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위든볽, 그는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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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위든볽, 그는 누구인가?

한스 안데르센(Hans Andersen)의 아름다운 이야기 중 하나이다. 어느 동산에서 자기들을 위해서는 너무나 작았던 화분을 결국 벗어나 자란 우람한 나무에 관한 묘사에서 이런 대목이 있다. 그들의 뿌리는 그 화분 안에서 잔인하게 옥죄어 엉켜있었다; 그럼에도 그 나무는 태양쪽으로 자신들을 용감하게 쳐들고, 가지들을 내뻗어, 그들의 꽃들을 만발하게 한 결과, 답답해 죽을 수 밖에 없는 운명은 자기들의 황금빛 열매와 더불어 새로와졌다. 그들의 붙임성 있는 팔들에는 노래하는 많은 새들이 찾아왔다. 그리고 그 나무의 가슴 깊은 곳에는 언제나 기쁨의 노래가, 재생의 즐거움이 그치지 않았다. 마침내 그 나무는 자기들을 감금했던 단단하고 차거운 쇠고랑을 부수고, 자기들의 힘있는 뿌리들은 자유의 달콤함을 만끽하며 동산으로 뻗어나갔다.
나의 생각에서 이 이상한 동산은 타이탄의 천재 이매뉴얼 스위든볽을 자라게 한 18세기를 상징한다고 여겨졌다. 어떤 이는 이 18세기를 이성의 시대라 부른다, 그리고 이 시대의 특성을 매우 냉혹한 시대, 인류 역사에서 가장 의기소침한 때로 특정지우고 있다. 사실인즉, 진보는 사방 각처에서 놀라울만큼 있어졌다. 위대한 철학자들, 그리고 정치가들, 그리고 두려움 없는 탐구가 과학에 있었다. 정부의 조직은 더 향상되었고, 봉건제도는 저지되었으며, 큰 도로들은 여느 이전 보다 훨신 안전해졌다. 중세 사상에 대한 불길 같은 열정은 엄한 예법과 이성의 쇠지휘봉에 의해 억제 당하고 말았다.
그러나 이 시대 앞의 암흑 시대에서 같이 이 시대에서도, 사악하고 압제하는 슬픔의 분위기와 찌무룩한 권력이양도 있었다. 테인(Taine) 같은 유능한 작가들은 그의 문학에 관한 역사 안에 어떻게 쓴맛의 신학이 인간을 마치 혐오스러운 죄의 후손으로 간주했고, 이 세상을 하느님의 분노에 내던졌는지를 적어두고 있다. 옛날 성인들이 중요시했었던 온화한 천사인 선행(Charity)이 대수롭지 않은 차원으로 격하되어 내밀렸다; 그리고 믿음 만(faith alone)을 추켜세웠다. 엄밀히 보면 신앙은 선행으로부터 출현해야 진짜 신앙일진대 그들이 내세운 신앙은 신앙이 아니고. 오히려 믿음 만이 천국 입장의 필수요건이라 억지부리는 자아 중심적 가설이라 말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이 신학은 사람들로 하여금 유용한 모든 일은 무익한듯, 신체적 모든 불행들은 벌받아서 그렇게 된듯 간주하게 만들어버렸다. 결국 여느 밤중들 보다 가장 깜깜한 밤, 무식함과 무감각함이 사랑에 굶주린 가슴을 지닌 세계를 덮어 씌웠다.
위와 같은 거친 사회적 분위기로부터 떠나 스위든볽의 천재성은 자랐고, 이 천재성은 사회에 족쇄를 채운 이 신학의 궤변을 부수도록 운명지어져 있었다. 마치 동화 속의 우람한 나무가 자기들을 옥죄었던 화분을 파열한 것과 대등하다. 깊이 생각하는 사람이 “옥죄인 세상을 풀어”주는 경우가 많을진대, 스위든볽의 시대 주위에 있던 몇 명의 인물들과 역사적 사건들 몇 개 정도는 다시 짚어보는 것도 도움이 될 것이라 여겨진다.
스위든볽이 태어난 것은 오랫동안 옛 세계를 주름잡았던 거인이라 할 수 있는 스콜라 철학에 처음으로 효과적인 펀치를 날린 영웅적 챔피언 쟌 아모스 코메니우스(John Amos Comeius)가 죽고 얼마되지 않아서였다. 스위든볽이 출생했던 1688년은 비록 무혈 혁명이다해도 영국의 운명을 가름하는 해였다. 그는 루이(Louis) 14세의 통치 기간 중에서도 가장 세력을 과시한 시기 동안 살았다. 그리고 그는 라 로쉘(La Rochelle)에 관한 기억이 아직도 모든 신교도들의 마음에 생생하게, 쓰라림 그대로 있었던 시기에 살았다. 그는 스위든의 광적인 왕, 챨스(Chales)의 놀랄만한 원정을 목격하였다. 그는 스웨덴의 식물학자 린네(Linnaeus)와 동시대 사람이었다. 그의 마지막 여러 년도에 프랑스에서는 루소(Rousseau)가 자연에 의거한 교육 원리를 부르짖었고, 디데롯(Diderot)은 감각들에 관한 자기 철학을 발전시켜 맹인도 가르쳐질 수 있다고 선포하였다. 기존의 전통적 사회 관습이 무너져내리고, 앞을 향하고 있는 그의 마음이 그리워한 시대가 갑작스럽게 돌진하는 시대를 인생으로 맞이한 스위든볽 같은 사람도 흔치 않을 것이다. 그가 처했던 주변 여건을 더 고려할 수록 그가 어떻게 그의 교회, 또는 그의 시대의 표준들과 공통되는 것이 아주 적었다는 상반된 결론에 이르게하는 바, 이런 스위든볽의 성장 배경은 기적으로 처리할 수 밖에 없는 듯하다. 나는 그로하여금 가장 독립적인 종교적 생각을 출발하게 한 것을 설명해줄 것같이 보이는 어떤 것도 그의 출생 환경과 어릴적 훈련에서는 발견하지 못해왔다. 여타 수많은 사람들이 경건한 부모로부터 태어나 스위든볽이 그러했듯 내노라하는 교육을 받았지만, 그들은 새로운 생각 내지 인류의 행복을 증진되게 하는데 이바지한 경우가 극히 적은 것이 아닌가! 이와달리 천사가 우리들로 하여금 눈치채지 않게 하면서 환대한 저 천재의 경우는 위 사람들과는 너무나 판이했다.
스위든볽의 고향은 스위든의 스톡호름(Stockholm)에 있었다. 그의 부모는 성실한 사람들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루터교파의 감독이면서 신학교의 교수였고, 영적 통찰력이 있었다. 알려진 바, 마틴 루터가 수도 생활 때에 영들을 보았고 영들의 음성을 들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그의 많은 추종자들이 자기들도 또다른 세계의 무엇인가를 한웅큼 쥐어 보겠다하여 격렬한 단식과 밤샘을 시도하기도 했다. 소년 이매뉴얼도 위와 비슷한 경험들을 가졌다고 전해지고 있기도하다. 그의 후반기 인생에서 그가 친구에게 이런 편지를 보낸 적이 있다; “네 살부터 열 살까지 나는 하느님에 관한 생각, 구원과 인간의 영적 경험들에 관련된 것에 몰두했었다; 그리고 몇 번의 경우 나는 나의 부모가 기이히 여긴 것들에 관한 사항들을 밝히 알아냈는 바, 내 부모는 이를 두고 필시 천사가 너를 통하여 말했음이 확실하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비록 그의 아버지가 그의 경험을 잘 헤아렸다 할지라도 그의 어머니는 단호하게 이의를 제기했다. 그래서 그녀는 남편에게 그가 “천국을 여행하는 것은 반드시 멈추어지게 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그 뒤 이매뉴얼은 그가 56세 될 때까지 영계로부터 어떤 빛도 보지 않았고, 어떤 소리도 듣지 않았다. 그의 종교적 저술을 참고해보면 위와 같은 영적 체험은 어린아이나 부적당한 남자나 여자에게 쓸모 없다는 것, 이런 환상들을 보려 애쓰는 것, 등은 매우 유해하다고 그의 독자들에게 경고하고 있다.
그의 어린 시절은 그의 불가사이한 삶을 위해 바람직한 아름다운 시작에 해당되었다. 그와 그의 아버지는 꾸준한 동료 관계였다. 그들 둘은 스톡호름 주위의 언덕들을 올라갔다. 그리고 협만(fjord)을 탐사했고, 이끼나 꽃, 그리고 빛을 내는 색깔 있는 돌들을 수집하기도 했다. 그들이 집에 돌아왔을 때, 이 어린아이는 옥외 경험들에 관하여 긴 보고서들을 쓰곤 했다. 그런 이유가 그는 어린 시절부터 학자였기 때문이다. 그의 마음은 언제나 자기 신체의 한계점을 넘어 내달렸다. 그렇다해도 여느 조숙한 젊은 이 같지 않게 그는 강하고 건강하게 성장했고, 그의 고상하고 남자다운 태도는 호평을 받았다.
그는 그 시대 그 나라에서 가능할 수 있는 최고의 교육을 받았다. 그는 웁살라(Upsala) 대학에 출석했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그의 초기 작품들은 그의 시적 재능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가 집중한 학문은 수학과 기계학이었다. 그는 미적분학의 아주 곤란한 풀이 과정을 단순하게 처리하여 그의 지도 교사를 놀라게 했다. 그리고 그의 급우들은 학문의 미로를 꿰어 헤쳐나가는데 매우 빠른 그의 지성을 뒤쫓지 못하는 경우가 자주 있었다고 말해진다. 그래서인지 그들은 그를 자기들과는 매우 다른 사람으로 간주하고 그에 관해 말할 때는 작은 어조로 했다 한다. 그는 엄격한 신조와 엄숙한 예법 속에서 양육되었는 바 이런 근엄함이 밖으로 노출되었지만 그런 자신을 본인은 의식하지 못한 듯 보여진다. 그의 얼굴은 준엄한 것으로 묘사되었는데 실상은 누구의 접근을 제지하고자 하는 의도는 그의 심중에 전혀 없다. 그의 얼굴형은 조각상 타입이었지만 그의 인물됨에서는 잘생기고 위풍당당하였다. 그는 젊은이들이 좋아하는 스포츠나 어떤 오락 같은 것에 빠져 있는 때가 없었던 것 같다. 그런 탓에서인지는 모르나 그에게 유일하게 열정을 느끼게 했던 수줍은 소녀와의 관계를 한참 뒤 이성간의 사랑으로 진전시킬 수 없었던 것 같다. 그는 그녀 대신 그녀의 아버지, 저명한 폴헤임(Polheim)에게 갔다. 그리하여 자기의 사랑을 도표들을 수단으로 입증했었을는지 모른다. 그래서인지 그녀의 아버지는 소녀가 삼년 내에 돌아갈 수 있게 보증하겠노라고 이 젊은 이에게 약속해주기도 했다. 그러나 이 소녀는 심히 놀랬고, 그녀의 오빠는 마지막으로 그녀를 포기하라고 스위든볽을 설득했다. 그녀에 대한 그의 사랑은 그 후에도 잊은 적이 없었다 한다.
그는 우수한 성적으로 웁살라 대학을 졸업했고, 1709년, 그의 나이 21세 때에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 뒤 그는 외국 나라들을 여행했는데, 그 목적은 여가를 즐기기 위함이 아니라 배우기 위해서였다. 랍삼(Robsahm)은 자기 메모 수첩에서 스위든볽에 관해 이렇게 말한다. “그는 배워 익힌 언어들에 더하여 잘 이해했던 외국 언어에는 프랑스, 영어, 네델란드어, 독일어, 이탈리아어가 있었는데, 그런 이유는 그가 이런 나라들을 여행했기 때문이다.”
그의 아버지는 그가 외교 업무에 종사하기를 원했으나, 그 대신 그는 과학의 길을 선택했다. 그는 유럽 군주국에게 자기를 소개하는 편지도 지니고 있었지만 조용히 그것들을 무시해버리고 대신 그 시대 저명한 학자들을 찾아 나섰다. 간혹 그는 미리 통보함도 없이 학자들을 찾아가 면담을 요청하기도 했다. 어쨌든 그에게는 그들의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어떤 것이 있었다. 그래서인지 그들은 그의 요청을 묵살한 적이 없었다. 그의 한가지 바램, 그의 사명은 배움, 즉 알아가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그는 자기에게 나누어 줄 새로운 사상들, 방법들, 또는 발달 과정을 가졌던 많은 사람에게서 공물을 거두어들이듯 흡수했다.
그의 심오한 학식은 그를 스위든의 찰스 12세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던듯 보이는 크리스토퍼 폴헤임(Christoper Polheim)과 가까운 협력 관계를 맺어지게 했다. 이런 관계에서 스위든볽은 왕에게 소개되어졌고, 왕은 그를 스위든의 광산 대학의 분석관으로 임명했는데, 이 공직의 주 임무는 채광과 제련에 관한 최고의 방법을 연구하고 권면하는 것이었다. (이 당시 광산의 채굴은 왕권에 직속되어 있었다. 그 이유가 국가 재원 확보에 매우 중요한 부서로 어쩌면 요즈음 재무부나 한국 은행 수준에 걸맞을지 모른다) 이 임명과 더불어 스위든볽은 그의 활동 영역이 놀라울 정도로 커지고 다양해진 시기로 진입하였다. 그는 자기 직책을 성실함에 지혜를 추가해 마무리지어 갔다. 그뿐 아니라 그는 과학의 전 분야에서 연구를 진행했다. 독립적으로 깊이 생각하는 사람다웁게 그는 발견을 위한 강력하고 독창성이 풍부한 비범한 재능의 충동을 따라갔다. 그리하여 가능만하다면 자연의 가장 깊은 비밀들까지 밝혀보려 했다. 그는 아침의 새의 노래들과 별들과 친숙했던 만큼, 조선소나 작업장, 용광로, 채석장과도 친밀했다. 그가 어스레한 구석에서 활짝 핀 꽃들을 발견했을 때, 그 꽃들은 그의 발걸음이 묻었던 위엄있는 산들이 지닌 경이로움 만큼이나 큰 비밀들을 그에게 말해주었다. 그의 재능은 실용성과 아름다움, 수학과 시, 발명과 문필력 등이 함께 어우러진 매우 드문 특징을 지녔다.
1718년, 그는 프레디맄샬(Frederickshall)을 포위 공격함에서 직책을 수행하고자 그의 기계학적 기술을 참조했다. 이 때 그는 기계들을 만들어서 몇척의 군함을 언덕과 계곡을 가로질러 육지 이 끝에서 저 끝으로 14마일의 거리를 운반한 적도 있었다. 그는 기계를 이용한 탈 것들, 즉 내부가 복잡히 얽힌 탈 것들, 비행하는 도구, 바다 밑을 항해하는 배 같은 것을 도안했다. 따라서 그는 자동차나 비행기, 잠수함의 출현을 예고한 셈이었다. 그는 물을 이용해 공기를 응축하고 빼내는 새로운 기계들을 만들기도 했다. 그는 음악에 친숙하지 않은 사람도 악보에 명기된 모든 종류의 곡조들을 연주하도록 해 줄 보편적인 음악 도구를 만들려 노력하기도 했다. 그는 인간의 욕구와 애착들을 분석을 수단으로 알아내는 방법을 연구했다.
그는 일 분에 수천 발을 발사할 수 있는 공기총을 고안했다. 그는 들어 올리는 다리들, 여타 기계학적인 도구들을 위한 계획들을 세웠다. 근대에 이르러서야 가능했던 과학과 예술이 서로 밀접하게 관계를 가지는 경이로운 시스템(system)의 모양들이 스위든볽의 머리 안에서는 이미 그려져 있었다. 그는 십진법이 실제에서 어떻게 이용되어질 수 있는가를 보여주기도 했다. 그는 수은 자력(mercurical magnetism), 고생물학(palaeontology), 생물학 분야 등에서도 1.5세기 이후에야 발달될 이론과 지식의 한웅큼을 이미 손에 쥐고 있었다; 그는 라플레이스(Laplace) 보다 앞서 성운설과 원자 이론을 약술하였다.
스위든볽은 자기의 재능이 가져다 줄 수 있는 당연한 큰 부유함이나 명성에 소경일리 만무했겠지만, 그는 자기 입술까지 들어 올렸던 행복의 잔을 거절했다. 인류의 슬픔들과 압제받는 것이 그의 가슴을 무겁게 짓누르며 놓여 있었다. 겸허하고 부끄러워함을 지닌 그의 혼은 수천 만의 인간 존재들에 저주를 비가 쏟아내리듯 퍼붓는 신학의 잔인함들을 바라보게 되었다. 그 당시 때맞추듯 영국에서 요나단 에드워드(Jonathan Edwards)가 지옥불과 공포를 설교했고, 회개 없이 죽은 셀 수 없는 아기들은 영원히 고통을 받는다고도 설교했다. 하느님의 말씀을 저주로 바꾸어 놓는 악의 교묘함, 근대인인 우리로서는 감히 상상조차도 불가능하지 않을까? 그들의 신학 이론은 천국이란 괴상한 곳, 지옥은 말할 필요도 없는 지독한 곳, 인간 삶은 그저 기나긴 고난의 행렬일 뿐이라고 결론짓게 만들 뿐이었다. 그래서 스위든볽은 이렇게 중얼거렸다. “이 섬뜩한 그림자가 온 세상을 뒤덮고 있는 이 때 내가 애써 획득한 이 모든 지식들이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그는 자기가 이룩한 명성을 다 뒤로 밀치고, 자기 인생의 삼분의 일에 해당하는 29년을 비교적 가난한 살림을 꾸렸지만, 자비로움으로 자기 주위 동료의 상처받은 혼들을 위로하면서 (그들에게) 신앙과 생활의 합리적 교리(를 전해주었다).
위와 같은 애씀 외에, 틈틈이 그는 자기에게 밀려들어오는 많은 생각들을 글로 썼다. 그리하여 종교 분야에서의 탐구를 시작하기 앞서 이미 60권이 넘는 책들과 팜플릿들을 제작했다. 이 시기에 있은 위대한 작품 사이에는 “자연적인 것들 속의 첫째 원리들”, “뇌”, “동물 왕국의 경제”, 그리고 “합리적 심리학” 등이 있다.
이러한 과학적 제작물에 관해 에머슨(Emerson)은 이렇게 말한다. “그는 19세기에나 있음직할 과학물들을 미리 내다본듯 여겨진다…그의 저술들은 고되게 독학하는 학생에게 만족스런 도서관이 되어줄 수 있을지 모른다; 이 도서관의 책들 중 하나로 ‘동물 왕국의 경제’가 있는데, 이 책은 생각함에 위엄을 받쳐주는 스타일에 의해 쓰여 인류를 명예롭게 하고 있다. 한마디로 ‘동물 왕국’은 경이로운 가치를 지닌 책이다. 이 책은 과학과 혼이 서로에게 오랫동안 뒤엉킨 상태였을 뿐인 것을 다시 하나로 놓는 아주 높은 목적을 지닌 책이다. 이 책은 해부학자가 인간 신체를 아주 수준 높은 시적 형태로 기록한 책이다. 통상 대단히 무미 건조하고 불쾌감을 줄 뿐인 주제가 대담하고 찬란히 빛나게 하는 방식으로 취급되었는 바 이런 측면에서 이를 능가할 책은 없을 것이다.”
알버트 후바드(Albert Hubbard)는 “자연적인 것들 속의 첫째 원리들”에 관련해 다윈(Dawin)은 이 책을 아주 꼼꼼히 읽었는듯 여겨진다 라고 말한다. 여하튼 그는 바위에 붙은 조그만 이끼에서 숲의 시작을 보았는 바, 진화의 어떤 것을 미리 예측하고 있었다. 또한 그는 성경의 글자 뜻 그대로의 창조 사건이 과학적 사실들과 비추어 모순되는 바 한쪽으로 내밀치기도 했다. 창세기에 관한 그의 태도는 이 후 그의 어떤 종교 저술들에서도 바꾼 적이 없음을 이 대목에 첨부해두어야 독자들에게 보탬이 될 것 같다. 사실 그는 오랫동안 존경받아 온 글자 직역(해석)주의에 냉소를 보내고 뜯어내었다. 동시에 그가 성경에서 발견한 것은 이 창조 이야기는 물리적 창조와는 아무 연관이 없다는 것, 대신 인간 혼의 창조에 관한 비유인데, 이것은 인류에게 아주 오랜 세월 잊혀진채 있었던 대화체이다는 것, 소위 태고적 스타일(설화체)에 속한다는 것이다.
수학, 기계학, 광산학 등등 외에 스위든볽은 그의 작품들에서 화학, 해부학, 지질학에서도 깊은 지식이 있음을, 그리고 음악을 애호했음도 보여준다. 그의 철학적 주제들은 위와 대등하게 다각도에 걸처 있었다. 그럼에도 그는 “사회에 유익할 모든 일에 자신을 내놓기 위해” 시간을 배정하고 있었는듯 하다. 여러 해 동안 그는 스위든의 국회 회원이었고, 국가에 대한 괄목할 만한 그의 봉사 정신 때문에 그는 아주 높은 영예를 받았다. 많은 명예직이 그에게 수여되었다. 한 예로 1724년 웁살라 대학 이사회는 그를 순수 수학 교수로 임용하고자 초대했다. 그러나 그는 사양했다. 그는 세인트 피러스버그, 웁살라, 스톡호름에 있는 여러 학회의 회원으로 초대되었다. 그의 초상화는 명예 회원의 일원으로서 스톡호름에 있는 왕실 과학 아카데미의 회관, 리내어스의 초상화 근처에 걸려있다.
스위든볽의 일생, 한마디로, 일, 일, 오로지 일 뿐인듯 보여진다. 그는 재정적으로 자립하였는데, 오히려 이것은 그로 하여금 더욱 일을 완성하도록 자극제 역활을 해주었을 뿐이다. 지위여하를 막론하고 모든 이 각자는 이기심 없는 헌신이나 자신의 고상한 인격에 대한 증거들을 낳기 마련이다. 그는 나이 많아짐에 따라 그의 상냥한 예절은 그와 절친한 모든 친구들에게 사랑받는 계기가 되었고 그의 젊은 시절 그의 얼굴에 나타난 엄중함도 눈녹듯 사라지고 말았다. 그러나 그는 실감나는 우정 관계는 가져보질 못했던 것 같다. 그렇게 된 이유가 그는 자기와 친숙했던 어떤 주제를 두고 그의 동료들과 대화할 때 조차도 그의 생각은 이미 사다리 높은 곳에 올라 앉은 격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의 저서를 타인에게 추천은 하였으나 정작 자신들은 읽으려 시도하지 않았다. 이 거대한 발자국을 뒤쫓아 사색의 위쪽 영역 안으로 들어가려하는 자는 아무도 없었고, 아마 들어갈 수도 없었을런지 모른다. 그는 소경에게는 눈이었고, 귀먹어리에게는 귀였고, 그들이 이해할 수 없었던 언어로 광야에서 외치는 목소리였다. 빛과 소리의 세계로부터 고립된 내 신체 조건은 그의 특이한 상황을 예리하게 느끼게한듯 여겨진다. 어쨌든 나는 그가 지상의 고독감 그 이상으로 외로워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세상은 그에게 생소한듯 비쳐졌을지 모른다. 그 이유는 그가 타인에 비해 과잉 성장해갔기 때문이다. 영혼의 급속한 성장에 비해 육체의 성장은 너무 느린 셈이어서 육체는 감옥의 가로장이 되어 영혼을 내려눌렀다. 아마 이를 견뎌낼 자 아무도 없었을 것이다. 그의 짐을 가볍게 해주도록 그와 비슷한 총명을 지녔다고 보증되는 자가 그의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는 자기 인생을 배움에 내던졌었다. 그는 그의 거대한 지식을 가지고 무엇을 할 수 있었을까? 그는 자신이 어려운 날들을 맞이했을 때 더 많은 기회가 주어지고 더 많은 빛을 받게되어 오히려 그 곤경을 반겼을지도 모른다. 한 가지 나로서 의문된 것은 그가 영적 계발이 있은 이 후 집에서도 꾸준히 평온을 유지해 나갔을지 이다.
1744년도 쯤에서 큰 변화가 스위든볽에게 왔다. 자연계의 사실들을 예리하게 뚫어보는 관찰자, 마음 속의 것들을 분석하는 이 사람은 사물 속의 영적인 것을 관찰하는 높은 능력들을 받게 되었다; 그의 영의 감각들은 영적 세계에 있는 실제들을 인식하도록 생명이 주어졌다. 그와 동시대 사람인 랍삼(Robsahm)은 자기가 스위든볽에게 물어보았던 것, 즉 “어디서, 어떻게, 천국에서, 지옥에서, 영들의 세계에서 거행되는 것들을 보고 듣도록 당신에게 수여되었소?” 라는 질문을 기록해두고 있다. 이 질문의 대답인즉, 밤에 어떤 이가 나에게 와서 말했다는 것, “그분은 주 하느님, 세상의 창조자, 그리고 구속자이시다는 것, 그리고 그분은 인간에게 성경의 영적 의미를 설명하려고 나를 선택했다는 것, 그리고 내가 이 주제에 관해 쓰게 될 때 그분 자신이 나에게 이 주제를 설명하시겠다는 것; 같은 날 밤에 내가 그것들의 실제, 즉 영들의 세계, 천국과 지옥을 통째로 나에게 열어주어 나로 확신하게 하셨다는 것, 그리고 그분은 내가 거기서 서로 다른 생활 조건에 있었던 내가 아는 사람들을 인식하게 하셨다는 것. 이 날로부터 나는 세상적인 모든 과학 연구를 포기했고, 주님께서 나에게 쓰라고 명령하신 것에 따라 영적인 것들에 온 힘을 모았다. 그 후 주님은 날마다 아주 자주, 내 눈을 열어 주셨는데, 때로는 한낮에도 나는 다른 세계를 볼 수 있었다, 더구나 완전히 깨어 있는 상태에서도 천사들과 영인들과 대화할 수 있었다.” 1766년 9월, 스위든볽은 시.에프. 오이팅거(C.F. Oetinger)에게 이렇게 적어 보냈다. “주님 자신께서 나에게 나타나셨다. 그리고 그분은 내가 지금 하고 있는 것들을 하시기 위해 나를 보냈다. 그리고 이 목적을 위해 그분은 내 마음의 내면들, 곧 내 영 속의 것들을 여셨다. 그리하여 나는 영계에 있는 것들을 보게 되었고, 거기 있는 이들의 소리를 듣는다. 나는 이 특전을 20년 동안 지녀왔었음을 엄숙히 증거한다.” 이 특별한 영들의 교제(intercourse)는 그가 런던에 일시 체류한 때인 1772년 3월 29일 그가 죽음을 맞는 날까지 계속되었다.
위와 같은 스위든볽의 경험을 숙지해보면서 나도 매우 작은 부분일지라도 위 그의 편지가 의도한 바가 무엇인지 감지할 수 있는 능력이 특이하게 있는 것 같음을 나는 느끼고 있었다. 거의 6년 동안 나는 자연 또는 마음 또는 죽음 또는 하느님, 무엇에 관한 것이든 그에 대한 개념들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나는 내 몸이 지시하는 그대로 생각했다. 단 하나의 예외도 없이 그 때의 내 기억들은 촉감을 수단으로 한 것 뿐이었다. 30년 동안 나는 새 이론의 빛에서 있게 된 내 발달 국면을 검사했고 또 검사했는 바, 나는 내가 말하는 것에서 틀렸다고 여겨지는 것이 없음을 확신했다. 나는 내가 먹을 것이나 따뜻한 곳을 찾는데 있어 동물처럼 재촉했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나는 울었던 것을 기억하는데, 그 울음은 내가 눈물이 나서 야기된 슬픔이 아니었다; 나는 발로 찼다, 그리고 나는 그것을 신체적으로 상기했기 때문에 그 행동은 내가 화났다는 것을 알게 해주었다. 나는 내 주변에 있는 것들을 흉내 냈었는데, 즉 내가 먹을 것을 윈했을 때를 위한 표시, 또는 내 어머니의 농장에서 달걀을 찾는 것을 도왔던 때를 기억해두기 위한 표시들을 만들어 두려 했었다. 오로지 육체적 기억들 뿐인 이 별난 행동에는 정서적이거나 합리적 생각 같은 것의 자잘한 한 조각도 있지 않았다. 나는 땅 속의 의식 없는 흙덩이 수준에 불과했다. 그 다음 갑작스러웠기 때문에 나는 언제, 어디서 어떻게 인지 알지 못했지만, 어쨌든 내 두뇌가 또 다른 마음과 충돌했다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나는 언어에, 지식에, 사랑에, 자연에 관한 통상적 개념들에, 선과 악의 일반 개념에 대해 깨어나졌다. 나는 존재하지 않았음으로부터 인간의 삶으로 실제로 들리워졌다. 나는 스위든볽이 지상 경험과 동시에 신체 감각들의 인식 범위를 너머 있는 영역과 접촉하였듯 서로 양립할 수 없는 두 평면들을 경험한 셈이었다. 나는 텅 빈 여러 해 동안 나 자신 또는 자연으로부터 아주 수준 낮은 개념들조차 받지 않았기에 나는 비록 유한한 마음으로부터 이다 해도 내 경험을 일종의 계시로 간주하고 있었다. 스위든볽은 그의 가장 높은 개념들을 무한한 마음으로부터의 계시로 간주했다. 사실 그 자신의 말로부터서도 명확해지는 바, 자기가 영계에서 의식있는 채로 현존해 보는 것이 그의 목표가 아니라, 그것은 우리 안의 두 통치 기능인 의지와 이해성 중 이해 측면을 발달시키는 수단일 뿐이다는 것, 그리고 선과 악, 영과 물질에 대한 각기 다른 개념들을 더 납득력 있게 보려는 수단으로 삼으려해서인 것, 또한 말씀을 번역함에서 단지 단어나 어구 번역이 아닌 원리들로 번역해가는 것을 알기 위한 수단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는 자신만이 이런 종류의 환상을 가지게 되었다고는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과는 거리가 먼 것, 그가 말하려했던 것은, 자기는 모든 사람들이 거주하는 땅에 자기도 거주하면서 동시에 지상을 떠난 모든 사람들이 살고 있는 진짜 세계도 충분히 의식하면서 29년을 살아왔다는 것이다. 그가 믿었던 바, 자기의 사명은 성경의 “영적 의미” 또는 거룩한 상징 측면을 찾아내고 해석하는 것, 그가 다른 세계에서 가진 경험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참되게 이해하려는 자신을 돕기 위함이었다는 것, 더불어 가장 경이롭고 인정 많은 진리들을 인류에게 날라다 주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스위든볽은 혼의 영역에서의 법칙들과 사실들을 탐사하는데 모든 정력과 용기를 바쳤다. 그는 히브리어의 연구에 착수했다. 그 목적은 자신이 원어로 구약 성서를 읽고 종교의 형체들과 비유들 그리고 고대 시대 때의 “신비들”에 관한 직접적인 지식을 얻기 위한 것이었다. 그는 여러 해 동안 의미가 불명확한 많은 성경 구절을 파헤치느라 무척 애를 많이 썼다. 허나 꾸준히 돌아오는 것은 좌절감 뿐이었다. 많은 것들이 그를 곤란하게 했는데, 특히 전통, 즉 거의 억누를 수 없는 종파별 성경 해석, 사랑이 기독교 신앙의 심장에 해당되는 것 같은데 이를 벗어난 시대의 냉냉함, 여느 예언자나 사도가 꿈도 꾸어보지 않은 교묘하고도 재기 넘치는 변호를 위한 신조로 포장된 교회 문학이 발휘하는 마법, 끝으로 감각들 속에 늘 붙어다니는 망상 등이다. 마침내 빛이 그의 마음을 깨트렸다. 다시 말해 참 진리가 그를 자유하게 만들었다. 그리하여 그는 자기의 훌륭한 모든 능력들을 세상을 석방시키는데 바치게 되었다.
1747년, 스위든볽은 그의 새로운 일이 방해받지 않도록 하려고 과세 평가관 직책으로부터 물러나고저 스위든의 프레드릭(Fredric) 왕에게 요청을 하여 허락을 얻었다. 동시에 아주 높은 작위가 그에게 제공되어졌으나 이를 거절했다. 그 이유는 자만심이 자신 속에 싹틀까 염려해서였다. 이렇게 해서 그는 자기를 주목하는 사회가 줄 수 있는 화려한 인생과 그의 머리에 씌워진 명예를 뒤로 하고 호젓한 그의 조그만 도서관으로 물러나 앉았다. 거기서 그는 27권의 책들을 썼고, 거기서의 단하나의 목적은 기독교 신앙을 지상에서 살아 움직이는 실체로 만드는 것이었다.
스위든볽의 책들을 읽는 각자의 의견이 무엇이든, 누구나 그의 독특한 인물됨에 의해서는 감명받을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는 모든 것을 친절하고 신중하게 처리하였다. 자신에 관련하여 흥분된 감정이나 우쭐댐 같은 것은 하나도 없었다. 그는 영적 영역을 더 멀리 여행할 수록 더욱 겸허해지고 침착해졌다. 그는 무지한 사람들의 약점인 쉽게 믿어버리려는 것에 호소하려 들지 않았다. 그는 어떤 개종자들을 만들려 시도도 하지 않았다; 즉 추종자들을 형성해 교파나 교단 같은 것을 설립해 교주가 되는 따위는 꿈속에도 없었다. 그는 주님께서 세상에 설립하시겠다는 새 교회에 자신의 이름이 연계되는 것도 원하지 않았다. 그는 자기의 메시지가 자기 세대를 위하여서라기 보다는 후 세대를 위한 것임을 느꼈다; 그리고 그의 길고 고된 노동의 해들의 결과인 그의 작품들은 라틴 팔절 본 판으로 인쇄되었고, 이것을 그는 유럽의 성직자와 대학들에 무료로 나누어 주었다. 왈트 윗맨(Walt Whitman)은 우리는 현재 우리에게 있는 것을 수단으로 누군가를 확신시킬 뿐이지만, 거대한 업무를 소화해나간 스위든의 선견자의 것들은 사람을 감동시키는 진리이다 라고 말한다. 스위든볽은 자기 서술의 많은 부분들이 당시의 교리와 맞지 않아 혐오하고 불신용 당할 것을 충분히 감지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스위든볽도 그들의 입맛에 너무 거스르지 않도록 어느 서술의 부분을 삭제하거나 우물쭈물 적당히 돌려댈 수도 있었을 것이다. 허지만 그는 자기가 매우 중시하는 것들을 문장의 외곽으로 밀쳐내거나 꽁무니를 빼는 짓은 결단코 하지 않았다. 그가 높이 올라가는 마음에 심히 고통을 주는 육체를 벗어났을 때, 찬란해야 할 그의 이름 위에 욕설까지 퍼부어졌다; 그리하여 참 기독교 신앙이 알려진 이래 가장 고귀한 챔피언들 중의 하나인 그는 한참 동안 세상에서 잊혀져 있었다. 지상에서 외롭게 살았던 그가 내내 알았던 유일한 보람은 모든 사람들의 복지와 행복을 위해 자신의 역량을 다 바쳤다는 것을 의식으로 알고 있다는 것이었다. 링컨(Lincoln)에 관한 쟌 드링크워러(John Drinkwater)의 몇 줄의 시가 아래에 있다. 이 시는 언제나 스위든볽을 내 앞에 생생하게 가져다 준다.

“깨달은 사람은 외롭다.
어떤 사람을 목장으로부터,
옥수수 고랑과 갈색의 건초 더미로부터
산 쪽으로,
그의 모든 모험들이
넓은 계곡들에 있는 파종자들과 경작자들 사이에 한 개의 융합된 경험이라고 깊게 생각하게 하는
높은 장소로
인도해가는 그의 선견은 외롭다.
이 선견이 그의 혼의 진로를 지배하고,
그의 손에 용기와 절제함을 주고 있다.”

“Lonely is the man who understands.
Lonely is vision that leads a man away
From the pasture-lands,
From the furrows of corn and the brown loads of hay
to the mountain-side,
To the high places where contemplation brings
All his adventurings
Among the sowers and the tillers in the wide
Valleys to one fused experience,
That shall control
The course of his soul,
And give his hand
Courage and continence.”

그렇다, 무엇과도 비교해 볼 필요 없는 불변함을 지닌채 이 선각자는 그의 혼을 고독함과 선견(vision) 안에서 소유했다.
그가 죽은지 150년이 흘렀다. 지금 천천히 그의 업적은 세상에 알려지고 있다. 그의 교리들에 반감을 표했던 사람들이 태도를 바꿔 이 교리를 더 알고저 문의하고 있다. 총명한 많은 사람들이 그의 가르침들을 문명의 중심지에서 변호했고, 우리가 꿈에서도 몰랐던 구석진 세상에까지 운반해 주었다. 그의 메시지는 빛 처럼 여행했다. 그리하여 그의 가르침은 인류의 삶에서 자신들을 실현해내려 투쟁하는 새로운 사회, 새로운 자유, 새로운 과학과 나란히 하고 있다. 나는 불구자나 절망에 빠져 있던 사람들이 이 위대한 메시지를 수단으로 자신의 인생을 풍요하고 빛을 내게 한 실예를 보아왔다. 나 역시 이 실예 속의 범주에 있다. 고로 이런 나의 간증을 통하여 누군가 한사람 만이라도 하느님이 자기와 현존함을 더 달콤하게 느껴본다거나 바깥쪽 환경의 난관을 지배하기 위한 더 예리한 묘미를 획득하게 해준다면 나는 더할나위 없이 행복할 것이다.
나는 어둠에서 배회하고 난관과 마주 칠 때, 영의 영역으로부터 속삭여 오는 격려의 음성을 듣고 있다. 나는 무한(이신 분)의 샘으로부터 쏟아져 내려오는 거룩한 열정을 느끼고 있다. 나는 하느님의 맥박을 가지고 연주하는 음악에 짜릿함을 느끼고 있다. 나는 보이지 않는 법칙에 의해 서로 묶인 태양과 혹성 같이 내 혼에 묶여 있는 영원한 불꽃을 느껴내고 있다. 나는 여기 내가 매일 마시는 공기 한가운데에서 영의 비가 쏟아지고 있음을 느끼고 있다. 나는 땅위의 모든 것은 천국의 모든 것과 얽매어 있다는 그 멋진 진리를 잘 알아채리고 있다. 비록 여기서 침묵과 어둠에 의해 감금된 나 이지만 죽음이 나를 자유하게 할 때 어두운 내 눈에 수천 배의 시력을 나에게 줄 빛을 지금 소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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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렌켈러 의 신앙간증 역자의 글

역자의 글

이 간증서는 켈러 여사의 중반기 (47세)에 “나의 종교”라는 제목으로 출간된 원문에 소제목을 추가한 것 외에는 다른 수정 없이 직역을 원칙으로 번역을 시도했다. 따라서 소제목과 일치하지 않거나 여러번 정독 한다면 내용상 뒤섞인 듯한 느낌을 받을 수도 있다. 이렇게 된 이유는 이 원고는 그녀가 오래전 자신의 신앙을 정리하는 차원에서 조금씩 작성했던 것도 일부 포함된데다 그녀의 중반기 시절에는 많은 봉사활동 내지 강연 일정을 소화하느라 바쁘기도 했던 연유에서가 아닌가 싶다. 오히려 역자는 이 점이 더 마음에 흡족했다. 그 이유가 이 책은 신학 강의서가 아니라 간증서이기 때문이다.

아마 웬만한 미국인이라면 쟈니 애플 씨드(Johnny Appleseed)와 헬렌 켈러 만큼은 기억하고 있다. 앞 사람은 미 개척 초기의 전설적 인물로, 뒤 사람은 삼중고의 슬픔을 기쁨으로 승화한 인물로 칭송되고 있다. 칭송을 일궈낸 일을 한 것은 육체이지만 정작 그들의 육체를 움직인 것은 그들이 스위든볽을 통해 얻은 내적 세계이다.

이 책은 그녀의 내적 세계가 어떤 계기에서, 어떻게, 누구의 도움이 컷었는지, 그리하여 기쁨으로 영글어진 내적 생명이 무엇인지를 말하고 있다. 즉 자신의 종교를 진정한 반석 위에 세운 구체적 내용을 열거하고 있다.

