에, 그러므로 그녀의 형제가 반대적 의미를 표현하듯 그녀 역시 그러하였다, 하여 모든 거짓들에 애착함이 표현되었다, 고로 교회가 부패된 것이 표현되었다; 이리하여 “그들이 자기들의 누이를 더럽혔기 때문이다”는 말은 그들이 신앙의 진리를 더럽혔다가 의미되는 것이다.

그들의 양떼들과 목축들. 이는 그들이 합리적 선과 자연적 선을 파괴했음을 의미한다. 이는 “양떼”의 의미가 합리적 선이다로부터; 그리고 “목축”은 자연적 선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리고 그들의 나귀들. 이는 거기로부터, 즉 합리적, 자연적 선으로부터 파생된 진리들을 의미한다. 이는 “나귀”, 또는 “암나귀들의 아들(새끼)”, 또한 “노새”의 의미가 자연 평면 속의 진리와 합리성 속의 진리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리고 그 성에 있었던 것은 무엇이든지, 그리고 들판에 있었던 것은 무엇이든지, 그들은 가져갔다. 이는 교회 속의 모든 진리와 선을 의미한다. 이는 “성”의 의미가 교리, 고로 교회의 진리이다로부터; 그리고 “들판”의 의미가 선 측면에 관한 교회, 고로 교회의 선이다로부터; 고로 “성 안에 있는 것은 무엇이든, 그리고 들판에 있는 것은 무엇이든”은 교회의 모든 진리와 선을 표시한다.

그리고 모든 그들의 재물. 이는 그들이 획득해왔던 지식 속의 모든 주제(matter)들을 의미한다. 이는 “재물(wealth)”이 지식에 관한 주제들이다로부터 알게 되는데, 이는 말씀의 많은 구절로부터 분명해진다; 그 이유가 영적 재물, 고로 영적 의미에서 이해되는 재물은 이 외에 더 다른 것은 없기 때문이다. 영적 재물이 알려져 있는 만큼에서 지식에 관한 주제도 그 만큼 있다; 그리고 주님의 왕국에서 (고로 교회에서) 이것들이 재물을 구성하는데, 이에 관하여 주님의 신성한 자비로부터 다른 지면에서 별도로 살필 기회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모든 갓난 아이. 이는 모든 순진을 의미한다. 이는 “갓난 아이”의 의미가 순진이다로부터 알려진다.

그리고 그들의 여인들. 이는 선행을 의미한다. 이는 “여성”, “여인”, “아내”의 의미가 진리에 애착함과 선에 애착함이다로 알게 된다. 진리에 애착함은 배우자가 언급될 때, 즉 배우자가 “남편”이라 불리울 때이다; 그리고 선에 애착함은 배우자에 관한 언급이 없이 “남자(man, vir)”이라는 표현이 사용될 경우이다. 이 구절의 경우, “여인”이 선에 애착함을 표시하는 이유는 그녀들이 진리들이 의미되는 성의 남자들의 여인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성은 모든 곳에서 세겜의 성이라 불리우는데, 이 세겜을 수단으로 고대인들 사이에 있는 교회의 진리가 표현되었다. 영적 선에 애착함은 선행과 같은 말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여인”은 선행이 의미된다.

그들은 포로로, 전리품으로 만들었다. 이는 그들은 그것들을 홀랑 벗겼고 악용했음을 의미한다. 이는 시리즈의 의미들부터 분명해진다.

그리고 그 집에 있었던 모든 것. 이는 교회 속의 모든 것을 의미한다. 이는 “집”의 의미가 선 측면에서의 교회이다로부터, 고로 교회의 모든 것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더불어 이 구절의 끝부분에서 집의 언급이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30-31절. 그리고 야곱은 시므온과 레위에게 말했다, 너희는 나에게 화를 끼쳐 나로 하여금 이 토지의 주민, 가나안족과 브리스족에게 악취를 내게 하였다. 그리고 나는 숫자에서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그리고 그들은 다함께 합세해 나를 칠 것이다, 그리고 나는 멸망할 것이다, 나와 내 집도 말이다. 31 그리고 그들이 말했다, 그가 우리의 누이를 창녀 같이 취급함이 옳은 것입니까?”

그리고 야곱은 말했다. 이는 외적인 고대 교회를 의미한다. 이는 야곱이 표현함이 고대 교회이다로부터 분명해진다. 그리고 고대 교회, 모두 각각의 교회 같이 외적 측면과 내적 측면을 지니는 바, 말씀에서 야곱에 의해서는 외적 교회가, 이스라엘에 의해서는 내적 교회가 표현되어진다.

