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기수들

성경: 요한계시록 6장

성경의 마지막 책인 요한 계시록은 세월이 흐르면서 기독교인에게 발달되게 되는 내적인 심정 상태를 상징적으로 기술하고 있는 환상들로 가득한 책이다. 이 환상을 받아 쓴 사도 요한에 대하여 잠시 살펴보도록 하자. 그는 노령에 소아시아 해안에서 떨어진 파트모스 섬으로 유배되었다. 물론 요한은 부활하신 날 저녁에 사도들 사이에 속해 있었고, 주님께서 그들에게 나타나셔서 그들로 하여금 성경을 이해할 수 있도록 그들의 이해성을 열어 주시는 틈에도 속해 있었다. 파트모스 섬에서 있게 된 그의 환상들은 과거 주님께서 지상에서의 삶으로 밝혀 주셨듯이 말씀속의 진리가 인간의 마음속에 있는 깊고 깊은 악들을 어떻게 점진적으로 드러나도록 해주는가와 그리하여 어떤 이들은 진리에 순종하는 쪽을 선택하여 자신속의 악과 싸우고 또 다른 이들은 진리를 부정하거나 자신속의 악을 계속 옹호할 수 있도록 진리를 거짓으로 만드는 다양한 방법들을 보여주시기 위해 있어진 것이다.
첫째로 요한은 일곱 등경 사이에 서 계시는 주님에 관한 경이로운 환상을 보았다. 그리고 그가 담당해 왔던 소아시아 지역의 일곱 교회에 대한 경고와 심판에 관한 편지가 주어졌다. 그런 다음 그는 심판의 큰 옥좌와 스물 네 명의 장로들 그리고 네 생물들과 일곱 인이 찍혀 봉해진 두루마리, 즉 어린 양만이 펼 수 있는 두루마리에 관한 환상을 보았다. 우리는 봉해진 두루마리의 봉인이 떼어지는 환상으로 본문의 공부를 시작한다.
성경은 주님께서 우리에게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를 가르쳐 주시기 위해 주어진 책이다. 우리가 성경 속의 가르침대로 살아간다면 이 세계와 저 세계 모두에서 행복해질 것이라고 주님께서 약속하고 계신다. 그리고 우리 모두는 그것이야 말로 진리라고 입을 모은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이러한 진리를 더욱 배우고 그것에 순종하기를 항상 원하지 않는 것일까? 그 이유는 간단히 말하자면 우리가 이기적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에게 이타적으로 되어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다. 우리가 성경을 이해하면 할수록 진리는 우리속의 이기심을 발견하도록 우리의 마음과 이해성을 환히 보게 해주어 그 안에 들어 있는 악이 뿌리째 뽑힐 수 있도록 도와준다.
봉인이 떼어짐이란 우리 안에서 더 큰 악들이 밝히 드러나지는 모습을 상징한다. 첫째로부터 넷째까지의 봉인이 떼어질 때마다 요한은 기수를 태운 말들을 보았다. 말씀 속에서 말이란 총명 또는 우리의 보다 높은 추론력을 상징한다. 우리가 가진 추론력은 우리 속에서 가장 유용한 자질 중 하나이다. 좋은 측면에서의 추론력은 상당히 유용하다. 하지만 우리는 때로 그것을 정반대의 측면에서 사용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자신이 원하는 것을 취득하고자 하는 욕망이 우리의 마음을 덮어 버린게 되면 우리는 그것이 분명히 악에 속하는 줄 알면서도 그것을 소유하고자 하는 욕심을 위해 추론력을 오용하게 된다. 이러한 실수는 우리가 성경에 관하여 익히 잘 알고 있을 때조차 종종 저지르게 된다. 각기 다른 말들이란 사람들이 각기 다른 방법으로 성경을 이해하고 사용함을 상징하고 있다.
흰말은 우리가 성경의 가르침에 대로 살고자 하는 바램으로 인해 성경속의 진리를 이해함을 상징한다. 우리가 이러한 바램으로 성경을 대한다면, 주님께서 언제나 우리의 마음을 계발시켜 주신다. 그래서 흰말의 기수는 싸우기 위해 활이란 무기를 가졌고, 시험에 분명히 승리한다는 월계관을 쓰고 있던 것이다. 흰말의 기수는 정복에 정복을 더해 갔다. 붉은말이란 성경을 거짓되게 이해하는 자들로서, 자신속의 결점을 변명하거나 타인들을 저주하는데 성경을 사용하는 자들을 상징한다. 이런 식의 이해성은 우리를 도와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 영혼에 해를 끼치게 된다. 검은 말은 흰말과는 정반대의 경우이다. 따라서 검은 말은 성경에 대한 진정한 이해가 전혀 없는 상태를 상징한다. 그 이유는 성경을 하느님의 계시로서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는바, 검은 말이 진리를 알고자 하지 않는 사람들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이런 부류의 사람들은 성경 글자의 어느 일부를 끄집어내어 마치 그것이 진리의 전부인 듯 소란을 피운다. 즉, 과거 바리사이파인이나 율법학자들은 일부의 규정들을 지키며 자신들이 꽤 경건하다고 여겼다. 그러나 이러한 사람들은 진정한 진리와 선함에 관해서는 눈썹 하나도 까닥하지 않았다. 마태복음 23장 23-24절을 읽어보도록 하자.
마지막으로 넷째 봉인이 떼어짐에서 “푸르스름한” 말이 튀어나왔다. 이 말은 진리를 행할 마음도 없고 진리를 이해해 보려는 의지도 없는 마음과 이해성의 양쪽 모두를 상실하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상징한다. 앞서 공부했던 큰잔치의 비유에서 장가들어서 잔치에 참석할 수 없다고 잘라서 말한 사람을 되새겨 보기 바란다. 이런 사람에게는 구원의 여지가 전혀 없는 것이다. 그 이유는 주님께서 그들에게 다가 갈 수 있는 여지가 그들의 마음속뿐만 아니라 이해성에도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푸르스름한 말 위에 탄 기수는 죽음이라고 불린다. 우리가 주님으로부터 전적으로 뒤돌아서면 우리의 영혼에는 전혀 생명이 없게 되기 때문이다. 그런고로 “그 뒤에는 지옥이 따르고 있었다.”
다섯째 봉인이 떼어짐은 구원될 수 있는 모든 사람들을 보여주고 있다. 여섯째 봉인의 떼어짐은 구원될 수 없는 사람들을 보여주고 있다. 이 마지막 부류의 사람들은 주님으로부터 숨겨지기만을 원했다.
마태복음 23장 23-24절의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아, 너희 같은 위선자들은 화를 입을 것이다. 너희는 박하와 회향과 근채에 대해서는 십분의 일을 바치라는 율법을 지키면서 정의와 자비와 신의 같은 아주 중요한 율법은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십분의 일세를 바치는 일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되겠지만 정의와 자비와 신의도 실천해야 하지 않겠느냐? 이 눈먼 인도자들아, 하루살이는 걸러내면서 낙타는 그대로 삼키는 것이 바로 너희들이다.”라는 구절을 되새기면서 본과를 정리해 보도록 하자.