그녀는 스위든볽지언(Swedenborgian)임을 천명하고 있다. 역자가 번역을 시도한 것은 이 때문이다. 그런데 켈러 여사 내지 스위든볽지언을 신비주의자라 말하는 일이 많다. 최근 “나는 신비주의자 입니다”라는 제목을 붙여 출간한 그녀의 한국어판 신앙 자서전도 보았기 때문이다. 그녀가 “나는 신비주의자”라 공언해서가 아니라 아마 그녀가 내세를 상세히 말하기 때문에서가 아닌가 싶다. 신비주의의 공식 풀이를 국어 사전을 빌리면, “순수한 내면적 직관과 직접적 체험에 의해 최고 실재자를 인식하려는 종교 철학 문학상의 경향”이라 설명하고 있다. 역자 더러 간단히 말해보라 하면, “하늘로부터 오는 삶의 원리를 배워 깨달아 이를 지상에서 응용해가려 노력함” 이다.

스위든볽지언은 신비주의자라고 하기 보다는 합리주의자라 하는 편이 18세기가 아닌 20세기를 위해서는 더 합당할 것이다. 그들은 하느님에 관한 것, 저쪽 세계의 원리들을 스위든볽의 가르침을 참고하여 성경으로부터 합리적 사고를 수단으로 알아 내기 때문이다. 이 합리적 수단의 하나가 상응(correspondence) 해석이다.

다시 말해 기독 신앙에의 접근 방법을 합리성에 기초한다는 말이다. “내가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회사는 회사의 모든 것을 알 때까지 투자를 유보하라.” 이는 몇 년전 유명한 투자가 워렌 버핏이 후배 투자가에게 실패 없는 투자를 위해 조언한 글 한토막이다. 소문에 따라 투자하지 말라는 경고이다. 이 경고는 영원한 삶의 품성을 지상에서 선택해야 하는 인간에게도 꼭 필요하다. 어마어마한 교인과 화려한 돈냄새가 물씬 풍기는 거대한 건물 안에서 울려 퍼지는 찬양과 설교 내용이라 해서 검증 없이, 내 합리성의 되새김 없이 무조건의 아멘…은 재고해야 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스위든볽지언은 믿음의 신비를 지적으로 접근한다. 다시 말해 신앙심을 키우는 방식이 산기도나 철야기도, 내지 방언 은사에 의존하기 보다는 성경을 합리적으로 더욱 더 이해해 감에 있다는 말이다. 그 이유가 “사람의 아들은 큰 영광과 능력을 가지고 하늘의 구름들에 오신다…(the Son of Man coming on the clouds of heaven with power and great glory)”(마24:30) 라고 그분의 재림 수단을 주님께서 직접 말씀해두셨는데, 이 “하늘의 구름들”이 거룩한 말씀의 글자들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성경 안의 하느님의 말씀에 그분의 출현이 있고 동시에 능력과 영광(영적 의미)이 그 글자 안에 드리워 있기에 말씀의 합리적 이해 (계시록 22:2)는 대단히 중요하다는 말이다.

스위든볽지언이즘(swedenborgism)은 스위든볽의 사명을 뒤따르는 것이다. 그분의 사명(mission)은 성경의 영적 의미, 또는 거룩한 상징 측면을 찾아내고 해석하는 것, 그리하여 말씀 속의 사랑 가득한 많은 진리들을 인류에게 날라다 주시려는 주님의 재림 섭리에서 그분의 도구로 사용되는 것이었는 바, 우리 역시 작은 도구가 되어 일조하는 것이다.

스위든볽지언의 삶은 미래에 보게 되는 것을 지금 보며 사는 것이다. 이들은 내적 감각을 활발히 응용하는 사람이다. 내적 감각에 선견(vision)이 있다.

이 책의 번역에서 한글 표기는 평범한 영어 사전에 있는 어휘를 일차로 선정했다. 가능한 신학적 냄새가 풍기는 용어는 피하고 싶어서였다. 이 책을 접하고 그녀의 신앙을 이룬 밑거름에 관한 더 많은 내용이 궁금하신 분은 아래 사이트를 검색하여 자유로이 다운받아 가기 바란다.
WWW.BAYSIDECHURCH.ORG

지옥의 삶

제4부
지옥의 삶

55 주님께서 지옥들을 통제하신다

앞 서 천국을 취급하는 대목에서 이미 살핀 바는, 주님은 천국의 하느님이시다는 것과 천국의 전체 조직은 그분으로부터이다 는 것이다. 천국과 지옥의 관계는 서로를 향하여 일하는 두 반대되는 세력의 관계, 이로부터 완전한 균형(balance)이 모든 존재하는 것에서 보존되는 결과를 가져온다는 것을 받아들인다면, 이에 수반되는 것은, 이것을 조절하시는 그분은 저것 역시 조절하셔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 이유가 주님께서는 지옥으로부터의 폭발에 한계를 정하고 지옥의 미친 바램을 점검해 주시지 않으면, 이 평형 상태(equilibrium)는 파괴될 것이고 이 평형과 더불은 모든 것도 파괴될 것이다.

잘 알려진 사실은, 두 반대되는 힘이 똑같은 크기로 서로를 향하여 일할 때 각 쪽이 동등한 세력으로 있을 경우 둘 중 이쪽이 저쪽보다 더 강한 힘을 가지지 않는 바 마치 정지한 듯 보여진다는 것이다. 이 때 균형은 마치 어느 쪽에서도 어떤 이의제기도 할 수 없는 듯 아주 쉽게 제3의 당사자에 의해 결정되어질 수 있다. 이 때 제3의 당사자의 행동은 완전한 조절을 가능케 한다.

천국과 지옥 사이의 평형 상태는 여러분이 싸움 중에 있는 두 용사 사이에서 발견되리라 예상하는 그런 종류는 아니다. 오히려 거짓인 것이 진리인 것에, 악인 것이 선인 것에 맞서 있는 영적인 균형이다. 이 균형은 사람이 자유로운 상태로 생각하고 의도하는 것을 가능하게 한다. 그 이유는 사람이 생각하고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악과 거짓, 선과 진리 어느 것과 더불어 실시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고로 누군가가 이 균형에 있을 때, 그는 이쪽이든 저쪽이든 선택에 있어 자유하다.

각 사람은 주님에 의하여 이 균형 안에서 계속 유지되고 있다. 그 이유는 그분은 천국과 지옥 모두를 통치하시는 바 그들의 영향력도 조절하시기 때문이다. 악의 영향력은 선인 것을 파괴하려고 하는 끈질긴 노력을 결코 끝내지 않는다. 성사되지 않을 경우 분함과 폭행이 뒤따른다. 선의 영향력은 지옥이 사납게 날뛰는 것에 재갈을 물려 자제시킨다. 이리하여 균형이 창조되어진다.

영계에서의 힘(power)은 선하고 참된 것과 더불어서만 존재한다. 그 이유는 이 영계의 힘은 신성으로부터 오고 모든 힘은 신성에 속하기 때문이다. 악과 거짓은 진짜 힘을 가지지 않는데, 그 이유는 그것들 안에는 선하고 참된 것은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고로 모든 힘은 천국 안에 있고 지옥에는 없다.

영들의 세계에 있는 사람들도 위와 똑같은 균형, 또는 평형 상태에 있다. 그 이유가 영들의 세계는 천국과 지옥의 중간쯤에 있기 때문이다. 그 결과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들도 똑같은 균형 안에서 계속 유지되고 있다. 그 이유가 그들은 주님에 의해 영들의 세계에 있는 영들을 통하여 통치되기 때문이다.

이 균형은 만일 주님이 천국과 지옥 위에서 조절하시지 않고 양쪽을 규율하시지도 않는다면 전연 존재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분이 이를 실시 않았다면, 악은 단순히 선한 사람을 그릇 인도하고, 자유의 균형은 파괴되었으리라.

지옥도 천국이 존재하는 방식에서 여러 다른 공동체들로 구성되고 있다. 그리고 지옥과 천국은 정반대이기 때문에 천국에 있는 공동체와 꼭반대되는 공동체가 지옥에 있다. 반대됨이 없이 존재하는 것은 하나도 없다. 그래서 어떤 것의 본성을 알려면 그 반대에 있는 것의 본성을 보면 알 수 있다. 고로, 평형 상태를 위하여, 주님은 천국의 각 공동체는 그것과 짝을 이루는 지옥의 공동체를 가지도록 설비하신다.

더 보태고자 하는 것은, 지옥에 있는 각 공동체는 소규모의 지옥이다는 것, 마치 천국의 공동체가 소규모의 천국이듯 한다는 것은 주목해둘 만한 가치가 있다. 그리고 세 천국들이 있듯 세 지옥들이 있다. 가장 낮은 지옥은 가장 안쪽 또는 가장 높은 천국에, 중간 지옥은 중간 또는 둘째 천국에, 가장 높은 지옥- 또는 가장 온순한 지옥-은 가장 바깥쪽 천국 또는 첫 번째 천국에 반대된다.

56. 주님이 지옥들을 조절하시는 방법

지옥들은 천국들과 거기의 공동체들을 통하여 진행되는 주님 자신의 영향력에 의해 조절되어진다. 이것은 악은 근원적 차원에서 제어한다. 특별히, 지옥을 조절함은 지옥을 점검하고 거기서 폭발하는 것을 조절하는 능력이 주어진 천사들을 통하여 실시된다. 항시 천사들이 지옥으로 보내져 그들의 현존을 수단으로 잠잠케 한다.

일반적으로 말하면, 지옥의 사람들은 그들 고유의 두려움들에 의해 간단히 조절되어진다.

어떤 이들은 비록 그들의 두려움이 조만간 덜해질지라도 어쨌든 세상에 있는 동안 가졌던 두려움들에 의해 조절되어진다. 그리하여 처벌에 대한 두려움은 그들 중 많은 자로 악행을 단념하게 한다. 대체로 더 악한 사람이 덜 악한 사람 위에 군림하는 힘이 주어진다. 그들은 이리저리 돌려대고 획책하고 처벌과 공포감을 조성하여 아랫 것들을 노예화하고 복종케 한다. 그럼에도 소위 그곳의 통치자들도 자기들에게 그어진 범주를 넘어 가는 것에는 두려움이 앞선다. 어쨌든 형벌에 대한 두려움은 지옥에 있는 사람의 광폭함을 조절하는 특효약이다. 그 외 방법은 없다.

세상에 있는 사람들은 이렇게 믿었다; 지옥을 통치한 악마는 한명이다는 것, 이 악마는 과거 빛의 천사였는데, 반역질 이후 그의 패거리와 함께 지옥으로 내쳐졌다는 것이다. 게다가 사람들이 이를 믿는 이유는 성경에서 악마와 사탄, 그리고 루시퍼(Lucifer)가 언급되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를 성경글자 그대로 취했다. 그러나 ‘악마’와 ‘사탄’은 여러 등급의 악에서 있는 지옥을 간단히 뜻하는 것이고, ‘루시퍼’는 천국에서 나와 지옥에 가서 영향력을 행사하는 사람을 뜻한다. 지옥에 있는 모든 이가 복종하는 한 명의 악마는 없다. 지옥에 있는 모든 이도 인류로부터 이다. 그리고 그들 각각은 그가 세상에 있는 동안 신성에 완전 반대됨으로부터 있는 악마이다.

57. 주님이 사람을 지옥으로 던지는 것이 아니라 사람 스스로 그렇게 한다

어떤 이는 이런 생각을 하고 있다; 사람이 악할 경우, 하느님은 화내시고, 그 사람으로부터 얼굴을 돌리시고, 거절하시고, 그를 지옥으로 내던지신다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믿는 이들도 있다; 하느님은 사람을 처벌하시고 그에게 해굿이까지 하신다는 것이다. 그들이 이렇게 생각한 것은 그들로부터가 아니라 성경의 글자 서술로부터이기에 이에 대해 그들은 고집스럽다. 그러나 그들은 그 성경 글자 서술의 영적 의미는 아주 다르다는 것을. 교회의 진정한 가르침은 하느님은 어느 사람으로부터서도 그분의 얼굴을 돌리시지 않는다는 것을, 그를 내치지 않으신다는 것을, 어느 누구라해서 지옥으로 던지거나 화를 내는 일은 결코 없다는 것을 실감 못하고 있다.

계발된 어떤 사람이라면 그가 성경을 읽을 때, 하느님은 선량함 자체, 사랑 자체, 자비 자체이시다는 것, 그는 누구에게나 악을 행하실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랑은 그 자체로부터 사람을 내던질 수 없다. 그 이유는 내칠 경우 이는 사랑의 참 본성에 반대되고, 고로 신성한 본성 자체에 반대되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이 계발된 마음을 가지고 생각한다면, 그는 하느님은 사람들을 선량함과 사랑과 자비로 다루시고, 그들을 위하여 선인 것을 원하시고, 그들을 사랑하시고, 그들 위에 자비를 두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그들은 선과 악은 반대적이므로 선인 것이 나오는 것은 오로지 천국밖에 없고, 또는 주님으로부터 흘러들어 계속 그 사람으로 악으로부터 멀어지게, 그리고 선인 것 쪽으로 인도하심을 알게 된다. 그리고 천국과 지옥은 균형을 이루는 바, 주님이 뒤돌아 떠나신다면 사람에게 남는 것은 오로지 악인 것 뿐인 바, 그는 더 이상 사람일 수가 없다.

위로부터 우리가 알 수 있는 바, 주님은 선인 것 가지고 모든 사람 안으로 흘러드신다는 것, 악한 사람 안으로도 선한 사람에게와 동등하게 흘러드신다는 점이다. 그러나 이런 차이는 발생된다; 그분은 계속적으로 악한 사람으로 악에서 멀어지게, 선한 사람은 선인 것을 향하여 인도하신다. 이런 차이는 주님 때문이 아니라 사람 때문이다. 그 다음 명백해지는 것은, 사람은 지옥 때문에 악인 것을, 주님 때문에 선인 것을 행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은 자기가 하는 것이 자신으로부터 라고 여길 경우, 그가 악을 행하면 그 악은 그에게 마치 그의 것인냥 착 달라붙어 있다. 이것이 왜 주님이 아닌 당사자가 자기의 악을 책임질 수밖에 없는가에 대한 이유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자신을 지옥으로 인도하는 자는 주님이 아닌 바로 자기 자신이다. 주님은 어느 사람이든 지옥으로부터 멀어지게 하고 싶으신바, 만일 그가 자신의 악을 행하기를 원치 않는다든가, 악 안에 있기를 바라지 않는 만큼, 주님은 사람들을 지옥으로부터 자유하게 하신다.

사람의 의도함과 사랑함은 사후 그와 더불어 머문다. 따라서 세상에서 악을 사랑한 자는 다른 삶에서 똑같은 악을 사랑하고, 자신이 악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고로 악한 사람은 그의 영이 관심을 둔 만큼 지옥에 매여 있다. 그는 이미 거기에 있다. 그리고 사후 그가 원하는 것은 그의 악이 있는 곳에 있는 것 외에 원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결과적으로 사후 주님이 아닌, 사람 자신이 자기를 지옥에 던진다.

사후 발생하는 것을 간략히 이렇게 기술해볼 수 있다. 사람이 영들의 세계로 들어갈 때, 그는 자기를 갖가지 방법으로 돕는 천사들에 의해 환영된다. 그들은 주님에 관하여, 천국에서의 삶에 관하여 말해준다. 그러나 만일 사람이 이런 사항을 알았고, 거기서 있는 것들을 부인했고, 비웃었다면, 그는 곧바로 어디론가 떠나기를 갈망한다. 천사들이 그를 주시했을 때, 그는 천사들을 떠난다. 결국 그는 자기와 꼭같은 사람과 결합한다. 그리고 주님으로부터 돌아서 그가 세상에 있는 동안 연결 고리를 맺었던 지옥에 얼굴을 내민다. 천국의 어떤 협력도 그에게 가능함에도 이와 같은 영은 자신의 악을 따르고, 종국에는-자유로이-자신을 자신의 지옥으로 내던진다.

58. 지옥에 있는 이들은 그들의 자아 사랑과 세상 사랑의 결과로 악과 거짓인 것 안에 있다

지옥에 있는 모든 이는 악과 거짓인 것들 만에 붙잡혀져 있다. 거기에는 악과 참된 것 안에 동시에 있는 자는 아무도 없다. 악한 사람들도 그들이 세상에 있는 동안 영적인 것을 듣고 말하고 배우고 읽어 매우 친숙해져 있을 수 있다. 그들 중 어떤 이는 자기들의 유창한 말과 선행을 수단으로 자기는 마음으로부터의 기독인이다고 믿도록 타인을 속이기까지 한다.

그러나 이와 같은 모든 사람들은 심정에서 악하다. 그래서 그들의 바깥쪽 삶이 벗겨질 때, 그들은 자기들의 진짜 색깔을 드러내고야 만다. 그들에게서 외관적으로 있었던 선과 진리인 것은 그들의 기억에만 머문다. 마치 수집된 정보 수준이다. 과거 그들은 이 정보들을 의지에서 꺼낼 수 있었고, 자기들 목적 성취를 위해 쓸 수 있었다. 이런 사람들이 그들의 진정한 본성에 놓이게 될 때, 그들은 더 이상 진리인 것으로부터는 어떤 것도 말할 수 없고, 오직 거짓인 것만 가능하다. 그 이유는 그들이 악으로부터 말하기 때문이다. 악을 기초로 해서 진리를 이야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오직 거짓 생각만 튀어나올 뿐이다.

사후 사람이 위 같을진대, 그의 몸과 얼굴은 그 사람 안에 들어 있는 것에 상응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상대를 쳐다봄으로 그가 무엇 같은지를 정확히 말할 수 있다; 이는 그의 얼굴만을 쳐다봄이 아니라 그의 몸과 그의 말씨, 그가 처신하는 방법 등을 쳐다봄으로부터 이다. 지옥에 있는 영들이 천국의 어떤 빛 안에서 검사되어질 때, 그들은 자기들의 악한 품질과 꼭같게 보인다. 각 사람은 자기 악의 복제이다. 그들은 경멸, 협박, 미워함, 복수함, 격렬함과 잔인함이 눈에 보일 수 있는 모양으로 바뀐다. 그럼에도 누군가가 자기들을 칭찬하거나 어떤 이유로 자기들을 우쭐거리게 해주면, 그들의 얼굴은 더 부드러워지고 그들이 느끼는 쾌락으로부터 오는 행복한 표정 같은 어떤 것도 나타난다.

이런 악령의 나타남은 보기에도 섬뜩하다. 어떤 이는 얼굴이 부풀어 있다. 어떤 이는 터진 종기가 가득하다. 많은 사람들이 실제의 얼굴을 가지고 있지 않고 털만 무성하거나 뼈만 앙상하다. 어떤 이는 이빨만 눈에 띈다. 그들의 몸은 기괴하다. 천사의 빛으로는 위와 같이 보이지만 그들 끼리에서는 정상적인 사람 같이 보인다. 이는 주님의 배려하심에서 비롯되는 바, 그들 자신의 상태는 그들을 위해 천사에게 보여지는 방식으로부터 있지 않는다.

이런 영들의 모든 것은 자아 사랑이나 세상 사랑의 구체화이다.

위 두 사랑은 지옥을 최고 높은 자리에서 통치하고 또한 지옥을 만든다. 이 두 사랑은 두 천국 사랑, 즉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에 완전 반대된다. 사람들은 이 두 사랑-자아 사랑과 세상 사랑-이 왜 그렇게도 극악무도한지에 대한 이유를 알 수 없다. 그들은 교만함, 이것은 가시화될 때, 훨씬 더 나쁜 어떤 것이다고 말한다. 그리고 더 첨가해서 하는 말, 모든 이는 찬양받기 위하여, 자아 영광을 위하여 뭔가를 행하려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그들은 자아 사랑이 지옥을 조절하는 사랑이다는 것, 이것이 사람 안에서 지옥을 만든다는 것을 모르고 있다.

고로 자아 사랑은 좀 더 상세히 설명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 이유는 이 사랑이 여느 다른 악한 사랑들의 원천이기 때문이다. 자아 사랑은 자신이 잘되기를 원하는 것, 타인이 자신의 복지에 기여하지 않을 경우 그 사람이 잘되기를 원치 않는다. 자아 사랑도 선행이 있는데 이는 자신의 영광과 영예라는 목적이 존재할 경우 뿐이다. 그가 타인을 위해 하고 있는 것 안에 자신의 영예 같은 것이 보이지 않으면, 자신에게 ‘이로부터 내가 얻는 것이 무엇인가?’ 라고 묻고, 선행을 멈춘다. 그의 행복함은 순수하게 자아 사랑의 행복함이다. 사랑으로부터의 이 즐거움이 사람의 생명을 만드는 바, 그의 생명은 자아의 생명이다. 이와같은 사람도 그에게 소속된 사람, 즉 아내나 자식들, 자신 것이라 부르는 이들을 사랑할 수 있다. 이 사람의 범주에는 그를 칭찬하고 그에게 순종하는 모든 사람들이 포함된다.

위와 대조적으로, 천국의 사랑은 유용함 자체를 위하여 유용한 것을 사랑함이다. 이 사랑은 실지로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함이다. 그러나 만일 사람이 자신의 이득을 위하여서만 유용한 것을 사랑한다면, 그는 이런 것을 자기를 위해 일하는 노예 수준에서 사랑한다. 그는 모든 사람, 모든 것이 자기를 위해 일하기를 원한다. 그에게 다른 길은 대체로 없다. 자신의 자아 이익으로 둘둘말아진 누군가는 자기가 행하는 어떤 선마저도 자신의 이득에 초점을 맞춘다. 이것이 발생한 이유는 그가 행함 안에서 자신을 챙기려들기 때문, 그리고 정작 진짜 자신은 원하지 않은채 선행을 실시했기 때문이다.

자아 사랑은 사람을 위쪽이 아래쪽이 되게 거꾸로 세운다. 그래서 그들은 영계에서 그들의 발은 천국 쪽으로 하고 지옥을 향해 추락하는 듯 나타난다. 이 때문에 자유로이 지옥을 들어간 사람들이 머리를 먼저 떨어뜨리면서 입장하는듯 보여진다.

세상 사랑은 자아 사랑 만큼 천국 사랑에 반대되어 있지는 않다. 그 이유는 세상 사랑은 자아 사랑보다는 덜 유해하기 때문이다. 세상 사랑은 자기를 위해 타인의 부를 차지하려는 바램이다. 그리고 여하한 수단을 강구해서라도 이것을 가능하게 하려든다. 이것은 자신의 심정을 재물에 두고 세상이 어떤 영적 사랑으로부터도 멀어지게끔 유도해도 내버려둔다. 따라서 이것은 많은 모양새를 취한다. 개인의 발전을 위해 재물을 사랑함, 한층 더 재물을 손에 넣기 위해 지위를 사랑함이 있다; 세상적 쾌락을 가지려는 수단으로 재물을 사랑함이 있다; 재물 자체가 사랑스러워 재물을 사랑함, 사람들이 가지는 탐욕 같은 것이 있다. 이를 열거하자면 끝이 없을지 모른다.

재물은 실로 대단한 유용함을 지닐런지 모른다. 재물의 뒤에서 마음이 확실히 정한 목적(purpose)이 재물의 유용함(use)이다. 시야에 잡히는 목적(end)은 재물을 사랑함의 품질을 결정한다. 위 두 목적은 정확히 똑같다. 이외 모든 것은 목적 달성을 위한 수단일 뿐이다

59. 지옥 불과 이를 갊

대부분의 사람들은 성경에서 언급되는 지옥 불과 이를 갊은 글자 그대로 지옥에 있는 것들이라는 것만, 그 외 무엇을 의미하는 지는 모르고 있다. 어떤 이는 불이 실지로 있다고, 또는 아마 양심의 고통 비슷한 종류의 고통이 아닐까 생각한다. 어떤 이는 지옥 불은 사악한 사람들을 겁주기 위해 사용한 어구이다고 생각한다. 어떤 이는 이를 갊은 실지로 발생한다고, 또는 이를 가는 소리를 들을 때 섬뜩한 바, 두려움 같은 종류를 표시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어쨌든 위 두 가지 모두는 영적으로 이해해야 한다. 그 이유가 영적인 것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자연적 형상들을 통하여서만 사람들에게 표현되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지옥 불과 이를 갊은 사후 악한 사람의 영의 삶의 부분이 확실하다. 또는 이것을 또다른 방식에 놓기 위해, 그들은 영계에서 이런 것들을 수행할 것이다. 고로 그것들은 적절히 이해되어져야할 필요가 있다. 먼저 지옥 불에 관하여이다. 열에는 두 근원이 있다; 하나는 주님 자신이신 천국의 태양으로부터 이다. 또 하나는 이 세상의 태양으로부터이다. 영적 태양으로서 주님으로부터 오는 열은 사랑인 영적 열이다. 우리가 세상의 태양으로부터 느끼는 열은 순수하게 자연적이다. 그것은 자연계에서의 성장함을 가져다준다. 이 성장은 천국 열, 또는 사랑이 그들의 전체 존재를 활성화하는 사람의 영 안으로의 영적 흐름을 반영하고 있다. 자연적 현상은 그것이 영적 원인의 결과, 또는 영적 원인과 상응한 결과이지 않으면 발생하거나 존재할 수 없다. 자연계에 있는 것들 조차도 영적 세계의 영향력으로부터 싹틔우고 성장하는 자기들의 능력을 가진다.

사람들을 위해서, 영적 열은 그것이 본질적으로 사랑이기 때문에 그들의 생명의 열이다. 이 열이 성경에서 ‘불’에 의해 의미된다. 천국적 불은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고, 지옥적인 불은 자아 사랑과 세상을 사랑함이다. 지옥적인 불도 실제로 천국의 불과 똑같은 근원, 즉 천국의 태양, 또는 주님으로부터 이다. 단지 천국의 불은 받는 사람에 의해 찌그러지고 지옥적이 되어질 뿐이다. 그 이유가 영계로부터 안으로 흘러드는 모든 것은 그것을 어떻게 받느냐, 또는 그것이 유입되는 형체가 무엇이냐에 의존되기 때문이다. 이것은 세상의 태양으로부터 있는 열과 빛과도 똑같다. 이 열이 나무나 작물에 의해 받아질 때, 이 열은 식물을 자라게 하고 향기를 내품게 한다. 그러나 이 열이 시체나 더러운 물질에 의해 받아질 때 부패를 일으키고 악취를 진동케 한다. 사랑이 선한 사람들, 영들, 천사들의 생명 안으로 흘러들 때 이 사랑은 그들의 선으로 열매를 맺게 한다. 그러나 악한 사람들과 더불어서는 그 반대 효과가 발생한다. 그것은 다툼과 부패이다.

지옥 불이 자아와 세상을 사랑함인바, 이것은 이 사랑들에 속하는 염원이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또한 이것은 그것들로부터의 쾌락도 보여준다. 이것이 영계에서, 지옥이 열릴 때, 불과 연기가 그것들로부터 나오는 것이 실제로 보여질 수 있는가의 이유이다. 그래서 그것들이 닫힐 때, 불은 연기를 냄이 있기 위해 보여진다. 이것은 상응으로부터 이다.

그럼에도 지옥에 있는 사람들은 위 같은 불 안에 실제로 있지는 않다; 이 불은 외관이다. 그들은 불타는 어떤 것도 의식하지 못하고 있다. 단지 자기들이 세상에서 있었던 동안 느꼈던 같은 종류의 열만을 느낄 뿐이다.

이 지옥 불은 지옥에 있는 고통의 어떤 종류를 뜻한다. 이 고통은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려는 염원으로부터 오는 고통, 이와 동행하는 분노이다. 한 가지 궁금해지는 것은, 이런 고통이 거기 있다는데 왜 악령들은 기꺼이 자신들을 거기에 내던지는가 이다. 모든 지옥 각각은 그것 자신의 영역력(sphere)-그것 고유의 염원-을 토해낸다. 이것은 거기 있는 이들로부터 오고 있다. 이 염원 사항이 똑같은 염원 내용을 지닌 누군가에 의해 감지될 때, 그는 즐거움으로 가득해지고 그것을 향하여 돌아서며 그것을 얻기를 염원한다. 이러하다 해도 사실 그는 거기 있는 고통의 종류를 실지로는 실감 못하고 있다. 아마 미리 실감했다 하더라도 그는 계속 그것을 염원할 것이다. 그가 자기 지옥에 있을 때, 그는 따뜻하게 환영받아지고, 자기가 친구 사이에 있다고 믿는다. 어쨌든 이것은 몇 시간 정도만 지속된다. 이제 친구라는 자들은 그가 얼마나 영리한지, 얼마나 센지 아주 가까이서 관찰하고 파악되면 그들은 그를 여러 방법으로 공격하는데, 점차 가혹함과 폭력의 강도를 높여 간다. 그들은 그를 더욱 멀리 지옥 안으로 유도함으로 실행한다. 그 이유는 더 깊은 지옥으로 갈수록 더 사악한 영들이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그를 공격한 후, 그들은 그가 노예로 전락할 때까지 그에게 형벌을 가한다. 그럼에도 반역질은 언제나 거기서 더 튀어나온다. 그 이유는 모든 이는 자기가 가장 중요한 사람이 되어 있기를 원하고, 모든 다른 것들에는 미움으로 맞서 불사르고, 거기서는 언제든지 새로운 반란이 끊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이런 상황은 저런 상황에 길을 내준다, 노예된 사람들은 타인을 정복하기 위하여 새로운 지도자에게 도움을 주는 것에서 자유롭다. 그런데 순종을 거절한 이들은 다시 고통당한다. 그리고 이것은 계속된다. 이런 지옥의 고통이 지옥-불이라 불려진다.

한편, 이를 갊은 각자의 거짓 사상을 가지고 서로 다투고 충돌함의 계속이다. 이 사람들이 지닌 것은 타인을 경멸함, 증오, 조롱함, 비웃음, 모독함이다. 이런 악들은 상처, 자름, 발톱을 내밈, 긁음 같은 것으로 돌발한다. 그 이유가 모든 이는 자기의 거짓 사상이 진리라고 불러주기를, 그것이 매우 가치 있는 것이기에 그것을 위해 싸우기 때문이다. 이 다툼은 진리인 것이 천국으로부터 유입될 때면 언제든지 지옥 밖에서는 이를 가는 소리로 들려진다.

이 지옥에 사는 사람들은 자연만을 믿고 주님을 부정하는 이들이다. 그들은 천국으로부터의 어떤 빛도 수용할 수 없다. 대부분의 그들은 자기 눈이 보고 자기 손이 만져지지 않은 것은 하나도 믿지 않는다. 이것이 왜 그들이 하는 논쟁들이 이를 가는 소리 같이 들리는가에 대한 이유이다. 또한 영계에서 모든 거짓 사상들은 삐꺽거리는 소리를 낸다. 그리고 이를 갊 그 자체는 자연의 가장 낮은 것들, 그리고 사람의 가장 바깥쪽의 것들에 상응한다.

60. 지옥적 영들의 악의와 교활함

무엇인가를 깊이 생각하고 자신의 마음이 어떻게 작동하는가를 얼마라도 이해하는 사람이라면 영들이 능력 면에서 얼마나 많이 사람을 능가하는지를 볼 수도 있다. 사람은 반 시간 동안 말하거나 글로 써 내려 갈 것들을 자신의 마음 안에서는 일 분만에 더 많이 판명하고 분류해서 결말까지도 도출해 낼 수 있다. 그가 영으로 생각할 때 그는 위와 같이 더 많은 것을 할 수 있게 되어간다. 그 이유가 생각하는 것이 영이고 생각을 언어나 글로 표현하는 것은 몸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후 천사가 되는 사람은 그가 세상에서 지녔던 것에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총명과 지혜를 누린다. 세상에서의 그의 영은 그의 몸에 매여 있어, 그가 곰곰이 생각했던 어떤 것이라 해도 상대적으로 조잡하고 불분명한 용기 안으로 유입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영이 몸으로부터 석방되고, 그 고유의 삶 안으로 들어 올 때, 완전히 달라진다. 그의 여건은 이전 보다 더 방대하게 능가한다. 이것이 천사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생각들, 사람의 마음에 결코 들어 갈 수 없는 종류의 생각들을 가질 수 있는 이유이다. 이럼에도 천사들은 인간 존재로서 태어나졌었고, 자신이 자신을 생각하건대 자기는 여느 사람보다 더 현명하지 않다 여긴다.

지옥의 영들의 악의와 교활함은 천사들의 지혜와 총명 만큼 대단하다. 이 둘의 여건은 똑같다. 사람이 죽은 후, 그의 영은 그 자신의 선 또는 악 안에 완전하게 빨려든다. 그것에 일치되게 생각도 존재한다.

허나 사람이 세상에 있었던 동안은 판이 했다. 그 이유가 세상에서의 경우, 사람의 영의 악한 부분은 어떤 제약 아래 놓여있어 노골적으로는 될 수 없었다. 그의 악한 것은 선한 행위와 애착들의 바깥쪽 나타남에 의해 철저히 덮혀 있었다. 당사자 조차도 어떤 악의와 교활함이 자기 영 안에 상존했는지 조차 거의 모를 정도였다. 게다가 그의 영이 그 본성을 드러내야 하는 때, 즉 사후 그가 되어져야 할 악마라는 것은 더더욱 알지 못하고 있었다.

이런 악의는 사람들의 예상을 훨씬 넘는다는 것을 그 자체로 보여준다. 수 천의 악들이 그 악 자체로부터 발발한다. 그런데 아마 수천 악 중의 하나도 설명하기 힘들다. 게다가 그것들은 너무나 악질이어서 만일 주님께서 모든 사람을 보호해주시지 않는다면, 사람들은 지옥으로의 빠짐을 결코 피하지 못했으리라. 그 이유가 지옥으로부터의 영들도 천국으로부터의 천사들 같이 각 사람과 더불어 있기 때문이다. 주님은 사람이 신성을 인식하고 신앙과 사랑하는 행동들에 기초된 삶을 살지 않으면 그를 보호하실 수 없다. 만일 사람이 이런 경우가 아니라면 그는 주님으로부터 돌아서서 지옥의 영들을 향하고 자신의 악의와 가장 비슷한 종류의 악의를 취한다. 그럴 때 조차도 그는 주님에 의해 그 자신의 악으로부터 멀어지도록 인도받고 있다, 그리고 만일 주님이 양심의 이 내적 제한에 의해 그를 인도하실 수 없다면, 그는 법과 처벌의 두려움 같은 바깥쪽 제재 수단에 의해 그를 인도하신다.

그런데 그가 다른 곳으로 가버릴 경우, 그는 영적으로부터의 어떤 것에 의해 인도되어질 수 없다. 그 이유는 이럴 경우, 그는 정직과 공정인 체하는 것으로 위장하는 사기치는 방법을 창안하기 때문이다. 이런 상태의 모든 것은 그의 영의 악을 쉽게 증가하게 하고 그 악으로 하여금 형태를 갖추게 하여 자기 본성 속의 악과 다를 바 없게 만든다.

가장 나쁜 상황은 자아 사랑에서 가지쳐 나온 악을 지니는 이들이다. 그들의 속임수는 철저한 바, 삶을 통째로도 파괴할 수 있는 독으로 꽉차있다. 이런 영들은 ‘악귀(genni)’라 불리는데, 그것들은 지옥들의 뒤쪽 부분을 향해 있다. 세상을 사랑함의 결과로 악인 이들은 지옥의 앞쪽 부분을 향하고 있다. 그들은 ’영들‘이라 불린다. 그들은 심각한 악질은 아니고 상대적으로 온순하다.

악귀들은 사람의 생각 측면이 아닌 애착 측면에서 술책을 벌인다. 악귀들은 애착들을 감시하고 냄새 맡고 있다. 그것들이 선한 애착들임을 간파했을 때, 그들은 선한 애착을 인도하되 비트는 수단으로 악한 것이 되게 돌려 놓는다. 악귀들의 이런 짓은 너무나 은밀해서 사람은 전혀 눈치채지 못한다. 악귀들은 이에 관한 어떤 것도 사람의 생각 안으로 오지 않도록 대단한 주의를 기울임으로 그것의 일을 진행시키고 있다. 생각 측면에 올 경우 노출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악귀들이란 사람의 쾌락과 바램을 악용함으로 그 사람을 흔들어 꾀어서 사람의 마음을 올가미에 묶어두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악귀들은 변화의 희망이 엿보이는 어떤 사람들을 위해 주님에 의해 그 사람 뒤쪽에 붙잡혀 있다. 악귀는 사람의 양심을 파괴하는 능력을 가졌을 뿐아니라 양심 안의 유전적인 것들, 사실 그대로라면 그냥 그 상태로 멀리 떨어져 있을 유전적인 것들을 휘젖는 재주 까지 겸비하고 있다. 고로 주님께서는 사람이 이런 악귀로부터의 피해를 막아주시기 위해 이런 지옥들은 밀봉해두셨다. 따라서 악귀 비슷한 사람이 다른쪽 삶의 세계로 올 때, 이 사람은 그들의 지옥으로 순간적으로 내던져진다.

지옥적 영의 사기침은 아주 복잡 다양해서 그것들을 나열하자면 책 몇권 분량은 되지 않을까 싶다. 그것들은 세상에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한 종류는 상응들을 남용하는 것이다; 또다른 것은 신성한 질서의 보다 수준 낮은 것들의 오용이다; 셋째는 전환, 수색을 이용해 생각의 흐름과 소통함의 다른 종류를 내세우는 것,즉 다른 영들을 그들 자신으로부터 떼어 그들 스스로 파견자를 자처하는 방식을 이용한다; 넷째는 몽상을 이용하는 것; 다섯째는 영을 영사하여(spirit-projection), 하나 아닌 여럿인 듯 보이게 하는 것; 여섯째는 흉내냄, 설득함 그리고 속임수 등이다.

지옥의 영들은 자기들의 갖가지 기술을 이용해서 서로에게 고통을 안긴다. 만일 그것들이 그가 죽는 시점에서 그의 고유의 악의 부분이었다면, 악령은 사후 그것들 안으로 온다.

지옥의 고통들을 주님이 묵인하신 이유는 이것만이 악을 점검하고 조절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이다. 주님의 조절 아래 지옥의 패거리들을 보존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은 처벌과 공포이다; 그 외의 방법은 없다. 그 이유가 형벌과 고통에 대한 두려움이 없다면 악은 폭력으로 사납게 날뛰어 모든 것은 파편 조각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마치 이 세상의 나라에 법이 없고 형벌도 없다면… 하고 상상해보면 가늠된다.

61. 지옥들의 출현, 장소, 그리고 숫자

영적 세계에서도 자연계에 존재하는 똑같은 종류들을 볼 수가 있다. 이것들은 너무나 흡사해서 외관 상으로는 차이가 없다. 거기서도 평야와 산 그것들 사이의 계곡, 호수, 강 등등 세상에서 보이는 것들을 볼 수 있다. 그렇다 해도, 이런 모든 것들은 영적 근원으로부터 이다. 그래서 그것들은 영인이나 천사들에만 보여질 수 있고 사람들은 아니다. 따라서 사람들은 그가 죽어 영인이 되거나, 특별한 허락을 받지 않으면 영계에 있는 것들을 자신의 눈으로 결코 보지 못한다. 역으로 천사나 영인은 자기들과 더불어 이야기 하도록 특별히 허락된 사람과 더불어서가 아니면 자연계에 있는 어떤 것도 볼 수 없다. 영적 세계와 자연적 세계 사이에 이런 유사함이 있기에, 사후 사람은 자기가 방금 자연계를 떠났다는 것, 자기가 세상 안에 있지 않다는 것을 거의 알아채지 못한다. 이러기에 죽음은 이 세계로부터 그것과 비슷한 저 세계로 건너감이라 일컬어진다.

천국들은 보다 높은 지역들에 있고, 영들의 세계는 보다 낮은 지역에, 그리고 지옥들은 위 둘 아래 지역에 있다. 천국 자체는 내적 시력이 열리지 않는 이상 영들의 세계에 있는 영인들에게 보이지 않는다; 물론 가끔 그들은 안개나 빛나는 구름을 통해 볼 수는 있다. 이런 이유는 천사들이 다른 사람들 보다 더 높은 지혜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고, 그래서 천사들은 영들의 세계 안에 있는 이들의 시력 그 넘어에 있기 때문 이다.

