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제 1장

제 1 장

1절. 시작에서 하느님께서는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다. 최 고대의 시간이 ‘시작’이라 불리운다. 이는 예언자들에 의해 여러 구절들에서 “옛(것)의 날들”, 그리고 또한 “영원의 날들”로 불리우고 있다. “시작”은 또한 인간이 거듭나지고 있는 때에서 첫 기간을 포함하는데, 그 이유는 그 때 인간은 새로이 태어나지고, 생명을 받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거듭남 자체는 인간의 “새로운 창조”라고 불리운다. 예언서의 거의 모든 부분들에 있는 “창조”, “형성”, “만듦”이라는 단어가 의미에서는 약간씩 차이는 보이지만 대체로 거듭남을 의미하고 있다. 이사야서의 경우:
내 이름을 수단으로 불리우는 모든 자(를), 나는 내 영광을 위해 그를 창조 했고,
나는 그에게 모양을 주었다, 그렇다, 나는 그를 만들었다 (이. 43:7).
그러므로 주님은 “되찾으시는 분,” “자궁으로부터 모양을 주시는 분,” “만드시는 분,” 그리고 또한 “창조하시는 분”이시라 불리운다; 이사야에서
나는 여호와 네 거룩한 자, 이스라엘의 창조자, 네 왕이다 (이. 43:15).
다윗에서:
창조된 사람들이 야(Jah)를 찬양할 것이다 (시. 102:18).
당신은 당신의 영을 내보내시고, 그들이 창조되어지고, 그리고 당신은 지면의
얼굴들을 새로이 하십니다 (시. 104:30).
“하늘”이 내적 인간을, “땅”이 외적 인간을 의미하고 있는 것은 뒤이어지는 구절로부터 알게 될런지 모른다.

2절. 땅은 공허하고 텅비었고, 그리고 짙은 어둠이 깊음의 얼굴들 위에 있었다. 그리고 하느님의 영이 물들의 얼굴들 위에서 움직이셨다. 인간의 거듭남 이전, 그는 “공허하고 텅빈 땅”이라 불리우는데, 또한 선과 진리가 전혀 씨뿌려지지 않았던 “지면”이라고도 불리운다; “공허하다”는 선에 관한 것이, “텅비다”는 진리에 관한 것이 씨뿌려지지 않았다는 말이다. 이로 인해 “짙은 어둠”이 오는데, 즉 우둔함, 그리고 주님에 관한 신앙에 속하는 모든 것에 무지함, 그 결과 영적 측면에 속하는 모든 것과 천국의 생명에 무지함(이다). 이런 인간을 예레미야를 통해 주님께서 이렇게 묘사하신다:
내 백성들은 우둔하다, 그들은 나를 알지 못해왔다; 그들은 어리석은 아들들이다,
그리고 총명하지 않다; 그들은 악을 행하는데는 영리하다, 그러나 선을 행하기 위해서
그들은 지식을 가지고 있지 않다. 나는 땅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보라 공허하고
텅빔(이다), 그리고 하늘들, 그리고 그것들은 빛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예. 4:22-23).

“깊음의 얼굴들”은 거듭나지 않고 있는 인간의 욕망들(craving, 또는 탐욕들). 그리고 거기로부터 근원하는 거짓들이다. 이 욕망들과 거짓으로 거듭나지 않고 있는 자는 전적으로 되어있고, 이 안에 완전히 침수되어 있다. 이 상태는 빛을 가지지 못하는 바, 그는 “깊음”, 또는 불명확하고 혼돈된 어떤 것과 같다. 또한 이런 인물들은 말씀의 여러 구절들에서 “깊은 곳”, 그리고 “바다의 깊은 곳”이라 불리는데, 이것이 인간이 거듭나기 전, “말라붙어 있다,” 또는 “황폐되어 있다.” 이사야의 경우:
고대의 날들 안에서, 옛 세대들 안에서와 같이 눈뜨고 있게 하소서.
당신은 바다, 큰 깊은 곳의 물들을 말라붙게 하신 그분, 몸값을 치루고
되찾는 자가 건너 가도록 바다의 깊은 곳을 길로 만드신 그분 아닙니까?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되찾은 자가 돌아올 것입니다 (이. 51:9-11).
위와 같은 사람이 천국으로부터 보여질 경우, 생명력이 결여된 검은 덩어리 같이 나타난다. 같은 방식의 표현들이 예언자들에 의해 자주 말해지는데, 인간의 황폐함을 포함한다. 이것은 거듭남에 앞서 있다; 그 이유가 인간이 참된 것을 알고, 선인 것으로 감동 받기 전, 참된 것과 선인 것이 들어옴에 저항하고 방해하는 이것 저것들이 반드시 제거되어 있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새 인간이 임신되어질 수 있기 앞서, 반드시 옛 인간은 죽을 필요가 있다.

“하느님의 영”을 수단으로 주님의 자비가 뜻해진다. 이 영이 “움직인다,” 또는 암탉이 그녀의 알들을 품듯이 “품으신다” 라고 말해지고 있다. 하느님의 영을 움직이게 하는 것은 주님께서 인간 안에 감추여 있게 하신 것, 또는 소중히 보관하시는 것에 해당하는 것이다. 이것은 말씀 안에서 두루 리메인스(remains, 아껴두신 것), 남아 있게 하신 것(remnant)이라 일컬어지는데, 이것은 참된 것과 선인 것에 관한 지식들로 구성되어 있다. 이것은 인간의 외적인 것들이 깡그리 피폐될 때까지 빛 또는 낮 안으로 결코 와지지 않는다, 이 지식들이 이 구절에서 “물들의 얼굴들”이라 불리운다.

3절. 하느님께서 말하셨다, 빛이 있으라, 그리고 빛이 있었다.
첫 상태는 선인 것과 참된 것이 더 높은 어떤 것임을 알기 시작할 때이다. 인간의 외적 측면은 모두 다 선하고 참된 것이 무엇인지를 알려고도 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그것들은 자아를 사랑함과 세상을 사랑함에 속하는 모든 것들을 두고도 선이라고 공상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아 사랑과 세상 사랑에 호의를 보이는 모든 것들을 참된 것이라고 공상한다; 하여 (공상한) 이런 선들이 악들이고, 이런 진리들이 거짓들임은 눈치채지도 못한다. 그러나 인간이 새로운 것을 마음에 품을 때, 그는 먼저 자기의 선들이 선들이 아님을 알기 시작한다, 그리고 또한, 그가 빛 안으로 올 때, 주님이 계신다는 것, 그리고 그분이 선과 진리 자체이심을 (알게 된다). 인간들은 주님이 실재하심을 알아야 한다는 것을 그분 자신께서 요한 복음에서 이렇게 가르치신다:
너희는 내가 있다는 것을 믿지 않으면, 너희는 너희 죄들 안에서 죽을 것이다 (요. 8:24).
또한, 주님이 선 자체, 또는 생명, 그리고 진리 자체, 또는 빛이시다, 그 결과 주님으로부터가 아니면 선도, 진리도 있지 않다는 것을 이렇게 선포하셨다:
시작에서 말씀이 계셨다, 그리고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다, 그리고 하느님은
말씀이셨다…모든 것들이 그분에 의해 만들어졌다, 그리고 그분 없이 만들어졌던
어떤 것도 있지 않았다. 그분 안에 생명이 있었다, 그리고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그리고 이 빛이 어둠 안에서 빛나고 있다. 그분은 참 빛이셨다,
이 참 빛이 세상 안으로 오는 모두 각각의 사람을 비추고 있다 (요. 1:1, 3-4, 9).

4, 5절. 그리고 하느님께서 빛을 보셨더니, 그것은 선이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빛과 어둠 사이를 구별하셨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빛을 낮이라 부르시고 어둠을 밤이라 부르셨다. 그리고 저녁과 아침은 첫째 날 이었다. 빛이 “선”이라 불리운다, 그 이유는 빛이 선 자체 이신 주님으로부터 있기 때문이다. “어둠”은 인간에게 새로운 것이 임신되어 태어나기 전, 빛인 듯 나타났던 이런 저런 모든 것들을 뜻한다. 그 이유는 악이 선 인듯, 거짓이 진리인 듯 나타났었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어둠인데, 인간 자신에 어울리는 것들로만 구성되어 있고, 인간에게 여전히 남아있는 것들이다. 주님으로부터 있는 것은 무엇이든 “낮”에 비교되는데, 그 이유는 낮은 빛 속에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인간 고유에 속한 것은 무엇이든 “밤”에 비교되는데, 그 이유는 밤은 어둠 속에 있기 때문이다. 이런 비교함들은 말씀 안에서 자주 발생한다.

5절. 그리고 저녁과 아침은 첫째 날 이었다. “저녁”을 수단으로, “아침”을 수단으로 뜻해지는 것이 지금 식별되어질 수 있다. “저녁”은 앞서 있는 모두 각각의 상태를 뜻하는데, 그 이유는 저녁이 그늘의 상태, 또는 거짓으로부터와 신앙 없음으로부터의 상태이기 때문이다; “아침”은 이후의 모두 각각의 상태, 빛 속의 것, 또는 진리로부터와 신앙에 관한 지식으로부터의 것이다. 일반적 의미에서 “저녁”은 인간 고유에 속해 있는 모든 것들을 의미한다; 그러나 “아침”은 주님으로부터 있는 것 모두를 말하는데, 다윗을 통해 이렇게 말해졌다:
여호와의 영이 내 안에서 이야기하셨다, 그리고 그분의 말이 내 혀 위에 있었다;
이스라엘의 하느님이 말하셨다, 이스라엘의 바위가 나에게 이야기하셨다. 그분은
태양이 올라오고, 구름들 없는 아침 일 때, 밝게 빛나심으로부터, 비를 주심으로부터
부드러운 풀잎이 땅으로부터 밖으로 솟구치는 때의 빛 같이 계신다 (삼하 23:2-4).
“저녁”은 신앙이 없을 때, 그리고 “아침”은 신앙이 있는 때인 바, 세상에 주님의 오심이 “아침”이라 불리운다; 그리고 그분이 오시는 때에 신앙이 없기 때문에, “저녁”이라 불리우기에, 다니엘서에서:
거룩한 자가 나에게 말했다, 저녁 조차 그것이 아침이 되는 때,
이천 삼백(일) (단. 8:14, 26).
마찬가지로 이 구절의 말씀에서도 “아침”이 주님의 모두 각각의 오심을 표시하기 위해 사용되어지고 있다; 결과적으로 아침은 새로운 창조에 관한 표현인 것이다.

“날”이 때 자체를 표시하기 위해 사용되는데 말씀에서 이보다 더 공통되는 표시함은 아무 것도 없을 것이다. 이를 위해 이사야서를 보자:
여호와의 날이 가까이 있다. 잘 보라, 여호와의 날이 온다. 나는 천국들을 흔들 것이다,
땅은 내 성남의 분노의 날에 그녀장소로부터 흔들릴 것이다. 그녀의 때는 오는 것
근처에 있다, 그리고 그녀의 날들은 오래 끌어지지 않을 것이다 (이. 13:6, 9, 13, 22).
그녀의 오랜 것은 고대의 날들로부터 이다. 그리고 두로는 왕 한명의 날들에 따라
칠십 년을 잊혀져 있을 그 날이 올 것이다 (이. 23:7, 15).
“날”이 때를 표시하기 위해 사용되는 바, 때는 그 때의 상태 또한 표시하는데 사용되어지고 있다. 예레미야서를 보자:
우리에게 화있다, 그 이유는 날이 기울었기 때문, 그 이유가 저녁의 그림자들이
뻗쳐져 있기 때문이다 (예. 6:4).
그리고 다른 구절에서:
만일 너희가 날에 관한 내 언약, 그리고 밤에 관한 내 언약을 헛되이 만들 것이다면,
그들의 계절에는 낮도 밤도 있지 않을 것이다 (예. 23:20, 또한 25).
그리고 다른 구절에서:
옛 것으로부터 이듯 하여지게, 우리의 날들을 갱신하소서 (애. 5:21).

6절. 그리고 하느님께서 말하셨다, 물들 한가운데 광활한 공간이 있고, 그것이 물들 안에서 물들 사이를 구별되게 하라. 하느님의 영, 또는 주님의 자비가 낮 안으로 참된 것에 관한 지식들과 선인 것에 관한 지식들을 낳고, 그리고 주님이 계시다는 것, 그분이 선 자체, 진리 자체 이시다는 것, 그분으로부터가 아니면 선과 진리는 없다는 첫째가는 이 빛들이 주어진 후, 그 다음 그분은 내적 측면과 외적 측면 사이에, 결과적으로 내적 인간 안에 있는 지식들과 외적 인간 안에 있는 기억 속의 지식들 사이에 구별을 만드신다. 내적 인간은 또한 “광활한 공간”이라 불리운다; 내적 인간 안에 있는 지식들이 “광활한 공간 위쪽의 물들”이라 불리운다; 그리고 외적 인간의 기억 속의 지식들은 “광활한 공간 아래쪽의 물들”이라 불리운다.
인간은 거듭나지고 있음 이전 일 경우, 그는 어떤 내적 인간이 존재하는지 조차 모르고, 그는 내적 인간의 본성과 품질에 대하여는 아주 많이 덜 친숙해 있다. 그는 내적 인간과 외적 인간이 서로로부터 구분되어 있지 않다고 상상한다. 그 이유가, 육체적이고 세상적인 것들 안에 침수된 상태에서 그의 내적 인간 역시 그것들 안에 침수되어 있기 때문이다. 하여, 구분된 것이 혼동되고 불명료한 단일체를 구성하고 있다. 그러므로 첫 번째 말해졌다, “물들 한가운데 광활한 공간이 있어라,” 그리고 그 다음, “물들 안에서 물들 사이에 구별이 있게 하자”; 그 뿐만이 아니다, “광활한 공간 아래 있는 물들과 광활한 공간 위에 있는 물들 사이에 구별이 있게 하자,” 이는 다음 절에서 말해진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광활한 공간을 만드셨다, 그리고 광활한 공간 아래에 있는
물들과 광활한 공간 위에 있는 물들 사이에 구분을 만드셨다. 그리고 그것은
그렇게 있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광활한 공간을 천국이라 부르셨다 (창. 1:7-8).
인간이 거듭남의 과정에서 주목하는 다음 것은 그가 내적 인간이 있다는 것, 또는 내적 인간 안에 있는 것들은 선들과 진리들이고, 이것들은 주님 만으로부터 있다는 것을 알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거듭나아져 가고 있는 때에도, 외적 인간은 여전히 선들은 자신으로부터 행해진 것, 진리들은 자신으로부터 말해지고 있다고 상상하는 본성 속에 있다. 인간이 주님의 그것들을 수단으로 인도되어지나 마치 자신 속의 것들을 수단으로 인도되는 듯 하여 선인 것을 행하고, 진리인 것을 말하는 까닭에, 7절에서도 광활한 공간 아래의 물들에 관한 구분이 먼저 언급되고, 그 뒤에 광활한 공간 위의 물들에 관한 언급이 있다. 인간은 자신 속의 것들을 수단으로, 감각들의 오류들을 수단으로, 뿐 아니라 탐욕들을 수단으로 인도되어지고, (그것이) 주님에 의해 참되고 선한 쪽으로 구부려진다는 것 또한 천국의 신비이다, 하여 거듭남의 모든 움직임과 순간 하나하나, 일반적, 세부적으로 공히 저녁으로부터 아침까지, 고로 외적 인간으로부터 내적 인간으로, 또는 “땅”으로부터 “하늘”로 진행된다. 그러므로 광활한 공간, 또는 내적 인간이 지금은 “천국”이라 불려진다.

“땅을 뻗는 것과 천국들을 뻗치는 것”이라 말하는 것은 거듭남을 취급할 때 예언자들이 흔히 사용하는 형체이다. 이사야서를 보자:
고로 여호와 너를 되찾으시는 분, 그리고 자궁으로부터 네게 모양을 주신 그분이
말하신다; 나는 모든 것들을 만드는 여호와, 나 자신 천국들 만을 뻗어 나아가게
하는 여호와, 땅을 널리 뻗게 하는 여호와이시다 (이. 44:24).
그리고 다시, 주님의 강림이 공개적으로 말해지는 대목에서:
상한 갈대를 그분은 부러뜨리시지 않는다, 그리고 연기나는 심지를 그분은 꺼지게
하시지 않는다; 그분은 심판을 진리 쪽에서 낳으실 것이다 (이. 42:3).
즉, 그분은 오류들을 부러뜨리시지 않고, 탐욕들을 꺼지게 하시지 않으나, 그것들을 선하고 참된 것 쪽으로 구부리신다; 그러므로 뒤잇는 바:
여호와 하느님께서 천국들을 창조하신다, 그리고 그것들을 뻗쳐지게 하신다;
그분은 땅을 뻗게 하신다, 그리고 땅으로부터 소출(을 내신다); 그분은 그것 위의
사람들에게 숨을 주신다, 그리고 그 안에서 걷는 그들에게 영(을 주신다) (이. 42:3-5).
같은 취지를 두고 다른 구절들을 나열함으로 인한 중복된 언급은 삼갈 것이다.
8절. “저녁과 아침은 둘째 날이었다.” “저녁,” “아침,” 그리고 “날”에 관한 뜻은 위 5절에서 언급된 바 있다.

9절. 그리고 하느님께서 말하셨다. 하늘 아래에 있는 물은 모두 한 장소로 모이고, 마른 [토지]가 나타나게 하자. 그리고 그렇게 되었다. 내적 인간과 외적 인간이 있다는 것, 진리들과 선들이 주님으로부터, 내적 인간으로부터, 내적 인간을 통하여 외적 인간에게 흘러든다는 것이 알려질 때, 비록 그것이 그렇게 나타나지지 않을지라도, 그 다음 이런 진리들과 선들, 또는 거듭나고 있는 인간 안에 있는 선하고 참된 것에 관한 지식들은 인간의 기억 안에 저장된다, 그리고 기억 속의 지식들 안에 분류되어져 저장된다; 그 이유가 외적 인간의 기억 안으로 은근히 심어진 것, 그것이 자연적인 것이든, 영적인 것이든, 천적인 것이든, 무엇이든 (일단은) 기억 속의 지식들로서 거기에 머무른다, 그리고 거기로부터 주님에 의해 (꺼내져) 나와진다. 이런 지식들이 “한 장소로 다함께 모아진 물들”이고, “바다들”이라 불리운다. 그러나 외적 인간 자신은 “마른 [토지]”로 불리우나, 다음 절에서 즉시 “땅”이라 불린다.

10절.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마른 [토지]를 땅이라 부르셨다. 그리고 물들이 함께 모인 것을 바다들이라 부르셨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보셨더니 그것은 선 이었다. “물들”이 지식들을 의미하는 것은 말씀에서는 매우 흔히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로 “바다”는 지식들이 수집됨을 의미한다. 이사야서를 보자:
땅은 물들이 바다를 덮듯 여호와에 관한 지식들로 가득할 것이다 (이. 11:9).
그리고 같은 예언서에서, 지식들의 결핍이 취급되어진다:
물들이 바다로부터 실패할 것이다, 그리고 강이 말라붙되 깡그리 말라질 것이다,
그리고 시내들이 물러날 것이다 (이. 19:5-6).
새로운 교회에 관해 이야기하는 학개서에서:
나는 천국들과 땅, 그리고 바다 그리고 마른 [토지]를 흔들 것이다; 그리고 나는
모든 민족들을 흔들 것이다; 그리고 모든 민족들의 바람이 올 것이다; 그리고
나는 이 집을 영광으로 채울 것이다 (학. 2:6-7).
그리고 거듭남의 과정 안에 있는 사람에 관하여, 스가랴서에서:
거기 한 날이 있을 것이다, 그 날이 여호와에게 알려질 것이다; 낮도 아니고,
밤도 아니다; 그러나 저녁 때에 비쳐짐이 있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날에 생명 있는
물들이 예루살렘으로부터 나갈 것이다, 그것의 한쪽 부분은 동쪽의 바다를 향하여,
그리고 그것들의 한쪽은 뒤쪽의 바다를 향하여 (나갈 것이다) (슥. 14:7-8).
거듭나져서 여호와를 예배할 황폐한 사람을 다윗이 묘사하고 있다:
여호와께서는 그분이 가둔 자들을 경멸하시지 않는다; 천국들과 땅, 바다와 바다
안에서 기는 모든 것이 그분을 찬양 할 것이다 (시. 69:33-34).
“땅”이 (받아 담는) 용기를 의미한다는 것은 스가랴서로부터 나타난다:
여호와께서 천국들을 뻗치게 하신다, 그리고 땅의 기초들을 놓으신다, 그리고
그분의 한 가운데에서 인간의 영에 모양을 주신다 (슥. 12:1).

11, 12절. 하느님께서 말하셨다, 땅은 부드러운 풀잎을 내고, 풀잎은 씨를 산출하라, 그리고 과일 나무는 땅에서 본질적으로 씨가 있는 과일을 그 종류대로 맺으라. 그리고 그것은 그렇게 있었다. 그래서 땅은 부드러운 풀잎, 그 종류대로 씨를 맺는 풀잎을, 본질적으로 씨가 있는 열매를 맺는 나무를 내놓았다. 하느님께서 보셨더니 이것은 선이었다. “땅” 또는 인간이 주님으로부터인 천적인 씨들을 받고 선하고 참된 것으로부터의 어떤 것을 생산할 준비가 되었을 때, 그 다음 주님께서는 먼저 부드러운 것이 솟아오르게 하시는데, 이것이 “부드러운 풀잎”이라 불리운다; 그 다음 더 쓸모있는 어떤 것, 이는 그 자체 안에 씨를 다시 맺는데, “씨를 산출하는 풀잎”이라 불리운다; 그리고 드디어 열매가 많이 열리게 되는 선으로부터의 어떤 것이 그것의 종류에 따라 각각 “자체 안에 씨를 가진 과일을 맺는 나무”라 불리운다. 거듭나아지고 있는 인간이 처음 가지는 품질은, 자기가 행하는 선, 자기가 말하는 진리가 자기로부터 이다 라고 상상하는 것, 실재로 모든 선과 모든 진리는 주님으로부터 있어도 그는 그렇게 상상한다. 하여 그것들이 자신으로부터 있다고 상상하는 누구이든지 그는 아직까지는 진정한 신앙으로부터의 생명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럼에도 그는 이후에 (생명을) 받을런지 모른다; 그 이유는 그가 아직까지는 그것들이 주님으로부터 있다 라고 믿을 수 없기 때문에, 그는 신앙으로부터의 생명을 받도록 준비하는 상태에 아직은 머물고 있기 때문이다. 이 상태가 여기서 생명 없는 것들을 수단으로 표현되어져 있다, 그리고 신앙으로부터의 생명의 계속됨이 생명 있는 것들을 수단으로 표현되어진다.
씨뿌리시는 그분은 주님이시고, “씨”는 그분의 말씀이다, 그리고 “땅”은 인간이다. 이에 대하여는 그분 자신이 선포해주셨다 (마 13:19-24, 37-39; 막 4:14-21; 눅 8:11-16). 세 복음 모두 대체로 이렇게 묘사되고 있다:
하느님 왕국은 이러한 바, 마치 땅에 씨를 던지는 사람 같다, 그리고 잠들고
밤과 낮이 일어난다, 그리고 씨는 성장하여 일어선다, 그는 어떻게를 알지 못한다;
그 이유가 땅이 그녀 자신으로부터의 열매를 가져다 주기 때문인데, 먼저,
싹을 내고, 그 다음 이삭, 그 후 이삭 안에 알찬 곡식(을 가져다 놓는다) (막 4:26-28).
“하느님의 왕국”을 수단으로, 보편적 의미에서 천국 전체가 뜻해진다; 덜 보편적 의미에서, 주님의 진정한 교회; 그리고 세부적 의미에서, 진정한 신앙 속에 있는 모든 이, 또는 신앙 속의 생명을 수단으로 거듭나진 모든 이(가 뜻해진다). 그러므로 이와같은 인물 역시 “천국”이라 불려지는데, 그 이유는 하느님의 왕국이 그 사람 안에 있기 때문이다. 이를 주님께서 누가복음에서 가르치신다:
바리새인들이 언제 하느님의 왕국이 올 것이냐고 그분에게 요구했을 때, 그분은
그들에게 대답하여 말하셨다, 하느님의 왕국은 눈에 보이게 오지 않는다:
그들이 말한다, 오 여기다, 또는 오, 저기다! (그러나) 아니다. 그 이유가 잘 보라,
하느님의 왕국은 너희의 안쪽에 있기 때문이다 (눅 17:20-21)..
이것은 인간의 거듭남에 관한 세 번째 무대(단계), 즉 회개하는 인간의 상태이다, 그리고 (이 상태 역시) 같은 방식, 즉 그늘로부터 빛으로, 또는 저녁으로부터 아침으로 진행한다;

그러므로 (13절에서) 말해진다. “그리고 저녁과 아침은 셋째 날 이었다.”

14-17절. 그리고 하느님께서 말하셨다. 하늘들의 광활한 공간에 발광체들이 있어 낮과 밤이 구별되게 하라, 그리고 그것들을 표시와 계절과 날과 해를 위해 있게 하라. 15 그리고 그것들이 하늘의 광활한 공간에 있는 발광체들을 위해 있게 하여 땅에 빛을 주게 하라. 그리고 그것은 그렇게 있었다. 16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두 개의 큰 발광체를 만드시고, 더 큰 발광체는 낮을 규율하고, 보다 작은 발광체는 밤을 규율하게 하셨다. 그리고 별들(도 만드셨다). 17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그것들이 땅에 빛을 주도록 하늘의 광활한 공간에 두었다. 큰 발광체들을 수단으로 뜻해지는 것은 우선 신앙의 본질인 것과 새로이 창조되어가는 이들과 더불어 신앙의 본질이 진보하는 것을 알지 않으면 명료하게 이해되어질 수 없다. 신앙의 참 본질과 생명은 주님 뿐 이시다. 그 이유는 주님을 믿지 않는 자는 생명을 가질 수 없기 때문인데, 이를 주님께서 요한 복음에서 이렇게 선포해 두셨다:
아들을 믿는 자는 영원한 생명을 가지나, 아들을 믿지 않는 자는 생명을 볼 수 없고,
하느님의 분노가 그 사람 위에 머무를 것이다 (요 3:36).
새로이 창조되어가는 이들과 더불어 있는 신앙의 진보는 다음과 같다. 첫째, 그들은 생명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 이유는 생명은 선인 것과 참된 것에만 있고 악과 거짓 안에는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 후에 그들은 신앙을 수단으로 주님으로부터 생명을 받는다. 첫 번째, 지식일 뿐인 기억 속의 신앙을 수단으로; 다음에 지성적인 신앙인 이해함에 있는 신앙을 수단으로; 마지막으로 사랑으로부터의 신앙, 또는 구원을 가능케 하는 신앙인 심정에 있는 신앙을 수단으로 생명을 받아간다. 이 세 종류 중 첫 두 종류는 3절로부터 13절에서 생명 없는 것들을 수단으로 표현되어져 있다. 그러나 사랑을 수단으로 생명을 주는 신앙은 20절부터 25절 까지 에서 생명 있는 것들에 의해 표현되어져 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사랑, 그리고 사랑에서 파생된 신앙이 지금 여기서 먼저 취급되어지고, “발광체들”이라 불리운다; 사랑은 “낮을 규율하는 더 큰 발광체”이다; 사랑으로부터 파생된 신앙은 “밤을 규율하는 더 작은 발광체”라 불리운다; 그리고 이 두 발광체들은 하나를 만들고 있어야 하는 바, 그것들에 관해 말해질 때, 복수를 암시하지 않게 단수 표현으로 “발광체들이 있어라”라고 말해지고 있다.
내적 인간에 있는 사랑과 신앙은 육체상의 외적 인간에 있는 열과 빛과 비슷하다. 이런 이유로 해서 전자는 후자를 수단으로 표현되어진다. 이런 연유에서 발광체들이 “하늘의 광활한 공간 안에 있다,” 또는 내적 인간 안에 있다 라고 말해지는 것이다; 큰 발광체는 내적 인간의 의지 안에, 그리고 작은 발광체는 내적 인간의 이해함 안에 놓인다; 그러나 그것들은 태양의 빛이 그 빛을 받는 대상 안에서 오로지 있어지듯 의지와 이해함 안에서만 나타난다. 의지는 사랑을 가지고 감동되고, 이해함은 진리 또는 신앙을 가지고 감동되는데 이는 주님의 자비로 가능해지는 영역에 속한다.
“큰 발광체들”이 사랑과 신앙을 의미한다는 것, 그리고 “태양, 달, 그리고 별들”이라고도 불리는 것은 예언서로부터도 분명해진다. 에스겔서를 보자:
내가 너희를 소멸할 때, 나는 하늘들을 덮고 거기 있는 별들을 검게 만들 것이다;
나는 구름으로 태양을 덮을 것이고, 달은 그녀의 빛을 주지 않을 것이다; 하늘의
빛으로부터의 모든 발광체들을 나는 네 위에서 검게 만들 것이다, 그래서 나는
네 토지 위에 어둠을 놓을 것이다 (겔. 32:7-8).
위 구절에서는 바로와 이집트인들이 취급되는데, 말씀에서 그들을 수단으로 감각과 기억 속의 것만으로부터의 원리가 뜻해진다; 그리고 감각과 기억속의 것만을 수단으로, 사랑과 신앙이 소멸되어져 갔었음을 아래 구절에서 살필 수 있다:
여호와의 날이 황폐함 안에 토지를 놓기 위해 온다, 그 이유가 하늘의 별들과
거기로부터의 별자리들이 그들의 빛을 주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태양은 그의 나감(해돋음)에서 어둡게 되어지고, 달은 그녀의 빛이 비추지 않게
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 13:9-10).
다시, 요엘서에서:
여호와의 날이 온다, 어둠의 날이고 짙은 어둠의 날이다; 땅은 그분 앞에서 떨린다,
하늘들이 동요한다; 태양과 달은 검어진다, 그리고 별들은 그것들의 빛남을
철수 할 것이다 (욜 2:1-2, 10).
다시, 이사야서에서, 주님의 강림에 관해서, 그리고 이방인들이 계발됨에 관해서, 결과적으로 새로운 교회(a new church)에 관해서, 그리고 세부적 측면에서는 어둠 안에 있는 모두에 관해서, 그리고 빛을 받는 모두, 그리고 거듭나지고 있는 모두에 관해 말하는데 다음과 같다:
일어나라, 빛나게 하라, 네 빛이 오기 때문이다; 잘 보라 어둠이 땅을 덮고, 짙은 어둠이
사람들을 덮고 있다, 그래서 여호와께서 네 위에서 일어나실 것이다, 그리고 이방인들이
네 빛 쪽으로 올 것이다, 그리고 왕들은 네 일어남으로부터의 빛남 쪽으로 올 것이다;
여호와께서는 너에게 영원한 빛으로 계실 것이다, 네 태양은 더 이상 저물지 않을 것이다, 네 달이 그 자체를 철수하는 일도 없을 것이다, 그 이유가 여호와가 너에게
영원한 빛이실 것이기 때문이다 (이. 60:1-3, 20).
다윗서에서:
총명 안에서 여호와께서는 하늘들을 만드신다; 그분은 물들 위 너머에
땅을 뻗치신다; 그분은 큰 발광체들을 만드신다, 태양은 낮을 규율하고,
달과 별들은 밤을 규율한다 (시. 136:5-9).
그리고 다른 구절에서:
네 여호와를 찬송하라, 태양과 달아, 그분을 찬송하라, 빛으로부터의
너희 모든 별들아, 그분을 찬송하라, 너희 하늘들 속의 하늘들아,
그리고 하늘들 위 너머 있는 네 물들아 (시148:3-4).
위 모든 구절들에서 “발광체들”은 사랑과 신앙을 의미한다. 하여 “발광체들”이 주님을 향하여 있는 사랑과 신앙을 표현하고 의미했기 때문에 유대 교회 안에서 영구적으로 발광체가 저녁으로부터 아침까지 계속 불타고 있어야함을 엄히 명령해두셨는데, 그 이유는 이 교회 안에 있는 명령 사항들이 주님을 표현했기 때문이다. 이 발광체에 관해서 이렇게 씌여 있다:
그리고 너는 이스라엘의 아들들에게 명령해서, 그들로 너에게 발광체를 위해
기름을 가져오게 해서 등이 계속적으로 밝히고 있게 할 것이다. 베일 밖,
만남의 천막에서 아론과 그의 아들들은 저녁으로부터 아침까지 여호와 앞에서
그것을 배열할 것이다 (출. 27:20-21).
이것들이 사랑과 신앙을 의미한다는 것, 이것들에 주님께서는 불붙이시어 내적 인간 안에 빛이 드리우게 하시고, 내적 인간을 통하여 외적 인간 안에도 빛을 드리우시는데, 이는 신성한 주님의 자비에 속하는 바, 적당한 장소에서 알릴 것이다.

사랑과 신앙이 처음 “큰 발광체들”이라 불리우고, 후에 사랑은 “더 큰 발광체”, 그리고 신앙은 “더 작은 발광체”라 불리운다; 그리고 사랑에 관해서는 “낮을 규율한다”고 말해지고, 신앙에 관해서는 “밤을 규율한다”라고 말해진다. 이것들은 감추여져 있는 신비함인 바, 날들에 관한 이 끝에서, 주님의 신성한 자비의 허락이 있어 그것들을 설명해 볼 것이다. 이런 신비들이 날들의 이 끝 안에 더 특별하게 감추어져 있는 이유는 지금이 시대의 종말, (즉) 어떤 사랑도 거의 없고, 그 결과 어떤 신앙도 거의 드문 때이기 때문인데, 주님 자신이 복음서들에서 다음의 말로 예견해 두셨다:
태양이 어두워질 것이고, 달은 그녀의 빛을 주지 않을 것이며, 별들은 천국으로부터
떨어질 것이다, 그리고 천국들의 권능들이 흔들릴 것이다 (마. 24:29).
위 구절에서 “태양”을 수단으로 사랑이 뜻해지는데, 이것이 어둡게 되어진다; “달”을 수단으로 신앙이 뜻해지는데, 이것이 빛을 주지 않는다; 그리고 “별들”을 수단으로 신앙에 관한 지식이 뜻해지는데, 이것이 천국으로부터 추락한다, 그리고 이것들은 “천국들의 미덕들과 능력들”이다.
태고 교회는 사랑 자체 외 다른 신앙이 없음을 인정했다. 천적인 천사들 역시 사랑으로부터 있는 신앙을 제외하면 신앙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한다. 천국 전체는 사랑으로부터의 천국인데, 그 이유는 사랑으로부터의 생명 외에 다른 생명이 천국들에는 없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천국의 모든 행복이 파생되어 나온다, 이는 너무나 위대해서 그것을 묘사할 재간은 아무것도 없고, 어떤 인간의 생각에 의해서도 마음에 품어진 적이 없다. 사랑의 영향 아래 있는 이들, 심정으로부터 주님을 사랑하는 이들이 알고 선포하고 지각하는 모든 것은, 모든 사랑, 그 결과 모든 생명은 사랑만으로부터 있다 는 것이다. 고로 모든 행복은 주님으로부터서만 온다, 그래서 그들은 사랑의 미미한 것, 생명의 미세한 것, 또는 행복의 아주 작은 것 조차도 자신으로부터는 가지지 않는다. 모든 사랑은 주님만으로부터 온다는 것이 그분의 변모하심의 사건에서 큰 발광체, 또는 태양을 수단으로 표현되어져 있는데, 이렇게 씌여 있다:
그분의 얼굴은 태양같이 빛을 발했고, 그분의 의복은 빛같이 희었다 (마. 17:2).
가장 깊게 있는 것들이 얼굴에 의해, 의복에 의해서는 가장 깊게 있는 것들로부터 진행되는 것들이 의미되고 있다. 고로 주님의 신성이 “태양”, 또는 사랑에 의해 의미된다; 그리고 그분의 인성은 “빛”, 또는 사랑으로부터 진행하는 지혜를 수단으로 의미되어져 있다.

각자의 능력에서도 쉽게 알아지는 것은, 얼마간의 사랑도 없이 가능할 생명은 없다는 것, 그리고 사랑으로부터 흐르는 것이 아니고도 가능할 환희(joy)는 없다는 것이다. 어쨌든 사랑이 이러하고, 생명도 이러하고, 환희도 이러하다: 만일 당신이 사랑들, 바람들(desires, 이것도 사랑으로부터 있기 때문)을 제거한다면, 생각함은 즉시로 중지될 것이고, 당신은 죽은 인물 같이 되어 있을 것이다. 이는 생명에 대하여 나에게 보여졌던 바와 같다. 자아 사랑들과 세상 사랑들도 생명과 환희와 유사한 어떤 것을 그것들 안에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것들 모두는 진정한 사랑, 즉 인간은 모든 것들 위 너머에 주님을 사랑함이, 그리고 자신 같이 이웃을 사랑함이 존재하는 진정한 사랑에 반대되기에, 그것들은 사랑들이 아닌 미워함들 임이 분명해질 것은 틀림 없다. 그 이유가 누군가가 자신과 세상을 사랑하는 정도에 비례하여 그는 자기 이웃을 미워하고, 그러므로 주님도 미워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진정한 사랑은 주님을 사랑함이고, 진정한 생명은 그분으로부터의 사랑 속의 생명이다, 그리고 진정한 기쁨은 이 생명으로부터의 기쁨이다. 진정한 사랑, 진정한 생명은 한분으로부터 밖에 있을 수 없다, 이로부터 진정한 기쁨들과 더없는 진정한 행복들이 흐른다, 천국들 안에 있는 천사들의 경우가 이와 같다.

사랑과 신앙은 분리를 허용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그것들은 하나로 구성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둘은 똑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발광체들”에 관해 말해지는 처음 대목에서, 그것들은 하나로서 간주된 바, “하늘들의 광활한 공간 안에 발광체들(sit luminaries) 이 있어라” 하고 말해진다. 이 상황에 관하여 아래의 경이로운 세부사항들을 관련시켜서 설명하도록 나에게 (주님으로부터) 허락되어졌다. 천적 천사들, 주님으로부터 자기들 안에 있는 천적 사랑의 덕택으로 이 사랑으로부터 신앙에 관한 모든 지식들 안에 있다, 그리고 이와같은 생명과 총명으로부터의 빛 안에 있는데, 이것의 어떤 것도 거의 묘사되어질 수 없다. 그 반면 사랑 없이, 신앙의 교리물로 부터의 지식들 안에 있는 영들은 생명의 차거움과 빛의 희미함 안에 있는 바, 그들은 천국들의 첫 문지방에 조차도 접근 할 수 없고 다시 뒤돌아 도망한다. 그들 중의 몇은, 비록 그분의 가르침들에 따라 살아오지도 않았으면서도, 자기들은 주님을 믿어왔었노라고 말한다, 이런 품성을 두고 주님께서 마태복음에서 말하셨다:
나에게 주여, 주여 라고 말하는 모든 이가 천국들의 왕국 안으로 들어가지 않는다;
그러나 내 뜻을 행하는 자가 들어 간다: 그 날에 많은 이들이 나에게 주여, 주여,
우리가 당신의 이름으로 예언하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당신의 이름으로 악마들을
내쫓았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당신의 이름으로 많은 경이한 일들을 행하지 않았습니까?
라고 말할 것이다 (마 7:21,22, 끝절까지).
여기에서 명백해지는 바는, 사랑 안에 있는 이들은 신앙 안에도 역시 있고, 그것에 의해서 천국의 생명 안에도 있다는 것, 그러나 신앙 안에 자기들은 있다 라고 말하는 이들이 사랑의 생명 안에도 있는 것은 아니다는 것이다. 사랑 없는 신앙의 생명은 마치 열이 없는 태양의 빛 같고, 겨울철과 같은 바, 아무 것도 자라지 못하고, 모든 것들이 움직이지 못하고 죽은 듯 있다; 이와 반대로 사랑으로부터 진행하는 신앙은 봄철의 태양의 빛 같아, 태양의 열매 풍성하게 하는 열의 결과로 모든 것들은 성장하며 번성한다. 이것은 영적인 것과 천적인 것들에 관련하여서도 거의 비슷하다. 하여 말씀 안에서도 이것들은 세상과, 땅의 얼굴 위에 존재하는 것들 가지고 통상적으로 표현되어져 있다. 신앙 없음, 그리고 사랑 없는 신앙은 주님에 의해 “겨울”에 비교되어지고 있다. 시대의 종말을 미리 말하시는 마가복음에서:
너희의 도망감이 겨울에 있지 않도록 기도하라, 그 이유가 이것들은 재해의 날이기
때문이다 (막 13:18-19)
“도망감”은 마지막 때를 뜻한다. 또한 인간이 죽을 때인 그 사람의 때도 뜻한다. “겨울”은 사랑이 결여된 생명이다; “재해의 날”은 다른 삶에서 겪는 비참한 상태이다.

인간은 두 가지 능력을 가지고 있다: 의지력(뜻함, will)과 이해력(이해함, understanding)이다. 이해함이 뜻함에 의해 통치되어질 때, 그것들은 함께 한 개의 마음(one mind)을 구성한다, 고로 한 개의 생명을 구성한다. 그 이유가 인간이 뜻하고 행동하는 것을 그는 생각하고 의도 또한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해함이 뜻함에 일치하지 않을 때 (신앙을 가지고 있다 말하면서 그 신앙에 정반대되어 사는 이들의 경우 같이), 그러면 한 개의 마음은 둘로 분리되어진다. 즉 한 개는 천국 안으로 자체를 드높이려는 바람을 지니고, 다른 하나는 지옥을 향하여 간다; 의지가 모두 각각의 행동 안에서 행위자 일 경우, 전체 인간은 만일 주님의 자비가 그 인간 위에 드리워 있지 않다면 지옥 안으로 곤두박질하여 빠지고 말 것이다.

신앙이 사랑으로부터 분리된 이들은 신앙이 무엇인지 조차 모르고 있다. 신앙에 관해서 생각하고 있을 때, 어떤 이들은 이는 단지 생각하기 이다 라고, 어떤 이는 주님을 향하여 방향을 잡은 생각하기 이다 고 상상하고, 그것은 신앙으로부터의 교리이다 라고 하는 자는 거의 없다. 그러나 신앙은 신앙으로부터의 교리가 함유하는 모든 것들에 대한 지식과 인정함, 뿐만 아니라 특별하게 신앙으로부터의 교리가 가르치는 모든 것들에 순종하는 것이다. 신앙으로부터의 교리가 가르치고 사람들로 순종하라 하는 첫째가는 것들은 주님을 사랑함과 이웃을 향한 사랑이다, 그 이유가 만일 인간이 이 두 교리 안에 있지 않다면, 그는 신앙 안에 있지 않다. 이것을 주님께서 마가복음에서 아주 명백하게 가르치시는 바 그것에 관한 의구심을 떨쳐버리게 한다.
마가복음에서:
모든 명령 중의 첫째[이다], 귀 기울여라, 오 이스라엘이여; 주 우리의 하느님은
한 분 주님이시다. 너희는 모든 네 심정으로, 그리고 모든 네 혼으로, 그리고
네 모든 지성으로, 그리고 모든 네 힘으로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할 것이다:
이것이 첫째 명령이다. 그리고 둘째도 비슷하다, 즉 이것이다, 너희는 너의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할 것이다. 이것 보다 더 큰 명령은 없다 (막 12:29-31)
마태복음에서, 앞의 명령들을 “첫째이고 큰 명령”이라 부르시고, “이 명령에 모든 율법과 예언들이 걸려있다”라고 말하신다 (마 22:37-41). “율법과 예언들”은 넓은 측면에서 신앙으로부터의 교리이고, 전체 말씀이다.

광명체들이 “표시들을 위해, 그리고 계절들을 위해, 그리고 날들을 위해, 그리고 햇수들을 위해” 있을 것이다 라고 말해졌다. 이 말들 안에는 현재 펼쳐 볼 수 있는 것 보다 더 많은 신비들이 포함되어져 있다. 물론 글자 의미 안에는 신비한 종류의 어떤 것도 나타나 있지는 않다. 여기서는 영적이고 천적인 것들의 교체(alternations)가 일반적, 세부적 측면에서 있다는 것, 이것들이 날들과 햇수들에 비교되어진다는 것을 주목해보는 것으로 만족해야 할 것 같다. 날들의 변화는 아침으로부터 정오로, 그로부터 저녁으로, 그리고 밤을 통과하여 아침으로 이다; 햇수들의 변화도 이와 유사하다, 즉 봄으로부터 여름으로, 가을로, 그리고 겨울을 통하여 봄으로 이다. 하여, 열과 빛의 교체가, 그리고 땅의 생산물의 교체가 있다. 이 변화들에 영적이고 천적인 것들의 교체가 비교되어진다. 이와같은 교체와 다양함 없는 생명은 불변할 것인 바, 결과적으로 생명이 전혀 없다; 선과 진리는 식별되고 구별되어질 리 없을 것이고, 지각됨은 더더욱 없을 것이다. 이런 교체들이 예언서들에서 “법칙들, ordinances, 정해놓은 질서”로 불리었다. 예레미야서를 보자:
여호와께서 말하셨다, 이 분은 빛을 위해 낮에는 태양을 주신다,
그리고 달과 별들의 법칙은 밤에 빛을 위해서이다…이 규례들은
내 앞으로부터 물러나지 않을 것이다 (예. 31:35-36).
그리고 같은 예언서에서:
여호와께서 말하셨다, 만일 낮과 밤에 관한 내 언약이 서있지 않다면, 그리고
만일 내가 하늘과 땅의 법칙을 놓아두지 않았다면 (예. 33:25).
그러나 이런 것들에 관하여, 주님의 신성한 자비로부터 창세기 8:22(에서 살핀다).

18절. 낮을 규율함, 그리고 밤을 규율함, 그리고 빛과 어둠 사이를 구분함;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그것이 선 이었음을 보셨다. “낮”에 의해 선이 뜻해지고, “밤”에 의해 악이 뜻해진다; 그러므로 선들은 낮의 일들이라 불리우나, 악들은 밤의 일들이라 불린다; “빛”에 의해 진리가 뜻해진다, 그리고 “어둠”에 의해 거짓이 뜻해진다. 주님께서 말하시는 바:
사람들은 빛 보다 어둠을 사랑했다. 진리를 행하는 자는 빛 쪽으로 온다 (요3:19, 21).

19절. 그리고 저녁과 아침은 넷째 날 이었다.

20절. 하느님께서 말하셨다. 물들은 기는 것(동물),(과) 살아 있는 혼(soul)을 기게 하는 원인이 되라. 그리고 새(fowl)는 하늘들의 광활한 공간의 얼굴들의 위쪽, 땅 위에서 날으라. 큰 발광체들이 불을 밝혀오고 내적 인간 안에 장소를 두고, 이로부터 외적 인간도 빛을 받은 이후, 인간은 처음으로 살아 있기를 시작한다. 지금까지의 인간은 자신이 행한 선을 놓고 그것은 자신으로부터 있어진 것, 자기가 말한 진리를 두고서는 그것은 자신으로부터 였다고 상상하는 까닭에 그는 살아있어 왔다고 말해지기는 거의 힘들다; 그리고 인간은 자신으로부터는 죽어 있다, 자신 안에 있는 것은 악과 거짓인 것 밖에 아무 것도 없다, 그러므로 그가 자신으로부터 생산하는 것은 무엇이든 살아 있지 않다, 그 까닭은 그는 그 자체가 선인 선을 행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인간은 선인 것을 생각 조차 할 수 없고, 선인 것을 뜻할 수 도 없고. 결과적으로 주님으로부터가 아니면 선인 것을 행할 수 없다는 것은 신앙으로부터의 교리로부터 모든 이 각각에게 명백해져야만 할 것이다. 그러기에 주님께서 마태복음에서 말하신다:
선한 씨를 뿌리는 그분은 사람의 아들이다 (마. 13:37).
어떤 선도 선의 진짜 원천으로부터가 아니면 와질 수 없는데, 이 선의 원천은 오직 한 분이신 바, 주님께서 다른 복음서에서 말하신다:
한 분, 하느님 외에 선한 자는 없다 (눅. 18:19).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 생명 쪽으로 인간을 소생시키실 때, 즉 그를 거듭나게 하실 때, 먼저 그분은 그에게 그가 자신으로부터 선인 것을 행하고, 참인 것을 이야기하는 것을 허용하신다. 그 이유가 최초 시기의 인간은 자신으로부터 인 듯 하는 것 외 다른 것은 마음에 품어질 수도 없기 때문, 그리고 믿는 쪽으로 인도되는 길, 후에 모든 선과 진리는 그분 만으로부터 있다는 것을 지각하도록 인도되는 길은 먼저 자신으로부터 인 듯 하는 방법 밖에 없기 때문이다. 인간이 (주님의 허용하심에서) 이와같은 길(방도, way)에서 생각하는 동안, 그의 진리들과 선들은 “부드러운 풀”에, 또한 “씨를 산출하는 풀잎”에, 그리고 마지막으로 “과일을 맺는 나무”에 비교되어진다. 이 모두는 생명이 없다; 그러나 지금 그는 사랑과 신앙을 수단으로 생생해지고, 주님이 자기가 행하는 모든 선, 자기가 말하는 모든 진리를 역사하심을 믿는다. 하여 그는 먼저 “물의 기는 것들”에, 그리고 “땅 위에서 나는 새들”에, 또한 짐승에 비교되어진다. 이것들은 모두 생명 있는 것들이다. 그리고 “생 혼들”이라 불리운다.

“물들이 생기게 한 기는 것들”을 수단으로 외적 인간에 속하는 기억 속의 지식들이 의미되어진다; 일반적으로 “새들”은 합리적, 지적인 것들이 의미된다. 이로부터 후자는 내적 인간에 속한다. “물들의 기는 것들”, 또는 “물고기들”은 기억 속의 지식들을 의미한다는 것은 이사야서로부터 분명해진다:
나는 왔고 거기에 사람은 없었다; 내 견책에서 나는 바다를 말렸다, 나는 강들을
황무지로 만든다; 그것들의 물고기에서는 고약한 냄새가 날 것인데, 그 이유는
물이 없어 목말라 죽기 때문이다; 나는 하늘들을 검음으로 옷 입힌다 (이. 50:2-3).
이것이 에스겔서로부터 서는 한층 더 명백해진다. 거기서 주님은 새 성전(the new temple), 또는 일반적 측면에서의 새로운 교회(a new church), 그리고 교회 속의 인간, 또는 거듭나는 인물을 묘사하신다; 그 이유가 거듭나는 모든 이 각각은 주님의 성전(a temple)이기 때문이다:
주 여호비께서 내게 말하셨다. 이 물들은 동쪽을 향한 경계선 쪽으로 유출될 것이다,
그리고 바다를 향하여 갈 것인데, 바다 안으로 인도되는 바, 물들이 치료될 것이다;
그리고 강물이 가는 곳은 어디이든 기어다닐 모든 생 혼은 살아있게 될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는 극도로 많은 물고기가 있을 것인데, 그 이유는 이 물들이 그쪽으로
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들은 치료될 것이다, 그리고 강이 닿는 쪽의 모든 것은
살아있을 것이다; 그리고 어부들이 엔게디로부터 에네글라임까지 그것 위에 서서,
그물을 펼칠 것이다; 그것들의 물고기는 종류별로 있을 것인데, 마치 큰 바다의
물고기 같이 극도로 많을 것이다 (겔. 47:8-10).
“엔게디로부터 에네글라임까지 어부들”과 “그물을 펼침”은 신앙으로부터의 진리들로 자신의 자연적 인간을 훈육 받을 이들을 의미한다.
“새들”은 합리적이고 지성적인 것들을 의미한다는 것은 예언서들로부터 분명해진다. 이사야서에서:
동쪽으로부터 새를 부르고, 먼 토지로부터 내 의도에 맞는 사람을 부른다 (이. 46:11).
그리고 예레미야서에서:
내가 잘 보니 사람이 없었고, 하늘들의 모든 새들이 도망가 버렸다 (예. 4:25).
에스겔서에서:
나는 우람한 삼목의 새 싹을 심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가지를 들어 올릴 것이다,
그리고 열매를 맺을 것이다, 그래서 장엄한 삼나무일 것이다; 그리고 그것 아래
날개 달린 모두 각각의 새가 거주할 것이다, 거기로부터의 가지들의 그늘 아래에서
그들은 거주할 것이다 (겔. 17:22-23).
그리고 새로운 교회에 관해, 또는 거듭나는 사람에 관해 말하는 호세아서에서:
그 날에 나는 그들을 위해 들판의 들짐승과, 지면의 움직이는 것들과
언약을 만들 것이다 (호. 2:18).
“들짐승”이 들짐승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 “새”가 새를 의미하지 않을 것은 모든 이에게 자명할 것이다, 그 이유는 주님께서 그들과 “새로운 언약을 만드신다”고 말해지기 때문이다.

인간에게 어울리는 것은 무엇이든 그 자체 안에 생명이 없다, 그래서 그것이 명백하게 만들어질 때는 언제나, 그것은 딱딱한 (느낌), 마치 뼈만 앙상한 물체나 검은 물질 같다; 그러나 주님으로부터인 것은 무엇이든 생명을 가지고 있고, 그 안에는 영적인 것과 천적인 것을 포함하고 있다. 이것이 모습을 보일 때 인간적이고 생생함이 나타난다. 이것은 신용할 수 없는 듯 보일런지 모르나 지독하게도 진실되다. 하여 천사들의 영 안에 있는 단 하나인 모두 각각의 사상, 생각하기, 표현은 그것의 미세한 세부 사항들 안에도 생명 자체이신 주님으로부터 진행하는 애착을 포함하고 있다. 그리하여 주님으로부터 있는 것은 무엇이든 그것들 안에 생명을 가진다, 그 이유가 그것들은 그분을 향한 신앙을 포함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이)이 구절에서 “생 혼”에 의해 의미되어져 있다; 그것들은 신체의 한 특성(species)이라 할 수 있는 것 역시 가지고 있는데, 이 구절에서는 “자체를 움직이는 것”, 또는 “기어다닌다, creeps”에 의해 의미되어져 있다. 어쨌든 이런 진리들은 인간에게는 아직까지는 깊은 수준의 비밀들일 뿐이다. 그리고 지금은 “생 혼”, 그리고 “자체를 움직이는 것”만이 언급되어 취급되어지고 있다.

21절.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큰 고래들, 그리고 물들이 각 종류대로 기게 한 기는 모든 살아 있는 혼, 그리고 날개 달린 모든 새들을 그 종류대로 창조하셨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보셨더니 그것은 선 이었다. “물고기들”은, 앞서 말했던 바 같이 기억 속의 지식들을 의미하는데, 지금은 주님으로부터의 신앙을 수단으로 생명이 있다, 고로 살아 있다. “고래들”은 기억 속의 지식들에 종속됨 안에 있는 그 지식들의 일반적 원리들이다, 그리고 일반적 원리들로부터 세부적인 것들이 있다; 그 이유가 세부적인 것들이 존재하되 일반적 원리 아래 있지 않은 것은 우주 안에 없기 때문이다. “고래들”, 또는 “큰 물고기들”은 때로는 예언자들에 의해서도 언급되기도 하는데, 거기서도 그것들은 기억 속의 지식들 속의 일반적인 것들을 의미한다. 이집트 왕 바로(그를 수단으로 인간의 지혜나 총명, 즉 일반적 측면에서의 지식이 표현되어져 있다)가 “큰 고래”라 불리운다. 에스겔서를 보자:
잘 보라, 나는 너에 맞서 있다, 이집트의 왕 바로여, 자기 강들 한 가운데 누워있는
큰 고래여, 하여, 내 강은 나의 소유이다, 그리고
나는 나 자신을 만들었다 말했다 (겔. 29:3).
그리고 또 다른 구절에서:
이집트 왕 바로를 위해 애가를 채택하라, 그리고 그에게 말해라,
너는 바다들에 있는 고래 같다, 그리고 네 강들 안에서 나갔다,
그리고 네 발로 물들을 괴롭혔다 (겔. 32:2).
이런 말들을 수단으로 기억적 지식들을 수단으로, 고로 자신들로부터 신앙 속의 신비들 안으로 진입하기를 바라는 이들이 의미되어져 있다. 이사야서에서:
그 날에 여호와께서는 그분의 단단하고 크고 강한 검을 가지시고 꽤나 긴 뱀
리워야단, 꼬불꼬불하기까지 한 뱀 리워야단을 방문하실 것이다. 그리고
그분은 바다 안에 있는 고래들을 죽이실 것이다 (이. 27:1).
“바다 안에 있는 고래들을 죽임”에 의해서 진리로부터의 일반적 원리들조차 모르는 인물들이 의미되어지고 있다. 그래서 예레미야서에서:
바빌론의 왕 느부갓네살이 나를 삼켰다, 그는 나를 괴롭혔다, 그는 나를 텅빈
그릇으로 만들었다, 그는 나를 고래같이 들이켰다, 그는 자기 배를 나의 맛있는
것을 가지고 채웠다, 그는 나를 내 던졌다 (예. 51:34).
고래가 요나에게 했듯, 그는 이 구절에서 “맛있는 것”이라 부르는 신앙으로부터의 지식들을 삼켰음을 명시하고 있다; “고래”는 신앙에 관한 지식들로부터의 일반적 원리들을 단지 기억 속의 지식으로만 소유하는 이들, 그리고 이런 방식 안에서 행동하는 이들을 명시하고 있다.

22절. 그리고 하느님께서 이것들에 복 주셨고 말하시기를, 열매를 많이 맺고 번성하라, 그리고 바다들에 있는 물들을 채우라, 그리고 새는 땅에서 번성할 것이다. 주님으로부터 자체 안에 생명을 가지는 모든 것은 그 자체 열매를 많이 맺고 광대하게 번성 한다; 이는 육체 안에서 살 때 보다 다른 삶에서는 깜짝 놀라는 수준에서 (전개된다). 말씀에서 “열매를 맺는 것”은 시랑으로부터 있는 것들을, 그리고 “번성하는 것”은 신앙으로부터 있는 것들을 단정하고 있다. 말씀에서 있는 주님의 “복 주심” 역시 열매를 많이 맺음과 번성함을 의미하는데, 그 이유는 복 주심이 사랑과 신앙으로부터 진행되기 때문이다.
23절. 저녁과 아침은 다섯째 날 이었다.

24,25절. 그리고 하느님께서 말하셨다, 땅은 그 종류대로 살아있는 혼을 내라; 그리고 짐승, 그리고 그 자체 움직이는 것, 그리고 땅의 야생 동물을 그 종류대로 내라; 그리고 그것은 그렇게 있었다. 25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땅의 야생 동물을 그 종류대로, 그리고 지면에서 기는 모든 것을 그 종류대로 만드셨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보시니 그것은 선 이었다. 인간, 땅 같아서, 신앙에 관한 지식들이 그 인간 안에 먼저 뿌려지지 않으면 선으로부터의 어떤 것도 생산할 수 없는 바, 무엇에 의하여 인간은 믿어지고 행함이 있는 지를 알아야 할런지 모른다. 말씀을 듣는 것은 이해력의 직무이고, 그것을 행하는 것은 의지력의 직무이다. 말씀을 들었는데, 그것을 행하지 않는 것은 마치 우리가 믿노라고 말하는데, 자기의 신조에 따라 살지 않을 때의 경우와 같다; 이럴 경우 우리는 들음과 행함을 분리하고 있다, 고로 분단된 마음(mind)을 가진다, 하여 주님께서 “어리석은 자”라 부르시는 자가 되어 간다. 아래 구절을 읽어 보자:
내 말들을 듣고, 그리고 그것들을 행하는 자는 누구이든, 나는 그를 반석 위에
자기 집을 건축한 슬기로운 인간에게 비교할 것이다: 그러나 내 말들을 듣고,
그리고 그것들을 행하지 않는 모든 이를, 나는 모래 위에 자기 집을 건축한
어리석은 자에 비교할 것이다 (마. 7:24, 26).
이해함에 속하는 것들은, 앞서 보였던 바 같이, “물들이 생기게 한 기는 것들”, 그리고 또한 “땅위에 있는 새”, 그리고 “광활한 공간의 얼굴들 위에”에 의해 의미되어져 있다; 그러나 뜻함 속에 있는 것들은 여기서 “땅이 생산하는 생 혼”, 그리고 “짐승”, 그리고 “기는 것”, 또한 “그 땅의 야생 동물”에 의해 의미되어져 있다.

고로 태고 때에 살았던 이들은 이해함과 뜻함에 관련되는 것들을 (한꺼번에) 의미했다; 그러므로 예언서들에서, 구약 성경의 말씀 안에서 비슷한 것들이 여러 다른 동물들을 수단으로 꾸준히 표현되어져 있다. 짐승(beast)들은 두 종류가 있다; 악한 짐승, 그렇게 부르는 이유는 그것들이 피해를 입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선한 짐승, 그것들은 피해를 주지 않기 때문이다. 인간 안에 있는 악은 악한 짐승들에 의해 의미되는데, 예를 들면, 곰들, 이리들, 개들 등등이다; 그리고 선하고 온화한 것들은, 어린 암소, 양, 어린 양이 지닌 본성을 수단으로 의미되어지고 있다. 이 구절에서 참조되는 짐승들은 선하고 온화한 것들이다, 그런고로 애착(affection)들을 의미하는데, 그 이유는 창세기 1장이 거듭나지고 있는 이들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 안에서 보다 더 수준 낮은 것(애착)들, 이것들은 신체와 더 잘 연결되는데, “그 땅의 야생 동물들”이라 불리 우고, 그리고 탐욕들(cupidities)과 쾌락들(pleasures)이다.

“짐승들”이 인간의 애착들, 악한 자의 경우는 악한 애착, 선한 자의 경우는 선한 애착을 의미한다는 것은 말씀 안의 수많은 문단들로부터 분명해지는데, 몇 구절만 살핀다. 에스겔서에서:
잘 보라, 나는 너를 위하여 있다, 그래서 나는 너를 뒤돌아 볼 것이다, 하여
너희는 갈고 뿌릴런지 모른다, 그리고 나는 네 위에서 사람과 짐승을 불어나게
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들은 불어나 열매를 산출할 것이다; 그리고 나는 너의
고대 때 안에서와 같이 너희를 살도록 해 주겠다 (겔. 36:9, 11, 거듭남을 취급함).
요엘서에서:
내 들판의 너희 짐승들은 걱정하지 말라, 그 이유는
광야의 거주하는 장소가 풀이 무성해지기 때문이다 (욜. 2:22).
다윗서에서도 역시:
이렇게 나는 어리석었다, 나는 당신 앞에서 짐승 같이 있었습니다 (시. 73;22).
예레미야서에서, 거듭남을 취급하면서:
잘 보라, 그 날이 온다, 여호와께서 말하시는 바, 나는 이스라엘 가문과 유다 가문을
사람의 씨와 짐승의 씨를 가지고 씨뿌릴 것이다, 그리고 나는 건축하고 심는
그들을 돌보아 줄 것이다 (예. 31:27-28).
“야생 동물들”도 비슷한 의미를 가진다, 호세아서를 보자:
그 날에 나는 그들을 위해 들판의 야생 동물들과 더불어, 그리고 하늘들의 새와 더불어, 그 리고 땅의 기는 것과 더불어 언약을 만들 것이다 (호. 2:18)
욥기에서:
너는 땅의 야생 동물들을 두려워 말라, 그 이유는 네 언약이 들판의 돌들과
더불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들판의 야생 동물들은 너와 평화로이
있을 것이다 (욥. 5:22-23).
에스겔서에서:
나는 너와 평화의 언약을 만들 것이다, 그리고 악한 야생 동물들이 토지로부터
중지되게 할 것이다, 하여 그들은 광야 안에서 확신을 갖고 거주할 것이다 (겔. 34:25).
이사야서에서:
들판의 야생 동물들이 나를 존경할 것이다,
그 이유는 내가 광야에 물들을 주었기 때문이다 (이. 43:20).
에스겔서에서:
하늘들의 모든 새들이 자기들의 둥지를 그 굵은 가지들에 만들었다, 그리고
그 나뭇가지 아래 들판의 모든 야생 동물들이 자기들의 새끼들을 낳을 것이다.
그리고 그 그늘 아래 모든 민족들이 거주할 것이다 (겔. 31:6).
이 대목은 아시리아인을 두고 말해지는데, 그들을 수단으로 영적 (평면의) 인간(the spiritual man)이 의미되어져 있다, 그리고 그가 에덴의 동산에 비교되어진다.
다윗서에서:
너희는 그분을 찬양하라, 모든 그분의 천사들아, 땅으로부터 여호와를 찬양하라,
너희 고래들아, 과일 나무들아, 야생 동물아, 그리고 모두 각각의 짐승아,
기는 것이여, 그리고 날고 있는 새여 (시. 148:2, 7, 9-10).
위 구절에서의 언급은 같은 것(한 가지 것)에 관해서이다. “고래”, “과일 나무”, “야생 동물”, “짐승”. “기는 것”, “새” 들이 인간 안에 있는 살아있는 원리들을 의미하지 않으면 그것들로 여호와를 찬양하라고 불러지지도 않을 것이다.
예언자들은 “짐승들”과 “땅의” “야생 동물들”, 그리고 “짐승들”과 “들판의” “야생 동물들”을 조심스럽게 구별해 놓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 안에 있는 선들이 “짐승들”이라 불리는데, 천국에서 주님에게 가장 가까이 있는 이들이 “동물들”이라 불리는 것과 꼭 같다. 에스겔서와 계시록 모두에서:
모든 천사들이, 그리고 원로들이, 그리고 네 동물들이 왕좌를 빙둘러 섰다,
그리고 자기들의 얼굴을 왕좌 앞에 떨구었다, 그리고 어린 양을 경배했다
(계. 7:11; 19:4).
복음을 가진 이들은 창조물이라 불린 그들에게 전도했다, 그 이유는 그들이 새로이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너희는 세상 안으로 가라, 그리고 모든 창조물에게 복음을 전하라 (막. 16:15).

이런 말들이 거듭남에 관련하여 신비들을 포함하고 있다는 것은 앞 구절(24절)에서 말해졌던 바와 뒷 구절(25절)으로부터 분명하다, 즉 땅은 “생 혼, 짐승, 그리고 땅의 야생 동물”을 낳았다, 이에 반해 다음 절에서는 순서가 바뀌고 있다. 즉 하느님께서는 “땅의 야생 동물을” 만드셨다 라고 말해졌다, 그리고 “짐승”의 순서는 마찬가지이다; 그 이유는 첫째로, 그리고 그 후 그가 천적 수준이 되어갈 때까지, 인간은 자신에 관한 것을 만들어 가고 있다; 고로 거듭남은 외적 인간으로부터 시작하여, 내적 인간 쪽으로 진행한다; 그러므로 여기서(25절)는 또 다른 순서가 있다, 그리고 외적인 것들이 먼저 언급되었다.

그 다음 인간이 이해력에 속하는 신앙의 원리로부터 이야기할 때, 그리고 그것에 의해서 자신이 참된 것 안에 있음과 선 인 것 안에 있음을 확증할 때 그는 거듭남의 다섯 번째 상태 안에 있음이 나타난다. 그러면 그 사람에 의해 낳는 것들은 생명이 있음이다, 그래서 “바다의 물고기들”, 그리고 “하늘들의 새들”이라 불리 운다. 그가 이해함에 속하는 신앙으로부터, 그리고 뜻함에 속해 있는 신앙에서 파생된 사랑으로부터 진리들을 이야기하고, 그리고 선들을 행할 때, 그는 여섯째 상태 안에 있다; 그 다음 그가 낳는 것은 “생 혼”, 그리고 “짐승”이라 불린다. 그리고 그 다음 그가 신앙으로부터 뿐 아니라, 사랑으로부터 행동하기를 시작할 때, 그는 “하느님의 형상(image)”인 영적 (평면의) 인간(a spititual man)이 되어간다. 이것이 지금 다루어지는 주제이다.

26절. 그리고 하느님께서 말하셨다, 우리가 우리의 모습에 따라 우리의 형상 안에서 사람을 만들자. 그리고 그것들로 바다의 고기 위에서, 그리고 하늘들의 새 위에서, 그리고 짐승 위에서, 그리고 모든 땅 위에서, 그리고 땅에서 기는 모든 기는 것들 위에서 통치권을 가지게 하자. 태고 교회 안에서 주님께서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대화하셨던 이 교회인과 더불어, 주님께서는 사람(a Man) 같이 나타나셨다; 이 대목에 관련하여서는 많은 말을 한참 더 해야 하겠지만, 때가 아직 도착한 것 같지는 않다. 어쨌든 태고 교회인들은 자기들을 두고 아무도 사람이라는 표현을 쓰지 않고 단지 주님 자신, 그리고 그분으로부터 있는 것들에 국한해 사용했다; 그들이 자신을 “사람들”이라 부르지 않았으나 단지 자신들 안에 있는 어떤 것들, 즉 사랑으로 부터의 모든 선과 신앙으로 부터의 모든 진리를 두고 (“사람” 칭호를 붙였는데), 자기들이 이것을 주님으로부터 가졌음을 지각했다. 그들이 “사람으로부터” 있었다고 말했는데, 그 이유는 그것들이 주님으로부터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고로 해서 예언서들 안에서, “사람”과 “사람의 아들”을 수단으로 주님이 뜻해진다; 그리고 내적 의미에서, 지혜와 총명; 고로 거듭나지는 모든 이(까지도 뜻해진다). 예레미야서를 보자:
나는 땅을 잘 보았다, 그리고 보라, 그것은 공허하고 텅빔 이었다, 그리고 하늘들,
그리고 그것들은 빛을 가지지 않았다. 나는 잘 보았고 보니 사람이 없었다,
그리고 하늘들의 모든 새들은 도망가 버렸다 (예. 4:23, 25).
아래 구절, 이사야서에서는 내적 의미에서 , “사람”에 의해 거듭나는 인물이 뜻해지고, 최고 의미에서는 한 분 사람으로서의 주님 자신이 뜻해진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 그를 만들어 내신 분, 여호와께서 말하신다,
나는 땅을 만들었다, 그 위에 사람을 창조했다; 나, 내 손들이 천국들을 펼쳤다,
그리고 그것들의 모든 군대에게 나는 명령했다 (이. 45:11, 12).
그러므로 주님께서 사람으로서 예언자들에게 나타나셨다. 에스겔서를 보자:
광활한 공간 위쪽에, 사파이어 보석의 나타남 같은, 왕좌의 모습이 (있고),
그것 위에 사람의 나타남 같은 모습이 (계셨다) (겔. 1:26).
그리고 다니엘에 의해 보여질 때, 그분은 “사람의 아들”, 즉 사람이라 불리셨다. 다니엘서에서:
나는 보았다, 그리고 잘 보니, 사람의 아들 같은 분이 하늘의 구름들을
사용하시어 왔다, 그리고 날들의 옛적부터 계신 분에게 왔다, 그리고 그들이 그분을
그분 앞 가까이 데려왔다; 그리고 그에게 권세와 영광과 왕국이 주어졌고,
모든 백성, 민족, 언어들이 그분을 섬기도록 했다; 그분의 권세는 영원한 권세여서
사라지지 않을 것이고, 그분의 왕국은 파괴되는 일이 없을 것이다 (단. 7:13, 14).
주님 역시 자신을 “사람의 아들”, 즉 사람이라 부르신다, 그리고 다니엘서와 같이, 영광 안에서 그분이 오심을 미리 말하시고 있다:
그때 그들은 사람의 아들이 권능과 큰 영광과 더불어 하늘의 구름들 안에서
오는 것을 볼 것이다. (마. 24:30).
“하늘의 구름들”은 말씀의 글자적 의미이다; “권능과 큰 영광”은 말씀의 내적 의미이다. 이 의미는 주님과 그분의 왕국 만에 관련되는 일반적, 세부적 측면 모두에서 있는 의미이다; 그리고 이로부터 내적 의미는 그것의 권능과 영광을 파생시킨다.

태고 교회는 “주님의 형상”을 수단으로 표현될 수 있는 것 보다 더 (많이) 이해했다. 인간은 자기가 천사와 영들을 통하여 주님의 통치하심 아래 있다는 것, 모든 이 각각과 더불어 최소한 두 영들과 두 천사들이 있다는 것에 무지해 있다. 영들을 수단으로 인간은 영들의 세계와, 천사들을 수단으로 천국과 교통한다. 영들을 수단으로 영들의 세계와, 천사들을 수단으로 천국과, 그리하여 천국을 통해 주님과의 교통이 없으면, 인간은 전혀 살 수 없다; 인간의 삶은 이 결합에 전적으로 의존된다. 고로 만일 영들과 천사들이 물러가 버린다면, 그는 그 즉시 사멸되고 말리라.
그런데 인간이 타락하고 있다면, 거듭날 때와 전혀 딴판이다. 타락하는 동안 악령이 그와 함께 있고, 악령이 그를 좌지우지 하는 바, 비록 천사가 현존하지만, 천사는 그가 최고로 수준 낮은 악에 빠지지 않도록, 그가 어떤 선 쪽으로 구부려지도록 해보는 것 이상 다른 어떤 것도 할 수 없다. 사실상 그가 선 쪽으로 구부려지게 하는 것은 탐욕들을 수단으로, 진리 쪽으로는 감각들의 오류들을 수단으로 해서 이다. 이때에도 인간은 그와 함께 있는 영들을 통하여 영들의 세계와 교통을 한다, 그러나 천국과의 교통은 그다지 많지 않다, 그 이유는 악령이 통치하고 천사들은 악령들의 통치를 막으려 하는 수준, 소극적 자세를 취해야 하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이 거듭날 때, 천사가 통치하고, 그래서 그는 모든 선들과 진리들로 감화된다, 그리고 악들과 거짓들에 관련해서는 그것들에 대한 걱정과 공포 수준에서만 그치고 있다. 실로 천사들이 그를 인도하나, 오직 봉사할 뿐인데, 그 이유는 주님 만이 천사들과 영들을 통하여 인간을 통치하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이 천사들의 섬김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바, 이 구절에서 “우리가 우리의 형상 안에서 사람을 만들자”라고 복수로 말해지지만, 여전히 주님 만이 통치하시고 배치하시기 때문에, 다음 절에서는 “하느님께서 그분의 형상 안에서 그를 창조하셨다”라고 단수로 말해진다. 이것을 주님께서는 이사야서에서 분명하게 선포하신다:
그런고로 여호와, 너를 되찾으신 자, 그리고 너를 자궁으로부터 만들어 내신 그분,
나 여호와가 모든 것들을 만들고, 천국들을 펼치시며,
나 자신에 의해 땅을 퍼뜨린다 (이. 44;24).

“형상”에 주목해 보자. 형상(image)은 모습(likness)은 아니나, 모습에 따라 있는다; 그러므로 “우리가 우리의 모습에 따라서(after) 우리의 형상 안에서 만들자”라고 말해지고 있다. 영적 인간이 형상이고, 천적 인간은 “모습”, 또는 유사함(similitude)이다. 이 장에서는 영적 (평면의) 인간이 다루어진다; 다음 장에서는 천적 (평면의) 인간이 다루어진다. “형상”인 영적 (평면의) 인간이 주님에 의해 “빛의 아들”이라 불리운다. 요한복음에서:
어둠에서 걷는 자는 그가 어디로 가는지를 모른다. 너희가 빛을 가지는 동안,
너희는 빛의 아들일런지 모른다 (요. 12:35, 36).
그분은 또한 “친구”라고 일컬으신다:
만일 너희가 내가 명령한 것은 무엇이든 행한다면 너희는 나의 친구들이다
(요. 15:14-15).
그러나 천적 (평면의) 인간, 이 인간은 “모습(likeness)”인데, “하느님의 아들”이라 불리 운다. 요한복음서에서:
그러나 그분을 받아들인 많은 이들, 그들에게 그분은 하느님의 아들이 되는
능력을 주었다, 그분의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 조차 (주셨다).
이는 피로 부터가 아니고, 육의 의지로 부터도 아니고, 인간의 의지로 부터도 아니고
하느님으로부터 태어나진 것이다 (요. 1:12-13).

인간이 영적 (평면)에 있는 한, 그의 통치권은 외적 인간으로부터 내적 인간 쪽으로 진행된다. 하여 26절에서 말해지는 바: “그것들로 바다의 고기 위에서, 그리고 하늘들의 새 위에서, 그리고 짐승 위에서, 그리고 모든 땅 위에서, 그리고 땅에서 기는 모든 기는 것들 위에서 통치권을 가지게 하자.” 그러나 그가 천적 평면의 인간이 되어갈 때, 그래서 그가 사랑으로부터 행할 때, 그러면 그의 통치권은 내적 인간으로부터 외적 인간 쪽으로 진행한다. 주님께서 다윗서에서 자신을 묘사하시는데, 더불어 그분의 모습인 천적 평면의 인간도 묘사 하신다:
당신은 그를 당신 손으로부터의 일들 위에서 통치권을 가지게 만드셨다;
당신은 그분의 발 아래 모든 것들, 양떼와 모든 가축떼, 또한 들판의 짐승들,
하늘들의 새, 그리고 바다의 물고기, 그리고 바다의 길을 통과하는 것이
무엇이든 놓아두셨다 (시. 8:6-8).
이 시편 구절에서, “짐승들”이 먼저 언급되고 그 다음 새, 물고기의 언급이 있다, 그 이유는 천적 인간은 의지에 속하는 사랑으로부터 진행하는 바, 영적 인간과 다르다. 하여 영적 인간의 경우는 이해력에 속하는 “물고기들”과 “새”가 먼저 명명되어졌다, 그리고 이것은 신앙 쪽이다; 그리고 “짐승들”은 후에 언급되었다.

27절.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그분 고유의 형상으로 창조하셨고, 하느님의 형상 안에서 그분은 그를 창조하셨다; “형상”이 여기서 두 번 언급된 이유는 이러하다. 즉 신앙, 이해력에 속하는데, “그분의 형상”이라 불리 운다; 이에 반하여 사랑, 의지력에 속하는데, 이것은 영적 인간에서는 뒤에 따라 온다, 그러나 천적 인간에서는 의지 측면인 사랑이 앞에 오는 바, “하느님의 형상”이라 불리운다.

남성과 여성(으로) 그분은 그들을 창조하셨다. 내적 의미에서 “남성과 여성”을 수단으로 뜻해지는 것이 무엇인지는 태고 교회에게는 잘 알려져 있으나, 말씀의 내면의 의미가 이 교회의 후손 사이에서 잃어져 버렸을 때, 이에 따른 신비들 역시 멸해졌다. 그것들의 결혼들은 행복과 즐거움의 최고의 근원들이었다. 그리고 무엇이든 그들은 결혼에 비교했었는데, 이렇게 함으로 결혼의 더없는 행복을 지각하기 위해서였다. 또한 내적 인간인 그들은 내적인 것만으로 기뻐했다. 외적인 것들을 그들은 눈으로 단지 볼 뿐이고 (외적인 것이) 표현한 것 만을 생각했다. 따라서 그들에게 외적인 것들은 별 것이 아니었고, 단지 내적인 것 쪽으로 자기들의 생각을 돌리게 하는 어느 정도의 수단이 되어주는데 불과했다. 하여 천적인 것 쪽으로, 그리고 자기들의 전부되시는 주님 쪽으로, 그 결과 천국의 결혼 쪽으로, 이로부터 그들은 그것의 결혼들로부터의 행복이 와진다는 것을 지각했다. 영적 인간에게 있는 이해함을 그들은 남성이라 부르고, 뜻함을 여성이라 부른다, 그리고 이것들이 하나로서 행동할 때, 그들은 그것을 결혼이라 불렀다. 이 교회로부터 관례가 된 말(speech)의 형체가 왔는데, 이 관례 때문에 교회 자체는 선으로부터 있는 교회의 애착으로부터 마치 “시온의 처녀”, “예루살렘의 처녀” 등등의 말 같이, “딸”, 그리고 “처녀”, 그리고 “아내”라 불리웠다. 이 주제를 놓고 살피는 것은 2:23과 3:15에서 있을 것이다.

28절.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그들에게 복을 주셨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그것들에게 말하셨다. 열매를 많이 맺으라, 그리고 번성하라, 그리고 땅을 계속 채우라, 그리고 땅을 정복하라; 그리고 바다의 물고기 위에서, 하늘들의 새 위에서, 땅 위에서 기는 살아있는 각기 모두 위에서 통치권을 가져라. 태고 사람들은 이해함과 뜻함, 또는 신앙과 사랑의 결합(conjunction)을 결혼이라 불렀던 바, 이 결혼으로부터 생산된 선에 관한 모든 것을 그들은 “열매를 많이 맺음”, 그리고 진리에 관한 모든 것을 “번성함”이라 일컬었다. 이러하여 그것들은 예언서들 안에서 그렇게 불리워진다. 한 예로 에스겔서를 보자:
나는 너 위에서 인간과 짐승을 번성하게 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들은 번성하고
열매를 맺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너를 너희의 고대 때들 같이 거주하게 해 줄
것이다, 그리고 네 시작들에서 보다 더 나을 것이다, 그래서 너희는 내가 여호와임을
알 것이다, 그렇다, 나는 사람이 네 위에서, 내 백성 이스라엘 위에서 조차 걷게
해 줄 것이다 (겔. 36:11-12).
위 구절에서 “인간”을 수단으로 이스라엘로 불리우는 영적 인간이 뜻해진다; “고대 때들”을 수단으로 태고 교회가, “시작들”을 수단으로 홍수 이후 고대 교회가 뜻해진다. 진리 측면인 “번성함”의 언급이 먼저 있고, 그 후에 선의 측면인 “열매를 많이 맺음”의 언급이 있는 이유는 현재 다루는 대목이 거듭나아지고 있는 인간 이지 거듭나진 인간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해함이 뜻함과, 또는 신앙이 사랑과 하나되어질 때, 그 인간은 주님에 의해 “결혼한 토지”라 일컬어진다. 이사야서를 보자:
네 토지를 두고 폐물이라 더 이상 칭하지 않고, 헵시바(내 기쁨이 그녀 안에 있다)
라 불리워질 것이고, 네 토지는 쁄라(결혼했음)라 부를 것인데, 그 이유는 여호와께서
네 안에서 기뻐하시기 때문, 그리고 네 토지는 결혼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 62:4).
거기로부터 유출되는 열매들은 진리로부터인 바, “아들들”이라 불리우고, 선으로부터 있는 이들은 “딸들”이라 불리운다. 이는 말씀 안에서 매우 흔하다. 많은 진리들과 선들이 있을 때,
땅은 “계속 충전되어진다”, 또는 “채워진다”; 그 이유는 주님께서 (거듭나는) 인간에게 복 주시며 이야기하실 때, 즉 그 인간 위에서 일하실 때, 선과 진리의 광대한 증가가 있어지기 때문인 바, 주님께서 마태복음에서 말하신다:
천국들의 왕국은 겨자-씨 한 알 같은데, 이것을 인간이 가져다가 자기 들판에 뿌렸다,
이것은 모든 씨들 중에서 지극히 작으나, 그것이 성장될 때, 그것은 풀잎들 사이에서
가장 커져서, 나무가 되어간다, 그리하여 천국들의 새들이 와서 그 나무의 가지에
자기들의 둥지를 짓는다 (마. 13:31-32).
“겨자-씨의 한 알”은 인간이 영적 (수준)으로 되어가기 이전에서의 인간의 선이다. 하여 이 선은 “모든 씨들 중에서 지극히 작다.” 그 이유는 거듭나기 전의 인간은 자기로부터 선을 행한다고 생각하기 때문, 그리고 인간이 지닌 것은 악 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거듭남의 상태 안에 있을 경우, 그 사람 안에는 선에 관한 어떤 것이 있으나 그 선은 모든 선 중에서 가장 작은 선이다.
좀 더 설명하면, 신앙이 사랑과 접합할 때, 신앙은 더 크게 성장하고, “풀잎”이 되고, 마지막으로 결합이 완성되어, “나무”가 된다. 그 다음 “천국들의 새들” (이 구절들에서의 경우 진리들, 또는 지상적인 것들을 명시하고 있음) 이 “그 나뭇가지에 자기들의 둥지를 짓는다.” 이것은 기억 속의 지식들이다. 인간이 영적 (평면의) 수준으로 되어가는 때 뿐만 아니라,영적 (평면의) 수준에 이르러서도, 그는 전투하는 상태 안에 있는 바, 본문에서 “땅을 정복하고 통치권을 가져라” 라고 말해진다.

29절. 그리고 하느님께서 말하셨다, 보라, 나는 너에게 온 땅의 얼굴들에 있는 씨를 맺는 모든 풀잎, 그리고 열매 있는 모든 나무를 준다; 씨를 산출하는 나무, 그것은 너에게 식량을 위하여 있을 것이다. 천적 인간은 천적인 것들만으로 기뻐해진다. 그 이유는 그것들이 자기 생명과 일치하기 때문이다. 하여 이것들은 천적 식량이라 불리운다. 영적 인간은 영적인 것들을 가지고 기뻐해진다. 그 이유는 이것들이 자기 생명과 일치하기 때문, 하여 영적 식량이라 불리운다. 자연적 인간도 위와 마찬가지로 자연적인 것들 가지고 즐거워해진다. 이것이 그의 생명 속에 있는 바, 식량이라 불리는데, 간략히 말해 기억 속의 지식들에 존재한다. 영적 인간이 여기서 다루어지는 바, 그의 영적 식량이 표현물을 수단으로 묘사되는데, “씨를 맺는 풀잎”, 그리고 “열매가 있는 나무”와 같다. 일반적으로는 “씨를 산출하는 나무” 이다. 그의 자연적 식량은 다음 절에서 묘사되어 있다.

“씨를 맺는 풀잎”은 사용을 중요시하는(주목해서 보는, regards) 각각 모두의
진리이다; “열매가 있는 나무”는 신앙으로부터의 선이다; “열매”는 주님께서 천적 인
간에게 주시는 식량, 그러나 “열매를 생산하는 씨”는 그분이 영적 (평면의) 인간에게 주는 식량이다. 그러므로 “씨를 산출하는 나무, 네게 그것은 식량을 위해 있을 것이다”라고 말해진 것이다. 천적 식량이 나무로부터의 열매라 불리우는 것은 천적 인간이 취급되는 다음 장으로부터 분명해지는데, 여기서는 이를 확증하는 수준에서 에스겔서로부터 주님의 이 말들 만을 인용해 보자:
강가, 거기로부터 강둑 위, 이쪽에, 저쪽에, 식량의 각각 모두의 나무가 올라오는데,
이 나무의 잎은 시들지 않고, 거기로부터 열매가 사라지는 일이 없다;
그것은 그것의 달 안에서 다시 태어나진다; 그 이유는 이것들은 성소로부터의
물들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거기로부터의 열매는 식량을 위해 있을 것이다,
그리고 거기로부터의 잎은 치료약을 위해 있을 것이다 (겔. 47:12).
“성소로부터 유출되는 물들”은 “성소”이신 주님의 생명과 자비이다. “열매”는 지혜,
이것이 그들을 위한 식량일 것이다; “잎”은 그들의 사용(use)을 위해 있게 될 총명이
다, 그리고 이 사용이 “치료약”이라 불려진다. 그러나 이 영적 식량이 “풀잎”이라 불
리는데, 다윗서로부터 나타난다:
나의 목자, 나는 부족하지 않을 것이다; 당신께서는 나로 풀잎의 초장에
눕게 만드신다 (시. 23:1,2).

30절. 그리고 땅의 각각 모두의 야생 동물에게, 그리고 하늘들의 각각 모두의 새에게, 그리고 살아있는 혼이 있는 땅 위에서 기는 모든 것에게, 각각 모두의 푸른 풀잎은 식량을 위하여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그렇게 있었다. 동일한 인간의 자연적 평면의 음식물이 여기서 묘사되어져 있다. 그의 자연물이 “땅의 야생 동물”과 “하늘들의 새”를 수단으로 의미되어져 있고, 이것에 야채와 풀잎의 푸른 것이 식량을 위해 주어져 있다. 그의 자연적 식량과 영적 식량 모두 다윗서에서 이렇게 묘사되어져 있다:
여호와께서는 짐승을 위해 풀이 자라게 하신다, 그리고 사람의 섬김을 위해 풀잎을,
하여 그는 땅으로부터 빵을 낳을 런지 모른다 (시. 104:14).
이 구절에서 “짐승”은 11,12절에서 언급된 땅의 야생 동물과 하늘들의 새 모두를 표
현하기 위해 사용되어져 있다.

“야채와 풀잎의 푸른 것” 만이 자연적 인간을 위한 식량으로 묘사된 이유는 이
러하다. 거듭남의 과정에서, 인간이 영적으로 만들어질 때, 그는 전투를 꾸준히 실시
해간다, 이러기 때문에 주님의 교회는 “전투원”이라 불리우기도 한다; 그 이유가 거듭
나기 전, 탐욕들이 통치권을 가지는데, 그 이유는 전체 인간은 오로지 탐욕들과 이 탐
욕들로부터 파생된 거짓들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거듭나는 동안 이런 탐욕들과
거짓들이 한방에 폐지되어질 수 없다, 그 이유는 한방에 폐지되면 그가 획득하고 있
는 생명의 전부가 탐욕들과 거짓들인데, 한방에 그의 모든 생명이 파괴되고 말 것이
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악령들이 인간과 더불어 계속하는 짓을 내버려두다 보면, 악령
들은 인간의 탐욕들을 흥분시키는데, 이 흥분으로 인해 이것들이 느슨해지는 틈이 생기는데, 이는 무수한 방법들에서 있고, 그것들이 주님에 의해 선 쪽으로, 하여 개혁되어질 수 있는 쪽으로 구부려질 수 있다. 전투 시기에서, 악령들은 선하고 참된 것 모두에 맞서, 즉 주님을 향하고 있는 사랑과 신앙, 이것들이 영원한 생명을 가지게 하기 때문에 극도의 미움을 결과 맺는 바, 풀잎의 푸른 것과 야채에 비교되는 식량밖에 그 인간에게 남기는 것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는 그에게 씨를 맺는 풀잎, 그리고 열매 있는 나무에 비교되는 식량 역시 주신다. 이 식량이란 환희와 기쁨과 더불어 있는 고요와 평화의 상태들이다.; 그리고 이 식량을 주님께서는 간헐적으로 인간에게 주신다.
주님께서 인간을 매 순간, 어쩌면 각각 모두의 순간의 지극히 작은 것에 이르기까지에서 방어해주시지 않으면, 인간은 주님을 향한 사랑과 신앙에 관련되는 것들에 맞서는 영들의 세계 안에서 우세를 떨치는 형언할 수 없는 격렬함과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의 미워함의 결과로 곧바로 사멸될 수밖에 없다. 이런 사실의 확실함을 내가 확언할 수 있는데, 나는 (신체를 떠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수 년 동안 다른 삶 안에 있는 영들과 연합되어 왔었기 때문이고, 심지어는 최악의 영들과도 (접촉)되었기 때문이다. 때로 나는 수 천의 영들에 둘러싸인 채로 그들이 독액을 내품는 것도 (당하게) 허용되어진 바 있다. 그들은 가능한 모든 방법에서 나에게 떼지어 달려들었다. 그렇지만 내 머리털 하나 다치게 할 수 없이 안전했던 것은 주님의 보호 덕택이었다. 이런 저런 많은 경험들로부터 나는 영들의 세계와 그곳의 본성에 관하여, 뿐 아니라 영원한 생명의 행복을 누리기 위하여 반드시 견뎌내야 하는 거듭나는 이들의 전투에 관하여도 통째로 교육받아 왔다. 그러나 이런 사실들을 의심없는 신앙으로 믿어짐에서 이런 일반적 묘사 만으로 잘 교육될 자는 없을 것이다. 세부적 사항들이 주님의 자비로부터 다음 장에서 관련되어 있을 것이다.

31절.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그분이 만드신 모든 것을 보셨고, 바라보시니 그것은 참 선 이었다. 이 상태는 “참 선”이라 불린다. 앞의 상태에서는 단지 “선”이라 불리웠다; 그 이유는 지금 신앙으로부터 있는 것들이 사랑으로부터 있는 것들과 하나(one)를 만들기 때문이다. 그리고 고로 결혼이 영적인 것들과 천적인 것들 사이에 결과되어져 있다.

신앙에 관한 지식들에 관련되는 모든 것들, 그리고 주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으
로부터 있는 모두가 천적 (수준)이라 불려진다; 전자는 이해력에 속하고 , 후자는 그
의 의지력에 속한다.

인간 거듭남의 때들과 상태들은 일반적, 세부적 측면에서 여섯으로 나뉘어진다.
그리고 그의 창조의 날이라 불리어진다; 그 이유가, 점차로, 전혀 인간이지도 않음으
로부터, 그는 처음 한가지씩 어떤 것이 되어간다. 그렇게 해서 조금씩 그는 여섯째 날
까지 도달한다. 여섯째 날 안에서 그는 하느님의 형상이 되어간다.

한편 주님께서는 그를 위해 악들과 거짓들에 맞서 계속적으로 싸우신다. 그리고 전투들을 수단으로 진리와 선 안에서 그를 확증하신다. 전투의 때는 주님께서 일 하시는 때이다; 그러므로 예언서들에서 거듭남은 하느님의 손가락의 일이라 불리어진다.
그분은 우리가 사랑을 원리로하여 행동할 때까지 쉬시지 않는다; 그 다음 전투가 중
지된다, 일이 꽤 많이 진전되어 갔을 때, 신앙이 사랑과 결합되어지는 바, 이것이 “참
선”이라 불리어 진다; 그 이유는 그 때 주님께서 그분의 모습으로서 그를 움직이시기
때문이다. 여섯째 날의 끝에서 악령들은 떠난다. 그리고 선한 영들이 악령들의 자리에
들어 앉는다. 그리고 인간은 천국 안으로 입문되어진다. 또는 천적인 낙원 안으로 입
문되어진다. 이에 관하여는 다음 장의 몫이다.

이상 살핀 내용은 말씀의 내적 의미이고, 말씀 속의 최고의 생명이며, 글자의 뜻으로부터는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사실 여기에 담긴 신비들은 너무나 많아 이 작은 몇 페이지로 그것들을 펼쳐 전개하는 것은 무리였을 것은 의심치 않는다. 따라서 매우 작은 한, 두 가지, 즉 거듭남이 이 장에서 취급된다는 것, 이 거듭남은 외적 인간으로부터 내적 인간으로 진행한다는 것 정도 뿐이다. 천사들이 말씀을 지각하는 것은 이러하다: 그들은 글자 안에 있는 것의 어떤 것도 전혀 알지 못하는데, 단 하나의 단어를 놓고서도 그러하다; 더욱이 그들은 말씀의 역사적 예언적 부분들에서 자주 오르내리는 나라들, 성들, 강들, 인물들의 이름은 더더욱 모른다. 그들은 단어들과 이름들에 의해 의미된 것들로부터서만 생각(idea)을 가진다. 고로 낙원에 있는 아담을 수단으로 그들은 태고 교회를 지각하는데, 그럼에도 그 교회가 아닌, 그 교회 속의 주님에 대한 신앙을 지각한다. 노아를 수단으로 그들은 태고 교회의 후손들과 더불어 잔존하여 아브람의 때까지 계속되었던 교회를 지각한다. 아브라함을 수단으로 그들은 그 개인을 결코 지각하지 않고, 그가 표현했던 것, 즉 구원해주는 신앙을 지각할 뿐이다; 이 외 훨씬 많다. 한마디로 그들은 이름들과 단어들과는 완전히 동떨어진 영적인 것들과 천적인 것들을 지각하고 있다.

어떤 자들이 내가 말씀을 읽고 있을 때, 천국의 첫 입구 뜰에까지 데려와졌다.
그리고 거기서 나와 더불어 대화를 나누었다. 그들은 이렇게 말했다. 자기들은 말씀
안에 있는 글자, 또는 단어의 한 조각도 이해할 수 없었다는 것, 그러나 오직 가장 가
까운 내면의 의미 안에서 의미된 것 만을 이해했다고 말하고, 그 의미는 영속되는 질서 안에서 매우 아름다웠다고, 자기들에게 큰 감명을 안겼다고 선포했다. 하여 그들은 그것을 영광(Glory)이라 일컬었다.

말씀 안에는 일반적으로 네 가지의 문체가 있다. 첫 번째 문체는 태고 교회로부터의 문체이다. 표현의 이 형식은 지상적이고 세상적인 것이 언급될 때, 영적이고 천적인 것에 관해 생각하는 것과 같은 방식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자신들을 표현물을 수단으로 표현할 뿐만 아니라 이것들이 자기들에게 더 생명을 주도록 하기 위하여 어
떤 종류의 역사적 시리즈들로 만들어 나갔다; 그리고 이것은 그들에게 아주 높은 등급에서 기쁨을 주었다. 이 문체로부터 한나가 예언했다, 말하기를:
높고, 높은 것을 말하라! 고대의 것이 네 입으로부터 나오게 하라 (삼상 2:3).
이런 표현들이 다윗서에서 “옛 (시절)로부터의 어두운 말들”이라 일컬어졌다. 창조에 관한 세부 사항들, 에덴의 동산, 등등, 아브람의 때까지 내려온 것들을 모세가 태고 교회의 후손들로부터 가졌다.
두 번째 문체는 역사물이다. 이는 안쪽으로는 아브람의 때로부터 있는 모세의 책들에서 발견된다. 그리고 여호수아, 사사기, 사무엘, 열왕기로부터의 말씀에서 발견된다. 이 책들 안에서 역사적 사실들은 그것이 글자의 의미에서 나타내는 것과 같다; 그럼에도 그것들 모두는 내적 의미에서는 아주 다른 것들을 일반적, 세부적 측면 모두에서 포함하고 있다. 이 책의 의미는 주님의 신성한 자비로부터 뒤이어지는 페이지들에서 그것들 순서 안에서 (열거 된다).
세 번째 문체는 예언적인 것이다. 이것은 태고 교회에서 아주 높게 받들어 모시다시피 해 왔던 말들로부터 태어났다. 어쨌든 이 문체는 태고 교회 문체처럼 연결되거나 역사적 형체 안에 있지 않고, 깨어져 있고, 내적 의미 안에서가 아니면 이해는 불가능에 가까웁다. 그러나 그 안에는 가장 깊은 신비들이 있다. 그리고 이 신비들은 아름답게 연결되는 질서를 따르고 있다. 그러면서 외적 인간과 내적 인간에; 교회의 많은 상태들에; 천국 자체에; 그리고 가장 깊은 의미에서 주님에 관련되고 있다.
네 번째 문체는 다윗의 시편들의 것이다. 이는 예언적 문체와 통상적 (우리의) 언어 사이인 중간에 해당되는 문체이다. 여기서 주님은 왕으로서의 다윗이라는 인물 아래, 내적 의미 안에서 취급되시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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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해설 역자 서문

편저자 서문

인간이 이기적일 뿐이다고 당신이 생각하고 있을지라도 분명한 것은 그의 본성 안에 어떤 원리들이 있다는 것…(No matter how selfish you think man is, it’s obvious that there are some principles in his nature….) 이 글은 아담 스미스의 도덕 감정론의 첫 글귀의 첫 토막인데, 이는 그의 책의 출발이자, 그의 책의 근간이 인간 본성을 관찰하고 주목함에 있다는 것, 또는 인간 본성을 아는 것이 너와 나라는 우리들의 삶 사이에서 얼마나 중요한지를 피력한 글귀 같아서 여기에 인용했다. 또한 그의 두 번째 책 “국부론” 역시 이기적일 뿐인 인간 본성과 재물과의 관계를 파헤쳤다고 대단히 간결하게 말해볼 수 있다.
이 책 “창세기 해석”은 이기적일 뿐인 인간 본성의 원리와 상태와 변화, 주님께서 이런 인간 본성을 아시고 구원을 위해 적절한 섭리를 펼치신다는 것을 생생하게 알게해주어 여러분을 실감나게 할 것이다. 하여 이 책을 정독하면 아담 스미스의 책 뿐만 아니라 철학의 대가 칸트의 저서인 “순수 이성 비판” 등등, 그리고 문학 세계에서 난해하다 여겨진다는 궤테의 “파우스트”에 이르기까지의 책들의 이해가 어렵지 않게 될 것이다.
성경은 인간 본성이 재 형성되고, 주님으로부터 선물받는 새 창조로부터의 생명을 그분을 믿는다고 고백만 하면 한번에 받아지는 것이 아님을 말해주고 있다. 그 이유가 인간의 마음은 하루에도 수백 번 뒤엎을 수 있게 복잡한 구조를 지녔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간이 주님을 만나는 것, 하여 새 생명을 받아 처음의 인간이 아닌 새로운 인간이 되는 것이 쉽지 않기에 성경은 이를 셀수 없이 많은 경우들을 이야기 형체로, 비유 형태로 많은 페이지를 할애하여 반복적이고 중복되는 듯 하지만 그렇지 않게 하여 우리에게 전달하고 있다.
이 책은 천국의 비밀들 (Secrets of Heaven, 라틴어로는 알카나 세레스티아, Arcana Coelestia)을 성경의 구절을 중심으로 재 편집했다.
이 책이 여러분께서 여러분의 마음의 가장 깊은 안쪽에 거주하시는 주님을 찾아가 뵙는데 한몫 해주길 기도한다.
더 많은 자료는 baysidechurch.org 또는 biblestudynotesblog.wordpress.com을 검색하면 도움을 줄지 모른다.
6. 19. 2016 뉴욕 베이사이드에서 배제형.

창세기 제 31장

창세기 제 31 장

1-3절. 그리고 그는 라반의 아들들이 하는 말을 들었다. 말하기를, 야곱이 우리 아버지의 모든 것을 가져 갔다. 그리고 우리 아버지의 것으로부터 그는 모든 그의 풍부함을 만들었다. 2 그리고 야곱은 라반의 얼굴 표정을 보았다, 그리고 보라 그는 예전 같지 않았다. 3 그리고 여호와께서 야곱에게 말하셨다, 네 아버지의 토지에로, 그리고 네 출생지로 되돌아 가거라, 그리고 나는 너와 함께 있겠다. “그리고 그는 라반의 아들들이 하는 말을 들었다, 말하기를”이란 “라반”에 의해 의미된 선으로부터의 진리들, 다시 말해 자연 평면에서 주님에 의해 획득된 선에 비교되는 품질을 지닌 진리들을 의미한다. “야곱은 우리 아버지의 모든 것을 가져 갔다”란 지금 “야곱”으로 의미되는 선에 속한 모든 것들이 중간의 선으로부터 그분에게 주어졌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우리 아버지의 재산으로부터 그는 부자가 되었다”란 그분은 그것을 그분 자신에게 주셨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야곱은 라반의 얼굴 표정을 보았다”란 “야곱”으로 의미된 선이 물러날 때 이 선과 더불어 있는 상태의 바뀜을 의미한다. “그리고 보라 그는 예전 같지 않았다”란 비록 그것으로부터 가져온 것이 하나도 없고, 있다면 결합(결혼)이라는 상태 뿐이나 야곱으로 의미된 선을 향한 상태는 변했음을 의미한다. “여호와께서 야곱에게 말하셨다”란 주님께서 신성으로부터 지각하심을 의미한다. “네 아버지의 토지로 돌아가거라”란 그분께서는 지금 신성으로부터의 선에 자신이 더 가까워지게 해야할 것임을 의미한다. “네 출생지”란 그분은 자신을 파생되는 진리에 향하게 하셔야 함을 의미한다. “그리고 나는 너와 함께 있겠다”란 그러면 그것은 신성일 것임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는 라반의 아들들이 하는 말을 들었다, 말하기를, 이는 “라반”에 의해 의미된 선으로부터의 진리들이 그것의 품질로부터 자연 평면에서 주님에 의해 획득된 선과 비교함을 의미한다. 이는 “아들들”의 의미가 진리들이다로부터; 그리고 “라반”이 공동의 지주(stock)로부터 있는 방계의(2차적인, collateral) 선을 표현한다로부터; 고로 이 선은 진짜(순수한) 선들과 진리들을 받아들임을 위해 봉사하는(섬기는) 선일는지 모른다; 여기서의 경우 그렇게 봉사했던 선을 의미하는데, 그 이유는 그것의 분리가 취급되기 때문이다. 야곱이 “이 말들을 들었다”에는 라반의 선의 품질이 자연 평면에서 주님에 의해 획득된 선에 비교되어졌다가 내적 의미에 포함되고 있다; 이는 이어지는 사항들로부터 보여질는지 모른다: 즉 라반의 아들들이 분노했다는 것, 그리고 야곱이 자기 아버지의 모든 것들을 갸져갔다고 선언한 것, 야곱이 라반의 얼굴을 보니, 그는 예전 같지 않았다는 것 등으로부터 이다.
야곱에 의해 표현된 진리의 선에 비(교)하여 라반의 선의 품질은 어떠한지에 대한 것은 앞 장에서 서술하고 보여진 바 있으나, 여기서 예증을 통해, 즉 인간의 거듭남을 가지고 한 번 더 짚어보기로 한다. 그 이유는 여기서 인간의 거듭남이 표현적 의미에서 취급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인간이 거듭나아지고 있을 때, 그는 주님에 의해 어떤 종류의 중간의 선 (중매하는 선, mediate good) 안에 간직되어 있는다. 이 선은 진짜 선들과 진리들을 받아들임을 위해 봉사한다; 그러나 이 임무 수행이 끝나면, 이 선은 진짜의 선들과 진리들로부터 분리된다, 아마 거듭남에 관하여, 또는 새로운 인간에 관하여 어떤 것을 배운 모든 이라면 거듭난 이 후의 새로운 인간은 (세상에서 지니고 있어야만 하는 육체만 같을 뿐) 옛 인간과 전혀 다르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다. 그 이유가 새로운 인간은 영적이고 천적인 것에 애착함 안에 있고, 이 애착함이 새로운 인간에게 정신적 기쁨(delight)과 육체적 기쁨(pleasure, 쾌락)을 생산하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옛 인간은 세상적이고 지상적인 것들에 대한 애착함 안에 있고, 이 애착함도 옛 인간에게 정신적 기쁨과 육체적 기쁨을 생산하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새로운 인간은 천국의 것들을 목적들로 주목해서 보고, 옛 인간은 세상 안의 것들을 목적들로 주목해서 본다. 이로부터 분명한 것, 즉 새로운 인간은 옛 인간과 모든 측면에서 다르고 딴판이다는 점이다.
인간이 옛 인간의 상태로부터 새로운 인간의 상태로 데려다 놓여지기 위하여, 세상 속의 욕망들(현세에의 욕망들, conscupiscences)을 벗어야 하고, 천국에 애착함들을 반드시 입어야 한다. 이 작업은 셀 수 없이 가지각색인 바, 이는 주님만이 아실 뿐이고, 천사들에게도 주님에 의해 알게 해주신 것만에 국한되어 그들도 알고 있다; 더욱이 인간에게는 극히 적은 자에게만 주님에 의해 알려지고 있다. 그럼에도 말씀의 내적 의미 안에서는 이 사항들을 알도록 일반적, 특수적, 개별적 모두에서 명명백백하게 만들어져 있다. 인간이 옛 인간이다로부터 새 인간이다의 상태로 될 때 (즉 거듭나아지고 있을 때), 이는 (어느 목사가 누구에게 십자가의 피의 공로를 믿습니까?라고 묻는 것에 믿습니다! 라고 고백만하면 단 번에 당신은 새 인간이다 라고 어느 목사의 선포에 따라 새 인간이 되는 것이 아니라) 햇수에 햇수를 더하고 곱하여 이루어지는 것, 그렇다, 인생의 마지막까지를 포함, 인생 전체가 요구된다고 말해도 되는 시간의 길이를 거쳐 이루어진다. 그 이유가 현세에의 욕망은 뿌리채 뽑혀나가야 하고, 천국에 애착함들이 (그 자리에 주님에 의해) 은근히 심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는 이전에 가지지 않았던 생명을 선물받아야 한다. 이에 대해 당사자는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한다. 인간 생명의 상태의 변화가 이렇게 엄청 큰 폭의 차이가 있다는 것, (또한 이 큰 변화가 단 번에 되어지지 않는다고 위에 말한 바를 인정한다면,) 필시 따르는 것은 인간은 세상에 애착함과 천국에 애착함 양쪽을 오가는 선 안에 오래 간직될 필요가 있다는 것, 즉 인간은 중간의 (중매하는, 중재하는, mediate) 선 안에 오랫동안 간직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인간은 이 선 안에 간직되어 있지 않으면, 그는 천국의 선들과 진리들도 인정하는 단계에 결코 와지지 않는다.
중재하는 선, 또는 중간(middle)의 선이 “라반과 그의 양떼”에 의해 의미되고 있다. 그러나 이 중간의 선에 인간은 마냥 간직되는 것은 아니고, 중간의 선이 그 본분을 다하고 나면, 반드시 이 선은 분리되어야 한다. 이 분리가 이 장에서 취급된다. 중간에 위치한 선을 사용함이 끝나면 분리되어야 함은 유아기로부터 노년에 이르기까지에서 수행하는 상태들의 변화를 예증으로 삼아도 될는지 모른다. 크게 구분해서 인간의 시기는 유아기-아이시절-젊은 이-성년-노년이다 (요즘은 너나 나나 워낙 오래 살므로 확실치는 않지만, 위의 시기를 나이로 구별해본다면 1-3세, 4-17세, 18-29세, 30-70세, 70 이후 라고 말해도 될는지 모른다 역자주.) 어쨌든 모두 아는 바, 인간은 젊은 이로 건너갈 때, 그가 가지고 놀던 장난감들과 더불어 유아기, 어린 시절을 벗는다는 것; 그가 성숙되는 상태로 건너갈 때, 이전의 시기를 벗고; 노년기로 건너갈 때도 그렇다는 것이다. 그리고 만일 이런 변화의 과정을 되씹어 본다면, 알게 되는 바, 각 시기는 그것 나름대로 기쁨들을 가지고 있다는 것, 이것 덕분에 그는 이어지는 시기 안으로 계속되는 단계들을 받아들인다; 즉 이 기쁨들은 당사자로 다음 단계로 데려다주는 용도에 충당된다; 마지막으로 노령에 있는 그에게 총명과 지혜를 가져다주는 도우미 역할을 한다.
이로부터 분명한 바, 새로운 상태를 입을 때, 이전의 상태는 뒤에 남겨진다는 것이다.
어쨌든 위의 시기별 비교함은 기쁨들이 수단들이다는 것, 그리고 이 수단들은 인간이 이어지는 단계 안으로 진입할 때 뒤에 남겨진다는 것만은 확실하다는 점이다; 이에 반해 인간의 거듭남 동안 그의 상태는 그의 이전 상태와 완전히 다르다; 그리고 거듭나는 그를 인도하는 것은 어떤 자연적 방법에 의해서가 아니라 주님에 의해 초자연적 방법에 의해서 이다는 점이다; 누구도 주님만에 의해 설비된 거듭남을 위한 매체(media), 또는 수단에 의하지 않고, 고로 우리가 지금 말하는 중간의 선에 의하지 않고 거듭난 상태에 도달할 자는 없다. 그리고 인간이 자기의 목적으로 세상적, 지상적, 육체적인 것들을 가지지 않는 상태로, 그리하여 천국으로부터 있는 것들을 목적으로 삼는 상태 안으로 데려와졌을 때, 이때 (양쪽을 오갈 수 있는) 중간의 선은 분리되어진다. 어떤 것을 목적으로 가지는 것은 그것을 그밖의 어떤 것보다 더 사랑하는 것이다.

야곱은 우리 아버지의 모든 것을 가져 갔다. 이는 지금 “야곱”으로 의미되는 선에 속한 모든 것들이 중간의 선으로부터 그분에게 주어졌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라반의 아들들이 야곱에게 주어져서 가져 간 것이 아님을 이어지는 대목에서 알 수 있다

그리고 우리 아버지의 것으로부터 그는 이 모든 풍부함을 만들었다. 이는 그분은 그것들을 그분 자신에게 주셨음을 의미한다. 이는 “풍부함을 만듦”의 의미가 그분 자신에게 주는 것이다로부터; 그 이유가 최고 의미에서 이는 주님을 서술한다, 즉 누군가로부터 선과 진리를 가져올 일 없는 분이신 바, 오직 그분 자신으로서만 가져오실 수 있기 때문이다. 그분의 어머니쪽의 인간에 관련된 다른 선은 실로 수단으로서 그분을 섬겼다; 그 이유가 수단이 된 이 선을 라반이 의미했는데, 그는 야곱의 어머니 리브가의 형제(오라버니) 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중간의 선을 수단으로 그분께서는 자신을 위해 그분 자신의 힘으로 그분의 자연 평면을 신성으로 만드는 어떤 것들을 획득하셨다. 수단들로부터 획득하는 어떤 것이 있고, 수단에 의해 획득되는 어떤 것이 있다. 주님께서는 수단들에 의해 선을 획득하셨다, 그 이유는 그분은 사람으로 태어나셨고, 어머니쪽으로부터 그분이 추방하셔야만 하는 유전적인 것들이 파생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분은 수단들로부터 선을 획득하시지 않았다, 그 이유는 그분은 여호와로부터 임신되었고, 여호와로부터 신성을 받으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분은 자신에게 그분이 신성을 만든 선들과 진리들을 주셨다. 그 이유가 신성 자체가 필요한 것은 아무것도 없기 때문, 중간의 선조차 필요 없으셨기 때문이다; 그분은 질서에 따라 모든 것들이 행해져야만 한다는 것을 뜻하신 것이다.

그리고 야곱은 라반의 얼굴 표정을 보았다. 이는 “야곱”으로 의미된 선이 물러날 때 중간의 선과 더불어 있는 상태의 바뀜을 의미한다. 이는 야곱의 표현함이 자연 평면의 선이다로부터; 그리고 라반이 표현함은 중간의 선이다로부터; 그리고 “얼굴 표정”의 의미가 내면들, 같은 말로 상태의 변화들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 이유가 뒤잇는 말, “그가 그의 얼굴 표정을 보았다, 그리고 바라보니 그는 예전 같지 않았다”라고 말해지기 때문이다. 말씀에서 내면들이 “얼굴”에 의해 의미되는 이유는 내면들은 얼굴을 통하여 빛을 내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신들을 거울 안에서 같이, 또는 형상에서처럼 얼굴에서 표출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얼굴 표정, 생김새(안색)는 생각들의 상태들과 애착들의 상태들을 의미한다.

그리고 보라 그는 예전 같지 않았다. 이는 “야곱”에 의해 의미된 선을 향하여 상태가 완전히 바뀌웠다를 의미한다, 어쨌든 라반의 것으로부터 가져온 것은 아무것도 없고, 전과 같이 야곱의 것은 야곱 자신의 것을 가졌을 뿐이다. 오직 야곱에게 바뀐 것은 결합에 관 한 상태뿐인데, 이는 “그(라반)는 그(야곱)에게 전혀 예전 같지 않았다”는 말이 야곱을 향해 상태가 완전히 바뀌었다를 표시한다는 사실로부터; 또는 라반의 것을 가져오지(훔치지) 않았다는 사실로부터도 알게 된다.
이 구절이 인간 안에 있는 선들과 진리들에 관련하여 있는지를 납득하기 위하여 거의 누구에게도 알려지지 않은 것을 밝히 알려야만 가능할 것 같다. 참으로 알고 있고 인정하는 것은 모든 선과 모든 진리는 주님으로부터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어떤 이에게 인정된 것은 유입이 있다는 것, 그러나 이 유입을 당사자는 눈치채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알려지지 않았고, 적어도 심정에서 인정받지 못하는 것은, 인간 주위에 영들과 천사들이 있다는 것, 그리고 당사자의 내적 인간은 그들 한가운데에 있다는 것, 고로 주님에 의해 통치된다는 것, 비록 이런 사항이 말해졌다 해도, 거의 믿지 않는다는 것이다. 다른 삶에는 무수한 사회들이 있다는 것, 이 사회들은 각각의 선과 진리의 모든 부류들(genus)에 따라 주님에 의해 정리정돈되어 배치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 반대의 사회들은 악과 거짓의 모든 부류에 따라 배치되어 있다; 선과 진리의 어떤 부류들이 있지 않는 만큼, 또는 이 부류들로부터의 어떤 종(種, species)이 있지 않은 만큼, 참으로 어떤 특수한 다양함이 있지 않은 만큼, 이 부류와 종은 이와 같은 천사의 사회들을 가지지 않는다, 또는 이 부류와 종에 상응하는 천사의 사회가 있지 않다. 이와 반대로도 아니다, 즉 악과 거짓의 어떤 부류들, 부류들로부터의 종들, 참으로 어떤 특수한 다양함, 이 종류와 종들에 상응하는 악마적인 사회들이 있지 않다. 비록 인간이 위의 사회를 알아채지 못할지라도 인간 각각은 그의 내면들 측면에서(즉 그의 생각들과 애착들 측면에서) 이와 같은 사회 안에 있다. 인간이 생각하고 뜻하는 모든 것은 이 근원으로부터 있는 바, 만일 인간에게서 그가 속한 이런 영들과 천사들의 사회들을 거두어가 버린다면, 그는 그 순간 생각함도, 뜻함도 없어지고 말아 그는 절대적으로 죽은 자 같이 되고 만다. 비록 인간이 자기 스스로부터 모든 것들을 가지고 있다고, 그래서 천국도 지옥도 있지 않다고, 또는 천국이든, 지옥이든 자기로부터는 아주 멀리 옮겨져 있다고 믿는다 할지라도, 여하튼 인간의 상태는 위와 같이 있다는 말이다.
더욱이 각자 안에 있는 선이 자기에게는 단순한 것, 또는 하나로서 나타나지만, 그럼에도 다양하고, 다양한 것으로 구성되므로 그것의 일반적 측면을 일일이 조사하는 것이 가능할 수 없다. 이것은 악의 측면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이와 같은 것이 인간 안의 선이고, 인간과 더불은 천사들의 사회이다; 그리고 이와 같은 것이 인간 안의 악이고, 인간과 더불은 악령들의 사회이다. 인간은 이런 사회들을 자신에게 소환한다(출두하라고 명령한다), 즉 그는 자신을 이런 영들의 사회 안에 놓아둔다; 그 이유가 비슷한 것끼리 제휴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탐욕스러운 인간은 똑같은 탐욕 안에 있는 비슷한 영들의 사회를 소환한다. 복수함에서 기쁨을 만끽하는 자는 비슷한 기쁨 안에 있는 이들을 소환한다. 이 외의 많은 경우가 있다. 이 영들은 지옥들과 교통한다, 그리고 인간은 그것들 한가운데에 있으면서, 자신의 뜻에 있지 않고 그것들의 뜻에 있는 만큼에서 그것들에 의해 통치되어진다, 비록 인간 당사자가 자신의 기쁨으로부터, 고로 자유함으로부터 그는 그렇게 하므로 자신이 자신을 지휘한다고 상상할지라도 그렇다는 말이다. 그러나 탐욕적이지 않은 이들, 타인에 앞서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이들, 타인을 경멸하지 않는 이들, 복수함에서 기쁨을 향유하지 않는 이들은 비슷한 천사들의 사회 안에 있다, 그리고 그것들을 수단으로 주님에 의해 인도되어진다, 참으로 그들의 자유함을 수단으로 모든 선과 진리쪽으로 그는 자신이 인도되게 허용한다; 게다가 그가 더 내면적이고 더 완전한 선쪽으로 자신이 인도되도록 허용하는 만큼에 비례하여 그는 더 내면쪽이고 완전한 천사의 사회들에로 데려와진다. 그의 상태의 변화는 (그가 속하는) 사회들의 바뀜밖에 더 아니다. 이런 경우를 알도록 나에게는 수년에 걸쳐 경험을 가져보게 허락된 바 있다, 이로 인하여 인간의 유아기로부터 각자에게 친밀해진 것이 나에게도 친밀해 있다는 사실로부터 분명해졌다.
이런 모두로부터 지금 분명한 것은, 어떻게 이런 경우가 인간의 거듭남과 더불은 경우인지에 대하여서 이다, 그리고 중간의 기쁨들과 선들과 더불어, 이것들을 수단으로 그는 그의 옛 인간의 상태로부터 새 인간의 상태쪽으로 주님에 의해 가져다 놓이는지도 분명해진다는 말이다 – 즉 이것은 천사들의 사회들을 수단으로, 이 사회들의 바뀜으로 결과된다는 것이다. 중간의 선들과 기쁨들은 이런 사회들밖에 더 아니고, 이것이 주님에 의해 인간에게 적용되는데, 인간 각자가 그것들을 수단으로 영적이고 천적인 선들과 진리들을 받아들일는지 모르는 정도에서 적용된다; 그리하여 이 받아들임이 결과되면, (중매 역할을 한) 사회들은 분리된다, 그리고 더 내면쪽으로, 더 완전한 선과 진리가 그에게 인접된다. 이것이 본문에서 “라반”에 의해 의미된 중간의 선이 뜻하는 바이다, 그리고 이 선의 분리됨을 수단으로 하는 것이 이 장에서 취급되는 주제이다.

여호와께서 야곱에게 말하셨다. 이는 주님께서 신성으로부터 지각하심을 의미한다. 이는 역사적 말씀의 부분에서 있는 “말하다, say”의 의미가 지각하다 임으로부터 알게 된다. “여호와”가 주님이심은 이미 살핀 바 있다. 이로부터 “여호와께서 말하셨다”가 주님이 신성으로부터 지각하심이 의미됨을 알게 된다.

네 아버지들의 토지로 돌아가거라. 이는 그분께서는 지금 신성으로부터의 선에 자신이 더 가까워지게 해야 한다를 의미한다. 이는 아버지들(조상)의 토지의 의미가 신성으로부터의 선이다로부터, 그 이유가 주님을 서술하기 때문이다; “토지(가나안)”는 주님의 왕국을, 그리고 최고 의미에서는 주님의 신성한 인간을, 그 이유가 이것이 흘러들어 그분의 왕국을 생산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버지”는 선을 표시한다. 그리고 지금 선들과 진리들이 획득되었는 바, 이를 가지고 주님께서는 그분의 자연 평면을 신성으로 만드시는데, 이 선들과 진리들이 야곱이 라반에게 체류하고, 거기서 야곱이 풍부해짐에 의해 표현되어져 있다, 이에 뒤이어 “자기 조상의 토지로 되돌아 감”에 의해서는 그분 자신을 신성으로부터의 선에 더 가까이 있게 하시려는 것이 의미되어 있다.

그리고 네 출생지로. 이는 그분은 자신을 (신성으로부터의 선에서) 파생되는 진리에 향하게 하셔야 함을 의미한다. 이는 “출생지(nativity)”의 의미가 선으로부터 있는 진리이다로부터 알려진다. 그 이유가 모든 진리는 선으로부터 출생되기 때문이다; 이와 다른 근원지는 없다; 그리고 이것이 선으로부터 있기에 진리라고 불리우는 것이다. 그리고 진리로부터 이것이 선임이 확증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너와 함께 있겠다. 이는 그러면 그것은 신성일 것임을 의미한다. 이는 여호와께서 말하셨다는 사실로부터; 그리고 여호와가 주님을 뜻한다로부터 알게 된다 (4068항); 고로 신성을 뜻한다. 이렇게 누군가와 더불어 있는다는 것은 거기에 신성이 있는 것이다. 최고 의미는 주님에 관련된 사항이므로 글자 의미에서는 나뉨이 있지만, 최고 내적 의미에서는 하나됨(unity)만 있다

4-13절. 그리고 야곱은 보냈다, 그리고 라헬과 레아를 그의 양떼가 있는 들판으로 불렀다. 그리고 5 그는 그들에게 말했다, 내가 당신들의 아버지의 얼굴을 보았더니, 그는 예전과는 아주 딴판이다. 그리고 내 아버지의 하느님께서 나와 함께 계셔왔다. 6 당신들도 아는 바, 나는 전력을 다하여 당신들의 아버지를 섬겼다. 7 그리고 당신의 아버지는 나를 속였다, 그리고 내 보상을 열 번이나 바꾸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그가 나에게 악행을 하는 것을 내버려두지는 않으셨다. 8 만일 그가 얼룩진 것들은 다 너의 보상이다 라고 말하면 온 양떼가 얼룩진 것을 낳았고, 그가 부분적으로 색깔이 있는 것이 너의 보상이다 라고 말하면 온 양떼는 부분적으로 색깔 있는 것을 낳았다. 9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당신들의 아버지의 획득물을 거두어서, 그것을 나에게 주셨다. 10 그리고 그 양떼가 흥분하기 시작했을 때 나는 내 눈을 들었고, 꿈에서 보았다, 그리고 보라 양떼 위에 뛰어 오른 숫염소는 부분적으로 색갈 있고 얼룩지고, 회색이었다. 11 그리고 하느님의 천사가 꿈에 나에게 말하셨다, 야곱아. 그리고 나는 말했다, 저를 바라보고 있나이다! 12 그리고 그는 말했다, 바라건대 네 눈을 들어보라, 그리고 양떼 위에 올라 탄 모든 숫염소는 부분적으로 색깔 있고 얼룩지고, 회색인 것을 보아라. 그 이유는 내가 라반이 너에게 했던 모두를 보아왔기 때문이다. 13 나는 네가 기둥에 기름부었던 곳, 네가 나에게 서원을 하였던 곳, 벧엘의 하느님이다. 이 토지에서 빠져 나가거라, 그리고 네 출생지로 돌아가라. “야곱은 (사람을)보내서 양떼가 있는 들판으로 라헬과 레아를 불렀다”란 지금 “야곱”으로 의미된 선에 의해 진리에 대한 애착이 첨가됨, 그리고 이 선이 떠났을 때 적용함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는 그들에게 말했다, 내가 너희 아버지의 얼굴을 보니, 그가 나를 보는 것이 예전 같지 아니하였다”란 “라반”으로 의미된 선 안에서 있는 상태의 바뀜을 의미한다. “그리고 내 아버지의 하느님은 나와 함께 계셔 왔다”란 그가 가졌던 모든 것들은 신성으로부터 이었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너희들이 아는 바, 나는 전력을 다해 너희 아버지를 섬겨 왔다”란 그것은 그분 자신의 권능 속에 있었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너희 아버지는 나를 속였다, 그리고 내 삯을 열 번이나 방법을 바꾸었다”란 그분께서 그분 자신으로부터 이 선 속의 것들을 적용했을 때 그분 자신을 향한 선의 상태를 의미한다, 그리고 그것의 바뀜은 아주 컷다도 의미한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내가 악행을 당하도록 내버려두시지 않았다”란 그럼에도 그것은 방해할 수 없었음을 의미한다. “만일 그가 이렇게 말한다면, 얼룩진 것은 네 삯이 될 것이다 라고 하면, 모든 양떼는 얼룩진 것을 낳았다”란 그분의 자유를 의미한다, 그리고 그분의 자유 안에서 주님은 이런 것들, 즉 선들에 인접해 있는 악들 조차도 가져 가셨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만일 그가 이렇게 말한다면, 부분적으로 색깔 있는 것이 네 삯이다 라고 하면, 모든 양떼는 부분적으로 색깔 있는 것을 낳았다”란 인접해 있는 것이 거짓인 경우도 앞의 경우와 같았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너희 아버지의 획득물을 거두어 가셔서, 그것을 나에게 주셨다”란 이러한 것들은 신성으로부터 이었음을 의미한다. “양떼들이 흥분하는 때에…”란 그들이 합쳐지도록 하려는 애착의 열정을 의미한다. “나는 눈을 들었고 꿈에서 보았다”란 자연적 선이 불명료한 상태에서 지각함을 의미한다. “그리고 보라 양떼 위에 올라 탄 숫염소는 부분적으로 색깔 있고, 얼룩지고, 회색들 이었다”란 “야곱”으로 의미된 자연적 선이 그 근원으로부터 오는 이와 같은 것들에 감화시켜진 결과를 의미한다. “그리고 하느님의 천사가 꿈에서 나에게 말하셨다, 야곱아. 그리고 나는 말했다, 저를 바라보고 있나이다!”란 신성으로부터의 지각, 그리고 그 희미한 상태 안에 현존하심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는 말했다, 바라건대 네 눈을 들어라”란 그분 자신이었던 것으로부터 주의를 기울이심을 의미한다. “그리고 양떼 위에 올라 탄 모든 숫염소는 부분적으로 색깔 있고, 얼룩지고, 회색인 것임을 보라”란 이런 것들의 받아들임이 있을 것임을 의미한다. “그 이유는 라반이 너에게 했던 모두를 보아 왔기 때문이다”란 “라반”으로 의미된 선으로부터의 자기 자신, 이것은 그 자체로부터 행동되는 것이 아님을 의미한다. “나는 벧엘의 하느님이다”란 자연적인 것 안에 있는 신성을 의미한다. “네가 기둥에 기름부었던 곳”이란 진리의 선이 있는 곳, 그리고 그것의 경계선을 의미한다. “네가 나에게 서원했던 곳”이란 거룩한 것을 의미한다. “지금 일어나라”란 승강을 의미한다. “이 토지로부터 빠져 나가거라”란 이 선으로부터 분리됨을 의미한다. “그리고 네 출생의 토지로 돌아가거라”란 진리로부터의 신성한 선과 결합함을 의미한다.