광고

봉인된 책

성경: 요한계시록 5장

본문은 제 37장의 본문인 계시록 4장에 이어지는 환상이다. 앞서 보좌란 심판을 상징해 주는 것임을 설명했다. 따라서 요한이 본 것은 기독교회에 속한 사람들에게 있어질 심판에 대한 것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소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 대한 경고와 견책의 메시지가 주어진 후 곧바로 본문이 뒤따르는 것은 아주 당연하다. 새교회는 대 심판, 즉 마지막 심판이라고 불리는 것을 주님의 선택을 받은 스베덴보리가 목격했음을 인정한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주님께서 승천하신 이후 최후의 심판이 있게 되는 때까지 초기 기독교인들을 포함한 모든 기독교인들이 심판의 시간이 찰 때 까지 가상적인 천국에서 살도록 허용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여기서 심판의 시간이 차는 시기란 주님께서 말씀의 내적 의미들을 사람들에게 안전하게 여실 수 있을 만큼 그들의 영이 발달한 시기를 말한다.
본문에서 알 수 있듯이 최후의 심판은 주님께서 봉인된 두루마리 혹은 책을 여심으로 시작되었다. 두루마리 또는 책이란 말씀을 말한다. 이 말씀은 “안과 밖”으로 쓰여 있다. 다시 말하면, 말씀은 우리가 이야기처럼 읽고 이해하게 되는 겉 의미와 우리의 영혼과 천국 그리고 그분에 관련된 속 의미를 가진다는 말이다. 이 속(내적) 의미는 주님이 세상에 계실 때 제자들에게 조금 보여주신 것과 표면적으로 드러나도록 허용된 소량만을 제외하고 모두 봉인 되어 있었다. 이렇게 표면에 드러나 있는 구절에 대한 본 보기가 바로 본문의 8절이다. 이 구절에서는 “향이 가득 담긴 대접”이 무엇인지를 명백하게 보여 주고 있다. 다니엘서 12장을 참조하면 말씀이 봉해져야 했던 이유와 봉해진 말씀에 관하여 알게 될 것이다.
요한의 환상 가운데 봉인된 책은 심판의 옥좌에 앉아 계신 주님의 오른손에 들려 있었다. 우리 모두는 빠르던 느리던 간에 말씀의 가르침에 따라 살았는지를 심판받는다. 제 20장 11-12절을 참조하기 바란다. 우리가 주님을 진심으로 믿는 가운데 말씀을 더 깊게 들여다보면 그 안에 있는 의미를 통해서 우리 마음에 있는 진정한 의도와 생각들이 마치 영화라도 보듯이 눈앞에 환히 보여 지게 될 것이다. 그래서 본문은 봉인들이 하나씩 떼어짐에 따라 일어나게 되는 것들이 주님의 섭리로 이뤄지는 어떤 준비에 관한 것이다. 말씀의 가장 깊은 이타적인 사랑에 반대되는 모든 심정들은 그들의 자리를 지옥에서 발견할 때까지 점점 더 빛으로부터 돌아서게 된다. 그리고 이타적인 사랑에 하모니를 이루는 모든 심정들은 거룩한 성의 문으로 들어가도록 준비되게 된다. 옥좌에 계신 주님이란 우리의 이해력을 넘어 스스로 존재하시는 주님을 말한다. 유다 지파에서 난 사자란 그분의 사랑에서 뻗쳐 나오는 힘에 관한 주님으로, 그 힘은 삶의 길을 우리에게 가르치시기 위하여 우리에게 까지 내려와 영향을 미치고 있다. “죽임을 당한 것 같은” 양이란 세상에 오셔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신 주님과 우리로 하여금 자유롭게 선택하여 그분을 믿을 수 있도록 자유를 남겨 두신 측면에서의 주님이다.
오직 주님만이 봉인을 떼실 수 있었다. 스베덴보리는 그의 저서에서 말씀의 내적 의미를 쓰도록 주님께서 그에게 허용하신 것은 그분의 섭리에 의해서라고 거듭하여 강조한다. 또한 그는 주님이 자신을 통하여 말씀의 내적 의미를 밝히시고 자신의 이해성을 열어 주셔서 말씀의 내적인 의미를 우리에게도 열어 주시는 것이 바로 그분께서 약속하신 재림임을 그의 저서에서 기회가 있을 때마다 강조한다. 봉인된 말씀의 영적 의미가 풀림으로서 마지막 심판이 영계에서 거행되게 되었다. 이후로부터 이 세상에서 영계로 올라간 모든 영들은 천국과 지옥 중 가고 싶은 곳을 스스로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게 되었는데, 이것이 바로 스베덴보리가 설명하는 각 개인의 심판이다. 이러한 선택은 전에는 불가능했었는데, 이는 말씀에 대한 잘못된 해석을 통해서 이뤄진 가상적인 천국의 영향력이 상당히 컸기 때문이다. 하지만 주님께서 말씀의 봉인을 푸셔서 우리가 원하기만 하면 말씀의 내적 의미를 알고 이해하게 되는 영계의 심판이 있었고, 이로 인해 우리의 영은 진정으로 자유로운 선택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저 세상에 도착한 영은 그가 이 세상에서 살았던 동안의 삶과 질적으로 다른 삶을 선택하지 못한다. 그 이유는 삶의 질이 그 사람의 사랑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며 그 사람의 사랑이 곧 그 사람의 삶 자체이기 때문이다. “향이 가득 담긴 금 대접… 그 향은 곧 성도의 기도”라는 구절은 성소의 금 분향제단과 연결되는 부분이다. 그리고 하프는 “영적인 진리들로부터 온 주님에 대한 고백”을 표현하고 있음을 알아야 할 것이다. 앞서 우리는 37장에서 말씀에 언급되는 몇 가지 악기를 공부했다. 여러분은 그 중에서 현악기는 진리에 대한 우리의 표현이며, 관악기는 사랑에 대한 우리의 표현을 상징함을 기억할 것이다.