그러나 평야나 계곡에 있는 이들은 서로 볼 수 있다. 이렇긴 해도 그들이 자기들의 진짜 본성으로 분류가 되면, 악령들은 선한 영들을 더 이상 볼 수가 없다. 그러나 선한 영들은 아직은 악한 것들을 볼 수 있다. 그러나 그것들로부터 자신들을 돌아서게 한다. 그리고 이들이 돌아서자 마자 그것들은 보일 수 없게 된다. 지옥들은 볼 수 없는데, 그 이유는 닫혀있기 때문이다. 단지 거기 있는 이들과 비슷한 사람이 열 때 입구 정도는 보여지기도 한다. 지옥으로의 입구는 오로지 영들의 세계로부터만 열릴 수 있다. 천국으로부터가 아니다.

지옥들은 각 처, 즉 산 아래, 언덕 아래, 바위 아래에 있다; 평야나 계곡 아래에도 있다. 그 지옥들 각각은 어둠침침하다. 거기 있는 지옥의 영들은 타고있는 횃불이 던지는 빛 안에 있다. 그들의 눈은 이런 빛에 익숙해 있다. 이들은 천국의 빛에 대해 그것은 의미심장한 암흑이라 간주한다. 만일 그들이 자기들의 동굴을 떠난다면, 그들은 전혀 볼 수 없다.

지옥 쪽으로의 열림 모두는 감추어져 있어, 악령들이 영들의 세계로부터 안으로 가는 때를 제외하고는 시력 넘어에 있다. 그럼에도 주님이 흡족해 하실 때, 지옥 너머에 있는 영 또는 천사는 자기의 시력으로 마치 뚜껑이 열려서 보듯, 지옥의 것들이 무엇과 비슷한지를 꿰뚫어 볼 수 있다. 어떤 지옥들은 동굴 같아 보이고, 다른 지옥은 짐승의 굴과 도둑의 소굴 같아 보이고, 어떤 것은 바닥에 동굴을 가진 광산의 통로 같이 보인다. 어떤 지옥에서는 마치 큰 화재 이후 생겨난 듯한 돌더미를 볼 수 있는데 거기에 지옥의 영들이 살고 숨어 있다. 보다 온순한 지옥에서는 금방이라도 찌그러질듯한 오두막집, 거기에 사람이 혼잡하게 운집한 것이 보여진다. 오두막집 안에 지옥의 영들이 있고, 멈춤이 없는 말다툼, 두둘겨팸, 발톱으로 할큄, 강도질과 불화가 있다. 지옥들의 어떤 것 안에는 지저분한 곳(갈봇집) 밖에 없고, 다른 지옥들의 경우 침침한 숲 안에, 거기서 영들이 맹수의 소리지름 같이 으르렁거리고 있다. 거기에는 다른 영의 추격을 피해 달아날 수 있도록 아래쪽에 터널도 있다. 거기에는 갖가지 형벌을 당하고 있는 영들이 도망하는 사막도 있다.

지옥의 정확한 장소는 주님만이 아신다. 물론 악령이 들어간 지역들로 미루어 보면 대충은 그 위치를 추정해볼 수는 있다. 지옥들도 천국이 있는 지역이나 거기 있는 사랑의 종류에 따라 구역이 나뉘는 것과 원리는 똑같다. 모든 영적 지역은 동쪽에 있는 태양이신 주님에 관련하여 위치가 정해진다. 지옥들은 천국의 반대인 바, 그들의 지역들은 서쪽으로부터 출발하는데 그들이 더 악할 수록 동쪽으로부터 더 멀어진다. 지옥이 어떻게 배열되는지를 아는 것은 실지로 가능치 않다. 우리가 알 수 있는 전부란 단지 아주 끔직한 악은 북쪽 측면에, 덜 끔직한 악은 남쪽 측면에 자리잡는다는 정도이다. 또한 동쪽 측면은 보다 더 온순한 지옥들이, 말하자면 잘난체해대나 그렇다고 집요한 미움으로 차 있지 않은 이들이다.

지옥의 숫자는 단지 천국의 공동체 만큼이나 많다라고 말하는 것으로 만족해야하지 않나 싶다. 그 이유가 각 천국의 공동체는 그에 상응하여 반대되는 지옥의 공동체를 가지기 때문이다. 지옥의 숫자는 셈을 넘어 있다. 지옥들 아래 지옥들도 있다.

만일 사람들이 경멸함, 적개심, 미움, 복수함, 사기 같은 것들이 악이다는 식으로 아주 단순하게 생각해버린다면 정작 중요한 지옥에 대한 진가를 놓고서는 아무 것도 인정하지 못한다. 어쨋든 모든 악 중의 어느 한 개의 악이라 해도 그 자체는 수많은 형태의 악을 함유하고 이 형태 하나는 다시 여러 다른 종류들로 세분화되어가는 양상을 보이는바, 책 전체를 그런 것들의 목록으로 나열만 해도 책 한권을 채우는 것은 쉬운 일이 될지 모른다.

62. 천국과 지옥 사이의 균형

천국과 지옥 사이에 있는 균형(balance)-또는 평형상태(equilibrium)-의 존재는 ‘지옥’편의 초두에서 이미 언급했다. 그런데도 그것에 관하여 더 말할 필요가 있는 이유는 이것에 대한 이해는 전체로서의 천국과 지옥을 이해하는 열쇠에 해당되기 때문이다.

만일 어떤 것이 결과되어 존재한다면 모든 것은 균형 안에 있어야만 한다. 균형 없이 작용과 반작용은 없다. 그 이유가 평형 상태는 두 세력 사이에 있고, 이쪽이 작용하고, 저쪽은 반작용하기 때문이다. 작용과 반작용의 동등함으로부터 야기되는 쉼의 상태가 평형 상태라 불리운다.

자연계에는 자연계 전체로서, 그리고 그 안의 각각의 것 안에 균형이 있다. 예를 들면, 보다 낮은 대기는 보다 높은 대기가 아래로 누르는 작용에 비례해 반작용하고 저항한다. 자연계에는 열과 차거움, 빛과 그늘, 마름과 습함, 등등에도 균형이 있다. 그것들 사이의 중간 지점이 균형을 이룬다. 모든 것은 안으로 흘러드는 어떤 세력(force)이 있고 다른 것은 그것을 수용하거나 마다 한다. 자연계에서는 이런 것을 두고 세력과 노력이라 부르지만, 영계에서는 생명과 의지, 또는 의도함이라 부른다. 저 세계에서 생명은 살아 있는 세력이고, 의지는 살아있는 노력이다. 균형은 자유라 불리운다.

고로, 영적 균형, 또는 자유함이 존재 안으로 오고, 이쪽에서 선의 작용이 있으면 저쪽에는 악의 반작용이, 또는 이쪽에서 악의 작용이 있으면 저쪽에서 선의 반작용이 있다. 다시 말해, 선한 사람에서는 선이 작용하고 악이 반작용하여 균형이 발생하고, 악한 사람에서는 악의 작용이 있고 선이 반작용하여 균형이 발생한다. 이러한 이유는 사람의 삶의 모든 부분은 선인 것과 악인 것이 더불어 실시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각 사람의 의지는 그릇과 같다.

천국과 지옥 사이에는 영구한 균형이 있다. 그래서 악인 것을 행하려는 노력이 지옥으로부터 위쪽으로 숨쉰다. 그리고 선인 것을 행하려는 노력이 천국으로부터 아래쪽으로 숨쉰다. 영들의 세계는 완전한 균형 안에 있다. 그 이유는 천국과 지옥 한 중간에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완전한 균형을 유지해야 사후 영계로 입장하는 사람의 상태의 종류에 걸맞게 각 사람을 보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완전한 균형이 없다면 이는 불가능하리라. 이 균형을 수단으로 사람은 세상에 있을 때나 똑같은 자유 아래 있게 되는 바, 모든 이는 그가 무엇 같았는지 조심스럽게 검사되어진다.

악은 지옥으로부터 숨쉬고 선은 천국으로부터 숨쉬는 이유는 각 개별적인 사람은 사람의 애착과 생각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영적 영역력(sphere)에 에워싸여 있기 때문이다. 각 개인이 이러하듯 천국과 지옥의 공동체 전부에게도 마찬가지 이다; 그들의 병합된 영역력은 앞으로 흘러나오는데 전체 천국으로부터 그리고 전체 지옥으로부터 이다.

선은 천국으로부터 흐른다. 그 이유는 거기 모든 이는 선인 것 안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악은 지옥으로부터 흐른다. 그 이유는 거기 모든 이는 악인 것에 포함되어져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천국으로부터 흐르는 선은 모든 천사들을 그들의 이기심으로부터 지켜주고 그분의 형상 안에 간직되게 해주시는 주님으로부터 온다. 이에 비해, 지옥들에 있는 이들은 그들 자신의 이기심에만 포함되고 있다, 그리고 이것 자체에는 악 밖에 없다. 악만 있기에 그것은 지옥이다.

위 논지에서 미루어 알 수 있는 바는, 천국에 있는 천사들과 지옥에 있는 영들이 보존되게 하는 균형은 영들의 세계에서 발견되는 균형과 같지 않다는 것이다. 천국에 있는 천사들을 위한 균형은 그들이 선인 것에 포함되기를 원했던 정도 만큼의 문제- 또는 그들이 세상에서 있었는 동안 선을 행하면서 살았던 정도 만큼의 문제- 그리고 얼마나 많이 악인 것으로부터 돌아섰는가의 정도 만큼의 문제이다. 그리고 지옥에 있는 영들을 위한 균형은 그들이 악인 것 안에 포함되기를 원했던 정도 만큼- 또는 그들의 생애 동안 악하게 살았던 정도 만큼-그리고 그들이 자기들의 심정과 영에서 선을 반대했던 정도 만큼의 문제이다.

만일 주님이 천국과 지옥 둘 다를 규율하시지 않거나 통치하시지 아니했다면 균형은 있지 않았을 것이고 만일 균형이 없다면 천국과 지옥은 없었을 것이다. 천국과 지옥 사이의 균형은 거기에 들어가는 사람들의 수효에 의해 영향받는다. 이 수효는 하루에도 수 천에 달한다. 이 수효가 얼마인지, 그것에 관하여 아는 천사는 없다. 주님만이 이를 헤아리실 수 있다. 그 이유는 신성은 어디에나 현존하시고, 주어진 상황이 어느 방법에 기대어야 하는가를 아시기 때문이다. 고로 주님은 주어진 지옥의 공동체가 너무나 강해지는 것을 방지하려 감독하시고 있다. 어느 지옥 공동체가 강해질 경우 그것을 억제하려 어떤 방도가 취해져 균형을 이루도록 되돌린다. 이런 방도들 중 어떤 방도는 주님 자신이 더 가갑게 현존하시는 것이다; 또 어떤 방도로는 이 공동체가 디른 공동체와 더 밀접해지는 것이다. 또 다른 방도는 초과된 악령들을 사막이나 다른 지옥들로 추방하는 것이다. 이등등이다. 요점은 균형이 있는지 여부를 판단하는 것은 주님이시다는 것, 천국과 지상에서 모든 사람의 구원은 이 균형 안에서 쉼을 얻는다는 것이다. 지옥은 천국을 꾸준히 공격하고 천국을 파괴하려 하는 한편, 주님은 천국에 있는 사람으로하여금 자기들의 이기심으로부터 멀어지게 하고 그분으로부터 오는 선 안에 간수하심으로 보호하신다. 그 반면 천국은 지옥을 공격할 방법이 없다. 그 이유는 주님으로부터 오는 영역력은 모든 이를 구원하시려는 중단 없는 노력이기 때문이다. 지옥에 있는 사람들은 구원되어질 수 없는 바, 그들은 악인 것에 붙잡혀 있고 주님에 반대되어 있는 고로 그들은 자기들이 그렇게 있는 만큼 억제되고, 그들이 어떤 한계를 넘어 서로가 맞서 충돌하지 않도록 제한되어 진다.

63. 천국과 지옥 사이의 균형 때문에 사람들은 자유함에 있다

영적 균형은 자유함 자체이다. 그 이유는 그것이 선인 것과 악인 것 사이에 있는 균형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의미되는 자유함은 선이든, 악이든 의도하는 능력, 그리고 이것 보다는 저것을 선택하는 능력이다.

이 자유함은 주님에 의해 각 사람에게 주어진다. 그리고 이 자유함은 거두어지는 일은 결코 없다. 이것은 주님에 속한 어떤 것일 뿐이지 사람에 속한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마치 사람의 것인 듯 그의 생명과 더불어 사람에게 주어져 있다. 이리하여 그는 개혁되고 구원된다; 이 자유함 없이 개혁이든 구원이든 가능하지 않다. 확실한 바, 자유함이 사람으로 나빠지게 생각하게 만들든지, 좋아지게 생각하게 하든, 정직하게 이든, 또는 비정직하게 이든, 공정하게 이든, 불공정하게 이든, 잘 이야기 하게 하든 또는 잘 행동하게 하든 어떤 상황에서 이든 자유함은 그 사람의 범주 안에 놓여 있다.

사람이 이 영적 자유함 없이는 개혁되어질 수 없는 이유는 그가 구원되고자 한다면 이와 동시에 반드시 내다버려야 할 온갖 종류의 악들과 더불어 사람은 태어나기 때문이다. 구원될 이들은 자신 안에 있는 갖가지 악들을 보고 인식하지 않으면 그 악들을 내다버리지 못할 것은 당연하다. 그는 그것들의 정체를 규명해야 한다; 그는 그것들을 행하기를 원치 않아야 한다. 마지막으로 그것들로부터 돌아서야 한다. 그리고 그것들과 확실히 이별해야 한다. 이 사건은 당사자가 선한 것 안에 있는 만큼 악 안에도 포함되어 있어야 발생된다. 우리는 악으로부터 선을 볼 수 없고 오직 선으로부터 악을 볼 수 있다. 사람이 생각할 수 있는 선은 그가 어린 시절에서 배워진 것들로부터, 성경을 읽음으로부터, 성경의 해설을 들음으로부터 형성된다. 또한 사람은 세상의 삶으로부터 도덕적으로 선인 것을 배운다.

자유 안에 있어야 할 필요가 있는 이유는 사람이 뭔가를 실시하되 이는 그의 사랑과 행동하는 애착의 결과로서 발생하지 않으면 그 뭔가는 그 사람의 부분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뭔가에 대한 모든 방법이 그 사람 안으로 온다. 그러나 그것들은 그의 생각함을 넘어 그의 의지로 들어가지 못한다. 사람의 의지 안으로 정당하게 들어가지 않은 것은 그에게 속한 것이 아니다. 그 이유는 생각은 기억으로부터 도출되는 한편, 의지 또는 의도함은 생명 자체로부터 도출되기 때문이다. 사람의 영은 그가 개혁되고 구원되어질 수 있는 자유 안에서의 있음이 유지되도록 천국과 지옥 모두에 연결되어 있다. 천국으로부터의 천사와 지옥으로부터의 영들이 각 사람과 더불어 있다. 이런 방식을 통해 사람은 영적 균형 안에 있다. 그러므로 자유 안에도 있다. 한 가지 이해해둘 것은, 천국과 지옥과 더불은 사람의 연결은 직접적 수단이 아니고 간접적 수단, 즉 영들의 중간 세계에 있는 영들을 통하여 연결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 영들이 사람과 더불어 있다; 천국 자체나 지옥 자체로부터의 누구와도 그는 함께 있는 것은 아니다. 사람은 영들의 세계에 있는 악한 영들을 통하여 지옥과, 영들의 세계에 있는 선한 영들을 통하여 천국과 연결되어지고 있다.

이상의 내용은 모든 것이 배열되어지는 방법인 바, 영들의 세계는 천국과 지옥 중간에 있고, 실제의 균형이 거기서 발생한다. 사람들에게 붙은 영들은 특별한 공동체로부터 사람에게 파견된 것이다. 이 특별한 영은 그룹(group)의 ‘지배를 받는(subject)’ 영이라 불리운다. 전체 공동체는 다른 공동체, 또는 개인과 위의 방법으로 교통할 수 있다. 이것은 영계에서의 왕래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이다; 아마 이 세상 사람 사이에 놓인 서로 간에 있는 오감, 의사를 서로 타진함과도 동일할 것이다. 영들의 세계로부터의 공동체의 지배를 받는 영들이 각 사람에게 붙어 있다.

마지막으로 사후 삶에 대한 사람들의 개념(notion), 천부적인 개념, 즉 천국으로부터 사람 안으로의 흐름으로부터 오는 개념에 대해 몇 마디 말을 보탤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천국과 연결된 모든 사람과 더불어 있는 사후 삶에 관한 타고난 생각이 있다. 이 생각의 발단과 출처는 천국의 영향력, 좀 더 꼼꼼히 말하면, 영들의 세계로부터 와서 사람에게 붙어있는 영들을 수단으로 주님으로부터 천국을 통하여 있는 영향력이다. 사람들이 만일 생각에 관한 그들의 자유가 잘못된 생각들에 의해 있다면, 예를 들면, 혼은 단지 생각일 뿐이다든가, 단지 몸 안에 존재하는 어떤 것 밖에 아니다 는 식으로 인간 혼에 관한 잘못된 생각들에 의해 삭제되지 않았다면 천부적 개념을 가진다. 그 이유가 사실 혼은 사람의 생명 외 다른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영이 실제의 사람이다. 그가 세상에서 끌고 다니는 육체의 몸은 영이 자연계에서 행동할 수 있게 해주는 몸종에 불과할 뿐이다.

64. 후기(postscript)

이 책에서 말해진 모든 내용들은 영적인 것에서 즐거움을 발견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이상한듯 여겨질지 모르나, 그와 반대인 사람에게는 영적인 것에 대한 그들의 개념을 더 명료해지게 만들 것이다. 특히 진리를 위하여 진리인 것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하여는 이 책은 더 특별할 것이다. 사실 사랑되어진 것은 그것 고유의 빛을 마음 안으로 가져다 준다. 특히 진리가 사랑 받을 때 더욱 그러하다. 그 이유는 참으로부터의 모든 것은 빛 안에 있기 때문이다.

천국의 삶

제3부
천국의 삶

26. 천국의 태양

이 세상의 태양은 천국에서는 보여지지 않는다. 그 이유는 그 태양은 온전히 자연적이기 때문이다. 그렇다 해도 천국에도 태양은 있다. 이 태양 역시 자연계의 태양 같이 빛과 따뜻함이 있다. 천국의 태양은 주님이시다. 천국의 빛은 신성한 진리이고 따뜻함은 신성한 선인데, 마치 태양으로부터 있는 따뜻함 같이 주님으로부터 유출된다. 주님이 천국의 태양이신 이유는 그분이 신성한 사랑, 영적 모든 것의 근원이시기 때문이다. 이 사랑이 태양 같이 천국에서 빛을 낸다.

천국에서 주님이 태양으로 보여질 수 있기에, 즉 그분 안에 있고 그분으로부터 흐르는 그분의 신성한 사랑 때문에 천국에 있는 모든 사람은 언제나 그분을 향하고 있다. 그러나 지옥들에 있는 사람들은 지옥 자체인 어둠을 향하고 있는 바, 그들은 주님에게 등을 보이는 셈이다. 이런 돌아섬이 거행되는 이유는 저세상의 사람들은 자기 고유의 사랑인 내향적 동기만을 바라보기 때문이다. 영계에서는 자연계에 있는 것 같은 고정된 나침반의 끝점(point)들은 없다; 영계에서 방향을 결정하는 것은 초점(focus)이다.

사람들 역시, 영 안에서, 이 세상에서 위와 유사하게 자신들을 돌아서게 한다. 자아 사랑과 세상 사랑이 동기가 되어 움직이는 이들은 자신들을 주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쪽으로 향한다. 이와 반대로 주님과 자기의 이웃을 사랑하는 이들은 그분을 향하여 자신을 돌린다. 섭섭한 대목은 이 세상은 나침반의 고정된 끝점이 있기 때문에 사람들이 이 사실을 알아채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주님은 천국의 태양이시고 그분으로부터 모든 것이 유래하는 바, 그분을 향하여 돌아서기 때문에, 주님은 모든 것의 중심이고 모두 각각의 방향과 목적의 근원이시다. 이런고로 그분 아래 있는 모든 것은 그분의 현존 안에, 그리고 그분의 인도하심 아래 있다. 이는 천국과 땅 위에서 마찬가지 이다.

27. 천국의 빛과 열

자연으로부터서만 사물을 생각하려 고집하는 사람은 자연계의 정오의 태양 보다 훨씬 밝은 빛이 천국에 있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곳의 빛은 세상의 빛인 자연적인 빛이 아니고, 영적인 빛이다. 이 빛은 실지로 태양이신 주님으로부터 공표되고, 신성한 사랑인 이 태양으로부터 신성한 진리가 빛으로 공표된다. 진리는 천사들에게 빛인데, 그 이유는 그들은 자기들의 태양으로부터 뭔가를 지각하는 영적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천사들은 신성한 진리로부터 삶에 관한 모든 것을 이해한다, 그리고 그들의 이해함은 안쪽의 시각이다. 이 시각이 그들의 바깥쪽 시각 안으로 흘러 보는 것을 산출한다.

천국에서 빛의 근원이 위와 같고, 그 다음 이 빛은 주님으로부터 신성한 진리를 받는 방법에 따라, 그리고 천사들과 더불은 지혜와 총명의 등급에 따라 다양하게 바뀐다. 간략히 말해, 천적 왕국에 있는 빛은 영적 왕국에 있는 빛과 다르고, 같은 왕국 안에서도 각 공동체마다, 심지어 각 개인 마다에서도 차이가 있다.

천국의 빛은 어떤 것이 실지로 있는 그대로를 확실히 보이게 한다. 따라서 제아무리 작은 조각도 감추이지 못한다. 보다 높은 등급의 천사들은 자신들을 공개적으로 보여주는 것을 사랑하는데, 그 이유는 자기들에게는 선한 의도들만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천국 아래 있는 이들은 천국의 빛에서 보여지는 것 자체를 두려워한다. 지옥의 이들은 자기들 등급의 사람들끼리는 확실히 사람으로 쳐다보지만, 그들이 천국의 빛에서 보여질 때 그들은 자기들의 악의 실지의 모양인 흉측한 괴물 같이 보인다. 천사들이 이 세상 사람의 영적 상태를 볼 경우 위 같은 현상은 천사들에게 마찬가지로 나타난다. 따라서 만일 그들이 내향적으로 선하다면, 그들은 아름다운 사람 같이 보이고, 그들이 내향적으로 악하다면, 그들은 모양 없는 괴물 같이 보여진다.

열-또는 따뜻함은 천국에서 태양으로서 주님으로부터 공표되는 사랑이다. 그 이유는 그분은 신성한 사랑이시기 때문이다. 이 사랑도 빛의 경우 같이 천사들의 공동체 내의 사랑의 등급에 따라 천국에서 다각도로 받아진다. 선(goodness, 선량), 이는 사랑이다. 그리고 진리(truth), 이는 빛이다. 이 둘은 오직 하나로 발산되는 것으로서 주님으로부터 공표된다. 그 이유는 그 둘은 진실로 하나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천사들은 그 둘을 따로 떼어 보는데, 그 이유는 천사들의 등급에 차이가 많은 이유로 어떤 천사는 빛 보다 열을 많이, 또다른 천사는 열 보다 빛을 더 많이 받는 경우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천사가 완전에 가까울수록 빛과 열을 동등하게 받는다.

28. 천국의 네 지역들

천국도 세상에서 같이, 네 중요한 지역들이 있다; 동, 남, 서, 북이다. 세상에서 이것들은 태양의 위치에 의해 결정되어지나, 천국에서 그것들은 주님의 현존으로부터 결과되어진다. 태양으로서 주님이 보여지는 방향은 ‘동’쪽이라 부른다. 그 반대 방향은 ‘서’쪽이다; ‘남’쪽은 오른쪽에 있고 ‘북’쪽은 왼쪽에 있다. 이 방위는 사람들이 자기들의 얼굴, 내지 몸을 어느 방향으로 돌린다 하더라도 진실을 붙잡게 한다. 그 이유는 천국에서 모든 방향들은 동쪽으로부터 결정되어지기 때문이다. 주님이 보여지는 방향이 ‘동’쪽이라 불리우는데, 그 이유는 그분이 생명의 근원이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따뜻함과 빛-즉 사랑함과 이해함이 천사들에 의해 받아지는 만큼에서 주님은 그들 사이에서 일어나졌다고 말해진다. 또한 동쪽은 천사들이 자기들의 얼굴이나 몸을 어느 쪽 방향으로 돌리든지 천사들 앞에 계속적으로 있는다. 천사들은 땅 위 사람들의 것으로부터 여러 다른 방향으로 돌아 선다. 그 이유는 돌아서는 그들의 이유가 다르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기들이 사랑하는 것 쪽으로 향하여 선다. 그리고 결과로서 그들의 사랑은 그들 앞에 계속적으로 있는다. 천국에서, 주님은 그들 사랑의 근원이시다. 그리고 주님이 그분의 사랑 안에서 그들과 더불어 있는 한, 그분은 그들이 어느 방향으로 얼굴을 보이고 있든 그분을 바라보게 해주신다.

이에 대한 결과로, 놀라운 상황이 천국에서 일어난다. 많은 사람들은 거기서 한 장소에 있을 수 있고, 이 사람은 자기 얼굴과 몸을 이쪽으로 돌아서고, 저 사람은 저쪽으로 돌아 설 수 있다. 그럼에도 그들의 모두는 자기들 앞에서 주님을 뵙는다. 그리고 각자는 남쪽을 그의 오른쪽에, 북쪽은 그의 왼쪽에, 그리고 서쪽은 자기 뒤에 위치한다. 천국에서 또 다른 놀랄만한 사실은 천사들의 얼굴이 동쪽을 향해 있는 때 조차에서도 그들은 다른 세 지역들도 관찰한다는 것이다. 이는 생각과 더불어 행해지는 그들의 한층 더 깊은 내적 시력으로부터 와진다.

천국에서 사람들은 위 네 지역에 따른 여러 다른 면적에서 살고 있다. 사랑과 선량함에 속한 것들 안에 포함되어진 사람들은 동쪽과 서쪽에 사는데, 그들 중에서 보다 더 지각적인 이들은 동쪽에, 상대적으로 덜 지각적인 이들은 서쪽에 분포하고 있다. 한편 지혜의 빛 안에 있는 이들은 남쪽, 상대적으로 빛이 약한 사람들은 북쪽이다. 이 배열은 천적, 영적 왕국에서 전체 공동체, 또는 단 하나의 공동체 모두에게 참 질서이다. 일반적으로, 동쪽을 향하는 공동체들은 서쪽을 향하는 공동체들 보다 더 낫다. 그리고 남쪽을 향하는 공동체들은 북쪽을 향하는 공동체들 보다 낫다.

29. 천국에서 천사들의 상태는 변화한다

이는 천사들과 더불은 사랑, 지혜 그리고 이해함으로부터 있는 것들, 또한 그들 삶 자체가 변화, 또는 교차한다는 말이다. 천사들은 똑같은 상태에 계속적으로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변화들을 통과해간다. 각 천사의 사랑과 지혜는 어떤 특정한 때의 그의 특별한 상태에 따라 다양해진다. 그래서 천사는 강렬하게 사랑할 때도 있지만 그렇지 않을 때도 있다. 이런 사랑함의 농도는 대단히 진한 것으로부터 아주 옅은 것에 이르기까지 등급별로 다양하다. 그들이 최고로 사랑하고 있다고 느낄 때, 그들은 자기들 사랑의 완전 충만된 빛과 따뜻함 안에 있는다. 그러나 자기들의 사랑함이 미미할 때 그들은 상대적으로 차거나 그늘 안에 있고, 불유쾌한 상태나 희미한 상태 안에 머물기도 한다. 그럼에도 그들은 이런 상태들로부터 첫 단계로 되돌아 온다. 이 변화들은 마치 이 세상의 빛과 그늘, 따뜻함과 차거움, 아침과 저녁이라는 하루의 주기 같이 이 상태에 저 상태가 뒤를 잇는다. 이런 것들은 실지로 상응한다. 아침은 천사들의 사랑이 진할 때와. 정오는 지혜가 아주 밝은 빛에 있을 때와, 저녁은 사랑과 지혜가 상대적으로 그늘 상태에 있을 때, 밤은 사랑과 지혜의 어떤 것도 없을 때와 상응한다. 그런데 밤 자체는 천국에 있는 사람들의 상태와 상응하는 것이 없고 오로지 지옥에 있는 사람들과만 상응할 뿐임을 주목해두자. 천국에서는 ‘저녁’ 상태가 다가오는 새 아침에 앞서 있는 새벽으로 인도해준다.

천사들은 자기들의 내적 상태의 변화, 뿐아니라 자기들 주위에서 보는 여러 다른 것들의 외관도 변한다. 이에 대한 설명는 차후 있을 것이다.

위와같은 변화가 있어야 하는 이유가 있다. 천사들은 영적 생활에서 다양함이 계속 있을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그들이 천국의 진가를 인정함이 언제나 똑같은 상태에만 있다면 그 진가의 가치가 줄어드는데, 마치 지상에서 누군가가 제한 없이 계속 편안함이나 쾌락들에 푹 빠져 있다면 시간이 지날수록 그것들로 인한 즐거움도 상실되고 마는 경우와 같다. 또 하나 이유는 여기 사람들 같이 천사들도 자기 인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 때문에 너무 많은 시간을 자신들에 관해 생각하려드는 경향이 있다. 천국의 모든 이 각각은 자아 사랑으로부터 오는 힘은 쓰지 못한다. 그들이 주님에 의해 자아 사랑이 억제 되면 그들은 사랑과 지혜에 관한 것을 경험하지만, 그들이 자아 사랑 안에 푹 빠지면, 또는 그것 안으로 빠져드는 것을 방치하면 그들은 그 사랑을 경험한다.

30. 천국의 시간

천국에 있는 모든 것도 세상에서 있어지는 똑같은 방식으로 연속성과 발달이라는 것이 발생되고 있음에도, 천사들은 시간과 공간에 대한 실지 개념은 없다. 이것은 당연시되어 있는바 그들은 이것들이 이와 같다는 것을 이해 못한다. 이 세상의 시간은 눈에 보이는 태양의 운동에 기초하여 때와 계절들을 산출하고 있다. 천국의 태양은 어떤 연속성이나 궤도 운동 같은 것에 의해 날이나 해가 산출되지 않는다. 그러나 고정된 간격들에서 발생하지 않는 상태의 변화로 생산된다. 이는 천사가 왜 시간 개념이 없고 오직 지나가는 상태 개념만 지니는 가에 대한 이유이다. 그리고 그들은 이런 방식에서 시간과 더불어 있어지는 모든 것을 이해한다. 천사들이 시간에 대한 생각이 없기 때문에 영원이 무엇을 뜻하는 가에 대한 이해가 지상의 사람들의 것과는 아주 다르다. 천사들은 영원을 시간의 무한한 길이가 아닌 무한한 상태를 뜻한다고 보고 있다. 만일 누군가가 시간, 공간 그리고 물질을 용어에 국한해 생각한다면, 그 생각은 한계에 부딪치나, 만일 생각의 더 높은 평면으로, 이런 것들 넘어로 간다면, 한계에 부딪치는 일은 없다.

31. 천국에 있는 표현과 나타남

천국에서 천사들이 자기 주위에 있는 것들을 어떻게 보는지를 서술하는데 간단한 방법은 없다. 한가지 간단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천국의 것들은 세상에 있는 것보다 더 완전하고 더 풍부하다는 점이다. 천국에 물건과 사물이 실지로 있다는 것은 성경의 예언자들이 자기들의 환상에서 본 것에 의해서도 확증되어진다. 천국이 예언자들에게 열려졌을 때 이런 것들을 예언자들에게 보일 수 있게 되었는데, 이는 내향 또는 영적 시력이 열릴 때 발생한다. 이렇게 열리는 것은 주님의 허락이 있을 때이다. 마치 어떤 사람이 육체의 감각으로부터 있는 자연적 지각을 거두어들이고 영적 빛과 이해함으로 들려질 때와 같다.

천국의 것들은 그것들이 일반적으로는 지상의 것과 같은 한편, 많은 방법들에서 아주 다르기도 하다. 기본적 차이는 천국의 것들은 영적 태양으로부터 존재하나, 지상의 것은 이 세상의 태양으로부터 존재한다는 점이다. 천국의 것들은 지상의 것에서 행하는 똑같은 방법에서 발생하지 않는다. 천국에서, 모든 것은 거기 있는 천사들과 더불은 그것의 상응에 따라서 주님으로부터 온다. 내부의 상태들에 상응하는 천국에 있는 모든 것은 실제로 그것들을 재연(re-present)하는 것인 바, 그것들은 그것들의 ‘표현(represent)’이라 일컫는다. 게다가 천국에 있는 것들은 천사들의 상태에 따라 다양해지기도 하는 바, 그것들은 ‘나타남’이라 일컫는다. 이는 이 세상에 있는 것 만큼 사실로서 완전하게 보일 수 있고 보여짐에도 불구하고 그러하다. 천국에서, 물체들은 여기 이곳 보다 아주 더 선명하게 보여진다.

천국에서의 나타남은 ‘진실로 나타남’이라 불리우는데, 그 이유는 그것들이 실지로 발생하기 때문이다.

상응의 결과로 천사들이 보는 것에 대한 예를 한가지 들어보자; 나무와 꽃들이 가득찬 공원과 정원이 총명한 천사들 앞에, 그들 주위에 나타난다. 그리고 그것들은 완전한 질서로 배열되어 있다. 거기에는 아취형의 출입구와 작은 길이 여기 저기에 있다. 거기를 산책하는 사람들의 이해함은 완전에 가깝다. 그들은 꽃들을 꺽어 화환을 만든 다음 작은 어린 아이에게 씌워준다. 거기에는 이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나무들과 꽃들이 있고, 그리고 나무에 있는 열매는 이 천사들이 지닌 사랑에 있는 선함이다. 그들은 공원과 정원 때문에 이 풍경을 보는데, 열매 열린 나무들과 꽃들은 총명과 지혜에 상응한다.

32. 천국에서 천사들의 옷

천사들도 옷을 입고 있는데, 그 이유는 그들은 지상의 사람들 같이 함께 사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또한 그들은 집과 그와 유사한 것들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구분짓는 차이점은 이렇다: 그들이 가진 모든 것은 더 완전한데, 그 이유는 그들이 더 완전한 상태에 있기 때문이다. 천사들의 지혜가 인간의 지혜를 훨씬 더 능가하듯, 그런 수준으로 천국에서는 모든 것이 지각되고 있다. 천사들의 옷은 여타의 것들이 상응하듯 상응한다. 그리고 그것들이 상응하기 때문에 그것들은 실제로 존재한다. 그들의 옷은 그들의 총명에 상응한다. 천국에 있는 사람들은 자기들의 총명을 간수하도록 잘 차려입은 상태로 보여진다. 총명의 수준에서 이 사람이 저 사람을 능가할 경우 이 사람은 더 세련된 옷을 차려 입고 있다. 가장 총명한 천사들의 옷은 마치 자기들이 불 속에 있는 것 처럼 이글거리는 불빛이다. 총명이 덜한 천사는 빛나는 흰 옷을 가진다. 더욱 덜 총명한 천사는 여러 다른 색깔로 된 옷을 가진다. 모든 천사들 중 최고의 천사는 벗고 있다.

천사들의 옷이 자기들의 총명에 상응하기 때문에 의복 자체는 특별한 진리들에 상응하는데, 마치 모든 총명이 신성한 진리로부터 오는 것과 같다.

불타는 듯한 옷과 빛나는 의복의 나타남은 불이 사랑에, 빛이 참인 것에 상응함으로부터 오고 있다. 이 나타남들의 크기는 천사들이 주님을 얼마나 영접하느냐에 비례한다. 다양한 색깔의 옷 역시 다양하게 영접함에 상응한다. 최고의 천사들이 벗고 있는 이유는 그들 만이 순진 안에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순진은 벌거벗었음으로 표현되어진다. 천사들은 이 옷들을 볼 수 있을 뿐 아니라 그것들을 느낄 수 있다. 그들은 갈아 입을 옷도 많이 가지고 있다. 그래서 그들은 이 옷들을 밀쳐두거나 입으려고 다시 꺼내기도 한다. 그들은 이 옷들이 주님으로부터 주어진 것이라고 말한다. 때때로 그들은 그런 줄도 모르고 옷입고 있기도 한다.

영계에서의 옷은 언제나 거기 사람들의 품질을 간직하기 때문에, 지옥에 있는 이들, 진리를 알고 싶지 않은 이들은 찢어지고 더럽고 불쾌하기 조차한 옷을 입고 각자 자기의 사악함을 간직하고 있다. 그들은 이런 옷 외에 어떤 옷도 입을 수 없다. 그들이 발가벗은 것이 보이지 않도록 주님은 그들에게 그들의 옷을 주신다.

33. 천국에 있는 집(house)들과 자기 집(home)

천사들은 공동체들 안에서 살고 있다. 그리고 그들은 자기들 만의 집을 지닌다. 이는 마치 자기들 생명의 개인적 품질에 따라 다양한 옷을 입는 것과 비슷하다. 보다 수준 높은 상태에 있는 천사들을 위해서는 웅대한 집이 있다. 이 보다 덜 높은 수준의 상태의 천사를 위해서는 정성들여 만든 집이 있다. 그들의 거주함은 자기 집이라 불리는 땅 위의 것들과 거의 같다. 단지 그곳의 집이 더 아름답다는 것만 차이가 난다. 그 집은 방들, 곁방, 여러 침실을 가지고 있다. 정원과 화단과 잔디로 둘러싸인 안뜰도 있다.

거기 사람들은 아주 가깝게 붙어 살고 있다. 집들은 이 세상의 집들이 큰 도로나 작은 도로, 광장을 따라 배열된 도시의 집 같이 이 집과 다음 집이 아주 가깝다. 천국에 있는 건물의 도안은 아주 완전한 바 그것들은 예술의 참 본체를 표현한다고 여러분은 말할지 모른다. 사실 그럴 수 밖에 없는 이유는 설계 자체에 관한 예술이 천국으로부터 오기 때문이다. 천사들은 자기들 눈 앞에 펼쳐지는 이런 아름다운 것들-게다가 더 완전한 것들은 주님이 놓아두신 것이라고 말한다. 더구나 천사들은 이런 것들을 볼 때 눈으로 보다는 마음으로 더 즐거움을 향유한다. 그 이유는 그들이 모든 것 안에 있는 상응을 보기 때문, 더 나아가 이를 통하여 신성한 것을 보기 때문이다.

집안에 있는 여러 다른 것들 까지도 상응한다. 집 자체는 거기 사는 이들의 선에 상응한다. 집안의 특별한 것들은 이 선을 만들어 가는 다양한 품질과 상응한다. 집 밖은 이 선으로부터 발생하는 진리들에 상응하는 것들이고, 또한 지각과 통찰력에 상응한다.

천사들의 자기 집은 이 세상에서 지어지는 집들과 같은 식으로가 아니다. 천사들의 자기 집은 주님에 의해 천사들에게 자유로이 주어지되, 그가 어떻게 선과 진리인 것을 받는지에 일치하는가에 따라 모든 이에게 주어진다. 천사들은 자기들이 소유하는 모든 것을 주님으로부터의 선물로서 간직하고 있다. 주님은 그들이 필요한 모든 것을 주시고 있다.

34. 천국에 있는 공간

비록 천국에 있는 모든 것이 이 세상에 있는 것들과 아주 똑같은 공간에, 장소에 있도록 나타난다 할지라도, 천사들은 장소와 공간에 대한 개념이 없다. 이것이 역설적 이론 처럼 비쳐질 것인바, 설명이 필요하다.

