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50장 해석

창세기 제 50 장

1-3절. 요셉이 아버지의 얼굴에 엎드려졌다, 그리고 그 위에서 울었다, 그리고 그에게 키스했다. 2 그리고 요셉은 그의 종, 의사에게 그의 아버지를 방부 처리를 하도록 명령했다. 그리고 의원들은 이스라엘을 방부처리했다. 3 그리고 그를 위하여 사십 일을 채웠는데, 그 이유는 방부 처리하는 기간이 사십 일 걸리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집트 사람들은 그를 위하여 칠십 일 동안 곡을 했다.

요셉이 아버지의 얼굴에 엎드려졌다. 이는 내적 부분이 선에 애착함 쪽으로 유입됨을 의미한다. 이는 누군가의 “얼굴에 엎드려짐”의 의미가 유입됨이다로부터; 요셉의 표현함이 내적 부분이다로부터; “얼굴”의 의미함이 애착이다로부터; 그리고 여기서 “아버지”인 이스라엘의 표현함이 영적 선, 또는 진리의 선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로부터 분명한 바, “요셉은 자기 아버지의 얼굴에 엎드려졌다”에 의해 내적 부분이 영적 선에 애착함 안으로 유입됨이 의미된다는 것이다. 내적 부분이 영적 선에 애착함 안으로 유입된다가 의미되는 이유는 내적 의미에서 취급되는 주제가 영적 (수준의) 교회 (the spiritual Church, 영적 평면의 교회, 영적 수준의 인간을 위한 교회, 둘째 천국의 교회)이고, 이 교회가 주님에 의해 설립되어졌다 이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이스라엘”에 의해 진리의 선, 또는 영적 선이 의미되고, 이 선이 영적 (수준의) 교회를 만들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에 의해 이 교회가 의미되어진다. 이 선이 존재 안으로 오기 위하여 요셉에 의해 표현되는 내적 부분의 천적 평면(the internal celestial)의 유입이 반드시 있어야 함이 틀림이 없다; 그 이유가 이 유입 없이 영적 선은 선이 아니기 때문, 그 이유는 이 선이 애착 없음으로부터 있어지기 때문이다. 이어지는 구절의 내적 의미에서 이 교회의 설립이 계속되어진다. 죽고, 매장되어지는 이스라엘에 의해 이 교회가 의미되는 이유는 내적 의미에서 “죽음”에 의해 죽음이 의미되지 않기 때문, “매장”에 의해 매장이 의미되지 않기 때문, 그러나 “죽음”에 의해 새로운 생명 (삶)이 의미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매장”에 의해서는 거듭남이 의미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위에서 울었다. 이는 슬픔을 의미한다. 여기서 “울다”에 의해 외적 부분에서와 같은 죽음 때문에 야기되는 슬픔 같은 것이 내적 의미에서는 뜻해지지 않는다, 그러나 영적 (수준의) 교회의 선 때문에 야기되는 슬픔이다: 즉 이 교회의 선이 자연적인 것 넘어 승강되어질 수 없기 때문에 야기되는 슬픔이다; 그 이유가 주님께서는 이 선을 완전해지게 하시어 그분 쪽으로 끌어당기시려 계속적으로 유입을 통하여 흘러드시기 때문, 그러나 여전히 천적 (수준의) 교회에 속하는 첫째가는 선의 등차로 승강되게 하실 수 없으시기에 야기되는 슬픔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는 영적 교회인은 상대적으로 희미함에 있기 때문; 즉 그들은 진리들인지 아닌지를 추론한다; 또는 진리들을 교리라고 불리우는 것으로 확증한다; 확증한 것이 진짜인지 아닌지를 지각함이 없다; 그가 그것을 자신과 더불어 확증했을 때, 그것이 진리이다고 완전히 믿어버린다. 설사 거짓일지라도 믿어 굳히고야 만다; 그 이유가 기발난 착상으로 이리저리 꿰맞춘 교리일 뿐, 총명으로부터가 아닌 것, 지혜로부터는 더 더욱 아닌 것일지라도 확증되어질 수 없다 하는 것은 세상에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아마 거짓된 것이 진짜인 것보다 더 쉽사리 이의 없이 확증될는지 모른다, 그 이유는 그것들은 인간의 강한 욕망들을 흡족하게 하는 대목이 삽입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더욱이 인간의 감각들의 오류들과 일치해놓기 때문이다. 영적 교회인의 속성이 위 같을 진대, 그는 자연적인 것 넘어로 승강되어질 수 없다; 이런 등등이 “요셉은 그(이스라엘) 위에서 울었다”에 의해 의미되는 슬픔이다.

그리고 그에게 키스했다. 이는 첫 결합을 의미한다. 이는 “키스함”의 의미가 애착으로부터의 결합이다로부터; 이 경우 첫 결합이다, 그 이유는 더 밀착된 결합이 이어지는 것에서 취급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요셉은 그의 종, 의사에게 명령하였다. 이는 결합을 방해한 악으로부터 보호함을 의미한다. 이는 “명령하다”의 의미가 흘러듦이다로부터; 요셉의 표현함이 내적 부분이다로부터; “의원”의 의미가 악들로부터 보존함이다로부터 알려진다. 이 보존함이 방금 앞에서 말한 결합을 방해한 악들로부터를 표시하는 것은 문맥의 연결로부터 나타나고 있다. 그러므로 “요셉이 그의 종, 의원에게 명령했다”에 의해 결합을 방해한 악들로부터 보존함에 관련되는 내적 부분으로부터의 유입이 있음이 분명해진다. “의원”의 의미가 악들로부터 보존함인 이유는 영계에서 질병들이 악들과 거짓들이기 때문, 영적 질병은 악들과 거짓들밖에 더 아니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악들과 거짓들이 내적 인간으로부터 건강을 거두어가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음에 병듦을 유발한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고통들을 일으킨다; 말씀에서도 “질병들”에 의해 의미되는 것은 이밖에 더 없다.
“의사(physician)”, 또는 “의술”, “약”이 말씀에서 악들과 거짓들로부터 보호되게 함을 의미하는 것은 그것들이 언급되는 아래 구절에서 알게 된다:
만일 너희가 하느님의 음성을 귀기울인다면, 그리고 내가 보기에 선인 것을 행한다면, 그리고 나의 명령들에 청종하여 모든 그분의 규례들을 지킨다면, 나는 이집트인들에게 내렸던 질병의 어느 것도 내리지 않을 것이다; 그 이유가 나는 너희의 의사 여호와이기 때문이다 (출. 15:26);
“의사 여호와”는 악들로부터의 보호자(보존자)를 표시한다, 그 이유가 이것들이 “이집트인들에 의해 내려진 질병”에 의해 의미되기 때문이다. “이집트인에게 내려진 질병”이란 기억 속의 지식들로부터 추론함에 근원을 둔 악들과 거짓들, 그리고 신앙의 비밀들에 관한 오류들을 의미한다는 것은 주님의 신성한 자비로부터 질병들을 취급하는 대목에서 더 말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영적인 질병들이 의미된다는 것은 바로 위 인용구절, “만일 그들이 하느님의 말씀을 청종하고 선을 행하고, 그분의 명령에 귀기울인다면, 이 질병들은 그들 위에 내려오지 않는다”에서도 분명해진다.
같은 의미에서 주님은 자신을 의사라고 일컬으신다, 누가복음서에서:
온전한 자는 의사가 필요 없으나, 병든 자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로운 자가 아닌 회개할 죄인을 부르러 왔다 (눅. 5:31, 32);
위 구절에서 역시 “의사”는 악들로부터의 보호자를 표시한다, 그 이유가 “온전한” 자는 정의로운 자를, “병든” 자는 죄인을 뜻하기 때문이다. 예레미야서에서:
길르앗에 향유(香油, balm)가 없더냐? 거기에 의사가 없더냐? 왜 내 백성의 딸의 건강이 회복되지 않느냐? (예. 8:22);
“의사”는 교회에서 거짓들로부터 보호함을 표시한다, 그 이유가 “내 백성의 딸의 건강”이 교회에 있는 교리의 진리를 표시하기 때문이다.
“고치다(heal),” “치료하다(cure),” “치료(remedy),” 그리고 “약(medicine)”이 말씀에서 자연 측면에서 언급되는 것이 아니라 영적 측면에서 이다는 것이 아래 구절에서 분명해진다:
왜 당신께서는 우리를 치시고, 치료해주시지 않습니까? 그들은 평화를 기다리나 선은 없습니다; 치료의 때, 그러나 바라보니 공포(의 때입니다) (예. 14:19; 8:15).
다시:
나는 그로 하여금 건강과 고쳐짐이 있게 하겠다, 그리고 나는 그들을 치료할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들에게 평화와 진리의 왕관을 밝히 알릴 것이다 (예. 33:6).
다시:
건강을 위하여 네 판단을 판결할 자는 아무도 없다, 너는 회복의 약들을 가지고 있지 않다 (예. 46:11).
에스겔서에서:
거기로부터의 강둑의 이쪽과 저쪽에 식품의 모두 각각의 나무가 올라온다, 그들의 잎은 시들지 않는다, 거기로부터의 열매는 다 소비되는 일이 없다, 그것은 그것의 달들에서 다시 열매맺 는다, 그 이유는 거기로부터의 물들은 성소로부터 나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거기의 열매는 식품을 위해 있고, 거기의 잎은 치료약을 위해 있다 (겔. 47:12);
위 예언서에서 취급한 주제는 하느님의 새로운 집, 또는 새로운 성전이다, 이를 수단으로 새로운 교회가, 내적 의미에서 주님의 영적 왕국이 의미된다; 그러므로 : “식품을 위한 모두 각각의 나무가 올라오는 둑을 가진 강”은 총명과 지혜에 속하는 것들을 의미한다; “나무들”은 지각들과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들을 의미한다; “성소로부터 나가는 물들”은 총명을 만드는 진리들을 의미한다; “성소”는 천적 수준의 사랑, 즉 최고 의미에서인 주님의 신성한 인간으로부터의 사랑이다; “식품을 위한 열매들”은 사랑의 선들이다; “치료약을 위해 있는 잎”은 신앙의 진리이다. 이로부터 분명한 바, “치료약”이 의미하는 것, 즉 악들과 거짓들로부터 보호되는 것이다; 그 이유가 신앙의 진리가 생활의 선쪽으로 인도할 때, 이것이 보호해준다, 그 이유는 이것이 악들로부터 물러나게 하기 때문이다.

그의 아버지를 방부 처리를 하도록. 이는 어떤 접촉 전염으로 감염되지 않도록을 의미한다. 이는 “방부 처리함”의 의미가 접촉 전염으로부터 보호함이다로부터; 그리고 이스라엘의 표현함이 영적 교회의 선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러므로 “그의 아버지를 방부 처리를 함”에 의해 영적 교회에 속하는 선이 어떤 접촉 전염으로 감염되지 않도록 보호함의 수단이 의미되어진다. “방부 처리”가 접촉 전염으로부터 보호의 수단인 이유는 신체를 방부 처리하는 목적이 썩음으로부터 보호하기 때문이다. 접촉 전염으로부터 영적 선의 보호의 수단이 이어지는 구절에서 취급된다.

그리고 의사들은 이스라엘을 방부 처리했다. 이는 진리로부터 있는 선의 보호를 위해 행해지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방부 처리함”의 의미가 접촉 전염으로부터 보호하는 수단이다로부터, 여기서는 보호를 위해 행해지는 것이다; 그 이유는 “그들이 방부 처리를 했다”하고 말해지기 때문이다; “의사”의 의미가 악들로부터 보호함이다 이다로부터; 그리고 이스라엘의 표현함은 영적 선, 즉 진리로부터 있는 선이다.

그리고 그를 위하여 사십 일을 채웠다. 이는 시험들을 수단으로 있는 준비함의 상태들을 의미한다. 이는 숫자 “40”의 의미함이 시험들이다로부터; 그리고 “날들”의 의미가 상태들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것들이 준비의 상태들이다는 것이 “날들이 그를 위하여 채워짐”에 의해 의미되고 있다. 그 이유가 이 날들이 채워짐으로 시체가 썩음에서 보호됨이 준비되어지기 때문인데, 영적 의미에서는, 혼들이 악의 접촉 전염됨으로부터 보호되도록 하는 것이다.

그 이유는 방부 처리하는 기간이 사십 일이 걸리기 때문이었다. 이는 이러함이 보존의 상태들이다를 의미한다. 이는 “날들”의 의미가 상태들이다로부터; 그리고 “방부 처리를 함”의 의미가 보호의 수단이다로부터 알려진다.

그리고 이집트 사람들은 그를 위하여 곡을 했다. 이는 교회의 기억 속의 지식들이 슬퍼함을 의미한다. 이는 “울다”의 의미함이 슬픔의 극치이다, 그리고 내적 슬퍼함의 표현이다로부터; 그리고 이집트인의 표현함이 교회의 기억 속의 지식들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교회의 기억 속의 지식의 슬퍼함이 “이집트인들이 이스라엘을 위하여 울다”에 의해 의미된 것이 그의 죽음 때문에 있어진 슬퍼함을 뜻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이것은 글자의 의미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서 그들의 슬퍼함은 교회의 선 때문에 있는 슬퍼함을 뜻한다, 즉 이스라엘에 의해 표현된 선이 교회의 외적 부분인 기억 속의 지식들을 남겨 두고, 그것들로부터 교회의 내적 부분으로, 즉 진리의 선으로 승강했다. 이럴 경우 기억 속의 지식들은 이전 같이 있는 그 자체에서 더 이상 중요시되지 않는다, 그러나 진리의 선 아래쪽에 있는다. 그 이유가 영적 교회의 진리가 선이 될 때, 혁명이 거행된다, 즉 인간은 진리들로부터 진리를 바라보지 않고 선으로부터 진리들을 바라본다는 말이다, 이 혁명은 이미 몇 번 설명해왔었다. 이로부터 슬퍼함이 오고, 또한 다른 질서가 기억 속의 지식들 사이에 결과되어진다, 이것은 고통 없이 결과되지 않는다.

칠십 일 동안. 이는 충만한 상태를 의미한다. 이는 “70”의 의미로부터 분명해진다; 그 이유가 이 숫자는 “7”과 같은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7”은 시작으로부터 끝까지의 전체 기간, 고로 충분한 상태를 의미한다.
“70”이 전체 기간, 고로 충만한 상태를 표시하는 것은 아래 구절로부터도 분명해진다:
두로가 한 왕의 날들에 따라서 칠십 년을 잊혀 있는 때가 올 것이다; 칠십 년의 끝으로부터 두로는 음녀의 노래 같이 있을 것이다; 그 이유가 칠십 년의 끝으로부터 여호와께서는 두로를 방문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이. 23:15, 17);
“두로”는 교회의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들을 표시한다, 이것이 잊혀져 있을 것이다; “칠십 년”은 시작부터 끝까지의 전체 기간이다; “한 왕의 날들에 따라서”란 상태들을 표시한다, 그리고 “왕”은 진리들을 표시한다. 위 구절의 주제가 무엇인지를 생각해보려 하는 이들이다면, 눈치채는 것은, “두로”가 두로를 뜻하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내적 의미 없이 “두로가 칠십 년을 잊혀져 있는다”는 것을 납득할 수 없다는 것, “한 왕의 날들에 따라서”가 뜻하는 것도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예레미야서에서:
온 땅이 황무해질 것이다, 그리고 황페함이다, 그리고 이 나라들이 칠십 년을 바빌론을 섬길 것이다; 그리고 칠십 년이 찰 때, 내가 바빌론 왕에, 이 나라에 있는 그들의 불법을 방문할 것이다 (예. 25:11, 12; 29:10);
“칠십 년”은 황무함과 황폐함이 충만되는 상태를 표시한다, 그리고 이것은 유태 백성이 견뎌야 하는 칠십 년의 포로됨에 의해 의미되어져 있다.
다니엘서에서:
칠십 주가 네 백성과 네 거룩함의 도성 위에 포고된 것은 위법함이 절정에 이르기 위하여, 그리고 죄들을 가두기 위하여, 그리고 불법이 벌을 받기 위하여, 그리고 시대들의 정의로운 자를 데려다 놓기 위하여, 그리고 환상과 예언을 밀봉하기 위하여, 그리고 지극히 거룩함에 기름을 붓기 위하여 서 이다 (딘. 9:24);
위에서 “70”은 충만된 상태, 즉 주님이 오시기 이전 전체 기간을 분명하게 표시한다; 그러므로 그분에 관해서 말해지는 것은, 그분은 “시간의 충만해짐(때가 차자)”에서 오셨다 이다. “칠십 주”가 충만한 상태를 표시하는 것은 이 구절의 세부 사항들로부터 명백하다, 즉 많은 주들이 “위법함이 절정에 이르기 위하여”, 또한 “불법이 벌을 받기 위하여”, 또한 “시대들의 정의로운 자를 데려다 놓기 위하여”, 또한 “환상과 예언을 밀봉하기 위하여”, “지극히 거룩한 자에게 기름붓기 위하여 포고되어졌다”의 각 세부사항들은 충만함을 포함하고 있다는 것이다. 같은 것이 인용구절의 다음 구절에 포함되어 있다:
그러므로 알고 지각하라, 예루살렘을 회복하고 건설하라는 말이 나감으로부터 제 1 인 자 메시아에 게 (이르기) 조차 (하는데) 칠 주 일 것이다 (단. 9:25);
위의 “7”은 충만한 상태를 표시한다. (“7”, 또한 “70”은 충만한 상태를 의미한다) “예루살렘”이 이 구절에서 새로운 교회를 분명하게 표시한다, 그 이유가 예루살렘은 그때 건축되지 않았고, 파괴되어졌기 때문이다.

4-6절. 그리고 그를 위하여 곡하는 날들이 지나갔다, 그리고 요셉은 바로의 집에 말했다, 말하기를, 만일 제가 당신의 눈에서 은혜를 발견하였다면 부디 바로의 귀에 말합니다, 말하기를, 5 나의 아버지는 나에게 맹세하게 하고, 말하기를, 보라, 나는 죽는다. 내가 가나안의 토지에 나를 위하여 파둔 내 매장지에 너는 나를 매장하여라. 그리고 지금 청하옵건대 나로 올라 가게 하소서, 그리고 나의 아버지를 매장하게 하소서, 그리고 나는 돌아오겠습니다. 6 그리고 바로는 말했다, 올라 가라, 그리고 네 아버지가 너에게 맹세 시킨대로 그를 매장하라.

그리고 그를 위하여 곡하는 날들이 지나갔다. 이는 슬픔의 상태들이 완성되어졌다를 의미한다. 이는 “지나갔다”의 의미가 완성되어졌다 이다로부터; 그리고 “곡하는 날”의 의미가 슬픔의 상태들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리고 요셉은 바로의 집에 말했다. 이는 내적 부분이 자연적 마음에 유입됨을 의미한다. 이는 “말함”의 의미가 유입됨이다로부터; 요셉의 표현함이 내적 부분이다로부터; 집의 표현함이 마음이다로부터; 그리고 바로의 표현함이 자연 평면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러므로 분명한 바, “요셉이 바로의 집에 말하였다”에 의해 자연적 마음 안으로 내적 부분이 유입됨이 의미된다는 것이다.

말하기를, 만일 제가 당신의 눈에서 은혜를 발견하였다면. 이는 그것이 잘 받아들여질지 모른다를 의미한다. 이는 “당신의 눈에서 은혜를 발견한다”의 의미가 은근히 심어짐이다로부터, 고로 잘 받아질는지 모른다 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부디 바로의 귀에 말합니다. 이는 동의를 구하는 탄원을 의미한다. 이는 “부디”의 의미가 탄원함이다로부터; 그리고 “귀”의 의미가 순종함이다로부터, 여기서는 동의함인데, 그 이유는 왕에게 말하기 때문이다. 순종함 또한 동의함이다; 그러나 하위 등급에 대하여는 순종함, 상위 등급에 대하여는 동의함이다.

말하기를, 나의 아버지는 나에게 맹세하게 했다. 이는 그는 심정에 교회를 가지고 있다를 의미한다. 이는 “아버지”인 이스라엘의 표현함이 영적 교회이다로부터; 그리고 “맹세를 만든다”가 내향적으로 묶는다, 고로 심정에서 가지는 것이다로부터, 그 이유가 내향적으로 묶는 자, 고로 양심을 수단으로 묶는 자가 이것을 가지는 이유는 그가 심정에서 그것을 가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것이 여기서 “맹세를 만든다”에 의해 의미된다.

말하기를, 보라, 나는 죽는다. 이는 교회가 존재되는 것이 중지됨을 의미한다. 이는 “죽는다”의 의미가 더 이상 있지 않는다이다로부터; 그리고 교회가 만기가 될 때, 이것은 교회의 마지막 때이다.

내가 가나안의 토지에 나를 위하여 파둔 내 매장지에 너는 나를 매장하여라. 이는 교회는 이전의 교회가 있어 왔던 곳에서 소생되어야함을 의미한다. 이는 “매장지” 또는 “매장하다”의 의미가 소생되는 것이다로부터; 그리고 “가나안의 토지”의 의미가 주님의 왕국과 교회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야곱이 여타 다른 곳이 아니고, 아브라함과 이삭이 매장되어진 곳, 가나안의 토지에 매장되기를 바랬던 이유는 그의 후손들이 그 토지를 소유해야 하고, 그리하여 자신도 그들 사이에 누워 있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어쨌든 내적 의미는 이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밖의 어떤 것, 즉 거듭남과 부활의 어떤 것이다, 그 이유가 이 안에 교회가 있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내적 의미에서 “매장”에 의해 거듭남과 부활이 의미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가나안의 토지”에 의하여 교회가 의미되고, “아브라함, 이삭, 야곱”에 의해 신성 자체와 신성한 인간 측면에서의 주님, 그리고 관계적 측면에서 주님의 왕국의 내적, 외적 부분이 의미되기 때문이다. 거기 그들의 매장지의 내적 의미가 이러한 바, 그러므로 부활을 믿는 유태인들과 더불어 비록 자기들이 가나안 외의 지역에 매장된다 해도 자기들은 거기서 다시 일어날 것이라는 견해를 간직하고 있다.
“이전의 교회가 있어왔던 곳”에서 교회가 다시 일어나야 한다고 말한 이유는 태고 때로부터 주님의 교회가 가나안의 토지에 있어왔었기 때문이다. 이 이유 때문에 아브라함은 거기로 가도록 명령받았고, 야곱의 후손들이 그곳으로 데려와진 것이다; 그렇다고 가나안의 토지가 여타 다른 토지들 보다 더 거룩하다 해서가 아니고, 태고 때로부터 거기의 모든 장소들, 지역들, 도성들, 산들, 강들 등등이 주님의 왕국에 속하는 이런저런 것을 표현하였기 때문이다; 그것들에게 주어진 이름들 자체가 이런저런 것들을 포함했다. 그 이유가 천국으로부터 주어진 모두 각각의 이름이 어떤 장소에, 그리고 어떤 인물에 주어져서 천적인 것과 영적인 것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이 천국으로부터 주어졌는 바, 천국에서도 그렇게 지각되어졌다; 이것은 천적 수준이었고 천국과 교통을 가졌던 태고 교회가 이름들을 주었을 경우이다. 그러므로 교회가 거기서 다시 일어나야 하는 이유는 말씀이 거기서 주어지고, 말씀 안에서 그 토지의 모든 것들은 영적이고 천적인 것들을 의미하고 표현하여, 말씀은 땅에서 뿐만 아니라 천국에서도 이해되어진다; 이렇게 장소와 인물의 이름들이 의미적이지 않으면 이해됨은 가능해질 수가 없다. 이런 이유로 야곱의 후손들이 이곳으로 데려와져야 했고, 거기서 예언자들이 일어나서 그들을 수단으로 말씀들이 쓰여졌다; 이런 이유로 교회의 표현이 야곱의 후손들 사이에 설립되었다. 이상 살핀 바로 왜 이전의 교회가 있었던 곳에서 교회가 일어나야 한다고 말해졌는지가 납득되었을 것이다.
말씀에 있는 이름들이 어떤 것들을 의미한다는 것은 이름들의 의미가 설명되는 대목에서 살펴진 바 있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말씀의 이름들이 의미 측면에서 지각되어진다는 사항은 아직 알려진 바 없어 말해두고 가야 할 것 같다. 말씀이 읽혀질 때, 주님께서는 흘러드시고 가르치신다. 경이롭다 말할 것은 영계에도 쓰기, 저술이 있다는 것이다, 나는 이것을 때때로 보았었다, 그리고 읽을 수가 있었는데,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그것들은 선한 영들과 천사들을 수단으로 하면 명료하게 이해된다, 그 이유는 그것들이 그들의 보편적 언어와 일치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로 알도록 해준 것은, 거기서의 모든 단어는 음절 자체쪽으로 내려가는데, 그 세계에 속한 것, 즉 영계의 것을 포함한다; 그리고 거기서 그것들은 숨쉼으로부터, 말함으로 결과하는 애착으로부터, 고로 더 부드럽거나 더 거칠거나 하게 변경되어진다; 그러나 이것을 아마도 누구도 믿지 못할 것이다. 이런 것을 열어 보여주신 이유는 말씀에 있는 이름들이 천국 안에서 기록되어져 왔었다는 것, 거기서는 의미 측면에서 지각되었다는 것을 알게 해주시려는 이유 때문이다.

그리고 지금 청하옵건대 나로 가게 하소서, 그리고 나의 아버지를 매장하게 하소서. 이는 내적인 것을 수단으로 거기에 교회의 소생함이 있음을 의미한다. 이는 “묻다”의 의미가 소생하다 이다로부터; 여기서 “아버지”인 이스라엘의 표현이 교회이다로부터; 그리고 이를 말하는 요셉의 표현함이 내적 부분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리고 나는 돌아오겠습니다. 이는 자연적 마음에 현존함을 의미한다. 이는 “돌아오다”의 의미함이 현존함이다로부터 분명해진다; 그 이유가 내적 의미에서 “발표하는 것(set forth)”, 그리고 “가는(go) 것”은 사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되돌아 오다”, “다시 오다”는 떠남 대신에 생명의 현존이다, 그 이유가 마음이 여전히 거기에 있기 때문이다. 현존함이 자연적 마음에 있는 이유는 되돌아 오는 곳이 이집트이고, 이집트는 자연적 마음을 의미하기 때문에서 이다.

그리고 바로가 말했다, 올라 가라, 그리고 네 아버지를 매장하라. 이는 교회가 소생될 것임을 확증함을 의미한다. 이는 앞에서 살핀 바 있다. 확언함이 표시되어지고 있음은 분명하다.

그가 너에게 맹세 시킨 것에 따라. 이는 이것이 심정에 존재하기 때문이다를 의미한다. 이는 “맹세를 만든다”가 심정에서 가지는 것이다 (6514)에서 알게 된다.

7-9절. 그리고 요셉은 그의 아버지를 매장하러 올라 갔다. 그리고 그와 함께 바로의 모든 종들이 올라 갔다. 그의 집의 원로들, 그리고 이집트 토지의 모든 원로들, 8 그리고 요셉의 모든 집안, 그리고 그의 형제들, 그리고 그의 아버지의 집안이 함께 올라 갔다. 오직 아기들, 그리고 그들의 양떼, 그들의 목축떼 만이 고센의 토지에 남았다. 9 그리고 그와 함께 병거와 기병도 함께 했다. 그리고 군대는 심히 많았다.

그리고 요셉은 그의 아버지를 매장하러 올라 갔다. 이는 내적인 것이 교회를 다시 설치하려는 쪽으로 향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는 요셉의 표현함이 내적 부분이다로부터; “매장함”의 의미가 소생함이다로부터, 고로 다시 설치함인데, 그 이유는 교회에 관해서 말해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기서 “아버지”인 이스라엘의 표현함이 교회이다로부터 알려진다.

그리고 그와 함께 바로의 모든 종들이 올라 갔다. 이는 그것은 자연 평면 속의 기억 속의 지식을 자체에 인접되게 했다를 의미한다. 이는 “그와 함께 올라감”이 자신에게 인접되게 함이다로부터; 그 이유가 이들이 올라가게 된 것은 명령에 의한 것인 바, 요셉이 이들을 자신 쪽에 인접되게 한 셈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로의 종들”의 의미가 자연 평면의 기억 속의 지식들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바로에 의해 일반적 측면에서의 자연 평면이 표현된다; 그리고 자연 평면에 기억 속의 지식들이 있기 때문에, 이것이 바로의 “종들”에 의해서, 또는 “이집트인들”에 의해서 의미된다.

그의 집의 원로들. 선에 일치된 가운데 있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원로들”의 의미함이 지혜의 제일의 것들, 고로 선과 일치하는 것들이다로부터 (아래에서 살핀다); 그리고 “집”의 의미가 선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원로들”이 지혜의 제일의 것들을 표시하는 이유는 말씀에서 “노인”들이 슬기로운 자를, 그리고 인물로부터 추상화된 의미에서는 지혜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들”이 복합체에 있는 모든 진리들과 선들을 의미하고, 백성들 위에 임명된 제 1 인 자들은 총명 속에 있는 제 1의 진리들을, 그리고 “원로들”은 지혜의 제일의 것들, 고로 선 속에 있는 제일의 것들이 의미되어진다.
“제 1 인 자”가 총명 속에 있는 제 1의 진리들을 의미함에 대하여는 이미 살폈다; “원로들”은 지혜의 제일의 것들, 그리고 “노인”이 지혜를 의미함에 대하여는 아래 구절로부터 분명해진다:
그들로 여호와를 벡성의 회중에서 격찬하게 하라, 그리고 그분을 원로들의 집회에서 (격찬하게 하라) (시. 107:32);
위에서 “백성의 회중(모임, 집합)”은 총명에 속하는 진리들에 있는 이들을 표시한다, “회중”은 진리들을 서술하고, “백성” 또한 진리들을 서술한다; 그리고 “원로들의 집회”는 선에 있는 이들을 서술하는데, 이는 지혜 속에 있다; 그 이유가 지혜는 생명(삶) 속에, 고로 선 속에 있고, 총명은 지식들 속에, 고로 진리 속에 있다. 다시:
나는 원로들 보다 더 지혜롭습니다, 그 이유는 내가 당신의 명령들을 준행하기 때문입니다
(시. 119:100);
위에서 “원로들”은 슬기로운 자를 분명하게 표시한다. 마찬가지로 욥기서에서:
노인 안에 지혜가 있다, 그리고 날들의 길이 안에 총명이 있다 (욥. 12:12).
모세의 책에서:
너는 백발의 머리 앞에서 일어설 것이다, 그리고 노인의 얼굴을 존경하라 (레. 19:32);
이것이 명령된 이유는 노인들이 지혜를 표현했기 때문이다.
계시록서에서:
왕좌 위에 나는 24 원로들이 앉은 것을 보았다, (그들은) 흰옷을 입었다, 머리에 금빛의 왕관을 가졌다 (계. 4:4);
“원로들”은 지혜에 속하는 것들을 표시한다, 고로 선에 속하는 것들이다; “원로들”이 이런 것들을 표시하는 것은 그들을 묘사한 것으로부터: 즉 그들은 “왕좌 위에 앉았다, 흰옷을 입었다, 그리고 머리에 금의 왕관을 가졌다”에서 분명해진다; 그 이유가 “왕관”은 지혜의 선으로부터 있는 총명의 진리들을 표시한다; 흰옷”도 마찬가지이다. “머리에 금빛의 왕관”은 지혜의 선들을 표시한다; 그 이유가 “금”은 사랑의 선이다, 그리고 “머리”는 천적 평면(부분), 여기에 지혜가 있다. 셋째 천국, 즉 가장 안쪽 천국에 있는 이들이 “슬기롭다” 라고 불리우고, 주님에 가장 가까운 이들이다; 그러나 중간 천국, 즉 둘째 천국에 있는 이들은 “총명하다”라고 불리우고 주님에 가까이 있지는 않다.
다시:
모든 원로들이 왕좌를 빙둘러 섰다, 그리고 원로들, 그리고 네(4) 동물들 (계. 7:11);
위에서 역시 “원로들”은 지혜에 속하는 것들을 표시한다. 아래 구절도 마찬가지 이다:
아이가 노인을 향하여 으쓱대었다, 경멸하는 자가 존경받는 자를 향하여 우쭐대었다 (이. 3:5);
다시:
여호와 체바욷이 시온 산에서, 그리고 예루살렘에서 통치할 것이다; 그리고 그분의 원로들 앞에서 영광되실 것이다 (이. 24:23).
예레미야서에서:
나의 성직자들과 나의 원로들이 도성에서 숨을 내쉴 것이다, 그 이유는 그들이 그들의 혼에 원기를 주겠다고 식품을 찾아 헤멨기 때문이다 (애. 1:19).
다시:
그녀의 왕과 그녀의 제 1 인 자들이 법이 없는 나라들 사이에 있다; 시온의 딸의 원로들이 땅에 앉아 있다, 그들은 침묵하고 있다 (애. 2:9, 10).
다시:
그들이 시온에서 여인들을 강탈했다, 유다의 성들에서 처녀들을 강탈했다; 제 1 인 자들이 자기들 손으로 목을 매었다; 노인의 얼굴이 존경되지 않고 있다; 원로들이 성문으로부터 끊어졌다
(애. 5:11, 12, 14).
에스겔서에서:
불행에 불행이 겹치고, 소문이 소문에 겹쳐 더해질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예언자로부터 환상을 추구할 것이다; 그러나 성직자로부터 법이 멸해졌고, 원로들부터 묘략이 멸해졌다. 왕은 슬퍼할 것이고, 제 1인 자는 놀람으로 옷입을 것이다 (겔. 7:26, 27).
스가랴서에서:
예루살렘의 거리들에 남노인과 여노인들이 거주할 것이다, 그리고 나이가 많은 탓에 모두 각각은 자기 손에 지팡이를 가질 것이다 (슥. 8:4).
원로들은 지혜에 속하는 것들을 표현한다는 것은 모세에게 내려졌던 하느님의 영이 원로들에게도 내려져서 이로부터 그들이 예언하게 하신다는 기록으로부터도 알게 된다 (민. 11:16-17). 반대적 의미에서 “원로”는 지혜에 반대되는 것들을 표시한다 (겔. 8:11, 12).

그리고 이집트 토지의 모든 원로들. 이는 진리에 일치됨에 있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원로들”의 의미가 지혜의 제일의 것들, 고로 선에 일치함에 있는 것들을 의미한다, 여기서는 진리에 일치함에 있는 이들을 의미하는데, 그 이유는 선에 일치함에 있는 이들은 진리에 일치함에도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집트의 토지”의 의미가 기억 속의 지식들이 있는 자연적 마음이다로부터, 고로 또한 진리들이 있는 자연적 마음이다로부터; 그리고 기억 속의 지식들이 참일 때, 그것들은 기억 속의 지식들의 진리들이라 불리운다.

그리고 요셉의 모든 집안. 이는 영적 평면 속의 천적인 것들을 의미한다. 이는 요셉의 표현함이 영적 평면 속의 천적 부분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러므로 “요셉의 집안”이란 영적 평면 속의 천적인 것들을 표시한다.

그리고 그의 형제들. 이는 그로부터 파생된 진리들을 의미한다. 여기서 “요셉의 형제들”인 이스라엘의 아들들은 영적 진리들이다; 이 진리들은 “요셉”인 내적 부분의 천적인 것으로부터 있다, 그러나 “이스라엘”인 영적 선을 통하여서 이다.

그리고 그의 아버지의 집안. 이는 영적인 선을 의미한다. 이는 여기서 “아버지”인 이스라엘의 표현함이 영적인 선이다로부터; 그러므로 그의 “집안”은 이 선에 속하는 복합체에 있는 모든 이런저런 것들을 표시한다.

오직 아기들. 이는 순진을 의미한다. 이는 살핀 바 있다.

그리고 그들의 양떼. 이는 선행을 의미한다. 이는 “양떼”의 의미가 선행의 내면의 선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들의 목축떼. 이는 선행의 실제들을 의미한다. 이는 “목축떼”의 의미가 선행의 외면의 선들이다로부터; 고로 거기로부터의 실제들이다, 그 이유가 이것들이 선행의 외면의 선들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고센의 토지에 남았다. 이는 이것들은 교회의 기억 속의 지식의 가장 안쪽에 있었음을 의미한다. 이는 “고센의 토지”가 자연 평면의 한가운데 또는 가장 안쪽이다로부터, 거기는 교회의 기억 속의 지식들이 있다. 순진과 선행의 선들, 내면과 외면 모두가 이것의 가장 안쪽에 있었다는 것이 그들의 “어린 아이들, 양떼들, 목축떼들을 고센의 토지에 남겨두었다”에 의해 의미되어 있다, 그 이유가 어떤 것이 어디에 있든지, 그것들이 거기 있다고 말해지기 때문에서 이다. 고로 “그들이 남았다”에 의해 내적 의미에서 남았다가 의미되지 않고, 그러나 거기 있다, 즉 “고센의 토지”인 교회의 기억 속의 지식들의 가장 안쪽에 있다가 의미된다는 말이다.

그리고 그와 함께 병거가… 함께 했다. 이는 교리적인 것들을 의미한다. 이는 “병거”의 의미가 교리적인 것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기병도. 이는 지적인 것들을 의미한다. 이는 “기병”의 의미가 지적 부분에 속하는 것들이다로부터, 그 이유가 “말”에 의해 지성이 의미되기 때문이다. “기병”이 지성, 또는 이해력에 속하는 것들을 표시한다는 것을 아래 구절들로부터 더 알 수 있다:
여호와만이 그들을 인도하셨다; 그분은 그를 땅의 높은 장소들을 타게 만드셨다
(신. 32:12, 13);
위는 고대 교회에 관하여 이다; “그를 땅의 높은 장소들을 타게 만드심”은 더 높은 이해력을 수여하심을 표시한다.
다윗서에서:
당신의 영예 안에서 오르시고 진리로부터의 말씀, 관대하심으로부터 말씀, 정의로부터의 말씀을 타소서, 그리고 당신의 오른 손이 당신에게 경이로운 것을 가르칠 것입니다 (시. 45:4);
주님에 관해서 말해지고 있다; “진리로부터의 말씀을 탄다”는 진리로부터 이해함 자체에서 이다를 표시한다. 다시:
하느님을 노래하라, 너희는 그분의 이름을 찬양하라; 그분의 이름 야(Jah)를 수단으로 구름들을 타시는 그분을 드높여라 (시. 68:4);
위 구절 또한 주님을 말하고 있다; “구름들”은 말씀의 글자 의미를 표시한다; “그것들을 탄다”란 내적 의미에서 있는 것이다, 이 의미에서 진리는 총명과 지혜 안에 있다.
스가랴서에서:
그 날에 나는 놀람으로 모두 각각의 말을 쳐죽일 것이다, 그리고 그의 기수는 미침으로 쳐죽일 것이다, 그리고 나는 나의 눈을 유다의 집안에 열 것이다; 그러나 소경됨으로 백성의 모두 각각의 말을 쳐죽일 것이다 (슥. 12:4);
위에서 “말”은 지적 부분(지적인 것)을 표시한다; 그리고 “기수”는 지력을 표시한다. 위 구절의 “말”이 동물인 말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 “기수”가 기수를 뜻하지 않을 것임을 누가 짐작하지 못할까? 이것이 이해력에 속한다는 것은 너무나 확실하다.
“말”과 “기병”에 의해 지적인 것들이 의미되는 것, 반대적 의미에서 추론함과 이로부터의 거짓들을 의미함을 아래에서 알는지 모른다:
그리고 나는 보았다, 그리고 잘 보니, 흰 말, 그리고 그 위에 앉은 그는 활을 가졌다; 그리 고 왕관이 그에게 주어져 있었다, 그리고 그는 정복하며 정복하려고 나아 갔다. 그리고 거 기서 또 다른 말이 나오는데 붉었다, 그리고 그 위에 앉은 그에게 땅으로부터 평화를 가져 가는 것이 주어졌다, 그리고 그들은 서로를 죽이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에게는 큰 검이 주 어졌다. 그리고 나는 보았다, 그리고 잘 보니, 검은 말; 그리고 그 위에 앉은 그는 그의 손 에 저울을 가졌다. 그리고 나는 보았다, 그리고 잘 보니, 창백한(pale) 말; 그리고 그 위에 앉은 그의 이름은 죽음이었다 (계. 6:2-8);
위에서 “말”, 그리고 “말 위에 앉은 자”는 진리를 이해함에 속하는 이런저런 것들을 의미한다, 그리고 반대적 의미에서 거짓에 속하는 이런저런 것들을 의미함이 세부 사항들로부터 분명해진다. “흰말과 그 위에 앉은 자”는 말씀으로부터 진리를 이해함을 표시한다. “흰말 위에 앉은 자”가 말씀 측면에서의 주님이시다는 것이 분명한 말들로 말하여지고 있다 (계. 19:11, 13, 16). “붉은 말과 그 위에 앉은 자”는 악의 탐욕들로부터 추론함을 표시한다, 이로부터 폭력이 말씀으로부터의 진리들에 저질러진다; “검은 말과 그 위에 앉은 자”는 진리로부터의 지적인 것을 소멸시킴을 표시한다; 그리고 “창백한 말과 그 위에 앉은 자”는 결과적으로 지옥에 떨어짐을 표시한다.
반대적 의미에서 “말”과 “기병”은 타락된 지력을 표시한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거짓들이다. 에스겔서를 읽어보자:
오홀라는 내 앞에서 매춘짓을 했다, 그리고 그녀는 그녀의 애인에 홀딱 빠졌다, 이들은 통치자요 지도자이며, 그들의 모두는 잘생긴 젊은 이들이고, 말을 타는 기병이었다. 그녀의 자매 오호리바는 앗수르의 아들들을 사랑했다, 이들은 통치자이고 지도자들이고, 그녀의 이웃들인데, 잘 차려입고 말을 타는 기병이었고, 그들 모두가 잘생긴 젊은이 이었다 (겔. 23:5, 6, 12);
“오홀라”는 타락한 영적 교회를 표시한다, 이는 “사마리아”이다; 그리고 “오홀리바”는 타락한 천적 교회이다, 이는 예루살렘이다; 그 이유가 사마리아 지역에 있던 이스라엘족들이 영적 교회를 표현했고, 예루살렘 속에 있던 유태인은 천적 교회를 표현했기 때문이다. “앗시리아인”, “앗수르의 아들들”은 신앙의 진리들에 맞서 추론함을 표시한다; “말을 타는 기병”은 타락한 이해력을 표시한다, 이로부터 거짓들이 온다.
하박국서에서:
나는 갈대아인들을 휘저을 것이다, 이들은 모질고 성급한 민족이다, 땅의 넓이로 가서 자기의 소유가 아닌 주택을 상속받기 위하여서이다; 그들의 말은 표범보다 빠르다, 저녁의 이리보다 더 날카롭다, 그들의 기병들은 멀리로부터 와서 자신들을 펼쳐놓는다 (합. 1:6, 8)
“갈대아인”들은 거짓들 안에 있는 이들이다, 그러나 외형상으로는 진리들에 있는 것같이 나타난다, 고로 진리의 모독이다, 그리고 “바빌론”은 선의 모독이다. “땅의 넓이로 가는” 것은 진리들을 파괴함이다. 그러므로 분명한 것은, 멀리로부터 와서 자신들을 펼치는 기병“은 타락된 이해력에 속하는 것들, 고로 거짓들을 표시한다.

그리고 군대는 심히 많았다. 이는 진리들과 선들이 결합했음을 의미한다. 이는 “군대”가 선들과 진리들이다로부터; 그리고 여기서는 진리들과 선들이 “바로의 집안의 원로들”, “이집트의 토지의 원로들”, 그리고 “요셉의 집안”, 그리고 “그의 형제들”, 그리고 “그들의 아버지의 집안”에 의해 모두 의미되고, 이 모두가 함께 있기에, “심히 큰 군대”에 의해서는 진리들과 선들이 결합되었다가 의미된 것이다.

10-11절. 그리고 그들은 요단 강 건너편에 있는 아닷의 타작 마당에 왔다, 그리고 그들은 거기서 대단하게 소리내어 울었고 슬피 울었다. 그리고 그는 그의 아버지를 위하여 칠일 동안 애곡하였다. 11 그리고 그 토지의 주민인 가나안 족이 아닷의 타작마당에서 애곡하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말했다, 이것은 이집트 사람들에게 비통한 슬픔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것의 이름을 아벨미스라임이라 불렀다, 이곳은 요단 강 건너편이다.

그리고 그들은 아닷의 타작 마당에 왔다. 이는 첫 상태를 의미한다. 이는 “타작 마당”의 의미가 진리의 선이 있는 곳이다로부터, 그 이유가 타작 마당에 낟알이 있기 때문, 그리고 “낟알(grain)”에 의해 진리로부터 있는 선이 의미된다, 또한 선으로부터의 진리도 의미된다; 그리고 “아닷”의 의미로부터 이 상태의 품질이 의미된다. 고로 “아닷의 타작 마당”에 의하여 교회의 진리와 선에 관한 상태가 의미되는데, 그 이유는 이곳이 (가나안 토지쪽에서 볼 때) 요르단 건너편(요르단강을 건너서)에서 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건너감(통과함, passage)에 의해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들의 가르쳐짐이 개시됨이 의미된다 (아래에서 살핀다). 그 이유가 “요르단(강)”은 가나안 토지의 첫 경계선에 해당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가나안의 토지”에 의해 교회가 의미되는 바, “요르단”에 의해서는 교회가 시작됨의 처음에 있는 이런저런 것들, 또는 이런저런 것들로 해서 교회로 입장함이 열려지는 것이 의미된다.
그러므로 “아닷의 타작 마당”에 의해서는 처음 상태가 의미된다; 그리고 처음 상태가 의미되기에, 슬퍼함이 타작마당 가까이에서 있어졌다, 그 이유는 이곳이 요르단 이쪽이었기 때문, 그리고 교회를 의미하는 가나안이 시야 안에서 거기 있었기 때문이다. “타작 마당”이 진리의 선과 선의 진리가 있는 곳, 고로 교회 속의 것들이 있는 곳임이 아래에서 분명해진다:
너희 시온의 아들들아 기뻐환호하라, 그리고 너의 하느님 여호와 안에서 즐거워하라; 타작 마당들 이 낟알로 가득하다, 그리고 압착틀은 새로운 포도주와 기름으로 넘쳐흐른다 (욜. 2:23, 24);
위에서 “시온의 아들들”은 선으로부터의 진리들을 표시한다; “낟알로 가득한 타작 마당”은 진리들과 선들로 풍부함을 표시한다.
호세아서에서:
즐거워하지 마라, 오 이스라엘아, 그 이유는 너희가 너희 하느님 아래로부터 매춘짓을 범했기 때문이다, 너희는 모든 낟알 마당들에서 매춘 삯을 사랑했다; 타작 마당과 포도즙틀이 그들을 먹이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새로운 포도주는 그녀를 속일 것이다 (호. 9:1, 2);
“매춘짓을 범하고 매춘 삯을 사랑하는” 것은 진리들을 왜곡하는 것과 왜곡한 것을 사랑하는 것을 표시한다; “곡식 마당들”은 왜곡된 선의 진리들을 표시한다.
“타작 마당”이 선을 의미했고, 또한 진리도 의미했기에, 낟알들이 마당으로부터 모아질 때, 그들은 성막들의 축제를 벌였는데, 모세의 책을 읽어보자:
너희가 너희의 타작 마당으로부터, 그리고 포도즙틀로부터 그러모을 때, 너희는 칠 일 동안 성막의 절기(잔치)를 너희에게 만들 것이다 (신. 16:13);
“성막 절기”는 거룩한 예배를 의미했다, 고로 선과 진리로부터의 예배이다.

요르단(강) 건너편에 있는…(이집트에서 보는 요르단강이 아니고 가나안의 쪽에서 보아서 말해진다 따라서 통곡함이 강을 건너기 전에 있었다로 생각한다 역자 주.) 이는 선과 진리에 관하여 인지(認知, 인정하고 앎)함이 개시되는 상태를 의미한다. 이는 “요르단”의 의미함이 선과 진리를 인지하기를 개시함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 인지함이 주님의 왕국과 교회로의 입장의 처음에 해당되고 마지막 나감에 해당된다. 그러므로 “요르단 건너”는 선과 진리의 인지함을 개시함이 의미된다, 그 이유는 선과 진리를 인지함이 인간이 교회에 속하는 것들을 받아들임에서 첫째로 해야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거기서 대단하게 소리내어 울었고 슬피 울었다. 이는 통탄함을 의미한다. 이는 “소리내어 운다”가 통탄함 임에서 분명해진다. 여기서 의미된 통탄함은 개시함의 통탄함이다; 그 이유가 처음의 시기에서 있는 선과 진리를 인지함이 선 안에 심어져서 교회의 선이 되기 전 통탄함이 있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또 다른 상태가 자연 평면에서 유발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거기서 기억 속의 지식들은 또 다른 질서 안에 놓여짐이 틀림 없기 때문이다; 고로 인간이 이전에 사랑해왔던 이것저것은 파괴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그는 시험들을 수행해야만 한다. 그러므로 이 통탄함이 소리내어 울 정도의 통탄함으로 표현되고 있다.

그리고 그는 그의 아버지를 위하여 칠 일 동안 애곡하였다. 이는 슬픔의 끝을 의미한다. 이는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들이 심어지기 전, 통탄함이다로부터; 그리고 “칠 일”의 의미가 시작으로부터 끝까지의 전체 시기이다로부터; 여기서는 그러므로 끝을 의미하는데, 그 이유는 이 날들이 끝났을 때, 그들은 요르단을 건넜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토지의 주민인 가나안 족이 아닷의 타작마당에서 애곡하는 것을 보았다. 이는 교회 속의 선을 수단으로 슬픔을 지각함을 의미한다. 이는 “보다”의 의미가 지각이다로부터; “주민”의 의미함이 선이다로부터; “애곡함”의 의미가 통탄함이다; 그리고 “아닷의 타작 마당”의 의미가 처음의 상태, 즉 개시함의 상태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러므로 분명한 바, “토지의 주민, 가나안족, 아닷의 타작 마당에서 크게 통곡하는 것을 보았다”에 의해 교회의 선을 수단으로 통탄함이 지각됨이 의미된다.

그리고 말했다, 이것은 이집트 사람들에게 비통한 슬픔이다. 이는 기억 속의 지식들은 그것이 교회 속의 진리 안으로 입장하기 전, 슬픔을 가진다를 의미한다. 이는 앞에서 살핀바 있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것의 이름을 아벨미스라임이라 불렀다. 이는 통탄함의 품질을 의미한다. 이는 “이름”, 그리고 “이름을 부름”의 의미가 품질이다로부터, 그리고 고대 시대 때는 어떤 것이다와 그것이 어떤 상태이다를 의미하기 위해 이름이 주어졌는 바, 여기서는 품질이 의미된다; 그러므로 품질 자체가 “아벨미스라임”에 의해 의미된다, 이 이름의 원어는 “이집트인들이 통곡한다”를 뜻한다.

12, 13절. 그리고 그의 아들들은 그가 그들에게 명령했던 대로 그에게 행했다. 13 그리고 그의 아들들은 그를 가나안의 토지로 운반했다, 그리고 그를 아브라함이 매장지를 소유하기 위해 마므레 앞, 헷족 에브론으로부터 들판과 함께 매입한 막벨라의 들판에 있는 굴에 매장했다.

그리고 그의 아들들은 그가 그들에게 명령했던 대로 그에게 행했다. 이는 유입에 따른 결과를 의미한다. 이는 “행하다”의 의미가 결과이다로부터; “명령하다”의 의미가 유입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리고 그의 아들들은 그를 가나안의 토지로 운반했다. 이는 교회가 저쪽에로 이동했음을 의미한다. “그들이 운반했다”의 의미함이 이동했다 이다로부터, 즉 교회가 이동했다 이다, 그 이유는 이것이 “가나안의 토지”에 의해 의미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를 매장했다. 이는 거기서 소생함을 의미한다. 이는 “매장함”이 소생함이다로부터 분명해진다.

막벨라의 들판의 굴에. 이는 거듭남을 시작함을 의미한다. 이는 “막벨라의 들판의 굴”의 의미함이 희미함에 있는 신앙이다로부터; 그리고 “막벨라”는 거듭남을 표시한다; 고로 거듭남의 시작이 의미된다, 그 이유가 이때 신앙이 희미함에 있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이 들판과 함께 샀다. 이는 주님께서 도로 찾은 이들을 의미한다. 이는 “사다”의 의미가 되찾다 이다로부터; 아브라함의 표현함이 주님이시다로부터; 그리고 “들판”의 의미가 교회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러므로 분명한 바, “아브라함이 들판과 더불어 샀다”에 의해 주님께서 되찾은 교회 속에 있는 이들이 의미된다는 것이다.

매장지를 소유하기 위해 헷족 에브론으로부터. 이는 신앙으로부터 진리와 선을 받고 거듭나지려고 자신이 고통하는 이들을 의미한다. 이는 “매장지”의 의미가 거듭남이다로부터; 그리고 에브론 헷족의 표현함이 선과 진리가 받아질 수 있는 이들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마므레 앞. 이는 질과 양을 의미한다. 이는 “마므레”의 의미가 결합되는 것들의 질과 양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아브라함이 마므레 앞 막벨라의 들판의 동굴을 매입한 것이 무엇인가 특별한 어떤 것이 의미되리라는 것은 이 말이 거의 똑같게 나열되어 여러 군데의 구절에서 언급되어 있다는 것으로부터 짐작할 수 있다. 아래에 모아 보았다:
마므레 앞 막벨라에 있는 에브론의 들판을 확실히 (자기 것임을) 만들었다 (창. 23:17-18).
이후, 아브라함은 그의 아내 사라를 마므레의 얼굴 위 막벨라 들판의 동굴에 매장했다. 그리고 들판과 거기 있는 동굴이 헷의 아들들로부터 매장지로 아브라함의 소유가 된 것을 확실히 해두었다 (창. 23:19, 20).
그들은 아브라함을 마므레의 얼굴 위쪽인 헷족 소알의 아들 에브론의 들판에 있는 막벨라의 동굴에 아브라함을 매장했다; 아브라함이 헷의 아들들로부터 샀던 들판이었다 (창. 25:9, 10).
나를 헷사람 에브론의 밭에 있는 굴에 매장하라, 이 굴은 가나안의 토지 마므레 앞 막벨라 밭에 있는 것이다. 아브라함이 그의 매장지를 소유하기 위해 헷사람 에브론에게 밭과 함께 샀다. 이 밭과 거기 있는 굴은 헷사람에게서 산 것이다 (창. 49:29-32)..
그리고 이 장에서
그들은 그를 막벨라의 동굴에 매장하였다, 이것은 아브라함이 매장지의 소유를 위해 들판과 더불어 헷족 에브론으로 샀다, 마므레에 있다.
위 구절들에서 읽듯 거의 비슷한 단어의 반복됨에 의해 의미되는 특별한 어떤 것은 아브라함, 이삭, 야곱을 수단으로 주님이 표현되어졌다는 것; 그들의 매장이 부활과 소생을 표현했다는 것; 막벨라 동굴에 의해 거듭남의 시작이; 헷족 에브론에 의해 신앙의 선을 받는 이들, 그리고 거듭나지기 위해 자신에게 있는 고통을 감내하는 이들을; 헷족의 아들들에 의해 영적 교회가 표현된다는 것이다. 하여 비록 여러 군데에서 반복되었을 뿐 실상 한 줄밖에 안되는 정도의 말만 가지고도 영적 교회(a spiritual Church)를 다시 설립(시작, set up, establish)하는데 필요한 요건이 다 충족되어 의미되어 있다.

14절. 그리고 요셉은 이집트로 돌아 갔다, 그와 그의 형제들, 그리고 그와 함께 그의 아버지를 매장하러 올라 갔던 모든 이들이 그가 그의 아버지를 매장한 뒤 돌아 갔다.

그리고 요셉은 이집트로 돌아 갔다, 그와 그의 형제들. 이는 기억 속의 지식들에서 내적 부분의 천적인 것과 신앙의 진리가 살아가는 것(삶)을 의미한다. 이는 “되돌아 오다”의 의미가 사는 것이다로부터; 요셉의 표현함이 내적 부분의 천적 평면이다로부터; 여기서 “그의 형제들”인 이스라엘의 아들들의 표현함이 복합체에 있는 신앙의 진리들이다로부터; 그리고 “이집트”의 의미가 기억 속의 지식들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기억 속의 지식들 안에서 내적 부분의 천적인 것과 신앙의 진리들이 살아 감이 창세기 몇 장에 걸쳐 있는 셈이기는 하다; 즉 요셉이 이집트의 토지의 통치자와 바로의 집안의 주인으로 만들어짐, 그리고 야곱의 아들들이 요셉에게 오는 여행에서, 그리고 이집트로 이들과 더불어 아버지까지 오게 됨에서 취급되어져 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의 아버지를 매장하러 그와 함께 올라 갔던 모든 이들. 이는 거듭남에 도움이 되는 모든 것들을 의미한다. 이는 “매장하다”의 의미가 거듭남과 부활함이다로부터; 그리고 소생함과 다시 교회가 설립됨이다로부터; 이러한 것에 도움이 되는 것들이 “그와 함께 올라갔던 모든 이들”에 의해 의미된다. 그 이유가 이 모든 이들은 요셉의 전체 집안, 또한 그의 아버지의 집안, 마찬가지로 바로의 집안의 원로들, 그리고 이집트의 토지의 원로들이기 때문; 하여 “요셉의 집안”에 의해서는 영적 평면의 천적인 것들이 의미되고, “그의 아버지의 집안”에 의해서는 영적 선의 모든 것들이 의미되고; “바로의 집안의 원로들”은 선과 일치하는 것들이 의미되고; “이집트의 토지의 원로들”에 의해서는 진리와 일치하는 것들이 의미된다. 그러므로 분명한 바, “그와 함께 매장하려 올라갔던 모든 이들”은 거듭남에 도움이 되는 모든 것들이 의미된다. “매장하는” 것이 거듭남과 부활함을 의미하고, 또한 소생함과 교회가 다시 설립됨(시작함)도 의미한다고 말하는 이유는 이 의미들이 결국은 같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거듭남이 부활함인 이유는 인간이 거듭나질 때, 그는 죽은 자로부터 살아 있게 되어 다시 일어나기 때문이다. 같은 방식에서 교회가 소생되어 인간 안에서 다시 설립될 때도 그러하다; 그 이유가 이것도 거듭남에 의해, 고로 죽음으로부터 생명으로인 부활함에 의해 결과되기 때문이다.

그가 그의 아버지를 매장한 후… 이는 교회를 소생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매장되어짐”의 의미가 교회가 소생함이다로부터; 이스라엘의 표현함이 영적 (평면의, 천국의) 교회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15-21절. 요셉의 형제들은 그의 아버지가 죽었다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그들은 말했다, 요셉이 혹시 우리들을 미워하여 우리가 그에게 행한 모든 악을 다 갚지나 아니할까 하고 16 요셉에게 말을 전하여 이르되 당신의 아버지가 돌아 가시기 전에 명령하여 이르시기를 17 너희는 이같이 요셉에게 이르라 네 형들이 네게 악으로 갚았을 지라도 이제 바라건대 그들의 잘못과 죄를 용서하라 하셨나니 당신 아버지의 하느님의 종들인 우리 죄를 이제 용서하소서 하매 요셉이 그들이 그에게 하는 말을 들을 때에 울었더라. 18 그의 형들이 또 친히 와서 요셉의 앞에 엎드려 이르되 우리는 당신의 종들이니이다. 19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하느님을 대신하리이까? 20 당신들은 나에 대하여 악을 생각했으나, 하느님은 그것을 선을 위하여 생각하셨다, 하여 오늘과 같이 하시어, 많은 사람들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셨다. 21 당신들은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당신들을 떠받쳐주리다, 그리고 당신들의 아기들도 하고 그들을 위로하였더라.

요셉의 형제들은 그의 아버지가 죽었다는 것을 보았다. 이는 선과 진리로부터 멀리해지는 것, 그리고 교회가 소생되어졌음을 지각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보다”의 의미가 이해하는 것과 지각하는 것이다로부터; 여기서 “형제들”인 야곱의 아들들의 표현함이 진리와 선으로부터 멀리해지는 것이다로부터, 그 이유가 과거 그들이 요셉을 죽이기를 바랬었고, 그를 팔리게 만들었을 때, 그들은 진리와 선으로부터 멀리해지려는 것을 표현했기 때문이다. 이런 상태가 이어지는 구절에서 “혹 요셉이 우리를 미워하기라도 한다면, 그리고 우리가 그에게 앙갚음했던 모든 악을 우리에게 되갚는다면”의 말로부터도 분명해진다. “죽어 있다”의 의미가 소생되어지는 것이다로부터, 즉 교회가 소생되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아버지”인 이스라엘의 표현함이 교회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러므로 분명한 바, “요셉의 형제들은 자기들의 아버지가 죽었다는 것을 보았다”에 의해 교회가 소생되어졌던 진리와 선으로부터 멀리해졌던 것을 수단으로 지각함이 의미되고 있다.

그리고 그들은 말했다, 혹 요셉이 우리를 미워하기라도 한다면. 이는 그들은 내적 부분을 거절했다를 의미한다. 이는 “미워한다(증오함을 갖고 있다)”의 의미가 반대되는 것, 그리고 거절하는 것이다로부터; 그리고 요셉의 표현함이 내적 부분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사실상 요셉이 그들을 거절한 것이 아니라 그들이 요셉을 거절했다. 즉 외적 부분(“형제들”)의 탓을 내적 부분(“요셉”)의 탓으로 돌리고 있는데, 이는 외관에 따라 말하면 그런 식이 된다. 즉 미워함 복수함 같은 것들은 실상 인간에게 속한 특성일 뿐인데, 말씀 안에서 여호와께서 복수하시는 듯 쓰여 있는 경우와 같다.

우리가 그에게 앙갚음했던 모든 악을 우리에게 되갚는다. 이는 응분의 상벌에 따라 임박해진 처벌을 의미한다. 이는 “우리가 그에게 징벌한 모든 악이 되돌려진다”의 의미가 응분에 따른 처벌이다로부터; 그 이유가 누군가에게 행하여진 악을 되돌림은 그 악을 저질른 것으로부터의 처벌이기 때문이다. 처벌함, 악을 되돌림이 영계에서는 어떻게 있는지를 말해야만 할 것 같다, 그 이유는 이로부터 본문의 내적 의미가 분명해지기 때문이다. 만일 악령들이 영들의 세계에서 어떤 악을 행하려 할 때, 그들이 세상에서 저질렀던 악을 넘어서 저지르려고 하면, 처벌자들이 초과되어 행해지는 악에 대하여는 응징을 한다. 처벌 당한 자는 어떻게 처벌자들이 자기가 초과된 악을 했는지를 알아냈는지를 말할 수 없다. 또한 그에게 알려주는 것은, 이것이 다른 세계에서의 질서이다는 것, 즉 악 자체는 그것과 동등한 처벌을 꼭함께 동반한다는 사실이다. 하여 행위로부터의 악은 처벌로부터의 악과 완전히 결합되어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그것의 벌은 악 자체 안에 있다는 것이다. 고로 징벌자가 즉시 있는 셈이다.
위의 경우는 악령들이 영들의 세계에서 악을 행할 때이고, 그들의 세계인 지옥에서는 그들이 이 세상에서 품어왔던 악들로 행동된 악에 따라 서로가 서로를 응징한다; 그 이유가 그들이 자기들과 더불어 악을 가져왔기 때문이다. 이상 살핀 바로부터, 처벌이 응분의 상벌에 따라 임박하다는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가 분명해졌을 것이다; 즉 “우리가 그에게 징벌한 모든 악이 되돌아 온다”에 의해 의미된 것이다. 그러나 선한 영들의 경우는 다르다, 그들이 악을 말하거나 행한다면, 그들은 처벌되지 않는다, 그러나 용서된다, 변명을 인정해준다. 그 이유는 그들의 목적이 악을 말하거나 행하는데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은 지옥에 의해 자기들 안에서 악을 흥분되었기 때문임을 알고 있다, 하여 그들은 자기들의 과오로서 인정되기까지로 이어지지 않는다; 그리고 그들에게서 목격되는 것은 이런 악들에 저항하려 애쓴다는 것, 또한 벌어진 악들에 슬퍼한다.

그들은 요셉에게 전하여 말하기를. 이는 내적 부분으로부터의 유입과 그 결과 지각함을 의미한다. 이는 “전하다(command, 명하다)”의 의미가 유입이다로부터; 요셉의 표현함이 내적 부분이다로부터; 그리고 “말하다(say)”의 의미가 지각하다 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러므로 “그들이 요셉에게 명하여, 말하기를”에 의해 내적 부분으로부터의 유입이 의미된다, 그 결과 지각함이 결과된다. 요셉에게 대한 그들의 명령함이 내적 부분으로부터 외적 부분으로의 유입인 이유는 유입은 언제나 내적 부분에서 외적 부분으로 만 있기 때문이다. 이 반대로의 흐름은 없다.

당신의 아버지는 그가 죽기 전, 명령하시어 말하기를. 이는 그것은 교회의 명령을 수단으로 하여 있다를 의미한다. 이는 여기서 “아버지”인 이스라엘의 표현함이 교회이다로부터; “명령함”의 의미가 유입이다로부터, 여기서의 명령하다는 교회로부터 오는 명령, 고로 신성으로부터 이다; 그리고 “그가 죽기 전”의 의미함이 교회가 아직 존재하는 동안이다로부터 알려진다. 이것이 교회의 명령을 수단으로 이다는 것은 모든 이는 그의 형제, 또는 이웃을 용서해야 한다는 주님의 아래 말씀으로부터 분명해진다;
베드로가 예수께 말했다, 저에게 죄를 진 형제를 몇 번 용서하면 됩니까? 일곱 번 까지 입니까? 예수께서 그에게 말하신다, 나는 네게 일곱 번까지 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일흔 번씩 일곱 번이다 (마. 18:21, 22).
유태 나라에 각인된 것은, 그들은 결코 용서하지 않는 것, 자신에게 상해를 입힌 자는 적으로서 간주한다는 것, 그러므로 그들로 누군가를 미워하는 것이 당연하듯 허용된 셈이었다, 하여 급기야는 그를 죽여도 되는 쪽을 선택하는 것이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들이 이렇게 된 이유는 그들에게는 내적 측면이라는 것이 하나도 없이 외적인 것 뿐이었기 때문이다, 고로 그들에게는 내적 교회의 명령은 없었다. 이것이 왜 요셉의 형제들이 요셉이 자기들을 미워하고 자기들에게 악을 행할까 매우 두려워했던 이유이다. (이 민족들이 완전 외적이었기 때문에 그들은 보고 들은대로 적는 것이 어느 민족 보다 꼼꼼해서 성경을 만드는 인간 도구로는 최적이었다 역자주.)

그러므로 너희는 요셉에게 말하라. 이는 행해져야 한다는 것을 내적 부분으로부터 지각함을 의미한다. 이는 “말하다(say)”가 역사적 말씀에서 지각하다이다로부터; 그리고 요셉의 표현함이 내적 부분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행해져야 하는 것이 “고로 너희가 말하라”에 의해 의미되어 있다.

바라건대 네 형제들의 잘못, 그리고 그들의 죄를 부디 용서해라. 이는 청원과 회개를 의미한다. 이는 “부디 용서하라”가 청원함을 의미한다로부터; 그리고 이것은 회개함 또한 의미한다는 것은 그들이 잘못하고 죄지었다는 것을 고백함으로부터, 그리고 이어지는 것, 즉 그들은 자신들을 요셉에게 종들로서 바치는 모습에서 분명해진다. “잘못함”과 “죄지음”이라는 중복된 듯한 언급이 있는 이유는 말씀의 세부적 측면에는 선과 진리의 결혼이 있기 때문이다; 하여 “잘못(transgression)”은 진리에 대한 악행을, 고로 보다 덜 악한 것을; “죄(sin)”는 선에 대한 악을, 고로 보다 더 큰 악행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이것 모두가 언급되는 것인데, 다른 구절들에서 이를 읽어보자:
야곱은 라반에게 말했다, 나의 잘못이 무엇입니까? 나의 죄가 무엇입니까? 당신은 내 뒤를 따라 추격해왔다 (창. 31:36).
이사야서에서:
나는 너의 잘못들을 구름 같이 지워없앨 것이다, 그리고 너의 죄들을 구름 같이 (지울 것이다) (이. 44:22)
에스겔서에서:
그가 잘못한 그의 잘못함에서, 그가 죄지은 그의 죄 안에서, 이것들 안에서 그는 죽는다
(겔. 18:24).
다시:
당신의 잘못들이 밝혀지는 한편, 모든 너의 일들 안에서 너의 죄들이 나타날는지 모른다
(겔. 21:24).
다윗서에서:
잘못되어짐이 용서되는 자는 복있다, 죄지은 것이 덮어지는 자는 복있다 (시. 32:1).

그 이유는 그들이 너에게 악으로 갚았기 때문이다. 이는 그들이 흘러드는 선과 진리로부터 돌아서 버렸기 때문이다를 의미한다. 이는 “악”의 의미가 돌아서 버림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리고 선과 진리로부터 라고 말한 이유는 “그들이 요셉에게 갚았다”고 말해졌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요셉”은 천적 부분(평면), 그리고 내적 선이고, 이를 통하여 주님으로부터 선과 진리가 흘러들기 때문이다. 내적 부분을 통하여 있는 유입에 주목하면 이렇다: 주님께서는 선과 진리를 가지시고 인간의 내적 부분을 통하여 계속적으로 흘러드신다, 하여 선은 생명과 그것의 열을 주는데 이것은 사랑이고, 진리는 계발함과 그것의 빛을 주는데, 이것은 신앙이다. 그러나 이 유입함이 더 전진할(advance) 때, 즉 외면들 쪽으로 발전할 때, 거기서는 거절함, 타락시킴, 질식시키는 악들과 더불어 있게 된다; 이때 거절, 타락, 질식시킴의 정도에 따라서 내면들은 그 정도만큼 닫혀진다, 그리고 결국 남는 것은 여기저기 흩으러져 조금씩 남고 유입의 통로 역시 갈라진 틈새 수준으로만 열려 있다; 이로부터 거기에 인간에게 생각하는 것과 뜻하는 능력이 남아 있으나 진리와 선에 대하여는 맞서 있다. 어쨌든 이 닫힘은 악의 정도에 따라서 외면의 것들을 향하여 더욱 더 꿰뚫는다 (스며든다, 통과해간다, penetrate), 하여 이것은 감각적 수준 쪽으로 내려간다, 이로부터 이때 생각함이 온다. 그다음 쾌락(pleasure)들과 열망(craving)들이 모든 것을 빼앗아 간다. 이런 상태에 지옥들이 있다; 그 이유가 이익과 명예와 명성을 위하여 생각했었던 선하고 고귀한(올바른) 것에 대한 것은 다른 삶에 오는 악한 자로부터서는 그것 모두를 떼어내버리기 때문이다. 이때 이 악한 자는 감각적인 것 안에 있는다.

그리고 지금 바라건대 당신의 아버지의 하느님의 종들의 잘못을 용서 하소서. 이는 회개, 그리고 교회 속에 신성한 것들이 있음을 인정함을 의미한다. 이는 “부디 잘못을 용서하소서”의 의미가 잘못을 저질렀음을 고백함, 그리고 회개함이다로부터; 그리고 “당신의 아버지의 하느님의 종들”의 의미가 교회 속의 신성한 것들을 인정함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 이유가 자신들을 “그의 아버지의 하느님의 종들”이라 일컬음으로 그들은 자기들이 교회의 하느님을 섬길 것임을, 결과적으로 교회 안에 신성한 것들이 있음을 인정함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이스라엘”, 여기서 “아버지”에 의해 교회가 의미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요셉은 그들이 그에게 말했을 때 울었다. 이는 사랑으로부터 수용함을 의미한다. 이는 “울다”의 의미가 슬픔과 사랑 모두를 의미한다로부터; 요셉의 표현함이 내적 부분의 천적 측면이다로부터; 그리고 “말하다(speak)”의 의미가 유입이다로부터, 이로부터 수용함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 이유가 유입이 “요셉”인 내적 부분의 천적 측면으로부터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수용함은 요셉의 “형제들”인 자연 평면에 있는 진리들을 수단으로 있다. 그러므로 “그들이 요셉에게 말했을 때, 그는 울었다”에 의해 사랑으로부터 수용함이 의미됨이 분명하다.

그리고 그의 형제들은 와서 그 앞에 엎드렸다. 이는 내적 부분 아래 자연 평면에 있는 것들이 복종함을 의미한다. 이는 여기서 “형제들”인 이스라엘의 아들들의 표현함이 자연 평면에 있는 영적 진리들이다로부터; “요셉 앞에 엎드림”의 의미가 복종함이다로부터; 그리고 요셉의 표현함이 내적 부분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로부터 분명해지는 바, 그의 “형제들이 가서 요셉 앞에 엎드렸다”의 의미가 내적 부분 아래 자연 평면에 있는 것들이 복종함이다가 분명해진다. 이 장의 주제는 영적 교회(a spiritual Church)를 다시 설립하심이다, 그리고 이 구절에서는 자연 부분(평면)의 것들이 내적 부분(평면)에 복종함이다; 따라서 분명해지는 것은, 자연 평면의 것, 또는 외적 인간에 속하는 것들이 영적 평면, 또는 내적 인간에 (완전) 복종함이 있지 않으면, 어느 누구에게도 (주님의) 영적 교회(a spiritual Church)의 설립은 가능할 수 없다는 것이다. 신앙에 속한 진리만이 인간을 선점하고, 선행에 속하는 선이 그 하위 등차에서 있는 한, 그 만큼에서 자연적, 외적 인간은 영적 또는 내적 인간에게 복종하지 않고 있다는 말이다. 그러나 선이 지배력을 확보하자마자, 자연적, 외적 인간이 자신을 복종하게 내놓아지고, 이때 인간은 영적 교회가 된다. 이는 인간은 진리가 가르치는 것을 애착으로부터 행한다는 것, 그리고 그의 자연적 인간(평면)이 애착과 반대되는 것을 바란다 할지라도 그것과는 상관 없이 자기가 애착하려는 것과 반대되는 쪽으로는 절대 행동하지 않는다는 사실로부터 알는지 모른다. 애착 자체, 애착함의 요구에 따라서 있어지는 추론력이 지배력을 가진다, 그리고 이것은 자연 평면에 있는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의 기쁨들을 조절하여 그것에 너무 흠뻑 취하지 않게 경감되게 하거나, 억제하거나, 제압하거나 심지어 완전히 눌러버리기까지 (정복) 할 수 있다(subdue). 또한 자연 평면에 있는 기억 속의 지식들을 채우고 있는 오류들의 경우도 마찬가지 이다. 이것이 거듭되다 보면, 차츰 자연 평면의 많은 사항들을 점유하여 마지막에는 완전 정복하는 것, 즉 자연 평면 전체가 복종하는 경지에까지 다다른다. 하여 이 복종함이 인간의 쾌락들(pleasure, 기쁨들) 사이에 있어진다. (즉 사사건건에서 주님의 말씀에 복종할 때 마다, 즉 선행의 선과 신앙의 진리에 따른 생활이 기쁨이 되어 있다. 역자주) ; 이후 자연 평면은 쉼에 있고, 일치함에 놓여 있는다. 그리고 일치함에 놓일 때, 내적 부분의 유쾌함에 동참한다. 이상 살핀 바로부터, 자연 평면에 있는 것들이 내적 부분에 복종함이 뜻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는지 모른다. 이것이 “그의 형제들이 그 앞에 엎드려 절하고, 말하기를, 우리는 당신의 종들입니다”에 의해 의미되고 있다.

그리고 그들은 말했다, 보라, 우리는 당신의 종들입니다. 이는 그들은 자신들 마음대로 처신하지 않을 것임을 의미한다. 이는 “종들”의 의미가 자신의 자유함 없이 있는다 이다로부터, 고로 자신의 자유 의사대로 하지 않는다 이다.

요셉이 그들에게 말했다, 두려워 마시오. 이는 내적 부분을 수단으로 재-창조됨을 의미한다. 이는 요셉의 표현함이 내적 부분이다로부터; 그리고 “두려워 말라”의 의미가 그들은 근심에 있지 않아도 된다 이다로부터; 그리고 이어지는 말로부터, 즉 그들을 위로하여 걱정을 떨치게 하고 있다. 그러므로 “두려워 말라”에 의해서는 재 창조가 의미된다.

내가 하느님을 대신하리이까? 하느님이 설비하실 것임을 의미한다. 이는 “내가 하느님을 대신할까?”가 하느님이 있으심이 아니고, 하느님이 설비하신다는 것이 의미되는 질문 형식의 말투이다.

그리고 당신들은 나에게 악을 생각했다. 이는 멀어진 것들은 악밖에 더 의도하는 것이 없다를 의미한다. 이는 여기서 “당신들”인 야곱의 아들들의 의미함이 진리와 선으로부터 멀어진 것들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 이유가 그들이 요셉에 대해 악을 생각했을 때, 그때 그들은 멀리되어진 것들을 표현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 위에 악을 생각함”의 의미가 악을 의도하는 것이다로부터; 그 이유가 누군가에 맞서 생각함은 악을 의도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멀어진 것들은 선을 의도할 수 없기에 악밖에 더 의도되는 것은 없다라고 말해진 것이다. 이 경우를 조금 더 주목하면 이렇다: 선과 진리로부터 멀어진 이들은 악밖에 더 의도하는 것이 없다, 그 이유는 그가 선을 의도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가 의도한 것들은 실상 그를 통치하는 셈이다, 그러므로 그것들은 그의 모든 생각들 안에, 그의 지극히 작은 것(행동) 안에도 있다; 그 이유가 의도나 목적이 인간의 생명 자체이기 때문, 목적은 그의 사랑이기 때문, 그리고 그의 사랑은 그의 생명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인간은 그가 가진 목적과 똑같고, 천국의 빛에서 있는 그의 형상이다; 그리고 일반적(전체적) 측면에서의 그의 형상은 그의 의지의 사소한 것에서도 똑같다. 고로 그의 목적이 이러이러하면, 전체 인간 또는 그러그러하다.
이로부터 분명한 바, 악한 목적이 있는 자는 선한 목적들이 있는 이들 사이에 있는 것이 가능할 수가 없다; 고로 지옥에 있는 자가 천국에 있는 것이 가능할 수가 없다; 그 이유가 목적들이 충돌하기 때문, 그리고 (거기서는) 선한 목적들이 언제나 대승한다, 그 이유는 선한 목적들은 주님으로부터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분명한 바, 누구이든 자비만으로부터 천국으로 입장 승인이 있는다고 믿는 것이 올바르지 않다는 것이다. 즉 악한 목적을 자신 안에 지닌 자가 천국 안으로 들어오면, 그는 마치 육체의 죽음의 고통을 겪는 것 같이 그의 생명은 노동을 한다; 게다가 그는 심한 고통을 느끼고야 만다; 이외에도 그는 천국의 빛에서는 악마로서 나타난다. 그러므로 진리와 선에서 멀어진 이들이 하는 짓이라고는 악밖에 없다고 말한 것이다. 그리고 이 악은 당사자의 생각과 의지의 매우 작은 사항 안에도 있다는 것은 이런 영들이 뿜어내는 기운이 멀리로부터 방산됨으로부터 분명해진다, 그 이유가 이것 때문에 그들의 품질이 지각되기 때문이다. 이 기운은 생명의 모든 세부 사항으로부터 있는 영적 증기(evaporation)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그것을 선을 위하여 생각하셨다. 이는 신성은 그것을 선으로 돌려 놓으신다를 의미한다. “선을 위해 생각함”의 의미가 의도하는 것이다; 그러나 하느님에 관련해 말해질 경우, 이것은 선으로 돌려 놓으신다 이다; 그 이유가 하느님이 의도하시는 것을 그분은 행하시기 때문이다.

오늘 이렇게 있는 것 같이 하시려고. 이는 이것은 영원으로부터 질서에 의거 있다를 의미한다. 이는 “행하심”의 의미가 신성에 관련해 말해질 경우, 질서 이다로부터; 그 이유가 신성이 행하시는 것은 무엇이든 질서 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오늘과 같이 있다”의 의미가 영원으로부터 있다를 의미한다.

많은 사람들을 살아 있게 만드시려고. 이는 이로부터의 생명이 선으로부터의 진리들 안에 있는 이들에게 있다를 의미한다. 이는 “살아있게 만드심”의 의미가 영적 생명이다로부터; 그리고 “사람들”의 의미가 진리이다로부터, 여기서는 선으로부터의 진리이다, 그 이유는 “많은 백성(great people)” 이라 말해졌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선으로부터의 진리는 진리로부터 선이 있는 것에 비교해서 크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선으로부터의 진리는 사실상 그 자체가 선이기 때문, 그 이유는 선으로부터 만들어내졌기 때문이다; 고로 그것 형체에서도 선이다.
여기서 요셉이 그의 형제들에게 한 말인 즉: “당신들은 나에 대하여 악한 것을 생각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선을 위하여 그것을 생각하셨다, 하여 오늘과 같이 하시어, 많은 사람들로 살아있게 만드시었다” 인데, 이 말 안에는 천국의 비밀을 포함하고 있다. 이러하다: 다른 삶에서 주님께서는 지옥의 영들이 선한 자를 시험 안으로 유인하는 것을 허용하신다, 결과적으로 악들과 거짓들을 쏟는 것을 허용하신다는 말이다. 게다가 악령들은 전력을 다해 쏟아 붓는다; 이러는 이유는 이러할 때, 그들은 기쁨을 가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님 자신 시험에 있는 이들과 더불어 직접적으로, 간접적으로는 천사들을 수단으로 현존하신다, 그리고 지옥의 악령의 거짓들이 끽소리 못하게 논박하시고, 그것들의 악들이 사라지게 하신다, 고로 새로움, 희망, 승리감을 주시딘다. 고로 선의 진리들 안에 있는 이들과 더불어, 신앙의 진리들과 선행의 선들은 더욱 내향적으로 심어져서 더욱 강하게 확증되어진다. 이리하여 영적 생명이 수여된다.
이런 모두로부터 분명해지는 바, 이 구절의 내적 의미에서 의미된 것인 즉, 진리와 선으로부터 멀어진 이들이 시험들을 유발한다는 것, 악밖에 더 행해지는 것은 없다는 것, 그러나 신성은 그 악을 선으로 돌려 놓으신다는 것, 그리고 이것은 영원으로부터 있는 질서에 따라서 이다는 것, 이로부터 선으로부터의 진리 안에 있는 이들에게 생명이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인식해야 하는 것은, 선한 자를 곤경에 몰아 넣는 것은 허용된 지옥의 영들이 하는 짓인 악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들은 온힘을 쏟아 누구이든 천국으로부터 지옥으로 끌어내기기를 바라고 있다, 그 이유는 그들의 생명의 즐거움은 누군가의 혼을 파괴하는 것에서 얻어내기 때문이다; 고로 영원으로까지이다. 그러나 선이 그 시험으로부터 나오도록 해주시는 것 외에는 누구도 그들로 해서 지옥으로 빠지는 일은 없다. 즉 선한 자가 지닌 진리와 선이 이 시험들로 해서 더욱 튼튼해지고 모양새를 확실히 가져오는 것만 있기 때문이다. 주님으로부터 진행하는 목적이 영계를 보편적으로 통치한다. 하여 제 아무리 작은 것이라 할지라도, 선이 그것으로부터 나오게 하심 뿐이다. 그러므로 주님의 왕국은 목적(end)들과 쓸모 있어짐(use)의 왕국이라 불리운다.

그리고 이제 두려워 마시오. 이는 그들은 걱정하지 말라를 의미한다.

내가 당신들을 떠받쳐 주리다, 그리고 당신들의 아기들도 (기르리이다). 이는 그들은 이해력에 있는 진리와 의지력에 있는 선을 수단으로하여 신성으로부터 내적 부분을 통하여 살 것임을 의미한다. 이는 “떠받치다(sustain)”의 의미가 선과 진리의 유입이다로부터, 고로 진리와 선을 통하여 생명이 있다; 그리고 요셉의 표현함이 내적 부분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러나 꼼꼼히 말하면 생명은 내적 부분으로부터가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내적 부분을 통하여서 있다, 하여 “신성으로부터 내적 부분을 통하여”라고 말한 것이다. “당신들과 당신들의 아기들”에 의해 자연 평면에 잇는 영적 진리들, 그리고 그것들 안에 있는 순진이 의미되고, 이것들은 진리와 선을 수단으로 신성으로부터 내적 부분을 통하여 살아가진다. “떠받침”이 진리와 선을 수단으로 살아감을 표시하는 이유는 영적 식품이 지식, 총명, 지혜, 고로 진리와 선이기 때문이다. 진리가 이해력에 있고, 선은 의지력에 있다라고 말한 이유는 모든 진리는 이해력에 속하기 때문, 그리고 선은 의지력에 속하기 때문이다. 즉 이해력은 진리의 저장소이고, 의지력은 선의 저장소이다.

그리고 그는 그들을 위로했다. 이는 희망을 의미한다. 이는 “위로함”의 의미가 희망을 가지고 마음의 불안을 달래는 것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리고 그들의 심정에 말했다. 이는 신뢰를 의미한다. 이는 “심정에 말하다”의 의미가 신뢰를 나누어주다, 즉 악이 닥치지 않는다는 신뢰를 나누어주는 것이다; 그 이유가 “말하다(speak)”가 유입을 표시하기 때문, 그리고 “심정”은 의지를 표시한다; 고로 “심정에 이야기 하는 것”은 의지 안으로 유입됨을 표시한다, 그 결과는 신뢰함이다. 이런 모두로부터 다시 분명해지는 것은, 말씀의 세부 사항 안에 선과 진리의 결혼이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의 경우, “위로함”은 이해력에 속하고, “심정에 말함”은 의지에 속하기 때문; 그러므로 그가 “그들을 위로함”이 희망을 의미하는 이유가, 이것이 선을 수단으로 의지로부터 있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진짜 신뢰함은 선행의 선 안에 있는 자들에게서만 가능하고, 진짜 희망은 신앙의 진리들에 있는 이들에게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22, 23절. 요셉은 그와 그의 아버지의 집안과 함께 이집트에서 거주했다. 그리고 요셉은 일백 십 년을 살았다. 23 그리고 요셉은 에브라임의 아들들의 삼 대를 보았다. 므낫세의 아들 마길의 아들들도 그의 무릎에서 태어났다.

그리고 요셉은 이집트에서 거주했다. 이는 내적 부분으로부터 교회의 기억 속의 지식들이 살아간다(생명이 있다)를 의미한다. 이는 거주하다의 의미가 살아간다 이다로부터; 요셉의 표현함이 내적 부분이다로부터; 그리고 “이집트”의 의미함이 교회의 기억 속의 지식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 장의 앞 구절들에서 취급된 주제는 다시 설립되어지는 영적 교회이다; 그리고 외적 또는 자연적 인간이 내적 또는 영적 인간에 완전히 복종한 이후-즉 자신들이 요셉의 종이라고 말하며 엎드린 요셉의 형제들의 모습에서 의미된 것들 이후, 지금 취급되는 주제는 다시 설립된 영적 교회이다, 이것이 바로 이 구절에서, 요셉은 이집트에서 거주함에 의해, 그리고 에브라임으로부터 출생한 아들들, 그리고 므낫세의 아들 마길에 의해 묘사되어 있다. 영적 교회인 인 이들이 교회의 기억 속의 지식들 안에서 내적 부분으로 살아감이다. 그 이유가 이 교회인과 더불은 기억 속의 지식들은 종속됨이 만들어져 있다, 그리고 이런 종속됨의 질서를 위하여 그들은 선과 진리의 유입을 받아들인다, 하여 이 선과 진리는 내적 부분으로부터의 유입의 저장소들이다. 그러나 영적 교회이지 않은 이의 경우는 아주 다르다; 이들과 더불은 기억 속의 지식들은 진리와 선의 확증물들을 주변으로 거절해버리는 경향이 너무 강하다, 고로 천국의 빛으로부터 멀리 옮겨져 있다; 하여 그것들의 빈 자리를 거짓과 악을 저장하는데 사용한다.

그와 그의 아버지의 집안. 이는 내적 부분으로부터, 그리고 그것의 선을 의미한다.
이는 여기서 “그”인 요셉의 표현함이 내적 부분이다로부터; 그리고 “집”의 의미함이 선이다로부터 알려진다.

그리고 요셉은 일백 십 년을 살았다. 이는 상태와 질을 의미한다. 이는 말씀에서 숫자들의 의미함이 실제의 어떤 것들(real things)이다로부터; 그리고 뾰족하게 말하면, 실제의 어떤 것의 상태와 품질이다로부터알게 된다. “110”의 경우도 마찬가지인데, 이 숫자는 내적 부분으로부터 기억 속의 지식들이 살아감의 상태와 품질을 포함한다.

그리고 요셉은 에브라임의 아들들의 삼 대를 보았다. 이는 지력 측면에 관련하여 교회가 다시 설립됨, 그리고 그것의 파생물을 의미한다. 이는 에브라임의 표현함이 교회의 지력 측면이다로부터; 그리고 “삼 대의 아들들”의 의미함이 파생물들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 이유가 부모로부터의 아들, 아들의 아들인 바, 그들은 부모에 의해 표현되는 것의 파생물을 표현하기 때문이다. 내적 부분으로부터, 즉 주님으로부터 내적 부분을 통하여 교회를 다시 세우심(설립하심)이 “요셉이 보았다”에 의해 의미되어지고 있다.

므낫세의 아들 마길의 아들들 역시. 이는 의지력 측면에 관련하여 교회가 다시 설립됨, 그리고 그것의 파생물을 의미한다. 이는 므낫세의 표현함이 교회의 의지력이다로부터; 그리고 그의 “아들들”과 아들들의 아들들의 의미로부터, 여기서는 “마길의 아들들”인데, 파생물들이다로부터; 즉 교회의 의지력 측면의 파생물들인데, 이는 마길의 아들들에 의해 의미된다, 즉 진리들과 결합한 선들, 고로 선으로부터의 진리들이다, 그 이유가 선으로부터 파생되어져 왔었던 진리들이 선의 형체들이기 때문이다. “마길의 아들들”이 진리들과 결합한 선들을 표시함이 그들이 “요셉의 무릎에서 태어났다”에 의해 의미되고 있는데, 뒤이어 있다; 그리고 그들이 선으로부터의 진리들을 표시함이 사사기서의 책에서 이렇게 의미되어 있다: “마길로부터 입법자들이 내려왔다” (5:14); “입법자들”은 선으로부터의 진리들을 표시한다.

요셉의 무릎에서 태어났다. 이는 그들은 내적 부분으로부터 진리의 선과 합쳐진 선으로부터 있었다를 의미한다. 이는 “무릎에서 낳다”의 의미함이 선과 진리의 결합이다로부터; 그리고 요셉의 표현함이 내적 부분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요셉의 무릎에서 태어난 마길의 아들들은 요셉이 그들을 그의 자기 자신으로 인정했음을 포함하고 있다. 그 이유가 이렇게 말해질 경우, 이것은 그들이 그의 자기 자신으로 채택했다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를 라헬의 하녀 빌하로부터 출생한 아들로부터 알는지 모른다. 이 아들을 두고 라헬이 말한다:
보라 내 하녀 빌하가 있다, 그녀에게로 가라, 그리고 그녀가 내 무릎에 낳을 것이다, 그리고 나 역시 그녀로 말미암아 건축할 것이다 (창. 30:3).
이 아들들이 요셉에 의해 자기 자신으로 인정된 이유는 므낫세에 의해 교회의 의지력 측면, 즉 교회의 선이 표현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요셉에 의해 표현되는 내적 부분은 선과 더불어서만 흘러들 뿐, 선을 통하지 않는 진리와 더불어서는 흘러들지 않는다; 이런 이유로 말씀은 그들이 “요셉의 무릎에서 태어난” 자라고 말한 것이다.

24-26절. 그리고 요셉은 그의 형제들에게 말했다, 나는 죽는다. 그리고 방문하시는 하느님이 너희를 방문할 것이다, 그리고 너희로 이 토지로부터 그분께서 아브라함에게, 이삭에게, 그리고 야곱에게 맹세하셨던 토지에로 올라 가게 만드실 것이다. 25 그리고 요셉은 이스라엘의 아들들에게 맹세하라고 하고, 말하기를, 방문하시는 하느님이 너희를 방문하실 것이다, 그리고 너희는 내 뼈를 여기로부터 올라 가게 만들어라. 26 그리고 요셉은 죽었고, 일백 십년의 아들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그를 방부 처리했다, 그리고 그는 이집트에 있는 궤 안에 놓여졌다.

그리고 요셉은 그의 형제들에게 말했다, 나는 죽는다. 이는 교회 속의 내적 부분이 중지된다고 예언함이다. 이는 요셉의 표현함이 내적 부분이다로부터, 여기서는 교회의 내적 부분이다, 그 이유는 이 장의 앞 부분에서 취급된 주제는 교회를 내적 부분을 수단으로, 즉 주님에 의해 내적 부분을 통하여 다시 설립함이었었다; 그리고 “죽는다”의 의미가 이와 같이(영적 교회)로 있는 것이 중지되는 것이다. 이 때에 관한 예언이 “요셉이 그의 형제들에게 말했다”에 의해 의미되고 있다; 지금 이어지는 것에서, 마지막에까지 조차에서 취급되는 주제는 교회의 더 나아간 상태이다. 그러므로 “요셉이 그의 형제들에게, 나는 죽는다라고 말했다”에 의해 교회의 내적 부분이 중지될 것이 의미된다.
여기서의 경우는 이렇다: 교회가 존재를 하려면 내적, 외적 부분이 반드시 있음에 틀림이 없다, 그 이유는 교회의 내적 부분(domain, 범위) 안에 있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교회의 외적 부분 안에 있는 이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전자는 매우 적고, 후자는 매우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적 부분에 있는 이들과 더불어 내적 교회가 있는데, 이들 또한 외적 부분이 있어야 한다, 그 이유가 이 둘은 분리되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 후자인 외적 교회의 경우도 내적 교회와 분리되어져서는 안된다. 그러나 이 교회와 더불어 존재하는 내적 부분은 매우 희미함 안에 놓여 있다.
교회의 내적 부분은 심정으로부터 선을 뜻하고, 선에 감동되어 있음에 존재한다; 그리고 내적 부분에 속하는 외적 부분은 심정으로부터의 뜻함을 행동 안에 존재하게 한다, 그리고 이 행동은 인간이 선으로부터 아는 신앙의 진리들에 따라서 이다; 그러나 교회의 외적 부분은 대체로 의식들을 경건하게 수행함에, 교회의 가르침에 따라서 선행의 일들을 행함에 존재한다. 이로부터 분명해지는 것은, 교회의 내적 부분은 의지력에 있는 선행의 선이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선이 중지될 때, 교회 자체 또한 중지된다, 그 이유가 선행의 선이 교회의 근본(essential, 가장 중요한 것)이기 때문이다. 내적 부분이 중지된 이후라 해도 외적 예배는 실로 이전 같이 여전히 남아 있다. 그러나 이때의 예배는 예배가 아니고 의식 준행이다. 즉 이러이러하게 하라고 틀이 짜여졌기 때문에 그냥 보존되는 것일 뿐이다. 예배 같이 나타나는 이 (예배) 의식은 알맹이가 없는 깍지일 뿐이다. 그 이유가 이것은 내적 부분이 없이 남은 외적 부분이기 때문이다. 교회의 상태가 이러할 경우, 이 교회는 마지막에 있다.

그리고 방문하시는 하느님이 너희를 방문하실 것이다. 이는 마지막 때가 올 것이다를 의미한다. “방문하심이 있다”의 의미가 마지막 때이다로부터, 역사적 측면에서는 이스라엘의 아들들이 압제당함의 마지막의 시기이다; 그리고 내적 의미 측면에서는 옛 교회의 마지막 때, 그리고 새로운 교회의 처음의 때이다. 말씀에서 이 마지막 때가 “방문하심(visitation)”이라 불리우고, 이 방문은 일반적 측면에서는 교회를 방문하심, 특수적 측면에서는 교회인을 방문하심, 하여 양쪽 모두를; 그리고 태어나지는 새로운 교회를 방문하심, 만기가 되는 옛 교회를 방문하심을; 특별하게는 구원되어지는 교회인을 방문하심, 그리고 지옥에 떨어져야 하는 자를 방문하심, 모두를 서술한다.
위의 사항들이 말씀에서 “방문하심”, “방문의 날”에 의해 의미되는 것을 아래 구절들로부터 알는지 모른다. 누가 복음서에서:
이스라엘의 주 하느님을 찬양할지라; 그 이유는 그분은 방문하시어 그분의 벡성을 해방되게 하셨기 때문이다. 우리의 하느님의 자비의 동정심(bowel)을 통하여, 그럼으로서 높음 위로부터 동틀녘에 우리를 방문하셨다, 하여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은 그들에게 나타나실는지 모른다
(눅. 1:68, 78, 79);
위 구절은 주님이 탄생하실 즈음, 주님에 관한 사가랴의 예언적 말함이다; 이 구절의 “방문하시는” 것은 새로운 교회의 일어남을 표시한다, 그리고 신앙의 진리와 선에 무지한 이들을 계발하심, 고로 무지함에서 해방되게 하심을 표시한다; 그러므로 말해지는 바, “그분은 방문하시어 그분의 백성이 해방되게 하셨다”, 그리고 “그분은 방문하셨는 바, 어둠에, 죽음의 그늘에 앉은 그들에게 나타나실는지 모른다.”
모세의 책에서: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하셨다, 이스라엘의 원로들을 함께 모우라, 그리고 그들에게 말하라, 여호와 너희 조상의 하느님, 아브라함의, 이삭의, 야곱의 하느님이 나에게 나타나셨다, 말하시기를, 나는 너희를 꼭 방문할 것이다, 그리고 이집트에서 너희에게 행해진 것(을 방문할 것이다)
(출. 3:16).
다시:
백성은 믿었다; 그리고 그들은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아들들을 방문하셨다를 들었다 (출. 4:31).
여기서 “방문하는 것”은 교회가 중지되는 때인 마지막 때를, 그리고 교회가 시작하는 때인 처음의 때를; 이집트인들과 더불어서는 마지막 때가, 이스라엘의 아들들과 더불어서는 처음의 때를 표시한다; 고로 후자의 해방됨이 있다.
예레미야서에서:
그들은 바빌론으로 끌려가질 것이다; 거기서 그들은 내가 방문하는 때까지조차 있을 것이다; 그때 나는 하느님의 집의 집기들이 오게 만들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들을 이 장소로 도로 데려다 놓을 것이다 (예. 27:22).
다시:
칠십 년이 바빌론에서 충족되었을 때, 나는 너희를 방문할 것이다, 그리고 나는 나의 선한 말을 너희 위에서 확고히 굳힐 것이다, 그리고 너희를 이 장소로 도로 데려다 놓을 것이다 (예. 29:10);
위에서 “방문하는” 것은 해방을 표시한다; 일반적 측면에서는 포로됨과 황무해짐의 마지막 때이다.
“방문하심”과 “방문의 날”이 교회의 마지막 때를 표시함을 아래에서 읽는다:
방문하심과 황폐하심의 날에서 너희는 무엇을 할 것이냐? 이것은 멀리로부터 올 것이다; 너희는 도움을 위하여 누구에게로 도망할 것이냐? (이. 10:3)
다시:
보라 여호와의 날이 온다, 잔인, 그리고 분노함, 성냄, 격노함이 땅을 황폐해지게 만들어지게 하신다. 나는 세상에 있는 악을 방문할 것이다, 그리고 사악한 자 위의 그들의 불법(을 방문할 것이다) (이. 13:9, 11).
예레미야서에서:
그들은 추락하는 그들 사이에서 추락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방문하심의 때에 그들은 곱드러질 것이다 (예. 8:12).
호세아서에서:
방문하심의 날들이 와진다, 보답(대갚음)의 날들이 와진다 (호. 9:7).
모세의 책에서:
그리고 지금 가라, 백성을 내가 너에게 말했던 곳으로 인도해라. 보라 내 천사가 네 앞에 갈 것이다. 그리고 내 방문의 날에 나는 그들 위에 있는 그들의 죄를 방문할 것이다 (출. 32:34).
누가복음서에서: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관하여 말하셨다, 그들은 네 안에서 돌 위에 돌 하나도 남아있지 않게 할 것이다; 그 이유는 너는 네 방문의 때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눅. 19:44).
“방문의 날”은 주님의 오심을 표시한다, 그리고 그때 계발됨을 표시한다; 그러나 유태 나라에 관하여서일 경우, 그들은 이것을 인정하지 아니했는 바, 그들과 더불은 교회의 표현의 마지막 때를 표시한다; 그 이유가 예루살렘이 파괴되었을 때, 제물 바침이 중지되었기 때문, 그리고 그 나라는 산산히 조각나고 말았기 때문이다.
에스겔서에서:
큰 음성이 내 귀에서 외쳤다, 도성을 방문하심이 가까이 와있다, 그리고 사람은 자기 손에 파멸의 자기 도구를 가지고 있다 (겔. 9:1);
위도 의미는 비슷하다. 이사야서에서:
르바임은 일어나지 못할 것이다, (그들을) 당신은 방문하셨다, 당신은 그들을 소멸되게 하셨다 (이. 26:14);
“르바임”은 홍수 이전인 태고 교회의 후손을 표시한다, 이들은 또한 “느빌림”과 “아낙”이라 불리운다; “당신이 르바임을 방문하시고 소멸되게 하셨다”는 이 교회의 마지막 때, 그리고 그들을 지옥으로 내던지심을 표시한다. “방문”은 보답(앙갚음), 고로 지옥에 떨어짐을 표시한다. 예레미야서에서:
내가 이것을 방문하지 않을 것이냐? 내 혼이 이런 나라에 앙갚음하지 않겠느냐? (예. 49:8).
다시:
나는 내가 그를 방문하는 때에 그 자 위에 에서의 파멸을 가져올 것이다 (예. 49:8).
그리고 호세아서에서:
나는 그를 그의 길(방법)들에서 방문할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의 일들에 앙갚음할 것이다
(호. 4:9).

그리고 너희로 하여금 이 토지로부터 그분께서 아브라함에게, 이삭에게, 그리고 야곱에게 맹세하셨던 토지에로 올라 가게 만드실 것이다. 이는 그들은 고대인들이 있었던 교회의 상태에로 갈 것을 의미한다. 이는 그들이 떠나 올라가야 하는 “이집트의 토지”의 의미가 황폐된 교회이다로부터; 이 교회가 이집트인들이 이스라엘의 후손들을 압제함으로 표현되었다; 그리고 그것의 파멸은 수프 바다(홍해)에서 그들이 익사됨으로 표현되었다; 그리고 “가나안의 토지”, 즉 이스라엘 후손이 올라가야 한다는 토지의 의미가 주님의 왕국과 교회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것이 고대 교회, 또는 고대인들이 있었던 교회의 상태이다는 것은 “하느님께서 아브라함, 이삭, 야곱에게 주겠다고 맹세하신” 토지라고 지목하심에 의해 의미되어져 있다; 그 이유가 최고의 의미에서 이들에 의해 주님이 뜻해지기 때문, 그리고 표현 의미에서 천국들에 있는 그분의 왕국, 땅 위의 그분의 왕국, 즉 교회가 뜻해지기 때문이다. 고로 “그들에게 주신다고 맹세하는” 것은 고대인들이 있던 교회의 상태 안으로 그들이 온다를 확증하는 것이다. 사실상 야곱의 후손들은 이런 교회의 수준에 오지 못했다, 뿐만 아니라, 아예 외적인 것만에 국한되었다, 즉 표현만 했을 뿐, 즉 내용 없는 형식적 교회일 뿐이었다. 그럼에도 그들이 그 토지에 와야 하는 이유는 지금까지 있어 왔고, 앞으로도 있게 될 영적 교회 속에 있는 모든 이들을 표현해야 했기 때문이다. (“맹세”가 신성으로부터 확증하는 것이다에 대하여는 2842, 3375항을 보라.) 또한 가나안의 토지가 야곱의 후손에게 약속되고 주어진 이유는 그들이 교회를 표현하도록 하시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그곳에는 고대 때로부터 교회가 있어 왔기 때문에 그곳의 모든 장소의 이름들은 (천국에서 이미) 명명되고 표현 의미를 이미 가졌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요셉은 이스라엘의 아들들에게 맹세하라고 했다. 이는 묶음을 의미한다.

방문하시는 하느님이 너희를 방문하실 것이다. 이는 교회의 이런 마지막이 올 때를 의미한다. 이는 “방문함”이 교회의 마지막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리고 너희는 내 뼈를 여기로부터 올라 가게 만들어라. 이는 거기에 교회를 표현함이 있을 것임을, 그러나 내적 부분 또한 반드시 있어야 하는 표현 교회는 아님을 의미한다. 이는 요셉의 표현함이 교회의 내적 부분이다로부터; 그리고 요셉에 의해 교회의 내적 부분이 표현되기에, 그의 “뼈”에 의해서는 (교회의) 가장 외적인 것, 또는 교회의 최말단의 것, 고로 교회를 표현함 만을 의미한다. 그 이유가 고대 교회에서 있어왔었던 표현들, 또한 야곱의 후손들과 더불어 제정되어진 표현들은 교회의 최말단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 해도 그 표현물들(장소, 인물, 건물 등등)이 표현하고 의미한 것들은 교회의 내적 부분들이었다. 이 내적 부분들은 “영이 있는 살”에 의해 의미되어진다, 그러나 “뼈”에 의해서는 최말단들이 의미되어진다. 그러므로 분명해지는 것은, 내적 부분 없는 외적 부분만으로 교회가 있을 때, 이런 교회의 품질은 살이 없는 뼈로만 된 인간과 같다는 것이다.

그리고 요셉은 죽었다. 이는 교회의 내적 부분의 존재함이 중지됨을 의미한다. 이는 “죽는다”가 이전 같이 있는 상태가 중지됨이다로부터; 그리고 요셉의 표현함이 내적 부분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일백 십 년의 아들. 이는 그때의 상태를 의미한다. “110 년”의 의미는 내적 부분으로부터 기억 속의 지식들의 생명의 상태와 품질이다.

그리고 그들은 그를 방부 처리를 했다. 이는 여전히 보존되고 있다를 의미한다. 이는 “방부 처리를 하다”의 의미가 악의 접촉 전염으로부터 보존됨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여기서 취급되는 주제가 교회의 마지막이기에, “교회가 있기를 중지할 때 (내적 부분은) 여전히 보존되고 있다”에 대하여 좀 더 말해야 할 것 같다. 이는 인간과 더불은 교회의 내적 부분이 중지할 때 거행된다. 이때에도 외적 부분은 여전히 과거 내적 부분이 있었을 때와 같이 그대로 남아 있다; 그렇지만 이때 내적 부분은 인간 당사자와 더불어 실제로는 있지는 않다, 그 이유는 그가 그것에 관하여 생각하지 않기 때문, 설사 생각한다 해도 그것에 감동되지 않기 때문; 그러나 이 내적 부분은 인간 당사자와 함께 하는 천사와 더불어 있다. 그리고 황폐된 교회 속의 인간은 내적 부분에 관하여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는다, 그것에 감동되는 일도 없다, 그리고 내적 부분이 존재하는지조차 모를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므로 내적 부분은 당사자로 인해 상해를 받아 질 수가 없다. 그 이유가 인간이 알고 있는 것, 특히 그가 믿었던 것이 당사자에 의해 피해를 입을 수가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그가 모르거나, 존재하는 것을 믿지 않거나 하고 한다면 피해를 입힘 자체를 생각해볼 여지도 없기 때문이다. 이 방식에서 교회의 내적 부분은 보존되어진다, 하여 어떤 악도 영향을 줄 수 가 없다. 이렇게 하여 교회의 내적 사항들은 야곱의 후손들 사이에서 보존되어졌다; 그 이유는 그들은 내적인 것이 없는 외적인 것 안에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그들은 내적인 것을 알려 하지도 않았다; 고로 교회의 내적인 것들은 그들에게 밝히 알려지지 않았다. 이상 말한 것들이 “보존되어짐”에서 뜻해지고 있다.

