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석 위에 지은 집과 모래 위에 지은 집

I
반석 위에 지은 집과
모래 위에 지은 집
– 실제에 적용 안된
진리의 불안정성 –
성서 본문: 마태복음 7장 24-27절

24. “그러므로 지금 내가 한 말을 듣고 그대로 실행하는 사람은 반석 위에 집을 짓는 슬기로운 사람과 같다. 25. 비가 내려 큰 물이 밀려 오고 또 바람이 불어 들이쳐도 그 집은 반석 위에 세워졌기 때문에 무너지지 않는다. 26. 그러나 지금 내가 한 말을 듣고도 실행하지 않는 사람은 모래 위에 집을 짓는 어리석은 사람과 같다. 27. 비가 내려 큰 물이 밀려 오고 또 바람이 불어 들이치면 그 집은 여지없이 무너지고 말 것이다.”

종교는 삶과 관계가 있다

이 비유는 주님의 비유 중에서도 의미 파악이 가장 명백한 비유에 속할 것이라 본다. 그 이유는 이 비유가 주는 교훈의 두드러진 요점을 쉽게 알 수 있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즉 실제화된 진리만이 시험에 잘 견딘다는 것이다.
“…내가 한 말…,” 이는 주님이 말하신 것은 그분 자신이다는 것, 그분의 진리를 밝혀 주심이다는 것, 우리의 애정, 생각, 그리고 행동이라는 영혼의 정부(government)를 위해 그분이 내려놓는 위대한 삶의 원리이다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이 그분의 소유인 것은 그분은 신성한 진리이시요, 인격화되신 분이 주님이시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다른 성경 부분에서 주님은 말하시기를, “너희가 듣는 이 말은 나의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것이다…”, 즉 신성한 진리는 독립된 존재가 아니라 신성한 선으로부터 이다는 말이다. 신성한 선은 아버지요, 진리는 아들이다. 그럼에도 아버지와 아들은 선이 진리와 하나를 만들듯 하나인 것이다. 진리는 선의 형체이고 진리를 수단으로 선은 그 자체를 명백히 한다. 마치 불의 열이 불의 빛과 불가분하게 하나를 만드는 것과 같다.

영적으로 듣는 것

속뜻에서 듣는 것은 속 사람, 즉 영이 듣는 것, 즉 영이 알고 이해하는 것이다. 주님이 말한 말씀을 듣는다는 것은 그분의 진리를 알고 이해하는 것이고, 그분의 말은 진리이다는 것을 안다는 것도 되고, 그분의 소유인 그 말을 우리가 받고 있다는 것도 포함하고 있다. 자연적인 인간은 진리의 근원이 주님이심을 생각해 봄도 없이 단지 과학적인 수준 정도에서 진리를 원리로서 채택한다. 예를 들면, 세상적으로 슬기로운 자는 말하기를, “정직이 최상의 정책이다”고 말하고, 그는 가장 정직한 정책을 채택한다. 채택하는 이유는 흔들릴 수밖에 없는 부정직한 정책보다 정직한 정책이 소득이 더 많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은 종교적인 원리에 의해 규율 받지 않고 세상적인 정책에 규율 받아진다. 한마디로 그는 자기 정책을 선택함에 있어 뱀의 신중성을 사용해 간다.
그러나 주님이 가르치시고 뜻하시고자 하는 것을 알려고 하는 사람, 주님의 명령이 있는 사항을 행동에 놓기로 결정한 사람들은 종교적인 원리에 의해 규율되어 진다.
오늘 비유는 경고장을 가지고 우리에게 접근하고 있다. 이 경고가 갖는 힘의 출처는 천국은 신성한 진리를 그저 알고 이해함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알고 이해한 뒤 행동함에 의거 이루어진다는 주장에 있다. 그 이유는, 반석 위에 집을 지은 사람과 모래 위에 집을 지은 사람의 차이가 “지금 내가 한 말을 듣고 그대로 실행한 사람”인지 아니었는지의 차이이기 때문이다. 양쪽 다 듣기는 했고, 양쪽 다 알고 이해는 했다. 그러나 전자는 주님의 말씀을 자기 삶에 응용해서 악에 대해 흔들리지 않는 경우이나, 후자는 그분의 말씀을 지적 측면에서는 간직했으나, 일상 생활에서의 응용이 없었던 결과, 시험이라는 폭풍이 불어닥치면 여지없이 무너져 영적 죽음에 빠지게 된다.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듣는 이유는 한마디로 그 말씀을 행동에 놓기 위함이요 듣는 목적인 바, 듣는 것은 목적을 관철하기 위한 수단이기 때문이다.

슬기로운 사람

주님의 말씀이나 가르침을 행하는 자는 슬기로운 사람과 같다. 세상은 많이 아는 자를 슬기롭다고 흔히 부른다. 그러나 주님이 슬기로운 자라고 하실 때 그 사람이란 자기 지식에 따라 살아감으로서 선용을 만드는 자를 두고 일컫고 계신다. 어리석은 자란 지식을 선한 삶에 응용 못했기 때문이다. 슬기로운 자는 자기 집을 반석 위에 세움으로 자기의 지혜를 증거 한다. 영적 의미에서의 이 비유는 영적인 사항들, 즉 영이 마음속에서 짓게 되는 영적인 집과 관계가 있다.

영적인 집

마음은 각자의 영적인 집이고, 그 집은 각 개인이 거주하는 곳이다.
마음은 의지와 생각으로 구성되고 의지는 애정(뭔가를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고 생각은 지성을 동반하고 있다. 인간의 영적 삶은 그의 마음, 즉 그의 의지와 이해성 속에 존재한다. 각자의 영적 삶의 질, 또는 삶의 종류는 그의 마음 상태에 달려 있다.
우리 모두는 어떤 원리 하에 각자의 마음을 짓고 있다. 뾰족이 말해서 우리는 영원히 살게 될 집을 우리 속에 짓고 있다. 하루하루, 순간 순간마다, 우리는 각자가 선택한 계획에 의거 집에 구조물을 하나씩 하나씩 붙여 세워가고 있다. 우리가 이 집을 천국의 재료들인 선한 애정, 진정한 생각들로 짓고 있다면, 우리의 주님은 그 집에 들어가시어 우리와 함께 거하시게 된다. 우리가 그분의 말씀을 지킬 때 우리는 주님이 거하실 집을 짓게 된다. 그 이유는 그분이 말하시는 바,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말을 잘 지킬 것이다. 그러면 나의 아버지께서도 그를 사랑하시겠고 아버지와 나는 그를 찾아가 그와 함께 살 것이다”고 하셨기 때문이다 (요한복음 14:23).
선한 사람이 자기 몫인 주님의 가르침을 행하는 동안, 주님은 그분의 몫을 집행하는 천사들을 통해 우리 속에서 집을 실지로 지으신다. 악한 사람의 경우, 악령이 그에게 역사해서 그를 악마의 도구로 사용하게 된다.
이와 같이 우리가 우리 속에 짓게 되는 집이라는 인격은 지어지는 집, 즉 상부 구조에만 의존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정성은 집이 앉게 되는 기초에 의존됨을 잊어서는 안된다. 견고한 기초 없이 안전한 집은 있어질 수 없는 것이다. 제 아무리 번쩍거리는 궁전일지라도 그 기초가 가라앉는다면 그 궁전의 가치는 하루 아침에 사라지고 만다.

반석

성경 글자에서 반석(rock)은 진리에 대한 상징물이다. 신성한 인간 측면에서의 주님은 진리이신 고로 그분은 바위(rock)라 불리우신다. “야훼는 나의 반석, 나의 요새, 나를 구원하시는 이, 나의 하느님, 내가 숨을 바위…” (시편 18:2).
반석, 그 위에 슬기로운 자는 자기의 정신적 집을 짓는데, 그 반석은 주님이시다. 좀더 뾰족한 의미로 보면 반석은 주님의 신성한 진리이다. 우리는 믿음으로 이 진리를 받는다. 집을 반석 위에 짓는 것은 주님의 진리 위에 마음을 세운 것이며 순수한 믿음을 붙잡게 된다. 위에서 살핀 인간 마음의 두 부분은 집의 두 부분과 같다. 의지는 집의 기초이고, 이해성은 기초 위에 세운 상부 구조이다. 의지가 믿음 속의 진리를 굳게 잡고 있을 때 집은 반석 위에 세워진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진리를 알아보고 이해한 뒤 우리 심정을 그 진리, 주님의 진리 위에 정착시킬 때, 한 마디로 그 진리에 따라 선한 삶이 영위될 때 반석 위에 집은 건설되는 것이다.

모래

“모래”란 의지로 사랑됨이 없이 기억이나 지성 속에 놓여 있는 진리를 상징한다. 바위나 모래는 똑 같은 재료인 돌로 구성되어 있다. 둘 다 자연계의 법칙에 따라 있지만, 모래는 과거 수많은 세월 동안 큰 바위가 서로 결집된 상태가 흐트러진 죽은 해골 같은 돌들이다. 바위를 구성하는 분자들은 우리 마음에서 결합되고 응고되어 서로 단결되어 있는 생생한 진리와도 같다. 이 진리는 살아 움직이는 사랑의 원리로 묶여 있는 것이다. 그러나 모래 속의 분자는 서로 풀리어 있어 서로가 접합하고 있을 뿐 결합되어 있지 않고 서로 서로 옆에 놓여 있는 상태이므로 기반을 주지 못하는 기억이나 지성 속의 진리들과 같은 것이다.
의지에 기초를 둔 진리, 즉 진리에 의거 살고 있는 믿음이라는 반석이 아니면 단단한 기초가 되지 못한다는 사실이 누가복음 6장 49절에서는 더 뾰족하게 서술되는데, “그러나 내 말을 듣고도 실행하지 않는 사람은 기초 없이 맨땅에 집을 지은 사람과 같다”고 말해지고 있다.

반석 위의 교회

“선생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 이십니다”라고 베드로가 말했을 때, 예수께서 그에게,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죽음의 힘도 감히 그것을 누르지 못할 것이다”라고 말하셨다. 우리의 주님이 그분의 교회를 건설하고자 하는 반석이란 진리를 살아 내는 믿음, 즉 의지 안에 기초를 둔 진리이다. 우리가 반석 위에 영적인 집을 건설할 때 그 집이 교회인데, 그 이유는 우리 주님이 그 안에 계시기 때문이고 그 안에서 우리가 그분을 예배하기 때문이다. 교회는 이렇게 해서 인간 안에서, 믿음의 진리 안에서, 사랑 안에 기초를 두어 뿌리를 내린다.
우리가 주님을 사랑함에 원리를 두지 않으면, 자아 사랑으로 흘러 가고 만다. 그래서 “인간이 자기에게 주어지는 것들이 천국으로부터가 아니면 그는 천국적인 것을 아무것도 받을 수 없는데,” 그 이유는 자아에 의존하면 어떤 힘도, 안정성도, 견고함도, 행복도 없기 때문이다.
인간이 진리를 지상적으로 받게 될 때 그 진리는 자기에게 자기 속의 악들을 보여주도록 허용되지 않는다. 따라서 그는 자기의 악들을 끊지 못하며 진리의 실제 응용 역시 있을리 만무하다. 그러나 오늘 비유는 우리에게 왜, 어떻게 모래가 우리 집을 짓는데 불안정한가를 보여주고 있다.

집의 위험은 비나 홍수 그리고 바람에서 온다. 우리가 주목할 점은 이런 위험은 모래 위에 지은 집이든, 반석 위에 지은 집이든 공히 닥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는 버티고 다른 하나는 허물어진다. 반석 위에 세운 집이 별난 재주가 있기라도 해서 비나 홍수 그리고 바람을 피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단지 파괴되는 것을 피할 뿐이다.
비나 홍수 그리고 바람이란 우리 삶의 경험 속에서 우리를 에워싸고 강타하는 시험을 표현해 준다. 너나 나나 할 것 없이 모두 이것들을 만나야만 한다. 그러나 선한 자는 그것들 아래서 견고하게 서 있고, 악한 자는 흔들리고 무너지는 것이다.
우리의 믿음은 시험 속에서 그 강도, 기량, 성질 등등 모든 것의 상태를 조사 받게 된다. 만일 그 믿음이 진정한 믿음이라면, 그 믿음은 주님 위에 기초를 두고 심정으로 사랑되고 있는 바, 그 믿음은 그 테스트에 견디게 되어 불 속에서 연단된 금같이 더 품질 좋은 순수함을 드러낸다. 그러나 그것이 가짜 믿음이라면, 혹은 지성 속의 믿음에 불과했다면,또는 사랑이 주도해 가는데 기초를 두지 않았다면, 그 믿음은 훼손되어 쓸려 가버리고 만다.

시험 (temptation)

악을 향한 우리의 자연적인 경향성들을 발판으로 해서 악령들은 우리에게 가까이 와 꾀어 들이어 유전적인 우리의 악한 성질(propensity)을 흥분시킬 수 있다. 그럼에도 천사들은 주님의 말씀에서 온 진리의 가르침을 수단으로 우리에게 가까이 접근해서 악한 영향력과 맞서면서 천국으로 우리를 인도해 간다. 우리의 믿음이 지성 속에만 있을 경우, 천사들은 생각 차원에서만 우리에게 영향을 미치게 할 수 있고, 만일 우리 심정이 악과의 대결에서 포기된 상태이면, 악령은 심정에 다가가서 애정을 수단으로 우리를 끌고 가버린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애정이란 언제나 전진 방향으로만 가능하다는 것, 그리고 비록 우리의 생각이 애정과 이견을 보인다 해도 애정은 지성을 점진적으로 장악해서 끌고 갈 수 있다는 것도 잊어서는 안된다. 따라서 천사들이 우리의 애정을 가지고 우리를 인도하게 하려면, 우리는 믿음에 속한 것을 사랑해야 하고 그 사랑한 만큼 가능해진다. 그러면 우리의 자연적 마음속에 든 악한 기질까지도 우리를 장악할 힘을 어떤 시험 속에서도 갖지 못한다.
시험은 모든 이에게 온다. 그러나 선한 사람에게 있어 시험은 자신을 더 순수해지게 만들고, 악한 자에게는 자기의 악을 더 확증하는 기회가 된다.
시험의 심한 시련이 비나 홍수, 바람이 집에 불어 들이치는 모습으로 본문에서 잘 그려지고 있다.
“비,” 이것도 물과 같이 자연적인 진리를 상징한다. 그러나 이 비가 광폭하고 파괴적일 때 이는 꺼꾸로된 진리, 거짓으로 변해 버린 진리를 명시하게 된다.
집을 때려부술 듯 퍼붓는 비는 마음을 공격하는 거짓, 우리에게 오는 거짓 암시, 속임을 당하게 만드는 거짓들, 악령에서 나와 마음에 오게 되는 각종 것들이다. 그리고 이것들로 인해 악에 대한 유전적인 자연적 경향성을 흥분시키는 것들까지도 비가 표현해 준다.

홍수

시험 속에서 이런 거짓 암시들이 마음속에 흘러 들어와 차츰 이 암시들의 부피가 증가해 간다. 자연계에서 오래 계속되고 무거워진 비가 홍수를 야기시키듯, 시험 동안 우리 마음속에서 이 거짓 암시라는 사악한 비는 처음에는 조금 들어오지만 차차 거짓을 축적해서 이를 부풀려 홍수를 만들고, 넘칠듯 넘실거리는 홍수와도 같이 돌진하여 그나마 우리 속에 남아 있던 영적 삶에 속한 것들을 집어삼키고야 만다.

바람

비에는 바람이 흔히 동반한다. 비와 동반하는 바람이 세어지면 폭풍이 되는데, 이는 거짓이 생각에 관계하여 있어지는 독특한 모습들을 표현해 준다. 폭풍은 비나 홍수보다 더 미묘함을 가지고 은근히 강타하게 된다. 바람은 모든 틈새나 구석까지도 침투해 들어와 약한 모든 구석을 자기들의 영향력을 높이는데 이용하고 만다. 바람은 처음에는 조용하게 오나 맹렬한 돌풍을 일으켜 앞에 있는 모든 것을 거꾸러트린다.

단어의 차이점

번역 성경에서 쉽게 나타나지 않는 차이점에 대한 암시를 주고자 한다. “부딪치매, beat”라는 단어는 두 집의 경우 똑같지는 않다. 반석 위에 지은 집에 있어지는 부딪침은 약한 부딪침, 엄습함, fall이 원문에 더 가까운 번역일 것 같고, 모래 위에 지은 집은 때려눕힘, beat upon, 또는 때려부숨, dash against가 더 나을 것 같다고 본다. 시험 기간 동안 거짓들은 악한 마음에는 거짓 믿음을 가지고 광폭하게 돌진하여 그 속에 잔류한 선과 진리들을 모두 때려 눕힐 수 있다. 그러나 선 자체에게는 아주 약한 광폭함을 가지고 다가와 쓰러트리려 할 뿐이다. 더우기 거짓은 거짓을 초대한 우리의 악한 성질을 광폭하게 끌고 가 버린다. 그래서 선한 자의 경우, 엄습한 폭풍인 시험이 끝나면 선한 자 속에든 악한 기질이 그만큼 더 사라진 결과 달콤한 평화가 마음의 더 많은 부분을 점유하게 된다.

영적 폭풍의 근원

주님은 그분의 교회를 인간 안에서 지으시되 “죽음도 감히 누르지 못할” 살아 있고, 사랑받는 믿음이라는 반석 위에 지으신다. 이는 우리에게 광폭한 시험의 근원을 암시해 주게 된다. 시험은 성난 폭풍이고, “지옥문”으로부터 돌진해 나와, 우리 속의 악들이나 악한 기질이 있는 곳으로 들어가고자 애쓴다. 그 이유는 지옥의 것과 우리 속의 악한 성질과는 서로 뜻이 통하기 때문이다. 각종 시험을 수단으로 악령은 우리의 영적인 집을 파괴하거나 유인해낸다. 그러나 시험이라는 위와 같은 폭풍은 선한 자에게는 서비스를 제공하는 수준이고, 더욱이 주님의 경우는 “분노한 자로 그분을 찬양하게 만든다.” 그래서 선한 자는 선함을 더욱 확고 부동하게 하는 계기가 되고 악한 자에게는 악함을 허용받는 계기가 된다. 시험 중에 선한 자는 더 굳건해지는데, 그 이유는 그들의 심정이 거듭나는 중이기 때문이고, 그들 안쪽의 사랑들이 시험을 야기시키는 주범인 자연적 수준의 마음속에 있는 악에 기울려는 유전성에 반대하기 때문이다.

