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국 -그 곳의 이모저모-

천국

– 그 곳의 이모저모-

차례

원서 표지
역자의 글
선각자 소개
원 저자 서문

제 1부 죽음, 그 이후…….9

제 2부 천국의 모양……….44

제 3부 천국의 삶…………..68

제 4부 지옥의 삶……………119

부록

선각자 저서 안내
선각자 용어 풀이
선각자에게만 유일한 기본 생각들
도서구입 안내

THE SHORTER

Heaven and Hell

by
Emanuel Swedenborg
Abridged by Julian Duckworth and Trevor Moffat

** 원서 표지**

SEMINAR BOOKS
LONDON

역자의 말

이 책은 원서 “천국과 지옥”을 1/6의 분량으로 줄인 책이다. 따라서 원저자 자신의 영적 체험 내지 성경의 인용 구절, 혹 문장에서 반복되는 듯한 대목은 생략되어 있어 원서 보다 더 이해가 안될지 걱정이 앞선다. 그러나 책의 분량이 적은 것은 장점이다.
역자가 선각자의 천국과 지옥이라는 책을 처음 접할 때가 1969년도 였다. 그때나 지금이나 사실 역자의 관심사는 내세의 이모저모 보다는 수많은 교파와 인간들에 의해 찢겨진 성경 해석을 선각자의 지식을 통해 전달된 상응학으로 나를 위해 정립해보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지금은 성서 상응 사전을 마무리해 보았다.
그렇다해도 되돌아보면 선견자의 신학의 기초서라 할 수 있고, 유럽 사회를 포함, 그리고 칸트나 궤테, 에머슨, 타골 등등 역사에 발자취를 남긴 인물들이 애독했던 이 책을 정독하는 것이 스위든볽지언(swedenborgian)이 향유하는 축복이자, 동시에 의무도 아닐까 하는 생각이 최근 들어 이를 성취하고자 이 책의 번역을 시도했다.
역자의 번역인 이상 부족한 부분이 많을 것이라 사료된다. 그렇게 판단하는 독자는 완역본인 정인보 번역과 김은경 번역을 직접 읽는 것도 더 나은 방법일 줄 믿는다. 이 소책은 위 완역본의 입문서 정도로 생각하기 바란다.

에마뉴엘 스웨덴볽

(Emanuel Swedenborg, 1688-1772)
그는 비상한 재능들을 부여받았었는데, 이 재능은 아주 독특하고 다양하기도 해서, 저명한 학자들은 다방면에서 천재이다 라고 평가되는 아주 희귀한 몇 사람들 사이에 그를 끼여 넣어 분류했다. 백과사전들은 많은 주요한 과학적 발견과 발명을 그의 비옥한 지성의 잘 익은 열매들로 진열하고 있기도 하다. 그는 물질에 관한 근대 역학 개념을 예상했다. 혹성의 형성에 관한 성운설을 암시했다. 야금술 분야에서 처음 포괄적 작업들을 일궈낸 광산 엔지니어였다. 대수학에 관한 스웨덴의 교과서를 처음 준비한 수학자였다. 그리고 두뇌의 몇 구역의 기능과 관이 없는 선(glands)들을 발견하였다.
이렇게 과학의 가장 바깥 영역들에 까지 이르는 한편, 그는 혼(soul)이 어떻게 일하는지를 합리적으로 설명하기 위한 탐구에도 몰두했다. 이 탐구는 그가 영(spirit)의 아주 방대한 영역으로 돌아서고 직접적이고 강렬하게 영적 실재를 알아 채게 될 때 까지 해결의 실마리를 잡지 못했었다. 그는 이 영적 실재를 “영적 시각” (영적으로 봄) 이라 불렀다. 그는 인간 혼의 발단과 성장에 관한 가장 완전한 서술이 성서에 있음을 발견했다.
그가 우리에게 매우 조심스럽게 상기시켜주는 것은, 자기가 기록한 것들은 그 곳에 실제로 있는 것의 파편 조각에 불과할 뿐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 파편 조각의 실재를 움켜쥔 애독자, 자신의 생명과 그것의 성장이 이 저술 안에서 반사(mirrored)되고 있음을 찾아내는 독자들은 성서를 위한 가장 드높은 이름인 “하느님의 말씀”에 새로운 의미를 주는 인간의 진행에 대한 자비로운 이해를 발견할 것이다.

원저자의 서문

마태복음 제 24장에서, 주님께서 ‘시대의 끝’에 관하여 이렇게 말하시고 있다.

“이런 날들의 환난 후 즉각적으로, 태양은 어두워질 것이고, 달은 그것의 빛을 주지 않을 것이다; 별들은 하늘로부터 떨어질 것이고 하늘들의 힘(권능)들이 흔들릴 것이다. 그런다음 사람의 아들에 관한 표시가 하늘에 나타날 것이고 땅의 모든 지파들이 통곡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힘(능력)과 큰 영광과 더불어 하늘의 구름들에 오시는 사람의 아들을 볼 것이다. 그분은 나팔의 큰 소리를 지닌 천사들을 보낼 것이고, 그리고 그들은 하늘의 이쪽 끝으로부터 다른 쪽 끝까지, 네 방위들로부터 그의 뽑은 자를 함께 모을 것이다.”

위 구절의 말들이 글자 그대로가 진리이다고 믿는 이들은 위 사건들이 때가 차면 거행될 것이라고 믿고 있다. 그들은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대체되기 위해 온 세상의 사라짐을 예상하고 있다. 허나 말씀은 그 하나하나의 문구와 세부사항 안에 더 깊은 영적 의미를 담아두기 위하여 위와 같이 표현하고 있다. 그 이유가 말씀은 순수한 상응물로, 또는 영적 형상들로 쓰여 있기 때문이다.
마태복음으로부터 발췌된 위 문단은 간단히 말해 인간들이 주님을 향한 사랑과 신앙을 잃어버릴 때 ‘교회’ 또는 인간의 영적인 자각이 어떻게 하강하는지를 상징적으로 묘사해놓은 것이다.

다수의 인간들은 죽은 이후 삶의 참 모습, 또는 사후 삶이 있는지 조차도 눈치채지 못하고 있다. 그들은 말한다, ‘누가 되돌아와 우리에게 말했던가?’ 허나 이에 관련된 진리들은 말씀 안에 이미 포함되어 있다. 나는 주님의 허락을 받아 수 년 동안 천사와 영들을 만나고, 그들과 대화하고, 심지어 지옥에 있는 영들과도 만나 대화하였는데, 이는 나에게 불신과 혼동이 있지 않도록 하시려는 주님의 배려 때문이었다. 이 책은 이런 교통함의 결과인 바, 여러분은 이 책을 통해 사후 삶의 참 모습을 알게 될 것이다.

제 1 부
죽음, 그 이후

영들의 세계

사후, 모든 인간은 어떤 장소-또는 상태-안으로 온다. 이곳을 영들의 세계라 부르는데, 이 세계는 천국도 지옥도 아닌 이 둘 사이 중간쯤에 있는 장소 또는 상태이다. 인간이 죽을 때, 그는 먼저 영들의 세계 안으로 오고, 그 다음 거기서 한동안 있다가, 천국으로 들어 올려지든지, 아래 지옥으로 끌어 당겨진다. 그 향방은 세상에서의 각자 삶의 품질에 달려 있다.
영들의 세계, 이 세계가 천국과 지옥 사이의 중간 장소이듯, 사후 인간은 중간 상태에 놓인다. 지옥은 아래에, 천국은 위에 있다. 인간이 영들의 세계에 있는 한, 그는 천국에 있는 것도, 지옥에 있는 것도 아직 아니다.
위와 같은 이유가 인간 안에 있는 천국은 그 인간 안에 있는 선인 것과 진리인 것이 하나로 됨, 그리고 지옥은 그 인간의 악인 것과 거짓인 것의 하나됨이기 때문이어서 이다. 영이 된 인간 안에서 선인 것이 진리인 것과 충분하게 통합될 때면 언제든지, 그는 천국으로 가고, 악하고 거짓인 것이 충분히 통합될 때는 언제든지 지옥으로 간다.
위 과정은 영들의 세계에서 거행되는 단일화의 과정인데, 그 이유는 이곳의 인간은 중간 상태에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의지와 이해함이 분리된 채로 있는 한, 이 중간 상태에 머물게 된다. 대부분의 인간들은 진리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음에도 이것에 대한 지식은 얼만큼, 또는 아주 조금, 또는 아주 없거나 한다.
인간이 죽을 때 그를 천국에, 또는 지옥에 있도록 해주기 위해, 그를 영들의 세계에 데려다가 그 인간 안에 있는 분리된 상태의 이해함과 의지의 마지막 화합이 성취되도록 한다. 그 이유가 천국과 지옥에서는 누구도 나뉜 마음, 즉 이렇게 생각하고 저렇게 행동하는 것이 허용되지 않기 때문이다. 오로지 모든 이는 자기가 의도하는 것들을 이해해야 하고, 자기가 이해하는 것만을 행해야 한다.
천국에서의 경우, 선을 행하기를 바라는 인간은 진리를 이해한다. 한편, 지옥에서의 경우, 악을 행하기를 의도하는 이들은 거짓을 이해한다. 고로 영들의 세계에서 거짓 생각과 사상들은 기본적으로 선한 이들로부터 제거되고 그들의 선과 하모니를 이루는 진정한 생각들로 대체된다. 이와 반대로, 진정한 생각들은 악한 인간들로부터 제거되고 그들의 악한 의도에 걸맞는 거짓 사상들로 대체된다.
영들의 세계에는 엄청난 숫자의 인간들이 있다.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모든 인간이 거쳐야 하는 첫 번째 장소이기 때문이다. 또한 이곳에서 모든 이는 매우 자세히 조사를 받고 천국이든 지옥이든 떠날 준비를 한다. 영들의 세계에서 보내는 시간은 고정되어 있지 않다. 어떤 인간은 거의 즉각적으로 천국, 또는 지옥으로 간다; 그런가 하면 어떤 이는 몇 주를, 어떤 이는 몇 년을 지체하나 그렇다고 30년을 넘지는 않는다. 체류 기간은 그 인간의 생명의 안쪽과 바깥쪽 수준들 사이의 상응에 의존된다.
인간이 영들의 세계로 들어오면 즉각 주님께서는 그가 세상에 있었던 동안 자기를 주도했던 사랑과 똑같은 사랑을 가진 공동체와 연결되도록 설비하신다. 악한 인간은 지옥에 있는 공동체들 중 어느 하나와 즉각 연결되고, 선한 인간은 천국의 공동체들 중 하나와 연결된다. 이런 식으로 그들이 구별된다 할지라도, 영들의 세계의 신입자는 자기가 만나기를 원하는 자와 누구든지 자유로이 섞일 수 있다. 즉 친구들, 친척들, 남편과 아내이든, 그가 원하면 언제든 만나고 이야기할 수 있다. 나는 여섯 아들을 가진 아버지를 보았다. 이 아버지는 그들 각각을 알아보았다. 그러나 그들은 세상에서의 자기들 삶의 결과로 아주 다른 본성 속에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이내 헤어졌다. 영들의 세계로부터 천국이나 지옥으로 이동하는 인간은 자기와 사랑의 품질이 거의 갖지 않는 이상, 더 이상 서로를 보지도 못하고, 보아도 알아보지 못한다. 그들은 영들의 세계에서 서로를 볼 수 있다. 그 이유는 거기서 인간들은 세상에서 가졌던 상태와 같은 상태, 즉 자기의 상태가 이랬다 저랬다 했듯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후에, 모든 인간은 과거 자기를 가장 주도한 사랑에 의해 영구적인 상태로 진입한다. 이 상태에서 서로를 인식하는 것은 서로 유사한 사랑을 지녔을 경우 뿐이다. 그 이유가 비슷한 것은 결합하고 비슷하지 않은 것은 분리되기 때문이다.
영들의 세계가 각 개인과 더불어 천국과 지옥 사이의 중간 상태에 있듯, 이 세계 위는 천국이고, 아래는 지옥이다. 지옥의 모든 공동체들은 영들의 세계로부터 닫혀있다. 그리고 오로지 구멍이나 바위의 갈라진 틈 정도만 열려 있다. 물론 활짝 열릴 수도 있지만 이럴 경우는 대단한 감시가 동반되고 허락 없이 누구도 나올 수 없다. 이것 마저 대단히 특별한 때에만 적용된다. 천국 역시 영들의 세계로부터 모든 측면이 닫혀 있다. 천국으로의 비좁은 길 외에는 천국의 어떤 공동체로 가는 열린 출입구는 없다. 이 출입구 역시 감시가 철저하다.
영들의 세계는 산들과 절벽들 사이에 있는 계곡 같이 보인다. 여기 저기가 더 높거나 더 낮거나 하다. 천국의 공동체들로의 입구는 천국에 들어갈 준비를 마친 인간에게만 보여진다. 영들의 세계로부터 각 천국 공동체로 가는 단 하나의 입구가 있고, 이 입구는 단 하나의 길로 이어지고 이 길은 몇 개의 더 좁은 길로 나뉘고 이 길은 가파르게 올라가야 한다.
지옥의 공동체들로의 출입구 역시 들어갈 준비를 완료한 자 외에는 볼 수 없다. 입구가 열릴 때 인간은 어둡고, 검댕이로 휘감은 동굴을 볼 수 있는데, 이 동굴은 깊이 아래로 빠져들게 인도한다. 거기에 다시 많은 문들이 있다. 구역질나는 냄새가 이 동굴로부터 휩쓸리듯 밖으로 밀려 뿜어나온다. 선한 영들은 도망했는데, 그 이유는 그들이 구토를 일으켰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악령들은 걸신들린 듯 이 냄새에 끙끙거린다. 그 이유는 그들이 이 냄새에서 쾌감을 발견했었기 때문이다. 각 악령은 과거 세상에 있었을 때 자기 고유의 악한 품질에서 즐거움을 발견했듯이, 사후에도 그는 자기 악과 상응하는 특별한 악취에 즐거워한다. 언제인가 나는 어떤 인간이 천국의 숨(breath)이 자기에게 도달하자 크게 외쳐 통곡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는데, 그에게 지옥의 숨이 도착하자 조용해지고 흡족해 하고 있었다.
각 인간은 자기 안에 두 출입구를 가지고 있다-하나는 지옥을 향해 열리고 거기로부터 악과 거짓된 영향력이 온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천국을 향해 열리고 거기로부터 선하고 참된 영향력이 온다. 지옥 문은 악한 어떤 것에 빠져있고 거짓 사상에 몰입된 인간들 안에서 열려진다. 천국으로부터의 빛은 위쪽 갈라진 틈새를 통해 들어 올 수 있고 이 인간들이 논리적으로 생각하고 말하는 것을 가능하게 하고 있다. 한편 천국 문은 선한 것과 참된 사상에 깊이 몰두한 인간에게 열리어 있다. 인간에게 합리적 마음으로 인도하는 두 길이 있다-더 높은 길, 또는 내향의 길, 이 길을 수단으로 선하고 참된 것이 주님으로부터 흐른다. 그리고 더 낮은 길, 또는 외향의 길, 이를 수단으로 악하고 거짓인 것이 지옥으로부터 기어오를 수 있다. 인간의 합리적 마음은 위 두 길을 인도하는 중심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자기 마음 안으로 놓여지게 허락하는 천국의 빛의 양에 비례하여 합리적이다.
이 빛이 안에 있도록 허락하지 않는 만큼 그의 합리성은 시드는데, 설사 그가 자신을 보건대 합리적인 듯 여겨질지라도 그렇지 않다.
위 모든 것은 인간과 천국과 지옥의 상응을 보여주기 위하여 여기서 언급되어진 것이다. 합리적 마음이 형성될 때, 이 마음은 영들의 세계 자체, 즉 이 세계 위에 천국이, 이 세계 아래 지옥이 있는 영들의 세계와 상응한다. 천국 입장이 준비된 이들은 그의 합리적 마음은 위쪽은 열리고 아래쪽으로는 닫혀 있다. 그 반면, 지옥을 위해 준비를 마친 이들은 아래쪽으로는 열리고 위쪽으로는 닫힌 합리적 마음을 가지고 있다. 그 다음 아래쪽만을 쳐다볼 수 있는 이들은 지옥을 향하고, 위쪽만을 보는 인간은 천국을 향한다.
위를 쳐다봄은 주님을 찾고 있음을 뜻한다. 그의 중심은 모든 천국이 쳐다보는 중심이기도 하다. 아래를 쳐다봄은 지옥에 초점을 두는 반대편 중심을 향하여 주님으로부터 돌아섬을 뜻한다. 지옥 전체가 주님으로부터 얼굴을 돌리고 있다.

모든 인간 각각은 영이다

불멸하는 인간의 혼(soul)은 그가 생각하고 살고 있는 그의 부분, 즉 그의 영(spirit)이다. 몸은 인간이 자연 안에서, 물질 세계에서 유용한 삶을 이끌 수 있는 수단이고 영에 비해 부속품에 불과하다. 영이 실제로 인간 자신이다. 그런 이유는, 인간의 몸이 그의 영으로부터 분리될 때, 소위 그가 죽을 때, 여전히 그는 인간이고 살아 있기 때문이다. 내가 천국으로부터 들은 바, 죽은 자는 소생하기 이전 차디찬 몸 안에, 두꺼운 관 안에 있는 동안에도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들은 신체의 아주 미세한 부분도 움직일 수 없다는 점을 빼고는 자신이 살아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영이 인간 자신인 바, 뒤따르는 명제는 인간의 영은 그의 몸이 인간 모양으로 있는 것과 똑같은 모양이다는 것이다. 그래서 영이 몸 안에 있었을 때 만큼이나 같게 그의 몸으로부터 분리되어도 감각들을 즐긴다. 이것은 인간이 행동하는 수단-주체 또는 본체, 즉 이로부터 뭔가의 진행이 있고, 이 안에서 뭔가가 발생하는 본체 없이 어떤 것을 생각하거나 뜻할 수 없다는 사실로부터 알 수 있다. 본체 없이 존재한다고 생각되어진 어떤 것에는 현실성이 없다. 시각 기관 없이 본다는 것은 없다. 청각 기관 없이 듣는다는 것은 없다. 생각의 경우도 시력이나 청력의 이치와 똑같다; 생각이 본체-기관 형체-안에서 그리고 그로부터 발생하지 않으면 생각도 전혀 발생할 수 없다.
이것이 왜 영들이 몸에서 해방된 후에도 인간과 완전 똑같이 보고, 듣고, 느끼는지에 대한 이유이다; 이는 자연계가 아니라 영계에서 그렇다는 말이다. 영이 육체 안에서 가졌던 자연적 감각들은 영에 추가되었던 물질 부분으로부터 왔다; 그러나 그때 조차에서도 영은 영적으로 생각하고 뜻하는 것을 느꼈고 감지했다.
두 상황이 여기서 보태질 수 있는데, 이는 내적 수준에 관련된 인간이 영이다는 것, 그리고 이 영은 실질의 몸의 형체 안에 있다는 점이다.
모든 인간은, 그가 몸 안에서 사는 동안, 그의 고유의 영이 관심을 가졌던 영들의 공동체 안에 있다. 설사 그가 이 사실을 눈치 못 챈다 해도 그러하다. 선한 인간은 천사의 공동체 안에, 악한 인간은 지옥의 공동체 안에 있다. 그리고 각 인간은 그가 죽을 때 예전에 있어 왔던 공동체에 들어간다. 어쨌든 그는 세상에서 사는 동안 이 공동체를 볼 수 없다. 그 이유는 자연계에 사는 동안은 자연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이 육체로부터 물러나 영 안에 있는 방식에서 생각할 때, 그는 때로 자기의 공동체에서 나타난다. 그리고 그가 보여질 때, 그는 거기 있는 영들과는 쉽게 구별된다. 그 이유는 그는 조용한 묵상과 생각만을 열심히 하고, 그 외 두리번 거리는 것도 없고, 굳이 자기를 보이려하지 않기 때문이다. 어떤 영이 그에게 말을 걸면 즉시 그는 사라진다.
몸으로부터 물러난 경우의 또 다른 예는 이러하다. 인간이 잠자는 상태와 깨어있는 중간 상태로 데려다 놓인다. 그리고 그가 그 상태 안에 있을 때, 그는 완전히 깨어 있다고 자신을 간주한다. 그가 충분히 깨어있을 때, 모든 감각-시력, 청력 등등-은 방심하지 않는다. 게다가 촉각은 정상적 몸이 깨어 있을 때 보다 더 예민하다. 이 상태에서, 천사들과 영들은 확실하게 보여지고 듣고 만지기 조차 가능하다. 이 상태에서 육체의 몸이 간섭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이것이 ‘몸 밖으로 나감’이라 부르는데, 이때 그는 자기가 몸 안에 있는지, 몸 밖으로 나갔는지 알지 못한다.

사후 인간은 어떻게 깨어나 영원한 삶에 들어가는가?

육체의 몸이 자연계에서 더 이상 기능을 발휘하지 못 할 때, 인간은 죽는다. 죽을 때, 심장과 폐의 움직임은 멈춘다. 그럼에도 인간은 죽지 않는다. 단순히 그는 세상에서 자기를 섬겼던 몸으로부터 분리되는 것 뿐이다. 인간 자신은 계속 살아있다. 그가 영이기 때문이다. 그는 단순히 이 세계로부터 저 세계로 건너갈 뿐이다. 성경에 등장하는 단어 ‘죽음’은 내적 의미에서는 실제로 부활과 삶의 계속을 염두해서 사용된 단어이다.
호흡함과 심장 박동은 영과 매우 친밀한 관계이다. 즉 생각은 호흡함과, 느낌은 심장 박동에 관련된다. 따라서 이 두 기관의 움직임들이 몸에서 일하는 것을 멈출 때, 영의 즉각적 분리가 있게 된다. 다시 말해 이 둘은 실제로 묶여 있는 상태이나 이것이 깨질 때 몸의 영이 떠나는 셈이다. 몸의 영이 박탈된 그 몸은 차거워지고 부패하기 시작한다.
이 분리 후, 인간의 영은 한 동안 그의 몸 안에 있기를 계속한다. 그러나 오직 심장의 박동이 마지막 뛸 때까지 이다. 이것은 죽음을 일으킨 아픔에 따라 다양해진다. 심장이 멈추는 순간, 인간은 깨어나진다. 그러나 이것은 주님 만에 의해 행해질 뿐이다. 여기서 말한 깨어남은 영이 몸으로부터 영계 안으로 끌어 당겨짐을 뜻한다. 흔히 이를 두고 ‘부활’이라 말한다.
나 자신에게 위의 깨어남을 경험해보도록 허락되었었기에 지금 그것이 어떻게 일어나는가를 기술하는 것을 가능케 한다.
나는 내 육체의 감각들이 염려되어질 정도 만큼에서 무의식 상태 안으로 데려가졌다. 그래서 나는 흡사 죽은 인간 같았다. 그럼에도 나의 모든 내적 감각들은 손상받지 않은 채 남아 있어 나는 모든 것- 사후 인간들이 깨어나질 때 인간들에게 일어나는 것들을 볼 수 있고 기억할 수 있었다.
내가 주목한 것은 내 호흡함이 거의 작동하지 않았다는 것, 그러나 영은 더 내향의 호흡함을 계속했다는 것, 이것이 미약하나마 몸의 호흡함과 연결되어져 있는 것이다. 이후, 내 심장 박동과 천적 왕국이 왕래하는 관계가 형성되어 졌다. 그 이유는 이 왕국은 심장과 상응하기 때문이다. 나는 나와 더불어 있는 이 왕국으로부터의 천사들을 보았다. 어떤 천사는 나와 거리를 두고 있었고, 두 천사가 내 머리에 앉아 있었다. 그러자 애착으로부터의 내 고유의 느낌은 제거되었다. 그럼에도 내 생각과 지각은 계속되었다. 나는 몇 시간을 이런 상태에 있었다.
그때, 내 주위에 있었던 영들이 내가 죽었다고 말하며 떠났다. 거기에는 흡사 방부 처리된 몸에서 나는 냄새 같은 것, 약간은 상쾌한 냄새가 맴돌았다. 천적 천사들이 현존할 때, 시체와 더불어 행해지는 모든 것들은 방향성 있는 어떤 것으로 지각되어진다. 이는 영들이 이 향내를 지각할 때 그들의 접근을 막아준다. 이것은 인간이 깨어나질 때, 인간의 영으로부터 악령을 멀리 있게 하는 방법도 된다.
내 머리 옆에 있었던 천사들은 침묵했다. 오직 그들의 생각들과 내 생각들 사이에만 소통함이 있었다. 이런 생각들이 죽어가고 있는 인간에 의해 받아질 때, 그때 천사들은 인간의 영이 이제야 몸을 떠나 인도될 상태에 있다는 것을 안다. 그들의 생각들이 소통하는 동안, 천사들은 내 얼굴을 쳐다보았다. 이것은 천국에서 생각을 주고 받는 방식이기도 하다.
나 역시 감지한 것은 천사들이 내가 생각하고 있는 것을 발견하려고, 그리고 나의 생각이 죽는 인간이 대체로 가지는 영원한 삶의 생각과 같은지 여부를 보려고 애쓰고 있었다는 것이다. 나는 그들이 죽는 인간이 가지는 생각을 내가 간직하기를 원했다는 것도 감지했다. 후에, 내게 말해진 바, 인간의 영은 몸이 죽을 때 가진 마지막 생각 안에 간직되고, 이는 그가 세상에 있는 동안 자신을 가장 강하게 이끌었던 사랑으로부터 오는 생각들로 되돌아 갈 때 까지이다. 특별하게 내가 느껴보도록 허락된 것은, 내 마음 -즉 내 영-안으로부터 나오는 끌어 당김이었다. 내게 말해진 바, 이것은 주님에 의해 행해진다는 것, 이것이 부활의 실제적 근원이다는 것이다.
천적 천사들은 인간이 깨어날 때, 언제나 현존한다. 그들은 인간을 떠나지 않는데, 그 이유는 그들이 모든 이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이 이 사랑스러운 천사와 있는 것이 부담스러워 더 이상 버티지 못할 경우, 그는 이 천사가 떠나주기를 원한다. 이것이 발생할 때, 영적 왕국으로부터의 천사가 그에게 빛을 주기 위해 가까이 온다. 이 단계 까지를 그는 볼 수는 없고 단지 생각하는 것만 가능하다. 이 바꿈이 발생할 때, 인간은 그의 왼쪽 눈으로부터 코 쪽을 향하여 한 꺼풀이 둘둘 말아져 내려 왔음을 느낀다. 이리하여 눈은 열리고 볼 수 있다. 이것이 실제로 당사자에게 발생하고 있는 듯 인간에게 나타난다. 이것이 행해질 때, 어떤 것은 빛나나, 안개같은 것이 보여지는데, 어쩌면 그가 처음 깨어날 때, 반쯤 감겨진 눈꺼풀을 통해 보는 것 같다고 말하는 편이 나을 듯 싶다. 이후 나는 내 얼굴이 부드럽게 벗겨지는 것을 느꼈다. 이것은 더 영적인 방법으로 생각하는 쪽으로 인도했다. 이런 벗겨짐은 나로 하여금 인간이 자연적 생각함으로부터 영적 생각함 안으로 오는 것을 보여 주는 것, 그리고 인간의 마음 안에서 어떤 생각이 사랑을 동반하지 않고 튀어 나오는 것을 천사들은 매우 크게 걱정하여 이를 예방해준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그들은 이제 그가 영이다는 것을 그 인간에게 말한다.
지금 인간이 볼 수 있는 것은, 영적 천사가 새롭게 깨어나는 인간에게 할 수 있는 모든 도움- 즉 영계에 관하여 그리고 거기 있는 것들에 관하여, 그러나 그가 이해할 수 있는 한도에서 그에게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만일 그가 말해지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면, 인간은 이 천사가 자기로부터 떠나가기를 갈망할 것이다. 그러나 떠나는 것은 천사가 아니다. 오히려 인간이 그 천사들로부터 자신을 분리한다. 그 이유가 모든 천사들은 사랑만을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특수한 예에서, 이 천사들은 도와 주기를 사랑하고, 가르쳐 인도해 천국으로 이끌기를 사랑한다.
인간이 이런 천사들로부터 이동할 때, 그는 선한 영들에 의해 받아들여지고, 이 영들은 그가 이들과 더불어 있는 한 그를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해준다. 그러나 만일 이 세상에서의 그의 삶이 선한 영과 친구 관계를 갖는 것이 불가능한 종류의 삶이었다면, 그는 선한 영들로부터 멀어지기를 갈망한다. 이런 모형은 필요하다면 더 오래, 더 자주 발생하는데, 이는 그 인간이 세상에서 살았던 삶의 종류와 걸맞는 영이 등장할 때까지 이다. 그런다음 놀라웁게도 그는 세상에서 자기를 이끌었던 같은 종류의 삶으로 인도된다.
이런 입문적 국면은 며칠 정도만 지속될 뿐이다. 후에, 그는 자기 영의 진정한 본성을 밝히 알게 하기 위해 이 상태로부터 저 상태로 인도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는 천국 또는 지옥으로 간다. 이상 모든 것은 모든 이를 위한 아주 일반적인 과정을 대단히 짧게 기술한 것이다. 어떤 인간은 사후 자기가 살아 있다는 것을 발견함으로 해서 완전히 당혹해 한다. 이런 사건은 세상에 사는 동안 사후의 혼에는 어떤 생명도 없다고 믿었던 이들이 접하는 사건이다. 이와 같은 부류의 인간들은 사후 자기와 의견을 같이하는 인간들과 친구한다. 그들은 생명이 있다고 믿는 이들과는 분리되어진다. 일반적으로, 이 인간들은 지옥의 어떤 공동체와 연결 고리를 형성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그들은 교회가 가르치는 것을 경멸하고 신성한 것을 부인하는 일을 자주 했기 때문이다.

사후에도 인간은 완전한 인간 모양 안에 있다

모든 영 각각은 인간의 모양이다. 이 모양을 또 다른 방식으로 놓으려 해도, 각 영은 인간으로서 나타난다. 이런 까닭은 인간이 인간인 것은 그의 몸 때문이 아닌 영 때문에서 이다. 이 문제는 이미 거론 했었다.
사후 인간이 영들의 세계로 먼저 들어갈 때, 그의 얼굴과 음성은 그가 세상에 있었던 동안 지녔던 것과 아주 비슷하다. 이런 이유는 그의 삶은 보다 더 외적 상태에 있고, 그의 내향의 수준들은 아직 열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상태는 인간이 죽은 후에 가지는 첫 번째 상태이다. 그 후에, 얼굴은 바뀌기 시작하고 아주 다르게 되어간다. 그리하여 그가 세상에 사는 동안 무엇보다 우선시 하여 자기를 이끈 사랑, 자기 영이 몸 안에 있는 동안 그 영을 먼저 차지했던 사랑으로부터 오는 외관을 입는다. 이 사랑이 진짜 인간이다. 인간의 영의 얼굴은 그의 몸의 얼굴과는 딴판이다. 그의 육체의 얼굴은 부모로부터 이다. 반면 그의 영의 얼굴은 그가 사랑한 것으로부터 이다. 그리고 이 사랑은 영적 형상 안에 있다. 사후 바깥쪽 모양새들이 시들어질 때, 동시에 인간의 내면의 생명이 열려질 때 발생하는 바는, 영은 안쪽에서 사랑하는 것이 바깥쪽에서도 닮아진다는 것이다. 나는 세상으로부터 방금 도착한 인간을 보았다. 그리고 나는 그들의 얼굴과 음성을 수단으로 그들을 인식했다. 그러나 후에 내가 그들을 보았을 때, 나는 그들을 인식하지 못했다.
얼굴이 바뀌는 또 다른 이유는 이렇다. 사후 삶에서는 자기들이 가지지 않은 애착으로 겉을 꾸미는 것이 허용되지 않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위선은 있을 수 없다는 말이다. 위선자의 얼굴이 바뀌려면 더 많은 시간이 걸려야 하는데, 그 이유는 그들이 세상에서 선하게 나타나도록 오래 있었던 만큼이나, 그들의 삶은 선한 애착들의 사본 같이 보이게 하기 위하여 오래 연습해왔기 때문이다. 결과로 그들은 한동안 아주 매력적인 냥 보여지나, 그런체하는 것을 고수하는 그들의 능력은 그들로부터 점차적으로 거두어지고, 그들의 내면의 수준은 그들이 사랑한 것들로 옷입는다. 그 후에, 그들은 여느 타인 보다 더 일그러지기 까지 한다.
인간이 신성한 것을 더 내향적으로 사랑해왔고, 그의 생애 동안 그것들에 의해 살았다면, 사후 그는 더 아름다워진다. 이런 이유는 사후 모든 이의 내면의 수준은 열리되, 그들의 사랑과 생명의 품질에 의거 모양을 갖추기 때문이다. 그 결과로, 내향의 애착이 더 많으면, 그는 천국의 형태를 더 갖춘다. 그래서 그의 얼굴은 더 아름답다. 사실상,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하고 참된 모든 것, 천국을 만드는 모든 것은 인간의 모양 안에 있다. 이것은 일반적 차원에서 뿐 아니라 아주 미세한 부분, 아주 상세한 측면에서 그러하다. 이 모양은 천국에 있는 모든 이로 인간의 모양 안에 있게 하는 원인이다. 또한 그가 주님을 받아들인 방법을 반사하는(mirror) 것이기도 하다.

사후에도 모든 감각, 기억, 생각, 애착은 존재한다.

인간이 죽을 때, 그는 육체의 몸을 빼고는 그와 더불어 있는 자신 속의 모든 것을 영계 안으로 운반한다. 그때 그는 자기의 자연적 몸과 다르다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는 영적 몸을 가진다. 이 몸은 자연적 요소가 아닌 영적 본질들로 구성되어 있다. 더 나아가, 영적인 어떤 것을 만질 때, 영적 어떤 것을 볼 때, 이는 자연적 어떤 것을 보고 만질 때와 똑같다. 그래서 인간은 영이 되었을 때, 그는 자기가 세상에서 가졌던 몸 안에 있지 않다 라고 말할 수 없다. 한마디로 그는 자기가 죽었다는 것을 모른다.
영이 된 인간들은 그들이 세상에 있는 동안 가졌던 모든 감각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본다, 그들은 듣는다, 그들은 말한다, 그들은 냄새 맡고 맛을 볼 수 있다; 그들은 만짐으로부터 있는 압력 조차 느낄 수 있다. 이에 더하여, 이전에 가졌던 것들, 즉 갈망함, 생각들, 되새겨봄, 애착과 느낌, 사랑, 노력함, 의도함을 가지고 있다. 학문과 연구를 즐겼던 인간들은 전과 같이 읽고 쓸 수 있다. 한마디로, 인간이 이쪽 삶에서 저쪽 삶으로 건너갈 때, 이는 마치 이 장소에서 저 장소로 간 것과 같고, 건너 갈 때 자신의 권리로 행동했었던 모든 것도 가져 가는 것이다.
그는 자기와 더불은 세상적인 것들의 기억-그가 보았고, 들었고 읽었고, 배웠던 것들, 또는 그의 유아 시절로부터 생애 마지막 순간까지 세웠던 생각들까지 가져간다. 그러나 그의 기억 안에 있는 위의 세상적인 것들은 영적 환경에서는 재생산되어질 수 없기 때문에, 그것들은 마치 우리가 기억 안의 것을 생각하지 않을 경우 그대로 기억 안에 있듯 일종의 휴식 상태가 되어 있다. 그러나 주님이 원하시면 그것들은 마음에 되돌아 올 수 있다.
오로지 육체의 감각만으로 자신을 통치했던 인간들은 사후 인간의 삶이 위와 같다는 것을 전혀 믿을 수 없다. 그 이유는 그는 어떻게 그렇게 있을 수 있는지를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영적인 것들에 관하여 생각할 때 조차도 자연의 용어 안에서만 생각할 뿐이다. 손으로 만져서 느낄 수 있는 것 외에는 어떤 것도 그들을 위해서 존재가 가능할 수 없다.
그들이 영적 세계에서 가지는 영적 감각들은 이 세상의 감각들 보다 더 예민하고 정밀하다. 천국에 있는 이들은 그들이 이 세상에 있었을 때 보다 더 뚜렷하게 보고, 듣고 더 슬기롭게 생각한다. 이제 그들은 천국의 빛으로 보고, 많은 등차를 수단으로 세상의 것을 훨씬 능가하는 영적 대기를 통하여 듣는다. 이 차이는 수정 같은 맑은 것과 구름으로 덮인 것의 차이 같다. 신성한 진리가 천국의 빛이고 이것이 천사들에게 아주 세세한 세부사항을 볼 능력을 준다. 이에 더하여, 천사들의 시력은 그들의 이해력과 완전히 일치한다. 그들의 듣고 지각함은 하나로서 행동하는 바, 연설자의 음성의 소리와 똑같게 그의 애착과 생각을 알 능력을 주고 있다.
한편, 지옥에 있는 이들의 감각들은 불완전하다. 그리고 악령은 그의 악한 행동들을 보여줄 수 있다. 그 이유는 그들도 그의 기억으로부터 끌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간음, 도둑, 뇌물주는 것, 부패한 짓 등이 발생했던 그때와 같은 상세함으로 열려 보여진다. 이런만큼, 악한 사건에 시치미를 떼는 일은 가능치 않다. 이 모든 것은 주님 자신이 말하셨던 다음 구절 안에서 준수되고 있다. 즉 “폭로되지 않을 감추인 것은 아무것도 없고, 알아보지 못 할 숨겨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 너는 어두움 안에서 말해진 것을 빛 안에서 들을 것이고, 너는 귀에 대고 말해진 것을 지붕에서 선포할 것이다.” (누가 12:2, 3)
사후 인간의 행동들이 그에게 보여질 때, 이 정보를 꺼낼 책임을 가진 천사들은 그의 얼굴을 쳐다본다. 그 다음 이 검사는 몸 전체에서 보여질 때까지 그의 온 몸을 통해 모두 퍼진다. 이와 같은 일이 발생하는 까닭은 기억 속의 것들이 뇌 안에 씌였을 뿐 아니라 인간 전체에 씌여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간이 생각했던 것, 하기를 원했던 것, 말한 것, 행동된 것은 파괴되어질 수 없다. 그 이유는 그것들이 그의 영에 적혔기 때문이다.
인간의 세상적 기억이 영적 세계 안으로 운반되었다 해서, 자연적 요소들 자체가 다시 저쪽 삶으로 가져다 놓아 지는 것은 아니다. 각자의 장소에서 영적인 물건들이 상응을 수단으로 자연적 물건들과 연결되어져 보여진다. 이렇게 보여질 때, 그것들은 자연적 요소들 만큼 똑같은 모양을 가지고 나타난다. 이런 이유는 영적 세계에 있는 보일 수 있는 모든 것들은 그것이 영적일지라도 자연적으로부터 있는 어떤 것 같이 보이기 때문이다.
만일 인간이 자료와 사실에 입각한 지식들에 의하여 자기 마음을 발달 시켰다면, 그러고서 그가 영적 세계, 즉 외적 지식들로부터가 아닌 자기들의 애착들로부터 이야기 하는 곳으로 올 때, 이런 인간들은 단순하거나 어리석은 자 같이 나타난다. 그가 긁어 모았던 것은 더 이상 표출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그런 것은 세상에 속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인간이 세상의 자료와 언어를 수단으로 그의 마음을 발달시킨 만큼에서 합리적 인간이었을 뿐이었기 때문이다.

사후 인간의 품질은 세상에서 가졌던 품질과 똑같다

성경에서, 인간은 자기 삶 동안의 행동들에 따라 판결받아질 것이고 보상받아질 것이다고 자주 말해진다. 진실된 방식으로 생각하고 착하게 사는 자는 천국에 갈 것이고, 사악하게 산 자는 지옥에 간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다. 그럼에도 악한 인간은 사후 자기의 상황이 세상에서의 자기 자신의 삶에 의존된다는 것을 기꺼이 믿으려하지 않는다. 그는 천국 입장은 자비로부터서만 증여 받는다고 생각하고 생활로부터 분리된 신앙에 기대는데 어떠한 거리낌도 느끼지 않는다.
반드시 알아야만 하는 것은, 인간의 품성은 그의 행동들 내에 포함되어 있다는 것, 그의 내적 태도는 그가 행하는 것에 일치되지 않으면 진짜로서 만들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런 행동들은 인간의 바깥쪽 삶이고 그의 내적 삶의 품질은 바깥쪽 삶을 통하여 표현되어진다. 그럼에도 행동들은 바깥쪽으로 표출하는 방법 만을 뜻하는 것은 아니고, 인간 내부에 있는 방법 까지를 뜻한다. 그 이유가 모든 행동들은 인간의 의도와 생각으로부터 튀어나오기 때문이다. 행동이 이 근원으로부터 오지 않으면, 행동은 기계 같은 단지 움직임 자체일 것이다. 고로, 행동은 내적 원인으로부터 오는 결과이다.
위 문단은 사후 인간이 들어가야 하는 삶이 무엇인지를 우리로 알 수 있게 한다. 이것은 그의 사랑, 잠재성 안에 있는 사랑 뿐아니라 행동 안에 있는 사랑에 기초된 삶, 즉 그가 행동한 것들인데, 그 이유는 행동 안에 그가 사랑하는 것, 그가 믿는 것의 모든 요소들이 포함되고 있기 때문이다.
각 인간은 ‘통치하는 사랑’-각 인간을 지배하는 사랑-이라 불리는 것을 가지고 있다. 사후 그는 이 사랑을 간직하고 영원히 바뀌지도 않는다. 모든 인간은 서로 다른 꽤 많은 사랑들을 가지고 있으나 이것들을 거꾸로 추적해보면 결국 그 뿌리는 통치하는 사랑이고 이 사랑과 하나를 만들고, 함께 어우러져 삶을 구성하고 있다. 이 사랑의 어떤 것은 그것의 본성상 더 바깥쪽이고, 또 어떤 것은 더 안쪽이다. 어떤 것은 보다 가까이 있고, 다른 어떤 것은 멀리 있다. 그러나 이 사랑들 모두는 한 인간 안에서 어떤 종류의 왕국을 만들고 있다. 그리고 인간이 이것을 눈치채지 못할지라도 뚜렷한 질서에서 정리정돈되어 있다. 그러나 전부는 아니겠지만 일부는 당사자도 알게 된다. 그 이유는 인간이 자기 주위의 삶의 영역을 확장하는 방식은 내부에 있는 자기를 통치하는 사랑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사후에는, 그가 사랑했었던 것이 그 인간이다. 죽음 자체는 인간을 통치하는 사랑과 일치하지 않는 모든 것의 제거를 야기한다. 만일 인간이 기본적으로 선하다면, 이런 그의 기본적 품성에 적절치 않은 어떤 부분은 제거되어진다. 또는 그것이 어디론가 실려가버리는 듯 된다. 이 방식으로 그는 자기 고유의 사랑 안으로 놓여진다. 이런 일은 악한 인간에게도 발생하는데, 악한 인간의 경우, 그가 알고 있는 진정한 생각들은 제거되거나 운반되어진다. 마침내 각 인간은 자기 고유의 사랑으로 되어가고, 한번 이것이 발생된 이상, 인간은 자기를 사랑함 쪽으로 자기 얼굴을 돌려서, 그가 어느 방향으로 틀든지 그 사랑이 자기 눈 앞에서 전개되는 셈이다.
모든 영은 그가 자기를 통치하는 사랑을 간직하는 한 어느 곳으로도 인도될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은 어떤 일이 발생한 것을 알고 그것에 저항해야겠다고 생각한다 해도 저항할 수 없다. 어떤 영은 저항하려고 자기를 통치하는 사랑에 반대되는 행동을 해보려 노력하지만 언제나 헛수고로 끝난다. 이런 이유는 그들의 사랑은 그들이 끌어 당길 수 있는 그들을 둘러싸고 있는 사슬이나 밧줄과 같아서 이다. 이로부터 그들은 자신들을 자유롭게 할 수 없다.
세상에 있는 인간들 조차도 똑같다; 그들 고유의 사랑이 그들을 이끈다. 그리고 그들은 자기 고유의 사랑을 수단으로 타인도 이끈다. 서로 각자 다른 삶에서 보여지는 모든 모양들은 인간의 영이 그를 통치하는 사랑이다는 이 사실이 진리임을 보여준다. 그곳에서는 누군가가 어떤 인간의 사랑을 간직하면서 어떤 것에 관하여 이야기 하거나 행동을 할 때, 그 인간은 생기가 있고 기쁜 얼굴을 지닌 모습이 거기서 눈에 보여진다. 그러나 누군가가 자기의 통치하는 사랑에 반대되어지도록 하는 대화가 있기만 해도 그 인간의 얼굴은 변하기 시작하고 일그러져 불분명해진다. 결국 그 인간은 마치 거기 있지 않았던 듯 사라지고 만다.
위와 같은 몇 요점들은 통치하는 사랑의 중요성을 보여주는데 보탬이 되었으리라 생각한다. 인간이 영원히 있게되는 방식은 그를 통치하는 사랑이 관련되는 한도 까지에서 이다. 인간은 만일 그가 지닌 신앙, 믿음이 천국의 사랑으로부터 생겨지지 않으면 그것을 간직할 수 없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존속하는 사랑은 행동 안에 있는 사랑이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이 사랑이 그 인간 자신의 생명이기 때문이다.

사후 인간의 삶의 즐거움은 그것에 상응하는 것들로 바뀐다.