그리고 그는 이집트에서 궤 안에 놓여졌다. 이는 교회의 기억 속의 지식 안에 숨었음을 의미한다. 이는 “궤”의 의미가 저장하는 것, 숨겨지게 하는 어떤 것이다로부터; 그리고 “이집트”의 의미함이 교회의 기억 속의 지식이다로부터; 그리고 그때 당시 교회의 기억 속의 지식들은 고대 교회에 있어왔던 표현과 의미들에 관한 지식들이다. 이것들 안에 내적 부분이 숨겨 놓임이 전술한 말들에 의해 의미되어지고 있다. “궤”가 어떤 것이 저장됨, 또는 어떤 것이 숨겨 놓임을 표시하는 것은 증거의 궤로부터 알는지 모른다, 이 궤 안에 십계, 또는 법이 저장되었다.

지금까지 창세기에서 포함되는 내적 의미가 취급되어 왔다. 그러나 이 책 안에서 모든 것들은 48, 49장의 예언적 부분들 말고는 대체로 역사적이다. 예언적 부분은 내적 의미 없이는 거의 파악이 불가능하게 글자 자체가 나타나지고 있다. 역사적 형체로 된 글자의 경우는 그것의 내적 의미로부터 떼어낼 수 도 있다. 내적 의미가 글자 의미와 완전히 다른 구절의 경우는 분리하려는 경향이 더욱 강해진다. 그 이유가 내적 의미는 영적, 천적인 것들을 (주제로) 취급하고, 글자 의미는 세상적, 지상적인 것들을 (주제로) 취급하기 때문이다. (이 두 의미들은 사실상 불연속적, 등차가 다른 평면에 있기 때문, 마치 상응이라는 층계가 없으면 오가지 못하는 윗층과 아래 층의 경우와 유사할지 모른다 역자주) 지금까지 내적 의미가 각 절의 단어 하나하나로부터 설명되어 왔다, 특히 천국으로부터 나에게 이런 내적 의미를 이해하도록 받아쓰게 해주셨기에 가능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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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49장 해석

창세기 제 49 장

1, 2절. 그리고 야곱은 그의 아들들을 불렀다, 그리고 말했다, 너희는 너희 자신을 그러모으라, 그리고 나는 날들의 끝에서 너희에게 무엇이 일어날 것인지 너희에게 말하리라. 2 너희 자신들을 소집하고 들으라 너희 야곱의 아들들아, 그리고 너희 아버지 이스라엘에게서 들으라.

그리고 야곱은 그의 아들들을 불렀다. 이는 자연 평면에 있는 신앙으로부터의 진리들과 사랑으로부터의 선을 질서 안에 자리잡아 앉히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부르다”의 의미가 질서 안에 놓는다 이다로부터, 그 이유가 그들을 함께 부르는 이유는 신앙의 진리들과 선행의 선들이 질서 있게 배열되어 표출되게 하려는 때문이다; 그리고 야곱과 그의 아들들의 표현함이 자연 평면에 있는 신앙의 진리들과 선행의 선들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 장의 내적 의미에서 표현되고, 여기서 의미되는 신앙의 진리들과 사랑의 선들에 주목해보자: 이미 살핀 바는,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들은 하나로 된 복합(one complex, 그것들의 전체 their entirety) 안에 있는 모든 진리들과 선들, 고로 주님으로부터 진행하는 모든 진리들과 선들을, 결과적으로 천국 안에 있는 이것저것들을, 그리고 천국을 구성하는 이것저것들을 일반적 측면에서 표현하고 있다. 그리고 그들이 일반적 측면에서 모두 표현하였기 때문에, 특별한 측면에서 개별적으로도 표현하였다; 그 이유가 일반물은 그것 안에 특별한 것들을 포함하기 때문이다, 마치 전체가 부분들을 아우르는 것과 같다.
천국에 있는 빛들은 선들과 파생되는 진리들에 일치하여 다양해진다, 그리고 빛들에 일치하여 총명과 지혜의 상태들이 있다; 그리고 이로부터 빛은 우림과 둠밈을 통하여 반짝거렸고 흔들거렸다(quiver), 그리고 이것은 질문을 만든 주체의 상태에 일치하는 다양함과 더불어서 였다. 이것이 거행된 이유는 열두 지파들을 수단으로 일반적 측면에서의 모든 진리들과 선들이 의미되었기 때문, 하여 지파들이 가슴받이에, 즉 우림과 둠밈에 명시되었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각 지파 당 한 개의 보석을 거기에 박도록 명령되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보석인 이유는 그것들이 영적, 천적 진리들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보석들이 앉혀지게 한 금은 선을 의미했다. 이것은 우림과 둠밈에 의해 의미되어진 비밀이다.
열두 지파가 이런 의미를 가진 것은 그들이 언급되는 말씀의 구절들로부터 분명해진다; 특히 여호수아서의 가나안의 토지에서 지파들의 상속분으로부터 이다; 그리고 주님의 왕국에서 그들의 상속분으로부터, 이는 에스겔서의 마지막 장들에서이다, 거기서 우리는 새로운 땅, 새로운 예루살렘, 새로운 성전에 관해 읽는다; 그리고 계시록에서 이다 (계. 7:4-8); 또한 그들이 광야에서 진영을 펼치는 질서로부터, 이 질서는 진정한 질서에 있는 진리들과 선들의 이모저모이다. 그러므로 발람의 예언적 발음이다; “발람이 자기 눈을 들어올려, 이스라엘이 각 지파들에 따라 거주하는 것을 보았을 때, 하느님의 영이 발람 위에 왔다. 그는 또렷한 발음으로 말했다, 너희 성막들은 얼마나 좋은지, 오 야곱아! 너 거주민 오 이스라엘아! 그들이 심어진 것은 골짜기들 같고, 강가에 있는 동산 같고, 여호와께서 심으신 백단향(sandal-wood)나무 같고, 물가에 있는 삼나무들 같다” (민. 24:2-6).

그리고 말했다, 너희는 너희 자신을 함께 그러모으라. 일반적인 측면에서 있는 모든 것을 함께를 의미한다. 이는 “그러모으다”의 의미가 그것들이 함께 있어야 한다 이다로부터, 즉 야곱의 열두 아들들에 의해 의미되는 사랑의 선들과 신앙의 진리들 모두이다.

그리고 나는 날들의 끝에서 너희에게 무엇이 일어날 것인지 너희에게 말하리라. 이는 그들이 그때 있었던 질서에서 있는 교회의 상태의 품질을 의미한다. “일어날 것을 말함”의 의미가 교통하고 미리 말하다 이다로부터; 그리고 “날들의 끝”의 의미가 그들이 함께 있는 상태의 마지막 국면(final phase)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 이유가 “날들”은 상태들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끝(end)”은 마지막(last, final) 국면이다; 고로 날들의 끝은 상태의 마지막 국면이다, 즉 마지막 국면에서 질서적으로 함께 있을 때의 일반적 측면에서의 진리들과 선들이다. 교회의 상태가 의미되는 이유는 야곱과 그의 아들들에 의해 표현되는 진리들과 선들이 교회를 구성하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야곱에 의해 교회가 표현되었고; 그의 아들들 또한 교회를 표현했다. 상태의 품질이 뜻해지는 이유는 교회의 진리들과 선들의 표현함이 지파들, 또는 야곱의 아들들이 말씀에서 언급된 순서에 따라서 있기 때문이다. 르우벤이 첫 번째로 언급되는데, 이때 교회의 품질 중의 하나가 언급된다, 즉 르우벤이 처음 언급될 때는 신앙이라는 신앙의 품질에서 시작한다; 그러나 유다가 처음 언급될 때는 사랑이라는 신앙의 품질에서 시작한다; 그리고 어떤 다른 것이 처음 언급되는 경우도 마차가지로 달라진다. 또한 품질은 처음 언급된 지파 뒤를 따라 언급되는 질서에 따라서도 다양해진다. 그러므로 사실상 무수하게 출시된다, 그렇다, 무한하게 다양함들이다, 그리고 열두 지파들에 의해 의미되는 일반적 측면에서의 진리들과 선들이 특수적인 다양함들을 가지게 될 때, 각 진리와 선은 무수한 것이 되고, 이것은 그것들 각각이 또 다른 얼굴을 일반적 측면에서 갖게 한다; 이 특수적인 진리들과 선들이 무수한 낱개의 다양함들을 가지게 된다; 등등이다. 발생한 무한한 다양함들은 자연 평면에서 많은 것들을 수단으로 예증될는지 모른다. 그러므로 열두 지파가 말씀에서 하나의 질서에서 언급될 때, 다른 의미들을 가진다; 고로 (다양함 때문에) 그들이 다른 부분에서 언급될 때 또 다른 의미들을 가진다. (여기서의 경우가 그 하나의 예이기도 한데,) 이 장에서 그들이 의미하는 것들은 말씀의 다른 곳에서와 다르다.

너희 자신들을 소집하라. 이는 그들은 그들 자신을 질서 안에 자리잡아 앉혀야 함을 의미한다. 이는 “소집하다(assemble, 모으다, 조립하다)”의 의미가 질서 안에 자리잡아 앉히는 것이다로부터; 그 이유가 영적 의미에서 “소집하는” 것은 이외 다른 뜻은 없기 때문이다, 즉 진리들과 선들은 질서대로 놓여지지 않으면 모아질 수 없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주님으로부터 진행되는 보편적인 유입이 이를 결과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것은 그것들 안에 아주 미세한 것들까지 내려가는 모든 낱개들을 포함한다; 그리고 함께 모아진 모든 것들이 보편적 유입이고, 이 유입이 천국들에 있는 모든 것들을 질서로 환원한다. 보편적 유입이 이를 행할 때, 선들과 진리들은 마치 자신들을 질서 안에 자리잡아 앉혀 놓은 것처럼 나타난다, 그리고 마치 그것들이 그것 자신과 조화를 이루는 질서 안으로 흐르는 것처럼 있다. 그리고 주님으로부터의 보편적 유입에 의해 질서 안에서 계속적으로 보존되어진다. 일반적 측면에서의 천국들의 사회들도 경우는 이와 같고, 특수한 측면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그 이유가 천사들이나 영들이 소집되자 마자, 그들은 즉시 자신들에 관련된 질서 안으로 배치되는 바, 이것이 천국의 사회를 구성하기 때문, 이것이 천국의 형상이기도 하다. 이것이 거행되려면, 반드시 있어야 하는 것은, 주님으로부터 진행되는 일반적 유입이 참으로 미세한 사항에 이르기까지에서 포함되어야 하는 것, 즉 미세한 것까지도 가장 완전한 질서 안에 포함되고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많은 이들이 상상하듯, 어떤 보편적 유입이 미세한 낱개적 사항들이 포함됨 없이 있는다면, 하여 인간, 영, 천사들 각각이 낱개들을 좌지우지 한다면, 질서 대신 거기에는 혼동만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해 천국도, 지옥도, 인류도, 심지어 자연계조차 있어질 수 없다. 이것은 인간과 더불은 많은 것들로 예증될는지 모른다. 인간 당사자의 생각들이 보편적으로 질서잡혀 있고, 동시에 사랑의 애착함들에 의해 낱개적으로도 정돈되지 않으면, 그의 생각들이 합리적으로 분석적으로 그것을 위하여 흐르는 것이 불가능하다. 행동들과 더불어서도 마찬가지 이다: 보편적, 낱개적 측면에서의 혼이 신체의 각 기관 안으로 흘러들지 않으면, 육체가 질서있고 정상적 운행이 거행될 수 없다; 그러나 낱개적, 보편적 측면에서 혼이 흘러들 때, 신체의 모든 것들은 자체들에 관하여 질서 안에 자리 잡고 있다. 이를 미루어 보아도 알게 되는 것은, 진리들과 선들이 자체들을 질서 안에 자리잡아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 어림되었을 것이다.

들으라 너희 야곱의 아들들아. 이는 자연 평면에 있는 선과 진리들을 의미한다. 이는 야곱의 아들들이 자연 평면에 있는 선들과 진리들이다로부터 알려진다.

그리고 너희 아버지 이스라엘에게서 들으라. 이는 영적 선에 의해 그들에 관하여 예언됨, 최고 높은 의미에서는 주님께서 미리 보셨음을 의미한다. 이는 “듣다”의 의미가, 즉 날들의 끝에서 발생할 것을 듣는 것은 예언이다로부터; 그리고 이스라엘의 표현함이 영적 선이다로부터; 그리고 예언함이 “날들의 끝에서 발생할 것을 들음”에 의해 의미되었기 때문에, 이는 최고 의미에서 주님의 미리 보셨음이 의미된다; 그 이유가 모든 예언은 주님의 미리 보셨음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야곱의 아들들이 이스라엘에게 듣는다”라고 말해지는데, 그 이유는 교회 속에 있는 이들이 주님에게서 듣기 때문, 즉 말씀 안에서 주님으로부터 듣기 때문이다. 하여 주님께서는 신앙의 진리들과 사랑의 선들에 관하여 말씀에서 가르치신다, 그리고 야곱의 이 아들, 저 아들에 의해 의미되는 이런 저런 진리와 선에 관하여 그분이 예언하신 것들을 가르치신다; 그리고 그분은 선행으로부터 분리된 신앙, 여기서 “르우벤,” “시므온,” “레위”에 의해 의미되는 신앙에 관한 것을 가르치시고 예언하신다; 그리고 “유다”에 의해 의미되는 천적 선에 관하여도, “요셉”에 의해 의미되는 영적 선에 관하여도, 나머지 아들들에 의해 의미되는 이것저것 모두를 가르치시고 예언하시고 있다.

3, 4절. 르우벤, 내 장자, 너는 내 강함이다, 그리고 내 기세의 시작이다, 탁월함이 우수하고 힘도 우수하다. 4 물 같이 가벼운 바 너는 우수하지 않을 것이다, 그 이유는 네가 네 아버지의 침대(bed) 위에 갔고, 그 다음 너는 그것을 모독했기 때문이다. 그는 내 침상(couch)에 올라 갔다.

르우벤, 내 장자. 이는 신앙이 외견상으로 앞의 위치에 있음을 의미한다. 이는 르우벤의 표현함이 이해력에 있는 신앙이다로부터, 그리고 일반적 측면에서 교회의 신앙을 고백함이다로부터; 그리고 “첫 출생”의 의미가 앞의 위치(prior place)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너는 내 강함이다. 이는 신앙을 통하여(수단으로) 선에 힘(power)이 있다를 의미한다. 이는 여기서 “너”인 르우벤의 표현함이 이해력에 있는 신앙이다로부터; 그리고 “강함(strength)”의 의미가 선 안에 있는 힘(power)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힘(power)에 주목해보자: 즉 생각하는 힘, 뜻하는 힘, 지각하는 힘, 선인 것을 행하는 힘, 거짓들과 악들을 흩뜨리는 힘, 등등인데, 이것은 진리를 통하여 선으로부터의 모든 것이다; 선이 주체이고, 진리는 도구적인 것이다. 본문의 강함(세기, strength)이 선 안에 있는 힘(power)을 의미함에 비해 “기세(기력, forces)”는 진리의 힘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내 기세의 시작”이 바로 뒤를 이어 말해지고, 이는 진리에 있는 첫 힘을 의미한다. 그 이유가 말씀의 원어에서 “기세”는 진리를, “강함”은 선을 서술하기 때문이다.
말씀이 거룩하다는 것, 그리고 말씀의 내면은 가장 거룩하다는 것은 말씀의 모든 세부 사항들 안에 천국의 결혼이 있다는 것, 즉 선과 진리의 결혼이 있다는 것, 고로 천국이 있다는 사실로부터 분명해진다; 그리고 가장 깊은 의미에서의 모든 세부 사항에서는 주님의 신성한 인간과 그분의 왕국과 교회의 결혼이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 최고 의미에서 주님 안에서의 신성 자체와 신성한 인간의 합일이 있다는 것이다. 이런 가장 거룩한 사항들이 말씀의 모두 각각의 세부 사항 안에 있다. 이는 말씀이 신성으로부터 내려왔다는 명백한 증거이다. 이것이 그러한지를 보여주는 또 다른 것은, 선을 언급하는 곳에서는 진리의 언급 또한 있다는 것; 내적 부분이 말해지는 곳에서는 외적 부분도 말해지고 있다는 것이다. 선을 꾸준히 의미하는 단어들이 있는가 하면 진리를 꾸준히 의미하는 단어가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선과 진리를 의미하는 단어도 있다; 만일 그것들이 선과 진리를 의미하지 않는다 해도 그것들은 여전히 선과 진리를 서술하거나 그것들을 포함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단어들이 서술하고 의미함으로부터 분명해지는 바, 이미 말했듯이, 모두 각각의 세부 사항 안에 선과 진리의 결혼, 즉 천국의 결혼이 있다는 것, 그리고 가장 깊은 의미, 최고 의미에서 주님 안에서 있는 신성의 결혼, 고로 주님 자신이 있다는 것이다.
이 결혼은 모든 곳에서 나타나는데, 여기서의 경우,“너는 나의 강함이다, 그리고 내 기세의 시작이다”, 또는 “탁월함이 우수하고 힘도 우수하다”라고 표현하여 결혼을 포함하고 있다. 여기서 “강함”은 선에 관련되고, “기세”는 진리에 관련된다; 그리고 “탁월함이 우수하다”는 진리에, “힘이 우수하다”는 선에 관련된다. 르우벤에 관해 이어지는 말에서, “너는 네 아버지의 침대에 올라갔다; 너는 그것을 모독했다; 그는 내 침상에 올라갔다.” 시므온과 레위에 관한 말에서: “그들의 성냄은 저주받을지라, 그 이유는 격렬하기 때문이다; 그들의 분노는 저주받아야 한다, 그 이유는 단단했기 때문이다; 나는 그들을 야곱에서 나누어낼 것이다, 그리고 이스라엘에서 그들을 흩뜨릴 것이다” (7절); 여기서 “성냄”은 선으로부터 돌아섬을, “분노”는 진리로부터 돌아섬을 의미한다; 그리고 “야곱”은 교회의 외적 부분을, “이스라엘”은 교회의 내적 부분을 의미한다. 유다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네 형제가 너를 찬양할 것이다, 네 아버지의 아들들이 네게 절할 것이다” (8절); 다시: “그는 자기의 어린 나귀를 포도나무에 맨다, 그리고 그는 배들의 정박소에서 있을 것이다” (13절). 단에 관하여: “그는 길에 있는 뱀일 것이다, 작은 길에 있는 독사일 것이다” (17절).
똑같은 것이 시편서와 예언서들에서 발생한다, 이사야서에서: “바벨은 영원히 거주하지 못할 것이다, 대대로 거주하지 못할 것이다. 그녀의 때는 가까이 있다, 그리고 그것은 올 것이다, 그리고 그녀의 날들은 길어지지 않을 것이다 (13:20, 22). 다시: 너희는 여호와의 책에서 찾으라, 너희는 읽으라; 이것들 중의 하나도 빠진 것이 없어 이쪽이 다른쪽을 갈망하지 않는다; 그 이유가 그분이 입으로 명령하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분의 영이 그것들을 그러모으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똑같은 분이 그들을 위하여 제비를 뽑으셨다, 그리고 그분의 손이 재어서 그들에게 분배하셨다. 그들은 그것을 영원까지 소유할 것이다, 대대로 그들은 거기에서 거주할 것이다” (이. 34:16, 17); 이외에도 예로 들 수 있는 구절은 수천 절도 족할 것이다. 말씀에 있는 표현들이 영적이고 천적인 사항들을 의미한다는 것, 그리고 어떤 것은 선을, 어떤 것은 진리를 말한다는 것을 모르는 이들은 위의 예로 든 구절만 가지고도 거기서 거의 비슷한 말을 왜 반복했는지를 모를 수밖에 없다. 하여 지면만 낭비하는 듯 지루하게 여길지 모른다. 이럼으로 말씀에 관하여 잘못 생각하는 이들은 이런 대목에서는 경멸적인 느낌을 내비친다. 그들의 속내야 어찌 되어가든 이런 반복된 대목 안에 참으로 신성한 사항들이 저장되고 있다. 즉 천국의 결혼, 이는 천국 자체이다; 그리고 신성의 결혼, 이는 주님 자신이다. 이 의미가 주님이 계시는 “영광”이다, 그리고 글자 의미에서는 이 영광이 있는 “구름”이다.

그리고 내 기세(氣勢)의 시작이다. 이는 이 신앙을 통하여 진리에 첫 힘(개시하는 힘)이 있다를 의미한다. 이는 “기세의 시작”의 의미가 처음의(개시하는) 힘이다로부터; 그리고 “기세”는 진리를 서술하는 바, 진리에서의 첫 힘이 의미된다, 이와 같은 의미가 이사야서에서:
여호와께서는 지쳐버린 자에게 강함을 주신다, 그리고 기세가 없는 자에게 그분은 힘이 불어나게 하신다 (이. 40:29)
위에서 “강함”은 선을 서술하고, “기세”는 진리를 서술한다, 그리고 “힘”은 양쪽 모두를 서술한다. 신앙을 통하여 선에 힘이 있고 진리에 첫 힘이 있다는 것을 어떻게 이해하여야 할 것인지, 그리고 이것이 “르우벤, 너는 나의 첫 출생, 너는 나의 강함, 나의 기세의 시작이다”에 의해 의미되는 지를 조금 더 말하고 지나가야 할 것 같다. 영계에 있는 모든 힘은 진리를 통하여 선으로부터 있다, 선 없이 진리는 무엇이든 힘을 가지지 못한다, 그 이유가 진리는 몸 같기 때문이다, 그래서 선은 이 몸의 혼 같다. 혼이 무언가를 행하기 위하여 몸을 수단으로 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명백한 바, 선이 없는 진리는 무엇이든 힘을 가지고 있지 않다, 혼이 없는 육체 같다는 말이다, 이때의 육체는 송장이다, 진리도 선 없이는 마찬가지 형국이다.
선을 통하여 진리의 신앙이 처음 출생할 때, 힘이 진리 안에 있다고 나타난다. 이 힘이 “신앙을 통하여 진리에 있는 첫 힘”이라 불리운다, 그리고 “기세의 시작”에 의해 의미되어진다. “생득권(장자권)”이 취급되는 다른 구절을 읽어보자:
그분은 이집트에 있는 모든 첫 출생을, 함의 천막들에서 기세의 시작을 쳐죽이셨다 (시. 78:51).
다시:
그분은 그들의 토지에서 모든 첫 출생을, 모든 그들의 기세의 시작을 쳐죽이셨다 (시. 105:36).
신명기서에서:
그는 미움받는 자의 첫 출생의 아들을 인정하여, 그에게 그를 위하여 발견되는 모든 것의 두 부분을 줄 것이다; 그는 그의 기세의 시작이고, 생득권의 권리가 그의 것이다 (신. 21:17).
첫 출생에 의해 진짜 의미에서 선행 속에 있는 선이 의미되나, 나타남(외관)에 따른 의미에서는 신앙 속에 있는 진리이다, 그리고 이 둘은 교회의 기초들이기에, 고대인들에 의해 “아버지의 강함, 그의 기세의 시작”이라 불리웠다. 이와같은 것을 의미한다는 것은 이런 사실로부터도 분명해진다: 즉 모두 각각의 첫 출생은 여호와, 또는 주님에 속해 있다는 것, 그리고 모든 첫 출생 대신, 레위 지파가 받아졌고, 성직이 그들에게 주어졌다.
이 세상의 거의 누구도 선으로부터 진리에 힘이 있음의 본성을 아는 자는 없다; 그러나 다른 삶에 있는 이들에게는 익히 아는 사항들이다; 고로 이런 의미는 거기로부터의 밝히 알게 해주심(계시)에 의한 것이다. 선으로부터 진리에 있는 이들은, 즉 선행으로부터 신앙에 있는 이들은 선으로부터 진리를 통하여 힘 안에 있다. 이 힘 안에 모든 천사들이 있고, 이로부터 천사들은 말씀에서 “힘들(권능들)”이라 불리운다; 그 이유가 그들은 악령들을 제지하는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 한 명의 천사가 수 천의 악령들을 단번에 제압할 수 있다. 그들이 이런 힘을 주로 발휘하는 때는 인간과 더불어 있을 때, 그를 많은 지옥들로부터 방어할 때이고, 그것은 수 천천의 방법에서 실행된다.
그들은 선행 속에 있는 선으로부터 신앙 속에 있는 진리를 수단으로 이 힘을 가진다; 그러나 그들이 주님으로부터 그들의 신앙을 가지는 바, 주님만이 그들 안에 있는 힘이다. 주님으로부터 신앙을 통하여 있는 이 힘이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하신 말씀에 뜻하여 있다:
이 바위 위에 나는 나의 교회를 건축할 것이다; 그리고 지옥의 큰 문들이 그것에 맞서 세력을 떨치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나는 너에게 천국들의 왕국의 열쇠들을 줄 것이다, 그리고 네가 땅에서 묶는 자는 누구든지 천국들에서 묶일 것이다, 그리고 네가 땅에서 푸는 자는 누구든지 천국들에서 풀릴 것이다 (마. 16:18, 19);
위 구절이 베드로에게 말해졌다, 그 이유는 배드로에 의해 신앙이 표현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베드로”에 의해, “베드로”라고 불리우는 말씀의 어디에서 이든, 내적 의미에서 신앙이, 최고 의미에서 신앙에 관한 주님이 의미된다.

탁월함이 우수하고 힘도 우수하다. 이는 영광과 거기로부터 파생된 주권을 의미한다. 이는 “탁월함이 우수하다”의 의미가 영광이다로부터, 그 이유가 탁월하면 영광 안에 있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힘이 우수하다”는 주권(sovereignty)이 의미되는데, 그 이유는 힘있는 자가 주권을 쥐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이 구절에서의 “영광(glory)”은 신앙 속에 있는 진리에 관련되고 있다, 그리고 “주권”은 선행 속에 있는 선에 관련되고 있다; 그러므로 영광과 주권이라 말해진다, 즉 선행의 선과 신앙의 진리로부터 이다.

물 같이 가벼운 바. 이는 신앙 만으로는 이와 같은 영광과 주권들을 가지지 못한다를 의미한다. 그 이유는 “물 같이 가볍다”의 의미가 무게가 없다, 또는 힘이 없다 이기 때문이다. 신앙만이, 즉 선행으로부터 분리된 신앙이 뜻해지는 이유는 이어지는 대목에서, 즉 르우벤, 시므온, 레위에 관하여 이어지는 대목으로부터 분명해지기 때문이다; 그 대목에서 그들의 이름 아래 신앙만, 또는 분리된 신앙이 취급된다.

너는 우수하지 않을 것이다. 이는 그것은 영광도, 주권도 가지고 있지 않다를 의미한다. 이는 탁월함에서, 힘에서 “우수하지 않다”의 의미로부터 알게 되는데 이는 앞에서 살폈다. 이런 신앙에서는 영광도 주권도 없다.

그 이유는 네가 네 아버지의 침대 위에 갔기 때문이다. 이는 신앙이 선행으로부터의 선에서 분리될 때 신앙은 더러운 결합을 가진다를 의미한다. 이는 “아버지의 침대 위에 갔다”의 의미가 더러운 결합을 가지는 것이다로부터, 즉 선행의 선으로부터 분리된 신앙이 이런 짓을 한다는 말이다. 그 이유가 만일 여기서와 같이 르우벤에 의해 표현되는 신앙인 교리에 있는 신앙, 또는 이해력에 있는 신앙이 선 쪽으로 개시되지 않거나 선과 결합하지 않거나 한다면, 그것은 흩터지거나, 효력이 없거나 되어 있든지, 또는 악하고 거짓인 것 쪽으로 개시하거나 결합해버리는데, 이것이 여기서 의미된 더러운 결합이다, 그 이유는 이때 이것은 모독이 되기 때문이다. 이것이 이러하다는 것은, 신앙은 선밖에 어느 곳에도 거처할 곳이 없다는 사실로부터 이다, 고로 만일 거기에 거처할 장소를 가지지 않는다면, 신앙은 무익해지거나 악에 들러붙는다. 이는 다른 삶에서 선행 없이 신앙만 있을 경우 그들의 신앙은 흩터지고 마는 것에서 분명해진다; 그런데 그것이 악과 결합했다면, 그들의 몫은 모독과 더불어 있다.
말씀의 내적 의미에서 “간음(adultery)”은 선에 섞음질하는 것을, “매춘(whoredom)”은 진리를 거짓화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더러운 결합은 금지된 수준들이라 불리워져 (레. 18:6-24), 모독의 다양한 종류가 의미된다. 이 본문 역시 모독이 의미되는 것이 분명하다, 즉 “너는 네 아버지의 침대 위에 갔다, 그때 너는 그것을 모독했다; 그는 내 침상 위에 갔다.” 이것이 분리된 신앙을 수단으로 선을 모독함을 뜻하는 것은 르우벤의 사악한 행위가 벌어졌던 (창. 35:22) 대목에서 이미 살핀 바 있다.
신앙만, 또는 선행에서 분리된 신앙과 더불은 경우는 이렇다: 만일 이것이 악과 결합한다면 (이는 누군가가 처음에 신앙 속에 있는 진리를 믿고, 후에 그것을 부정하고, 그것에 반대되게 생활할 때 발생된다), 이때 이것은 모독이 된다; 그 이유가 신앙 속에 있는 진리와 선행 속에 있는 선이 처음에는 교리와 생활을 수단으로 내면들에 뿌리를 박았는데, 그 후에 거기에 악을 불러들여 악과 결합했기 때문이다. 다른 삶에서 최악의 장소가 이런 부류의 인간이 오는 것을 위해 대기하고 있다; 그 이유가 이런 자와 더불은 악은 그로부터 떼어내질 수가 없기 때문, 그래서 다른 삶에서도 그들은 특별 분리되어 관리된다; 이런 인간은 그의 내면들에 저장된 어떤 리메인스도 없다, 그 이유가 (그의 내면들에 악이 들러붙었기에) 그들은 악 안에서 깡그리 멸해졌기 때문이다. 이런 자의 지옥은 먼 거리에서 앞쪽 왼쪽에 있다, 이들이 천사의 시각에서는 해골 같이 보여 생명이 거의 없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러므로 선과 진리를 모독함을 예방하기 위하여 (주님이 미리 보신 바) 거듭남의 싹수가 전혀 없는 자들의 경우, 악 안에, 이로부터 거짓 안에 있는 것이 허용된다, 이때 그는 모독할 수는 없다.

그 다음 너는 그것을 모독했다. 이는 만일 그것이 악과 결합했다면 모독함은 존재했다를 의미한다. 이는 이미 살핀 바 있다.

그는 내 침상(couch)에 올라 갔다. 이는 그것이 자연 평면에 있는 영적 선을 오염시켰다를 의미한다. 이는 “침상에 감”의 의미가 모독함으로 오염시킴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표현함이 자연 평면에 있는 영적 선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5-7절. 시므온과 레위는 형제이다. 폭력의 도구들이 그들의 칼들이다. 6 그들의 비밀 안으로 내 혼은 가지 말지라. 그리고 그들의 회합에 내 영광은 연합하지 말지라. 그 이유는 그들이 분노하자 그들은 사람을 죽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기분이 유쾌하면 그들은 수소를 느슨해지게 했다. 7 그들의 성냄은 격렬한 바 저주받아야 하고, 그들의 분노는 단단한 바 저주 받아야 한다. 나는 그들을 야곱 안에서 나누어 낼 것이고 이스라엘 안에서 그들을 흩뜨리라.

시므온과 레위는 형제이다. 이는 의지에 있는 신앙, 그리고 선행을 의미하는데 여기서의 선행은 거꾸로의 선행이다. 그 이유는 그들이 선행으로부터 분리된 신앙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는 시므온의 표현함이 의지에 있는 신앙 이다로부터; 그리고 레위의 표현함이 선행이다로부터, 그러나 여기서 거꾸로의 것들이다, 그 이유는 그들이 선행으로부터 분리된 신앙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이 신앙이 르우벤에 의해 표현될 때(4절), 이에 뒤잇는 것이 시므온과 레위에 의한 의지에 신앙이 없음, 고로 선행도 없음이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이것들이 그것들의 시작으로부터 시리즈에서 뒤잇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시므온에 의해서는 의지에 있는 거짓이, 레위에 의해서는 행동에 있는 악이 의미된다. 그 이유는 이것들은 의지에 있는 신앙, 선행에 반대되기 때문이다. 이것이 의미되는 이유는 그들이 저주받음으로부터 분명하다.

폭력의 도구들이 그들의 칼들이다. 이는 교리적인 것이 선행의 일들, 이리하여 선행 자체를 파괴하는데 충당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는 “폭력의 도구들”이 선행을 파괴하는 것을 돕는 것이다로부터 (“도구들”이 섬김 속에 있는 것들을 표시하고, 그리고 “폭력”이 선행의 파멸을 표시함에 대하여는 아래에서 살핀다); 그리고 “검들”의 의미가 교리적인 것들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 이유가 “검들(swords, gladius)”은 신앙의 진리들을 표시하고, 이를 수단으로 거짓들과 악들에 맞서 전투가 치러진다(2799항), 고로 “검(machaera)”은 교리적인 것들(종교적 가르침)이다. 여기서는 교리적인 것을 수단으로 진리와 선에 맞서 전투가 치뤄짐, 이리하여 진리와 선이 소멸됨이다, 그 이유는 선행에서 분리된 신앙에 있는 이들이 거꾸로 세력을 떨치기 때문이다.
신앙만에 있는 종교적 지식들(교리들)이 선행을 파괴하는 주된 이유는 이런 것들을 가르치기 때문이다: 즉 인간은 선행의 일들 없이 신앙만을 수단으로 구원된다는 것, 그리고 선행의 일은 필요 요건이 아니다는 것, 설사 그의 전 인생이 어떤 식으로 살아와졌던지 이에는 마지막 한 시간 전까지도 포함된다는 것, 게다가 간음자였던, 잔인했던 자이든, 모독을 일삼았던 자이든 모두가 구원될 수 있다는 것, 구원은 천국으로의 입장 승인이고, 이는 각자 삶의 마지막에서라도 입장 승인의 은총을 받는다면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다. 하여 어떤 자는 자비로부터 뽑혀지고, 어떤 자는 무자비함으로부터 지옥에 떨어진다는 것 등등이다. (아마 이 책이 쓰여진 이전으로 계산하면 한 5백년 전 이상은 족히 넘는데 그때의 경우는 문맹 시대여서 성직자가 위 같이 말해도 먹혀들었지만, 인터넷으로 성직자가 한 말을 조사하고 비교하고 재검토가 가능한 시대가 열린 지금이야 신앙만으로 구원은 가능함이라는 교리로 점철된 신학교를 나왔다 해도 무리수를 두어 억지 주장을 대놓고 할 수준 이하의 성직자는 없을 것이다고 생각해본다. 역자주) 설사 간음자가 천국에 왔다 할지라도, 거기는 생명과 생명의 교류가 그 당사자를 거기서 거주할 수 없게 하고 만다. 그 이유는 그가 거기서 자기 생명의 악으로 말미암아 고통을 견디기 어렵기 때문, 따라서 자기 생명을 드넓게 발휘하여 속이 시원할 가장 깊은 지옥으로 가기를 소원할 것이기 때문이다.
“검”이 싸우고 살육하는 거짓을 의미하는 것을 말씀에서 읽을 수 있다:
붉은 또 다른 말이 나왔다, 그리고 그 위에 앉은 자에게 땅으로부터 평화를 가져가는 것이 주어졌다, 하여 그들은 서로를 죽일 것이다, 그러므로 그에게는 큰 검이 주어졌다 (계. 6:4).
다시:
만일 누군가가 검으로 죽인다면, 검을 가지고 그가 죽여질 것이다 (계. 13:10, 14).
“폭력”이 선행에 타격을 가한 폭력이다는 것은 말씀의 많은 구절로부터 분명해진다:
폭행자는 중지될 것이다, 조롱자는 소진 될 것이다, 불법을 영글게 한 모든 자는 절멸될 것이다, 이런 자들이 말을 가지고 사람을 죄짓게 만든다, 그리고 큰 문에서 사람을 꾸짖어 올가미를 씌웠다, 그리고 의로운 자를 텅빔으로 들어서게 했다 (이. 29:20, 21);
위 구절에서 “폭행자”는 원어에서는 또 다른 단어로 표현하나 의미는 거의 같다; “폭행자”는 선행에 상해를 입힌 자이다는 것이 “사람을 말을 가지고 죄짓게 만든다”, 그리고 “의로운 자를 텅빔으로 들어서게 하다”에 의해 의미되고 있다.
다시:
그들의 일들은 불법의 일들이다, 그리고 폭력의 행위가 그들의 손 안에 있다. 그들의 발은 악쪽으로 내달린다, 그리고 그들은 순진한 피를 서둘러 흘리게 만든다 (이. 59:6, 7);
위에서 “폭력”은 선행에 가한 폭력이다, 이것 또한 “피를 흘림”에 의해 의미되고 있다. 다시:
폭력이 네 토지에 더 이상 있지 않을 것이다, 네 경계내에서 황폐해짐과 파괴가 없을 것이다 (이. 60:18);
위에서 “폭행”은 선행의 파멸을 표시한다, 그 이유가 이 파멸로부터 “토지, 즉 교회의 황폐함과 파괴”가 오기 때문이다.
예레미야서에서:
나는 폭력과 황폐를 외칠 것이다; 그 이유는 여호와의 말이 나를 꾸짖어 내가 온종일 수치함에 있기 때문이다 (예. 20:8);
위에서 “폭력”은 영적인 것들에 있는 폭력을 표시한다, 고로 선행의 파멸과 신앙의 파멸을 표시한다. 에스겔서에서:
토지가 피들의 심판으로 가득하다, 그리고 도성은 폭력이 가득하다 (겔. 7:23);
위에서 “피들의 심판”은 신앙의 파멸, “폭력”은 선행의 파멸을 표시한다.
다시:
만일 그가 아들을 낳았는데, 폭행하는 것, 피를 뿌리는 것, 이런 짓들을 누군가에게 행하는 자이다면: 만일 그가 산들 위에서 먹었고, 그의 동료의 아내를 더럽혔다면,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를 핍박했다 면, 약탈품을 가로채고, 저당물을 내주지 않는다면, 자기 눈을 우상들에게로 들어 올리고, 역겨운 짓을 한다면, 돈놀이에 주어서 이자를 받아 먹었다면, 그는 살 것이냐? 그는 살지 못할 것이다, 정녕 그는 죽는다 (겔. 18:10-13);
위에서 “폭행하고 피를 뿌리는 아들”이 묘사되어 있다, 그리고 그것이 파괴하는 선행의 모든 일들이 열거되고 있다; 고로 “폭행하고 피를 뿌리는 아들”은 선행과 신앙의 파괴자이다.
다윗서에서:
오 여호와시여 저를 악인으로부터 구출하소서, 저를 폭행자로부터 보전되게 하소서, 그들은 그들의 심정에서 악들을 생각합니다, 온종일 그들은 전쟁을 위해 함께 모이고 있습니다; 그들은 뱀 같이 그들의 혀를 날카롭게 합니다, 그들의 입술 아래에는 독사의 독이 있습니다. 사악한 자의 손으로부 터 저를 지키소서 오 여호와여; 저를 폭행자로부터 보전해주소서. 혀의 사람이 땅위에서 존속 못하게 하소서; 악으로 그를 뒤엎도록 폭력의 사람을 사냥하게 하소서 (시. 140:144, 11);
“폭력의 사람”은 신앙의 진리들과 선행의 선들을 파괴하는 이들을 표시한다; 그들이 이 진리들과 선들에 맞서 싸우는 것이 그들이 “전쟁을 위헤 온종일 함께 모인다, 뱀같이 혀를 날카롭게 한다, 그들의 입술 아래 독사의 독이 있다, 그리고 악이 그를 뒤엎으려고 그를 사냥한다”에 의해 의미되고 있다. (위 구절 외에, 겔. 12:19; 욜. 4:19; 말. 2:16, 17; 습. 3:4; 시. 18:48; 55:9-11; 58:3-6; 신. 19:16 도 더 찾아 읽을 수 있다.)

그들의 비밀(스런 장소) 안으로 내 혼은 가지 말지라. 이는 영적 선은 그들의 의지 속에 있는 악들을 알고 싶어하지 않음을 의미한다. 이는 이를 자신에게 말하는 이스라엘의 표현함이 영적 선이다로부터; 그리고 “비밀함으로 가지 않음”의 의미가 알기를 바라지 않음, 즉 “시므온과 레위”에 의해 의미된 의지 속의 악들을 알기를 바라지 않음이다로부터: “내 혼”이라 말해지는 이유는 여기서 영적 선을 갈망하는 선의 생명이 의미되기 때문; 그것의 진리의 생명은 이어지는 말에서 있는 “영광”에 의해 의미되어진다.

그리고 그들의 회합에 내 영광은 연합하지 말지라. 이는 영적 선으로부터의 진리는 거기서 파생된 그들의 생각 속의 거짓들을 알고 싶어 하지 않음을 의미한다. 이는 이스라엘의 표현함이 영적 선이다로부터; “그들의 회합에 연합하지 않다”의 의미가 그들의 생각 속의 거짓들과 결합하기를 바라지 않음, 고로 그것들을 알기를 바라지 않음이다 (생각 속의 거짓이 “회합”에 의해 의미된다, 이것은 마치 “무리들” 같이 진리들을 서술하나 반대 의미에서는 거짓들이다); 그리고 “영광”의 의미로부터, 이것은 진리를 서술한다, 그 이유가 진리는 영적 선에 있는 이들에게 영광이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그들이 분노하자 그들은 사람을 죽였기 때문이다. 이는 그들은 자신들을 깡그리 돌아서게 했다, 이렇게 방향을 틀어 버리는 와중에 신앙을 소멸되게 했음을 의미한다. 이는 “성냄”의 의미가 선행으로부터 퇴조함, 그리고 돌아섬이다로부터; 그리고 “죽이다”의 의미함이 소멸되게 하다 이다로부터; 그리고 사람(남자, vir)의 의미가 신앙의 진리이다로부터 알려진다.

그리고 기분이 유쾌하면 그들은 수소를 느슨해지게 했다. 이는 타락된 의지로부터 그들은 선행의 외적인 선을 완전히 쇠약해지게 했다를 의미한다. 이는 “유쾌하다(good pleasure)”의 의미함이 의지이다, 여기서는 타락된 의지이다로부터; “느슨해짐(unstring)”이 약해지는 것이다로부터; 그리고 “수소”의 의미가 선행의 자연적, 또는 외적인 선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수소”가 여기서 말해지는 이유, 그리고 방금 앞에서 “사람”이 말해지는 이유는, “사람(남자)”에 의해 신앙의 진리가, “수소”에 의해 선행의 선이 의미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선이 취급될 때, 진리 역시 취급되도록, 그 이유는 말씀의 모두 각각에서 천국의 결혼이 있기 때문이다.

그들의 성냄은 격렬한 바 저주받아야 한다. 이는 선으로부터 비극적으로 돌아 섬을, 결과적으로 정죄됨을 의미한다. 이는 “저주되다”의 의미가 정죄(定罪)되다 이다로부터, 그 이유는 저주되어져 버린 자는 정죄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성냄”의 의미가 선으로부터 돌아섬이다로부터; 고로 “격렬한 성냄”은 비극적 돌아섬을 표시한다.

그리고 그들의 분노가 단단하였기 때문이다. 이는 파생된 진리로부터 돌아 섬, 그것이 확증되어 버리고 마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분노(wrath)”의 의미가 진리로부터 돌아섬이다로부터; 그리고 “단단하다”의 의미가 확증하는 것이다로부터, 그 이유가 확증되어진 거짓들은 설득되기 까지 하기 때문에 단단해서 이다. 이 단단함이 경험으로부터 알도록 내게 허락되었다. 영들과 천사들 사이에서 선으로부터의 진리는 부드러운 것으로 나타나고 시야에 표출되어진다, 그러나 악으로부터의 거짓은 단단한 것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이 단단함은 악으로부터의 거짓이 확증됨에 비례해서이다. 설득이 많은 것들로부터 확증함들을 수단으로 야기 되었을 때, 이 단단함은 거기서 마치 뼈의 단단함 같이 나타난다. 이런 단단함은 마치 세상의 단단함 같다, 세상에 있는 단단함은 빛의 광선을 되튕긴다. 고로 주님으로부터 천국의 빛이 단단함 에 낙하할 때 악과 거짓에 의해 생산되는 것은 되튕기는 것이다; 그러나 주님으로부터 천국의 빛이 부드러움에 낙하할 때, 선으로부터 진리에 의해 생산되는 것은 받아들임이다.

나는 그들을 야곱 안에서 나누어 낼 것이다. 이는 그들은 자연 평면 안에서 추방되어야 마땅함을 의미한다. 이는 “나누다”의 의미가 진리와 선으로부터 분리함과 제거함이다로부터, 고로 추방함이다; 그리고 유다의 표현함이 자연 평면 또는 외적 인간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스라엘 안에서 그들을 흩뜨리라. 이는 그들은 영적 인간 안에서도 추방되어야만 한다를 의미한다. 이는 “흩뜨리다”의 의미가 추방하다 이다로부터; 그러나 “흩뜨림”은 “나누다”와 구별되는데, 후자는 외적 인간 또는 진리를 서술하나, “흩뜨림”은 내적 인간 또는 선을 서술한다. 이상 살핀 것들, 즉 이스라엘에 의해 르우벤, 시므온, 레위에 관련하여 말해진 사항들은 (1절의) 날들의 끝에서 그들의 후손들은 저주받지 않았고, 그리고 야곱 안에서 나누고, 이스라엘 안에서 흩어지지 않았다는 것은 이런 사실만 보아도 짐작된다: 즉 시므온 지파는 지파들 중의 하나로서 여전히 건재했다는 것, 레위의 경우는 저주가 아닌 오히려 축복이라 말해도 괜찮게 그들은 성직 직분을 수행하게 되었다는 것, 르우벤 지파 또한 다른 지파 보다 시시하거나 천박하지 않았다는 것 등등이다. 그러므로 분명한 것은, 날들의 끝에서 그들에게 닥칠 것이라고 하여 야곱의 아들들에 대해 이 장에서 말해지는 것은 그들에게 닥치는 것이 아니라. 그들에 의해 내적 의미에서 뜻해진 것들에 닥치는 것들이라는 말이다; 5-7절의 경우, “르우벤”, “시므온”, “레위”에 의해 내적 의미에서 뜻해진 이들, 즉 선행으로부터 분리된 신앙에 있는 이들에게 닥치는 것들이다는 말이다. 이로부터 분명해지는 것은, 말씀의 내적 의미는 글자에서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 자연적인 것들과 영적인 것들 사이에 있는 상응 관계를 알지 못하는 이들에게 나타나지 않는 의미이다는 것, 그리고 영적인 것이 무엇이며, 천적인 것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하는 이들에게 내적 의미는 완전 어둠이다는 것이다.

8-12절. 너 유다야, 네 형제들이 너를 경축할 것이다, 네 손이 네 원수의 목에 있을 것이다, 네 아버지의 아들들이 너에게 절할 것이다. 9 유다는 사자의 새끼이다. 먹이됨으로부터 내 아들 너는 올라 갔다. 그는 구부렸다, 어떤 사자 같이, 늙은 사자 같이 웅크렸다. 누가 그를 일으켜지게 할까? 10 (임금의) 홀이 유다로부터 옮겨지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법률 제정자가 그의 발 사이로부터 실로가 올 때 까지 조차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에게 백성들이 순종한다. 11 그는 그의 젊은 나귀를 포도나무에 맨다, 그리고 그의 나귀 새끼는 특선한 포도나무에 맨다. 그는 자기 옷을 포도주로 씻는다, 그리고 그의 덮개는 포도의 피로 빤다. 12 그의 눈은 포도주로 인하여 붉다, 그리고 그의 이는 우유로 인하여 희다.

너 유다야. 이는 천적 (수준의) 교회(the celestial church), 최고 높은 의미에서 신성의 천적 부분 측면에서의 주님 (the Lord as to the Divine celestial)을 의미한다. 이는 유다의 표현함이 최고 의미에서 사랑의 신성 측면에서의 주님, 또는 신성의 천적 부분 측면에서의 주님이다로부터; 그러나 관계적 의미에서는 주님의 천적 왕국, 고로 천적 (수준의) 교회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네 형제들이 너를 경축할 것이다. 이는 이 교회는 여타 나머지 교회를 넘어서 특출하다를 의미한다. 이는 “경축되어짐”이 특출해 있다 이다로부터; 여기서 “너”인 유다의 표현함이 천적 수준의 교회이다로부터: “형제들”의 의미가 이 교회의 진리들, 고로 또한 이 진리들에 있는 교회들이다로부터; 이것은 유다의 형제들이 표현한다, 그 이유가 진리들과 선들이 교회를 구성하기 때문에서 이다. 천적 교회의 진리들이 “네 형제들”, 즉 유다의 형제들에 의해 의미된다; 한편 영적 (수준의) 교회의 진리들은 “그의 아버지의 아들들”에 의해 의미된다.

네 손이 네 원수의 목에 있을 것이다. 이는 지옥적이고 악마적인 패거리들은 그의 현존에서 혼비백산할 것이다를 의미한다. 이는 “적들(원수들)”의미가 지옥적인 악마적인 패거리들이다로부터, 그 이유가 이것들이 영적인 적들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의 목에 네 손이 있다”의 의미가 도망가는 중에 있는 자들을 추격함이다, 그 이유가 적들이 도망할 때, 정복자의 손이 그의 목에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의 현존에서 그들이 도망할 것이다 라고 말해진 이유는 지옥의 어떤 패거리가 주님의 천적 왕국의 천사에게 접근할 때, 그는 천사가 현존만 해도 견디지 못해 도망하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그는 천적 사랑, 즉 주님을 사랑함의 기운에 버텨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 기운은 지옥의 패거리들에게는 태워버리고, 고통을 주는 불이 되기 때문이다. 더욱이 천적 천사들은 결코 싸우지 않는다, 더욱이 제아무리 원수라 해도 그의 목에 자기 손을 놓지 않는다, 실로 그가 관심을 두는 누구도 원수로서 간주하는 일이 없다; 그럼에도 이렇게 표현되는 이유는 이 세상의 조건 때문이다; 그러나 진짜의 의미는 지옥의 것들이 자기들을 그의 원수로 간주하여 그가 나타나자 혼비백산 달아나는 것이다.

네 아버지의 아들들이 너에게 절할 것이다. 이는 진리들은 자발적으로 자신들을 복종시킬 것이다. 이는 “절하다”가 자신들을 복종하게 하다 이다로부터; 그리고 “아버지의 아들들”의 의미함이 영적 선으로부터 있는 진리들이다로부터, 그 이유가 “이스라엘의 아들들”이 영적 진리들을 표시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스라엘”이 영적 선이다에서 알게 된다. 이 진리들이 자진해서 복종하는 이유는, 유다에 의해 표현된 천적 수준의 사랑이 이스라엘의 아들들에 의해 표현된 영적 진리들 안으로 흘러들 때, 그것을 질서에로 배치하기 때문, 고로 그것들을 주님에게 복종되게 하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천적 부분은 영적 진리 안으로 유입을 통하여, 즉 선이 유입을 통하여 진리 안에서 이런 효력을 가지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주님의 천적 왕국은 가장 깊은(안쪽, inmost) 천국, 또는 셋째 천국인 것, 고로 다른 천국 보다 주님에 가장 가까운 천국이다. 이에 비해 주님의 영적 천국은 중간, 또는 둘째 천국인데, 주님으로부터 좀 멀리 떨어져 있다. 이 질서로부터 주님은 영적 왕국 안으로 천적 왕국을 통하여 간접적으로, 그리고 직접적으로 모두에서 흘러드신다. 영적 왕국은 천적 왕국을 수단으로 질서 안에 보존된다, 그리고 이 질서에서 주님에게 복종한다. 천적 왕국으로부터의 유입은 이웃을 향한 사랑을 수단으로 결과되어진다, 그 이유가 이 사랑이 천적 왕국에게는 외적 부분이고, 영적 왕국에게는 내적 부분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두 왕국의 결합이 있다.

유다는 사자의 새끼이다. 이는 타고난 힘(force, strength, 氣勢)을 지닌 순진을 의미한다. 이는 “사자”의 의미함이 사랑의 선과 거기로부터 파생하는 진리가 그것들의 힘 안에 있다이다로부터 (아래에서 살핀다); 고로 “사자의 새끼”는 힘들을 가진 순진을 표시한다. “타고난 힘을 가진”이라고 말한 이유는 여기서 “유다”는 사랑의 천적 부분이고, 사랑의 천적 부분은 의지 부분에 있기 때문이다; 고로 타고난 힘들을 가지고 있다; 그 이유가 인간이 의지 부분의 것들 쪽에서 태어나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태고 교회에 속했던 이들은 천적 부분에 속했고, 자기들이 의지 부분에 선을 가졌던 만큼에서 사랑의 선 안으로 태어나진다. “사자의 새끼”가 순진을 표시하는 이유는 “사자”가 천적 수준의 사랑의 선을 표시하고, “새끼”는 마치 그것의 유아이듯 하여 순진을 표시하기 때문이다.
“사자”가 천적 수준의 사랑의 선을 표시하는 것, 그리고 파생되는 진리, 그것의 힘 안에 있는 것, 그리고 반대적 의미에서는 자아 사랑의 악이 그것의 힘 안에 있는 것을 표시하는 것은 “사자”가 언급되는 말씀의 많은 구절들로부터 분명해진다. 우선 천적 사랑의 선이 표시되는 구절이다:
보라 유다의 지파 속에 있는 사자, 다윗의 뿌리가 승리를 하시어 그 책을 여시고, 거기의 일곱 인들을 푸신다(떼신다) (계. 5:5);
여기서 주님이 그분 자신의 신성의 사랑과 거기서 파생되는 신성한 진리에 속하는 전능하심으로부터 “사자”라고 불리우신다. 말씀의 다른 구절들에서, 여호와, 또는 주님이 “사자”에 비교되어진다; 즉
그들은 여호와의 뒤를 따라 갈 것이다; 그분은 사자 같이 표호하실 것이다; 그 이유는 그분이 표호하시고, 아들들은 바다로부터 영예와 더불어 오기 때문이다 (호. 11:10).
이사야서에서:
고로 여호와께서 나에게 말하셨다, 사자가 표호할 때 같이, 그리고 젊은 사자가 자기 먹잇감 위에 있을 때 같아, 만일 많은 목자들이 그에게 달려왔다해도, 그는 그들의 음성에서 당황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야단법석에서 괴로워하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여호와 체바욷께서는 싸우시기 위해 시온 산 위에, 거기로부터의 언덕 위애 오실 것이다 (이. 31:4);
위에서 신성한 선의 전능하심이 “사자”에 비교되고 있다, 그리고 거기서 파생되는 신성한 진리의 전능함이 “어린 사자”에 비교된다, 그 이유가 “여호와 체바욷께서 싸우시기 위해 시온 산과 거기로부터의 언덕들에 오신다”라고 말해지기 때문, 여기서 “시온산”은 신성의 사랑의 선을 의미하고, 그리고 “거기로부터의 언덕”은 거기서 파생되는 신성한 진리이기 때문 이다.
같은 이유로 에스겔서와 계시록서에서 동물들, 이를 수단으로 거룹들이 의미되는데, 사람, 사자, 수소, 독수리의 얼굴들을 가졌다. 에스겔서에서:
네 동물들의 얼굴들의 닮음이다: 오른쪽에서 사람의 얼굴과 사자의 얼굴을 그들 넷이 가졌다; 그리고 왼쪽에서 수소의 얼굴을 그들 넷이 가졌다; 그리고 그들 넷은 독수리의 얼굴을 가졌다 (겔. 1:10; 10:14).
그리고 계시록서에서:
왕좌 앞에 앞과 뒤에 눈들이 가득한 네 동물들이 있었다. 그리고 첫째 동물은 사자 같았았다, 그리고 둘째 동물은 송아지 같았다, 셋째 동물은 사람으로서의 얼굴을 가졌다, 넷쩨 동물은 날고 있는 독수리 같았다 (계. 4:6, 7).
이 동물들이 거룹들이라고 에스겔서 10장에서 말해진다, 그리고 계시록서에서 그것들의 묘사됨으로부터 분명해진다, 즉 그들은 앞과 뒤에 눈들을 가졌다; 그 이유가 “거룹들”에 의해 주님의 미리 보셨음과 섭리하심이 의미되기 때문이다: 그들이 사자의 얼굴을 가졌다는 것은 신성한 선으로부터 신성한 진리의 전능하심으로부터 이었다는 것, 이것은 섭리 속에 있다. 새로운 성전에 관련하여 있는 거룹들도 비슷하였다 (겔. 41:19).
천적 수준의 인간, 그는 선과 파생된 진리로부터, 즉 주님으로부터 있는 힘 안에 있다는 것이 “사자들”에 의해 뜻해진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그들에게 부족함이 없다. 젊은 사자가 결핍되고 배고픔을 견딘다; 그러나 여호와를 찾는 그들은 어떤 선도 부족하지 않을 것이다 (시. 34:9, 10).
다시:
사자들이 그들의 먹잇감을 따라 으르렁댄다, 그리고 하느님으로부터 그들의 식품을 찾으려 한다. 태양이 올라온다, 그들은 함께 모일 것이다, 그리고 그것들은 그들의 거처들에 누울 것이다 (시. 104:21, 22).
그리고 발람의 예언에서:
그 때에 야곱과 이스라엘에게 말해질 것이다, 하느님이 어떻게 역사하셨는지! 보라 백성들이 늙은 사자로서 일어날 것이다, 그리고 젊은 사자로서 그는 자신을 일으킬 것이다; 그는 먹잇감을 먹을 때까지 쉬지 않을 것이다 (민. 23:23, 24).
그리고 다시:
발람이 자기들의 지파들에 따라 거주하는 이스라엘을 보았을 때 말했다, 그는 구부리고 있다, 그는 사자 같이 웅크린다, 그리고 늙은 사자 같아 누가 그를 일어나게 하는가? (민. 24:2, 9).
위에서 천적 수준의 인간이 묘사된다, 그 이유가 발람이 이스라엘이 지파들에 따라 거주하는 것을 영 안에서 보았을 때, 지파들이 그들의 진영에 의해 표현된 천적 수준의 질서이었기 때문이다. 이 질서는 주님으로부터 신성한 진리를 통하여 신성한 선으로부터 이다, 그리고 이 질서 안에 모든 권능이 있다, 이것이 여기서 “구부리고 웅크린 사자”에 의해 표시되고 있다.
미가서에서:
야곱의 남은 자들이 나라들 사이에, 많은 백성들 사이에 있을 것이다, 마치 사자가 숲속의 들짐승 사이에 있듯, 젊은 사자가 양떼들 사이에 있듯 이다; 그가 통과하고, 짓밟고 흩뜨린다, 구출될 자 아무도 없다. 너희의 손이 너희의 적들 위에서 의기양양해지게 하라, 그리고 모든 네 적들이 멸절되게 하라 (미. 5:8, 9).
위에서 “사자”와 “젊은 사자”는 천적 수준의 선과 천적 수준의 진리를 표시하고, 이것이 “야곱의 남은 자들”이다. 이 의미와 비슷한 의미를 지닌 구절로는 이. 21:8; 예. 25:38; 겔. 32:2; 슥. 11:3도 있다. 이와 같은 의미가 솔로몬의 왕좌 양쪽에서, 여섯 계단들의 열두 사자들에 의해서도 표현되어 있다 (왕상. 10:18-20); 또한 열 놋쇠 받침들의 가장자리에 있는 사자들에 의해서도 표현되었다 (왕상. 7:29, 36).
반대적 의미에서 “사자”는 자아 사랑의 악이 그것의 힘 안에 있는 것을 의미한다. 즉:
거기에 사자가 있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굶주린 짐승이 그 위에 올라가지 않을 것이다, 그것이 거기서 발견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자유로이 갈 것이다; 고로 여호와께서 되찾은 자들이 돌아와 노래하며 시온에 올 것이다 (이. 35:9, 10).
예레미야서에서:
왜 이스라엘이 먹잇감이 되었느냐? 젊은 사자가 그에 맞서 으르렁댄다, 그들은 자기들의 음성을 발음한다, 그것들은 그들의 토지를 황폐해짐으로 환원되게 한다 (예. 2:14, 15).
다시:
사자가 그의 덤불로부터 올라온다, 그리고 나라들을 파괴하는 자가 여행했다, 그는 토지를 황폐쪽으 로 되돌리기 위해 그의 궁전으로부터 나갔다 (예. 4:7)
다시:
그들은 여호와의 길을, 그들의 하느님의 정의를 알지 못해왔었다. 그러므로 숲으로부터의 사자가 그들을 쳐죽이며, 그리고 들판의 이리가 그들을 황폐해짐에 눕게 할 것이다 (예. 5:4, 6).
그리고 나훔서에서:
사자의 주택(사자굴)이 어디 있느냐? 젊은 사자들의 풀밭(먹는 장소)이 어디이냐? 어디서 사자, 늙은 사자, 사자의 새끼가 성큼성큼 걷더냐? 그리고 아무도 (그것들이) 두려워 떨게 하지 못했지 않느냐? 사자는 그의 새끼들을 위하여 (먹이를) 충분히 잡았다, 그리고 그의 늙은 암사자를 강건하게 했다. 보라 나는 너에 맞서 있다, 여호와 체바욷께서 말하신다, 그리고 나는 너의 병거를 태워 연기 안에 있게 할 것이다, 그리고 검이 젊은 사자들을 삼킬 것이다; 그리고 나는 땅으로부터 먹잇감을 절멸할 것이다 (나. 2:11-13).
니느웨에 관하여 말하고 있다. 위 구절에서 “사자”는 자아 사랑의 악이 파괴하고 황폐하게 할 때 그것이 소유한 힘을 표시한다; 이와 비슷한 구절이 예. 12:8; 49:19; 50:17, 44; 51:38; 겔. 19:2-11; 33:2; 욜. 1:6; 습. 3:3; 시. 57:5; 58:6; 91:13; 계. 13:2도 있다.

먹이감이 됨으로부터 내 아들 너는 올라 갔다. 이는 주님으로부터 천적 수준의 것을 통하여 많은 사람들이 지옥으로부터 해방됨이 있다를 의미한다. 이는 “먹잇감이 됨으로부터 올라갔다”의 의미가 지옥으로부터 해방됨이 있다 이다로부터 (아래에서 살핀다); 그리고 여기서 “내 아들”인 유다의 표현함이 신성의 천적 부분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먹잇감이 됨에서 올라감”이 지옥으로부터의 해방됨을 표시하는 이유는 인간은 그 스스로부터서는 지옥 안에 있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자기 자신으로부터 의지와 생각은 악과 거짓밖에 없기 때문, 이를 수단으로 그는 지옥에 붙들인 바 되고 있어 폭력 없이 거기로부터 떼어내질 수가 없다. 이 떼어냄과 해방됨(구출됨)이 “먹잇감”이라 불리운다; 그리고 이것이 주님의 신성한 선으로부터 행해지기 때문, 하여 천적 수준의 것을 통하여 주님으로부터 많은 이들이 지옥으로부터의 해방됨이 있다고 말해진 것이다.
그러나 알아야하는 것은, 육체의 삶에서 그가 영적 선 안에, 즉 신앙을 통하여 선행 안에 있었지 않으면 지옥으로부터 떼어냄이나 해방됨이 없다는 것이다; 그 이유가 그가 신앙을 통하여 이 선 안에 있었지 않으면, 주님으로부터 흘러드는 선을 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주님의 선은 통과하여 흐르는 바, 이를 받을 그릇이 없다면, 주님의 선은 어느 곳에서도 안착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럴 경우의 인물들은 지옥들로부터 떼어내지거나 해방될 수 없다. 그 이유가 인간이 육체의 삶에서 획득한 모든 상태들이 다른 삶에 고스란히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이 그를 채우고 있다; 다시 말해 그들이 지니고 온 선의 상태들에 주님의 선이 채워져(보완되어) 천국으로 올려지는 것이다, 또는 그들이 지니고 온 악의 상태들에 악이 보충되어 지옥으로 내려진다. 이것이 인간이 죽을 때, 그와 같이 그는 남는다고 말함의 뜻이다. 이상 살핀 것으로부터, 신성의 천적 부분을 수단으로 지옥으로부터 주님에 의해 해방될 수 있는 자가 누구인지 분명해졌을 것이다. (이 대목은 영계에서의 사건임을 미리 감지하며 읽는 것도 이해에 도움이 될지 모른다 역자주.)

그는 구부렸다, 어떤 사자 같이, 늙은 사자 같이 웅크렸다. 이는 사랑의 선과 거기서 파생된 진리가 그들의 능력 안에 있음을 의미한다. 이는 “구부리다”의 의미가 자기 힘을 뻗치는 것이다로부터, 그 이유가 사자가 (먹잇감을 보고) 웅크릴 때, 이 자세는 힘줄을 단단히 조이고, 힘을 모으는 것이기 때문이다; “웅크리다(couch)”의 의미가 두려움 없이 안전하게 눕다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자”와 “늙은 사자”의 의미가 사랑의 선과 파생되는 진리가 그것들의 힘 안에 있다 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젊은 사자”는 선으로부터 진리를 통하여 힘 안에 있는 자이고, “늙은 사자”는 선을 통하여 힘 안에 있는 자이다. 그 이유가 천적 수준의 사랑 안에 있는 자는 결코 싸우지 않고 선을 통하여 안전하게 있기 때문이다; 그들이 가는 곳에서는 악들이 도망한다, 그 이유는 악은 그들의 현존을 견뎌낼 수 없기 때문이다; 이것이 “늙은 사자”에 의해 의미되는 이들이다.

누가 그를 일으켜지게 할까? 이는 그는 지옥 안에 있는 모든 것 사이에서 안전하다를 의미한다. 이는 “누가 그로 일어나게 할까”의 의미가 안전하게 있다 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것이 지옥들에 있는 모든 이들 사이에서 임을 표시하는 이유는 그가 모든 악들 사이에서 안전해 있기 때문, 설사 지옥들 한 가운데에서 조차 그렇다는 말이다; 그 이유가 주님을 사랑함과 이웃을 향한 사랑이 이 결과를 가지기 때문인데, 이 사랑에 있는 이들은 주님과 아주 밀접하게 결합해있고, 주님 안에 있기 때문, 그 이유는 그들이 그분으로부터 진행하는 신성 안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어떤 악도 그에게 접근조차 시도할 수 없다. 우리가 알아야하는 것은, 무수한 지옥들이 있다는 것, 이 지옥들은 종과 속에 따라 등차별로 구분되어 있다는 것, 이 종과 속은 그 세부 사항적으로 무수하다는 것이다; 각 지옥 안은 이런 질서로 있다는 것; 이 질서는 천적 수준의 천사들을 통하여, 직, 간접적으로 주님에 의해 보존된다는 것; 상황에 따라서는 천사들이 그들의 무질서를 질서로 가져다 놓기 위해 지옥 이리저리로 보내진다는 것; 이 수준의 천사들은 그들의 임무 수행에서 안전해 있다는 것이다. 이러므로 천적 수준의 것 안에 있는 이들은 지옥들에 있는 모든 이들 사이에서 안전하다고 말한 것이다.

홀(지휘봉)이 유다로부터 옮겨지지 않을 것이다. 이는 주권은 천적 수준의 선으로부터 떠나지 않을 것이다를 의미한다. 이는 “옮긴다”의 의미가 떠나다 이다로부터; “홀(scepter)”의 의미가 주권이다로부터, 실로 선으로부터 진리의 주권이다, 그 이유가 지휘봉은 왕권의 표지이기 때문, 그리고 왕권에 의해 진리가 의미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유다의 표현함이 천적 왕국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글자의 의미로부터 나타나는 대로라면, 이 구절에 포함되는 것은, 왕국이 주님이 오실 때까지 유태 백성으로부터 옮겨지지 않을 것이다가 뜻해진다. 이것 역시 맞다, 이런 역사적 진리 안에서도 내적 의미가 있다; 그 이유가 왕국이 유태 백성으로부터 옮겨지지 않는 것은 세상의 문제이다; 그러나 내적 의미의 영적 진리는 “홀”을 주권으로 이해할 때, 그리고 “유다”가 천적 왕국으로 이해할 때 나타난다. 그러나 이 주권이 주님이 오실 때까지 천적 왕국으로부터 떠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은 계시로부터 알지 않으면 누구도 알 수 없는 비밀이다. 이러하다: 주님께서 세상에 오시기 이전, 여호와, 또는 주님으로부터 인간과 영들에게 생명을 유입하심은 천적 왕국을 통하여, 즉 이 왕국에 있는 천사들을 통하여 있었다. 그러므로 그들이 주권을 가졌다. 그러나 주님이 세상 안으로 오셨을 때, 그리고 그분 자신 안에서 인간을 신성으로 만드셨기 때문에, 그분은 천적 왕국의 천사들과 더불어 있었던 것을 입으신 것이다, 고로 그분은 이 주권을 입으신 것이다. 그 이유가 이전의 신성은 신성한 인간이 되어주었던 이 천국을 통하여 내려와졌다; 이것은 여호와께서 나타나셨을 때 시야에 표출되어진 신성한 사람(Man, Person)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 신성한 인간은 주님 자신이 자신 안에서 인간을 신성으로 만드셨을 때 중지되었다. 이는 이 경우가 어떻게 비밀한지를 보여준다. 이 왕국의 천사들은 실로 큰 주권을 지금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들이 그분을 사랑함을 통하여 주님의 신성한 인간 안에 있는 만큼에서이다.

그리고 법률 제정자가 그의 발 사이로부터. 이는 더 낮은 것들에서 이 선으로의 진리들이다로부터 (아래에서 살핀다); 그리고 “발”의 의미함이 자연 수준의 것이다로부터, 고로 보다 수준 낮은 것들이다. 그 이유가 자연 평면은 아래쪽에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천적인 것들은 위쪽에 있기 때문이다. “법률제정자가 그의 발 사이로부터”라고 말해졌는데, 이는 천적 평면의 영적 부분이 의미되도록 하기 위하여, 또는 선으로부터 있는 진리가 의미되도록 하기 위하여서이다. 그 이유가 그때 당시 영적 왕국은 주님의 오심 이후 같이 천적 왕국과 구별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천적 왕국과 하나로 되어 있었고, 단지 천적 왕국의 외적 부분으로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의 발 사이로부터”라고 말해져서 선으로부터의 진리가 의미되도록 말해졌다; 그 이유가 그의 발 사이에 라는 말이 발의 안쪽 측면이 뜻해졌고, 이것이 그의 허리와 교통함으로부터 임이 의미되었기 때문이다, 이 진리로부터 “실로가 올 때 옮겨짐”도 말해지고 있다, 즉 그것의 주권이 옮겨질 것, 즉 천적 왕국의 것과 같은 주권이 옮겨진다는 말이다; 그 이유가 그때 당시 천적 왕국은 이 진리를 수단으로 그것의 주권을 행사했었기 때문; 그리고 이것이 그러했기 때문에 이 진리가 “법률제정가”라고 불리운 것이다. 이 진리가 이사야서에서 “법률제정가”에 의해 내적 의미에서 뜻해져 있다:
여호와는 우리의 재판관이시다, 여호와는 우리의 법률제정가 이시다, 여호와는 우리의 왕이시다 (이. 33:22);
위에서 “재판관”은 그분이 선으로부터 행하신다를 표시한다; “법률제정가”는 그분이 이 선으로부터의 진리로부터 행하신다를 표시한다; “왕”은 그분이 진리로부터 행하신다를 표시한다; 고로 그것들은 질서에 따라서 이다. 다윗서에서:
길르앗은 나의 것이다, 그리고 므낫세는 나의 것이다, 그리고 에브라임은 내 머리의 강함이다, 유다는 나의 법률제정가이다 (시. 60:7; 108:8);
위에서 “유다는 법률제정가”란 천적 선과 그것의 천적 진리이다. 모세의 책에서:
샘, 제 1 인 자들이 그것을 팟다, 백성의 귀인들이 그것을 팟다, 법률제정가를 수단으로, 그들의 장대들을 가지고 이다 (민. 21:18).
다시:
갓은 자신을 위한 첫 열매들을 보았다, 그 이유가 감추인 법률제정가의 지분이 있었기 때문이다; 거기로부터 백성의 머리들이 왔다; 그는 여호와의 정의를 일했다, 그리고 그분의 공정을 이스라엘 과 더불어 (신. 33:21);
위에서 “법률제정가”는 선으로부터의 진리를 표시한다.

실로가 올 때까지. 이는 주님의 오심, 그리고 그 다음 평화의 고요함을 의미한다. 이는 “실로”의 의미가 주님이시다로부터; 이 분이 실로라고 불리우신 것은 그분이 평화를 회복시켜 모든 것들을 고요하게 하신다는 사실로부터이다. 원어에서 “실로”는 고요함을 뜻하는 단어로부터 파생되고 있다. 주님이 여기서 실로라고 불리우신 이유는 이미 말해진 천적 왕국과 그것의 주권에 관하여로부터 명백해진다; 그 이유가 신성이 이 왕국을 통하여 시야에 표출되어질 때, 거기에 비고요함이 있었는데, 천국에 있든, 지옥에 있든 모든 것은 질서 안으로 환원되어질 수 없었기 때문, 그 이유는 이 천국을 통하여 흐르는 신성이 순수해 있을 수 없었기 때문인데, 이 천국이 순수하지 않기 때문에서 이다. 이 천국은 자체적으로 모든 것이 질서에로 완전 환원될만큼의 강함은 없었다, 하여 지옥적이고 악마적인 영들이 지옥으로부터 올라올 수가 있었고, 세상으로부터 도착하는 혼들을 통치하였다. 그 결과 천적 수준이 아니면 아무도 구원될 수 없었다. 드디어 거의 누구도 구원이 가능하지 못할 정도에 이르자, 주님께서 인간을 입으시고, 이 인간을 신성으로 만드신 것이다; 이것 때문에 그분은 모든 것들을 질서로 환원되게 하셨는데, 첫째는 천국을, 둘째는 지옥들이었다, 그후 평화의 고요함이 생산되었다. 영적 수준의 인간, 즉 영적 왕국의 교회에 있는 이들이 주님의 오심으로 해서 구원되어졌다. 즉 여호와, 또는 주님으로부터의 신성한 진리가 인류 안으로 천국을 통하여 흘러들었다는 것, 그러나 인간이 선으로부터 자신을 옮겼을 때 이 흘러듦은 만족할 성과가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주님은 세상에 오셨고, 자신 안에서 인간을 신성으로 만드셨는데, 이는 주님의 신성한 인간 자체로부터 신성한 진리가 진행되도록 하시기 위함이었고, 이로 인해 진리를 통해 선을 받는 인간이 구원되도록 하시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그에게 백성들이 순종한다. 이는 그분의 신성한 인간으로부터 받아질 수 있는 진리들이 진행되어 나갈 것이다를 의미한다. 이는 “순종”의 의미가 주님으로부터 진행하는 진리들을 받아들임이다로부터; 그리고 “백성들”의 의미가 진리들 안에 있는 이들, 고로 진리들이다로부터, 그리고 그러므로 영적 교회 속에 있는 이들이다.

그는 그의 젊은 나귀를 포도나무에 맨다. 이는 외적인 교회를 위한 자연 평면에 있는 진리[를 통한 결합]을 의미한다. 이는 “맨다, 묶는다”의 의미가 결합되는 것이다로부터; “포도나무”의 의미가 영적 교회이다로부터, 여기서는 영적 교회의 외적 부분 (external spiritual church, 외적 영적 교회)인데, 그 이유는 곧이어 말해지는 “특선한 포도나무”가 내적 교회를 의미하기 때문에서 이다; 그리고 “나귀”의 의미가 자연 평면에 있는 진리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러므로 “그는 그의 젊은 나귀를 포도나무에 맨다”에 의해 자연 평면에 있는 진리를 통하여 외적 교회와 결합함이 의미됨이 분명하다.

그리고 그의 나귀 새끼는 특선한 포도나무에 맨다. 이는 내적 교회를 위한 합리성으로부터의 진리를 [통하여를] 의미한다. 이는 “포도나무”의 의미함이 영적 교회이다로부터, 고로 “특선한 포도나무”는 내적 교회이다, 그 이유가 교회의 내적 부분은 외적 부분 보다 더 우수하기 때문이다; “나귀 새끼”의 의미함이 합리적 진리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교회의 외적 부분은 그것의 내적 부분과 구별된다; 전자는 자연 평면에, 고로 외적 인간 안에 있고; 후자는 합리성에, 고로 내적 인간 안에 있다. 교회의 외적 부분에 있는 이들은 진리 안에 있으나, 내적 부분에 있는 이들은 선 안에 있다; 전자는 신앙의 진리에 비해 선행의 선에 많이 감동되지 않으나, 후자는 선행의 선에 감동되고 이로부터 신앙의 진리와 더불어도 있다. 후자는 “특선한 포도나무”에 의해 의미되는 이들이나 전자는 “포도나무”에 의해 의미된다.

그는 자기 옷을 포도주 안에서 씻는다. 이는 그분의 자연 평면은 그분의 신성한 선으로부터의 신성한 진리이다를 의미한다. 이는 “씻다”의 의미함이 순수해지는 것이다로부터; “포도주”의 의미함이 이웃을 향한 사랑의 선, 그리고 신앙의 선, 그리고 최고 의미에서 주님의 신성한 선으로부터 신성한 진리이다 (아래에서 살핀다); 그리고 “옷(clothing)”의 의미가 내면의 것을 덮는 외면의 것이다; 고로 자연 평면, 그 이유가 이것이 외면이기 때문, 그리고 내면인 합리성을 덮는다; 그러므로 “옷”은 진리를 표시한다, 그 이유는 진리는 외면이기 때문, 그리고 내면인 선을 덮는다.
“포도주”가 이웃을 향한 사랑과 신앙의 선이다는 것은 성찬 예식에서의 빵과 포도주에 관련하여 이미 살핀 바 있다; 즉 “빵”은 천적 사랑의 선, “포도주”는 영적 사랑의 선이다. 이는 제물을 바침에서 식사 제물과 음료 제물로부터도 알는지 모른다, 즉 “식사 제물”은 사랑의 선을, “음료 제물”은 신앙의 선을 의미하는 바, 사랑의 선에 속하는 이런저런 것들로 식사 제물은 구성되고, 음료 제물인 포도주는 신앙의 선이 의미되어진다; 더욱이 제물들 자체가 “빵”이라 불리우기도 한다. 포도주의 음료 제물이 제물 바침에서 고용되어진 것에 대하여는 출. 29:40; 레. 23:12, 13, 18, 19; 민. 15:2-15; 28:6, 7, 18-끝절까지; 29:1-7을 더 살피면 더 도움이 될 것이다.
“포도주”가 이웃을 향한 사랑과 신앙의 선을 의미하는 것은 아래 구절에서 분명해진다:
목마른 모든 이여, 너희는 물들쪽으로 오라, 그리고 은을 가지지 않은 자; 너희는 오라, 사서 먹으라; 그렇다 오라, 은 없이 그리고 값을 치룸 없이 포도주와 젖을 사라 (이. 55:1);
위 구절에서 모든 이가 알아야 하는 것은, 모든 이로 포도주와 젖을 사라는 것이 아니다는 것, 그러나 포도주와 젖에 의해 의미되는 것은 이웃을 향한 사랑과 신앙이다는 것이다; 이것들이 은 없이, 값을 치룸 없이 주님에 의해 주어진다는 뜻이다.
호세아서에서:
타작마당과 포도즙틀이 그들을 먹이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새로운 포도주는 그들을 속일 것이다. 에브라임이 이집트로부터 되돌아올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앗시리아에서 불결한 것을 먹을 것이다. 그들은 여호와께 포도주를 붓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제물들을 그분이 반기시지 않을 것이다 (호. 9:2-4).
위 구절 역시 내적 의미에서 사랑의 선과 신앙의 진리가 뜻해진다, 이것을 그들은 중단되게 했다; 사랑의 선은 “타작마당”이다; 신앙의 선은 “포도즙틀”, “새로운 포도주”, 그리고 “제주 (술을 따라 바침)”이다; “에브라임이 이집트로부터 돌아온다”란 지적 부분이 신앙의 비밀들에 관하여 기억 속의 지식들과 상담하는 것이다; “그들이 앗시리아에서 불결한 것을 먹을 것이다”는 그 결과 추론함으로부터 결과하는 것을 표시한다. 더욱이 연결 자체는 글자들에서 보다 말들에서 더 잘 나타나고 있다. 그 이유가 내적 의미는 시종일관성이 있으나 외적 의미는 그렇지가 못하기 때문이다; 즉 “타작 마당과 포도즙틀이 그들을 먹이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새로운 포도주가 그들을 속일 것이다”, 그리고 이내 이어진 “에브라임은 이집트로부터 돌아올 것이다, 그들은 앗시리아에서 불결한 것을 먹을 것이다”인데, 내적 의미로가 아니면 무엇을 뜻할 것인가?
상호 사랑과 신앙의 선의 중지가 “포도즙틀”과 “포도주”에 의해 묘사되는데, 예레미야서에서 이다:
너의 포도원 위에 황폐자가 닥쳤다; 그리하여 즐거움이 그러모아졌다, 그리고 기쁨은 갈멜로부터이 다, 그리고 모압의 토지로부터 이다, 그 이유가 내가 포도주가 포도즙틀로부터 중단되게 저주했기 때문이다; 그가 환호하는 소리를 짓밟을 것이다 (예. 48:32, 33).
“포도주”가 상호 사랑의 선과 신앙의 선을 의미하는 것은 계시록서에서 분명해진다:
나는 네 동물들의 한가운데로부터 말하는 음성을 들었다, 기름과 포도주를 다치게 말라
(계. 6:6)
위에서 “기름”은 천적 사랑의 선이다; 그리고 “포도주”는 영적 사랑의 선이다.
“기름과 포도주”에 의한 같은 의미가 주님의 사마리아인에 관한 비유에 있다:
어떤 사마리아인이 여행했을 때, 그는 도둑들에 의해 상처받은 자를 보았다, 하여 그의 측은함 마음이 움직여졌다, 그래서 그에게 가서, 그는 그의 상처들을 싸매고, 기름과 포도주를 부었다 (눅. 10:33, 34);
위에서 “기름과 포도주를 붓다”는 그가 사랑의 일들과 선행의 일들을 수행하였다를 의미한다. 같은 것이 고대인들이 어떤 것을 성별할 때 기둥에 기름과 포도주를 붓는 것에 의해서도 뜻해졌다 (창. 35:14).
“포도주”가 사랑의 선과 신앙의 선을 표시한다는 것은 주님께서 성찬 예식을 제정하시던 때에 말하셨던 아래 구절로부터도 분명해진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내가 내 아버지의 왕국에서 너희와 더불어 포도나무의 생산물을 새로이 마실 때까지 나는 그것을 이후로부터 마시지 않을 것이다 (K. 26:29; 눅. 22:17, 18);
모든 이가 알 수 있는 것은, 그분이 거기서 포도주를 마시지 않으시리라는 것, 그러나 사랑의 선과 신앙의 선이 의미되었다는 것, 이것을 그분은 그분의 왕국 속에 있는 이들에게 나누어주시리라는 것이다. 같은 의미가 “포도주”에 의해 의미되는 구절로는 이. 24:9, 11; 애. 2:11, 12; 호. 14:7; 암. 9:13, 14; 슥. 9:15, 17; 눅. 5:37-39 에서도 더 읽어볼 수 있다.
“포도주”가 사랑의 선과 신앙의 선을 의미하기에, 최고 의미에서는 주님의 신성한 선으로부터의 신성한 진리를 의미한다, 그 이유가 이로부터 유입을 수단으로 그것을 받는 인간은 사랑의 선과 신앙의 진리를 가지기 때문이다.
말씀에서 대부분의 표현들이 반대적 의미 또한 지니는데, 여기서의 “포도주”도 예외는 아니다, 즉 악으로부터의 거짓을 의미하는데, 이사야서에서:
새벽 아래 아침에서 일어나서, 독주를 뒤따라서, 황혼 까지 머무는 그들에게 화있을 것인 즉, 포도주가 그들을 불태울런지 모른다! 포도주를 마시는 영웅들에게 화있을 것이다, 그리고 독주를 섞는 용사에게 화있을 것이다 (이. 5:11, 22).
다시:
이들은 포도주를 통하여 실수한다, 그리고 독주를 통하여 엉뚱한데로 간다; 성직자와 예언자는 독주를 통하여 길을 잘못 든다, 그들은 포도주를 들이켰다, 그들은 독주를 통하여 배회한다; 그들은 보는 사람(seer)들 사이에서 실수하고 있다, 그들은 재판에서 걸려넘어지고 있다
(이. 28:7).
다시:
목자들이 이해하려고 알려 하지 않는다, 그들 모두는 그들 자신의 길쪽으로 뒤쪽을 쳐다본다. 너희는 오라, 나는 포도주를 가져올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독주로 취할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 내일도, 오늘 같이, 큰 풍부함이 있게 하라 (이. 56:11, 12).
위 구절 외에, 예. 13:12; 호. 4:11; 7:5; 암. 2:8; 미. 2:11; 시. 75:8; 신. 32:33도 더 찾아 읽을 수 있다. 악으로부터의 거짓이 “분노의 포도주의 잔”에 의해서도 의미되고 있다 (예. 25:15, 16; 계. 14:8, 10; 16:19); 그리고 “하느님의 성내심의 격노함의 포도주의 포도즙틀”에 의해서도 의미된다 (계. 19:15); 그리고 “매춘의 포도주”에 의해서도 의미된다 (계. 17:2; 18:3).

그리고 그의 덮개는 포도의 피에서 (빤다). 이는 그분의 지적 부분은 그분의 신성한 사랑으로부터의 신성한 선이다를 의미한다. 이는 “포도들의 피”의 의미가 사랑의 선이다로부터, 그리고 최고 의미에서 그분의 신성한 사랑으로부터의 주님의 신성한 선이다로부터 (아래에서 살핀다); 그리고 “덮개(covering)”의 의미가 지적 부분이다로부터, 그 이유가 지적 부분이 그릇이기 때문이다, 받는 것이 그릇인데, 이는 덮는 경우와 같다. “덮개”에 의해서는 지적 부분이 의미되지만, “옷(clothing)”에 의해서는 자연 평면이 의미된 이유는 거기서 취급된 주제가 외적 부분이기 때문, 그러나 여기서는 내적 부분이다; 그 이유가 말씀에는 천국의 결혼이 모든 곳에 스며있기 때문이다. 즉, 외적인 것이 취급되면 내적인 것이 뒤잇고, 진리가 취급되면 선이 그 뒤를 잇기도 하여 짝을 맞춘다. 때로는 똑같은 것이 반복되는 경우도 있다, 즉 “그는 자기 옷을 포도주에서 빤다, 그리고 그의 덮개를 포도들의 피에서 빤다”에서 포도주나 포도들의 피나 거의 똑같은 것이도록 나타난다, 또한 “옷”과 “덮개”도 거의 같게 나타난다. 그렇지만 완전 똑같은 것은 아니다, 그 이유는 외적인 것과 내적인 것이 표현되었기 때문이다.
“포도들의 피”가 주님의 신성한 사랑으로부터 신성한 선을 표시하는 것은 “피”의 의미가 주님의 신성한 선으로부터 신성한 진리이다로부터 분명해진다; 그리고 “포도들”이 최고 의미에서 그분의 영적 왕국에 있는 이들이 가지는 주님의 신성한 선을 의미한다; 그리고 관계적 의미에서 선행의 선이 의미된다. “포도의 피”에 의해 모세의 책에서 같은 의미로 있는 구절이다:
목축의 버터와 양떼의 젖, 어린 양들과 바산의 아들들의 숫양들의 지방과 더불어, 그리고 숫염소들, 밀의 콩팥의 지방과 더불어; 그리고 너는 혼합하지 않은 포도의 피를 마실 것이다 (신. 32:14)

그의 눈은 포도주로 인하여 붉다. 이는 지적 부분, 또는 주님의 인간의 내적 부분은 선밖에 더 다른 것은 없다를 의미한다. “붉다(red)”의 의미가 사랑의 선이다로부터, 그리고 이것은 붉은 것인 불로부터와 피로부터 이다. 그러므로 “포도주로 붉다”는 선밖에 더 이상은 없다; 그리고 “눈”의 의미가 지적 부분이다로부터; 그리고 여기서 주님이 취급되는 바, “지적 부분”에 의해 뜻해지는 것은 그분의 인간의 내적 부분이다, 그 이유가 주님의 인간의 외적 부분이 “그의 이는 젖으로 희다”에 의해 의미되기 때문이다. 아래에서 이어진다.

그리고 그의 이는 우유로 인하여 희다. 이는 신성의 자연 평면은 진리의 선밖에 더 아니다를 의미한다. 이는 “희다(white)”가 진리를 서술한다로부터; 그리고 “이”의 의미가 순수 의미에서 자연적인 것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 이유가 인간 육체에 있는 것들 중 단단한 것, 뼈, 이, 연골은 가장 낮은 자연 평면 속에 있는 진리들과 선들에 상응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젖”의 의미가 영적 평면의 천적 부분 (celestial spiritual), 또는 진리로부터의 선(진리의 선)이다로부터 알려진다. 주님의 신성한 자연 평면이 진리의 선이다는 것을 인간에 비교해 말하면, 주님을 사랑함에서 신앙 안에 있는 이들이다; 그 이유가 외적 교회에 있는 이들은 주님의 신성한 자연 평면 보다 더 높게 생각을 승강하게 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내적 교회 속에 있는 이들은 생각을 자연 평면을 넘어 내적인 것 쪽으로 승강하게 할 수 있다. 그 이유가 주님에 대한 신앙 안에 있는 이들은 자기 생각들을 승강되게 하는 수용력에 따라 그분에 대한 생각도 가지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내적인 것의 본성을 아는 자가 내적인 것에 대한 생각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적인 것의 본성을 모르는 자는 외적인 것만에 대한 생각을 가질 뿐이다. 그러므로 주님의 신성한 자연 평면이 “진리의 선”이라 불리워진다, 그럼에도 그분의 전체 인간은 신성한 사랑의 신성한 선이다.

지금까지 유다에 관해 말했던 것으로부터 아주 분명해지는 것은, 말씀에는 내적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의미가 포함되었다는 것이 알려지지 않으면, 유다에 괸해 쓰여진 것들의 의미 또한 알아질 수 없다. 즉 그는 “사자의 새끼이다”는 것, 그는 “약탈품으로부터 가버렸다”는 것, 그는 “사자 같이 구부렸고 웅크렸다”는 것, “늙은 사자 같이”; 그리고 “그의 발 사이의 법률제정가”가 의미한 것, “실로”가 의미한 것, “그의 젊은 나귀를 포도나무에 맨다, 그의 나귀새끼를 특선한 포도나무에 맨다”가 의미한 것, “그의 옷을 포도주에, 그의 덮개를 포도들의 피에서 빤다”가 의미한 것, “그의 눈은 포도주로 붉다, 그의 이는 젖으로 희다”가 의미한 것을 모른다는 말이다. 이 모든 것들의 의미는 완전하게 감추여 뉘여 있다, 하여 더 깊이 놓인 의미들을 수단으로 알아내야 한다.

13절. 스불론은 바다들의 정박소에서 거주할 것이다, 그리고 그는 배들의 정박소에서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의 옆은 시돈 쪽을 향해 있을 것이다.

스불론. 이는 선과 진리가 동거함을 의미한다. 이는 스불론의 표현이 천국의 결혼이다로부터, 고로 선과 진리의 결합이다, 그 이유는 이 결합이 천국의 결혼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선과 진리가 동거함이다”라고 말한 이유는 원어에서 “스불론”이 동거함(cohabitation)을 뜻하기 때문에서 이다. 여기서는 “스불론”의 이름 아래 기억 속의 지식들로부터 영적 진리들에 관하여 결말을 만들어내는 교회에 있는 이들, 고로 이 결말들을 가지고 자신과 더불어 튼튼한 성벽을 쌓아둔(fortify) 교인들이 취급된다. 그러나 알아야 하는 것은, “스불론”에 의해 기억 속의 지식들과 감각적인 것들이 그것을 위한 증거들을 보여주지 않으면 믿지 않는 이들을, 그리고 부정적인 것(마음의 소극적 태도) 안에 있는 이상 믿지 않는 이들을 뜻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실 누구이든 이런 마음의 태도에 있다면 누구도 결코 믿지 않는다, 그 이유는 부정적인 것, 소극적 마음의 태도가 보편적으로 그를 통치하기 때문이다. 이럴 경우, 부정적인 것들이 흘러들고, 기억 속의 지식들에 함께 모아지나, 확증하는 것들은 아니다; 사실상 후자는 한쪽 측면으로 내몰려 있거나, 그나마 내몰리는 형편이 아니다면 부정적인 것에 박수를 쳐대는 박수부대로서 전락하여 있다. 그러므로 해서 부정적인 것은 더욱 요새화 된다. 그러나 여기서 “스불론”에 의해서는 말씀으로부터 교리적인 것들을 믿는 이들, 고로 이들과 더불어서는 확증하는 어떤 것이 보편적으로 통치하고 있다; 그렇지만 그들의 신앙은 진리들 안에 있지는 않고, 기억 속의 지식들 안에 있다, 그 이유가 그들은 기억 속의 지식들을 교리적인 것들에 적용하기 때문, 하여 그들이 확증한 것을 요새화 한다. 그러므로 “스불론”에 속하는 이들은 자신들을 기억 속의 지식들로부터 승강되게 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이 신앙의 어떤 진리를 듣거나 생각할 때, 그들은 즉시 기억 속의 지식들 쪽으로 뒤쪽으로 낙하한다. 이 세상에는 이런 부류에 속하는 이들이 허다하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기억 속의 지식들과 감각적인 것들이 이런 사용을 위헤 그들을 섬기게 장치해두신 바 있다.

바다들의 정박소에서 거주할 것이다. 이는 기억 속의 지식들로부터 진리의 결말이 있는 생활을 의미한다. 이는 “정박소(haven)”의 의미가 기억 속의 지식들의 종착지이자 그것들이 출발(시작)하는 주소지(residence, 주거)이다로부터; 여기서는 기억 속의 지식들로부터 진리의 결말이 있는 주소지이다. 그 이유가 “스불론”의 이름 아래 이 주소지 안에 신앙의 진리들이 있는 이들이 취급되기 때문이다; “바다들(seas)”의 의미가 복합체(complex, 전체, entirety)에 있는 기억 속의 지식들이다 (28항); 그리고 “거주하다(dwell)”의 의미가 생활하다(삶, life)로부터 알게 된다. 이로부터 분명한 바, “바다들의 정박소에서 거주함”에 의해 기억 속의 지식들로부터 진리의 결말이 있는 생활을 함이 의미된다는 것이다. 더 알아야 하는 것은, 이 생활은 외적 인간, 또는 자연적 인간, 그리고 어떤 이와 더불어서는 가장 낮은 자연 평면에서, 또는 감각적 수준에서 있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그들이 신앙의 진리를 가지고 있어 보아야 기억 속의 지식들에 묶인 바 되어 승강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영적 수준의 교회의 여타 다른 이들 보다 더 희미함 안에 있다, 그 이유가 그들은 지적 부분으로부터 아주 조금의 빛밖에 더 가지지 못하기 때문, 그 이유는 지적 부분이 기억 속의 지식들과 감각적인 것들 안에 침수되어버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긍정적인 것 안에 있는 이들, 그리고 기억 속의 지식들을 수단으로 신앙의 진리들을 요새화한 이들의 경우는 매우 다르다; 이들은 이런 지식들로부터 승강되어질 수 있다, 즉 이것들이 있는 자연 평면으로부터 승강되어질 수 있다는 말이다. 이 사람들의 지적 부분은 계발되어져왔다, 그리고 이로부터 영적 진리에 대하여 어떤 지각함을 지니고 있다, 이 지각함에 기억 속의 지식들은 신앙의 진리와 선행의 진리를 비추어 보아 나타나게 하고 인정되게 하는 거울 같은 섬김을 한다. 마치 애착들이 얼굴에서 나타나는 것과 같다.

그는 배들의 정박소에 있을 것이다. 이는 말씀으로부터의 교리적인 것들이 있는 곳을 의미한다. 이는 “정박소”의 의미가 주소지이다로부터, 고로 그들이 있는 곳이다; 그리고 “배(ship)들”의 의미가 말씀으로부터의 교리적인 것들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배들”이 이 의미를 가지는 이유는 배들은 바다들과 강들을 통과하여 생활에 유익한 것을 운반하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바다들”과 “강들”에 의해 지식들과 기억 속의 지식들이 의미되기 때문; 이것들을 통해 운반되는 삶의 유용한 것들은 교리적인 것들이다, 또한 “배들”에 의해 의미되는 말씀으로부터의 진리들 자체임이 아래 구절에서 확인된다:
섬들이 나를 신뢰할 것이다, 그리고 다시스의 배들이 우선적으로 멀리로부터 네 아들들을, 그들과 더불어 자기들의 은과 금을 가져오려 (한다) (이. 60: 9);
“다시스의 배들”은 교리적인 것들과 말씀으로부터의 진리들을 표시한다, 그러므로 말해진다, 그들은 “그들의 아들들, 그들의 은과 금을 가져온다”; 그 이유는 “아들들”에 의해 진리들에 있는 이들이; “은”에 의해 진리 자체가; “금”에 의해 선이 의미되기 때문이다. 모든 이가 아는 바, 다시스의 배들이 여기서 뜻해지지 않는다는 것, 아들들도, 은도 금도 뜻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에스겔서에서:
너의 경계들은 바다의 심장 안에 있다, 너의 설계자가 너의 아름다움을 완전하게 했다, 그들은 스닐의 전나무의 모든 판자로 건축되었다; 그들은 너를 위한 돛대를 만들기 위하여 레바논으로부 터 삼나무를 가져왔다. 바산의 상수리나무로 그들은 노들을 만들었다; 그들은 너의 들보를 상아로 만들었다; 깃딤의 섬들로부터 층계의 딸(회향목, 황양목)을 (가져와서 만들었다); 이집트로부터 수를 놓은 일로 만든 고운 아마포가 너의 돛이었다, 하여 그것은 너에게 기(ensign, 깃발)일는지 모른다; 엘리사아섬으로부터의 푸르고 진홍색 (천)은 너의 덮개이었다. 시돈과 아르왓의 주민들이 너의 노잡이 이었다:너의 현자들, 오 두로여, 네 안에 있다, 너의 수로 안내인들 이었다. 그발의 원로들과 현자들이 네 안에서 너의 배를 틀어막는 자 이었다; 바다의 모든 배들과 그들의 선원들이 네 안에 있어 상거래를 했다 (겔. 27:4-9). (층계의 딸이라 번역되었는데, 이는 배의 어떤 부분을 말하는 것으로 추정되나 확실치 않고 회향목과 황양목은 한역 성경의 것을 옮겨놓은 것임, 역자주.)
위는 두로에 관하여 말하고 있다, 이를 수단으로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이 의미된다, 이것이 배에 속하는 용어들로 묘사되고 있다; 즉 “널판자”, “돛대”, “노”, “들보”, “돛”, “덮개”, “노젖는 자”, “수로안내인(키잡이)” 등등이다. 이런 사항들이 글자대로 이해되어서는 안될 것임은 누구에게나 자명할 것이다; 그러나 “두로”가 진리와 선에 관한 지식으로, “배들”에 의해서는 말씀으로부터의 교리적인 것들을 더불은 모두라고 이해할 때, 위 구절 모두는 아름답게 이해할 수 있다.
다윗서에서:
오, 여호와, 당신의 일들은 얼마나 다양한지요! 지혜 안에서 당신은 그것들 모두를 만들었습니다. 이 바다는 공간들에서 크고 넓습니다; 거기에 배들이 갑니다; 당신이 만들어내신 고래가 거기 안에서 놉니다 (시. 104:24-26).
다시:
그들로 고백함의 제물을 바치게 하라; 그리고 기뻐환호하여 여호와의 일들을 선포하여라. 배들로 바다로 내려가는 그들은, 많은 물들에서 일하는 그들, 이것들이 여호와의 일들과 그분의 경이하심들 을 깊음 안에서 본다 (시. 107:22-24).
위에서 “배들”은 지식들과 교리적인 것들을 표시한다; “고래”는 기억 속의 지식들의 일반성들(일반적 측면에서의 기억 속의 지식들)을 표시한다; 그리고 “배들”이 지식들과 교리적인 것들이기에, 그러므로 말해지기를, “배로 바다로 내려가는 그들은 깊음 안에서 여호와의 일들과 그분의 경이함들을 본다 이다; 그 이유가 이런 것들은 말씀으로부터 지식들과 교리적인 것들 안에 있는 이들이 보기 때문이다.
계시록에서:
두 번째 천사가 소리를 냈다, 그리고 불로 타고 있는 큰 산인 듯한 것이 바다로 내던져졌다, 그리고 바다의 삼분의 일이 피가 되었다, 그러므로 바다에 있는 창조물의 삼분의 일이, 그리고 혼들을 가졌던 것이 죽었다; 그리고 배들의 삼분의 일이 파괴되었다 (계. 8:8, 9)
“불타고 있는 큰 산”은 자아 사랑을 표시한다 (1691항); 이 “바다”는 기억 속의 지식들이 있는 자연 평면이다; “피”는 폭행이 선행에 있어졌음이다; “혼들을 가진 바다의 창조물들”이란 선들을 지닌 기억 속의 지식들의 진리들이다; “삼분의 일”은 아직 완성되지 않은 어떤 것이다; 그들이 “죽는다”란 그들은 영적 생명을 가지지 않았다 이다; 그러므로 “배들의 삼분의 일이 파괴됨”이란 말씀으로부터의 교리적인 것들 속의 진리들과 선들이 거짓화되었다를 표시한다. 이 모두로부터 이 예언을 수단으로 뜻하는 것을 알았으리라 본다.
그러나 반대적 의미에서 “배들”은 거짓과 악인 것에 관한 지식들과 교리적인 것들을 의미하는 것을 아래 구절에서 읽을 수 있다:
끝의 때에서 남쪽의 왕이 그와 겨룬다; 그러므로 북쪽의 왕이 회오리 바람 같이, 병거와 마병, 그리고 많은 배들을 거느리고 그에게 돌진할 것이다, 그리고 그가 토지들 안으로 올 것이다, 그리고 뒤엎고 꿰뚫을 것이다 (단. 11:40);
“남쪽의 왕”은 선으로부터의 진리를 표시한다; “북쪽의 왕”은 악으로부터의 거짓들을; 마병과 더불은 “병거들”과 배들은 거짓의 교리적인 것들을; “토지들”은 교회들을, 끝의 때에 악들로부터의 거짓들이 교회들을 꿰뚫고 뒤엎을 것이 예언되어 있다.
계시록에서:
모든 키잡이와 배들에 고용된 모든 이, 그리고 선원들, 그리고 바다에서 일하는 많은 자들이 멀찍이 떨어져 섰다, 그리고 그들은 바빌론을 불태우는 연기를 보았을 때 외쳤다, 말하기를, 어느 도성이 이 큰 도성과 비슷할 수 있는가? 슬픔, 슬픔이 있다, 이 큰 도성아, 바다에서 배들을 가졌던 모든 자들은 그녀의 호화로움 때문에 부자로 만들어졌다! (계. 18:17-19).
위에서 “배들”이 거짓과 악의 교리적인 것들과 지식들을 표시함은 분명하다, 그 이유는 “바빌론”이 바깥쪽으로만 거룩할 뿐 내향적으로는 모독적인 예배를 표시하기 때문이다. 더욱이 위의 배들이 배가 아닌 그밖의 어떤 것을 뜻하는지를 모를 자는 없을 것이다. 이사야서에서:
고로 너희를 되찾으신 분,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 여호와께서 말하신다, 너희를 위하여 나는 바빌론쪽으로 보냈었다, 하여 나는 모든 그녀의 빗장들을 내던질는지 모른다, 그리고 갈대아인들, 이들의 외침은 배들 안에 있다 (이. 43:14).
위에서의 의미도 (앞 구절과) 비슷하다. 더욱이 악으로부터의 거짓들이 “배들”에 의해 의미되어지는 것을 이. 2:11, 16; 23:1, 14; 시. 48:7에서 더 읽을 수 있다.

그리고 그의 옆은 시돈 쪽을 향해 있을 것이다. 이는 한 쪽에서는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들에로 확장됨을 의미한다. 이는 “옆, 측면(side)”의 의미가 어느 한 쪽에서 확장됨이다로부터; 그리고 “시돈”의 의미함이 선과 진리에 관한 외면의 지식들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스불론이 취급되는 곳, 여기서의 경우 같이, 지식들, 교리적인 것들, 기억 속의 지식들에 관한 언급이 만들어진다, 그리고 선과 진리에 관하여 이쪽에서 확장됨이 있다고 말해지고, 또한 말씀으로부터 교리적인 것들이 있는 기억 속의 지식들로부터 진리의 결말이 있다고 말했다. 그러므로 말해둘 필요가 있는 것은 위 용어들 사이의 차이점이다. 교리적인 것들은 말씀으로부터 있는 이런저런 것들이다; 지식들은 이쪽에서는 교리적인 것들로부터, 다른 쪽에서는 기억 속의 지식들로부터 있는 이런저런 것들이다; 그리고 기억 속의 지식들은 경험을 통해 알아진 것들, 다시 말해 자신의 경험이든 타인의 경험이든, 경험에 속하는 이런저런 것들이다.

14, 15절. 잇사갈은 무거운 짐들 사이에 드러누운 뼈만 앙상한 나귀이다. 15 그리고 그는 쉼을 보고 그것이 좋다 하고, 토지를 보고 그것이 즐거움이다 할 것이다. 그리고 그는 짐을 메기 위해 그의 어깨를 구부릴 것이다, 그리고 공물에는 종이리라.

잇사갈. 이는 일들로부터 얻은 보답(recompense, 보상 reward)을 의미한다. 이는 잇사갈의 표현함이 보상 또는 보답, 삯(hire)으로서 획득되는 상호간의 사랑(mutual love)이다로부터, 여기서는 일들로부터 획득되는 보상임이 분명한데, 이는 여기서 잇사갈에 관한 예언의 내적 의미에서 취급되는 세부 사항으로부터 확실해진다. 더욱이 잇사갈은 원어에서 보상(reward, hire)을 뜻한다. 잇사갈이 여기서는 일들로부터 얻어지는 보상을 의미하고, 앞 장에서는 상호간의 사랑도 뜻한다고 말한 이유는 여기서의 “잇사갈”에 의해서는 상호간의 사랑의 어떤 종류와 나타남 안에 있는 이들, 즉 어떤 종류의 이웃을 향한 사랑, 또는 선행 속에 있다고 나타나지는 이들, 그리고 자기들이 행한 선들 때문에 보상되어지기를 바라는 이들이 뜻해지고 있기 때문에서 이다. 고로 이런 이들은 진짜 상호간의 사랑, 또는 선행을 더럽힐 뿐만 아니라 악용하거나 뒤집거나 곡해하고 타락시킨다. 그 이유가 진짜 상호간의 사랑 안에 있는 이들은 자기들로 해서 이웃이 이롭게 될 때, 그것 자체가 자기들에게 기쁨이고 행복이 되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그들은 이 일들로 보상은 커녕 어떤 바램도 갖지 않기 때문이다. 이 기쁨과 복됨(bliss)이 말씀에서 “삯, 보상”에 의해 뜻해진다; 그 이유가 기쁨과 복됨이 보상 자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른 삶에서의 경우(영들의 세계에서), 이것이 그들을 위한 천국이 된다. 그 이유가 이 사랑에 있는 이들이 쓸모 있어짐(use)들을 수행할 때, 그리고 타인들에게 선을 행할 때, 그들은 이런 환희와 행복함에 있으므로 처음 동안에서는 그들이 천국 안에 있다라고 자신들에게 여겨진다; 이것은 주님에 의해 각자의 선용의 등차에 따라 그들에게 주어진다; 그러나 그들이 보상을 생각하자마자 이 행복은 사라진다, 그 이유가 보상에 관한 생각은 사랑을 불순해지게 하게 때문, 그리고 그것을 타락쪽으로 기울게 하기 때문이다. 그 이유인 즉, 이때 그가 이웃에 관하여가 아닌 자신에 관하여 생각하기 때문, 즉 타인이 아니고 자신을 행복하게 만드는 것을 생각하기 때문이다; 고로 그들은 이웃을 향한 사랑을 자신들을 향한 사랑 쪽으로 전환한다. 그들이 이를 행하는 만큼에서 천국으로부터의 환희와 행복은 그들에게 교통되어질 수가 없다, 그 이유는 그들이 천국으로부터의 행복의 유입을 자신들에게 집중해두었기 때문이다, 즉 타인들에게 보내지는 쪽으로 배치하지 않았다는 말이다. 마치 빛의 광선을 전도하지 않고 흡수만 하는 대상물 같다. 빛을 전도하는 대상물들은 빛 안에서 나타나고 반짝거리지만, 그것들을 흡수해버리는 물체는 불투명하고 전혀 반짝거리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런 본성 속에 있는 이들은 천사의 사회로부터 분리되어진다, 그리고 마치 천국과는 공통된 것이 하나도 없는 이들 같다. 이런 이들이 여기서 “잇사갈”이라는 이름 아래 묘사되어 있다.