영계에서 장소가 바뀌는 것은 상태의 내부 변화를 수단으로 일어난다. 장소가 바뀌는 것, 또는 여행은 단순히 상태의 바뀜이다. 이는 천사들이 어떻게 여행하는지를 알게 한다. 그들은 움직임을 위해 거리나 공간을 가지지 않는다. 그 이유는 그들은 상태로 만들어진 또 다른 치수(dimension)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위의 사실은 천국에서 어떻게 장소의 바뀜이 발생하는지를 알려주는 바, 한 가지 명백해지는 것은, 서로 비슷한 상태에 있는 이들은 서로 가깝게 위치하고, 한편 다른 상태에 있는 사람들은 멀리 떨어져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비슷한 것은 가깝고 비슷하지 않으면 멀리 있다. 내적 상태에 상응하는 바깥쪽 상태가 아니면 천국에는 공간이 없다. 이런 이유 때문에 천국의 왕국들과 등급들은 서로 서로로부터, 각 천국에 있는 공동체들도, 또한 각 공동체 안의 천사들 사이도 구분이 있다. 이는 지옥이 반대되는 상태에 있는 이래 천국으로부터 완전하게 분리된 이유를 설명해준다.

위의 사실에서 또 하나 알려준다. 영계에서 누군가와 함께 있기를 갈망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누군가가 그 사람에게 나타난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그가 타인에 관해 생각하고, 자신을 그의 상태에 놓기 때문이다. 한편, 사람들은 자기가 상대로부터 돌아서는 만큼 그 사람으로부터 멀리 있게 된다. 이 돌아섬은 불일치하는 생각으로부터 발생하기에, 몇 사람이 한 장소에 있다 해도 자기들이 일치하는 정도 만큼 서로를 보는 경우가 발생한다. 더구나 불일치가 있는 순간 서로는 사라지고 만다.

누군가가 이 장소에서 저 장소로 갈 때, 그가 거기에 있기를 원하는 강도에 따라 더 빠르게 도착하거나 더 느리게 도착한다. 여행의 경우도 같은 이치인 바 같은 거리를 여행해도 더 길어지거나 더 짧아지기도 한다.

35. 천국의 모양(form)이 천국의 모든 연합(association)과 교제(communication)를 위한 방식을 정한다.

다소 차이는 있겠지만, 지금까지 말해온 것으로부터 천국의 전반적인 조직도 알 수 있게 될지 모른다. 요점은 이것이다. 그곳에서의 그룹짓는 것이나 교제하는 모든 것을 위한 방식을 만드는 어떤 모양이 있다는 것이다. 이 뿐만 아니라 천사들의 모든 총명과 지혜, 그리고 (밖으로) 나가는 생각들과 애착들 모두를 위한 방식도 있다. 누군가가 천국적인 모양 안에 있는 정도 만큼 그는 슬기로워져 있다. 천국의 모양은 영계를 움직이는 질서의 특별한 법칙들에 의존하고 있다. 천국의 모양 안에 있음은 이 질서에 살고 있음과 같은 말이다. 지상에서의 사람은 천국의 형상으로 창조되었지만, 바깥쪽으로는 세상의 형상이다. 사람들이 자기들 마음에 악한 바램과 거짓 사상들의 입장을 허용함으로 해서 자기들 안의 천국적인 형상은 파괴되었기 때문에, 사람 안에 있는 더 깊은 것들은 그가 태어나는 그 때로부터 굳게 닫혀져 있다. 이는 왜 인간은 동물과 달리 완전한 무지에서 태어나지는지에 대한 이유도 된다. 사실상, 만일 사람의 천국의 모양이 아무리 보아도 회복될 기미가 없다고 한다면, 질서 속의 것들을 가르치는 것이 하나의 방법이다. 그 이유는 모양 자체 역시 질서로부터 오기 때문이다.

성경은 그것을 통해 주어진 다양한 명령 안에 신성한 질서의 모든 법칙을 담고 있다. 사람이 이 법칙들을 알고 그것들로 사는 만큼, 자기 안에 굳게 닫힌 것들이 자유해진다. 그 다음 천국의 형상은 그 사람과 더불어 새롭게 모양을 만든다. 그러므로 우리는 천국의 형체 안에 있음, 즉 성경 안에 거기서 있는 것들에 의해 사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 수 있다.

천사들이 그룹 안에서 서로를 끌어 당기는 방법은 그들의 영적 친척 관계에 기초를 두고 있다. 이는 전체로서의 천국, 각 공동체 안에서, 그리고 각 가족 단위에서 역시 마찬가지 이다. 서로 비슷한 상태에 있는 천사들은 이 세상 친척들이 서로를 인식하듯 한다. 그리고 서로의 마음을 아주 잘 이해한다.

각 천국에 있는 모양은 각 천사의 생각과 느낌을 나누는 형태이다. 그러나 여러 다른 천국들 사이에서는 다른 소통 방식이 있는데, 이는 소통함이라기 보다는 영향을 줌이라고 일컫는 것이 나을듯 싶다. 천사들은 자기들 안으로 흘러드는 주님에 의해 함께 연합되므로, 더 높은 천국의 천사들이 더 낮은 천국으로 들어가 거기 천사들과 대화하지 않도록 각별한 조심스러움이 있다. 그 이유가 만일 이런 일이 발생한다면 더 높은 천사는 즉각 자기의 모든 이해력을 잃기 때문이다. 이런 일이 발생하리라고 여겨지는 이유는 전체로서의 천국에 세 수준이 있듯, 각 천사에게 자기 생명의 세 수준을 가지기 때문이다. 가장 높은 천국에 있는 천사들은 가장 높은 생명의 수준이 열려져 있다, 그리고 나머지 낮은 것에는 닫혀 있다. 중간 천국에 있는 천사들은 두 번째 수준에 열려 있고, 가장 낮은 천사들은 가장 낮은 수준에 열려 있고, 나머지 두 수준은 닫혀 있다. 가장 높은 천국으로부터의 천사가 더 낮은 천국의 누군가와 대화하려 들어가는 순간, 그 천사 자신의 생명의 수준은 닫혀지고 만다. 그리고 한번 닫혀지면, 그가 되돌아 올 때까지 가장 높은 수준의 지혜는 잃고 있게 된다.

보다 낮은 수준으로부터 보다 높은 수준의 천국들 안으로는 흐르지 않는데, 그 이유는 이것이 질서에 반대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영향력은 언제나 더 높은 곳에서 더 낮은 천국들로 미친다.

더 높은 천국으로부터 오는 천사들의 지혜는 어쩌면 수 천 배의 비율로 더 낮은 천국들에 있는 천사의 것을 능가한다. 이것이 왜 낮은 천국의 천사가 더 높은 천사와 대화 할 수 없는 이유인가 이다. 사실, 그들은 자기들이 쳐다볼 때 보는 것 조차 안된다. 그들의 천국은 그들 위에 안개 같은 것이 보인다. 반면, 더 높은 천국의 천사는 더 낮은 천국들의 천사를 볼 수 있으나, 그들이 대화하는 것은 허용되지 않는데 그 이유는 자기들의 지혜의 수준을 잃게 되기 때문이다.

36. 천국이 통치되는 방법

천국이 공동체들로 구성되었기에 그 각각의 공동체는 그 안에 수 백, 수 천의 천사들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각 공동체 안에 있는 이들은 같은 종류의 선 안에 포함되어 있는바, 거기에 통치의 필요가 있다. 질서는 반드시 유지되어야 하고, 질서에 관한 문제들은 보살펴야 할 필요가 있다.

아무리 위와 같다 해도 상호적인 사랑으로부터 오지 않는 천국의 통치는 없다. 그래서 통치의 종류는 각 공동체에 잘 어울리는 것에 따라 다양해진다: 이것은 보편적으로 똑같지 않다.

천적 왕국에서, 통치는 삶 속의 것들에서 자기들을 가르치고 인도하는 주님 만으로부터 온다. 진리인 것은 그들의 심정 안에 있다. 그래서 그들은 진리인 것을 즉시 알고 이해한다. 그곳에는 법적 다툼이 없고, 오로지 공의를 위한 사랑만 있다. 그들 중 보다 덜 슬기로운 사람은 보다 더 슬기로운 사람에게 묻고, 더 슬기로운 사람은 주님에게 문의하여 답을 받는다. 그들의 천국, 이와 대등하게 그들의 가장 큰 기쁨은 주님으로부터 정의롭게 살아가는 것이다.

영적 왕국 안에 있는 이들은 이웃을 향한 사랑, 그리고 이 사랑이 포함하는 것에 더 관심이 있다. 이 품질은 의사 결정에 필요한 진리와 이해함에 기초를 두고 있다. 이 천사들은 주님에 의해 안내를 받지만, 더 간접적이다. 그들은 공무원들을 가지고 있고 그 숫자는 공동체의 필요에 따라 다르다. 그들 역시 하모니를 지키기 위해 법들을 가지고 있다. 공무원들은 이 법들에 의해 모든 것을 통치한다. 그들은 슬기롭기 때문에 그 법들을 이해하고 있다. 혹 그들에게 어떤 의심되는 점이 발생하면 그들은 주님에 의해 계발되어진다.

영적 왕국에는 다양한 통치가 있어, 이 공동체와 저 공동체의 통치는 차이가 있다. 그리고 여러 기능들을 가지고 있는데, 마치 몸의 부분들이 다양한 것과 같고, 이것에 그들 각각은 상응한다. 그럼에도 통치의 모든 모양은 그들이 자기들의 목적으로서의 공통된 선에, 그리고 공동체내에 있는 각 개인의 선에 초점을 두고 일치하고 있다. 모든 이 각각은 주님의 돌보심 아래 직접 있다. 그리고 그는 개인들이 그들 자신의 선을 받는 근원이 공통의 선임을 확실히 한다. 각 천사는 자기가 전체로서의 선을 사랑하는 만큼 선인 것을 받는다.

통치하는 이들은 최고의 사랑과 지혜를 가진 이들이다: 이들은 모든 것 중에서 선을 제일 먼저 추구하고 이 선을 위해 무엇을 갖추어야 하는지도 알고 있다. 이 같은 사람은 타인 위에 지배권을 행사하려 들지 않고 명령도 내리지 않는다; 그들은 섬기고 봉사한다. 즉 선인 것을 사랑함으로부터 타인에게 선을 행하고 있다. 그렇다 하더라도, 그들에게 영예와 영광이 주어진다. 그들은 공동체의 중앙에 살고, 타인 보다 더 높은 곳에, 웅대한 집에 살고 있다. 그들 모두는 이를 인정함이 비록 자신을 위한 것도 아니고, 순종의 범주를 떠난 것은 아니라 해도 기쁘게 수용한다. 모든 이가 아주 잘 아는 바, 이 영예는 주님에 의해 그들에게 주어진다는 것, 그 때문에 그들은 순종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공익 업무들을 처리하는 것이 모든 이의 삶이다. 명확하게 주님의 왕국은 공익을 위한 직업의 천국이다.

37. 천국에 있는 예배

외관상, 천국에 있는 예배는 세상에 있는 예배나 별반 차이가 없는 듯하나, 내향적으로는 아주 다르다. 땅 위와 흡사하게 예배 의식이나 교회 건물도 있다. 그리고 그들은 가르침을 이용하는데, 이와 함께 설교도 빠지지 않는다. 이런 것들이 천국에서 발생하는 이유는 천사들의 사랑과 지혜가 계속 성장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천국에서의 예배는 이곳 교회들의 진행이나 설교를 열심히 경청하는 문제 등에서 똑같지는 않다. 그곳의 예배는 사랑으로부터의 생활, 진정한 가르침들에 기초한 이웃다움과 신앙으로부터의 생활이다. 교회 예배 의식은 생활에 관한 문제들을 위해 더 많이 가르치기 위한 수단 일 뿐이다.

모든 설교가 기초를 둔 가르침은 생활과 직접 관계되고 있다.

그들 중 누구도 생활로부터 신앙의 문제를 분리하지 않는다. 그리고 각 천국에는 가르침들이 주어지는데, 이는 거기 있는 천사들의 특별한 지각에 어울리는 수준에서 이다. 모든 가르침의 필수 요소는 주님의 ‘신성한 인간(Divine Human)을 인정함이다.

설교자 모두는 영적 왕국에 소속되어 있고 천적 왕국은 아니다. 이런 이유는 예배 의식에서 사람들이 선한 것으로부터 오는 참된 생각에 관심이 모아져 있고, 모든 설교는 진리로부터 행해지기 때문이다. 아무리 위와같다 해도 천적 왕국 역시 설교를 가지고 이것을 수단으로 진리에서 빛을 받고, 그들에게 주어지는 새로운 진리들을 청종함으로 더 완전해지기 까지 한다. 그들은 설교를 들을 때, 그 내용의 것들을 보고, 사랑하고, 그것들로 생활하여 자기 생명의 한 부분을 만든다.

설교자들은 동쪽을 향한 설교단에 서 있다. 즉각 설교자 앞에는 더 큰 지혜의 빛 안에 있는 천사들이 앉고, 그들의 오른쪽과 왼쪽에 보다 덜 큰 지혜의 빛에 있는 이들이 앉는다. 그들은 설교자가 모두를 볼 수 있도록 원형 방식으로 앉게 되어 있다. 새로 오는 자는 문쪽에 더 가까이 앉는데, 교회의 동쪽을 향한다. 설교자 뒤쪽에 앉는 자는 누구도 없다. 누군가가 의견을 말하면, 설교자는 혼동에 빠지고 만다. 모든 설교자는 주님에 의해 임명되고, 그 결과 그들은 설교 라는 선물을 받아 가지고 있다

38. 천국에 있는 천사들의 힘(power)

영계의 영향력이 이 세상 안으로 온다는 것, 아예 영계 자체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은 천사들이 실지로 힘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납득할 수 없다. 이들이 생각하는바, 천사들은 실제의 실체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 그러므로 결과를 주는 어떤 것도 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를 더 깊게 생각하는 이들의 경우는 판이하다. 그들은 사람은 자기의 동기와 이해력으로부터 가지는 모든 힘 없이는 그는 자기의 근육 하나도 움직일 수 없음을 실감한다.

사람에게 있는 동기와 이해함은 영인들과 천사들의 영향력을 통해 그 사람의 움직임이나 몸짓에 이르기까지 주님에 의해 규율되어진다. 이를 믿든, 아니 믿든, 사람은 천국의 이 영향력 없이 단 한걸음도 내 디딜 수 없다. 영적 인간이 생각하는 것, 그의 입이 말하는 것; 그가 의도하는 것, 그의 몸이 행하는 것, 자기 바램에 따라 몸에 힘을 주는 강약에 이르기까지 모두이다.

천사들은 수 백, 수 천의 악령을 내던져 그들을 지옥으로 되돌려 보낼 힘을 가지고 있다. 이 힘의 진가를 인정할 필요는 있지만, 그렇다고 그 힘이 그들 자신으로부터 나온 것은 아니다. 모든 그들의 힘은 주님으로부터 그들에게 온다.

사실, 그들 자신들도 이 힘의 근원을 인식하는 만큼에서만 힘이 발휘된다. 힘이 자신으로부터라고 약삭빠르게 믿는 사람은 그 힘이 약해져 악령 앞에 버티고 서 있지도 못한다. 이런 이유로 천사들은 자기들이 행한 것에 대한 칭찬이나 영예를 거절하고 자신에게 공로를 돌리지 않는다. 그들은 그 모두를 주님의 탓으로 돌리고 그분께 칭찬과 영예를 돌린다.

39. 천국에 있는 언어와 말

천사들도 지상의 사람이 말하는 방식으로 서로 대화한다. 그들은 갖가지 것들, 즉 집식구 문제, 친근하게 말도 주고 받고, 도덕적인 문제, 그리고 영적 생활을 토의한다. 그들이 지상의 사람 보다 더 깊은 생각으로부터 더 총명함으로부터 라는 것 외에는 별 차이가 없다.

천사들의 말, 인간의 말 같이, 분리된 단어들의 형태를 취한다. 크게 이야기 한다, 그리고 천사들은 말해진 모든 것을 듣는다. 그 이유는 그들은 입과 혀와 귀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의 말을 운반하는 대기(공기)가 있다. 이 대기는 영적 존재들에 적합한 영적 대기이다. 영적 존재들은 이 대기를 수단으로 숨쉬고 이야기 한다.

천국에는 한 개의 보편적 언어가 있어 모든 이는 자기의 공동체가 어디로부터 이든, 멀리 있든 가까이 있든 상관 없이 아주 완전하게 모든 이를 이해한다. 이 언어에는 학식이 필요 없다. 그 이유는 이것은 모든 이에 주어지는 모태 언어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실제로는 그들의 애착과 생각함으로부터 흐른다. 언어의 소리는 애착에 상응한다. 그리고 단어들 자체는 이 애착으로부터 오는 생각에 상응한다. 이 상응이 언어를 영적으로 만든다; 소리냄은 애착에, 사고는 이야기함이다. 이는 천사들이 상대가 이야기하는 방식으로부터 단순하게 그가 실지로 무엇 같은지를 아는 방법이기도 하다.

천사들의 언어는 애착에 근원된 소리로부터 파생된 몇 단어들 말고는 인간의 언어와 공통된 것이 없다. 두 언어의 차이 때문에 인간의 어떤 언어의 단 한 단어 조차 발음해 내는데 천사들은 무능력을 보여준다. 사실 그들도 발음해보려 여러 차례 시도했었지만 말할 수 없었는데, 그 이유는 그들이 자기들 애착에 일치하는 것만을 발음할 수 있기 때문이다.

천적인 천사들은 더 깊은 수준의 애착으로부터 대화하는데, 그 이유는 그들이 주님을 더 크게 사랑하고 있기 때문이다. 영적인 천사들은 총명으로부터 말하는데, 그 이유는 그들이 이웃을 향한 사랑에 있기 때문에서 이다. 천적인 천사들의 언어는 마치 시냇물 흐르듯, 따라서 부드럽고 깨어지지 않은 소리 형태인데 비해, 영적인 천사들은 파삭파삭하되 맑은 소리 형태이다.

그리고 그곳에서의 모든 교제를 위해 모형(pattern)을 만드는 천국의 모양(form)으로부터 오는 전체로서의 천사들의 언어에는 일종의 하모니가 있다.

40. 천사들이 사람과 이야기 하는 방법

천사들이 사람들과 담화할 때, 그 때의 언어는 천사들 것이 아닌 사람의 언어이다. 이런 이유는 천사들이 누구와 대화할 때 그들은 그를 향하여 돌아서고 자신을 그에게 결합시키기 때문이다. 이것은 둘을 비슷한 종류의 생각함 안으로 가져다 준다. 그리고 사람의 생각함이 그의 기억에 연결되어져 있고, 거기서 말이 나오는 바, 천사와 사람 이 둘은 똑같은 언어를 사용할 수 있다. 천사 또는 영이 사람과 이 연결을 만들 때, 천사나 영은 사람의 기억 전체에 들어가고, 그가 알아채는 한 그는 사람이 아는 모든 것을 알고 있다.

사람과 더불은 천사의 말은 두 사람 사이에서는 청취가 가능하나, 오로지 그 한 사람뿐 근처 사람까지 청취되지는 않는다.

영들과 대화하는 것, 비록 요즘 시대에서는 매우 드믄데, 그 이유는 위험하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는 사람은 누구와 함께 있는 것을 모르고 있는데 영들은 알고 있기 때문이다. 악령들은 사람들을 향한 살인적인 느낌들에 피난처를 제공하는 자연적 영들 곁에 있다. 그리고 그 영들은 영과 몸을 파괴하는 것 외에 원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사실 그것들은 어떤 정상적 자연적 쾌락으로부터 자신들을 차단해버리는 극점에까지 환상의 과도한 탐익에 몰입하는 이들과 더불어 발생한다.

고독한 생활을 꾸리는 사람의 경우, 영들이 자기들끼리 대화하는 것을 때로는 들을 런지 모르나 피해가 일어나지는 않는다. 그런 이유가 이 영들이 대화할 때 자기들과 함께 사람이 있는 것을 그 영들이 알지 못하도록 주님께서 철수 시켜 놓고 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영들은 자기들이 있는 곳 외 다른 곳에 사람들이 있다는 것, 또는 또 다른 세계가 있다는 것도 눈치채지 못한다. 고로 사람이 그들과 대화하려는 것은 허용되지 않는데, 그 이유는 만일 그가 대화한다면 악령들이 위 사항이 있음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

언제나 종교적인 문제들을 생각하는 사람들, 그리고 자기 안을 직관하는 고점까지 종교적 문제를 압축한 사람들 역시 영들이 대화하는 것을 듣기 시작한다. 종교 자체가 목적이고 종교가 사람의 모든 것을 빨아들이고, 생활과 남에게 유익해짐에 응용해보려는 것과 균형을 맞추지 않을 때, 사람의 관심된 것을 선점하면서 그 사람의 온 영을 건네받는다. 그들은 영계에 들어가기까지 해서 거기 영들에게 영향을 끼치기도 한다. 이와 같은 사람이 도취되어 얻는 것은 환상물이다. 그들은 자기들이 들은 것은 성령이다고 믿는다. 사실, 사람의 영을 도취시켜 큰 즐거움을 얻는 영일 뿐이다.

천사들과의 대화는 누구도 허용되지 않으나, 예외는 있다. 천사의 표준에 의해 사는 사람, 주님을 그분의 ‘신성한 인간‘ 안에서 인식하는 사람이다. 그리고 대화가 허용된 이들은 천국에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들은 자기들의 내적 생각들이 있는 천국의 빛으로부터 보고 있기 때문이다.

41. 천국에 있는 글쓰기

천사들이 단어를 사용하여 이야기 하는 것과 거의 같게 그들은 글을 쓴다. 그들의 마음은 말 뿐만 아니라 글을 통하여 생각들과 의미들을 운반한다. 천국에 책들이 있는데 주님께서 준비해두셨다. 이것들은 우선적으로 말씀을 위하여 있다, 신성한 진리로서의 말씀은 천국의 모든 지혜의 참 근원이다. 이는 천사나 사람에게나 공히 같다. 말씀 자체는 주님에 의해 직접 주어져 있다. 그리고 말씀은 질서적인 방법에서 천국들을 통하여 걸러지고, 마지막으로 사람들과 더불어 쉼에 이른다. 그러므로 말씀은 천사와 사람의 지각에 잘 어울리게 되어 있다.

이것은 왜 천사들이 말씀을 가지고 있고, 지상의 사람이 읽듯 그들도 읽는 가에 대한 이유이다. 천사들은 말씀으로부터 그들의 모든 믿음들, 가르침, 설교를 이끌어 낸다. 말씀은 지상의 것과 아주 같은데, 한가지 예외는 우리에게 있는 글자 의미인 자연적 의미가 천국에는 없다는 것이다. 대신 영적 의미가 있고, 이것은 말씀의 내적 의미이다. 말씀은 신성이 맨 마지막인 글자에 내려와 존재하는 곳이다는 것은 세상에서 폭넚게 생각되고 있다. 그러나 그 안에 이 신성의 속성이 놓여 있다는 것은 알려져 있지 않다. 가장 높은 천국에서, 글쓰기는 천국의 모양을 간직하는 굽어진 글자나 둥그런 글자로부터 형태를 지어간다. 경이로운 대목 하나는, 천사들에게 언어가 주어진 방법과 같이 위와 같이 글 쓰는 방법은 가르쳐질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이런 글쓰기가 천국의 글쓰기이다. 지상 최초의 사람들은 글자들이 창안되기 전 이런 종류의 글쓰기를 지녔다. 이 글쓰기가 언어 안으로 이어졌고, 이 글쓰기는 말씀이 근원적으로 씌어진 방식이다. 이런 이유로 근원적 글자들의 세세한 모양들에서 조차 감추인 의미와 신성한 것이 있는 이유이다.

천사들은 천국적 필기체인 이 글쓰기를 통해 아주 정밀하게 자기들의 생각들과 애착들을 표현할 수 있다. 이 글쓰기는 단지 생각만으로 부터서는 가늠할 수 없는 많은 감추인 것을 함유한다. 그러나 낮은 천국들에는 이런 종류의 글쓰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낮은 천국에는 세상의 글자 종류만큼이나 많고 유사한 글자가 있다. 그렇다 해도 이 글자가 사람들에게는 납득될 수 없는데, 그 이유는 이것 역시 천국의 천사들의 언어이기 때문이다. 이 글쓰기는 사람들이 많은 페이지들에서 기술할 수밖에 없는 것도 몇 단어들로 표현할 수 있다.

하나 더 언급할 만한 것은, 천국의 이런 글 쓰기는 아주 자연스럽게 천사들의 생각함으로부터 별 노력함 없이, 어떤 주저함도 없이 흐른다는 것이다. 생각이 객관화 된다. 그리고 단어들 자체는 천사의 생각과 상응하므로 이는 동시적으로 와진다.

42. 천국에 있는 천사들의 순진

순진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은 이 세상에는 거의 없다, 그리고 악한 자는 순진에 관해 전혀 모른다. 순진은 얼굴에서, 말투에서, 동작에서, 특별히 어린이에게서 보여질 수 있는 가시적인 특성이 있다. 사람들은 순진이 무엇인지 모른다, 더구나 천국 자체가 있는 곳, 사람 내에 저장된 것조차 모른다. 순진에는 어린 아이의 순진과 지혜의 순진이 있다. 전자는 진짜 순진은 아니고 바깥쪽 모양에서만 순진일 뿐이다. 그럼에도 우리가 그 순진으로부터 진정한 순진에 관하여 배우는 것은 가능하다. 이 순진은 작은 어린이의 얼굴에서, 어느 정도는 그들의 움직임에서, 그리고 그들의 아주 어린 시절의 말투로부터 빛을 발하고 있다. 작은 어린이 자신들은 더 깊은 생각들을 가지지 못하는데, 그 이유는 그들이 선과 악 사이의 차이를 모르기 때문이다. 그 결과 그들은 어떤 자아 동기, 또는 악한 의도를 가지지 않는다. 이 아이들은 자신들에게 어떤 공로도 돌리지 않는데, 그 이유는 모든 것이 부모로부터 임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기에게 주어진 조그만 것들 가지고도 만족하고 행복해 한다. 그들은 먹는 것, 입는 것, 미래를 위한 것에 걱정하지 않는다. 그들은 세상을 시샘하며 쳐다보지 않는다. 그들은 자기들의 양친을 사랑하고 또 자기들 주위의 사람들을 사랑한다. 그들은 자기들을 인도해가도록 자신들을 허용한다. 그들은 행복하게 귀기울이고, 순종한다. 이런 어린 아이의 순진은 그들로 예법이나 말씨, 기억함, 생각을 배우는 수단이고, 이를 수단으로 위와 같은 것을 그들 안에 저장한다. 그렇다해도 이 순진은 바깥쪽 만에 속하는데, 그 이유는 몸에 속하고 마음에 속하지 않기 때문이다.

지혜의 순진은 진짜 순진이다. 그 이유는 그것이 내부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이 순진은 마음에 있는 의도와 생각으로부터 오고 있다. 순진이 있는 이런 것들 안에 지혜도 있다. 그래서 천국에서는 순진은 지혜 안에 있다라고 말해진다. 또한 천사는 자기가 얼마나 순진한지에 따라 슬기롭다. 그다음 천사들은 자신 안에 있는 어떤 선을 두고 자신의 공로 때문이라고 하지 않는다. 오로지 자기들은 주님으로부터 받은 것들이므로 주님의 공로임을 인정한다. 그들은 주님에 의해 인도되고 싶어한다.

그들은 선인 것을 사랑하고 진리 안에서 즐거워 한다. 그들은 자기가 가진 것이 많든 적든 만족하며 살고 있다. 그들은 자기들이 가진 것의 다소는 자신이 받을 수 있는 최대한도의 것임을 알고 있다. 그들은 미래에 관하여 근심이 없다. 그리고 그들이 원하는 모두는 주님의 인도를 받는 것, 자기들이 받는 모든 것의 공로를 그분께 돌리는 것이기 때문에 그들은 그들 자신의 이기적 경향성으로부터 안전하게 보호되고, 그들이 더 그럴수록 더욱 주님으로부터 흘러온다. 순진은 천국의 참 본질이다. 이런 이유로 순진의 특성을 자기 내부에 가지지 않으면 아무도 천국에 입장하지 못하는 것이다.

43. 천국에 있는 천사들의 평화

천사들이 천국에서 가지는 평화가 어떤 종류인지를 서술한다는 것은 아마 조금 힘들 것 같다. 따라서 하느님 안에서 만족하는 사람들의 ‘마음의 평화’에 비교해보는 것만이 가능할 것이다.

천국에는 두 개의 근본되는 특질이 있다: 순진과 평화이다. 이 둘은 모두 주님으로부터 온다. 순진은 천국에 있는 모든 선의 근원이고, 평화는 선인 것의 모든 기쁨의 근원이다. 모든 선은 그 선 자신의 기쁨을 가지고 그들 모두 사랑으로부터 온다. 순진과 평화 모두 주님의 신성한 사랑으로부터 오고, 그것들은 그것들의 참 심정으로부터 천사들에게 영향을 끼친다.

평화의 근원은 주님 자신 안에 있는 신성한 평화이다. 이는 신성 자체와 주님에 있는 ‘신성한 인간’의 합일로부터 온다. 이와 같이 평화는 신성의 어떤 것인 바, 천국에 있는 모든 것에 행복을 가지고, 특히 기쁨을 가지고 더 깊숙이 영향을 준다. 평화는 천국과 더불어 그리고 거기 각 개인과 더불어 있는 주님의 연결 고리이다. 이로부터의 결과로서 천사들은 모든 것을 축복으로 받고, 사람들이 천국의 기쁨이라 부르는 것을 느낀다.

이 특성들은 사람들이 세상에서 사는 한, 사람들 안에서 감추여 놓인채 그 사람과 동떨어져 있다. 그리고 그가 자기 몸을 떠나 모든 것이 벗겨져 있는 곳인 영계에 들어가서야 밝히 들어나게 된다.

신성한 평화는 선인 것과 진리인 것이 하나될 때 도래하기 때문에 천사들은 자기들이 사랑하는 상태에 있을 때 평화 안에 있게된다. 그 이유가 사랑하는 상태에서만 그들 안의 모든 것은 하나로 가능하기 때문이다. 세상에서의 평화는 적대적인 것의 중지 또는 문제있는 것들이 제거될 때 라고 말하는 것을 듣는 천사는 말하기를, 그들 자신 안에서 이것들은 평화가 전혀 아니다고 한다. 진짜 평화, 천사들은 말한다, 천국의 선 안에 있는 사람에게 있다고… 그 이유는 이 선 안에 평화의 존재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평화는 실제로 주님으로부터 천국의 선에 있는 사람의 중심 안으로 흘러들어 그들의 낮은 수준 아래로 흐르고, 그들의 내적 마음에 평화를 가져다 주고, 그들의 바깥쪽 마음에 고요함을, 결과적으로 기쁨을 가져온다.

44. 천국과 인류 사이의 연결 고리(link)

많은 사람들이 아는 바, 선한 모든 것은 하느님으로부터 있고, 사람으로부터서는 하나도 있지 않다는 것, 그리고 악은 악마로부터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위의 어떤 것도 사람과 천국 사이에 연결 고리(link), 그리고 지옥과의 연결 고리가 있지 않으면 있을 수 없다. 이 연결고리는 사람의 의도와 생각과 더불어 있다.

각 개인과 더불어 선한 영들과 악령들이 있다. 이 영들을 통하여 사람은 천국과 지옥과 연결된다. 이런 영들은 천국과 지옥 사이 중간쯤에 있는 영들의 세계 안에 있다. 이 세계의 자세한 설명은 이미 앞 편에서 취급했다.

영들은 자기들이 어떤 사람과 연결되어 있는지를 결코 알지 못한다; 그러나 그들이 누군가와 더불어 있을 때 그들은 그 사람의 기억들과 생각들이 자기 것이라고 믿는다. 사람과 더불어 있는 영들은 그 사람 자신의 사랑과 똑같은 품질 속에 있다; 그러나 사람 자신은 악한 영들을 초대하는 것과는 반대로 선한 영들은 주님에 의해 그 사람에게 연결되어져 있다. 사람과 더불은 영들이 그렇다 해도 있는 그대로의 생명은 변해지고 그가 사랑하는 것이 바뀐다. 이렇게 사람은 자기와 더불어 아주 어린 시절부터, 어떤 이는 후기 어린 시절부터, 누구는 청년기부터, 성년기부터, 혹은 노년 시절에야 이러한 어떤 영들을 가지고 있다.

순진한 영들은 초기 어린 시절에 현존하고, 이들은 순진의 천국과 자신들을 연결해놓고 있다; 학식을 사랑함을 가진 영들은 후기 어린 시절에 현존한다; 진리와 유용함에 애착하는 영들은 젊은 성년기와 만숙기에 현존한다; 그리고 노령기의 영들은 지혜와 순진에 포함되어 있는 사람에게 현존한다.

천사들과 사람들 사이의 연결 고리는 자기들의 이해함이 개혁되어질 수 있고 그리하여 거듭나질 수 있는 사람들과 더불어서만 존재한다. 이것은 바뀌어질 수 없는 사람들과 더불어서는 다르다.
가능한한 선한 영들로 해서 악으로부터 제제되도록 선한 영들은 그들과 확실히 있다. 그러나 그들의 직접적 연결은 지옥을 왕래하는 악령들과 더불어 있다. 결과적으로, 영들은 자기와 연결된 사람과 같은 종류의 영을 가지게 된다. 만일 그들이 자신들을, 또는 돈, 복수, 간음을 사랑하면, 그다음 이런 것을 사랑하는 이와 비슷한 영들이 그 사람과 있게된다. 이런 영들은 악한 바램 안에 거처를 정한다. 사람이 선한 영들에 의해 악한 어떤 것을 행함으로부터 간직될 수 없는 만큼 이 악령들은 불 가운데 자신을 놓는다. 그리고 이 바램이 그 사람을 지배하는 한 그 영들은 착 들러붙어 떠나질 않는다. 이렇게 악한 사람은 지옥과, 선한 사람은 천국과 연결되어져 있다.

영들을 수단으로 주님에 의한 사람의 통치는 영들이 행하는 방식 안에서 일어난다. 그 이유는 세상에 있는 사람은 천국의 모형(pattern) 안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사람은 지옥에 속하는 악한 것들을 향하려는 경향성들을 가지고 태어난다. 이 경향성은 신성한 질서에 정 반대이다. 따라서 사람은 위와 같은 영들과의 간접적 연계를 수단으로 가능할 뿐인 천국의 모형(pattern) 안으로 되돌려질 필요가 있다. 만일 사람들이 천국의 모형 안으로 태어나졌다면 상황은 아주 달랐을 것이다. 그 이유가 그럴 경우 사람은 영들을 통하여 주님에 의해 통치되어질 필요가 없고, 그들은 일반적으로 흐르는 질서 자체를 수단으로 인도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지상의 사람은 자기의 생각함과 바램으로부터 언어와 말함이라는 행동 안으로 오는 것과 같은 일반적 영향력에 의해 통치되어진다. 이것 모두는 직접적으로 흐르는 바, 그렇게 해서 그 사람과 더불어 연결된 영들이 그 사람과 공통되는 것이 없도록 한다.

주님 자신이 천국의 모형을 유지하는 개개인 안으로 흘러 사람의 가장 깊은 수준, 뿐아니라 그의 더 바깥쪽 수준 안으로 흐르고 있으시다는 것을 실감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리고 이 사람은 천국을 받기 위하여 이런 것들을 배열한다. 이 영향은 직접적인 것이라 불리우고, 이에 비해 영들의 영향은 간접적이다. 두 번째 영향은 첫 번째 영향에 의해 가능해진다.

영들은 자신의 생각들을 사람들 안으로 도입하지 않는다, 그러나 오히려 선과 진리인 것, 또는 악과 거짓인 것을 위한 사랑의 애착 안으로 도입한다. 이런 까닭에 사람은 선인 것, 악인 것 사이에 기본적 선택(권)을 가진다. 사람은 이 둘 사이에서 선택하므로 해서 자유로운 상태에 있게 된다.

사람은 이 둘을 곰곰이 생각해봄으로 선인 것은 받고 악인 것은 거절할 수 있다. 그리고 그가 수용하는 것은 그의 일부가 되어가고, 그가 거절하는 것은 그의 것이 되지 않는다.

45. 사람을 천국에 연결하는 것은 말씀이다

어떤 것을 더 깊게 생각하는 사람의 모든 것은 그것의 근원과 연결되어 있고, 그렇지 않은 것은 분해될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자체에 의해 존재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모든 것은 그것에 앞서 거기에 있었던 어떤 것으로부터 온다. 그들 또한 실체는 실재 안으로 계속 오고 있음이다. 이것이 어떻게 그렇게 되는지를 서술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우리는 자연계가 모든 것의 근원인 영계와 상응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 또한 사람과 더불어 행해지는 모든 것과 천국의 모든 것 사이에도 상응이 있어 연결되었다고 말할 수는 있다..

인류가 천국으로부터 돌아서 자아와 세상을 향함으로 천국과의 연결은 절단되나 그 후, 주님은 천국과 인류 사이의 연결을 보존하는 수단을 설비하셨다. 이 중간 고리가 말씀이다.

말씀은 그 안에 있는 모든 말들과 그것의 의미가 상응관계에 놓여 있게 하는 방식에서 씌어졌다. 그리하여 이 의미는 천사가 연루되는 영적 또는 내부 의미를 가지고 있다. 사람이 말씀을 읽고 말씀의 글자 의미를 이해할 때, 그 사람과 함께 하는 천사들은 동시에 내부 의미를 이해하고 있다. 천사들은 영적으로 생각하고 사람들은 자연적으로 생각한다. 이 둘은 다르게 보일런지 모르나 그럼에도 그 둘은 하나인데, 그 이유는 그 둘은 상응하기 때문에서이다. 이 둘은 연설자의 말들 같이 거의 하나를 만들고, 그것의 효과는 연설의 말들이 아닌 의미에 초점을 맞추어 이해한 청중자와 같다.

또한 말씀은 교회 밖에 있는 사람과 천국을 연결한다. 주님의 교회는 보편적인 바 어떤 것이 신성으로부터임을 인식하고, 그들의 이웃을 사랑하며 사는 모든 사람 안에 존재한다. 이 사람들이 죽을 때, 그들은 천사에 의해 가르침을 받고, 기쁘게 신성한 진리들을 받는다. 이 보편적인 교회는 주님이 보시기에 마치 천국이 그러하듯, 개인 한 사람 같다. 그러나 말씀이 발견되는 교회, 말씀을 수단으로 주님이 알려진 교회는 사람 속의 모든 기관과 몸에 생명을 가져다 주는 ‘심장과 폐’와 같이 개인 한 사람 같다.

만일 사람이 이 내부 의미가 존재함을 알았고, 그가 말씀을 읽을 때 이 의미에 대한 어떤 지식으로부터 생각하는 것을 했다면, 그는 더 슬기로워지고 천국과의 연결은 더 밀접하고 더 단단한 연결 고리를 형성해 있을 것이라고 천사들은 말한다. 이를 통하여 그는 천사들과 같은 종류의 생각들 안으로 와질 것이다.

46. 천국과 지옥에는 인류로부터 온 사람들이 산다

천국에 미리 창조해둔 천사는 없다. 그리고 빛의 천사로 창조되고 그다음 내던져진 악마도 지옥에 없다. 천국과 지옥에 있는 모든 이들은 어떤 예외 없이 인류로부터 온다. 이것은 천사들의마음과 사람의 마음 사이의 유사성을 가지고 확증되어질 수 있다. 두 마음 모두는 이해하는 능력, 지각하는 능력, 다각적인 것을 추론하는 능력, 의도함, 또는 뜻하는 능력을 공히 가지고 있다; 마음의 두 형태들은 천국이 받아지도록 모양지어져 있다. 인간 마음은 천사의 마음 만큼이나 슬기로움을 성장하게 할 수 있는 잠재성을 지니고 있다. 그런데 이 세상에서 그렇지 않는 이유는 마음이 자연적으로 생각하는 물질적 수준에 한정되어져 있기 때문이다.

허나 사후에는 아주 다르다, 그 이유는 그 때에는 마음은 더 이상 자연적으로 생각하지 않기 때문, 그리고 사람의 자연적 마음이 표현할 수 없고 이해될 수 없는 사상들을 영적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제 천사 같이 생각하고 이해한다. 이것은 사람의 안쪽 부분-그의 영-은 천사와 인간 모두에서 잠재성 안에 있었지만 그가 지상의 몸에서 해제 될 때, 사실 천사이다는 것을 확증해준다.