옥좌를 본 요한의 환상

성경: 요한계시록 4장

여러분은 마가복음 16장 19절에서 주님의 승천에 관하여 읽었을 것이다. 이 사건은 부활 후 40일이 지나 있었고, 이에 대해서는 사도행전 1장 1-12절에 가장 잘 기술되어 있다. 사도행전은 기독교회의 시작에 관한 이야기를 알려준다. 사도행전 그리고 당시 사도들이나 다른 이들로 조직된 기독교인의 단체들에게 보내는 편지들인 21권의 서간문은 내적 의미를 담고 있지 않아서 공부 과정에는 포함시키지 않았다. 그러나 그 책들에는 기독교인 모두를 위해 매우 가치 있는 역사적 사건들이 포함되어 있으므로 그 내용의 중요성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사도들은 세상으로 뛰쳐나가 복음을 전파했다. 그들은 가는 곳마다 복음에 굶주린 사람들을 발견했고, 그들에게 주님의 생애와 그분이 주시는 구원을 전하는 복음을 알려 주었다. 그리하여 기독교는 아주 빠르게 성장했다. 그 결과 로마 제국은 그들의 거동에 의혹을 품기 시작했고 그들을 탄압하기에 이르렀다. 기독교의 전통은 요한을 제외한 다른 10명의 사도들이 모두 순교했다고 전한다.
요한은 사도들 가운데 가장 나이가 어렸고, 90세가 넘도록 까지 살았다고 한다. 요한은 그의 생애 말기에 소아시아 해안에서 떨어진 파트모스라는 섬에 유배되었다. 당시 요한은 소아시아 지역에 조직된 일곱 교회의 지도자였다. 파트모스 섬에서 요한에게 많은 환상들이 주어졌는데, 그것들을 기록한 책이 바로 계시록이다. 계시록은 성경에 있는 마지막 책이다. 계시록 1장 19절과 본문의 첫 절에서 이 책은 예언의 책이라고 말해진다. 그 이유는 계시록이 주님에 관한 환상으로 시작되기 때문이다(제 1장). 요한은 환상으로 나타나신 주님이 바로 과거에 자신이 따라 다녔던 스승임을 인식했고, 그분이 바로 천국을 통치하시는 분임을 확신했다. 그리고 계시록의 2장과 3장에서 요한에게 아시아의 일곱 교회에 대한 메시지가 주어지는데, 여기서 주님은 그 일곱 교회들의 내적 상태를 우리에게 보여 주신다. 그 교회들은 제각기 처한 상태가 달랐다. 그들에게는 좋은 특질뿐만 아니라 나쁜 것들도 있어서 그들이 이 세상에서 주님의 진정한 교회가 되고자 한다면 그들의 과오를 회개하고 고쳐야 함이 경고되고 있다.
주님이 사도들을 떠나 승천하신 후 사도들이 직면한 문제점은 그분의 가르침을 각자의 삶에 어떻게 적용하느냐에 관한 것이었다. 우리는 이에 대한 사도들과 다른 전도자들의 견해차를 사도행전과 21권의 서간문들을 통해 알 수 있다. 이러한 서로의 견해차는 주님의 말씀에 대한 해석이 서로 달랐기 때문이다. 이는 오늘날에 많은 교단들이 기독교에 있게 된 근본적인 이유 중 하나이다. 주님은 어떠한 경우에서도 우리를 강요하지 않으신다. 그리고 모든 인간은 서로 다르다. 따라서 우리가 주님의 가르침을 이해하는 방법과 그것을 삶에 적용하는 방법은 서로 다를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더욱이 주님의 말씀을 공부하며 스스로 이해하고 마음에 와 닿는 진리만큼 주님께 순종해야 할 것이다. 우리가 이런 마음가짐을 갖는다면 설사 공부한 것을 잘못 이해했다하더라도 주님께서 우리를 천국으로 인도해 주실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자신이 원하는 대로 주님의 말씀을 이해하려 하거나 자신의 의견에 정당성이 되는 근거를 찾기 위해 말씀을 공부한다면, 말씀 안에 있는 진리는 우리에게 열려지지 않아 주님께서 우리를 인도하실 수 없게 된다. 기독교회들 안에는 진정으로 주님을 따르려는 자와 그저 따르는 체하는 자가 언제나 섞여 있기 마련이다. 우리는 모두 선과 악 양쪽에 대한 경향성을 지닌다. 주님과 천사들은 각 개인 또는 교회 내에서 악을 조절하며 선을 보호하기 위해 역사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지상에서 사는 한 영적인 전투는 언제 어느 곳에서나 지속되며, 우리가 저 세계에 들어 갈 때에 비로소 선과 악이 분리되는 진정한 심판이 있게 된다. 이러한 영적인 전투와 그 결과로서 있게 되는 심판이 바로 본문에서 요한에게 생생하게 보이는 환상들이다.