시므온과 레위에게. 이는 영적인 것들과 천적인 것들의 표현을 의미한다. 이는 시므온의 표현함이 신앙, 고로 반대적 의미는 거짓이다로부터; 레위가 표현함은 사랑인데, 반대적 의미로는 악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러므로 여기서 그들은 영적이고 천적인 것들의 표현을 표시하는데, 그 이유는 신앙 속의 것들은 영적인 것들을, 사랑 속의 것들은 천적인 것들이라 불리우기 때문이다. 시므온과 레위가 이런 것들의 “표현”을 의미한다고 말한 이유는 그들에 의해 어떤 인물을 의미하지 않고 어떤 것(thing)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고로 그들이 표현한 것은 실체가 없는 것, 즉 비 물질인 것이다. 야곱의 후손들의 품질이 교회를 설립할 수 없는 지경이라 하더라도, 교회를 표현함이 야곱의 후손들 사이에서 가능할 수 있게 하는 것은 그들이 주님에 의해 명령된 의례를 바깥쪽 형체에서 엄격히 준수하는 것이다. 그 이유가 여기서 교회를 표현한다고 말하는 범위는 교회의 껍질만을 말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구절에서도 “시므온과 레위”에 의해 영적, 천적인 것들이 의미된다.

너희는 나에게 화를 끼쳐 나로 하여금 이 토지의 거주민에게 악취를 내게 하였다. 이는 고대 교회 속에 있었던 이들이 그들을 몹시 싫어했을 것임을 의미한다. 이는 “나에게 화를 끼쳐, 나로 냄새를 풍기게 만들었다”의 의미가 그들로 몹시 싫어하게 느끼게 함이다로부터; 그리고 “토지의 거주민”의 의미가 여기서는 고대 교회 속에 있는 이들이다로부터 알려진다. 그 이유가 “토지”에 의해 교회가 의미되기 때문이다, 고로 “토지의 거주민들”에 의해 교회 속에 있는 이들, 여기서는 고대 교회 속에 있는 이들이 의미되는 이유는 이 교회가 가나안의 토지에 있는 몇 나라들 사이에 잔존하였기 때문이다. 이 고대 교회가 모두 멸해질 때까지 야곱으로부터 튀어나온 사람들 사이에 표현뿐인 교회의 출현은 있지 않았다. 다시 말해 창세기 15:16에서 말해진 바대로, 토지의 거주민의 불법이 극점에 이를 때까지 야곱의 후손들의 가나안의 토지로의 입장은 승인되어지지 아니하였다; 그 이유가 이전 것이 황폐될 때까지 새로운 교회의 출현은 없기 때문이다.

가나안족과 브리스족에게. 이는 선과 진리 안에 있는 이들을 의미한다. 이는 “가나안족”의 의미가 교회의 선 안에 있는 이들을; “브리스족”은 교회의 진리 안에 있는 이들을 의미함에서 알게 된다. 두 민족이 이런 의미를 가지는 이유는 고대 교회가 거기서 그들 사이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가나안의 토지에 태고 교회의 사람이 존재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고대 교회의 사람들, 특히 “히브리”라 일컬어진 고대 교회인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가나안의 토지의 거주민들은 일반적으로 “히브리인들”이라 불리운 이유 때문이다 (창. 40:15), 그리고 또한 그들은 제단들을 가졌고, 제물을 바쳤다. 그러므로 그들이 우상숭배자가 된 이후 그 제단을 파괴함이 말씀 안에서도 자주 언급되고 있다. 그러므로 교회, 또는 교회의 어떤 것이 남아있는 한, 교회의 선이 “가나안족”에 의해, 교회의 진리가 “브리스족”에 의해 의미된다. 그러나 그들과 더불은 교회의 어떤 것이 극점에 도달할 경우, 악이 “가나안족”에 의해, 거짓은 “브리스족”에 의해 의미된다.

그리고 나는 숫자에서 [적은 바]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이는 그것은 쉬울 것임을 의미한다. 이는 “숫자에서 적은 바 죽을 수밖에 없다”의 표현의 의미로부터 알게 된다; 그러나 내적 의미에서의 시리즈에 일치할 경우, 이는 양이 아닌 질을 말하는 바, 쉬운 것을 의미한다. 이를 뒤집어 말하여, “그들이 모이면 숫자가 많다”라고 읽을 수도 있는 바, 야곱쪽은 이들에게 쉽게 멸망당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은 다함께 모여 나를 칠 것이다, 그리고 나는 파괴될 것이다. 이는 그러므로 해서 고대 교회는 멸해질 것임을 의미한다. 이는 “다함께 모임”, “나를 침”, “파괴됨”의 의미가 결과적으로 멸망함을 예상하고 있기 때문이다. 고대 교회가 뜻해지는 이유는 야곱이 자신과 자신의 집을 두고 말하기 때문인데, 야곱은 여기서 고대 교회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와 내 집도. 이는 진리와 선에 관하여를 의미한다. 여기서 “나”는 야곱인데, 여기서 그의 표현은 진리 측면에 관련되는 교회인데, 이는 앞에서 많이 살펴왔다; 즉 그는 자연 평면에 있는 신성한 진리를 표현한다는 것이다. 지금 표현함의 측면만 말해보면, 그는 최고 의미에서 자연 속의 신성한 진리에 관련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