그런데 사람의 이 안쪽 부분이 더 높은 것을 향해 열리지 못하고 더 낮은 것만을 쳐다 볼 경우, 그 상황에서 그의 영이 몸으로부터 석방되면 그 영은 인간 모양 안에 있고 악마적으로 된다. 그것은 천국을 쳐다 볼 수 없고 오로지 아래쪽인 지옥을 좋아할 뿐이기 때문이다.

신성한 질서가 어떻게 일하는지를 이해하는 이들은 사람이 천사가 되어지도록 창조 되었다는 것도 지각할 것이다. 그 이유가 천국의 생명과 천사의 생명의 기초가 그 사람 안에 형성되어 질 수 있기 때문이다. 신성한 질서는 마무리함 없이 결코 멈추지 않는다. 이 질서는 그것 자체가 자기의 모양을 옷입고 번성하는 수준에까지 진보해간다. 천국의 씨앗판은 인간의 이 수준에서 천국에서 천사가 되도록 하기 위해 사람 속에 미리 창조되어 있다.

47. 교회 밖에서 태어난 사람의 경우

교회 밖에서 태어난 사람은 구원되어질 수 없다는 것이 일반적인 사고이다. 그 이유는 구원받으려면 말씀과 주님에 관한 지식이 있어야 하는데, 그들에게 이것이 없기 때문이다 라고 말한다. 그럼에도 그들이 구원되어짐을 보여주는 한가지 사실은 주님의 자비는 보편적 진리이다는 것, 그분의 자비는 개별적인 모든 사람에게 뻗쳐나간다는 사실이다. 교회 밖에서 태어난 이들은 교회 안에서 태어난 사람 만큼 인간으로 태어난다. 그들이 주님에 관한 지식을 가지지 못한 것은 그들의 과오가 아니다.

이성은 우리에게 말한다. 아무도 지옥에 가도록 태어나지 않는다고… 그 이유는 주님이 실지로 사랑 자체이시고, 그분의 사랑은 모든 이를 구원하고 싶은 바램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고로 그분은 모든 사람이 종교에 관한 어떤 생각을 가지고, 이를 수단으로 그들이 신성으로부터 있는 어떤 것에 대한 느낌을 가져 더 높은 생명의 수준을 가지는 것을 보증하신다. 어떤 종교에 의해 산다는 것은 생명을 더 깊게 고찰함으로부터 산다는 것을 단순히 뜻한다. 그 다음 사람은 주님 속에 있는 것에 초점을 맞춘다. 이것에 집중하는 만큼, 사람은 세상에 그의 초점이 없고 그의 사고는 생명의 바깥쪽 사고로부터 더 멀리로 이동한다.

우리는 알 수 있다. 즉 모든 이 각자는 자기 안에서 무엇이 천국을 만드는지 이해할 때 구원되어질 수 있을런지 모른다는 것이다. 천국은 당사지 안에 있고, 자기와 더불어 천국을 가진 사람은 천국 안으로 입장한다는 것이다. 사람 안에 있는 천국은 신성을 인식하고 신성에 의해 인도되고 있다. 모든 종교의 첫째가는 필수는 신성인 것에 관한 인식이다. 이 인식 없으면 종교도 없다. 모든 종교의 법들은 예배에-즉, 예배가 사람들에게 수긍되도록 어떻게 주님을 예배하느냐에 중심을 두고 있다. 그리고 이것이 각 개인의 마음 안에서 바램이 될 때, 그때에 그는 주님에 의해 인도되어진다.

교회 밖의 사람들도 교회 안의 사람들 만큼이나, 때로는 더 낫게 도덕적인 생활, 곧바른 삶을 영위한다. 도덕적인 생활에는 두 가지가 수반된다. 신성으로부터의 어떤 것을 위함, 또는 세상에 있는 사람을 위함이다. 이 둘은 똑같지 않다; 외견상 이 둘은 같아 보이지만 내향적으로는 아주 다르다. 전자는 사람을 구하나 후자는 그렇지 않다. 신성인 것을 위하여 도덕적 삶을 사는 사람은 주님에 의해 인도되어지고, 한편 세상 사람 앞에 보이기 위한 도덕적 삶은 자신에 의해 인도되어진다.

위의 뚜렷한 구분을 위해 예를 드는 것도 유용할듯 싶다. 이웃에게 잘못을 하지 않는 이유가 그것이 종교에 반대되기 때문이라면 그 사람은 영적 동기로부터 자제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달리 법이 두려워서, 자기 명성을 잃을까봐, 자신의 이득을 위하여 자제하는 사람은 자연적 동기로부터의 자제이고 자신에 의해 인도되어 간다. 도덕적 생활이 영적인 사람은 자기 안에 천국을 가지나, 영적이지 않은 사람은 자기 안에 천국을 가지지 못한다. 이런 이유로 천국은 더 높은 수준으로부터 안으로 흘러들고, 그 사람의 내부 수준들을 열고, 이를 통하여 그의 바깥쪽 생활 안으로 흐른다; 이에 비해 세상적인 것은 더 낮은 수준으로부터 흘러들고 삶의 안쪽이 아닌 더 바깥쪽 수준들에 영향을 미친다.

이 사람에 있는 천국의 상태와 저 사람에 있는 천국의 상태는 광대하게 다양하다. 이것은 사람 안에 있는 천국의 생각들의 품질에 따라 다양해진다. 그 다음 교회 밖에 있는 이들, 그들이 진정한 생각들을 직접적으로 눈치채지 못했을런지 몰라도 그들이 가진 사랑 때문에 다른 삶에서는 궁극적으로 그것들을 받을 것이다.

주님으로부터 떨어져서는 구원이 없다는 것은 진실인데, 이를 더 꼼꼼히 말하면 주님을 제외하고는 구원이 없다를 뜻한다고 이해하여어야 되리라.

48. 천국에 있는 어린 아이들

혹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도 믿는다. 교회 내에서 태어난 아이들 만이 천국에 갈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사람들은 더 말한다. 교회내에서 태어난 아이들은 세례를 받았는 바, 교회의 신앙에 입문한 것이나 다름없다고 한다. 그러나 이런 사람이 모르는 바, 단지 세례를 통해서만이 신앙을 획득하고 천국에 들어가는 자는 아무도 없다는 것이다. 세례는 사람이 재탄생되어야 할 필요가 있음을 기억함과 단순한 표시 역할을 수행한다는 것이다.

모든 아이들, 어디서 그들이 태어났든 그들이 죽을 때는 주님에 의해 영접된다는 것, 그리고 천사들에 의해 양육되어진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이 세상에서 죽는 아이들은 다른 삶에 있는 많은 아이들과 같고 지상에서 가졌었던 품성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똑같은 어린아이 같은 마음, 같은 순진, 같은 상냥함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이 단계에서 잠재적으로만 천사일 뿐이나, 천사가 되는 과정을 밟고 있고 때가 차면 예외 없이 천사가 된다. 이 세상 삶을 통과한 모든 이는 저 곳에서 이곳에서와 비슷한 상태에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젊은이였으면 젊은이 상태를 발견하고 어린이는 어린이 상태를 발견한다. 이후 각 사람의 삶의 외관의 상태는 바뀐다. 이 때 어린아이는 타 연령층에 비해 장점이 크다. 즉 그들은 아직 순진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자기들 삶에 의한 악은 아직 기반도 제대로 되어있지 않다. 그들의 순진은 모든 천국의 특성들이 그들 안에 이식될 수 있게 한다. 그 이유는 순진은 천국의 저장소이기 때문이다. 저 세상에 있는 어린이의 상태는 이 세상 어린이의 것 보다 더 낫다. 그 이유는 저곳의 어린 아이들은 모든 제한들을 지닌 육체로 옷입혀 있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천사 누구와 닮았다. 이 세상에서 작은 어린이는 걷기를 배워야 하고, 자기 움직임에 협조하는 법을 배워야 하고, 어떻게 말하는지를 배워야 한다. 자기의 감각들 조차 연습에 의해 점차적으로 발달시켜야만 한다. 육체의 몸은 그 자체 딱딱하다; 육체의 몸은 그것의 감각을 내부가 아닌 외부로부터 받는다. 이것도 저 세상 어린이와는 다르다. 영인 바, 그들은 자기들 내에 있는 것과 일치하여 동시적으로 행동한다. 비록 처음에는 생각들의 연속성이 없다 할지라도 연습 없이 걷고, 이야기한다. 이런 능력 조차 머지 않아 발달한다. 그 이유는 그것들의 바깥쪽 형태가 내적 상태와 하나되어 있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죽은 후 그들을 소생시킴은 즉각 있고 이후, 그들은 천국으로 데려와져 이 세상에서 아이들을 사랑했고 또한 하느님을 사랑했던 여성 천사의 보살핌 아래에 있는다. 위 여인의 특수한 품성 때문에 이 여인들은 어린이를 자신의 아이인냥 받는다. 그리고 아이들은 그들의 안쪽 출생 본성으로부터 이 여인들을 비록 그들 고유의 어머니가 있다 해도 사랑한다. 각 여인들은 자기들이 원하는 만큼의 여러 어린이들을 자기들의 영적인 부모 사랑으로부터 돌본다.

천국에 있는 어린이들은 천사가 주님을 쳐다보는 선을 따라 오른 쪽에 있다. 그들은 직접적인 주님의 시야와 돌보아주심 아래 있는 천국의 영역에 있다.

이제 천국의 어린이들이 어떻게 양육되는지 기술해보자. 그들은 자기들의 보호자로부터 말하기를 배운다, 그리고 자기들의 말을 시작하는데 이는 그들의 애착으로부터의 단순한 소리들이고, 이것은 발달하기 시작하는 생각들로서 더 맑게 점진적으로 되어간다. 천사의 모든 말은 애착으로부터 튀어나오는 생각-형체들(thought-forms)이다.

무엇보다 먼저 어린이들을 둘러싸고 있는 사랑스러운 것들이 그들의 애착들 안으로 부드럽게 스며들고 아이들이 보도록 주어진다. 이 대상물은 근원에서 영적이기 때문에, 어린이가 그것들을 봄과 동시에 천국의 것들이 흘러든다. 이 방식에 어린이의 내적 수준들은 열려지고, 날마다 그들은 더 완전이 되어간다. 이 첫 단계가 설립될 때, 어린이는 자기들이 가르침을 받는 또다른 천국으로 데려가지는데, 이 과정은 계속된다. 아이들이 가르쳐지는 주요 수단은 각자의 특별한 이해 수준에 적합할 수 있는 것들의 표현들이다. 이 표현은 너무나 아름답고 지혜로 꽉 차 그들은 묘사를 거부한다.

아이들이 지혜와 이해함을 획득했을 때, 그들은 천사들이 되어가는 바, 이제 더 이상 어린아이 같이 보이지 않고, 성인들 같은, 성인의 지혜와 완전함이다. 아이-천사들이 지혜 안에서 자랄 때 더 만숙하게 보이게 되는 이유는 지혜가 영적 자양분이기 때문이다. 그들의 마음에 먹이가 되는 진짜의 것들은 그들의 몸에게도 먹이가 된다. 이것은 상응으로부터 있다. 그 이유가 그들의 몸의 모양은 그들 내부의 바깥쪽 표현 밖에 더 아니기 때문이다.

한가지 더 알만한 가치가 있는 것은 천국에 있는 어린이는 젊은 성인 시절이 개시되고 이 시기를 넘어 노년기로는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들은 영원히 젊은 성년기에 머문다.

49. 천국에 있는 슬기로운 자와 단순한 자

세상에서 상식화 되다시피 한 것이 있다. 총명은 학자와 학문의 문제이다는 것, 그러므로 현자는 단순한 자 보다 천국에서 더 영광되고 상위에 있을 것이다 라고 단정한다. 그러나 천국의 총명은 이런 속성에 있지 않다. 천국의 총명은 진리인 것을 사랑함으로부터 오는 내부의 총명이다. 이 총명은 세상이나 천국의 영광을 위함이 아니고, 진리 자체를 위하여서 이다. 이 총명은 천사들을 더 깊은 감정과 기쁨으로 채운다. 진리인 것에 의해 움직여지고 기쁨을 갖는 사람들은 천국의 빛에 의해 영향받아진다. 그리고 만일 그들이 이것을 수단으로 움직인다면, 그 다음 그들은 신성한 진리, 사실상 주님 자신에 의해 움직여진다. 이런 이유는 천국의 빛이 천국에 계신 주님이기 때문이다.

천국의 빛은 이 빛을 받도록 특별히 모양을 갖추어 온 마음의 더 깊은 수준에 들어갈 수 있고 영향을 줄 수 있다. 천국의 빛은 마음에 영향을 주고 마음을 기쁨으로 채우는 방식으로 들어간다. 그 이유가 천국으로부터 흘러들고 받아지는 어떤 것은 자체 내에 즐거워하고 유쾌한 어떤 것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진리인 것에 대한 순수한 애착의 근원이다. 이 애착을 가지고 진리를 받는 사람은 천국에서 빛을 낸다고 말해진다. 그러나 자신의 영광을 위해 진리를 추구하는 이들은 천국에서 빛을 낼 수 없다. 그 이유는 그들이 그 자체 어둠인 세상적 빛에서만 있기 때문이다. 실로, 자아-영광이 그들의 주된 동기이고 그들이 기대하는 유일한 목적이다. 이럴 경우, 의문을 지닌 사람은 우선 자신에 초점을 맞추고 목적에 대한 수단으로 진리를 단순히 사용한다. 그 결과 그는 자기의 눈을 천국으로부터 세상으로 돌리고, 주님으로부터 자신에게로 가버린다. 외관상, 이런 종류의 사람도 진실로 빛 안에 있는 사람 만큼 학식 있어 보인다. 그 이유가 그들도 똑같이 말하기 때문이다. 때로 바깥쪽일 경우, 그들이 더 슬기로운 자 같은데, 그 이유는 자아-영광에 의해 재빠르고, 천국을 모방함에 더 숙달되었기 때문이다. 허지만 그들의 내부는 판이하고, 이런 것들은 천사들에게는 환히 보인다.

사람이 이 세상에서 획득하고 발달시키는 품질들은 당사자와 함께 머문다; 그는 죽을 때 자기와 더불어 그 품성들을 가져간다. 그들은 사후에도 계속 발달 시킨다. 그러나 그것을 선한 용도에 놓으려는 그의 바램과 진리인 것에 대한 그의 애착의 크기에서 일 뿐이다. 바램이 작으면 발달함도 미미하고, 크면 발달도 규모가 있다. 어쨌든 각자는 그가 받을 수 있는 만큼만 받는다. 그 이유가 사랑은 그 자체와 일치하는 모든 것을 끌어당기기 때문이다.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가진 모든 자에게, 그것은 주어질 것이다. 그렇게 해서 그는 더 큰 풍부함을 누릴 것이다” (마태13:12).

진정한 총명과 지혜는 선과 진리인 것을 지각하고, 그 결과 악과 거짓인 것을 보고, 그리하여 내면의 지각으로부터 이 둘 사이를 명백하게 구별함에 놓여 있다. 총명하고 슬기로워지기 위해, 사람은 많은 것, 즉 천국과 영적인 것, 뿐만 아니라 세상의 방법들을 계속 배워갈 필요가 있다. 사람이 계속 배우고 배웠던 것을 생활에 응용하는 만큼, 그는 슬기로워지고 총명해진다. 그 이유는 완전에 더 가까워지기 때문이다.

단순한 사람은 내적 수준들이 열려있는 이들이지만 영적 진리나 자연적 진리들을 수단으로 발달되지 않는다. 그들은 들을 때 어떤 것이 진리인지를 지각한다. 그러나 그들은 그 자체로는 그것들을 보지 못한다. 슬기로운 자는 내부의 수준이 열려있을 뿐 아니라 발달되는 이들이다. 이 두 부류 사람 모두 자신 안에 진리를 보고 그것들을 지각한다.

50. 천국에 있는 부자와 가난한 자

누가 천국 안으로 받아들여지는가에 관한 생각은 여러 가지가 난무한다. 어떤 이는 가난한 자는 들어가고, 부자는 아니다고 상상한다; 어떤 이는 부자든 가난한 자든 공히 받아들여진다고 믿는다; 한편 또 어떤 이는 부자는 자기의 재물을 포기해서 가난해질 때까지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고 믿는다. 위 같은 이런 저런 견해들은 성경의 어떤 문단에 기초를 두는 일이 흔하다.

그러나 부자와 가난한 자의 천국 입장 여부를 놓고 말하는 사람들이 대체로 실패하는 대목은 이와 관련된 성경의 의미를 이해함에서이다. 성경은 어느 문제이든 그것이 자연적 형상들을 가지고 표현되어서 일 뿐 성경은 영적 문제들에 관한 것을 취급한다.

글자 직역주의자들은 아래와 같은 성경 구절의 요점을 놓치기 십상이다.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귀를 통과하는 것만큼 힘들다”, 또는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 그 이유가 천국의 왕국이 그들의 것이기 때문이다.” 성경을 영적으로 이해하는 이들은 다른 방법으로 의미를 본다. 이들은 알고 있다. 즉 천국은 각자가 부자든 가난하든 어찌되었든 신앙과 사랑에 기초를 두고 생활하는 모든 사람을 위해 존재한다는 것이다. 또한 자기가 부유하다고 해서 무턱대고 천국을 부인하는 자 아무도 없고, 자기가 가난하다는 이유로 천국에 받아지지 않는 자 아무도 없다. 부자나 가난한 자 모두 천국 안에 있다. 그리고 많은 부자들이 가난한 자보다 거기서 더 큰 영광과 행복 안에 있다. 이 말을 이해하려면 성경에서 ‘부자’와 ‘가난한 자’가 누구를 의미하는지를 정밀하게 살펴야 한다.

어떤 사람이 세상의 사람 같이 외향적으로 살런지 모른다. 그는 부자가 되고, 삶의 좋은 것들을 즐긴다. 이런 것의 어떤 것도 그의 천국 입장에 걸림돌은 아닐 것이다. 단지 조건이라면, 그가 자신 안에서 하느님에 관해 잘 생각하고, 그의 이웃을 공정히 대우해야 한다는 점이다.

사람의 행동들, 이것 가지고 사람은 판결받는다고 말씀에서 말해지는데, 실지로는 그로 하여금 행동하게 하는 것인 그의 생각들과 애착(affections)들에 의해 판결받는다. 다시 말해 사람의 삶의 바깥쪽 것이 아닌, 그의 내부의 삶의 조건만이 구원 여부를 결정한다. 부자의 헌금과 가난한 자의 헌금은 자연적 규모에서는 차이가 클지언정, 때로는 영적 규모에서는 전혀 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은 자신 안에서 하느님에 관해 생각하고 이웃에게 친절을 베풀기를 원하는데, 바깥쪽으로는 여러 방식에서 또다른 사람 같이 살 수 있다. 이럴 경우 그는 많은 사람들이 믿는 천국 가는 진행절차에 별 어려움이 없다. 유일한 어려움은 자아와 세상 사랑에 저항하고, 이 사랑이 자신을 선점하는 것을 멈추게 할 수 있느냐이다. 그 이유는 이것이 모든 악의 원인이기 때문이다. 사람이 자아와 세상적 바램들로부터 오는 악들에 저항하는 만큼 그는 자신이 아닌 주님에 의해 인도된다. 그 다음 주님은 이런 것들을 사람 안에서 저항하게하고 그것들을 제거하실 수 있다.

사랑과 선용의 삶-공의와 공정인 것을 행함이 천국으로 사람을인도한다; 이것은 경건의 생활 또는 세상을 단념함이 아니다. 그이유가 사람은 일반적 활동 안에 포함되어져 있을 때 만이 자기 삶이 무엇을 표현하는지 알 수 있고, 천국을 위한 훈련 안에서 성장이 시작된다. 만일 그가 세상으로부터 철수한다면, 이 발달은 발생할 수 없다. 각 개인의 삶은 그와 더불어 사후 남는다. 이것은 그가 부자이건 가난하든 상관 없는 일이다. 이 사람이 저 사람 보다 더 특별한 허가 조항은 없다. 착하게 살았던 사람이 천국 안으로 온다. 그리고 악하게 살았던 사람은 그렇지 않다.

부유함은 세상에서 상대적으로 규모가 큰 공익(use)을 일궈낼 수도 있다. 그리고 부유한 사람은 가난한 사람이 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복지를 제공할 수 있을런지 모른다. 만일 재물이 이런 방편에서 사용되어진다면, 그들 역시 게으름(무익함)으로부터 사람의 마음이 물러나게 하는 일을 가능하게 한다. 이 게으름은 해로운데, 그 이유는 이 게으름 안에서 사람은 그가 지니고 태어난 악으로부터 악질적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재물 자체를 목적으로 사랑되어졌던 부유함과 더불어서는 아주 판이하다. 사후 이런 것들은 혼 없는 몸 같이 더러워지고 부패해진다.

가난한 사람은 가난함을 이유로 해서 천국에 입장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의 삶의 품질에 따라서 가능하다. 경우에 따라 가난 자체가 사람을 천국으로부터 더 멀어지게 할 수 있다. 이는 부자도 마찬가지이다. 많은 가난한 사람들은 불만족해할 수 있고, 부자를 시기할 수 있고, 심지어 재물이야말로 진정한 축복이다고 믿을 수도 있다. 게다가 그들이 재물을 얻지 못할 때, 성을 내고, 특히 섭리에 맞서려 든다. 그러나 위와는 반대의 가난한 자도 흔하다. 그들은 자기 몫에 만족한다. 그는 책임 있고 열심히 일하고, 게으름 보다는 일을 선호한다. 그리고 그는 조심스럽게 그리고 잘 살고 있다.

‘부자’와 ‘가난한 자’의 운명을 놓고 혼란해지는 이유는 대체로 이 두 단어가 자주 언급되는 성경 구절을 잘못 이해함 때문에 발생한다. 거기서 ‘부자’는 선과 진리인 것에 대한 영적 지식을 많이 소유한 사람들-즉 말씀이 존재하는 곳인 교회 내에 있는 이들을 일반적으로 상징하고 있다. ‘가난한 자’는 이런 지식이 결핍되어 있으나 그 지식을 갈망하는 이들을 상징 한다.

51. 천국에 있는 결혼들

천국이 인류로부터 형성된 이후, 그리고 천국 안에 두 성별의 천사들이 있은 이래, 그리고 남자는 여자를 위해, 여자는 남자를 위해 있게 된 이래, 이에 뒤따르고 있는 것은 천국 안에 결혼 관계가 있다는 것이다. 이는 세상의 결혼을 참고해도 된다. 천국 안에 존재하는 결혼 방식에서 결혼은 두 개인이 한 마음으로 함께 자라감이다. 이 합일은 설명되어질 필요가 있다. 인간 마음 자체는 두 부분들로 구성되어 있다. 하나는 ‘이해함’이고 다른 하나는 ‘뜻함(의지)’이다. 이 둘이 결합하여 일하고 있을 때 그 둘은 하나의 마음을 만든다. 천국에서 남편은 ‘이해함’의 부분에, 여인은 ‘의지’ 부분이다. 이 합일, 이것은 그들 사이의 내적 묶임이고, 바깥쪽으로 그리고 육체적으로 표현을 발견한다. 이 때 그것은 사랑으로 느껴진다. 이 사랑은 진정한 결혼 사랑이다. 이 사랑은 두 개인들이 한 마음으로 합일됨으로부터 온다. 천국에서 이것은 ‘함께 생활함’이라 부르고, 이 둘은 하나로, 한 천사라고 까지 불리워진다. 이 합일은 남자와 여자가 창조된 모양으로부터 온다. 남자는 식별력, 이해력으로부터 반영하도록, 이에 비해 여자는 애정 깊도록, 의지로부터 반영(reflect)하도록 태어나졌다. 이는 그 둘 고유의 기질에서, 그리고 그들의 육체적 모양과 나타남에서 보여진다. 남자는 더 억센 외관, 더 깊은 음성, 더 다부진 신체를, 여자는 모양새가 더 부드럽고, 더 상냥스런 음성, 더 큰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 이와 똑같은 차이가 이해력과 의지에도 있다. 이런 이유로 성경에서 ‘젊은 남자’ 그리고 ‘동정녀’, 또는 ‘남자’와 ‘여자’에 관련하는 영적 의미가 이해함과 뜻함, 또는 애착함의 특별한 속성으로부터 있는 이유이다.

남자와 여자는 이해력과 애착의 두 능력을 각자 가지고 있다. 그러나 남자 안에서는 이해력이 이끌고, 여자 안에서는 의지가 이끈다. 그리고 사람의 품성은 당사자 안에 있는 최상의 것으로부터 온다. 그럼에도 천국의 결혼들에서는 지배한다는 느낌은 없다. 아내의 의도함은 실지로 그녀의 남편에 속해 있다. 그리고 남자의 이해력은 그의 아내에 속해 있다. 그 이유는 그 각각은 상대의 목적과 생각들을 분배하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어떻게 하나를 만들었는지는 이러하다. 이 합일은 충만된 느낌 안에 있는 실제적인 합일이다. 그 이유는 아내의 의지가 그녀의 남편의 이해력에 들어 가고, 남자의 이해력은 그녀의 의지에 들어간다. 그리고 이것은 특히 그들이 서로의 얼굴을 쳐다 볼 때 발생한다. 천국에는 생각과 느낌의 충만되고 열린 나눔이 있다. 거기서 남편과 아내 사이에는 모든 것이 더 보태진다. 그 이유는 그들은 서로 사랑하기 때문이다.

진정한 결혼 사랑의 근원은 주님으로부터 있는 진리와 선의 합일이다; 이것이 왜 천국에 있는 선과 진리의 합일이 ‘천국의 결혼’이라 불리는 가에 대한 이유이다. 사람 내에 있는 진리가 그 사람 안에 있는 선에 밀접히 결합(unite)되어 있는 한, 그는 주님과 천국에 결합(join)되어 있다. 결혼 사랑은 이에 대한 가장 큰 표현이다. 결혼으로부터 마음들이 함께 옴(화합함)에-그리고 결과로서 일어나는 사랑 안에-자신의 것이 상대방의 것이기를 소원하는 상호 바램이 있다. 이것은 한 개인 안에도 있다. 즉 그가 뜻하는 것을 생각할 때, 그리고 그가 생각한 것을 뜻할 때, 그러면 그는 한 마음 속에 있는다.

52. 천사들이 천국에서 하는 일

천사들에 의해 행해지는 일은 너무나 많고 다양한 바 세부적으로 다루기는 쉽지 않다. 따라서 일반적으로 취급하고자 한다. 천국의 각 공동체들은 행할 각기 특별한 일을 가지는데, 그 이유는 공동체들 사이의 구별이 그들의 선의 품질에 의거하듯, 일 역시 각자에게 제공되는 유용함에 의해 구별되는데, 마치 선이 행동을 통하여 보이게 되듯, 유용함(use)도 같은 논리이다. 천국에서 모든 이 각각은 적극적인 쓸모 있음(use)이다. 그 이유는 주님의 왕국은 쓸모 있음으로부터의 왕국이기 때문이다.

천국에 관하여 지금까지 말해왔던 모든 것-즉 천국의 예배, 통치, 집과 나의 집, 결혼들-으로부터 명백한 것은 천국의 각 공동체 안에는 많은 직업들과 책임들이 있다는 것이다.

천국 안에 있는 모든 것은 신성의 모형에 따라 조직되어져 있다. 이것은 천사들에 의해 수행되는 책임들을 통하여 유지되어진다. 공통되는 선의 문제들은 더 슬기로운 천사의 관심사이다. 한편 더 세부적인 유용함은 덜 슬기로운 천사가 취급한다. 이 유용함은 각자가 신성의 설계도의 부분을 형성한 것에 정확히 일치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각 직업의 가치는 그 직업이 섬기는 유용함 안에서 보여진다. 그렇지만 천사들은 자기들이 일한 것에 대한 가치를 들먹거리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 모두를 유용함 자체의 탓으로 여긴다. 그리고 유용함이 행해진 선 안에 있을 때, 그리고 모든 선은 주님으로부터 인 바, 그들은 자기들이 한 모든 것을 주님에게로 돌린다.

위의 원리로부터, 우리는 천국에 있는 천사들의 계급의 속성을 알 수 있다. 천국에서는 세부적인 유용함에 얼마나 더 무게를 두어 더 사랑하느냐에 따라 그 유용함을 수행한 사람은 존경되고 사랑되어진다는 것이다. 즉 작은 씀씀이이라 해도 큰 씀씀이와 동등하게 귀히 여겨 실행함에 따라 계급이 결정된다는 말이다.

또한 이 존경은 각 사람이 자기가 행한 유용함을 자신이 아닌 주님의 탓으로 얼마만큼 돌려드리냐에 비례해서 보여진다. 천국에서, 타인에 대한 존경은 유용함의 기초 위에 있지 사람 위에 있지 않다. 타인을 존중함 또한 위와 같은 원리로부터 이다. 한 사람은 그가 크게 중요하든, 작게 중요하든 여타 모든 이와 비슷하게 있도록 보여진다. 유일한 차이는 그의 지혜 속에 있다. 그러면 지혜는 무엇인가? 유용한 것을 사랑함, 즉 동료나 공동체, 진정한 교회(the Church)를 사랑하는 것이다.

아기들을 돌봄이 포함된 일을 하는 공동체들이 있다. 어떤 공동체들은 성장하는 어린이들을 가르치고 훈련시킨다. 어떤 이들은 기독교 배경으로부터 온 단순한 사람, 그들의 선을 훈육하여 그들을 천국 쪽으로 인도한다. 물론 비 기독교 배경의 출신이라도 단순한 선을 지닌 이들은 앞의 기독 출신이나 마찬가지 이다. 어떤 공동체는 방금 도착한 영들을 악령들로부터 보호한다. ‘낮은 땅’의 단계에 붙들린채 있는 사람들을 돕는 직업도 있다. 또한 지옥들에 있는 사람들을 도와서 그곳의 사람들이 도가 지나치게 서로를 헐뜯지 않도록 하는 이도 있다. 그리고 사후 소생한 사람을 돕는 공동체도 있다.

땅 위 사람들을 도우려고 파견되는 천사들도 있다. 이들은 사람들이 자기들의 도움을 자유함에서 수락하면 악한 생각과 느낌들로부터 떠나, 선인 것을 주입해주어 그들을 지키고 인도한다. 천사들이 땅 위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 천사들은 그들의 애착들과 느낌들 안에 살고 있다. 그리고 언제나 그 사람이 지닌 생명의 본성에 따라 조금 멀리, 조금 더 가까이 있는다. 이런 모든 직업들은 천사들에게는 당연한 활동들 이다. 그럼에도 각 개인의 천사는 각자 고유의 천국에 이바지함을 지닌다. 이 이바지함(기부함)이 신성의 설계의 한 부분을, 공동의 선의 한 부분을 만든다.

53. 천국적인 기쁨과 행복함

천국의 기쁨(joy)은 자기 고유의 행복함과 복됨을 다른 사람과 나눔에 따른 즐거움(delight)으로부터 온다. 그리고 천국에 있는 모든 이는 이와 같이 느끼는 바, 천국에 얼마나 많은 기쁨이 있을 것인지 짐작되었을 것이다.

온 천국에 널리 퍼져 있는 타인과 나눈다는 느낌은 천국에 있는 두 개의 우선하는 최고의 사랑들, 즉 주님을 사랑함과 이웃을 향한 사랑으로부터 유래한다. 주려고 서두름이라는 속성은 위 두 사랑들의 선천적 속성이다. 주님의 사랑은 모든 타인에게 그 자체의 모든 것을 주려는 사랑이다. 그 이유는 이 사랑은 보편적 행복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사랑이 그분을 사랑하는 사람들 안에 존재한다. 그 이유는 주님이 그들 안에 계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아를 사랑함은 위 두 사랑에 찡그리고 그것을 다른 쪽으로 돌려, 마치 자아 단독의 생각인 듯 자아 쪽을 향해 홈을 판다. 세상의 것들을 사랑함은 타인에 속한 것을 탐내도록 다그친다. 이 두 사랑들은 타인에 있는 즐거움과 행복함을 파괴하는 것을 선천적으로 지니고 있다. 따라서 나눔이 실시된다면, 오직 이기적 이유들을 위한 행동이 있을 뿐이다.

세상에 사는 동안 무엇보다 우선 자신과 세상을 사랑하는 사람은 그가 세상에 있는 동안은 이 사랑은 즐거움으로 가득하고 짙은 쾌락이 있다고 느낀다. 그럼에도 주님과 자기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은 그가 세상에 사는 동안 이런 사랑들에 즐거움이 충만되어있다고 느끼지 않는다. 그리고 이런 세상적인 것들이 자기들의 축복이라는 느낌을 전혀 감지하지 못한다. 그 이유는 이것들이 그 사람 내부 아래 깊숙이 처박혀 있고 매일의 생활 관심사로 덮혀 있기 때문이다.

위 모든 것은 사후 바뀐다. 그 이유가 그 때에 자아 사랑과 세상 사랑은 고뇌와 고통으로 가득채워지기 때문이다. 이것이 이 사랑들의 본성이다. 사후 그들은 소위 ‘지옥-불’이라 불리는 것으로 바뀐다. 또는 그 때에 그들은 상응에 따라 추잡하고 구역질나는 어떤 것으로 변해진다. 이럼에도 이런 것에 관심있었던 이들에게는 즐거운 것이라고 느껴진다.

이 세상에서 감지할 수 없어 감추여졌던 기쁨이 사후 천국의 아주 충만된 즐거움으로 바뀌어 가능한 모든 방법 안에서 지각되고 느껴진다. 이것은 영적인 즐거움에서 기인하기 때문이고 천국에서의 삶은 영의 삶이기 때문이다. 천국의 기쁨과 행복함은 사람에 있는 육체의 감각들에 비교해봄으로 보여질 수 있다. 각각의 감각은 각 감각의 용도에 걸맞는 위치를 지킬 때 즐거움의 느낌을 가져다 준다. 시력은 아름다운 것, 색깔, 모양새들을 봄으로 기쁨을 가져다 준다; 듣는 것은 달콤하고 하모니 있는 소리를 들음으로 기쁨을 가져온다; 냄새맡음은 향기로부터 즐거움을 가져온다; 맛을 봄은 향미로부터 즐거움을 가져온다. 시력이 즐거움을 가져다 주는 이유는 시력이 이해력을 섬기는 유용성(use)으로부터 온다. 들음이 즐거움을 가져오는 이유는 들음이 그것의 특수한 감수성을 수단으로 이해력과 의지 모두를 섬기는 유용함 때문이다. 다른 감각 기관도 위와 비슷하다. 촉각, 이 감각은 가장 순수하고 가장 절묘한 바, 결혼 사랑을 표현한다. 그리고 이 감각은 인류의 증가와 아울러 천국에 있는 이들의 숫자 증가라는 유용함 때문에 모든 감각 중에서도 가장 가치있는 감각이다.

모든 이런 즐거움들이 감각들에 채워져 있는데, 그 이유는 천국 자체가 그것들 안으로 흘러들기 때문이다. 천국에 있는 각 천사의 삶은 봄철을 향해 계속적으로 진보해간다. 수 천 년 살았다면, 진보는 더 크고 더 가득해지고 있다. 그리고 이것은 영원히 계속된다. 이 진보는 사람 안에서 관심 받아진 사랑, 선량함, 신앙의 성장에 따라 언제나 있게 된다.

늙고 지치고 하여 죽은 여인, 그러나 천국의 방식 안에서 살아왔었다면 그녀는 시간이 지나면서 꽃다운 여성으로, 과거 이 세상에서 결코 본 적이 없는 아름다움을 더욱 더 꽃피운다. 이 아름다움을 산출하는 것은 그녀의 내부의 품질이고, 이 품질이 그들의 바깥쪽 나타남이 되고, 그녀의 얼굴에서도 상세하게 나타난다. 이와같은 여인들은 사랑 그 자체의 모양들이다. 한마디로 천국에서 늙는다는 것은 젊어진다는 말이다.

54. 천국의 크기는 무제한이다

천국의 크기와 넓이가 무제한이다는 진리는 지금까지 말해왔었던 많은 것들로부터 명백하게 보여질 수 있다. 우선 천국은 인류로부터, 즉 교회의 안으로부터 이든 밖으로부터 이든 세상에서 사는 동안 선인 것을 수단으로 살았던 사람들이 구성원이다는 사실이다. 세상에 지금 살고 있는 사람만도 어머어마하고 하루에도 엄청난 사람이 죽고 있다. 게다가 이것은 수 천 년 이상되는 인간 삶의 시작 이래 계속되어 왔다. 이 모든 사람이 죽을 때 저 세계로 들어 간다. 아직도 이는 계속 중이다. 아주 이른 시기에 살았던 대부분의 사람은 천국에서 천사가 되었다. 그 이유는 그때 당시의 사람들은 더 내향적으로, 영적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모든 어린이는 천사가 되는데, 땅 위 그들의 숫자는 총 인구의 20-25%에 달한다는 사실로부터도 천국의 크기를 가늠해 볼 수 있다. 크기를 두고 추측을 더 보탠다면, 태양계에서 눈에 보일 수 있는 모든 행성이 땅이다는 것, 이를 넘어 우주에는 셀 수 없는 더 많은 땅들이 있고, 거주민으로 채워져 있다는 사실 등등이다. 전체 우주에서 주님 만이 천국과 땅의 하느님으로서 인식되고 있다.

전체로서의 천국은 사람 모양을 닮았고, 사람에 있는 모든 것에 상응하는 바, 가늠되는 것은 이 상응은 다 채워지는 것이 가능할 수 없다는 점이다. 그 이유는 상응은 개개의 기관들과 조직 뿐아니라 모든 아주 작은 부분, 분비선, 단섬유에 이르기까지 있기 때문이다. 또한 사람에 있는 더 내향의 수준들과도 상응이 있다- 즉 그의 개성을 구성하는 것들인데, 이것 역시 숫자를 초월한다.

이 상응이 채워지는 것이 가능할 수 없는 이유는 몸의 특수한 부분에 상응하는 공동체의 수가 더 커질 수록 천국은 더 완전해지기 때문이다. 고로 무한이다.

나에게 천국의 거주하는 부분과 비 거주 부분이 보여졌는데, 비 거주 부분은 너무나 커서 결코 채워질 수 없을 것 같았다. 설사 우리의 거주민 같이 행성들에 있는 모든 거주민을 가지고 채워도 채워질 수 없을 것이다.

혹자는 이렇게 믿는다. 천국은 작은 크기이고 어떤 유형의 범주에 있는 사람들, 즉 ‘뽑힌 자’, 또는 ‘가난한 자’, 또는 주님께서 중재한 자로 한정되었다는 것이다. 이런 방편으로 해서 천국은 닫히지않는다. 게다가 다 채워지는 일도 결코 없다. 주님께서는 그분을 받아들이고 사랑과 신앙의 규율인 신성한 계획 속의 법칙에 의해 생활하는 모든 개개인을 인도하신다. 모든 개인은 천국을 위해 태어나고, 그가 세상에서 자신 안으로 천국을 받는다면 천국에 입장되고 그렇지 않으면 닫혀진다. 간단하다.

천국의 모양

제2부
천국의 모양

13. 천국에서는 주님이 하느님이시다

천국과 지옥에 관한 어떤 생각을 해보기 앞서 우선 필요한 것은 하느님의 본성을 이해하는 것이다. 그이유가 그 외 모든 것은 이 근본적인 요점에 의존되고 있기 때문이다. 천국의 전체에서 주님 만이 하느님으로 예배되어진다. 천사들은 주님이신 한분 하느님만을 생각할 수 있다고 말한다. 천사들이 덧붙여 말하기를, 만일 자기들이 따로따로 있는 세 인물이 세 하느님이다고 행여 믿어지기라도 한다면, 자기들은 혼동을 일으키고 마는데, 이 혼동 자체는 이것을 말하면서 저것을 뜻하는 것이 불가능한 천국에 들어감으로부터 예방해준다 한다. 천국에서 각자 속의 확신과 생각은 모두에게 알려지게 되어 있고 천사들의 얼굴에서 보여지기 까지 한다. 그래도 한가지 알려져야 할 것은, 선한 이들, 그런데 하느님에 관하여 잘못된 사상을 믿게 되었던 이들은 결국에는 천국 안으로 영접되고 거기서 주님이 하느님이시다는 진리의 가르침을 받는다는 것이다.