정신적인 집은 영계에서 세워진다

인간의 영은 언제나 영계에서 사는 바, 우리 안쪽의 집 어디에 계속 건축되어 가고 있을까? 물론 영계이다. 오늘 비유가 말하는 바, 주님의 말씀대로 사는 자는 슬기로운 자이어서 굳건한 반석 위에 집을 짓는 사람 같다고 했다. 사실 영적으로 보건대 슬기로운 자는 “…사람 같다”가 아니라, 슬기로운 사람으로 존재한다. 그는 영적인 반석 위에 자기의 영적인 집을 영적으로 짓는다. 그리고 어리석은 자는 자기의 영적인 집을 영적인 모래 위에 짓는다.
본문은 영적인 사항에 관해 글자적으로도 진정한 것이다. 선한 자의 안쪽에 있는 집은 실제로 천국에 짓고 있다. 그 이유는 천국은 특정한 장소에 존재하는게 아닌 내향의 상태(inward state)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자연적인 죽음은 각자에게 자기 집에 대한 소유권을 100% 획득하게 하는 수단일 뿐이다.
그러나 악한 자는 시험 동안에 무너지는데, 그 이유는 그들의 안쪽 마음이 그들을 도와주게 될 천국 쪽에 닫혀 있기 때문이다. 악은 지옥과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어서 지옥이 그들을 이끄는 대로 뜻을 같이 한다. 따라서 악한 자는 자기들의 집을 지옥에다 실지로 짓고 있다.
반석 위에 기초한 집은 폭풍에 견디고 무너지지 않는다. 즉 자기 의지 속에 기초한 믿음을 가진 자는 주님에게 생명과 도움을 구하고, 받기 때문에 어떤 시험, 죽음까지도 그를 당해 내지 못하는 바, 그는 악령과의 대적에서 승리하고야 만다.

무너짐

모래 위에 지은 집은 폭풍에 노출되면 무너진다. 여지없이 무너진다. 즉, 진리를 알고 이해하되 마음 안쪽에서 악을 흠모하는 이들은 시험 동안에 무너진다. 자기에게 자발적으로 있어지는 지식이나 이해성의 남용으로 인해 스스로 “더 큰 단죄를” 자초한다. 그 무너짐이란 아주 크고, 완전한 무너짐이다. 이 무너짐은 처음에는 가벼운 거짓으로 시작된다. 사실 이 경미한 거짓의 수준에서 우리가 자유로워지는 것은 별로 힘들지는 않다. 그러나 이 경미한 거짓이 반복되어 가다 보면 악으로부터 온 거짓이라는 크고 강한 급류로 돌변해 간다. 이 급류의 원인인 억수 같은 비는 진실로 크게 무너지는 것, 영적인 것을 완전히 침식하여 영적 인간을 영원히 멸해 축축한 무덤을 만들고야 마는 것이다.

인격

실제로 사용된 진리만이 참 인격을 형성한다. 우리 인생의 가장 큰 업무는 우리의 주님이 거하실 집을 우리 심정과 삶 속에 지어 드리는 것이다. 우리가 주님을 위해 짓지 않는다면, 우리는 단지 야생 동물이나 불결하고 보기 싫은 새들이 거할 굴을 짓게 될 것이다. 우리의 모든 선한 애정들은 우리 안쪽의 집을 짓는데 쓰여지는 품질 좋은 재목들이다. 모든 진정한 생각은 튼튼하고 오래가는 돌이다. 그 반면 우리 속의 악한 애정은 벌레 먹은 재목이요, 모든 거짓 생각은 인간이 찍어 만든 벽돌에 불과하다.
우리 주님은 그분의 말씀 속에서 우리가 집을 잘 짓도록 계획을 세우고 비용을 계산할 수 있게 섭리해 두셨다. 이 건축의 실제야말로 우리가 가질 수 있는 최대의 기쁨이다. 어리석은 자는 자기 계획대로 집을 지으려고 애쓰지만 선하고 슬기로운 자는 주님의 계획대로 집을 짓는다. 슬기로운 자는 온 정성을 가지고 재료들을 선발하고 아주 세심하게 주의해서 집을 지어 간다. 그러나 부주의한 사람은 자기 손에 편리할 듯 싶은 재료이면 선뜻 선택한다. 결국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어떤 감상적인 수준의 것이 아닌 고정된 원리들이다. 원리를 가지고 뭔가를 실현하지 않고는 고정된 원리가 인간 속에 존재할 수 없다. 진리를 생각함, 선을 사랑함들이 한 개의 행동 속에서 자신의 지침으로 고정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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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비유의 본성, 사용, 해석에 관하여

(성서 비유들의 본성, 사용, 해석에 관해서)
정의

단어 “비유, parable”는 “곁에 놓음, throw beside,” “비교함, compare”라는 그리스어 파라볼레(parabole)에서 파생된 단어이다. 비유를 정확히 구별해 정의를 내린다는 것은 힘들다. 그 이유가 기존에 있어 온 정의는 비유의 필수적인 어떤 요소를 제외하고 있다거나, 단지 비유적 형체인 것만을 포함시키거나 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스터 사전(Worcester’s Dictionary)은 이렇게 비유를 정의하고 있다. “자연 또는 삶에 있는 실제적인 어떤 것에 기초된 짧은 이야기 또는 우화, 그 이야기를 즉각적인 관심사의 어떤 것과 비교함으로 도덕성을 끌어내는 이야기들.” 대주교 트렌피는 비유를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비유는 하나의 가공적이긴 하나 대체로 일상생활의 일로부터 취해져 보다 높고, 덜 알려진 진리를 예증하기 위해 사용된 대화체들.” 비유는 우화(fable)와는 다르다. 그 이유가 우화는 생명 없고 추론이 불가능한 것들을 인간 존재가 행동하듯 그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비유는 인간 존재에게 가능한 것들을 취급하고 있다. 단지 그 이야기가 특별한 경우를 위해 창안되었다는 점에서만 가공적일 뿐이다. 풍유(allegory)도 의미를 엄격하게 보면 비유와 다르다. 그 이유는 풍유에서는 사상이나 품질이 인격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풍유는 일반적으로 스스로 해석하고 있으나, 비유는 설명을 필요로 한다.
영어 성경의 공통된 번역, 특히 구약 성경의 경우, 단어 “비유”는 세 측면에서 사용되고 있다: 1. 수수께끼(enigma), 또는 희미하게 말함 2. 풍유적인 어떤 담화로서 3. 가공적이나 가능한 대화체로 어떤 진리를 탐사하고 예증하려고 고안됨. 그러나 비유를 취급할 때, 일반적인 비유 목록은 우화나 풍유, 예언들, 환상들과 엄격히 구분되는 것을 나열하고 있다.
비유는 진리를 감각적으로 그리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의 감각들이 진리를 붙잡을 수 있도록 진리를 가져다 놓는 것이다. 따라서 진리를 풍유적으로 서술한 것이 아닌, 상응에 의한 서술, 자연적인 것과 영적인 것이 짝을 이루는 법칙에 의한 서술인 것이다.

상응 (correspondence)

영적 원인인 내향의 것과 영적 원인의 자연적 결과인 외향의 것들 사이에는 명확한 유사성이 존재한다.
물리적인 세계 속의 것들은 영(spirit)이라는 내부 세계 속의 것들을 명백하게 해주거나 체현된 바깥쪽 형상일 뿐이다. 따라서 우리는 안쪽 삶을 언급하는데 있어 육체적 삶에서 사용하는 용어들을 사용한다. 그러나 그 언어를 사용하되 풍유적 방법, 또는 상징적 방법으로 사용할 뿐이다. 우리는 진리를 본다고 말하거나, 애정이 훈훈하다라던가, 명백한 생각, 달콤한 느낌 등등의 말을 늘 사용한다, 이런 용어들이 육체적 삶과 정신적 삶 사이에 존재하는 관계에 정확히 일치해서 사용될 때, 우리는 상응에 의거 말하는 것, 또는 자연과 영을 대응시켜 말하는 것이 된다. 이 법칙은 성경이 씌어진 수단이기도 하다. 성경의 글자 의미는 바깥쪽 사항들, 인간의 자연적 삶에 속한 것을 취급하면서, 그 반면 영과 육체의 관계와도 같이, 글자 내에는 변하지 않는 의미, 시종일관된 의미, 계속적인 영적 의미가 있어 언제나 인간 본성의 영적 측면을 취급하고 있다.
그래서 성경의 안쪽 의미, 즉 영적 의미는 상응의 법칙에 관한 지식과 사실들을 수단으로 발견되어진다.
그러므로 영적 의미는 영적 진리들을 표현하고 있고 영적 삶에 응용된다. 그래서 영적 진리가 감추어 놓인 글자 언어는 유사함을 수단으로 글자 속의 진리를 표현한다. 다시 말해서 유사함이란 상징물, 상응물, 그리고 표현물의 형상을 수단으로 한다는 말이다.

주님이 사용하신 비유

주님이 성서에서 비유를 사용하셨다는 것은 모든 이에게 알려져 있다.
따라서 그 다음 논제는 왜 주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셨는가 이다. 이 의문에 대하여서는 어떤 억측도 남기지 않는다. 그 이유는 주님께서 마태복음 13장 13절에서, “내가 그들에게 비유로 말하는 이유는 그들이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고, 깨닫지도 못하기 때문이다” 하고 답하셨기 때문이다.
진리란 일종의 칼과 같다. 잘 사용하면 우리를 잘 섬기는 물건이 되지만 잘못 사용하면 칼을 다룬 자를 다치게 한다. 이와 같이 우리에게 진리에 관한 지식이 더 많아질 때, 그 지식 속의 진리를 소홀히 하면, 우리는 더 많은 단죄를 받게 된다. 따라서 인간이 진리에 순종할 수 있는 조건이 갖추어지기 전에는 진리를 명확히 이해하는 것이 그 인간에게 있어 최상이 되지 못한다.
따라서 진리에 관한 논리적 서술은 서술 그 자체가 인간으로 이해하도록 명령하는 셈이지만, 비유는 진리를 받고 사용할 준비가 된 이들에게 진리를 운반해 주면서도, 명백한 진리를 들을 준비가 안된 이들을 위해서는 그냥 지나칠 수 있는 여유를 제공한다.

비유는 시선을 끈다

주님이 비유를 사용하신 데 대한 이유는 비유가 지닌 놀란만한 특성과 동시에 사람을 끄는 매력이 있기 때문에서였을 것이라 본다. 대화의 시작에서 비유 형체는 듣는 자의 시선을 잘 잡아당기고, 그 속의 교훈이 인정되어 상대방 속에 정착할 때까지 들은 자로 하여금 잘 붙들고 있게 해준다. 비유는 진리를 큰 힘으로 마음 앞에 가져다 놓는다. 이때 유사성은 기억 속에서 교훈이 자리잡는데 중요한 역할을 해준다. 영적 사항들은 이 세상의 인간 삶의 통상적인 것들과는 달라서 자칫하면 기억에서 미끄러져 빠져나가기 쉽다. 그러나 우리가 일상 생활에 있는 흔한 문제와 관련되어 생각할 때, 비유는 우리의 상상 속에 놀랄 만하게 인상지워 놓여있게 해준다. 이렇게 되면 진리들은 이중적으로 표현되어진다. 진리의 영은 사실이라는 육체로 준비되고, 육체는 원리의 영으로 준비를 갖춘다. 그래서 진리의 각각 측면은 마음속에 진리를 고정시킬 뿐 아니라 다른 측면이 마음에 고정되는 것까지 돕고 있다. 비유는 시선을 잡아끈다. 그 이유는 비유가 원리를 구체화 해 놓은 그림이기 때문이다. 비유 안에서 추상적인 원리들은 단단한 형태로 구체화되었다. 다시 말해 비유는 모든 마음들의 시선을 잡아당기는데, 그 이유가 비유는 모든 이들이 아는 친숙해진 것들로 형성된 그림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움직이며 살아간다. 육체가 일하고 의무를 이행하며 산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래서 우리의 생각들은 경험을 수단으로 우리의 감각들과 고리를 형성해 놓고 있다. 그래서 우리의 영적인 마음들이 열리는 시작 초반에는 늘 경험하는 일상생활 속에서 영적인 것들이 드러나야만 영적인 것에 관한 분명한 사상을 가질 수 있게 되어 있다. 비유가 시선을 끄는 이유는, 모든 타락된 본성 속에 숨겨 있는 악덕을 다루면서, 한편 거듭나는 사람이 배워 실제에 응용해야 할 미덕을 다루기 때문이다. 주님의 비유에서 가르쳐지는 진리는 마치 해묵은 달력과 같이 “시대에 뒤떨어지는” 일은 결코 없다. 오히려 그 속의 진리는 “매 아침을 새롭게, 매 저녁을 새로워지게” 하는 주님의 부드러운 자비와 같다.

비슷한 것에서의 지각은 모든 이에게 공통적인 것이다

다시 말해서 비슷한 것(유추)에서 오는 지각은 인간 본성의 모든 국면에 공통되는 것이라는 말이다. 성경의 글자가 주어진 동방인들은 쉽게 비슷한 속성에서 지각한다. 그러나 이런 능력과 같은 종류들은 모든 인간 속에 놓여져 있다. 따라서 이 능력을 비합리적인 독단적 교리가 내려 누르지 않는다거나, 감각적 삶이 질식시키지 않는 한, 언제나 인간 속에서 작동하고 있다. 비유에서 사용되는 진리의 형체는 모든 본성에, 모든 세대에 적용할 수 있게 되어 있다. 따라서 이 형체는 이 세상에 있는 자연적인 사람에게 영적 진리를 가르치는데 가장 보편적인 형태인 것이다. 생각이나 표현의 양식이나 어조는 시대에 따라 변하고 있다. 그러나 유추의 원리는 언제나 인간과 더불어 남아 있는데, 그 이유는 그것은 모든 본성 속에 있는 같은 성질의 토양이기 때문이다.
자연적인 감각은 모든 사람에게 열려져 있으나, 영적 마음은 거의 열려져 있지 않다. 따라서 모든 시대 풍토에서 인간에게 도달할 수 있는 가장 보편적인 방법은 각 인간의 감각에 먼저 접촉하는 것이다. 그 다음 유추를 수단으로 진리는 감각을 넘어서 영적 삶이 열린 사람에게로 들어간다.

비유는 의지에까지 도달한다

그 다음 비유 속의 진리는 마음을 통과해 의지를 두드려 설사 논리적 서술이 주어져 이해성이 받아들일 수 없는 진리에도 스스로 용납하도록 마음을 강요시킨다. 명확하게 지적인 빛으로 인간에게 다가오는 많은 진리들은 인간 속의 각종 편견으로 인해 명확한 진리에 마음 문이 닫혀져 있음을 발견한다. 그러나 비유가 지닌 놀라운 형체는 의지를 갈아엎어 지성의 문을 열도록 하여 마음이 변화할 준비를 갖추게 한다. 이런 한 예로 바쎄바에 관련하여 다윗을 견책한 나단의 비유를 생각해 보자.
이 비유는 다윗에게 진리를 보여주었다. 그래서 그는 비유 속의 악행자에 대하여 분노를 표현했다. 그러나 그는 죄 있는 자가 자신이라는 것을 자각하지 못했다. 그러나 의지 안으로 들어가는 통로를 발견한 진리는 그 진리가 적용된 사람에게 예언의 말을 수단으로 쉽게 자각되었던 것이다.

비유는 심판을 위해 일한다

만일 어떤 사람이 기꺼이 회개하지 않는다면, 비유의 형체는 그 사람으로 자신의 영적 위치가 어딘 지를 분명하게 해줌으로써 심판의 목적을 위해 봉사한다. 그 이유가 비유는 어느 나라에서든 그 나라 형편에 맞추어 진리를 표현하는데 가장 좋은 형체인 반면, 진리의 형체는 듣는 자가 기꺼이 회개하지 않으면 듣는 자의 마음에 진리가 옳다는데 대한 뉘우침이나, 그 사람이 악에서 돌아서게 할 수 없기 때문이다. 회개는 진리를 향한 인간 의지의 상태에 달려 있다.
이리하여 비유는 진리를 사용하겠다는 이들에게는 진리를 날라다 주고, 동시에 교훈을 받을 채비가 안되어 그 교훈을 모독할 것 같은 이들로부터는 진리를 감추는 두 가지 일을 수행해 낸다. 마치 땅콩의 껍질과도 같이, 비유의 글자는 진리를 남용하려는 것에서 비유의 알맹이인 가르침을 보호하면서 장차 사용을 위해 잘 보존되게 해준다. 또는 이스라엘 후손의 여행을 인도한 불기둥과 구름기둥과도 같아, 여행의 안내와 더불어 추격해 오는 에집트 군대가 그 후손을 볼 수 없게 했던 것과 같다.

비유는 형상(image)이 고정되게 한다

위에서 살핀바와 같이 비유는 진리를 받을 준비가 된 사람에게는 진리를 나타내 보이고, 준비가 안된 사람에게는 진리를 감추이게 하지만, 무관심하게 듣는 자에게도 비유의 형상만은 고정시켜 주어서 차후 비유 속에 있는 진리를 받을 준비가 될 때까지 비유를 붙잡을 수 있게 해준다. 다시 말해 비유의 글자는 땅에 떨어진 씨의 껍질과도 같아 속에 든 생명이 싹트기에 적절한 토양의 조건을 갖출 때까지 보호해 주는 것과 같다.

비유는 성령으로 차 있다

주님이 승천하시기 전, 제자들에게 확답하신 것은, 성령이 와서 그들에게 모든 것을 가르쳐 줄 것이라는 것, 그분이 그들에게 말하셨던 것은 무엇이든지 모두 다 그들 기억에 가져다 주시리라는 것이었다. 이것은 성취되었는데, 과거 그들 마음에 씨와도 같이 뿌려진 형상들, 즉 비유를 수단으로 있어졌던 것들이 그들의 눈앞에 펼쳐져 그 속의 영적 의미들이 부분적으로 밝혀졌던 것이다. 그들이 들었던 비유들은 과거 그들의 마음이 특별히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던 탓에 단지 형상뿐이었지만, 그들의 마음 자체가 진리의 빛으로 팽창되며 사랑으로 뜨거워지자, 그들 속에 있던 형상들이 벗겨져서 진리의 더 높은 양상에서 더 높은 생명으로 채워졌던 것이다.
그렇다면, 순수한 영적 가르침은 무엇일까? 그것은 정확한 정보를 전달해 준 다기보다는 듣는 자의 마음을 열게 하고 훈련하게 하여 그로 하여금 그가 들은 정보 속에 있는 모든 진리를 받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씨는 말씀이다. 씨의 성장은 심어져야만 한다는 조건뿐만 아니라 심겨진 토양의 조건에도 의존된다. 어떤 수준의 진리가 보여지고, 어떤 국면의 진리가 받아들여 질 것이냐는 것은 진리를 받는 마음의 상황에 크게 좌우된다. “씨뿌리는 자”의 비유에서 각기 다른 종류의 땅에 씨가 떨어지는 상황을 생각하면 쉽게 납득될 것이다.
똑같은 사실, 똑같은 교리라 해도 자연적 마음뿐인 사람에게는 자연적인 진리만을, 영적인 사람에게는 영적 진리를, 천적인 사람에게는 천적인 진리를 전달한다. 예를 들면 주님의 제자들, 그들이 감각적인 마음 상태에 있었을 때, 주님이 말하신 비유는 그들을 혼동하게 해주었던 때가 많았다. 그래서 해처럼 명백한 빛보다 구름이라는 희미함 속에 사는 이들을 위해 “주님은 구름과 함께 오신다.”