요한의 환상은 오래 전의 예언자 에제키엘이 가졌던 환상과 아주 유사하다. 에제키엘서 1장 26-28절 그리고 출애굽기 19장 16절과 24장 10절을 읽어 보자. 나팔소리란 주님의 진리에서 오는 권능이 말하는 것을, 옥좌란 심판을 의미한다. 옥좌 위에 앉아 계신 분은 주님이시며, 그분은 진리를 수단으로 심판을 집행하신다. 보석들이란 진리를 사랑하는 이들에게 진리가 나타나는 여러 가지 양상을 말하며, 보석이 각기 다른 색깔과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듯이 그것들은 각기 다른 진리의 모습들이다. 그러나 보석들이 한결같이 깨끗하며 빛난다 함은 보석들이 각기 다른 양상의 진리를 표현하나 그것들이 표현하는 진리들의 깨끗함과 빛남은 모두 다 같다는 의미다. 유리바다란 자연적인 천국에 사는 사람조차도 정결한 분위기에 살고 있음을 보여 준다. 에제키엘이 보았던 무지개는 햇빛이 빗방울에 굴절 반사되어 형성되는 것으로, 주님께서 진리로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 이 진리들은 우리 안에서 빛나면서 아름다운 여러 가지 색깔을 갖게 됨을 의미한다.
우선 에제키엘 1장 5-14절을 읽어 보자. 에제키엘이 본 “생물, living creature”은 요한이 본 “생물, beast”과 같다. 그러나 그리스어의 번역인 beast 보다 히브리어의 번역인 living creature가 그 의미상 더 나을 것이다. 에제키엘서 공과 부분을 기억한다면, 사자와 송아지와 사람 그리고 독수리가 상징하는 바도 알 것이다. 이러한 생물들은 실제로 존재하는 생물들이 아니며, 이는 영계에서도 마찬가지다. 이 생물들은 “거룹들, cherubim”이라고 불리며, 성서에 있게 되는 그들의 모습은 상징적인 것으로 하느님의 섭리가 말씀의 글자를 통하여 임하시며 보호하는 힘을 표현 한다. 이것이 바로 “그 몸에는 앞뒤에 눈이 가득 박혀 있다”고 기록된 이유이다. 그들의 눈이 앞뒤에 있는 이유는 주님께서 모든 것 곧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까지 보심을 의미하기 위함이다. 생물들이 가진 날개란 우리의 생각을 지상 위로 들어 올릴 수 있는 말씀이 가진 힘을 의미한다.
흰옷을 입은 24원로(장로)들이란 진리를 배움으로써 스스로의 생각을 깨끗하게 만드는 선한 사람들을 표현한다. 금관이란 이타적인 사랑으로 그들이 모두 시험을 극복했음을 보여준다. “원로”들이란 다른 사람보다 더 지혜롭다고 여겨지는 교회 내의 사람들에게 주어진 명칭이었다. 이런 견지에서 보면, 우리가 올바르게 살아가면 우리 모두는 “원로”가 되어가는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그 이유는 우리가 진리를 배우고 그에 따라 살려고 하면 매 해마다 지혜로워 질 것이기 때문이다.
본문은 원로들과 생물들이 주님을 예배함으로 끝을 맺는다. 이리하여 요한은 그의 환상 초기에서부터 주님께서 천국의 모든 것을 통치하신다는 확증을 가졌다. 그 이유는 그가 후에 극심하게 위험한 환상들을 보게 될 것이므로 초기에 주님께서 승리하실 것임을 미리 확신하고 있어야 했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는 요한이 가진 확증이 필요하다. 그 이유는 이 책이 요한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를 위해 쓰여 졌기 때문이다.