야곱은 (사람을)보내서 양떼가 있는 들판으로 라헬과 레아를 불렀다. 이는 지금 “야곱”으로 의미된 선을 수단으로 진리에 애착함이 첨가됨(adjunction), 그리고 이 선이 떠났을 때, 그때에 적용함을 의미한다. 이는 “야곱”의 표현이 자연 평면의 선이다로부터; 그리고 라헬과 레아의 표현이 이 선에 인접되어진 진리에 애착함이다로부터; “라헬”은 내면의 진리에 애착함을; “레아”는 외면의 진리에 애착함이다; 그리고 “이들에게 (사람을) 보내서 양떼가 있는 들판으로 부름”은 자체에 그것들을 인접되게 함을 표시함이 분명하다. “들판”은 선으로부터 있는 것, 그리고 선이 있는 곳을 의미한다; 그리고 “양떼”는 지금(까지) 획득했던 선들과 진리들 자체, 그리고 이것들쪽으로 라헬과 레아에 의해 뜻해진 진리에 애착함들이, 선(야곱)이 떠났을 때, 적용되어졌다. 이 장에서 야곱은 자연 평면의 선을 표현하고, 이 평면에서 이 선을 신성과 결합하기 위해 더 가까이 끌어 당겼다, 그 이유는 자연 평면의 선이 “라반”에 의해 의미된 선으로부터 자체를 꾸준히 분리시키려 함에 있었고, 또한 분리함의 행동 안에서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표현들은 선과 진리에 관한 상태의 변화에 따라서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상태의 바뀜들은 이런 선과 진리 안에 있는 영들과 천사들의 변화에 의거 있기 때문이다.
중간의 선 안에 있는 영들과 천사들이 물러날 때, 그때 더 완전한 선 안에 있는 새로운 사회들이 가까이 끌어당겨진다. 인간의 상태는 그 인간이 있는 영들과 천사들의 사회들에 의존된다. 즉 같은 생각 속에, 같은 의지 속에 있다는 말이다. 그러나 각 인간의 상태의 바뀜은 두 경우가 있는데, 하나는 그가 어떤 사회들을 자신에게 인접하게 할 때, 그리고 다른 경우 하나는 어떤 사회가 주님에 의해 그에게 인접될 때이다. 전자의 경우이다면, 그는 악 안에 있다; 후자의 경우이다면 그는 선 안에 있다. 후자의 경우의 선은 그의 생명(삶)의 개혁을 도우려고 사회들을 통하여 흘러든다. 야곱에 의해 표현된 선과 “라헬과 레아”에 의해 표현되는 진리에 애착함들이 야곱이 “라반”에 의해 의미된 선으로부터 떠날 때 적용되는 것에 관해 이 장의 내적 의미에서 말해지는 것은 사회들과 그것들의 바뀜들과 정확히 일치한다. 천사들은 사회들로부터 인간이 가지는 상태들, 고로 인간의 선들과 진리들, 결과적으로 우리로서는 한 개의 일반적인 사항으로도 거의 나타나지 않는 무수한 것들을 지각한다. 고로 천사들은 원인 자체 안에 있다, 그 반면 인간은 결과 안에만 있어 그것들을 보지 못한다, 본다 해도 원인으로 결과하는 어떤 변화들을 통하여 이지만 너무나 희미한 지각력 안에서 일 뿐이다; 그리고 그가 주님에 의해 천사들을 통하여 계발되지 않으면 선과 진리에 관한 것은 아무것도 보지 못한다.

그리고 그는 그들에게 말했다, 내가 너희 아버지의 얼굴을 보니, 그가 나를 보는 것이 예전 같지 아니하였다. 이는 “라반”으로 의미된 선 안에서 있는 상태의 바뀜을 의미한다.
이는 여러 번 설명되었다.

그리고 내 아버지의 하느님은 나와 함께 계셔 왔다. 이는 그분이 가지셨던 모든 것들은 신성으로부터 이었음을 의미한다. 이는 “그분의 아버지의 하느님”이 그분의 서술할 경우, 그분이 가지신 신성이다는 사실로부터; 그리고 “나와 함께 계셔 왔다”는 그분이 가지신 모든 것들은 신성으로부터 이었다를 의미함에서 알게 된다. 주님이 자신 안에 있는 인간을 신성으로 만드셨을 때, 그분도 그분 주위에 영들과 천사들의 사회들을 가지셨다. 그 이유가 그분께서는 모든 것들이 질서에서 이루어져 나가기를 뜻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분은 영들과 천사들의 사회가 섬김의 본분을 다하게 하려고 그분 자신에게 소환하셨다, 그리고 그분이 좋아하시는 쪽으로 그것들을 바꾸셨다; 그렇다고 그것들을 자신에게로 가져가시거나 자신에게 적용하신 것은 아니다. 그분은 신성으로부터만 적용하셨을 뿐이다. 이런 방법에서 그분은 천국과 지옥 역시 질서 안으로 되돌리셨다. 이런 방식의 단계들을 계속하시어 그분은 그분 자신을 완전히 신성이 되게 하셨다. 그분께서는 영들과 천사들의 사회들을 (그분의 인간을 신성이 되게 하시는 작업 등등에) 요긴하게 사용할 수도 있으셨지만 그것들로부터 어떤 것도 취하시지 않으셨는데, 예증으로 더 생각해보자.
선이 자신들로부터 있다 라고, 고로 선들 안에 자신의 공적을 놓는 사회들도 그분을 이런 선에 관한 기억 속의 지식을 그분에게 소개함으로 그분에게 유용함을 제공했고, 제공된 이 선으로부터 자기 공적을 주장함이 없는 선 안으로, 즉 신성으로부터 있는 것과 같은 선에 관한 지혜 또한 받아들임에 요긴한 도움을 제공했다. 이 지식과 이로부터의 지혜는 이런 사회들로부터 있는 것은 아니나, 그것들을 수단으로( 그것들을 디딤돌로 삼아) 획득되어졌다. 또 다른 예를 생각해보자: 자신들이 매우 슬기롭다 라고 믿는 사회들, 그래서 선과 진리에 관하여 추론하는 이들, 그리하여 그것이 이런지 저런지 모든 것에 관하여 추론해대는 이들은 대부분 영적 평면에(수준에) 속하는 사회들이다; 이 사회들 역시 이런 인물들에 관한 지식, 즉 추론하는 그들이 얼마나 큰 그늘 안에 있는지를 실감하게 하여, 주님이 그들에게 자비를 가지지 않으시면 그들은 필시 멸해지리라는 것을 알게 되셨지만, 이 지식은 오히려 신성으로부터 더 많은 것을 받아들이셨다, 다시 말해 받아들인 것은 이 사회로부터가 아니고 단지 이 사회들을 수단으로(빌미 삼아) 되어졌다는 말이다.
또 다른 예를 생각해보자. 하느님을 사랑함 안에 있는 사회들, 그리고 그들이 그 하느님이 무한하신 분이라고 기대하며, 숨겨진 하느님을 예배하면서, 자기들은 그분을 사랑함 안에 있을 수 있다 라고 믿는 사회들의 경우이다. 그럼에도 그들이 어떤 생각을 동원해서 무한하신 분을 유한하신 분으로 만들지 않으면, 또는 유한한 지적인 생각들을 수단으로 자신들 안쪽에서 보일 수 있게 숨겨진 하느님을 표출하지 않으면 실지로 위와 같이 믿지 못하는 사회도 있다. 그들이 믿지 못하는 바, 그들은 두꺼운 어둠 안을 쳐다보고, 그 안에 있는 어떤 것을 사랑으로 얼싸 안는데, 이로부터 많은 공상적이고 충분히 이해되지 않는 기발난 발상이 각자의 생각들에 일치하여 일어나고야 마는 사회도 있다. 이런 사회들이라 해도 그들의 내면의 품질에 관한 것, 또한 그들의 사랑의 품질에 관한 지식 안으로 그분을 끌어들여, 이들 역시 그분의 인간이 신성이 되지 않으면 구원해줄 수 없다 라는 것을 실감하게 함으로 그분에게 서비스를 제공한다. 이 지혜 또한 이런 사회들로부터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사회를 수단으로 신성으로부터 이다. 이런 위의 예들은 이 구절의 주제인, “라반”으로 의미된 선으로부터 취해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 그러나 주님이 가지셨던 모든 것들은 신성으로부터, 즉 그분 자신으로부터 이었다는 것을 곰곰이 생각해보게 하고 있다.

그리고 너희들이 아는 바, 나는 전력을 다해 너희 아버지를 섬겨 왔다. 이는 그것은 그분 자신의 권능 속에 있었음을 의미한다. 이는 “섬기다”의 의미가 애쓰다(study) 이다로부터; 그러나 주님을 서술할 경우, 그분 자신의 힘이다로부터; 그리고 이것은 “전력을 다해”라고 표현하여 이를 한층 더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너희 아버지는 나를 속였다, 그리고 내 삯을 열 번이나 방법들을 바꾸었다. 그분께서 그분 자신으로부터 이 선 속의 것들을 적용했을 때 그분 자신을 향한 선의 상태를 의미한다, 그리고 그것의 바뀜은 아주 컷다도 의미한다. 이는 “아버지”, 여기서는 라반인 바, 이 의미는 중간의 선이다로부터; “삯”의 의미가 그분 자신으로부터 이다로부터; 그리고 “열 번”의 의미가 바뀜이 아주 큼이다로부터 분명해진다. “열”은 아주 크다를 표시한다; 그리고 “방법들”은 바뀜들을 표시한다. 이 선의 상태 자체는, 주님께서 그분 자신으로부터 이 선으로부터 있는 것을 적용하셨을 때, 바뀜이 있다와 관련이 있고, 또한 바뀜을 함축하고 있다. 만일 라반에 의해 의미된 선 대신, 이런 선 안에 있는 영들과 천사들의 사회를 가지고 생각해보면 이 경우가 어떻게 서 있는지가 분명해진다. 사회들은 그 사회가 들러 붙어 있어온 자들에게서 쉽게 떼어지지 않는다. 따라서 떼어져야 하는 때가 닥치면, 이 사회들의 영들은 분노한다. 본문에서 라반이 야곱에게 그의 삯을 두고 처신했듯 행동한다; 그렇다, 그들은 만일 어떤 선이 자기들을 수단으로 당사자에게 옴을 지각하면, 그들은 그 선이 자기들부터 그에게 왔다고 말한다; 그 이유가 그들은 자기들의 분노함에서 악으로부터 말하기 때문이다.
거듭나지는 이들에게서도 이와 비슷한 경우는 자주 있다. 주님께서는 인간을 거듭나게 해주시려 사회들을 수단으로 하여 진짜 선들과 진리들을 받아들이게 하는데 유용하게 하신다, 그리고 이 도우미 역할이 끝나면, 이전의 사회로부터 다른 사회로 옮기신다. 이때 이전의 쓰임을 당한 사회는 분노한다. 그러나 이런 사항들이 인간에게 나타나지 않는데, 그 이유는 그가 영들과 천사들의 집단 안에 있다 라고 믿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천사들에게는 명료하게 나타나고, 인간 차원의 경우라면, 주님의 신성한 자비로부터 영들과 천사들과 이야기함이 허락되었거나, 그들 중의 하나로서 그들 사이에 있거나 하는 인간이면 가능할지 모른다.
영들은 인간들이 이런 대목을 알지 못함에, 더욱이 자기들이 인간과 더불어 있음을 알지 못함에, 또한 많은 이들이 자기들의 현존함을 부정할 뿐만 아니라 지옥과 천국이 있음도 부정하고 있음에 한탄하고 있다. 어쨌든 이들은 이런 부정함이 인간의 우둔함 탓이라고 말한다. 사실인 즉, 인간은 이에 대해 생각함이 조금도 없다는 것, 이에 대해 뜻함도 조금도 없다는 것, 인간의 이런 실상이 영들을 통하여 주님으로부터 오지 않는다는 것도 사실이다; 그리고 이것은 주님께서 인류를, 특별하게는 각 인물을 통치하시는 수단들로서 그것들에 의해 있다는 것도 사실이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내가 악행을 당하도록 내버려두시지 않았다. 이는 그럼에도 그것은 방해할 수 없었음을 의미한다. 이는 “악행을 당하게 내버려두시지 않다”의 의미가 주님을 서술할 경우, 방해될 수 없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 이유는 신성에 악행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기 때문, 그러나 신성의 유입은 방해될 수 있다. 모든 악이 이 유입을 방해한다; 그리고 여기서도 “악을 행하는 것”에 의해 의미되고 있다.

만일 그가 이렇게 말한다면, 얼룩진 것은 네 삯이 될 것이다 라고 하면, 모든 양떼는 얼룩진 것을 낳았다.” 이는 그분의 자유를 의미한다, 그리고 그분의 자유 안에서 주님은 이런 것들, 즉 선들에 인접해 있는 악들조차도 가져 가셨음을 의미한다. 이는 내적 의미에서 있는 주제의 상태로부터 알게 된다. 그 주제란, 그분은 삯을 바꿀 자유를 가지셨다는 것, 고로 그분의 자유 안에서 이런 것들이 취해졌다는 것이다. 취해진 이것들에는 선들에 인접된 악들조차 포함되었다는 것은 “얼룩짐”의 의미가 악이 섞인 선들이다로부터 명백해진다.

그리고 만일 그가 이렇게 말한다면, 부분적으로 색깔 있는 것이 네 삯이다 라고 하면, 모든 양떼는 부분적으로 색깔 있는 것을 낳았다. 이는 인접해 있는 것이 거짓인 경우도 앞의 경우와 같음을 의미한다. 이는 바로 앞의 대목과 같은 경우이다; 그리고 “부분적으로 색깔 있다”의 의미가 악들과 섞여 흩어져 있는 진리들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결과적으로 거짓들이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너희 아버지의 획득물을 거두어 가셔서, 그것을 나에게 주셨다. 이는 이러한 것들은 신성으로부터 이었음을 의미한다.

양떼들이 흥분하는 때에. 이는 그들이 합쳐지도록 하려는 애착의 열정을 의미한다. 이는 “흥분함”이 애착의 열정과 그 결과를 의미한다로부터; 고로 그것들(선들과 진리들)은 결합되어야 하리라는 것을 의미한다.

나는 눈을 들었고 꿈에서 보았다. 이는 자연적 선이 불명료한 상태에서 지각함을 의미한다. 이는 “눈을 들어올림”의 의미가 생각하는 것, 또한 의도하는 것, 고로 지각하는 것이다로부터; 그리고 “꿈에서”의 의미가 불명료함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자연 평면의 선이 “야곱”이다.

그리고 보라 양떼 위에 올라 탄 숫염소는 부분적으로 색깔 있고, 얼룩지고, 회색들 이었다. 이는 “야곱”으로 의미된 자연적 선은 그 근원으로부터 인 이와 같은 것들에 물들여지고 마는(감화되고 마는) 결과를 의미한다. 이는 앞 장에서 이런 주제들에 관해 말해진 것으로부터 분명해지는데, 앞 장에서, 라반의 양떼를 수단으로 얼룩지고, 색갈 있고, 반점 있는 것들이 야곱의 것으로 되어진 대목의 의미에서 파악된다.

그리고 하느님의 천사가 꿈에서 나에게 말하셨다, 야곱아. 그리고 나는 말했다, 저를 바라보고 있나이다! 이는 신성으로부터의 지각, 그리고 그 희미한 상태 안에 현존하심을 의미한다. 이는 말씀의 역사적 부분에서 “말하다”의 의미가 지각하는 것이다로부터; 그리고 “하느님의 천사”의 의미가 신성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 이유가 “천사”라는 단어가 말씀에서 언급될 경우, 이는 주님의 어떤 것, 즉 신성의 어떤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천사는 자신으로부터 말하지 않고 주님으로부터 말하기 때문, 특히 여기서와 같이 꿈에서의 경우는 더욱 그러하다. 더 나아가 천사들은 선과 진리의 어떤 것도 자신들로부터 라고 말하는 것을 듣기만 해도 분노하기까지 할 정도이다. 고로 그들은 이런 생각들이 행여나 있을지 염려하여 이런 생각들을 제거하기에 바쁘고, 이런 경우가 다른 이들에게서도 발생하는 일은 절대 없어야 한다고 생각하므로 타인들부터도 이런 생각을 떼어 놓아주려 애쓴다. 그 이유가 자기들이 생각하고, 뜻하고 결과하는 선과 진리의 모든 것은 주님으로부터서만 있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기 때문이다. “꿈에”의 의미는 불명료함에서를 표시한다. 자연 평면에서의 현존, 이 현존은 불명료함 안에 있다는 것은 본문의 야곱이 천사에게 대답함에서도 의미되어져 있다.

그리고 그는 말했다, 바라건대 네 눈을 들어라. 이는 그분 자신이었던 것으로부터 거기로 주의를 기울이심을 의미한다. 이는 “눈을 들어올림”의 의미가 생각하고 의도하는 것, 고로 주의를 기울임이다. 이 대목의 의미가 그분 자신으로부터 이었던 것이다는 본문, “네 눈을 들어보라”라고 말해짐과 시리즈로부터 분명해진다.

그리고 양떼 위에 올라 탄 모든 숫염소는 부분적으로 색깔 있고, 얼룩지고, 회색 임을 보라. 이는 이런 것들을 받아들임이 있을 것임을 의미한다. 고로 그분은 이와 같은 것들을 빨아들이실 것임을 의미한다. 이는 앞에서 말했다.

그 이유는 라반이 너에게 했던 모두를 보아 왔기 때문이다. 이는 “라반”으로 의미된 선의 자기 자신, 이것은 그 자체로부터 행동하지 않음을 의미한다. 이는 라반의 표현이 중간의 선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중간의 선의 자기 자신은 그 자체로부터 행동되지 않는다는 것은 “나는 그가 네게 했던 모두를 보아왔다”의 말에 의미되어 있다. 이 의미를 가지는 것은 내적 의미에서 있는 주제를 정신적으로 조망함으로, 또한 이런 선 안에 있는 사회들로부터 분명해진다. 그 이유가 이들로부터 이 선의 품질이 명백하게 보여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는 그것들은 교통함을 위해, 그리고 수단들로서 섬기는 영들의 사회들이기 때문이다. 이 선들은 그 자체로부터, 그리고 그것의 자기 자신으로부터 많은 것을 행하지 않고 그 선 자체가 타인에 의해, 즉 천사들에 의해서는 선쪽으로, 악령들에 의해서는 악쪽으로 인도되어지게 허용한다는 말이다. (그래서 중간의 선이라 불려지는지도 모른다.) 이것은 이어질 구절들에서 있게 되는 라반의 말로부터도 나타난다. 이 모두는 “라반”에 의해 의미된 선의 자기 자신에 의해 뜻해짐을 보여준다, 즉 이 선은 자체 스스로 행동하지 않는다는 것임을 보여준다는 말이다. 지금까지의 구절 (6-12절)의 내적 의미의 내용들은 요약하는 방식으로만 밝혀왔다. 그 이유는 이 구절의 많은 단어들이 앞 구절에서 이미 살폈기 때문이므로 의문점은 앞 구절들에서 다시 살피기 바란다.

나는 벧엘의 하느님이다. 이는 자연 평면에 있는 신성을 의미한다. 이는 “벧엘”의 의미가 질서의 최말단에 있는 선, 결과적으로 자연 평면에 있는 선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 이유는 영적 평면과 천적 평면에 있는 것들의 종착점이 거기 이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분명한 바, “벧엘의 하느님”은 자연 평면에 있는 신성이다는 것이다. “벧엘”이 자연 평면에 있는 신성을 의미하기에, 거기에 있는 천적인 것들에 관한 지식들도 의미한다. 그 이유는 이런 사항들이 선 속에 있기 때문이다.

네가 기둥에 기름부었던 곳. 이는 진리의 선이 있는 곳, 그리고 그것의 경계선을 의미한다. 이는 “기둥”의 의미가 거룩한 경계선, 고로 질서의 최말단, 그러므로 진리이다로부터; 그리고 “기름부음”의 의미가 여기서는 야곱에 의해 행해진 기름부음, 그리고 기둥의 머리 위에 기름을 부음인 바, 진리를 선으로 만드는 것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네가 나에게 서원했던 곳. 이는 거룩인 것을 의미한다. 이는 “서원을 함”의 의미가 주님께서 준비해주시기를 뜻하는 것이다로부터 분명해진다; 그리고 최고 의미에서는 주님을 서술하는 바, 그분이 준비하신다를 뜻한다; 그 이유는 주님이 준비하시는 것은 무엇이든 그분으로부터 진행하는 것이고, 그분으로 진행되는 것은 무엇이든 거룩이기 때문, 그러므로 “서약을 함”이 여기서 거룩한 것을 의미하게 된다. 이런 설명을 얼핏 읽어서는 이해함에 다소 무리가 뒤따르는 것은 피하기 힘들다. 그러나 인간이 서약을 할 때, 그는 자신을 어떤 대상에 구부리고, 신성에 관련하여 자신 위에 어떤 것을 부과하기 때문이다. (흔한 경우, 하느님께서 제가 원하는 이런 것을 해주시면, 저 역시 당신에게 저런 사항을 실행한다고 약속합니다 같은 식이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는 간증 같은 데에서 우리가 흔히 듣지 않을까 싶다. 역자주.) 그러나 이런 서원이 인간이 아닌 신성 자체, 또는 주님이실 경우, 이는 어떤 소원을 비는게 아니라 뜻하심, 준비하심, 즉 행하심이다. 따라서 신성 또는 주님이 행하시는 것은 그분으로 진행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분으로부터 진행되는 것은 무엇이든 거룩하다.

지금 일어나라. 이는 승강을 의미한다. “일어남, arising”은 말씀 어디에서 이든 승강함을 의미한다.

이 토지로부터 빠져 나가거라. 이는 이 선으로부터 분리됨을 의미한다. 즉 “라반”에 의해 의미된 선으로부터 분리됨인데 이미 설명한 바 있다.

그리고 네 출생의 토지로 돌아가거라. 이는 진리로부터의 신성한 선과 결합함을 의미한다. 이는 “토지로 돌아감”의 의미가 그분 자신을 신성으로부터의 선에 더 가까워지게 하심이다로부터; 그리고 “출생”의 의미가 진리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로부터 “네 출생의 토지로 돌아감”에 의해 진리로부터의 신성한 선과 결합함이 의미됨을 알게 된다.

14-16절. 그리고 라헬과 레아는 대답하여 그에게 말했다, 우리는 더 이상 우리 아버지의 집에서 유산이나 지분을 가지는 것이 없지 않느냐? 15 우리는 아버지에게 외국인으로 세어지고 있지 않는가? 그러기에 그는 우리를 팔아 버렸고, 우리의 은을 먹어 치웠다.
16 하느님께서 우리의 아버지로부터 거두어 간 모든 재물은 우리의 것이고 우리의 아들들의 것이다. 지금 하느님께서 당신에게 말한 모든 것을 행하시오. “그리고 라헬과 레아는 대답하여 그에게 말했다”란 진리에 애착함들의 상호 관계를 의미한다. “우리는 아버지의 집에서 더 이상 지분이나 상속을 가지는 것이 없지 않느냐?”란 “라반”으로 의미된 선으로부터 그들이 분리되는 첫 상태를 의미한다. “우리는 아버지에게 외국인으로 취급되어지고 있지 않느냐? 그런고로 그는 우리를 팔았다”란 그들이 그것에 더 이상 속하지 않도록 하려고 그들 사이를 나쁘게 했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우리의 은을 게걸스럽게 먹어 치웠다”란 만일 그들이 분리되지 않는다면 이런 애착들로부터의 진리들은 소멸될 것임을 의미한다. “하느님께서 우리 아버지로부터 거두어들인 모든 재산은 우리의 것이요 우리 아들들의 것이다”란 모든 것들은 (누군가에 의해 주어진 것은 아무것도 없고) 오로지 그분의 신성으로부터 흘러듦을 수단으로 그분께서 거기로부터 자신에게 가져온 것들인 바, 그분 자신의 힘으로부터 이었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지금 하느님께서 당신에게 말하신 모든 것을 행하시오”란 주님의 섭리를 의미한다.

그리고 라헬과 레아는 대답하여 그에게 말했다. 이는 진리에 애착함들의 상호 (의존) 관계를 의미한다. 이는 “대답하다”에서 동의함을 말할 경우, 상호적임이 의미된다, 그리고 받아들임도 의미된다로부터; 그리고 라헬의 표현함이 내면의 진리에 애착함; 그리고 레아는 외적 진리에 애착함이다로부터 알려진다. 앞에서 진행해온 것의 내적 의미에서 취급된 주제는 자연 평면의 선이고, 이것이 “야곱”에 의해 의미되었고, 이 선이 “라반”인 중간의 선과 분리되었을 때의 경우에 대해서, 그리고 어떻게 자연 평면의 이 선이 자체를 “라헬과 레아”에 의해 의미된 진리에 애착함들에 인접되게 하였는지에 대한 것이었다. 지금 취급되는 주제는 진리에 애착함들로부터의 선에 상호적으로 어떻게 적용되는지 이다. 이 적용함(application)이 지금 “라헬과 레아”에 의한 말들에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이런 말들의 의미는 이런 정도의 설명만 가지고는 어떤 이해력에도 명쾌함을 선물하기는 매우 힘들고 그나마 좀 더 가능해지려면, 배움이 있든지, 이것들에 관한 기억 속의 지식으로부터 기쁨을 지각함이 있든지 해야 한다. 한마디로 이 대목들에 대한 영적 지식들을 갖는 것이다. 이 구절 같은 경우에 필요한 것은 (순수하게) 영적인 지식들 뿐이다. 이 외의 것들을 이 구절에 적용함은 아예 생각조차 할 필요도 없다. 그 이유가 세상적, 지상적인 것을 자기의 목적으로 가지는 이들은 자기들의 감각들을 세상의 것, 지상의 것으로부터 물러나 있게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설사 물러났다고 장담하고, 실지로 그렇게 했다 해도, 이들이 지각하는 것은 비 기쁨인 것들이기 때문이다. 이럴 경우 그들은 자기들이 사랑하는 것, 즉 그들의 목적으로 가지는 것들로부터 물러나 있거나 떠나 있을 것이다. 이런 본성을 지닌 자, 즉 어떻게 선이 그 자체를 진리의 애착함들에 인접되게 하는지를; 그리고 어떻게 진리에 애착함이 자체를 선에 적용하는지를 자기가 알기를 바라는지를; 그리하여 자기가 이를 아는 것에 지루해하는지, 그렇지 않은지를 테스트하려는 자의 경우이다; 이때 그는 이런 사항들이 자기에게 별 이득이 없다고 말할런지 모른다, 그리고 자기는 그것들에 관하여 아무것도 납득함이 없다고도 말할런지 모른다.
그러나 이런 사항들이 세상의 사업과 관련된 것으로 그에게 말해지면, 이 사항이 제아무리 난해한 이해가 있다 해도 개의치 않고 달려든다, 또는 이런 사항들을 납득하면 상대의 애착들을 꿰뚫는 바 이를 이용하면 자신에게 잘 따라붙게 할 것이다고 귀띰한다면 아마도 그는 한술 더 떠서 애착의 내면들조차도 파헤치겠다고 덤벼든다. 과학의 난해한 문제를 탐사하느라 애쓰는 자에게 이런 사항들을 응용하면 엉켜진 난제들을 탐사하는데 도움을 줄 것이라 말하면 그의 눈이 번득거릴 것이다. 그러나 영적 선과 진리가 의문 안에 있게 될 때, 그는 이 주제를 지루하게 느끼고, 금새 등을 돌려 댈 것이다. 이런 것들은 교회에 존재하는 인간의 품질이 알려지도록 하기 위하여 말해져 왔었다.
그러나 선이 그 자체쪽으로 진리를 어떻게 인접되게 하는지, 그리고 진리가 그 자체를 선쪽으로 어떻게 인접하는지에 대한 것은 생각 또는 관념이 선과 진리로 똑바로 향하는 것보다 영들이나 천사들의 사회들을 향하는 것이 더 잘 알아지게 나타날 수 있다. 그 이유가 선과 진리는 이 사회들을 통하여 흘러들기 때문이다; 또한 이미 말한 바 같이(4067항), 인간의 뜻함과 생각함은 이 사회들로부터 오기 때문, 즉 그것들로부터 안으로 흐르기 때문, 마치 이는 그것들이 당사자 안에 있는 듯 나타난다. 여기서의 경우가 어떤지 역시 영들과 천사들의 사회로부터 이다, 즉 그것을 아는 것은 원인 자체로부터 아는 것이다; 그리고 천사들의 사회로부터 아는 것은 이 원인들의 목적들로부터 그것을 아는 것이다. 그것 자체가 인접한 역사적 사항들은 이것들을 더 명백하게 나타나게 한다.
내적 의미는 진리들에 선이 첨가됨을; 그리고 자연 평면에서 진리가 적용됨을 취급한다; 그 이유가 이미 자주 말한 바 같이, 야곱은 자연 평면에 있는 선이고, 그의 여인들은 진리에 애착함들이기 때문이다. 사랑과 선행 속에 있는 선은 주님으로부터 흘러들되, 인간 당사자와 더불어 있는 천사를 통하여서 이다. 다시 말해 당사자의 지식들 외의 어떤 다른 것 안으로는 아니다. 그리고 선이 거기에 고정될 때, 생각은 지식들의 진리들 안에 간직되어 있는다; 이것들로부터 많은 것들이 관련되고 일치될 경우 불리움을 받는다; 그리고 이 불리움은 인간이 이것이 그렇다고 생각할 때까지, 그리고 이것이 그렇기 때문에 애착으로부터 그것을 뜻할 때까지 이다. 이것이 행하여질 때, 선은 그 자체를 진리들에 결합시키고, 진리들은 자유함 안에서 그 자체를 적용한다; 그 이유는 모든 애착은 자유를 있게 하는 원인이기 때문이다.
어쨌든 이런 때 조차에서도 의심이나 부정함 따위가 당사자와 합류하여 왔던 양들에 의해 흥분되어진다; 그러나 애착함이 우세해 있는 한, 우세한 만큼에서 그는 긍정적인 확언을하는 쪽으로 인도되어진다, 하여 그는 이런 참된 것들을 수단으로 진리들 안에서 확증한다. 선이 이런 방식에서 흘러들 때, 이 선이 천사들을 통하여 흘러드는 것인지가 당사자에게 짐작되지 않는다, 그 이유는 이것이 아주 내면적으로 흐르고, 특히 인간의 희미함 안으로, 즉 세상적, 육체적인 것들로부터 있는 인간의 희미함 안으로 흐르기 때문이다. 어쨌든 확실한 원칙은 선이 천사들로부터 흐르지 않고, 주님으로부터 천사들을 통하여 흐른다는 것이다; 이 점을 모든 천사들은 고백하고, 결단코 자신들로부터서는 어떤 선도 있지 않다는 것, 누군가가 선이 당신 덕분이라 말만해도 분개할 정도이다. 이런 모든 것은 원인 자체로부터 인 바, 이제 알아야 하는 것은, 선이 진리쪽에 어떻게 인접하는지, 그리고 진리가 적용되는 것은 어떻게 되는지에 대한 것이다. 이것이 여기서의 내적 의미에서 취급된 주제이다.

우리는 아버지의 집에서 더 이상 지분이나 상속을 가지는 것이 없지 않느냐? 이는 “라반”으로 의미된 선으로부터 그들이 분리되는 첫 상태를 의미한다. 이는 이 말들, “우리는 더 이상 지분이나 상속을 가지지 않느냐?”의 의미가 우리는 더 이상 어떤 결합도 가지지 않느냐?이다로부터; 그리고 “우리 아버지의 집”의 의미가 라반에 의해 표현된 선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로부터 결과되는 것은, 이 말들에 의해 라반에 의해 의미된 선과의 첫 분리가 의미되었다는 것이다. 그 이유가 처음의 상태는, 마음이 의구심 가운데 있다; 두 번째 상태는 의구심이 추론들에 의해 추방된다; 세 번째는 확언함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행동함이다. 이 단계에서 진리와 더불은 선은 자체를 지적인 부분으로부터 의지 안으로 은근히 심는다, 그리고 자기에게 걸맞게 한다.

우리는 아버지에게 외국인으로 취급되어지고 있지 않느냐? 그런고로 그는 우리를 팔았다. 이는 그들이 그것에 더 이상 속하지 않도록 하려고 그들 사이를 나쁘게 했음(이간질 했음)을 의미한다. 이는 “외국인으로 세어짐”의 의미가 이간질을 당함이다로부터; 그리고 “팔다”의 의미가 이간질 당하려고 그들은 그것에 더 이상 속하지 않았다 인 바, 이로부터 알게 된다.

그리고 우리의 은을 게걸스럽게 먹어 치웠다. 이는 만일 그들이 분리되지 않는다면 이런 애착들로부터의 진리들은 소멸될 것임을 의미한다. 이는 “먹어 치움”의 의미가 소멸되는 것이다로부터; 그리고 “은”의 의미가 진리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우리의 은”이 이런 애착들로부터의 진리인 이유는 이미 자주 말한 바 대로, 진리에 애착함들이 라헬과 레아에 의해 표현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사항들이 포함되고 있는 것은 중간의 선을 수단으로 은근히 심어진 선들과 진리들의 경우가 어떤 것인지를 알지 않으면, 또는 중간의 선을 담당하는 영들의 사회들이 어떤 특성을 지녔는지를 알지 못하면 위의 내용이 여기에 포함되어 있다는 것도 알지 못한다. 중간의 선을 조력하는 영들의 사회들은 세상의 것들 안에 있다; 그러나 진리에 애착함들을 소개하고 받아들이게 함을 조력하는 천사들의 사회들은 세상의 것 안에 있지 않고 천국의 것 안에 있다.
이 두 종류의 사회들이 거듭나지는 이들에 관계하여 행동한다; 그리고 그가 천사들에 의해 천국의 것들 안쪽으로 개시하는 만큼, 세상의 것들에 있는 영들은 물러나진다; 그리고 이 영들이 물러나지지 않으면, 진리들은 사라진다. 그 이유가 세상의 것과 천국의 것이 인간 안에서 일치함 안에 있으려면, 천국의 것이 세상의 것을 지배할 경우 뿐이기 때문이다. 고로 이 반대, 즉 세상의 것이 천국의 것을 통치한다면 두 종류의 일치함은 없다. 이 둘이 일치함 안에 있을 때, 진리들은 인간의 자연 평면에서 번성한다; 그 반대의 경우는 진리의 위축이다. 아마 소멸되기까지도 한다, 그 이유는 세상의 것이 천국의 것을 어두워지게 하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의구심 안에 처박는다는 말이다. 이러다가도 천국의 것들이 통치할 때면, 세상의 것들 위에 빛이 드리워져 명료한 상태에서 의심은 축출된다. 무엇보다 제일 먼저 사랑하려드는 것이 그를 통치한다. 이런 사항들은 만일 진리에 애착함들에 의해 뜻해지는 것들이 세상의 것(중간의 선)에서 분리되지 않으면 소멸되리라는 것을 보여준다. 이것이 본문, “그가 우리의 은을 먹어치웠다”에서 의미되고 있다.

하느님께서 우리 아버지로부터 거두어 들인 모든 재산은 우리의 것이요 우리 아들들의 것이다. 이는 모든 것들은 (누군가에 의해 주어진 것은 아무것도 없고) 오로지 그분의 신성으로부터 흘러듦을 수단으로 그분께서 거기로부터 자신에게 가져온 것들인 바, 그분 자신의 힘으로부터 이었음을 의미한다. 이는 앞에서 설명되었다.

그리고 지금 하느님께서 당신에게 말하신 것 모든 것을 행하시오. 이는 주님의 섭리를 의미한다. “하느님께서 말하신 모두를 행함”은 순종함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것이 주님을 서술할 경우, 이는 설비하심을 의미한다; 그 이유가 그분은 또 다른 누구로부터 행동되지 않고 그분 자신으로부터만 행동하시기 때문이다. 하느님은 자신에게 “행하라”고 말하시는 것이 아니라, 자신으로부터 행하고 있다고 말하신다.

17-18절. 그리고 야곱은 일어났다, 그리고 그의 아들들과 그의 여인들을 낙타 위에 올렸다. 18 그리고 그는 모든 그의 습득물, 그리고 그가 수집한 모든 그의 물질, 그가 밧단-아람에서 모았던 것인 그가 사들인 습득물을 챙겨서 가나안의 토지에 있는 그의 아버지 이삭에게로 떠났다. “그리고 야곱은 일어났다”란 “야곱”으로 의미된 선의 승강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의 아들들과 그의 여인들을 낙타에 들어올렸다”란 진리들의 승강, 그리고 진리들에 애착함들의 승강, 그리고 이 승강함이 일반적인 것들 안에서 질서 있게 배열됨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는 자기가 모은 그의 모든 물질과 그의 모든 습득물을 챙겨 떠났다”란 라반의 것으로부터 파생된 선과 진리가 분리됨을 의미한다; “그가 사들인 습득물”이란 다른 근원으로부터 이들에 의해 획득된 것들을 의미한다; “그가 밧단-아람에서 모았던 것”이란 자연적인 것 안에 있는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들을 의미한다; “가나안의 토지에 계신 그의 아버지 이삭에게로 가기 위해”란 그분의 인간이 신성으로 만들어져야 한다는 의향쪽으로, 합리성 속의 신성한 선과 합쳐지기 위하여를 의미한다.

그리고 야곱은 일어났다. 이는 “야곱”으로 의미된 선이 승강함을 의미한다. 이는 “일어남”의 의미가 승강함을 포함한다로부터; 그리고 야곱의 표현함이 자연 평면의 선이다로부터, 여기서는 신성쪽으로 더 가까이 당겨지는 선이다, 그 이유는 중간의 선, 또는 “라반”과 분리되어지기 때문이다. 이것이 인간에 주목하면, 그가 천국의 것들에 더 가까이 당겨지는 바, 그가 “승강된다”고, 또는 높은쪽으로 당겨진다 라고 말해진다. 이렇게 말해지는 이유는 인간은 천국이 더 높은 데에 있다고, 하여 승강되어야 천국 안에 들어간다고 믿고 있기 때문에서일 뿐이다. 사실상 이런 표현은 외관만으로부터의 표현이다, 그 이유는 천국, 또는 천국의 것들(즉 영적이고 천적인 것들)은 높은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안쪽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그가 영적 사랑과 신앙 안에 있을 때, 그는 그의 내면들 측면에서 천국 안에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의 아들들과 그의 여인들을 낙타에 들어올렸다. 이는 진리들의 승강, 그리고 진리에 애착함들의 승강, 그리고 이 승강함이 일반적인 것들 안에서 질서 있게 배열됨을 의미한다. 이는 “아들들”의 의미가 진리들이다로부터; 그리고 “여인들”, 여기서는 라헬과 레아, 그녀들의 하녀들인데, 이들은 진리에 애착함, 지식들(주관적 지식들)에 애착함, 기억 속의 지식들(객관적 지식들)에 애착함을 의미한다; 그리고 “낙타들”의 의미가 자연 평면에 있는 일반적 기억 속의 지식들이다로부터 알려진다.
표현들과 상응함이 어떤 경우인지를 알지 않으면, “그는 그의 아들들과 여인들을 낙타들 위에 들어올렸다”는 말이 위와 같은 의미를 가지는 것을 믿을 수 없다; 그 이유가 문장 내에서 단순히 아들, 여인, 낙타만을 생각한다면, 이 단어 자체 안에 함유하는 어떤 영적인 뜻과는 너무나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단어나 문장을 영적으로 보고 지각하는 천사들은 지상의 아들을 생각하지 않고, 아들이 말하여지면, 진리를 생각한다. 여인이 언급되면, 여인이 아닌 진리에 애착함, 지식들에 애착함, 기억 속의 지식들에 애착함을 떠올린다. 낙타 역시 마찬가지여서 자연 평면의 일반적인 것들을 떠올린다. 그 이유가 이런 것이 이런 모든 것들에 대한 상응이고, 이와 같은 것이 천사의 생각이기 때문이다. 경이로운 또 하나는 육체 안에서 사는 내적인 영적 인간의 경우도 이와 같다는 것이다. 물론 외적 인간의 경우는 이를 알아채지 못한다. 이런 이유로 해서 거듭나져가다 죽는 이들은 이와 같은 생각 안에 있게 되어 별다른 배움을 따로 가질 필요도 없이 그는 천사들과 더불어 생각하고 이야기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이것은 그가 이런 내면의 생각을 (세상에서) 꾸준히 지녀오다가 죽었을 경우가 아니면 불가능하다. 생각들이 (양쪽 세계를 향해) 이런 특성을 지니는 것은 자연적인 것들과 영적인 것들의 상응으로부터 오고 있다; 그러므로 비록 말씀의 글자 의미가 자연적 수준이지만, 그것 안쪽에 영적 수준의 것들을 포함할 수 있고, 게다가 영적인 것들의 개별적, 특수적인 것들도 포함할 수 있다. 이런 것은 내면, 또는 영적 생각과 거기로부터 파생되는 말 속에 있다; 또는 다른 말로 하면, 천사들의 생각과 말 안에 있다.
진리들의 승강과 진리에 애착함의 승강, 이 승강함이 일반적인 것들에서 질서적으로 배열되고 있다에 주목해보면, 이러하다: 진리들과 애착함들의 승강은 영원한 생명(삶)으로부터의 것과 주님의 왕국으로부터의 것들이 육체의 생명(삶)과 세상의 왕국에 속한 것들 앞에 놓여질 때 가능해진다. 다시 말해 인간이 전자의 것을 중요함의 제 1의 서열에 두고 이것을 자신의 우두머리로 인정할 때, 그리고 후자의 것은 도구로 삼고 두 번째 중요한 것으로 인정할 때, 그와 더불은 진리들과 애착들은 승강된다; 그 이유가 인간이 천국의 빛 안으로 운반되는 정도에 비례하여 자신 내부에 총명과 지혜를 지니기 때문이다. 그러면 세상의 빛으로부터 있는 것들은 마치 그가 천국의 것을 거울로 보듯 그가 지닌 천국의 형상이 되어 있는다. 이 반대의 경우도 당연히 존재한다. 즉 육체의 생명 속의 것들과 세상의 왕국 속의 것들이 삶의 중요도에서 제 1 의 서열로 장착될 경우이다. 그가 이렇게 장착한 이유는, 후자의 것, 천국의 빛이든, 천국의 왕국이든 그의 육체의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 또는 누군가가 거기로 왔다는 것을 보지 못했기 때문, 최소한 그것들에 대해 알려진 것이 없어 알지 못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게다가 이런 것들이 존재한다고 믿든, 믿지 않든 자신에게 오는 이득도, 해함도 아무것도 없다는 결론에 당도한다. 하여 이런 생각들을 확증하여 굳히고 세상의 삶을 사노라면, 그는 선행과 신앙을 지독하게 경멸하고야 만다. 이런 인간이 될 경우, 진리들과 진리에 애착함들의 승강은 아예 없고, 승강되기는커녕 질식되든가, 거절되든가, 타락되든가 하는 식으로 치닫는다. 그 이유가 그는 자연적 수준의 빛 안에 있기 때문이다, 이 안으로 어떤 천국의 빛도 흐르지 않는다. (자연계와 영계는 평행적 관계(parallelism)에 있어 상응이라는 사다리가 아니면 승강, 하강을 할 수 없다 역자주.) 이상 살핀 바로부터 진리의 승강, 진리에 애착함의 승강에 의해 뜻해진 바를 알았을 줄로 본다.
이제는 일반적인 것들에서 이 승강함들이 질서적으로 배열되고 있다를 생각해보자. 사실 이 배열은 필수적 결말이다; 그 이유가 인간이 천국의 것들을 세상의 것들 앞에 장착하는 만큼에서 세상의 것들은 천국의 상태들에 따라 배열되기 때문, 위에서 말한 바대로, 천국의 것을 거울을 통해 보는 것 같이 세상의 것이 천국의 형상이 되어 있다. 그 이유가 이 두 가지 는 상응하는 표현들이기 때문이다. 질서 안으로 배열함을 결과하는 것은 목적들이다. 즉 주님께서는 인간 안에서 목적들을 통하여 질서적인 배열을 해주신다는 말이다. 그 이유는 질서 안에 서로 뒤잇는 세가지가 있기 때문인데, 그것은 목적들(ends), 원인들(causes) 결과들(effects)이다. 목적은 원인을 생산하고, 원인을 통하여 결과가 도출된다. 목적이 있고, 목적이 있음으로 원인이 밖으로 출시되고, 원인이 세상 밖으로 출시한 것이 결과이다. 목적들은 인간 안에서 가장 깊은 것들이다; 원인들은 중간, 또는 중매하는 것들인데, 중매하는 목적들이라 불리운다; 그리고 결과들은 최말단(ultimate), 그리고 최종의 것(last) 또는 최말단의 목적들이라 불리운다. 결과들은 일반적인 것들(generals)이라고도 불리운다. 이상 살핀 바로부터 일반적인 것들에서 질서적으로 배열됨이 무엇인지 가늠되었을 것이다. 즉, 영원한 생명(삶)에 속한 것, 주님의 왕국에 속한 것이 목적으로 주목될 때, 모든 중간의 목적들, 또는 원인들, 그리고 모든 최말단의 목적들, 또는 결과들이 목적 자체에 일치하여 질서적으로 배열된다; 그리하여 목적 자체가 자연 안에 있는데, 그 이유는 결과들이 거기 있기 때문이다; 같은 말로 일반적인 것들이 거기 있기 때문이다.
자기 스스로 판단력을 소유하고 어떤 주제이든 곰곰이 따져 생각할 수 있는 년령 이후의 모든 이라면 자기가 두 왕국들 안에 있다는 것, 즉 영적 왕국과 자연적 왕국 안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영적 왕국은 내면에 있고, 자연적 왕국은 외면에 있다는 것도 알 수 있다; 결과적으로 그는 두 왕국에서 이것이 저것 앞에 놓이게 할 수 있다; 즉 그는 다른 것에 우선하여 이것을 목적으로 중요시 할 수 있다는 말이다. 고로 목적으로 중시한 것이 그를 통치한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그가 자기의 목적으로 영적 왕국을 중시하고 그 왕국에 속한 것을 우선시 한다면, 그는 주님을 사랑함과 이웃을 향한 선행을 제 1의 것, 가장 높은 것으로 인정한다. 결과적으로 모든 것들은 사랑과 선행을 확증하고 신앙으로부터 이다 라고 말해진다; 그 이유가 이것들이 이 왕국에 속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럴 경우 자연 평면 안의 모든 것이 이 왕국에 종속되고 순종하기 위하여 이 왕국의 것에 맞추어 질서 안에 배열된다. 그러나 인간이 자연적 왕국을 그의 목적으로 가지고 그의 중요도의 첫 순위에 앉힐 때, 그는 주님을 사랑함에 속한 모든 것, 이웃을 향한 선행에 속한 모든 것, 고로 신앙으로부터 있는 모든 것을 무엇이든 쓸모 없게 만들고 그렇게 만든 만큼 소멸되어진다. 그 대신 세상을 사랑함과 자기를 사랑함, 이 사랑에 속한 모든 것이 자신의 모든 것이 되게 한다. 이럴 경우, 그의 자연 평면에 있는 모든 것들은 그의 목적들에 발맞추어 배열된다, 고로 천국의 것들에 지독하게 반대되어 있다; 이리하여 그는 자신 안에 지옥을 만든다. 목적으로 중시하는 것이 사랑인 이유는 모든 목적은 사랑 속에, 사랑으로부터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사랑되어지는 것은 무엇이든 그의 목적으로 중요시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자기가 모은 그의 모든 물질과 그의 모든 습득물을 챙겨 떠났다. 이는 라반의 것으로부터 파생된 선과 진리가 분리됨을 의미한다. 이는 “챙겨 떠남, carry away”의 의미가 분리되는 것이다로부터; “습득물”의 의미가 진리이다로부터; 그리고 “물질, substance”의 의미가 선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가 모은 것”은 라반과 그의 양떼와 관련이 있는데, 그 이유는 야곱이 라반의 양떼를 수단으로 재산을 획득했기 때문이다. “습득물”이 진리를; “물질”이 선을 표시하는 이유는 습득물이 원어에서의 경우, 일반적으로 “가축떼, cattle”를 의미하는 단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가축떼”는 특별한 측면에서, 즉 “양떼”와 동시에 언급되는 때가 자주 있는데, 이럴 경우, 양떼가 선을, 가축떼는 진리를 의미한다. “물질”은 이런 저런 모든 것들이 획득되게 하는 자원(resources)을 의미한다. 습득물과 물질은 재산이라는 측면에서 거의 비슷한 의미를 지니지만, 이 두 단어가 같이 언급될 경우, 하나는 진리를, 다른 하나는 선을 서술하는데, 그 이유는 말씀의 특별한 측면 모두 각각 안에는 선과 진리의 천국 결혼이 스며 있기 때문이다.

그가 사들인 습득물. 이는 다른 근원으로부터의 것들을 수단으로 획득된 것들을 의미한다. 이는 “습득물”의 의미가 진리들이다로부터; 그리고 “사들임”의 의미가 또 다른 근원으로부터 획득된 것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 이유가 사들인 습득물은 또 다른 근원으로부터 이기 때문, 그러나 아직 라반의 양떼를 수단으로 획득되어졌던 것들로부터 있었다.

그가 밧단-아람에서 모았던 것. 이는 자연 평면에 있는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들을 의미한다. 이는 “밧단-아람”의 의미가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가나안의 토지에 계신 그의 아버지 이삭에게로 가기 위해. 이는 그분의 인간이 신성으로 만들어져야 한다는 의향에서, 합리성 속의 신성한 선과 합쳐지기 위하여를 의미한다. 이는 이삭의 표현함이 신성한 합리성이다로부터; 그리고 특별하게는 합리성의 신성한 선이다로부터; 그리고 “가나안의 토지”의 의미가 주님의 천적 왕국이다로부터; 그리고 최고 의미, 즉 주님을 서술할 경우, 그분의 신성한 인간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상 살핀 바를 종합하면, “가나안의 토지에 계신 그의 아버지 이삭에게로 감”은 그분의 인간이 신성으로 만들어질 의향으로 합리성의 신성한 선과 결합하기 위하여가 의미되어 있다.
인간 안에 있는 합리성과 자연 평면의 결합에 대해서 말해보면, 합리성은 내적 인간 속에 있고, 자연 평면은 외적 인간 속에 있다고 알려지고 있다; 그리고 그것들의 결합이 인간을 산출하는데, 결합 당시의 품질이 그 인간이다. 그리고 두 인간이 하나로서 행동할 때 결합이 있다; 그리고 자연적 인간이 합리적 인간을 섬기고 종속될 때 그들은 하나로서 행동한다. 인간의 경우, 이것은 주님이 해주셔야만 가능하지만, 주님의 경우, 그분 자신에 의해서 하셨다.

19-21절. 그리고 라반은 그의 양떼의 털을 깍으러 나갔다. 그리고 라헬은 그녀의 아버지의 것인 드라빔을 훔쳤다. 20 그리고 야곱은 자기가 도망한다는 것을 그에게 말하지 않았는 바 그는 아람 사람 라반의 심정을 훔쳤다. 21 그리고 그는 자기와 자기가 가졌던 모든 것을 가지고 달아났다. 그리고 그는 일어나 강을 건넜다, 그리고 그의 얼굴을 길르앗 산을 향하여 놓았다. “그리고 라반은 그의 양떼의 털을 깍으러 나갔다”란 선용의 상태 그리고 선으로부터 목적이 있는 상태를 의미하는데, 이 상태가 “라반의 양떼”이다. “그리고 라헬은 그녀의 아버지의 것인 드라빔을 훔쳤다”란 진리에 관련하여 라반으로 의미되는 상태의 변화를 의미한다. “그는 자기가 도망하는 것을 라반에게 말하지 않았다”란 분리를 수단으로를 의미한다. “그리고 야곱은 아람 사람 라반의 심정을 훔쳤다”란 선에 관련하여 라반으로 의미되는 상태의 변화를 의미한다. (여기서의 “아람 사람 라반”은 앞 장에서와 같은 신성한 진리와 선을 내포하지 않는 선을 명시한다) “그는 자기와 자기가 가졌던 모든 것을 가지고 달아났다”란 분리됨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는 일어났다”란 승강을 의미한다. “그리고 강을 건넜다”란 결합이 있는 상태를 의미한다. “그리고 그의 얼굴을 길르앗 산을 향하여 놓았다”란 선이 거기에 있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라반은 그의 양떼의 털을 깍으러 나갔다. 이는 선용(use)의 상태, 그리고 선으로부터 목적이 있는 상태를 의미하는데, 이 상태가 “라반의 양떼”이다. 이는 “털을 깍음”의 의미가 선용이다로부터; 고로 목적이다, 그 이유가 선용(use, 쓸모 있음, 유용함)이 목적이기 때문, 이는 아래에서 살핀다; 그리고 “양떼”의 의미가 선이다로부터. 이것이 선용의 상태와 목적의 상태가 “털을 깍으러 나감”으로 의미됨을 보여준다. 여기서 취급되는 주제는 “라반”인 중간의 선이 “야곱”인 라반의 양떼를 수단으로 획득한 선으로부터 분리됨이다; 그러나 이 분리됨이 어떤 경우인지는 이 선 안에 있는 영들의 사회로부터가 아니면 알려질 수 없다, 그리고 영들의 사회로부터 이 선이 인간에게 흘러듦에 관하여는 내가 경험한 것을 아래에 서술해보는 도리밖에 없다.
(영들의 사회 안에는 크게 구분한다면) 선한 영들이 있다, 그런가 하면 중간 수준으로 선한 영들이 있다, 또한 악한 영들이 있다. 이들은 인간의 거듭남 동안 당사자에게 인접해 있다, 인접한 목적은 이 영들을 수단으로 그가 진짜 선들과 진리들을 소개받고, 진짜의 것을 받아들여졌으면 해서 이다, 그리고 이 작업은 주님에 의해 천사들을 수단으로 해서 이다. 그러나 당사자에게 인접한 영들, 또는 영들의 사회들이 거듭나지려는 인간과 일치하여 있지는 않다, 물론 잠간 동안 정도의 시간 간격 정도에서는 일치해 있는 경우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인접한 인물의 거듭남에 도우미 역할을 끝내면, (일치하지 않기에) 분리되어진다. 그들이 분리되는 방식들은 아주 다양하다. 즉 선한 영의 경우는 이렇고, 중간의 영은 저렇고, 악한 영의 경우는 더 더욱 다르다. 선한 영의 분리는 이 분리됨을 알아채림 없이 진행되어 결과가 나타난다. 그 이유가 선한 영들은 자신들이 어떻게 해야 주님이 흡족해 하시는지를 알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간 정도로 선한 영들은 선한 영과는 달리 많은 수단이 동원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게다가 자유함 안에서 물러나게 하는 정도에 (눈치채서 스스로 분리되어 주는 정도에) 이르려면 많은 방법들이 요구된다. 그 이유가 그 영들이 자기들의 기쁨(delight)과 자기들 수준의 복됨을 지각하기 위하여서는 그들의 선의 원래 상태로 되돌려야 하기 때문이다, 즉 이 영들은 거듭나는 인간과 연합하기 이전에서 자기들이 발견했던 기쁨(pleasure) 만큼으로 되돌려 데려다 놓으면 그들은 거듭나는 인간의 기쁨의 수준과 일치하지 않아 불편함을 갖게 되어 결국 제 스스로 분리된다. 악령 역시 자유 안에서 분리를 진행하지만, 이 자유란 그것들이 자신의 기준에서 말하는 자유일 뿐이다. 그들이 거듭나는 인간에게 인접되게 하신 이유는 거듭나는 인간으로 거절되어져야 하는 천국과 반대적인 생각들과 기쁨들을 받아들여 보게 해줄까 하는 의도에서 이다. 그러면 반작용이 있어 오히려 선들과 진리를 더 빨리, 더 확고히 붙드는 챤스를 가지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확증함이 시작될 때, 그 영들은 거듭나는 인간에게 남아 있는 것에 불편함을 지각하고, 분리됨에서 기쁨을 누릴 것같이 여기면서 결국 스스로의 자유함에서 떨어져 나간다. 거듭나는 인간의 선과 진리에 관련한 상태는 대략 위와 같이 하여 바뀜이 있다.
“양털을 깍는 것”이 선용(use)을 수행하는 것을 표시하는데, 그 이유는 말씀에서 “양털을 깍음”은 선용(유용함) 밖에 더 다른 의미가 없기 때문, 그 이유가 이를 수단으로 양털이 획득되기 때문이다. “양-털 깍음”이 선용을 표시하는 것을 모세의 책에 있는 구절로부터 분명해진다:
네 목축떼와 네 양떼로부터 태어나는 첫배의 숫컷 모두는 여호와 네 하느님에게 신성한 것으로 구별해 바쳐라; 너는 네 숫소의 첫배를 일을 부리지 말고, 네 양떼의 첫배의 털을 깍지 말라; 그러나 너는 여호와께서 선택하신 장소에서 매 해마다 여호와 네 하느님 앞에서 그것을 먹을 것이다 (신. 15:19);
위에서 “양떼의 첫배의 털을 깍지 말라”는 것은 그것으로부터 가정에서의 선용을 만들지 말라는 것을 표시한다. “양털 깎음”이 선용을 의미했기에, 그 시절 양털 깍는 날은 특별한 행사를 치루는 날로서, 어떤 공적 직능을 수행하듯 여겼다. 이는 창. 38:12, 13에서 유다가 “그는 자기 양떼의 털을 깍았다”라는 구절로부터도 알게 되고; 다윗의 아들들에 관한 사무엘하서에서:
이 년이 지났을 때 였다, 압살롬이 에브라임에 있는 바알하솔에서 양털을 깍는 행사를 가졌다; 그리고 압살롬이 왕의 모든 아들들을 불렀다; 그리고 압살롬이 왕에게 왔다, 그리고 말했다, 보십시오, 지금 당신의 종이 양털 깍는 행사를 개최합니다; 왕이시여, 바라옵건대, 그의 종, 당신의 종과 더불어 가게 하소서 (삼하. 13:23, 24).

그리고 라헬은 그녀의 아버지의 것인 드라빔을 훔쳤다. 이는 진리에 관련하여 라반으로 의미되는 상태의 변화를 의미한다. 이는 여기서 “훔치다”의 의미가 귀하고 거룩하게 여기는 것을 가져감, 고로 상태가 바뀜이다로부터; 그리고 “드라빔(teraphim)”의 의미가 진리들인 바로부터, 이는 아래에서 살핀다; 그리고 “아버지”의 의미가, 여기서는 라반, 그에 의해 의미되는 선이다; “아버지”가 선을 의미한다. 위 살핀 바를 종합하면, “라헬은 그녀의 아버지의 것인 드리빔을 훔쳤다”에 의해 진리 측면에서 “라반”에 의해 의미되는 상태가 바뀜이 의미되게 된다.
이런 내용들이 포함되는 것은 영들이 (거듭나는 인간으로부터) 분리되어질 때, 그 영들의 상태로부터 알는지 모른다. 그 이유가 선과 진리 측면에서의 영들의 상태는 이 영들이 속하여 있는 사회와 일치하여 있기 때문이다. 대체로 모든 생각은 다른 것들을 통하여 흐른다, 즉 생각 속의 주제들은 대체로 사회 안에 있는 이들을 통하여 흐른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이들이 이 사회로부터 옮겨 저 사회로 보내질 때, 그들의 생각과 애착의 상태 역시 바뀐다, 고로 선과 진리 측면의 그들의 상태도 바뀐다. 그런데 만일 그들이 불일치하는 사회 안으로 보내질 경우, 그들은 불편함을 가지게 되고, 뭔가 억류된 느낌까지 들어 거기를 빠져나와 일치하는 사회로 떠난다. 이런 이유로 악한 자는 선한 자의 사회 안에 머물기가 힘들다, 이 반대의 상황도 마찬가지 이다; 그리고 모든 영들과 천사들은 사랑으로부터 있는 애착에 일치되는 사회들 안으로 구별되어진다. 그러나 사랑의 모든 애착은 그것 안쪽에 다양한 것들을 포함한다; 그렇지만 한 개가 군림하는 바, 이 한 개 아래에서라면, 각 영은 많은 사회들 안에 있을 수 있기는 하다. 그러나 여전한 것은 자기를 통치하는 애착인 것을 향하려고 노력하는 것, 따라서 결국은 그 애착에로 귀착하고야 만다.
“라반”에 의해 의미된 선, 그리고 이 선의 상태가 바뀜에 주목해보자. 이 선이 야곱에 의해 표현된 선과 더불어 있는 동안에서는 이 선도 신성에 가까이 있었다. 그 이유가 “야곱”이 자연 평면에 있는 신성으로부터의 선을 표현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함께 있었던 동안에서는 선과 진리의 더 완전한 상태에 있었다. 그러나 분리됨이 있게 되자, 이것은 선 측면에서, 진리 측면에서 모두에서 또 다른 상태에 놓여지게 되었다. 간단히 말하면, 다른 삶에서의 상태의 바뀜은 신성에 더 가까이, 또는 더 멀리에 위치하느냐밖에 더 아니다. 이로부터 라반에 의해 의미된 선이 야곱으로 의미된 선과 분리될 때의 상태 변화가 어떤 경우가 될 것인지 짐작이 될 것이다.
“라헬이 자기 아버지의 것인 드라빔을 훔쳤다”는 것은 진리들 측면에서 상태의 바뀜을 의미한다고 말한 이유는 “드라빔”이 라반의 하느님들(his gods)을 뜻하기 때문이다. 이는 이어지는 구절에서, 라반이 야곱에게 한 말로부터 분명해진다:
어찌하여 너는 내 하느님들을 훔쳤느냐? 그리고 야곱이 대답했다, 당신이 당신의 하느님들을 발견할 때 그가 누구이든, 그는 우리의 형제 앞에서 살지 못할 것이다 (창. 31:30, 32)
내적 의미에서 “하느님들”은 진리들을 의미한다, 이런 이유로 구절의 주제가 진리일 경우, “하느님(God)”이 명명되어진다.
드라빔은 그들이 하느님에게 문의할 때 사용했던 우상들이다, 그리고 그들이 받았던 대답들은 신성으로부터의 진리들이었기에, 호세아서에서 진리들이 “드라빔”에 의해 의미되었다:
이스라엘의 아들들은 많은 날들을 왕 없이, 그리고 제 일인 자 없이, 그리고 제물을 바침 없이, 그리고 에봇과 드라빔 없이 앉았다(살아왔다) (호. 3:4);
“에봇”과 “드라빔”은 대답으로 그들이 받았던 신성으로부터의 진리들을 표시한다, 그 이유가 그들이 하느님께 물어볼 때, 그들은 에봇을 입었기 때문이다 (삼상. 23:9-12). 스가랴서에서:
드라빔이 불법을 말한다, 그리고 점장이가 거짓을 보고 있다, 그리고 꿈장이들이 헛것을 말한다 (슥. 10:2);
위에서도 “드라빔”은 대답들을 표시하나 불법적인 대답들이다.
“드라빔”이 위와 같은 것을 의미했기에, 이것을 소지함이 금하여졌음에도 누군가에게서 이것들이 발견되곤 했다; 그중 한 예가 사사기서에 있다:
미가는 하느님의 집을 가졌다, 그리고 그는 에봇과 드라빔을 만들었다, 그리고 자기 아들들 중의 하나의 손을 채웠다(임무를 지웠다), 그리하여 그가 자기의 성직자가 되게 했다. 그리고 단지파의 몇 명이 그들의 형제들에게 말했다, 이 집 안에 에봇과 드라빔, 새긴 우상과 부어만든 우상이 있다는 것을 너희는 알고 있느냐? 그리고 이들이 미가의 집 안으로 갔을 때, 그들은 새긴 우상, 에봇과 드라빔, 그리고 부어만든 우상을 가져갔다. 그리고 성직자의 심정은 선이었다, 그리고 그는 에봇과 드라빔과 새긴 우상을 가져갔다. 그리고 미가는 단지파의 아들들을 뒤따라 갔다, 그리고 말했다, 너희는 내가 만든 내 하느님들, 그리고 성직자를 가져갔다, 그리고 떠나버렸다, 그리고 나는 무엇을 더 가지겠는가? (사. 17:5; 18:14, 18, 20, 24).
다윗의 아내, 미갈 또한 그것들을 가지고 있었는데, 사무엘상서를 보면:
그리고 미갈은 드라빔을 가져왔다, 그리고 그것들을 침대 안에 놓았다, 그리고 그것들을 옷으로 덮었다. 그리고 사울의 특사가 왔다, 그리고 잘 보라, 드라빔이 침대 안에 있었다
(삼상. 19:13, 16).
어쨋든 드라빔은 금지된 우상들이었다는 것은 그것들에 관해 말해진 다른 장소에서 분명해진다 (삼상. 15:23; 왕하 23:24; 겔. 21:26).

그리고 야곱은 아람 사람 라반의 심정을 훔쳤다. 이는 선에 관련하여 라반으로 의미되는 상태의 변화를 의미한다. 이는 “훔치다”의 의미가 귀하게 여기고 거룩한 것을 가져가버림, 고로 상태가 바뀜이다로부터; “심정”의 의미가 의지로부터 진행하는 것이다로부터; 그리고 의지가 선으로부터의 의지일 경우, “심정”은 의지를 표시한다; 그리고 라반의 표현함이 중간의 선이다로부터, 그리고 이 선이 지금 분리되고 있다; 그리고 이것이 분리되고 있기에, 그는 지금 “아람 사람”이라 불리운다. 이는 24절에서도 이어진다. “아람 사람 라반”은 이전 같은 신성한 선과 진리가 있지 않은 선을 표시한다. 그 이유는 아람, 또는 시리아는 유브라데 강에 의해 가나안의 토지로부터 분리되었기 때문, 그러므로 내적 의미에서 주님의 왕국, 그리고 최고 의미에서 주님의 신성한 인간 이 의미되는 가나안의 토지 바깥쪽이 의미되기 때문이다. “아람”과 시리아는 특별하게는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런 지식을 의미하는 이유는 거기에도 고대 교회가 있었고, 이 교회의 잔존물이 오랜 동안 거기에 남아 있었기 때문, 이는 발람에 관한 기록으로부터 알게된다. 그는 이 지방 출신이었고, 여호와에 관한 지식을 가졌던 바, 그는 주님에 관한 예언도 했다. 그러나 거기에서도 우상이 번창한 이후 아브람이 거기를 떠나도록 부름받았다, 그리고 아브람으로부터 두드러지게 표현 교회의 설립이 등장하면서, 아람, 또는 시리아는 교회 밖의 영역을 표현했다, 또는 교회로부터 분리됨을, 고로 주님의 왕국에 속한 것에서 멀리 떨어짐을 표현했다; 비록 이렇다해도 아람은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을 의미함은 여전히 보유하고 있다. 야곱이 라반에게 자기가 떠남을 말하지 않음으로 라반의 심정을 훔친 이유는 방금 앞에서는 진리 측면에서의 상태의 변화가 있었고, 바로 여기서는 선 측면에서의 상태의 변화를 의미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는 말씀에서 진리가 취급되는 곳에서는 선도 취급되어 말씀의 어느 곳이든 선과 진리의 천국 결혼을 의미해두기 때문이다.

그는 자기가 도망하는 것을 라반에게 말하지 않았다. 이는 분리를 수단으로를 의미한다. 이는 별도의 설명은 필요하지 않다. “야곱이 자기가 도망치는 것을 라반에게 말하지 않음으로 그의 심정을 훔쳤다”가 역사적 의미에서 뜻해지는 것은, 야곱은 라반으로부터 라반이 야곱의 것인 모든 것도 자기의 소유물로 간주하는 희망을 박탈하여 그에게 심통(心通, distress)을 되돌린 것이다. 그 이유가 그 당시의 법에 따라 야곱이 (자기의 종처럼) 자기를 섬겼기에, 야곱의 모든 것, 그의 아내들인 자기의 딸, 거기서 나온 아들들, 뿐만 아니라 그의 양떼 등등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자기 것에 속하는 것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이런 당시의 법은 모세의 책에서도 발견된다:
만일 네가 히브리인의 종을 산다면, 6년을 봉사하게 하고, 7년째에는 그가 아무 댓가도 치루지 않고 나갈 것이다. 만일 그의 주인이 그에게 아내를 준다면, 그리고 그녀가 그에게 아들들과 딸들을 낳는다면, 아내와 그 자녀는 그의 주인의 것이다, 그리고 그는 자기 몸만 가지고 나갈 것이다 (출. 21:2, 4).
라반이 이런 식으로 생각했다는 것은 뒤이어지는 구절에서 야곱의 말로부터도 분명해진다:
내 아버지의 하느님,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삭이 두려워하는 분이 나와 함께 계시지 않았던들, 당신은 나를 빈손으로 떠나보냈을 것이다 (42절).
그리고 라반의 말로부터:
라반이 야곱에게 대답하여 말했다, 딸들은 나의 딸들이다, 그리고 아들들은 나의 아들들이다, 그리고 양떼는 나의 양떼이다, 그리고 네가 보는 모든 것이 나의 것이다 (43절);
위의 라반의 말은 사실상 억지 주장이다. 그 이유가 야곱은 그가 사들인 종이 아니다, 야곱의 아내들은 그가 봉사한 댓가로 받았고, 양떼 역시 그의 삯으로 라반이 지불한 것이기 때문, 고로 그 당시의 법이 야곱에게는 해당되지 않는다. 게다가 야곱은 라반보다 더 수준 높은 집안의 자녀 출신이다. 이제 야곱은 도망치므로 해서 라반이 예상해왔던 희망을 박탈하고 대신 심통만을 되돌렸기에, 그는“자기가 도망함을 말하지 않음으로 아람 사람 라반의 심정을 훔쳤다”고 말해진 것이다. 그러나 이 말들은 내적 의미에서는 선 측면에 관련하여 “라반”에 의해 의미된 상태가 바뀜이 의미되어지고 있다. 분리함에 의한 상태의 바뀜은 앞에서 살폈다.

그는 자기와 자기가 가졌던 모든 것을 가지고 달아났다. 이는 분리됨을 의미한다. 이는 앞의 대목과 비슷하므로 중복 설명은 피한다.

그리고 그는 일어났다. 이는 승강을 의미한다. 이 말 역시 이미 살폈는 바, 설명이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강을 건넜다. 이는 결합이 있는 상태를 의미한다. 이는 “강”, 여기서는 유브라데강의 의미가 결합, 즉 신성과 결합함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강”이 이 의미를 가지는 이유는 강 건너쪽 가나안의 토지와의 경계선에 해당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가나안의 토지의 모든 경계선들은 마지막인 것, 처음인 것을 표현하고, 의미했다; 마지막인 것은 거기에서 끝남이 있었기 때문; 그리고 처음인 것은 거기서부터 시작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모든 경계선들은 경계선 밖으로 나가는 이들에게는 마지막이 되고, 경계선 안으로 들어오는 자에게는 시작에 해당되기 때문이다. 지금의 야곱은 들어가고 있다, 고로 이 강은 그의 처음에 해당하는 바, 이는 결합을, 최고 의미에서는 신성과 더불은 결합을 표시한다; 그 이유가 가나안의 토지가 내적 의미에서는 주님의 천적 왕국을; 최고 의미에서는 주님의 신성한 인간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야곱이 강을 건넘에 의해 의미되는 것이 분명해진다.
그리고 그의 얼굴을 길르앗 산을 향하여 놓았다. 이는 거기에 선이 있음을 의미한다. 이는 “산”의 의미가 사랑의 천적 평면, 즉 선이다로부터 분명해지고, 이와 더불어 결합이 있었다. “길르앗”은 그것의 품질을 의미한다. 강이 경계선이었고, 처음의 결합이 거기에서 있었기에, “길르앗 산”, 이것은 요단강 이쪽 편(가나안쪽)에 위치하는 바, 처음의 결합이 거행되는 선을 의미한다.
길르앗 토지, 즉 산이 서 있는 곳, 그곳은 넓은 의미에서 이해할 경우, 가나안의 맨끝 안쪽, 요단강의 이쪽 편에 있었다, 그리고 르우벤 지파와 갓 지파에게, 특히 므낫세 지파의 절반에게 상속분으로 할당된 지역이다. 그리고 상속분으로 주어지는 토지는 이보다 더 멀리 확장되었으므로 폭넓게 이해하면 가나안의 토지 경계 안쪽이라 말해지는 것이다. 이 세 지파에게 상속분으로 할당된 기록은 모세의 책에서 발견된다 (민. 32:1, 26-41; 신. 3:8, 10-16; 여. 13:24-31). 그러므로 가나안의 토지를 전체적으로, 즉 한 장의 지도로 펴볼 경우, 말씀에서 말해지는 바, “길르앗으로부터 단에 이르기까지”, 또는 “브엘-세바로부터 단에 이르기까지”하고 말해지고 있다, 그 이유가 단 역시 경계선에 위치했기 때문이다. “길르앗으로부터 단까지”라는 표현에 관한 것은 모세의 책에서 발견된다:
모세는 모압의 평야로부터 느보산 위, 여리고의 맞은편인 비스가의 꼭대기로 올라갔다; 그리고 여호와께서는 그에게 길르앗으로부터 단까지의 모든 토지를 보여주셨다 (신. 34:1, 2);
그리고 사사기서의 책에서:
길르앗은 요단 건너에 거주한다; 그리고 단, 왜 그가 배들을 두려워하는가? (사. 5:17)
길르앗은 경계선이었기 때문에, 길르앗은 영적 의미에서 처음의 선을 의미한다. 이 선은 육체의 감각으로부터의 선이다. 그 이유가 이 선 또는 이 선으로부터의 기쁨(pleasure)은 거듭나지려는 인간이 거듭남을 개시할 때 맨 먼저 있게 되는 선에 해당되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길르앗”이 취해진 경우가 예언서에 있는데, 예. 8:20, 22; 22:6; 46:11; 50:19; 겔. 47:18; 옵. 19절; 미. 7:14; 슥. 10:10; 시. 60:7; 그리고 반대 의미일 경우, 호. 6:8; 12:12 이다.

22-25절. 그리고 셋째날 야곱이 도망쳤음이 라반에게 알려졌다. 23 그리고 그는 그와 함께 그의 형제들을 거느리고 칠 일 길을 추격했다, 그리고 길르앗 산에서 그에게 합류했다. 24 그리고 하느님께서 밤에 아람 사람 라반에게 꿈에 오셨다, 그리고 그에게 말하셨다, 너는 선으로 악에 이르기까지 조차에서 야곱에게 말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25 그리고 라반은 야곱을 따라 잡았다, 그리고 야곱은 산에서 그의 천막을 고정시켰다. 그리고 라반은 길르앗 산에서 그의 형제들과 함께 고정시켰다. “사흘째 날에 라반에게 알려졌다”란 끝을 의미한다. “그가 도망했다는 것”이란 분리를 의미한다. “그리고 그는 자기와 더불어 그의 형제들을 데리고 갔다”란 잃어버린 것들 대신에 있는 선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를 추격했다”란 결합의 계속적인 열정을 의미한다. “칠 일 간의 길”이란 진리의 거룩함을 의미한다. “그리고 길르앗 산에서 그에게 합류했다”란 그 근처에 얼마 정도의 결합이 있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밤에 꿈으로 아람 사람 라반에게 오셨다”란 이 선이 그 자체로 남겨질 때 이 선은 희미하게 지각함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에게 말했다, 너는 선으로부터 악에 이르기까지 조차에서 야곱에게 말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란 서로 간에 어떤 친밀한 관계가 더 이상 없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라반이 야곱을 따라 잡았다”란 결합의 어떤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야곱은 산에서 그의 천막을 고정시켰다”란 지금 “야곱”으로 의미된 선 이 있는 사랑의 상태를 의미한다. “그리고 라반은 길르앗 산에서 그의 형제와 함께 고정시켰다”란 얼마 정도의 이 결합 안에 있는 이 선의 상태를 의미한다.

사흘째 날에 라반에게 알려졌다. 이는 결합의 끝을 의미한다. 이는 “셋째 날”의 의미가 마지막인 것, 또한 완성인 것, 고로 끝인 것이다로부터, 또한 시작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 이유가 결합의 상태의 끝은 이어지는 상태의 시작, 이것도 분리함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기서는 “셋째 날”에 의해 의미된다.

그가 도망했다는 것. 이는 분리를 의미한다. 이는 “도망함”의 의미가 분리되어짐이다로부터 분명해진다.

그리고 그는 자기와 더불어 그의 형제들을 데리고 갔다. 이는 잃어진 것들 대신에 있는 선을 의미한다. 이는 “형제들”의 의미가 선들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형제들”에 의해 내적 의미에서 비슷한 선과 진리에 있는 이들, 즉 선과 진리에 애착함이 비숫한 이들이 의미된다. 그 이유가 다른 삶에서는 모든 이들이 애착들과 일치하여 연합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연합된 이들이 형제다움(brotherhood, 형제애)을 구성한다. 실지로 그들은 자신들을 두고 형제들이라 부르지는 않으나, 그들은 결합을 수단으로 형제들이다. 지상에서 혈연이나 결혼을 수단으로 이루어지는 관계가 있는 반면, 다른 삶에서는 선과 진리에 따라 친족 관계 여부가 생산된다; 그러므로 이 둘 사이에는 상응함이 있다; 다른 삶에서 선과 진리 자체만을 주목한다면, 이는 주님만으로부터 있기에, 주님 외에 다른 아버지는 없음을 인정한다. 그러므로 선들과 진리들 안에 있는 모든 이는 형제다움 안에 있다; 그렇지만 이는 총괄적 측면이고, 개별적 측면으로는 선과 진리의 품질에 따라 친족 관계의 수준이 결정된다. 이 수준들이 말씀에서 “형제들,” “자매들,” “사위,” “며느리” “손자들,” “손녀들” 등등의 가족간의 호칭으로 불리우고 있다.
지상에서의 경우, 이런 친족 관계는 공동의 어버이와의 관련에 의해 명명되지만, (다른 삶에서는) 그것들이 애착들에 관련하여 달라진다; 어쨌든 지상의 이런 형제다움이나 친족 관계는 다른 삶에서는 사라져 버리고, 제아무리 지상에서 형제들이었다 해도 각자의 선과 진리가 비슷하지 않으면, 각기 다른 형제다움 안으로 와진다. 처음 입장시에는 대체로 함께 있을 듯하나 아주 짧은 시간에 분리되어진다; 다시 말하지만, 저 세계는 인간을 함께 묶여있게 하는 물질(재물)이 없고, 그 대신 애착들이 있기 때문, 그리고 이 애착의 품질은 다른 세계에 입장함과 동시에 청명한 날 같이 분명해지기 때문, 또한 이쪽 편이 가지는 애착의 종류가 다른쪽 편을 향하여 가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애착의 품질들이 적나나해질 때, 그리하여 각자의 애착이 그것에 걸맞는 사회를 끌어 당길 때, (지상에서) 불일치한 배열이지만 함께 있을 수밖에 없어왔던 이들은 분리, 해체된다; 즉 외적 인간으로부터 있어온 모든 형제다움, 친구 관계 등등은 모두 철폐되어지고, 내적 인간으로부터 있어온 것만이 남는다. “그가 자기와 함께 자기 형제들을 데리고 갔다”에 의해 잃어진 것들 대신에 있는 선들이 의미되는 이유는 이미 말한 대로, 이 사회가 저 사회로부터 분리될 때, 다른 사회에로 오는 격인 바, 이전의 사회의 선 대신에 다른 선들에로 오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를 추격했다. 이는 결합의 열정이 계속됨을 의미한다. 여기서의 “추격”은 결합에 대한 열정(분리되지 않겠다는 열정)이 계속됨이 분명하다. 여기서 취급되는 주제는 중간의 선이 쓰임을 다한 후 진짜 선으로부터 분리됨이다. 이 분리됨의 과정은 앞에서 반복 설명했다. 그러나 이 분리됨은 인간이 관찰할 수 있게 어떤 존재를 가질 수 없기에 인간에게는 매우 불분명하나, 천사들에게는 무수한 다양성을 포함하여 아주 분명하다. 이 분리됨이 거듭나는 인간에게서는 거듭남의 도우미들(ministers)로서 당사자와 늘 현존하기에 당사자와 함께하는 천사들은 이 도우미를 수단으로 결과되는 그의 상태의 바뀜을 보고 지각한다. 그리고 주님으로부터 이 중간의 선에 따라, 이것을 수단으로 그와 함께 한 천사들은 인간 당사자가 허용하는 범주 내에서 그를 선쪽으로 인도한다. 게다가 이 과정은 천국에서는 매우 중요한 쓸모 있음의 수준이기에, 이 장의 많은 구절을 할애하여 상세하게 언급되고 있다. 그러므로 다시 한번 우리가 실감할 수밖에 없는 것은 말씀의 내적 의미가 천사의 말이다는 것이다.

칠 일 간의 길. 이는 진리의 거룩함을 의미한다. 이는 “길”이 진리를 의미함에서; 그리고 “7”의 의미가 거룩한 것이다로부터; 여기서의 경우, 의미는 결합하려는 열정, 즉 진리의 거룩함과 더불은 결합함 자체로부터의 열정이다.

그리고 길르앗 산에서 그에게 합류했다. 이는 그것으로 해서 얼마쯤의 결합 같은 것이 있음을 의미한다. 이는 “합류하다(join)”의 의미가 결합이다로부터; 그리고 “길르앗 산”의 의미가 처음 결합에서 있는 선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고로 “길르앗 산에서 그와 합류함”에 의해 얼마쯤의 결합이 있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밤에 꿈으로 아람 사람 라반에게 오셨다. 이는 이 선이 그 자체로 남겨질 때 이 선은 희미하게 지각함을 의미한다. 이는 라반이 중간의 선을 표현한다로부터; 그리고 그가 야곱과 분리될 때, 그는 “아람 사람”이라 불리운다로부터; 그리고 “밤에 꿈”의 의미가 희미한 것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 희미함에서 지각함이 “하느님께서 밤에 꿈으로 오심”에 의미되었다.

그리고 그에게 말했다, 너는 선으로부터 악에 이르기까지 조차에서 야곱에게 말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이는 서로 간에 어떤 교통함(친밀한 관계)도 더 이상 없음을 의미한다. 이는 “선으로부터 악에 이르기까지 조차에서”의 의미가 선을 말하면서 속으로는 악을 생각하고 있는 것, 그리고 이렇다보면 결국은 악을 말하고 악을 행하게 된다 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런 식으로 처세를 하는 인물을 눈치채면, 누구도 그와 더 이상의 친분 관계를 유지하려는 자는 아마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런 이유는 실제적으로 결합하는 것이 생각함과 뜻함이기 때문이다. 물론 말들끼리도 결합이 가능할는지 모르나, 말하는 자가 선을 생각하고 선을 뜻하는구나 라고 듣는 자로 하여금 믿게 설득하든지, 믿는 자가 그렇게 믿어버리고 말든지 하는 때의 경우만 해당될 것이다. 그러나 다른 삶에서는 모든 생각이 명명백백하다, 그 이유가 인물들로부터 품어져나오는 어떤 기운(영적 기운, sphere)을 수단으로 교통(소통)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듣는 자나 말하는 자나 공히 자기가 어떤 종류의 인물인지, 즉 자기의 생각과 의지가 어느 방향인지, 어떤 특성인지를 감출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결합은 이 기운에 일치하여 결과된다. 따라서 본문, “너는 선으로부터 악에 이르기까지 조차에서 말하지 않도록”이 내적 의미에서 더 이상 어떤 교통함도 없다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리고 라반이 야곱을 따라 잡았다. 이는 결합의 어떤 것을 의미한다. 이는 앞에서 살폈다.

그리고 야곱은 산에서 그의 천막을 고정시켰다. 이는 지금 “야곱”으로 의미된 선 이 있는 사랑의 상태를 의미한다. 이는 “천막”의 의미가 사랑의 거룩함이다로부터; 그리고 “천막을 고정시킴”이 이 사랑의 상태이다로부터; 그리고 “산”의 의미가 선이다로부터; 지금 여기서는 “야곱”에 의해 뜻해진 선이다로부터 알려진다.

그리고 라반은 길르앗 산에서 그의 형제와 함께 고정시켰다. 이는 얼마 정도의 이 결합 안에 있는 이 선의 상태를 의미한다. 이는 라반의 표현함이 야곱에 의해 표현된 선으로 지금 분리된 선이다로부터; “고정함”의 의미가 이 선의 상태이다로부터; (여기서 라반은 고정시켰다고만 기록하여 천막이라는 단어는 빠져 있는데, 그 이유는 라반과 관련되는 상태는 얼마쯤의 결합말고는 사랑의 거룩한 상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한글역 성경의 경우 라반이 천막을 고정시켰다 라고 번역되고 있는데, 영역의 경우는 단어 천막이 빠져 있다. 아마 천막이 빠져 있는 번역이 옳은 번역일 것이다 역자주.) 그리고 “형제들”의 의미가 라반에 의해 의미된 선과 연합한 선들이다로부터; 그리고 “길르앗 산”의 의미가 처음 결합과 마지막 결합이다로부터 알려진다. 이로부터 “라반이 자기 형제들과 길르앗 산에서 고정시켰다”의 의미가 이 결합의 얼마쯤에서 있는 이 선의 상태임이 분명해진다. 지금 위에 설명한 매우 간단한 의미 그 이상 포함된 것들은 납득력에 잘 정착되어질 수 없는데, 그 이유는 주님에 의해 영들과 천사들의 사회들이 거듭나는 인간에게 인접할 때와 분리될 때 다른 삶에서 발생하는 것들로부터 말하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이렇게 인접하고 분리하고 하는 과정은 저 세계에 존재하는 질서에 일치하고 있다는 말이다. 이런 과정의 일부 단계들은 이 장에서 얼마라도 서술되었는데, 그것들이 인간에게는 완전히 알려지지 않은 상황인지라, 아마 읽는 자는 이것이 신비함들이라고 하여 이해함을 포기할 수도 있을지 모른다. (어쩌면 이 책을 덮고 읽기를 포기할지 모른다 역자주.) 어쨌든 여기에 제시한 내적 의미 정도만에서 라도 만족해야 하지 않나 싶다. (육체를 지닌 우리로서는) 그것들의 수천 분의 일조차도 확실히 납득하는 것은 가능할 수 없기 때문이다.

26-30절. 그리고 라반이 야곱에게 말했다, 너는 무슨 짓을 했느냐, 너는 내 심정을 훔쳤다, 그리고 검에 붙잡힌 포로들 같이 내 딸들을 끌고 가버렸지 않았느냐? 27 어찌하여 너는 도망하려는 네 자신을 감추었느냐? 그리고 나를 훔쳤느냐? 그리고 나에게 말하지 않았느냐? 그리고 나는 너를 기뻐하며, 그리고 노래하며, 소구치며, 그리고 하프를 켜며 떠나 보냈을 것이다. 28 그리고 너는 내 아들들과 내 딸들에게 키스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았다. 지금 너는 어리석게 행동했다. 29 내 손이 너에게 악을 행하도록 하느님에게 있게 하다니! 그리고 너의 아버지의 하느님이 어제 밤 나에게 말하셨다, 말하기를, 너는 선으로부터 악에 이르기까지 조차에서 야곱에게 말하지 않도록 주의하여라. 30 그리고 이제 너는 가야하는 곳으로 가라, 그 이유는 네가 네 아버지의 집을 향하기를 갈망해왔기 때문이다. 어찌하여 너는 내 신들을 훔쳤느냐? “그리고 라반이 야곱에게 말했다”란 교통하는 상태를 의미한다. “너는 무슨 짓을 했느냐”란 분개함을 의미한다. “너는 내 심정을 훔쳤다”란 더 이상 신성한 선을 전과 같이 갖지 못함을 의미한다. “그리고 내 딸들을 끌고 가버렸다”란 전과 같은 진리에 애착함은 더 이상 없음을 의미한다. “마치 검에 붙잡힌 포로 같이”란 진리에 애착함들이 그것으로부터 가져가버려졌음을 의미한다. “어찌하여 너는 도망하려는 네 자신을 숨겼느냐? 그리고 나를 훔쳤느냐? 그리고 나에게 말하지 않았느냐?”란 분리됨이 자유로움에서 결과되어 왔었는지 아닌지 하는 상태를 의미한다. “그리고 나는 너를 기뻐하며, 노래하며 떠나보냈을 것이다”란 자기 자신으로부터 진리들 측면에 관하여 그 자체가 있다고 믿는 상태를 의미한다. “소구치며 하프를 켜며”란 영적 선에 관하여를 의미한다. “너는 나로 내 아들과 내 딸들과 키스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았다”란 이 선의 신조에 일치하는 자유로운 상태에서의 분열을 의미한다. “지금 너는 어리석은 짓을 했다”란 분개함을 의미한다. “너에게 악을 행할 능력이 내 손에 있다”란 만일 그것이 능력을 지녔다면 하고 분개함을 의미한다. “그리고 네 아버지의 하느님이 어젯밤 나에게 말하셨다”란 그것은 신성에 의해 허락되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말하시기를, 너는 야곱에게 선으로부터 악에 이르기까지 조차에서 말하지 않도록 주의하여라”란 친밀한 관계 유지가 금하여졌음을 의미한다. “지금 너는 가야할 길을 가라”란 그것 자신으로부터 자체가 분리되도록 행동함을 의미한다. “너는 네 아버지의 집을 향하는 것을 갈망해왔기 때문이다”란 직접적으로 흐르는 신성한 선과의 결합을 갈망함을 의미한다. “어찌하여 너는 내 신들을 훔쳤느냐?”란 진리를 잃어 분개함을 의미한다.

그리고 라반이 야곱에게 말했다. 이는 교통하는 상태를 의미한다. 즉 지금 “라반”에 의해 의미된 선이 야곱에 의해 표현된 지금의 선과 교통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말함”의 의미가 교통함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결합의 어떤 것이 결과된 만큼에서를 말한다; 그리고 “라반이 야곱에게 말했다”는 말이 즉각 뒤잇는 바, 교통함이 “말함”에 의해 의미된다.

너는 무슨 짓을 했느냐? 이는 분개함을 의미한다. 이는 여기에 포함된 애착으로부터, 그리고 라반의 이어지는 말이 분개함의 하나임에서 분명해진다.

너는 내 심정을 훔쳤다. 이는 이전처럼 신성한 선을 더 이상 갖지 못함을 의미한다. 이는 “심정을 훔침”의 의미가 귀하게 여기고 거룩한 것을 가져가버림이다로부터; 이 분리를 통하여 이전 같은 식으로 신성한 선은 더 이상 갖지 못했다.

그리고 내 딸들을 끌고 가버렸다. 이는 전과 같은 진리에 애착함은 더 이상 없음을 의미한다. 이는 “딸들”(여기서는 라헬과 레아)의 의미가 진리에 애착함들이다로부터 분명해진다.

마치 검에 붙잡힌 포로 같이. 이는 진리에 애착함들이 그것으로부터 가져가버려졌음을 의미한다. 이는 설명 없이 분명할 것이다. 진리에 애착함들이 “검에 붙잡힌 포로들 같이”라고 불리우는 이유는 “검(sword)”이 진리를 서술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것은 이미 설명된 바 있다.

어찌하여 너는 도망하려는 네 자신을 숨겼느냐? 그리고 나를 훔쳤느냐? 그리고 나에게 말하지 않았느냐? 이는 분리됨이 자유로움에서 결과되어 왔었는지 아닌지 하는 상태를 의미한다. 이는 “도망하려는 네 자신을 감춤”의 의미가 기꺼워하지 않는 것으로부터 자체를 분리함이다로부터; “나를 훔침”의 의미가 귀하고 거룩한 것을 가져감이다로부터; 그리고 “나에게 말하지 않음”의 의미가 여기서는 분리함을 수단으로를 표시함으로부터; 이 말들과 뒤이어지는 말의 모두로부터 의미되는 것은 분리함이 그것의 뜻에 거슬러 만들어졌다는 것, 분리함은 자유한 상태에서 행해졌어야 한다는 것이다. 자유함의 이 상태가 지금 이어지는 말, 즉 “나는 기뻐하며, 노래부르며, 소고치고 하프를 켜며 너를 떠나 보냈을 것이다”에 의미되고 묘사되어 있다. 그러나 이 말은 그때 당시 그의 신조에 따른 라반의 말일 뿐이다. 거듭나지고 있는 이들과 더불어 진행되는 중간의 선이 진짜 선들에서 분리됨, 이것이 자유함에서 행해지는 것의 경우가 어떠한지는 앞에서 (난해하다 여겼을지 모르지만) 설명은 해둔 바 있다, 이를 다시 참조하기 바란다.
어쨌든 이 경우가 실감나게 인간에게 전혀 와닿지 않는다, 그 이유는 인간 당사자들이 자기와 더불어 있는 선이 어떻게 다양해지는 지를 모르기 때문, 더욱이 모두 각각의 선의 상태가 어떻게 바뀌는지를 모르기 때문, 최소한 대충적인 차원에서라도, 즉 유아의 선이 어떻게 다양해지는지, 이 선이 어린 아이의 선으로 바뀌고, 젊은 이의 선으로 이어지고, 다시 성년의 선에 진입하고 노년의 선으로 들어가는지 조차 모르기 때문이다. 거듭나지지 않고 있는 이들의 경우는 바뀌는 선들이 없다, 그러나 애착들과 기쁨들의 바뀜은 있다. 거듭나는 이들에게는 선들의 상태의 바뀜들이 있고, 이 바뀜은 유아로부터 생을 마감하는 때까지에 걸쳐서 있다. 그 이유가 주님은 어떤 종류의 생명쪽으로 인간 당사자를 인도해야하는지를 아시기 때문, 동시에 인간 각자가 주님에 의해 자신이 인도되도록 어떻게 허용해 가야하는지도 아시기 때문; 그리고 모든 것들은 일반적 특수적, 참으로 작은, 사소한 낱개 수준의 것도 예견되어 설비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은 선들의 상태의 바뀜들의 경우들이 어떻게 진행되는지를 전혀 모른다; 모르는 주된 이유는 그가 이런 주제에 관한 지식들이 없는 것이 첫째 이유이다, 더구나 오늘날 대다수의 인간이 이에 관하여는 어떤 지식도 습득하기를 바라지 않는 것도 주된 이유이다. (신앙 생활을 잘해서 사업도 성공하고, 병도 치료되었거나 하는 등등의 신앙 간증을 들어야 웬지 나의 마음도 감동받는 것을 느끼는 것이 육체 속의 인간의 현실이어서인지 몰라도 이런 식의 동영상이 신앙인의 대화에서 주류를 이루는 것 같다 역자주.) 그리고 주님께서는 인간에게 직접적으로 흘러들어 그를 가르치시지 않고, 간접적 방법, 즉 그의 지식 안으로 흘러드시는 간접적 방법으로 (이래야 인간 당사자의 선택의 자유함을 침해하지 않는다, 역자주) 흘러드시기에 인간은 선들의 상태의 바뀜에 친숙해질 수 없다. 그리고 인간이 이런 주제에 관한 지식 없이 있기를 바라는 조건에 있는 한, 더욱이 오늘날 자신이 거듭나지게 허용해주는 이들이 너무나 적기에, 설사 이런 주제를 적나나하게 해설해놓는다 해도 그것들이 납득되어질리 만무하다.
어쨌든 이 주제를 놓고 한 개의 예증이라도 해두고 넘어가야 할 것 같기에, 내가 다른 삶에서의 경험을 말해보겠다. 나는 기독 세계로부터 다른 삶으로 온 이로부터 경험을 가졌다. 그는 자신의 지식이 타인보다 월등히 수준이 높다고 자부하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그는 지상 삶 동안 그것이 맞다고 인정해왔었다. 그러나 그는 악한 생활을 해왔기 때문에, 그는 선과 자유함에 관해서, 그리고 그 결과인 기쁨과 복됨에 관하여 매우 어리석은 무지함 에 있었던 바, 그는 지옥의 기쁨과 자유함, 그리고 천국의 기쁨과 자유함 사이의 차이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사실상 그는 어떤 것도 있지 않았다고 말했다. 타인보다 더 학식이 뛰어나다는 이들사이에서조차 있는 이런 무지함이 어떤 그늘 안으로 그들의 추론을 밀어넣을지, 그렇다, 크고 미친 몽상으로 여기서 내적 의미에서 말해지는 주제인 선과 자유함에 관한 것이 돌변되고야 말는지 모른다. 그럼에도 진리인즉, 말씀 각처에는 천국의 비밀들을 포함하지 않는 대목은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설사 인간에게는 어느 순간에서도 나타나지 않더라도 그렇다는 말이다. 제아무리 지식의 결핍이 대단하고, 무지함에도 아랑곳하지 않는 현실이 현재의 인간이지만 어쨌든 천국적인 것들은 기꺼이 존재하고 있다.

그리고 나는 너를 기뻐하며, 노래하며 떠나보냈을 것이다. 이는 자기 자신으로부터 그것(즉 라반에 의해 의미된 선)이 그 자체 진리들 측면에 관하여 있다고 믿는 상태를 의미한다. 이는 “나는 너를 떠나보냈을 것이다”가 이것은 자유함 안에서 그 자체를 분리할 것이다를 의미함으로부터; 그러나 이 상태에 있을 때 그 자체가 분리된 것은 아닌데, 이는 앞에서 말했다; 이런 것이 보여주는 바, 그는 자기 자신으로 자신을 있게 한다고 믿은 상태에서 라반이 뱉은 말들이다는 것이다. 그 이유가 자신으로부터 믿어지는 것은 진리이지 않은 것으로부터 믿는 것이고, 그 반면 자신으로부터 라고 믿지 않는 것, 그러나 주님으로부터 라고 믿는 것은 진리로부터 믿는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관련된 상태는 진리들에 관련되는 상태인 것은 “기뻐하며, 노래하며”에 의해 의미되어 있다. 그 이유가 “기뻐함과 노래함”이 진리들 측면을 서술하기 때문이다.
말씀에서 간혹 등장하는 단어는 “기뻐함(기쁨, gladness)”, “기쁨(환희, joy)”이 있다. 때로는 이 두 단어가 동시에 언급되기도 한다; 그러나 “기뻐함”은 주제가 진리와 진리에 애착함을 취급할 때 언급되고; “기쁨”은 선과 선에 애착함을 취급할 때 언급된다. (한글 번역에서는 통상 기쁨으로 번역되는 영어 단어에는 여러 개가 있는데, 대체로 이 책과 성경에 잘 등장하는 단어로는 pleasure, delight, gladness, joy가 있다. 역자 역시 예전에는 이 단어들을 한글로 다르게 표현해서 구분해보려 애썼으나 요즘은 대체로 기쁨이라 번역하고 괄호에 영어를 삽입하기도 한다. 구분하지 않게 된 이유는 영한 사전에서 기쁨으로 대체로 번역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어 단어의 경우 기쁨의 종류를 구분하고저 다른 단어를 사용하는 것으로 역자는 알고 있다. 즉 pleasure는 주로 육체적, 감각적, 관능적, 또는 향락적 기쁨을 표시할 때; delight는 동작이나 표정으로 기쁨이 표시된다고 생각될 때; gladness는 생각 측면, 고로 진리 등으로부터 기쁨을 표시할 때; joy는 영적인 기쁨, 정확히 말하면 선 측면에서의 기쁨, 가장 깊은 측면에서의 기쁨, 즉 천적 수준의 기쁨을 표시할 때 라고 역자는 추측하므로 참고하고, 역자의 생각이 틀릴 수도 있으므로 더 연구하기 바란다. 역자 주.)
이사야서에서:
잘 보라 기쁨(joy)과 기뻐함(gladness)이 있다, 숫소들을 잡고 양을 죽이고, 고기를 먹으며 포도주 를 마신다 (이. 22:13);
위에서 기쁨은 선을 서술하고, “기뻐함”은 진리를 서술하고 있다.
이사야서에서:
포도주 때문에 거리들에서 외침이 있다; 모든 기뻐함이 황량해짐으로 만들어질 것이다, 그리고 모든 기쁨이 추방될 것이다 (이. 24:11).
이사야서에서:
여호와께서 되찾은 자가 돌아올 것이다, 그리고 노래하며 시온으로 올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머리 위에 영원히 지속돠는 기쁨(이 있을 것이다); 그들은 기쁨과 기뻐함을 획득할 것이다, 그리고 슬픔과 슬피움은 도망칠 것이다 (이. 35:10; 51:11).
이사야서에서:
여호와께서 시온을 위로하실 것이다; 기쁨과 기뻐함이 거기 안에서 발견될 것이다, 고백함과 노래하는 음성(을 발견할 것이다) (이. 51:3).
예레미야서에서:
나는 유다의 성읍들과 예루살렘의 거리들에서 기쁨의 함성과 기뻐함의 소리, 신랑의 소리와 신부의 소리가 중단되게 할 것이다, 그 이유는 토지가 황폐될 것이기 때문이다 (예. 7:34; 25:10).
예레미야서에서:
기쁨의 함성과 기뻐함의 소리, 신랑의 소리와 신부의 소리, 너희를 여호와 체바욷께 고백하라 라고 말하는 그들의 음성 (예. 33:11).
예레미야서에서:
기뻐함과 몹시 기뻐함이 갈멜로부터, 그리고 모압의 토지로부터 모아들여져 왔었다 (예. 48:33).
요엘서에서:
식품이 우리의 눈 앞에서 끊어지고, 여호와의 집으로부터 기뻐함과 몹시 기뻐함이 중단되었지 않던가? (욜. 1:16)
스가랴서에서:
단식함이 유다의 가문에게 기쁨과 기뻐함과 좋은 절기들로 있을 것이다 (슥. 8:19).
말씀에 있는 모든 것에는 천국의 결혼(즉 선과 진리의 결혼)이 있다는 것을 모르는 이는 말씀에서 기쁨(환희, joy)과 기뻐함(즐거워함, gladness)의 매 한가지 기쁨이다고 믿을런지 모른다. 그리고 두 표현이 언급된 것은 기쁨을 더 강조하려 해서 일 것이라고, 따라서 그 중 하나는 불필요할지도 모른다고 여길지 모른다. 그러나 말씀의 마침표, 쉼표 등등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에는 영적 의미 없이 사용된 것은 없다. (단지 우리가 그것 모두를 납득하지 못할 뿐이다 역자주.) 기쁨(joy)은 선 측면을 서술하고, 기뻐함(gladness)은 진리 측면을 서술한다. “노래” 역시 진리 측면을 서술한다. 이는 “노래(song)”라는 단어가 언급되는 구절에서 확인된다; 즉 이. 5:1; 24:9; 26:1; 30:29; 42:10; 겔. 26:13; 암. 5:23 등등이다.
주님의 왕국에 있는 모든 것들은 선 또는 진리에 관련되고 있다. 다시 말해 사랑으로부터의 것들과 선행으로부터의 신앙에 관련되고 있다. 선에 관련되는 것들, 또는 사랑 속에, 사랑으로부터 있는 것들은 천적이다 라고(천적 수준이다 라고, 천적 평면에 속해 있다 라고, 천적 왕국으로부터, 또는 천적 왕국에 속해 있다 라고, 또는 셋째 천국으로부터 라고) 불리운다; 그러나 진리에 관련되는 것들, 또는 선행으로부터의 신앙 속에 있는 것들은 영적이다 라고 (영적 수준이다 라고, 영적 평면에 속해 있다 라고, 영적 왕국으로부터, 또는 영적 왕국에 속해 있다 라고, 또는 둘째 천국으로부터 라고) 불리운다. (흔한 신학서들의 경우, 천적이라는 말은 천국적이라는 말과 같은 의미에서 혼용해 사용될지 모르고, 영적이라는 말은 육체적이라는 단어에 대비해서만 사용될지 모르나, 이 책의 경우, 위와 같이 근원이나 수준이 다름을 명기하기 위해 다르게 사용된다. 물론 이 책도 영적 세계(약칭 영계)에서의 경우는 자연계에 대비하여 사용된다. 이런 식의 단어 표기는 타 신학서 내지 타 종교의 교리에는 없을지 모른다. 하여 이런 언어에 친숙해지지 않은 독자의 경우 이해함에 혼동될지 모르므로 유의하기 바란다. 역자주.) 기쁨이라는 단어를 포함, 말씀에 있는 모든 것들은 일반적, 특수적, 개별적, 낱개 하나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것에서 주님의 왕국이 취급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최고 의미(가장 깊은 의미)에서는 주님 자신이 취급되고 있다; 그리고 주님의 왕국은 선과 진리의 결혼, 또는 천국의 결혼이다; 그리고 주님 자신 안에도 신성한 결혼이 있고, 이 결혼으로부터 천국의 결혼이 도래한다; 그러므로 말씀의 모든 것에는 이 결혼이 있다. 특히 예언서들에서 이런 결혼의 표기를 위해 글자적으로는 중복되는 듯한 표기가 많은데, 이는 같은 뜻을 단지 단어들을 바꾼 것에 불과한 것으로 지루하게 여기며 말씀을 읽어서는 안될 것이다. 이런 반복됨들 역시 무의미한 적은 결코 없다, 즉 반복된 듯한 표현의 이것은 천적인 것 (즉 사랑과 선에 속한 것), 저것은 영적인 것(즉 선행으로부터의 신앙, 또는 진리로부터의 신앙)이 의미되어진다; 이런 사항들이 보여주는 것은, 말씀의 모든 것에는 천국의 결혼(즉 주님의 왕국)이 있다는 것, 그리고 최고 의미에서 신성한 결혼 자체(즉 주님)가 있다는 것이다.

소고치며 하프를 켜며. 이는 영적 선에 관하여를 의미한다. 이를 좀 더 꼼꼼하게 말하면, 이 선(중간의 선, 라반이 표현하는 선)은 영적 선에 관한 것도 이 선 자체로부터 있다고 믿는 상태를 의미한다. 이는 “소고(timbrel)와 하프(harp)”가 선을 서술하나, 그 중 영적 선을 서술함에서 분명해진다. (이는 말씀의 많은 구절에서 확인된다.) 영적 (수준의) 선(spiritual good)은 신앙으로부터의 선이라 불리우고 선행(charity)이다; 그러나 천적 (수준의) 선은 사랑으로부터의 선이라 불리우고, 이는 주님을 사랑함이다. 천국들에는 주님의 두 왕국들이 있다. 그 중의 하나가 그분의 천적 왕국이라 불리우고, 이 왕국 안에는 주님을 사랑함 안에 있는 이들이 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그분의 영적 왕국이라 불리우고, 이웃을 향한 선행 안에 있는 이들이 있다. 이 두 왕국들은 서로로부터 구분되나, 이 둘은 하나로서 행동하고 하나를 이루고 있다. 이 구분되는 천적, 영적 왕국에 관하여는 이미 자주 서술되어 왔다.
고대 시대의 교회에서도 여러 종류의 악기들을 사용했다. 즉 타악기(소고, timbrel), 현악기(psaltery), 관악기(pipe), 하프(harp), 데카코르드(decachord, 옛 그리스의 열 줄을 지닌 현악기) 등등이다. 이들의 어떤 것은 천적 종류(평면, 수준)에, 어떤 것은 영적 종류(평면, 수준)에 속해 있다. 따라서 말씀에서 이런 악기의 언급이 있게 되면, 선의 어떤 종류, 영적 선이나 천적 선의 어떤 것을 암시하게 된다. 소고와 하프는 영적인 것들의 부류에 속했다, 그러므로 이 대목에서도 “영적 선에 관련하여”라고 말한 것이다.

너는 나로 내 아들과 내 딸들과 키스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았다. 이는 이 선의 확신(신조, belief)에 일치하는 자유로운 상태에서의 분열을 의미한다. 이는 “키스함”의 의미가 애착으로부터 있는 결합이다로부터, 그러므로 “키스하게 내버려두지 않다”는 분열(disjunction)을 의미한다; 그리고 “아들들”은 진리들을; “딸들”은 선들을 의미한다; 고로 선들과 진리들에 관하여 있는 분열이 의미된다. 이 분열이 이 선의 확신에 일치하는 자유한 상태에서 있었다는 것이 문맥의 연결에서 찾아진다.

지금 너는 어리석은 짓을 했다. 이는 분개함을 의미한다. 이는 말의 표현에 포함된 애착에서 분명해진다.

내 손이 네게 악을 행하도록 하느님에게 있게 하다니! 이는 만일 그것이 능력을 지녔다면 하는 분개함의 상태를 의미한다. 이는 “손”의 의미가 힘이다로부터 분명해진다. 이것이 말해진 상태, 이것들에 의해 의미된 상태가 분개함인 것은 분명하다.

그리고 네 아버지의 하느님이 어젯밤 나에게 말하셨다. 이는 그것은 신성에 의해 허락되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이는 설명 없이 분명해졌을 것이다.

말하시기를, 너는 야곱에게 선으로부터 악에 이르기까지 조차에서 말하지 않도록 주의하여라. 이는 교통함(친밀한 관계 유지)이 금지되어졌음을 의미한다. 이는 “선으로부터 악에 이르기까지 조차에서 말함”의 의미가 더 이상 어떤 교통함도 없다를 의미함에서 알게 된다, 고로 교통함이 금지되어졌음 이다.

지금 너는 가야할 길을 가라. 이는 그것 자신으로부터 자체가 분리되도록 행동함을 의미한다. 이는 “가야할 길을 간다”가 분리되어짐이다로부터 분명해진다. 이것이 그것 자신으로부터 인 것은 분명하다.

너는 네 아버지의 집을 향하는 것을 갈망해왔기 때문이다. 이는 직접적으로 흘러드는 신성한 선과의 결합을 갈망함을 의미한다. 이는 “아버지(즉 이삭과 아브라함)의 집”의 의미가 직접 흘러드는 선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 외에 이삭과 함께 있는 아브라함은 직접적으로 흘러드는 신성한 선을, 라반은 방계의 선을, 또는 직접적으로 흘러들지 않는 선을 표시한다. 방계의 선, 또는 직접 흐르지 않는 선은 중간의(중매하는) 선이라고 앞 폐이지에서 말해왔다. 그 이유가 이 선은 선들로서 나타나는 세상의 것에 속하는 많은 것들에서 파생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선은 선은 아니고 선 비숫하게 보일 뿐이다. (그렇지만 세상의 우리들은 이것도 선이라고 알고 있으므로 이 책을 읽는데 혼동을 주는 경우가 많아지는 원인일지 모른다. 역자주.) 한편, 직접 흘러드는 선은 주님으로부터 직접적으로 오는 선, 또는 주님으로부터 천국을 통한 간접적으로 오는 선, 이 선은 방금 위에서 언급한 세상 속의 선과는 분리되는 선이다.
거듭나지는 모두 각각의 인간은 처음에는 중간의 선 안에 있다, 그 이유가 진짜 선들과 진리들을 받아들이는데 유용한 수단으로 중간의 선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제아무리 명약이 발견되었어도 인간 신체가 흡수하지 못하면 아무 소용이 없기에 약의 체내 흡수를 위해 여러 촉매제(중매제)를 사용하는 것을 미루어 생각하면 이 대목의 이해에 도움이 될지 모른다. 역자주.) 그러나 이 선이 유용한 도움을 주고 나면, 이 선은 분리되어진다. 그리고 인간은 보다 더 직접 흘러드는 선으로 데려다 놓여진다. 그리하여 거듭나는 인간은 거듭남의 등차 별로 완전해진다. 예를 들면; 거듭나지는 인간에게서 처음의 경우, 그는 자신이 선을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이 자신으로부터 이다고 믿는다, 따라서 이로부터 그가 행한 선행의 공로는 자신에게 있다고 믿는다; 그 이유가 그는 선이 어떤 다른 근원으로부터 흘러들 수 있다는 것을 아직은 알지 못하고, 설사 누군가가 말해주어 알았거나, 어떤 책을 통해 알았다 해도 납득하지 못하고, 여전히 자신이 선을 행하였으니 그 선행에 대한 보답을 받는 것은 당연지사 아닌가 하는 생각에서 물러서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처음의 그가 선행을 해보아야 내게 이득될게 없는데 라고 판단한다면, 선행의 시작은 아예 물건너가고 말 것이다. 그러나 진짜는 아니고 모조품 수준일지언정 붙들고 있으면 선인 것을 행하는 습관에 젖어들면서, 그는 선인 것을 행함에 애착함, 뿐만 아니라 선에 관한 지식들 안으로, 심지어 공적 주의에 관한 것까지를 살피고 숙고해보는 단계로 진입한다. 이 단계를 지나면서 그는 선인 것을 행함에 애착함 안으로 인도될 때, 그는 이전과는 다르게 생각하고, 이전과는 다르게 믿기를 개시한다. 즉 선은 주님으로부터 흘러든다는 것; 따라서 자신이 행하는 선으로부터 자신이 보상을 받을 이유가 없다는 것을 생각하고 믿는다는 말이다; 결국 그는 선인 것을 뜻하고 행함에 애착하는 상태 안에 있어, 그는 자기 공적 주의를 철저히 배제하고, 심지어 그것을 혐오하기까지에 이른다. 결론적으로 선으로부터 선에 감동되어 있다. 그가 이런 상태에 있을 때, 선은 직접 안으로 흘러든다. (이 수준이면 요한복음서 14장에서, “빌립에게 예수께서 내가 그분 안에, 그분이 내 안에 계신다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하고 반문하신 구절을 실감할지 모른다 역자주.)
또 다른 예로 부부의 사랑(conjugial love)을 생각해보자. 이 사랑의 발단으로 처음에 있었던 선은 (상대쪽의 어느) 아름다움이었다. 또는 예의 범절 (깍듯이 대접해줌), 또는 각자가 서로를 두고 생각해보니 내게 꼭 맞는 어떤 것의 발견(이것은 단지 바깥쪽 측면에서 걸맞는 것), 또는 조건이 거의 동등함, 또는 자신이 바라던 어떤 속성(자신에게 없다고 여긴 어떤 특성이 상대에게서 발견됨) 등등 같은 것인데, 이는 가지각색일 것이므로 예를 다 들어 말하기는 힘들다. 어쨌든 이런 것들이 서로가 서로를 볼 때 선(좋은 것, 바라는 것)이 되어 있다. 여기서 말하는 중간의(중매하는) 선에 해당될지 모른다. 하여튼 이 선들은 부부의 사랑의 처음 중간의 선들이다. 이 후에 마음들의 결합이 온다, 이 결합 안에서 이쪽이 저쪽으로서 처럼 뜻한다. 그러면 상대가 원하는 것(기뻐하는 것)을 행함에서 자신도 기쁨을 지각한다. 이것이 두 번째 상태이다. 그러면 이전의 것들은 비록 현존한다 해도 더 이상 중요시할 사항은 아니되어 있다. (눈이 예뻐 결혼을 결정했는데, 몇 년 뒤 자식을 낳으면서 알게 된 것은 그녀가 눈 수술 덕분에 예뻐진 것이었을 때일지라도, 이미 그 남자는 그녀의 눈 예쁨을 좋아했었음을 훨씬 넘는 그녀를 사랑함에 있을 경우가 아닌가 싶다 역자주.) 마지막으로 천적인 선과 영적인 진리에 관련하여 하나가 됨(일체가 됨, unition)이 뒤따른다. 이 하나됨 안에서는 이쪽이 저쪽이 믿는 것과 꼭같이 믿는다. 또한 이쪽이 감동되는 대목은 저쪽도 감동되고 있다. (물론 지상 세계에서 오래 같이 산 부부의 경우에서도 보여지기는 하나, 이는 부부 양쪽의 영적 세계를 두고 하는 말이 라 생각하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사료된다 역자주) 이 상태가 올 때, 둘은 함께 천국의 결혼 안에 있다. 이는 선과 진리의 결혼이다, 고로 부부의 사랑 안에 있다. 그 이유가 부부의 사랑은 이외 더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둘의 애착들 안으로 흘러드시지만 하나의 애착 안으로 흘러드시는 것과 같이 하신다. 이것이 직접 흘러드심이다; 그러나 이전의 선, 즉 간접적으로 흘러드신 선은 직접 흘러드는 선을 받아들이게 해주심의 수단 역할로 끝난다.

어찌하여 너는 내 신들을 훔쳤느냐? 이는 진리를 잃어버렸기에 분개함을 의미한다.
이는 앞에서 라헬이 드라빔을 가져감에 관련하여 설명된 바 있다.

31, 32절. 그리고 야곱은 라반에게 답하여 말했다, 나는 당신께서 무력으로 나로부터 당신의 딸들을 데리고 갈까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 32 당신께서 당신의 신을 누구에게서 찾든지 그는 우리 형제 앞에서 살지 못할 것입니다. 당신은 나와 더불어 있는 것을 뒤져보시오, 그리고 그것을 당신에게 가져가십시오. 그리고 야곱은 라헬이 그것들을 훔친 것을 모르고 있었다. “그리고 야곱은 라반에게 답하여 말했다, 나는 당신께서 무력으로 나로부터 당신의 딸들을 데리고 갈까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란 분리가 그 선의 자유 안에서 있어졌을 경우, 필시 진리에 애착함은 해를 당했을 것임을 의미한다. “당신이 당신의 신들을 누구에게서 찾든지 그는 우리 형제 앞에서 살아 있지 못할 것입니다”란 이 진리는 그의 것 (라반)이 아니었다는 것, 그의 진리는 그의 선 (야곱) 안에 내재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당신은 나와 더불어 있는 것을 뒤져보시오, 그리고 그것을 당신에게 가져가시오”란 이 선 속의 모든 것들은 분리되어졌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야곱은 라헬이 그것들을 훔친 것을 모르고 있었다”란 그것들은 내면의 진리에 애착함 속에 있었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야곱은 라반에게 답하여 말했다, 나는 당신께서 무력으로 나로부터 당신의 딸들을 데리고 갈까 두려워 했기 때문입니다. 이는 분리가 그 선의 자유 안에서 있어졌을 경우, 필시 진리에 애착함은 해를 당했을 것임을 의미한다. 이는 앞에서 진행한 대목, 즉 “라반”에 의해 의미된 선쪽에서 있는 자유함에서의 분리가 취급된 것에 대한 답변이 여기서 있는 바로부터 분명해진다. 이 대목 역시 내적 의미에서 천국의 비밀들을 포함하고 있으나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은 이유로 상세한 설명을 할 수 없을 것 같다. 이 선의 자유함에서 분리가 있을 경우 필시 존재하고야 마는 상태, 이런 상태에서 진리에 애착함들은 해를 입고 말 것임이 “당신이 강제로 나로부터 당신의 딸들을 데려간다면”에 의해 의미됨은 분명하다; 그 이유가 “딸들(라헬과 레아)”에 의해 진리에 애착함이 의미되기 때문인데, 이는 앞에서 여러 번 상술했다. 그리고 이어지는 아래 대목에서 더 잘 알는지 모른다.

당신이 당신의 신들을 누구에게서 찾든지 그는 우리 형제들 앞에서 살아 있지 못할 것입니다. 이는 이 진리는 그의 것 [라반의 것]이 아니었다는 것, 그의 진리는 그의 선 [야곱의 선] 안에 내재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신들(gods)”, 즉 드라빔이 진리들이다로부터; 그렇지만 “라반”에 의해 의미된 선으로부터의 진리들은 아니고, 라헬에 의해 표현된 애착으로부터의 진리들이었다. 이 진리들이 “신들”에 의해 여기서 의미되었기에, 라헬이 그것들을 훔쳤다고 서술되어진 것이다; 그리고 이어지는 대목에서 이에 대해 더 말하고 있다; 내적 의미에서만 분명한 것을 나타내는 신비함들이 이런 대목에 포함되어 있지 않다면 이런 행위 자체가 기록되지 않을 수도 있지 않을는지 모른다. 그리고 여기서 주제로 취급된 진리들은 “라반”에 의해 의미된 선으로부터의 진리들이 아니라, 라헬에 의해 표현된 진리에 애착으로부터의 진리들이기애, “당신이 당신의 신들을 누구에게서 발견하든 그는 우리의 형제들로부터 살지 못할 것이다”에 의해 진리는 그의 것이 아니다는 것, 그리고 그의 진리는 그의 선[야곱의 선]에 내재할 수 없다가 의미되는 것이다.
이 신비와 더불은 경우는 이렇다: 모두 각각의 영적 선은 그것 자신의 진리들을 가진다; 그 이유가 이 선이 있는 곳에는 그것의 진리들도 있기 때문이다. 그 자체만에 주목하면, 선은 하나이나 진리들을 수단으로 다양해진다; 그 이유가 진리들은 육체의 기관 중 하나를 구성하는 섬유(fiber)들에 비교된다. 기관의 형체에 일치하게 섬유들은 기관을 만들어 내고, 결과적으로 기관의 기능을 만들어 낸다, 그리고 기능의 작동은 혼을 통하여 흐르는 생명을 수단으로 결과된다. 이 생명은 주님으로부터 있는 선으로부터 이다. 고로 이 선, 비록 하나이지만 모두 각각의 개별적인 것으로 다양해지고, 이것과 저것이 결코 같지 않은 모든 것으로 다양해진다. 그러므로 이 선으로부터의 진리는 또다른 선으로부터의 진리와 내재할 수 없다. 그러므로 이쪽 인간의 진리가 또 다른 인간의 선 안에 내재할 수 없다. 그 이유가 선 안에 있는 모든 이와 더불은 진리들은 당사자 안에서 서로 교통하고, 어떤 형체를 생산하는 바, 이쪽의 진리가 저쪽으로 이동될 수 없다; 그러나 이것이 저쪽으로 갈아타는 경우, 그것을 받는 당사자의 선의 형체 안으로 건너가되, 또 다른 양상(면모, 외관, 모습, aspect)을 입어야 한다. 어쨌든 이런 대목에 있는 신비함은 너무나 깊은 차원인지라 간단한 몇 줄의 말 가지고는 상술될리 만무하다. 그러므로 정확히 똑같은 진리를 동시에 두 인간이 받는다 해도 이쪽 인간의 마음과 저쪽 인간의 마음은 결코 같지 않다; 따라서 인간의 숫자만큼 다양함도 크고, 그들 각각의 애착들과 생각들 역시 다양하다. 하여 보편적 천국은 항구적인 다양함으로 있는 천사의 형체로 구성된다, 이 다양한 형체가 주님에 의해 하나의 천국 형체로서 하나를 생산하도록 섭리되고 있다. 그 이유가 하나(one)는 결코 똑같은 것들로 구성되지 않고 형체 안에 다양한 것들로 구성되고, 이것이 그들의 형체에 따라 하나를 만든다. 이상 모두로부터 그의 진리[라반의 진리]에 뜻해진 것은 그의 선[야곱의 선] 안에 내재하지 않음이 분명해졌을 것이다.

당신은 나와 더불어 있는 것을 뒤져보시오, 그리고 그것을 당신에게 가져가시오. 이는 이 선 속의 모든 것들은 분리되어졌음을 의미한다. 이는 말들의 뜻으로부터 분명해진다. 즉 당신의 것이 나와 더불어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 즉 “라반”에 의해 의미된 선으로부터의 것은 야곱이 가졌던 선 안에 있지 않다는 것, 결과적으로 이 선의 모든 것은 분리되어졌다를 의미한다.