각 사람은 각자의 능력에 따라 받는다

진리의 빛은 각 사람에게 각자가 정신적으로 어떤 위치에 있어야 진리를 볼 수 있는지 밝혀 준다. 마치 자연계의 태양이 쏟는 밝은 빛에서 어떤 이는 그 빛으로 인해 자기 앞에 펼쳐진 아름다운 광경을 보겠지만, 어떤 이는 태양의 강한 광선만을 똑바로 쳐다보아 오히려 눈이 멀어 보지 못하는 것과 비슷하다. 따라서 태양과 자기와의 위치에 따른 결과는 극과 극이 될 수도 있다. 우리는 주님이 말하시는 것을 듣는다. 그러나 올바른 방법으로 듣는 위치에 있어야 함이 선결 조건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말하시기를,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지라. 가진 자에게 주어지겠지만, 가지지 못한 자는 가진 것처럼 보이는 것마저 빼앗기리라.” “하느님에 속한 자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다.” “어떤 사람이 그분의 뜻을 행하고자 한다면, 그는 그 교리를 알아야 할 것이다.”
우리 주님의 비유 속에 있는 두 겹의 속성은 주님 자신 속에 있는 속성과도 같다. 그분은 그분의 인성(humanity) 가운데서 그분을 영접하는 마음의 열림에 따라 하느님으로, 때로는 단지 인간이신 듯 나타나셨다.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신성한 속성의 교리는 인간이 만든 신조(creed)로부터는 “건축자가 버린 돌”이지만, 그 돌은 새 예루살렘에서는 “모퉁이의 돌”이 되어 있다. 이 돌은 비유뿐만 아니라 모든 진리와 함께 존재하고 있고 세상에서 가장 큰 진리, 즉 예수 그리스도의 속성을 제자들에게 알게 해주시되 각자의 수준에 따라 깨닫도록 배려하시기도 했다. 우리가 주님의 속성 측면에서 접근할 때, 우리는 그분의 속성을 더욱 명확하게 관조할 수 있다. 그분의 속성은 모든 진리와 더불어 존재한다. 따라서 우리가 그분의 속성을 사랑하여 인격을 형성하는데 사용한다면, 우리는 그분의 속성을 더 충분히 이해하게 된다.

비유는 주님이 일하실 때 필요하셨다

왜 주님이 비유로 말하셨는가를 좀 더 외적 측면에서 찾는다면, 그분이 지상에서 어떤 일을 하시는데 필요하셨다는 것, 지상에서 그분이 오신 이유를 노골적으로 말하셨다면 유대인의 폭동과 분노를 폭발시켜 그분의 공생애를 마무리하는데 간섭을 받으시기 때문이라는 등등의 이유도 있었을 것이다. 이렇게 해서 주님의 섭리 속에서 이런 저런 모든 것은 하느님의 사랑이 가진 목적과 협동을 이루고 있기도 하다.
예수님께서는 비유로 가르치셔서 듣는 귀를 가진 자에게는 그분의 가르침에 든 진리를 나타내 보이시되, 그가 받을 수 있는 정도만큼에서 진리의 어떤 면을 보여주셨다. 이리하여 선한 사람들의 거듭나는 일을 도와주시고, 준비된 사람들을 개혁과 회개에로 인도해 주셨으나, 진리의 영적 측면을 볼 준비가 아직 안된 이들에게는 그들의 장래를 위해 기억 속에 진리의 형상이 고정되게 해주시고, 진리를 명확히 보기는 하되 진리를 남용하게 될 사람들은 그들이 알게 된 진리를 모독하는 가장 비참한 죄에서 보호되게 배려하셨는가 하면 심판을 위해 준비된 사람들에게는 빛 가운데 심판을 보여 주시기도 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자주 말하신 것은,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어라” 이었다. 귀를 연 자는 들을 수 있었으되, 자기들의 영적인 귀를 틀어막은 자의 경우는 그들에게 상해를 입지 않게 지나쳐 갔다.

유추함의 원리

비유를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유추의 원리를 납득해야 한다. 이 원리는 우리에게 생각을 어느 정도 열어야 함을 요구하고 있다. 그 이유가 이 원리는 우리 삶의 양면인 자연적 측면과 영적 측면을 고려해야 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비유를 명확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합리적으로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합리적으로 생각한다는 것은 목적, 원인, 그리고 결과 사이에 있는 논리적 연결을 지각하는 것이다. 성경의 비유에서 취급되는 자연의 사실이나 원리를 이해하고 있다면, 이 원리는 비유들을 이해하는데 도울 수 있게 된다. 그 이유는 글자 의미와 영적 의미에 있는 상응은 단지 서술 형체뿐만 아니라 감각, 사상까지 포함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비유로 마음 안에 선명하게 그려진 그림을 가지기 위해 우리는 진리의 상징물로 고용된 것들에 관해 적절한 지식을 가져야만 하는 것이다.

교리에 관한 지식이 필요하다

비유가 진리의 영적 측면과 자연적 측면에 고리를 맺기 때문에 영적 진리가 포함되어 있는 교회 속의 교리에 관한 좋은 지식의 획득은 비유에서 우리에게 주입해 주고자 하는 영적 진리에 관한 명확한 지식을 가지게 해준다. 이런 사항은 다른 문제들, 다른 영적인 사항에도 마찬가지이다. 자신이 소유한 것이 많으면 더 많은 것이 주어질 기회를 가진 셈이라는 말이다. 그 이유는 이미 가진 것은 더 많은 것을 획득하는 수단이 되기 때문이다.

경험이 가르친다

주님의 가르침이 의미하는 것을 납득하는 좋은 방법은 주님이 직접 가르치셨던 그 사람들로부터 느끼셨던 대로 우리도 느껴 보려 하는 것이다. 그분은 파괴하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니라 구원해 주기 위해서, 상한 심정을 싸매 주기 위해 오셨다. 우리가 그분의 느낌과 생각 안으로 진입해 음미할 때, 우리는 그분의 가르침과 행동 역시 음미해 볼 수 있다. 그 이유는 이러한 것들이 똑같은 목적, 즉 인간 구원에 대한 모든 수단이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가 인간 본성을 관조하되 남을 단죄하기 위해, 또는 자신의 속셈을 챙기기 위해 관조한다면, 우리는 무한하신 사랑의 가르침을 움켜 쥘 수 없을 것이다.

비유들은 서로 관계가 있다

우리 주님의 비유는 비유 하나 하나가 독립된 위치를 갖고 있다. 그리고 그 각각은 단지 비유적인 가르침이 아니라, 상응으로 가르치는 신성한 비유인 것이다.
이 비유들이 각자 독립된 위치에 있으면서 그 모두는 서로 관계가 있다. 한 예로 마태복음 8장에서 “씨뿌리는 자”로 시작되는 몇 개의 비유를 생각해 보자. 이 비유들은 거듭남의 진보를 예증하면서 모두 연결을 이루고 있다. 주님의 비유는 마치 어떤 사람이 화랑을 걸어다니면서 전시된 작품을 면밀히 검사해 보는 것과 같다고 생각해 볼 수 있다. 즉 우리는 비유를 전체적 시리즈로, 또는 개별적 비유로 생각할 수 있다는 말이다. 각 비유는 각 나름대로 우리를 가르친다. 그럼에도 시리즈로 된 미술 작품과도 같이 각각은 나머지 비유들을 설명해 주고 있고, 모든 비유는 각 비유가 이해되도록 돕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우리가 주님의 비유를 관조할 때, 우리는 천국의 화랑을 거닐고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우리가 천국의 인도, 성령의 이끌림을 원한다면, 그림들이 설명될 때 우리를 참석하게 해줄 것이다. 그 때 중요한 것은, 설명되고 이해된 부분에 대해 우리는 반드시 영적이고 천국적인 음미를 해야 한다는 것, 즉 우리를 안내하는 그 가르침이 일상 생활에서 적은 부분일지라도 꼭 응용하는 노력이 곁들여져야 한다는 말이다.

각 복음서가 조금씩 다르듯 각 비유도 차이가 있다

각 복음서의 특성이 조금씩 다르듯 각 복음서 내의 비유에도 조금씩 차이가 있다. 네 복음서는 각기 다른 관점에서 온 진리의 서술이다. 이는 영의 세계에 있는 네 방위로부터, 거룩한 성에의 접근이 네 측면에서 있는 것을 말한다. 이와 같이 개별적으로는 각기 다르고, 다양한 특성을 소유했다 해도, 복음서, 그리고 그 속의 비유들은 모두 다 신성하게 무한한 사랑 속의 위대한 똑같은 진리를 가르치고 있다.

행동으로 보여준 비유들

인간에게 도달하려는 하느님의 사랑은 입으로 말해지는 비유뿐만 아니라, 행동으로 보여주는 비유까지 동원하고 있다. 예를 들어보자. 오지그릇을 사 가지고 벤힌놈 골짜기로 가서 장로와 사제 몇 사람에게 그 그릇을 깨는 모습으로 가르치도록 예레미야가 명령받는다 (예레미야 19:1-11): 예레미야가 나무 멍에와 끈을 만들어 그것을 주님의 말씀과 함께 여러 왕에게 보내는 비유 (예레미야 27:2): 하나니야가 예레미야의 목에 있는 멍에를 부순 뒤 있게 되는 예언의 비유 (예레미야 28:18): 예레미야가 밭을 사는 비유 (예레미야 32:6-15) 등등이다.
또한 에제키엘과 즈가리야의 행동을 통한 비유도 있다. 묵시록의 경우에도 이와 같은 비유가 있다. 그 이유는 예언자가 본 것, 환상들은 행동된 비유들이기 때문이다. 아주 큰 규모로 행동된 비유는 인간 거듭남을 예증하는데 보여준 이스라엘의 출애굽과 더불은 광야 여행이다.
보편적 의미에서 볼 때, 주님은 지상에 있는 일상 경험을 비유로 삼아 우리를 가르치시고 있다. 지상의 삶에 속한 것은 사실상 영적 삶에 대한 비유에 속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듣고 보는 모든 것은 만일 우리가 들으려 하고 경청하려 한다면 영적 교훈들을 우리에게 말해 주고 있기도 하다.

고대의 언어는 비유적이다

인류 역사를 한참 거슬러 올라간다면, 진리를 표현하는 방법으로 비유가 얼마나 널리 보급되었었는지 금방 알아챌 수 있다. 더 충만한 영적 시야가 인간을 더 광대한 감각적 삶 위로 들어올릴 때, 바깥 자연 속의 모든 것은 마음속 내적 세계에 관해 비유로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사람은 자연을 통해 하느님의 본성까지 쳐다본다. 자연은 일종의 거울이다. 그 속에서 영적인 사람은 자신의 모습을 보는 것이다. 우리가 비유로 충만해 있는 주님의 일을 발견한다면, 비유의 언어로 씌어진 그분의 말씀 역시 발견하는 바, 이 얼마나 놀라운 일일까?
글자 형태로 교회에 내려 온 모든 것은 기독인인 우리에게 와지는 영적 실재에 관한 형상으로 존재해 왔다. “율법이 모세에 의해 주어졌으나, 은총과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오게 되었다.”

예증과 견책

주님의 비유들 중에 어떤 비유는 위대한 진리를 예증해 주기 위해 주어진 듯 보이나, 다른 비유는 그 당시 널리 퍼진 죄들을 견책하시기 위해 주어진듯 여겨질 때도 없지 않다. 그러나 이 비유이든, 저 비유이든 면밀히 검토해 본다면, 각 비유 속에는 위의 두 가지 모두가 존재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교리를 강력히 주장하거나, 삶을 위한 교훈 등등 모두는 태양 광선이 열과 빛을 다 같이 보내듯 따로 따로이되 동시에 한 비유 속에 존재한다. 그 이유가 기독교는 신조에 있는게 아니라 삶에 있기 때문이다. 신조(creed)는 삶을 위해 존재할 뿐이다. “모든 종교는 생활에 관계되 고, 종교 생활은 선을 행하는 것이다.”
교리는 삶에 관한 이론이고, 행동은 삶 속에서 이론이 구체화된 것이다.

비유의 해석

따라서 주님의 비유에 관한 해석의 법칙은 무엇일까? 많은 각 개인은 그들 나름대로 비유를 읽는 방법을 가지고 있다. 밝혀질 수 있어 사용할 수 있는 해석의 법칙은 없을까? 자연이나 인간에 속한 모든 것에 법칙이 있음을 우리는 발견한다. 하느님의 사랑은 계획이나 방법을 가지고 일하고 있다. 그 중에서 방법이 법칙인 것이다. 그래서 인간이 사는 두 세계, 영계와 자연계 속의 모든 것이 질서, 또는 법칙에 의해 통치되고 있다면, 인간에 영향을 미치는 모든 것은 법칙에 속한 어떤 질서에 따라 작동되어야만 한다. 따라서 기록되고 말해지는 비유들이 어떤 법칙에 일치되며 골격이 짜여 있다면, 비유들은 법칙에 의거 읽혀질 수 있다.
법칙이 존재한다면 이는 밝혀질 수 있고, 따라서 인간은 그것을 고용하게 된다. 만일 우리가 법칙의 원리를 알고 있고, 어떤 사건의 사실들을 알고 있다면, 우리는 그 사건에 법칙을 응용할 수 있을 것이다. 만일 우리가 주님의 비유를 읽으면서 자신의 관념에 머무른다면, 비유로부터 끌어 올려져 알게 된 진리에 기초가 없다. 그러나 우리가 이미 알려진 법칙을 가지고 있다면, 비유의 가르침을 건설하는 반석을 가진 셈이 된다. 모든 과학은 그 나름대로 법칙과 용어를 가지고 있다. 미술도 그 나름대로의 방식(mode)이 있다. 음악을 기술하는 경우, 그 나름대로 소리를 위한 표시가 있다. 그래서 우리가 이러한 것을 배울 때, 각자의 지식이나 기술에 따라 각 사람에게 모든 것을 똑같이 말해 준다. 이러기 위해서는 각자의 관념이나 변덕스러움을 남겨 두어서는 안된다.

상응의 법칙

이미 살핀 바와 같이, 성경의 비유는 상응의 법칙, 즉 영적인 것과 자연적인 것의 상대물에 의거 씌어져 있다. 상응의 법칙은 육체와 영 사이의 관계를 포함해서 두 세계를 연결시켜주는 위대한 법칙이다. 비유의 글자는 인간의 자연적 삶 속의 것들로 되어 있지만 비유가 예를 들어 증거하는 영적 원리는 인간의 영적 삶에 관한 법칙이다. 이런 관계가 인간의 육체와 영 사이에 존재하기 때문에 진리는 자연적 삶에 흔한 사항들에 기초를 두고, 비유라는 형체로 놓여져 사람들이 비유의 의미를 알고자 하여 유추(analogy)를 수단으로 해서 자기들의 영적 마음이 비유의 의미에 열리게 할 수 있다.
자연과 영의 대응물, 상응의 법칙에서 우리는 비유 해석에 관한 원리를 가진다. 이 원리의 응용은 열려진 모든 마음, 모든 시대, 모든 나라, 정신적 진보가 어느 수준에 와있든 비유의 의미를 알 수 있게 해준다. 그래서 상응의 법칙은 변동이 없는 원리, 또는 해석의 법칙이요, 이 응용은 비유뿐만 아니라 거룩한 말씀의 모든 다른 부분에도 응용된다. 사실, 우리 인간 삶의 모든 경험이나 현상에 적용되기도 한다. 세상에는 한 분 하느님, 하나의 진리가 존재하고, 해석의 법칙도 하나뿐이다. “들을 귀 가진 자는 들을 것이다.”

비유의 세부 사항에도 진정한 뜻이 있는가?

주님의 비유를 해석하는데 확실한 법칙이 있다는 사실은 우리로 다음의 질문에 대답하게 해준다. 얼마나 많은 비유가 우리에게 진리를 가르치고 있는가? 비유의 세부 사항들을 해석할 수 있게 하는 일반 원리를 우리는 수집했는가? 많은 신학적 논쟁들은 이런 요점 사항들에 대해서는 계속 확정짓지 못한 채 연기되어 왔었다. 그러나 신성한 법칙이 존재하고, 비유는 이 법칙에 따라 골격을 갖추고 있다고 한다면 비유는 그 법칙에 의거 완전히 이해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비유 속의 세부 사항 모두는 그림 속의 세세한 부분과 같다. 전체로서의 그림을 구성하는 것이 세부 사항이다. 그래서 비유를 해석해 가는 가운데 세부 사항에서 주님 스스로 생각을 어떻게 맞추셨는지를 알게 해준다. “씨뿌리는 자”의 비유를 설명하신 주님의 방법, 생각을 상기해 보라. 예수께서도 세부 사항에 관한 해석을 주고 계신다. 이 구절에 덧붙여 기억해 볼 것은, 이 때 주님께서는 듣는 자에게 걸맞는 해석, 즉 외적인 해석만을 주셨을 따름이라는 것이다. 그분의 제자들에게까지도 외적 해석만이 주어졌는데, 그 이유는 그들이 비유에 관한 승강된 가르침, 영적 가르침을 받을 준비가 안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비유의 세부 사항에서도 가르침을 얻어 보아야 할 것인지에 관한 의문은 예수님 스스로 사용하신 방법을 생각하면 결말이 나리라 본다. 사실 상응의 원리로부터 살피면 위의 의문은 명백히 풀린다.
우리가 상응 속의 원리와 사실들을 따라가는 한, 우리는 비유의 세부 사항까지 해석이 가능해질 수 있다.

보증 없는 추론들

한가지 위험한 것은 상응에서 이탈하여 오로지 추론으로 의미를 끌어내려는 것이다. 이런 추론은 복음서의 가르침에 대중화한 방침으로든지, 비유의 상응을 가지고 추론하려 들든지, 모두 보증 안된 것들일 뿐이다. 예를 들면, 다섯은 슬기롭고 다섯은 미련했다고 서술하는 “열 처녀의 비유”를 가지고, 인류의 절반은 구원되고, 절반은 그렇게 되지 못할 것이라고 말한다면, 이는 주님의 비유에서의 가르침이든, 그 외 다른 구절에서든, 어리석은 추론을 생산했을 뿐이다. 이런 추론은 상응의 법칙이 응용된 것이라고 말할 수 없다. 상응이란 자연계와 영계 사이의 관계, 마음의 눈인 영적 시야와 육체의 눈인 자연적 시야 사이의 관계이다. 그러나 보증 없는 추론은 외적인 이것과 또 다른 외적인 저것과의 비교일 뿐, 인간 삶의 법칙이 놓여 있지 않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에 관한 모든 실제적인 상응들을 살피되, 정당성이 보증도 안되는 추론을 끌어낼 수도 있다는 점을 미리 유의하면서 조심스럽게 성경의 교훈을 끌어내야 하리라 본다.

상응은 신성한 원리이다

새교회 밖에서의 큰 곤란은, 상응의 원리를 신성한 원리로서 알지 못하고 있는 점이다. 이들은 비유가 인간을 본따서 만든 석상과 동등한 형상으로 생각한다. 사실 석상은 어떤 인간 형상의 모습인바 바깥 형체는 비슷할는지 몰라도 사람은 아니다. 초상화의 경우, 색깔까지 그 사람과 비슷하게 맞출 수 있겠지만 그 사람의 속 부분은 불가능하여 오로지 피상적인 수준을 넘지 못한다. 그러나 비유의 경우는 이와 아주 다르다. 비유는 그림이나 조각이 아닌 인간의 형상이다. 바깥으로 구체화된 열정은 그 열정을 표현하는 형상이다. 마치 웃는 얼굴이나 양팔을 벌린 모습은 그 사람의 애정이 표현된 모습이고, 반대로 주먹을 불끈 쥐고, 이를 악물었을 경우, 그것은 그 사람의 분노가 표출된 모습인 것과 같다.
그러므로 우리는 비유로부터 외적인 것들인 자연적 추론이 아닌, 자연적 결과 안에 들어 있는 영적 원인을 끌어내야 할 것이다.