뼈만 앙상한 나귀. 이는 가장 수준 낮은 섬김을 의미한다. 이는 “나귀”의 의미가 섬김(service, 봉사함)이다로부터; 그리고 “뼈”의 의미가 생명을 거의 가지고 있지 않다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고로 “뼈만 앙상한 나귀(bony ass)”는 가장 수준이 낮은 섬김이다. 그 이유가 보상을 위하여 선인 것을 행하는 자, 그 사람도 실로 쓸모 있음을 수행하고 섬김 속에 있는 것은 분명하나 가장 낮은 장소에 있는 주님의 왕국에 있는 이들 사이에 있다, 그 이유가 그들은 자신들에게 교통되는 선을 분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은 가장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들 옆을 지나쳐간다, 혹시 이들에게 선을 행한다면, 이것을 주님에게 반드시 보상을 청구한다. 그러므로 그들은 자기들이 실시한선에 대한 공적을 확실히 챙긴다. 고로 주님의 자비가 자신들에게 마땅히 베풀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런 도중에서 그들은 굴종의 상태로부터 퇴조한다, 그리고 주님으로부터 천국을 통하여 복되고 행복한 것을 받는 상태에 비례하여 선을 베풀려 한다. 이런 모두로부터 분명해지는 바, 다른 삶에서 이런 부류의 사람들도 쓸모 있는 일에 참여는 하나 가장 수준이 낮은 섬김에 속한다.

무거운 짐들 사이에 누워 있다. 이는 일들에 둘러 싸여 있는 생활을 의미한다.
이는 “누워 있다”의 의미가 생활(life)이다로부터, 그러나 불명료한 생활이다; 그리고 “짐들(burdens)”의 의미가 일들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짐들”이 이런저런 일들을 표시하는 이유는 여기서 취급된 이들은 이웃을 향한 사랑의 애착으로부터 선들을 행하지 않고, 자아를 향한 사랑의 애착으로부터 선을 행하는 이들이기 때문이다. 이 사랑의 애착으로부터 흐르는 일들은 초라한 나귀에 의해 운반되는 짐들 같다, 그 이유가 그들의 일은 가장 낮은 섬김들에 해당되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억지적 섬김(servitude)은 자아 사랑과 세상 사랑의 애착으로부터 있고, 자유적 섬김은 주님을 사랑함과 이웃을 향한 사랑의 애착으로부터 있기 때문이다. 그 이유인 즉, 전자의 사랑으로부터의 애착은 지옥으로부터 흘러들고, 이것은 폭력과 더불어 명령되나, 후자의 사랑으로부터의 애착은 주님으로부터 흘러들고, 명령되지 않고 이끌리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다시 분명한 것은, 보상을 예상하고 선인 것을 행하는 이들은 가장 수준 낮은 섬김들이다는 것, 그리고 그들의 일들은 (고달프게 하는 수준의) “짐들”이다. 같은 것이 아래 구절의 “짐들”에 의해 의미되고 있다:
잇사갈의 제 1 인 자들이 드보라와 함께 있었다; 그리고 잇사갈은 바락과도 그러했다; 골짜기에서 그는 그의 발 아래 놓일 것이다, 르우벤의 부류(class)들에서 심정의 결심들이 대단했다. 당신은 양떼의 쉿하는 소리(hissing)를 들으려고 왜 짐들 사이에 앉아 있는가? (사. 5:15, 16)
위에서 “잇사갈”은 일들에 대해 보상되어지기를 바라는 이들을 표시한다; “발 아래 계곡에서 놓여지는” 것은 가장 수준이 낮은 것들에서 섬김을 담당하는 것이다; “르우벤 부류”는 신앙의 진리들에 관한 지식들에 있는 이들을 표시한다, 이들 사이에 여기서 “잇사갈”에 의해 의미되는 이들이 있는데, 그들 아래의 장소에서 이다; “양떼들의 쉿하는 소리를 듣는” 것은 “양떼들”인 선행의 선에 있는 이들로부터 경멸됨을; “짐들 사이에 앉다”는 자아 공적의 일들 사이에 있다를 표시한다. (쉿하는 소리란 연설을 듣다가 거기에 불만을 표할 때 내는 야유소리라고 생각하면 될지 모른다; 또한 짐들 사이에 있다란 내가 이렇게 선행을 많이 베푸는데 왜 알아주지 않나하고 푸념하는 누군가의 모습을 연상하면 될지 모른다. 역자주.)

그는 쉼을 보고 그것이 좋다. 이는 보상 없는 선으로부터의 일들, 그것들은 행복으로 꽉 차있다를 의미한다. 이는 “쉼(rest)”의 의미가 천국에 속하는 것들, 고로 선행의 선 안에 있는 것들, 또는 보상 없는 선으로부터의 일들이다로부터 (아래에서 살핀다); “이것이 좋다”의 의미는 그것들은 행복으로 가득하다 이다. “쉼”이 보상 없는 선으로부터의 이들을 표시하는 이유는 가장 높은 의미에서 “쉼”, 또는 “평화”는 주님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관계적 의미에서는 천국을 의미한다; 고로 주님으로부터 있는 선을 의미한다; 그리고 “쉼” 또는 “평화”에 의해 의미되는 것들에 있는 이들은 선행의 선 안에 있는 이들 외애 더 다른 사람은 없는 바, 고로 보상 없이 선으로부터의 일들 안에 있는 이들이고, 이들이 “쉼”에 의해 의미되고 있다; 이것은 본문의 내적 의미에서 연결되는 사항들로부터 뒤이어지고 있다.
주제 자체에 주목해보자: 보상을 목적으로 선을 행하는 이들은 어떤 보상도 없이 선을 행함에 천국의 행복 자체이다는 크나큰 행복이 있다라고 아는 것은 가능할 수가 없다. 그들이 무지한 이유는 그들이 행복을 자아 사랑의 기쁨에서 지각하기 때문이다; 인간이 이 사랑에서 기쁨을 지각하는 한, 그는 그만큼에서 천국의 사랑에 있는 기쁨을 지각하지 못한다, 그 이유는 그것은 반비례하기 때문이다. 자아 사랑으로부터 흐르는 기쁨은 천국의 사랑으로부터 있는 기쁨을 완전 소멸되게 한다, 하여 이 사람에게는 천국의 기쁨이 무엇인지가 절대적으로 알려지지 않는다; 만일 이런 본성이 말해주어봤자, 믿지 않고, 도리어 부정해버린다.
다른 삶에서 이것을 나로 악령들로부터 알게 해주신 적이 있었다. 이들은 지상 삶에서 보상 없이는 선을 타인들을 위하여서나, 또는 나라를 위하여서나 행한 적이 없던 자들이었다; 이런 자들은 보상의 목적 없이 선을 행하고 기쁨을 가지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보상이 없으면 모든 기쁨이 중지된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들에게 이 기쁨이 중지될 때, 천국의 기쁨이 시작된다라고 말을 덧붙였더니, 그들은 이 말에 놀라는 눈치였다; 그리고 그들이 여전히 놀라워하는 것은, 이 천국의 기쁨이 인간의 가장 안쪽을 통하여 흘러든다는 것, 하여 그의 내면들은 표현할 수 없는 행복으로 감동된다는 말을 들었을 때 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말하기를 자기들은 이를 납득할 수 없다는 것, 그렇게 되는 것도 바라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이유가 그들이 믿는 것은, 만일 자기들이 자아 사랑의 기쁨을 잃는다면, 매우 비참해질 것이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이때 자기들의 생명의 모든 환희가 박탈되기 때문이다는 것이다. 이들 또한 자아 사랑의 상태와 다른 상태에 있는 이들을 단순한 자, 천진난만한 자라고 부른다. 어쨌든 본문이 말하려는 이들은 보상을 목적으로 일을 하는 이들을 닮지 않은 대목은 하나도 없다; 그 이유가 그들은 섬김에 따라 자신들에게 그 섬김에 보상해줄 자가 아니면 이웃이든, 나라이든, 천국이든, 주님이든 모든 것에 관계가 없고 오로지 자신을 중요시하기 때문이다. 이상 살핀 것이 본문의 잇사갈에 관하여 내적 의미에서 서술된다.

토지를 보고 그것이 즐거움이다. 이는 주님의 왕국 안에 있는 그들은 이 행복 안에 있다를 의미한다. 이는 “토지”의 의미가 교회, 고로 또한 주님의 왕국이다로부터; “토지”가 이 의미를 지니는 이유는 이것이 가나안의 토지이기 때문이다. 말씀에서 가나안의 토지에 의해 주님의 왕국이 표현된다, 그 이유는 거기에 교회가 태고 때로부터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즐거움(pleasant, 유쾌함)이었다”로부터, 이것은 보상 없이 선으로부터의 일들 안에 있는 행복을 의미한다. 본문이 이렇게 말한다, 즉 “그가 쉼을 보고 그것이 좋다, 그리고 토지를 보고 그것은 즐거움이다.” 이 두 표현들에 의해 주님의 왕국에 있는 행복이 의미된다; 그 이유는 “쉼을 보니 좋다”는 천적 수준의 것에 관련되어 선 측면에서; “토지를 보니 유쾌하다”는 영적 수준의 것에 관련되어 진리 측면을 서술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두 표현이 연달아 (반복되듯) 있는 이유는 선과 진리의 결혼 때문이다. 보상 없는 선으로부터의 일들 안에 행복이라는 주제를 한번 더 관심을 가져보자: 오늘날, 보상의 목적 없이 선들을 행함 안에 천국의 행복이 있다는 것을 아는 자는 매우 적은 편이다; 그 이유가 명예를 발전시키는 것에, 타인의 섬김을 받는 것에, 재물을 풍부히 지니는 것에, 쾌락들 안에서 생활하는 것 말고는 행복이 있는 곳은 없다고 알기 때문이다. 허나 이런 것들을 뛰어넘어 인간의 내면들에 감동을 주는, 내면들을 훈훈하게 하는 행복이 있다는 것, 고로 천국의 행복이 있다는 것, 이 행복이 진짜 선행의 행복이다는 것에 너무나 깊이 무지해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현자라고 칭송되는 자에게 이것이 천국의 행복인지 여부를 물어보라. 많은 이들이 선한 일들을 거절하는 이유는 자기 공적을 인정받음 없이 선한 일은 있을 수가 없다고 믿는데서 비롯된다. 이들이 모르는 것은 주님에 의해 인도됨 안에 있는 이들은 선한 일을 행하는 것 자체 외에 더 바라는 것이 없다는 것, 이들은 선한 일의 공적을 자신에게 돌리는 것보다 더 어리석은 짓은 없다고 알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새로운 의지 안에 있다, 이 의지는 거듭나져가는 이들에게 주님에 의해 주어진다, 그 이유는 이것이 인간 안에서 주님의 의지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짐을 메기 위해 그의 어깨를 구부릴 것이다. 이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온 노력으로 노동한다를 의미한다. 이는 “어깨”의 의미가 모든 힘, 또는 모든 노력이다로부터; 그리고 “짐을 멘다”의 의미가 공적을 위하여 일들을 행하는 것이다로부터; 그러므로 “메기 위해 어깨를 구부린다”에 의해서는 공적을 위하여 온 노력으로 일을 하는 것이다가 의미된다. 이것이 “멘다(bear)”라고 말해진 이유는 그들이 선에 애착함이 있어 선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 자아에 애착함으로부터 마지못해 선을 행하기 때문이다.
자기들이 수행한 선에 보상을 바라는 이들에 한번 더 주목해보자: 우리가 알아야 하는 바, 그들에게는 만족이라는 것이 결코 없다는 것이다; 게다가 타인 보다 더 큰 보상이 없을 경우 그들은 분노한다. 자기 보다 더 축복받았다고 보여지는 자를 발견하면, 슬퍼지고 불평을 늘어 놓는다. 그들은 내향의 행복에 존재하는 행복은 결코 만들지 못하고 외향의 것만에서, 즉 특출하다 칭송받는 것에서, 지배권을 쥐는 것에서, 천사들의 섬김을 받는 것에서, 천사들 수준을 넘는 것에서, 결과적으로 천국에서 제 1 인 자요 위대한 자이다가 되는 것에서 이다; 허나 여전히 존재하는 천국의 행복은 통치하기를 바라는데 있지 않고, 타인이 나를 섬겨주는데 있지 않다는 것, 가장 작은 자가 되는 것에 있다는 것이 아래 구절에 있다:
그런데,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이 말하기를, 당신의 영광 안에서 우리가 하나는 당 신의 오른쪽에, 하나는 왼쪽에 앉을 자리를 수여 하십시오 하고 말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너희는 네가 구하는 것을 모르고 있다. 내 오른편과 내 왼편에 앉는 것은 내가 주는 것이 아니다. 너희는 아는 바, 이방인들을 지배한다고 자처하는 자들은 그들 위에서 왕권을 휘두른다; 그리고 그들의 큰 자는 그들 위에서 권위를 행사한다. 그러나 너희 사이 에서는 그것이 그렇게 있지 않을 것이다: 즉 너희 사이에 크다 일컫는 자는 누구든지, 너희 를 섬기는 자 일 것이다. 그리고 최고이다 하는 너희 속의 누구든지 모두의 종일 것이다. 그 이유가 사람의 아들 조차도 섬김을 받기 위해 오지 않았다, 그러나 섬기기 위해 왔다 (막. 10:35-45).
그리고 보상의 목적 없이 선인 것을 행하는 이들이 천국을 가진다는 것을 가르치신다:
그 이유가 자신을 추켜세우려 드는 자는 누구든지 깎아내려 질 것이고, 자신을 낮추는 자 는 드높여 질 것이기 때문이다. 너는 정찬이나 만찬을 만들 때, 네 친구들을, 네 형제들을, 네 친척들을, 네 부유한 이웃들을 부르지 말라; 그들 역시 다시 너를 초대해서, 초대했던 너에게 보답을 만들지 않게 하라. 그러나 너는 잔치를 만들 때, 가난한 자, 불구자, 절음 발이, 소경을 부르라. 그리고 너는 복되어질 것이다; 그 이유는 그들은 네게 보답할 수 없 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너는 정의로운 자의 부활에서 보답 받아 질 것이기 때문이다
(눅. 14:11-14).
“정의로운 자의 부활에서 보답된다”는 보상 없이 잘 행동함으로부터 향유하는 내적인 행복함이다, 그들은 이 행복을 자기들이 쓸모 있음을 수행할 때 주님으로부터 받는다; 보수 없이 섬김을 사랑하는 이들, 그들이 더 사랑하면, 그들이 수행하는 쓸모 있음은 더욱 고귀해진다, 사실상 그들은 타인들 보다 더 위대하고 더 힘있는 것이다.
보수를 위하여 선한 일들을 하는 자도 똑같이 말한다, 그 이유는 그들도 말씀으로부터 아는 바, 천국에서 작은 자이기를 바래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때 그들은 자기들이 이렇게 말하면 큰 자가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결국 큰 자가 되는 것이 목적인 셈이다, 그러나 보수 없이 선을 행하는 자는 실지로 저명해진다는 것을 염두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섬김만을 수행할 뿐이다.
이들로부터 공적을 챙기려 드는 자들, 그들의 품질을 위에서 살폈는데, 다른 삶에서 어떠한지는 여러번 살핀 바도 있는데, 이렇다: 그들은 나무를 패고 풀을 깍는다; 어떻게 그들이 표현하는지; 자아와 세상을 위해 선인 것을 행한 자는 다른 삶에서 보상이 없다는 것; 이들에 공적을 놓는 자는 자기들 입맛에 따라 말씀의 글자를 해석한다는 것, 그리고 그들은 내면의 내용이 있다에 비웃는다; 진정한 선행에는 자기 공적은 통째로 빠져 있어야 한다는 것; 선행으로부터 신앙을 분리하는 자는 그들이 행한 일들을 자아 공적으로 만든다는 것; 천국으로 들어가는 자는 그들 자신의 것과 자아 공적을 벗어야 한다는 것; 그들이 자신으로부터 선행한다고 믿는 것, 그리고 이 선을 수단으로 그들은 공적을 가지는 것은 개혁 초기의 대부부의 인물들이 가지는 경우이다, 그러나 그들은 거듭남으로 해서 이것을 벗는다.

그리고 그는 공물에는 종이리라. 이는 그는 공적을 가질지도 모른다를 의미한다. 이는 “공물에 종이다”의 의미가 종속되는 것과 섬기는 것이다로부터; 그리고 그들은 “뼈만 앙상한 나귀이다, 짐들 사이에 누운” 자들이 일들을 통하여 공적을 가지기를 바라는 이들이 라고 말해지고, 그리고 “그는 짐을 메려고 어깨를 구부린다”와 “공물에는 종이다”에 의해서도 역시 일들을 통하여 공적을 가지기를 바라는 이들이 의미된다고 말해진다; 그 이유가 그것들이 가장 수준이 낮은 섬김이기 때문이다. “공물을 섬기는 것”이 종속되고 섬기는 것이다를 아래 구절에서 읽을 수 있다:
너희가 그것에 맞서 싸우려고 도성쪽으로 가까이 다가설 때, 너희는 그들을 평화에 초대하라; 그리고 그들이 평화를 위하여 그렇게 응답하여, 너희에게 문을 연다면, 그 안에서 발견되는 모든 백성은 너희에게 공물을 위하여 있을 것이다, 그리고 너희를 섬길 것이다 (신. 20:19, 11).
예레미야서에서:
사람들이 복작거리던 이 도성이 어찌하여 적막하게 되었는지! 그녀는 과부 같이 되어졌다. 나라들 사이에 위대했던 그녀, 제 1 인 자들을 통치했던 그녀가 공물을 바치는 자가 되었다 (애. 1:1).
위에서 “조공자가 되었다”는 섬김이 의미된다. 마태복음서에서:
예수께서 말하셨다, 너는 무엇을 생각하느냐, 시몬아? 땅의 왕들은 누구로부터 관세나 공물 을 거두느냐? 자기들 자녀로부터, 또는 외국인으로부터? 베드로가 그분에게 말한다, 외국 인들로 부터. 예수께서 그에게 말하신다, 그러면 자녀들은 자유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 리가 그들에게 반칙 하지 않도록, 너는 바다로 가라, 그리고 갈고리를 던져라, 그리고 먼저 올라오는 물고기를 집어 올려라; 그리고 네가 그것의 입을 열었을 때, 너는 돈 한 조각을 발견할 것이다; 가져 가라, 그리고 나와 너희를 위하여 그들에게 주거라 (마. 17:25-27).
위에서 “공물을 주는 것” 또는 세금에 의해 섬기는 이들이 뜻해진다, 그러므로 “외국인들이 내고 아들들은 자유하다”라고 말해진다, 그 이유가 (포로로 잡아 온) 외국인들은 종들이기 때문이다. 베드로가 바다로부터 물고기를 취하고 그것의 입에서 그가 바쳐야하는 돈 조각을 발견하는 것은 가장 수준이 낮은 자연 평면은 섬김을 마땅히 해야함을 표현했다; 그 이유가 “물고기들”이 이 자연 평면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16-18절. 단은 그의 백성을 이스라엘의 한 지파로서 판결할 것이다. 17 단은 길에 있는 뱀, 작은 길의 독사이고, 말의 뒤꿈치를 물것이다, 그리고 그의 기수는 뒤를 향해 떨어질 것이다. 18 오 여호와여, 나는 당신의 구원을 기다립니다.

단. 이는 진리 가운데 있으나 선 가운데는 아직 있지 않은 이들을 의미한다.
이는 단의 표현함이 생활의 선이다로부터; 그러나 여기서는 진리로부터 생활의 얼마간의 선 안에 있는 이들, 그러나 선으로부터서는 아직 아닌 이들이다. 그 이유가 주님에 의해 거듭나지는 인간은 이런 등차에서 있다: 그는 처음에 진리 안에 있는다; 그러나 진리로부터 생활의 어떤 선 안에 있지는 않는다; 그 다음 그는 진리로부터 생활의 선 안에 있는다, 그러나 선으로부터는 아직 아니다; 후에, 그가 거듭나져갔을 때, 그는 선으로부터 생활의 선 안에 있다, 이때 그는 선으로부터 진리를 지각한다, 그리고 자신 안에서 진리를 불어나게 한다: “단”에 의해 진리로부터 생활의 선 안에 있는 이들, 그러나 선으로부터는 아직 아닌 이들이 뜻해진다; 그들과 더불은 선은 진리 안에 깊숙이 감추여 뉘여져 있다, 그리고 그들에게 진리에 애착함을 주고 있다, 그리고 그들을 진리에 따라 살도록 부채질하고 있다. 이런 이들이 주님의 왕국 안에 있다; 그러나 그들은 선으로부터 선을 행함이 아닌, 진리로부터 인 바, 즉 새로운 의지로부터가 아닌 지적 부분으로부터 인 바, 고로 사랑으로부터가 아닌 그렇게 행하도록 명령되었기에 행동되는 것, 순종함으로부터 인 바, 그들은 첫 천국, 또는 최말단 천국 (천국의 외곽 부분)에 있다.
이들이 단에 의해 표현되는 이들이다, 그 이유가 그의 열두 아들을 수단으로 내적 의미에서 있는 이스라엘의 예언적 말함에서 그들의 품질 측면에서 주님의 왕국에 있는 모든 이들이 일반적 측면에서 묘사되었기 때문이다. “단”에 의해 의미된 이들이 최말단 천국 안에, 또는 주님의 왕국의 최말단 부분이 의미되는 이유는 진리 안에 있기는 하나 아직 선 안에 있지 않기 때문인데, 이것이 가나안의 토지를 지파들의 상속분으로 분배할 때, 단의 몫(lot. 부지, 제비뽑기)은 마지막에서 할당됨에 의해 표현되었기 때문이다 (여. 19:40-48); 그리고 그들의 상속분은 이 토지의 맨끝 지경에 놓였다 (사. 18); 제비는 여호와 앞에서 뽑혔다 (여. 18:6), 그러므로 그들의 표현함에 따라 각각에게 할당된 것이다. 가나안의 토지는 주님의 왕국을 표현했다, 그리고 모든 경계선들은 표현적이었다; 고로 이 토지의 최말단들은 주님의 왕국에 있는 최말단들을 표현했다; 그러므로 단은 거기서 최말단들에 있는 이들을 표현했다; 그 이유가 진리들이 선과 결합하기 이전에서는 그것들은 최말단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일 진리가 선으로부터 완전 분리된다면, 그것은 주님의 왕국의 어떤 경계선 안쪽에는 있지 않는다, 경계선 밖에 있는다.
단의 상속분이 가나안의 토지의 최말단이었다는 것은 이 토지의 전체를 묘사할 때 말해진 것, 즉 “브엘세바로부터 단까지”로부터도 분명해진다 (삼하. 3:10; 17:11; 24:15; 왕상 4:25). 이 인용 구절에 등장하는 “브엘세바”는 토지의 가장 안쪽을 의미했다, 그 이유가 시온과 예루살렘이 토지의 중심이 되기 전 아브라함과 이삭이 거주했던 곳이기 때문이다.
진리 안에는 있으되, 선 안에는 아직 있지 않은 이들의 품성이 사. 18장에서 묘사되고 있다: 즉 그들이 거주할 곳을 확보하기 위하여 쳐들어갔을 때, 미가의 집으로부터 레위인을 데리고 나오고, 그의 에봇, 데라빔, 새긴 우상도 가져왔다; 이것 때문에 진리 안에는 있으나 선 안에 아직 있지 않은 이들의 예배가 의미되었다; 그 이유가 그들은 외적인 것을 숭배하나 내적인 것을 무시했기 때문이다. 선 안에 있는 자 외에는 내적인 것을 알 자는 아무도 없다. 이것이 단 지파에 의해 표현되어진 것은 말씀의 모든 역사물들, 즉 모세의 책, 여호수아, 사사기, 사무엘, 열왕기서들이 주님의 왕국의 천적, 영적인 것들을 표현하고 있다는 사실로부터 분명해진다; 마찬가지가 단 지파에 관한 사사기서의 줄거리도 포함된다. 진리 안에 있으나 선 안에 아직 있지 않은 이들에 관하여는 이어지는 단에 관한 아래의 내적 의미에서 묘사되고 있다.

그의 백성을 이스라엘의 지파 중의 하나로서 판결할 것이다. 이는 그는 이스라엘의 지파들이 표현하는 일반적 측면에서의 진리들 중의 하나이다를 의미한다. 이는 “판결하다”의 의미가 공적 측면에서의 진리이다로부터 (아래에서 살핀다); “백성”의 의미가 진리들에 있는 이들이다로부터, 여기서는 진리 안에 있으나 아직 선 안에 있지 않은 이들 이다, 그 이유가 이들이 “단”, 또는 단의 “백성”이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의 지파”의 표현함이 일반적 측면에서의 모든 신앙의 진리들과 선들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러므로 “그는 이스라엘의 지파의 하나로서 그의 백성을 판결할 것이다”에 의해 단에 의해 표현되는 이 진리가 이스라엘의 지파들이 표현하는 일반적 진리들 사이에 있다가 의미되는 것이다. “자기 백성을 판결함”에 의해 공적 측면에서의 진리를 표시하는 이유는 이스라엘의 지파에 의해 일반적 측면의 모든 진리들이 표현되기 때문인데, 이 지파가 언급되는 많은 구절로부터 알는지 모른다, 그리고 심판하는 것은 진리이다; 고로 “자기 백성을 심판함”에 의해서는 공적 수행에서의 진리가 의미된다.
이에 관련하여 우리가 말씀에서 읽게 되는 대목으로는, 24원로들이 왕좌에 앉아 나라들과 백성들을 심판한다는 것; 그리고 열두 사도들이 마찬가지로 왕좌에 앉아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심판한다는 대목이다. 말씀의 내적 의미를 모르는 이들은 글자대로 심판한다고 (억지로라도) 알고 있으려 할는지 모른다. 그러나 “24 원로들”, “12 사도들”, “왕좌들”에 의해 의미된 것을 알게 될 때, 이런 대목이 어떻게 이해되어야 하는지를 내적 의미로부터 알게 된다; 즉 하나의 복합체(complex, 전체, entirety)로서 있는 모든 진리들이다. 이에 따라 심판이 있다는 말이다. 마찬가지가 여기서인, “이스라엘의 지파중의 하나로 자기 백성을 판결함”에서 뜻해진다; 그러나 그들, 또는 그들의 어떤 원로들이 판결한다가 아니라 그들에 의해 의미된 진리들 자체가 판결한다는 것, 고로 주님 만이 판결하신다는 것이 의미된다, 그 이유는 그분으로부터 모든 진리가 진행되기 때문이다. 24원로들이 왕좌에 앉아서 심판하는 대목이 아래 구절에 있다:
왕좌를 빙둘러 24 왕좌들이 있었다, 그리고 나는 왕좌 위에 24 원로들이 앉은 것을 보았다, 그들은 흰 의복을 입었고, 그들의 머리에는 금 왕관이 있었다 (계. 4:4: 11:16).
다시:
나는 왕좌들을 보았다, 그리고 그들은 그것 위에 앉았다, 그리고 심판이 그들에게 주어졌다
(계. 20:4).
열두 사도들에 관하여는 아래 대목에서 읽을 수 있다:
예수께서 말하셨다, 거듭남에서 나를 따랐던 너희는 사람의 아들이 그분의 영광의 왕좌 위에 앉을 때, 너희 역시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들을 심판하는 열두 왕좌에 앉을 것이다 (마. 19:28).
그리고 누가복음서에서:
나는 내 아버지께서 나에게 약속하신 것 같이 왕국을 너희에게 약속한다, 너희는 내 왕국에서 내 식탁에서 먹고 마시고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들을 심판하는 왕좌에 앉을는지 모른다
(눅. 22:29, 30).
위 구절들에서 24 원로들, 열두 사도들이 뜻해지는 것이 아니다는 것은 인간이든, 천사들이든 누구도 심판할 자격이 없다는 사실로부터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이는 일반적 측면에서의 모든 진리들과 선들이 뜻해진다; 즉 주님밖에 인간의 내면들을 알 수 있는 분은 없기 때문이다. 이 모두로부터 지금 명백한 바, “단이 이스라엘의 지파 중의 하나로 그의 백성을 판결할 것이다”에 의해 단에 의해 표현된 진리가 일반적 진리들 사이에서의 하나로서 심판이 있다가 의미된다는 것이다.

단은 길에 있는 뱀일 것이다. 이는 선이 아직 까지는 인도하지 않기 때문에 진리에 관하여 그들이 추론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단의 표현함이 진리 안에 있으나 선 안에는 아직 있지 않은 이들이다로부터; “뱀(serpent)”의 의미함이 감각적인 것으로부터 추론하는 것이다로부터 (아래에서 살핀다); 그리고 “길”의 의미가 진리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고로 “단은 길에 있는 뱀일 것이다”에 의해 진리에 관하여 그들이 추론함, 그 이유는 선이 아직 인도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추론함의 품질, 그 결과 진리의 품질에 관한 것은 이어지는 것에서 말해질 것이다.
“뱀”이 감각적인 것으로부터 추론함을 표시하는 이유는 천국에서 인간의 내면들이 다양한 동물들에 의해 표현되기 때문, 이로부터 말씀에서도 마찬가지로 표현되기 때문이다. 인간의 감각적인 것들이 뱀에 의해 표현되는 이유는 감각적인 것들이 인간 안에서 가장 수준이 낮은 것들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관계적으로 지상적인 것들, 그리고 마치 기어다니 듯 하기 때문이다. 이는 감각적인 것들을 통하여 흐르는 형체들로부터 알는지 모른다, 이에 관하여는 주님의 신성한 자비로부터 그밖의 장소에서 살필 것이다. 그러므로 이런 감각적인 것들이 뱀들에 의해 표현되어졌고, 주님의 신성한 감각적 부분 조차 광야에서 구리뱀에 의해 표현되기까지 하였다; 그리고 외적 부분들에서는 신중함과 용의주도함이 “뱀”에 의해 의미되었음을 아래 구절에서 읽을 수 있다:
너희는 뱀 같이 슬기롭고 비둘기 같이 악의가 없어라 (마. 10:16).
그러나 인간이 감각적인 것 안에 있을 때, 내적인 것과 멀리 떨어진다, 마치 진리 안에 있고, 선 안에 있지 않은 경우와 같다, 그리고 감각적인 것으로부터 말한다, 이때 “뱀”에 의해 추론이 의미된다; 그러므로 단이 취급되는 여기서는 진리에 관하여 추론함이 의미된다, 그 이유는 선이 아직 인도하지 않기 때문이다. 다른 경우에서 뱀에 의해서는 악의, 교활, 사기가 뱀에 의해 의미된다, 그러나 독 있는 뱀, 독사 같은 경우는 독성 있는 추론이 의미된다

작은 길의 독사. 이는 선에 관하여 진리로부터 추론함을 의미한다. 이는 “독사(arrow-snake)”의 의미가 선에 관하여 추론함이다로부터 (아래에서 살핀다); “작은 길(path)”의 의미가 진리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작은 길의 독사”가 선에 관하여 진리로부터 추론함을 표시하는 이유는 “뱀”에 의해 추론함이 의미되고, 고로 “독사”에 의해서는 (추론) 자체를 계획하는 추론함, 즉 선을 향하여 진리로부터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단에 의해 표현되는 이들과 더불어 진리는 아래쪽에 있고, 선은 위쪽에 있기 때문이다.

말의 뒤꿈치를 문다. 가장 낮은 자연 평면으로부터의 오류를 의미한다. 이는 “문다(bite)”의 의미가 달라붙는(유착, adhere) 것, 그렇게 해서 상해를 입히는 것이다로부터; 그리고 “말의 뒤꿈치”의 의미가 가장 낮은 자연 평면으로부터의 오류들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 이유가 “뒤꿈치(heel)”는 가장 낮은 자연 평면과 육체 수준의 것을 표시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말”은 지적 부분을 표시한다; 여기서의 “말”은 오류들을 표시하는데, 그 이유는 이것이 가장 낮은 자연 평면, 또는 감각적 수준의 것에 속하는 지적 부분이기 때문이다. 진리에 있는 이들, 그러나 선 안에 아직 있지 않은 이들이 가장 낮은 자연적인 것으로부터 오류 안에 있는 이유는 선이 진리와 함께 있지 않으면, 진리는 어떤 빛 안에도 있지 못한다는 사실로부터 알는지 모른다; 그리고 선이 어떤 진리를 만날 때, 선은 진리를 계몽할 뿐만아니라, 선 자신의 빛 안으로 진리 자체를 가져다 놓는다. 그러므로 진리 안에 있기는 하나 아직 선 안에 있지 못한 이들은 그늘과 어둠 안에 있을 수밖에 없다; 그 이유는 진리는 자체로부터 빛을 가지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이 선으로부터 가지는 빛은 어렴풋한 수준의 빛, 마치 틈새로 새어나온 빛의 수준일 뿐이다. 이런 수준의 인물이 진리에 관하여 생각하고 추론할 때, 그리고 진리로부터 선에 관하여 추론하고 생각할 때, 그들은 어둠에서 유령을 보는 이들과 비슷하다, 그리고 유령들을 진짜 신체들이라고 믿는다; 또는 침침한 장소에서 벽에 있는 표시들을 보고 공상 안에서 이것들이 어떤 인간 또는 동물로 만들어 버리는 이들과 비슷하다; 여기서 취급되는 진리와 더불은 경우가 이런 수준의 경우이다. 그 이유가 그들은 진리들이 아닌 것을 진리들이라고, 즉 유령을 신체라고, 벽의 어떤 표시가 사람이라고 우기는 것이다. 더욱이 교회의 모든 이설(이단, heresy)들은 말씀으로부터의 어떤 진리 안에 있어왔던 이들, 그러나 선 안에 있지 않았던 이들로부터 발생되어져 왔다; 그들에게 이설은 진리 같이 정확하게 나타났다; 같은 방식에서 교회 안의 오류들도 그러하다. 이런 자신들만의 진리(오류)들을 선포해왔던 이들이 선 안에 있지 않아왔었다는 것은 그들이 신앙의 진리 뒤쪽 멀찍이 구석으로 선행의 선을 처박아 두거나, 이 선에 전혀 일치하지 않는 기발난 비꼬기 논리로 돌려 부분적으로 자동으로 거절되게 한다는 사실로부터 알는지 모른다.
진리 안에 있으나 아직 선 안에 있지 않은 이들이 가장 낮은 자연 평면의 수준으로부터의 오류들로부터 선과 진리에 관하여 추론한다고 말했는 바, 이제는 오류가 무엇인지 짚어보고 가야할 것 같다. 예로 사후의 삶을 가지고 생각해보자. 가장 낮은 자연적 수준으로부터의 오류 안에 있는 이들, 즉 진리 안에 있으나 아직 선 안에 있지 않은 이들은 자기 신체 외에는 인간 안에서 살아 있는 어떤 것이 있다는 것을 믿지 않는다, 하여 그가 죽을 때, 그가 다시 육체를 받지 않으면, 다시 일어날 수 없다고 믿는다. 이런 이들에게 이렇게 말해주면, 즉 우리의 육체 안에는 육체라는 것이 살아 있는 것 말고 또 다른 인간이 살고 있다는 것, 즉 내면의 인간이 있다는 것, 우리가 죽을 때 이 인간이 주님에 의해 들리워진다는 것, 들리워지면 인간은 영들과 천사들이 가지는 것과 같은 몸을 가진다는 것, 그리고 그는 보고, 듣고, 말하면서 어느 집단 안에 있다는 것, 이는 그가 세상에서의 자기와 같은 인간 자신으로 나타나 있다는 것이다. 허나 그들은 이것을 납득하지 못한다. 가장 수준 낮은 자연적인 것으로부터의 오류들이 그들로 이런 일들은 불가능하다고 믿게 만든다, 그 이유는 그들의 신체가 그들로 보지 못하게 하기 때문이다.
더욱이 이런 인물들이 영 또는 혼에 관하여 생각할 때, 이것마저 자연에서 보여질 수 있는 것이 아니면 이에 관한 생각도 여하간 오리무중해 있다, 하여 누구는 에테르이라고, 누구는 숨이라고, 누구는 불꽃이라고 얼버무린다; 어떤 이는 그것이 육체에 다시 결합할 때까지 그것은 거의 어떤 생명력도 가지지 못하는 단지 생각하는 힘이다고 말한다. 그들이 이런 식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그들에게 모든 내면의 것들이 그늘 안에, 어둠 안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오직 바깥쪽의 것들 만 빛 안에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야말로 그들이 실수 안으로 쉽게 빠져들게 하는 요인인 것이다; 하여 그들은 혼이 육체와 다시 함께 하는 것만에 몰두한다. 특히 세상의 파멸 때의 경우는 더욱 그러하다, 하여 지금까지 세상의 종말을 기다리고 있다. 누군가는 이렇게 생각할지 모른다. 인간의 생명은 들짐승의 생명과는 완전히 같지가 않다, 그리고 죽은 자의 누구도 인간에게 나타나서 생명의 상태를 알려주지 않는다는 것, 이렇게만 간단히 초점을 바꾸어 생각해도 그들은 항간에서 말해온 부활에 관한 교리로부터 물러나 앉고 만다. 이런 경우는 너무나 예가 많지만 지면 관계상 생략해야 할 것이다. 한마디로 본문과 연결해 생각을 정리하면, 그들이 선 안에 있지 않아서, 즉 선을 통하여 빛 안에 있지 않은 이유 때문이다. 위의 예를 든 경우 같은 수준에 머물고 막무가내로 그것을 당차게 고집하는 이들에 관하여 말해진다: “그리고 그의 기수는 뒤쪽을 향하여 떨어질 것이다; 나는 당신의 구원을 기다립니다, 오 여호와여.” 이는 주님이 도움을 가져다 주시지 않으면 퇴조함이 온다가 의미되고 있다.

그리고 그의 기수는 뒤를 향해 떨어질 것이다. 이는 그러므로 물러남이 온다를 의미한다. 이는 “뒤를 향해 떨어짐”의 의미가 멀어짐(recrde), 즉 진리로부터 멀어짐이다; “기수”의 의미가 가장 낮은 자연 평면으로의 오류들 안에 있는 이들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단”에 의해 위에서 서술한 이런저런 상태로 교회 내에 있는 이들이 의미되고, 그리고 주님의 왕국에서 마지막째(가장 바깥 경계선)에 있는 이들이 의미되기에, 그러므로 “단”에 의해 거짓들을 부화하고 퍼뜨리는 거짓 안에 있는 이들도 의미된다. 그들의 거짓들이 “말”이라 불리우고, 진리와 선에 관해 그들의 추론함이 “뱀”이라고 아래 구절에서 불리운다:
그의 말들이 코를 불며 거칠게 숨쉼이 단으로부터 들려졌다; 그의 강한 말들의 울음 소리에 온 토지가 와들와들 떨었다; 그리고 그들이 오고 토지와 거기 가득한 것, 도성과 그 안에 거주하는 이들을 삼켰다. 보라 내가 너희 사이에 뱀들을, 독사들을 보낸다, 이것은 마법에 걸려들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너희를 물을 것이다 (예. 8:16, 17).

나는 당신의 구원을 기다립니다, 오 여호와여. 이는 주님께서 도와주시지 않으면을 의미한다. 이는 “구원을 기다림”의 의미가 도움을 가져오는 것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진리 안에서 물러나고 선 안에서 아직 인도되지 않을 때 주님께서 가져오시는 도움에 관하여 주목해보자, 이것이 “기수가 뒤쪽으로 떨어지고, 나는 당신의 구원을 기다립니다, 오 여호와시여”에서 의미되고 있다. 우리가 알아야 하는 것은, 그들이 아래쪽, 또는 바깥쪽을 쳐다보고 있다는 점이다, 그 이유가 그들이 아직 선 안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에 비해 선 안에 있는 이들은 마치 거듭나는 이들 같이 위쪽 또는 안쪽을 쳐다보고 있다; 그 이유가 인간이 거듭나질 때, 질서는 이 길로 바뀌기 때문이다. 진리 안에, 그리고 선 안에 아직 있지 않은 이들이 아래쪽과 바깥쪽을 쳐다보는 바, 그들은 웅대한 사람에서 바깥쪽의 피부의 영역에 속하는 이들 사이에 있다; 그 이유가 바깥쪽 피부는 신체의 내면들로부터 바깥쪽으로 돌아서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밖인 것으로부터 그것의 닿음(접촉)을 가진다, 그러나 내부로부터의 닿음을 가지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이런 인물이 주님의 왕국 안에 있는 것은 분명하다, 그 이유가 웅대한 사람에 있기 때문, 그러나 최말단들에 있다.

19절. 갓, 군대가 그를 파괴할 것이다, 그리고 그는 뒤꿈치를 파괴할 것이다. “갓”이란 진리로부터의 일들 일 뿐, 아직은 선으로부터의 일들은 아님을 의미한다. “군대가 그를 파괴할 것이다”란 사려분별함 (판단함)이 없이 진행된 일들, 이것은 진리로부터 질주할 것임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는 뒤꿈치를 파괴할 것이다”란 그러므로해서 자연 평면에 있는 무질서를 의미한다.

갓. 이는 진리로부터의 일들 일 뿐, 아직은 선으로부터의 일들은 아님을 의미한다.
이는 “갓”의 표현함이 일들(works)이다로부터; 여기서의 경우, 진리로부터의 일들, 그러나 아직 선으로부터는 아닌 일들이다. 이는 내적 의미에서의 묘사됨으로부터 알게 된다. 또한 시리즈의 질서적 순서에 따라서 이기도 하다. 앞의 “단”의 경우는 진리 안에 있되 아직 선 안에 있지 않은 것, 그 뒤를 이어 진리들로부터의 일들이기는 하되, 아직 선으로부터의 일들은 아니다, 하여 순서적으로 이 일들의 품질이 이어진다.

군대가 그를 파괴할 것이다. 이는 사려분별함 (판단함)이 없이 진행된 일들, 하여 그들은 진리로부터 질주할 것이다를 의미한다. 이는 “군대(troop)”의 의미가 일들이다로부터, 여기서는 사려분별 없는 일들이다; 그 이유가 진리로부터 이되 아직 선으로부터가 아닌 일들을 행하는 이들은 불명료한 이해력을 지니기 때문이다, 이에 비해 선으로부터 일들을 행하는 이들은 계발된 이해력을 가진다, 그 이유는 선이 계발해주기 때문이다. 주님으로부터의 진리의 빛은 선을 통하여 지적 부분으로 흘러든다, 고로 진리 안으로, 그러나 진리 안으로 직접적으로는 아니다. 여기서는 경우는 태양의 빛과 같다, 이 빛은 열을 통하여 식물 왕국의 주체들 안으로 흘러든다, 그리고 그것들로 성장하고 꽃피우나, 직접적으로는 아니다; 그 이유가 빛이 열 없이 흘러든다면, 그것은 겨울의 경우인 바, 자라거나 꽃피우거나 하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더욱이 “그를 파괴한다”란 진리로부터 내몰아낸다를 표시한다.
그러나 여기서 “갓”에 의해 의미되는 이들이 누구인지가 말해질 것이다. 진리에 관련하여환영에 빠진 이들, 그럼에도 이로부터 일들을 하는 이들; 고로 진리로부터가 아니고, 선으로부터는 더 더욱 아닌 이들이 있다. 이런 일들을 수단으로 그들은 진리로부터부터 내몰린다, 그 이유가 진리 안에 있으나 아직 선 안에 있지 않은 이들은 어떤 것을 자기의 종교적 어떤 확신(광신적 신앙, religiousity)으로부터 행동 안으로 가져온 그 후 그는 마치 그 확신이 진리 자체인 듯 둔갑하여 그것을 방어하는데 골몰하고 그것 안에 웅크린다, 이런 상태의 당사자는 선 안으로 오지 않고서는 자신의 확신 자체를 수정하려 어떤 것도 받지 않으려 한다; 그 이유가 그렇게 행동함을 수단으로 그는 그것에 물들여져 있고 그것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고로 일들이 그를 진리에서 내몰리게 하는 셈이다. 이 외에도, 그는 이런 것들이 진리가 아닌데도 진리이다고 믿는다, 그 이유가 이런 인물들 또한 “단”에 의해 의미되는 이들 같이, “감각적인 것으로부터, 고로 사려분별함 없이 판단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생각해보자. 모든 이는 이웃으로 동등하게 세어져야 한다는 것을 진리로 삼는 이들이 있다. 따라서 그는 악한 자이든 선한 자이든 똑같은 혜택이 돌아가게 하는 것에 그의 관심이 모아져 있다. 고로 그는 사려 분별 없이 일들을 진행하는 셈이다. 또한 진리 자체에도 반대된다; 그 이유가 진리 자체인 즉, 모든 이는 이웃이다, 그러나 모든 이웃은 각기 다른 등차에 있다, 그리고 선 안에 있는 이웃이 더 등차가 높은 이웃이다.
또한 “갓”에 의해 모든 구원받음은 일들 만에 있다고를 만드는 이들도 의미한다, 이를 염두하시고 주님께서 바리새인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셨다:
고로 바리새인들은 스스로 서서 기도했다, 하느님, 저는 당신에게 감사합니다, 즉 제가 다른 이들 같지 않기 때문, 즉 저는 강탈자가 아니고, 부정한 자도 아니고, 간음자도 아니고, 심지어 세리조차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저는 일 주에 두 번 금식합니다, 저는 제가 소유한 모든 것의 십일조를 바칩니다 (눅. 18:11, 12);
그야말로 위 구절은 진리들 자체로서 외적인 것을 붙들고 있는 형국이다. 주님의 왕국에도 이런 이들이 있는데, 문지방에 서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말하신다, “내가 네게 말한다, 세리가 다른 이들(바리새인) 보다 (더) 의롭다여김을 받고 집으로 내려갔다”(눅. 18:14). 또한 바리새인도 의롭다여김을 받고 내려갔다, 그 이유는 그는 명령되었기에 순종함으로부터 일들을 했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갓에 의해 진리 아닌 것을 진리라고 부르면서 일들을 행한 이들이 표현되어진다; 어쨌든 그들의 일들은 진리들과 같다, 그 이유가 일들은 의지와 이해력이 행동선상에 있는 것밖에 더 아니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들을 구원하는 것은 선인 것을 행하겠다는 의도심을 지니는 것, 그리고 그들의 무지함 안에 순진의 어떤 것이 있는 것이다.
진리이지 않은 것으로부터 일하는데도 진리이다고 믿어 외적 일들 안에 있는 이들이 아래 구절에서 “갓”에 의해 의미된다:
여호와를 버린 너희, 나의 거룩함의 산을 잊은 너희, 갓을 위해 식탁을 차리고, 므니에게 음료 제물 (제주)을 따른 너희 (이. 65:11).
“갓에게 식탁을 차린다”는 것은 일들만에 있다 임을 표시한다.
그리고 예레미야서에서:
암몬의 아들들에게 향하여, 고로 여호와께서 말하신다: 이스라엘에 [아들들이 없느냐]? 그에게 상속자가 없느냐? 어찌하여 그의 왕이 갓을 물려 받고, 그의 백성들이 도성들에 거주하느냐? (예. 49:1);
“갓을 물려 받는”것은 진리이지 않은 것으로부터의 일들 안에서 살고 있는 이들을 표시한다; “암몬의 아들들”은 진리들을 거짓화하는 이들, 거짓화 해놓고 그것에 따라 사는 이들 이다, 갓에 관한 이런 사항들이 예언자에 의해 그들에게 적용되고 있다.

그리고 그는 뒤꿈치를 파괴할 것이다. 이는 그러므로 해서 자연 평면에 있는 질서의 결핍을 의미한다. 이는 “파괴하다(ravage)”의 의미가 진리로부터 내몰려지는 것이다로부터, 고로 질서가 혼란한 것, 또는 질서가 결핍되는 것이다; 그리고 “뒤꿈치”의 의미가 가장 낮은 자연 평면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러므로 분명한 바, “그는 뒤꿈치를 파괴할 것이다”에 의해 자연 평면에 있는 질서의 궁핍이 의미된다는 것이다. 진리로부터 일들을 하되, 아직 선 안에 있지 않은 이들은 그들의 자연 평면에 질서의 궁핍이 초래될 수밖에 없다, 그 이유는 일들이 자연 평면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그들은 영향을 미친 만큼에서 그들의 내면들이 닫힐 수밖에 없다; 그 이유가 내면들이 종결되는 평면이 자연 평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만일 이것이 질서의 결핍이다면, 내면들로부터 흘러드는 모든 것도 질서의 결핍 안에 있게 된다; 질서의 결핍은 어둠이고 불명료함이다, 하여 그들은 진리인 것을 볼 수 없고, 어둠과 불명료함 때문에 그들은 진리 아닌 것을 진리로 붙잡고, 비 진리로부터 일들을 하고 있다. 사실상 일들이 가장 필요한 것이 진리이다, 그 이유는 일들은 결과와 삶 안에 있는 선행과 신앙이기 때문이다, 하여 진리 없이 선행도 없다는 것을 누가 알지 못할까? 일들은 바깥쪽 형체로 있는 선과 진리밖에 더 아니다; 그 이유는 선은 의지력으로부터, 진리는 이해력으로부터 있고, 이것들이 행동 안으로 놓여질 때, “일들”이라 불리우는 것인 바, 선과 진리가 이러이러하면, 일들 역시 이러이러함이 분명하지 않을까?

20절. 아셀로부터 그의 빵은 지방이 있다, 그리고 그는 왕의 기쁨들을 산출할 것이다. “아셀로부터”란 애착들은 행복이다를; “그의 빵은 지방이 있다”란 선으로부터의 기쁨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는 왕의 기쁨들을 산출할 것이다”란 진리로부터 오는 즐거움(유쾌함)을 의미한다.

아셀로부터. 이는 애착들은 복됨(blessedness, 행복, 은총 입음)이다를, 즉 주님을 사랑함과 이웃을 향한 사랑으로부터 있는 천적 수준의 애착들의 복됨을 의미한다. 이는 “아셀”의 표현함이 영원한 생명(삶)으로부터의 행복(happiness), 그리고 애착들로부터의 복됨(blessedness)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더욱이 아셀은 복됨(blessedness)으로부터 그렇게 불리우는 이름이다. (이 대목에서 복됨이라는 단어는 역자가 사전에도 없는데 사용하고 있다. 그 이유가 영한 사전은 다른 두 영어 단어를 행복으로 모두 번역하나 영어 단어는 구분해 사용해서 이 구분을 표시하기 위해 약간 다른 단어로 복됨이라는 표현을 사용했을 뿐 실상 모두 행복이다. 그러나 단어의 괄호에 두 다른 영어 단어를 삽입해두어서 혹시 혼란을 야기하지 않을까 하여 덧붙인다. 영어 단어는 자연적 차원에서만, 영적 차원에서만, 또는 자연적과 영적을 혼동해 사용하거나 할 때 각각의 표현에 각각의 단어를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어휘는 많고 복잡하지만 일단 그 단어나 어휘를 알면 차후 구분이 완전히 자동적으로 잘되므로 읽는 자로 혼돈을 줄 염려가 사라지게 되어 있다, 예를 들면, 하늘을 성경에서 heaven이라고 표현하지, sky라는 단어를 거의 사용하지 않는데, 그 이유가 성경은 인간의 자연적 행복 보다는 영적 행복을 추구하는 책이기 때문이다. 감정의 표현인 기쁨의 경우도 joy는 가장 높은 수준의 영적 기쁨(천적 수준의 기쁨, 환희)을, delight은 보통의 영적 기쁨을, pleasure는 자연적, 육체적 수준의 기쁨, 하여 쾌락 같은 것을 말한다. happiness는 일반적, 또는 자연적, 영적 모두를 아우르되 자연적 수준이 강조되는 행복이나, blessedness는 영적 수준의 행복일 것으로 여겨진다. 역자가 언어학자가 아닌 이상, 위에 말한 것이 정확하다고 말할 수는 없으므로 아이디어 제공 수준에서 참조하기 바란다. 역자주) 아셀로 표현되는 행복은 쉽게 묘사되어질 수는 없다, 그 이유는 그것이 내적 부분에 있기 때문이다. 하여 누구와도 당사자의 육체 자체와 더불어 이 행복은 좀처럼 보여지지 않는다, 더욱이 감각 부분에도 그러하다. 그 이유가 육체에서 그의 삶 동안 (두 감각들을 지니는데), 인간은 자기 육체에서 거행되는 감각들에 대해서는 100% 명료하나, 그의 영에서 거행되는 감각 부분에서는 매우 불분명해 있다. 그 이유는 육체에 있는 동안 세상적 그의 관심사가 영적 감각을 방해하는 형국으로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자연적, 감각적인 것이 내향의 것들과 일치하는 정도만큼에서만 애착들의 복됨은 흘러들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겨우 흘러든 것마저도 실상 아주 희미한 수준, 하여 마음이 만족함으로부터 있어지는 고요함 정도에서만 감지 된다; 그러나 이 세상을 떠난 이후, 그것은 자체를 완전 명명백백하게 한다, 하여 그때는 복되고 행복한 어떤 것으로 지각되어진다, 그리고 이때 그것은 내면들과 외면들 모두에게 영향을 미친다. 한 마디로, 천적 수준의 애착들로부터의 복됨은 내적 경로를 수단으로 흘러드는 혼 또는 영 자체에 관한 것이다, 그리고 육체를 향하여도 꿰뚫는다, 그러나 자연적, 감각적인 것으로부터의 즐거움들이 길에 버티지 않는 만큼에서일 뿐이다.
그나마 이 복됨의 조금(whit, 조각)일지라도 자아 사랑과 세상 사랑의 즐거움에 있는 자에게는 가능하지 않다; 그 이유는 이 사랑들은 완전 반대 국면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런 사랑들에 있는 자들은 위엄을 드높이는 것, 재물이 풍부해지는 것, 누구보다 더 잘났다 칭송받는 것 등등을 벗어나 복됨이라는 단어는 납득조차 불가능해 있다. 이들에게 이렇게 말해본다면, 즉 이런 사랑들로부터의 즐거움들은 외적이다는 것, 하여 육체와 더불어 사라진다는 것, 그리고 사후 마음에 남는 것은 슬픔과 우울함으로 변하여진다는 것, 이런 것이 지옥들을 지배한다는 것; 그리고 천국에 있는 이들에 의하여 향유되는 만족함과 행복이 있는 내적 즐거움이 있다는 것, 등등이다. 이런 사항들을 그들은 전혀 납득하지 못한다, 그 이유는 외적 부분이 그들을 지배하고 내적 부분은 닫혀 있기 때문이다. 이 모두로부터 “아셀”에 의해 의미된 애착의 복됨이 무엇인지 알았으리라 본다.

그의 빵은 지방이 있다. 이는 선으로부터의 기쁨을 의미한다. 그 이유는 “지방이 많음, 살쪘음(fstness)”이 천적인 것, 또는 사랑의 선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단어 “지방”이 사용되되 빵에 결합되어 사용될 경우, 이는 사랑의 선을 의미하고, 이때 “지방”에 의해서는 이 사랑의 기쁨이 의미된다.

그리고 그는 왕의 기쁨들을 산출할 것이다. 이는 진리로부터 오는 유쾌함을 의미한다. 이는 “기쁨(delight)들”의 의미가 유쾌함이다로부터; 그리고 “왕”의 의미가 진리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고로 “왕의 기쁨들을 산츨할 것이다”는 진리로부터 유쾌한 것을 표시한다. 위에서 “선으로부터의 기쁨”과 “진리로부터 유쾌함”이 언급되었는데, 그 이유는 말씀의 모든 곳에 천국의 결혼이 있기 때문에서 이다. 천국의 복됨으로부터인 선으로부터 기쁨과 진리로부터의 유쾌함은 게으름에 있지 않고, 활동적임에 존재한다; 또한 활동적 임에서 기쁨과 유쾌함은 항구적이고 꾸준히 위쪽을 향하는 바, 복됨을 유발한다. 천국에 있는 이들과 더불어, 활동적임은 쓸모 있어짐을 수행함에 존재한다 (이들에게 이것은 선으로부터의 기쁨이다), 그리고 쓸모 있어짐의 목적에 풍미를 더한다 (이것은 그들에게 진리로부터의 유쾌함이다).

21절. 납달리는 풀어 놓은 암사슴이라, 세련된 강연을 한다.

납달리. 이는 시험들 이후의 상태를 의미한다. 이는 납달리의 표현함이 시험이다로부터; 또한 시험들 이후의 상태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더욱이 납달리는 “씨름함”을 뜻하는 단어로부터 명명되어졌다, 이는 영적 의미에서 시험들을 의미한다.

풀어 놓은 암사슴. 이는 자연적 애착의 자유를 의미한다. 이는 “암사슴”의 의미가 자연적 애착이다로부터 (아래에서 살핀다); 그리고 “풀려 있다”의 의미가 자유하다이다로부터, 그 이유가 붙잡힌 암사슴이 풀어나진다면, 이는 자유를 가지기 때문이다. 시험의 상태로부터 해방됨이 “풀어나진 암사슴”에 비교되는 이유는 암사슴이 숲의 동물이고, 여느 짐승 보다 자유함을 사랑하는 짐승이기 때문, 이것은 또한 자연 평면과도 닮은 데가 있다; 그 이유가 이것(자유함을 사랑함)은 그것의 애착들의 기쁨 안에서 있기를 사랑하기 때문, 결과적으로 자유함 안에 있기를 사랑한다는 말이다, 그 이유가 자유함은 애착에 속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암사슴”이 자연적 애착을 의미하는 이유는 암사슴이 [선한] 애착들 중의 하나를 의미하는 짐승이기 때문이다, 즉 쓸모 있음과 식품을 위해 있는 짐승들, 어린 양, 양, 염소, 염소새끼, 수소, 거세한 수소, 암소 등과 비슷한 대목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축화된 이런 짐승들은 태워바침이나 제물로 사용되기 때문에 영적 수준의 애착들을 의미함에 비해, 암사슴은 이런 쓰임새에는 있지 않는 바, 자연적 수준의 애착밖에 더 의미하지 않는다.
자연적 애착들이 “암사슴”에 의해 의미되는 것을 아래 구절에서 읽을 수 있다:
여호와께서는 내 발을 암사슴들의 것 같게 만드신다, 그리고 나를 내 높은 장소에 서게하신다 (시. 18:33).
그리고 하박국서에서:
여호비 주님은 나의 강함이시다, 그분은 내 발을 암사슴의 것 같게 놓으신다, 그리고 나를 내 높은 장소 위에서 행군하게 만드신다 (합. 3:19).
“암사슴들의 것 같게 발을 만드는” 것은 애착들의 자유함에 있는 자연 평면을 표시한다. “암사슴들의 것 같이 발을 놓는” 것이 이 의미를 가지는 것은 발이 암사슴들의 것 같이 달리기 위해 재빠르고 행동적인 발을 만드는 것이 영적 어떤 것이 아니다는 사실로부터 알런지 모른다; 그럼에도 영적인 어떤 것이 포함한다는 것은 즉각 이어지는 말이, “여호와께서는 그를 놓아서 그가 그의 높은 장소 위에서 행군하게 하신다” 임에서 분명해진다. 이것이 자연적 애착 넘어 있는 영적인 애착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가 아래 구절에 있다:
절름발이가 숫사슴 같이 뛸 것이다 (이. 35:6);
그 이유가 “절름발이”에 의해 선 안에 있는 이, 그러나 아직 진짜 선 안에 있지는 않는 이가 의미되기 때문이다.
다윗서에서:
숫사슴이 물있는 시내를 갈구함 같이 제 혼이 당신을 갈구합니다 (시. 42:1);
위에서 “숫사슴”은 진리에 애착함이다; “물있는 시내를 갈구함”은 진리들을 갈망함을 표시한다.
예레미야서에서:
시온의 딸로부터 그녀의 모든 영예는 가버렸다; 그녀의 제 1 인 자들은 숫사슴들 같이 되어진다, 그들은 풀밭을 발견하지 못했다 (애. 1:6)
위에서 “시온의 딸”은 선에 애착함을 표시한다, 이 애착함은 천적 수준의 애착함으로부터 이다; “제 1 인 자”들은 이 교회의 제 1 의 진리들을 표시한다, 이는 숫사슴들에 비교되어진다, 그러므로 자연적 진리의 애착들이 의미된다; 그리고 “숫사슴들이 풀밭을 발견 못함”에 의해서는 진리들과 그것들의 선 없이 있는 자연적 애착들을 의미된다.
마찬가지로 “암사슴”에 관한 것을 아래 구절에서 읽을 수 있다:
땅이 조각으로 갈라져버렸다, 토지에 비가 내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농부는 부끄러워지고 말았다, 그들은 자기들의 머리들을 덮었다, 그 이유는 새끼를 낳은 암사슴조차도 들판에 풀이 없어 새끼를 포기했기 때문이다 (예. 14:4, 5)
“암사슴”은 자연적 선에 애착함을 표시한다; “들판에서 새끼를 낳았다”란 자연적 애착들이 교회의 영적인 것들과 결합함을 표시한다; 그러나 이 애착들이 진리들과 선들이 결핍되어졌기 때문에, 말해지는 바, 그녀는 “포기했다(내버렸다), 풀이 없기 때문이다.” 아마 모든 이는 이 구절에서 “암사슴”에 어떤 내적 의미가 있을 것임을 눈치챘을 것이다; 그 이유가 내적 의미 없이는 “암사슴이 들판에 새끼를 낳고 풀이 없어 그것을 포기했다”에 의해 뜻해지는 바를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다윗서에서:
여호와의 음성이 암사슴들로 낳게 만드신다, 그리고 숲을 발가벗기신다; 그러나 그분의 성전에서 모든 이는 말한다, 영광 (시. 29:9);
“암사슴들로 낳게 만드는 여호와의 음성”이라는 말에 영적인 내적 의미가 있다는 것은 이 뒤를 이은 말, “그러나 그분의 성전에서 모든 이들이 말한다, 영광”이 이어짐에서 분명해진다. 이 말은 영적 의미 없이는 앞의 암사슴들과 숲과 일치되지 않는다.

강연을 세련되게 한다. 이는 마음(mind)이 기뻐함(gladness)을 의미한다. 이는 “세련된 강연”의 의미함이 마음이 기뻐함이다로부터; 그 이유는 모든 강연이 마음(지성)으로부터 진행되기 때문, 하여 마음이 기쁘고 기운차 있을 때, 세련된 강연을 만들기 때문이다.

이상 살핀 바로부터 단, 갓, 아셀, 납달리에 관한 이스라엘의 예언적 말함에는 내적 의미가 있다는 것, 이 의미 없이 그의 발언은 이해될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해진다. 즉, “단은 길 위의 뱀, 작은 길의 독사이다, 말의 뒤꿈치를 문다, 그의 기수는 뒤쪽으로 떨어질 것이다”; 또한 “군대가 갓을 파괴할 것이다, 그는 뒤꿈치를 파괴할 것이다”; 또한 “아셀의 빵은 지방이 있다, 그는 왕에게 기쁨들을 줄 것이다”; 또한 “납달리는 풀려진 암사슴이다, 세련된 강연을 한다”에 대해서이다. 내적 의미라는 열쇠 없이 누가 이런 사항들이 뜻하는 것을 알 수 있을까? 사실 이런 사항들은 야곱의 아들들, 또는 지파들에 관해 말해진 것이 아님은 “날들의 끝에서” 그들에게 떨어지는 말들이 아니었다는 사실로부터도 간단히 파악된다. 따라서 그들에 의해 표현되는 이런저런 것들이다는 것을 이미 살핀 바로 분명해졌을 것이다.

22-26절. 요셉은 결실이 풍부한 자의 아들인데, 아들이다는 점에서는 샘 가까이 결실이 풍부한 자이고, 딸이다는 점에서는 성벽 위에서 행진하는 딸이다. 23 활쏘는 자가 그를 더 비참하게 하고, 그를 향해 쏘고, 그를 미워한다. 24 그러나 그는 자기 활의 강함 안에 앉아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의 손들의 무기들은 강력한 야곱의 손들에 의해 힘세지게 만들어졌다. 거기로부터 목자, 이스라엘의 돌이 있다. 25 너의 아버지의 하느님으로 말미암아, 그분이 너를 도울 것이다, 그리고 솨다이와 더불어, 그리고 그분은 위의 천국의 복됨을 가지고 너를 복되게 하실 것이고, 아래에 드러 누운 깊음 속의 복됨과, 가슴들과 자궁의 복됨을 내리실 것이다. 26 네 아버지의 복됨은 네 선조들의 복됨 보다 더 우세하여 시대의 언덕들의 바램과 맞먹을 것이다.그것은 요셉의 머리 위에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의 형제의 나지르인의 머리의 관 위에 있을 것이다.

요셉은 결실이 풍부한 자의 아들이다. 이는 영적 왕국의 교회, 최고 높은 의미에서 신성한 영적 부분에 관련되는 주님을 의미한다. 이는 요셉의 표현함이 최고 의미에서는 신성한 영적 부분에 관련한 주님을, 내적 의미에서는 영적 왕국과 신앙의 선을, 그리고 외적 의미에서는 열매가 풍성함과 번성함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리고 “요셉”이 선의 열매가 풍성해짐과 진리의 번성함을 표시하기 때문에 그는 “결실이 풍부한 자의 아들이다”라고 불리운다. 여기서 요셉에 의해 주님의 영적 왕국이 묘사되나, 앞의 유다에 의해서는 주님의 천적 왕국이 묘사된다고 말해진 바 있다; 그 이유는 천국을 구성하는 두 왕국이 천적, 영적 왕국이기 때문이다. 천적 왕국은 셋째 천국, 또는 가장 안쪽 천국이고, 영적 왕국은 둘째 천국, 또는 중간 천국을 구성한다. 영적 왕국에서 주님은 달 같이, 천적 왕국에서는 태양 같이 나타나신다. 요셉과 유다에 의한 두 왕국의 차이는 단지 받는 그릇의 차이나 다름이 없다. 주님은 선밖에 그 외는 아니시다. 그분의 신성한 선으로부터 진행하는 것이 천국 안으로 흐르는데, 그분의 천적 왕국으로 흐를 경우, “신성의 천적 부분”이라 말하고, 영적 왕국으로 흐를 경우, “신성한 영적 부분”이라 말할 뿐이다. 즉 받는 그릇에 따른 상대적, 관계적 표현일 뿐이다.

아들이다는 점에서는 샘 가까이 결실이 풍부한 자이다. 이는 말씀으로부터 오는 진리로부터 결실이 있음을 의미한다. 이는 “아들”의 의미가 진리이다로부터; 그리고 “결실이 풍부한 자”의 의미가 진리로부터 결실이 풍부함이다; 그 이유가 영적 의미에서 결실이 풍부함은 출생, 태생 같이 진리와 선의 결실이 풍부함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샘(fountain, 원천)”의 의미가 말씀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러므로 분명한 바, “아들이다는 점에서는 샘 가까이에 있는 결실이 풍부한 자이다”에 의해 말씀으로부터의 진리로부터 결실이 풍부함이 의미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요셉에 의해 표현되는 교회, 즉 영적 수준의 교회 속에 있는 이들은 말씀의 진리로부터 선인 것을 아는 것을 배운다, 고로 진리를 통하여 선 안으로 들어감이 있어진다; 그러므로 그들은 “결실이 풍부한 자”에 의해 의미된 열매가 풍성함을 가진다.

딸이다는 점에서는 성벽 위에서 행진하는 딸이다. 이는 거짓들에 맞서 싸우기 위하여를 의미한다. 이는 “딸”의 의미가 교회이다로부터; 여기서는 영적 수준의 교회, 그 이유는 이것이 여기서 취급되는 주제이기 때문; 그리고 “성벽 위에서 행진함”의 의미가 거짓과 싸우기 위하여를 의미하는데, 이는 이어지는 말로부터 분명해진다, 즉 “사수가 그를 비참해지게 한다, 그리고 그를 향해 쏜다, 그리고 그를 미워한다, 그리고 그는 그의 활의 강함 안에서 앉을 것이다.” 그러므로 진리에 맞서 거짓들이 싸우는 것이 의미된다.
“담 위에서 행진한다”라고 말해진 이유는 내적 의미에서 취급되는 주제가 거짓들에 의해 진리가 공격받음, 그리고 진리가 거짓에 맞서 방어함이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요셉에 의해 표현되는 영적 수준의 교회는 계속적으로 공격을 받고, 주님에 의해 이것이 방어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말씀에서 이 교회에 속하는 것들이 도성에 비교되어, 그 안에 성벽, 외루, 성문, 빗장 등을 지닌 성에 비교되고 있다; 그리고 이 도성이 공격당함에 의해서는 거짓들에 의해 진리가 공격 당함이 묘사되고 있다; 그러므로 “도성”은 교리적인 것들이 의미된다, 그리고 그것의 “성벽”은 그것을 방어하는 신앙의 진리들이다, 그리고 반대적 의미로는 그것을 파괴하는 거짓들이다. “성벽”이 방어하는 신앙의 진리를 의미하는 것을 아래 구절에서 읽을 수 있다:
우리는 강한 도성을 가지고 있다; 구원을 그분께서는 성벽들과 성채들을 위하여 임명하실 것이다. 너희는 성문을 열어라, 하여 신의를 지키는 정의로운 나라가 들어갈는지 모른다 (이. 26:1).
다시:
너희는 너희 성벽들을 구원이라 부를 것이다, 그리고 너희의 성문은 찬양(이라 부를 것이다) (시. 60:18).
다시:
보라 나는 너희에게 손 위에 새겼었다, 너희 성벽들은 내 앞에서 계속적으로 있다 (이. 49:16);
“성벽들”이 신앙의 진리들을 표시한다. 다시:
나는 너희 성벽들 위에 경비병들을 놓을 것이다, 오 예루살렘이여; 그들은 마음에서 여호와를 간직하면서 낮과 밤 내내 침묵하지 않을 것이다 (이. 62:6);
위도 의미는 앞과 같다. 예레미야서에서:
고로 여호와 체바욷께서 말하신다, 나는 너희가 바빌론과 싸우려 지닌 전쟁의 무기들을 되돌릴 것이고, 성벽 없이 너희가 포위되게 할 것이다. 나 자신 내뻗은 선으로 너희에 맞서 싸울 것이다 (예. 21:4, 5).
다시:
여호와께서는 시온의 딸의 성벽을 파괴하기로 작정하셨다; 그분은 누벽과 성벽이 통곡하게 만드셨 다; 그들은 함께 쇠약해질 것이다. 그녀의 성문은 땅 안으로 가라앉을 것이다; 그분은 그녀의 빗장들을 파괴하시고 부수셨다 (애. 2:8, 9).
에스겔서에서:
아르왓의 아들들과 너의 군대가 내 성벽 위 빙둘러 있었다; 그리고 가마딤이 너의 망루에 있었다; 그들은 그들의 방패들을 네 성벽 빙둘러 걸어두었다, 그들은 너의 아름다움을 온전하게 했다 (겔. 27:11);
두로에 관하여 말하고 있다, 이를 수단으로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들이 의미되고 있다.
선과 진리에 관한 것들이 “성벽”과 “도성”에 의해 의미되는 것은 요한에 의해 보여진 천국으로부터 내려오는 거룩한 성 예루살렘에 대한 묘사로부터 매우 분명해진다. 거기서 새로운 교회가 의미되는 것은 모든 세부 사항들로부터 명백하다; 그리고 거기의 “성벽”에 의해 주님으로부터 진행하는 신성한 진리가 의미되어진다: 즉
천국으로부터 내려오는 거룩한 예루살렘, 크고 높은 벽을 가지고 있고, 열두 문들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도성의 벽은 열 두 기초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것들에 어린 양의 열 두 사도들의 이름들(이 있다). 그리고 나에게 말하고 있었던 그는 도성과 그곳의 문들과 벽을 측량하였다. 그리고 그가 도성의 벽을 쟀는데, 일백 사십 사 큐빗이었고, (이는) 천사에 속하여 있는 사람의 치수이다. 그리고 도성의 벽의 구조물은 벽옥이었다, 그리고 도성은 순수한 유리 같은 순금이었다. 그리고 도성의 벽의 기초들은 모두 각각 귀중한 돌로 장식되어 있었다. (계. 21:10-19);
“성벽”은 주님으로부터 진행하는 신성한 진리이다, 그리고 그러므로 선행의 선으로부터의 신앙의 진리이다는 것은 성벽에 관하여 말해지는 모든 것으로부터 분명해진다, 즉 그것은 “열두 기초들을 가졌고, 그것에는 어린 양의 열두 사도들의 이름이 있다.” “열둘”에 의해 모두가 의미된다; 그리고 “성벽”과 그것의 “기초들”은 신앙의 진리들, 마찬가지가 “열두 사도들”이다; 또한 “성벽은 144큐빗이었다.” 이 숫자에 의해 “12”와 같은 것이 의미된다, 그 이유가 12×12=144 이기 때문이다. 이 숫자가 성벽에 적용될 때 이는 신앙의 모든 진리들과 선들을 의미하기에 덧붙여진 말은 “사람의 치수, 즉 천사의 치수”이다는 것이다; 또한 “성벽의 기초는 벽옥이었다, 그리고 그것의 기초들은 모두 각각의 보석들로 장식되었다,” 그 이유가 “벽옥”에 의해, 그리고 “보석”에 의해 신앙의 진리들이 의미되기 때문이다.
반대적 의미에서 “성벽”은 파괴시키는 거짓들이 의미되는데 아래 구절에 있다:
환상의 골짜기에 떠들썩함의 날; 주 여호비 체바욷께서 성벽을 파괴하신다, 그리고 산을 향하여 외침이 있다; 그 이유가 엘람이 화살통을 메고, 사람의 병거와 더불어, 마병과 더불어 이기 때문, 마병들은 성문에서조차 그 자신을 놓이게 했다 (이. 22:5-7).
다시:
네 성벽들의 피난의 요새를 그분은 풀이 죽게 하시고, 내던지시고, 땅으로 날려보시고, 먼지로 되게 조차 하실 것이다 (이. 25:12).
예레미야서에서:
너희는 그녀의 성벽들에 가라. 그리고 던져라 (예. 5:10).
다시:
나는 벤하닷의 궁전을 삼킬 불을 다마스커스의 벽에 지필 것이다 (예. 49:27).
다시:
바빌론의 성벽들을 향하여 기를 들어올려라, 경계를 계속하라, 경비병을 세워라 (예. 51:12).
에스겔서에서:
그들은 두로의 성벽들을 전복할 것이다, 그리고 그녀의 탑들을 파괴할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녀로 부터 그녀의 먼지를 긁어낼 것이다, 그리고 그녀를 바위의 마름(dryness)으로 만들 것이다
(겔. 26:4).

그를 더 비참하게 한다. 이는 거짓들을 수단으로 저항함을 의미한다. 이는 “더 비참하다”의 의미가 저항하다이다로부터, 그 이유가 싸움이 지금 취급되는 동안 저항이 큼에 비례하여 비참함도 더해지기 때문이다. 저항함이 거짓을 수단으로 한다는 것은 이어지는 말로부터 분명해진다.

그를 향해 쏜다. 이는 그들은 이런 거짓들로부터 싸운다를 의미한다. 이는 “쏘다”의 의미가 거짓들로부터 싸우는 것이다로부터 분명하다; 그 이유가 “활”이 교리를 의미하고, “화살”, 또는 “표창(dart)”은 교리 속에 있는 이것저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고로 진리들 안에 있는 이들과 더불어서는 교리의 진리들을, 그리고 거짓들에 있는 이들과 더불어서는 교리의 거짓들을 의미한다. “쏘는”것이 여기서 거짓들로부터 싸우는 것인 이유는 여기서 취급된 주제가 거짓들 안에 있는 이들이기 때문이다.

그를 미워한다, 활쏘는 자. 이는 모든 적개심을 동원하여를 의미한다. 이는 “미워한다”의 의미가 모든 적개심이다로부터, 그 이유가 누군가를 미워함에서 붙들고 있는 자는 그가 할 수만 있다면 최대한 모든 적개심으로 박해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활쏘는 자”의 의미가 여기서는 영적 교회의 사람들에 반대하는 이들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 이유가 “활로 쏘는 자”, 또는 “궁수”가 영적 인간을 표시하는 이유는 “활”이 영적 교회의 교리적인 것들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반대적 의미에서 “활로 쏘는 자” 또는 “궁수”는 영적 인간을 적으로 삼는 자들을 표시한다. 그러므로 분명해지는 바, “궁수가 그를 미워한다”는 거짓에 있는 이들이 모든 적개심으로 영적 교회인을 박해한다가 의미된다.

그러나 그는 자기 활의 강함 안에 앉아 있을 것이다. 이는 그는 교리 속의 싸우는 진리를 수단으로 안전하다를 의미한다. 이는 “앉아 있다”의 의미가 안전하다이다로부터, 그 이유가 자기 활의 강함에 앉은 자는 안전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활”의 의미가 교리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교리의 강함이 진리이다, 그 이유가 교리 안에서 진리가 아닌 것은 아무 소용도 없기 때문이다. 진리가 강한 이유는 선이 진리를 통하여 행동하기 때문에서 이다; 선에는 악 또는 거짓이 접근할 수 없는 특성을 선 자체가 보유하기 때문, 고로 지옥의 어떤 패거리의 접근도 불가능하기 때문, 오히려 선이 접근하면, 또는 선 안에 있는 천사가 접근하면 이들은 흠칫 달아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선이 지옥으로부터 인간과 더불어 있는 이 패거리들과 싸우기 위하여, 또한 세상으로부터 도착하는 영들을 보호하기 위하여, 마찬가지로 더 낮은 땅에 있는 이들을 보호하기 위하여, 선은 진리를 통하여 행동한다, 그 이유가 이 방법에서 선이 그것들에 접근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얼마나 많은 힘이 진리 안에 있는지를 나로 분명히 알도록 다른 삶에서 보는 것이 주어졌다. 자연적 진리에 있었던 어떤 영의 경우, 이 세상에서 그의 삶 동안 그는 의로운 자이었는데, 많은 지옥들을 통과해갔다, 그리고 거기로부터 나와 이야기를 했다, 그리고 그것들을 서술했다; 그가 힘과 강함에 있었고, 아주 대단했으므로 지옥의 영들이 그에게 감염시키는 것이 전혀 불가능했다는 것, 하여 그는 이 지옥으로부터 저 지옥으로 건너갔지만 안전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진리 안에 있지 않은 이들에게는 불가능한 것이다. 이 모두로부터 분명한 바, “활의 강함에 앉음”이 교리의 진리를 수단으로 안전해 있다를 의미함이다: 이것이 싸우는 진리를 수단으로 이다는 것은 전에 진행된 것으로부터 뒤이어진다, 즉 “궁수가 그를 향해 쏘고, 그를 미워한다”에 뒤이어진다.

그리고 그의 손들의 무기들은 힘세어지게 만들어졌다. 이는 싸우기 위한 기세의 힘을 의미한다. 이는 “무기”와 “손”의 의미함이 힘(power)들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것이 싸움을 위한 기세(force)의 힘이 분명한 이유는 취급되는 주제가 싸움이기 때문이다.

강력한 야곱의 손에 의해. 이는 주님의 신성한 인간의 전능하심을 의미한다. 이는 “손”의 의미가 힘이다로부터, 그리고 주님이 취급되는 최고 의미에서 전능하심이다. 그리고 “강력한 야곱”의 의미가 주님의 신성한 자연 평면, 고로 그분의 신성한 인간이다로부터; 이것이 “강력한 야곱”에 의해 뜻해지는 주님이시다는 것은 아래 구절로부터 알게 된다:
그가 여호와에게 맹세하고 강력한 야곱에게 서원했다, 나는 내가 여호와를 위한 장소, 강력한 야곱의 주택을 발견할 때까지 내 집의 천막 안으로 가지 않을 것이다 (시. 132:2, 3, 5).
그리고 이사야서에서:
모든 육체가 알는지 모른다, 즉 나 여호와가 너의 구세주, 너의 되찾는 자, 강력한 야곱이시다는 것이다 (이. 49:26).
다시:
들어라 오 야곱 나의 종아, 그리고 내가 선택한 이스라엘아, 나는 내 영을 너희 씨 위에 쏟을 것이다, 그리고 나의 축복을 네 아들들 위에; 누군가가 말할 것이다, 나는 여호와의 것이다, 그리고 누군가는 그분 자신을 여호와의 이름을 수단으로 부를 것이다, 그리고 또 다른 자는 그의 손으로 여호와의 것임을 적을 것이다, 그리고 자신을 이스라엘의 이름으로 별칭하여 부를 것이다
(이. 44:1, 3, 5).
“이스라엘”이 최고 의미에서는 주님을 표시함을 아래에서 읽는다:
이스라엘이 어린 아이였을 때, 그때 나는 그를 사랑했다, 그리고 나의 아들을 이집트로부터 불렀다 (호. 11:1);
주님이 “이스라엘”에 의해 뜻해짐이 아래에서 분명하다:
요셉은 소년과 더불어 이집트로 갔다, 하여 예언자에 의해 말해진 것, 즉 이집트로부터 나는 나의 아들을 불렀다가 성취되었다 (마. 2:14).

거기로부터 목자, 이스라엘의 돌이 있다. 이는 이로부터 영적 왕국 속의 모든 선과 진리가 있다를 의미한다. 이는 “목자”의 의미가 신앙의 진리를 수단으로 선행의 선으로 인도하는 자이다로부터; 여기서 최고 의미에서 주님이 취급되는 바, 이는 선과 진리 자체를 의미한다; “돌”의 의미가 진리이다로부터; 그리고 이스라엘의 표현함이 영적 교회이다로부터; 그 이유가 “이스라엘”은 영적 선, 또는 진리의 선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진리의 선이 영적 교회의 본질 자체이다로부터, 그러므로 “이스라엘”에 의해 영적 교회가 의미된다, 그리고 보다 높은 의미에서는 주님의 영적 왕국이 의미된다.
이 모두로부터 분명한 바, “거기로부터 목자, 이스라엘의 돌”에 의해 주님의 영적 왕국의 모든 선과 진리가 있다가 의미됨이다. 가장 높은 의미에서 “이스라엘의 돌”은 그분의 영적 왕국에 있는 진리 측면에서의 주님이신데, 그 이유는 “돌”이 일반적 의미에서 성전을, 특수적 의미에서는 성전의 기초를 의미하기 때문, 그리고 “성전”에 의해 주님의 신성한 인간이 의미되고 (요. 2:19, 21), 그리고 또한 성전의 기초 (마. 21:42, 44, 이. 28:16)도 의미한다. 가장 높은 의미에서 “돌”은 그분의 영적 왕국 속에 있는 신성한 진리 측면에 관련한 주님을 표시하는 구절을 아래에서 읽을 수 있다:
건축가들이 거절한 돌이 모퉁이의 머리가 되었다. 이것은 여호와로부터 행해졌다: 이것은 우리의 눈에 놀라웁다 (시. 118:22, 23).
“돌”이 여기서 주님이시다는 것이 아래에서 분명해진다:
쓰여진 바, 건축가들의 거절한 돌, 같은 돌이 모퉁이의 머리가 되었다; 이 돌 위에 떨어지는 자는 누구든지 부셔질 것이다; 그러나 그 위에 누가 떨어지든, 그 돌은 그를 가루로 만들 것이다 (눅. 20: 17, 18);
위는 주님께서 자신에 관하여 말하신 말들이다. 이사야서에서:
그분이 너의 두려워함이 되게 하라, 그분이 너의 경외함이 되게 하라; 그 이유가 그분은 성소를 위해 있을 것이다, 비록 이스라엘의 두 집들에게 걸려 넘어지는 돌, 그리고 위반케 하는 돌일지라도; 그들 사이에 많은 이들이 걸려 넘어질 것이다, 그리고 추락한다, 그리고 부셔질 것이다
(이. 8:13-15);
위에서 주제는 주님이시다. 다시:
고로 주 여호비께서 말하셨다, 보라 나는 시온에 반석을 위하여 돌을, 연단된 돌을 귀중한 모퉁이의 돌로, 견고한 반석의 돌로 놓을 것이다; 믿는 자는 서두르지 않을 것이다 (이. 28:16).
스가랴서에서:
여호와 체바욷께서 그분의 양떼를, 유다의 가문을 방문하실 것이다, 그리고 그들을 전쟁애서 영광의 말(horse)로서 만들 것이다; 그분으로부터 모퉁이돌이 있다. 그분으로 못(nail)이 있다, 그분으로부터 전쟁의 활이 있다 (슥. 10:3, 4)
다니엘서에서:
당신은 손으로 행해지지 않고 잘라내진 돌을 보셨습니다, 그리고 그 돌이 상의 발을, 즉 철과 진흙이었던 발을 쳤습니다, 그리고 그것들을 조각으로 부셨습니다. 상을 부순 돌은 큰 바위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온 땅을 채웠습니다. 천국들의 하느님이 영원히 파괴되지 않을 왕국을 일으키실 것입니다, 그분의 왕국은 또 다른 백성에게 돌아가 있지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이 왕국은 모든 왕국들을 가루로 부수고 살라버릴 것입니다, 그러나 그 자체는 영원히 설 것입니다. 이와같이 당신은 보셨은 즉, 사람의 손이 뜨지 않은 돌이 철, 동, 진흙, 은, 금을 부순 것을 보신 것입니다 (단. 2:34, 35, 44, 45);
위 구절에서 “돌”은 가장 높은 의미에서 주님이 뜻해진다, 그리고 관계적 의미에서 그분의 영적 왕국이 뜻해진다; 돌이 “바위로부터 떼어져 나왔다”는 것은 이것이 신앙의 진리로부터 이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이유가 이것이 말씀에서 “바위”에 의해 의미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신앙의 진리가 “돌” 또는 “바위”에 의해 의미되기에, 주님의 영적 왕국 또한 의미된다, 그 이유가 이 왕국은 신앙의 진리 안에 있기 때문, 그리고 이로부터 선 안에 있기 때문이다.
야곱이 베고 잤던 돌, 그 후에 그가 기둥으로 놓은 돌, 마찬가지가 의미되어 있다:
야곱이 그의 잠에서 깨어났다, 그리고 그는 말했다, 정녕 하느님이 이 장소에 계신다, 그리고 나는 그것을 알지 못했다; 그리고 그는 두려워졌다, 그리고 말했다, 이 장소는 얼마나 떨리는 곳인가! 이것은 하느님의 집밖에 더 아니다, 그리고 이것은 천국의 문이다. 그리고 야곱은 아침에 일찍이 일어났다, 그리고 그가 베게로 삼았던 돌을 가져왔다, 그리고 그것을 기둥으로 세웠다, 그리고 기둥의 머리에 기름을 부었다; 그리고 그는 말했다, 내가 기둥으로 세운 이 돌은 하느님의 집일 것이다 (창. 28:16-18, 22).
고대인들은 돌을 수단으로 가장 높은 의미에서는 주님을, 표현 의미에서는 그분의 영적 왕국을 이해했다. 아래 구절을 읽어보자:
여호수아는 여호와의 성소에 있었던 돌을 상수리나무 아래 세웠다. 그리고 여호수아는 전체 백성에 게 말했다, 보라, 이 돌이 우리에게 증거를 위해 있을 것이다; 그 이유가 이 돌이 여호와의 모든 강연들, 그분이 우리에게 말하셨던 것을 들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돌은 너희를 향하여 증거로서 있을 것이다, 너희가 너희의 하느님을 부인하지 않도록 (여. 24:26, 27).

요셉에 관련한 앞 세 절 (22-24절, 라틴 원문은 “앞 두 절”이라 말하고 있음 역자주) 의 내용들이 내적 의미에서 있다는 것은 이미 살핀 내용들로부터 분명할 것이다. 이 내용들은 영적 왕국의 본성이 알려지지 않으면 여전히 불분명해 있을 수밖에 없다. 이 왕국은 신앙의 진리 안에 있고, 이 진리로 생활의 진리를 만들고 이로부터 선을 만드는 이들로 구성되는 왕국이다. 그 이유가 신앙의 진리가 살아내질 때, 이것이 선이 되고, 이 선은 “진리의 선”이라 불리운다, 그러나 그것의 본질 측면에서 이것은 행동에 있는 진리이다, 주님의 영적 왕국에서 신앙의 진리는 다양하다, 그 이유는 예를 들면, 이 교회에서는 이것이 진리라고 말하지만, 저 교회에서는 진리가 아니라고까지 말하는 경우도 흔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은 각 교회의 교리에 따른 것이다; 고로 사실상 이 교리들이 진리라고 불리운 셈이다. 이런 진리들이 선과 결합되어져서 영적 교회의 선을 만든다; 고로 그것의 선은 그것의 진리가 어떠한지가 관건인 셈이다. 그 이유는 선이 진리들로부터 그것의 품질을 가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분명한 바, 영적 교회의 선은 불순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불순하기 때문에, 영적 수준의 인간들은 신성한 수단이 아니면 천국 안으로 받아들여질 수가 없다. 주님께서는 세상에 오시고, 자신 안에서 인간을 신성으로 만드심으로 해서 신성한 인간 구원의 수단 자체를 만드신 것이다; 이를 수단으로 영적 수준의 인간은 구원되어진다. 그러나 (다른 삶에서) 그들과 더불은 선은 불순하기 때문에 그들은 악과 거짓들에 감염될 수밖에 없는 처지이다, 고로 전투들이 있는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이 전투들을 수단으로 그들 안의 불순한 것들을 점진적으로 깨끗해지게 설비해두신 것이다, 그 이유가 주님이 그들을 위해 싸우실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딸이 성벽 위에서 행진한다”에 의해, 그리고 “궁수들이 그를 비참하게 하고, 그에게 쏘고, 그를 미워한다, 그리고 그는 그의 활의 강함에 앉을 것이다, 그리고 그의 손의 무기는 강력한 야곱의 손에 의해 강하게 만들어 진다, 이로부터 목자, 이스라엘의 돌이 있다”에 의해 의미되고 있다.
영적 교회 속에 있는 이들에 관해 이미 말해진 바를 되살피면, 그들은 진리와 그로부터 파생되는 선의 측면에서 희미함 안에 있다는 것; 이 희미함은 주님의 신성한 진리에 의해 계발된다는 것; 주님의 오심 이전, 그분의 오심 이후와 같은 영적 왕국은 있지 않았다는 것; 주님이 (영계에서의) 영적 수준의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세상에 오셨다는 것; 그리고 그들은 주님의 신성한 인간을 수단으로 구원되어진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분명한 바, “그의 손의 무기는 강력한 야곱의 손에 의해 상하게 만들어진다, 이로부터 목자, 이스라엘의 돌이 있다”에 의해 싸움의 힘은 주님의 신성한 인간의 전능하심으로부터 파생된다는 것, 이로부터 영적 왕국에 있는 모든 선과 진리가 있다.

너의 아버지의 하느님으로 말미암아, 그분이 너를 도울 것이다. 이는 그분은 고대 교회의 하느님이시다를 의미한다. 이는 여기서 “아버지”인 야곱의 표현함이 고대 교회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 교회가 영적 수준의 교회이었다, 그리고 이 안에서 주님이 예배되었다, 이 분이 여기서 “고대 교회의 하느님”에 의해 뜻해진다. 이 분으로부터 위에서 말해진 전투에서 도움이 있다.

그리고 솨다이와 더불어. 이는 시험들 후에 은혜를 베푸는 사람, 주님을 의미한다.
이는 “솨다이”의 의미가 주님이 시험들에 관련하여 그렇게 불리우심, 그리고 시험들 후에 은혜를 베푸시는 분이심 이다.

그분은 위의 천국의 복됨(blessing)들을 가지고 너를 복되게 하실 것이다 . 이는 내부로부터의 선과 진리를 가지고를 의미한다. 이는 “복됨”이 진리의 번성함과 선의 열매가 풍성함이다로부터; “복됨”은 영적 의미에서 이밖에 더 없다; 그리고 “위의 천국”의 의미가 내부로부터 인데, 그 이유가 인간 속의 천국이 그의 내면들이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생활의 선 안에 있는 이들은 그의 내면의 측면에 관련하여 보면, 그는 천사들과 더불은 사회 안에, 고로 천국 안에 있기 때문이다. 한편 그의 외면들은 인간의 사회들과. 고로 세상과 함께하고 있다. 그러므로 인간이 주님으로부터 내부로부터 있는 천국을 통하여 흘러드는 선과 진리를 받을 때, 그는 “위의 천국의 복됨들을 가지고 복되고 있다.”

아래에 드러 누운 깊음 속의 복됨들을 가지고. 이는 자연 평면에 있는 기억 속의 지식을 가지고를 의미한다. 이는 “복됨들을 가지고 복되어 있다”의 의미가 영계로부터 있는 이런저런 것들을 수여받음 이다로부터; 그리고 “아래 드러누운 깊음”이 자연 평면의 기억 속의 지식들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천국”인) 그의 내면에 비해 자연 평면은 “아래 드러누운 깊음”이라 불리운다; 그리고 자연 평면이 “아래 드러누운 깊음”에 의미되는 바, 기억 속의 지식들 또한 의미되어진다, 그 이유가 이것들 모두는 기쁨들과 더불어 자연 평면에 있기 때문, 그리고 자연 평면의 생명을 만들기 때문, 특히 영적 인간과 더불어 그것의 생명을 만들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기억 속의 지식들을 수단으로 그는 진리들 안으로 받아들여지고, 진리들을 수단으로 선 안으로 받아들여지기 때문이다. “깊음”에 의해 자연 평면에 있는 기억 속의 지식의 진리들이 의미되는 다른 구절이 아래에도 있다:
여호와의 복됨이 그의 토지이다; 하늘의 귀중한 것들 때문에, 이슬 때문에, 또한 아래 들어누운 깊음 때문에 (신. 33:13).

가슴들의 복됨을 가지고. 이는 선과 진리에 애착함들을 가지고를 의미한다. 이는 “가슴들”의 의미가 선과 진리에 애착함들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가슴들”이 선과 진리에 애착함들인 이유는 가슴의 신체 기관이 자손 (번식)과 관련되기 때문, 그러므로 해서 부부의 사랑(conjugial love, 결혼의 사랑)의 범주(province)에 속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부부의 사랑은 선과 진리의 결혼인 천국의 결혼에 상응한다; 그 이유가 부부의 사랑이 이 결혼으로부터 내려오기 때문이다. (결혼이라는 단어로 한역되는 영어 단어는 주로 marriage이다. 이 책에서는 두 단어를 사용한다. conjugial과 marriage이다. 둘 모두 영한 사전을 참조하면 결혼으로 번역함이 대세일지 모르나, 이 책의 주인(원저자)이 두 단어를 잘 모르거나 혼동해서 마구잡이로 단어 선택을 하지 않았으리라를 염두한다면 분명 역자로서는 두 영어 단어를 가능한 다른 한역을 선택해야 하지 않을까하는 고민에 빠질 수밖에 없다. 물론 라틴어로부터 영역에서도 둘을 가능한 구분하고 있다. 하여 역자는 conjugial은 “부부의”로, 간혹 “결혼의”로 번역하기로 작정했는데, “부부의”가 더 순수해진 결합을 표시하지 않나 하는 역자의 개인적 소견으로 선택된 한역임을 덧붙여둔다, 역자주.) (원저자의 저서에 결혼애로 흔히 번역해 말해지는 “conjugial love”가 있는데, 역자는 이 책의 제목을 부부의 사랑, 부제로는 선과 진리의 결혼, 또는 천국의 결혼이라 말하려 한다. 역자가 이 책까지 번역할 의도는 아직은 없다. 그 이유가 이 책이 성경 글자를 바탕으로 깔지 않기 때문이다. 역자의 관심은 성경 읽기와 이해에 있어서 이다.) 그러므로 “가슴들”에 의해서 선과 진리에 애착함이 의미된다. 마찬가지인데, 유아들이 가슴(유방)들을 수단으로 자양분을 공급받는다는 사실로부터도 더 분명해진다, 그리고 이 애착을 통하여 “가슴들”은 자손을 향한 사랑과 더불은 부부의 사랑의 결합이 의미된다.
이 애착들이 “가슴들”에 의해 의미되는 다른 구절이 아래에 있다:
너는 나라들의 젖을 빨 것이다, 그리고 왕들의 가슴들을 빨 것이다. 나는 놋쇠를 위하여 금을, 철을 위하여 은을 가져온다 (이. 60:16, 17);
“왕들의 가슴들을 빠는” 것은 진리로부터의 선을 표시한다, 그 이유가 “왕들”에 의해 진리들이 의미되기 때문이다. “나라들의 젖”에 의해, 그리고 “왕들의 가슴들”에 의해 어떤 감추인 의미, 즉 영적 의미가 있을 것임은 누구에게나 예상될 것이다. 그 이유가 성경이 의미함도 없이 괜히 이런 예언을 했을 리가 만무하기 때문이다; 선과 진리가 의미된다는 것은 바로 이어진 말로부터 분명해진다: 즉 “나는 놋쇠를 위해 금을, 쇠를 위해 은을 가져올 것이다.” “놋쇠”는 자연적 선을, “금”은 천적인 선을, “철”은 자연적 진리를, 그리고 “은”은 영적 진리를 의미한다.
그리고 에스겔서에서:
불어남을 말한다면 나는 들판의 싹같이 너를 만들었다, 이로부터 너는 불어나게 했다, 그리고 성장했다, 그리고 너는 장식품으로 꾸몄다; 너의 가슴들은 견실하게 만들어졌다, 그리고 너의 머리털은 자랐다 (겔. 16:7);
이것은 예루살렘을 두고 말한 것이다, 이를 수단으로 고대 영적 교회가 의미된다; “가슴들”이 “견실하게 만들어짐”에 의해 선과 진리에 내면의 애착함이; “그들의 머리털이 자랐다”에 의해 자연 평면 속에 있는 외면의 애착함이 표시된다. 이 말들 안에 글자에서 나타나지 않는 것이 있음은 분명하다; 그 이유가 이것 없이 “그녀의 가슴들은 견실하게 만들어졌다, 그녀의 머리털은 자랐다”라고 예루살렘을 두고 말해질 수 없기 때문이다.
에스겔서에서:
이집트에서 매춘짓을 한 두 여인이 있는데, 한 어머니의 딸들이다; 그들은 그들의 젊은 시절에 매춘짓을 했다, 매춘짓에서 그들의 가슴들은 눌려졌다, 그리고 그들은 그들의 처녀임의 젖꼭지가 접촉되었다 (겔. 23:2, 3);
“두 여인들”은 예루살렘과 사마리아이다. 이들을 수단으로 내적 의미에서 교회들이 의미된다; 그들이 “젊은 시절에 이집트에서 매춘짓을 했다”에 의해 그들은 기억 속의 지식들을 수단으로 교회의 진리들을 왜곡되게 했다가 의미된다. 그러므로 “그들의 가슴들이 눌려졌다”에 의해서는 선과 진리에 애착함들이 거짓화함을 수단으로 타락되어졌다가 의미된다. 이런저런 사항들이 “여인의 매춘”에 의해, 그리고 “그들의 가슴들이 눌림”에 의해 의미된다는 것은 이 여인들에 대한 묘사에서 의미를 찾고저 하는 이들이다면 분명해질 것이다.
호세아서에서:
너는 너의 어머니에게 탄원(변론, plead)하여, 그녀로 그녀의 얼굴로부터 그녀의 매춘들을, 그리고 그녀의 가슴들 사이로부터 그녀의 간음들이 중단해지게 하라, 하여 내가 그녀를 발가벗기지 않도록, 그리고 그녀를 광야로서 만들지 않도록, 그리고 그녀를 가믐의 토지로 놓지 않도록, 그리고 목마름 으로 그녀를 죽이지 않도록 하라 (호. 2:2, 3);
“어머니”는 교회를 표시한다; “매춘들”은 진리를 거짓화 함들을 표시한다; 그러므로 “가슴들 사이로부터 간음함”은 선과 진리에 애착함들이 섞음질 됨을 ; “발가벗겨짐”은 모든 진리가 박탈됨을; “그녀를 광야로 만들고, 그녀를 가믐의 토지로 놓는 것, 그리고 목마름으로 죽게 하는 것”은 모든 진리가 소멸함을 표시한다.
다시:
유산하는 자궁과 마른 가슴을 그들에게 주소서 (호. 9:14);
“마른 가슴들‘은 애착들이 진리와 선에 관해 있지 않은 것을 표시한다. 이사야서에서:
걱정거리 없는 너희 여인들아 일어나 내 음성을 들어라, 자신만만한 너희 딸들아, 네 귀로 내 강연을 들어라; 네 자신을 발가벗겨 알몸으로 만들어라, 그리고 허리에 띠를 두르라; 그들은 순수한 포도주의 들판들과 열매가 풍성한 포도나무를 위하여 가슴들 위에서 자신을 칠 것이다 (이. 32:9, 11, 12);
위에서 “딸들”은 애착들을 표시한다; “알몸으로 만드는”것은 진리가 결핍됨이다; “허리에 띠를 두름”은 잃어진 선 때문에 슬퍼함에 있다를 표시한다; “가슴들 위에서 칠 것이다”는 잃어진 진리로부터의 선 때문에 슬픔에 있다를 표시한다; 이런 사항들이 의미되기에, “순수한 포도주와 열매가 풍성한 포도나무를 위하여”가 말해진다; 그 이유가 “들판”은 선 측면에서의 교회를, 그리고 “포도나무”는 영적 교회를, 결과적으로 진리로부터의 선을 표시하기 때문이다.
계시록에서:
나는 일곱 금빛의 등불대들을 보았고, 그리고 일곱 등불대들의 한가운데에 사람의 아들 같은데, 발까지 내려오는 흰 의복을 입고, 금빛의 띠로 가슴들에서 띠를 매신 분이셨다 (계. 1:12, 13);
“금빛의 등불대들”은 선으로부터의 진리들을 표시한다; “사람의 아들”은 신성한 진리를 표시한다; “금빛의 띠로 가슴들에서 띠를 두르심”은 사랑의 선을 표시한다. 요한에 의해 보여진 이런저런 사항들은 주님의 왕국과 그분의 교회 속에 있는 이런저런 것들을 포함한다는 것을 모든 이들은 말씀은 신성하다로부터 결말지을는지 모른다; 그 이유가 이 세상의 왕국들에 관하여 위의 예언들이 있는 것이다면 이 말씀에 무슨 신성함이 있을 것인가? 하고 되물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천국의 사항들이 “등불대”에 의해, 그리고 “발 까지 내려오는 의복을 차려입고, 가슴에 금띠를 매신 사람의 아들“에 의해 의미된다는 것을 알는지 모른다.
누가복음서에서:
군중들로부터 어떤 여인이 목청을 돋구워 예수에 관해 말했다, 당신을 밴 자궁은 복 있다, 당신에게 젖을 물린 가슴은 복있다, 그러나 예수께서 말하셨다, 그렇다 오히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것을 지키는 자가 복있다 (눅. 11:27, 28);
주님의 답변으로부터 “복된 자궁”과 “가슴”에 의해 의미된 것이 분명해진다; 즉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것을 행하는 이들이다; 고로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것은 진리에 애착함이고, 들은 말씀을 행하는 것은 선에 애착함이다.

그리고 자궁의. 이는 그들의 결합을 의미한다. 즉 선과 진리의 결합을 의미한다. 이는 “자궁”의 의미가 가장 안쪽에서의 부부의 사랑이다로부터; 부부의 사랑이 선과 진리의 결합인 천국의 결혼으로부터 출시되는 바, 그러므로 이 결합이 “자궁”에 의해 의미되어진다.

네 아버지의 복됨이 네 선조들의 복됨 보다 더 우세할 것이다. 이는 이 교회는 합리성으로부터가 아닌 자연 평면으로부터 영적 선을 가지고 있다를 의미한다. 이는 요셉의 표현함이 영적 수준의 교회이다로부터; 여기서 “아버지”인 이스라엘의 표현함이 자연 평면으로부터의 영적 선이다로부터; 그리고 여기서 “선조들”인 이삭과 아브라함의 표현함이 최고 의미에서는 주님의 신성의 내적 부분이다로부터; 즉 “이삭”은 주님의 신성한 인간의 내적 부분, 또는 주님의 신성한 합리성이고, “아브라함”은 주님의 신성 자체이다; 그러나 관계적 의미에서 “아브라함과 이삭”은 주님의 왕국과 교회의 내적 부분을 표시한다. 이 모두로부터 “네 아버지의 복됨은 네 선조들의 복됨 보다 더 우세할 것(prevail, 널리 보급될 것, 크게 유행할 것) 이다”에 의해 뜻해지는바가 짐작되었으리라 본다. 즉 영적 수준의 교회는 자연적, 또는 외적 인간으로부터 선을 가져야 할 것, 그러나 합리성 또는 내적 인간으로부터서는 아니다 이다; 그 이유가 영적 수준의 교회인의 선은 자연 평면에 있기 때문, 그리고 그것은 더 이상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천적 수준의 교회의 선은 합리성에 있다. 이런 의미가 이 말에 포함된 것은 이스라엘과 아브라함과 이삭이 무엇을 표현하는지와 영적 교회의 선은 어디에서, 어디로부터 인지가 알려지지 않으면 알아질 수가 없다.