그리고 야곱은 라헬이 그것들을 훔친 것을 모르고 있었다. 이는 그것들은 내면의 진리에 애착함 속에 있었음을 의미한다. 이는 라헬의 표현함이 내면의 진리에 애착함이다로부터; 그리고 “훔치다”의 의미가 귀하게 여기고 거룩한 것을 가져감이다로부터 분명해진다. 이 구절의 말 그대로 라헬이 라반의 신들인 드라빔을 훔침에 의해 진리 측면에서 라반에 의해 의미된 상태가 바뀌었다가 의미된다; 그리고 여기서와 이어지는 대목에서, 상태의 바뀜이 더 묘사되고 있다. 이는 라반에 의해 표현된 선이 “야곱”인 선으로부터 분리된 후, 이 분리를 통하여 또 다른 상태로 와졌다는 사실로부터 결과한다; 그 이유가 선들이 결합되어 와졌을 때 라반에 의해 표현된 선에게 나타났던 진리들이 마치 그것들이 가져가버림을 당한 것처럼 지금 지각되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라반이 그것들(진리들)을 잃었다고 그것을 두고 불평하고, 그가 천막들을 수색했으나 발견하지 못하고 마는 이유이다. 그 이유가 좋은 의미에서의 드라빔은 그의 것이 아니고 “라헬”인 진리에 애착함들에 속하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에 대한 설명은 다른 삶에서 발생한 것이 아니면 보여질 수 없을 것 같다: 그 이유가 인간 가까이에서 발생한 것들은 마치 그것들이 인간 안에서 발생한 것처럼 그에게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경우는 다른 삶에서 영들과 더불어서도 똑같기 때문이다. 중간의 선 안에 있는 영들의 사회들이 천사들의 집단 안에 있을 때, 천사들에게 속한 선들과 진리들이 마치 자기들 것인냥 나타나기 때문이다, 참으로 그들은 이와 달리는 방법이 없다. 그러나 그들이 분리될 때, 그때 그들은 이런 경우는 아니다 라고 지각한다; 그러므로 그들은 자기들이 소속했던 천사의 집단이 진리를 가져가버림에 불평을 한다. 이런 상황이 여기서 드라빔을 두고 나누는 대화에 의해 내적 의미에서 의미되어 있다.
일반적으로 말하면, 자기 자신의 것인 선과 진리는 누구에게든지 없다, 모든 선과 진리는 주님으로부터 안으로 직접 흐르거나, 또는 주님으로부터 천사들의 사회들을 통하여 간접적으로 흘러들 뿐이다; 그럼에도 선과 진리는 마치 인간의 것인냥 나타나는데, 그것들을 인간이 자신에게 얼마나 잘 어울리게 한 정도에 따라서이지만, 그가 그것들이 자신의 것이 아니고 주님의 것임을 아는 상태에, 그리고 인정하는 상태에, 마지막으로 믿는 상태에 이를 때까지이다. 더욱이 말씀으로부터, 따라서 기독 세계에도 알려진 바, 모든 선과 진리는 주님으로부터 있다는 것, 어느 선도 인간으로부터 없다는 것이다; 이것에 한술 더 떠 말해진 말씀으로부터 있는 교회의 교리물들은 이렇게 선포한다, 즉 (어느 선도 인간으로부터 없는 바) 인간은 자신으로부터 선을 얻으려고 애쓸 수 없다, 고로 그것을 뜻할 수 없다, 그러므로 그것을 행할 수 없다 – 그 이유가 선을 행함은 선을 뜻함이기 때문 – 그리고 모든 신앙 역시 주님으로부터 있다; 하여 신앙 역시 주님으로부터 흐르지 않으면 인간은 전혀 신앙을 가질 수 없다고 선포한다는 말이다.
이런 것들이 교회의 교리물이나 설교 등을 통해 선포된다. 그러나 적은 숫자, 아마 매우 적은 숫자만이 그것이 그렇다 라고 믿는다는 것은 이런 사실로부터, 즉 그들은 모든 생명은 그 자체로 있다고 상상한다는 점에서, 그리고 생명이 흘러든다 라고 생각하는 자는 거의 없다는 사실에서 알게 된다. 인간의 모든 생명은 사고력과 의지력에 존재한다; 그 이유가 생각하고 뜻하는 능력을 가져간다면, 남아 있는 생명은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진짜 생명 자체는 선을 생각함과 선을 뜻함에, 또한 진리를 생각함과 우리가 진리이다고 생각하는 것을 뜻함에 존재한다. 이런 것들이 인간으로부터 있지 않고 주님으로부터 있다는 것, 그리고 그것들은 천국을 통하여 주님으로부터 흘러든다는 것이 말씀으로부터 있는 교회의 교리물과도 일치하는 바, 판단력이 있고 곰곰이 되새겨 보는 이들이다면 모든 생명도 거기로부터 흘러든다고 결말지을지 모른다.
이는 반대의 경우인 악과 거짓의 경우도 똑같다. 말씀으로부터의 교리물들에 따라서 악마는 악을 불어넣으려 무진 애를 쓴다. 그러므로 누군가가 큰 죄악을 범할 때, 그가 자기를 악마가 끌고가게 내버려두었었다 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렇다고 믿는 자가 거의 없을지라도 이는 엄연한 사실이다; 그 이유가 모든 선과 진리가 주님으로부터 있듯이 모든 악과 거짓은 지옥으로부터, 즉 악마로부터 있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우리는 모든 선과 진리가 흘러들 듯, 악과 거짓도 흘러든다는 것, 결과적으로 생각함과 뜻함의 모든 것도 흘러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흘러듦에서 판단력이 있고 곰곰이 되새겨보는 자라면, 모든 생명이 비록 인간 안에 저절로 있는 듯하지만 그것이 흘러듦을 알 수 있다.
이런 경우는 최근 이 세상에서 저 세상으로 갓 올라온 영들에게 자주 보여진다. 그들 중의 얼마가 말했다, 만일 모든 악과 거짓 또한 흘러든다면, 악과 거짓의 어떤 것도 인간의 탓일 수 없다, 그리고 그것들은 인간의 과오 때문이 아니다, 그 이유는 이것들은 인간 외의 또 다른 근원으로부터 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에게 돌아온 대답은 그들이 자신으로부터 생각하고 뜻한다고 믿음으로 악과 거짓을 자기 것이 되게 했다는 것; 만일 그들이 이런 경우가 실제로 있다고 믿는다면, 그들은 악과 거짓을 자기 것이 되게 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그 이유가 그들이 모든 선과 진리가 주님으로부터 있다고 믿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만일 그들이 이것을 믿었다면, 그들은 자신을 주님에 의해 인도되게 허용했을 것이다, 그러한 바 그들은 다른 상태에 있어 왔을 것이다는 것; 그 다음 그들의 생각과 의지 안으로 진입한 악이 생각과 의지에 영향을 주지 못했을 것이다, 그 이유는 악이 아닌 선이 그들의 생각과 의지로부터 밖으로 나갔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인간에게 영향을 주는 것은 당사자 안으로 들어간 것이 아니라 안에서 밖으로 나간 것이기 때문이다 (막. 7:15).
많은 이들이 이 성경 말씀을 알 수 있지만 믿는 자는 거의 없는 실정이다. 악한 자도 이 말씀을 알 수 있지만 그들 역시 믿지 않는다. 그 이유는 그들은 자기 자신인 것 안에 있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에게 모든 것이 흘러듦을 보여줄 때, 흘러듦이 자기들로부터 거두어진다면, 자기들은 더 이상 살 수 없을 것이라고 주장은 하면서도 자신의 것 안에서 살기를 허락받는 쪽으로 걱정하며 탄원을 재촉하는 만큼에서 위 사항을 사랑할 뿐이다. 이런 것을 아는 이들조차 지니는 확신에서도 별반 차이가 없다. 어쨌든 이런 사항들은 중간의 선에 있는 영들이 다른 인간과 결합하고 분리될 때, 그들과 더불어 어떤 경우가 발생하는지를 알게 하려고 말해져오고 있었다; 즉 그들이 결합되었을 때, 그들은 선들과 진리들이 비록 자신들 것이 아님에도, 그것이 자기들 자신이다고 하는 것 외에 달리 아는 것이 없다.

33-35절. 그리고 라반은 야곱의 천막으로 왔다, 그리고 레아의 천막으로 왔다, 그리고 두 하녀의 천막으로 왔다, 그리고 그것들을 찾지 못했다, 그리고 레아의 천막에서 나가서 라헬의 천막에 왔다. 34 그리고 라헬은 드라빔을 가져다가 그것들을 낙타의 짚 안에 놓고, 그것들 위에 앉았다. 그리고 라반은 모든 천막을 다 더듬어 나갔다, 그리고 그것들을 찾지 못했다. 35 그리고 그녀는 그녀의 아버지에게 말했다, 제가 당신 앞에서 일어나지 못한다고 화내지 말아주세요, 그 이유는 여인의 길이 제게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는 수색했다, 그리고 드라빔을 발견하지 못했다. “그리고 라반이 야곱의 천막으로, 레아의 천막으로, 두 하녀의 천막으로 왔다, 그러나 그것들을 찾지 못했다”란 그들의 거룩한 것들 안에는 이런 진리들은 있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는 레아의 천막에서 나와 라헬의 천막으로 왔다”란 이 진리의 거룩함을 의미한다. “그리고 라헬은 드라빔을 가져갔었다”란 신성으로부터 있는 내면의 자연적 진리들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것들을 낙타의 짚 안에 놓았다”란 기억적 지식들 안에를 의미한다. “그리고 그것들 위에 앉았다”란 그것들이 내면적이다를 의미한다. “그리고 라반은 모든 천막을 다 더듬어 보았다, 그리고 그것들을 찾지 못했다”란 그의 자신이었던 것은 거기에 있지 않았다를 의미한다. “그리고 그녀는 그녀의 아버지에게 말했다”란 선 쪽으로를 의미한다. “제가 당신 앞에서 일어날 수 없다 해서 내 주인의 눈에 분노하심이 있게 하지 마세요”란 그것들은 밝혀질 수 없음을 의미한다. “그 이유는 여인의 길이 제게 있기 때문입니다”란 아직까지 그것들은 불결한 것들 사이에 있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는 수색했다, 그리고 드라빔을 발견하지 못했다”란 그것들은 그의 것이 아니었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라반이 야곱의 천막으로, 레아의 천막으로, 두 하녀의 천막으로 왔다, 그러나 그것들을 찾지 못했다. 이는 그들의 거룩한 것들 안에는 이런 진리들은 있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이는 “천막”의 의미가 거룩인 것이다로부터, 여기서는 거룩한 것들이다, 그 이유는 천막들이 야곱, 레아, 하녀들의 천막이었기 때문이다. 의문시되는 진리들이 거기에 있지 않았다는 것이 그가 천막에서 드라빔을 찾지 못했음에 의해 의미되고 있다. 야곱에 의해서는 자연 평면의 선이; 레아에 의해서는 외적 진리에 애착함이; 하녀들에 의해서는 외적인 애착들이 표현되고 있다; 여기서 의문시되는 진리가 외적 측면에 있지 않고 내적 측면에서 있기에, 그것들은 위 세 인물들의 천막에서(그들의 거룩한 것들에서) 발견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라헬의 천막에서, 즉 내면의 진리에 애착함으로부터의 거룩한 것 안에서 발견된다; 그 이유가 라헬이 내면의 진리에 애착함을 표현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레아의 천막에서 나와 라헬의 천막으로 왔다. 이는 이 진리로부터의 거룩함을 의미한다. 이는 이미 살폈다. 선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지만 진리들도 외면과 내면이 있다는 것이다; 그 이유가 내적 인간과 외적 인간이 있기 때문이다. 내적 인간으로부터의 선들과 진리들은 내적 선들과 진리들이라 불리우고, 외적 인간으로부터의 선들과 진리들은 외적 선들과 진리들이라 불리운다. 내적 인간으로부터 선들과 진리들은 세 등차로부터 있는데, 이는 세 천국들이 있는 것과 같다. 외적 인간으로부터의 선들과 진리들 또한 세 등차들이 있는데, 이것들은 내적인 것들과 상응한다. 내적인 것과 외적인 것 중간에 선들과 진리들이 있다 (즉 중간의 선들과 진리들이다); 그 이유가 중간의 선(중매하는 선) 없이 교통함은 가능할 수 없기 때문이다. 자연적 인간에 적절한 선들과 진리들이 있는데, 이것들은 외적 선들과 진리들이라 불리운다; 그리고 육체 속에 있는 감각의 선들과 진리들 또한 있다, 고로 이것은 가장 바깥쪽의 선들과 진리들이다. 세 등차들 중 마지막째의 선과 진리들은 외적 인간에 속하고, 이미 말한 대로, 그것들은 그 만큼의 내적 인간의 선들과 진리들에 상응한다; 이에 관하여는 주님의 신성한 자비로부터 별도로 취급해 볼 것이다.
각 등차의 선들과 진리들은 각 등차별로 완전히 구별되고 있다, 하여 각 등차가 섞이거나 혼동되는 일은 결코 없다. 더 내면에 있는 것들은 구성 성분(component)에 해당되고, 더 외면에 있는 것들은 혼합물(composite)에 해당한다. 이 선들과 진리들이 등차별로 정확히 구분되고 있다 할지라도, 그럼에도 인간에게는 구분되어진 상태로 나타나지 않는다. 감각적 인간은 모든 내면의 것들을 감각적 수준 그 외의 것으로는 보지 않는다, 다시 말해 그는 내적인 것들 자체를 감각적이다고만 볼 뿐이다; 그 이유가 그는 감각적인 것으로부터, 즉 가장 바깥쪽으로부터 안쪽을 보기 때문이고, 그렇게밖에 말할 수 없는 이유는 바깥에서는 안쪽을 들여다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안쪽으로부터서는 바깥을 본다. 자연적 인간의 수준인 자 (즉, 기억 속의 지식으로부터만 생각하는 자)는 그가 자연적인 것으로부터만 가장 안쪽의 것도 생각하는 바, 이때 그는 사실상 외적 인간일 뿐이고, 따라서 그는 가장 안쪽의 것을 자연적인 것 이상임을 알지 못한다. 그러나 자연적인 기억 속의 지식들 덕택에 열려져왔었던 분석적(해석적)인 원리들로부터 판단하고 결말짓는 내면의 인간은 그가 지닌 이것들(분석 원리)이 인간이 소유하는 가장 안쪽의 것들임을 믿는다, 그 이유는 그것들이 자신에게 가장 안쪽에 위치한 것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런 분석적 원리들이라 해도 그의 합리적인 것들 아래쪽에 있을 뿐이다, 고로 진짜 합리적인 것들에 비교해 상대적으로 이것들은 보다 외면, 또는 아래쪽에 있다. 위에 설명한 경우들이 인간의 납득력이다. 위에서 방금 말한 자연적, 또는 외적 인간 역시 그 인간 수준에서 세 등차로 나뉘어 있다; 또한 내적 인간도 세 천국들에 있는 것과 같은 세 등차들로 구성되고 있다.
이상 말해진 모두로부터 “드라빔”에 의해, 즉 이것이 야곱, 레아, 두 하녀들의 천막에서는 발견되지 않았지만, 사실상 라헬의 천막에 있었다는 것, 즉 내면의 진리에 애착함의 거룩한 것 안에 있었다에 의해 의미된 진리들의 경우가 어떤 경우인지 보였을 것이다. 신성으로부터 있는 모든 진리는 거룩한 것 안에 있는데, 그 이유는 신성으로부터 있는 진리는 거룩하므로 거룩한 것 말고는 있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 주님으로부터 안으로 흘러드는 것은 애착(즉 사랑)으로부터 거룩하다 라고 말해진다, 그리고 이것이 인간을 진리에 감동되게 한다.

그리고 라헬은 드라빔을 가져갔었다. 이는 신성으로부터 있는 내면의 자연적 진리들을 의미한다. 이는 라헬의 표현함이 내면의 진리에 애착함이다로부터; 그리고 “드라빔”의 의미가 신성으로부터의 진리들이다로부터, 내면의 진리들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리고 그것들을 낙타의 짚 안에 놓았다. 이는 기억적 지식들 안에를 의미한다.
이는 “낙타의 짚”이 기억 속의 지식들을 의미한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런 지식들이 “짚”이라 불리우는 이유는 두 가지 때문, 즉 이것이 낙타의 식품이고, 이 짚은 상대적으로 거칠고 질서 없이 흩으러진 엉성한 양상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기억 속의 지식들은 나무들의 수풀(덤불, thickets)들, 또는 숲속의 수풀들에 의해 의미되기도 한다.
기억 속의 지식들이 상대적으로 조잡하고 엉성한 바, 이것이 “짚” 또는 “덤불”에 의해 의미된다는 것은 단지 기억 속의 지식들에만 있는 이들에게는 그렇다는 것이 아예 나타나지 않는다, 그래서인지 좀 배웠다하는 자들은 이를 알고 있는 듯 여긴다. 이들이 믿는 바, 인간이 더 알면, 또는 소유하는 기억 속의 지식이 더 많으면, 더 슬기로워진다는 것이다. 그러나 경우에 따라 그럴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을 나는 다른 삶에 온 자, 즉 세상에서 기억 속의 지식에만 있었던 자, 그것 때문에 학식이 높다 평판을 받고 살았던 이들로부터 확실히 알게 되었다. 그 이유가 이들이 기억 속의 지식들에 노련하지 않은 이들 보다 더 우둔해 있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가 내게 알려졌다, 즉 기억 속의 지식들은 실로 슬기로워지는 수단임은 틀림없다, 그러나 그 반대로 미친 자 되는 수단도 된다는 것이다. 선으로부터 있는 이들에게 기억 속의 지식들은 슬기로워지는 수단이나, 악으로부터 있는 이들에게 그것은 미친 자 되는 수단이다. 그 이유가 기억 속의 지식들을 수단으로 악한 생활 뿐만 아니라 거짓 원리가 올바른 진리이다고 확증하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그들은 시건방져서 오만한 신념 (자아 설득)으로 가득 찰 수밖에 없는데, 그 이유는 자신의 슬기가 타인의 것과 비교 안되게 높다고 스스로 인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그들은 자기들의 합리성을 파괴하는데 이르고야 만다. 그 이유가 기억 속의 지식으로부터 추론할 수 있는 자는 없기 때문이다, 설사 합리력을 향유하는 이들보다 더 고고하게 외관상으로 나타난다 해도 그렇다는 말이다. 그 이유가 이런 노련함은 얼빠진 빛의 결과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합리성에서 탁월한 자는 선이 선인 것, 진리가 진리인 것, 그 반대인 악이 악인 것, 거짓이 거짓인 것을 분명하게 볼 수 있는 자 뿐이다. 이에 반해 선을 악으로, 악을 선으로, 또한 진리를 거짓이라고, 거짓이 진리이다로 간주하는 자는 제 아무리 능변이 출중하다 해도 결단코 합리성이 그 사람 안에 있다 라고 말조차도 해볼 수 없다. 선이 선이라고, 진리가 진리라고, 악이 악이다고, 거짓이 거짓이라고 분명하게 갈라서 보는 사람과 더불어 빛은 천국으로부터 그 사람 안으로 흘러들어, 그의 지력을 계발한다, 하여 그가 자기의 이해력에서 보는 추론들은 자신에게 드리운 많은 광선들로 해서 야기된 것들이다. 똑같은 빛이 그들의 기억 속의 지식도 계발해준다, 하여 이 지식들은 진리를 확증하고, 더 나아가 엉성하고 조잡하게 널려 있는 이 지식들마저 질서에 일치하는 천국의 형체 안으로 정돈되고 배열해놓아 필요시 유용한 수단이 될 수 있게 준비된다. 그러나 선과 진리에 반대하여 있는 이들, 마치 악한 생활 안에 있는 이들 같이 이 천국의 빛이 드리움을 승인하지 않고, 그 대신 얼빠진 자신들의 빛만으로 기쁨을 향유하려든다. 결국 이것은 어둠 안에서 벽에 있는 점이나 줄무늬를 바라보고는 굉장한 벽화가 그려져 있다 라고 기발난 말솜씨로 타인을 설득해대기까지 하는 것과 같다. 허나 진짜 빛, 천국의 빛으로 보면 점이고 단순히 이리저리 마구 그어진 줄일 뿐임을 실감하는 것과 같다.
이상 살핀 바로부터 기억 속의 지식은 슬기로워지는 수단이자, 미쳐버리는 수단도 된다는 것을 알았을 것이다. 다시 말해 이것은 합리성을 보다 더 완전해지게 하는 수단이지만, 때로는 합리성을 파괴하는 수단도 된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다른 삶에서, 이런 지식들을 수단으로 자신의 합리성을 망치게 한 이들은 이런 지식들에 정통하지 못했던 이들보다 더 아둔해 있었다. 이런 지식들이 상대적으로 조잡하다는 것은 이 지식들이 외적 인간, 또는 자연적 인간에 속해 있다는 것으로도 분명해진다; 이에 반해 기억 속의 지식을 수단으로 연마된 합리성은 영적 인간, 또는 내적 인간에 속해 있다. 위 둘은 순수성에 관하여 서로에서 너무나 다르고, 따라서 서로는 멀리 멀리 떨어져 위치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들 위에 앉았다. 이는 그것들이 내면적이다를 의미하는데, 그 이유는 그것들이 낙타의 짚 안에 놓이고 그녀가 짚 위에 앉음으로 해서 그녀 아래에 있는 형국이기 때문이다. 이는 “낙타의 짚”의 의미가 기억 속의 지식들이다로 알게 되는데 이미 살폈다 “드라빔”에 의해 의미되는 진리들은 기억 속의 지식들은 아니지만, 이 지식들 안에 있다. 세 등차들로 된 진리들에 주목하면, 보다 내면인 진리는 보다 더 외면인 진리보다 안쪽에 있는데, 이것이 질서 안에서 챙겨 놓이는 형국이다.

그리고 라반은 모든 천막을 다 더듬어 보았다, 그리고 그것들을 찾지 못했다. 이는 그의 자신이었던 것은 거기에 있지 않았다를 의미한다. 이는 내적 의미의 시리즈로부터 알게되므로 설명은 생략한다.

그리고 그녀는 그녀의 아버지에게 말했다. 이는 선 쪽으로를 의미한다. 이는 “아버지”의 의미가 선이다로부터; 그리고 여기서의 아버지는 라반인 바, 이는 중간의 선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제가 당신 앞에서 일어날 수 없다 해서 내 주인의 눈에 분노하심이 있게 하지 마세요. 이는 그것들은 밝혀질 수 없음을 의미한다. 이는 내적 의미에 있는 것들의 시리즈로부터 분명해지는 바 설명은 필요 없다. 그 이유가 일어선다는 것은 열어보이는 것, 그러므로 “드라빔”에 의해 의미된 진리들을 밝히는 것이기 때문, 고로 “일어설 수 없다”는 그것들이 밝혀질 수 없다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여인의 길이 제게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아직까지 그것들은 불결한 것들 사이에 있음을 의미한다. 이는 “여인의 길(경수)”이 불결함을 의미하기 때문, 고로 그녀가 앉은 것들 역시 불결해 있다 (레. 15:19-31); 고로 그것들이 아직도 불결한 것들 사이에 있다가 의미된다. 내면의 진리들이 불결한 상태이다 라고 말해지는 때는 이 진리들이기억 속의 진리 안에서 상응하는 상태에는 아직 있지 못할 때, 즉 서로 일치함의 상태에 있지 못할 때이다. 이런 상태가 제거되는 때란 인간이 깨끗해지는 때, 즉 거듭나질 때이다.

그리고 그는 수색했다, 그리고 드라빔을 발견하지 못했다. 이는 그들은 그의 것이 아니었음을 의미한다. 즉 이 진리들은 라반의 것이 아니었다는 말이다. 이는 “수색했으나 발견하지 못했다”로부터 알게 된다. 외적 역사적 의미에서 본다면, 드라빔들은 라반의 것이나 단지 숨겨져서 찾지 못했다를 말하고 있으나, 내적 의미에서는 드라빔은 그의 것이 아니다를 말하고 있다. 이런 진리들(신성으로부터의 진리들)이 라반에 의해 의미된 선에 속하지 않고 내면의 진리에 속해 있다는 것이다. 이 모두로부터 드라빔에 관련하여 어떤 신비함들이 감추여 놓였는지 실감할 것이다.
신성으로부터의 진리들이 “드라빔”에 의해 의미된 이유는 고대 교회 속에 있던 이들은
신성을 다양한 이름들을 수단으로, 결과들에 있는 다른 나타남들에 따라서 구별했다; 예를 들면, “하느님 사다이”에 의해서는 시험들로부터, 즉 시험 안에서 주님께서 인간을 위해 전투하시고, 그 후 인간에게 이익들을 수여하심으로부터 그렇게 이름을 불렀다 (1992, 3667항); 인간이 자신으로부터 신앙의 신비함들 안으로 들어오지 않도록 하시는 그분의 섭리로부터서는 “그룹(cherubs)들”이라 불렀다; 그들이 대답으로 받은 신성으로부터의 진리들은 “드라빔”이라 불렀다; 이 외에도 신성의 특성에 따라 특별한 이름들이 붙여졌다.
슬기로운 이들의 경우에서는 여러 이름들이 있지만 이는 하느님들이 아닌 하나의 유일한 주님을 의미한다고 이해했으나, 단순한 이들에게서는 자신들을 위해 (자신들의 필요에 따라, 즉 아들을 원하는 여인이거나, 사업 성공을 원하는 자이거나, 높은 지위를 원하거나 하는 따위) 필요한 만큼 많은 신성에 관련한 표현물들을 고안해냈다. 이것이 더 극성적인 형태, 즉 우상 숭배 수준으로 돌아섰을 때, 그들은 자신들을 위해 아주 많은 하느님들을 모양지었다. 요즘의 말로 유행을 탄 것이다. 이것이 번져 이방인들 역시 많은 독특한 제나름의 우상들을 창안했다. 하여 사방 곳곳에서 우상들은 많이 불어났다. 어쨌든 고대 시대에서 신성한 사항들이 이런 이름들에 의해 이해되었던 바, 그것들 중의 극히 일부가 말씀 안에서 유지 존속된 것이 “사다이(Shaddai)”, 또는 “그룹(cherubs)들”, 또는 “드라빔”이라는 단어들이다. 대답으로 오는 신성으로부터의 진리가 “드라빔”에 의해 의미된 것은 호. 3:4에서 분명해진다.

36-42절. 그리고 야곱은 성을 냈다, 그리고 라반에게 따지고 들었다. 그리고 야곱은 라반에게 답하여 말했다, 내 잘못이 무엇입니까? 제가 무슨 죄를 지었기에 당신은 불같이 내 뒤를 추격하셨습니까? 37 당신은 내 모든 집기들을 다 만져 보았는데 당신은 당신 집의 집기 중 무엇을 찾았습니까? 제 형제와 당신의 형제 사이에 그것을 놓고, 그들로 우리 둘 사이를 판가름하게 합시다. 38 저는 당신과 이십 년을 지냈습니다. 당신의 양과 당신의 암염소들이 그들의 새끼를 지우지 아니하였고, 저는 당신의 양떼 속의 숫양들을 먹지도 않았습니다. 39 저는 찢긴 것을 당신에게 가져다 주지 않고, 나는 그 손실을 떠안았고, 낮에 도적을 당했든 밤에 도적을 당했든 당신은 그것을 제 손에 청구했습니다. 40 그러므로 저는 낮에는 더위가, 밤에는 추위가 나를 괴롭히는 것을 견디었습니다, 그리고 제 잠은 제 눈에서 쫓겨났습니다. 41 저는 당신의 집에서 이십 년, 십사 년은 두 딸을 위해서, 육 년은 당신의 양떼를 위해서 당신을 섬겼습니다, 그리고 당신은 열 번씩 제 삯을 바꿨습니다. 42 나의 아버지의 하느님,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삭이 두려워하는 분께서 저와 함께 계시지 아니하였더라면 지금 당신은 저를 빈 손으로 내보내셨을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저의 비참함과 내 손의 수고함을 보셨는 바, 어젯밤 판결하셨습니다. “그리고 야곱은 성을 내었다, 그리고 라반에게 따졌다”란 자연 평면에서의 열정을 의미한다. “그리고 야곱은 답하여 라반에게 말했다, 제 잘못이 무엇입니까? 무슨 죄를 지었기에 당신은 이렇게도 불같이 저를 추격하셨습니까?”란 그분께서 자신을 분리하신 것은 악으로부터가 아니었다를 의미한다. “당신은 내 집기들을 다 만져 보았는 바 당신은 당신 집의 집기들 중 무엇을 찾았습니까?”란 선으로부터의 어떤 진리들도 그의 자신으로부터 있었던 것은 없고, 모든 진리는 주어진 것이었음을 의미한다. “그것을 내 형제와 당신의 형제 사이에 놓고, 그들로 우리 둘 사이를 판가름하게 해봅시다”란 공정하고 공평한 것으로부터 판결이 있음을 의미한다. “이십 년 간 나는 당신과 함께 지냈습니다”란 그분의 자기 자신을 의미한다. “당신의 양과 당신의 암염소는 제 새끼를 지우지 않았습니다”란 선에 관한 그것의 상태와 진리의 선을 의미한다. “당신의 양떼 속의 숫양을 나는 먹지 아니했습니다”란 그분께서는 그의 것 속에 있는 선으로부터의 진리를 가져가신게 하나도 없으셨음을 의미한다. “찢긴 것을 저는 당신에게 가져오지 않았습니다”란 그분의 탓이 아닌 악은 그 선과 함께 있었음을 의미한다. “나는 그 손실을 메꾸었습니다”란 선이 그것으로부터 왔음을 의미한다. “내 손으로부터 당신은 그것을 청구했습니다”란 그것은 그분으로부터 였음을 의미한다. “낮에 도적을 당했든 밤에 도적을 당했든”이란 자아 공적 속의 악을 모두 의미한다. “그러므로 해서 저는 낮에는 더위를, 밤에는 추위를 견뎌내어야 했고, 제대로 잠을 청해 볼 수도 없었습니다”란 시험을 의미한다. “이십 년 동안 나는 당신 집에서 당신을 섬겼습니다”란 그분의 자기 자신을 의미한다. “십사 년은 두 딸을 위해서”란 그분이 진리에 애착함들을 거기로부터 자신에게 획득하시는 첫 기간을 의미한다. “그리고 육 년은 당신의 양떼를 위해서”란 그 후 아마도 그분은 선을 획득하셨을 것임을 의미한다. “그리고 당신은 내 삯을 열 번이나 바꾸었다”란 그분께서 이런 선들을 자신에게 적용하셨을 때 그분을 향한 그것의 상태를 의미한다. “제 아버지의 하느님,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삭이 두려워하는 분이 나와 함께 하시지 아니하였더라면”이란 신성과 신성한 인간이 아니면을 의미한다. “필시 나는 지금 빈 손으로 내보내졌을 것입니다”란 혼자 힘으로 모든 것을 청구했어야 할 것임을 의미한다. “하느님께서는 나의 비참함과 내 손의 수고함을 보셨고, 어젯밤 판결하셨읍니다”란 모든 것들은 그분 자신의 권능으로 그분으로부터 이었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야곱은 성을 내었다, 그리고 라반에게 따졌다. 이는 자연 평면에서의 열정을 의미한다. 이는 “격노함”, 또는 “화를 냄”, 결과적으로 “따짐(꾸짖음)”의 의미가 열정이다로부터; 그리고 야곱의 표현함이 자연 평면의 선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격노함, 화를 냄”, 그리하여 “따짐”의 의미가 열정이라 말한 이유는 천국에서, 또는 천사들과 더불어서 화를 냄은 없고 열정은 있기 때문이다. 화를 냄과 열정은 다른데, 화를 냄 안에는 악이 있고, 열정 안에는 선이 있다; 사실상 화를 내는 자는 화낸 상대에게 악을 의도함에 있으나 열정에 있는 자는 상대에게 선을 의도함에 있다; 실제의 행동이 개시된다면, 선을 의도함에 있는 자의 경우는 즉각 선행이 발휘되나 악 안에 있는 자는 그 반대일 뿐이다. 비록 바깥 형체에서 이 둘은 비슷할지 몰라도 내적 형체는 판연히 다르다.

그리고 야곱은 답하여 라반에게 말했다, 제 잘못이 무엇입니까? 무슨 죄를 지었기에 당신은 이렇게도 불같이 저를 추격하셨습니까? 이는 그분께서 자신을 분리하신 것은 악으로부터가 아니었다를 의미한다. 이는 “잘못(transgression)”, “죄”의 의미가 악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추격해온 원인은 야곱이 자신을 분리했기 때문임은 분명하다, 고로 이 의미는 그분이 자신을 분리하신 것은 악으로부터가 아니었다가 된다.

당신은 내 집기들을 다 만져 보았는 바 당신은 당신 집의 집기들 중 무엇을 찾았습니까? 이는 선으로부터의 어떤 진리들도 그의 자신으로부터 있었던 것은 없고, 모든 진리는 주어진 것이었음을 의미한다. 이는 “자기 집의 집기들”이 그의 자신의 진리들이다로부터 분명해진다. 이로부터 분명한 바, “자기 집의 집기들”은 그의 자신의 진리들을 표시함이다. “그것들을 뒤지고 발견 못함”은 그의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 결과적으로 모든 것은 주어져왔었다는 것이다.

그것을 내 형제와 당신의 형제 사이에 놓고, 그들이 우리 둘 사이를 판결하게 해봅시다. 이는 공정하고 공평한 것으로부터 판결이 있음을 의미한다. 이는 “형제들”의 의미가 선들이다로부터 분명해진다. 그리고 “내 형제들과 당신의 형제들”은 공정하고 공평한 것을 표시하고, “그들로 우리 둘 사이를 판가름하게 하자”는 판결을 표시함이 분명하다. “내 형제들과 당신의 형제들”이 공정과 공평인 이유는 여기서 취급되는 주제가 자연 평면이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영적 평면에서 선과 진리인 것이라 불리우는 것이 자연 평면에서는 공정과 공평이라 불리움이 마땅하기 때문이다. 인간에게는 두 평면(plane)이 있는데, 이 위에 주님으로부터 있는 천적인 것들과 영적인 것들이 놓여진다. 두 평면 중 하나는 내면이고 또 하나는 외면이다. 평면 자체는 양심밖에 더 아니다. 이 평면들 없이(즉 양심 없이) 주님으로부터의 천적, 영적인 것들은 고정될 수 없다, 그 이유가 마치 체 위에 물을 붇는 격이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이런 평면(양심)이 없는 이는 양심이 무엇인지를 모른다; 더욱이 그들은 영적, 천적인 것이 있다는 것을 믿지 않는다.
내면의 평면, 또는 내면의 양심은 진짜(순수) 의미에서 선과 진리가 있다; 그 이유가 주님으로부터 흐르는 선과 진리가 이 양심을 움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외면의 평면은 외면의 양심이다; 그리고 거기에 적절한 의미에서 공정과 공평인 것이 있다; 그 이유가 도덕적, 시민적 종류 모두에서 공정과 공평인 것이 있기 때문, 이것도 마찬가지로 흘러들고 외면의 양심을 움직인다. 여기서도 역시 가장 바깥의 평면이 있는데, 이것도 양심으로 나타나나, 이것은 양심은 아니다. 즉 자기 자신의 명예, 명성 때문에, 그리고 세상의 부유함과 소유를 위하여, 그리고 법을 두려워하여 있는 공정과 공평인 것을 행하는 것이다. 이 세 평면들이 인간을 통치한다, 즉 이것들은 주님께서 인간 당사자를 통치하는 수단이다. 내면의 평면을 수단으로 (즉 영적 선과 진리에 대한 양심을 수단으로) 주님은 거듭나져왔었던 이들을 다스리신다. 외면의 평면을 수단으로 (즉 공정과 공평인 것에 대한 양심을 수단으로, 다시 말해 도덕적, 시민적 종류에서의 선과 진리에 대한 양심을 수단으로) 주님께서는 아직 거듭나지 않고 있는, 그러나 거듭나질 수 있는 이들을, 그리고 또한 만일 육체의 삶 안에 있지 않다면, 그러나 다른 삶에서 거듭나고 있는 이들을 다스리신다. 가장 바깥 평면, 즉 양심은 아니지만 양심 같이 나타나는 평면을 수단으로 주님께서는 위의 두 부류 외의 모든 이들, 악한 자에 이르기까지 모두를 통치하신다; 이 통치하심이 없으면 이들은 완전한 사악함이나 미친 자에로 돌진하기 십상이고, 이 평면의 제한이 없으면 정말로 그렇게 실행되어버리기 때문이다. 이 세 평면을 수단으로 자신들이 다스려지게 허용하지 않는 모든 이들은 미쳐 있든지, 또는 법들에 따라 처벌되어있다.
거듭나는 자와 더불어 이 세 평면들은 하나로서 행동한다; 그 이유는 이것이 다른 것 안으로 흐르기 때문, 그리고 내면의 것이 외면의 것을 배열한다. 첫 평면, 또는 영적 선과 진리에 대한 양심은 인간의 합리성 안에 있다; 그러나 둘째 평면, 또는 도덕적, 시민적 차원의 선과 진리에 대한 양심(즉 공정과 공평에 대한 양심)은 인간의 자연 평면 안에 있다. 이로부터 공정과 공평이 무엇인지 분명해졌을 것이고, 본문에서 이것이 “형제들”에 의해 의미된다는 것, 즉 공정은 “내 형제들”, 공평은 “네 형제들”에 의해 의미된다; 그 이유가 그들이 공정과 공평이라 불리우는 이유는 주제가 자연적 인간이기 때문이고, 공정과 공평이 자연적 인간을 적절하게 서술하기 때문이다.

이십 년 간 나는 당신과 함께 지냈습니다. 이는 그분의 자기 자신을 의미한다. 이는 “20”이 리메인스의 선을 의미함에서 알게 된다. 그러나 이 “20”이 주님을 서술할 경우, 이는 그분의 자기 자신밖에 더 의미하지 않는다. “20년”은 이 자기 자신의 상태들을 의미한다. 라반에 대한 야곱의 말들에 포함된 것들은 주님께서 그분의 자신의 힘으로 그분 자신을 위하여 획득하신 자연 평면에 있는 자기 자신을 취급하고 있다, 그리고 사실상 이 자기 자신의 다양한 상태들에 관하여서 이다.

당신의 양과 당신의 암염소는 제 새끼를 지우지 않았습니다. 이는 선에 관한 그것의 상태와 진리의 선을 의미한다. 이는 “양”의 의미가 선이다로부터, 이는 아래에서 살핀다; 그리고 “암염소”의 의미가 진리의 선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위에서 간단히 말한 “선”은 좀 더 꼼꼼히 말하면, 의지력으로부터의 선(의지의 선)을 뜻한다; 그러나 “진리로부터의 선(진리의 선)은 이해력으로부터의 선이 뜻해진다. 의지력의 선은 선으로부터 선을 행함이다; 그러나 이해력의 선은 진리로부터 선을 행함이다. 진리로부터 선을 행하는 이들에게 위 둘은 한가지인 듯, 같은 것인 듯 나타나나; 그럼에도 그것들은 서로에서 많이 다르다; 그 이유가 선으로부터 선을 행하는 것은 선을 지각함으로부터 선을 행하는 것이다; 그리고 선을 지각함은 천적 평면(수준)에만 존재한다; 이에 비해 진리로부터 선을 행하는 것은 기억 속의 지식으로부터 선을 행하는 것, 결과적으로 이해력으로부터 선을 행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그렇다 하는 지각이 없이 선을 행하는 것; 그리고 우리가 타인에게서 배웠기 때문에, 또는 자신의 지력을 수단으로 자신으로부터 의문시되던 선에 대한 것의 결론을 맺어 선을 행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것은 실로 오류투성이의 진리일는지 모른다, 그러나 만일 이 진리가 목적으로 선을 가지고, 인간이 이 목적을 향해 실행한다면 선 같이 되어 간다.
“양”이 선을 의미하는 것은 말씀의 많은 구절로부터 보여지는데, 몇 구절만 아래에 첨가한다. 이사야서에서:
그분은 괴롭힘을 당하셨다, 그리고 그분은 입을 열지 않으셨다; 그분은 죽임을 당하려는 어린 양 같이, 그리고 양털 깍는 자 앞에서의 양 같이 인도되신다, 그리고 그분은 그분의 입을 열지 않으셨다 (이. 53:7);
위는 주님에 관하여서이고, 그분이 양에 비교되시고, 진리로부터가 아니고 선으로부터 이심에 관하여서이다. 마태복음서에서:
예수께서는 파견하시는 열둘에게 말하셨다, 이방인들의 길로 가지 말라, 그리고 사마리아인들의 성읍으로 너희는 들어가지 말라; 그러나 오히려 이스라엘의 집의 잃어진 양에게로 가라
(마. 10:5, 6);
“그들이 가지 말아야 하는 이방인들”이란 악들 안에 있는 이들을 표시한다. “사마리아인들의 성읍들”은 거짓들 안에 있는 이들을 표시한다; “양”은 선들 안에 있는 이들을 표시한다.
요한복음서에서:
그분이 부활하신 후에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말하셨다, 내 어린 양들을 먹이라; 두 번째 말하셨다, 내 양들을 먹이라; 그리고 세 번째 말하셨다, 내 양들을 먹이라 (요. 21:15-17);
“어린 양”은 순진 안에 있는 이들을 표시한다; 처음 언급된 “양들”은 선으로부터 선 안에 있는 이들을; 마지막 “양들”은 진리로부터 선 안에 있는 이들을 표시한다. 마태복음서에서:
사람의 아들이 그분의 영광 안에서 오실 때, 그분은 그분의 오른쪽에 양을; 그분의 왼쪽에 염소를 놓으실 것이다; 그리고 그분은 그분의 오른쪽에 있는 이들에게 말하실 것이다, 오라 너희는 내 아버지의 복을 받은 자들이다, 세상의 창설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준비된 왕국을 상속받으라; 그 이유는 내가 굶주렸다, 그리고 너희는 나에게 먹을 것을 주었다; 내가 목말랐다, 그리고 너희는 나에게 마실 것을 주었다; 내가 낯선 사람이었다, 그리고 너희는 나를 안으로 데려갔다; 나는 벌거벗고 있었다, 그리고 너희는 나를 입혔다; 내가 병들었다, 그리고 너희는 나를 방문했다; 내가 감옥에 있었다; 그리고 너희는 나에게 왔다. 너희가 내 형제들 중의 지극히 작은 자의 하나에게 했던 만큼, 너희는 그것을 나에게 했다 (마. 25:31-40);
위에서 “양들”은 선들을, 즉 선 안에 있는 이들을 표시함은 분명하다. 모든 종류의 선행의 선들이 위 구절들의 내적 의미에서 포함되어져 있는데, 이는 별도로 주님의 신성한 자비로부터 살필 기회를 가질 것이다. “숫염소들”에 의해 신앙 안에 있고 선행 없음 안에 있는 이들이 의미된다.
마찬가지로 에스겔서에서:
너에 관하여, 오 나의 양떼들아, 주 여호비께서 말하신다, 잘 보라 나는 가축떼와 가축떼 사이를, 양의 숫양들, 그리고 숫염소들 사이를 판결한다 (겔. 34:17);
위의 “숫염소들”은 특히 선행 없음으로부터 신앙 안에 있는 이들이다는 것은 “숫염소들”의 의미가 좋은 의미에서 신앙의 진리 안에 있고, 그로부터 얼마의 선행 안에도 있는 이들이다로부터 알는지 모른다; 반대적 의미에서, 신앙이 구원한다를 구원 신앙 논리의 출발점으로 삼고, 선행 없음의 신앙 안에 있는 이들이다. 이와 똑같은 이들이 바로 앞에 인용한 주님의 말씀에도 있다. 그러나 신앙의 진리가 없는데, 선행의 선도 없는 이들은 위와 같은 심판의 진행 절차도 필요 없이, 그들이 거짓 안에 있다는 어떤 유죄 판결도 필요 없이 지옥으로 운반된다.

당신의 양떼 속의 숫양들을 나는 먹지 아니했습니다. 이는 그분께서는 그의 것 속에 있는 선으로부터의 진리를 가져가신게 하나도 없으셨음을 의미한다. 이는 “숫양들”이 선으로부터의 진리들을 의미함으로부터 알게 된다; 그 이유가 “양들”은 선들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숫양도 양떼에 속하므로, 선으로부터의 진리들을 의미하게 된다; 그리고 “먹다”의 의미가 자기 것이 되게 함이다로부터, 고로 가져가는 것이다; 즉 이는 또 다른 그의 것으로부터 가져가서 자기 것이 되게 함이다.

찢긴 것을 저는 당신에게 가져오지 않았습니다. 이는 그분의 탓이 아닌 악은 그 선과 함께 있었음을 의미한다. “찢김”의 의미가 또 다른 것에 의해 입혀진 죽음인 바, 그분의 과오에 의하지 않은 악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인간과 더불은 악은 많은 근원들이 있다. 첫 번째 악은 선조 대대로 축적되어 내려 받아진 상속으로부터 있는 악이다. 이 악은 각자의 자아 안에 있다. 두 번째 악은 실제적인 것으로부터 있는 악, 즉 악한 생활을 수단으로 자신이 획득해버린 악이다. 이 악을 그는 부분적으로는 상속에 의해서 받는데, 마치 악의 바다로부터 한바가지를 퍼담아 자신의 행동 안으로 옮겨다놓는 식이다. 이것에 부분적으로 자신이 창안한 많은 악들이 추가된다. 그러나 실제상의 악, 즉 인간이 그의 자기 자신을 만드는 악은 다양한 근원들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대별하면, 두 가지이다: 하나는, 자신의 과오가 없이 타인(다른 것들)으로부터 악을 받는 것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자기의 과오를 통하여 자기 자신에 일치되게 악을 받는 것이다. 자기의 과오 없이 타인의 악으로 말미암아 받아진 악이 말씀에서 “찢긴 것(what is torn)”에 의해 의미된다. 그러나 자신에 일치됨으로부터 받아진 악, 즉 자신이 저지름으로 받아진 악은 말씀에서 “시체(carcass)”에 의해 의미된다.
그러므로 고대 교회에서, 유태 교회에서도 마찬가지지만, 시체는 그 자체로부터(저절로) 죽은 것, 또는 시체, 또는 찢겨 죽은 것을 먹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다. 모세의 책에서:
시체와 찢긴 것을 먹는 모든 혼, 그가 본토박이 이든 외국인 이든, 그는 자기 옷들을 빨 것이다, 그리고 물로 자신을 씻을 것이다, 그리고 저녁 때까지 불결할 것이다. 그리고 만일 그가 그것들을 빨지 않는다면, 그의 살을 씻지 않으면, 그는 자기의 불법을 낳을 것이다
(레. 17:15, 16).
레위기서에서:
너희는 시체와 찢겨서 시체가 된 것을 먹어 자신이 더러워지지 않도록 먹지 말라: 나는 여호와이다 (레. 22:8);
위에서 “찢겨서 시체가 된 것”은 거짓으로부터 있는 악, 즉 숲에서 찢어 죽이는 들짐승인 악한 자에 의해 주입된 거짓으로부터 있는 악을 표시한다; 그 이유가 말씀에서 지옥적인 자들이 들짐승에 비교되기 때문이다. 출애굽기서에서:
거룩함의 사람들을 너희는 나에게 있게 하라; 그러므로 너희는 들판에서 찢긴 어떤 고기도 먹지 말고, 그것을 너희는 개들에게 던질 것이다 (출. 22:30).
에스겔서에서:
예언자가 여호와께 말한다, 제 혼은 더렵혀지지 아니하였습니다; 그리고 저는 시체나 찢겨 죽은 것을 먹지도 않았고, 제 입 안으로 역겨운 고기가 오지 않았습니다 (겔. 4:14).
에스겔서에서:
성직자들은 어떤 시체, 또는 새이든, 짐승이든, 찢겨 시체된 것을 먹지 말라 (겔. 44:31);
위는 새로운 땅이 있는 주님의 왕국에 관해 말하고 있다.
이런 구절들로부터 “찢겨 죽은 것”이 내적 의미에서 뜻해진 것을 알았을는지 모른다; 그러나 이에 대해 분명히 알아지도록 한 번 더 예를 들어 생각해보자: 만일 인간이 선으로부터의 생활을 이끌고 있고, 또는 자신의 생활을 선쪽에서 잘 이끌 듯 타인에게도 그렇게 하고 있지만 악 안에 있는 또 다른 인간의 이런 추론에 설득당하게 자신을 허용해버린다면, 즉 당신이 선으로부터 생활을 하고 있지만, 그 생활이 당신이 구원받는데, 별 효과가 없다고 결론적으로 말할 때의 경우이다. 이 인간의 추론인즉, 모든 인간은 죄들 안에서 태어나지기 때문 (아담이 지었다는 죄, 통상 말하는 원죄론일지 모른다); 그리고 (주님만이 선의 근원이신 바, 주님 외에 선을 행할 자는 없기에) 아무도 자신으로부터 선을 행할 수 없기 때문, 그러므로 선을 행할 수 없다는 것; 그러므로 구원의 수단은 신앙이라 불리우는 것으로 설비되어져 왔다는 추론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선의 생활 없이 신앙을 수단으로 구원되어질 수 있다고 말한다, 따라서 죽기 몇 분 전 일 때조차에서도 신앙을 받는다면 구원될 수 있다는 것이다. 만일 선한 생활을 잘 꾸려가던 누군가가 이런 논리에 자신을 설득당하게 허용하면, 그는 자신의 생활 측면은 시체가 되어가는 바, 나중에는 선으로부터 생활을 경멸하기까지에 이른다. 이 때의 이 인간을 두고 말씀에서 “찢겼음”이라고 말해진다; 그 이유가 “찢김”이 선 안으로 거짓이 은근히 심어짐을 서술하기 때문이다. 그리하면 선은 더 이상 살아 있지 않게 된다 (“시체”이다).
부부(conjugial)라는 것을 예로 삼아 한 번 더 생각해보자: 이 단어를 두고 누군가가 처음에는 매우 수준 높은 단어로 간주하여 이를 천국에서의 부부로 중요시하였다 하자, 그런데 그 후에 결혼한 짝들이라는 수준, 또는 두 부부 모두 부부라는 것은 세상만을 위한 부부, 아이들을 돌보고 교육하기 위하여, 또는 상속을 위하여, 급기야 결혼의 묶음은 단지 계약에 불과할 뿐이다, 고로 동의함이 있으면 계약 해제, 느슨한 조건으로 계약을 변경함 따위의 기발난 착상도 동원한다, 하여 음탕함이 부부 사이에 스며들고 결과된 것이 결혼에 대한 천국적 수준이 “찢긴” 것이다.
찢은 자가 악한 자인데, 이것은 외적인 것들로부터 추론함으로 야기되는데, 이 안으로 내적인 것들은 생활의 악 때문에 은근히 심어질 수 없다. 예레미야서를 보자:
숲으로부터 나온 사자가 큰 자를 죽인다, 사막의 이리가 그들을 황폐해지게 한다, 표범이 그들의 성읍들을 망보고 있다, 거기로부터 나가는 모든 이는 찢긴다, 그 이유는 그들의 위법이 번창했고, 그들의 뒤로 미끌어짐이 증가했기 때문이다 (예. 5:5, 6).
그리고 아모스서에서:
에돔이 검을 들고 그의 형제를 추격했다, 그리고 그의 동료들을 파괴했다, 그리고 그의 분노는 영구히 찢었다, 그리고 그는 꾸준히 자기의 격노를 유지한다 (암. 1:11).

나는 그 손실을 메꾸었습니다(짊어졌습니다). 이는 선이 그것으로부터 왔다를 의미한다. 이는 “손실을 짊어짐”이 선을 만드는 것을 의미한다로부터; 여기서, 선이 그것으로부터 왔다는 것을 의미한다. 과오로부터의 악에 주목해보면, 이것은 앞에서 “시체”와 “찢긴 것”에 의해 의미된 바와 비슷한데, 이러하다; 과오(과실, fault)로부터의 악, 또는 실제의 악을 수단으로 계약해버린 수준의 악, 그리고 생각 안에서 신앙, 또는 확신에 이르도록 굳혀진 악은 (저 세상에서도) 수정되어질 수 없고 영원히 남아 있는다; 이에 비해 과오로부터가 아닌 악, 또는 당사자가 생각함을 수단으로 확증해버리지 않은 악, 또는 이런 생각으로부터 내향적으로 자기가 자기를 설득하지 않은 악 역시 실제로는 (저 세상에서) 남아 있지만, 그것은 바깥쪽에 붙어 있다; 그 이유가 이 악은 당사자의 내면쪽을 뚫지 못하는 바, 그의 내적 인간을 타락되게 못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런 악 때문에 선이 오는 경우가 발생한다; 즉 외적 인간 안에 있는 것들에서 아직 선으로서 감동되지 않은 것, 그렇지만 선이라고 동의된 것들을 내적 인간은 볼 수 있으나 이것을 두고 내적 인간은 악쪽에 더 기울어 있다고 보는 한편, 같은 외적 인간에 있는 악들과 비교해보게 된다. 이때 내적 인간은 두 비교로 해서 선쪽을 더욱 명료하게 보게 된다. 이때 인간은 선에 더 강하게 감동되어진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선이 그것으로부터 온다고 말한 것이다.

내 손으로부터 당신은 그것을 청구했습니다. 이는 그것은 그분으로부터 이었음을 의미한다. 이는 “손”의 의미가 힘이다로부터, 고로 이것은 그분으로부터 이었다를 뜻하게 된다; 그 이유는 그분 자신의 힘으로부터 인 것은 그분으로부터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낮에 도적을 당했든 밤에 도적을 당했든. 이는 자아 공적으로부터의 악을 의미한다.
이는 “훔침을 당함”, 또는 “도적질 당함”의 의미가 자아 공적 (self-merit)의 악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인간이 자신이 지녔었다고 판단하여 선을 자신에게로 돌릴 때, 또는 선행이 자신이 본래 선한 인간이어서 라고 할 때, 또한 자신이 지닌 선, 자신의 선한 인간됨 때문에 자신은 당연히 구원받아 마땅하다고 할 때, 거기에 자아 공적이라는 악이 의미되고, 이 악이 말씀에서 “도적(theft)”에 의해 의미되어 있다. 그러나 이 악에 주목해보자, 개혁되는 모든 이가 처음에서는 선이 자신으로부터 이다고 상상한다, 그러므로 자신이 행한 선을 수단으로 자신은 구원을 받을만 하다고 상상한다. 이렇게 구원을 받을만 하다고 상상한 것은 선이 자기 것이다고 상상했던 결과로부터이다. 그 이유가 이 생각이 저 생각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신을 거듭나지게 허용한 이들은 자기들의 생각에서 이것을 확증하지 않는다, 또는 이것이 그렇다 라고 자기가 자기를 설득하지 않는다; 그러나 오히려 그런 생각이 사라져간다. 그 이유가 누군가가 외적 인간 안에 있는 한, 자신의 개혁의 단계는 모든 이의 경우에서 이렇기 때문이다. 모든 이의 개혁은 이와 달리해서는 행해질 수 없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외적 인간은 이 이상의 것을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외적 인간이 현세에의 강한 욕망과 더불어 제거될 때, 그래서 내적 인간이 일을 시작할 때; 즉, 주님께서 내적 인간을 통하여 총명의 빛과 더불어 흘러드실 때, 그의 외적 인간은 계발된다; 이때 인간은 처음의 경우와 다르게 믿기를 시작한다, 그리고 선이 자신으로부터가 아니고 주님의 (선물하신) 덕분에 자신 안에 있음을 믿는다. 이상으로부터 여기서 과오로부터 있지 않은 악, 즉 선을 오게 하는 자기 공적의 악을 뜻하는 것이 분명해졌을 것이다. 그러나 유의할 것은, 인간이 성년기에 와 있을 때, 그의 생각 안에서 확증한다면, 그래서 자기는 자기가 행한 선을 수단으로 구원받고도 남는다고 선행에 대한 공적을 자신에게 귀결되도록 자신을 설득했다면, 의문시되던 악, 그의 주변을 맴돌던 악은 철저히 그에게 들러 붙어 떼어내지지 않아 수정되어질 수 없다는 점이다. 그 이유가 이런 인간은 주님의 것인 것을 자신들의 것이라고 주장한다, 고로 주님으로부터 계속 흘러드는 선을 받지 않는다; 즉 주님으로부터 흘러드는 선을 자신들의 것으로 전환하여 자기 자신이라 주장하는 바, 주님의 선을 더럽히기 때문이다. 이것이 “도둑”에 의해 의미되는 악들이다.

그러므로 해서 저는 낮에는 더위를, 밤에는 추위를 견뎌내어야 했고, 제대로 잠을 청해 볼 수도 없었습니다. 이는 시험을 의미한다. 이는 “더위(heat)”와 “추위(cold)”의 의미가 너무나 많은 사랑, 너무나 적은 사랑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 두 사랑은 극과 극에 위치하고 있다. 태양의 높, 낮음에서 “낮”은 신앙 또는 진리의 상태를; “밤”은 신앙 또는 진리가 없는 상태를 의미한다; 그리고 “잠을 청해 볼 수가 없다, 잠이 눈으로부터 몰아내졌다”의 의미가 계속적으로, 또는 쉼 없이 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런 상황은 시험 안에서 경험되는 것인 바, 이를 일반적으로 말하여 시험들이라 말한 것이다. “더위”가 너무나 많은 사랑을 의미하는 이유인즉, 영적인 불과 열이 사랑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와 반대인 영적인 추위는 사랑 없음이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인간의 생명 자체는 사랑밖에 더 아니기 때문이다; 사랑 없이 인간은 무엇에서 이든 생명을 갖지 못한다. 아마 곰곰이 되새겨볼 수 있는 사람이라면 그는 자기 신체 안에서 불과 열의 모든 원천이 이 근원으로부터 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추위”는 모든 사랑이 결핍된 것을 의미하지 않고, 단지 영적인 사랑과 천국의 사랑의 결핍일 뿐이고, 이 사랑들의 결핍이 영적인 죽음이라 불리운다. 인간이 이 사랑을 박탈해버릴 때, 그에게 자기를 사랑함과 세상을 사랑함이 점화된다. 이 사랑이 상대적으로 춥고, 차게 되어갈 수 있는데, 이는 인간이 육체 안에서 살 때 뿐만 아니라 다른 삶에 와서도 이어진다. 만일 육체 안에서 살 때, 이 인간에게서 이 사랑을 거두어버린다면, 그는 거의 어떤 생명도 가지지 않을 만큼으로 차가와져 간다. 아마 이 사람 더러 천국적이고 신성한 것들을 거룩한 방식에서 생각해보도록 강요한다면, 그는 앞의 경우나 동일하게 차가워져 가고 말 것이다. 다른 삶에서, 이런 인간이 지옥들 사이에 올 때, 그는 불 안에, 또는 탐욕들의 열기 안에 있다; 그러나 만일 그가 천국에 접근한다면, 이 불과 열기는 차거움으로 변해진다, 그가 더 접근할수록, 그 차거움의 정도는 증가해져 간다. 이런 차거움에서 기인된 것이 지옥에 있는 이들의 “이를 갊” 이다 (마. 8:12; 13:42, 50; 22:13; 24:51; 25:30; 눅. 13:28).

이십 년 동안 나는 당신 집에서 당신을 섬겼습니다. 이는 그분의 자기 자신을 의미한다. 이는 “20”이 리메인스의 선을 의미함으로부터 분명해진다. 그리고 이 말이 주님을 서술할 경우, 그분이 자기 자신에게 획득하셨던 선, 고로 그분의 자기 자신을 표시한다; 그리고 “섬기다”의 의미가 주님을 서술해줄 경우, 그분의 자신의 힘이다로부터 알려진다.

십사 년은 두 딸들을 위해서. 이는 그분이 진리에 애착함을 거기로부터 자신에게 획득하시는 첫 기간을 의미한다. 이는 “14”, 또는 2주의 의미가 처음 기간이다로부터 분명해진다; 그 이유가 말씀에서 “주들(weeks)”은 크든 작든 전체 기간밖에 더 의미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2주가 하나로서 명명되는 경우, 그 의미는 똑같다. 그 이유가 숫자가 증가하는 것이 그 의미를 거두어지는 것(바꾸어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여기서 말하는 “14” 또는 2주의 의미가 분명해질 것이다. 그리고 “두 딸들”, 즉 라헬과 레아의 의미가 진리에 애착함들이다로부터 알려진다; “딸들”은 애착들을 의미한다.

그리고 육 년은 당신의 양떼를 위해서. 이는 그후 아마도 그분은 선을 획득하셨을 것임을 의미한다. 이는 “6”의 의미가 전투와 노동이다로부터, 여기서는 전투와 노동으로부터 남아 있게 된 것, 고로 그 후에 와진 것; 그리고 “양떼”의 의미가 선이다로부터 알려진다.

그리고 당신은 내 삯을 열 번이나 바꾸었다. 이는 그분께서 이런 선들을 자신에게 적용하셨을 때 그분을 향한 그것의 상태를 의미한다. 이는 “삯, 댓가, reward”가 주님을 서술할 경우, 그분 자신으로부터를 표시함으로부터, 고로 그분이 그분 자신에게 선들을 적용하셨을 때이다; 그리고 그것들을 “바꿈”의 의미가 그분을 향하여 있는 라반에 의해 의미된 선의 상태이다로 알게 된다. “열 번”은 상태가 아주 크다를 의미한다.

제 아버지의 하느님,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삭이 두려워하는 분이 나와 함께 하시지 아니하였더라면. 이는 신성과 신성한 인간이 아니면을 의미한다. 이는 “제 아버지의 하느님”의 의미가 선 측면에서의 신성이시다로부터; “아버지”는 신성한 선이시다, 그리고 “아들”은 신성한 진리이시다, 여기서는 각 실체(Essence)로부터의 신성한 선; “아브라함의 하느님”의 의미가 신성한 실체라 불리우는 신성 자체이시다, 그 이유는 아브라함이 신성 자체 측면에서의 주님을 표현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삭이 두려워하시는 분”의 의미가 신성한 인간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여기서 “두려워하는 분, Dread”라고 언급되는데, 그 이유는 신성한 진리가 선 안에 있지 않은 이들에게 두려움, 경외함, 공포등과 같은 것을 날라다 주는 일이 많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성한 선은 그렇지가 않아 아무에게도 공포를 전달하지 않는다. 똑같은 것이 이 장 53절에서 뜻해진다: 즉 “야곱은 그의 아버지 이삭이 두려워하시는 분을 두고 맹세했다.” 그 이유가 라반이 야곱으로부터 (완전히) 분리되었는 (즉 중간의 선이 신성으로부터의 선에서 분리되었는) 그때, 그는 악으로 피해를 입히고 싶어했기 때문이다. 이는 라반이 말한 대목으로부터 분명해진다. 그러므로 그가 이런 상태에 있었기에, “이삭이 두려워하는 분”이라는 하느님에 대한 표현이 사용된 것이다. 사실 “이삭의 두려워하는 분”이 이삭의 하느님이다는 것은 누구나 짐작할 수 있고, 라반이 지금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상태에 있다는 것도 알 수 있다. 이삭은 주님의 신성한 인간을 표현한다, 그리고 이것은 신성한 합리성 측면에서이다.
선 안에 있지 않은 이들에게 두려움, 경외심을 운반하는 것은 신성한 선의 측면이 아니라 신성한 진리 측면이다에 관한 경우는 이렇다: 주님으로부터 진행하는 거룩함은 그 자체 안에 신성한 선과 신성한 진리를 가지고 있다. 이 거룩함은 주님으로부터 계속적으로 진행한다. 그것들로부터 천국들에 빛이 있다, 그러므로 인간 마음들 안에 있는 빛도 이로부터이고, 결과적으로 지혜와 총명을 있게 한다. 그 이유가 지혜와 총명이 이 빛 안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빛, 또는 지혜와 총명은 이것들을 받아들임(그릇)에 따라서 모든 것에 영향을 미친다. 악 안에 있는 이들은 신성한 선을 받지 않는다, 그 이유는 그들은 사랑과 선행이 없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모든 선은 사랑과 선행 속에(사랑과 선행으로부터)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신성한 진리는 악한 자에 의해서조차도 받아질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의 외적 인간에 의해서이고 내적 인간에서는 아니다.
이것은 태양으로부터 있는 빛과 열과도 비슷하다. 영적인 열은 사랑이다, 고로 선이다; 그러나 영적인 빛은 신앙이다, 고로 진리이다. 태양으로부터의 열이 어떤 대상물에 의해 받아질 때, 나무들과 꽃들은 생장하여 잎과 꽃, 열매와 씨를 생산한다. 이것은 봄과 여름의 시기를 지나가면서 이다. 그러나 태양으로부터의 열이 받아지지 않고, 오직 빛만 있을 때, 식물은 생장하지 못하고, 움직이지 않는 상태, 동면의 상태에 있는데 가을과 겨울이다. 영적인 열과 빛도 대동소이한데, 이것은 주님으로부터 이다. 만일 인간이 봄과 여름같은 상태이다면, 그는 사랑과 선행으로부터의 선을 받고, 열매들을 산출한다; 만일 그가 가을과 겨울의 상태이다면, 그는 사랑과 선행의 선을 받지 않는다, 따라서 열매들의 산출도 없다. 그럼에도 그는 빛만큼은 여전히 받고 있다, 즉 그는 신앙의 것들, 또는 진리에 관한 것들을 알는지 모른다. 겨울의 빛이 이와 똑같은 결과를 지니고 있다, 그 이유가 이 빛도 색깔들, 아름다움들과 그것들을 뚜렷이 보일 수 있게 만들기는 하기 때문이다, 여기까지는 여름의 빛과 별반 차이가 없다; 그러나 겨울의 빛은 내면들을 꿰뚫지 못한다, 그 이유는 이 빛 안에 열이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대상물이 활기를 띠게 자극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선이 받아지지 않고, 오직 빛만 있을 때, 이는 마치 열이 대상물에 받아짐이 없고, 오직 빛으로부터의 형체의 형상(그림자)과 빛으로부터의 아름다움만이 있을 때, 그리고 내부에 차거움이 있을 때, 거기에는 무감각, 마비 증상, 휴면 상태(torpor)만이 있을 뿐이다, 하여 거기에서 빛을 받아들임이 있을 때, 그 결과는 오그라듦, 덜덜 떠는 증상뿐이다. 이것이 살아 있는 것들 안에 두려움, 걱정, 심지어 공포까지 드리운다. 이런 비교를 통해 악한 자에게 드리우는 두려움에 대해 조금은 납득되었을지 모른다. 그것들은 신성한 선으로부터 오지 않고, 오직 신성한 진리로부터서만 일 뿐이다. 다시 말해, 이것은 신성한 선은 받지 않고 신성한 진리만 받을 경우이다는 말이다. 또한 선이 없는 신성한 진리는 내면들을 향하여 관통하지 못하고 단지 맨끝의 것들(말단들)에, 즉 외적 인간, 더 자세히 말하면, 감각적 부분에만 달라 붙어 있을 수 있을 뿐이다. 이럴 경우 내적 형체는 보기 흉하고 오염되어 있어도 육체의 눈에 보일 수 있는 것인 맨끝 부분인 외적 형체는 그럴싸하게, 번드르하게 나타날 수 있다. 이로부터 대중적이 되다시피한 신앙의 본성, 즉 선한 일들이 없어도 구원된다고 말하는 신앙, 선을 뜻하고 선행을 실행함이 없는 신앙의 모습을 상상해볼 수 있다.
신성한 진리가 신성한 인간으로부터 진행되되 신성 자체로부터가 아닐 때, 여기서 “이삭의 두려워하는 분”에서 의미되는 신성한 인간이다; 그 이유가 방금 말했듯, 공포를 야기할 수 있는 것은 신성한 선이 아니라 진리이기 때문이다. 신성한 진리가 주님의 신성한 인간으로부터 이고, 신성 자체로부터는 아니다는 것은 지금까지 밝혀지지 않았던 신비함이다. 이 경우는 이렇다: 주님이 세상에 오시기 이전, 신성 자체가 전체 천국 안으로 흘렀다; 그때의 천국은 대체로 천적인 평면 뿐이었다, 다시 말해 신성의 유입을 통하여, 신성한 전능하심을 수단으로, 사랑의 선 안에 있는 이들로 구성되었다, 따라서 이로부터 천국들에는 빛이 있었고, 지혜와 총명이 있었다. 그러나 인류가 사랑과 선행으로부터의 것 자체를 제거한 후, 빛은 천국을 통하여 더 이상 있어질 수 없고, 따라서 (천국의) 지혜와 총명이 인류 안으로 꿰뚫고 들어와 질 수 없게 되었다. 이 원인으로, (인류의 멸망을 방지해주기 위해) 인류를 구원하심의 필요성에 부응하여 있게 된 것이 주님이 세상에 오시는 것, 그리고 세상에 계신 인간을 자체 안에서 신성으로 만드심이다. 이러면 이 신성한 인간이 신성한 빛이 되고, 이 신성한 인간으로부터의 빛이 모든(보편적) 천국들과 모든(보편적) 세상을 비추고, 계발해줄 수 있을는지 모른다. 사실상 그분은 영원으로부터 빛 자체이셔 왔다, 그 이유가 이 빛은 천국을 통하여 신성 자체로부터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지상의 신성한 인간)은 인간을 입은 신성 자체이었다, 그리고 이 인간이 신성으로 만들어졌다. 지상의 신성한 인간이 신성으로 만들어졌을 때, 이 신성한 인간은 천적 (평면의) 천국 자체 뿐만 아니라, 영적 (평면의) 천국, 나아가 인류까지 계발해줄 수 있게 되었다. 즉 모든 것이 선 안에 있는 신성한 진리를 받았고 받고 있다는 것이다, 즉 그분을 사랑함과 이웃을 향한 선행 안에 있는 이들이 신성한 진리를 받았고 받고 있다는 말이다. 요한복음서에서:
그분을 영접한 많은 이들, 그분의 이름을 믿는 이들에게 그분은 하느님의 아들들이 되어지는 힘을 주셨다; 이들이 태어난 것은 피들로부터도 아니고, 육의 의지로부터도 아니고, 인간의 의지로 부터도 아니고, 하느님의 의지로부터 이었다 (요. 1:12, 13).
지금 말해진 바로부터 아래 요한복음서의 말씀이 의미하는 것도 알 수 있다:
시작에서 말씀이 있었다, 그리고 말씀은 하느님과 더불어 있었다, 그리고 하느님은 말씀이었다. 똑같은 것이 하느님과 더불어 시작에서 있었다. 모든 것들이 그분에 의해 만들어졌다, 그리고 그분 없이 만들어져 있는 어떤 것도 있지 않았다. 그분 안에 생명이 있었다, 그리고 생명은 인간들의 빛이었다. 이것은 진정한 빛이었다, 이 빛이 세상 안으로 오는 모두 각각의 인간을 비추고 있다 (요. 1:1-4, 9).
위에서 “말씀”은 신성한 진리를 의미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각각의 실체 측면에서 신성한 선이시다, 그리고 신성한 진리가 그분으로부터 진행함을 위 구절들로부터 알는지 모른다. 그 이유가 신성한 선은 인간에 의해, 천사들에 의해서까지도 받아질 수 없고, 오로지 주님의 신성한 인간에 의해서만 받아진다. 아래 말씀에 뜻해져 있다:
여하튼 하느님을 본 자는 아무도 없다; 아버지의 품 안에 계신 독생자, 그분(아들)이 그분(아버지) 을 나타내고(진열해놓고) 있다 (요. 1:18).
그러나 신성한 진리는 받아질 수 있다, 그러나 받는 인간의 품질에 따라서; 그리고 이 품질의 신성한 진리 안에 신성한 선이 거할 수 있다, 물론 이것도 수용하는 품질에 따라서이다.
본문의 말, “나의 아버지의 하느님,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삭이 두려워하시는 분이 나와 더불어 계시지 않았더라면”이 인간에 의해 읽힐 때, 위와 같은 신비한 내용들이 천사들에게 표출된다. 이런 몇 구절의 인용문만 생각해도 말씀 안에 얼마나 많은 천국적인 것이 있는지, 설사 글자상에서는 아무것도 있지 않을 듯해도 신비함이 가득하다는 것을 눈치채게끔 한다. 어쨌든 우리가 지금까지 말해온 것들은 신비함이라는 빙산의 한조각일 뿐이다. 천사들은 이런 신비함들을 보고 지각하되 무한정인 바, 인간의 언어로 표현하는 것은 불가능하고, 사실상 인간의 마음은 이런 신비함들을 담을 만한 그릇도 아니다. (그렇지만 공부를 게을리 말아야 하는 이유는 지금의 이런 앎이 천국에 가서도 계속되기 때문이다 역자주.)

필시 나는 지금 빈 손으로 내보내졌을 것입니다. 이는 혼자 힘으로 모든 것을 청구했어야 할 것임을 의미한다. 이는 “빈손으로 보내짐”의 의미가 그분으로부터 모든 것들이 거두어짐, 고로 모든 것들을 자신 스스로 청구함이다에서 알게 된다.

하느님께서는 나의 비참함과 내 손의 수고함을 보셨고, 어젯밤 판결하셨습니다. 이는 모든 것들은 그분 자신의 힘으로 그분으로부터 이었음을 의미한다. 이는 “비참함”과 “내 손의 수고함들”의 의미가 시험들이다로부터 분명해진다; 그리고 시험과 승리를 수단으로 주님께서는 신성을 인간에 하나되게 하셨다, 그리고 이것을 신성으로 만드셨다, 그리고 이것은 그분 자신의 힘으로부터 이었다, 이런 사항들이 똑같은 말들에 의해 의미되어지고 있다. “하느님이 보셨다, 그리고 판결하셨다”는 주님의 신성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주님 안에서 신성이 주님의 인간과 더불어 계셨고, 이 계심이 주님의 신성한 인간이셨고, 이것을 주님께서는 행하셨다.

43절. 그리고 라반은 답하여 야곱에게 말했다, 이 딸들은 내 딸들이다, 그리고 이 아들들은 내 아들들이다, 그리고 양떼는 내 양떼이다, 그리고 네가 보는 모든 것은 나의 것이다. 그리고 나는 오늘 이 딸들에게, 그들에게서 출생한 그들의 아들들에게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그리고 라반은 답하여 야곱에게 말했다”란 희미한 지각의 상태를 의미한다. “딸들은 내 딸이다, 그리고 아들은 내 아들이다, 그리고 양떼는 내 양떼이다”란 진리에 대한 모든 애착들, 그리고 모든 진리들과 선들은 자기 자신이었다 라고 함을 의미한다. “그리고 네가 보는 모든 것은 나의 것이다”란 지각하는 능력, 지적인 자질 모두 역시 자기 자신이었다 라고 함을 의미한다. “그리고 나는 오늘 내 딸들에게, 그들에게서 출생한 그들의 아들들에게 무엇을 할 수 있으랴?”란 그 자체 단독으로 감히 그것들을 요구하지 못함을 의미한다.

그리고 라반은 답하여 야곱에게 말했다. 이는 희미한 지각의 상태를 의미한다.
이는 “대답하여 말함”의 의미가 지각함이다로부터 알려진다. 지각의 상태가 희미하다에 대한 것은 라반이 하는 말로부터, 즉 딸들, 아들들, 그리고 양떼들이 자기 것이다고, 실상 그의 것이 아니었다로부터 분명해진다; 그리고 내적 의미에서 중간의 선이 모든 선들과 진리들이 자신의 것이라고 요구하나 그렇지 않다.

딸들은 내 딸이다, 그리고 아들은 내 아들이다, 그리고 양떼는 내 양떼이다. 이는 진리에 대한 모든 애착들, 그리고 모든 진리들과 선들은 자기 자신이었다 라고 함을 의미한다. 이는 “딸들”, 여기서는 라헬과 레아인데 진리에 애착함이다로부터; 그리고 “아들들”의 의미가 진리들이다로부터; 그리고 “양떼”의 의미가 선들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것들이 자신의 것이라 주장함은 라반의 말, “딸들은 나의 딸들, 아들들은 나의 아들들, 양떼는 나의 양떼이다”에서 분명해진다.

그리고 네가 보는 모든 것은 나의 것이다. 이는 지각하는 능력, 지적인 자질 모두 역시 자기 자신이었다 라고 함을 의미한다. 이는 “본다”가 지각하는 것과 이해하는 것을 의미한다로부터, 고로 진리와 선을 지각하는 것과 지적 능력이 자신에 속해 있다를 의미함이 분명해진다. 어떻게 이런 주장이 나오는지에 대하여는 앞에서도 설명된 바 있고, 특히 다른 삶에서 거행되는 것을 예로 삼기도 했다. 즉 영들, 특히 중간 종류에 속하는 영들이 천사의 사회 안에 있을 때, 그들은 사회로부터 자기들 안으로 흘러드는 선과 진리에 애착함이 그들의 것이다 라고 하는 것 외 달리해서는 알지를 못한다. 이렇게 다른 삶에서 애착들과 생각들의 교통이 있는데, 이것도 그 사회와 더불은 결합의 정도에 비례하여 그들은 그렇게 생각한다. 이와 똑같은 영들이 사회로부터 분리되어지고 말 때, 그들은 분노한다; 그리고 그들이 분노의 상태에 있을 때, 그들은 희미한 지각의 상태에로 와진다; 그리고 이런 상태에서는 내면의 지각은 없을 수밖에 없는데, 그들은 천사의 사회에 속하는 선들과 진리들, 즉 자신들이 잠간 속했던 그 사회의 것들이 자신의 것들인 듯 자신을 위하여 청구한다. 이런 모습이 이 본문에 묘사되어 있다. 더 나아가 많은 경험을 수단으로 나는 선과 진리에 애착함들이 다른 이들과 어떻게 교통하는지를 알게 되었다. 이런 부류의 영들이 가끔 나와 더불어 있어 왔다, 그리고 애착의 얼마만큼을 수단으로 결합되었을 때, 그들은 내 생각들과 애착들이 자기들 것이라고 아는 것 외 달리 주장하지를 않았다. 그래서 내가 배운 바, 이와 똑같은 상황이 모든 인간들에게도 있다는 것이다; 그 이유가 모든 인간은 각기 자기와 더불은 영들을 가지기 때문이다. 이 영들이 인간 당사자에게 와서 그의 애착들 안으로 들어가자 마자 아는 것은 그 사람의 것이 자기들 것이라고 하기 때문이다. 이런 식으로 해서 영들은 인간과 결합한다, 그리고 그 영들을 통하여 인간은 주님에 의해 규율되어진다 (2488항); 이런 사실들에 관하여는 이후 장들의 끝에서 경험으로부터 서술될 것이다.

그리고 나는 오늘 내 딸들에게, 그들에게서 출생한 그들의 아들들에게 무엇을 할 수 있으랴? 이는 그 자체 단독으로 감히 그것들을 요구하지 못함을 의미한다. 이는 “딸들”의 의미가 진리에 애착함이다로부터; “아들들”이 진리들을 의미한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 자체가 감히 요구하지 못한다는 것이 “내가 오늘 그들에게 무엇을 할 수 있을까?”에 의미되는 것은 이미 진행한 사항, 즉 하느님께서 그에게 꿈에서, “너는 야곱에게 선이든 악에서조차 이든 말하지 않도록 조심해라”라고 말하신 대목에서 분명해진다.

44-46절. 그리고 이제 오라, 나와 너 사이에 언약을 만들자, 그리고 그것이 나와 너 사이에 증거가 되게 하자. 45 그리고 야곱은 돌을 가져왔다, 그리고 그것을 기둥으로 세웠다. 46 그리고 야곱은 그의 형제들에게 말했다, 돌들을 모아라. 그리고 그들은 돌들을 가져왔다, 그리고 돌 무더기를 만들었다, 그리고 그들은 그 무더기에서 먹었다. “그리고 이제 오라 나와 너 사이에 언약을 만들자, 그리고 그것이 나와 너 사이에 증거가 되게 하자”란 신성한 자연 평면이 일들로부터의 선들과 결합함, 즉 한쪽으로 밀려나 있듯 있는 이들, 또는 이방인들의 선들과 결합함을 의미한다. “그리고 야곱은 돌을 가져왔다, 그리고 그것을 기둥으로 세웠다”란 이런 진리와 이 진리에서 파생되는 예배를 의미한다. “그리고 야곱은 그의 형제들에게 말했다”란 일들로부터 선 안에 있는 이들을 의미한다. “돌을 모으라. 그리고 그들은 돌을 가져왔다, 그리고 무더기를 만들었다”란 선으로부터 온 진리들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들은 무더기에서 먹었다”란 신성 속의 선으로부터 자기 것으로 됨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제 오라 나와 너 사이에 언약을 만들자, 그리고 그것이 나와 너 사이에 증거가 되게 하자. 이는 신성한 자연 평면이 일들로부터의 선들과 결합함, 즉 한쪽으로 밀려나 있듯 있는 이들, 또는 이방인들의 일들 속의 선들과 결합함을 의미한다. 이는 “언약함”의 의미가 결합이다로부터; 여기서 라반인 “나”의 의미가 일들로부터의 선들이다로부터 인데, 이는 아래에서 살핀다; 그리고 야곱인 “너”의 의미가 신성한 자연 평면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라반”에 의해 한쪽으로 밀려나 있는 듯 있는 이들, 또는 이방인들에게 있는 선들, 즉 일들로부터의 선들이 의미되는 이유는 지금 라반이 야곱과 분리되었기 때문이다 (즉 중간의 선이 자연 평면의 신성으로부터의 선에서 분리되었기 때문이다), 하여 라반은 이제는 더 이상 중간의 선으로 어떤 수단을 제공하는 도우미 역할을 표현하지 않고, 단지 어떤 선, 따라서 어느 한쪽 구석에 밀려 있는 듯한 선, 또는 단순한 방계의 선을 표현하기 때문이다. 라반이 야곱과 더불어 결합되어 있기 이전 그는 방계의 선을 표현했다, 그에 따라서 한쪽에 있는 선을 표현하는데, 이 선의 본성은 아래에서 서술한다. 어쨌든 이 상황은 롯과 이스마엘의 경우에서와 매우 비슷하다. 롯이 아브라함과 더불어 있는 한, 그는 외적 감각적 인간 측면의 주님을 표현했다; 그러나 그가 아브라함과 분리되었을 때, 그는 외적 예배 안에 있는 이들, 그럼에도 선행 안에 있는 이들을 표현했다, 그리고 또한 계속적으로 있던 교회의 몇 개의 상태들을 표현했다.
이스마엘의 경우도 그러했다: 그가 아브라함과 더불어 있는 동안, 그는 주님의 처음 합리성을 표현했다; 그러나 그 후에 그가 분리되었을 때, 그는 영적 평면에 속하는 이들을 표현했다. 이와 같은 경우가 라반의 경우이다. 그 이유인 즉, 비록 분리가 만들어졌다 해도 결합은 여전히 남아 있기 때문, 단지 예전 같은 수준의 결합은 아니다는 것만 다를 뿐이다. 이런 이유로 여기서의 라반, 그리고 이어지는 대목들에서의 라반은 일들로부터의 선들, 즉 한쪽으로 밀린 듯 있는 이들, 또는 이방인들과 더불어 있는 선들을 표현한다. 이방인들이 한쪽으로 밀려 있는 듯하다고, 또는 방계의 선이다고 말해진 이유는 그들이 교회 바깥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리와 선 안에 있는 교회 안에 있는 이들은 방계적 계보가 아닌 직계에 속한다. 그 이유는 그들이 말씀을 가졌기 때문, 그들은 말씀을 통하여 천국과 교통하기 때문, 그리고 천국을 통하여 주님과 교통하기 때문, 그러나 이방인들의 경우는 말씀을 가지지 않았고, 주님을 모르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에서 한쪽으로 밀린 듯 있다 라고 말해본 것이다. 이런 이방인들이 일들로부터의 선들 안에 있는 이들을 뜻하는데, 그들은 선행의 선이 있는 외적 평면에 있기 때문이다. 이것들은 “일들로부터의 선들(goods of works)”이라 불리우나, “선한 일들(good works)”은 아니다. 그 이유가 선한 일들은 내부에 선을 지님 없이 존재할런지도 모르나, 일들로부터의 선들은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야곱은 돌을 가져왔다, 그리고 그것을 기둥으로 세웠다. 이는 이런 진리와 이 진리에서 파생되는 예배를 의미한다. 이는 “돌”의 의미가 진리이다로부터; 그리고 “기둥”의 의미가 파생되는 예배, 즉 진리로부터 있는 예배이다로부터 분명해진다. 이로부터 이와 같은 진리와 이 진리에서 파생되는 예배임이 이런 말들로부터 분명해진다. 즉 “이와 같은 진리”, 이는 이방인들과 더불어 존재하는 진리이다; 그 이유가 비록 이방인들이 말씀에 관하여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다 할지라도, 따라서 주님에 관하여 아는 것이 없다 해도, 그들은 기독인들이 가지는 것과 같은 외적인 진리들은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신(Deity)은 거룩한 태도(방식)에서 예배되어져야 한다는 것, 절기는 준수되어야 한다는 것, 부모들은 존경되어야 한다는 것, 우리는 도둑질해서는 안된다는 것, 간음질을 해서는 안된다는 것, 살인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 이웃의 물품을 몹시 탐내지 말라는 것, 등이다; 이런 사항은 십계명에도 속하는 명령 준수 사항들이다. 이것은 교회 내에서 삶의 규율들이기도 하다. 교회 내의 현자는 이런 사항을 외적 형체에서 준수할 뿐 아니라 내적 형체에서도 준수한다. 이들은 비록 신앙이 무엇인지를 잘 알지는 못해도 최소한 이런 명령 사항에 반대되는 것들은 자기들의 종교적 체계에도 반대되고, 일반적 선에도, 고로 그들이 인간에게 빚지는 내적 의무들에도 반대된다는 것, 결과적으로 선행에 반대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들은 양심의 얼마만큼을 그들의 희미한 수준에서 가지고는 있다, 하여 이 양심에 반대되는 것을 기꺼이 행동하지 않는다. 이상으로부터 분명한 바, 주님께서는 이들도 규율하신다는 것, 단지 희미한 수준일 뿐이다. 고로 그분께서는 그들에게 내면의 진리들을 받는 능력을 나누어 주신다(impart). 그들은 이 능력을 다른 삶에 가서도 받는다.
교회 밖 이방인들의 구역과 상태에 관하여 다른 삶에 있는 기독인들과 이야기를 나눌 때가 있었다. (나는) 이 삶에서 이들은 주님의 교훈들에 살지 않았던 이들보다 더 쉽게 신앙으로부터의 진리들과 선들을 받는다고 그들에게 말했다; 그런데 기독인들은 그들을 생각하는 것이 잔인함에 가까왔다, 즉 교회 밖의 그들은 지옥에 가야 마땅하다는 것, 이런 근거는 주님 없이 구원은 없다는 자기들의 정경(cannon)에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에게 말했던 진정함은 이것이다; 서로의 선행 안에서 살았던 이방인들, 그리고 공정과 공평인 것에 관한 양심 같은 종류로부터 행동하여 왔던 이방인들은 이런 선행 안에서 살지 않았던 교회인들 보다 더 쉽게 다른 삶에서 신앙을 받고 주님을 인정한다는 것이다. 더구나 거짓들 안에 있는 기독인들, 즉 천국은 자신들만을 위해 있다고 믿는 이들, 그 이유가 자기들만이 말씀을 가졌기 때문이라고, 그런데 말씀을 심정으로 가진 것이 아니라 종이 위에 쓰인 글씨만으로 지닌 이들; 하여 주님을 알기는 하는데, 그분의 신성한 인간 측면에서의 신성함을 믿지 않는 이들; 하여 그분을 그분의 다른 실체 측면에 관련하여 공동의 인간으로서만 인정하는 이들, 그러므로 그들 자신만 남아 그들 자신의 생각들에만 남아있게 될 때, 그들은 그분을 숭배하지도 않는다. 고로 그들은 주님으로부터 밖으로 있는 이들인 바, 오히려 이들에게 구원은 없다.

그리고 야곱은 그의 형제들에게 말했다. 이는 일들로부터 선 안에 있는 이들을 의미한다. 이는 야곱이 주님의 신성한 자연 평면이다로부터; 그리고 “형제들”의 의미가 선들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여기서, 일들로부터의 선들 안에 있는 이들, 그리고 이방인들이다는 것은 앞에서 보여주었다. 그 이유가 선 안에 있는 모든 이는 주님의 신성과 결합되어지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결합이 주님에 의해 “형제들”이라 불리운다; 마가복음서에서:
예수께서는 그분을 빙둘러 앉은 이들을 쳐다보시고, 잘 보라, 나의 어머니, 그리고 나의 형제들이다; 그 이유가 하느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누구이든, 나의 형제, 그리고 자매, 그리고 어머니와 똑같다 (막. 3:31, 34, 35).
모든 결합은 사랑과 선행을 통하여 있다. 아마 누구도 이 사항은 알고 있다; 그 이유가 영적 결합은 사랑과 선행밖에 더 아니기 때문이다. 주님을 사랑함이 그분과 결합함이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리고 이웃을 향한 선행도 똑같다, 이는 주님의 말씀으로부터 분명해진다:
내 형제의 지극히 작은 자 중의 하나에게 행한 만큼 너희는 나에게 그것을 한 것이다 (마. 25:40).
위에서 취급된 주제는 선행의 일들이다.

돌을 모으라; 그리고 그들은 돌을 가져왔다, 그리고 무더기를 만들었다. 이는 선으로부터 있는 진리들을 의미한다. 이는 “돌들”의 의미가 진리들이다로부터; 그리고 “무더기”의 의미가 선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무더기”가 선을 의미하는 이유는 고대 시대에서 그들은 제단을 짓기 전, 무더기를 만들고 그 위에서 사랑으로 힘을 모아 쌓았다는 증거로 삼고 그 위에서 먹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후에 고대인들의 표현물이 되어 거룩한 것으로 주목받으면서, 무더기 대신 제단을 건축했다; 이 제단 역시 돌이 재료인데, 무더기가 아닌 더 정교한 방법으로 건축한 것 뿐이다. (여. 22:28, 34). 이는 “무더기”가 제단과 같은 의미, 즉 사랑의 선을 의미한 이유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 안에 있는 “돌들”에 의해 신앙의 진리들이 의미된다.

그리고 그들은 무더기에서 먹었다. 이는 신성 속의 선으로부터 자기 것으로 됨을 의미한다. 이는 “함께 먹다”의 의미가 교통함, 결합함, 그리고 자기 것이 되게 함이다로부터; 그리고 “무더기”의 의미가 선이다로부터 알려진다; 여기서는 무더기가 신성으로부터의 선이다.

47-50절. 그리고 라반은 그것을 여갈사하두다 라고 불렀고, 야곱은 갈르엣이라 불렀다. 48 그리고 라반이 말했다, 이 무더기는 오늘 나와 너 사이에 증거이다. 그러므로 그는 그것의 이름을 갈르엣, 49 그리고 미스바라 불렀다. 그 이유는 그가 말하기를, 우리가 그의 동료로부터 감추여진 사람일 것이나 여호와께서 나와 너를 지켜보실 것이기 때문이다. 50 만일 네가 내 딸들을 박대한다면, 그리고 만일 네가 내 딸들을 제치고 여인을 데려온다면, 우리들과 더불은 사람은 없지만 보라 하느님께서 나와 너 사이에서 증거하신다. “그리고 라반은 그것을 여갈사하두다 라고 불렀다”란 라반으로 표현된 선의 부분에서의 품질을 의미한다. “그리고 야곱은 그것을 갈르엣이라 불렀다”란 신성한 자연 평면의 선쪽에 있는 품질을 의미한다. “그리고 라반이 말했다, 이 무더기는 오늘 나와 너 사이에 증거이다. 그러므로 그는 그것의 이름을 갈르엣이라 불렀다”란 그렇게 영원히 있을 것임을 의미한다, 이로부터 그것의 품질도 의미한다. “그리고 미스바. 그 이유가 그가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나와 너 사이를 지켜보신다 라고 했기 때문이다”란 주님의 신성한 자연 평면의 현존을 의미한다. “그 이유가 우리는 그의 동료로부터 감추여진 사람일 것이기 때문이다”란 교회 속에 있는 것에 관련하여 있는 분리를 의미한다. “만일 네가 내 딸들을 박대한다면, 그리고 네가 내 딸들을 제치고 여인을 데려 온다면, 우리와 더불은 사람은 없지만…”이란 진리에 대한 애착은 교회 안에 남아 있을 것임을; “보라, 하느님이 나와 너 사이에서 증거하신다”란 확증을 의미한다.

그리고 라반은 그것을 여갈사하두다 라고 불렀다. 이는 라반으로 표현된 선의 부분에서의 품질을 의미한다. “부르다”, 또는 “이름을 부르다”의 의미가 품질이다로부터 분명해진다. 라반이 말한 시리아의 관용어 “여갈사하두다”는 “증거의 무더기”를 뜻한다. 고대 시대 때에 이런 무더기는 표시를 위해, 증거를 위해, 후에는 예배를 위해 있었다; 여기서의 경우, 표시와 증거를 위해서이다; 그 이유가 표시, 거기에 경계가 있다는 것; 그리고 증거, 거기서 언약이 만들어졌다는 것, 그리고 그들 중의 어느쪽도 상대에게 악을 행하려고 건너가서는 안되는 경계선이기 때문이다. 이는 라반의 말로부터 분명하다:
이 무더기는 증거이고, 그리고 기둥은 증거인 바, 나는 악을 위하여 이 무더기를 건너 네게로 가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너는 이 무더기를 건너 나에게 오지 말라 (52절).
이로부터 “여갈사하두다”에 포함된 것이 무엇인지는 분명해졌을 것이다. 그러나 내적 의미에서는, 라반의 부분에서 있는 진리들로부터의 선의 품질, 즉 이방인들의 부분, 즉 일들로부터의 선 안에 있는 이들의 부분에 있는 선의 품질을 의미한다.

그리고 야곱은 그것을 갈르엣이라 불렀다. 이는 신성한 자연 평면의 선의 부분에 있는 품질을 의미한다. 이는 야곱의 표현함이 주님의 자연 평면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히브리어 관용어, 또는 가나안 지역의 관용어에서 야곱이 가져온 말, “갈르엣”은 “무더기”, 그리고 “증거”, 또는 “증거 무더기”를 뜻한다. “증거 무더기”의 내적 의미가 이제 뒤이어진다.

그리고 라반이 말했다, 이 무더기는 오늘 나와 너 사이에 증거이다. 그러므로 그는 그것의 이름을 갈르엣이라 불렀다. 이는 그렇게 영원히 있을 것임을 의미한다, 이로부터 다시 그것의 품질도 의미한다. 이는 “무더기”의 의미가 선이다로부터; 그리고 “증거”의 의미가 진리를 수단으로 선을 확증함이다로부터 인데, 이는 아래에서 살핀다; “오늘”의 의미가 영원이다로부터; 그리고 “이름을 부름”의 의미가 품질이다로부터 알려진다. 품질 자체가 지역 이름 “갈르엣” 안에 포함되어 있다. 그 이유가 고대 시대 때에 이름이 붙여질 경우, 거기에는 품질이 포함되었기 때문이다. 이상으로부터 라반의 말, 즉 “이 무더기는 나와 너 사이에 오늘 증거이다; 그러므로 그는 그것을 갈르엣이라 불렀다”에 의해 의미된 것, 즉 이는 라반에 의해 의미된 선이 주님의 자연 평면의 신성으로부터의 선과 결합함을 증명함이다는 것, 결과적으로 주님께서 선을 수단으로 이방인들과 결합하신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그 이유가 이 선이 지금 라반에 의해 표현되기 때문이다. 이 선으로부터의 진리들이 결합에 대한 것을 증명한다; 그럼에도 그들이 이 세상에 사는 한 이 선은 한쪽으로 밀려 있는 듯 하여 있다, 그 이유는 그들이 신성으로부터의 진리들을 가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선에서 사는 이들(즉 서로의 선행 안에서 사는 이들), 비록 그들이 신성의 원천(즉 말씀)으로부터 직접 신성으로부터의 진리들을 가지고 있지 않다 해도, 그들의 선까지 밀봉된 것은 아니다, 그 선은 열려질 수 있고, 특히 다른 삶에서 주님에 관해서와 신앙의 진리를 배울 때 확실히 열려진다. 이에 비해 주님을 사랑함 안에, 서로의 선행 안에 있는 기독인들은 세상에 사는 동안 더 직접적인 선 안에 있다, 그 이유는 그들이 신성으로부터의 진리 안 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다른 삶에 오면, 만일 제일 먼저 반드시 떼어내야 하는 거짓들이 없다면 교육받음 없이 천국 안으로 입장한다. 그러나 선행 안에서 살지 않았던 기독인들의 경우, 그들은 자신들로부터 천국을 닫아지게 한다, 참으로 그들 중의 많은 자들이 천국을 열 수 없다; 그 이유가 그들은 진리를 알고 있되 그것들을 부정하고, 자신들을 진리에 거슬러 굳혔기 때문이다, 물론 그들은 입으로는 그렇게 하지 않았지만, 심정상으로 그렇게 했던 것이다.
라반이 자신의 관용어로 “여갈사하두다”라고 무더기를 부르고, 그 다음 가나안의 관용어로 “갈르엣”이라 불렀는데, 둘 모두 거의 같은 의미를 지닌다. 하나는 적용함을 위하여, 그 다음 적용함 때문에 결합함을 위하여이다. 가나안의 관용구, 또는 “가나안의 입술로”말하는 것은 누군가의 자기를 신성에 적용하는 것이다; 그 이유가 “가나안”은 주님의 왕국을 의미하기 때문, 고로 최고 의미에서 주님이 의미되기 때문이다; 이사야서에서:
그 날에 가나안의 입술로 말하고, 여호와 체바욷에게 맹세하는 이집트의 토지 안에 다섯 성읍들이 있을 것이다. 그 날에 이집트의 토지 한 가운데에 여호와께 대한 제단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집트의 토지에서 여호와 체바욷에게 표시를 위하여와 증거를 위하여 있을 것이다
(이. 19:18-20).
“증거(witness)”가 진리를 수단으로 선을 확증함을 표시한다는 것, 그리고 선을 수단으로 진리를 확증하는 것을 표시한다는 것, 그러므로 “증언(testimony)”은 선으로부터 진리가 있음을, 그리고 선으로부터 있는 진리를 표시한다. 이는 말씀의 많은 구절들로부터 알는지 모른다. “증거”가 진리를 수단으로 선을 확증함, 그리고 선을 수단으로 진리를 확증함을 표시함에 대하여는 아래 구절에서 분명해진다. 여호수아서에서:
여호수아가 백성들에게 말했다, 너희는 너희 자신을 향하여 증거이다. 즉 너희는 여호와를 섬기도록 그분이 뽑으셨다. 그리고 그들이 말했다, 우리는 증거(증인)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너희 한가운데 있는 이상한 신들을 내버려라, 그리고 너희 심정을 이스라엘의 하느님 여호와에게 기울여라. 그리고 백성이 여호와께 말했다, 우리는 여호와 우리의 하느님을 섬기고, 그분의 음성에 우리는 순종할 것입니다. 그리고 여호수아는 이 날 백성들과 언약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것들을 세겜에서 규례와 판결 법으로 제정했다. 그리고 여호수아는 이 말들을 하느님의 법의 책 안에 기록했다; 그리고 그는 큰 돌을 가져왔다; 그리고 그것을 여호와의 성소에 있는 상수리나무 아래에 그것을 세웠다. 그리고 여호수아가 모든 백성에게 말했다, 잘 보아라, 이 돌은 우리에게 증거일 것이다, 그 이유가 그분이 우리에게 이야기한 여호와의 모든 말들을 들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너희가 너희 하느님을 부정하지 않도록 증거로 너희에게 있을 것이다 (여. 24:22-27).
위의 증거(증인)은 확증임이 명백하다, 실로 언약의 확증, 그에 따른 결합이다; 그 이유가 “언약”은 결합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호와, 또는 주님과 더불은 결합은 선을 수단으로 하지 않으면 가능하지 않다; 그리고 결합하는 선은 진리로부터 그것의 품질을 갖는다; 따라서 “증거”는 진리를 수단으로 선을 확증함이다. 여기서 뜻해진 선은 그들이 그분을 섬기겠다고 그분을 선택함에 의해 여호와 또는 주님과의 결합이다; 확증을 만든 수단인 진리는 “돌”이다; 최고 의미에서 “돌”은 주님 자신이시다, 그 이유는 모든 진리가 그분으로부터 있기 때문, 그러므로 그분은 “이스라엘의 돌”이라 불리우신다 (창. 49:24); 그래서 말해진다, “잘 보아라, 이 돌이 우리에게 증거를 위해 있을 것이다, 그 이유는 이 돌은 그분이 우리에게 이야기하시는 여호와의 모든 말들을 들었기 때문이다.”
계시록서에서:
나는 나의 두 증인들을 줄 것인즉, 그들은 삼베옷을 입고 이천 이백 육십 일 동안 예언할 것이다. 이들은 땅의 하느님 앞에 서있는 두 올리브 나무들과 두 등잔대들이다. 그리고 만일 어떤 인간이 그들을 해치기를 바란다면, 불이 그들의 입으로부터 나와서, 그들의 적들을 삼킬 것이다; 이들은 천국을 닫는 힘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들이 자기들의 증언을 끝마쳤을 때, 끝없이 깊은 구렁(무저 갱)으로부터 오는 짐승이 그들과 전쟁을 만들 것이다, 그리고 그들을 정복할 것이고, 그들을 죽일 것이다. 그리고 삼일 반 후에 하느님으로부터의 생명의 숨이 그들 안으로 들어갈 것이다, 하여 그들은 자기들의 발로 섰다 (계. 11:3-7, 11);
위에서 언급한 두 증인은 선과 진리이다(즉, 진리가 안에 있는 선, 그리고 선으로부터 있는 진리), 모두가 심정에서 확증된 선과 진리임이 그것이 말해진 바로부터, 즉 두 증인들은 두 올리브 나무와 두 등잔대들이다로부터 분명해진다. “두 올리브 나무들”은 천적인 선과 영적인 선을 표시한다. 천적인 선은 주님을 사랑함으로부터의 선, 그리고 영적인 선은 이웃을 향한 선행으로부터의 선이다. “등잔대들”은 이런 선들로부터의 진리들이다. 이 대목은 주님의 신성한 자비로부터 등잔대를 주제로 취급하는 곳에서 더 살피게 될 것이다. 이 선들과 진리들은 천국을 닫고 여는 힘을 가진다. 이에 대하여는 22장의 서문을 참조하면 될 것이다. “무저갱으로부터의 짐승 (즉 지옥으로부터의 짐승)이 그들을 죽일 것이다”란 교회 내에서 선과 진리의 황폐해짐을 의미한다; 그리고 “하느님으로부터의 생명의 영이 그들 안으로 들어갔다, 하여 그들은 그들의 발로 섰다”란 새로운 교회를 의미한다.
고대 때에 무더기가 증거로서 놓였고, 후에는 제단이었다는 것은 여호수아서에서 분명해진다:
르우벤족과 갓족이 말했다, 잘 보아라 우리의 조상들이 만든 여호와의 제단의 모형이다, 이는 태워 바침을 위해서도 아니고, 제물을 위해서도 아니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와 너희 사이에 증거이 다. 그리고 르우벤의 아들들과 갓의 아들들은 제단을 여호와가 하느님이심에 대하여 우리 사이에 증거라고 불렀다 (여. 22:28. 34).
내적 의미에서 “증거”는 진리를 수단으로 선을 확증함을 표시한다.
“증거”가 진리를 수단으로 선을 확증함, 그리고 선을 수단으로 진리를 확증함이기에, 최고 의미에서 “증인”에 의해 주님이 의미된다, 그 이유는 그분이 확증하는 신성한 진리이시기 때문이다; 이사야서에서:
나는 너희와 영원히 지속되는 언약을, 다윗의 진정한 자비들조차 만들 것이다; 잘 보라 나는 그분을 백성에게 증인으로, 백성의 제 일인 자요 사령관으로 주었었다 (이. 55:4).
계시록서에서: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이 분은 신실한 증인이시고, 죽은 자로부터의 첫 출생이시고, 그리고 땅의 왕들의 제 일인 자이시다 (계. 1:5).
계시록서에서:
이런 사항들이 하느님의 창조의 시작이신 신실하시고 진정한 증인을 말한다 (계. 3:14).
모든 진리는 둘 또는 셋 증인의 말에 설 것이고, 증인 하나로는 안된다고 하는 명령이 표현 교회에 주어졌는데, 이 명령은 이런 신성한 법, 즉 하나의 진리가 선을 확증하지 못한다 이다, 그러나 여러 진리들이 선을 확증한다는 법칙으로부터 이다; 그 이유가 하나의 진리가 다른 진리와의 연결 없이는 확증되지 않는 바, 여러 진리가 함께 있어야 한다는 것, 그 이유가 이것이 저것을 볼 수 있게 하기 때문이다. 하나가 어떤 형체를 생산하지(완성하지) 않는다, 고로 어떤 품질을 만들지 않는다, 그러나 시리즈로 연결된 여러 개가 (정확한) 품질을 결정해준다. 하나의 음조가 어떤 멜로디를, 하모니는 더욱 생산하지 못하듯, 진리 역시 그러하다. 비록 하나의 진리가 시민적 상태 안에 기초를 두고 있다 할지라도 하나의 진리로는 의문시되는 법의 기초만 될 뿐이다; 또한 이쪽이 저쪽에 반대되지 않는 것 (서로 보완하는 것)은 십계명의 가르침의 경우가 어쩌면 대표적 예인데, 이는 살핀 바 있다 (2609항).
“증거(testimony)”가 선으로부터 진리가 있음, 그리고 선으로부터 있는 진리를 표시함은 이미 말해진 바로부터 이다; 또한 하나의 말이라 불리우는 돌판 위에 쓰여진 계명의 열 가르침이 “증거”이다는 사실로부터 이다. 모세의 책에서:
여호와께서 시내산 위에서 모세와 더불어 이야기하심을 끝내시면서, 그분은 그에게 하느님의 손가락으로 쓰신 증거의 두 판들, 돌판을 주셨다 (출. 31:18).
출애굽기서에서:
모세는 산으로부터 내려갔다, 그리고 증거의 두 판들, 판의 양쪽에 쓰여진 돌판이 그의 손에 있었다 (출. 32:15).
그리고 판들이 궤 안에 놓여졌을 때, 궤는 “증거의 궤”라 불리운다, 모세의 책에서: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하셨다, 너는 내가 네게 줄 증거를 궤 안에 둘 것이다 (출. 25:16, 21).
모세는 증거를 가져와서 궤 안에 두었다 (출. 40:20).
출애굽기서에서:
나는 너를 증거의 궤 위에 있는 두 그룹들 사이로부터 자비석 위로부터 만나고, 이야기를 할 것이다 (출. 25:22).
출애굽기서에서:
향의 구름이 증거 위에 있는 자비석을 덮을는지 모른다 (레. 16:13).
출애굽기서에서:
열둘 지파들의 막대기들이 증거 앞 만남의 천막 왼쪽에 있었다 (민. 17:4).
(“증거의 궤”를 출. 25:22; 31:7; 계.15:5에서 더 읽어보라.)
그러므로 계명의 가르침들이 “증거”라 불리운 이유는 그것들이 언약으로부터,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결합으로부터 있기 때문이다; 이 결합은 인간이 가르침들을 준수하지 않으면 외적 형체 뿐만 아니라 내적 형체에서도 존재 안으로 와질 수 없다. 이 가르침들의 내적 형체가 무엇인지는 이미 살핀 바 있다; 그러므로 이 가르침들은 진리를 수단으로 확증되는 선이다, 그리고 선으로부터 파생되는 진리인 바, 이것이 “증거”에 의해 의미된다. 이것이 그렇기 때문에 판들 또한 “언약의 판들”이라 불리운다; 그리고 궤는 “언약의 궤”라 불리운다. 이상으로부터 말씀에서 “증거”에 의해 순수 의미에서 의미되는 것이 무엇인지 분명해졌을 것이다. 더불어 신. 4:45; 6:17, 20; 이. 8:16; 왕하. 17:15; 시. 19:7; 25:10; 78:5; 93:5; 99:2, 22, 24, 59, 79, 88, 138, 167; 122:3, 4; 계. 6:9; 12:17; 19:10도 더 읽기 바란다.

그리고 미스바. 그 이유가 그가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나와 너 사이를 지켜보신다 라고 했기 때문이다. 이는 주님의 신성한 자연 평면으로부터의 현존(presence)을 의미한다. 즉 지금 라반에 의해 표현된 선 안에서를 의미한다. 이는 “쳐다봄(looking)”, 또는 “지켜보심(watching)”이 현존하심을 뜻한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 이유가 또 다른 대상을 쳐다보는 자, 또는 높은 전망대에서 누군가를 지켜본다면, 이는 보고 있다는 시각으로부터 함께 현존하는 셈이기 때문이다. 이 외에 “보는”것, 주님을 서술할 때, 예견과 섭리를 표시한다, 고로 현존 , 그러나 예견하심과 섭리하심을 수단으로 현존하심이다. 주님의 현존하심에 주목해보면, 그분은 모든 이와 더불어 현존하신다, 그러나 그분을 받아들임에 따라서이다; 그 이유가 모든 이의 생명은 주님만으로부터 있기 때문이다. 선과 진리 안에서 그분의 현존을 받는 이들은 총명과 지혜의 생명 안에 있다; 그러나 이렇게 받지 않고 악과 거짓 안에서 그분의 현존을 받는다면, 그는 미친 짓과 우둔함 안에 있다; 그럼에도 그들은 이해력이나 똑똑함의 수용력은 남보다 뛰어날 수도 있다. 이렇게 말한 이유는 악과 거짓 안에 있는 이들이 바깥 형체에서 선하고 참된 것의 탈을 뒤집어 쓰고 그럴듯하게 행세하는데 남보다 한수 높기 때문이다. 이렇게 잘 포장된 악과 거짓이 순박한 인간을 사로잡기에 이런 자가 선하고 참된 것에 대한 지식을 모르고서는 악용하지도 못하기 때문에 하는 말이다. 현존하심의 품질이 “미스바”에 의해 의미된다; 여기서의 경우, 일들로부터의 선들 안에 있는 이들과 더불어 있는 품질, 즉 이방인들과 더불은 품질, 여기서 라반에 의해 의미된 품질이다; 그 이유가 원어에서 “미스바”는 “쳐다봄”으로부터 파생되어지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우리는 그의 동료로부터 감추여진 사람일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교회 속에 있는 것에 관련하여 있는 분리를 의미한다. 이는 “감추여 있다”의 의미가 분리됨이다로부터; 그리고 “그의 동료로부터의 사람”의 의미가 교회 내에 있는 이들, 그리고 교회 밖에 있는 이들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것들이 “감추여”라고 말해진 이유는 그것들이 선과 진리 측면에 관련하여 분리되었기 때문, 고로 교회의 것들에 관련하여 분리되었기 때문이다.

만일 네가 내 딸들을 박대한다면, 그리고 네가 내 딸들을 제치고 여인들을 데려 온다면, 우리와 더불은 사람은 없지만… 이는 진리에 애착함들은 교회 안에 남아 있을 것임을 의미한다. 이는 “딸들”, 즉 라헬과 레아의 의미가 진리에 애착함들이다로부터; “여인들”의 의미가 진짜이지 않은 진리에 애착함들이로부터, 고로 교회 속에 있지 않은 진리에 애착함이다로부터; 그 이유가 진리에 애착함이 교회를 만들기 때문이다; 하여 “딸들을 제치고 여인들을 데려온다”는 것은 진짜 진리에 애착함 외에 다른 애착함들이 있을 것임을 의미한다; “우리와 더불은 사람은 없다”의 의미가 사람이 그의 동료로부터 감추여질 때, 즉 그들이 분리되어질 때 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상의 것을 종합하면 분명해지는 바, 이 말들에 의해 진짜 진리가 진짜이지 않은 진리들로 더럽혀지지 않고 교회 안에 남아있을 것이다가 의미된다.

보라, 하느님이 나와 너 사이에서 증거하신다. 이는 확증을 의미한다. 여기서는 신성으로부터 확증함이다. 이는 “증거(증인)”의 의미가 확증함이다로부터 알려진다.

51-53절. 그리고 라반이 야곱에게 말했다, 이 무더기를 보아라, 그리고 내가 너와 나 사이에 세운 이 기둥을 보라. 52 이 무더기가 증거이다, 그리고 이 기둥이 증거가 된다, 그리고 나는 악을 위하여 이 무더기, 이 기둥을 넘어 너에게 건너 가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너는 악을 위하여 이 무더기, 이 기둥을 넘어 나에게 오지마라. 53 아브라함의 하느님과 나홀의 하느님, 그들의 아버지의 하느님께서 우리 사이를 판결하신다. 그리고 야곱은 그의 아버지 이삭이 두려워하는 분을 두고 맹세했다. “그리고 라반이 야곱에게 말했다, 이 무더기를 보아라, 그리고 이 기둥을 보아라, 이는 내가 너와 나 사이에 세운 것이다”란 결합을 의미한다. “이 무더기는 증거이다, 그리고 이 기둥이 증거이다”란 확증을 의미한다. “나는 악을 위하여 이 무더기를 건너 너에게 가지 않을 것이니, 너도 이 무더기를 건너 나에게 오지 마라”란 선으로부터 얼마나 많이 흘러들 것인지를 규정하는 한계를 의미한다. “아브라함의 하느님, 그리고 나홀의 하느님이 우리 사이를 판결하신다”란 신성이 양쪽 모두에 흐름을 의미한다. “그들의 조상의 하느님”이란 최고의 신성으로부터를 의미한다. “그리고 야곱은 그의 아버지 이삭이 두려워하는 분을 두고 맹세했다”란 신성한 인간으로부터의 확증을 의미한다. 이 상태에서는 신성한 인간이 “두려워하는 분”이라 불리우고 있다.

그리고 라반이 야곱에게 말했다, 이 무더기를 보아라, 그리고 이 기둥을 보아라, 이는 내가 너와 나 사이에 세운 것이다. 이는 결합을 의미한다. 이는 앞에서 말해진 바로부터 분명해진다; 그 이유가 무더기와 기둥은 언약이 만들어졌음(즉 친구 관계)에 대한 표시와 증거를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고로 내적 의미에서의 의미는 결합이다.

이 무더기는 증거이다, 그리고 이 기둥이 증거이다. 이는 확증을 의미한다. 이는 “증거”의 의미가 확증함이다로부터; 즉 “기둥”인 진리를 수단으로 선을 확증함, 그리고 “무더기”인 선으로부터 진리를 확증함이다에서 알려진다.

나는 악을 위하여 이 무더기를 건너 너에게 가지 않을 것이니, 너도 이 무더기를 건너 나에게 오지 마라. 이는 선으로부터 얼마나 많이 흘러들 것인지를 규정하는 한계를 의미한다. 이는 “건너감”이 흘러듦을 의미함으로부터; “무더기”가 선을 의미한다로부터; 그리고 “기둥”의 의미가 진리이다로부터; 또한 무더기와 기둥이 표시를 위해, 증거를 위해 양쪽을 위해 있기 때문에서 이다; 그러나 이 대목에서는 한계의 표시를 위해서 이다. 결합이 취급되기에, 내적 의미는 선으로부터 얼마나 많이 흘러들 것인지를 규정하는 한계임이 앞 뒤 연결 문맥에서 살펴진다. 결합은 선을 수단으로 결과된다는 것, 그리고 선은 받음에 따라서 흘러든다는 것은 앞에서도 서술한 적이 있다. 그러나 선을 받음은 진리들에 따르지 않고서는 여하한 방법으로도 가능하지 않다, 진리가 선이 안쪽으로 흘러들게 하기 때문이다; 즉 선은 대행자이고 진리는 수용체이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모든 진리는 받는 그릇들이다. 진리들이 선이 안으로 흘러들게 하기에, 진리들은 선의 흐름을 한계짓는 것이다. 그래서 이 대목에서 선으로부터 흘러듦이 얼마나 많을 것인지를 규정하는 한계를 뜻한다고 말한 것이다.
이런 경우를 놓고 조금 더 서술해보겠다: 인간이 어떤 인간이든, 그 인간의 본성이 어떠하든, 인간과 더불어 있는 진리들은 그 인간의 애착을 수단으로, 즉 그의 사랑 속에 있는 어떤 기쁨을 수단으로 당사자의 기억 안으로 들어간 것이다. 그의 사랑으로부터 있는 기쁨, 즉 당사자가 애착하는 것도 없이는 어떤 것도 인간에게 들어가 질 수 없다, 그 이유는 애착 안에(또는 사랑함으로부터의 기쁨 안에) 자기의 생명이 있기 때문이다. 들어간 것들은 그것과 비슷한 기쁨이 재발할 때는 언제든지 그것과 연계된 것과 함께 재생산되어진다. 같은 방법에서 똑같은 진리가 누군가의 자아, 또는 또 다른 자아를 수단으로 그것이 들어갔을 때 있었던 사랑의 기쁨, 또는 애착은 같은 방식에서 다시 흥분된다. 그 이유는 그것들 끼리 서로 입맛이 같기 때문이다. 이렇게 말을 늘어 놓은 이유는 이로부터 미루어 아는 바, 인간이 선 안에 있지 않으면, 어떤 진리도 순수한 애착과 더불어 심어지지 않는다는 것, 더구나 내면적으로 뿌리내리지 못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어서 때문이다. 진리에 대한 순수한 애착(진짜 애착)은 주님을 사랑함과 이웃을 향한 선행으로부터 있는 선으로부터만 있다. 이 선은 주님으로부터 흘러들지만, 진리들이 아니면 자리잡아지지 않는다; 그 이유가 진리들 안에서 선은 환영받고, 사실상 이 둘은 일치함에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선을 받음은 진리들의 본성에 따라서이다. 서로의 선행 안에서 살았던 이런 이방인들과 더불어 존재했던 진리들은 위와 같은 일치함의 본성 속에 있으므로 주님으로부터 흘러드는 선이 그들의 진리 안에서 환영받음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이 이 세상에서 사는 한, 말씀으로부터 진리들을 가지는 기독인들과, 그리고 영적 선행 안에서 말씀으로부터 사는 이들과는 방식에서 똑같지는 않다.

아브라함의 하느님, 그리고 나홀의 하느님이 우리 사이를 판결하신다. 이는 신성이 양쪽 모두에 흐름을 의미한다. 즉 교회 내에 있는 이들이 가지는 선 안으로, 그리고 교회 밖에 있는 이들이 가지는 선 안으로 신성은 흐른다를 의미한다. 이는 “아브라함의 하느님”의 의미가 교회 내에 있는 이들에 관하여 주님의 신성이다로부터; 그리고 “나홀의 하느님”의 의미가 교회 밖에 있는 이들에 관하여 주님의 신성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로부터 분명한 바, 이 말들에 의해 신성이 양쪽으로 흐름이 의미된다는 것이다. “아브라함의 하느님”이 교회 내에 있는 이들에 주목하여 말하는 주님의 신성인 이유는 아브라함이 주님의 신성 측면, 결과적으로 주님으로부터 직접 오는 신성을 표현해서 이다. 그러므로 교회 내에 있는 이들이 “아브라함의 아들들”이라고 뾰족하게 뜻해지기도 한다 (요. 8:39). “나홀의 하느님”이 교회 밖에 이들에 주목해서 있는 주님의 신성인 이유는 나홀이 이방인들의 교회를, 그리고 그의 아들들은 형제애 안에 있는 이들을 표현하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나홀의 아들인 라반 역시 한쪽으로 있는 선, 즉 이방인들이 주님으로부터 가지는 식의 선을 표현한다. 주님으로부터 이와 같이 다양한 것이 표현되는 것은 다양한 것이 주님 안에 있어서가 아니라 주님의 신성을 담는 그릇이 다양하기 때문에서 이다. 이것은 인간 안에서 움직이는 생명과도 같다. 하나의 생명이지만 이것이 기관에서는 기관의 역할로 특징지어 지고, 섬유질에서는 그 나름대로의 역할을 표출하는 바, 하나의 생명이 표출되는 신체의 각종 부위에 따라 다르게 명명되는 것과 비슷하다. 즉 눈은 이 방법으로 보고, 귀는 저 방식으로 듣고, 혀는 또 다른 방식에 따라 지각한다; 하여 팔과 손도, 폐도, 발도, 간도, 위도, 제각각 무척 다르다. 그럼에도 다양하게 제각각 작동하는 것을 통제하는 하나의 생명이 있다. 다시 말해 생명이 다양해서 복잡한 신체 구조가 있는 것이 아니라 생명을 받는 신체들이 조건과 필요에 따라 받아지는 양상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각 기관의 형체는 행동이 결정됨에 따라 있기 때문이다.

그들의 아버지의 하느님. 이는 최고의 신성으로부터를 의미한다. 이는 “아버지의 하느님”의 의미가 최고의 신성이시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 이유가 “아버지”가 말씀에서 언급되는 곳은 어디에서든지 내적 의미에서 선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주님의 “아버지”, 또는 주님께서 “아버지”라는 말을 하실 때, 이는 그분 안에 있는 신성한 선이다. 신성한 선이 최고의 신성이다, 그러나 신성한 진리는 신성한 선으로부터 있는 진리이다, 그래서 “아들”이라 불리운다. 더 나아가 여기서의 “아버지”는 실상 아브라함과 나홀의 아버지인 “데라”이다, 그리고 그는 교회들의 공통된 지주(common stock)를 표현하는데 이미 살핀 바도 있다. 이로부터 관계적 의미에서 아브라함은 진짜 교회(순수한 교회)를 표현하고; 나홀은 이방인들의 교회를 표현한다.

그리고 야곱은 그의 아버지 이삭이 두려워하는 분을 두고 맹세했다. 이는 신성한 인간으로부터의 확증을 의미한다. 이 상태에서는 신성한 인간이 “두려워하는 분”이라 불리우고 있다; 이는 “맹세함”의 의미가 확증함이다로부터; 그리고 “이삭의 두려워하는 분”의 의미가 주님의 신성한 인간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아브라함의 하느님, 나홀의 하느님, 그들의 아버지(데라)의 하느님”, 그리고 야곱의 아버지 “이삭이 두려워하는 분”이라고 말해진 이유는 데라의 아들들이 여러 숫자의 하느님들을 인정했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그들이 우상숭배자들이었기 때문이다. 각 가문은 각 가문별로 자기들 특유의 하느님을 예배했고, 각자가 그런식으로 하느님을 모시는 것이 우상 숭배자들의 특징이고, 서로 이것을 인정했다. 이런 이유로 본문에서 여러 하느님들이 거론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의 가문에만 유독 그들의 하느님으로 여호와를 인정하도록 강요되었다(명령되었다). 이런 결과로 아브라함의 후손들이 다른 신들쪽으로 종종 타락하는 모습을 말씀의 역사, 예언 부분에서 마주친다. 다시 말해 이 후손들은 여호와의 이름을 명목상의 차원에서 인정한 것, 외적 측면에서만 인정한 것, (요즈음식으로 말하면 교회에서 믿으라니까 뭘 믿어야하는 지도 확실치 않으면서 믿습니다 하고 고백하는 식인 바) 그들은 여호와의 이름의 내적 측면은 전혀 알지 못했고, 알기를 바라지도 않았다.
그들이 교회의 의식 자체에 관심을 집중하는 만큼 그들은 우상적이었다. 그 이유가 그들이 내적 측면에서 분리되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교회의 내적인 것에서 분리될 때, 교회 속의 다양한 의식들은 우상 숭배의 도구일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의 진짜인 것이 (지독하게 외적인) 그들을 수단으로 표현되어질 수 있었다. 그 이유가 표현함들은 표현하는 인물(person)에 중점을 두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어떤 것(thing)에 집중하기 때문이다. (연극이나 드라마에서 작가가 하느님에 해당되고 배우나 탈랜트는 성경의 인물쯤으로 비교 생각해도 될지 모른다 역자주.) 그럼에도 표현 교회(representative church)가 (지상의) 존재 안으로 와지기 위하여, 그리고 주님께서 천국을 통하여 인간과의 어떤 교통이 있기 위하여 아브라함의 계보들이 비록 심정으로는 인정하지 못해도, 인정하기를 원하지 않아도, 어쨌든 입술로만이라도 여호와를 인정함 안에 보존해야하는 매우 특유한 중요성이 있었다. 그래서 그들과 더불은 표현 교회는 내적 측면이 유출되는 일은 없었고 오로지 외적 측면에서만 있었다; 이 방법에서 그들은 주님과 교통함을 가졌다; 즉 내적인 것을 수단으로 교통하는 진짜 교회(genuine church)와는 판연히 다르다. 이런 이유로 그들의 신성한 예배는 그들의 혼들에 전혀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그들의 혼에 감동을 주지 않았다); 다시 말해 그들의 신성한 예배가 그들로 하여금 다른 삶에 있는 복됨을 만들어주지 않았다, 단지 이 세상에서의 번영만에 국한되었을 뿐이다.
그러므로 그들이 이런 외적인 것들을 준수하도록 하기 위하여, 만일 그들이 내적 측면에서 여호와를 인정했을 경우 불필요한 많은 기적같은 경이로운 일들이 그들 사이에서 수행되어지기도 했고, 때로는 처벌, 포로됨, 위협 같은 것을 수단으로 그들이 예배를 준수하도록 내몰리기도 했다. 이에 반해 내적 예배에서 있는 자는 주님에 의해 내몰리는 일은 결코 없고 자유함에서 그분의 인도를 허용한다. 그들에게 제일의 중요한 외적인 것은 그들이 여호와를 고백하는 것이다; 그 이유가 여호와가 주님이셨기 때문, 이분이 그 교회의 모든 것 안에서 표현되었기 때문이다.