비유는 중심 되는 진리로부터 붙잡아야 한다

비유를 해석하여 영적 교훈에 가장 잘 도달될 수 있는 것은 먼저 비유 속에 있는 중심 되는 진리를 파악하는 것이다. 그러면 그 뒤에 부수되는 여러 가지 상황들은 그림의 전체 중의 한 부분으로 자리잡게 될 것이다. 중심된 진리에 관한 지식으로부터 비유를 생각하는 사람은 마치 공원의 중앙에 위치한 사람이 사방의 길을 볼 수 있는 경우 같이 된다.
구심점은 비유의 중심 원리에 해당되고, 사방으로 뻗는 길은 비유의 여러 상황을 말한다. 그래서 중심 원리가 좁고 넓은 길들을 통제하여 간다. 따라서 공원 한 중앙에 위치한 사람은 공원의 계획도 쉽게 알게 되고, 공원의 특정 지역들 사이의 연관성도 이해할 수 있듯이, 비유 해석의 중심에 선 사람은 비유의 가르침에 관한 일반 계획, 서로 다른 듯한 비유간의 연결이나 관계까지도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공원 주변만을 맴도는 사람은 공원의 특정 구역과 구역의 연결을 납득 못하듯, 비유의 중심 원리를 파악치 못하고 바깥으로만 맴도는 사람은 비유의 가르침을 납득하지 못한다.
비유 속의 중심 진리가 무엇인지를 파악하려는 경우, 우리는 그 비유의 전후 문맥을 살피거나, 소개되는 상황, 또는 응용 등에 대해 배울 수 있을는지 모른다. 주님이 토론하시는 것, 그분께서 우리로 하여금 응용하기를 바래시는 것이 무엇인지 알려고 할 때 우리는 그분이 의도하시는 가르침의 힘을 느낄 수 있다. 기하학에서의 경우 주변은 언제나 중심에 이끌려 있지, 중심이 주변에 매달려 있지 않음을 알아야 한다. 중심 되는 진리는 비유가 올바르게 해석되게 방향을 제시하고 더불어 응용 가능하게 해준다.

비유는 예증하는 구절들이다

비유는 논쟁적이지 않고 예를 들고 있을 뿐이다. 다시 말해서 비유는 새로운 교리를 가르치기 위해 주어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이미 주어진 교리를 확증하고 있다는 말이다. 그래서 우리가 비유 속의 중심 진리를 볼 수 있을 때만이 그 비유의 응용 또한 가능한 것이다. 전후 문맥 속의 모든 상황은 비유가 예증하는 중심 진리를 내세울 때만이 하나로 뭉쳐진다.
비유 속의 진리는 진리의 빛 가운데 있는 이들에게는 언제나 명백하게 모습을 드러낸다. 중심 원리, 또는 진리가 언제나 쉽게 발견되는 것은 아니지만, 일단 발견된 이후는 누구도 쉽게 볼 수 있다. 마치 과학자가 어떤 법칙을 발견하거나 발명하는데 노력이 많이 들었지만, 그 뒤의 모든 사람들은 그 결과를 쉽게 사용할 수 있는 것과 비슷하다.
성경 속의 비유는 주님의 작품이므로 그 비유들은 반드시 그분의 목적을 위해, 그분이 밝혀 두신 법칙에 의해서만 해석되어야 한다.
비유는 영적 진리를 예증하기 위해서 주어져 있을 뿐, 어떤 국가나 교회사, 예언하는데 기발난 생각들을 제공하려고 주어져 있지 않다. 교회들의 역사에서 모든 종파나 그 종파의 신학자들이 자기들의 신조를 입증하려는데 사용되도록 비유는 강요당해 왔었다. 그래서 상징적이거나 교리에 얽매이지 않은 듯한 비유의 경우, 쉽게 남용되는 쪽으로 기울고 만다. 새교회 밖에서의 경우, 비유의 영적 가르침은 몇 계단 올라간 수준 정도로 생각하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의미는 자연적인 의미일 뿐, 확실히 구분되는 영적 의미는 아닌 것이다.

영적 의미는 외관상으로 글자와 연결되어 있지 않다

비유의 영적인 해석은 비유의 글자와 연결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놓고 새교회에서도 이의를 제기해 왔다. 그러나 위의 사항이야말로 새교회가 비유를 해석하는데 올바른 방법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왜냐하면 비유의 글자와 영의 관계는 인간의 육체와 영의 관계와 같기 때문이다. 이 두 관계는 서로 아무런 관계가 없는 듯 여겨진다. 그럼에도 그 둘은 아주 가깝게 연결이 가능한 가운데 존재한다. 우리가 제 아무리 인간의 육체를 연구하여 이해했다 해도 그것 가지고 인간의 영을 이해하는 수준까지 오를 수 없다. 사실 노골적으로 불신앙을 말하는 사람들의 일부는 자연과학을 우수한 성적으로 공부한 사람들 사이에 존재한다. 그들이 더욱 물리적 삶을 연구할수록, 그들은 더욱 영적 삶의 존재를 덜 믿는다.
왜? 이유를 정밀하게 말한다면, 바깥쪽 생각에서 볼 때 영과 육체는 전혀 연결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위 둘의 연결은 연속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 상응성에 있다. 영적 삶을 명백하게 이해하고저 하는 사람은 그 삶의 증거를 물리적 삶을 외적으로, 감각적으로 연구함으로 발견하려 들지 말고 자신의 영적 마음을 열므로 해서 발견해야 한다. 영적 마음이 열려질 때, 과거 영적 사항을 지각하는데 장애물이었던 자연 속의 참 사실들은 이제 자신의 열린 눈을 통해 그에게 영적 삶을 확증해 주고, 예증물도 되어 주며 응용도 할 수 있게 한다. 비유를 해석하는 새교회의 방법 속에서 발견되는 영적 의미들은 글자 의미와 끊어져 있다고 말해서는 안된다. 영과 몸이 끊어져 있다고 말하는 정도 이상으로 글자와 영은 끊어져 있는 것이 아니다. 연결된 존재를 볼 수 있는 사람에게는 끊어져 있지 않다.
성경의 영적 의미, 이는 인간의 영과 같이, 볼 눈을 가진 사람에게 그 존재의 비밀을 끝내 밝혀 준다. 이미 알려진 영적 원리들은 진리의 빛으로 보는 이에게 비유의 비밀을 밝히고 응용할 수 있게 해준다. 그 이유가 진리는 중심으로부터 바깥으로 이어져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명백한 영적 진리가 없으면 인간은 해석을 위한 확정된 법칙을 가지지 못한다. 확정된 법칙을 가지지 않은 채 비유에서 의미를 찾을 경우, 그는 성경에서 의미를 퍼내는 것이 아니라 아예 성경을 밀쳐내어 놓고 만다. 이러면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도록 성경은 인간에 의해 남용되고 마는 것이다.
그러나 어린아이 같은 영으로 성경의 글자에 다가가는 사람, 주님이 자기에게 가르치시고자 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받을 준비가 된 그 사람에게, 성경의 모든 부분은 그 사람 속에서 영원한 생명수가 솟아오르도록 하는 샘이 되어 줄 것이다.

감복숭아 가지와 끓는 가마솥

감복숭아 가지와 끓는 가마솥

성서 본문: 예레미야 1장 11-14절

11. 야훼께서 나에게 말씀을 내리셨다. “예레미야야, 무엇이 보이느냐?” “감복숭아 가지가 보입니다” 하고 내가 대답하였더니, 12. 야훼께서 이르셨다. “바로 보았다, 나도 내 말이 이루어지는가 이루어지지 않는가를 깨어 지켜 보리라.”
13. 야훼께서 두 번째로 이렇게 말씀을 내리셨다. “이번에는 무엇이 보이느냐?” “부글부글 끓는 솥물이 북쪽에서 쏟아져 내리려 하고 있읍니다” 하고 내가 대답하였더니, 14. 야훼께서 이르셨다.
“이 나라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북녘에서 재앙이 쏟아져 내리리라.”

황폐함

본문의 비유는 두 개의 환상으로 구성되고 있다. 예레미야는 예언자요 예언자로서 영의 눈이 열린 사람이어서 영의 내향적 세계가 되어가는 것들을 볼 수 있었다. 이 환상들은 인간 마음의 상황들을 표현하기 위해 영계의 영적 본체로 구성되어 있다. 이와 같은 경우가 성경에는 많이 기록되어 있다.

환상들 (visions)

주제는 황폐된 것, 또는 적들에 의해 땅이 황폐해진 것이다. 그래서 영적인 주제는 악을 탐닉함으로 황폐해진 마음이다.

가지

가지(막대기, 지팡이)란 통치자의 주권 같은 능력, 권위, 권세를 표현한다. 통치자의 일이 모든 것을 그의 명령 밑에 두려는 것, 또는 이런 목적을 위해 비질서 하에 있는 이들을 교정하고 훈련시키는 등등, 통치자가 가할 수도 있는 처벌을 포함하는 훈련과 교정을 표현한다.

감복숭아 나무

위의 경우의 가지는 감복숭아 나무로부터 이다. 자라서 열매를 맺는 나무는 인간의 마음 안에서 자라나는 원리들과 그 원리들이 실제 삶에서 열매를 맺는 것을 표현한다. 각기 다른 나무들은 각기 다른 원리, 각기 다른 마음의 상태를 표현하여 이것이 인간 안에, 또는 각 개인 안에서, 또는 집합된 마음인 교회 안에 있게 된다. 이런 연유로 나무가 성경에서 많이 언급되고 있기도 하다.
감복숭아(살구, almond) 나무는 봄철에 가장 빨리 꽃이 핀다. 1월에 꽃이 피고 3월에 열매를 맺고 있다. 그래서 이 나무는 봄의 선구자이다. 히브리어 뜻을 보면 감복숭아는 바삐 서두는 것, 조급함(hasty)이라는 뜻이 있다. 그래서 이 나무는 “성급한 나무” 또는 “깨우는 자”라고도 불린다. 따라서 본문에서 예레미야에게 하시는 주님의 대답에서 이 나무의 이름의 뜻이 응용됨을 발견하게 될 것이라 본다. 즉 “바로 보았다. 나도 내 말이 이루어지는가 이루어지지 않는가를 깨어 지켜보리라.” 예레미야가 본 것은 다르게 말하면, “성급한 나뭇가지가 보입니다” 일는지 모른다. 그래서 감복숭아 나무는 조속히 오게 되는 것에 대한 표현물, 또는 약속이나 예언의 성취가 곧 닥친다는데 대한 표현인 것이다.
영적으로, 새 계절을 제일 먼저 잡는다는 면에서의 감복숭아 나무는 진리가 우리 내향의 삶에 적용될 때와 같이 내면의 진리를 지각함을 표현한다. 그리고 이 지각은 우리가 거듭날 때 자연적 마음 안에 존재하는 심정의 선함을 바탕으로 파생된다. 따라서 감복숭아 열매는 일상생활이나 일 가운데 있는 실제적인 선함을 표현하기도 한다. 이 나무의 가지가 지팡이(rod)로 전환될 경우, 이는 내면의 진리에 대한 우리의 지각은 우리의 자연적 감각들의 어리석은 생각이나 바램들을 훈련시켜 교정하는데 사용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이 목적을 위해 성경의 글자, 특별히 십계명은 이 지팡이의 가장 바깥의 형체를 담당하고 있다. 그 이유는 신성한 말씀의 글자는 진리가 우리 지각에 올 수 있도록 하는 수단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신성한 말씀의 글자는 우리의 생각이나 느낌, 그리고 행동들, 즉 실제 삶 속에서 우리를 교정하고 훈련시키는 지팡이이어야 한다. 학교에서 선생님들이 막대기를 가지고 시선을 모으거나, 경고하고 훈련시키는데 사용하듯, 신성하신 선생님은 언제나 말씀이라는 막대기를 잡고 계시면서 선하고 진정한 원리에, 그리고 선한 행동쪽으로 우리의 관심을 애정 깊게 불러서 당기신다. 그 이유는 우리가 삶의 법칙에서 탈선될 경우 부드러운 어조로 경고하시고 영원하신 선은 우리의 잘못된 행위에서 우리를 훈련시키기 때문이다.
자신 속의 악한 경향성에 저항하면서 선을 행하려는 사람의 경우, 주님께 고백하는 말, “막대기와 지팡이로 나를 인도하시니 걱정할 것 없다”이다. 주님이 그분의 사랑의 섭리 가운데서 필요하신 것은 “만국을 쇠지팡이로 다스리심”이다. 즉 우리 마음 속에 있는 모든 것을 훈련시키시되 자연적 진리라는 엄격한 법칙에 의거하신다는 것, 진리를 우리의 행동이라는 자연적 삶에 응용시켜 가신다는 말이다. 감복숭아 나무에 관한 첫 환상은 뭔가가 절박하다는 것, 또는 뭔가가 급속도로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암시한 것이다. 감복숭아 가지가 보였다 함은 교정과 훈련이 있을 것임을 미리 말해 두신 것이다. 그래서 두 번째 환상, “끓는 솥물”은 그 훈련의 형체가 어떤 것인지, 그 훈련이 언제 있을 것인지를 암시하고 있다.

끓는 솥 (seething pot)

둘째 환상에서 예레미야는 “끓는 솥물” 또는 끓는 냄비, 고기 가마가 끓어올라 가장자리로 넘치려 할 정도로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가마솥, 급기야는 흘러 넘치 게 될 것 같은 상황의 가마솥을 본 것이다.
글자적인 표현에서의 부글부글 끓는 고기 가마솥은 장차 북쪽에서 내려오는 느부갓네살왕의 군대 때문에 크게 흔들릴 예루살렘성을 표현한 것이다. 가마솥 속의 내용물들이 끓어 넘침은 강력한 적들로 인해 유대인들이 파괴되고, 재난과 혼란이 있게 될 것을 적절히 표현한 것이다.
영적으로, 움푹 들어간 용기인 가마솥은 마음에 있는 가마솥, 다시 말해 우리의 의지와 이해성을 담고 있는 진리의 서술, 즉 교리를 표현한다. 각양 각색의 사람들이 서로 비슷한 교리들을 교리로서 붙잡을는지 모르나 어찌됐든 각양 각색의 교리들은 그들의 정신적인 용기 안에 있게 된다. 그래서 어떤 경우든 그 용기가 사용 중에 있으면 담겨있는 내용물 여하에 따라 그릇의 성격이 결정된다. 그 내용물이 건강에 좋은 음식일 수도 있고, 때로 심하게 나쁠 경우는 사람을 죽게 만들 수도 있다. 나쁜 의미에서 고기 가마라면 감각적 쾌락을 표현한다. 그 이유는 그 내용물이 육의 욕망이기 때문이다. 출애굽기 16장을 보면, 에집트를 떠나 가나안으로 향하는 도중의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에집트의 고기 가마를 무척 그리워하였다. 그리고 만나에 관해서는 경멸하는 어조로 말했다. 이 만나는 주님이 그들을 위해 마련해 주신 것이다. 이 양식은 고기 같이 그들의 식욕을 즐기게 하고 뱃속을 무겁게 채워주지 않는 “가벼운 양식”이다.
사람들은 진정한 교리를 자기의 교리로서 붙잡을 수 있다. 그럼에도 그는 그것을 육의 욕구로 채우고, 그의 자연적인 마음을 감각적 생각으로 채울 수도 있는 것이다.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이 하느님을 믿고 있다고 하자. 그래서 그는 자기 삶의 이런 저런 것들에 대해 하느님께 감사한다. 그리고 저녁 식사에 앉으면 자기 앞에 차려진 다채로운 음식에 감사 기도를 올린다. 그런데, 그의 먹는 모습을 보면 며칠 굶은 사람 같이 먹는다. 옆에서 본다면, 그는 마치 살려고 먹는다기 보다 먹으려고 사는 듯 여겨진다. 이럴 경우, 비유적으로 보면, 그는 좋은 가마솥, 또는 교리를 사용하고는 있지만, 그는 육의 욕구라는 음식을 가지고 자기 솥을 채우고, 감각적 오류라는 물을 사용한다. 그 다음 육의 욕구와 감각적 오류를 넣은 자기 솥을 자아 사랑이라는 불로 끓이는 격이다. 자아 사랑의 불은 그 본성이 자기 불을 조절할 줄을 몰라서 그 솥은 끓어 넘치게 되어 모두 못쓰게 되고 만다. 넓은 측면에서의 교회 역사에는 위와 같은 모습들이 각 교회 말기에 존재한다. 즉 악한 열정이 인간을 통치해 가되 그 교회의 교리를 가진 이들 모두를 통치해 버릴 때까지 그 열정은 그칠줄 모르고 계속 있어지는 것이다. 자아 사랑이라는 악령은 만사가 끓어 넘쳐 한도를 넘어 끝장을 보는 것을 그 본성으로 가지고 있어 결국 영적 파멸이 있게 될 때까지 이어진다.

북쪽 (the North)

무질서하고 약해진 상태가 되면 북쪽에 있는 적들이 마음으로 내려와 그나마 잔류해 있는 조금의 생명까지 쓸어버린다.
본문은 말하기를, 가마솥이 북쪽에서 쏟아져 내리려 하고 있다고 했다. 이를 다른 표현으로 말하면, 가마솥의 열림(얼굴이)이 북쪽을 향해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고대 이스라엘은 인구와 영토에 비해 돌이 많은 편이어서, 연료를 채취하기가 힘들었다 .그래서 경제적인 방법, 즉 집안에 구덩이를 파고, 그 주위를 돌로 둘러치고 솥을 걸어 열의 손실을 막으면서 음식을 끓였다. 그래서 이 구덩이의 사면 중 한쪽은 연료를 더 보충할 수 있도록 열려 있었다.
이런 불구덩이와 솥을 예레미야가 환상으로 보았을는지 모른다. 그리고 연료를 넣기 위해 열린 구멍이 북쪽이었을 것임이 본문을 통해 추측된다.