시대의 언덕들의 바램에 맞먹는다. 이는 천적 수준인 서로의 사랑을 향하여를 의미한다. 이는 “시대의 언덕들”이 서로의(mutual 상호간의) 사랑이다로부터 (아래에서 설명한다) 알게 된다. 영적 수준의 교회가 이 사랑에 도달할는지 모른다는 것이 “시대의 언덕들의 바람에 맞먹기 조차”에 의해 의미되어 있다. “시대의 언덕들”이 서로의 사랑을 의미한다는 것을 다른 구절들로부터 살피기에 앞서, 서로의 사랑에 의해 뜻해지는 것이 먼저 말해져야 할 것 같고, 이 사랑 쪽으로 요셉에 의해 표현되는 영적 수준의 교회인이 도달하느라 분주하다는 것이다. 이미 말해져서 알고 있는 것은, 천국을 구성하는 두 왕국이 있다는 것, 즉 천적 왕국과 영적 왕국이 있다는 것이다. 이런 차이가 두 왕국에 있다. 천적 왕국의 내면의 선은 주님을 사랑함의 선이고, 이 왕국의 외면의 선은 서로의 사랑함의 선이다; 이 왕국에 있는 이들은 사랑의 선 안에 있고, 신앙의 진리라 불리우는 진리 안에 있지는 않다, 그 이유가 이 진리는 이 왕국의 선 안에 있기 때문이고, 이 진리는 선으로부터 분리되어 보여질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왕국에 속하는 이들은 신앙은 언급조차 할 수 없다, 그 이유가 그들에게는 신앙의 진리 대신 있는 것이 서로의 사랑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적 왕국의 경우, 내적 부분은 이웃을 향한 선행의 선이고 외적 부분은 신앙의 진리이다.
이런 모두로부터 분명해지는 바, 이 왕국들의 차이점이다, 또한 천적 왕국의 외적 부분은 “영적 평면의 천적 부분”이라 불리우는 중매를 통하여 영적 왕국의 내적 부분과 일치한다는 사실이다. 그 이유는 이미 말한 대로 천적 왕국의 외적 부분이 서로의 사랑의 선이고, 영적 왕국의 내적 부분이 이웃을 향한 선행의 선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서로의 사랑의 선은 이웃을 향한 선행의 선 보다 더 내면적이다, 그 이유는 전자는 합리성으로부터, 후자는 자연 평면으로부터 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천적 수준의 교회의 외적 부분인) 서로의 사랑의 선이 더 내면적일지라도, 그리고 이웃을 향한 선행의 선은 더 외면적이라 할지라도, 주님께서는 중매를 통하여 이 선들을 결합하신다, 고로 두 왕국들은 결합하고 있다.
천적 교회의 선과 영적 교회의 선의 차이를 만들기 위하여 이어지는 페이지들에서 우리는 전자의 선을 서로의 사랑의 선이라 부르고, 후자의 선은 이웃을 향한 선행의 선이라 부를 것인데, 지금까지에서는 이 차이를 관찰하지는 않았었다. 이 차이들을 먼저 알고 있어야 이 영적 교회에 관한 이스라엘의 복있음인 “시대의 언덕들의 바램과 맞먹기 조차”에 의해 의미하는 것인, 영적 왕국은 천적 왕국 속에 있는 서로의 사랑의 선에 까지 선행의 선을 끌어올릴 수 있을는지 모른다에 대해 말하는 것도 쉬워질 것이다. 이런 방법에서 두 왕국들은 친밀하게 결합할는지 모른다: 이것이 이런 말들(“산들과 언덕들”)에 의해 의미되고 있다.
예언의 말씀의 아주 많은 구절들에서, “산들과 언덕들”이라는 말의 언급이 있는 편이다. 이 말들에 의해 내적 의미에서 사랑의 선이 의미된다: 즉 “산들”에 의해서는 주님을 사랑함의 선이, 하여 천적 왕국의 내적 부분이, “언덕들”에 의해서는 서로의 사랑함이, 하여 이 왕국의 외적 부분이 의미된다; 그러나 영적 왕국이 취급될 경우, “산들”에 의해서는 이웃을 향한 선행의 선이, 하여 이 왕국의 내적 부분이, “언덕들”에 의해서는 신앙의 진리가, 하여 외적 부분이 의미된다. 우리가 알아야하는 것은, 주님의 모두 각각의 교회에는 내적 부분과 외적 부분이 있다는 것, 마찬가지로 그분의 왕국도 그러하다는 것이다.
“언덕들”이 위와 같은 의미를 가지는 것을 아래 구절에서 읽을 수 있다:
후자의 날에서 여호와의 산은 산들의 머리를 위해 있을 것이고, 그리고 언덕들의 넘어로 드높여질 것이다 (이. 2:2; 미. 9:1);
“여호와의 산”은 시온 인데, 주님의 천적 왕국을 표시한다, 고로 이 왕국의 선, 이는 주님을 사랑함으로부터 있는 선이다; 고로 최고 의미에서 이는 주님 자신이시다, 그 이유가 천적 왕국에 있는 모든 사랑과 모든 선은 주님에 속하기 때문이다.
이와 비슷한 것이 말씀의 다른 구절에서 “시온의 산”에 의해 의미되어진다, 그리고 “거기의 언덕들”에 의해서는 서로의 사랑의 선이 의미되어진다. 이사야서에서:
여호와 체바욷께서 시온의 산 위에, 그리고 거기의 언덕 위에 싸우시기 위해 내려오실 것이다 (이. 31:4);
위에서 “언덕”은 서로의 사랑의 선을 표시한다; 그리고 “언덕”에 의해 서로의 사랑의 선이 의미되어진다, 그리고 “산”에 의해 주님을 사랑함의 선인 천적 사랑의 선이 의미된다, 하여 “여호와께서는 시온의 산, 거기의 언덕들 위에 싸우시기 위해 내려오실 것이다”라고 말해지는 것이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자연계의) 시온의 산과 거기의 언덕들에 내려오신다는 뜻이 아니고, 사랑의 선이 있는 곳을 위하여, 즉 이 선 안에 있는 이들을 위하여 주님(여기서는 여호와)께서 싸우신다는 말이다. 하여, 만일 그분이 시온을 위해, 그리고 예루살렘을 위해 싸우셨다면, 그들이 천적 교회를 표현했기 때문이 된다. 그러므로 시온 산은 거룩하다고 불리우고 예루살렘 역시 거룩하다 불리운다. 이 일컬어짐은 예언서들에서 예루살렘의 역겨운 것들이 취급되는 상황에서, 하여 그 자체 더러움이었던 때에서 조차도 거룩하다 불리웠다.
다윗서에서:
산들이 평화를 가져올 것이다, 그리고 언덕들은 정의에 (있을 것이다) (시. 72:3).
다윗서에서:
여호와를 찬양하라, 너희 산들아, 그리고 모든 언덕들아 (시. 148:9).
다윗서에서:
산들이 숫양들 같이 깡충깡충 뛴다, 언덕들은 양떼의 아들들 같이 (뛴다) (시. 104:4, 6).
다시:
하느님의 산은 바산의 산이다; 언덕들의 산은 바산의 산이다. 왜 너희는 껑충 뛰느냐? 너희 산들아, 너희 산들의 언덕들아. 하느님께서는 그것 안에서 거주하시기를 바라신다, 여호와께서는 영원히 거주하실 것이다 (시. 68:15, 16).
이런 구절들에서 “산들”은 천적 사랑을 표시한다, 그리고 “언덕들”은 영적 사랑을 표시한다; 여기서 산들이, 언덕들이, 산이나 언덕에 있는 이들을 뜻하지 않음은 분명할 것이다.
이사야서에서:
모두 각각의 높은 산 위애, 들어올려진 모두 각각의 언덕, 시내들, 물들의 수로들 위에 있을 것이다 (이. 30:25);
“물들의 수로들”은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들을 표시한다, 이것이 “모두 각각의 높은 산과 들어올려진 언덕”에 있다 라고 말해진 이유는 이 지식들은 천적 평면의 선들과 영적 수준의 사랑으로부터 흘러들기 때문이다.
하박국서에서:
여호와께서 서시어 땅을 측량하셨다; 그분이 보시고 나라들을 흩으셨다. 그 이유는 영원의 산들이 흩어졌기 때문, 그리고 시대의 언덕들이 자신을 낮추었기 때문이다 (합. 3:6);
“영원의 산들”은 태고 교회의 사랑의 선을 표시한다, 이 교회는 천적 수준이었다; “시대의 언덕들”은 이 교회에 속했던 서로의 사랑의 선을 표시한다; 전자는 내적 부분이고, 후자는 외적 부분이다. 이 교회가 말씀에서 뜻해질 때, 태고적의 이들이 암시되게 “영원”이라는 단어가 때때로 첨가된다, 여기서는 “영원의 산들”인데, 다른 구절에서는 “영원의 날들”이 첨가된다; 그리고 “시대” 또한 첨가되는데, 여기서는 “시대의 언덕들”이다, 또한 이스라엘의 예언적 발음에서, “시대의 언덕들의 바램에까지 조차”이다. 그러므로 분명한 바, “시대의 언덕들”에 의해 서로의 사랑이 의미된다는 것, 이것은 천적 수준의 교회, 또는 주님의 천적 왕국 속에 있다는 것이다.
마찬가지가 모세의 책에서 요셉에 관련한 모세의 예언적 말함에도 있다:
동쪽의 산들의 첫 열매들에 관한 것으로부터, 영원의 언덕들의 귀중한 것들에 관한 것으로부터, 그것들로 요셉의 머리 위에 오게 하라 (신. 33:15, 16).
이사야서에서:
산들과 언덕들이 노래로 다시 소리낼 것이다, 그리고 들판의 모든 나무들이 손으로 박수칠 것이다 (이. 55:12).
요엘서에서:
그 날에 산들이 새로운 포도주를 떨어트릴 것이다, 그리고 언덕들이 젖으로 흐를 것이다, 그리고 유다의 모든 시내들이 물로 흐를 것이다 (욜. 3:18; 암. 9:13).
에스겔서에서:
나의 양이 모든 산들에서, 그리고 모두 각각의 언덕에서 방황하고, 그리고 땅의 모든 얼굴 위에서 그들은 흩어졌다. 나는 그것들을 내 언덕의 범위에 있게, 복있게 만들 것이다; 그리고 나는 철따라 비를 내려보낼 것이다 (겔. 24:6, 26).
예레미야서에서:
황폐케 하는 자들이 광야에 있는 모든 언덕들에 들이닥칠 것이다; 그 이유가 여호와의 검이 삼키기 때문이다 ( 예. 12:12).
이 구절들에서 천적 사랑의 선들이 “산들”에 의해 의미되어진다; “언덕들”에 의해서도 마찬가지이나, 보다 낮은 등차에서 이다.
이상 살핀 바와 같이 “산들”과 “언덕들”에 의해 의미되기 때문에. 고대 교회에서 그들의 신성한 예배 또한 산과 언덕에서 있어졌다; 그 후에 히브리 나라가 산과 언덕 위에 제단을 쌓고, 거기서 제물을 바치고 향을 태웠다; 그리고 언덕이 없는 지역에서는 높은 장소를 건축했다. 그러나 이 예배가 우상화가 되어갔는데, 그 이유는 산이나 언덕 자체를 거룩한 것으로 여겨 예배했기 때문, 하여 이스라엘이나 유태나라에서 이런 예배가 금지되어졌다, 그 이유는 여타 다른 나라보다 더 쉽게 우상화로 변질되었기 때문이다. 어쨌든 고대 시대에서 있었던 이런저런 표현들은 유지되어야하는 질서에서 시온 산은 선택되고, 이를 수단으로 최고 의미에서 주님의 신성한 사랑의 신성한 선이, 표현 의미에서 그분의 왕국에 있는 신성의 영적 부분과 천적 부분이 표현되어졌다.
이와 같은 것들이 의미되었기에 아브라함으로 모리아의 토지의 어느 산으로 가서 이삭을 제물로 바치도록 명령되었기도 하다, 그리고 주님이 산 위에서 모세에 의해 보여지셨다, 그리고 법이 산의 정상에서 선포되어졌다, 그 이유가 그분은 호렙산 위에서 모세에 의해 보여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법이 시나이 산 위에서 선포되어졌다; 예루살렘의 성전이 산 위에 지어졌다.
고대 의식으로부터 거룩한 예배는 산위와 언덕 위에서 개최되었다는 것, 그 후에 이방인들과 우상화된 이스라엘족들과 유태인들이 그 위에서 제물을 바치고 향을 태운 것이 아래 구절로부터 분명해진다:
너의 간음들, 요상한 소리들, 매춘의 사악함이 들판의 언덕 위에서, 나는 너희의 역겨운 짓을 보았었다 (예. 13:27);
위는 예루살렘에 관해 말해진다. 에스겔서에서:
그들의 찌름당해진 자들이 그들의 우상들 한가운데에서, 제단을 빙둘러서, 모든 높은 언덕에서, 산들의 모든 머리들에서, 그리고 모두 각각의 푸른 나무 아래에서, 그리고 모두 각각의 엉켜진 상수리나무 아래에서 뒹굴 것이다 (겔. 6:13).
예레미야서에서:
모두 각각의 높은 언덕 위에, 모두 각각의 푸른 나무 아래에서, 너는 음행을 저지르고 있다
(예. 2:20; 3:6; 그리고 왕상. 14:23; 왕하 16:4; 17:10).
우상적인 예배가 산들과 언덕 위에서 자행되었기 때문에 그것들에 의해 반대적 의미인 자아 사랑에 속하는 악들이 의미된다. 예레미야서에서:
산들, 그리고 보라 그것들이 흔들려졌다, 그리고 모든 언덕들이 뒤엎어졌다. 나는 바라보았다 그리고 보라 거기에 사람이 없었다, 그리고 하늘의 모든 새들이 날아가버렸다 (예. 4:24, 25).
이사야서에서:
모든 계곡이 들어올려질 것이다, 그리고 모든 산과 언덕이 낮추어질 것이다 (예. 40:4).
이사야서에서:
보라 나는 너를 긴 못을 가진 새로운 타작기로 놓을 것이다; 너는 산 위에서 타작할 것이다, 그리고 언덕을 겨 같이 만들 것이다 (이. 41:15).
다시:
나는 산들과 언덕들을 황폐된 채로 놓을 것이다, 그리고 모든 그것들의 초본들을 말리울 것이다 (이. 42:15).
그리고 미가서에서:
너희는 여호와께서 말하시는 것을 듣기를 바란다; 일어나라, 너는 산들과 쟁변하라 , 그리고 너의 음성을 언덕들이 듣게 하라 (미. 6:1).
예레미야서에서:
내 백성이 잃어진 양이 되고 말았다, 그들의 목자들은 그들을 잘못 이끌고 있다, 반역적인 산들아, 그들은 산으로 언덕 위로 가버렸다, 그들은 그들의 (양)우리를 잃어버렸다
(예. 50:6; 또는 예16:6; 나. 1:5, 6).
“산들”과 “언덕들”이 사랑의 선들과 영적 사랑을 의미하는 이유는 산이나 언덕이 땅 보다 돌출되어 있었기 때문인데, 이런 돌출되고 높은 것들에 의해 천국 속에 있는 이런저런 것들, 최고 의미에서는 주님에 속해 있는 것도 표현되어졌다. “가나안의 토지”는 주님의 천국의 왕국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이 토지에 있는 모든 것들은 의미적이었다, 따라서 “산들”과 “언덕들”이 이런저런 높은 어떤 것들을 의미하게 되었다. 그 이유가 천적 수준에 있던 태고인들은 자기들이 산으로 올라갔을 때, 높음으로부터 거룩한 것을 생각했다, 그 이유는 여호와 또는 주님이 “가장 높은 곳에서” 거주하신다고 말하셨기 때문, 또한 영적 의미에서 “높다”는 사랑의 선을 표시했기 때문이다.

그것들이 요셉의 머리 위에 있을 것이다. 이는 내면들에 관련되는 이런저런 것들을 의미한다. 이는 “머리”의 의미가 내면들이다로부터, 그 이유는 인간의 모든 것들은 머리에서 그들의 첫 원리들 안에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은 또한 내면의 것들이 머리에 의해 의미되는 상응으로부터 이다. 그러므로 “목”은 중매적인 것을 의미한다; “몸”은 외면의 것들을; “발바닥”과 더불어 “발”은 가장 바깥쪽의 것들을 의미한다. 이 상응은 천국이 웅대한 사람과 관계하기 때문이다; 가장 깊은 천국, 즉 주님의 천적 왕국이 있는 곳은 웅대한 사람의 머리에 관계한다; 중간 또는 둘째 천국, 즉 영적 천국이 있는 곳은 몸에 관계한다; 그리고 최말단, 또는 첫째 천국은 발에 관계한다.

그리고 그의 형제의 나지르인의 머리의 관 위에 있을 것이다. 이는 외면들에 관련하여를 의미한다. 이는 “나지르인의 머리의 관”의 의미가 외면의 것들이다로부터 (아래에서 살핀다); 그리고 “그의 형제”인 이스라엘의 아들들을 표현함이 자연 평면에 있는 영적 진리들이다로부터, 이것 역시 상대적으로 외면이다, 그 이유가 영적 교회인은 진리의 선 안에 있고, 이 선은 내면인데, 이것이 자연 평면의 내면이기 때문이다. “나지르인”이 외면의 것들을 의미하는 이유는 나지르인들이 신성의 자연 평면 측면에서의 주님을, 이것은 주님의 신성한 인간의 외적 부분을 표현하기 때문이다. 이것을 그들이 표현했다는 것은 나지르인 됨은 털에 있다는 것, 신성 있음이 털에 존재했다는 것, 이것은 언급되어져 왔던 표현을 위하여서 이었다는 사실로부터 분명해진다; 그 이유가 (머리)털이 자연적인 것에 상응하고, 의미도 하기 때문이다. 또한 이것은 나지르인 됨을 서약하는 이들로부터도, 즉 이들에게는 자기들의 털을 면도하는 것을 금지했다는 것, (민. 6:5); 그리고 이후에 그들이 나지르인 됨을 끝냈을 때, 그들은 천막의 문에서 머리를 밀고, 그 털을 평화 제물의 바침 아래 불 안에 놓도록 되어 있었다는 것 (민. 6:13, 18) 등등으로부터도 분명해진다. 더 분명해지는 대목으로는 나지르인 이었던 삼손, 그의 힘셈이 그의 머리털에 있었다는 사건으로부터 일 것이다 (사. 13:3, 5; 16; 3301항). 그러므로 예레미야서에 쓰여진 바:
네 나지르인됨의 머리털을 잘라내어라, 그리고 그것을 내던져라, 그리고 언덕들 위에서 통곡을 하여라 (예. 7:29).
이 구절들로부터 “나지르인의 머리의 관”에 의해 외면의 것들이 의미됨이 분명해진다, 그 이유가 나지르인의 머리의 관은 그의 머리털이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말씀에서 나지르인에 의미된 비밀이다.

이상 살핀 이스라엘이 요셉에 관해 예언한 모두로부터도 분명해지는 것은, 모든 세부 사항에서 내적 의미가 있다는 것, 이 의미 없이 거의 어떤 것도 이해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글자만으로부터 이 구절들을 들여다보는 이는 이런 사항들이 요셉에 관해 예언된 것인 바, 요셉의 두 아들에서까지에 이르러 발생할 것이라고 믿을지 모른다 (창. 48:1). 그러나 그들의 역사에서, 즉 모세의 책으로부터 여호수아, 사사기, 사무엘, 열왕기서에 이르기까지에서 예언한 말과 비슷하게도 발생된 것이 없다; 그 이유가 그들이 나머지 지파들 보다 더 축복된 것이 없다는 것, 그들도 포로로 끌려가고 이방인들 사에에서 영영 흩어지고 말았다; 이로부터도 분명한 바, 이 구절이 글자 의미에서 서술된 것을 의미하고 있지 않다는 것, 고로 내적 의미에서의 어떤 것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또한 내적 의미 없이 요셉에 관한 이 구절이 포함한 것을 아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즉 요셉은 “결실이 풍부한 자의 아들, 아들이란 점에서는 샘 가까이 결실이 풍부한 자이고, 딸이란 점에서는 성벽 위에서 행진하는 딸이다. 활쏘는 자가 그를 더 비참하게 하고, 그를 향해 쏘고, 그를 미워한다. 그러나 그는 자기 활의 강함 안에 앉아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의 손들의 무기들은 강력한 야곱의 손들에 의해 힘세지게 만들어졌다. 거기로부터 목자, 이스라엘의 돌이 있다. 너의 아버지의 하느님으로 말미암아, 그분이 너를 도울 것이다, 그리고 솨다이와 더불어, 그리고 그분은 위의 천국의 복됨을 가지고 너를 복되게 하실 것이고, 아래에 드러 누운 깊음 속의 복됨과, 가슴들과 자궁의 복됨을 내리실 것이다. 네 아버지의 복됨은 네 선조들의 복됨 보다 더 우세하여 시대의 언덕들의 바램과 맞먹을 것이다. 그것은 요셉의 머리 위에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의 형제의 나지르인의 머리의 관 위에 있을 것이다.” 이런 말들의 각각이든 전체적이든 내적 의미가 아니고서는 이 말이 뜻하는 것을 알 수 없다.

27절. 베냐민은 이리이다. 그는 아침에 붙잡을 것이다, 그는 전리품을 게걸스럽게 먹을 것이다, 그리고 저녁에 그는 약탈품을 나눌 것이다.

베냐민. 그는 “요셉”인 영적 교회의 선으로부터의 진리를 의미한다. 이는 “베냐민”의 표현함이 천적 평면의 영적 부분(the spiritual of the celestial)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천적 평면의 영적 부분은 선으로부터 진리이다, 여기서는 이스라엘의 예언적 말함에서 있는 요셉에 의해 표현되는 것인 영적 교회 속에 있는 선으로부터의 진리이다. 그 이유가 요셉에 의해 영적 교회가 표현되는 바, 베냐민에 의해서는 이 교회의 선이 표현되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교회는 선으로부터 교회이기 때문이다; 이 선의 진리가 “베냐민”이다.

이리이다. 이는 선을 구출하고 구해내려는 강한 욕망(avidity, 탐욕, 갈망)을 의미한다. 이는 “이리”가 사로잡고 흩트리는 것이다로부터; 그리고 말씀에서 “짐승들”이 탐욕(욕망, cupidity)들을 의미하는 바, 이리 또한 사로잡으려 하는 강한 욕망을 의미한다. 이는 아래 말씀으로부터도 분명해진다:
너희는 거짓 예언자들을 조심하여라, 이들은 양의 의복을 입고 너희에게 온다, 그러나 내향적으로 그들은 약탈하는 이리들이다 (마. 7:15).
그리고 요한복음서에서:
목자가 아닌 품꾼인 자, 양이 자기의 소유가 아닌 자,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들을 떠나 도망한다, 그리고 이리는 양들을 사로잡는다, 그리고 양들을 흩어진다 (요. 10:12; 이와 비슷한 구절로는 눅. 10:3; 예. 5:6; 겔. 22: 27; 습. 3:3도 있다).
그러므로 분명한 바, 이리는 사로잡으려는 이들이다는 것, 그러나 여기서는 사로잡혀져 있어 왔던 이들을 지옥으로부터 구출하려는 자를 의미한다, 여기서의 이리는 앞의 사자의 경우와 비슷한 범주에 있다. 즉 사자의 경우 말해진 것은, “약탈한 것을 움킴”, “전리품을 그러모움”, “약탈에 약탈을 더한다” 등등 같은 말인데, 여기서의 이리에 대한 표현과 유사하다. 그럼에도 좋은 의미에서 “사자”는 선으로부터 힘을 지닌 진리를 의미한다. 이는 약탈적인 짐승인 표범, 독수리 등에서도 같다.

그는 아침에 붙잡을 것이다, 그는 전리품을 게걸스레 먹을 것이다. 이는 주님이 현존할 때 그것이 행해질 것임을 의미한다. 이는 “아침”의 의미가 최고 의미에서 주님이시다로부터, 그러므로 “그는 아침에 붙잡을 것이다”는 주님이 현존하실 때, 이때 선을 구출함과 구해냄이 있을 것이다를 표시한다; 그리고 “전리품을 게걸스레 먹을 것이다”의 의미가 그분이 구출하고 구조해낸 이들을 그분 자신의 것으로 삼는다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붙잡음”, “약탈함”, “전리품”, 그리고 “약탈품”이 말씀에서 주님에 관련되어 말해지는 이유는 그분이 선을 구출하고 구조하심 때문이다는 것은 이미 살핀 9절로부터 분명해진다: 즉 “유다는 사자의 새끼이다; 먹이됨(prey, 약탈품됨)으로부터, 나의 아들, 너는 가버렸다.” 이를 수단으로 주님으로부터 천적인 것을 통하여 지옥으로부터 해방됨(구조됨)이 있다가 의미되어 있다. 또한 말씀의 다른 구절로 아래에 있다:
여호와의 표호하심은 사자의 것과 비슷하시다. 그분은 젊은 사자 같이 표호한다, 그리고 으르렁 소리를 내신다, 그리고 먹이감을 꽉 붙드신다, 하여 그것을 빼앗을(구출할) 자 아무도 없다
(이. 5:29)
다시:
사자가 표호하고, 젊은 사자가 강탈한 것 위에 있듯, 여호와께서 시온의 산 위에 싸우시기 위해 내려오신다 (이. 31:4).
예레미야서에서:
나는 그 날에 너를 구출할 것이다, 정녕 나는 너를 구출할 것이다; 그러나 네 혼은 너에게 전리품을 위해 있을 것이다, 그 이유는 너는 나를 신뢰했기 때문이다 (예. 39:17, 18).
스바냐서에서:
너는 나를 기다려라, 여호와께서 말하신다, 내가 약탈품 쪽에서 일어나는 날까지 조차에서 (기다리 라) (습. 3:8).
이사야서에서:
나는 많은 것들 사이에서 그분과 나눌 것이다, 하여 그분은 강한 자들과 전리품을 나눌지 모른다 (이. 53:12);
위 이. 53장 전체는 주님에 관련하여 말하고 있다.
“강탈품 또는 전리품을 게걸스레 먹는 것”은 악들에 의해 붙잡아져왔던 선을 자기 것이 되게 하는 것임이 아래 발람의 예언적 말함으로부터 분명해진다:
보라, 백성이 늙은 사자 로서 일어날 것이다, 그리고 젊은 사자 같이 그는 자신을 들어올릴 것이다; 그는 전리품을 먹을 때까지 쉬지 않을 것이다 (민. 23:24).
이 모두로부터 “강탈품”, “전리품”, “약탈품” 등의 단어가 주님에 의해 선을 구출하고 구조함을 표시함이 분명하다. 이 단어들이 베냐민에 의해 표현된 진리를 서술하는 이유는 힘이 진리의 속성이고, 이 힘은 선으로부터 가지기 때문이다는 것이다.

그리고 저녁에 그는 약탈품을 나눌 것이다. 이는 아직은 그들이 희미함 가운데 있을 때 주님의 왕국 안에서 그들이 소유함을 의미한다. 이는 “저녁”의 의미가 희미한 것이다로부터; “약탈품을 나눈다”의 의미함이 천국에서 소유함을 주는 것이다로부터; 그 이유가 “약탈품”이 주님에 의해 구출되고 구조되어왔던 이들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약탈품을 나눈다”의 의미는 천국에 있는 이들 사이에 분배됨이 의미되는데, 이는 주님의 왕국에서 소유함을 가지는 것과 같은 의미이다. 이것이 “저녁”에 행해진다 라고 말해지는 이유는 천국으로 승강되는 이들이 처음에는 희미함에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는 그들이 천국의 어떤 사회에 보내지기 위해 천사들을 통하여 주님에 의해 진리들에 관한 가르쳐짐을 받아서 명료한 상태에 와져야 하기 때문이다. 즉 거짓들이 사라지기 위하여서는 시간의 간격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위 사항들은 “베냐민”에 의해 의미되는 것들이다; 그러나 내적 의미 없이, 베냐민에 관해 말해진 것, 즉 “이리”, “그는 아침에 붙잡을 것이다”, “그는 전리품을 게걸스럽게 먹을 것이다, 저녁에 약탈품을 나눌 것이다” 같은 말에 포함된 것이 무엇인지를 누가 말할 수 있을까? 이런 구절들은 내적 의미에 의한 밝힘 없이는 완전히 감추인 대목들이다. 이런 종류의 구절들은 예언서들에 다량으로 있다. 이 구절들 역시 글자로부터 이해하려들면 거의 납득될 수 있는 것이 없다. “야곱의 아들들”에 의해, 그리고 이들의 이름으로 명명된 “지파들”에 의해 주님의 교회와 왕국 속에 있는 이런저런 사항들이 의미된 것이다.

28절. 이 모든 것은 이스라엘의 열 두 지파들이다. 그리고 이것은 그들의 아버지가 그들에게 말한 것이다, 그리고 그들을 복있게 했다. 그는 각자에게 걸맞는 그의 복됨에 의거 그들에게 복을 빌었다.

이 모든 것은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들이다. 이는 복합체(complex, 전체, entirety) 안에 있는 모든 진리들과 선들을 의미한다. 이는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들”의 의미가 복합체에 있는 모든 진리들과 선들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것들이 “지파들”에 의해 의미된 것은 각 지파들을 살핀 앞 장의 구절과 이 장에서 말해진 사항으로부터 분명해졌을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그들의 아버지가 그들에게 말한 것이다. 이는 영적 선으로부터 유입을 통하여 교통함을 의미한다. 이는 “말하다(speak)”의 의미가 유입(inflow)이다로부터, 여기서는 유입(influx)을 통하여 교통함이다로부터; 그리고 여기서 그들의 “아버지”인 이스라엘의 표현함이 영적 선이다로부터 알려진다.

그리고 그들을 복있게 했다. 그는 각자에게 걸맞는 복됨에 의거 그들에게 복을 빌었다. 이는 영적 삶에 관한 예언, 이와 같은 상태에서 각각의 인간에게 일어날 것에 관한 예언을 의미한다. 이는 “복됨”의 의미가 예언이다로부터; 그리고 “각자에게 걸맞는 복됨에 의거 그는 그들에게 복을 빌었다”의 의미가 각각의 인간에게 발생하리라는 것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런저런 상태에서 있는 각각의 인간의 영적 삶에 관한 것이 이 장의 이스라엘의 아들들, 또는 그들의 이름에 따른 지파들에 관해 말해진 것으로부터 분명해진다; 그 이유가 그들에 의해 선들과 진리들에 관한 교회의 모든 상태들이, 고로 교회 내에 있는 모두 각각의 인간의 영적 생명(삶)에 관하여 서술되어 있다.

29-33절. 그리고 그는 그들에게 명령했다, 그리고 그들에게 말했다, 나는 내 백성들에게로 거두어지려 하고 있다. 나를 헷사람 에브론의 밭에 있는 굴에, 우리 선조에게 매장하라. 30 이 굴은 가나안의 토지 마므레 앞 막벨라 밭에 있는 것이다. 아브라함이 그의 매장지를 소유하기 위해 헷사람 에브론에게 밭과 함께 샀다. 31 그들은 아브라함과 그의 아내 사라를 거기에 매장하였고, 이삭과 그의 아내 리브가도 거기 매장하였으며, 나는 레아를 그곳에 매장하였다. 32 이 밭과 거기 있는 굴은 헷사람에게서 산 것이다. 33 야곱이 아들들에게 명하기를 마치고 그의 발을 침대에 거두어 들이고 만기가 되니 그의 백성에게로 거두어 졌다.

그리고 그는 그들에게 명령했다, 그리고 그들에게 말했다. 이는 은근히 심어줌을 의미한다. 이는 이어지는 말로부터 이다, 즉 이스라엘이 자기 아들들에게 막벨라 동굴에, 거기 아브라함과 이삭의 매장지에 자기를 매장할 것을 말할 때, 이 말에 의해 자연 평면에 있는 선들과 진리들에 있는 생명, 자연 평면 안에 내면의 것들과 가장 안쪽의 것들이 있음이 의미된다; 그리고 이런 것들이 이어지는 것 안에서 취급되기 때문에, “그들에게 명령하여 그들에게 말했다”에 의해 위의 사항들이 은근히 심어짐이 의미된다

나는 내 백성들에게로 거두어지고 있다. 이는 그는 자기로부터 있는 자연 평면 속의 선과 진리 안에 있을 것을 의미한다. 이는 여기서 “내 백성”인 이스라엘의 아들들, 이들 이름으로 명명된 지파들의 표현함이 자연 평면에 있는 선들과 진리들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리고 이것들이 이스라엘로부터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리고 “이 백성에게 거두어짐”의 의미가 이러저런 것들 안에 있다 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여기서와 뒤이어 취급되는 주제가 거두어짐, 또는 이스라엘의 “아들들”, 또는 그들 이름에 따른 “지파들”인 자연 평면에 있는 선들과 진리들 안에서 “이스라엘”인 영적 선이 출시됨(cming forth, 세상 밖으로 공표됨) 이기에, 이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를 말하고 지나가야 할 것 같다.
인간 안에는 가장 안쪽의 것, 이것 아래 내면의 것, 외면의 것이 있다. 이 세 개의 부분들은 완전 구분이 되는 것들로서 있다; 그것들은 질서 안에서 계속적이다, 고로 가장 안쪽으로부터 가장 바깥쪽으로 내려간다; 그것들이 연속되는 질서에 따라서 그것들 역시 흘러든다; 고로 생명은 가장 안쪽을 통하여 내면들 안으로, 그리고 내면들을 통하여 외면들 안으로 이다; 고로 질서에 따라 그것들은 연속된다; 그리고 흐름이 멈추는 최말단 외에서는 이 흐름은 계속된다. 그리고 내면의 것들이 질서에 따라 최말단 쪽으로 흘러 내려가는 바, 내면의 것들은 최말단 안에서 함께 있으나 유입의 이런 질서에 따라서 있다: 즉 흘러든 가장 안쪽의 것은 중앙 부분을 붙들고(점유하고) 있다; 그다음 가장 안쪽의 것 아래 있는 내면의 것들은 중앙을 에워싸고 있다; 그리고 외면의 것들이 주변(외곽, circumference)을 만든다; 그리고 이런 형국은 일반적 측면에서, 그리고 낱개적 측면에서도 동일하다. 전자의 질서를 “연속적인 질서”라고, 후자의 질서는 “동시에 일어나는 질서”라고 불리운다; 그리고 후자의 질서는 전자의 질서로부터 기원하고 있다; 그 이유가 모두 각각의 경우에서 동시에 일어나는 질서는 연속적인 질서에 그것의 근원을 가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렇게 근원되어야 그렇게 존재할 수 있다.
모든 내면들이 최말단 안에서 함께 있는 바, 그러므로 생명이 마치 최말단 안에 있는 것처럼, 즉 육체 안에 있는 것처럼 나타난다; 그러나 생명은 (육체가 아닌) 내면의 것(혼)에 있으나, 그렇다고 근원적인 생명이 거기 있는 것은 아니고 가장 높은 것 안에, 즉 주님 안에 있을 뿐이고, 이 분으로부터 생명의 모든 것이 존재하고 근원된다. 그러므로 외면에 있는 생명은 내면의 생명에 비교해 매우 희미하다; 그 이유가 외면에서 생명은 일반적 수준에서 있고, 많은 것들의 유입으로, 즉 내면의 무수한 것들의 유입으로부터 출시된 생명이기 때문이다. 이 무수한 것들이 함께 (연속적, 동시적 질서에 따라) 함께 나타나고 일반적 측면에서 있는 것이다. 이제 본문의 주제와 연결해 생각해보자. 즉 “이스라엘”인 영적 선이 그의 아들들, 또는 지파들인 자연 평면의 선들과 진리 안에 있어야만 한다는 것; 그 이유가 영적 선은 자연 평면의 내면에 해당되고 그의 아들들인 선들과 진리들은 자연 평면의 외면들에 해당되기 때문이다. 하여 영적 선이 이것들 안에 있음이 틀림이 없다는 것이 “나는 내 백성에게로 거두어지고 있다”에 의해 의미되어 있다.

나를 내 조상에게 매장하라. 이는 그 안에는 내면의 것들과 가장 깊은 것이 있다를 의미한다. 이는 여기서 “조상들”인 아브라함과 이삭의 표현함이 내면의 것들과 가장 안쪽의 것이다로부터; 즉 아브라함은 가장 안쪽의 것, 그리고 이삭은 가장 안쪽인 것 아래 있는 내면의 것이다

굴에. 이는 희미함이 있는 곳을 의미한다. 이는 “동굴”의 의미가 희미함인 것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더욱이 이스라엘의 아들들과 지파들에 의해 표현되는 자연 평면의 진리들과 선들이 있는 자연 평면의 외면들에 희미함이 있다, 그 이유는 거기에는 일반적 수준의 것이 있기 때문이다.

헷사람 에브론의 밭에 있는. 이는 그럼에도 명료해질 수 있음을 의미한다. 이는 “들판”의 의미가 교회이다로부터; 그리고 “헷사람 에브론”의 표현함이 진리와 선이 받아질 수 있는 이들, 고로 신앙의 희미함이 명료해질 수 있는 이들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여기서의 경우는 이렇다: 자연 평면에 있는 것은 무엇이든, 특히 자연 평면의 외면에 있는 것은 무엇이든, 자연 평면의 내면에 있는 것에 비교하면 희미하다, 더욱이 합리성에 있는 것에 비하면 더더욱 희미함에 있다. 그러나 이 희미함은 두 방법에서 명료해진다: 첫째는 만일 외면들이 내면의 것들에 굴종함에 가져다 놓인다면, 고로 상응함 안으로 가져다 놓이는 경우이다; 둘째로, 만일 인간이 외면으로부터 내면의 것들 쪽으로 승강할 수 있다면, 고로 내면의 것들로부터 외면의 것들을 볼 수 있는 경우이다. 이 후자의 경우는 교회의 내적 부분에 있는 이들에게 가능하고, 전자는 외적 부분에 있는 이들에게 가능하다; 그러나 이것이든 저것이든 주님으로부터 거듭남을 통하지 않고는 획득되어지지 않는다. 이로부터 분명한 것은, 희미함이 명료해질 방법은 있다는 것이다.

막벨라 밭에 있는 굴에. 이는 이 희미함 안에를 의미한다. 이는 “동굴”, 그리고 “막벨라”의 의미가 희미한 것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마므레 앞. 이는 그것에 관한 양과 질을 의미한다. 이는 “마므레”의 의미함이 인접된 것 쪽으로 어떤 것의 양과 질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가나안의 토지에 이는 교회가 있는 곳을 의미한다. 이는 “가나안의 토지”가 교회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아브라함이 헷사람 에브론에게 밭과 함께 샀다. 이는 되찾음(redemption)을 의미한다. 이는 “사다”의 의미가 자기 소유로 만드는 것이다로부터, 고로 또한 되찾는 것이다로부터, 그 이유가 되찾아지는 것은 자신 소유로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의 표현이 최고 의미에서 주님이시다로부터; “들판”의 의미가 교회이다로부터; 그리고 에브론 헷 사람의 표현이 선과 진리가 받아질 수 있는 이들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러므로 이 본문의 뜻이 무엇인지 분명해진다, 즉 선과 진리가 받아질 수 있는 교회인을 주님께서 되찾으실 수 있다는 것이다.

그의 매장지를 소유하기 위해. 이는 거듭남을 의미한다. 이는 “무덤”의 의미가 거듭남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들은 아브라함과 그의 아내 사라를 거기에 매장하였고, 이삭과 그의 아내 리브가도 거기에 매장하였으며 나는 레아를 그곳에 매장하였다. 이는 모든 내면의 것들은 자연적인 것 안에 있는 선과 진리 안에 질서적으로 있다를 의미한다. 이는 이미 앞에서 살핀 바 있다.

이 밭과 거기 있는 굴은 헷사람에게서 산 것이다. 이는 진리를 받는 이들, 그리고 진리를 통하여 선을 받는 이들을 되찾는다를 의미한다. 이는 “산 것, 매입, purchase”의 의미가 되찾음이다로부터; “들판”의 의미가 교회이다로부터, 고로 교회인이다, 그 이유가 교인이 교회이기 때문이다. “동굴”의 의미가 희미한 것이다로부터; 그리고 헷의 아들들의 표현이 고대 교회로부터 있었던 영적 교회이다로부터; 그리고 “헷의 아들들”이 고대 교회로부터의 영적 교회이기 때문에 그들은 진리를 받는 이들, 그리고 받은 진리를 통하여 선을 받는 이들을 표시한다, 그 이유가 이로부터 영적 교회가 있기 때문이다. 이런 모두로부터 분명해지는 바, “밭과 거기에 있는 동굴을 헷사람의 아들들로부터 매입함” 은 진리를 받고, 받은 진리를 통하여 선을 받는 교회인들, 비록 그들이 아직은 희미함의 수준이지만 되찾으신다는 것이다.

야곱이 아들들에게 명하기를 마쳤다. 이는 은근히 심음의 결과를 의미한다. 이는 “아들들에게 명령하여 그들에게 말하다”의 의미가 은근히 심어짐이다로부터. 그리고 “그들에게 명하기를 마치다”는 은근히 심어짐의 결과를 표시한다.

그리고 그는 그의 발을 침대에 거두어 들였다. 이는 내면에 있던 보다 낮은 수준의 것들이 보다 더 수준 낮은 자연 평면 속의 선과 진리 쪽으로 향함에 관하여를 의미한다. 이는 “발을 거두어들이다”의 의미가 자신을 더 낮은 것들 쪽으로 향하게 하다 이다로부터; 그리고 내면의 것인 보다 낮은 것들이 뜻해지는 것은 이미 살핀 대목으로부터 분명해진다; 그리고 “침대”의 의미가 자연 평면이다로부터, 고로 자연 평면의 선과 진리이다, 그 이유가 이것들이 인간과 더불어 자연 평면을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더 낮은 자연 평면의 선과 진리인 이유는 이 자연 평면이 자신을 향하게 하고 있기 (침대로 거두어 들임) 때문이다; 이스라엘에 의해 자연 평면으로부터의 영적 선이, 야곱에 의해서는 자연 평면의 영적 진리가, 그리고 그의 아들들에 의해서는 자연 평면의 선들과 진리들이 표현되는 바, 이것들이 엄밀히 말하면 각기 다른 종류별로 구별될 수 있기에, 그러나 단어 “침대(bed)”도 자연 평면을 의미하기 때문에 이 장의 여러 군데에서 삽입된 것을 볼 수 있다; 즉 이 구절의 경우, “그가 말하기를 마치자, 그의 발을 침대로 거두어 들였다” 라든가, 요셉이 그에게 왔을 때, 말해지기를, “그는 기운을 차리고 침대 위에 앉았다” 라든가; 그가 요셉에게 자기를 매장하는 것에 관하여 말하고, “이스라엘은 침대의 머리에서 자신을 구부려 절했다” 라든가 하는 경우들이다. 이런 언급이 있어진 이유는 야곱이 생각되어질 경우, 영들의 세계에서는 침대에 누워있는 인간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이것은 머리 위 먼 거리에서, 오른쪽 앞쪽에서 나타난다. 이런 나타남은 천국에서 야곱에 대한 생각이 자연 평면에 관하여로 바뀐다는 사실에서 비롯된다; 그 이유가 천국에서는 야곱이라는 인물이 지각되지 않고 야곱에 의해 표현된 것, 즉 자연 평면이 지각되기 때문, 이 자연 평면이 침대에 의해서도 간단히 의미된다, (하여 여러 구절에 침대가 등장하는 일이 발생된 것이다.)

만기가 되었다(expired). 이는 거기서의 새로운 삶을 의미한다. 즉 그의 아들들과 지파들에 의해 표현되는 보다 낮은 평면의 선들과 진리들 안에서의 새로운 생명을 의미한다. 이는 “만기가 되다(숨을 내쉬다, expire)”, 또는 “죽다(die)”의 의미가 새로운 삶(생명)이다 .

그의 백성에게로 거두어 졌다. 이는 영적 선은 영적 선 자체로부터 있는 자연 평면 속의 선과 진리 안에 있었다를 의미한다. 이는 같은 말이 등장한 구절(29절)에서 살핀 바로부터 분명해진다. (거기서 살핀 것이 영적 선의 출시됨과 삶에 관하여서인데, 이것이 그의 아들들과 지파들인 더 낮은 자연 평면의 선들과 진리들 안에 있는 “이스라엘”이다.) 외면의 것 안에서 내면의 것의 출시됨에 관하여 더 알아둘 것이 있다: 즉 모든 것들, 인간 뿐만 아니라 보편적 자연계의 것들은 연속적인 만들어짐(형성, formation)을 수단으로 세상에 모습을 나타낸다는 것, 고로 후자의 것은 전자의 것으로부터 연속된 만들어짐이다. 그러므로 각각의 만들어짐은 다른 것들로부터 분리되어 출시된다, 그러나 사실상 여전히 후자는 전자에 의존되고 있다. 다시 말해 후자는 전자 없이 존재할 수 없다; 그 이유가 후자는 전자와 연결됨이 보존되면서 전자를 수단으로 만들어짐이 있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분명한 바, 후자 안에 이 후자 앞의 모든 것들이 질서적으로 있다는 것이다. 이는 전자를 본체(substance)라고 간주할 경우에서 전자로부터 진행하는 양식(mode)과 힘(force)의 경우와도 비슷하다. 이것은 인간에 속하는 내면의 것들과 외면의 것들과 같은 경우이고, 또한 인간의 생명 속에 있는 이런저런 것들의 경우이다.
위와 같은 만들어짐에 따라 인간에 있는 내면의 것들과 외면의 것들이 있다고 생각을 해보지 않은 이들은 인간의 내면과 외면에 대한 어떤 생각을 가지는 것이 가능할 수가 없다, 또한 이것이 다른 것 안으로 유입됨에 관한 생각도 아예 가능하지 않다. 더욱이 육체적인 것인 외적 부분(외적 인간)은 죽음에 의해 분리될 때, 외면의 인간의 품질이기도 한 내면의 인간이 출시되어 살아간다는 것에 대한 생각이 가능하지 않다. 내면의 것들과 외면의 것들을 놓고 이런 생각을 품는 다른 경우도 있다; 즉 이 두 가지 것들은 계속적으로 더욱 더 순수해져 가고 있다는 생각, 고로 계속성을 수단으로 이 둘은 대단히 밀착되어져 있다는 것, 고로 후자의 만들어짐이 전자의 것과 구분됨이 없다는 것, 이런 생각을 품는다면, 외적 부분이 죽을 때 내적 부분도 죽는다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다. 그 이유가 그것들이 밀착되고 시종일관하기 때문, 그것들의 연속성과 밀착함을 이유로 이것이 죽으면 저것도 죽어야 한다고 결론낼 수밖에 없는 지경이다. 하여 (이 책에서는) 이 본문 말고도 수 없이 반복적으로 말해온 것은 내적 부분(내적 인간)과 외적 부분(외적 인간)은 서로로부터 완전 분리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내면의 것과 외면의 것은 질서 안에서 계속된다는 것; 또한 모든 내면의 것들은 외면의 것 안에서 함께 있다는 것, 다른 말로 모든 전자의 것들은 후자의 것들 안에 함께 있다는 것이다. 이 내용이 이 구절의 내적 의미에서 취급되고 있다. .

창세기 48장 해석

창세기 제 48 장

6218. 1, 2절. 이런 말들이 있은 후 였다, 어떤 이가 요셉에게 말했다, 보라 당신의 아버지가 아프다. 그리고 그는 그와 함께 그의 두 아들, 므낫세와 에브라임을 데리고 갔다. 2 그리고 어떤 이가 야곱에게 말했다, 그리고 말했다, 보라 당신의 아들 요셉이 당신에게 오고 있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기운을 냈다, 그리고 침대에 앉았다.

6219. 이런 말들이 있은 후 였다. 이는 이전에 있어왔던 것들로부터 뒤이어지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말들”의 의미가 것들이다로부터; 고로 “이 말들이 있은 후”는 앞에 있어왔던 것으로부터 이어지는 것을 의미하게 된다.

6220 누군가가 요셉에게 말했다. 이는 탁월한 지각을 의미한다. 이는 “말하다(say)”의 의미가 지각하다이다로부터 (1791, 1815, 1819, 1822, 1898, 1919, 2080, 2619, 2862, 3509, 5687항); 이 지각이 탁월한 지각이라 말한 이유는 취급되는 주제가 교회의 지력과 의지력이 뒤이어지기 때문에서이다, 고로 교회의 진리와 선, 그리고 이것은 “요셉”인 천적 평면의 내적 부분을 통하여 유입으로부터 이기 때문이다.

6221. 보라 네 아버지가 아프다. 이는 거듭남이 계속됨을 의미한다. “죽는다”가 생명 쪽으로 부활함을 의미하고, 그리고 거듭남도 의미한다 (3326, 3498, 3505, 4618, 4621, 6036항); 이로부터 “아프다”, 이는 (죽는 쪽으로) 진행중이다인 바, 거듭남을 향하여 전진하는 것, 고로 거듭남의 계속인 것을 표시한다. “죽는다”가 거듭남을, 그리고 “아프다”가 거듭남의 계속을 표시한다는 말은 믿어지기에는 거리가 멀 수밖에 없을 것으로 여겨진다. 그렇지만 천사들의 말과 생각의 어떤 것을 아는 자라면, 이 의미가 그렇구나 하고 인정하는 것이 별 대수로운 일은 아닐 것이다. 천사들은 죽음 이라는 것을 모른다, 아프다는 것도 모른다, 고로 이것들에 대한 생각도 없다, 그러나 그들의 장소에서, 인간이 그것들을 읽는 것을 들을 때, 그들은 삶의 계속과 부활에 대한 생각을 가진다. 이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인간이 죽을 때, 그는 자기 영의 세상 삶을 떠받쳐준 육체를 벗고, 자기 영이 지금까지 함께 해왔던 영의 어떤 사회 안으로 들어가기 때문이다. 이것은 “죽다”와 “아프다”가 천사들 앞에서 읽혀질 때, 그들에게 표출되는 생각이다, 그리고 거듭남에 관한 생각도 마찬가지인데, 이것은 생명 안으로 부활함이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거듭나기 이전, 인간은 영적으로 죽어 있기 때문; 그러나 그가 거듭나졌을 때, 그는 살아 있고, 부활의 아들이 된다. 만일 그가 육체 안에서 살 때, 인간 자신이 천국을 갈망할 경우, 죽음과 병듦을 놓고 이것은 생명 쪽으로 부활함으로 진행해가려 함이다는 것밖에 더 달리 생각하지 않는다면, 그는 자신으로 육체에 대한 생각으로부터 철수하게 할 것이다, 특히 자신이 아플 때, 하여 죽음 가까이 다가감이 확실하다고 자신이 확신할 때 더욱 육체에 집념된 생각으로부터 철수 하게 할 것이다. (어쩌면 영과 육의 분리됨을 육체가 아직 살아 있는 동안 약간 맛볼지 모른다. 역자주) 이로부터 육체의 죽음에 관한 영적인 생각은 생명의 새로워짐에 관한 생각이다; 그러므로 부활과 거듭남이 천국에서 주제가 될 때, 이 생각들은 아래로 흐르고, 세상 속에 있는 이런저런 것 안으로 스며드는데, 이 생각밖에 더 달리 내려오지는 않는다. 고로 이 생각은 말씀과 더불어 있는 바, 이런 생각의 각각 그리고 모든 것 측면에서 주님으로부터 (천국 안에) 내려와져서, 그 다음 천국을 통하여 세상 안으로도 내려와진다; 이런 하강함에서 이 생각들(천적, 영적 의미, 또는 내적 의미)는 우선 세 천국들 각각의 납득력에 어울리는 것을 (옷)입는다, 그리고 마지막 (지상의) 인간의 납득력에 적절한 형체를 (옷)입는다. 이것이 지상의 모든 이가 마주 대하는 글자 의미인 것이다.

그리고 그는 그의 두 아들, 므낫세와 에브라임을 데리고 왔다. 이는 교회 속의 의지력과 교회 속의 지력이 내적 부분으로부터 출생함을 의미한다. 이는 므낫세가 자연 평면에서의 새로운 의지력과 이것의 품질이다로부터; 그리고 에브라임의 표현이 자연 평면에서의 새로운 지력과 이것의 품질이다로부터; 그들이 내적 부분으로부터 출생됨은 그들이 요셉의 아들이다는 것에 의해 의미된다, 그 이유는 요셉에 의해 천적 평면으로부터의 내적 부분이 표현되기 때문이다.
이쯤에서 교회의 지력과 의지력이 뜻해지는 것을 설명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교회의 지력(지성, intelluctual)은 신앙의 진리가 무엇인지를, 선행의 선이 무엇인지를 말씀으로부터 지각하는 것이다. 우리 모두 아는 바, 인간은 자신이 끌어안은 교의 (주장, tenet)는 무엇이든, 그것을 말씀의 글자 의미로부터 확증해야 속이 풀리는(안심하는) 습성을 지녔다는 것, 여기서 성경의 글자가 한몫 거드는 일익을 담당하는 본성을 지니고 있다. (어쩌면 성경의 글자기 지니는 부작용일지 모르나 이는 자연계의 글자인 이상 피할 도리는 없다 역자주), 이런 이유는 말씀의 글자 의미는 진리들을 받는 그릇들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그릇들의 품질은 당사자가 진리들을 받을 때까지 투명성을 통하여 이듯 (진리가) 나타나 있지 않고 있다. 그 이유는 글자 의미는 (지독하게 넓다 말할 수도 있는) 일반성들이기 때문이다. 이런 일반성을 말씀이 지닐 수밖에 없는 이유는 당사자가 자신에게 걸맞는 것인 특수적, 개별적인 진리들을 받기 위하여는 우선 일반성 범위의 것들이 배워져야만 하기 때문이다. (훈련소에서 전쟁을 위한 기본틀을 군인이면 누구나 습득한 다음, 각기 특별 부서에 배치되어 군인의 임무를 수행하는데, 이때 훈련소에서의 배움은 전쟁을 위한 일반성에 해당한다. 이 과정을 익힘 없이 특수한 임무를 배우는 일이 없다. 한마디로 해부학을 합격 못한 사람은 의사가 되어서는 안 되는 것일지 모른다. 역자주.) 이렇게 말씀의 글자적 의미는 당사자가의 의미로부터 자신이 내세우고 싶은 어떤 주장(교의)이든 확증할 기회를 제공하므로 수많은 교파, 이교들이 속출할 수밖에 없다, 사실상 그들 주장의 전부가 글자 의미에 빠짐 없이 있는 것은 아니고 어느 부분의 일치함을 기발나게 발굴해서, 그들 스스로 그것을 확대하여 자신의 주장의 전부가 하느님의 계시나 된 듯 진리로 비쳐지게 만든 것 뿐이다. (이른 바 휴거 소동이 인간들의 역사에 몇 번씩 등장한 것, 예수님이 승천 이후, 그분이 구름을 타고 오신다고 했는바, 하늘의 구름을 보고 구름에 나타나는 예수를 학수 고대하는 것이 현실이지 않던가, 그래도 최근은 대놓고 버젓이 이를 강조하는 연설자는 줄어든 것 같다. 아마 예수가 아무리 기다려도 구름 안에 오시지 않기 때문일지 모른다 역자주) 아마 이런 자들에게 진리 자체를 천국으로부터 듣게 한다면, 그들이 그 진리를 받아들일까? 아마 완전 거부 뿐일 것이다.
이런 이유는 그들이 교회의 지력을 가지지 않은 때문이다; 그 이유가 교회의 지력은 당사자가 말씀을 읽을 때, 하여 이 구절과 저 구절을 조심스럽게 비교하며 믿어져야 하는 것, 행동되어져야 하는 것을 지각함 안에 존재한다. 이 지력이 발견되어지는 것은 오직 주님에 의해 계발되는 때 뿐이다. 이들은 기독교 세계에서 계발된 자라고 불리어 진다. 이 계발됨은 진리들을 알기를 바라는 자, 그러나 자신의 영예나 영광 따위가 아닌 삶과 선용을 위해 알기를 바라는 자들 안에서 발견되어진다. 이 계발됨 자체는 인간에 있는 지력에 의해 받아진다, 그 이유가 계발되는 것이 지력이기 때문이다. 이는 이런 사실로부터 분명해진다: 즉 지력이 약한 사람은 말씀으로부터 이런저런 것들을 볼 수가 없기 때문, 그들은 자기들이 계발되어지리라고 믿는 신앙을 가진 것 뿐이다. 더 알아야하는 것은, 거듭나져가는 이들은 계발되어질 수 있는 지력을 주님으로부터 받는다는 것이다. 지력으로 흘러들어 지력을 계발하는 것은 주님으로부터 천국을 통하여 있는 빛이다; 그 이유가 지력이 그것의 빛, 그것의 시각, 그 결과 그것의 지각을 가질 수 있는 근원은 이외 다른 곳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교회의 지력이라 불리우는 이 지력은 단지 기억 속의 지식들로부터 오는 지력보다 더 내면적이다, 그 이유는 어떤 것이 그러하다고 하는 지각은 기억 속의 지식들로부터, 또는 철학 같은 것으로부터의 명령(dictate)이 아닌, 말씀의 영적 의미로부터 있는 명령으로부터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교회의 지력에 있는 이들은 말씀 어디에서나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선행이 교회의 근본임을 가르친다는 것을 명료하게 지각할 수 있기 때문; 그리고 인간의 생명은 사후 남아 있다는 것; 그의 생명은 그의 사랑들로부터 이다는 것; 또한 신앙은 선행으로부터 분리되면 신앙이 아니다는 것; 신앙은 주님을 사랑함의 선과 이웃을 향한 선행의 선에 인접하여 있지 않으면 아무 쓸모가 없다는 것; 결과적으로 이것들과 신앙은 영원한 생명이 있기 위해 함께 결합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 등등을 지각한다는 말이다. 이런 것들이 진리들이다는 것은 계발된 지력을 가지는 이들에 의해서만 명백하게 지각될 수 있을 뿐이다.
흔히 믿어지고 있는 대목은, 교의나 자신들의 교회의 교리물들을 능란하게 이리저리 잘 꿰매어 설득력 있는 확증함으로 열변을 토하는 이들에게 교회의 지력이 있다고 믿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교회의 지력이 아니다; 그 이유가 교의를 확증하는 것은 지력으로부터가 아니고, 감각적 부분에서 있는 창의력(발명의 재주, ingenuity)으로부터 일 뿐이다. 그래서 이런 것은 최악의 인간들에게서 발견되는 일이 흔하고, 아무것도 믿지 않는 이들에 의해서도 행해질 수 있고, 심지어 거짓 자체에만 있는 이들에 의해서 행동된다. 이런 식의 아이디어 창출 수준은 사기성이 교묘한 자들이라면 자기들이 좋아하는 쪽으로 성경의 구절들을 예증으로 슬며시 곁붙치면서 단순한 자들을 거짓 교의 안에 가둔다. 이런 결과물이 도래되는 것은 교회의 지력을 소유한 자들에게는 상상에도 없어야 정상 아닐까?
본문의 에브라임이 교회의 지력을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교회의 선은 므낫세에 의해 표현된다. 이 선은 신앙의 진리들을 수단으로 교인들 안으로 주님에 의해 은근히 심어지는 선행의 선이다. 신앙의 진리들이 선행의 선과 함께 지력 안으로 흘러들고 지력을 계발하고, 또한 지력과 의지력이 하나의 마음을 만들게 하기 때문이다. 이 지력과 의지력 모두가 내적 부분으로부터 태어나진다는 것은 많이 말해왔었다; 그 이유가 선과 진리에 애착함 모두를 수단으로 계발함이 오는데, 이 애착의 근원들은 내적 부분밖에 없기 때문, 결과적으로 이것들은 내적 부분으로부터, 즉 내적 부분을 통하여 주님으로부터 태어나진다.

그리고 누군가가 야곱에게 말했다. 이는 자연 평면 속의 진리로부터 지각함을 의미한다. 이는 “말하다(tell)”의 의미가 지각함이다로부터; 그리고 야곱의 표현함이 자연 평면의 진리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리고 말했다, 보라 네 아들 요셉이 너에게 오고 있다. 이는 내적 부분의 현존에 관하여를 의미한다. 이는 요셉의 표현함이 내적 부분이다로부터; 그리고 누군가 “에게 오다”의 의미함이 현존함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요셉”이 여기서는 내적 부분이다 라고 말해지고, 다른 장소에서는 천적 평면으로부터의 내적 부분이라 말해졌는데, 이런 의미 변경은 자연 평면에서 이 평면 아래 수준인지, 또는 이 평면 위쪽 수준인지에 따라 응용함이 변경되기 때문이다: 즉 야곱에 의해 표현되는 보다 낮은 수준이 암시되는 경우에서는 요셉에 의해 “내적 부분, the internal”이 표현되고, 보다 높은 수준일 경우인 이스라엘이 언급되는 경우, 또는 이스라엘의 아들들이라 언급될 경우, 요셉에 의해 “천적 평면으로부터의 내적 부분, the internal celestial”, 또는 “내적 부분의 선(internal good, 내적인 선)이 표현된다. 이런 이유는 유입 때문이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기운을 차렸다(힘을 일구었다). 이는 영적 선을 통하여 있는 새로운 힘을 의미한다. 이는 “기운을 차리다”의 의미가 새로운 힘(force)들을 받는 것이다로부터; 그리고 이스라엘의 표현함이 자연 평면으로부터의 영적 선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 힘들이 영적 선을 통하여 있다고 말한 이유는 “야곱”이라 말해지고, 즉각 “이스라엘”이라 뒤이어 말해졌기 때문이다: 즉 “누군가가 야곱에게 말했다. 보라 네 아들 요셉이 온다. 그 다음 이스라엘은 기운을 차렸다”라고 말해졌기 때문이다. 여기서 “이스라엘”은 자연 평면으로부터의 영적 선이다, 그러나 “야곱”은 자연 평면의 진리이다. 자연 평면의 진리는 거기서 신앙 속에 있고, 선행의 선인 영적 선을 수단으로 확증되어진다 (기운을 차린다, 힘이 돋구어진다). 또한 “이스라엘”은 교회의 내적 부분이고, “야곱”은 교회의 외적 부분이다. 교회의 외적 부분은 교회의 내적 부분 외에 다른 근원으로부터 힘이 돋구어지거나 힘을 받거나 하지 않는다. 교회의 내적 부분에 있는 이들이 선행의 선에 있는 이들이다, 이 선은 신앙의 선, 진리의 선, 영적 선, 이것이 “이스라엘”이라 불리운다; 그러나 교회의 외적 부분에서 있는 이들은 신앙의 진리에 있는 이들이다, 따라서 선 안에 있다고 잘라 말해보기에는 아직 때가 이르지 못한 수준, 그렇지만 그들의 진리 안에 선이 있는 상태, 이 진리가 “야곱”이다.

그리고 침대에 앉았다. 이는 영적 선이 자연 평면 쪽으로 돌리어졌다를 의미한다. 이는 “침대”의 의미가 자연 평면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스라엘이 침대에 앉다”가 영적 선이 자연 평면쪽으로 돌리어졌다를 표시하는 이유는 창. 47:31에서 “이스라엘은 침대의 머리에서 자신을 구부려 절하였다”에 의해서는 영적 선이 자연 평면의 내적 부분 속에 있는 이런저런 것들 쪽으로 자체를 돌렸다가 의미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가 거기로부터 자신을 옮겨 침대에 앉음에 의해서는 자연 평면 쪽으로 자체를 돌렸다가 의미된다. 자연 평면의 내면 쪽으로, 외면 쪽으로 돌림에 의해 표현되는 것은 납득력에 와닿게 하는 것이 쉽지가 않은데, 그 이유는 자연 평면에 내면과 외면이 있다는 것, 그리고 생각함이 이것이다 하고, 다른 경우에서는 저것이다 하고 말하는 이유를 아는 자가 거의 없기 때문이다; 이런 것을 모르는 자는 이런 사항들을 곰곰이 되집어 생각하려는 것도 없는 바, 어떤 경험을 바탕으로 그런 것에 관한 지식들을 가지지도 못하고 흘려보내고 말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런 것은 모든 이에게 공통적인 것이고, 단지 정도나 수준이나 따위에서만 차이가 조금 있을 뿐이다. 그 이유가 생각이라는 것은 때로 높고 고상한 것까지로 상승했다가도, 때로 낮고 천한 수준까지로도 하강하는 일을 밥먹듯 일삼기 때문이다.
이 외에 모든 이도 알 수 있는 것은, 이스라엘이 침대의 머리에서 자신을 구부려 절함, 그리고 후에 침대에 앉다를 추켜든다면, 최고로 거룩한 말씀 안에서 (의미를 찾는다고) 들먹거리기에는 너무나 경미한 주제들이 아닌가 말할지 모른다는 것, 그러나 이 말씀 역시 정녕 거룩한 말씀이다에 무게를 둔다면, 이 말의 의미 역시 알려져야 할 것이다. 이 의미는 각 단어가 지니는 개별적 영적 의미를 우선 알아야 하고, 이 의미는 천사들이 생각하는 언어들이다는 것도 알고 있어야 한다, 천사들은 세상의 물체, 육체에 속하든, 땅에 속하든 천국의 언어로만 알 뿐이다. 이 언어를 이해하는 것이 상응이다. 이에 대하여는 몇 장에 걸쳐 설명한 바 있다.

3-7절. 그리고 야곱은 요셉에게 말했다, 하느님 솨다이께서 가나안의 토지에 있는 루즈에서 나에게 나타나셨다, 그리고 나에게 복을 내리셨다. 4 그리고 그분은 나에게 말하셨다, 보라 나는 너를 열매 있게 만들고, 너로 번성해지게 할 것이다, 그리고 너를 큰 무리의 백성으로 만들 것이다. 그리고 나는 이 토지를 너 이후 네 씨에게 영원히 소유하도록 주리라. 5 그리고 지금 내가 이집트로 너에게 오기 전 이집트의 땅에서 너에게 태어난 네 두 아들, 그들은 나의 것이다. 르우벤과 시므온 처럼 에브라임과 므낫세, 그들은 나의 것이다. 6 그리고 그들 이후 너에게서 출생하는 네 자손은 너의 것이다. 그들의 형제들의 이름에서 그들은 자기들의 상속 재산을 청구하리라. 7 그리고 나, 내가 밧단으로부터 오는 있는데 라헬이 가나안의 토지, 그 길에서, 에브랏에 당도하기에는 아직 토지의 넓이가 있었을 때 죽었다. 그리고 나는 그녀를 거기 베들레헴과 같은 곳, 에브랏으로 가는 길에 매장했다.

그리고 야곱은 요셉에게 말했다. 이는 자연 평면 속의 진리가 내적 부분과 교통함을 의미한다. 이는 “말하다(say)”의 의미가 지각하다, 또한 교통하다 이다로부터, 그 이유가 또 다른 사람에 의해 지각된 것이 교통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야곱의 표현함이 자연 평면의 진리이다로부터; 그리고 요셉의 표현함이 내적 부분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하느님 솨다이께서 가나안의 토지에 있는 루즈에서 나에게 나타나셨다. 이는 신성이 이전의 상태에서 자연 평면에 나타나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하느님 솨다이(Shaddai)”의 의미가 신성이다로부터, 그 이유가 아브라함, 이삭, 그리고 야곱의 하느님이 “솨다이”이라고 불리웠기 때문, 그리고 그분은 여호와, 또는 주님, 고로 신성이셨다, 이는 이미 지나온, 창. 28:13, 20에서 살핀 바로부터 알는지 모른다; “나에게 나타나셨다”의 의미가 그분이 나타나셨다 이다로부터; “루즈”의 의미가 이전 상태에서의 자연 평면이다로부터; 그리고 “가나안의 토지”의 의미가 교회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상으로부터 분명해진다, 즉 “하느님 솨다이께서 나에게 가나안에 있는 루즈에서 나타나셨다”에 의해 신성이 영적 교회가 있는 자연 평면에서 나타나심이 의미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나에게 복을 내리셨다. 이는 생동 있게 함에 관하여 예언함을 의미한다. 이는 “복을 주시다”의 의미가 여기서는 생동 있게 함에 관하여 예언이 있다를 의미함으로부터 분명해진다; 그 이유가 복을 주심은 그분이 그를 열매가 풍성히 있게, 그를 번성하게, 그가 일련의 백성들로 한 집단으로 일구어지게, 자기 이후 자손에게 영원한 소유로 토지를 주시는 것 등등을 해주심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런 예언되는 모든 것은 생동 있게 함에 관한 것이다; 그러나 신앙의 진리와 선행의 선 안에 있는 이들에 해당된다; 그 이유가 이것들이 내적 의미에서 있는 “야곱”과 “이스라엘”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분은 나에게 말하셨다, 보라 나는 너를 열매 있게 만들고, 너로 번성해지게 할 것이다. 이는 선행의 선과 신앙의 진리를 통하여 생기 있어짐을 의미한다. 이는 “열매 풍성해지게 만들어지다”의 의미가 선행의 선이다로부터, 그리고 “번성해지다”의 의미가 신앙의 진리들에 관해 말해진다 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런 것들이 인간을 살아있게 만들기에, 생기 있어 짐이 그들을 서술한다.

큰 무리의 백성으로 만들 것이다. 이는 무한하게 증가함을 의미한다. 이는 “큰 무리의 백성”의 의미가 한계 없는 선으로부터의 진리들이다로부터; 그 이유가 “백성”들이 진리들을 의미하기 때문, 그리고 “무리(company)”는 풍부함이다. 이로부터 “큰 무리의 백성을 만든다”는 진리들이 풍부히 증가하게 된다를 의미하게 된다; 그리고 이것이 무한하다인 이유는 무한이신 분으로부터 진행하는 영계의 모든 것들은 진리들과 선들에 관하여 무한대로 불어나고 증가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무한이라 불리는 것은 숫자를 가지고 한계를 지어 말해보거나 세어질 수 없다. 그렇다 해도 영계의 무한인 것은 절대적 무한에 비해 상대적으로 유한이다. 이 둘 사이에는 비율이 적용되지 않는다.
진리들과 선들이 무한하게 증가할 수 있다는 것은 그것들이 무한이신 주님으로부터 진행하고 있다는 사실로부터 오고 있디. 진리들과 선들이 이런 속성 속에 있다는 것은 보편적인 천국은 진리와 선 안에 있다는 사실로부터 알는지 모른다, 그럼에도 이 사람의 진리와 선이 저 사람의 진리와 선과 똑같은 적은 한 번도 없다. 이런 식으로 수 천천의 천국도 같은 것은 하나도 없다. 이는 천사들이 영원히 완전 쪽으로 진행해간다는 사실로부터도, 즉 그들은 선과 진리에서 계속적으로 성장하고 있다, 그럼에도 어떤 완전함의 등급에는 도달할 수 없다, 그 이유는 무한한 영역에 언제나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진리들은 숫자적으로 무한이기 때문, 그리고 각 진리는 그것 안쪽에 무한한 영역을 지니기 때문, 등등이다.
이것은 자연에 있는 어떤 것 가지고도 더 확실해진다: 비록 인간이 숫자상 무한하게 불어난다 해도, 같은 얼굴을 가진 또 다른 자는 여전히 없다, 그리고 내부의 얼굴 또한 그렇다, 즉 마음이 같은 자, 아마 목소리의 어조 조차도 그렇다; 이로부터 분명한 것은, 모든 것들에는 무한한 다양성이 있다는 것, 이것과 저것이 같지 않다는 것이다. 이런 다양함은 영계에 속하는 진리와 선에서도 마찬가지여서 무한적이다; 그 이유가 자연계의 하나의 것이 영계의 수천 천과 상응하기 때문이다. 고로 더 내면에 속할수록 더 무한적이다.
영계에 속한 것이 무한한 이유, 자연계의 것 역시 그 다양함이 무한한 이유 모두는 무한 자체로부터 출시되기 때문이다. 이는 위에서 말했다; 그것들이 무한에서 출시되지 않으면 그것들은 결코 무한이어질 수가 없다; 그러므로 양쪽 세계의 무한이신 것들로부터 분명해지는 것은 신성이 무한이심 이다.

그리고 나는 이 토지를 너 이후 네 씨에게 영원히 소유하도록 주리라. 이는 이 선과 진리 안에 있는 이들을 위한 주님의 왕국을 의미한다. 이는 “토지”, 여기서는 가나안의 토지의 의미가 주님의 왕국이다로부터; “씨”의 의미가 신앙의 진리와 선행의 선이다로부터; 그리고 “영원히 소유함”의 의미가 주님의 생명을 가지는 것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것들이 “왕국의 아들들이다.”

그리고 이집트의 토지에서 지금 너에게 태어난 네 두 아들들. 이는 내적 부분으로부터 자연 평면에 태어난 선과 진리를 의미한다. 이는 여기서 “두 아들들”인 므낫세와 에브라임의 표현함이 내적 부분에서 태어난, 자연 평면에 있는 교회의 의지력과 지력이다로부터, 그리고 선이 의지력에, 진리는 지력 속에 있기 때문에, 같은 것에 의해 교회의 선과 진리도 의미된다; 요셉에게 “태어난 자”의 의미가 내적 부분으로부터 있다 이다; 그리고 “이집트의 토지”의 의미가 자연적 마음이다로부터, 이 안에 기억 속의 지식들이 있다, 그리고 자연 평면도 의미한다.

내가 이집트로 너에게 오기 전. 이는 자연 평면 속의 진리가 거기 기억 속의 지식들 안에 있기 전을 의미한다. 이는 “내가 네게 오기 전”의 의미가 그것이 있었기 이전 이다로부터; 자신에 관한 이것을 말하는 야곱의 표현함이 자연 평면의 진리이다로부터; 그리고 “이집트”의 의미가 자연 평면의 기억 속의 지식들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야곱과 그의 아들들이 이집트 안으로 옴에 의해 진리들이 교회의 기억 속의 지식들 안으로 은근히 심어짐이 표현되었다에 대하여는 앞 두 장들에서 보여준 바 있다.

그들은 나의 것이다. 이는 그것들은 내 안에 있다를 의미한다. 이는 자신에 관련해 이 말을 한 야곱의 표현함이 자연 평면의 진리이다로부터 (아래에서 더 살핀다); 그리고 므낫세와 에브라임의 표현함이 자연 평면에 있는 교회의 의지력과 지력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 말, “그들은 나의 것이다”가 그들을 내 안에 있다를 표시한다고 말을 한 이유는 야곱이 자연 평면의 진리, 고로 진리 측면에 관한 자연적 수준, 그리고 자연 평면에서 있는 에브라임과 므낫세에 의해 표현되는 지력과 의지력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것들이 자연 평면에서 있는 바, 그들은 “나의 것”에 의해 그것들은 내 안에 있다가 의미된 것이다. “야곱”이 자연 평면이다는 것, 최고 의미에서 주님의 신성한 자연 평면이다는 것; 그리고 관계적 측면에서 자연 평면에 있는 진리, 고로 진리 측면에서의 자연적 수준, 그러므로 그의 “열 아들들”은 자연 평면에서 있는 세부적인 교회의 진리들, 고로 지금은 “요셉의 아들들” 또한 자연적 평면에 포함된다. 바로에 의해서도 역시 자연 평면이 표현되었다, 그렇지만 진리 측면은 아니고 기억 속의 지식들에 관련되어서 이다. 이것은 진리들 보다 더 수준이 낮다, 그리고 이 안으로 진리들은 받아들여질 수 있고 은근히 심어질 수가 있다. 이것이 야곱과 그의 아들들이 이집트 안으로 옴에 의해 표현되어졌다.

에브라임과 므낫세. 이는 교회 속의 지력과 의지력을 의미한다.

르우벤과 시므온 처럼, 그들은 나의 것이다. 이는 그들은 진리와 진리로부터의 선일 것이다를 의미한다. 이는 르우벤의 표현함이 이해력에 있는 신앙, 그리고 인간을 생활의 선에 도달 할 수 있게 하는 교리의 진리이다로부터, 고로 일반적 측면에서 지력 속의 진리이다; 그리고 시므온의 표현함이 의지력에 있는 신앙, 결과적으로 행동에 있는 진리, 이는 신앙의 선 또는 진리의 선이다로부터, 고로 일반적 측면에서 새로운 의지력에 속하는 선이다. 같은 것이 에브라임과 므낫세에 의해 표현되는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르우벤은 그의 표현성(representative)을 모독해버렸다; 그리고 시므온은 그의 표현성을 더럽혔다, 그리고 이것 때문에 그들은 저주되었다(창. 39:3-7), 그러므로 그들은 생득권을 잃었다, 그들 대신, 요셉의 두 아들, 에브라임과 므낫세가 첫 출생으로 인정되어졌다 (역상. 5:1). 그럼에도 불구하고 표현성은 르우벤과 시므온에 의해 유지되었다, 그 이유가 표현하는 실제 인물이야 어찌됐든 그것이 주제는 아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르우벤과 더불은 이해력에 있는 신앙의 표현은 거기에(자연 평면에) 남아 있다는 말이다, 그리고 의지력에 있는 신앙의 표현도 거기에 남아 있다는 말이다; 그러나 에브라임과 더불어 교회의 지력을 표현함, 그리고 므낫세와 더불어 교회의 의지력의 표현함도 거기에 있다.

그리고 그들 이후 너에게서 출생하는 네 자손. 이는 그 후에 있는 내면의 진리들과 선들을 의미한다. 이는 “자손(generation)”의 의미가 신앙과 선행에 속하는 것들, 고로 진리들과 선들이다로부터; 그리고 “그들 이후에”의 의미가 그 후에 있는 내면의 것들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내면의 것들이 의미되는 이유는 이후에 내적 부분으로부터 태어나지는 (begotten) 것들은 더 내면적이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이전에 태어나져왔었던 것들이 이후에 더 내면적으로 태어나지는 것들을 생산하기 위해 섬김(봉사, 디딤돌)의 역활을 하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내적 부분은 점차적으로 자연 평면을 그것 자체 쪽으로 승강되게 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인간에 있는 지력(지성)의 모든 것들의 자손(대대)로부터 분명해진다: 즉 처음에는 감각적 인간, 이후에 그가 지적 인간이 될 때까지 더욱 더 내면 쪽으로 들어간다. (감각적 수준의 인간 ->자연적 수준의 인간-> 그 다음 자연적- 영적 수준의 인간 -> 그 다음 영적 수준의 인간 -> 그 다음 천적 수준의 인간도 가능하다는 인간의 가능성을 소설화 한 것이 빅톨 위고의 레미제라블 (일명, 쟌발잔)이 아닌가 싶다 역자주.) 이는 신앙과 선행을 수단으로 결과되는 새로운 자손과도 똑같다. 인간은 등차적으로 왼전해져 간다 (인간의 거듭나짐은 내면들을 향하여 계속적으로 승강함이다에 대하여는 6183항을 보라).
말씀에서 “세대, 자손(generation)”이 신앙과 선행에 속하는 것들을 의미하는 이유는 영적인 것 외에 내적 의미에서 이해될 수 있는 것은 없기 때문에서이다. 이런 자손이 다윗서에서 뜻해진다;
그들은 정녕 두려울 것이다; 그 이유가 하느님이 의로운 자의 자손 안에 계시기 때문이다
(시. 14:5);
“의로운 자의 자손”은 선으로부터의 진리들을 표시한다, 그 이유가 “정의”가 선을 서술하기 때문이다. 이사야서에서:
그들은 헛되이 애쓰지 않을 것이다, 공포를 산출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여호와의 복된 자의 씨이다 (이. 65:23).
다시:
누가 그것을 작업하고 행할까? 누가 시작으로부터 자손이라고 부를까? 나, 여호와, 처음, 그리고 마지막과 더불어 나는 똑같다 (이. 41:4).
에스겔서에서:
너의 무역과 너의 자손들은 가나안족의 토지 속에 있다; 너의 아버지는 아모리족이었다, 그리고 너의 어머니는 헷족이었다. 네 자손들에 관하여, 네가 태어나던 그 날에 너의 배꼽(줄)은 잘라지지 않아졌었다, 그리고 너는 내 시각을 위해 물들로 씻어지지 않았다 (겔. 16:3, 4);
위는 예루살렘의 구역질 나는 것들을 이야기 한다, 위의 “자손들”은 영적인 것에서의 자손들이 분명하다.
다시 이사야서에서:
영원의 날들에서 같이 깨어라, 영원들의 자손들아 (이. 51:9);
“영원의 날들”은 태고 교회의 상태와 시간을 표시한다, “영원”이라는 표현이 이 교회와 관련하여 서술되는 이유는 이 교회가 주님을 사랑함의 선 안에 있었기 때문, 그리고 이 선, 주님으로부터 직접적으로 흘러들기 때문에 “영원”이라 불리우고 있다. “영원들의 자손들”은 이 선으로부터 파생된 선의 형체들이다.
모세의 책에서:
영원의 날들을 기억하라, 자손 대대로의 햇수들을 깨달으라 (신. 32:7);
위에서 “영원의 날들”은 홍수 전에 있었던 태고 교회의 상태와 시간을 표시한다. 이 교회는 천적 (수준의) 교회 이었다. “자손 대대로의 햇수들”은 홍수 후에 있었던 고대 교회의 상태와 시간을 표시한다, 그리고 이 교회는 영적 (수준의) 교회이었다; 위에서 이 교회들이 취급된 것이다.
그리고 요엘서에서:
유다는 영원 쪽으로 거주할 것이다, 그리고 예루살렘은 자손 대대로 쪽으로(거주할 것이다)
(욜. 3:20);
위에서 “영원”이 유다를 서술한다, 그 이유는 유다에 의해 천적 (평면의) 교회가 표현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손 대대로”가 예루살렘을 서술하는 이유는 “예루살렘”에 의해 영적 (평면의) 교회가 의미되기 때문이다.
이사야서에서:
나의 정의는 영원 쪽으로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나의 구원은 자손 대대로 쪽으로 (있을 것이다) (이. 51:8);
위에서 “영원”은 사랑의 선을 서술하고 있다, 그 이유가 “정의”가 이 선을 서술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손”은 신앙의 선을 서술한다.
다윗서에서:
당신의 왕국은 모든 영원들의 왕국입니다, 그리고 당신의 통치하심은 모든 자손 대대로에게 있습니 다 (시. 145:13);
위에서의 의미도 앞 구절들과 같다; 그 이유가 “영원”이 천적인 것을, 그리고 “자손”이 영적인 것을 서술하지 않으면, 하나만 말해져도 될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쓸모도 없이 반복적으로 말해진 것이 아니다는 말이다.
신앙의 상태에 속하는 것들이 사생아는 십대까지 여호와의 회합에 오지 못한다는 명령에 의해서 (신. 23:2); 암몬족과 모압족은 십대 그이후 조차까지 회합에 오지 못한다는 것(3절); 에돔족과 이집트인들은 삼대까지만 회합에 오지 못한다는 것 (8절); 십계명의 명령에서도, 여호와께서는 아버지들의 불법을 아들들 위에서, 그분을 미워하는 이들에 관련하여 삼, 사대 위에(까지) 방문하실 것이다 (출. 20:5)에 의해서도 의미되고 있다.
“자손들”이 신앙과 선행 속의 것을 표시하는 이유는 영적 의미에서 자손은 거듭남 속에 있는 이것 저것, 또는 거듭나는 자 속의 이런 저런 것들 외에 다른 것을 뜻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마찬가지가 말씀에 있는 “출생들”, “해산함”, “임신함들”의 경우이다; 이런 단어들도 신앙과 선행의 임신, 해산, 출생을 표시한다.

너의 것이다. 이는 그것들은 내적 부분인 합리성 안에 있을 것이다를 의미한다. 이는 요셉에 의해 표현되는 천적 평면으로부터의 내적 부분이 합리성 안에 있다는 사실로부터 분명해진다; 그러므로 “너의 것이다”에 의해서는 그것들은 합리성 안에 있을 것이다가 의미되지만, 바로 앞에서의 경우, 즉 “나의 것이다”에 의해서는 그것들은 야곱에 의해 표현되는 자연 평면의 진리들이 있는 자연 평면 안에 있을 것이다가 의미된다. 따라서 합리성(rational)이 무엇인지 간략한 서술이나마 있어야 할 것 같다: 내적 인간의 지력이 “합리성”이라 불리운다, 그러나 외적 인간의 지력은 “자연성”이라 불리운다; 고로 합리성은 내적 부분이고, 자연성은 외적 부분이다; 그리고 이 둘은 서로로부터 완벽하게 구분된다. 진실로 합리적 인간은 천적 인간이라 불리우는 자, 하여 선을 지각함과 이 선으로부터 진리를 지각함을 가진 이들이다; 이에 비해 이 지각을 가지지 못한 이들, 그러나 지식을 가진 이들, 즉 배워진 바 있기에 진리인 것을 아는 이들, 이로부터 양심을 가진 이들은 진실로는 합리적 인간은 아니고, 내면의 자연적 인간이다. 이런 이들은 주님의 영적 (평면의) 교회 속에 있다. 영적 평면과 천적 평면은 아주 다르다, 마치 달빛과 태양빛이 다른 것에 비교된다. 고로 주님께서는 영적 평면에는 달로서, 천적 평면에는 태양으로 나타나신다.
세상에 있는 많은 이들이 상상하는 것은, 합리적 인간은 많은 것들에 관하여 예리하게 추론할 수 있는 자이다는 것이다, 하여 그가 자기의 추론들을 함께 정리하면 마치 그의 결말들은 진리처럼 나타날는지 모른다; 그러나 이런 짓은 인간들의 가장 나쁜 짓 안에서 발견된다, 이들은 악들이 선들이라고, 거짓들이 진리들이라고도 노련하게 추론헤서 설득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저리 뒤집는 것 역시 별로 힘들지 않다. 그러나 곰곰이 반영하는 자라면 알 수 있는 것은, 이런 추론의 발상은 사악한 몽상이다는 것이다, 그리고 합리적인 것이 아니다는 것이다. 합리성은 선이 선임을, 이 선으로부터 진리가 진리임을 내향적으로 보고 지각함 안에 존재한다; 그 이유가 이와 같은 인간의 시각과 지각함은 천국으로부터 있기 때문이다. 주님의 영적 교회 속에 있는 이들이 내면적으로 자연적 수준인 이유는 그들이 부모나 스승으로부터 받았던 것, 그 후에 자신이 확증한 것들을 진리로 인정하기 때문, 또한 자신 안에서 그것을 확증하는 것 외의 어떤 다른 근원으로부터서는 진리인지 여부를 내향적으로 보지도 지각도 못한다. 따라서 이것은 천적 수준과는 딴판이다. 후자가 합리적이다, 그러나 전자는 내면적으로 자연적(자연 평면의 안쪽 부분, interiorly natural)이다.
요셉에 의해 표현되는 천적 평면으로부터의 내적 부분(internal celestial)은 합리성 안에 있다; 이에 비해 이스라엘에 의해 표현되는 영적 선은 자연 평면의 내면(interior natural) 안에 있다; 그 이유가 이스라엘 의해 영적 수준의 인간들이, 요셉에 의해서는 천적 수준의 인간들이 표현되기 때문이다.

그들의 형제들의 이름에서 그들은 자기들의 상속 재산을 청구하리라. 이는 그들은 교회 속의 진리들과 선들과 함께 하면서, 그것들의 품질 속에 있어야 함을 의미한다. 이는 “이름”, “이름으로 부름”의 의미함이 품질이다로부터; 여기서 “형제들”인 에브라임과 므낫세의 표현함이 교회의 지력과 의지력이다로부터, 고로 진리와 선이다; 그리고 “그들의 상속 재산에서”의 의미가 그들 사이에 함께 있다 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리고 나, 내가 밧단으로부터 오는. 이는 지식들의 상태로부터를 의미한다. 이는 “밧단-아람”의 의미가 진리에 관한 내면의 지식들이다로부터; 고로 “밧단”은 지식들의 상태이다.

라헬이 가나안의 토지에서 죽었다. 이는 내면의 진리에 대한 이전의 애착이 끝났음을 의미한다. 이는 “죽는다”가 존재하는 것이 중지됨이다로부터, 그리고 이전의 표현함의 끝이다; 그리고 라헬의 표현함이 내면의 진리에 대한 애착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 길에서, 아직 토지의 넓이가 있었을 때 죽었다. 이는 중간인 것을 의미한다.

에브랏으로 가는. 이는 이전의 상태 안에 있는 영적 평면 속의 천적 부분을 의미한다.
이는 “에브랏”이 이전 상태에서 있는 영적 평면의 천적 부분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리고 나는 그녀를 거기 에브랏으로 가는 길에서 매장했다. 이는 이 상태를 거절함을 의미한다. 이는 “매장하다”의 의미가 거절이다로부터; 그리고 “에브랏”의 의미가 이전 상태에 있는 영적 평면의 천적 부분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베들레헴과 같은 곳. 이는 그것의 장소에서 선과 진리에 새로이 애착함을 의미한다.
이는 “베들레헴”의 의미가 새로운 상태에 있는 천적 평면의 영적 부분이다로부터, 고로 선과 진리에 새로이 애착하는 상태; 그 이유가 천적 평면의 영적 부분이 선의 진리, 고로 선으로부터 진리에 애착함이기 때문이다. 이 구절의 내용이 내적 의미에서 어떠한지를 잠간 살피고 가야할 것 같다. 여기서 취급된 주제는 진리의 이전 상태를 거절함, 그리고 새로운 상태를 수용함이다. 진리의 이전 상태는 인간이 거듭나지고 있는 동안에서 있는 상태이다, 후자, 즉 새로운 상태는 그가 거듭나져갔었을 때 있는 상태이다. 이전의 상태에서 인간은 자신이 총명해지기 위하여 진리에 애착되어진 상태이고, 후자는 삶을 위하여 진리에 애착하는 상태이다. 교리를 위하여서는 인간은 진리로부터 선을 찾고, 삶(생명)을 위하여서는 선으로부터 진리를 찾는다. 고로 후자의 상태는 전자의 상태와 반대적이다; 그러므로 전자의 상태는 그가 거듭나지는 동안 거절되어져 간다; 그리고 후자, 새로운 상태가 받아져 간다. 더욱이 두 상태를 비교해보면, 전자는 후자에 비해 불순하다. 그 이유가 그가 총명해지기를 원해서 교리를 위하여 진리에 애착할 때, 그는 명성과 영광에도 동시에 애착하는 결과를 빚기 때문이다. 이 애착은 당사자에게 표출될 수밖에 없고, 받아지게 허용될 수밖에 없는데, 그 이유는 이것이 인간의 본성이라 어쩔도리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삶을 위해 진리에 애착할 때, 그는 목적으로서의 영광과 명성은 거절하고, 생활의 선을 포옹한다, 즉 이웃을 향한 선행을 포옹한다. (이것이 베들레헴, 즉 빵의 집이다, 역자주)

8, 9절. 그리고 이스라엘은 요셉의 아들을 보았다, 그리고 말했다, 이들은 누구의 것이냐? 9 그리고 요셉은 그의 아버지에게 말했다, 이들은 나의 아들들입니다, 하느님께서 여기서 저에게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는 말했다, 부디 그들을 나에게 데려와다오, 그리고 나는 그들에게 복을 빌어 주겠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요셉의 아들들을 보았다. 이는 교회 속의 지력과 의지력에 관하여 지각함을 의미한다. 이는 “보다”의 의미가 지각함이다로부터; 그리고 에브라임과 므낫세의 표현함이 “요셉”인 내적 부분으로부터 태어난 교회의 지력과 의지력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리고 그는 말했다, 이들은 누구의 것이냐? 이는 그들의 근원을 의미하고 그리고 그것들에 관하여 지각함이다. 이는 “말하다”가 지각함이다로부터; 그리고 “이들이 누구의 것이냐?”의 의미가 그들의 근원에 관하여 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 이유가 내적 의미에서 질문은 지각함에 의해 얻어진 지식을 표시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요셉은 그의 아버지에게 말했다. 이는 내부로부터의 대답을 의미한다. 이는 설명이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그 이유가 “요셉”에 의해 내적 부분이 뜻해지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인간이 지각할 때, 그때 그는 자신과 더불어 질문을 만들고, 또한 그 질문에 스스로 대답도 하기 때문이다. 나 역시 관찰했었던 것은, 영들이 나에게 무엇을 물었을 때, 그들은 단지 내 생각을 들여다 봄으로 답을 받아냈다.

이들은 하느님께서 여기서 저에게 주신 나의 아들들입니다. 이는 그들은 자연 평면에 내적 부분으로부터 있었다를 의미한다. 이는 그들이 자기 아들들이다고 말하는 요셉의 표현함이 내적 부분이다로부터; 그리고 “여기서”인 “이집트의 토지”의 의미가 자연 평면이다로부터, 고로 자연 평면이다.

그리고 그는 말했다, 그들을 나에게 데려와다오. 이는 그들은 영적 선(의 요구)에 동의해야함을 의미한다. “그들을 그에게로 데려오다”의 의미가 그들은 동의해야 한다 이다로부터; 그리고 그들이 동의해야 하는 이스라엘의 표현이 영적 선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내가 그들에게 복을 빌리라. 이는 선과 진리에 관하여 예견함을 의미한다. 이는 “복을 빌다”가 예견하다인데, 여기서는 므낫세와 에브라임에 의해 표현되는 선과 진리에 관하여 예견함이다. “복을 빌다”기 일반적 표현 자체일 경우, 그것은 다양한 것들을 의미한다; 그것은 예견도, 즉 발생될 좋은 일, 발생될 나쁜 일 모두를 의미한다, 이는 다음 장에서 이스라엘의 예언함에서 르우벤, 시므온, 레위에게는 나쁜 것을, 유다와 요셉에게는 좋은 것을 예언하고 있다. 이 예언함이 창. 49:28에서 “복을 빈다”로 불리우고 있다: 즉 “이것은 그들의 아버지가 그들에게 이야기 한 것, 그리고 그들에게 복을 빈 것, 각자의 복에 따라서 그가 그들에게 복을 빌었다.” “복을 빔”이 예언을 표시하는 것은 49장의 1절이다: “야곱은 그의 아들들을 불렀다, 그리고 말했다, 너희는 다 함께 모일 것이다, 그리고 나는 너희에게 날들의 끝에서 너희에게 발생할 것을 말할 것이다.”

10-14절. 그리고 이스라엘의 눈은 고령인 탓에 무거워졌다. 그는 볼 수 없었다. 그리고 그는 그들을 그에게 가까이 데려 왔다. 그리고 그는 그들에게 키스하고 그들을 포옹했다. 11 그리고 이스라엘은 요셉에게 말했다, 나는 네 얼굴을 보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리고 보라 하느님께서 나로 네 씨 역시 보게 해주셨다. 12 그리고 요셉은 그들을 그의 넓적다리로부터 떼어 물러나게 했다. 그리고 그는 엎드려 절했다. 13 그리고 요셉은 그들 둘 다, 그의 오른쪽에 있는 에브라임은 이스라엘의 왼쪽에, 그리고 그의 왼쪽에 있는 므낫세는 이스라엘의 오른쪽에 데려다 놓았다, 그리고 그들을 그에게 가까이 데려왔다. 14 그리고 이스라엘은 그의 오른 손을 내밀었다, 그리고 그 손을 에브라임의 머리에 놓았다, 그리고 그는 동생이었다. 그리고 그의 왼손은 므낫세의 머리에 얹졌다. 그는 그의 손들을 엇갈리게 내밀었다,그 이유가 므낫세가 장자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눈은 무거워졌다. 이는 그의 희미한 지각을 의미한다. 이는 “눈”의 의미가 지각이다로부터, 또는 “보다” 역시 같은 의미이다; 이스라엘의 표현함이 자연 평면에 있는 영적 선이다로부터; 그리고 “무거워짐”의 의미함이 눈에 관해 말해질 경우, 희미한 것이다로부터, 고로 희미한 지각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스라엘이 요셉의 아들들을 축복할 때 그가 희미한 지각 안에 있었다는 것은 그가 (성경에서 아브라함, 이삭과 더불어) 표현함의 끝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또한 이를 일반적 측면에서 말하면, 이스라엘에 의해 표현되는 영적 선이 희미한 상태이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이 선은 천국의 빛이 아닌, 자연계의 빛이 있는 자연 평면으로부터 있기 때문, 이에 비해 영적 (평면)의 선, 천적 (평면의) 선은 천국의 빛에 있는 합리성으로부터 있다. (인간의 외적 부분), 또는 외적 인간이 위의 자연 평면에 해당된다. 이 자연 평면으로부터의 영적 선이 언급될 때, 이 선 안에 있는 이들은 주님의 영적 교회 속에 있는 이들이고, 그러므로 이 교회가 이스라엘에 의해 표현되어진다. 이 영적 수준이 상대적으로 희미하다에 대하여는 이미 살핀 바 있다; 그리고 희미함에 있는 이들은 신앙 속에 있는 진리를 첫째 자리에(첫째 중요성)놓는다, 마치 여기서 이스라엘이 자기 손을 므낫세에 앞서 에브라임에 놓는 것과 같다.
영적 인간이 이렇게 믿는 이유는 영적 인간은 진리를 수단으로 선 쪽으로 받아들여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이 받아들여졌을 때, 그들은 선을 지각하지는 않는데, 그 이유는 이 선은 내부로부터 진리에 애착함 안으로 흘러들기 때문이다, 고로 그들이 거듭나졌을 때까지 선을 지각함의 수준은 아니다는 말이다. 고로 이들은 신앙의 열매들을 선행의 선들이라 부른다. 그럼에도 죽음이 임박할 때까지 이전의 삶이 어떠하든, 좌우지간 원칙상으로 설사 선행의 일들이 없다해도 신앙만이 구원해준다고 주장하는 이들을 위해서는 신앙의 열매가 선행의 선이라 말해지는 따위는 너무나 관심에서 멀어 있다. (신앙 제일 주의, 하여 이왕이면 다홍치마라는 식으로 신앙에 있어도 되고 없다해도 괜찮다는 식에서 선한 일들을 간주하는 경우일 것이다. 역자주) 이것이 선과 진리를 희미하게 지각함이다. 어쨌든 다음과 같다: 교리로부터 파생되는 원리로부터 신앙을 선행 보다 중요시하는 이들, 그렇지만 선행의 생활 안에 있는 이들은 주님의 영적 교회 속에 있다, 그리고 구원되어진다; 그 이유는 생활 측면에서 그들은 선행의 선을 첫째에 놓았고, 교리 측면에서는 신앙의 진리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고령인 탓에. 이는 표현함의 끝에서 때문에를 의미한다. 이는 “고령”의 의미가 표현의 새로움이다로부터, 고로 이전 것의 끝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는 볼 수 없었다. 이는 용의 주도함이 없음을 의미한다. 이는 “보다”의 의미가 지각함이다로부터, 고로 용의주도함이다.

그리고 그는 그들을 그에게 가까이 데려왔다. 이는 현존을 의미한다. 이는 “데려오다”의 의미가 현존을 만들다 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리고 그는 그들에게 키스했다. 이는 진리에 대한 애착으로부터 결합함을 의미한다. 이는 키스의 의미가 애착으로부터 결합함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것이 진리에 애착하므로부터 인 이유는 “그가 그들을 포옹했다”는 말이 뒤잇고, 이는 선에 애착함으로부타의 결합함이기 때문이어서 이다, 그 이유가 “포옹함”이 키스함 보다 더 내면적이고, 더 밀착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을 포옹했다. 이는 선에 대한 애착으로부터 결합함을 의미한다. 이는 “포옹함”의 의미가 사랑의 결합함이다로부터, 고로 선에 애착함으로부터 결합함이다. “포옹함”이 이 애착을 표시하는 것은 포옹을 수단으로 사랑함을 증명하기 때문, 포옹은 사랑으로부터 흐르는 행동이다; 그 이유가 모두 각각의 영적 애착은 그것에 상응하는 제스추어(gesture)를 인간의 신체에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제스추어가 애착의 표현이다. 키스함도 이 표현 중의 하나임은 모르는 자가 없을 것이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요셉에게 말했다. 이는 내적 부분 쪽으로 승강함을 의미한다. 이는 “말하다”의 의미함이 지각하다이다로부터, 또한 유입함이다로부터; 이것이 승강함을 표시하는 이유는 이 구절에서 취급되는 주제가 사랑의 유입, 고로 내적 부분으로부터 선과 진리의 유입이기 때문이다, 이 유입이 내적 부분 쪽으로 승강함이다. 그 이유가 외적 부분은 내적 부분으로부터의 유입과 승강함을 수단으로 하지 않으면, 내적 부분을 향한 사랑 안에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외적 부분에서 느껴지는 사랑 자체는 내적 부분 속에 있었고, 이로부터 느끼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떤 결과를 생산하기 위하여 모두 각각의 행동함은 그것의 반작용 또는 상호 작용을 가져야만 한다, 그리고 행동함은 원인이고 반작용은 원인이 발생시킨 어떤 것이다, 그러므로 반작용은 행동함 속에 있다, 마치 원인으로 야기된 어떤 것이 원인 속에 있는 것과 같다. 발생시킨 원인에 있는 모든 힘이 원인으로부터 인 것이다. 이것은 보편적 자연에 있는 모두 각각의 낱개들에 있는 반작용의 경우이다.

나는 네 얼굴들을 보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이는 그의 사랑이 유입되리라는 것에 대한 희망은 가지지 않았다를 의미한다. 이는 “얼굴들”의 의미가 내면들이다로부터, 애착들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 이유가 이것들이 빛을 내는 신체 부분은 주로 얼굴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얼굴”은 신성의 사랑을, 그 결과 자비를 표시한다; 그리고 “나는 …에 관하여 생각을 갖지 못했다”의 의미가 그는 희망을 가져보지를 못했다 이다. 이것이 “얼굴을 봄”에 의해 의미되는 사랑의 유입이다는 것은 진행하는 것, 그리고 뒤이어지는 것들로부터 분명해진다.

그리고 보라 하느님께서 나로 네 씨 역시 보게 해주셨다. 이는 사랑의 유입이 지각되었을 뿐 아니라 거기로부터 선과 진리도 파생되었다를 의미한다. 이는 여기서 “씨”인 므낫세와 에브라임의 표현함이 의지력 속의 선과 지력 속의 진리이다로부터; 그리고 “씨”의 의미 또한 선과 진리이다로부터; 그리고 이렇게 말해졌기 때문이다: 즉 “나는 네 얼굴들을 보리라는 생각은 갖지 못했다, 보라, 하느님께서 나로 네 씨 역시 보게 만드셨다.” 이 말은 사랑의 유입이 지각되었을 뿐 아니라 거기로부터 선과 진리도 파생되었다를 의미하게 된다; 그 이유가 “얼굴들을 보는 것”에 의해 사랑의 유입이 의미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요셉은 그들을 그의 넓적다리로부터 떼어 물러나게 했다. 이는 영적 선의 부분에 있는 사랑의 애착으로부터 있는 의지력의 선과 지력의 진리를 의미한다. 이는 요셉의 표현함이 천적 평면으로부터의 내적 부분이다로부터; 요셉이 떼어 물러나게 한 므낫세와 에브라임의 표현함이 의지력의 선과 지력의 진리이다로부터; 그리고 “넓적다리”의 의미가 사랑의 애착함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것이 “영적 선의 부분에서”라고 말한 이유는 그들이 영적 선인 이스라엘로부터 떼어 물러나 있었기 때문이다. 이것을 수단으로 의미되는 것은, 천적 평면으로부터의 내적 부분이 영적 선으로부터 의지력의 선과 지력의 진리를 이동시켰다는 것, 즉 거기로부터의 사랑의 애착으로부터 옮겼다는 것, 그 이유는 이스라엘을 수단으로 영적 선이 표현되는데, 그가 이 선과 진리를 자신에게 접근하게 했기 때문이다 (9절). 그렇지만 실제 요셉에 의해, 즉 천적 평면으로부터의 내적 부분에 의해 그에게 가까이 접근되었다. 이런 이유로 그들은 떼어 물러나 있게 했고, 다시 요셉에 의해 가까이 데려다 놓여진다 (이는 뒤이어진다). 이유인즉, 이 방법에서 천적 평면으로부터의 내적 부분으로부터 사랑의 유입이 영적 선을 통하여 그것들 안으로 있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이것이 질서에 의거한 것이기 때문, 이로부터 그들이 축복되어질 때 외적 의식도 엄격히 이행되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이때 그것들은 주님 앞에서 표출된 것이고, 주님으로부터 “복을 빌다”에 의해 의미된 예견하심이 있다. 그러므로 요셉이 그의 아버지의 넓적다리로부터 떼어 물러나게 했다가, 다시 이스라엘 쪽으로 데려다 놓여지고 있다.

그리고 그는 엎드려 절했다. 이는 그들의 굴종함을 의미한다. 이는 “얼굴을 땅 쪽으로 구부려 절함”의 의미가 내면의 굴종함 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 이유가 이렇게 절함은 마음의 굴종함에 상응하는 행동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심정으로부터 하느님을 숭배하는 이들은 이런 식으로 구부려 절한다. 지금 요셉이 절한 이유는 그들을 대신함 때문이고, 이는 아버지 이스라엘이 아닌 주님 앞에서이고, 이 분으로부터 이스라엘을 수단으로 복을 받기 때문이다. 이 절함이 그들을 대신해 요셉에 의해 있어진 이유는 이런 경우가 영적 사항에서 있기 때문이다; 자연 평면의 의지력의 선과 지력의 진리는 주님 앞에서 그것 자체에서 겸손해질 수 없다, 오직 유입을 수단으로 내적 부분으로서만 겸허해질 수 있다. 자연 평면 자체에는 의지력과 이해력이 없다, 생명의 어떤 것도 없다. 오직 내적 부분을 중매자로 하여 주님으로부터 생명을 받아야 거기에 생명이 있다.

그리고 요셉은 그들 둘 다, 그의 오른쪽에 있는 에브라임은 이스라엘의 왼쪽에. 이는 (중요성에서) 두 번째 장소(위치)에 지력의 진리가 있다를 의미한다. 그리고 그의 왼쪽에 있는 므낫세는 이스라엘의 오른쪽에. 이는 (중요성에서) 첫 번째 장소(위치)에 의지력의 선이 있음을 의미한다. 이는 에브라임의 표현함이 지력의 진리, 므낫세의 표현함이 의지력의 선이다로부터; 그리고 “오른쪽”의 의미가 첫째 자리이다로부터; 그리고 “왼쪽”의 의미가 둘째 자리이다로부터; 이는 통상 우리의 손의 사용됨의 우선 순위로부터이다. 여기서의 경우가 어떤지가 아래에서 이어진다.

그리고 그들을 그에게 가까이 데려왔다. 이는 근접함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그의 오른손을 내밀어 에브라임의 머리에 놓았다. 이는 그가 진리가 첫째 장소에 있다라고 생각했다를 의미한다. 이는 “그의 오른손을 내밀다”가 첫째 자리이다라고 생각함이다; 그리고 에브라임의 표현함이 지력 부분, 또한 신앙의 진리이다로부터, 그 이유가 신앙의 진리가 인간의 지력 부분에 거주하기 때문이다 (사실상 이 지력에 천국으로부터의 빛이 있을 경우, 즉 영적 시각에서만 신앙의 진리가 있다). 지금 이 구절과 17-19절에서, 놓여지는 이야기는, 이스라엘이 그의 오른 손을 에브라임의 머리 위에, 그리고 그의 왼손을 므낫세의 머리 위에 얹는 것이다; 이를 수단으로 그는 신앙의 진리가 첫째로 중요하다고, 선행의 선은 그 다음 중요하다 라고 생각했다는 것이 의미되어 있다. 이런 이유는 인간이 거듭나질 때까지 이스라엘에 의해 표현된 영적 (수준의) 인간은 이와 달리 상상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 이유가 이 수준의 인간은 신앙의 진리가 무엇인지에 관하여는 느껴질 수 있는 납득력을 가지지만, 선행의 선이 무엇인지에 관하여는 그렇지가 못하기 때문이다; 후자는 내면의 길을 통해 흐르지만, 전자는 외면의 길, 즉 기억 속의 지식 같은 것을 통해 흐르기 때문이다.
아마 거듭나지 않고 있는 이들은 이렇게 절대적으로 말한다: 즉 신앙은 첫째로 중요하다, 이것이 교회의 본질이다고, 그 이유는 이 길에서 자기들이 바라는 대로 살 수 있기 때문이다는 것, 더 보태는 말인즉, 자기들은 신앙에서 구원을 가진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작금에 이르러 선행은 흔적 조차 찾기 힘들어져서 이에 대한 본성은 누구에게도 거의 알려지지 못한 채로 있는 바, 결과적으로 제대로의 신앙 역시 거의 갖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그 이유가 전자 없이 후자는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만일 선행이 첫째 자리에, 신앙을 둘째 자리에 놓고 있다면, 교회의 양상은 아주 달라질 것이다; 그 이유가 신앙의 진리에 따라 사는 이들을 두고 기독인들이라 부르지 않을 것, 선행의 생활로 기독인의 기준을 삼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때 이들은 선행이 무엇인지를 알 것이다. 이때는 지금 같이 신앙의 진리들에 관한 입씨름으로 서로를 구분짓는 바람에 교파가 많아질 이유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 대신 그들은 말한다, 교회는 하나이다, 이 안에 생활의 선 안에 있는 이들이 모두 있다, 교회가 있는 지역, 뿐만 아니라 교회가 없는 지역도 모두 이 안에 있다. 이 방식에서 교회는 주님의 왕국에 속하는 이런저런 것들의 본보기가 되어 있을 것이다; 그 이유는 선행이 계발되고, 선행 없는 신앙은 결코 없기 때문이다; 더욱이 분리된 신앙만으로 초래되는 오류도 명백히 깨끗해질 것이다.
그러므로 분명한 바, 만일 선행의 선을 첫째 위치에 두는 경우 교회의 양상은 얼마 다를지이다. 즉 선행이 본질이고, 신앙이 둘째 본질에 있어 선행을 위한 형식 부분을 담당한다면 교회의 모습은 너무나 달라지지 않을까? 이런 때의 교회의 면모는 고대 교회의 것과 비슷할 것이다. 즉 선행 외에 다른 교리물이 없던 교회, 선행 안에 교회를 만드는 것이다; 이로부터 그들은 주님으로부터 지혜를 가졌다. 이 교회의 품질이 모세의 책에서 말해지는 아래의 구절에 있다:
여호와께서 그를 여기저기로 인도하셨다, 그분은 그를 가르치셨다, 그분은 그를 눈 속의 (눈)동자 로서 지키셨다. 독수리가 그녀의 둥지를 휘젖고, 그녀의 어린 것이 파닥거리고, 그녀의 날개를 넓게 펴는 것 같이, 그분은 그를 데리고 갔다, 그분은 그를 그분의 날개 위에서 실어날랐다; 여호와만이 그를 인도하셨다, 그와 더불어 어느 이상한 신이 없었다. 그분은 그를 땅의 높은 장소들을 타게 만드셨다, 그리고 그를 들판들의 증가분으로 먹이셨다; 그분은 그가 반석으로부터 꿀을 빨게 만드셨다, 그리고 바위의 틈새로부터 기름을 빨게 하셨다; 목축의 버터, 그리고 어린 양의 지방과 더불어 양떼의 젖, 그리고 바산의 아들들 숫양들, 숫염소들, 그리고 밀의 콩팥의 지방; 그리고 포도의 피로부터 너희는 순수한 포도주를 마신다 (신. 32:10-14).
그러므로 이 교회 속에 있는 이들은 천국 안에, 거기서 모든 행복과 영광 안에 있다.