주님이 하느님이심을 부정하는 이들은 만일 이를 신앙으로 스스로 확증해왔다면 천국 밖에서 자신을 발견한다. 이런 사람들은 끝내는 명백하게 생각하는 능력을 상실한다. 이 진리는 이렇게 간단하다: 천국은 주님을 영접하는 이들, 주님이 보편적인 하느님이다고 알고 있는 이들만이 있는 곳이라는 말이다.

죽게된 아주 어린 아이- 그들은 셋째 천국을 구성하고 이들은 그들의 아버지로서 주님을 사랑하고 이 아버지가 모든 이의 주님이심을 아는 (셋째) 천국에서 양육되어진다.

14. 주님의 신성한 생명이 천국을 만든다

천사들 모두 함께 ‘천국’이라 불리워진다. 그 이유는 그들 자신이 천국을 만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님 자신의 신성한 생명이 천사들 안으로 흘러들고 이를 천사들이 받아들여 그것이 천국을 만든다. 모든 사랑과 이해함은 주님으로부터 오는데, 천사들은 자신 안으로 이것을 받아 들인 만큼에서 그들은 천국 안에 있는다.

각각의 천사들은 주님 없이 자기들은 선을 행할 수 있다거나 선을 행하기를 원해서는 안됨을 은연중에 깨닫는다. 그들은 생각이나 느낌이 주님으로부터가 아님을 보게되면 자신의 생각과 느낌을 무시해버린다. 모든 천사들 중 가장 높은 수준의 천사들은 이를 지각하고 대단한 사건으로 까지 간주하여 느낀다. 이를 그들이 더 할 수록 그들은 자신들이 더욱 천국 안에 있어진다고 느낀다. 이런 까닭은 그들이 심오한 이해와 강렬한 기쁨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천사들은 생명 자체는 주님으로부터만 올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들은 말한다. 저절로 존재한 것은 아무 것도 없고 오로지 그 존재에 선행한 어떤 것으로부터 존재할 뿐이다고… 모든 것은 천사들이 생명의 참 존재라 부르는 첫 근원으로부터 존재한다. 그리고 모든 것은 이 근원으로부터 존재를 계속한다. 그 이유는 존재가 계속 태어나기 때문이다. 만일 생명의 이 흐름이 한순간이라도 멈춘다면, 모든 것은 즉각 존재함을 중단하고 만다. 천사들은 말한다. 생명에는 하나의 원천만 있고 이로부터 모든 생명이 진행하고 있다. 이를 받아들이는 자들은 자신 안에서 천국을 발견한다. 그러나 이 사실을 억압하거나 부정하는 이들은 지옥으로 들어가 생명을 죽음으로 바꾼다.

창조된 세계는 유입하는 생명의 근원의 본성을 비춰주고 보여준다는 것을 근거로 삼아 천사들은 위의 진리를 지지한다. 천사들이 위의 모든 것을 믿기 때문에, 그들은 자기들이 행한 선 때문에 자기에게 오는 어떤 감사도 무시하고 받지 않는다. 따라서 만일 자기들이 ‘선’이라 불려진다면 그들은 실망하고 떠나버린다.

자신의 선함에 신뢰를 두는 이들 그리고 자기가 행한 것 때문에 영예를 취하는 영은 천국의 어느 한 부분에도 있을 수 없다. 천사들은 위 영을 어리석은 도둑으로 밖에 여기지 않는다. 요한복음 15장에서, 주님께서는 천국에 있는 이들은 그들이 그분 안에, 그리고 그분이 그들 안에 있다고 말씀하신다. 그때서야 주님은 자신 속에 있는 것들 안에서 천사들과 더불어 거주하신다.

15. 천국의 신성한 생명은 주님과 이웃을 향한 사랑이다

사랑과 진리는 빛과 열이 태양으로부터 올 때와 같은 방법으로 주님으로부터 천국 안으로 흘러든다. 태양에서 빛과 열은 확실히 구분되지만 그것들이 땅에 생명을 가져오기 위해서는 결합하고 있다. 이와같은 방법으로 주님의 사랑과 진리도 천국에 생명을 주고 있다. 그 이유가 불은 사랑의 형상이고, 빛은 사랑으로부터 오는 진리의 형상이기 때문이다.

사랑은 사람들을 하나 되게 합친다. 이렇게 해서 사랑은 천국을 만든다. 사랑은 천사들을 주님과 그리고 서로서로에게 함께 하게 한다. 또한 사랑은 생명의 본질이어서 천사와 사람들을 사랑으로부터 자기들의 생명을 가지게 한다. 이것은 사랑하는 자와 사랑받는 자의 따뜻함과 생명력에서, 사랑이 없을 경우 그들의 차가움에서 보여질 수 있다. 모든 이 각자의 생명은 각자의 사랑의 품질과 똑같다.

천국에는 두 개의 확실히 구분되는 사랑이 있다; 주님을 사랑함과 이웃을 사랑함이다. 자기의 사랑을 주님에게 우선적으로 초점을 맞추는 이들은 천국의 중앙에 있다. 자기의 사랑이 이웃이라는 용어에 그 자체를 나타내 보이는 이들은 중앙으로부터 더 멀리 있다. 이 사랑들 모두 주님으로부터 나오고 각각의 사랑은 천국을 만든다. 천국에서 잘 알려진바, 주님을 사랑함은 단순히 그분을 하나의 인물로 숭배함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으로부터 나오는 선을 사랑함을 뜻한다. 그리고 그분의 선을 사랑함이란 그분의 선을 행하려 작심하여 사랑으로부터 그것을 실천함이다. 마찬가지로 이웃을 사랑함이란 어떤 인물을 뜻하는 게 아니라 그와 더불어 있는 말씀으로부터의 진리와 선을 자신의 삶의 수단으로 작정하여 그것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천사들은 누군가가 원하는 것을 행하기를 바라고 그들을 위해 그것을 실제로 행동하는 인물을 수단으로 이 두 사랑들이 그 자체를 어떻게 보여주는지를 계속 묘사하고 있다. 이 방법이 응용되는 가운데 그는 역으로 사랑받아지고 상대방과 결합되어진다. 그들 역시 말하는 바,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은 주님 자신의 모습에 있고, 이 선을 자기 생명의 참 원리로 만드는 이들은 주님의 모습이 되어가, 그분과 결합되어진다고 한다. 이 사랑은 극도로 아름다운 천사의 외관으로 보여지기 까지 하는데, 이 아름다움은 그들에게 끼친 주님의 영향으로부터 이다. 사랑은 그들의 얼굴에서, 그들의 대화에서, 그리고 그들 각각의 행동을 통하여 빛난다. 각자 지닌 사랑의 품질로부터 나오는 영적 활동 영역이 천사 주위에 있다. 그리고 이 영역은 먼거리에서 조차 인식되어질 수 있다. 이 영역은 사랑으로 꽉차있으므로 그들은 타인의 아주 깊은 것들에까지 당도한다.

영계에서 각 영은 자기 고유의 사랑의 방향으로 자신을 돌아 세운다.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이들은 계속적으로 주님을 향하여 돌아서는 반면 자신을 사랑하는 이들은 계속 그분으로부터 떠난다. 이 회전은 몸의 각 움직임에 적용되고 있다. 그 이유는 천국에서의 공간이란 각자의 내부의 상태에 걸맞게 행동하는 것이고, 방향은 각자의 생각의 초점에 따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천사가주님을 향하여 돌아서는 것은 만일 천사가 그분으로부터 오는 것들을 행하기를 사랑하면 주님께서 천사들을 돌아서게 해주시는 바 돌아섬의 주체는 실상 천사가 아닌 주님이시다.

사랑 자체가 천국의 신성한 생명인 이유는 사랑은 사랑 안에 천국적인 모든 것을 포함하고 있어서이다; 즉 평화, 총명, 지혜와 행복 등이다. 사랑은 풍요로워지고 완전해지기를 추구한다. 그래서 사랑은 자기와 하모니를 이루는 모든 것을 받아들인다. 각 사람의 사랑은 기억 안으로 깊이 들어가 수색하여 자기와 일치하는 모든 것을 끌어내고 사용을 위해 모으고 분류하나 자기와 일치 않는 것은 거절한다. 따라서 이 세상에서의 삶 동안 선한 것을 행하기를 단순히 바라왔던 사람은 사후 아주 슬기로워질 수 있다. 그 이유는 그는 천국을 영접하는 수단을 획득했었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 이기적이고 세욕에 집중한 이는 사후 점차적으로 무지해가고 선한 것을 몹시 싫어하여 움츠리고 만다. 결국 그는 지옥을 향하여 자신을 떼어내 거기서 자기와 유사한 이들과 결합한다.

16. 천국은 구분되는 두 왕국을 가지고 있다

천국은 무한하게 변화함과 다양함으로 구성되고 있다. 그 이유는 거기에는 동일한 두 천사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전체를 만들어가는 각기 다른 부분들로 구별되어진다. 천국은 하느님의 왕국이다. 이 왕국은 구분되는 두 부분들로 나뉘어져 있다. 그런 다음 이 두 부분들은 각각 세 등차로 구별되어진다. 거기에는 각기 다른 무수한 천사들의 공동체와 그룹들이 있다.

어떤 천사의 경우 그는 다른 천사보다 더 깊은 수준과 상이한 방법에서 주님을 알아채린다. 이 사실은 ‘천적’ 왕국과 ‘영적’ 왕국으로 불리울 수 있는 두 천국의 왕국들 사이에서 기초적인 구분함이 되고 있다. 천적 형태의 천사들은 영적 형태의 천사들이 사용하는 기억을 통하거나 추론하는 과정을 통하기 보다는 오히려 직접적으로 주님으로부터 그들의 생명 안으로 진리를 받는다. 천적 천사들은 진리를 심정에 적어 소유한다. 지각적인 이 천사들은 어떤 것이 진리인지 아닌지를 즉각 알고 그것을 사용해보기를 바라고 있다. 영적인 천사들은 어떤 것이 진리인가를 알려면 자기들의 추론력을 사용하여 곰곰이 생각하는 것이 필요하다. 위와 같은 기본적인 구별 때문에 위 두 형태의 천사들은 서로 자유롭게 혼합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은 어떤 중개하는 천사 공동체를 수단으로 소통한다. 따라서 비록 천국이 두 개의 확실히 구분되는 왕국을 형성하고 있다 해도 (소통함을 통해) 하나의 전체를 만들고 있다.

17. 천국은 명백한 세 등급을 가지고 있다

천국은 각기 다른 세 등급으로 구별되어질 수 있다; 즉 가장 높은 등급, 또는 가장 안쪽; 중간, 또는 둘째 등급; 그리고 가장 낮고, 바깥쪽, 또는 제3 등급. 아마 3층 집을 연상해보면 쉽게 이해될 것이다.

사람의 마음도 위와 유사한 구조로 배열되어 있다. 그 이유는 사람의 마음 역시 주님에 의해 창조되었기에 위와 동일한 질서와 디자인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각 사람은 아주 작은 규모의 천국적 모양 안에 있다. 이는 각 사람이 보다 깊은 수준에서 천국들과 어떻게 소통되어질 수 있는지를 알게 한다. 사후, 각 사람은 자기가 지상 삶에서 주님을 어떤 방법으로 영접했었는지에 따라 세 등급 중 하나에 속하는 천사들 사이에 있게 된다.

천국의 위 세 등급은 천사들이 주님을 영접하는 방법들로부터 천적, 영적, 자연적 등급이라 불리워진다. 천국의 자연적, 또는 가장 낮은 등급은 그 안에 천사들의 천적 유형과 영적 유형, 어느 유형이든 또한 가지고 있다. 따라서 어쩌면 천적-자연적 등급과 영적-자연적 등급이라고 말하는 편이 더 정밀할 것이다.

각 천국의 등급 안에는 다른 천사들 보다 더 깊게 알아챔을 지닌 천사들이 있다. 지각(perception)이라는 이 등급은 천사들을 중앙 쪽으로 더 가까이 있게 하거나 천국의 특수한 등급에 해당하는 주변 쪽에 각 사람을 있게 한다. 천사의 마음이 주님을 향하여 열리는 정도 만큼에서 중앙 쪽으로 각 천사의 위치는 정해진다.

진리를 수단으로 해서 움직이되 진리를 즉각 사용하고 싶어하는 천사들은 천국의 가장 높은 등급, 또는 가장 안쪽 등급에 있게된다. 그 반면 진리를 자기들 기억 안으로, 그다음 이해력 안으로 가져가고, 거기로부터 진리를 사용하려 하는 이들은 두 번째 또는 중간 등급에 있다. 그리고 적당한 삶, 직바른 삶, 그리고 신성한 존재가 있다고 믿는 이들, 그러나 이를 굳이 더 배워 알려 하지 않는 이들은 제 3의 등급, 또는 바깥쪽 등급에 위치한다.

천국적 지각은 각 사람이 가장 높은 것, 또는 중앙을 향하여 이동할 때 증가한다. 그 이유는 이럴 때 신성에 더 가까워지기 때문이다. 천사의 완전함은 총명, 지혜와 사랑, 그리고 이것들로부터 오는 행복에 있다. 가장 깊은 천국의 천사들은 다른 두 등급의 천사들 보다 더 주님께 자신들의 가락을 맞춘다; 고로 그들의 완전함은 더 크다.

위 등급은 확실히 차별되므로 이 천국의 천사가 저 천국의 천사와 쉽게 연계하지 못한다. 만일 어떤 천사가 낮은 천국으로부터 보다 높은 천국으로 승강한다면 그는 고통을 느끼기 시작한다. 그는 거기 있는 이들을 볼 수 없고 그들과 대화도 할 수 없다.

만일 어떤 천사가 높은 천국으로부터 그 보다 낮은 천국으로 하강한다면 그는 자기 지혜를 상실하고, 말더듬고, 결국은 거기를 떠나야 하는 지경에 이른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간혹 예외로 허용해주는 때가 있다. 예를 들면, 자신의 복지를 위해 더 높은 천국의 영광을 보는 것이 허용될 경우이다. 그렇다 해도 이런 천사들은 완전한 소통을 가능하게 하는 중매하는 천사들에 둘러싸여 조심스럽게 준비되는 절차를 거쳐야만 한다.

같은 천국 안에 있는 천사들은 각자의 애착들이 비슷하다면 거기 있는 모두와 섞일 수 있고 다함께 즐길 수 있다.

위와 같은 구분함들이 존재할지라도, 여전히 전체로서의 천국들은 주님 때문에, 그리고 이 천국이 저 천국에 영향을 주기 때문에 하나를 만든다. 이런 방법들에서 세 천국들은 철두철미하게 연결 되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게 하여 하나를 만든다.

천국의 모양에 대한 명백한 생각을 가져 보겠다면 천국의 세 등급들이 영적인 것들 안에서 어떻게 작동하는 가를 우선 이해하는 것이 필수이다. 사람들은 등급이라는 용어를 두고 생각할 때 이는 점진적 변화로 생각하려는 경향이 있다. 마치 어둠으로부터 빛으로, 또는 뜨거움으로부터 차가움으로 이어지는 점진적 변화같이 말이다. 그러나 영적 등급은 이와 다른 방법, 즉 불연속적 방법에서 작동한다. 이 수준 또는 등급으로부터 또 다른 등급은 분명 다르나 그럼에도 그것들은 연결되어 있다. 마치 원인과 결과의 관계와 같다. 그리고 이로부터 제 3의 등급이 있다. 빠져나오는 둘은 첫 번째 안에 포함되어 있는데, 마치 사람의 마음과 몸이 그의 영의 생산물이긴 하나 그 자체 영의 부분은 아닌 것과 같다. 만일 이 원리를 납득하지 않으면 많은 사항들, 즉 천국의 모양, 인간의 마음, 영계와 자연계 사이의 관계에 대한 이해가 있을 수 없고, 상응의 본성과 근원도 이해될 수 없다. 각각의 천사와 사람은 주님의 생명이 직접 흐르는 모든 것 중에서 가장 높은 등급, 또는 내부의 가장 안쪽 등급을 가지고 있다. 이를 수단으로 주님은 모든 것을 그 뒤를 이어 적절한 질서 안으로 배열하신다. 이것은 영혼 자체이고, 주님께서 각 사람과 더불어 있는 주님 자신의 ‘주거지’이다. 위 가장 안쪽 수준이야말로 이 수준을 가지지 않는 동물과는 아주 달리 각 사람을 진정 인간으로 만든다. 이 수준 때문에 각 사람은 주님에 의해 천국의 빛 안으로 들어 올려질 수 있고, 주님을 믿을 수 있고, 주님에 의해 움직여질 수 있고, 그분을 볼 수 있다. 이 수준을 수단으로 각 사람은 총명과 추론함을 가질 수 있고, 마지막에는 영원히 살 수 있게 된다. 그럼에도 언제나 그것의 존재를 알아챔이 있지 않는데 그 이유는 그것은 주님 만에 속한 것이기 때문이다.

18. 천국은 셀 수 없는 공동체들로 구성되어 있다

세 등급의 천국 각각 안에서 천사들은 아주 다양한 크기의 공동체들로 그룹짓고 각 그룹은 거기 있는 이들의 특별한 품질을 반영하고 있다. 비슷한 품질들을 가지는 이들은 함께 하나의 공동체를 형성한다. 그리고 거기에 있는 좋은 품질들의 무한한 다양성들 때문에 거기에는 셀 수 없이 많은 공동체들이 있다.

천국의 공동체들은 선에 대한 특별한 품질에 따라 서로서로가 관계하여 위치하고 있다. 영계에서의 거리는 내부 상태에 있는 다양함의 결과라는 사실에서 비롯된다. 크게 차이 나는 사람들은 더 멀리 떨어진다; 덜 차이 나는 이들은 더 가깝게 위치한다, 즉 유사함이 접근함을 가져다 준다.

다시 동일한 공동체 내에 있는 이들은 유사하게 배열되어진다. 보다 더 완전해지면 중앙에 더 가까워지고 있음이 발견된다; 덜 완전하면 그 덜한 정도에 따라 주변 쪽으로 향한다. 각 경우에서, 공동체 내에서의 배열은 빛이 더 멀어지면 더 희미해지는 방법과 비교될 수 있다. 중앙에 있는 이들은 가장 큰 빛에 있다. 천국의 보편적인 법칙의 하나는 같은 것은 같은 것에 끌린다는 것이다. 자신과 비슷한 타인과 더불어 있는 사람들은 마치 자기 집에서 가족들과 있는 듯 느낀다. 그래서 그들은 자유함과 평화, 극도의 행복함을 느낀다.

그 다음 알게 되는 바, 천국들을 전체로서 결속하는 것은 선의 품질이다는 것, 또한 사람들은 선에 대한 자기들의 특별한 품질에 의해 구별된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배열을 하는 것은 천사가 아닌 선의 근원이신 주님이시다. 그분은 인도해주고 결합되게 하고 구별해주시고 자유를 가져다 주며 각자의 특별한 사랑과 신앙, 그리고 기쁨으로부터의 생활을 영위하도록 모든 이 각각을 관리해주신다.

지상의 사람들이 가족, 친구, 친척을 알아보듯 천국에서도 자기와 비슷한 선을 지닌 사람을 서로 인식한다. 설령 단 한번도 서로 본 적이 없다 해도 알아보는 것에 실패하지 않는다. 천국에서의 유일한 관계는 사랑과 신앙으로 이루어지는 영적 관계 뿐이다. 나는 나자신을 위하여 위 상황을 겪은 적이 있다. 내가 본 어떤 천사들은 나의 어린 시절로부터의 나에 대한 전부를 아는 것처럼 여겨졌다. 나를 알아보았던 이들은 나의 영적 상태와 비슷한 상태였다.

같은 공동체에서 사는 천사들은 대체로 비슷한 것을 찾고 있는데, 그렇다고 세부사항에서 까지 똑같은 것을 찾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서로가 닮고 있다. 그 이유는 그들의 사랑의 품질이 그들의 얼굴에 빛을 내고 모양새에서 까지 비슷해져 있기 때문이다. 내가 어떤 천사의 얼굴을 보았는데, 그는 단 하나의 천국의 공동체 안에서 조차도 그 안에 애착의 다양한 형태가 표현되기 위해 얼굴의 표현이 어떻게 바뀌는지를 나에게 증명이라도 해주는 것 같았다. 이것은 얼마 동안 지속되었는 바, 그때 내가 주목한 것은 표현이 계속 바뀐다 해도 똑같은 일반적인 얼굴을 배경으로 거기에 언제나 있었다는 점이다. 천사들은 또다른 천사가 무엇 같은지를 그의 얼굴을 쳐다봄으로 즉각 알 수 있다. 천국에서는 자기 가 느끼는 것, 생각하는 것을 감추는 것, 또는 있는 그대로가 아닌 다른 것인 체 하는 것들이 불가능하다.

천국에 있는 모든 공동체들은 비록 자신의 공동체로부터 다른 공동체로 가지 못하기 때문에 직접적인 어떤 교환을 수단으로 해서는 아니지만 서로가 접촉하고 있다. 직접적인 교환에 의한 접촉은 아마 자신을 떠나 올바른 느낌이 안 드는 그 외의 어떤 장소에 가는 것과 비슷할 것이다. 그 대신 그들은 자기들로부터 나오는 영역력(sphere)들을 수단으로 접촉한다. 이 영역력은 더 멀리 더 넓게 뻗칠 수 있고 더 깊게 타인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이런 방법에서, 가장 높은 천국의 천사들은 천국 전체를 통하여 강한 영향력을 가지는 바, 마치 그들의 영역력은 모든 곳에 침투하는 듯하다. 그리고 이 영역력들의 결과로 천국의 각 천사는 그 외의 모든 이와 소통한다.

천국에서 천사들의 크고 작은 공동체들은 수만, 수천 수백의 천사들로 형성되어 있다. 그리고 마치 집 옆에 집, 가족 옆에 가족이 살고, 여타 공동체와 따로 떨어져 사는 천사들도 있다. 이 사람들은 더 직접적으로 주님의 관찰하심과 안내 아래 있고 최상의 천사들이다.

19. 각 공동체는 소형의 천국이고 각 천사는 최소 규모의 천국이다.

선의 품질이 천국을 만드는 바, 이 품질은 모든 천국 공동체, 또한 각 천사 내에 있다. 이 선은 아무리 다양해진다해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래도 이 선은 천국의 선이다. 그 차이는 이 장소에 이런 종류, 저 장소에 저런 종류의 선의 품질이 있다는 것 뿐이다.

각 천국의 공동체는 소형의 천국이다. 그 이유는 전체로서의 천국과 똑같은 틀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중심에 더 가까이 있는 공동체는 그만큼 더 영적이고, 덜 영적인 공동체는 주변 쪽에서 그룹지어 위치하고 있다. 이는 어떻게 주님께서 마치 그들이 하나의 천사인 것 처럼 천국에 있는 모든 이를 인도하시나를 보여준다. 그분은 각 공동체에 있는 이들과도 똑같게 행하신다. 천사의 공동체는 때로는 하나의 천사인듯 그 존재의 외관을 취하기도 한다.

천국 전체를 망라해 있는 이 큰 동일하지 않음 때문에 천사들이 주님께 응답하는 방법들에서도 폭넓은 다양함이 있다. 예를 들면 각기 다른 방법에서 그들은 그분을 예배하는 것이다. 천국의 참 완전함은 다양함이 증가하는데 놓여있기에 이런 다양해짐 역시 신성한 질서 안에 있다. 원리는 이것 아닐까 싶다; 즉 어떤 것이 완전해지려면 가지각색의 다양한 부분들로부터 형성되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것이 그러하다는 것을 아름다움, 즐거움, 기뻐함이 우리의 감각을 움직이는 방법들과 일치하는 모든 것의 하모니로부터 완전함의 느낌을 가져다주는 방법들에서 찾아 알 수 있다. 이것은 우리가 천국의 어떤 것을 볼 수 있는 우리를 위한 일종의 거울이다. 참으로 여기 이 세상에서 발생하는 것들은 영계에 있는 것들의 거울이다.

위 사항은 교회 차원에서도 똑같다; 그 이유가 비록 많다 할지라도 만일 선의 품질이 교회 안에 있다면 그 각각은 교회일런지 모르기 때문이다. 이는 교회 안의 각 사람을 두고도 동일하다. 그 각 개인은 소형의 ‘교회’이다. 각 개인과 천국이 현존하는 천사 사이에 차이나는 것은 실지로 없다. 그들 모두 최소 규모에서 천국의 모양들이다. 주님은 사람들이 천국 안으로 와서 천사가 되도록 사람들을 창조하셨다. 주님으로부터 선을 소유하는 사람은 ‘천사적인 사람’이다. 그러나 이런 차이는 있다; 사람의 내부 모양이 천사의 것과 같이 천국의 모형에 있는 동안 그의 바깥쪽 모양은 세상의 모형에 따라 형체를 이룬다는 점이다. 그는 이 수준을 천사가 가진 것 그 이상의 수준을 가진다. 그리고 그가 선 안에 있는 한, 세상적 수준은 천국에 종속되고 천국을 섬긴다. 그러면 주님은 마치 그가 천국 안에 있는 것처럼 그와 더불어 양쪽 수준 모두에서 현존해주신다.

끝으로 주목해둘만한 것이 있다. 자신 안에 천국을 소유하는 사람은 자기와 관련되어 가장 중요한 것들과 일반적인 것들 뿐아니라 자기 삶의 아주 작은 세부사항에서도 천국을 소유한다는 것. 이것들은 가장 큰 것들의 모형을 형상(작은 모형) 안에서도 마찬가지로 반복한다. 이런 이유는 천국에서 모든 각 사람은 자신의 사랑의 모양 안에 있으면서 그의 사랑은 그가 지닌 모든 것 안으로 흐르고, 그것을 자기의 모형으로 배열하기 때문이다. 천국을 만드는 것이 주님을 사랑함이듯, 주님은 각각 그리고 모든 것들 안으로 흘러드시고, 그들을 그분 고유의 모습으로 옷입히시고, 그가 어디에 있든 거기에 천국을 가져다 주신다.

20. 전체로서의 천국은 사람의 모양과 비슷하다

천사들은 천국을 ‘큰 사람(Great Human)’이라 부른다. 이것은 각자의 공동체를 포함하는 전체로서의 천국이 단 한명의 사람의 모양과 비슷하다는 것을 아는 천사들에 의해서 보편적으로 이해되고 있다. 중요한 많은 생각들이 이 개념 뒤를 잇는 바, 그들은 이 개념을 이해함 없이는 (여타 다른 사항을) 명백하게 알 수 없다.

어떤 사람이 순전히 물질적인 것으로만 말하고 있다 해도 그 사람이 누구인지는 그가 참된 생각들을 이해하는 능력과 선행을 원하는지의 여부로부터 가늠된다. 물질적인 신체는 위 내부 능력을 단순히 섬길 뿐인바, 내적 능력들에 종속되어 있다. 육체는 그 자체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천사들이 어떤 사람을 생각하는 방법은 이렇다. 그들은 사람이 자기 몸으로 무엇을 하고 있는지에는 관심이 없다. 그 대신 그들은 그 사람의 행동 뒤에 숨겨져있는 바램들과 의도들에 관심을 집중한다. 그들은 이 수준을 그 사람 자신이라고 부른다. 천국을 전체적으로 본 천사는 한명도 없다. 그 이유는 이것이 그들의 납득력 넘어에 있기 때문이다. 때때로, 어쨌든, 천사들은 수많은 천사들로 구성된 완전한 공동체를 볼 수 있고, 이 완전한 공동체가 모양 측면에서는 단 한명의 사람임을 보게 된다. 이로부터 천사들은 천국들의 전체는 인간의 모양과 비슷하다는 것을 추론해낸다. 그러나 이 모양은 천국의 외형(shape)이 아닌 천국의 조직체로서 이다.

천국이 인간의 모양에서 존재한 이래, 천국은 마치 한명의 사람인듯, 마치 사람이 뭔가를 할 때 신체의 기관과 세포가 하나로 함께 일하는 것과 같은 방법에서 전체로서 하느님에 의하여 통치되어진다. 몸의 각 부분은 그것의 복지에 기여하고 각 부분은 각기 특별한 용도를 가진다. 전체로서의 몸은 각 부분의 몸이 요구하는 것을 제공하고, 각 부분은 전체로서의 몸을 위해 각기 특별한 방법들에서 제공한다. 이 상호 봉사 안에 통일성이 담겨져 있다. 천국에서는 제공된 용도에 따라 동일한 모형의 조직체가 있다. 유용함(usefulness)은 모든 이의 선을 위하여 타인의 복지를 추구하는 것이다; 그리고 천국에 있는 모든 이 각자는 근원으로서 주님을 먼저 바라보고, 그다음 전체 복지가 추구되어야 할 공동체로서 그분의 왕국을 주시한다.

천국이 신체의 구성됨과 비슷한 바, 천국은 다양한 기관들과 부분들로 배열되어 있고 명칭도 비슷하다. 천사들은 어느 공동체가 천국의 ‘머리’ 부분, ‘가슴’ 부분, ‘허리’ 부분 등등을 형성하는지 알고 있다. 총괄적으로 요약해 말하면, 가장 높은 천국들은 머리부터 목 까지를 형성하고, 중간, 또는 둘째 천국들은 가슴에서 허리와 무릎 까지를 형성하고, 가장 낮은 천국 또는 세 번째 천국들은 발에서 발바닥, 그리고 팔에서 손 끝 까지를 형성하는데, 그 이유는 사람에게서 발이나 손은 가장 바깥쪽에 속한 부분들이기 때문이다.

‘큰 사람’에 관계되는 위 원리들은 만일 누군가가 천국에 관해, 그리고 천국이 어떻게 사람들과 연결되는지에 관해 올바른 생각을 확실히 가져보겠다면 꼭 필요한 본질적 요소이다.

21. 천국의 각 공동체는 인간의 모양과 비슷하다

천국의 각 공동체는 주님이 그 공동체 안에 현존 할 때 단하나의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난다. 이것은 불일치하는 것이 제거되는 만큼 더 선명하게 보여진다. 그렇다해도 서로 완전히 똑같은 공동체는 단 하나도 없다. 그것들은 한 가족 내의 사람들이 다르듯 각각은 다르고, 전체로서 모양을 결정하는 선의 다양함들에 따라 그 다름이 결정된다. 각 공동체 안의 사람들은, 공동체를 단 한명의 사람 같이 나타나지게 만들면서, 그 공동체의 특별한 선에 포함되어 있다. 가장 높은 천국들의 중앙에 있는 공동체들은 모든 공동체 중에서 가장 완전하고 아름다운 모양을 가진다. 한 공동체 안에 사람들이 더 많으면 더 완전한 모양의 공동체가 되어간다. 그 이유는 다양함이 불어나기 때문이다. 이런 결과로, 전체로서의 천국은 천국의 숫자들이 매일 증가하는 만큼에서 더 완전을 달성해간다. 따라서 천사들에게는 새로운 천사가 자기들 사이에 도착하는 것 이상 더 반가운 사건이 없다.

22. 각 천사는 완전한 사람의 모양이다

단 한명의 천사는 그 천사 안에 천국의 전체와 부분들의 형상이 있기 때문에 최소 규모에서의 천국이다. 천국은 천사들이 공유(communion) 하고 있다, 그 이유는 천국 속의 모든 것을 각 천사가 함께 나누기 때문, 그리고 각 천사는 자기가 가지는 모든 것을 전체적인 공유 관계로부터 받는다. 이러한 바 각 천사는 받는 자, 고로 최소한 규모의 천국이다. 많은 사람들이 가지는 잘못된 생각은 영들은 육체가 없는 생각들과 느낌들에 불과하다는 것이나, 나는 영계에서의 내 경험으로부터 그러하다고 암시받을 만한 어떤 것을 본 적이 결코 없다. 나는 개개인의 영과 집단으로 있는 영들을 만났었고 그들과 이야기 했지만 집단으로 있든 개인으로 있든 다르다는 것을 보질 못했다. 단순하고 맑은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천사를 언제나 사람으로 생각하는데, 그 이유는 그들은 천사에게 모양이 없거나 실체가 없는 어떤 것으로 생각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천사들은 모든 측면에서 사람이다, 그래서 그들은 얼굴, 귀, 몸, 손과 발, 등등 사람들이 지닌 것과 같다. 그들은 서로 보고 듣는다, 그리고 그들은 스스로 말한다. 그들은 사람들이 가진 어떤 것도 빠진 것이 없다. 단하나 차이점이 있다; 물질적 몸 대신, 천사들은 영적 실체로 이루어진 영체를 가진다는 점이다.

우리는 사람들이 신체의 감각들이 아닌 영의 눈을 통하여서만이 천사들을 볼 수 있다는 점의 진가를 인정할 필요가 있다. 이 수준은 영계 안에 있다. 그 반면 물질적 모든 것은 자연계에 있다. 같은 것이 같은 것을 보는데, 그 이유는 비슷한 실체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만일 육체의 눈으로 하여금 자연의 많은 것들을 볼 수 없게 할 경우, 그 눈은 영계의 것도 얼마나 더 보지 못할까?

어쨋든 영계의 것들은 육체의 시야는 철수하고 영적 시야를 열리게 할 때 사람에게 보일 수 있게 된다.

23. 전체로서, 부분으로서의 천국이 사람의 모양과 비슷한 이유는 그것이 주님의 신성한 인간으로부터 이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말해왔던 모든 것은 가장 중요한 진리, 즉 주님의 신성이 천국을 만들기 때문에 신성의 모양은 인간이다 라는 진리로부터 생겨난 줄기들일 뿐이다. 천사들은 이와 다르게는 어떤 식으로든 신성에 관하여 생각할 수 없다. 그들이 이같이 생각하는 이유는 그들 안으로 흐르는 신성 자체에 의해 자기들이 인도받기 때문, 그리고 이에 따라 그들의 생각들은 그들 주변 모든 곳에 도달할 수 있기 때문에서 이다. 천사들이 더 지혜롭다면, 그들은 이것이 진리임을 더 명확하게 이해한다; 이 지각함의 결과에 맞추어 주님은 그에게 나타나신다. 실지로 주님은 볼 수 없는 신성을 믿는 것이 아닌 보일 수 있는 신성을 인정하고 믿는 사람들에게 인간의 모양으로 ‘천사’로서 나타나신다. 전자는 볼 수 없고 후자는 볼 수 있다.

천사들은 주님 만이 ‘사람(Person)’이시고 자기들 자신은 그분 때문에 사람일 뿐이다고 계속 말한다. 그들이 덧붙이는 말은, 그들의 각각은 각자가 주님을 받는 등차에서만 사람이다는 것이다. 이것은 무엇보다 우선 주님을 자신 안에 영접하는 가장 높은 천국에서 천사의 외모로부터도 보여진다. 그들의 이해함과 지혜는 참 사람의 모양을 하고 있기 때문에 그들은 모든 천사들 중에서도 가장 아름답다.

천국으로부터 어떤 영향을 받는 모두 각각의 사람은 하느님이 사람의 모양으로 계신다고 생각하는데, 그 이유가 이 생각은 하느님이 천국에서 지각되는 방법에 해당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신들로부터 생각할 뿐인 사람들은 이 생각을 파괴하는 바, 그들은 볼 수 없는 하느님만을 생각할 수 있을 뿐이다. 삶의 악한 길을 고집해왔던 사람들은 하느님은 확실히 없다라고 생각한다. 누구도 신성에 관한 어떤 개념이 없으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

신성에 관한 어떤 생각 없이, 어떤 영도 천국의 문지방에 접근 조차 할 수 없다. 설사 그가 그곳 가까이 왔다 해도 그는 안쪽으로부터의 저항을 느낄 것인데, 그 이유는 그의 내적 마음이 닫혀져 있고 천국의 모양으로 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세욕에 찌든 마음을 지닌 사람은 하느님이 ‘사람’이다는 것을 이해하는데 대단히 어렵다. 그의 견지는 온통 그의 감각들이 자기에게 말하는 것에만, 그리고 자기 주변의 공간에 나타나는 것에만 기초를 두고 있다. 세상에 있는 공간의 확장 따위는 천국에 없다. 그 대신 경계선 없는 공간이 있는데, 그 이유는 천국의 공간은 경계가 없는 것인 내적 시야 또는 생각으로부터 비롯하기 때문이다. 천국에서 모든 것은 각 개인에 소통되는데, 그 이유는 생각이 일하기 때문이다.

24. 천국과 인간의 모든 것 사이에 상응 관계가 있다

천국과 인간의 것 사이에 존재하는 관계의 본성은 오늘 까지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럴만한 몇 이유들이 있다. 중요한 이유는 사람들이 자신과 세상을 사랑함에 의해 자신들을 천국으로부터 철수 시키기 때문이다. 이 사랑은 사람들로 신체 감각에 호소하는 세상적인 것들에 집중하게 하려는 경향이 짙은 바, 세상의 것들에 기뻐하고 그다음 그는 영적 것들에는 눈감아버리고, 그것들은 곰곰이 생각해보기에는 너무 추상적일 뿐이라 단정하여 내버린다.

최 고대 시대의 사람들은 위와 같은 것들에 관해 다르게 느꼈다. 그들은 천국과 인간인 것 사이의 관계, 또는 상응을 이해함은 모든 지식 중 가장 고귀한 것이다고 믿었다. 이 믿음은 그들을 슬기 있게 만들었고, 그들에게 상응에 관한 이해를 주었고, 그래서그들은 상응을 수단으로 천국과 소통하고 있었다. 그 이유는 이 지식은 천사들의 지식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것들에 무지한 오늘날, 이 무지가 사람들이 영계에 관하여, 또는 영계가 자연계와 인간의 생활에 미치는 것들을 알게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들고 있다. 또한 이 지식이 없으면 인간의 영 또는 혼이 육체에 행하는 것, 사후 인간의 삶에 관한 어떤 것도 이해되어질 수 없다. 이러할진대, 관계의 본성은 차후 더 많은 문제들을 말끔히 설명하기 위해 꼭 필요하다.

첫째로, 상응 자체의 본성이다. 자연계의 모든 것은 영계로부터 존재한다. 마치 결과가 그것을 산출한 원인으로부터 도래한 것 과 같다. 이렇기 때문에 자연계에 있는 모든 것은 영계의 어떤 것과 상응하거나 또는 그것의 형상이다. 사람은 최소 규모에서 천국이자 최소 규모에서의 세상 양쪽에 해당되는 바, 그는 자기 안에 영계와 자연계를 가지고 있다. 그의 자연계-그의 몸, 몸의 감각들과 행동들의 수준에서 발생하는 모든 것은 그의 영계- 그의 마음, 마음의 이해함과 마음이 의도하는 것으로부터 존재 안으로 와진다. 이 두 세계는 상응 관계에 있다.

사람의 얼굴은 위의 사항을 훌륭하게 예증해준다. 짐짓 흉내내거나 꾸며지지 않은 솔직한 얼굴에서 사람의 참된 생각들과 느낌들은 투명하게 보일 수 있다. 이는 얼굴이 왜 마음의 색인 목록이라 부르는지에 대한 이유이다; 사람의 영계는 그의 자연계 안에 포함되고 있다. 이제는 사람의 모든 것과 더불어 전체로서의 천국의 상응으로 이동해 보자. 천국은 사람의 모양을 반사하고 있다. 그 이유는 천국이 ‘큰 인간’ 또는 인간의 모양에서 조직되고 배열되기 때문이다. 천국을 만드는 공동체들은 몸의 부분들 처럼, 어떤 공동체는 머리에, 가슴에, 팔에 이것 중의 더 특별한 부분에, 등등으로 배열되고 있다. ‘큰 인간’의 특별한 부분에 있는 공동체들은 사람 자신 안의 어떤 부분에 상응한다. 예를 들면, 머리 부분에 있는 이들은 사람의 머리에 상응한다. 인간만이 천국의 내적 유입으로부터 존재하는 바, 각 사람은 이 상응으로부터 이 땅에서 자기 존재를 가지기에 이런 연결 관계에 관한 지식은 매우 중요하다.