나침반의 방위 (the points of the compass)

나침반의 방위는 각기 다른 정신적인 관점(standpoints)을 표현한다. 동쪽, 이곳은 태양이 떠오르는 곳으로 보다 높고 보다 내면에 속한 마음의 상태들을 표현한다. 주님을 처음 인식하게 되는 방위, 즉 사랑을 원리로 삼기 위해 주님을 찾는 경우가 이에 해당된다. 남쪽, 이곳은 태양이 정오에 위치하는 방위이다. 그래서 가장 밝은 빛이 있을 때인데 이는 총명해지기 위해 진리를 찾는 경우, 즉 진리의 총명을 표현한다. 서쪽, 이곳은 태양의 하루 일과 중 마지막에 도달되는 곳이고, 동쪽에 반대되는 바, 이는 사랑과 선함의 측면에서 마음이 보다 희미해져 있는 상태를 표현한다. 다시말해 보다 외적인 상태, 영적인 상태에 비해 보다 더 자연적인 상태에 있음을 말한다. 남쪽의 반대 위치인 북쪽은 진리 또는 총명의 측면에서 보다 더 희미해져 있는 상태, 영적 총명보다 자연적 상태에 치우쳐 있는 경우이다.
이상 살핀바와 같이, 북쪽은 자연적 마음 안에 있는 상태를 암시해 준다. 그래서 거듭나는 사람의 경우, 이 자연적 상태는 진리라기보다 거짓 사상의 상태일 뿐이다. 이렇게 희미한 상태에서는 마음에 알려져 있는 영적 진리는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아 사랑이라는 악에서 방어해 줄 진리가 없는 것이다. 이럴 경우 육의 욕구는 과감히 돌진해 들어온다. 그리하여 각 사람 속의 교리라는 가마솥은 거짓과 악한 느낌으로 채워지고 만다. 그런 다음 그 가마솥은 끓어오르고, 가마솥의 얼굴은 북을 향하고 있어 타락된 사람 속의 희미한 것들과 차디찬 심정으로부터 오는 것은 무엇이든지 받아 넣는 것이다.
가마솥의 얼굴이 어느 쪽을 향해 있느냐는 것에는 보다 더 심오한 의미가 들어있다. 인간 신체에서 얼굴은 마음의 지표(index)이다. 그 이유는 마음 속에서 행동되는 것은 무엇이든지 얼굴에 표현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람들이 반듯이 서 있게되면 얼굴을 포함하는 그의 머리 부분은 타 부분보다 언제나 위쪽에 위치한다. 그런고로 얼굴은 안쪽의 삶, 인간의 내면을 표현한다. 그래서 우리는 상대방이 실지 갖고있는 생각과 느낌을 알기위해 흔히 상대방의 얼굴을 훑어본다. 그리고 우리가 뭔가에 접촉하기를 원할 때, 우리는 얼굴을 그쪽으로 향하게 한다. 그러나 자신이 상대방의 의견에 반대임을 보여주고 싶을 때 고개를 돌려 얼굴을 뒤쪽으로 향하게 하거나 아예 등을 돌려 댄다. 이상 살핀 의미를 참작해서 보면, 북쪽을 향해 있는 가마솥의 얼굴은 영적인 북쪽을 향해 얼굴을 댄 것인바, 이는 북쪽에서 흘러오는 영향들을 받겠다는 뜻이다. 이런 표현적 의미는 다른 성경 부분에서도 그 일반적 원리에서는 같고 관점만 다를 뿐이다.

끓어 넘침 (boiling over)

본문이 제시한 표현상의 그림은 매우 강하다. 부글부글 끓는 솥, 그 속의 내용물이 끓어올라 넘치는 모습, 넘쳐흘러 못쓰게 되고, 더욱 끓어 결국 태우기까지 해서 솥 속에 든 것은 무엇이든 다 파괴하고 마는 모습은 인간의 마음상태 중, 희미하게 하고 죽게 만드는 자아 사랑의 감각적 욕구가 마음 전체에 열을 가하게 될 때의 상태를 표현한다. 그리고 이 상태는 느부갓네살 왕의 군대가 돌진해 들어오는 것같이 지옥의 모든 영향력이 마음에 돌진하는 찰나를 그려주고 있다. 악과 거짓이 필연적으로 저지르고야 마는 것은, 악과 거짓에 문이 열린 마음을 파괴하고 천국 쪽에 대한 마음 문을 확실히 닫히게 하는 것이다.

예레미야 (Jeremiah)

이 환상은 예언 초기에 있는 젊은 예언자 예레미야에게 처음 보여진 것들이다. 그래서 그로 하여금 자기의 일과 사명이 무엇인지 짐작하게 해준 환상이다. 감복숭아 나뭇가지에 관한 첫 환상이 그를 가르친 것은, 그의 사명은 이스라엘 백성 위에 이 나뭇가지를 사용하라는 것, 타락해 가는 그 백성들의 세대 속에서, 그들 교회의 지도자들까지 이기적이고 감각적 삶으로 다 포기된 상태 하에서, 그로 하여금 그 백성들을 교정하고, 타이르고, 훈육하라는 것이었다. 교회가 한참 기운 상태에서의 예언자란 그의 목소리가 높아질 수밖에 없고 행동을 바꾸라는 외침은 매우 고조될 수밖에 없을 것은 뻔한 이치이다.
그래서 그의 이야기는 교회의 파멸, 국가의 파멸에 관해 말할 뿐이어서 매우 슬픈 이야기들이다. 그래서 그는 “슬피우는 예언자”라 불렸고, “애가”의 저자이기도 한 것이다. 이 예언자 주위의 모든 것, 즉 백성의 상황은 퇴보되어 악의 열매가 무르익어 악의 추수인 파괴가 성급히 다가오고 있었다. 이런 형편 속에 주님은 예레미야에게 큰 사명을 놓으셨다. 즉, “보아라! 나는 오늘 세계 만방을 너의 손에 맡긴다. 뽑기도 하고 무너뜨리기도 하고 멸하기도 하고 헐어 버리기도 하고, 세우기도 하고 심기도 하여라”고 명령하셨던 것이다. 그 이유는 이와 같은 때, 이런 상황에서 어떤 이들은 예언자의 경고에 경청해서 도움을 예언자에게 청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예언자는 하느님의 말씀을 그들에게 운반해 주게 된다. 이러므로써 그들은 자기들의 심정에 새로운 애정을, 그들의 이해성에 새 생각을 심게 됨으로써 새 삶을 건설하여 새로운 실제 삶으로 단련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실지 응용 (practical application)

우리가 의아해 할 수밖에 없는 것은, 예레미야 시대에 이스라엘이 끔직한 상황들에 처했었는데, 더욱이 그런 상황에는 그 당시 학식이 있다는 자들까지 포함해서 이다. 게다가 하느님이 선택한 백성이라고 자처한 그들이기도 했는데 말이다.
그러나 오늘날에도 이런 비슷한 상황은 우리가 자신 속에서 악의 영향력이 행세하도록 허용한다면 언제나 가능한 일이다. 주님의 명백한 진리는 심각한 경고와 교정을 말해주느라 오늘도 우리 마음속을 거닐고 있으시다. 감복숭아 나무가지가 고대 이스라엘에게 필요했듯 우리에게도 필요한 가지이다. 우리가 신성한 말씀의 나무가지 밑에서 생각하고 느끼며 행동하지 않으면 단 하루도 영적으로 안전치 못하다. 우리는 정신적인 설비들을 갖추어 가는데 가장 보증되는 교리라는 가마솥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 가마솥 안에 무엇을 넣고 끓여야 할까? 이 솥에 열을 공급해 줄 불은 어디로부터 있어져야 하는 것일까? 내향의 삶이라는 일용할 양식을 끓여줄 영적인 물의 종류는 무엇일까? 지금이야말로 우리가 예레미야의 일을 자신을 위해 해야 할 때이다. 즉 우리 마음에 있는 것을, “뽑기도 하고 무너뜨리기도 하고 멸하기도 하고 헐어버리기도 하고, 세우기도 하고 심기도 해야 할 것이다.” 또한 우리는 허리를 동이고 일어나 주님이 하신 말씀을 자기 마음에 일러주어야 할 것이다.

네 병거와 말

네 병거와 말

성서 본문: 스가랴(즈가리야) 6장 1-8절

1. 또다시 고개를 들고 보니, 놋쇠로 된 두 산 사이에서 병거 네 대가 나오는데 2. 첫째 병거는 붉은 말들이, 둘째 병거는 검은 말들이, 3. 셋째 병거는 흰 말들이, 네째 병거는 짙은 점박이 말들이 끌고 있었다. 4. 내가 나와 말하던 그 천사에게, “나리, 이것이 무엇입니까?” 하고 묻자 그 천사는 이렇게 말하였다. 5. “이 네 병거는 하늘의 영들이다. 이 영들은 온 천하의 주님을 들어 가 뵈옵고 이제 막 나와 사방으로 떠나는 길이다. 6. 붉은 말들은 동녘 땅으로, 검은 말들은 북녘 땅으로, 흰 말들은 서녘 땅으로, 점박이 말들은 남녘 땅으로 나갈 말이다.” 7. 그 씩씩한 말들은 나가서 온 세상을 순찰하라는 명령을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8. 그 천사가 나를 부르며 일러 주었다. “자, 보아라. 북녘 땅으로 나갈 말들이 주의 영을 모시고 북녘 땅으로 떠난다.”

요약

새교회를 위한 교리들은 사랑과 이타애로부터 끌려 나와 진다는 것, 이 교회는 영적 진리에 무지하나 마음씨 고운 각 사람들로부터 형성되어진다는 데 대한 예언이다.

병거들

네 병거가 환상 가운데서 보여졌다. 모든 수송 수단(vehicle)은 인간이 이용하기 위해 만들어져 있는 것이고 인간을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 수송 수단은 실제로 사용될 수 있게 진리를 놓는 것, 즉 진리를 서술의 형체로 바꾼 것인 바, 교리들을 표현하게 된다. 시편 20편 7절을 보면 이렇게 말하고 있다. “누구는 병거를 믿고, 또 누구는 기마를 믿지만 우리만은 우리 하느님 야훼의 이름을 믿사옵니다.” 병거를 신뢰한다는 것은 교리에 신뢰를 둔다는 것이고, 말을 신뢰한다는 것은 인간 자신의 자연적인 이해성에 의존한다는 것이며, 주님의 이름을 기억한다는 것은 자신의 가르침과 지도를 위해 주님을 신뢰한다는 뜻이다.
네 병거가 있고, 각각은 네 방위 동, 서, 남 그리고 북쪽으로 여행하리라고 예상되어 있는데, 그 의미는 뒤에서 살피겠다.

놋쇠로 된 산들

이 병거들은 두 산 사이로부터 출현했다. 땅보다 높은 위치에 있는 산이란, 인간 마음속에 있는 원리 중에서 가장 높은 원리들을 표현한다. 이 가장 높은 원리란 사랑의 원리, 특별히 주님을 사랑함이 자신의 원리가 되어 있는 것을 표현한다. 사랑은 선한 모든 것의 근원이다.
본문에는 두 개의 산이 있는데, 이는 서로 구별되는 사랑의 두 형체, 즉 주님을 사랑함과 이웃을 향한 사랑을 표현하는 것이다.
이 산들은 놋쇠(brass)로 된 산이었다. 놋쇠는 다각도로 사용되는 기초 금속류이나 귀금속인 금이나 은에 비해 그 가치는 훨씬 낮다. 놋쇠는 자연적 선함, 실생활에 있는 선, 자연적 마음속의 선을 표현한다. 이 선은 금으로 표현되는 천적 선과 은으로 표현되는 영적 선과 등차가 다른 선이다. 따라서 놋쇠로 된 산들이란 주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과 관련을 갖는 자연적 삶 속에 있는 선함, 즉 자연적 선함을 표현한다. 그래서 병거들이 놋쇠로 된 두 산 사이에서 나왔다는 사실은 주님으로부터 파견된 교리들은 자연적 인간이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는데 사용할 수 있는 수준의 선함, 즉 자연적 선함의 정신적 평면에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산에서 흘러내려 계곡을 비옥하게 하는 물의 흐름같이 일상 생활 속에서 실제 사용되는 진리는 우리의 자연적 행동 지침을 선한 질서 속에 있게 하는데, 이 진리는 사랑의 가장 높은 산으로부터 흘러내리고 주님과 하나 되고자 하는 가장 심오한 바램, 그리고 동료들과도 가장 좋은 유대 관계가 있어지게 해준다. 만인의 사용을 위해 모세가 높은 산으로부터 십계명을 받아 들고 내려 왔다는 것이 위의 말을 예증해 줄 것이다. 시련과 시험 속에 있는 거듭 나아가는 사람들이 신성한 인도의 필요성을 인식하게 될 때, 다윗처럼 이렇게 노래하리라. “이 산 저 산 쳐다본다. 도움이 어디에서 오는가? 하늘과 땅을 만드신 분, 야훼에게서 나의 구원은 오는구나” (시편 121:1,2).

말들

병거는 말에 의해 끌려진다. 말은 인간의 지적인 원리, 이해성, 특별히 신성한 말씀에 관한 인간의 이해성을 표현한다. 에제키엘 39장 17, 20절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너 사람아, 주 야훼가 말한다. 내가 이스라엘의 산에 제물을 잡아 큰 잔치를 벌여 놓았으니, 너희는 사방에서 몰려 와 제물인 고기를 먹고 피를 마셔라… 너희는 내가 차려 놓은 잔칫상에서 말과 기병과 용사와 그 밖의 군인들의 살코기를 배불리 먹어라.” 이와 비슷한 잔치가 계시록 19장에서도 선포되고 있다. 이런 모든 사항들은 주님의 말씀 속에 있는 진리와 교리 등등에 관한 영적 잔치를 상징화하고 있다.
본문에서 말이 끄는 병거란, 신성한 말씀에 관한 지식을 수단으로, 그리고 이해성의 품질 수준에 따라 인간의 이해성에 의해 끌려지는 교회의 교리를 표현한다.

색깔들

각기 다른 조건과 품질의 인간 이해성이 여러 가지 색깔인 빨강, 검정, 흰 그리고 회색(gray, bay)으로 표현되어져 있다. 빨간 색은 사랑과 선함에 관한 색이다. 그 이유가 선함은 행동에 있는 사랑이기 때문이다. 붉은 말은 사랑 또는 선함이라는 측면에서의 이해성에 관한 속성 또는 품질을 표현한다. 맨 먼저, 병거가 붉은 말에 이끌려지는데, 이는 새교회가 형성되는 초기 단계에서의 마음의 조건을 표현한다. 그 이유는 교리가 선포되는 가운데서 진리의 품질이나 그 수준은 진리에 도움을 얻는 사람들의 상태와 언제나 부응되기 때문이다. 신성한 진리는 모든 등차 속에 존재하므로 그 진리는 인간 마음의 모든 국면에 도달된다. 그러나 세부적인 측면에서 인간에 도달되는 진리는 현재 그 인간의 정신적 열림의 수준이나 등차에 국한되어진다. 이런 이유로 해서 붉은 말로 이끌리는 병거는 자연적인 선함이나 사랑 가운데 있기는 하지만 아직 영적 진리에 관한 지식이 없는 사람들에게 도달되도록 주어지는 교리들을 표현한다. 그 이유를 넓은 측면에서 볼 때, 새 교회는 초기 기독교회의 남은 조각들로부터 형성되지 않고 이방인의 세계, 즉 초기 기독교회의 교리들로 특별하게 훈육되지 않고, 단지 단순하게 신실한 마음이 선한 이들로부터 형성되기 때문이다.
검은 색이란 정신적인 어두움, 진리에 무지함, 예를 들면 글자대로의 외적 방법으로 모든 것을 찾아내려는 사람들의 마음들을 표현한다.
흰색은 진리의 빛, 또는 깨끗한 순수성을 표현한다. 흰 말은 신성한 말씀에 관한 이해성을 표현하는데, 인간 마음이 진리에 관한 어떤 지식을 획득하여 이해성이 빛이 날 때를 말한다. 계시록 19장 11, 13, 14절을 보면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나는 또 하늘이 열려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거기에는 흰 말이 있었고 ‘신의’와 ‘진실’이라는 이름을 가진 분이 그 위에 타고 계셨습니다… 그분은 피에 젖은 옷을 입으셨고 그분의 이름은 ‘하느님의 말씀’이라 하였습니다. 그리고 하늘의 군대가 희고 깨끗한 모시옷을 입고 흰 말을 타고 그분을 뒤따르고 있었습니다.”
점박이 또는 회색은 흰색과 검은 색의 혼합이다. 따라서 점박이 말이란 무지한 듯 하면서도 약간의 진리를 알고 있는 것, 즉 지식 측면이 희미한 상태의 이해성을 표현한다.

씩씩함 (strong, bay)

본문에서는 씩씩한 말(bay horse, 적갈색 말) 역시 보여주고 있다. “bay”로 번역되는 히브리 단어는 “짙은 빨강, deep red” 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이 색은 창백함을 암시하기 보다 오히려 “강함”을 나타내는데 많이 사용되어지고 있다. 한국어 번역 성경의 경우, “씩씩함” “건장함”으로 번역되고 있다. 본문의 씩씩한 말(bay horse)의 색깔은 적갈색(reddish brown), 밤색(chestnut color)이다. 이 단어가 색깔 측면에서 오늘 본문과 같이 사용되는 곳이 성경 내에 더 이상 없기 때문에 우리는 비교 생각할 기회를 갖지 못하나. “건장함, strong”으로 사용되는 예를 한군데 읽어보면 다음과 같다. “나를 미워하는 억센(강한) 원수들, 내 힘으로는 당해 낼 수 없는 것들 손에서 나를 건져 주셨다” (시편 18:17).
적갈색(reddish brown)은 활력 있는 건강한 색깔로 여겼는 듯 추정된다. 이 색을 강건함(strength)으로 여긴 것은 이 단어의 표현적 의미와도 일치된다. 적갈색 말(건장한 말)이란 악과 거짓에 저항할 수 있을 만큼 충분한 지식이 있는 인간 이해성의 상태, 그래서 진리의 힘이 아주 강한 인간 마음의 상태를 표현한다.
색깔이 다른 말들에 관한 언급은 즈가리야서와 계시록 모두 유사하게 기록되고 있다.

네 영 (또는 네 바람)

“나리, 이것이 무엇입니까?”라고 예언자가 병거와 말들에 관해 묻자, “이 네 병거는 하늘의 영들이다. 이 영들은 온 천하의 주님을 들어가 뵈옵고 이제 막 나와 사방으로 떠나는 길이다”라고 대답해 주었다. “영”은 “바람”이라고도 번역하고 있는데, 그 이유가 히브리어나 그리스어에서 단어 하나가 바람, 숨, 영을 다 말하고 있기 때문에, 그런 이유로 정확한 의미는 알기 곤란하게 되어 있다. 어떻게 말해졌던지간에 이 말들은 인간이 지닌 각자의 정신적 수준에 의거한 필요성에 맞춰 인간에게 뻗쳐 나가는 신성의 영향력을 표현한다. 왜냐하면 이 말들은 온 천하의 주님 앞에 서 있는 데로부터 사방으로 뻗쳐 나가기 때문이다. 온 천하란 모든 각 교회 속의 하느님이다. 시편 104편 3절에서 주님에 관해 이렇게 노래한다. “…구름으로 병거를 삼으시고, 바람 날개를 타고 다니시며…”
글자대로 읽을 경우, 지상의 네 방위를 언급하는 듯 여겨진다. 그러나 그 영적 의미는 인간에게로 나가 각 인간의 생각과 삶의 각 등차에 도달되는 네겹(fourfold)으로 된 주님의 영향력을 언급하고 있다. 이런 이유로 요한의 환상에서 보여준 거룩한 성에도 네 면이 있었다. 이 성은 천국에서 내려와서 새교회를 받을 각자의 능력에 따라 인간 마음에 닿게 되는 새교회를 표현하고 있다.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에게 분명히 말하신 것은, 그들은 자신들의 악한 인격 때문에 하늘 나라를 차단시키고 있다는 것, 그러나 교회는 이방인들로부터 형성될 것이라고, 즉 “사방에서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어 하느님 나라의 잔치에 참석할 것이다” (누가복음 13:29). 그래서 어린 양이 큰 책의 봉인을 뗄 때, 각 색깔의 말들이 요한에게 보여졌다. 큰 책이란 하느님의 말씀이요, 어린 양이 봉인을 떼셨다는 것은 주님께서 성경의 내적인 영적 의미를 밝히 보여주셨다는 것, 그 속의 진리가 인간에게 뻗쳐 나가 이 진리를 받고 싶어하는 각종 인간 국면에 도달된다는 말이다.