그리고 그는 동생이였다. 이는 비록 그것이 두 번째 장소에 있다 할지라도를 의미한다. 이는 “동생”의 의미가 둘째 위치에 있어져야 한다 이다로부터 분명해진다.

그리고 그의 왼손을 므낫세의 머리에 얹었다. 이는 그는 선이 둘째 위치에 있다 라고 생각했다를 의미한다. “그의 왼손을 얹다”의 의미가 둘째 위치라고 생각하다 이다로부터; 그리고 므낫세의 표현함이 의지력, 고로 선행의 선 또한 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에 대한 것은 앞에서 살폈다.

그는 그의 손들을 엇갈리게 놓았다. 이는 그러므로 질서에 따른 것이 아니다를 의미한다. 그 이유가 이러므로 해서 그는 동생을 첫출생으로 만들어 질서가 거꾸로 있게 했다; 즉 신앙의 진리가 앞서 있고 더 높다는 것, 선행의 선은 뒤의 것, 더 낮다는 것이다; 그 이유가 “생득권”은 앞의 것, 우위인 것을 표시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얼마나 많은 악이 교회 안으로 받아들여졌는지를 분명히 알게 한다. 거꾸로의 질서로 인해 교회인들은 희미함에 젖어 선이 무엇인지를, 고로 진리가 무엇인지도 모르게 되고 말았다; 그 이유가 선은 불꽃 같고, 진리는 이 불꽃으로부터의 빛 같기 때문이다; 만일 당신이 불꽃을 치워버리면 빛 역시 사라지고 만다; 그런데 만일 어떤 빛이 나타난다면, 불꽃 없이 있는 빛인 바, 사기적 빛인 것이다. 이런 사기적 빛으로부터 교회들은 서로의 의견을 내세워 다양해져, 진리를 가지고 논쟁을 일삼는다. 하여 자기들의 견해가 진리이다고, 저 견해, 저 교리는 사기라고 설득해대는 것이다. 더욱 더 나쁜 상황은, 그들이 교회의 회중에서 앞의 자리에 신앙을 놓아두었을 때, 그 다음 그들은 신앙을 선행으로부터 떼어내는 것, 하여 후자를 상대적으로 덜 중요하게 여기는 쪽으로, 삶에 별 중요성이 없는 것으로 차츰 교인들로 생각하게 하는 쪽으로 기울게 만드는 것이다. 이로부터 교회는 멸해진다; 그 이유가 인간과 더불어 교회를 만드는 것은 생활 없는 교리가 아니고, 고로 특출한 신앙인 확신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진짜 확신은 선행 안에 있는 이들에게나 가능하기 때문, 이로부터 확신 있는 신앙의 삶이 있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므낫세가 장자였기 때문이다. 이는 참으로 선이 앞선 위치에 있어 왔기에를 의미한다. 이는 므낫세의 표현함이 의지력에 있는 선이다로부터; 그리고 “생득권”의 의미가 앞인 것(우선권, priority)과 우위인 것 (superiority), 고로 “첫출생”은 앞의 위치(자리)에 있는 자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아마 누구라도 조금만 계발된다면, 선이 의지력에 있다는 것, 첫째 중요하다는 것, 진리는 둘째 중요하다는 것, 인간의 생각함 안에 있다는 것을 누구인들 알 수 없을까? 또한 인간의 의지력이 이것을 생각하게 하는데, 사고력 자체가 딴짓을 할 리가 없다. 결과적으로 인간과 더불은 선이 이것, 또는 저것이 진리라고 생각하게 한다는 것이다. (이 반대인 악의 경우도 생각해보라. 역자주) 고로 진리가 둘째 자리에 있다는 것, 선이 첫째 자리에 있다는 것을 모르기가 차라리 더 힘들지 모른다. 신앙 속에 있는 진리가 선이 아니면 뿌리를 내릴 수 없는지 여부, 신앙이 선 안에 뿌리를 내리지 않아도 신앙인지 여부는 각자의 사고력에 맡겨 조금만 생각해도 결판나는 대단히 어렵지 않는 숙제일 뿐이다. 그러므로 교회의 우선적인 것, 본질이어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 좁혀 말해서 인간 안에 있는 교회는 어떤 것이 내용이어야 하고 형식이어야 하는지 이다.

15, 16절. 그리고 그는 요셉을 축복했다, 그리고 말했다, 내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 앞에서 걸어 가셨던 하느님, 내가 존재한 이래 오늘 까지 나를 먹이신 하느님, 16 나를 모든 악에서 되찾으신 천사가 이 소년들을 축복하소서. 그리고 내 이름, 그리고 내 조상들 아브라함과 이삭의 이름이 그들 안에서 불리게 하소서. 그리고 그들로 땅의 한 가운데에서 크게 불어나게 하소서.

그리고 그는 요셉을 축복했다. 이는 지력 속의 진리와 의지력 속의 선은 내적 부분으로부터 생명을 가진다는 것을 예견함을 의미한다. 이는 “축복했다”의 의미함이 예견함이다로부터; 그리고 여기서 “요셉”이라 말해지는 에브라임과 므낫세의 표현함이 자연 평면에 있는 지력으로부터의 진리와 의지력으로부터의 선은 내적 부분으로부터 출생됨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요셉”에 의해 그의 아들들이 뜻해지는 것은 축복함의 내용 자체로부터 분명하다, 즉, “나를 모든 악으로부터 되찾으신 천사가 이 소년들에게 축복하소서, 그리고 내 이름이 그들 안에서 불리워지게 하소서”하고 말해지기 때문, 그리고 므낫세와 에브라임에 의해 표현되는 자연 평면에 있는 이 선과 진리가 자연 평면의 내적 부분 자체이기 때문이다. 내적 부분과 외적 부분은 실로 서로로부터 확실히 구분되어진다; 그러나 그것들은 자연 평면에서 함께 있다, 거기서 내적 부분은 그것 자신에 어울리는 형체 안에서와 같이 있다, 이 형체는 그것 자체로부터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 안쪽의 내적 부분으로부터서만 있을 뿐이다; 고로 그것은 (배우가) 연기하듯 행동할 뿐이다. 마치 효력(효능, 유효성, the efficient)이 결과 안에 있는 것과 같다: 효력과 결과는 서로로부터 구분되어진다, 그럼에도 효력은 효력 자신이 개작한 형체에서와 같은 식으로 하여 있다. 이 형체를 통하여 생산되는 영역에서 원인으로서 행동한다. 인간 안의 자연 평면에서 내적 부분으로부터 출생한 선과 진리의 경우도 이와 같다; 그 이유가 내적 부분은 자연 평면에서 삶을 인도하면서 그 자체도 거기 있기 위하여 자연 평면에 있는 이런저런 것들로 자체를 옷입혀 놓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옷입혀진 이것들은 덮개라는 역할밖에 더 이상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그리고 말했다, 내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 앞에서 걸어 가셨던 하느님. 이는 내적 선과 내적 진리는 신성으로부터 생명을 가졌다를 의미한다; “걷다”의 의미가 사는 것이다로부터, 또는 생명을 가지는 것이다로부터; 아브라함의 표현함이 최고 의미에서 주님의 신성 자체이다로부터; 그리고 이삭의 표현함이 주님의 신성한 합리성, 고로 주님의 내적 인간 (internal human)이다로부터; 그 이유가 야곱이 주님의 신성한 자연 평면, 또는 주님의 외적 인간 (external human)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표현적 의미에서 “아브라함”은 내적 선, “이삭”은 내적 진리이다. 표현적 의미에서 있는 이런 사항들이 “아브라함과 이삭”에 의해 의미되는 이유는 주님의 왕국에 있는 선과 진리가 그분의 신성과 신성한 인간으로부터 진행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주님 자신이 주님의 왕국에 계시기 위함인 바, 고로 그분 자신이 그분의 왕국이다.

나를 먹이신 하느님. 이는 신성은 자연 평면으로부터 있는 영적 진리의 선에 생기를 불어 넣으신다를 의미한다. 이는 “먹다”의 의미가 생기 있게 함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먹이는 것”은 가르치는 것도 의미하는데, 그 이유는 “풀밭(pasture, 목초지)”이 인간의 영적 생명을 받쳐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방금 말한 “먹이는 것”, “풀밭”은 양떼를 염두하고 한 말인데, 비해 본문의 경우는 야곱을 두고 먹여짐이 말해지고 있다; 즉 그의 삶과 생명에 필요한 것이 받쳐주어졌다는 말이다. 내적 의미에서도 역시 같은 것이 의미된다. 즉 신체의 생명을 받쳐주는 것이 내적 의미에서는 영적 생명을 받쳐주는 것을 말하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이 자연 평면으로부터의 영적 선을 표현한다는 것은 이미 살핀 바 있다; 그리고 이스라엘이 표현하는 선은 진리로부터의 선이기 때문에, 영적 진리의 선이 여기서 의미된다; 그 이유가 순수 의미에서 “이스라엘”은 영적 교회이고, 이 교회의 선은 진리의 선이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이 교회에 속하는 이들은 진리를 수단으로 선에 관하여 가르쳐짐이 있기 때문, 즉 그들이 진리에 따라서 행동할 때, 그 안에서 그들은 가르쳐짐이 있어진다는 것, 이때 이 진리가 선이라 불리운다. 이것이 진리의 선이라 불리우는 선이고, 이스라엘에 의해 표현되어진다.

내가 존재한 이래 오늘 까지. 이는 계속적으로를 의미한다. 이는 “오늘(to-day)”, 또는 “이 날 (this day)” 의 의미가 항구적이고 영원한 것이다로부터알게 된다. 그러므로 여기서 “내가 존재한 이래, 오늘 까지”는 먹여주심과 생기 있게 하심이 계속적으로 있다를 의미하게 된다.

나를 모든 악에서 되찾으신 천사(Angel). 이는 주님의 신성한 인간, 이를 수단으로 지옥으로부터의 해방이 결과되어진다를 의미한다. “천사”의 의미가 주님의 신성한 인간이다로부터 (아래에서 살핀다); “되찾음”의 의미가 해방됨이다로부터; 그리고 “악”의 의미가 지옥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악”이 지옥을 표시하는 이유는 지옥 자체는 악밖에 더 이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당신이 지옥에 있는 모든 것은 악이다라고 말하든지, 지옥은 악이다고 말하든지 같기 때문이다. “악”이 언급될 때, 지옥이 영적 의미에서 뜻해진다; 그 이유가 영적 의미 안에 있는 이들은 마치 천국에 있는 천사들이 인물들로부터 추상적으로 생각하고 이야기를 하듯 하기 때문, 이것이 양쪽의 그들에게 보편적이기 때문에, 그러므로 양쪽 모두에서 악은 지옥이다. 통치하는 악이 뜻해질 때 등장하는 단어 “죄” 역시 같은 논리에서 있다. 이를 위해 창. 4장을 읽어보자: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말하셨다, 만일 네가 잘하지 못하면, 죄가 (방)문(door)에서 누워있다; 그리고 너에게 그의 바램이 있다, 그리고 너는 그를 통치할 것이다 (창. 4:6, 7);
위에서 “죄”는 지옥을 표시한다, 하여 인간이 악을 행할 때 지옥은 당사자 바로 가까이에(at hand), 또는(또한) 즉시(at hand) 있는다. 인간과 더불은 악 자체는 지옥밖에 더 아니다, 그 이유가 악은 지옥으로부터 흘러들기 때문이다, 이때의 인간은 가장 작은 형체로서의 지옥인 것이다, 즉 지옥에 있는 이들이나 악을 행하는 자연계의 인간이나 추상적 측면에서는 같다는 말이다. 그 반면, 인간에 있는 선 자체는 당사자에 있는 천국밖에 더 아니다; 그 이유가 선은 천국을 통하여 주님으로부터 흘러들기 때문; 고로 선 안에 있는 자는 가장 작은 형상에서의 천국이다, 즉 선을 행하고 있는 인간은 천국에 있는 이들이나 같다는 말이다.

“되찾는 천사(redeeming Angel)”란 신성한 인간 측면에서의 주님이시다는 것은 인간을 옷입으시고, 그 인간을 신성으로 만드심으로 인간을 되찾으셨다는 사실로부터, 즉 인간을 지옥으로부터 되찾으셨다는 사실로부터 분명해진다; 이로부터 주님의 인간 측면에서 그분은 “되찾는 분(구속자, Redeemer)”라 불리우신다. 신성한 인간이 “천사(Angel)”라고 불리운 이유는 단어 “천사(angel)”가 보내짐을 뜻하기 때문, 그리고 신성한 인간 측면에 관련하여 주님은 “보내심”이라고 말해지는 대목을 복음서들의 많은 구절들로부터 명백해진다. 더욱이 주님이 세상에 오시기 이전, 신성한 인간(the Divine Human)은 그분이 말씀을 이야기하셨을 때 천국을 통하여 흐르는 여호와 자신이셨다; 그 이유가 여호와는 천국들 넘어 계셨기 때문, 천국들을 통하여 그분으로부터 건너온 것이 그때 당시에서는 신성한 인간이셨다; 그 이유가 천국 안으로 여호와가 유입되심을 수단으로 그분은 사람을 놓으셨고, 거기로부터 파생된 신성 자체가 신성한 사람(a Divine man)이었다. 이때 이것이 “보내짐(Sent)”이라 불리우고, 이를 수단으로 진행됨(preceeding)이 뜻해진다, 이것이 본문의 “천사(Angel)”와 같다.
그러나 그분의 이 신성한 인간을 수단으로 여호와께서는 인간에게 더 이상 흘러드실 수가 없었는데, 그 이유는 그들이 자기들을 그분의 신성으로부터 너무나 멀리 옮겨버렸기 때문, 그러므로 그분은 자신을 인간으로 옷입으셨고, 그것을 신성으로 만드신 것이다. 이로부터 천국을 통한 유입을 수단으로 신성한 인간으로부터의 선행의 선과 신앙의 진리들을 받는 인류에게 도달이 가능해지셨던 것이다, 고로 이것은 보일 수 있게 만들어졌고, 그들을 지옥으로부터 해방하실 수 있었다, 이외 다른 수단으로는 이 해방은 가능할 수가 없다. 이 건지심이 “구속하심”이라 불리운 것이고, 건진 자, 되찾으신 자인 신성한 인간 자체가 “되찾으신 천사”라고 불리운 것이다.
신성한 인간, 뿐만 아니라 신성 자체 측면에서의 주님은 천국 넘어 계신다; 그 이유가 그분은 천국에 빛을 비추이시는 태양이시기 때문이다; 고로 천국은 그분 아래 멀리 있다. 천국 안에 있는 신성한 인간은 그분으로부터 진행하는 신성한 진리이고, 이것은 태양으로서의 그분으로부터의 빛이다. 그분의 본질 측면에서 주님은 신성한 진리가 아니다, 그 이유가 이것은 태양으로부터의 빛 같이 그분으로부터 있기 때문, 그러나 그분은 신성한 선 자체, 여호와와 더불은 하나이시다.
주님의 신성한 인간이 말씀의 다른 구절에서 “천사(Angel)”라 불리우는데 아래 구절을 읽어보자:
모세가 하느님의 산, 호렙 쪽에 왔을 때, 여호와의 천사가 덤불의 한가운데로부터 불의 불꽃 안에서 그에게 나타났다. 여호와께서는 모세가 보려고 이쪽으로 방향을 트는 것을 보셨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는 덤불의 한가운데로부터 그를 불렀다. 그리고 그분은 더 말했다, 나는 너희 아버지의 하느님,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삭의 하느님, 그리고 야곱의 하느님이다 (출. 3:1, 2, 4, 6);
위에서 “여호와의 천사(Angel)”라고 불리운 자는 주님의 신성한 인간이시다, 그리고 여호와 자신이 말하셨다는 것은 매우 분명하다. 여호와께서 신성한 인간 안에 거기서 계셨다는 것은, 신성 자체는 신성한 인간을 통하지 않고는 나타나실 수 없으셨다는 사실로부터 알는지 모른다; 요한복음서의 주님의 말씀을 읽어 보면 이렇다: “하느님을 본 자는 없다, (그러나) 아버지로부터 태어나신 아들(the only begotten Son), 아버지의 품 안에 계신 분, 그분이 그를 알게 만드셨다(나타나게 만드셨다, set forth, known, declare)” (요. 1:18); 그리고 다른 구절에서, “너희는 아버지의 음성을 들은 적도, 그분의 모양을 본 적도 없다” (요. 5:37).
더욱이 신성한 인간 측면의 주님이 “천사”라고 불리우신 대목은 백성을 가나안의 토지로 인도하심이 취급되는 곳에서도 있다:
보라 나는 너희 앞서 천사(Angel)를 보낸다, 길을 지켜주어서 내가 준비한 장소로 너희를 데려오기 위하여서 이다. 너는 그분의 얼굴로부터 조심하여라, 그 이유는 그분은 너희의 위법을 참아주시지 않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나의 이름이 그분의 한가운데 있기 때문이다 (출. 23:20, 21, 23);
위 구절의 “천사”가 신성한 인간이시다는 것은 이 말, 즉 “나의 이름이 그분의 한가운데 있기 때문”이라 말해진 사실로부터 분명해진다, 즉 여호와 자신이시다. “나의 이름”에 의해 신성한 인간 안에 계신 여호와의 품질이 의미되어진다.
이사야서에서:
그들의 모든 환난에서 그분은 환난을 가지셨다, 그리고 그분의 얼굴들로부터의 천사가 그들을 구해내셨다; 그분의 사랑 안에서와 그분의 긍휼 안에서 그분은 그들을 되찾으셨다, 그리고 그분은 그들을 데려가셨다, 그리고 영원의 모든 날들(에서) 그들을 운반하셨다 (이. 63:9);
“여호와의 얼굴들의 천사”는 신성한 인간 측면에서의 주님이시다는 것은 명백하다, 그 이유는 “그분이 그들을 되찾으셨다”라고 말해졌기 때문이다.
말라기서에서:
잘 보라 너희를 찾는 주님이 그분의 성전으로 갑자기 오실 것이다, 너희가 바라는 언약의 천사 조차; 잘 보라 그분은 오신다, 여호와 체바욷. 그러나 누가 그분의 오심의 날을 참아낼까?, 그리고 그분의 나타나심에서 서있을 자 누가 있을까? 그때 유다와 예루살렘의 식사 제물이 여호와께 달콤할 것인 바, 마치 영원의 모든 날들에서 같고, 이전의 햇수들 같다 (말. 3:1, 2, 4);
“언약의 천사”는 신성한 인간 측면에서의 주님이시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 이유가 취급된 주제가 그분의 오심이기 때문이다; “유다와 예루살렘의 제물이 여호와에게 향기로울 것이다”란 사랑과 신앙으로 그분을 예배함은 그때 향기로울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유다”에 의해 유다가 뜻해지지 않고 “예루살렘”에 의해 예루살렘이 뜻해지지 않는 것은 너무나 분명하다; 그 이유가 그때나 그 후에나 유다와 예루살렘의 제물은 향기롭지 않았기 때문이다. “영원의 날들”은 천적 수준이었던 태고 교회의 상태들이다; “이전의 햇수들”은 영적 수준이었던 고대 교회의 상태들이다. 더욱이 “천사(angel)”가 말씀에서 천사를 의미하지 않고, 주님에 있는 신성으로부터의 어떤 것을 의미한다.

“되찾음”에 주목하면, 이것의 적당한 의미는 회복하는 것과 그분의 것이어왔던 그분 자신에 어울리게 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 단어는 노예됨, 죽음, 그리고 악에 관련해 서술된다; 노예이었을 때란 영적 의미에서 지옥에 의해 노예되어져 있음을 의미한다; 죽음에 관련할 경우, 이는 저주됨을 의미한다; 악에 관련해서는 여기서와 같이 지옥 안에 있는 이들이 의미된다; 그 이유가 천사들이 되찾는 악이 지옥이기 때문이다. 주님께서 이런 악들로부터 그분 자신의 인간을 신성으로 만드심으로 해방되게 하셨는 바, 그러므로 그분의 신성한 인간은 말씀에서 “구세주, 되찾는 분”이라 불리우신다: 즉
나는 너희를 돕는다, 여호와께서 말하신다, 그리고 너희의 되찾는 자,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 (이. 41:14).
다시:
고로 여호와, 이스라엘의 되찾는 분, 그의 거룩하신 분 (이. 49:7, 20).
다시:
여호와 체바욷이 그분의 이름이다; 그리고 너희를 되찾는 분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 온 땅의 하느님으로 그분은 불리우실 것이다 (이. 54:5).
위 구절들에서, “여호와”라고 불리우시는 신성 자체가 “되찾는 분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이라 불리우는 신성한 인간과 구별되고 있다.
그러나 신성한 인간 안에 여호와 자신이 계신다는 것은 아래 구절로부터 분명해진다:
고로 여호와, 이스라엘의 왕, 그리고 그의 되찾는 분, 여호와 체바욷께서 말하신다, 나는 처음이다, 그리고 나는 마지막이다, 그리고 나 외에 하느님은 없다 (이. 44:6)
다시:
고로 여호와 너희의 되찾는 분이 말하신다, 나는 너희 하느님 여호와이시다, 너희를 가르친다 (이. 48:17).
다시:
당신은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그 이유가 아브라함이 우리를 모르고, 그리고 이스라엘은 우리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당신 여호와가 우리의 아버지, 우리의 구속자이십니다; 영원으로부터 당신의 이름은 있습니다 (이. 63:16).
다윗서에서:
구덩이로부터 너의 생명을 되찾으신 여호와 (시. 103:4).
위 구절들로부터 말씀에서 “여호와”에 의해 주님 외의 다른 뜻이 없음이 분명해진다; 그리고 “여호와 구속자”는 그분의 신성한 인간이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되찾아졌었던 이들이 “여호와의 되찾으심”이라 불리운다: 즉
너희는 시온의 딸에게 말하라, 잘 보라 너의 구원이 온다; 잘 보라 그분의 보상이 그분과 더불어 있다, 그리고 그분의 일의 값이 그분 앞에 있다. 그들이 그들을 부를 것이다, 즉 거룩함의 백성, 여호와의 되찾으심 (이. 62:11, 12);
주님으로부터 그들이 “여호와의 되찾으심”이라 불리우는 것은 아주 분명하다; 그 이유가 그분의 오심에 관해 말해지기 때문이다: 즉 “보라 너의 구원이 온다; 보라 그분의 보상이 그분과 더불어 있다.” 이 외에도 이. 43:1; 52:2, 3; 63:4, 9; 호. 13:14; 출. 6:6; 15:13; 욥. 19:25 등등의 구절에서 “구속함(redemption)”이 노예됨, 죽음, 악에 관련해 서술된다.

소년들을 축복하소서. 이는 선과 진리를 가지도록 그들에게 주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축복함”의 의미가 선과 진리를 수여하는 것이다로부터; 그 이유가 영적 의미에서 “축복함”은 이외 다른 것은 포함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기서 “소년들”인 므낫세와 에브라임의 표현함이 교회의 지력과 의지력이다로부터, 이것에 진리와 선이 주어질 것이다: 즉 지력에는 진리가; 의지력에는 선이 수여되리라는 것이다.

그리고 내 이름이 그들 안에서 일컬어지게 하소서. 이는 그들 안에 자연 평면으로부터의 영적 진리의 선의 품질이 있을 것임을 의미한다. 이는 누군가의 “이름이 불리워짐”의 의미가 당사자에 있는 그의 품질이다로부터; 그리고 이스라엘의 표현함이 자연 평면으로부터의 영적 진리의 선이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품질이 그들 안에 있었기 때문에, 그러므로 그들 역시 야곱의 아들들로 받아들여졌고, 지파들로, 즉 므낫세 지파, 에브라임 지파로 만들어졌다. 그리고 레위 지파가 성직을 담당하므로 해서 상속분을 할당받는 지파들로부터 제외되었을 때, 이 두 지파가 보태져서 열두 지파로 세어졌다 (레위와 요셉이 빠졌으므로 열 지파 인데 거기에 요셉의 두 아들들이 추가된 것이다. 역자주) (여호수아서와 에스겔서 48장을 참조하라.)

그리고 내 조상들 아브라함과 이삭의 이름. 이는 내적인 선과 진리의 품질을 의미한다. 이는 “이름”의 의미가 품질이다로부터; 그리고 “아브라함과 이삭”의 표현함이 내적인 선과 진리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내적인 선과 진리는 이것들이 선과 진리이기 위하여 반드시 외적인 선과 진리 안에 있어야함이 틀림이 없다. 이미 말했듯이, 외적 부분은 어떤 것에 형체를 주는 일만 담당한다, 하여 내적 부분이 있을 그릇일 뿐이다, 그리고 주님으로부터 자체 안으로 유입됨에 따라 거기로 삶을 인도한다. 또한 내적 부분도 가장 높은 것에 비교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이 높은 것은 주님이시고, 이로부터 모든 생명이 온다; 그리고 그 아래쪽의 것들은 그들의 질서에서에서, 마지막인 육체에 이르기 까지 등차들을 통하여 생명을 담는 그릇되는 형체들일 뿐이다.

그리고 그들로 땅의 한 가운데에서 크게 불어나게 하소서. 이는 가장 안쪽으로부터 확장됨을 의미한다. 이는 “한가운데”의 의미가 가장 안쪽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러므로 “크게 불어남”의 의미가 확장함이다; “다수”로 의미되는 진리들은 가장 안쪽, 즉 중앙으로부터 주변으로 자체들을 확장한다; 그리고 확장함이 더 커질수록 천국의 질서에 더 나은 일치함에 있게 된다, 고로 보다 더 완전한 상태가 된다; 이것이 축복의 이 부분에 의해 의미되는 상태이다: 즉 “그들로 땅의 한가운데에서 다수로 자라게 하소서.”

17-20절. 그리고 요셉은 그의 아버지가 그의 오른손을 에브라임의 머리에 얹은 것을 보았다, 그리고 그의 눈에 좋지 않게 보였다. 그래서 그는 그의 아버지의 손을 에브라임의 머리 위로부터 므낫세의 머리 위로 옮기려고 붙잡았다. 18 그리고 요셉은 그의 아버지에게 말했다, 그렇지 않습니다, 나의 아버지시여. 이 아이가 장자입니다. 당신의 오른손을 그의 머리에 놓으소서. 19 그런데 그의 아버지가 거절했다, 그리고 말했다, 나는 안다, 내 아들아, 나는 알고 있다. 그도 역시 한 민족이 될 것이다, 그리고 그도 역시 크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럼에도 그의 동생이 형보다 더 크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의 씨는 나라들에 충만할 것이다. 20 그리고 그는 이 날 그들을 축복해서, 말하기를, 너 안에서 이스라엘이 축복할 것이니, 말하기를, 하느님이 너를 에브라임 같이 그리고 므낫세 같게 평가하신다. 그리고 그는 므낫세 앞에 에브라임을 자리잡아 앉혔다.

그리고 요셉은 그의 아버지가 그의 오른손을 에브라임의 머리에 얹은 것을 보았다. 이는 그는 진리가 첫 번째의 장소에 있는 것으로 간주했음을 지각함을 의미한다. 이는 “말하다”의 의미가 이해하다와 지각하다이다로부터; 요셉의 표현함이 천적 평면으로부터의 내적 부분이다로부터; 여기서 “아버지”인 이스라엘의 표현함이 자연 평면으로부터의 영적 선이다로부터; “오른손을 머리에 놓다”의 의미함이 첫째 자리에 있다라고 생각함이다로부터; 에브라임의 표현함이 자연 평면에 있는 지력의 진리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로부터 분명한 바, “요셉이 자기 아버지가 에브라임의 머리에 그의 오른 손을 얹는 것을 보았다”에 의해 자연 평면으로부터의 영적 선이 진리가 첫째 자리에 있다라고 생각했다는 것을 천적 평면으로부터의 내적 부분이 지각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의 눈에 좋지 않게 보였다. 이는 불쾌함을 의미한다. 이는 설명이 따로 필요 없다. 이것이 요셉을 불쾌하게 헸다고 말한 이유는 요셉에 의해 표현되는 천적 평면으로부터의 내적 부분은 이스라엘에 의헤 표현되는 영적 선 보다 수준이 더 높기 때문이다. 더 수준 높은 것은 더 수준 낮은 것이 어떻게 진행되어야 진리인지를 알고 보고 있기 때문이다. 즉 더 높은 것은 천국의 빛으로부터 아래 있는 것을 본다는 말이다; 고로 “요셉”인 천적 평면으로부터의 내적 부분은 “이스라엘”인 자연 평면으로부터의 영적 선이 잘못함을 보고 있다는 것, 고로 그를 불쾌하게 한 것이다.

그래서 그는 그의 아버지의 손을 붙잡았다. 이는 그의 희미한 지각의 능력 안으로 유입이 있음을 의미한다. 이는 “손을 붙잡다”의 의미함이 지각의 힘 안으로 유입이 있다로부터; 그 이유가 내적 부분이 유입을 수단으로 외적 부분에게 어떤 것을 생각하고 뜻하라고 강요할 때, 마치 여기서 그의 손을 붙잡듯, “손”에 의해 의미되는 지각의 힘으로부터 바라기 때문이다. 영적 평면이 희미함에 있다는 것은 이런 사실로부터도 분명해진다; 즉 인간이 거듭나기 이전의 경우 그는 선과 진리에 관련하여 아주 짙은 어둠에 있다, 그 다음 거듭남이 자꾸 진행을 반복하면서 자기가 인정하는 어떤 교회의 교리 안에 있는 진리로 신앙을 가지고 진리인지 아닌지를 따져본다. 어쨌든 그의 진리가 의지 속에, 그로부터 생활 속에 있게 될 때, 그 진리들은 선이 되어간다. 이때의 선을 진리의 선, 신앙의 선, 마찬가지로 영적인 선, 또는 영적 교회의 선이라 불리운다. 이런저런 근원으로부터 있는 선의 품질은 그 당사자가 주제(중요 사항)를 곰곰이 생각할 경우 알려질는지 모른다. 어쨌든 이방인들의 선을 포함 이런저런 선이라 할지라도 그 선의 주요 관심의 주제가 이웃을 향한 선행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면, 그리고 이 선행 안에 순진이 있다면 그 선은 주님께서 열납하실 수 있는 선이다.

에브라임의 머리 위로부터 므낫세의 머리 위로 옮기려고. 이는 잘못함으로부터 그를 돌아서게 하려고를 의미한다. 이는 “옮기다”의 의미가 돌아서게 함이다로부터; “에브라임의 머리 위로부터 므낫세의 머리 위로”는 잘못함으로부터 이다; 그 이유가 진리가 첫째 자리에, 선이 둘째 자리에 있는 것은 그를 위하여는 잘못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는 앞에서 살폈다.

그리고 요셉은 그의 아버지에게 말했다, 그렇지 않습니다, 나의 아버지시여. 이 아이가 첫출생입니다. 이는 선이 우위를 가진다는 것에 관하여 지각할수 있게 유입이 있음을 의미한다. 이는 “말하다(say)”의 의미가 여기서 “요셉”인 천적 평면으로부터의 내적 부분을 서술할 경우, 유입이 있다 이다로부터; 여기서는 지각할 수 있는 유입이다, 그 이유는 그가 그의 손을 붙잡을 뿐만 아니라, “그렇지 않습니다, 나의 아버지시여, 이 아이가 첫 출생이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당신의 오른손을 그의 머리에 놓으소서. 이는 그리하여 선이 첫째 장소에 있어야 하리라를 의미한다. 이는 “머리에 오른 손을 얹는다”의 의미가 첫째 자리이다라고 생각함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가 축복했을 때, 이스라엘은 그의 손을 머리에 놓았는데, 이는 고대인들로부터 받아진 의식이었다; 그 이유가 머리 안에 인간의 지력과 의지력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이에 비해 육체는 그것에 따라서 행동해주는 것, 동의하는 것이다; 고로 머리에 손을 놓는 것은 축복함이 지력과 의지력에, 고로 인간 자신에게 교통하는 것에 대한 표현이다. 고대 때로부터의 똑같은 의식이 지금까지 남아 있는 셈이다, 하여 즉위식에, 또는 작금의 축복을 위한 행위에 사용되고 있다.

그의 아버지가 거절했다. 이는 동의 않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말했다, 나는 안다, 내 아들아, 나는 알고 있다. 이는 그것은 그렇다, 그러나 그것은 다르게 나타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알고 있다”의 의미함이 여기서는 이것이 그러하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달리 나타난다 이다. “이스라엘”인 영적 선이 이를 지금 지각한 것은 “요셉“인 천적 평면으로부터의 내적 부분의 유입으로부터 이었다. 영적 선이 이런 유입으로부터 계발됨에 있을 때, 이것이 그러하다를 지각한다, 즉 선이 앞의 자리에, 진리가 그 다음 자리에 있는다는 것, 또한 이것은 달리 나타난다는 것까지 지각한다; 그러나 진리가 선을 통치할 것이라는 사실에 입각할 경우, 진리가 먼저 존재한다는 것이다. 하여 그는 어린 아들의 머리에 오른 손을, 첫 출생의 머리에 왼손을 놓는 것을 유지한 것이다.

그도 역시 한 민족이 될 것이다, 그리고 그도 역시 크게 될 것이다. 이는 선으로부터의 진리, 고로 천적 (왕국의) 인간도 증가하리라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민족(people)”의 의미가 진리이다로부터; “크게 되어짐”의 의미함이 증가하는 것이다로부터 ; 그리고 여기서 축복되는 므낫세의 표현함이 내적 부분으로부터 태어난 자연 평면이 있는 의지력의 선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선으로부터의 진리가 천적 수준의 인간 속에 있다는 것은 이미 많이 말해왔던 바이다: 즉 천적 인간은 의지력으로부터 선 안에 있는 자이다, 그리고 이로부터 진리 안에 있다; 그리고 그는 지력으로부터 진리 안에 있고, 이로부터 선 안에 있는 영적 수준의 인간과 구별된다. “므낫세”가 의지력의 선이기 때문에, 그러므로 그에 의하여 천적 인간이 표현된다, 그러나 천적 인간 중의 (내적 부분이 아닌) 외적 부분, 또는 천적 수준의 교회의 외적 부분의 인간이다; 그 이유가 “므낫세”는 자연 평면, 고로 외적 인간에 있는 의지력의 선이기 때문이다; 이에 비해 “요셉”은 천적 수준의 교회의 내적 부분이다, 그 이유는 합리성에, 고로 내적 인간에 있는 의지력의 선이기 때문이다.
천적 인간 속에 있는 선의 진리에 관하여 조금 말을 보태야 할 것 같다. 이 진리는 실로 진리라고 말은 하지만 실상 선이다. 천적 인간과 더불어 주님을 사랑함의 선과 이웃을 향한 사랑의 선이 있다. 주님을 사랑함의 선은 그의 내적 부분이고, 이웃을 사랑함의 선은 그의 외적 부분이다. 그러므로 천적 교회 속에 있는 인간들만에 주목하면, 주님을 사랑함 안에 있는 이들은 이 교회의 내적 부분 속에 있다, 그리고 이웃을 향한 사랑 속에 있는 이들은 이 교회의 외적 부분 속에 있다. 이 사랑의 선, 즉 천적 인간과 더불은 이웃을 향한 사랑의 선이 여기서 “선의 진리”라고 불리우고, 이것이 므낫세에 의해 표현되어진다. 그 이유가 천적 수준의 인간은 진리로부터 추론하지 않는다, 또는 진리에 관하여 추론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그는 선으로부터 지각을 가지고 (즉, 주님으로부터 선을 통하여 지각을 가지고) 이것이 그러하다, 그러하지 않다를 결정하기 때문이다; 천적 인간과 더불은 선행의 선이 진리라고 불리우는데, 이는 천적 수준의 진리이다.

그럼에도 그의 동생이 형보다 더 크게 될 것이다. 이는 진리로부터의 선은 더 증가함을 받는데, 이것이 영적 (왕국의) 인간이다를 의미한다. 이는 여기서 “어린 형제(동생)”인 에브라임의 표현함이 내적 부분으로부터 태어난 자연 평면에 있는 지력의 진리이다로부터, 그러나 여기서 “에브라임”은 진리로부터의 선이다 (아래에서 살핀다); 그리고 다른 이(형) 보다 “더 크게 되어짐”은 더 불어남을 받을 것이다를 의미한다. 여기서 “에브라임”이 진리로부터 선인 이유는, 그가 영적 수준의 교회인을, 그러나 영적 수준의 교회의 외적 부분의 인간을 표현하기 때문이다. 마치 므낫세가 천적 수준의 교회의 외적 부분의 인간인 것과 비슷하다. 진리로부터의 선이 이 인간을, 즉 영적 수준의 교회의 인간을 구성한다. 이 교회의 내적 부분은 이스라엘에 의해 표현되어지고, 에브라임에 의해서는 외적 부분이다. 영적 수준의 교회의 인간은 천적 수준의 교회의 인간과 이런 점에서 다르다: 영적 수준의 교회의 선은 지력 부분에 심어진다, 그러나 천적 수준의 교회의 선은 의지력 부분에 심어진다; 그러므로 (짧게 말하면) 에브라임은 영적 인간을, 므낫세는 천적 인간을 표현한다.
진리로부터의 선 또는 영적 인간이 선으로부터의 진리, 또는 천적 인간 보다 더 증가함을 받는 이유는 인간의 의지력은 계속적으로 타락시켜져 오다가 마지막으로 악이 의지를 점유해버렸다, 하여 거기에 온전한 것이라고는 남은 것이 하나도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간이 멸하지 않도록 주님께서 설비하신 것은, 인간이 지력 부분에서 거듭나져 구원되는 것이다. 의지력 부분이 온전한 자가 거의 없는 바, 천적 인간이 될 수 있는 자 역시 거의 없으나, (지력 부분에서의 거듭남을 개시하여) 영적 인간을 만드는 것은 가능한 바, 이들은 당연히 크게 증대할 것이 틀림이 없다. 고로 후자가 전자 보다 더 증대할 것이다. 이것이 그의 “동생이 형 보다 더 크게 된다”에 의해 의미되어져 있다.

그리고 그의 씨는 나라들에 충만할 것이다. 이는 신앙 속의 진리가 세력을 떨치리라(크게 유행할 것이다, 군림할 것이다, reign)를 의미한다. 이는 “씨”의 의미가 신앙과 선행이다로부터, 여기서는 신앙이다, 그 이유는 에브라임을 서술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라들에 충만함”의 의미가 풍부함, 고로 신앙의 진리가 크게 유행함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말씀에서 “충만함(fulness)”은 모두를 의미한다; 그리고 모두를 의미하지 않을 경우, 풍부함을 의미한다, 그리고 진리와 선 양쪽에서 모두를 서술한다; “다수, 수가 많음(multiude)”은 진리를, “크기, 양, 확대 (magnitude)”는 선을 서술한다. 양쪽 모두를 서술할 경우 충만함인데, 이를 아래에서 읽어보자:
잘 보라 물들이 북으로부터 일어난다, 이것은 넘쳐흐르는 시내가 될 것이다, 이것이 토지와 토지 속에 충만된 것, 도성과 그 안에 거주하는 그들을 침수되게 할 것이다 (예. 47:2);
“토지와 충만한 것”은 진리와 선 모두를, 즉 교회 속에 있는 진리와 선 모두를 표시한다. 이런 이유 때문에, 첨가되는 말은, “도성과 그 안에 거주하는 그들”이다; 그 이유가 “도성”에 의해 진리들이 의미되고, “그 안에 거주하는 그들”에 의해 선들이 의미되기 때문이다.
에스겔서에서:
그들은 외톨이 임에서 자기들의 빵을 먹을 것이다, 그리고 자기들의 물들을 깜짝 놀람과 더불어 마실 것이다, 거기로부터의 토지는 그것의 충만함으로부터 황폐해질는지 모른다 (겔. 12:19);
“토지”는 교회를 표시한다, 그리고 “충만함”은 거기 있는 선과 진리이다. 양쪽 모두가 의미되는 것은 앞의 말로부터, 즉 “그들은 외톨이 신세로 빵을 먹을 것이다, 그리고 깜짝 놀람과 더불어 물들을 마실 것이다”로부터 분명해진다; 그 이유가 “빵”에 의해 사랑의 선이, “물들”에 의해 신앙의 진리가, 이것이 “땅의 충만함”이라 불리우기 때문이다.
아모스서에서:
야곱이 자랑하는 것, 그의 궁전들을 나는 미워한다, 그러므로 나는 도성과 거기로부터의 충만함을 닫을 것이다 (암. 6:8).
다윗서에서:
천국들이 당신의 것, 땅 역시 당신의 것입니다; 세상과 거기의 충만함을 당신께서 기초를 놓으셨습 니다 (시. 89:11).
그리고 다윗서에서:
땅은 여호와의 것, 그리고 거기의 충만함; 세상, 그리고 거기 안에 거주하는 그들. 그 이유가 그분은 바다들 위에 그것을 기초를 놓으셨기 때문, 그리고 그것을 시내들 위에 건설하셨기 때문이다 (시. 24:1, 2);
위 구절의 “충만함” 역시 진리와 선을 표시한다; “땅”은 특별한 의미에서의 교회를, “세상”은 보편적 의미에서의 교회를 의미한다. “여호와께서 바다들 위에 세상의 기초를 놓으셨다”는 것은 기억 속의 지식에 있는 것들 위에를 표시한다; 그리고 “그분은 시내들 위에 그것을 건설하셨다”는 총명 속에 있는 것들 위에를 표시한다. 아마 이 구절의 말이 평범하게 생각하려 들면 앞뒤가 맞지 않는 문장에 불과할지 모른다. 그러나 조금 생각을 깊게 하는 이라면, “바다들”과 “시내들”이 뭔가 다른 어떤 것이다고, 하여 이 어떤 것이 말씀의 영적, 또는 내적 의미임을 눈치 챌 것이라 본다.

그리고 그는 이 날 그들을 축복했다. 이는 예언과 영원하게 섭리됨을 의미한다. 이는 “축복함”이 예언함이다로부터, 그러나 최고 의미에서 주님의 선견 (미리 보셨음, foresight)이다; 선견이기 때문에, 또한 섭리이다. 그 이유가 선견은 섭리 없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주님은 악을 미리 보시고, 선을 준비해두신다, 그리고 미리 보여진 악을 섭리를 수단으로 선 쪽으로 구부리신다. 여기서 “축복하는” 것이 선견과 섭리를 표시하는 이유는 축복하는 이스라엘이 최고 의미에서는 주님이시기 때문이다. 영원하게가 뜻해진 것은 “이 날”, 또는 “오늘”의 의미가 영원인 것이다로부터 분명하다.

말하기를, 너 안에서 이스라엘이 축복할 것이니, 말하기를, 하느님이 너를 에브라임 같이 그리고 므낫세 같게 평가하신다. 이는 그 자신인 영적 부분이 지력의 진리 안에 그리고 의지력의 선 안에 있을런지 모른다를 의미한다. 이는 이스라엘의 표현함이 영적 선이다로부터; 그리고 에브라임의 표현함이 지력의 진리, 므낫세의 표현함은 의지력의 선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스라엘”인 영적 부분이 그들 안에 있을는지 모른다는 것은 이 말, 즉 “너 안에서 이스라엘이 축복할 것이다, 그리고 하느님이 너를 놓는다”에 의해 의미되고 있다.
이스라엘이 “에브라임과 므낫세”인 지력의 진리와 의지력의 선 안에 있다에 의해 표현된 영적 부분에 주목하면 이렇다: 이스라엘에 의해 표현된 영적 선은 내적 교회의 영적 부분이다; 이에 비해 에브라임과 므낫세에 의해 표현되는 진리와 선은 외적 교회 속에 있다. 내적 부분이 교회의 내적 부분이기 위하여서는 교회의 외적 부분이 반드시 필요하다, 그 이유가 외적 부분이 내적 부분이 서는 기초를 붙들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적 부분이 흘러들어 담겨 있게 한다. 그러므로 외적인 것인 자연 평면 또한 반드시 거듭남이 필요한 것이다; 그 이유가 거듭나지 않을 경우, 내적 부분은 그것이 서는 기초도 그것을 담는 그릇도 가지지 못하기 때문이다. 기초도, 그릇(저장소)도 없다면, 내적 부분은 완전하게 사멸한다. 고로 (사멸하지 않으려면) 영적 부분은 지력의 진리와 의지력의 선 안에 있어야 한다.
이 주제를 예증으로 살펴보자: 인간이 자신 내부에서 평온과 복됨으로 느끼게 하는 선행의 애착 자체는 어떤 보수를 바램 없이 이웃에게 혜택을 주는 것을 행함에 있다는 것이 교회의 내적 부분이다; 그러나 이 선을 뜻하고, 진리로부터 이 선을 행하는 것, 즉 이를 말씀이 명령하였기 때문에 뜻하고 행하는 것은 교회의 외적 부분이다. 만일 외적 부분인 자연 평면이 내적 부분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즉 이 선을 뜻하고 행함에 참여 않겠다면, 그 이유가 보상이 없다면, 자아를 위해 그것들은 아무것도 아니다고 결정한다면 (그 이유가 이런 기질은 유전적으로부터, 그리고 실제적으로부터 누구나 지니는 것이다), 이때 내적 부분은 설 자리인 기초가 사라진 셈, 내적 부분에 상응하는 저장소도 없는 것, 하여 내적 부분을 통하여 주님으로부터의 유입된 것은 거절당하고, 악용당하고, 마지막으로 소멸되고 만다; 그러므로 내적 부분은 멸해지는 바, 닫아지고 멈추어진다, 하여 천국으로부터의 어떤 것도 내적 부분을 통하여 자연 평면 안으로 건너가지 못한다. 따라서 일반적 본성으로부터의 미세한 어떤 빛만이 틈새를 통하여 이리저리 다니는데, 이것은 자연적 수준의 생각함, 말함, 뜻함에 얹혀 있고, 선과 진리에 반대하는 악과 거짓이 자기들의 행동에 영적인 빛이 종속하여 박수쳐주는 부대로 전락해 있다.

그리고 그는 므낫세 앞에 에브라임을 자리잡아 앉혔다. 이는 그는 진리가 첫째 장소에 있다고 간주했는데, 그 이유는 그가 영적 부분에 있었기 때문이다 (13, 14, 17-19절에서 설명되었다).

21, 22절. 그리고 이스라엘이 요셉에게 말했다, 보라 나는 죽는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너와 함께 계실 것이다, 그리고 너를 네 조상들의 토지에로 도로 데려다 놓으실 것이다. 22 그리고 나는 너에게 네 형제들 보다 뛰어난 한 몫을 주겠다, 이 몫은 내가 내 검과 내 활로 아모리족의 손으로부터 얻은 것이다.

그리고 이스라엘이 요셉에게 말했다, 보라 나는 죽는다. 이는 영적 선이 새로운 삶에 관하여, 그리고 표현함을 끝냄에 관하여 천적 평면의 내적 부분으로부터 지각함을 의미한다. 이는 “말하다”의 의미가 지각함이다로부터; 이스라엘의 표현함이 영적 선이다로부터; 요셉의 표현함이 천적 평면으로부터의 내적 부분이다로부터; 그리고 “죽는다”의 의미가 생명으로 부활함이다로부터, 또한 이전의 표현함의 끝이다 알게 된다; 이 끝 또한 여기서 “죽는다”에 의해 의미되어 있다. 교회의 어떤 것을 표현하는 자가 죽을 때, 그 표현성은 누군가가 계속 잇는다, 즉 아브라함을 이어 이삭이, 이삭을 이어 야곱, 야곱을 이어 그의 아들들이 계승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모세가 죽었을 때, 여호수아가 승계했고, 사사 시대에도, 열왕 시대에서도 그러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너와 함께 계실 것이다. 이는 주님의 신성한 섭리를 의미한다. 이는 “하느님이 너와 함께 계실 것이다”의 의미가 주님의 신성한 섭리이다; 그 이유가 주님이 누군가와 더불어 계실 때, 그분은 그를 인도하시고, 발생할 모든 것들을, 슬프던, 즐거운 것이든 그에게 선을 위하여 발생하게 하신다; 이것이 신성의 섭리이다. “주님의” 섭리라고 말한 이유는 이 말, 즉 “하느님께서 너와 함께 계실 것이다”라고 말해지기 때문인데, 말씀에서 “하느님”에 의해, “여호와”에 의해 주님이 뜻해지기 때문에서이다; 그분 외에 하느님은 없기 때문이다. 그분은 아버지 자체, 아들 자체이신 바, 그들은 하나이시다; 아버지는 그분 안에, 그분은 아버지 안에 계신다는 것을 그분 스스로 요. 14:9-11에서 가르치신다.

그리고 너를 네 조상들의 토지에로 도로 데려다 놓으실 것이다. 이는 양쪽 고대 교회의 상태에로를 의미한다. 이는 “토지”의 의미가 교회이다로부터; 그리고 “조상들”의 의미가 고대와 태고 교회의 사람들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두 고대 교회들의 상태”라고 말한 이유는 이스라엘의 아들들과 그들의 후손들은 고대 교회들에 속했던 이들과 마찬가지로 주님의 왕국을, 즉 천적 왕국과 영적 왕국의 모두 각각의 특별한 측면에서 표현했기 때문이다. 표현 자체 역시 조직되어졌다: 즉 유태 나라와 더불어서는 천적 왕국을, 이스라엘 나라에 의해서는 영적 왕국을 표현했다; 그러나 이 두 나라는 오로지 표현뿐만 (완전 껍데기 수준의 표현)이 설립되어질 수 있었는 바, 주님의 왕국, 또는 교회의 어떤 것은 전혀 없었다; 그 이유가 그들이 바랬던 것은 내적 부분의 어떤 것은 절대 아닌 외적인 것만이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기에 표현이 존재하도록 하시기 위하여, 이것 때문에 천국과의 어떤 교통이, 그리고 천국을 통하여 주님과의 어떤 교통함이 있기 위하여, 그들은 외적 부분들에 보존되었다; 그리고 이때 주님에 의해 설비된 것은, 교통함은 내적 부분 없이 단지 외적 부분의 표현만을 수단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이런 상태 쪽에서 이다면 야곱의 후손들을 도로 데려다 놓으실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전혀 몰랐지만 그들의 외적 표현들 안에 내향적으로 감추인 신성한 것들이 뉘여 있었다; 가장 높은 의미에서의 경우, 주님의 신성한 인간에 관한 것이다; 그리고 관계적 의미에서 천국들에, 그리고 교회에 있는 주님의 왕국에 관한 것이다. 양쪽 고대 교회의 이 상태가 “하느님께서는 너를 너의 조상들의 토지에로 도로 데려가실 것이다”는 말에 의해 의미되어 있다.

그리고 나는 너에게 네 형제들 보다 뛰어난 한 몫을 주겠다. 이는 지력의 진리와 의지력의 선을 거기서 더 가지게 될 것을 의미한다. 이는 여기서 “요셉”인 에브라임과 므낫세의 표현함이 지력의 진리와 의지력의 선이다로부터; 그리고 “형제들 보다 뛰어난 한 몫을 준다”의 의미가 거기, 즉 “토지”에 의해 의미되는 교회 안에서 더 가지게 되는 것이다. 거기서 지력의 진리와 의지력의 선을 더 가지는 것, 이것들이 교회의 필수 요소이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생득권 (장자의 명분)이 요셉의 아들들에게 주어졌다 (역상. 5:1).

내가 아모리족의 손으로부터 얻은 것. 이는 악을 제어하는 승리를 수단으로를 의미한다. 이는 아모리족의 의미가 악이다로부터; 그리고 “손으로부터 취함”의 의미가 승리를 통하여 획득함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아모리족에 주목해보자. 그들에 의해 악이 의미되는데, 가나안족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말씀에서 언급되는 그 토지에 있는 나머지 나라들도 다양한 종류의 악들과 거짓들을 의미한다. 이스라엘의 아들들이 가나안의 토지를 점유하기 위해 왔을 때, 이런 나라들에 의해 이런저런 것들이 표현되어졌다, 이런 이유로 이스라엘의 아들들은 천국의 것들을, 그 토지의 나라들은 지옥의 것들을 표현했다, 하여 그들에게는 저주가 있어졌는 바, 이스라엘의 아들들은 잔존하는 그들과 계약을 맺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다.
이스라엘의 아들들은 지옥들을 표현한 이들의 토지를 탈취하여 살았다는 것은 주님의 오심의 때쯤에서 지옥의 것들이 천국의 큰 부분을 점령해왔었다는 것의 표현이었다; 그리고 세상에 오심과 그분의 인간을 그분 자신 안에서 신성으로 만드심을 수단으로 주님께서는 그것들을 추방하시어 지옥들 안으로 내던지셨다, 그리고 그것(그것들이 내쫒긴 영역)을 그분의 영적 왕국 속에 있을 이들에게 상속분으로 주셨다.
아모리족의 나라에 의해 일반적 측면의 악이 표현된 것은 그것이 언급되는 아래 구절에서 분명해진다:
예루살렘, 너의 상거래(trading)들과 너의 세대(generation, 출생들, births)들은 가나안족의 토지 로부터 있었다; 너의 아버지는 아모리족, 그리고 너의 어머니는 헷족이었다 (겔. 16:3, 45);
내적 의미에서 “아버지”는 교회의 선을 의미하나 반대 의미에서는 악을 의미한다; “어머니”는 교회의 진리를 의미하나 반대 의미에서는 거짓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말해진다 “너의 아버지는 아모리족, 너의 어머니는 헷족이었다.”
아모스서에서:
나는 그들 앞에서 아모리족을 파괴했다, 이들의 키는 삼나무들 같았다, 그리고 그는 상수리나무의 튼튼함이었다. 나는 아모리족의 토지를 소유하도록 너희를 광야에서 인도했다 (암. 2:9, 10);
위 구절 역시 “아모리족”은 악을 표시한다, 그 이유가 자아 사랑의 악이 “삼나무들의 높이와 상수리나무의 튼튼함”에 의해 묘사되었기 때문이다. “아모리족”이 일반적 측면에서의 악인 이유는 가나안의 토지 전체가 “아모리족의 토지”라고 불리웠기 때문이다. 하여 말해진 바, “나는 아모리족의 토지를 소유하도록 너희를 광야에서 인도했다.” 다시 아래에서:
유다의 왕 므낫세는 자기 앞에 있었던 아모리족들이 했던 모든 악보다 더 악한 짓을 했다
(왕하. 21:11).
내 검을 가지고에 의해 전투하는 진리를 수단으로 이다는 것은 “검(sword)”의 의미가 전투하는 진리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리고 내 활을 가지고가 교리를 수단으로가 의미되는 것은 “활(bow)”의 의미가 교리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 말, 즉 “내가 내 검과 내 활을 가지고 아모리족의 손으로부터 취한 몫”이 이스라엘에 의해 내적 의미 때문에 이야기되어졌다는 것은 아주 분명하다, 그 이유는 과거 야곱이 자기의 검과 활로 아모리족으로부터 취한 몫이 아니고, 그 몫(토지, 지분)을 하몰의 아들들로부터 샀기 때문인데, 이는 창. 33장의 이 말로부터 이다: “야곱이 세겜에, 세겜의 도성에 당도하였는데, 이곳은 가나안의 토지 안에 있고, 그가 밧단-아람으로부터 그쪽으로 왔을 때이다; 그리고 도성 앞에 진영을 차렸다. 그리고 그는 들판의 몫을 세겜의 아버지, 하몰의 아들들의 손으로부터 일백 크시라를 주고 샀다” (18, 19절). 이 들판을 그가 요셉에게 준 몫이었다는 것은 여호수아서의 이 말들로부터 알게 된다: “요셉의 뼈들, 이스라엘의 아들들이 이집트로 모셔왔는데, 그들은 세겜에서, 야곱이 일백 크시라로 세겜의 아버지 하몰의 아들들로부터 샀던 토지의 몫에 매장했다; 그리고 그것들은 요셉의 아들들에게 상속분을 위해 있었다” (여. 24:32). 이로부터 분명한 바, 이 몫은 샀다는 것, 그리고 그것이 요셉에게 주어졌다는 것이다.
이 몫의 근처에 세겜 성이 있었지만 이 성은 뜻해지지 않고 있다는 것도 주목해둘 일이다. 과거 시므온과 레위가 성의 모든 남자들을 살육하고, 그 성을 그들이 검으로 강취했었는데 (창. 34장), 야곱은 이 행위를 혐오했다, 이것 때문에 시므온과 레위를 저주했다, 그리고 자신을 이 행위로부터 떼어놓으려 했다, 하여 말한다, “내 혼이 그들의 비밀 안으로 들어가게 하지 말 것이다; 그들의 회합에 내 영광은 연합하지 말지라. 그 이유는 그들이 분노하자 그들은 사람을 죽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기분이 유쾌하면 그들은 수소를 느슨해지게 했기 때문이다. 그들의 성냄은 격렬한 바, 저주받아야 하고, 그들의 분노는 단단한 바 저주 받아야 한다, 나는 그들을 야곱 안에서 나누어 낼 것이고 이스라엘 안에서 흩뜨리라” (창. 49:5-7). 이런 모두로부터 명백한 바, “내가 내 검과 내 활을 가지고 아모리족의 손으로부터 취한 몫”이라는 말이 그에 의해 말해질 때, 그가 예언적 영 안에 있었다는 것, 이는 내적 의미를 위함이었다는 것이다.

창세기 47장 해석

창세기 제 47 장

1절. 요셉이 바로에게 와서 말했다, 그리고 말했다, 나의 아버지와 나의 형제들, 그리고 그들의 양떼들, 그리고 그들의 목축들, 그리고 그들이 가진 모든 것이 가나안의 토지로부터 왔습니다. 그리고 보라 그들은 고센의 토지에 있습니다.

그리고 요셉이 바로에게 와서 말했다. 이는 기억 속의 지식이 있는 자연 평면에서 천적 평면으로부터의 내적 부분이 현존함, 그리고 그 결과로 유입과 지각이 있음을 의미한다. 이는 누군가에게 “오다”의 의미가 현존하다 이다로부터; 요셉의 표현함이 천적 평면으로부터의 내적 부분이다로부터; “말하다(tell)”의 의미가 유입이 있다 이다로부터; 바로의 표현함이 자연 평면, 이로부터 일반적 측면에서의 기억 속의 지식이다로부터; 그리고 “말하다(say)”의 의미가 지각하다 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러므로 “요셉이 바로에게 왔다, 그리고 말했다”에 의해 기억 속의 지식이 있는 자연 평면에 천적 평면으로부터의 내적 부분이 현존함이 의미된다, 그 결과 유입과 지각함이 있다.
자주 말했던 사항은, 내적 부분의 유입이 자연 평면, 또는 외적 부분 안으로 만들어짐, 그리고 후자가 지각함이라는 것에 대해서이다; 이것이 보여주는 바는, 자연 평면은 내적 부분으로부터, 즉 주님으로부터 내적 부분을 통하여 유입이 있는 덕택에 존속하고 살아간다는 것이다. 그 이유가 이 유입 없이 자연 평면은 생명이 없기 때문, 생명이 없는 이유는 그것이 세상의 자연 안에 있기 때문이다. 세상의 것이 가지는 모든 것은 영계로부터 파생되기 때문이다; 이 세상의 자연은 생명이 지독하게 없다; 그러므로 인간과 더불은 자연이 살아 가기 위하여 주님으로부터의 유입이 있어야만 하고, 이는 주님으로부터 인간의 내적 부분 안으로 직접적으로, 뿐만 아니라 영계를 통하여 중개적, 간접적으로 있는다, 그 이유가 내적 부분은 영계 안에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연이 살아 있기 위하여 내적 부분으로부터 자연 안으로 유입이 있어야만 한다. 인간의 자연 평면은 거기로부터 생명을 받아 만들어 진다. 이것이 천적 평면으로부터의 내적 부분이 기억 속의 지식이 있는 자연 평면 안으로 유입됨에 의해 뜻해진다. 내적 부분으로부터의 유입 덕택에 바로에 의해 표현되는 외적 또는 자연 평면에 지각이 출시된다; 그 이유가 유입과 지각함은 서로 상응하기 때문이다.

6064. 나의 아버지와 나의 형제들. 이는 자연 평면에 있는 영적 선과 교회의 진리들을 의미한다. 이는 여기서 “아버지”인 이스라엘의 표현함이 자연 평면에 있는 영적 선이다로부터; 그리고 이스라엘의 아들들의 표현함이 자연 평면에 있는 진리들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방금 위에서 말한(6063항) 유입과 지각함이 이것들, 즉 자연 평면에 있는 영적 선과 교회의 진리들에 관련되고 있다.

그리고 그들의 양떼들, 그리고 그들의 목축들. 이는 진리로부터의 내면과 외면의 선들을 의미한다. 이는 “양떼들”의 의미가 내면의 선들, 그리고 “목축들”의 의미가 외면의 선들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진리의 선들이 의미되는 이유는 이스라엘에 의해 표현되는 영적 선이 진리의 선이기 때문이다. 천국 안에서와 인간에게 있는 선들은 두 근원으로부터 이다, 하나는 의지력에, 또 하나는 이해력에 근원을 가진다. 의지력에 근원을 둔 선 안에는 천적 수준의 교회 속에 있던 태고인들이 있었다; 그러나 이해력에 근원을 둔 선 안에는 영적 수준의 교회 속에 있었던 고대인들이 있었다. 전자의 선에는 셋째 천국, 또는 가장 안쪽의 천국에 있는 이들이 있다, 그러나 후자의 선 안에는 중간 천국 또는 둘째 천국에 있는 이들이 있다. 이에 대한 본성이 무엇인지는 너무나 자주 거론해왔기도 하다. 어쨌든 의지에서 근원되는 선은 선으로부터 진리가 있는다; 그러나 이해력에서 근원하는 선은 진리로부터 있는 선, 또는 진리의 선이다. 이 선은 자체적으로는 진리가 행동에 있는 것밖에 더 아니다.

그리고 그들이 가진 모든 것. 이는 그로부터 파생된 것은 무엇이든지를 의미한다.

가나안의 토지로부터 왔다. 이는 그들은 교회로부터 있다를 의미한다. 이는 어떤 “토지로부터 오다”의 의미가 거기로부터 있다 이다로부터; 그리고 “가나안의 토지”의 의미가 천국들에 있는 주님의 왕국과 지상에 있는 주님의 왕국이다로부터 알려진다.

그리고 보라 그들은 고센의 토지에 있다. 이는 그들은 기억 속의 지식들인 자연 평면의 한 중앙에 있다를 의미한다. 이는 “고센”의 의미가 자연 평면의 한 중앙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자연 평면의 중앙에 주목해보면 이렇다: 교회 속에 있는 선들과 진리들, 이것이 주님의 말씀으로부터 있다는 것이 신앙과 더불어 자연 평면에서 받아지고 인정되어갔을 때, 그것들은 거기서 중앙(중심)에 위치하게 된다. 그 이유가 바라봄 아래 곧바로 있는 이런저런 것들은 중앙에, 그리고 바라봄 아래 있으나 곧바로 있지 않은 이런저런 것들은 측면 쪽에 있는다. 고로 중앙에 있는 것들은 명백하게 나타난다, 그러나 측면의 것들은 희미하게 나타난다. 이는 눈의 시각이 가지는 경험과 똑같다. 시각 아래 곧바로 있는 것 (직시하는 것)은 중앙에 있고, 명료하게 나타난다; 그러나 시각 아래 곧바로 있지 않은 것들, 즉 중앙으로부터 떨어진 것들은 불분명하게 나타난다. 그 이유가 내적인 눈, 이는 지적 마음인데, 이 마음은 천국의 빛으로부터 그것의 시력을 가지고, 그것 자체의 바깥쪽 자연 평면에 있는 이런저런 것들을 조망한다. 이는 외적인 눈인 기억 속의 지식들도 마찬가지 인데, 이것은 자체의 바깥쪽의 대상물과 그 주변 대상물의 영역을 조망한다. 내적 시각은 인간 당사자가 지닌 진리와 선에 가장 많이 일치하는 기억 속의 지식 쪽으로 결정되고, 이때 이 지식들은 중앙 쪽에 위치한다. 내적 시각이 기억 속의 지식들을 바라보는 이유는 그것이 영적인지를 검사하고 영적인 것들 쪽으로 시각의 초점을 모으려해서이다. 하여 영적 관조함 아래 있게 하려 해서 이다.

2-6절. 그는 형제들 중에서 다섯 사람을 데려다가 바로 앞에 세웠다. 3 그리고 바로가 그의 형제에게 말했다, 너희들은 무슨 일을 하느냐? 4 그리고 그들은 바로에게 말했다, 당신의 종들은 양을 치는 목자인데, 우리 모두와 우리의 조상들도 목자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바로에게 말했다, 우리는 이 토지에 머무르려고 왔습니다. 그 이유가 당신의 종들의 양떼를 위한 풀밭이 없기 때문입니다, 기근이 가나안의 토지에 극심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지금 바라옵건대 당신의 종들이 고센의 토지에서 거주하게 해주십시오. 5 그리고 바로는 요셉에게 말했다, 말하기를, 너의 아버지와 네 형제들이 너에게 왔다. 6 네 앞에 이집트의 토지가 있다. 토지의 가장 좋은 곳에서 네 아버지와 네 형제들이 살게 하라. 그들로 고센의 토지에서 거주하게 하라. 그리고 네가 알아보아 그들 사이에 활동적인 자가 있다면 내 가축의 제 1인 자로 세워라.

그는 형제들 중에서 다섯 사람을 데려갔다. 이는 교회 속의 진리로부터 얼마를 의미한다. 이는 여기서 “형제들”인 야곱의 아들들의 표현함이 교회의 진리들이다로부터; 그리고 “다섯”의 의미가 얼마 정도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바로 앞에 세웠다. 이는 기억 속의 지식들 안에 은근히 심음을 의미한다. 이는 바로의 표현함이 일반적 측면에서의 기억 속의 진리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은근히 심어짐(insinuation)이 “그 앞에 세움”에 의해 의미되는 이유는 그것들을 표출하는 끝이 그것들, 즉 교회의 진리들을 은근히 심는 것이기 때문, 그 이유가 이것들이 “야곱의 아들들”이기 때문이다. 진리들에 주목하면, 그것들은 교회의 기억 속의 지식들 안에 은근히 심어져야만 함이 틀림이 없다; 그럼에도 이 주제에 관하여 오늘날 알려진 바 없어 여기서 더 예증해두어야 할 것 같다. 오늘날 교회의 기억 속의 지식들은 말씀의 글자 의미에 속하는 이런저런 것들이다. 내적 의미로부터의 진리들이 이런 기억 속의 지식 안으로 은근히 심어지지 않으면, 마음은 갖가지 이교(이단)들을 끌어낼 수 있다; 그러나 진리들이 그것들 안으로 은근히 심어져 있는다면 마음은 이단들을 끌어낼 수 없다.
예를 들면, 말씀의 글자 의미로부터 배웠던 이들의 경우, 하느님은 성내신다, 그분은 처벌하시고 시험으로 인도하신다, 지옥으로 내던지시고, 심지어 악이 야기되게 하신다 등등의 하느님에 관한 거짓 생각들을 끌어낸다; 하여 하느님이신 선 자체로부터 악은 출현할 수 있다, 이는 그분에게 정반대되는 위험한 도출이다, 여전히 선으로부터 선만이 오고, 악은 악으로부터서만이 온다. 그러나 만일 내면의 진리들이 기억 속의 지식들 안으로 은근히 심어져 있지 않으면, 이 지식들은 엉뚱한 발상을 도출할 수도 있다. 이런 진리들이 그럴지 모른다: 즉 인간을 성내게 하는 것은 그 사람에게 있는 악 때문이다, 이것이 시험들로 인도한다, 벌한다, 지옥으로 내던진다, 그리고 그 자체가 악을 계속 생산한다는 것; 이 주제 주위의 사정은 왕국들에 있는 법들 같은 것이다, 이 법들은 왕으로부터 온다, 반면 처벌의 악들은 왕으로부터가 아니다, 그러나 악들을 행한 이들로부터 이다.
이런 진리도 있다: 지옥들은 존재한다, 모든 악의 근원이다, 그리고 이것이 허용되어져 있는 이유는 인간을 위하여 피할 수 없기 때문, 즉 그가 악 안에 있다는 것을 보도록, 그의 생명은 거기로부터 파생되어져 있다는 것을, 그러므로 그가 악 안에 남아 있다면, 그는 자유 안에 있을 수 없다, 고로 개혁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은 악을 선쪽으로 구부리신다.
이 진리 또한 있다: 가장 일반적인 것들이 처음에 믿어지게 된다는 것, 그리고 그 후에 그것들은 개별적인 진리들을 수단으로 예증되어진다는 것; 예를 들면, 이런 일반적 측면에서의 기억 속의 진리이다: 즉 거행되는 모든 것들은 하느님으로부터 이다, 고로 처벌의 악도 모든 것이라는 말에 포함된다; 그러나 한 참 후에 이것이 어떤 방식에서 하느님으로부터 인지를 배우게 된다; 또한 허용으로부터 행해지는 것에 대한 근원과 본성도 배워진다.
마찬가지로 이 진리가 있다: 하느님에게 대한 모든 예배에는 거룩한 두려움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 이 두려움 안쪽에는 하느님은 선에는 보상을, 악에는 처벌을 하신다는 생각이 있다. 단순한 자나 어린 아이들은 이를 믿지 않으면 안된다, 그 이유는 그들이 허용이 무엇인지를 납득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는 말씀에 따라서 조차 즉 “오히려 몸과 혼을 지옥으로 파괴하실 수 있는 그분을 두려워 하라” 이다 (마. 10:28); 그리고 그들이 악인 것을 행함에서 두려움 때문에 감히 엄두를 못낼 때, 차츰 선과 함께 사랑이 은근히 심어진다, 이런 뒤에 그들은 하느님으로부터 있는 것은 선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 지각도 한다, 그리고 악은 자신들로부터 이다는 것, 마지막으로 모든 악은 지옥으로부터 이다는 것까지 이다.
더욱이 천국에 있는 이들은 하느님으로부터 있는 것은 선뿐이다는 것을 지각하나, 지옥에 있는 이들은 모든 악은 하느님으로부터 있다고 말한다, 그 이유는 그분이 그것을 허용하시고, 그것을 제거하시지 않기 때문이다고 말한다. 그러나 영들의 세계에 있는 이들에게 대답으로서 말해지는 것은, 만일 악이 그들로부터 거두어진다면, 그들은 생명이 없게 되는 것, 이것이 악 안에 있는 이들의 경우이다는 것; 그들 안에 있는 악이 법에 따라서 자신들을 처벌한다는 것; 그리고 처벌의 악 때문에 그들은 악들을 마음대로 행하려듦이 금해진다는 것이다; 또한 악의 처벌은 선을 보호하는 장치도 된다는 것이다. 이 말에 더하여, 악 안에 있는 이들, 또한 내적 예배 없이 외적 예배에만 이들, 유태인의 경우 같이, 하느님을 두려워함 안에 모든 수단에 의해서라도 있어야 하고, 하느님은 반드시 처벌하신다는 신앙도 지녀야 한다; 그 이유가 하느님을 두려워함으로부터 그들은 선인 것을 행할 수 있으나, 사랑으로부터서는 결코 아니다.
이런 것들과 이외 많은 다른 진리들이 위에 참고로 제시한 기억 속의 지식들 안으로 은근히 심어질 때, 아주 다른 면모가 나타난다; 그 이유가 이때 기억 속의 지식들은 투명한 (transparent) 그릇 같기 때문이다. 이 그릇 안에서 진리들은 하나의 일반적 진리로서밖에 보여지도록 하는 원인이 되어준다.

그리고 바로가 그의 형제에게 말했다. 이는 자연 평면에 있는 교회의 진리에 관하여 지각함을 의미한다. 이는 “말하다(say)”의 의미가 지각하다이다로부터; 바로의 표현함이 자연 평면과 일반적 측면에서의 기억 속의 진리이다로부터; 그리고 여기서 “형제들”인 야곱의 아들들의 표현함이 자연 평면의 교회의 진리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 모두로부터 “바로가 그의 형제에게 말했다”가 자연 평면에 있는 교회의 진리들에 관하여 자연 평면이 지각함이 의미된다.

너희들은 무슨 일을 하느냐? 이는 용역(service)과 사용(use)에 관하여를 의미한다. 이는 “일들”의 의미가 선들이다로부터, 고로 용역과 사용이다, 그 이유가 이것들이 선들이기 때문이다. 선행의 선들이라 불리우는 모든 선들은 사용(선용, 유용, use)들밖에 더 아니다, 그리고 사용(쓰여짐)들은 이웃을 위한, 우리의 나라를 위한, 교회를 위한, 주님의 왕국을 위한 일들밖에 더 아니다. 더욱이 그 자체에 주목하면, 선행 자체는 선행은 일로 되고, 행동 안에 담길 때까지 선행이 아닌 것이다. 그 이유가 누군가를 사랑하는데, 그에게 선을 행항 능력이 있음에도 선을 행하지 않으면, 그는 그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그 반대의 경우는 말하지 않아도 알고 있을 것이다. 상대를 향한 선행의 모든 것은 행위 자체, 또는 일 안쪽에 포함되고 있음은 누구나 경험한 사례가 적지 않을 줄로 본다. 한마디로 이에 대한 것은 논란의 여지가 없다는 말이다; 인간의 일은 자신의 선행과 신앙의 모든 것들의 복합체인 셈이다, 그리고 영적 선들이라 불리운다, 그리고 실로 실행에 의해, 즉 쓰여짐에 의해 선이 되어간다.
천국에 있는 천사들은 주님으로부터의 선 안에 있기에, 그들은 쓰여짐을 갈망하는 것 외에 더 바라는 것이 없다 이 쓰여짐이야말로 그들의 삶의 기쁨들 자체이다, 그리고 쓰임새에 따라서 그들은 더 없는 행복을 향유한다. 이를 주님께서 가르치신다:
사람의 아들은 아버지의 천사들과 더불어 그분의 영광에서 올 것이다; 그때 그는 모든 이에게 그의 일들에 따라서 보답할 것이다 (마. 16:27);
“일들”에 의해 여기서 일의 바깥쪽 형체에서와 같은 일을 뜻하지 않는다, 그러나 내향의 형체에 있는 일들을 뜻한다, 즉 그것들에 포함된 선행 등등이다; 천사들은 이외 다른 것 때문에 일을 중요시하지 않는다.
그리고 인간의 일들은 그의 선행과 신앙의 모든 것들의 복합체이다, 그리고 삶은 선행을 선행이 되게, 신앙을 신앙이 되게, 고로 선이 되게 해준다, 그러므로 주님은 여느 다른 제자들보다 더 요한을 사랑하셨다, 그리고 그는 만찬에서 그분의 가슴에 기대고 있다 (요. 21:20); 그 이유가 요한에 의해 선들 또는 선행의 일들이 표현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주님께서 베드로가 아니고 그에게 “나를 따르라” 말하셨다, 베드로에 의해서는 신앙이 표현되었다. 그러므로 “베드로”인 신앙이 분개하여 말했다, “주여, 이 사람은 무엇을 할 것입니까? 예수께서 그에게 말하셨다, 만일 내가 올 때까지 그가 남아있게 하려 뜻한다면 그것이 네게 무엇일 것이냐?” (요. 21:11-23). 이 말씀에 의해 미리 말해진 것은, 신앙은 일들을 경멸하리라는 것, 그럼에도 이 일들은 주님 가까이 있다는 것이다, 이는 양과 염소에 관한 주님의 말씀으로부터도 알아질 것이다 (마. 25:34-46), 여기서 일밖에 세어지는 것은 더 없다. 그리고 신앙은 주님을 거절할 것임이 베드로가 그분을 세 번 부인할 때 그에 의하여 표현된 것으로부터 분명하다; 그의 부인함이 밤에 있었다는 것은 교회의 마지막 때, 즉 어떤 선행도 더 이상 있지 않을 때를 의미한다; 그가 세 번 행했다는 것은 이런 조건이 그 때 완성되다를 의미한다; 이 부인함이 수탉이 울 때 이었다는 것은 교회의 새로움이 일어나기 전을 의미한다, 그 이유가 밤을 뒤잇는 동틀녃과 아침은 교회의 처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은 바로에게 말했다, 당신의 종들은 양을 치는 목자입니다. 이는 그들은 선으로 인도한다를 의미한다. 이는 “양을 치는 목자”의 의미가 선으로 인도하는 자이다로부터, 여기서는 선으로 인도하는 진리인데, 그 이유는 야곱의 아들들이 교회의 진리들을 표시하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와 우리의 조상들도. 이는 이것은 고대인들로부터서도 그러했다를 의미한다. 이는 “조상들(아버지들, fathers)”의 의미가 고대 교회 속에 있던 이들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유태인들과 이스라엘인들이 취급되는 말씀의 구절에서 칭찬과 더불어 그들의 조상들이 언급되는 경우가 많다. 말씀의 글자 의미를 벗어나지 못하는 이들은 이 조상들을 놓고 이들은 아브라함, 이삭, 야곱, 또는 야곱의 아들들에 국한되는 이해해버리는 범주를 벗어나지 못한다. 그러나 그런 구절들에서 좋은 의미에서의 내적 의미에서의 경우, 조상들에 의해 그들의 열조들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홍수 이전의 태고 교회, 홍수 이후의 고대 교회에 속했던 이들이 뜻해진다. 이 두 교회들이 “아버지들”이라 불리우는 이유는 그들로부터 교회가 내려와졌기 때문, 또한 교회에 관한 것들이 파생되었기 때문이다.
“조상들”에 의해 고대 교회에 속한 이들이 뜻해지는 구절을 읽어보자:
여호와께서는 너희 조상들을 사랑하시는 것에서 기쁨을 가지셨다, 그리고 그분은 그들 이후에 그들의 씨를 선택하셨다 (신. 10:15).
다시:
영원의 날들을 기억하라, 대대로의 햇수들을 이해하라. 지극히 높으신 분이 나라들에게 그들의 상속분을 주었을 때, 그분이 인간의 아들들을 분리했을 때, 그분은 이스라엘의 아들들의 숫자에 따라 백성들의 경계를 놓으셨다. 그러나 여수른이 살쪘을 때, 그는 하느님을 버렸다, 그들은 악마들에게, 가까이 있는 것으로부터 온 신들, 그리고 너희의 조상들이 알지 못했던 신들에게 제물을 바쳤다 (신. 31:7. 8, 15, 17);
위 구절은 모세의 예언적 노래이다, 이 노래에서 고대 교회가 7-15절까지에서, 야곱의 후손이 15-44절 까지에서 취급되고 있다. 홍수 전에 있었던 태고 교회의 상태가 “영원의 날들”에 의해, 홍수 후에 있었던 고대 교회의 상태가 “대대로의 햇수들”에 의해 의미되어지고 있다; 그들의 선의 상태가 “지극히 높으신 분이 나라들에게 그들의 상속분을 주었다”에 의해; 그리고 그들의 진리의 상태가 “지극히 높으신 분이 인간의 아들들을 분리하셨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아들들의 숫자에 따라 경계들을 놓으셨다”에 의해 의미되고 있다. 이로부터 “조상들”에 의해 고대 교회에 속한 이들이 뜻해짐이 분명하다.
마찬가지인데, 아래 구절도 있다:
거룩함의 우리의 집, 그리고 우리의 잘 꾸며진 (집), 우리의 조상들이 당신을 찬양했던 곳이 불로 타버렸다 (이. 64:11).
예레미야서에서:
너희의 아버지(조상, father)가 먹고 마시지 않았느냐? 그러나 그는 공정과 공의를 행했다; 그때 그것은 그들과 더불어 더 할 나위없었다 (예. 22:15).
다시:
그들은 여호와께, 공의의 주택에, 그리고 그들의 조상들의 희망, 여호와에게 죄를 지었다
(예. 50:7).
다윗서에서:
우리는 우리의 귀로 들었었습니다, 오 하느님, 우리의 조상들이 우리에게 말했습니다, 당신께서 그들의 날들(시절)에서, 옛날의 날들에서 행하셨던 일들입니다 (시. 44:1).
위 “조상들”의 의미와 같은 의미가 다니엘서 11:23, 37, 38에도 있다. 고대 교회 속에 있던 이들이 위의 구절들에서 “조상들”에 의해 뜻해진 것은 글자 의미에서는 보여지지 않는다, 그러나 교회와 교회의 선들과 진리들이 취급되는 내적 의미에서만 보여진다. 더욱이 천국의 결혼, 즉, 선과 진리의 결혼인 교회 자체가 말씀에서 선 측면은 “아버지”로, 진리 측면은 “어머니”로 불리운다 (3703, 5581항).

그리고 그들이 바로에게 말했다. 이는 지각의 계속을 의미한다. 이는 “말하다(say)”의 의미가 지각함이다로부터; 그리고 바로의 표현함이 일반적 측면에서의 자연 평면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자연 평면에 의한 지각함의 계속이 의미되는 이유는 “그들이 바로에게 말했다”는 표현 때문이다.

우리는 이 토지에 머무르려고 왔습니다. 이는 기억 속의 지식 안에서 생명을 구하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체류하다(머무르다, sojourn)”의 의미가 가르쳐짐이 있다, 또한 사는 것이다로부터; 고로 “머무르기 위해 오다”는 생활을 찾는 것(살 곳을 찾는 것)을 뜻한다; 그리고 “토지”, 여기서는 이집트의 토지의 의미가 기억 속의 지식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기억 속의 지식들 안에서 진리의 생활함에, 또는 기억 속의 지식들 안에서 살 곳을 찾는 진리들에 주목해보자, 알려져 있는 것은, 영계에 있는 모든 것들, 그리고 영계로부터 자연계에 있는 모든 것들은 그것들이 나타나지 않게 하면서 있을 곳(은신처)을 찾는다, 찾는 이유는 결과 안에서 원인으로 행동하는 것, 즉 그것들이 어떤 것을 계속적으로 생산하려는 목적 때문이다. 이 은신처에 대한 대표적 실예가 몸일 것이다, 이 몸 안에 있으려고 찾는 것이 혼이다. 찾는 노력은 생기가 없는 것들이 장소를 차지하고 있는 자연의 최말단에서만 중지될 뿐이다. 자연계 안에서 이것은 모든 것 안에서 보여진다; 그리고 또한 영계에서 보여진다; 즉 영계에서는 선이 진리들 안에서 생활하려고, 진리들은 기억 속의 지식들 안에서 살려고 찾고 있다, 그리고 기억 속의 지식들은 감각의 것들 안에서, 그리고 감각의 것들은 세상에서 살 곳을 찾는다.
진리들이 기억 속의 진리들 안에 있다 라는 것에 더 특별히 주목해보자: 알려진 바, 내면의 진리들이 실로 기억 속의 진리들 안에 은근히 심어질는지 모른다, 그러나 이 진리들은 기억 속의 지식들 안에 선이 있을 때까지 생명을 가지고 있지를 않는다; 그 이유가 선 안에 생명이 있고, 선으로부터 진리들 안에 생명이, 고로 진리들을 통하여 선으로부터 기억 속의 지식들 안에 생명이 있기 때문이다. 이때 선은 진리들에게 혼이다, 그리고 진리들을 통하여 육체와 같은 것인 기억 속의 지식들 안에서 혼이다. 다시 말해 이웃을 향한 선행은 신앙에 생기를 넣고 움직이게 하고, 신앙을 통하여 자연적 수준의 마음에 속하는 기억 속의 지식에도 생기를 넣고 움직이게 한다는 말이다.
진리들과 기억 속의 지식들이 서로 분리되어 있다는 것을 아는 자는 오늘날 거의 없는 것 같다. 그 이유인 즉, 선행으로부터 신앙의 진리들 안에 있는 자가 거의 없는 탓이다, 그리고 신앙의 진리들 안에 선행이 없을 경우, 이것은 진리들이 아니라 기억 속의 지식들밖에 더 수준이 못된다, 그 이유가 진리들이 기억 속의 여느 지식들이나 매한가지로 우두커니 있는 것, 즉 쓰여짐을 받지 못한 채로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앙의 진리들이 선행으로부터 있을 때, 또는 선행이 그것들 안에 있을 때, 이때 그것들은 기억 속의 지식들과 인지할 수 있을 정도로 차별화 된다, 때로는 자신들을 기억 속의 지식들 넘어로 승강되게 하고, 지식들을 자기들 아래쪽에 두고 그것들을 이리저리 뒤적거린다. 이것은 사 후 인간의 상태로부터 아주 선명하게 보일는지 모른다. 이때야말로 그가 합리적으로 신앙의 진리들과 선들에 관하여 생각하고 말할 수 있고, 이것은 육체의 삶에서의 경우 보다 더 통찰력이 있다. 그러나 그는 기억으로부터 어떤 기억 속의 지식들을 되부를 수는 없다, 비록 그가 기억들을 다 가지고는 있긴 하지만, 그것은 그에게는 잊혀져 버렸고, 철폐된 것으로 있기 때문이다. 이상 살핀 바로 분명한 것은, 그 자체 영적인 신앙의 진리들과 그 자체 자연적인 기억 속의 진리들은 서로로부터 분리되고 있다는 것; 그리고 신앙의 진리들은 선행의 선에 애착함을 수단으로 기억 속의 지식들의 수준으로부터 천국을 향하여 승강되어진다는 것이다.

그 이유가 당신의 종들의 양떼를 위한 풀밭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는 기억 속의 지식들은 진리의 선이 결여되어 있다를 의미한다. 이는 “양떼를 위한 풀밭”의 의미가 진리의 선들이 있는 기억 속의 지식들이다로부터; 고로 “풀밭이 없다”란 진리의 선들이 없는 기억 속의 지식들이다. 내적 의미에서 “풀밭”은 영적 생명을 지탱시켜주는 어떤 것, 특별히 기억 속의 지식의 진리이다, 그 이유가 육체가 식품을 요구하듯, 혼은 이것을 바라기 때문이다. 이 진리가 자양분을 준다, 그러므로 “먹이는” 것은 가르침을 주는 것(배워지는 것)을 표시한다. 기억 속의 지식과 진리들이 인간의 혼을 떠받친다는 것은 인간이 어떤 것들을 알기를 갈망함으로부터, 또한 식품과 기억 속의 지식들과의 상응 관계로부터도 매우 분명해진다, 이 상응은 인간 안에서 당사자가 식품에 관여할 때, 그 자체를 보여준다, 그 이유가 당사자가 (식품과 상응에 관해) 이야기를 하고 듣는 동안이다면, 유즙을 받는 그릇들은 열리고 받되 그렇지 않았던 때보다 더 활짝 열리어 받기 때문이다. 영적 진리들과 가르침들 또한 만일 당사자가 선에 애착함 안에서 있다면 더 충분히, 보다 더 완전하게 깨닫는 결과를 준다. 진리들이 영적 생명에 자양분을 주는 것은 선한 영들과 천국에 있는 천사들과 더불어 더욱 또렷하다, 그 이유가 선한 영들과 천사들은 어떤 것을 알기를, 그리고 슬기로워지기를 언제나 갈망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이 이 영적 식품에 결핍할 때, 그들은 황무함을 느끼고, 그들의 삶은 께느른해 있고, 그리고 그들은 배고파 있다; 그리고 자기들의 갈망함이 만족될 때까지 그들은 자기들의 삶의 행복 안으로 회복되지 못하고 일어나지도 못한다. 그러나 기억 속의 지식들이 혼에 건강한 자양분을 생산해주기 위하여, 그것들 안에는 진리의 선으로부터 생명이 있음에 틀림이 없다. 만일 이 근원으로부터 생명이 없다면, 기억 속의 지식들은 인간의 내면의 생명을 떠받쳐주지 못한다, 그러나 오직 그의 자연적 생명, 그의 영적 생명이 아닌 채로 있을 뿐이다.
“풀밭”이 내적 의미에서 인간의 영적 생명을 떠받드는 것을 표시하는 것을 다른 구절로부터도 읽어볼 수 있다:
나는 너희에게 백성의 언약을 주었는데, 토지를 회복하기 위하여서; 묶인 자들에게 나가라 하고 말하기 위하여; 어둠에 있는 자들에게 너희는 밝히 나타내라 하도록 하기 위하여서 이다; 그리고 그들은 길들에서 먹여질 것이다. 모든 언덕들 위에 그들의 풀밭이 있을 것이다 (이. 49:8, 9);
“길들 위에서 먹여지는 것”은 진리들 안에서 가르쳐짐이 있다는 것을 표시한다; “모든 언덕들 위에 풀밭”은 선으로부터 떠받쳐지는 것을 표시한다; 그 이유가 “언덕들”, “산들”과 마찬가지로 사랑의 선들이기 때문이다.
예레미야서에서:
내 풀밭의 양떼를 흩트리고 파괴하는 목자들에게 화있을 것이다 (예. 23:1);
위에서 “풀밭”은 영적 생명을 떠받쳐주는 이런저런 것들을 표시한다.
다시:
시온의 제 1 인 자들은 숫사슴 같이 된다; 그들은 어떤 풀밭도 찾지 못했다 (애. 1:6);
“그들이 풀밭을 찾지 못했다”란 선의 진리가 없다를 표시한다
에스겔서에서:
나, 나 조차 내 양떼를 수색할 것이다, 나는 그들을 좋은 풀밭에서 먹일 것이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높은 산들에 그들의 우리가 있을 것이다; 고로 그들은 좋은 우리 안에 누워있을 것이다, 그리고 지방이 많은 풀밭에서 그들은 이스라엘의 산들 위에서 먹을 것이다 (겔. 34:11, 14);
위에서 “이스라엘의 산들 위에 있는 좋고 지방이 많은 풀밭”이란 진리의 선들을 표시한다. 다시:
너희가 좋은 풀밭에서 먹었던 것이 별것 아닌 듯 여기고, 너희 풀밭의 남을 것을 발로 짓밟았다 (겔. 34:18);
위 역시 의미는 비슷하다. 호세아서에서:
나는 너희를 광야에서, 메마름의 토지에서 알았다. 그들이 그들의 풀밭을 가졌을 때, 그들은 배불리 먹었다, 그리고 그들의 심정은 우쭐대었다 (호. 13:5, 6).
요엘서에서:
짐승들이 신음소리를 낸다, 수소의 목축들이 혼란에 빠져 있다, 그 이유는 그들의 풀밭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 작은 가축떼의 양떼들이 황무해지게 만들었다 (욜. 1:18).
다윗서에서:
여호와는 나의 목자이시다; 풀잎의 풀밭에 그분은 나로 눕게 만드실 것이다; 쉼의 물들 쪽으로 그분은 나를 인도하실 것이다; 그분은 내 혼을 회복하게 하실 것이다 (시. 23:1-3).
다시:
여호와께서는 우리를 만드셨다, 그리고 우리가 자신을 만든 것이 아니다; 그분의 백성, 그분의 풀밭의 양떼(도 그러하다). [또는,] 그러므로 우리는 그분의 것이다; 그분의 백성, 그리고 그분의 풀밭의 양떼 (이다) (시. 100:3).
위 구절들의 “풀밭”은 인간이 배워야 하는 영적 생명을 중요시하는 이런 저런 진리들을 표시한다; 영적 생명은 마치 풀밭 같아서 피폐해 있을 경우, 목축들이 쇠약해지듯, 마치 육체와 식품의 관계에서와 마찬가지이다. “풀밭”은 혼 또는 인간의 영을 회복되게 하고 떠받치는 선과 진리를 표시한다는 것을 주님의 말씀에서 읽을 수 있다:
나는 문이다; 어떤 자가 나로 말미암아 안으로 들어간다면, 그는 구원될 것이다, 그리고 들어가고 나간다, 그리고 풀밭을 발견할 것이다 (요. 10:9).
“풀밭”은 그분을 인정하고, 그분만으로부터 생명을 찾는 이들이 가지는 선들과 진리들이다.

기근이 가나안의 토지에 극심하였기 때문입니다. 이는 교회 안에도 이와 같은 것들이 결핍되고 있다를 의미한다. 이는 “기근”의 의미가 선의 곂핍이다로부터; 그리고 “가나안의 토지”의 의미가 교회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리고 지금 바라옵건대 당신의 종들이 고센의 토지에서 거주하게 해주십시오. 이는 그들이 그들의 한 중앙에서 살도록을 의미한다. 이는 “거주하다”가 사는 것이다로부터; 그리고 “고센의 토지”의 의미가 자연 평면의 한가운데, 또는 중앙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리고 바로는 요셉에게 말했다, 말하기를. 이는 기억 속의 지식들이 있는 자연 평면에서 지각함을 의미한다. 이는 “말하다(say)”의 의미가 지각함이다로부터; 바로의 표현함이 기억 속의 지식이 있는 자연 평면이다로부터; 그리고 요셉의 표현함이 내적 부분이다로부터, 이로부터 자연평면은 지각함을 가진다.

너의 아버지와 네 형제들이 너에게 왔다. 이는 자연 평면으로부터의 영적 선 안으로, 그리고 거기에서 교회의 진리들 안으로 천적 평면으로부터의 내적 부분이 유입됨에 관련하여를 의미한다. 이는 여기서 “아버지”인 이스라엘의 표현함이 자연 평면으로부터의 영적 선이다로부터; 그리고 여기서 “형제들”인 그의 아들들의 표현함이 자연 평면에 있는 교회의 진리들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천적 평면으로부터의 내적 부분의 유입이 의미된 이유는 이런 사항들이 요셉에게 말해지기 때문이고, 요셉에 의해 천적 평면으로부터의 내적 부분이 표현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연 평면 안으로, 또는 외적 부분 안으로의 유입이 내적 부분으로부터 오고 있다.

그리고 네 앞에 이집트의 토지가 있다. 이는 자연 평면 속의 기억 속의 지식들은 천적 평면으로부터의 내적 부분의 후원 아래 있다를 의미한다. 이는 “이집트의 토지”의 의미가 기억 속의 지식들이 있는 자연적 마음이다로부터; 그리고 “네 앞에”의 의미가 “요셉”인 천적 평면으로부터의 내적 부분의 후원 아래 있다로부터 알게 된다.

토지의 가장 좋은 곳에서 네 아버지와 네 형제들이 거주하게 하라. 이는 그들은 이것들의 가장 안쪽에서, 즉 기억 속의 지식들의 가장 안쪽에서 살 것임을 의미한다. 이는 “토지의 가장 좋은 곳”이란 기억 속의 지식들이 있는 자연적 마음의 가장 안쪽이다로부터; “거주하다(dwell)”의 의미가 사는 것이다로부터; 그리고 여기서 “아버지와 형제들”인 이스라엘과 그의 아들들의 표현함이 자연 평면으로부터의 영적 선과 거기 있는 교회의 진리들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가장 좋다(best)”가 가장 안쪽을 표시하는 이유는 똑바로 전망되는 곳이 가장 좋은 곳이기 때문; 그 이유가 눈은 가장 애착하고 기쁨이 있는 것에 똑바로 방향을 두기 때문이다; 이런 똑바로 바라보는 곳이 가장 안쪽인 이유는 이것이 중앙에 위치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가장 강한 빛에서 눈 앞에 있다; 한편 다른 것들은 주변을 빙둘러 위치한다, 그러므로 덜 명료하다, 마지막의 것은 불명료하다, 그 이유는 그것들에는 덜 애착이 있고 기쁨도 덜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내적 빛 앞에서 있는 기억 속의 지식의 모습이다. 내적 시각의 대상물은 기억 속의 지식들과 진리들 외에 다른 것은 없다. 기뻐해지는 것과 그것들에 있는 선이 그것들을 향하여 시각을 방향짓게 한다. 내적 부분에 일치하는 진리들과 기억 속의 진리들은 영적이고 천적인 진리들과 더불어 기뻐하고 감동되는 것들과 더불어 잘 보여지는 곳(즉 가장 안쪽) 아래에 와있는다, 그 이유가 그들에게 이런 진리들은 가장 좋은 것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거짓들과 그것들과 일치하지 않는 기억 속의 지식들은 자아 사랑과 세상 사랑의 악들이 애착하고 기뻐하는 것과 더불어 전망 아래 똑바로 오지 않는다.

그들로 고센의 토지에서 거주하게 하라. 이는 중앙에를 의미한다. 이는 “거주하다”의 의미가 사는 것이다로부터; 그리고 “고센의 토지”의 의미가 자연 평면의 중앙, 또는 가장 안쪽이다로부터 알려진다.

그리고 너는 그들 사이에 활동적인 자가 있는지 알아보라. 이는 교리에서 더 특출한 것을 의미한다. 이는 “활동적인 자”의 의미가 교리 측면에서 더 특출한 것이다로부터, 그 이유가 “사람(남자, vir)”이 총명 있는 자, 또한 진리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교리이다; 그리고 “활동적(activity)”이 원어에서는 힘, 용기를 의미하는 단어에 의해 표현되고 있다, 이는 내적 의미에서 힘을 가진 것, 고로 특출한 것이다.

그들을 내 가축떼의 제 1 인 자로 세워라. 이는 그들은 기억 속의 지식의 제 일 가는 것일런지 모른다를 의미한다. 이는 “제 1 인 자(prince)”의 의미가 제 일의 것이다로부터; 그리고 “가축떼”의 의미가 선이 있게 하는 진리이다로부터, 여기서는 진리들이 있는 기억 속의 지식들이다, 그 이유는 “내 가축떼 위에”, 즉 바로의 것 위에 라고 말해지기 때문, 바로를 수단으로 선을 있게 하는 진리들이 아닌 진리들이 있는 기억 속의 지식들이 의미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7-10절. 그리고 요셉은 그의 아버지 야곱을 모셔와서 바로 앞에 세웠다. 그리고 야곱은 바로를 축복하였다. 8 그리고 바로가 야곱에게 말했다, 네 나이가 얼마인가? 9 그리고 야곱은 바로에게 말했다, 내가 머무르고 있는 햇수들의 날들은 일백 삼십 년입니다. 많지 않으나 악이 내 생애의 햇수들의 날들이 되어 왔습니다. 나의 나이는 내 조상들의 체류함의 날들에서 그들의 생애의 햇수들에는 도달하지 못했습니다. 10 그리고 야곱은 바로에게 복을 빌었다, 그리고 바로 앞으로부터 나왔다.

그리고 요셉은 그의 아버지 야곱을 모셔왔다. 이는 일반적 진리가 현존함을 의미한다. 이는 “오게 함”, 또는 “모셔옴”의 의미가 현존을 만드는 것이다로부터, 그리고 누군가에게 “오다”가 현존이 있다 이다로부터; 그리고 야곱의 표현함이 자연적 진리의 교리, 여기서는 일반적 측면에서의 진리인데, 그 이유는 그의 아들들이 세부적 측면에서의 진리들을 표현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내적 부분으로부터 인 이유는 “요셉”이 내적 부분이기 때문, 이로부터 자연 평면에 진리들이 있기 때문이다. 일반적 진리가 요셉의 “아버지”라고 불리운다, 그 이유는 일반적 진리는 무엇 보다 먼저 인간에게 은근히 심어지기 때문이다. 이후에 이 진리는 세부적, 특수적 진리들로 풍요해진다, 그리고 마지막, 내적 부분으로부터, 즉 이성과 이해력으로부터 이런 진리들을 조망함을 출시한다. 이는 인간과 더불어서도 거의 같다, 그 이유가 그의 판단력이 유아로부터 점차 증가해가기 때문이다. 또한 이는 인간이 새로이 태어날 때, 또는 거듭나질 때의 영적 진리들과 선들과도 똑같다. 그러나 내적 부분이 일반적 진리로부터 자연 평면에 출시된 이후, 상태는 바뀐다, 그리고 내적 부분은 아버지로서 자연 평면에 있는 진리를 더 이상 인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종으로서 이다. 자기 아버지 마저 그의 종이 된다는 것이 요셉의 꿈에 의해 이미 선포되었다: 즉 태양과 달과 열한 별이 그에게 경례하게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때 당시 그의 아버지가 말했다, “네가 꾸었다는 이 꿈이 무엇이란 말이냐? 나와 네 어머니와 네 형제들이 엎드려 네게 절해야 한다는 말이냐?” (창. 37:9, 10); 그러므로 그의 아버지가 그의 아들들에 의해 요셉의 면전에서 그의 “종”이라고 자주 불리우기도 했다 (창. 43:28; 44:24, 27, 30, 31); 더욱이 요셉은 모든 이와 이집트의 토지에서 주인이었다, 따라서 그의 아버지도 여기에 당연히 포함된다.

그리고 바로 앞에 세웠다. 이는 기억 속의 지식들의 일반적인 것 안으로 은근히 심음을 의미한다. 이는 이미 살폈다.

그리고 야곱은 바로를 축복했다. 이는 결합을 경건하게 소원함, 그 결과로 열매 가 풍성히 있음을 의미한다. 이는 “축복하다”의 의미가 여기서는 결합을 경건히 소원함이다로부터, 즉 기억 속의 지식들과 진리가 결합함을 경건히 소원함이다, 그 이유가 여기서 이 결합이 다루어지기 때문이다. “축복하는(bless)” 것은 많은 것들을 의미한다; 영적 의미에서 이것은 선인 모든 것, 또한 번창하는 모든 것을 포함한다; 그리고 이로부터 사랑의 선과 선행의 선을 선물함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것은 결합을 의미한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진리에 애착함으로부터 열매가 풍성해짐을 의미한다; 또한 번창하기를 경건히 소원함도 의미한다; 여기서 그러므로 여기서 취급되는 것에 대한 경건한 소원, 즉 결합을 위해, 그리하여 열매 풍성해지기 위해서 이다. 그 이유가 열매가 풍성해짐은 결합에 뒤잇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결합이 결과되었을 때, 선은 증가하고, 진리는 배가되기 때문이다. 이때 선과 진리의 결혼이 있는 바, 이로부터 위의 결과들이 생산된다. 매춘 같은 짓의 경우 위의 질서를 건너뛸는지 모르나, 이 근원으로부터의 선은 가짜일 뿐이다; 진리 역시 선을 자체에 중요시하여 가지는 바, 이 선으로부터 자체의 향기를 파생시킨다.

그리고 바로는 야곱에게 말했다. 이는 기억 속의 지식들이 있는 자연 평면에서 교회의 일반적 진리에 관하여 지각함을 의미한다. 이는 “말하다 (say)”가 지각함이다로부터; 바로의 표현함이 기억 속의 지식들이 있는 자연 평면이다로부터; 그리고 야곱의 표현함이 교회의 일반적 진리이다로부터 알려진다.

당신의 생애의 햇수의 날들은 얼마나 많은가? 이는 영적 평면으로부터 자연 평면의 생명의 상태에 관하여를 의미한다. 이는 “날들”, 또한 “햇수들”의 의미함이 상태들이다로부터; 그리고 “생애(인생, life)”의 의미함이 자연 평면에 있는 영적 생명(삶), 즉 영적 평면으로부터의 자연적 평면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리고 야곱은 바로에게 말했다. 이는 대답을 의미한다.

내가 머무른 햇수들의 날들. 이는 생명의 연속인 것에 관하여를 의미한다.
이는 “날들”, “햇수들”의 의미함이 상태들이다로부터; 그리고 “체류함들, 머무름”의 의미가 삶(생명, life)과 훈련(가르침, instruction)이다로부터, 고로 생명의 연속적인 상태이다.

일백 삼십년입니다. 이는 상태와 품질을 의미한다. 이는 말씀에 있는 모든 숫자들이 어떤 것들을 의미한다, 고로 취급되는 어떤 것의 상태와 품질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이 숫자는 특별하게 지금까지 야곱에 속하고 관련되었던 생명의 상태와 품질을, 즉 자연 평면이 이때까지 영적 평면으로부터 가졌던 영적 생명의 상태와 품질을 의미한다.

많지는 않으나(few) 악이 내 생애의 햇수들의 날들이 되어 왔습니다. 이는 자연 평면의 생명(삶)의 상태는 시험들로 꽉 차 있어 왔다를 의미한다. 이는 날들과 햇수들이 상태들이다로부터; 그리고 “야곱의 생애”의 의미가 자연 평면에 있는 영적 삶(생명)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 상태에 있는 시험들이 “악”을 가지고 있어왔던 날들에 의해 의미되어진다. 모든 시험들에는 악이 나타난다, 그 이유가 그것들은 내면의 근심 불안과 비통함이고, 마치 지옥에 떨어짐 같기 때문이다. 이때 당사자는 자신의 악들의 상태 안에, 결과적으로 그를 고발한 악령들 사이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고로 (악령들이) 양심을 고문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사들은 그를 방어한다, 즉 천사들을 통하여 주님께서 보호하신다, 그 이유가 주님께서는 그를 희망과 신뢰함 안에서 간직하시려 하기 때문, 이러므로 내부로부터 두 힘의 맞붙음이 야기 된다. 특히 당사자가 영적인 것을 받을 때, 그의 자연 평면이 시험에 놓이는 경우가 많다, 그 이유는 자연 평면에 교리의 거짓들과 생활의 악이 주재하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야곱이 이를 자신에 관련하여 말한 것이다, 그 이유는 야곱에 의해 여기서 진리 측면에서의 자연 평면이 표현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내 조상들의 생애의 햇수들의 날들에는 도달하지 못했다. 이는 그들의 생명의 상태로까지는 들어 올려지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이는 “도달하다”의 의미가 들어 올려지는 것이다로부터; 그리고 “날들”, 그리고 “생애의 햇수들”의 의미가 영적 생명의 상태들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도달하다”가 여기서 들어 올려 지는 것인 이유는 그의 조상들, 이삭과 아브라함이 더 들어 올려졌기 때문, 즉 자기 보다 더 내면의 것들이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최고 의미에서 아브라함은 주님의 신성 자체를, 이삭은 주님의 신성한 합리성을, 그리고 야곱은 그분의 신성한 자연 평면을 표현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에 의해서는 인간과 더불은 천적 평면, 이삭은 영적 평면. 야곱은 자연적 평면을 표현했다, 그 이유는 인간의 거듭남은 주님의 신성이 되심의 형상이기 때문이다. 이상 모두로부터 “그리고 그것은 내 조상들의 생애의 햇수들의 밀들에는 도달하지 못했다”에 의해 그들의 생명의 상태로까지는 들어올려지지 못했다가 의미됨이 분명하다.