인간이 즐거웁다 하는 모든 것들은 그를 통치하는 사랑으로부터 온다. 그 이유는 인간은 그가 사랑하는 것들, 특히 무엇보다 중요시하여 사랑하는 것에서만 즐거움을 취하기 때문이다. 즐거움을 가져오는 모든 것을 거꾸로 추적해보면, 천국에 있는 인간을 통치하는 사랑은 주님을 사랑함이고, 지옥의 경우는 자아를 사랑함이다.
인간의 자연적 즐거움이 사후 그의 영적 대응물로 어떻게 바뀌는지를 보기 위하여서는 상응에 관한 지식이 요구되어진다. 상응(학)이 기본적으로 가르치는 바는, 자연적인 것은 그것에 상응하는 영적인 것 없이 존재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다. 특별히 상응학은 상응하는 그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이 어떤 종류의 것에 속하는지를 가르쳐준다. 고로, 이를 알아챈 인간은 만일 자기가 자기의 사랑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면 사후 자신의 상태가 무엇 같을 것일지를 가늠할 수 있다. 악한 인간들은 이런 것을 보도록 준비되지 않는다. 설사 그들이 준비되었다 해도, 그들은 그것을 수용하기를 거절할 것이다. 그러나 천국의 사랑 안에 있는 인간은 가르쳐질 수 있다. 그들은 자기들이 태어나면서 지닌 악해지려는 경향성들을 보게끔 준비되어진다. 그들은 이런 모든 것을 진정한 것을 기초로 하여 보고 있다. 그 이유는 사실상 진리가 악한 것을 들추어 보이기 때문이다.
상응 지식의 기초 위에서라면, 인간의 삶의 즐거움들이 사후 그것들에 상응하는 것들로 어떻게 바뀌는지를 아는 것도 완전 가능하다. 이에 대해 몇 예증들을 열거해 보겠다.
악한 사랑들과 거짓 사상들 안에서 즐거움을 발견해왔던 인간들은 천국의 시야로부터 멀리 도망한다. 그들은 동굴이나, 바위 틈의 열린 곳 안으로 허둥지둥 급히 들어가고 거기 숨는다. 이런 동굴이나 열린 곳은 거짓 사상들이나 악한 바램들과 상응한다, 그리고 이 인간들은 자기들이 노골적으로 매우 불유쾌한 여건에서 살고 있는데도 거기서 즐거움을 발견한다. 비밀스런 인간들은 서로를 볼 수도 없는 캄캄한 방의 한 구석에서 서로의 귀에 대고 속삭이는 것을 즐긴다. 영리함을 나타내려고 정보를 수집하기를 사랑했던 인간들의 경우, 그들은 모래가 많은 장소를 들판이나 정원보다 더 선호한다. 정작 자기의 삶에는 제대로 응용하지도 못하는 종교적인 가르침이나 교리에서 즐거움을 만끽하는 인간들은 자신들을 위해 바위투성이의 장소를 선택한다. 그리고 둥근 돌들 더미 사이에서 사는 것을 즐긴다. 위와 같은 것 내지 여타 다른 것도 악한 인간들이 사후 영적 세계 안으로 입장할 때 그들이 가진 즐거움에 상응하는 것들이다.
이와 대조적으로, 세상에서 천국적인 종류의 사랑 안에서 살았던 인간들의 즐거움은 천국에서 그것에 상응하는 것들로 바뀐다. 그들은 드높게 자리잡은 장소에서 살고, 그들의 눈 앞에는, 들판과 작물들과 포도원들이 봄철 기후 아래 있다. 어떤 이는 귀중한 돌들로 만든 듯 보이는 집에서, 또는 아름답게 잘 가꾼 정원 있는 집에서, 또는 모든 것이 웃고 있는 듯, 들떠서 떠드는 듯 여겨지는 장소에서, 또는 투명한 곳에서, 또는 매우 넓게 열려진 장소에서, 등등 같은 곳에서 살고 있다. 위의 예는 자기의 사랑이 천국의 사랑인 인간들의 즐거움에 대한 몇가지 예에 불과할 뿐이다.
이상으로부터, 모든 인간의 즐거움들은 사후 그것들에 상응하는 것들로 바뀌었다는 것, 그리고 똑같은 사랑이 영원히 지속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결혼적 사랑, 공정을 사랑함, 정직, 선량함, 진리, 지식과 지각을 사랑함, 지혜와 이해함을 사랑함, 등등의 사랑은 천국의 사랑 범주이다. 이런 사랑들로부터 흐르는 것들은 물의 원천으로부터 형성된 시내와 같다.

사후 인간의 첫 번째 상태

인간은 죽은 후 그가 천국이나 지옥을 들어가기 전 세 가지 상태를 통과한다. 첫 번째 상태는 그의 바깥쪽 삶에 더 관련되어져 있고, 두 번째는 그의 내적 삶에, 그리고 세 번째는 준비하는 상태이다. 인간은 그가 영들의 세계에 있는 동안 이 세 상태들을 통과한다. 그럼에도 이 단계들을 거치지 않고 즉각적으로 천국이나 지옥으로 직행하는 인간들도 있다. 천국으로 즉각 입장하는 인간들은 그가 세상 삶 동안 거듭나아져 와서 천국 입장의 준비가 완료된 인간들이다. 이런 인간들에게 필요한 준비는 그들이 천사에 의해 들려지기 전, 육체에 딸려 붙어 있었던 자연적 불순물들을 떨구는 일 뿐이다. 나는 사후 한 시간 만에 들림을 받은 몇 인간을 보았었다.
한편, 내부적으로는 완전 사악함인데도 선한 것으로 밖을 덧칠한 인간도 있다. 그들은 지옥 안으로 즉각 데려가진다. 나는 죽은 뒤 즉각 지옥으로 직행한 인간들을 보았었다-그들 중 하나, 사기성 지독한 인간은 그의 머리가 먼저 갔다. 그러나 이런 극단적 부류의 인간들은 영들의 세계에서 보존되며 준비하는 방대한 숫자에 비교한다면 아주 미미한 숫자이다.
사후 첫 번째 상태는 이 세상에서의 삶과 너무나 비슷하다. 인간들은 타인에게 세상에서와 아주 똑같은 외관을 보인다. 행위 역시 그러하다. 이 상태에서 인간은 죽음에서 깨어나질 때 자기가 영이다고 천사가 말해준 것을 깨닫지 못한 이상, 자기가 더 이상 세상에 있지 않음을 전혀 눈치채지 못할런지 모른다. 이 상태에서 그는 이 세상으로부터 온 친척이나 친구들도 알아 본다. 다른 삶에 있는 인간들은 거기서 친구나 친척이 아닐지라도 누군가에 대해 생각할 때는 언제든지 그의 생각함 안에서 그 인간의 얼굴을 여러 상황과 연계하면서 붙잡고 있는다. 그가 이렇게 할 때, 상대방은 마치 그가 호출이라도 받은 듯 현존한다.
이 첫 상태에서, 모든 이는 인간들을 만나고 자기들이 함께 있어주기를 원하는 인간이 있다면 그들은 짧든 길든 함께 머문다. 만일 그들이 함께 머물 이유가 실지로 없다면 이내 그들은 분리되는데, 마치 서로 만난 친구가 떠나는 듯 하다. 더구나 서로 만나 다툼이 있었다면 이는 공개적으로 발발하여 인간들은 서로 싸움질하기 조차 한다. 인간들은 자기가 죽어 있다는 것, 그런데 세상에서 지녔던 몸 안에 있다는 것에 놀란 이상, 그들은 천국과 지옥이 무엇 같은지, 자기들은 어디에 있을 것인지에 대해 알려는 호기심이 더 많아진다. 그러면 그들은 가르쳐지고 데리고 다녀져 사후 삶에 관하여 생각하도록 부추켜진다. 대부분의 인간들은 자기가 천국에 갈 것인지를 알아보려 열심을 낸다. 그들은 자기가 세상에서 선한 인간이었으니 분명 천국에 입장한다고 믿는다. 그러나 그들 중 대다수가 삶의 더 깊은 것들, 또는 더 내향의 수준들에 관한 생각은 가지고 있지 않다. 어쨌든 이런 인간들은 선한 영들에 의해 검사되어 그들의 삶의 품질이 정녕 무엇인지 보여진다. 그리고 어떤 것들은 그 자신을 보여주기 시작한다. 악한 인간은 삶의 바깥쪽에 해당하는 모든 것에는 열심을 내어 듣지만 더 깊은 것들에 관하여 말해지는 것에는 하등 관심이 없다. 그들은 듣지만 묵묵답답이다. 게다가 그들은 어떤 지역으로 향하여 가고 싶어 한다. 그래서 그들을 혼자 놔두면 그쪽 방향으로 난 길을 따라 가고 만다. 그들의 삶의 품질은 그들이 가고 싶어한 지역들로부터, 그들이 따라 걸어간 그 길로부터도 감지된다.
인간들은 이 첫 상태에서 며칠을, 몇 달을, 혹 일 년을 머문다. 머무는 시간의 길이는 바깥쪽 삶과 안쪽 삶이 얼마나 많이 일치하느냐에 달려 있다. 그 이유는 모든 인간은 자기의 바깥쪽 삶의 대부분을 먼저 벗겨내고, 얼마큼인지 모르나 내향의 것들에 상응하는 바깥쪽 삶의 평면에 있기 위해 그 자신 고유의 사랑의 형상이 되어가야 하기 때문이다.

사후 인간의 두 번째 상태

두 번째 상태를 내면의 상태라고 부르는 이유는 지금 인간은 그의 마음 안에 있는 것 안에, 또는 그의 의지와 그의 생각함에 놓이고, 그 반면 첫 번째 상태에서 작동되었던 바깥쪽에 속한 것들은 잠들어 있기 때문이다. 이 두 번째 상태는 세상에서 인간이 어떤 제약 조건 없이 자기 혼자 있었을 경우, 또는 자기 주위에 아무도 없는 상황과 엇비슷할 것이다. 인간이 세상에서 있을 경우, 자기가 말하는 것을 자극하는 그가 지닌 생각에 전권을 넘기듯, 인간은 이 상태 안으로 완전 무의식 상태로 미끄러든다. 인간이 이 상태 안에 있을 때 그는 자기 고유의 자아, 그 자신의 생명 안에 잠긴다. 그리고 그의 진정한 본성이 밝히 드러내진다. 이제 인간은 그가 실제로 사랑하는 것으로부터 생각하기 시작하고 그럴 것 같다 생각되는 것은 거의 없고 의도함과 뜻함만이 작동하고 있다. 단지 그의 의도함들에 관한 생각들이 적나나해짐에 따르는 두려움 같은 것을 제외하고는 그가 말하는 것과 똑같다.
모든 인간이 이 두 번째 상태를 통과하는 이유는 이것이 그의 영의 실제의 상태이기 때문이다. 첫 번째 상태는 그가 다른 인간들과 함께 있었을 때, 그의 영이 어떠했는지 이였는바, 엄밀히 말해 이것은 그의 진정한 상태는 아니다.
지금 그가 세상에 있었던 동안 어떤 종류의 인간이었는지가 명확해진다. 그 이유는 이쯤에서 그는 그에게 실제로 속해 있는 것, 그의 부분이 된 것을 기초로 처신하기 때문이다. 만일 그가 세상에서 진짜 선 안에 있었다면, 지금 그는 합리적으로, 슬기롭게-아마 사실상 더 슬기롭다. 그 이유는 구름으로 덮듯 어둡게 만든 육체의 묶임에서 자유하기 때문이다. 그런 반면, 만일 그가 세상에 있는 동안 악 안에 있었다면, 지금 미친 듯 발광적으로 행동하여 더 사악해진다. 그 이유는 자유함 아래, 제한 없음에 있기 때문이다.
양심에 따라 살아왔던 인간들이 이 두 번째 상태에 있을 때, 잠으로부터 깨어나는 듯 여겨진다. 그 이유가 지금 그는 천국의 빛으로부터, 전보다 더 깊은 지혜로부터 생각하기 때문이다. 깨어나자 그는 천국의 지각이 그들의 마음에 열리기 시작하는 방식에 의해 영향받게 된다. 그들은 큰 즐거움과 천사들과의 연합으로부터 오는 내적 복됨으로부터의 새 감각을 느낀다. 이쯤에서 이와 같은 영들은 주님을 인식할 수 있고, 그들 자신의 삶을 통하여 그분을 예배할 수 있다. 그들은 이 예배가 어떻게 완전한 자유 안에서 행해지는지를 알 수 있다. 그 이유가 자유에 관한 이 느낌은 그들의 가장 깊은 애착 안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외적 예배는 그들의 생활에서 중요한 부분을 더 이상 담당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내부로부터의 진정한 예배가 외적 예배의 자리에 들어 앉았기 때문이다.
위와 대조되는 것, 세상에서 완전한 악 안에서, 양심은 전혀 없이, 그러므로 신성으로부터의 모든 것을 부인했던 많은 이들이 있다. 이 같은 인간들은 두 번째 상태인 삶의 내적 수준으로 진입하자마자, 그들은 우둔한 인간들 같이 되어지는 바-폭력, 미워함, 복수와 경멸함이 돌발하고, 어떤 것은 너무나 사악해서 이런 것이 인간 내부에 과연 존재할까 의심될 정도이다. 그들은 사실상 자기들이 행하기를 원하면 무엇이든 가능한 완전한 자유 안에 있다. 그 이유는 그들이 세상에 있을 때 자기들을 점검했던 어떤 제약된 외적인 것이 떠나버렸기 때문이다.
그들이 위와 같은 상태에 있을 때, 그들은 때때로 자기들이 있었던 첫 번째 상태를 회상한다. 그들 중 어떤 이는 자신을 부끄러워하고, 어떤 이는 부끄럼을 전혀 느끼지도 않는다. 어떤 이는 첫 번째 상태에 더 머물게 하지 않게 했다고 화를 낸다. 이런 모습만 보아도 만일 그들에게 이를 허용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필시 그들은 자신들을 더 지독하게 파괴했을 것이다. 그 이유는 비밀스럽고 사기로 범벅된 바깥쪽 삶이 그와 똑같은 방식으로 그들의 내적 생명을 불살라 결국 사라지게 까지 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두 번째 상태에서, 인간들은 그가 세상에 있었던 동안 자신 안에 가지고 있었던 것, 그때 그가 가졌던 것, 그 당시 비밀리 말해진 것이 공개적으로 보여지고 그것과 정확히 같아지게 됨을 눈으로 본다. 이 시점에서는 바깥쪽 요인들이 좌지우지하지 않는 바, 영들은 이와 같은 것들을 노골적으로 이야기하고 과거 세상에서는 자기들의 명성에 흠집이라도 생길까 하는 걱정을 하였는데, 이런 걱정 같은 것이 없는 채 그것들을 행동에 옮긴다. 따라서 이 상태에 있는 동안 그들은 자기들의 많은 악들을 가져다 놓는 바, 천사들과 선한 영들에게 자기들이 진짜로 무엇인지를 드러내고야 만다.
악령들은 이 두 번째 상태에 있는 동안, 모든 종류의 악 안으로 돌진한다. 그 결과, 그들은 자주 처벌받고 때로는 대단히 무거운 처벌도 뒤따른다. 영들의 세계에는 여러 다른 종류의 처벌이 있고, 당사자가 세상에서 왕이었는지, 노예이었는지에 따라 있을법한 차별은 없다. 모든 악은 그것에 따른 고유의 처벌을 가져오는데, 그 이유는 행동과 그것의 결과는 분리되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 고로 이런 악, 저런 악 안에 있는 인간은 그것의 처벌 역시 내포하고 있다. 설사 그렇다 해도, 이 벌은 그가 세상에 있는 동안 저지른 악 때문이 아니라 다른 삶인 지금 행하는 악 때문에 자초한 벌이라고 말해야 마땅하다. 어쨌든 인간은 사후 그 자신 고유의 삶으로, 이는 육체를 지녔던 시절의 삶과 같다.
처벌이 있어야하는 이유는 이 상태에서 악을 조절하는 수단이 형벌 뿐이기 때문이다. 격려함은 더 이상 일하지 않는다, 가르침도 없다, 법을 두려워 할 일이 없다, 명성을 잃을 일도 없다. 그 이유는 바깥쪽의 행위가 지금은 인간의 실제적 본성으로부터 뻗어나오고, 그리고 이것은 극심한 처벌을 수단으로 하지 않으면 조절도, 부서질 조짐도 없기 때문이다.
그 반면, 선한 영들은 처벌이 전혀 없다. 설사 그가 세상에서 악한 어떤 것을 했을지라도 처벌은 없다. 그 이유는 그들의 이런 악이 사후 그들에게 되돌아 오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의 악은 앞 문단의 악과는 근본이 다르다. 그들의 악은 진정한 것을 고의적으로 심각히 반대하여 야기된 악이 아니다. 그들의 악은 부모로부터 상속된 악 외 어느 다른 악은 아니다.
모든 인간은 그가 세상에 있었던 동안 그의 영이 있었던 공동체에로 온다. 그의 영은 조금씩 거기로 안내되어진다. 결국은 거기에 당도하고 들어간다. 악한 영이 그의 삶의 내적 상태에서 붙잡혀졌을 때, 그는 그의 공동체를 향하여 점차로 돌아선다. 결국 그는 이 두 번째 상태가 마무리짓기도 전에 자기 공동체를 향하여 일직선으로 돌아선다. 그리고 이 상태가 끝났을 때, 그는 자신을 자신 같은 이들이 있는 지옥 안으로 내던진다. 이 내던짐은 마치 곤두박질하는 모양, 즉 머리는 아래로, 발은 위로 한 채 꼴아박는 격이다. 이같은 모습이 보여지는 이유는 그때의 이 인간은 거꾸로 된 질서 안에 있어 지옥의 것은 사랑하되 천국의 것은 거절하기 때문이다.
이 두 번째 상태 동안에도 역시 악한 영과 선한 영은 서로가 갈라선다. 첫 번째 상태 동안에서는 이 두 영은 함께 있었는데, 그 이유는 영들이 바깥쪽 것들에 포함되는 한, 세상에서 악한 자와 선한 자가 함께 있듯 여기서도 똑같기 때문이다. 이 분리됨은 다각도에서 발생한다. 이를 한꺼번에 묶어 말하면, 악령이 첫 번째 상태에 있는 동안 그들의 선한 생각들과 애착들을 통하여 접촉한 공동체로 악령을 데려감으로 성사된다. 이 방식에서 그들은 자기들이 악하지 않다는 것을 그들의 바깥쪽 모양새에 의해 설득되어졌던 공동체로 데려가진다. 지금 악령들은 이 공동체의 영들에게 자기들의 진짜인 것을 노출하는 바, 이 영들은 그들을 보자마자 돌아서버리고, 그들이 이러하자마자 악령 역시 그들의 얼굴을 이 선한 공동체로부터 그들의 마지막 예정지인 지옥의 공동체를 향하게 한다.

사후 인간의 세 번째 상태

세 번째 상태는 일종의 가르침이다고 말하는 편이 나을지 모른다. 이 상태는 천국에 들어가려는 인간들만을 위한 상태, 그래서 천사가 되려는 인간들만을 위한 상태, 지옥에 들어가는 인간들을 위한 상태는 아닌데, 그 이유는 그들은 가르쳐질 수 없기 때문이다. 지옥에 들어갈 이들을 위하여서는 두 번째 상태가 그들의 사랑쪽으로 완전히 돌아서고, 그들이 들어갈 지옥의 공동체를 향하는 바 세 번째 상태까지 마무리해 준 셈이 된다.
선한 인간들은 가르침을 수단으로 천국을 위한 준비의 하나인 세 번째 상태로 데려와진다. 선하고 진정한 것에 관한 통찰력을 수단으로 하지 않고 천국을 위해 준비될 자 아무도 없다. 이 통찰력에 가르침이 포함되고 있다. 물론 세상에서의 삶 동안 세상적인 태도에서 있는 공정과 정직에 관하여 아는 것은 가능하다. 그 이유는 그곳에도 옳고 그름에 속한 것을 가르치는 법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적 수준에서 진리인 것과 선인 것은 세상으로부터 배워질 수 없고 오직 천국으로부터만 배워진다. 설사 인간들이 성경으로부터, 교회 가르침으로부터 뭔가를 알고 있다 해도 이런 것들은 그가 천국 안에 있지 않는 이상 인간의 내적 삶 안으로 들어갈 수 없다. 인간은 그가 신성인 것을 인식하고 이것 때문에 공정과 정직을 행동에 옮길 때 천국 안에 있는다. 그러나 누구도 위와 같이 있으려면 먼저 가르쳐져야만 한다. 예를 들면, 하느님은 계시다는 것, 천국과 지옥이 있다는 것, 사후에도 삶이 있다는 것, 무엇보다 우선적으로 하느님은 사랑되어야 한다는 것, 타인은 자기가 자신을 사랑하듯 사랑되어야 한다는 것, 그리고 또한 성경은 그것이 하느님의 말씀이므로 믿어야 한다는 것 등등이 가르쳐져야 한다는 말이다. 이런 사항이 참이다고 믿을 때까지 그는 영적으로 생각할 수 없고, 그것들을 의도할 수도 없다. 그러나 그가 그것들을 행할 때, 그 다음 천국이 그의 삶에 내재한다. 즉 주님이 천국을 통하여 인간의 삶에 내재하신다. 그런고로 가르침이 필요하다. 인간이 전에 도덕적으로 정직과 공정이다고만 보았던 것이 지금 그의 영적 삶의 기초가 되어가고 있다.
이 세 번째 상태에서의 가르침은 다양한 천사의 공동체에 의해 주어진다. 특별히 북쪽과 남쪽 지역의 천사들에 의해 가르쳐지는데, 그 이유는 이들은 총명과 지혜에 속한 것에 관심이 많기 때문이다. 가르치는 장소가 있는데 주님은 그곳으로 영들의 세계에서 두 번째 상태를 마친 가르쳐져야 할 선한 영들을 데려온다. 이 장소들은 가르쳐져야 할 천국의 선한 품질의 유형에 따라 배열되고 배치되어 있다. 이 방식에서 모든 이는 그 자신의 지각과 품성에 꼭 맞는 방법으로 가르쳐질 것이다.
인간들은 대단히 많은 다양한 방식에서 가르쳐지는데, 그 이유는 그들은 아주 다양하고 다른 종류의 삶의 배경과 상황으로부터 오기 때문이다. 각각 그들에 꼭 맞는 선생이 모두를 위해 찾아진다. 그리고 모든 가르침이 교리와 동떨어진 말씀으로부터가 아니고, 말씀으로부터 끌어낸 교리의 기초 위에서 행해진다.
모든 이는 각기 이해할 수 있는 방식에서 가르쳐지는데, 즉 각자의 특별한 종교에 따라, 그리고 그들이 세상에서 자기 삶의 기초가 되었던 그들만의 특별한 종교의 가르침에 따라 진행된다. 그리고 천국들에 있는 가르침은 이런 점에서 세상적 가르침과 다르다. 즉 통찰력이 기억에 위임되는 것이 아니라 삶에 위임되는 것이다. 그들은 가르침을 받아 그들 자신의 삶과 일치하는 모든 것 안에 가져다 놓는다. 이것이 그들의 본성인 바, 그들은 삶에 유용해짐을 위해 진정한 것을 사랑함으로 계속적으로 영감되어진다. 그리고 주님은 모든 이가 자기의 본성에 걸맞는 유용성을 사랑하도록 설비해주신다. 이 사랑은 꼭 천사가 되겠다는 인간의 희망에 의해 더욱 강렬해진다.
훈육이 마무리되고 영들이 천국을 위해 준비되어졌을 때, 그들은 천국의 옷으로 차려 입는다. 이 옷은 대체로 고운 모시 같은 흰색이다. 이렇게 잘 차려입고 그들은 천국으로 안내하는 길로 데려와지고 거기서 수호 천사에게 인계된다. 그 다음 그들은 천국 공동체 안으로, 많은 종류의 행복 안으로 환영받는다.
각 천사는 주님에 의해 그 자신의 공동체로 인도된다. 이것은 여러 다른 갈래의 길에 의해 실시된다. 영들이 인도되는 이 길을 아는 천사는 없다. 아는 분은 오직 주님뿐이시다. 천사같은 영이 자기 고유의 공동체에 도착할 때, 그들의 가장 깊은 삶의 수준이 공개된다. 그 이유는 공개됨이 그 공동체와 완전한 조화를 달성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은 즉각 인식되고 큰 기쁨으로 환영받는다.

자비 만으로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

많은 인간들이 어떤 천국이 있는지, 또는 그 천국에 도달하는 방법은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에, 그리고 인간 안에 있는 천국의 삶에 무지하기 때문에 그들 중 대단히 많은 이들이 천국 입장 허가 여부의 결정은 신앙을 가지고 있어 주님의 중재를 받은 이들을 위한 주님의 자비에 국한된 문제라고 믿는다. 고로 그들은 인간은 신성한 호의로부터 나오는 은총에 의해서 구원될 수 있다고 상상한다. 어떤 이는 이것은 지옥에 있는 이들에게도 적용된다고 생각하기 까지 한다.
위 문단에서와 같이 생각하는 인간들은 인간이 실지로 무엇인지에 관하여 아는 것이 하나도 없다. 그들은 인간의 품질은 그가 살아온 것과 꼭같다는 것, 그의 삶은 그의 사랑과 꼭같다는 것, 그의 물질적 모양은 그의 내향적 삶이 행동들을 통하여 그 자체를 표현할 수 있는 바깥쪽 모양일 뿐이다는 것을 모르고 있다. 그들은 몸은 그 자체로부터 사는 것이 아니라 영으로부터 산다는 것, 그가 사랑한 것으로부터 사는 것임을 모른다. 인간이 위 같은 사항들에 무지한채로 있는 한, 그들은 구원은 자비와 은총이라 불리는 주님이 선심쓰신 결과일 뿐 그 이상은 아니다고 계속 믿고 있다.
따라서 이 신성한 자비(mercy)가 무엇인지 꼼꼼히 헤아려두는 것이 필요하다. 신성한 자비는 인류 전체를 향한 순수한 자비이다. 그리고 단 한 인간도 이 자비로부터 취소 받는 일은 결코 없다. 고로, 구원되어질 수 있는 모든 이 각각은 구원된다. 허나 누군가가 구원될 수 있는 방법은 주님께서 밝히 알려주시고 있는 신성한 수단에 의해서이다. 이것은 인간이 구원되어지기 위해 어떻게 살아야하는지를 가르치고 있다. 그것들을 수단으로 주님께서는 인간을 천국을 향한 쪽으로 인도하시고, 천국의 생명을 주실 수 있다. 주님께서는 모든 이를 위해 이를 실시하신다. 그러나 인간 자신이 악을 억제하지 않으면 주님은 천국의 생명을 주실 수 없다. 그 이유는 악이 장애물이기 때문이다. 인간이 악을 그만두는 만큼, 주님은 그를 그분의 신성한 수단을 통해, 그리고 순수한 자비로부터, 그의 유아기로부터 세상 삶의 마지막까지, 그리고 영원히 인도하신다, 위 모든 것은 주님의 자비는 자비 만이 아닌 순수한 자비이다는 것-즉 어떻게 살아왔는지는 하등 관계가 없이 호의로부터만 인간 각각이 구원되는 것은 아니다는 것을 보여준다. 주님은 그분의 질서에 반대되는 것은 절대 실시하실 수 없다. 그 이유는 그분 자신이 질서이시기 때문이다. 위로부터 더 알아지는 것은, 사후 인간의 삶은 바뀌지 않는다는 것-즉 악한 삶이 선한 삶으로 바뀔 방법은 없다는 것, 더구나 지옥의 삶이 천사의 삶으로 바뀌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 이유가 각 개인의 영은 머리로부터 발끝까지 그의 사랑과 꼭같고, 그의 삶과도 꼭같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에 반대되게 변한다는 것은 각 인간의 영의 완전한 파멸을 뜻한다.

천국으로 인도하는 삶을 사는 것은 어렵지 않다

인간들이 자주 착각하는 것은 천국으로 인도하는 삶을 살아내는 것은 대단히 힘들다는 것이다. 그들이 들어왔던 바는, 인간이 천국으로 가려면 세상을 단념할 필요가 있다는 것, 즉 육체와 더불어 있는 모든 즐거움을 포기하고 영적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이것이 뜻하는 바가, 세상과 더불어 그에 딸린 재물, 명예 등등을 반드시 금하고, 쉴틈 없는 기도와 성경 읽기 등등을 하면서 하느님에 관하여, 구원에 관하여, 그리고 영생에 관하여 계속 묵상하는 것이다고 상상한다. 간단히 말해 어불성설이다. 사실상, 위와 같이 세상을 포기한 인간들이 자신을 위해 비참한 삶만을 만들고, 정작 그가 죽을 때 천국의 기쁨을 받을 수 없는 인생으로 점철하는 경우가 많다.
만일 인간이 천국의 생명을 받고 싶다면, 그는 세상에 살고 세상의 업무나 사업에 가담하고 있어야 한다. 그 이유가 도덕적, 시민적인 삶을 통하여 그는 영적 생명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외 영적 삶이 인간 안에서 형성되어질 수 있는 다른 방법은 없다. 다시 말해 그의 영이 천국을 위해 준비될 수 있는 다른 방편은 없는 말이다. 그 이유는 내면적 삶을 산다는 것은 이 삶과 동시에 있어야 하는 외향의 삶이 없는 것은 마치 기초 없는 집에서 사는 것과 흡사한 바, 이 삶은 점차 가라앉고 균열이 생기고 비틀거리다가 결국 붕괴되기 때문이다. 영적으로 살고 있음은 자연적으로 살고 있음, 또는 세상에서 살고 있음에서 옮겨가지지 않는다. 오히려 두 가지의 살고 있음은 함께 묶여 있다. 혼이 몸과 함께 있는 것과 같다.
삶은 세 겹, 즉 영적 삶, 도덕적 삶, 시민적 삶이다. 도덕적, 영적 삶으로 이어지지 못한 채 시민적 생활을 영위하는 인간이 있다. 아직 영적 삶까지는 아니더라도 도덕적 삶을 사는 인간이 있다. 그리고 사회적, 도덕적, 영적, 이 셋을 동시에 사는 인간도 있다. 어쨌든 이것들은 천국의 삶으로 인도 가능한 삶들이다.
도덕적, 시민적 삶은 영적 삶의 활동적 측면이다. 만일 영적인 것이 이 활동적 측면에서 분리되면, 생각함과 말함 밖에 더 아니고 기초 없는 영적 삶에 불과하다.
모든 이는 도덕적, 시민적 삶을 살 수 있다. 모든 이는 세상에서의 그의 삶으로부터 위 두 삶이 무엇인지에 친숙해 있다. 모든 이는, 좋게 이든 나쁘게 이든 이 두 삶을 꽤 잘 이끌어간다. 그 이유는 어느 누구도 자신이 정직하고 공정한 인간이라 불러주는 것을 마다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영적인 인간도 자연적 인간이나 꼭같게 사는 것이 필요하다. 한 가지 차이는, 영적 인간의 경우, 시민적 도덕적 법들을 준수하는 것은 그것이 신성한 법에 관한 문제이기 때문에 준수한다는 것이다. 누군가가 이렇다면 그는 그것을 현실화함 없이 주님에 의해 인도되어진다. 이때 그가 시민적, 도덕적 삶의 차원에서 행해졌어도 그것은 당연히 영적 근원으로부터이다. 십계명은 영적, 도덕적, 시민적 삶에 관한 모든 법칙들을 포함하고 있다. 이 계명은 인류 전체를 위해 주님에 의해 주어져 있다. 계명의 첫 셋은 영적 삶과 더불어 행해지고, 그 다음 넷은 시민 생활과 더불어, 마지막 셋은 도덕적 삶에 관련된다.
위 모든 것이 말하는 것은 천국으로 인도하는 삶은 세상으로부터 분리될 경우 성취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것이다. 사랑의 행동 없는 신앙심 깊은 삶은 천국으로 인도해주지 못한다. 차라리 쓸모 있는 활동-즉 모든 업무, 일에서 공정과 정직으로 처리해가는 것 등이 천국으로 인도하는 것들이다. 그리고 신성한 법들을 지키려 정당하게 행동할 때, 이 행동은 내면적 동기, 또는 천국적 동기로부터 이다.
천국으로 인도하는 삶은 고되지 않다. 오히려 사랑하는 활동과 분리된 경건하다는 삶이 살아내기에 더 고달프고, 그런 경건 생활이 천국으로 인도한다고 믿는 정도 만큼 천국에서 멀어지게 할 뿐이다.

제 2 부

천국의 모양

천국에서는 주님이 하느님이시다

천국과 지옥에 관한 어떤 생각을 해보기 앞서 우선 필요한 것은 하느님의 본성을 이해하는 것이다. 그 이유가 그 외 모든 것은 이 근본적인 요점에 의존되고 있기 때문이다. 모든 천국들에서 주님 만이 하느님으로 예배되어진다. 천사들은 주님이신 한분 하느님만을 생각할 수 있다고 말한다. 천사들이 이에 덧붙여 말하기를, 만일 자기들이 따로따로 있는 세 인물이 세 하느님이다고 행여 믿어지기라도 한다면, 자기들은 혼동을 일으키고 마는데, 이 혼동 자체는 이것을 말하면서 저것을 뜻하는 것이 불가능한 천국에 들어감으로부터 예방해준다 한다. 천국에서 각자 속의 확신과 생각은 모두에게 알려지게 되어 있고 천사들의 얼굴에서 보여지기 까지 한다. 그래도 여러분에게 한 가지 알려져야 할 것은, 선한 이들, 그런데 하느님에 관하여 잘못된 사상을 믿게 되었던 이들은 결국에는 천국 안으로 영접되고 거기서 주님이 하느님이시다는 진리의 가르침을 받는다는 것이다.
주님이 하느님이심을 부정하는 이들은 만일 이를 신앙으로 스스로 확증해왔다면 천국 밖에서 자신을 발견한다. 이런 인간들은 끝내는 명백하게 생각하는 능력을 상실한다. 이 진리는 이렇게 간단하다. 즉 천국은 주님을 영접하는 이들, 주님이 보편적인 하느님이다고 알고 있는 이들만이 있는 곳이라는 말이다.
죽은 아주 어린 아이-그들은 셋째 천국을 구성하고 이들은 그들의 아버지로서 주님을 사랑하고 이 아버지가 모든 이의 주님이심을 아는 (셋째) 천국에서 양육되어진다.

주님의 신성한 생명이 천국을 만든다

천사들은 모두 함께 ‘천국’이라 불리워진다. 그 이유는 그들이 천국을 구성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님의 신성한 생명이 천사들 안으로 흘러들고 이를 천사들이 받아들여 그것이 천국을 만든다. 모든 사랑과 이해함은 주님으로부터 오는데, 천사들은 자신 안으로 이것을 받아 들인 만큼에서 천국 안에 있는다.
각각의 천사들은 주님 없이 자기들이 선을 행할 수 있다거나 선을 행하기를 원해서는 안됨을 은연중에 깨닫는다. 그들은 생각이나 느낌이 주님으로부터가 아님을 보게 되면 자신의 생각과 느낌을 무시해버린다. 모든 천사들 중 가장 높은 수준의 천사들은 이를 지각하고 대단한 사건으로까지 간주하여 느낀다. 이를 그들이 더 할 수록 자신들이 천국 안에 있음을 더욱 느낀다. 이런 까닭은 그들이 심오한 이해와 강렬한 기쁨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천사들은 생명 자체는 주님으로부터만 올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들은 말한다. 저절로 존재한 것은 아무것도 없고 오로지 그 존재에 앞서 있는 어떤 것으로부터 존재할 뿐이다고… 모든 것은 천사들이 생명의 존재 자체라 부르는 첫 근원으로부터 존재한다. 그리고 모든 것은 이 근원으로부터 존재를 계속한다. 그 이유는 존재가 계속 태어나기 때문이다. 만일 생명의 이 흐름이 한순간이라도 멈춘다면, 모든 것은 즉각 존재함을 중단하고 만다. 천사들은 말한다. 생명에는 하나의 원천만 있고 이로부터 모든 생명이 진행하고 있다. 이를 받아들이는 자들은 자신 안에서 천국을 발견한다. 그러나 이 사실을 억압하거나 부정하는 이들은 지옥으로 들어가 생명을 죽음으로 바꾼다.
창조된 세계는 유입하는 생명의 근원의 본성을 비춰주고 보여준다는 것을 근거로 삼아 천사들은 위의 진리를 지지한다. 천사들이 위의 모든 것을 믿기 때문에, 그들은 자기들이 행한 선 때문에 자기에게 돌아오는 어떤 감사도 무시하고 받지 않는다. 따라서 만일 자기들이 ‘선’이라 불려진다면 그들은 실망하고 떠나버린다.
자신의 선함에 신뢰를 두는 이들 그리고 자기가 행한 것 때문에 영예를 취하는 영은 천국의 어느 한 구석에도 있을 수 없다. 천사들은 위 영을 어리석은 도둑으로 밖에 여기지 않는다. 요한복음 15장에서, 주님께서는 천국에 있는 이들은 그들이 그분 안에, 그리고 그분이 그들 안에 있다고 말씀하신다. 그때서야 주님은 자신 속에 있는 것들 안에서 천사들과 더불어 거주하신다.

천국의 신성한 생명은 주님과 이웃을 향한 사랑이다

사랑과 진리는 빛과 열이 태양으로부터 올 때와 같은 방법으로 주님으로부터 천국 안으로 흘러든다. 태양에서 빛과 열은 확실히 구분되지만 그것들이 땅에 생명을 가져오기 위해서는 결합하고 있다. 이런 방법으로 주님의 사랑과 진리도 천국에 생명을 주고 있다. 그 이유가 불은 사랑의 형상이고, 빛은 사랑으로부터 오는 진리의 형상이기 때문이다.
사랑은 인간들을 하나되게 합친다. 이렇게 해서 사랑은 천국을 만든다. 사랑은 천사들을 주님과 그리고 서로서로에게 함께 하게 한다. 또한 사랑은 생명의 본질이어서 천사와 인간들을 사랑으로부터 자기들의 생명을 가지게 한다. 이것은 사랑하는 자와 사랑받는 자의 따뜻함과 생명력에서, 사랑이 없을 경우 그들의 차가움에서 보여질 수 있다. 모든 이 각자의 생명은 각자의 사랑의 품질과 똑같다.
천국에는 두 개의 확실히 구분되는 사랑이 있다; 주님을 사랑함과 이웃을 사랑함이다. 자기의 사랑을 주님에게 우선적으로 초점을 맞추는 이들은 천국의 중앙에 있다. 자기의 사랑이 이웃이라는 용어에 그 자체를 나타내 보이는 이들은 중앙으로부터 더 멀리 있다. 이 사랑들 모두 주님으로부터 나오고 각각의 사랑은 천국을 만든다. 천국에 잘 알려진 바, 주님을 사랑함은 단순히 그분을 하나의 인물로 숭배함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으로부터 나오는 선을 사랑함을 뜻한다. 그리고 그분의 선을 사랑함이란 그분의 선을 행하려 작정하여 사랑으로부터 그것을 실천함이다. 마찬가지로 이웃을 사랑함이란 어떤 인물을 뜻하는 게 아니라 그와 더불어 있는 말씀으로부터의 진리와 선을 자신의 삶의 수단으로 작정하여 그것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천사들은 누군가가 원하는 것을 행하기를 바라고 그들을 위해 그것을 실제로 행동하는 인물을 수단으로 이 두 사랑들이 그 자체를 어떻게 보여주는지를 계속 묘사하고 있다. 이 방법을 응용하는 가운데 그는 역으로 사랑받아지고 상대방과 결합되어진다. 그들 역시 말하는 바,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은 주님 자신의 모습에 있고, 이 선을 자기 생명의 참 원리로 만드는 이들은 주님의 모습이 되어가서, 그분과 결합되어진다고 한다. 이 사랑은 극도로 아름다운 천사의 외관으로 보여지기까지 하는데, 이 아름다움은 그들에게 끼친 주님의 영향으로부터 이다. 사랑은 그들의 얼굴에서, 그들의 대화에서, 그리고 그들 각각의 행동을 통하여 빛난다. 각자 지닌 사랑의 품질로부터 나오는 영적 활동 영역이 천사 주위에 있다. 그리고 이 영역은 먼 거리에서 조차 인식되어질 수 있다. 이 영역은 사랑으로 꽉차있으므로 그들은 타인의 아주 깊은 것들에까지 당도한다.
영계에서 각 영은 자기 고유의 사랑의 방향으로 자신을 돌아 세운다.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이들은 계속적으로 주님을 향하여 돌아서는 반면 자신을 사랑하는 이들은 계속 그분으로부터 떠난다. 이 회전은 몸의 각 움직임에 적용되고 있다. 그 이유는 천국에서의 공간이란 각자의 내부의 상태에 걸맞게 행동하는 것이고, 방향은 각자의 생각의 초점을 따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천사가 주님을 향하여 돌아서는 것은 만일 천사가 그분으로부터 오는 것들을 행하기를 사랑하면 주님께서 천사들을 돌아서게 해주시는 바, 돌아섬의 주체는 실상 천사가 아닌 주님이시다.
사랑 자체가 천국의 신성한 생명인 이유는 사랑은 사랑 안에 천국적인 모든 것을 포함하고 있어서이다. 즉 평화, 총명, 지혜와 행복 등이다. 사랑은 풍요로워지고 완전해지기를 추구한다. 그래서 사랑은 자기와 하모니를 이루는 모든 것을 받아들인다. 각 인간의 사랑은 기억 안으로 깊이 들어가 수색하여 자기와 일치하는 모든 것을 끌어내고 사용을 위해 모으고 분류하나 자기와 일치 않는 것은 거절한다. 따라서 이 세상에서의 삶 동안 선한 것을 행하기를 단순히 바래왔던 인간은 사후 아주 슬기로워질 수 있다. 그 이유는 그는 천국을 영접하는 수단을 획득했었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 이기적이고 세욕에 집중한 이는 사후 점차적으로 무지해가고 선한 것을 몹시 싫어하여 움츠리고 만다. 결국 그는 지옥을 향하여 자신을 떼어내 거기서 자기와 유사한 이들과 결합한다.

천국은 구분되는 두 왕국을 가지고 있다

천국은 무한하게 변화함과 다양함으로 구성되고 있다. 그 이유는 거기에는 동일한 두 천사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전체를 만들어 가는 각기 다른 부분들로 구별되어진다. 천국은 하느님의 왕국이다. 이 왕국은 구분되는 두 부분들로 나뉘어져 있다. 그런 다음 이 두 부분들은 각각 세 등차로 구별되어진다. 거기에는 각기 다른 무수한 천사들의 공동체와 그룹들이 있다.
어떤 천사의 경우 그는 다른 천사보다 더 깊은 수준과 상이한 방법에서 주님을 알아채린다. 이 사실은 ‘천적’ 왕국과 ‘영적’ 왕국으로 불리울 수 있는 두 천국의 왕국을 구분짓는 기초가 되고 있다. 천적 수준의 천사들은 영적 수준의 천사들이 사용하는 기억을 통하거나 추론하는 과정을 통하기 보다는 오히려 직접적으로 주님으로부터 그들의 생명 안으로 진리를 받는다. 천적 천사들은 진리를 심정에 적어 소유한다. 지각적인 이 천사들은 어떤 것이 진리인지 아닌지를 즉각 알고 그것을 사용해보기를 바라고 있다. 영적 천사들은 어떤 것이 진리인가를 알려면 자기들의 추론력을 사용하여 곰곰이 생각하는 것이 필요하다. 위와 같은 기본적인 구별 때문에 위 두 형태의 천사들은 서로 자유롭게 혼합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은 어떤 중개하는 천사 공동체를 수단으로 교통한다. 따라서 비록 천국이 두 개의 확실히 구분되는 왕국을 형성하고 있다 해도 (교통함을 통해) 하나의 전체를 만들고 있다.