교회들에 대한 메시지

성경: 요한계시록 2-3장

말씀 안에 있는 모든 것은 글자 외에 세 가지 주요한 내적 의미들을 지닌다. 첫 째는 인류의 영적 역사에 관련되는 것이며, 두 번째는 우리 개개인의 영적 발달에 관한 것이다. 그리고 세 번째는 주님의 생애에 관한 것이다. 이와 같은 내용은 요한 계시록, 구약 성서 혹은 복음서에서도 동일하다.
첫 번째 의미, 즉 내적인 역사적 의미에서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들은 사도들 혹은 초기 기독교 지도자들에 의해 복음이 전파된 결과로 발달된 기독교 조직의 여러 가지 형태를 그린다. 또한 각 시대에 존재하게 될 다양한 형태에 대해서도 그려준다. 두 번째는 영적 의미라고 불리는데, 이는 우리의 종교생활 가운데 스스로 발견하게 되는 다양한 상태들을 그려준다. 세 번째는 천적 의미라고 부르는데, 이는 다양한 상태들 안에 있는 개인 또는 교회를 주님이 어떻게 다루시는지를 그려준다. 다시 말하자면, 주님의 사랑과 지혜가 모든 인간의 필요성을 만나고 모든 인간들이 도달하고자 자유로이 선택한 것을 가장 높은 상태로 끌어 올리시려는 적절한 반응(신축성)을 그리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너의 이것은 나쁘고 저것은 좋다”라고 말씀하고 계심을 알 수 있다. 옳고 그름은 우리가 선행과 믿음에서 멀리 떨어져 있느냐 혹은 가까이 있느냐에 의해 결정된다. 즉, 우리의 심정 안에 주님의 이타적 사랑이 들어 있는 정도와 우리의 지성 안에 그분의 말씀으로부터의 진리를 가지는 만큼에 따라 결정된다. 사랑과 진리는 서로 손잡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가 사랑보다 지혜가 더 많거나 혹은 지혜보다 사랑이 더 많게 되면, 우리는 어떤 시험에 빠지게 되어 회개하고 진정한 균형을 회복해야 한다. 우리가 시험을 인식하고 싸워간다면,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질 천국의 진짜 있을 곳을 준비하는 것이며 가장 큰 행복을 갖게 될 것이다.
주님은 각 메시지에서 서로 다른 방법으로 그분을 묘사하고 계신다. 그분이 언급하시는 모든 속성은 요한에게 보여준 그분에 대한 환상에 기초한다. 주님은 그 안에서 각각의 교회로 기술된 상태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강력히 호소하시는 신성한 특질을 강조하고 계신다. 예를 들면, 스베덴보리는 필라델피아 교회의 경우 주님에 근거를 둔 선으로부터의 진리 안에 있는 사람들이라고 설명한다. 3장 7절에 언급된 모든 것은 진리로 행해져야 함을 뜻한다. 그들 앞에는 “문”이 열려 있다고 말해진다. 그러나 라오디게이아 교회는 어떤 때는 그들 자신을 믿고 어떤 때는 말씀으로부터 믿음을 가져 거룩한 것을 모독하는 이들로 그려진다. 그들에게는 주님이 만물의 근원이심을 상기하고 그분께 마음의 문을 열라고 말해진다. 주님의 진리를 신뢰하는 대신 자기 자신의 지혜를 신봉하려함은 시험 중에서도 가장 깊은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이를 극복하려 하면, 주님은 우리의 영원한 복락을 위해서 모든 것을 인도해 주신다. 이에 대해 주님은 “승리하는 자에게는 나와 함께 내 옥좌에 앉게 하여 주겠다”라고 약속 하신다.
주님이 각 개인 또는 각각의 일곱 교회에게 다른 방법으로 스스로를 나타내신 바와 같이 승리의 보상에 대한 약속 역시 각각에게 다르게 주어지고 있다. 우리 각자는 가능성과 취약점 그리고 고유의 시험들을 갖고 있다. 어느 두 개인도 이 세상에서 똑같은 장단점 또는 시험을 가질 수 없다. 주님은 각 개인을 꿰뚫어 알고 계셔서 각기 다른 방법으로 다루시고 각자가 창조하는 수준이나 위치에 도달되도록 최선의 기회를 주고 계신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 모두에게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라고 말씀하고 계신다.