영적 네 방위

넓은 의미에서 태양이 떠오르는 동쪽은 주님을 표현한다. 그 이유는 태양이 그분을 표현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를 인간에 관련해서 생각해 보면, 동쪽은 주님에 대한 사랑, 이 사랑의 결과가 인간의 심정 속에 있는 선함을 표현한다. 그래서 누군가가 주님을 영적으로 사랑하며 산다고 할 때, 그는 동쪽에 거주한다고 말해진다. 이 동쪽과 반대 위치에 있는 서쪽은 동쪽이 내적이고 영적인데 비해 외적인 자연적 사랑의 상태를 표현한다. 태양이 정오에 있을 때가 남쪽에 해당되는데, 이 때가 가장 많은 빛이 비치는 바, 남쪽은 영적 총명을 표현한다. 남쪽에 반대되는 북쪽은 자연적 마음 수준이 갖는 총명, 영적 진리보다는 자연적 진리를 붙잡고 있는 상태, 다시 말해 자연적 마음의 관점에서 보여지는 진리의 국면들을 표현한다. 비교적 측면에서 볼 때, 북쪽과 서쪽은 성경의 글자에서 보여지는 바대로 사랑을 표현하고 있고, 그 반면 남쪽과 동쪽은 신성한 말씀 속의 영적 의미에서 보여지는 진리와 사랑을 표현한다.
각기 다른 색깔의 말들이 각기 다른 방향으로 가도록 본문은 임무를 부여하고 있다. 먼저, 검은 말은 북쪽으로 갔는데, 그 뒤를 흰 말이 따르고 있다 (개역 성경 참조). 북쪽은 마음이 차고 어두운 상태를 표현한다. 이 상태는 자연적인 사랑 안에 있을 때이고, 진리에 관한 빛이 희미할 때이다. 이런 마음의 상태를 검정이 표현하는 바, 이는 영적인 북쪽과 부합되어 진다. 북녘을 향해 검은 말이 간다는 것은 마음이 선하지만 무지해 있는 이들, 마지막으로 새교회 안으로 들어와질 이방인들에게 신성한 말씀에 관한 글자를 소개한다는 뜻이다. 이렇게 소개받은 뒤, 그들이 말씀을 받을 준비가 될 때, 그들에게 더 큰 진리의 빛을 보내신다는 것이 본문에서 검은 말 뒤를 이어 흰 말이 나가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 이리하여 이방인들이 신성한 말씀에 관한 글자를 받고, 그 글자에 있는 법대로 자신의 행동을 굳혔을 경우, 그들은 자기들 정신적 상태와 행동에 적절한 진리의 더 높은 형체들에 그들 마음이 열릴 준비가 되어 있게 된다.
점박이(grizzled, 회색, gray) 말들은 남녘으로 갔다. 이 말들은 검정 말이 표현하는 진리의 빛보다 더 많은 빛을 가진 마음의 상태를 표현한다. 그래서 그들은 진리에 대한 이해와 지적인 지식을 가지고 이방인들과 교통할 수 있다.
적갈색 말(또는 씩씩한 말)들은 “나가서 온 세상을 순찰하라”고 명령되고 있다. 다시 말해 그들의 영향을 더욱 폭넓게 미치도록 하라는 말이다. 비교 측면에서 볼 때 하늘이 정신적인 천국, 영적 마음을 표현하는데 반해, 땅(earth)은 인간 속의 자연적 마음을 표현한다. 이런 측면에서 볼 때, 땅을 두루 다녀라(순찰하라)는 것은 신성한 진리가 자연적 마음에 도달하여 인간이 지닌 악에 대한 자연적 경향성에 저항하면서 주님의 이름으로 신성한 진리의 빛 속에서 자기 속의 악을 극복하게 하는 목적을 수행해 가는 것, 더불어 그분의 강함만이 인간을 감각적인 조건에서 영적 조건에로 바뀌게 할 수 있음을 확연히 인정할 수 있게 우리를 도우신다는 것을 말한다.

“내 영을 가라앉혔다 (quiet my spirit)”

본문은 다음과 같은 독특한 표현으로 끝맺고 있다. “보라 북녘 땅으로 나간 자들이 북녘 땅에서 내 영을 잠잠하게 했다. Behold. these that go toward North country have quieted My Spirit in the North country.” 이를 글자대로 말하면, “…내 영을 쉬게 했다. Have caused my Spirit to rest in the North country.” 주님의 영, 그 영은 바로 주님 자신이신데, 병거나 말들을 수단으로 주님의 영 안에서 어떤 다른 것을 만들게 하리라고 생각될 수도 있겠지만 전혀 타당치 않다. 그러나 본문에 언급되는 상황은 주님의 영을 향한 태도를 유발하게 하는 마음의 상태를 뜻한다. 표현적 측면에서 볼 때, 인간이 자기 속에서 자기를 거듭나게 해주시려고 역사 하시는 주님의 영에 반대하여 더 이상 투쟁하지 않게 될 때, 주님의 영은 쉬시고, 잠잠해지신다. 거듭나는 인간의 상호적인 사랑(mutual love)이 신성한 사랑을 위해 거처할 장소를 제공할 경우, 주님은 그 사람 속에서 안식하신다. 만물의 창조 후에 이어진 안식일(The Sabbath, rest)은 창조하시므로 몹시 피로해지신 창조주가 피로를 회복하시려고 정해 놓은 안식일이 아니다. 안식일은 인간 거듭남의 영적인 조건을 표현해 놓으신 것이고, 그 조건을 갖춘 심정 속, 즉 평화와 사랑 속에서 주님은 쉬실 수 있으셨던 것이다. 이런 인간 조건에 대한 주님의 말씀을 찾아보자. “너를 구해 내신 용사 네 하느님 야훼께서 네 안에 계신다. 너를 보고 기뻐 반색하시리니 사랑도 새삼스러워라. 명절이라도 된 듯 기쁘게 더덩실 춤을 추시리라” (스바니야 3:17). “야훼께서 너를 너그럽게 대하셨으니 내 영혼아, 너 이제 평안히 쉬어라” (시편 116:7).
이렇게 되는 조건은 “북녘 땅에서” 발생된다. 즉 이방인들, 주님의 말씀이 없는 자, 무지 가운데 있었던 이들 사이에서 일어나 신성한 말씀을 수단으로 새교회는 형성되어질 것이다. 먼저 신성한 말씀의 글자를 수단으로, 후에 그 글자를 바탕으로 한 영적 의미 속에서 형성된다. 조금씩 조금씩 우리의 주님은 천상 천하의 영원한 교회, 그분의 새 예루살렘을 건설하신다. 아마도 형체에서는 다양하겠지만 사랑과 진리에서는 하나인 교회를 건설하신다. 다음의 구절로 위의 말을 더 되새겨 보자. “축제 기분에 들뜬 우리 마을, 시온을 보아라! 네 눈은 아늑한 보금자리, 옮겨지지 않을 천막, 예루살렘을 보리라. 그 말뚝이 다시는 뽑히지 아니하고 그 줄 하나도 끊어지지 아니하리라. 거기에서 넓은 강이 여러 줄기로 흐르지 아니하고 야훼께로부터 한 시내가 흘러 우리의 기쁨이 되리라… 우리를 재판하는 이는 야훼, 우리의 법을 세우는 이도 야훼, 우리를 다스리는 왕도 야훼, 그분만이 우리를 구원하신다” (이사야 33:20-22).

여인과 에바

여인과 에바

성서 본문: 스가랴(즈가리야) 5장 5-11절

5. 나와 말하던 그 천사가 나서서 말하였다. “저기 나타나는 것이 무엇인지 눈을 똑바로 뜨고 보아라.” 6. 내가 “저것이 무엇입니까?” 하고 묻자 그가 대답하였다. “저기 나타나는 것은 말이다. 저 말 속에는 온 땅에 가득한 죄악이 담겨 있다.” 7. 그러자, 납으로 된 뚜껑이 열리면서, 그 큰 말 속에 한 여인의 앉아 있는 모습이 보였다. 8. 그는 “몹쓸 것”이라고 하면서 그 여인을 말 속에 틀어 넣고 납뚜겅을 도로 덮었다. 9. 다시 고개를 들어 보니, 두 여인이 나타나서 황새 날개 같은 날개로 바람을 일으키며 그 말을 공중으로 들어 올려 날아 가고 있었다. 10. 내가 나와 말하던 그 천사에게 “저 여인들은 그 말을 어디로 가지고 갑니까?” 하고 묻자 11. 그는 나에게 이렇게 일러 주었다. “그가 있을 신전을 시날 땅에 짓고 받침대를 마련하여 그 위에 모시려고 갔다.”

개요

악한 사랑으로 속을 채운 유대교회가 자기들의 선함을 뒤집고, 더 나아가 신성한 진리까지 모독하여 완전히 뒤집힌 교회가 되는 것을 본문은 밝히 알려 준다.

에바

에바란 이스라엘 후손들이 사용한 가장 큰 측량치로서 마른 것을 측량할 때 사용되었다. 오늘날의 1 부쉘(bushel), 또는 1 말 정도일 것이다. 고체(solid)는 선함에 관한 것을, 액체(liquid)는 진리에 관한 것을 표현하는 바, 고체(마른 것)의 측량치는 선함의 품질, 또는 선함의 품질을 테스트하는 것을 표현한다. 따라서 넓은 의미에서 에바는 선함을 표현하고 있다. 이 선함이 실제 사용되고 있을 때 “저기 나타나는 것…” 이라고 본문에서 말해지는 것이다.
천사가 말하는 에바에 관해서 개역 성경은 “This is their resemblance through all the earth, 온 땅에 가득한 죄악이 담겨있다.” 다른 번역의 경우, “그것은 온 땅에 가득한 죄악을 나타내는 것…” 등등으로 번역되나, 히브리어를 글자대로 말한다면, “This is their eye through all the earth, 이것은 온 땅에 가득한 그들의 눈이다”일 것이다. 눈이란 이해성, 또는 지성으로 이 눈이 마음의 눈이요, 이 눈으로 정신적인 것들이 총명하게 보여지게 된다. 에바라고 본문이 언급한데 대해서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기를, 이는 통상적인 측량치 정도로 간주하기 쉽다. 그러나 영적으로 보건대, 이는 교회 안에서의 자연적 선에 관한 통상적인 종류들, 예를 들면, 경건함이나 헌신 등과 같은 바깥쪽 행동으로 측량되는 선함을 표현한다.

이 에바는 납뚜껑을 가지고 있다. 기초 금속으로서의 납은 아주 낮은 수준의 선함, 즉 물질에 속한 선, 자연적 감각에 알려진 선, 즉 감각적인 선을 말한다. 이 납 뚜껑은 “한 달란트, a talent of lead”이라고 말해지고 있다. 히브리인에게 있어서의 달란트라는 무게 단위는 매우 무거운 측량치에 사용되었는데, 이는 어느 시대에서나 정확히 일치해 온 것은 아니다. 그러나 현대의 무게로 볼 때 100파운드(pound)쯤 될 것이라 본다. 금 한 달란트나 은 한 달란트는 큰 액수가 요구되는 큰 공사나 사업에 사용되는 액수이었다. 마태복음 25장 14-30절의 달란트의 비유에서, 우리는 달란트라는 용어의 사용에 관한 예를 찾아볼 수 있다. 화폐 가치로 사용된 달란트는 진리나 선함에 관한 지식을 표현한다. 왜냐 하면, 돈처럼 지식도 어떤 것을 획득하는 수단일 뿐이기 때문이다. 이 큰 덩치의 납뚜껑이 물질적(육적)이고 감각적인 선함을 표현했는데, 그 뚜껑이 납 한 달란트였다는 사실이 육적인 선함에 형태를 주는 지식임을 암시해 주고 있다. 에바(말) 속에 든 것이 폭로 되도록 이 납뚜껑이 들리웠다(열려졌다).

여인

뚜껑이 열려지자, 에바 속에 든 내용물은 여인이었다. 여인이란, 개개인의 인격에 따른 선과 악, 또는 애정 측면의 삶을 표현한다. 본문의 경우, 거꾸로 되어 버린 교회가 그려지고 있으므로, 여인은 악을 사랑함을 표현했다. 이 사실이 뒷받침되도록 천사가 그 여인에 대해 “몹쓸 것, 사악함, wickedness, 글자대로 보면 악”이라고 말했다. 이 악한 여인은 썩어진 교회에 대한 일반적 모습을 표현한 것이다. 에바는 자연적 선, 즉 외적 행동에 있는 선을 표현했고, 여인은 심정 안에 있는 악, 교회를 구성하는 이들의 경건함이나 헌신이라는 외적 선함 내에 거주하고 있는 악을 사랑함을 표현했다. 유대 교회, 비록 그들이 아직까지는 교회 예배의 형식을 엄격히 준수해 가고 있다 해도, 그들의 심정은 온갖 종류의 악 속에 몰입되어 있었다는 말이다.
위와 같은 모습에 대해 “위선자, 바리사이파인과 율법학자”라고 예수님께서 질타하시었음을 우리는 기억한다. 그리고 주님은 다음과 같은 구절로 그들 국가의 일반적 모습을 표현하셨다. “너희는 겉은 그럴싸해 보이지만 그 속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썩은 것이 가득 차 있는 회칠한 무덤 같다” (마태복음 23:27). 이 서술은 외형상으로는 경건하게 열심히 고백하는 중에 있다 해도 유대인들의 속은 악한 속성으로 가득 차 있음을 폭로하는 것이다. 이것이 에바 속에 든 악한 여인으로 상징화된 의미인 것이다.
여인이 에바 속에 “앉아 있다”는 것은 그 여자가 위와 같은 악 속에 자신을 고정시켰다는 말이다. 그 이유가 “앉음”이란 어느 정도 항구적인 자세를 표현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자세는 어떤 조건에서 안일함을 갖고 있어 마음이 변하는 이동하는 상태인 서 있는 것과 대비를 이룬다. 여인이 “에바 속에” 있었다는 것은 그 여자가 그와 같은 조건으로 확실하게, 통째로 고정되었음을 의미한다.

덮음

천사가 예언자에게 여인을 보여준 뒤, 그는 여인을 에바 속으로 틀어넣고 납뚜껑을 도로 덮었다. 이런 행동이 나타내 주는 것은, 여인으로 표현된 유대교회가 외적인 경건과 헌신이라는 선함을 유지했으면서도 그들 심정으로는 악을 확증하여 고정시켰다는 것, 이런 악들은 감각적이고 육적인 선으로 덮어져야 한다는 것, 그리하여 이런 심정의 소유자들은 자기들 종교를 육적인 선 속에 놓았다는 것이다. 행동에 있는 선을 심정에 있는 악과 결합시키는 것은 선함의 모독을 성립시킨다.
천사가 에바를 닫을 때, 말해진 것은 “…납뚜껑을 도로 덮었다. He cast the weight upon the mouth”이다. 이를 히브리어 글자대로 말한다면, “납 같은 돌, stone of lead”로 덮었다이다. 고대 시대 때의 무게, 중량(weight)은 종종 돌로 표현했다. 그래서 중량이 흔히 돌로 불리웠는데, 오늘날의 경우, 영국에서는 14파운드를 돌 하나(a stone)로 일컫는다. 돌이란 자연적 평면에서의 진리, 자연적 진리를 표현한다. 그러나 나쁜 의미로 사용될 경우, 돌은 거짓으로 왜곡된 자연적 진리를 표현해 준다. 이리하여 “납 같은 돌”이란 감각적인 거짓을 의미하고, 이 의미는 감각적인 악을 표현하는 납과 일치를 이루게 된다.

두 여인

에바가 닫힌 후, 두 여인이 나타나 에바를 들어 운반했다. 여인은 애정을 표현하는 바, 두 여인은 다른 교회들에 존재하는 애정, 그 교회의 다른 조건, 에바 속의 여인으로 표현된 유대교회의 악한 인격을 지각했다는 것을 표현한다. 그래서 그들은 그들 사이에서 에바 속의 여인이 사라지도록 주님의 지휘를 받아 다른 교회들을 오염시키지 않은 채 그 자체 스스로 존재 될 수 있는 곳에 던져지도록 섭리되고 있다. 그 이유가, 이방인 교회의 일부는 비록 그 교회가 진리에 무지해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그들은 단순한 심정으로 주님을 모셔 보려 하는 태도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그들이 오염되어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이 교회들이 지닌 자연적인 선한 애정들이 유대인 속에 든 위선을 인식하도록 허용하심으로 그것이 죄악임을 알고 거절하게 하여 그 악의 오염에서 보호되어 져야 했다는 말이다. 여인이 둘이라는 말은 그들의 선한 자연적 애정들이 하나 된 상태에 있음을 표현하기 위한 것이다. 개인 측면에서 볼 때, 우리의 선한 자연적 애정들이 우리가 알고 있는 진리와 하나를 이룰 때 위선적인 경건함 따위는 노출되어 알게 됨으로서 주님이 그런 죄악에서 우리를 보호하시게 된다.

날개

이 여인들은 “날개”를 가지고 있었다. 날개, 이는 새의 팔인 바, 힘을 표현하는데, 그 이유가 새들이 힘을 발휘하는 중요한 수단이 날개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새는 우리의 생각(사고)을 표현하고, 날개는 사고하는 힘을 표현한다. 그리고 날아간다는 것은 사고력을 사용하는 것이다. 위선적인 경건이라는 악령을 사라지게 하는 것은 우리의 날개를 잘 사용함으로 가능해진다. 즉 사고력의 사용은 악한 여인이 들어앉은 에바를 들어 올려 날아가는 것으로 표현되고 있다.
두 여인이 “황새 같은 날개”를 가졌다는 것을 글자대로 생각하면, 그들의 날개는 길고, 강해서 더 세차게 공기를 차면서 빠르게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을 뜻한다. 황새는 자연적 생각을 표현하는데, 이 생각은 계속적으로 힘있게 생각해 갈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바람

두 여인에 관해 말해질 때, 그들에게 황새 같은 날개가 있어 “바람을 일으켰다”고 말해지고 있다. 개역 성경을 참조하면 “…그 날개에 바람이 있더라. The wind was in their wings”라고 말하고 있다. 이는 날개가 바람을 이용하는데 대해 풍자적으로 말한 것이다. 그러나 이를 영적으로 보면 그 의미는 보다 더 심오해진다. 신체적 특징을 가지고 바람을 일으키는 것, 그럼으로 해서 필요한 목적을 성취시키는 것은 신성한 섭리의 역사, 특별히 신성한 진리를 인간 마음에 흘려 보내심으로 인간을 거듭나게 하는 역사를 표현한다. 사람을 창조하는 기록, 창세기 2장 7절에서, “여호와 하느님께서 진흙으로 사람을 빚어 만드시고 코에 입김을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되어 숨을 쉬었다”라고 말해지고 있다. 바람, 숨, 영으로 번역되는 히브리 단어는 모두 같은 어원에서 출발하고 있다.