54, 55절. 그리고 야곱은 산에서 제물을 바쳤다, 그리고 그의 형제를 불러 빵을 먹었다. 그리고 그들은 빵을 먹었다, 그리고 산에서 그 밤을 보냈다. 55 그리고 아침에 라반은 일찍 일어났다, 그리고 그의 아들들과 딸들에게 키스했다, 그리고 그들에게 복을 빌어 주었다. 그리고 라반은 떠나 자기 자리로 돌아 갔다. “그리고 야곱은 산에서 제물을 바쳤다”란 사랑의 선으로부터 예배함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의 형제를 불러 빵을 먹었다”란 주님의 신성한 자연 평면으로부터 선을 자기 것 되게 함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들은 빵을 먹었다”란 결과를 의미한다. “그리고 산에서 온 밤을 보냈다”란 평온을 의미한다. “그리고 아침에 라반은 일찍 일어났다”란 이 선이 주님의 신성한 자연 평면으로부터 계발됨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의 아들들과 그의 딸들에게 키스했다”란 이러한 진리들을 인정함, 그리고 이러한 진리에 애착함을 인정함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들에게 복을 빌어 주었다”란 그와 동시에 일어나는 기쁨을 의미한다. “그리고 라반은 떠났고, 그의 장소로 돌아 갔다”란 라반에 의한 표현이 끝났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야곱은 산에서 제물을 바쳤다. 이는 사랑의 선으로부터 예배함을 의미한다. 이는 “제물을 바침”이 예배를 의미한다로부터; 그리고 “산”의 의미가 사랑의 선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제물을 바침”이 에배를 의미하는 이유는 후기 표현 교회, 또는 히브리 표현 교회에서 태워 바침과 제물 바침이 모든 그들의 예배의 중심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그들은 산에서 제물을 바쳤는데, 이는 말씀의 많은 구절로부터 분명하다. 그런 이유는 “산”이 높기 때문이다; 하여 그들은 산은 높은 것을 의미할 것이다고, 높은 것이 천국의 것이다고, 그래서 그 속에 있는 것을 천적(celestial)이다고 불렀다. 그러므로 높은 것 중의 최고는 주님을 의미해서, 그들은 주님을 가장 높은 분(Most High)이라고 불렀다. 이런 방식에서 그들은 외관으로부터 생각했다. 그 이유가 보다 더 내면의 것들은 보다 더 높게 나타난다. 천국과 인간의 관계에서도 이는 그렇게 나타나고 있다. 천국은 당사자와 더불어 내면적으로 있는데, 인간은 천국이 높은데 존재하는 듯 상상하는 버릇이 있다. 이런 이유로 말씀에서 높은 것이 언급되는 경우, 내적 의미에서 내면의 것이 의미된다. 세상에서 천국이 높은 데에 있다고 상상되게 하는 이유는 눈에 보이는 하늘이 우리 위쪽 넘어 있기 때문, 그리고 우리가 시간과 공간 안에서 살기에 생각의 범주가 시공 안에 한계지어지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내면의 것이 존재하는지, 그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자가 적다는 것, 게다가 거기에는 시간과 공간 따위가 없다는 것을 실감하는 자는 더욱 적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말씀의 언어는 인간의 생각의 관념에 일치하고 있다; 그리고 만일 인간의 생각 차원 대신, 천사의 생각 차원에 있다면, 누구도 전혀 납득하지 못하고 만다. 하여 인간의 이해력에 합당한 것의 결핍으로 인간은 그 말씀이 무엇인지에 의아해 하고, 전혀 아무것도 아니다고 결론지어 거절되고 만다.

그리고 그의 형제를 불러 빵을 먹었다. 이는 주님의 신성한 자연 평면으로부터 선을 자기 것 되게 함을 의미한다. 이는 “형제들”의 의미가 지금 언약으로 결합된 이들, 즉 친구 관계에 의해 결합된 이들이다로부터; 그리고 내적 의미에서는 선과 진리 안에 있는 이들이다로부터; 그리고 “먹다”의 의미가 자기 것이 되게 함이다로부터; 그리고 “빵”의 의미가 사랑의 선이다로부터, 그리고 최고 의미에서 주님을 의미한다. 최고 의미에서 “빵”이 주님을 의미하기에, 그러므로 빵은 그분으로부터 있는 거룩한 모든 것, 즉 선과 진리의 모든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사랑과 선행으로부터 있는 것은 선밖에 없으므로 “빵”은 사랑과 선행을 의미한다. 옛 시대에서 제물이 사랑과 선행을 의미함밖에 더 없으므로 그들은 단어 하나인 “빵”을 가지고 사랑과 선행 모두를 단번에 표현했다. 그들은 천국의 축제가 표현되도록 하기 위하여, 즉 사랑과 선행을 수단으로 결합함이 표현되도록 제물의 고기를 함께 먹었다. 이것이 지금은 성찬에 의해 의미되었다; 그 이유가 이 성찬이 제물을 바침을, 그리고 신성시 구별한 것들로부터의 절기 속의 것들을 대신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성찬은 자체 내에 내적인 것을 포함하는 교회의 외적인 것이다; 이 내적인 것을 수단으로 사랑과 선행 안에 있는 이들은 천국과, 천국을 통하여 주님과 결합한다. 그 이유가 성찬에서 있는 “먹다” 역시 자기 것이 되게 함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하여 성찬에 있는 “빵”은 천적인 사랑을, 그리고 “포도주”는 영적인 사랑을 의미한다. 인간이 성찬 예식을 거행할 때, 즉 성찬의 거룩한 상태에서 먹고 마시는 동안, 천국 안에서는 천적, 영적 사랑만이 지각된다.
“주님의 신성한 자연 평면으로부터의 선을 자기 것이 되게 함”이라는 표현을 사용한 이유는 지금 여기서 취급되는 주제가 이방인들의 선, 즉 라반에 의해 지금 표현되는 선이기 때문에서 이다. 주님과 더불은 인간의 결합은 꼼꼼히 말하면 그분의 최고의 신성 자체와의 결합이 아니라 그분의 신성한 인간과의 결합이다; 그 이유가 인간은 주님의 최고의 신성에 대한 생각은 무엇이든 가져볼 수 없고, 최고의 신성은 인간의 생각을 초월하는 바, 인간이 최고의 신성을 생각하면, 그것은 아무것도 없는 것, 즉 무로 전락하고 만다; 그러나 인간은 그분의 신성한 인간에 대한 생각은 가질 수 있다; 그 이유가 모든 이는 무언가에 관해 생각하면, 그는 생각과 애착이라는 것을 수단으로 그 무언가와 결합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반대로 생각하지 않고 애착도 없으면 결합은 없다; 따라서 만일 어떤 이가 주님의 인간을 곰곰이 생각하고 있다면, 그는 그의 생각(idea) 안에 거룩함을 가진다, 동시에 주님으로부터 오는 이 거룩함이 천국을 채우고 있다는 것 또한 생각하고(think) 있다; 하여 그는 천국 또한 생각하고 있다; 그 이유가 복합체 안에서 천국이 인간에 관련하여 있는 것을 낳고, 낳아진 이것은 주님으로부터 행해진 것, 즉 주님이 그렇게 만드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과정은 인간이 주님의 최고의 신성과의 (직접적인) 결합은 가능할 수 없다는 것, 오직 그분의 신성한 인간과 결합하고, 신성한 인간을 통하여 (간접적으로) 그분의 최고 신성과 결합한다는 사실을 설명해준다. 그러므로 요한복음서(1:18)에서 여하튼 하느님을 본 자는 없고, 독생자 뿐이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분을 통하지 않고 아버지께로 올 자는 없다; 그러므로 그분은 중재자(Mediator)라고 불리우신다. 그런데 이런 경우도 발생한다; 즉 교회 내에서 최고의 존재만을 믿는다고 말하는 이들의 경우이다, 하여 주님에 관하여는 시시하게 생각하는 이들, 심지어는 시시함을 넘어 주님에 관한 것을 전혀 믿지 않는 이들, 하여 천국이 있는 것, 지옥이 있는 것에 관심을 두지 않는 것, 이것은 죽은 다음의 일인데, 안다고 지금의 신앙 생활에 무슨 소용이 있는가, 착하게 살면서 최고의 존재 한 분을 바라보다 죽으면 되는 것 아닌가를 심정에서 다져가는 신앙인들, 하여 신앙이 자연 평면의 문턱을 넘지 못하는 바, 어찌보면 그는 자연을 예배하는 수준일 경우에 국한될 수 있다. 이런 인물들이 경험으로 신앙을 배울 경우, 악한 자도 자기들 식으로 말하는 것을 듣고 혼동을 일으키기도 한다. (스베덴보리, 내지 스위든볼지언을 두고 “신비주의자들 이다”라고 말한다. 사실 한국 언어에서는 이 신비주의 라는 말이 어떤 무당이나 점쟁이들이 하는 짓을 연상하게끔 되어 있어 자칫 스위든볼지언이 무당의 족속들 아닌가하는 착각을 듣는 상대에게 일으킨다. 그러나 신비, 신비주의 라는 단어를 국어 사전을 들추어 국문학자가 내린 정의를 읽는다면, 얘기는 아주 달라진다. 즉 순수한 내면적 직관과 직접적 체험에 의해 최고 실재자를 인식하려는 종교, 철학, 문학상의 경향이라 풀이하고 있다. 역자더러 간단히 말해보라 하면, 천국의 비밀(천국의 질서)을 지각하여(이치를 깨달아) 실생활에 적용함이라 말하고 싶음을 첨언한다 역자주.)
주님의 인간에 주목하면, 인간들은 다양한 방법에서 생각한다, 하여 이 사람은 이렇게, 저 사람은 저렇게, 이 사람이 저 사람보다 더 거룩한 생각 안에 있기도 한다. 어쨌든 교회 내에 있는 이들은 그분의 인간이 신성하다 라고 생각할 수 있고, 또한 그분은 아버지와 하나이다는 것, 또한 아버지가 그분 안에 있으시다 라는 것도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교회 밖의 사람들은 이런 생각을 가질 수 없다, 그 이유는 그들이 주님에 관하여 아는 것이 없기 때문, 그리고 그들은 자기들의 눈으로 보는 형상들로부터 외에는 신성에 대한 생각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 그러므로 자기들의 손으로 만질 수 있는 우상들 외의 생각은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주님께서는 그들의 조잡한 그분에 대한 생각 안에 있는 그들의 선행과 순종심으로부터의 선을 수단으로 이들과도 그분 자신을 결합하신다. 이런 상황 때문에 여기서 “주님의 신성한 자연 평면으로부터의 선을 자기 것이 되게 함”이라고 말한 것이다; 인간과의 주님의 결합은 인간의 생각함과 그에서 파생되는 애착에 따라서 이다. 이를 크게 구별하면, 주님에 관하여 가장 거룩한 생각 안에 있고, 동시에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들과 애착함 안에 있는 이들이 교회 내에 있다면, 이 사람은 그분의 신성한 합리성 측면에서(수준에서) 주님과 결합되어 있다. 이에 비해 위와 같은 상태의 수준에 있지는 않지만, 즉 내면의 생각과 애착 안에 있지는 않으나 여전히 선행의 선 안에 있는 교인들이라면, 그는 그분의 신성한 자연 평면과 결합되어 있다. 그러나 이 수준보다 더 낮은 상태, 즉 보다 더 조잡한 종류의 거룩함을 지닌 이들은 그분의 감각 평면과 결합되어 있다; 이 결합이 뱀에 물렸어도 놋쇠뱀을 쳐다보면 치료되는 광경에 표현되어 있다 (민. 21:9). 이 결합은 우상들을 예배하는 이방인들, 그런데도 자기들 나름의 종교에 일치하여 선행 안에서 살고 있는 이방인들 사이에 있다. 이상 살핀 바로부터 야곱이 빵을 먹으려고 그의 형제들을 부른 것의 의미가 주님의 자연 평면으로부터 선을 자기 것이 되게 함이다를 이해했을 줄로 본다.

그리고 그들은 빵을 먹었다. 이는 결과를 의미한다. 즉 외적 의미에서 친구 관계, 최고 의미에서 주님의 자연 평면에서 선과 진리의 결합을 의미함이다.

그리고 산에서 온 밤을 보냈다. 이는 평온을 의미한다. “온 밤을 지냄(묵음)”의 의미가 평화를 가지는 것이다로부터, 고로 평온이다. 언약을 한 사람들이 한 장소에서 온 밤을 머무는 것은 관례였는데, 이는 이렇게 함으로 더 이상 적대 관계가 없음을 서로에게 표시하기 위하여서 였다. 그리고 내적 의미에서는 평온과 평화이다; 그 이유가 선과 진리 측면에서 결합되어 있는 이들은 평온과 평화 안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온 밤을 지낸 것이 “산에서”라고 말해지는데, “산”이 사랑과 선행의 선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사랑과 선행이 평화를 수여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침에 라반은 일찍 일어났다. 이는 이 선이 주님의 신성한 자연 평면으로부터 계발됨을 의미한다. 이는 “아침에 일찍 일어남”의 의미가 계발됨이다로부터; 그리고 “라반”의 표현이 이방인이 지니는 선 같은 것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여기서 뜻해진 이 선의 계발됨이 주님의 자연 평면으로부터 이다는 것은 시리즈로부터 분명해진다. 계발됨에만 주목하면, 우선 모든 계발됨은 주님으로부터 있고, 주님께서는 인간 안에 있는 선을 통하여 계발해주신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믿는 바, 선과 진리, 악과 거짓에 관하여 추론할 수 있는 사람이 계발되어진다는 것이다; 그리고 계발되는 수준의 정도는 당사자가 선과 진리, 악과 거짓을 말함에서 얼마나 명민하고 세밀한 구별력(예민함, 또는 교활함)을 구사하는지에 따라, 동시에 기억 속의 많은 지식들을 가지고 자신의 추론력을 뒷받침해 주느냐에 따라, 게다가 자신이 추론한 것들을 감각 속의 것들을 가지고 얼마나 잘 비교해 증명하느냐, 또는 확신(설득)시키느냐에 따라 크기가 좌우된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이런 사람들은 자신들의 상상력과 지각력에도 불구하고 계발됨은 없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계발되게 하는 힘은 두 종류가 있기 때문이다, 즉 하나는 천국의 빛으로부터 오고, 다른 하나는 실체가 없는(얼빠진) 빛으로부터 오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두 종류는 바깥 형체에서는 똑같이 나타난다, 물론 안쪽의 형체는 너무나 판이하게 다르다. 다시 말해, 천국의 빛으로부터 있는 계발은 선 안에서 있다, 즉 선 안에 있는 이들과 더불어 있다, 이들은 선으로부터 진리를 볼 수 있어, 마치 청명한 날 물체를 보고 이것이 이렇다, 저렇다 하는 것과 같다. 그러나 얼빠진 빛으로부터 있는 자는 악 안에서의 계발이다, 즉 악 안에 있는 이들과 더불어 있는 계발이다는 말이다, 이들의 계발이다는 것은 자신들이 지닌 앎(유식함)으로부터 추론함에서 기인되는 것인지라 말로 뱉는 한도까지에서는 위의 두 종류가 같을 수 있겠지만 , 애착의 단계에서 완연히 달라진다. 후자에게는 말하고 추론하고 했던 것을 행동에 옮기려는 애착이 없다. 이런 자에게 계발됨이 없다는 것을 짐작 못하는 사람은 없을 줄로 본다.
얼(혼)빠진 빛에 주목하여 보면, 다른 삶에서는 이러하다: 모든 인간은 이 세상에서 했던 짓과 같은 짓을 저 세상에서도 구사한다. 위의 후자의 부류는 선과 진리, 악과 거짓을 능변있게 추론한다는 말이다. 게다가 육체 안에서의 삶일 때보다 더 완전하고 특출하다. 그 이유는 거기서는 이 세상에서 자신들을 한계짓게 하던 것마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의 추론들이 얼빠진 빛으로부터 이다는 것은 금새 나타난다 (물론 선한 영들과 천사들에게만 그렇다는 말이다). 그리고 그들 안으로 흘러든 천국의 빛은 즉시 얼빠진 빛으로 바뀌고 만다; 한마디로 천국의 빛은 그들 안에서 숨막히는 형국이다. 마치 태양의 빛이 어떤 것에 떨어졌는데, 불투명하고 검게 되어지는 모습 같다; 또는 천국의 진리가 거짓들 안에 있는 이들에게 흘러들 때, 재빨리 이를 자신의 것으로 삼아 자신이 창안한 듯 자신 자체로 바뀌어 악용하고 타락되는 것과 같다; 또는 태양의 빛이 추하고 불결한 것에 스며들 때, 기껏 생산하는 것은 이상한 색깔과 불쾌한 냄새뿐인 경우와 같다. 이는 자신이 타인보다 아는 것이 더 많아 능변이 빼어나다 우쭐하면서 생활은 악하고 사기투성이로 점철하는 자가 지니는 얼빠진 빛이다.
이들이 사기칠 목적으로 선인 것의 모조품을 만들지 않는 조건이다면, 그들이 누구인지, 그들의 속성이 무엇인지가 그들이 말하는 모든 것으로부터 나타난다. 이런 자들 범주에 주님을 부정하고 경멸하는 이들이 있다, 이들은 속으로 주님을 고백하는 이들을 비웃는다. 이들 사이에 간음을 사랑하는 자들이 있다. 이들은 결혼은 거룩하다고 믿고, 이 거룩함에 어떤 이유에서 이든 덧칠해서는 결코 안된다고 하는 이들을 비웃는다. 이들 사이에, 교회의 가르침과 교리들은 공통의 사람들(우리 모두)을 위하여 있다고 믿는 이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그 가르침의 범주를 벗어나서는 안된다고 말하면서, 자신을 예외로 인정하고, 은근슬쩍 이 범주를 넘나드는 자들이 있다. 이들 사이에, 모든 것들은 자연에서 기인한다고 믿는 자들이 있다, 하여 이들은 모든 것은 신성에서 기인된다고 믿는 이들을 두고 너무나 단순하여 어리석고 유약한 판단을 한다고 비아냥거린다. 이들 사이에, 만사 형통함은 자신이 지닌 신중함 때문이다고 믿는 자들이 있다. 이들이 말한다, 최고의 존재는 일반적 보편적인 것만을 통치할 뿐, 개인적, 특수적인 사건에는 개입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외 많은 경우의 예들이 많겠지만 생략한다.
위와 같은 얼빠진 빛에 있었던 자들은 다른 삶에서도 그렇게 있다. 하여 거기서도 그들은 대단한 예민함을 발휘해 추론한다; 그러나 그들이 천국의 어떤 사회에 접근할 때, 그들의 얼빠진 빛은 소멸하여 어두워진다; 결과적으로 그들의 생각들이 애매모호해져 가서 전혀 생각 자체가 있지를 않게 된다. 그 이유가 그들은 천국의 빛 때문에 경련을 일으키고 압축되어지고(오그라들고) 말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은 자기들의 빛이 있는 곳, 지옥쪽으로 머리를 디밀어 스스로 자신을 내던지고야 만다. 이상으로부터 진정한 계발이 무엇일 것인지가 분명해지리라 본다, 즉 이는 주님으로부터 있는 선으로부터 온다는 것; 또한 거짓 계발됨이 무엇인지도, 그것은 지옥으로 있는 악으로부터 온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의 아들들과 그의 딸들에게 키스했다. 이는 이러한 진리들을 인정함, 그리고 이러한 진리에 애착함을 인정함을 의미한다. 이는 “키스함”의 의미가 애착함으로부터 결합함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결과적으로 인정함 (그 이유가 키스함에 선과 진리를 수단으로 결합함이 있고, 이 결합을 인정함이 있기 때문)이 있다; 그리고 “아들들”의 의미가 진리들, 진실함들이다로부터; 그리고 “딸들”, 여기서는 라헬과 레아의 의미가 진리에 애착함들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키스함”이 애착으로부터 결합함이다는 것은 상응으로부터 이다; 더 나아가 신체의 모든 기관과 조직이 천국과 상응하고 있다는 것은 장들의 끝부분에서 이미 살핀 바도 있다. 인간의 내적인 것들이 얼굴의 모든 것들과 상응하고 있다, 그러므로 생명의 원동력(animus)은 생김새(용모)로부터 빛을 낸다, 그리고 내면의 생명의 원동력, 또는 마음은 눈으로부터 빛을 낸다. 또한 생각과 애착은 신체의 행동과 몸짓에 상응한다; 이것에 관련하여 잘 알려진 것은, 이것에는 자발적 측면과 비자발적 측면에 속하는 것들이 있다는 것이다. 그 이유가 심정으로부터 부끄러이 여김은 신체의 외적 몸짓인 무릎꿇는 자세를 산출한다. 더욱 더 심정의 부끄러이 여김은 땅에 납작 엎드리는 몸짓이다. 심정의 기쁨과 마음의 환희는 노래함과 기뻐환호함을 유발한다. 슬픔과 내적 울음은 통곡하는 울음을 생산한다; 그러나 애착으로부터의 결합은 키스함을 생산한다. 이 모두로부터 분명해지는 바, 외적 행동들이 상응하기 때문에, 그것들은 내적인 것들의 표시들이다는 것이다. 그리고 표시들 안에 내적인 것들이 있는 바, 이것이 표시들의 품질을 가져온다. 그러나 외적인 것들을 가지고 모조품을 만들기를 바라는 이들과 더불어서도, 그 외적인 것들 역시 표시들인 것만은 분명하다, 단지 그것들은 흉내내기, 위선, 사기침의 표시이다. 키스함이라는 행동도 표시이다. 모든 이는 이 행동을 통해 자신이 당신을 심정으로부터 사랑한다는 것이 의미되기를 원한다. 그 이유는 당사자는 키스함의 행동이 이런 사랑으로부터 온다는 것, 그리고 애착으로부터 결합함의 흔적이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이것 가지고 이웃에게 당신 안에 있는 선을 위하여 당신을 사랑한다는 것을 납득시키기를 바라는 경우도 있다. 그런데 사실상 자신을 위하여, 자신의 명예와 이득을 위하여, 따라서 그가 말한 선은 명분상의 선, 따라서 악으로 있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는 것은 누구나 한 번 이상 경험으로 알고 있을지 모른다. 그 이유가 목적이 자신인 자, 최소한 중간의 목적마저 선쪽에 있지 않은 자, 그런데 이 목적에 관련하여 타인과 결합하기를 바라는 자는 악 안에 있는 자이다.

그리고 그들에게 복을 빌어 주었다. 이는 그와 동시에 일어나는 기쁨(joy)을 의미한다. 이는 “복을 빔”의 의미가 성공, 행복을 경건하게 원함이다로부터; 고로 누군가가 떠날 때, 진정 기뻐함을 증명하는 것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리고 라반은 떠났고, 그의 장소로 돌아 갔다. 이는 라반에 의한 표현이 끝났음을 의미한다. 이는 “그의 장소로 되돌아 감”의 의미가 이런 상태로 감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결과적으로 이 말에 의해 라반에 의한 표현은 끝났다가 의미되어진다. 이상 모두로부터 다시 실감되는 것은 말씀에 있는 모든 것들은 일반적이든, 특수적이든 내면의 것들을 포함하고 있다는 것, 특히 내면의 것들은 인간과 더불어 있는 천사들의 지각에 매우 적합한 속성을 갖추고 있다는 점이다. 예를 들면: “빵”이 말씀에서 언급되어질 때, 천사들은 물질적 빵은 알아차리지 못하고 영적인 빵만을 지각한다; 고로 빵 대신 생명의 빵이신 주님을 지각한다. 이는 주님 자신도 요한복음서 6:33, 35에서 가르치시기도 한다. 그리고 그들이 주님을 지각하기 때문에, 그들은 주님으로부터 있는 것을 지각한다; 고로 온 인류를 향한 그분의 사랑을 지각한다; 그리고 그들은 그때 동시에 주님에 대한 인간의 상호적 사랑을 지각한다. 그 이유가 이 두 가지 것들이 생각과 애착의 하나의 생각에 부합되어 있기 때문이다.
성찬에서 빵을 받을 때 거룩한 상태에 있는 이들의 생각도 위와 다른 것은 아니다; 그 이유가 빵을 받아 먹을 때, 그는 빵만을 먹는다고 생각하지 않고 주님과 그분의 자비를, 그리고 그분을 사랑함에 관한 것, 그리고 이웃을 향한 선행에 관한 것을 생각할 것이기 때문이다; 또는 그는 회개나 삶을 수정함도 생각하는 기회를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상 이런 생각함들은 당사자가 가지는 거룩한 상태에 따라서, 특히 생각함뿐만 아니라 애착 측면에서 있는 거룩함의 상태에 따라 매우 다양하다. 어쨌든 이로부터도 분명한 한 가지는 (성찬을 받는 당사자와 함께 있는) 천사들은 말씀이 언급될 때 먹는 “빵”을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 그러나 주님에 대한 것, 더불어 사랑으로부터 있는 무수한 것들을 생각한다는 것이다. 포도주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성찬의 말씀에서 “포도주”의 언급이 있을 때, 천사들에게는 포도주를 암시하지 않고 이웃을 향한 선행을 암시받는다. 이러므로, 이 방법에서, 인간은 천국과의 연결이 있고, 천국을 통하여 주님과의 연결이 있기에, 빵과 포도주는 상징물이 되어 거룩한 상태에 있는 인간을 천국과 하나되게 하고, 천국을 통하여 주님과 하나되게 한다.
말씀 안에 있는 모든 것도 위와 다르지 않다, 그러므로 말씀은 인간으로 주님과 하나되게 하는 중매체이다; 그리고 이런 하나로 묶는 매체가 없으면, 천국은 인간에게 흘러들지 못한다. 다시 말해 매체가 없으면, 하나됨도 없는 바, 천국은 그 자체인간으로부터 아주 멀어질 것인 바, 인간은 더 이상 선쪽으로의 인도 받음도 없고, 아예 육체적, 세상적 선조차 사라지고 만다; 하여 모든 연결 고리, 아주 외적인 것마저 파괴되어 있는다. 그 이유가 주님께서는 양심 속에 있는 내적인 결합력을 수단으로 선 안에 있는 이들을 규율하시고, 악 안에 있는 이들은 외적 결합력만으로 통치하시기 때문이다. 만일 이런 결합력이 끊어진다면, 인간 모두는 미친 자 되어 있다. 마치 법의 두려움도 아랑곳하지 않는 자이거나, 자기 목숨에 대한 두려움도 없는 자이거나, 명예나 이득도 아랑곳하지 않는다거나 하여 내적, 외적 속박이 모두 깨져 멸망밖에 남는 것은 없게 될 것이다. 이상으로부터 말씀이 왜 존재하는지, 말씀의 속성이 무엇인지를 짐작하였을 줄로 안다.

창세기 제 30장

창세기 제 30 장

1, 2절. 그리고 라헬은 자기가 야곱에게 아이를 낳아주지 못함을 보았다, 그리고 그녀는 그의 언니에 대비하여 더 열성적이었다. 그리고 야곱에게 말했다, 나에게 아들들을 주시오. 그리고 그렇게 되지 않으면 나는 죽어 있다. 2 그리고 야곱은 라헬에게 화를 내었다, 그리고 그는 말했다, 내가 너로부터 뱃 속의 열매를 보류하시는 하느님을 대신하느냐? “그리고 라헬은 자기가 야곱에게 아이를 낳아주지 못함을 보았다”란 내면의 진리가 아직까지는 인정되지 못했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라헬은 그의 언니에 대비하여 더 열성적이었다”란 외적 진리가 인정되었던 것 같이 내적 진리가 인정되지 않음에 분개함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녀는 야곱에게 말했다, 나에게 아들들을 주시오”란 자연적 진리의 선으로부터 내면의 진리들을 가지기를 바라는 것을 의미한다. “만일 그렇게 되지 않으면 나는 죽어있다”란 그러므로 해서 다시 일어나지 못할 것임을 의미한다. “그리고 야곱은 라헬에게 화를 냈다”란 자연적 선쪽에서 분개함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는 말했다, 내가 …하느님을 대신하느냐”란 그것은 불가능이었음을 의미한다. “뱃 속의 열매를 보류하시는 분…”이란 이는 반드시 내적인 것으로부터 임에 틀림이 없다를 의미한다.

그리고 라헬은 자기가 야곱에게 아이를 낳아주지 못함을 보았다. 이는 내면의 진리가 아직까지는 인정되지 못했음을 의미한다. 이는 라헬이 내면의 진리에 대한 애착, 또는 내면의 진리 자체를 표현함으로부터 알게 된다; “낳음”이 신앙 안에서, 또한 행동에서 인정함이다로 부터도 알게 되는데 이는 아래에서 살핀다; 그리고 야곱이 자연적 진리로부터의 선을 표현함으로부터 알게 된다. “낳음(bearing)”이 신앙에서, 또한 행동에서 인정하다 인 이유는 말씀에서 “출생”에 의해 영적인 출생이 의미되기 때문에서 이다. 영적 출생은 진리와 선 안에서 신앙을 인정함이다; 여기서의 경우 신앙 안에서, 또한 행동 안에서 인정함, 즉 라헬에 의해 표현된 내면의 진리를 인정함이다. 여기서 신앙 안에서, 또한 행동에서 인정함이라 말한 이유는 인간은 그것에 따라 살 때까지 신앙을 인정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기 때문에서 이다. 행함을 위하여 습득되지 않은 신앙의 진리들, 그러나 그것들을 알기만 하려는데 목적이 있을 경우, 그 자체는 악과 거짓에 대한 애착과 연합되고 만다; 그 이유가 그것들이 그것을 배운 인간과 더불어 신앙 속에 있지 않고 내면적으로는 신앙에 반대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라헬은 그의 언니에 대비하여 더 열성적이었다. 이는 외적 진리가 인정되었던 것 같이 내적 진리가 인정되지 않음에 분개함을 의미한다. 이는 “더 열성적이었다”의 의미가 분개함을 표현한다로부터, 그리고 이것은 레아가 아들을 낳듯이 낳지 못했기 때문으로부터 알려진다. 그리고 라헬이 내면의 진리를; 그리고 여기서 “언니”인 레아가 외적 진리를 의미함에서 알려진다. 이 경우가 거듭나지는 이들과 더불어서는 이렇다: 이들은 내적 진리가 무엇인지를 아는 것을 배운다, 그러나 처음에 그들은 그것에 따라 사는 신앙을 가지고 내적 진리를 인정하지 않는다. 그 이유가 내적 진리들은 외적 진리가 이 진리에 상응해서 순응(개작, adapt)할 때까지 유입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내적 진리, 즉 모든 선은 주님으로부터 있다는 것, 인간 자신으로부터 있는 모든 선은 선이 아니다는 내적 진리를 예로 삼아 말해보자. 거듭남의 시작에서 이 진리가 알려질는지 모른다, 그러나 이 진리는 신앙 안에서, 또한 행동에서 인정되지 않는다; 그 이유가 이 진리를 신앙과 행동으로 인정하는 것은 이 진리가 그러하다고 지각을 가지는 것, 그리고 이것이 그렇구나를 의지력쪽에서 애착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지각함과 애착은 선으로부터의 모든 행동 안에 담겨 있다. 그리고 인간 자신인 것으로부터의 선은 자아만을 중시할 수밖에 없어, 타인에 앞서 자신을 우선시한다는 것, 더욱이 자기가 행하는 선이 자아의 선함 덕택이라 간주할 수밖에 없음도 지각한다. 이런 사항들은 이 진리가 외적 진리와 결합하기 이전, 실상 외적 진리 안에 담겨 있다; 그러나 자아를 중시함이 중단되고, 이웃을 중시함이 느껴지기를 시작할 때까지 이 내적 진리는 외적 진리와 결합될 수 없을 뿐이다. 이상으로부터 “내적 진리가 외적 진리가 인정받듯 아직은 인정되지 않고 있음에 분개함”에 의한 것을 이해했으리라 본다.

그리고 그녀는 야곱에게 말했다, 나에게 아들들을 주시오. 이는 자연적 진리의 선으로부터 내면의 진리들을 가지기를 바라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야곱이 자연적 진리로부터의 선을 표현함에서 알려진다; 그리고 “아들들”의 의미가 진리들이다에서 알게 된다; 여기서는 내적 진리들인데, 그 이유는 이 아들들이 내면의 진리를 표현하는 라헬로부터의 아들이기 때문이다.

만일 그렇게 되지 않으면 나는 죽어 있다. 이는 그러므로 해서 다시 일어나지 못할 것임을 의미한다. 이는 “죽어 있다”가 다시 생명으로 일어나지 못하는 것을 의미함으로부터 파악된다. 고대 시대 때에 아내들은 자기가 아들이든, 딸이든 낳지 못할 때, 자기는 죽어 있다고 자신을 불렀다; 그리고 그녀들 스스로 그러하다고 믿고 있었는데, 그 이유는 후손을 남기지 못하면 자기는 기억 속에 있지 않은 것이기 때문, 이는 마치 죽은 것이나 다름 없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아이를 못 낳는 여인들이 자신을 그렇게 부르고 믿은 것은 실상 세상적 측면에 그 원인들이 있다. 그러나 모두 각각의 원인은 그 원인 앞의 원인으로부터 출시된다. 고로 자연계의 원인은 영적 세계의 원인으로부터 그렇게 있는 것이다. 영적 세계의 원인은 선과 진리의 천국 결혼이다. 이 결혼에서 낳는 것은 신앙의 진리들과 선행의 선 외에 다른 출생은 없다. 이런 것들이 “아들들과 딸들”이고, 이것이 말씀 속의 “아들과 딸”에 의해서도 의미된다. 이런 출생들을 가지지 않은 누구이든, 즉 신앙의 진리들과 선행의 선들을 낳지 않는 자는 누구이든, 그는 마치 죽은 자나 다름 없다. 즉 그는 천국, 또는 생명쪽으로 다시 일어나지 못하는 죽은 자 사이에 있는다는 말이다. 이상으로부터 라헬의 이 말, “그렇지 않다면, 나는 죽어 있다”이 의미한 것을 알았을 것이다.

그리고 야곱은 라헬에게 화를 냈다. 이것이 자연적 선의 측면에서 분개함을 의미하는 데, 이는 “화를 냄”이 분개함을 의미한다로부터 (이는 아래에서 살핀다); 그리고 야곱이 자연 측면의 선이다로부터 분명해진다. 이 화를 냄이 “라헬을 향하여”라고 말해졌다. 그 이유는 라헬에 의해 표현되는 내면의 진리가 “야곱”인 자연적인 선에 의해 신앙과 행동에서 아직은 인정되지 않고 있기 때문에서 이다. 내적 의미에서 “화를 냄”이 분개함이 있음을 표시하는 이유는, 내면들을 향하여, 또는 천국을 향하여 승강함에 있는 모두 각각의 애착은 더 온순해지고, 마지막으로 천국적인 애착으로 바뀌기 때문이다. 글자에서 나타나는 것들, 여기서는 “화를 냄”이다는 표현은 상대적으로 거친 표현인데, 그 이유는 그것들은 자연적, 육체적이기 때문일 뿐, 그것들이 육체적, 자연적 인간으로부터 내적, 또는 영적 인간으로 승강할 경우 그것들은 결국 온순하고 상냥해지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글자 의미는 자연적 인간의 납득력에 잘 정박되고, 영적 의미는 영적 인간에 잘 정박되는 이유에서 이다. 이것이 “화를 냄”이 분개함을 의미하는 것도 보여준다. 진짜 영적 분개함(그리고 천적 분개함)은 자연적 성냄으로부터 파생되는 것은 아무 것도 없고, 열정의 내면적 본질로부터 있는다. 이 열정도 바깥쪽 형체에서 나타날는지 모른다, 그러나 내적 형체에서는 성냄이 아니고, 실로 성냄으로부터의 분개함조차 없다; 그러나 이 열정은 이것이 그러하지 않는다는 것에 대해 기도로 소원함이 동반되는 어떤 슬픔이다; 그리고 더 내면의 형체에서 이것은 선하고 참되지 않은 어떤 것 때문에 천국적 즐거움이 깨지는 것을 희미하게 느끼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말했다, 내가 …하느님을 대신하느냐. 이는 그것은 불가능이었음을 의미한다. 이는 “하느님을 대신하지 못함”이 불가능이다를 의미함으로 알게 된다; 그 이유가 “하느님”은 능력, 또는 힘으로부터 명명되기 때문; 그러나 “여호와”는 있음, 또는 실체로부터 명명된다. 이런 이유 때문에 말씀에서 주제가 진리일 경우, “하느님”이 언급되고, 선일 경우 “여호와”가 언급된다. 선이 서술되고 있는 동안, 능력은 진리를 서술한다; 그 이유가 선은 진리를 통하여 힘을 가지고, 진리를 통하여 선은 닥치는 모든 것을 수행한다. 이로부터 우리는 “내가 하느님을 대신하느냐?”의 말이 이것은 불가능이었음이 의미됨을 알게 된다.

뱃 속의 열매를 보류하시는 분. 이는 반드시 내적인 것으로부터 임에 틀림이 없다를 의미한다. 이는 내적 의미로부터 결과하는 단어들의 내적 의미로부터 알게 된다; 내적 의미에서 “뱃속의 열매”는 “출생”, 즉 신앙과 행동에서 진리와 선을 인정함을 의미한다 (3905항); 그리고 진리와 선의 결합도 의미한다. 이런 인정함과 결합은 외적 인간으로부터 공표할 수 없고, 오직 내적 인간으로부터 이다; 그 이유가 모든 선은 주님으로부터 내적 인간을 통하여 외적 인간으로 흐르기 때문이다, 이 때 외적 인간의 감각적인 것들을 수단으로 은근히 심어진 진리들이 채택된다, 그리고 인간으로 신앙과 행동에서 그것들을 인정하게 한다, 이 인정함이 당사자와 결합되게 하여 자기 것이 된다. 모든 선은 내적 인간을 통하여 주님으로부터 외적 인간의 기억 안에 모아진 진리들 안으로 흐른다는 것은 앞서 여러 차례 반복적으로 설명해왔다. (선의 이런 근원을 인정함이야말로 새 교회 교리의 근간일 것이다 역자 주.)

3-5절. 그리고 그녀는 말했다, 내 하녀 빌하를 보라, 그녀에게 오라, 그녀가 내 무릎에 (아이를) 낳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녀로부터 나까지도 건축하리라. 4 그리고 그녀는 그에게 그녀의 하녀 빌하를 여인으로 주었다, 그리고 야곱은 그녀에게 왔다. 5 그리고 빌하가 임신했다, 그리고 아들을 낳았다. “그리고 그녀는 말했다, 내 하녀 빌하를 보라”란 자연적 진리와 내면의 진리 사이에 있는 확인하는 수단들을 의미한다. “그녀에게 오라”란 이것에는 결합하는 능력이 있다를 의미한다. “그리고 그녀는 내 무릎에 (아이를) 낳아 줄 것이다”란 내면의 진리에 대한 애착 안에 인정함이 있고, 이 인정함으로부터 결합이 있다를 의미한다. “그리고 나는 그녀로부터 나까지도 건축할 것이다”란 그것에 의해서 이 애착은 생명을 가짐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녀는 그에게 그녀의 하녀 빌하를 여인으로 주었다”란 확언하는 수단이 인접하였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빌하는 임신했다, 그리고 야곱에게 아들을 낳았다”란 받아들임과 인정함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녀는 말했다, 내 하녀 빌하를 보라. 이는 자연적 진리와 내면의 진리 사이에 있는 확인(확언, affirm)하는 수단들을 의미한다. 이는 “하녀,” 또는 “몸종”이 외면의 인간에 속하는 지식들에 대한 애착이다로부터 분명해진다; 그리고 이 애착은 내면의 진리들이 자연적, 또는 외적 진리들과 결합함을 위한 수단들이기 때문에, 여기서 “몸종”에 의해 그것들 사이에서 있는 확인하는 수단들이 의미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수단들의 품질을 빌하가 표현한다. 라헬과 레아가 자손을 생산할 의도로 야곱에게 여인으로 준 몸종들을 수단으로 표현되고 의미되는 것은 다만 어떤 것을 위해 편의(service, 조력, 도움)를 제공하는 정도이다; 이 대목에서일 경우, 내면의 진리가 외적 진리와 결합하는 수단을 제공함이다; 그 이유가 라헬은 내면의 진리를, 레아는 외적 진리를 표현하기 때문, 그리고 야곱의 열두 아들들을 수단으로 인간이 거듭나지는 동안, 또는 (인간 안에서) 교회가 만들어지는 동안, 그 인간이 영적이고 천적인 것쪽에 입문하는 것을 조력하는(serve) 일반적, 또는 기본적인 사항들이 의미되기 때문, 또한 인간이 거듭나지거나 교회가 인간 안에서 만들어질 때 (즉, 죽은 상태로부터 살아 있는 상태로, 또는 육체적일 뿐인 인간의 수준에서 천국적인 인간의 수준이 되어갈 때) 그는 주님에 의해 인도하심에 따라 많은 상태들을 통과하기 때문이다. 이 일반적 상태들이 “열두 아들들”, 이후 “열두 지파들”로 불리우고 있다; 이런 이유로 “열두 지파들”은 신앙과 사랑의 모든 것들을 의미한다; 그 이유가 일반적(포괄적) 사항에는 세부적, 특수적 모든 사항들이 포함되기 때문이다. 이 후자가 전자에 관련하여 거듭남을 위한 어떤 것을 생산하는 것이다.
인간이 거듭나질 때, 내적 인간은 외적 인간과 결합한다, 즉 내적 인간의 선들과 진리들이 외적 인간의 선들과 진리들과 결합한다는 말이다; 그 이유가 인간은 진리들과 선들로부터 인간이기 때문이다. 이런 것들의 결합에는 수단은 필수적이다. 수단은 이쪽에서는 이런 것들을, 다른쪽에서는 다른 어떤 것을 파생되게 하는 것들이다. 그리고 이것은 이쪽을 우선시하여 응하면, 다른쪽은 하위에 둘 수밖에 없는 결과가 동반된다. 이런 수단들이 “하녀”에 의해 의미되는데, 내적 인간쪽에서의 수단은 라헬의 하녀에 의해; 외적 인간쪽에서의 수단은 레아의 하녀에 의해서이다.
결합을 위해 수단이 반드시 있어야만 하는 이유는 자연적 인간은 그 자체일 경우 영적 인간에 조금도 동의하지 않기 때문, 아마 반대되어 있는 만큼 불일치하고 있다고 말하는 편이 더 나을지 모른다. 그 이유가 자연적 인간은 자신과 세상을 중시하고 사랑하지만, 영적 인간은 자신과 세상이 영계에서의 쓸모 있음을 증진하는데 이바지할 경우를 뺀다면 자신과 세상을 중시하거나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다. 즉 영적 인간은 (영계를 위해) 쓸모 있는지 여부와 영계에 목적을 두고 자신과 세상을 조력자로 간주하고 사랑도 한다. 자연적 인간은 자신의 위엄이 드높아져 타인 위에 군림하는 것을 자신의 생명으로 간주한다. 그러나 영적 인간은 겸비함에 있을 때, 작은 자임을 천명할 때 생명을 가진 것으로 여긴다. 영적 인간은 자신의 높은 지위나 명성이 이웃에, 사회에, 교회에 도움을 주는 수단이 되지 않으면 자신의 지위나 명성을 무시해버린다. 다시 말해 자신이 지니게 된 명성과 지위를 자신을 위하여서가 아닌 그가 목적으로 삼는 쓸모 있음을 위하여서만 중시할 뿐이다. 자연적 인간은 다른 이들보다 더 부자이고, 세상의 재산을 소유하고 있을 때, 자기는 축복받은 자라고 여긴다. 그러나 영적 인간은 진리와 선에 관한 지식을 많이 지닐수록 자기는 더욱 부자라고 여기고, 특히 자신이 진리들에 따라 선을 실행하는 만큼에서 이다.
위와 같은 간단한 생각만 가지고도 자연적 인간과 영적 인간은 각각의 목적 측면에서 얼마나 반대되어 있는지 잘 드러난다. 그럼에도 이 두 인간은 결합되어질 수 있다는 것, 이 결합이 성사되는 것은 외적 인간의 것들이 내적 인간의 목적들에 종속되어 도움을 주게 만들어질 때이다. 그러므로 인간이 영적 인간으로 되기 위하여서는 외적 인간의 것들이 내적 인간의 방향에 고분고분하게 따라주어야 할 필요가 있다. 다시 말해 목적이 자기와 세상을 총애함을 벗어던지고, 이웃과 주님의 왕국을 사랑함을 입어야 한다는 말이다. 전자가 벗어지고 후자가 입혀지는 것은 수단을 동원하지 않고서는 결코 성사될 수 없다. 이 수단이 “하녀”에 의해 의미되고, 세부적, 특수적 수단은 하녀로부터 출생하는 “네 아들들”에 의해
의미되고 있다.
첫 번째 수단은 이것이 이렇다 하고 확언(확인)하는 것, 또는 내적 진리의 확인이다. 이 확언이 올 때, 인간은 거듭남의 시작 안에 있는다; 선이 내적 인간에 의해 작업되면서 확인함을 야기한다. 이 선은 확언이 있기 전에서는 부정적인 것 안으로, 심지어는 의심이 가득할 때는 흘러들 수 없다. 그러나 확언함이 있은 이후 이다면, 이 선은 애착을 수단으로 자체를 명백히 한다, 다시 말해 인간이 진리에 애착함과 더불어, 또는 진리와 더불어 기뻐할 때, 이 선은 자체를 명백히 드러낸다는 말이다; 처음에는 진리를 알게됨에서 이고, 그다음 진리에 따라 행동하면서 이다. 쉬운 예로 주님은 인류를 구원하신다 라는 말을 생각해보자. 이 말이 인간에 의해 확언함이 있지 않을 경우, 그가 말씀으로부터, 또는 주님에 관해 교회에서 배웠던 모든 것들, 기억 속의 지식들 중에 그의 자연적 기억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은 그의 내적 인간과 결합되어질 수 없다, 다시 말해 거기 신앙으로부터 있을 수 있는 모든 것들과 결합될 수 없다. 고로 애착이 흘러들 수 없고, 심지어 인간의 구원함에 이바지하는 이런 진리의 일반적 개념 안으로 조차 애착은 흘러들 수 없다. 그러나 확언함이 있을 때, 거기에는 무수한 사항들이 보태어지고, 안으로 흐르는 선을 가득채운다; 그 이유가 선은 주님으로부터 계속적으로 흘러들지만, 확언함이 없는 곳에는 받아들임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확언함은 첫 번째 수단이고, 마치 이 수단은 주님으로부터 안으로 흘러드는 선의 첫 거처인 듯 하여 있다. 이런 경우는 위의 간단한 명제 외에 신앙의 진리들이라 불리우는 여타 진리들에도 똑같이 적용된다.

그녀에게 오라. 이는 이것에는 결합하는 능력이 있다를 의미한다. 이는 “누군가에게 옴”이 결혼인 것이 언급될 때인 경우, 결합함을 말한다로부터; 여기서의 경우, 확언과 더불어 있는 결합력이다; 그 이유는 결합의 첫째는 이것이 그렇다 하는 확언과 더불어 있음에 틀림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녀는 내 무릎에 (아이를) 낳을 것이다. 이는 내면의 진리에 대한 애착 안에 인정함이 있고, 이로부터 결합이 있다를 의미한다. 이는 “낳다”가 신앙과 행동에서 인정하는 것이다로부터; 그리고 “무릎,” 또는 “넓적다리”가 부부의 사랑(conjugial love)에 속하는 것들이다로부터; 고로 신앙의 진리가 사랑의 선과 결합함에 속하는 것들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 이유가 이 결합은 주님의 왕국에 있는 혼인의 원리 자체이기 때문이다. 고로 “내 무릎에 낳는다”란 라헬에 의해 표현된 내면의 진리로부터 인정함을 의미한다. 아내의 동의하에 하녀로부터 출생하는 아들과 딸이 합법적으로 인정받기 위해 주인의 무릎에서 출산하는 고대인의 관습은 영적이고 천적인 것들을 의미하고 표현한 의식에 그들의 예배가 존재했던 고대 교회로부터 파생되었다. 이 교회에서, “낳는다”는 진리를 인정함을 의미하고, “무릎”은 부부의 사랑, 고로 애착으로부터 있는 선과 진리의 결합을 의미했기 때문에, 아내가 불임했을 때, 그녀가 살아 있는 자로 다시 일어나지 못하는 죽은 자로 낙인 받지 않게 하려는 의도로 (하녀로부터 자기 무릎에 낳게 하는) 의식이 용인되어 있었다.
내적 의미에서 이런 말을 수단으로 확언, 또는 인정함의 두 번째 단계가 의미되었는데, 이는 애착으로부터 있는 확언과 인정이다; 그 이유가 결합이 거행되기 위하여 확언, 또는 인정함의 안쪽에 애착이 반드시 있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모든 결합은 애착을 수단으로 결과되고, 애착 없이 진리는 생명을 가지지 못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이웃은 사랑되어져야만 한다는 진리, 선행은 이 진리에 의해 존립된다는 것, 그리고 선행 안에 영적 생명이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은 만일 애착이 이 진리에 동행하지 않으면 (또는 시중들어 주지 않으면), 즉 이 진리들이 심정으로부터 뜻함이 없으면, 실상 알몸 상태의 수준, 즉 기억 속의 지식으로 덩그러니 있을 뿐이다. 애착 없이 이 진리들은 살아 있지 않다. 다시 말해 제아무리 잘 알고 있다 해도 그럼에도 그는 이웃을 사랑하지 않고, 여전히 이웃보다 자기를 더 사랑한다. 하여 그는 자연적 생명만 지녔을 뿐이고 영적 생명 안에 있는 것은 아니다. 바꿔말해 자연적 애착이 영적 애착을 다스리고 있다. 자연적 애착이 통치하는 한, 그 인간은 “죽은 자”라고 불리우는데, 그 이유는 천국의 생명에 반대되는 생명(삶)을 가지고 있기 때문, 그리고 천국의 생명이 생명 자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그녀로부터 나까지도 건축할 것이다. 이는 그것에 의해서 이 애착은 생명을 가짐을 의미한다. 이는 “건축하다(build)”가 죽어가는 것이 아님, 결과적으로 다시 일어남, 또는 살아 있게 됨을 의미함에서 분명해진다.

그리고 그녀는 그에게 그녀의 하녀 빌하를 여인으로 주었다. 이는 확언하는 수단이 인접하였음을 의미한다. 이는 빌하가 표현하는 것, 그리고 하녀가 의미하는 것이 확언하는 수단이다로부터; 그리고 “여인으로 줌”이 인접하는 것이다로부터 분명해진다.

그리고 야곱은 그녀에게 왔다. 이것은 결합되어졌음을 의미하는데, 이는 누군가에게 “들어감, 또는 옴”이 결혼인 것을 서술할 때, 결합을 말함에서 알게 된다.

그리고 빌하는 임신했다, 그리고 야곱에게 아들을 낳았다. 이는 받아들임과 인정함을 의미한다. 이는 “임신하다”의 의미가 받아들임이다로부터; 그리고 “낳는다”의 의미가 인정함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 이유가 영적 의미에서 임신과 출생은 선으로부터 진리를 받아들임, 결과적으로 인정함이기 때문이다.

6절. 그리고 라헬은 말했다, 하느님께서 나를 판단하셨다, 그리고 또한 내 음성을 들으셨다, 그리고 나에게 아들을 주셨다. 그러므로 그녀는 그의 이름을 단이라 불렀다. “그리고 라헬이 말했다, 하느님께서 나를 판단하셨다, 그리고 또한 내 음성을 들으셨다”란 최고 의미에서 공정과 자비를, 내적 의미에서 신앙의 거룩함을, 외적 의미에서 생활의 선을 의미한다. “그리고 나에게 아들을 주셨다”란 이 진리가 인정되어졌음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그녀는 그의 이름을 단이라 불렀다”란 그것의 품질을 의미한다.

그리고 라헬이 말했다, 하느님께서 나를 판단하셨다, 그리고 또한 내 음성을 들으셨다. 이는 최고 의미에서 공정과 자비를; 내적 의미에서 신앙의 거룩함을; 외적 의미에서 생활의 선을 의미하는데, 이는 “하느님이 나를 판단하심”, 그리고 “내 음성을 들으심”의 의미로부터 분명해진다. “하느님이 나를 판단하심”이 주님의 공정(justice)을 의미하는 것은 추가 설명이 필요치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분이 내 음성을 들으심” 역시 마찬가지 이다; 그 이유는 주님은 공정함으로부터 모두를 판단해주시기 때문, 그리고 자비하심으로부터 모든 것을 들으시기 때문이다. 그분은 신성한 진리로부터 이시기 때문에 공정함으로부터 판결하신다, 그리고 그분은 신성한 선으로부터 이기 때문에 자비하심으로부터 들으신다; 공정하심으로부터 그분은 신성한 선을 받지 않는 이들을 판단하신다; 그리고 자비하심으로부터 그분은 행동하는 것들을 들으신다. 그러나 여전하신 것은, 그분이 공정함으로부터 판결하실 때, 동시에 자비로부터도 있으신다는 것이다; 그 이유가 모든 신성한 공정 안에 자비하심이 있기 때문이다, 마치 신성한 진리 안에 신성한 선이 있는 것과 같다. 이 대목은 신비함들이 너무나 깊어서 이런 식의 몇 마디 말로 마감하기에는 너무나 벅차므로 차후 주님의 신성한 자비로부터 별도로 말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하느님께서 나를 판단하셨다, 그리고 또한 내 음성을 들으셨다”에 의해 내적 의미에서 신앙의 거룩함이 뜻해지는 이유는 진리 측면이라 단언되는 신앙이 신선한 공정에 상응하기 때문; 그리고 선 측면인 거룩함은 주님의 신성한 자비에 상응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 “판단하는 것”, 또는 “판결”이 신앙의 진리 측면을 서술하기 때문, 그리고 “판단하시는” 분이 하느님이다고 말해졌기 때문에, 이것은 선인 것, 또는 거룩한 것을 표시한다. 고로 신앙의 거룩함은 이 표현들 모두에 의해 의미되는 것임이 분명해진다; 그리고 전체로서의 이 하나가 그것들 둘 다에 의해 의미되기에, 두 표현들은 “그리고 또한”이라는 말로 묶여져 있다. 외적 의미에서 생활의 선이 의미되는 것 역시 상응으로부터 인데, 그 이유는 생활의 선이 신앙의 거룩함에 상응하기 때문이다. 내적 의미 없이는 “하느님이 나를 판단하셨다, 그리고 또한 들으셨다”에 의해 의미되는 것이 알아질 수 없다는 것은 하나의 생각을 이해력에 표출해보려 해도 글자 의미에서는 모순되지 않게 표출될 수 없다는 것으로부터도 분명해진다.
이 구절, 그리고 “요셉”의 출생에 이르기까지의 구절에서 “하느님”이 명명되고, 이 구절 앞의 (네 아들의 출생, 29:31-35)에서는 “여호와”가 명명되어진 이유는 본 장에서는 영적 인간의 거듭남이 취급되나, 앞 29장에서는 천적 인간의 거듭남이 취급되었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영적 인간으로부터 있는 신앙의 선이 주제가 될 경우, “하느님”이 명명되어지고, 천적 인간으로부터 있는 사랑의 선이 주제일 경우, “여호와”가 명명되기 때문이다. 29장에서의 이야기는 유다쪽으로 내려가면서 있었는데, 거기서 유다는 천적 인간을 표현했다; 그러나 30장에서는 이야기가 요셉쪽으로 내려가면서 계속되는데(23, 24절), 그는 영적 인간을 표현하게 된다. 유다쪽으로 이어지면서 “여호와”가 명명된 것은 29장 32, 33, 35절에서 발견된다. 요셉쪽으로 내려가며 이어지는 이야기에서 “하느님”이 명명된 것은 30장 6, 8, 17, 18, 20, 22, 23절에서 발견된다; 그리고 그 후에 “여호와”가 다시 명명되고 있는데, 그 이유는 주제가 영적 인간으로부터 천적 인간으로 바뀌기 때문이다. 이런 대목은 구절들 안에 감추여놓인 비밀이다. 그리고 내적 의미를 모르면 아무도 알 수 없는 사항이기도 하다, 또한 천적 인간이 누구인지, 영적 인간이 누구인지를 먼저 알고 있지 않으면 알 도리가 없다.

그리고 나에게 아들을 주셨다. 이는 이 진리가 인정되어졌음을 의미한다. 이는 “아들”의 의미가 진리이다로부터; 그리고 “아들을 줌”의 의미가 이 진리를 주는 것이다로부터, 이는 이것을 인정함과 같은 말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 이유가 인정한 모든 진리는 주님에 의해 주어지기 때문이다. “아들을 줌”은 “낳는다”를 당연히 포함한다. 그리고 “낳는다”는 인정함인데 이미 살폈다.

그러므로 그녀는 그의 이름을 단이라 불렀다. 이는 그것의 품질을 의미한다. 이는 “이름”, 그리고 “이름을 부름”의 의미가 품질(quality)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품질 자체는 이름 “단(Dan)” 안에 들어 있다. 그 이유는 그가 “판단함”으로부터 그렇게 불리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 이름은 라헬의 모든 말, 즉 “하느님이 나를 판단하셨다, 그리고 또한 내 음성을 들으셨다”에 의해 의미된 것, 즉 생활의 선, 그리고 신앙의 거룩함, 최고 의미에서 주님의 공정하심과 자비하심의 의미도 포함하고 있다. 이 의미는 “단”에 의해, 그리고 단으로부터 “단지파”라고 불리우는 지파에 의해 표현되는 교회의 일반적 원리이다. 이 일반적 원리는 인간이 거듭나질 수 있기에 앞서, 또는 교회로 만들어지기 이전, 당사자에 의해 확언, 또는 인정함이 있어야 하는 첫 번째 원리이다. 이 사항들이 확언되거나 인정되지 않으면, 신앙과 생활 속의 이외 다른 사항도 받아들임이 가능해질 수 없다, 그러므로 확언되어질 수도 없고, 인정함은 더 더욱 가능할 수 없다. 그 이유가 자신과 더불어 신앙만을 확언한 자, 그리고 신앙의 거룩함, 즉 선행(이것이 신앙의 거룩함이다)을 확언하지 않는 자는 그가 확언한 것 역시 생활의 선, 즉 선행의 일에 의해 확언하지 않기 때문, 즉 신앙의 본질에 흥미가 없다, 하여 결국 그것을 거절하고야 말기 때문이다. 하여 확언함과 더불어 인정함을 동반하는 것이 거듭나지려는 이들과 더불어서는 첫 번째 원리이지만, 거듭나져 가고 있었던 이들과 더불어서는 마지막 번째가 된다. 그러므로 거듭나지려는 이들에게 “단”은 첫 번째에 해당되고, 거듭 나져 온 이들에게 “요셉”은 마지막 번째이다; 그 이유가 “요셉”은 영적 인간 자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거듭나져온 인간에게 “요셉”은 첫 번째이고, “단”은 마지막 번째인데, 그 이유는 거듭나지려는 이들은 이것이 그렇다 하는 확언, 즉 신앙은 거룩하다는 것, 생활 속에 선이 있어야만 한다는 것을 확언함으로부터 거듭남을 개시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적 인간인 거듭난 인간은 영적 선 자체 안에 있다, 그리고 영적 선 자체로부터 그는 이런 확언함은 마지막에 해당하는 것으로 간주한다; 그 이유가 이 사람과 더불어 있는 신앙의 거룩함과 생활의 선은 이미 확증되어 왔기 때문이다.
“단”은 거듭나려 할 때 첫 번째 사항임에 분명한 확언함이다는 것은 위의 설명 외에 “단”이 언급되는 다른 구절들로부터 더 확인된다. 아래 구절은 야곱, 예언하는 그때 당시 그는 이스라엘인데, 그의 아들들에 관한 예언들 중 단에 관한 대목이다:
단은 이스라엘 지파의 하나로 자기 백성들을 판결할 것이다; 단은 길 위의 뱀, 좁은 길 위의 독사일 것이다, 하여 말의 뒤꿈치를 문다, 그리고 말 위의 승마자를 뒤쪽으로 떨어지게 한다. 나는 당신의 구원을 기다립니다, 오 여호와시여 (창. 49:16-18).
여기서 “단”은 진리를 확언함을 표시한다, 이에 관련하여 말해지는 바, 누군가가 감각적인 것들로부터 진리에 관련하여 추론할 때, “단”은 “길 위에 있는 뱀, 좁은 길에 있는 독사이다”; 누군가가 가장 낮은 지적인 것들 또는 기억 속의 지식에게 의견을 물을 때, 그리하여 그것들로부터 결말을 끌어낼 때, “말의 뒤꿈치를 물고, 승마자를 뒤쪽으로 떨어지게 한다.” 이런 이유로 말해지는 바, “나는 당신의 구원을 기다립니다, 오 여호와시여” 이다. “뱀”은 신성한 신비함들에 관하여 감각적인 것들과 기억 속의 지식들로부터 추론하는 인간이다; 그리고 “길” 또는 “좁은 길”은 진리를 의미한다; 그리고 “말의 뒤꿈치”는 가장 낮은 지적인 것들 또는 기억 속의 지식들이다; 그 이유가 “말”은 지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몸체에서 가장 낮은 부분이 “뒤꿈치”이다.
다시 열두 지파들에 관한 모세의 예언에서:
단에 관해 그가 말했다, 단은 사자의 새끼이다, 그는 바산으로부터 껑충 뛴다 (신. 33:22).
“사자”는 말씀의 내적 의미에서 교회의 힘인 교회의 진리를 의미한다, 그 이유는 진리로 싸우고 정복하기 때문이다; 그런고로 사자의 새끼는 진리에 관련해 첫 번째 있어져야 하는 것, 즉 확언과 인정함을 표시한다. “바산으로부터”라고 말해지는 이유는 확언과 인정함이 자연 (평면의) 선으로부터 있기 때문이다. 예레미야서에서:
네 심정을 사악함으로부터 씻어내라, 오 예루살렘아, 하여 너는 구원될는지 모른다. 네 불법에 관한 생각들을 네 한가운데에서 얼마나 오랫동안 숙박하게 할 작정이더냐? 그 이유가 음성이 단으로부터 선포하기 때문, 그리고 에브라임 산으로부터 불법을 듣게 하기 때문이다
(예. 4:14, 15);
“단으로부터”는 확언되어지기로 되어 있는 진리를 표시한다; “에브라임 산으로부터”는 이 확증함이 애착으로부터 이다를 표시한다.
예레미야서에서:
평화를 기다리나 좋은 것이 없다; 그리고 치료될 때를 기다리나 (좋은 것이 없다), 그리고 잘 보라 공포이다. 말의 콧김을 뿜음이 단으로부터 들려졌다; 강한 자의 말의 울음 소리가 온 토지를 전율케 했다; 그리고 그들은 와서 토지와 거기로부터 가득한 것, 도성과 그 안에 거주하는 그들을 삼켰다. 그 이유가 잘 보라 나는 너희 사이에 뱀, 독사를 보낼 것이다, 이에 맞서는 마술은 없다, 그리고 그것들이 너희를 물을 것이다 (예8:15-17);
“말의 콧김을 뿜는 것이 단으로부터 들려졌다”는 비 확언적인 것으로부터(즉 부정적 방식으로) 진리에 관해 추론함을 표시한다; “전율한 토지”, 그리고 그들이 “토지의 가득한 것을 삼킴”은 교회와 교회 속의 모든 것들을 표시한다; 그 이유가 비 확언된 것으로부터 진리에 관해 추론하는 이들은 신앙의 모든 것을 파괴하기 때문이다; “뱀, 독뱀”은 추론함을 표시한다.
에스겔서에서:
오고 있는 단과 야완은 네 장터에서 빛나는 철을 주었다; 육계와 창포가 네 거래 물품 안에 있었다 (겔. 27:19);
위는 두로를 취급한 대목이다, 두로에 의해 진리와 선에 관한 지식이 의미된다. “단”은 확언되는 처음의 진리들을 표시한다; “장터(fairs)”와 “거래 물품(trading)”은 진리와 선에 관련한 습득물을; “빛나는 철”은 (시간적으로) 처음에 있는 진리인 자연적 진리를; “육계”와 “창포”는 선을 있게 한 자연적 진리이다.
아모스서에서:
그 날에 아릿따운 처녀들과 젊은 이들이 목마름으로 시들해질 것이다. 사마리아의 죄있는 것(우상) 을 두고 맹세한 그들, 그리고 말했다, 네 하느님 오 단이 살아 있다; 그리고 브엘세바의 길이 살아 있다; (이렇게 말한) 그들까지 엎드려질 것이고, 다시 일어나지 못할 것이다
(암. 8:13, 14);
“네 하느님, 오, 단이 살아 있다, 그리고 브엘세바의 길이 살아 있다”는 그들이 신앙의 모든 것들과 신앙에 관한 교리를 부정함에 있다를 표시한다. 위에서 신앙의 모든 것들을 부정함이 의미된 이유는 단은 가나안의 토지의 마지막 경계(가장 북쪽), 그리고 브엘세바는 가나안의 첫 번째 토지, 또는 한가운데, 또는 가장 안쪽(가장 남쪽)이었기 때문에서 이다; 또한 “가나안의 토지”에 의해 주님의 왕국이 표현되고 의미되었기 때문, 고로 교회도 표현되고 의미되었기 때문, 그리고 사랑과 신앙의 모든 것들 역시 표현하고 의미되었기 때문, 그 이유는 이것들이 주님의 왕국과 교회 속에 있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가나안의 토지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은 그것들의 거리, 위치, 경계들에 따른 것조차도 표현적이었다.
예루살렘이 정식으로 있기 전, 토지의 가장 안쪽, 또는 한가운데, 즉 첫 번째 경계는 브엘세바였는데, 그 이유는 거기서 아브라함과 이삭이 거주했기 때문에서 이다; 그러나 토지의 가장 바깥, 즉 마지막 경계는 단이었다; 그러므로 한 복합체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이 의미될 경우, “단으로부터 브엘세바까지”라고 말해졌다. 이를 사무엘하서에서 읽어보자:
사울의 가문으로부터 왕국이 옮기는 것, 그리고 이스라엘과 유다 위에, 단으로부터 브엘세바에까지 조차에서 다윗의 왕좌가 세워지는 것 (삼하. 3:10).
사무엘하서에서:
단으로부터 브엘세바에 이르기까지 모든 이스라엘이 모였다 (삼하. 17:11).
그리고 다시:
다윗이 요압에게 말했다, 단으로부터 브엘세바에 이르러 이스라엘의 모든 지파들을 통과해가라 (삼하. 24:2, 15).
열왕기상서에서:
유다와 이스라엘, 단으로부터 브엘세바에 이르러 모든 이 각자가 자기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안전하게 거주했다 (왕상. 4:25).
위 표현은 역사적 의미에서 가나안의 토지의 모든 것들을 뜻했다; 그러나 내적 의미에서는 주님의 왕국의 모든 것들을, 그리고 교회의 모든 것들 역시 뜻한다.
“단”을 살피는 앞의 대목에서 “단”은 첫 경계이다 라고 말했고, 또한 마지막 경계이다 라고도 말했는데, 그 이유는 신앙과 선행이 인간과 더불어 시작 단계에 있을 때, 진리와 선을 확언함은 모든 사항들 중에서 처음에 해당되기 때문, 그러나 신앙과 선행 안에 있는 이들과 더불어서는 이 확언은 마지막 단계에 있기 때문이다. 또한 가나안의 토지가 상속분으로 나뉠 때 마지막 몫이 단에게 할당되었다 (여. 19:40 이하 등등); 그 이유가 제비를 던짐이 여호와 앞에서 이었기 때문이다 (여. 18:6); 그런고로 각 지파가 표현하는 것에 따라 제비뽑아진 것이다.
그리고 몫이 지파들 사이에서 있게 단에게 떨어지지 않았다는 것, 그러나 지파들의 경계선들 넘어이었다는 것 (사. 18:1), 단 지파는 날인되는 만 이천 명의 지파들에 관한 언급이 있는 계시록서에서 요한에 의해 생략되었다는 것 (계. 7:5-8), 이런 기록이 있는 이유는 진리를 확언함, 또한 선을 확언함이 확언함 자체로 끝나 더 이상의 발전이 없는 이들은 “날인된” 자들 안에, 즉 주님의 왕국 안에 없기 때문이다. 최악질의 인간이라 해도 진리들과 선들을 아는 것은 할 수 있고, 또한 그것이 그러하다고 확언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러나 진리를 확언함의 품질은 각자 삶으로 증명해진다.
“단”은 창. 14:14에서 경계선으로서 언급되었다; 이 구절은 아브라함이 적을 멀리까지 뒤쫓을 때의 마지막 장소로서 언급되는데 위와 비슷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단”이라 불린 도성은 그 때 당시 단의 후손들에 의해 실지로 건축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 후에 이다 (여. 19:47; 사. 18:29); 그럼에도 그때조차 이 도성은 가나안의 토지로 들어간다는 측면에서는 첫 경계선이라고, 나간다는 측면에서는 마지막 경계선이라 불리웠다; 그리고 토지의 가장 안쪽은 헤브론이었는데, 그 후에 아브라함과 이삭이 거주한 브엘세바가 되었다.

7, 8절. 그리고 그녀는 다시 임신했다, 그리고 빌하, 라헬의 하녀는 야곱에게 두 번째 아들을 낳았다. 8 그리고 라헬은 말했다, 하느님의 고투하심들을 가지고 나는 내 언니와 맞붙었다, 그리고 나는 이겼다. 그리고 그녀는 그의 이름을 납달리라 불렀다. “그리고 그녀는 다시 임신했다, 그리고 빌하, 라헬의 하녀가 낳았다”란 받아들임과 인정함을 의미한다. “야곱에게 둘째 아들을…”이란 두 번째의 일반적 진리를 의미한다. “그리고 라헬은 말했다, 하느님의 고투하심들을 가지고 나는 내 언니와 맞붙었다, 그리고 나는 이겼다”란 최고의 의미에서 힘을, 내적 의미에서 승리가 있는 시험을, 외적 의미에서 자연적 인간이 저항함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녀는 그의 이름을 납달리라 불렀다”란 그것의 품질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녀는 다시 임신했다, 그리고 빌하, 라헬의 하녀가 낳았다. 이는 앞 구절에서 살핀 바와 마찬가지로 받아들임과 인정함을 의미한다. 이는 “임신함”의 의미가 받아들임이다로부터; 그리고 “낳다”의 의미가 인정함이다로부터; 그리고 또한 “하녀”의 의미가 “도움을 주는 수단”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 이유가 여기서의 주제는 내적 인간과 외적 인간의 결합을 위하여 섬김에 있는 두 번째 일반적 수단이기 때문이다.

야곱에게 둘째 아들을… 이는 두 번째의 일반적 진리를 의미한다. 이는 “아들의 의미가 진리이다로부터 분명해진다. 여기서의 의미가 일반적 진리인 것은 앞에서 말한 것, 즉 야곱의 열두 아들, 그리고 이들로부터 열두 지파라 불리우는 지파들이 교회의 일반적 사항들, 또는 교회의 신앙과 사랑, 또는 진리와 선으로부터의 일반적인 것들이어서, 그들에 의해 이 사항들이 표현되고 의미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반대적 의미 역시 표현하고 의미하는데, 이는 신앙과 사랑으로부터가 아닌 것, 즉 거짓과 악으로부터 있는 모든 사항들이고, 이는 이후 등장할 것이다.

그리고 라헬은 말했다, 하느님의 고투하심들을 가지고 나는 내 언니와 맞붙었다, 그리고 나는 이겼다. 이는 최고의 의미에서 자신의 힘을, 내적 의미에서 승리가 있는 시험을, 외적 의미에서 자연적 인간이 저항함을 의미한다. 이는 “하느님의 고투하심(wrestlings of God)”과 “맞붙었음(wrestling)”의 의미가 시험들이다로부터 분명해진다; 그 이유가 시험들은 내적 인간과 외적 인간, 또는 영적 인간과 자연적 인간이 맞붙는 것밖에 더 아니기 때문이다. 맞붙는 이유는 각각은 상대쪽을 지배하기를 바라고 있기 때문, 그런데 누가 지배자인지가 분명치 않을 때, 전투는 발발하고, 이 전투가 여기서 “맞붙었다(씨름했다)”라고 말해진다. “이기는” 것은 정복하는 것임은 설명이 필요 없을 것이다.
최고 의미에서 이 말들이 자신의 힘을 의미하는 이유는 주님이 세상에서 인간 안에 계실 때, 그분 자신의 힘을 가지고 계속 시험들과 맞부딛치시어 정복하셨기 때문에서 이다; 그러나 인간의 경우는 주님의 경우와 다르다. 즉 인간은 어떤 영적 시험도 맞부닥쳐서 자신의 힘으로부터 시험을 정복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이유가 주님께서 인간 안에서 시험과 맞부닥치시어 정복해주시기 때문이다.
내적 의미에서 “하느님의 고투하심”과 “이김”이 인간이 정복하는 시험들을 표시한다는 것은 방금 앞에서 말한 것으로 분명할 것이다. 그러나 외적 의미에서 자연적 인간이 저항함이 의미되는 이유는 모든 시험은 그밖에 더 다른 것은 없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앞에서 말했듯이, 영적 시험들에서 내적 인간과 외적 인간, 또는 영적 인간과 자연적 인간, 어느쪽이 우월한지, 그리하여 어느쪽이 상대쪽을 지배할 것인지를 놓고 다툼이 있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이 둘은 서로에 반대되기 때문이다. 인간이 시험들에 있을 때, 당사자의 내적 인간, 또는 영적 인간은 천사들을 통하여 주님에 의해 통치되어진다; 그러나 그의 외적, 또는 자연적 인간은 지옥의 영들을 통하여 통치된다; 그리고 이 둘 사이에서의 전투가 인간에게는 시험들로서 지각되는 것이다. 인간이 거듭나질 수 있는 조건, 즉 신앙과 생명 안에 있을 경우, 그는 시험들을 정복할 것이다; 그러나 이런 조건을 갖추지 않은 경우라면, 그는 시험에서 굴복당한다. 자연적 인간이 저항한다는 것은 그녀가 “자기 언니와 맞붙었다”라고 말해지는 대목에 의미되어 있는데, 그 이유는 여기서의 언니는 “레아”이고, 레아는 외적 인간에 애착함을 의미하고 있고, 라헬은 내적 인간에 애착함을 의미해주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녀는 그의 이름을 납달리라 불렀다. 이는 그것의 품질, 즉 시험에서 승리함이 있다는 것, 또한 자연적 인간의 저항함이 있다는 것도 의미한다. 이는 “이름”, 그리고 “이름을 부름”의 의미가 품질(quality)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품질 자체가 이름 “납달리”에 담겨 있다. 그 이유가 그의 이름이 “맞붙다, 씨름하다”에서 명명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납달리는 교회의 두 번째 일반적 진리를 표현했다. 그 이유가 시험은 내적 인간과 외적 인간의 결합을 위한 수단이기 때문이다. 이 두 인간은 서로에게 모순되는 상황에 있지만, 시험을 수단으로 상응되고 일치되는 쪽으로 조정된다. 참으로 외적 인간은 그 자체로만 보면, 그것의 생명의 즐거움이 있는 육체적, 세상적인 것들밖에 더 갈망하는 것이 없다. 그러나 내적 인간, 이 인간이 거듭나질 수 있는 이들과 더불어서일 경우, 천국쪽으로 열리고, 천국 속의 것들을 바라는 바, 이때 천국의 것들 안에서 천국의 즐거움을 발견한다. 따라서 인간이 시험 중에 있는 동안이라면, 이 두 종류의 즐거움 사이에 전투가 있다. 이 전투가 있어도 인간은 이를 알지 못한다. 그 이유는 당사자가 천국의 즐거움이 무엇인지를, 지옥의 즐거움이 무엇인지를 모르기 때문, 더욱이 이 둘은 서로에 완전히 반대되기 때문이다. 천적 (수준의) 천사들은 인간이 세상적, 육체적 즐거움을 목적 차원이 아닌 수단 차원으로 격하시켜, 이것이 천국의 즐거움을 위한 수단, 방편으로 삼지 않으면 세상적, 육체적 즐거움에 있는 인간과 더불어 있을 수가 없다. 이것이 결과될 때, 천사들은 양쪽에서 인간과 더불어 있을 수 있다. 이러면 그의 즐거움은 복됨, 축복이 되고, 마지막으로 다른 삶에서 행복이 된다.
거듭남 이전이라 해도 자기의 자연적 인간의 즐거움은 지옥적이 아니다고, 그리고 이 즐거움은 악마적인 영들에 의해 소유당해져 있지 않다고 믿는 자가 있다면, 그는 대단한 착각이다. 그렇게 착각하고 마는 이유는 그가 이 경우에서 인간과 더불어 어떠한지를 모르기 때문에서 이다. 즉 거듭나기 전일 경우, 그의 자연적 인간이 여느 다른 인간 같이 있다고 자신에게 나타날런지는 몰라도 그의 자연적 인간은 악귀나 지옥의 영에게 소유당해져 있음을 모른다는 말이다. 더 나아가 자신도 다른 신앙인 같이 거룩함에 있다고, 자기도 신앙의 진리와 선에 관하여 열심히 추론하는 이들 틈에 끼여 있다고, 참으로 자기는 신앙의 진리와 선에 대해 확신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할지라도, 만일 그가 자기 직업에서 공정함과 공평함에 대해 애착하고 있음이, 그리고 동료들 틈에서와 자신의 생활에서 진리와 선에 대해 애착함이 자신 안에서 지각되지 않고 있다면, 그의 즐거움은 지옥의 즐거움으로부터 있다는 것을 자신에게 눈치채게 해야 할 것이다. 그 이유가 지옥의 사랑은 자기와 세상을 사랑함 외에 더 아니기 때문이다. 이 사랑이 그의 즐거움을 만들 경우, 거기에는 신앙으로부터의 것, 선행으로부터의 것은 있지 않기 때문이다. 지옥의 즐거움이 인간 안에서 우위를 차지하고 있다면, “단”에 의해 의미된 것, 즉 거듭남의 시작인 첫 수단, 신앙의 거룩함과 생활의 선에 대해 확언함과 인정함 외의 여타 다른 수단들은 죽어저 있거나 사라져버린 수준에서 있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시험을 수단으로 함이 있는데, 이것이 거듭남을 위한 두 번째 수단이고, 이것이 납달리에 의해 의미되어 있다; 그 이유가 이 수단은 첫 수단에 뒤잇기 때문, 즉 신앙과 선행으로부터의 진리와 선에 대한 확언함과 인정함이 없는 이들에게는 시험의 어떤 전투도 발생할 수 없기 때문, 전투가 없는 이유는 자연적 즐거움이 납득시키려 하는 악과 거짓에 저항하는 (천국적인) 어떤 것이 당사자 안에 없기 때문이다.
“납달리”가 언급되는 다른 말씀에서 납달리는 시험 후에 있는 인간의 상태를 의미한다; 이스라엘이 된 야곱의 예언에서:
납달리는 풀어놓은 암사슴이라, 세련된 말들(sayings)을 준다 (창. 49:21);
위에서 “풀어놓은 암사슴”이란 시험 이후 존재하는 자유해진 상태에 있는 자연적 진리에 대한 애착을 표시한다; 이 상태는 “납달리”에 의해 의미된 시험들 안에 있는 품질이기도 하다; 그 이유가 시험들에서 분투노력함은 자유에 관련하여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모세의 예언을 보자:
납달리에게 그는 말했다, 납달리는 특별하게 사랑받음에 만족하고 있다, 그리고 여호와의 복됨이 가득하다, 그는 서쪽과 남쪽을 소유할 것이다 (신. 33:23).
야곱의 아들들과 지파들의 표현들은 그들이 명명됨이 질서와 일치하여 있다. 그리고 드보라와 바락의 예언에서:
스불론은 자기 혼을 죽기까지 하여 헌신한 백성들이다, 그리고 납달리는 들판의 높은 장소에서 (그러 하였다) (사. 5:18).
위 구절은 내적 의미에서 시험의 전투들이 취급되고 있다; 그리고 그들은 악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 이들 사이에 있는데, 그 이유는 그들이 진리들과 선들 안에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들판의 높은 장소에서” 있는 것이다.

9-11절. 그리고 레아는 자기가 출산함으로부터 잠자코 있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그녀의 하녀 실바를 데려왔다. 그리고 그녀를 야곱에게 여인으로 주었다. 10 그리고 레아의 하녀, 실바는 야곱에게 아들을 낳았다. 11 그리고 레아는 말했다, 떼가 오고 있다, 그리고 그녀는 그의 이름을 갓이라 불렀다. “그리고 레아는 자기가 출산함으로부터 잠자코 있는 것을 보았다”란 인정되어 왔던 더 다른 외적 진리는 없었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녀는 그녀의 하녀 실바를 데려왔다”란 확인된 합쳐지는 수단들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녀를 야곱에게 여인으로 주었다”란 이것이 결합을 가져왔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실바, 레아의 하녀가 야곱에게 아들을 낳았다”란 (외적 진리가) 인정함을 의미한다. “그리고 레아가 말했다, 떼(troop)가 오고 있다”란 최고의 의미에서 전지하심과 전능하심을, 내적 의미에서 신앙의 선을, 외적 의미에서 일들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녀는 그의 이름을 갓이라 불렀다”란 그것의 품질을 의미한다.

그리고 레아는 자기가 출산함으로부터 잠자코 있는 것을 보았다. 이는 인정되어 왔던 더 다른 외적 진리는 없었음을 의미한다. 이는 레아가 외적 진리를 표현한다로부터; 그리고 “낳는다”가 신앙과 행동에서 인정함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러므로 내적 의미에서 레아가 낳음으로부터 잠자코 있음은 더 다른 진리들이 인정되어 오지 않았음이 의미된다.

그리고 그녀는 그녀의 하녀 실바를 데려왔다. 이는 확인된 합쳐지는 수단들을 의미한다. 이는 “하녀”가 외적 인간이 내적 인간과 결합하는데 도움이 되는 확인된 수단을 의미함에서 알려진다.

그리고 그녀를 야곱에게 여인으로 주었다. 이는 이 수단이 결합을 결과되게 했음을 의미한다. 이는 “여인으로 주다”의 의미가 결합이다로부터 분명해진다.

그리고 실바, 레아의 하녀가 야곱에게 아들을 낳았다. 이는 외적 진리가 인정함을 의미한다. 이는 “낳다”가 인정함이다로부터; “하녀”가 확인된 결합하는 수단이다로부터; 그리고 “아들”의 의미가 진리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리고 레아가 말했다, 떼가 오고 있다. 이는 최고의 의미에서 전지하심과 전능하심을, 내적 의미에서 신앙의 선을, 외적 의미에서 일들을 의미한다. 이는 여기서의 “떼(troop)”의 의미로부터 알게 된다. 최고 의미에서 “떼”의 의미가 전능하심(omnipotence)과 전지하심(omniscience)인 이유는 여기서의 “떼”는 다수(multitude)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수(숫자가 많음)”가 주님의 신성을 서술할 경우, 이는 무한히 숫자가 많음이고, 이 많음은 전능하심과 전지하심밖에 더 다른 의미는 없다. 그러나 전능하심은 크기에 속하는 양(量, quantity)을; 전지하심은 숫자가 많음에 속하는 양으로부터 이다. 또한 전능하심은 무한한 선, 또는 신성한 사랑, 고로 신성의 의지를 서술한다; 그러나 전지하심은 무한한 진리, 또는 신성한 총명을 서술한다. 내적 의미에서 “떼”가 신앙의 선인 것은 상응으로부터 이다; 그 이유가 주님의 신성한 전능하심에 선행으로부터 있는 선이; 그리고 그분의 전지하심에 신앙으로부터 있는 진리가 상응하기 때문이다.
외적 의미에서 “떼”가 일(work)들을 의미하는 이유는 이것들이 신앙의 선에 상응하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신앙으로부터의 선이 일을 생산하기 때문, 다시 말해 신앙의 선은 일함 없이는 그 존재가 가능하지 않기 때문에서 이다. 바꿔말해 선을 생각함과 선을 뜻함은 선을 행함 없이 가능하지 않은 것과 같다. 전자는 내적 측면이고, 후자는 외적 측면일 뿐이다. 더욱이 일만에 국한해 생각해보아도 그것이 신앙의 선에 상응하지 않으면, 그것들은 선행의 일도, 신앙의 일도 아닌 것이 되기 때문이다. 즉 그것들이 내적 측면으로부터 오지 않기 때문, 따라서 죽은 일에 불과하기 때문, 이 죽은 일 안에는 선도, 진리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들이 상응할 경우, 그때 그것들은 선행이든, 신앙이든 어느쪽의 일이 되어 있는다. 선행의 일은 그 일의 혼, 즉 선행으로부터 흐르는 것들이고, 신앙의 일은 신앙으로부터 흐르는 것들이다. 선행의 일은 거듭난 인간과 더불어 존재하나; 신앙의 일은 아직 거듭난 것은 아닌 이들, 그러나 거듭나아지고 있는 이들과 더불어 존재한다. 이런 경우는 선으로부터의 애착과 진리로부터의 애착에서도 같은 경우이다. 그 이유가 거듭난 인간은 선에 애착함에서, 고로 선을 뜻함으로부터 선을 행하기 때문; 그러나 거듭나고 있는 인간은 진리에 애착함에서, 고로 선을 앎으로부터 선을 행한다. 이 둘의 차이점은 이미 반복적으로 말해왔기에 설명은 생략한다. 어쨌든 이로부터 무슨 일이 있는지가 명백해진다.
일에 관하여 더 살핀다면, 신앙의 선은 인간의 의지와 이 의지로부터 파생되는 생각이 그의 얼굴에 있는 것에 비교된다. 이것이 당사자의 마음이다는 것, 즉 그의 의지와 의지로부터 파생된 생각이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만일 의지와 생각이 그것들의 형상으로서 그의 얼굴에 표출되지 않으면, 이때 보여진 것은 그의 의지와 생각이 아닌 바, 그것은 위선, 또는 사기(가짜)이다; 그 이유는 표출된 것이 그가 뜻하고 생각한 것과 다르기 때문이다. 이 경우는 생각과 의지로부터 있는 인간의 내면들에 관련하여 있는 신체의 모든 행동과도 똑같다. 인간의 내적 측면은 행동, 행동함을 수단으로 하는 그의 외적 측면 안에 살고 있다. 만일 행동 또는 행동함이 당사자의 내적인 것에 의거 있지 않다면, 이것은 그 행동은 그 행동을 생산하고 있는 그의 내적인 것이 아닌 것, 그러나 관습과 습관이 자극함으로부터 되풀이 되는 행동일 뿐이다. 또는 위조된 어떤 것, 즉 위선이나 사기침 같은 것이다. 이로부터 무슨 일인지가 다시 명백해진다; 그리고 이로부터 더 생각해볼 것은, 신앙을 고백하는 이들, 더욱이 신앙의 선을 고백하는 이들, 그런데 일을 부정하고, 더욱이 일함을 거절한다면, 이는 신앙이 결핍된 것, 선행이 결핍되었음이 명백해진다.
위와 같은 것이 선행과 신앙으로부터의 일의 본성이고, 인간은 일 안에 있지 않으면 그는 선행과 신앙 안에 있는 것이 결단코 아니기에, “일(work)”은 말씀에서 자주 언급되고 있다; 아래 구절들에서 읽어보자:
당신의 눈은 인간의 아들들의 모든 길들 위에 열려 있으시다, (이는) 그의 길들에 따라서, 그리고 그의 일들의 열매에 따라서 모두 각각에게 주시기 위하여서 이다 (예. 32:19).
예레미야서에서:
너희 모두는 자기의 악한 길로부터 돌아서라, 그리고 너의 일들을 선한 일로 만들어라 (예. 35:15).
예레미야서에서:
나는 그들의 일에 따라서, 그리고 그들의 손의 일에 따라서 보답할 것이다 (예. 25:14).
호세아서에서:
나는 그의 길들(로부터) 그를 방문할 것이다, 그리고 그의 일들(로부터) 그에게 보답할 것이다 (호. 4:9).
미가서에서:
토지는 그 안에 거주하는 자들 때문에, 그들의 일함의 열매 때문에 황무해질 것이다 (미. 7:13).
스가랴서에서:
고로 여호와 체바욷께서 말하셨다: 너희는 네 악한 길로부터, 그리고 네 악한 일들로부터 돌아서라. 여호와 체바욷께서 우리의 길에 따라, 그리고 우리의 일들에 따라 우리에게 행하시기로 생각하셨듯 이, 그렇게 그분은 우리에게 하셨다 (슥. 1:4, 6).
계시록서에서:
이 후로부터 주님 안에서 죽는 죽은 자들은 복되다; 그렇다, 영에게 말한다, 그들은 자기들의 노동함으로부터 쉴런지 모른다; 그리고 그들의 일들이 그들을 뒤따르고 있다 (계. 14:13).
계시록서에서:
나는 하느님 앞에 선 크고 작은 죽은 자를 보았다, 그리고 책들이 열려졌다; 그리고 생명의 책인 또 다른 책이 열려졌다; 그리고 죽은 자는 그들의 일들에 따라, 책들 안에 쓰여져 왔던 것으로부터 심판되어졌다. 그리고 바다가 그 안에 있던 죽은 자를 포기했다; 그리고 죽음과 지옥이 그것들 안에 있는 죽은 자를 포기했다; 그리고 그들 모두 각각은 자기들의 일들에 따라서 심판되어졌다 (계. 20:12, 13).
계시록서에서:
잘 보라 나는 빠르게 온다, 그리고 내 보상이 각자의 일들에 따라서 모든 이에게 주려고 나와 더불어 있다 (계. 22:12).
요한복음서에서:
이것이 심판이다, 즉 빛이 세상에 와 있다, 그리고 인간들이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했다, 그 이유는 그들의 일들이 악하였기 때문이다. 악을 행하는 모든 이는 빛을 미워한다, 그리고 자기 일들이 견책받지 않으려고 빛에 오지 않는다; 그러나 진리를 행하는 자는 빛쪽으로 온다, 하여 그의 일들은 명백히 나타나는데, 그가 하느님 안에서 일해 왔기 때문이다 (요. 3:19-21).
요한복음서에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할 수 없다, 그러나 세상은 나를 미워한다, 그 이유는 내가 그것의 일들이 악이다고 증명하기 때문이다 (요. 7:7).
다시:
예수께서 유태인들에게 말하셨다, 만일 너희가 아브라함의 아들들이다면, 너희는 아브라함의 일들을 행할 것이다. (그런데) 너희는 너희 아버지의 일들을 행하고 있다 (요. 8:39, 41).
다시:
만일 너희가 이런 것들을 안다면, 만일 너희가 그것들을 행한다면 너희는 복되다 (요. 13:17).
마태복음서에서:
너의 빛을 인간 앞에 비추이게 하면 그들이 너희의 선한 일들을 볼는지 모른다. 그것들을 가르치고 행하는 누구이든, 그는 천국들의 왕국에서 큰 자라 불리울 것이다 (마. 5:16, 19).
마태복음서에서:
나에게 주여 주여 라고 말하는 모든 이가 천국들의 왕국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내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자(이다). 많은 이들이 그 날에 나에게, 주여, 주여, 우리가 당신의 이름으로 예언하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당신의 이름으로 악마들을 내쫓고, 그리고 당신의 이름으로 많은 능력 있는 일들을 행하지 않았습니까 하고 말할 것이다. 그리고 그때 나는 그들에게 고백할 것이다, 나는 너희를 결코 알지 못한다, 불법을 일하는 너희는 나로부터 떠나라 (마. 7:21-23).
누가복음서에서:
집의 주인은 그들에게 대답하여 말할 것이다, 나는 네가 어디로부터 인지를 알지 못한다; 그때 너희는 말하기를 시작할 것이다, 우리는 당신의 현존하심에서 먹고 마시었습니다, 그리고 당신이 우리의 거리들에서 가르치셨습니다; 그러나 그분이 말하실 것이다, 내가 네게 말한다, 나는 네가 어디로부터 인지를 알지 못한다, 불법을 일하는 자인 너희여 나로부터 떠나라 (눅. 13:25-27).
마태복음서에서:
내 말들을 듣고, 그것들을 행하는 모든 이, 나는 그를 슬기로운 자에 비교할 것이다; 그러나 내 말들을 듣고, 그것들을 행하지 않는 모든 이는 어리석은 자에 비교할 것이다 (마. 7:24, 26).
마태복음서에서:
사람의 아들이 그분의 천사들과 더불어 그분의 아버지의 영광 안에서 오실 것이다, 그리고 그때 그분은 모든 이에게 각자의 일들에 따라 보답하실 것이다 (마. 16:27).
이런 구절들로부터 일함이 인간을 구원한다는 것, 그리고 사람을 정죄도 하는 셈이다는 것이 분명해진다; 말하자면, 선한 일은 구원을, 악한 일은 정죄한다는 말이다; 그 이유가 인간의 일 안에 그의 의지가 들어 있기 때문이다; 선을 뜻하는 자는 선을 행한다; 그러나 선을 뜻하지 않는 자, 제아무리 자기가 선을 뜻하고 있다 말할지라도 그가 선을 행하지 않을 때에 선을 뜻하고 있지도 않는다. 이것은 흡사 나는 그것을 뜻한다고 말하고, 나는 그것을 뜻하지 않는다 하고 말하는 것처럼 있다는 말이다. 그리고 의지 자체가 일 안에 있기 때문에, 그리고 선행은 의지로부터 있기 때문에, 그리고 신앙은 선행으로부터 있기 때문에, 그가 선한 일을 행하지 않을 때 그의 의지로부터의 것, 그의 선행과 신앙으로부터의 것이 무엇일지는 명명백백하다. 특히 그 반대의 상황, 즉 악한 일을 하고 있을 경우 역시 더더욱그렇다.
더 나아가 알아야 할 것은, 주님의 왕국은 일로부터 있는 삶으로부터 인간 안에서 시작한다는 점이다. 그 이유가 이때 그는 거듭남의 시작 안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님의 왕국이 인간 안에 있을 때, 이 왕국의 종착점은 일 안에 있다, 그리고 그때 인간은 거듭난다. 그 이유가 그의 내적 인간이 외적 인간과 상응으로 일치되어 외적 인간 안에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의 일은 그의 외적 인간으로부터 있다, 한편 선행과 선행에서 파생되는 신앙은 그의 내적 인간 속에 있다; 그러므로 그의 일이 선행인 셈이다. 그러므로 내적 인간의 생명은 외적 인간으로부터의 일 안에서 세상 밖으로 출시된다(공표된다). 그러므로 마지막 심판을 말하시는 주님께서 챙기시는 것은 일 뿐이다. 하여 그분이 선한 일들을 행하여 온 이들에게 너희는 영원한 삶(생명) 안으로 들어가라고 말하시고; 악한 일을 하여 온 이들에게 너희는 지옥으로 떨어져야 한다고 말하셨던 것이다 (마. 25:32-46). 위에서 살핀 대목으로부터 또하나 분명해지는 것은, 주님의 품 안에서 그분의 가슴에 기대고 있던 요한에 관한 의미이다. 그는 제자들 중에서도 가장 사랑받아진 제자라 말해진다 (요. 13:23, 25; 21:20); 그런 이유가 요한이 선한 일을 표현했기 때문이다. (창세기 18, 22장 서문을 보라.) 신앙의 일이 무엇인지, 일이라는 측면이 비슷한 바, 이것 역시 신앙의 열매라 불리울는지 모른다; 그리고 선행의 일이 무엇인지는 주님의 신성한 자비로부터 별도의 장소에서 충분히 살필 기회를 가져볼 것이다.

그리고 그녀는 그의 이름을 갓이라 불렀다. 이는 그것의 품질을 의미한다. 이는 “이름”, 그리고 “이름을 부름”의 의미가 품질이다로부터 알게 되는데 이미 살폈기에 설명은 생략한다. 품질 자체가 “갓”에 의해 의미되어진다, 즉 신앙으로부터의 선과 일로부터의 선이다. “품질”은 내부에 있는 것은 무엇이든 모든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는 신앙의 선 내부에와 일 내부에 있는 모든 것이다; 그리고 이것들은 무수하다, 그 이유는 각각 안에서 개별적인 바 품질 역시 무수하게 다양할 수밖에 없기 때문, 그리고 신앙의 선 안에 있지 않은 이들, 그리고 선한 일 안에 있지 않은 이들의 경우에서는 반대의 의미를 갖는데, 이것 또한 “갓”이 언급되는 구절에서 표현된다. 내적 인간의 신앙으로부터의 선과 외적 인간의 선한 일이 상응할 때, 이것들은 세 번째 일반적 수단이고, 이것은 인간이 주님의 왕국 안으로 입장하기 이전, 즉 그가 거듭남을 수단으로 교회를 만들 수 있기 이전, 신앙과 행동으로 인정되어져야 하는 것이다.

12, 13절. 그리고 실바, 레아의 하녀는 야곱에게 두 번째 아들을 낳았다. 13 그리고 레아가 말했다, 내 복됨이로다. 그 이유는 딸들이 나를 복된 자라고 부를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녀는 그의 이름을 아셀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실바, 레아의 하녀는 야곱에게 두 번째 아들을 낳았다”란 두 번째 일반적 진리를 인정함을 의미한다. “그리고 레아는 말했다, 내 복됨이로다 그 이유가 딸들이 나를 복된 자라고 부를 것이기 때문이다”란 최고의 의미에서 영원을, 내적 의미에서 영원한 삶으로부터의 행복을, 외적 의미에서 애착들로부터의 기쁨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녀는 그의 이름을 아셀이라고 불렀다”란 그것의 품질을 의미한다.

그리고 실바, 레아의 하녀는 야곱에게 두 번째 아들을 낳았다. 이는 두 번째 일반적 진리를 인정함을 의미한다. 이는 “낳다”의 의미가 인정함이다로부터; “하녀”의 의미가 외적 인간이 내적 인간과 결합하는데 도움을 주는 확언하는 수단이다로부터; “아들”의 의미가 진리, 여기서는 일반적 진리이다로부터; 그리고 야곱, 레아, 실바가 표현하는 것을 종합해보면, 이 말의 내적 의미가 외적 인간이 내적 인간과 결합하는데 도움을 주는 두 번째 일반적 진리를 인정함임을 보여준다.

그리고 레아는 말했다, 내 복됨이로다 그 이유가 딸들이 나를 복된 자라고 부를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최고의 의미에서 영원을, 내적 의미에서 영원한 삶으로부터의 행복을, 외적 의미에서 애착들로부터의 기쁨을 의미한다; 이는 “복됨”의 의미로부터, 그리고 “딸들이 나를 복된 자라고 부를 것이다”의 의미로부터 알게 된다. “복됨(blessedness)”이 최고 의미에서 영원이다는 것은 인간 안에 있는 어떤 것이 상응함으로부터가 아니면 보여질 수 없다; 그 이유가 신성인 어떤 것, 무한인 어떤 것은 인간이 어떤 생각을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인 유한한 것들로부터가 아니면 그나마 납득되지 않는다. 유한한 것들로부터 끌어낸 생각 없이, 특별히 공간과 시간에 관한 것들에 관한 생각 없이, 인간은 신성의 어떤 것, 더욱이 무한한 것을 납득할 수 없다. 공간과 시간에 관한 생각이 없으면 인간은 어떤 생각도 전혀 할 수 없다; 그 이유가 인간은 자기 신체에 관련하여서, 고로 외적 감각들로부터 있는 자기의 생각들에 관련하여 시간 안에 있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천사들은 시간과 공간 안에 있지 않고, 상태에 관한 생각만을 가진다, 그러므로 말씀에 있는 시간과 공간은 상태들을 의미한다.
두 상태들이 있다, 즉 공간에 상응하는 상태, 시간에 상응하는 상태이다. 공간에 상응하는 상태는 있음 (Esse, being, 實體, 존재자, 본질)에 관한 상태이고; 시간에 관련한 상태는 공표됨(公表, Existere, coming forth, 세상에로 나옴, 實在)이다. 인간을 만드는 두 가지 것은 있음과 공표됨이다. 인간의 있음은 주님으로부터 진행되는 영원한 것을 받는 그릇(수용체, recipient)밖에 더 아니다; 그 이유가 인간들, 영들, 그리고 천사들은 주님으로부터 생명을 받는 그릇을 만들어내거나 그 그릇 자체 그 이상은 아니기 때문이다. 공표됨이 생명을 받아들임이라 단언된다. 인간은 자기가 (스스로) 있다(존재한다) 라고, 그리고 이 있다가 자신으로부터 라고 믿는다; 그러나 이미 말했던 바대로, 그는 공표된 것, 즉 (있음으로부터 생명을 받아들임으로) 세상에 모습을 나타낸 것 뿐이다. (엄밀히 말해) 있음(Being)은 주님 안에만 있다. 그리고 “여호와”라 불리운다. 여호와이신 있음으로부터 모든 것은 있도록(존재하도록) 나타난다(sicut sint). 그러나 주님의 있음, 또는 여호와는 어느 누구와도 교통되어질 수 없다; 오로지 주님의 인간에만 국한되어 교통된다. 신성한 있음, 즉 여호와께서 주님의 인간을 만드셨다. 공표됨(coming forth)은 주님에게도 해당되어질 수 있다; 그러나 그분이 신성을 입고 계셨던 곳에서만, 즉 그분이 세상에 계셨던 때만에 국한된다. 그러나 그분이 신성한 있음이 되셨을 때, 공표됨은 그분으로부터 진행되어 나오는 것 외에는 그분에게 해당되지 않는다. 그분으로부터 진행되어지는 것이 그분 안에서 공표된 것 같이 나타나는 것일 뿐, 그분 안에 있는 것은 아니고, 그분으로부터 있는 것이고, 이것이 인간들, 영들, 천사들이 공표되게 한다. 인간, 영, 천사 안에서 공표됨은 살아 있음이다; 즉 사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살아 있음은 영원한 행복이다. 영원한 생명(삶, 살아 있음)으로부터의 행복은 주님의 신성한 있음으로부터 인 최고 의미에서의 영원에 상응한다. 영원한 생명으로부터의 행복이 “복됨”의 내적 의미에서 의미되고, 외적 의미에서는 애착들로부터의 기쁨이다는 별도의 설명이 필요 없을 것이다.
이것이 여기서 의미된 것은 영원한 생명으로부터의 기쁨에 상응하는 진리와 선에 대한 애착들로부터의 기쁨이다. 모든 애착들은 각기 그것들의 기쁨을 가진다. 애착이 이러이러하면 기쁨도 이러이러하다. 악과 거짓에 애착함 역시 그것들의 기쁨을 가지고 있다; 인간이 거듭나지기를 시작하기 이전, 그리고 주님으로부터 진리와 선에 애착함들을 받기를 시작하기 이전에서, 악과 거짓에 애착함들로부터의 기쁨만이 있는 듯 여겨진다. 하여 여타 다른 기쁨들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인간은 믿는다, 급기야 만일 자신에게서 이 기쁨을 박탈한다면, 자기는 깡그리 멸해진 수준에로 떨어지고 말 것이라 생각하기까지 한다. 그러나 주님으로부터 진리와 선에 애착함을 받는 이들은 과거 그들이 유일한 기쁨이다고 믿었던 것의 본성을 점차적으로 보고 지각하여, 그것은 상대적으로 천박한 기쁨이다는 것, 참으로 불결한 기쁨이다는 것도 알게 된다. 이쯤에서 더 발전하면, 그는 악과 거짓으로부터의 기쁨들을 하찮은 것, 야비한 것으로 간주한다. 이쯤에서 더 발전하면, 그는 그것들을 혐오함 아래 있게 한다.
나는 악과 거짓에 애착함들로부터의 기쁨 안에서 있어 왔었던 다른 삶에 있는 이들과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다; 그리고 나는 허락을 받아 그들이 자기들의 기쁨들을 박탈할 때까지 그들에게는 생명이 없다는 것을 말해주었다. 그러나 오히려 그들은 자기들로부터 이 기쁨을 박탈하면 자기들에게 어떤 생명도 남아 있지를 않는다고 내게 말했다 (이는 현 세상에 있는 어떤 인물에서도 마찬가지 이다). 그러나 나는 그 기쁨이 박탈될 때 생명이 시작된다는 것, 이 생명은 천국의 것과 같은 것이고 이전 당신들이 지녔던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생명임을 허락을 받아 말해주었다. 그러나 이런 사항을 그들은 납득할 수 없었는데, 그 이유는 알지 못하면 믿어지는 것이 아무 것도 없기 때문이다. 이는 세상에서 자기와 세상을 사랑함에 있고 선행이 없는 이들과도 일맥 상통한다. 그들은 이런 사랑들로부터의 기쁨들을 알고 있다, 그러나 선행으로부터의 기쁨들이 아니다. 고로 그들은 선행이 무엇인지에 무지해 있다, 게다가 그들은 선행 안에 어떤 기쁨이 있다는 것은 더욱 모른다; 선행의 기쁨들이 보편적 천국을 채우고, 거기서 복됨과 행복을 구성하고 있다는 것을 모른다; 그리고 만일 당신이 이것을 믿으려 뜻한다면, 이것이 총명과 지혜 역시 그것들의 기쁨들과 더불어 구성한다는 것도 알게 된다; 그 이유가 선행의 기쁨들 안으로 주님은 진리의 빛과 선의 불꽃과 더불어, 그리고 파생되는 총명과 지혜와 더불어 흘러드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거짓들과 악들은 이런 기쁨들을 거절하고, 질식시키고, 악용하고 타락시킨다, 그러므로 어리석고 미친 짓을 하는 것이다. 이상 설명으로부터 애착들로부터의 기쁨의 본성과 품질이 어떠한지와 이것이 영원한 생명으로부터의 행복에 상응한다는 것이 분명해졌을 것이다.
이 시대의 인간(교인)을 꽉 붙들고 있는 것 중 하나는, 죽음의 문턱에 있는 자가 믿노라고 고백하면, 그는 과거 일생동안 자기가 지녀왔던 애착의 품질이 어떠하든 상관 없이 천국으로 들어간다는 것이다. 나는 이렇게 믿었고, 살아왔던 이들과 이야기를 했던 적이 가끔 있었다. 그들이 다른 삶에로 올 때, 그들은 처음에는 자기들의 과거 생활을 중시함이 없이, 즉 과거 악과 거짓에 애착함으로부터의 기쁨을 입고 있는 것, 이것이 자기들의 목적들이었음에 아랑곳할 바 없이 자기는 천국으로 들어가리라는 것, 그 외의 다른 생각은 없었다. 나는 그들에게 모든 이가 천국으로 들어가는 것은 허락되어 있다는 것을, 그 이유가 주님은 천국에 들어가기를 바라는 누구이든 그 사람으로부터 천국 입장을 방해하시지 않기 때문이다는 것을 허락을 받아 말해주었다. 그러나 그들에게 천국 입장이 승인되었을 때, 그들이 거기서 살 수 있는지 여부를 그들은 알 수 있다. 거기서 살 수 있음을 굳건히 믿는 자 역시 천국에 들어오게 허락되었다. 그러나 거기서의 생명은 주님을 사랑함과 이웃을 향한 사랑함이고, 이 사랑들이 거기 생명으로부터의 모든 영역과 행복을 에워싸고 있기에, 거기에 들어온 그들은 혼돈에 빠져들고, 숨쉬는 것조차 할 수 없는 지경에서 자기들의 애착들이 불결하다는 것을 지각하기를 시작하고, (천국 안에서) 지옥의 고통을 느끼기 시작한다. 이런 결과로 그들은 자신들을 아래쪽으로 향하여 디밀면서, 자기들은 (천국으로부터) 멀리 떠나있기를 바란다고, 천국에 있는 것은 자기들로서는 지옥이다고 말한다. 이 대비되는 상황은 이쪽의 기쁨과 저쪽의 기쁨의 본성이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한마디로 악과 거짓에 애착함으로부터의 기쁨 안에 있는 이들은 진리와 선에 애착함으로부터의 기쁨에 있는 이들과 결단코 섞여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 기쁨들은 서로에 반대된다, 마치 천국과 지옥 같다.
영원한 생명의 행복에 대해 주목해보자: 선과 진리에 애착하며 살아가는 이들이라 해도 그가 세상에 있는 이상 그는 영원한 생명으로부터의 행복들을 지각할 수 없다, 그러나 그 대신 어느 정도의 어떤 기쁨을 지각할 수 있다. 이런 이유는 그가 신체 안에 있는 동안 그는 세상의 관심사들 안에 잠겨 있어 결과적으로 (자기 내부 깊숙이 있는) 영원한 삶의 행복이 여타 다른 방법에서 명백히 나타내보이려 하나 이를 세상의 근심 걱정이 방해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영원한 생명으로부터의 행복이 깊숙한 내부로부터 바깥쪽으로 인간과 더불어 있는 세상적 관심과 그에 따른 근심들 안으로 흐를 때, 이 행복은 그것들 안에 잠겨져서, 일종의 희미한 기쁨, 없어도 무방하다 싶을 정도의 기쁨의 수준에 있는다. 그러나 이 기쁨은 복됨이 있는 내부에, 즉 이 행복 내부에 여전히 둥지를 갖고 있다. 이 행복이야말로 하느님 안에서 만족하는 행복이다. 인간이 육체를 벗을 때, 그리하여 세상적 관심과 그에 따른 근심도 놓아야 하는 때, 그의 내면의 인간 내부에서 희미함 안에서 감추여 놓였던 행복은 밖으로 나와 자체를 밝힌다.
우리가 애착이라는 단어는 상당히 많이 사용하는 편인 바, 애착에 의해 뜻해지는 것을 살펴보자. 애착은 사랑밖에 더 아니나, 차이점이라면 사랑을 계속하는 것이다. 그 이유가 악과 거짓과 더불어서 이든, 선과 진리와 더불어서 이든 우리는 계속 사랑함으로부터 어떤 결과를 빚어내기 때문이다. 이 사랑은 당사자에게 속해 있는 일반적, 특수적, 개별적, 낱개 하나하나에 이르기까지, 한 마디로 사사건건 안에 항상 출석하고 있어, 인간으로서는 그것이 사랑으로서 지각되지 않을 뿐이다. 하여 이 사랑은 각자의 특성에 따라, 각자 사건의 경우에 따라, 넓은 측면에서는 인간의 그때 그때의 상태들과 변화됨에 따라 다양하게 옷을 바꿔 입을 뿐 사랑함은 계속적이다. 이 사랑의 계속됨(continuous)이 애착(affection)이라 불린다. 이 계속됨은 인간이 뜻하고 생각하고 실행하는 모든 것 안에서 있다. 다시 말해 이 계속됨이 인간의 삶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당사자의 모든 기쁨을 만드는 바, 결과적으로 그의 생명 자체인 셈이다; 그 이유가 인간의 생명은 그의 애착으로부터의 기쁨밖에 실상 더 아니다; 고로 그의 사랑으로부터의 애착밖에 더 아니다. 사랑은 인간의 뜻함이고, 이 뜻함 때문에 생각함이 파생되고, 그것의 실제화가 행동이다.

그리고 그녀는 그의 이름을 아셀이라고 불렀다. 이는 그것의 품질을 의미한다. 이는 “이름을 부름”의 의미가 품질이다로부터 인데 이미 설명했다. 품질 자체가 단어 아셀이 표현하는 것에 있다. 원어에서 “아셀”은 “복됨”을 뜻한다; 그러나 여기서의 경우 이름에는 그의 어머니 레아가 말한 것, 즉 “내 복됨에서; 그 이유가 딸들이 나를 복있다고 부를 것이기 때문이다”에 의해 의미된 모든 것, 즉 영원한 생명으로부터의 행복에 상응하는 애착들로부터의 기쁨을 포함한다. 이것은 외적 인간이 내적 인간에 결합하는 네 번째 일반적 원리이다; 그 이유가 인간이 영원한 생명의 행복에 자신 내부에 있는 기쁨이 상응한다는 것을 지각할 때, 이때 그의 외적 인간은 그의 내적 인간과 결합되기를 시작하기 때문이다. 이 두 인간을 결합되게 하는 것은 진리와 선에 애착함으로부터의 기쁨이다. 그 이유는 애착들로부터의 기쁨 없이 어떤 결합도 있을 수 없기 때문, 또한 인간의 생명은 애착들로부터의 기쁨 안에 있기 때문이다. “그녀를 복되다고 부르는 딸들”에 의해 교회가 의미된다. 이것이 레아에 의해 말해진 이유는 하녀로부터의 출생을 수단으로 결합에 도움을 주는 수단들인 일반적 진리들이 의미되기 때문, 그리고 교회가 인간 안에서 출시된다는 것을 의도하기 위한 이유 때문이다. 인간이 이 기쁨, 또는 애착을 지각할 때, 그는 교회가 되어가기를 시작하고 있다; 그리고 이런 까닭에 이것이 네 번째, 또는 하녀의 마지막 아들에서 말해진다.
“아셀”은 말씀에서도 자주 언급된 편이다. 그러나 아셀에 의해서, 뿐만 아니라 다른 아들들에 의해서도 마찬가지지만, 그때마다 취급되는 주제의 품질, 즉 각 대목에서 취급된 주제인 각 상태에 있는 것들의 품질이 의미된다; 또한 각 품질은 각 아들이 명명되는 순서에 따라서도 있다. 예를 들면 순서가 “르우벤” 또는 신앙으로 시작하는 경우는 이런 상태의 품질의 종류를, 순서가 “유다” 또는 천적 (평면의) 사랑으로 시작하는 경우는 다른 상태의 품질의 종류를, 그리고 순서가 “요셉” 또는 영적 (평면의) 사랑으로 시작하는 경우는 또다른 상태의 품질의 종류가 의미된다는 말이다; 그 이유가 첫 번째인 것의 본질과 품질은 갈래를 만들어 뒤이어지는 것들 안으로 건너가기 때문이다. 이것은 각 아들이 명명되는 장소에서 그것들의 의미가 다양해지는 바탕이다. 여기에서 같이 그들의 출생이 취급되는 곳에서는 그들에 의해 교회의 일반적 원리가 의미된다; 결과적으로 교회를 만드는 신앙과 사랑으로부터의 모든 것이 의미된다. 그리고 이 후의 것이 이 전의 것 안에 담겨 있는 이유 때문에, 이것은 인간의 거듭남, 또는 인간이 교회가 되기 이전 인간의 상태도 취급하고, 최고의 의미일 경우, 주님, 즉 어떻게 그분이 그분의 인간을 신성으로 만드셨는지가 취급된다. 고로 벧엘에서 야곱에 의해 보여진 사다리에서의 오름이 여호와에게 조차 닿아진 것과 흡사하다.

14-16절. 그리고 르우벤이 밀을 수확하는 날에 나갔다, 그리고 들에서 합환채를 발견했다, 그리고 그것을 그의 어머니 레아에게 가져왔다. 15 그리고 라헬이 레아에게 말했다, 바라건대 나에게 네 아들의 합환채를 주라. 그리고 레아가 라헬에게 말했다, 네가 내 남자를 빼앗은 일이 작은 일이더냐, 그리고 너는 내 아들의 합환채 역시 가저가려 드느냐? 그리고 라헬이 말했다, 그러므로 그는 이 합환채를 위해 너와 오늘 밤 누울 것이다. 16 그리고 야곱이 저녁 무렵 들에서 왔다, 그리고 레아가 그를 만나러 나갔다, 그리고 말했다, 당신은 저에게 와야 합니다. 그 이유는 제가 내 아들의 합환채를 가지고 당신을 빌려왔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는 그녀와 그날 밤에 누웠다. “그리고 르우벤은 밀을 수확하는 날에 나갔다”란 신앙이 사랑과 선행에 주목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들에서 합환채를 발견했다”란 선행과 사랑으로부터의 진리와 선 안에 있는 부부의 사랑에 속하는 것들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것을 그의 어머니 레아에게 가져왔다”란 외적 진리에 애착함에 적용함을 의미한다. “그리고 라헬이 레아에게 말했다”란 내면의 진리에 애착함이 지각함, 그리고 그것을 갈망함을 의미한다. “바라건대 나에게 네 아들의 합환채를 주라”란 부부의 사랑에 관한 것은 상호적으로 번갈아서 합쳐져야 할 것임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 여자가 그녀에게 말했다, 네가 내 남자를 뺏은 일이 작은 일이더냐”란 부부이기를 바램이 있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너는 내 아들의 합환채 역시 가저가려 하느냐?”란 그러므로 자연적 선과 외적 진리와의 부부의 관계는 철회될 것임을 의미한다. “그리고 라헬이 말했다”란 동의함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그는 오늘 밤 네 아들의 합환채를 위해 너와 누울 것이다”란 결합이 있을 것임을 의미한다. “그리고 야곱은 저녁에 들에서 왔다”란 진리의 선이 선의 상태에 있기는 하나 자연적인 것에 한정되는 바 불명료한 상태임을 의미한다. “그리고 레아가 그를 맞으러 나갔다”란 외적 진리에 애착함 쪽에서 갈망함을 의미한다. “그리고 말했다, 당신은 나에게 와야 합니다”란 그와 함께 합져질 것임을 의미한다. “그 이유가 저는 내 아들의 합환채로 당신을 빌려왔기 때문입니다”란 사전에 생각함으로 약속되어진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는 그날 밤 그녀와 누웠다”란 결합을 의미한다.

그리고 르우벤은 밀을 수확하는 날에 나갔다. 이는 신앙이 사랑과 선행에 주목하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는 “르우벤”의 표현함이 거듭남의 첫 번째 사항인 신앙이다로부터; “날들”의 의미가 상태들이다로부터; 그리고 “밀”의 의미가 사랑과 선행이다로부터; 그러므로 “밀 수확”은 사랑과 선행의 상태가 발전함을 의미한다. 외적 인간이 내적 인간과 결합하는 수단들이 하녀에 의해 얻어진 야곱의 네 아들들의 표현 아래에서 묘사되어져 있다; 그리고 지금 취급되는 주제는 이외 나머지 아들들을 수단으로 하는 선과 진리의 결합이다; 그러므로 “합환채(dudaim)”가 먼저 말해지고, 이를 수단으로 이 결합, 또는 부부의 관계가 의미되고 있다. “밀 수확”이 사랑과 선행의 발전하는 상태를 의미하는 이유는 “들판”이 교회를, 고로 교회에 속한 것들을; 들판에 뿌려진 “씨”가 선과 진리에 관한 것들을; 그리고 씨로부터 나온 식물, 즉 밀, 보리, 그리고 다른 곡식들은 사랑과 선행에, 또는 신앙에 속하는 것들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이런 사항들에 관련되는 교회의 상태들이 “파종기”와 “수확기”에 비교되고, 창세기 8장 22절에서와 같이 불리운다.
“밀”이 사랑과 선행에 속한 것들을 표시하는 것은 아래 구절로부터도 알게 된다. 모세의 책에서:
여호와께서는 그가 땅의 높은 장소들을 타게 만드시고, 들판의 소출을 먹게 하시고, 바위로부터 꿀을 빨게 하시고, 단단한 바위로부터 기름을 (빨게 하신다); 목축떼와 양떼의 버터를 어린 양들과 숫양들의 지방, 바산의 아들들과 더불어, 그리고 밀의 콩팥의 지방과 더불어 숫염소의 지방과 더불어 (먹게 하신다), 그리고 너는 포도의 순수한 피를 마셨다 (신. 32:13, 14);
위 구절의 내적 의미에서 취급된 주제는 고대 교회인데, 그것이 세워졌을 때 당시의 상태였다; 그래서 그 교회 안에는 사랑과 선행으로부터의 모든 것들, 그리고 신앙으로부터의 모든 것들이 있었음이 의미들을 수단으로 묘사되어져 있다. “밀의 콩팥의 지방”은 사랑과 선행으로부터의 천적인 것; 그리고 “지방(fat)” 또는 “지방이 풍부함(fatness)”이 천적인 것을 (353항), 그리고 “밀”은 사랑을 의미하기에, 그것들은 말씀에서 자주 함께 접합하여 있는다. 다윗서에서:
나의 백성이 나에게 순종적이었다, 이스라엘은 내 길 안에서 걸었다. 그분은 그들에게 밀의 지방을 먹이실 것이다, 그리고 바위로부터 꿀을 가지고 나는 너희를 만족하게 할 것이다
(시. 81:13, 16).
다윗서에서:
여호와, 그분은 네 경계를 평화롭게 만드신다, 그리고 밀의 지방을 가지고 너를 채우신다
(시. 147:14).
“밀”이 사랑과 선행이다는 것을 예레미야서에서 알는지 모른다:
많은 목자들이 내 포도원을 망가트렸다, 그들은 내 들판의 몫을 짓뭉개었다, 그들은 내 들판의 몫을 고독한 광야로 만들었다. 파괴자들이 광야의 모든 언덕들에 당도해 있다; 그 이유가 여호와의 검이 토지의 이쪽 끝에서 토지의 저쪽 끝에 까지에 이르러 삼키기 때문이다; 어느 육체도 평화롭지 않다. 그들이 밀을 뿌렸었지만, 가시들을 수확했다 (예. 12:10, 12, 13).
“포도원”과 “들판”은 교회를 표시한다; “고독한 광야”는 교회의 황폐함을; “삼키는 검”은 진리의 황폐함을; “평화가 없다”는 감동을 주는 선이 없음을; “밀을 뿌림”은 사랑과 선행으로부터의 선들을; “가시들을 수확함”은 자기와 세상을 사랑함으로부터의 악들과 거짓들을 표시한다.
[4] 요엘서에서:
들판이 망가졌다, 지면이 슬퍼한다, 그 이유는 곡식이 망가졌고, 새 포도주는 말라졌고, 기름이 쇠약해지고, 농부는 부끄러워졌고, 포도원지기는 울부짖는다, 그 이유는 밀과 보리 때문이다; 그 이유가 들판의 수확이 멸해졌기 때문이다. 네 자신에 띠를 두르고 통곡하라, 너희 성직자들아; 울부짖어라, 너희 제단을 섬기는 자여 (욜. 1:10, 11, 13).
위 구절은 황폐된 교회의 상태를 묘사하고 있다는 정도는 누구나 짐작할 것이다; 고로 “들판”과 “지면”은 교회이다; “곡식”은 교회의 선, 그리고 “새 포도주”는 교회의 진리 (3580항)이다; 그리고 “밀”은 천적 (수준의) 사랑, “보리”는 영적 (수준의) 사랑이다; 그리고 교회의 상태가 취급되기에, 말해지는 바, “네 자신에 띠를 두르고 통곡하라 너희 성직자들아; 울부짖어라 너희 제단을 섬기는 자들아” 이다.
[5] 에스겔서에서 여호와의 영으로부터 예언자에게 이렇게 말해졌다:
네게로 밀, 보리, 콩, 렌즈콩(팥), 기장(조), 귀리를 가져와라, 그리고 그것들을 한 그릇에 담아라, 그리고 그것 가지고 네게 빵을 만들어라. 너는 인분을 가지고 그들의 눈 앞에서 케이크를 만들어라. 그렇게 이스라엘의 아들들은 불결한 자기들의 빵을 먹을 것이다 (겔. 4:9, 12, 13);
위는 선과 진리를 모독함이 취급되고 있다; “밀, 보리, 콩, 렌즈콩, 기장, 귀리”는 다양한 종류의 선들과 이 선에서 파생되는 진리를 표시한다; 이것을 인분을 가지고 “빵” 또는 “케이크”로 만듦은 선과 진리의 모든 것을 모독함을 표시한다.
[6] 계시록서에서:
내가 보고 잘 보니 검은 말이었다; 그리고 그 위에 앉은 자는 자기 손에 저울을 가졌다. 그리고 나는 네 살아 있는 창조물 한 가운데로부터의 음성을 들었는데, 말하기를, 밀 한 분량에 일 페니, 그리고 보리 세 분량에 일 페니; 그리고 기름과 포도주는 다치게 말라 (계. 6:5, 6);
위는 선과 진리의 황폐해짐이 취급된다; “한 페니에 밀 한 분량”은 사랑이 부족함을; 그리고 “한 페니에 보리 세 분량”은 진리가 부족함을 표시한다.
[7] 에스겔서에서:
유다와 이스라엘의 토지는 너의 상인들이었다; 민닛의 밀, 그리고 과자(pannag), 그리고 꿀, 그리고 기름, 그리고 유향을 가지고 그들은 너와 거래하였다 (겔. 27:17);
위의 주제는 두로이고, 두로를 수단으로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들이 의미된다; 사랑과 선행의 선과 그것들의 행복이 “민닛의 밀, 과자, 꿀, 기름, 유향”이다; “유다”는 천적 (평면의) 교회를, 그리고 “이스라엘의 토지”는 영적 (평면의) 교회이고, 이 교회들로부터 사랑과 선행의 선과 행복이 있다; “거래함”은 획득함이다.
[8] 모세의 책에서:
밀과 보리의 토지, 그리고 포도나무와 무화과 나무와 석류 나무의 토지, 올리브의 토지, 기름의 (토지), 그리고 꿀의 토지 (신. 8:8);
위는 가나안의 토지를 묘사하고 있는데, 가나안의 토지는 내적 의미에서 주님의 왕국이다 (1413, 1437, 1585, 1607, 3038, 3705항). 사랑과 선행의 선들이 “밀과 보리”에 의해; 그리고 신앙의 선들은 “포도나무와 무화과 나무”에 의해 의미된다.
[9] 마태복음서에서:
그분의 부채가 그분의 손에 있다, 그리고 그분은 그분의 타작 마당을 통째로 걸러내실 것이다; 그리고 그분은 그분의 밀을 곳간에 모아들이시나, 그분은 겨를 꺼지지 않는 불로 태우실 것이다 (마. 3:12).
위는 세례 요한이 주님을 두고 이야기한 것이다; “밀”은 사랑과 선행의 선을 표시한다; “겨”는 선이 하나도 없는 것을 표시한다. 마태복음서에서: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하라, 그리고 추수 때에 나는 수확자들에게 말할 것이다, 가라지들을 먼저 거두어라, 그리고 그것들을 단으로 묶어 태워라, 그러나 밀은 내 곳간 안으로 그러모아라 (마. 13:30);
“가라지들”은 악들과 거짓들을; 그리고 “밀”은 선들을 표시한다. 이것들은 비교적이다(비유이다). 말씀에서의 비유들은 의미들을 수단으로 만들어지고 있다.