요한의 환상

성경: 요한계시록 1장

사도 요한은 “사랑 받은 제자”로 불렸다. 주님은 그에게 요한복음서를 쓰도록 하셨을 뿐 아니라 요한 1,2,3서와 계시록까지 쓰도록 하셨다. 그는 여느 제자보다 더 오래 살기도 했다. 주님이 부활하신 지 40일 후 제자들은 그분이 하늘(heaven)로 승천하심을 보았다. 이에 대해서는 누가복음 24장 50-53절에서 말해진다. 사도들은 승천 후 밖으로 나가 주님이 그들에게 명령하신 대로 세상 각처에 복음을 전파했다. 복음의 전파는 A.D. 70년경 로마인들에 의해 예루살렘의 성전이 파괴됨으로 인해 가세되었다. 그리하여 소아시아는 그들 활동의 본거지가 되었다. 기독교인의 그룹들은 그곳에서 교회로 형성되어 갔다. 요한은 에페소 교회의 지도자로 추측된다. 그는 고령이 되었을 당시 주님의 제자 중 유일한 생존자가 되었으므로, 그가 모든 기독교회의 총 지도자격이었을 것임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는 기독교인을 박해함으로 인해 에게해에 있는 파트모스 섬으로 유배되었다. 그는 그곳에서 요한계시록에 기록된 환상을 가졌다. 이 책은 그리스어로 묵시록(Apocalypse)이라고도 불리며 같은 의미를 지닌다.
구약성서는 율법과 예언서로 구성되어 있다. 이와 같이 신약성서도 법을 구성하는 복음서와 예언서인 요한계시록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외의 신약성서의 책들은 구약성서 속의 거룩한 저술(Sacred Writing)로 말하는 책들처럼 말씀(Word)의 일부가 아니다. (그 책들은 내적 의미를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러나 그 책들도 역사적으로 가치를 지니고 흥미가 있으므로 계속 읽혀야 한다.
요한은 “성령에 감동”되어 있었다. 그의 영적 시야는 “이미 본 것과 이후에 일어날 일들”을 보도록 열려져 있었다. 환상은 그의 눈 앞에서 공연되는 권위 있는 상징적 활동사진과 같았다. 스베덴보리는 “영계의 본체들은 물질계의 본체처럼 비활성적이지 않아서 영적 힘에 즉각 응답한다. 그래서 거기서의 모든 것은 천사, 영들 또는 악마들의 생각과 애착에 상응되는 바깥쪽 형체를 즉각 입힌다.”라고 설명한다.
요한의 환상은 그에게 주님이 나타나 보여주심으로 시작되었다. 그는 그분이 과거 세상에서 섬겼던 그의 스승임을 인식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분 주위에 수반된 모든 것이 신격(deity)적이어서 죽은 자같이 그분의 발 앞에 쓰러졌다. 그리고 요한에게 주어진 주님의 말씀들은 그분이 창조자 하느님이시며 요한의 스승인 예수 그리스도 이심을 느끼게 해준다. 우리는 새 교회에서 이를 주님에 대한 우리의 환상으로 받고 있다. 우리는 두렵고 위세를 떨치는 하느님인 예수를 찾지 않는다. 주님은 요한에게 말씀하셨듯이 “두려워 말라, 나는 처음과 나중이다.”라고 우리에게 하신다.
요한의 환상은 우리가 그분께 기도할 때나 그분에 관해 생각할 때 마음속에 두어야 할 주님의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 준다. 이 그림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빛남이다. 황금등경, 별, 불꽃같은 눈, 풀무불에 단 놋쇠 같은 발 그리고 얼굴은 “힘있게 비취는 태양처럼”…등등에서 눈에 띄는 것은 빛남임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인간 형체로서의 인상을 가져보려고 애쓴다. 그러나 그 형체는 너무나 빛나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찬찬히 볼 수 없고 세부적 사항을 파악하는 것도 불가능 하다. 상응으로 볼 때 이 전체는 신성한 진리들이다. 금띠는 우리 모두를 묶어주는 신성한 사랑을, 황금등경은 우리 세대의 사람들을 교회로 만들어 주는 신성한 진리에 대한 사랑을 그려주는 것 외에는 모두 진리와 상응되고 있다. 좌우에 날이 선 검이란 악을 파괴하며 선을 보호하는 신성한 진리를 말한다.
연속되는 계시록의 환상들은 우선적으로 세상에 있는 교회, 인간의 심정과 지성 속의 상태들, 교회 혹은 마음을 에워싼 조건들 그리고 마지막 심판에서 이것들이 파괴될 것임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계시록은 “새 교회의 헌장”이라고 불려 왔다. 그러나 우리는 교회에 관해 말씀 안에서 말해지는 모든 것들이 우리 개개인의 삶에도 똑같이 적용되고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또한 우리 모두는 이 책에서 그려진 악들을 가지고 있으므로, 그것들과 싸우며 진정한 교회가 우리 각자 안에서 자랄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부활절 (4)