(** 그들의 체류한 날들에서. 이는 그들의 생명의 상태에 관련하여서를 의미한다. 이는 원문에서 생략되고 있다 역자주.)

그리고 야곱은 바로를 축복했다. 이는 결합을 위하여 경건하게 소원함, 그리고 그 결과 열매 있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는 바로 앞으로부터 나왔다. 이는 시간에 관련하여 분리됨을 의미한다. 이는 “나왔다”의 의미가 분리되어지다 이다로부터, 여기서는 바로에 의해 표현되는 기억 속의 지식이 있는 자연 평면으로부터 시간에 관련하여 분리됨이다. “나감”에 의해 시간에 관련하여 분리됨이 의미된다는 이러하다: 앞 페이지들에서 취급한 주제는 “이스라엘”인 자연 평면으로부터의 영적 선, 또한 그의 “아들들”인 자연 평면에 있는 교회의 진리들이 “요셉”인 천적 평면으로부터의 내적 부분과 결합하여 가는 것이었다; 그러나 자연 평면과의 결합은 아직 취급되지 않았었다, 결합은 아니고 오직 거기에 은근히 심어지는 것일 뿐이었다. 그러나 이어지는 구절, 즉 13-27절로부터 취급된다. 그러므로 “야곱이 바로 앞으로부터 나갔다”에 의해 시간에 관련하여서의 분리됨이 의미된 것이다.

11, 12절. 그리고 요셉은 그의 아버지와 그의 형제들이 살 곳을 마련했다, 그리고 그들에게 이집트의 토지에서 소유권을 주었는데, 그 토지의 가장 좋은 곳, 라암세스를 바로가 명령한대로 주었다. 12 그리고 요셉은 그의 아버지, 그리고 그의 형제들, 그리고 그의 아버지의 모든 집식구를 아기의 입에 따라 빵으로 떠받쳤다..

그리고 요셉은 그의 아버지와 그의 형제들이 살 곳을 만들었다. 이는 천적 평면으로부터의 내적 부분으로부터 영적 선과 교회 속의 진리들이 생명을 받음(생명을 이어감)을 의미한다. 이는 “살다(거주하다)”의 의미가 생명이다로부터; 여기서 “아버지”인 이스라엘의 표현함이 자연 평면으로부터의 영적 선이다로부터; 여기서 “형제들”인 야곱의 아들들의 표현함이 자연 평면에 있는 교회의 진리들이다로부터; 그리고 요셉의 표현함이 천적 평면으로부터의 내적 부분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 모두로부터 “요셉이 그의 아버지와 그의 형제들의 살 곳을 만들었다”에 의해 천적 평면으로부터의 내적 부분으로부터 영적 선과 교회의 진리들이 생명을 이어감을 의미함이 분명하다.

그리고 그들에게 이집트의 토지에서, 그 토지의 가장 좋은 곳에서 소유권을 주었다. 이는 기억 속의 지식들이 있는 자연적 마음의 가장 안쪽에서를 의미한다. 이는 “소유권”의 의미가 영적 생명이 거주함(residence)이다로부터; “이집트의 토지”의 의미가 기억 속의 지식들이 있는 자연적 마음이다로부터; 그리고 “토지의 가장 좋은 곳”이란 가장 안쪽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로부터 “그리고 그들에게 이집트의 토지의 소유권을 토지의 가장 좋은 곳에서 주었다”에 의해 기억 속의 지식들이 있는 자연적 마음의 안쪽에서 영적 생명이 거주함이다가 의미된다.

라암세스의 토지에서. 이는 마음의 가장 안쪽과 그것의 품질을 의미한다. 말씀에서 있는 모든 이름들, 인물이든, 장소이든 모두는 어떤 것들을 의미한다; 그리고 “고센의 토지”는 자연적 마음의 가장 안쪽을 표시한다, 그러므로 토지의 가장 좋은 곳인 “라암세스”는 자연적 마음에서 영적인 것에 관하여 가장 안쪽을 표시한다. 그러나 이 안쪽에 관한 본성은 인간에 의해 거의 납득되지 않는다, 그 이유가 이것은 무수하고 말로 나타낼 수 없는 것들을 함유하고 있기 때문, 고로 천국의 빛에서만 보여질 수 있다; 말씀에서 이외 다른 이름들의 경우도 마찬가지 이다.

바로가 명령한 대로. 이는 기억 속의 지식이 있는 자연 평면이 동의함과 더불어를 의미한다. 이는 “명령하다”가 유입이다로부터, 그러나 여기서는 동의함인데, 그 이유는 바로에 의해 표현되는 자연 평면이 내적 부분으로부터의 유입을 수단으로 자연 평면에 속하는 모든 것을 가지고 있기 때문; 그러므로 자연 평면이 명령한다는 것은 실로 그것으로부터의 명령 같이 나타나나, 실지로는 내적 부분으로부터 이기 때문이다; 고로 이것은 동의함이다. (자연 평면을) 내적 부분에 비교한다면, 이는 말과 생각의 관계와 같다; 인간의 말이 명령한다고 나타나지만, 실지로는 생각이 한 것이다.

그리고 요셉은 그의 아버지, 그리고 그의 형제들, 그리고 모든 그의 아버지의 집식구를 빵을 가지고 떠받쳤다. 이는 천적 평면으로부터의 내적 부분으로부터 영적 선과 자연 평면에 있는 교회의 진리들 안으로 이것들의 생명인 선이 계속적으로 유입되고 있다를 의미한다. 이는 “빵을 가지고 떠받든다”의 의미가 선의 유입이 있다 이다로부터; 그 이유가 “떠받드는” 것이 여기서는 계속적으로 흘러듦을 표시한다, 이로부터 인간은 영적 생명을 가진다, 그리고 “빵”은 사랑의 선이다; 요셉의 표현함이 천적 평면으로부터의 내적 부분이다로부터; 여기서 “아버지”인 이스라엘의 표현함이 자연 평면으로부터의 영적 선이다로부터; 여기서 “형제들”인 이스라엘의 아들들의 표현함이 자연 평면에 있는 교회의 진리들이다로부터; 그리고 “모든 그의 아버지의 집”의 의미가 영적 선 속에, 그리고 이 선으로부터 한 복합체에 있는 모든 것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상 살핀 바로부터 분명한 바, “요셉은 그의 아버지, 그리고 그의 형제들, 그리고 모든 그의 아버지의 집을 빵을 가지고 떠받쳤다”에 의해 천적 평면으로부터의 내적 부분으로부터 사랑의 선이 자연 평면에 있는 영적 선과 교회의 진리들 안으로, 그리고 영적 선 속에, 그것으로부터 있는 모든 것들 안으로 계속적으로 유입함이 있다가 의미됨이다.

아기들의 입에 따라서. 이는 각각의 순진의 선의 품질에 따라서를 의미한다. 이는 “입에 따라서”가 각각, 그리고 품질에 따라서 이다로부터; 그리고 “아기”의 의미가 순진의 선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천적 평면으로부터의 내적 부분으로부터의 유입이 순진의 선의 품질에 따라서 자연 평면에 있는 영적 선과 교회의 진리들 안으로 있는다에 주목해보자: 순진은 선행의 모든 선과 사랑의 모든 선에 품질을 주는 가장 안쪽에 있다. 그 이유가 주님은 순진을 통하여 선행 안으로 흘러드시기 때문, 그리고 순진에 비례하여 이러저러하게 선행을 받음이 있게 된다; 그 이유가 순진은 선행의 본질 자체이기 때문이다. 순진의 본성은 어린 아이를 거울로 삼으면 알는지 모른다. 그들은 자기들의 부모를 사랑한다, 그리고 그들만을 신뢰한다, 그리고 부모들을 기쁘게 하는 것 외의 다른 것에는 별 관심이 없다; 그리고 그들은 식품과 입을 것을 가지는데, 그것이 필요해서만이 아닌 그들의 기쁨을 위하여서도 이다; 그리고 그들이 자기들의 부모를 사랑하기에, 그들은 부모들에 동의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 애착의 기쁨을 가지고 행동한다, 이는 명령 뿐만 아니라 명령받기를 원함에서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 무엇이든에서 자기를 중시함은 없다; 이외 유아의 특징은 더 있겠지만 더 열거함은 생략한다. 그러나 우리가 유념할 것은, 어린 아이들의 순진은 순진이 아니라 순진의 외관(semblance)일 뿐이다는 것이다. 진짜 순진은 오로지 지혜 안에만 거주한다, 그리고 지혜는 신앙의 선과 사랑의 선으로부터 자신의 자아를 주님을 향한 자세를 견지하고 있을 때만에서 존재한다. 마치 어린 아이들이 부모를 향하여 자세를 취하는 위의 경우 같다.

13-26절. 모든 토지에는 빵이 없었다, 그 이유는 기근이 아주 극심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집트의 토지와 가나안의 토지는 기근으로 시달림을 겪고 있었다. 14 그리고 요셉은 이집트의 토지에서, 그리고 가나안의 토지에서 발견되는 모든 은을 거두어 들였다, 그 이유는 그들이 농산물을 샀기 때문이다. 그리고 요셉은 은을 바로의 집으로 가져왔다. 15 그리고 은이 이집트의 토지, 그리고 가나안의 토지에서 모두 소비되었을 때 모든 이집트 사람들이 요셉에게 와서 말하기를, 우리에게 빵을 주소서. 우리에게 은이 떨어졌다고 해서 왜 우리가 당신 옆에서 죽어야 합니까? 16 그리고 요셉이 말했다, 너희들의 가축을 다오. 그리고 은이 떨어졌다면 나는 너에게 너희 가축을 받고 (빵을) 줄 것이다. 17 그래서 그들은 그들의 가축을 요셉에게 가져왔다. 그리고 요셉은 그들에게 빵을 말과 양떼의 가축떼, 그리고 목축의 가축떼, 그리고 나귀들과 (바꾸어) 주었다. 그리고 그는 그들에게 빵을 공급하여 그 해에 모든 가축과 바꾸었다. 18 그리고 이 해가 끝났을 때, 그들은 두 번째 해에 그에게 왔다, 그리고 그에게 말했다, 우리는 이 은이 어떻게 소비되었는지 내 주께 숨기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짐승떼는 내 주에게 있습니다. 내 주 앞에서 우리에게 남아 있는 것은 우리의 몸과 우리의 지면 밖에 없습니다, 19 어찌하여 우리와 우리의 지면 모두가 당신의 눈 앞에서 죽어서야 되겠습니까? 우리와 우리의 지면을 빵으로 사십시오, 그리고 우리는 살 것이고, 우리의 지면은 바로에게 종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살도록 씨를 주십시오, 그러면 죽지 않습니다, 그리고 지면은 황폐해진채로 있지 않을 것입니다. 20 그리고 요셉은 바로를 위하여 이집트의 모든 지면을 샀다. 이집트인들은 각자 그의 들판을 팔았다, 그 이유는 기근이 그들에게 너무 가혹하게 극심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토지는 바로의 것이였다. 21 그리고 그는 백성들을 이집트의 경계 이 끝에서 저 끝 까지 이르러 도성으로 이동하게 했다. 22 그는 오직 성직자들의 지면은 사지 않았다. 그 이유는 그 몫은 바로에 의해 성직자들에게 분배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은 바로가 그들에게 주었던 할당된 몫을 먹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들의 지면을 팔지 않았다. 23 그리고 요셉은 백성에게 말했다, 보라 나는 오늘 바로를 위하여 너희와 너희의 지면을 샀다. 자, 여기에 너희를 위한 씨가 있다, 그리고 너희는 지면에 씨를 뿌리라. 24 그리고 수확하면 너희는 바로에게 오분의 일을 주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사분(오분의 사)은 너희를 위하여 있는데, 들판의 종자를 위하여, 그리고 너희의 식품을 위하여, 그리고 너희 집에 있는 그들을 위하여, 그리고 너희 아기들을 위한 식품을 위하여 이다. 25 그리고 그들은 말했다, 당신은 우리를 살아있게 만들었습니다. 우리는 내 주의 눈에서 은혜를 발견하였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바로의 종들입니다. 26 그리고 요셉은 이집트의 지면에 관하여, 즉 바로가 오분의 일을 가지되, 성직자들의 지면 만은 바로의 것이 아니라는 법령을 제정하였는데 지금까지도 유효했다.

그리고 모든 토지에는 빵이 없었다. 이는 선이 더 이상 나타나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빵”의 의미함이 사랑의 선과 선행의 선이다로부터; 그리고 거기 “모든 토지에서 아무것도 없다”의 의미가 더 이상 나타나지 않았다 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지금 이어지는 것은 천적 평면으로부터의 내적 부분이 자연 평면의 모든 것을 일반적인 원리 아래 질서 안으로 환원되게 하는 것이 취급되어지는데, 그 목적은 기억 속의 지식들이 교회의 진리들과 결합함이 결과되도록, 그리고 이 진리들을 통하여 영적 선과 , 그리고 이 선을 통하여 천적 평면으로부터의 내적 부분과 결함함이 결과되도록 하려 해서 이다. 그러나 기억 속의 지식들이 일반적인 원리 아래 질서 안으로 환원되게 함은 선의 황폐됨과 진리의 황무해짐을 통하여, 그리고 머지 않은 그 후에, 유지 지탱하는 것을 줌을 통하지 않고서는 결과되어질 수가 없다; 그러므로 지금 이어지는 것에서 모든 이런 것들이 내적 의미에서 취급되어진다. 그러나 많은 이유 때문에 이 세상에서의 삶 동안의 인간의 경우, 이런 사항들은 좀처럼 거행되지를 않는다; 이에 반해 다른 삶에서 그것들은 거듭나는 모든 이와 더불어 진행된다. 그리고 그것들이 이 세상의 인간과 더불어 거행되지 않기에, 거기서 거듭나는 자에게 이 사항들이 알려지지 않은 것으로 나타난다 해도 경이로워하지 않는다, 그리고 당사자에게는 이전에 듣지 않았던 비밀한 것들 같이 여겨질 뿐이다.

그 이유는 기근이 아주 극심했기 때문이다. 이는 황량함을 의미한다. 이는 “기근”의 의미가 선의 결핍과 지식들의 결핍이다로부터; 고로 “아주 심한 기근”은 황무함을 표시한다. 황무함에 주목함과 더불어 알아야하는 것은, 진리들과 선들, 그리고 거기로부터의 지식들은 천국에 있는 이들의 영적 생명을 만든다는 것이다, 그 이유가 이것들이 천적이고 영적인 식품들이어서, 이로부터 그들이 자양분을 얻기 때문이다. 이 식품들은 주님에 의해 매일 그들에게 주어진다. 그들에게 아침이 올 때, 선들이 공급된다, 정오일 때, 진리들이 공급된다; 그러나 저녁일 때, 선들과 진리들이 결핍된다, 그리고 이 결핍은 저녁에서 동틀녘과 아침이 되돌아 올 때까지 이다. 아침일 때 천사들은 식욕이 대단히 왕성해 있다, 이것은 지상의 인간들이 배고파 먹을 것을 찾을 때 보다 더 갈망하는 상태이다. 이 상태가 “기근”의 상태에 의해 의미된다, 그리고 이것은 일종의 황무함이기도 한데, 이것은 더 낮은 땅에서 있는 황무함과는 다른 황무함이다.
이 세상의 거의 누구도 믿을 수 없는 것은 천사의 천국이 진리들과 선들, 그리고 이것들에 대한 지식에 식욕을 돋운다는 것에 대하여서 이다; 그 이유가 이득과 영예와 쾌락에 몰입하는 것밖에 관심이 없는 자들은 이런 것들이 천사들에게 삶의 주제이다는 것에 의아해 할 것이다, 하여 말한다,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들이 무엇이다는 말인가? 이것들이 삶에 무엇을 해준다는 말인가? 생명을 주고 삶에 기쁨을 안겨주는 것들이 재물과 명예와 쾌락들이 아니던가?” 그러나 그들이 알아야 하는 것은, 이런 것들로부터 있는 것들은 육체의 생명이고, 혼의 생명은 아니다는 것, 전자의 생명은 육체와 더불어 사라지고 후자의 생명은 영원히 남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세상에 거처가 있는 동안 영적 생명에 관하여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는 자는 자신의 악과 상담할 뿐이다.
황무함에 더 주목해보자, 황무함은 식욕을 이끌어내기 위하여 있다는 것이다, 그 이유가 선들과 진리들은 식욕의 강도에 따라서 받아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램들이 식욕에 의해 흥분될 때, 선과 진리를 획득함이 있어 그들로 행복과 만족함을 향유하게 한다. 그러므로 다른 삶에서 황무함에 있는 이들은 머지 않아 갱생되어저 그들의 바램들을 달성한다. 이런 교차됨을 수단으로 모든 이는 완전해져 간다. 주목해둘만한 것은, 자연계의 하루 안에 있는 교차됨이다, 즉 아침, 정오, 저녁, 밤, 그리고 다시 아침인데, 이것은 영계의 교차됨을 완전하게 표현한다는 것, 이런 차이는 있다: 영계의 교차됨은 이해력과 의지력 안으로 흘러들고, 하여 생명 속에 있는 이것저것들을 유지지탱시킨다는 것, 하여 그것을 떠받쳐준다는 것이다.
더 주목해두어도 될 만한 것은, 저녁의 그늘과 밤의 어두움은 주님으로부터 오지 않는다는 것, 그러나 천사들, 영들, 인간들에 속하는 것들로부터 온다는 것이다. 그 이유가 태양으로서의 주님은 계속 빛나고 흘러들지만, 인간에 있는 인간 자신의 것으로부터의 악들과 거짓들이주님으로부터의 그것들을 돌려있게 하고 뒤짚는다는 것, 고로 저녁의 그늘로, 밤의 어둠 안으로 자신들을 인도한다는 것이다; 이는 자연계의 태양도 같다. 그것은 계속 비추고 흘러들지만, 지구가 자전함으로 태양으로부터 돌려세워 자체를 그늘과 어둠으로 데려다 놓는다.
자연계에 이런 교차가 있는 이유는 자연계가 영계로부터 출시되었기 때문, 고로 영계로부터 존속하기 때문이다; 이러므로 보편적 자연은 주님의 왕국을 표현하는 극장 무대이다. 교차됨이 영계에서 존재하는 이유는 천국에 있는 모든 이는 계속적으로 완전해져가야 하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이런 교차됨은 자연계 안에도 있다, 그렇지 않으면 결핍과 더불어 멸해지고 만다.
더 알면 도움이 될 것은, 천국에는 밤이 없다는 것, 오직 저녁까지만 있다는 것, 이 저녁을 계승하는 것은 아침에 앞서 있는 동틀녘이다. 그러나 지옥에는 밤이 있다. 거기에도 교차됨은 있다, 그러나 이것들은 천국의 교차됨에 반대적이다; 그 이유가 지옥에서 아침은 탐욕들의 열이다, 정오는 거짓의 근질근질함(참을 수 없는 욕망)이다, 저녁은 불안 근심이다, 밤은 고통이다. 이런 모든 교차됨을 통하여 밤이 통치한다, 그리고 이것은 다양한 그늘과 밤의 어두움만을 표출한다.
더 알아야 하는 것은, 영계에서 이 사람의 교차됨과 저 사람의 교차됨은 같은 자가 없다는 것이다; 또한 거기의 교차됨은 (자연계 같이) 시간대로 나뉘어지지 않고 그들에게 보이도록 표출되는 상태의 다양함들이다; 그 이유가 시간이라는 것은 자연계 안에 있고, 상태라는 것은 영계 안에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집트의 토지와 가나안의 토지는 기근으로 시달림을 겪고 있었다. 이는 이것은 자연 평면에서와 교회 내부에서 있었다를 의미한다. 이는 “이집트의 토지”의 의미가 기억 속의 지식들이 있는 자연적 마음이다로부터; “가나안의 토지”의 의미가 교회이다로부터; 그리고 “기근”의 의미가 황무함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러므로 “이집트의 토지와 가나안의 토지는 기근으로 시달림을 겪고 있다”는 말에 의해 기억 속의 지식들이 있는 자연 평면, 그리고 교회 내부에 황무함이 있었다가 의미된다.

그리고 요셉은 모든 은을 거두어 들였다. 이는 참되고 개작할 수 있는 모든 기억 속의 지식을 의미한다. 이는 “거두어 들임”의 의미가 하나로 함께 가져옴이다로부터; 요셉의 표현함이 천적 평면으로부터의 내적 부분이다로부터; 그리고 “은”의 의미가 진리이다로부터, 그러나 여기서는 참되고 개작 가능한 기억 속의 지식이다, 그 이유는 이 은은 이집트의 토지와 가나안의 토지에 있는 은이라 말해졌기 때문인데, 이제 이어진다. 이로부터 “요셉이 모든 은을 거두어 들였다”에 의해 천적 평면으로부터의 내적 부분이 참되고 개작 가능한 기억 속의 지식을 하나 안으로 함께 가져다 놓았다가 의미된다. 기억 속의 지식이 참되고 개작 가능하다라고 말해진 이유는 오류들에 의해 어두워지지 않아왔던 기억 속의 지식들은 일소되어질 수 없는 한, 비적합한 상태가 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타인들에 의해, 또는 자신의 자아에 의해 거짓들과 악들에 응용됨으로 뒤집어지지 않은 기억 속의 지식들이 있다. 이것들은 한때 언제인가 감명된 적이 있어 기억 속에 있고 남아 있다. 그러므로 이런저런 손상을 입지 않아 자유로운 모든 기억 속의 지식들은 참되고 적합해지게 개작할 수 있는 지식들이다.

이집트의 토지에서, 그리고 가나안의 토지에서 발견되는. 이는 자연 평면에, 그리고 교회에 있었던…을 의미한다. 이는 “이집트의 토지”의 의미가 기억 속의 지식들이 있는 자연 평면이다로부터; 그리고 “가나안의 토지”의 의미가 교회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여기서의 교회는 인간과 더불은 교회 속에 있는 것이 뜻해진다. 그 이유가 인간 진리와 선 안에 있을 때 그는 교회이기 때문, 일반적 교회 역시 이런 사람들의 모임으로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그들이 농산물을 샀기 때문이다. 이는 그러므로해서 그들은 버텨냈다를 의미한다. 이는 “농산물(produce)”의 의미가 교회의 진리이다로부터; 그리고 “사다”의 의미가 자기 것이 되게 하다 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고로 의미는 버텨내는 것이다, 그 이유는 취급되는 주제가 “농산물”에 의해 의미되는 영적 식품이기 때문이다. 이 식품을 자기 것이 되게 할 때 영적 생명은 버텨낸다.

그리고 요셉은 은을 바로의 집으로 가져왔다. 이는 모든 것은 자연 평면에서 일반적인 것에 관련되는 쪽으로 가져와졌다를 의미한다. 이는 “가져오다”의 의미가 관계 안으로 가져오고 받아들이는 것이다로부터; “은”의 의미가 참되고 개작할 수 있는 기억 속의 지식이다로부터; 그리고 바로의 표현함이 일반적 측면에서의 자연 평면이다로부터; 고로 “바로의 집”은 자연 평면에 있는 일반적인 것, 그 이유는 복합체 안에 모든 것이 있기 때문이다.
참되고 개작할 수 있는 기억 속의 지식들이 일반적인 것에 관련됨 쪽으로 가져와졌다는 말에 주목해봄에서 일단 알아야 할 것은, 어떤 것이 있기 위하여, 모든 기억 속의 지식들, 그리고 또한 진리들, 무엇이든 그것들은 일반적인 것들에 관련됨 안으로 가져와짐에 틀림이 없다, 그리고 일반성 아래 놓여지고 포함되고도 있어야 함이 틀림이 없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들은 산산히 흩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기억 속의 지식들과 진리들이 어떤 것이 되기 위하여, 그것들은 하나의 형체 안으로 가져와져야 함에 틀림이 없다, 그래야 그것들은 서로 상호적으로 중요시하기 때문이다, 이러려면 그것들은 하나의 일반성 아래에서 연계되어 있어야만 한다; 그러므로 형체 안에서 그것들을 함께 붙들고 있는 것은 이 일반성이고, 그 안에 있는 각각은 시종일관 자신의 품질을 가질는지 모른다. 일반성 자체는 다른 일반성과 함께 더 큰 일반성 아래 관련됨 쪽으로 가져와짐에 틀림이 없다, 그리고 더 큰 일반성은 다시 그 보다 더 큰 일반성 아래로 등등이다. 그렇지 않으면 이것들은 사라지고 만다.
모든 것이 다함께 공존하게 붙드는 가장 큰 보편적 일반성은 주님 자신이시다, 그리고 함께 붙드는 것은 그분으로부터 진행하는 신성한 진리이다. 더 일반적인 것은 영계에서는 일반적 사회들이다, 이 쪽으로 신성한 진리는 흘러들고 그것들을 서로로부터 종류별로 구분되게 한다. 일반적인 것들은 더 일반적 사회 아래에서 덜 일반적이다. 더 일반적 사회들은 인간 안에서 (팔 다리 같은) 부분들, 기관, 내장 등에 상응한다. 이들은 경이로운 연결을 수단으로 상호적으로 중요시하면서 하나의 형체를 이루고, 서로가 함께 서로를 붙들고 있다. 또한 하나로서 모두를 함께 표출한다. 인간 안에서 가장 보편적 일반성은 함께 한 개를 붙드는 것인 혼이다. 고로 또한 주님으로부터 진행하는 신성한 진리이다, 그 이유가 이 진리는 계속적으로 흘러들면서 인간으로 그렇게 있도록 해주는 원인이기 때문이다.
주님으로부터 진행하는 신성한 진리는 “모든 것들은 말씀을 통하여 창조되었다”라고 불리운다 (요. 1:1-3), 또는 이를 통하여 모든 것들은 존재 안으로 왔었다, 결과적으로 모든 것들은 이를 통하여 존속한다. 보편적 자연계에 있는 모든 것들은 일반성 아래, 각각은 그것 자신의 일반성 아래 있다; 그리고 이와 달리해서는 그것들은 존속할 수 없다는 것은 누구나 자연에 있는 무엇이든 조금 깊이 관찰하면 금방 식별되는 사안이다.

그리고 은이 이집트의 토지, 그리고 가나안의 토지에서 모두 소비되었을 때. 이느 돌보지 않아 황폐해진 터에 참되고 융통성 있는 기억 속의 지식이 자연 평면에서, 그리고 교회에서 더 이상 보여지지 않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이는 “모두 소비됨”의 의미가 더 이상 보일 수 없이 있다 이다로부터; “은”의 의미가 참되고 융통성 있는(개작할 수 있는) 기억 속의 진리이다로부터; “이집트의 토지”의 의미가 기억 속의 지식들이 있는 자연 평면이다로부터; 그리고 “가나안의 토지”의 의미가 교회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것이 황무함 때문이었다는 것은 앞에 살핀 바로부터 분명하다.

모든 이집트 사람들이 요셉에게 왔다. 이는 내적 부분에 신청함을 의미한다. 이는 “그에게 오다”의 의미가 신청하는 것이다로부터; “이집트”의 의미함이 기억 속의 지식이다로부터; 그리고 요셉의 표현함이 내적 부분이다로부터 알려진다. 자연 평면에서 모든 기억 속의 지식은 내적 부분의 후원 아래 있었다는 것이 요셉이 이집트의 모든 토지를 통치했다에 의해 의미되었다, 그러나 자연 평면에서 기억 속의 지식들과 교회의 진리들이 결합하는 것이 내적 의미에서 이제 묘사되어진다.

말하기를, 우리에게 빵을 주소서. 이는 영적 생명의 지탱에 관하여 간원함을 의미한다. 이는 “주다”의 의미가 빵을 서술할 경우, 지탱하는 것이다로부터; 그리고 “빵”의 의미가 영적 생명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빵”에 의해서는 특별하게는 사랑의 선과 선행의 선이 의미 되나, 일반적으로는 영적 생명이 의미된다, 그 이유는 이 경우에서 “빵”에 의해 모든 식품이 뜻해지기 때문; 그리고 일반적으로 모든 식품이 뜻해질 때, 영적 생명이 뜻해진다, 그 이유가 영적 의미에서 일반적 측면에서의 식품은 모든 사랑의 선과 신앙의 진리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 둘이 영적 생명을 만들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은이 떨어졌다고 해서 왜 우리가 당신 옆에서 죽어야 합니까? 이는 진리가 결핍된 이유로 영적 죽음이 초래되는 도리밖에는 달리 없음을 의미한다. 이는 “죽는다”의 의미가 영적 죽음이다로부터(아래에서 살핀다); 그리고 “은이 떨어짐”의 의미가 진리의 결핍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진리의 결핍이 있을 때 영적 죽음이 있다에 주목하면 이렇다: 영적 생명은 진리들에 따른 활동들, 결과적으로 사용함들(uses)에 존재한다; 그 이유가 영적 삶에 있는 이들은 생활에 긴요하게 필요할 것으로 여겨 진리들에 식욕을 가지고 갈망하기 때문이다, 즉 그들은 기회가 되면 진리들을 사용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사용됨에 일치하는 만큼에서 진리를 받을 수 있고, 그 만큼에서 영적 생명도 지닌다, 그 이유는 그만큼에서 그들은 총명과 지혜의 빛 안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말씀에서 “저녁”에 의해 의미되는 때인, 그늘짐의 상태가 오는 때, 즉 진리들이 부족해졌을 때, 영적 생명은 고민하고 괴로워한다; 그 이유가 이런 것들이 자신들에게는 그늘에 속하는 것으로, 영적인 죽음에 속하는 것으로 표출되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이런 경우, 그들은 이전 같이 빛 안에 간직되고 있지 않기 때문, 그러나 부분적으로 그들 자신 쪽으로 뒤미끄려져 놓여 있기 때문이다; 거기 그늘로부터 영적 죽음의 형상, 지옥에 떨어짐이 발생된다.
“죽음”에 의해 영적 죽음, 또는 지옥에 떨어짐(damnation)이 의미되는 것은 말씀의 많은 구절들에서 분명해지는데, 아마 아래에 열거하는 구절들만 가지고도 충분할지 모른다:
이사야서에서:
정의 안에서 그분은 가난한 자를 심판하실 것이다, 그리고 정직을 가지고 땅의 야비함을 꾸짖을 것이다. 그러나 그분은 그분의 입의 막대를 가지시고 땅을 쳐부실 것이다, 그리고 그분의 입술의 숨을 가지고 그분은 사악한 자를 죽게 하실 것이다 (이. 11:4);
주님에 관해서 이다. “그분의 입의 막대”, 그리고 “그분의 입술의 숨”은 신성한 진리로부터 심판이 있다를 표시한다; “죽는” 것은 지옥에 떨어짐을 표시한다. 다시:
그분은 영원하게 죽음을 들키실 것이다: 그리고 주 여호비께서는 모든 얼굴들 위로부터 눈물을 닦으실 것이다 (이. 25:8).
다시:
죽은 자는 살지 못할 것이다; 르바임(Rephaim)은 일어나지 못할 것이다; 그 이유는 당신께서 방문하셨기 때문이다, 당신이 그들을 소멸하셨다 (이. 26:14).
다시:
너희 죽은 자는 살 것이다, 나의 주검, 그들은 일어날 것이다 (이. 26:19).
다시:
너희는 말했었다, 우리가 죽음과 언약을 만들었다, 그리고 지옥과 더불어 우리는 환상을 만들었다; 죽음과 더불은 너의 언약은 폐지되었다, 그리고 지옥과 더불은 너의 환상은 서지 못할 것이다 (이. 28:15, 18).
예레미야서에서:
너희는 빛을 기다린다, 그러나 그분은 그것을 죽음의 그림쪽으로 돌리신다, 그분은 그것을 짙은 어둠으로 만드신다 (예. 13:16).
에스겔서에서:
너희는 보리 한웅큼과 빵 조각들 때문에 내 백성 사이에서, 죽지 않아야 하는 혼들을 살해되게, 살아 있지 않아야 할 혼을 살게 만들어 나를 모독했었다 (겔. 13:19).
호세아서에서:
나는 그들을 지옥의 손으로부터 되찾을 것이다; 죽음으로부터 나는 그들을 건질 것이다; 오 죽음아, 나는 너의 유해물(pest)들일 것이다; 오 지옥아, 나는 너의 파멸일 것이다 (호. 13:14).
다윗서에서:
당신은 나를 죽음의 큰문들로부터 들어올리신다 (시. 9:13).
다시:
나의 눈을 밝아지게 하소서, 하여 우연히라도 제가 죽음에 잠들지 않도록 (시. 13:3).
다시:
죽음의 끈들이 나를 휘감았다, 그리고 지옥의 끈들 (시. 18:4, 5).
다시:
그들은 지옥에서 양떼로서 놓여질 것이다; 죽음이 그들에게 풀밭일 것이다 (시. 49:14).
계시록서에서:
나는 지옥의 열쇠와 죽음의 열쇠를 가지고 있다 (계. 1:18).
다시:
극복하는 자는 두 번째 죽음에서 상해받지 않을 것이다 (계. 2:11).
다시:
나는 너의 일들을 알고 있다, 네가 살아 있다는 이름을 가지고 있다는 것, 그러나 너는 죽어 있다. 너는 경계하라, 그리고 막 죽으려 하는 그 남은 것들을 확고히 굳히라 (계. 3:1, 2).
마태복음서에서:
어둠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다; 그리고 죽음의 지역과 그림자에 앉은 그들에게, 그들에게 빛이 일어나졌다 (마. 4:16).
요한복음서에서:
내 말을 듣는 자, 나를 보내신 그분을 받는 자는 영원한 생명을 가질 것이다, 그리고 심판 안으로 오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죽음으로부터 생명으로 건너갔다 (마. 5:24).
다시:
나는 떠나간다, 그리고 너희는 나를 찾을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너희의 죄 안에서 죽을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너희는 너희의 죄들 안에서 죽을 것이다고 말했다; 그 이유가 너희가 나는 있다를 믿지 않으면, 너희는 너희의 죄들 안에서 죽을 것이다. 만일 누가 내 말을 지킬 것이다면, 그는 죽음을 결코 보지 않을 것이다 (요. 8:21, 24, 51, 52).
“죽음”이 지옥에 떨어짐이기에, 표현 교회의 백성은 죽은 자를 만지는 것을 금해왔다, 그리고 만일 그들이 접촉되었다면, 그들은 불결한 자이었다, 그리고 깨끗해져야 했다 (겔. 44:25; 레. 15:31; 21:1, 2; 22:8; 민. 6:6-12; 19:11-끝절까지).

그리고 요셉이 말했다. 이는 내적 부분으로부터 대답이 있다를 의미한다. 이는 요셉의 표현함이 내적 부분이다로부터; 이것이 대답을 의미함은 분명하다.

너희들의 가축을 다오. 그리고 나는 너희 가축을 받고 너에게 (빵을) 줄 것이다. 이는 그들은 장래 진리로부터의 선을 가져와야 그들은 버텨낼 수 있을 것을 의미한다.
이는 “가축”의 의미가 진리의 선들이다로부터; 그리고 그들에게 “준다”의 의미, 즉 빵인데, 이는 영적 생명을 유지지탱함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만일 은이 떨어졌다면. 이는 만일 진리가 더 이상 그들에게 보여질 수 없다면을 의미한다. 이는 “은이 떨어졌다면”의 의미가 진리의 결핍이다로부터, 고로 진리가 더 이상 보여질 수 없다 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진리가 보여질 수 없다라고 말한 이유는 황무함의 상태에서 진리는 마치 도망가버린 듯 비쳐지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진리는 현존한다, 그 이유는 여하튼 가지고 있는 모든 진리와 선은 주님으로부터 인간, 영, 그리고 천사에게 주어진 것이기 때문, 하여 언제나 남아 있고, 그것들이 거두어가지는 일은 없다. 그러나 황무함의 상태에서 그것들은 나타나있지 않기 위해 그들 자신의 것을 수단으로 희미함에 있는다; 그러나 빛의 상태가 되돌아 올 때, 그것들은 현존하고 보여질 수 있다. 이것이 진리가 보여질 수 없다라고 말한 이유이다.

그래서 그들은 그들의 가축을 요셉에게 가져왔다. 이는 진리의 선들, 즉 그들이 장래 가져와야 하는 진리의 선들을 의미한다. 이는 “가져오다”의 의미가 장차 가져오는 것이다로부터; 그리고 “가축”의 의미가 진리의 선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리고 요셉은 그들에게 …빵을 주었다. 이는 영적 생명에 관련되는 자양분을 의미한다. 이는 “빵을 주다”의 의미가 영적 생명을 지탱함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말들을 위하여(말 대신에…). 이는 지적 부분으로부터의 기억 속의 지식들을 의미한다. 이는 “말들(horses)”이 지적인 것들이다로부터; 그리고 그것들이 이집트를 서술했고, 이집트에 의해 기억 속의 지식들이 의미되는 바, 여기서의 “말들”은 지적 부분으로부터의 기억 속의 지식을 표시한다. 여기서 잠간 살펴야 하는 것은 지적 부분으로부터의 기억 속의 지식이 무엇인지 이다. 인간은 지력(지성, intelluctual)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는 의지력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이 지력과 의지력은 그의 내적 인간 뿐만 아니라 외적 인간도 가지고 있다. 인간에 있는 지력은 그의 유아기로부터 그의 성숙기에 이르기까지에서 자라고 증가한다. 그리고 경험에 속하는 것과 기억 속의 지식에 속하는 것으로부터 바라보고 관찰하고 판단하는 것들에 존재한다; 또한 결과들로부터 원인들을 바라보기도 한다; 그리고 원인들과 연결하여 결과(consequense)들을 바라보기도 한다. 고로 지력은 시민적, 도덕적 생활의 범주에 속하는 이런저런 것들을 납득하고 지각함에 존재한다. 이것은 천국으로부터의 빛의 유입으로부터 존재 안으로 온다; 그러므로 모두 각각의 인간은 지력에 관하여 완전해질 수 있다. 지력은 인간이 응용(신청, appiication)하려는 것에 따라서, 자신의 삶에 따라서, 그리고 자신의 본성에 따라서 모든 이 각각에게 주어진다; 지력은 만일 건전한 마음 바탕에 있다면, 결핍되는 일이 없다. 지력이 주어지는 목적은 당사자로 자유 안에, 선택함 안에 있도록 하려 해서, 즉 선과 악을 자유함에서 선택하게 하려 해서 이다. 인간이 위에 상술한 것과 같은 지력을 가지지 않으면, 그는 이것을 스스로로부터 행할 수 없다, 고로 어떤 지력이든 그에게 자기 것이 되게 할 수 없다.
더 알아야 할 것은, 인간에게는 영적 진리와 선의 그릇이기 위하여 영적인 것을 받는 지력이 있다는 것이다. 그 이유가 선에 관한 어떤 것, 즉 선행에 관한 어떤 것, 진리에 관한 어떤 것, 즉 신앙에 관한 어떤 것도 지력을 가지지 않은 자 안으로는 은근히 심어질 수가 없기 때문, 그러나 그의 지력에 따라서만 은근히 심어진다; 그러므로 인간은 그의 성년기 까지, 즉 그가 지력을 소유할 때까지 주님에 의해 거듭나지지 않는다. 지력을 소유하기 전의 인간의 마음은 메마른 지면에 뿌려져 있는 씨 같이 사랑의 선과 신앙의 진리는 당사자에게 있다. 그러나 인간이 거듭나져갔을 때, 그의 지력은 선인 것, 이로 말미암아 진리인 것을 보고 지각하는 쪽에서 쓰임새(use)를 수행한다; 그 이유가 지력은 천국의 빛 속에 있는 이런저런 것들을 자연의 빛 속에 있는 것들 안으로 운반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전자는 후자 안에서 나타난다, 마치 인간의 내면의 애착이 컽치레에서 자유한 얼굴로부터 나타나는 것과 같다; 그리고 지력이 이 사용(쓰임)을 수행하는 바, 말씀에서, 교회의 영적 부분이 취급되는 많은 구절들에서 지력 또한 취급된다, 이에 관하여 주님의 신성한 자비로부터 다른 장소에서 더 살필 기회가 있을지 모른다.
이상 살핀 바로부터 지력으로부터의 기억 속의 지식들이 뜻하는 것, 즉 그것들은 인간이 악인지, 선인지를 지적으로 납득하고 지각하는 이런저런 것들을 확증하는 기억 속의 지식들이다. 이 기억 속의 지식들이 말씀에서 “이집트로부터의 말들”에 의해 의미되고 있다:
도움을 위해, 그리고 말들에 기대기 위해, 이집트로 내려가는 자들에게 화있을 것이다; 그리고 병거를 신뢰하는 이유는 그것들이 많고 마부가 있고 강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것들은 이스라엘의 거룩한 분을 바라보지 않는다, 여호와를 찾지 않는다. 이집트는 인간이지 하느님이 아니다; 그리고 그의 말들은 육이지 영이 아니다 (이. 31:1, 3);
위에서 “이집트로부터의 말들”은 뒤집어진(악용된) 지력으로부터의 기억 속의 지식들을 표시한다.
에스겔서에서:
그는 이집트로 사절들을 보냄으로 그를 향하여 반역했다, 이집트가 자기에게 말과 많은 사람들을 주지 않을 까 해서 였다. 그가 잘 될까? 이 짓을 한 그가 도망할까? (겔. 17:15);
위에서 “이집트로부터의 말들”은 타락한 지력으로부터의 기억 속의 지식들을 표시한다, 이것이 신앙을 주제로 상담하고 있다, 한편 말씀, 즉 주님은 자기들의 타락된 지력으로부터가 아니면 믿어지지 않는다; 고로 믿는 것이 도대체 없다; 그 이유가 부정함이 타락한 지력을 통치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기억 속의 지식들이 파멸되는 것이 바로의 말들과 병거들이 수프 바다(홍해)에 익사하는 모습으로 표현되었다; 그리고 이 지식들이 “말들”에 의해 의미되기 때문에, 그리고 거짓 교리적인 것들이 “병거들”에 의해 의미되기 때문에, 그러므로 “말들과 병거들”은 말씀에서 자주 언급되고 있다, 출. 14:17, 18, 23, 26, 28을 보라; 그리고 그 이후 있은 모세와 미리암의 노래에서:
바로의 말이 안으로 갔다, 또한 그의 병거도, 그리고 그의 마병도 바다 안으로 갔다; 그러나 여호와께서는 바다의 물들을 그들 위에 되돌아오게 하셨다. 너희는 여호와께 노래하라, 그 이유가 그분은 자신을 드높이셨기 때문이다; 말과 기병들을 그분은 바다 안으로 내던지셨다
(출. 15:19, 31).
위와 비슷한 기억 속의 지식들이 이스라엘 위에 세우는 왕을 위해 모세의 책에 규정해 둔 것에 의해서도 의미되고 있다;
만일 왕을 바란다면, 형제들의 한가운데로부터의 왕이 그들 위에 놓일 것이다; 오직 그는 자신을 위하여 말을 번성되게 말 것이다, 말들을 불리려고 이집트 쪽으로 백성을 되돌리지 말 것이다 (신. 17:15, 16);
왕은 신성한 진리 측면에서의 주님을 표현했다, 고로 총명 측면에서의 주님을 표현했다, 그 이유가 진짜(순정, genuine)가 신성한 진리로부터 있을 때 총명이 있기 때문이다. 총명은 신성한 진리인 말씀을 수단으로 포획되어야만 한다는 것, 그리고 자신의 지력으로부터의 기억 속의 지식들을 수단으로 해서는 안된다는 것이 왕은 “말들을 불려서는 안되고 말들을 불리겠다고 이집트로 사람들을 되돌리지 말라”는 훈령에 의해 의미되고 있다.

양떼의 가축떼, 그리고 목축의 가축떼. 이는 진리로부터의 내면과 외면의 선들을 의미한다. 이는 “양떼”가 내면의 선들, “목축떼”가 외면의 선들이다로부터; 그리고 이 선들이 진리로부터의 선들이기에 “양떼의 가축떼”, 그리고 “목축의 가축떼”라고 말해진다. “가축떼(cattle)”는 진리의 선이다.

그리고 나귀들. 이는 섬김의 것들을 의미한다. 이는 “나귀들”의 의미가 섬김(봉사함)의 것들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리고 그는 그들에게 빵을 공급하여 … 모든 가축떼와 바꾸었다. 이는 내적 부분으로부터의 선의 유입을 통하여 버텨나감을 의미한다. 이는 “빵을 공급하는” 것, 또는 그들에게 빵을 주는 것의 의미가 영적 생명을 유지해감이다로부터; “가축떼”의 의미가 진리의 선이다로부터; 그리고 그것들을 공급하는 요셉의 표현함이 내적 부분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것이 내적 부분을 통하여 선의 유입으로부터 있은 이유는 자연 평면에서 영적 생명의 모든 지탱함은 내적 부분으로부터의 선의 유입, 즉 내적 부분을 통하여 주님으로부터의 선의 유입 때문이어서 이다. 유입(influx)이라는 단어의 사용이 빈번한 바, 이것이 무엇인지 잠간 살피고 지나가야 할 것 같다. 유입의 본성은 자연에서의 유입(inflow)의 이런저런 것들과 비교해봄으로 알는지 모른다, 즉 태양으로부터 땅의 모든 것들 안으로 열의 유입, 이로부터 (식물 세계의) 생장하는 생명이 온다; 그리고 같은 것 안으로 빛의 유입으로부터도 생장하는 생명에 도움을 주는 것이 온다, 그리고 이 외에도 색갈과 아름다움들의 근원이다; 마찬가지로 열이 우리의 신체들 안으로 유입됨으로부터, 그리고 빛이 눈 안으로 부터도, 등등이다. 이로부터 천국의 태양이신 주님으로부터 생명의 유입이 무엇인지를 알는지 모른다, 이 분으로부터 사랑인 열이 온다, 그리고 신앙인 영적 빛이 온다. 더욱이 유입 자체가 명백하게 느껴진다는 점이다; 그 이유가 천국의 열, 이는 사랑인 바, 인간 안에서 생명의 원천을 이루는 열이 있게 한다; 그리고 천국의 빛, 이는 신앙인데, 인간 안에서 총명의 빛이 있게 한다; 단지 이것들은 받아짐에 따라 다양해질 뿐이다.

이 해에. 이 상태의 시기에를 의미한다. 이는 “해”의 의미가 시작부터 끝까지의 전체 기간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리고 이 해가 끝났을 때. 이는 이 상태의 시기 이후 황량함을 의미한다. 이는 “이 해가 끝났을 때”의 의미가 이 상태의 시기 이후이다로부터 “해”가 전체 상태의 기간을 표시하는 앞 항에서 말했다. 이 기간 이후 황량함이 있다가 의미되는 것은 이어지는 것으로부터 이다.

그들은 두 번째 해에 그에게 왔다. 이는 그 뒤를 이어 있는 상태의 시작을 의미한다.
이는 설명할 필요 없이 알 것이다.

그리고 그에게 말했다, 우리는…내 주께 숨기지 않을 것입니다. 이는 그것이 내적인 것에 알려졌다는 것을 지각함을 의미한다. 이는 “말하다(say)”의 의미가 지각하다 이다로부터; 여기서 “주”인 요셉의 표현함이 내적 부분이다로부터; 그리고 “주께 숨기지 않는다”의 의미가 알려진다 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내적 의미에서 “숨기지 않는다”가 알려진다를 표시하는 이유는 자연 부분에서 출시되고 거행되는 모든 것은 그것 자체에 속하는 모든 것을 내적 부분으로부터 가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내적 부분에게 감추여 있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럼에도 외적 의미에서, 특히 역사적 의미에서, 본문 같은 형체가 사용된다; 예를 들면, 주님께서 인간에게 이야기를 하실 때, 그분은 그에게 당장의 주제가 무엇인지를 먼저 질문하는 방식 같은 것이다. 사실 그분은 이미 다 파악하고 계시지만 대화의 순서가 그렇다는 말이다; 이런 대목이 등장하는 곳으로는 여호와의 천사가 하갈에게 이야기를 할 때(창. 16:7, 8); 아브라함에게(창. 18:9); 모세에게(출. 4:2) 등등이다; 실로 이런 방법이 아니면 (인간의) 외적 느낌이 만족할 대안이 없다, 즉 어떤 것이 발음되지 않으면, 인간이 믿는 것은 자기는 모른다 일 뿐이다.

어떻게 이 은이 소비되었는지… 이는 진리가 황량함 때문에 보이지 않음을 의미한다. 이는 앞에서 살폈다.

그리고 짐승떼는 내 주에게 있습니다. 이는 진리의 선을 의미한다. 이는 “짐승의 떼”, 또는 “양떼와 목축떼”의 의미가 진리로부터의 내면과 외면의 선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것이 황량함 때문에 더 이상 보여질 수 없다는 것은 이미 살폈다.

내 주 앞에서 우리에게 남아 있는 것은 우리의 몸과 우리의 지면 밖에 없습니다. 이는 선과 진리를 받는 그릇이 완전하게 황폐되었음을 의미한다. 이는 “몸”의 의미가 선을 담는 그릇(선의 저장소)이다로부터; “지면(ground)”의 의미가 진리의 저장소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지면”이 진리의 저장소(그릇)인 이유는 지면이 씨들을 받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면에 뿌려진 씨들에 의해 특별하게는 선행으로부터 신앙 속에 있는 것, 고로 선으로부터 진리 속에 있는 것이 의미되어진다; 지면”이 진리를 담는 그릇을 표시함에 대하여는 이미 살핀 바 있다. 이 저장소들이 황량해졌다는 것이 “이외에 내 주 앞에 남은 것은 없다”에 의해 의미된다.
진짜 의미에서 “몸(body)”은 사랑이 있는 선을 의미한다, 그리고 “지면”은 신앙 속에 있는 진리를 의미한다; 그러나 “은”과 “가축떼”로 의미되는 진리들과 진리의 선들이 황량함 때문에 더 이상 보일 수가 없을 때, 이때 “몸”에 의해서는 선의 저장소만을, “지면”은 진리의 저장소만을 의미하게 된다. 진짜 의미에서 “몸”이 사랑 속에 있는 선을 의미하는 이유는 몸, 또는 “몸”에 의해 뜻해지는 전체 인간은 주님으로부터의 생명의 저장소이기 때문, 고로 선의 저장소이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사랑의 선이 인간 안에서 생명 자체를 만들기 때문이다, 생명의 원천을 이루는 열이 사랑인바, 사랑은 생명의 열 자체이다; 그리고 이 열이 인간 안에 있지 않으면, 그는 죽은 것이다. 그러므로 내적 의미에서 “열”에 의해 사랑의 선이 뜻해진다. 그리고 인간이 천국의 사랑을 가지지 않고 지옥의 사랑만을 가질 때조차에서도, 여전히 그의 생명의 가장 안쪽은 천국의 사랑으로부터 있다, 그 이유가 이 사랑은 주님으로부터 계속적으로 흘러들기 때문이다, 그리고 흘러듦의 시작점에서는 당사자에게 생명의 원천이 되는 열이 결과되게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작점을 지나는 진행의 과정에서 인간에 의해 뒤집히고 남용되고 타락된다, 이로부터 지옥의 사랑이 온다, 이로부터 불결한 열이 있다.
진짜 의미에서 “몸”이 사랑의 선이다는 것은 천사들로부터 분명해진다, 그 이유가 그들이 현존할 때, 사랑이 그들로부터 쏟아지기 때문, 하여 천사는 보이지도 않고 사랑 밖에 더 있는 것은 없다고 여러분도 믿을 정도가 될 것이다; 이 전체 몸으로부터 또한 사랑으로부터 있는 빛으로부터 밝게 빛남이 있다; 그 이유가 사랑의 선은 그 자체로부터 발광하는 불꽃 같기 때문이다, 이것이 거기서 파생되는 신앙의 진리이다. 이것이 천국의 천사들의 특품인 바, 거기서 주님 자신이 어떠하실지는 더 말하지 않아도 이미 짐작되었을 것이다; 즉 그분으로부터 천사들은 사랑의 모든 것을 가진다, 이분의 신성한 사랑인 태양으로서 나타나고, 이 태양으로부터 천국의 빛이 있다, 그리고 거기 안에 있는 모든 이는 자기들의 천국의 열을, 자기들의 사랑을, 고로 자기들의 생명을 가진다. 주님의 신성한 인간이 이렇게 나타나고 있다, 그리고 이로부터 모든 이런저런 것이 존재한다. 이로부터 분명한 바, 주님의 “몸(body)”에 의해 뜻해지는 것이 신성한 사랑임을, 마찬가지로 그분의 “살(flesh)” 또한 신성한 사랑이다. 더욱이 주님의 몸 자체, 영광되셨을 때, 즉 신성으로 만드셨을 때, 신성한 사랑밖에 더 아니다. 무한 이신 신성에 관하여 우리가 생각한다면 이 이상 더 무엇을 생각할 수 있을까?
이 모두로부터 거룩한 만찬에서 “몸”은 보편적 인류를 향하여 있는 주님의 신성한 사랑밖에 더 뜻해지는 것은 없다, 이에 관해 복음서들에 쓰여 있다:
예수께서 빵을 가지시고, 그리고 축사하시고, 쪼개셨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주셨다, 그리고 말하셨 다, 받으라, 먹어라; 이것은 나의 몸이다 (마. 26:26; 막. 14:22; 눅. 22:19);
“이것은 나의 몸이다”라고 빵에 관해 그분이 말하신 이유는 “빵”에 의해 신성한 사랑이 의미되었기 때문이다.
신성한 사랑이 주님의 “몸”에 의해 요한 복음서에서 의미된다:
예수께서 말하셨다, 이 성전을 파괴하라, 그리고 삼 일 안에 내가 이것을 일으킬 것이다. 그러나 그분은 그분의 몸의 성전에 관해 말하셨다 (요. 2:19, 21);
“그분의 몸의 성전”은 신성한 선으로부터의 신성한 진리이다. 그리고 그분의 “몸”이 최고 의미에서 주님의 신성한 사랑의 신성한 선이시기 때문에, 그러므로 천국에 있는 모든 이는 “주님의 몸 안에” 있다라고 말해진다.
주님의 “몸”이 신성한 선이다는 것은 아래 말씀으로도 알게 된다:
나는 나의 눈을 들었다, 그리고 보았다, 그리고 잘 보니, 고운 아마옷을 입으신 사람이 보였는데, 그분의 허리는 우하즈의 금으로 띠를 하고 계셨다; 그분의 몸은 또한 녹주석(tarshish, beryl) 같았다, 그리고 그분의 얼굴은 번개의 나타남이었다, 그리고 그분의 눈은 불의 횃불로서 이었다, 그리고 그분의 팔과 발은 광을 낸 놋쇠의 빛남 같았다, 그리고 그분의 말들의 음성은 군중의 음성 같았다 (단. 10:5, 6);
“우하즈의 금으로 띠를 두름”에 의해, “번개의 나타남이 그분의 얼굴이었다”에 의해, “불의 횃불이 그분의 눈을 표현했다”에 의해, “놋쇠의 빛남이 그분의 팔과 다리이었다”에 의해 사랑의 선이 의미되어진다; “금”이 사랑의 선이다에 대하여는 이미 살핀 바 있다, 그리고 또한 “불”도 살폈다, 그리고 번개 역시 불이기 때문에 같다; 그리고 “놋쇠”는 자연 평면에서의 사랑의 선과 선행의 선이다; “녹주석(또는 감람석, 황옥)”에 의해 몸의 나머지 부분이 나타났다, 즉 머리와 허리 사이의 몸의 중간인데, 선행의 선과 신앙의 선이 의미되어진다, 그 이유는 녹주석은 빛나는 귀한 돌(보석)이었기 때문이다.

어찌하여 우리와 우리의 지면 모두가 당신의 눈 앞에서 죽어서야 되겠습니까? 이는 만일 그들이 황폐되어질 것이다면, 내적 부분 아래 영적 생명은 더 이상 있지 않을 것을 의미한다. 이는 “당신의 눈 앞에서”의 의미가 내적 부분 아래 이다로부터, 그 이유가 이 말을 받는 자가 요셉이기 때문이다; “우리와 우리의 지면”의 의미가 선과 진리의 그릇들(저장소들)이다로부터, 고로 영적 생명의 저장소들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 저장소들 안에 영적 생명이 없을 때, “죽는다”라고 말해지고 있다; 그 이유가 “죽는다”가 황무해짐, 즉 선과 진리가 영적 생명을 만드는데, 이것이 결핍됨이 의미된다.

우리와 우리의 지면을 빵으로 사십시오. 이는 그들이 선을 가지고 버텨내도록 그릇 둘 모두를 자기 것으로 삼음을 의미한다. 이는 “사다”의 의미가 자기 것이 되다 이다로부터; “우리와 우리의 지면”의 의미가 선과 진리의 저장소들이다로부터, 고로 둘 모두가 저장소들이다; 그리고 “빵으로”의 의미가 선으로부터 지탱함이다. “빵”이 사랑의 선과 신앙의 선인 이유는 여기서는 빵에 의해 모든 식품이 뜻해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는 살 것이고, 우리의 지면은 바로에게 종입니다. 이는 완전 복종함을 의미한다. 이는 “우리와 우리의 지면”의 의미가 선과 진리의 저장소들이다로부터; 그리고 “종들”의 의미가 인간의 자기 자신으로부터의 자유 없이 있다로부터, 고로 모조리 복종함이다. 저장소들에 의해 인간의 형체들 자체가 뜻해진다; 그 이유가 인간들은 주님으로부터 생명을 받는 형체들밖에 더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형체들은 인간들이 주님으로부터 있는 영적 생명이 들어옴을 거절하는 실제의 삶과 유전적인 것을 수단으로 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저장소들이 아주 많이 단념되어 그것들이 인간의 자기 자신으로부터 어떤 것도 더 이상 가지지 못할 때, 온통 복종함이 있다. 거듭나지고 있는 인간은 황무함의 반복되는 교차함에 의해 자신의 것이라고 우길만한 것이 더 이상 없는 마지막 수준까지 떨어질 때, 하여 남은 것은 주님의 것 뿐이다고 여겨지는 때를 맞는다; 그리고 그가 주님의 것이 되어갈 때, 자기에게 남은 것은 자기를 슬프게하는 것뿐이라고, 하여 근심 걱정에 사로잡힌다; 그리고 그가 그의 이런 자아의 상태로부터 건져내질 때, 그는 자기의 행복과 복됨 안으로 되돌아 온다. 이런 상태들의 순환은 모든 천사들에게 있다.
그분이 인간을 복되고 행복하게 만들기 위하여, 주님께서는 완전 복종을 요구하신다, 즉 그가 한쪽으로는 자신, 다른 쪽으로는 주님 하여 양다리 걸치기 식의 부분적 복종이 아니다는 말이다. 이럴 경우 그는 두 주인을 섬기는 셈이기 때문이다 (마. 6:24). 완전 복종은 주님의 아래 말씀에 의해서도 뜻해진다:
나 보다 아버지와 어머니를 더 사랑하는 자는 나에게 가치가 없다; 그리고 나 보다 아들과 딸을 사랑하는 자도 나에게 가치가 없다 (마. 10:37);
“아버지와 어머니”에 의해 일반적 측면에서 의미되는 것은 유전으로부터 인간의 자기 자신인 것들, 그리고 “아들과 딸”은 실제의 생활로부터 그의 자기 자신인 것들이 의미된다. 인간의 자기 자신은 “혼”에 의해서도 의미된다: 즉
자기 혼을 사랑하는 자는 그것을 잃을 것이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자기 혼을 미워하는 자는 그것을 영원한 생명쪽으로 간직할 것이다. 만일 누군가가 나를 섬기려한 다면, 그로 하여금 나를 따르게 하라; 그리고 내가 있는 곳, 거기에 나의 종 역시 있을 것이다 (요. 12:25, 26).
완전 복종이 아래 주님의 말씀에 의해 의미된다:
또 다른 제자가 말했다, 주여 , 저로 먼저 가서 나의 아버지를 묻게 하십시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에게 말하셨다, 나를 따르라; 그리고 죽은 자는 그들의 죽은 자가 매장하게 하라
(마. 8:21, 22).
복종이 100%이어야만 함은 교회의 첫째 명령으로부터도 분명하다: 즉
너희는 주 너희 하느님을 네 모든 심정으로부터, 그리고 네 모든 혼으로부터, 그리고 네 모든 마음으로부터, 그리고 모든 네 힘으로부터 사랑할 것이다; 이것은 첫째의 명령이다 (마. 12:30).
고로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 인간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주님 자신으로부터 이기 때문에 그러므로 모든 심정, 모든 혼, 모든 마음, 그리고 모든 힘, 이것은 받는 것들인 바, 주님의 것들임에 틀림이 없다, 결과적으로 복종은 당연히 통째로 이어야 한다. 이런 복종이 여기서 “우리는 살 것이고, 그리고 우리의 지면도, 바로에게 종들이다”라는 말에 의미되는 복종인 것이다. 그 이유가 바로에 의해 천적 평면으로부터의 내적 부분의 후원 아래 있는, 최고 의미에서일 경우, “요셉”인 주님의 후원 아래 있는 일반적 측면에서의 자연 평면이 표현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씨를 주십시오. 이는 이 방도에서 선행으로부터의 선과 신앙으로부터의 진리가 유입됨을 의미한다. 이는 “씨”의 의미가 선행의 선과 신앙의 진리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것을 “주는” 것이 유입이다는 것이 분명한 이유는 그것들이 주님으로부터 유입을 수단으로 인간에게 오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는 살 것이고 죽지 않습니다. 이는 이 근원으로부터 영적 생명이 있고 더 이상 지옥에 떨어짐의 공포도 없다를 의미한다. 이는 “산다”의 의미가 영적 생명이다로부터; 그리고 “죽는다”의 의미가 지옥에 떨어짐이다로부터, 여기서는 지옥에 떨어짐의 공포이다, 그 이유는 황무함의 상태이나 인간이 거듭나지는 상태 이기도한 바, 이 상태에서는 지옥에 떨어짐은 없는 바, 단지 공포일 뿐이다.

그리고 지면은 황폐해진채로 있지 않을 것입니다. 이는 마음은 교회의 기억 속의 지식으로 경작되어야 한다를 의미한다. 이는 “지면”의 의미가 진리의 저장소 이다로부터, 저장소 자체는 마음이다, 여기서는 자연적 마음이다, 그 이유는 말해지는 지면이 이집트의 지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황폐해 있다”의 의미가 보여질 수 있는 진리가 없이 있는 것이다로부터; 현재의 경우, 교회의 기억 속의 지식 없이 있는 것이다, 그 이유는 “이집트인”에 의해 교회의 기억 속의 지식들이 의미되기 때문이다, 또한 이것은 자연 평면의 진리들이기도 하다. “이집트의 토지”가 기억 속의 지식들이 있는 자연적 마음이다는 것은 이미 살핀 바 있다; 그러므로 “이집트의 지면”은 이 마음을 특별하게 의미한다. 그러므로 “지면이 황폐해 있지 않다”에 의해 마음은 기억 속의 지식들로 함양되어야 함이 틀림이 없는 것이다.

그리고 요셉은 바로를 위하여 이집트의 모든 지면을 샀다. 이는 내적 부분이 기억 속의 지식이 있는 자연적 마음 전체를 그 자신에 자기 것이 되게 해서 일반적인 후원 아래 두었다를 의미한다. 이는 요셉의 표현함이 내적 부분이다로부터; “사다”의 의미가 자신의 것이 되게 하다 이다로부터; “이집트의 지면”의 의미가 기억 속의 지식이 있는 자연적 마음이다로부터; 그리고 바로의 표현함이 일반적 측면에서의 자연 평면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고로 “바로를 위하여”는 자연 평면에서 일반적 후원 아래 놓는 것을 표시한다.

이집트인들은 각자 그의 들판을 팔았다. 이는 교회를 향하여 유익한 모든 것들이 재 통일되고 종속됨을 의미한다. 이는 “팔다”의 의미가 자기 자신의 것이 더 이상 있지 않기 위해 멀어지는 것이다로부터, 고로 단념하고 종속시키는 것(신하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들판”의 의미가 교회의 교리이다로부터, 그리고 일반적 의미에서는 교회이다. 이로부터 “이집트인들은 각자 자기 들판을 팔았다”에 의해 교회를 유익하게 하는 모든 것들이 재 통일되고 종속됨이 의미된다.

그 이유는 기근이 그들에게 너무 가혹하게 극심했기 때문이다. 이는 자포자기에 이를 정도의 황폐함이 있었기 때문에를 의미한다. 이는 기근의 의미가 교회 속에 있는 이런저런 것들에 관련하여 황무함이 있다로부터; 그리고 기근이 “가혹하게 극심하다”고 말해질 때, 이것은 자포자기를 표시한다, 그 이유가 황무함의 마지막 단계가 자포자기이기 때문이다. 자포자기가 황무함의 마지막 순서이고 시험의 마지막 단계인 데에는 많은 이유들이 있다, 허지만 여기서는 한 가지만 아래에서 열거해보겠다. 자포자기는 자신들로부터서는 선과 진리는 아무것도 없다는 것, 자신으로부터 정죄되고 말았다고, 그러나 주님에 의해 정죄되고 만 자신들이 건져내어졌다고, 그리고 근원은 선과 진리를 수단으로 함 안에서만 흘러든다는 것을 결과물들 안에서 인정하는 것을 느끼는 이들에게서 발생된다. 또한 이들에게 자포자기는 주님으로부터 있는 생명의 행복을 느끼게 하는 단초를 제공한다; 그 이유가 그들이 (자포자기에서) 이 상태로 나와 있을 때, 그들은 마땅히 죽어야 할 운명, 지옥에 떨어져야 할 운명에서 있었지만, 그런 감옥에서 자유해져 있는 것과 같다. 더욱이 황무함과 시험들을 수단으로 천국의 삶에 반대되는 상태들을 실감했지만, 이 결과는 만족하고 행복한 것에 대한 감각하고 지각함이기에 자포자기함이 마치 이를 위해 있었던 필수 과정이였음을 뒤돌아 본다. 그러므로 두 완전 반대되는 상태의 비교는 자연스레 뒤따를 수밖에 없고 그 비교는 지금의 행복을 더 진하게 만든다. (아마 이런 신앙의 체험은 많은 이들이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겪는 일들이다.)

그리고 토지는 바로의 것이였다. 이는 모든 것들은 내적 부분의 후원 아래 있는 자연 평면에 종속되어졌다를 의미한다. 이는 “토지는 바로의 것이었다”의 의미가 “토지”에 의해 의미되는 모든 것들을 자기 것이 되게 하고 종속되게 함이다로부터; 그리고 바로의 표현함이 일반적 측면에서의 자연 평면이다로부터, 이 안으로 “이집트”에 의해 의미되는 기억 속의 지식들이 가져와진다. 이것이 내적 부분의 후원 아래 있는 이유는 일반적, 부분적 모두를 아우르는 전체 자연 평면에서 이집트의 모든 토지를 통치하는 요셉에 의해 의미되기 때문에서 이다. 그리고 또한 그는 바로의 집까지도 통치하였다를 아래에서 읽는다:
요셉이 자기 형제들에게 말했다, 나를 보낸 하느님께서는 바로에게 아버지, 그의 집의 모든 이에게 는 주인으로 (되게 했다), 그리고 나는 모든 이집트의 토지를 통치한다 (창. 45:3, 8).
위 구절은 자연 평면이 내적 부분의 후원 아래 있다고 말한 이유이다.

그리고 그는 백성들을 도성들 쪽으로 이사하게 했다. 이는 기억 속의 지식 속의 진리들은 교리적인 것들에 관련되는 쪽으로 가져와졌다를 의미한다. 이는 “백성”의 의미가 진리들이다로부터, 여기서는 그것이 이집트의 사람들을 서술하므로 기억 속의 진리들이다; 그리고 “도성들”의 의미가 교리적인 것들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러므로 “백성들을 도성 쪽으로 옮기는 것”은 교리적인 것들에 관련되는 쪽으로 기억 속의 진리들을 가져오는 것이다. 이것은 앞의 이 말을 뒤잇는다, 즉 진리들은 자연 평면에서 일반적인 것에 관련되는 쪽으로 가져와진다에 뒤잇고 있다; 그 이유가 교리적인 것들은 일반적 수준인 바, 이쪽으로 진리들은 관련되게 가져와지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교회의 교리는 그것의 머리들로 나뉘어진다, 그리고 각 머리는 교회의 일반적 수준에서 있다. 이런 이유로 백성들은 요셉에 의해 도성으로 옮겨진 것이 일반적인 것들, 고로 교리적인 것들에 진리들이 관련됨이 표현된 것이다.

이집트의 이 끝에서 저 끝에 까지. 이는 기억 속의 지식이 있는 자연 평면 전체를 망라하는 확장을 의미한다. 이는 “경계의 이 끝으로부터 경계의 저 끝까지”라는 표현의 의미가 전체를 망라하여 있는 확장이다로부터; 그리고 “이집트”의 의미가 자연 평면에 있는 기억 속의 지식들이다로부터, 고로 기억 속의 지식이 있는 자연 평면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 이유가 자연 평면은 담는 것, 기억 속의 지식들은 담겨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집트의 왕 바로”에 의해 일반적 측면에서의 자연 평면, 또한 일반적 측면에서의 기억 속의 지식이 의미된다; 그리고 “이집트의 토지”에 의하여는 자연적 마음이 의미된다.

그는 오직 성직자들의 지면은 사지 않았다. 이는 내적 부분은 선을 받으려는 자연적 수용력으로부터 그 자체를 위하여 획득했는데, 그 이유가 자연적 수용력(capacity)은 스스로 존재했기 때문임을 의미한다. 이는 위 말이 나온 요셉의 표현함이 내적 부분이다로부터; “지면”의 의미가 진리의 저장소이다로부터, 여기서의 경우 선을 받는 수용력이다, 그 이유가 수용력이 받는 능력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저장소가 저장소이기 위해서는 수용력은 내부에 있음이 틀림이 없다. 이 수용력은 선으로부터 온다, 즉 주님으로부터 선을 통하여 온다; 그 이유가 사랑의 선이 주님으로부터 흘러들지 않으면, 선이든, 진리이든 무엇이든 받는 능력을 가질 자는 없기 때문이다. 주님으로부터 사랑의 선의 유입이 인간 안쪽의 모든 것들로 받는 능력을 갖게 해준다. 선을 받는 수용력이 자연 평면으로부터 이다는 것이 이집트에 있는 지면에 의해 의미된다, 그 이유가 “이집트”에 의해 기억 속의 지식들에 관련한 자연 평면이 의미되기 때문이다. 위에 주어진 내적 의미는 “성직자들”의 의미가 선들이다로부터 더 분명해진다 (아래에서 살핀다); 그리고 “사지 않는다”의 의미가 이런 수용력들을 자기 것으로 삼지 않는다 이다로부터, 사실 이 수용력은 황무함과 유지지탱시켜줌을 수단으로 내적 부분이 그것들의 수용력과 더불어 선과 진리들을 자신의 것이 되게 했던 것이다. 그 이유는 이런 수용력들은 자신으로부터, 즉 내적 부분으로부터 있었기 때문이다. 고로 “그는 성직자의 지면은 사지 않았다”는 말에 의해서는 내적 부분이 자연 평면으로부터 자체를 위해 선을 받는 수용력을 포획하지 않았다가 의미되는데, 이런 이유는 이것들이 사실상 자체로부터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의 경우 이렇다. 진리와 선을 받는 인간에 있는 수용력들은 주님으로부터 직접적으로 있다, 바꿔 말해 이 수용력을 인간이 지니는 것은 당사자의 도움이 주님에게 필요하지 않다는 말이다. 그 이유가 인간은 선과 진리를 받기 위한 이 수용력을 언제나 간직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수용력으로부터 인간은 이해력과 의지력을 가진다; 그러나 인간이 이런 것을 받지 못하는 때란 그가 악으로 돌아서 있는 때이다; 그렇다 해도 사실상 이 수용력은 당사자에게 남아있다, 그러나 그것들이 생각과 느낌쪽으로의 접근이 당사자에게 닫힌 것 뿐이다; 그러므로 진리를 보고 선을 느끼는 수용력은 인간이 자신으로 악 쪽으로 돌아서게 하고 생활과 신앙에서 악을 확증함에 비례하여 사멸한다. 인간이 진리와 선을 받는 수용력, 어떤 수용력이든 그것에 기여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은 교회의 교리에 잘 알려진 사실이다, 더구나 신앙의 진리와 선행의 선의 어떤 것도 인간으로부터 오는 것은 하나도 없다, 그러나 이 모두는 주님만으로부터 오고 있다. 그럼에도 인간은 자신 안에서 이 수용력을 파괴할 수 있다. 이로부터 지금 알아지는 것은, 내적 부분이 선을 받는 수용력들을 자연 평면으로부터 자체를 위해 어떻게 포획하는지에 대한 것이다. 그 이유는 이것들이 자체로부터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자연 평면으로부터”라고 말해지는 이유는 주님으로부터 선의 유입됨이 내적 부분을 통하여 자연 평면 안으로 있어지기 때문이다. 받는 수용력이 자연 평면으로부터 획득되었을 때, 유입이 있다, 그 이유는 이때야 말로 받음이 있기 때문이다.
선들이 “성직자들”에 의해 의미된다에 주목할 경우, 우선 알아야 하는 것은, 주님으로부터 진행되는 두 가지 것들이 진리와 선이다는 것이다. 신성한 선은 성직자들에 의해, 신성한 진리는 왕들에 의해 표현되어진다. 이로부터 “성직자”는 선을, “왕”은 진리를 의미한다. 고대 표현 교회에서, 성직과 왕권은 한 인물 안에 병합하고 있었다, 그 이유는 주님으로부터 진행하는 선과 진리가 하나로 있었기 때문, 그리고 천국에서 천사들또한 함께 인접되었기 때문이다.
고대 교회에서 이와 같이 둘이 병합되어 있던 인물이 “멜기세덱”, 또는 “정의의 왕”이라 불리웠는데, 이는 아브라함을 방문한 멜기세덱으로부터 확인된다: 즉
살렘의 왕 멜기세덱이 빵과 포도주를 가져왔다; 그리고 그는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에게 성직자 였다; 그리고 그는 아브라함에게 복을 빌어주었다 (창. 14:18, 19).
그가 양쪽 측면 모두에서 주님을 표현했다는 것은 그가 왕이었고, 동시에 성직자이었다는 것, 그리고 그에게는 아브라함을 축복하는 것, 아브라함에게 사랑의 선과 신앙의 진리의 상징물인 빵과 포도주를 제공하는 것이 허용되었다는 사실로부터 분명해진다. 멜기세덱이 양쪽 측면 모두에서 주님을 표현한 대목이 다윗서로부터도 분명해진다:
여호와께서는 맹세하셨다, 그리고 그분은 후회하시지 않을 것이다, 당신은 멜기세덱의 방식에 따라 영원하게 성직자이시다 (시. 11:4);
위는 주님에 관하여 말해졌다; “멜기세덱의 방식에 따라”란 그가 왕과 성직자이었다를 뜻하는데, 최고 의미에서 그분으로부터 신성한 선과 신성한 진리가 함께 진행된다는 것을 뜻한다.
더욱이 표현 교회가 야곱의 후손과 더불어 설립되어졌는 바, 그러므로 한 인물에서 결합되어 주님으로부터 하나로서 진행하는 신성한 선과 신성한 진리가 (애당초에서는) 표현되었다. 그러나 전쟁들이나 이 백성의 우상 숭배 때문에 이 두 직능은 우선 나뉘어졌다. 백성을 통치한 자들은 “지도자”, 후에는 “사사(판관)”라 불리웠다; 한편 거룩한 것들을 공적으로 수행한 이들은 “성직자(priest)”라고 불리었고, 아론의 후손과 레위인이 이에 속했다. 그럼에도 이후에 이 직능은 한 인물에서 함께 병합되었는데, 그 인물은 엘리와 사무엘이었다. 그러나 이 백성들의 특성상 결국 그들 사이에서 표현 교회(교회를 표현함, a representative church)가 설립되어질 수 가 없었고, 표현만 하는 교회(껍질만 교회임, the representative of church)가 유지되어갔다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는 그들 사이에서 대세를 이룬 것이 우상 숭배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두 직능들이 둘로 분리되는 것이 허용되어졌다. 하여 신성한 진리 측면에서의 주님은 왕들에 의해, 신성한 선 측면에서의 주님은 성직자들에 의해 표현되었다. 게다가 이것은 주님이 기뻐하셔서가 아닌 백성이 원해서 있게 되었다는 것이 아래 구절에서 읽어진다:
백성이 네게 말하는 모든 것에서 백성의 음성에 순종하라; 그 이유가 그들이 너를 거절한 것이 아니라, 그들은 나를 거절해왔었기 때문이다, 하여 나로 자기들을 통치하지 않게 하려 해서이다; 그리고 너는 그들에게 왕의 권위를 보여줄 것이다 (삼상. 8:7-끝절; 12:19, 20).
이 두 직능들이 분리되지 않아야 하는 이유는 신성한 선으로부터 분리된 신성한 진리는 모든 이를 정죄하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신성한 선에 하나된 신성한 진리는 구원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신성한 진리로부터 인간은 지옥 쪽으로 정죄되지만, 신성한 선에 의해서는 그가 거기로부터 꺼내져 천국으로 승강되게 한다. 구원은 자비 속에 있다, 고로 신성한 선으로부터 있다. 그러나 인간이 자비를 거절할 때, 고로 자신으로부터 신성한 선을 거절할 때 지옥에 떨어짐이 있다; 즉 그는 진리로부터의 심판에 남겨진다는 말이다.
성직자들이 신성한 선 측면에 괸하여 주님을 표현했다는 것, 그리고 이로부터 그들은 선을 의미한다는 것은 성직 직분이 제정되고 설립되는 구절들에서 알아질는지 모른다. 즉 아론이 대 성직자로 뽑힐 때의 성직 직분에 따른 이모저모들에서, 후에는 레위인들에 관한 사항들에서; 대 성직자가 제단을 보살피기 위해 지성소 안으로 들어가게 한 것이라든가, 여호와의 거룩한 것들은 성직자를 위해 있는다라든가 (레. 23:20; 27:21); 성직자들은 토지에서 몫을 가지거나 상속받지 못한다라든가, 그러나 여호와께서 그들의 몫과 상속분이다는 것 (민. 18:20; 신. 10:9; 18:1); 레위인들은 첫 출생 대신 여호와에게 주어졌다는 것, 그리고 여호와에 의해 그들은 아론에게 주어졌다는 것 (민. 3:9, 12, 13, 40-끝절; 8:16-19); 레위인과 더불어 대 성직자는 그들이 진을 칠 때, 앞을 향할 때 진영의 한가운데 있는다는 것 (민. 1:50-54; 2:17; 3:23-38; 4:1-끝절); 아론의 씨 중에서 어떤 흠이라도 있는 자는 번제단과 제물 바침에 가까이 있어서는 안된다 (레. 21:17-21); 이 외에 많은 다른 사항들이 있다 (레. 21:17-21).
모든 이런 사항들은 최고 의미에서 주님의 신성한 선을 표현했다. 고로 관계적 의미에서 사랑 속에, 선행 속에 있는 선을 표현했다. 그러나 아론의 의복들, 이는 “거룩함의 의복들”이라 불리우는데, 신성한 선으로부터의 신성한 진리를 표현했다; 이 의복에 관한 것은 차후 주님의 신성한 자비로부터 출애굽기편에서 더 말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진리가 “왕들”에 의해, 선이 “성직자들”에 의해 의미되기에, 말씀에서 “왕들과 성직자들”이 함께 자주 언급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하느님과 그분의 아버지에게 왕들과 성직자들로 만드셨다
(계. 1:5, 6; 5. 10);
“왕들”이 신앙 속에 있는 진리로부터 “만들어진다”라고, 그리고 “성직자들”은 선행 속에 있는 선으로부터 “만들어진다” 라고 말해진다. 고로 주님 안에 있는 이들과 더불어 진리와 선은 맞잡고 있다. 마치 천국에 있는 이들과 같다, 그리고 이것이 “왕들과 성직자들로 만들어짐이다”에 의해 뜻해져 잇다.
예레미야서에서:
왕과 제 1 인 자들의 심정이 멸해지는 그 날이 올 것이다; 그리고 성직자들은 놀라워질 것이다; 그리고 예언자들은 경이로워 할 것이다 (예. 4:9).
다시:
이스라엘의 집이 부끄러워질 것이다; 그들, 그들의 왕들, 그들의 제 1 인 자들, 그리고 그들의 성직자들, 그리고 그들의 예언자들 (예. 2:26).
다시:
유다의 왕들, 제 1 인 자들, 성직자들, 그리고 예언자들, 그리고 예루살렘의 주님들 (예. 8:1).
이 구절들에서 “왕들”은 진리들을 표시한다; “제 1 인 자들”은 제 1 의 진리들을; “성직자들”은 선들을; 그리고 “예언자들”은 가르치는 이들을 표시한다.
더 알게 되는 것은, 요셉이 성직자들의 지면을 사지 않음은 선과 진리를 받는 모든 수용력은 주님으로부터 있다는 것을 표현했다는 사실이다. 이와 비숫한 레위인들의 들판에 관한 법이 있다:
레위인들의 도성들의 외곽의 들판은 팔리지 않을 것이다; 그 이유가 이것은 그들의 영원한 소유지이 기 때문이다 (레. 25:34);
위 구절의 내적 의미에 의해 인간은 자신을 위해 사랑의 선과 선행의 선인, 교회의 선의 어떤 것도 주장해서는 안된다, 그 이유는 이것은 주님 만으로부터 있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그 몫은 바로에 의해 성직자에게 분배되었기 때문이다. 이는 그것은 내적 부분의 후원 아래 자연 평면을 수단으로 질서 안에 놓여있었음을 의미한다. “분배된 몫(지정된 몫)”의 의미함이 질서에 놓인 것이다로부터; 그리고 바로의 표현함이 일반적인 자연 평면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리고 이것이 자연 평면에 질서 안에 놓인 것이 내적 부분으로부터 왔기 때문에, 내적 부분의 후원 아래 있었다라는 말이 더 추가되었다, 이것은 요셉이 이집트의 통치자이었다, 또한 바로의 집도 통치했다에 의해서도 표현되고 있다.

그리고 그들은 바로가 그들에게 주었던 할당된 몫을 먹었다. 이는 선들을 질서 안에 장착됨에 따라 있었던 것 이상으로 그들 자신에게 자기 것이 되도록 하지 않았다를 의미한다. 이는 “먹다”의 의미가 누군가의 자신에게로 자기 것이 되게 함이다로부터; 그리고 “그들에게 할당된 몫”의 의미가 질서에 놓인 것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고로 “그들에게 할당된 몫을 먹다”에 의해 선들을 질서에 놓여진 것 그 이상을 자기 것이 되게 하지 않았다가 의미된다. 이것이 바로에 의해 표현되는 자연 평면으로부터 이었다는 것, 즉 내적 부분의 후원 아래 자연 평면에서 이었다는 것은 방금 앞에서 살폈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들의 지면을 팔지 않았다. 이는 이런 이유로 그들은 그것들을 단념하거나 복종시킬 필요가 없었다를 의미한다. 이는 “팔다”의 의미가 단념하다 이다로부터, 고로 복종케 하는 것이다, 그 이유가 단념하는 것은 또 다른이에게 복종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집트의 성직자의 “지면”의 의미가 자연 평면에서 선을 받는 수용력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런 이유로 그들은 그것들을 단념하거나 복종시킬 필요가 없었다는 것이 “그러므로…않았다”는 표현에 의해 의미되었다.

그리고 요셉은 백성에게 말했다. 이는 내적 부분이 기억 속의 지식 속의 진리 안으로 유입됨을 의미한다. 이는 “말하다”의 의미가 지각하다 이다로부터; 그리고 이것이 “요셉”인 내적 부분을 서술하기 때문에 이것은 유입을 표시한다, 그 이유가 외적 부분에서 지각되는 것은 내적 부분으로부터 흘러들기 때문이다; 그리고 요셉의 표현함이 내적 부분이다로부터; 그리고 “백성”의 의미가 기억 속의 지식 속의 진리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보라 나는 오늘 바로를 위하여 너희와 너희의 지면을 샀다. 이는 그것은 그 자체를 위해 획득하였다는 것, 그리고 그것들을 내적 부분의 후원 아래 있는 자연 평면에 있는 일반적인 것에 종속되게 만들었다를 의미한다. 이는 “사다”의 의미가 자기 것이 되게 함과 획득함이다로부터; 그리고 “지면”의 의미가 진리의 저장소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것들을 자연 평면에서 일반적인 것 쪽에 종속되게 했다는 것이 “그가 그것들을 바로를 위해 샀다”에 의해 의미되는데, 바로에 의해서는 일반적 측면에서의 자연 평면이 표현되고 있다. 하여 앞에서 살핀 내용에 일치함과 더불어 “내적 부분의 후원 아래” 라고 말한 것이다.

자, 여기에 너희를 위한 씨가 있다, 그리고 너희는 지면에 씨를 뿌리라. 이는 심어져야 하는 신앙의 진리와 선행의 선을 의미한다. 이는 “씨”의 의미가 선으로부터의 진리, 또는 선행으로부터의 신앙, 고로 모두이다; “뿌리다”의 의미가 심는 것이다로부터; 그리고 “지면”의 의미가 저장소이다로부터. 그러나 진리와 선이 심어질 때, “지면”은 더 이상 저장소를 의미하지 않고 들판 같이 교회 속에 있는 이런 저런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수확하면. 이는 거기로부터 파생된 열매를 의미한다. 이는 “수확(ingather)하다”의 의미가 열매들이다로부터; 그 이유가 추수, 이는 들판에서 그러모으는 것인 바, 이것은 열매들이기 때문이다.

너희는 바로에게 오분의 일을 주어야 할 것이다. 이는 리메인스를 의미한다, 즉 이것들은 내적인 것의 후원 아래 있는 자연 평면에 있는 일반적인 것을 위해 있다를 의미한다. 이는 “5”, 또는 “1/5”의 의미가 리메인스(remains)이다로부터; 그리고 바로의 표현함이 자연 평면에 있는 일반적인 것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내적 부분의 후원 아래”라고 더 붙여 말한 이유는 앞에서 살핀 바 있다. 리메인스가 무엇인지도 이미 살폈다. 즉 그것들은 내면의 인간 안에 저장된 주님으로부터의 선들과 진리들이다. 이것들은 당사자가 선의 상태에 있을 때, 그의 외면, 또는 자연 평면에 놓여지게 된다; 그러나 그가 악의 상태에 있는 순간이면, 그것들은 재빨리 되돌아서 다시 저장된다. 그것들이 이렇게 민감하게 처방되는 이유는 그것들이 악과 혼합되어 멸해지고 마는 것을 예방하시려 해서 이다. 인간이 거듭나질 수 없을 때, 당사자에게 있는 리메인스는 그의 내면 안에서 조심스럽게 보존되어진다. 그러나 인간이 거듭나질 때, 거듭나는 만큼에서 그것들은 내면으로부터 꺼내지고 외면 안으로 놓여진다, 그 이유가 거듭남을 수단으로 내면의 것들이 외면의 것들과 결합하고 하나로서 행동하기 때문이다. 리메인스는 처음에는 일반적인 것들에 놓여지고, 그 후 세부적, 특수적인 것들에 계속적으로 놓여 간다. 여기서 취급되는 내적 의미에서의 주제는 자연 평면의 거듭남이기에, 리메인스가 자연 평면에 있는 일반적인 것들을 위하여 있다고 말한 것이다.

그리고 사 분(오 분의 사)은 너희를 위하여 있다. 이는 아직 리메인스가 아닌 것을 의미한다. 이는 “사 (부)분들(4/5)”, 이는 리메인스를 의미하는 오 분의 일을 제외한 그 나머지 인 바, 가져가버려지는 것인 바, 이는 아직 리메인스가 아닌 것들이 의미된다. 숫자 “4”는 “2”와 같은 의미를 지닌다, 즉 쌍인 것들, 함께 결합한 것들을, 즉 선과 진리가 결합한 경우를 의미한다. 이것들이 아직 리메인스가 되지 못하였을 때의 그것들이 여기서 “사 분”에 의해 의미된다. 그 이유가 선들과 진리들은 그것들이 인간에게 자기 것 삼아질 때까지는 리메인스가 되지 못한다, 그리고 그것들이 자유 안에서 애착으로부터 받아질 때, 처음으로 인간에게 자기 것이 되어 간다.

들판의 종자를 위하여. 이는 마음의 자양분을 위하여를 의미한다. 이는 “종자(씨)”의 의미가 진리와 선이다로부터, 고로 신앙과 선행이다; 그리고 “들판”의 의미가 일반적 의미에서는 교회이다로부터, 그리고 특별한 의미에서는 인간에게 있는 교회이다, 고로 교회가 있는 인간, 즉 진리와 선을 받는 인간이다. 그가 “들판”이라 불리울 경우, 그의 마음이 뜻해진다; 그 이유가 인간은 그의 외적 형체로부터 인간이 아니고, 그의 마음으로부터, 즉 그의 마음을 구성하는 그의 이해력과 의지력으로부터, 또한 그의 더 내향의 마음을 구성하는 신앙의 진리와 선행의 선으로부터 인간이다. 이것, 즉 이 마음이 진짜 의미에서 인간일 때, 진리와 선에 의해 자양분을 받아 유지 존속된다; 그리고 진리와 선이 “씨”에 의해 의미되는 바, 자양분 또한 그것에 의해 의미된다. 이는 이어지는 말에서 직접적으로 분명해진다: “너의 식품을 위하여, 그리고 너의 집에 있는 자들을 위하여, 그리고 너의 아기들을 위한 식품을 위하여.” 이로부터 “들판의 씨”가 마음의 자양분을 표시한다.

그리고 너희의 식품을 위하여, 그리고 너희 집에 있는 그들을 위하여. 이는 그러므로해서 진리의 선이 각각에, 모든 것 안에 있도록을 의미한다. 이는 “식품(food)”의 의미가 진리의 선이다로부터; 그리고 “집에 있는 그들”의의미가 진리로부터 파생되는 선의 각각 그리고 모든 것들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고로 “집에 있는 그들을 위한 식품”의 의미는 각각 그리고 모든 것들에서 있는 진리의 선이다. 진리의 선이 각각 그리고 모든 것들에 있다는 말에 주목해보자: 인간이 거듭남에 비례하여, 선은 당사자에게 속하는 각각 그리고 모든 것들 안으로 그 자체를 은근히 심는다; 그 이유가 선에 애착함이 당사자 안에서 보편적으로, 즉 각각 그리고 모두에서 통치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보편적으로 통치하는 것은 낱개적으로도, 즉 각각 그리고 모든 것에서 통치한다. 이것은 모든 이와 더불은 통치하는 애착으로부터 보여질는지 모른다. 이 애착, 그것이 무엇이든, 그의 의지력의 각각의 특별한 것 안에, 또한 그의 생각의 특별한 것 안에 현존한다, 그리고 비록 생각 안에서 언제나 나타나지 않은 듯 할지라도 그것 안에 있다. 나타나지 않은 듯 한 이유는 어떤 순간에서는 대상물을 수단으로 애착에 덧입혀져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옷입혀진 애착이 벗겨지면, 통치하는 애착은 명료한 시야 안으로 와진다.
이것은 영들과 천사들의 경우로 말해보는 것이 더 나을 것 같다. 악인 영들, 또는 악이 대세인 이들은 각각 그리고 모든 것에서 악하다, 설사 그들이 참된 것을 이야기하고, 선인 것을 행하는 때 조차도 악하다, 그 이유는 사사건건에서 그들은 타인으로 선이라 믿게 하기 위해 속임수를 쓰거나, 선과 유사한 것으로 술책을 부리려는 의도 외에 다른 것은 그들의 심중에 없기 때문이다. 이것이 진행될 때, 그들의 말함은 매우 강한 어조로부터 들려지고, 또한 그들의 기운으로부터 지각된다. 선이 통치하는 천국의 천사들은 각각 그리고 모든 것에서 선이다; 바꿔말하면, 그들과 더불어서는 주님으로부터의 선이 각각 그리고 모든 것에서 빛을 내고 있다; 그 이유가 설사 그들이 악의 어떤 것을 행한 듯 여기는 때 조차에서도 그럼에도 그들의 목적이나 의도는 선이 거기로부터 있지 않을까 하는 것 뿐이다. 이런 모두로부터 분명한 것은, 선이 보편적으로 통치하는 곳은 선이 각각 그리고 모든 것을 통치한다는 것이다; 이는 악과 더불어서도 같은 이치이다. 각각 그리고 모든 것들이 같은 본성으로부터 일 때, 보편적으로 통치하는 것이 처음에 존재 안으로 온다; 그리고 보편적인 것은 이것들의 양과 질에 따라서 있는다; 그 이유가 보편적이라 불리우는 것은 그것이 개별적으로 모든 것들 안에 있다는 사실로부터 보편적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너희 아기들을 위한 식품을 위하여. 이는 순진 속에 있는 이런저런 것들에서를 의미한다. 이는 “식품”의 의미가 진리의 선이다로부터; 그리고 “아기들”의 의미가 순진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리고 그들은 말했다, 당신은 우리를 살아있게 만들었습니다. 이는 영적 생명은 여타 다른 방법에서, 여타 어느 근원에서도 없다를 의미한다. 이는 “살게 만들었다”의 의미가 영적 생명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진행되는 것에서 취급되는 주제는 자연 평면의 거듭남, 생동하게 함이어 왔다. 이것의 전체 과정이 묘사되어져 있다. 여기에 더 첨부되는 말은 자연 평면의 거듭나는 과정은 이런 방식밖에 없고, 여타 다른 근원도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내 주의 눈에서 은혜를 발견하였습니다. 이는 이 방법에서 그들은 의지를 종속시켰다와 굴종함을 의미한다. 이 말은 자기들에게 속했던 모든 것이 단념되어 온 이후 나온 말이고, 인정함의 말들이다; 고로 이런 방법에서 자기들은 종속된다는 의지로부터의 말들이기도 하다; 고로 이 말들은 굴종함의 말들이기도 하다. 이런 의미가 이 말 안에 있다는 것, 이때의 백성의 상태로부터 분명해진다, 또한 이 상태는 전 후에 이어지는 시리즈로부터도 분명해진다.

그리고 우리는 바로의 종들입니다. 이는 그들은 자기 자신을 단념하고, 내적 부분의 후원 아래 있는 자연 평면에 복종시킴을 의미한다. 이는 “종들”의 의미가 그들 자신으로부터의자유가 결핍되는 것이다로부터, 고로 그들의 자기 자신을 단념하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의 것이다”의 의미함이 내적 부분의 후원 아래 있는 자연 평면에 종속됨이다.

그리고 요셉은 그것을 법령으로 만들었다. 이는 동의함으로부터 결론지은 것을 의미한다. 이는 “법령을 만듦”의 의미가 동의함으로부터의 결말지은 것이다; 그 이유가 법령이 만들어지는 것은 양쪽의 동의로 행해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일치함에 의해 정해진 것들로 간주된다. 고로 정식으로 이다.

오늘날 까지. 이는 영원하게를 의미한다.

이집트의 지면에 관하여, 즉 바로가 오 분의 일을 가지도록. 이는 리메인스를 의미한다.

성직자의 지면 만은 바로의 것이 아니다. 이는 선을 받기 위한 수용력, 이것은 내적 부분으로부터 직접 있다를 의미한다. 자연 평면이 내적 부분과 결합함에 관하여, 그리고 황무함과 생동있게 함의 반복을 수단으로 자연 평면의 거듭남에 관하여 지금까지 말해온 것이 오늘날 교인들은 들어보지도 못한 말로서 어안이 벙벙할지 모른다. 그럼에도 이것은 진정 그렇게 실행되고 있다는 것은 아마 여러분이 겪는 영적 삶에 조회해본다면 수긍이 가는 대목이 있을지 모른다. 그리고 이것은 다른 삶에서 단순한 영들조차도 잘 친숙된 것 중의 하나이다. 그러므로 말씀이 인간에 의해 읽혀질 때, 다른 삶에 있는 이들은 말씀의 내적 의미 안에 있다, 뿐 아니라 이 모든 것들을 지각하고, 더불어 무수한 비밀들도 눈치챈다, 이런 대목은 어떤 인간의 언어로도 표현될 수 없다. 예증되어왔었던 이런저런 것은 오직 상당히 적을 뿐이다.

27-31절. 그리고 이스라엘은 이집트의 토지, 고센의 토지에서 거주했다. 그들은 거기에서 소유권을 가졌다, 그리고 열매를 많이 맺었고, 극도로 번창했다. 28 그리고 야곱은 이집트의 토지에서 십칠 년을 살았다. 그리고 야곱의 날들, 그의 생애의 햇수는 칠 년, 그리고 일백 사십 년이었다. 29 그리고 이스라엘의 날들은 죽는 쪽으로 가까이 당겨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그의 아들 요셉을 불렀다, 그리고 그에게 말했다, 내가 네 눈에서 은혜를 발견하였 왔었기를 간구한다면, 청컨대 네 손을 내 넓적다리에 놓고 자비와 진리를 나에게 행하라. 부디 나를 이집트에 묻지 말라. 30 그리고 내가 내 조상들과 함께 눕거든 너는 나를 이집트로부터 운반하여 나를 그들의 매장지에 장사하라. 그리고 그는 말했다, 나는 당신의 말에 따르겠습니다. 31 그리고 그는 말했다, 나에게 맹세하라. 그리고 그는 그에게 맹세했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침상의 머리에서 자신을 구부려 절하였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이집트의 토지에서 거주하였다. 이는 영적 선이 교회에 있는 기억 속의 지식들 사이에서 살았음을 의미한다. 이는 “거주하다(dwell)”의 의미가 사는 것이다로부터; 이스라엘의 표현함이 영적 선이다로부터; 그리고 “이집트의 토지”의 의미가 기억 속의 지식들이 있는 자연적 마음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고센의 토지에서. 이는 그들의 한 중앙에를 의미한다. 이는 “고센의 토지”의 의미가 자연 평면의 한가운데, 또는 중앙이다로부터, 고로 기억 속의 지식들의 한가운데를 의미하는데, 그 이유는 고센은 이집트의 가장 좋은 지역(tract)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거기에서 소유권을 가졌다. 이는 내적 부분에 의해 질서 안에 주어지고 놓여지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소유권(possession)”의 의미가 영적 생명의 주소지(residence)이다로부터; 그리고 요셉이 그들에게 이 소유권을 주었는 바 (11절), 이는 이 주소지가 내적 부분에 의해 주어자고 질서 안에 놓여졌다가 의미된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시리즈로부터 뒤잇는다.

그리고 열매를 많이 맺었고, 극도로 번창했다. 이는 선행의 파생되는 선들과 신앙의 진리들을 의미한다. 이는 “열매를 많이 맺다”의 의미가 선행의 선들을 산출하는 것이다로부터; 그리고 “번창함”의 의미가 신앙의 진리들을 산출하는 것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리고 “열매를 많이 맺는다”는 표현은 “열매들”로부터 오기 때문인데, 이는 내적 의미에서 선행의 일들을 의미한다; 그리고 표현, “번창하는 것”은 “다수, 수가 많다(multititude)”에서 인 바, 이는 내적 의미에서 신앙의 진리들을 서술한다; 그 이유가 말씀에서 “많다(many)”는 진리들, “크다(great)”는 선들에 관해서 말해진다.

그리고 야곱은 이집트의 토지에서 살았다. 이는 자연 평면의 진리가 기억 속의 지식들 안에 있었다를 의미한다. 이는 “살아 있다(living)”의 의미가 영적 생명 이다로부터; 야곱의 표현함이 자연 평면의 진리이다로부터; 그리고 “이집트의 토지”의 의미가 교회의 기억 속의 지식들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십칠 년. 이는 거기에서의 상태를 의미한다. 이는 “17”의 의미가 새로운 것이다로부터; 그리고 “년(햇수)”의 의미가 상태들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여기서 “야곱이 이집트에서 살았던 17년”에 의해서는 기억 속의 지식들 사이에서 자연 평면이 있는 영적 생명의 끝에 이르기까지 이어지는 이 생명의 상태의 시작이 의미된다.

그리고 야곱의 날들, 그의 생애의 햇수는 칠 년, 그리고 일백 사십 년이었다. 이는 일반적인 상태와 그 상태의 품질을 의미한다. 이는 숫자들, 즉 “7”, “40”, “100”의 의미가 밝혀진다면 알는지 모른다. “7”이 의미하는 것은 이미 살폈다; “40”이 의미하는 것도 살폈다; 그리고 “100”이 의미하는 것도 살폈다. 그러나 이런 숫자들이 만들어내는 합성된 숫자는 밝히 알기가 쉽지는 않다, 그 이유가 그것들은 요약된 서술 쪽으로, 그리고 납득함 쪽으로 표현되어지기 위해 환원될 수 있는 것 그 이상의 것을 포함하기 때문이다. 위 숫자들은 일반적 측면에서 야곱, 그리고 야곱의 품질에 의해 표현되는 상태의 전부를 포함한다. 천사들은 이런 사항들은 147이라는 숫자 자체로부터 하나의 복합체(complex, 영적 실체) 안에서 본다; 그 이유가 천사들과 더불어서는 말씀에 있는 모든 숫자들이 영적 실체들(realities)에 대한 관념(추상적 생각, idea)으로 건너가기(fall, pass) 때문이다. 이는 때로 길게 늘어 놓은 숫자들이 나에게 나타나곤 했는데, 그 때 천사들이, 자기들이 대화하는 것들이 연속되는 숫자 내부에 포함되어 있다고 말해준 사실로부터 (말씀의 숫자들에 대한 개념이) 명백해졌다. 이로부터 또한 천적 수준의 교회 속에 있던 태고인들은 숫자들로 구성되는 평가(계산, computation)를 만들었고, 이를 수단으로 자연적 수준의 마음의 관념(생각, idea)에서는 쉽게 납득할 수 없는 천국의 것들을 전달했다. 그러나 그들의 시대들 이후 이런 평가 방법은 천국적인 것들에 대한 지각과 더불어 멸절되었다, 그리고 남은 것은 단순한 숫자들의 의미, 그나마 일반적 의미만에 대한 지식이었다. 이 단순한 숫자들은 예를 들면, “3,” “6,” “7,” “12” 이다. 그리고 중복된 숫자들의 의미에 대한 지식은 많지가 않다. 오늘날 말씀 안에 있는 숫자들이 계산적 측면이 아닌 어떤 것을 의미한다는 것이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므로 이 주제에서 말해지는 것이 아마 많은 이들에게 믿기 힘든 생각에 불과할지 모른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날들은 죽는 쪽으로 가까이 당겨지고 있었다. 이는 거듭나기 직전의 상태를 의미한다. 이는 “가까이 당겨지다”의 의미가 가까이 있어진다, 고로 바로 앞에 있다 이다로부터; “날들”의 의미함이 상태들이다로부터; 이스라엘의 표현함이 영적 선이다로부터; 그리고 “죽는다”의 의미가 다시 일어남, 그리고 영적 삶 안으로 깨어남이다로부터, 고로 거듭나지는 것이다; 그 이유가 거듭나지고 있는 이들은 영적 죽음으로부터 다시 일어나기 때문이다, 그리고 새로운 생명 안으로 깨어나진다.

그리고 그는 그의 아들 요셉을 불렀다. 이는 내적 부분의 현존을 의미한다. 이는 “자신에게로 부르다”의 의미가 자신과 더불어 현존함을 만드는 것이다로부터, 고로 현존함이 있다; 그리고 요셉의 표현함이 내적 부분이다로부터 알려진다.

그리고 그에게 말했다, 내가 네 눈에서 은혜를 발견하여 왔었기를 간구한다면. 이는 갈망함을 의미한다. 이는 야곱이 요셉에게 위 말들을 말했을 때 야곱이 지녔던 애착으로부터 분명해진다. 이 애착이 대화의 이 형체 안쪽에 있다; 그 이유가 “만일 내가 네 눈에서 은혜를 발견하여 왔었기를 간구한다면”의 말은 애착이 표현되는 수단으로서의 말의 형체이기 때문이다, 고로 의지의 갈망함이다.

청컨대 네 손을 내 넓적다리에 놓아라. 이는 거룩한 묶임을 의미한다. 이는 “손을 넓적다리(thigh) 아래에 놓다”의 의미가 부부의(결혼의, conjugial) 사랑에 속하는 것을 수단으로, 모든 힘으로 묶는 것(binding)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손”에 의해 힘(power)이 의미되고, 그리고 “넓적다리”에 의해서는 부부의 사랑 속에 있는 것이 의미된다, 그리고 최고 의미에서 부부 (결혼, the conjugial)는 주님 안에서 신성과 신성한 인간의 합일 (union)이다; 그리고 이로부터 천국 안에서 신성한 선과 신성한 진리의 합일이 있다; 그 이유가 주님으로부터 진행하는 것은 신성한 선으로부터의 신성한 진리이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천국은 천국이다, 그리고 “결혼(marriage)”이라 불리운다, 그 이유가 이것은 거기서 선과 진리의 결합이고, 이 결합은 주님으로부터 진행되고, 결합을 만든다. 그리고 거기서 주님은 선이시기에, 그리고 천국은 선으로부터 파생되는 진리이기에, 그러므로 말씀에서 주님은 “신랑”이라 불리우고, 천국과 교회는 “신부”라고 불리운다; 그 이유가 선과 진리가 결혼을 만들기 때문, 그리고 그들의 결합은 부부(the conjugial)에 의해 뜻해진다. 이로부터 분명해지는 것은, 부부인 것을 수단으로 묶여져 있는 것들은 얼마나 신성한 것인지이다. 이것이 “넓적다리에 손을 놓다”에 의해 의미되어져 있다. 이로부터 선과 진리의 결혼은 진짜(순수) 부부의 사랑의 자손이다. 이에 대한 것에 관련하여, 그리고 이것의 신성(고결함)에 관련하여서는 이미 살핀 바도 있다.
(선각자는 단어 “conjugial”을 즐겨 사용하는 편이나, 영한 사전에는 없고, 대신 “conjugal”이 있고 이에 대한 번역은 “부부의, 또는 결혼의” 이다. 왜 전자의 단어를 선각자가 즐겨 사용했는지, 즉 고집하였는지를 역자는 아직은 헤아리지 못하고 있다. 또한 이 단어의 한역에서 역자는 “결혼의”로도 번역도 하나 여기서는 “부부의”로 번역하고 있다. 그 이유는 결혼이라는 단어는 결혼 생활이라고 말을 더 붙여 사용하지 않을 경우, 결혼 직전부터 결혼하는 과정이 주로 연상되지만, 부부라는 단어는 결혼 직전 내지 막 결혼하고 있음, 또는 결혼 초기 등과 같은 느낌은 전혀 주지 않고 결혼 생활이 어느 정도 긴 세월이 지난 상태, 자녀도 낳고 기르는 상태를 암시하는 것 같아서 부부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또한 부부라는 단어에는 결합이라는 단어 보다 합일이라는 단어가 더 어울리지 않을까 생각한다. 이는 독자들의 생각의 범위를 더 넓히려는 차원에서 첨가한 말이므로 참조하여 도움이 되길 바란다 역자주.)