그리고 들에서 합환채를 발견했다. 이는 선행과 사랑으로부터의 진리와 선에 있는 부부의 사랑에 속하는 것들을 의미한다. 이는 “합환채(dudaim)”의 의미가 부부의 사랑에 속하는 것들이다로부터 인데, 아래에서 살핀다; 그리고 “들판”의 의미가 교회이다로부터, 결과적으로 신앙의 진리와 선행의 선이다로부터 알려진다. 그 이유는 이것들이 교회를 만들기 때문이다. 합환채가 무엇인지를 성경 번역가들은 모른다. 그들은 그것이 열매나 꽃을 가진 식물일 것으로 추정하고 자기들 각자의 의견에 따라 이름을 주고 있다. 어쨋든 그것에 어떤 이름을 붙여야 올바른 이름이 될 것인지는 중요 사항이 못된다. 단지 교회 속에 있었던 고대인들 사이에서 모든 열매나 꽃이 의미적이었다는 사실이 중요할 뿐이다; 그 이유가 그들이 알고 있는 것은, 자연계는 전체적이든, 세부적이든 모두에서 주님의 왕국을 표현하는 극장 무대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연계의 세 왕국에 있는 것들도 표현적이다는 것, 하여 자연계 각각의 것은 영계에 있는 어떤 특별한 것을 표현한다는 것, 그러므로 열매나 꽃 역시 그러하다는 것이다. “합환채”에 의해 선과 진리는 부부임을 의미한다는 것은 여기서의 내적 의미에서의 시리즈로부터 알는지 모른다; 뿐만 아니라 이 단어의 원어에서 갈라져 나온 단어들로부터도 알게 된다. 그 이유가 단어 “합환채”로부터 파생되는 것이 사랑들과 사랑들을 수단으로 결합함을 뜻하기 때문이다. “합환채”가 이로부터 근원한다는 것, 그리고 부부적인 것이다는 것은 아래 말들로부터 분명해진다;
아침에 우리는 포도원쪽에서 일어날 것이다; 우리는 포도나무가 꽃피웠는지, 그리고 포도를 내밀 었는지, 석류가 꽃들을 나오게 했는지를 볼 것이다; 거기서 나는 네게 내 사랑들(dudim)을 줄 것이다; 합환채가 향기를 내뿜을 것이다 (아. 7:12, 13).
위 구절 역시 “합환채”에 의해 의미되는 것을 보여준다.
위 구절이 발견되는 책, 아가서에 주목해보자, 이 책은 “모세와 예언서들”이라 불리우는 책들 사이에 있지는 않다, 그 이유는 이것에는 내적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고대 문체로 쓰여져 있고, 고대 교회의 책들로부터 수집된 의미들로, 그래서 고대 교회에서 천적이고 영적인 사랑을 의미한 것들, 고로 부부의 사랑을 의미하는 것들로 가득하다. 이것이 이 책의 본성인 것은 그것의 글자 의미에서 많은 사항들이 점잖치 못하다는 것, 이런 것은 “모세와 예언서들”이라 불리는 책과 더불은 경우가 아니다는 것에서 분명해진다; 그리고 이 책 내부에 천적인 것, 그리고 부부의 사랑을 의미하는 것과 같은 것이 수집되었기에, 마치 이 책이 어떤 신비적인 의미를 소유한 것처럼 나타날 뿐이다.
위와 같은 “합환채”의 의미로부터 지금 우리는 “르우벤이 들판에서 그것들을 발견했다”에 의해 사랑과 선행으로부터의 진리와 선의 부부 관계가 의미되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말하자면, 이는 결합되어질 수 있다를 의미한다. 그 이유가 영적 의미에서 부부의 원리는 선과 더불어 진리는 결합될 수밖에 없다는 것, 그리고 선은 진리와 더불어 결합되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로부터 모든 부부의 사랑이 온다; 그러므로 진짜 (순수한) 부부의 사랑은 선과 진리 안에 있는 이들, 고로 천국의 결혼 안에 있는 이들이 아니면 가능해질 수 없다.

그리고 그것을 그의 어머니 레아에게 가져왔다. 이는 외적 진리에 애착함에 응용함을 의미한다. 이는 “가져오다”가 응용하다, 적용하다임으로부터; 그리고 레아가 외적 진리에 애착함을 표현한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리고 라헬이 레아에게 말했다. 이는 내면의 진리에 애착함이 지각함, 그리고 그것을 갈망함을 의미한다. 이는 “말함”이 지각함이다로부터; 그리고 라헬이 내면의 진리에 대한 애착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 의미가 이 진리에 애착함과 이 진리를 갈망함이다는 것은 뒤이어지는 것으로부터도 분명해진다; 그 이유가 라헬이 말한다, “내가 바라건대 네 아들로부터 나에게 주라.”

바라건대 나에게 네 아들의 합환채를 주라. 이는 부부의 사랑에 관한 것에 애착함과 그것을 갈망함은 상호적으로 번갈아서 결합되어져야 할 것임을 의미한다. 이는 “합환채”의 의미가 부부의 사랑에 속한 것들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 의미가 애착과 갈망이다는 것은 분명해진다.

그리고 그 여자가 그녀에게 말했다, 네가 내 남자를 뺏은 일이 작은 일이더냐? 이는 부부이기를 바램이 있음을 의미한다. 이는 여기서 레아의 남편도 되는 야곱을 데려 감의 의미가 그들 사이에 있는 서로의 사랑을 포함하는 것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러므로 “네가 나의 남자를 뺏는 일이 작은 일이더냐?”에 의해 거기에 부부이기를 갈망함이 있음이 의미되고 있다.

그리고 너는 내 아들의 합환채 역시 가저가려 하느냐? 이는 그러므로 자연적 선과 외적 진리와의 부부의 관계는 철회될 것임을 의미한다. 여기서 “가저감”의 의미가 철회함이다로부터; “합환채”의 의미가 부부인 것이다로부터; 그리고 “아들”의 의미가 진리이다로부터 알게 되는데; 여기서의 경우, 외적 진리, 그 이유는 이것을 말하는 이가 레아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레아”가 외적 진리인 것은 이미 살폈다.

그리고 라헬이 말했다. 그러므로 그는 오늘 밤 네 아들의 합환채를 위해 너와 누울 것이다. 이는 결합함이 있을 것임에 동의함을 의미하는데, 이는 설명이 필요치 않을 것이다.

그리고 야곱은 저녁에 들판으로부터 왔다. 이는 진리의 선이 선의 상태에 있기는 하나 자연적인 것에 속하는 바 불명료한(희미한) 상태임을 의미한다. 이는 야곱의 표현함이 자연 평면의 진리의 선이다로부터; “들판”의 의미가 선 측면에서의 교회이다로부터, 고로 선이기도 하다; 그리고 “저녁”의 의미가 희미함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리고 레아가 그를 맞으러 나갔다, 그리고 말했다, 당신은 나에게 와야 합니다. 이는 외적 진리에 애착함 쪽에서 그와 함께 결합하기를 갈망함을 의미한다. 이는 레아가 외적 진리에 애착함을 표현한다로부터 분명해진다. 이 의미가 결합하기를 갈망함인 것은 설명이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그 이유가 저는 내 아들의 합환채로 당신을 빌려왔기 때문입니다. 이는 사전에 생각함으로 약속되어진 것을 의미한다. 이는 “삯을 내고 빌림, hiring to hire”의 의미가 약속된 것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것이 예견(foresight)으로부터 인 이유는 인간 안에서 진리가 선과, 그리고 선이 진리와 더불어 있는 모든 결합은 예견으로부터 있기 때문이다. 즉 주님의 섭리하심으로부터 있다는 말이다. 그 이유가 여기서 취급된 주제는 진리가 선과, 그리고 선이 진리와 결합하는 것이기에, 여기서의 선은 인간에게 걸맞는 선이기 때문에서이다. 그리고 모든 선은 주님으로부터 이다는 것, 즉 선이 진리와 결합함을 통하여 그 선이 자기 것 되게 함이 있기에 여기서 “예견함으로부터”라고 말했던 것이다. 주님의 섭리는 이 결합에 특별한 관심이 있다. 그 이유가 이 결합을 수단으로 인간은 인간이 되고, 야생 동물과 구별되어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가 이 결합으로 선을 받는 만큼에서 그는 인간이 된다; 다시 말해 그가 이 결합을 결과 하기 위해 주님에게 허가를 내주는 만큼에서 그는 인간이 된다는 말로 바꿀 수도 있다. 그러므로 이 선은 인간과 더불어 있는 선이다; 그리고 이 외에 영적인 다른 선, 그리고 영원쪽으로 남는 다른 선은 가능하지 않다.
더욱이 인간이 세상에 있는 한, 생명(삶)의 기쁨들인 외적 인간의 선들은 이 선을 내향적으로 함께 하는 만큼에서 (그가 소유하게 되는) 유일한 선일 뿐이다. 재물로부터의 선을 예로 생각해보자. 재물이 그것들 안쪽에 영적인 선을 가지는 만큼에서, 즉 재물들이 그것의 목적으로 이웃의 선을, 나라에 대한 선을, 즉 공공의 선을, 그리고 교회의 선을 그것의 목적으로 가지는 만큼에서 그것들은 선이 된다. 그러나 흔히 우리가 이야기하는 영적인 것은 세상적으로 부유함의 상태에서는 가능하지 않다고, 또한 이런 부유함은 천국에 자신의 방을 마련하는데 걸림돌이 된다고 자신을 스스로 설득하는 이들은 크게 빗나가는 것이다. 그 이유가 만일 그들이 자신의 재산을 포기한다면, 사실상 그들은 누구에게도 (마음에서만 선을 행할 수 있을지 몰라도 구체적으로는) 선을 행할 수 없기 때문이고, 그럴 경우, 세상에서의 남은 시간 동안 자신마저 비참해지기 때문이다. 결국 그는 이웃의 선, 공공의 선, 교회의 선조차 자신의 목적으로 삼아 계속적으로 행동할 수 없고, 자신은 구원되어져 천국에서 더 큰 자가 되어진다 라고 착각하게 되는 자신만이 덩그러히 남을 뿐이다. (아마도 이렇게 하는 멍청한 자가 요즘 세상에서 있기는 힘들지 몰라도 가끔 누구에게 설득당해 낭패를 보는 자도 있기는 하다.) 더구나 그들이 세상적 선을 벗어던진다면, 그들은 자신을 타인들의 경멸의 대상이 되게 만들 뿐이고, 결과적으로 자신이 세상에서 유용한 인간이 되는 것, 또는 세상에서의 의무들을 이행하는데 있어 무용지물로 전락되게 할 뿐이다.
위의 경우와 매우 유사한 예로 인간이 섭취하는 영양물이 있다. 이 영양물은 건전한 육체 안에 건전한 마음을 가지는 것이다. 만일 인간이 자기 신체로부터 가져야할 영양분을 박탈한다면, 그는 자신에게서 자신의 목적으로 필요해지는 조건을 박탈하는 셈이 되고 만다; 그러므로 영적인 인간도 세상의 영양물을 얕보지 않고, (건강한 음식을 맛있게 먹는) 쾌락조차 경멸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그는 이런 영양물이나 쾌락에 집착하지 않는다, 즉 그는 그것을 그의 목적으로 삼는 것은 아니고 목적에 대한 수단 중의 하나로만 간주한다는 말이다. 이런 간단한 예증으로부터 이외 다른 사항도 판단해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그날 밤 그녀와 누웠다. 이는 결합을 의미하는데, 별도의 설명은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이쯤해서 말해볼 것은, 앞의 주제들에서는 단어들의 내적 의미들을 피력하는 수준에서만 살폈는데, 그 이유는 앞의 주제들은 하나의 시리즈로 설명하지 않으면 납득되어질 수 없는 특성을 지녔기 때문에서이다. 그 이유가 취급된 주제가 진리와 선의 결합, 그리고 선과 진리의 결합, 이 결합이 영적 의미에서 이해되는 부부의 관계이기 때문이다; 즉 영적 의미에서의 부부의 관계가 인간과 더불은 천국의 결혼, 교회 안에서 있는 천국의 결혼을 만들기 때문이다. 이 천국의 결혼의 신비함들이 앞의 구절들에서 묘사되어지고, 아래와 같은 사항을 밝히 알리고 있다. 천국의 결혼은 선이 진리와 결혼함, 또는 진리가 선과 결혼함이다고 말해왔는데, 그럼에도 이 결혼은 이쪽 수준과 다른쪽 수준이 같은 상태에서 결합되지 않는다. 다시 말해 이쪽의 수준은 다른쪽보다 수준이 낮고, 다른쪽은 이쪽 수준보다 높은 상태에서 결합이 있다는 말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외적 인간의 선은 내적 인간의 진리와 결합한다; 같은 말로, 자연적 인간의 선과 자연적 인간의 진리 사이에서 결합이 있지 않고, 자연적 인간의 선과 영적 인간의 진리 사이에서 결합이 있다. 이 결합이 결혼을 만든다.
이것은 내적, 또는 영적 인간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여기서도 영적 인간의 선과 진리 사이에서 천국의 결혼이 있지 않고, 영적 인간의 선과 천적 인간의 진리 사이에서 결혼이 있다. 그 이유가 천적 인간이 영적 인간보다 상대적으로 더 높은 수준에 있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천적 인간의 선과 진리 사이에서 천국의 결혼은 있지 않고, 천적 인간의 선과 주님으로부터 진행하는 신성으로부터의 진리 사이에서 있다. 주님의 신성한 결혼 자체는 그분의 신성한 인간 안에서 신성으로부터의 선과 신성으로부터의 진리 시이에서 있지 않고, 신성으로부터의 선과 신성 자체 사이에서 있다, 즉 아들과 아버지 사이에서 있다는 말이다; 그 이유가 주님의 신성한 인간으로부터의 선이 말씀에서 “하느님의 아들”이라 불리우고, 신성 자체가 “아버지”라 불리우기 때문이다.
이런 사항들이 합환채에 관련하여 말해진 내적 의미 안에 포함된 신비함들이다. 아마 모든 이들 역시 합환채라는 (식물이 무엇인지 확연치는 않지만) 단어 안에 어떤 신비함이 있음에 틀림이 없다는 정도는 가늠하고 있을 것이다. 그 이유가 르우벤이 들판에서 합환채를 발견한 것, 그리고 라헬이 그것을 바랬다는 것, 그리고 그것을 가져감에서 그들의 남자가 레아와 눕게된다는 약속을 한 것; 그리고 야곱이 저녁에 들판에서 귀가하자 레아가 야곱을 마중나간 것, 그리고 자기가 합환채로 삯을 지불하여 그를 빌려왔다고 말한 것, 등등에 신성한 어떤 사항이 감추여 있지 않으면, 아마 이런 사건들이 말씀에 수록된 것조차 의아히 여기면서 구절 자체를 하찮은 구절로 전락되게 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렇다 해도 그 안에 놓인 신성한 사항들은 야곱의 아들들, 그리고 아들들로부터 명명된 지파들에 의해 의미된 것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하면; 그리고 내적 의미에서의 주제의 시리즈를 알지 못하면; 더욱이 천국의 결혼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하면 (왜 이런 사건이 말씀의 이 대목에 끼여 있는지에) 불투명한 채로 묻혀질 수밖에 없게 된다. 한마디로 취급된 주제가 외적 인간에 있는 선이 내적 인간에 있는 진리에 애착함과 결합함임을 영영 모른다는 말이다.
이 신비함을 더 이해하기 위해 예증을 들어보자. 외적 인간의 진리들은 인간이 자기 부모들로부터 처음 배워지고, 그 뒤 선생들로부터, 그 뒤 책들, 또는 자신의 연구함으로부터 배워지는 기억 속의 지식들이다. 외적 인간의 선들은 그가 배워진 것들로부터 지각하는 그것들의 쾌락과 기쁨이다. 진리들이 있는 기억 속의 진리들, 그리고 선이 있는 기쁨들은 함께 결합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들의 결합은 당사자 안에서 천국의 결혼을 만들지 않는다. 그 이유가 자기와 세상을 사랑함에 집착하고 있는 이들, 그러므로 악과 거짓 안에 있는 것도 개의치 않는 이들에게 있는 기억 속의 지식들, 교리적인 것에 이르기까지 기쁨들과 결합되어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는 (자연계에서는) 이런 사랑들로부터의 기쁨들과 더불어 진리들조차 결합되어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인물들은 천국 결혼의 밖에서 있다. 그러나 외적 인간 또는 자연적 인간의 선이 있는 기쁨 또는 쾌락이 영적인 사랑으로부터, 즉 이웃, 나라, 사회, 교회, 마지막으로 주님의 왕국을 사랑함으로부터 있을 때, 더욱이 천적인 사랑인 주님을 사랑함으로부터 있을 때; 다시 말해 영적 사랑이 내적 인간, 또는 영적 인간으로부터 외적 인간 또는 자연적 인간의 기쁨 안으로 흘러들 때, 외적 또는 자연적 인간의 기억 속의 지식들이나 교리적인 것들과 결합하는 바, 이 때 당사자와 더불어 천국의 결혼이 있게 된다. 이런 결합은 악한 자의 경우는 가능하지 않고 오직 선한 자의 경우에서 일 뿐이다. 즉 자기의 목적을 영적인 사랑, 천적인 사랑에 두고 있는 이들의 경우에만 해당된다.
위와 같은 사항을 알게 되면, 단어들을 내적 의미에서만 풀이한 각각에 의해 의미된 것을 알게 된다. 즉 (거듭남의 시작의 첫 단계인 신앙의 진리인) 르우벤이 합환채를 발견한 것에 대해; 그가 그것을 (외적 진리에 애착함인) 자기 어머니 레아에게 가져온 것에 대해; (내적 진리에 애착함인) 라헬이 그것을 갈망했다는 것; 그것이 그녀에게 주어졌다는 것; 그러므로 레아가 (자연적 인간에 있는 진리로부터의 선인) 그녀의 남자 야곱과 누웠다는 것; 그리고 뒤이어지는 구절들, 레아에 의해 야곱에게 잇사갈과 스불론이 태어난 것, 이들을 수단으로 부부의 사랑에 관한 것들, 고로 천국의 결혼이 표현되고 의미되었다는 것; 그때 요셉이 출생되었고, 그를 수단으로 지금까지 다루어진 결혼 자체인 주님의 영적 왕국이 의미되고 표현되었다는 것에 관하여도 실마리를 풀게 해서 알게 해준다.

17, 18절.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레아에게 귀기울이셨다, 그리고 그녀는 임신해서 야곱에게 다섯 번째 아들을 낳았다. 18 그리고 레아는 말했다, 하느님께서 나에게 내 보상을 주셨다, 그 이유는 내가 내 하녀를 내 남자에게 주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녀는 그의 이름을 잇사갈이라 불렀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레아에게 귀기울이셨다”란 신성한 사랑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녀는 임신했고 야곱에게 다섯 번째 아들을 낳았다”란 받아들임과 인정함을 의미한다; “그리고 레아는 말했다, 하느님께서 나에게 내 보상을 주셨다, 그 이유는 내가 내 하녀를 내 남자에게 주었기 때문이다”란 진리로부터의 신성한 선과 선으로부터의 진리를, 내적 의미에서 천적인 부부의 사랑을, 그리고 외적 의미에서 서로의 사랑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녀는 그의 이름을 잇사갈이라 불렀다”란 그것의 품질을 의미한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레아에게 귀기울이셨다. 이는 신성한 사랑을 의미한다. 이는 누군가에게 “귀기울임”의 의미가 하느님 또는 주님을 서술할 경우 신성한 사랑이다로부터; 그 이유가 귀기울임이 누군가가 바라는 것, 간구하는 것을 실행함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신성한 선으로부터 인 바, 그리고 신성한 선은 신성한 사랑으로부터 오는 바, 누군가에게 “귀기울이심”은 최고 의미에서 신성한 사랑이 의미된다. 말씀의 내적 의미와 더불은 경우는 글자의 의미가 천국을 향하여 승강하는 것, 고로 생각함이 주님으로부터 있는 영역으로 진입하여 주님에 관한 것과 주님에 속한 것일 때의 경우인 바, 주로 이것은 천사들이 지각하는 경우에 해당된다. 이것에 글자 의미는 평면을, 또는 생각하는 수단을 제공할 뿐이다. 그 이유가 글자의 의미는 천사들에게 와질 수 없기 때문, 그 이유가 글자 의미는 세상적, 지상적, 육체적인 것들에 대부분의 지면을 할애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여 이로부터서는 천사들은 생각할 수 없는데, 그 이유는 그들이 영적, 천적인 것들 안에 있기 때문, 고로 지상의 것 넘어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에서 말씀은 인간을 돕기 위해 있지만 동시에 천사들을 위해서도 있는 책이다. 이런 점이 세상 어느 책과도 비교할 수 없는 특별한 점인 것이다.

그리고 그녀는 임신했고 야곱에게 다섯 번째 아들을 낳았다. 이는 받아들임과 인정함을 의미한다; 이는 “임신함”의 의미가 받아들임이다로부터; 그리고 “낳다”의 의미가 인정함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리고 레아는 말했다, 하느님께서 나에게 내 보상을 주셨다, 그 이유는 내가 내 하녀를 내 남자에게 주었기 때문이다. 이는 최고 의미에서 진리로부터의 신성한 선과 선으로부터의 진리를, 내적 의미에서 천적인 부부의 사랑을, 그리고 외적 의미에서 서로의 사랑을 의미한다; 이는 “보상(reward)”의 의미로부터 알는지 모른다. “보상”이란 단어는 말씀 안에서 자주 등장하는 단어이기는 하나 각 구절들에서 이 단어가 의미하는 것을 아는 자는 매우 적다. 인간이 행하는 선을 수단으로 인간은 칭찬받을 것이 아무 것도 없다(공덕(功德, merit)을 얻지 못한다)는 것은 교회들에 알려져 있다. 그 이유는 그 선이 그의 것이 아닌 주님의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공덕을 얻는 것, 또는 공덕 자체는 인간쪽을 보고 있기 때문(인간쪽으로 기울어져 있다), 하여 그 자체 자기 사랑에 결합하기 때문, 그리고 자신은 타인보다 탁월하다는 생각과도 결합하고, 결과적으로 타인을 경멸함과도 결합해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보상을 위하여 행해진 일들은 그 자체 선이 아니다, 그 이유는 그것들은 순수한 원천으로부터 솟아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즉 이웃을 향한 선행으로부터 솟아나지 않았다는 말이다. 이웃을 향한 선행은 그것 안쪽에 타인도 자신 같이 잘되기를 바램이 있다; 그리고 천사들의 경우, 자신이 잘됨보다 타인이 더 잘되기를 바램이 있다. 선행에 애착함 역시 이와 같다; 그러므로 이것은 모든 자기 공덕(self-merit)에 반대되어 있다, 결과적으로 보상을 기대하는 모든 선을 행함에 반대된다. 선행 안에 있는 이들에게 보상은 친절을 보여줄 수 있음에 있고, 그렇게 행하도록 허용됨 안에 있고, 그리고 친절을 받아들임 안에 있다. 이것이 기쁨, 그렇다 선행에 애착하는 이들에 의해 향유되는 복됨 자체이다. 이로부터 말씀에서 언급되는 “보상”이 무엇인지가 분명해진다. 즉 선행에 애착함으로부터의 기쁨과 행복이다; 또는 같은 것으로 서로의 사랑으로부터의 기쁨과 행복이다. 그 이유가 선행에 애착함, 그리고 서로의 사랑은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이상으로부터 분명한 바, 외적 의미에서의 “보상”은 여기에서는 서로의 사랑이다.
보다 높은 의미에서, 또는 내적 의미에서 “보상”을 수단으로 천적인 부부의 사랑이 의미된다는 것은 천국의 결혼에 관해 말해졌던 바로부터 알았을런지 모른다, 즉 이것은 선과 진리의 결합이다는 것; 그리고 서로의 사랑은 이 결합으로부터 또는 이 결혼으로부터 있다는 것이다. 이로부터 분명한 바, 내적 의미에서의 “보상”은 천적인 부부의 사랑이다는 것이다.
최고 의미에서 “보상”은 진리로부터의 신성한 선과 선으로부터의 진리이다는 것은 천국의 결혼이 거기로부터 파생된다는 사실로부터 분명해진다; 그 이유가 이 합일이 주님 안에서 있기 때문, 그리고 그분으로 진행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이 천국 안으로 흘러들 때, 이것이 선과 진리의 부부 관계를 만든다, 그럼으로 서로의 사랑을 만든다. 지금 말해진 것, 앞서 말해졌던 것으로부터, 레아의 말, 즉 “하느님께서 나에게 내 보상을 주셨다, 그 이유는 내가 내 남자에게 내 하녀를 주었기 때문이다”에 의해 내적 의미에서 의미되는 것이 분명해졌을 것이다; 그 이유가 “하녀”에 의해 외적 인간이 내적 인간과 결합함에 도움을 주는 확언하는 수단이 의미되기 때문이다. 고로 하녀의 아들들에 의해 의미된 이런 저런 것들이 확언되고 인정되기 이전에서는 선과 진리의 어떤 결합도 공표될 수 없다는 것, 고로 어떤 서로의 사랑도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 이유가 이런 확언이 먼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우리 앞의 말들에 의해 뜻해진다.

그리고 그녀는 그의 이름을 잇사갈이라 불렀다. 이는 그것의 품질을 의미한다. 이는 “이름을 부름”의 의미가 품질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 이유가 이름 잇사갈은 “보상”으로부터 명명되었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이름은 보상에 관해 말해졌던 것을 포함하고, 동시에 레아의 말에 의해 의미된 것까지 포함한다. “잇사갈”에 의해 “보상”이 뜻해지고; 그리고 외적 의미에서 “보상”은 서로의 사랑이고; 그리고 내적 의미에서 선과 진리의 결합이지만, 현재의 기독교계의 극히 적은 이들만이 “보상”의 이런 의미를 알기에, 그런 이유는 그들이 서로의 사랑이 무엇인지를, 더욱이 인간이 천국의 결혼 안에 있기 위하여는 선은 반드시 진리와 결합해야만 한다는 것을 모르기에 보상의 의미를 알 수 없는 바, 이를 좀 더 서술해두는 것이 좋지 않을까 싶다. 나는 이 주제를 놓고 기독교계로부터 온 다른 삶에 있는 많은 이들, 그리고 학식이 대단하다는 이들과도 이야기를 나누어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다; 그러나 놀라웁다 말해야 하는 것은, 내가 이야기를 하도록 허락된 이들 중의 거의 누구도 그것에 관하여 알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런데도 그들은 만일 자기들이 자기들의 추론을 사용해도 좋다고 한다면 자신들로부터 이에 관해 많은 것을 알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들이 사후 삶에 관하여는 걱정하지 않고 오직 세상 삶에 관해서만 걱정했을 때, 이런 것들이 그들의 관심 밖에 있었다.
그들이 자신들로부터 알고 있어 왔다고 하는 것을 그들은 추론을 사용하기 위해 선택했는데 아래와 같다: 첫째, 인간이 자기 육체를 벗을 때, 그는 세상에서 가졌던 이해력보다 훨씬 더 계발된 이해력을 충분히 발휘하게 된다는 것, 그 이유는 그가 육체 안에 있는 동안, 육체적, 세상적인 것들이 그의 생각들을 점령하고 있어 이것이 이해력을 희미하게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육체를 벗을 때, 이와 같은 것들이 간섭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것은 바깥쪽의 감각들의 것들로부터 마음의 추상을 수단으로 내면의 생각 안에 있는 이들과 더불어서도 그러하다. 이로부터 그들은 사후 삶이 죽음 이전 삶보다 더 명백한 시야와 계발됨을 누린다는 것을 알는지 모른다; 그리고 인간이 죽을 때, 그는 그늘짐에서 빛 안으로 건너간다는 것, 그 이유는 그가 세상의 것들로부터 천국의 것들에로 건너가기 때문, 그리고 육체의 것들로부터 영의 것들에로 건너가기 때문이다. 그러나 경이하다 말해야 하는 것은, 이 모든 사항을 알고 있다 해도 그럼에도 그들은 반대로 생각한다는 점이다, 즉 육체 안에서의 삶의 상태가 상대적으로 명료하다는 것, 그리고 육체를 벗은 이 후의 삶의 상태는 상대적으로 희미하다고 생각한다.
만일 그들이 자기의 추론을 사용한다면 알는지 모른다는 두 번째 사항은 인간이 세상에서 자신을 위해 획득한 생명이 그를 따라다닌다는 것이다; 즉, 그는 사후 그와 같은 생명 안에 있다는 점이다. 자신의 것 모두가 일괄하여 죽는다는 조건을 달지 않고서는 죽음에서 자신이 유아로부터 획득해왔던 생명을 벗을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다; 그리고 이 생명은 한 순간에 또다른 생명으로 바뀔 수 없다는 것, 그 반대의 상태로는 더 더욱 가능할 수 없다. 예를 들면: 사기침의 생명을 획득하고 이 생명에서 기쁨을 발견했던 자는 사기침의 생명을 벗지 못하고 사후에도 여전히 사기치고 있다. 자기를 사랑함에 있는 이들, 그럼으로 해서 자기를 떠받들어주지 않는 이들을 증오하고 앙갚음하는 자, 그리고 이외 다른 악에 있는 자는 육체의 삶 이후 그것들 안에 남아 있다; 그 이유가 이것들은 그들이 사랑한 것들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이 그들 생명의 기쁨을 구성했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그들의 생명 자체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런 것들은 그들의 생명을 완전히 소멸한다는 조건을 달지 않는 이상 그들로부터 거두어내질 수 없다. 이런 경우의 예는 다른 경우에도 많다.
인간이 자신으로부터 알는지 모른다는 세 번째의 것은, 인간이 다른 삶으로 건너갈 때, 그는 건너간 곳에서 있을 장소가 없는 많은 것들을 뒤에 남겨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음식, 의복, 집에 대한 걱정 같은 것, 또한 돈을 벌 걱정, 명예를 확보하는 것, 등등의 모든 것은 육체의 삶에서 인간에 의해 생각됐던 것들이다; 그러나 다른 삶에서는 이 지상의 왕국으로부터 있지 않은 다른 것들을 수단으로 계승된다.
그러므로 인간이 알 수 있는 네 번째 사항은 세상에 있는 자는 세상의 것들에 대해서만 생각을 가졌다는 것, 그리하여 세상의 것들에 전체적으로 소유당해져 왔다는 것, 그리고 그것들로 부터서만 생명의 기쁨을 획득한 이들은 천국의 것들에 관하여 생각하는 것이 자기들의 기쁨이 되는 이들 사이에 낄 수 없다는 것이다.
이로부터 다섯 번째 사항이 뒤따른다; 육체와 세상으로부터의 외적인 것들이 거두어질 때, 그때 인간은 내향적으로 있어 온 듯하여 있는다는 것, 즉 그는 내향적으로 생각하고 뜻한다. 만일 그의 생각들이 내향적으로 사기침, 음모를 획책함, 위엄을 갈망함, 이득을 갈망함, 명성을 갈망함 따위이었다면; 만일 그들이 증오함과 앙갚음에 들끓고 있었다면, 그는 자기가 여전히 그런 상태 아래 있다는 것을 볼 것이다. 그가 미리 계획한 목적을 위하여 사람들로부터 자기의 생각을 감추여 있게 하고, 한편 자신의 심정에 가지지도 않은 것을 믿도록 타인을 이끌고 있다 해도 그는 지옥에 속한 것을 생각하고 있음이 보여질 수 있다.
외적으로 값어치 있는 것 같은 이런 모든 것들은 다른 삶에서 거두어진다는 것은 바깥쪽의 것들은 육체와 더불어 모두 벗어지고 더 이상 어떤 사용도 없다는 사실로부터 알려질는지 모른다. 이로부터 모든 이는 자기가 천사들 앞에 어떤 종류의 인간으로 나타날 것인지를 자신을 위해 결말지을 수 있다.
알는지 모를 여섯 번째의 사항은 천국, 또는 천국을 통한 주님은 계속적으로 일하시고 선과 진리와 더불어 흘러드신다는 것이다; 그런데 인간 안에, 즉 사후에 사는 내면의 인간 안에 선과 진리를 담는 그릇인 평면, 또는 바탕이 없다면, 흘러드는 선과 진리는 받아질 수 없다; 이런 이유로 인간이 육체 안에서 사는 동안 자신 안쪽에 이런 평면을 확보하려 열심을 내야 한다; 그러나 이 평면은 이웃을 향하여 선인 것을 생각함과 이웃에 선인 것을 뜻함이 아니고서는 확보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웃에게 선인 것을 행함과 그로부터 생명의 기쁨을 획득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다시 말해 이 평면은 이웃을 향한 선행을 수단으로, 즉 서로의 사랑을 수단으로 획득되어진다. 이 평면이 양심이라 불리운다. 이 평면 안으로 주님으로부터의 선과 진리는 흐를 수 있고, 받아질 수 있다; 그러나 선행이 있지 않은 곳, 결과적으로 양심이 없는 곳은 아니다. 그 이유가 이 평면이 없으면 흘러드는 선과 진리는 통과해가거나 악과 거짓으로 변하기 때문이다.
인간이 자신으로부터 알 수 있는 일곱 번째의 것은, 하느님을 사랑함과 이웃을 향한 사랑이 인간을 인간답게 만든다는 것, 하여 들짐승과 구별되게 해준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들이 천국의 생명을, 또는 천국을 만든다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이 이런 사항을 알지 못하는 이유는 그가 이런 것들을 알기를 바라지 않기 때문이다. 바라지 않는 이유는 그가 반대적인 삶을 영위하기 때문이다, 더불어 그는 사후의 삶이 있다고 믿지 않기 때문이다. 사후의 삶이 있다고 믿기는 하나, 선행이 결여된 신앙의 원리를 채택하였기 때문이다. 그들은 죽는 그 시간에 믿노라는 고백 하나로 그 순간까지의 삶은 아랑곳하지 않아도 된다는 신앙의 원리, 즉 신앙만으로 구원이 확실하다고 하는 교리에 일치하여 믿기 때문이다.

19, 20절. 그리고 레아는 다시 임신했다, 그리고 여섯 번째 아들을 야곱에게 낳았다.
20 그리고 레아가 말했다, 하느님께서 나에게 신부 지참금을 기부하셨다. 이제는 내 남편이 나와 함께 살 것이다, 그 이유는 내가 여섯 아들을 그에게 낳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녀는 그의 이름을 스불론이라 불렀다. “그리고 레아는 다시 임신했다, 그리고 여섯 번째 아들을 야곱에게 낳았다”란 받아들임과 인정함을 의미한다. “그리고 레아는 말했다, 하느님께서 나에게 신부 지참금을 기부하셨다, 이제는 내 남자가 나와 함께 살 것이다, 그 이유는 내가 그에게 여섯 아들을 낳았기 때문이다”란 최고의 의미에서 주님의 신성 자체와 그분의 신성한 인간을, 내적 의미에서 천국의 결혼을, 외적 의미에서 부부의 사랑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녀는 그의 이름을 스불론이라 불렀다”란 그것의 품질을 의미한다.

그리고 레아는 다시 임신했다, 그리고 여섯 번째 아들을 야곱에게 낳았다. 이는 진리를 받아들임과 인정함을 의미한다. 이는 “임신함”의 의미가 받는 것이다로부터; 그리고 “낳는다”가 인정한다를 의미함으로부터 알게 된다; 그리고 “아들”의 의미가 진리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리고 레아는 말했다, 하느님께서 나에게 신부 지참금을 기부하셨다, 이제는 내 남자가 나와 함께 살 것이다, 그 이유는 내가 그에게 여섯 아들을 낳았기 때문이다. 이는 최고의 의미에서 주님의 신성 자체와 그분의 신성한 인간을, 내적 의미에서 천국의 결혼을, 외적 의미에서 부부의 사랑을 의미한다. 이는 “함께 산다(거주한다)”의 의미로부터, 또한 이때 레아가 말한 말로부터 알게 된다. “함께 거주한다”, 또는 “동거함”이 최고 의미에서 주님의 신성 자체와 주님의 신성한 인간인 이유는 “아버지”라 불리운 신성 자체가 “하느님의 아들”이라 불리운 신성한 인간 안에 상호적으로와 교차적으로 계시기 때문에서 인데, 이는 요한복음서에서 주님 자신의 말로부터 이다:
예수께서 말하신다, 빌립보야,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본 것이다.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가 내 안에 계신다는 것을 믿어라 (요. 14. 9-11; 10:38).
이 합일이 신성한 결혼 자체이다는 것에 대하여는 이미 말했다. 그럼에도 이 합일은 동거함은 아니고, 단지 글자 의미에서 “동거함”에 의해 표현되었을 뿐이다; 다시 말해 한 분이 아버지와 아들로서 글자 의미에서 두 분으로, 어떤 때는 셋으로, 즉 아버지와 아들, 성령으로 글자 의미에서 표출되어져 있을 뿐이다. 이에 대한 것은 별도로 주님의 신성한 자비로부터 살필 기회가 있을 것이다.
글자 의미에서의 “함께 거주함” 또는 “동거함”이 천국의 결혼인 것은 위와 똑같은 원인으로부터 이다. 그 이유는 이 결혼이 신성한 결혼으로부터 출시되기 때문이다. 이 신성한 결혼은 아버지와 아들의 합일, 또는 주님의 신성 자체와 그분의 신성한 인간의 합일이다.
천국의 결혼은 주님의 왕국이라 불리우고, 천국이라 불리기도 한다; 그리고 이것이 신성한 결혼으로부터 출시되기 때문이다. 이것이 “동거함”의 내적 의미에서 의미된 것이다, 천국은 “하느님의 주택”이라고도 불리우고 있다. 이사야서에서:
하늘로부터 내려다보소서, 그리고 당신의 거룩함과 당신의 장식품으로 된 주택으로부터 바라 보소서; 당신의 열정과 당신의 권능 있는 행하심은 어디 있습니까? 당신의 동정심으로부터의 동정하심과 나를 향한 불쌍히 여기심은 자체를 감금해 버렸습니다 (이. 63:15);
“거룩함의 주택”은 천적인 왕국을 표시한다; 그리고 “장식품으로 꾸민 주택”은 영적인 왕국을 표시한다. 위 구절의 “주택”은 “함께 거주함”과 “동거함”의 같은 근원으로부터 이다.
외적 의미에서 “함께 거주함” 또는 “동거함”이 부부의 사랑인 이유는 모든 진짜 부부의 사랑은 천국의 결혼, 즉 선과 진리의 결혼 외에 다른 근원으로부터는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사랑은 신성한 결혼으로부터 이다. 이 결혼은 주님의 신성 자체와 주님의 신성한 인간 측면에서의 주님이시다.
이런 사항들이 “함께 거주함”, 또는 “이제 내 남자가 나와 함께 거주한다”에 의해, 뿐만 아니라, “하느님께서 신부 지참금을 나에게 수여하셨다”에 의해서도 의미된다. 앞의
말은 선으로부터의 진리가, 뒤의 말에 의해서는 진리로부터의 선이 의미되었는데, 이 둘 모두가 천국의 결혼을 만든다. 그리고 결론적으로, “내가 그에게 여섯 아들을 낳았기 때문에”라고 말해진다; 그 이유가 “여섯”은 여기서 열둘과 같은 의미, 즉 신앙과 사랑의 모든 것들을 의미한다. 말씀에서 숫자의 절반, 또는 두 배는 주제가 비슷하다면 같은 의미를 지닌다.

그리고 그녀는 그의 이름을 스불론이라 불렀다. 이는 그것의 품질을 의미한다. 이는 “이름을 부름”의 의미가 품질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는 “함께 거주함”으로부터 “스불론”이라 명명되었다. 이 이름에는 “함께 거주함”에 관해 말해진 모든 것, 그리고 레아의 말들에 의해 의미된 것까지 포함된다.

21절. 그리고 그 후 그녀는 딸을 낳았다, 그리고 그녀의 이름을 디나라 불렀다. “그리고 그 후 그녀는 딸을 낳았다”란 이러한 모든 일반적 진리들에 애착함을, 그리고 또한 선이 있는 신앙으로부터의 교회도 의미한다. “그의 이름을 디나라 불렀다”란 그것의 품질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 후 그녀는 딸을 낳았다. 이는 이러한 모든 일반적 진리들에 애착함을, 그리고 또한 선이 있는 신앙으로부터의 교회도 의미한다. 이는 “딸”의 의미가 애착이 있음이다로부터, 또한 교회이다로부터; 그러나 교회의 무엇, 또는 교회의 무슨 종류에 애착하는지는 단어 딸에 첨가되는 말로부터 나타난다. 즉 “시온의 딸”이라 말해져서 “시온”이 첨가될 때는 천적인 교회를; “예루살렘의 딸”이라 불리워서 “예루살렘”이 첨가될 경우는 영적인 교회를 의미한다는 말이다. 이외 다른 경우도 많다. 여기 같이 아무 것도 첨가됨이 없을 경우, 선이 있는 신앙으로부터의 교회가 “딸”에 의해 의미된다; 그 이유가 여기까지에서 선이 안쪽에 있는 신앙의 일반적 진리들이 묘사되어 왔고, 그것들의 받아들임과 인정함이 있어 왔기 때문이다; 이런 진리들이 야곱의 “열 아들들”에 의해 의미되었다, 그리고 이 아들들 뒤를 이어 딸이 태어났다고 말해졌는 바, 이는 모든 이런 진리들이 있는 교회를 뜻한다는 것이 시리즈로부터 분명해진다.
우리가 선이 있는 신앙으로부터의 교회를 말하든지, 또는 영적 교회를 말하든지, 이 둘은 같은 말이다; 또한 우리가 모두에 애착함, 즉 모든 이런 진리들에 애착함이라 말해도 같은 말이다; 그 이유가 교회는 선이 있는 진리에 애착함으로부터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선에 애착함으로부터 진리가 있다; 그러나 진리에 애착함으로부터가 아니면 선이 있지 않고, 선에 애착함으로부터가 아니면 진리가 있지 않다. 교회로부터 있다고 말하는 이들이 진리에 애착함에 있으나 진리로부터의 선 안에 있지 않다면, 그는 진리들에 따라 살지 않는 바, 이는 대단히 실수한 것이다. 이런 자들은 비록 그들이 교회에 소속되어 있다 해도 그들은 교회 밖에 있는 것이다; 그 이유가 그들은 악에 애착함 안에 있어 진리가 결합될 수 없기 때문이다. 진리에 대한 그들의 애착함은 주님으로부터 있지 않고 자신들로부터 있다; 그 이유가 그들은 자신들을 중요시하고, 진리에 대한 지식들을 수단으로 명성을, 영예와 부를 얻으려 의도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교회쪽에, 주님의 왕국쪽에, 더욱이 주님쪽에 하등 관심이 없다. 선에 애착함 안에 있되 진리가 있지 않은 이들은 비록 교회에 소속되었어도 교회로부터 있는 것은 아니다; 그 이유가 그들은 자연적 수준의 선 안에 있을 뿐 영적인 선 안에 있지 않기 때문이고, 그들은 외관적으로 선이다면 그 원인, 목적, 또는 바탕이 악이라 할지라도, 또는 외관적으로 진리이다면 그 바탕이 거짓이라 해도 개의치 않는 바, 결국 갖가지 종류에 악과 거짓이 자신을 끌고가게 허용해 버린다.

그의 이름을 디나라 불렀다. 이는 그것의 품질을 의미한다. 이는 “이름” 또는 “이름을 부름”의 의미가 품질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디나가 표현하고 의미하는 품질은 선이 있는 신앙으로부터의 교회에 있는 모든 것을 의미한다. 이는 방금 앞에서 살폈다. 똑같은 의미가 그녀의 이름의 갈래로부터 분명해진다, 그 이유가 원어에서 “디나”는 “판단, 재판, 공정, judgment”을 뜻하기 때문이다.
22-24절.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라헬을 기억하셨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그녀에게 귀기울이셨다, 그리고 그녀의 자궁을 여셨다. 23 그리고 그녀는 임신했다, 그리고 아들을 낳았다, 그리고 말했다, 하느님께서 내 불명예를 거두어 들이셨다. 24 그리고 그녀는 그의 이름을 요셉이라 불렀고,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나에게 또다른 아들을 더하소서.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라헬을 기억하셨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그녀에게 귀기울이셨다”란 예견과 섭리를 의미한다. “그리고 그녀의 자궁을 여셨다”란 받아들이고 인정하는 수용력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녀는 임신했다, 그리고 아들을 낳았다”란 받아들임과 인정함을 의미한다. “그리고 말했다, 하느님께서 내 불명예를 거두어 들이셨다. 그리고 그녀는 그의 이름을 요셉이라 불렀다,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나에게 또다른 아들을 더하소서”란 최고의 의미에서 신성의 영적 평면에 관련된 주님을; 내적 의미에서 영적 왕국을; 또는 신앙으로부터의 선을; 그리고 외적 의미에서 구원, 또한 열매맺음과 번성함을 의미한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라헬을 기억하셨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그녀에게 귀기울이셨다. 이는 예견과 섭리를 의미한다. 이는 “기억하다”가 하느님을 서술하기 때문에 예견을 의미하는데, 그 이유는 “기억함”은 누군가를 바라보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최고 의미에서 “보다”는 예견함인데 이는 이미 살폈다; 그리고 “귀기울임”이 하느님을 서술하므로 섭리가 의미된다.

그리고 그녀의 자궁을 여셨다. 이는 받아들이고 인정하는 수용력을 의미한다. 이는 “자궁을 열다”의 의미가 임신과 출산하는 수용력을 주는 것이다로부터; 고로 내적 의미에서 진리로부터의 선들과 선으로부터의 진리를 받아들이고 인정하는 수용력을 의미한다. “임신하고 출산함”이 받아들임과 인정함을 표시하는 것은 이미 반복적으로 피력해 왔다.

그리고 그녀는 임신했다, 그리고 아들을 낳았다. 이는 받아들임과 인정함을 의미한다. 이는 이미 위에서 알았을 것이다.

그리고 말했다, 하느님께서 내 불명예를 거두어 들이셨다. 그리고 그녀는 그의 이름을 요셉이라 불렀다,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나에게 또다른 아들을 더하소서. 이는 최고의 의미에서 신성의 영적 평면에 관련된 주님을; 내적 의미에서 영적 왕국을; 또는 신앙으로부터의 선을; 그리고 외적 의미에서 구원, 또한 열매맺음과 번성함을 의미한다. 이는 말씀에 있는 요셉의 표현으로부터, 이는 아래에서 살핀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내 불명예를 거두셨다”의 의미로부터, 그리고 “여호와께서 제게 또다른 아들을 더하소서”의 의미로부터 알게 된다; 그 이유가 그는 “거두어들임, gathering”과 “더함, adding”으로부터 “요셉”이라 명명되었기 때문이다. “하느님께서 내 불명예를 거두셨다”가 지금 라헬은 더 이상 불임 상태에 있지 않다는 것, 고로 1절에서 야곱에게 말한 죽어있는 상태가 아니다를 의미한다. 그 이유가 라헬에 의해 내면의 진리에 애착함, 또는 진리 측면에서의 내면의 인간이 표현되었기 때문이다. 내면의 인간은 만일 외면, 또는 자연적 인간이 선들과 진리들에 관련하여 상응하지 않으면 마치 죽은 자 같이 있다
이 둘이 둘이 아니기 위해서, 즉 함께 하나의 인간이기 위해서 서로가 서로에 결합되고 있어야만 한다. 이 결합은 자연적 또는 외적 인간이 준비될 때까지, 즉 레아와 하녀들에 의한 야곱의 열 아들들에 의해 의미된 일반적 진리들을 받아들이고 인정할 때까지; 그리고 레아에 의한 야곱의 마지막 아들, “함께 거주함”으로부터 명명된 스불론에 의해 의미된 결합, 즉 자연적 인간의 선이 진리들과 결합할 때까지 공표될 수 없다(세상 밖으로 나와질 수 없다). 이 결합이 결과된 이후 내면의 인간과 외면의 인간은 천국의 결혼 안으로 들어가는데, 이는 이미 말했다. 그것들이 그 전에 천국의 결혼 안으로 들어가지 않는 이유는 큰 비밀이다; 그 이유가 내면의 인간의 선은 외면의 인간의 선과 그 자체 결합하고, 이를 수단으로 그 안에 있는 진리와 결합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내면의 인간의 선은 그 안에 있는 진리에 애착함을 수단으로 외면의 인간의 선과 그 자체 결합한다, 그리고 또한 그 안에 있는 진리와 결합한다; 고로 직접적, 간접적으로 이다. 내면의 인간이 먼저 외면의 인간과 결합하기에, 이 결합이 결과되기 이전 내면의 인간은 마치 존재하지 않는 듯, 마치 죽은 듯하여 있기에, 말해지는 바, “하느님께서 내 불명예를 거두어 들이셨다”이다. 이런 상태가 하느님께서 거두어 들이신 불명예에 의해 의미되어진다, 즉 그분은 그녀를 불명예로부터 해방되게 하셨다 이다.
그러나 뒤이어지는 말에 의해: 즉 요셉이라 명명되게 한 말, “여호와께서는 나에게 또다른 아들을 더하소서”에 의해, 또다른 신비함들이 의미되어지는데, 이러하다: 요셉에 의해 주님의 영적 왕국, 고로 영적 인간이 표현되었다; 그 이유가 이 왕국이 모두 각각의 영적 인간 안에 있기 때문이다. 영적 인간을 구성하는 두 가지는 선행과 신앙; 같은 말로 선과 진리이다. 선행으로부터 신앙이, 선으로부터 진리가 있는데, 이것이 요셉에 의해 표현되어져 있다. 신앙 안에 선행이, 진리 안에 선이 있는 것이 “또다른 아들”에 의해 의미되었고, 이것이 창. 35:16-18에서 베냐민에 의해 표현된다. 고로 “요셉”은 천적 영적 인간이다; 그리고 “베냐민”은 영적 천적 인간이다. 이 둘 사이의 차이점은 선으로부터 진리가 있음과 진리 안에 선이 있음에 관해 앞에서 말해져왔던 것으로부터 알는지 모른다. 이것은 라헬의 다른 말: “여호와께서는 내게 또다른 아들을 더하소서”에 의해 의미되어져 있다. 그러나 이 신비함들은 신앙으로부터의 선 안에 있는 이들 외에는 보여질 수 없다; 그 이유가 이것들은 천국의 빛에 있는 그들의 내면에 관하여서 이기 때문이다. 이 빛 안에 총명 또한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들은 세상의 빛 만에 있는 이들에 의해서는 보여질 수 없다, 그 이유가 이 빛 안에는 총명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천국의 빛이 세상의 빛 안에 있는 한도에서만 가능할지 모른다. 그러나 천국의 빛 안에 있는 천사들에게는 이런 사항은 일상적인, 대단히 평범한, 매우 당연한 사항일 뿐이다.
위 살핀 바로부터 이 말들, “하느님께서 내 불명예를 거두어 들이셨다”와 “여호와께서는 나에게 또다른 아들을 더하소서”에 의해 최고 의미에서 신성의 영적 평면에서의 주님이; 그리고 내적 의미에서는 주님의 영적 왕국, 또는 이 왕국의 영적 평면인 신앙으로부터의 선이 의미됨을 알았을 것이다. 그러나 외적 의미에서 이 말들에 의해 구원, 또한 열매맺음과 번성함이 의미되는데, 이런 이유 때문이다. 주님의 영적 왕국, 이미 반복적으로 서술했던 그대로, 선행 안에 있는 이들과 선행에 의해 신앙 안에 있는 이들로 구성된다. 이것은 주님의 천적 왕국과 구별된다. 이 천적 왕국은 주님을 사랑함 안에 있는 이들과 이 사랑함에 의해 선행 안에 있는 이들로 구성된다. 이 천적 왕국이 세 번째 천국, 또는 가장 깊은 천국을 구성한다; 그러나 영적 왕국에 있는 이들은 두 번째 천국, 또는 내면의 천국을 구성한다.
위 라헬의 말에서, 처음 말에서는 “하느님”이, 그 다음 말에서는 “여호와”가 언급되었는데, 그 이유는 전자는 진리로부터 선으로의 승강을; 후자는 선으로부터 진리로의 하강에 관련되었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영적 인간은 신앙으로부터의 선 안에(즉 진리가 있음으로부터 선 안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영적 인간이기 이전의 경우, 그는 신앙으로부터의 진리 안에( 즉 선을 담고 있는 진리 안에) 있다; 주제가 진리일 경우, 단어 “하느님”이 사용되고; 주제가 선일 경우, 단어 “여호와”가 사용된다.
요셉에 의해 주님의 영적 왕국, 또는 영적 인간, 고로 신앙으로부터의 선이 표현된다는 것을 요셉이 언급되는 다른 구절로부터도 알게 된다. 이스라엘이 된 야곱의 예언이다:
요셉은 결실이 풍부한 자의 아들, 샘가의 결실이 풍부한 자의 아들, 담 위에서 행진하는 딸의 아들이다; 활쏘는 자가 그를 더 비참하게 할 것이고 그에게 쏠 것이고, 그를 미워할 것이다; 그러나 그는 자기 활의 강함 아래 머무를 것이다; 그의 손의 무기들은 야곱의 전능하신 분에 의해 강하게 만들어질 것이다; 거기로부터 목자가, 이스라엘의 돌이 있다; 네 아버지의 하느님에 의해, 그리고 그분이 너를 도울 것이다, 그리고 사다이와 더불어, 그리고 그분이 위로부터 하늘의 복됨으로, 아래 놓인 깊음의 복됨과 가슴의 복됨과 자궁의 복됨과 더불어, 너를 복되게 하실 것이다; 네 아버지의 축복은 영원히 지속되는 언덕들쪽으로 내 선조들의 축복을 능가할 것이다; 그것들이 요셉의 머리 위에, 그의 형제들로부터의 나지르인의 머리 위에 있을 것이다 (창. 49:22-26);
위 예언의 말들 안에 주님의 신성의 영적 평면의 묘사가 최고 의미에서 포함되고 있다; 그리고 내적 의미에서 그분의 영적 왕국이 포함되어 있다. 위 구절의 세세한 것은 그 장의 설명에서 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모세의 예언에서:
그가 요셉에게 말했다, 그의 토지가 여호와께로부터 복을 받을 지라, 즉 하늘의 귀중한 것, 이슬, 그리고 아래 뉘인 깊은 것; 그리고 태양의 열매들의 귀한 것, 그리고 달들(months)의 소출의 귀한 것; 그리고 동쪽의 산의 첫 열매, 그리고 영원히 지속되는 언덕들의 귀한 것; 그리고 땅의 귀한 것과 그로부터 충만한 것; 그리고 수풀에서 거주하는 자로부터의 선한 의지이다; 그것들이 요셉의 머리 위에 올 것이다, 그리고 자기 형제들의 나지르인의 머리의 관 위에 올 것이다
(신. 33:13-17).
이스라엘이 주님의 영적 교회를 표현했기에, 야곱, 그때 당시 이스라엘인 그가 자기가 죽기 전 요셉에게 말했다:
내가 이집트 안으로 오기 이전, 이집트의 토지에서 네게 태어난 두 아들들은 나의 것이다; 에브라임 과 므낫세는 르우벤과 시므온 같이 나의 것이다. 나를 모든 악으로부터 되찾은 천사가 소년들을 축복하여, 나의 이름이 그들 위에, 내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의 이름이 그들 위에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토지의 한가운데에서 다수로 성장하게 하라
(창. 48:5, 16).
영적 교회를 구성하는 두 가지 것이 있는데, 그것은 이해력과 의지력이다. 그 둘 중에서 이해력은 에브라임에 의해, 그리고 의지력은 므낫세에 의해 표현되어진다.이로부터 요셉의 두 아들들이 야곱, 그때 당시 이스라엘에 의해 양자로 채택되고, 그의 자신의 것으로 인정한 이유를 알 것이다. “에브라임” 역시 말씀에서, 특히 예언서에서 자주 언급되고, 거기서 그는 진리와 선의 지적 측면을 의미했고, 이것은 영적 교회에 속한다.
에스겔서에서:
여호와께서 말하셨다, 사람의 아들아, 네게로 막대기 하나를 가져오라, 그리고 그것 위에, 유다와 그의 동료 이스라엘의 아들들이라고 쓰거라; 그리고 또다른 막대기를 가져다가 그것 위에, 요셉, 에브라임의 막대기, 그리고 그의 동료 이스라엘의 가문이라고 쓰라; 그리고 그것들을 서로 합쳐라, 하여 네 손에서 하나가 될 것이다. 고로 주 여호비께서 말하셨다, 잘 보라, 나는 요셉의 막대기, 즉 에브라임과 그의 동료 이스라엘의 지파들의 손에 있는 것을 가져다가, 유다의 막대기와 더불어 놓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들을 하나의 막대기로 만들 것이다, 그리고 그것들은 내 손에서 하나일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들을 토지에서, 이스라엘의 산들에서 하나의 나라로 만들 것이다, 그리고 하나의 왕이 그들 모두를 통치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더 이상 두 나라가 아니다, 그리고 그들은 다시 두 왕국으로 나뉘는 일이 더 이상 있지 않을 것이다 (겔. 37:16, 17, 19, 22).
주님의 천적왕국과 영적 왕국이 위에서 취급되어진다. 천적 왕국은 “유다”이다; 영적 왕국은 “요셉”이다; 이 왕국들이 둘이 아닌 하나이다로 말해진다. 또한 이 왕국들은 주님이 세상에 오심으로 하나로도 만들어졌다.
영적 왕국에 관해 주님께서 요한복음서에서 말하신다:
그리고 나는 이 우리 안에 있지 않은 다른 양을 가지고 있다; 나는 그들 또한 데려와야만 한다, 그리고 그들은 내 음성을 들을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 하나의 양떼가, 그리고 하나의 목자가 있을 것이다 (요. 10:16).
이것이 “두 막대기, 즉 유다와 요셉의 막대기, 이것은 하나로 함께 연합될 것이다, 그리고 주님의 손에서 하나일 것이다”에 의해 의미되어져 있다. 천적인 것(천적 수준)이 세 번째 천국, 즉 가장 깊은 천국을 구성한다; 그러나 영적 수준은 두 번째 천국, 즉 내면의 천국을 구성한다; 그리고 그것들은 하나이다, 그 이유는 이것이 다른 것 안으로 (즉 천적인 것이 영적인 것 안으로) 흘러들기 때문이다. 고로 영적인 것은 천적인 것에 평면(plane)을 제공하는 셈이다. 이런 방식으로 이 둘은 굳게 상호적으로 건립하고 있다. 셋째, 또는 가장 깊은 천국에 있는 신성의 천적 수준은 주님을 사랑함이다; 천적 영적 수준에 선행이 있다. 이 선행은 영적 수준이 있는 곳, 즉 둘째, 또는 내면의 천국에서 최고의 것, 제 일 순위의 것이다. 이것은 유입의 본성이 무엇인지를 보여주고, 또한 유입을 수단으로 공동으로 설립함의 본성도 보여준다. “나무”는 주님을 사랑함으로부터의 선, 그리고 이웃을 향한 선행으로부터의 선 모두를 의미한다. 이런 이유로 유다와 요셉은 “나무 막대기 위에 쓰여질 것이다”, 이 둘은 “하나가 될 것이다”라고 말해진 것이다.
스가랴서에서:
나는 유다의 가문을 튼튼하게 할 것이다, 그리고 나는 요셉의 가문을 구원할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들로 거주하게 할 것이다, 그 이유는 내가 그들 위에 자비를 가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은 내가 마치 그들로부터 떠난 적이 없었던냥 있을 것이다; 그 이유가 나 여호와가 그들의 하느님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그들에게 대답할 것이다 (슥. 10:6);
위 구절도 주제는 두 왕국들, 천적 왕국과 영적 왕국이다 (천적 왕국은 “유다”이고 영적 왕국은 “요셉”이다). 그리고 영적 왕국의 구원도 주제이다.
아모스서에서:
고로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가문에게 말하셨다, 너희는 나를 찾으라, 그리고 너희는 살 것이다. 여호와를 찾으라, 그리고 너희는 살 것이다, 그분이 요셉의 가문 안에서 불 같이 돌발하지 않도록 하라, (돌발하면) 그것은 삼킬 것이고, 그것을 끌 수 있는 자는 없다. 악을 미워하고, 선을 사랑하라, 그리고 큰 문에서 공정을 설립하라; 여호와 하느님 체바욷께서 요셉의 남은 자들에게 은총을 내리실는지 모른다 (암. 5:4, 6, 15);
위 구절에서도 영적 왕국이 “요셉”에 의해 의미된다; “이스라엘의 가문”은 영적 교회이다; “요셉”은 이 교회의 선이다, 그리고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가문에게 말하시기를, 너희는 나를 찾으라, 그리고 너희는 살 것이니, 그분이 요셉의 가문 안에서 불 같이 돌발하지 않도록 하라”라고 말해진 것이다.
다윗서에서:
귀를 주소서, 오 이스라엘의 목자여, 당신은 요셉을 양떼 같이 인도하십니다; 거룹들 위에 앉으신 당신은 빛을 발하십니다. 에브라임, 그리고 베냐민, 그리고 므낫세 앞에서 당신의 능력을 휘저으십 니다, 그리고 오시어 우리를 구원하신다 (시. 80:1-3);
위 구절에서도 “요셉”은 영적 인간이다; “에브라임, 베냐민, 므낫세”는 이 교회의 세 구성 요소들이다.
다시:
소리 높혀 노래하고 소고를 쳐라, 현악기와 더불어서 하프를 즐거이 켜라; 새로운 달(moon)에서, 축제에서, 우리 절기의 날에 나팔을 불어라; 그 이유가 이것이 이스라엘에게 규례이기 때문, 야곱의 하느님의 판단이기 때문이다; 그분이 이집트의 토지에 맞서 가셨을 때, 그분은 그것을 증거를 위해 요셉에게 지시하셨다; 나는 내가 몰랐던 언어를 들었다 (시. 81:2-5);
위에서 “요셉”이 영적 교회이다, 또는 영적 인간이다는 것은 위 말과 표현의 각각으로부터 분명해진다; 그 이유가 말씀 안에 영적인 것을 표현하는 용어들, 또는 천적인 것을 표현하는 용어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은 말씀 두루에서 한결 같이 있다. 위 구절에서 영적인 것을 표현하는 단어는 “노래”, “현악기와 더불은 소고”, “새 달에, 우리의 절기에 있는 축제에서 나팔을 붐”이다. 이로부터 주제가 “요셉”인 영적 교회임이 분명해진다.
에스겔서에서:
고로 주 여호비께서 말하셨다, 이것은 너희가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들에 따라서, 토지를 상속 받을 경계이다; 경계선들(lines)이 요셉에게 있을 것이다 (겔. 47:13);
위 구절의 주제는 주님의 영적 왕국이다; 그러므로 “경계선들이 요셉에게 있을 것이다”라고
말해졌다. 주님의 신성의 영적 평면은 그분의 “왕권”이라 불리우는데, 그 이유는 주님의 왕권 측면은 그분의 신성한 진리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분의 “성직” 측면은 그분의 신성한 선이다. 주님의 왕권 자체는 요셉이 이집트에서 왕으로 만들어짐에서 요셉에 의해 표현되어졌다. 이 표현에 관하여는 그 장의 설명에서 알게 될 것이다.
주님의 신성한 영적 평면, 또는 신성한 진리, 이것이 최고 의미에서 요셉에 의해 표현되어진 것에 주목해보자. 신성한 진리는 주님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있는 것이다; 그 이유가 주님은 신성한 선밖에 더 아니시기 때문이다; 신성한 진리는 신성한 선으로부터 진행된다. 이를 비교적으로 말하면, 이것은 태양과 태양의 빛 같이 있다; 빛은 태양 안에 있지 않으나, 태양으로부터 진행된다; 이것은 불과도 비슷하다. 불의 빛은 불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불로부터 진행한다. 신성한 선 자체도 말씀에서 “태양”과 “불”에 비교된다. 마찬가지로 “태양”과 “불”이라 불리운다. 주님의 천적 왕국은 주님으로부터 진행하는 선으로부터 살아 있다; 그러나 그분의 영적 왕국은 신성한 선으로부터 파생하는 진리로부터 살아 있다; 그러므로 다른 삶에서 주님은 천적 평면에 태양으로 나타나신다; 그러나 영적 평면에는 달로서 나타나신다. 열과 빛 모두 태양으로부터 진행한다. 비교컨대, 열은 사랑의 선, 이 선은 천적, 영적인 열이라 불리운다; 빛, 이는 선으로부터 파생되는 진리인데 영적인 빛이라 불리운다. 다른 삶에서 태양으로서의 주님으로부터 진행하는 천적인 열과 영적인 빛 안에 사랑의 선과 신앙의 진리, 고로 지혜와 총명이 있다.; 그 이유가 주님으로부터 진행하는 모든 것은 살아 있기 때문이다.
이상 살핀 바로부터 우리는 신성의 영적 평면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 그리고 이로부터 영적 왕국이 온다는 것, 그리고 천적 왕국이 온다는 것도 알 수 있다; 그리고 영적 왕국이 신앙의 선, 즉 선행이다는 것, 이 선은 주님으로부터 직접 흐른다는 것, 또한 천적 왕국을 통하여 간접적으로도 흐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주님으로부터 진행하는 신성의 영적 평면이 말씀에서 “진리의 영”이라 불리우고, 거룩한 진리이다; 이는 어떤 영으로부터 있지 않고 그분에 의해 보내진 영을 통하여 주님으로부터만 있다; 이는 요한복음서에서 주님 자신의 말씀으로부터 알게 된다:
그분, 진리의 영이 오실 때, 그분이 너희를 모든 진리 안으로 안내할 것이다; 그 이유가 그분은 자신으로부터 말하시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분이 무엇을 듣든지 그것을 그분은 말하실 것이다; 그리고 그분은 장차 있을 것을 너희에게 선포하실 것이다. 그분이 나를 영광되게 할 것이다; 그 이유는 그분이 나로부터 가져갈 것이고, 그것을 너희에게 선포하실 것이다
(요. 16:13,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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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26절. 라헬이 요셉을 낳은 뒤였다, 야곱은 라반에게 말했다, 저를 떠나 가게 해주십시오, 그리고 나는 내 장소로, 내 토지에로 갈 것입니다, 26 저에게 제가 당신에게 봉사해서 얻은 내 여성들, 그리고 내 자녀들을 주십시요, 그리고 나는 가겠습니다. 당신께서는 제가 당신을 어떻게 섬겨왔는지 아실 것입니다. “라헬이 요셉을 낳은 뒤였다”란 요셉으로 표현된 영적인 것을 인정함을 의미한다. “야곱이 라반에게 말했다”자연적 진리의 선이 신성한 근원으로부터 있는 2차적인 선쪽으로를 의미하는데, 이 선을 수단으로 내면들의 결합이 있다를 의미한다. “나를 떠나 가게 하소서, 그리고 저는 내 장소, 내 토지에로 갈 것입니다”란 그 다음 합리성 속의 신성과 결합하는 상태를 자연적 진리가 갈망함이 있었다를 의미한다. “저에게 내 여성들을 주십시요”란 자연 평면에 속해 있는 진리에 애착함들을 의미한다. “내 자녀들”란 그로부터 파생된 진리들도 마찬가지로 소속되었음을 의미한다. “제가 봉사해서 얻은…”이란 그분 자신의 힘으로부터를 의미한다. “그리고 나는 가겠습니다”란 신성한 합리성과 결합함을 의미한다. “당신은 제가 당신을 어떻게 섬겨 왔는지 알 것입니다”란 그분 자신의 힘으로 땀흘려 일하고 애씀을 의미한다.

라헬이 요셉을 낳은 뒤였다. 이는 요셉으로 표현된 영적인 것을 인정함을 의미한다. 이는 “낳다”의 의미가 인정함이다로부터; 라헬의 표현이 내면의 진리에 애착함이다로부터; 그리고 요셉의 표현이 영적 왕국, 고로 영적 인간이다로부터, 그리고 결과적으로 주님의 영적 평면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 이유가 주님으로부터 있는 영적 평면이 영적 인간을 만들고, 또한 영적 왕국도 만들기 때문이다. 하녀들과 레아에 의한 야곱의 아들들에 관련된 것에서 일반적 진리들을 받아들임과 인정함이 취급되었고, 마지막으로 내면의 인간과 그것들의 결합, 고로 그가 영적 인간으로 만들어질 때까지 조차의 인간의 거듭남이 취급되었다; 즉 “요셉”이 영적 인간이다. 그리하여 지금 즉각적으로 뒤이어지는 것은 선의 열매맺음과 진리의 번성함인데, 이것이 야곱이 라반의 양떼를 수단으로 자신을 위해 획득하는 “양떼”에 의해 의미되고 있다. 그 이유가 내면의 인간과 외적 인간의 결합, 또는 영적 인간과 자연적 인간의 결합 이후, 선의 열매맺음과 진리의 번성함이 거행되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이 결합이 인간 안에서 있는 천국의 결혼이기 때문이고, 이 결혼으로부터 선의 열매맺음과 진리가 번성함이 태어나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역시 외적 의미에서의 “요셉”에 의해 선의 열매맺음과 진리의 번성함이 의미된다.

야곱이 라반에게 말했다. 이는 자연적 진리의 선이 신성한 근원으로부터 있는 2차적인 선쪽으로를 의미하는데, 이 2차적인 선(방계적인 선, collateral good)을 수단으로 내면들의 결합이 있다를 의미한다. 이는 야곱의 표현이 자연적인 진리이다로부터; 그리고 라반의 표현이 신성한 근원으로부터의 방계의 선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내면들의 결합이 이 선을 통하여 결과된다는 것은 앞에서도 반복적으로 설명해왔다. 이 선이 “라반의 양떼”에 의해 의미되고, 이 선을 통하여 야곱은 자신을 위해 그의 자신의 양떼를 확보한다 (이에 관하여는 뒤이어진다).

나를 떠나가게 하소서, 그리고 저는 내 장소, 내 토지에로 갈 것입니다. 이는 그때 당시 합리성 속의 신성과 결합하는 상태를 자연적 진리가 갈망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이 말을 말하는 야곱이 자연적 진리의 선을 표현함으로부터; “장소”의 의미가 상태이다로부터; 그리고 “토지”의 의미가 합리성 속의 신성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 이유가 “내 토지”에 의해 자기가 보내지기를, 가기를 바랬던 것에서 자기 아버지 이삭과 자기 어머니 리브가가 뜻해지기 때문이다. 결합을 갈망함이 의미되는 것은 단어들 안에 포함된 애착으로부터 분명해진다.

저에게 내 여성들을 주십시오. 이는 자연 평면에 속하여 있는 자연적 진리에 애착함들을 의미한다. “내 자녀”란 그로부터 파생된 진리도 마찬가지로 소속되었음을 의미한다. 이는 “여성들”, 또는 “여인들”이 진리에 애착함들이다로부터; 그의 “여인 레아”는 외적 진리에 애착함을; 그리고 “라헬”은 내면의 진리에 애착함이다; 그리고 “자녀들”의 의미가 파생되는 진리들이다로부터; 그 이유가 “아들들”이 진리들을 의미하기 때문; 고로 여성들로부터 태어난 “자녀들”에 의해서는 파생된 진리들이 의미되기 때문이다. 하인들에게 주어진 여성, 이 여성으로부터 태어난 자녀는 이 하인이 섬긴 주인의 것이어야 한다는 것은 고대인들의 규례였다; 이는 모세의 책에서 읽을 수 있다.
만일 네가 히브리인의 하인을 산다면, 6년을 그가 섬길 것이다, 그리고 7년째에서 그는 댓가를 치루지 않고 떠날 것이다. 만일 그의 주인이 그에게 여인을 주고, 그녀가 그에게 아들들이나 딸들을 낳는다면, 여인과 그녀의 자녀들은 그녀의 주인의 것이다, 그리고 그는 그의 신체와 더불어 나갈 것이다 (출. 21:2, 4).
이것은 고대 교회에서의 규례이었고, 이것을 라반도 알고 있었기에, 야곱은 자신을 위해 여성들과 야곱의 자녀들을 달라고 주장했던 것이다. 이는 아래 구절에서도 알게 된다.
라반이 야곱에게 말했다, 딸들은 나의 딸들이다, 그리고 아들들은 나의 아들들이다, 그리고 양떼는 나의 양떼이다, 그리고 네가 보는 모든 것, 그것은 나의 것이다 (창. 31:43);
그리고 야곱이 이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라반에게 “나에게 내 여성들과 내 자녀들을 주십시오” 라고 말한 것이다. 그러나 앞의 인용 구절에서 모세에 의한 규례는 외적 또는 자연적 인간의 선들과 진리들을 획득한 내적, 합리적 인간의 권리를 표현했다; 그 이유가 하인(남자 하인)은 진짜 진리들이 은근히 심어지기 이전, 시작에서 있는 자연 평면의 진리를 표현했기 때문이다. 엄밀히 보면 시작 때에서 획득한 진리는 진리가 아니고, 진리처럼 나타날 뿐이다, 그럼에도 이미 말했던 그대로 진짜 진리들과 선들을 이끌어들이는 수단이 되어 섬김 역할을 톡톡히 담당해준다; 그러므로 선들과 진리들이 자연 평면의 진리를 수단으로, 또는 그것의 섬김에 의해 은근히 심어졌을 때, 이 수단들은 떠나게 하고, 획득한 진짜 선들과 진리들만이 존속된다. 이런 사항이 표현되기 위하여 하인들에 관한 법이 교부된 것이다.
그러나 야곱만에 국한해 주목하면, 그는 라반이 사들인 하인이 아니고, 오히려 라반보다 더 (등격이 높게) 구별되는 가문으로부터 였다. 그는 자신이 품팔아서 라반의 딸들을, 고로 그녀들로부터 출생한 자녀들을 샀다; 그 이유가 이런 것들은 그가 봉급으로 받은 것들이라는 말이다. 고로 그들 전부에 관한 라반의 생각은 진리와 일치하는 것이 아니다. 더욱이, “히브리 종”은 진짜 선들과 진리들을 이끌어들임을 위해 섬기는 진리를, 그의 “여인”은 자연적 선에 애착함을 의미했다. 이것 역시 야곱에게는 해당 사항이 아니다. 야곱에 의해서는 자연적 진리로부터의 선을, 그의 “여성들”에 의해서는 진리에 애착함이 표현되었다. 위 인용 구절에서 “주인”에 의해 합리성이 표현되었는데, 이 본문에서 “주인”인 듯 행세하는 라반에 의해서는 합리성을 표현하지 않고 방계적인 선을 표현할 뿐이다; 이것은 진짜 선(순수한 선)이 아니고, 진짜처럼 나타날 뿐이다, 그리고 실상 야곱이 표현하는 진리들을 이끌어들이는 섬김을 할 뿐이다
한 단계 더 진보된 이런 사항들이 누구인가 자신의 납득력에 와닿게 할 자는 극히 적다; 그 이유는 자연 평면의 진리와 선이 무엇인지를, 그리고 그것들은 합리성의 진리와 선으로부터 구별된다는 것을 아는 자 역시 매우 적기 때문에서 이다. 더욱이 선들과 진리들이 진짜가 아니고, 진짜인 듯 나타나면서 진짜 선들과 진리들을 이끌어들임에서 섬김 역할을 한다는 것, 특히 거듭남의 시작에서 그러하다는 것을 아는 자는 더 더욱 적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사항들이 이 구절의 말들의 내적 의미 안에, 그리고 뒤이어지는 라반의 양떼, 그리고 그 양떼로부터 야곱이 자신을 위해 양떼를 확보하는 구절의 내적 의미 안에 포함되어 있기에, 우리는 이런 사항들을 지나쳐 갈 수 없다. 지나쳐 가서는 안되는 이유는 이런 사항들을 납득하는 약간의 사람들 때문이다. 이들은 이런 사항들을 알기를 바라는 이들이고, 영적 선과 진리에 애착함 안에 있는 이들인데, 이들은 이런 사항들에 주목하기에 계발되어진다.

제가 당신에게 봉사해서 얻은… 이는 그분 자신의 힘으로부터를 의미한다. 이는 “봉사함, 섬김”이 노동함, 애씀을 의미한다로부터, 그리고 봉사함이 주님을 서술할 경우, 그분 자신의 힘으로부터를 의미한다; 그 이유가 그분 자신의 힘으로부터 주님께서는 신성한 선들과 신성한 진리들을 획득하시어 그분의 인간을 신성으로 만드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가겠습니다. 이는 신성한 합리성과 결합함을 의미한다. 이는 “가다”의 의미로부터 분명해진다; 즉 그의 장소, 그의 토지로 감이 “가다”에 함축되어 있다; 이를 수단으로 합리성 속의 신성과 결합하기를 갈망함이 의미된다.

당신은 제가 당신을 어떻게 섬겨 왔는지 알 것입니다. 이는 그분 자신의 권능으로 땀흘려 일하고 애씀을 의미한다. 이는 앞에서 살핀 바 있어 설명은 생략한다; 이외 더 포함된 것은 앞에서 살핀 것을 참조하면 될 것이다, 그리고 이어지는 구절에도 있다.

27-30절. 그리고 라반이 그에게 말했다, 바라건대 만일 내가 네 눈에서 은총을 발견해 왔었다면 나는 그것을 시험했었다, 그리고 여호와께서 너 때문에 나에게 복을 주셔 왔다. 28 그리고 그는 말했다, 네 보상을 나에게 나타내 보여라, 그리고 나는 그것을 줄 것이다. 29 그리고 그는 그에게 말했다, 당신은 제가 당신을 어떻게 섬겼는지 압니다, 그리고 어떻게 당신의 물질이 나와 더불어 있어 왔는지도 압니다. 30 당신이 제 앞에서 가졌던 것은 매우 적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돌발적으로 다수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여호와께서는 제 발에서 당신에게 복을 내리셨습니다. 그리고 지금 나는 제 자신의 집을 위하여 무엇을 해야 하리이까? “그리고 라반이 그에게 말했다”란 “라반”에 의해 의미된 선으로부터의 지각을 의미한다. “바라건대 만일 내가 네 눈에서 은총을 발견해 왔었다면…”이란 강하게 끄덕임을 의미한다. “나는 그것을 시험했었다, 그리고 여호와께서 너를 위해 나에게 복을 주셔 왔다”란 축복 하심이 자연 평면의 선을 위하여 신성으로부터 있었고, 섬김도 자연 평면의 선쪽으로 있도록 되어졌다를 의미한다. “그리고 그는 말했다, 나에게 네 보상을 나타내 보여라, 그리고 나는 그것을 줄 것이다”란 단독으로 바랬던 것을 줄 것임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는 그에게 말했다, 당신은 제가 당신을 어떻게 섬겨 왔는지 압니다”란 2차적인 선은 진리의 선에 관한 마음과 능력을 알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어떻게 당신의 물질이 나와 더불어 있었는지…”란 이것 또한 신성으로부터 였음을 의미한다. “당신이 내 앞에서 소유했던 것은 매우 적었습니다”란 2차적인 선은 그것이 합쳐지기 전에는 메마른 상태였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것은 돌발적으로 다수가 되었습니다”란 그 이후 열매맺었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여호와께서는 내 발에서 당신에게 복을 내리셨습니다”란 자연 평면이 소유했던 것은 신성으로부터 이었다를 의미한다. “그리고 지금 나는 내 자신의 집을 위하여 무엇을 해야 하리이까?”란 지금 그것 자신의 선은 거기로부터 열매를 만들 것임을 의미한다.

그리고 라반이 그에게 말했다. 이는 “라반”에 의해 의미된 선으로부터 지각함을 의미한다. 이는 “말하다”의 의미가 지각함이다로부터; 그리고 라반의 의미가 신성으로부터의 방계적인 선이다로부터 알려진다. 이 선으로부터 지각함이 이 말, 즉 “라반이 그에게 말했다”에 의해 의미된 이유는 말씀 안에서의 인물들은 그 인물 자체가 아닌 실제의 것들을 의미하기 때문에서 이다; 최고 의미에서 주님 안에 있는 신성한 것들; 그리고 내적 의미에서 인간 안에 있는 신성한 것들이 취급된다는 말이다; 고로 두 인물들이 아닌, 한 개인 안에 있는 두 개의 것들이다.

바라건대 만일 내가 네 눈에서 은총을 발견해 왔었다면. 이는 강하게 끄덕임을 의미한다. 이는 누군가의 “눈에서 은총을 발견했다”의 의미가 강하게 끄떡임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강하게 끄떡임은 그것이 현존하기를 바랄 때, “라반”에 의해 의미된 선이라고 단정된다. 자신 안에 있는 선과 진리에 애착함 위에서 곰곰이 되새겨 생각하는 자, 그렇게 할 수 있는 자, 그리고 그것들의 정신적 기쁨(delight)과 육체적 기쁨(pleasure)에서도 곰곰이 되새길 수 있는 자는 이쪽이 다른쪽에 우선하여 더 좋아한다는 강한 끄덕임을 알아채게 할 것이나, 곰곰이 되새겨 봄이 없는 자는 강한 끄덕임 비슷한 것도 나타나지 않는다.

나는 그것을 시험했었다, 그리고 여호와께서 너를 위해 나에게 복을 주셔 왔다. 이는 축복 하심이 자연 평면의 선을 위하여 신성으로부터 있었고, 섬김도 자연 평면의 선쪽으로 있도록 되어졌다를 의미한다. 이는 “여호와께서 복을 주시는지를 시험했다”의 의미가 어떤 것이 신성으로부터 이었는지를 아는 것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것이 자연 평면의 선을 위하여 이다는 것, 그쪽으로 섬김도 있었다는 것이 “너를 위하여”에 의해 의미되어져 있다; 그 이유가 “야곱”은 자연적 진리로부터의 선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라반”은 섬기는 방계적인 선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말했다, 나에게 네 보상을 나타내 보여라, 그리고 나는 그것을 줄 것이다. 이는 단독으로 바랬던 것을 줄 것임을 의미한다. 이는 설명이 필요 없이 분명해진다. 지금까지 말해왔던 것이 분명한 방식으로 이해력에 밝혀질 수 없는 이유는 우리의 지성(마음, mind)이 라반과 야곱으로 전개되는 역사적 시리즈에 대한 생각으로부터 내적 의미에서 취급되는 영적인 것들쪽으로 단번에 바뀌어질 수 없기 때문 (그 이유가 역사적 의미가 언제나 생각에 달라붙어 생각을 꽉 채우고 있다, 그렇지만 역사물이 아닌 것이 시리즈와 구절과 구절의 연결에서 납득하기 위하여서는 역사적 시리즈에 달라붙으려 하는 우리의 생각이 존재하지 않게 노력해야 하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라반과 야곱 둘 다에 의해 표현된 선에 대해 명료한 관념을 가지는 것이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반드시 기억하고 있어야 하는 것은, 라반에 의해 표현된 선은 진짜 선들과 진리들을 이끌어 들임에서만 유용한 섬김을 하는 속성을 가졌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유용한 섬김이 끝나면, 그 선은 뒤에 남겨두고 떠나야 한다는 것이다. 라반에 의한 선의 품질은 이미 상술한 바 있다. 좀 더 설명하면, 이 선은 마치 무르익지 않은 과일 안에 있는 미숙한 것, 그러나 이 미숙한 것을 수단으로 상큼한 쥬스가 이끌어들여 진다는 것에 비교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용도를 섬긴 이후, 그것은 흡수당해지고, 과일은 다른 소질(fiber)을 수단으로 무르익는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진짜 쥬스의 것들에 의해 무르익는다.
인간은 유아기와 어린 아이 시기에 많은 것들을 단지 사용할 목적으로 배운다, 그러나 그가 배운 그것들은 더 유용한 것들을 배우는 수단(섬김) 역할을 한다; 그리고 이 단계는 계속적으로 이어져 가고, 마지막, 그는 영원한 생명(삶)에 관한 것들을 배운다; 그리고 그가 이것들을 배울 때, 이전에 배웠던 것들은 거의 삭제당해진다. 마찬 가지 방식에서 인간이 주님에 의해 새로이 출생할 때, 그는 진짜 선과 진리에 애착함이 아닌 다양한 선과 진리에 애착함에 의해 인도되어진다, 그러나 이 다양한 진짜이지는 않으나 그때 당시 진짜 같이 여겨지는 선과 진리는 진짜 선과 진리를 우리로 납득 가능하게 하여, 끝내 우리로 하여금 진짜 선들과 진리들을 흡수하게 한다; 이것이 완료되었을 때, 이전의 애착들은 잊혀지거나 뒤쪽에 남아 있는다. 그 이유는 이것들은 단지 수단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이것이 “라반”에 의해 의미된 방계의 선과 “야곱”에 의해 의미된 진리로부터의 선의 관계에서, 뿐만 아니라, 이후 뒤이어지는 라반의 양떼와 야곱의 양떼의 관계에서도 동일하다.
이것들이 이 구절과 뒤이어지는 구절에 포함된 신비함들이다. 그러나 이런 사항들은 말씀 안에서 역사적 형체를 빌려 전달되는데, 그 이유는 말씀이 누구에게서 이든, 즉 아이들이든, 어른이든, 학력이 높든, 낮든 등등의 사람들에게서 각자 나름대로 기쁨을 가지고 읽혀지기 위하여서 이고, 읽혀지는 목적은 역사적 의미로부터 거룩한 기쁨 안에 있고, 그들과 동행하는 천사들은 내적 의미에서 기쁨을 가지는 것이다. 그 이유가 내적 의미는 천사의 총명에 적합하고, 외적 의미는 인간에게 잘 적응되기 때문이다. 이 수단으로 해서 천사와 인간의 제휴함이 있다. 그러나 인간은 이 제휴됨을 전혀 알지 못한다. 단지 거룩한 느낌에 동반되는 것으로부터 있는 어떤 종류의 기쁨만을 지각할 뿐이다.

그리고 그는 그에게 말했다, 당신은 제가 당신을 어떻게 섬겨 왔는지 압니다. 이는 2차적인 선은 진리의 선에 관한 마음과 능력을 알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이는 내적 의미에서 있는 시리즈에 속한 것으로부터 알게 된다. 누군가의 품질을 안다는 것은 그의 마음을 아는 것임이 분명하다. 누군가가 자기를 섬기는 것으로부터 그의 품질을 아는 것, 또는 “어떻게 내가 섬겼는지”에서 그의 품질을 아는 것은 그의 능력을 아는 것이다는 것은 여기서 “섬김, serving”이 누군가의 능력을 의미한다로부터 보여질는지 모른다; 그 이유가 야곱에 의해 능력을 가지는 것인, 진리로부터의 선 측면에서 주님의 신성한 자연 평면이 표현되었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어떻게 당신의 물질(가축들)이 있었는지가 뒤따르는데, 이 말에는 이것 또한 신성으로부터 이었다가 의미된다.

당신이 내 앞에서 소유했던 것은 매우 적었습니다. 이는 2차적인(방계의) 선은 그것이 결합되어지지 않으면, 그것은 메마른(무익한, barren) 상태였음을 의미한다. 이는 내적 의미에서 있는 시리즈로부터 보여진다. 그 이유가 라반에 의해 표현된 선의 품질, 그것이 “야곱”인 진리의 선과 결합이 있기 전, 아주 적은 유용함만을 가져었던 것으로 묘사되는 바, 이는 메마른 상태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경우가 어떠한지는 이어지는 구절에서 나타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돌발적으로 다수가 되었습니다. 이는 그 이후 열매맺었음을 의미한다. 이것은 결합 이후 열매맺음이 있었다는 것이 “돌발적으로 다수가 되었다”에서 의미되고 있다.

그리고 여호와께서는 내 발에서 당신에게 복을 내리셨습니다. 이는 자연 평면이 소유했던 것은 신성으로부터 이었다를 의미한다. 이는 “여호와께서 복을 내리심”의 의미가 선을 수여함이다로부터; 그리고 이것이 결합이다는 것; 고로 “여호와께서 복을 내리심”은 결합을 통하여 신성한 선이 수여됨을 의미한다; 여기서의 경우, 야곱에 의해 표현되는 자연 평면의 선을 수여하심이다. “발”에 의해 자연 평면이 의미된다. “발”이 자연인 것은 이미 말했다, 그리고 같은 의미가 이 장의 끝에 있는 인간에 있는 모든 것과 더불은 웅대한 사람과의 상응으로부터도 나타날 것이다. 이로부터 분명한 바, “여호와께서 내 발에서 당신에게 복을 내리셨다”에 의해 자연 평면이 소유한 것은 신성으로부터 이었다가 의미된다.
이 말들, 그리고 이 말들 앞쪽에 있는 말들 안쪽에 감추인 신비함은 알려졌다 해도 극히 적은 자에게 알려졌기에 밝히려는 것이다. 인간 안에 있는 선들, 뿐만 아니라 교회 안에, 또한 교회 밖에 있는 선들은 다양하다, 또한 너무나 다양해서 이 사람의 선과 저 사람의 선이 정밀하게 같을 수 있는 경우가 거의 없다. 이렇게 선의 다양함은 선 때문이 아니라 선과 결합되는 진리로 인해서이다; 그 이유가 모든 선은 그 선의 품질을 진리들로부터 가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진리들은 그것의 본질을 선으로부터 가진다. 또한 다양함들은 각자의 사랑으로부터의 애착으로부터 세상 밖으로 출시된다(공표된다); 이것은 인간의 삶(생활)에 의해 당사자 안에 깊이 뿌리박고 그 인간에게 잘 어울려 있다. 교회 내에 있는 사람들에서 조차 진짜 진리들을 지닌 자는 거의 없고, 교회 밖의 경우에서는 더 더욱 적다.; 다시 말해 진짜 진리에 애착함 안에 있는 인간은 매우 드물다는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활의 선 안에 있는 이들, 즉 주님을 사랑함과 이웃을 향해 선행 안에 있는 이들은 구원된다. 이들이 구원되어질 수 있는 이유는 주님의 신성이 하느님을 사랑함으로부터의 선 안에, 그리고 이웃을 향한 선행 안에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신성이 안쪽에 자리잡고 있는 모든 것들은 질서적으로 배열되고 있어, 그것들은 천국들 안에 있는 진짜 선과 진짜 진리와 결합될 수 있다. 이것이 이런 경우이다는 것은 천국을 구성하는 사회들로부터 분명해진다. 이 사회는 셀 수 없이 많고, 그 사회는 일반적, 특수적, 개별적으로 모두가 선과 진리에 관하여 다양하다, 그럼에도 모두는 하나의 천국을 만들어 낸다; 마치 신체의 기관이나 사지들이 비록 다른 환경과 거리에 위치함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인간을 만들고 있는 것과 같다. 그 이유가 많은 것들로부터 만들어진 하나는 정밀하게 똑같은 모형의 단위들로 구성되는 것이 결코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화를 이루는 다양함이 결합되었다고 말해볼 수 있다; 이런 경우는 영계에서 선들과 진리들에서도 마찬가지 이다. 그것들은 셀 수 없이 다양하여 정밀하게 꼭 같은 것은 하나도 없다. 그럼에도 사랑과 선행을 통하여 신성으로부터 하나를 만든다. 그 이유가 사랑과 선행은 영적인 결합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의 다양함은 천국의 하모니(harmony)이다, 이렇게 하모니를 만들므로 그것들은 신성 안에서, 즉 주님 안에서 하나이다.
더욱이 하느님을 사랑함으로부터의 선과 이웃을 향한 선행으로부터의 선은 진리측면에서, 그리고 진리에 애착함에서 제아무리 다양하다 해도, 진짜 진리와 선을 받아들일 수 있다. 그 이유가 이 선은 말하자면 딱딱하거나 반항적이지 않고, 부드럽고 잘 구부려지는 바, 주님의 인도하심에 자신을 쉽게 내어주기 때문이다. 이와 완전 반대의 경우는 자기 사랑함과 세상을 사랑함 안에 있는 이들의 경우이다. 이들은 주님쪽으로, 주님에 의해 구부려지지도 않고 주님의 인도하심에 자신을 내어주지도 않는다, 오히려 강경하게 저항한다, 그 이유는 그들은 자신을 스스로 인도하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게다가 거짓 원리로 자신을 굳힌 이들의 경우는 더 더욱 재론의 여지가 없다. 그들이 이런 특성 속에 있는 한 그들은 신성의 입장을 허용하지 않는다.
이상 살핀 바로부터 야곱이 라반에게 한 말에 의해 의미된 것이 분명해졌을 것이다; 그 이유가 “라반”에 의해 진짜이지 않은 선이 의미되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는 진짜 진리가 그것 안에 심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비록 진짜이지는 않다 해도 같은 속성 속에 있기에 진짜와 결합될 수 있고 신성이 그것 안에 있을 수 있다. 이런 선은 어린 아이나 교회 내에서 진리는 적게 알지만 선 안에 있는 단순 순박한 이들, 또는 자기들의 하느님들을 거룩하게 예배하는 직바른 이방인들 사이에 늘 존재한다. 이런 선을 수단으로 진짜 진리들과 선들이 도입되어질 수 있다. 이에 관하여는 이미 살핀 바 있다 (3690, 2598-2603항).

그리고 지금 나는 내 자신의 집을 위하여 무엇을 해야 하리이까? 이는 지금 그것 자신의 선은 거기로부터 열매를 만들 것임을 의미한다. 이는 “집”의 의미가 선이다로부터; 그리고 여기서는 “나의 집”인 바, 야곱에 의해 의미되는 선이다. “이 집을 위하여 행동하는” 것은 거기로부터 선이 열매 있게 만들어짐을 의미하는데, 이는 주제가 선을 열매맺음과 진리가 번성함인 것으로부터 분명해진다; 그 이유가 마지막 출생인 “요셉”에 의해 이 열매맺음이 의미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라반의 양떼를 수단으로 자신을 위해 야곱이 획득한 “양떼”에 관한 것이 지금 이어지는 바, 이 의미가 거기에도 묘사되어져 있다. 외적 인간과 내적 인간의 결합이 결과될 때까지 선이 열매를 맺음이 없고 진리가 번성하지도 않는다는 것은 다른 이에게 선을 뜻하는 것, 그래서 선을 생각하는 것이 내면의 인간으로부터 있다는 것; 그러나 선을 행하는 것, 그것을 수단으로 선을 가르치는 것은 외적 인간으로부터 있다는 사실로부터 알는지 모른다. 선을 행함이 선을 뜻함과 결합되지 않으면, 그리고 선을 가르침이 선을 생각함과 결합되지 않으면, 인간 안에 선이 없다; 그 이유가 악한 자가 악을 뜻하면서 선을 행할 수 있기 때문, 또한 악을 생각하면서 선을 가르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위선자나 모독적인 인물들도 웬만한 타인들보다 자신을 더 잘 위장해서 빛의 천사로 버젖이 거리에서 교회 안에서 제나름대로는 거룩한 듯 행세하나, 그들 내부는 악한 생각으로 차있다. 이런 경우를 들추어보아도 선을 행함이 선을 뜻함과, 그리고 선을 가르침이 선을 생각함과 결합되지 않으면 누구에게서도 선은 열매맺지 못한다는 것이다; 즉 외적 인간이 내적 인간과 결합되어야 선의 열매는 맺어진다.

31-33절. 그리고 그는 말했다, 내가 너에게 무엇을 주어야 할까? 그리고 야곱이 말했다, 당신은 저에게 어떤 것을 주지 않아도 됩니다. 만일 당신이 저를 위하여 이 말을 행하시면, 나는 양떼들에게 되돌아 가서, 그리고 먹이고 관리할 것입니다. 32 오늘 저는 당신의 모든 양떼들을 두루 통과하여 갈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로부터 얼룩지고 반점 있는 모든 작은 가축, 그리고 어린 양들 중에서 검은 것 모두, 그리고 염소들 중 얼룩지고 반점 있는 것들은 옮겨 놓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들이 나의 보상일 것입니다. 33 그리고 제 정의가 이튿날 나를 위한 답일 것입니다, 그 이유는 당신이 제 앞에 저의 보상을 오게 하리라 하셨기 때문입니다. 얼룩지지 않거나 반점이 없는 염소들, 어린 양들 중에서 검지 않은 것은 훔친 것으로 여기십시오. “그리고 그는 말했다, 내가 너에게 무엇을 줄까?”란 지식을 의미한다; “그리고 야곱이 말했다”란 응답을 의미한다; “만일 당신이 저를 위하여 이것을 하신다면 저에게 어떤 것을 주지 않아도 됩니다”란 진리로부터 있는 선의 쪽에서 가져와져야 할 것임을 의미한다; “나는 양떼에게로 돌아가서, 그리고 먹이고 관리할 것입니다”란 라반에 의해 의미된 선은 실제에 응용되어야 함을 의미한다; “저는 오늘 모든 당신의 양떼를 통과하여 갈 것입니다”란 그분께서 모든 선의 품질을 지각하심을 의미한다; “거기에서 얼룩지고 반점이 있는 모든 작은 가축을 옮긴다”란 그분의 것인 모든 선은 악(얼룩짐)과 거짓(반점)이 섞여있는 데에서 분리되어질 것임을 의미한다; “그리고 어린 양떼 사이에서 모든 검은 것”이란 “라반”으로 의미된 선에 속하는 순진이 있는 자기 자신을 의미한다; “그리고 염소 사이에서 얼룩지고 반점 있는 것들”이란 악과 거짓이 혼합되어 있는 진리의 모든 선은 그분의 것임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것은 저의 보상일 것입니다”란 이것은 그분 자신으로부터 이었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제 정의가 저를 위한 답일 것입니다”란 그분께서 가지셨던 신성한 거룩함을 의미한다; “이튿날”이란 영원쪽으로를 의미한다; “그 이유는 당신이 제 앞에 나의 보상을 오게 하리라 했기 때문”이란 그분의 자기 자신인 것을 의미한다; “염소들 중에서 얼룩지지 않고 반점이 없는 것”이란 “라반”으로 의미된 선으로부터 있지 않는 것은 진리의 선에서 악과 거짓이 혼합되었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어린 양 중에서 검은 것”이란 순진의 첫 상태를 의미한다; “이것은 내가 훔친 것”이란 그것은 그분의 것이 아니었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는 말했다, 내가 너에게 무엇을 줄까? 이는 지식을 의미한다. 이는 그가 자기 보상, 또는 삯으로 무엇을 얼마나 원하는지를 알기 위하여 있는 간청과 문의임에서 알는지 모른다. 그리고 야곱이 말했다. 이것이 응답함인 것은 설명이 필요 없다.

만일 당신이 저를 위하여 이 말을 하신다면 저에게 어떤 것을 주지 않아도 됩니다. 이는 진리로부터 있는 선의 쪽에서 가져와져야 할 것임을 의미한다. 이는 “어떤 것을 주지 않는 것”의 의미가 라반에 의해 표현된 선을 수단으로 가져오지 않는 것; 그러나 야곱에 의해 표현된 선, 즉 진리로부터의 선을 수단으로 함으로부터 가져와져야 할 것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가져와져야 하는 것은 아래에서 이어져 서술되고 있다.

나는 양떼에게로 돌아가서, 그리고 먹이고 관리할 것입니다. 이는 라반에 의해 표현된 선은 쓸모 있게, 즉 앞에서 살핀 것 같이, 진짜 선들과 진리들을 이끌어 들이는 데에 응용되어야 함을 의미한다. 이는 “양떼”, 여기서는 라반의 양떼의 의미가 라반에 의해 표현된 선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되돌아가서 먹이고 관리한다”는 것은 이 선을 쓸모 있게 응용한다는 것인데, 이어지는 대목으로부터 분명해진다; 그 이유가 야곱은 라반의 양떼를 수단으로 그의 자신의 것을 획득했는 바, 라반의 양떼는 야곱에게 쓸모 있는 수단이 되었기 때문이다.

저는 오늘 모든 당신의 양떼를 통과하여 갈 것입니다. 이는 그분께서 모든 선의 품질을 지각하심을 의미한다. 이는 “양떼”의 의미가 선이다로부터 분명해진다; 그리고 “그것 모두를 통과하여 감”이 그것의 품질을 알고 지각하는 것이다로부터 파악된다.

거기에서 얼룩지거나 반점이 있는 모든 작은 가축을 옮긴다. 이는 그분의 것인 모든 선은 악(얼룩짐)과 거짓(반점)이 섞여있는 데에서 분리되어질 것임을 의미한다. 이는 “옮김”의 의미가 분리하는 것이다로부터; 그리고 “양떼”(여기서는 염소나 어린 양 중의 하나이다)의 의미가 선들과 진리들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 구절과 이 장에서 이어지는 구절들 안에 신비함들이 있지만, 누군가가 생각하기를, 신성한 말씀일진대, 왜 이런 하찮은 언급이 섞여 있는가 하고 의아해 하는 이 구절 같은 경우에서 오히려 글자 안쪽에 더 많이 포함되는 경우도 있다는 점에 우리는 유의할 필요가 있다; 즉 야곱이 자기 보상, 또는 삯을 위해 염소들 사이에서 얼룩지거나 반점 있는 것, 어린 양들 중에서 검은 것을 요구한 것; 그 다음 그는 라반의 양떼들이 흥분할 때 그것들 앞에 흰색이 나오게 껍질을 벗긴 개암나무와 플라타너스 나무 막대기를 물통에 놓았다는 것; 어린 양들의 경우, 그는 양떼의 얼굴이 라반의 양떼 중에 잡색이고 검은 것을 향하게 놓았다는 것; 고로 그는 부자가 되었다는 것, 이는 선한 쪽에서의 기교가 아닌 악한 기교로 부자가 되었다는 것 등에 신비함들이 있다는 말이다. 얼핏 읽어가지고는 이런 대목에서 신성한 어떤 것이 조금도 나타나지 않을 수 있다. 이에 반해 말씀 속의 모든 것, 소수점 하나에 이르기까지 일반적, 특수적 모든 측면에서 신성하다는 것에 아마도 모든 이가 동의한다. 더욱이 구원을 위해 사소로운 수준에 머물고 있는 구절은 하나도 없다는 점도 모든 이가 알 것으로 추측한다. 여하튼 신성인 말씀은 구원함과 영원한 생명에 이바지하지 않는 대목은 하나도 없다.
이 구절, 이외 다른 구절에서도 모든 이는 어떤 신비함이 말씀 안쪽에 포함되었다고 결말짓는다, 그리고 세부 사항들로부터의 각각은 현 구절 같이 어떤 특성을 지녔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안쪽에서는 더 많은 신성한 것들을 산출하고 있다고 결말을 본다. 하지만 그것들이 안쪽에서 산출하는 것은 내적 의미로부터가 아니면 누구에게도 나타나는 것은 가능할 수 없다; 즉, 인간이 이런 사항들을 역사적, 자연적 의미에서 읽는 동안, 영적 의미 안에 있는 천사들에 의해서는 어떻게 지각되는지를 아는 것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그 이유가 이 두 의미들은 비록 가까웁게 결합되어 있지만, 동시에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지가 이미 설명해온 많은 세부 사항들로부터, 그리고 나머지 모든 구절로부터도 실감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 구절과 이 장의 이어지는 구절에 포함된 신비 자체는 지금까지 라반과 야곱에 관해 설명한 것, 즉 “라반”은 진짜 선들과 진리들을 이끌어들이는데 이바지하는 선이다는 것으로부터; 그리고 “야곱”은 진리로부터의 선이다는 것으로부터도 어느 정도 알려졌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아주 적은 인물들만이 영적 선에 상응하는 자연적 선이 무엇인지를; 그리고 영적 선이 무엇인지를, 그리고 두 선 사이에 상응이 있어야만 함을 알고 있다. 그리고 선이라고 나타나는 어떤 종류의 선이 진짜 선들과 진리들을 이끌어들이는 수단이다는 것을 아는 자도 매우 드물다. 이런 것을 취급하는 신비함들은 납득력에 쉽게 설명되어질 수 없다, 그 이유는 그것들은 이해력의 그늘 아래로 추락되기 때문, 다시 말해 제아무리 주제를 선명하게 설명해도 마치 내 나라 언어가 아닌 외국어로 말하는 것을 듣는 격이어서 듣는 자가 이해하지 못한다는 말이다. 그럼에도 이 신비함은 설명되어야 한다, 그 이유는 내적 의미에 저장된 것이 지금 열려지기 때문이다.
최고 의미에서 여기서 취급된 주제는 주님이시다, 즉 그분이 어떻게 그분의 자연 평면을 신성으로 만드셨는지 이다; 그리고 표현적 의미에서 인간에 있는 자연 평면이다, 즉 주님께서 인간의 자연 평면을 어떻게 거듭나게 하시는지 이다, 그리고 인간의 자연 평면이 인간 안쪽과 상응하게 어떻게 변형되는지 이다; 즉 육체의 죽음 이후 살게 되는 그 인간, 그때에는 영이라 불리우는 그 인간, 영이 육체로부터 떼어놓일 때, 이 영은 뼈와 살 외의 바깥쪽의 인간에 속하는 모두를 가져간다. 내적 인간과 외적 인간의 상응함이 시간의 세계 안에서, 또는 육체의 삶에서 결과되지 않았으면, 이 상응함은 영영 결과되지 않는다. 거듭남을 수단으로 주님에 의한 둘의 결합이 여기서의 내적 의미에서 취급되어진다.
인간은 자기가 거듭나질 수 있기 이전, 반드시 인정하고 받아들여야만 하는 일반적 진리들이 지금까지 다루어져 왔다. 즉 야곱과 레아와 하녀들의 열 아들들에 의해서 이다. 그리고 인간이 이 진리들을 받아들이고 인정한 이후, 외적 인간이 내면의 인간과, 또는 자연 평면이 영적 평면과 결합함이 이미 취급된 “요셉”에 의해 의미되어져 있다. 그리고 지금 질서에 일치하여 취급된 주제는 선의 열매맺음과 진리의 번성함이다. 이 결합이 결과되었을 때, 정밀하게 말하면 결합이 결과되는 만큼에서 선의 열매맺음과 진리의 번성은 처음으로 세상 밖으로 출시된다. 출시된 것이 야곱이 라반의 양떼를 수단으로 획득한 “양떼”에 의해 의미되어져 있다. 여기서 “양떼”에 의해 선과 진리가 의미되었는데, 이는 말씀의 다른 많은 장소에서도 마찬가지로 의미되고 있다; 그리고 “라반의 양떼”에 의해서는 라반에 의해 표현된 선, 이미 서술해온 라반의 본성이 의미된다. “야곱의 양떼”에 의해서는 라반의 양떼를 수단으로 획득한 진짜 선과 진리가 의미된다. 그리고 여기서 진짜 선과 진리가 획득되는 방법이 서술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우선 “얼룩짐,” “반점 있음,” “검다,” “희다”가 내적 의미에서 의미되는 것이 알려져야 납득이 가능해진다. 그러므로 이것들을 먼저 설명한다. 얼룩지거나 반점은 검고 흰 것으로 구성되어진다; 일반적으로 “검다”는 악을 의미하고, 특별하게는 인간의 자기 자신을 의미하는데, 그 이유는 인간의 자기 자신에는 악밖에 없기 때문이다. 또한 “검다”는 거짓을 의미하는데, 특별하게는 거짓으로부터의 원리를 의미한다. “희다”는 내적 의미에서 진리를 의미한다, 더 적절한 의미는 주님의 정의와 공적이고, 파생적으로는 인간 안에 있는 주님의 정의와 공적을 의미한다. 주님 측면에서의 희다는 특별히 “빛나게 희다”라고 불리운다, 그 이유는 주님으로부터 있는 빛은 빛나기 때문이다. 그러나 반대 의미에서 “희다”는 인간의 자기 정의, 또는 그의 자신의 공적을 의미한다; 그 이유가 선이 없는 진리가 이와 같은 자기 공적을 수반하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누군가가 선을 행할 때, 진리로부터의 선을 행하지 않으면, 그는 언제나 보답을 기대하고 있다, 그 이유는 그가 자신을 위해 그것을 행했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누군가가 선으로부터 진리를 행할 때, 이 선은 주님으로부터 있는 빛에 의해 계발되어진다. 이것이 “반점”에 의해 의미되는 것, 즉 거짓이 혼합된 진리이다를 보여준다; 그리고 “얼룩지다”에 의해 의미된 것, 즉 악이 섞인 선이다를 보여준다.
실제의 색깔이 다른 삶에서도 보여지는데, 너무나 아름답고 광휘가 있어 그것들은 묘사되어질 수 없다 (1053, 1624항); 그리고 그 색깔들은 빛의 다채로움으로부터 있고 그늘은 검고 흰 것으로부터 있다. 그러나 거기서의 빛이 비록 눈 앞에서 빛으로 나타난다 할지라도, 그것은 세상의 빛 같지 않다. 천국에서의 빛은 그 빛 안에 총명과 지혜를 지니고 있다; 그 이유가 주님으로부터 신성한 총명과 지혜가 거기서 빛으로 표출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천국 전체를 밝게 한다. 마찬가지 방식으로 다른 삶에서의 그늘 역시 그늘로서 나타나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세상의 그늘 같지는 않다; 그 이유가 거기서의 그늘에는 빛이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총명과 지혜가 빠져 있다. 그러므로 거기서의 희다와 검다는 빛 안에 총명과 지혜를 가지는 빛으로부터, 그리고 총명과 지혜가 빠져 있는 그늘로부터 출시되고 있기에, “희다”와 “검다”에 의해 위에서 살핀 것이 그 의미가 된다. 결과적으로 색깔들이 희다와 검다는 빛과 그늘의 변화이고, 평면들 안에서의 경우 같이, 그것은 색깔들이라 불리우는 다양하게 채색됨이 산출되어진다.
위 모두로부터 지금 우리가 알게 되는 것은, “얼룩진” 것, 즉 온 몸 전체가 검은 점과 흰 점을 찍듯이 한 것인 “얼룩짐, speckled”은 악이 혼합된 선을 의미한다는 것; 또한 “반점, spotted”인 것은 거짓이 혼합된 진리를 의미한다는 것이다. 이것들은 진짜 선들과 진리들을 산출하기 위하여 라반의 선으로부터 가져온 것들이다. 그러나 이것들이 어떻게 이 목적을 섬기는지는 참으로 천국의 빛 안에 있는 이들 앞에서나 명료하게 표출되어질 수 있는 신비함이다. 그 이유는 천국의 빛 안에만 총명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세상의 빛 안에 있는 이들의 경우, 그들은 거듭나지는 경우 같이 세상의 빛이 천국의 빛에 의해 계발되어야 한다; 그 이유가 모두 각각의 거듭나는 인물은 천국의 빛으로부터 자기 안에 있는 선들과 진리들을 보는데, 그 이유는 천국의 빛이 그의 지적인 시각을 생산하고, 세상의 빛은 그의 자연 평면의 시각을 생산하기 때문이다.
이 경우에 대해 몇 마디 말을 보탤까 한다. 인간 안에서는 순수한 선, 즉 악이 섞이지 않은 선이 없다; 순수한 진리, 즉 거짓이 섞이지 않은 진리가 없다. 그 이유가 인간의 의지는 악밖에 없기 때문, 이 악으로부터 그의 이해력에 거짓이 계속적으로 흐른다; 그 이유는 잘 알려진 바대로, 인간은 그의 선조들로부터 축적되어온 악을 상속이라는 수단으로 받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그 다음 그는 실제의 형태 안에서 악을 생산한다, 그리고 그것을 그의 자기 자신으로 만든다. 그리하여 자신으로 인해 자신에게 더 많은 악을 보탠다. 그러나 인간과 더불은 악은 다양한 종류들로부터 있다; 즉 선이 섞여질 수 없는 악들이 있고, 선이 섞일 수 있는 악들이 있다; 거짓들의 경우도 이와 같다. 이렇지 않다면, 인간의 거듭남은 가능해질 수 없다. 선들과 진리들이 섞일 수 없는 악들과 거짓들은 하느님을 사랑함과 이웃을 향한 사랑에 반대되는 악의 경우이다; 즉 증오함, 복수함, 잔인함, 자기와 비교해 타인을 경멸함; 거짓으로 설득함 따위들이다. 그러나 선들과 진리들이 섞일 수 있는 악들과 거짓들은 하느님을 사랑함과 이웃을 향한 사랑에 반대되지 않는 경우이다.
예를 들면: 만일 누군가가 타인보다 자기를 더 사랑한다면, 그리고 이 사랑으로부터 도덕적, 시민적 생활에서, 그리고 기억 속의 지식들과 교리적인 것들에서, 그리고 타인들보다 더 걸출하여 재산과 위엄함이 드높여짐에서 타인을 능가하려고 애쓰고 있다면, 그럼에도 한편에서는 하느님을 인정하고 숭배한다면, 또한 심정으로부터 이웃에 친절하게 공직을 수행하고 있다면, 그리고 양심으로부터 공정과 타당한 것을 행한다면, 자기로부터의 이런 사랑의 악은 선과 진리가 섞일 수 있는 악의 종류이다; 그 이유가 이것은 인간의 자기 자신인 악이기 때문, 그리고 유전적으로 태어나지는 악이기 때문; 그리고 그 사람으로부터 이 악을 갑자기 거두어간다면 그의 첫 생명의 불을 꺼지게 하는 악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타인 위에 군림하는 자신을 사랑하는 자, 그리고 이 사랑으로부터 자신과 비교해 타인을 경멸하는 자, 그리고 숭배하듯 자신을 존경하지 않는 이를 증오하고, 그에게 그런 댓가로 앙갚음질과 잔인함을 발휘함에서 기쁨을 즐기는 자, 이런 자로부터의 악에는 선과 진리가 섞일 수 없다. 그 이유가 그것들은 두 큰 일반적 사랑에 정반대이기 때문이다.
다른 예를 들어보자: 만일 누군가가 자신도 죄들로부터 순수해지는 것이 가능하다고 믿고, 고로 마치 더러운 자신을 많은 물로 씻어 깨끗해진다 믿어 실지로 깨끗하게 씻었다 하자, 그리고 이런 사람이 회개를 수행한 적이 있고 강요된 참회를 했을 때, 또는 고백함 이후, 그의 고백자로부터의 선포가 있을 때, 또는 그가 거룩한 성찬에 참여한 이후, 만일 그가 새 삶을 선과 진리에 애착함 안에서 살고 있다면, 비록 엉터리 교리에 자신도 한몫 끼인 형세이지만, 그가 끼여든 이 거짓은 선과 섞일 수 있는 거짓인 셈이다. 그러나 만일 그가 이전과 마찬가지인 육체적, 세상적 생명으로 살고 있다면, 이 거짓은 선이 섞일 수 없는 거짓이다.
다시 예를 생각해보자: 잘 믿고 있음으로 인간은 구원된다고 믿으면서 잘 믿지 않고 있는 자가 있다 해보자; 그런데 잘 믿기를 뜻하고, 결국 잘 실행하고 있다면, 이 거짓은 선과 진리가 섞일 수 있는 거짓이다; 그러나 그렇지가 않다면 선과 진리가 섞일 수 없는 거짓이 된다. 마찬가지로 누군가가 인간은 사후 다시 일어난다는 것에 무지하다면, 결과적으로 부활을 믿지 않는다면; 또는 만일 그가 이런 사항을 알아챘는데 아직 의심 중에 있다면, 아마 그것을 부정함쪽에 기울어 있다면, 그런데도 선과 진리 안에서 살고 있다면, 그의 거짓과 더불어서는 진리와 선이 섞일 수 있다; 그러나 그가 거짓과 악 안에서 살고 있다면, 진리와 선은 이런 거짓과는 섞일 수 없다, 그 이유는 그것들이 정반대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거짓이 진리를 파괴하고, 악은 선을 파괴하기 때문이다.
또다른 예를 생각해보자: 목적으로 선인 것을 가지는 잔꾀부림과 흉내냄(…인 척 함)은 신중함이 있다; 그리고 그것들과 혼합된 악들은 목적으로부터, 목적을 위하여 선과 섞일 수 있다. 그러나 목적으로 악을 가지는 잔꾀부림과 흉내냄은 신중함이 없고 교활함과 사기인 바, 이것과 더불어 선은 결코 결합될 수 없다; 그 이유가 악을 목적으로 하는 사기는 인간 안에서 일반적이든, 특수적이든 모든 것들에서 지옥의 것을 야기시키고, 악을 그 중앙에 놓고 선은 주변쪽으로 밀쳐버리기 때문이다. 이 질서는 지옥 자체이다. 아마 이런 경우의 다른 예는 셀 수 없게 많을 것이다.
선들과 진리들이 인접될 수 있는 악들과 거짓들이 있다는 것은 이런 사실, 즉 수많은 가지각색의 교조(독단적 주장)들과 교리들이 있다는 사실로부터도 볼 수 있을지 모른다. 이것들 중의 많은 것들이 이단적이나, 그럼에도 각각 안에서 구원되는 이들이 있다; 또한 주님의 교회가 교회 밖에 있는 이방인들 사이에 있기도 한다; 그리고 비록 그들이 거짓들 안에 있을지라도, 선행의 생명을 살아내는 이들은 구원되어진다 (2589-2604항); 이것은 악이 선들과, 진리가 거짓과 섞여 있을 수 있는 경우가 아니면 결코 가능하지 않다. 그 이유가 악이 선과, 거짓이 진리와 섞여 있으나 주님에 의해 질서 안으로 경이하게 배열되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함께 결합한 것도, 하나로 합쳐진 것도 아니고, 서로에 인접되고 서로에 응용하는 국면이다. 섞여 있는 것들 중에서 선들과 진리들은 중앙쪽으로 배치하고 악들과 거짓들은 주변쪽으로 배치하는 방식이다. 그러면 선들과 진리들은 중앙쪽으로, 악들과 거짓들은 바깥쪽으로 향하게 된다. 고로 후자는 전자에 의해 빛을 받는 형국인데, 이는 중앙으로부터 바깥쪽으로 빛을 비추어 검고 흰 것이 다양한 채색을 산출하는 것과 같다. 이것이 천국의 질서이다. 이것들이 “얼룩지고” “반점 있는” 것에 의해 내적 의미에서 의미되어져 있다.

그리고 어린 양떼 사이에서 모두 각각의 검은 것. 이는 라반에 의해 의미된 선에 속하는 순진이 있는 자기 자신을 의미한다. 이는 “검다”가 인간의 자기 자신이다로부터; 그리고 “어린 양”의 의미가 순진이 있음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순진이 있는 자기 자신에 관해 주목해보자. 이것이 “어린 양들 사이에서 검은 것”에 의해 의미되는데, 이 경우는 이러하다. 모든 선 안에는 그것이 선이기 위하여 순진이 반드시 있어야만 한다. 순진 없는 선행은 선행이 아니다; 더욱이 순진 없이 주님을 사랑함은 어불성설이다. 이런 이유로 순진은 사랑과 선행에, 결과적으로 선에 필수적이다. 순진이 있는 자기 자신은 자아로부터서는 악밖에 없다는 것, 모든 선은 주님으로부터 있다는 것을 입만으로가 아닌 심정으로부터 알고, 인정하고, 믿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자기 자신인 것은 검은 것밖에 없다; 부연 설명하면, 이는 그의 의지 측면의 자기 자신이 악일 뿐 아니라 그의 이해력 측면의 자기 자신이 거짓이다는 것을 알고, 인정하고, 믿는 것이다. 인간이 이런 고백함에 있고 심정으로부터 믿을 때, 주님은 선과 진리와 더불어 흘러드시어, 그에게 반짝이는 흰 것인 천국의 자기 자신을 은근히 심으신다. 이런 인정함과 심정으로부터의 믿음 안에 있지 않다면, 누구도 진정한 겸손 안에 있을 수 없다; 진정한 겸손 안에 있는 자는 자아의 절멸, 또는 자기의 자아를 몹시 싫어함, 고로 자아가 결석한 듯한 상태에 있는다. 이때야말로 그가 주님의 신성을 받을 수 있는 상태에 있다. 이런 수단으로 해서 주님은 겸허하고 죄를 깊이 뉘우치는 심정 안으로 선을 가지고 흘러드신다.
위와 같은 것이 순진이 있는 자기 자신이다. 이것이 여기서 야곱이 자신을 위해 선택한 “어린 양들 사이에 검은 것”에 의해 의미되어 있다; 그러나 양들 사이에 흰 것은 선들 안에 놓여진 자아 공적이다. 이것을 야곱은 선택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이것은 순진에 반대되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선들 안에 자기 공적을 놓는 자는 모든 선이 자신으로부터 라고 인정하고 믿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그가 행하는 선들에서 그는 주님이 아닌 자신을 중요시하기 때문, 따라서 그는 그의 공적 때문에 댓가를 요구한다. 그러므로 이런 자는 자신과 비교해 타인을 경멸하고, 때로는 그들을 사정 없이 규탄하는 바, 그는 이런 상태의 정도에 비례하여 천국의 질서로부터, 즉 선과 진리로부터 퇴조한다. 이런 모두로부터 분명해지는 바, 이웃을 향한 선행과 주님을 사랑함은 그것 안에 순진이 없으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누구나 자기 안에 순진의 얼마 만큼이 없으면 천국 안으로 올 수 없다; 이는 주님의 말씀에 따라서 이다:
참으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작은 어린 아이 같이 하느님의 왕국을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누구든 지, 그는 거기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마. 10:15; 눅 18:17);
위의 “작은 어린 아이”는 순진을 의미하는데, 다른 구절에서도 같다.
“어린 양들”이 순진을 의미하는 것은 말씀의 많은 구절로부터 알게 되는데, 아래 몇 구절만 첨가하였다. 이사야서에서:
이리가 어린 양과 더불어 거주할 것이다, 그리고 표범이 아이와 드러누울 것이다; 그리고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비육 가축이 함께 (거주할 것이다), 그리고 어린 아이가 그것들을 인도할 것이다 (이. 11:6);
위에서 취급된 주제는 주님의 왕국이다, 그리고 이 왕국 안에 있는 평화와 순진의 상태이다. “이리”는 순진에 맞서 있는 이들을; 그리고 “어린 양”은 순진 안에 있는 이들을 표시한다. 다시 이사야서에서:
이리와 어린 양이 함께 먹을 것이다, 그리고 사자가 수소와 더불어 짚을 먹을 것이다, 그리고 먼지는 뱀의 빵일 것이다. 그들은 내 거룩함의 모든 산을 상하게 하지 않을 것이고 파괴하지도 않을 것이다 (이. 65:25);
위 구절의 “이리”는 순진에 맞서는 이들을 표시한다; 그리고 “어린 양”은 순진 안에 있는 이들을 표시한다. “이리”와 “어린 양”이 반대되기에, 주님께서는 그분이 파견하는 칠십 명에게 말하셨다:
잘 보라 나는 너희를 이리들 한가운데에 있는 어린 양들 같이 파견한다 (눅. 10:3).
모세의 책에서:
그분은 그가 바위로부터 꿀을 빨도록, 그리고 단단한 바위로부터 기름을 빨게 하신다; 가축떼의 버터를, 그리고 양떼의 젖을, 어린 양들과 숫양들의 지방과 더불어, 바산의 아들들
(신. 32:13, 14);
위는 고대 교회의 천적인 것들을 내적 의미에서 취급한다, 그리고 “어린 양들의 지방”은 순진의 선행을 표시한다.
원어에서 “어린 양들”은 다양한 이름들로 표현되어지고 있다, 이 다양한 이름들을 수단으로 순진의 다양한 단계들이 의미된다; 그 이유가 이미 말했듯이, 모든 선 안에는 그것이 선이 되게 만드는 순진이 반드시 있다; 결과적으로 진리 안에서도 그러하다. 위 구절에서의 “어린 양들”은 “양”에서도 사용되는 단어와 같은 단어로 표현되어 있다 (레. 1:10; 3:7; 5:6; 17:3; 22:19; 민. 18:17도 참조하라); 그리고 이것은 선행의 신앙 속의 순진이 의미된다. 그밖의 구절에서 이것들은 다른 단어들에 의해 표현되고 있다. 이사야서에서:
너희는 광야를 향하여 (있는) 바위로부터 토지의 통치자의 어린 양을 시온의 딸들의 산으로 보내라 (이 16:1).
이사야서에서 또다른 단어에 의해서 이다:
주 여호비께서 강함 안에서 오신다, 그리고 그분의 팔이 그분을 위하여 통치하실 것이다; 그분은 목자 같이 그분의 양떼를 먹이실 것이다, 그분은 그분의 팔에 어린 양들을 그러모우실 것이다, 그리고 그분의 품 안에서 그들을 운반하실 것이다, 그리고 (젖을) 빰을 주는 이들을 부드럽게 인도하실 것이다 (이. 40:10, 11);
위에서 “그분의 팔 안에 어린 양들을 그러모으시고, 그리고 그분의 품에서 그들을 운반하는”것은 순진이 있는 선행 안에 있는 이들을 표시한다.
요한복음서에서:
예수께서 자신을 제자들에게 보이셨을 때, 그분은 요나의 아들, 시몬, 베드로에게 말하시기를, 너는 나를 이들보다 더 사랑하느냐? 그가 그분에게 말하신다, 그렇습니다, 주님, 제가 당신을 사랑하는 것을 당신은 아십니다. 그분이 그에게 말하신다, 내 어린 양들을 먹이라. 그분이 그에게 두 번째로 말하신다, 요나의 아들, 시몬아,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그가 그분에게 말하신다, 예, 주님, 제가 당신을 사랑하는 것을 당신은 아십니다. 그분이 그에게 말하신다, 내 양을 먹이라
(요. 21:15, 16).
위 구절, 그 외의 구절에서도 “베드로”는 신앙을 의미한다; 그리고 신앙은 그것이 이웃을 향한 선행으로부터, 고로 주님을 사랑함으로부터 있지 않으면 신앙이 아니다; 그리고 선행과 사랑은 그것들이 순진으로부터 있지 않으면 선행과 사랑이 아니다. 이런 이유로 주님께서는 처음에 베드로에게 그가 주님을 사랑하는지를, 즉 신앙 안에 사랑이 있는지 여부를 물으시고, (있다고 대답하자) 그 다음 “내 어린 양을 먹이라”고, 즉 (신앙은) 순진 안에 있는 이들을 먹이라고 말하신다. 두 번째에서도 같은 질문과 대답이 있는 다음, “내 양을 먹이라”고, 즉 (신앙은) 선행 안에 있는 이들을 먹이라고 말하신다. (즉 신앙 이론, 내지 교리물 등은 선행을 실행하고 있는 이들의 참고서 수준에 있어야 한다는 말, 즉 신앙을 선행보다 중요하게, 한 단계 높은 자리에 앉히지 말라는 것, 바꿔 말해 신앙은 선행의 보좌관 역할을 해야 한다는 뜻일지 모른다 역자 주.)
주님은 그분의 왕국 안에 있는 순진 자체이시기에, 순진의 모든 것은 그분으로 있기에, 그분은 “어린 양”이라 불리우신다; 요한복음서에서:
다음 날, 세례 요한은 예수께서 자기에게 오심을 보고, 말하기를, 잘 보라, 세상의 죄를 가지고 가시는 하느님의 어린 양이시다 (요. 1:29, 36).
그리고 계시록서에서:
이들은 어린 양과 전쟁을 만들 것이다, 그리고 어린 양은 그것들을 정복하실 것이다; 그 이유가 그분은 주들 중의 주님이시고, 왕들 중의 왕이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분과 더불어 있는 이들은 불리우고, 뽑힌 이들이다 (계. 17:14; 그 외의 구절로는 5:6; 6:1, 16; 7:9, 14, 17; 12:11; 13:8; 14:1, 4; 19:7, 9; 21:22, 23, 26, 27; 22:1, 3).
최고 의미에서 유월절 어린 양이 주님이시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그 이유가 유월절이 주님께서 신성이 되심, 즉 그분의 인간이 신성을 입으심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표현적 의미에서 이것은 인간의 거듭남을 의미한다; 그리고 유월절 어린 양은 거듭남에 필수 요소인 것, 즉 순진을 의미한다; 그 이유가 순진이 들어 있는 선행을 수단으로 하지 않고서는 누구도 거듭나질 수 없기 때문이다.
순진이 주님의 왕국에서 제 일의 것이고, 거기서 천적 평면 자체이기에, 그리고 제물과 태워 바침이 주님의 왕국의 영적, 천적인 것들을, 그러므로 순진이 있는 주님의 왕국의 필수 요소 자체이기에, 순진이 어린 양들에 의해 표현되어졌다. 이런 이유로 항구히, 또는 매일 태워바침이 하나는 아침에, 또 하나는 저녁에 어린 양들로 만들어졌다 (출. 29:37-39; 민. 28:3, 4), 그리고 안식일에는 두 배로 바쳐졌다 (민. 28:9, 10), 그리고 더욱이 절기들에서는 더 많은 어린 양이 바쳐졌다 (레. 23:12; 민. 28:11, 17, 19, 27; 29장). 순진에 관한 위와 같은 이유로 아이를 낳은 여인이 자기의 깨끗해짐의 날들을 다 채운 후에는 태워바침을 위해 어린 양, 그리고 어린 비둘기와 호도애를 바쳤다 (레. 12:6), 이는 부부의 사랑의 결과가 의미되기 위하여 이다; 또한 순진이 “유아들”에 의해서도 의미된다.