성경: 요한복음 15장

요한복음 제 19장 끝 부분에서 언급되는 사항을 살펴보도록 하자. 주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후 유대 종교의 대의원인 아리마태아 사람 요셉과 니고데모는 로마 총독 빌라도의 허가를 얻어 예수님의 시신을 십자가에서 내려 유대인들의 장례 풍속에 따라 향료를 바르고 고운 베로 감아서 장사지낸 일이 없는 새 무덤에 그분을 모셨다. 마태복음 27장 60절에서는 이 무덤이 요셉의 소유였다고 전한다. 그 후 그 무덤은 큰 돌을 굴려 봉인되었다고 한다. 이 돌에 관한 사항은 마태복음 27장 62-66절에서 자세히 언급된다. 앞서 우리는 종려주일을 공부하면서 주님이 죽음을 통과하셔야 했던 이유를 살펴보았다. 말씀에서의 매장 또는 무덤이란 선한 사람의 경우 부활이나 거듭남을 표현한다. 이 사항은 우리가 죽어서 무덤 속에 놓여 졌을 때 천사들이 그곳에서 우리가 깨어나는 것을 보며 영계로 들어오는 사람을 환영하는데 이때의 천사들의 입장을 고려해보면 가장 쉽게 이해될 것이다.
우리를 떠난 누군가에 관하여 이세상에 아직 있는 우리가 가지는 생각들이 요셉과 니고데모가 무덤에 예수님을 안장하기 전 시신을 싼 고운 베로 그려져 있다. 향료란 진리를 표현하는데, 특별히 심정의 선함에서 근거된 보다 내면에 속한 진리를 표현한다. 주님에 관한 요셉과 니고데모의 생각은 전적으로 그분의 지상적인 생명에 관한 것이었다. 하지만 제 19장 마지막 부분을 보면 그들이 주님을 믿으며 올바로 살려고 노력했음을 알 수 있다.
네 복음서들에서 볼 수 있는 공통된 사항은 무덤을 봉인했던 돌이 굴려져 있었다는 것과 여인들이 가장 먼저 주님의 시신이 무덤에 있지 않았음을 발견했다는 것이다. 여인은 애정을 표현한다. 돌은 좋은 측면에서 기초가 되는 진리 또는 가장 낮은 수준의 형체 속에 있는 진리를 표현한다. 본문에서의 무덤을 막은 돌이란 그분이 매장되어 꼼짝 못하도록 하려고 그분의 적들이 사용한 진리, 즉 남용된 진리를 표현한다. 주님의 적들은 그들의 의도하는 바를 성취시키기 위해 성경의 글자를 거짓으로 바꿔 놓았던 것이다. 마태복음 28장 2절을 보면, 큰 지진이 있었고 주님의 천사들이 입구의 돌을 굴렸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생각들이 결국 주님의 부활에 의해 전복되었음을 뜻하는 것이다. 여인들이 이 사실을 처음 발견한 까닭은 주님이 진정한 진리를 보여 주실 수 있도록 하는 조건인 그분에 대한 사랑이 우리의 심정 속에 있어야 함을 상징하기 위함이다. 이 여인들은 남자들인 제자들에게 사실을 알렸는데, 이는 우리의 애정이 지성의 측면에게 알 수 있게 해주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죽은 후 영체를 가지고 영계에서 계속 살게 된다. 물질세계에서 살았던 우리의 몸은 뒤에 남겨지게 된다. 반면에 주님은 죽음에서 일어나신 후에도 계속해서 물질세계와 직접적으로 접촉하셨다. 주님은 여인들과 제자들 그리고 그 밖의 많은 사람들에게 부활하신 당신의 모습을 보이시며 그들로 하여금 당신이 일어나셨음을 알도록 해주셨다. 그래서 그분은 물질적인 몸마저 남겨 두시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리아는 부활하신 그분을 처음에 알아보지 못했다. 주님은 제자들이 문을 잠그고 있었지만, 그들 가운데 나타나셨다. 누가복음을 보면, 엠마오로 향한 두 제자들이 주님과 함께 걷고 있으면서도 한참동안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다가 그분과 식사를 할 때서야 비로소 그분을 인식했음을 알 수 있다. 주님은 지상에서의 모든 삶을 통과하시면서 그분이 마리아에게서 입으셨던 유한한 인간 본성들을 신성으로 대체해 가셨다. 다시 말해서, 주님께서 이 세상에서의 시험들을 하나씩 극복하실 때마다 유한성을 벗으심으로써 그것을 신성으로 대체해 가셨다는 것이다. 어떤 이는 주님의 이러한 과정을 옷 한 벌에 비교하여 ‘옷의 실을 한번 빼내고 그 대신 금실로 대체하는 작업을 계속 되풀이하면, 결국 그 옷은 금 옷이 될 수 있을 것이다.’라고 설명하기도 했다. 주님은 일어나셨을 때 입으셨던 모든 인성 곧 물질적인 몸까지 포함해서 남겨두신 것이 하나도 없었다. 그래서 그분은 자연계 안에서 언제나 현존하실 수 있는 신성한 인성을 이루셨던 것이다. 따라서 마태복음서의 “내가 시대 끝날 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겠다.”라는 마지막 구절은 이를 두고 하신 말씀인 것이다. 주님은 영들이나 천사들과는 달리 이 세상에서 이뤄지는 모든 것을 보시며 알고 계신다. 그 이유는 주님이 신성한 인성으로 세상 안에 계실 수 있기 때문이다.
무덤에 남겨진 것은 오로지 그분의 머리를 싸맸던 수건과 수의뿐이었다. 수의(고운 베)란 우리가 말씀의 글자에서 발견하게 되는 주님에 관한 진리들을 의미한다. 그리고 수건이란 복음서에 기록된 바대로 지상에서의 그분의 외적인 삶에 관한 기억들을 의미한다. 주님은 이 두 가지 물건들을 남겨 두셨는데, 이는 우리가 그것들을 진리의 증거로서 추켜들고 검사하라는 섭리인 것이다.
이제 본문 24절부터 29절에 있는 토마에 관한 작은 사건을 공부하고 기억하도록 하자. 오늘날 누군가가 “내가 직접 보기 전에 믿지 못해.”라고 말할 때 그 말을 들은 상대방이 “너는 의심 많은 토마와 같아”라고 말하기도 한다. 토마가 주님을 직접 뵈어야 믿을 수 있겠다고 하자 주님은 직접 나타나심으로써 그에게 부활을 보여주셨다. 그러나 주님은 그의 지극히 지상적인 생각을 칭찬하시지 않으셨다. 주님은 그분에 관해 생각하며 그분에 대해 열심히 배워온 선한 이들에게 나타나시지만, 그분에 관한 우리의 생각이 물질적인 수준에 제한되기를 원치 않으신다. 이것에 관련된 사항은 17절에서 마리아에게 하신 말씀과 29절에서 토마에게 하신 말씀에 드러나 있다. 주님에 관한 우리의 생각은 말씀으로부터 그분에 관하여 더욱 더 배우게 될 때 지상적인 생각과 포부라는 수준이상으로 향상된다.