천국은 명백한 세 등급을 가지고 있다

천국은 각기 다른 세 등급으로 구별되어질 수 있다; 즉 가장 높은 등급, 또는 가장 안쪽; 중간, 또는 둘째 등급; 그리고 가장 낮고, 바깥쪽, 또는 제 3 등급. 아마 3층 집의 3층-2층-1층을 연상해보면 쉽게 이해될 것이다.
인간의 마음도 위와 유사한 구조로 배열되어 있다. 그 이유는 인간의 마음 역시 주님에 의해 창조되었기에 위와 동일한 질서와 디자인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각 인간은 아주 작은 규모의 천국의 모양 안에 있다. 이는 각 인간이 보다 깊은 수준에서 천국들과 어떻게 소통되어질 수 있는지를 알게 한다. 사후, 각 인간은 자기가 지상 삶에서 주님을 어떤 방법으로 영접했었는지에 따라 세 등급 중 하나에 속하는 천사들 사이에 있게 된다.
천국의 위 세 등급은 천사들이 주님을 영접하는 방법들로부터 천적, 영적, 자연적 등급이라 불리워진다. 천국의 자연적, 또는 가장 낮은 등급은 그 안에 천사들의 천적 유형과 영적 유형, 어느 유형이든 또한 가지고 있다. 따라서 어쩌면 천적-자연적 등급과 영적-자연적 등급이라고 말하는 편이 더 정밀할 것이다.
각 천국의 등급 안에는 다른 천사들 보다 더 깊게 알아챔을 지닌 천사들이 있다. 지각(perception)이라는 이 등급은 천사들을 중앙 쪽으로 더 가까이 있게 하거나 천국의 특수한 등급에 해당하는 주변 쪽에 각 인간을 있게 한다. 천사의 마음이 주님을 향하여 열리는 정도 만큼에서 중앙 쪽으로 각 천사의 위치는 정해진다.
진리를 수단으로 해서 움직이되 진리를 즉각 사용하고 싶어하는 천사들은 천국의 가장 높은 등급, 또는 가장 안쪽 등급에 있게 된다. 그 반면 진리를 자기의 기억 안으로, 그 다음 이해력 안으로 가져가고, 거기로부터 진리를 사용하려 하는 이들은 두 번째 또는 중간 등급에 있다. 그리고 적당한 삶, 직바른 삶, 그리고 신성한 존재가 있다고 믿는 이들, 그러나 이를 굳이 더 배워 알려 하지 않는 이들은 제 3의 등급, 또는 바깥쪽 등급에 위치한다.
천국의 지각은 각 인간이 가장 높은 것, 또는 중앙을 향하여 이동할 때 증가한다. 그 이유는 이럴 때 신성에 더 가까워지기 때문이다. 천사의 완전함은 총명, 지혜와 사랑, 그리고 이것들로부터 오는 행복에 있다. 가장 깊은 천국의 천사들은 다른 두 등급의 천사들 보다 더 주님께 자신들의 가락을 맞춘다. 고로 그들의 완전함은 더 크다.
위 등급은 확실히 차별되므로 이 천국의 천사가 저 천국의 천사와 쉽게 연계하지 못한다. 만일 어떤 천사가 낮은 천국으로부터 보다 높은 천국으로 승강한다면 그는 고통을 느끼기 시작한다. 그는 거기 있는 이들을 볼 수 없고 그들과 대화도 할 수 없다.
만일 어떤 천사가 높은 천국으로부터 그 보다 낮은 천국으로 하강한다면 그는 자기 지혜를 상실하고, 말더듬고, 결국은 거기를 떠나야 하는 지경에 이른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간혹 예외로 허용해주는 때가 있다. 예를 들면, 그의 복지를 위해 더 높은 천국의 영광을 보는 것이 허용될 경우이다. 그렇다 해도 이런 천사들은 완전한 소통을 가능하게 하는 중매하는 천사들에 둘러싸여 조심스럽게 준비되는 절차를 거쳐야만 한다.
같은 천국 안에 있는 천사들은 각자의 애착이 비슷하다면 거기 있는 모두와 섞일 수 있고 다함께 즐길 수 있다.
위와 같은 구분함이 존재할지라도, 여전히 전체로서의 천국들은 주님 때문에, 그리고 이 천국이 저 천국에 영향을 주기 때문에 하나를 만든다. 이런 방법들에서 세 천국들은 철두철미하게 연결 되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게 하여 하나를 만든다.
천국의 모양에 대한 명백한 생각을 가져 보겠다면 천국의 세 등급들이 영적인 것들 안에서 어떻게 작동하는 가를 우선 이해하는 것이 필수이다. 인간들은 등급이라는 용어를 두고 생각할 때 이는 점진적 변화로 생각하려는 경향이 있다. 마치 어둠으로부터 빛으로, 또는 뜨거움으로부터 차거움으로 이어지는 점진적 변화같이 말이다. 그러나 영적 등급은 이와 다른 방법, 즉 불연속적 방법에서 작동한다. 이 수준 또는 등급으로부터 또 다른 등급은 분명 다르나 그럼에도 그것들은 연결되어 있다. 마치 원인과 결과의 관계와 같다. 그리고 이로부터 제 3의 등급이 있다. 빠져나오는 둘은 첫 번째 안에 포함되어 있는데, 마치 인간의 마음과 몸이 그의 영의 생산물이긴 하나 그 자체 영의 부분은 아닌 것과 같다. 만일 이 원리를 납득하지 않으면 많은 사항들, 즉 천국의 모양, 인간의 마음, 영계와 자연계 사이의 관계에 대한 이해가 있을 수 없고, 상응의 본성과 근원도 이해될 수 없다. 각각의 천사와 인간은 주님의 생명이 직접 흐르는 모든 것 중에서 가장 높은 등급, 또는 내부의 가장 안쪽 등급을 가지고 있다. 이를 수단으로 주님은 모든 것을 그 뒤를 이어 적절한 질서 안으로 배열하신다. 이것은 영혼 자체이고, 주님께서 각 인간과 더불어 있는 주님 자신의 ‘주거지’이다. 위 가장 안쪽 수준이야말로 이 수준을 가지지 않는 동물과는 아주 달리 각 인간을 진정 인간으로 만든다. 이 수준 때문에 각 인간은 주님에 의해 천국의 빛 안으로 들어 올려질 수 있고, 주님을 믿을 수 있고, 주님에 의해 움직여질 수 있고, 그분을 볼 수 있다. 이 수준을 수단으로 각 인간은 총명과 추론함을 가질 수 있고, 마지막에는 영원히 살 수 있게 된다. 그럼에도 언제나 그것의 존재를 알아챔이 있지 않는데 그 이유는 그것은 주님 만에 속한 것이기 때문이다.

천국은 셀 수 없이 많은 공동체로 구성되어 있다

세 등급의 천국 각각 안에서 천사들은 아주 다양한 크기의 공동체들로 그룹짓고 각 그룹은 거기 있는 이들의 특별한 품질을 반사하고 있다. 비슷한 품질들을 가지는 이들은 함께 하나의 공동체를 형성한다. 그리고 거기에 있는 좋은 품질들의 무한한 다양성들 때문에 거기에는 셀 수 없이 많은 공동체들이 있다.
천국의 공동체들은 선에 대한 특별한 품질에 따라 서로서로가 관계하여 위치하고 있다. 영계에서의 거리는 내부 상태에 있는 다양함의 결과라는 사실에서 비롯된다. 크게 차이 나는 인간들은 더 멀리 떨어진다; 덜 차이 나는 이들은 더 가깝게 위치한다, 즉 유사함이 접근함을 가져다 준다.
다시 동일한 공동체 내에 있는 이들도 위와 유사하게 배열되어진다. 보다 더 완전해지면 중앙에 더 가까워지고 있음이 발견된다; 덜 완전하면 그 덜한 정도에 따라 주변 쪽으로 향한다. 각 경우에서, 공동체 내에서의 배열은 빛이 더 멀어지면 더 희미해지는 것과 비교될 수 있다. 중앙에 있는 이들은 가장 큰 빛에 있다. 천국의 보편적인 법칙의 하나는 같은 것은 같은 것에 끌린다는 것이다. 자신과 비슷한 타인과 더불어 있는 인간들은 마치 자기 집에서 가족들과 있는 듯 느낀다. 그래서 그들은 자유함과 평화, 극도의 행복함을 느낀다.
그 다음 알게 되는 바, 천국들을 전체로서 결속하는 것은 선의 품질이다는 것, 또한 인간들은 선에 대한 자기들의 특별한 품질에 의해 구별된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배열을 하는 것은 천사가 아닌 선의 근원이신 주님이시다. 그분은 인도해주고 결합되게 하고 구별해주시고 자유를 가져다 주며 각자의 특별한 사랑과 신앙, 그리고 기쁨으로부터의 생활을 영위하도록 모든 이 각각을 관리해주신다.
지상의 인간들이 가족, 친구, 친척을 알아보듯 천국에서도 자기와 비슷한 선을 지닌 인간을 서로 인식한다. 설령 단 한번도 서로 본 적이 없다 해도 알아보는 것에 실패하지 않는다. 천국에서의 유일한 관계는 사랑과 신앙으로 이루어지는 영적 관계 뿐이다. 나는 나자신을 위하여 위 상황을 겪은 적이 있다. 내가 본 어떤 천사들은 나의 어린 시절로부터의 나에 대한 전부를 아는 것처럼 여겨졌다. 나를 알아보았던 이들은 나의 영적 상태와 비슷한 상태였다.
같은 공동체에서 사는 천사들은 대체로 비슷한 것을 찾고 있는데, 그렇다고 세부사항에서까지 똑같은 것을 찾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서로가 닮고 있다. 그 이유는 그들의 사랑의 품질이 그들의 얼굴에 빛을 내고 모양새에서까지 비슷해져 있기 때문이다. 내가 어떤 천사의 얼굴을 보았는데, 그는 단 하나의 천국의 공동체 안에서조차도 그 안에 애착의 다양한 형태가 표현되기 위해 얼굴의 표현이 어떻게 바뀌는지를 나에게 증명이라도 해주는 것 같았다. 이것은 얼마 동안 지속되었는 바, 그때 내가 주목한 것은 표현이 계속 바뀐다 해도 똑같은 일반적인 얼굴을 배경으로 거기에 언제나 있었다는 점이다. 천사들은 또 다른 천사가 무엇 같은지를 그의 얼굴을 쳐다봄으로 즉각 알 수 있다. 천국에서는 자기가 느끼는 것, 생각하는 것을 감추는 것, 또는 있는 그대로가 아닌 다른 것인 체 하는 것들이 불가능하다.
천국에 있는 모든 공동체들은 비록 자신의 공동체로부터 다른 공동체로 가지 못하기 때문에 직접적인 어떤 교환을 수단으로 해서는 아니지만 서로가 접촉하고 있다. 직접적인 교환에 의한 접촉은 아마 자신을 떠나 올바른 느낌이 안 드는 그 외의 어떤 장소에 가는 것과 비슷할 것이다. 그 대신 그들은 자기들로부터 나오는 영역(sphere)들을 수단으로 접촉한다. 이 영역은 더 멀리 더 넓게 뻗칠 수 있고 더 깊게 타인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이런 방법에서, 가장 높은 천국의 천사들은 천국 전체를 통하여 강한 영향력을 가지는 바, 마치 그들의 영역은 모든 곳에 침투하는 듯하다. 그리고 이 영역의 결과로 천국의 각 천사는 그 외의 모든 이와 소통한다.
천국에서 천사들의 크고 작은 공동체들은 수만, 수천 수백의 천사들로 형성되어 있다. 그리고 마치 집 옆에 집, 가족 옆에 가족이 사는 듯한데, 여타 공동체와 따로 떨어져 사는 천사들도 있다. 이 인간들은 더 직접적으로 주님의 관찰하심과 안내 아래 있고 최상의 천사들이다.

각 공동체는 소형의 천국이고 각 천사는 최소 규모의 천국이다.

선의 품질이 천국을 만드는 바, 이 품질은 모든 천국 공동체로서의 안에, 또한 각각의 천사 안에 있다. 이 선은 아무리 다양해진다 해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래도 이 선은 천국의 선이다. 그 차이는 이 장소에 이런 종류, 저 장소에 저런 종류의 선의 품질이 있다는 것 뿐이다.
각 천국의 공동체는 소형의 천국이다. 그 이유는 전체로서의 천국과 똑같은 틀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중심에 더 가까이 있는 공동체는 그만큼 더 영적이고, 덜 영적인 공동체는 주변 쪽에서 그룹지어 위치하고 있다. 이는 어떻게 주님께서 마치 그들이 하나의 천사인 것처럼 천국에 있는 모든 이를 인도하시나를 보여준다. 그분은 각 공동체에 있는 이들과도 똑같게 행하신다. 천사의 공동체는 때로는 하나의 천사인 듯 그 존재의 외관을 취하기도 한다.
천국 전체를 망라해 있는 이 큰 동일하지 않음 때문에 천사들이 주님께 응답하는 방법들에서도 폭넓은 다양함이 있다. 예를 들면 그들은 각기 다른 방법으로 그분을 예배한다는 점이다. 천국의 완전함 자체는 다양함이 증가하는데 놓여있기에 이런 다양해짐 역시 신성한 질서 안에 있다. 원리는 이것 아닐까 싶다; 즉 어떤 것이 완전해지려면 가지각색의 다양한 부분들로부터 형성되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것이 그러하다는 것을 아름다움, 즐거움, 기뻐함이 우리의 감각을 움직이는 방법들과 일치하는 모든 것의 하모니로부터 완전함의 느낌을 가져다준다는 것을 가지고도 이해해 볼 수 있다. 이것은 우리가 천국의 어떤 것을 볼 수 있는 우리를 위한 일종의 거울이다. 참으로 여기 이 세상에서 발생하는 것들은 영계에 있는 것들의 거울이다.
위 사항은 교회를 놓고서도 똑같다; 그 이유가 만일 선의 품질이 교회 안에 있다면 그것이 교회이기 때문이다. 이는 교회 안의 각 인간을 두고도 동일하다. 그 이유는 각 개인은 소형의 ‘교회’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자기 속에 천국을 지니고 있는 각 인간과 천사 사이에 차이가 나는 것은 실지로 없다는 말이다. 그들 모두 최소 규모에서 천국의 모양들이다. 주님은 인간들이 천국 안으로 와서 천사가 되도록 인간들을 창조하셨다. 주님으로부터 선을 소유하는 인간은 ‘천사 같은 인간’이다. 그러나 이런 차이는 있다; 인간의 내부 모양이 천사의 것과 같이 천국의 모형에 있는 동안 그의 바깥쪽 모양은 세상의 모형에 따라 형체를 이룬다는 점이다. 그는 이 수준을 천사가 가진 것 그 이상의 수준을 가진다. 그리고 그가 선 안에 있는 한, 세상적 수준은 천국에 종속되고 천국을 섬긴다. 그러면 주님은 마치 그가 천국 안에 있는 것처럼 그와 더불어 양쪽 수준 모두에서 현존해주신다.
끝으로 주목해둘만한 것이 있다. 자신 안에 천국을 소유하는 인간은 자기와 관련되어 가장 중요한 것들과 일반적인 것들 뿐아니라 자기 삶의 아주 작은 세부사항에서도 천국을 소유한다는 것이다. 이것들은 가장 큰 것들의 모형을 형상(작은 모형) 안에서도 마찬가지로 반복한다. 이런 이유는 천국에서 모든 각 인간은 자신의 사랑의 모양 안에 있으면서 그의 사랑은 그가 지닌 모든 것 안으로 흐르고, 그것을 자기의 모형으로 배열하기 때문이다. 천국을 만드는 것이 주님을 사랑함이듯, 주님은 각각 그리고 모든 것들 안으로 흘러드시고, 그들을 그분 고유의 모습으로 옷입히시고, 그가 어디에 있든 거기에 천국을 가져다 주신다.

전체로서의 천국은 사람의 모양과 비슷하다

천사들은 천국을 ‘큰 사람(Great Human)’이라 부른다. 이것은 각자의 공동체를 포함하는 전체로서의 천국이 단 한명의 인간의 모양과 비슷하다는 것을 아는 천사들에 의해서 보편적으로 이해되고 있다. 중요한 많은 생각들이 이 개념 뒤를 잇는 바, 그들은 이 개념을 이해함 없이는 (여타 다른 사항을) 명백하게 알 수 없다.
어떤 인간이 순전히 물질적인 것으로만 말하고 있다 해도 그 인간이 누구인지는 그가 참된 생각들을 이해하는 능력과 선행을 원하는지의 여부로부터 가늠된다. 물질적인 신체는 위 내부 능력을 단순히 섬길 뿐인 바, 내적 능력들에 종속되어 있다. 육체는 그 자체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천사들이 어떤 인간을 생각하는 방법은 이렇다. 그들은 인간이 자기 몸으로 무엇을 하고 있는지에는 관심이 없다. 그 대신 그들은 그 인간의 행동 뒤에 숨겨져 있는 바램들과 의도들에 관심을 집중한다. 그들은 이 수준을 그 인간 자신이라고 부른다. 천국을 전체적으로 본 천사는 한 명도 없다. 그 이유는 이것이 그들의 납득력 넘어에 있기 때문이다. 때때로, 어쨌든, 천사들은 수많은 천사들로 구성된 완전한 공동체를 볼 수 있고, 이 완전한 공동체가 모양 측면에서는 한 명의 사람임을 보게 된다. 이로부터 천사들은 천국들의 전체는 인간의 모양과 비슷하다는 것을 추론해낸다. 그러나 이 모양은 천국의 외형(shape)이 아닌 천국의 조직체로서 이다.
천국이 사람의 모양에서 존재한 이래, 천국은 마치 한 명의 인간인 듯, 마치 인간이 뭔가를 할 때 신체의 기관과 세포가 하나로 함께 일하는 것과 같은 방법에서 전체로서 하느님에 의하여 통치되어진다. 몸의 각 부분은 그것의 복지에 기여하고 각 부분은 각기 특별한 용도를 가진다. 전체로서의 몸은 각 부분의 몸이 요구하는 것을 제공하고, 각 부분은 전체로서의 몸을 위해 각기 특별한 방법들에서 제공한다. 이 상호 봉사함 안에 통일성이 담겨져 있다. 천국에서는 제공된 용도에 따라 동일한 모형의 조직체가 있다. 유용함(usefulness)은 모든 이의 선을 위하여 타인의 복지를 추구하는 것이다; 그리고 천국에 있는 모든 이 각자는 근원으로서 주님을 먼저 바라보고, 그다음 전체 복지가 추구되어야 할 공동체로서 그분의 왕국을 주시한다.
천국이 신체의 구성됨과 비슷한 바, 천국은 다양한 기관들과 부분들로 배열되어 있고 명칭도 비슷하다. 천사들은 어느 공동체가 천국의 ‘머리’ 부분, ‘가슴’ 부분, ‘허리’ 부분 등등을 형성하는지 알고 있다. 총괄적으로 요약해 말하면, 가장 높은 천국들은 머리부터 목 까지를 형성하고, 중간, 또는 둘째 천국들은 가슴에서 허리와 무릎 까지를 형성하고, 가장 낮은 천국 또는 세 번째 천국들은 발에서 발바닥, 그리고 팔에서 손 끝 까지를 형성하는데, 그 이유는 인간에게서 발이나 손은 가장 바깥쪽에 속한 부분들이기 때문이다.
‘큰 사람’에 관계되는 위 원리들은 만일 누군가가 천국에 관해, 그리고 천국이 어떻게 인간들과 연결되는지에 관해 올바른 생각을 확실히 가져보겠다면 꼭 필요한 본질적 요소이다.

천국의 각 공동체는 인간의 모양과 비슷하다

천국의 각 공동체는 주님이 그 공동체 안에 현존할 때 단 하나의 인간의 모양으로 나타난다. 이것은 불일치하는 것이 제거되는 만큼 더 선명하게 보여진다. 그렇다해도 서로 완전히 똑같은 공동체는 단 하나도 없다. 그것들은 한 가족 내의 인간들이 다르듯 각각은 다르고, 전체로서 모양을 결정하는 선의 다양함들에 따라 그 다름이 결정된다. 각 공동체 안의 인간들은, 공동체를 단 한명의 인간 같이 나타나지게 만들면서, 그 공동체의 특별한 선에 포함되어 있다. 가장 높은 천국들의 중앙에 있는 공동체들은 모든 공동체 중에서 가장 완전하고 아름다운 모양을 가진다. 한 공동체 안에 인간들이 더 많으면 더 완전한 모양의 공동체가 되어간다. 그 이유는 다양함이 불어나기 때문이다. 이런 결과로, 전체로서의 천국은 천국의 숫자들이 매일 증가하는 만큼에서 더 완전을 달성해간다. 따라서 천사들에게는 새로운 천사가 자기들 사이에 도착하는 것 이상 더 반가운 사건이 없다.

각 천사는 완전한 인간의 모양이다

단 한명의 천사라 해도 그 천사 안에 천국의 전체와 부분들의 형상이 있기 때문에 최소 규모에서의 천국이다. 천국은 천사들이 공유(communion) 하고 있다, 그 이유는 천국 속의 모든 것을 각 천사가 함께 나누기 때문, 그리고 각 천사는 자기가 가지는 모든 것을 전체적인 공유 관계로부터 받기 때문이다. 이러한 바 각 천사는 받는 자, 고로 최소 규모의 천국이다. 많은 인간들이 가지는 잘못된 생각은 영들은 육체가 없는 생각들과 느낌들에 불과하다는 것이나, 나는 영계에서의 내 경험으로부터 그러하다고 암시받을 만한 어떤 것을 본 적이 결코 없다. 나는 개개인의 영과 집단으로 있는 영들을 만났었고 그들과 이야기 했지만 집단으로 있든, 개인으로 있든, 다르다는 것을 보질 못했다. 단순하고 맑은 신앙을 가진 인간들은 천사를 언제나 인간으로 생각하는데, 그 이유는 그들은 천사에게 모양이 없거나 실체가 없는 어떤 것으로 생각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천사들은 모든 측면에서 인간이다, 그래서 그들은 얼굴, 귀, 몸, 손과 발, 등등 인간들이 지닌 것과 같다. 그들은 서로 보고 듣는다. 그리고 그들은 스스로 말한다. 그들은 인간들이 가진 어떤 것도 빠진 것이 없다. 단 하나 차이점이 있다; 물질적 몸 대신, 천사들은 영적 실체로 이루어진 영체를 가진다는 점이다.
우리는 인간들이 신체의 감각들이 아닌 영의 눈을 통하여서만이 천사들을 볼 수 있다는 점의 진가를 인정할 필요가 있다. 이 수준은 영계 안에 있다. 그 반면 물질적 모든 것은 자연계에 있다. 같은 것이 같은 것을 보는데, 그 이유는 비슷한 실체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만일 육체의 눈으로 하여금 자연의 많은 것들을 볼 수 없게 할 경우, 그 눈은 영계의 것도 얼마나 더 보지 못할까? 라고 추측해 질문할는지 모르나 영계의 것들은 육체의 시야는 철수하고 영적 시야를 열리게 할 때에만 인간에게 보일 수 있게 된다.

전체로서, 부분으로서의 천국이 인간의 모양과 비슷한 이유는 그것이 주님의 신성한 인간으로부터 이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말해왔던 모든 것은, 주님의 신성이 천국을 만들고 그 신성의 모양은 인간이다 라는 가장 중요한 진리로부터 생겨난 줄기들이다. 신성에 관하여 천사들은 이와 다르게는 어떤 식으로든 생각할 수 없다. 그들이 이같이 생각하는 이유는 그들 안으로 흐르는 신성 자체에 의해 자기들이 인도받기 때문, 그리고 이에 따라 그들의 생각들은 그들 주변 모든 곳에 도달할 수 있기 때문에서 이다. 천사들이 더 지혜롭다면, 그들은 이것이 진리임을 더 명확하게 이해한다; 이 지각함의 결과에 맞추어 주님은 그에게 나타나신다. 실지로 주님은 볼 수 없는 신성을 믿는 것이 아닌 보일 수 있는 신성을 인정하고 믿는 인간들에게 인간의 모양으로 ‘천사’로서 나타나신다. 전자는 볼 수 없고 후자는 볼 수 있다.
천사들은 주님 만이 ‘인물(Person)’이시고 자기들 자신은 그분 때문에 인간일 뿐이다고 계속 말한다. 그들이 덧붙이는 말은, 그들의 각각은 각자가 주님을 받는 등차에서만 인간이다는 것이다. 이것은 무엇보다 우선 주님을 자신 안에 영접하는 가장 높은 천국에서 천사의 외모로부터도 보여진다. 그들의 이해함과 지혜는 인간 자체의 모양을 하고 있기 때문에 그들은 모든 천사들 중에서도 가장 아름답다.
천국으로부터 어떤 영향을 받는 인간은 하느님이 인간의 모양으로 계신다고 생각하는데, 그 이유가 이 생각은 하느님이 천국에서 지각되는 방법에 해당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신들로부터 생각할 뿐인 인간들은 이 생각을 파괴하는 바, 그들은 볼 수 없는 하느님만을 생각할 수 있을 뿐이다. 삶의 악한 길을 고집해왔던 인간들은 하느님은 확실히 없다라고 생각한다. 신성에 관한 어떤 개념이 없으면 누구도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
신성에 관한 어떤 생각 없이, 어떤 영도 천국의 문지방에 접근 조차 할 수 없다. 설사 그가 그 곳 가까이 왔다 해도 그는 안쪽으로부터의 저항을 느낄 것인데, 그 이유는 그의 내적 마음이 닫혀져 있고 천국의 모양으로 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세욕에 찌든 마음을 지닌 인간은 하느님이 ‘사람’이시다는 것을 이해하는데 대단히 어렵다. 그의 견지는 온통 그의 감각들이 자기에게 말하는 것에만, 그리고 자기 주변의 공간에 나타나는 것에만 기초를 두고 있다. 세상에 있는 공간의 확장 따위는 천국에 없다. 그 대신 경계선 없는 공간이 있는데, 그 이유는 천국의 공간은 경계가 없는 것인 내적 시야 또는 생각으로부터 비롯하기 때문이다. 천국에서 모든 것은 각 개인에 소통되는데, 그 이유는 생각이 일하기 때문이다.

천국과 인간의 모든 것 사이에 상응 관계가 있다

천국과 인간의 것 사이에 존재하는 관계의 본성은 오늘까지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럴만한 몇 이유들이 있다. 중요한 이유는 인간들이 자신과 세상을 사랑함에 의해 자신들을 천국으로부터 철수 시키기 때문이다. 이 사랑은 인간들로 신체 감각에 호소하는 세상적인 것들에 집중하게 하려는 경향이 짙은 바, 세상의 것들에 기뻐하고 그 다음 그는 영적 것들에는 눈감아버리고, 곰곰이 생각해보기에는 그것들은 너무 추상적일 뿐이라 단정하여 내버린다.
최 고대 시대의 인간들은 위와 같은 것들에 관해 다르게 느꼈다. 그들은 천국과 인간인 것 사이의 관계, 또는 상응을 이해함은 모든 지식 중 가장 고귀한 것이다고 믿었다. 이 믿음은 그들을 슬기 있게 만들었고, 그들에게 상응에 관한 이해를 주었고, 그래서 그들은 상응을 수단으로 천국과 소통하고 있었다. 그 이유는 이 지식은 천사들의 지식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것들에 무지한 오늘날, 이 무지가 인간들이 영계에 관하여, 또는 영계가 자연계와 인간의 생활에 미치는 것들을 알게 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들고 있다. 또한 이 지식이 없으면 인간의 영 또는 혼이 육체에 행하는 것, 사후 인간의 삶에 관한 어떤 것도 이해되어질 수 없다. 이러할진대, 관계의 본성은 차후 더 많은 문제들을 말끔히 설명하기 위해 꼭 필요하다.
첫째로, 상응 자체의 본성이다. 자연계의 모든 것은 영계로부터 존재한다. 마치 결과가 그것을 산출한 원인으로부터 도래한 것과 같다. 이렇기 때문에 자연계에 있는 모든 것은 영계의 어떤 것과 상응하거나 또는 그것의 형상이다. 인간은 최소 규모에서 천국이자, 최소 규모에서의 세상 양쪽에 해당되는 바, 그는 자기 안에 영계와 자연계를 가지고 있다. 그의 자연계-그의 몸, 몸의 감각들과 행동들의 수준에서 발생하는 모든 것은 그의 영계- 그의 마음, 마음의 이해함과 마음이 의도하는 것으로부터 존재 안으로 와진다. 이 두 세계는 상응 관계에 있다.
인간의 얼굴은 위의 사항을 훌륭하게 예증해준다. 짐짓 흉내내거나 꾸며지지 않은 솔직한 얼굴에서 인간의 참된 생각들과 느낌들은 투명하게 보일 수 있다. 이는 얼굴이 왜 마음의 색인 목록이라 부르는지에 대한 이유이다; 인간의 영계는 그의 자연계 안에 포함되고 있다. 이제는 인간의 모든 것과 더불어 전체로서의 천국의 상응으로 이동해 보자. 천국은 인간의 모양을 반사하고 있다. 그 이유는 천국이 ‘큰 사람’ 또는 사람의 모양에서 조직되고 배열되기 때문이다. 천국을 만드는 공동체들은 몸의 부분들 처럼, 어떤 공동체는 머리에, 가슴에, 팔에 이것 중의 더 특별한 부분에, 등등으로 배열되고 있다. ‘큰 사람’의 특별한 부분에 있는 공동체들은 인간 자신 안의 어떤 부분에 상응한다. 예를 들면, 머리 부분에 있는 이들은 인간의 머리에 상응한다. 인간만이 천국의 내적 유입으로부터 존재하는 바, 각 인간은 이 상응으로부터 이 땅에서 자기 존재를 가지기에 이런 연결 관계에 관한 지식은 매우 중요하다.
천국에 두 왕국이 있다는 것은 이미 상술했다. 천적 왕국은 심장, 그리고 몸 전체를 망라해 심장과 관련되는 모든 것과 상응한다. 마찬가지 방법에서 영적 왕국은 폐와 상응한다. 심장과 폐는 인간 안에서 두 왕국을 만든다. 심장은 동맥과 정맥을 통하여 활동하고, 폐는 신경과 근육에 영향을 미친다. 이 둘은 모두 육체의 노력 또는 운동에 포함되고 있다. 이와 같은 방법에서 각 인간의 영적 구성에도 두 왕국들이 있고, 이는 그의 의도함과 이해함이다. 그의 의도함은 선인 것을 위해 사랑함을 통하여 행동하는 반면 그의 이해함은 진리인 것을 사랑함을 통하여 행동한다. 이들은 몸에 있는 심장과 폐에 상응한다.
전체로서의 천국 역시 위와 정확히 같다. 천적 왕국, 사랑이 통치하는 곳, 천국의 의지력 측면이다. 영적 왕국, 진리가 통치하는 곳, 천국의 이해력 측면이다. 이들은 몸에 있는 심장과 폐와 상응한다. 이 상응은 왜 ‘심장’이, 성서에서 언급될 때, 사랑의 것들을 뜻하는지, 그리고 왜 ‘숨’이 이해함의 것들을 뜻하는지를 보여준다. 또한 왜 애착이 심장으로부터 또는 심장 안에 있는 것이 아님에도 심장 속에 있다 라고 말해지는 이유이다.
이것은 또한 성서에서 몸의 부위들이 영적인 것을 뜻하도록 언급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성서에 있는 모든 것은 이런 상응성을 지니고 있다. ‘머리’는 이해함과 지혜를 뜻하기 위해 사용되어진다; ‘가슴’은 사랑과 애착을, ‘허리’들은 결혼적 사랑을, ‘팔’들과 ‘손’들은 참인 것의 힘을, ‘발’은 자연적인 것을, ‘눈’들은 이해성을, ‘콧구멍’들은 지각을, ‘귀’들은 순종함을, ‘콩팥’들은 진리인 것을 검사함을, 등등을 뜻한다.
일상 생활 속의 언어에서 인간들은 총명을 뜻하는 말로 ‘좋은 머리’라 말한다. 몇 개 더 열거하면, ‘가슴의 친구’, ‘예리한 코를 가지고 있음’, 날카로운 시력’ 등등 대단히 많은데, 이 모든 표현들은 이 상응으로부터 유래되고 있다. 사실상, 그것들은 영계로부터 근원하고 있다. 단지 인간들이 실감나게 깨닫지 못할 뿐이다.
인간의 육체적 몸과 더불어 행해지는 모든 것이 천국의 어떤 것과 상응한다 할지라도, 인간이 자기의 바깥쪽 모양에 관심을 갖는 한 그는 천국을 표현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의 안쪽 모양에 관심을 두는 만큼에서 그 표현은 가능해질 뿐이다. 천국을 받는 것은 안쪽의 몸이고, 바깥쪽의 몸은 세상으로부터만 받는다.
이와 같이 인간의 육체적 몸은 천국의 모양이 마지막 안주하는 곳, 이 몸은 천국이 세워지는 기초이다. 다시 한번 진가를 인정해야만 하는 대목은 천국과 더불은 몸의 모든 상응은 주님의 ‘신성한 인간’ 때문이다는 점이다. 천국은 그분으로부터 있고 그분이 천국이시다. 이 대목은 왜 주님이 인간으로서 세상에 오셨는지를 설명해준다. 강림이 발생한 이유인즉, 주님이 오시기 이전 천국을 그곳의 질서대로 관리하셨던 ‘신성한 인간’이 더 이상은 천국을 보존하실 수 없었는데, 그 이유는 천국의 기초를 이루는 인간들이 (천국의) 모형을 약화시키고 파괴했기 때문이다.

천국은 자연의 모든 것과도 상응한다

자연계에 있는 모든 것은 영계의 어떤 것과 상응한다. 그 이유가 자연적인 것들은 그것들의 존재를 영적 원인들로부터 가지기 때문, 그리고 이 두 세계는 신성으로부터 유래한다. 땅 위 모든 것은 세 왕국들로 나뉘어 있다. 즉 동물, 식물, 광물 왕국이다. 각 왕국은 일반적으로 영계의 다른 수준에 상응한다. 그리고 각 왕국은 특수한 상응을 가지는 다양한 것들을 내포하고 있다. 한마디로, 자연의 모든 것, 큰 것부터 미미한 것까지, 상응 범주에 있다. 이에 대한 예증으로, 동물 왕국에 있는 사실을 들추어 보자. 이 왕국에는 본능적인 지식을 가진 많은 창조물들이 있다. 예를 들면, 벌은 어떻게 꿀을 수집하는지, 어떻게 꿀을 벌집에 저장하는지, 다가오는 겨울에 맞서 자신과 어린 것들을 위해 양식을 어떻게 예비해야 하는지를 알고 있다. 그것들은 자기들이 본능적으로 가지는 질서적인 모형 안에서 살고 있다.
식물 왕국에서도 씨를 가지고 예증을 해보자. 나무가 잎을 내고, 꽃을 피우고, 안에 새로운 씨가 든 열매를 산출한다. 이런 발달 과정은 질서적인 연속성에서 일어난다. 이는 어떤 묘사도 불가능한 불가사이한 질서에서 다함께 발생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동물은 다양한 애착에 상응한다. 즉 보다 온순하고 더 유용한 동물은 선한 애착에, 맹렬한 동물은 악한 애착에 상응한다. 특수적으로, 암소나 송아지는 유용함과 더불어 행동하려는 인간의 마음에 있는 자연적 애착에 상응한다. 한편 어린 양은 영적 애착에 상응한다. 여러 종류의 새들은 마음에 있는 생각의 수준들, 즉 자연적 생각들과 영적 생각들에 상응한다. 식물 왕국과 광물 왕국도 앞의 동물 왕국과 똑같다. 천국과 땅 사이의 연결은 상응을 수단으로 하여 있다. 이 상응은 다음의 방법으로 일한다. 주님의 왕국은 쓸모 있음을 목적(useful purpose)으로 삼는다, 그래서 전체 우주는 이와 같은 방법에서 창조되었는바, 유용함이 있는 곳은 어디이든 그것을 창조함에서 주님의 목적이 충만해짐이 가능하도록 하는 모양으로 옷입혀질 수 있다. 이 원리는 천국에서 먼저 작동되고 그다음 창조된 세계에서 작동하는데, 자연 자체의 물질적 실체에 까지 내려간다.
영적인 것과 자연적인 것 사이, 또는 천국과 땅 사이의 상응은 유용함을 통하여 존재한다. 이 유용함 자체가 연결을 만든다. 이 유용함을 옷입히는 다양한 모양들이 상응들이다. 그리고 이 상응이 특수한 유용함의 모양에까지 폭을 늘려 연결을 만든다.

제 3 부

천국의 삶

천국의 태양

이 세상의 태양은 천국에서는 보여지지 않는다. 그 이유는 그 태양은 온전히 자연적이기 때문이다. 그렇다 해도 천국에도 태양이 있다. 이 태양 역시 자연계의 태양 같이 빛과 따뜻함이 있다. 천국의 태양은 주님이시다. 천국의 빛은 신성한 진리이고 따뜻함은 신성한 선인데, 마치 태양으로부터 있는 따뜻함 같이 주님으로부터 유출된다. 주님이 천국의 태양이신 이유는 그분이 신성한 사랑, 영적 모든 것의 근원이시기 때문이다. 이 사랑이 태양 같이 천국에서 빛을 낸다.
천국에서 주님이 태양으로 보여질 수 있기에, 즉 그분 안에 있고 그분으로부터 흐르는 그분의 신성한 사랑 때문에 천국에 있는 모든 인간은 언제나 그분을 향하고 있다. 그러나 지옥들에 있는 인간들은 지옥 자체인 어둠을 향하고 있는 바, 그들은 주님에게 등을 보이는 셈이다. 이런 돌아섬이 거행되는 이유는 저세상의 인간들은 자기 고유의 사랑인 내향적 동기만을 바라보기 때문이다. 영계에서는 자연계에 있는 고정된 나침반의 끝점(point)은 없다. 영계에서 방향을 결정하는 것은 초점(focus)이다.
인간들 역시, 영 안에서, 이 세상에서 위와 유사하게 자신들을 돌아서게 한다. 자아 사랑과 세상 사랑이 동기가 되어 움직이는 이들은 자신들을 주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쪽으로 향한다. 이와 반대로 주님과 자기의 이웃을 사랑하는 이들은 그분을 향하여 자신을 돌린다. 섭섭한 대목은 이 세상은 나침반의 고정된 끝점이 있기 때문에 인간들이 이 사실을 알아채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주님은 천국의 태양이시고 그분으로부터 모든 것이 유래하는 바, 그분을 향하여 돌아서기 때문에, 주님은 모든 것의 중심이고 모든 이 각각의 방향과 목적의 근원이시다. 이런고로 그분 아래 있는 모든 것은 그분의 현존 안에, 그리고 그분의 인도하심 아래 있다. 이는 천국과 땅 위에서도 마찬가지 이다.

천국의 빛과 열

자연으로부터서만 사물을 생각하려 고집하는 인간은 자연계의 정오의 태양 보다 훨씬 밝은 빛이 천국에 있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그곳의 빛은 세상의 빛인 자연적인 빛이 아니고, 영적인 빛이다. 이 빛은 실지로 태양이신 주님으로부터 공표되고, 신성한 사랑인 이 태양으로부터 신성한 진리가 빛으로 공표된다. 진리는 천사들에게 빛인데, 그 이유는 그들은 자기들의 태양으로부터 뭔가를 지각하는 영적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천사들은 신성한 진리로부터 삶에 관한 모든 것을 이해한다, 그리고 그들의 이해함은 안쪽의 시각이다. 이 시각이 그들의 바깥쪽 시각 안으로 흐르는 바, 이것이 보는 것을 산출한다.
천국에서 빛의 근원이 위와 같고, 그 다음 이 빛은 주님으로부터 신성한 진리를 받는 방법에 따라, 그리고 천사들과 더불은 지혜와 총명의 등급에 따라 다양하게 바뀐다. 간략히 말해, 천적 왕국에 있는 빛은 영적 왕국에 있는 빛과 다르고, 같은 왕국 안에서도 각 공동체마다, 심지어 각 개인 마다에서도 차이가 있다.
천국의 빛은 어떤 것이 실지로 있는 그대로를 확실히 보이게 한다. 따라서 제아무리 작은 조각도 감추이지 못한다. 보다 높은 등급의 천사들은 자신들을 공개적으로 보여주는 것을 사랑하는데, 그 이유는 자기들에게는 선한 의도들만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천국 아래 있는 이들은 천국의 빛에서 보여지는 것 자체를 두려워한다. 지옥의 이들은 자기들 등급의 인간들끼리는 확실히 인간으로 쳐다보고 있지만, 그들이 천국의 빛에서 보여질 때 그들은 자기들의 악의 실지의 모양인 흉측한 괴물 같이 보인다. 천사들이 이 세상 인간의 영적 상태를 볼 경우 위 같은 현상은 천사들에게 마찬가지로 나타난다. 따라서 만일 그들이 내향적으로 선하다면, 그들은 아름다운 인간 같이 보이고, 그들이 내향적으로 악하다면, 그들은 모양 없는 괴물 같이 보여진다.
열-또는 따뜻함은 천국에서 태양으로서 주님으로부터 공표되는 사랑이다. 그 이유는 그분은 신성한 사랑이시기 때문이다. 이 사랑도 빛의 경우 같이 천사들의 공동체 내의 사랑의 등급에 따라 천국에서 다각도로 받아진다. 선(goodness, 선량), 이는 사랑이다. 그리고 진리(truth), 이는 빛이다. 이 둘은 오직 하나로 발산되는 것으로서 주님으로부터 공표된다. 그 이유는 그 둘은 진실로 하나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천사들은 그 둘을 따로 떼어 보는데, 그 이유는 천사들의 등급에 차이가 많은 이유로 어떤 천사는 빛 보다 열을 많이, 또 다른 천사는 열 보다 빛을 더 많이 받는 경우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빛과 열을 동등하게 받는 것과 완전해짐은 비례한다.

천국의 네 지역들

천국도 세상에서 같이, 중요한 4 지역들이 있다; 동, 남, 서, 북이다. 세상에서 이것들은 태양의 위치에 의해 결정되어지나, 천국에서 그것들은 주님의 현존으로부터 결과되어진다. 태양으로서 주님이 보여지는 방향을 ‘동’쪽이라 부른다. 그 반대 방향은 ‘서’쪽이다; ‘남’쪽은 오른쪽에 있고 ‘북’쪽은 왼쪽에 있다. 이 방위는 인간들이 자기들의 얼굴, 내지 몸을 어느 방향으로 돌린다 하더라도 진실을 붙잡게 한다. 그 이유는 천국에서 모든 방향들은 동쪽으로부터 결정되어지기 때문이다. 주님이 보여지는 방향이 ‘동’쪽이라 불리우는데, 그 이유는 그분이 생명의 근원이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따뜻함과 빛-즉 사랑함과 이해함이 천사들에 의해 받아지는 만큼에서 주님은 그들 사이에서 일어나졌다고 말해진다. 또한 동쪽은 천사들이 자기들의 얼굴이나 몸을 어느 쪽 방향으로 돌리든지 천사들 앞에 계속적으로 있는다. 천사들은 땅 위 인간들의 것으로부터 여러 다른 방향으로 돌아 선다. 그 이유는 돌아서는 그들의 이유가 다르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기들이 사랑하는 것 쪽으로 향하여 선다. 그리고 결과로서 그들의 사랑은 그들 앞에 계속적으로 있는다. 천국에서, 주님은 그들 사랑의 근원이시다. 그리고 주님이 그분의 사랑 안에서 그들과 더불어 있는 한, 그분은 그들이 어느 방향으로 얼굴을 보이고 있든 그분을 바라보게 해주신다.
이에 대한 결과로, 놀라운 상황이 천국에서 일어난다. 많은 인간들은 거기서 한 장소에 있을 수 있고, 이 인간은 자기 얼굴과 몸을 이쪽으로 돌아서고, 저 인간은 저쪽으로 돌아 설 수 있다. 그럼에도 그들의 모두는 자기들 앞에서 주님을 뵙는다. 그리고 각자는 남쪽을 그의 오른쪽에, 북쪽은 그의 왼쪽에, 그리고 서쪽은 자기 뒤에 위치한다. 천국에서 또 다른 놀랄만한 사실은 천사들의 얼굴이 동쪽을 향해 있는 때 조차에서도 그들은 다른 세 지역들도 관찰한다는 것이다. 이는 생각과 더불어 행해지는 그들의 한층 더 깊은 내적 시력으로부터 와진다.
천국에서 인간들은 위 네 지역에 따른 여러 다른 면적에서 살고 있다. 사랑과 선함에 포함되어진 인간들은 동쪽과 서쪽에 사는데, 그들 중에서 보다 더 지각적인 이들은 동쪽에, 상대적으로 덜 지각적인 이들은 서쪽에 분포하고 있다. 한편 지혜의 빛 안에 있는 이들은 남쪽, 상대적으로 빛이 약한 인간들은 북쪽이다. 이 배열은 천적, 영적 왕국에서 전체 공동체, 또는 단 하나의 공동체 모두에게 참 질서이다. 일반적으로, 동쪽을 향하는 공동체들은 서쪽을 향하는 공동체들 보다 더 낫다. 그리고 남쪽을 향하는 공동체들은 북쪽을 향하는 공동체들 보다 낫다.

천국에서 천사들의 상태는 변화한다

이는 천사들과 더불은 사랑, 지혜 그리고 이해함으로부터 있는 것들, 또한 그들 삶 자체가 변화, 또는 교차한다는 말이다. 천사들은 똑같은 상태에 계속적으로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변화들을 통과해간다. 각 천사의 사랑과 지혜는 어떤 특정한 때의 그의 특별한 상태에 따라 다양해진다. 그래서 천사는 강렬하게 사랑할 때도 있지만 그렇지 않을 때도 있다. 이런 사랑함의 농도는 대단히 진한 것으로부터 아주 옅은 것에 이르기까지 등급별로 다양하다. 그들이 최고로 사랑하고 있다고 느낄 때, 그들은 자기들 사랑의 완전 충만된 빛과 따뜻함 안에 있는다. 그러나 자기들의 사랑함이 미미할 때 그들은 상대적으로 차거나 그늘 안에 있고, 불유쾌한 상태나 희미한 상태 안에 머물기도 한다. 그럼에도 그들은 이런 상태들로부터 첫 단계로 되돌아 온다. 이 변화들은 마치 이 세상의 빛과 그늘, 따뜻함과 차거움, 아침과 저녁이라는 하루의 주기 같이 이 상태에 저 상태가 뒤를 잇는다. 이런 것들은 실지로 상응한다. 아침은 천사들의 사랑이 진할 때와. 정오는 지혜가 아주 밝은 빛에 있을 때와, 저녁은 사랑과 지혜가 상대적으로 그늘 상태에 있을 때, 밤은 사랑과 지혜의 어떤 것도 없을 때와 상응한다. 그런데 밤 자체는 천국에 있는 인간들의 상태와 상응하는 것이 없고 오로지 지옥에 있는 인간들과만 상응할 뿐임을 주목해두자. 천국에서는 ‘저녁’ 상태가 다가오는 새 아침에 앞서 있는 새벽으로 인도해준다.
천사들은 자기들의 내적 상태의 변화, 뿐아니라 자기들 주위에서 보는 여러 다른 것들의 외관도 변한다. 이에 대한 설명은 차후 있을 것이다.
위와 같은 변화가 있어야 하는 이유가 있다. 천사들은 영적 생활에서 다양함에서 계속 있을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그들이 천국의 진가를 인정함이 언제나 똑같은 상태에만 있다면 그 진가의 가치가 줄어드는데, 마치 지상에서 누군가가 제한 없이 계속 편안함이나 쾌락들에 푹 빠져 있다면 시간이 지날수록 그것들로 인한 즐거움의 강도가 약해지고 마는 경우와 같다. 또 하나 이유는 여기 인간들 같이 천사들도 자기 인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 때문에 너무 많은 시간을 자신들에 관해 생각하려드는 경향이 있다. 천국의 모든 이 각각은 자아 사랑으로부터 오는 힘은 쓰지 못한다. 그들이 주님에 의해 자아 사랑이 억제 되면 그들은 사랑과 지혜에 관한 것을 경험하지만, 그들이 자아 사랑 안에 푹 빠지면, 또는 그것 안으로 빠져드는 것을 방치하면 그들은 그 사랑을 경험한다.