시날 땅

두 여인은 에바에 든 여인을 시날 땅으로 운반해서, 거기에 그녀가 있을 집을 지어 그녀의 “처소 (받침대, base)”로 삼게 했다. 시날 땅은 갈대아 또는 바빌로니아에 관한 고대 이름인데, 이에 관해서는 창세기 10장 10절에서 “힘센 사냥꾼 니므롯”을 거론하면서, “그의 나라는 시날 지방인 바벨과 에렉과 아깟과 갈네에서 시작되었다.” 그리고 노아의 후손에 관해서 말해지는 바, “사람들은 동쪽에서 옮아오다가 시날 지방 한 들판에 이르러 거기 자리잡고는…”(창세기 11:2)라고 언급되고 있는 바, 거기서 그들은 바벨이라는 큰 탑을 짓기 시작했다.
시날 땅이란, 심정이 악과 결합되어 있어 모든 선함과 진리를 모독해 버리면서도 외형으로는 예배 속에 있는 상태를 표현한다. 예를 들면, 헌신적인 외적 경건함을 유지해 간다면 그리스도의 “대속, Vicarious Sacrifice”에 의해 하느님의 진노로부터 구원된다고 믿는 이들, 이런 구원을 위해서 악에서 선으로의 인격 변화인 회개와 개혁 그리고 거듭남을 간절히 바래고 노력하는 주님과의 협력 관계는 꼭 요구되는 것은 아니다고 믿는 식이 이에 해당될 것이다.
이 에바에 앉은 여인이 시날 땅으로 운반되었다는 것은 위선적 경건함, 심정이 악으로 차 있는 교회를 분리시켜 제거함으로서 교회의 다른 형체와 섞이거나 혼돈 되지 않도록 하고, 그것은 그 자체대로 있으면서 자신의 운명을 채워야 한다는데 대한 표현적 그림이다.
시날 땅에 그런 교회를 위해 집이 지어질 것이라고 했다. 이 집이란 인간의 고향, 즉 인간이 각자 거주하는 고향이다. 이 고향이란 각 개인이 독자적으로만 거주하는 곳, 자기 내면에 있는 의지이다. 이러므로 악한 여인이 사라지면서 멀리 떨어진 곳에 그 여인을 위한 집이 지어져 그곳에 안착한다는 것은 위선적인 선함이 분리되고, 그것 자체는 그것과 품질이 같은 생김새가 그 악 자체를 위한 기초(받침대)가 된다는 말이다.

예언

글자대로 생각해 본다면, 본문은 예루살렘의 파멸, 그리고 유대인 국가가 파괴될 것이라는데 대한 예언이라고 생각될 것이다. 사실 이런 예언은 로마가 유대 땅을 정복함으로 곧바로 실현되었기도 하다. 그러나 영적으로 생각한다면, 본문은 유대인에게 내려졌던 처방(dispensation) 위에 있을 심판, 더불어 모든 시대, 만민, 각 개인의 마음이 본문의 의미와 같을 경우, 그 마음 위에 내려질 심판을 묘사해 놓고 있다.
하나의 처방전으로 볼 때 유대교회는 오래 전 자신들의 악들로 인해 끝장을 보았다. 교회에 있어 온 각 개인은 아직 존재하고, 그 조직 역시 흐트러진 파편같이 되었지만 여전히 존재하고는 있다. 그러나 여러 세기를 걸치면서, 유대인은 기독교 국가들 사이에서 종교적으로 내쫓겼다. 유대인의 일부, 아마 많은 이들이 아직도 옛 이스라엘의 회복, 예루살렘으로의 귀환이라는 예언이 글자대로 성취되기를 기대하고 있을는지 모른다. 이런 성경의 예언 성취는 결코 있지 않는다. 성경의 예언들은 영적으로 성취되나 글자적으로는 꼭 일치하지 않는다. 글자적 성취가 있다면 그것은 영적 성취의 결과인 것뿐이다. 이 예언들이 의미하는 것들의 마지막 목적은 유대인들이 아니라, 새로워진 교회, 거듭나는 주님의 교회, 새 예루살렘을 위한 것이고, 이 목적을 향해 고대 예루살렘이나 그 백성들은 단지 글자로서, 비유적인 표현으로 존재할 뿐이다. 마치 육체적 삶이 정신적 삶의 상징물인 것과 같은 것이다.
교회의 매 단계, 태고교회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악은 주님과 그분의 신성한 선과 진리, 그리고 그분의 섭리를 사랑하는데 실패되도록 작용되어 왔다. 말하자면, 인간은 자기만의 사랑에 집착하고 자신의 능력만을 신뢰함으로서 영적인 사랑과 믿음과 정의를 자신들의 심정과 삶 속에서 파괴했다. 인간의 악과 거짓은 거듭나게 할 수 있는 영적 자유의 상태를 끌고 가, 진리는 왜곡하고 선함의 표준을 뒤집어 놓았다. 그래서 인간들은 자아에서 파생된 관념 속에 상주함으로써 그들이 형식적으로나마 예배한 하느님의 진정한 모든 속성까지 실지로 부정하고 만다. 이런 것들은 영적 시날, 자아 사랑과 위선적 예배라는 정신 상태로 운반되어 진다. 그곳, 노아의 후손이 해 놓은 고대의 모형 속에서 그들은 큰 탑을 쌓되 자신의 자연적 감각을 받침대로 해서 천국까지 도달하게 쌓아 올릴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자아 숭배를 위한 탑은 옛날과도 똑같이 사상에 혼동이 와서 끝장이 나는 바, 영적 사람다움을 이룩해 줄 모든 것들은 사라지고 만다. 다음의 두 예언자의 말에 귀를 기울여 보라. “야훼께서도 아시다시피, 사람이 산다는 것이 제 마음대로 됩니까? 사람이 한 발짝인들 제 힘으로 내디딜 수 있습니까?” (예레미야 10:23). “귀를 기울여 내 소리를 들어라. 정신 차려 내 말을 들어라. 농부가 날마다 밭만 갈겠느냐? 땅을 뒤집고 써레질만 하겠느냐? 땅을 고르고 나서 검정풀씨나 회향초씨를 뿌리지 않겠느냐? 밀과 보리를 심지 않겠느냐? 밭 가장자리에는 쌀보리를 심지 않겠느냐? 이런 농사법을 일러주신 이가 누구냐? 하느님께서 농부에게 가르쳐 주신 것이다. 검정풀씨를 타작기로 떨더냐? 탈곡기를 굴려 회향초를 떨더냐? 검정 풀씨는 막대기로 두드려 떤다. 회향초는 도리깨로 두드려 떤다. 어찌 밀알이 바숴지도록 두드리겠느냐? 아니다, 무작정 두드리지는 않는다. 바숴지기까지 탈곡기를 굴리지는 않는다. 이 생각도 만군의 야훼께서 가르쳐 주신 것이다. 놀라운 계획을 멋지게 이루시는 야훼께서 가르쳐 주신 것이다” (이사야 28:23-29).

날고 있는 두루마리

날고 있는 두루마리

성서 본문: 스가랴(즈가리야) 5장 1-4절

1. 또 내가 고개를 들고 쳐다보니, 두루마리 책 한 권이 날고 있었다. 2. 그가 나에게 무엇이 보이느냐고 묻기에 나는 “스무 자 길이에 나비가 열 자 되는 두루마리 책 한 권이 날고 있는 것이 보입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3. 그러자 그는 나에게 이렇게 일러 주었다. “이것은 온 나라를 휩 쓸 저주이다. 이 두루마리 한 쪽에는 ‘도둑질하는 자들은 다 사라지리라’ 라고 적혀 있다. 4. 이것은 내가 보낸 것이다. 만군의 야훼가 말한다. 남의 것을 훔쳐 먹은 자의 집에도, 내 이름을 팔아 거짓을 옳다고 맹세하며 사기치는 자의 집에도 들어 가 그 집 안에 머물면서 대들보와 돌담까지 다 허물어뜨릴 것이다.”

개요

본문은 교리나 생활면이 완전히 거꾸로 되어 버린 유대교회의 파멸이 임박했음에 대한 표징적 예언이다.

두루마리

예언자에게 보여진 두루마리는 현재와 같이 인쇄나 제본이 발명되기 전에 만들어진 책, 손으로 써서 만든 책이다. 에제키엘이 그의 환상 속에서 이와 같은 책을 보고 이렇게 말했다. “내가 바라보니, 한 손이 나에게 뻗쳐 있는데 그 손에는 두루마리 책이 들려 있었다” (2:9).
책이란 책 안에 씌어 있는 내용에서, 또는 저자의 특질로부터 책의 특성 역시 결정된다. 만일 책의 내용이 진정하다면, 그 책은 내용에 다소 수준의 차이는 있을지라도 진리를 표현할 것이다. 그러나 만일 그 내용이 거짓이라면, 그 책은 거짓을 표현할 것이다. 주님의 말씀이 “책, the book”이라 불리는데, 그 이유는 내용이 신성한 진리들로 채워져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본문에서 언급되는 책은 이스라엘 후손 내의 썩어진 교회의 사람들에 의해 씌어진 것, 자아 사랑에서 튀어나온 왜곡된 원리들을 내포하고 있다. 그래서 이 책, 즉 두루마리는 유대교회 안에 있는 모든 영적 생명을 파괴하는 악한 것뿐인 거짓을 표현하고 있다. 이 두루마리가 날고 있었다는 말은, 이런 거짓이 부패된 교회를 사방으로 다니며 설치어 그나마 마음 안에 남은 모든 선함과 진리를 파괴하고 있다는 말이다.

두루마리의 크기

이 두루마리가 책이라고 볼 때 굉장히 큰 크기였다. 어림잡아 30피트 길이에 폭이 15피트 정도였다. 이같이 책의 크기가 굉장함은 인간 마음 안에 있는 온갖 것을 통해 침투한 거짓 원리의 굉장한 세력을 표현하고 있다. 본문에서 말하는 큐빗(cubit)은 오늘날의 측량치로는 약 18인치 정도이다.
길이는 선함에 관한 측량 또는 품질을, 폭(나비)은 진리에 관한 측량 또는 품질을 표현한다. 본문의 경우 길이는 20큐빗이었다. 숫자로서의 20은 인간 마음 안에 저장된 내면의 원리, 즉 각자의 어린 시절에 주님께서 저장해 두신 것, 그리하여 성년 시절 시험이 올 때 그와 더불어 남아 있게 되는 원리들, 이를 통틀어 “아껴 두신 것들, remains”이라 불리는 것들을 표현하는 숫자이다. 그리고 나비는 10큐빗이었다. 숫자 10은 모든 것, 완성되는 시리즈를 표현하는데, 대표되는 예로서 모든 인간 삶을 위한 법칙인 십계명이 있다. 나비는 진리 측면을 말하는 바, 열 큐빗이란 원리 속의 진리에 관한 것, 즉 두루마리의 모든 특성이다. 그런데 이 두루마리는 선함이 악으로 뒤바뀌고, 진리가 거짓으로 온통 되어 버린 썩을 대로 썩어 거의 죽은 유대교회의 정신적 모습을 표현하고 있다. 또한 이 두루마리는 영적 삶의 수단으로 인간에게 밝혀 주셔 왔던 모든 신성한 원리들이 그 원리를 받았던 인간들에 의해 썩혀지고 영적 죽음으로 변하게 했다는 것, 주님이 축복하시기 위해 인간에게 주셨던 모든 것을 인간들이 저주로 바뀌게 했다는 것도 표현해 준다.

저주

천사가 두루마리의 의미를 예언자에게 설명할 때, “이것은 온 나라를 휩쓸 저주이다”라고 말했다. 이런 경우, 저주란 정죄 또는 처벌의 의미로 사용되는 바, 이는 인간이 거짓되게 맹세한 것, 자기 생각에 거짓이라고 알고 있으면서도 하느님에게는 진리를 증거 하겠다고 할 때 되돌려 받는 대가로 사용되고 있다. 이와 같은 처벌은 시민법에서 흔히 맹세에 붙어 다니는 조항인데, 이는 신성한 법에도 마찬가지이다. 그 이유는 맹세라는 단어의 가치는 언제나 신실함과 신뢰 속에만 절대적으로 존재해야 하는 까닭이다. 어떤 사회 속에 있어야 할 표준 외의 어느 다른 표준이 발생되면, 그것은 공동체 내의 모든 사람의 삶과 자유를 위태롭게 한다. 그래서 책임감 있는 사람들은 맹세의 본성이나 그 중요성을 이해하고 있기 때문에, 만일 의도적인 거짓 맹세를 할 경우, 그 새빨간 거짓말은 필시 시민적이고 영적인 처벌을 당사자에게 반드시 초래한다고 믿는다. “악이 사악한 자를 죽인다.” 그런데 악인에게는 하느님께서 악인에게 곤경을 만들어 주는 듯 여긴다. 예레미야 5장 25절에서, “너희가 이렇게 굴었기 때문에 계절이 순조롭지 못하게 되었다. 너희 죄가, 들어오는 복을 차 버린 것이다.” 이사야 59장 1,2절에서, “야훼의 손이 짧아서 구해 내지 못하시겠느냐? 귀가 어두워서 듣지 못하시겠느냐? 너희가 악해서 너희와 하느님 사이가 갈라진 것이다. 너희가 잘못해서 하느님의 얼굴을 가리워 너희 청을 들으실 수 없게 된 것이다” 라고 말해지고 있다.

지면 (나라, the face of the earth)

저주는 “온 지면(나라)을 휩쓸 저주”라고 말해지고 있다. 온 지면(whole earth)이란 처방이 내려졌었던 온 교회를 표현한다. 그리고 인간 마음속의 천국인 영적 마음과 구별되는 인간 속의 모든 자연적 마음도 표현한다.“ 얼굴(face)은 마음을 표시(index)한다.” 그래서 얼굴은 마음속의 내용물을 표현한다. 악인의 경우, 그가 알고 있는 내용물이란 자연적 마음속에 있는 내용물뿐이다. 그 이유는 그 사람에게는 영적 마음이 닫혀져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저주가 악을 행하는 이들을 “사라지게(cut off)” 할 것이라고 말해지고 있다. 이를 내향적으로 볼 때, 악한 인간이 확증한 거짓 원리들이 주님께로 열려야만 가능해지는 주님에게서 오는 영적 생명의 공급을 그들 속에서 자르게 된다는 말이다.

도둑질

본문에서 특별히 언급하는 악행자의 두 가지는 도둑질하는 자들과 거짓 맹세하는 자들이다. 도둑질이라는 것을 글자대로 생각한다면, 타인에게서 그의 물질적 재산이나 정신적 재산을 불법으로 탈취하는 것이다. 이를 영적으로 보면, 타인에게서 그 사람을 선하고 진정한 원리들, 또는 그의 합리성, 또는 영적 자유를 제거시키는 것이다. 이런 사항 중 어느 하나라도 상대방이 모르게 제거시킨다 해도, 그는 선과 악, 진리와 거짓, 의와 죄에 관한 그 사람의 올바른 감각을 강탈한 것이 된다. 한 마디로 영적 삶의 수단들을 강했다는 말이다. 이를 더 깊은 의미에서 살피면, 악인이 주님을 사랑함과 순종함을 거절할 때, 자기 생명이 주님의 선물임을 인정치 않을 때, 그는 주님으로부터 도둑질하는 것이 된다.
거짓이라는 망측한 저주가 인간의 마음을 쓸고 다닐 때, “도둑질하는 자들은 사라지고 만다.” 즉 이와 같은 거짓은 인간에게 생명을 실어 나를 수 없고, 오로지 죽음만을 가져온다는 말이다. 그 이유가 거짓은 인간의 마음을 주님 안에 있는 영적 생명의 근원에서 자르기 때문이다. 비록 그가 주님의 사랑스러운 초대를 받는다 해도 영적 죽음만을 선호하므로 주님께서 이렇게 말하신다. “너는 생명을 갖기 위해 나에게 오지 않는다.” 영적인 도둑질은 심정으로부터 모든 선을 거둬 가고, 그나마 주님께서 각 인간의 유아 시절에 저장해 두셨던 “아껴 두신 것, remains”까지 파괴한다.

맹세함

본문의 맹세란 거짓 맹세, 맹세 밑에 위증죄가 깔려 있는 허위 맹세임은, 본문 4절에서 “내 이름을 팔아 거짓을 옳다고 맹세하며 사기치는 자…”라는 사실에서 알 수 있다. 단지 맹세한다라든가, 진리를 말한다고 맹세하는 것, 등등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절대 금지되었던 것은 아니다. 그 반면, 맹세는 주님에 의해 성별되어 사제의 임무에서 규율되고 특별화 되었던 것이다. 주님의 이름으로 맹세하는 것은 가장 엄숙한 태도로 가장 높은 권위를 수단으로 확언하는 행위이다. 자신의 신실함이나 진실성을 증언하기 위해 하느님을 찾으면서 유유히 거짓말을 한다면, 우리는 가장 무거운 죄의 하나를 범하게 된다. 영적으로 볼 때, 맹세를 깨트림 속에서 우리는 선과 악, 진리와 거짓을 혼동하게 되어 결국 자신의 영적 합리성과 영적 자유를 파괴한다. 그 이유가 “죄인은 자기 죄에 노예이기” 때문이다. 거짓 맹세함은 주님께서 인간 마음 안에 저장해 두신 진리에 관해 “아껴 두신 것들”을 파괴한다. 그래서 레위기 19장 12절은, “너희는 남을 속일 생각으로 내 이름을 두고 맹세하지 말라. 그것은 나의 이름을 욕되게 하는 것이다”라고 규정하고 있다.
본문에서, 도둑과 거짓 맹세자들은 날고 있는 두루마리, 즉 저주로 사라지게 된다고 말하고 있다. 즉 타락하는 마음속에서 활기치는 거짓의 역사로 사라진다는 말이다. 두루마리에 적힌 서술은 한쪽에 그리고 다른 쪽에도 적혀 있는데, 이는 오른쪽과 왼쪽을 각각 암시하는 바, 심정 속의 선함, 이해성 속의 진리를 모두 제거시킨다는 말이 된다. 오른쪽은 우리의 애정 측면의 본성을, 왼쪽은 우리의 지성 측면의 본성을 표현해 준다.