그리고 염소들 사이에서 얼룩지고 반점 있는 것들. 이는 악과 거짓이 혼합되어 있는 진리로부터의 모든 선이 그분의 것임을 의미한다. (여기서의 “염소들”은 원어를 엄밀히 번역하면 암염소들이고, 흔히 염소떼로 번역한다.) 이는 “반점”이 거짓을, “얼룩”이 악을 의미함으로부터; 그리고 “암염소들”의 의미가 진리로부터의 선, 또는 신앙으로부터의 선이다로부터 알려진다. 이 모두가 그분의 것이다가 이어지는 말, 즉 “그리고 이것이 나의 보상이다”에서 의미되고 있다.
이쯤에서 진리로부터의 선 (the good of truth)이, 또는 신앙으로부터의 선행(the charity of faith)이 무엇인지에 대해 설명을 보태어 볼까 한다. 인간이 거듭나질 때, 신앙으로부터 있는 진리가 외관상으로는 먼저 온다, 그리고 선행으로부터 있는 선은 외관상으로 그 뒤를 따른다; 그러나 인간이 거듭났을 때, 선행으로부터의 선이 명명백백하게 먼저 진행되고, 신앙으로부터의 진리는 명백하게 그 뒤를 따른다. 그 이유가 인간이 거듭나질 때, 그는 선인 것을 진리로부터 행하는데, 그 이유는 그가 선인 것을 진리로부터 배우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것이 결과되게 하는 것은 진리 안쪽에 있는 선이다. 그 이유가 선은 내적인 경로를 수단으로, 즉 혼의 경로를 수단으로 주님으로부터 흘러들기 때문; 그러나 진리는 외적인 경로를 수단으로, 즉 육체의 것인 감각들을 수단으로 흘러들기 때문이다. 후자의 길을 수단으로 들어오는 진리는 안쪽에 있는 선에 의해 채택되어진다, 그리고 그것과 결합한다, 그리고 이것은 인간이 거듭나질 때까지이다. 그 다음 변혁(혁명)이 거행된다, 그리고 진리는 선으로부터 행해진다. 이상 살핀 바로부터 선행으로부터의 선들이 무엇인지, 진리로부터의 선이 무엇인지가 가늠되었을 것이다. 선행의 선들이 신앙의 열매들이라고 많은 이들이 말하는 것을 듣는데, 그 이유는 거듭남의 시작에서 외관상 그렇게 나타나는 것을 가지고 결말을 짓기 때문이다. 그들이 이와 달리해서는 알지 못하는 이유는 거듭나고 있는 자의 경우, 극소수만이 알기 때문, 그리고 상당히 거듭나져왔던 이들, 또는 선에 애착함 안에, 또는 선행 안에 있는 자 외에는 이를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선에 애착함으로부터, 또는 선행으로부터서는 이것이 분명하게 보여질 수 있다, 또한 지각된다; 그러나 거듭나지지 않고 있는 이들은 선에 애착함, 선행이 무엇인지조차 알지 못한다. 그들에게 이것을 묻는다면, 그들은 이것은 자기들과 상관 없는 어떤 것이라고 추론할 뿐이다. 이렇게 추론으로 나온 것에서 그들은 선행을 신앙의 열매라고 부른다. 실상 신앙이 선행으로 있어야 함에도 그렇게 불려질 수밖에 없는 처지이다. 선행 안에서 살고 있는 단순 순박한 사람에게는 어느 것이 먼저이고 어느 것이 뒤에 서야 하는지 추론함은 중요 사항이 아니다. 그 이유가 선행이 신앙의 생명임을 진즉 알고 있기 때문이다.
(말씀에서) “가축떼, cattle”에는 어린 양들 뿐만 아니라 양들, 염소 새끼들, 암염소들, 숫양들, 그리고 숫염소들이 뜻해진다. 비록 어린 양들과 암염소들만 언급되는 경우일지라도 그렇다는 말이다; 그리고 “암염소들”에 의해서는 신앙으로부터의 선행이 의미된다; 그 이유가 이런 사항들이 여기서 내적 의미로 취급되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반점 있다”가 원어에서는 “어린 양”을 의미하는 단어에 의해 표현되어져 있다 (이. 40:10. 11도 같다); 그리고 “얼룩지다”는 “목부” 또한 뜻하는 단어에 의해 표현되어져 있다 (왕하. 3:4; 암. 1:1).

그리고 이것은 저의 보상일 것입니다. 이는 이것은 그분 자신으로부터 이었음을 의미한다. 이는 “보상”의 의미가 그의 것, 즉 자기의 봉사함 때문에 있는 야곱의 것이다로부터; 그리고 이런 사항들이 그분의 자기 자신의 힘으로부터를 의미함에서 알게 된다. 이는 신성한 거룩함이다; 그 이유가 모든 영적, 천적인 선은 주님의 신성한 거룩함으로부터 진행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제 정의가 저를 위한 답일 것입니다. 이는 그분께서 가지셨던 신성한 거룩함을 의미한다. 이는 “정의”가 선이라고 단언됨에서 알게 된다; 그러나 여기와 같이 주님에 관해 서술할 때, 이것은 신성한 거룩함을 의미한다; 그 이유는 모든 영적, 천적인 선은 주님의 신성한 거룩함으로부터 진행하기 때문이다.

이는 영원쪽으로를 의미한다. 이는 이튿날의 의미로부터 분명해진다. “어제”, “오늘”, “내일”이 말씀에서 언급될 때, 영원은 최고 의미 측면에서 의미된다; “어제”는 영원으로부터를 의미한다; “오늘”은 영원을 의미한다; 그리고 “내일”은 영원쪽으로를 의미한다. 그 이유가 말씀에서 언급되는 때들은 상태들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는 “시대들”, “햇수들”, “달들”, “주들”, “날들”에서도 공히 같은 것을 보여준다. 그러나 주님과 더불어서는 상태들이 없다; 그러나 모든 것이 영원이고 무한이다. 이런 사항을 통해 “내일”에 의해 영원쪽으로가 의미됨을 알게 된다.

그 이유는 당신이 제 앞에 나의 보상을 오게 하리라 했기 때문. 이는 그분의 자기 자신인 것을 의미한다. 이는 “보상”이 주님을 서술할 경우, 그 의미는 그분의 자기 자신인 것을 의미하기 때문, 즉 그분 자신의 힘을 수단으로 획득하심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염소들 중에서 얼룩지지 않고 반점이 없는 것. 이는 “라반”으로 의미된 선으로부터 있지 않는 것은 진리의 선 안에서 악과 거짓이 혼합되었음을 의미한다. 이는 이미 살폈다.

그리고 어린 양 중에서 검은 것. 이는 순진의 첫 상태를 의미한다. 이는 “검다”가 인간의 자기 자신인 것이다로부터; 그리고 “어린 양”의 의미가 순진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어린 양들 안에서 검다”가 여기서 순진의 첫 상태임을 의미하는 이유는 거듭나지않고 있는 인간의 자기 자신이 거듭남의 처음에서는 그를 지배하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처음 당시에서, 그는 자기의 자신으로부터 선인 것을 행하고, 이 행함은 마치 자기 자신인 것처럼 있어져야만 한다고, 이러므로 해서 자기는 천국의 자기 자신인 것을 수여받을는지 모른다고 상상하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어린 양들 사이에 검은 것”이 순진의 처음 상태를 의미한다.

이것은 내가 훔친 것. 이는 그것은 그의 것이 아니었음을 의미한다. 이는 설명 없이 알 것이다. 글자 의미에서의 이 표현은 껄껄스러운 어떤 것 같이 소리날지 모른다; 그러나 이 소리가 천국쪽을 향하여 건너갈 때, 그것의 껄껄스러움은 잃어진다, 그리고 부드럽고 온순한 소리로 되어진다. 비슷한 표현이 마태복음서에서 발생한다:
그러므로 경계하라, 그 이유가 너의 주님이 어느 시간에 오실 것인지를 너희가 알지 못하기 때문이 다. 그러나 이것을 알아라, 만일 그가 어느 시간에 도둑이 오는지를 알았었다면, 그는 경계하였을 것이고, 자기 집을 통과하여 부수도록 내버려두지 않았을 것이다 (마. 24:42, 43).
그리고 계시록서에서:
만일 너희가 깨어있지 않으면, 나는 도둑 같이 너희에게 올 것이다, 그리고 너는 내가 네게 어느 시간에 올지를 알지 못한다 (계. 3:3).
계시록서에서:
보라 나는 도둑 같이 온다, 깨어 있고, 자기 의복을 간직한 자는 복 있다 (계. 16:15).
이 표현들은 주님에 관하여 사용되었다: “도둑 같이”란 말은 예기치 못한 것, 예상하지 못했던 것만을 의미한다. 내적 의미에서 “훔치다”는 주님의 것을, 즉 선과 진리를 자기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을 표시한다; 이는 거듭남의 시작에서 흔히 발생하고, 순진의 처음 상태이기도 한데, 이 표현은 이 말이 글자에서 소리내어지는 것보다 더 부드럽기는 하다. 결과적으로 “이것이 내가 훔친 것”은 이것이 자기 것이 아니었다를 의미한다.

34-36절. 그리고 라반이 말했다, 보라 내가 네 말에 따르리라. 35 그리고 그 날 그는 부분적으로 색깔이 있고 반점 있는 숫염소, 그리고 얼룩지고 반점 있고, 흰색을 가진 모든 암염소, 그리고 어린 양 중에서 검은 것 모두를 옮겼다, 그리고 그것들을 그의 아들들의 손에 주었다. 36 그리고 그는 자기와 야곱 사이에 사흘 길이 뜨게 하였다. 그리고 야곱은 나머지 라반의 양떼를 먹였다. “그리고 라반이 말했다, 보라 내가 네 말에 따르리라”란 동의함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는 그 날 부분적으로 색깔이 있고 반점 있는 숫염소를 옮겼다”란 선으로부터의 진리들이 라반의 선에 어울려졌던 악과 거짓들과 더불어 흩으려져 있고, 섞인 상태에서 분리되어졌다를 의미한다. “얼룩지고 반점 있는 암염소 모두”란 악과 거짓에 혼합된 상태인 그들의 선들을 의미한다. “그 안에서 흰색을 가진 것”이란 진리를 의미한다. “어린 양 중에서 검은 것 모두”란 순진 속의 자기 자신을 의미한다. “그것들을 자기 아들들의 손에 주었다”란 그것들이 진리들에 주어졌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는 자기와 야곱 사이가 사흘 길이 뜨이게 하였다”란 그들의 상태가 모두 분리되었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야곱은 나머지 라반의 양떼를 먹였다”란 남겨져 있었던 것으로부터 그는 합쳐질 수 있는 이러한 선들과 진리들을 가져왔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라반이 말했다, 보라 내가 네 말에 따르리라. 이는 동의함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는 그 날 부분적으로 색깔이 있고 반점 있는 숫염소를 옮겼다. 이는 선으로부터의 진리들이 라반의 선에 어울려졌던 악과 거짓들과 더불어 흩으러져 있고, 섞인 상태에서 분리되어졌다를 의미한다. 이는 “옮기다”의 의미가 분리됨이다로부터; 그리고 “숫염소들”의 의미가 선으로부터의 진리들이다로부터 (이는 아래에서 살핀다); 그리고 “부분적으로 색깔 있다”가 흩으러져 있고, 악들과 섞여 있다를 의미함으로부터; 그리고 “반점 있다”가 거짓들과 섞여 있고 흩으러져 있다를 의미함으로부터 (이는 앞에서 살폈다) 알려진다. 여기서는 “숫염소”가, 다음에서는 “암염소”가 언급되는데, 그 이유는 “숫염소”가 선으로부터의 진리들을; “암염소”는 진리로부터의 선들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 둘 사이의 차이점은 이미 상술했다 (3995항).
숫컷과 암컷 사이의 정밀한 구분이 말씀에서 만들어진다. 이는 제물과 태워바침으로부터 분명한데, 이와 관련하여 특별한 명령이 바쳐질 짐승에 관련하여, 즉 숫컷 어린 양인지, 암컷 어린 양인지, 암염소인지, 숫염소인지, 양 또는 숫양인지 등등에 주어져 있다; 이런 모두에서 이런 경우는 숫컷으로, 저런 경우는 암컷으로 바치도록 명령되고 있다. 일반적으로 보면, “숫컷”은 진리를 의미한다; 그리고 “암컷”에 의해서는 선이 의미된다. 그러므로 여기서 “숫염소”에 의해서는 선으로부터의 진리들이; “암염소”에 의해서는 진리로부터의 선들이 의미된다. 이제 뒤이어지는 “암염소”에 의해서는 그것들(진리들)에 인접된 선들이 의미된다. 이렇게 암, 수 염소의 본성에서 차이가 있기에, 그는 부분적으로 색깔 있는 숫염소를 옮겼다고 말해지나, 얼룩있는 것들은 아닌데, 이것은 암염소로부터 라고 말해진다; 그 이유가 “부분적으로 색깔 있다”는 진리가 흩으러져 악들과 섞인 것을; “얼룩지다”는 선이 흩으러져 거짓들과 섞인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3993항); 악들과 섞인 진리는 이해력에 속하고, 악들과 섞인 선은 의지력에 속한다. 이것이 다른 점이다. 이 모두는 라반에 의해 의미된 선으로부터 있다는 것이 분명한데, 그 이유는 그 가축들이 라반의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말씀에서 “(가축)떼”는 선과 진리, 같은 말로 선과 진리 안에 있는 이들, 그러므로 주님의 교회로부터 있는 이들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 신비함들은 이 이상 더 설명할 수 없다, 그 이유는 납득력이 선들과 진리들 안에서 배워지고, 동시에 계발되지 않으면 분명해질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반드시 먼저 알고 있어야만 하는 사항은, 선으로부터의 진리들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들로부터 있는 선들이 무엇인지에 관해서; 그리고 라반에 의해 여기서 표현된 이 선으로부터 아주 많은 것들이 분리되어질 수 있다는 것 등이다. 이 주제에 관해 지식을 갖지 않은 자들은 모두 각각의 선 안에는 무수한 것들이 있다는 것, 이는 너무나 많아서 대단한 학식자에 의해서도 일반적으로도 분류하기 힘들다는 것이다. 그 이유가 진리들을 수단으로 획득한 선들이 있고; 이 선들로부터 태어난 진리들이 있고; 다시 이 진리들을 수단으로 획득한 선들이 있기 때문이다. 선들로부터 태어난 진리들이 있다, 이것 역시 위와 같이 시리즈로 있다; 악들과 섞인 선들이 있다; 위에서 상술한 바대로 거짓들과 섞인 진리들이 있다; 그리고 이런 것들이 어울리고(섞이고) 부드러워지고 하는 것은 아주 다양하고, 여러 겹겹이어서 수만 겹을 초과할지 모른다; 그리고 그것들은 삶의 모든 상태들에 따라서 다양해진다; 그리고 삶의 상태들은 인간의 시기에 일치하여 일반적으로 다양해진다, 그리고 특별하게는 모든 종류들의 자기 애착들에 일치하여 다양해진다. 이로부터 라반의 선으로부터 아주 많은 것들이 분리되어질 수 있다는 말을 어느 정도라도 납득하였는지 모른다. 이런 종류 중에서 어떤 것은 진리들에 인접되는데 이것은 야곱의 아들들에 의해 의미된다; 어떤 것은 뒤에 남겨진다; 그리고 이것들로부터 다른 것들이 파생된다. 그러나 전에 말했던 대로 이런 사항들은 배워지고 계발이 동시에 있지 않으면 이해력에 와닿지 않는다.

얼룩지고 반점 있는 암염소 모두. 이는 악과 거짓에 혼합된 상태인 그들의 선들을 의미한다. 이는 “암염소”의 의미가 진리로부터의 선들이다로부터; 여기서는 진리들에 인접되어 왔던 선들이다; “얼룩지다”의 의미가 악들이 섞인 선들이다로부터; 그리고 “반점 있다”의 의미가 거짓들이 섞여 있는 진리들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 안에서 흰색을 가진 것. 이는 안에 진리가 있다를 의미한다. 이는 “희다”의 의미가 진리이다로부터, 그러나 적절하게는 주님의 정의와 공적, 그리고 파생적으로는 인간 안에서 있는 주님의 정의와 공적이다. “희다”가 이 의미를 가지는 이유는 주님으로부터 있고, 빛남과 흼의 근원인 천국의 빛이 진리를 의미하기 때문; 그러므로 이 빛에 의해 계발되는 것, 그리고 빛남이 되는 것은 인간 안에 있는 주님의 정의와 공적이라 불리우는 것들이다. 선으로부터 주님의 정의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자들, 그리고 자기의 공적을 거절하는 이들이 “의로운” 자에 의해 특별하게 의미되어 있다. 이를 마태복음서에서 주님께서 말하신다:
의로운 자는 그들의 아버지의 왕국에서 태양 같이 빛날 것이다 (마. 13:43).
“빛남 또는 희게 빛남”이 이 의미를 가지는 것은 말씀에 있는 다른 구절로부터 분명해진다. 모세의 책에서:
그의 눈은 포도주보다 더 붉을 것이다, 그리고 그의 이는 젖보다 더 희다 (창. 49:12);
위는 유다에 관해 말해지는데, 유다를 수단으로 주님의 사랑의 신성 측면에 관련된 주님이 표현되었다; 그리고 내적 의미에서, 천적 왕국; 그리고 천적 인간이 표현되었다. “눈이 포도주보다 더 붉음”은 신성한 지혜를 의미한다; 그리고 “이가 젖보다 더 흼”은 신성한 정의를 의미한다. 다윗서에서:
당신은 히솝(우슬초)으로 저를 순수해지게 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나는 깨끗해질 것입니다; 당신은 나를 씻으실 것입니다, 그리고 나는 눈보다 더 희어질 것입니다 (시. 51:7);
“씻는 것”, 그리고 “눈보다 더 희게 만드는 것”은 주님의 정의를 받아들임으로 죄들로부터 순수해지는 것을 표시한다. 계시록서에서:
일곱 등잔대들의 한가운데에 사람의 아들 같은 분이 계셨다; 그분의 머리와 머리털은 흰 양털 같이, 눈 같이 희었다; 그리고 눈은 불 속의 불꽃 같았다 (계. 1:13, 14).
계시록서에서:
너는 자기들의 의복을 더럽히지 않은 몇 이름들을 사데 (교회) 안에서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들은 흰 것 안에서(흰옷을 입고) 나와 더불어 걸을 것인데, 그 이유가 그들은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극복하는 자는 흰 의복을 입을 것이다 (계. 3:4, 5).
계시록서에서:
내가 네게 조언하는 것은 나로부터 불로 순수해진 금을 사서, 부자가 되라는 것이다; 그리고 흰 의복, 너는 그것을 입게 될는지 모른다 (계. 3:18).
다시:
제단 아래 모두 각각의 혼에게 흰 겉옷(도포, robe)이 주어졌다 (계. 6:9-11).
다시:
나는 왕좌 앞에, 그리고 어린 양 앞에, 흰 도포로 치장하고 서 있는 그들을 보았다, 그리고 원로 중의 한 명이 나에게 말했다, 흰 도포를 입은 이들은 누구이냐? 그들은 어디로부터 왔느냐? 그리고 나는 그에게 말했다, 나의 주여, 당신이 아십니다. 그리고 그가 나에게 말했다, 이들은 큰 환난으로부터 온 자들이다, 그리고 자기들의 도포를 빤 자들이다, 그리고 자기들의 도포를 어린 양의 피에서 희게 만든 자들이다 (계. 7:9, 13, 14).
다시:
희고 빛나는 고운 아마포를 입고, 금띠를 자기들의 가슴에 두른 천사들 (계. 15:6).
다시:
내가 보았고 잘보니 흰말이었다, 그리고 그 위에 앉으신 이는 활을 가지셨다, 그리고 그분에게 왕관이 주어졌다 (계. 6:2).
다시:
이 후에 나는 천국이 열린 것을 보았다, 그리고 잘 보니 흰말이 있었다. 천국에 있는 그분의 군대들이 희고 깨끗한 고운 아마포를 입으신 흰말 위의 그분을 뒤따랐다 (계. 19:11, 14).
위와 같은 구절을 포함하는 많은 구절들에서 “희다”에 의해 신앙으로부터의 진리가 의미되어지고 있다; “흰 의복”과 “흰 도포”는 이외 다른 의미는 없다. 그러나 유의할 점은, 여기서 말하는 신앙으로부터의 진리는 자신들로부터, 자신의 똑똑함으로부터 자기의 신앙을 가졌다고 말하는 이들에게는 해당되지 않는다. 그 대신 자신의 신앙과 지혜를 주님으로부터 가졌다고 믿는 이들에 속하는 말이다는 점이다. 그 이유가 이들이야말로 진리와 선의 어떤 것도 자신의 공로로 돌리지 않기 때문, 즉 자기들이 소유하는 진리들과 선들을 통하여 공적을 가졌다고 절대 믿지 않는다; 따라서 그들은 자신이 지닌 선들과 진리들로부터서 의로운 자라 칭함을 스스로 거절한다. 오직 그것들을 주님의 덕분으로 돌리고 있다. 고로 주님의 은총과 자비 때문이라 믿고 있다. 이것이 위 구절에서 “흰 의복을 입는” 것, 그리고 “어린 양의 피에서 희게 만드는” 것이다. 천국으로 입장하는 이들에게서 벗겨져야 하는 두 가지가 있다. 이는 자기 자신(own)과 결과적으로 자기에 대한 확신(confidence), 그리고 자아로부터 있다고 확신하는 공적(merit) 또는 자기 자신으로부터 의로워졌다는 정의로움이다. 천국에 입장하는 이들은 이것을 벗어내고, 주님으로부터 있는 천국의 자신, 그리고 주님의 공적, 또는 정의로움을 입는다; 그리고 그들이 이것을 입는 정도에 따라 얼마나 더 깊은 천국에, 즉 더 내면적인 천국에 거주하느냐가 결정된다. 이 두 가지 것이 위 구절에서 “붉다”와 “희다”에 의해 특별하게 의미되어 있다; 즉 “붉다, red”에 의해서는 그때(천국 입장) 당시 가지는 사랑의 선을; “희다, white”에 의해서는 신앙의 진리가 의미된다.

어린 양 중에서 검은 것 모두. 이는 순진이 있는 자기 자신을 의미한다. 이는 비슷한 말이 등장하는 곳에서 이미 살폈다.

그것들을 자기 아들들의 손에 주었다. 이는 분리된 진리들과 선들이 진리들에 주어졌음을 의미한다. 이는 “아들들”의 의미가 진리들이다로부터 분명해진다. “그들의 손에 주는 것”은 그들에게 결정권과 처분권을 주는 것인데, 그 이유는 “손”이 힘(권력)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아들들”에 의해 의미된 진리들은 감각적이라 불리우는 진리들인데, 그 이유는 그것들이 감각들로부터 있고, 자연적 마음의 가장 바깥쪽의 것들이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인간의 자연 평면은 이쪽에서는 육체의 감각적인 것들과 교통하고, 다른쪽에서는 합리적 마음의 합리적인 것들과 교통하기 때문이다. 이 중간에 있는 것들로 해서 세상에로 열려져 있고 육체로부터 있는 감각적인 것들로부터 천국으로 열려져 있고 합리적 마음으로부터 있는 합리적인 것들로 까지의 승강함이 결과된다; 이 승강함으로부터 하강함, 즉 천국으로부터 세상으로의 하강이 있다; 그러나 이것은 인간 안에서 만이 있다. 이런 승강과 하강이 이 장의 내적 의미에서 취급된 것들이다; 그리고 각각 그리고 모든 것들이 표현적으로 진행되기 위하여, 합리성은 이삭과 리브가에 의해서; 그리고 자연 평면은 야곱과 그의 두 여인들에 의해서; 그리고 감각적 평면은 그들의 아들들에 의해서 표현되어졌다. 그러나 감각적 평면에서, 이 평면은 질서의 최말단이기 때문에, 앞에서 살핀 바대로 모두 각각의 아들은 각기 어떤 일반적 진리를 표현하기에, (시간상의) 앞의 것(진리와 선)들이 함께 존재한다. (즉 최말단이 그릇 역할을 하는 바, 그 안에는 감각적 평면에서 천적 평면, 주님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일반적, 특수적, 개별적인 것이 함께 있다는 말일지 모른다. 이를 겹겹으로 된 양파를 연상하면 도움이 될지 모른다. 또는 현재의 각 인간의 처신이 과거의 그 인간, 내지 미래의 그 인간을 결정할 수 있다는 점에서 우리의 현재는 여기서 말하는 최말단일지 모른다. 역자 주.)

그리고 그는 자기와 야곱 사이가 사흘 길이 뜨이게 하였다. 이는 그들의 상태가 모두 분리되었음을 의미한다. 이는 “길이 놓임(뜨임)”의 의미가 분리되어지는 것이다로부터; “3”의 의미가 마지막인 것, 완성, 끝(목적)이다로부터, 고로 모두가 분리됨이다; 그리고 “날들”의 의미가 상태들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리고 야곱은 나머지 라반의 양떼를 먹였다. 이는 남겨져 있었던 것으로부터 그는 합쳐질 수 있는 이런저런 선들과 진리들을 가져왔음을 의미한다. 이는 “양떼”의 의미가 선들과 진리들이다로부터. “양떼의 나머지를 먹이는 것”은 남아 있는 것으로부터 결합되어질 수 있는 이런저런 선들과 진리들을 의미하는데, 이는 이어지는 구절에서 분명해진다. 그 이유가 이것이 그 구절에서 취급되는 주제이기 때문이다.

37-40절. 그리고 야곱은 포플러 나무와 개암나무와 플라타너스 나무의 싱싱한 막대를 가져왔다, 그리고 그것들의 껍질을 벗겨 흰색이 나오게 하고 가지가 흰색이 드러낸채 있게 했다. 38 그리고 그는 껍질 벗긴 가지를 도랑에 있는 물구유통에 양떼들이 물을 마시러 올 때 양떼들을 마주 보게 세웠다. 그리고 양떼들은 물을 마실 때 흥분하였다. 9 그리고 양떼들은 막대에서 흥분하였다, 그리고 양떼들은 부분적으로 색깔이 있고, 얼룩지고, 그리고 반점 있는 것들을 낳았다. 40 그리고 야곱은 어린 양들을 분리했다, 그리고 양떼의 얼굴들이 라반의 양떼에 있는 부분적으로 색깔 있고 검은 것들을 향하게 했다. 그리고 그는 자신 만을 위한 가축떼들을 두었다, 그리고 그것들이 라반의 양떼가 안되도록 관리했다. “그리고 야곱은 자기에게 포플러 나무의 싱싱한 가지를 가져왔다”란 자연적 선에 적당한 힘을 의미한다. “그리고 개암나무, 그리고 플라타너스 나무”란 자연적 진리들로부터 파생되는 힘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것들의 껍질을 벗겨 흰색이 나오게 하고 가지가 흰색이 드러난채 있게 했다”란 진리의 내면의 힘에 의해 질서적으로 배열됨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는 그가 껍질을 벗긴 가지를 개천에 놓았다”란 더 준비함을 의미한다. “양떼들이 물을 마시러 오는 물 구유통에…”란 진리에 애착함을 의미한다. “양떼를 마주 보게..그리고 양떼들은 물을 마시러 왔을 때 흥분했다”란 그들이 합쳐지도록 애착조차도 열정을 냄을 의미한다. “그리고 양떼는 가지에서 흥분을 했다”란 그분 자신의 힘으로부터의 결과를 의미한다. “그리고 양떼들은 부분적으로 색깔 있고, 얼룩지고, 그리고 반점 있는 것들을 생산했다”란 그것에 의해서 자연적 선 자체는 “라반”으로 의미된 중간에 위치하는 선으로부터 그것과 비슷한 것들을 가졌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야곱은 어린 양들을 분리했다”란 순진에 관하여를 의미한다. “그리고 양떼의 얼굴들을 부분적으로 색깔 있는 것들을 향하도록 했다”란 악과 거짓들과 더불어 흩어져 있는 진리들 쪽으로를 의미한다. “그리고 모든 검은 것”이란 그런 종류의 상태를 의미한다. “라반의 양떼 안에서”란 “라반”으로 의미된 선 안에서를 의미한다. “그리고 그는 스스로 자신만을 위한 가축떼를 놓았다”란 그분 자신의 힘에 의해 선들과 진리들을 분리하심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것들이 라반의 양떼와 섞이지 않게 했다”란 “라반”으로 의미된 선으로부터 절대적으로 분리됨을 의미한다.

그리고 야곱은 자기에게 포플러 나무의 싱싱한 막대를 가져왔다. 이는 자연적 선에 적당한 힘을 의미한다. 이는 “막대(rod)”의 의미가 힘(power)이다로부터; 그리고 “포풀러나무”의 의미가 자연 평면의 선이다로부터(이는 아래에서 살핀다) 알게 된다. 단어 “막대”는 말씀에서 자주 언급되는 편이다, 그리고 말씀 어느 곳에서나 힘을 의미하는데, 이는 목자가 양떼에게 힘을 발휘하는 것으로부터 신체를 받쳐주는 지팡이 역할을 담당하는 것에 이르기까지에서 힘을 의미한다. 마치 오른손이 힘을 의미하는 것처럼 이다; 그 이유가 “손”에 의해 힘이 의미되기 때문이다. 막대가 이런 의미를 가졌기에, 고대 시대 때에 막대는 왕들에 의해 사용되었고, 왕임을 표시하는 휘장이었는데, 이 휘장의 막대는 짧은 지팡이, 또한 홀이었다. 막대들은 왕만 사용한 것이 아니라 성직자나 예언자들도 사용하였는데, 이는 각자에 속하는 직분의 힘을 의미하였다. 아마 아론과 모세의 경우가 대표적일지 모른다. 이런 이유로 모세가 기적을 수행할 때, 막대를 뻗치거나 손을 뻗거나 한 이유이다; 그 이유가 신성한 힘이 “막대”나 “손”에 의해 의미되기 때문이다. “막대”가 힘을 의미하기 때문에 이집트의 마술사들이 마술적 기적을 수행할 때도 막대를 사용했다. 이로부터 지금도 마술사들은 그들의 손에 있는 막대를 가지고 표현하는 때가 많다.
그러나 원어에서, 목자나 왕들, 성직자나 예언자들에 의해 사용된 막대들은 또다른 단어에 의해 표현되어져 있다; 즉 여행자의 지팡이를 표시하는 단어에 의해, 또한 목자의 막대를 표시하는 단어에 의해서인데, 이에 대하여는 다른 구절들, 즉 창. 32:10; 출. 12:11; 삼상. 17:40, 43; 슥. 11:7, 10을 참조하면 알 것이다. 이 본문의 경우의 막대는 신체를 보조한다고 말해지지 않고 나무로부터, 즉 포풀러 나무, 개암나무, 플타너스 나무로부터 잘라낸 나무가지 토막이고, 이것을 양떼의 얼굴 앞 물구유통 안에 놓아두려는 막대이다. 그렇지만 이 막대도 위에서 상술한 막대와 같은 의미를 가진다, 그 이유는 이 막대가 내적 의미에서 자연적 선의 힘, 그리고 파생적으로 자연적 진리들을 묘사하기 때문이다.
막대가 만들어진 포풀러 나무에 주목해보자. 일반적으로 나무는 지각들과 지식들을 의미하는데, 그 중에서 천적 인간을 서술할 때 지각이; 영적 인간을 서술할 때, 지식이 의미된다. 그러므로 나무들은 특별하게는 선들과 진리들을 의미한다, 그 이유는 선들과 진리들이 지각들과 지식들에 속하기 때문이다. 나무들 중 어떤 종류, 즉 올리브 나무, 포도나무는 영적 인간으로부터 있는 내면의 선들과 진리들을 의미한다; 그리고 어떤 종류, 즉 포풀러, 개암, 플라타너스 나무는 자연적 인간으로부터 있는 외면의 선들과 진리들을 의미한다. 그리고 고대 시대 때에 각 나무는 선과 진리의 어떤 특별한 종류를 의미했기에, 작은 숲에서 개최된 예배는 숲의 나무들의 종류에 일치하고 있었다. 여기서 언급된 포풀러 나무는 흰 포풀러 나무이다, 이 나무는 나무의 흰 것으로부터 그것의 이름이 유래되어 불리우고 있다. 이로부터 “포풀러 나무”는 진리로부터 있는 선을 의미했다; 또는 같은 말로 진리의 선을 의미했다. 이 나무가 호. 4:13에서 언급되는데, 거기서는 반대적 의미, 즉 거짓된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개암나무, 그리고 플라타너스 나무. 이는 파생되는 자연적 진리들로부터 의 힘을 의미한다. 이는 “개암나무”, “플타너스 나무”의 의미가 자연적 진리들이다로부터 분명해진다. 이것이 이 나무들의 의미이다는 것은 말씀의 다른 장소로부터 명백해질 수 없다, 단지 에스겔서에서 “플라타너스 나무”의 언급만 있다:
하느님의 동산에 있는 삼나무들이 그를 덮어 가리지 못하고, 전나무는 그의 굵은 가지만도 하지 않고, 그리고 플라타너스 나무는 그의 가지들만큼 하지 않다, 그의 아름다움에 견줄 어떤 나무도 없었다 (겔. 31:8);
위 구절이 취급하는 주제는 지식들과 영적 교회의 인간에 관련되는 합리적인 것들이다. “하느님의 동산”은 영적 교회이다; “삼나무들”은 합리적인 것들이다; “전나무”와 “플라타너스나무”는 자연 평면의 것들; “전나무”는 선 측면에서의 자연적인 것들; “플라타너스 나무”는 진리 측면에서의 자연적인 것들이다.

그리고 그것들의 껍질을 벗겨 흰색이 나오게 하고 막대들이 흰색이 드러난채 있게 했다. 이는 진리의 내면의 힘에 의해 질서적으로 배열됨을 의미한다. 이는 “껍질 벗기기”, 또는 “나무 껍질들”의 의미가 내면의 것들이 빛으로 오도록 외면의 것들을 제거함, 고로 벌거벗음, 벗김이다로부터; “희다”의 의미가 진리이다로부터; 그리고 “막대”의 의미가 힘이다로부터; 여기서는 내면의 힘인데, 그 이유는 나무 껍질 안쪽에 있는 막대이기 때문이다. 진리의 내면의 힘으로 질서적으로 배열함은 내면의 인간이 외면의 인간쪽으로 영향력을 행사함, 또는 영적 인간이 자연적 인간쪽으로 영향력을 행사함이다; 그 이유가 자연적 인간 안에서 선과 진리의 질서적인 모든 배열은 영적 인간으로부터 오기 때문이다(즉, 영적 인간을 통하여 주님으로부터), 그리고 사실상 자연적 인간 안에 있는 진리를 통하여서 이다; 그 이유가 주님은 영적 또는 내면의 인간의 선 안으로 흘러드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이 거듭날 때까지에서는 선을 통하는 직접적 방식이 아닌 그 안의 진리를 통하여 자연적 인간 안으로 흘러드신다; 그러므로 자연적 인간 안에서 질서쪽으로의 모든 배열은 내면의 인간에 의해 결과되어진다. 이 외의 방법으로는 자연 평면, 또는 자연적 인간은 질서쪽으로 배열되는 것이 가능할 수 없다(거듭날 수 없다). 질서적 배열, 또는 거듭남이 내면의 인간에 의해 실시된다는 것은 진리를 인정함으로부터 분명해진다. 진리를 인정함은 내면의 인간에 의해 인정함이 있지 않으면 인정함은 없다; 그리고 또한 양심으로부터의 경우에서도, 이는 내면의 인간에 의해 진리를 인정함이다; 지각으로부터인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질서로의 배열은 진리를 수단으로 내면의 인간에 의해 결과되기에, 힘(능력, power)이 진리라고 단언되고, 또한 힘을 의미하는 막대에 의해, 또한 손에 의해 힘이 의미된다; 이는 본문 외 많은 구절들에서 확증해볼 수 있다. 유의할 점은 힘이 진리 자체에서 있는 것이 아니라 사실상 힘은 선 안에 있다는 것이다. 고로 선으로부터 진리 안에 있다; 더 꼼꼼하게 말하면, 주님으로부터 선을 통하여 진리 안에 있다. 이는 어느 정도이지만 진리의 내면의 힘이 질서적인 배열을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최고 의미일 경우, 이 본문은 주님이 취급되는데, 그분 자신의 힘이 의미된다; 그 이유가 신성은 자체적으로 힘을 가지기 때문, 그 이유는 신성의 힘은 다른 곳에 근원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그가 껍질을 벗긴 가지를 도랑들에 놓았다. 이는 더 준비를 함을 의미한다. 이는 뒤이어지는 것으로부터 분명해진다; 그 이유가 뒤어어지는 대목에서 진리의 내면의 힘의 효과가 취급되기 때문이다. 즉 힘이 “막대들”에 의해 의미된다; 내면의 인간에 의한 질서적 배열이 “벗김”에 의해; 그리고 “도랑들, gutters”에 의해서는 자연 평면에 있는 진리의 선이 의미된다.

양떼들이 물을 마시러 오는 물 구유통들 안에. 이는 진리에 애착함을 의미한다. 이는 “물”의 의미가 지식들(주관적 지식들)과 기억 속의 지식들(객관적 지식들)이다로부터 이것들은 자연적 인간의 진리들이다; “마시는 구유통”, 또는 “물 구유통”, 이는 물을 담는 그릇인 바, 내적 의미에서는 진리의 선들, 선들이 진리의 그릇이 됨으로부터; 그리고 “마시러 옴”의 의미가 진리에 애착함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마시러 오다”가 진리에 애착함인 이유는 이것이 목마름을 암시하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목마름은 욕구, 바램, 고로 진리를 앎에 애착함, 진리를 빨아들임에 애착함을 의미하다, 그리고 이것은 “물”이 일반적으로는 진리를 의미하기 때문에서 이다; 이에 반해 “배고픔”도 욕구, 바램을 의미하지만, 선을 빨아들임에 애착함을 의미한다; 이것은 식품으로 사용되는 것 중 대표적인 것인 “빵”이 선을 의미하기 때문에서 이다(2165항). 고로 이 본문이 진리에 애착함을 의미함이 분명해진다.

양떼를 마주 보게; 그리고 양떼들이 물을 마시러 왔을 때 그것들은 흥분했다. 이는 그들이 결합되도록 애착조차도 열정을 내기까지 조차 함을 의미한다. 이는 “마시러 옴에서 흥분을 함”의 의미가 애착의 열정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흥분을 함”이 열정을 의미하는 것은 분명하다; 그리고 “마시러 옴”이 진리에 애착함인 것은 앞에서 살폈다. “양떼를 마주 보게”가 그것들(진리와 선)에 결합이 있어지도록 이다고 말하는 이유는 쳐다봄이 애착을 자극함(흥분시킴)을 포함하기 때문에서 이다. 이 방식에서 영적인 것들도 결합한다. 더욱이 진리와 선을 이식함 모두, 또한 결합함 모두는 애착을 수단으로 작업되어진다. 습득된 진리들과 선들, 인간이 감명받지 못한, 더욱이 인간이 아직 애착하지 않고 있으면, 그것들이 기억 안으로 들어오기는 하지만, 벽에 살짝 붙은 듯 있어 살짝 부는 바람에도 어디론가 날려지고 마는 깃털 같다.
기억 안으로 들어가는 것들의 경우는 이렇다: 애착 없이 들어가는 경우는 기억의 그늘에 빠져 든다; 그러나 애착과 더불어 들어가는 경우는 빛에 온다. 빛에 있을 경우, 제아무리 사소한 주제라 여겨지는 것이라 해도 명료하고 생생하게 보여지고, 나타나는 것이 중요하다 여겨진 주제와 동등하다. 그러나 자기 주변이 그늘인 이들의 경우는 이렇지 않다. 이것이 사랑의 애착의 결과이다. 이로부터도 진리가 이식됨의 모두, 그로부터 선과의 결합 모두는 애착을 수단으로 결과된다는 것을 알게 한다; 그리고 애착이 더 클수록, 더 강한 결합이 있다. 여기서 “애착의 열정(ardor)”은 가장 깊은 애착이다.
그러나 진리들이 선 안에 심어지고, 선과 결합하려면, 진리와 선에 애착함을 수단으로 해야 한다, 이 애착들은 그것들의 원천들로부터 일 때만, 즉 이웃을 향한 선행과 주님을 사랑함으로부터서만 잘 진행된다. 그러나 악들과 거짓들은 이와 반대여서 악과 거짓에 애착함을 수단으로 심어지고 결합된다, 이것들은 그것들의 원천인 자기를 사랑함과 세상을 사랑함으로부터서만 잘 진행한다. 두 경우가 이렇고, 내적 의미에서 취급되는 여기서의 주제가 자연적 인간 안에서의 선과 진리의 결합이므로, 여기서와 뒤이어지는 본문에서 양떼들이 마시러 올 때 그것들이 흥분한다는 언급을 하여 위와 같은 경우가 의미되어지게 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양떼들은 막대들에서 흥분을 했다. 이는 그분 자신의 힘으로부터의 결과를 의미한다. 이는 “흥분함, growing warm”의 의미가 애착으로부터의 결과이다로부터; 그리고 “막대들”의 의미가 그분 자신의 힘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리고 양떼들은 부분적으로 색깔 있고, 얼룩지고, 그리고 반점 있는 것들을 생산했다. 이는 그것에 의해서 자연적 선 자체는 “라반”으로 의미된 중간에 위치하는 선으로부터 그것과 비슷한 것들을 가졌음을 의미한다. 이는 생산함(산출함, 낳음)이 인정함과 결합함이다로부터 (3911, 3915항); “부분적으로 색깔이 있다”가 악과 섞인 진리들이다로부터; “얼룩지다”의 의미가 악과 섞인 선들이다로부터; 그리고 “반점이 있다”가 거짓들이 섞인 진리들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런 것들이 여기서 의미된 것들, 즉 “라반”에 의해 의미된 선으로부터 오는 것이 마치 원금을 저축해 두었는데 이자가 발생하여 원금이 불어나듯, 야곱에 의해 표현된 자연적 진리의 선의 불어남이 발생한 것이다.

그리고 야곱은 어린 양들을 분리했다. 이는 순진에 관하여를 의미한다. 이는 “어린 양들”이 순진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여기서의 의미를 “순진에 관하여”라고 말했는데, 그 이유는 이어지는 본문에서 취급되는 주제가 자연 평면의 선과 진리를 배열하는 것이고, 이 배열함이 순진을 받아들이고 적용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양떼의 얼굴들을 부분적으로 색깔 있는 것들을 향하도록 했다. 이는 악과 거짓들과 더불어 흩어져 있는 진리들 쪽으로를 의미한다. 이는 “부분적으로 색깔이 있다”의 의미가 흩어져 악들과 섞인 진리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리고 모든 검은 것. 이는 그런 종류의 상태, 즉 “어린 양들에 있는 검은 것”에 의해 의미된 상태를 의미한다.

라반의 양떼 안에서. 이는 “라반”으로 의미된 선 안에서를 의미한다. 이는 “양떼”의 의미로부터, 그리고 라반의 표현이 선이다로부터 꼼꼼히 말하면 중간의(중매하는) 선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 선을 수단으로 자연 평면은 선들과 진리들을 가진다.

그리고 그는 스스로 자신만을 위한 가축떼를 놓았다. 이는 그분 자신의 힘에 의해 선들과 진리들을 분리하심을 의미한다. 이는 “(가축) 떼들, droves”, 또는 “양떼, flock”의 의미가 선들과 진리들이다로부터; 그리고 “스스로 자신만을 위해 놓다”의 의미가 그분 자신의 힘으로 획득해오신 것들을 분리하는 것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여기서의 최고 의미에서 취급되는 주제는 주님이시고, 어떻게 그분이 그분의 자연 평면을 신성으로 만드셨는지, 그리고 이것이 그분 자신의 힘으로부터, 그리고 여전히 질서에 따른 수단들에 의해서 이다. 그분이 자신 안에서 신성으로 만드신 선들과 진리들이 여기서 “가축떼들, droves”이고, 이것을 그분은 스스로, 자신만을 위해 놓으셨다.

그리고 그것들이 라반의 양떼와 섞이지 않게 했다. 이는 “라반”으로 의미된 선으로부터 절대적으로 분리됨을 의미한다. 이는 지금까지 말해왔던 것들로부터 분명해지는 바, 설명은 생략한다. 간단히 더 설명하면, 신성한 선들과 진리들은 인간인 것으로부터의 것은 어떤 것이든지 절대적으로 모두 분리되어야 한다. 그 이유는 신성으로부터의 것은 인간의 것 넘머이고 무한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단어들의 내적 의미들에 관하여 털어놓은 사항들은 너무나 내면적이고 너무나 신비해서 이해력이 받아들여 그 안에 진열해두기에는 무리일지 모른다. 그 이유가 취급된 주제가 최고 의미에서는 주님, 어떻게 주님이 그분의 인간 평면을 신성으로 만드셨는지 이기 때문; 그리고 표현적 의미에서, 그분이 인간을 거듭나게 하실 때, 어떻게 인간의 자연 평면을 만드시는가에 관해서 이기 때문이다. 이 사항들은 내적 의미에서 충분히 표출되었다.
최고 의미에서 여기에 포함된 것들은 주님에 관한 것, 즉 어떻게 그분 자신의 힘으로 그분은 자신 안에 있는 자연 평면을 신성으로 만드셨는가 인데, 이 사항은 천사의 이해력도 다 이해하지 못하는 수준, 즉 그들의 이해력을 초월해 있다. 이 사항의 얼마 만큼은 인간의 거듭남을 되새겨보면 알는지 모른다, 그 이유는 인간의 거듭남은 주님의 인간이 신성이 되심(Lord’s Glorification)의 형상(image)이기 때문이다. 이 거듭남으로부터 인간은 얼마 만큼이라도 어림할 수 있을지 모른다 (어림할 수 있다는 것을 놓고 누구나 가능성이 없다고 잘라 말할 수는 없겠지만, 아마 거듭나져온 이들의 경우에만 해당될 것이다). 어림하는 것도 육체 안에 있는 이상 대단히 불명료한 수준이다. 그 이유가 인간의 육체적이고 세상적인 것들은 당사자의 마음을 깜깜한 구석은 아니더라도 그늘진 쪽으로 몰아 처박아 아주 낮은 마음의 수준에 감금하기 때문이다. 더구나 거듭나져오지 않고 있는 이들은 지각들이 없기 때문에, 그나마 지식들마저 없으면 약간의 납득도 불가능하다. 이들은 선행에 애착함이 수단이 되어 거듭남이 결과한다는 것을 아는 것조차도 못한다; 그러므로 그들은 양심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한다; 게다가 내적 인간이 외적 인간과 상응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그들의 상상 속에 존재해보기도 힘들다. 이들도 본문의 단어들을 모르는 것은 아니고, 문맹자가 아닌 이상 대다수의 사람들이 이 단어들을 읽을 수 있다. 그러나 이들은 단어로부터의 어떤 것에 무지해 있다. 이 단어가 어떤 것을 의미하기에 여기에 이런 말씀이 나열되는지를 생각해보는 것조차 결핍된 현실을 보기만 해도, 이 본문들에 신비함이 내적 의미에서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 반사적으로 표명된다. 다시 말해 이 본문 같은 경우는 아마 어둠 속에서 무엇을 보라는 것, 귀머거리에게 잘 알아들으라고 큰소리로 외쳐대는 것일지 모른다. 더욱이 이들 안에 당당하게 군림해 그를 통치하는 자기를 사랑함과 세상을 사랑함으로부터의 애착들이 위 신비함을 알게 허용하지 않고, 아예 보지도 듣지도 못하게 한다. 이 두 사랑이 위 신비함을 즉각 거절하고, 설사 깜박하고 삼켰다 해도 즉시 토해낼 것이다. 그러나 선행에 애착하는 이들의 경우는 완전히 다르다. 이들은 알게 된 이런 사항들에 가슴이 벅차다. 그 이유가 그들과 함께 한 천사들이 인간 당사자가 이 신비함에 관한 지식들 안에만 있어도 행복함 안에 있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이때 당시 천사들은 주님을 취급하는 사항들임을 알고 있기 때문, 또한 그 사항 안에 천사들이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이웃과 그의 거듭남을 취급하는 내용들 안에 있기 때문이다. 이 본문의 신비함을 읽는 동안, 천사들로부터(엄밀히 말해 주님으로부터 천사들을 통하여) 있는 기쁨과 복됨은 선행에 애착하는 이들 안에 흘러든다; 그리고 한걸음 더 나아가 이 본문 안에 신비함으로부터의 거룩함이 있다고 믿을 때 더 한층의 기쁨과 복됨이 있다, 이에 더하여 이 본문의 내적 의미에 포함된 사항들의 얼마라도 납득할 때, 더 한층 기쁨과 복됨이 있다.
여기서 취급된 주제는 주님이 내적 인간의 선 안으로 유입하심 이다, 그리고 실지로 선을 통하여 진리 안으로도 유입하신다; 그 다음 유입됨은 외적, 또는 자연적 인간 안으로 있다, 그래서 (자연 평면의) 선과 진리 안으로 유입이 거행된다; 또한 (자연 평면에서) 진리를 받아들임이 있고, 이 진리는 거기(자연 평면)에 있는 선과 결합함이 거행된다; 그래서 수단이 되어 섬기는 선이 여기서 “라반”과 그의 “양떼”에 의해 의미되고 있다. 말씀의 내적 의미에 있고, 말씀의 내적 의미가 자기들의 실지의 말씀이 되는 천사들은 이 주제들이 인간의 납득력에 거의 당도하지 않지만, 당도한다 해도 금새 자기의 희미함에 꾸겨넣어지지만, 그들은 무수히 많은 것들을 보고 지각한다. 인간의 이런 수준은 이 주제에 관해 위와 같은 극히 일반적인 수준 외에 더 이상 뾰족하게는 설명할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41, 42절. 앞장 서 온 무리의 양떼로부터의 모두 각각이 흥분할 경우, 야곱은 도랑에서 먼저 함께 온 양떼의 눈 앞에 막대들을 두어 막대들에서 흥분하게 하였다. 42 그리고 뒤따라 온 양떼들에게는 그것들을 두지 않았다. 나중에 온 떼들은 라반의 것이고, 처음에 온 떼는 야곱의 것이었다. “앞장 서 함께 온 무리의 양떼로부터의 모두 각각이 흥분하는 경우”란 자발적으로 있는 것들을 의미한다. “야곱은 도랑에서 양떼의 눈 앞에 막대들을 놓아, 막대들에서 흥분하도록 했다”란 그분 자신의 권능에 의해 불러 일으켜지고 결합하는 것들을 의미한다. “그리고 뒤따라 온 것들에게는 그것들을 두지 않았다”란 강제적으로 있는 것들을 의미한다. “나중에 온 것들은 라반의 것이었다”란 자신의 애착과 자신의 품질에 일치하지 않는 것들은 뒤에 남겨짐을 의미한다. “그리고 먼저 온 것들은 야곱의 것이었다”란 자발적인 것들, 또는 자유로운 상태에서 있어진 것들은 결합되어졌음을 의미한다.

앞장 서 함께 온 것들의 양떼로부터의 모두 각각이 흥분하는 경우. 이는 자발적으로 있는 것들을 의미한다. 이는 “흥분함”의 의미가 애착의 열정과 그것의 결과이다로부터; “양떼”의 의미가 진리와 선이다로부터; “앞장 서 함께 옴”의 의미가 자발적인 것들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앞장 서 함께 온 것”이 자발적인 것들이다는 것은 이 구절의 내적 의미의 연결로부터, 그리고 애착으로부터 있는 것은 무엇이든 자발적이다로부터, 특히 “흥분함”에 의해 의미된 것인, 애착의 열정으로부터 있는 것은 더욱 자발적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래서 더욱 자발적인 것이 여기서 “흥분한다”는 말을 두번 반복하여 그것을 강조하고 있다; 또한 원어에서 이 단어로부터 파생된 의미가 최대한도로 사랑함이다로부터도 짐작된다. 더구나 여기서 자연 평면의 진리와 선의 결합이 취급되고, 이 결합은 자발적이지 않으면 결과되지 않는다는 것, 즉 자유한 가운데서만 결합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것은 “앞장 서 함께 온 무리의 양떼로부터의 모두 각각이 흥분함”, 또는 “앞장 서 함께 온 양떼의 무리의 모두 각각이 흥분함”이 자발적으로 있는 선들과 진리들, 또는 자유함에 있는 선들과 진리들, 같은 말로 최대한도의 애착으로부터 있는 선들과 진리들을 의미함을 보여주고 있다.

야곱은 도랑에서 양떼의 눈 앞에 막대들을 놓아, 막대들에서 흥분하도록 했다. 이는 그분 자신의 권능에 의해 불러 일으켜지고 결합하는 것들을 의미한다. 이는 “막대”의 의미가 힘이다로부터; 그리고 이것이 주님을 서술할 경우, 그분 자신의 힘이다로부터; 그리고 양떼가 흥분하도록 도랑에서 그것들의 눈 앞에 놓다“의 의미는 그것들이 결합하라고 불러 일으킴이다로부터 알게 되는데, 이는 앞에서 이미 살폈다.

그리고 뒤따라 함께 온 양떼들에게는 그것들을 두지 않았다. 이는 강제적으로 있는 것들을 의미한다. 이는 “뒤따라 함께 온 양떼, 또는 나중에 함께 온 양떼”의 의미로부터 알게 된다. “앞장 서 함께 온 양떼, 또는 처음에 함께 온 양떼”는 자발적인 것, 또는 자유한 것임은 이미 살폈다. “나중에 함께 온 양떼”는 강요당한 것, 또는 자유하지 않은 것을 의미한다. 이는 내적 의미에서 있는 연결로부터 분명해진다; 뿐만 아니라 “흥분함”이 이 대목에서는 언급되지 않는다는 것, 즉 거기에는 애착의 열정이 없다는 것으로부터도 알게 된다. 애착으로부터 있지 않은 것은 무엇이든 그것은 자발적인 것, 자유한 것이 아니다, 그 이유는 자발적, 또는 자유로이 있는 모든 것은 애착 또는 사랑으로부터 이기 때문이다. 이 단어의 원어에서 파생된 단어 중에는 표현에 불충분함을 뜻하는 단어도 있다; 그 이유가 애착의 열정이 불충분해감이 더할수록 자유함은 감소되기 때문이다; 이때 행동된 것은 자유로이 했다가 아니고 결국은 강제로 했다가 되기 때문이다.
진리와 선의 모든 결합은 자유함에서, 또는 자발적인 상태로부터 결과된다는 것, 결과적으로 모든 개혁됨과 거듭남이 그렇다는 것은 이미 인용한 구절에서 살폈기도 하다; 그리고 이 반대의 경우인 자유가 결석한 상태에서는 결합이 없다, 거듭남도 결과될 수 없다는 것도 살핀 바 있다. 주님의 섭리, 인간의 구원, 그리고 많은 이들이 지옥에 떨어짐을 추론하는 동안에서, 인간의 자유한 상태에 있지 않으면 진리와 선의 결합도 없고, 진리와 선을 자기 것이 되게 함도 없고, 결국 거듭남도 없다는 것을 알아채지 못하는 이들은 자신을 그늘들에 내던지고, 결과적으로 오류의 무덤 안에 묻힌다. 그 이유는 그가 상상하는 것이, 만일 주님이 마음만 작정하시면, 모든 이는 지옥 갈 일이 없다고, 그분이 기적이나, 죽은 자를 살리시거나 직접 계시해줌, 또는 인간을 악과 거짓으로 천사들을 시켜 방어해줌으로, 또는 강력한 강제 수단으로 인간을 선쪽으로 몰아세우심으로 인간이 회개를 수행하게 하실 수 있고, 이런 저런 인간이 모르는 기발난 수단을 동원하실 수 있다고 상상하기 때문이다.
이런 자가 한가지 깜박한 대목은 위 모두가 강제적이어서 누구도 위와 같은 수단을 가지고 개혁이 가능해질 수 없다는 것에 대해서 이다. 어떤 강제성에 속하든 강제성은 인간 당사자에게 어떤 애착도 나누어주지(immpart) 못한다. 또는 만일 당사자에게 어떤 애착을 강제로 나누어주려 들면, 이것은 악에 애착함과 동맹을 맺게 된다. 그 이유가 (처음에) 거룩한 어떤 것이 불어넣어진다, 실지로 거룩한 어떤 것이 불어 넣어진다; 그러나 인간의 상태가 바뀔 때, 인간이 이전의 애착들로 되돌아오면, 즉 악들과 거짓들의 상태로 되돌아 오면, 그때 거룩한 것들은 그 자체를 악들과 거짓들과 결합한다, 하여 모독된다, 급기야 모든 지옥들 중에서도 가장 비참한 지옥쪽으로 자신을 이끌고 만다. 이런 이유로 공개적인 기적들은 오늘날 수행되지 않는다, 그러나 기적이 수행됨이 없는 것은 아니고 단지 공개적이지 않다는 것, 즉 인간의 눈에 띄는 식의 기적은 없다는 말이다; 즉 오늘날의 기적은 인간에게 거룩함을 입힌 듯 하여 당사자로 분발하게 하지 않는다는 것, 인간의 자유를 거두어가는 식에서 수행되지 않는다는 것; 그러므로 죽은 자가 다시 일어나지 않는다, 그리고 인간이 악을 행하려 들기 직전 어떤 계시로, 또는 천사를 시켜 그를 제지하여 악에서 손을 떼게 하거나, 공개적인 강제성을 동원해 선쪽으로 당사자를 이동하게 하는 식의 기적은 없다.
인간의 자유는 주님이 일하시는 것 안에 있다, 그리고 이를 수단으로 그분은 그를 구부리신다(권고하신다); 그 이유가 모든 자유가 인간의 사랑 또는 애착 속에, 애착으로부터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의지 속에, 의지로부터 있다. 만일 인간이 자유함 안에서 선과 진리를 받지 않으면, 선과 진리는 그의 것이 됨, 자기 것으로 삼아지지 않는다. 설사 누군가가 그렇게 하도록 강제당할 때, 그것들은 그의 것이 아니고, 단지 당사자 속에 있을 뿐이다. 이렇게 선과 진리를 지니는 인간으로부터 진행되는 선과 진리는 자신 스스로 행하여지는 것이 아니다. 인간이 시험들이나 영적 전투들 안에 있을 경우, 간혹 선쪽으로 강요당하는 듯 나타날 때가 있는데, 이는 단지 여느 때보다 더 강한 자유를 가지는 것일 뿐이다. 또는 인간이 선과 진리쪽으로 자신을 강요할 때도 마치 자신이 자신을 강요하는 듯 나타난다; 그러나 이것은 자기의 자아를 밀어붙이게 하는 수준이다. 누군가가 자신을 강요할 때, 그는 내부에 있는 자유로부터 그렇게 하는 것이다. 이럴진대, 주님의 섭리에 관하여, 인간의 구원에 관하여, 그리고 많은 이를 지옥에 빠트림에 관하여서에 이르기까지를 추론하는 이들이 자신들을 어떤 그늘 안으로, 어떤 오류 안으로 침몰시키는지 자명해진다, 더욱이 그들은 주님께서 작업하시는 수단이 자유이다는 것, 결코 강제 충동으로가 아니다는 것을 모르고 있다; 거룩함에 속하는 것들을 두고 강제성을 동원하는 것 만큼 위험한 것은 없다. 거룩한 것은 반드시 자유함 안에서 받아져야 한다.

나중에 함께 온 것들은 라반의 것이었다는 자신의 애착과 자신의 품질에 일치하지 않는 것들은 뒤에 남겨짐을 의미한다. 그리고 먼저 함께 온 것들은 야곱의 것이었다는 자발적인 것들, 또는 자유로운 상태에서 있어진 것들은 결합되어졌음을 의미한다. 이는 이미 살폈다. 강제적인 것들에 의해 여기서는 결합되지 않았던 것들, 그리고 결합될 수 없었던 것들이 의미되었다; 그리고 자발적인 것들에 의해 결합되었던 것들, 그리고 결합될 수 있는 것들이 의미되었다. 후자의 경우, 자발적인 것들은 그것들의 애착들과 그것의 품질에 따라서 있다는 것도 뜻하고 있다. “라반”과 그의 “양떼”에 의해 의미된 선이 쓸모 있음에 충당된 후, 그 다음 분리된다고 이미 상술했었다. 이 분리됨은 다음 장에서 다루어진다.

43절. 그리고 이 사람은 자신을 극도로 크게 퍼트렸다, 그리고 그는 많은 양떼들, 그리고 여종들, 그리고 남종들, 그리고 낙타들, 그리고 나귀들을 소유했다. “그리고 이 사람은 자신을 극도로 크게 퍼트렸다”란 증가함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는 많은 양떼를 소유했다”란 그 결과인 내면의 선들과 진리들을 의미한다. “그리고 여종들과 남종들”이란 중간의 선들과 진리들을 의미한다. “그리고 낙타들, 그리고 나귀들”이란 외면과 외적 측면에 있는 선으로부터의 진리들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 사람은 자신을 극도로 크게 퍼트렸다. 이는 증가함을 의미한다. (즉 선과 진리가 증가함이다) “자신을 퍼트림”은 증가되어지는 것; “극도로”는 측량하기 힘들 정도로를 의미함이 분명하다.

그리고 그는 많은 양떼들을 소유했다. 이는 그 결과인 내면의 선들과 진리들을 의미한다. 이는 “양떼들”의 의미가 선들과 진리들이다로부터(343항); 그리고 이것들은 내면적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리고 여종들과 남종들. 이는 중간의 선들과 진리들(즉 자연적 선들과 진리들 자체)을 의미한다. 이는 “여종들”은 자연 평면의 애착들, 그러므로 자연 평면의 선들이다로부터; 그리고 “남종들”은 자연적 인간의 진리들인 기억 속의 지식들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리고 낙타들, 그리고 나귀들. 이는 외면과 외적 측면에 있는 선으로부터의 진리들을 의미한다. 이는 “낙타들”이 일반적 기억 속의 지식들이다로부터 (일반적 기억 속의 지식들은 더 낮고 더 외면에 있는 선으로부터의 진리들이다.) 그리고 “나귀들”의 의미가 (낙타로 의미된 것보다) 더 낮고 외적 측면에 있는 자연적 선으로부터의 진리들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내면의 선들과 진리들이 무엇인지; 또한 중간의 선들과 진리들이 무엇인지; 마찬가지로 외면과 외적인 선들과 진리들이 무엇인지는 이미 말해졌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인간 안에는 세 가지 것들, 즉 육체적, 자연적, 합리적인 것들이 있다. 육체적인 것은 가장 바깥쪽에, 자연적인 것은 중간에, 합리적인 것은 내면에 있다. 이 셋 중에서 어느 하나가 인간 안에서 다른 것 위에 군림할 때, 그는 육체적 인간이든, 자연적 인간이든, 합리적 인간이든 어떤 종류의 인간이 되어 있다. 인간의 세 부분은 경이로운 방법으로 교통하고(communicate) 있다; 육체적인 것은 자연적인 것과, 그리고 자연적인 것은 합리적인 것과 교통한다. 인간이 태어날 당시, 그 인간은 육체적일 뿐이나, 완전해짐을 향유할 수 있는 수용력을 안쪽에 가지고 있다. 그 후에 그는 자연적 인간이 되어간다, 마지막으로 그는 합리적 인간이 될 수 있다; 이로부터 이쪽이 저쪽과 교통함이 있는 것을 알는지 모른다. 육체적인 것은 감각들을 수단으로 자연적인 것과 교통한다. 그러나 이해력에 속하는 것들을 수단으로, 그리고 의지력에 속하는 것들을 수단으로 구분되고 분리된 방식으로 교통한다. 그 이유가 이 두 자질 (faculties, 이해력과 의지력)들은 인간이 인간이기 위하여서라면, 또는 적어도 인간이 될는지 모르기 위하여서라면 어쨌든 반드시 완전해져야만 하기 때문이다. (오각 중에서) 시각과 청각은 인간의 지성력을 완전하게 하는데 특별히 기여한다; 그리고 나머지 삼각은 의지력에 특별히 집중되고 있다. 이 오각들을 수단으로 인간의 육체적인 것들은 그의 자연적인 것, 즉 그의 중간의 부분과 교통한다. (이는 이미 상술했다). 그 이유가 감각들을 수단으로 (인간 안에) 들어간 것들은 자연 평면을 일종의 그릇(receptacle)으로 하여 자체들을 놓아두기 때문인데, 이 때의 자연 평면은 기억(memory)이다. 자연 평면의 정신적 측면에서 비롯되는 기쁨(delight), 육체적 측면에서 비롯되는 기쁨(쾌락, pleasure), 그리고 바램(욕구, desire)은 의지력에 속하고, 자연적 선들이라 불리운다.
위에 상술한 것들을 수단으로 인간의 자연 평면은 그의 내면 부분인 합리성과 교통한다. 이렇게 교통함으로 자연 평면으로부터 합리성으로 자체를 승강시킨 것들은 합리적 평면을 자신들을 위한 일종의 그릇으로 삼아 자신들을 놓아두는데, 이 때의 그릇은 내면의 기억이라 불리운다. 합리적 평면 안의 복되고 행복한 것들은 의지력에 속한다, 그리고 합리적 선에 속하고, 합리적 선으로부터 있다; 그리고 어떤 것을 내면에서 (정신적으로) 바라봄들(views), 전망함, 또는 (정신적 측면의) 시야들과 지각들은 이해력에 속하고, 이것들에 속하는 것을 합리적 진리들이라 부른다. 위의 셋이 인간을 구성하고, 이 셋들 사이에 교통이 있다. 외적인 감각들은 육체적인 것들이 자연적인 것과 교통하는 수단이다; 그리고 내면의 감각들은 인간의 자연적인 것들이 합리적인 것들과 교통하는 수단이다. 그러므로 외적인 감각들에 참여하는 자연 평면에 있는 것들은 육체에 적당한 바, 선으로부터 외면과 외적인 진리라고 불린다; 그러나 인간의 영에 적당한 내면의 감각들에 참여하는 것들, 그래서 이것이 합리성과 교통하는데, 이것들은 내면의 선들과 진리들이라고 불리운다. 이 둘 사이에 있는 것, 즉 양쪽에 참여하는 것(중매하는 것)은 중간의 선들과 진리들이라 불리운다. 이 셋은 내면들로부터 질서쪽으로 있다, 그리고 이것이 본문의 내적 의미에서 “양떼들, 그리고 여종들, 그리고 남종들, 그리고 낙타들, 그리고 나귀들”에 의해 의미되어 있다.

창세기 제 29장

창세기 제 29 장

1절. 야곱은 그의 발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동쪽의 아들들의 토지에로 갔다. “그리고 야곱은 그의 발을 들어 올렸다”란 자연적 수준의 것이 승강함을 의미한다. “그리고 동쪽의 아들들의 토지에로 갔다”란 사랑의 진리들쪽으로를 의미한다.

그리고 야곱은 그의 발을 들어 올렸다. 이는 자연적 수준의 것이 승강함을 의미한다. 이는 “들어올림”의 의미가 승강함이다로부터; “발”의 의미가 자연적인 것이다로부터 알게 되는데, 아래에서 더 살핀다. 이 구절의 승강은 이 장이 취급하는 승강, 즉 외적인 진리로부터 내적인 선으로의 승강이다. 최고 의미에서는 주님께서 그분의 자연 평면을 신성으로까지 만드시되 어떻게 질서에 따라 등차적인 것을 수단으로 내적인 선으로 만드셨는지 이다; 그리고 표현적 의미에서 주님께서 인간을 비슷한 질서에 따라 거듭나게 하실 때 어떻게 인간의 새로운 자연 평면을 만드시는 가에 대해서이다. 성년의 나이에 거듭나지고 있는 인간은 이 장과 이 장 뒤를 잇는 장들의 내적 의미에서 묘사된 질서에 따라 거듭남의 발전을 이룩해간다는 것을 알고 있는 자는 매우 적은데, 그 이유는 거듭남을 이 장들에서 곰곰이 반영해보는 자가 적기 때문, 또한 오늘날 거듭나질 수 있는 자가 적은 것도 한가지 이유이기도 하다. 그 이유는 이들이 교회의 마지막 때에, 즉 더 이상 어떤 선행이 없는 때, 결과적으로 더 이상 어떤 신앙도 없는 때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바, 신앙이 무엇인지조차 알려져 있지 않다, 물론 그들은 인간이 구원되는 모든 것은 신앙을 수단으로 한다고 입술로 말하고 있다 해도 신앙이 무엇인지 실상 알고 있는 것이 없다는 말이다. 신앙보다 더욱 덜 알려진 것은 선행이 무엇인지 이다; 이 두 가지들은 단어들로만 알려졌을 뿐, 이 두 단어들의 본질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이렇기 때문에 질서에 따라 인간이 새로이 만들어지는 것을 곰곰이 되새겨 보는 자가 매우 적고, 또한 거듭나는 자도 매우 적다고 말한 것이다.
자연 평면이 여기서 취급되기 때문에, 그리고 이것이 야곱에 의해 표현되기 때문에, 그가 “일어나서(arose)” 동쪽의 아들들의 토지쪽으로 갔다 라고 말해지지 않고, 그는 “자기 발을 들어 올려 (lift up)” 동쪽의 아들들의 토지쪽으로 갔다 라고 말해진다. 일어나다와 들어올리다 라는 두 표현들 모두 승강 (elavation)을 의미한다. 그러나 여기서 “자기 발을 들어올렸다”라고 말해진 이유는 이것이 자연 평면의 거듭남을 뽀족히 말하려는 이유에서 이다; 그 이유가 “발”이 자연적 수준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발”이 자연 평면, 또는 자연적인 것들을 의미하는 것은 앞 장의 끝에서 말해지는 웅대한 사람과의 상응으로부터 오고 있다. 웅대한 사람 안에서 발의 영역에 속하는 이들은 자연적 수준의 빛 안에 있고 영적 수준의 빛 안에는 거의 있지 않다; 결과적으로 발 아래 부분들, 즉 발바닥, 발꿈치는 가장 낮은 자연 평면의 것들을 의미한다; 그리고 가끔씩 말씀에서 언급되는 신(발)은 최말단인 육체적 자연 평면을 의미한다.

그리고 동쪽의 아들들의 토지에로 갔다. 이는 사랑의 진리들쪽으로를 의미한다. 즉 그쪽으로 승강함이다. 이는 “동쪽의 아들들의 토지”의 의미로부터 분명해진다. 아람, 또는 시리아가 “동쪽의 아들들의 토지”로 불리우는 것이 분명한 이유는 야곱이 자신을 그리로 향하게 했기 때문이다. 일반적 측면에서 “시리아”에 의해 선에 관한 지식들이 의미되는 것은 이미 살폈다; 그러나 특별하게 “아람-나하라임”(즉 “강들의 시리아”)에 의해서는 진리에 관한 지식들이 의미되어진다. 어쨌든 이 구절의 경우, 그가 아람, 또는 시리아로 갔다 라고 말해지지 않고 “동쪽의 아들들의 토지로 갔다”리고 말해지는데, 그 이유는 이 장 전체를 망라해서 취급되는 것이 사랑으로부터의 진리들로 상승함(ascent)이기 때문에서이다. 이 진리들은 사랑으로부터의 진리들인데, 이것은 여타 다른 대목들에서 천적인 진리들로 용어화 하여 사용되고 있다. 그 이유는 이 진리들은 이웃을 향한 선행과 주님을 사랑함에 관련되는 지식들이기 때문이다; 주님을 취급하는 최고 의미에서, 이 진리들은 신성한 사랑으로부터의 진리들이다.
이 진리들, 즉 주님을 사랑함과 이웃을 향한 선행에 관련되는 진리들은 인간이 거듭나지는 것이 가능해지기 이전에 반드시 배워져 있어야 한다; 또한 인정되고 믿어져 있어야 한다; 그리고 이 진리들이 인정되고, 믿어지고, 삶에 접목된 만큼에서 인간은 거듭나진다. 그리고 자기들의 자연 평면에 심은 만큼에서 자기의 지면을 확보하고 있는 셈이다. 이 진리들은 처음에는 부모나 선생들에 의한 교육을 통하여 자연 평면 안에 심어진다; 그 다음 주님의 말씀으로부터 이다; 그 후에 본인 스스로 이 진리들을 곰곰이 반추해봄으로 심어진다; 심어진다라고 말은 했지만 엄밀히 말하면 이 진리들은 당사자의 자연 평면의 기억 속의 지식들 안에 저장되었다고, 여느 지식들과 별반 차이가 없이 막연히 저장되어 있을 뿐인 바, 이 진리들이 당사자의 삶과 일치하지 않으면 이 진리들은 실상 인정되는 것도, 믿어지는 것도 아니다. 그 이유가 삶에 일치한다는 것은 당사자가 이 진리에 대한 애착을 갖는다는 말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가 생활로부터 애착을 가지는 만큼에서 이 진리들은 자기의 지면으로서의 자연 평면에 심어진다. 물론 이렇게 심어지지 않았다 해서 진리들이 당사자와 더불어 있지 않은 것은 아니고, 단지 그의 기억 속에 많은 지식 중의 하나로서, 이 구절 성경의 말씀 역시 야곱의 역사 이야기 수준으로 있을 뿐이고, 기껏 사용해보아야 자기 명예와 소득을 위해 사용되는 지식일 따름이어서, 자기 거듭남과는 무관한 상태이다.
“동쪽의 아들들의 토지”에 의해 사랑으로부터의 진리들이 의미된다는 것, 즉 선으로 향하는 진리에 관한 지식들이다는 것은 “아들들”의 의미가 진리들이다로부터 알런지 모른다; 그리고 “동쪽”의 의미가 사랑이다로부터도 알게 된다. 그들의 “토지”는 그들이 있는 지면이다. “동쪽의 아들들”이 진리와 선에 관한 지식들에서 있는 이들이다는 것, 결과적으로 사랑으로부터의 진리들 안에 있는 이들이다는 것은 말씀의 다른 구절로부터 더 알게 된다. 열왕기상서에서:
솔로몬의 지혜는 모든 동쪽의 아들들의 지혜보다, 그리고 모든 이집트인들의 지혜보다 훨 씬 더 불어났다 (왕상. 4:30);
위에서 “동쪽의 아들들의 지혜”에 의해 진리와 선에 관한 내면의 지식들이, 고로 그것들 안에 이들이 의미된다; 그러나 “이집트인들의 지혜”는 같은 지식들이나 보다 수준이 낮은 지식들인 기억 속의 지식들이다.
예레미야서에서:
고로 여호와께서 말하신다, 너는 일어나서, 게달을 향하여 올라가서, 동쪽의 아들들을 황폐 하게 하라. 그들의 천막들과 그들의 양떼들을 그들은 가져갈 것이다; 그들은 그들의 커튼들 을 가져갈 것이다, 그리고 모든 그들의 그릇들을, 그리고 그들의 낙타들을 가져갈 것이다 (예. 49:28, 29).
위 구절에서 “동쪽의 아들들”에 의해 선과 진리의 지식들 안에 있는 이들이 뜻해진다는 것은 그들이 그들의 천막들과 양떼들, 그들의 커튼들과 모든 그들의 그릇들, 그리고 낙타들도 가져간다는 사실로부터 분명해진다; 그 이유가 “천막들”에 의해 선의 거룩한 것들이 의미되기 때문; “양떼들”에 의해 선행의 선들이; “커튼들”에 의해 거룩한 진리들이; “그릇들”에 의해 신앙의 진리들과 기억 속의 지식들이; “낙타들”에 의해 일반적 측면에서의 기억 속의 지식들이 의미된다. 고로 “동쪽의 아들들”에 의해 이런 것들 안에 있는 이들, 즉 선과 진리의 지식들 안에 있는 이들이 의미된다.
예수의 출생에서 그분에게 온 동쪽으로부터의 슬기로운 자가 “동쪽의 아들들”이라 불리운 것은 그들이 주님이 탄생하시기로 되어 있음을 알고 있었다는 것, 그리고 그들은 동쪽에서 그들에게 나타난 별을 수단으로 그분이 강림하셨음을 알았다는 사실로부터도 분명해진다. 마태복음서에서:
예수께서 유대의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셨을 때, 보라, 슬기로운 자들이 예루살렘으로 와서, 말하기를, 유태인들의 왕으로 태어나신 그분이 어디 계십니까? 그 이유는 우리가 그분의 별을 동쪽에서 보았었기 때문이고 (그래서) 그분을 경배하러 왔습니다 (마. 2:1, 2).
고대 시대로부터 이와 같은 예언적 지식은 시리아 속에 있는 동쪽의 아들들 사이에 존재했었다는 것은 주님의 강림에 관한 발람의 예언에서 분명해진다. 모세의 책에서:
나는 그분을 보았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나는 그분을 바라보고 있다, 그러나 가까이는 아니다; 야곱으로부터 한 별이 일어날 것이다, 그리고 왕권이 이스라엘로부터 일어날 것이 다 (민. 24:17) .
발람은 동쪽의 아들들의 토지, 즉 시리아 출신이었음은 이 말씀으로부터 분명해진다:
발람은 분명한 어조로 발음하여 말했다, 발락이 나를 시리아로부터, 동쪽의 산들로부터 데 려왔다 (민. 23:7).
예수님의 탄생에서 그분에게 왔던 이 현자들은 마기(Magi, 마술사)라 불리운다, 그러나 그때 당시 현자들도 그렇게 불리웠었다는 것은 많은 구절로부터 분명해진다; 즉 창. 41:8; 출. 7:11; 단. 2:27; 4:6, 7; 왕상. 4:30, 이 외에도 예언서들에도 많다.
[6] 반대적 의미에서 “동쪽의 아들들”은 악과 거짓에 관한 지식들을, 고로 그런 지식들 안에 있는 이들을 의미한다, 이사야서에서:
에브라임의 시기함은 떠날 것이다, 그리고 유다의 적들이 멸절될 것이다; 그들은 바다를 향 하여 블레셋의 어깨 위에 날아 올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함께 동방의 아들들을 약탈할 것 이다 (이. 11:13, 14).
에스겔서에서:
암몬의 아들들을 향하여. 보라 나는 소유함을 위해 동쪽의 아들들에게 너희를 넘겼다, 그리 고 그들은 너희에게 그들의 법령들을 놓을 것이다 (겔. 25:3, 4).
그리고 사사기서에서:
이스라엘이 씨를 뿌렸을 때, 미디안이 올라왔다, 그리고 아말렉, 그리고 동쪽의 아들들; 그 들이 그를 맞서 올라왔다 (사. 6:3).
“미디안”은 생활의 선 안에 있지 않기 때문에 거짓 안에 있는 이들을 표시한다; “아말렉”은 진리들을 공격하는 거짓들 안에 있는 이들을 표시한다; “동쪽의 아들들”은 거짓의 지식들 안에 있는 이들을 표시한다.

2, 3절. 그리고 그는 보았다, 그리고 들판에 샘이 바라보였다, 그리고 거기에 세 무리의 양떼가 우물가에 누워있었다. 그 이유가 이 우물로부터 그들은 가축떼에게 물을 먹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큰 돌이 우물의 아구 위에 있었다. 3 그리고 모든 가축떼가 그리로 다 모여졌다. 그리고 그들은 우물의 아구로부터 돌을 굴려 내었다, 그리고 양떼에게 물을 먹였다, 그리고 그들은 우물의 아구에 그 돌을 다시 굴려 놓았다. “그리고 그는 보았다”란 지각을 의미한다. “그리고 우물이 보였다”란 말씀을 의미한다. “들판에”란 교회들을 위하여를 의미한다. “그리고 세 무리의 양떼가 우물가에 누워 있었다”란 교회들의 거룩한 것들과 교리적인 것들 속의 거룩한 것들을 의미한다. “그 이유가 그 우물로부터 그들은 가축떼에게 물을 먹였기 때문이다”란 기억 속의 지식이 거기로부터 파생되었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큰 돌이 우물의 아구에 있었다”란 말씀이 닫혀 있었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모든 가축떼가 그리로 모두 모였다”란 모든 교회들과 그들의 교리적인 것들이 말씀에서 파생되었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들은 그 돌을 우물의 아구로부터 굴렸다”란 그들이 말씀을 열었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양떼에게 물을 먹였다”란 말씀에서 교리가 왔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들은 그 돌을 우물의 아구에 다시 굴렸다”란 한 동안 말씀이 닫혀 있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는 보았다. 이는 지각을 의미한다. 이는 “보다”가 지각하는 것이다로부터, 이 의미에 관하여는 32절에서 르우벤이 취급될 때 더 살필 것인데, 그는 “보다”로부터 그렇게 불리웠다.

그리고 우물이 바라보였다. 이는 말씀을 의미한다. 이는 “우물(well)”의 의미가 말씀, 또한 말씀으로부터의 교리이다로부터 분명해진다. 여기서 말씀이 “우물”이라 불리우는데, 그 이유는 자연 평면이 취급되기 때문에서, 그리고 글자 자체에만 주목해, 말씀을 글자 의미에만 국한해서 납득하는 수준이 취급되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합리성이 취급될 때는 말씀이 “샘(fountain)”이라 불리운다, 이 합리성을 수단으로 하면 말씀은 내적 의미에 따라서 지각될 수 있다.

들판에. 이는 교회들을 위하여를 의미한다. 이는 “들판(field)”이 선 측면에서의 교회를 의미한다로부터 분명해진다. 말씀에서 교회는 “토지(land),” “지면(ground),” “들판”으로 의미되는데, 차이는 있다. “들판”이 교회를 의미하는 이유는 교회는 들판(밭)같아서 선과 진리의 씨들을 받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교회가 말씀을 가지고 있고, 이로부터 이런 씨들이 오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이 들판에 있는 모든 것이 교회 속에 있는 모든 것, 즉 씨뿌림, 베어들임, 곡식이 서있음, 밀, 보리 그리고 다른 것들 등을 의미한다. 물론 종류별로 의미에서 차이는 있다.

그리고 바라보니 세 무리의 양떼가 우물가에 누워 있었다. 이는 교회들의 거룩한 것들과 교리적인 것들 속의 거룩한 것들을 의미한다. 이는 “3”의 의미가 거룩한 것이다로부터; 그리고 “양떼의 무리”가 교회 속에 있는 것들, 고로 교리적인 것들이다로부터; 특별히 “양떼”는 교회 내에 있는 이들, 그리고 선행으로부터 있는 선들과 신앙으로부터 있는 진리들을 배워 감동된 이들을 의미한다; 여기서 “목자”는 이런 것들을 가르치는 자를 의미한다; 그러나 양떼는 일반적으로 선 안에 있는 이들, 고로 보편적 세계에서 주님의 교회에 속하는 이들을 의미한다. 이런 모든 것들이 교리적인 것을 수단으로 선과 진리 안으로 입문되는 바, “양떼”에 의해 교리적인 것들 역시 의미된다. 그 이유가 내적 의미에서 인간의 품질을 결정하는 것들, 그리고 이런 품질로부터 있는 인간 자신도 같은 표현에 의해 뜻해지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인간이라는 주체는 그가 사람이 되게 한 품질 때문으로부터 이해되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이름들이 실제적인 것들을 의미한다고, 이들에게 실제의 것들이 속해 있음을 반복적으로 서술해왔다, 예를 들면, “두로”와 “시돈”은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들을 의미한다는 것, 또한 이와 같은 지식들 안에 있는 이들을 의미한다는 것; 그리고 “이집트”는 기억 속의 지식들을 의미한다는 것, 그리고 “앗수르”는 추론함을, 그리고 이런 추론함 안에 있는 이들 역시 의미한다는 것, 등등이다. 그러나 천국에서 천사들 사이에 있는 언어는 인물을 생각함 없이 곧바로 실제적인 것들을 수단으로 결과 된다; 고로 보편적인 것들을 수단으로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기 때문에 그들은 자기들의 강연에서 있는 수많은 사항들을 잘 절충되게 한다; 특히 그들은 모든 선과 진리를 자신들이 아닌 주님의 공로로 돌린다. 이 결과로 그들의 언어로부터의 생각들은 어떤 것, 또는 누구에 의해서가 아닌 오로지 주님만에 의해 결정되어진다. 이런 사항들로부터 “양떼”가 교회들을, 또한 교리적인 것들을 의미한다고 말해진 것임을 알 수 있다. 양떼의 무리는 “우물가에 누워있다”고 말해지는데, 그 이유는 교리적인 것들이 말씀으로부터 있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그 우물로부터 그들은 가축떼에게 물을 먹였기 때문이다. 이는 기억 속의 지식이 거기로부터, 즉 말씀으로부터 파생되었음을 의미한다. 이는 “우물”의 의미가 말씀이다로부터; 그리고 “물을 먹임,” 또는 “마실 것을 줌”의 의미가 가르침을 주는 것이다로부터; 그리고 “무리(drove)”의 의미가 교리적인 것들로부터의 기억 속의 지식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로부터 “우물로부터 무리에게 물을 먹임”이 교리적인 것들로부터의 기억 속의 지식들이 말씀으로부터 임이 분명해진다. 이제 야곱에 관해 이어지는 대목들의 최고 의미에서 주님이 취급되는데- 즉 어떻게 주님께서 그분의 자연 평면을 신성으로 만드셨는지, 그리고 이 장에서는 그것이 개시됨을 취급한다; 그리고 내적 표현적 의미에서는 거듭나지는 이들이 취급되어지는데, 주님께서는 어떻게 인간의 자연적 수준을 새로이 만드시는지가 이 장에서 개시된다; 그러므로 여기서 취급된 주제는 말씀, 그리고 말씀으로부터 파생된 교리이다; 그 이유가 개시함과 거듭남은 말씀으로부터의 교리를 수단으로 결과하기 때문이다. 이런 것들이 “우물”과 “우물에서 (가축)무리에게 물을 먹임”에 의해 의미되기에 야곱의 역사적 측면의 이런 장면이 기록으로 남겨져 있는 것이다. 만일 이런 장면에 주님께서 의미를 담지 않으셨다면, 이 장면 같은 것은 실상 역사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하찮은 모습일지 모른다. 하여 이런 장면이 감싸고 있는 것이 선과 진리에 관한 교리와 기억 속의 지식이 말씀으로부터 이다는 것이 더욱 분명해진다.
자연적 인간은 실로 선과 진리가 무엇인지를 알 수 있고 지각도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수준은 자연적, 시민적 (도덕적) 수준에서의 선과 진리일 뿐이다; 더욱이 자연적 인간은 영적 수준의 선과 진리를 알 수 없는데, 그 이유는 이것이 계시로부터, 즉 말씀으로부터 와져야만 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인간은 모든 이에 의해 소유된 각자의 합리성으로부터 이웃을 사랑해야한다는 것, 하느님을 예배해야 한다는 것을 알는지 모른다; 그러나 어떻게 이웃이 사랑되어야 하고, 하느님이 예배되어져야 하는지, 즉 영적인 선과 진리가 무엇인지는 말씀으로부터서만 알려질 수 있다. 즉 선 자체가 이웃이다는 것, 결과적으로 선 안에 있는 이들이 이웃이다는 것, 더 정밀히 말해 그들이 지닌 선이 이웃이다는 것, 하여 이 선에 따라서 이웃은 사랑되어야 한다는 것, 그리고 주님은 선 안에 현존하시는 바, 선을 사랑함에서 주님이 사랑되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마찬가지 방법에서 말씀을 가지지 않은 이들은 모든 선이 주님으로부터 있다는 것, 그리고 주님으로부터의 모든 선은 인간에게 흘러든다는 것, 하여 인간에게 선에 애착을 가지게 해주신다는 것, 그리고 이 애착이 선행이라 불리운다는 것을 알 수 없다; 말씀을 가지지 않은 이들은 우주의 하느님이 누구이신지를, 그리고 그들로부터 감추여져 계신 주님이 그분이신지를 알 수 없다; 이렇게 알 수 없을 때에도 애착의 가장 깊은 측면, 선행의 가장 깊은 측면, 결과적으로 선의 가장 깊은 측면은 주님을 주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말씀을 지니지 않은 이방인들의 경우, 그들은 실로 이 세상 삶에서 이것을 알 도리가 없다; 그러나 그들이 서로의 선행 안에서 살았다면, 그들은 선에 관한 위의 교리를 포함하여 저 세상 삶에서 말씀을 배워 지닐 능력을 가질 수 있다; 거기서 그들은 이런 주제들을 아주 쉽게 받아들여 마음에 품을 수 있다 (2589-2604항).

그리고 큰 돌이 우물의 아구에 있었다. 이는 말씀이 닫혀 있었음을 의미한다.
이는 설명 없이 알 것이다. 말씀이 글자 의미 측면에서만 이해될 때, 그리고 글자 의미에서 있는 모든 것이 교리를 위하여 가져가질 때, 말씀은 닫혀 있다고 말해진다. 더욱이 이런 것이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을 옹호하는 교리로서 인정되어질 때 (그 당사자를 위해) 더 더욱 굳게 닫혀 있는다. 이렇게 말한 이유는 이들을 포함, 사람들이 우물의 아구에 놓인 돌을 굴려내는 경우가 있다는 것, 즉 닫혀 있는 말씀이라 해서 말씀 전체가 100% 닫혀진 것은 아니다는 말이다. 말씀은 글자 의미로 완전히 덮혀있는 것은 아니고 글자 의미와 더불어 내적 의미가 매우 적지만 드러나는 구절도 있어 글자 의미만 주창하는 누구라 해도 내적 의미를 맛볼 수 있는 구절도 특별하게 있기 때문이다. (참고로, 천적, 영적, 자연적인 세 의미를 동시에 보여주는 구절로서는 요나서 끝장 끝절일지 모른다, 역자 주). 이런 구절을 통해 말씀 안에 어떤 내면의 의미가 있다는 것, 또는 교회에서 받아진 교리적인 것들로부터서도 내적 의미가 있을 것 같음이 비추일 경우가 있지만, 이것을 알려하지 않는다는 것, 알고 싶어하는 바램도 없다는 것이 현실이다.
말씀이 닫혀 있음에 의해 뜻해진 것은 유태인들로부터 특별하게 보여질지 모른다; 이들은 글자 의미에 따라서 각각 그리고 모든 구절을 설명한다, 하여 그들은 땅 위 모든 국가들에서 우선적으로 자기들 나라가 선택되었다는 것, 메시아가 가나안의 토지 안으로 자기들을 데려가려고 오신다는 것, 그리고 땅의 모든 사람들과 나라들 위에서 우뚝서게 자기들을 드높혀 주실 것이라고 믿고 있다; 그 이유가 그들은 지상적인 육체적 사랑들에 침수되어 있기 때문인데, 이것이 그들 모두를 말씀의 내면적 측면에서 닫혀 있게 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아직도 어떤 천국 왕국이 있다는 것, 자기들이 사후 산다는 것, 내적 인간이 무엇인지, 영적인 어떤 것이 있는지조차도 모르고 있다; 더욱이 그들은 메시아가 혼들을 구원하시려 오신다는 것은 더 더욱 모른다. 말씀이 그들에게 닫혀져 있다는 것은 비록 그들이 기독인들 사이에 살지라도, 그들은 기독인들의 교리적인 것을 받지 않을 것이다로도 더 분명해진다. 이사야서에서:
이 백성에게 말하라, 너희는 정녕 듣기는 하나 이해하지 못한다; 너희는 확실히 보기는 하 나 지각하지 못한다. 이 백성의 심정을 비대해지게, 그리고 그들의 귀를 무겁게, 그리고 그 들의 눈을 소경으로 만들어라. 그리고 나는 말했다, 주여, 얼마나 오래? 그리고 그분이 말 하셨다, 이 성들이 주민이 없어 황폐해질 때까지, 집에 사람이 없을 때까지, 그리고 지면이 근심으로 황폐해질 때까지이다 (이. 6:9-11; 마. 13:14, 15; 요. 12:40, 41).
인간이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 침수되어 있는 만큼에서, 그리고 이런 사랑들의 탐욕들 안에 침수된 만큼에서, 그만큼 말씀은 그 사람에게 닫혀 있다. 그 이유가 이런 사랑들은 그들의 목적으로 자아를 가지기 때문, 이 목적은 자연적 수준의 발광체에 불이 켜지게 하지만 천국의 빛은 꺼지게 하고, 이 인간은 자기와 세상의 것에 대하여는 빈틈없으나 주님과 그분의 왕국 속의 것들에 대하여는 그렇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 역시 말씀을 읽지만 명예와 재물을 획득할 목적과 더불어서, 또는 나타남을 위하여서, 또는 그것을 사랑으로부터와 습관적으로부터, 또는 경건심으로부터 읽는 것이다, 그렇지만 삶을 수정할 목적으로부터가 아니다. 이런 사람에게 말씀은 다양한 방법들에서 닫혀져 있다; 어떤 이들에서는 그들의 교리가 무엇이었든 그 교리가 내리는 지령 외에는 결코 귀를 열지 않는 방법 같은 것으로도 닫혀져 있게 하신다.
예를 들어 이런 사항들에 귀를 막아 닫혀 있다. 천국을 열고 닫는 능력이 베드로에게 주어지지 않았다는 것, 그러나 베드로의 열쇠들에 의해 의미된 사랑으로부터의 신앙에게 주어졌다는 것,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이 이 사랑에 반대된다는 것, 고로 이 두 사랑들에 있는 이들은 결코 사랑으로부터의 신앙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성인들은 예배되어져서는 안되고 오직 주님만이 예배되어야 한다는 것, 이것을 그들은 받지 않는다. (마리아상, 베드로상, 등등을 세워놓고 그들에 두 손 모아 비는 행위를 우리 역시 자주 목격하는데 이를 말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역자주.) 그리고 성찬 예식에서의 빵과 포도주는 보편적으로 인류를 향한 주님의 사랑을, 인간이 주님을 향한 상호적인 사랑이 뜻해진다는 것, 이것도 그들은 믿지 않는다; 신앙으로부터의 선, 즉 선행으로부터의 신앙이지 않으면 그 신앙은 소용이 없다는 것, 이것을 그들은 역으로 설명한다; 이런 식의 경우는 더 있지만 생략한다. 이런 품성 속에 있는 이들은 말씀 안에 있는 진리 자체의 한조각도 볼 수 없고, 아마 그들은 보기를 원하지도 않을 것이다, 그러나 자기들 고유의 독단적 주장만을 완고하게 고집할 것이다. 말씀의 영광과 신성시함 안에 내적 의미가 있다는 말을 듣는 것조차 원하지 않는다; 만일 듣게 된 경우, 이를 혐오함으로부터 그들은 그것의 언급하는 것 조차에도 진저리를 낸다. 이리하여 말씀은 닫혀져 있지만 실상 말씀은 천국 안에서 열려져 있고, 천국을 통하여 주님에게로 열려져 있다. 그러나 이것이 인간에게 단독으로 닫혀지는 경우란, 인간이 삶의 목적 측면에서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의 악들 안에 있는 만큼에서, 그 결과 거짓의 원리들 안에 있는 만큼에서 그 인간에게 닫혀 있다. 이상 살핀 바로부터 우물의 아구 위에 놓여진 큰 돌이 의미하는 것을 알았으리라 본다.

그리고 모든 (가축)떼가 그리로 모두 모였다. 이는 모든 교회들과 그들의 교리적인 것들이 말씀에서 파생되었음을 의미한다. “(가축) 떼”란 교회들, 또한 교회에 속하여 있는 교리적인 것들로부터 분명해진다. 이것들이 말씀으로부터 이다는 것이 (가축) 떼들이 그리로 함께 모여들었다에 의해 의미되어 있다.

그리고 그들은 그 돌을 우물의 아구로부터 굴렸다. 이는 그들이 말씀을 열었음을 의미한다. 이는 이미 살핀 것, “우물의 아구 위에 놓인 큰 돌”이란 말씀이 닫혀 있음이다에 관한 사항으로부터 분명해진다. 고로 그들이 돌을 우물의 아구로부터 굴려냄은 그들이 말씀을 열었다가 의미된다.

그리고 양떼에게 물을 먹였다. 이는 말씀에서 교리가 왔음을 의미한다. 이는 “물을 먹임”, 또는 “물을 마시게 줌”의 의미가 가르치는 것이다로부터 분명해진다; 그리고 “양떼”가 신앙으로부터의 선들과 진리들 안에 있는 이들이다로부터 알게된다. 고로 “양떼에게 물을 먹이는 것”은 말씀으로부터 가르치는 것, 결과적으로 교리이다.

그리고 그들은 그 돌을 우물의 아구에 다시 굴렸다. 이는 한 동안 말씀이 닫혀 있음을 의미한다. 이는 방금 위에서 살핀 바로부터 분명해진다. 교회들에 말씀이 열려 있다, 그리고 후에 닫혀져 있다에 주목해보면 이렇다: 어떤 교회가 설립되는 시작에서 말씀은 그 교회의 사람들에게 먼저 닫혀져 있다, 그리고 후에 열려지는데, 주님께서 그렇게 설비하신다; 고로 그들은 모든 교리가 두 계명들에 기초를 둠을 배운다- 즉 주님은 무엇보다 먼저 사랑되어져야 한다는 것, 그리고 이웃을 자신 같이 사랑하는 것이다, 이 두 계명들이 목적으로 간주될 때, 말씀은 열려진다; 그 이유가 율법과 예언서들, 즉 말씀 전체가 이 계명들에 의존되고 있기 때문이다, 즉 모든 것들은 이 두 계명들로부터 파생되고, 이 두 계명들과 관련을 맺기 때문이다. 그리고 교인들이 진리와 선의 원리들 안에 있을 때, 그들은 자기들이 말씀에서 보는 모든 것에서 계발되어진다; 그 이유가 그때 주님께서는 천사들을 수단으로 그들과 더불어 현존하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을 가르치시기 때문이다 (물론 당사자가 이를 눈치 못채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리고 또한 그들을 진리와 선의 삶 안으로 인도하신다.
이것은 모든 교회들의 경우에서도 알 수 있을지 모른다, 즉 교회들의 유아기 시절, 그들은 사랑으로부터 주님을 예배하고, 심정으로부터 이웃을 사랑했다. 그러나 시간의 과정에서 교회들은 이 두 계명들을 멀리하여 갔다, 그리고 사랑의 선과 선행으로부터 소위 신앙의 것들쪽으로, 고로 생활로부터 교리쪽으로 비껴 섰다; 그들이 이렇게 비껴있는 한 말씀은 닫혀져 있다. 이것이 이 말씀의 내적 의미에 의해 의미되어 있다, 즉 “바라보니 들판에 우물이 있었다, 그리고 바라보니 세 무리의 양떼가 그것 주위에 누워있었다; 그 이유가 거기로부터 그들이 가축떼에게 물을 먹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큰 돌이 우물의 아구 위에 있었다. 그리고 모든 가축떼들이 그쪽으로 함께 모여들었다; 그리고 그들은 우물의 아구로부터 돌을 굴렸다, 그리고 양떼에게 물을 먹였다, 그리고 그들은 우물의 아구 위에 다시 그것의 장소에 돌을 놓았다.”

4-6절. 그리고 야곱은 그들에게 말했다, 나의 형제여 너희들은 어디에서 왔는가? 그리고 그들이 말했다, 우리는 하란으로부터 이요 5 그리고 그는 그들에게 말했다, 너희는 나홀의 아들 라반을 아느냐? 6 그리고 그들은 말했다, 우리는 그를 안다. 그리고 그가 그들에게 말했다, 그는 평안하시냐? 그리고 그들이 말했다, 평안하오. 그리고 바라보니 그의 딸 라헬이 양떼와 함께 오고 있다. “그리고 야곱이 그들에게 말했다”란 선으로부터의 진리를 의미한다. “내 형제여 당신들은 어디로부터 인가?”란 거기에 선행이 있는데 그것은 어느 근원으로부터 인가?를 의미한다. “그리고 그들은 말했다, 우리는 하란으로부터 이오”란 공통의 줄기로부터의 선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는 그들에게 말했다, 너희는 나홀의 아들 라반을 아는가?”란 그들은 이 줄기로부터의 선을 가지고 있는가? 를 의미한다. “그리고 그들은 말했다, 우리는 그를 안다”란 확언함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가 그들에게 말했다, 그는 평안하뇨?”란 이 선은 주님의 왕국으로부터가 아닌가?를 의미한다. “그리고 그들은 말했다, 평안합니다”란 확실함을 의미한다. “바라보니 그의 딸 라헬”이란 내면의 진리에 대한 애착을 의미한다. “양떼와 함께 오고 있다”란 내면의 교리적인 것들을 의미한다.

그리고 야곱이 그들에게 말했다. 이는 선으로부터의 진리를 의미한다. 이는 야곱의 표현이 주님의 신성한 자연 평면이다로부터 인데, 이는 앞에서 살폈다. 일반적, 특수적 측면 모두에서 각 인물이 어느 구절에서 등장하든 그들 모두는 내적 의미에서는 선과 진리와 관련을 가지는 까닭에, 여기서도 자연 평면에서의 선과 진리와 관련을 가진다; 그리고 인간의 거듭남 동안에서 자연 평면에 있는 선과 진리는 다른 상태(거꾸로의 상태)로부터 출발하여 발전하여 정상적인 상태에(거듭남에) 이르므로, 야곱에 의해서는 이 과정의 시기에 발맞추어진 진리와 선의 측면에서의 자연 평면이 표현되고 있다. 그러므로 이 구절에서는 선으로부터의 진리이다. 어쨌든 각 구절 마다에서 부딪치는 다양한 것들을 상세하게 설명하다보면, 주제가 불명료하게 비치는 경우를 피하기 힘든데, 특히 이런 희미해지는 경우는 진리와 선에 관한 구분된 생각을 하지 않는 이들과 더불어, 또한 진리를 통하여 선인 것, 그리고 선으로부터 있는 진리에 관하여 구분된 생각을 하지 않는 경우는 더욱 그렇다.

내 형제여 당신들은 어디로부터 인가? 이는 거기에 선행이 있는데 그것은 어느 근원으로부터 인가?를 의미한다. 이는 “형제”의 의미가 선 안에 있는 이들, 이로부터 선 자체, 결과적으로 선행이다로부터; 그리고 “당신은 어디로부터?”란 “어느 근원으로부터 그것이 있는가?”를 의미한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런 사항들에서 알게 되는 것은, 글자 의미에서 있는 질문이나 질문하는 어떤 인물에 포함되는 것은 내적 의미에서는 어떤 인물에 대한 것으로 결정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이유가 천국의 천사들은 인간 지위를 떠나 천국으로 들어갈 때 글자의 역사물들에 관한 것은 이미 사라져버렸기 때문이다. 고로 천사들의 경우 야곱이 하란 출신의 사람들에게 한 질문, “당신은 어디로부터 왔소?” 역시 거기에 선행이 있는데, 그것은 어느 근원으로부터 이오?로 이해한다.
여기서의 경우 다음과 같다: 외적 형태에서 선행으로 나타나는 선행이라 해서 한결같이 내적 형태에서도 선행은 아니다는 것이다. 그것의 품질과 근원은 그것의 목적으로부터 알려질 뿐이다. 내적 형체가 이기적, 또는 세상적 목적에서 근원된 선행은 선행이 아니고, 엄밀히 말해 선행이란 말을 사용해서도 안된다; 그러나 선행의 목적이 이웃, 일반적 선, 천국, 고로 주님에 있는 선행은 진짜 선행이고, 이 선행 내부에는 심정으로부터 선을 행하고 싶은 애착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이런 생활로부터 파생되는 즐거움은 다른 삶에서는 복됨이 되어간다. 우리가 주님의 왕국이 그 자체 무엇인지를 알기 위하여서 선행은 어느 근원으로부터 인지를 확실히 해두는 것은 최고로 중요하다. 이 선행에 관한 문의, 또는 같은 말로 이 선에 관한 것이 이 세 절에서 지금 취급되어진다; 처음 물어지는 것은 거기 있는 선행은 어느 근원으로부터 인지 이다. 이것이 “내 형제여 당신은 어디로부터 있는가?”에 의해 의미되어 있다.

그리고 그들은 말했다, 우리는 하란으로부터 이오. 이는 공통의 줄기(common stock)로부터의 선을 의미한다. 이는 하란의 의미가 공통의 줄기로부터의 방계적인(평행한, collateral) 선이다로부터 분명해진다.

그리고 그는 그들에게 말했다, 너희는 나홀의 아들 라반을 아는가? 이는 그들은 이 줄기로부터의 선을 가지고 있는가? 를 의미한다. 이는 라반이 공통의 줄기로부터의 방계적인 선을 표현한다로부터; 그리고 나홀이 공통의 줄기이다로부터, 이로부터 라반에 의해 표현된 선이 있다; “아는 것”이 내적 의미에서는 거기로부터 있다를 의미하는데, 이는 시리아로부터 알아진다. 나홀, 브드엘, 라반에 의해 방계적인 선의 표현이 어떻게 있는지에 대하여는 간략하나마 설명이 추가되어야 할 것 같다. 세 아들, 즉 아브람, 나홀, 하란의 아버지인 데라 (창. 10:27)는 공통의 줄기를 표현한다. 이로부터 교회들이 있다. 데라 자신은 실로 우상 숭배자였다, 그러나 표현에서는 인물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사항들에 관심이 집중된다. 그리고 표현적 유태인의 교회가 아브라함에서 개시되었고, 야곱의 후손들로부터 갱신되었기 때문에, 데라와 그의 세 아들들 역시 교회들의 표현을 옷입게 된 것이다, 하여 아브라함은 진짜 교회, 즉 말씀을 가진 이들과 더불은 교회이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형제 나홀은 말씀을 가지지 않은 교회, 즉 이방인들 사이에 존재하는 교회이다. 주님의 교회는 온 땅 두루에 흩어져 있다는 것, 그리고 선행 안에서 생활하는 이방인들 사이에 존재한다는 것은 이방인들에 관하여 살폈던 대목들로부터 분명해진다.
그러므로 위의 사항이 나홀, 그의 아들 브드엘, 브드엘의 아들 라반에 의해 공통의 줄기로부터의 방계적인 선을 표현한 이유이고, 이 선 안에 이방인들 사이에 있는 주님의 교회 속에 있는 이들이 있다. 이 선은 하강의 직계 선에 있는(아브라함-이삭-야곱 등등) 공통의 선과는 이런 점에서 차이가 있다 – 즉 그들의 선과 결합된 진리들은 진짜이지 않다는 것, 그것들 대부분은 감각들의 오류라 불리우는 외적 나타남들이다는 것이다; 그 이유가 이방인들은 자기들을 계발해줄 말씀을 가지지 못했던 때문에서이다. 본질적 측면에서 선은 오로지 하나일 뿐이지만, 선의 품질은 선 안에 심어진 진리들로부터 오기 때문이다, 하여 선은 다양해지기도 한다. 이방인들에게 진리로서 나타나는 진리들은 일반적으로 그들이 어떤 하느님을 예배함 안에 있고, 이 하느님으로부터 그들은 자기들의 선을 찾고, 이 분에게 자기들의 선의 근원을 돌린다, 그래서 그들은 세상에서 사는 한 그들은 이 하느님이 주님이심을 알지 못한다; 또한 그들은 형상들(조각상 등등) 아래에서 자기들의 하느님을 예배하고 이 상 조각을 거룩시 한다; 이 외에도 여러 사항들이 있다. 그럼에도 그들이 자기들의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향한 사랑 안에 있다면 그들이 구원받음에서 기독인들과 하등 차이가 나지 않는다; 그 이유가 그들은 다른 삶에서 내면의 진리들을 받는 수용력을 가졌기 때문이다. 이것이 여기서 공통의 줄기로부터의 방계적인 선이 뜻하는 것을 보여준다. 나홀을 수단으로 선 덕택에 형제다운 사랑 안에 있는 교회로부터의 사람들이 표현된 것은 이미 살폈다; 브드엘에 의해서는 첫 계급(계층, class)의 이방인들의 선이 표현된다 (2865, 3665항); 라반에 의해서는 외적 선, 또는 육체적 선에 대한 애착이 표현된다, 그리고 공통의 줄기로부터의 방계적인 선을 표현함에도 적절하다 (3612, 3665항).
이 선은 당사자가 영적 선을 포획하는 수단을 무엇보다 먼저 제공한다, 그 이유가 이것은 외적 육체적이기 때문, 그리고 감각들의 오류인 자신들에 있는 외적 나타나남들에 기반을 두기 때문이다. 인간은 어린 시절에서 진리와 선을 인정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 아예 모르고 있다) 그리고 비록 그가 내적인 선과 진리에 관해 배웠다 할지라도, 그는 육체적 수준의 것 외의 다른 생각은 가지지 못한다. 처음의 생각들이 이렇기 때문에 외적 선과 진리는 내적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는 첫 수단들이다. 이것이 야곱과 라반에 의해 여기서 표현되고 있다.

그리고 그들은 말했다, 우리는 그를 안다. 이는 확언함을 의미한다. 이는 설명이 필요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가 그들에게 말했다, 그는 평안하뇨? 이는 이 선은 주님의 왕국으로부터가 아니뇨? 를 의미한다. 이는 평안(평화, peace)의 의미로부터 분명해지는데, 아래에서 살핀다. 역사적 의미에서 위 질문은 라반에 관하여, 그가 평안한지 여부를 묻는 것이나, 내적 의미에서의 질문은 라반에 의해 표현된 선에 관하여서 이다. 라반이 공통의 줄기로부터의 방계적 선, 즉 이방인들 사이에 존재하는 선들 같은 것, 이들은 일반적 교회 안에 있는 이들, 즉 주님의 교회 안에 있는 이들을 표현하는데 앞에서 말한 바와 같다. 이로부터 “이 선은 주님의 왕국으로부터가 아니뇨?”가 의미되는 것이다.
평화에 주목해보면, 이는 최고 의미에서 주님 자신을, 이로부터 내적 의미에서 그분의 왕국을 의미한다, 그리고 선 안에 있는 이들 안에서 가장 깊게 선에 영향을 미치는 주님의 신성을 의미한다. 이런 사항들이 말씀에서 “평화”에 의해 의미된다는 것은 아래 인용 구절로부터 분명해진다; 이사야서에서:
우리에게 어린 아이가 태어나신다, 우리에게 아들이 주어진다; 그리고 통치권이 그의 어깨 위에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의 이름은 경이한 자, 상담자, 하느님, 영웅, 영원하신 아버지, 평화의 제 일인 자라고 일컬어질 것이다. 그의 통치와 평화의 불어남은 다윗의 왕좌 위에, 그리고 그의 왕국 위에서 끝이 없을 것이다 (이. 9:6-7);
위에서 “평화의 제 일인 자”란 주님이심을 분명하게 표시한다; 그리고 “그의 통치와 평화의 불어남”이 그분의 왕국 안에 있는 것들, 고로 그분의 왕국 자체를 표시한다. 다시:
정의의 일이 평화일 것이다, 그리고 정의의 노동은 영원히 있는 안전함과 조용함일 것이다; 그리고 내 백성은 평화의 주택 안에 거주할 것이다 (이. 32:17-18);
이 구절에서 주님의 왕국이 취급되고, 그 왕국의 평화, 조용함, 안전함이 계속되고, “평화의 주택”은 천국을 표시한다.
다시:
평화의 천사가 통렬하게 울고 있다; 작은 길들이 황폐된 채로 있다, 도보로 여행하는 사람 이 끊겼다 (이. 33:7, 8);
“평화의 천사들”은 주님의 왕국 안에 있는 이들, 고로 이 왕국 자체를, 그리고 최고 의미에서 주님을 표시한다; “작은 길들이 황폐된 채로 있다, 그리고 도보로 여행하는 자가 끊겼다”란 어떤 곳에도 진리가 더 이상 있지 않다는 것을 표시한다. 다시:
좋은 소식을 가져오고, 평화를 발표하는 그의 발이 산 위에 있음이 얼마나 즐거운 일이던 가; 시온에게 네 하느님이 통치하신다 하고 말하라 (이. 52:7).
위에서 “좋은 소식을 가져오고, 평화를 발표하는 자”는 주님의 왕국을 표시한다. 다시:
산들이 떠날 것이다, 그리고 언덕들이 옮겨질 것이다; 그러나 나의 자비는 너로부터 떠나지 않을 것이다, 내 평화의 언약은 옮겨지지 않을 것이다 (이. 54:10).
다시:
평화의 길을 그들은 알지 못했었다; 그리고 그들의 행로 안에는 공정이 없다 (이 59:8).
예레미야서에서:
나는 이 백성으로부터 내 평화를 가져갈 것이다, 여호와께서 불쌍히 여기심과 자비조차 가 져가신다고 말하신다 (예. 16:5).
다시:
평화의 (양)우리가 황폐되어 있다, 그 이유는 여호와의 노염이 불타기 때문이다
(예. 25:37).
다시:
평화를 예언하는 예언자는 예언의 말이 닥친 후 그때서야 여호와께서 그를 보내신 예언자 임이 알려질 것이다 (예. 28:9).
다시:
나는 내가 너희를 향하여 생각하는 생각들을 알고 있다, 평화에 관한 생각들이다, 여호와께 서 말하신다 (예. 29:11).
학개서에서:
나중에 지은 집의 영광이 먼저 지은 집의 영광보다 더 클 것이다; 그 이유는 이 장소에 나 는 평화를 주기 때문이다 (학. 2:9).
그리고 스가랴서에서:
그들은 평화의 씨일 것이다; 포도나무가 그녀에게 그녀의 열매를 줄 것이다, 그리고 땅이 그녀의 산출분을 줄 것이다, 그리고 하늘은 그들의 이슬을 줄 것이다 (슥. 8:12).
다윗서에서:
성실함을 고수하고 곧바름을 바라보라, 그 이유는 평화가 이 사람의 목적이기 때문이다 (시. 37:37).
누가복음서에서:
예수께서 그분의 제자들에게 말하신다, 너희는 누구의 집으로 들어가든지 먼저 말하라, 이 집에 평화가 있으라. 그리고 만일 평화의 아들이 거기 있으면, 너희의 평화가 그것 위에 있 을 것이다; 만일 아니다면, 그것은 다시 네게로 돌아올 것이다 (눅. 10:5, 6).
요한복음서에서:
평화를 나는 너희에게 남긴다, 내 평화를 나는 너희에게 준다; 세상이 주는 것이 아닌 (평 화를) 나는 네게 준다 (요. 14:27).
다시:
예수께서 말하셨다, 이런 것들을 내가 너희에게 말했던 것은 내 안에서 너희가 평화를 가 질는지 몰라서이다 (요. 16:33).
위 모든 구절들의 최고 의미에서 “평화”는 주님을 의미한다; 그리고 표현적 의미에서는 그분의 왕국을, 그리고 거기 안에 있는 주님으로부터의 선을, 고로 선 안으로 흐르는 신성을, 또는 선에 대한 애착들 안으로 흐르는 신성을 의미하고, 이것은 가장 안쪽으로부터 기쁨과 행복을 누리게 한다. 이로부터 축복의 이 말들에 의해 뜻해진 것이 분명해진다:
여호와께서 너희 위에 그분의 얼굴을 들어 올리시어 너희에게 평화를 주신다 (민. 6:26);
그리고 옛적부터 사용된 인사말, “너희에게 평화가 있을 지어다;” 그리고 이 말은 예수께서 사도들에게 말하셨기도 하다. 이밖의 평화에 관하여는 지나온 항목들을 더 참조하기 바란다.

그리고 그들은 말했다, 평안합니다. 이는 확실함을 의미한다. 이는 설명이 필요 없을 것이다. 그 이유가 이것은 확언하는 응답이기 때문이다.

바라보니 그의 딸 라헬. 이는 내면의 진리에 대한 애착을 의미한다. 이는 라헬이 내면의 진리에 대한 애착을 표현한다로부터; 그리고 레아는 외면의 진리에 대한 애착이다로부터 분명한데, 이에 대하여는 뒤이어진다.

양떼와 함께 오고 있다. 이는 내면의 교리적인 것들을 의미한다. 이는 “양떼”가 교회이다로부터, 그리고 또한 교리적인 것들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여기서의 경우 내면의 교리적인 것들이다, 그 이유는 라헬에 관해서 “그녀가 양떼와 함께 오고 있다”라고 말해지기 때문이다.

7, 8절. 그리고 그는 말했다, 보라 아직까지는 날이 아주 좋은 바, 이는 가축을 모아 들일 때가 아니다. 너는 양떼에게 물을 먹이고, 그리고 가서 그들을 먹이라. 8 그리고 그들이 말했다, 우리는 모든 가축떼가 다 모일 때까지 그렇게 할 수가 없다, 그리고 그들은 우물의 아구로부터 돌을 굴린다. 그때 우리는 양떼에게 물을 먹인다. “그리고 그는 말했다, 보라 아직까지는 날이 아주 좋다”란 지금 상태가 발전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지금은 가축을 모아들일 때가 아니다”란 교회 속의 선들과 진리들과 교리 속의 선들과 진리들은 아직까지는 하나로서 모여질 수 없음을 의미한다. “너는 양떼에게 물을 먹이고, 가서 그들을 먹이라”란 아주 적은 사람들에게 말씀으로부터의 배워짐이 있다를 의미한다. “그리고 그들은 말했다, 우리는 모든 가축떼가 다 모아질 때까지 그렇게 할 수 없다”란 그것들은 함께 있어야 한다를 의미한다. “그리고 그들은 돌을 우물의 아구로부터 굴린다”란 이러므로 해서 말씀 속의 것들이 들추어내짐을 의미한다. “그때 우리는 양떼에게 물을 먹인다”란 그때 그것들은 배워진다를 의미한다.

그리고 그는 말했다, 보라 아직까지는 날이 아주 좋다. 이는 지금 상태가 발전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는 “날”이 상태를 의미한다로부터; “보라 날이 아직까지는 아주 좋다”란 발전하고 있다를 표시하는데 이는 시리즈로부터 분명해진다.

지금은 가축을 모아들일 때가 아니다. 이는 교회 속의 선들과 진리들과 교리 속의 선들과 진리들은 아직까지는 하나로서 모여질 수 없음을 의미한다. 이는 “때”가 일반적으로 상태를 의미한다로부터; “모아들임”이 하나로 있어짐이다로부터; 그리고 “가축떼(cattle)”의 의미가 일반적으로 교회 속의 선들과 진리들과 교리적인 것들 속의 선들과 진리들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일반적으로 “가축떼”가 이 의미를 가지는 이유는 표현적인 교회의 의식들에서, 그리고 말씀에서, 동물들은 선에 애착함, 또는 진리에 애착함을 의미하기 때문에서 이다.
위 사항은 교회가 다시 설립되어질 경우에서도 일반적 측면에서는 공히 같다. 즉 선과 진리의 교리적인 것들이 하나로 되어져야만 한다는 것인데, 그 이유는 교회는 교리적인 것들 위에 건축되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교리적인 것들은 서로 서로 연결되고 상호 관련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그것들이 하나 안으로 먼저 모아들이지 않으면, 거기에는 결함이 있을 것이고, 부족한 것은 인간의 합리성을 수단으로 공급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것의 결론이 (인간의 생각) 그 자체로부터 일 때, 이 결론들은 얼마나 소경되고 환각적인지는 이미 지나온 많은 항목들에서 말했다. 이런 이유로 말씀이 교회들에 주어진 것이고, 말씀은 선과 진리에 관한 모든 교리적인 것들을 포함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거듭나지고 있는 이들과 더불어서도 마치 일반적 측면에서의 교회의 경우가 특수한 측면에서의 교회와 같은 경우와도 비슷하다. 그 이유가 거듭나는 것은 특별한 측면의 교회의 경우 중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교회에 속하는 선과 진리의 교리적인 것들은 거듭나기 전, 그 인간 안에서 모아져야만 한다는 것이 “보라 아직까지는 날이 아주 좋다, 가축떼를 모을 때가 아니다”에 의해 의미되고 있다.

너는 양떼에게 물을 먹이고, 가서 그들을 먹이라. 이는 아주 적은 사람들에게 말씀으로부터의 배워짐이(가르침을 받음이) 있다를 의미한다. 이는 “양떼에게 물을 먹임”이 말씀으로부터 배워짐이 있다를; 그리고 “가서 그것들을 먹이라”는 말의 의미가 파생되는 생활과 교리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리고 그들은 말했다, 우리는 모든 가축떼가 다 모아질 때까지 그렇게 할 수 없다. 이는 그것들은 함께 있어야 한다를 의미한다. 이는 “모아짐”의 의미가 하나로 만들어짐, 함께 있음이다로부터; 그리고 “가축떼”의 의미가 교리적인 것들이다로부터. 이 말들의 의미는 이미 살폈다.

그리고 그들은 돌을 우물의 아구로부터 굴린다. 이는 이러므로 해서 말씀 속의 것들이 들추어내짐을 의미한다. 이는 “돌을 굴림”의 의미가 들추어내짐 이다로부터 ; 그리고 “우물”의 의미가 말씀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때 우리는 양떼에게 물을 먹인다. 이는 그때 그것들은 배워진다를 의미한다. “양떼에게 물을 먹임”이 배워짐, 가르침을 받음이다로 알게 되는데, 이미 살폈다.

9-11절. 그가 그들과 아직 말하고 있는 동안, 라헬이 그녀의 아버지의 것인 양떼와 함께 왔다, 그 이유가 그녀는 여 목자였기 때문이다. 10 그리고 야곱은 그의 어머니의 오라버니 라반의 딸, 그리고 그의 어머니의 오라버니 라반의 양떼를 보았을 때, 야곱은 가까이 다가 왔다, 그리고 우물의 아구로부터 돌을 굴렸다, 그리고 그의 어머니의 오라버니 라반의 양떼에게 물을 먹였다. 11 그리고 야곱은 라헬에게 키스했다, 그리고 그의 음성을 높혀 울었다. “그가 아직 그들과 말하고 있는 동안”이란 이 경우에서 생각함을 의미한다. “라헬이 양떼와 더불어 왔다”란 교회 속과 교리 속에 있는 내면의 진리에 대한 애착을 의미한다. “그녀의 아버지의 것”이란 근원 측면에서 선으로부터를 의미한다. “그 이유는 그녀는 여 목자이었기 때문이다”란 내면의 진리에 대한 애착이 말씀 속에 있는 것을 배우게 한다를 의미한다. “그리고 야곱이 그의 어머니의 오라버니 라반의 딸 라헬을 보게 되었다”란 근원 측면에서 내적 진리에 대한 애착을 인정함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의 어머니의 오라버니 라반의 양떼”란 교회 그리고 그 교회로부터의 교리를 의미한다. “야곱은 가까이 왔다, 그리고 우물의 아구로부터 돌을 굴렸다”란 주님께서 자연적 선으로부터 말씀의 내면에 관한 것을 여셨다를 의미한다. “그리고 그의 어머니의 오라버니 라반의 양떼에게 물을 먹였다”란 가르침을 받음(배움이 있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야곱은 라헬에게 키스했다”란 내면의 진리들을 향한 사랑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의 음성을 드높여 울었다”란 사랑의 열정을 의미한다.