천국의 시간

천국에 있는 모든 것도 세상에서 있어지는 똑같은 방식으로 연속성과 발달이라는 것이 발생되고 있음에도, 천사들은 시간과 공간에 대한 실지 개념은 없다. 이것은 당연시되어 있는 바, 그들은 이것들이 이와 같다는 것을 이해 못한다. 이 세상의 시간은 눈에 보이는 태양의 운동에 기초하여 때와 계절들을 산출하고 있다. 천국의 태양은 어떤 연속성이나 궤도 운동 같은 것에 의해 날이나 해가 산출되지 않는다. 그러나 고정된 간격들에서 발생하지 않는 상태의 변화로 생산된다. 이는 천사가 왜 시간 개념이 없고 오직 지나가는 상태 개념만 지니는 가에 대한 이유이다. 그리고 그들은 이런 방식에서 시간과 더불어 있어지는 모든 것을 이해한다. 천사들이 시간에 대한 생각이 없기 때문에 영원이 무엇을 뜻하는 가에 대한 이해가 지상의 인간들의 것과는 아주 다르다. 천사들은 영원을 시간의 무한한 길이가 아닌 무한한 상태를 뜻한다고 보고 있다. 만일 누군가가 시간, 공간 그리고 물질을 용어에 국한해 생각한다면, 그 생각은 한계에 부딪치나, 만일 생각의 더 높은 평면으로, 이런 것들 넘어로 간다면, 한계에 부딪치는 일은 없다.

천국에 있는 표현과 나타남

천국에서 천사들이 자기 주위에 있는 것들을 어떻게 보는지를 서술하는데 간단한 방법은 없다. 한가지 말할 수 있는 것은 천국의 것들은 세상에 있는 것보다 더 완전하고 더 풍부하다는 점이다. 천국에 물건과 사물이 실지로 있다는 것은 성경의 예언자들이 자기들의 환상에서 본 것에 의해서도 확증되어진다. 천국이 예언자들에게 열려졌을 때 이런 것들을 예언자들에게 보일 수 있게 되었는데, 이는 내향 또는 영적 시력이 열릴 때 발생한다. 이렇게 열리는 것은 주님의 허락이 있을 때이다. 마치 어떤 인간이 육체의 감각으로부터 있는 자연적 지각을 거두어들이고 영적 빛과 이해함으로 들려질 때와 같다.
천국의 것들은 일반적으로는 지상의 것과 같은 한편, 많은 방법들에서 아주 다르기도 하다. 기본적 차이는 천국의 것들은 영적 태양으로부터 존재하나, 지상의 것은 이 세상의 태양으로부터 존재한다는 점이다. 천국의 것들은 지상의 것에서 행하는 똑같은 방법에서 발생하지 않는다. 천국에서, 모든 것은 거기 있는 천사들과 더불은 그것의 상응에 따라서 주님으로부터 온다. 내부의 상태들에 상응하는 천국에 있는 모든 것은 실제로 그것들을 재연(re-present)하는 것인 바, 그것들은 그것들의 ‘표현(represent)’이라 일컫는다. 게다가 천국에 있는 것들은 천사들의 상태에 따라 다양해지기도 하는 바, 그것들은 ‘가상(appearance, 나타남, 외관)’이라 일컫는다. 이는 이 세상에 있는 것만큼 사실로서 완전하게 보일 수 있고 보여짐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말한다. 천국에서, 물체들은 여기 이곳 보다 아주 더 선명하게 보여진다.
천국에서의 나타남은 ‘진실로 나타남’이라 불리우는데, 그 이유는 그것들이 실지로 발생하기 때문이다.
상응의 결과로 천사들이 보는 것에 대한 예를 한가지 들어보자; 나무와 꽃들이 가득찬 공원과 정원이 총명한 천사들 앞에, 그들 주위에 나타난다. 그리고 그것들은 완전한 질서로 배열되어 있다. 거기에는 아취형의 출입구와 작은 길이 여기 저기에 있다. 거기를 산책하는 인간들의 이해함은 완전에 가깝다. 그들은 꽃들을 꺽어 화환을 만든 다음 작은 어린 아이에게 씌워준다. 거기에는 이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나무들과 꽃들이 있고, 그리고 나무에 있는 열매는 이 천사들이 지닌 사랑에 있는 선함이다. 그들은 공원과 정원 때문에 이 풍경을 보는데, 열매 열린 나무들과 꽃들은 총명과 지혜에 상응한다.

천국에서 천사들의 옷

천사들도 옷을 입고 있는데, 그 이유는 그들은 지상의 인간들 같이 함께 사는 인간들이기 때문이다. 또한 그들은 집과 그와 유사한 것들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구분짓는 차이점은 이렇다: 그들이 가진 모든 것은 더 완전한데, 그 이유는 그들이 더 완전한 상태에 있기 때문이다. 천사들의 지혜가 인간의 지혜를 훨씬 더 능가하듯, 그런 수준으로 천국에서는 모든 것이 지각되고 있다. 천사들의 옷은 여타의 것들이 상응하듯 상응한다. 그리고 그것들이 상응하기 때문에 그것들은 실제로 존재한다. 그들의 옷은 그들의 총명에 상응한다. 천국에 있는 인간들은 자기들의 총명을 간수하도록 잘 차려입은 상태로 보여진다. 총명의 수준에서 이 인간이 저 인간을 능가할 경우 이 인간은 더 세련된 옷을 차려 입고 있다. 가장 총명한 천사들의 옷은 마치 자기들이 불 속에 있는 것 처럼 이글거리는 불빛이다. 총명이 덜한 천사는 빛나는 흰 옷을 가진다. 더욱 덜 총명한 천사는 여러 다른 색깔로 된 옷을 가진다. 모든 천사들 중 최고의 천사는 벗고 있다.
천사들의 옷이 자기들의 총명에 상응하기 때문에 의복 자체는 특별한 진리들에 상응하는데, 마치 모든 총명이 신성한 진리로부터 오는 것과 같다.
불타는 듯한 옷과 빛나는 의복의 나타남은 불이 사랑에, 빛이 진리인 것에 상응함으로부터 오고 있다. 이 나타남들의 크기는 천사들이 주님을 얼마나 영접하느냐에 비례한다. 다양한 색깔의 옷 역시 다양하게 영접함에 상응한다. 최고의 천사들이 벗고 있는 이유는 그들 만이 순진 안에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순진은 벌거벗고 있음으로 표현되어진다. 천사들은 이 옷들을 볼 수 있을 뿐 아니라 그것들을 느낄 수 있다. 그들은 갈아 입을 옷도 많이 가지고 있다. 그래서 그들은 이 옷들을 밀쳐두거나 입으려고 다시 꺼내기도 한다. 그들은 이 옷들이 주님으로부터 주어진 것이라고 말한다. 때때로 그들은 그런 줄도 모르고 옷입고 있기도 한다.
영계에서의 옷은 언제나 거기 인간들의 품질을 간직하기 때문에, 지옥에 있는 이들, 진리를 알고 싶지 않은 이들은 찢어지고 더럽고 불쾌하기 조차한 옷을 입고 각자 자기의 사악함을 간직하고 있다. 그들은 이런 옷 외에 어떤 옷도 입을 수 없다. 그들의 발가벗은 것이 보이지 않도록 주님은 그들에게 그들의 옷을 주신다.

천국에 있는 집(house)들과 자기 집(home)

천사들은 공동체 안에서 살고 있다. 그리고 그들은 자기 만의 집을 지닌다. 이는 마치 자기 생명의 개인적 품질에 따라 다양한 옷을 입는 것과 비슷하다. 보다 수준 높은 상태에 있는 천사들을 위해서는 웅대한 집이 있다. 이 보다 덜 높은 수준의 상태의 천사를 위해서는 정성들여 만든 집이 있다. 그들의 거주지는 자기 집이라 불리는 땅 위의 것들과 거의 같다. 단지 그곳의 집이 더 아름답다는 것만 차이가 난다. 그 집은 방들, 곁방, 여러 침실을 가지고 있다. 정원과 화단과 잔디로 둘러싸인 안뜰도 있다.
거기 인간들은 아주 가깝게 붙어 살고 있다. 집들은 이 세상의 집들이 큰 도로나 작은 도로, 광장을 따라 배열된 도시의 집 같이 이 집과 다음 집이 아주 가깝다. 천국에 있는 건물의 도안은 아주 완전한 바, 그것들은 예술의 참 본체를 표현한다고 여러분은 말할지 모른다. 사실 그럴 수 밖에 없는 이유는 설계 자체에 관한 예술이 천국으로부터 오기 때문이다. 천사들은 자기들 눈 앞에 펼쳐지는 이런 아름다운 것들-게다가 더 완전한 것들은 주님이 놓아두신 것이라고 말한다. 더구나 천사들은 이런 것들을 볼 때 즐거움을 눈으로 보다는 마음으로 더 향유한다. 그 이유는 그들이 모든 것에 있는 상응을 보기 때문, 더 나아가 이를 통하여 신성한 것을 보기 때문이다.
집 안에 있는 여러 다른 것들 까지도 상응한다. 집 자체는 거기 사는 이들의 선에 상응한다. 집 안의 특별한 것들은 이 선을 만들어 가는 다양한 품질과 상응한다. 집 밖은 이 선으로부터 발생하는 진리들에 상응하는 것들이고, 또한 지각과 통찰력에 상응한다.
천사들의 자기 집은 이 세상에서 지어지는 집들과 같은 식으로가 아니다. 천사들의 자기 집은 주님에 의해 천사들에게 자유로이 주어지되, 그가 어떻게 선과 진리인 것을 받는지에 일치하는가에 따라 모든 이에게 주어진다. 천사들은 자기들이 소유하는 모든 것을 주님으로부터의 선물로서 간직하고 있다. 주님은 그들이 필요한 모든 것을 주시고 있다.

천국에 있는 공간

비록 천국에 있는 모든 것이 이 세상에 있는 것들과 아주 똑같은 공간에, 장소에 있도록 나타난다 할지라도, 천사들은 장소와 공간에 대한 개념이 없다. 이것이 역설적 이론처럼 비쳐질 것인 바, 설명이 필요하다.
영계에서 장소가 바뀌는 것은 상태의 내부 변화를 수단으로 일어난다. 장소가 바뀌는 것, 또는 여행은 단순히 상태의 바뀜이다. 이는 천사들이 어떻게 여행하는지를 알게 한다. 그들은 움직임을 위해 거리나 공간을 가지지 않는다. 그 이유는 그들은 상태로 만들어진 또 다른 치수(dimension)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위의 사실은 천국에서 어떻게 장소의 바뀜이 발생하는지를 알려주는 바, 한 가지 명백해지는 것은, 서로 비슷한 상태에 있는 이들은 서로 가깝게 위치하고, 한편 다른 상태에 있는 인간들은 멀리 떨어져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비슷한 것은 가깝고 비슷하지 않으면 멀리 있다. 내적 상태에 상응하는 바깥쪽 상태가 아니면 천국에는 공간이 없다. 이런 이유 때문에 천국의 왕국들과 등급들은 서로 서로로부터, 각 천국에 있는 공동체들도, 또한 각 공동체 안의 천사들 사이도 구분이 있다. 이는 지옥이 반대되는 상태에 있는 이래 천국으로부터 완전하게 분리된 이유를 설명해준다.
위의 사실에서 또 하나 알려준다. 영계에서 누군가와 함께 있기를 갈망하는 인간이 있다면 그 누군가가 그 인간에게 나타난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그가 타인에 관해 생각하고, 자신을 그의 상태에 놓기 때문이다. 한편, 인간들은 자기가 상대로부터 돌아서는 만큼 그 인간으로부터 멀리 있게 된다. 이 돌아섬은 불일치하는 생각으로부터 발생하기에, 몇 인간이 한 장소에 있다 해도 자기들이 일치하는 정도 만큼 서로를 보는 경우가 발생한다. 더구나 불일치가 있는 순간 서로는 사라지고 만다.
누군가가 이 장소에서 저 장소로 갈 때, 그가 거기에 있기를 원하는 정도의 강약에 따라 더 빠르게 도착하거나 더 느리게 도착한다. 여행의 경우도 같은 이치인 바 같은 거리를 여행해도 더 오래 걸리거나 더 빨라지거나 한다.

천국의 모양이 천국의 연합과 교제를 위한 방식을 정한다.

다소 차이는 있겠지만, 지금까지 말해온 것으로부터 천국의 전반적인 조직도 알 수 있게 될지 모른다. 요점은 이렇다. 그곳에서의 그룹짓는 것이나 교제하는 모든 것을 위한 방식을 만드는 어떤 모양이 있다는 것이다. 이 뿐만 아니라 천사들의 모든 총명과 지혜, 그리고 (밖으로) 나가는 생각들과 애착들 모두를 위한 방식도 있다. 누군가가 천국의 모양 안에 있는 정도 만큼 그는 슬기로워져 있다. 천국의 모양은 영계를 움직이는 질서의 특별한 법칙들에 의존하고 있다. 천국의 모양 안에 있음은 이 질서에 살고 있음과 같은 말이다. 지상에서의 인간은 천국의 형상으로 창조되었지만, 바깥쪽으로는 세상의 형상이다. 인간들이 자기들 마음에 악한 바램과 거짓 사상들의 입장을 허용함으로 해서 자기들 안의 천국의 형상은 파괴되었기 때문에, 인간 안에 있는 더 깊은 것들은 그가 태어나는 그 때로부터 굳게 닫혀져 있다. 이는 왜 인간은 동물과 달리 완전한 무지에서 태어나지는지에 대한 이유도 된다. 사실상, 만일 인간의 천국의 모양이 아무리 보아도 회복될 기미가 없다고 한다면, 질서 속의 것들을 가르치는 것이 하나의 방법이다. 그 이유는 모양 자체 역시 질서로부터 오기 때문이다.
성경은 그것을 통해 주어진 다양한 명령 안에 신성한 질서의 모든 법칙을 담고 있다. 인간이 이 법칙들을 알고 그것들로 사는 만큼, 자기 안에 굳게 닫힌 것들이 자유해진다. 그 다음 천국의 형상은 그 인간과 더불어 새롭게 모양을 만든다. 그러므로 우리는 천국의 형체 안에 있음, 즉 성경 안에 있는 것들에 의해 사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 수 있다.
천사들이 그룹 안에서 서로를 끌어 당기는 방법은 그들의 영적 친척 관계에 기초를 두고 있다. 이는 전체로서의 천국, 각 공동체 안에서, 그리고 각 가족 단위에서 역시 마찬가지 이다. 서로 비슷한 상태에 있는 천사들은 이 세상 친척들이 서로를 알아보듯 한다. 그리고 서로의 마음을 아주 잘 이해한다.
각 천국에 있는 모양은 각 천사의 생각과 느낌을 나누는 형태이다. 그러나 여러 다른 천국들 사이에서는 다른 소통 방식이 있는데, 이는 소통함이라기 보다는 영향을 줌이라고 일컫는 것이 나을 듯 싶다. 천사들은 자기들 안으로 흘러드는 주님에 의해 함께 연합되므로, 더 높은 천국의 천사들이 더 낮은 천국으로 들어가 거기 천사들과 대화하지 않도록 각별한 조심스러움이 있다. 그 이유가 만일 이런 일이 발생한다면 더 높은 천사는 즉각 자기의 모든 이해력을 잃기 때문이다. 이런 일이 발생하리라고 여겨지는 이유는 전체로서의 천국에 세 수준이 있듯, 각 천사에게 자기 생명의 세 수준을 가지기 때문이다. 가장 높은 천국에 있는 천사들은 가장 높은 생명의 수준이 열려져 있다, 그리고 나머지 낮은 것에는 닫혀 있다. 중간 천국에 있는 천사들은 두 번째 수준에 열려 있고, 가장 낮은 천사들은 가장 낮은 수준에 열려 있고, 나머지 두 수준은 닫혀 있다. 가장 높은 천국으로부터의 천사가 더 낮은 천국의 누군가와 대화하려 들어가는 순간, 그 천사 자신의 생명의 수준은 닫혀지고 만다. 그리고 한번 닫혀지면, 그가 되돌아 올 때까지 가장 높은 수준의 지혜는 잃고 있게 된다.
보다 낮은 수준으로부터 보다 높은 수준의 천국들 안으로는 흐르지 않는데, 그 이유는 이것이 질서에 반대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영향력은 언제나 더 높은 곳에서 더 낮은 천국들로 미친다.
더 높은 천국으로부터 오는 천사들의 지혜는 어쩌면 수 천 배의 비율로 더 낮은 천국들에 있는 천사의 것을 능가한다. 이것이 왜 낮은 천국의 천사가 더 높은 천사와 대화 할 수 없는 이유이다. 사실, 그들은 자기들이 쳐다볼 때 보는 것조차 안된다. 그들의 천국은 그들 위에 안개 같은 것이 보인다. 반면, 더 높은 천국의 천사는 더 낮은 천국들의 천사를 볼 수 있으나, 그들이 대화하는 것은 허용되지 않는데 그 이유는 자기들이 지닌 지혜의 수준을 잃게 되기 때문이다.

천국이 통치되는 방법

천국이 공동체들로 구성되었기에 그 각각의 공동체는 그 안에 수 백, 수 천의 천사들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각 공동체 안에 있는 이들은 같은 종류의 선 안에 포함되어 있지만, 그럼에도 거기에 통치함은 필요한데, 그 이유가 질서는 반드시 유지되어야 하고, 질서에 관한 문제들은 보살펴져야 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아무리 위와 같다 해도 상호적인 사랑으로부터 오지 않는 천국의 통치는 없다. 그래서 통치의 종류는 각 공동체에 잘 어울리는 것에 따라 다양해진다: 이것은 보편적으로 똑같지 않다.
천적 왕국에서, 통치는 삶 속의 것들에서 자기들을 가르치고 인도하는 주님 만으로부터 온다. 진리인 것은 그들의 심정 안에 있다. 그래서 그들은 진리인 것을 즉시 알고 이해한다. 그곳에는 법적 다툼이 없고, 오로지 공의를 위한 사랑만 있다. 그들 중 보다 덜 슬기로운 인간은 보다 더 슬기로운 인간에게 묻고, 더 슬기로운 인간은 주님에게 문의하여 답을 받는다. 그들의 천국, 이와 대등하게 그들의 가장 큰 기쁨은 주님으로부터 정의롭게 살아가는 것이다.
영적 왕국 안에 있는 이들은 이웃을 향한 사랑, 그리고 이 사랑이 포함하는 것에 더 관심이 있다. 이 품질은 의사 결정에 필요한 진리와 이해함에 기초를 두고 있다. 이 천사들은 주님에 의해 안내를 받지만, 더 간접적이다. 그들은 공무원들을 가지고 있고 그 숫자는 공동체의 필요에 따라 다르다. 그들 역시 하모니를 지키기 위해 법들을 가지고 있다. 공무원들은 이 법들에 의해 모든 것을 통치한다. 그들은 슬기롭기 때문에 그 법들을 이해하고 있다. 혹 그들에게 어떤 의심되는 점이 발생하면 그들은 주님에 의해 계발되어 의구심은 걷힌다.
영적 왕국에는 다양한 통치가 있어, 이 공동체와 저 공동체의 통치에 차이가 있다. 그리고 여러 기능들을 가지고 있는데, 마치 몸의 부분들이 다양한 것과 같고, 이것에 그들 각각은 상응한다. 그럼에도 통치의 모든 모양은 그들이 자기들의 목적으로서의 공통된 선에, 그리고 공동체에 있는 각 개인의 선에 초점을 두고 일치하고 있다. 모든 이 각각은 주님의 돌보심 아래 직접 있다. 그리고 그는 개인들이 그들 자신의 선을 받는 근원이 공통의 선임을 확실히 한다. 각 천사는 자기가 전체로서의 선을 사랑하는 만큼 선인 것을 받는다.
통치하는 이들은 최고의 사랑과 지혜를 가진 이들이다: 이들은 모든 것 중에서 선을 제일 먼저 추구하고 이 선을 위해 무엇을 갖추어야 하는지도 알고 있다. 이 같은 인간은 타인 위에 지배권을 행사하려 들지 않고 명령도 내리지 않는다; 그들은 섬기고 봉사한다. 즉 선인 것을 사랑함으로부터 타인에게 선을 행하고 있다. 그렇다 하더라도, 그들에게 영예와 영광이 주어진다. 그들은 공동체의 중앙에 살고, 타인 보다 더 높은 곳에, 웅대한 집에 살고 있다. 그들 모두는 이를 인정함이 비록 자신을 위한 것도 아니고, 순종의 범주를 떠난 것은 아니라 해도 기쁘게 수용한다. 모든 이가 아주 잘 아는 바, 이 영예는 주님에 의해 그들에게 주어진다는 것,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순종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공익 업무들을 처리하는 것이 모든 이의 삶이다. 명확하게 주님의 왕국은 공익을 위한 직업의 천국이다.

천국에 있는 예배

외관상, 천국에 있는 예배는 세상에 있는 예배나 별반 차이가 없는 듯하나, 내향적으로는 아주 다르다. 땅 위와 흡사하게 예배 의식이나 교회 건물도 있다. 그리고 그들은 가르침을 이용하는데, 이와 함께 설교도 빠지지 않는다. 이런 것들이 천국에서 발생하는 이유는 천사들의 사랑과 지혜가 계속 성장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천국에서의 예배는 이곳 교회들의 진행이나 설교를 열심히 경청하는 문제 등에서 똑같지는 않다. 그곳의 예배는 사랑으로부터의 생활, 진정한 가르침들에 기초한 이웃다움과 신앙으로부터의 생활이다. 교회 예배 의식은 생활에 관한 문제들을 위해 더 많이 가르치기 위한 수단 일 뿐이다.
모든 설교가 기초를 둔 가르침은 생활과 직접 관계되고 있다.
그들 중 누구도 생활로부터 신앙의 문제를 분리하지 않는다. 그리고 각 천국에는 가르침들이 주어지는데, 이는 거기 있는 천사들의 특별한 지각에 어울리는 수준에서 이다. 모든 가르침의 필수 요소는 주님의 ‘신성한 인간(Divine Human)’을 인정함이다.
설교자 모두는 영적 왕국에 소속되어 있고 천적 왕국은 아니다. 이런 이유는 예배 의식에서 인간들이 선한 것으로부터 오는 참된 생각에 관심이 모아져 있고, 모든 설교는 진리로부터 행해지기 때문이다. 아무리 위와 같다 해도 천적 왕국 역시 설교를 가지고 이것을 수단으로 진리에서 빛을 받고, 그들에게 주어지는 새로운 진리들을 청종함으로 더 완전해지기까지 한다. 그들은 설교를 들을 때, 그 내용의 것들을 보고, 사랑하고, 그것들로 생활하여 자기 생명의 한 부분을 만든다.
설교자들은 동쪽을 향한 설교단에 서 있다. 설교자 앞에는 더 큰 지혜의 빛 안에 있는 천사들이 앉고, 그들의 오른쪽과 왼쪽에 보다 덜 큰 지혜의 빛에 있는 이들이 앉는다. 그들은 설교자가 모두를 볼 수 있도록 원형 방식으로 앉게 되어 있다. 새로 오는 자는 문쪽에 더 가까이 앉는데, 교회의 동쪽을 향한다. 설교자 뒤쪽에 앉는 자는 누구도 없다. 누군가가 의견을 말하면, 설교자는 혼동에 빠지고 만다. 모든 설교자는 주님에 의해 임명되고, 그 결과 그들은 설교 라는 선물을 받아 가지고 있다

천국에 있는 천사들의 힘(power)

영계의 영향력이 이 세상 안으로 온다는 것, 아예 영계 자체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 인간들은 천사들이 실지로 힘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납득할 수 없다. 이들이 생각하는바, 천사들은 실체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 그러므로 결과를 주는 어떤 것도 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를 더 깊게 생각하는 이들의 경우는 판이하다. 그들은 인간은 자기의 동기와 이해력으로부터 가지는 힘 없이는 자기의 근육 하나도 움직일 수 없음을 실감한다.
인간에게 있는 동기와 이해함은 영인들과 천사들의 영향력을 통해 그 인간의 움직임이나 몸짓에 이르기까지 주님에 의해 규율되어진다. 이를 믿든, 아니 믿든, 인간은 천국의 이 영향력 없이 단 한걸음도 내디딜 수 없다. 영적 인간이 생각하는 것, 그의 입이 말하는 것; 그가 의도하는 것, 그의 몸이 행하는 것, 자기 바램에 따라 몸에 힘을 주는 강약에 이르기까지 모두이다.
천사들은 수 백, 수 천의 악령을 내던져 그들을 지옥으로 되돌려 보낼 힘을 가지고 있다. 이 힘의 진가를 인정할 필요는 있지만, 그렇다고 힘이 그들 자신으로부터 나온 것은 아니다. 모든 그들의 힘은 주님으로부터 그들에게 온다.
사실, 그들 자신들도 이 힘의 근원을 인식하는 만큼에서만 힘이 발휘된다. 힘이 자신으로부터라고 약삭빠르게 믿는 인간은 그 힘이 약해져 악령 앞에 버티고 서있지도 못한다. 이런 이유로 천사들은 자기들이 행한 것에 대한 칭찬이나 영예를 거절하고 자신에게 그 공로의 탓을 절대로 돌리지 않는다. 그들은 그 모두를 주님의 공로의 탓으로 돌리고 그분께 칭찬과 영예를 돌리기만 할 뿐이다.

천국에 있는 언어와 말

천사들도 지상의 인간이 말하는 방식으로 서로 대화한다. 그들은 갖가지 것들, 즉 집식구 문제, 친근하게 말도 주고 받고, 도덕적인 문제, 그리고 영적 생활을 토의한다. 그들이 지상의 인간 보다 더 깊은 생각으로부터 더 총명함으로부터 라는 것 외에는 별 차이가 없다.
천사들의 말, 인간의 말 같이, 분리된 단어들의 형태를 취한다. 크게 이야기 한다, 그리고 천사들은 말해진 모든 것을 듣는다. 그 이유는 그들은 입과 혀와 귀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의 말을 운반하는 대기(공기)가 있다. 이 대기는 영적 존재들에 적합한 영적 대기이다. 영적 존재들은 이 대기를 수단으로 숨쉬고 이야기 한다.
천국에는 한 개의 보편적 언어가 있어 모든 이는 자기의 공동체가 어디로부터 이든, 멀리 있든 가까이 있든 상관 없이 아주 완전하게 모든 이를 이해한다. 이 언어에는 학식이 필요 없다. 그 이유는 이것은 모든 이에게 주어지는 모태 언어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실제로는 그들의 애착과 생각함으로부터 흐른다. 언어의 소리는 애착에 상응한다. 그리고 단어들 자체는 이 애착으로부터 오는 생각에 상응한다. 이 상응이 언어를 영적 차원으로 만든다; 소리냄은 애착에, 사고는 이야기함이다. 이는 천사들이 상대가 이야기하는 방식으로부터 단순하게 그가 실지로 무엇 같은지를 아는 방법이기도 하다.
천사들의 언어는 애착에 근원된 소리로부터 파생된 몇 단어들 말고는 인간의 언어와 공통된 것이 없다. 두 언어의 차이 때문에 인간의 어떤 언어의 한 단어 조차 발음해 내는데 천사들은 무능력을 보여준다. 사실 그들도 발음해보려 여러 차례 시도했었지만 말할 수 없었는데, 그 이유는 그들이 자기들 애착에 일치하는 것만을 발음할 수 있기 때문이다.
천적인 천사들은 더 깊은 수준의 애착으로부터 대화하는데, 그 이유는 그들이 주님을 더 크게 사랑하고 있기 때문이다. 영적인 천사들은 총명으로부터 말하는데, 그 이유는 그들이 이웃을 향한 사랑에 있기 때문에서 이다. 천적인 천사들의 언어는 마치 시냇물 흐르듯, 따라서 부드럽고 깨어지지 않은 소리 형태인데 비해, 영적인 천사들은 파삭파삭하되 맑은 소리 형태이다.
그리고 그곳에서의 모든 교제를 위해 모형(pattern)을 만드는 천국의 모양(form)으로부터 오는 전체로서의 천사들의 언어에는 일종의 하모니가 있다.

천사들이 인간과 이야기 하는 방법

천사들이 인간들과 담화할 때, 그 때의 언어는 천사들의 것이 아닌 인간의 언어이다. 이런 이유는 천사들이 누구와 대화할 때 그들은 그를 향하여 돌아서고 자신을 그에게 결합시키기 때문이다. 이것은 둘을 비슷한 종류의 생각함 안으로 가져다 준다. 그리고 인간의 생각함이 그의 기억에 연결되어져 있고, 거기서 말이 나오는 바, 천사와 인간, 이 둘은 똑같은 언어를 사용할 수 있다. 천사 또는 영이 인간과 이 연결을 만들 때, 천사나 영은 인간의 기억 전체에 들어가고, 그가 알아채는 한 그는 인간이 아는 모든 것을 알고 있다.
인간과 더불은 천사의 말은 두 인간 사이에서는 청취가 가능하나, 오로지 그 한 인간뿐 근처 인간까지 청취되지는 않는다.
영들과 대화하는 것, 비록 요즘 시대에서는 매우 드믄데, 그 이유는 위험하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는 인간은 누구와 함께 있는 것을 모르고 있는데 영들은 알고 있기 때문이다. 악령들은 인간들을 향한 살인적인 느낌들에 피난처를 제공하는 자연적 영들 곁에 있다. 그리고 그 영들은 영과 몸을 파괴하는 것 외에 원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사실 그것들은 어떤 정상적 자연적 쾌락으로부터 자신들을 차단해버리는 극점에까지 환상의 과도한 탐익에 몰입하는 이들과 더불어 발생한다.
고독한 생활을 꾸리는 인간의 경우, 영들이 자기들끼리 대화하는 것을 때로는 들을런지 모르나 피해가 일어나지는 않는다. 그런 이유가 이 영들이 대화할 때 자기들과 함께 인간이 있는 것을 그 영들이 알지 못하도록 주님께서 철수 시켜 놓고 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영들은 자기들이 있는 곳 외 다른 곳에 인간들이 있다는 것, 또는 또 다른 세계가 있다는 것도 눈치채지 못한다. 고로 인간이 그들과 대화하려는 것은 허용되지 않는데, 그 이유는 만일 그가 대화한다면 악령들이 위 사항이 있음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
종교적인 문제들을 언제나 생각하는 인간들, 그리고 자기 안을 직관하는 고점까지 종교적 문제를 압축한 인간들 역시 영들이 대화하는 것을 듣기 시작한다. 종교 자체가 목적이고 종교가 인간의 모든 것을 빨아들이고, 생활과 남에게 유익해짐에 응용해보려는 것과 균형을 맞추지 않을 때, 인간의 관심된 것을 선점하면서 그 인간의 온 영을 건네받는다. 그들은 영계에 들어가기까지 해서 거기 영들에게 영향을 끼치기도 한다. 이와 같은 인간이 도취되어 얻는 것은 환상물이다. 그들은 자기들이 성령으로부터 들었다고 믿는다. 사실, 이 영은 인간의 영을 도취시켜 즐거워하는 그 곳의 영일 뿐이다.
천사들과의 대화는 누구도 허용되지 않으나, 예외는 있다. 천사의 표준에 의해 사는 인간, 주님을 그분의 ‘신성한 인간‘ 안에서 인식하는 인간이다. 그리고 대화가 허용된 이들은 천국에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들은 자기들의 내적 생각들이 있는 천국의 빛으로부터 보고 있기 때문이다.

천국에 있는 글쓰기

천사들이 단어를 사용하여 이야기 하는 것과 거의 같게 그들은 글을 쓴다. 그들의 마음은 말 뿐만 아니라 글을 통하여 생각들과 의미들을 운반한다. 천국에 책들이 있는데 주님께서 준비해두셨다. 이것들은 우선적으로 말씀을 위하여 있다, 신성한 진리로서의 말씀은 천국의 모든 지혜의 참 근원이다. 이는 천사나 인간에게나 공히 같다. 말씀 자체는 주님에 의해 직접 주어져 있다. 그리고 말씀은 질서적인 방법에서 천국들을 통하여 걸러지고, 마지막으로 인간들과 더불어 쉼에 이른다. 그러므로 말씀은 천사와 인간의 지각에 잘 어울리게 되어 있다.
이것은 왜 천사들이 말씀을 가지고 있고, 지상의 인간이 읽듯 그들도 읽는 가에 대한 이유이다. 천사들은 말씀으로부터 그들의 모든 믿음들, 가르침, 설교를 이끌어 낸다. 말씀은 지상의 것과 아주 같은데, 한가지 예외는 우리에게 있는 글자 의미인 자연적 의미가 천국에는 없다는 것이다. 대신 영적 의미가 있고, 이것은 말씀의 내적 의미이다. 말씀은 신성이 맨 마지막인 글자에 내려와 존재하는 곳이다는 것은 세상에서 폭넓게 생각되고 있다. 그러나 그 안에 이 신성의 속성이 놓여 있다는 것은 알려져 있지 않다. 가장 높은 천국에서, 글쓰기는 천국의 모양을 간직하는 굽어진 글자나 둥그런 글자로부터 형태를 지어간다. 경이로운 대목 하나는, 천사들에게 언어가 주어진 방법과 같이 위와 같은 글 쓰는 방법은 가르쳐질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이런 글쓰기가 천국의 글쓰기이다. 지상 최초의 인간들은 글자들이 창안되기 전 이런 종류의 글쓰기를 지녔다. 이 글쓰기가 언어 안으로 이어졌고, 이 글쓰기는 말씀이 근원적으로 씌어진 방식이다. 이런 이유로 근원적 글자들의 세세한 모양들에서 조차 감추인 의미와 신성한 것이 있는 이유이다.
천사들은 천국적 필기체인 이 글쓰기를 통해 아주 정밀하게 자기들의 생각들과 애착들을 표현할 수 있다. 이 글쓰기는 단지 생각만으로부터서는 가늠할 수 없는 많은 감추인 것을 함유한다. 그러나 낮은 천국들에는 이런 종류의 글쓰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낮은 천국에는 세상의 글자 종류만큼이나 많고 유사한 글자가 있다. 그렇다 해도 이 글자가 인간들에게는 납득될 수 없는데, 그 이유는 이것 역시 천국의 천사들의 언어이기 때문이다. 이 글쓰기는 인간들이 많은 페이지들에서 기술할 수밖에 없는 것도 몇 단어들로 표현할 수 있다.
하나 더 언급할 만한 것은, 천국의 이런 글쓰기는 아주 자연스럽게 천사들의 생각함으로부터 별 노력함 없이, 어떤 주저함도 없이 흐른다는 것이다. 생각이 객관화 된다. 그리고 단어들 자체는 천사의 생각과 상응하므로 이는 동시적으로 와진다.

천국에 있는 천사들의 순진

순진이 무엇인지 아는 인간은 이 세상에는 거의 없다, 그리고 악한 자는 순진에 관해 전혀 모른다. 순진은 얼굴에서, 말투에서, 동작에서, 특별히 어린이에게서 보여질 수 있는 가시적인 특성이 있다. 인간들은 순진이 무엇인지 모른다. 더구나 순진은 천국 자체가 있는 곳 이다는 것, 인간 내에 저장되어 있다는 것을 모른다. 순진에는 어린 아이의 순진과 지혜의 순진이 있다. 전자는 진짜 순진은 아니고 바깥쪽 모양에서만 순진일 뿐이다. 그럼에도 우리가 그 순진으로부터 진정한 순진에 관하여 배우는 것은 가능하다. 이 순진은 작은 어린이의 얼굴에서, 어느 정도는 그들의 움직임에서, 그리고 그들의 아주 어린 시절의 말투로부터 빛을 발하고 있다. 작은 어린이 자신들은 더 깊은 생각들을 가지지 못하는데, 그 이유는 그들이 선과 악 사이의 차이를 모르기 때문이다. 그 결과 그들은 어떤 자아 동기, 또는 악한 의도를 가지지 않는다. 이 아이들은 자신들에게 어떤 공로도 돌리지 않는데, 그 이유는 모든 것이 부모로부터 임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기에게 주어진 조그만 것들 가지고도 만족하고 행복해 한다. 그들은 먹는 것, 입는 것, 미래를 위한 것에 걱정하지 않는다. 그들은 세상을 시샘하며 쳐다보지 않는다. 그들은 자기들의 양친을 사랑하고 또 자기들 주위의 인간들을 사랑한다. 그들은 자기들을 인도해가도록 자신들을 허용한다. 그들은 행복하게 귀기울이고, 순종한다. 이런 어린 아이의 순진은 그들로 예법이나 말씨, 기억함, 생각을 배우는 수단이고, 이를 수단으로 위와 같은 것을 그들 안에 저장한다. 그렇다해도 이 순진은 바깥쪽 만에 속하는데, 그 이유는 몸에 속할 뿐, 마음에 속하지 않기 때문이다.
지혜의 순진은 진짜 순진이다. 그 이유는 그것이 내부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이 순진은 마음에 있는 의도와 생각으로부터 오고 있다. 순진이 있는 것들 안에 지혜도 있다. 그래서 천국에서는 순진은 지혜 안에 있다라고 말해진다. 또한 천사는 자기가 얼마나 순진한지에 따라 슬기롭다. 그다음 천사들은 자신 안에 있는 어떤 선을 두고 자신의 공로 때문이라고 하지 않는다. 오로지 자기들은 주님으로부터 받은 것들이므로 주님의 공로임을 인정한다. 그들은 주님에 의해 인도되고 싶어한다.
그들은 선인 것을 사랑하고 진리 안에서 즐거워 한다. 그들은 자기가 가진 것이 많든 적든 만족하며 살고 있다. 그들은 자기들이 가진 것이 자신이 받을 수 있는 최대한도의 것임을 알고 있다. 그들은 미래에 관하여 근심이 없다. 그리고 그들이 원하는 모두는 주님의 인도를 받는 것, 자기들이 받는 모든 것의 공로를 그분께 돌리는 것이기 때문에 그들은 그들 자신의 이기적 경향성으로부터 안전하게 보호되고, 그들이 더 그럴수록 더욱 주님으로부터 흘러온다. 순진은 천국의 참 본질이다. 이런 이유로 순진의 특성을 자기 내부에 가지지 않으면 아무도 천국에 입장하지 못하는 것이다.

천국에 있는 천사들의 평화

천사들이 천국에서 가지는 평화가 어떤 종류인지를 서술한다는 것은 조금 힘들 것 같다. 따라서 하느님 안에서 만족하는 인간들의 ‘마음의 평화’에 비교해보는 것만이 가능할 것이다.
천국에는 두 개의 근본되는 특질이 있다: 순진과 평화이다. 이 둘은 모두 주님으로부터 온다. 순진은 천국에 있는 모든 선의 근원이고, 평화는 선인 것의 모든 기쁨의 근원이다. 모든 선은 그 선 자신의 기쁨을 가지고 그들 모두 사랑으로부터 온다. 순진과 평화 모두 주님의 신성한 사랑으로부터 오고, 그것들은 그것들의 참 심정으로부터 천사들에게 영향을 끼친다.
평화의 근원은 주님 자신 안에 있는 신성한 평화이다. 이는 신성 자체와 주님에 있는 ‘신성한 인간’의 합일로부터 온다. 이와 같이 평화는 신성의 어떤 것인 바, 천국에 있는 모든 것에 행복을 가지고, 특히 기쁨을 가지고 더 깊숙이 영향을 준다. 평화는 천국과 더불어 그리고 거기 각 개인과 더불어 있는 주님의 연결 고리이다. 이로부터의 결과로서 천사들은 모든 것을 축복으로 받고, 인간들이 천국의 기쁨이라 부르는 것을 느낀다.
이 특성들은 인간들이 세상에서 사는 한, 인간들 안에서 감추여 놓인채 그 인간과 동떨어져 있다. 그리고 그가 자기 몸을 떠나 모든 것이 벗겨져 있는 곳인 영계에 들어가서야 밝히 들어나게 된다.
신성한 평화는 선인 것과 진리인 것이 하나될 때 도래하기 때문에 천사들은 자기들이 사랑하는 상태에 있을 때 평화 안에 있게 된다. 그 이유가 사랑하는 상태에서만 그들 안의 모든 것은 하나로 가능하기 때문이다. 세상에서의 평화는 적대적인 것의 중지 또는 문제가 있는 것들이 제거될 때 라고 말하는 것을 듣는 천사는 말하기를, 그들 자신 안에서 이것들은 평화가 전혀 아니다고 한다. 진짜 평화, 천사들은 말한다, 천국의 선 안에 있는 인간에게 있다고… 그 이유는 이 선 안에만 평화의 존재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평화는 실제로 주님으로부터 천국의 선에 있는 인간의 중심 안으로 흘러들어 그들의 낮은 수준 아래로 흐르고, 그들의 내적 마음에 평화를 가져다 주고, 그들의 바깥쪽 마음에 고요함을, 결과적으로 기쁨을 가져온다.

천국과 인류 사이의 연결 고리(link)

많은 인간들이 아는 바, 선한 모든 것은 하느님으로부터 있고, 인간으로부터서는 하나도 있지 않다는 것, 그리고 악은 악마로부터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위의 어떤 것도 인간과 천국 사이에 연결 고리(link), 그리고 지옥과의 연결 고리가 있지 않으면 있을 수 없다. 이 연결고리는 인간의 의도와 생각과 더불어 있다.
각 개인과 더불어 선한 영들과 악령들이 있다. 이 영들을 통하여 인간은 천국과 지옥과 연결된다. 이런 영들은 천국과 지옥 사이 중간쯤에 있는 영들의 세계 안에 있다. 이 세계의 자세한 설명은 이미 앞 편에서 취급했다.
영들은 자기들이 어떤 인간과 연결되어 있는지를 결코 알지 못한다; 그러나 그들이 누군가와 더불어 있을 때 그들은 그 인간의 기억들과 생각들이 자기 것이라고 믿는다. 인간과 더불어 있는 영들은 그 인간 자신의 사랑과 똑같은 품질 속에 있다; 그러나 인간 자신은 악한 영들을 초대하는 것과는 반대로 선한 영들은 주님에 의해 그 인간에게 연결되어져 있다. 인간과 더불은 영들이 그렇다 해도 있는 그대로의 생명은 변해지고 그가 사랑하는 것이 바뀐다. 이렇게 인간은 자기와 더불어 아주 어린 시절부터, 어떤 이는 후기 어린 시절부터, 누구는 청년기부터, 성년기부터, 혹은 노년 시절에야 이러한 어떤 영들을 가지고 있다.
순진한 영들은 초기 어린 시절에 현존하고, 이들은 순진의 천국과 자신들을 연결해놓고 있다; 학식을 사랑함을 가진 영들은 후기 어린 시절에 현존한다. 진리와 유용함에 애착하는 영들은 젊은 성년기와 만숙기에 현존한다. 그리고 노령기의 영들은 지혜와 순진에 포함되어 있는 인간에게 현존한다.
천사들과 인간들 사이의 연결 고리는 자기들의 이해함이 개혁되어질 수 있고 그리하여 거듭나질 수 있는 인간들과 더불어서만 존재한다. 이것은 바뀌어질 수 없는 인간들과 더불어서는 다르다. 허지만 그들 역시 선한 영을 수단으로 악으로부터 제지되어지도록 선한 영들이 그들과 함께 있는 것은 확실하다. 그러나 그들의 직접적 연결은 지옥을 왕래하는 악령들과 더불어 있다. 결과적으로, 영들은 자기와 연결된 인간과 같은 종류의 영을 가지게 된다. 만일 그들이 자신들을, 또는 돈, 복수, 간음을 사랑하면, 그다음 이런 것을 사랑하는 이와 비슷한 영들이 그 인간과 있게 된다. 이런 영들은 악한 바램 안에 거처를 정한다. 인간이 선한 영들에 의해 악한 어떤 것을 행함으로부터 간직될 수 없는 만큼 이 악령들은 불 가운데 자신을 놓는다. 그리고 이 바램이 그 인간을 지배하는 한 그 영들은 착 들러붙어 떠나질 않는다. 이렇게 악한 인간은 지옥과, 선한 인간은 천국과 연결되어져 있다.
영들을 수단으로 주님에 의한 인간의 통치는 영들이 행하는 방식 안에서 일어난다. 그 이유는 세상에 있는 인간은 천국의 모형(pattern) 안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인간은 지옥에 속하는 악한 것들을 향하려는 경향성들을 가지고 태어난다. 이 경향성은 신성한 질서에 정 반대이다. 따라서 인간은 위와 같은 영들과의 간접적 연계를 수단으로 가능할 뿐인 천국의 모형(pattern) 안으로 되돌려질 필요가 있다. 만일 인간들이 천국의 모형 안으로 태어나졌다면 상황은 아주 달랐을 것이다. 그 이유가 그럴 경우 인간은 영들을 통하여 주님에 의해 통치되어질 필요가 없고, 그들은 일반적으로 흐르는 질서 자체를 수단으로 인도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지상의 인간은 자기의 생각함과 바램으로부터 언어와 말함이라는 행동 안으로 오는 것과 같은 일반적 영향력에 의해 통치되어진다. 이것 모두는 직접적으로 흐르는 바, 그렇게 해서 그 인간과 더불어 연결된 영들이 그 인간과 공통되는 것이 없도록 한다.
주님 자신이 천국의 모형을 유지하는 개개인 안으로 흘러 인간의 가장 깊은 수준, 뿐아니라 그의 더 바깥쪽 수준 안으로 흐르고 있으시다는 것을 실감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리고 이 인간은 천국을 받기 위하여 이런 것들을 배열한다. 이 영향은 직접적인 것이라 불리우고, 이에 비해 영들의 영향은 간접적이다. 두 번째 영향은 첫 번째 영향에 의해 가능해진다.
영들은 자신의 생각들을 인간들 안으로 도입하지 않는다, 그러나 오히려 선과 진리인 것, 또는 악과 거짓인 것을 위한 사랑의 애착 안으로 도입한다. 이런 까닭에 인간은 선인 것, 악인 것 사이에 기본적 선택(권)을 가진다. 인간은 이 둘 사이에서 선택하되 자유로운 상태에서의 선택함만이 있다.
인간은 이 둘을 곰곰이 생각해봄으로 선인 것은 받고 악인 것은 거절할 수 있다. 그리고 그가 수용하는 것은 그의 일부가 되어가고, 그가 거절하는 것은 그의 것이 되지 않는다.