자비와 진리를 나에게 행하라. 이는 굴종(humiliation)을 의미한다. 이는 “자비를 행하다”의 의미가 사랑의 선이다로부터; 그리고 “진리를 행하다”의 의미가 신앙의 진리이다로부터 (아래에서 살핀다) 알게 된다. 이 말들이 애원(supplication)의 말로 발음되고 있다, 고로 굴종함이다. “자비를 행하다”가 사랑의 선인 이유는 모든 자비가 사랑 속에 있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사랑 또는 선행 안에 있는 이들은 자비 안에 또한 있다, 그리고 당사자 안에 있는 사랑 또는 자비는 이웃이 필요함에, 또는 불행에 있을 때, 자비가 된다, 그리고 그는 그런 상태의 이웃에게 도움을 제공할 수 있다. 이러므로 “자비”에 의해서 사랑의 선이 의미되어지는 것이다. “진리를 행하다”가 신앙의 진리를 표시하는 이유는 모든 진리는 신앙 속에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이유 때문에 원어에서 똑같은 표현에 의해 신앙과 진리는 뜻해지고 있다.
사랑의 선과 신앙의 진리는 가장 가까운 결합에서 있기 때문에, 그리고 이쪽이 저쪽 없이는 가능할 수 없기 때문에, 본문 같은 형식으로 말하는 것은 고대인들에게는 통상적인 것이었다, 그 이유는 고대인들은 사랑의 선이 신앙의 진리와 분리될 수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이유로 이 둘은 말씀에서도 결합하여(연대로) 자주 말해진다: 즉
여호와는 자비와 진리가 크시다(많으시다, great) (출. 34:6).
사무엘하서에서:
다윗이 여부스인들에게 말했다, 여호와께서는 너희에게 자비와 진리를 행하신다
(삼하. 2:5, 6).
같은 책에서:
다윗이 기드 출신 잇대에게 말했다, 너는 돌아가라, 그리고 너와 함께 네 형제를 데리고 돌아가라, 자비와 진리와 더불어 (삼하. 15:20).
호세아서에서:
여호와께서는 토지의 거주민들과 논쟁을 가지셨다, 그 이유는 거기에 진리가 없고, 자비도 없고, 하느님에 관한 지식도 없기 때문이다 (호. 4:1).
다윗서에서:
여호와의 모든 길들은 그분의 언약을 지키는 이들에게는 자비와 진리이다 (시. 25:10).
다시:
당신은 나로부터 당신의 자비들을 보류하시지 않을 것입니다, 오 여호와여; 당신의 자비와 당신의 진리가 나를 영구적으로 지켜줍니다 (시. 40:11).
다시:
나는 여호와의 영원한 자비들을 노래할 것이다; 내 입을 가지고 나는 당신의 진리가 대대로 알려지게 만들 것이다. 그 이유는 내가 말했기 때문, 즉 자비는 영원하게 건축될 것이다; 천국들 자체에서 당신은 당신의 진리를 확증하실 것이다. 정의와 공정이 당신의 왕좌를 받친다; 자비와 진리가 당신의 얼굴들 앞에 서있다 (시. 89:24, 33; 92:2);
위 구절 외에 시편서에 더 있다 (26:3; 36:5; 57:3, 10; 61:7; 85:10; 86:15; 89:24, 33; 92:2).

부디 나를 이집트에 묻지 말라. 이는 거듭남은 기억 속의 지식에서 있지 않다를 의미한다. 이는 “묻다”의 의미가 부활과 거듭남이다로부터; 그리고 “이집트”의 의미가 기억 속의 지식들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거듭남이 기억 속의 지식들에서 있지 않다를 뜻하는 것은 아래에서 더 살핀다.

그리고 내가 내 조상들과 함께 눕거든. 이는 고대인들이 가졌던 것과 같은 생명(삶)을 의미한다. 이는 “눕다”가 삶이다로부터; 그 이유가 “눕는” 것이 여기서는 조상들과 더불어 매장되는 것을 뜻하고, 그리고 “매장되어짐”이 부활과 거듭남을 표시하는 바, “조상들과 함께 눕다”는 삶, 생명을 뜻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조상들(fathers)”의 의미가 고대와 태고 교회 속에 있었던 이들이다로부터, 고로 고대인들이다.

너는 나를 이집트로부터 운반하라. 이는 거기에 기억 속의 지식으로부터의 승강이 있을 것임을 의미한다. 이는 “나를 운반하라”의 의미가 승강함이다로부터; 그 이유가 이집트로부터 가나안의 토지로 건너가는 것은 “올라간다”라고 말해지기 때문, 고로 승강함이 의미된다, 그리고 “이집트로부터 운반하다”의 의미도 같다; 그리고 “이집트”의 의미가 기억 속의 지식들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기억 속의 지식들로부터 승강함이 무엇인지 잠간 살펴야 할 것 같다: 자연 평면의 거듭남은 영적 생명이 내적 인간을 통하여 자연 평면에 있는 기억 속의 지식들 안으로 주님에 의해 은근히 심어짐으로 결과되어진다. 이 은근히 심어짐이 이 장에서 취급되어왔다. 만일 거듭남이 상당한 진전을 보이고 있다면, 그는 더 진전될 소지를 지녔는 바, 이제 그는 자연 평면의 내면 쪽으로 승강되어진다, 이 승강함은 내적 부분의 직접적 후원 아래 있다; 거듭남이 이렇지 않게 진전이 없다면, 그의 영적 생명(삶)은 자연 평면의 외면에 있다. 이 승강함은 감각과 기억 속의 지식들에 관한 것들로부터 탈퇴함(withdrawl, 움추림, 물러남)으로 결과되어진다, 바꿔 말하면, 이런 것들 넘어로 승강함으로 결과된다, 이때 당사자는 내면의 생각과 애착 안으로 와있다, 고로 내면적으로 천국 안으로 와있다. 이 후자의 상태에 있는 이들은 내적인 교회 안에 있다. 그러나 전자의 상태에 있는 이들은 외적 교회에 있다, 이 외적 교회가 야곱에 의해, 후자에 있는 교회가 이스라엘에 의해 표현되고 있다. 그러므로 목적적 측면에서 “야곱”은 “이스라엘”일는지 모른다, 고로 “이스라엘”로서의 야곱에 의해 내면의 자연 평면인 영적 선이 표현될는지 모른다, 고로 내적 부분에 있는 영적 교회가 표현될는지 모른다. 이런 말들이 야곱에 의해 말해졌다.

나를 그들의 매장지에 장사하라. 이는 이런 저런 거듭남을 의미한다. 이는 “장사하다(bury, 매장하다)”의 의미가 거듭남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고로 “그들의 매장지에 장사하다”도 이런저런 거듭남을 표시한다.

그리고 그는 말했다, 나는 당신의 말에 따르겠습니다. 이는 신성에 의해 섭리 속에서 그렇게 행해질 것을 의미한다. 이는 누군가의 “말에 따라서 행하다”의 의미가 그렇게 행하여질 것이다로부터; 여기에 “신성에 의한 섭리 속에서”가 첨가된 이유는 아브라함, 이삭, 야곱이 세 가지 사항을 하나로 만드는 것을 표현했기 때문이다. 최고 의미에서 아브라함은 주님의 신성 자체를, 이삭은 신성한 합리성을, 그리고 야곱은 신성한 자연 평면을 표현했다; 그리고 인간을 중요시하는 측면일 경우, 이 세 열조들은 천적 선이 있는 가장 안쪽(inmost), 영적 선이 있는 내면(interior), 그리고 자연적 선이 있는 외면(exterior)을 표현했다. 이것들이 하나의 매장지 안에 셋이 있음으로 의미되고 있다, 그 이유는 “매장지(sepuchre)”에 의해 생명과 거듭남 쪽으로 부활함이 의미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말했다, 나에게 맹세하라. 이는 그것은 취소할 수 없을는지 모른다를 의미한다. 이는 “맹세(swear)”가 취소할 수 없는 확증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리고 그는 그에게 맹세했다. 이는 그것은 취소할 수 없다를 의미한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침대의 머리에서 자신을 구부려 절하였다. 이는 그가 내면의 자연 평면에 있는 이런저런 것들에로 돌아갔음을 의미한다. 이는 “자신을 구부려 절하다”의 의미가 여기서는 자신을 돌리는 것이다로부터; 그리고 “침대(침상)”의 의미가 자연 평면이다 (아래에서 살핀다)에서 알게 된다. 고로 “침대의 머리”는 자연 평면에서 더 높은 것, 즉 내면인 것이다; 그 이유가 “머리”가 말씀에서 언급될 때, 내면의 것이 의미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내면은 외면인 육체에 관련하여서인 (상대적) 내면이다. 그가 자연 평면의 내면 속에 있는 이런저런 것들 쪽으로 자신을 돌려놓음에 의해 의미된 것은, “야곱”인 자연적 진리는 “이스라엘”인 영적 선쪽으로 승강되어짐이 있었다는 것이다. 이는 앞에서 잠간 살폈다.
“침대”가 자연적인 것을 표시하는 이유는 자연 평면은 합리성 아래 있기 때문, 그리고 합리성에 침대로서 섬기기 때문이다; 합리성은 자연 평면 위에 침대에 몸을 뉘듯 하여 있다; 자연 평면이 아래에 (자리를) 펼쳐 놓기 때문에, 그것이 침대라고 불리는 것을 아래에서 읽어보자:
목자가 사자의 입으로부터 두 다리나 귀 조각을 구조했을 때 같이; 그렇게 사마리아에서, 침대의 모퉁이에서, 침상(couch, 소파겸 침대)의 끝에서 거주하는 이스라엘의 아들들을 구 조할 것이다 (암. 3:12);
“침대의 모퉁이에서”란 자연 평면의 가장 낮은 부분에서를 표시한다; 그리고 “침상의 끝에서”란 감각적인 것에서를 표시한다. 그 이유가 “백성 이스라엘”에 의해, 이들의 중심지(수도)가 사마리아였기 때문에 주님의 영적 왕국을 표현하였기 때문이다. 이에 관해 여기서는 아버지 이스라엘에 관련해 말해진다, 즉 “침대의 머리에서”이다. 그 이유는 영적 선, 이것이 아버지 이스라엘에 의해 표현되었는데, “침대의 머리”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감각적인 것 속에 있는 가장 낮은 자연 평면 속에 있는 이런저런 것들쪽으로 자신을 돌렸을 경우, 이때 그들에 관해서는 “침대의 모퉁이에서”, 그리고 “침상의 끝에서”라고 말해진다.
다시 같은 예언서에서:
상아 침대에 누운 그들, 그리고 자신들을 그들의 침상 위에 뻗친 그들; 그러나 그들은 요셉 의 어김을 위하여는 슬퍼하지 않는다 (암. 6:4, 6).
“상아의 침대들”은 가장 낮은 자연 평면의 쾌락들을 표시한다, 이것은 거만에 속하는 이것저것들이다; “요셉의 어김을 위하여 슬퍼하지 않는다”내적 부분으로부터 선이 사라짐에 관하여 관심이 없다를 표시한다. 다윗서에서:
만일 내가 내 집의 천막 안으로 온다면, 만일 내가 내 침대의 침상 위에 올라 간다면
(시. 132:3);
“내 집의 천막”은 사랑의 거룩함을 표시한다; “침대의 침상 위에로 올라가는”것은 자연 평면 위쪽, 사랑의 선으로부터 있는 진리 쪽으로를 표시한다. 위 구절의 말들이 예언적이다는 것은 누구나 짐작될 것이다, 하여 이런 말씀들은 내적 의미로서가 아니면 이해되지 않는다.

창세기 46장 해석

창세기 제 46 장

1절. 이스라엘은 여행했다, 그리고 그가 가졌던 모든 것, 그리고 브엘세바에 왔다, 그리고 그의 아버지 이삭의 하느님에게 제물을 바쳤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여행했다, 그리고 그가 가졌던 모든 것. 이는 결합이 시작됨을 의미한다. 이는 “여행”의 의미가 연속적이고 계속적이다로부터; 여기서는 “이스라엘”, 그리고 “요셉”의 최고 의미에서 의미되는 주님의 신성이 되심에서 연속되고 계속되는 것이다; 그러나 내적 의미에서 인간의 거듭남의 연속적이고 계속적인 것이다. 이 장에서는 자연적 인간이 영적 인간과의 결합, 또는 외적 인간이 내적 인간과의 결합이라는 주제가 연속되고 계속되는 바, 그러므로 “이스라엘이 여행했다, 그리고 그가 가졌던 모든 것”이라는 말은 이 결합의 시작을 의미하게 된다.

그리고 브엘세바에 왔다. 이는 선행과 신앙을 의미한다. 이는 “브엘세바”의 의미가 선행과 신앙에 관한 교리이다로부터, 그러나 여기서는 교리가 아닌 선행과 신앙이다, 그 이유는 이것이 “이스라엘”인 영적 선을 서술하기 때문이다. 영적 선은 교리 그 위의 수준이고, 교리는 이 선으로부터 있다; 그리고 그러므로 영적 선에 도착한 이는 교리적인 것들에 속하는 것은 필요가 없고, 다른 것들부터 있는다; 그 이유가 그는 어느 방향으로 무엇에 집중하든 그는 목적 안에 있기 때문, 그리고 목적 쪽으로 가기 위한 수단이 더 이상 필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교리적인 것들은 목적으로서의 선에 도달하는 수단밖에 더 아니다. 이런 이유로 “브엘세바”에 의해 선행과 신앙이 의미된다.

그리고 그의 아버지 이삭의 하느님께 제물을 바쳤다. 이는 거기서부터 있게 되는 예배, 그리고 신성한 지적 측면으로부터의 유입을 의미한다. 이는 “제물을 바침”의 의미가 예배이다로부터; 그리고 이삭의 표현함이 최고 의미에서 신성의 합리성, 또는 주님의 지적 측면이다로부터; 거기서부터 예배 안으로 유입이 의미되고 이어지는데, 그 이유는 그가 제물을 바친 곳, 브엘세바에 의해 의미된 것이 선행과 신앙이고, 이로부터 있는 것이 예배이다가 뜻해지기 때문이다. 야곱이 자기 아버지 이삭의 하느님에게 제물을 바쳤다는 것이 보여주는 바는, 유태 나라와 이스라엘 나라의 조상들이 무엇 같았는지(속성이 어떤 것인지)이다, 즉 그들 각각은 제각기 자신의 하느님을 예배했다는 것이다. 이삭의 하느님은 야곱의 하느님과 다른 하느님이었다는 것은 말씀에 기록된 이런 사실로부터, 즉 그가 그분에게 제물을 바쳤고, 밤중의 환상에서 그에게 말해지기를, “나는 하느님이다, 네 아버지의 하느님이다”; 또한 그가 이렇게 말하며 맹세했다, 즉 “아브라함의 하느님, 그리고 나홀의 하느님, 그들의 아버지의 하느님, (그분이) 우리 사이를 판결하신다; 그리고 야곱은 자기 아버지 이삭의 두려우신 분을 두고 맹세했다” (창. 31:53). 그리고 또한 분명한 것 하나는, 그는 처음에는 여호와를 인정하지 않았다는 것, 그 이유가 그가 이렇게 말했기 때문이다, “만일 하느님이 저와 함께 계시고, 그리고 내가 걷는 이 길에서 저를 지켜주시고, 그리고 저에게 먹을 빵을 주시고, 입을 의복을 주시고, 그리고 제가 내 아버지의 집으로 평화로이 되돌아오게 해주신다면, 그때 여호와는 나의 하느님일 것입니다” (창. 28:20, 21). 고로 그는 여호와를 조건적으로 인정했다.
자기들의 아버지들(조상)의 하느님을 인정하는 것은 그들의 관습이었다, 그러나 자기 자신의 하느님의 경우는 특별하였다. 이 관습의 근원지는 시리아에 있는 그들의 조상으로부터 갈라져 나왔다; 그 이유가 아브람의 아버지, 데라, 또한 거기 있을 때의 아브람 자신도 여호와가 아닌 다른 신들을 예배했기 때문이다. “야곱,”“이스라엘”이라 불리우는 그들의 후손 역시 이런 환경에 있을 수밖에 없었는 바, 결과적으로 심정 상에서는 그들은 이방인들의 하느님들을 예배했다, 그리고 여호와는 입에서와 이름에서만 일 뿐이었다. 하여 그들은 어떤 내적 측면은 하나도 없이 외적 측면에서만 있었기에 예배는 하느님의 이름을 입으로 부르고 외치면 되고, 그분이 자기의 하느님이라고 입으로 인정하면 되고, 그분이 자기들에게 복주시는 한 그분을 자기의 하느님으로 삼는 것, 이것이 예배의 전부 였다; 따라서 선행과 신앙의 생활로 예배가 구성되는 것은 그들의 상상 속에도 없었다.

2-4절. 그리고 하느님께서 밤의 환상에서 이스라엘에게 말하셨다, 그리고 그분은 말하셨다, 야곱아, 야곱아. 3 그리고 그분은 말하셨다, 나를 바라보라. 그리고 그분은 말하셨다, 나는 하느님, 네 아버지의 하느님이다. 이집트로 내려가는 것을 두려워 말라, 나는 거기서 너로부터 큰 나라를 만들 것이다. 4 나는 너와 함께 이집트로 내려가리라. 그리고 나는 너로 올라오게 하리니 정녕 올라온다. 그리고 요셉이 네 눈에 그의 손을 놓을 것이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밤의 환상들 안에서 이스라엘에게 말하셨다. 이는 희미한 계시를 의미한다. 이는 “하느님께서 환상들 안에서 말하셨다”의 의미가 계시하심 (revelation, 밝히 알리심)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 이유가 계시들이 만들어지는 방법들은 여러 종류들인데, 즉 꿈들에 의해서, 밤의 환상에 의해서, 낮의 환상에 의해서, 인간 내부로부터의 말함에 의해서, 보여지는 천사들로부터 당사자 바깥쪽으로부터의 말함에 의해서, 또는 보여지지 않는 천사들로부터 당사자 바깥쪽으로부터 말함에 의해서, 등등이다. 여기서의 경우, “밤중에 있는 환상”인 바, 이는 희미함을 의미한다, 그리고 희미함의 영적 의미는 진리가 나타나지 않음이다. 더욱이 말씀에서 “밤”은 악으로부터의 거짓을 의미한다, 그 이유가 악으로부터 거짓 안에 있는 이들이 밤의 희미함 안에 있기 때문이다. 고로 지옥에 있는 모든 자는 밤 안에 있다 라고 말해진다. 참으로 그들은 거기에 있는 일종의 빛 안에 있다, 그 이유가 그들도 서로를 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빛은 석탄불로부터의 빛 같다, 그리고 천국의 빛이 흘러들 경우, 어둠으로, 짙은 어둠으로 변하여진다. 그러므로해서 지옥에 있는 이들은 밤 안에 있다 라고 말해지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을 두고 밤의 천사, 또는 어둠의 천사라고도 불리운다; 한편 천국에 있는 이들은 낮의 천사, 또는 빛의 천사라고 불리운다.
“밤”이 희미한 것, 마찬가지로 거짓인 것을 표시하는 이유는 아래 말씀의 구절로부터 알는지 모른다:
예수께서 말하셨다, 낮에는 12 시간들이 있지 않더냐? 만일 누군가가 낮에 걷는다면, 그는 장애물에 걸려 넘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밤에 걷는 누군가가 있다면, 그는 넘어지고 만다, 그 이유는 빛이 그 자 안에 없기 때문이다 (요. 11:9, 10);
“12 시간들”은 진리의 모든 상태들을 표시한다; “낮에 걷는 것”은 진리 안에서 사는 것을; “밤에 걷는 것”은 거짓 안에서 사는 것을 표시한다.
다시:
낮 동안 나는 나를 보내신 그분의 일을 해야만 한다; 밤이 올 때, 아무도 일할 수 없다
(요. 9:4);
“낮”은 선으로부터의 진리를, “밤”은 악으로부터의 거짓을 표시한다. 교회의 처음의 때는 “낮”에 의해 뜻해지는데, 그 이유는 처음 당시에는 인간들이 선 안에 있어 진리가 받아졌기 때문이다; 교회의 마지막의 때는 “밤”에 의해 뜻해지는데, 그 이유는 마지막 때에는 인간들이 선 안에 있지 않기 때문에 어떤 진리도 받지를 못해서이다. 인간이 선 안에 있지 않을 때, 즉 그가 이웃을 향한 선행 안에 있지 않을 때, 설사 진리들 자체가 당사자의 입을 통해 말해진다 해도, 그는 그것들을 받지 못한다, 그 이유는 이때의 경우, 진리인 것을 전혀 지각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지각하지 못하는 이유는 진리의 빛이 육체와 세상에 속한 이런저런 것들 안으로 들어가서 그것들의 시중을 들고 있어, 육체와 세상의 것들만이 진짜인 것으로 판단되고 사랑되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천국에 속한 것들은 아닌데, 이런 인간과 더불어서의 천국에 속한 것들은 거의 값어치가 전무하다. 고로 진리의 빛은 빽빽한 어둠 안에서 질식되거나 흡수되어 있으나마나 한 듯 해진다, 마치 태양의 빛이 검은 것 안에 비출 때의 경우나 별반 차이가 없을지 모른다. 오늘날 이와 같은 때를 두고:
신랑이 지체하는 사이, 모든 처녀들은 졸다가 잠들었다. 그러나 한밤에 외침이 만들어졌다, 보라, 신랑이 오고 있다 (마. 25:5, 6);
“한 밤”은 옛 교회의 마지막 때를 표시한다, 이때란 선행이 없어 신앙이 없는 때이다, 또한 새로운 교회의 처음의 때는: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 밤에 한 침대 위에 둘이 있을 것이다; 하나는 받아들여질 것이나 하나는 남겨질 것이다 (눅. 17:34);
위 구절에서도 “밤”은 옛 교회의 마지막 때와 새로운 교회의 처음의 때를 표시한다.
마태복음서에서: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말하셨다, 너희 모두는 이 밤에 나를 향하여 수치스런 일을 벌일 것이다. 그리고 베드로에게, 이 밤에, 수탉이 울기 전, 너는 나를 세 번 부인할 것이다 (마. 26:31, 34);
주님이 밤에 붙잡히는 상황은 그 당시 그 때에 그들과 더불어 신성한 진리는 밤의 희미함 안에 있었음을, 그리고 악으로부터의 거짓이 그 장소에 있었음을 의미했다. 그리고 베드로가 세 번 부인한 것은 신앙의 진리가 가르쳐져 왔음에도 믿어지지 않았던 교회의 마지막 때를 표현했다. 이런 때가 “밤”인 이유는 그 때에 주님은 인간들의 심정에서 완전 부인되었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열두 사도들은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들 같이 신앙의 모든 것들을 표현했다, 그리고 베드로는 교회의 신앙을 표현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이 밤에 너는 나를 세 번 부인할 것이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너희 모두는 이 밤에 나에게 창피한 일을 벌일 것이다”라고 말하신 것이다.
이사야서에서:
누군가가 세일로부터 나를 불러, 경비병아, 밤이 어쨌다는 말이냐? 경비병아 밤이 어쨌다는 말이냐? 경비병이 말했다, 아침이 온다, 또한 밤도 온다 (이. 21:11, 12);
위는 주님의 오심에 관해서 말해지는데, 이는 “아침”이다, 이 오심은 땅에서 어떤 영적 진리도 더 이상 있지 않을 때에 거행되었고, 이 때가 위 구절에서 밤이다.
스가랴서에서:
여호와께 알려진 어느 날이 있을 것이다; 낮도 아니고 밤도 아니다; 그 이유가 저녁의 때쯤 빛이 있을 것이다. 그 날이 오면 예루살렘으로부터 생명 있는 물들이 나갈 것이다; 그리고 여호와께서는 모든 땅 위에서 왕이실 것이다; 그 날에 여호와는 한 분이실 것이다, 그리고 그분의 이름은 하나일 것이다 (슥. 14:7-9);
위 구절 또한 주님에 관하여, 또한 새로운 교회에 관하여 이야기를 하고 있다. “여호와는 왕이실 것, 그리고 여호와는 한 분이실 것, 그리고 그분의 이름은 하나일 것”이란 신성한 인간 측면에 관련한 주님에 관해서인데, 이 신성한 인간은 “아버지”라 불리우는 신성 자체와 더불어 하나이신 것이다. 주님이 오시기 이전, 신성한 인간은 천국들에 계신 여호와이셨다, 그 이유가 천국들을 통하여 그분은 땅 위 많은 이들 앞에서 신성한 사람으로서 자신을 표출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때 당시 신성한 인간은 주님께서 그분 자신 안에서 완전한 하나를 만드신 때와 같이 신성 자체와 더불어 완전하게 하나이셨던 것은 아니다. 이전 이 둘은 마치 분리되어 있는 듯하여 있었다는 것이 창. 19장으로부터 분명해진다, 즉 “여호와께서는 소돔과 고모라 위에 천국으로부터 여호와로부터 불과 유황이 비오게 하셨다”(24절). “낮도, 밤도 아닌” 때가 그분이 태어나신 때이다; 그 이유가 그때는 “저녁”이었기 때문, 즉 표현뿐인 교회의 마지막이었기 때문이다; “저녁의 때쯤의 빛”은 그때 나타날 신성한 진리이다.
이사야서에서:
정녕 밤에 알(Ar)은 폐물이 되었고, 모압은 베어져 버렸었다; 정녕 밤에 모압의 길(Kir)은 황폐해졌 었다 (이. 15:1);
“모압”은 자연적 선을 표시한다, 반대적 의미에서는 섞음질 된 선을 표시한다; 그것의 황폐함이 여기서 취급된다. 황폐해짐들이 “밤”에 결과되는 이유는 그때 진리가 희미해지고, 거짓들이 진입하기 때문이다. 예레미야서에서:
큰 도성이 밤에 정녕 슬피 울 것이다, 그녀의 눈물이 그녀의 뺨에 있을 것이다 (애. 1:2);
진리의 황무함을 묘사하고 있다; “밤”은 거짓을 표시한다.
다윗서에서:
너는 밤의 공포를, 낮에 날아드는 화살을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다, 정오를 황폐하게 하는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다 (시. 91:5, 6);
“밤의 공포”는 지옥으로부터 있는 악의 거짓들을 표시한다; “낮에 날아드는 화살”은 공개적으로 가르친 거짓이고, 이것 때문에 선이 파괴되어진다; “정오를 황폐하게 하는 죽음”은 노골적으로 살고 있는 악이다, 이것 때문에 진리가 파괴되어진다. 계시록서에서:
거룩한 예루살렘의 성문들은 낮에 닫히지 않을 것이다; 그 이유는 거기에 밤이 없기 때문이다 (계. 21:25).
거기에 밤은 있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초(candle)가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태양의 빛도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그 이유는 주 하느님이 그들에게 빛을 주시기 때문이다 (계. 22:5).
“거기에 밤이 없을 것이다”는 거기에 거짓이 없을 것이다를 표시한다. 다니엘서에서:
다니엘이 말했다, 나는 밤이었을 때, 나의 환상 안에 있었다. 이후 나는 밤의 환상들에서 보았다 (단. 7:2, 7);
위의 “밤의 환상들” 역시 희미한 계시를 표시한다, 그 이유가 이 구절에서 네 짐승들이 취급되기 때문, 그리고 그들의 뿔들, 그리고 희미한 계시에 속하는 많은 것들이 취급되기 때문이다. 스가랴가 “밤에” 보았던 여러 색깔의 말도 이와 의미가 비슷하다 (슥. 1:8 이하).

그리고 그분은 말하셨다, 야곱아, 야곱아. 이는 자연적 진리 쪽으로를 의미한다. 이는 야곱의 표현함이 자연적 진리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스라엘”이 아닌 “야곱”이라고 말해진 이유는 자연적 진리에 속하는 모든 것과 더불어 자연적 진리는 이집트로 내려가는 자기 아들들과 더불은 야곱에 의해 의미된 교회의 기억 속의 지식 쪽으로 개시됨에 틀림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분은 말했다, 나를 바라보라. 이는 주목함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분은 말하셨다, 나는 하느님, 네 아버지의 하느님이다. 이는 신성한 지적 측면, 이로부터 유입이 있다를 의미한다. 이는 여기서 “아버지”인 이삭의 표현함이 신성한 합리성, 또는 주님의 지적 측면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 이유가 말해지기를 “하느님, 네 아버지의 하느님”이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유입이 있다고 말한 이유는 모든 진리는 지적 측면 속에 있기 때문, 고로 또한 야곱에 의해 표현되는 자연적 진리 속에 있다. 위 말씀의 원어에서, 앞의 “하느님”은 단수인 “엘(El)”로, 두 번째 “하느님”은 복수인 “엘로힘(Elihim)”이다. 그 이유는 첫 번째 하느님은 한 분 하느님, 유일하신 분이시기 때문이고, 두 번째 하느님은 그분은 많은 속성들을 가지시고 있기 때문이다. 고로 이름 “엘로힘”, 또는 복수에서의 “하느님”이라는 표현은 말씀 거의 모든 곳에서 나타나고 있다. 많은 속성들이 있기에, 고대 교회는 그 속성 각각에 이름을 할당했다, 그러므로 그 교회의 후손들과 더불어서는 각각의 이름에 관한 이런 저런 지식들을 상실했는 바, 남은 것은 거기에 많은 하느님들이 있다는 정도뿐이었다, 하여 각 가문들은 자기들의 하느님을 위하여 그 하느님들 중의 하나를 선택했다. 마치 아브라함의 경우는 솨다이 (Shaddai), 이삭의 경우는 두려운 분(Pachad, Dread)이라 불러지는 하느님을 선택했다. 각각의 하느님은 신성의 속성들 중의 하나이기에, 그러므로 주님께서 아브람에게, “나는 하느님 솨다이”이다 라고 말하셨다 (창. 17:1), 그리고 여기서 야곱에게는, “나는 네 아버지의 하느님이다”라고 말하셨다.

이집트로 내려가는 것을 두려워 말라. 이는 자연적 진리는 그것에 소속된 모든 것과 더불어 교회의 기억 속의 지식 쪽에서 받아들여져야만 한다를 의미한다. 이는 여기서 이집트로 내려가기로 되어있는 “야곱”의 표현함이 자연적 진리이다로부터; 그리고 “내려감”의 의미가 받아들여짐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 이유가 이 받아들여짐(introduce, 개시됨, initiate)이 표현되기 위하여 야곱과 그에 딸린 모든 것들이 이집트로 내려가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집트”의 의미가 교회의 기억 속의 지식들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진리가 교회의 기억 속의 지식 쪽에서 받아짐에 주목하면 이렇다: 그때 당시 교회의 기억 속의 지식들은 자기들의 의식들에 관한 표현들과 의미들이었다, 그 이유가 교회의 모든 의식들은 이런 저런 표현들인 바, 이런 표현은 자기들의 선행의 교리물로 섬긴 그들의 기억 속의 지식들로부터 이다. 고로 이 기억 속의 지식으로부터 그들은 가난한자, 궁핖한 자, 비천한 자, 고뇌받는 자, 압제받는 자, 과부, 고아, 체류자, 감옥에 갇힌 자, 병자, 배고픈 자, 목마른 자, 절름발이, 소경, 귀머거리, 불구자 등등에 의해 뜻해지는 자가 누구인지를 알았다, 이외에도 많은 다른 분류들로 해서 이웃을 구별했다, 하여 어떻게 선행이 실행되어져야 하는지를 가르쳤다. 이와 같은 것이 그때 당시의 기억 속의 지식들이다. 오늘날 이런 것들은 기억으로부터 완전히 삭제되었다. 이런 상황은 말씀에서 언급되는 대목들로부터 분명해진다, 오늘날, 거의 누구도 말씀에서 “과부”가 등장할 경우 그 과부라는 단어가 무엇을 뜻하는지, 또는 “체류자(외국인)”, 또는 “감옥에 갇힌 자”가 언급될 경우, 무엇을 뜻하는지 알지 못한다. 어쨌든 옛날 이집트에서는 이런 기억 속의 지식들이 번창했다; 그러므로 “이집트”에 의해 기억 속의 지식들이 의미되는 것이다. “야곱”인 자연적 진리가 이런 기억 속의 지식 쪽에서 받아지는 것이 야곱이 모든 습득물을 챙겨 이집트로 내려감에 의해 표현되어져 있다.
진리들이 이런 기억 속의 지식들 쪽에서 받아지는 것은 그들이 이집트에서 있기 위해 이집트 안으로 데려가질 때이다. 이는 기억 속의 지식들이 생각 안으로 올 때, 기억 속의 지식 안으로 데려와진 진리들도 동시에 기억함 안으로 오기 때문에 여기서 받아진다고 말한 것이다; 예를 들면, 체류자(외국인)가 생각에서 표출되면, 이 체류자를 수단으로 가르침을 받아야 할 이들이 의미됨을 보게 되고, 즉시 이와 같은 선행이 실행되어야 한다는 진리도 생각 안으로 오는 경우이다. 기억 속의 지식들이 (자연적 진리들로) 채워질 때, 그다음 누군가가 이로부터 생각할 경우, 생각은 그 자체를 더 멀리 더 넓게 확장하고 흩뜨린다, 동시에 천국들에 있는 많은 사회들 쪽으로 방산된다. 이런 저런 기억 속의 지식들은, 그 자체 안쪽에 많은 진리들로 구성되고, 비록 인간에게는 알려지지 않지만, 위의 방식으로 자체를 밝힌다; 따라서 필요한 전제 조건은 기억 속의 지식들 안에 진리들이 있는 것이다.
내면의 것들이 자신들을 외면의 것들 안에 증여하는 것이 신성의 질서이다. 또는 앞의 것들이 뒤의 것들 안에 담기도록 뒤의 것들에 증여하는 것이다, 고로 마지막에 가서는 최말단의 것들 안에 앞의 모든 것들이 (겹겹이 포개진 듯) 담겨 있다. (아마 양파를 연상해도 도움이 될지 모른다. 역자주) 이런 방식은 자연계의 창조물의 어디에서이든 발생된다. 이것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인간은 충분하게 거듭나질 수가 없다, 그 이유가 진리들을 기억 속의 진리 쪽으로 가져다 놓음을 수단으로 내면의 것들과 외면의 것들이 일치를 이루고 하나를 만들어야 불일치가 발붙이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만일 불일치가 있다면, 그는 선 안에 있지 않는데, 그 이유는 그가 신성하지 않기 때문이다. 더욱이 기억 속의 지식들은 인간의 시각의 감각이 가지는 빛과 거의 같은 수준의 빛을 지니는 까닭에 진리로부터 있는 빛을 수단으로 내부에서 계발이 있지 않으면, 거짓들 쪽으로 인도되기 십상이다, 특히 감각의 오류로부터 파생되는 거짓 쪽으로 들어서고 만다; 또한 거짓들로부터 악들 안으로 진입하고야 만다. 이에 대하여는 각 장들의 끝에서 있는 유입에 관한 경험으로부터 더 알아질 것이다.

나는 거기서 너로부터 큰 나라를 만들 것이다. 이는 진리들이 선이 되어 갈 것을 의미한다. 이는 위의 말이 말해지는 대상인 “야곱”의 표현함이 자연적 진리이다로부터; 그리고 “나라”의 의미가 선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나라”와 “백성”은 말씀에서 자주 언급되는 단어이다, 그러나 모든 곳에서 이런 차이가 있다: 즉 “나라”는 선들 또는 악들을; “백성”은 진리들, 또는 거짓들을 의미한다.

나는 너와 함께 이집트로 내려가리라. 이는 그런 상태 안에 주님이 현존하심을 의미한다. 이는 “너와 함께 내려 감”의 의미가 주님의 현존하심이다로부터, 그 이유가 밤의 환상들에서 야곱에게 말하신 하느님이 주님을 뜻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너로 올라오게 하리니 정녕 올라온다. 이는 그 후 승강함이 있다를 의미한다. 이는 “올라 가다”의 의미가 승강함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여기서 의미되는 승강함은 기억 속의 지식들로부터 더 내면 쪽으로 있는 것을 말한다. 기억 속의 지식들이 진리들로 채워진 후, 인간은 더 내면을 향하여 기억 속의 지식들로부터 승강한다, 그리고 기억 속의 지식들은 당사자의 정신적 활동들의 최말단 평면으로 봉사한다. 더 내면쪽으로 향한다란 더 내면적으로 생각한다는 것, 마지막으로는 영으로서, 천사로서 생각한다는 말이다; 그 이유가 내면적 생각이 더 진전될수록 더 완전해지기 때문, 하느님으로부터의 진리와 선의 유입이 더 가까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요셉이 네 눈에 그의 손을 놓을 것이다. 이는 천적 평면으로부터의 내적 부분이 생기를 줄 것을 의미한다. 이는 요셉의 표현함이 천적 평면으로부터의 내적 부분이다로부터; 그리고 “눈에 손을 놓다”의 의미가 생기있게 함이다로부터 알려진다. 그 이유가 “눈에 손을 놓다(죽은 자의 눈을 감겨주는 것)”은 외적 감각, 또는 육체에 속한 것이 닫혀지고, 내적 감각이 열리게 되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고로 승강함이 결과돠어 생기있게 된다. 죽은 자의 눈에 손을 놓는 것은 관습이었는데, 그 이유는 “죽음”을 수단으로 생명으로의 소생이 의미되었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인간이 죽을 때, 그는 죽는 것이 아니고, 자기를 세상 삶을 위해 봉사했던 육체를 한쪽에 내려 놓고, 육체가 더 이상 필요 없는 다른 삶으로 건너갈 뿐이기 때문이다.

5-7절. 그리고 야곱은 브엘세바로부터 일어났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아들들은 그들의 아버지 야곱을, 그리고 그들의 아기들을, 그리고 그들의 여인들을 바로가 그를 모시라고 보낸 수레로 운반했다. 6 그리고 그들은 그들의 가축떼, 그리고 그들이 가나안의 토지에서 획득한 그들의 소유물을 챙겼다, 그리고 이집트로 왔다, 야곱, 그리고 그와 함께 하는 그의 모든 씨, 7 즉 그의 아들들, 그리고 그의 아들들의 아들들, 그의 딸들, 그리고 그의 아들들의 딸들, 그리고 모든 그의 씨를 그는 그와 함께 이집트로 데려 왔다.

그리고 야곱은… 일어났다. 이는 자연적 진리가 계발됨을 의미한다. 이는 “일어남”의 의미가 빛의 상태 쪽으로 승강함이다로부터, 고로 계발됨이다; 그리고 야곱의 표현함이 자연적 진리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브엘세바로부터. 이는 선행과 신앙의 교리로부터를 의미한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아들들은 그들의 아버지 야곱을 운반했다. 이는 영적인 진리들은 자연적 진리가 발전하게 해준다를 의미한다. 이는 이스라엘의 아들들의 표현함이 영적 진리들이다로부터; 그리고 야곱의 표현함이 자연적 진리들이다로부터 알려진다. “그들이 운반했다”가 그들이 발전되게 했다인 이유는 이것이 자연적 진리에 비교하여 영적 진리들을 서술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연적 진리는 영적 진리 외의 다른 근원으로부터서는 발전할 수 없다, 그 이유가 그것의 생명과 행동하게 하는 힘은 영적 근원으로부터 파생되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야곱의 아들들이 여기서 “이스라엘의 아들들”이라 불리우고, 야곱은 “야곱”이라 불리운다.

그리고 그들의 아기들을. 이는 순진 속에 있는 이런저런 것들과 함께를 의미한다. 이는 “아기들”의 의미가 순진이다로부터 알려진다. “순진 속에 있는 이런 저런 것들”, 또는 “선행 속에 있는 것”이라고 말해지는데, 그 이유는 순진과 선행 없이, 영적 진리가 자연적 진리를 발전하게 해줄 수 없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진리가 순수해지기 위하여 진리는 그것의 본질과 생명을 선행으로부터 파셍되어 있게 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선행은 순진으로부터 이다. 그 이유가 진리를 생생하게 하는 내면의 것들은 이런 순서를 따르기 때문이다: 가장 안쪽은 순진이다; 그 다음 낮은 것은 선행이다; 가장 낮은 것은 진리로부터 또는 진리에 따른 선행의 일이다. 그것들이 이 질서 안에서 서로가 연계되는 이유는 그것들이 천국들에서 그렇게 연계되기 때문이다. 가장 안쪽 또는 세 번째 천국은 순진의 천국이다; 중간 또는 두 번째 천국은 선행의 천국이다, 이것 안쪽에는 가장 안쪽 천국으로부터의 순진이 있다; 첫 번째 또는 최말단 천국은 진리의 천국이다; 이것 안쪽에는 두 번째 천국으로부터의 선행이, 이 선행 안쪽에 세 번째 천국으로부터의 순진이 있다. 이 모든 것은 인간과 더불어서도 같은 질서 속에 있다; 그 이유가 인간의 내면들 측면에 관련하여 인간은 위 세 천국들의 형상에 따라 만들어져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거듭난 인간은 특별한 측면에서, 또는 가장 작은 형체로서의 천국이다. 그러나 그의 외면의 측면애 관련하여, 특히 육체에 관련하여, 그는 세상의 형상에 따라 만들어져 있다, 그러므로 고대인들에 의하여 그는 소우주(microcosm)라 불리운다. 귀는 공기와 소리의 전체 속성에 따라, 눈은 에테르(ether)와 빛의 전체 속성에 따라, 혀는 액체에 있는 용해성과 유동성의 전체 감각에 따라, 콧구멍은 대기에 있는 이런 저런 유동성을 감각함에 따라, 촉각은 차고 뜨거운 것을 감각함에 따라, 또는 무게를 지닌 땅의 이런 저런 것들을 감각함에 따라서 등등이다. 이렇게 인간의 외적 감각들은 자연계의 전체 형상에 따라 만들어져 있다, 이와 같이 인간의 내적 감각들은 그의 이해력과 의지력에 속해 있다, 그리고 천국의 전체 형상에 따라 만들어졌는 바, 일반적 측면에서 천국이 있고, 세부적 측면에서 모두 각각의 인간은 주님으로부터 신성한 선을 받는 그릇일는지 모른다.

그리고 그들의 여인들을. 이는 선행 속에 있는 것들을 의미한다. 이는 “여인들”의 의미가 그들의 “남자들”이 진리들일 경우, 선들이다로부터, 결과적으로 선행 속에 있는 것들이다; 그 이유가 모든 영적 수준의 선들은 이웃을 향한 선행 속에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모든 천적 수준인 선들은 주님을 사랑함 속에 있다.

바로가 그를 모시라고 보낸 수레에서. 이는 교회의 기억 속의 지식들로부터 온 교리물들을 의미한다. 이는 “수레”의 의미가 교리적인 것들이다로부터; 그리고 바로의 표현함이 일반적 측면에서의 교회의 기억 속의 지식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러므로 이집트의 “왕”에 의해서는 일반적(전체적) 측면에서의 기억 속의 지식이 의미되어진다, 이는 이 구절 외의 다른 구절에서도 그러하다. 사실상 대부분의 구절들에서 “이집트”의 경우 같이 “바로” 역시 거꾸로된(악용된) 기억 속의 지식이 의미되는 경우가 많다. 좋은 측면에서의 경우인, “바로”에 의한 일반적 측면의 기억 속의 지식은 아래 구절에서 살펴진다:
어리석음들이 소안의 제 1 인 자들이다, 현자는 바로의 상담자들이다; 상담이 야만적이 되었다; 너희는 어떻게 바로에게 나는 현자의 아들이다, 고대의 왕들의 아들이다 하고 말하겠느냐?
(이. 19:11)
위에서 “바로”는 일반적 측면에서의 교회의 기억 속의 지식이다, 그러므로 그는 “현자의 아들”이라, “고대의 아들”이라 불리운다; “현자”와 “고대의 왕들”은 고대 교회의 진리들을 표시한다. 그러나 이런 지식이 우둔하게 만들어졌음이 여기서 뜻하여진다, 그 이유가 “어리석음들이 소안의 제 1 인 자들이다; 상담은 야만적이 되었다”라고 말해지기 때문이다.
다시:
그들은 이집트로 내려가려고 출발한다, 그러나 그들은 나의 입에 묻지 않았다; 자신들을 바로의 강함에서 힘세어지게 하기 위하여, 이집트의 그림자를 신뢰하기 위해서이다. 그러므로 바로의 강함은 너희에게 수치함이 될 것이고, 이집트의 그림자를 신뢰함은 치욕이 될 것이다
(이. 30:2, 3);
“자신들을 바로의 강함에서 강해지게 하는 것, 이집트의 그림자를 신뢰하는 것”은 신앙의 것들에서 기억 속의 지식들에 신뢰를 두는 것, 그러나 기억 속의 지식과 감각적인 것이 영적 진리를 받기를 명령하지 않으면, 어떤 영적 진리에서도 신앙을 가지지 않는 것을 표시한다. 이는 거꾸로된 질서이다; 그 이유가 신앙의 진리들이 첫째 자리에, 기억 속의 지식들은 둘째 자리에 있음이 확증되어야 하는 것이 질서이기 때문, 만일 기억 속의 지식들의 순위가 제 1 순위에 있으면 진리에 관한 것은 무엇이든 믿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예레미야서에서:
여호와 체바욷 이스라엘의 하느님이 말하셨다, 잘 바라보라 내가 노에서 아몬을, 그리고 바로를, 그리고 이집트를, 그리고 그것의 신들을, 그리고 그것의 왕들을; 특히 바로를, 그리고 그를 신뢰하는 자들을 방문한다(처벌한다) (예. 46:25);
위 구절에서도 “바로”는 일반적 측면에서의 기억 속의 지식을 표시한다; “그를 신뢰한 자들”은 기억 속의 지식들을 신뢰한 자들을, 그러나 말씀을 신뢰한 것이 아니고, 더욱이 말씀 안의 주님을 신뢰하지 않는다; 이로부터 거짓이 오고, 신성과 천국에 속한 것을 부정함이 온다. 특히 이런 식의 태도가 입가에서 맴돈다, 즉 “나로 하여금 내 눈으로 천국도, 하느님도 보이게 보여 보아라, 나는 믿을 것이다.” 하여 보여졌다 해도, 그들은 믿지 않을 것이다, 그 이유는 부정적인 것이 그를 통째로 지배하기 때문이다.
예레미야서에서:
바로를 향하여: 잘 보라 물들이 북으로부터 올라온다, 이것은 넘쳐흐르는 시내가 될 것이다, 그리고 토지에 범람하고 이로부터 도시와 거기에 거주하는 그들을 덮을 것이다; 하여 인간들은 외칠 것이다, 그리고 토지의 모든 주민들은 악을 쓰며 말할 것이다, 자기의 강한 말들의 발굽의 짓밟음에서 이다, 그리고 그의 병거 바퀴의 덜커덩거리는 소란한 소리에서 이다
(예. 47:1, 2, 3);
바로에 관하여 말해지는 위 구절의 각각의 것들로부터, 명백해지는 바, “바로”는 일반적 측면에서의 기억 속의 지식들이다는 것, 여기서는 거꾸로의 질서, 즉 신앙의 진리들을 파괴하는 기억 속의 지식이다. “넘쳐 흐르는 시내”는 진리에 관한 이해력을 파괴하는 기억 속의 지식이다, 고로 황폐함이다; “그것들이 토지에 범람한다”란 이것이 전체 교회에 있어진다를 표시한다; “도성과 거기 거주하는 이들”이란 교회의 진리와 거기서 파생되는 선을 표시한다; “말들의 발굽 소리”는 가장 낮은 기억 속의 지식들, 이것은 감각의 것들로부터 이리저리 방향지워지는 지식들이다; “병거의 진동”은 파생되는 거짓 교리를 표시한다; “덜커덩거리는 바퀴 소리”는 감각의 것들과 그것들의 오류들을 표시한다, 이것이 나아감을 야기한다.
에스겔서에서:
주 여호비께서 말하셨다; 잘 보라 나는 너희에 맞서 있다, 이집트의 왕 바로에, 그의 강들 한가운데 누운 큰 고래, 이렇게 말한다, 강은 나의 것이다, 그리고 나는 나 자신을 만들었다. 그러므로 나는 너희 턱에 갈고리를 놓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네 강들의 고기가 네 비늘에 찔리게 할 것이다 (겔. 29:3, 4)
위에서 “바로”는 일반적 측면에서의 기억 속의 지식을 표시한다. 이것도 그에 관해서 말해진 바로부터 분명해진다.
다시:
이집트의 왕 바로를 위해 애가를 지어라. 너는 바다들에서 고래들 같이 있다; 그리고 너는 네 시내들과 더불어 출시되었다, 그리고 네 발로 물들을 괴롭혔다, 그리고 그들의 시내들을 더럽혔다. 내가 너희를 절멸했을 때 나는 하늘들을 덮을 것이다, 그리고 거기의 별들을 검게 만들 것이다; 나는 구름으로 태양을 덮을 것이다, 그리고 달은 그녀의 빛을 빛이 나게 만들지 않을 것이다; 빛의 모든 발광체들을 나는 네 위에서 검게 만들 것이다, 그리고 네 토지 위에 어둠을 놓을 것이다 (겔. 32:2, 3, 7, 8);
위 구절, 또한 많은 예언서의 구절들 같이 내적 의미를 앎이 없이는 누군가라도 납득할 수가 없다는 것은 분명하다, 즉 바로가 바다들에 있는 고래들로서 이다, 그는 자기 시내들로부터 출시되었다; 그 자 위에서 하늘들이 덮어질 것이다, 별들은 검게 만들어질 것이다, 그리고 빛의 모든 발광체들; 태양은 구름으로 덮힐 것이다, 달은 빛을 주지 않을 것이다; 어둠이 그의 토지 위에 놓일 것이다 등등 같은 말들에 대한 의미이다. 그러나 내적 의미는 이런 말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가르친다, 즉 만일 인간이 그것들을 수단으로 신앙의 비밀 안으로 들어간다면, 그리고 그가 신앙의 비밀들을 기억 속의 지식들로부터 보지 않으면, 그가 이 비밀들을 감감의 것들로부터 보지 않으면 아무것도 믿지 못한다면, 기억 속의 지식들은 교회의 진리들을 뒤엎을 것이다는 말이다. 이것이 내적 의미인 것은 각 표현의 설명으로부터 분명해진다.
바로가 기억에만 있을 뿐인 진리로부터 “이집트의 왕”이라 불리운다; 그 이유가 기억 속의 진리는 자연 평면에 있는 진리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백성의 왕은 백성과 같은 의미를 가진다; 고로 “바로”는 “이집트”와 같은 의미를 가진다, 그러나 일반적 측면이다. “이집트”가 기억 속의 지식이다는 것은 자주 말해왔다. 바로가 “바다들에 있는 고래들”에 비교되고 있다, 그 이유는 “고래” 또는 “바다의 괴물”이 기억 속의 지식들로부터의 일반적인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다들”은 기억 속의 지식들의 집합들을 의미한다. 또한 그가 “자기 시내들로부터 출시되었다”라고 말해지는데, 그 이유는 “시내들”이 총명의 것들이기 때문, 여기서는 미친 짓에 속한 것들이 의미된다, 그 이유는 감각과 기억 속의 지식들로부터의 것들이기 때문이다. 그때 그는 “그의 발로 물들을 괴롭혔다, 그리고 그들의 시내들을 더럽혔다”라고 말해진다, 그 이유는 “물들”이 영적 진리들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발”에 의해 자연 평면으로부터의 것들이 의미된다; 고로 “자기 발로 물들을 괴롭히는” 것은 자연 평면의 기억 속의 진리를 통하여 신앙의 진리들을 뒤집고 더럽히는 것을 표시한다; 그리고 “그들의 시내들을 더럽힌다”는 총명을 뒤집고 더럽히는 것이다.
마지막, “그분이 절멸할 때, 하늘들이 닫힐 것”이라고 말해지는 이유는 “하늘들”에 의해 인간의 내면들이 의미되기 때문, 실로 이것들이 그의 하늘들이다. 기억 속의 지식들이 신앙의 진리들을 지배할 때, 또는 자연 평면이 영적 평면을 다스릴 때, 하늘들은 닫혀진다. 그때 진리와 선에 관한 지식들은 멸해진다는 것이 “나는 하늘들의 별들을, 빛의 모든 발광체들을 검게 만들 것이다”에 의해 의미되어진다. 이때 사랑의 선은 더 이상 흘러들 수 없다가 “나는 구름으로 태양을 덮을 것이다”에 의해 의미된다; 그리고 신앙의 선이 흘러들 수 없다는 것은 “달은 그녀의 빛이 빛이 나게 만들지 않을 것이다”에 의해 의미되어 있다. 그리고 고로 거짓들 만이 자연적 마음을 점유할 것이다가 “나는 네 토지 위에 어둠을 놓을 것이다”에 의해 의미되어 있다. 이상 모두로부터, 위 예언의 말씀에 포함된 의미가 무엇인지 분명해졌을 것이다. “바로”에 의해 일반적 측면의 기억 속의 지식들이 의미되는 바, 바로에 의해 일반적 측면에서의 자연 평면도 의미된다.

그리고 그들의 가축떼를 챙겼다. 이는 진리의 선들을 의미한다. 이는 가축떼(cattle)의 의미함이 진리의 선이다로부터; 그 이유가 “가축떼”에 의해 양떼와 목축떼, 그리고 말, 낙타, 노새, 나귀까지 모두를 뜻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양떼(flock)”는 내적 의미에서 내면의 선들을, 그리고 “목축떼(herd)”는 외면의 선들을, 그러나 “말들,” “낙타들,” “노새들,” “나귀들”은 지적 측면에 속하는 것들, 고로 이 측면으로부터의 모든 것은 진리에 관련된다, 고로 “가축떼”에 의해 진리의 선이 의미되고 있다.

가나안의 토지에서 획득한 그들의 소유물. 이는 교회 속에 이전부터 있던 진리들로부터 포획한 진리들을 의미한다. 이는 습득물의 의미가 포획된 진리, 또한 포획된 선이다로부터; 그리고 “가나안의 토지”의 의미가 교회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것들이 이전의 교회의 진리들로부터 포획된 것이다는 이유는 진리들이 자체들을 선으로 배가했을 때, 그것들은 이전의 진리들부터 배가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집트로 왔다. 이는 교회의 기억 속의 지식들 안으로 들이어짐을 의미한다. 이는 이집트로 “오다”, 또는 “내려가다”의 의미가 교회의 기억 속의 지식들 안으로 들이어짐(기억 속의 지식들 쪽으로 진리가 개시됨)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야곱, 그리고 그와 함께 하는 그의 모든 씨. 이는 자연적 진리, 그리고 자연적 진리에 속하는 신앙 속의 모든 것에 관하여를 의미한다. (즉, 교회의 기억 속의 지식 쪽으로 받아들이어짐, 또는 교회의 기억 속의 지식 쪽에서 개시됨이다). 이는 야곱의 표현함이 자연적 진리이다로부터; 그리고 “씨”의 의미가 선행으로부터의 신앙이다. 고로 “그와 더불은 모든 씨”란 자연적 진리에 속하는 신앙의 모든 것들을 표시한다.

그의 아들들, 그리고 그의 아들들의 아들들. 이는 그것들의 질서 안에 있는 진리들을 의미한다. 이는 “아들들”의 의미가 진리들이다로부터, 고로 “아들들의 아들들”의 의미도 비슷하다, 그러나 그것들의 질서에서 이전의 것들로부터인 진리들이다.

그의 딸들, 그리고 그의 아들들의 딸들. 이는 질서 안에 있는 선들을 의미한다. 이는 “딸들”의 의미가 선들이다로부터, 고로 “아들들의 딸들” 또한 이전으로부터 있는 선들, 고로 그것들의 질서에서이다.

그리고 모든 그의 씨. 이는 신앙의 모든 것과 선행의 모든 것을 의미한다. 이는 “씨”의 의미가 선행의 신앙이다로부터, 고로 신앙과 선행 모두이다; 그 이유가 전자가 있으면 후자가, 후자가 있으면 전자도 있는 것이 신앙과 선행의 관계이기 때문이다.

그는 그와 함께 이집트로 데려 왔다. 이는 그들은 교회 속에 있는 기억 속의 지식들에로 가져와졌음을 의미한다. 이는 이집트 쪽으로 “오다”, 또는 “내려 가다”의 의미가 진리가 기억 속의 지식 쪽으로 받아들이어짐, 또한 그쪽에서 개시됨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와 같은 의미인 것이 “이집트 쪽으로 그와 더불어 데려와짐”이다. 기억 속의 지식들이 진리들에 의해 규율될 때, 진리들은 그 지식들 안으로 들이어지고, 그 안에서 개시된다; 그리고 진리가 말씀에서 주님께서 그렇게 말하셨기 때문에 인정될 때, 기억 속의 지식들은 진리들에 의해 통치되어진다, 그리고 그것을 확언한 기억 속의 진리들이 받아들여진다, 그러나 그것에 반대되는 기억 속의 지식은 제거된다. 고로 진리는 진리를 확언한 기억 속의 지식들에 주인이다, 한편, 확언되지 않은 것들은 거절된다. 이럴 경우, 기억 속의 지식으로부터 생각하는 인간은 거짓들쪽으로 빠져들지 않는다. 이는 진리들이 내부에 있지 않은 경우이다. 그 이유가 기억 속의 지식들은 자체로부터는 진리가 아니기 때문, 그러나 그것들 내부에 있는 진리들로부터 진리이다, 그리고 이러한 식으로 그것들 안에 진리들이 있는 바, 이런 일반적 진리가 기억 속의 진리이다. 그 이유가 기억 속의 진리는 단지 그릇일 뿐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진리들과 거짓들 모두를 받을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은 한없는 다양성에 있다.
예를 들면, 모든 이는 이웃이다 라는 교회의 기억 속의 지식이 있다. 이 기억 속의 지식 쪽으로 끝없이 풍부함에서 진리들이 가져와지고 개시될는지 모른다, 그러나 각각의 이웃에는 차이가 있다; 선 안에 있는 자가 최고의 이웃이다, 그리고 이것 마저 선의 품질에 따라 차이를 가진다; 이웃의 근원은 주님 자신으로부터이다, 하여 그분에게 더 가까이 되면 될수록, 즉 그들이 선 안에 더 있을수록, 그들은 더 이웃이다; 반대로 그들이 그분으로부터 더 떨어지면, 덜 이웃이다; 그리고 또한 사회(공동체)는 개인 보다 더 이웃이다, 그리고 일반적 왕국은 사회보다 더 이웃이다, 그러나 자신의 나라는 다른 왕국들보다 더 이웃이다, 그리고 주님의 왕국은 더욱 더 이웃이다; 또한 누군가가 다른 이의 선을 위하여, 또는 그의 나라를 위하여, 또는 교회를 위하여 그의 직무를 올바르게 집행할 때 이웃은 사랑되고 있다, 등등이다. 이는 어떻게 많은 진리들이 교회의 이 하나의 기억 속의 지식 쪽으로 가져와질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이것은 하도 많은 진리들인지라, 그것들을 구별하고 인식하려고 종과 속으로 나누는 것조차 쉽지가 않다. 이것이 고대의 교회들에서는 학문이었다.
같은 기억 속의 지식도 끝 없는 거짓들로도 채워질 수 있다. 이에 대하여는 위의 전술한 진리들을 거꾸로 생각하면 될 것이다, 이런 식일 것이다, 즉 모든 이는 자신에게 이웃일 것이다, 그리고 모든 실례에서 이웃의 근원은 나자신으로부터 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가장 가까운 이웃은 나를 좋아하는 자이다, 그래서 나와 하나를 만드는 자이다, 그리고 나를 좋아하는 자 안에서 자신의 형상이 표출하게 하는 것이다; 자신의 이해득실에 유리하지 않으면 나라라 해도 내 이웃이 아니다; 등등이다. 그럼에도 기억 속의 지식은 똑같이 남아 있다; 즉 모든 사람은 이웃이다고 남아 있다는 말이다. 이런 사람은 진리로 그것을 채우고, 저 사람은 그것을 거짓들로 채운다. 이런 경우는 다른 기억 속의 지식들도 같다.

8-27절. 이집트로 내려간 이스라엘 가족들의 이름이 이러하니 야곱과 그 아들들, 곧 야곱의 맏아들 르우벤과 9 르우벤의 아들 하녹과 발루와 헤스론과 갈미요, 10 시므온의 아들 곧 여무엘과 야민과 오핫과 야긴과 스할과 가나안의 여인의 소생 사울이요 11 레위의 아들 곧 게르손과 그핫과 므라리요, 12 유다의 아들 곧 엘과 오난과 셀라와 베레스와 세라인데 엘과 오난은 가나안 땅에서 죽었고, 또 베레스의 아들 곧 헤스론과 하물이요 13 잇사갈의 아들 곧 돌라와 부와와 욥과 시므론이요, 14 스불론의 아들 곧 세렛과 엘론과 얄르엘이니 15 이들은 레아가 밧단 아람에서 야곱에게 낳은 자손들인데, 그 딸 디나를 합하여 남자와 여자가 삼십 삼 명이며, 16 갓의 아들 곧 시뵨과 학기와 수니와 에스본과 에리와 아로디와 아렐리요, 17 아셀의 아들 곧 임나와 이스와와 이스위와 브리아와 그들의 누이 세라며 또 브리아의 아들 곧 헤벨과 말기엘이니 18 이들은 라반이 그 딸 라헬에게 준 실바가 야곱에게 낳은 자손들이라 합 십 육명이요 19 야곱의 아내 라헬의 아들 곧 요셉과 베냐민이요 20 이집트 땅에서 온 제사장 보디베라의 딸 아스낫이 요셉에게 낳은 므낫세와 에브라임이요 21 베냐민의 아들 곧 벨라와 베겔과 아스벨과 게라와 나아만과 에히와 로스와 뭅빔과 훕빔과 아릇이니 22 이들은 라헬이 야곱에게 낳은 자손이라 합 십 사명이요 23 단의 아들 후심이요 24 납달리의 아들 곧 야스엘과 구니와 예셀과 실렘이라 25 이들은 라반이 그 딸 라헬에게 준 빌하가 야곱에게 낳은 자손이니 합이 칠 명이라, 26 야곱과 함께 이집트에 이른 자는 야곱의 자부 외에 육십 육명이니 이는 다 야곱의 몸에서 나온 자며, 27 이집트에서 요셉에게 낳은 아들이 두명이니 야곱의 집 사람으로 이집트에 이른 자의 도합이 칠십 명이었더라.

“이집트로 내려간 이스라엘 가족들의 이름이 이러하다”란 질서 안에서 영적 평면으로부터 온 진리들의 품질, 이것이 교회의 기억 속의 지식들 안으로 가져와짐을 의미한다. “야곱과 그 아들들”이란 전체적인 측면에서의 자연 평면 속의 진리, 그리고 세부 측면에서의 자연 평면 속의 진리들을 의미한다. “야곱의 맏아들 르우벤”이란 이해력에 있는 신앙, 이것이 첫 장소에서 가상적으로 있는다. “르우벤의 아들 하녹과 발루와 헤스론과 갈미”란 전체적인 측면에서의 신앙 속의 교리들을 의미한다. “시므온의 아들 곧 여무엘과 야민과 오핫과 야긴과 스할”이란 의지력에 있는 신앙과 전체적 측면에서의 그것의 교리들을 의미한다. “가나안의 여인의 소생 사울”이란 진짜 근원으로부터가 아닌 교리를 의미한다. “레위의 아들 곧 게르손과 그핫과 므라라”란 영적 사랑과 전체적 측면에서 그것의 교리들을 의미한다.
“유다의 아들들, 곧 엘과 오난과 셀라와 베레스와 세라”란 천적인 사랑과 그것의 교리들을 의미한다. “그런데 엘과 오난은 가나안 땅에서 죽었다”란 거짓과 악이 근절되어졌음을 의미한다. “또 베레스의 아들은 헤스론과 하물이다”란 선행의 선들로부터의 진리들을 의미한다. “잇사갈의 아들은 돌라와 부와와 욥과 시므론이다”란 천적 수준에서 있는 결혼의 사랑과 그것의 교리들을 의미한다. “스불론의 아들은 세렛과 엘론과 얄르엘이다”란 천국의 결혼과 그것의 교리들을 의미한다. “이들은 레아가 밧단 아람에서 야곱에게 낳은 자손들이다”란 이러한 교리들은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을 통하여 자연 평면에서 영적인 애정으로부터 있었음을 의미한다. “그 딸 디나”란 교회를 의미한다. “합하여 남자와 여자가 삼십 삼 명이다”란 영적 생명의 상태와 그 품질을 의미한다.
“갓의 아들은 시뵨과 학기와 수니와 에스본과 에리와 아로디와 아렐리이다”란 신앙의 선과 그로부터 파생된 일들과 그것들의 교리들을 의미한다. “아셀의 아들은 임나와 이스와와 이스위와 브리아와 그들의 누이 세라며 또 브리아의 아들 곧 헤벨과 말기엘이다”란 영원한 생명의 행복과 애착들로부터 있는 기쁨과 그것들의 교리들을 의미한다. “이들은 실바의 아들들이다”란 이들은 외적 교회 속에 있음을 의미한다. “라반이 그 딸 라헬에게 준”이란 외적 선에 대한 애착으로부터를 의미한다. “실바가 야곱에게 낳은 자손들이다”란 그들은 자연 평면으로부터 있었음을 의미한다. “십 육명이다”란 그들의 상태와 품질을 의미한다.
“야곱의 아내 라헬의 아들들”이란 천적인 애착으로부터 인 것을 의미한다. “요셉과 베냐민이다”란 교회의 내적인 것을 의미한다. “요셉”은 내적인 선을, “베냐민”은 거기서 파생된 진리를 의미한다. “그리고 요셉에게 이집트의 토지에서… 태어나졌다”란 천적 평면으로부터의 내적 부분과 자연 평면에 있는 영적인 것들을 의미한다. “온의 제사장 보디세라의 딸 아스낫이 그에게 낳았다”란 선이 진리와 결혼함 그리고 진리가 선과 결혼함으로부터를 의미한다. “므낫세와 에브라임”이란 새로운 의지력과 그것의 지성을 의미하고 이것은 교회 속에 있다. “베냐민의 아들들은 벨라와 베겔과 아스벨과 게라와 나아만과 에히와 로스와 뭅빔과 훕빔과 아릇이다”란 내적 부분으로부터의 영적인 것과 그것의 교리를 의미한다.
“이들은 라헬이 야곱에게 낳은 아들들이다”란 그들은 천적인 애착으로부터 이었음을 의미한다. “십 사명이다”란 그들의 상태와 품질을 의미한다.
“단의 아들은 후심이다”란 신앙의 거룩함과 생활의 선, 그리고 이들 속의 교리를 의미한다. “납달리의 아들은 야스엘과 구니와 예셀과 실렘이다”란 승리가 있는 시험들과 그것들에 관한 교리들을 의미한다. “이들은 빌하의 아들들이다”란 이들은 내적 교회 속에 있다를 의미한다. “라반이 그 딸 라헬에게 준…”이란 내적 선에 대한 애착으로부터를 의미한다. “칠 명이다”란 그들의 상태와 품질을 의미한다.
“야곱과 함께 이집트에 이른 자”란 교회의 기억 속의 지식 안으로 받아들이어진 모든 진리들과 선들을 의미한다. “야곱의 몸(넓적다리)로부터 나왔다”란 결혼으로부터 이었다를 의미한다. “야곱의 자부 외에”란 이 결혼으로부터 있지 않았던 것들에 대한 애착을 제외하고를 의미한다. “육십 육명이다”란 그들의 상태와 품질을 의미한다. “이집트에서 요셉에게 낳은 아들”이란 자연 평면에 있는 천적인 것과 영적인 것을 의미한다. “두 명이다”란 의지와 그로부터 파생된 지성을 의미한다. “야곱의 집 사람으로 이집트에 이른 자는 칠십 명이었다”란 질서 안에 꽉찼음을 의미한다.

위 구절에 대한 더 많은 설명은 생략하고 있다, 그 이유는 그들은 단지 이름들 뿐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의미하는 것은 방금 앞에서 주어진 일반적 설명으로부터 알 것이다. 그리고 야곱의 아들들 각각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하여는 그들의 출생이 있는 대목에서 알 수 있을 것이다. 한 가지 정리해둘 만한 것이 있다: 즉 야곱의 아들들은 비록 그들이 아직 젊다 해도 그들로부터의 아들의 출생이 이집트에서는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들의 아들들 모두는 가나안의 토지에서 출생했다는 것, 베냐민을 제외하고는 그들 모두가 밧단-아람에서 출생되었다. 이는 주님의 특별한 신성한 섭리로부터 이었다, 즉 교회 속의 것들이 그들의 출생 자체로부터 그들에 의해 표현되어야 한다는 질서 때문이다. 밧단-아람에서 태어난 야곱의 아들들은 교회 속의 것들은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들을 수단으로 새로이 태어나야만 한다는 것, 또는 거듭나야만 한다는 것을 표현했다; 그 이유가 “밧단-아람”은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들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의 출생은 신앙과 선행을 통하여 새로운 출생을 표현했다, 고로 처음에 이것들에 관한 지식들을 통하여서 이다. 그러나 그들의 아들들이 가나안의 토지에서 모두 태어나졌다는 것은 그때로부터 교회 속에 있는 이런저런 것들이 이었다는 것을 표현했다, 그 이유가 “가나안의 토지”는 교회를 표시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요셉에게 이집트에서 아들들이 태어났다는 것은 외적 인간 안에서 내적 인간이 지배함을, 특히 자연 평면에서 천적 평면으로부터의 영적 부분이 통치하는 것이 질서임을 표현했다, 즉 “므낫세”는 자연 평면에서 있게 되는 (새로운) 의지력 측면이고, 그리고 “에브라임”은 자연 평면에서 있게 되는 교회의 지적 능력(새로운 이해력)을 표현하는데, 이것을 교회가 소유해야 한다는 것이다. (** 요셉에 의해 표현되는 것을 두 목사는 조금씩 다르게 라틴어로부터 번역하고 있으나 말만 조금 다를 뿐 결국은 같은 말 뜻에 이른다. 즉 Potts 목사의 경우, the celestial spiritual 인데 천적 평면으로부터의 영적 부분이라고 역자는 번역했다. 그리고 참고로 보는 영역서인 Elliott 목사의 경우, the celestial of spiritual 이고 역자가 번역한다면 영적 평면 속의 천적 부분일 것이다. 모두 같은 말 뜻임을 알기 바란다. 역자주)

28-30절. 그리고 그는 그에 앞서 유다를 보내 자기에게 고센으로 가는 길을 보여주게 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고센의 토지에 왔다. 29 그리고 요셉은 그의 마차에 견인줄을 채웠다, 그리고 그의 아버지 이스라엘을 맞으러 고센으로 올라 갔다. 그리고 그는 그에게 보여졌다, 그리고 그의 목들을 어긋맞겨 안고 그의 목들에서 한참동안 울었다. 30 그리고 이스라엘은 요셉에게 말했다, 네가 아직 살아 있어 네 얼굴을 보았으니 나는 지금 죽어도 된다.

그리고 그는 그에 앞서 유다를 보냈다. 이는 교회 속의 선이 천적 평면으로부터의 내적 부분과 교통함을 의미한다. 이는 유다의 표현함이 교회의 선이다로부터; 그리고 요셉의 표현함이 천적 평면으로부터의 내적 부분이다로부터; “자기에 앞서 보낸다”란 교통하는 것임이 분명하다. 다른 사람이 아니고 유다가 보내진 이유는 선이 선과 교통한다는 것, 이는 직접적, 즉각적 교통함이 있다가 의미되도록 하기 위하여서 이다. 다시 말해 유다가 표현하는 외적 선이 요셉이 표현하는 내적 선과의 교통함이다. 직접, 즉각적이다고 말한 이유는 주님으로부터 흘러드는 주님을 사랑함으로부터 있는 선과 이웃을 향한 선행으로부터 있는 선은 내적 부분을 통하여 외적 부분 안으로 흘러들기 때문이다. 고로 외적 부분에서 받아진 선 만큼 거기에 선이 있게 된다. 그러나 만일 인간의 외적 부분에 선이 없이 신앙의 진리만 있다면, 이때 내적 부분을 통한 주님으로부터의 선의 유입은 외적 부분에서 받아지지 않는다; 그 이유가 진리와의 직접적인 교통함은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이 유다가 야곱에 의해 요셉에게 보내진 이유이다.

자기에게 고센으로 가는 길을 보여주도록. 이는 자연 평면의 중앙에 관련하여를, 즉 중앙에서(가장 깊은 곳에서) 교통이 있었다를 의미한다. 이는 “고센”이 자연 평면에서 중앙(midst, center, 즉 inmost)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자연 평면에서 중앙, 또는 가장 깊음에 의하여 자연 평면에서 가장 좋은 곳이 의미된다, 그 이유가 가장 좋은 것이 중앙에 있기 때문, 즉 중앙에 가장 좋은 것으로부터 선함의 등급에 따라 중앙으로부터 변두리쪽으로 점점 멀어져 가서 위치하는 것이 천국의 배열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배열은 거듭나는 자 안에서 선들의 질서적인 배열이기도 하다. 그러나 사악한 자와 더불은 배열은 가장 악한 것이 중앙에, 그리고 선들은 추방되고 계속 밀려나서 완전 외곽으로, 결국은 바깥으로 내몰린다. 이것은 사악한 자들의 개인적으로 지니는 형체이고, 일반적으로는 지옥들이다. 고로 이것은 지옥의 형체이다. 중앙에 가장 좋은 것, 그리고 측면을 향하여 선들이 질서에서 배열됨에 관하여 위에서 말한 바로부터 교회의 선이 천적 평면으로부터의 내적 부분과 교통함이 뜻해지는 것은 자연 평면에서 중앙에 관련되는 것과 더불어서 임이 분명하다.

(** “그리고 그들은 고센의 토지에 왔다”란 거기에 생명이 거주함을 의미한다. 이 대목을 추가로 설명하는 문항은 원문에서 있지 않다 역자주.)

그리고 요셉은 그의 병거에 견인줄을 채웠다”란 내적 부분으로부터의 교리를 의미한다. 이는 요셉의 표현함이 내적 부분이다로부터; “병거”의 의미함이 교리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리고 그의 아버지 이스라엘을 맞으러 … 올라 갔다. 이는 유입을 의미한다. 즉 천적 평면의 내적 부분으로부터 자연 평면으로부터 있는 영적 선 안으로 유입됨을 의미한다. 이는 “맞으러 올라가는” 자인 요셉의 표현함이 천적 평면으로부터의 내적 부분이다로부터; 그리고 이스라엘의 표현함이 영적 선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고로 “그를 맞으러 올라 가는 것”은 유입을 표시한다, 그 이유가 “맞으러 올라 가는”것이 자신을 그쪽으로 향하게 하는 것이고 그에게 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고센으로. 이는 자연 평면의 중앙에를 의미한다. 이는 방금 앞에서 설명했다.

그리고 그는 그에게 보여졌다. 이는 지각을 의미한다. 이는 “보다”의 의미가 이해하다와 지각하다 이다로부터, 그리고 또한 신앙을 가지는 것이다로부터 분명해진다. 모두에게 알려져 알고 있는 것 중 하나는 인간과 더불어 그의 생명을 구성하는 두 가지의 것이 있다는 것, 그것은 영적 빛과 영적 열이다. 영적 빛은 그의 이해력을 만들고, 영적 열은 그의 의지력을 만든다. 영적 빛은 주님의 신성한 선으로부터의 신성한 진리로부터 그것의 근원이 있다, 그러므로 선행의 선으로부터의 신앙의 진리이다. 영적 열은 주님의 신성의 사랑으로부터의 신성한 선이 그것의 근원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주님을 사랑함의 선인 천적 수준의 사랑과 이웃을 향한 선행의 선인 영적 수준의 사랑의 선이다. 위 둘이 인간의 전체 생명을 구성한다.
영적 빛에 주목해보자, 영적 빛은 이해력 안에서 이해력과 더불어 있다, 마치 자연계의 빛이 외적 시각에서 시각과 더불어 있는 것과 같다; 즉 눈이 보기 위하여서 빛이 조명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이때 눈은 눈의 바깥쪽 빙둘러 있는 것들을 본다; 그러나 눈이 보는 대상물들은 영적 이다, 즉 기억 속의 지식들과 진리들이다. 그러나 이 빛이 조명되지 않을 때, 지적 마음 또는 인간의 내적 눈은 마치 외적 또는 육체의 눈 같이 어둠에 있고, 아무것도 보지 못한다, 즉 기억 속의 지식들로부터의 진리의 어떤 것도, 그리고 진리로부터의 선의 어떤 것도 보지 못한다. 지적 마음을 비추이는 빛이 진정한 빛 자체이다, 그리고 이 빛은 자연계의 정오의 빛을 수 천 배 이상을 능가하는 빛임을 나는 내가 보았기에 증거하고 있다. 이 빛을 수단으로 천국들에 있는 모든 천사들은 자신들 바깥쪽을 빙둘러 볼 수 있고, 또한 같은 빛을 수단으로 그들은 신앙으로부터 있는 진리들과 그것의 품질을 보고 지각한다. 이로부터 “보다”에 의해 영적 의미에서 이해함 뿐만 아니라, 이해력으로부터 있는 것은 무엇이든, 즉 생각, 반영, 관찰, 신중, 등등 많은 이런저런 것들을 의미하게 된다; 마찬가지로 신앙, 뿐만 아니라 신앙으로부터 있는 무엇이든, 즉 진리, 말씀으로부터의 교리, 등등까지도 의미한다.
영적 열에 주목해보자. 이 열은 인간의 의지력 안에 의지력과 더불어 있다, 마치 자연계의 열이 육체 안에 육체와 함께 있어 생기 있게 하는 것과 같다. 그러나 그것의 첫 근원에서 이 근원은 주님으로부터 이다, 영적 열은 보편적 인류를 향한 신성한 사랑이다, 그리고 이로부터 그분에 대한 상호적인 사랑과 이웃을 향한 사랑이 있다. 이 영적 열이 진정한 열 자체이다, 이 열이 열을 가지고 천사들의 몸을 기쁘게 한다, 동시에 사랑으로 그들의 내면을 기쁘게 한다. 이로부터 “열,” “불꽃,” “불”이 말씀에서 사랑에 속하는 것들을 진짜 의미에서 의미한다, 즉 선과 진리에 대한 애착, 그리고 또한 선 자체 등등이다.

그리고 그의 목들을 어긋맞겨 안았다. 이는 결합을 의미한다. 이는 “목들을 어긋맞겨 안다”의 의미가 결합이다로부터, 즉 대단히 가깝고 친밀한 결합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 대목이 결합을 의미하는 이유는 목은 머리와 몸을 함께 결합되게 하기 때문, 그리고 “머리”에 의해서 내면들이, “몸”에 의해서는 외면들이 의미되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목”은 내면들이 외면들과 결합함을 표시한다. 고로 내면들이 외면들과, 또한 천적인 것들이 영적인 것들과 교통함이 결합 덕택인 바, 같은 단어들에 의해 의미된다, 그 이유가 “요셉”은 내적 부분을, “이스라엘”은 요셉에 비교해서 외적 부분이기 때문이다.

그의 목들에서 한참동안 울었다. 이는 자비를 의미한다. 이는 “울다”의 의미가 자비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의 목들에서 한참동안 울었다”라고 말해진 이유는 결합의 처음 그리고 계속되는 결합이 자비, 최고 의미에서 “요셉”인 주님의 자비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요셉에게 말했다. 이는 영적 선이 지각함을 의미한다. 즉 천적 평면으로부터의 내적 부분이 지각함을 의미한다. 이는 “말하다(say)”가 말씀의 역사 부분에서 지각함이다로부터; 요셉의 목들에서 울었던 이스라엘의 표현함이 영적 선이다로부터; 그리고 요셉의 표현함이 천적 평면으로부터의 내적 부분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에 관한 모두는 이미 앞쪽에서 상세히 알려져 있다.

나는 지금 죽어도 된다. 이는 새 생명을 의미한다. 이는 “죽는다”의 의미가 생명으로 부활함이다로부터, 고로 새로운 생명이다. “죽는다(dying)”가 생명의 새로움을 의미하는 이유는 위의 열거한 항들에서 보여준 바 있다; 즉 인간이 죽을 때, 즉각 그의 생명의 새로움이 시작된다; 그 이유가 지금까지 세상에서의 삶을 섬겨주기 위해 입었던 물질적 몸을 벗고 생명 안으로 일으켜지기 때문이다. 여기서 새로운 생명이 “죽는다”에 의해 의미된 이유는 새로운 생명은 내적 부분을 수단으로 유입으로부터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결합으로부터, 이것은 요셉이 이스라엘의 목들을 어긋맞겨 안음“에 의해 의미되었다.

내가 네 얼굴들을 보았으니. 이는 자비를 인지했으니를 의미한다. 이는 “보다”의 의미가 인지하다(notice)이다로부터; 그리고 “얼굴들”의 의미가 주님을 서술할 경우, 자비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네가 아직 살아 있다. 이는 자신 안에 그 결과로서 있는 생명을 지각함을 의미한다. 이는 “살아 있다”가 내적 의미에서 영적 생명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자신 안에서 이 생명을 지각함이 의미된 것은 앞의 진행된 상황에 이어져서 이다. 그리고 그를 봄에서 있는 환희가 자신 안쪽에 생명이 현존함을 지각하게 했다.

31-34절. 그리고 요셉은 그의 형제들에게, 그리고 그의 아버지의 집(식구)에게 말했다. 나는 올라 가서 바로에게 말할 것입니다, 내 형제, 그리고 내 아버지의 집이 가나안의 토지에 있었는데, 나에게 왔습니다. 32 그리고 이 사람들은 양떼를 치는 목자들입니다, 그들은 가축을 치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기들의 양떼와 목축과 그들이 가진 모든 것을 가지고 왔습니다. 33 그리고 아마 바로는 당신을 부를지 모릅니다, 그리고 말하기를, 너의 일들은 무엇이냐? 34 그러면 당신은 말하십시오, 당신의 종들은 젊은 시절로부터 지금 까지 조차, 우리 모두, 그리고 조상도 모두 가축을 치는 사람들이였습니다. 이는 당신이 고센의 토지에 거주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입니다. 그 이유가 이집트 사람들은 양떼를 치는 목자를 지겹게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요셉은 그의 형제들에게 말했다. 이는 자연 평면에 있는 진리들이 지각함을 의미한다. 이는 “말하다(say)”의 의미가 지각하다 이다로부터; 이스라엘의 아들들의 표현함이 자연 평면에 있는 영적 진리들이다로부터; 그리고 요셉의 표현함이 천적 평면으로부터의 내적 부분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상으로부터 분명한 바, “요셉이 말했다”에 의해 그가 지각함이 의미되지 않는 이유는 요셉은 내적 부분이기 때문, 그리고 모든 지각함은 내적 부분을 통하여 외적 부분, 또는 자연 평면으로 흐르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자체 스스로로부터 자연 평면은 무엇이든 아무것도 지각하지 못하고, 오직 그 자체에 앞서 있는 것으로부터만 지각한다; 물론 앞의 것이라 해도 자체로부터서는 아니고 그 앞의 앞의 것으로부터 지각이 가능하다, 고로 마지막 앞의 것은 그분 자신으로부터 계신 주님이시다. 이와 같음이 유입의 본성이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것이 지각의 본성이다. 유입과 더불어 출시됨(공표됨, coming forth)과 존속됨(subsistence)이 있다. 자체로부터 출시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러나 앞의 것으로부터 이다, 고로 모든 것들은 처음(First)으로부터, 즉 자체적(Itself)으로 있음(Esse)과 존속함(Existere)이신 분으로부터이다. 또한 같은 것으로부터 모든 것들은 존속한다, 그 이유가 계속적인 출시됨이 항구적인 존속함이 되기 때문이다. “이런 진리들 안에 있는 이들이 지각한다”라고 말하지 않고, “자연 평면에서 진리들이 지각한다”라고 말해진 이유는 이와 같은 표현이 영적 언어이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이 방법에서 생각 속의 관념(idea)이 인물들로부터 추상화 되기 때문, 그리고 어떤 것들 쪽으로 결정을 내려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떤 것들, 즉 진리들과 선들은 인간과 더불어 살아 있고, 인간을 살아 있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이것들은 주님으로부터 있고, 이 분으로부터 생명의 모든 것이 있기 때문이다. 이런 방법에서 또한 진리들과 선들을 인물의 것이라고 여기려고 생각함으로부터 물러나게 한다. 이와 같은 언어를 수단으로 일반적인 관념을 가지게 되는 바, 이 관념은 당사자의 생각이 진리들과 선들에 인접하는 것 보다 더 드넓게 확장되게 해준다; 예를 들면, 만일 “이런 진리들 안에서 이들이 지각한다”라고 말해진다면, 관념들은 즉시 인물에 국한되어지고 만다, 하여 그것들은 일반적인 관념으로 물러나는 것이 발생된다; 동시에 이런 방식이라면, 진리의 빛으로부터의 계발됨이 흐지부지 되어진다. 더욱이 다른 삶에서, 인물들에 대한 생각은 그것을 생각한 이들을 흥분시킨다; 그 이유가 다른 삶에서 모든 생각이 교통되어지기 때문이다. 이 교통함이 있는 이유는 말함의 추상화 된 형체가 사용되기 때문, 그 한 예가 여기서의 “자연 평면에서 진리들의 지각함이 있다” 이다.

그리고 그의 아버지의 집(식구)에게 말했다. 이는 거기서 선들에 관하여, 즉 선들에 관하여 지각함이 있다를 의미한다. 이는 “집(house)”의 의미가 선이다로부터; 그리고 “아버지”의 의미가 선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나는 올라 가서 바로에게 말할 것입니다. 이는 교회의 기억 속의 지식들이 있는 자연 평면과 소통함을 의미한다. 이는 “말하다(tell)”의 의미가 교통하다 이다로부터; 그리고 바로의 표현함이 교회의 기억 속의 지식들이 있는 자연 평면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말하기를, 내 형제, 그리고 내 아버지의 집이 가나안의 토지에 있었는데, 나에게 왔습니다. 이는 교회의 진리들과 선들에 관련하여서 이고, 그것들이 받아들이어졌다를 의미한다. 이는 “이스라엘의 아들들”의 표현함이 자연 평면에 있는 영적 진리들이다로부터; “아버지의 집”의 의미가 거기에 있는 선들이다로부터; “가나안의 토지”의 의미가 교회이다로부터; 그리고 “요셉에게 오다”, 또는 요셉이 있는 이집트로 오다의 의미가 교회 속에 있는 기억 속의 지식들 안으로 받아들어졌다 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리고 이 사람들은 양떼를 치는 목자들입니다. 이는 그것들은 선으로 인도한다를 의미한다. 이는 “양떼의 목자들”의 의미가 선으로 인도하는 이들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 이유가 가르치고 인도하는 자가 “목자”이고, 가르침을 받고 인도 받는 자가 “양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적 의미에서 선으로 인도하는 진리들이 뜻해진다, 그 이유가 여기서 “사람들”인 이스라엘의 아들들을 수단으로 “양떼의 목자들”은 영적 진리들을 표현하기 때문이다. 더욱이 그것을 가르치는 이들과 더불어서는 인도하는 진리들이다. 신앙 속에 있는 진리들이 선행 속에 있는 선 쪽으로 인도한다는 것은 이미 살핀 바 있다; 같은 논리에서, 일반적, 세부적, 특수적 측면에서의 모든 것들은 목적에 관련이 있고, 목적을 바라보고 있다, 그리고 목적을 바라보지 않는 것들은 존속할 수가 없다. 그 이유가 주님은 목적을 위하여가 아닌 것은 창조하신 것이 없으시기 때문이다; 같은 취지인 것은, 창조되어진 모든 것들 안에서 목적은 모든 것이다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리고 창조되어져 왔었던 모든 것들이 이런 질서에 있는 바, 처음으로부터 중간의 것들을 통하여 있는 모든 것들은 마지막의 것들, 또는 최말단의 것들을 바라보고 있다, 하여 마지막, 또는 최말단에 있는 목적은 처음 안에서 있는 목적을 중요시하고 있다. 이로부터 이것과 저것의 연결이 온다. 처음 근원으로부터 목적 자체는 신성의 사랑으로부터의 신성한 선밖에 더 없다; 고로 이는 주님 자신이시다. 그러므로 말씀에서 그분은 “처음과 마지막”, “알파와 오메가”이라 불리우신다 (이. 41:4; 44:6; 48:12; 계1:8, 11, 17; 2:8; 21:6; 22:13). 이럴진대, 인간과 더불은 생명에 속하는 각각 그리고 모든 것들은 목적에 관련되어 있어야 하고, 목적을 바라보고 있어야 할 것이다. 합리적 능력의 얼마라도 겸비한 자라면 알아챌 수밖에 없는 것은, 인간과 더불은 기억 속의 지식들은 그것들의 목적으로 진리들을 바라보고 찾는다는 것, 그리고 진리들은 그것들의 목적으로 선들을 바라보고 찾는다는 것, 그리고 선들은 마지막이고 처음의 목적이 되시는 주님을 바라보고 찾는 것이다; 그들이 그분을 진리들로부터 바라보고 찾을 경우 그들은 마지막에 있는 목적 측면에서 이다. 만일 그들이 선으로부터 주님을 바라보며 찾을 경우, 그들은 처음에 있는 목적 측면에서 이다. 선 쪽으로 인도하는 교회의 진리들의 경우가 이럴진대, 이것이 “사람들은 양떼의 목자들입니다”에 의해 의미된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가축떼의 사람들”이다가 아래에서 이어진다.

그들은 가축을 치는 사람들입니다. 이는 그들은 진리들로부터의 선을 가지고 있다를 의미한다. 이는 “가축떼(cattle)”의 의미가 진리의 선, 진리들로부터의 선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것이 자연 평면에 있는 영적 진리들인 이스라엘의 아들들에 관련되어 말해진다; 고로 선 쪽으로 인도하는 진리들을 두고 말해진다.

그래서 그들은 자기들의 양떼와 목축과 그들이 가진 모든 것을 가지고 왔습니다. 이는 내면의 선, 외면의 선 그로부터 있는 것은 무엇이든 현존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는 “양떼”의 의미가 내면의 선이다로부터; “목축떼”의 의미가 외면의 선이다로부터; “그들이 가진 모든 것”의 의미는 거기로부터 있는 무엇이든 이다로부터; 그리고 “그들이 가져왔다”의 의미가 현존하고 있다 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리고 아마 바로는 당신을 부를지 모릅니다. 이는 만일 자연 평면 안에 교회의 기억 속의 지식들이 있다면 합쳐지기를 뜻할지 모른다를 의미한다. 이는 “자신에게로 부른다”의 의미가 결합이 있기를 뜻한다 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 이유가 그들이 자기의 토지 안에서 거주하게 하고 장차 자신과 더불어 하나의 나라가 되게 하고 싶은 애착으로부터 자신에게로 부른 것은 결합되기를 뜻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로의 표현함이 교회의 기억 속의 지식들이 있는 자연 평면이다로부터도 알려진다. 바로가 부름에 의해 받아들이어짐과 결합이 상호적이다는 것, 즉 교회의 기억 속의 지식들과 자연 평면의 선들과 진리들의 결합과 상호 받아들이어짐이 의미된다; 그 이유가 모든 결합은 상호성, 즉 양쪽이 동의함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교회의 진리들이 교회의 기억 속의 지식들과 결합함이 여기서 다루어지고 있는데, 우리가 유념해야 할 것이 있다: 즉 실로 결합의 시작이 기억 속의 지식들로부터 만들어지지 않는다는 것, 그러나 이를 통하여 결합으로 진입함은 신앙의 진리 쪽에서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인간과 더불은 기억 속의 지식들은 감각의 것들부터 파생되기 때문, 고로 세상의 것들로부터 파생되는 바, 거기로부터서는 무수한 오류들이 있기 때문이다. 결합의 출발은 신앙의 진리들로부터만 있어야함이 틀림이 없다. 첫째, 교회의 교리적인 것들을 배워야만 한다, 그 다음 이 교리들이 진정한 진리인지를 말씀으로부터 검사되어야 한다; 그 이유는 교회의 우두머리가 이렇게 저렇게 말했고, 추종자들이 그것이 맞다고 확증했다고, 그 나라에 오래전부터 있어온 교회로부터의 교리이니까, 또는 자기의 출생 때부터 인간들이 그것들을 붙들고 있으니까, 다시 말해, 교황의 교리적인 것이든, 퀘이커의 교리적인 것이든, 유태인들의 것이든, 심지어 모하멭의 것이든, 모두를 아울러 몽땅 진리라고, 즉 맹목적 추종함은 위험 천만하기 때문이다. 고로 알게 되는 것은, 말씀은 수색되어져야만 한다는 것, 하여 교리가 진정 진리인지를 반드시 보아야만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진리에 애착함으로부터 행해질 때, 이때 인간은 거기로부터의 앎 없이 진리인 것을 지각하기 위하여 주님에 의해 계발되어진다. 그리고 자신이 지닌 선에 일치함에 따라 계발됨 안에서 진리의 확증함이 있게 된다. 만일 이런 진리들이 교리적인 것들과 불일치한다면, 자기로 하여금 교회를 휘젖지 않도록 조심하게 해야 한다.
그 후에, 그가 확증했을 경우, 고로 교리적인 것들이 신앙의 진리들이다는 것을 말씀으로부터 확언했을 경우, 이때 그는 자기가 소유한 기억 속의 모든 지식들을 수단으로 그것들을 확증하게 허용할 수 있다; 그 이유는 확언한 것이 보편적으로 통치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일치하는 기억 속의 지식들은 받아들이되, 그것이 오류를 포함했기에 불일치하는 것은 거절한다. 그 이유가 신앙은 기억 속의 지식들을 수단으로 힘세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자신들이 출생한 교회의 교리적인 것들이 진리인지 여부를 알려는 애착으로부터 성경을 수색하는 것은 누구에게나 금해지지 않는다. 그 이유가 그가 계발될 수 있는 방법은 이외 달리 있지를 않다. 이것이 행해진 후, 그가 기억 속의 지식들을 가지고 자신의 성벽을 튼튼히 하는 것 역시 금지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가 계발되기도 전에 자신의 방어벽부터 튼튼히 하려는 것은 질서상 맞지가 않다. 이상 설명한 것이 신앙의 진리들이 기억 속의 지식들과, 이외 모든 다른 지식들 무엇이든지와 결합해가는 방법이고 유일한 방법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오늘날 이 순서를 따르는 이는 흔치가 않다; 그 이유가 말씀을 읽는 대부분의 인물들이 진리에 대한 애착으로부터 읽지 않기 때문, 대체로 자기들이 내세운 교리들과 맞는 대목이 어디 있나 하고 탐사하는 것이 대부분의 경우이기 때문, 한마디로 자신의 주장을 말씀에게 증명해내라고 윽박지르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
주님의 왕국을 묘사하는 말씀에서, 그 안에는 영적, 합리적, 그리고 기억 속의 지식들이 함께 결합되어 있다; 그러나 이것이 단지 이름들만을 열거함으로 의미되고 있다; 즉 “이스라엘,” “앗시리아,” 그리고 “이집트”라는 나라 이름에 의해서이다. “이스라엘”에 의해서는 영적 측면이, “앗시리아”에 의해서는 합리적 측면이, “이집트”에 의해서는 기억 속의 지식이 의미된다 아래 말씀을 읽어보자:
그 날에 이집트의 토지의 한가운데에 여호와의 제단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거기로부터의 경계선 가까이에 여호와께 기둥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이집트의 토지에 있는 여호와 체바욷에게 표시를 위해, 그리고 거기로부터의 증거를 위해 있을 것이다; 그 이유가 그들은 압제자 때문에 여호와께 외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분은 그들에게 구조자, 그리고 제 1 인 자를 보낼 것이다, 그리고 그가 그들을 구원해낼 것이다. 그리고 여호와는 이집트에게 알려지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집트인들은 그 날에 여호와를 알 것이다, 그리고 제물과 식사 제물을 바칠 것이다, 그리고 여호와께 서약을 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수행할 것이다. 그 날에 이집트로부터 앗시리아 로 작은 길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앗시리아는 이집트 쪽으로 올 것이다, 그리고 이집트는 앗시리아 로, 그리고 이집트인들이 앗사리아를 섬길 것이다. 그 날에 이스라엘은 이집트와 더불어, 그리고 앗시리아와 더불어 세 번째 일 것이다, 그리고 토지의 한 가운데에서 행복할 것이다; 이것을 여호와 체바욷께서 복주실 것이다, 말하시기를, 이집트 나의 백성은 복될지어다, 그리고 앗시리아 는 내 손의 일이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나의 상속이다 (이. 19:19-25);
모든 이가 쉽게 알 수 있는 것은, 위 구절에서 이집트가, 앗시리아가, 이스라엘이 뜻해지지 않고 그 나라들의 이름을 수단으로 그밖의 뭔가를 뜻할 것이라는 것이다. 셋이 교회인 안에서 함께 결합되어 있다는 것이 예언자의 말, 즉 “이집트로부터 앗시리아로의 작은 길이 있을 것, 그리고 앗시리아가 이집트로 올 것, 그리고 이집트는 앗시리아로, 그리고 이집트는 앗시리아를 섬길 것; 그 날에 이스라엘은 이집트, 앗시리아 다음으로 세 번째 일 것, 토지의 한가운데에서 복될 것”에서 묘사되어 있다. 그 이유가 인간이 교인이 되기 위하여, 필요한 것은 그가 영적 인간, 합리적 인간이 되고, 이 인간들을 섬기는 기억 속의 지식들과 더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모두로부터 분명해지는 바, 기억 속의 지식들은 신앙의 진리들로부터 결코 거절되어서는 안된다는 것, 그러나 그것들과 결합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결합은 전자의 방법, 즉 신앙으로부터의 방법을 수단으로, 그러나 후자의 방법이 아니다는 것, 즉 기억 속의 지식들로부터의 방법은 아니다는 것이다.

그리고 말하기를, 너의 일들은 무엇이냐? 이는 그리고 당신의 선들을 알려고를 의미한다. 이는 일들의 의미가 선들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일들”이 선들인 이유는 선들은 의지로부터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의지로부터 있는 것은 선, 또는 악이다, 그러나 이해력으로부터 있는 것들, 즉 강연, 설교 등등은 진리, 또는 거짓이다. 야곱의 아들들의 일들, 또한 그들의 조상들의 일들은 가축에 풀을 뜯기는 것, 고로 목자들로서 행동하는 것이다. 이 일들이 선들을 의미하는 또 하나는 특별하게 진리들로부터의 선들이다. 일들이 이런 의미를 가지는 것은 상응으로부터이다, 그 이유가 양떼에 속하는 것들인 어린 양, 양, 염소새끼, 염소가 선행의 선에 상응하기(내적 선) 때문이다; 목축에 속하는 거세한 수소, 수소도 마찬가지(외적 선)이다. 이것들이 상응하는 것은 이런 사실로부터, 즉 천사들이 선행의 선에 관하여 대화를 할 때, 영들의 세계 어딘가에서, 또한 첫 천국, 또는 최말단 천국의 어딘가에서 양떼와 목축떼가 나타난다는 사실로부터 분명해진다. 천사들이 선행으로부터의 내면의 선을 이야기 할 때는 양떼가, 외면의 선일 경우는 목축이 나타난다. 이런 이유로 말씀에서 이런 사항들이 “양떼와 목축떼”에 의해 의미된다. 일반적으로 말씀에서 있는 모두 각각의 의미함은 다른 삶에서의 표현들로부터 그것의 근원을 가진다, 그리고 이것들은 상응으로부터 이다. 이유인 즉, 원인과 결과의 관계 같이 자연계는 영계로부터 있기 때문, 고로 자연계에서 원인으로 행동한다. 이 방법에서 이 세계의 모든 것들은 방침과 질서에서 함께 붙들고 있다.

그리고 당신은 말하십시요, 당신의 종들은 그들의 젊은 시절로부터 지금까지 조차 가축을 치는 사람들이였습니다. 이는 시작으로부터 지금까지 그들은 선이 있게 하는 진리들을 가지고 있다를 의미한다. 이는 “가축을 치는 사람들”의 의미가 진리로부터 선이 있다 이다로부터; 그리고 “그들의 젊은 시절로부터 지금까지”의 의미가 시작으로부터 아직까지 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가축떼”가 선을 있게 하는 진리들이다에 주목해보자, 모두가 아는 것은, “가축떼”에는 덩치가 크든 작든 짐을 싣는 모든 짐승들, 양떼와 목축들, 그리고 또한 낙타들, 노새들, 나귀들 모두에서 이다. 짐을 싣는 짐승은 진리들에 관련되는 이런저런 것들을 의미한다, 그러나 목축들과 양떼들은 선에 관련되는 이런 저런 것들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그러므로 “가축떼”인 일반적으로 짐을 싣는 모든 짐승들은 선인 것을 있게 하는 진리를 의미한다. 단어 “가축떼(cattle)”가 원어에서는 “습득물(acquisition)”을 뜻하는 단어로부터 이다, 그리고 “습득물”은 영적 의미에서 선을 있게 하는 진리이다, 그 이유가 선은 진리를 수단으로 획득되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작은 가축떼”는 내면의 선들을 의미한다, 그 이유가 이들에는 양떼에 속하는 것, 어린 양, 양, 염소새끼, 염소, 숫양이기 때문이다. “가축떼”가 선을 있게 하는 진리인 것을 다른 구절에서도 확인 해보자:
그때 그분은 네 씨에게 비를 주실 것이다, 이와 더불어 너는 토지에 씨를 뿌릴 것이다; 그리고 빵의 증가(가 있다); 그리고 그것은 지방일 것이고 풍부할 것이다; 그 날에 네 가축떼는 넓은 목초지에서 풀을 뜯을 것이다 (이. 30:23);
“풀을 뜯는 것”은 진리들 안에서와 선에 관하여 가르침이 있는 것을 표시한다; “넓은 목초지”는 진리의 교리를 표시한다; “넓다”라고 말해진 이유는 “넓이”가 진리이기 때문이다. 고로 “가축떼”는 진리들로부터 선이 있음이 분명하다.
네 손을 (이제는) (사람이) 살게 된 황폐된 곳 위에, 그리고 가축떼와 소유물을 가지고 일하며, 땅의 배꼽(중앙)에 거주하는 (여러) 나라로부터 그러모은 백성 위에로 도로 가져다 놓는 것 (노략질 하려 드는 것) (겔. 38:12);
위 구절에서도 마찬가지로 “가축떼”는 진리들을 통하여 선이 있음을 표시한다; 그리고 “소유물”은 선을 표시한다.

우리 모두, 그리고 조상들도. 이는 처음의 선들로부터 그렇게 있었다를 의미한다. 이는 “조상들(fathers, 아버지들)”의 의미가 선들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고로 가축을 치는 사람들, 또한 조상들 모두는 처음의 선들로부터를 표시한다. 말씀에서 “조상들”에 의해 아브라함, 이삭, 야곱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이들보다 훨씬 먼 선조이며 선 안에 있었던 고대 교회에 속했던 이들이 뜻해진다.

이는 당신이 고센의 토지에 거주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입니다. 이는 그렇게 당신의 거주지는 교회의 기억 속의 지식이 있는 자연 평면의 한 중앙이다를 의미한다. 이는 “거주하다”의 의미가 삶이 있다 이다로부터; 고로 삶의 거주지들이다; 그리고 “고센”의 의미가 자연 평면의 중앙, 또는 가장 안쪽이다로부터. 거기에 “이집트”에 의해 의미되는 교회의 기억 속의 지식들이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 이유가 고센은 이집트의 최상의 지역이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이집트 사람들은 양떼를 치는 모두 각각의 목자를 지겹게 여기기 때문입니다. 이는 교회의 기억 속의 지식에 반대되고 있는 왜곡된 기억 속의 지식과 분리됨을 의미한다.
이는 “이집트인들의 역겨워하는 것”의 의미가 기억 속의 지식들을 분리함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 이유가 역겨운 것들이 분리되는 이유는 그것들이 원리들과 사랑들을 받아들임에 반대되어 있기 때문 이다; 현재의 경우, “양떼의 목자라면 누구든지 이집트인들에게는 역겹다”라고 말해질 경우에서의 이집트인에 의해 의미된 것, 즉 거꾸로된 기억 속의 지식들에 반대함이다; 그리고 “양떼의 목자”의 의미가 선으로 인도하는 자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선을 확증하는 기억 속의 지식에 타락된(악용된) 기억 속의 지식들은 같은 부류의 지식들이지만 서로에게 반대적 이다. 악용된 기억 속의 지식들은 신앙의 진리들과 선행의 선을 파괴한다, 그리고 또한 질서를 거꾸로 하고 있다, 마치 마술사들이 이집트에 존재하는 것과 같다. 그 이유가 질서에 일치하는 아주 많은 것들을 이런 마술사들은 남용하기 때문이다, 즉 상응들과 표현들을 남용한다는 말이다. 사실상 이것들은 여느 평범한 이들에서 보다 마술사 같은 이들 사이에서 더 발달되어 있다. 악한 자들이 표현과 의미, 상응들을 응용할 때 조차 그것들은 질서에 따르고 있다, 그 이유가 이들이 그것들을 응용함에서 타인에게 명령함을 실행하고, 타인에게 피해를 주는 행위가 초래되기 때문인데, 그것들이 뒤집혀 마술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반대되는 것의 분리함이 중요한 바, 여기서는 진리들과 더불은 선이 “고센”에 의해 의미된 (자연 평면의) 중앙에 있게 될 때 거행되어 질서 안으로 가져오는 식으로 하여 결과되고 있다; 그 이유가 반대적인 악용된 기억 속의 진리들은 내던져야 하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취급한 주제는 진리들이 기억 속의 지식들과 결합함이었다. 더 나아가 내적 부분, 또는 영적 인간이 외적 부분, 또는 자연적 인간과의 결합은 진리들이 기억 속의 지식들 안으로 은근히 심어지지 않으면 가능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 이유가 자연적 수준의 애착들의 기쁨들과 함께 기억 속의 지식들은 외적 또는 자연적 인간을 구성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결합이 기억 속의 지식들과 더불어서 결과되어 있지 않으면 어떤 것도 결과되는 것은 없게 된다는 말이다. 그렇지만 인간이 거듭나도록 하기 위하여는 그의 내적 부분과 외적 부분은 함께 결합하여야만 한다, 그 이유가 그것들이 결합되어 있지 않으면, 내적 인간을 통하여 외적 또는 자연적 인간 안으로 주님으로부터 흘러드는 모든 선은 악용되거나, 질식되거나, 거절되기 때문이다, 이때 내적 인간은 닫히고 만다. 하여 이 결합이 결과되는 방법이 이 장에서 묘사되어 왔다, 이 방법은 진리들을 기억 속의 지식들 안으로 삽입하는 수단들에 의하여서 이다.

창세기 45장 해석

창세기 제 45 장

1, 2절. 그리고 요셉은 자기 앞에 서있었던 모든 사람 앞에서 자신을 억제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소리질렀다, 모든 사람은 나로부터 물러가라. 그리하여 요셉이 자신을 그의 형제들에게 알리는 동안 거기에는 아무도 그와 더불어 있지 않았다. 2 그리고 그는 그의 목청을 돋구어 울었다. 그래서 이집트 사람들이 들었고, 바로의 집도 들었다.

그리고 요셉은 자기 가까이에 서있었던 모든 사람 앞에서 자신을 억제할 수 없었다. 이는 모든 것들은 이제 결합을 위하여 천적 평면으로부터의 내적 부분 (the internal celestial) 을 수단으로 준비가 만들어졌음을 의미한다. 이는 “요셉”의 표현함이 내적 선, 고로 천적 평면으로부터의 내적 부분이다로부터, 그 이유는 천적 평면에 의해 주님으로부터 진행하는 선이 뜻해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신을 억제할 수 없었다”의 의미가 모든 것이 결합을 위해 만들어졌다 이다로부터 알려진다. 이는 이런 경우와 비슷할 것이다. 누군가가 어떤 목적이나 결과를 얻기 위해 갖가지 수단을 다 동원하여 질주했다면, 결과를 개봉하고 싶은 자신을 억제할 수 없는 때와 같다. 이것을 위의 본문이 의미한다; 앞 장에서는 결합이 개시되었고, 이 장에서는 결합 자체가 진행된다. “요셉 가까이에 서있던 모든 이”에 의해서는 결합을 방해하는 이런저런 것들을 의미한다, 이런 이유로 그들은 내보내졌는데, 아래에서 살핀다.

그래서 그는 소리질렀다. 이는 결과가 아주 가까이 있음을 의미한다. 자신을 억제할 수 없을 때 나오는 것이 소리침인 바, 이는 결과가 임박했다를 뜻한다.