천국에 두 왕국이 있다는 것은 이미 상술했다. 천적 왕국은 심장, 그리고 몸 전체를 망라해 심장과 관련되는 모든 것과 상응한다. 마찬가지 방법에서 영적 왕국도 폐와 상응한다. 심장과 폐는 사람 안에서 두 왕국을 만든다. 심장은 동맥과 정맥을 통하여 활동하고, 폐는 신경과 근육에 영향을 미친다. 이 둘은 모두 육체의 노력 또는 운동에 포함되고 있다. 이와 같은 방법에서 각 사람의 영적 구성에도 두 왕국들이 있고, 이는 그의 의도함과 이해함이다. 그의 의도함은 선인 것을 위해 사랑함을 통하여 행동하는 반면 그의 이해함은 진리인 것을 사랑함을 통하여 행동한다. 이들은 몸에 있는 심장과 폐에 상응한다.

전체로서의 천국 역시 위와 정확히 같다. 천적 왕국, 사랑이 통치하는 곳, 천국의 의도 부분이다. 영적 왕국, 진리가 통치하는 곳, 천국의 이해함 부분이다. 이들은 몸에 있는 심장과 폐와 상응한다. 이 상응은 왜 ‘심장이, 성서에서 언급될 때, 사랑의 것들을 뜻하는지, 그리고 왜 ’숨‘이 이해함의 것들을 뜻하는지를 보여준다. 또한 왜 애착들이 심장으로부터 또는 심장 안에 있는 것이 아님에도 심장 속에 있다 라고 말해지는 이유이다.

이것은 또한 성서에서 몸의 부위들이 영적인 것을 뜻하도록 언급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성서에 있는 모든 것은 이런 상응성을 지니고 있다. ‘머리’는 이해함과 지혜를 뜻하기 위해 사용되어진다; ‘가슴’은 사랑과 애착을; ‘허리’들은 결혼적 사랑을; ‘팔’들과 ‘손’들은 참인 것의 힘을; ‘발’은 자연적인 것을; ‘눈’들은 이해성을; ‘콧구멍’들은 지각을; ‘귀’들은 순종함을; ‘콩팥’들은 진리인 것을 검사함을, 등등을 뜻한다.

일상 생활 속의 언어에서 사람들은 총명을 뜻하는 말로 ‘좋은 머리’라 말한다. 몇 개 더 열거하면, ‘가슴의 친구’, ‘예리한 코를 가지고 있음’, ‘날카로운 시력’ 등등 대단히 많은데, 이 모든 표현들은 이 상응으로부터 유래되고 있다; 사실상, 그것들은 영계로부터 근원하고 있다. 단지 사람들이 실감나게 깨닫지 못할 뿐이다.

사람의 육체적 몸과 더불어 행해지는 모든 것이 천국의 어떤 것과 상응한다 할지라도, 사람은 자기의 바깥쪽 모양에 관심을 갖는한 그는 천국을 표현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의 안쪽 모양에 관심을 두는 만큼에서 그 표현은 가능해질 뿐이다. 천국을 받는 것은 안쪽의 몸이고, 바깥쪽의 몸은 세상으로부터만 받는다.

이와 같이 인간의 육체적 몸은 천국의 모양이 마지막 안주하는 곳이다; 이 몸은 천국이 세워지는 기초이다. 다시 한번 진가를 인정해야만 하는 대목은 천국과 더불은 몸의 모든 상응은 주님의 ‘신성한 인간’ 때문이다는 점이다. 천국은 그분으로부터 있고 그분이 천국이시다. 이 대목은 왜 주님이 사람으로서 세상에 오셨는지를 설명해준다. 강림이 발생한 이유인즉, 주님이 오시기 이전 천국을 그곳의 질서대로 관리하셨던 ‘신성한 인간’이 더 이상은 천국을 보존하실 수 없었는데, 그 이유는 천국의 기초를 이루는 사람들이 (천국의)모형을 약화시키고 파괴했기 때문이다.

25. 천국은 자연의 모든 것과도 상응한다

자연계에 있는 모든 것은 영계의 어떤 것과 상응한다. 그 이유가 자연적인 것들은 그것들의 존재를 영적 원인들로부터 가지기 때문, 그리고 이 두 세계는 신성으로부터 유래한다. 땅 위 모든 것은 세 왕국들로 나뉘어 있다. 즉 동물, 식물, 광물 왕국이다. 각 왕국은 일반적으로 영계의 다른 수준에 상응한다. 그리고 각 왕국은 특수한 상응을 가지는 다양한 것들을 내포하고 있다. 한마디로, 자연의 모든 것, 큰 것부터 미미한 것까지, 상응 범주에 있다. 이에 대한 예증으로, 동물 왕국에 있는 사실을 들추어 보자. 이 왕국에는 본능적인 지식을 가진 많은 창조물들이 있다. 예를 들면, 벌은 어떻게 꿀을 수집하는지, 어떻게 꿀을 벌집에 저장하는지, 다가오는 겨울에 맞서 자신들과 어린 것들을 위해 양식을 어떻게 예비해야 하는지 알고 있다. 그것들은 자기들이 본능적으로 가지는 질서적인 모형 안에서 살고 있다.

식물 왕국에서도 씨를 가지고 예증을 해보자. 나무가 잎을 내고, 꽃을 피우고, 안에 새로운 씨가 든 열매를 산출한다. 이런 발달과정은 질서적인 연속성에서 일어난다. 이는 어떤 묘사도 불가능한 불가사이한 질서에서 다함께 발생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동물은 다양한 애착들에 상응한다. 즉 보다 온순하고 더 유용한 동물은 선한 애착들에, 맹렬한 동물은 악한 애착에 상응한다. 특수적으로, 암소나 송아지는 유용함과 더불어 행동하려는 사람의 마음에 있는 자연적 애착들에 상응한다. 한편 어린 양은 영적 애착에 상응한다. 여러 종류의 새들은 마음에 있는 생각의 수준들, 즉 자연적 생각들과 영적 생각들에 상응한다. 식물 왕국과 광물 왕국도 앞의 동물 왕국과 똑같다. 천국과 땅 사이의 연결은 상응을 수단으로 하여 있다. 이 상응은 다음의 방법에서 일한다; 주님의 왕국은 유용한 목적(useful purpose)으로부터의 왕국이다, 그래서 전체 우주는 이와 같은 방법에서 창조되었는바, 유용함이 있는 곳은 어디이든 그것을 창조함에서 주님의 목적이 충만해짐이 가능하도록 하는 모양으로 옷입혀질 수 있다. 이 원리는 천국에서 먼저 작동되고 그다음 창조된 세계에서 작동하는데, 자연 자체의 물질적 실체에 까지 내려간다.

영적인 것과 자연적인 것 사이, 또는 천국과 땅 사이의 상응은 유용함을 통하여 존재한다. 이 유용함 자체가 연결을 만든다. 이 유용함을 옷입히는 다양한 모양들이 상응들이다. 그리고 이 상응이 특수한 유용함의 모양에 까지 폭을 늘려 연결을 만든다.

죽음 그 이후

제1부
죽음, 그 이후

1. 영들의 세계

사후, 모든 사람은 어떤 장소-또는 상태-안으로 온다. 이곳을 영들의 세계라 부르는데, 이 세계는 천국도 지옥도 아닌 이 둘 사이 중간쯤에 있는 장소 또는 상태이다. 사람이 죽을 때, 그는 먼저 영들의 세계 안으로 오고, 그 다음 거기서 한동안 있다가, 천국으로 들어 올려지든지, 아래 지옥으로 끌어 당겨진다. 그 향방은 세상에서의 각자 삶의 품질에 달려 있다.

영들의 세계, 천국과 지옥 사이의 중간 장소이듯, 사후 사람은 중간 상태에 놓인다. 지옥은 아래에, 천국은 위에 있다. 사람이 영들의 세계에 있는 한, 그는 천국에 있는 것도, 지옥에 있는 것도 아직 아니다.

위와 같은 이유가 사람 안에 있는 천국은 그 사람 안에 있는 선인 것과 진리인 것이 하나로 됨, 그리고 지옥은 그 사람의 악인 것과 거짓인 것의 하나됨이기 때문이어서이다. 영이 된 사람 안에서 선인 것이 진리인 것과 충분하게 통합될 때면 언제든지, 그는 천국으로 가고, 악하고 거짓인 것이 충분히 통합될 때는 언제든지 그는 지옥으로 간다.

위 과정은 영들의 세계에서 거행되는 단일화의 과정인데, 그 이유는 이곳의 사람은 중간 상태에 있기 때문이다. 사람이 의지와 이해함이 분리된 채로 있는 한, 그는 이 중간 상태에 머물게 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런 식, 즉 진리인 것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음에도 이것에 대해 생각함은 얼마 만큼, 또는 아주 조금, 또는 아주 없거나 한다.

사람이 죽을 때 그를 천국에, 또는 지옥에 있도록 해주기 위해, 영들의 세계에 데려다가 그 사람 안에 있는 분리된 상태의 이해함과 의지의 마지막 화합이 성취되도록 한다. 그 이유가 천국과 지옥에서는 누구도 나뉜 마음, 즉 이렇게 생각하고 저렇게 행동하는 것은 허용되지 않기 때문이다. 오로지 모든 이는 자기의 의도하는 것들을 이해해야 하고, 자기가 이해하는 것만을 행해야 한다.

천국에서의 경우, 선을 행하기를 바래는 사람은 진리를 이해한다. 한편, 지옥에서의 경우, 악을 행하기를 의도하는 이들은 거짓을 이해한다. 고로 영들의 세계에서 거짓 생각과 사상들은 기본적으로 선한 이들로부터 제거되고 그들의 선과 하모니를 이루는 진정한 생각들로 대체된다. 이와 반대로, 진정한 생각들은 악한 사람들로부터 제거되고 그들의 악한 의도에 걸맞는 거짓 사상들로 대체된다.

영들의 세계에는 엄청난 숫자의 사람들이 있다.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모든 사람이 첫 번째 거쳐야 하는 장소이기 때문이다. 또한 이곳에서 모든 이는 매우 자세히 조사를 받고 천국이든 지옥이든 떠날 준비를 한다. 영들의 세계에서 보내는 시간은 고정되어 있지 않다. 어떤 사람은 단순히 들어가 거의 즉각적으로 천국, 또는 지옥으로 간다; 그런가 하면 어떤 이는 몇 주를, 어떤 이는 몇 년을 지체하나 그렇다고 30년을 넘지는 않는다. 머무는 시간의 길이는 그 사람의 생명의 안쪽과 바깥쪽 수준들 사이의 상응에 의존된다.

사람이 영들의 세계로 들어오면 즉각 주님께서는 그가 세상에 있었던 동안 자기를 이끌었던 사랑과 똑같은 사랑을 가진 공동체와 연결되도록 설비하신다. 악한 사람은 지옥에 있는 공동체들 중 어느 하나와 즉각 연결되고, 선한 사람은 천국의 공동체들 중 하나와 연결된다. 이런 식으로 그들이 구별된다 할지라도, 영들의 세계의 신입자는 자기가 만나기를 원하는 자와 누구든지 자유로이 섞일 수 있다. 즉 친구들, 친척들, 남편과 아내이든, 그가 원하면 언제든 만나고 이야기할 수 있다. 나는 여섯 아들을 가진 아버지를 보았다. 이 아버지는 그들 각각을 인식했다. 그러나 그들은 세상에서의 자기들 삶의 결과로 아주 다른 본성 속에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이내 헤어졌다. 영들의 세계로부터 천국이나 지옥으로 이동하는 사람은 자기와 사랑의 품질이 거의 갖지 않는 이상, 더 이상 서로를 보지도 못하고, 보아도 알아보지 못한다. 그들은 영들의 세계에서 서로를 볼 수 있다. 그 이유는 거기서 사람들은 세상에서 가졌던 상태와 같은 상태, 즉 자기의 상태가 이랬다 저랬다 했듯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후에, 모든 사람은 과거 자기를 가장 많이 이끈 사랑에 의해 영구적인 상태로 진입한다. 이 상태에서 서로를 인식하는 것은 서로 유사한 사랑을 지녔을 경우 뿐이다. 그 이유가 비슷한 것은 결합하고 비슷하지 않은 것은 분리되기 때문이다.

영들의 세계가 각 개인과 더불어 천국과 지옥 사이의 중간 상태에 있듯, 이 세계 위는 천국이고, 아래는 지옥이다. 지옥의 모든 공동체들은 영들의 세계로부터 닫혀있다. 그리고 오로지 구멍이나 바위의 갈라진 틈 같은 틈새 정도만 열려 있다. 물론 활짝 열릴 수도 있지만 이럴 경우는 대단한 감시가 동반되고 허락 없이 누구도 나올 수 없다. 이것 마저 대단히 특별한 때에만 적용된다. 천국 역시 영들의 세계로부터 모든 측면이 닫혀 있다. 천국으로의 비좁은 길 외에는 천국의 어떤 공동체로 가는 열린 출입구는 없다. 이 출입구 역시 감시가 철저하다.

영들의 세계는 산들과 절벽들 사이에 있는 계곡 같이 보인다. 여기 저기가 더 높고 더 낮고 하다. 천국의 공동체들로의 입구는 천국 들어갈 준비를 마친 사람에게만 보여진디. 영들의 세계로부터 각 천국 공동체로 가는 단 하나의 입구가 있고, 이 입구는 단 하나의 길로 이어지고 이 길은 몇 개의 더 좁은 길로 나뉘고 이 길은 가파르게 올라가야 한다.

지옥의 공동체들로의 출입구 역시 들어갈 준비를 완료한 자 외에는 볼 수 없다. 입구가 열릴 때 사람은 어둡고, 검댕이로 휘감은 동굴을 볼 수 있는데, 이 동굴은 깊이 아래로 빠져들게 인도한다. 거기에 다시 많은 문들이 있다. 구역질나는 냄새가 이 동굴로부터 휩쓸리듯 밖으로 밀려 뿜어나온다. 선한 영들은 도망했는데, 그 이유는 그들이 구토를 일으켰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악령들은 걸신들린듯 이 냄새에 끙끙거린다. 그 이유는 그들이 이 냄새에서 쾌감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각 악령은 과거 세상에 있었을 때 자기 고유의 악한 품질에서 즐거움을 발견했듯이, 사후에도 그는 자기 악과 상응하는 특별한 악취에 즐거워한다. 언제인가 나는 어떤 사람이 천국의 숨(breath)이 자기에게 도달하자 크게 외쳐 통곡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는데, 그에게 지옥의 숨이 도착하자 조용해지고 행복해 하고 있었다.

각 사람은 자기 안에 두 출입구를 가지고 있다-하나는 지옥을 향해 열리고 거기로부터 악과 거짓된 영향력이 온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천국을 향해 열리고 거기로부터 선하고 참돤 영향력이 온다. 지옥 문은 악한 어떤 것에 빠져있고 거짓 사상에 몰입된 사람들 안에서 열려진다. 천국으로부터의 빛은 위쪽 갈라진 틈새를 통해 들어 올 수 있고 이 사람들이 논리적으로 생각하고 말하는 것을 가능하게 하고 있다. 한편 천국 문은 선한 것과 참된 사상에 깊이 몰두한 사람에게 열리어 있다. 사람에게 합리적 마음으로 인도하는 두 길이 있다-더 높은 길, 또는 내향의 길, 이 길을 수단으로 선하고 참된 것이 주님으로부터 흐른다; 그리고 더 낮은 길, 또는 외향의 길, 이를 수단으로 악하고 거짓인 것이 지옥으로부터 기어오를 수 있다. 사람의 합리적 마음은 위 두 길을 인도하는 중심이다. 그러므로 사람은 자기 마음 안으로 놓여지게 허락하는 천국의 빛의 양에 비례하여 합리적이다.

이 빛이 안에 있도록 허락하지 않는 만큼 그의 합리성은 시드는데, 설사 그가 자신을 보건대 합리적인듯 여겨질지라도 그렇지 않다.

위 모든 것은 사람과 천국과 지옥의 상응을 보여주기 위하여 여기서 언급되어진 것이다. 합리적 마음이 형성될 때, 이 마음은 영들의 세계 자체, 즉 이 세계 위에 천국이, 이 세계 아래 지옥이 있는 영들의 세계와 상응한다. 천국 입장이 준비된 이들은 그의 합리적 마음은 위쪽은 열리고 아래쪽으로는 닫혀 있다. 그 반면, 지옥을 위해 준비를 마친 이들은 아래쪽으로는 열리고 위쪽으로는 닫힌 합리적 마음을 가지고 있다. 그 다음 아래쪽만을 쳐다볼 수 있는 이들은 지옥을 향하고, 위쪽만을 보는 사람은 천국을 향한다.

위를 쳐다봄은 주님을 찾고 있음을 뜻한다. 그의 중심은 모든 천국이 쳐다보는 중심이기도 하다. 아래를 쳐다봄은 지옥에 초점을 두는 반대편 중심을 향하여 주님으로부터 돌아섬을 뜻한다. 전체 지옥이 주님으로부터 얼굴을 돌린다.

2. 모든 사람 각각은 영이다

사람의 불멸하는 혼(soul)은 그가 생각하고 살고 있는 그의 부분, 즉 그의 영(spirit)이다. 몸은 사람이 자연 안에서, 물질 세계에서 유용한 삶을 이끌 수 있는 수단이고 영에 비해 부속품에 불과하다. 영이 실제로 사람 자신이다. 그런 이유는, 사람의 몸이 그의 영으로부터 분리될 때, 소위 그가 죽을 때, 여전히 그는 사람이고 살아 있다. 내가 천국으로부터 들은 바, 죽은 누군가가 소생하기 이전 차디찬 몸 안에서, 두꺼운 관 안에서 있는 동안에도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신체의 아주 미세한 부분도 움직일 수 없다는 점을 빼고는 자신이 살아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영이 사람 자신인 바, 뒤따르는 명제는 사람의 영은 그의 몸이 인간 모양으로 있는 것과 똑같은 모양이다는 것이다. 그래서 영이 몸 안에 있었을 때 만큼이나 같게 그의 몸으로부터 분리되어도 감각들을 즐긴다. 이것은 사람이 행동하는 수단-주체 또는 본체, 즉 이로부터 뭔가의 진행이 있고, 이 안에서 뭔가가 발생하는 본체 없이 어떤 것을 생각하거나 뜻할 수 없다는 사실로부터 알 수 있다. 본체 없이 존재한다고 생각되어진 어떤 것에는 현실성이 없다. 시각 기관 없이 본다는 것은 없다. 청각 기관 없이 듣는다는 것은 없다. 생각의 경우도 시력이나 청력의 이치와 똑같다; 생각이 본체-기관 형체-안에서 그리고 그로부터 발생하지 않으면 생각도 전혀 발생할 수 없다.

이것이 왜 영들이 몸에서 해방된 후에도 사람과 완전 똑같이 보고, 듣고, 느끼는지에 대한 이유이다; 이는 자연계가 아니라 영계에서 그렇다는 말이다. 영이 육체 안에서 가졌던 자연적 감각들은 영에 추가되었던 물질 부분으로부터 왔다; 그러나 그때 조차에서도 영은 영적으로 생각하고 뜻하는 것을 느꼈고 감지했다.

두 상황이 여기서 보태질 수 있는데, 이는 내적 수준에 관련된 사람이 영이다는 것, 그리고 이 영은 실질의 몸의 형체 안에 있다는 점이다.

모든 사람은, 그가 몸 안에서 사는 동안, 그의 고유의 영이 관심이 있는 영들의 공동체 안에 있다. 설사 그가 이 사실을 눈치못챈다 해도 그러하다. 선한 사람은 천사의 공동체 안에, 악한 사람은 지옥의 공동체 안에 있다. 그리고 각 사람은 그가 죽을 때 예전에 있어 왔던 공동체에 들어간다. 어쨌든 그는 세상에서 사는 동안 이 공동체를 볼 수 없다. 그 이유는 자연계에 사는 동안은 자연적 수준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람이 육체로부터 물러나 영 안에 있는 방식에서 생각할 때, 그는 때로 자기의 공동체에서 나타난다. 그리고 그가 보여질 때, 그는 거기 있는 영들과는 쉽게 구별된다. 그 이유는 그는 조용한 묵상과 생각만을 열심히 하고, 그 외 두리번 거리는 것도 없고, 굳이 자기를 보이려하지 않기 때문이다. 어떤 영이 그에게 말을 걸면 즉시 그는 사라진다.

몸으로부터 물러난 경우의 또다른 예는 이러하다. 사람이 잠자는 상태와 깨어있는 중간 상태로 데려다 놓인다. 그리고 그가 그 상태 안에 있을 때, 그는 완전히 깨어 있다고 자신을 간주한다. 그가 충분히 깨어있을 때, 모든 감각-시력, 청력 등등-은 방심하지 않는다. 게다가 촉각은 정상적 몸이 깨어 있을 때 보다 더 예민하다. 이 상태에서, 천사들과 영들은 확실하게 보여지고 듣고 만지기 조차 가능하다. 이 상태에서 육체의 몸이 간섭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이것이 ‘몸 밖으로 나감’이라 부르고, 이때 그는 자기가 몸 안에 있는지, 몸 밖으로 나갔는지 알지 못한다.

3. 사후 사람은 어떻게 깨어나 영원한 삶에 들어가는가?

육체의 몸이 자연계에서 더 이상 기능을 발휘하지 못 할 때, 사람은 죽는다. 죽을 때, 심장과 폐의 움직임은 멈춘다. 그럼에도 사람은 죽지 않는다. 단순히 그는 세상에서 자기를 섬겼던 몸으로부터 분리되는 것 뿐이다. 사람 자신은 계속 살아있다. 그가 영이기 때문이다. 그는 단순히 이 세계로부터 저 세계로 건너갈 뿐이다. 성경에 등장하는 단어 ‘죽음’은 내적 의미에서는 실제로 부활과 삶의 계속을 염두해서 사용되는 단어이다.

호흡함과 심장 박동은 영과 매우 친밀한 관계이다. 즉 생각은 호흡함과, 느낌은 심장 박동에 관련된다. 따라서 이 두 기관의 움직임들이 몸에서 일하는 것을 멈출 때, 영의 즉각적 분리가 있게 된다. 다시 말해 이 둘은 실제로 묶여 있는 상태이나 이것이 깨질 때 몸의 영이 떠나는 셈이다. 몸의 영이 박탈된 그 몸은 차거워지고 부패하기 시작한다.

이 분리 후, 사람의 영은 한 동안 그의 몸 안에 있기를 계속한다. 그러나 오직 심장의 박동이 마지막 뛸 때까지 이다. 이것은 죽음을 일으킨 아픔에 따라 다양해진다. 심장이 멈추는 순간, 사람은 깨어나진다. 그러나 이것은 주님 만에 의해 행해질 뿐이다. 여기서 말한 깨어남은 영이 몸으로부터 영계 안으로 끌어 당겨짐을 뜻한다. 흔히 이를 두고 ‘부활’이라 말한다.

나 자신에게 위의 깨어남을 경험해보도록 허락되었었기에 지금 그것이 어떻게 일어나는가를 기술하는 것을 가능케 한다.

나는 내 육체의 감각들이 염려되어질 정도 만큼에서 무의식 상태 안으로 데려가졌다. 그래서 나는 흡사 죽은 사람 같았다. 그럼에도 나의 모든 내적 감각들은 손상받지 않은채 남아 있어 나는 모든 것- 사후 사람들이 깨어나질 때 사람들에게 일어나는 것들을 볼 수 있고 기억할 수 있었다.

내가 주목한 것은 내 호흡함이 거의 작동하지 않았다는 것, 그러나 영은 더 내향의 호흡함을 계속했다는 것, 이것이 미약하나마 몸의 호흡함과 연결되어져 있는 것이다. 이후, 내 심장 박동과 천적 왕국이 왕래하는 관계가 형성되어 졌다. 그 이유는 이 왕국은 심장과 상응하기 때문이다. 나는 나와 더불어 있는 이 왕국으로부터의 천사들을 보았다; 어떤 천사는 나와 거리를 두고 있었고, 두 천사가 내 머리에 앉아 있었다. 그러자 애착으로부터의 내 고유의 느낌은 제거되었다. 그럼에도 내 생각과 지각은 계속되었다. 나는 몇 시간을 이런 상태에 있었다.

그때, 내 주위에 있었던 영들이 내가 죽었다고 말하며 떠났다. 거기에는 흡사 방부처리된 몸에서 나는 냄새 같은 것, 약간은 상쾌한 냄새가 맴돌았다. 천적 천사들이 현존할 때, 시체와 더불어 행해지는 모든 것들은 방향성 있는 어떤 것으로 지각되어진다. 이는 영들이 이 향내를 지각할 때 그들의 접근을 막아준다. 이것은 사람이 깨어나질 때, 사람의 영으로부터 악령을 멀리 있게 하는 방법도 된다.

내 머리 옆에 있었던 천사들은 침묵했다. 오직 그들의 생각들과 내 생각들 사이에만 소통함이 있었다. 이런 생각들이 죽어가고 있는 사람에 의해 받아질 때, 그때 천사들은 사람의 영이 이제야 몸을 떠나 인도될 상태에 있다는 것을 안다. 그들의 생각들이 소통하는 동안, 천사들은 내 얼굴을 쳐다보았다. 이것은 천국에서 생각을 교통함(주고 받음)이 거행되는 방식이기도 하다.

나 역시 감지한 것은 천사들이 내가 생각하고 있는 것을 발견하려고, 그리고 나의 생각이 죽는 사람이 대체로 가지는 영원한 삶의 생각과 같은지 여부를 보려고 애쓰고 있었다는 것이다. 나는 그들이 죽는 사람이 가지는 생각을 내가 간직하기를 원했다는 것도 감지했다. 후에, 내게 말해진 바, 사람의 영은 몸이 죽을 때 가진 마지막 생각 안에 간직되고, 이는 그가 세상에 있는 동안 자신을 가장 강하게 이끌었던 사랑으로부터 오는 생각들로 되돌아 갈 때 까지이다. 특별하게 내가 느껴보도록 허락된 것은, 내 마음 -즉 내 영-안으로부터 나오는 끌어 당김이었다. 내게 말해진 바, 이것은 주님에 의해 행해진다는 것, 이것이 부활의 실제적 근원이다는 것이다.

천적 천사들은 사람이 깨어날 때, 언제나 현존한다. 그들은 사람을 떠나지 않는데, 그 이유는 그들이 모든 이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이 이 사랑스러운 천사와 있는 것이 부담스러워 더 이상 버티지 못할 경우, 그는 이 천사가 떠나주기를 원한다. 이것이 발생할 때, 영적 왕국으로부터 천사가 그에게 빛을 주기 위해 가까이 온다. 이 단계 까지를 그는 볼 수는 없고 단지 생각하는 것만 가능하다. 이 바꿈이 발생할 때, 사람은 그의 왼쪽 눈으로부터 코 쪽을 향하여 한 꺼풀이 둘둘 말아져 내려 왔음을 느낀다. 이리하여 눈은 열리고 볼 수 있다. 이것이 실제로 당사자에게 발생하고 있는 듯 사람에게 나타난다. 이것이 행해질 때, 어떤 것은 빛나나, 안개같은 것이 보여지는데, 어쩌면 그가 처음 깨어날 때, 반쯤 감겨진 눈꺼풀을 통해 보는 것 같다고 말하는 편이 나을듯 싶다. 이후 나는 내 얼굴이 부드럽게 벗겨지는 것을 느꼈다. 이것은 더 영적인 방법으로 생각하는 쪽으로 인도했다. 이런 벗겨짐은 나로 하여금 사람이 자연적 생각함으로부터 영적 생각함 안으로 오는 것을 보여 주는 것, 그리고 사람의 마음 안에서 어떤 생각이 사랑을 동반하지 않고 튀어 나오는 것을 천사들은 매우 크게 걱정하여 이를 예방해준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그들은 이제 그가 영이다는 것을 그 사람에게 말한다.

지금 사람이 볼 수 있는 것은, 영적 천사가 새롭게 깨어나는 사람에게 할 수 있는 모든 도움- 즉 영계에 관하여 그리고 거기 있는 것들에 관하여, 그러나 그가 이해할 수 있는 한도에서 그에게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만일 그가 말해지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면, 사람은 이 천사가 자기로부터 떠나가기를 갈망할 것이다. 그러나 떠나는 것은 천사가 아니다; 오히려 사람이 그 천사들로부터 자신을 분리한다. 그 이유가 모든 천사들은 사랑만을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특수한 예에서, 이 천사들은 도와 주기를 사랑하고, 가르쳐 인도해 천국으로 이끌기를 사랑한다.

사람이 이런 천사들로부터 이동할 때, 그는 선한 영들에 의해 받아들여지고, 이 영들은 그가 이들과 더불어 있는 한 그를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해준다. 그러나 만일 이 세상에서의 그의 삶이 선한 영과 친구 관계를 갖는 것이 불가능한 종류의 삶이었다면, 그는 선한 영들로부터 멀어지기를 갈망한다. 이런 모형은 필요하다면 더 오래, 더 자주 발생하는데, 이는 그 사람이 세상에서 살았던 삶의 종류와 걸맞는 영이 등장할 때까지 이다. 그런다음 놀라웁게도 그는 세상에서 자기를 이끌었던 같은 종류의 삶으로 인도된다.

이런 입문적 국면은 며칠 정도만 지속될 뿐이다. 후에, 그는 자기영의 진정한 본성을 밝히 알게하기 위해 이 상태로부터 저 상태로 인도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는 천국 또는 지옥으로 간다. 위 모든 것은 모든 이를 위한 아주 일반적인 과정을 대단히 짧게 기술한 것이다. 어떤 사람은 사후 자기가 살아 있다는 것을 발견함으로 해서 완전 당혹해 한다. 이런 사건은 세상에 사는 동안 사후의 혼에는 어떤 생명도 없다고 믿었던 이들이 맞는 사건이다. 이와 같은 부류의 사람들은 사후 자기와 의견을 같이하는 사람들과 친구한다. 그들은 생명이 있다고 믿는 이들과는 분리되어진다. 일반적으로 말하면, 이 사람들은 지옥의 어떤 공동체와 연결 고리를 형성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그들은 교회가 가르치는 것을 경멸하고 신성한 것을 부인하는 일을 자주 했기 때문이다.

4. 사후에도 사람은 완전한 사람 모양 안에 있다

모든 영 각각은 인간의 모양이다. 이 모양을 또다른 방식으로 놓으려 해도, 각 영은 사람으로서 나타난다. 이런 까닭은 사람이 사람인 것은 그의 몸 때문이 아닌 영 때문에서이다. 이 문제는 이미 거론 했었다.

사후 사람이 영들의 세계로 먼저 들어갈 때, 그의 얼굴과 음성은 그가 세상에 있었던 동안 지녔던 것과 아주 비슷하다. 이런 이유는 그의 삶은 보다 더 외적 상태에 있고, 그의 내향의 수준들은 아직 열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상태는 사람이 죽은 후 가지는 첫 번째 상태이다. 그 후에, 얼굴은 바뀌기 시작하고 아주 다르게 되어간다. 그리하여 그가 세상에 사는 동안 무엇보다 우선시 하여 자기를 이끈 사랑, 자기 영이 몸 안에 있는 동안 그 영을 먼저 차지했던 사랑으로부터 오는 외관을 입는다. 이 사랑이 진짜 사람이다. 사람의 영의 얼굴은 그의 몸의 얼굴과는 딴판이다. 그의 육체의 얼굴은 부모로부터 이다. 반면 그의 영의 얼굴은 그가 사랑한 것으로부터 이다. 그리고 이 사랑은 영적 형상 안에 있다. 사후 바깥쪽 모양새들이 시들어질 때, 동시에 사람의 내면의 생명이 열려질 때 발생하는 바는, 영은 그가 안쪽에서 사랑하는 것은 바깥쪽에서도 닮아진다는 것이다. 나는 세상으로부터 방금 도착한 사람을 보았다. 그리고 나는 그들의 얼굴과 음성을 수단으로 그들을 인식했다. 그러나 후에 내가 그들을 보았을 때, 나는 그들을 인식하지 못했다.

얼굴이 바뀌는 또 다른 이유는 이렇다. 사후 삶에서는 자기들이 가지지 않은 애착으로 겉을 꾸미는 것이 허용되지 않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위선은 있을 수 없다는 말이다. 위선자의 얼굴이 바뀌려면 더 많은 시간이 걸려야 하는데, 그 이유는 그들이 세상에서 선하게 나타나도록 오래 있었던 만큼이나, 그들의 삶은 선한 애착들의 사본 같이 보이게 하기 위하여 오래 연습해왔기 때문이다. 결과로 그들은 한동안 아주 매력적인냥 보여지나, 그런체하는 것을 고수하는 그들의 능력은 그들로부터 점진적으로 거두어지고, 그들 내면의 수준은 그들이 사랑한 것들을 입는다. 그 후에, 그들은 여느 타인 보다 더 일그러지기 까지 한다.

사람이 신성한 것을 더 내향적으로 사랑해왔고, 그의 생애 동안 그것들에 의해 살았다면, 사후 그는 더 아름다워진다. 이런 이유는 사후 모든 이의 내면의 수준은 열리되, 그들의 사랑과 생명의 품질에 의거 모양을 갖추기 때문이다. 그 결과로, 내향의 애착이 더 많으면, 그는 천국의 형태를 더 갖춘다. 그래서 그의 얼굴은 더 아름답다. 사실상,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하고 참된 모든 것, 천국을 만드는 모든 것은 인간의 모양 안에 있다. 이것은 일반적 차원에서 뿐 아니라 아주 미세한 부분, 아주 상세한 측면에서 그러하다. 이 모양은 천국에 있는 모든 이로 인간의 모양 안에 있게 하는 원인이다. 또한 주님이 받아지는 방법을 반영(mirror)하는 것이기도 하다.

5. 사후에도 모든 감각, 기억, 생각, 애착은 존재한다.

사람이 죽을 때, 그는 육체의 몸을 빼고는 그와 더불어 있는 자신 속의 모든 것을 영계 안으로 운반한다. 그때 그는 자기의 자연적 몸과 다르다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는 영적 몸을 가진다. 이 몸은 자연적 요소가 아닌 영적 본질들로 구성되어 있다. 더 나아가, 영적인 어떤 것을 만질 때, 영적 어떤 것을 볼 때, 이는 자연적 어떤 것을 보고 만질 때와 똑같다. 그래서 사람은 영이 되었을 때, 그는 자기가 세상에서 가졌던 몸 안에 있지 않다라고 말할 수 없다. 거듭 말해, 그는 자기가 죽었다는 것을 모른다는 말이다.

영이 된 사람들은 그들이 세상에 있는 동안 가졌던 모든 감각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본다, 그들은 듣는다, 그들은 말한다, 그들은 냄새 맡고 맛을 볼 수 있다; 그들은 만짐으로부터 있는 압력 조차 느낄 수 있다. 이에 더하여, 이전에 가졌던 것들, 즉 갈망함, 생각들, 되새겨봄, 애착들과 느낌들, 사랑들, 노력함들, 의도함들을 가지고 있다. 학문과 연구를 즐겼던 사람들은 전과 같이 읽고 쓸 수 있다. 한마디로, 사람이 이쪽 삶에서 저쪽 삶으로 건너갈 때, 이는 마치 이 장소에서 저 장소로 간 것과 같고, 건너 갈 때 자신의 권리로 행동했었던 모든 것도 가져 가는 것이다.

그는 자기와 더불은 세상적인 것들의 기억-그가 보았고, 들었고 읽었고, 배웠던 것들, 또는 그의 유아 시절로부터 생애 마지막 순간까지 세웠던 생각들까지 가져간다. 그러나 그의 기억 안에 있는 위의 세상적인 것들은 영적 환경에서는 재생산되어질 수 없기 때문에, 그것들은 마치 우리가 기억 안의 것을 생각하지 않을 경우 그대로 기억 안에 있듯 일종의 휴식 상태가 되어 있다. 그러나 주님이 원하시면 그것들은 마음에 되돌아 올 수는 있다.

오로지 육체의 감각만으로 자신을 통치했던 사람들은 사후 사람의 삶이 위 같다는 것을 전혀 믿을 수 없다. 그 이유는 그는 어떻게 그렇게 있을 수 있는지를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영적인 것들에 관하여 생각할 때 조차도 자연의 용어 안에서만 생각할 뿐이다. 손으로 만져서 느낄 수 있는 것 외에는 어떤 것도 그들을 위해서 존재가 가능할 수 없다.

그들이 영적 세계에서 가지는 영적 감각들은 이 세상의 감각들 보다 더 예민하고 정밀하다. 천국에 있는 이들은 그들이 이 세상에 있었을 때 보다 더 뚜렷하게 보고, 듣고 더 슬기롭게 생각한다. 이제 그들은 천국의 빛으로 보고, 많은 등차를 수단으로 세상의 것을 훨씬 능가하는 영적 대기를 통하여 듣는다. 이 차이는 수정 같은 맑은 것과 구름으로 덮인 것의 차이 같다. 신성한 진리가 천국의 빛이고 이것이 천사들에게 아주 세세한 세부사항을 볼 능력을 준다. 이에 더하여, 천사들의 시력은 그들의 이해력과 완전히 일치한다. 그들의 듣고 지각함은 하나로서 행동하는 바, 연설자의 음성의 소리와 똑같게 그의 애착과 생각을 알 능력을 주고 있다.

한편, 지옥에 있는 이들의 감각들은 불완전하다. 그리고 악령은 그의 악한 행동들을 보여줄 수 있다. 그 이유는 그들도 그의 기억으로부터 끌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간음, 도둑, 뇌물주는 것, 부패한 짓 등이 발생했던 그때와 같은 상세함으로 열려 보여진다; 이런만큼, 악한 사건에 시치미떼는 일은 가능치 않다. 이 모든 것은 주님 자신이 말하셨던 다음 구절 안에서 준수되고 있다; 즉 “폭로되지 않을 감추인 것은 아무 것도 없고, 알아보지 못 할 숨겨진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너는 어두움 안에서 말해진 것을 빛 안에서 들을 것이고, 너는 귀에 대고 말해진 것을 지붕에서 선포할 것이다.” (누가 12:2,3)

사후 사람의 행동들이 그에게 보여질 때, 이 정보를 꺼낼 책임을 가진 천사들은 그의 얼굴을 쳐다본다. 그 다음 이 검사는 몸 전체에서 보여질 때까지 그의 온 몸을 통해 모두 퍼진다. 이와 같은 일이 발생하는 까닭은 기억 속의 것들이 뇌 안에 씌였을 뿐 아니라 사람 전체에 씌여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이 생각했던 것, 하기를 원했던 것, 말한 것, 행동된 것은 파괴되어질 수 없다. 그 이유는 그것들이 그의 영에 적혔기 때문이다.

사람의 세상적 기억이 영적 세계 안으로 운반되었다 해서, 자연적 요소들 자체가 다시 저쪽 삶으로 가져다 놓아 지는 것은 아니다. 각자의 장소에서 영적인 물건들이 상응을 수단으로 자연적 물건들과 연결되어져 보여진다. 이렇게 보여질 때, 그것들은 자연적 요소들 만큼 똑같은 모양을 가지고 나타난다. 이런 이유는 영적 세계에 있는 보일 수 있는 모든 것들은 그것이 영적일지라도 자연적으로부터 있는 어떤 것 같이 보이기 때문이다.

만일 사람이 자료와 사실에 입각한 지식들에 의하여 자기 마음을 발달 시켰다면, 그러고서 그가 영적 세계, 즉 모든 이가 외적 지식들로부터가 아닌 자기들의 애착들로부터 이야기 하는 곳으로 올 때, 이런 사람들은 단순하거나 어리석은 자 같이 나타난다. 그가 긁어 모았던 것은 더 이상 표출될 수 없다. 그 이유는 그런 것은 세상에 속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사람이 세상에서 자료와 언어를 수단으로 그의 마음을 발달 시킨 만큼에서 합리적이지, 고도로 숙달시킨 그의 자료와 언어 만큼에서가 아닌, 그것을 수단으로 그의 마음을 발달 시켰던 만큼에서 합리적 사람이 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6. 사후 사람의 품질은 세상에서 가졌던 품질과 똑같다

성경에서, 사람은 자기 삶 동안의 행동들에 따라 판결받아질 것이고 보상받아질 것이다고 자주 말해진다. 진실된 방식으로 생각하고 착하게 사는 자는 천국에 갈 것이고, 사악하게 산 자는 지옥에 간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다. 그럼에도 악한 사람은 사후 자기의 상황이 세상에서의 자기 자신의 삶에 의존된다는 것을 기꺼이 믿으려하지 않는다. 그는 천국 입장은 자비로부터서만 증여 받는다고 생각하고 생활로부터 분리된 신앙에 기대는데 어떠한 거리낌도 느끼지 않는다.