인간을 천국에 연결하는 것은 말씀이다

깊이 생각하는 인간이라면, 모든 것은 그것의 근원과 연결되어 있고, 그렇지 않은 것은 분해될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저절로 존재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말이다. 모든 것은 그것에 앞서 거기에 있었던 어떤 것으로부터 온다. 생각이 깊은 인간이라면, 실체란 존재 안으로 계속 들어옴이다는 것 또한 실감하고 있다. 이것이 어떻게 그렇게 되는지를 서술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우리는 자연계가 모든 것의 근원인 영계와 상응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 또한 인간과 더불어 행해지는 모든 것과 천국의 모든 것 사이에도 상응이 있어 연결되었다고 말할 수는 있다..
인류가 천국으로부터 돌아서 자아와 세상을 향함으로 천국과의 연결은 절단되나 그 후, 주님은 천국과 인류 사이의 연결을 보존하는 수단을 설비하셨다. 이 중간 고리가 말씀이다.
말씀은 그 안에 있는 모든 말들과 그것의 의미가 상응관계에 놓여 있게 하는 방식에서 씌어졌다. 그리하여 이 의미는 천사가 연루되는 영적 또는 내부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인간이 말씀을 읽고 말씀의 글자 의미를 이해할 때, 그 인간과 함께 하는 천사들은 동시에 내부 의미를 이해하고 있다. 천사들은 영적으로 생각하고 인간들은 자연적으로 생각한다. 이 둘은 다르게 보일런지 모르나 그럼에도 그 둘은 하나인데, 그 이유는 그 둘은 상응하기 때문에서이다. 이 둘은 연설자의 말들 같이 거의 하나를 만들고, 그것의 효과는 연설의 말들이 아닌 의미에 초점을 맞추어 이해한 청중자와 같다.
또한 말씀은 교회 밖에 있는 인간과 천국을 연결한다. 주님의 교회는 보편적인 바 어떤 것이 신성으로부터임을 인식하고, 그들의 이웃을 사랑하며 사는 모든 인간 안에 존재한다. 이 인간들이 죽을 때, 그들은 천사에 의해 가르침을 받고, 기쁘게 신성한 진리들을 받는다. 이 보편적인 교회는 주님이 보시기에 마치 천국이 그러하듯, 하나의 인간 같다. 그러나 말씀이 발견되는 교회, 말씀을 수단으로 주님이 알려진 교회는 인간 속의 모든 기관과 몸에 생명을 가져다 주는 ‘심장과 폐’와 같이 개인, 즉 하나의 인간 같다.
만일 인간이 이 내부 의미가 존재함을 알았고, 그가 말씀을 읽을 때 이 의미에 대한 어떤 지식으로부터 생각하려 노력했다면, 그는 더 슬기로워지고 천국과의 연결은 더 밀접하고 더 단단한 연결 고리를 형성해 있을 것이라고 천사들은 말한다. 이를 통하여 그는 천사들과 같은 종류의 생각들 안으로 와질 것이다.

천국과 지옥에는 인류로부터 온 인간들이 산다

천국에 미리 창조해둔 천사는 없다. 그리고 빛의 천사로 창조되고 그다음 내던져진 악마도 지옥에 없다. 천국과 지옥에 있는 모든 이들은 어떤 예외 없이 인류로부터 온다. 이것은 천사들의 마음과 인간의 마음 사이의 유사성을 가지고 확증되어질 수 있다. 두 마음 모두는 이해하는 능력, 지각하는 능력, 다각적인 것을 추론하는 능력, 의도함, 또는 뜻하는 능력을 공히 가지고 있다; 마음의 두 형태들은 천국이 받아지도록 모양지어져 있다. 인간 마음은 천사의 마음 만큼이나 슬기로움을 성장하게 할 수 있는 잠재성을 지니고 있다. 그런데 이 세상에서 그렇지 않는 이유는 마음이 자연적으로 생각하는 물질적 수준에 한정되어져 있기 때문이다.
허나 사후에는 아주 다르다, 그 이유는 그 때에는 마음은 더 이상 자연적으로 생각하지 않기 때문, 그리고 인간의 자연적 마음이 표현할 수 없고 이해될 수 없는 사상들을 영적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때에는 천사 같이 생각하고 이해한다. 이것은 인간의 안쪽 부분-그의 영-은 천사와 인간 모두에서 잠재성 안에 있었지만 그가 지상의 몸에서 해제 될 때, 사실 그는 천사이었다는 것을 확증해준다.
그런데 인간의 이 안쪽 부분이 더 높은 것을 향해 열리지 못하고 더 낮은 것만을 쳐다 볼 경우, 그 상황에서 그의 영이 몸으로부터 석방되면 그 영은 인간 모양 안에 있고 악마적으로 된다. 그것은 천국을 쳐다 볼 수 없고 오로지 아래쪽인 지옥을 좋아할 뿐이기 때문이다.
신성한 질서가 어떻게 일하는지를 이해하는 이들은 인간이 천사가 되어지도록 창조 되었다는 것도 지각할 것이다. 그 이유가 천국의 생명과 천사의 생명의 기초가 그 인간 안에 형성되어 질 수 있기 때문이다. 신성한 질서는 마무리함 없이 결코 멈추지 않는다. 이 질서는 그것 자체가 자기의 모양을 옷입고 번성하는 수준에까지 진보해간다. 천국의 씨앗판은 인간의 이 수준에서 천국에서 천사가 되도록 하기 위해 인간 속에 미리 창조되어 있다.

교회 밖에서 태어난 인간의 경우

교회 밖에서 태어난 인간은 구원되어질 수 없다는 것이 일반적인 사고이다. 그 이유는 구원받으려면 말씀과 주님에 관한 지식이 있어야 하는데, 그들에게 이것이 없기 때문이다 라고 말한다. 그럼에도 그들이 구원되어짐을 보여주는 한가지 사실은 주님의 자비는 보편적 진리이다는 것, 그분의 자비는 개별적인 모든 인간에게 뻗쳐나간다는 사실이다. 교회 밖에서 태어난 이들은 교회 안에서 태어난 인간 만큼 인간으로 태어난다. 그들이 주님에 관한 지식을 가지지 못한 것은 그들의 과오가 아니다.
이성은 우리에게 말한다. 아무도 지옥에 가도록 태어나지 않는다고…그 이유는 주님이 실지로 사랑 자체이시고, 그분의 사랑은 모든 이를 구원하고 싶은 바램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고로 그분은 모든 인간이 종교에 관한 어떤 생각을 가지고, 이를 수단으로 그들이 신성으로부터 있는 어떤 것에 대한 느낌을 가져 더 높은 생명의 수준을 가지는 것을 보증하신다. 어떤 종교에 의해 산다는 것은 생명을 더 깊게 고찰함으로부터 산다는 것을 단순히 뜻한다. 그 다음 인간은 주님 속에 있는 것에 초점을 맞춘다. 이것에 집중하는 만큼, 인간은 세상에 그의 초점이 없고 그의 사고는 생명의 바깥쪽 사고로부터 더 멀리로 이동한다.
우리는 알 수 있다. 즉 모든 이 각자는 자기 안에서 무엇이 천국을 만드는지 이해할 때 구원되어질 수 있을런지 모른다는 것이다. 천국은 당사자 안에 있고, 자기와 더불어 천국을 가진 인간은 천국 안으로 입장한다는 것이다. 인간 안에 있는 천국은 신성을 인식하고 신성에 의해 인도되고 있다. 모든 종교의 첫째가는 필수는 신성인 것에 관한 인식이다. 이 인식함이 없으면 종교도 없다. 모든 종교의 법들은 예배에-즉 예배가 인간들에게 수긍되도록 어떻게 주님을 예배하느냐에 중심을 두고 있다. 그리고 이것이 각 개인의 마음 안에서 바램이 될 때, 그때에 그는 주님에 의해 인도되어진다.
교회 밖의 인간들도 교회 안의 인간들 만큼이나, 때로는 더 낫게 도덕적인 생활, 올바른 삶을 영위한다. 도덕적인 생활에는 두 가지가 수반된다. 신성으로부터의 어떤 것을 위함, 또는 세상에 있는 인간을 위함이다. 이 둘은 똑같지 않다; 외견상 이 둘은 같아 보이지만 내향적으로는 아주 다르다. 전자는 인간을 구하나 후자는 그렇지 않다. 신성인 것을 위하여 도덕적 삶을 사는 인간은 주님에 의해 인도되어지고, 한편 세상 인간 앞에 보이기 위한 도덕적 삶은 자신에 의해 인도되어진다.
위의 뚜렷한 구분을 위해 예를 드는 것도 유용할 듯 싶다. 이웃에게 잘못을 하지 않는 이유가 그것이 종교에 반대되기 때문이라면 그 인간은 영적 동기로부터 자제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달리 법이 두려워서, 자기 명성을 잃을까봐, 자신의 이득을 위하여 자제하는 인간은 자연적 동기로부터의 자제이고 자신에 의해 인도되어 간다. 도덕적 생활이 영적인 인간은 자기 안에 천국을 가지나, 영적이지 않은 인간은 자기 안에 천국을 가지지 못한다. 이런 이유로 천국은 더 높은 수준으로부터 안으로 흘러들고, 그 인간의 내부 수준들을 열고, 이를 통하여 그의 바깥쪽 생활 안으로 흐른다; 이에 비해 세상적인 것은 더 낮은 수준으로부터 흘러들고 삶의 안쪽이 아닌 더 바깥쪽 수준들에 영향을 미친다.
이 인간에 있는 천국의 상태와 저 인간에 있는 천국의 상태는 광대하게 다양하다. 이것은 인간 안에 있는 천국의 생각들의 품질에 따라 다양해진다. 그 다음 교회 밖에 있는 이들, 그들이 진정한 생각들을 직접적으로 눈치채지 못했을런지 몰라도 그들이 가진 사랑 때문에 다른 삶에서는 궁극적으로 그것들을 받을 것이다.
주님으로부터 떨어져서는 구원이 없다는 것은 진실인데, 이를 더 꼼꼼히 말하면 주님을 제외하고는 구원이 없다를 뜻한다고 이해해두어도 무방할 것이다.

천국에 있는 어린 아이들

혹 어떤 인간들은 이렇게도 믿는다. 교회 내에서 태어난 아이들 만이 천국에 갈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인간들은 더 말한다. 교회 내에서 태어난 아이들은 세례를 받았는 바, 교회의 신앙에 입문한 것이나 다름없다고 한다. 그러나 이런 인간이 모르는 바, 단지 세례를 통해서만이 신앙을 획득하고 천국에 들어가는 자는 아무도 없다는 것이다. 세례는 인간이 재탄생되어야 할 필요가 있음을 기억하라는 단순한 표시 역할을 수행할 뿐이다는 것이다.
모든 아이들, 어디서 그들이 태어났든 그들이 죽을 때는 주님에 의해 영접된다는 것, 그리고 그들은 천사들에 의해 양육되어진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이 세상에서 죽는 아이들은 다른 삶에 있는 많은 아이들과 같고 지상에서 가졌었던 품성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똑같은 어린아이 같은 마음, 같은 순진, 같은 상냥함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이 단계에서 잠재적으로만 천사일 뿐이나, 천사가 되는 과정을 밟고 있고 때가 차면 예외 없이 천사가 된다. 이 세상 삶을 통과한 모든 이는 저 곳에서 이곳에서와 비슷한 상태에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젊은이였으면 젊은이 상태를 발견하고 어린이는 어린이 상태를 발견한다. 이후 각 인간의 삶의 외관의 상태는 바뀐다. 이 때 어린아이는 타 연령층에 비해 장점이 크다. 즉 그들은 아직 순진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자기들 삶에 의한 악은 아직 기반도 제대로 되어있지 않다. 그들의 순진은 모든 천국의 특성들이 그들 안에 이식될 수 있게 한다. 그 이유는 순진은 천국의 저장소이기 때문이다. 저 세상에 있는 어린이의 상태는 이 세상 어린이의 것 보다 더 낫다. 그 이유는 저곳의 어린 아이들은 모든 제한들을 지닌 육체로 옷입혀 있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천사 누구와 닮았다. 이 세상에서 작은 어린이는 걷기를 배워야 하고, 자기 움직임에 협조하는 법을 배워야 하고, 어떻게 말하는지를 배워야 한다. 자기의 감각들 조차 연습에 의해 점차적으로 발달시켜야만 한다. 육체의 몸은 그 자체 딱딱하다; 육체의 몸은 그것의 감각을 내부가 아닌 외부로부터 받는다. 이것도 저 세상 어린이와는 다르다. 영인 바, 그들은 자기들 내에 있는 것과 일치하여 동시적으로 행동한다. 비록 처음에는 생각들의 연속성이 없다 할지라도 연습 없이 걷고, 이야기한다. 이런 능력 조차 머지 않아 발달한다. 그 이유는 그것들의 바깥쪽 형태가 내적 상태와 하나되어 있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죽은 후 그들을 소생시킴은 즉각 있고 이후, 그들은 천국으로 데려와져 이 세상에서 아이들을 사랑했고 또한 하느님을 사랑했던 여성 천사의 보살핌 아래에 있는다. 이 여인은 자기의 특유한 품성 때문에 어린이를 자신의 아이인 냥 받는다. 그리고 아이들은 그들의 안쪽 출생 본성으로부터 이 여인들을 비록 그들 고유의 어머니가 있다 해도 사랑한다. 각 여인들은 자기들이 원하는 만큼의 여러 어린이들을 자기들의 영적인 부모 사랑으로부터 돌본다.
천국에 있는 어린이들은 천사가 주님을 쳐다보는 선(line)을 따라 오른 쪽에 있다. 그들은 직접적인 주님의 시야와 돌보아주심 아래 있는 천국의 영역에 있다.
이제 천국의 어린이들이 어떻게 양육되는지 기술해보자. 그들은 자기들의 보호자로부터 말하기를 배운다, 그리고 자기들의 말을 시작하는데 이는 그들의 애착으로부터의 단순한 소리들이고, 이것은 발달하기 시작하는 생각들로서 더 맑게 점진적으로 되어간다. 천사의 모든 말은 애착으로부터 튀어나오는 생각-형체들(thought-forms)이다.
무엇보다 먼저 어린이들을 둘러싸고 있는 사랑스러운 것들이 그들의 애착 안으로 부드럽게 스며들고 아이들이 보도록 주어진다. 이 대상물은 근원에서 영적이기 때문에, 어린이가 그것들을 봄과 동시에 천국의 것들이 흘러든다. 이 방식에 어린이의 내적 수준들은 열려지고, 날마다 그들은 더 완전해져 간다. 이 첫 단계가 설립될 때, 어린이는 자기들이 가르침을 받는 또 다른 천국으로 데려가지는데, 이 과정은 계속된다. 아이들이 가르쳐지는 주요 수단은 각자의 특별한 이해 수준에 적합할 수 있는 것들의 표현들이다. 이 표현은 너무나 아름답고 지혜로 꽉 차 있어 그들은 묘사해보는 것조차도 거부한다.
아이들이 지혜와 이해함을 획득했을 때, 그들은 천사들이 되어가는 바, 이제 더 이상 어린아이 같이 보이지 않고, 성인들 같은, 성인의 지혜와 완전함이다. 아이-천사들이 지혜 안에서 자랄 때 더 만숙하게 보이게 되는 이유는 지혜가 영적 자양분이기 때문이다. 그들의 마음에 먹이가 되는 진짜의 것들은 그들의 몸에게도 먹이가 된다. 이것은 상응으로부터 있다. 그 이유가 그들의 몸의 모양은 그들 내부의 바깥쪽 표현 밖에 더 아니기 때문이다.
한가지 더 알만한 가치가 있는 것은 천국에 있는 어린이는 젊은 성인 시절이 개시되지만 이 시기를 넘는 노년기는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들은 영원히 젊은 성년기에 머문다.

천국에 있는 슬기로운 자와 단순한 자

세상에서 상식화 되다시피 한 것이 있다. 총명은 학자와 학문의 문제이다는 것, 그러므로 현자는 단순한 자 보다 천국에서 더 영광되고 상위에 있을 것이다 라고 단정한다. 그러나 천국의 총명은 이런 속성에 있지 않다. 천국의 총명은 진리인 것을 사랑함으로부터 오는 내부의 총명이다. 이 총명은 세상이나 천국의 영광을 위함이 아니고, 진리 자체를 위하여서 이다. 이 총명은 천사들을 더 깊은 감정과 기쁨으로 채운다. 진리인 것에 의해 움직여지고 기쁨을 갖는 인간들은 천국의 빛에 의해 영향받아진다. 그리고 만일 그들이 이것을 수단으로 움직인다면, 그 다음 그들은 신성한 진리, 사실상 주님 자신에 의해 움직여진다. 이런 이유는 천국의 빛이 천국에 계신 주님이기 때문이다.
천국의 빛은 이 빛을 받도록 특별히 모양을 갖추어 온 마음의 더 깊은 수준에 들어갈 수 있고 영향을 줄 수 있다. 천국의 빛은 마음에 영향을 주고 마음을 기쁨으로 채우는 방식으로 들어간다. 그 이유가 천국으로부터 흘러들고 받아지는 어떤 것은 자체 내에 즐거워하고 유쾌한 어떤 것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진리인 것에 대한 순수한 애착의 근원이다. 이 애착을 가지고 진리를 받는 인간은 천국에서 빛을 낸다고 말해진다. 그러나 자신의 영광을 위해 진리를 추구하는 이들은 천국에서 빛을 낼 수 없다. 그 이유는 그들이 그 자체 어둠인 세상적 빛에서만 있기 때문이다. 실로, 자아-영광이 그들의 주된 동기이고 그들이 기대하는 유일한 목적이다. 이럴 경우, 의문을 지닌 인간은 우선 자신에 초점을 맞추고 목적에 대한 수단으로 진리를 단순히 사용한다. 그 결과 그는 자기의 눈을 천국으로부터 세상으로, 주님으로부터 자신에게로 향하게 한다. 외관상, 이런 종류의 인간도 진실로 빛 안에 있는 인간 만큼 학식 있어 보인다. 그 이유가 그들도 똑같이 말하기 때문이다. 때로 바깥쪽일 경우, 그들이 더 슬기로운 자 같은데, 그 이유는 자아-영광에 의해 재빠르고, 천국을 모방함에 더 숙달되었기 때문이다. 허지만 그들의 내부는 판이하고, 이런 것들은 천사들에게는 환히 보인다.
인간이 이 세상에서 획득하고 발달시키는 품질들은 당사자와 함께 머문다; 그는 죽을 때 자기와 더불어 그 품성들을 가져간다. 그들은 사후에도 계속 발달 시킨다. 그러나 그것을 선한 용도에 놓으려는 그의 바램과 진리인 것에 대한 그의 애착의 크기에서 일 뿐이다. 바램이 작으면 발달함도 미미하고, 크면 발달도 규모가 있다. 어쨌든 각자는 그가 받을 수 있는 만큼만 받는다. 그 이유가 사랑은 그 자체와 일치하는 모든 것을 끌어당기기 때문이다.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가진 모든 자에게, 그것은 주어질 것이다. 그렇게 해서 그는 더 큰 풍부함을 누릴 것이다” (마태 13:12).
진정한 총명과 지혜는 선과 진리인 것을 지각하고, 그 결과 악과 거짓인 것을 보고, 그리하여 내면의 지각으로부터 이 둘 사이를 명백하게 구별함에 놓여 있다. 총명하고 슬기로워지기 위해, 인간은 많은 것, 즉 천국과 영적인 것, 뿐만 아니라 세상의 방법들을 계속 배워갈 필요가 있다. 인간이 계속 배우고 배웠던 것을 생활에 응용하는 만큼, 그는 슬기로워지고 총명해진다. 그 이유는 완전에 더 가까워지기 때문이다.
단순한 인간은 내적 수준들이 열려있는 이들이지만 영적 진리나 자연적 진리들을 수단으로 발달되지 않는다. 그들은 들을 때 어떤 것이 진리인지를 지각한다. 그러나 그들은 그 자체로는 그것들을 보지 못한다. 슬기로운 자는 내부의 수준이 열려있을 뿐 아니라 발달되는 이들이다. 이 두 부류의 인간 모두 자신 안의 진리를 보고 지각한다.

천국에 있는 부자와 가난한 자

누가 천국 안으로 받아들여지는가에 관한 생각은 여러 가지로 난무한다. 어떤 이는 가난한 자는 들어가고, 부자는 아니다고 상상한다; 어떤 이는 부자든 가난한 자든 공히 받아들여진다고 믿는다; 한편 또 어떤 이는 부자는 자기의 재물을 포기해서 가난해질 때까지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고 믿는다. 위 같은 이런 저런 견해들은 성경의 어떤 문단에 기초를 두는 일이 흔하다.
그러나 부자와 가난한 자의 천국 입장 여부를 놓고 말하는 인간들이 대체로 실패하는 대목은 이와 관련된 성경의 의미를 이해함에서 이다. 성경은 어느 문제이든 그것이 자연적 형상들을 가지고 표현되었을 뿐 성경은 영적 문제들에 관한 것을 취급한다.
글자 직역주의자들은 아래와 같은 성경 구절의 요점을 놓치기 십상이다.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귀를 통과하는 것만큼 힘들다”, 또는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 그 이유가 천국의 왕국이 그들의 것이기 때문이다.” 성경을 영적으로 이해하는 이들은 다른 방법으로 의미를 본다. 이들은 알고 있다. 즉 천국은 각자가 부자든 가난하든 어찌되었든 신앙과 사랑에 기초를 두고 생활하는 모든 인간을 위해 존재한다는 것이다. 또한 자기가 부유하다고 해서 무턱대고 천국을 부인하는 자 아무도 없고, 자기가 가난하다는 이유로 천국에 받아지지 않는 자 아무도 없다. 부자나 가난한 자 모두 천국 안에 있다. 그리고 많은 부자들이 가난한 자보다 거기서 더 큰 영광과 행복 안에 있다. 이 말을 이해하려면 성경에서 ‘부자’와 ‘가난한 자’가 누구를 의미하는지를 정밀하게 살펴야 한다.
어떤 인간이 세상의 인간 같이 외향적으로 살런지 모른다. 그는 부자가 되고, 삶의 좋은 것들을 즐긴다. 이런 것의 어떤 것도 그의 천국 입장에 걸림돌은 아닐 것이다. 단지 조건이라면, 그가 자신 안에서 하느님에 관해 잘 생각하고, 그의 이웃을 공정히 대우해야 한다는 점이다.
인간의 행동들, 이것 가지고 인간은 판결받는다고 말씀에서 말해지는데, 실지로는 그로 하여금 행동하게 하는 것인 그의 생각과 애착에 의해 판결받는다. 다시 말해 인간의 삶의 바깥쪽 것이 아닌, 그의 내부의 삶의 조건만이 구원 여부를 결정한다. 부자의 헌금과 가난한 자의 헌금은 자연적 규모에서는 차이가 클지언정, 영적 규모에서는 전혀 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자신 안에서 하느님에 관해 생각하고 이웃에게 친절을 베풀기를 원하는데, 바깥쪽으로는 여러 방식에서 또 다른 인간 같이 살 수 있다. 이럴 경우 그는 많은 인간들이 믿는 천국 가는 진행절차에 별 어려움이 없다. 유일한 어려움은 자아와 세상 사랑에 저항하고, 이 사랑이 자신을 선점하는 것을 멈추게 할 수 있느냐 이다. 그 이유는 이것이 모든 악의 원인이기 때문이다. 인간이 자아와 세상적 바램들로부터 오는 악들에 저항하는 만큼 그는 자신이 아닌 주님에 의해 인도된다. 하여 그 다음 주님은 인간이 저항해왔던 이런 것들을 인간 안에서 제거하실 수 있다.
사랑과 선용의 삶-공의와 공정인 것을 행함이 천국으로 인간을 인도한다; 이것은 경건의 생활 또는 세상을 단념함이 아니다. 그 이유가 인간은 일반적 활동 안에 포함되어져 있을 때 만이 자기 삶이 무엇을 표현하는지 알 수 있고, 천국을 위한 훈련 안에서 성장이 시작된다. 만일 그가 세상으로부터 철수한다면, 이 발달은 발생할 수 없다. 각 개인의 삶은 그와 더불어 사후 남는다. 이것은 그가 부자이건 가난하든 상관 없는 일이다. 이 인간이 저 인간 보다 더 특별하다 말할만한 허가 조항 따위는 없다. 착하게 살았던 인간이 천국 안으로 온다. 그리고 악하게 살았던 인간은 그렇지 않다.
부유함은 세상에서 상대적으로 규모가 큰 공익(use)을 일궈낼 수도 있다. 그리고 부유한 인간은 가난한 인간이 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복지를 제공할 수 있을런지 모른다. 만일 재물이 이런 방편에서 사용되어진다면, 그들 역시 게으름(무익함)으로부터 인간의 마음이 물러나게 하는 일을 가능하게 한다. 이 게으름은 해로운데, 그 이유는 이 게으름 안에서 인간은 그가 지니고 태어난 악으로부터 악질적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재물 자체를 목적으로 사랑되어졌던 부유함과 더불어서는 아주 판이하다. 사후 이런 것들은 혼 없는 몸 같이 더러워지고 부패해진다.
가난한 인간은 가난함을 이유로 해서 천국에 입장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의 삶의 품질에 따라서 가능하다. 경우에 따라 가난 자체가 인간을 천국으로부터 더 멀어지게 할 수 있다. 이는 부자도 마찬가지이다. 많은 가난한 인간들은 불만족해할 수 있고, 부자를 시기할 수 있고, 심지어 재물이야말로 진정한 축복이다고 믿을 수도 있다. 게다가 그들이 재물을 얻지 못할 때, 성을 내고, 특히 섭리에 맞서려 든다. 그러나 위와는 반대의 가난한 자도 흔하다. 그들은 자기 몫에 만족한다. 그는 책임 있고 열심히 일하고, 게으름 보다는 일을 선호한다. 그리고 그는 조심스럽게 잘 살고 있다.
‘부자’와 ‘가난한 자’의 운명을 놓고 혼란해지는 이유는 대체로 이 두 단어가 자주 언급되는 성경 구절을 잘못 이해함 때문에 발생한다. 거기서 ‘부자’는 선과 진리인 것에 대한 영적 지식을 많이 소유한 인간들-즉 말씀이 존재하는 곳인 교회 내에 있는 이들을 일반적으로 상징하고 있다. ‘가난한 자’는 이런 지식이 결핍되어 있으나 그 지식을 갈망하는 이들을 상징 한다.

천국에 있는 결혼들

천국이 인류로부터 형성된 이후, 그리고 천국 안에 두 성별의 천사들이 있은 이래, 그리고 남자는 여자를 위해, 여자는 남자를 위해 있게 된 이래, 이에 뒤따르고 있는 것은 천국 안에 결혼 관계가 있다는 것이다. 이는 세상의 결혼을 참고해도 된다. 천국 안에 존재하는 결혼 방식에서 결혼은 두 개인이 한 마음으로 함께 자라감이다. 이 합일은 설명되어질 필요가 있다. 인간 마음 자체는 두 부분들로 구성되어 있다. 하나는 ‘이해함’이고 다른 하나는 ‘뜻함(의지)’이다. 이 둘이 결합하여 일하고 있을 때 그 둘은 하나의 마음을 만든다. 천국에서 남편은 ‘이해함’의 부분에, 여인은 ‘의지’ 부분이다. 이 두 부분의 합일은 그들의 내적 묶임이고, 바깥쪽으로 그리고 육체적으로도 묶임의 표현을 발견한다. 이 때 그것은 사랑으로 느껴진다. 이 사랑은 진정한 결혼의 사랑이다. 이 사랑은 두 개인들이 한 마음으로 합일함으로부터 온다. 천국에서 이것은 ‘함께 생활함’이라 부르고, 이 둘은 하나로, 한 천사라고 까지 불리워진다. 이 합일은 남자와 여자가 창조된 모양으로부터 온다. 남자는 식별력, 이해력으로부터 반영하도록, 이에 비해 여자는 애정 깊도록, 의지로부터 반영(reflect)하도록 태어나졌다. 이는 그 둘 고유의 기질에서, 그리고 그들의 육체적 모양과 나타남에서 보여진다. 즉 남자는 더 억센 외관, 더 깊은 음성, 더 다부진 신체를, 여자는 모양새가 더 부드럽고, 더 상냥스런 음성, 더 큰 아름다움을 지니는 등등이다. 이와 똑같은 차이가 이해력과 의지력에도 있다. 이런 이유로 성경에서 ‘젊은 남자’ 그리고 ‘동정녀’, 또는 ‘남자’와 ‘여자’에 관련하는 영적 의미가 이해함과 뜻함, 또는 애착함의 특별한 속성으로부터 있는 이유이다.
남자와 여자는 이해력과 애착의 두 능력을 각자 가지고 있다. 그러나 남자 안에서는 이해력이 이끌고, 여자 안에서는 의지가 이끈다. 그리고 인간의 품성은 당사자 안에 있는 최상의 것으로부터 온다. 그럼에도 천국의 결혼들에서는 지배한다는 느낌은 없다. 아내의 의도함은 실지로 그녀의 남편에 속해 있다. 그리고 남자의 이해력은 그의 아내에 속해 있다. 그 이유는 그 각각은 상대의 목적과 생각들을 분배하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어떻게 하나를 만들었는지는 이러하다. 이 합일은 충만된 느낌 안에 있는 실제적인 합일이다. 그 이유는 아내의 의지가 그녀의 남편의 이해력에 들어가고, 남자의 이해력은 그녀의 의지력에 들어간다. 그리고 이것은 특히 그들이 서로의 얼굴을 쳐다 볼 때 발생한다. 천국에는 생각과 느낌의 충만되고 열려 놓인 나눔이 있다. 거기서 남편과 아내 사이에는 모든 것이 서로에게 더 보태진다. 그 이유는 그들은 서로 사랑하기 때문이다.
진정한 결혼 사랑의 근원은 주님으로부터 있는 진리와 선의 합일이다; 이것이 왜 천국에 있는 선과 진리의 합일이 ‘천국의 결혼’이라 불리는 가에 대한 이유이다. 인간 내에 있는 진리가 그 인간 안에 있는 선에 밀접히 하나되어(unite) 있는 한, 그는 주님과 천국에 결합(join)되어 있다. 결혼 사랑은 이에 대한 가장 큰 표현이다. 결혼으로부터 마음들이 함께 옴(화합함)에-그리고 결과로서 일어나는 사랑 안에-자신의 것이 상대방의 것이기를 소원하는 상호 바램이 있다. 이것은 한 개인 안에도 있다. 즉 그가 뜻하는 것을 생각할 때, 그리고 그가 생각한 것을 뜻할 때, 그러면 그는 한 마음 속에 있는다.

천사들이 천국에서 하는 일

천사들에 의해 행해지는 일은 너무나 많고 다양한 바 세부적으로 다루기는 쉽지 않다. 따라서 일반적으로 취급하고자 한다. 천국의 각 공동체들은 행할 각기 특별한 일을 가지는데, 그 이유는 공동체들 사이의 구별이 그들의 선의 품질에 의거하듯, 일 역시 각자에게 제공되는 유용함에 의해 구별되는데, 마치 선이 행동을 통하여 보이게 되듯, 유용함(use)도 같은 논리이다. 천국에서 모든 이 각각은 적극적인 쓸모 있음(use)이다. 그 이유는 주님의 왕국은 쓸모 있음으로부터의 왕국이기 때문이다.
천국에 관하여 지금까지 말해왔던 모든 것-즉 천국의 예배, 통치, 집과 나의 집, 결혼들-으로부터 명백한 것은 천국의 각 공동체 안에는 많은 직업들과 책임들이 있다는 것이다.
천국 안에 있는 모든 것은 신성의 모형에 따라 조직되어져 있다. 이것은 천사들에 의해 수행되는 책임들을 통하여 유지되어진다. 공동의 선함의 문제들은 더 슬기로운 천사의 관심사이다. 한편 더 세부적인 유용함은 덜 슬기로운 천사가 취급한다. 이 유용함은 각자가 신성의 설계도의 어느 부분을 형성한 것에 정확히 일치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각 직업의 가치는 그 직업이 섬기는 유용함 안에서 보여진다. 그렇지만 천사들은 자기들이 일한 것에 대한 가치를 들먹거리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 모두를 유용함 자체의 탓으로 여긴다. 그리고 유용함이 행해진 선함 안에 있을 때, 그리고 모든 선은 주님으로부터 인 바, 그들은 자기들이 한 모든 것을 주님에게로 돌린다.
위의 원리로부터, 우리는 천국에 있는 천사들의 계급의 속성을 알 수 있다. 천국에서는 세부적인 유용함에 얼마나 더 무게를 두어 더 사랑하느냐에 따라 그 유용함을 수행한 인간은 존경되고 사랑되어진다. 즉 작은 씀씀이라 해도 큰 씀씀이와 동등하게 귀히 여겨 실행함에 따라 계급이 결정된다는 말이다.
또한 이 존경은 각 인간이 자기가 행한 유용함을 자신이 아닌 주님의 탓으로 얼마만큼 돌리느냐에 비례해서 있어진다. 천국에서 타인에 대한 존경은 유용함의 기초 위에 있지 인간 위에 있지 않다. 타인을 존중함 또한 위와 같은 원리로부터 이다. 한 인간은 그가 크게 중요하든, 작게 중요하든 여타 모든 이와 비슷하게 있도록 보여진다. 유일한 차이는 그의 지혜 속에 있다. 그러면 지혜는 무엇인가? 유용한 것을 사랑함, 즉 동료나 공동체, 진정한 교회(the Church)를 사랑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아기들을 돌봄이 포함된 일을 하는 공동체들이 있다. 어떤 공동체들은 성장하는 어린이들을 가르치고 훈련시킨다. 어떤 이들은 기독교 배경으로부터 온 단순한 인간, 그들의 선을 훈육하여 그들을 천국 쪽으로 인도한다. 물론 비기독교 배경의 출신이라도 단순한 선을 지닌 이들은 앞의 기독교 출신이나 마찬가지 이다. 어떤 공동체는 방금 도착한 영들을 악령들로부터 보호한다. ‘낮은 땅’의 단계에 붙들린채 있는 인간들을 돕는 직업도 있다. 또한 지옥들에 있는 인간들을 도와서 그곳의 인간들이 도가 지나치게 서로를 헐뜯지 않도록 하는 이도 있다. 그리고 사후 소생한 인간을 돕는 공동체도 있다.
땅 위 인간들을 도우려고 파견되는 천사들도 있다. 이들은 인간들이 자기들의 도움을 기꺼이 수락하면 악한 생각과 느낌들로부터 떠나, 선한 것을 주입해주어 그들을 지키고 인도한다. 천사들이 땅 위 인간들과 함께 있을 때, 천사들은 그들의 애착과 느낌 안에 살고 있다. 그리고 언제나 그 인간이 지닌 생명의 본성에 따라 조금 멀리, 조금 더 가까이 있는다. 이런 모든 직업들은 천사들에게는 당연한 활동들이다. 그럼에도 각 개인의 천사는 각자 고유의 천국에 이바지하고 있다. 이 이바지함(기부함)이 신성의 설계의 한 부분을, 공동의 선의 한 축을 이룩한다.

천국적인 기쁨과 행복함

천국의 기쁨(joy)은 자기 고유의 행복함과 복됨을 다른 인간과 나눔에 따른 즐거움(delight)으로부터 온다. 그리고 천국에 있는 모든 이는 이와 같이 느끼는 바, 천국에 얼마나 많은 기쁨이 있을 것인지 짐작될 것이다.
온 천국에 널리 퍼져 있는 타인과의 나눔의 느낌은 천국에 있는 두 개의 우선하는 최고의 사랑들, 즉 주님을 사랑함과 이웃을 향한 사랑으로부터 유래한다. 주려고 서두름이라는 속성은 위 두 사랑들의 선천적 속성이다. 주님의 사랑은 모든 타인에게 그 자체의 모든 것을 주려는 사랑이다. 그 이유가 이 사랑이야말로 가장 보편적 행복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사랑이 그분을 사랑하는 인간들 안에 존재한다. 그 이유는 주님이 그들 안에 계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아를 사랑함은 위 두 사랑에 찡그리고 그것을 다른 쪽으로 돌려, 마치 자아 단독의 생각인 듯 자아 쪽을 향해 홈을 판다. 세상의 것들을 사랑함은 타인에 속한 것을 탐내도록 다그친다. 이 두 사랑들은 타인에 있는 즐거움과 행복함을 파괴하는 것을 선천적으로 지니고 있다. 따라서 나눔이 실시된다면, 오직 이기적 목적들을 위한 나눔의 행동이 있을 뿐이다.
세상에 사는 동안 무엇보다 우선 자신과 세상을 사랑하는 인간은 그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서는 이 사랑은 즐거움으로 가득하고 짙은 쾌락이 있다고 느낀다. 그럼에도 주님과 자기 이웃을 사랑하는 인간은 그가 세상에 사는 동안 이런 사랑들에 즐거움이 충만되어 있다고 느끼지 않는다. 그리고 이런 세상적인 것들이 자기들의 축복이라는 느낌을 전혀 감지하지 못한다. 그 이유는 이것들이 그 인간 내부 아래 깊숙이 처박혀 있고 매일의 생활 관심사로 덮혀 있기 때문이다.
위 모든 것은 사후 바뀐다. 그 때에 자아 사랑과 세상 사랑은 고뇌와 고통으로 가득 채워진다. 이것이 이 사랑들의 본성이기 때문이다. 사후 그들은 소위 ‘지옥-불’이라 불리는 것으로 바뀐다. 또는 그 때에 그들은 상응에 따라 추잡하고 구역질나는 어떤 것으로 변해진다. 이럼에도 이런 것에 관심있었던 이들에게는 즐거운 것이라고 느껴진다.
이 세상에서 감지할 수 없어 감추여졌던 기쁨이 사후 천국의 아주 충만된 즐거움으로 바뀌어 가능한 모든 방법 안에서 지각되고 느껴진다. 이것은 영적인 즐거움에서 기인하기 때문이고 천국에서의 삶은 영의 삶이기 때문이다. 천국의 기쁨과 행복함은 인간에 있는 육체의 감각들에 비교해봄으로 보여질 수 있다. 각각의 감각은 각 감각의 용도에 걸맞는 위치를 지킬 때 즐거움의 느낌을 가져다 준다. 시력은 아름다운 것, 색깔, 모양새들을 봄으로 기쁨을 가져다 준다; 듣는 것은 달콤하고 하모니 있는 소리를 들음으로 기쁨을 가져온다; 냄새맡음은 향기로부터 즐거움을 가져온다; 맛을 봄은 향미로부터 즐거움을 가져온다. 시력이 즐거움을 가져다 주는 이유는 시력이 이해력을 섬기는 유용성(use)으로부터 온다. 들음이 즐거움을 가져오는 이유는 들음이 그것의 특수한 감수성을 수단으로 이해력과 의지 모두를 섬기는 유용함 때문이다. 다른 감각 기관도 위와 비슷하다. 촉각, 이 감각은 가장 순수하고 가장 절묘한 바, 결혼 사랑을 표현한다. 그리고 이 감각은 인류의 증가와 아울러 천국에 있는 이들의 숫자 증가라는 유용함 때문에 모든 감각 중에서도 더욱 무게가 있는 감각이다.
모든 이런 즐거움들이 감각들에 채워져 있는데, 그 이유는 천국 자체가 그것들 안으로 흘러들기 때문이다. 천국에 있는 각 천사의 삶은 봄철을 향해 계속적으로 진보해간다. 수 천 년 살았다면, 진보는 더 크고 더 가득해지고 있다. 그리고 이것은 영원히 계속된다. 이 진보는 인간 안에서 관심 받아진 사랑, 선량함, 신앙의 성장에 따라 언제나 있게 된다.
늙고 지치고 하여 죽은 여인, 그러나 천국의 방식 안에서 살아왔었다면 그녀는 시간이 지나면서 꽃다운 여성으로, 과거 이 세상에서 결코 본 적이 없는 아름다움을 더욱 더 꽃피운다. 이 아름다움을 산출하는 것은 그녀의 내부의 품질이고, 이 품질이 그들의 바깥쪽 나타남이 되고, 그녀의 얼굴에서도 상세하게 나타난다. 이와 같은 여인들은 사랑 그 자체의 모양들이다. 한마디로 천국에서 늙는다는 것은 젊어진다는 말이다.

천국의 크기는 무제한이다

천국의 크기와 넓이가 무제한이다는 진리는 지금까지 말해왔었던 많은 것들로부터 명백하게 보여질 수 있다. 우선 천국은 인류로부터, 즉 교회의 안으로부터 이든 밖으로부터 이든 세상에서 사는 동안 선인 것을 수단으로 살았던 인간들이 구성원이다는 사실이다. 세상에 지금 살고 있는 인간만 계산해도 어마어마하고 하루에도 엄청난 인간이 죽고 있다. 게다가 이것은 수 천 년 이상되는 인간 삶의 시작 이래 계속되어 왔다. 이 모든 인간이 죽을 때 저 세계로 들어 간다. 아직도 이는 계속 중이다. 아주 이른 시기에 살았던 대부분의 인간은 천국에서 천사가 되었다. 그 이유는 그때 당시의 인간들은 더 내향적으로, 더 영적으로 생각했었기 때문이다.
모든 어린이는 천사가 되는데, 땅 위 그들의 숫자는 총 인구의 20-25%에 달한다는 사실로부터도 천국의 크기를 가늠해 볼 수 있다. 크기를 두고 추측을 더 보탠다면, 태양계에서 눈에 보일 수 있는 모든 행성이 땅이다는 것, 이를 넘어 우주에는 셀 수 없는 더 많은 땅들이 있고, 거주민으로 채워져 있다는 사실 등등이다. 전체 우주에서 주님 만이 천국과 땅의 하느님으로서 인식되고 있다.
전체로서의 천국은 인간 모양을 닮았고, 인간에 있는 모든 것에 상응하는 바, 가늠되는 것은 이 상응은 다 채워지는 것이 가능할 수 없다는 점이다. 그 이유는 상응은 개개의 기관들과 조직 뿐아니라 모든 아주 작은 부분, 분비선, 단섬유에 이르기까지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인간에 있는 더 내향의 수준들과도 상응이 있다- 즉 그의 개성을 구성하는 것들인데, 이것 역시 숫자를 초월한다.
이 상응이 채워지는 것이 가능할 수 없는 이유는 몸의 특수한 부분에 상응하는 공동체의 수가 더 커질 수록 천국은 더 완전해지기 때문이다. 고로 무한이다.
나에게 천국의 거주하는 부분과 비거주 부분이 보여졌는데, 비 거주 부분은 너무나 커서 결코 채워질 수 없을 것 같았다. 설사 우리의 거주민 같이 행성들에 있는 모든 거주민을 가지고 채워도 채워질 수 없을 것이다.
혹자는 이렇게 믿는다. 천국은 작은 크기이고 어떤 유형의 범주에 있는 인간들, 즉 ‘뽑힌 자’, 또는 ‘가난한 자’, 또는 주님께서 중재한 자로 한정되었다는 것이다. 이런 방편을 이유로 해서 천국은 닫히지 않는다. 게다가 다 채워져 만원사례가 되는 일도 결코 없다. 주님께서는 그분을 받아들이고 사랑과 신앙의 규율인 신성한 계획 속의 법칙에 의해 생활하는 모든 개개인을 인도하신다. 모든 개인은 천국을 위해 태어나고, 그가 세상에서 자신 안으로 천국을 받는다면 천국에 입장되고 그렇지 않으면 닫혀진다. 간단하다.

제 4 부

지옥의 삶

주님께서 지옥들을 통제하신다

앞의 천국을 취급하는 대목에서 이미 살핀 바는, 주님은 천국의 하느님이시다는 것과 천국의 전체 조직은 그분으로부터이다는 것이다. 천국과 지옥의 관계는 서로를 향하여 일하는 두 반대되는 세력의 관계, 이로부터 완전한 균형(balance)이 모든 존재하는 것에서 보존되는 결과를 가져온다는 것을 받아들인다면, 이에 수반되는 것은, 이것을 조절하시는 그분은 저것 역시 조절하셔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 이유가 주님께서 지옥으로부터의 폭발에 한계를 정하고 지옥의 미친 바램을 점검해 주시지 않으면, 이 평형 상태(equilibrium)는 파괴될 것이고 이 평형과 더불은 모든 것도 파괴될 것이다.
잘 알려진 사실은, 두 반대되는 힘이 똑같은 크기로 서로를 향하여 일할 때 각 쪽이 동등한 세력으로 있을 경우 둘 중 이쪽이 저쪽보다 더 강한 힘을 가지지 않는 바, 마치 정지한 듯 보여진다는 것이다. 이 때 균형은 마치 어느 쪽에서도 어떤 이의제기도 할 수 없는 듯 아주 쉽게 제 3 의 당사자에 의해 결정되어질 수 있다. 이 때 제 3 의 당사자의 행동은 완전한 조절을 가능케 한다.
천국과 지옥 사이의 평형 상태는 여러분이 싸움 중에 있는 두 용사 사이에서 발견되리라 예상하는 그런 종류는 아니다. 오히려 거짓인 것이 진리인 것에, 악인 것이 선인 것에 맞서 있는 영적인 균형이다. 이 균형은 인간이 자유로운 상태로 생각하고 의도하는 것을 가능하게 한다. 그 이유는 인간이 생각하고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악과 거짓, 선과 진리, 그 어느 것과 더불어 실시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고로 누군가가 이 균형에 있을 때, 그는 이쪽이든 저쪽이든 선택하는데, 이는 자유하다.
각 인간은 주님에 의하여 이 균형 안에서 계속 유지되고 있다. 그 이유는 그분은 천국과 지옥 모두를 통치하시는 바, 그들의 영향력도 조절하시기 때문이다. 악의 영향력은 선인 것을 파괴하려고 하는 끈질긴 노력을 결코 끝내지 않는다. 성사되지 않을 경우 분함과 폭행이 뒤따른다. 선의 영향력은 지옥이 사납게 날뛰는 것에 재갈을 물려 자제시킨다. 이리하여 균형이 창조되어진다.
영계에서의 힘(power)은 선하고 참된 것과 더불어서만 존재한다. 그 이유는 영계의 힘은 신성으로부터 오고 모든 힘은 신성에 속하기 때문이다. 악과 거짓은 진짜 힘을 가지지 않는데, 그 이유는 그것들 안에는 선하고 참된 것은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고로 모든 힘은 천국 안에 있고 지옥에는 없다.
영들의 세계에 있는 인간들도 위와 똑같은 균형, 또는 평형 상태에 있다. 그 이유가 영들의 세계는 천국과 지옥의 중간쯤에 있기 때문이다. 그 결과 세상에 있는 모든 인간들도 똑같은 균형 안에서 계속 유지되고 있다. 그 이유가 그들은 주님에 의해 영들의 세계에 있는 영들을 통하여 통치되기 때문이다.
이 균형은 만일 주님이 천국과 지옥 위에서 조절하시지 않고 양쪽을 규율하시지도 않는다면 전혀 존재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분이 이를 실시 않았다면, 악은 단순히 선한 인간을 그릇 인도하고, 자유의 균형은 파괴되었으리라.
지옥도 천국이 존재하는 방식에서 여러 다른 공동체들로 구성되고 있다. 그리고 지옥과 천국은 정반대이기 때문에 천국에 있는 공동체와 꼭 반대되는 공동체가 지옥에 있다. 반대됨이 없이 존재하는 것은 하나도 없다. 그래서 어떤 것의 본성을 알려면 그 반대에 있는 것의 본성을 보면 알 수 있다. 고로, 평형 상태를 위하여, 주님은 천국의 각 공동체는 그것과 짝을 이루는 지옥의 공동체를 가지도록 설비하신다.
더 보태고자 하는 것은, 지옥에 있는 각 공동체는 소규모의 지옥이다는 것, 마치 천국의 공동체가 소규모의 천국이듯 한다는 것은 주목해둘 만한 가치가 있다. 그리고 세 천국들이 있듯 세 지옥들이 있다. 가장 낮은 지옥은 가장 안쪽 또는 가장 높은 천국에, 중간 지옥은 중간 또는 둘째 천국에, 가장 높은 지옥- 또는 가장 온순한 지옥-은 가장 바깥쪽 천국 또는 첫 번째 천국에 반대된다.