집, 기타 등등

날고 있는 두루마리, 곧 저주는 “남의 것을 훔쳐먹은 자의 집에도, 내 이름을 팔아 거짓을 옳다고 맹세하며 사기치는 자의 집에도 들어가 그 집안에 머물면서 대들보와 돌담까지 다 허물어뜨릴 것이다”라고 말해지고 있다. 영적으로 보건대, 인간의 집이란 각자의 마음, 특별히 그의 의지, 또는 심정이고, 이곳은 인격의 근본 동기인 통치하는 사랑(ruling love)이 거주하는 곳이다. 날고 있는 두루마리로 표현된 이 거대한 파괴적인 거짓 원리들은 인간의 의지 안으로 들어가서 애정의 영적인 생명까지 살라 버린다. 거짓 맹세자의 정신적인 집 속에서 이 엄청난 거짓들은 그 속에 남은 진리의 모든 형체까지 왜곡시켜 버린다.
본문은 서술하기를, 저주는 대들보(timber)와 돌담(stones)까지 사라지게 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나무로 된 대들보란 모든 인간 삶이 건설되어야 할 자연적 선함을 표현한다. 돌(stone)이란 선한 인간의 정신적인 집의 기초나 벽을 형성해 주는 것, 즉 자연적인 진리를 표현한다. 이와 같은 선함과 진리들이 고정되어진 거짓이라는 저주로 파괴되어지고 만다.

일반적인 표징

오늘 본문에 흐르는 양상을 보면, 두 가지 죄 즉 도둑질과 주님의 이름으로 거짓 맹세하는 것을 열거하면서 이 두 죄를 널리 퍼져 있는 죄악들에 대한 대표되는 격으로 내세워 놓고 있다. 그 이유는 그 두 죄가 십계명의 두 돌판에 반대되는 것, 하나는 하느님과 인간 관계에 대해, 또 하나는 인간 상호 관계에 해당되기 때문이다. 즉 주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일컫는 것은 첫 돌판에 반대되는 죄이고, 도적질하는 것은 둘째 돌판에 있는 율법을 깨트리기 때문이다.
악이나 거짓, 그리고 죄는 어느 인간의 마음속에서도 홀로 거주하는 일이 없다. 악들은 떼지어 돌아다닌다. 그래서 우리가 인간 마음의 소유권을 탈취했다고 여겨지는 어떤 고정되어진 악을 발견한다면, 어디서든지 우리는 타락하는 심정을 발견하고, 그외 다른 악들도 발견하게 되는데, 발견 못한다면 최소한 잠재하고 있다든지, 시작하는 초기에 있다고 보아도 된다. 모든 인간은 인격의 일반적(평균) 수준을 가진다. 그 수준은 선을 향해서도, 악을 향해서도 동등한 수준이다. 또는 일반 수준 아래나 위로 자신의 미덕이든 악덕이든 가지지 못한다. 다시 말해서, 어느 인간도 자기 인격 중 어느 일부만 거듭 나아가고, 일부는 타락된 채 남아 있을 수 없다는 말이다. 그 이유는 거듭남은 부피로 진보되는게 아니라 품질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모든 인간 속에 있는 인격의 일반적인 품질은 그 사람의 마음과 삶의 각 분과에 품격을 주게 된다.
큰 두루마리가 날아다니면서 닥치는 곳마다 파괴하는 모습은 아주 생생하고 강력한 그림을 우리 마음에 남게 한다. 어찌됐든 악과 거짓, 죄악으로 고정되고만 인간 마음속을 날고 있는 참혹한 저주는 존재한다. 이는 인간의 심정과 지성 안에서 형성되어 고착된 죽을 수밖에 없는 저주이다. 우리가 그런 저주를 피할 수 없는 이유는, 우리가 죽게 하는 저주를 형성시켜 주고 먹여 살려 주는 썩은 것을 사랑함 때문이다. 이런 것에서 탈피하는 유일한 방법은 회개와 거듭남밖에 없다. 그러나 그것도 우리의 인격 속에서 악이 고정되기 전 일뿐이다. 그래서 사랑의 하느님이 내리시는 말씀을 경청해야 한다. 그래서 회개치 못하는 심정 속에 확증된 악이 고착되기 전, 즉 자신 스스로 지옥을 만드는 데서 구원하시고자 하는 하느님의 말씀을 경청해야 할 것이다. “일러주어라 ‘내가 맹세한다. 죄인이라고 해도 죽는 것을 나는 기뻐하지 않는다. 주 야훼가 하는 말이다. 죄인이라도 마음을 바로 잡아 버릇을 고치고 사는 것을 나는 기뻐한다. 그러니 너희는 돌아 오라. 나쁜 버릇을 고치고 돌아 오라. 이스라엘 족속아, 어찌하여 너희는 죽으려고 하느냐!’” (에제키엘 33:11). “살고 싶으냐? 악을 버리고 선을 행하여라. 너희의 말대로 만군의 하느님 야훼께서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 (아모스 5:14).

황금 촛대와 올리브나무

황금 촛대와 올리브나무

성서 본문: 스가랴(즈가리야) 4장 1-4절, 11-14절

1. 나와 말을 하던 그 천사가 돌아 와서 나를 흔들어 깨웠다. 잠이 덜 깬 사람처럼 얼떨떨해 하는 나에게, 2. 그가 물었다. “무엇이 보이느냐?” 나는 금으로 만든 등잔대가 보인다고 대답하였다. 그 등잔대 꼭대기엔 그릇이 하나 있고, 그 가장자리로 돌아 가며 심지 주둥이가 하나씩 뚫린 등잔 일곱 개가 붙어 있었다. 3. 그리고, 올리브나무 두 그루가 등잔대 오른쪽과 왼쪽에 하나씩 서 있었다. 4. 나는 나와 말하던 그 천사에게 “나리, 이것들이 무엇입니까?” 하고 물었다.
11.나는 그 천사에게 “그러면 등잔대 오른쪽과 왼쪽에 있는 올리브나무 두 그루는 무엇입니까? 12. 또, 금대롱으로 기름을 대어 주는 올리브나무 가지가 둘 있는데, 그것은 무엇입니까?” 하고 물었다. 13. 그 천사가 그것이 무엇인지 모르겠느냐고 하기에 내가 모르겠다고 대답하자, 14. 그는 이렇게 일러 주었다. “올리브나무 두 그루는 온 세상의 주를 모시도록 기름 부어 성별한 두 사람을 뜻한다.”

개요
이 본문은 천국적 진리를 수단으로 사랑의 선, 즉 주님으로부터 새교회에 있게 될 영적인 빛을 취급하고 있다.

깨어남

자연적인 삶과 영적인 삶은 경험에 있어서 그 수준이 아주 다르다. 육체적 삶에 속한 것들, 눈으로 볼 수 있는 현상, 생각, 일에 종사할 때, 우리는 영적 삶의 현상이나 경험에 대하여는 마치 잠자는 듯한 상태로 있게 된다. 영계는 내면의 세계요, 원인과 생명에 관한 세계이다. 그 반면, 자연계는 영적 원리가 구체화되는 세계요, 그 결과라는 외면의 세계이다. 통상적인 생활, 일상 생활 속에서 우리는 자기 몸 속에서 활동하는 영혼이 있다는 것조차도 인식하지 않는다. 그래서 주님이 인간 영혼의 눈을 갑자기 열리게 하시어 영계를 보도록 허락하시면 그 당사자는 잠자는데서 갑자기 깨어나듯 하면서 자연적 삶의 현상 속에 자기 의식을 새롭게 하게 된다.
이와 비슷한 깨어남이 우리 마음에서도 발생한다. 그 때란, 생각의 감각적 형체로부터 영적 국면으로 건너갈 때, 즉 자연적 마음의 상태만 가지고는 납득하기 어려웠던 원리들을 합리적으로 지각하게 될 때에 발생된다. 이와 같은 일들이 천사가 예언자를 흔들어 깨워 영계에서 진열되는 상징적 표현물을 보도록 하는 것으로 의미되고 있다. 그래서 성경은 인간이 자연적 마음만 지닐 경우 잠자는 상태라고 언급하고, 마음이 영적 진리에로 승강시키도록 불리워질 때, “깨어나라”고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음을 읽어볼 수 있다. “티끌에 거하는 자들아, 깨어 노래하라” (이사야 26:19). “깨어라, 깨어라. 너 시온아, 힘을 내어라 찬란하게 몸을 단장하여라” (이사야 52:1).

황금 촛대

예언자는 황금 촛대와 두 올리브나무를 보았다. 촛대란 등잔대이다. 본문에서 사용되는 히브리어는 빛, 등불을 포함하는 덮개, 초, 횃불 등등에 다 사용되는 일반적 용어이다. 오늘날의 경우, 빛을 언급할 때, 가스, 전기 불, 촛불 등등이라고 말하는 것과 비슷할는지 모른다. 다양하게 사용된 한 예로 다음 구절을 보자. “야훼여 당신은 나의 등불, 내 앞에서 어둠을 몰아 내 주십니다” (사무엘하 22:29). 시편의 경우, “당신은 나의 촛불이십니다. 여호와 나의 하느님이시여, 내 어둠을 밝혀 주소서.”
자연적인 수준의 풍자적 의미에서 본문의 환상은 즈루빠벨의 일들, 성전을 수리하고 새로 설비하는 일에 관련되어 언급하고 있다. 그러나 영적 의미에서 본문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 그리고 인간 마음속에서 영적 교회를 수리하는 그분의 일, 천국의 진리와 생명을 가져다주시는 일을 언급하고 있다. 특별히 이 환상은 천상 천하에 있는 새 예루살렘 교회를 상징하고 있다. 이 교회는 주님으로부터 오는 영적 빛 가운데 존재한다. 특별한 의미로 볼 때, 이 교회는 주님의 성전이시다. 그 안에서 주님은 신성한 인성으로 알려져 예배되어 진다. 신성한 인성은 가장 높은 의미에서 여호와의 성전이시다. 계시록 1장 20절에서, “네가 본 일곱 황금 등경은 일곱 교회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이 등경은 금으로 되어 있다. 금은 주님을 사랑함과 상응된다. 주님을 사랑함이 위의 교회에 존재하고, 그 교민들은 그분의 말씀을 수단으로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의 진리, 진리의 가장 높은 빛을 지각하여 진리를 사용하는 사람들로 구성된다.

그릇, 대롱(주둥이, pipe) 등등

등잔대는 기름을 담은 그릇을 꼭대기에 가졌고 일곱 등잔대는 제각기 대롱을 가지고 그릇 꼭대기에서 기름을 공급받게 되어 있었다.
그릇과 대롱이란 말씀에서 오는 교회의 교리를 표현한다. 이 교리는 그릇과도 같이 진리와 사랑의 선함을 담고 있으면서 영적인 것이 실제 사용될 때 수단으로 이용되는 것이다. 이 그릇이 등잔대의 꼭대기에 있었다는 것은 기름, 즉 천국적 사랑의 근원을 표현하고, 생명의 가장 높은 것들은 주님으로부터만 온다는 것도 표현해 주고 있다.
그 등잔은 일곱이었다. 일곱은 거룩함을 표현한다. 그래서 일곱 등잔이란 말씀을 통해 주님으로부터 오는 교회 속의 거룩한 진리들이다. 그 이유가 가장 높은 의미에서 주님은 거룩함 자체이시기 때문이다. 성막의 등잔에 관한 내용을 읽어보자. “너는 순금으로 등잔대를 만들어라. 한 덩이를 두드려서 밑동아리와 원대를 만들고, 또 두드려서 꽃받침과 꽃잎 모양을 갖춘 잔들이 뻗어나게 하여라… 그리고 등잔 일곱 개를 만들어 앞을 환히 비추도록 등잔대에 올려놓아라” (출애굽기 25:31,37).

등불

넓은 의미로 볼 때, 등은 교리를 의미한다. 교리는 빛처럼 진리를 밝히 드러내게 해준다. 그래서 시편 119편 105절은, “당신의 말씀은 내 발에 등불이요 나의 길에 빛이옵니다” 라고 노래하고 있다. “천하를 살피는 야훼의 눈이다” 라고 불리는 등잔대 위의 일곱 등불은 인간 삶의 모든 것 위에 군림하시어 거룩하게 지키는 주님의 완전한 섭리를 표현한다. 지상의 교회는 각기 등차별로 신성한 진리를 가지되, 그 진리를 전복시키지 않았을 경우, 제각기 “세상의 빛”이다. 최고로 높은 등차에서 볼 때, 주님은 “세상의 빛”이시다. 이런 견지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라고 말하셨기도 하다.

올리브나무

환상 속의 올리브나무는 천적인 교회(the Celestial Church), 주님에 대한 사랑을 원리로 삼는 교회, 동료를 위해서도 천국적 사랑을 포함하는 교회를 뜻한다. 올리브나무의 열매는 몸을 따뜻하게 해주고, 미끈미끈한 기름으로 가득 차 있는 바, 이는 주님의 자녀로서 인간의 사랑 안에서까지 보여지는 주님에 대한 실제적인 사랑을 표현한다.
올리브나무가 두 그루 있었다. 그중 오른쪽은 천적인 사랑을, 왼쪽은 천적인 총명을 표현한다. 그 이유가 오른쪽은 사랑이나 애정을 가지고 있는 의지 또는 심정을, 왼쪽은 생각을 지니는 지성, 또는 이해성을 표현하기 때문이다. 이러므로 두 올리브나무는 사랑과 이타애, 또는 천적 인간의 주님에 대한 사랑과 동료에 대한 사랑을 표현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표현적 측면에서는 사랑의 위 두 가지 품성, 개인이라는 측면에서는 위 두 가지 사랑의 품성으로 다스려지는 사람(person)이다.

이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모르느냐?

환상에서 보여진 것들에 관해 예언자가 천사에게 묻자, 그의 첫 대답은 “이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모르느냐?” 라는 것이었다. 되받아 치는 식의 이 대답은 환상 속에서 두 번씩 있어지고 있다. 당연히 생각될 수 있는 것은, 예언자가 특별히 가르쳐 주지 않고는 모를 것임을 천사가 짐짓 알고 있다는 것일는지 모른다. 그러나 천사의 되받아 친 대답은 예언자의 마음 상태를 더 선명하게 만들므로서, 그의 생각을 끌어내어 그의 마음에 더 확실하게 문제를 고정시켜 주려 의도된 것이다. 이래서 이 예언자가 인간들 가운데 있는 교회들을 표현해 준 격이 된다. 따라서 “이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모르느냐?” 라는 천사의 물음이란, 예언자가 이런 사항들을 알고 있었어야 한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다시 말해 환상 속의 이런 저런 모습은 교회와 더불어 존재한 신성한 말씀 속에 이미 언급되어 있는 것이라서 만일 인간이 거듭나고 계발되는 상태에 있다면 이미 이해되고도 남을 사항들이라는 말이다.
이와 유사한 경우가 요한계시록 7장 13절에서도 언급되고 있다. 거기서 요한이 영계의 표현적 현상을 목격하고 있을 때 원로 중의 하나가 요한에게 물었다. “흰 두루마기를 입은 이 사람들은 도대체 누구이며 또 어디에서 왔습니까?” 이 때 요한은 자기가 본 것을 이해하고 있지는 않았으나 그 사항을 알아보고 싶어서 이렇게 응답했다. “어른께서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러자 천사가 요한에게 가르쳐 주었다. 위와 같은 천사의 물음은 우리의 정신적 의문들, 선함이나 빛에 관한 우리의 물음은 비록 그런 것들이 우리 자신의 행동에서 비롯된 듯 여겨진다 해도 그것은 주님에 의해 부추겨 진 것이라는 위대한 영적 사실을 잘 표현하고 있을는지 모른다. 우리는 모든 것을 자신 스스로로부터 행동한다. 그러나 주님의 사랑과 지혜는 각자의 마음 문이 열린 등차에 따라 흘러 들어와서 더욱 많은 물음이 당사자에게 있도록 하여 영적 삶에 관해 더 많이 이해하려는 노력이 있어지게 하신다. 그럼에도 주님은 우리가 자신 스스로에게서 그런 것들이 발생한 듯 느끼고 생각하는 것도 허용해 주신다. 그리하여 더 높은 인격 달성에 각자 스스로 노력하게 배려하신다.

기름 부음

천사가 예언자를 가르치기를, “올리브나무 두 그루는 온 세상의 주를 모시도록 기름 부어진 두 사람” 이라고 했다. “기름 부어짐”은 올리브 기름으로 부어졌다는 것과 같은 말이다. 그 이유는 올리브 기름은 주님을 사랑함에서 비롯되는 선함과 상응되기 때문이다. 올리브 기름은 이스라엘 교회에서 하느님의 명령에 의해 사용되었고, 그것의 상응은 예언자를 통해 그 교회에 밝히 알려져 있었다. 기름 붓는 것은 아주 다양한 형태에서 이루어져 왔었다. 예를 들면 성막이나 성전에서, 사제들, 예언자나, 왕들, 어떤 맹세의 증거로 삼는 돌들 위에도 부어졌었다. 개인의 경우, 자기의 기쁨과 사랑을 표현하기 위해 스스로 기름을 붓기도 했다. 이 모든 경우에서 부어지는 기름은 사랑을 표현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주님을 모시기 위해 기름 부어지는 이들은 “기름에서 태어남, born of oil”이라고 말해지기도 했다. 다시 말해 주님을 섬기는 사람들은 사랑의 영으로 채워져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주를 모심 (주 앞에 서 있음, standing by the Lord)

기름 부어진 자들이 “주를 모시라고” 말해지고 있다. 본문이 의도한 객관적인 그림은 양쪽에 명령을 즉각 받을 준비를 갖춘 두 신뢰하는 종을 거느린 왕에 관한 것이다. 그러나 영적으로 그려지는 본문의 그림은 거듭나는 사람의 마음에 즉위하신 신성한 왕으로서의 주님에 관한 것이다. 그분 옆에 서 있는 두 “기름 부어진 자”란 주님을 사랑함(오른쪽)과 이웃을 사랑함(왼쪽)을 기둥 원리로 삼고 있는 마음을 말한다. 이 두 원리는 인간 마음속에서 주님을 자신의 통치자로 인식하면서 매일의 생활에서 겪어 가는 자그마한 일 까지에서도 그분이 하라는 것을 행하는 착실한 종들과 같다. 주님의 뜻을 내 삶에서 수행할 각오가 되어 있는 마음은 행복하다.
본문에서 하느님은 “온 세상의 주”라고 불리고 있다. 여기서의 “온 세상”이란 인간 마음 안에 있는 교회를 표현한다. 주님은 모든 교회의 하느님이시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 (마태복음 28:18)라고 선포하시었다. 최고 높은 의미에서 하늘과 땅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성과 인성이시다. 낮은 의미에서 하늘과 땅은 인간 안에 있는 영적 마음과 자연적 마음이다. 이 두 마음 모두가 주님의 사랑과 지혜를 받을 때 인간은 거듭나게 되어 천국 품성을 지니게 된다. 이 때 주님은 각 마음속에서 왕위에 오르시게 된다. 그러면 그 왕좌 옆에 천국의 사랑과 지혜라는 두 올리브나무가 서 있게 된다. 이 마음에 의해 하느님의 뜻은 자연계의 삶 즉 지상에서 펼쳐지게 된다. 동시에 계발된 영적 삶이 하늘에도 알려지고 행해지게 된다. 매일 우리 삶에서 주님은 그분의 거룩한 진리들을 가르쳐 주시어 천국적 사랑의 선함으로 우리를 인도해 주시려 노력하신다. 매일 매일 그분의 역사 속에, 그분의 말씀 속에서 그분의 무한한 사랑과 지혜를 구체화하시면서 우리 앞에 앉아 계신다. 그분의 사랑과 지혜가 우리 삶의 사실(fact)들 앞을 지나치시면서 지금도 이렇게 되물으신다. “이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모르느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