그가 아직 그들과 말하고 있는 동안. 이는 이 경우에서 생각함을 의미한다. 이는 말씀의 역사적 부분에서 “말하다(speak)”가 생각하는 것이다로부터 분명해진다. 이것이 이 경우에서 생각함을 의미한다는 것은 분명한데, 그 이유는 그가 그들과 말하는 바로 그때에 라헬이 왔기 때문이다.

라헬이 양떼와 더불어 왔다. 이는 교회 속에 있는 내면의 진리와 교리 속에 있는 내면의 진리에 대한 애착을 의미한다. 이는 라헬이 내면의 진리에 대한 애착을 표현한다로부터; 그리고 “양떼”의 의미가 교회, 그리고 또한 교리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어째서 라헬이 내면의 진리에 대한 애착을, 레아는 외면의 진리에 대한 애착을 표현하는지를 알려면, 먼저 염두하고 있어야 하는 것은 야곱에 의해 표현되는 자연 평면이 선과 진리로 구성되고 있다는 것, 그리고 이 자연 평면에서, 마치 인간의 모든 것에서, 또는 일반적, 특수적 측면 모두에 해당되는 보편적 자연 평면의 모든 것에서, 선과 진리의 결혼은 필수적이다는 점이다. 이 결혼 없이 어떤 생산도 없다. 다시 말해 모든 생산, 모든 결과는 결혼으로부터 있다는 말이다. 그렇지만 선과 진리의 이 결혼은 인간이 태어날 때 그의 자연 평면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인간 홀로 신성한 질서 안에서 태어나지지 않기 때문이다; 실로 일찌기 인간은 순진의 선과 선행의 선을 소유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이 선은 인간의 유아 시기에 주님으로부터 흘러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선과 짝짓기 할 진리는 없다(진리는 흘러들지 않는다). 인간이 계속 나이먹어감에서, 그의 유아 시절 주님에 의해 당사자 안으로 은근히 심어두셨던 이 선은 내면들을 향하여 안쪽으로 당겨진다, 그리고 거기서 주님에 의해 보관되고 훗날 그가 입는 생명의 상태들을 부드럽게 한다. 유아기와 첫 어린 아이 시절에서의 선이 없다면, 인간은 나이 먹을수록 더욱 나빠져 이는 들짐승보다 더 흉폭해지고 말 것이다. 유아기의 이 선이 안쪽으로 깊이 당겨질 때, 이 선의 자리에 악이 와서 인간의 자연 평면 안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이 악과 더불어 거짓이 짝짓기를 한다, 그리고 인간 안에서 결합이 거행된다, 악과 거짓이 결혼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이 구원받기 위하여는 인간은 반드시 거듭나야 하고, 악은 그 자리에서 옮겨지고 주님으로부터의 선이 은근히 심어져야만 한다, 그리고 그가 받은 선에 따라, 진리가 당사자 안으로 은근히 심어진다, 그 목적은 짝짓기가 결과되기 위해, 선과 진리가 결혼하기 위해서이다.
이것들이 야곱에 의해, 그리고 그의 두 아내, 라헬과 레아에 의해 표현되는 밑그림에 해당된다. 그러므로 지금 야곱은 자연 평면의 선을 표현함을 옷입고, 라헬은 진리를 표현함을 옷입고 있다; 그러나 선과의 진리의 모든 결합은 애착을 수단으로 하는 바, 실제로 라헬에 의해 표현된 진리에 대한 애착이 선과 짝짓기를 하는 것이다. 더 나아가, 자연 평면도 합리성에서 같이 내면과 외면이 있다; 라헬은 내면의 진리에 대한 애착을, 그리고 레아는 외면의 진리에 대한 에착을 표현한다. 이들의 아버지인 라반은 공통의 줄기로부터의 선을 표현한다, 그러나 방계적인 선이다; 이 선은 방계적인 계열에서 “리브가”에 의해 의미되는 합리성의 진리에 상응하는 선이다. 그런고로 이 계열로부터의 딸들은 자연 평면에서 애착을 표현한다, 그 이유가 이것들은 아버지로부터의 이 선으로부터 딸로서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애착들이 자연적 선과 짝짓기를 하는 바, 그것들은 진리에 대한 애착을 표현한다; 하여 하나는 내면의 진리에 대한 애착을, 또 하나는 외면의 진리에 대한 애착을 표현하는 것이다.
인간의 자연 평면 측면에서 그의 거듭남에 주목하면, 야곱과 라반의 딸들, 라헬과 레아의 경우와 똑같은 바, 말씀을 내적 의미에 따라 볼 수 있고 납득하는 자는 누구든지 그에게 이 비밀들이 드러내진다. 그러나 선과 진리 안에 있는 자 외에는 이 비밀을 볼 수 없다. 이 외의 이들은 말씀 안에서 도덕적, 시민적 삶에 관계되는 것들을 지각할 수는 있다, 그리고 설사 그의 총명이 내적 의미의 얼마라도 나타나게 해준다해도 그 의미를 인정할 수 있는 만큼의 본성에 관하여 아는데까지는 도달하지 못한다. 그 이유가 그들은 선과 진리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기 때문, 하여 악이 선이라고, 거짓이 진리라고 상상한다; 그러므로 선이 언급되는 찰나에 악에 대한 생각이 표출되고, 진리가 언급되는 순간, 거짓이 표출된다; 결과적으로 그들은 내적 의미에서의 내용들의 어떤 것도 지각하지 못한다. 오히려 내적 의미들을 듣자마자, 어둠이 나타나고 그것이 빛을 꺼지게 한다.

그녀의 아버지의 것. 이는 근원 측면에서 선으로부터를 의미한다. 이는 여기서 “아버지”인 라반이 공통의 줄기로부터의 방계적인 선이다로부터; 그리고 “아버지”의 의미가 선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 이유는 그녀는 여 목자이었기 때문이다. 이는 내면의 진리에 대한 애착이 말씀 속에 있는 것을 가르친다(배우게 한다)를 의미한다. 이는 “목자”, 또는 양떼를 먹이는 자의 의미가 인도하고 가르친다 이다로부터; 그리고 여기서 “그녀”인 라헬이 내면의 진리에 대한 애착을 표현한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 가르침이 말씀으로부터 이다고 말하는 이유는 그녀가 양떼를 데리고 우물에 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물”이 말씀을 의미하는 것은 이미 살폈다. 더 나아가 가르치는 것은 내면의 진리에 대한 애착이다. (우리는 내면의 진리에 대한 애착으로부터 배워진다) 그 이유가 이 애착으로부터 교회는 교회이고, 목자, 또는 목사는 목자, 또는 목사이기 때문이다. 말씀에서 “목자”, 또는 “먹이는 자”가 인도하고 가르치는 이들을 의미하는 이유는 “양떼”가 인도받고 배우는 이들을, 결과적으로 교회, 그리고 교회의 교리들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목자”와 “양떼”가 이런 의미를 가진다는 것은 기독교계에 훤히 알려져 있다, 그 이유는 가르치는 이들, 배우는 그들이 그런 식으로 불리우기 때문이다. 따라서 말씀으로부터 이에 대한 것은 실상 확증해볼 필요도 없다.

그리고 야곱이 그의 어머니의 오라버니 라반의 딸 라헬을 보게 되었다. 이는내적 진리에 대한 애착을 그것의 근원 측면에서 인정함을 의미한다. 이는 “본다”의 의미가 인정하는 것이다로부터 분명해지는데, 이는 시리즈로부터, 또는 문맥의 연결로부터 알려진다; 그리고 라헬이 내면의 진리에 대한 애착이다로부터. “자기 어머니의 오라버니 라반의 딸”은 그것의 근원을 함축하고 있다, 즉 이 진리는 방계적 선으로부터 있다는 것, 이 선은 야곱의 어머니, 리브가에 의해 표현된 합리적 진리와 형제다운 사랑으로 결합하여 있다는 것이다.
진리에 대한 애착, 선에 대한 애착에 주목해보면 이렇다: 인간에 의해 지각되는 진리에 대한 진짜 애착과 선에 대한 진짜 애착은 모두 주님으로부터 이기 때문에 신성한 근원으로부터 이다; 그러나 그것들이 하강하는 도중에서 그것들은 다양한 흐름으로 갈라진다, 그리고 이 갈라짐으로부터 그것들은 새로운 근원을 자체를 위해 만들어낸다; 그 이유가 이것들은 진짜가 아닌 가짜의 애착들 안으로도 흐르고, 그래서 인간 안에 있는 악과 거짓에 대한 애착들 안으로도 흐르는 바, 이런 식으로 그것들은 다양해진다. 외적 형체에서 이 애착들은 진짜 애착들 같이 나타난다; 그러나 내적 형체에서 그것들은 가짜 특성으로부터 있다. 애착의 진짜와 가짜를 식별하는 유일한 방법은 애착들의 목적을 살피는 것이다; 만일 목적에 주목하여 그것들이 자기와 세상을 위하여 있다면 이 애착들은 진짜가 아니다; 그러나 그것들이 이웃의 선, 사회의 선, 나라의 선, 특히 교회의 선과 주님의 왕국의 선을 위하여 있다면, 그것은 진짜이다, 그 이유는 이런 경우, 주님이 이 선들 안에 계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누군가의 안에 있는 애착의 목적을 확실히 구분하는 것은 현자의 몫이다. 때로 이것은 마치 그것의 목적이 자기를 위한 것이 아닌데, 그런 것처럼 나타날 때도 있다; 그 이유가 인간은 만사를 자신 위에 비추어 곰곰이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관습과 습관으로부터 그렇게 할 때도 있다. 그러나 만일 어떤 이가 자기 내부에 있는 목적들을 알기를 바란다면, 그는 자기가 칭송과 자기 영광됨으로부터 즐거움을 지각하는 지를, 그리고 그 반대인 자기로부터 분리된 선용으로부터 즐거움을 가지는지를 점검하면 된다. 만일 후자이다면, 그는 진짜 애착 안에 있는 것이다. 그래도 그는 자기가 있는 다양한 상태들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그 이유가 상태들 자체가 지각을 아주 많이 다양해지게 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자신 안에서 이런 것들을 조사할 수 있으나 타인의 것은 조사할 수 없다; 그 이유가 각 인간의 애착의 목적은 주님 만에게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주님께서 아래 같이 말하신 이유이다:
판단받지 않도록 (남을) 판단하지 말라; 네가 비난당하지 않도록 (남을) 비난하지 말라 (눅. 6:37);
수천의 인물들이 진리와 선의 측면에서 비슷한 애착 안에 있는 듯 나타날는지 모른다, 그럼에도 그 애착들의 각 하나 하나는 근원 측면에서, 즉 목적 측면에서 비슷하지 않은 애착 안에 있다.
목적이 애착의 품질을 결정한다는 것, 즉 그것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거짓인지를 결정한다는 것, 그 이유는 인간의 목적이 그의 생명 자체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그의 생명 속에 있는 것, 즉 그의 사랑 속에 있는 것을 자기의 목적으로 지닌다. 자기 이웃의 선, 일반적 선, 교회와 주님의 왕국의 선이 목적일 때, 그의 혼의 측면에서 그는 주님의 왕국 안에, 고로 주님 안에 있다. 그 이유가 주님의 왕국은 인류의 선을 위함이 이 왕국의 목적(end)이고 이 목적을 위한 선용(use)의 왕국이기 때문이다 (3645항). 인간과 더불어 있는 천사 자체는 당사자의 목적들 안에만 있다. 주님의 왕국이 있는 목적 안에 인간이 있는 만큼에서, 천사들은 그와 더불어 즐거워진다, 그리고 당사자와 형제로서 자신을 결합시킨다; 그러나 인간이 자아를 위해 목적을 가지는 만큼에서 천사들은 그만큼 멀리 퇴거해 있는다, 그리고 지옥으로부터의 악령들이 가까이 다가온다, 그 이유는 지옥이 자기만을 위한 목적 안에 있기 때문이다. 이상 살핀 것만 가지고도 애착들이 어떤 근원으로부터 인지를 조사하고 아는 것은 얼마나 중요한 사항인지 모른다는 것, 이것은 오직 목적으로부터만 알려진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의 어머니의 오라버니 라반의 양떼. 이는 교회 그리고 그 교회로부터의 교리를 의미한다. 이는 “양떼”가 교회와 교리를 의미한다로부터 알게 된다. 라반이 여기서 “자기 어머니의 오라버니”라고 불리운 이유는 방금 위에서 설명했듯, 근원 측면에서 인정함이 마찬가지로 의미되었기 때문이다.

야곱은 가까이 왔다, 그리고 우물의 아구로부터 돌을 굴렸다. 이는 주님께서 자연적 선으로부터 말씀의 내면에 관한 것을 여셨다를 의미한다. 이는 야곱의 표현함이 주님의 신성한 자연 평면, 이 구절에서는 그 안에 있는 선 측면이다로부터; 그리고 “우물의 아구로부터 돌을 굴림”이 말씀의 내면들 측면에 관하여 말씀의 덮개를 벗기심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최고 내적 의미에서 주님께서 자연적 선으로부터 말씀의 내면들 측면에 관련하여 말씀의 덮개를 벗기셨다가 의미된다고 말한 이유는 여기서 야곱이 자연 평면에 있는 선을 표현하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야곱은 선을 표현함을 옷입는데, 그 이유는 지금 진리가 라헬이 표현하는 애착을 수단으로 그쪽으로 인접되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말씀의 내면 측면에서 말씀의 덮개를 벗기는 것은 선으로부터 있기 때문이다. 선이 말씀의 덮개를 벗기는 것이 분명한 것은, 그것이 각 인간 안에 있는 사랑으로부터 이고, 이 사랑 속에 있는 것을 인간은 보고, 그것을 진리들이라고 부르기 때문이다. 그렇게 부르는 이유는 그 진리가 자기의 사랑과 일치하기 때문이다. 각 인간의 사랑 안에 그의 생명의 빛이 있다, 그 이유는 사랑은 불꽃과 같아서 마치 불꽃으로부터 빛이 발출하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사랑 또는 불꽃의 경우 같이 인간의 진리의 빛도 있다. 선을 사랑함에 있는 이들은 이 사랑으로부터 있는 것, 결과적으로 말씀 안에 있는 진리들을 볼 수 있다, 그리고 그는 그가 선을 사랑하는 양과 질에 비례하여 진리들을 알게 된다 그 이유가 이런 경우 빛 또는 총명이 천국으로부터, 즉 천국을 통하여 주님으로부터 흘러들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인간이 생활 측면에서 선 안에 있지 않으면 그는 말씀의 내면들의 것을 볼 수 없고 인정할 수도 없다고 말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의 어머니의 오라버니 라반의 양떼에게 물을 먹였다. 이는 가르침을 받음(배움이 있음)을 의미한다. 이는 “양떼에게 물을 먹임”이 가르침을 주다를 의미함으로부터 알게 된다. 여기서 라반이 세 번째로 “그의 어머니의 오라버니”라고 불리워진 이유는 양떼와 라헬의 근원이 어딘지를, 그리고 이 근원으로부터 내면의 진리에 대한 애착과 교리가 온다는 것을 확실히 못박아 주시려는 의도 때문에서이다.

그리고 야곱은 라헬에게 키스했다. 이는 내면의 진리들을 향한 사랑을 의미한다. 이는 “키스함”이 애착으로부터 결합하고 하나로 됨을 의미한다는 것으로부터 분명해진다, 결과적으로 사랑으로, 그 이유는 사랑을 그 자체에만 주목하면, 애착으로부터 하나됨과 결합함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라헬의 표현이 내면의 진리에 대한 애착이다로부터 알려진다. 그러므로 “야곱이 라헬에게 키스했다”란 내면의 진리들을 향한 사랑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의 음성을 드높여 울었다. 이는 사랑의 열정을 의미한다. 그 이유는 “음성을 높혀 운다”가 사랑으로부터의 끓어오름이기 때문인다. “운다”는 슬픔쪽과 사랑쪽 모두에서 사용되는데, 그것들의 가장 높은 수준을 표시하기 위해서 이다.

12, 13절. 그리고 야곱은 라헬에게 자기는 그녀의 아버지의 형제이다는 것, 그리고 자기는 리브가의 아들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녀는 달려가서 그녀의 아버지에게 말했다. 13 그리고 라반은 그의 여동생의 아들 야곱에 관한 소식을 듣자 그를 만나러 달려갔다, 그리고 그를 껴안았다, 그리고 그에게 키스했다, 그리고 그를 그의 집으로 데려왔다. 그리고 그는 라반에게 모든 말을 했다. “그리고 야곱은 라헬에게 자기는 그녀의 아버지의 형제라고 말했다”란 “야곱”인 선과 “라반”인 선은 인척 관계임을 의미한다. “그리고 자기는 리브가의 아들”이란 이 인척들의 결합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녀는 달려가서 그녀의 아버지에게 말했다”란 내면의 진리들을 수단으로 인정함을 의미한다. “그리고 라반은 그의 여동생의 아들 야곱에 관한 소식을 듣자…”란 연계된 선에 관하여 인정함을 의미한다. “그는 그를 만나러 달려갔다”란 동의함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를 껴안았다”란 애착함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에게 키스했다”란 애착으로부터 오는 결합이 개시됨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를 자기 집으로 데려왔다”란 결합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는 라반에게 모든 말들을 했다”란 진리들로부터를 의미한다.

그리고 야곱은 라헬에게 자기는 그녀의 아버지의 형제(brother)라고 말했다. 이는 “야곱”인 선과 “라반”인 선은 인척 관계임을 의미한다. 이는 “말하다(tell)”의 의미가 알게 만든다 이다로부터; 그리고 야곱은 선을 표현한다로부터; 그리고 인척 관계임을 알게 한 상대방인 라헬이 내면의 진리에 대한 애착이다로부터; 그리고 “형제(brother)”가 여기서는 야곱이고, 선이다로부터; 그리고 여기서 라반인 그녀의 아버지의 의미 역시 선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 모두와 시리즈로부터 분명해지는 바, “야곱이 라헬에게 자기는 그녀의 아버지의 형제이다”고 말한 것은 “야곱”인 선과 “라반”인 선은 인척 관계임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인척 관계라고 선언한 것, 결과적으로 (“라헬”인) 내면의 진리에 대한 애착을 통하여 두 선의 결합이 있다고 말하면 아마 (여러분에게) 주제를 더 불분명하게 만들게 했을는지 모른다. 그 이유는 자연 평면의 선이 무엇인지를, 그리고 이 선이 합리성의 선과 구분된다는 것을 아는 자가 거의 없기 때문이다; 또는 공통의 줄기로부터의 방계적인 선(평행으로 있는 선, 또는 수평 계열에서의 선) 이 무엇인지를; 또는 내면의 진리에 대한 애착이 무엇인지를 아는 자가 너무 적기 때문일지 모른다, 자신 스스로의 탐구로 자신을 위해 이런 것들에 관한 어떤 생각을 획득하지 못한 이들은 어렴풋한 생각밖에 더 이상 받는 것이 없다, 만일 어떤 것이 있더라도 특징 열거 명세서에 불과할 것이다; 그 이유가 인간은 자기 자신으로부터 가지든가, 또는 자신 안에서 주제를 들여다 봄으로 자신을 위해 획득하기 보다는 타인으로부터 아주 많은 것을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나머지 모든 생각함은 사라져 버리더라도, 선과 진리의 인척 관계는 무수하다는 것, 그리고 천국 사회들은 그 관계에 일치하여 있다는 것 정도만이라도 알고 있다면 족하다고 여겨진다.
야곱은 자기가 라반의 누이동생의 아들임에도 자기를 “라반의 형제”라고 부른 이유는 선으로부터 일 경우, 모두는 종교상으로 형제(brethren)이기 때문이다. 라반 역시 야곱을 형제라고 불렀는데(15절), 이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다. 피가 친족 관계를 만들고, 결합하는 것이 선이다; 그 이유가 선은 사랑으로부터 있기 때문, 그리고 사랑은 영적 결합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고대 교회에서 선 안에 있는 모두를 형제라고 불렀고, 유태 교회에서 조차 그러했던 이유이기도 하다; 그러나 유태인의 교회가 다른 사람들을 천한 것으로 평가하고, 자신들만이 뽑힌 자로 상상했던 까닭에, 그들은 유태인으로 태어난 자 만을 형제라고 불렀다, 그리고 나머지는 동료, 또는 외국인으로 불렀다. 원시 기독 교회 역시 선 안에 있는 모두를 형제라고 불렀다, 그러나 후에는 자기들 모임에 들어 있는 이들만을 형제라고 불렀다. “형제(brother)”라는 단어가 기독인들 사이에서 선과 더불어 사라져버렸다, 그리고 진리가 선의 자리를, 신앙이 선행의 자리를 꿰차고 들어 앉았을 때, 그들은 선으로부터서 더 이상 서로를 종교상으로 형제라고 부르지 않고, 이웃들이라 불렀다. 이것 역시 선행의 삶이 없는 신앙의 교리로부터의 결과물이기도 하다. 하여 자신보다 사회적, 물질적 수준에서 더 낮다 싶은 이들과의 형제 관계는 상대자가 자기 아래 있는 듯 여기고 만다. 그 이유는 이런 인물에게 있는 형제 관계는 주님으로부터, 결과적으로 선으로부터 근원이 있지 않고 자아로부터, 결과적으로 명예나 이득쪽에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기는 리브가의 아들이다는 것. 이는 이 인척들의 결합을 의미한다. 이는 별도의 설명이 필요 없을 것이다; 그 이유가 야곱의 어머니이고 라반의 여동생인 리브가로부터의 결합이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녀는 달려가서 그녀의 아버지에게 말했다. 이는 내면의 진리들을 수단으로 인정함을 의미한다. 이는 “달려가서 말함”의 의미가 알게 만듦에 대한 애착이다로부터, 이 대목에서의 경우 인정함이다가 분명하다; 그리고 그녀의 “아버지”의 의미가 라반에 의해 의미된 선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인정함이 내면의 진리들을 수단으로 있었다는 것이 라헬에 의해 표현되었다는 것, 그녀는 내면의 진리에 대한 애착을 의미하고 있다. 고로 이로부터의 결과는 이 말들에 의해 내면의 진리들을 수단으로 인정함이 의미된다. 여기서의 경우 이렇다: 야곱이 표현하는 선(즉 자연 평면에서의 선)은 일반적인 모든 선과 같이 그것의 존재 측면은 알려져 있고, 인정되고 있다, 그러나 진리들을 수단으로 하지 않으면 그것의 품질 측면은 알려지거나 인정되어지지 않는다; 그 이유가 선은 선의 품질을 진리들로부터 받기 때문이다, 그리고 진리들을 수단으로 알려지고 인정되어지기 때문이다. 선은 진리가 그것 안에 심어질 때까지 선행의 선이라 불리워지지 못한다, 그것 안에 심어지는 진리 역시 마찬가지여서 그것 안에 있는 선 때문에 진리라 불려지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어느 한 인물의 선, 비록 이 선이 타인의 선과 매우 정밀하게 비슷하다 할지라도 절대로 똑같지는 않다; 다시 말해 누군가의 선이 제아무리 보편성을 지녔다 해도 무슨 선이든 타인의 선과 같을 수 없다는 말이다. 이는 애착의 많은 부분이 초상화되는 인간의 얼굴에서도 인류 전체를 망라해 똑같은 자는 없다. 진리들 자체는 마치 아름다운 얼굴을 구성하는 듯하다, 이 속의 선은 진리의 형체로부터 이다, 그러나 영향을 주는 것은 선이다. 모든 천사의 형체가 이와 같고, 만일 인간이 그의 내면의 생명으로부터 주님을 사랑함과 이웃을 향한 선행 안에 있다면 천사의 경우와 같을 것이다. 그가 이런 형체들로 창조되어지는 이유는 하느님의 형상과 모습 안으로 다시 태어나지기 때문이다. 거듭나진 이들이 이런 형체이고, 이는 육체 측면이 어떠했든 관계가 없다. 이로부터 분명한 바, 선에 의해 뜻해지는 것은 내면의 진리들을 수단으로 인정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라반은 그의 여동생의 아들 야곱에 관한 소식을 들었다. 이는 연계된 선에 관하여 인정함을 의미한다. 이는 내적 의미에서 이 말들의 의미로부터 결과된 것들로부터 같은 방식에서 분명해진다; 이는 서술된 것을 상호 인정함이다. 여기서 취급한 주제는 선을 선택함이 분명하고, 선택함은 선과 진리의 결혼에 앞서 진행된다.

그는 그를 만나러 달려갔다. 이는 동의함을 의미한다. 이는 “만나려 달려감”의 의미가 동의함이다가 분명한데, 그 이유는 이 행동에서 결합이 내다보이기 때문이다; 이에 관하여는 아래에서 계속된다. 이것이 동의함, 또는 결합 같은 것임은 많이 알려진 상태이다.

그리고 그를 껴안았다. 이는 애착함을 의미한다. 이는 “껴안다”의 의미가 애착함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 이유가 내면의 애착이 이런 제스츄어로 외적 표현을 취하고야 말기 때문이다. 또한 모든 애착은 그것에 상응하는 신체상의 제스츄어를 가지고 있기도 하다. 일반적으로 애착은 껴안음에 의해 표현된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지식이다.

그리고 그에게 키스했다. 이것이 개시됨을 의미하는 것은 “키스함”이 애착으로부터의 결합이다로부터 분명해진다, 여기서 이 결합쪽으로 개시됨이 의미되는데, 그 이유는 결합에 앞서 진행되는 것이 개시됨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를 자기 집으로 데려왔다. 이는 결합을 의미한다. 이는 “집으로 데려옴”의 의미가 자신에게 있음이다로부터; 그 이유가 내적 의미에서 자신이 “집”이라 불리우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이 선으로부터, 이 선은 “집”에 적절히 어울린다. 이 구절의 경우 집의 의미는 라반에 의해 의미되는 선이다; 그러므로 “집으로 데려옴”은 결합이 의미된다. 여기서 “야곱”인 자연 평면의 선과 “라반”인 방계적인 선이 결합하는 과정이 내적 의미에서 충분히 묘사되어 있다. 아래 이어지는 다섯 가지가 이 결합 과정을 구성한다; 즉 서로가 인정함, 동의함, 애착함, 개시함, 그리고 결합함이다, 서로 인정함은 라헬이 자기 아버지에게 달려가 말하고, 라반이 자기 여동생의 아들에 관한 말을 듣는 것에 의미되어 있다; 동의함은 라반이 그를 만나려 달려옴에 의해 의미되었다; 애착함은 라반이 그를 껴안음에 의해; 개시함은 그가 그에게 키스함에 의해; 결합은 그가 그를 집으로 데려옴에 의해 의미되었다.

그리고 그는 라반에게 모든 말들을 했다. 이는 진리들로부터를 의미한다. 즉 거기로부터 인정함, 동의함, 애착함, 개시함, 결합함이라는 모두가 있었다는 것이 시리즈로부터 확인된다, 그리고 내적 의미에 따라 설명된 말들로부터, 이것이 결말이다.

14, 15절. 그리고 라반이 그에게 말했다, 너는 정녕 내 뼈요 내 살이다. 그리고 그는 그와 함께 한 달을 지냈다. 15 그리고 라반은 야곱에게 말했다, 네가 내 친척이라 해서 네가 아무 댓가도 없이 봉사하느냐? 무엇이 너의 댓가인지 나에게 말하라. “그리고 라반은 그에게 말했다, 너는 정녕 내 뼈요 내 살이다”란 진리들에 관해서와 선들에 관해서 합쳐지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는 그와 함께 한 달을 지냈다”란 삶의 새로운 상태를 의미한다. “그리고 라반은 야곱에게 말했다, 네가 내 친척이기 때문에…”란 그들은 선으로부터 혈육 관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를 의미한다. “그렇다고 해서 아무 댓가도 없이 봉사하느냐? 너의 대한 댓가가 무엇인지 내게 말하라”란 결합이 반드시 수단이어야만 함을 의미한다.

그리고 라반은 그에게 말했다, 너는 정녕 내 뼈요 내 살이다. 이는 진리들에 관해서와 선들에 관해서 결합되었다를 의미한다. 이는 “너는 내 뼈이고 내 살이다”라는 말의 의미가 결합이다로부터 분명해진다. 고대인들은 한 집 속에 있는 자를 두고, 또는 한 가족을 두고, 또는 어떤 혈족 관계에 있는 자를 두고 “내 뼈이고 내 살”이라는 말의 형체를 사용해 표현했다; 이로부터 이 말은 결합을 의미했다. 이 결합이 진리들에 대해서와 선들에 대해서를 의미하는 이유는 모든 영적 평면의 결합은 이 둘로부터 결과되고, 자연 평면의 모든 결합도 이 둘에 관련을 맺고 있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뼈(bone)와 살(flesh)”에 의해 인간의 자기 자신(man’s own)이 의미된다; “뼈”에 의해서는 이해력 측면에서의 자기 자신이, “살”은 의지력 측면에서의 자기 자신이 의미된다; 고로 “뼈”에 의해서는 진리 측면에서 자기 자신인 것을, 그 이유는 이것이 이해력으로부터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살”에 의해서는 선 측면에서 자기 자신인 것이, 그 이유는 이것이 의지력으로부터 있기 때문이다.
일반적 측면에서 인간의 자기 자신에 주목해보면, 여기에는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지옥적인 것, 또 하나는 천국적인 것이다; 지옥의 것은 지옥으로부터 인간에 의해 받아진다, 그리고 천국적인 것은 천국으로부터, 즉 천국을 통하여 주님으로부터 이다; 그 이유가 모든 악, 뿐만 아니라 악에서 파생되는 모든 거짓은 지옥으로부터 흘러들기 때문이다; 그리고 모든 선, 그리고 선에서 파생되는 진리는 주님으로부터 흘러든다. 이렇다는 것이 신앙의 교리로부터 인간에게 알려져 있기는 하지만, 이를 믿는 자는 만 명당 한 명이 있을지 없을지 하다. 이런 이유로 인간은 지옥으로부터 흘러드는 악이 자신에 잘 어울리는 것으로 판단하고 그것을 자기 자신으로 만들고, 주님으로부터 흘러드는 선은 당사자에게 감명을 주지 못해 결국 당사자의 자기 자신의 것으로 귀속되지 못한다. 인간이 악은 지옥으로부터, 선은 주님으로부터 각각 흘러든다는 것을 믿지 않는 이유는 당사자 자신이 자기 사랑 안에 있고, 그리고 자기 사랑함이 모든 것을 운반하는 것이라고 믿기 때문, 하여 모든 것이 당신의 안쪽으로 흘러든다고 말해주면 극도로 분노하기 까지 할 정도이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인간의 자기 자신 속의 모두에는 악밖에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이 악은 지옥으로부터, 선은 주님으로부터 이다고 믿는 것은 그가 자기를 사랑함 안에 있지 않고, 이웃을 향한 사랑과 주님을 사랑함 안에 있다는 사실로부터 온다. 그 이유가 이 두 사랑이 이런 믿음도 동반해주기 때문이다. 고로 인간은 주님으로부터 천국적인 자기 자신을 받는 것이다.
이 자기 자신은 두 상반된 의미에서 “뼈와 살”에 의해 의미된다; 결과적으로 말씀에서 “뼈”에 의해서 진리가, 반대적 의미로는 거짓이, 그리고 “살”에 의해서는 선이, 반대적 의미에서는 악이 의미된다. “뼈”가 이런 의미를 가지는 것을 아래 구절들에서 보여질 것이다. 이사야서에서:
여호와께서 너희를 계속적으로 인도하실 것이다, 그리고 너희 혼이 가뭄에서 만족할 것이 다, 그리고 네 뼈들을 튼튼하게 만드실 것이다; 하여 너는 물을 댄 동산 같이 있을는지 모 른다 (이. 58:11);
위에서 “뼈를 튼튼하게 만듦”에 의해 이해력 측면의 자기 자신을 살아 있게 만드시는 것이, 즉 이해력을 총명으로 계발해주심이 의미된다; 그리하여 말해진다, “너는 물을 댄 동산 같을 것이다.” 다시:
그때 너희는 볼 것이다, 그리고 너의 심장은 기뻐 환호할 것이다, 그리고 너의 뼈들은 풀같 이 번성할 것이다 (이. 66:14);
“뼈들이 풀같이 번성함”은 앞 구절과 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
예레미야애가서에서:
그녀의 나지르인(Nazirite)들은 눈보다 더 희고(whiter), 그들(의 살결)은 젖보다 더 희다 (fairer); 그들의 뼈들은 보석(gem)들보다 더 붉고, 광을 낸 청옥(sapphire) 이었다; 그의 형체는 검은 것보다 더 어둡고, 그들은 거리들에서 알아주지 않는다; 그들의 피부는 그들의 뼈에 딱 달라붙어, 시들어져 있다; 이것은 나무 같이 되어 있다 (애. 4:7, 8);
“나지르인”은 천적 수준의 인간을 표시한다; “눈보다 더 희고, 젖보다 더 살결이 희다”는 것은 천적 수준의 진리 안에 있다를 표시한다; 그리고 이 진리가 선을 사랑함으로부터 이기 때문에, “그들의 뼈는 보석들보다 더 붉다”하고 말해진다. “그들의 피부가 그들의 뼈에 달라붙었다”에 의해서 사랑의 천적 수준의 것들이 바뀐 상태, 즉 뼈에 살이 없는 상태, 즉 더 이상 어떤 선도 없는 상태가 서술되고 있다; 이럴 경우 모든 진리는 뼈에 붙어버린 피부같이 된다; 이것이 “시들어지고 나무 같이 되었다”로 말해졌다.
에스겔서에서:
반역적인 가문을 향하여 비유로 발음하라, 그리고 그들에게 말하라, 고로 주 여호비께서 말 하신다, 큰 솥을 걸어라, 그것을 장치하라, 그리고 그것 안으로 물을 부어라; 그것 안으로 조각들을, 모두 각각의 좋은 조각, 넓적 다리와 어깨를 그러모우라; 그것을 골라 모은 뼈들 로 채워라; 양떼로부터의 좋은 것을 가져와라; 그리고 그것 아래 뼈들의 불난로가 있게 하 라; 뼈 또한 그것의 한가운데에서 삶아지게 하라 (겔. 24:3-5, 10);
위에서 “큰 솥”은 선과 진리에 제공된 폭력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이것이 “피의 도성”이라 불리우고 있다 (6절); “큰 솥 안으로 모은 조각들, 좋은 조각, 넓적 다리와 어깨”는 살들이고, 이것에 의해 선들이 뜻해진다; 큰 솥을 채운 “골라모은 뼈들”은 진리들을 표시한다; “뼈들의 불난로”는 진리에 대한 애착이다; “뼈들이 그것의 한가운데에서 삶아짐”은 진리들에 제공된 폭력을 표시한다. 아마 모든 이가 이 구절 안에 신성한 비밀들이 저장되어 있다는 것 정도는 눈치채질 것이다. 그리고 이 비밀들을 알려면, “큰 솥,” “단지,” “조각들,” “넓적 다리와 어깨,” “골라모은 뼈들,” 그리고 “삶는 것”의 내적 의미가 무엇인지를 알지 못하면 결코 알아질 수 없다는 것도 짐작될 것이다. 미가서에서:
공정함을 아는 것은 너를 위해서가 아니더냐? (너는) 선한 자를 미워하고 악한 자를 사랑 한다; 너는 그들로부터 그들의 피부를 잡아뜯고, 그들의 뼈로부터 살을 발라낸다; 너는 내 백성의 살을 먹어치웠다, 그리고 그들로부터 그들의 피부를 벗겨냈다, 그리고 그들의 뼈들 을 부러eM렸다, 그리고 그것들을 나누되 마치 솥단지 안으로 넣을 때같이, 그리고 살을 큰 솥 안으로 넣을 때 나누듯이 하였다 (미. 3:1-3);
위 구절도 앞 구절의 의미와 비슷하다.
에스겔서에서:
그는 나를 여호와의 영 안에서 데려왔다, 그리고 나를 계곡의 한가운데, 뼈들이 가득한 그 아래에 내려 놓았다. 그리고 그가 나에게 말했다, 이 뼈들이 살아 있느냐? 그가 나에게 말 했다, 이 뼈들에게 예언하라, 그리고 그들에게 말하라, 오 너희 마른 뼈들아 여호와의 말씀 을 들어라; 고로 주 여호비께서 이 뼈들에게 말하신다, 잘 보아라, 나는 너희가 살아 있도 록 너희 안으로 숨이 들어가게 할 것이다; 나는 너희 위에 힘줄을 놓을 것이다; 그리고 살 이 너희에게 오도록 할 것이다, 그리고 피부로 너를 덮을 것이다, 그리고 네가 살도록 너를 숨쉬게 할 것이다. 나는 예언했다, 그리고 뼈들이 다함께 와서 뼈에 뼈가 (붙었다); 그리고 내가 바라보니, 오, 그것들에 힘줄이 있었다, 그리고 살이 올라왔다, 그리고 피부가 위에서 그것들을 덮었다; 그리고 그것 안에 숨이 없었다; 그리고 숨이 그것들에게 왔다, 그리고 그 것들이 살아났다, 그리고 자기들의 발로 섰다 (겔. 37:1, 3-8, 10).
위 구절이 취급한 일반적 주제는 이방인들 사이에서 다시 교회가 설립되는 것이다; 그리고 특수적으로는 인간의 거듭남이다: “마른 뼈들”은 이해력 측면에서의 자기 자신, 이것은 주님으로부터 선의 생명을 받기 전 죽어 있는 것, 그러나 죽은 것을 살게 만드심이다; “주님이 뼈들 위에 오게 하시겠다는 살”은 의지력 측면에서의 자기 자신, 이것은 천국적인 자기 자신, 또는 천적 수준의 자기 자신이라 불리우는데, 선을 의미한다; “숨”은 주님의 생명이다, 그리고 이것이 인간으로 자기 자신으로부터 뜻하고 행동하는 듯 여겨지게 인간의 선 안으로 흘러들 때, 그때 인간의 선은 생기 있어지고, 선으로부터 진리가 살아 움직인다, 하여 마른 뼈들로부터 사람이 만들어진다.
다윗서에서:
모든 나의 뼈들이 느슨해졌다, 나의 심장은 밀납 같이 되어진다, 나는 모든 나의 뼈들을 셀 수 있다. 그들은 내 의복을 그들 사이에서 나누었다, 그리고 내 속옷을 두고는 그들은 제비 뽑기를 했다 (시. 22:14, 17, 18);
위 구절의 주제는 신성한 진리들 측면에서 주님의 시험들이다, 주님의 자기 자신인 것이 “내 뼈들”이라 불리운다; 그리고 신성한 선 측면에서 주님의 자기 자신 인 것은 “내 심장”이라 불리우고 있다 그리고 “뼈들”이 이런 진리들을 의미하기 때문에, 뼈들을 세는 것은 추론들과 거짓들을 통하여 진리들을 흐트러지게 하고 싶은 바램을 표시한다. 그러므로 즉각 뒤잇는 말은, “그들은 내 의복을 나누었다, 내 속옷을 두고는 제비뽑기를 했다”이다; 그 이유가 “의복”은 진리들, 그러나 외면의 진리들을 의미한다; “그것들을 나누고 속옷을 제비뽑는 것”도 마찬가지 것을 포함하는데, 마태복음서 27장 35절에서도 그러하다. 다시:
내 혼이 여호와를 드높입니다; 그것은 그분의 구원하심을 기뻐할 것입니다, 모든 나의 뼈들 이 당신 같은 분이 누가 있는가? 하고 말할 것이다 (시. 35:9, 10);
위 구절에서 “뼈들”이 이해력 측면에서의 자기 자신을 영적 의미에서 표시하는 것은 분명하다. 다시:
당신은 나로 환희와 즐거움을 듣게 해주실 것입니다; 당신이 상하게 한 뼈들이 (나를) 드 높일 것입니다 (시. 51:8);
“상해진 뼈들이 드높일 것”이란 시험들 이후 진리들을 통하여 재창조됨을 의미한다.
“뼈”가 이해력 측면에서의 자기 자신, 즉 진리 측면에서 자기 자신, 그리고 최고 의미에서 주님의 자기 자신인 신성한 진리가 의미되었기에, 유월절 어린 양의 뼈를 부러뜨리지 말라고 명령되었다; 이에 관해 모세의 책에서:
그것은 한 집 안에서 먹어질 것이다; 너는 고기를 집으로부터 밖으로 운반하지 말라; 너희 는 어린 양의 뼈를 부러뜨리지 말라 (출. 12:46).
그리고 다른 책에서:
그들은 그것을 아침까지 남아 있게 말 것이다, 거기로부터 뼈를 부러뜨리지 말라
(민. 9:12).
“뼈를 부러뜨리지 않는 것”은 최고 의미에서 신성으로부터의 진리들에 폭력을 행사하는 것; 그리고 표현적 의미에서, 어떤 선이든 관계없이 선으로부터의 진리라면 그것에 폭력을 행사하지 않는 것이다; 그 이유가 선의 품질과 선의 형체가 진리들로부터 있고, 진리는 선의 받침목, 마치 뼈가 살에 형체를 주는 것 같기 때문이다.
신성한 진리 자체인 말씀이 죽은 자를 살아나게 한다는 것이 엘리사의 무덤에 죽은 자를 던졌는데, 죽은 자가 엘리사와 접촉되자 되살아나서 자기 발로 서는 기록에 의해 표현되어졌다 (왕하. 13:21). (엘리사가 신성으로부터의 진리 측면에서의 주님을 표현한다에 대하여는 2762항을 참조하라.) 반대적 의미에서 “뼈들”은 인간의 자기 자신으로부터인 거짓을 의미하는데, 아래 구절을 읽어보자. 예레미야서에서:
그 때에 그들은 유다의 왕들의 뼈들, 그의 제 일인 자들의 뼈들, 그리고 성직자들의 뼈들, 그리고 예언자들의 뼈들, 그리고 예루살렘 주민의 뼈들을 그들의 묘지에서 꺼내올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자기들이 사랑하고 섬기던 태양, 달, 하늘의 모든 군대 앞에 뿌릴 것이다 (예. 8:1, 2).
에스겔서에서:
나는 그들의 우상들 앞에 이스라엘의 아들들의 시체를 놓아둘 것이다, 그리고 나는 너희 제단을 빙둘러 너희의 뼈들을 뿌릴 것이다 (민. 24:8).
모세의 책에서:
하느님이 그를 이집트로부터 데려왔다; 그는 외각수의 힘을 지녔다; 그는 그의 적들인 나라 들을 먹어치울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뼈들을 부러뜨릴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활을 파괴할 것이다 (민. 24:8).
열왕기하서에서:
요시아왕은 기둥들을 조각으로 부수었다, 그리고 작은 숲들을 베어버렸다, 그리고 그들의 장소를 인간의 뼈로 채웠다; 그는 무덤으로부터 뼈를 가져갔다, 그리고 그것들로 그것을 더럽게 하도록 제단 위에서 불태웠다; 그는 거기 있던 모든 성직자들을 재단 위에 제물로 바쳤다, 그리고 사람의 뼈들을 그것들 위에서 태웠다 (왕하. 23:14, 16, 20).
모세의 책에서:
들판의 표면 위에 있는 칼로 죽임을 당한 자, 또는 죽어 있는 자, 또는 인간의 뼈, 또는 무 덤을 만진 혼은 칠 일 동안 불결할 것이다 (민. 19:16, 18).
“뼈들”이 그들이 있는 거짓들을; “무덤들”이 그들이 있는 악들을 의미하기에, 그리고 위선이 선같이 바깥쪽으로 나타나나 안쪽으로는 거짓과 모독된 것으로 더럽혀져 있기에, 주님께서 마태복음서에서 말하신다:
너희에게 화가 있을 것이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아, 위선자들아! 그 이유가 너희는 너희 자신을 회칠한 무덤 같이 만든다, 이것은 실로 바깥쪽으로는 아름답게 나타나나, 안쪽은 죽 은 인간의 뼈와 불결함으로 가득하다; 너희 역시 바깥쪽으로는 인간들에게 정의로운 자 같 이 나타나나, 너희의 안쪽은 위선과 불법으로 가득 차 있다 (마. 23:27, 28).
위 구절로부터도 분명한 것은 “뼈들”에 의해 진리와 거짓 측면 모두에서 이해력 측면의 자기 자신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살(flesh)”에 주목해보자, 살은 최고 의미에서는 주님의 신성한 인간 속의 자기 자신을 의미하고, 이는 신성한 선, 그리고 관계적 의미에서 이것은 신성한 인간, 즉 그분의 신성한 선에 의해 살아있게 만들어진 인간의 의지력 측면의 자기 자신을 의미한다. 이 자기 자신은 천국의 자기 자신이라 불리우고, 이것은 본질적으로 선 안에 있고, 이 선으로부터 진리 안에도 있는 이들에게 꼭 어울리는 주님만의 것이다. 이런 자기 자신을 천국들 안에 있는 천사들이 지니고 있고, 인간의 경우, 그의 내면들의 측면이, 즉 그의 영의 측면이 주님의 왕국 안에 있는 이들도 지닌다. 그러나 반대적 의미에서, “살”은 인간의 의지력 측면의 자기 자신을 의미한다, 이 자기 자신은 본질적으로 악밖에 없다, 그리고 주님에 의해 생기 있지 않을 경우, “죽어 있다”라고 일컬어진다, 고로 인간 자체는 죽어 있다고 말해진다.
최고 의미에서 “살”은 주님의 신성한 인간의 자기 자신, 고로 그분의 선 측면의 자기 자신이다는 것은 주님의 말씀으로부터 분명해진다. 요한복음서에서:
예수께서 말하셨다, 나는 천국으로부터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만일 누군가가 이 빵을 먹는다면 그는 영원히 살 것이다; 그리고 내가 주는 빵은 내 살이다, 이것을 나는 세상의 생명을 위하여 줄 것이다. 그러므로 유태인들은 서로가 승강이하며 말하기를, 어떻게 이 사 람이 자기의 살을 먹으라고 우리에게 줄 수 있단 말이냐? 그러므로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 하셨다, 참으로, 참으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사람의 아들의 살을 먹지 않으면, 그리고 그분의 피를 마시지 않으면, 너희는 너희 안에 생명을 가지지 못한다; 내 살을 먹 고, 그리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원한 생명을 가진다, 그리고 나는 그를 마지막 날에 일 으킬 것이다; 그 이유가 내 살이 참으로 음식이고 내 피는 참으로 음료이기 때문이다; 내 살을 먹는 자, 그리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주하고, 나는 그 사람 안에 거주한 다. 이것은 천국으로부터 내려온 빵이다 (요. 6:51-56, 58);
위에서 “살”은 주님의 신성한 인간의 자기 자신, 즉 신성한 선 측면에서의 자기 자신이다는 것이 아주 분명하다; 그리고 이것이 성만찬에서 “몸”이라 불리우고 있다. 성만찬에서 “몸” 또는 “살”은 신성한 선을 의미한다; 그리고 “피”는 신성한 진리를 의미하는데 이미 살핀 것을 참고 해도 될 것이다; 그리고 “빵”과 “포도주”는 “살”과 “피”와 같기 때문에, 즉 “빵”은 주님의 신성한 선을, 그리고 “포도주”는 그분의 신성한 진리를 의미하기 때문에, 빵과 포도주를 살과 피를 대신하도록 명령된 것이다. 이것이 주님께서 “나는 살아 있는 빵이다; 내가 주는 빵은 내 살이다; 내 살을 먹는 자, 그리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주하고 나는 그 사람 안에 거주한다; 이것은 천국으로부터 내려온 빵이다”라고 말하신 이유이다.
같은 것이 유태인의 교회에서는 아론, 아론의 아들들, 제물을 바친 자, 깨끗한 자가 제물의 살을 먹도록 명령됨으로, 그리고 이 행위는 거룩함이다는 것을 명령함으로 표현되어졌다 (출. 12:7-9; 29:30-34; 레. 7:15-21; 8:31; 신. 12:27; 16:4). 그러므로 만일 불결한 인물이 이 살을 먹었다면, 그는 자기 백성으로부터 잘리워져야 했다 (레. 7:21). (이 제물이 빵이라 불리운 것은 2165항을 참조하라.) “살”은 “거룩함의 살”이라 불리웠다 (예. 11:15; 학. 2:12), 그리고 “주님의 왕국에 있는 식탁 위에 있던 공물(offering)의 살”은 에스겔서 40:43을 보라, 거기서 새 성전이 묘사되는데, 이를 수단으로 주님의 왕국에서 그분을 예배함이 분명하게 의미되고 있다.
관계적 의미에서 “살”은 주님의 신성한 선에 의해 살아 있게 만들어진 인간의 의지 측면에서의 자기 자신을 의미한다는 것을 아래 구절로부터 알게 된다. 에스겔서에서:
나는 그들에게 하나의 심정을 줄 것이다, 그리고 나는 너의 한가운데에 새로운 영을 놓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들의 살로부터 돌로 된 심정을 옮기고 살로 된 심정을 그들에게 줄 것이다 (겔. 11:19; 36:26);.
“그들의 살로부터 돌로 된 심정”은 살아 있지 않은 의지와 자기 자신을 표시한다; 그리고 “살로 된 심정”은 살아 있게 된 의지와 자기 자신이다. 다윗서에서:
오 하느님 당신은 나의 하느님이십니다; 아침에 나는 당신을 찾습니다; 내 혼이 당신을 갈 망합니다, 내 살이 마른 토지에서 당신을 갈망합니다; 그리고 나는 물이 없어 지쳐있습니다 (시. 63:1).
다시:
내 혼이 여호와의 뜰을 갈망합니다; 내 심정과 내 살이 살아계신 하느님에게 환희를 위해 외칩니다 (시. 84:2).
욥기서에서:
나는 나를 되찾으시는 분을 알았습니다, 그분은 살아 계십니다, 그리고 마지막에서 그분은 먼지 위에서 일어나실 것입니다; 그리고 후에 이런 것들이 내 피부를 에워쌌습니다. 그리고 내 살로부터 나는 하느님을 볼 것입니다; 이 분을 나는 나 자신을 위하여 볼 것입니다, 그 리고 나의 눈이 바라볼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것은 아닙니다 (욥. 19:25-27).
“피부를 에워싼 것”은 자연 평면과 더불은 것, 즉 인간이 사후 자기와 함께 지니는 것을 표시한다; “살로부터 하느님을 보는 것”은 자기 자신이 살아있게 됨을 표시한다; 그러므로 그는 말한다, “이 분을 나는 나 자신을 위해, 그리고 나의 눈이 바라볼 것이다; 다른 것은 아니다.” 살이 인간의 자기 자신을 의미했다는 것은 교회들에 알려져 있기에, 그리고 욥기서가 고대 교회의 책이다는 것도 알려져 있기에, 그러므로 그는 이런 사항들을 의미적 측면에서 말했다. 이는 다른 구절 역시 마찬가지이고, 또한 그때 당시의 관습적인 것과 일치하여 말한 것이다; 그런데 이런 구절로부터 연역하여(추론하여), (세상의 종말에서) 죽은 몸 자체는 네 바람들로부터 (사방으로부터) 수집하여져서 다시 일어날 것이라고 외치는 이들(목사들)은 말씀의 내적 의미에 친숙해 있지 않다. 내적 의미를 아는 이들은 자기들은 몸과 더불어 다른 삶에로 건너간다는 것을 알고 있다. 단지 더 순수해진 몸이다는 것이 다른 점이다; 그 이유가 다른 삶에는 더 순수해 있는 몸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그들은 서로를 보고, 함께 대화하고, 그리고 현재의 몸 안에서 같은 모든 감각을 향유하기 때문이다, 단지 거기서는 아주 더 정교하다는 것이 다를 뿐이다. 인간이 땅에서 지니는 몸은 땅에서의 사용을 위해 있다, 그리고 그러므로 뼈들과 살로 구성된다; 그리고 영이 다른 삶에서 지니는 몸은 그 삶의 사용을 위해 고안되어져 있다, 그리고 뼈들과 살로 구성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들에 상응하는 것들로 구성된다.
반대적 의미에서 “살”은 인간의 의지 측면의 자기 자신, 이것은 본질적으로 악밖에 없다는 것을 아래 구절로부터 분명해진다. 이사야서에서:
그들은 모두 각각의 인간이 자기 자신의 팔의 살을 먹을 것이다 (이. 9:20).
다시:
나는 그들의 자신의 살을 가지고 압제자를 먹일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새 포도주와 더불 어서 같이 그들 자신의 피를 마실 것이다 (이. 49:26).
예레미야서에서:
나는 그들의 아들들의 살을 가지고, 그리고 그들의 딸들의 살을 가지고 그들을 먹일 것이 다, 그리고 그들은 모두 각각이 그의 동료의 살을 먹을 것이다 (예. 19:9).
스가랴서에서:
남아 있는 이들 모두 각각은 또 다른 자의 살을 먹게 하라 (슥. 11:9).
모세의 책에서:
나는 너를 네 죄들을 위해 일곱 배나 징계할 것이다; 그리고 너희는 너의 아들들의 살을 먹을 것이다; 그리고 너의 딸들의 살을 너희는 먹을 것이다 (레. 26:28, 29).
인간 의지 측면의 자기 자신, 고로 인간의 본성이 묘사되어 있다. 그 이유가 인간 본성은 악과 악에서 파생되는 거짓밖에 더 없기 때문이다; 고로 진리들과 선들을 미워할 수밖에 없는데, 이것이 “그의 팔의 살을, 아들들과 딸들의 살을, 그리고 동료의 살을 먹는다”에 의해 의미되고 있다.
계시록서에서:
나는 태양에서 서있는 천사를 보았다; 그리고 그는 큰 음성으로 외쳤다, 하늘의 한가운데에 서 날고 있는 모든 새들에게 말하기를, 다함께 자신들을 그러모아 위대하신 하느님의 만찬 으로 오라, 하여 너희는 왕들의 살을, 그리고 장군들의 살을, 그리고 용사들의 살을, 그리고 말들의 살을, 말 위에 앉은 이들의 살을, 그리고 자유한 자와 억매인 자 모두의 살을, 작은 자와 큰 자 모두의 살을 먹어라 (계. 19:17, 18; 겔. 39:17-20).
위 구절에 있는 것들, 즉 “왕들의 살, 장군들의 살, 용사의 살, 말의 살, 말 위에 앉은 자의 살, 자유한 자와 억매인 자 모두의 살”이 이것 그대로를 의미하지 않을 것임은 누구나 짐작될 것이다; 고로 “살”이 다른 것을 의미한다는 것은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았다. 거짓들로부터 있는 악들, 그리고 악들로부터 있는 거짓들, 이 모두가 인간의 의지 측면의 자기 자신으로부터 이다는 것은 몇 개의 표현들로부터 명백해진다.,
내적 의미에서 인간의 이해력의 측면으로부터 결과하는 거짓이 “피”이다, 그리고 그의 의지 측면으로부터 결과하는 악은 “살”이다, 그러므로 거듭나지는 인간에 관하여 주님께서 말하신다:
그분을 받아들인 많은 이들, 이들에게 그분은 하느님의 아들이 되는 능력을 주었다, 그분의 이름을 믿는 자에게조차 (주셨다), 이는 피로부터도 아니고, 육(살)의 의지로부터도 아니고 하느님으로부터 태어나진 것이다 (요. 1:12, 13).
그런고로 일반적 측면에서 살(육)은 모두 각각의 인간을 뜻한다; 그 이유가 우리가 인간이다 말하든지, 인간의 자기 자신이라 말하든지 실상 같은 것을 두고 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최고 의미에서 “살”은 주님의 신성한 인간을 의미한다는 것이 위에 인용한 구절에서, 그리고 아래 구절에서 분명해진다:
말씀이 육(살)을 만들었다, 그리고 우리들 사이에서 거주하셨다, 그리고 우리는 그분의 영 광을, 아버지의 독생자로부터의 영광을 바라보았다 (요. 1:14).
이 “살”로부터 모든 살은 살아 있게 된다, 즉 말하자면, 모두 각각의 인간은 그분의 사랑을 자기 것 되게 함을 수단으로 주님의 신성한 인간으로부터 살아 있어진다, 이 자기 것 되게 함이 “사람의 아들의 살을 먹는다”에 의해 의미되고 있다 (요. 6:51-58), 그리고 성만찬에서 “빵”을 먹음에 의해서도 의미된다; 그 이유가 “빵”은 “몸”, 또는 “살”이기 때문이다 (마. 26:26, 27).

그리고 그는 그와 함께 날들의 한 달을 거주했다. 이는 삶의 새로운 상태를 의미한다. 이는 “거주함”이 생활하다를 의미함으로부터; 그리고 “날들의 한 달”이 새로운 상태를 의미한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러나 “해”, “달”, “날” 같이 단수로 언급될 때, 이것은 전체 상태를 아우르는 말이다; 고로 진행하는 것의 끝과 그 뒤를 잇는 것의 시작을 아우르는 말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달”은 단수인 바, 진행되는 것의 끝과 이어지는 상태의 시작, 즉 새로운 상태를 의미한다. 이는 다른 구절에서도 발견된다. 이사야서에서:
드디어 달로부터 그것의 달까지, 그리고 안식일로부터 안식일까지에 이르러 모든 살(육체) 이 자신을 구부려 내 앞에 절할 것이다, 여호와께서 말하신다 (이. 66:23).
계시록서에서:
그는 나에게 수정처럼 맑은, 생명의 물의 순수한 강을 보여주었다, 이 강은 하느님의 왕좌 와 어린 양의 왕좌로부터 나오고 있다. 그것의 거리의 한가운데에서, 그리고 강의 이쪽과 저쪽에서 생명의 나무가 있었다, 그 나무는 열 두 열매들을 맺고, 매 달 그것의 열매를 생 산하고 있다 (계. 22:1, 2);
“그것의 열매를 매 달 생산함”은 선을 받음의 측면에서, 그리고 그로부터 쓸모 있음이 결과하는 측면에서 언제나 새로운 상태에 있음을 의미한다.
모세의 책에서:
레위인은 그들의 아버지의 가문에 따라, 그들의 가족에 따라 한 달 이상 된 모든 남성의 숫자를 세어라. 이스라엘의 첫 출생인 모든 남성은 한 달 이상 된 자를 세어라, 그리고 그 들의 이름들의 숫자를 가져와라 (민. 3:15, 40);
진행되는 것의 끝과 종속되는 상태의 시작(즉 새로운 상태)이 “달”에 의해 의미되었기 때문에 “한 달 이상 된 남성”으로부터 계수를 시작하라고 명령된 것이다. 다시:
만일 네가 포로들 사이에서 형체에서 아름다운 여인을 본다면, 그리고 네가 그녀에게 바램 을 가진다면, 그래서 그녀를 아내로 네게로 데려간다면, 그녀는 그녀의 포로된 의복을 벗게 하고, 네 집에 앉게 할 것이다, 그리고 그녀의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날들의 한 달을 곡할 것이다, 그리고 그 후에 너는 그녀에게 갈 것이다, 그리고 그녀를 알 것이다; 그리고 아내 로 네게 있을 것이다 (신. 21:11, 13);
위의 “날들의 한 달”은 진행되는 것의 끝, 그리고 종속되는 것, 또는 새로운 상태의 시작을 명백하게 표시한다.

그리고 라반은 야곱에게 말했다, 네가 내 형제이기 때문에… 이는 그들은 선으로부터 혈육 관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를 의미한다. 이는 라반의 표현이 공통의 줄기로부터의 방계적인 선이다로부터; 그리고 야곱의 표현함이 자연 평면의 선이다로부터; 그리고 “형제”의 의미가 선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여기서의 경우 “형제”의 의미는 근친 관계에서의 선이다, 그 이유는 이것이 라반에 의해 야곱에게, 결과적으로 선에 의해 선에게 말해진 것이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모든 혈연의 친척 관계는 그것의 근원이 선으로부터 파생된다, 그 이유가 선이 사랑으로부터 있기 때문이다. 내려가는 계열에서 사랑의 가장 가까운 등차는 혈연 친척 관계라고 불리운다, 그리고 적절하게는 “형제”에 의해 이해된다. 영계에서, 또는 천국에서는 주님을 사랑함으로부터의 것과 이웃을 향한 사랑으로부터의 것, 같은 말로 선으로부터의 것 외에 다른 친척 관계, 인척 관계는 없다는 것이 나에게 보여준 사실로부터 명백해졌다, 즉 천국을 구성하는 모든 사회들, 아주 무수하지만 서로로부터 완전하게 구분된다는 것, 사랑의 등차와 차이에 일치해서, 그리고 이 사랑으로부터 파생된 신앙에 일치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들은 육체의 삶에서 존재했던 어떤 친족 관계로부터가 아닌데도, 선으로부터, 그리고 선에서 파생된 진리로부터 서로를 인식한다는 사실로부터 확실해졌다. 거기서는 서로에서 대단히 비슷한 선을 지니지 않으면 아버지가 아들, 또는 딸을 인식하지 못한다, 또는 형제가 형제를, 자매가 자매를, 남편이 아내를 인식하는 일이 없다. 실로 그들이 다른 삶에 처음 올 때라면 만나기는 하나, 이내 분리되어진다; 그 이유가 선 자체, 또는 사랑과 선행이 그들이 속할 사회를 결정짓기 때문이다. 혈연적 친척 관계는 각 인물이 있는 사회 안에서 시작하여 다른 친척 관계로까지, 결국 먼 인척 관계인 주변으로까지 이다.

그렇다고 해서 아무 댓가도 없이 봉사하느냐? 너의 대한 댓가가 무엇인지 내게 말하라. 이는 결합의 수단이 반드시 있어야만 함을 의미한다. 이는 “댓가 없는 봉사”의 의미가 어떤 특전이 없음이다로부터; 그리고 “댓가(보상, reward)”의 의미가 결합의 수단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댓가”는 말씀에서도 가끔 등장하는 단어이다, 그리고 내적 의미로는 결합의 수단밖에 더 아니다. 그 이유가 천사들은 보상에 관하여서는 어떤 것도, 이 구절 같이 보상이라는 말을 듣는 것 자체도 지독하게 싫어하기 때문이다, 아마 그들 안에 있는 어떤 것 때문이 아닌가 싶다; 그렇다, 그들은 어떤 선, 또는 선한 행동을 두고 보상을 생각하는 것과는 정반대의 품질을 지닌 것이 틀림없다. 그들은 자기 자신인 것에는 악밖에 없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러므로 그들이 자기 자신으로부터 행하는 것은 무엇이든 보상에 반대되는 것이 동반되고야 만다; 그리고 모든 선은 주님으로부터 있고, 자신들 안에 흘러들어 자신들의 선한 행동이 있다는 것, 그나마 이것은 오로지 주님의 자비로부터 이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엄밀히 말해 선 자체는 그 선이 보상을 염두한다면 선이 아니다, 그 이유가 보상을 생각하는 순간, 이기적인 목적이 이 선한 행동에 인접하고, 인접되면 선이 주님으로부터 이고, 자비로부터 이다는 것을 부정하려는 생각이 고개를 들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유입됨이 줄어드는 만큼 선과 선에 대한 애착 안에 있는 축복과 천국 자체도 줄어들 수밖에 없다. 그 이유가 선에 대한 애착(즉 주님을 사랑함과 이웃을 사랑함)은 그것 내부에 복됨과 행복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 복됨과 행복은 애착과 사랑 자체 내부에 존재한다. 애착으로부터 어떤 것을 행하는 것, 그리고 그것의 복됨, 그리고 동시에 보상을 위하여 그것을 행하는 것, 이것들은 서로에게 직 반대된다. 그러므로 말씀에 있는 “보상, 댓가”가 읽혀질 때, 천사들은 보상의 어떤 것도 지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주님에 의해 자비로부터와 그분께서 공짜로 수여하시는 어떤 것을 지각할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상은 아직 거듭남을 개시하지 못한 자들을 위해 결합의 수단으로 아주 유용하다; 그 이유가 선과 선에 대한 애착 안에서 아직 시작하지 않은 이들(즉 아직 충분히 거듭나지 않은 이들)은 보상을 빼놓고는 달리 행동할 수 없기 때문, 그들은 선에 대한 애착으로부터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위한 복됨과 행복에 대한 애착으로부터 행동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동시에 지옥에 대한 두려움으로부터 행동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이 거듭나질 때, 이것은 거꾸로 되어 선에 대한 애착이 되어간다, 그때는 보상에 대한 생각은 더 이상 없게 된다.
이에 대한 예는 시민적 생활을 떠올리면 될 것이다: 자기 나라를 사랑하는 자, 선한 의지로부터 나라의 선을 증진하는 것을 기쁨으로 삼고, 이에 대한 애착을 가진자의 경우, 만일 이런 것의 실현이 막힐 경우, 이를 슬퍼하고 이를 행할 기회가 수여되도록 탄원도 할 것이다; 그 이유는 이것이 그의 애착의 대상이고, 그의 기쁨과 복됨의 근원이기 때문이다. 이런 자는 존경도 받고, 높은 관직에까지도 앉혀질 것이다; 이런 직책의 수여됨이 비록 그의 선행에 대한 보상이라 불리울지라도, 그에게 이런 직책은 자기 나라의 선을 증진하는 수단일 뿐이다. 그러나 자기 나라를 위한 애착을 지니지 않은 이들, 그러나 자기와 세상에 대한 애착을 지닌 이들은 명예들과 재물을 위하여 행동을 취한다. 그는 이것을 목적으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인물들은 자기 나라에 앞서 자신을 챙기고 있다(즉 공통의 선에 앞서 자신으로부터의 선을 내세운다). 한마디로 심보가 더러운 것이다. 그럼에도 자신은 진솔한 사랑으로부터 행동함을 비추이게 하려고 안간 힘을 쓴다. 그들이 나라 사랑에 관하여 개인적으로 생각할 때, 이 사랑은 자기 만큼 사랑하는 자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육체의 삶에서 이런 나라 사랑을 지닌 자가 다른 삶에 와서도 주님의 나라를 두고 똑같은 생각을 지니고 있다. 그 이유가 각 자의 애착은 삶의 형태가 바뀌어도 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16, 17절. 그리고 라반은 두 딸을 가졌는데, 큰 딸의 이름은 레아였고, 그리고 작은 딸의 이름은 라헬이었다. 17 그리고 레아의 눈은 약했고, 그리고 라헬은 모습이 아름다웠고 바라보기에도 아름다웠다. “라반은 두 딸을 가졌다”란 공통의 줄기로부터 있는 선으로부터의 진리에 대한 애착을 의미한다. “큰 딸의 이름은 레아였다”란 그것의 품질이 외적 진리에 대한 애착임을 의미한다. “그리고 작은 딸의 이름은 라헬이었다”란 그것의 품질이 내적 진리에 대한 애착임을 의미한다. “그리고 레아의 눈은 약했다”란 외적 진리에 대한 애착은 외적 진리를 이해함을 중요시함을 의미한다. “그리고 라헬은 모습은 아름다웠고 바라보기에도 아름다웠다”란 내적 진리에 대한 애착은 영적인 것들을 이해함을 중요시함을 의미한다.

그리고 라반은 두 딸을 가졌다. 이는 공통의 줄기로부터 있는 선으로부터의 진리에 대한 애착을 의미한다. 이는 라반이 공통의 줄기로부터 있는 선, 그러나 방계적인 선이다로부터; 그리고 “딸들”의 의미가 애착들이다로부터, 이 구절의 경우, “라반”인 선으로부터의 진리에 대한 애착이다.

큰 딸의 이름은 레아였다. 이는 그것의 품질이 외적 진리에 대한 애착임을 의미한다. 그리고 작은 딸의 이름은 라헬이었다. 이는 그것의 품질이 내적 진리에 대한 애착임을 의미한다. 이는 레아의 표현이 외적 진리에 대한 애착이다로부터; 그리고 라헬은 내적 진리에 대한 애착이다로부터; 그리고 “이름”의 의미가 품질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레아가 언니(큰 딸, elder)라 불리우는데, 그 이유는 외적 진리가 먼저 배워지기 때문, 그리고 라헬이 동생(작은 딸)이라 불리운 이유는 내적 진리는 나중에서야 배워지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인간은 외적 진리들에 먼저 감명을(영향을) 받고, 한참 후 그는 내적 진리에 감동된다는 말이다. 그 이유가 외적 진리들은 내적 진리의 평면들이기 때문이다. (그림도구에서 도화지가 외적 진리에, 색연필은 내적 진리에 해당될지 모른다 역자 주.) 다시 말해, 일반적인 것 안으로 유일한 것(낱개들, singulars, 더 이상 나뉠 수 없는 것들)이 은근히 심어지는 것이다. 또 다른 말로하면, 일반적인 것 없이 유일한 것을 납득할 수 없다는 말이다. (즉 시민적, 도덕적 선이라는 도화지가 없으면 영적 선이라는 색연필은 무용지물인 것과 같다. 역자 주) 말씀에서 글자 의미는 일반적 측면에 해당되고, 내적 의미는 유일한 측면에 해당된다. 전자는 외적 진리들에 해당되고 후자는 내적 진리들에 해당된다; 그리고 애착 없는 진리들은 진리들이 아니다, 그 이유는 그 진리 안에 생명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외적 진리이든. 내적 진리이든 진리라는 말이 언급될 때는 실상 해당 진리에 애착은 당연히 동반된다고 이해해도 될 것이다.

그리고 레아의 눈은 약했다. 이는 외적 진리에 대한 애착은 외적 진리를 이해함을 중요시함을 의미한다. 이는 레아의 표현이 외적 진리에 대한 애착이다로부터; “눈”의 의미는 이해력이다로부터; 그리고 “약함”의 의미가 비교적으로 약해 있다로부터 알려진다. 외적 진리에 대한 애착들은 이해력에서 약하다는 것, 또는 외적 진리 안에 있는 이들은 이해력에서 약해 있다는 것은 외적인 것으로부터만, 즉 일반적인 것으로부터만, 일반적인 것이 아직 유일한 것에 의해 예증받지 못한 상황에서라면, 당사자가 이해했다 라고 판단한 그 진리는 실상 허약하고 물렁하고, 흔들리는 수준이어서 작은 바람에도 나풀거리듯, 다시 말해, 자신의 진리가 타인의 견해에 흔들리는 유약한 상태이다. 그러나 유일한 것(각자의 삶)에서 예증된 진리들은 흔들리지 않고 꾸준하고 강하다, 그 이유는 이 진리는 “라헬이 지닌 것, 즉 아름다운 모습(형체, form)과 바라보니 아름답다”에 의해 의미되는 내용(본체, 본질)과 형식(형체) 모두의 것을 지녔기 때문이다. 이 둘을 겸비한 것이 라헬을 수단으로 표현된 내면의 진리에 대한 애착이다.
외적 진리들과 그것의 애착들에 의해 뜻해진 것, 그리고 내적 진리들과 그것의 애착들에 의해 뜻해진 것, 그리고 전자는 눈이 약하고, 후자는 모습에서 아름답고, 바라보기에 아름답다에 의해 뜻해진 것을 선은 가난한 이들에게 실시되어야 한다는 대목을 예로 놓고 생각해보자. 외적 진리 안에 있는 이들은 이를 글자대로인 것, 즉 일반적 진리만을 알고 있다; 그리고 그들은 진실로 가난한 자가 누구인지를 식별하지 못한다, 더욱이 말씀에서의 “가난한 자”는 영적으로 가난한 자를 뜻하는 것임을 모르고 있다. 그 결과 그는 선한 자에게나 악한 자에게 똑같이 선을 실행한다. 그는 자기가 악한 자에게 선을 행한 것이 선한 자에게 악을 행함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한다. 그러므로 이런 단순한 열정에 있는 이들은 사기적인 수법에 허망하게 휘둘려 지독한 곤혹을 치루기 십상이다. 그러나 내적 진리 안에 있는 이들은 가난한 자가 누군지를 알고, 그들 각각을 식별하고, 각 품질에 따라 모든 이 각각에게 선을 실행한다.
또 다른 예를 생각해보자: 외적 진리에 있는 이들은 우리는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는 것을 글자대로 가지고 있다. 그리고 모든 이는 똑같은 등차에서 이웃이다고 믿는다, 고로 모든 이는 똑같은 사랑으로 보듬어야 한다고 믿는다. 그래서 그런 식에서 자신들이 이끌림을 당하는데도 이를 허용한다. 그러나 내적 진리 안에 있는 이들은 모든 이는 이웃이되 각 인물의 이웃된 등차는 다르다고 알고 있다. 결과적으로 그는 외적 진리 안에 있는 이들이 모르는 무수한 것을 알고 있다; 그러므로 이웃이라는 이름을 걸었다고 자신이 엉뚱한 길로 끌어가게 내버려두지 않는다, 또한 명분이 야기하는 선의 설득으로부터 악을 도출하는 실수도 없다. (하느님의 일이라는 명분을 걸면 얼마나 많은 순진한 이들이 쉽게 빨려드는지 여러분도 목격했을 것이다 역자주.)
또 다른 예를 생각해보자: 외적 진리만에 있는 이들은 상상한다, 즉 다른 삶에서 학식자는 별같이 빛을 낼 것이다; 그리고 주님의 포도원에서 노동한 모든 이들은 여느 누구보다 보상을 확실히 받을 것이라고 상상할지 모른다. 그러나 내적 진리 안에 있는 이들은 “학식자”, “슬기로운 자”, “총명한 자”에 의해서 선 안에 있는 이들이 의미된다는 것, 그들이 어떤 인간의 지혜나 총명을 가졌든, 아니가졌든 그것은 상관 없다는 것을 안다. 그리고 선 안에 있는 이들이 별같이 빛을 낸다고 알고 있다; 그리고 주님의 포도원에서 노동한 이들은 자기로 노동하게 한 자기의 선과 진리에 대한 애착에 일치하여 보상을 받을 것이라고 알고 있다; 그리고 자신과 세상을 위해 주님의 포도원에서 일한 자들, 즉 자아 찬양과 재물을 위하여 재능을 발휘한 자들은 세상에서 자기들의 보상을 가지겠지만, 다른 삶에서의 그들의 구역은 사악한 자들의 사회이다 (마. 7:22, 23). 그러므로 외적 진리들만에 안주할 경우, 그의 이해력은 얼마나 약한지! 분명하다; 그리고 내적 진리들이 외적 진리들에 본질과 형체를 준다는 것, 또한 각 사람에게 있는 선에 품질을 부여한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이세상 삶동안 외적 진리에만 있었으되, 동시에 단순한 선 안에서 생활한 이들은 다른 삶에서 그들에게 부족한 것, 즉 내적 진리와 지혜를 받는다; 그 이유가 단순한 선으로부터 그들은 받을 수 있는 그릇을 준비하여 다른 삶으로 건너갔기 때문이다.

그리고 라헬은 모습이 아름다웠고 바라보기에도 아름다웠다. 이는 내적 진리에 대한 애착은 영적인 것들을 이해함을 중요시함을 의미한다. 이는 앞에서 설명되었다. “모습, 형체(form)”에 의해 본질이; “바라 봄(look)”에 의해 본질에서 파생되는 아름다움이 의미된다.

18-20절. 그리고 야곱은 라헬을 사랑했다. 그리고 그는 말했다, 저는 당신의 작은 딸 라헬을 위하여 칠 년을 봉사하리 이다. 19 그리고 라반이 말했다, 나는 그녀를 다른 사람에게 주는 것보다 너에게 주는 편이 더 낫다. 나와 함께 있으라. 20 그리고 야곱은 라헬을 위하여 칠 년을 봉사했다, 그리고 그 세월은 그가 가졌던 그녀에 대한 사랑 때문에 며칠에 불과한 세월로 여겨졌다. “그리고 야곱은 라헬을 사랑했다”란 내적 진리를 향한 선으로부터의 사랑을 의미한다. “그는 말했다, 나는 당신의 작은 딸 라헬을 위해 칠 년을 봉사하리 이다”란 내적 진리와 합쳐지기 위하여 끈임없이 노력함, 동시에 이 노력함은 거룩한 상태임을 의미한다. “그리고 라반이 말했다, 그녀를 다른 사람에게 주는 것보다 너에게 주는 편이 더 낫다, 나와 함께 있으라”란 이 선과 더불어 내적 진리를 통하여 결합하는 수단들을 의미한다. “그리고 야곱은 라헬을 위하여 칠 년 동안 봉사했다”란 성취를 의미한다. “그리고 그 세월은 그가 라헬에 대한 사랑 때문에 며칠에 불과한 세월로 여겨졌다”란 사랑의 상태를 의미한다.

그리고 야곱은 라헬을 사랑했다. 이는 내적 진리를 향한 선으로부터의 사랑을 의미한다. 이는 야곱의 표현이 자연 평면의 선이다로부터; 그리고 라헬의 표현이 내적 진리에 대한 애착이다로부터; 이 구절에서의 경우, 자연 평면의 선과 결합이 예상되는 내적 진리, 이 결합이 예상되는 것은 “사랑하였다”에서 추측된다.

그는 말했다, 나는 당신의 작은 딸 라헬을 위해 칠 년을 봉사하리이다. 이는 내적 진리와 결합되어지기 위하여 끈임없이 노력함(study), 동시에 이 노력은 거룩한 상태임을 의미한다. 이는 “봉사함”이 노력함이다로부터; 그리고 “7”의 의미가 거룩한 것이다로부터; 그리고 “년, 햇수”의 의미가 상태이다로부터; 이것이 결합하기 위함이었음은 분명하다. 이상을 종합하면, “나는 당신의 작은 딸 라헬을 위해 칠 년을 봉사하리이다”가 내적 진리와 결합하기 위하여 끈임없이 노력하는 것, 동시에 이는 거룩한 상태임이 의미된다. 여기서 말하는 바, 내적 진리를 배우고, 인정하고, 믿을 때, 그 진리는 자연 평면과 결합함이 있어진다는 것이다. 인간의 자연 평면에, 즉 이 인간의 기억 안에는 두 종류의 진리들, 즉 외적 , 내적 진리들이 있는데, 이것들은 기억화된 교리적인 형태 안에 있다; 그러나 이것들은 인간이 삶을 위해 그것들에 감동되기 까지 결합하지 않고 있다, 즉 그것들이 인간 당사자로부터 사랑받아질 때까지 결합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 이유가 사랑될 때에야 선이 그것들과 짝짓기를 하는 바, 이것 때문에 자연 평면은 합리성과 결합되어진다, 결과적으로 내적 인간과 결합된다. 이 경로에 의해 주님으로부터 자연 평면 안으로의 생명의 유입이 있다.

그리고 라반이 말했다, 그녀를 다른 사람에게 주는 것보다 너에게 주는 편이 더 낫다, 나와 함께 있으라. 이는 내면의 진리를 통하여 이 선과 결합함의 수단들을 의미한다. 이는 “보상, 댓가”의 의미로부터, 이를 중요시하여 대답과 확인함이 이 구절의 말이 만들어지게 한 것이므로, 결합의 수단들이 의미됨이 분명하다. 여기서 “그녀”에 해당하는 “라헬”이 내면의 진리이고, “너에게”에 해당하는 “야곱”은 선이다는 것은 이미 살폈다. “야곱”인 선이 “라반”인 선과 “라헬”인 내면의 진리를 수단으로 결합함에 주목하면, 이것에는 납득하도록 쉽게 서술하기에는 무리가 되는 비밀들이 있다; 그 이유가 첫째로 각 선에 대한 명료한 생각이 있어야만 하고, 또한 내면의 진리에 대한 애착에 관한 명료한 생각도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모든 주제를 이해함은 생각에 따라서 있기 때문; 만일 생각이 없으면 아무 것도 없다; 만일 생각이 불분명하다면 불분명하다; 만일 생각이 뒤집혀 있다면 뒤집혀 있다; 그리고 만일 생각이 명료하다면 명료하다. 이것은 애착들에 따라서도 그러한 바, 애착들을 수단으로 생각은 설사 명료하다 해도 다양해진다. 따라서 우리는 거듭나지는 모든 인간 안에서 그의 자연 평면의 선, 여기서 야곱에 의해 표현된 선이 여기서 라반에 의해 표현된 선과 라헬에 의해 표현된 내면의 진리에 대한 애착을 수단으로 결합함이 먼저 있다는 것만을 서술하고 말 것이다. (한참) 후에 이삭과 리브가인 합리성의 선과 이 선으로부터의 진리와 결합함이 있게 된다; 즉 외적 인간이 내적 인간과 결합함이 있다.

그리고 야곱은 라헬을 위하여 칠 년 동안 봉사했다. 이는 성취함을 의미한다. 이는 이 말들의 의미가 끊임없는 노력(study)과 동시에 거룩한 상태가 내면의 진리와 결합하기 위하여서였던 바로부터 분명해진다. 여기서 이런 것들을 성취함이 엿보임은 분명하다.

그리고 그 세월은 그가 라헬에 대한 사랑 때문에 며칠로 그의 눈 안에 있었다. 이는 사랑의 상태를 의미한다는 것, 즉 그것은 지루함에서 자유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그의 눈에서 있다”가 그렇게 나타나는 것을 의미함으로부터; 그리고 “날들”이 상태들을 의미함으로부터 분명해진다. 이로부터 “그가 그녀를 사랑함 때문에 그의 눈에서 며칠로”는 사랑의 상태를 표시하고 있다. 인간이 사랑의 상태 안에 있을 때, 또는 천적 수준의 애착 안에 있을 때, 그는 천사의 상태 안에 있다, 즉 애착 안에 조급함이 없다면, 시간 안에 있지 않은 것처럼 있는다. 그 이유가 조급함은 육체의 애착이고, 인간이 이 조급함 안에 있는 만큼 그는 시간 안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이 조급함 안에 있지 않은 만큼, 그는 시간 안에 있지 않다. 이것은 애착 또는 사랑에 속하는 모든 즐거움과 기쁨으로부터 일종의 형상 안에서 나타난다, 인간이 이것들 안에 있을 때, 그는 시간에 주목하지 않는다, 그 이유가 이때의 그는 내적 인간 안에 있기 때문이다. 순수한 사랑의 애착을 수단으로 인간은 육체적, 세상적인 것들로부터 물러나 있는다, 그 이유가 그의 마음이 천국을 향하여 승강되기 때문, 고로 시간 속의 것들로부터 물러나 있는다. 시간이 어떤 것이다고 나타나는 이유는 우리가 애착, 또는 사랑에 속하지 않는 것들을 곰곰이 생각하므로 해서 지루해지기 때문에서이다. 이로부터 칠 년의 세월이 그가 그녀를 사랑함 때문에 그의 눈에 며칠로밖에 있지 않았다가 의미한 것을 알았을 것이다.

21-24절. 그리고 야곱은 라반에게 말했다, 나에게 나의 여인을 주십시오, 내 날들이 다 찼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나는 그녀에게 올 것입니다. 22 그리고 라반은 그 곳의 모든 남자들을 모아 놓고, 잔치를 베풀었다. 23 그리고 저녁이 되자, 그는 그의 딸 레아를 데려왔다, 그리고 그녀를 그에게 데려왔다, 그리고 그는 그녀에게 갔다. 24 그리고 라반은 그의 하녀 질바를 그의 딸 레아에게 그녀의 하녀로 주었다. “그리고 야곱은 라반에게 말했다, 나에게 나의 여인을 주십시요”란 일반적인 선으로부터 내면의 진리에 대한 애착과의 결합이 지금 있었음을 의미한다. “그 이유는 내 날이 다 찼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나는 그녀에게 올 것입니다”란 지금 질문하는 상태임을 의미한다. “그리고 라반은 그곳의 모든 사람을 다 불러 모았다”란 이 상태 속의 모든 진리를 의미한다. “그리고 잔치를 베풀었다”란 개시함을 의미한다. “그리고 저녁 때가 되자”란 아직까지는 상태가 불명료함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는 그의 딸 레아를 데려왔다, 그리고 그녀를 그에게 가져다 주었다, 그리고 그가 그녀에게 왔다”란 아직까지는 외적 진리에 대한 애착과만 결합되었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라반은 그녀에게 자기의 하녀 질바를 주어서 그의 딸 레아의 하녀가 되게 하였다”란 부수적인 수단들인 외적인 묶음들 또는 외적인 애정들을 의미한다.

그리고 야곱은 라반에게 말했다, 나에게 나의 여인을 주십시오. 이는 일반적인 선으로부터 내면의 진리에 대한 애착과의 결합이 지금 있었음을 의미한다. 이는 야곱의 표현이 자연 평면의 선이다로부터; 이 구절에서는 일반적인 선인데, 그 이유는 자연 평면 속의 것들은 상대적으로 일반적인 것들이고, 여기에 내적 인간으로부터 이 후자에 나타나는 자연적, 또는 외적 인간 안으로 흐르는 무수한 것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 이 구절의 경우 같이 일반적인 것들 속의 개별적인 것들이 받아지기 앞서 무수하게 있다. 이런 이유로 야곱에 의해 표현된 선을 지금은 일반적 선이라 부른 것이다. 내면의 진리와의 결합이 의미되는 것은 분명하다, 그 이유가 여기서 “나의 여인”이라 부른 라헬이 내면의 진리에 대한 애착을 표현하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내 날이 다 찼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나는 그녀에게 갈 것입니다”이는 지금 질문하는(묻는) 상태임을 의미한다. 이는 “날들”이 상태들을 의미한다로부터 분명해지고, 이에 대해서는 설명이 필요 없을 것이다.

그리고 라반은 그곳의 모든 남자들을 다 불러 모았다. 이는 이 상태 속의 모든 진리를 의미한다. 이는 “남자들(viri)”의 의미가 진리들이다로부터; 그리고 “그곳, 장소(place)”의 의미가 상태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리고 잔치를 벌였다. 이는 개시함을 의미한다. 이는 “잔치”의 의미가 자기 것이 되게 함과 결합함이다로부터; 현재의 경우는 개시함인데, 그 이유는 개시함은 결합에 앞서 있기 때문, 또한 그것을 서약하고 증명하는 것도 개시함 뒤를 잇기 때문이다. 의미적이고 표현적 의미 안에 있었던 고대인들이 벌린 잔치는 선행 속에 있는 서로의 사랑을 개시함밖에 더 다른 것은 의미하지 않았다. 결혼 잔치(nuptial feast) 역시 부부의 사랑(conjugial love)을 개시함을 의미했다; 그리고 거룩한 잔치들은 영적인 사랑과 천적인 사랑을 개시함을 의미했다; 그리고 잔치에서의 먹고 마심 때문에 잔치는 자기 것 되게 함과 결합을 의미했다 (3734항). 이 의미 때문에 주님께서도 똑같은 의미에서 말하셨다:
많은 이들이 동과 서로부터 올 것이다, 그리고 아브라함, 이삭, 그리고 야곱과 함께 천국들의 왕국에서 앉을 것이다 (마. 8:11).
그리고 다른 구절에서 제자들에게:
너희는 내 왕국에서 내 식탁에서 먹고 마실는지 모른다 (눅. 22:30).
그리고 그분이 성찬식을 설립하셨을 때, 말하셨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내가 내 아버지의 왕국에서 너희와 더불어 그것을 새로이 마시는 그 날까지, 나는 이후로부터 포도나무의 열매로부터 마시지 않을 것이다 (마. 26:29),
위 구절을 읽으면서 “주님의 왕국에서 앉는 것, 먹는 것, 그리고 마시는 것”이 앉는 것, 먹는 것, 마시는 것을 의미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 대신 이 왕국에서 존재하는 어떤 것을 의미할 것이다고 최소한 판단할 것이다. 이는 사랑으로부터의 선과 신앙으로부터의 진리를 자기 것 삼음을 의미한다; 고로 이것은 영적이고 천적인 식품(food)이라 불리우는 것을 의미한다. 위의 구절만 보아도 주님께서 말하신 모든 말씀에는 내적 의미가 있음이 분명해진다, 하여 내적 의미를 알지 못하면 아브라함, 이삭, 야곱과 더불어 그분의 왕국의 식탁에서 앉아 먹고 마심이 의미하는 것을 알 도리가 없다, 또한 그분의 아버지의 왕국에서 그 포도나무의 열매로부터 그들과 더불어 마심이 의미하는 것도 알지 못한다; 성찬식에서 빵을 먹고, 포도주를 마심이 뜻하는 것도 알아질 수 없다.

그리고 저녁 때가 되자. 이는 아직까지는 상태가 불명료함을 의미한다. 이는 “저녁”이 불분명한 상태(희미한 상태)를 의미한다로부터 분명해진다. 자기들에 잘 어울리는 의식을 지녔던 고대인들 사이에서, 저녁에 만들어진 잔치, 즉 저녁 만찬은 결합에 앞서 있는 개시함밖에 더 다른 것을 의미하지 않았다. 비록 이 개시함이 결합을 예상되게 하고 있지만 엄밀히 말하면 이 개시함은 결합함에 비교하면 불분명한 상태이다. 다시 말해, 인간이 진리 안으로, 그로부터 선 안으로 들어감이 개시되는 동안에서 그가 배운 모든 것이 그에게 불분명해 있다; 그러나 선이 자기와 결합될 때, 그리고 이 선으로부터 진리를 중요시할 때, 모든 것이 그에게 명료해져 온다, 그리고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명료해진다. 그 이유가 그는 지금 그것이 존재하는지 여부에 대해서, 그리고 이것이 그렇다는 것에 대해 더 이상 의심하지 않기 때문이다.
인간이 이 상태 수준에 있을 때, 그때 그는 무수히 많은 것을 알기를 시작한다, 그 이유가 이제 그는 중심으로부터 변두리에 이르기까지 아우르는 선과 진리에 관한 것을 믿고 지각함으로부터 진행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가 진행해감에 비례하여 그는 빙둘러 있는 것들, 그리고 더 폭넓게 많은 것을 보게 된다. 그 이유가 그는 바깥 경계선쪽으로 더욱 밀고 나갈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그 이후 경계선 내의 공간에 있는 주제들의 각각을 중심의 주제나 마찬가지로 하여 새로운 환경을 설정해 간다. 이런 와중에 선으로부터의 진리의 빛은 측량할 수 없을 정도로 증가하는 바, 계속 빛을 발하는 발광체인 듯 되어간다. 그 이유가 이때 인간은 주님으로부터 있는 천국의 빛 안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이 과연 그런지, 과연 존재하는지 토론만해댈 뿐 의심을 떨치지 못하는 이들과 더불어서는 무수한 것들이 한 조각도 나타나지 않는다; 그들에게 일반적이든, 특수적이든 모든 것들이 불분명해 있다. 그들에게는 이것이 실제로 존재하는지보다 이것의 존재가 의심스럽다하는 것에 집착하고 있다. 어떤 것이 존재하는지 여부를 놓고 재간을 부리는 자를 두고 슬기로운 자라 부르는 것이 작금의 현실이다.
예를 들면: 말씀에 내적 의미가 있다, 이것이 신비적이라 불리운다는 명제를 두고 생각해보자: 이것이 믿어질 때까지, 인간은 말씀의 내적 의미에 있는 무수한 것들의 조금도 알 수가 없다. 이것은 무한한 다양함으로 온 천국을 채울만큼 무수하지만 알아질 수 없다는 말이다. 또 다른 예를 들면, 신섭한 섭리에 관하여 추론하는 이들이 그것은 보편적일 뿐, 개별적이지는 않다고 믿는다면, 그는 섭리의 셀 수 없이 많은 것들의 얼마라도 납득해보는 것이 불가능하다. 또 다른 예를 들면, 누군가가 선 안에 있는 것이 가능한지 여부를 추론하는 자가 있는데, 그가 인간의 의지가 근본적으로 타락되어 있음을 볼 경우, 인간은 거듭남에 관련한 모든 비밀들을 결코 알 수 없다, 또는 새로운 의지가 주님에 의해 타락한 인간에게 심어질 수 없다, 또는 이런 심어짐에 관련한 비밀들을 알 수가 없다고 판단해버린다. 이런 몇 예를 들추어보아도 이런 인물이 얼마나 내적 의미에 대해 희미한 상태에 있는지를 어림하게 해준다, 더욱이 이들은 지혜의 문턱조차 넘지 못한다.

그리고 그는 그의 딸 레아를 데려왔다, 그리고 그녀를 그에게 데려왔다, 그리고 그가 그녀에게 갔다. 이는 아직까지는 외적 진리에 대한 애착과 만 결합되었음을 의미한다. 이는 레아의 표현이 외적 진리에 대한 애착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녀를 그에게 데려옴”은 부부의 결합 같은 것이 의미되는 것이 분명하다. 여기서의 경우는 이렇다: 내적 진리에 대한 애착 안에 있는 인간, 즉 주님의 왕국에 관한 내면의 비밀들을 알기를 바라는 이들이라 해도 처음 때에서는 이 비밀들이 그와 더불어 결합되어 있지 않다, 설사 그가 그것들을 알고 인정하고, 믿고 있는 듯 해도 결합된 상태는 아니다는 말이다, 그 이유가 아직까지는 그와 더불어 현존하는 것은 세상적이고 육체적인 애착들이고, 이 애착들이 그로하여금 이런 비밀들을 받아들이고 믿는 듯 하게 만들지만, 실상 이 애착들이 현존하는 만큼, 의문 중인 내면의 진리들은 결합되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 선으로부터의 진리에 대한 애착, 그리고 선에 대한 애착만이 이 비밀들에 그 자체 꼭 들어맞는다; 그리고 인간이 애착들 안에 있는 만큼에서, 내면의 진리는 그 사람에게 결합되어 있다, 그 이유가 진리는 선의 그릇이기 때문에서 이다.
주님 역시 천적인 진리와 영적인 진리(즉 내면의 진리)는 진짜 애착 외에는 결합되어지지 않도록 설비해두셨다. 이런 이유로 선으로부터의 진리에 대한 일반적 애착, 그 안에 심어진 진리들은 일반적 진리들밖에 더 아니다. 진리의 상태는 선의 상태에 일치하여 있다, 즉 신앙의 상태가 선행의 상태와 일치하여 있다. 예를 들면: 사악한 자가 주님은 보편적 천국을 통치하신다는 것, 또한 천국은 서로의 사랑과 주님을 사랑함이다는 것; 또한 이런 사랑으로 주님과의 결합이 있고, 지혜와 행복도 있는다는 것, 등등을 아는 것은 가능하다. 더 나아가 그들이 그것이 맞다는 확신까지 가지는 것도 가능하다; 그럼에도 신앙의 진리가 그들과 결합되어지지 않을는지 모른다, 더욱이 사랑의 선이 그들과 결합해 있지 않을는지 모른다. 어쨌든 열매로 그 나무를 알 듯, 결합의 여부는 당사자의 생활을 보면 알려진다. 이들이 지녔고 믿고 있는 듯 나타나는 것들은 포도송이들을 돌이 없고 비옥한 땅 안에 매장했을 때 단지 곰팡이로 해서 용해되고 마는 수준의 것, 또는 밤중의 도깨비불이 아침에 해가 오르면 흔적 없이 되는 수준일 것이다. 이에 관하여는 주님의 자비로부터 더 말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라반은 그녀에게 자기의 하녀 질바를 주어서 그의 딸 레아의 하녀가 되게 하였다. 이는 부수적인 수단들인 외적인 묶음(bond)들 또는 외적인 애정들을 의미한다. 이는 “하녀”의 의미가 외적인 애착들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라반이 그녀에게 주었다”가 그것들이 공통의 줄기로부터의 방계적인 선으로부터 이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그 이유는 공통의 선이 이런 애착들의 근원이기 때문이다. 그것들이 외적인 묶음들이라 불리우는 이유는 모든 애착들이 묶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인간을 묶는 것은 그가 지닌 애착들 외에 더 다른 것은 없다. 각 인간이 지닌 애착은 당사자에게 묶는 끈으로 실제로 나타나는 것은 아닌데도 그렇게 불리우는 이유는 애착이 인간을 통치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당사자로 그가 애착하는 것에 묶여 있게 한다. 내적인 애착들은 내적인 묶음들이라 불리우고, 진리와 선에 대한 애착은 양심의 묶음들이라 불리운다. 이 내적인 묶음에 외적인 애착, 외적인 묶음들이 상응한다. 거듭나는 이들이 외적인 것들을 수단으로 내적인 것들을 받아들일 때, 이 받아들임의 상태가 여기서 취급되고 있다, 즉 라반의 하녀를 그의 딸 레아의 하녀로 주었다고 말해진 것, 이는 이와 같은 애착들은 받아들임의 수단을 섬기도록 주어져 있다를 의미하고 있다. 이 애착들은 가장 외적인 애착들, 이는 육체의 애착들 같은 것임은 레아가 외적 진리에 대한 애착이다는 사실로부터 분명해진다. 이 주제 또한 주님의 신성한 자비로부터 차후 더 언급할 것이다.

25, 26절. 아침이 되자 그것은 레아였다. 그리고 그는 라반에게 말했다, 나에게 한 이런 처사는 대체 무엇입니까? 나는 라헬을 위하여 당신에게 봉사하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왜 저를 속이셨습니까? 26 그리고 라반은 말했다, 이곳에서는 큰 딸에 앞서 작은 딸을 주는 식의 행동은 하지 않는다. “아침이 되었다”란 그 상태에서 있는 계발을 의미한다. “보라 그것은 레아였다”란 외적 진리와 결합했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는 라반에게 말했다, 나에게 한 이런 처사는 대체 무엇입니까?”란 분개함을 의미한다. “나는 라헬을 위하여 당신에게 봉사하지 않았습니까?”란 내적 진리에 대한 애착을 위해 애써왔음을 의미한다. “왜 저를 속이셨습니까?”란 더 크게 분개함을 의미한다. “라반이 말했다, 이 곳에서는 … 행동은 하지 않는다”란 상태가 그와 같지 않음을 의미한다. “큰 딸에 앞서 작은 딸을 주는 것”이란 내적 진리에 대한 애착이 외적 진리에 대한 애착보다 먼저 진행되는 것을 의미한다.

“아침이 되었다” 이는 그 상태에서 있는 계발을 의미한다. 이는 “아침”의 의미가 계발됨이다로부터 분명해진다; 그리고 여러 때(아침, 정오. 저녁 등등)가 상태들을 의미하는 바, 아침(morning-tide, morning) 역시 상태들을 의미한다. 계발은 현재 뒤잇는 것, 즉 그는 외적 진리만과 결합했음을 인정했다와 관련이 있다.

보라 그것은 레아였다. 이는 외적 진리와 결합했음을 의미한다. 이는 레아의 표현이 외적 진리에 대한 애착이다로부터 분명해진다. 이 말들이 이 애착과 결합함을 의미하는 것은 분명한데, 그 이유는 여인으로 주어진 자는 라헬 대신 레아였기 때문이다. 이것이 포함하는 것은 앞에서 말한 것, 즉 내적 진리와 결합함에 앞서 외적 진리와 결합함에 대해 말한 대목에서 분명해진다.

그리고 그는 라반에게 말했다, 나에게 한 이런 처사는 대체 무엇입니까? 이는 분개함을 의미한다. 이는 이 구절의 말과 이어지는 말에 있는 애착으로부터 분명해진다. 분개함의 애착이 야곱 역사의 시리즈에 따라 이 구절의 말투 안으로 낙하하고 있다. 말씀의 내적 의미를 구성하는 것은 두 가지가 있는데, 그것은 애착과 실제의 것이다; 말씀의 표현 안에 감추여놓인 애착은 인간에게 나타나지 않는다. 그것은 말씀의 가장 깊은 곳에 저장되어 있다; 이렇게 저장될 뿐 인간에 나타나지 못하는 이유는 인간이 육체의 삶 동안 그는 세상적, 육체적 애착 안에 있기 때문, 이 애착은 말씀의 내적 의미 안에 있는 애착과 공통되는 것이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이 후자가 영적, 또는 천적 사랑에 대한 애착들이고, 이것을 지각할 수 있는 자는 거의 없는데, 아마 지독하게 단순한 인물이라면 스쳐지나가는 수준의 약간은 가능할 수 있다. 그 외의 인간은 진짜(순수한) 애착이 무엇인지조차 알 수 없다. 어쨌든 이 영적, 천적 애착은 주님을 사랑함과 이웃을 향한 선행 안에 포함되어 있다. 이 사랑 안에 있지 않은 이들은 비록 이 애착이 온 천국을 채우고, 말할 수 없는 다양함 안에 있지만 이 애착을 놓고 그것은 아무 것도 아니다고 믿는다. 이 다양함들과 더불은 이런 애착들은 말씀의 내적 의미 안에서 각각의 시리즈로, 각각의 표현으로, 한 음절에서 조차에도 저장되어 있다. 그러면서 단순한 선 안에 있는 이들, 동시에 순진 안에 있는 이들이 말씀을 읽을 때 빛을 발한다. 이것은 무한한 다양함으로 있다.
천사들 앞에서 빛을 발하는 애착에는 두 종류가 있다. 그것은 진리에 대한 애착과 선에 대한 애착이다. 진리에 대한 애착은 영적 천사들 앞에서, 선에 대한 애착은 천적 천사들 앞에서 빛을 발한다. 선에 대한 애착, 이것은 주님을 사랑함이고, 인간에게 말로 표현할 수 없다. 그러므로 인간이 납득할 수 없다; 그러나 진리에 대한 애착, 이는 서로의 사랑인데, 이는 지극히 일반적 수준에서 어느 정도만큼에서 인간에게 납득될는지 모른다. 그나마 순수한 서로의 사랑에 있는 이들에 의해서이다, 그리고 이것은 어떤 내적인 지각으로부터 있지 않고, 희미한 수준의 지각으로부터 이다.
예로, 여기서 취급된 분개함의 애착에 주목해보면, 선행의 애착이 무엇인지 모르는 자는 누구든지, 그가 이 선행 안에 있지 않은 결과로, 이 구절의 분노에 대해 누군가가 자신에게 악을 행할 때, 즉 노염의 분노의 수준밖에 더 다른 생각은 가질 수 없다. 천사들은 이런 분노를 가지지 않는다, 그러나 이와는 아주 다른 분노, 이는 노염의 분노가 아닌 것, 즉 열정의 분노, 악이 들어 있지 않은 분노, 미워함, 복수함 같은 것에서 아주 멀리 떨어져 있는 분노, 또는 악을 위해 악으로 되돌아가는 식, 즉 마치 천국이 지옥으로부터 있는 식의 분노는 없다. 그러므로 사실상 이 구절의 분노는 어떤 단어로도 표현할 길이 없다.
이는 다른 경우에서도 비슷한데, 선과 진리로부터 있는 애착, 또는 선과 진리 속에 있는 애착에 주목해보아도 비슷하다. 이는 천사들이 목적들 안에만 있다는 사실, 또는 목적들의 쓰임새(목적들을 위한 수단들) 안에서만 있다는 사실로부터 분명해진다. 목적들은 사랑들, 또는 애착들밖에 더 아니다; 그 이유가 인간이 사랑하는 것을 그는 목적으로 간주하고 중요시하기 때문이다. 이럴진대, 천사들은 말씀 안에 있는 것들의 애착 안에 있다; 이 애착들은 다양함과 더불어 있고, 다양한 종류의 각 애착에 따라 천사들이 있는 것이다. 이런 사항만 들추어도 말씀이 얼마나 거룩한지는 분명해질 것이다. 그 이유가 신성한 사랑 안에, 즉 신성으로부터 있는 사랑 안에, 그러므로 말씀에 포함된 것들 안에 거룩함이 있다.

나는 라헬을 위하여 당신에게 봉사하지 않았습니까? 이는 내적 진리에 대한 애착을 위해 애써왔음을 의미한다. 이는 라헬의 표현이 내적 진리에 대한 애착이다로부터; 그리고 “봉사함”이 애써왔음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왜 저를 속이셨습니까? 이는 더 크게 분개함을 의미한다. 이는 앞의 설명만 가지고도 충분할 것이다.

라반이 말했다, 이 곳에서는 … 행동은 하지 않는다. 이는 상태가 그와 같지 않음을 의미한다. 이는 “이곳, 장소”의 의미가 상태이다로부터 분명해진다. 이로부터 “우리의 장소에서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가 상태가 이와 같지 않다를 의미함이 분명하다.

큰 딸에 앞서 작은 딸을 주는 것. 이는 내적 진리에 대한 애착이 외적 진리에 대한 애착보다 먼저 진행되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여기서 “작은 딸”인 라헬의 표현이 내적 진리에 대한 애착이다로부터; 그리고 여기서 “첫 출생, 큰 딸”인 레아의 표현이 외적 진리에 대한 애착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로부터 “첫 출생에 앞서 둘째를 주는 것”이 내적 진리에 대한 애착이 외적 진리에 대한 애착에 앞서 진행되는 것을 의미함이 분명해진다. 이는 방금 앞에서 간략히 설명했었다; 여기서 조금 더 설명을 보태보자. 인간의 상태를 모르는 자는 인간이 외적, 내적 진리 모두에 친숙해 있고, 자기의 기억 안에도 들어와 있다면 내적인 진리 뿐만 아니라 외적인 진리와 다함께 결합한다고 믿는다. 그럼에도 인간이 그것들에 사는 때까지 결합은 없다, 그 이유가 삶이 결합을 보여주고 결합했음을 증명하기 때문이다.
위의 사항, 그리고 어린 시절로부터 인간 안에 심어진 경우에서도 진리인 것은, 이것들은 그가 그것에 따라 살 때까지 그의 자기 자신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다시말해 애착으로부터의 것들 안에 그의 의지가 빨려들면, 그는 자기의 기억 속의 지식으로부터, 또는 교리로부터 더 이상 삶으로 가져다놓지 않고, 그에게는 알려지지 않은 어떤 즐거움으로부터 애착 속의 것이 삶 안에 자동적으로 놓여진다 (삶 자체가 애착인 셈이다). 이는 마치 자신의 기질, 천성이 그러해서 있는 듯 여겨질 정도이다; 어쨌든 모든 이는 번복되는 사용, 습관 같은 것에 의해서도 이런 속성을 자신을 위해 획득하기도 한다. 그리고 이것은 그가 배웠었던 것으로부터 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자신이 교리를 수단으로 배워왔었던 것들이 외적 인간으로부터 내적 인간 안으로 은근히 심어질 때까지 진리와 더불은 결합은 거행될 수 없다. 진리들이 내면의 인간 안에 있을 때, 그는 기억으로부터 진리의 실행을 더 이상 하지 않고, 그의 자기 자신의 본성으로부터 실행한다, 결국 그의 내면의 기억 안에 새겨져 있어, 어떤 것을 실행할 때 내면의 기억과 동시적으로 행동 안으로 놓여진다; 이렇게 나타날 때 타인이 이런 행동을 보면, 그가 천성적으로 그런 소질을 가진 듯 여겨지게 한다. 이것은 인간이 어린 시절에 배웠던 언어들로부터, 또는 추론력으로부터, 마찬가지로 양심으로부터 보여질런지 모른다. 이로부터 분명해지는 것은, 내면에 있다 해서, 그것이 인간과 결합된 것이 아니고, 그것이 삶 속에서 나타날 때까지 인간과 결합한 것은 아니다는 것이다. 이 주제를 두고 주님의 신성한 자비로부터 따로 말해볼 기회가 있을 것이다.

27, 28절. 이 주간을 채워라, 그리고 우리는 너에게 그녀 역시 주겠다, 너는 칠 년을 다시 나에게 봉사해야 한다. 28 그리고 야곱은 그렇게 했다, 그리고 이 주간을 채웠다, 그리고 그는 그에게 여인으로 그의 딸 라헬을 주었다. 29 그리고 라반은 그의 딸 라헬에게 그의 하녀인 빌하를 그녀의 하녀로 삼게 주었다. 30 그리고 그는 라헬에게도 갔다, 그리고 그는 레아보다 라헬을 더 사랑했다, 그리고 그에게 칠 년을 더 봉사했다. “이 주간을 채워라”란 끊임없는 노력(study)이 계속됨을 의미한다. “그리고 우리는 너에게 그녀 역시 주겠다, 너는 칠 년을 더 나에게 봉사해야 한다”란 그런 다음 끊임없는 노력의 상태가 가득 차 있는 것을 의미한다. “야곱은 그렇게 했다, 그리고 이 주간을 채웠다”란 이에 대한 결과를 의미한다. “그리고 그는 그에게 그의 딸 라헬을 여인으로 주었다”란 지금 내면의 진리에 대한 애착과 선이 결합했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라반은 그의 딸 라헬에게 그의 하녀 빌하를 그녀의 하녀로 주었다”란 묶음 또는 도움을 주는 수단들인 외면의 애착들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는 라헬에게도 갔다”란 내적 진리에 대한 애착과 결합함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는 레아보다 라헬을 더 사랑했다”란 외적 진리보다 내적 진리를 더 사랑함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는 그에게 또 다른 칠 년을 봉사했다”란 거룩한 끊임없는 노력을 의미한다.

이 주간을 채워라. 이는 끊임없는 노력(study)이 더 계속됨을 의미한다. 이는 “채움”의 의미가 봉사함, 또는 봉사함으로 채우는 것, 고로 끊임없는 노력이다; 그리고 “주간(week)”의 의미가 상태, 그리고 전체 기간이다로부터; 그러므로 현재의 경우, 계속해서 일어나는 상태와 기간, 결과적으로 계속적인 것이 의미된다. “주간”의 의미에 주목해보면, 이것은 “달(month)”의 의미와도 같다, 즉 이것이 단수로 언급될 때, 이것은 이전 것의 끝, 그리고 뒤잇는 상태의 시작, 고로 새로운 상태, 고로 시작으로부터 진행하여 끝까지에 이르는 바, 전 기간을 채움을 의미한다. “주간”이 모든 때들 같이 상태와 기간을 의미하는 이유는 모든 상태들 역시 그것들의 기간을 가지기 때문이다; 즉 시작, 그리고 발전해감, 그리고 끝을 가진다는 말이다; 그럼에도 다른 삶에서 이것들은 때들로 지각되지 않고, 상태들과 상태의 회전으로 지각된다. 여기서 분명해지는 것은, 고대인들이 주간을 수단으로 이해한 것은 모든 기간, 즉 날, 해, 시대 이든, 그 기간이 크든 작든 7로 구분되는 모든 기간으로 이해했다는 것이다. 여기서는 칠 년의 기간이 말해졌다; 고대인들과 더불어 일곱은 거룩한 것을 의미했다, “주간”은 거룩한 시기를, 또한 기간의 거룩함을 의미했다.

그리고 우리는 너에게 그녀 역시 주겠다, 너는 칠 년을 더 나에게 봉사해야 한다. 이는 그런 다음 끊임없는 노력의 상태가 가득 차 있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봉사, 봉사함의 의미가 끊임없는 노력이다로부터; 그리고 “칠 년”은 “주간, 칠 일”과 같은 의미인 바, 전체 기간이다로부터; 고로 충만된 상태, 이것 역시 거룩하다. 이 표현, “우리는 그녀 역시 줄 것이다”는 내적 진리에 대한 애착과 결합함이 있을 것이다를 의미한다. 내적 의미에서 “봉사함”이 끊임없이 노력함인 이유는 외적 인간의 노동은 내적 인간 안에서는 끊임없는 노력이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끊임없는 노력(study, 공부함)은 마음의 노동이라 불리운다.

야곱은 그렇게 했다, 그리고 이 주간을 채웠다. 이는 이에 대한 결과를 의미한다. 이는 “주간을 채움”의 의미가 끊임없는 노력의 계속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리고 이 노력의 결과가 뜻해짐이 분명하다.

그리고 그는 그에게 그의 딸 라헬을 여인으로 주었다. 이는 지금 선이 내면의 진리에 대한 애착과 결합했음을 의미한다. 이는 야곱이 자연 평면의 선을 표현한다로부터; 그리고 라헬이 내면의 진리에 대한 애착을 표현한다로부터; “여인으로 그녀를 주는 것”은 결합을 의미한다. 모든 선이 진리와 결합함은 처음에 외견의 외면으로부터 내면으로 진행하고, 마지막으로는 그것의 가장 깊은 측면까지 진행하는데 이것이 질서이기에. 여기서 내면의(interior) 진리에 대한 애착이라고 말해지고 있다. 그 이유가 진리 속에 있는 애착 자체는 선으로부터 안으로 흘러들기 때문이다. 선이 내적(internal) 진리에 대한 애착과 결합함은 자연 평면의 선이 합리적 진리와 결합됨에 있고, 이를 통하여 합리적 선과도 결합되어 있을 때 처음동안에서 거행된다. 이 결합이 야곱이 열두 아들의 출생 이후 아버지와 어머니의 집으로 돌아가는 모습으로 표현되는데, 이는 나중에 그 대목에서 살핀다.

그리고 라반은 그의 딸 라헬에게 그의 하녀 빌하를 그녀의 하녀로 주었다. 이는 묶음 또는 도움을 주는 수단들인 외면의 애착들을 의미한다. 이는 이미 살폈다. 라헬의 하녀 “빌하”가 외면의 애착들을; 그리고 레아의 하녀 “질바”가 외적 인 애착들을 의미하는 이유는 라헬에 의해 내적 진리에 대한 애착이; 레아에 의해 외적 진리에 대한 애착이 표현되기 때문에서 이다. 외면의 애착들은 내적인 것들에 도움이 되는 자연적인 애착들이다. 외면의 애착들이 진리가 선과 결합하는데 쓸모가 있는 이유는 이 애착들을 수단으로 하지 않으면 교리 속에 있는 어떤 교리도, 기억 속의 어떤 지식도 인간 안으로 들어갈 수 없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애착 안에 생명이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애착들 없이 단 한 절도 생각하거나 발음조차 할 수 없다. 이를 더 흥미있게 관찰하는 사람이라면, 금새 알아차리는 것은 애착 없는 음성은 자동 조작되는 음성, 생명 없는 음성임을 지각할 것이다. 고로 그 안에 있는 애착의 양과 질에 따라 그 안에 있는 생명의 양과 질도 있다. 이는 선이 없는 진리가 어떤지를; 그리고 애착은 선으로부터 진리들 안에 있다는 것도 보여준다.
인간의 이해력의 본성을 좀 더 세심히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눈치채는 것은, 의지력이 이해력 안에 있지 않으면 이해함은 없다는 것, 즉 이해력의 생명은 의지 안에 있다는 것이다. 다시 이것은 선이 없는 진리는 어떤지를, 그것은 생명 없음이다는 것, 따라서 진리는 그것의 생명을 선으로부터 받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 이유가 진리는 인간의 지적 부분에, 선은 인간의 의지 부분에 속하기 때문이다. 이 모두로부터 선으로부터 있는 선행이 없는 신앙은 어떨지를, 선행의 선이 없는 신앙의 진리들은 죽어 있다는 것을 금새 알아챌 수 있다. 그 이유는 이미 말한 대로, 진리들 안에 있는 애착의 품질과 양이 진리들의 생명과 품질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리들은 선행의 선이 없을 때 조차에서도 살아 있는 듯 나타나는 것은 자기를 사랑함과 세상을 사랑함으로부터 있기 때문이다. 이 사랑은 생명이 없어 영적 의미에서 죽음이라 불리우고 지옥의 생명이다. 애착은 계속 사랑하고 있는 것을 뜻한다.
이상 살핀 바로부터 애착들은 진리가 선과 결합하는데 쓸모 있는 수단들이다는 점; 그리고 애착들이 진리들을 받아들이게 한다는 것, 또한 진리들을 질서 안으로 배치한다는 것이다. 즉 진짜 애착들인 주님을 사랑함과 이웃을 향한 사랑으로부터 있는 애착들은 천국의 질서 안으로 배치된다; 그러나 자기를 사랑함과 세상을 사랑함으로부터 있는 애착들은 지옥의 질서 안으로 배치된다; 즉 천국의 질서에 정 반대되게 배치된다는 말이다.
가장 외적인 애착들은 신체 속의 것들인데, 이것들은 식욕과 (육체적) 쾌락이라 불리운다. 그 다음 내면의 애착들은 자연적 마음 속에 있다; 그러나 내적 애착들은 합리적 마음 속에 있고, 영적인 애착들이라 불리운다. 이 마지막에, 즉 마음 속의 영적인 애착들에 교리적 진리들은 외면, 그리고 가장 외적인 것, 또는 자연적이고 육체적인 애착들을 수단으로 받아들여진다. 그런고로 이 애착들은 쓸모 있는 수단들이고, 이것이 라반에 의해 레아와 라헬에게 주어진 하녀에 의해 표현되어 있다. 이 하녀들의 존재가 여기서 “라반”의 하녀라고 말해지는데, 이는 그 애착들이 라반에 의해 표현되는 선에 근원을 가졌음을 의미한다. 라반이 표현하는 선은 이미 살폈다. 처음 배워진 진리들은 이와 다른 애착들을 수단으로 은근히 심어지지 않는다; 진짜 애착들은 시간이 흐르면서 와지는데, 인간이 선으로부터 행동하기 전에는 와지지 않는다.

그리고 그는 라헬에게도 갔다. 이는 내적 진리에 대한 애착과 결합함을 의미한다. 이는 “…에게 감”의 의미가 결합이다는 것; 그리고 라헬이 내적 진리에 대한 애착이다로부터 알려진다.

그리고 그는 레아보다 라헬을 더 사랑했다. 이는 외적 진리보다 내적 진리를 더 사랑함을 의미한다. 이는 레아와 라헬의 표현으로부터 분명해진다; 즉 라헬은 내적 진리, 레아는 외적 진리이다.

그리고 그는 그에게 또 다른 칠 년을 봉사했다. 이는 거룩한 끊임없는 노력을 의미한다. 이는 “봉사함”의 의미가 끊임없는 노력이다로부터, 그리고 “일곱”의 의미가 거룩인 것이다로부터 알려진다. 여기서 거룩한 끊임없는 노력이라 말한 이유는 끊임없는 노력을 통하여 내적인 진리들은 선과 결합하기 때문인데, 그 이유는 모든 내적인 진리들은 주님을 바라보고 있고 그분을 사랑함을 통하여 선과 결합하기에 이 사랑함은 거룩 자체이기 때문이다.

31절. 그리고 여호와께서는 레아가 미움받는 것을 보셨다, 그리고 그분은 그녀의 자궁을 여셨다, 그리고 라헬은 불임이었다. “그리고 여호와께서 보셨다”란 주님의 예견과 섭리를 의미한다. “레아가 미움받았다”란 외적 진리에 대한 애착은 신성으로부터 더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그만큼 덜 귀여워해짐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분은 그녀의 자궁(태)을 여셨다”란 거기로부터 교회들의 교리가 왔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라헬은 불임이었다”란 내면의 진리는 받아들여지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여호와께서 보셨다. 이는 주님의 예견과 섭리를 의미한다. 이는 “보다”가 주님을 서술할 경우, 이는 예견과 섭리를 의미하는데, 이에 관하여는 32절에서 르우벤의 이름이 “보다”로부터 주어지는 바, 거기서 자세히 말할 것이다.
예견과 섭리를 일반적 측면에서 주목해보면, 예견은 인간 편에, 섭리는 주님 편에 적절한 표현이다. 주님께서는 영원으로부터서 인류가 어떻게 있을지를, 그 인류의 각각인 인간의 품질이 어떻게 있을지를, 그리고 악은 계속적으로 불어나리라는 것, 하여 인간 스스로 지옥으로 머리를 디밀고 돌진하고야 말리라는 것을 예견하셨다. 이렇기 때문에 주님은 인간이 지옥에 디민 머리를 빼내 천국으로 돌아서게 해줄런지 모를 수단들을 설비하셨다, 뿐만 아니라 그분은 섭리하심으로부터 계속적으로 인간을 돌려세워 인도하시었다. 또한 주님이 예견하신 것은, 어떤 선도 인간 안에서 뿌리를 내리려면 그가 자유함에서가 아니면 불가하다는 것, 자유함에서 뿌리내리지 않은 것은 무엇이든 악과 시험이 접근하자 마자 사라져버리고 말 정도로 너무나 허약하다는 것이다. 또한 주님이 예견하신 것은, 인간 스스로, 또는 그의 자유함으로부터 (네가 알아서 잘해라 라고 인간 자신에게 무작정 맡겨 놓을 때) 인간은 최고로 깊은 지옥 안으로 기울고야 말 것이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만일 인간이 천국쪽으로 자신을 인도할 수 있게 그의 자유함에서 허용하지 않는다면, 지옥에 가더라도 최악의 지옥은 면하게 해줄 수 있는 설비들을 마련하시는 것이다; 그러나 만일 인간이 선쪽으로 자유함에서 인도되기를 허용한다면, 그는 천국으로 인도될는지 모른다. 이런 사항들이 예견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섭리가 무엇을 뜻하는지를 보여준다, 그리고 미리 보여진 무엇이 설비되었는지도 알게 한다.
그리고 이상 살핀 바로부터 알게 되는 것은, 주님은 예견하지 못한다고 하던가, 또는 그분은 우리의 낱개에 속하는 사항들까지는 보지 못한다던가, 이런 사항들을 그분이 예견해서 인도해주지 못한다 라고 믿는 이들이 얼마나 틀렸는지 이다. 진리인즉, 주님의 예견과 섭리는 인간과 더불은 지극히 미미한 낱개적인 사항들 안에 있다는 것이다. 이런 사항들은 수 백만 중의 하나로부터 이어서 너무나 미세하기 때문에 인간의 생각이 오히려 자신 속의 이것을 납득하지 못한다. 그 이유가 인간의 삶의 아주 작은 순간도 영원으로 이어지는 결과들의 시리즈를 포함하기 때문이다, 즉 매 순간의 것들은 뒤잇는 것에 새로운 시작으로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인간의 이해력과 의지력 모두에서 그러하다. 주님께서는 영원으로부터 인간의 품질이 무엇일지를, 이것이 영원쪽으로 무엇일지를 미리 보셨기에, 그분의 섭리는 지극히 작은 낱개들 사항에서 있게 되었는 바, 인간을 선의 품질을 지니는 쪽으로 구부리시고 통치하신다. 이 수단은 인간의 자유를 적절히 조절해가심 이다. 이 주제에 관하여 차후 주님의 신성한 자비로부터 더 살필 것이다.

레아가 미움을 받았다. 이는 외적 진리에 대한 애착은 신성으로부터 더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그만큼 덜 귀여워해짐을 의미한다. 이는 “미워함”이 덜 귀여워함이다로부터; 그리고 레아의 표현이 외적 진리에 대한 애착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외적 진리들은 내적 진리들보다 신성으로부터 더 멀리 있다는 것은 외적인 것들은 내적인 것들로부터 온다는 사실로부터 알는지 모른다; 그 이유가 외적인 것들은 내적인 것들과 하나로서 나타나기 위해 수많은 내적인 것들로 구성된 형상들과 형체들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외적인 것들의 본성상 이것은 신성으로부터 더 멀리 있다; 그 이유가 신성은 가장 깊은 측면에, 또는 가장 높은 측면에 있기 때문이다. 주님께서는 가장 높은 데로부터 인간의 가장 깊은 것들 안으로 흐르시고, 이를 통하여 인간의 내면들 안으로, 그리고 이를 통하여 외적인 것들 안으로 흘러드신다. 고로 그분은 직, 간접적으로 흘러드시는 셈이다. 그리고 외적인 것들은 신성으로부터 더 멀리 떨어져 있는 바, 이로 인해 그것들은 비교적으로 질서 밖에 있어, 그것들은 내적인 것들과 달리 질서쪽으로 환원되도록 자신들을 허용하지 않는 경향이 강하다. 이는 씨를 예로 들어도 마찬가지이다; 씨는 바깥(껍질)보다 안쪽이 더 완전하다, 안쪽은 식물 전체를, 또는 나무 전체를 각각의 질서에서, 그것의 잎과 열매를 포함해 생산할 수 있다; 외적인 형체들은 다양한 원인으로부터 상처를 쉽게 받지만 씨의 내적, 또는 가장 깊은 형체들은 그렇지 않고, 이것은 더 내면적이고 더 완전한 본성 안에 있다. 이 경우는 인간의 내적 측면과 외적 측면과도 비슷하다; 그러므로 인간이 거듭나질 때, 그는 자연 평면이 거듭나기 전, 합리적 평면이 먼저 거듭난다; 그리고 자연 평면의 거듭남은 꽤 나중에 가서야, 그리고 더욱 힘들게 거듭난다, 그 이유는 자연 평면 안에는 질서 안에 있지 않은 많은 것들이 있고, 동시에 육체와 세상으로부터 상처를 받기 쉽게 노출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렇기에 이런 것들이 본문에서 “귀여움을 받지 못한다”라고 말해진다; 그러나 그것들이 내적인 것들에 일치하는 한, 그리고 그것들이 생활과 그것들 안에 있는 내적인 것들을 바라보는데 도움을 주는 한, 또한 거듭남에 이바지하는 한, 그만큼 그것들도 역시 귀여움을 받을 것이다.

그리고 그분은 그녀의 자궁(태)을 여셨다. 이는 거기로부터 교회들의 교리가 왔음을 의미한다. 이는 “자궁을 여는 것”, 또는 임신함과 아이를 낳음의 의미가 교회가 되는 것이다로부터 분명해진다; 그리고 이것이 교리적인 것들을 수단으로 결과되기 때문에, 그러므로 “자궁을 여는 것”은 교회들의 교리들이 의미된다. 이 경우가 어떻게 있는지는 아래에서 살피게 된다.