주님이 지옥들을 조절하시는 방법

지옥들은 천국들과 거기의 공동체들을 통하여 진행되는 주님 자신의 영향력에 의해 조절되어진다. 이것은 악을 근원적 차원에서 제어한다. 특별히, 지옥을 조절함은 지옥을 점검하고 거기서 폭발하는 것을 조절하는 능력이 주어진 천사들을 통하여 실시된다. 항시 천사들이 지옥으로 보내져 그들이 거기에 주재함을 수단으로 잠잠케 한다.
일반적으로 말하면, 지옥의 인간들은 그들 고유의 두려움들에 의해 간단히 조절되어진다.
어떤 이들은 비록 그들의 두려움이 조만간 덜해질지라도 어쨌든 세상에 있는 동안 가졌던 두려움들에 의해 조절되어진다. 그리하여 처벌에 대한 두려움은 그들 중 많은 자로 악행을 단념하게 한다. 대체로 더 악한 인간이 덜 악한 인간 위에 군림하는 힘이 주어진다. 그들은 이리저리 돌려대고 획책하고 처벌과 공포감을 조성하여 아랫 것들을 노예화하고 복종케 한다. 그럼에도 소위 그곳의 통치자들도 자기들에게 그어진 범주를 넘어 가는 것에는 두려움이 앞선다. 어쨌든 형벌에 대한 두려움은 지옥에 있는 인간의 광폭함을 조절하는 특효약이다. 그 외 방법은 없다.
세상에 있는 인간들은 이렇게 믿었다; 지옥을 통치한 악마는 한 명이다는 것, 이 악마는 과거 빛의 천사였는데, 반역질 이후 그의 패거리와 함께 지옥으로 내쳐졌다는 것이다. 게다가 인간들이 이를 믿는 이유는 성경에서 악마와 사탄, 그리고 루시퍼(Lucifer)가 언급되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를 성경글자 그대로 취했다. 그러나 간단히 말해 ‘악마’와 ‘사탄’은 여러 등급의 악에서 있는 지옥을 뜻하는 것이고, ‘루시퍼’는 천국에서 나와 지옥에 가서 영향력을 행사하는 인간을 뜻한다. 지옥에 있는 모든 이가 복종해야 하는 한 명의 악마는 없다. 지옥에 있는 모든 이도 인류로부터 이다. 그리고 그들 각각은 그가 세상에 있는 동안 신성에 완전 반대됨으로부터 있었던 악마이었다.

주님이 인간을 지옥으로 던지는 것이 아니라 인간 스스로 던진다

어떤 이는 이런 생각을 하고 있다; 인간이 악할 경우, 하느님은 화내시고, 그 인간으로부터 얼굴을 돌리시고, 거절하시고, 그를 지옥으로 내던지신다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믿는 이들도 있다; 하느님은 인간을 처벌하시고 그에게 해굿이까지 하신다는 것이다. 그들이 이렇게 생각한 것은 그들로부터가 아니라 성경의 글자 서술로부터이기에 이에 대해 그들은 고집스럽다. 그러나 그들은 그 성경 글자 서술의 영적 의미는 아주 다르다는 것을. 교회의 진정한 가르침은 하느님은 어느 인간으로부터서도 그분의 얼굴을 돌리시지 않는다는 것을, 한마디로 그를 내치시지 않으신다는 것을, 어느 누구라해서 지옥으로 던지거나 화를 내는 일은 결코 없으시다는 것을 실감 못하고 있다.
계발된 어떤 인간이라면 그가 성경을 읽을 때, 하느님은 선량함 자체, 사랑 자체, 자비 자체이시다는 것, 그분은 누구에게나 악을 행하실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랑은 그 자체로부터 인간을 내던질 수 없다. 그 이유는 내칠 경우 이는 사랑의 참 본성에 반대되고, 고로 신성한 본성 자체에 반대되기 때문이다. 어떤 인간이 계발된 마음을 가지고 생각한다면, 그는 하느님은 인간들을 선량함과 사랑과 자비로 다루시고, 그들을 위하여 선인 것을 원하시고, 그들을 사랑하시고, 그들 위에 자비를 두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그들은 선과 악은 반대적이므로 선인 것이 나오는 것은 오로지 천국밖에 없고, 또는 주님으로부터 흘러들어 계속 그 인간으로 악으로부터 멀어지게, 그리고 선인 것 쪽으로 인도하심을 알게 된다. 그리고 천국과 지옥은 균형을 이루는 바, 주님이 뒤돌아 떠나신다면 인간에게 남는 것은 오로지 악인 것 뿐인 바, 그는 더 이상 인간일 수가 없다.
위로부터 우리가 알 수 있는 바, 주님은 선인 것 가지고 모든 인간 안으로 흘러드신다는 것, 악한 인간 안으로도 선한 인간에게와 동등하게 흘러드신다는 점이다. 그러나 이런 차이는 발생된다; 그분은 계속적으로 악한 인간으로 악에서 멀어지게, 선한 인간은 선인 것을 향하게 인도하신다. 이런 차이는 주님 때문이 아니라 인간 때문이다. 그 다음 명백해지는 것은, 인간은 지옥 때문에 악인 것을, 주님 때문에 선인 것을 행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인간은 자기가 하는 것이 자신으로부터 라고 여길 경우, 그가 악을 행하면 그 악은 그에게 마치 그의 것인냥 착 달라붙어 있다. 이것이 왜 주님이 아닌 당사자가 자기의 악을 책임질 수밖에 없는가에 대한 이유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지옥으로 인도하는 자는 주님이 아닌 바로 자기 자신이다. 주님은 어느 인간이든 지옥으로부터 멀어지게 하고 싶으신 바, 만일 그가 악을 행하기를 원치 않는다든가, 악 안에 있기를 바라지 않는 만큼, 주님은 인간들을 지옥으로부터 자유하게 하신다.
인간의 의도함과 사랑함은 사후 그와 더불어 머문다. 따라서 세상에서 악을 사랑한 자는 다른 삶에서 똑같은 악을 사랑하고, 자신이 악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고로 악한 인간은 그의 영이 관심을 둔 만큼 지옥에 매여 있다. 그는 이미 거기에 있다. 그리고 사후 그가 원하는 것은 그의 악이 있는 곳에 있는 것 외에 원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결과적으로 사후 주님이 아닌, 인간 자신이 자기를 지옥에 던진다.
사후 발생하는 것을 간략히 이렇게 기술해볼 수 있다. 인간이 영들의 세계로 들어갈 때, 그는 자기를 갖가지 방법으로 돕는 천사들에 의해 환영된다. 그들은 주님에 관하여, 천국에서의 삶에 관하여 말해준다. 그러나 만일 인간이 이런 사항을 알았고, 거기서 있는 것들을 부인했고, 비웃었다면, 그는 곧바로 어디론가 떠나기를 갈망한다. 천사들이 그를 주시했을 때, 그는 천사들을 떠난다. 결국 그는 자기와 꼭 같은 인간과 결합한다. 그리고 주님으로부터 돌아서 그가 세상에 있는 동안 연결 고리를 맺었던 지옥에 얼굴을 내민다. 천국의 어떤 협력도 그에게 가능함에도 이와 같은 영은 자신의 악을 따르고, 종국에는-자유로이-자신을 자신의 지옥으로 내던진다.

지옥에 있는 이들은 자기의 자아 사랑과 세상 사랑의 결과로 악과 거짓 안에 있다

지옥에 있는 모든 이는 악과 거짓인 것들 만에 붙잡혀져 있다. 거기에서 악과 참된 것 안에 동시에 있는 자는 아무도 없다. 악한 인간들도 그들이 세상에 있는 동안 영적인 것을 듣고 말하고 배우고 읽기도 하여 매우 친숙해져 있을 수 있다. 그들 중 어떤 이는 자기들의 유창한 말과 선행을 수단으로 자기는 마음으로부터의 기독인이다고 믿도록 타인을 속이고 강요하기까지 한다.
그러나 이와 같은 모든 인간들은 심정에서 악하다. 그래서 그들의 바깥쪽 삶이 벗겨질 때, 그들은 자기들의 진짜 색깔을 드러내고야 만다. 그들에게서 외관적으로 있었던 선과 진리인 것은 그들의 기억에만 머문다. 마치 수집된 정보 수준이다. 과거 그들은 이 정보들을 의지에서 꺼낼 수 있었고, 자기들 목적 성취를 위해 쓸 수 있었다. 이런 인간들이 그들의 진정한 본성에 놓이게 될 때, 그들은 더 이상 진리인 것으로부터는 어떤 것도 말할 수 없고, 오직 거짓인 것만 가능하다. 그 이유는 그들이 악으로부터 말하기 때문이다. 악을 기초로 해서 진리를 이야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오직 거짓 생각만 튀어나올 뿐이다.
사후 인간이 위 같을진대, 그의 몸과 얼굴은 그 인간 안에 들어 있는 것에 상응한다. 그래서 인간들은 상대를 쳐다봄으로 그가 무엇 같은지를 정확히 말할 수 있다; 이는 그의 얼굴만을 쳐다봄이 아니라 그의 몸과 그의 말씨, 그가 처신하는 방법 등을 쳐다봄으로부터 이다. 지옥에 있는 영들이 천국의 어떤 빛 안에서 검사되어질 때, 그들은 자기들의 악한 품질과 꼭 같게 보인다. 각 인간은 자기 악의 복제이다. 그들은 경멸, 협박, 미워함, 복수함, 격렬함과 잔인함이 눈에 보일 수 있는 모양으로 바뀐다. 그럼에도 누군가가 자기들을 칭찬하거나 어떤 이유로 자기들을 우쭐거리게 해주면, 그들의 얼굴은 더 부드러워지고 그들이 느끼는 쾌락으로부터 오는 행복한 표정 같은 어떤 것도 나타난다.
이런 악령의 나타남은 보기에도 섬뜩하다. 어떤 이는 얼굴이 부풀어 있다. 어떤 이는 터진 종기가 가득하다. 많은 인간들이 실제의 얼굴을 가지고 있지 않고 털만 무성하거나 뼈만 앙상하다. 어떤 이는 이빨만 눈에 띈다. 그들의 몸은 기괴하다. 천사의 빛으로는 위와 같이 보이지만 그들 끼리에서는 정상적인 참 인간 같이 보인다. 이는 주님의 배려하심에서 비롯되는 바, 그들 자신의 상태는 그들을 위해 천사에게 보여지는 방식으로부터 있지 않는다.
이런 영들의 모든 것은 자아 사랑이나 세상 사랑의 구체화이다.
위 두 사랑은 지옥을 최고 높은 자리에서 통치하고 또한 지옥을 만든다. 이 두 사랑은 두 천국 사랑, 즉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에 완전 반대된다. 인간들은 이 두 사랑-자아 사랑과 세상 사랑-이 왜 그렇게도 극악무도한지에 대한 이유를 알 수 없다. 그들은 교만함, 이것은 가시화될 때, 훨씬 더 나쁜 어떤 것이다고 말한다. 그리고 더 첨가해서 하는 말, 모든 이는 찬양받기 위하여, 자아 영광을 위하여 뭔가를 행하려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들은 자아 사랑이 지옥을 조절하는 사랑이다는 것, 이것이 인간 안에서 지옥을 만든다는 것을 모르고 있다.
고로 자아 사랑은 좀 더 상세히 설명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 이유는 이 사랑이 여느 다른 악한 사랑들의 원천이기 때문이다. 자아 사랑은 자신이 잘되기를 원하는 것, 타인이 자신의 복지에 기여하지 않을 경우 그 인간이 잘되기를 원치 않는다. 자아 사랑도 선행을 베푸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자신의 영광과 영예라는 목적이 존재할 경우 뿐이다. 그가 타인을 위해 하고 있는 것 안에 자신의 영예 같은 것이 보이지 않으면, 자신에게 ‘이로부터 내가 얻는 것이 무엇인가?’ 라고 묻고, 선행을 멈춘다. 그의 행복함은 순수하게 자아 사랑의 행복함이다. 사랑으로부터의 즐거움이 인간의 생명을 만드는 바, 그의 생명은 자아의 생명이다. 이와같은 인간도 그에게 소속된 인간, 즉 아내나 자식들, 자신의 것이라 부르는 이들을 사랑할 수 있다. 이런 사랑의 범주에는 자기를 칭찬하고 자기에게 순종하는 모든 인간들만 포함된다.
위와 대조적으로, 천국의 사랑은 유용함 자체를 위하여 유용한 것을 사랑함이다. 이 사랑은 실지로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함이다. 그러나 만일 인간이 자신의 이득을 위하여서만 유용한 것을 사랑한다면, 그는 이런 것을 자기를 위해 일하는 노예 수준에서 사랑한다. 그는 모든 인간, 모든 것이 자기를 위해 일하기를 원한다. 그에게 다른 길은 대체로 없다. 자신의 자아 이익으로 둘둘말아진 누군가는 자기가 행하는 어떤 선마저도 자신의 이득에 초점을 맞추게 한다. 이것이 발생한 이유는 그가 행함 안에서 자신을 챙기려들기 때문, 그리고 정작 진짜 자신은 원하지 않은채 선행을 실시했기 때문이다.
자아 사랑은 인간을 위쪽이 아래쪽이 되게 거꾸로 세운다. 그래서 그들은 영계에서 그들의 발은 천국 쪽으로 하고 지옥을 향해 추락하는 듯 나타난다. 이 때문에 자유로이 지옥을 들어간 인간들이 머리를 먼저 떨어뜨리면서 입장하는 듯 보여진다.
세상 사랑은 자아 사랑 만큼 천국 사랑에 반대되어 있지는 않다. 그 이유는 세상 사랑은 자아 사랑보다는 덜 유해하기 때문이다. 세상 사랑은 자기를 위해 타인의 부를 차지하려는 바램이다. 그리고 여하한 수단을 강구해서라도 이것을 가능하게 하려든다. 이것은 자신의 심정을 재물에 두고 세상이 어떤 영적 사랑으로부터도 멀어지게끔 유도해도 내버려둔다. 따라서 이것은 많은 모양새를 취한다. 개인의 발전을 위해 재물을 사랑함, 한층 더 재물을 손에 넣기 위해 지위를 사랑함이 있다; 세상적 쾌락을 가지려는 수단으로 재물을 사랑함이 있다; 재물 자체가 사랑스러워 재물을 사랑함, 인간들이 가지는 탐욕 같은 것이 있다. 이를 열거하자면 끝이 없을지 모른다.
재물은 실로 대단한 유용함을 지닐런지 모른다. 재물의 뒤에서 마음이 확실히 정한 목적(purpose)이 재물의 유용함(use)이다. 시야에 잡히는 목적(end)은 재물을 사랑함의 품질을 결정한다. 위 두 목적은 정확히 똑같다. 이외 모든 것은 목적 달성을 위한 수단일 뿐이다

지옥 불과 이를 갊

대부분의 인간들은 성경에서 언급되는 지옥 불과 이를 갊은 글자 그대로 지옥에 있는 것들이라는 것만, 그 외 무엇을 의미하는 지는 모르고 있다. 어떤 이는 불이 실지로 있다고, 또는 아마 양심의 고통 비슷한 종류의 고통이 아닐까 생각한다. 어떤 이는 지옥 불은 사악한 인간들을 겁주기 위해 사용한 어구이다고 생각한다. 어떤 이는 이를 갊은 실지로 발생한다고, 또는 이를 가는 소리를 들을 때 섬뜩한 바, 두려움 같은 종류를 표시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어쨌든 위 두 가지 모두는 영적으로 이해해야 한다. 그 이유가 영적인 것을 인간에게 말하려면 인간들이 알고 있는 자연적 형상들을 통하여 표현되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지옥 불과 이를 갊은 사후 악한 인간의 영의 삶의 부분 임이 확실하다. 또는 이것을 또 다른 방식으로 놓기 위해, 그들은 영계에서 이런 것들을 수행할 것이다. 고로 그것들은 적절히 이해되어져야 할 필요가 있다. 먼저 지옥 불에 관하여이다. 열에는 두 근원이 있다; 하나는 주님 자신이신 천국의 태양으로부터 이다. 또 하나는 이 세상의 태양으로부터이다. 영적 태양으로서 주님으로부터 오는 열은 사랑인 영적 열이다. 우리가 세상의 태양으로부터 느끼는 열은 순수하게 자연적이다. 그것은 자연계의 성장함을 가져다준다. 이 성장은 천국 열, 또는 사랑이 그들의 전체 존재를 활성화하는 인간의 영 안으로의 영적 흐름을 반영하고 있다. 자연적 현상은 그것이 영적 원인의 결과, 또는 영적 원인과 상응한 결과이지 않으면 발생하거나 존재할 수 없다. 자연계에 있는 것들 조차도 영적 세계의 영향력으로부터 싹틔우고 성장하는 자기들의 능력을 가진다.
인간들을 위해서, 영적 열은 그것이 본질적으로 사랑이기 때문에 그들의 생명의 열이다. 이 열이 성경에서 ‘불’에 의해 의미된다. 천국적 불은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고, 지옥적인 불은 자아 사랑과 세상을 사랑함이다. 지옥적인 불도 실제로 천국의 불과 똑같은 근원, 즉 천국의 태양, 또는 주님으로부터 이다. 단지 천국의 불은 받는 인간에 의해 찌그러지고 지옥적이 되어질 뿐이다. 그 이유가 영계로부터 안으로 흘러드는 모든 것은 그것을 어떻게 받느냐, 또는 그것이 유입되는 형체가 무엇이냐에 의존되기 때문이다. 이것은 세상의 태양으로부터 있는 열과 빛과도 똑같다. 이 열이 나무나 작물에 의해 받아질 때, 이 열은 식물을 자라게 하고 향기를 내품게 한다. 그러나 이 열이 시체나 더러운 물질에 의해 받아질 때 부패를 일으키고 악취를 진동케 한다. 사랑이 선한 인간들, 영들, 천사들의 생명 안으로 흘러들 때 이 사랑은 그들의 선으로 열매를 맺게 한다. 그러나 악한 인간들과 더불어서는 그 반대 효과가 발생한다. 그것은 다툼과 부패이다.
지옥 불이 자아와 세상을 사랑함인바, 이것은 이 사랑들에 속하는 염원이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또한 이것은 그것들로부터의 쾌락도 보여준다. 이것이 영계에서, 지옥이 열릴 때, 불과 연기가 그것들로부터 나오는 것이 실제로 보여지는가에 대한 이유이다. 그래서 그것들이 닫힐 때, 불은 연기를 냄이 있기 위해 보여진다. 이것은 상응으로부터 이다.
그럼에도 지옥에 있는 인간들은 위 같은 불 안에 실제로 있지는 않다; 이 불은 외관이다. 그들은 불타는 어떤 것도 의식하지 못하고 있다. 단지 자기들이 세상에서 있었던 동안 느꼈던 같은 종류의 열만을 느낄 뿐이다.
이 지옥 불은 지옥에 있는 고통의 어떤 종류를 뜻한다. 이 고통은 다른 인간에게 피해를 주려는 염원으로부터 오는 고통, 이와 동행하는 분노이다. 한 가지 궁금해지는 것은, 이런 고통이 거기 있다는데 왜 악령들은 기꺼이 자신들을 거기에 내던지는가 이다. 모든 지옥 각각은 그것 자신의 영역(sphere)-그것 고유의 염원-을 토해낸다. 이것은 거기 있는 이들로부터 오고 있다. 이 염원 사항이 똑같은 염원 내용을 지닌 누군가에 의해 감지될 때, 그는 즐거움으로 가득해지고 그것을 향하여 돌아서며 그것을 얻기를 염원한다. 이러하다 해도 사실 그는 거기 있는 고통의 종류를 실지로는 실감 못하고 있다. 아마 미리 실감했다 하더라도 그는 계속 그것을 염원할 것이다. 그가 자신의 지옥에 있을 때, 그는 따뜻하게 환영받아졌고, 자기는 친구들 사이에 있다고 믿는다. 어쨌든 이것은 몇 시간 정도만 지속된다. 이제 친구라는 자들은 그가 얼마나 영리한지, 얼마나 센지 아주 가까이서 관찰하고 파악되면 그들은 그를 여러 방법으로 공격하는데, 점차 가혹함과 폭력의 강도를 높여 간다. 그들은 그를 더욱 멀리 지옥 안으로 유도함으로 이를 실시한다. 그 이유는 더 깊은 지옥으로 갈수록 더 사악한 영들이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그를 공격한 후, 그들은 그가 노예로 전락할 때까지 그에게 형벌을 가한다. 그럼에도 반역질은 언제나 거기서 더 튀어나온다. 그 이유는 모든 이는 자기가 가장 중요한 인간이 되어 있기를 원하고, 모든 다른 것들에는 미움으로 맞서 불사르고 하여 언제든지 새로운 반란이 끊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이런 상황은 저런 상황에 길을 내준다, 노예된 인간들은 타인을 정복하기 위하여 새로운 지도자에게 도움을 주는 것에서 자유롭다. 그런데 순종을 거절한 이들은 다시 고통당한다. 그리고 이것은 계속된다. 이런 지옥의 고통이 지옥-불이라 불려진다.
한편, 이를 갊은 각자의 거짓 사상을 가지고 서로 다투고 충돌함의 계속이다. 이 인간들이 지닌 것은 타인을 경멸함, 증오, 조롱함, 비웃음, 모독함이다. 이런 악들은 상처, 자름, 발톱을 내밈, 긁음 같은 것으로 돌발한다. 그 이유가 모든 이는 자기의 거짓 사상이 진리라고 불러주기를, 그것이 매우 가치 있는 것이기에 그것을 위해 싸우기 때문이다. 이 다툼은 진리인 것이 천국으로부터 유입될 때면 언제든지 지옥 밖에서는 이를 가는 소리로 들려진다.
이 지옥에 사는 인간들은 자연만을 믿고 주님을 부정하는 이들이다. 그들은 천국으로부터의 어떤 빛도 수용할 수 없다. 대부분의 그들은 자기 눈이 보고 자기 손이 만지지 않은 것은 하나도 믿지 않는다. 이것이 왜 그들이 하는 논쟁들이 이를 가는 소리 같이 들리는가에 대한 이유이다. 또한 영계에서 모든 거짓 사상들은 삐꺽거리는 소리를 낸다. 그리고 이를 갊 그 자체는 자연의 가장 낮은 것들, 그리고 인간의 가장 바깥쪽의 것들에 상응한다.

지옥적 영들의 악의와 교활함

무엇인가를 깊이 생각하고 자신의 마음이 어떻게 작동하는가를 얼마라도 이해하는 인간이라면 영들이 능력 면에서 얼마나 많이 인간을 능가하는지를 볼 수도 있다. 인간은 반 시간 동안 말하거나 글로 써 내려 갈 것들을 자신의 마음 안에서는 잠간 만에 더 많이 판명하고 분류해서 결말까지도 도출해 낼 수 있다. 그가 영으로 생각할 때 그는 위와 같이 더 많은 것을 할 수 있게 되어간다. 그 이유가 생각하는 것이 영이고 생각을 언어나 글로 표현하는 것은 몸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후 천사가 되는 인간은 그가 세상에서 지녔던 것에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총명과 지혜를 누린다. 세상에서의 그의 영은 그의 몸에 매여 있어, 그가 곰곰이 생각했던 어떤 것이라 해도 상대적으로 조잡하고 불분명한 그릇 안에 담겨 있을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영이 몸으로부터 석방되고, 그 고유의 삶 안으로 진입할 때, 완전히 달라진다. 그의 여건은 이전 보다 더 방대하게 능가한다. 이것이 천사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생각들, 인간의 마음에 결코 들어 갈 수 없는 종류의 생각들을 가질 수 있는 이유이다. 이럼에도 천사들은 인간 존재로서 태어났었고, 자신이 자신을 생각하건대 자기는 여느 인간보다 더 현명하지 않다 여긴다.
지옥의 영들의 악의와 교활함은 천사들의 지혜와 총명 만큼 대단하다. 이 둘의 여건은 똑같다. 인간이 죽은 후, 그의 영은 그 자신의 선 또는 악 안에 완전하게 빨려든다. 그것에 일치되게 생각함도 존재한다.
허나 인간이 세상에 있었던 동안은 판이 했다. 그 이유가 세상에서의 경우, 인간의 영의 악한 부분은 어떤 제약 아래 놓여있어 노골적으로는 될 수 없었다. 그의 악한 것은 선한 행위와 애착들의 바깥쪽 나타남에 의해 철저히 덮혀 있었다. 당사자 조차도 어떤 악의와 교활함이 자기 영 안에 상존했는지 조차 거의 모를 정도였다. 게다가 그의 영이 그 본성을 드러내야 하는 때, 즉 사후 그가 되어져야 할 악마라는 것은 더 더욱 알지 못하고 있었다.
이런 악의는 인간들의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다는 것을 그 자체로 보여준다. 수 천의 악들이 그 악 자체로부터 발발한다. 그런데 아마 수천의 악 중의 하나도 설명하기 힘들다. 게다가 그것들은 너무나 악질이어서 만일 주님께서 모든 인간을 보호해주시지 않는다면, 인간들은 지옥으로의 빠짐을 결코 피하지 못했으리라. 그 이유가 지옥으로부터의 영들도 천국으로부터의 천사들 같이 각 인간과 더불어 있기 때문이다. 주님은 인간이 신성을 인식하고 신앙과 사랑하는 행동들에 기초된 삶을 살지 않으면 그를 보호하실 수 없다. 만일 인간이 이런 삶을 꾸리지 않으면 그는 주님으로부터 돌아서서 지옥의 영들을 향하고 자신의 악의와 가장 비슷한 종류의 악의를 취한다. 그럴 때조차도 그는 주님에 의해 그 자신의 악으로부터 멀어지도록 인도받고는 있다, 그리고 만일 주님이 양심의 이 내적 제한에 의해 그를 인도하실 수 없다면, 주님은 법과 처벌의 두려움 같은 바깥쪽 제재 수단에 의해 그를 인도해주신다.
그런데 그가 다른 곳으로 가버릴 경우, 그는 영적으로부터의 어떤 것에 의해 인도되어질 수 없다. 그 이유는 이럴 경우, 그는 정직과 공정인 체하는 것으로 위장하는 사기치는 방법을 창안하기 때문이다. 이런 상태의 모든 것은 그의 영의 악을 쉽게 증가하게 하고 그 악으로 하여금 형태를 갖추게 하여 자기 본성 속의 악과 다를 바 없게 만든다.
가장 나쁜 상황은 자아 사랑에서 가지쳐 나온 악을 지니는 이들이다. 그들의 속임수는 철저한 바, 삶을 통째로도 파괴할 수 있는 독으로 꽉 차있다. 이런 영들은 ‘악귀(genni)’라 불리는데, 그것들은 지옥들의 뒤쪽 부분을 향해 있다. 세상을 사랑함의 결과로 악한 이들은 지옥의 앞쪽 부분을 향하고 있다. 그들은 ’영들‘이라 불린다. 그들은 심각한 악질은 아니고 상대적으로 온순하다.
악귀들은 인간의 생각 측면이 아닌 애착 측면에서 술책을 벌인다. 악귀들은 애착들을 감시하고 냄새 맡고 있다. 그것들이 선한 애착들임을 간파했을 때, 그들은 선한 애착을 인도하되 비트는 수단으로 악한 것이 되게 돌려 놓는다. 악귀들의 이런 짓은 너무나 은밀해서 인간은 전혀 눈치채지 못한다. 악귀들은 이에 관한 어떤 것도 인간의 생각 안으로 오지 않도록 대단한 주의를 기울임으로 그것의 술책을 진행시키고 있다. 생각 측면에 올 경우 노출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악귀들이란 인간의 쾌락과 바램을 악용함으로 그 인간을 흔들어 꾀어서 인간의 마음을 올가미에 묶어둔다.
그러나 악귀들은 변화의 희망이 엿보이는 어떤 인간들을 위해 주님에 의해 그 인간 뒤쪽에 붙잡혀 있다. 악귀는 인간의 양심을 파괴하는 능력을 가졌을 뿐아니라 양심 안의 유전적인 것들, 사실 그대로라면 그냥 그 상태로 멀리 떨어져 있을 유전적인 것들마저 휘젖는 재주까지 겸비하고 있다. 고로 주님께서는 인간이 이런 악귀로부터의 피해를 막아주시기 위해 이런 지옥들은 밀봉해두셨다. 따라서 악귀 비슷한 인간이 다른쪽 삶의 세계로 올 때, 이 인간은 그들의 지옥으로 순간적으로 내던져진다.
지옥적 영의 사기침은 아주 복잡 다양해서 그것들을 나열하자면 책 몇 권 분량은 되지 않을까 싶다. 그것들은 세상에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한 종류는 상응학들을 남용하는 것이다; 또 다른 것은 신성한 질서의 보다 수준 낮은 것들을 오용함이다; 셋째는 전환, 수색을 이용해 생각의 흐름과 소통함의 다른 종류를 내세우는 것, 즉 다른 영들을 그들 자신으로부터 떼어 그들 스스로 파견자를 자처하는 방식을 이용한다; 넷째는 몽상을 이용하는 것; 다섯 째는 영을 영사하여(spirit-projection), 하나 아닌 여럿인 듯 보이게 하는 것; 여섯째는 흉내냄, 설득함 그리고 속임수 등이다.
지옥의 영들은 자기들의 갖가지 기술을 이용해서 서로에게 고통을 안긴다. 만일 그것들이 그가 죽는 시점에서 그의 고유의 악의 부분이었다면, 악령은 사후 그것들 안으로 온다.
지옥의 고통들을 주님이 묵인하신 이유는 이것만이 악을 점검하고 조절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이다. 주님의 조절 아래 지옥의 패거리들을 보존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은 처벌과 공포이다; 그 외의 방법은 없다. 그 이유가 형벌과 고통에 대한 두려움이 없다면 악은 폭력으로 사납게 날뛰어 모든 것은 파편 조각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마치 이 세상의 나라에 법이 없고 형벌도 없다면… 을 상상해보면 가늠된다.

지옥들의 출현, 장소, 그리고 숫자

영적 세계에서도 자연계에 존재하는 똑같은 종류들을 볼 수가 있다. 이것들은 너무나 흡사해서 외관상으로는 차이가 없다. 거기서도 평야와 산 그것들 사이의 계곡, 호수, 강 등등 세상에서 보이는 것들을 볼 수 있다. 그렇다 해도, 이런 모든 것들은 영적 근원으로부터 이다. 그래서 그것들은 영인이나 천사들에만 보여질 수 있고 인간들은 아니다. 따라서 인간들은 그가 죽어 영인이 되거나, 특별한 허락을 받지 않으면 영계에 있는 것들을 자신의 눈으로 결코 보지 못한다. 역으로 천사나 영인은 자기들과 더불어 이야기 하도록 특별히 허락된 인간과 더불어서가 아니면 자연계에 있는 어떤 것도 볼 수 없다. 영적 세계와 자연적 세계 사이에 이런 유사함이 있기에, 사후 인간은 자기가 방금 자연계를 떠났다는 것, 자기가 세상 안에 있지 않다는 것을 거의 알아채지 못한다. 이러기에 죽음은 이 세계로부터 그것과 비슷한 저 세계로 건너감이라고 대다수의 인간들이 말하고 있다.
천국들은 보다 높은 지역들에 있고, 영들의 세계는 보다 낮은 지역에, 그리고 지옥들은 위 둘 아래 지역에 있다. 천국 자체는 내적 시력이 열리지 않는 이상 영들의 세계에 있는 영인들에게 보이지 않는다; 물론 가끔 그들은 안개나 빛나는 구름을 통해 볼 수는 있다. 이런 이유는 천사들이 다른 인간들 보다 더 높은 지혜를 가지고 있어 영들의 세계 안에 있는 이들의 시력 그 넘어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평야나 계곡에 있는 이들은 서로 볼 수 있다. 이렇긴 해도 그들이 자기들의 진짜 본성으로 분류가 되면, 악령들은 선한 영들을 더 이상 볼 수가 없다. 그러나 선한 영들은 아직은 악한 것들을 볼 수 있다. 그러나 그것들로부터 자신들을 돌아서게 한다. 그리고 이들이 돌아서자 마자 그것들은 보일 수 없게 된다. 지옥들은 보여질 수 없는데, 그 이유는 닫혀있기 때문이다. 단지 거기 있는 이들과 비슷한 인간이 열 때 입구 정도는 보여지기도 한다. 지옥으로의 입구는 오로지 영들의 세계로부터만 열릴 수 있다. 천국으로부터가 아니다.
지옥들은 각 처, 즉 산 아래, 언덕 아래, 바위 아래에 있다; 평야나 계곡 아래에도 있다. 그 지옥들 각각은 어둠침침하다. 거기 있는 지옥의 영들은 타고있는 횃불이 던져주는 듯한 빛 안에 있다. 그들의 눈은 이런 빛에 매우 익숙해 있다. 게다가 이들은 천국의 빛을 놓고는 그것은 의미심장한 암흑이라 간주한다. 만일 그들이 자기들의 동굴을 떠난다면, 그들은 전혀 볼 수 없다.
지옥 쪽으로의 열림 모두는 감추어져 있어, 악령들이 영들의 세계로부터 안으로 가는 때를 제외하고는 시력을 초월해 있다. 그럼에도 주님이 허락하실 때, 지옥 너머에 있는 영 또는 천사는 자기의 시력으로 마치 뚜껑이 열려서 보듯, 지옥의 것들이 무엇과 비슷한지를 꿰뚫어 볼 수 있다. 어떤 지옥들은 동굴 같아 보이고, 다른 지옥은 짐승의 굴과 도둑의 소굴 같아 보이고, 어떤 것은 바닥에 동굴을 가진 광산의 통로 같이 보인다. 어떤 지옥에서는 마치 큰 화재 이후 생겨난 듯한 돌더미를 볼 수 있는데 거기에 지옥의 영들이 살고 숨어 있다. 보다 온순한 지옥에서는 금방이라도 찌그러질듯한 오두막집, 거기에 인간이 혼잡하게 운집한 것이 보여진다. 오두막집 안에 지옥의 영들이 있고, 멈춤이 없는 말다툼, 두둘겨팸, 발톱으로 할큄, 강도질과 불화가 있다. 지옥들의 어떤 것 안에는 지저분한 곳(갈봇집) 밖에 없고, 다른 지옥들의 경우 침침한 숲 안에, 거기서 영들이 맹수의 소리지름 같이 으르렁거리고 있다. 거기에는 다른 영의 추격을 피해 달아날 수 있도록 아래쪽에 터널도 있다. 거기에는 갖가지 형벌을 당하고 있는 영들이 도망하는 사막도 있다.
지옥의 정확한 장소는 주님만이 아신다. 물론 악령이 들어간 지역들로 미루어 보면 대충은 그 위치를 추정해볼 수는 있다. 지옥들도 천국이 있는 지역이나 거기 있는 사랑의 종류에 따라 구역이 나뉘는 것과 원리는 똑같다. 모든 영적 지역은 동쪽에 있는 태양이신 주님에 관련하여 위치가 정해진다. 지옥들은 천국의 반대인 바, 그들의 지역들은 서쪽으로부터 출발하는데 그들이 더 악할 수록 동쪽으로부터 더욱 더 멀어진다. 지옥이 어떻게 배열되는지를 아는 것은 실지로 가능치 않다. 우리가 알 수 있는 전부란 단지 아주 끔직한 악은 북쪽 측면에, 덜 끔직한 악은 남쪽 측면에 자리잡았을 것이다는 정도뿐이다. 또한 동쪽 측면은 보다 더 온순한 지옥들이, 말하자면 잘난체해대나 그렇다고 집요한 미움으로 차 있지 않은 이들이다.
지옥의 숫자는 단지 천국의 공동체 만큼이나 많다라고 말하는 것으로 만족해야하지 않나 싶다. 그 이유가 각 천국의 공동체는 그에 상응하여 반대되는 지옥의 공동체를 가지기 때문이다. 지옥의 숫자는 셈을 넘어 있다. 지옥들 아래 지옥들도 있다.
만일 인간들이 경멸함, 적개심, 미움, 복수함, 사기 같은 것들이 악이다는 식으로 아주 단순하게 생각해버린다면 정작 중요한 지옥에 대한 진가를 놓고서는 아무것도 인정하지 못한다. 어쨋든 모든 악 중의 어느 한 개의 악이라 해도 그 자체는 수많은 형태의 악을 함유하고 이 형태 하나는 다시 여러 다른 종류들로 세분화되어가는 양상을 보이는바, 책 전체를 그런 것들의 목록으로 나열만 해도 책 한권을 채우는 것은 쉬운 일이 될지 모른다.

천국과 지옥 사이의 균형

천국과 지옥 사이에 있는 균형(balance)-또는 평형상태(equilibrium)-의 존재는 ‘지옥’편의 초두에서 이미 언급했다. 그런데도 그것에 관하여 더 말할 필요가 있는 이유는 이것에 대한 이해는 전체로서의 천국과 지옥을 이해하는 열쇠에 해당되기 때문이다.
만일 어떤 것이 결과되어 존재한다면 모든 것은 균형 안에 있어야만 한다. 균형 없이 작용과 반작용은 없다. 그 이유가 평형 상태는 두 세력 사이에 있고, 이쪽이 작용하고, 저쪽은 반작용하기 때문이다. 작용과 반작용의 동등함으로부터 야기되는 쉼의 상태가 평형 상태라 불리운다.
자연계에는 자연계 전체로서, 그리고 그 안의 각각의 것 안에 균형이 있다. 예를 들면, 보다 낮은 대기는 보다 높은 대기가 아래로 누르는 작용에 비례해 반작용하고 저항한다. 자연계에는 열과 차거움, 빛과 그늘, 마름과 습함, 등등에도 균형이 있다. 그것들 사이의 중간 지점이 균형을 이룬다. 모든 것은 안으로 흘러드는 어떤 세력(force)이 있고 다른 것은 그것을 수용하거나 수용을 마다하거나 한다. 자연계에서는 이런 것을 두고 세력과 노력이라 부르지만, 영계에서는 생명과 의지, 또는 의도함이라 부른다. 저 세계에서 생명은 살아 있는 세력이고, 의지는 살아있는 노력이다. 균형은 자유라 불리운다.
고로, 영적 균형, 또는 자유함이 존재 안으로 오고, 이쪽에서 선의 작용이 있으면 저쪽에는 악의 반작용이, 또는 이쪽에서 악의 작용이 있으면 저쪽에서 선의 반작용이 있다. 다시 말해, 선한 인간에서는 선이 작용하고 악이 반작용하여 균형이 발생하고, 악한 인간에서는 악의 작용이 있고 선이 반작용하여 균형이 발생한다. 이러한 이유는 인간의 삶의 모든 부분은 선인 것과 악인 것이 더불어 실시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각 인간의 의지는 그릇과 같다.
천국과 지옥 사이에는 영구한 균형이 있다. 그래서 악인 것을 행하려는 노력이 지옥으로부터 위쪽으로 숨쉰다. 그리고 선한 것을 행하려는 노력이 천국으로부터 아래쪽으로 숨쉰다. 영들의 세계는 완전한 균형 안에 있다. 그 이유는 천국과 지옥 한 중간에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완전한 균형을 유지해야 사후 영계로 입장하는 인간의 상태의 종류에 걸맞게 각 인간을 보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완전한 균형이 없다면 이는 불가능하리라. 이 균형을 수단으로 인간은 세상에 있을 때나 똑같은 자유 아래 있게 되는 바, 모든 이는 그가 무엇 같았는지 조심스럽게 검사되어진다.
악은 지옥으로부터 숨쉬고 선은 천국으로부터 숨쉬는 이유는 각 개별적인 인간은 인간의 애착과 생각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영적 영역(sphere)에 에워싸여 있기 때문이다. 각 개인이 이러하듯 천국과 지옥의 공동체 전부에게도 마찬가지 이다; 그들의 병합된 영역은 앞으로 흘러나오는데 전체 천국으로부터 그리고 전체 지옥으로부터 이다.
선은 천국으로부터 흐른다. 그 이유는 거기 모든 이는 선인 것 안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악은 지옥으로부터 흐른다. 그 이유는 거기 모든 이는 악인 것에 포함되어져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천국으로부터 흐르는 선은 모든 천사들을 그들의 이기심으로부터 지켜주고 그분의 형상 안에 간직되게 해주시는 주님으로부터 온다. 이에 비해, 지옥들에 있는 이들은 그들 자신의 이기심에만 포함되고 있다, 그리고 이것 자체에는 악 밖에 없다. 악만 있기에 그것은 지옥이다.
위 논지로 알 수 있는 바는, 천국에 있는 천사들과 지옥에 있는 영들을 보존되게 하는 균형은 영들의 세계에서 발견되는 균형과 같지 않다는 것이다. 천국에 있는 천사들을 위한 균형은 그들이 선인 것에 포함되기를 원했던 정도 만큼의 문제- 또는 그들이 세상에서 있었는 동안 선을 행하면서 살았던 정도 만큼의 문제- 그리고 얼마나 많이 악인 것으로부터 돌아섰는가의 정도 만큼의 문제이다. 그리고 지옥에 있는 영들을 위한 균형은 그들이 악인 것 안에 포함되기를 원했던 정도 만큼- 또는 그들의 생애 동안 악하게 살았던 정도 만큼-그리고 그들이 자기들의 심정과 영에서 선을 반대했던 정도 만큼의 문제이다.
만일 주님이 천국과 지옥 둘 다를 규율하시지 않거나 통치하시지 아니했다면 균형은 있지 않았을 것이고 만일 균형이 없다면 천국과 지옥은 없었을 것이다. 천국과 지옥 사이의 균형은 거기에 들어가는 인간들의 수효에 의해 영향받는다. 이 수효는 하루에도 수 천에 달할지 모른다. 이 수효가 얼마인지, 그것에 관하여 아는 천사는 없다. 주님만이 이를 헤아리실 수 있다. 그 이유는 신성은 어디에나 현존하시고, 주어진 상황이 어느 방법에 기대어야 하는가를 아시기 때문이다. 고로 주님은 주어진 지옥의 공동체가 너무나 강해지는 것을 방지하려 감독하시고 있다. 어느 지옥 공동체가 강해질 경우 그것을 억제하려 어떤 방도가 취해져 균형을 이루도록 되돌린다. 이런 방도들 중 하나는 주님이 자신을 더 가깝게 현존하게 해주시는 것이다; 또 다른 방도로는 이 공동체가 다른 공동체와 더 밀접해지는 것이다. 또 다른 방도는 초과된 악령들을 사막이나 다른 지옥들로 추방하는 것, 이런 등등이다. 요점은 균형이 있는지 여부를 판단하는 것은 주님이시다는 것, 천국과 지상에서 모든 인간의 구원은 이 균형 안에서 쉼을 얻는다는 것이다. 지옥은 천국을 꾸준히 공격하고 천국을 파괴하려 하는 한편, 주님은 천국에 있는 인간으로하여금 자기들의 이기심으로부터 멀어지게 하고 그분으로부터 오는 선 안에 간수하심으로 보호하신다. 그 반면 천국은 지옥을 공격할 방법이 없다. 그 이유는 주님으로부터 오는 영역은 모든 이를 구원하시려는 중단 없는 노력이기 때문이다. 지옥에 있는 인간들은 구원되어질 수 없는 바, 그들은 악인 것에 붙잡혀 있고 주님에 반대되어 있는 고로 그들은 자기들이 그렇게 있는 만큼 억제되고, 그들이 어떤 한계를 넘어 서로가 맞서 충돌하지 않도록 제한되고 있다.