포도나무의 비유

성경: 요한복음 15장

본문은 주님이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 마지막 과월절 기념을 마치신 후 사도들에게 주신 마지막 가르침 중의 일부이다. 이 때 유다는 이미 주님을 배반하는 일련의 계획을 진행하기 위해 떠나 있었다. 그래서 남아있는 열 한 명의 제자들이 기독교회를 기초하는 작업에 참가하게 된 것이다.
포도나무는 말씀에서 수차례 언급된다. 이 나무에 대한 가장 높은 의미는 신성한 진리의 측면에서 주님을 표현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주님은 “나는 참 포도나무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이는 우리 삶의 차원에서 보면 이타애 곧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진리의 선”을 표현한다. 앞서 우리는 이타애에 관해서 살펴보았다. 이타애란 우리가 우리 속에 선함이나 지혜가 있지 않고 모든 선함과 지혜가 주님 안에 있어서 그분으로부터 선한 것을 배우며 그분의 계명에 순종할 때만이 이웃에게 선을 베풀 수 있음을 마음으로 깊이 느껴 인식함을 의미한다. 우리는 이렇게 인식할 때만이 참 포도나무인 주님에게 붙어 있는 포도나무 가지가 되어 포도인 이타애의 순수한 일을 생산하게 된다.
우리는 위의 설명들로부터 본문에서 주님 안에 거해야 한다거나 그분의 계명에 순종해야 한다는 등의 언급이 많은 까닭을 이해할 수 있다. 이에 대한 예를 들어 보자면, 우리가 교회에 헌신하기 위해 노력하면서 “내가 교회에 계속 다니면서 이웃에 친절하고 타인에게 더 이상 피해를 주지 않는다면, 나는 주님이 뜻하시는 선한 사람일거야.”라고 생각하며 자신을 평가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다가 심지어 “내가 성경공부를 오랫동안 해왔고 성경을 몇 번이나 통독했으니 이젠 더 이상 성경을 공부하지 않아도 내 믿음은 진전 될 거야.”라는 생각을 갖게 된다. 우리는 우리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이런 식의 생각을 갖게 됨을 발견하고 깜짝 놀라기도 한다. 하지만 이러한 방향으로 열심을 내고 노력하는 것은 그 사람을 진정한 기독교인으로 만들지 못한다. 그 이유는 이런 사람들의 대다수가 요한복음 12장 43절의 “하느님께서 주시는 영광보다도 인간이 주는 영광을 더 사랑하는 데로”라는 말씀처럼 되기 일쑤이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들은 자신의 인도를 위해 주님이 아닌 누군가를 쉽게 찾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는 “잘려나간 가지처럼 밖에 버려져 말라 버리게 되는 것이다.”
가지는 포도나무가 확장된 것이다. 사도들은 주님이 그들에게 주신 진리를 세상으로 전파해야 했다. 주님이 그들에게 경고하신 것은 그분의 진리를 자신의 사상과 바꿔놓지 말라는 것이었다. 이제 16절을 읽어보도록 하자. 이는 우리가 자신의 의지로 하는 대신 주님의 의지로 해보려고 노력할 때만이 성공적으로 선을 행할 수 있게 되며 그분이 함께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자신이 타인보다 우월하다고 억측해서는 안 될 것이다. 주님은 포도나무가 가지를 뻗쳐 내듯이 우리 각자가 사도가 되어 세상에 뻗쳐나가길 원하신다. 그래서 그분은 우리 자신 외에 어느 누구도 할 수 없는 그분의 일을 행하도록 우리 각자에게 특별한 징조와 때를 준비해 두셨다.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성실히 공부하면서 그분의 말씀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며 말씀 속의 계명에 충실해 나가면, 우리는 그분의 사랑과 생명이 우리의 모든 행함 안에 자연스럽게 있어져 유익하고 좋은 열매를 삶에서 맺게 될 것이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에게 “내가 이 말을 한 것은 내 기쁨을 같이 나누어 너희 마음에 기쁨이 넘치게 하려는 것이다.”라고 약속하고 계신다. 만약 우리가 어떤 일이나 행위가 잘못된 것인 줄 알면서도 기어이 하고 싶은 충동 때문에 행하게 되면, 우리는 행복함을 느끼지 못할 것이다. 그러한 일을 행함이 재미있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 이면에는 어떤 불안감이 그 사람의 마음을 늘 불편하게 했을 것이다. 우리는 젊은 시절에 어른들의 충고를 무시하고 자신의 뜻대로 하면 일이 훨씬 더 수월할 것이라고 판단할 때도 있지만, 이러한 우리의 미숙한 판단에 의한 선택이 오히려 불행을 초래하게 됨을 경험하기도 한다.
주님의 계명을 따르는 우리가 명심해야 할 사항은 주님께서 계명을 지켜나가면 언젠가는 편한 세월이 올 것이라고 우리에게 말씀해 주시지 않는다는 것이다. 반면에 주님은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거든 너희보다도 나를 먼저 미워했다는 것을 알아두어라”하고 사도들에게 말씀하셨다. 우리는 다양한 집회에서 자신의 원리를 내세워 주위 사람들로부터 기발한 생각이라고 칭찬을 받아 은근히 우쭐됐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가 주님께서 하라고 말씀하신 것을 행하면 그분은 과거 맛보지 못한 더 깊은 내면의 행복과 용기를 우리에게 주실 수 있게 된다. 주님에게서 비롯된 행복과 용기는 타인의 말과 행동으로 인한 혼란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해 줄 것이다.
우리가 타인의 말과 행동에 관계없이 본문에서 얻을 수 있는 교훈은 주님만이 마땅히 생각해야 하는 것과 어떻게 느끼고 처신해야 하는지를 우리에게 진실로 말씀해주실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오직 주님만이 우리로 하여금 영적인 피해를 받지 않도록 우리를 안전하게 보호해주시며 진실로 이웃에게 선을 행할 수 있도록 해주신다. 따라서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만이 이 세상에서뿐만 아니라 저 세계에서도 우리에게 천국의 행복을 가져다주실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