그리고 라헬은 불임이었다. 이는 내면의 진리는 받아들여지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이는 라헬이 내면의 진리에 대한 애착을 표현한다로부터; 그리고 “불임”의 의미가 거기로부터(내면의 진리에 대한 애착으로부터) 교리들이 없었다, 결과적으로 교회들이 없었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 이유가 이 서술은 레아에 대해서 한 말, 즉 “여호와께서 그녀의 태를 여셨다”, 이를 수단으로 거기로부터(외면의 진리에 대한 애착으로부터) 교회들의 교리들이 왔다가 의미된 것에 반대되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내면의 진리들이 받아들이지 않는 이유는, 내면의 진리들은 인간의 신앙을 초월해 있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내면의 진리들은 인간의 생각들 안으로 낙하하지 않기 때문. 이 진리들은 외적인 나타남에 따라 있지도 않기 때문, 즉 인간이 자신들을 이끌도록 허용하기 좋아하는 감각의 오류들에 따라 있지 않기 때문, 이것들은 인간의 생각들과 어느 정도라도 일치한다고 믿어지는 것이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 내면의 진리이다, 즉 다른 삶에는 시간과 공간이 없다, 그러나 이런 것들 대신 상태들이 있다. 지상에서 각자 자신의 삶 동안, 즉 시간과 공간에 있는 동안 그는 시간과 공간들로부터 그의 모든 생각들을 가지는 반면, 시간과 공간이 없으면 그는 전혀 생각할 수 없다; 그리고 그러므로 다른 삶에 있는 상태들이 시간과 공간을 수단으로 인간에게 묘사되지 않으면, 또는 시공에 있는 물체들을 수단으로 상태에 있는 것을 형체화하지 않으면, 인간은 어떤 것도 지각하지 못하고, 고로 어떤 것도 믿지 못하고, 결과적으로 가르침을 받지도 못한다; 그러면 교리는 불임 상태인 바, 그것으로부터 교회는 있지 않을 것이다.
또 다른 예를 생각해보자: 천적, 영적 애착들이 세상의 애착과 육체의 애착들을 수단으로 묘사되지 않으면, 인간은 어떤 것도 지각하지 못한다. 그 이유는 인간은 이런 애착들 안에 있기 때문이다. 이 애착을 수단으로 인간은 천적이고 영적인 애착들에 대한 어떤 개념(notion)을 가질 수 있다, 그럼에도 두 애착은 서로로부터 구분되고 다르며, 마치 천국과 땅이 다른 것과 같다. 천국의 영광, 또는 천국에 있는 천사의 영광을 놓고서도, 인간은 천국의 영광을 세상의 영광에 일치하게 만들어 내지 않으면, 그는 이 주제를 납득하지 못한다, 고로 그것을 인정할 수도 없다.
이런 이유로 주님께서는 인간의 납득력에 일치되게, 외관이 동일하게 나타나도록 하시어 말씀에서 말하셨다. 말씀의 글자 의미는 이런 본성 속에 있다, 그럼에도 그것 안에는 여전히 내적 의미를 포함하고, 그 안에 내면의 진리들이 있다. 이것이 레아에 대해서는 “여호와께서 그녀의 자궁을 여셨다”라고, 라헬에 대해서는 “그는 불임이었다”라고 말한 이유이다; 그 이유는 이미 말한 대로 레아는 외면의 진리에 대한 애착을, 라헬은 내면의 진리에 대한 애착을 표현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외면의 진리는 인간이 배우는 처음의 진리인 까닭에 이 진리들을 수단으로 인간이 내면의 진리들을 받아들일 수도 있게 설비해두셨다. 이것이 다음 장에서 “하느님께서 라헬을 기억하셨다, 그리고 그녀에게 귀기울이셨다, 그리고 그녀의 자궁을 여셨다”라고 말해진 대목에서 의미되어진다.
이 주제들은 고대 시대에 있었던 교회들로부터, 그리고 그들의 교리적인 것들로부터 실체화될런지 모른다. 이것들이 외적인 진리들로부터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고로 홍수 후에 있었던 고대 교회와 더불어서는 대부분이 외적인 표현들과 의미들이있었고, 이것 안에 내적인 것들이 저장되어 있었다. 대부분의 이 교회인들은 외적인 것들 안에 있을 때 거룩한 예배 안에도 있었다, 그리고 그들 중 누군가가 초기에 그들에게 말했다, 즉 이 외적인 것들은 신성한 예배의 필수적인 요소는 아니다, 필수적인 것은 외적인 것을 수단으로 표현되고 의미된 영적인 것들과 천적인 것들이다, 그러나 그들은 이런 교리들을 통째로 거절했다, 하여 교회는 없었다. 이와 같은 것이 유태인의 교회였다: 만일 누군가가 이들에게 그들의 의식들에 관하여, 이 의식은 주님의 신성한 것들로부터 그들의 신성시함이 파생된 것이다 하고 말한다면, 그들은 그것을 통째로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이와 같은 상황은 주님이 세상에 오셨을 때도 같았다, 그 당시의 그들은 더욱 더 육체적으로 되어 있었고, 특히 이 유태 교회에 속한 이들은 더욱 그러했다. 이것은 주님과 동거동락했던 제자들, 그분으로부터 그분의 왕국에 관해 많은 것을 듣고 배웠다는 제자들 자신의 경우도 같았다, 이렇게 배운 그들인데도 그들은 내면의 진리들을 지각하지 못했고, 그 당시 유태인들이 예상한 메시아에 관해 마음에 품었던 것을 넘어서지 못했다: 즉 주님은 이 백성을 여타 모든 나라들 위에 서게해서 영광과 더불어 지배하게 하실 것이다는 것, 그리고 그들이 천국의 왕국에 관하여 주님으로부터 많은 것들을 들었음에도, 천국의 왕국은 지상의 왕국과 비슷할 것이다는 것, 하느님 아버지는 이 왕국 안에서 가장 높으신 분일 것이다, 그분 다음으로 아들이 있다는 것, 그다음 열둘인 자기들이 있다는 것, 이런 순서에서 자기들 역시 세상을 통치하게 될 것이다는 생각을 조금도 벗어나지 못했다; 그러므로 야고보와 요한이 자기들을 그분의 오른쪽과 왼쪽에 앉게 하여 달라고 주님에게 요청했던 것이다 (막. 10:35-37); 그러자 나머지 제자들이 자기들보다 더 위대해지겠다 하는 이들을 두고 분개했다 (막. 10:41; 마. 20:25-28). 이와 같은 상황은 비록 주님께서 천국에서 가장 큰 자되는 것이 무엇인지를 가르치신(마. 20:25-28; 막 10:42-45) 직후에도 제자들은 자기들의 납득력에 따라 여전히 말하고 있을 뿐이어서, 자기들은 열 두 왕좌에 앉을 것이고 이스라엘의 열 두 지파를 판결한다고 알고 있다 (눅. 22:24, 30; 마. 19:28).
만일 이것을 그들에게 말해준다면; 즉 “제자들”이란 그들 자신을 뜻하지 않고, 사랑과 신앙의 선 안에 있는 모든 이들을 뜻한다는 것; 또한 주님의 왕국 안에서는 세상에서 있는 왕좌들이 없다는 것, 지배자도 없다는 것, 통치함도 없다는 것, 당신들은 거기 있는 지극히 작다 여겨지는 누구도 판단할 수 없다는 것을 말해준다면, 그들은 이 말들을 통째로 거절하고, 정말 그렇다고 그들이 결론을 낼 경우, 그들은 주님을 즉각 떠나면서 이렇다면, 차라리 자기들의 예전 직업이 더 나을 것이다고 하여 되돌아갔을 것이다. 주님께서 그렇게 말하신 이유는 그들은 외적 진리들만을 받을 것이다는 것, 그러나 이 진리를 수단으로 내적 진리들도 받아들일지 모른다는 것 때문이다. 그 이유가 주님께서 말하신 외적 진리 내에 내적 진리들이 감추여 있었기 때문, 그리고 시간이 흐르면서 이 진리들에 그들의 눈이 열릴 것이라는 것, 그때 외적 진리들은 내적 진리들을 생각하는 수단, 내지 물체일 뿐이 되어 사라져버린바나 다름 없게 되리라는 이유 때문이었다. 이상 서술한 바로부터 이 장과 다음 장에서의 말씀, 즉 먼저 여호와께서는 레아의 자궁을 여셨다, 그리고 그녀는 야곱에게 아들들을 낳았다, 그 후에 라헬이 아들들을 낳았다에서 뜻해진 내용을 이해했을 것이다.

이 장 이후 이어지는 장들에서 야곱의 열 두 아들들이 다루어지고, 그들을 아버지(조상)로 하여 야곱의 열두 지파들의 이름들이 명명되어졌다, 하여 여기서 지파라는 단어가 의미하는 것, 그리고 왜 그 지파가 열둘이었는지를 총괄적 측면에서 다루어 본다. 지금까지 이 안에 감추여 있는 비밀들을 알았던 자는 아무도 없다. 그 이유는 말씀의 역사들은 글자에 쓰인 그대로의 역사들일 뿐이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글자에 나타난 것이 거룩한 사항들을 섬길 뿐, 더 이상의 어떤 것이 없다고 굳건히 믿어버리기 때문이다. 따라서 열두 지파들이란 이스라엘의 후손들의 분파들이 여러 구분된 나라들, 또는 일반적으로 가문들을 형성했던 것밖에 더 다른 의미는 없다고 결론 맺어두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그것들은 신성한 것들을 포함하고 있다; 말하자면, 열두 지파란 사랑과 신앙이 아주 많이 분열된 것이다는 것; 그러나 각 지파가 의미하는 것은 각 지파의 이름이 결정되는 장면인 야곱의 아들들이 출생하는 그 구절에서 살필 것이다. 일반적으로 열두 지파란 진리와 선, 또는 신앙과 사랑에 관한 교리의 모든 것들을 의미한다. 그 이유가 이것들(진리와 선, 신앙과 사랑)이 주님의 왕국을 구성하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진리 또는 신앙으로부터의 것들 안에 생각의 모든 것이; 선 또는 사랑으로부터의 모든 것 안에 애착의 모든 것이 있기 때문이다. 유태인의 교회가 설립된 이유는 이 교회 속의 것들이 주님의 왕국을 표현하도록 하기 위함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열둘로 나뉜 이 백성의 분파들은 주님의 왕국 속의 것들을 의미했다. 이것은 이전에 결코 누구에게도 열려지지 않은 비밀(mystery)이다.
숫자 “12”가 일반적 측면에서 모든 것들을 의미한다는 것은 이미 살폈다; “지파들”은 진리와 선, 또는 신앙과 사랑으로부터 있는 여러 가지 것들을 의미한다, 고로 “열두 지파들”은 이런 것들로부터의 모든 것들을 의미하는 바, 이를 하나씩 서술하기에 앞서 말씀에서 열두 지파를 찾아 확증해보자. 계시록서에서:
새 예루살렘의 거룩한 성은 열두 큰 문(gate)을 가졌다, 그리고 큰 문들 위에는 열두 천 사들이 (있었다); 그리고 거기 위에 이름들이 쓰여 있는데, 이것은 이스라엘의 아들들의 열 두 지파들의 이름들이다; 그리고 그것 안에 어린 양의 열두 사도들의 이름들(이 있다). 그 가 갈대로 도성을 쟀더니 12000 펄롱(furlong)이었다; 그리고 그가 거기로부터 성벽을 쟀 더니 144 큐빗(cubit)이었다, 이것은 사람에 대한 측량, 즉 천사에 대한 측량이었다. 열두 큰 문들은 열두 진주들이었다 (계. 21:12, 14, 16, 17, 21).
거룩한 성, 또는 새 예루살렘이 주님의 새 교회(Lord’s New Church)이다는 것은 위구절의 세부 사항들로부터 분명해진다. 위 구절에 앞서 있는 몇 장들이 교회의 상태들을 묘사하되, 그것들의 종말 앞의 것을 묘사하고 있다. 하여 인용한 위 구절에서는 새 교회를 취급하고 있다, 그러므로 큰 문들, 성벽, 성의 기초들은 교회 속의 이런 저런 사항들밖에 더 아니다, 즉 이것은 선행과 신앙에 속한 것들이다, 그 이유는 이것이 교회를 구성하기 때문이다;
고로 위 구절에서 여러 번 언급되는 숫자 “12”, 그리고 “지파들”, 또한 “사도들”역시 열둘, 지파들, 사도들 자체를 뜻하는 것이 아니고 한 복합체(complex)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을 뜻하는 것임은 누구나 빤히 알 수 있는 사항들이다; 마찬 가지로 숫자 “144” 역시 마찬가지 의미 선상에 있다. 그 이유가 144는 12×12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열둘이 모든 것들을 의미하기에, “열두 지파들” 역시 교회 속의 모든 것들을 의미함이 분명하다. 이는 이미 말한 대로 진리들과 선들, 또는 신앙과 사랑이다; 마찬가지로 “열두 사도들”에 의해서도 교회의 모든 것들, 즉 신앙과 사랑으로부터의 모든 것들이 의미된다. 그러므로 이 숫자(12)는 “사람에 대한 (사람에 관한) 측량, 즉 천사에 대한 측량”이라 불리우고, 이 말을 수단으로 진리와 선의 상태가 뜻해지고 있다.
계시록서에서와 같이, 구약 성경의 예언서들에서도 새 예루살렘이 취급된다. 거기서도 주님의 새 교회가 의미되고 있다; 즉, 이사야. 65:18, 19, 그 이하; 스가랴. 14장; 특히 에스겔, 40-48인데, 이 구절들에서 “새 예루살렘,” “새 성전,” 그리고 “새 땅”에 의해 천국들에 있는 주님의 왕국, 그리고 교회인 땅 위에 있는 그분의 왕국이 내적 의미에서 묘사되어 있다. 에스겔서에서 말해진 사항들로부터서는 더욱 분명해지는데, 그 이유는 거기서는 “땅,” “예루살렘,” “성전”, 그리고 그 안의 모든 것들, 또한 “열두 지파들”에 의해 의미가 더 명백해 있기 때문이다; 또한 토지의 분배가 취급되고, 지파들에 따라서 있는 그것의 상속분, 또한 성, 성벽, 기초들, 큰 문들, 성전 안에 속할 모든 것들에 의해서도 내적 의미가 분명해진다. 아래에는 에스겔서의 구절 중에서 지파들에 관해 언급한 구절만 인용한다: .
주 여호비께서 말하셨다, 이것은 경계이다, 이 경계를 가지고 너는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 들에 따라 토지를 상속할 것이다. 너희는 이스라엘의 지파들에 따라 이 토지를 나눌 것이 다. 그리고 너희에게 상속을 위해 제비뽑는 수단으로 나눔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너희 사 이에 체류하는 외국인들에게도 (마찬 가지이다). 그들은 이스라엘의 지파들의 한가운데에 서 상속분을 위해 너희와 함께 제비를 던질 것이다 (겔. 48:13, 21-23). 토지에 관한 것은 이스라엘에서 소유권을 위해 제 일인 자에게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나의 제 일인 자들은 내 백성을 더 이상 괴롭히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이스라엘의 가문들에 그들의 지파에 따라 토지를 줄 것이다 (45:8).
위는 상속분에 관하여서 이다, 그리고 어떻게 그것들이 지파들에게 할당되는지, 이것이 48장 1절 이하에서 언급되는데 지파들이 이름들에 의해 언급되고 있다. 그리고 도성의 큰 문들에 관하여, 이스라엘의 지파들의 이름들에 따라서이고, 같은 장 31-34절에서 읽을 수 있다.
거기서 “지파들”이 지파들을 뜻하지 않음은 분명한데, 그 이유는 에스겔이 이 예언을 할 즈음에서는 이스라엘의 열 지파는 어느 방향으로 갔는지도 확실치 않게 사방으로 흩어져 사라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은 그 후에 되돌아오지 않았고, 되돌아 올 수도 없었는데, 그 이유는 그들은 이방인들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각 지파에 대한 언급이 만들어져 있고, 그들이 토지를 어떻게 상속받을 것인지, 그들의 경계는 어떨 것인지에 대한 언급이 있다; 즉 단 지파를 위한 경계(2절); 아셀 지파를 위한 경계(3절); 납달리, 므낫세, 에브라임, 르우벤, 유다를 위한 경계, 레위지파를 위한 상속분은 무엇일지에 대해; 베냐민 지파를 위한 경계; 시므온, 잇사갈, 스블론, 그리고 갓을 위한 경계 (4-29절); 또한 도성은 이스라엘 지파들의 이름에 따라 열두 큰 문을 가져야 한다는 것; 북쪽을 향한 큰 문 셋은 르우벤, 유다, 레위를 위해; 동쪽을 향한 큰 문 셋은 요셉, 베냐민, 그리고 단을 위해; 남쪽을 향한 큰 문 셋은 시므온, 잇사갈, 그리고 스블론을 위해; 그리고 서쪽을 향한 큰 문 셋은 갓, 아셀, 그리고 납달리를 위해서 이다는 것 (31-34절); 고로 분명한 바, “열두 지파들”은 주님의 왕국의 모든 것들, 또는 신앙과 사랑의 모든 것들을 의미한다는 것, 그 이유가 이미 말한 대로 이것들이 주님의 왕국을 구성하기 때문이다.
“열두 지파들”이 주님의 왕국의 모든 것들을 의미하기 때문에, 그러므로 또한 열두 지파들은 그들의 진영 배치에 의해, 여행 순서에 의해서도 이 왕국을 표현했다. 모세의 책에서, 그들은 지파들에 따라 회중의 천막을 빙둘러 진영을 차렸다고 우리는 읽는다; 즉 동쪽을 향하여서는 유다, 잇사갈, 그리고 스블론이; 남쪽을 향하여서는 르우벤, 시므온, 그리고 갓이; 서쪽을 향하여서는 에브라임, 므낫세, 그리고 베냐민이; 북쪽을 향하여서는 단, 아셀, 그리고 납달리 지파가 진영을 차렸다; 그리고 그들이 진영을 차렸던 대로 여행도 했다 (민. 2장). 이런 사항에서 그것들은 주님의 왕국을 표현했음이 발람의 예언으로부터 분명해진다:
발람이 그의 눈을 들어올렸을 때, 그리고 각 지파들에 따라 거주하는 이스라엘을 보았을 때, 하느님의 영이 발람 위에 왔다, 그리고 그는 자기의 또렷한 말투로 발음해서 말했다, 그들의 장막은 얼마나 훌륭한지, 오 야곱아, 네 주택들아, 오 이스라엘아! 그들이 심어짐이 골짜기들 같고, 강가의 동산들 같고, 여호와께서 심으신 침향목 같고, 물가의 삼나무들 같 다 (민. 24:2-6).
발람이 이 말들을 여호와로부터 말했다는 것이 이외 여러 곳에서 분명하게 서술되어 있다 (민. 22:8, 18, 19, 35, 38; 23:5, 12, 16, 26; 24:2, 13).
이 모두로부터 분명해지는 바, 지파들에 따라 가나안의 토지의 상속에 의해 표현된 것, 이에 관하여 우리가 모세의 책에서 읽는 바, 모세는 이스라엘의 군대에 편입될 수 있는 이십 세 이상의 모든 이를 그들의 아버지의 집에 따라 계수한 이스라엘의 아들들의 모든 회중(의 기록)을 가져오게 하였다는 것; 그리고 토지는 제비뽑아 분배하였다는 것; 그들의 아버지의 지파들의 이름에 따라 그들은 상속분을 받는다는 것 (민. 26:7-56; 33:54; 34:19-29); 토지는 여호수아에 의해 제비뽑아 지파들에 따라 나눈 것 (여. 13; 15-19장) 등등이다. 앞에서 말한 대로 이런 대목에서 주님의 왕국이 표현되었다는 것은 그 구절 안의 모든 세부 사항들로부터 분명해진다; 그 이유가 “가나안의 토지”가 왕국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의 아들들이 “군대들”이라 말해진 이유, 그리고 그들이 “그들의 군대들에 따라 진을 친다(encamp)”고 말해진(민. 2:4-30) 이유는 “군대”가 같은 것, 즉 진리들과 선들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주님은 “여호와 체바욷,” 즉 “군대들의 여호와(만군의 여호와)” 라고 불리우셨다. 그러므로 그들이 이집트를 떠날 때, “여호와의 군대들”이라 불리운 것을 아래 모세의 책에서 읽는다:
사백 삼십 년이 오는 바로 그 날, 여호와의 모든 군대들은 이집트의 토지로부터 나갔다 (출. 12:41).
그들이 이집트에서, 후에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군대들”이라는 품질 수준에서 그렇게 불리운 것은 오로지 표현상의 측면일 따름이었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자명할 것이다. 그 이유가 그들은 글자 의미의 표현 그대로 “여호와의 군대들”이라면 주님의 것인 진리와 선들로 인격의 품질을 갖춘 이들이 상상되어야 하겠지만, 실상 그들은 그런 진리들과 선의 측면에서는 아마 모든 나라 중에서 최악이라 말해야 될 것이기 때문이다.
우림과 둠밈이라 불리운 것, 즉 아론의 가슴받이에서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의 이름들”에 의해 의미된 것도 위에 설명한 내용과 맥락을 같이 한다. 이 가슴받이에 관하여 우리가 모세의 책에서 읽는 바, 네 줄로 할 것, 열두 돌(stone)들이 있을 것, 이 돌들은 이스라엘의 이름들에 따라 있을 것, 그들의 이름들에 따라 열둘 일 것; 그리고 인장 새김이 열두 지파들을 위해 각 보석 위에 있을 것 (출. 28:21; 39:14) 등등이다; 그 이유가 아론은 주님의 신성한 성직을 표현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그에게 수여된 모든 것들은 신성한 천적, 영적인 것들을 표현했다. 이 표현의 의미들은 차후 그 구절들을 다룰 때 주님의 신성한 자비로부터 설명할 것이다. 가슴받이 자체 안에, 이것은 가장 거룩하였던 바, 주님 안에서 사랑과 신앙으로부터 있는 모든 것들에 관한 표현들이었다. 이것들이 우림과 둠밈이다. 이름들이 귀중한 돌(보석) 위에 새겨진 이유는 일반적 측면에서 “돌”은 진리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귀중한 돌”은 선으로부터 투명해진 진리들이다; 그리고 몇몇 지파들의 “이름들”이 품질을 의미했기에, 그러므로 돌의 특별한 종류가 각 지파를 위해 할당되었다 (출. 28:17-20; 39:8, 10-13). 그리고 각 돌의 색깔과 투명도는 각 지파에 의해 의미된 품질을 표현했다; 이로부터 여호와 또는 주님은 우림과 둠밈에 의해 대답을 주셨다.
에봇의 양 어깨 위에 있던 “두 호마노(얼룩마노, onyx) 돌들”에 의해서도 가슴받이에 있는 돌들과 같은 의미가 표현되었으나 수준상에서 덜 하였다; 그 이유가 “어깨들”은 모든 힘을, 고로 주님의 전능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슴”, 또는 “심장과 폐들”은 신성한 천적, 영적 사랑을 의미했다; 즉 “심장”은 신성한 천적 사랑을; “폐”는 신성한 영적 사랑을 의미했다, 그리고 이 장의 끝에서, 즉 웅대한 사람이 취급되는 곳에서, 심장과 폐의 영역의 상응이 취급되는 곳에서 더 자세히 알아질 것이다. “에봇의 어께 위에 있는 두 돌들”에 관해서 우리는 모세의 책에서 아래와 같이 읽는다:
너는 두 호마노 돌을 가져와라, 그리고 그것들 위에 이스라엘의 아들들의 이름들을 새겨라; 이쪽 돌에 그들 이름의 여섯을, 다른 쪽의 돌에 나머지 그들의 이름을 새기되 그들의 세대 들에 따라서이다. 너는 두 돌들을 에봇의 어깨 위에 놓을 것이다, 이는 이스라엘의 아들들 을 위한 기억함의 돌들일 것이다 (출. 28:9, 10, 12; 39:6, 7).
지파들이 진리와 선, 또는 신앙과 사랑으로부터 있는 것을 의미했기 때문에, 그리고 각 지파는 거기로부터의 어떤 보편적인 것을; 레위 지파는 사랑을 의미했기 때문에(이는 이 장 34절에서 다룬다), 이로부터 막대기들을 놓아둠에 의해 의미된 것, 즉 각 지파에 하나씩, 회중의 천막에서, 그리고 레위 지파의 막대기에서만 알몬드의 꽃이 핀 것의 의미가 알아진다. 이에 관해 우리는 모세의 책에서 읽는다:
열두 막대기들을 가져와라, 이는 그들의 아버지의 집의 각 머리를 위해 하나씩이다, 그리고 그것들을 만남의 천막 왼쪽에 놓아두라; 그리고 너는 레위 지파의 막대기 위에 아론의 이 름을 써놓아라. 그리고 아론의 막대기는 막대기들의 한가운데에 있었다, 아침에 레위 지파 를 위한 아론의 막대기에 꽃이 핀 것이 보였다, 그리고 꽃이 만발하여 알몬드가 열렸다 (민. 17:2-8);
이는 사랑이 주님의 왕국에 있는 모든 것의 필수적 근본이다는 것, 이로부터 모든 열매 풍성함이 있음을 의미했다. 아론의 이름이 그것 위에 쓰인 이유는 아론이 주님의 신성한 성직 측면에서 그분을 표현했기 때문이다. “주님의 성직”에 의해 신성한 선이 의미된다는 것, 이것은 그분의 사랑과 자비로부터이다는 것; 그리고 “주님의 왕권”에 의해서는 신성한 선으로부터 있는 신성한 진리이다.
이상 살핀 바로부터 아래 구절의 “지파들”과 “열두 지파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알는지 모른다. 계시록에서:
그리고 나는 날인되어진 그들의 숫자를 들었다; 십사만 사천 명, 이스라엘의 모두 각각의 지파로부터 날인되었다. 유다 지파에서 일만 이천 명이 날인 되어졌다. 르우벤 지파에서 일 만 이천 명이 날인 되어졌다. 갓 지파에서 일만 이천 명이 날인 되어졌다. 아셀 지파에서 일만 이천 명이 날인 되어졌다. 납달리 지파에서 일만 이천 명이 날인 되어졌다. 므낫세 지 파 중에서 일만 이천 명이 날인 되어졌다. 시므온 지파 중에서 일만 이천 명이 날인 되어 졌다. 레위 지파 중에서 일만 이천 명이 날인 되어졌다. 잇사갈 지파 중에서 일만 이천 명 이 날인 되어졌다. 스불론 지파 중에서 일만 이천 명이 날인 되어졌다. 요셉 지파 중에서 일만 이천 명이 날인 되어졌다. 베냐민 지파 중에서 일만 이천 명이 날인 되어졌다
(계. 7:4-8).
모세의 책에서:
영원의 날들을 상기하라; 세대와 세대의 햇수들을 이해하라. 지극히 높으신 분이 나라들에 게 그들의 상속분을 주었을 때, 그분이 사람의 아들들을 분리하셨을 때, 그분은 이스라엘의 아들들의 수에 따라 백성의 경계들을 놓으셨다 (신. 32:7, 8).
다윗서에서:
예루살렘은 빽빽하게 채워진 성으로 건설되었다; 그쪽으로 지파들, 야(Jah)의 지파들, 이스라엘의 증거들이 여호와의 이름을 고백하기 위하여 올라간다 (시. 122: 3, 4).
여호수아서에서:
모든 땅의 주의 언약의 궤가 너희 앞에서 요단을 건너는 것을 잘 보라. 너에게 이스라엘의 지파들로부터 열두 사람을, 모두 각각의 지파들로부터 사람을 데려와라. 모든 땅의 주의 여 호와의 궤를 맨 성직자의 발 바닥이 요단의 물에서 쉴 것인 즉, 요단의 물은 절단 될 것이 다; 그것들은 한 무더기로 서있을 것이다 (여. 3:11-13).
다시:
요단의 한가운데로부터, 성직자들의 발이 준비하여 섰던 장소로부터 열두 돌들을 가져와라, 그리고 그것들을 너희 더불어 운반하라, 모두 각각의 사람이 그의 어께 위에 돌을 운반하 되, 이스라엘의 지파들의 수에 따라서이다; 이것은 요단의 물들이 끊어졌다는 것에 대한 표 시이다. 더 나아가 여호수아는 요단의 한가운데, 언약의 궤를 맨 성직자들의 발이 섰던 장 소에 열두 돌들을 세웠다 (여. 4:3-9).
다시:
엘리야는 여호와께서 네 이름은 이스라엘일 것이다 하고 말하신 야곱의 아들들의 지파들의 수에 따라 열두 돌들을 가져왔다; 그리고 그는 여호와의 이름 안에서 제단을 건축했다 (왕상. 18:31, 32).
“지파들”이 사랑의 선들과 신앙의 진리들을 의미하는 것은 마태복음서의 주님의 말씀으로부터도 분명해진다:
그때 사람의 아들의 표시가 나타날 것이다; 그리고 그때 땅의 모든 지파들이 통곡할 것이 다, 그리고 그들은 힘과 영광과 더불어 하늘의 구름들 안에 오는 사람의 아들을 볼 것이다 (마. 24:30);
위에서 “땅의 모든 지파들이 통곡함”에 의해 진리를 인정함과 선으로부터의 생활이 더 이상 있지 않을 것이 의미된다, 그 이유는 취급된 주제가 시대의 극점(종말)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가 계시록서에서:
잘 보라 그분은 구름을 사용하시어 오신다, 그리고 모두 각각의 눈이 그분을 볼 것이다, 그 리고 그분을 찌른 그들 또한 볼 것이다; 그리고 땅의 모든 지파들은 그분 때문에 슬퍼할 것이다 (계. 1:7).
“하늘의 구름들에서 오심”에 의해 의미된 것은 18장 서문에서 알았을 런지 모른다; 또한 경험으로부터 나에게 보여진 더 많은 사항으로부터 위의 의미에 대해 더 알고 있으리라 본다.
신앙과 사랑의 모든 것들이 “지파들”이라 불리운 이유는 원어에서의 같은 표현이 “홀(scepter)”과 “지팡이(staff)” 또한 의미하기 때문이다. “홀” 또는 “지팡이”가 힘(power)을 의미하는 것은 차후 주님의 신성한 자비로부터 더 살필 것이다. 이름 “지파”는 그것 안에 진리들과 선들이 주님으로부터 자체 내에 모든 힘을 가진다는 것을 포함하고 있다. 이런 이유로 천사들이 “힘들”이라 불리우고, 마찬가지로 “주권들”이라고도 불리운다, 그 이유가 “제 1 인자”가 이스마엘로부터 내려온 “열두 제 1 인자들” 같이(창. 25:16) 선행과 신앙의 제일의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파들을 관장하는 제 1 인자도 마찬가지이다 (민. 7:13:4-16).
지금까지 말해온 열두 지파들로부터 주님의 제자들, 후에 “사도들”이라고 불린 그들이 왜 열둘이었는지; 그리고 그들이 지파들 같이 선들과 진리들 측면에서 주님의 교회를 표현했다는 것도 알았으리라 본다. 베드로가 신앙을; 야고보가 선행을; 요한은 선행의 일을 표현한 것은 이미 살핀 바 있다 (18장 서문과 22장 서문). 마찬가지로 주님께서 그들에게, 그들에 관하여 말하신 것으로부터 매우 분명하다.

32절. 그리고 레아는 임신해서 아들을 낳았다, 그리고 그녀는 그의 이름을 르우벤이라 불렀다. 그렇게 부른 까닭은 여호와께서 내 고통을 보셨다, 하여 지금 내 남자가 나를 사랑할 것이다 라고 그녀가 말해서였다. “그리고 레아가 임신해서 아들을 낳았다”란 외적인 것으로부터 내적인 것에 이르러 있는 영적인 임신과 출생을 의미한다. “그녀는 그의 이름을 르우벤이라 불렀다”란 그것에 관한 품질, 이것이 묘사됨을 의미하고 있다. “여호와께서 나를 보셨다” 이는 최고 높은 의미에서 예견, 내적 의미에서 신앙, 내면의 의미에서 이해함, 외적 의미에서 보는 것, 그리고 현재의 경우 주님으로부터의 신앙을 의미한다. “내 고뇌”란 선에 도착하는 상태를 의미한다. “지금 내 사람이 나를 사랑할 것이다”란 여기에서 진리의 선이 올 것임을 의미한다.

그리고 레아가 임신해서 아들을 낳았다. 이는 외적인 것으로부터 내적인 것에 이르러 있는 영적인 임신과 출생을 의미한다. 이는 “임신함과 낳음”의 의미가 내적 의미에서 거듭나지는 것이다로부터 분명해진다; 그 이유가 거듭나지는 인간은 새로이 임신되어 출생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거듭남은 새로운 출생, 그러나 영적 측면에서의 새로운 출생이다. 인간은 참으로 인간으로 그의 부모로부터 태어나진다, 그러나 그가 주님으로부터 다시 태어날 때까지 그는 사람이 아니다. 영적이고 천국적인 삶은 인간을 사람으로 만드는 삶이다. 그 이유는 이것이 당사자를 들짐승과 구별되게 하기 때문이다. 이런 영적인 임신과 출생이 말씀에서 임신과 출생으로 언급되는 것에 의해 의미된다; 그리고 여기서 말해진 것, 즉 “레아가 임신해서 아들을 낳았다”에서도 같은 것이 의미된다. 이런 임신들과 출생들은 외적인 것으로부터 내적인 것들에로 거행된다는 것이 “레아가 임신하고 낳음”에 의해 의미되었다고 말한 이유는 레아에 의해 외적 진리에 대한 애착이 표현되기 때문; 그리고 르우벤에 의해 신앙으로부터의 진리가 표현되는데, 이것은 거듭남의 처음에 해당되고, 거듭남은 외적인 것으로부터 개시되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가 어떠한지는 레아와 라헬에 의한 야곱의 자녀들에 관하여 뒤이어지는 것으로부터 차츰 나타날 것이다.

그녀는 그의 이름을 르우벤이라 불렀다. 이는 그것에 관한 품질, 이것이 묘사됨을 의미한다. 이는 “이름,” “이름을 부름”의 의미가 품질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품질 자체는 이 말, 즉 “여호와께서 내 고뇌를 보셨다, 그 이유가 지금 나의 사람이 나를 사랑할 것이기 때문이다”에 의해 묘사되어 있는데, 이것이 르우벤이다. 여기서 야곱의 모든 아들들의 이름들이 교회의 보편적인 것들을 의미하는 것은 이제 살필 것이다. 또한 진짜 보편적인 것들도 각각의 이름 안에 놓여졌다; 그러나 당사자가 이름이 불리워진 이유의 표현에 대한 내적 의미를 알지 못하면, 무슨 보편적인 의미가 있는가도 알지 못한다. 예를 들면, 르우벤의 의름이 붙여진 이유인 “보셨다”라는 표현; 시므온으로 명명되게 한 표현인 “들으셨다”; “달라붙을 것이다”라는 표현에서 레위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그리고 “고백할 것이다”라는 표현으로부터 유다로 이름지어졌다. 이 외에 다른 이름도 마찬가지 이다.

“열두 지파들”이 진리와 선, 또는 신앙과 사랑으로부터의 모든 것들을 의미하는 것을 앞에서 살폈다; 그리고 야곱의 아들들로부터 지파들의 이름들이 명명되었는데, 이를 하나씩 취급할 것인 바, 또 다른 비밀들이 여기서 열려진다, 즉 그것들 안에 포함된 것이 열려진다는 말이다. 모든 천적, 영적 열, 또는 사랑과 선행이 마치 태양으로부터 불꽃이 있듯 천국에서 외적 형체에서 지각되어진다; 또한 이 천적이고 영적인 빛, 또는 신앙은 천국에서 외적인 형체에서 태양으로부터의 빛 같이 나타난다; 그리고 거기로부터의 빛은 그것 안에 총명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이것은 거기서 태양이신 주님으로부터 이기 때문이다는 것은 많이 살폈다. 이로부터 분명한 바, 모든 선은 태양이신 주님으로부터 있는 열로부터이다는 것; 그리고 모든 진리는 거기로부터 있는 빛으로부터이다는 것이다; 더 분명한 것은, 모든 애착들, 이는 주님으로부터 있는 천적이고 영적인 열의 변화들이다는 것, 그리고 이 변화로부터 상태의 바뀜이 있다는 것; 그리고 모든 생각들, 이는 신앙 또는 진리인 바, 주님으로부터 있는 천적이고 영적인 빛의 다양함들이다는 것, 그리고 이로부터 총명이 온다는 것이다. 이 열과 빛 안에 천국에 있는 모든 천사들이 있다는 것, 그리고 그들의 애착들과 생각들의 다른 근원은 없다는 것이다. 이는 그들의 언어로부터 명백해진다, 이는 이 근원의 결과에서 천국의 빛의 변경과 다양함들에 있다, 그리고 말로 다 설명할 수 없이 다양하고 충만되어서 납득력을 초월해 있다.
이런 사항들이 세상에서 표현적으로 전시되기 위하여 야곱의 몇 아들들에게 이름이 주어지고, 이것들이 선과 진리, 또는 사랑과 신앙의 보편적인 것들을, 고로 천적이고 영적인 열의 변화들, 그리고 이 열로부터 파생된 빛의 변화들 측면에서의 보편적인 것들을 의미하였다. 이 보편적인 것들의 질서 자체가 불꽃과 불꽃으로부터 파생되는 광휘를 결정한다. 질서가 사랑으로부터 시작될 때, 진짜 질서를 뒤잇는 모든 것은 불꽃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질서가 신앙으로부터 시작될 때, 진짜 질서를 뒤잇는 모든 것은 명료함(lucid, 투명함)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뒤잇는 것들에 따른 차이는 존재한다. 그러나 뒤잇는 것의 질서가 진짜 질서가 아니다면, 모든 것은 차이점과 더불어 희미함, 불명료함으로 나타난다. 이 질서와 이로부터 결과하는 차이에 관하여는 차후 주님의 신성한 자비로부터 별도로 살필 것이다. 이것은 주님께서 우림과 둠밈을 수단으로 어떻게 대답을 주셨는지를; 그리고 질문에 있는 문제의 상태에 따라 그들은 귀중하고 투명한 돌, 열두 지파들의 이름이 새겨진 돌로부터의 빛과 광채를 수단으로 대답을 받았다는 것을 설명한다; 그 이유가 이미 말한 대로, 이름들 위에 주님의 왕국에 있는 사랑과 신앙의 보편적인 것들이 새겨져 있었기 때문, 결과적으로 불꽃과 빛의 보편성을 수단으로 사랑과 신앙속의 것들이 천국에서 표현되어졌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먼저 말씀으로부터 확증해두어야 할 것은 언급되는 지파들의 이름의 순서가 말씀에서 다양하다는 것, 그리고 이것은 취급된 주제의 상태와 일치한다는 것; 그리고 이로부터 우림과 둠밈에 의해 주님으로부터 주어지는 대답들은 순서로부터 질문한 주제의 상태에 따라 빛을 발한다는 것을 알는지 모른다; 그리고 주제의 상태들은 선과 진리의 질서에 일치하여 다양해진다. 그러나 진리와 선의 무엇이 야곱의 각 아들에 의해 의미되는지는 설명함에서 보여질 것이다; 즉, “르우벤”에 의해서는 주님으로부터의 신앙이; “시므온”에 의해서는 주님으로부터 있는 의지의 신앙이; “레위”에 의해서는 사랑 또는 선행이; “유다”에 의해서는 사랑의 신성과 주님의 천적 왕국이 의미된다. 나머지 여덟 명에 대하여는 다음 장에서 서술할 것이다. 출생일에 따른 그들의 순서는 다음과 같다: 르우벤, 시므온, 레위, 유다, 단, 납달리, 갓, 아셀, 잇사갈, 스블론, 요셉, 베냐민 이다. (이는 29:32-35, 30:6, 8, 11, 13, 18, 20, 24; 35:18절을 보라.) 이 순서는 여기서 취급된 주제의 상태에 따라 있다, 이것은 인간의 거듭남의 순서이다; 그 이유가 거듭남의 경우, 개시함이 “르우벤”인 신앙의 진리로부터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발전해감이 “시므온”인 참된 것을 뜻함, 이로부터 “레위”인 선행으로 발전한다; 하여 주님을 향하는데, 이것은 최고 의미이고, 이것이 “유다”에 의해 표현되어져 있다. 영적 임신과 출생, 또는 거듭남은 외적 측면으로부터 내적 측면으로 진행이 된다; 즉, 신앙의 진리로부터 사랑의 선쪽으로 이다는 말이다.
야곱이 마므레(기럇아르바)에 있는 그의 아버지 이삭에게 오기 직전, 열두 아들들은 다음 순서로 명명되어져 있다: 르우벤, 시므온, 레위, 유다, 잇사갈, 스블론, 요셉, 베냐민, 단, 납달리, 각, 아셀이다 (창. 35:23-26); 이 순서는 레아와 라헬의 아들들이 출생일 그대로 먼저 명명되고 그 다음 하녀들로부터의 아들들이 그 뒤에 명명된 것이다. 이는 그 장에서 취급된 주제에 따라 있는 순서이다. 이들은 아직 더 다르게 열거된 경우를 발견할 수 있는데, 그들이 여행해서 이집트에 왔을 때이다 (창. 46:9-19); 그리고 또 다른 순서는 야곱이 그가 죽기 전, 개명된 이름 이스라엘을 지닌 때에 아들들에게 축복하는 대목이다 (창. 49:3-27); 그리고 또 다른 순서가 있는 대목은 그들이 모세에 의해 축복될 때이다 (신. 33:6-24). 그들이 회중의 천막을 빙둘러 진을 칠 때 다음 순서에서 였다: 동쪽 방면에는 유다, 잇사갈, 스불론; 남쪽 방면에는 르우벤, 시므온, 갓; 서쪽 방면에는 에브라임, 므낫세, 베냐민; 북쪽 방면에는 단, 아셀, 납달리이다 (민. 2장). 그리고 그들이 축복을 위하여 그리짐산에, 저주를 위하여 에발산에 어떤 순서에서 섰었는지는 신명기서 27장 12, 13절에서 알게 된다. 각 지파로부터 뽑은 제 일인 자가 토지를 정탐하기 위하여 보내질 때, 그들이 열거된 순서는 이렇다: 르우벤, 시므온, 유다, 잇사갈, 에브라임, 베냐민, 스불론, 요셉 또는 므낫세, 단, 아셀, 납달리, 갓이다 (민. 13:4-16). 그러나 상속분을 위하여 토지가 주어진 제 일인 자는 또 다른 순서에서 열거되고 있다 (민. 34:19-29). 어떤 순서에서 토지가 상속분으로 주어질 때 제비가 뽑히고 공표되었는지에 대하여는 여호수아서 13-19장에서 읽을 수 있다.
지파들에게 상속으로 있어지는 새로운 토지, 또는 거룩한 토지가 묘사된 에스겔서에서 열거된 그들의 순서는 이렇다: 단, 아셀, 납달리, 므낫세, 에브라임, 르우벤, 유다, 베냐민, 시므온, 잇사갈, 스불론, 갓이고, 모두는 동쪽을 향한 모퉁이로부터 서쪽, 또는 바다쪽의 모퉁이까지, 남쪽의 모퉁이에 있었던 갓을 제외하고는 남쪽을 향하여 이다 (겔. 48:2-8. 23-26); 그리고 새로운 성, 거룩한 성의 큰 문이 취급될 때, 그들은 이 순서이다: 북쪽을 향하여 큰 문이 셋, 르우벤, 유다, 그리고 레위; 동쪽을 향하여 큰 문이 셋, 요셉, 베냐민, 그리고 단; 남쪽을 향하여 큰 문이 셋, 시므온, 잇사갈, 그리고 스불론; 서쪽을 향하여 큰 문이 셋, 갓, 아셀, 그리고 납달리이다 (겔. 48:31-34). 각 지파로부터 봉인된 일만 이천 명의 순서는 계시록서 7장 5-8절에서 읽을 수 있다. 이 모든 구절들에서 지파들의 열거는 거기서 취급되는 특수한 주제의 상태에 따라서 함께 있다. 이 주제에 이 순서가 상응하고 있다. 특수한 상태는 전후 문맥에서 알아진다.
우림과 둠밈에 있는 귀중한 돌들의 순서에 대하여는 말씀에서 언급되고 묘사되어 있으나, 무슨 지파에 무슨 돌이 상응할 것이지는 언급되지 않고 있다. 이렇게 말한 이유는 돌들은 천적인 불꽃으로부터 있는 빛의 모든 것들을 표현했기 때문이다, 즉 선으로부터의 진리의 모든 것, 또는 사랑으로부터의 신앙의 모든 것들을 표현했다; 그리고 그들이 이 표현을 가졌기 때문에, 천국의 빛 자체가 주제의 상태에 일치하여 질문에 대한 대답이 기적적인 방식을 통하여 빛을 냈다, 즉 선하고 참된 것에 대해 확언하기 위하여 새빨갛게 달아오름(glowing)과 빛나게 함(shining)이 있었던 것, 더불어 선하고 참된 것의 상태의 차이에 따라 색깔의 다양해짐도 있었다; 이는 천국에서 거행되는 것과 똑같다, 거기서 모든 천적인 것들과 영적인 것들은 빛과 빛의 차이를 수단으로 표현된다, 게다가 이것은 말로 표현할 길 없고 인간에 의한 납득은 불가능하다; 그 이유는 이미 말한 대로, 천국의 빛 안에는 주님으로부터의 생명이 있기 때문, 결과적으로 지혜와 총명이, 그러므로 빛의 차이에서 진리의 생명에 속하는 모든 것들이 있기 때문, 즉 지혜와 총명에 속하는 모든 것이 있기 때문; 그리고 불꽃의 차이에서와 불꽃의 새빨갛게 달아오름과 광휘의 차이에서, 선의 생명에 속하는 모든 것, 그리고 선으로부터 진리의 생명에 속하는 모든 것, 또는 주님을 사랑함과 이 사랑함으로부터 파생되는 신앙에 속하는 모든 것이 있기 때문이다. 에봇의 가슴받이와 아론의 심장(가슴, heart)에 있었던 우림과 둠밈이 위와 같다는 것은 단어, “우림과 둠밈”이 “빛들과 완전함들”을 뜻한다는 사실로부터도 분명해지고, 우림과 둠밈이 놓여진 가슴받이가 “판단의 가슴받이”라고 불리운 사실로부터도 분명해진다. 그 이유가 “판단, 재판, 판결, 공정, judgment”이 총명과 지혜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아론의 심장에 있었던 이유는 심장이 신성한 사랑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귀중한 돌들은 금(테)를 둘러 앉혔다, 그 이유가 “금”은 내적 의미에서 사랑의 선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귀중한 돌”은 선으로부터 투명해 있는 진리이다.
우림과 둠밈에 관하여 모세의 책에서 아래와 같이 읽는다:
너는 판단의 가슴받이를 만드는데, 디자인의 일로서 (미리 잘 설계된 일로서), 에봇을 만들 때 같이, 너는 그것을 만들 것이다, 너는 금으로, 푸른 색(실)과 심홍색(실), 그리고 두 번 물들인 진홍색(실), 꼬아만든 고운 아마포로 그것을 만들 것이다. 이것은 정사각형으로 두 겹일 것이다; 그리고 너는 그것 안에 돌을 박아끼우기를 하여 놓을 것이다, 이것은 네 줄로 있을 것이다, 박아끼우는 구멍은 금으로 둘러 있을 것이다. 그리고 돌들은 이스라엘의 아들 들의 이름들에 따라 있을 것이다. 그들의 이름들에 따라 열둘이다; 모두 각각의 이름은 인 장을 새김 같이 하는데, 그것들은 열두 지파를 위해서 있을 것이다
(출. 28:15-17, 20; 39:8-14).
각 열에 있게 되는 돌들 또한 디자인되고 있다. 그리고 더 나아가:
가슴받이는 에봇으로부터 분리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아론은 그가 거룩한 장소에 들어 갈 때, 여호와 앞에서 계속적으로 기억함을 위하여 그의 심장 위에 있는 가슴받이에서 이 스라엘의 아들들의 이름들을 짊어질 것이다. 그리고 너는 우림과 둠밈을 판단의 가슴받이 에 놓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들은 아론이 여호와 앞으로 들어갈 때, 그의 심장 위에 있을 것이다; 그리고 아론은 계속적으로 여호와 앞에서 자기 심장 위에서 이스라엘의 판단을 나 를 것이다 (출. 28:28-30; 레. 8:7, 8).
여호와 또는 주님은 우림을 수단으로 질문을 받고 답을 주셨다는 것을 모세의 책에서 알아진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하셨다, 네게로 눈의 아들 여호수아를 데려와라, 그리고 너는 그 위 에 네 영광을 놓을 것이다, 하여 이스라엘의 아들들의 모든 회중이 순종하게 하라. 그는 성 직자 엘르아잘 앞에 설 것이다, 그리고 엘르아잘은 여호수아를 위하여 여호와 앞에서 우림 의 판결에 문의할 것이다 (민. 27:18, 20, 21).
그리고 사무엘서에서:
사울이 여호와께 문의했다, 그리고 여호와께서는 그에게 대답하지 않으셨다, 꿈으로도, 우 림으로도, 예언자들에 의해서도 (대답하지 않으셨다) (삼상. 28:6).

여호와께서 나를 보셨기 때문 라고 그녀가 말했기 때문이다. 이는 최고 높은 의미에서 예견, 내적 의미에서 신앙, 내면의 의미에서 이해함, 외적 의미에서 보는 것, 그리고 현재의 경우 주님으로부터의 신앙을 의미한다. 이는 “보는 것, seeing”의 의미로부터 분명해지는 바, 아래에서 살핀다. 위에서 살핀 바로부터 야곱의 아들들로부터 명명된 열두 지파들은 진리와 선, 또는 신앙과 사랑의 모든 것, 고로 교회의 모든 것, 그리고 각 지파는 어떤 보편적인 것들을 의미했다는 것; 고로 열두 지파들은 교회에 속하는 무엇이든 모든 것들을 납득하고 그것 안에 포함하는 열두 보편적인 것들을 의미했다는 것; 그리고 보편적 의미에서 주님의 왕국에 속하는 모든 것들을 의미했다는 것이다. “르우벤”이 의미하는 보편적인 것은 신앙이다. 신앙이 첫 보편적인 것인 이유는 인간이 거듭날 때, 또는 교회가 되어갈 때, 그는 반드시 먼저 신앙에 속한 것들, 즉 영적 진리에 속한 것들을 배워 그것들에 물들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그는 신앙의 교리를 수단으로, 또는 진리의 교리를 수단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인간은 자신스스로부터서는 천국의 선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하는 바, 그것을 교리로부터 배워야만 하기 때문, 이것이 신앙의 교리라고 불리우는 것이다. 신앙의 모든 교리는 삶을 목적으로 중요시한다, 그러므로 선을 중요시하는데, 선이 생명이기 때문이다. 고대인들 사이에 논쟁의 정점에 있었던 대목은 어느 것이 교회의 첫 출생인가에 관한 것이다, 즉 신앙으로부터 있는 진리가, 아니면, 사랑으로부터 있는 선이 첫 출생인지에 대한 논쟁이다. 신앙으로부터 있는 진리가 첫 출생이다는 견해를 유지한 이들은 외적 나타남으로부터 이를 주장했다, 그리고 진리가 첫째인 이유는 진리가 먼저 배워지기 때문, 그리고 배운 진리를 수단으로 선을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선이 근본적으로 첫 출생이다는 것, 그리고 선은 내적 인간을 통하여 주님으로부터 은근히 심어져 있다는 것, 이 선이 외적 인간을 통하여 진리를 양자로 삼고 받아들인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있다; 그들은 선 안에 주님으로부터 있는 생명이 있다는 것, 스리고 진리 안에는 그 진리가 선을 통하여 생명을 가지지 않는다면 생명이 없다는 것; 고로 선은 진리의 혼이다는 것, 또한 선은 혼이 혼의 몸을 가지듯 진리를 선 자체에 어울려지게 하여 진리를 옷입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하고 있다. 이로부터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외적 나타남에 따라서일 경우, 진리가 첫 장소에 있다는 것, 그리고 인간이 거듭나는 동안, 진리는 마치 첫 출생인 듯 있다는 것; 그렇지만 인간이 거듭나졌을 때, 선이 근본적으로 첫 장소에 있고, (주님에 의한) 첫 출생인 바, 이때부터는 (삶의) 첫째 자리에 있는다는 것이다.
이 장, 그리고 이 장 앞에서의 주제는 자연 평면의 거듭남, 그리고 여기서는 이 자연 평면의 거듭남의 첫 상태가 진리를 수단으로 선을 소개받는 것이기에, 야곱의 첫 아들, 르우벤은 “여호와께서 보심”으로부터 명명되어졌는데, 이는 내적 의미에서 주님으로부터의 신앙을 의미한다. 신앙 자체만에 주목해보면, 신앙에는 두 가지, 즉 이해력 측면에서의 신앙과 의지력 측면에서의 신앙이 있다; 신앙으로부터 있는 진리를 알고 이해하는 것은 이해력 측면에서의 신앙이라 불리운다; 그러나 신앙으로부터 있는 진리를 뜻하는 것은 의지력 측면에서의 신앙이라 불리운다. 이해력에 있는 신앙은 “르우벤”에 의해 의미되는 신앙이고, 의지력에 있는 신앙은 “시므온”에 의해 의미되는 신앙이다. 이해력에 있는 신앙, 또는 진리를 이해함은 의지에 있는 신앙, 또는 진리를 뜻함에 앞서 있다는 것은 모든 이가 반드시 분명히 해두어야 한다. 그 이유가 인간 당사자가 (천국의 선 같은) 어떤 것을 모르고 있다면, 그는 자기가 그것을 뜻하기 앞서 필히 그것이 존재하는지, 그것이 무엇인지를 먼저 알아야만 하기 때문이다.
외적 의미에서 “보는 것”은 시력(시각)을 의미한다는 것은 설명할 필요조차 없이 자명하다; 그리고 내면의 의미에서 “보는 것”은 이해함을 의미하는 것도 분명해질는지 모른다, 그 이유가 내적 인간의 시력은 이해력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항간에서도 익히 아는 것은, 이해력이 내적인 시력이다는 점이다, 그리고 외적 관계에서 빛이 이것이라 단언하고, 이를 지적인 빛이라 부른다. 내적 의미에서 “보는 것”이 주님으로부터의 신앙을 표시하는 것은 내면의 이해력은 진리와 선으로부터 있는 것들 외에 더 다른 대상을 가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이것들이 신앙의 대상(목적, object)이기 때문이다. 내면의 이해력, 또는 내적인 시각은 신앙 속에 있는 진리들을 그것의 대상으로 삼는데, 이것은 시민적, 도덕적 생활을 대상으로 하는 이해력에 비해 훨씬 명백히 드러나지 않는다. 드러나지 않는 이유는 전자는 후자 안쪽에 있고, 인간이 세상의 빛 안에 있는 한, 희미할 수밖에 없는 천국의 빛 안에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듭나져가고 있는 이들과 더불어 그것은 자체를 밝히 보이는데, 특히 양심에 의해서이다. 최고 의미에서 “보는 것”이 선견(foersight)이다는 것은 반드시 분명히 해두어야 하는데, 그 이유는 총명이 주님을 서술할 경우, 이는 무한한 총명, 고로 선견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보다”로부터 이름 르우벤이 명명된 것이 내적 의미에서 주님으로부터의 신앙이다는 것은 말씀의 여러 구절로부터 명백해지는 바, 아래에 그 일부를 인용한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하셨다, 너는 불같은 뱀(불 뱀)을 만들어라, 그리고 그것을 지주(긴 장대) 위에 놓아라; 그리고 뱀에 물린 모든 이가 그것을 보면, 그는 살 것이다. 모세는 놋 쇠로 뱀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것을 지주 위에 놓았다; 그리고 만일 뱀이 누군가를 물었다 면, 그는 놋쇠 뱀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그는 다시 살았다 (민. 21:8, 9).
놋쇠 뱀이 외적 감각 또는 자연 평면 측면에서의 주님을 표현했다는 것은 이미 살폈다; 그리고 “놋쇠”가 자연 평면을 의미하는 것도 살폈다. 그분에 대한 신앙이 놋쇠 뱀을 본 이들, 또는 그것을 쳐다본 이들은 다시 살았다에 의해 표현되어졌다는 것이 주님 자신께서 가르치신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높이 들어올렸듯, 사람의 아들도 들어올려져야만 한다; 그분을 믿는 자는 누구이든 멸해지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가질 것이다 (요. 3:14, 15).
이사야서에서:
주께서 말하셨다, 이 백성에게 가서 말해주어라, 너희가 듣는 것은 확실하나, 이해하지 못 한다; 그리고 너희가 보는 것은 확실하나 알지 못한다; 이 백성의 심장을 비대해지게 만들 어라, 그리고 그들의 귀를 무겁게 만들어라, 그리고 그들의 눈들이 소경되게 만들어라; (하 여) 그들이 자기들의 눈으로 보지 않도록, 그리고 자기들의 귀로 듣지 않도록, 그리고 자기 들의 심정이 이해하지 못하도록 (하라) (이. 69, 10).
“보고 있는데 알지 못한다”는 것은 진리인 것을 이해함에도 그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을 의미함이 분명하다; “그들이 자기들의 눈으로 보지 않도록 소경을 만듦”은 그들에게서 진리를 이해함을 박탈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 구절의 “본다”가 주님에 대한 신앙을 의미하는 것은 마태복음서 13장 13, 14절; 그리고 요한복음서 12:36, 37, 39, 40절로부터 분명해진다.
에스겔서에서:
사람의 아들 너는 반역의 집 한 가운데서 거주해라, 그들은 보는 눈을 가지고 있지만 보지 못하고, 그들은 듣는 귀를 가지고 있지만 듣지 못한다 (겔. 12:2);
“보는 눈을 가지나 보지 못한다”는 그들이 신앙의 진리들을 이해하나 뜻하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이것이 거짓들로 사기적인 빛을 도출하고, 진리는 어둡게 하는 악들 때문임을 이사야서에서 아래 말로 가르치신다:
이것은 반역의 백성, 거짓말하는 아들들, 여호와의 법을 듣지 않는 아들들이다; 이들이 선 각자에게 보지 말라 하고 말했다; 그리고 환상을 가진 이들에게 우리를 위하여 올바른 것 들을 보지 말라, 우리에게 매끄러운 것을 말하라, 환영을 보라 (이. 30:9, 10).
다시:
어둠에서 걷는 백성이 큰 빛을 보았었다; 죽음의 그늘의 토지에 거주한 그들은 그들 위에 서 빛을 낸 빛을 가진다 (이. 9:2).
위에서 “큰 빛을 봄”은 신앙으로부터 있는 진리를 받아들이고 믿는 것을 뜻한다. 신앙 안에 있는 이들 위에서 천국의 빛이 “빛을 낸다”고 말해진다, 그 이유는 천국에 있는 빛은 신성한 선으로부터의 신성한 진리이기 때문이다.
다시:
여호와께서 깊은 잠의 영을 쏟으셨다, 그리고 너희의 눈을 닫았다; 예언자들과 너희의 머리들, 선각자들을 그분이 덮으셨다 (이. 29:10)
“눈을 닫는 것”은 진리를 이해함을 닫는 것을 표시한다; “선각자들을 덮는 것”은 신앙의 진리들을 알고 가르치는 이들을 덮는 것을 표시한다. 선각자(seer)는 정식으로 말하면 예언자를 일컫는 말이기도 하다, 그리고 “예언자”는 가르치는 이들, 또한 교리의 진리들을 표시한다. 다시:
성직자와 예언자가 독주를 통하여 잘못하고 있다; 그들은 선각자들 사이에서 헤메고 있 다; 그들은 판결에서 어긋나고 있다 (이. 28:7);
위 구절도 앞의 구절과 의미는 같다; 그들이 어긋내고 있는 “판결”은 신앙의 진리이다. 다시:
보는 그들의 눈이 닫아지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듣는 그들의 귀가 경청할 것이다
(이. 32:3).
다시:
너의 눈이 아름다움에서 있는 왕을 바라볼 것이다, 그들은 먼 거리의 토지를 볼 것이다 (이. 33:17);
“아름다움에 있는 왕을 바라보는 것”은 주님으로부터 있는 신앙의 진리들을 표시한다, 여기서 “아름답다”는 선으로부터 그렇게 불리운다; “먼 거리의 토지를 보는 것”은 사랑의 선을 표시한다. 마태복음서에서:
심정이 순수한 자는 복되다, 그 이유는 그들이 하느님을 볼 것이기 때문이다 (마. 5:8);
위에서 “하느님을 본다”는 것은 그분을 믿는 것, 고로 신앙으로 그분을 보는 것임이 분명하다; 그 이유가 신앙 안에 있는 그들은 신앙으로부터 하느님을 보기 때문, 그 이유는 하느님은 신앙 즉, 진정한 신앙을 구성하는 신앙 안에 계시기 때문이다.
다시:
만일 네 눈이 너로 어긋나게 한다면, 그것을 뽑아내라; 그 이유가 두 눈을 가지고 지옥의 불에 던져지기 보다는 한 눈을 가지고 생명으로 들어가는 것이 더 낫기 때문이다
(마. 18:9);
위 구절에서 “눈”이 눈을 뜻하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그것을 뽑아내라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 이유는 몸의 눈이 자신을 어긋난 짓을 하게 하는 원인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리를 이해함이 여기서 “눈”이 뜻하는 것이다. 신앙의 진리를 알고 납득했는데도 악한 생활을 하고 있다면, 신앙의 진리를 알지 않고 납득도 못한 것이 더 낫다는 것이 “두 눈 가지고 지옥 불에 던지우는 것보다 한 눈 가지고 생명으로 들어가는 것이 더 낫다”에 의해 의미되어 있다.
마태복음서에서:
너희의 눈은 보기 때문에 복 있다; 그리고 너희의 귀는 듣기 때문에 복 되다. 참으로 내가 네게 말한다, 많은 예언자들과 의로운 사람들이 너희가 보는 것을 보기를 바랐으나, 그 것들을 보지 못했다 (마. 13:16, 17; 요. 12:40);
위에서 “보는 것”은 주님에 대한 신앙으로부터 있는 것들, 고로 신앙을 알고 이해하는 것을 표시한다; 그 이유가 그들이 주님을 보았기 때문에, 또는 그분의 기적들을 목격했기 때문에 복되다는 말이 아니고 그들이 믿었기 때문에 그 신앙이 복있다는 말이기 때문이다; 이를 요한복음서의 말로부터 더 알는지 모른다:
내가 너희에게 말했다, 너희 역시 나를 보아왔으나, 믿지 않았다. 이것이 나를 보내신 그분 의 뜻인즉, 나를 보는 모든 이, 그분을 믿는 모든 이는 영생을 가진다는 것이다. 아버지와 더불어 있던 그분 외에 아버지를 본 자는 아무도 없다, 그분이 아버지를 보아왔다. 참으로, 참으로, 내가 네게 말한다, 나를 믿는 자는 영생을 가진다 (요. 6:36, 40, 46, 47);
“보는데 믿지 않는 것”은 신앙의 진리들을 아는데 그것들을 받지 않는 것이다; “보고 믿는 것”은 그것들을 알고 받는 것이다; “아버지와 더불어 있던 그분 외에 아버지를 본 자는 아무도 없다”는 신성한 선은 신성한 진리를 수단으로 하지 않고는 인정되어질 수 없다를 표시한다. 그러므로 내적 의미는 그분이 주님이심을 인정하지 않으면 천적 선을 아무도 가질 수 없다 이다.
마찬가지로 복음서에서:
여하튼 하느님을 본 자는 아무도 없다; 독생자, 아버지의 품 안에 있는 그분, 그분이 그분 을 선포했다 (요. 1:18).
그리고 다시:
예수께서 말하셨다, 나를 본 자는 나를 보내신 분을 보고 있다. 나는 세상 안으로 빛으로 왔다. 나를 믿는 자는 누구든지 어둠 안에 거하지 않는다 (요. 12:45, 46);
위에서 “보는 것”이 믿는 것, 또는 신앙을 가지는 것임이 분명하다. 다시:
예수께서 말하셨다, 만일 너희가 나를 알았었다면, 너희는 나의 아버지 역시 알았을 것 이다; 그리고 이후로부터 너희는 그분을 알고 그분을 보았었다. 나를 보았던 자는 아버지를 보았었다 (요. 14:7, 9).
다시:
세상은 진리의 영을 받을 수 없다, 그 이유는 그것이 그분을 보지 못하고, 그분을 알지도 못하기 때문이다; 나는 너희를 고아들로 남겨두지 않을 것이다; 나는 너희에게 온다. 그럼 에도 아주 잠깐, 그리고 세상은 나를 더 이상 보지 못한다; 그러나 너희는 나를 본다; 그 이유는 내가 살기 때문에 너희 역시 살 것이기 때문이다 (요. 14:17-19);
위에서 “보는 것”은 신앙을 가지는 것을 의미한다, 그 이유가 주님은 신앙을 수단으로 해서만 보여지기 때문이다. 신앙은 사랑의 눈이기 때문, 주님은 신앙을 통하여 사랑을 수단으로 보여진다; 그러므로 “너희는 나를 본다. 내가 살기 때문에 너희 역시 살 것이다”라고 말해진다.
다시:
예수께서 말하셨다, 나는 보는 그들이 보지 않게, 보는 그들을 소경으로 만드는 심판을 위 해 나는 이 세상 안으로 와있다; 바리새인들이 말했다, 우리 역시 소경입니까? 예수께서 그 들에게 말하셨다, 만일 우리가 소경이었다면, 너희는 죄를 가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너희는 말하기를, 우리는 보고 있다; 그러므로 너희의 죄는 남아있다 (요. 9:39-41);
여기서 “보는 그들”이란 자신은 타인들보다 더 총명하다고 상상하는 이들을 표시한다, 이들에 관하여 말해지는 바, 그들은 “소경으로 만들어진다”는 것, 즉 신앙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는 것이다 (“보지 못함”, 또는 “소경이다”가 거짓들 안에 있는 이들, 또는 무지 안에 있는 이들이라 단언되는 것은 2383항을 참조하라.) 누가복음서에서:
너희에게는 하느님의 왕국의 신비들을 아는 것이 주어져 있다; 그러나 나머지에게는 비유 안에서 (아는 것이 주어진다); 보는 그들이 보지 못하게; 그리고 듣는 그들이 듣지 못하게 (하시려 함에서 이다) (눅. 8:10).
위는 시대의 극점(종말), 또는 교회의 마지막 때, 교회에 더 이상 어떤 신앙도 없는 때가 취급된다.
다시:
예수께서 그들과 앉았을 때였다, 그분은 빵을 들고 축복하셨다, 그리고 떼어서, 그들에게 주었다; 그리고 그들의 눈이 열려졌다, 그리고 그들은 그분을 알았다 (눅. 24:30, 31);
위 구절을 수단으로, 주님께서는 선이 없는 진리가 아닌 선을 수단으로 나타나신다는 의미를 담아두셨다, 그 이유가 “빵”은 사랑으로부터의 선이기 때문이다. 이 구절, 그리고 다른 구절로부터 “보는 것”의 내적 의미는 주님으로부터의 신앙을 의미한다, 그 이유가 진정한 신앙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신앙 외에 없기 때문이다. 이것 또한 인간으로 보는 것을 가능하게 한다, 즉 믿는 것을 가능하게 한다; 그러나 자기로부터의 신앙, 또는 인간의 자기 자신인 것으로부터의 신앙은 신앙이 아니다, 그 이유는 이것은 당사자로 거짓들을 진리들로, 진리들을 거짓들로 보게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가 진리들을 진리로서 본다면, 여전히 그는 보지 못하는데, 그 이유는 그가 믿지 않기 때문, 믿지 않는 이유는 그가 신앙들 안에서 주님을 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보기 때문이다.
“보는 것”이 주님 안에서 신앙을 가지는 것임은 천국의 빛에 관하여 이미 자주 말해왔던 사항들로부터 분명해진다, 즉 주님으로부터 있음은 총명과 지혜를 동반한다는 것, 결과적으로 그분 안에서의 신앙이 동반된다; 그 이유가 주님 안에서의 신앙은 총명과 지혜 안쪽에 내향적으로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천사들 같이 이 빛으로 “보는 것”은 주님 안에서의 신앙 외에 더 다른 의미는 있을 수 없다. 주님 자신 역시 이 빛 안에 계신다, 그 이유는 이 빛이 그분으로부터 진행하기 때문이다. 또한 이 빛은 주님 안에서의 신앙을 가진 이들의 양심 내부에서 빛을 내고 있다, 물론 인간 당사자들은 그가 육체 안에 있는 한 이 사실을 알아채지는 못한다, 그 이유가 이 빛이 육체 안에서는 세상의 빛에 의해 희미해져 있기 때문이다.

내 고뇌. (즉 “여호와께서 보셔왔기 때문”) 이는 선에 도착하는 상태를 의미한다. 이는 “고뇌”가 시험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리고 시험이 선에 도착하는 수단이 되기 때문에, “내 고뇌”는 여기서 진리로부터 오는 상태 (이는 외적 측면이다), 그리고 선에 도착하는 상태를 (이는 내적 측면이다) 의미한다.

지금 내 사람이 나를 사랑할 것이기 때문. 이는 여기에서 진리의 선이 올 것임을 의미한다. 이는 “사랑할 것이다”가 거기로부터 선이 있다를 의미한다로부터; 그 이유가 모든 선은 사랑으로부터 있기 때문, 그리고 그러므로 여기서 “사랑함”에 의해 의미된다; 그리고 “사람”의 의미가 진리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진리의 선이 무엇인지는 누누이 설명해왔었다, 즉 그것은 생활(삶)에 사용할 목적으로 진리에 애착함이다; 그 이유가 삶은 거듭나진 이 후의 인간에게서는 그의 진리가 중요시하는 선이기 때문이다. 진리에 따른 생활 없이, 진리가 선과 결합하는 결과는 있어질 수 없다, 결과적으로 선이 자기 것이 되는 일이 없다는 말이다.
이를 알기 위해 불건전하게 사는 이들과 건전하게 사는 이들을 주시해본다면, 모든 이들도 명백히 알 수 있다: 불건전하게 사는 이들의 경우, 설사 그들이 어린 시절과 소년 시절에 교회의 교리들을 배웠다 하더라도 그들에게서는 그분 안에서의 신앙과 교회의 진리를 믿고 있다는 검증이 되지 않는다; 이에 반해, 건전하게 사는 이들의 경우, 그들은 자기들이 진리들이다고 믿는 진리들 안에서의 신앙을 그들 각각이 가지고 있다. 더욱이 진리를 가르치는 이들, 마치 교회의 감독자 같은 경우, 그가 불건전하게 살고 있다면, 실로 그는 믿는다고 고백은 할지 몰라도 심정에서 그는 믿지 않고 있다.
이들 중의 일부의 경우, 신앙과 엇비슷하게 돌려대어 설득하는 재주가 대단하다, 그러나 기억 속의 지식을 논리로 확증하는 그 이상을 넘지 못한다, 그 이유는 그것이 진리이기 때문이 아니고, 그것이 자신의 직책이나, 명예나, 이득 측면에서 그것을 고백하는 것이 매우 유리하기 때문이다. 설사 그가 고백하는 것이 진리이다 해도 그것은 그의 귀를 통하여 기억 안으로, 그리고 기억으로부터 입술로 나가기는 하나 더 이상 깊이 꿰뚫지를 못해 그의 심정으로부터의 고백은 없다. 이로부터 분명한 것은, 진리를 인정함의 품질, 즉 신앙의 품질을 보여주는 것은 그의 삶이다는 것이다; 생활의 선으로부터 분리된 신앙의 발명품은 인간이 어떻게 살았든, 그는 은총을 통하여 구원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생활 속의 선이 분리된 신앙만으로도 구원됨은 모든 이의 삶의 전부가 사후에도 남아있는다는 교리와 언쟁을 벌린다.

르우벤의 출생에서 레아가 발음한 말, “여호와께서 나의 고뇌를 보셨었다, 하여 지금 내 남자가 나를 사랑할 것이다”의 내적 의미로부터 교회의 무엇이 보여질 것이다, 즉 르우벤이 의미하는 것, 또는 르우벤으로부터 이름지어진 지파가 의미하는 것, 또는 이것은 인간이 교회가 되어갈 때 처음의 상황이다는 것; 그리고 이것은 교리의 진리이기 때문에, 이것에 의하여 인간이 생활의 선에 도달할런지 모른다는 것이다.

33절. 그리고 그녀는 다시 임신했다, 그리고 아들을 낳았다, 그리고 말했다, 여호와께서 내가 미움받은 것을 들으셨기에 나에게 이것 역시 주셨다. 그리고 그녀는 그의 이름을 시므온이라 불렀다. “그리고 그녀는 다시 임신했다, 그리고 아들을 낳았다”란 외적인 것들로부터 더 내면적인 것들을 향하여 있는 영적인 임신과 출생을 의미한다. “여호와께서 …들으셨기 때문에”란 최고 의미에서 섭리를, 내적 의미에서 신앙에 관한 의지를, 내면의 의미에서 순종을, 외적 의미에서 들음을, 현재의 경우 주님 으로부터만 있는 신앙인 의지 안에 있는 신앙을 의미한다. “내가 미움받은 것”이란 의지가 신앙에 상응되지 않을 경우, 그 신앙의 상태를 의미한다. “그리고 나에게 이것 역시 주셨다”란 계속적인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녀는 그의 이름을 시므온이라 불렀다”란 그것의 품질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녀는 다시 임신했다, 그리고 아들을 낳았다. 이는 외적인 것들로부터 더 내면적인 것들을 향하여 있는 영적인 임신과 출생을 의미한다. 이는 이미 설명한 바 있다. 거듭남의 발전은 외적인 것으로부터 더 내면의 것들을 향하여 만들어진다. 즉 다시 말해 이 발전은 이해함으로부터 있는 기억 속의 지식으로부터 의지쪽으로 이다, 이를 영적으로 말하면 신앙 속에 있는 진리로부터 선행쪽으로의 발전이다. 이해함은 의지에 앞서 진행되는데, 이것이 의지를 눈에 보일 수 있는 형체로 명백해지게 한다. 이로부터 분명한 바, 이해함은 의지의 외적인 것이다; 그리고 신앙은 선행의 외적인 것이다; 또는 같은 말로, 의지는 이해함의 내적인 것이고, 선행은 신앙의 내적인 것이다. 고로 외적인 것으로부터 더 내면쪽으로 발전함은 이해력에 있는 신앙으로부터 의지에 있는 신앙으로, 결과적으로 신앙으로부터 선행으로 발전해 가는 것이다. 이 선행이 레위에 의해 표현되는데 차후 살핀다. 신앙을 선행과 떼어 구별할 경우, 진리를 뜻한다는 것, 마치 교리 속의 진리 같은 것, 예를 들면 사도신경이라 부르는 고백 안에서와 같은 식의 진리이다고 알려져 있다; 그리고 이런 진리는 교회 안에 있는 일반적 의미에 따라서이다; 그 이유가 진리들 안에서 신앙을 가지고 거기에 안주하면, 신앙만으로 구원이 있다고 믿어지고 만다. 신앙이 신용(trust)과 신뢰(confidence)이다는 것을 아는 자는 드물다, 게다가 신용과 신뢰는 선행으로부터 있다는 것을 아는 자는 매우 드물다. 더 나아가 선행의 삶을 살지 않는 이들이 이를 안다고 말하면, 그의 말은 사기일 뿐이다.

여호와께서 …들으셨기 때문에. 이는 최고 의미에서 섭리를, 내적 의미에서 신앙에 관한 의지를, 내면의 의미에서 순종을, 외적 의미에서 들음을, 현재의 경우 주님으로부터만 있는 신앙인 의지 안에 있는 신앙을 의미한다. 이는 “들음”의 의미로부터 알려진다. “듣는다”가 청각 기관에 의해 있다는 것은 두 말할 필요조차 없다, 그러나 내면의 의미에서 “듣는 것”은 순종이고, 내적 의미에서는 의지 안에 있는 신앙이다. 이는 말씀의 많은 구절로부터 분명해지는 바, 아래에서 살핀다; 그리고 시력의 본성에 관련된 것은 청력의 본성으로부터도 알아진다. 내면의 의미에서 “시력”은 이해력이고, 내적 의미에서는 이해력 안에 있는 신앙이다 (3863항); 이렇게 말한 이유는 어떤 것의 품질은 내적인 시력에 의해 나타나지기 때문이고, 이 나타난 것들은 지적인 신앙에 의해 납득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들려진 것들이 내면들을 관통할 때, 그것들은 시력 같은 어떤 것으로 바뀌어진다, 그 이유는 들어진 것은 내면적으로 보여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듣는 것”도 역시 “시력”에 의해 의미된 것, 즉 이해함으로부터 있는 것, 또한 신앙으로부터 있는 것을 의미한다; 동시에 들음은 경우가 이러하다는 것을 설득하고, 그리고 인간의 지적 부분 뿐만 아니라, 그의 의지 부분에 영향을 미치게 한다, 그리고 들은 당사자로 그가 본 것을 뜻하게 한다. 이로부터 “들음”은 어떤 것을 이해함, 그리고 동시에 순종을 의미하고; 영적 의미에서 의지에 있는 신앙을 의미한다.
이런 의미들이 들음이라는 단어 안에 숨어 있기에, 우리가 자주 사용하고 듣는 “들음, hearing”, “귀기울임, 청종, hearkening”, “경청함, attending” 같은 언어에도 스며있다. 그리고 “누군가에게 귀기울임”은 누군가에게 순종함이다. 이렇게 때때로 주제의 내면의 것은 인간의 언어(말함)의 표현 안쪽에 포함되어져 있다. 이런 이유는 인간의 영이 말함의 표현의 의미를 생각하고 지각하기 때문에서이다. 이것이 표현의 첫 원리 안에 있는 영들과 천사들이 교류함에서도 사용되고 있다. 더 나아가 이와 같은 것은 인간에서 어떤 것이 원을 한바퀴 돌 듯 순환한다. 즉 귀나 눈, 또는 들음과 봄을 수단으로 들어가 어떤 것은 이해력 안으로 건너가고, 이해함을 통하여 의지쪽으로, 그리고 의지로부터 행동으로 나타난다. 이를 다시 말해보면, 신앙의 진리는 처음에는 기억 속의 진리가 되어 있다; 그 후에 의지 안에서 신앙의 진리가 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행동에서 신앙의 진리가, 고로 선행이 된다. 기억 속의 지식에 있는 신앙, 또는 이해력에 있는 신앙이 “르우벤”이다; 의지 안에 있는 신앙이 “시므온”이다; 그리고 의지 안에 있는 신앙이 선행이 될 때, 이것이 “레위”이다.
최고 의미에서 “듣는 것”이 섭리를 의미한다에 대하여는 이미 살핀 “보다”의 최고 의미가 예견이다로부터 알는지 모른다; 그 이유가 주님께서 보심은 이 경우가 이렇다 하는 것을 영원으로부터 영원까지 보심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님의 미리 준비하심(providing)은 이것이 그렇다는 것을 지도 감독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인간의 자유를 선쪽으로 구부리심이다, 그러나 인간이 자유 안에서 자신을 구부리게 허용하는 만큼에서이다.
“여호와께서 들으심”에 의해, 이로부터 시므온이 명명되어졌다는 것이 내면의 의미에서 순종을 의미하는 것, 그리고 내적 의미에서 주님만으로부터의 의지 안에 있는 신앙이 의미된다는 것은 말씀의 많은 구절로부터 분명해진다; 아래와 같다:
잘 보니 구름으로부터의 음성이 말하시기를,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 이 아들 안에서 나는 아주 흡족하여 있다; 너희는 그에게서 들어라 (마. 17:5);
“그에게서 들어라”는 그분 안에서 신앙을 가지는 것, 그리고 그분의 명령들에 순종하는 것을 표시한다; 고로 의지 안에 신앙을 가지는 것이다. 요한복음서에서:
참으로 참으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죽은 자가 하느님의 아들의 음성을 듣는 시각이 오 고 있다; 그리고 듣는 이들은 살 것이다. 이를 두고 놀라지 말라; 그 이유는 무덤에 있는 모든 이가 그분의 음성을 듣는 시간이 오기 때문이다 (요. 5:25, 28);
“하느님의 아들의 음성을 듣는 것”은 주님의 말씀 안에서 신앙을 가지는 것, 그리고 그것들을 뜻하는 것을 표시한다. 의지로부터의 신앙을 가지는 이들은 생명을 받는다; 그러므로 말해진다, “듣는 이들은 살 것이다.”
다시:
문으로 들어가는 자는 양의 목자이다; 그에게 문지기는 연다; 그리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 는다. 그리고 나는 이 우리 안에 있지 않은 다른 양도 가지고 있다; 그들 역시 나는 데려와 야 한다. 그리고 그들은 내 음성을 들을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 하나의 양떼가 있을 것이 다, 그리고 하나의 목자가 있을 것이다. 내 양은 내 음성을 듣는다, 그리고 나는 그들을 안 다, 그리고 그들은 나를 따른다 (요. 10:2, 3, 16, 27);
“음성을 듣는 것”은 의지의 신앙으로부터 순종하는 것을 표시한다. 다시:
진리로부터 있는 모든 이가 내 음성을 듣는다 (요. 18:37);
위도 앞의 구절과 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 누가복음서에서:
아브라함이 그에게 말했다, 그들은 모세와 예언자들을 가지고 있다; 그들이 그들에게 듣게 하라. 만일 그들이 모세와 예언자(가 말한 것을) 듣지 않으면, 그들은 설사 죽은 자가 죽음 으로부터 일어나도 설득되지 않을 것이다 (눅. 16:29, 31);
“모세와 예언자가 말한 것을 듣는 것”은 말씀 안에 포함된 것들을 아는 것, 그리고 그 안에서 신앙을 가지는 것을 표시한다; 또한 그것들을 뜻하는 것이다. 그 이유가 신앙을 가졌는데 뜻하지 않는 것은 “보았는데”, “듣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말씀에서 들음과 봄이 동시에 말해지는 대목이 많다. 이 구절 전후에서도 마찬가지여서, 르우벤은 보는 것, 시므온은 듣는 것이 의미된다; 이것들은 르우벤과 시므온이 형제이듯 형제 관계에 있다.
“봄”과 “들음”이 함께 언급되는 대목은 아래 구절로부터 분명해진다. 마태복음서에서:
그러므로 나는 비유로 그들에게 말한다; 그 이유는 그들이 보지만 보지 못하기 때문; 그리 고 듣는데 듣지 못하기 때문, 그들은 이해도 못하기 때문이다. 그들 안에서 이사야의 이런 예언들이 성취되고 있다, 이렇게 말해진다, 듣는 것으로 너희는 들을 것이다; 그리고 깨닫 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보는 것으로 보고 있다, 그리고 그들은 지각하지 못할 것이다; 그 이유가 이 백성의 심장은 총체적으로 밀납칠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귀는 무디어져 있다, 그들의 눈은 닫혀져 있다; 여하튼 그들의 눈이 보지 않도록, 그리고 그들이 귀가 듣 지 않도록, 그리고 그들의 심정이 깨닫지 않도록이다. 그러나 너희의 눈은 보기 때문에 복 되다; 그리고 너희의 귀는 듣기 때문에 복 있다. 참으로 참으로 내가 네게 말한다, 많은 예 언자들과 의로운 자들이 너희가 보는 것을 보기를 바랬었으나 그것들을 보지 못했다; 그리 고 너희가 들은 것을 들고 싶어했으나 그것들을 듣지 못했다
(마. 13:13-17; 요. 12:40; 이. 6:9).
마가복음서에서: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말하셨다, 왜 너희는 빵이 없음 때문이라 추론하느냐? 너희는 아직도 지각하지 못하고, 이해하지도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심정을 무딘채로 아직 가지고 있느 냐? 눈을 가졌는데 보지 못하느냐? 귀를 가졌는데 듣지 못하느냐? (마. 8:17, 18)
누가복음서에서:
너희에게는 하느님의 왕국의 신비들을 아는 것이 주어졌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에게는 비 유 안에서 (아는 것이 주어졌다); 그들이 보되 보지 못하고, 듣되 듣지 못하기 (때문이다) (눅. 8:10).
이사야서에서:
소경의 눈이 열릴 것이다, 그리고 귀먹어리의 귀가 열릴 것이다 (이. 35:5).
다시:
그 날에 귀머거리가 책의 말씀들을 들을 것이다, 그리고 소경의 눈이 짙은 어둠으로부터 볼 것이다, 그리고 어둠으로부터 (볼 것이다) (이. 29:18).
다시:
들어라, 너희 귀머거리들아; 그리고 쳐다보라, 너희 소경들아, 너희가 볼는지 모른다
(이. 42:18).
다시:
눈을 가진 소경인 백성, 그리고 귀를 가진 귀머거리 백성을 데려내오라 (이. 43:8).
다시:
보는 그들의 눈이 닫혀져 있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듣는 그들의 귀가 경청할 것이다
(이. 32:3).
다시:
네 눈이 너희 선생들을 볼 것이다, 그리고 너희 귀가 말을 들을 것이다 (이. 30:20, 21).
다시:
피를 들음으로부터 자기 귀를 멈추게 한 자, 악을 봄으로부터 자기 눈을 닫은 자는 높 은 곳에 거주할 것이다 (이. 33:15, 16).
에스겔서에서:
사람의 아들, 너는 반역의 집 한가운데에서 거주하라, 그들의 눈은 보는데 보지 못하고, 듣 는 귀를 가졌는데 듣지 못하는 자들이다 (겔. 12:2).
위 구절들에서 “들음”과 “봄”은 이것이 저것을 뒤잇기 때문에 모두 언급된다; 즉 이해력에 있는 신앙은 “봄”이고, 의지력에 있는 신앙은 “들음”이다. 그렇지 않으면 아마 하나만 언급해도 충분했을지 모른다. 그리고 이로부터 왜 야곱의 아들들이 하나는 “본다”로부터, 또 하나는 “듣는다”로부터 명명되었는지도 분명해졌을 것이다.
“봄”이 기억 속의 지식 안에 있는 신앙, 또는 이해력에 있는 신앙을, ”들음“이 순종에 있는 신앙, 또는 의지 안에 있는 신앙을 의미하는 것은 다른 삶에 있는 것과의 상응과 그로부터 파생되는 의미들로부터 이다. 그 이유가 지적인 이들, 그로부터 신앙 안에 있는 이들이 눈의 영역에; 그리고 순종하는 이들, 이로부터 신앙 안에 있는 이들은 귀의 영역에 있기 때문이다. 이것에 관한 더 설명은 이 장의 끝, 주님의 신성한 자비로부터 웅대한 사람, 그리고 이 사람과 더불은 인간 신체에 있는 모든 것들의 상응이 서술되는 대목에서 발견될 것이다.
그러므로 내적 의미에서 “눈”이 이해함이다는 것; 그리고 “귀”가 순종함이다는 것, 그리고 영적 의미에서 파생되는 신앙, 또는 의지에 있는 신앙이다는 것을 아래 인용 구절에서 분명해질 것이다. 이사야서에서:
그렇다, 너는 듣지 못했다; 그렇다, 너는 알지 못했다; 그렇다, 그때로부터 너희 귀는 그 자 체 열리지 않았다 (이. 47:8).
다시:
주 여호비께서 나의 귀를 듣도록 일깨울 것이다, 마치 배운 자들 같이 이다; 주 여호비께서 나의 귀를 열으셨다, 그리고 나는 반역하지 않았다 (이. 50:4, 5).
다시:
나에게 확실히 경청하라, 그리고 선인 것을 너희는 먹으라, 너희 혼이 살찜 안에서 그 자체 즐거워 할는지 모른다; 너의 귀를 기울여라, 그리고 나에게 오라; 너의 혼이 살도록 들어라 (이. 55:2, 3).
예레미야서에서:
누구에게 내가 말하고 증명해서 그들이 들을는지 모르도록 할 것인가; 잘 보라 그들의 귀 는 할례받지 않았다, 그리고 그들은 귀기울일 수 없다 (예. 6:10).
다시:
이것을 나는 그들에게 명했다, 말하기를, 너희는 내 음성을 들어라, 그리고 나는 너희 하느 님일 것이다, 그리고 너희는 나의 백성일 것이다; 그리고 너희는 듣지 않았다, 자기들의 귀 를 기울이지도 않았다 (예. 7:23, 24, 26).
다시:
여호와의 말씀을 들어라, 오 너희 여인아; 그리고 너희 귀를 그분의 입으로부터 말을 받아 들이게 하라 (예. 9:20).
다시:
너희는 너희의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그리고 나에게 순종하지도 않았다 (예. 35:15).
에스겔서에서:
사람의 아들, 내가 네게 말했던 모든 나의 말들을 네 심정에서 받을 것이다. 그리고 네 귀 에서 들을 것이다 (겔. 3:10).
다시:
나는 내 열정을 너희에 맞서 놓아둘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너희를 격노함으로 다룰 것이 다; 그들은 너희 코와 귀를 가져갈 것이다 (겔. 23:25).
“코와 귀를 가져감”은 진리와 선을 지각함을, 그리고 신앙의 순종함을 표시한다. 스가랴서에서:
그들은 귀기울기를 거절했다, 그리고 완고한 어깨로 돌아섰다, 그리고 그들의 귀를 무겁게 만들었다, 그들이 듣지 않으려 하려 해서 이다; 그리고 그들은 자기들의 심정을 최고로 굳 어 지게 했다, 그들이 법을 듣지 않으려 해서 이다 (슥. 7:11, 12).
아모스서에서:
고로 여호와께서 말하신다, 목자가 사자의 입으로부터 두 다리를, 또는 귀 조각을 잡아채듯 이, 그렇게 이스라엘의 아들들은 사마리아에서, 침대의 모퉁이에서, 그리고 침상의 끝에서 잡아채질 것이다 (암. 2:12).
“두 다리를 잡아채는 것”은 선으로부터의 의지를 표시한다; 그리고 “귀 조각”은 진리의 의지를 표시한다. “귀 조각”이 이런 의미를 가지는 것은 다른 삶과의 상응과 그로부터 파생되는 의미로부터 이다, 이에 따라 말씀의 내적 의미도 있고, 이스라엘과 유태인의 의식들에 있는 의미도 마찬가지이다. 아론과 그의 아들들이 성직 봉사에 임명되어 취임하였을 때, 명령된 바, 모세는 수양의 피를 가져와서 아론의 귓바퀴에, 그의 아들들의 귓바퀴에 놓도록, 그리고 그들의 오른 손의 엄지에, 그리고 엄지 발가락 위에 놓도록 했다 (출. 29:20). 이 의식을 수단으로 신앙의 의지가 표현되어졌다, 이 안으로 성직자로서 그는 개시되는 것이다. 이 의식이 거룩하다는 것은 모든 이가 알는지 모른다, 그 이유는 여호와에 의해 모세에게 명령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렇게 귓바퀴에 피를 놓는 것은 거룩했다. 세부적 거룩한 사항에서 의미되는 것은 말씀의 내적 의미로부터서만 알려질 수 있다, 이 의미란 의지로부터의 신앙은 반드시 보존되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귀”에 의해 순종이 의미되는 것, 내적 의미에서 신앙이 의미되는 것을 섬김으로부터 떠나지 않으려는 종에 관한 의식 행사로부터 더 알게 된다. 모세의 책에서:
만일 남종, 또는 여종이 섬김으로부터 떠나지 않으려 한다면, 그의 주인은 그를 하느님에게 데려갈 것이다, 그리고 그를 문으로, 또는 문지방으로 데려갈 것이다, 그리고 그의 주인 은 그의 귀를 송곳으로 뚫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영원히 그를 섬길 것이다
(출. 21:5, 6; 신. 15:17);
“송곳으로 문지방에서 귀를 뚫는 것”은 영구히 섬김, 또는 순종함을 의미한다; 영적 의미에서 이것은 진리를 이해함을 뜻하지 않는 것, 그러나 순종으로부터 진리를 뜻하는 것을 의미하는 바, 이것은 상대적으로 덜 자유한 상태이다.
내적 의미에서 신앙의 순종이 “귀”에 의해, 그리고 순종함은 “들음”에 의해 의미되는 바, 주님께서 자주 말하신 말씀으로부터도 분명해진다:
귀를 가진 자는 자기로 하여금 듣게 하라
(마. 13:9, 43; 막. 4:9, 23; 7:16; 눅. 8:8; 14:35; 계. 2:7, 11, 29; 3:13, 22).
최고 의미에서 “듣는 것”은 섭리를 의미한다는 것; 그리고 “보는 것”은 예견하심이다는 것은 “눈”과 “귀”가 여호와, 또는 주님을 서술하는 말씀의 구절로부터 분명해진다. 이사야서에서:
너의 귀를 기울여라 오 여호와 그리고 들어라; 너의 귀를 열어라 오 여호와 그리고 보라 (이. 37:17).
다니엘서에서:
오 나의 하느님 당신의 귀를 기울이시어 들어주소서; 오 여호와 당신의 눈을 여시고 우리 의 황폐됨을 보소서 (단. 9:18).
다윗서에서:
오 하느님 당신의 귀를 제게 기울이소서, 그리고 제 말을 들으소서 (시. 17:6).
다시:
당신의 귀를 나에게 기울이소서, 그리고 나를 구하소서 (시. 71:2).
다시:
당신의 진리 때문에 당신의 귀를 내 기도에 돌아서게 하소서, 당신의 정의 때문에 제게 응답하소서 (시. 143;1).
예레미야애가서에서:
오 여호와 당신은 내 음성을 들으셨습니다; 내 시력으로부터 당신의 귀를 숨기지 마소서 (애. 3:55, 56).
다윗서에서:
오 여호와 내 고난의 날에 당신의 얼굴을 나로부터 숨기지 마소서; 당신의 귀를 나에게 기 울이소서; 제가 외치는 날에 제게 응답하소서 (시. 102:1, 2).
여호와께서 인간의 것 같은 귀나 눈을 가지시지 않았을 것은 누구나 인정할 것이다, 그러나 “눈”과 “귀”에 의해 의미되는 것을 서술할 수 있는 신성에 속하는 특성, 즉 무한한 의지와 무한한 이해력이다. 무한한 의지는 섭리이다, 그리고 무한한 이해함은 예견이다. 이것들이 “눈”과 “귀”에 의해 최고 의미에서 이해되어진 것들이다. 이상으로부터 시므온이라 명명하게 된 “여호와께서 들으셨다”에 의해 의미되는 여러 의미들을 알았으리라 본다.

3870. 내가 미움받은 것. 이는 의지가 신앙에 상응되지 않을 경우, 그 신앙의 상태를 의미한다. 이는 “미워함”의 의미가 사랑되지 않음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 이유가 이와 같은 것이 의지가 신앙의 것과 상응되지 않을 경우 신앙의 상태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내적 의미에서 취급된 주제는 외적인 것으로부터 내적인 것으로의 인간의 거듭남이 발전해감이다; 즉 신앙의 진리로부터 선행의 선으로의 발전이다. 신앙의 진리는 외적이고 선행의 선은 내적이다. 신앙의 진리가 살아지기 위하여 그것은 반드시 의지 안으로 받아들여져야만 한다. 그래야 생명을 받기 때문이다; 진리가 앎으로부터서는 살아 있지 않으나 뜻함으로부터서는 살아 있다. 생명은 주님이 인간 안에서 창조하시는 새로운 뜻함을 통하여 주님으로부터 흘러든다. 처음의 생명은 순종을 수단으로 그 지체를 명백히 한다, 이것은 처음의 의지이다; 두 번째는 진리를 행함에 대한 애착을 수단으로 하고, 이는 의지가 발전한 것이다, 이것은 즐거움과 복됨이 진리를 행함 안에서 지각될 때 존재한다. 이렇게 신앙의 발전이 있지 않으면, 진리는 진리가 되어 있지 않는다, 때로는 삶과 무관한 것, 때로는 거짓을 확증하는 편법 수단에 동원되든가, 때로는 거짓된 것을 타인에게 설득시키려 할 때 등등에 이용당하고 만다. 이런 경우는 인간의 악한 애착, 또는 탐욕과 그 자체 짝짓기를 하기 때문이다. 즉 당사자 자신의 고유의 의지와 더불어서일 경우, 선행에 반대되기 때문에 야기되는 것이다. 오늘날 흔해진 교리, 선행 없이도 신앙만으로 구원된다는 대단히 쉬운, 그럴듯한 거듭남의 삶을 증언하는 도구로 진리가 타락된 것과 같다.
[2] 이런 신앙, 즉 선행과 분리된 신앙, 그러므로 선행에 반대되는 신앙이 르우벤에 이어지는 사건에서 표현되어져 있다, 즉 그가 자기 아버지의 첩, 빌하와 드러누운 사건이다 (창. 35:3, 4). 이에 관하여 야곱, 그 당시 이스라엘은 아래 말로 르우벤이 대단히 싫은 사람이라고 표현했다:
르우벤, 나의 첫 출생, 너는 나의 힘이다, 그리고 나의 기력의 시작이다; 너는 물 같이 가벼 워서 빼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 이유는 네가 네 아버지의 침대에 갔기 때문이다, 그 침대를 더럽혔기 때문이다; 그는 내 침상에 올라갔다 (창. 49:3, 4).
선행과 분리되고, 선행에 반대되어 있는 이 신앙의 의지와 애착은 위 인용 구절에 이어지는 시므온과 레위에 관한 아래의 말에서 역시 묘사되어 있다:
시므온과 레위는 형제이다. 폭력의 무기들은 그들의 검들이다; 그들의 비밀들 안으로 내 혼 은 가지 말지라, 그리고 그들의 회합에 내 영광은 하나되지 말지라. 그 이유는 그들이 분노 하자, 그들은 사람을 죽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기분이 유쾌하면 그들은 수소를 느슨해지게 했다. 그의 성냄은 격렬한 바 저주받아야 하고, 그들의 분노는 잔인한 바 저주받아야 한 다, 나는 그들을 야곱 안에서 나누어 낼 것이고, 이스라엘 안에서 흩을 것이다.
이것이 여기서 “시므온과 레위”에 의해 묘사된 선행으로부터 분리된 신앙이다는 것은 주님의 신성한 자비로부터 이어지는 구절에서 살핀다.

그리고 나에게 이것 역시 주셨다. 이는 계속적인 것을 의미한다. 즉 순종에, 또는 의지에 있는 신앙, 기억 속의 지식, 또는 이해함에 있는 신앙에 뒤어지는 신앙의 상태인데 이는 살폈다. 이것이 “그리고 나에게 이것 역시 주셨다”에 의해 의미된다.

그리고 그녀는 그의 이름을 시므온이라 불렀다. 이는 그것의 품질을 의미한다. 이는 “이름”, 그리고 “이름을 부름”의 의미가 품질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품질 자체는 레아가 뱉은 말, 즉 “여호와께서는 내가 미움받는 것을 들으셨다, 그리고 나에게 이것 역시 주셨다”의 내적 의미 안에 포함되어 있다. 이 품질이 “시므온”에 의해 의미된 것, 또한 그로부터 명명된 지파의 이름에 의미되어 있다. 이 품질은 인간이 거듭날 때, 또는 그가 교회가 되어갈 때, 두 번째 있게 되는 교회의 두 번째 보편적인 것(단계)이다; 즉 순종, 또는 신앙으로부터의 진리를 행하려는 의지이다; 이 순종, 이 의지 안에 선행이 심어지는데, 이것이 이어지는 구절에서 “레위”에 의해 의미되어진다.

34절. 그리고 그녀는 다시 임신했다, 그리고 아들을 낳았다, 그리고 말했다, 지금 이번에는 나의 남자가 나에게 굳게 결합할 것이다. 그 이유는 내가 세 아들을 낳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녀는 그의 이름을 레위라 불렀다. “그리고 그녀는 다시 임신했다, 그리고 아들을 낳았다”란 외적인 것으로부터 더 내적인 것쪽으로 있는 영적인 임신과 출생을 의미하고 있다. “그리고 말했다, 지금 이번에는 내 남자가 나에게 굳게 결합할 것이다”란 최고의 의미에서 사랑과 자비를, 내적 의미에서 선행을, 외적 의미에서 결합을, 현재의 경우 영적인 사랑을 의미한다. “그 이유는 내가 세 아들을 낳았기 때문이다”란 계속적인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그는 그의 이름을 레위라고 불렀다”란 그것의 품질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녀는 다시 임신했다, 그리고 아들을 낳았다. 이는 외적인 것으로부터 더 내적인 것쪽으로 있는 영적인 임신과 출생을 의미하고 있다. 이는 같은 말이 언급되는 대목에서 이미 살폈다.

그리고 말했다, 지금 이번에는 내 남자가 나에게 굳게 결합할 것이다. 이는 최고의 의미에서 사랑과 자비를, 내적 의미에서 선행을, 외적 의미에서 결합을, 현재의 경우 영적인 사랑을 의미한다. 이는 “굳게 결합함”의 의미로부터 알게 된다. 외적 또는 대략적인 내면의 의미에서 “굳게 결합하는 것(to cleave)”이 결합이다는 것은 설명이 필요 없다. 내적 의미에서 “굳게 결합함”이 선행(charity)이다는 것은 선행, 또는 같은 말로 서로의 사랑 (mutual love)은 영적인 결합이다; 그 이유는 이것이 의지의 애착들의 결합, 결과적으로 이해함으로부터의 생각들에 동의함이기 때문이다; 고로 마음의 두 부분들이 결합함이다. 최고 의미에서 “굳게 결합함”은 사랑과 자비인 것은 이런 사실로부터 분명해진다. 즉 선행, 또는 영적인 사랑이라 단언되는 무한하고 영원인 것은 자비이고, 이 자비란 비참함 안에 가라앉으려 드는 인류를 향한 신성한 사랑이다. 그 이유가 인간을 그 자체만으로 본다면 인간은 악밖에 더 아니고, 당사자 자신으로부터 자기 안에 든 것은 지옥적인 것 밖에 없기 때문, 그리고 그가 신선한 사랑으로부터 주님을 수단으로 바라볼 때, 자신으로부터 있는 지옥적인 것으로부터 자신의 승강함이 있다, 그리고 그가 구제됨이 “자비”라 불리운다. 자비가 신성한 사랑으로부터 이기 때문에, “굳게 결합함”에 의해서 사랑과 자비 양쪽 모두가 의미된다.
내적 의미에서 “굳게 결합함”이 영적인 사랑, 또는 이웃을 향한 선행을 의미한다는 것은 말씀의 아래 구절로도 알는지 모른다. 이사야서에서:
여호와께 굳게 결합한 외국인의 아들들로 말하지 말게 할 것은, 여호와께서 그분의 백성으 로부터 나를 정녕 분리하실 것이다라 말함이다. 여호와께 굳게 결합하고, 그분을 섬기며, 여호와의 이름을 사랑하는 외국인의 아들들은 그분의 종들일 것이다 (이. 56:3, 6).
“여호와께 굳게 결합하는 것”은 명령들을 준수하는 것, 이것은 영적인 사랑으로부터 이다; 그 이유가 이웃을 향한 선행의 선 안에 있지 않으면, 누구도 심정으로부터 하느님의 명령들을 준수하지 않기 때문이다. 예레미야서에서:
이 날에 이스라엘의 아들들이 올 것이다, 그들과 유다의 아들들은 슬피 울면서 가고, 자기 들의 하느님을 찾을 것이다. 그들은 시온쪽으로 얼굴이 있게 하고, 길에 관해 시온에 물을 것이다, 너희는 와서 잊혀지지 않는 영원히 지속되는 언약과 더불어 여호와께 굳게 결합되 게 하라 (예. 50:4, 5).
위에서 “여호와께 굳게 결합함”은 심정으로부터, 즉 선행의 선으로부터 명령들을 준수하는 것과 같다.
스가랴서에서:
많은 나라들이 그 날에 여호와께 굳게 결합할 것이다, 그리고 나의 백성일 것이다
(슥. 2:11).
위 구절의 의미도 앞 구절과 같다. 이사야서에서:
여호와께서 야곱을 불쌍히 여기실 것이다, 그리고 이스라엘을 다시 택하실 것이다, 그리고 그들을 그들 자신의 토지에 놓아두실 것이다; 그리고 방랑자가 그들에게 굳게 결합할 것이 다, 그리고 그들은 야곱의 집에 자신들을 연합할 것이다 (이. 14:1).
“방랑자가 그들에게 굳게 결합하는 것”은 법을 준수함이 비슷하다는 것; “야곱의 집에 연합하는 것”은 선행의 선 안에 있는 것을 의미한다, 이 선 안에 “야곱의 집”에 의해 의미된 이들이 있다. 마태복음서에서:
아무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 그는 이쪽을 미워하고 다른쪽을 사랑하든지, 또는 그가 이쪽에 굳게 결합하고 다른쪽은 경멸하든지 할 것이다 (마. 6:24).
위에서 “사랑하는 것”은 사랑의 천적 평면을 표시한다; 그리고 “굳게 결합함”은 사랑의 영적 평면을 표시한다; 둘이 언급된 이유는 둘은 서로에서 구별되기 때문이다. 만일 같다면 하나만 언급하셨을지도 모른다.
이렇기 때문에 영적 사랑에 있는 이들이 “레위의 아들들”이라 불리운다. 말라기서에서:
그분이 오시는 날에 누가 견디어내며, 그분이 나타나실 때 누가 서있을 것인가? 그분은 은 의 정제하는 분으로, 순수해지게 하는 분으로 앉으실 것이다; 그리고 그분은 레위의 아들들 을 순수해지게 하실 것이다, 그리고 금과 은 같이 그들을 걸러내실 것이다 (말. 3:2, 3).
주님은 최고 의미에서 영적 사랑 안에 있는 이들을 향한 그분의 신성한 사랑과 자비로부터 “레위”에 의해 의미된다. 말라기서를 보자:
내가 너희에게 이 명령들을 보냈다는 것을 알도록, 나의 언약이 레위인들과 더불어 있다는 것을 알도록 이다, 여호와 체바욷께서 말하신다; 나의 언약은 그들과 더불어 생명과 평화로 부터 있을 것이다. 너희는 길에서 비껴섰다; 너희는 많은 이들로 법에서 걸려넘어지게 했 다; 너희는 레위의 언약을 부패되게 했다. 그러므로 나는 너희를 정당하게 만들었다
(말. 2:4, 5, 8, 9).
그리고 최고 의미에서 “레위”는 주님의 신성한 사랑 또는 자비, 그리고 내적 의미에서 영적인 사랑, 그러므로 레위 지파는 성직 직분을 맡았다; 그 이유가 말씀의 내적 의미에서 “성직”은 사랑의 거룩함밖에 더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왕권”은 신앙의 거룩함이다.
“레위”라고 이름을 붙이게 된 표현인 “굳게 결합함”에 의해 영적인 사랑, 같은 말로 서로의 사랑이 의미되었는데, 이것이 원어적 표현에서는 서로 주고 받는 것 또한 의미하였다; 그리고 유태 교회에서 서로 주고 받는 것에 의해 서로의 사랑이 표현되었는데, 더 자세한 것은 주님의 신성한 자비로부터 별도로 취급해볼 것이다. 서로의 사랑은 우정 관계와 이런 점에서 다르다: 즉 서로의 사랑은 인간 안에 있는 선을 중요시 한다; 친구 관계는 인간에 주목하고 있다; 그리고 친구 관계가 선으로부터 인간을 주목할 경우, 또는 선을 위하여 주목할 경우, 서로의 사랑과 같아진다, 그러나 자기를 위하여 선이라 부를 경우, 친구 관계는 서로의 사랑이 아니고, 자기를 사랑함에 접근되어진다, 접근되는 만큼 서로의 사랑에 반대된다. 자체만에서 보면 서로의 사랑은 이웃을 향한 사랑밖에 더 아니다; 그 이유가 내적 의미에서 이웃은 선밖에, 최고 의미에서는 주님밖에 더 없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모든 선은 주님으로부터 있고, 그분은 선 자체이시기 때문이다. 이 서로의 사랑, 또는 이웃을 향한 선행이 영적 사랑에 의해 뜻해져 있다, 그리고 “레위”에 의해 의미되고 있다.
더 나아가 말씀에서 천적인 사랑과 부부의 사랑을 “굳게 결합함”의 표현을 수단으로 글자 의미에 표현하여 놓고 있다. 그러나 원어에서의 표현으로부터서는 레위가 명명된 것과는 다르다. 이 단어는 아직 더 가까이 결합함을 의미한다. 모세의 책에서:
너희는 여호와 너희 하느님을 경외할 것이다; 그분을 너희는 섬기고, 그분에게 굳게 결합할 것이다 (신. 10:20). 너희는 여호와, 너의 하느님의 뒤를 따라 걸을 것이다, 그리고 그분을 경외하라, 그리고 그분의 명령들을 지키라, 그리고 그분의 음성을 들을 것이다, 그리고 너 희는 그분을 섬기고, 그분에게 굳게 결합할 것이다 (신. 13:4). 여호와 너의 하느님을 사랑 하는 것, 그리고 그분의 모든 길들에서 걷는 것, 그리고 그분에게 굳게 결합하는 것 (신. 11:22). 여호와 네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 그분의 음성에 순종하는 것, 그리고 그분에게 굳 게 결합하는 것; 그 이유가 그분이 네 생명이기 때문이다 (신. 30:20).
여호수아서에서:
명령들과 법을 행함에 애써 집념하라, 이것은 여호와의 종 모세가 너희에게 명령했다, 즉 여호와 너희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 그리고 그분의 모든 길들에서 걷는 것, 그리고 그분의 명령들을 지키는 것, 그리고 그분과 굳게 결합하는 것, 그리고 네 모든 심정으로, 그리고 네 모든 혼을 가지고 그분을 섬기는 것이다 (여. 22:5).
열왕기하서에서:
왕 히즈키야는 이스라엘의 하느님 여호와를 신뢰했다. 그는 여호와께 굳게 결합했다, 그는 그분을 따름으로부터 떠나지 않았다, 그분의 명령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것들을 준수했다 (왕하 18:5, 6).
예레미야서에서:
허리띠가 사람의 허리에 굳게 결합되듯, 나는 나에게 이스라엘의 모든 집, 그리고 유다의 모든 집이 굳게 결합되게 했다, 하여 그들이 백성으로 나에게 있도록, 그리고 이름을 위하 여, 그리고 찬양을 위하여, 그리고 장식품을 위하여 있도록 이다; 그리고 너희는 순종하지 않았다 (예. 13:11).
부부의 사랑이 “굳게 결합함”에 의해 표현된 구절은 아래와 같다:
그러므로 남자는 그의 아버지와 그의 어머니를 떠날 것이다, 그리고 그의 아내와 굳게 결 합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하나의 육체일 것이다 (창. 2:24). 너희의 경직된 심정 때문에, 모세가 이 명령들을 썼다; 그러나 창조의 시작으로부터 하느님께서는 남성과 여성을 만드 셨다; 이 원인 때문에 남자는 그의 아버지와 그의 어머니를 떠나 그의 아내와 굳게 결합할 것이다; 그리고 그들 둘은 하나의 육체일 것이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 함께 결합해두신 것 을 인간이 쪼개지게 하지 말라 (막. 10:5-9; 마. 19:5). 세겜의 혼이 야곱의 딸 디나에게 굳게 결합했다; 그는 처녀를 사랑했다, 그리고 처녀의 심정에 말했다 (창. 34:3). 솔로몬은 외국의 여인을 사랑했다; 솔로몬은 사랑 안에서 이 여인들과 굳게 결합했다
(왕상. 11:1, 2).
위 모두의 구절로부터 “굳게 결합하는 것”이 사랑의 용어이다는 것, 고대 시대에서 교회들에 의해 사용됨으로 받아진 것, 이 교회들은 의미들 안에 있었다는 것; 그리고 내적 의미에서 이것은 영적인 결합밖에 더 아니다는 것, 이 결합은 선행과 사랑이다는 것임을 알았을 것이다.

그 이유는 내가 세 아들을 그에게 낳았기 때문이다. 이는 계속적인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세 아들”에 의해 의미된 계속적인 상태란 선행이 지금 도착하는 상태이다; 그 이유가 인간이 거듭나지는 동안, 즉 교회로 만들어지는 동안, 첫 번째의 일은 신앙의 진리가 무엇인지를 알고 이해해야만 하는 것이다; 두 번째 일은 그것을 뜻하고 행하는 것이다; 그리고 세 번째 일은 그것에 감동되는 것이다. 그리고 인간이 진리에 감동될 때, 즉 그가 진리에 따라 행동함에서 즐거움과 복됨을 지각할 때, 그때 그는 선행 안에, 또는 서로의 사랑 안에 있다. 이런 계속됨이 “나는 그에게 세 아들을 낳았다”에 의해 뜻해진다.

그러므로 그는 그의 이름을 레위라고 불렀다. 이는 그것의 품질을 의미한다. 이는 “이름”, 그리고 “이름을 부름”의 의미가 품질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품질은 이 말 안에 즉 “지금 내 사람은 나와 굳게 결합할 것이다, 그 이유는 내가 그에게 세 아들을 낳았기 때문이다”에 포함되어 있다. 이 품질이 “레위”에 의해 의미되었고, 그로부터 명명된 지파에 의해서도 의미된다; 그리고 이것이 교회의 세 번째 보편적인 것이다 (즉, 인간이 거듭나질 때, 또는 교회가 되어갈 때 세 번째의 단계이다), 그리고 선행이다. 선행 측면의 경우, 그 자체 안에 진리를 뜻함이 포함된다; 그리고 이를 통하여 그 자체 안에 진리를 이해함이 포함된다. 선행 안에 있는 자는 누구이든 이것을 가진다. 그러나 인간이 선행에 당도하기 전, 그는 반드시 처음에 외적인 것 안에, 즉 진리를 이해함 안에 있었어야만 하고; 다음으로 진리를 뜻함 안에 있었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진리에 애착함 안에서, 즉 선행 안에 있는다. 그리고 인간이 선행 안에 있을 때, 그는 그때 주님을 지켜보는데, 이것이 야곱의 넷째 아들인 “유다”로 표현되는 여러 의미 중에서 최고 의미이다.

35절. 그리고 그녀는 다시 임신했다, 그리고 아들을 낳았다, 그리고 그녀는 말했다, 이번에 나는 여호와를 고백할 것이다. 그러므로 그녀는 그의 이름을 유다라고 불렀다. 그리고 그녀는 출산으로부터 아직 서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다시 임신했다, 그리고 아들을 낳았다”란 외적인 것에서부터 내적인 것에 이르는데 더 있게 되는 영적인 임신과 출생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녀는 말했다, 이번에는 내가 여호와를 고백할 것이다”란 최고의 의미에서 주님을, 내적 의미에서 말씀을, 외적 의미에서 말씀으로부터의 교리를, 현재의 경우 사랑 속의 신성과 주님의 천적 왕국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그녀는 그의 이름을 유다라고 불렀다”란 그것의 품질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녀는 출산으로부터 아직 서있었다”란 지상으로부터 여호와 또는 주님에게로 사다리를 수단으로 오름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녀는 다시 임신했다, 그리고 아들을 낳았다. 이는 외적인 것에서부터 내적인 것에 이르는데 더 있게 되는 영적인 임신과 출생을 의미한다. 이는 앞에서 살폈는 바 설명은 생략한다

그리고 그녀는 말했다, 이번에는 내가 여호와를 고백할 것이다. 이는 최고의 의미에서 주님을, 내적 의미에서 말씀을, 외적 의미에서 말씀으로부터의 교리를, 현재의 경우 사랑 속의 신성과 주님의 천적 왕국을 의미한다. 이는 “고백함”의 의미로부터 알게 된다. 외적, 또는 대략적인 내면의 의미에서 “고백하는 것(confess)”은 말씀으로부터의 교리임이 분명하다; 그 이유가 고백은 흔히 알고 있는 것, 즉 인간이 주님 앞에서 그의 신앙을 선포하는 것밖에 더 아니기 때문이다; 인간은 자기가 믿는 것이 무엇이든, 그것 안에서 납득한다. 결과적으로 자기에게 있는 것이 무엇이든 그 사람에게는 교리이다는 말이다. 내적 의미에서 “고백하는 것”은 말씀을 의미하고 말씀을 뒤따르고 있어야 한다, 그 이유가 신앙과 선행의 모든 교리는 말씀으로부터 있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인간 자신만으로부터 이다면, 그는 천적이고 영적인 것들에 대해서는 어떤 것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는 신성한 계시로부터서만 그것들을 알 수 있다, 이 신성한 계시가 말씀이다. 최고 의미에서 “고백하는 것”이 주님을 의미하는 것은 주님이 말씀이시기 때문, 결과적으로 말씀으로부터의 교리, 그리고 말씀이 내적 의미에서는 주님만에, 그리고 그분의 왕국만에 주목하기 때문이다. 고로 “여호와를 고백하는 것”은 사랑의 신성과 그분의 천적 왕국이 의미된다; 그 이유가 주님이 신성한 사랑 자체, 그리고 이 사랑의 유입이 그분의 왕국을 구성하기 때문, 그리고 이것은 그분으로부터 있는 말씀을 수단으로 하기 때문이다. “여호와를 고백함”으로부터 명명된 “유다”에 의해 사랑의 신성과 주님의 천적 왕국이 의미된다는 것은 이미 살폈다 (3654항); 그리고 이로부터 여기서 “고백함”이 이 의미를 가진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고백하다”, 또는 “고백”의 의미는 이 단어가 언급되는 구절로부터서도 알는지 모른다. 이사야서에서:
그 날에 너희는 말할 것이다, 나는 당신에게 고백할 것입니다, 오 여호와시여; 비록 당신이 제게 성내셨을지라도, 당신의 노염은 바뀌어집니다, 그리고 당신은 저를 위로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날에 너희는 말할 것이다, 여호와에게 고백하라, 그분의 이름을 불러라, 그분의 일들을 백성들이 알게 만들어라, 그분의 이름이 드높다함을 말하라 (이. 12:1, 4).
다윗서에서:
우리는 당신에게 고백합니다, 오 하느님, 우리는 고백합니다, 그리고 당신의 이름이 가까이 있습니다, 당신의 경이한 일들이 선포합니다 (시. 75:1).
다시:
고백을 위한 시편: 기뻐하는 시끄러움을 여호와께 만들어라, 모든 땅아; 그분이 우리를 만 드셨다, 그리고 우리 자신이 아니다, 그분의 백성, 그분의 풀밭의 양떼. 고백함으로 그분의 큰 문들을 통하여, 찬양과 더불어 그분의 뜰 안으로 들어가라; 너희는 그분에게 고백하라, 그리고 그분의 이름을 복되게 하라. 그 이유가 여호와는 선하시고, 그분의 자비는 영원하시 고, 그분의 진리는 세세토록 있기 때문이다 (시. 100:1-5).
위에서 “고백함”과 “고백”이 여호와, 또는 주님을 인정함, 그분의 것인 것을 인정함을 의미하는 것이 분명하다. 이 인정함이 교리와 말씀이다는 것은 분명하다.
이사야서에서 다시:
여호와께서 시온을 위로하실 것이다, 그분은 그녀의 모든 황폐된 장소를 위로하실 것이다; 기쁨과 즐거움이 거기 안에서 발견될 것이다. 고백과 노래하는 음성이 발견될 것이다
(이. 51:3).
그리고 예레미야서에서:
고로 여호와께서 말하신다, 잘 보라 나는 야곱의 천막들의 포로된 것을 도로 가져다놓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의 거처에 불쌍히 여김을 가질 것이다; 그리고 도성은 그녀 자신의 돌더미 위에 건축될 것이다, 그리고 궁전이 거기로부터의 방식에 따라 깃들일 것이다; 그리 고 그것들로부터 고백이 진행될 것이다, 그리고 즐거움을 만드는 그것들로부터의 음성이 진행될 것이다 (예. 30:18, 19).
다윗서에서:
나는 그분의 정의에 따라서 여호와께 고백할 것이다, 그리고 나는 가장 높으신 여호와의 이름을 노래할 것이다 (시. 7:17).
다시:
내가 하느님의 집에 갈 때, 노래함과 고백함의 음성과 더불어, 축제를 지키는 군중과 더불 어 (시. 42:4).
다시:
나는 나라들 사이에서 오 주님, 당신에게 고백할 것입니다, 나는 백성들 사이에서 당신에게 시편을 노래할 것입니다; 그 이유가 당신의 자비는 천국에서까지 조차 위대하시기 때문입 니다 (시. 57:9, 10).
위 구절로부터 분명해지는 바, “고백”은 사랑의 천적 평면에 관련된다는 것이 분명하다, 그 이유는 이 용어는 사랑의 영적 평면에 속하는 용어로부터 구별되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고백과 노래하는 음성”, “즐거움을 만드는 그들의 음성”, “나는 나라들 사이에서 당신에게 고백할 것입니다”, “나는 백성들 사이에서 당신에게 시편들을 노래할 것입니다”라 말하기 때문이다. “고백”, “고백함”은 천적 평면이다를, “노래하는 음성”, “즐거움을 만드는 그들의 음성”은 영적 평면에서의 표현들이다. 또한 “나라들 사이에서 고백함, 그리고 백성들 사이에서 노래함”이라 말해지는데, 그 이유는 “나라들”이 선 안에 있는 이들을, “백성들”은 진리 안에 있는 이들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즉 천적인 사랑 안에 있는 이들, 영적인 사랑 안에 있는 이들을 의미한다는 말이다. 말씀에서, 예언서들과 더불어서, 위의 두 표현들이 대부분 발생하는데, 하나는 천적 평면, 또는 선에, 또 하나는 영적 평면, 또는 진리에 관련되고 있다. 이는 신성한 결혼, 즉 선과 진리의 결혼이 말씀의 각 부분에서 있도록 하시기 위함이다. 이로부터 분명해지는 것은, “고백”은 사랑의 천적인 것을 포함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진짜 고백, 또는 심정으로부터 있는 고백은 선으로부터서만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진리로부터 있는 고백이 “노래함의 음성”, “즐거움을 만드는 음성”. “시편들을 노래하는 음성”이라 불리운다.
이와 같이 다윗서에서:
나는 노래를 가지고 하느님의 이름을 찬양할 것이다, 그리고 고백을 가지고 그분을 크게 보이게 할 것이다 (시. 69:30).
다시:
나는 현악기로 당신에게 고백할 것입니다, 당신의 진리까지도, 오 나의 하느님; 당신에게 나는 하프로 노래합니다, 오 당신 이스라엘의 거룩한 분이시여 (시. 71:22).
“하프로 노래하는 것”, 그리고 다른 현악기로 노래하는 것은 영적인 것들을 의미하는데, 이미 살폈다. 다시:
고백을 가지고 그분의 큰 문으로 들어가서, 찬양으로 그분의 뜰로 들어가라; 그분에게 고 백, 그분의 이름을 찬미 (시. 100:4);
위에서 “고백”과 “고백함”은 선의 사랑으로부터 이고, “찬양함”과 “찬미함”은 진리의 사랑으로부터 이다. 다시:
고백으로 여호와께 대답하라; 우리의 하느님에게 하프 위에서 시편들을 노래하라
(시. 147:7).
다시:
나는 큰 회중 안에서 여호와께 고백할 것입니다; 나는 많은 백성 사이에서 당신을 찬송할 것입니다 (시. 109:30).
다시:
우리 당신의 백성 그리고 당신의 풀밭의 양떼가 당신에게 고백할 것입니다; 우리는 세세토 록 당신의 찬양을 하나하나 열거할 것입니다 (시. 79:13).
다시:
그들로 여호와께 그분의 자비를 고백하게 하자, 그리고 사람의 아들들에게 그분의 경이한 일들을 고백하게 하자, 그들이 고백의 제물을 바치게 하자, 그리고 노래함으로 그분의 일들 을 선포하게 하자 (시. 107:21, 22).
위 구절은 하나의 것을 위해 두 가지 표현을 포함하고 있다는 것이 분명하다, 만일 두 표현 중 하나는 선인 천적 평면을, 또 하나는 진리인 영적 평면을 포함하지 않으면 중복된 말인 듯 비쳐질 수도 있다; 결과적으로 이 두 표현은 신성한 결혼이라는 하나를 표현하고 있다. 주님의 왕국 자체가 이 결혼이기 때문이다. 이 신비는 말씀 전체를 망라하여 스며들어 있다, 그러나 내적 의미를 수단으로 하지 않으면 결코 밝혀지지 않는다. 다시 말해 천적 평면에 속하는 것, 그리고 영적 평면에 속하는 것에 관한 지식을 아는 특권을 누릴 수 없다는 말이다. 어쨌든 우선적으로 익혀야 하는 것은 천적 평면이, 영적 평면이 무엇인지에 대한 일반적 측면(넓은 측면)인데, 이는 많이 취급된 바 있다.
천적 사랑으로부터인 심정으로부터의 진짜 고백은 순수한 의미에서 있는 고백이다. 이 고백 안에 있는 자는 모든 선이 주님으로부터 있다는 것을, 그리고 모든 악은 자신으로부터 이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리고 그가 이런 인정함 안에 있을 때, 그는 면목 없음의 상태 안에 있다, 그 이유가 그때 그는 주님이 자기 안에 있는 모든 것이시다는 것, 그리고 자기는 상대적으로 아무 것도 아니다는 것을 인정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고백이 이 상태로부터 만들어질 때, 이것은 천적 수준의 사랑으로부터 만들어진 것이다.
유태 교회에서 바쳐진 고백함의 제물은 감사함이었고, 보편적 의미에서 감사(기도)와 이에 대한 보답으로 바치는 제물이라 불리웠는데, 이에는 두 종류, 즉 고백과 봉헌이다. 고백의 제물이 사랑의 천적인 것을 포함했다는 것을 아래 구절에서 읽어볼 수 있다:
이것은 여호와께 바치게 되는 감사함의 제물이다; 만일 그가 고백을 위해 그것을 바친다면, 그때 그는 바치되, 고백의 제물 외에, 기름을 섞은 누룩 없는 과자들, 그리고 기름을 부은 누룩 없는 웨이퍼(wafer)들, 그리고 삶은 고운 곡식가루, 기름을 섞은 과자들, 고백의 제물 외에 누룩 있는 빵의 과자들 위에서 그는 자기 선물을 바칠 것이다 (레. 7:11-13).
여기서 언급된 모든 것들, 즉 “기름을 섞은 누룩 없는 과자들”, “기름을 부은 누룩 없는 웨이퍼들”, “삶은 고운 곡식가루”, “누룩 있는 빵의 과자들”은 사랑과 신앙의 천적인 것들, 그리고 그로부터의 고백을 의미한다는 것, 그리고 이를 바치는 이들은 반드시 면목 없음의 상태 안에 있어야만 한다.
봉헌 제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