천국과 지옥 사이의 균형 때문에 인간들은 자유함에 있다

영적 균형은 자유함 자체이다. 그 이유는 그것이 선인 것과 악인 것 사이에 있는 균형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의미되는 자유함은 선이든, 악이든 의도하는 능력, 그리고 이것 보다는 저것을 선택하는 능력이다.
이 자유함은 주님에 의해 각 인간에게 주어진다. 그리고 이 자유함은 거두어지는 일은 결코 없다. 이것은 주님에 속한 어떤 것일 뿐이지 인간에 속한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마치 인간의 것인 듯 그의 생명과 더불어 인간에게 주어져 있다. 그러므로 인간은 개혁되고 구원된다; 이 자유함 없이 개혁이든 구원이든 가능하지 않다. 확실한 바, 자유함이 인간으로 나빠지게 생각하게 만들든지, 좋아지게 생각하게 하든, 정직하게 이든, 또는 비정직하게 이든, 공정하게 이든, 불공정하게 이든, 선의로 이야기 하게 하든 또는 잘 행동하게 하든 어떤 상황에서 이든 자유함은 그 인간의 선택의 범주 안에 놓여 있다.
인간이 이 영적 자유함 없이 개혁되어질 수 없는 이유는 그가 구원되고자 한다면 이와 동시에 반드시 내다버려야 할 온갖 종류의 악들과 더불어 인간은 태어났었기 때문이다. 구원될 이들은 자신 안에 있는 갖가지 악들을 보고 인식하지 않으면 그 악들을 내다버리지 못할 것은 당연하다. 따라서 그는 그것들의 정체를 반드시 규명해야 한다; 그 다음 그는 그것들을 행하기를 원치 않아야 한다. 마지막으로 그것들로부터 돌아서야 한다. 그리고 그것들과 확실히 이별해야 한다. 이 사건은 당사자가 선한 것 안에 있는 만큼 악 안에도 포함되어 있어야 발생된다. 우리는 악으로부터 선을 볼 수 없고 오직 선으로부터 악을 볼 수 있다. 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 선은 그가 어린 시절에서 배워진 것들로부터, 성경을 읽음으로부터, 성경의 해설을 들음으로부터 형성된다. 또한 인간은 세상의 삶으로부터 도덕적으로 선인 것을 배운다.
자유 안에 있어야 할 필요가 있는 이유는 인간이 뭔가를 실시하되 이는 그의 사랑과 행동하는 애착의 결과로서 발생하지 않으면 그 뭔가는 그 인간의 부분이 되지 않기 때문에서 이다. 뭔가에 대한 모든 방법이 그 인간 안으로 온다. 그러나 그것들은 그의 생각함을 넘어 그의 의지로 들어가지 못한다. 인간의 의지 안으로 정당하게 들어가지 않은 것은 그에게 속한 것이 아니다. 그 이유는 생각은 기억으로부터 도출되는 한편, 의지 또는 의도함은 생명 자체로부터 도출되기 때문이다. 인간의 영은 그가 개혁되고 구원되어질 수 있는 자유 안에서의 있음이 유지되도록 천국과 지옥 모두와 연결되고 있다. 천국으로부터의 천사와 지옥으로부터의 영들이 각 인간과 더불어 있다. 이런 방식을 통해 인간은 영적 균형 안에 있다. 그러므로 자유 안에도 있다. 한 가지 이해해두어야 하는 것은, 천국과 지옥과 더불은 인간의 연결은 직접적 수단이 아니고 간접적 수단, 즉 영들의 중간 세계에 있는 영들을 통하여 연결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 영들이 인간과 더불어 있다; 천국 자체나 지옥 자체로부터의 누구와도 그는 함께 있는 것은 아니다. 다시 말해 인간은 영들의 세계에 있는 악한 영들을 통하여 지옥과, 영들의 세계에 있는 선한 영들을 통하여 천국과 연결되어지고 있다.
이상의 내용은 모든 것이 배열되어지는 방법인 바, 영들의 세계는 천국과 지옥 중간에 있고, 실제의 균형이 거기서 발생한다. 인간들에게 붙은 영들은 특정한 공동체로부터 인간에게 파견된 것이다. 이 특별한 영은 그룹(group)의 ‘지배를 받는(subject)’ 영이라 불리운다. 전체 공동체는 다른 공동체, 또는 개인과 위의 방법으로 교통할 수 있다. 이것은 영계에서의 왕래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이다; 아마 이 세상 인간 사이에 놓인 서로 간에 있는 오감, 의사를 서로 타진함과도 동일할 것이다. 영들의 세계로부터의 공동체의 지배를 받는 영들이 각 인간에게 붙어 있다.
마지막으로 사후 삶에 대한 인간들의 개념(notion), 천부적인 개념, 즉 천국으로부터 인간 안으로의 흐름으로부터 오는 개념에 대해 몇 마디 말을 보탤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천국과 연결된 모든 인간과 더불어 있는 사후 삶에 관한 타고난 생각이 있다. 이 생각의 발단과 출처는 천국의 영향력, 좀 더 꼼꼼히 말하면, 영들의 세계로부터 와서 인간에게 붙어있는 영들을 수단으로 주님으로부터 천국을 통하여 있는 영향력이다. 인간들이 만일 생각에 관한 그들의 자유가 잘못된 생각들에 의해 있다면, 예를 들면, 혼은 단지 생각 차원에 불과 할뿐이다 든가, 단지 몸 안에 존재하는 어떤 것 밖에 더 이상은 아니다는 식으로 인간 혼에 관한 잘못된 생각들에 의해 삭제되지 않았다면 천부적 개념을 가진다. 그 이유가 사실 혼은 인간의 생명 외 다른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영이 실제의 인간이다. 그가 세상에서 끌고 다니는 육체라는 몸은 영이 자연계에서 행동할 수 있게 해주는 몸종에 불과할 뿐이다.

후기(postscript)

이 책에서 말해진 모든 내용들은 영적 내용물에서 즐거움을 발견하지 못하는 분들에게는 이상한 듯 여겨질지 모르나, 그와 반대인 분들에게는 영적 내용에 대한 그들의 개념을 더 명료해지게 하는데 도움을 줄 것이다. 특히 진리를 위하여 진리인 것을 사랑하는 분들을 위하여 이 책은 더 각별할 것이다. 사실 사랑되어진 것이 그것 고유의 빛을 마음 안으로 가져다 주기 때문이다. 특히 진리가 사랑 받을 때 더욱 그러하다. 그 이유는 진실로부터의 모든 것은 빛 안에 있기 때문이다.

부록
(Appendix)

선각자의 출판 서적, 비 출판 서적 소개
선각자의 용어에 대한 간결한 풀이
선각자에게만 유일한 기본 생각들
도서구입 안내

선각자의 신학 관련 저서들

1. 직접 출판한 저서들 2. 출판되지 않고 발견된 그의 기록 내지 저술인 것들.

천국의 비밀들 (1749-1756년) 영의 일기(또는 영적 경험)(1745-1765)
천국과 지옥 (1758년) 요한계시록 설명 (1757-1759년)
새 예루살렘과 그곳의 교리 (1758년) 아타나시안 신조 (1759-1763년)
마지막 심판 (1758년) 주님에 관하여 (1759-1763년)
백마 (1758년) 예언서들과 시편의 내적의미(1759-1763년)
우주에 있는 땅들 (1758년) 마지막 심판 (1759-1763년)
주님에 관한 교리 (1763년) 신성의 사랑 (1759-1763년)
거룩한 성경에 관한 교리 (1763년) 신성의 지혜 (1759-1763년)
삶에 관한 교리 (1763년) 선행의 교리 (1766년)
신앙에 관한 교리 (1763년) 5 기억할만한 관련들 (1766년)
마지막 심판에 관한 계속 (1763년) 결혼에 관해서 (1766년)
신성의 사랑과 지혜 (1763년) 정경들 (1769-1772년)
신성의 섭리 (1764년) 새 교회에 관한 교회의 역사 (1769-1772년)
요한계시록 밝힘 (1766년) 부속물(coronis) (1769-1772년)
부부의 사랑 (1768년) 새 교회로 초대함 (1769-1772년)
간략한 해설 (1769년)
유입, 또는 혼과 몸 사이의 상호 작용 (1769년)
진정한 기독 종교 (1771년)

선각자의 용어 풀이
(Glossary)

** 참고: (commercium) 식의 표기된 것은 라틴어임
이 풀이는 간결해서 좋지만, 한편 너무나 간결해서 어떤 단어의 경우는 이해함에 불리할 수 있는 단점도 있다. 어쨌든 아래의 글들은 Swedenborg Resercher’s Manual by William Ross Woofenden으로부터 발췌되었다. 정확한 이해를 위해 영역본이 필요할 경우 역자에게 연락하기 바란다 (인터넷에서 헌 책은 구매가 가능할지 모른다, 검색해보기 바란다).

감각적인 (Sensuous)
관능적인, 감각의, 그리고 감각 지향의. 섹스적인 것만을 함축하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감각들에서 집중함에 의해 특색을 이루는 것, 감각들에 의해 납득되는 것. 마음의 자연적 수준에서도 가장 낮은 평면.

개혁 (Reformation)
거듭남의 과정 중의 일부를 묘사하는데 사용되었다, 즉 당사자의 바깥쪽 생활을 질서 안에 놓는 것이다. 당사자는 진리가 우세한 순종의 상태에서 진리를 수단으로 선 쪽으로 인도된다. 이것은 주님으로부터 새 의지를 받기 위한 준비단계이다.

거듭남 (Regeneration)
넓은 의미에서 재출생의 모든 과정. 좁은 의미에서 개혁에 뒤이어지는 과정. 주님이 각 개인 안에서 새로운 의지를 만들어가시는 과정, 또는 (삶의) 과정의 목적(goal).

결혼의 (부부의, connubial)
결혼에 관련되는 단어이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것은 결혼에 연계
된 외적인 것들 만에 관련하여, 또는 부정적 측면에서 사용되는 편이다. 새나 동물의 짝짓기에 사용되었다.

고대 교회 (ancient church)
성경에서 노아와 그의 자손들에 의해 표현된 고대 시대 성경 속의 사람들의 종교.

과학물들 (Scientifics)
과학적 진리들을 보라. 지식들, 사실들, 자료들.

과학적 진리들 (Scientific truths)
위 표현은 빈약한 번역일지 모른다, 그 이유는 이 용어가 우리가 아는 “과학(science)”을 가리키는 경우가 매우 드물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연을 연구함으로부터, 그리고 성경의 글자 그대로의 의미로부터 획득한 사실들, 자료들, 진리들이다.

공적 (Merit, meritorious)
흔한 사용법에서 이 단어가 함축하는 것은 긍정적(건설적) 측면이 대세이다. 그러나 선각자가 이 단어를 사용할 때의 경우, 거의 언제나 뜻하는 것은, 공적 추구(merit-seeking), 즉 자비롭게 여겨질 수 있다 싶은 어떤 행위 또는 친절한 어떤 행동에 대하여 돈 또는 명성을 보상을 은근히 기대함이다.

광적 신앙 (Religiosity)
외적, 또는 미신적 믿음 체계, 신봉자의 편에서 내적 약속의 깊이를 갖지 않은 종교를 묘사하는데 사용하였다.

교류 (Intercourse)
왕래함 (commercium)에 대한 오래전의 번역, 상호 작용 (interact)을 뜻한
다, 이는 개인들 또는 어떤 것들을 연합시키는 것이다. 개인의 혼과 몸이 어떻게 교통하고 일반적으로 상호 작용하는지를 언급할 때도 사용된다.

교리 (Doctrine)
세 가지를 뜻하려고 사용된다: 1. 배움의 과정, 2. 학식 또는 과학의 분과, 또는 3. 특별한 취지에서 교회의 가르침. 일반적으로 이것은 진실로 종교 생활을 꾸려가기 위하여 절대로 필요한 가르침일 것이다, 그리고 고로 본질적으로 실용적일 것이다.

교회 (church)
이 단어는 흔한 보통의 단어 사용에서도 어떤 영적 생활만도 아니고, 그렇다고 어떤 종파나 조직체만을 지칭할 때도 아닌 것이 뜻해지게 보통이 아닌 의미에서 사용되어진다, 즉 조직체에서이든, 개인적으로 이든, 영적 생활을 사실로 깨달음이다. 고로 개인(person, 개인)은 영적인 교회이다.

균형 (balance)
(평형을 보라.) 천국 세력과 지옥 세력이 균등하게 인간에게 영향을 미치도록 하는 섭리적 상태를 염두해서 사용된다, 하여 당사자가 악의 영향력에 휘둘리는 듯 외관상 나타남에도 불구하고 실상 그는 자유한 상태에서 도덕에 관한 결정들을 만들게 됨을 말할 때 이 단어가 사용되고 있다.

그릇 (Vessel)
인간은 하느님으로부터 생명을 받는 “그릇”이다고 말해진다, 단지 담는 용기라는 말이 아니고 유기적 형체로서 이다.

기억해둘만한 관련 사항들 (Memorable relations)
기억해둘만한 사건(memorabilia, memorable occurrences)라고도 말한다. 선각자가 그의 후기 저서들의 장들에 첨부하는 식으로, 또는 군데군데에 흩뿌
리는 식으로 해서 기록했는데, 다른 세계에서의 그의 경험들에 관한 이야기들이다.

기운 (영역, sphere)
모두 각각의 사람들은 자신의 총체적 사랑들로부터 되튀긴 유출물에 에워싸여 있다고 말해진다. 일반적으로 이것은 땅 위에서는 감지될 수 없다. 누군가의 기운이 어떤지는 천국에 있는 모든 이에 의해서는 확연히 감지된다, 하여 상대방과 연계되어도 되는지, 피해야 하는지를 결정하는 기초이다.

길들여진 선 (Domestic good)
개인이 부모로부터 유전적으로 끌어낸 선을 뜻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이것은 당사자가 (선택의) 자유함 안에서 그것을 자기 것이 되게 하지 않으면 “저축”되지 않는다. 또한 “가정의 자연적 선”, 그리고 “자연적 선”이라고도 불리운다. (천국의 비밀 3518항의 창. 27:9에 대한 해석을 참조하라.)

김나지움 (Gymnasium)
유럽에서 공통적으로 사용함에서는 두 번째의 학교 (중고등학교). 선각자는 이 단어를 그룹들의 멤버들이 생각들을 토의하고 그들의 마음들을 실행해보는 영계의 모임들이나 거기의 학교들을 언급하는데 사용했다.

끊이지 않는 등차들 (continuous degrees)
수준들(levels) 또는 단계들(gradations), 마치 찬 것으로부터 따뜻한 것까지, 또는 어둠으로부터 빛으로까지의 경우와 유사하다. 또한 “넓이의 등차들” 또는 “수평적인 수준들”이라 불리운다.

나머지 상태들 (Remnant states)
“리메인스”를 보라.

논리를 더듬어 사고함 (Ratiocination, 합리화함)
“추론(reasoning)”으로만 번역되면 약간 유감스럽다. 이는 거짓 추정들, 거짓 추론, 거짓 연역을 끌어내는 과정을 함축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아마 “합리화 함(rationalizing)”의 뜻을 지닌 최근의 심리학적 용어에 매우 가까울지 모른다.

능력(Faculty)
이런 것을 뜻하는데 사용되었다, 1. 신체적 수단(resource), 2. 가능성, 기회, 3. 타고난 경향(propensity) 또는 능력(ability), 그리고 4. 정신의 품질. 이 마지막 의미에서 보면, 이것은 하느님으로부터 수여됨이다. 이 수여된 것을 올바로 사용함에 의해 당사자는 자기 안에서 주님의 현존하심을 보증받는다.

다써버림(고갈, exinanition)
영이 텅빔, 영적 황무함의 상태. 주님의 경우, 이것은 그분의 인간 부분이 내부의 신성으로부터 분리된 듯 여겨져 있는 겸허의 상태이었다.

담는 어떤 것(용기, containant)
초기 번역자들에 의해 만들어진 단어, 또한 “포용함(continent)”으로도 번역하나 통상적인 수준은 못된다. 이것은 콘테이너, 저장소를 언급하는 것인데, 때로는 마음이 생각들의 “저장소”이다를 서술함에서 심령 연구적 측면에서 사용된다.

더 낮은 땅(Lower earth)
영계에 관한 선각자의 세부적 묘사에서, 더 낮은 땅은 영들의 세계에서는 그 아래쪽 영역이고, 지옥 쪽에서는 그 위쪽 영역이다.

동물 영 (animal spirit)
갈렌(Galen)의 관념에 있는 세 신체 영들 중의 하나. 선각자는 더 순수한 종류의 피를 뜻하기 위해 사용했다. 돌(Dole)의 “신성의 사랑과 지혜” 423쪽에서는 “혼-영”으로 번역하였다.

동물 왕국 (동물 왕국의 경제)
“인간의 혼의 영역의 역학”을 다룬 선각자의 1740년의 저서 Oeconomia Regni Animalis 에 대한 미흡한 번역어 이다.

되풀이하는 결혼들 (Iterated marrages)
반복된 결혼들, 재결혼.

되찾음 (구속, Redemption)
보통의 의미에서 사용되지 않는다, “되사는 것”, 되찾음은 그리스도의 생애 전 과정의 결과로 얻어진 지옥을 복종케 함과 천국의 질서를 다시 세운 것을 뜻한다. 하여 믿는 자에게 가능할 수 있는 개개인의 구원을 만드신 것이다.

리메인스 (Remains)
사랑과 진리에 관한 감명들이 인간에게는 알려지지 않은 신비한 방법에서 주님에 의해 개개인 안에 심어진 사랑과 진리에 관한 깊은 감명들, 이것은 유아로부터 모든 삶을 통하여 각 개인과 더불어 계속 “남아” 있으면서, 재출생을 위한 기초가 되어주고 있다. 이 단어는 “나머지들(remnants)” 또는 “나머지 상태들”으로도 번역하고 있다.

림버스(Limbus, 가장자리, 변방)
“봉투, 덮개(envelope)” 또는 “테두리, 가장자리(border)”로도 번역되었다. 각자의 특질(본성, nature)로부터 끌어내진 가장자리를 뜻하기 위해 사용되었는데, 사후에도 이것은 존속하여 영계에서 (어떤 형체라고 분명하게 묘사할 수는 없지만) 하나의 불변성(fixity), 안정성(stability), 영속성(permanence)을 주고 있다. 이 단어는 쉽게 정의를 내리기가 힘든 복잡한 개념에 있다.

맥시머스 호모 (Maximus Homo)
“웅대한 사람”과 “보편적 인간”을 보라

메디아 (Media)
종종 단수의(유일한, singular), 매개(중간, medium). 이는 사이에서 가는 것들을 뜻한다. 두 실체의 각각으로부터 어떤 것을 도출하는 중간의 것(intermediary), 그리고 개인을 이쪽 편으로 끌어낼 때, 다른 쪽은 종속시키는 효과를 갖게 된다.

모양 (Form)
유기체(organization) 또는 본질이 나타나게 하는 유기적 저장소(organic receptacle)를 철학적 의미로 사용했다. 이것은 외형(shape, 모양)에 관련되지 않고, 질서, 의향, 배열과 실재물의 부분들과 관련된다. 기능 또는 사용과 밀접하게 연합하고 있다.

목적, 원인, 결과 (End, Cause, Effect)
목표(goal) 또는 의도(purpose)의 철학적 의미에서 사용되는데, 목적은 의지력의 사랑 또는 의향(intention)이고, 원인은 의도(purpose)를 성취하려고 이해력을 통하여 있는 수단들이다, 결과는 초래하는 행동, 말함, 감각 또는 생산, 고로 성취됨이다.

묶는 것들(속박됨, bonds)
이는 족쇄를 채우는 식의 뜻에서는 아니고, 어떤 개인이 유독 사랑하는 특별난 것을 뜻한다. 즉 너무나 사랑하기에 그것에 묶인 상태인 듯 되는 것, 하여 사랑된 것의 반대되는 것에 대하여는 금하게 한다(아랑곳하지 않는다). 외적 묶임들은 시민 생활에, 내적 묶임들은 영적 생활에 영향을 준다..

방계적인 선(Collateral good, 부수적인 선, 서자 출신의 선)
자연적 선함과 영적 선함 사이에 놓인 선함, 하여 일부는 자연적 선함, 일부는 영적 선함이 섞인 상태의 선함, 즉 본질적으로는 영적인 것들에 대한 자연적 수준의 사랑, 고로 진짜의 선함은 아니나 진짜의 선함에 관련되고 있다.

별개의 하나 (구분되는 하나, distinctly one)
선각자에게서의 단일성(하나임, oneness)은 단순함이 아니고 목적(의도, purpose)의 통일성(unity)이다. 사랑과 진리는 행동 안에서 분리되어 존재할 수가 없다, 그러나 여전히 그것들의 하나임 안에서 구분될 수 있다, 고로 “별개의” 또는 더 나은 표현으로는 “구분할 수 있게 있는 하나”이다.

부가적인 (adscititious)
때로는 “외래의(adventitious)”로도 번역할 때도 있다, 부가적인(additional), 외적 측면에서 첨가됨

부끄러히 여김 (창피함, 굴욕, Humiliation)
당황함이나, 근대적 의미에서는 그렇게 사용되지 않고, 겸손의 상태를 뜻하기 위하여 사용하고 있다, 이 겸손 안에서 개인은 자기에게 있는 듯 여겨지는 어떤 선 또는 진리가 실제로는 주님의 것이 자기 안에 있는 것임을 인정한다. 이 단어는 주님께서 그분의 영적 텅빔의 상태를 두고 사용하셨다.

부부의 (결혼의, conjugial)
이는 선각자가 철자를 기록함에서 (conjugalis 대신) conjugialis를 더 좋아했다는 점을 반영하기 위해 초기 번역자들이 개발한 단어이다. 이 단어는 결혼에 속하는 것들, 그리고 결혼한 양쪽(부부)가 서로를 위하여 가지는 사랑들에 관련되고 있다. 일반적으로 적극적 자세를 취한다.

불연속 등차들 (discrete degrees)
구분되는 수준들, 이쪽이 저쪽 보다 더 높다, 마치 목적, 원인, 결과의 관계와 같다. 또한 수직적 수준들이라 불리운다, 고도(altitude)의 등차들, 높이의 등차들.

보편적 인간 (Universal Human)
맥시무스 호모에 대한 돌씨의 번역어이다. “웅대한 사람”을 보라.

보편적 교회 (Universal church)
“우주로부터의 교회(the church universal)”, 모든 곳에 존재하는 교회를 말한다, 교회 조직체를 초월한 교회이다. 진실로 전기독교적인 개념, 이 세상의 모든 종교에서 각 종교의 신앙으로부터 있는 신실한 개인들.

사람 (Man, homo, vir)
라틴어는 “사람”을 위해 두 단어들을 가진다: 호모(homo)-개인(person, 남자와 여자 모두), 인류(mamkind), 본질적 개인으로서의 주님; 그리고 버(vir)-남자 인간의 존재.

사정관(assessor, 재산 평가인)
1716년 선각자는 광산 왕립 대학에 “비범한 사정관”으로 위촉되어졌다, 즉 그는 스웨덴 광산국의 협력 멤버로 명명되어졌다. 그는 1724년 사정관 정회
원이 되었다. (그때 당시 광산국은 국왕 직속 감시 아래에 있었는데, 그 이유가 왕의 중요한 자금 조달이 금을 비롯한 광산 채굴에 있었기 때문이다 역자주)

사탄 (Satan)
악마를 보라. 악의 욕망들을 지적으로 확증하는 악령. “악한 자”의 이름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항간에서 말해지는 것, 즉 하나의 제 일의 악마 또는 어둠의 제 일 인 자가 있다는 식으로 선각자는 믿지 않는다)

사회 (Society)
연계된 사람들의 그룹, 함께 생활하는 사람의 그룹, 공동체, 다음 세계에서 천사들 또는 영들의 그룹. 또한 스웨덴볼지언들이 자기들의 지역 교회 조직이나 모임을 지칭할때에도 사용했다.

상응 (correspondence)
스웨덴볼기안이즘에 기초되는 개념, 신성과 모든 보다 낮은 생명의 등차들 사이에 있는 원인적인 관계와 기능적인 관계이다, 이것은 신성이 창조의 모든 것 안으로 흘러가는 방식, 또는 법칙이다.

상응물들(correspondences)
응답하고, 걸맞고, 동의하고, 또는 서로에게 유추되는 어떤 것들, 또는 실재물들, 마치 태양의 열과 빛이 하느님의 사랑과 지혜에 상응하는 것과 같다. 고로 열과 사랑, 그리고 빛과 진리는 상응물인 것이다.

새 교회 (New Church) (1)
하느님-인간 관계들의 어떤 새로운 상태를 놓고 일반적으로 사용되었다, 또한 주님만을 인정하고 예배하고, 그분의 말씀을 거룩하게 붙들고, 신성의 진리들을 사랑하고, 그리고 선행으로부터 분리된 신앙을 거절하는 교회 시대를 언급할 때 사용되었다.

새 교회 (New Church) (2)
스웨덴볽의 신학 저서들에서 발견한 교리들에 접착된 어떤 조직화된 종교 그룹을 대중적으로 규정하려고 사용된 명칭이다. 이런 그룹의 개개인들은 새 교회인(a New Churchman)이라 종종 불리운다

새 예루살렘 (New Jerusalem)
성경의 계시록서의 뒷 부분에서 묘사된 상징적 도성이다. 초기 스웨덴볽지언들이 천국의 도성을 수단으로 상징화되고 의미된 교회를 자기들의 교회로서 삼기 위해 이 이름을 채택하였었다.

새 예루살렘의 교회 (Church of the New Jerusalem)
선각자께서 기독교 교리의 본질되는 주석을 이끌어낸 교회들 중에서 가장 일반적으로 사용한 교회의 이름인데, 약식으로 말하면, “새 교회(New Church)” 이다.

선 (Good)
선함 또는 선한 것을 뜻하려고 사용한다, 이것은 신성의 질서에 따라서 생각하고 행동함에 애착함이라고 일반적으로 정의된다. 고로 이것은 쓰임(use)이 포함된 주님과 이웃을 사랑함이 그 품질이다. 인간에 있는 선은 하느님의 신성의 선에 관련이 있다.

선으로부터 진리에 애착함 (Affection of truth from good)
정밀하게 정의를 내린다면 “선행(charity)”이다, 즉 (이웃에) 쓸모있는 행동들을 있게 하는 각 개인들에 있는 선으로부터 만들어내진 진리를 사랑함이다.

선의 진리 (Truth of Good)
이 관용구의 또 다른 대체할 수 있는 어구는 “사랑의 지혜”가 있다. 이는 누군가가 지혜있기를 바램, 또는 지혜 있기를 사랑함을 가지지 않으면 지혜에
도달될 수 없다를 알아채게 한다. 이 사랑으로부터 결과할 수 있는 지혜가 “선의 진리”이다.

선행 (charity)
흔한 대중적인 사용법에서일 경우, 이 단어는 물질적 궁핍을 경감되게 해주는 것(자선 행위)을 뜻한다. 선각자는 이 단어를 영의 측면에서 관심을 갖는 것, 영의 복지를 향상되게 하는 것, 사욕이 없이 주어진 업무에 매진함, 이웃에 선을 행함에서 어떤 보수도 예상되지 않는다해도 심정에서 기쁨을 느끼고 있는 것을 뜻하는데 사용하고 있다.

수정 (변경, Modification)
선각자의 신학 저서 이전의 그의 어떤 저서에서, 본성을 통하여 교통하는 모든 방식을 함축하는 개념으로 사용하였다. 이 생각은 그의 후기 교리 또는 상응물에 관한 개념 안에 통합되고 포함시켜졌다.

순결한 (chaste)
흔히 이해되는 것은 순진한, 순수한, 독신(주의) 따위이다. 선각자는 결혼한 자가 섹스에 대하여 순수하고 깨끗한 자세를 가지는 것을 뜻하는데 사용하였다. 진정한 결혼의 사랑은 “순결함 자체”이다 말하고 있다.

순수 지력 (Pure intellect)
선각자의 신학 저서가 있기 전에서인 이성 심리학(Rational Psychology)이라는 책에서, 그는 순수 지력이란 개인들에게 생각하고 추론하는 힘을 주는 능력이다라고 정의하고 있다, 그리고 이 순수 지력은 하느님으로부터 파생된 직각적인 지혜와 함께 유기체의 모든 과정들을 통치한다.

순진 (Innocence)
라틴어의 뿌리에서는 해가 없음(harmlessness)을 뜻한다. 영적 순진은 자아
에 의해 인도되기 보다 주님에 의해 인도되기를 내향적으로 기뻐함이다. 이 특성은 각 개인에 인접되어 있으면서 당사자가 천국으로 인도되는 것을 돕는다.

스톨지 (Storge)
유아를 사랑함을 뜻하는 그맄어로부터 빌려온 단어, 특별히 그들의 부모들에 의해 유아들을 위해 느끼는 사랑. “어버이다운 사랑”, “어버이다운 애정”으로 번역되었다.

시대의 종말 (consummation of the age)
잘못 번역된 킹제임스 성경의 “세상의 끝”을 대체할 수 있는 어구. 이 어구는 시대, 또는 년대의 마감, 또는 끝을 언급한다.

시리즈(Series)
연결된 순서, 생각함의 열차. 선각자의 신학 저서 이전의 시기의 저서에 “시리즈들과 사회” 그리고 “시리즈들과 등차들”의 용어들이 가설로 언급되었는데, 이후 등차에 관한 신학적 개념에 포함시켜졌다.

시험 (Temptation)
나쁜 것을 하도록 부추킴 또는 자극함의 의미에서 사용되지 않는다. 이것은 각 개인의 지배하는 사랑을 공격하여 개인을 심리하고 테스트한다- 당사자의 특성을 밝히 드러내주고, 그 특성이 더 힘세어질 기회를 제공하는 내적 투쟁이다.

신앙의 진리 (Truth of faith)
누군가의 신앙의 부분에 있는 진정한 생각, 그러나 당사자의 삶에서 사용하게 놓여져 있지는 않은 진리이다. 이는 “신앙의 선”에 대조되어 사용된다, 이것은 누군가의 살아있는 신조들로부터 와지는 선함이다.

신성이 되심 (Glorification)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분의 있음의 모든 평면들에 있는 인간적일 뿐인 것을 벗기 위해 그것들을 신성으로 만드시는 과정. 또한 주님의 마음 안에 신성한 의식을 건립하심, 그리하여 그분이 생명 자체가 되셨다를 뜻하는데에도 사용되었다.

신성의 인간 (Divine Human)
새 교회 신학의 중심을 차지하는 생각, 이 용어는 주님의 인간이 신성이 되신 이후의 주 예수 그리스도에 적용된다, 고로 인간의 형체에 있는 신성의 사랑이다-즉 “신위(Deity)”의 모든 충만함이 신체의 형체 안에 살고 있으심”이다. (골. 2:9)

신성의 자연 평면 (Divine Natural)
신성이 되심, 또는 신성으로 만들어진 예수의 마음, 또는 내부의 본성의 자연적 수준, 또는 가장 낮은 수준.

신성이 진행함 (Divine proceeding)
진행함의 행동에 있는 신성, 고로 그분으로부터 방산되는 하느님의 품질들, 성경의 어떤 문맥에서는 성령과 필적되고 있다.

신하 (Subject, 종속하는)
평범한 사용법에 추가하여, 철학적 의미에서는 활동 또는 행위에 기초가 되는 것을 말하는데 사용하였다. 예를 들면, 선행은 “신하”를 가져야만 한다, 즉 선행을 구체화하고, 느끼고, 실시하는 개성.

쓰임 (사용, Use)
쓸모 있는 활동, 목적을 섬기는 기능, 종종 선과 같은 뜻의 선상에 놓이기도 한다. 섬기기를 진짜로 바램이 들어있는 수고함을 정규적으로 함축하고 있
다. 고로 “쓰임으로부터의 선, good of use”이 목적이다. 이 목적에 잘 어울리는 알맹이나 동기를 가지고 있는 마음가짐이나 행위.

아니마 (anima, 영혼, 내적 개성, 남성의 여성적 요소)
인간의 혼(soul), 이 단어는 다양한 전통적인 의미선상에 있어 한마디로 통일된 정의는 힘들다. 사후 살게되는 개인의 부분이다. 선각자는 분석 심리학자로 유명한 융(Jung) 보다 훨씬 먼저 이 단어를 사용했지만, 융이 이 단어에 여성의 특성을 할당했으나 선각자의 경우에서는 그런 추가된 의미는 보여지지 않는다.

아니뮤스(animus, 왕성한 정신, 외적 개성, 여성의 남성적 요소)
때로는 “의향(desposition)”으로 번역된다. 이 단어는 (만일 아니마와 대비하여 사용된다면 보다 수준이 낮은 마음,) 일반적으로 마음(mind)에 관련된다. 각자의 기질, 개성.

악 (Evil)
악, 자체만에 주목하면, 선으로부터 절단(severance) 또는 무질서된 선, 하느님으로부터 분리(disunion)와 주님과 천국에 반대함. 고로 개인 안에 있는 악은 그 개인 내부에 있는 지옥이다.

악귀들 (인간의 일생 동안 따라 다닌다는 귀신, Genii)
선각자는 이 용어를 가장 나쁜 종류의 악령들을 지칭하는데 사용하고 있다, 이것은 개인의 의지에 들어붙어 악의에 차서 행동하게 하고, 당사자의 선한 바램들을 악한 의도들 쪽으로 비튼다. 진리를 만들려고 노력하는 자가 이런 악령에게서는 그것이 거짓이고 반대적인 것으로 나타난다.

악마 (devil)
선각자를 위하여서 단어 “악마(devil)”는 지옥들 전체를 뜻한다. 악마는 사후에 있는 악한 개인이다. “사탄”에 대비해볼 때, 사탄은 자신들 안에 있는 악들의 욕망들을 지성적으로 확증한다, 악마들은 그것들을 살아내려 뜻한다.

악의 거짓 (Falsity of evil)
이는 “악으로부터의 거짓(falsity of evil)”라고도 불리운다. 거짓 생각 또는 악한 바램이 원인이 되어 진리가 비뚫어짐.

…안에 (In)
“종사함 안에” 또는 “상태 또는 조건 안에”의 의미에서 자주 사용된다. 선각자의 책에서 우리는 읽는 바, 어떤 개인이 “선 안에”, 또는 “선에 애착함 안에” 있다 등등이라고 읽는다. 이는 그가 선인 것을 사랑함의 상태 안에, 또는 선함의 상태 안에 있다를 뜻한다.

알카넘 (알캐이넘, arcanum)
비밀, 감추인 어떤 것. 이 단어의 복수는 알카나(알캐이너, arcana)이다. “알카나 세레스티아(arcana coelestia), 즉 천국의 비밀들”은 선각자의 가장 방대한 저서 명이다.

양심 (conscience)
선을 악으로부터 구별하는 능력-선천적인 것이 아니고 배워서 획득한 능력인 바 모든 이에게 균일하게 똑같을 수 없다. 선한 자만이 진정한 양심을 가진다. 가짜 양심이 선의로 의도될 수도 있을지 모르나, 신조의 오류들에 부분적으로 기초하고 있다.

양심 장사치들 (conscience mongers)
지나치게 양심적인 인간들, 타인을 혹평하는 인간들.

역사적인 신앙 (Historical faith)
전통에 기초한 “신앙” 또는 타인들의 신조들(믿음들)에 기초한 “신앙”, 고로 진실된 신앙은 아닌 것이 확실하고, 신앙 같이 나타남(껍데기 신앙)일 뿐이다 (“가정의 선”도 참조해보라.)

영계 (영적 세계, Spiritual world)
다음 세계, 또는 사후 개인들의 거처를 일반적으로 아우러서 언급하는 용어이다. 영들의 세계, 즉 사후 들어가는 첫 상태를 위해 선각자가 이름 지은 영들의 세계, 천국과 지옥의 중간에 있는 영들의 세계와 혼동하지 말라.

오류(잘못된 생각, Fallacy)
현혹시키는 나타남. (태양이 “올라온다” 같은 식에서의) 감각들의 오류들이 가장 작은 중대한 것이다. 보다 나쁜 것은 당사자의 보다 수준 낮은 본성으로부터 파생되어진다, 즉 악과 결합된 거짓들이다, 이는 개인의 부분에 신앙의 부족에 기인된다.

외관 (나타남, appearance)
순수한 진리, 또는 신성의 진리를 그 진리가 숙박한 형체들로부터 구별하려고 사용되는 단어이다. 고로, 모든 이는 자기의 유한한 상태에 따라 진리를 볼 때의 그 진리이다. 진리의 이런 나타남을 당사자가 선한 의도로 사용한다면, 이 나타남을 진리로서 주님께서 받아주시기 때문에, 망상(잘못 생각함, illusion)은 아니다.

웅대한 사람 (Grand Man)
라틴어의 맥시무스 호모(maximus homo, 가장 큰 사람, greatest man), 돌(Dole)에 의해서는 “보편적인(우주적인) 인간”으로 번역되었는데, 주님의 “몸”으로서의 천국들 전체, 또는 천국과 땅 위의 교회를 아우르는 주님의 왕국에 관련된다. 때로는 주님 자신을 뜻하는 데에도 사용된다.

유입 (Influx)
흘러듦(inflow), 또는 입력(input) 또는 영향력 (influence)를 뜻한다. 이 단어는 행동하는 모든 힘은 하느님으로부터 창조의 모든 것 안으로 변함없고 중단 없이 흐르고 있다는 근본적인 개념을 묘사하는데 사용된다.

유전적 악 (Hereditary evil)
이 용어는 선각자에 의해 별도의 제한됨도 없이 무조건식으로 사용되는 편이기는 하나, 사실상 그는 전통적 견해는 사절하고, 우리는 실제의 악을 유전적으로 상속하는 것이 아니고 악을 향하려는 경향성들을 상속한다고 주장한다. 우리는 성인들이 되어서는 이것을 확증하거나 채택하거나, 또는 거절하거나 거부할는지 모른다.

유출 (Efflux)
산출(output), 밖으로 흐름. 하느님으로부터 개인들 안으로 흘러든 선과 진리는 되돌아서 이웃을 사랑함의 행동들의 형체로 세상 안으로 흘러나간다. 하느님의 보편적 법은 유입은 언제나 유출에 의거 있게 된다는 것이다.

육체의 (coporeal)
실재를 나타내는데 자주 사용되어 신체적 부분, 또는 신체에 부착된 마음의 부분을 뜻하였다. 신체적, 육체적인 것은 감각과 육체적 쾌락들과 더불어 선취되어 있다.

은근히 주입하다 (Insinuate)
기초되는 라틴어의 의미에서 이 단어는 어떤 것을 노골적 방법이 아닌 미묘하게 받아들여지게 또는 스며들게하는 것을 뜻한다. 수용자가 주입 과정을 충분히 알아챔이 없이 내면의 위치를 할당하는 것이다.

음란 (간통, scortatory)
성관계가 문란한 것을 묘사한 것이다, 음행, 매춘.

의미함 (Significative)
영적 뜻을 운반하고 가리키는 어떤 것. 특별한 뜻, 뜻있음. 현재는 표현함과 상응함과 구분되어 사용된다.

의지력과 이해력 (Will and understanding)
“의도력과 식별력(intentionality and discernment)”, “자발력과 지력(the voluntary and the intellectual)”. 이것들은 인간의 개성 속의 포괄적인 두 양상들 또는 능력들이다. 의지력은 의지력의 모든 기능들을 포함하고, 신성의 영향력에 반응을 보이고, 수용하는 부분을 섬긴다. 이해력은 식별하는 모든 기능들을 포함하고, 의지력을 가르치고, 그것의 의향들을 집행하는 것을 섬긴다.

이성이 있는 (합리적인, rational)
이 단어는 실명사로 사용하는 경우가 매우 흔해졌다. 천국으로부터의 빛이 세상의 빛 안에 있는 것을 계발하는 정신적 평면이다. 의식되는 마음 중에서 가장 높은 수준이다. 합리적 진리는 자연적인 것들에 관한 영적 진리이다.

이웃 (Neighbor)
내 집 아닌 다음 집에 있는 사람이면 이웃이다가 절대로 아니다. 이런 독특한 생각선상에 있다, 즉 주님으로부터의 선이 이웃인 것이다, 고로 각 개인이 나의 이웃이 되는 척도는 상대방이 주님으로부터의 선을 받아들인 양과 질에서 이다. 고로 가장 비중이 큰 이웃의 순서를 차례로 열거한다면, 주님-교회-나의 나라 등등으로 내려간다.

인식함들(cognitions)
때로는 “지식들”로도 번역된다. 이는 사실들(facts)을 관념들(ideas), 또는 앎의 보다 깊은 수준들 안으로 조직화 함을 뜻하기 위해 사용된다. 엘리엇씨는 그의 새 번역서인 “알카나 세레스티아”에서 “내면의 것들에 관련되는 지식의 항목들”이라 정의하고 있다.

있음 (being, ens)
실재(entity) 또는 구별되는 어떤 것을 뜻하기 위해 사용되는데 선각자는 이 단어를 매우 드물게 사용했다, 또한 순수하게 정신적 건설을 뜻하기 위한 합리성, 이성적 인 것에 대한 어구인 “ens rationis”에서 사용되었다. 이를 있음인 esse, 즉 “혼” 또는 어떤 것의 본질되는 속성과 대비해보라.

있음 (being, esse)
어떤 것에 있는 본질되는 품질, 실체(reality) 자체, 예를 들면, 하느님의 근본적 본질은 신성한 사랑이다.

자기 것이 되게 하다 (appropriate, 사유)
이 단어는 선각자에 의해 형용사로는 한번도 사용되지 않고 동사로만 사용된 특별한 단어인데, 자신에게 고유한 것으로 주장함, 또는 소유하는 것이다.

자기 자신 (Own)
자기 자신은 라틴어 suus 와 proprium 모두를 번역하는데 몇 번역자에 의해 사용되었다. 자아(self), 자아를 위해, 자아로부터 살아감, 이기심이라는 자아를 느낌, 인간의 거듭남에서 자아가 인도함이라는 망상은 필수적이다.

자아 (Proprium)
자기 자신을 보라. 이기심을 느낌이라는 기초적 의미에 추가하여 많은 다른 의미들을 가지는 경우도 있다, 즉 천사적인 자아, 악마적인 자아, 인간 자아, 신성한 자아, 지옥적 자아, 지적 자아, 자발적 자아 등등이다.

자아로서 같이 (as of self)
마치 자기 고유의 힘을 수단으로처럼, 컽으로 보기에 자신 스스로인 듯 하는 것. 선각자의 신학에서 비평적 개념인데, 즉 누군가가 “마치” 자아의 힘에서 인 듯 행동하는 것, 그러나 동시에 모든 힘은 하느님으로부터 온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다.

자연적 인간 (Natural man)
세상적인 것들에 집중적으로 흥미를 가지는 어떤 개인을 뜻한다 할지라도, 그 개인의 전체를 뜻하여서는 일반적으로 사용되지 않는다. 단지 어떤 개개인에게서 가장 수준이 낮은 인간의 마음을 언급할 때 가장 흔히 사용되고 있다.

자연주의자 (Naturalist)
하느님을 믿는 대신 자연을 믿는다는 어떤 개인을 경멸적 의미에서 만 사용되었다, 즉 물질주의자와 비슷하다. 자연주의도 이와 비슷한데, 모든 종교적 개념들의 근원을 자연에 신뢰를 둔 것이라 정의된다.

자유 (Freedom)
애착으로부터 생각하고 뜻하고, 이치에 맞다고 여겨지는 것에 따라서 자유하게 행동하는 것이다. 만일 이것들이 천국적이다면, 자유는 진짜이다; 만일 지옥적이다면, 이것은 외관적일(껍데기적일) 뿐, 실제로는 비 자유함이다. 진정한 자유는 당사자로 자아 강요(self-compulsion)를 사용하는 것을 허용한다.

지배하는 사랑 (Ruling love)
삶을 좌지우지하는 각 개인에 있는 가장 강력한 사랑. 가능할 수 있는 지배하는 사랑은 네 가지로 함축해볼 수 있다: 1. 하느님을 사랑함. 2. 이웃을 사랑함. 3. 자아를 사랑함. 4. 세상을 사랑함이다. 이 중 첫 둘째 만이 거듭나지는 개인을 위하여 받아져야 하는 지배하는 사랑들이다.

지혜 (Wisdom)
많은 지식을 소유함을 언급하는 데에는 거의 사용되지 않는다, 이 용어는 통상 삶에 관한 것만을 서술하는데 사용되고 있다. 지혜는 사랑으로부터 진정한 것을 지각함, 뜻함, 행동함으로 구성된다. 슬기로운 개인은 진리에 기초한 선을 행함을 위한 변동없는
바램을 가지고 있다.

진실한 (True)
절대적 의미에서 진실함은 신성한 사랑의 형체와 수단들이다. 관계적 의미에서, 이것은 개개인의 사랑 속에 있는 지각하고 결과를 있게 하는 기능이다.

진리의 선 (Good of truth)
개개인 안에서 진리를 수단으로 도달되는 상태인데, 이 상태는 사랑의 행동들 안에서 자체를 표현한다, 이를 수단으로 그 진리는 선이 된다. 이것은 영적인 선이라고도 불리운다.

질투 (Jealousy, zelotypia)
선각자는 부부의 사랑의 첫 장에서만 사용하였는데, 귀중한 것을 보호함을 사랑함, 특히 결혼의 사랑을 보호하기를 사랑함을 뜻하기 위해 사용했다. 그는 나쁜 질투가 있다는 것도 인정하고 있으나, 그가 강조하고 싶은 점은 질투의 긍정적 측면에서 이다. 그는 이것을 열정들 중의 열정이라 일컫는다-즉 열정의 진정한 모양새이다.

천사 (angel)
천국에 있는 개인(person). 선각자의 신학에서 모든 천사들은 처음에 자연계에 살았고, 사후 천국에 입장한 사람들이다. 선각자는 천사의 개념을 놓고, 창조로부터의 분리된 계층으로 말하는 것을 거절한다.

천성 (타고난 자질, Genius)
개인의 기질, 특성, 재능, 경향성, 개인과 개인들 집단의 영 또는 품질.

첩 (pellicacy, concubine, mistress)
이 단어는 pellex로부터 인데, 첩을 두고 사는 상태이다

최말단 (Ultimate)
연결 고리의 마지막, 수준이 가장 낮은 것, 가장 외적인 것, 가장 먼 것. “가장 큰 것”을 뜻하기 위해 선각자에 의해 사용되지 않았다.

충격(자극, conatus)
종종 “애씀(endeavor)”으로 번역된다. 일반적으로 행동들 뒤에 놓인 에너지를 두고 사용된다. 특별한 목적들을 쟁취하게 하는 꾸준한 충격을 받는 생활 자세일 수 있다.