반드시 알아야만 하는 것은, 사람의 품성은 그의 행동들 내에 포함되어 있다는 것, 그의 내적 태도는 그가 행하는 것에 일치되지 않으면 진짜로서 만들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런 행동들은 사람의 바깥쪽 삶이고 그의 내적 삶의 품질은 바깥쪽 삶을 통하여 표현되어진다. 그럼에도 행동들은 그것들이 바깥쪽으로 표출하는 방법 만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들은 사람 내부에 있는 방법을 뜻한다. 모든 이가 실감하는 것은, 모든 행동들은 사람의 의도와 생각으로부터 튀어나온다는 것이다. 행동이 이 근원으로부터 오지 않으면, 행동은 기계 같은 단지 움직임 일 것이다. 고로, 행동은 내적 원인으로부터 오는 결과이다.

이것은 우리로 사후 사람이 들어가는 삶에 의해 의미되는 것을 보게 해준다. 이것은 그의 사랑, 잠재성 안에 있는 사랑 뿐아니라 행동 안에 있는 사랑에 기초된 삶, 즉 그가 행동한 것들인데, 그 이유는 행동 안에 그가 사랑하는 것, 그가 믿는 것의 모든 요소들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각 사람은 ‘통치하는 사랑’-각 사람을 지배하는 사랑-이라 불리는 것을 가지고 있다. 사후 그는 이 사랑을 간직하고 영원히 바뀌지도 않는다. 모든 사람은 서로 다른 꽤 많은 사랑들을 가지고 있으나 이것들을 거꾸로 추적해보면 결국 그 뿌리는 통치하는 사랑이고 이 사랑과 하나를 만들고, 함께 어우러져 삶을 구성하고 있다. 이 사랑의 어떤 것은 그것의 본성상 더 바깥쪽이고, 또 어떤 것은 더 안쪽이다; 어떤 것은 보다 가까이 있고, 다른 어떤 것은 멀리 있다. 그러나 이 사랑들 모두는 한 사람 안에서 어떤 종류의 왕국을 만들고 있다. 그리고 사람이 이것을 눈치채지 못할지라도 뚜렷한 질서에서 정리 정돈되어 있다. 그러나 전부는 아니겠지만 일부는 당사자도 알게 된다. 그 이유는 사람이 자기 주위의 삶의 영역을 확장하는 방식은 자기 내부에 있는 통치하는 사랑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사후에는, 그가 사랑했던 것이 그 사람이다. 죽음 자체는 사람의 통치하는 사랑과 일치하지 않는 모든 것의 제거를 야기한다. 만일 사람이 기본적으로 선하다면, 이런 그의 기본적 품성에 적절치 않은 어떤 부분은 제거되어진다. 또는 어디론가 실려가버리는 듯 된다. 이 방식으로 그는 자신의 사랑 안으로 놓여진다. 이런 일은 악한 사람에게도 발생하는데, 악한 사람의 경우, 그가 알고있는 진정한 생각들은 제거되거나 운반되어진다. 마침내 각 사람은 자기 고유의 사랑으로 되어가고, 한번 이것이 발생된 이상, 사람은 자기 사랑 쪽으로 자기 얼굴을 돌려서, 그가 어느 방향으로 틀든지 그 사랑이 자기 눈 앞에 있게된다.

모든 영은 그가 자기의 통치하는 사랑을 간직하는 한 어느 곳으로도 인도될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은 어떤 일이 발생한 것을 알고 그것에 저항해야겠다고 생각한다 해도 저항할 수 없다. 어떤 영은 저항하려고 자기의 통치하는 사랑에 반대되는 행동을 해보려 노력하지만 언제나 헛수고로 끝난다. 이런 이유는 그들의 사랑은 그들이 끌어 당길 수 있는 그들을 둘러싸고 있는 사슬이나 밧줄과 같다. 이로부터 그들은 자신들을 자유롭게 할 수 없다.

세상에 있는 사람들 조차도 똑같다; 그들 고유의 사랑이 그들을 이끈다. 그리고 그들은 자기 고유의 사랑을 수단으로 타인도 이끈다. 서로 각자 다른 삶에서 보여지는 모든 모양들은 사람의 영이 그의 통치하는 사랑이다는 이 사실이 진리임을 보여준다. 그곳에서는 누군가가 어떤 사람의 사랑을 간직하면서 어떤 것에 관하여 이야기 하거나 행동을 할 때, 그 사람은 생기가 있고 기쁜 얼굴을 지닌 모습이 거기서 눈에 보여진다. 그러나 누군가가 자기의 통치하는 사랑에 반대되어지도록 하는 대화가 있기만 해도 그 사람의 얼굴은 변하기 시작하고 일그러져 불분명해진다. 결국 그 사람은 마치 거기 있지 않았던듯 사라지고 만다.

이러한 몇 요점들이 이 통치하는 사랑의 중요성을 보여주는데 보탬이 될런지 모른다. 사람이 영원히 있게되는 방식은 그의 통치하는 사랑이 관련되는 한도 까지에서 이다. 사람은 만일 그가 지닌 신앙, 믿음이 천국의 사랑으로부터 생겨지지 않으면 그것을 간직할 수 없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존속하는 사랑은 행동 안에 있는 사랑이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이 사랑이 그 사람 자신의 생명이기 때문이다.

7. 사후 사람의 삶의 즐거움은 그것에 상응하는 것들로 바뀐다

사람이 즐거웁다 하는 모든 것들은 그의 통치하는 사랑으로부터 온다. 그 이유는 사람은 그가 사랑하는 것들, 특히 무엇보다 중요시하여 사랑하는 것에서만 즐거움을 취하기 때문이다. 즐거움을 가져오는 모든 것을 거꾸로 추적해보면, 천국에 있는 사람의 통치하는 사랑은 주님을 사랑함이고, 지옥의 경우는 자아를 사랑함이다.

사람의 자연적 즐거움이 사후 그의 영적 대응물로 어떻게 바뀌는지를 보기 위하여서는 상응에 관한 지식이 요구되어진다. 상응(학문)이 기본적으로 가르치는바는, 자연적인 것은 그것에 상응하는 영적인 것 없이 존재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이다. 특별히 상응 학문은 상응하는 그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이 어떤 종류의 것에 속하는지를 가르쳐준다. 고로, 이를 알아챈 사람은 만일 자기가 자기의 사랑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면 사후 자신의 상태가 무엇 같을 것일지를 가늠할 수 있다. 악한 사람들은 이런 것을 보도록 준비되지 않는다. 설사 그들이 준비되었다 해도, 그들은 그것을 수용하기를 거절할 것이다. 그러나 천국의 사랑 안에 있는 사람은 가르쳐질 수 있다. 그들은 자기들이 태어나면서 지닌 악해지려는 경향성들을 보게끔 준비되어진다. 그들은 이런 모든 것을 진정한 것을 기초로 하여 보고 있다. 그 이유는 사실상 진리가 악한 것을 들추어 보이기 때문이다.

상응 지식의 기초 위에서라면, 사람의 삶의 즐거움들이 사후 그것들에 상응하는 것들로 어떻게 바뀌는지를 아는 것도 완전 가능하다. 이에 대해 몇 예증들을 열거해 보겠다.

악한 사랑들과 거짓 사상들 안에서 즐거움을 발견해왔던 사람들은 천국의 시야로부터 멀리 도망한다. 그들은 동굴이나, 바위 틈의 열린 곳 안으로 허둥지둥 급히 들어가고 거기 숨는다. 이런 동굴이나 열린 곳은 거짓 사상들이나 악한 바램들과 상응한다, 그리고 이 사람들은 자기들이 노골적으로 매우 불유쾌한 여건에서 살고 있는데도 거기서 즐거움을 발견한다. 비밀스런 사람들은 서로를 볼수도 없는 캄캄한 방의 한구석에서 서로의 귀에 대고 속삭이는 것을 즐긴다. 영리함을 나타내려고 정보를 수집하기를 사랑했던 사람들의 경우, 그들은 모래가 많은 장소를 들판이나 정원보다 더 선호한다. 정작 자기의 삶에는 제대로 응용하지도 못하는 종교적인 가르침이나 교리에서 즐거움을 만끽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을 위해 바위투성이의 장소를 선택한다. 그리고 둥근 돌들 더미 사이에서 사는 것을 즐긴다. 위와 같은 것 내지 여타 다른 것도 악한 사람들이 사후 영적 세계 안으로 입장할 때 그들이 가진 즐거움에 상응하는 것들이다.

이와 대조적으로, 세상에서 천국적인 종류의 사랑 안에서 살았던 사람들의 즐거움은 천국에서 그것에 상응하는 것들로 바뀐다. 그들은 드높게 자리잡은 장소에서 살고, 그들의 눈 앞에는, 들판과 작물들과 포도원들이 봄철 기후 아래 있다. 어떤 이는 귀중한 돌들로 만든듯 보이는 집에서, 또는 아름답게 잘 가꾼 정원 있는 집에서, 또는 모든 것이 웃고 있는 듯, 들떠서 떠드는 듯 여겨지는 장소에서, 또는 투명한 곳에서, 또는 매우 넓게 열려진 장소에서, 등등 같은 곳에서 살고 있다. 위의 예는 자기의 사랑이 천국의 사랑인 사람들의 즐거움에 대한 몇가지 예에 불과할 뿐이다.

이상으로부터, 모든 사람의 즐거움들은 사후 그것들에 상응하는 것들로 바뀌었다는 것, 그리고 똑같은 사랑이 영원히 지속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결혼적 사랑, 공정을 사랑함, 정직, 선량함, 진리, 지식과 지각을 사랑함, 지혜와 이해함을 사랑함, 등등의 사랑은 천국의 사랑 범주이다. 이런 사랑들로부터 흐르는 것들은 물의 원천으로부터 형성된 시내와 같다.

8. 사후 사람의 첫 번째 상태

사람은 죽은 후 그가 천국이나 지옥을 들어가기 전 세 가지 상태를 통과한다. 첫 번째 상태는 그의 바깥쪽 삶에 더 관련되어져 있고, 두 번째는 그의 내적 삶에, 그리고 세 번째는 준비하는 상태이다. 사람은 그가 영들의 세계에 있는 동안 이 세 상태들을 통과한다. 그럼에도 이 단계들을 거치지 않고 즉각적으로 천국이나 지옥으로 직행하는 사람들도 있다. 천국으로 즉각 입장하는 사람들은 그가 세상 삶 동안 거듭나아져 와서 천국 입장의 준비가 완료된 사람들이다. 이런 사람들에게 필요한 준비는 그들이 천사에 의해 들려지기 전 그들 육체에 딸려 붙어 있었던 자연적 불순물들을 떨구는 일 뿐이다. 나는 사후 한 시간 만에 들림을 받은 몇 사람을 보았었다.

한편, 내부적으로는 완전 사악함인데도 선한 것으로 밖을 덧칠한 사람도 있다. 그들은 지옥 안으로 즉각 데려가진다. 나는 죽은 뒤 즉각 지옥으로 직행한 사람들을 보았었다-그들 중 하나, 사기성 지독한 사람은 그의 머리가 먼저 갔다. 그러나 이런 극단적 부류의 사람들은 영들의 세계에서 보존되며 준비하는 방대한 숫자에 비교한다면 미미한 숫자이다.

사후 첫 번째 상태는 이 세상에서의 삶과 너무나 비슷하다. 사람들은 타인에게 세상에서와 아주 똑같은 외관을 보인다. 행위 역시 그러하다. 이 상태에서 사람은 죽음에서 깨어나질 때 자기가 영이다고 천사가 말해준 것을 깨닫지 못한 이상, 자기가 더 이상 세상에 있지 않음을 전혀 눈치채지 못할런지 모른다. 이 상태에서 그는 이 세상으로부터 온 친척이나 친구들도 알아 본다. 다른 삶에 있는 사람들은 거기서 친구나 친척이 아닐지라도 누군가에 대해 생각할 때는 언제든지 그의 생각함 안에서 그 사람의 얼굴을 여러 상황과 연계하면서 붙잡고 있는다. 그가 이렇게 할 때, 상대방은 마치 그가 호출이라도 받은 듯 현존한다.

이 첫 상태에서, 모든 이는 사람들을 만나고 자기들이 함께 있어주기를 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들은 짧든 길든 함께 머문다. 만일 그들이 함께 머물 이유가 실지로 없다면 이내 그들은 분리되는데, 마치 서로 만난 친구가 떠나는 듯 하다. 더구나 서로 만나 다툼이 있었다면 이는 공개적으로 발발하여 사람들은 서로 싸움질하기 조차 한다. 사람들은 자기가 죽어 있다는 것, 그런데 세상에서 지녔던 몸 안에 있다는 것에 놀란 이상, 그들은 천국과 지옥이 무엇 같은지, 자기들은 어디에 있을 것인지에 대해 알려는 호기심이 더 많아진다. 그러면 그들은 가르쳐지고 데리고 다녀 사후 삶에 관하여 생각하도록 부추켜진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가 천국을 얻을 것인지를 두고 알아보려 열심을 낸다. 그들은 자기가 세상에서 선한 사람이었으니 분명 천국에 입장한다고 믿는다. 그러나 그들 중 대다수가 삶의 더 깊은 것들, 또는 더 내향의 수준들에 관한 생각은 가지고 있지 않다. 어쨌든 이런 사람들은 선한 영들에 의해 검사되어 그들의 삶의 품질이 정녕 무엇인지 보여진다. 그리고 어떤 것들은 그 자신을 보여주기 시작한다. 악한 사람은 삶의 바깥쪽에 해당하는 모든 것에는 열심을 내어 듣지만 더 깊은 것들에 관하여 말해지는 것에는 하등 관심이 없다. 그들은 듣지만 묵묵답답이다. 게다가 그들은 어떤 지역으로 향하여 가고 싶어 한다. 그래서 그들을 혼자 놔두면 그쪽 방향으로 난 길을 따라 가고 만다. 그들의 삶의 품질은 그들이 가고 싶어한 지역들로부터, 그들이 따라 걸어간 그 길로부터도 감지된다.

사람들은 이 첫 상태에서 며칠을, 몇 달을, 혹 일 년을 머문다. 머무는 시간의 길이는 바깥쪽 삶과 안쪽 삶이 얼마나 많이 일치하느냐에 달려 있다. 그 이유는 모든 사람은 자기의 바깥쪽 삶의 대부분을 먼저 벗겨내고, 얼마큼인지 모르나 내향의 것들에 상응하는 바깥쪽 삶의 평면에 있기 위해 그 자신 고유의 사랑의 형상이 되어가야 하기 때문이다.

9, 사후 사람의 두 번째 상태

두 번째 상태를 내면의 상태라고 부르는 이유는 지금 사람은 그의 마음 안에 있는 것 안에, 또는 그의 의지와 그의 생각함에 놓이고, 그 반면 첫 번째 상태에서 작동되었던 보다 더 바깥쪽에 속한 것들은 잠들어 있기 때문이다. 이 두 번째 상태는 세상에서 사람이 어떤 제약 조건 없이 자기 혼자 있었을 경우, 또는 자기 주위에 아무도 없는 상황과 엇비슷할 것이다. 사람이 세상에서 있을 경우, 자기가 말하는 것을 자극하는 그가 가지고 있는 생각에 전권을 넘기듯, 사람은 이 상태 안으로 완전 무의식 상태로 미끄러든다. 사람이 이 상태 안에 있을 때 그는 자기 고유의 자아, 그 자신의 생명 안에 잠긴다. 그리고 그의 진정한 본성이 밝히 드러내진다. 이제 사람은 그가 실제로 사랑하는 것으로부터 생각하기 시작하고, 그럴 것 같다 생각되는 것은 거의 없고 의도함과 뜻함만이 작동하고 있다. 단지 그의 의도함들에 관한 생각들이 적나나해지는데 따르는 두려움 같은 것을 제외하고는 그가 말하는 것과 똑같다.

모든 사람이 이 두 번째 상태를 통과하는 이유는 이것이 그의 영의 실제의 상태이기 때문이다. 첫 번째 상태는 그가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있었을 때, 그의 영이 어떠했는지 이였는바, 이것은 그의 진정한 상태는 아니다.

지금 그가 세상에 있었던 동안 어떤 종류의 사람이었는지가 명확해진다. 그 이유는 이쯤에서 그는 그에게 실제로 속해 있는 것, 그의 부분이 된 것을 기초로 처신하기 때문이다. 만일 그가 세상에서 진짜 선 안에 있었다면, 지금 그는 합리적으로, 슬기롭게-아마 사실상 더 슬기롭다. 그 이유는 그가 구름으로 덮듯 어둡게 만든 육체의 묶임에서 자유하기 때문이다. 그런 반면, 만일 그가 세상에 있는 동안 악 안에 있었다면, 지금 그는 미친듯 발광적으로 행동하여 더 사악해진다. 그 이유는 그가 지금 자유 아래, 제한 없음에 있기 때문이다.

양심에 따라 살아왔던 사람들이 이 두 번째 상태에 있을 때, 잠으로부터 깨어나는 듯 여겨진다. 그 이유가 지금 그는 천국의 빛으로부터, 전보다 더 깊은 지혜로부터 생각하기 때문이다. 깨어나자 그는 천국의 지각이 그들의 마음에 열리기 시작하는 방식에 의해 영향받게 된다. 그들은 큰 즐거움과 천사들과의 연합으로부터 오는 내적 복됨으로부터의 새 감각을 느낀다. 이쯤에서 이와 같은 영들은 주님을 인식할 수 있고, 그들 자신의 삶을 통하여 그분을 예배할 수 있다. 그들은 이 예배가 어떻게 완전한 자유 안에서 행해지는지를 알 수 있다. 그 이유가 자유에 관한 이 느낌은 그들의 가장 깊은 애착 안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외적 예배는 그들의 생활에서 중요한 부분을 더 이상 담당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내부로부터의 진정한 예배가 외적 예배의 자리에 들어 앉았기 때문이다.

위와 대조되는 것, 세상에서 완전한 악 안에서, 양심은 전혀 없이, 그러므로 신성으로부터의 모든 것을 부인했던 많은 이들이 있다. 이같은 사람들이 두 번째 상태에 있는 삶의 내적 수준으로 진입하자마자, 그들은 우둔한 사람들 같이 되어지는 바-폭력, 미워함, 복수와 경멸함이 돌발하고, 어떤 것은 너무나 사악해서 이런 것이 사람 내부에 과연 존재할까 의심될 정도이다. 그들은 사실상 자기들이 행하기를 원하면 무엇이든 가능한 완전한 자유 안에 있다. 그 이유는 그들이 세상에 있을 때 자기들을 점검했던 어떤 제약된 외적인 것이 떠나버렸기 때문이다.

그들이 위와 같은 상태에 있을 때, 그들은 때때로 자기들이 있었던 첫 번째 상태를 회상한다. 그들 중 어떤 이는 자신을 부끄러워하고, 어떤 이는 부끄럼을 전혀 느끼지도 않는다. 어떤 이는 첫 번째 상태에 더 머물게 하지 않게 했다고 화를 낸다. 이런 모습만 보아도 만일 그들에게 이를 허용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필시 그들은 자신들을 더 지독하게 파괴했을 것이다. 그 이유는 비밀스럽고 사기로 범벅된 바깥쪽 삶이 그와 똑같은 방식으로 그들의 내적 생명을 불살라 결국 사라지게 까지 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두 번째 상태에서, 사람들은 그가 세상에 있었던 동안 자신 안에 가지고 있었던 것, 그때 그가 가졌던 것, 그 당시 비밀리 말해진 것이 공개적으로 보여지고 그것과 정확히 같아지게 됨을 눈으로 본다. 이 시점에서는 바깥쪽 요인들이 좌지우지하지 않는바, 영들은 이와 같은 것들을 노골적으로 이야기하고 과거 세상에서는 자기들의 명성에 흠집이라도 생길까 하는 걱정 같은 것이 없는채 그것들을 행동에 옮긴다. 따라서 이 상태에 있는 동안 그들은 자기들의 많은 악들을 가져다 놓는바, 천사들과 선한 영들에게 자기들이 진짜로 무엇인지를 드러내고야 만다.

악령들은 이 두 번째 상태에 있는 동안, 모든 종류의 악 안으로 돌진하는 바, 그들은 자주 처벌받아지고 게다가 대단히 무거운 처벌도 뒤따른다. 영들의 세계에는 여러 다른 종류의 처벌이 있고, 당사자가 세상에서 왕이었는지, 노예이었는지에 따라 있을법한 차별은 없다. 모든 악은 그것에 따른 고유의 처벌을 가져오는데, 그 이유는 행동과 그것의 결과는 분리되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 고로 이런 악, 저런 악 안에 있는 사람은 그것의 처벌 역시 내포하고 있다. 설사 그렇다 해도, 이 벌은 그가 세상에 있는 동안 저지른 악 때문이 아니라 다른 삶인 지금 행하는 악 때문에 자초한 벌이라고 말해야 마땅하다. 어쨌든 사람은 사후 그 자신 고유의 삶으로, 육체를 지녔던 시절과 같다.

처벌이 있어야하는 이유는 이 상태에서 악을 조절하는 수단이 형벌 뿐이기 때문이다. 격려함은 더 이상 일하지 않는다, 가르침도 없다, 법을 두려워 할 일이 없다, 명성을 잃을 일도 없다. 그 이유는 바깥쪽의 행위가 지금은 사람의 실제적 본성으로부터 뻗어나오고, 그리고 이것은 극심한 처벌을 수단으로 하지 않고서는 조절도, 부서질 조짐도 없다.

그 반면, 선한 영들은 처벌이 전혀 없다. 설사 그가 세상에서 악한 것을 했을지라도 처벌은 없다. 그 이유는 그들의 이런 악이 사후 그들에게 되돌아 오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의 악은 앞의 악과는 종류가 다르다. 그들의 악은 진정한 것을 고의적으로 심각히 반대하여 야기된 악이 아니다. 그들의 악은 부모로부터 상속된 악 외 어느 다른 악은 아니다.

모든 사람은 그가 세상에 있었던 동안 그의 영이 있었던 공동체에로 온다. 그의 영은 조금씩 거기로 안내되어진다. 결국은 거기에 당도하고 들어간다. 악한 영이 그의 삶의 내적 상태에서 붙잡혀졌을 때, 그는 그의 공동체를 향하여 점차로 돌아선다. 결국 그는 이 두 번째 상태가 마무리짓기도 전에 자기 공동체를 향하여 일직선으로 돌아선다. 그리고 이 상태가 끝났을 때, 그는 자신을 자신 같은 이들이 있는 지옥 안으로 내던진다. 이 내던짐은 마치 곤두박질하는 모양, 즉 머리는 아래로, 발은 위로 한 채 꼴아박는 격이다. 이같이 보여지는 이유는 그때의 이 사람은 거꾸로된 질서에 있어 지옥의 것은 사랑하되 천국의 것은 거절하기 때문이다.

이 두 번째 상태 동안에도 역시 악한 영과 선한 영은 서로가 갈라선다. 첫 번째 상태 동안에서는 이 두 영은 함께 있었는데, 그 이유는 영들이 바깥쪽 것들에 포함되는 한, 세상에서 악한 자와 선한 자가 함께 있듯 여기서도 똑같기 때문이다. 이 분리됨은 다각도에서 발생한다. 이를 한꺼번에 묶어 말하면, 악령이 첫 번째 상태 안에 있는 동안 그들의 선한 생각들과 애착들을 통하여 접촉한 공동체로 악령을 데려감으로 성사된다. 이 방식에서 그들은 자기들이 악하지 않다는 것을 그들의 바깥쪽 모양새에 의해 설득되어졌던 공동체로 데려가진다. 지금 악령들은 이 공동체의 영들에게 자기들의 진짜인 것을 노출하는 바, 이 영들은 그들을 보자마자 돌아서버리고, 그들이 이러하자마자 악령 역시 그들의 얼굴을 이 선한 공동체로부터 그들의 마지막 예정지인 지옥의 공동체를 향하여 돌아 선다.

10. 사후 사람의 세 번째 상태

세 번째 상태는 일종의 가르침이다고 말하는 편이 나을지 모른다. 이 상태는 천국에 들어가려는 사람들만을 위한 상태, 그래서 천사가 되려는 사람들만을 위한 상태, 지옥에 들어가는 사람들을 위한 상태는 아닌데, 그 이유는 그들은 가르쳐질 수 없기 때문이다. 지옥에 들어갈 이들을 위하여서는 두 번째 상태가 그들의 사랑쪽으로 완전 돌아서고, 그들이 들어갈 지옥의 공동체를 향하는바 세 번째 상태 역할까지 마무리해 준 셈이다.

어쨌든 선한 사람들은 가르침을 수단으로 천국을 위한 준비의 하나인 세 번째 상태로 데려와진다. 선하고 진정한 것에 관한 통찰력을 수단으로 하지 않고 천국을 위해 준비될 자 아무도 없다. 이 통찰력에 가르침이 포함되고 있다. 물론 세상에서의 삶 동안 세상적인 태도에서 있는 공정과 정직에 관하여 아는 것은 가능하다. 그 이유는 그곳에도 옳고 그름에 속한 것을 가르치는 법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적 수준에서 참인 것과 선인 것은 세상으로부터 배워질 수 없고 오직 천국으로부터만 배워진다. 설사 사람들이 성경으로부터, 교회 가르침으로부터 뭔가를 알고 있다 해도 이런 것들은 그가 천국 안에 있지 않는 이상 사람의 내적 삶 안으로 들어갈 수 없다. 사람은 그가 신성인 것을 인식하고 이것 때문에 공정과 정직을 행동에 옮길 때 천국 안에 있는다. 그러나 누구도 위와 같이 있으려면 먼저 가르쳐져야만 한다. 예를 들면, 하느님은 계시다는 것, 천국과 지옥은 있다는 것, 사후에도 삶이 있다는 것, 무엇보다 우선적으로 하느님은 사랑되어야 한다는 것, 타인은 자기가 자신을 사랑하듯 사랑되어야 한다는 것, 그리고 또한 성경은 그것이 하느님의 말씀이므로 믿어야 한다는 것 등등이 가르쳐져야 한다는 말이다. 이런 사항이 참이다고 믿을 때까지 그는 영적으로 생각할 수 없고, 그것들을 의도할 수도 없다. 그러나 그가 그것들을 행할 때, 그 다음 천국이 그의 삶에 내재한다. 즉 주님이 천국을 통하여 사람의 삶에 내재하신다. 그런고로 가르침은 필요하다. 사람이 전에 도덕적으로 정직과 공정이다고만 보았던 것이 지금 그의 영적 삶의 기초가 되어가고 있다.

이 세 번째 상태에서의 가르침은 다양한 천사의 공동체에 의해 주어진다. 특별히 북쪽과 남쪽 지역의 천사들에 의해 가르쳐지는데, 그 이유는 이들은 총명과 지혜에 속한 것에 관심이 많기 때문이다. 가르치는 장소가 있는데 주님은 그곳으로 영들의 세계에서 두 번째 상태를 마친 가르쳐져야할 선한 영들을 데려온다. 이 장소들은 가르쳐져야할 천국의 선한 품질의 유형에 따라 배열되고 배치되어 있다. 이 방식에서 모든 이는 그 자신의 지각과 품성에 꼭 맞는 방법으로 가르쳐질 것이다.

사람들은 대단히 많은 다양한 방식에서 가르쳐지는데, 그 이유는 그들은 아주 다양하고 다른 종류의 삶의 배경과 상황으로부터 오기 때문이다. 각각 그들에 꼭 맞는 선생이 모두를 위해 찾아진다. 그리고 모든 가르침이 교리와 동떨어진 말씀으로부터가 아니고, 말씀으로부터 끌어낸 교리의 기초 위에서 행해진다.

모든 이는 각기 이해할 수 있는 방식에서 가르쳐지는데, 즉 각자의 특별한 종교에 따라, 그리고 그들이 세상에서 자기 삶의 기초가 되었던 그들만의 특별한 종교의 가르침에 따라 가르침은 진행된다. 그리고 천국들에 있는 가르침은 이런 점에서 세상적 가르침과 다르다. 즉 통찰력이 기억에 위임되는 것이 아니라 삶에 위임되는 것이다. 그들은 가르침을 받아 그들 자신의 삶과 일치하는 모든 것 안에 가져다 놓는다. 이것이 그들의 본성인 바, 그들은 삶에 유용해짐을 위해 진정한 것을 사랑함으로 계속적으로 영감되어진다. 그리고 주님은 모든 이가 자기의 본성에 걸맞는 유용성을 사랑하도록 설비해주신다. 이 사랑은 꼭 천사가 되겠다는 사람의 희망에 의해 더욱 강렬해진다.

훈육이 마무리되고 영들이 천국을 위해 준비되어졌을 때, 그들은 천국의 옷으로 차려 입는다. 이 옷은 대체로 고운 모시 같은 흰색이다. 이렇게 잘 차려입고 그들은 천국으로 안내하는 길로 데려와지고 거기서 수호 천사에게 인계된다. 그 다음 그들은 천국 공동체 안으로, 많은 종류의 행복 안으로 환영받는다.

각 천사는 주님에 의해 그 자신의 공동체로 인도된다. 이것은 여러 다른 갈래의 길에 의해 실시된다. 영들이 인도되는 이 길을 아는 천사는 없다. 아는 분은 오직 주님뿐이시다. 천사적 영이 자기 고유의 공동체에 도착할 때, 그들의 가장 깊은 삶의 수준이 공개된다. 그 이유는 공개됨이 그 공동체와 완전한 조화를 달성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은 즉각 인식되고 큰 기쁨으로 환영받는다.

11. 자비 만으로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

많은 사람들이 어떤 천국이 있는지, 또는 그 천국에 도달하는 방법은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에, 그리고 사람 안에 있는 천국의 삶에 무지하기 때문에 그들 중 대단히 많은 이들이 천국 입장 허가 여부의 결정은 신앙을 가지고 있어 주님의 중재를 받은 이들을 위한 주님의 자비에 국한된 문제라고 믿는다. 고로 그들은 사람은 신성한 호의로부터 나오는 은총에 의해서 구원될 수 있다고 상상한다. 어떤 이는 이것은 지옥에 있는 이들에게도 적용된다고 생각하기 까지 한다.

어쨌든 위의 사람들은 사람이 실지로 무엇인지에 관하여 아는 것이 하나도 없다. 그들은 사람의 품질은 그가 살아온 것과 꼭같다는 것, 그의 삶은 그의 사랑과 꼭같다는 것, 그의 물질적 모양은 그의 내향적 삶이 행동들을 통하여 그 자체를 표현할 수 있는 바깥쪽 모양일 뿐이다는 것을 모르고 있다. 그들은 몸은 그자체로부터 사는 것이 아니라 영으로부터 산다는 것, 사람의 영은 그가 사랑하는 것이 자기 영 임을 모른다. 사람이 위 같은 사항들에 무지한채로 있는 한, 그들은 구원은 자비와 은총이라 불리는 주님의 호의밖에 더는 아니다고 계속 믿고 있다.

따라서 이 신성한 자비(mercy)가 무엇인지 꼼꼼히 헤아려두는 것이 필요하다. 신성한 자비는 인류 전체를 향한 순수한 자비이다. 그리고 단 한 사람도 이 자비로부터 취소 받는 일은 결코 없다. 고로, 구원되어질 수 있는 모든 이 각각은 구원된다. 허나 누군가가 구원될 수 있는 방법은 주님께서 밝히 알려주시고 있는 신성한 수단에 의해서이다. 이것은 사람이 구원되어지기 위해 어떻게 살아야하는지를 가르치고 있다. 그것들을 수단으로 주님께서는 사람을 천국을 향한 쪽으로 인도하시고, 천국의 생명을 주실 수 있다. 주님께서는 모든 이를 위해 이를 실시하신다. 그러나 사람 자신이 악을 억제하지 않으면 주님은 천국의 생명을 주실 수 없다. 그 이유는 악이 장애물이기 때문이다. 사람이 악을 그만두는 만큼, 주님은 그를 그분의 신성한 수단을 통해, 그리고 순수한 자비로부터, 그의 유아기로부터 세상 삶의 마지막까지, 그리고 영원히 인도하신다, 위 모든 것은 주님의 자비는 자비 만이 아닌 순수한 자비이다는 것-즉 어떻게 살아왔는지는 하등 관계 없고 호의로부터만 사람 각각은 구원되는 것이 아니다는 것을 보여준다. 주님은 그분의 질서에 반대되는 것은 절대 실시하실 수 없다. 그 이유는 그분 자신이 질서이시기 때문이다. 위로부터 더 알아지는 것은, 사후 사람의 삶은 바뀌지 않는다는 것-즉 악한 삶이 선한 삶으로 바뀔 방법은 없다는 것, 더구나 지옥의 삶이 천사의 삶으로 바뀌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 이유가 각 개인의 영은 머리로부터 발끝까지 그의 사랑과 꼭같고, 그의 삶과도 꼭같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에 반대되게 변한다는 것은 그의 영의 완전 파멸을 뜻한다.

12. 천국으로 인도하는 삶을 사는 것은 어렵지 않다

사람들이 자주 착각하는 것은 천국으로 인도하는 삶을 살아내는 것은 대단히 힘들다는 것이다. 그들이 들어왔던 바는, 사람이 천국가려면 세상을 단념할 필요가 있다는 것, 즉 육체와 더불어 있는 모든 즐거움을 포기하고 영적으로 살아야 할 것이다는 말이다. 그들은 이것이 뜻하는 바가, 세상과 더불어 그에 딸린 재물, 명예등등을 반드시 금하고, 쉴틈 없는 기도와 성경 읽기 등등을 하면서 하느님에 관하여, 구원에 관하여, 그리고 영생에 관하여 계속 묵상하는 것이다고 상상한다. 간단히 말해 어불성설이다. 사실상, 위와 같이 세상을 포기한 사람들이 자신을 위해 비참한 삶만을 만들고, 정작 그가 죽을 때 천국의 기쁨을 받을 수 없는 인생으로 점철하는 경우도 많다.

만일 사람이 천국의 생명을 받고 싶다면, 그는 세상에 살고 세상의 업무나 사업에 가담하고 있어야 한다. 그 이유가 도덕적, 시민적인 삶을 통하여 그는 영적 생명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영적 삶이 사람 안에서 형성되어질 수 있는 다른 방법은 없다. 또는 그의 영이 천국을 위해 준비될 수 있는 다른 방편은 없다. 그 이유는 내면적 삶을 산다는 것은 이 삶과 동시에 있어야 하는 외향의 삶이 없는 것은 마치 기초 없는 집에서 사는 것과 흡사한바, 이 삶은 점차 가라앉고 균열이 생기고 비틀거리다가 결국 붕괴되기 때문이다. 영적으로 살고 있음은 자연적으로 살고 있음, 또는 세상에서 살고 있음에서 옮겨가지지 않는다. 오히려 두 가지 살고 있음은 함께 묶여 있다. 혼이 몸과 함께 있는 것과 같다.

삶은 세 겹이다; 영적 삶, 도덕적 삶, 시민적 삶이다. 도덕적, 영적 삶으로 이어지지 못한 채 시민적 생활을 영위하는 사람이 있다; 아직 영적 삶까지는 아니더라도 도덕적 삶을 사는 사람이 있다. 그리고 사회적, 도덕적, 영적, 이 셋을 동시에 사는 사람도 있다. 어쨌든 이것들은 천국의 삶으로 인도 가능한 삶들이다.

도덕적, 시민적 삶은 영적 삶의 활동적 측면이다. 만일 영적인 것이 이 활동적 측면에서 분리되면, 생각함과 말함 밖에 더 아니고 기초 없는 영적 삶에 불과하다.

모든 이는 도덕적, 시민적 삶을 살 수 있다. 모든 이는 세상에서의 그의 삶으로부터 위 두 삶이 무엇인지에 친숙해 있다. 모든 이는, 좋게이든 나쁘게이든 이 두 삶을 꽤 잘 이끌어간다. 그 이유는 어느 누구도 자신이 정직하고 공정한 사람이라 불러주는 것을 마다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영적인 사람도 자연적 사람이나 꼭같게 사는 것이 필요하다. 한가지 차이는 시민적 도덕적 법들을 준수하는 것은 그것이 신성한 법에 관한 문제이기 때문에 준수한다는 것이다. 누군가가 이렇다면 그는 그것을 현실화함 없이 주님에 의해 인도되어진다. 이때 그가 시민적, 도덕적 삶의 차원에서 행해졌어도 그것은 당연히 영적 근원으로부터이다. 십계명은 영적, 도덕적, 시민적 삶에 관한 모든 법칙들을 포함하고 있다. 이 계명은 인류 전체를 위해 주님에 의해 주어져 있다. 계명의 첫 셋은 영적 삶과 더불어 행해지고, 그 다음 넷은 시민 생활과 더불어, 마지막 셋은 도덕적 삶에 관련된다.

위 모든 것이 말하는 것은 천국으로 인도하는 삶은 세상으로부터 분리될 경우 성취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것이다. 사랑하는 행동 없는 신앙심 깊은 삶은 천국으로 인도해주지 못한다. 차라리 쓸모있는 활동-즉 모든 업무, 일에서 공정과 정직으로 처리해가는 것 등이 천국으로 인도하는 것들이다. 그리고 신성한 법들을 지키려 정당하게 행동할 때, 이 행동은 내면적 동기, 또는 천국적 동기로부터 이다.

천국으로 인도하는 삶은 고되지 않다; 오히려 사랑하는 활동과 분리된 경건하다는 삶이 살아내기에 더 고달프고, 그런 경건 생활이 천국으로 인도한다고 믿는 정도 만큼 천국에서 멀어지게 할 뿐이다.

죽음 그 이후 영들의 세계 그리고 천국과 지옥 원저자 서문

원저자의 서문

마태의 복음, 제 24장에서, 주님께서 ‘시대의 끝’에 관하여 이렇게 말하시고 있다.

“이런 날들의 환난 후 즉각적으로, 태양은 어두워질 것이고, 달은 그것의 빛을 주지 않을 것이다; 별들은 하늘로부터 떨어질 것이고 하늘들의 힘들은 흔들릴 것이다. 그런다음 사람의 아들에 관한 표시가 하늘에 나타날 것이고 땅의 모든 지파들이 통곡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힘과 큰 영광을 사용하여 하늘의 구름들에 오고 있는 사람의 아들을 볼 것이다. 그리고 그분은 나팔의 큰 소리를 지닌 천사들을 보낼 것이고, 그리고 그들은 하늘의 이쪽 끝으로부터 다른 쪽 끝까지, 네 방위들로부터 그의 뽑은 자를 함께 모을 것이다.”

위 구절의 말들이 글자 그대로 참이라고 믿는 이들은 위 사건들이 때가 차면 거행될 것이라고 믿고 있다. 그들은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대체되기 위해 온 세상의 사라짐을 예상하고 있다. 허나 말씀은 그 하나하나의 문구와 세부사항 안에 더 깊은 영적 의미를 담아두기 위하여 위와 같이 표현되고 있다. 그 이유가 말씀은 순수한 상응물로, 또는 영적 형상들로 쓰여 있기 때문이다.

마태복음으로부터 발췌된 위 문단은 간단히 말해 사람들이 주님을 향한 사랑과 신앙을 잃어버릴 때 ‘교회’ 또는 그 인간의 영적인 자각이 어떻게 하강하는지를 상징적으로 묘사해놓은 것이다.

다수의 사람들은 죽은 이후 삶의 참 모습, 또는 사후 삶이 있는지 조차도 눈치채지 못하고 있다. 그들은 말한다, ‘누가 되돌아와 우리에게 말했던가?’ 허나 이에 관련된 진리들은 말씀 안에 이미 포함되어 있다. 나는 주님의 허락을 받아 수 년 동안 천사와 영들을 만나고, 그들과 대화하고, 심지어 지옥에 있는 영들과도 만나 대화하였는데, 이는 나에게 불신과 혼동이 있지 않도록 하시려는 주님의 배려 때문이었다. 이 책은 이런 소통의 결과인 바, 사람들은 이 책을 통해 사후 삶의 참 모습을 알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