타고난 (선천적인, connate)
글자대로 말하면, “출생으로부터 존재하고 있음”이다, 이것은 때로는 유전적 경향성들을 부정하는데 관련되어 사용되고 있다. 또한 자주 비슷한 단어인 생득의(innate, 타고난), 천부의 (inborn), 같은 성질의(congenial)와 더불어 사용된다

탐욕 (cupidity, 강력한 욕망)
(현세에의 욕망을 보라.) 자연적 마음으로부터 일어나는 강력한 욕구, 갈망, 그리워함. 이 단어의 라틴 뿌리는 현세에의 욕망의 뿌리만큼 강한 부정적인 것을 함축하여 운반하지는 것은 아닌 듯 비쳐진다.

태고 교회 (Most ancient church)
선각자는 이 용어를 대문자로 자주 표기했다. 하여 이 이름이 매우 지당하다 싶어서인 듯한 느낌을 우리로 갖게 한다. 이 용어는 신성에 관련하여서 일 경우, 가장 이른 유사 이전(역사 문명 이전)을 언급하는 전문어이다. 이 용어는 창조와 에덴의 동산을 언급하는 창세기서의 사건에 상징적으로 결합되어 있다.

트란스훌럭스 (Transflux)
관통하여 흘러가버림. 주님으로부터의 선이 아무런 효과도 보지 못하고 어떤 개인을 관통하여 흘러가버리는 것을 부정적으로 언급함에 사용되었다. 마치 물이 조리채를 빠져나가는 경우 같다. 이런 개인은 양심 없이 있다라고 말해진다.

평형 (Equilibrium)
(균형을 보라.) 가장 널리 가능할 수 있는 선각자의 번역에서 용어 “평형”이 발견될 것이다. 현재까지에서, 보다 단순하고 충분하게 어울리는 번역문은 돌(Dole)의 번역에서의 “균형”에 번역어의 한계가 그어지고 있는 실정이다.

표현 (Representative)
영적 생각(idea)을 상징하려고 사용되는 자연의 대상물, 개인, 행동, 또는 이 영적 생각 자체. 또한 영계에서 보일 수 있는 형체에서 생각이 표출됨.

합리적인 것 (이성적인 것, Ens rationis)
순수하게 정신적 건축물, 마음 안에서만 존재하는 어떤 것. 어떤 문맥에서는 도깨비불(will-o-the-wisp, ignis fatuus, 환영)에 대충 견주기도 한다. 있음 [ens]를 보라.

허용 (Permission)
이는 신성한 섭리의 한 부분이라 선각자는 규정하고 있다. 허용된 것, 관용(묵인)된 것은 허락된 것, 묵인되어진 어떤 것이나 그렇다고 하느님이 바라는 어떤 것은 아니다. 바람직하지 않은 어떤 행동들을 묵인하는 것은 인간의 자유를 침해하지는 않는다.

현세에의 욕망(concupiscence, 강한 욕망)
몇몇 번역자들에 의해 존속되어 온 라틴어풍의 단어이다. 동사 형체는 어떤 것을 강하게 바램(desire), 또는 갈망함(lust)을 뜻한다. 명사는 강한 욕구를 뜻하는데, 통상적으로는 악, 또는 (섹스 쪽이거나 아니거나 할는지 모르는) 욕망이다. 때로는 탐욕(cupidity)이라는 단어와 분간할 수 없는 경우도 많다.

황폐됨 (Vastation)
황무한 상태, 극점(종말), 다빠져나가 텅빔. 영들의 세계에서 벌어지는 과정, 즉 외적인 악들과 거짓들이 선한 자로부터 제거됨, 그리고 위선적으로 있는 선들과 단지 지식들인 것이 악한 자로부터 제거됨, 하여 어정쩡하게 선과 악이 뒤섞여 있던 세상에서의 인간의 상태가 선과 악이 선명한 상태로 확실히 구분되는 과정에서 사용되는 단어이다.

회개 (Repentance)
재출생에서의 첫 단계, 여기에는 하느님에게 죄들을 고백함, 자기가 용서되기를 간구함이 포함되고, 진정한 선행과 신앙의 교훈들에 따라 새로운 생활을 이끌려는 진실한 노력이 뒤따르는 것이다.

(외부쪽에) 흘러듦 (afflux)
…쪽으로 흐름, 또는 …쪽을 향하여 흐름. 이 방식을 수단으로 주님께서는 악을, 악한 자를 통제하신다. 선과 진리는 악한 자 쪽으로(to) 흐를 수는 있으나, 그렇다고 악이나 악한 자 안쪽으로(into)는 흐르지 않는다. 고로 악이나 악한 자를 통치하는 것은 내부(within)로부터가 아닌 외부(without)로부터 이다. 이 단어는 (내부쪽에) 유입됨(influx, 흘러듦)과 날카롭게 대비되어 선각자의 책에서는 사용되나 한국어에서는 같은 말로 번역되고 있어 가로에 영어를 추가로 기입해서 (역자는) 구별해보고 있다.

선각자의 신학에서만 유일한 기본적 생각들(concepts)

1. 하느님에 관하여 선각자에게 밝혀진 기본적 생각들

신성한 생명은 하나이고, (사실) 생명은 이 생명밖에 없다. 주님 만이 생명 자체이시다, 그 이유는 그분이 생명 자체이시기 때문이다. 땅 위 인간과 영계에 있는 인간은 이 생명의 그릇들일 뿐이다.

(참고: 선각자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뜻하기 위해 단어 “주님”을 시종일관하게 사용한다. 또한 이 글 내지 역자의 번역서에서 사용되는 단어 중 개인(個人, 때로는 인물, 人物, person)이 있는데, 그러나 역자가 이 단어를 영한 사전에서 같이 사람 등의 알기 쉬운 단어로 번역하지 않고 조금은 껄끄러운 개인으로 표기하는 이유는 지상에 태어나 아무개라는 이름으로 살았던 물질인 인간, 즉 개인(예를 들면, 예수)을 뾰족이 암시하고 싶어서 이다.)

하느님의 본질에는 두 구성 요소가 있는데, 그것은 사랑과 지혜이다. 하느님의 사랑을 구성하는 세 고유 특성이 있는데, 그것은 그 자체의 바깥쪽 다른 이들을 사랑하는 것, 다른 이들과 하나이기를 바라는 것, 그리고 다른 이들을 자체로부터 복되게 하여주는 것이다.

신성의 사랑과 지혜를 본질 자체 측면에서 일 경우, 우리는 생각조차 할 수 없다. 그 이유는 그것은 무한이어서 우리의 사고력을 초월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랑과 지혜가 상응적(correspondential) 외관에서 일 경우, 우리는 생각해볼 수 있다. 천사의 눈에서, 주님은 태양으로서 나타난다, 이로부터 영적인 열과 빛이 나아가는 바, 유추해봄(analogy)을 수단으로 천사들은 자기들이 유지 지탱할 수 있는 이유는 이 영적 빛과 열, 즉 하느님으로부터 꾸준히 방산되는 신성의 사랑과 지혜에 의해서 이다를 생각하고 알 수 있다.

상응을 수단으로, 이 유추해봄은 땅 위 개인들도 사용할 수 있다. 즉, 자연이 물질적 태양의 열과 빛을 수단으로 매 순간을 유지 지탱하듯, 인간인 나는 주님의 신성한 사랑과 지혜를 수단으로 영적으로 유지 지탱되고 있다는 것을 생각해보고 알 수 있다.

주님(the Lord)은 보편적(우주적) 인간(universal human)이시다. 주 예수 그리스도, 이 분만이 충분하게(fully, 결여됨이 없는) 인간이시다. 이 분으로부터 천사들, 영들, 그리고 지상의 거주민들은 집합적으로 “사람들(men)”이라 불리운다. 이 분이 천국 안으로 유입되심으로 전체 천국은 하나의 인간을 표현하고 닮아 있게 하고 있다. 유추를 수단으로, 땅 위 개인들의 (인간) 본성 안에 있는 천국의 것 만이 진실로 인간(human)이다

새로운 기독 세계의 하느님은 하나의 보일 수 있는 하느님이 계시고, 이 분 안에 보일 수 없는 하느님이 계시는데, 마치 혼이 그의 신체 안에 있는 것과 같다. 만일 누군가가 그렇지 않다라고 판단했다면, 그는 이 하느님과 결합되어질 수 없을 것이다, 그 이유는 하느님과 개인들의 사이에 있는 모든 결합은 상호적(reciprocal) 임이 틀림이 없기 때문이다. 이런 상호성은 보일 수 있는 하느님이 아니면 불가능하다.
위와 비슷하게, 모든 천국들 안에서, 하느님에 관하여 이런 생각밖에 없다: 즉, 그분은 개인이시다는 것, 그리고 이 개인이 주님이시다는 것이다. 골로새서에서 바울의 통찰력이 선각자의 견해가 진실임을 이렇게 증명하고 있다: 즉, 일어나시고 신성이 되신(risen and glorified) 예수 그리스도 안에, 하느님(Godhead)의 모든 충만함이 육체적으로 거주하시고 있다. 땅 위와 천국 안에 있는 사람(people)은 이를 알 수 있다.
하느님 안에 있는 삼위일체(trinity, 三位一體)에 관하여서 성경의 구절들은 상징적 언어에서 말하고 있다. 신성의 삼위일체는 주님의 한 개인 안에 있다, 이 셋을 구별해 알 수 있는 것은 혼, 신체, 그리고 이 둘의 결과인 활동(activity, 행동)으로 이해할 경우에서 이다. 유추를 수단으로 각각의 개인 안에도 삼위일체가 있다. 셋을 한꺼번에 취합하면 하나의 개인을 구성한다: 즉 혼, 신체, 그리고 혼이 신체를 이용한 결과인 행동이다. 그러나 이것은 유한한 삼위일체이다, 그 이유는 인간은 그릇들, 또는 생명의 “기관들(organs, 유기체들)”이기 때문이다. 주님 안에서의 삼위일체는 무한이고, 고로 신성인 이유는 주님은 그분의 인간(human)조차도 생명 자체이시기 때문이다.
아버지이든, 아들이든, 그리고 성령이든, 이 단어의 언급이 있는 말씀 안의 어디에서 이든, 이는 하느님의 속성을 구별해 말해보는 양상일 뿐이다. 다시 말해 하느님의 통일성(unity, 여럿이 아닌 하나) 안에 삼위가 있는 바, 아버지, 또는 성령(님) 같은 식으로 분리적으로는 존재하지 않고, 주님 만으로 존재한다는 말이다. (우리는 하느님을 주님으로만 부르는 것이 합당할지 모른다 역자주) “아버지”, 또는 하느님의 “혼(soul)”과 “영(Spirit)”, 또는 하느님의 활동은 주님 만으로부터 존재하고 출현(coming forth, 존재 안으로 옴)된다. 그러므로 하느님, 그리스도, 또는 성령으로 분리된 존재들로 말하는 듯 여겨지는 성경의 사건들이다 해도 상징적, 유추적으로 이해되어져야 한다. 고로 통찰력은 분리된 둘, 또는 셋의 신성의 존재들로서가 아닌 유일한 하나의 하느님의 속성과 활동의 어떤 양상(면모, aspect)들 쪽으로 있어야 할 것이다.

신성의 사랑은 모든 창조의 근원이고 지탱자이다. 영적인 존재들은 사랑 외에 다른 근원으로부터 존재 안으로 와질 수가 없다; 그리고 창조하는 사랑은 사랑 자체 이신 주님으로부터만 존재 안으로 와질 수가 있다 (세상 밖으로 나타나짐).

모든 창조의 보편적 목적(purpose, 의도)는 창조자가 창조된 우주와 영원히 합류하는(join) 것이다. 이 합류는 이 창조 안에 신성의 본성이 “거주”할 수 있는 존재들이 있어야 가능해진다. 다시 말해 신성에 걸 맞는 성질이 각 개인들 안에 있어야 합류가 가능하다는 말이다. 고로 모든 것은 각 개인들의 사용을 위해서 창조되어왔었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모든 창조된 것들의 사용은 가장 바깥 부분들로부터 개인들 쪽으로 등차적으로 올라간다, 그리고 개인들을 통하여 하느님 쪽으로 올라간다. 이것은 “생명의 순환”이라고도 불리운다.
창조의 특별한 목적은 하느님의 사랑을 받고 되돌림을 영원히 계속함으로, 인류로부터 천사들의 천국을 영원히 부풀려감일는지 모른다.

하나의 끈덕진 신학적 관념에 반대하여 있는 것은 이것이다, 즉 하느님은 무로부터 우주를 창조하지 않았다. 무로부터 만들어진 어떤 것도 있을 수가 없다. 모든 것들은 실체(substance, 물질) 자체인 실체로부터 창조되어져 왔다. 이 실체는 신성의 사랑이다. 이 근원으로부터 만 모든 것들은 만들어내지고 지탱되어진다.

하느님은 물질의 우주를 창조하셨는데, 이는 영적 실재(reality)들에 “옷을 주는(clothing)” 것, 그리고 개인들이 원하면, 그들 고유의 자유의지로부터 영적이고 잠재적인 천사의 존재들이 되는 평면(plane)을 제공하기 위하여서 이다.

자연 평면에서 더 이상 진짜 인간 다움(humanity)이 있지 않게 되었을 때, 그리고 인류가 바야흐로 파멸에 직면하려고 했을 때, 즉, 천국으로부터 생명과 빛을 받는 역량을 거의 잃었을 때, 하느님은 그분의 무한성을 유한성으로 만드셨다, 즉 예수 그리스도 라는 개인 안에서 세상 안으로 오셨다. 이때 쾌히 받아들심으로부터 주님이 “입으신” 인간 다움은 인류를 괴롭히는 허약함과 동일한 것을 지닌 지극히 평범한 인간의 어머니 마리아로부터의 것이었다. 그러나 (예수의) 내부에 잠재적인 신성의 거주하심에서 끌어냄을 수단으로 예수는 지상 평면에서 개인들에게 영향을 주는 천국과 지옥의 세력 사이에 있는 균형을 언제나 회복되게 하시면서, 점진적으로, 질서있게(순서적으로), 그리고 완전하게 지옥들의 힘들에 정면으로 맞서 이겨내셨다. 주님의 삶의 모든 과정은 되찾음을 구성하는 것, (즉) 개개인의 구원이 지금 그리고 언제나 가능하게 만드심이다.

2. 영적 세계에 관하여 선각자에게 밝히 알린 기본 생각들

진짜이고 영원한 영적 세계가 있다. 그 세계는 셋으로 구분되는데, 천국, 지옥 그리고 영들이 있는 중간 세계이다.

죽음은 삶에 있는 질서적, 필수적 단계이다. 인간의 신체가 그것의 생각들과 애착들에 상응하는 자연계에 있는 기능들을 더 이상 수행할 수 없을 때, 그 개인은 “죽는다”라고 말해진다, 그러나 개인은 죽지 않는다, 단지 지상 평면에서 사용을 위해 주어진 육체라는 부분들로부터 분리되어질 뿐이다, 개인은 살기를 계속하는데, 그 이유는 개인이 개인인 이유는 신체 때문이 아니라 영 때문, 즉 개인 안에 있는 생각하는 혼, 또는 영이 당사자 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애착과 더불은 생각이 그 개인을 구성한다. 고로 죽음은 이 세계로부터 저 세계로 건너가는 (다리 역할을 하는) 것일 뿐이다.

(자연계) 생명의 모두가 중단되자 마자, 개인은 영들의 세계에서 즉각적으로 소생되어진다. 이것은 가장 높은 천사들의 조력을 받아 주님에 의해 행해진다. 그 다음, 개인은 자기 검증과 자기 인식의 과정을 통하여 안내되어진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 또는 그녀 자신의 결단력이 영원한 집을 천국이든 지옥이든 선택할 수 있다. 어느 누구도 천국으로 입장이 주어지는 수단으로서의 “보상”이라는 것은 없다, 누구도 지옥으로 정죄됨을 수단으로 “처벌”되지 않는다. 천국과 지옥 안에서 모든 이는 자기 자신의 선택을 수단으로 각자의 영역에 있다.

죽음 후에 모두 각각의 개인에게는 자신의 생각들과 애착들을 수정할 충분한 수단들이 수여된다. 모두는 천사들을 수단으로 주님에 의해 가르쳐지고 인도되어진다; 그리고 모두는 자기들이 생명을 따라서 생명을 살아감이다는 것, 그리고 천국과 지옥이 있다는 것을 의식할 때, 그들은 첫째로 모든 진리들을 받아들임에 있다. 그러나 지상에서 (하느님을) 인정하지 않았고, 하느님에 맞서 악들을 죄들로서 금하는 노력을 만들지 않았던 이들은 이내 진리들을 듣는 것에 진저리를 내고 그것은 선택의 문제라고 여기고 물러나버린다. 짧게 말해, 섭리는 모두가 구원되는 쪽으로, 즉 천국을 선택함이 가능해지도록 그것을(진리의 선택을 하도록) 만들고 있다. 그리고 그렇게 선택하지 않은 개인은 홀로 책임질 수 있게 만들어져 있다.

용어 “영”은 영들의 세계라 불리우는 사후 첫 상태에서 일시적으로 있는 자를 뜻하기 위해 사용할 뿐이다. 용어 “천사”는 교육받고 자기 수정을 끝내서 천국에서 자기 자리를 찾아갈 수 있게 된 이들을 뜻한다. 지옥에 자신의 장소를 발견하는 이들은 사탄들 또는 악마들이라 불리워진다.

개인로부터의(각자의) 영이 영들의 세계 안으로 진입하였을 때, 그녀 또는 그의 얼굴과 음성의 음질은 그들이 세상에서 가졌었던 것들에 대단히 비슷하다. 그러나 그 후 얼굴과 여타 얼굴의 생김새들과 행동들은 점차적으로 각자의 애착(affection)들과 당사자를 지배했던 사랑(ruling love)에 일치하도록 바뀌고 있다. (지상에서는 가면을 씀이 가능하나 여기서는 가면이 허용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과거 신체 안에서 영의 생명의 외면의 것들의 사용함이 끝나서, 이 외면의 것들이 곁에 놓여진 지금, 바깥쪽으로의 나타남과 이전의 애착들은 바뀐다, 하여 바뀐 그의 상태란 그가 보여지는 것과 행동하는 것은 그의 내면의 존재와 완전 일치되고 있는 상태의 것이다.

천국의 생활을 세부적인 것까지 말하고저 이 책의 페이지를 할당하기에는 너무나 많은 바, 여기서는 윤곽만을 그리고 지나간다; 우선 그 곳의 삶이 진짜 삶이다는 것, 진짜 당신의 가족들이 거주한다는 것, 직업들(각자 할 일들)이 매우 다양하다는 것, 기쁨만을 언제나 선사하는 공동체와 모임들이 있다는 것이다. (특별한 것은), 거기에 많은 어린 아이들이 있다는 것, 그 이유는 유아기나 어린 아이 시절에 죽은 모두는 천국 안으로 직접 오고 거기서 성장하기 때문이다.

지옥은 기본적으로 천국에 반대되는 것들, 거기를 선택한 이들의 특성이 악인지라 그들의 파괴적 힘에 의해 (모두는) 총체적으로 (언제나) 찡그려져 있다. 거기에는 (주님께서 악한 자를 징벌하려 만든) 불, 유황(불), 또는 기분내키는대로의 임의적 처벌 등등이 없다; 악은 그것 고유의 사용료(toll)를 부담할 뿐이다; 지옥은 객관적으로 불행의 상태이다. 그러나 지옥에 있는 이들은 자신들을 위해 최고의 선택이었음을 자랑하고 있다.

3. 우리에게 있는 하느님의 말씀에 관하여 선각자에게 밝히 알린 기본 생각들

하느님이 언제나 설비해두시는 것은, 어느 시대를 무론하여 그 시대의 인간다움에 걸맞을 수 있는 신성한 진리의 밝힌(계시) 것을 관리하는 책무에 봉사하는 교회를 인류와 더불어 있게 하신 것이다. 우리가 아는 이 계시는 말씀(Word)이고, 이 말씀은 성경에서 발견되었다. 이 말씀을 수단으로 인류는 천국들과 계속적으로 연결된다. 그러므로 이 말씀에 있는 모두 각각의 표현들 안에 천국의 것들과 연관되는 내적 의미가 있다. 말씀이 내적 의미를 지닌 특성 때문에 말씀은 천국의 마음들과 인간의 마음들을 결합하게 한다.

많은(아마 대부분의) 기독인들이 이의 없이 이구동성 말하는 것은, 말씀은 신성의 호흡이 담겨 있다는(영감되어 있다, inspired) 것, 그러므로 거룩하다 이다. 그렇지만 선각자를 통한 이 계시 앞의 (시대에서) 경우, 말씀 안에서 어디에 말씀의 거룩함 또는 신성이 존재하는지를 알지 못했다. 그 이유가 말씀을 여느 책을 읽듯 평범히 읽는다면 (즉 글자 그대로의 의미에서의 경우라면), 여느 촌뜨기 작가의 저술 같고, 때로는 문체상 (문법도 모르고 씌어진 듯하여) 엇박자인 냥 보이고, 심지어는 현 시대의 저술 보다 수준이 미천한 듯까지 깍아서 평가할 수도 있는 책인 듯 비쳐지게 나타나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하느님을 예배하기를 선택하지 않든지, 또는 하느님 보다 세상의 것들을 존경하는 쪽을 선택하든지 하는 이들은 말씀에 관련해 거룩한 어떤 것이 있을 수 있다는 것마저 부정하는 오류 안으로 쉽사리 추락할는지 모른다. 짧게 말해, 이렇든 저렇든 각자는 말씀을 신성이 거주하는 책임을 수긍하던지 부정하던지는 그의 선택(의 잣대) 안에 있다는 말이다.

어쨌든, (순위에서) 자연 앞에 하느님을 두는 이들, 그리고 진짜로(순수하게) 진리를 찾는 이들은 글자에 있는 많은 서술문들이 주님의 말씀으로서 확인하여 그 글자들을 꾸준히 받아들이고 있다. 사실상 이들의 마음들은 계시(밝히 앎)의 필요와 실재 쪽으로 통찰력이 열려져 있다. 그 이유가 계시 없이 지식은 없고, 결과적으로 하느님을 인정함도 없기 때문이다. 사실상 주어져왔었던 계시를 통하여서만 사람들은 하느님에게 접근할 수 있어, 그분으로부터의 유입을 받고, 자연적 존재로부터 영적 존재로 되어질 수가 있었다.

말씀의 책들은 계속적이고 연결된 내적 의미를 가지는 모든 책들이다. 구약 성서 부분에 있는 이 말씀의 책들은 모세의 다섯 책들, 여호수아, 사사, 사무엘상하, 열왕기상하, 시편, 이사야, 예레미야, 애가, 에스겔, 다니엘, 호세아, 요엘, 아모스, 오바디야, 요나, 미가, 나훔, 하박국, 스바냐, 학개, 스가랴, 말라기; 그리고 신약 성서 부분에서는 마태, 마가, 누가, 요한, 계시록이다.

복음서들은 주님 자신의 말들을 포함한다, 이 말들 안에는 영적 의미들이 숨겨져 있고, 이 영적 의미들을 통하여 천국과의 교통이 가능하다. 사도들의 저술들(서간문)은 교회를 위해 유용하나, 내적 의미를 포함하고 있지는 않다.

말씀의 가장 바깥쪽, 또는 글자적 의미로부터의 모든 세부사항들은 감각 기관(sensory)에 의존하고 싶어하는 이들의 납득력에 적합해 있다, 고로 어린이들과 단순한 이들에게 (특별히) 안성마춤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글자 그대로의 의미의 대부분은 진리의 외관 (측면)들이다, 따라서 그것들이 계발된 이해력으로부터 지각되지 않으면, 그것들이 실제적으로 진리이다고 믿어져버림에 의해 거짓화 되어갈 수 있다. (단순한 자나 어린이들이 아닌 이들, 특히 지식인이라 자부하는 이들이다면) (마음만 먹으면) 거짓화 할 수 있는 위험성이 글자로 있는 많은 서술문의 도처에 산재해 있다. 예를 들면, 하느님은 성내신다, 그분은 시험하신다, 그분이 지옥으로 내던지신다 등등이다; 또한 마지막 심판에서 주님은 글자에 박힌 그대로 구름을 타고 땅 쪽으로 내려오신다… 태양과 달이 빛을 주지 않을 것… 별들은 추락할 것이다 등등도 있다. 이런 서술들은 자연계의 재난을 예보함들이 아니고, 어느 누구 안에서 거행될 수 있는 내적 바뀜들에 대한 상징들임을 알아볼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영적 투시 화법(perpective, 상관 관계, 견지, 시각, 원근법) 뿐이다.

글자 그대로의 의미가 이런저런 방법들에서 잘못 이해되어질 수 있기 때문에, 이 의미는 어떤 상해받음도 허용 않을는지 모르는 글자 안쪽에 숨겨 놓인 진짜 진리들 쪽으로 안내하는 역할로 봉사하고 있다. 이 개인은 이런 식으로 해서, 저 개인은 저런 식으로 해서 글자의 의미를 이해할 때라 해도 영속되는 피해는 있지 않다; 그러나 피해가 가해지는 때이다면, 신성한 진리에 반대하는 거짓들을 첨가할 때이다. 이 짓은 거짓들 안에 있는 자신이 정당하다 하여 그것을 입증하고자 말씀의 서술들을 선택하는 이들에 의하여 자행된다.

말씀 안에 있는 모두 각각의 개인, 장소, 어떤 것, 어떤 사건 등등은 어떤 영적 실재(reality)를 상징하고, 이 실체(reality)와 상응하고 있다. 이런저런 상응을 통한 의미들이 말씀의 영적 의미를 구성한다. 따라서 영적 의미는 글자 안에 나타나 있지 않다. 그것은 글자 그대로의 의미 내부에 있다. 마치 혼이 신체 안에 있는 경우, 지성의 생각이 눈 안에 있는 경우, 사랑의 애착이 얼굴 안에 있는 경우 같다. 말씀을 영적으로 만들어주는 것이 영적 의미이다. 영적 의미야 말로 진실로 주님의 말씀이다.
어쨌든, 글자 그대로의 의미 안에서 말씀은 그것의 충만함으로, 그것의 거룩함에서, 그리고 그것의 힘을 지니고 있다. 그 이유가 글자 그대로의 말씀은 안쪽에 있는 영적 의미들의 거처이자. 그릇들이고, 받침기둥이기 때문이다.

말씀 안에 있는 표현들은 그것들의 시리즈 안에 영적인 생각들을 포함하도록 씌어 있다. 이 영적 생각들은 글자를 읽는 자가 상응 지식에 친숙해 있지 않으면 그 사람에게 나타나지 않는 생각들이다. 이 방법에서 신성은 말씀 안에 감추여 놓여 있다.
상응들이 모든 힘을 가진다, 하여 상응에 따라서 땅 위에서 행하여진 것은 천국 안에서 직접적인 결과를 가진다, 그 이유는 상응은 신성으로부터 있기 때문이다. 사랑의 선과 신앙의 선 안에서 살아가는 이들은 “상응 안에” 있다 라고 말해진다, 그리고 신성은 이 당사자를 통하여, 그리고 당사자 안에서 행동하실 수 있다.

주님의 말씀은 목마른 개인, 생명을 바라는 개인에게 생명을 주고 있다. 이것은 요한의 복음서에서 가르치고 있다. 말씀은 살아 있다, 그래서 생명을 준다, 그 이유는 최고 의미에서 말씀은 주님과 그분의 왕국을 다루기 때문이다. 말씀에 있는 생명은 말씀을 읽는 당사자가 거룩함의 느낌을 갖게 하면서 당사자의 마음 안으로 흘러든다. 이렇기 때문에, 주님은 그분으로 있는 말씀 측면에서, 자신이 영원한 생명 안으로 솟아오르는 물의 원천이다고 선포하신다.

4. 우리 자신과 우리가 의도했던 운명에 관하여 선각자에게 밝히 알린 기본적 생각

사랑과 지혜, 그러므로 의도력과 분별력이 각자의 생명 자체를 구성한다. 생명이 무엇인지를 아는 자는 드문 편이다. 사람들이 그것에 관하여 생각할 때, 그것은 파악하기 어려운 것, 그것은 개념화에 도전하는 어떤 것인 듯하게 여긴다. 이렇게 응답하는 이유는 하느님 만이 생명이시다는 것, 그리고 그분의 생명은 신성한 사랑과 신성한 지혜이다를 실감 못 하기 때문이다. 이쯤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우리들 자신의 생명은 하느님의 생명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 그 이유는 우리가 그분으로부터 생명을 받는 만큼에서 우리가 생명을 가지기 때문이다. 사랑이 누군가로부터 쇠하여질 때 그는 나태해진다, 지혜가 쇠하여져 갈 때, 그는 무디어져 있다. 만일 이 두 가지가 동시에 쇠하여지면, 그는 말살되고 있다.

신성의 사랑은 이 사랑이 사랑하는 다른 존재들 안에서 이 사랑을 사랑한 당사자를 수단으로 현재의 것이 존재하고 있음과 되어감을 도울 수는 없다. 어쨌든 만일 이런저런 인간의 존재들이 자신들 안에 무한의 어떤 것, 또는 본질적 사랑으로부터의 실체와 생명의 어떤 것,또는 신성으로부터의 어떤 것을 가졌다면 위의 말함이 발생할 수 없었다. 만일 우리들 안에 무한하고 신성으로부터의 어떤 것이 실제로 있었다면, 하느님은 타인들에 의해 사랑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타인들)는 자신들만을 사랑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 이유가 무한 또는 신성은 특이하고 나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이유 때문에 서로의 사랑은 본질적 사랑으로부터의 어떤 것도 있지 않은 타인들과 더불어서만 발생할 수 있을 뿐이다.

인간의 존재, 본질적으로와 자아 측면 만에 집중한다면, 짐승으로부터 별반 다를 것이 없다. 즉, 오각도 매우 비슷하다, 식욕도, 자연적 수준의 바램들도, 뿐만 아니라 애착들도 피장파장일지 모른다. 개인의 최선의 사랑들조차 매우 비슷하다, 즉 동료를 사랑함, 자식을 사랑함, 결혼한 짝을 사랑함 등등에서 이다. 어쨌든 인간은 내면의 생명을 가지고 있음 덕분에 짐승 보다 상위에 있는다. 이 생명은 주님으로부터 파생된 사랑의 생명과 신앙의 생명이다. 만일 이것이 출석되지 않고 있다면, 그 개인은 결코 인간일 리가 없을 것이다. 더욱이 주님으로부터 이 생명을 통하여 그 개인은 사후 살고 있다.

모든 사람들은 각자의 마음에 속해 있는 내면들의 것에 관련되는 물질의 신체로 이 세계 안에서 옷을 입고 있는 영이다. 신체는 영의 생각함들의 방향과 영의 애착함들의 조절 아래 있다.

인간 종족, 위에서 명기한 대로, 천국이 설립되는 기초이다. 이런 이유로 인간의 창조는 마지막 번째에서 이었다, 그 이유가 마지막 번째가 앞서 창조한 것을 아우르는 기초이기 때문이다. 모든 창조가 하느님으로부터 오기에, 개인들은 신성의 질서의 형체들로 창조되어졌다.

사람들은 자연계와 영계가 외면적으로 결합(join)하게 하는 수단이다. 사실상, 개인이 영적 존재로 되는 정도에서, 그는 두 세계가 외면적, 내면적 결합(conjunction)을 위한 매체가 되어져 있는다.

인간의 혼(soul)은 당사자의 가장 깊고 가장 순도 높은 본질이다. 그러나 본질은 형체를 가져야만 한다, 그리고 혼은 사랑의 모든 것들의 형체로부터 애착(affection)들이라 불리우고, 지혜로부터의 모든 것들의 형체로부터 지각(perception)들이라 불리운다.

개인은 어떤 지식 안으로 태어나지 않는다, 총명 또는 지혜 안으로 태어나지는 것은 더더욱 아니고, 오직 그런 것들을 받는 수용력, 그리고 그것들을 빨아들이는 능력만을 지니고 태어난다. 이것은 두 겹의 방법에서 결과되어진다: 신성이 흘러드는 내적인 방법에 의해서; 세상이 흘러드는 외적인 방법에서 이다. 이것들이 개인 내부에서 만난다, 그리고 그때 개인이 신성에 의해 계발되기를 선택하는 정도에서 개인은 지혜의 상태 안으로 점진적으로 들어간다.

모두 각각의 개인은 자기를 성화(聖化, sanctification)함에서 자아가 인도할 수 있다 라는 환영(幻影, 착각, 잘못 생각함), 자아(selfhood, 이기심)로부터의 느낌, 감각을 가진다. 선각자는 이기심으로부터의 이런 저런 느낌을 “자아(proprium)”라는 단어로 언급하고 있다; 사실 개인을 두고 성화함이라는 단어 보다는 “거듭남”이 더 어울릴 것이다.

신성의 섭리인 것은, 개인은 이성에 일치하여 자유함으로부터 행동하는 것; 또한 개인이 생각하고, 뜻하고, 행동하는 것의 모두는 온전히 자아로부터 있게 나타나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나타남이 없다면, 어떤 것이 그의 것, 또는 자기 자신의 것임을 아무도 느낄 수 없을 것이고, 따라서 개인은 자신 고유의 개인일 수도 없게 되고 만다. 자아로부터의 이런저런 감각 없이 개인에게 귀속되는 것은 어떤 것도 있어질리 만무하고, 고로 개인은 선이든, 악이든 무엇을 행하든지 무관심, 또는 하느님을 믿든, 지옥의 꼬드김을 따라가든 무관심으로 일관되어지고 만다. 줄여 말해, 개인은 개인 당사자될 리 없고, 진실로 인간일 수도 없다는 말이다.

개혁되고 영적으로 되어가는 모든 이의 처음 상태는 그들이 주님에 의해 개혁됨을 믿지 않는 것, 그 대신 자신들에 의해 개혁됨을 믿는 것이다; 즉 선에 대한 모든 뜻함과 진리에 대한 모든 생각함이 자신으로부터 근원되었다고 믿는 것이다. 이 보다 한 술 더 떠진 것은, 주님께서 그들이 이런 상태 안에 있게 배려하시고 있으시다는 점이다. 그 이유는 만일 그가 자신 스스로 하고 있다 하지 않으면, 그는 개혁되어 질 수가 없기 때문이다. 실로, 만일 그들이 거듭남 이전에 너희들 스스로 선을 행할 수 없고, 진정한 어떤 것도 생각할 수 없다고 (주님으로부터) 말해졌었다면, 자기들은 의지와 생각 안으로의 유입을 기다려야 한다고 상상하는 실수로 붕괴되든지, 또는 만일 선과 진리가 자신들 안에서 근원되지 않는다면, 자신들은 기계 같은 처지이다고 상상하는 실수로 어떤 시도도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선과 진리가 자신들로부터 근원된다고 생각하는 것이 첫째로 허용되어야 한다.

그러나 거듭남의 과정이 한참 진행되면서 점차로 조금씩 가르쳐짐이 있어지는 것은, 예전의 자기 느낌과 생각함과 다른 것이 있다는 것, 즉 선하고 진정한 모든 것은 주님으로서만 100% 존재한다는 것이 당사자에게 슬금슬금 비쳐온다. 그리고 거듭남의 과정이 더 한참, 즉 완전함에 거의 접근하다시피 할 때, 당사자에게 주입되는 가르침은, 주님으로부터 있지 않는 것은 악이고 거짓이다는 것이다. 거듭나지고 있는 이들이라면, 그들의 이 세상의 삶 동안 가르쳐짐을 많이 깨닫지 못한 채 기한이 다 찰 경우, 다음 삶에서 이를 깨닫고, 그것을 지각함으로 보도록 인도 받는다.

인간의 자유 의지는 거듭남에 필수적이다. 개인이 모든 애착들과 모든 생각함들에 관련하여 내면적으로 자유함 안에 있지 않으면, 개인은 선과 진리가 뿌리내릴 수 있는 질서 안에 결코 놓여질 수 없다. 이 자유함은 양쪽에 놓여지는 무게가 평형을 이루는 천칭(저울)에 유추되는 방식에서 주님에 의해 유지되어진다. 비슷한 방식에서 주님은 모두 각각의 개인에 대한 선과 악의 영향력이 균형을 맞추고 있게 유지하신다. 그러나 개인은 이에 대해 의식하지 못 한다, 하느님의 선물 중의 하나인 것은, 개인은 자신의 생명을 두고 그것은 자신 고유의 것이다라고 느껴야 한다는 것, 우리가 그것을 그렇게 느끼는 것이 하느님의 뜻이다는 것이다. 이러한 즉, 우리가 말씀에 있는 질서의 법들에 일치하여 살기를 선택할 때, 고로 하느님의 사랑을 받아들이기로 작정함이 온전히 우리 자신으로부터 임을 우리가 느낄는지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은 그분의 손가락을 천칭 위쪽에서 직각으로 세우시어 유지하시면서 선택의 우리의 자유함을 알맞아지도록 조절해주시지만, 그렇다고 강제적 수단으로 자유를 침범하시는 일은 결코 없으시다.

하느님은 악을 창조하시지 않으셨다, 그러나 질서 안에서 실제의 선택들이 인류로 그것을 받아들이도록 허용해버렸을는지 모른다. 만일 사람들이 하느님이 처음 그들을 창조했던 사랑 안으로 태어나졌다면, 어떤 악도 있지 않았을 뿐 아니라, 사람들은 악이 무엇인지도 모르기조차 하여 있었을 것이다. (애당초) 우리가 창조되어진 사랑은 이웃을 사랑함으로부터의 사랑이다. 고로 우리는 우리 자신 만큼, 아니 그보다 더 많이 이웃을 사랑하는 것을 배울는지 모른다, 그리고 이웃에 선을 행함에서 기쁨을 발견할 것이다. 이 사랑이 진실로 인간이다, 그 이유는 이 사랑 안에 짐승으로부터 발견되는 자연적 수준의 사랑과 구별되는 영적 수준의 요소들이 있기 때문이다.

“원죄” 또는 “유전적 악” 같은 것은 없다. 누구도 실제의 악들 안으로 태어나지지 않는다, 그러나 특별한 악들을 향한 다소의 경향과 더불어 악들을 향한 경향성만 지니고 태어난다. 결과적으로, 사후 개인은 악들을 향한 어떤 유전적 경향성으로부터 판단되어지지 않고, 개인이 동의함에서 받아들이고 행동했던 실제의 악들로부터 만 이다.

우리가 실제의 선을 상속하지 않고, 선이 되어질 경향성만이 상속 가능하다는 것도 위와 동일하게 진정하다. 천성적으로 자연적 선과 친절함을 향유한 듯 여겨지는 이들, 그리고 타인에게 선을 행함을 타고

난 듯 실행하는 이들이라 여기지는 이들을 목격하는 때도 있다. 그러나 이런 이들이라 해도 그들이 말씀으로부터 선을 행함에 관한 원리들을 동시에 흡입하지 않으면, 그들은 양심을 발달시키지 못한다, 그 이유는 양심은 자연적 선, 또는 유전적 선에 대한 경향성과 그것에 일치하는 생명으로부터 오지 않기 때문이다. 만일 어떤 개인들이 이런 상태에서 영적 세계 안으로 온다면, 그들은 자기들에게 강하게 인상지우는 선과 진리의 원리들을 가지는 것을 포함하여, 테스트되고 심리되는 어려운 과정을 통과해야만 한다. 이 방법에서만이 그들은 천국의 양심을 받을 수 있다.

이른 바, 천국행의 삶을 사는 것은 여느 사람들이 믿는 것 만큼 고되고 힘든 삶이 아니다. 혹 자는 생각한다, 영적 삶을 영위하는 것은 힘든 것이다, 그 이유는 세상을 포기함이 필요하기 때문, 신체와 육에 연합된 식욕들을 포기해야 하기 때문, 그리고 영적 존재들 같이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이들은 이것은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을 거절함을 뜻하는 것으로 받는다, 뾰족하게는 재물과 명성을 거절하는 것, 그리고 하느님, 구원, 영원한 생명에 관하여 꾸준히 경건하게 묵상하는 것, 그들의 생활은 기도함과 말씀을 읽는 것, 여타 경건하다는 저서들을 읽는데 있다고 생각한다는 말이다.

그러나 선각자는 말한다, (그가 저 세계로부터의) 풍부한 경험과 천사들과의 토론은 그로 하여금 위와 상황이 완전 다르다는 것을 알게 해주었다. 사실상, 이 세상을 포기하고, 포기하는 식으로 살았던 사람들이 천국의 환희를 받지 못하는 자신들 때문에 슬픔에 잠긴 삶을 저 세상에서 건설하고 있다. 모두 각각의 개인의 (이 세상에서의) 삶은 그 개인과 더불어 (저 세상에서도 당사자에게) 머물고 있다. 그 이유가 천국의 삶을 받아들이려면 개인은 이 세상에서 그것과 대등한 삶을 살고 있었어야만 했었기 때문이다. 이 세상 삶의 과정에서 있는 시민적, 도덕적 생활을 수단으로 개인은 영적 생명을 획득한다, 사실상, 이 방법만이 영적 생명이 개인 안에서 만들어지게 할 수 있다, 또는 개인의 영이 천국을 위하여 준비되게 해줄 것이다.

천국행으로 인도하는 생활은 실제로 놀라우리만치 단순하다. 당신이 부정직하고 불공정하다고 아는 방법으로 어떤 것을 얻을 때, 특히 당신의 영이 그런 쪽으로 향하여 움직이려 들 때, 당신에게 필요한 딱 하나는 그것이 하느님의 가르침에 반대되기 때문에 행해져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런 방식으로 대수롭지 않다 여겨지는 사소한 악과 거짓으로부터의 것을 부딪치더라도 대수롭지 않은 것이라 여기지 않고 오히려 중요하게 여기며 하나하나를 처리해 소화해나간다면, 점차 당신은 천국 쪽에 당신의 발을 디밀고 있다. 이러할 때 당신의 더 높은 수준의 마음들이 열리어져서 어떤 것이 부정직하고 불공정한 것인지를 뚜렷이 보게 된다; 그리고 그런 것들을 보았을 때, 단번에 그것들을 부수어버릴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모든 이가 인간의 자유 의지 때문에 획득할 수 있는 영적 상태 쪽으로 당신을 인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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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도서들의 대부분은 발행자, 역자가 출판의 모든 과정을 직접 완료한 책이므로 우선 많은 책이 쌓여 있지 않고 부족할 때마다 몇 십권씩 추가로 출판하고 있습니다. 또한 책의 단가는 여느 시중의 책의 단가와는 달리 순수 재료비만을 계상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여느 복사 비용보다 저렴할지 모릅니다. 따라서 이 출판사의 책은 팔릴 때마다 조금씩 적자를 볼 수밖에 없지만, 이 출판사의 바램은 이익 창출이 아니라 이 귀중한 지식을 공유하는 것, 더불어 이 귀중한 지식이 많은 분들의 손 안에, 책꽃이에 있어 필요시 언제나 읽기를 바램에서, 또한 이 지식의 습득은 여느 소설이나 수필집을 대하듯 하여서는 즉각 이해
에 와닿지 않는 결점이 있기에, 어쩌면 시험 공부하듯 노력함이 곁들여야 하기에 전자책이나 전화기나 컴퓨터 다운에 앞서 종이책 구입을 권장하는 차원에서 출판 사업을 펴고 있습니다.

펴내는 자: 한광숙, 배제형
펴낸곳: 도서 출판 벽옥
등록: 제 2016-000002호
주소: 전남 화순군 화순읍 안양산로 31-5
전화: 010-4738-1711
홈페이지: baysidechurch.org
biblestudynoteblog.wordpress.com
역자 E-mail : jeandsook@gmail.com

각 도서와 가격

** 각 도서는 대체로 양장본으로 제본하려 노력하고 있습니다. 또한 위 인터넷 주소에서 책을 만나볼 수 있고 다운받아 직접 제본도 가능할 것입니다.

1. 번역 서적

말씀의 합리적 이해 (전 6권. 각 430여쪽) 값 각 권 12000원
비유 (796쪽) 값 25000원
신약 비유 해석 (516쪽) 값 15000원
구약 비유 해석 (394쪽) 값 15000원
이스라엘의 첫 세 왕 (576쪽) 값 15000원
마태복음 해석 (736쪽) 값 15000원
요한복음 해석 (640쪽) 값 15000원
요한계시록 해석 (513쪽) 값 15000원
바이블 스터디 노트 (전 4권, 각 권 평균 650여쪽) 값 각 권 15000원
성경 공과 (전 24권, 각 권 평균 234쪽) 값 각 권 5000원
창세기 요약 해석 (401쪽) 값 15000원
레위기 해석 (526쪽) 값 15000원
영, 한글 구약 성경 (창세기, 출애굽기 340쪽) 값 5000원
영, 한글 신약 성경 (4 복음, 계시록 406쪽) 값 5000원
성경 상응 사전 (1082쪽) 값 25000원
헬렌 켈러의 신앙 간증 (126쪽) 값 5000원
죽음 그 이후 영들의 세계 그리고 천국과 지옥 (132쪽) 값 5000원
새 예루살렘 그리고 그곳의 교리 (100쪽) 값 5000원
천국의 비밀들 (전 12권 각 500여쪽) 값 각 권 20000원
창세기 해석 (전 5권 각 550-630여쪽) 값 각 권 15000원
성경 연구 (전 6권 각 430-480여쪽) 값 각 권 15000원

2. 원서

선각자의 필적이 담긴 쉬밑의 라틴 성경 (900쪽) 값 25000원
알카나 세레스티아 (쟌 엘리엇 영역)
알카나 세레스티아 (쟌 클라우 영역, 쟌 폿스 수정) 값 각 권 20000원
* 이 외의 원서의 종이책 재출판도 준비 중에 있습니다.
* 위 엘리엇 영역본은 copyright이 있을 것 같아서 출판을 미루고 있는 바, 필요한 분은 인터넷 검색이 가능하므로 연락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