모든 사람은 나로부터 물러가라. 이는 역으로 있거나 일치하지 않는 기억 속의 지식들은 한 가운데로부터 내쳐짐을 의미한다. 이는 “그와 더불은 모든 사람”의 의미가 기억 속의 지식들이다로부터 알게 되는데, 그 이유는 이 사람들이 이집트인들이었고, 그들에 의해 기억 속의 지식이 의미되기 때문이다. 이들이 일치하지 않고 역으로 있다고 말한 이유는 이렇다: 결합이 외적 인간, 또는 자연적 인간에 있는 진리들이 내적 부분인 선과 결합될 때, 즉 신앙의 진리들이 선행의 선과 결합될 때, 이때 일치하지 않는 기억 속의 모든 진리들, 특히 역으로 있는 것들은 중앙에서 측면 쪽으로 거절되어진다. 고로 중앙에 있는 빛으로부터 그늘진 바깥쪽으로 거절되어진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 이 결합을 위해서 기억 속의 지식들은 필수적인 것, 중요한 것이 아닌 것으로 간주된다는 것, 따라서 부분적으로는 보여지지 않기도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하모니를 이루거나 일치하는 기억 속의 지식들이 있다면, 그것들로부터의 것은 거기 남아 있는데, 그 나마 남아 있는 것들은 추출된(extract) 지식들, 즉 격이 높아진(sublime) 기억 속의 지식들이다. 이 지식들을 가지고 내면은 감각한다. 이 감각함으로부터 얼마 정도의 즐거움 까지, 즉 하루 중에서 아침이 우리에게 주는 상쾌함 같은 정도까지는 느껴질 수는 있지만 대체적으로는 인간에 의해 지각되지 않는다. 이렇게 하여 신앙 속에 있는 진리는 선행 속에 있는 선과 결합되어진다.

그리하여 요셉이 자신을 그의 형제들에게 알리는 동안 거기에는 아무도 그와 더불어 있지 않았다. 이는 천적 평면으로부터의 내적 부분이 이 중매자를 통하여 자연 평면에 있는 진리들과 합쳐질 때 여타 어느 지식도 현존하지 않음을 의미한다. 이는 앞에서 설명되었다.

그리고 그는 그의 목청을 돋구어 울었다. 이는 자비와 환희(joy)를 의미한다. 여기서 “울다(weep)”의 의미가 자비의 결과이다로부터; 그리고 또한 슬픔의 결과, 사랑의 결과이다로부터, 고로 환희이다.

그래서 이집트 사람들이 들었다. 이는 최말단(ultimate) 조차도를 의미한다. 이는 “듣다(hear)”, 즉 우는 소리를 듣다의 의미가 자비와 환희를 지각함이다로부터; 그리고 이집트인들의 표현함이 기억 속의 지식들이다로부터, 고로 최말단들이다로부터, 그 이유가 기억 속의 지식들은 인간의 최말단, 즉 인간의 기억과 생각에 있는 것들에 해당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이 최말단이라고 당사자에게는 나타나지 않고, 오히려 그것들이 총체적으로 지혜나 총명으로부터 인 듯하게 여겨지고 있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실로 이것들은 지혜나 총명의 그릇일 뿐이다. 그 이유가 이 지식들은 육체의 감각적인 것들과 자체들을 결합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자신의 생각함을 되짚어보면 분명해진다. 즉 우리가 어떤 진리를 문의하게 되면, 우리의 생각함이 기억 속의 진리 안에서 이리저리 뒤져보는 바, 이 지식들이 표출되고 현존하는 것은 분명한데 우리의 눈, 귀 같은 감각에 모습을 나타내지는 않는다; 그 이유가 이때 생각은 이 지식들이 포함하는 것을 (한약을 달여 약만을 추출하듯) 추출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기저기 기억 속에 흩어 있는 것 뿐만 아니라 깊숙이 감추여 있다시피 있는 지식들까지도 다 뒤져낸다.) 그 다음 문의에 대한 답으로서 결론을 만들어 낸다. 여기서 한 차원 더 전진하는데, 즉 생각이 더 내면적으로 파고드는 것이다. 그 수단은 생각이 기억 속의 지식들을 생각함 자체로부터 제거하는 것이고, 얼마 만큼 제거되느냐에 따라 얼마나 깊이 내면을 수색하는지가 결정된다. 이것이 더 분명해지는 것은 다른 삶의 경우이다. 인간이 다른 삶에 오게 되어 영이 될 때, 실로 그는 자신의 기억 속의 지식들까지도 가져오지만, 거기서 그것들을 사용하지 못한다. 그 이유는 몇 가지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는 진리와 선에 관해 생각하고 이야기도 하는데, 세상에서 보다 더 또렷하고 완전하게 이다. 이로부터 알는지 모르는 것은, 기억 속의 지식들이 이해력을 형성하는 것을 돕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해력이 형성되어지고 나면, 이 지식들은 최말단 평면(plane)을 구성해줄 뿐, 인간은 이 지식으로부터 더 이상 생각하지 않고, 그 지식 위에 있게 된다.

바로의 집도 들었다. 이는 자연 평면 전체를 통하여를 의미한다. 이는 바로의 표현함이 일반적 측면에서의 자연 평면을 의미함에서 알게 된다. 고로 그의 “집”은 자연 평면 전체를 의미한다.

3-5절. 그리고 요셉은 그의 형제들에게 말했다, 나는 요셉이다. 나의 아버지는 아직 살아계신가? 그런데 그의 형제들은 그에게 대답할 수 없었다. 그 이유는 그들이 요셉 앞에서 너무 당황해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요셉은 그의 형제들에게 말했다, 당신들은 나에게 부디 가까이 오시오. 그래서 그들은 가까이 다가갔다. 그리고 그는 말했다, 나는 당신들이 이집트로 팔았던 당신들의 형제 요셉이요. 그리고 당신들이 저쪽으로 나를 팔았다고 해서 슬퍼하지 않고, 지금 당신의 눈에서 분노가 있지 않게 할 것입니다. 그 이유는 하느님께서 당신들을 살게 만들고저 당신들 앞에 나를 보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요셉은 그의 형제들에게 말했다. 이는 천적 평면으로부터의 내적 부분이 자연 평면에 있는 진리에 지각하는 능력을 주었다를 의미한다. 이는 “말하다(say)”의 의미가 말씀의 역사 부분에서의 경우, 지각하다 이다로부터, 여기서는 지각의 능력을 주는 것을 의미한다 (아래에서 설명한다); 요셉의 표현함이 천적 평면으로부터의 내적 부분이다로부터; 그리고 여기서 “그의 형제들”인 야곱의 열 아들의 표현함이 자연 평면에 있는 진리들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고로 내적 의미는 천적 평면으로부터의 내적 부분이 자연 평면에 있는 진리들에게 지각하는 능력을 주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다”가 지각하는 능력을 주는 이유는 이어지는 사항들에서의 주제가 “요셉”인 천적 평면으로부터의 내적 부분이 “야곱의 열 아들”인 자연 평면에 있는 진리들과 결합함이기 때문, 그리고 결합이 있을 때, 지각력이, 즉 진리에 애착함을 통하여, 고로 선으로부터 지각하는 능력이 주어지기 때문이다.

나는 요셉이다. 이는 자신을 명백히 함(manifestation)을 의미한다.

나의 아버지는 아직 살아계신가? 이는 자연 평면으로부터 있는 영적 선의 현존(現存)을 의미한다. 여기서 “아버지”인 이스라엘의 표현함이 자연 평면으로부터의 영적 선이다로부터; “그가 아직 살아 계신가”의 의미는 거기로부터 현존하고 있다 이다. 그 이유는 지금 요셉이 자신의 정체를 밝힘에서 사실 아버지가 살아계심으로 판단하고 있음에도 안부를 묻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은 처음에는 생각 속에서 현존했고, 이 현존함을 생각하면서 계속 요셉은 그의 형제들과 이야기를 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말한 이유인즉, “요셉”인 천적 평면으로부터의 내적 부분이 “야곱의 아들들”인 자연 평면에 있는 진리들과의 결합은 “이스라엘”인 자연 평면으로부터 인 영적 선을 통하지 않고는 결괴되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결합이 결과되었을 때, 그들은 야곱의 열 아들들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열 아들들”, 즉 자연 평면에 있는 영적 진리들이다.

그런데 그의 형제들은 그에게 대답할 수 없었다. 자연 평면에 있는 진리들은 아직 말할 상태에 있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이는 여기서 “그의 형제들”인 야곱의 아들들의 표현함이 자연 평면에 있는 진리들이다로부터; 그리고 “대답할 수 없다”의 의미가 말할 상태에 아직 있지 않다로부터, 즉 진리들로부터 내적 인간과 말할 상태는 아직 못된다는 말이다. 이 경우가 여기서는 이렇다: 내적 인간이 외적 인간과 결합될 때, 또는 선이 진리와 결합될 때, 처음에는 내적 인간 쪽에서만의 교통함이 외적 인간과 더불어 있다; 즉 교통함이 아직 상호적이지 않다는 말이다. 이 교통함이 상호적일 때, 결합이 있는다. 그러므로 요셉이 베냐민의 목을 끌어안고 울고, 그의 모든 형제들과 키스하고 난 후 처음으로 그의 형제들이 그와 대화했다고 말해지는 것이다 (15절). 이는 결합이 결과된 이후, 받아들임 덕택에 상호 교통함이 있다는 것이 의미되어진다.

그 이유는 그들이 요셉 앞에서 너무 당황했기 때문이다. 이는 그들 사이에서 동요가 있음을 의미한다. 이는 “당황함(cobsternation)이 있다”의 의미가 동요함(commotion)이 있다 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당황함은 그밖에 더 다른 의미는 없다. 동요함을 수단으로 자연 평면에 있는 진리들에 관한 질서가 새로이 배열됨(dispostion)과 설정됨(setting)이 뜻하여진다. 질서 안에서의 이런 설정됨에 관하여, 즉 인간의 기억에 있는 기억 속의 지식들과 진리들이 질서 안에서 설정됨에 관하여는 인간에게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주님이 허락하실 경우, 천사들에게는 알려진다. 그 이유가 이것은 경이로운 질서이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조그만 다발(bundle)들 같이 응집(cohere) 한다, 그리고 조그만 다발들 자체가 함께 응집한다, 그리고 이것은 인간이 마음에 품는 것들에 따라서 있다. 이 응집함은 여느 인간도 믿어본 적이 없는 경이로운 것이다. 다른 삶에서 때로는 그것들이 시야에 잡히기도 한다. 그 이유가 영적인 이런저런 것들은 천국의 빛에서는 눈의 시각에 진열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상의 눈의 시각은 아니다. 기억 속의 지식들과 진리들은 인간의 사랑들 만으로 황홀한 형체들로 배열되어진다, 즉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을 수단으로 지옥의 형체들로, 하느님을 사랑함과 이웃을 향한 사랑을 수단으로 천국의 형체들로 배열된다. 그러므로 인간이 거듭나지는 동안, 그리고 결합이 내적 인간의 선과 외적 인간의 진리들에서 결과되는 한편, 동요함은 진리들 사이에서 발생된다, 그 이유가 이 결합시에 다른 배열이 수행되기 때문이다. 이 동요함이 여기서는 “당황함”에 의해 의미되고 있다. 이때 만들어진 동요는 이전 상태의 바뀜으로부터, 즉 이전 상태에서 누려왔던 기쁨이 결핖됨으로부터 발생하는 걱정에 의해 진리 자체가 명명백백해진다. 또한 이 동요됨은 과거 삶에 관한 걱정으로도 자체를 표명한다, 즉 내적인 선과 내적 부분 자체를 더 낮은 자리에 추방해버리고 있었던 것에 대한 걱정이다. 이 걱정이 이어지는 구절에서 취급된다.

그리고 요셉은 그의 형제들에게 말했다. 이는 새로운 자연 평면이 지각됨을 의미한다. 이는 “말하다”가 지각하다를 의미함으로부터; 그리고 야곱의 아들들의 표현함이 자연 평면의 진리들, 여기서는 자연 평면이다로부터; 그 이유가 자연 평면에 있는 진리들을 표현하는 것들은 자연 평면 자체 역시 표현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바로의 경우, 그가 표현하는 것은 일반적 측면에서의 기억 속의 지식인데, 이는 그가 이집트의 왕이었기 때문인데, 그는 일반적 측면에서는 자연 평면 자체를 표현한다. 자연 평면에 있는 진리들, 그리고 자연 평면 자체, 또는 자연적 인간 자체 모두는 하나로서 행동한다, 그 이유가 진리들은 내용들(알맹이들)이고, 자연 평면은 내용을 담는 그릇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지금은 내적 의미에서 그릇이 의미되고, 내용은 어떤 시리즈에 따라서 이다.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여기서 야곱의 아들들은 새로운 자연 평면을 표현하게 되기 때문이고, 이를 위한 결합의 행동이 일반적인 설명(explication)에 일치하여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내적 부분과 외적 부분의 결합, 또는 선이 진리와 결합함이 거행될 때, 첫 번째 순서는 인간이 진리에 감동되고 선과도 감동되는 지각력이 수여되는 것이다, 이때 동요함이 느껴질 수밖에 없다; 그 다음 내면으로 교통함이 유입을 수단으로 주어진다; 등등이다. 이로부터 야곱의 아들들이 지금 표현하는 것은 새로운 자연 평면인데, 그 이유는 이전의 상태가 바뀌었기 때문이다.

당신들은 나에게 부디 가까이 오시오. 이는 내면적으로 교통함을 의미한다. 이는 “가까이 오다”의 의미가 더 밀접하게 교통하는 것이다로부터, 여기서는 내적 측면에 비교하여 외적 측면을 서술하는 경우이므로, 이는 더 내면적으로 교통하는 것이다. 인간이 모르는 것은, 자연적, 또는 외적 인간과의 교통함에는 내면과 외면의 양쪽 측면에서 있다는 것에 대해서이다. 모르는 이유는 그가 내적 인간에 관한 관념, 그리고 외적 인간의 생명과 구분되는 내적 인간의 생명에 관한 관념을 자신을 위해 만들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마 모든 이에게 내적 인간에 대해 물어본다면, 이것은 우리 안쪽에 있는 인간이다는 정도의 생각 뿐일 경우가 허다할지 모른다. 게다가 안쪽 인간이 바깥쪽 인간, 즉 외적 인간과는 별도의 생명 (또한 삶)을 지니고 있어 완전 구분된다는 것을 모르고 있다. 게다가 내적 인간의 삶은 더 순수하다는 것, 하여 인간이 죽을 때, 내적 인간은 외적 인간으로부터 진짜 분리됨이 거행되고, 이 분리됨 이후 살아가는 내적 인간이 영(spirit)이라 불리운다는 것까지 연결해 생각을 정리해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사실상 이 영이 인간 동물이라는 육체애 얹혀서 살고 있는 인간 당사자 자체이다. 이 영이 자신에게 나타나는 “나”이고 다른 삶에서는 이세상의 인간 같이 나타나는 육체라는 껍질 없는 진짜 “나”가 나타나고 있다. 저세상의 인간도 이세상의 인간이 향유한 것들, 즉 촉각, 후각, 시각, 청각, 이야기함, 생각함이 수여되어져 있다. 저 세상에 도착한 당사자가 자신이 다른 삶에 있다는 것을 꼼꼼히 반영해보지 않고 있다면, 그는 세상에서 육체 안에 있던 자기를 상상하고 있다. 이는 내가 거기 있는 영들이 말하는 것에서 확인되었다. 어쨌든 이런 사항들로부터 분명해지는 것은, 인간의 내적 부분과 외적 부분이 무엇인지 이다. 이런 두 부분들에 관하여 생각을 정리해서 지닌다면, 이후 자주 언급될 수밖에 없는 내적 인간과 외적 인간이라는 단어의 등장에서 보다 더 선명한 관념을 가지고 생각하게 될 것이라 본다. 또한 여기서 “이리 가까이 내게로 오시오”에 의해 의미된 내면의 교통함이 뜻하는 것도 더욱 실감될 것이다. (성경의 첫 장 첫 절에 등장하는 “하늘” 과 “땅”이 성경을 여는 두 단어 인 셈인데, 이것이 비록 거듭남 이전의 내적 인간과 외적 인간을 의미하지만, 어쨌든 우리가 지니는 두 인간을 선포함으로 성경의 책이 펼쳐지고 있다고 생각에 떠올린다면, 이 두 인간에 대한 것을 생각 속에 정리해두는 것이 성경의 이해에 얼마나 중요할 것인지 실감되리라 본다. 역자 주)

그래서 그들은 가까이 다가갔다. 이는 그 결과를 의미한다. 즉 보다 더 내면적으로 교통함이 결과된다 이다.

그리고 그는 말했다, 나는 … 당신들의 형제 요셉이요. 이는 유입을 수단으로 명백히 자신의 정체를 드러냄을 의미한다. 이는 “말하기를, 나는 당신들의 형제 요셉이다”의 의미가 자신이 누구인지를 명백히 함 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 명백히 함은 유입을 수단으로 된다고 말한 이유는 내적 인간이 외적 인간 안으로 가는 방법은 유입외에는 다른 수단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금 더 내면적인 교통함이 결과되어졌다. 유입을 수단으로 명백히 함이 선의 측면에서는 진리에 애착함을 통하여 통지함, 그리고 이것은 선행이다; 그러나 진리 측면에서는 그 점에 관하여 인정함, 그리고 이것은 신앙이다.

당신들이 이집트로 팔았던. 이는 그들이 멀리했던 내적 부분을 의미한다. 이는 “그들이 팔아버린 그”인 요셉의 표현함이 내적 부분(내적 인간)이다로부터; 그리고 “팔다”의 의미가 멀리해버림, 소원해지게 함이다로부터(alienate) 알게 된다. “이집트”에 의해 가장 낮은 것이 여기서 의미되는데, 그 이유는 기억 속의 지식들이 인정함을 받지 못한 상황에서는 측면으로 밀려나 있기 때문, 고로 최말단, 또는 가장 낮은 것 쪽으로 밀려나 있기 때문이다. 역사적인 요셉이 이런 경우에 처했었지만, 오늘날의 경우는 요셉이 의미하는 내적 인간도 우리라는 인간으로부터 소원된 단어로, 생소한 단어로 있기는 마찬가지로 되어 있다. 실로 이 단어는 기억 속의 지식들 중의 하나이다, 그 이유는 내적 인간이 있다는 것이 교리로부터 알려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가장 낮은 것 쪽으로 거절되어져 있었는데, 그 이유는 인정되지 않았고, 믿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실로 이것이 기억으로부터 멀어졌다기 보다는 신앙으로부터 멀어져 있다고 말하는 편이 더 정확할 것이다. 내적 의미에서 “판다”는 것은 신앙과 선행에 속한 것들을 멀리해버림, 결과적으로 인간을 내적 교회로 만드는 것으로부터 소원해짐이다는 것은 영계에서는 지상에서 같이 팔고 사는 것은 없다는 사실로부터, 그러나 “사다”에 의해서는 선과 진리를 내 것 되게 함, 그리고 “팔다”에 의해서는 그것들로부터 멀어짐이다는 사실로부터 알는지 모른다. 또한 “팔다”에 의해서는 선에 관한 지식들과 진리에 관한 지식들의 교통함을 의미하는데, 그 이유는 “거래함(trade)”이 이런 지식들을 획득하고 교통함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서의 경우 팔다는 “은(돈)을 수단으로 하여 있어지는” 통상적인 장사에서의 팔다는 아니다.
“파는” 것이 소원해짐을 표시하는 것은 아래 말씀의 구절들에서 알 수 있을 것이다:
고로 여호와께서 말하셨다, 내가 떠나보냈던 너희 어머니의 이혼 증서는 어디 있느냐?
또는 내가 너희를 판 나의 고리대금 업자는 누구냐? 보라, 너희의 죄들 때문에 너희는 팔렸었다, 그리고 너희의 위법 때문에 너희의 어머니는 떠나보내졌었다 (이. 50:1);
“어머니”는 교회를 표시한다; 그리고 “팔다”는 멀어짐(소원해짐)을 표시한다. 에스겔서에서:
때가 온다, 날이 가까이 와있다; 사는 자는 기뻐하지 마라, 그리고 파는 자는 슬퍼하지 마라; 그 이유가 분노는 거기로부터 모든 군중 위에 있다. 그 이유가 비록 그들의 목숨이 살아있는 자들 사이에 아직 있을지라도 파는 자가 판 것을 되돌리지 못하기 때문이다 (겔. 7:12, 13).
위는 영적 교회인 “이스라엘의 토지”에 관해서이다; “파는 자”는 진리들을 멀리 있게 하고 거짓들을 자신에게 은근히 심은 자들을 표시한다.
요엘서에서:
유다의 아들들과 예루살렘의 아들들을 너희는 그리스인들의 아들들에게 팔았었다, 하여 너희는 그들을 자기들의 경계로부터 멀어지게 하였다. 보라 나는 그들을 너희가 그들을 팔았던 장소로부터 휘저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너희의 아들들과 딸들을 유다의 아들들의 손 안으로 팔 것이고, 이들이 아주 멀리 떨어진 쪽의 사람들에게, 스바인들에게 팔 것이다 (욜. 3:6-8);
위는 두로와 시돈에 관해서 말하고 있다; “판다”는 것은 멀어지는 것도 표시한다. 모세의 첵에서:
그들의 반석(되신 분)이 그들을 팔았다, 그리고 여호와께서 그들을 닫으셨다 (신. 32:30);
“파는” 것이 멀어짐을 표시하는 것은 분명하다; “반석”은 최고 의미에서 진리 측면에서의 주님이시다, 표현 의미에서 신앙이다; “여호와”는 선 측면에서의 주님이시다.
영적 의미에서 “사는” 것은 자신을 위해 포획하는 것, “파는” 것은 멀리하는 것인 바,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하늘의 왕국을 팔고 사는 것에 비교하신다:
하늘들의 왕국은 들판에 감추여 있는 보물에 견주어진다; 이것을 발견했을 때, 그 사람은 감추어두 고, 그리고 기쁨을 가득히 안고, 가서 그가 가진 모든 것을 판다, 그리고 그 들판을 산다. 다시: 하늘들의 왕국은 아름다운 진주들을 찾는 상인에 비교된다; 그가 귀중한 진주 하나를 발견했을 때, 가서 그는 가진 것을 팔이서 그것을 샀다 (마. 13:44-46);
“하늘들의 왕국”은 인간과 함께 있는 선과 진리를, 고로 당사자와 더불어 있는 천국(하늘)을 표시한다; “들판”은 선을 표시한다; 그리고 “진주”는 진리를 표시한다; “사는” 것은 포획하여 그것들을 자신의 것이 되게 함을 표시한다; “그가 가진 모든 것을 파는” 것은 그가 이전에 지녔던 그의 자기 자신을 멀리함을 표시한다, 고로 악들과 거짓들을 멀리함을 표시한다. 그 이유는 이것들이 그의 자기 자신이었기 때문이다.
누가복음서에서:
예수께서 젊은 제 1 인 자에게 말하셨다, 그렇지만 네게 하나의 것이 부족해 있다; 네가 가진 것을 팔아라, 그리고 가난한 자에게 분배하라, 그때 너는 천국에 있는 보물을 가질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눅. 18:22);
내적 의미에서 위 말씀에 의해 뜻해지는 바, 인간 자신 속의 모든 것들은 악들과 거짓들밖에 없다는 것, 그러므로 “그가 가진 모든 것들”인 이것들은 반드시 멀리해야만 함이 틀림이 없다는 것이다. 멀리 했을 때 그는 주님으로부터 “천국에 있는 보물”인 선들과 진리들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마찬가지가 다른 구절에 있다:
너희의 재산을 팔아라, 그리고 자선(보시)을 하라, 닳아지지 않는 지갑을 만들어라, 실패함이 없는 천국들에 있는 보물을 만들어라 (눅. 12:33);
아마 모든 이는 위 말씀들 안에 또 다른 의미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 이유는 자기의 재산을 파는 누군가는 오늘날의 경우 자신을 거지로 만들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런 행위에서 공적 주의를 피할 수는 없다는 것 외에도, 미래에 선행을 실시할 능력을 자신에게서 영영 박탈해버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천국에는 지상에서 가난한 자였던 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부자도 있어야 하는 것이 진리이기 때문이다. 이 구절에는 위의 구절들에 있는 의미도 더 포함하고 있다.
“파는” 것이 교회의 것들을 멀리 함을 의미하는 것이 아래 구절에 있다:
포로로 잡은 여성과 결혼하여 아내가 된 그녀가 만일 기뻐하지 않으면, 어디로이든 떠나보내라, 그러나 어떤 경우이든 은을 받고 팔지 말라, 그리고 그녀를 가지고 이익을 만들지 말라, 그 이유는 그가 그녀를 괴롭혔기 때문이다 (신. 21:14);
“포로된 여성으로부터의 아내”란 진짜 지주로부터가 아닌 멀어진 진리를 표시한다, 그러나 이 진리는 인간에 속하여 있는 교회의 선에 어느 방법에서 근접될는지 모른다는 것을 표시한다; 그렇지만 이 진리가 어떤 점에서 일치함이 없다면 제거될는지 모른다는 것, 그러나 멀리해짐은 아니다는 것, 그 이유는 이것은 어느 정도까지에서는 결합되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위 법의 영적 의미이다.
마찬가지인데 아래에 법이 더 있다:
만일 이스라엘의 아들들로부터의 자기 형제들의 혼을 훔치고, 거기서 이득을 만들고, 그리고 그을 팔아먹은 자가 발견된다면, 그 도둑은 죽임을 당할 것이다, 하여 너희는 너희 한가운데로부터 악들을 멀리해버릴는지 모른다 (신. 24:7);
“이스라엘의 아들들의 도둑들”은 자신을 위하여 교회의 진리들을 획득한 이들, 그러나 그것들에 따라 살려는 목적에서가 아니고, 고로 심정으로부터 그것들을 가르치려는 것도 아니고, 그러나 그것들 때문에 이익을 창출하려는 이들이다: 이런 도둑은 지옥에 떨어진다는 것이
“그는 죽임을 당할 것이다”에 의해 의미되어 있다.

지금 슬퍼하지 않는다. 이는 심정, 또는 의지의 불안을 의미한다. 이는 “슬퍼함”의 의미가 불안함(anxiety), 그리고 실로 심정 또는 의지로부터의 불안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 이유가 즉각 이어지는 말인즉, “분노하지 않는다”이기 때문인데, 여기서는 “분노(anger)”가 영의 슬픔, 또는 이해력에서의 슬픔이 의미되기 때문이다. 여기서 심정 또는 의지의 슬픔, 그리고 영 또는 이해력의 슬픔이라 말한 이유는 상응을 수단으로 심정은 의지와 관계되기 때문, 그 이유는 의지는 천적 평면, 또는 사랑의 선에 관계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영(spirit, 숨, breath)은 폐에 관련되고, 이해력에 속한 것과 관련되기 때문, 그 이유는 이것은 영적 평면, 또는 신앙의 진리와 관계되기 때문이다. (** 라틴어에서는 영과 숨은 같은 단어를 사용한다.)

당신의 눈에서 분노가 있지 않게 할 것입니다. 이는 영의 슬픔, 또는 이해력의 슬픔을 의미한다. 이는 “분노”의 의미가 여기서는 슬픔이다로부터, 그 이유는 같은 감정의 반복, 즉 “슬퍼하지 않는다”의 반복이고, 그리고 “슬퍼하지 않는다”가 의지 또는 심정의 슬픔이기 때문에 여기서는 마음의 다른쪽인 이해력 측면의 슬픔이 의미된다; 말씀에서 반복됨이 발생할 경우, 한쪽은 의지에, 다른 쪽은 이해력에 관련된다, 이를 다시 말하면, 하나는 사랑의 선쪽에서, 그리고 다른 하나는 신앙의 진리쪽에서 이다; 그리고 “눈”의 의미가 이해함이다로부터 더 알게 된다.

그리고 당신들이 저쪽으로 나를 팔았다. 이는 그들이 가장 낮은 쪽으로 소외되게 했다를 의미한다. 이는 앞에서 살핀 바 있다.

그 이유는 하느님께서 당신들을 살게 만들고저 당신들 앞에 나를 보냈기 때문입니다. 이는 그렇기 때문에 섭리로부터 그들에게 나누어 준(impart) 영적 생명을 의미한다. 이는 “살게 만들려고”의 의미가 영적 생명이 있다 이다로부터 (아래에서 살핀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나를 당신들 앞에 보냈다”의 의미가 섭리로부터 이다를 의미함에서 알게 된다. 이것이 섭리로부터 이다는 것은 요셉의 꿈에서 분명해진다; 즉 그의 형제들이 그에게 그들 자신들을 굽혀 절할 것, 그리고 아버지도 그러할 것이 미리 보여졌는데, 이것이 섭리로부터가 아니면 예견되었을리 만무하다. “살게 만듦”에 의해 영적 생명이 의미된다는 것, 또는 거듭남을 통하여 새로운 생명이 의미된다는 것은 이것 만으로부터 알런지 모른다. 즉 말씀의 영적 측면은 영적 생명 그 이상의 표현은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어쨌든 말씀에는 자연적 생명이 있고 영적 생명이 있다. 자연적 생명은 말씀의 글자 의미에 있고, 영적 생명은 내적 의미 안에 있다; 말씀의 많은 구절들에서 “살아있게 만듦”에 의해, 그리고 “생명”에 의해 글자 의미에서 영적 생명 자체가 뜻하여진다; 에스겔서에서:
내가 사악한 자에게 너희는 정녕 죽으리라 말할 때; 그리고 너희는 그에게 경고를 주지 않거나, 사악한 자로 그의 악한 길을 단념하고 살아 있게 만들려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겔. 3:18)
다시:
너희는 보리 한웅큼과 빵 조각 때문에 내 백성 사이에서 나를 모독하여, 죽지 않아야 할 혼들이 살해되게 하고, 죽어야 할 혼들을 살게 만든다. 너희는 사악한 자의 손을 더 힘세지게 하여, (오히려) 그것들로 살아 있게 만들어 그의 악한 길로부터 되돌아오지 못한다 (겔. 13:19, 22).
호세아서에서:
이틀 후에 여호와께서 우리를 살게 만드실 것이다; 그리고 셋째 날에 그분은 우리를 일으키어, 우리는 그분 앞에서 살는지 모른다 (호. 6:2).
다윗서에서:
내가 생명의 토지에서 선을 보는 것을 믿었지 않으면 (시. 27:13).
계시록서에서:
극복하는 자에게 나는 하느님의 낙원의 한가운데 있는 생명의 나무로부터 먹도록 줄 것이다 (계. 2:7).
요한복음서에서:
아버지께서 죽은 자를 일으키시어 그들을 살게 만드심 같이, 아들도 그분이 뜻하는 자를 살게 만든다 (요. 5:21).
다시:
살게 만드는 것이 영이지, 육은 아무 이익도 내지 못한다: 내가 너희에게 이야기하는 말들은 영이고, 생명이다 (요. 6:63).
위 구절들에서 “살게 만드는 것”, 그리고 “생명”은 영적 생명, 이 생명은 천국에 있는 생명, 그리고 이 생명이 단순히 “생명”이라 마태복음서에서 불리운다:
[문(gate)이] 좁고, 길이 협소하다, 이것은 생명으로 인도한다, 그리고 그것을 발견하는 자는 거의 없다 (마. 7:14);
“생명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천국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표시한다 (마. 18:8, 9; 19:17; 막. 9:43, 45, 47; 요. 5:24).

6-8절. 2년 동안 기근이 토지의 한가운데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경작함도 수확도 없는 5년이 아직 있습니다. 7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당신들을 위하여 토지에 리메인스(remains)를 놓으시려고 당신들 앞에 나를 보냈습니다, 그리고 큰 피신으로 당신들이 살게 만드시려고 입니다. 8 따라서 당신들이 나를 저쪽에 보낸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십니다. 그리고 그분은 나를 바로에게 아버지되게 놓으셨고, 그의 모든 집에는 주가 되게 하셨습니다, 나는 이집트의 모든 토지를 통치하고 있습니다.

…동안. 이것은 실제의 경우이다를 의미한다. 이는 앞 뒤 문맥의 진행으로부터 파악되는 바 설명이 필요 없다.

기근이 토지의 한가운데에 있은지 이 년이 되었다. 이는 자연적 수준의 마음 안에서 선의 상태를 의미한다. 이는 “햇수들”의 의미가 상태들이다로부터; “기근”의 의미가 선의 결핍이다로부터 (그 이유가 “빵(bread)”이 영적 의미에서 사랑의 선, 그리고 “식품(food)”이 진리의 선, 그러므로 “기근”은 선의 결핍, 그리고 “목마름”은 진리의 결핖이기 때문); 그리고 “토지의 한가운데에”, 즉 이집트의 한가운데의 의미가 자연적 수준의 마음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리고 “한가운데에”라고 말해지는 이유는 “한가운데, 중앙 (midst)”이 가장 안쪽(inmost)이고, 거기는 선이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2년”은 선과 진리의 결합함의 상태를 표시하는데, 그 이유는 “2”가 결합을 의미하기 때문, 여기서의 경우, 결합은 아닌데, 2년이 기근의 햇수이기 때문이다.
여기서의 경우는 이렇다. 선이 일하기 위하여서는 자연적 마음 안에 진리들이 있어야만함에 틀림이 없다, 그리고 진리들은 진짜의 사랑으로부터 있는 애착을 수단으로 받아들여져야만 한다. 인간의 기억에 있는 것은 무엇이든 모든 것들은 어떤 사랑을 수단으로 받아들여진 것이다, 그리고 그 사랑과 결합되어 거기에 남아 있다. 신앙의 진리들도 예외는 아니다. 만일 이 진리들이 진리를 사랑함에 의해 받아들여졌다면, 이 진리들은 그 사랑과 결합되어 남아 있다. 그것들이 결합되어오고 있을 때, 이때 다음의 경우들이 이어진다: 만일 애착이 재생산된다면, 그것과 결합된 진리들은 동시에 세상 밖으로 출시된다. 그러므로 인간의 거듭남 동안 (이는 성인 시기에만 결과되는데, 그 이유는 그전에는 당사자가 자신으로부터 신앙의 진리들에 관하여 생각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는 주님으로부터 천사들을 수단으로 통치되어진다, 동시에 그에게 감명을 준 진리들을 간직하면서, 그리고 결합되어 왔던 애착 안에 있는 이런저런 진리들을 수단으로 해서 이다; 그리고 이 애착, 즉 진리에 대한 애착이 선으로부터 인 바, 그는 점차 선쪽으로 인도된다.
이것이 그러한지에 대하여 많은 경험으로 나에게 분명해졌다, 그 이유가 내가 주목했던 것은, 악령들이 악들과 거짓들을 주입했을 때, 그때 주님으로부터의 천사들이 이미 심어졌었던 진리들을 가지고 나를 지켜주어, 나로 하여금 악들과 거짓들을 억제하게 해주었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분명해졌던 것은, 진리에 애착함을 수단으로 뿌리내려져왔던 신앙의 진리들은 천사들이 일하는 평면이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평면을 가지지 않은 이들은 천사들에 의해 인도될 수 없어, 자신들이 지옥에 의해 인도되는 것을 내버려둘 수밖에 없다는 것, 그 이유는 천사들이 어느 곳에도 발붙일 곳이 없어 그냥 통과해 흘러가기 때문이다. 이 평면은 신앙의 진리들이 행동 안으로 놓여지지 않으면, 즉 의지 안에 심어지고, 의지를 통하여 생활 안에 놓여지지 않으면 획득되어질 수도 없다. 또 하나 언급해둘만한 것은, 인간과 더불어 신앙의 진리들 안으로 천사들이 작업하는 것은 좀처럼 명백하게 거행되는 것, 즉 이 진리에 관한 생각들을 흥분시키기 위하여 주도적인 듯한 느낌을 나타내보이지는 않는다, 그러나 애착과 함께 이 진리에 일치하는 일반적인 생각을 생산한다. 그 이유가 이 작업은 감지할 수 없는 유입을 수단으로 결과되기 때문, 이것은 시각에 표출될 때, 흐르는 빛 같이 나타난다, 이 빛은 선 안에 있는 셀 수 없는 진리들로 구성되고, 이것은 인간에 있는 어떤 낱개의 것을 에워싼다, 그리고 그를 진리 안에 있는 동안 이 진리의 사랑 안에서 간직한다. 그리하여 천사들은 인간의 마음을 거짓들로부터 승강되게 하고, 그를 악들로부터 보호한다. 어쨌든 이러저런 사항들은 인간에게 통째로 알려져 있지 않다.

오 년이 아직 더 있다. 이는 리메인스(remains)가 빛을 발할 때까지 이 상태의 기간을 의미한다. “5”의 의미가 리메인스(remains)이다로부터; 그리고 “년(year)”들의 의미가 상태들이다로부터 알려진다. 기간은 “아직” 있다를 수단으로 이 햇수가 의미되어지고 있다. 이로부터 분명한 것은, 이 말들에 의해 리메인스가 빛을 발할 때까지의 이 상태의 기간이 의미된다는 것이다. 리메인스(remains)란 주님에 의해 내면의 인간 안에 저장된 진리들과 선들이다. 여기서는 선이 자체를 드러내기 이전 진리에 애착함들과 인정함들이다. 선과 더불어 이것들은 빛을 발한다. 빛을 발하는 동안 이것들로부터 끌려나오는 만큼에서 생활에의 사용에 도움을 준다. 이것은 주님의 섭리 영역에 속한다, 그리고 이것은 계속적인데, 비록 인간이 그것에 관해 아는 바 없을 지라도, 또는 기꺼이 알려하지 않아도 계속 된다. 그 이유가 인간 당사자는 낱개적인 미미한 사항들에서까지 섭리가 있다는 것을 부정하기 때문, 그렇지만 인간 출생으로부터 마지막에 까지, 그다음 영원까지 이것은 계속적이다. 모두 각자와 더불어 어떤 숫자로 적어질 수 있는 것 보다 더 많은 섭리에 속한 것들이 매 순간 발생한다.

경작함도 수확도 없는. 이는 한동안 선, 그리고 파생되는 진리도 나타나지 않을 것을 의미한다. 이는 “경작하다(밭을 갈다, plow)”의 의미가 진리들을 받기 위해 선을 수단으로 준비함이다로부터 (이는 아래에서 더 살핀다); 그리고 “수확”의 의미가 선으로부터의 진리들이다로부터 (그 이유가 수확은 작물이 영글어 그러모을 때이기 때문, 이로부터 “수확”은 선으로부터 있는 진리이다) 알려진다. 이 진리가 존재 안으로 오기 이전, 실로 진리들이 나타나나, 그것들은 진리를 통하여 선이 있게 될 때의 진리들이고 선으로부터의 진리들은 아니다. 진리로부터 행동하는 인간은 진리를 통하여 선이 있는 진리들 안에 있으나, 선으로부터 행동하는 인간은 선으로부터 있는 진리들 안에 있는다. “경작함”이 선을 표시한다고 말해진 이유는 경작되는 들판이 선 측면에서의 교회를 의미하기 때문에서 이다, 고로 교회 속에 있는 선이다. 고로 “경작함”은 진리들을 받기 위해 선을 수단으로 준비됨이다; 더욱이 경작함에서 사용된 수소들은 자연 평면에 있는 선들을 의미한다.
이것이 경작함의 의미이기에, 표현 교회에 금해진 사항은 “수소와 나귀를 함께 가지고 (겨리를 지워가지고) 경작하는”것이다 (신. 22:10), 그러나 안쪽으로부터의 어떤 이유, 고로 영계로부터의 어떤 이유가 없다면 결코 금지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설사 함께 경작함에서 어떤 피해가 거기에 있을 수 있는 것일까? 안쪽으로부터, 또는 영계로부터의 이유인즉, “수소로 경작하는” 것은 자연 평면에 있는 선을 의미하고; “나귀로 경작하는” 것은 자연 평면에 있는 진리를 의미해서 이다. 위 금지 명령의 내면의 이유 또는 영적인 이유는 천사들은 선과 진리를 분리해서 생각하지 못한다는 것; 그들은 반드시 결합하여 하나를 만들어야만 한다는 것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수소와 나귀를 수단으로 하는 이런저런 경작을 기꺼이 바라보려 하지 않는다. 천적 평면의 천사들은 선으로부터 분리된 진리는 아예 생각하는 것조차 엄두를 못낸다, 그 이유가 자신들과 더불은 모든 진리는 선 안에 있기 때문이다; 고로 그들에게 있는 진리는 선이기도 하다. 같은 이유로 “양털과 아마를 섞어 짜서 옷을 만드는 것”도 금하였다 (신. 22:11); 그 이유가 “양털”은 선을, “아마”는 진리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밭을 가는” 것, “써레질하는” 것, “씨뿌리는” 것, “베어들이는” 것은 선과 선으로부터의 진리에 속하는 이런저런 것들임이 호세아서로부터 분명하다:
나는 에브라임을 (짐승을) 타게(ride) 만들 것이다; 유다는 밭을 갈 것이다, 야곱은 그를 위하여 써레질을 할 것이다; 정의에 따라 네 자신을 위해 씨뿌려라, 경건함에 따라 베어들여라; 너를 위하여 묵히는 지면을 부수어라; 그리고 여호와께서 오시어 정의를 가르치실 때까지 여호와를 찾을 때이다 (호. 10:11, 12);
(짐승을) “타는” 것이 에브라임을 서술하는 이유는 “타는” 것이 이해력을 향유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에브라임”은 교회의 지적 측면이다; 그러나 “경작하는” 것은 유다를 서술하는데, 그 이유는 “유다”는 교회의 선이기 때문이다.
아모스서에서:
말들이 바위에서 달리더냐? 누가 수소들을 가지고 경작할 것이냐? 하여 너희는 판단을 쓸개로, 정의의 열매를 쓴쑥으로 바뀌게 했다 (암. 6:12);
“말들이 바위에서 달리더냐?”는 신앙의 진리가 이해되더냐?를 표시한다. 그 이유가 바위는 영적 의미에서 신앙이기 때문이다 (창. 22 서문을 보라); 그리고 “말들”은 이해력 속에 있는 이런저런 것들이다; “누가 수소들로 경작하더냐?”란 그가 선을 행할 것이냐?를 표시한다. “수소들”은 자연 평면에 있는 선이다. 이것이 그렇게 행해질 수 없었다는 것이 이어지는 말, “너희가 판단을 쓸개로, 정의의 열매를 쓴쑥으로 바뀌게 했기 때문”에서 의미된다
누가복음서에서:
예수께서 말하셨다, 쟁기를 자기 손에 놓았는데, 뒤쪽을 바라보는 자는 누구나 하느님의 왕국을 위하여 적합하지 않다 (눅. 9:62)
위 말들은 마태복음서의 아래 구절과 같은 의미를 지닌다:
집 위에 있는 자는 자기로 하여금 집 안에 있는 어떤 것을 가져가려 내려오지 않게 하라; 그리고 들판에 있는 자는 자기로 하여금 자기 옷들을 가져가려 되돌아 가지 않게 하라 (마. 24:17, 18);
위 말들의 의미는 이렇다: 선 안에 있는 자는 신앙의 교리물들에 속하는 것들 쪽으로 자신을 향하게 하지 말라는 것이다. 고로 “자기 손을 쟁기에 놓은 자”는 선 안에 있는 자이다; 그러나 “뒤쪽을 쳐다보는” 것은 신앙의 교리물들을 찾는 자이다, 그리고 고로 선을 돌보지 않게 된다. 엘리야가 불쾌히 여겼던 사건이 있다. 즉 그가 들판을 경작하는 엘리사를 불렀을 때, 그가 묻기를, 자기 아버지 어머니에게 키스를 먼저 했으면 (작별 인사) 하고 물었을 때였다; 엘리야가 말했다, “가고, 되돌아오라, 그 이유가 내가 네게 무엇을 행하였는지 때문이다” (왕상. 19:19-21). 반대적 의미에서 “경작하는” 것은 선을 삭제해버리는 악들을 의미한다, 고로 황폐함을 의미한다; 예레미야서에서:
시온은 들판 같이 경작될 것이다, 그리고 예루살렘은 무더기들일 것이다, 그리고 이 집의 산은 숲의 높은 장소들 같이 되어지는 것이다 (예. 26:18; 미. 3:12).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당신들 앞에 나를 보냈습니다. 이는 그것은 신성한 섭리에 의해 결정되었음을 의미한다. 이는 “하느님께서 당신들 앞에 나를 보냈다”의 의미가 신성의 섭리이다에서 알게 된다.

당신들을 위하여 토지에 리메인스를 놓으시려고. 이는 교회의 중앙과 가장 깊은 곳을 의미한다. 이는 리메인스(remains)의 의미가 주님에 의해 인간 안쪽에 저장하신 진리들에 결합된 선들이다로부터; 여기서는 교회의 중앙과 가장 깊은 쪽에를 의미한다. “중앙과 가장 깊은 쪽”이라 말한 이유는 인간과 더불어 있는 가장 깊은 곳은 가장 안쪽의 것들과 내면의 것들이 함께 있는 곳이 자연 평면의 중앙을 점령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연속되는 것들에서 서로를 뒤잇는 것 안에서 가장 깊은 곳에 있는 것들은 중앙에 위치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자연 평면에서의 이 경우는 동시적이다; 고로 가장 깊은 쪽의 것들은 자신들을 외면의 것들에 배열한다. “토지에 당신들을 위하여 리메인스를 놓아두시려고”는 교회의 가장 깊은 측면이 야곱의 아들들과 더불어 있어야만 함을 함축하고 있다; 이는 그들이 가장 깊은 안쪽에 있어야만 한다가 아니라, 교회의 모든 형체 안에 교회의 표현이 그들과 더불어 설립되어야 한다는 말, 하여 말씀이 거기에 있도록 하신다는 말이다. 이런저런 것들이 교회에 비교하여, 추상적으로는 민족이나 나라로부터 “리메인스”에 의해 의미되어진다.
리메인스 또는 나머지(residue)라는 단어는 간혹 말씀에서 언급되는데, 이 두 단어 모두에 의한 표현들이 단지 백성의 남은 자, 나라 속의 남은 자 같은 식으로 글자에 따라서만 이해되고 있다; 허지만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아왔던 것은 그 단어들이 영적 의미에서 주님에 의해 내면의 인간 안에 저장해두신 선들과 진리들이다는 것이다; 아래 구절을 보자. 이사야서에서:
그날에 여호와의 싹이 영예를 위하여와 영광을 위하여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피신한 그들에게 장엄함과 장식함을 위하여 땅의 열매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시온에 남은 이들, 예루살렘 에 남겨진(residuus) 이들, 예루살렘에서 생명 안으로 적혀 있는 모든 이가 거룩하다 불리울 때가 온다 (이. 4:2, 3);
“시온에 남은 이들, 그리고 예루살렘에 남겨진 이들”은 생명 안으로 적혀 있는 다른 이들 보다 더 거룩한 것은 결코 아니다; 이로부터 분명해지는 바는, “남은 자와 남겨진 자”에 의해 거룩한 것들과 생명 안으로 적힌 것들이 의미된다는 것. 이런 거룩한 것들은 진리들과 결합된 선들이고, 이것들은 주님에 의해 내면의 인간 안에 저장되고 있다.
이사야서에서:
그 날에 이스라엘의 남은 자, 그리고 야곱의 집의 피신했던 이들이 자기들을 친 자들에게 더 이상 기대지 않고 진리 안에 계신 이스라엘의 거룩한 분, 여호와께 기댈 것이다. 남은 자들이 돌아올 것이다, 야곱의 남은 자들이 전능하신 하느님에게로 돌아 올 것이다 (이. 10:20, 21);
위의 “남은 자”가 어떤 백성, 또는 어떤 나라로부터의 남은 자가 아니다는 것은 말씀에서, 특히 예언서들에서, “이스라엘”에 의해 이스라엘이 뜻해지지 않는 것, “야곱”에 의해 야곱이 뜻해지지 않고, 모두에 의해 교회와 교회 속에 있는 것이 뜻해진다는 사실만 가지고도 알는지 모른다. 여기서의 경우, “남은 자들”에 의해 이스라엘과 야곱의 남은 자가 아니라 교회에 속하는 진리들과 선들이 의미된다. 그렇다, “어떤 백성의 남은 자들”, 또는 “나라 에 남겨진 자들”, 이런 식으로 말씀에서 말하여질 때, 어떤 백성이나 나라의 남은 자가 의미되지 않는 이유는 내적 의미에서 “백성”에 의해 진리들이, “나라(민족)”에 의해서는 선들이 의미되기 때문이다. “리메인스(남은 자)”에 의해 진리들과 선들이 의미되는 것이 알려져 있지 않고, 하여 이상한 듯 나타나는 이유는 글자 의미, 특히 역사적 부분에서, 이런 의미 같은 것을 생각하는 것으로부터 강력하게 보류되게, 물러나 있게 장치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사야서에서:
그때 백성의 남은 자들을 위하여 작은 길(path)이 있을 것이다, 이들은 앗수르로부터 남겨진 자(residue)일 것이다; 마치 이스라엘이 이집트의 토지로부터 올라올 때 바다를 통과하는 그들을 위해 있었던 것 같다 (이. 11:16);
위 구절 역시 의미는 비슷하다; “앗수르로부터 남겨진 자”란 외고집의 잘못된 추론을 통하여 파괴되지 않은 이들이다.
다시:
그날에 여호와 체바욷께서는 그분의 백성의 남은 자에게 잘생김의 머리띠를 위하여, 왕관을 장식품 을 위하여 있으실 것이다 (이. 28:5).
다시:
더욱이 남겨진(residua) 유다의 가문의 피신자가 다시 아래쪽을 향하여 뿌리를 내릴 것이고, 위쪽을 향하여는 열매를 산출할 것이다. 남은 자가 예루살렘으로부터 나갈 것이고, 시온으로부터서 는 피신자가 나갈 것이다 (이. 37:31, 32).
다시:
버터와 꿀을 남겨진 모든 자가 토지의 한가운데에서 먹을 것이다 (이. 7:22).
예레미야서에서:
나는 내가 그들을 흩뜨려버렸던 모든 토지들로부터 내 양떼의 남은 것들을 그러모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들의 양우리로 도로 데려다놓을 것이다, 하여 그들은 생산하고 번성할는지 모른다 (예. 23:3).
다시:
검에 의해 남은 자들로부터의 백성은 광야에서 이스라엘에게, 그에게 쉼을 주려함에서 은총을 발견하였다 (예. 31:2);
“광야에서 검에 의해 남은 이들로부터의 백성”은 “유아들”이라 불리워진 이들이었다, 이들은 죽고 남은 자들이고, 가나안의 토지로 데려와졌다. 이 “유아들(infants, 작은 아이들, 대략 7세 미만)”이 남겨졌다, 그리고 그들을 수단으로 순진의 선들이 의미되었다, 그들이 가나안의 토지 안으로 받아들여짐은 주님의 왕국 안으로의 입장이 승인됨을 표현하였다.
에스겔서에서:
너희가 나라들 사이에서 피신하는 때, 너희가 땅에서 흩터지는 때, 나는 남겨질 자를 만들 것이다. 그때 너희의 피신한 이들은 포로가 된 나라 사이에서 나를 기억할 것이다 (겔. 6:8, 9)
인간의 내면의 것들 안에 주님에 의해 저장된 선들과 진리들이 “흩트러지고 포로가 된 나라들 사이에서 남은 자와 남겨진 자”에 의해 표현된 이유는 인간이 악들과 거짓들 사이에서 있고 이것들에 포로가 된 상황에 있기 때문이다. 악들과 거짓들은 “나라들”에 의해 의미 것들이다. 외적 인간, 내적 인간으로부터 분리될 때, (아껴둘만한 것까지) 깡그리 분리되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당사자의 미래 거듭남의 발전이 다시 있을 때의 경우를 위해 선들과 진리들을 그러 모아 저장해두신다. 이렇지 않다면, 인간은 구원이 가능해질 수가 없다, 그 이유가 리메인스 없이 누구도 구원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요엘서에서:
여호와의 이름을 부른 모든 이가 피신할 때가 올 것이다; 여호와께서 말하셨던 바대로 시온산과 예루살렘에서 피신자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남겨진 자들 사이에 여호와께서 부를 자가 있을 것이다 (욜. 2:32).
미가서에서:
나라들 사이에, 많은 백성들의 한가운데에서 야곱의 남은 자가 있을 것인데, 마치 사자가 숲의 짐승들 사이에 있는 것과 같다 (미. 5:8).
스바냐서에서:
이스라엘의 남은 자는 외고집을 부리지 않을 것이다, 거짓을 이야기하지 않을 것이다; 사기치는 혀도 그들의 입 안에서 발견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먹여지고 쉼에 있을 것이고, 아무도 두려움을 만들지 않는다 (습. 3:13);
스가랴서에서:
도성의 거리들은 그 거리들에서 노는 소년소녀들로 가득할 것이다; 이것은 네 백성의 남은 자들의 눈에서 경이로울 것이다: 지금, 나는 이전의 날들 같지 않게 벡성의 남은 자들에게 있을 것이다, 그 이유가 이것은 평화의 씨이기 때문이다; 포도나무가 그것의 열매를 산출할 것이다, 그리고 땅은 그것의 증가분을 산출할 것이다, 그리고 하늘들은 그들의 이슬을 산출 할 것이다; 그리고 나는 이 백성의 남은 자를 이 모든 것들의 상속자로 만들 것이다 (슥. 8:5, 6, 11, 12);
위에서 리메인스(남은 자)들이 “평화의 씨”라 불리운다, 그리고 열매를 풍성히 맺는 선의 진리들에 있는 이들이 “포도나무는 그것의 열매를, 땅은 그것의 증가분을, 하늘들은 그들의 이슬을 산출한다”에 의해 묘사되고 있다.
영적 의미에서 뜻해지는 리메인스는 생활 속의 악들과 거짓들로부터의 확신(거짓들에 설득됨)에 의해 닫혀지고, 더 이상은 나타나지 않는다; 그리고 이전에는 인정해왔던 진리들을 부정함에 의해 그것들은 살라져버리고 만다, 그 이유가 이것은 모독이라 불리우는 진리와 거짓의 혼합이기 때문이다. 이에 관해 이사야서에서:
그분은 인간을 옮기실 것이다, 그리고 사막들이 토지의 한가운데에서 번성할 것이다: 거의 누구도 거기서 있지 못하나 십분의 일이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것은(십분의 일이) 근절될 것이다 (이. 6:12, 13)
“10”은 리메인스를 표시한다. 다시:
나는 너희의 뿌리를 죽일 것이다, 그리고 그는 너희의 남겨진 그것들을 죽일 것이다 (이. 14:30);
위는 블레셋에 관하여서이다, 이들은 지식들의 지식들에만 있는 이들, 지식들로부터의 생활이 없는 이들이다; 위에서 남겨진 이들이 “뿌리”라고 불리운다, 그 이유가 뿌리들로부터 같이 그것들(지식들)로부터 선들과 진리들이 자라오르기 때문, 이것이 인간을 사람으로 만든다. 그러므로 “그는 사람을 옮기실 것이다”는 리메인스를 파괴됨을 표시한다.
예레미야서에서:
젊은 이들은 검에 의해 죽을 것이다; 그들의 아들들과 그들의 딸들은 기근으로 죽을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는 그들에게 남은 것이 전혀 없을 것이다 (예. 11:22, 23);
위는 아나돗인에 관해서이다. 다시:
나는 유다의 남은 자들을 데려갈 것이다, 이들은 이집트에 체류하려고 그들의 얼굴을 이집트의 토지 안으로 가게 놓아둔 자들이다, 하여 그들은 모두 살라질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 피신자는 있지 않을 것이다, 또는 유다의 남은 자로 남겨진 자가 있는데, 그는 이집트의 토지에 거주하려고 왔던 자이다 (예. 44:12, 14, 28);
유다 지파로부터 있던 이들이 이집트에 체류하는 것, 거기에 거주하지 못하게 한 이유, 그리고 이 금지가 매우 심각한 금지 명령이었던 이유인즉, 유다 지파는 주님의 천적 평면의 교회를 표현했기 때문, 천적 평면은 “이집트”에 의해 의미되는 기억 속의 지식들에 관하여 지독하게도 기꺼이 알려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그들은 자기들이 있는 천적 수준의 선으로부터 모든 것들을 알기 때문이다, 만일 그들이 기억 속의 지식들 쪽으로 자신들을 향하게 한다면 선이 멸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주님의 천적 왕국에 있는 이들은 천적인 선 안에 있는 바, (그리고 천적 진리는 선행이고, 한편 영적 진리는 신앙이다) 그들은 신앙이라는 말조차 꺼내기를 주저하는데, 그 이유는 자기들이 선으로부터 “내려가지” 않도록, 그리고 뒤쪽을 향하지 않도록 조심하는 것이다. 이는 아래 말씀에서도 의미된다:
집 위에 있는 자, 자기로 하여금 집으로부터 어떤 것을 가져가려 내려 가게 하지 말라; 그리고 들판에 있는 자, 자기로 하여금 자기 옷을 가져가려 되돌아가게 하지 말라(마. 24:17, 18);
위 구절은 앞에서 살폈다 (5895항)l 그리고 이 말씀도 있다:
롯의 아내를 기억하라 (눅. 17:32);
그녀는 뒤쪽을 쳐다보았고 소금 기둥이 되었다.
어떤 것도 남겨지는 것이 없도록 철저히 저주된 나라들에 의해 불법이 그들과 더불어 극점에 달했다는 것, 하여 잔존한 선과 진리는 아무것도 없다는 것, 고로 리메인스가 전혀 없는 것이 표현되어졌다. 모세의 책에서:
그들은 바산 왕 옥을 쳐부셨다, 그리고 모든 그의 아들들, 그리고 모든 그의 백성들, 그들이 하나도 남지 않을 때까지 였다 (민. 21:35; 신. 3:3).
다시:
그들은 시혼의 성을 공략했다, 그리고 성의 모든 자, 남자, 여인, 어린 아이에게 저주를 주었다; 그들은 하나도 남지 못하게 했다 (신. 2:34).
그들이 “저주를 주었다”라고 쓰인 구절은 더 있다.
리메인스에 주목하면, 또는 주님에 의해 인간의 내면들에 저장된 선들과 진리들에 주목하면, 이렇다: 인간이 애착으로부터, 고로 자유함에서 선과 진리 안에 있을 때, 이때 선과 진리는 심어진다. 그리고 이 심어짐이 거행될 때, 천국으로부터의 천사들은 더 가까이 접근하고, 인간과 자신들을 결합한다. 이 결합은 인간의 내면들에서 선들과 진리들이 출시하게 한다. 그러나 인간이 외적 측면으로부터의 것들에 있을 때, 마치 그가 육체적, 세상적인 것들에 있을 경우, 이때 천사들은 물러간다, 그리고 그들이 물러갈 때, 이때 이런저런 선들과 진리들은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한때 결합이 있었은즉, 그 인간은 천사들과 결합하는 능력 안에는 있다, 고로 자기에게 속하는 선과 진리에 대한 수용력은 가진다는 말이다; 그러나 인간의 갖가지 사용에 따라 이런저런 것들을 배치하시는 주님의 기뻐하심이 있는 것 보다 더 자주, 더 많이 거행되지는 않는다.

당신들을 살게 만드시려 하신 것입니다. 이는 자연 평면에 있는 진리들을 위하여 거기로부터 있는 영적 생명을 의미한다. “살게 만든다”는 것은 영적 생명이 있다를 의미한다. 영적 생명의 모든 것은 리메인스로부터 인 바, 거기로부터 영적 생명이 있다 라고 말한 것이다. 그리고 이 생명이 거기로부터 있기 때문에, 이 리메인스에 관하여 말해진 이후 즉각 뒤이어지는 것은 “당신들을 살게 만드시려고”이다, 즉 야곱의 아들들에 의해 표현되는 자연 평면에 있는 진리들이다.

큰 피신으로. 이는 지옥에 떨어짐으로부터 해방됨을 의미한다. 이는 “피신함(escape)”의 의미가 지옥에 떨어짐에서 해방됨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 해방됨은 리메인스를 수단으로, 즉 주님에 의해 인간에게 저장하신 선들과 진리들을 수단으로 결과되어진다. 선들과 진리들을 받은 자, 즉 그것들이 내면들 안에 심어지도록 자신을 허용한 자는 지옥에 떨어짐을 피한다, 그리고 남겨진 자 사이에 있는다. 그러므로 말씀에서 “피신”이 말하여지는 곳에서는 “남겨진 자”나 “리메인스”의 언급 또한 있는다. 여기서는 요셉을 수단으로 하여서이고, 다른 구절을 더 읽어보자: 이사야서에서:
그 날에 땅의 열매가 이스라엘의 피신자를 위한 장식과 당당함을 위하여 있을 것이다; 그리고 시온에 남아 있는 자, 그리고 예루살렘에 남겨진 자가 거룩하다 불리우는 때가 올 것이다
(이. 4:2, 3).
다시:
그 날에 이스라엘의 남은 자, 그리고 야곱의 가문의 피신자가 자기를 친 자에게 더 이상 기대지 않을 것이다 (이. 10:20).
다시:
더욱이 남겨진 유다의 가문의 피신자가 다시 아래쪽으로 뿌리를 내리고, 위쪽으로는 열매를 산출할 것이다; 그 이유가 예루살렘으로부터 남은 자가 나갈 것이고, 시온으로부터서는 피신자가 나갈 것이기 때문이다 (이. 37:31, 32).
에스겔서에서:
너희가 나라들 사이에서 검을 피하는 자 얼마를 가질 때, 너희가 땅에서 흩어질 때, 나는 남겨지는 자를 만들 것이다; 이때 너희로부터의 피신한 그들은 나를 기억할 것이다 (겔. 6:8, 9).
요엘서에서:
여호와의 이름을 부를 자들이 피신하는 때가 온다; 여호와께서 말하신 바대로, 시온에서, 예루살렘 에서 피신자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남겨진 자 사이에서 여호와께서 부를 자가 있다 (욜. 2:32).
예레미야서에서:
피신자가 있지 않을 것이다, 또는 유다의 남은 자로 남겨지는 자가 있지 않을 것이다
(예. 44:12, 14)
위 구절들로부터 분명해지는 바, “피신하는” 것이 무엇인지, 즉 “피신하는” 이들은 리메인스를 가진 이들이다, 그리고 “피신하는” 것은 지옥에 떨어짐으로부터 건져지는 것이다.

따라서 당신들이 나를 저쪽에 보낸 것이 아니다. 이는 그들이 자연 평면 속에 있는 기억 속의 지식에로 떠나게 하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이는 그가 보내진 곳, “저쪽”인 “이집트”의 의미가 자연 평면에 있는 기억 속의 지식들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당신들이 나를 보내지 않았다”는 그들이 떠나보내지 않았다인 것은 분명하다.

하느님이십니다. 신성이 이것을 실시했음을 의미한다. 이는 설명이 필요 없다.
이에 관하여는 앞의 요셉의 사건을 살필 때 밝히 설명했다: 즉 그가 이집트에 팔리우고, 그때 처음에는 보디발의 집을 섬겼을 때인데, 그는 최고 의미에서는 주님을, 보다 낮은 의미에서는 주님에 의해 거듭나지는 이들을 표현했던 바, 기억 속의 지식들은 배워지는 처음의 것들이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이 지식들로부터 결말되어지는 것이 진리들이기 때문, 고로 이 지식들은 결말로 얻은 진리들에게 종결점인 셈이다. 이후 이 지식들은 더 내면의 것들을 향하여 진보를 만들어 간다. 이런 일련의 과정을 요셉이 표현했는 바, 이를 표현하기 위해 신성이 그를 거기에 보냈음이 분명하다.

그리고 그분은 나를 바로에게는 아버지되게 놓으셨다. 이는 지금 자연 평면은 그분으로부터 있음을 의미한다. 이는 바로의 표현함이 일반적 측면에서의 자연 평면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것이 그분으로부터이다는 것은 그가 “아버지로 앉다”에 의해 의미된다, 그 이유가 아들들은 아버지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적절한 의미는 선이다; 그리고 선에 내적, 외적 인간의 모든 것들이 의존되는 바, “하느님이 바로에게 아버지로 자기를 앉힘”에 의해 그분으로부터, 즉 선으로부터 자연 평면이 있다가 의미된다; 그 이유가 요셉은 천적 평면으로부터의 내적 부분, 또는 내적인 선을 표현하기 때문이다. 유입을 수단으로 자연 평면에 있는 모든 것들이 질서 안에 놓이고, 마지막으로 자연 평면이 자체로부터 있게 해준다.

그의 모든 집에는 주가 되게 하셨다. 이는 그분으로부터 자연에 있는 모든 것이 존재한다를 의미한다. 이는 “바로의 모든 집”의 의미가 자연 평면에 있는 모든 것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거기의 모든 것이 그분으로부터 이다는 것이 요셉이 그것 위에 주(lord)로 앉혔다에 의해 의미되었다. 더욱이 말씀에 있는 “주”는 선을 서술한다.

나는 이집트의 모든 토지를 통치하고 있다. 이는 그가 자연적 수준의 마음에 있는 기억 속의 지식을 배열한다를 의미한다. 이는 “통치한다”의미가 배열 배치한다이다로부터; 그리고 “이집트의 토지”의 의미가 자연적 수준의 마음이다로부터, 고로 모든 기억 속의 지식들이다. 그 이유가 이런 지식들은 자연적 마음에 속한 것들이기 때문이다. 기억 속의 지식들이 자연적 마음의 지적 부분(이해력 부분)을 구성한다, 그러나 내적 인간으로부터 흘러드는 선이 거기서는 의지 부분을 만들고 거기서 기억 속의 지식들을 배열한다.

9-13절. 당신들은 서둘러 나의 아버지에게 올라가십시오, 그리고 그에게 말하기를, 당신의 아들 요셉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느님께서 나를 모든 이집트의 주로 세웠습니다. 나에게 내려 오십시오, 지체마십시오. 10 그리고 당신은 고센의 토지에 거주할 것입니다, 그리고 당신은 저 가까이 계실 것이고, 당신, 그리고 당신의 아들들, 그리고 당신의 아들들의 아들들, 그리고 당신의 양떼, 그리고 당신의 목축들, 그리고 당신이 소유한 모든 것입니다. 11 그리고 내가 거기서 당신을 떠받들 것입니다. 그 이유가 기근의 다섯 해가 아직 더 있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뿌리뽑히지 않도록, 당신과 당신의 집식구, 그리고 당신이 가진 모든 것이 뿌리 뽑히지 않도록 하십시오. 12 그리고 보라 내 입으로 내가 당신들에게 말하는 것을 당신들의 눈이 보고 있다, 그리고 나의 아우 베냐민의 눈이 보고 있다. 13 그리고 여러분은 나의 아버지에게 이집트에서의 나의 모든 영화, 당신들이 보았던 모든 것을 말씀드리시오. 그리고 서두르시오, 그리고 나의 아버지를 이쪽으로 내려 오게 하시오.

당신들은 서둘러 나의 아버지에게 올라가십시오. 이는 영적 선을 의미한다. 이는 여기서 “아버지”인 이스라엘의 표현함이 자연 평면으로부터 있는 영적 선이다로부터. 영적 선이 천적 평면으로부터의 내적 부분의 아버지이다고 말한 이유는, 영적 선이 자연 평면으로부터 이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외적 부분에 속한다는 것, 내적 부분이 출시되기 전에 이미 외적 부분은 있었다는 것, 마치 아들이 있기 전에 아버지가 이미 있었다는 논리에서 뜻해진 말이다. 그러나 발전함의 질서는 외면의 것들로부터 내면의 것들 쪽으로, 마치 기억 속의 지식들로부터 지적인 것들 쪽으로 발전하는 것이다. 그리고 바깥쪽의 것들은 안쪽의 것들에 평면을 제공한다. 이런 발전으로부터, 또는 이 출생으로부터 외적 부분은 내적 부분에 의해 “아버지”라 불리운다; 결과적으로 “이스라엘”인 자연 평면으로부터의 영적 선이 “요셉”인 천적 평면으로부터의 내적 부분에 “아버지”인 것이다.

그리고 그에게 말하시오, 당신의 아들 요셉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는 천적 평면으로부터의 내적 부분에 관하여 지각함을 의미한다. 이는 “말하다”가 말씀의 역사 부분일 경우, 지각하다 이다로부터; 그리고 요셉의 표현함이 천적 평면으로부터의 내적 부분(the internal celestial)이다로부터. “이스라엘”인 영적 선이 “요셉”인 천적 평면으로부터의 내적 부분에 관하여 지각(력)이 있다가 의미되는 이유는 “당신의 아들 요셉이 말했다”의 내적 의미가 영적 선 안으로 천적 평면으로부터의 내적 부분의 유입이 지각력이기 때문이다.

하느님께서 나를 모든 이집트의 주로 세웠습니다. 이는 자연에 있는 모든 것, 그리고 각각을 배열함을 의미한다. 이는 “주로 세움”의 의미함이 배열함이다로부터; 그리고 “모든 이집트”의 의미가 자연 평면에 있는 기억 속의 지식들이다로부터, 고로 그 평면에 있는 각각 그리고 모든 것이다, 그 이유가 자연 평면은 기억 속의 지식들로 구성되기 때문이다.

나에게 내려 오십시오, 지체마십시오. 이는 확실한 결합을 의미한다. 이는 “내려오다”, 또는 “나에게 오다”의 의미가 결합함이다로부터; 그리고 “지체 말라”의 의미가 확실한 것이다로부터 알려진다.

그리고 당신은 고센의 토지에 거주할 것입니다. 이는 자연 평면에서 중앙에를 의미한다. 이는 “거주하다”의 의미가 사는 것이다로부터; 그리고 “고센의 토지”의 의미가 중앙 또는 가장 안쪽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 토지가 이집트 안에 있고, “이집트”에 의해 자연 평면에 있는 기억 속의 지식이 의미되기 때문에, “고센의 토지”는 자연 평면에서 중앙, 가장 안쪽이다. 고센은 이집트의 토지에서 가장 좋은 지역이었는 바, 기억 속의 지식들이 있는 자연 평면에서 가장 좋은 곳은 단연 중앙, 한가운데 이다; 그 이유가 자연 평면에서 선 자체는 태양 같은 어떤 것으로 있고, 중앙으로부터 변두리에 있는 진리들에 빛을 주기 때문이다.

그리고 당신은 저 가까이 계실 것이다. 이는 영구적인 결합을 의미한다. 이는 “가까이 있다”의 의미가 영구적 결합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 이유가 “요셉에게 오다”에 의해 결합이 의미되기 때문. 그러므로 “그에게 가까이 있는” 것, 고로 그 옆에 계속적으로 있는 것은 영구적인 결합이다.

당신, 그리고 당신의 아들들, 그리고 당신의 아들들의 아들들. 이는 영적 선 그리고 영적 선으로부터 있는 모든 것, 그리고 영적 선으로부터 있는 모든 것으로부터 있는 모든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당신”인 이스라엘의 표현함이 영적 선이다로부터; “그의 아들들”의 의미가 이 선으로부터 있는 것들이다로부터, 이는 자연 평면에 있는 진리들이다, “아들들의 아들들”의 의미가 이것들로부터 있는 것들, 즉 다시 태어나고 파생된 진리들이다. 선이 첫 위치 (상석)에 있고, 지배할 때, 이 선은 계속적으로 진리들을 생산한다. 즉 진리들은 주변으로 더욱 많은 진리들을 불려가는데, 마치 아주 강한 빛을 내는 별 주위에 작은 별들이 두루 깔리는 것 같다. 선만이 진리들을 증가되게 하는 것은 아니고 진리들로부터 진리들이 배가된다. 이것이 “아들들의 아들들”, 또는 손자 등등이다. 요셉은 그의 아버지를 통하여서가 아니면 그의 형제들을 초대하지 못한다, 하여 “그”가 그의 아들들, 그리고 아들들의 아들들과 더불어 와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 이유인즉, 중매를 통하지 않고서는 천적 평면으로부터의 내적 부분이 자연 평면의 진리들과 결합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당신의 양떼, 그리고 당신의 목축들. 이는 내면과 외면에 있는 자연적 선을 의미한다. 이는 “양떼”의 의미가 내적 선이다로부터, 여기서는 자연 평면의 내면에 있는 선이다, 그 이유는 그 양떼가 이스라엘의 양떼이기 때문, 이스라엘에 의해 자연 평면으로부터의 영적 선이 표현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목축”의 의미가 자연 평면의 외면의 선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목축”에 의해 외면의 선이, “양떼”에 의해 내면의 선이 의미되는 이유는 목축을 구성하는 짐승들이 수소나 거세한 수소이고, 이것들은 제물을 바침에서 선행의 외적 선들, 또는 외적 인간의 선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양떼를 구성하는 짐승은 어린 양, 양, 염소들이고, 선행의 내적 선, 또한 내적 인간의 선들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후자의 선 안에 있는 이들이 말씀에서 흔히 읽는 단어 “양떼(flock)”로 불리우고, 그것들을 인도하는 자가 “목자”라고 불리운다.

그리고 당신이 소유한 모든 것. 이는 거기로부터 있는 것은 무엇이든지를 의미한다.
이는 “당신이 가진 모든 것”이 거기로부터 있는 것 모두이다를 의미함에서 알게 된다; 그 이유가 자연 평면에 있는 선들과 진리들은 아버지로서의 영적 선으로부터 있기 때문; 그러므로 그것으로 있는 바 그것들은 그것 속에 있는 셈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가 거기서 당신을 떠받들 것입니다. 이는 천적 평면으로부터의 내적 부분으로부터 영적 생명이 계속 유입됨을 의미한다. 이는 “떠받든다(sustain)”의 의미가, 이것이 요셉에 의해 말해질 경우, 즉 천적 평면으로부터의 내적 부분을 표현하는 그가 말할 경우인 바, 천적 평면으로부터의 내적 부분으로부터 영적 생명이 계속 유입됨이 의미된다; 영적 의미에서 떠받친다는 주님으로부터 천국을 통하여 선의 유입과 진리의 유입 외에 다른 것은 없다. 이로부터 천사들 역시 유지 지탱되고, 이로부터 인간의 혼도(즉 그의 내적 인간도) 그러하다. 이 떠받쳐짐은 식료품을 수단으로 외적 인간이 떠받쳐짐과 상응된다; 그러므로 “식품(food)”에 의해 선이, “음료(drink)”에 의해서는 진리가 상응된다. 이러한 바, 인간이 식품에 관여할 때, 그와 더불은 천사들은 선과 진리에 대한 생각에 관여한다, 특이하고 경이로운 것은 식품의 종류에 따라서도 다르게 관여한다는 것이다. 고로 인간이 성찬에서 빵과 포도주를 받을 때, 그와 더불은 천사들은 사랑의 선과 신앙의 선에 관한 생각 안에 있다, 그 이유는 빵이 사랑의 선과, 포도주는 신앙의 선과 상응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들이 상응하기 때문에, 그것들은 말씀에서도 같은 상응을 가진다.
인간의 혼(즉 내적 인간)이 영적 식품과 음료, 즉 선과 진리에 의해 떠받쳐진다는 것을 주님의 말씀들로부터 분명해진다. 모세의 책에서:
인간은 빵만으로 살아 있지 않다, 그러나 여호와의 입으로부터 모두 각각의 말하심(言說, utterance)을 수단으로 인간은 살아 있다 (신. 8:3; 마. 4:4);
“여호와의 입으로부터의 말하심”은 그분으로부터 진행하는 선과 진리이다. 요한 복음서에서:
멸해지는 식품을 위하여 노동하지 말라, 그러나 영원한 생명 쪽으로 남아있게 하는 식품을 위하여 노동하라. 이것은 사람의 아들이 너희에게 줄 것이다 (요. 6:27).
다시:
제자들이 예수에게 간절히 원하여 말하기를, 스승이시여, 잡수십시오. 그분이 그들에게 말했다, 나는 너희가 모르는 먹을 식품을 가지고 있다 (요. 4:31, 32).
그리고 음료에 관하여도 마찬가지인데:
예수께서 말하셨다, 만일 어떤 이가 목마르다면, 그로 하여금 나에게 오게 해서 마시게 하라; 내 안에서 믿는 자는 누구이든, 성경이 말했던 그대로, 그의 배로부터 살아있는 물의 시내들이 흐를 것이다 (요. 7:37, 38).

그 이유가 기근의 다섯 해가 아직 더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선이 결핍되는 기간을 의미한다. 이미 “기근”과 “다섯”에 관하여는 살핀 바 있어 설명은 생략한다.

당신이 뿌리뽑히지 않도록. 이는 멸하지 않도록을 의미한다.

당신과 당신의 집식구, 그리고 당신이 가진 모든 것. 이는 영적 선 그리고 영적 선에 속해 있는 모든 것을 의미한다. 이는 여기서 “당신”인 이스라엘의 표현함이 영적 선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리고 “당신의 집식구, 당신이 가진 모든 것”은 영적 평면에 속하는 모든 것임이 분명하다.

그리고 보라, 당신들의 눈이 보고 있다. 이는 지각으로부터 증언함을 의미한다.
이는 “눈”과 “보는” 것의 의미함이 지각함이다로부터; 고로 증언함이 의미됨이 분명하다.

그리고 나의 아우 베냐민의 눈. 이는 중매자의 지각으로부터를 의미한다. 이는 “눈”과 “보다”의 의미가 이해하고 지각하는 것이다로부터; 그리고 베냐민의 표현함이 중매자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여기서의 경우 이렇다: 베냐민이 중매자를 표현하고, 이 중매자는 내면의 진리이고, 이 진리는 “요셉”인 내적 선에 의존하는 바, 이 진리는 그의 열 형제들이 표현하는 진리들인 외적 진리 보다 더 명료하고 정교한 지각을 가졌다. 즉 진리와 선이 내적 부분에 더 가까울수록, 그것들은 더 완전한 지각력을 가지는 바, 천국의 빛에서 더 깊게 지각하고, 주님 쪽으로 더 가까이 위치한다. 그 이유가 주님으로부터의 신성한 선과 진리의 유입은 계속적인 조정함(mediation), 그리고 연속적임을 통하여 발전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첫째의 원리들(첫 등차) 또는 (주님으로부터의 유입됨이) 시작하는 등차에 있는 이들은 중간 등차나 최말단 등차에 있는 이들 보다 더 명료한 지각과 더불어 유입을 받는다(그 이유는 보다 더 직접적으로 받는 셈이기 때문). 거리들에 따라서 (빛 속에 있는 경우) 선과 진리의 연속적인 희미해짐이 있다. 그 이유가 등차를 수단으로 계속적으로 더 완전해짐에는 상대적으로 어둠침침이 있기 때문이다. 위 모두로부터 분명해지는 것은, “중매자의 지각함으로부터 증언함”이 무엇을 뜻하는지 이다. 그 이유는 중매자는 내면이고, 야곱의 아들들이 표현하는 진리들은 외면이기 때문이다.

내 입으로 내가 당신들에게 말하는 것. 이는 명백하게 나타나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첫 증언은 그들의 눈이 본 것으로, 두 번째 증언은 베냐민의 눈이 본 것으로, 지금은 세 번째의 증언으로 그가 그들에게 말하는 그의 입을 가지고 이다; 이럼으로해서 그가 요셉이다는 것에 대한 모든 의구심이 제거되었다; 결과적으로 (요셉 자신이) 완전히 명백하게 나타났다는 것, 그러므로 이 말에는 명백하게 나타냄이 포함되고 있다.

그리고 여러분은 나의 아버지에게 이집트에서의 나의 모든 영화를 말하시오. 이는 자연 평면에서 영적 (평면의) 천국이 영적 선과 소통함을 의미한다. 이는 “말하다(tell)”의 의미가 교통하다이다로부터; “영화(glory)”의 의미가 영적 천국 이다로부터 (아래에서 살핀다); “이집트”의 의미가 자연 평면에 있는 기억 속의 지식들, 고로 자연 평면이다로부터; 그리고 교통함이 만들어지게 될 “아버지”인 이스라엘의 표현함이 영적 선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상 모두로부터 분명한 바, “당신들은 이집트에서 내 영화의 모든 것을 아버지에 말하라”에 의해 자연 평면에서 영적 선이 영적 (평면의) 천국과 교류함이 의미된다.
“영화”가 영적 (평면의) 천국을 표시함에 주목하면, 이렇다; 천국을 만들어내는(form, consist) 두 왕국들이 있다; 즉 천적 왕국과 영적 왕국이다. 천적 왕국은 가장 안쪽 천국, 또는 세 번째 천국, 그리고 영적 왕국은 중간의 천국, 또는 두 번째 천국이다. 천적 평면에 있는 선은 천적인 (수준의) 선이라 불리우고, 영적 평면에 있는 선은 영적인 (수준의) 선이라 불리운다. 천적 선은 주님을 사랑함의 선이고, 영적인 선은 이웃을 향한 선이다. 이 두 왕국의 결합에 주목해보면, 이 두 왕국을 결합하게 하는 것은 이웃을 향한 선행의 선이다. 그 이유가 천적 왕국의 내적 부분은 주님을 사랑함 이고 외적 부분은 이웃을 향한 선행 이기 때문이다; 한편, 영적 왕국의 내적 부분은 이웃을 향한 선행이고, 외적 부분은 선행으로부터의 신앙이다. 이로부터 이 두 왕국의 결합은 이웃을 향한 선행을 통하여 결과됨이 분명하다. 그 이유가 이 선행에서 천적 왕국의 종착점이 있고, 영적 왕국의 출발점이 있기 때문이다 (출발과 도착이 있는 버스 터미널을 연상해보아도 될지 모른다 역자주.) 고로 전자의 마지막이 후자의 시작이다. 이런 관계로 이 둘은 서로를 붙들고 있다.
“영화”가 무엇인지 이제 말해본다. “영화(영광)”는 최고 의미에서 신성한 진리 측면에서의 주님이시다, 고로 이것은 주님으로부터 진행하는 신성한 진리이다. 그러나 표현 의미에서 “영광”은 이웃을 향한 사랑의 선, 또는 선행(charity)이고, 이것은 천적 왕국의 외적 선이고 주님의 영적 왕국의 내적 선이다, 그 이유가 이 선은 진짜 의미에서 천국에 있는 신성한 진리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기서는 영적 선, 또는 선행인 이스라엘이 취급되기 때문에, 이것이 천국들에서 영적 왕국을 만들기 때문에, 그리고 땅에서 영적 교회를 만들기 때문에, 여기서 이스라엘에게 말하라고 한 요셉의 “영광”을 수단으로는 영적 (평면의) 천국이 뜻해진다. 영적 천국이 “영광”이라 불리우는 이유는 그 천국에서 나타나는 것은 무엇이든 빛 안에서, 밝게 빛남 안에서, 광휘 안에서 이기 때문이다.
“영광”이 주님의 신성한 인간으로부터 있는 신성한 진리를 서술한다는 것, 이것이 왕 측면에서의 주님의 속성이다는 것이 요한복음서에서 분명해진다;
그러나 말씀이 육으로 만들어졌다, 그리고 우리 안에서 거주하셨다, 그리고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아버지의 유일한 독생자에 관한 영광을 보았고, 은총과 진리로 가득하였다 (요. 1:14);
“말씀”은 신성한 진리이다, 그리고 이것이 주님으로부터 진행하기 때문에, 이것은 주님 자신이시다; 그리고 이로부터 “영광”은 신성한 진리를 서술한다.
누가복음서에서, 예수께서 산에서 변모하셨을 때;
보라 거기에 그분과 더불어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었다, 이들은 모세와 엘리야였다; 이들이 영광 안에서 보여졌다 (눅. 9:30, 31);
주님께서는 위 광경을 베드로, 야고보, 요한에게 신성한 빛 안에서 나타나는 것과 같은 그분의 신성한 인간을 보이셨다; 그리고 이때 그분이 보이셨던 형체는 내적 의미에서 있는 말씀과 같은 것을 바라보도록(view) 표출되었다; 고로 이것은 천국에 있는 신성한 진리와 같은 것이다, 그 이유가 말씀은 교회의 사용을 위한 신성한 진리이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그분과 더불어 모세와 엘리야도 동시에 바라보게 표출된 것이다; 그 이유가 모세에 의해서는 율법이, 고로 역사적 부분과 더불은 모세의 책들을 표현되었고, 엘리야에 의해서는 예언서들, 또는 예언의 말씀들이 표현되었기 때문이다. “모세”가 법을 뜻한다에 대하여는 창. 18장 서문을 참조하면 될 것이다; “엘리야”가 예언의 말씀을 뜻함도 같은 서문에서 있다.
마태복음서에서:
그들은 사람의 아들이 능력과 영광과 더불어 하늘의 구름들 안에서 오는 것을 볼 것이다
(마. 24:30);
말씀의 글자 의미가 “구름”이다, 그리고 내적 의미는 “영광”이다. 외적 의미 측면에서의 말씀은 구름 안에서 있다, 그런 이유는 인간의 마음들이 어둠 안에서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말씀이 구름 안에 있지 않으면, 어떤 누구에게나 거의 이해되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내적 의미에 속하는 거룩한 것들은 세상에 있는 악한 인간(people)에 의해 모독될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이사야서에서 말하신다:
여호와께서는 시온의 모두 각각의 거주지 위에, 그리고 그녀의 회합의 위에, 낮에는 구름을, 밤에는 불의 불꽃이 빛을 내게 창조하실 것이다; 모든 영광 위에 덮개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낮 동안에는 그늘을 위하여 성막이 있을 것이다 (이. 4:5, 6).
그런고로 성막 위에 낮에는 구름이, 밤에는 불이 나타났다, 그 이유는 성막이 주님의 신성한 인간을, 결과적으로 그분으로부터 진행하는 신성한 진리를, 고로 교회의 신성한 진리인 말씀을 표현했기 때문이다. 같은 사항이 모세의 책에서 이 말씀에 의해 의미되고 있다:
구름이 만남의 천막을 덮었다, 그리고 여호와의 영광이 주택을 채웠다 (출. 40:34).
다시:
여호와의 영광이 이스라엘의 모든 아들들 앞에서 만남의 천막에서 나타났다 (민. 14:10).
다른 곳에서:
구름이 천막을 덮었다, 그리고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났다 (민. 16:42).
마찬가지로 시내산 위에서 “구름”과 “영광”, 이에 관해 모세의 책에서:
모세가 산으로 올라 갔을 때, 구름이 산을 덮었다, 그리고 여호와의 영광이 육일 동안 시내산에 거주하셨다 (출. 24:15, 16).
이런 사항들이 표현한 것 역시 법, 즉 신성한 진리인 법때문이었고, 하여 이 산으로부터 선포되었다. 여호와의 구름과 영광이 모세가 산에 올라 갔을 때 보여진 이유는 그가 법, 즉 역사적 말씀을 표현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때로 말해지는 것은, “모세와 예언자들”, 또는 “율법과 예언서들”이라 불러지는 것이다. “법”에 의해서는 모세의 책과 더불어 역사적 부분의 말씀이, 그러나 예언서들은 아니다, 이 책들은 엘리야와 엘리사에 의해 표현되었기 때문이다; 말씀이 역사적 부분과 예언적 부분으로 되어 있다는 것은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러므로 말씀이 “율법과 예언서들”이라 말해질 경우, “율법”은 역사적 말씀을, “예언서들”에 의해서는 예언적 말씀이 뜻해진다.
신성한 진리가 거룹을 빙두른 구름에서와 그것들 위에서 무지개로서 밝음에 의해 표현되었다:
나는 불의 나타남, 마치 빙둘러 빛남의 나타남을 보았다; 비가 온 날의 구름에 있는 활의 나타남 같았다; 이것은 여호와의 영광의 모습의 나타남이었다 (겔. 1:27, 28);
그리고 이렇게 불리워진다:
여호와의 영광과 이스라엘의 하느님의 영광 (겔. 8:4; 10:18, 19; 11:22, 23);
비교적 측면에서 가장 깊은 천국의 영광은 “여호와의 영광”, 비교적 측면에서 중간, 또는 영적 천국에서의 영광은 “이스라엘의 하느님의 영광”이라 불리운다. 천국들에 있는 신성한 진리가 영광 안에서 나타나는 이유는 영적 천국에서의 진리 자체가 빛나는 구름으로 눈 앞에 나타나기 때문이다(이는 나에게도 보도록 허락되기도 했다), 그리고 이 진리 안쪽의 선은 거기서 불타는 것으로 나타난다. 고로 불에 의해 다양해진 구름은 외적 의미에서 “영광”인 경이로운 양상들을 표출한다. 그러나 내적 의미에서의 “영광”은 총명과 지혜이고, 이것들이 영광에 의해 표현되어져 있다.
신성한 진리, 이로부터 모든 지혜와 총명이 있다, 뿐만 아니라 외적 시각 앞에 다채로운 구름의 나타남인데, “영광”이다. 아래 구절들에서 분명해진다:
여호와께서 말하셨다, 살아 있음이 나이다, 그리고 온 땅은 여호와의 영광으로 채워질 것이다 (민. 14:21);
위 말씀은 여호와께서 하셨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의절되었을 때, 그리고 그들의 어린 것들만이 가나안의 토지에 갈 것이라고 말해졌을 때 였다, 이런 상황 아래, “온 땅이 여호와의 영광으로 채워졌다”에 의해, 그들과 더불은 교회의 표현만 할 뿐임에서, 그리고 말씀에서, 대부분이 그들을 취급하고, 거기에 여호와의 영광이 있을 것이라고, 이와 더불어 온 천국도 (영광으로) 채워질 것이라고, 이로부터 교회의 거룩한 것들이 있을 것이 의미되고 있다.
이사야서에서:
스랍이 소리쳤다, 거룩, 거룩, 거룩, 여호와 체바욷이시다; 모든 땅의 충만함이 그분의 영광이다 (이. 6:3).
다시:
여호와의 영광이 밝히 알리실 것이다, 그리고 모든 육체가 함께 볼 것이다 (이. 40:5).
다시:
그러므로 우림 안에서, 바다의 섬에서 여호와께, 이스라엘의 하느님 여호와의 이름에 영광을 드리자 (이. 24:15);
“우림”은 주님으로부터 진행하는 신성한 진리로부터 있는 빛을 표시한다; “바다의 섬들”은 진리로부터 더 멀리 떨어진 이들을 표시한다.
다시:
레바논의 영광이 그것에 주어질 것이다, 갈멜과 샤론의 영예; 그들은 여호와의 영광을, 우리의 하느님의 영예를 볼 것이다 (이. 35:2);
“레바논”은 영적 교회를 표시한다; “갈멜과 샤론”은 천적 교회를 표시한다; 선행인 천적 진리가 뜻해질 때, 글자로부터까지 “여호와의 영광”을 서술하고 있다; 앞 구절(이. 24:15)의 “이스라엘의 하느님의 영예”가 서술되는데, 이는 영적 선이 뜻해질 때, 이것 역시 선행이 있을 때이다.
다시:
일어나라, 빛을 발함이 있으라, 네 빛이 오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호와의 영광이 너희 위에 일어났기 때문이다. 보라 어둠이 땅을 덮는다, 그리고 짙은 어둠이 백성들을 (덮는다); 그러나 여호와께서는 네 위에서 일어나실 것이다, 그리고 그분의 영광이 네 위에서 보여질 것이다 (이. 60:1, 2);
위는 주님에 관하여서이고, 이분이 “빛”이라 불리우신다 (요. 1:4, 9도 비슷하다); 그리고 그분 위에서 “여호와의 영광”이 일어날 것이다고 말해진다; 즉 신성한 진리가 그분의 것이다고 말해진다. 마찬가지가 같은 예언서에서:
나 자신을 위하여, 나 지신을 위하여, 나는 그것을 행할 것이다; 어찌 그것이 모독되어진다는 말인가? 내 영광을 나는 다른 자에게 주지 않는다 (이. 48:11);
위 구절도 주님에 관하여서 이다; “영광”은 가장 높은 의미에서 신성한 인간을, 또한 신성한 진리를 표시한다, 그 이유는 이것이 거기로부터 이기 때문이다; “그분의 영광을 다른 자에게 주지 않는다”란 그분 자신과 하나인 신성한 인간에게 만 그것을 주신다는 말이다.
계시록서에서: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거룩한 성 예루살렘; 하느님의 영광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녀의 발광체는 가장 귀중한 돌 같다 (계. 21:10, 11);
“거룩한 성 예루살렘”은 천국들에 있는 주님의 영적 왕국이다, 그리고 땅에서는 그분의 영적 교회이다, 이 둘을 “영광”이 서술하고 있다; “발광체”는 신성으로부터의 진리이다.
말씀에서 신성한 진리가 왕권에 의해 표현되듯, 신성한 진리 측면에서의 주님이 왕들에 의해 표현되므로 “영광”을 왕의 속성이 되고 있다. 다윗서에서:
너희 머리들을 들어라, 오 너희 큰 문(gate)들이여; 그리고 너희는 들리어질 것이다, 세상의 너희 작은 문(door)들아; 영광의 왕이 안으로 가신다. 누가 영광의 이 왕이냐? 강하고 영웅이신 여호와; 전쟁의 영웅 여호와 (이시다). 너희의 머리들을 들오라 오 너희 큰 문들이여; 그리고 오 세상의 작은 문들을 들어라; 영광의 왕이 안으로 가신다. 누가 영광의 이 왕인가? 여호와 체바욷 (이시다), 그분이 영광의 왕이시다 (시. 24:7-10).
이사야서에서:
여호와 체바욷이 시온의 산에서 통치하실 것이다, 그리고 예루살렘에서; 그리고 그분의 영광의 원로들 앞에서 (이. 24:23);
“영광”은 신성한 진리를 표시한다. 여호와가 신성한 진리가 취급되는 곳에서는 “여호와 체바욷”이라, 또는 “군대들의 여호와(만군의 여호와)”라고 불리우신다, 그 이유는 “군대들”에 의해 진리들이 의미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왕국에 의해서는 신성한 진리가 표현되었는 바, 그러므로 왕이 앉은 왕좌는 그들이 심판했을 때 “영광의 왕좌”라고 불리웠다 (이. 22:23; 예. 14:21; 17:12). 그리고 마태복음서에서:
사람의 아들은 그분의 영광의 왕좌에 앉을 것이다 (마. 19:28).
다시:
사람의 아들이 그분의 영광 안에서 올 때, 그리고 그분과 더불은 모든 거룩한 천사들, 그때 그분은 그분의 영광의 왕좌에 앉으실 것이다. 그리고 왕이 그들에게 말할 것이다 (마. 25:31, 34, 40).
왕좌가 “영광의 왕좌”라 불리운 또 다른 이유는 심판들이 진리로부터 결과되어졌기 때문이다. 다시:
사람의 아들은 그분의 천사들과 더불은 그분의 아버지의 영광 안에서 올 것이다; 그리고 그때 그분은 모든 이에게 그의 행실들에 따라서 보답할 것이다 (마. 16:27).
위 모두로부터 “영광”에 의해 뜻해지는 것이 분명해졌을 것이다. 주님의 기도에서:
왕국과 권능과 영광이 영원히 당신의 것입니다 (마. 6:13).
천국들에서의 주님의 영적 왕국과 땅 위에서의 그분의 영적 교회는 “잘생김, comeliness”이라고도 불리우고 있다 (이. 60:7; 63:15; 64:11; 단. 8:9; 11:16, 41, 45. ** 참고: 이 구절들에서의 히브리 단어는 라틴어로는 decus 인데, kjv 등의 영역에서는 영광, glory으로 번역하는데, 원저자의 경우는 아름다움, 잘생김으로 번역하고 있다 역자주.) 더욱이 “영광”이 요셉에 의해 언급되는데, 그 이유는 가장 높은 의미에서 요셉 자신이 신성한 영적 평면, 즉 신성한 진리 측면에서의 주님을 표현하기 때문; 그리고 내적 의미에서는 그분의 영적 왕국, 그리고 또한 신앙의 선을 표현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당신들이 보았던 모든 것. 이는 거기서 주목되었고 지각된 것은 무엇이든지를 의미한다. 이는 “보다(see)”의 의미가 이해하다와 이해함으로부터 지각하고 주목하는 것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리고 서두르시오, 그리고 나의 아버지를 이쪽으로 내려 오게 하시오. 이는 더 가까운 결합을 의미한다. 이는 앞에서 살핀 바 있다; 그리고 다시 여기서 반복되고 있다, 그리고 사랑의 애착으로부터 인 바, 이것은 친밀한 결합을 표시한다.

14, 15절. 그리고 그는 그의 아우 베냐민의 목들에 엎드려져서 울었다. 그리고 베냐민은 그의 목들에서 울었다. 15 그리고 그는 그의 모든 형제와 키스했다, 그리고 그들과 울었다, 그 후에 그의 형제들은 그와 이야기 했다.

그리고 그는 그의 아우 베냐민의 목들(necks)에 엎드려졌다. 이는 중매자와 더불은 가장 깊은 결합을 의미한다. 이는 “목”의 의미가 유입, 교통, 그리고 결합인데 (** 눈이나 귀와 달리 목은 하나뿐인데, 복수인 목들로 히브리어, 라틴어 모두에서 기록하고 있다. 역자 주), 여기서 가장 적절한 의미는 결합, 즉 천적인 것과 영적인 것의 결합, 고로 “요셉”인 천적 평면으로부터의 내적 부분(the internal celestial)이 “베냐민”인 천적 평면의 영적 부분(the spiritual of celestial)과 결합함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목들에 엎드려졌다(목들을 끌어 안았다, fall)”는 자신들을 밀접하게 결합했다는 것, 결과적으로 가장 깊은 결합을 표시한다. 그리고 베냐민의 표현함이 중매자이다로부터 알려진다.

울었다. 이는 자비의 결과를 의미한다. 이는 “울다(weep)”가 자비로부터 인 것이다, 고로 그것의 결과가 의미된다.

그리고 베냐민은 그의 목들에서 울었다. 이는 영접 그리고 거기로부터의 상호성을 의미한다. 이는 이 행동이 상호적으로 있었다는 사실로부터 분명해진다; 그러므로 이것은 받아들임과 상호 관계를 표시한다. 선이 진리들과 결합함, 그리고 상호적으로 진리가 선과 결합함에 주목해보면, 선이 진리들 안으로 흐르고, 자체를 그것들에 결합할 때, 진리들 안으로 선은 자체로부터 선을 쏟는다, 그리고 선의 자신을 수단으로 선 자체에 진리가 달라붙게 한다, 이리하여 결합이 오고 있다. 그리고 진리들이 생명을 받을 때, 받은 후에는 그것들은 서로에게 작용, 반작용하여 마치 각기 자신들로부터 행동하는 듯하다. 그럼에도 진리들은 자신들로부터 행동하지 않는다, 그러나 진리들에 자체를 수단으로 하여 달라붙은 선 안으로 흐르는 선으로부터 행동한다. 이런 경우는 살아있는 육체에 있는 혈관과 같다. 진리들은 피 없는 혈관과 비슷하다; 그러나 선은 마치 피 같이 있다; 이 선이 자체를 이전에 텅비어 있던 (혈관이라는) 그릇 안으로 쏟을 때, 그것(혈관)은 움직임 안에 놓인다, 또한 선 역시 상호적으로 움직임 안에 있는다, 그 이유가 그것들은 피로부터 움직이는 능력을 받았기 때문, 마치 생명을 받은 것과 같다. 이런 모두로부터 분명해지는 바, 선이 진리들과 결합함, 그리고 상호적으로 진리들이 선과 결합하는 경우가 어떤 경우일 것인지 이다.

그리고 그는 그의 모든 형제와 키스했다. 이는 은총으로부터 인접함(adjunction)을 의미한다. 이는 키스의 의미가 애착(애정)으로부터의 결합함이다로부터, 여기서는 은총으로부터 인접함인데, 그 이유는 야곱의 아들들에 의해 표현되는 자연 평면의 진리들은 요셉인 내적 선과 비교적으로 거리가 더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 그리고 더 멀리 떨어져 있는 것들은 내적 선과 결합하려면 중매자를 통하여서만 그나마 가능해진다; 그 이유는 엄밀히 말하면, 자연 평면의 진리들은 내적 선과 상응하지 않는 이런저런 것들을 여전히 붙들고 있는 상태이기 때문 이다; 그러므로 “자기 형제들과 키스함”에 의해서는 은총으로부터 결합함이 의미된다. 여기서 자비로부터가 아니라 은총으로부터라고 말한 이유는 내적 선에서 한층 더 멀리 떨어진 상태의 진리들, 고로 상응함이 충분하지 않는 상태의 진리들은 그것들이 자비를 간청할 수 있는 만큼의 (완전) 굴종(겸허, humiliation)의 수준에 있지 않아서 이다; 그것들은 심정으로부터서는 자비라는 단어조차 끄집어낼 수가 없다, 그 대신 은총이라는 단어는 가능하다. 그리고 이것은 그것에 붙어 있는 비 상응적인 것들이 자기를 사랑함으로부터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신을 사랑하는 자는 심정으로부터서는 자신을 겸허해지게 할 수 없다; 그 이유가 그는 자신을 자신 내부로부터서는 상석에 앉히고 있기 때문, 다시 말해 모든 것에서 자신만을 중요시한다는 것, 자신 외의 것은 하찮은 일거리에 불과한 것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과 울었다. 이는 애착(애정)의 결과를 의미한다. 이는 “울다”의 의미가 자비의 결과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는 바로 앞 문단의 설명한 이유와도 상충된다.

그 후에 그의 형제들은 그와 이야기 했다. 이는 영접으로부터의 상호 소통을 의미한다. 이는 앞에서 살핀 바 있다, 또한 영접함으로부터 있는 상호 교통함이 무엇인지도 이미 살폈다.

16-20절. 그리고 이 목소리가 바로의 집에 들렸다, 말하기를 요셉의 형제들이 와있다. 그리고 이것은 바로의 눈에, 그의 종들의 눈에도 좋게 여겨졌다. 17 그래서 바로는 요셉에게 말했다, 네 형제에게 말하라, 이것을 너희는 하라. 너희 짐승들에 양식을 싣고, 가서, 가나안의 토지에 당도하라. 18 그리고 너희 아버지와 너희 집식구들을 데리고, 나에게 오라. 그리고 나는 너희에게 이집트의 토지의 좋은 곳을 줄 것이다, 그리고 너희는 그 토지의 지방을 먹을 것이다. 19 그리고 지금 명령했다, 이것을 너희는 실시하라. 너희는 이집트의 토지로부터 수레들을 너희 아기들, 그리고 너희 여인들을 위하여 가져가라, 그리고 너희 아버지를 모시고, 오라. 20 그리고 너희의 눈이 너희의 물자를 아끼려 하는 것을 보게 말라. 그 이유는 이집트의 온 토지의 좋은 것이,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목소리가 바로의 집에 들렸다. 이는 이것이 보편적인 자연 평면을 채웠다 를 의미한다. 이는 어딘가 다른 곳, 또는 멀리로부터서 들려진 목소리(voice), 이것이 유입을 서술할 경우, 채워지는 것이다로부터; 그 이유가 들려진 목소리가 채우듯, 흘러드는 유입도 그렇게 채우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로의 집”의 의미가 보편적 자연 평면이다로부터; 그 이유는 바로에 의해서는 일반적 측면에서의 자연 평면을 표현했기 때문이다.

말하기를 요셉의 형제들이 와있다. 이는 교회의 진리들이 자연 평면에서 현존하고 있다를 지각함을 의미한다. 이는 “와있다(to have come)”의 의미가 현존하고 있다 이다로부터; 그리고 야곱의 아들들, 또는 요셉의 형제들의 표현함이 자연 평면에 있는 교회의 진리들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자연 평면에는 다양한 종류의 기억 속의 지식들이 있다: 거기에는 지상적, 육체적, 세상적인 것들에 관한 기억 속의 지식들이 있는데, 이것들은 가장 수준 낮은 지식들이다, 그 이유가 이것들은 외적 감각들, 또는 육체의 것들로부터 직접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시민적 상태, 시민의 통치 정부, 규례들, 법들에 관한 기억 속의 지식들이 있다, 이것들은 앞의 지식들 보다는 약간 더 내면적이다; 그리고 도덕적 삶에 관한 기억 속의 지식들이 있다, 이것은 한층 더 내면적이다; 그러나 영적 삶에 속하는 기억 속의 지식들은 앞의 모든 것들 보다 더 내면적이다. 이 후자가 교회의 진리들이다, 이것이 인간과 더불어 교리로서만 있는 한에서는 그것은 기억 속의 지식들 그 이상이라 말할 수 없다; 그러나 그 지식들이 사랑의 선으로 있을 때, 그 지식들은 기억 속의 지식들이라는 수준을 박차고 일어난다; 그 이유는 이때 그 지식들은 영적인 빛 안에 있기 때문이다; 이 빛으로부터의 질서에서 이 지식들은 그것들 아래쪽에서 기억 속의 지식들을 쳐다 본다. 기억 속의 지식들의 이런저런 등차들을 수단으로 인간은 총명의 수준에 이른다, 그 이유가 이런 등차들을 수단으로 기억 속의 지식들은 마음을 열리게 해서, 영계로부터의 빛이 흘러들 수가 있기 때문이다. 이런 설명으로부터 자연 평면에서 진리들의 현존함에 의해 뜻해졌음이 분명해졌을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바로의 눈에 좋아 보였다. 이는 거기 안이 기쁨으로 꽉 찼음을 의미한다. 즉 자연 평면이 기쁨으로 꽉 찼다는 말이다. 이는 누군가의 “눈에 좋아 보임, 또는 …의 눈에 선이다(to be good in the eyes of) ”란 당사자에게 기쁨이다 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로의 표현함이 일반적 측면에서의 자연 평면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의 종들의 눈에도. 이는 거기 가장 낮은 것들에서 조차를 의미한다. 이는 “종들”의 의미가 보다 낮은 수준의 것들이다로부터, 고로 가장 낮은 수준의 것들이다도 의미한다. 자연 평면에 있는 기억 속의 지식들에서 보다 낮은 것, 가장 낮은 것이 무엇인지는 앞에서 살핀 바 있다.

그래서 바로는 요셉에게 말했다. 이는 천적 평면으로부터의 내적부분으로부터 자연 평면이 지각함을 의미한다. 이는 “말하다(say)”가 말씀의 역사 부분에서는 지각하다를 의미한다로부터; 바로의 표현함이 일반적 측면에서의 자연 평면이다로부터; 요셉의 표현함이 천적 평면으로부터의 내적 부분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요셉이 표현하는 천적 평면은 내적 부분이고, 바로가 표현하는 자연 평면은 외적 부분이기에, 그러므로 지각함은 천적 평면으로부터의 내적 부분으로부터 자연 평면 속에 있는다, 그 이유가 모든 지각함은 내부로부터 있기 때문이다; 어떤 경우에도 그 거꾸로인 밖으로부터 안쪽의 것을 지각함은 없다. 그 이유가 유입으로부터 지각함이 있기 때문이다.
지각함이 무엇인지는 자주 언급되어진 바이지만 여기서도 간략히 더 살펴야 할 것 같다. 모두 각각의 인간에게는 어떤 것이 그렇다, 아니다 하는 것을 지각하는 능력(capacity)이 있다. 자신 안에서, 또는 자신의 마음 안에서 결말을 끌어내는 능력이 어떤 것을 지각하게 한다. 이 능력은 영계로부터의 유입이 있지 않으면, 지독하게 불가능하다. 때로 이 선물을 향유함에서 이 사람은 저 사람의 능력보다 탁월하다. 덜 탁월한 이들은 자신 안에서, 또는 자신의 마음 안에서 맺어지는 결말이 덜 강력한 바, 덜 지각한다. 즉 이들은 타인들이 대체로 이런 신앙을 가지니까 아마도 그것이 옳을 것이다고 하여서, (또는 목사들이 설교에서 있던 말이니까 아마 맞지 않을 까하는 식의 태도로 인해 자신 내부의 결정에 사실상 자신의 이해력이 한발 뒤로 물러선 셈일 때) 당사자의 지각력은 무디어져 있게 된다는 말이다, 고로 덜 지각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보다 더 탁월한 이들은 타인들로부터가 아닌 상태에서 자신들을 위해 이것이 그렇다 여부를 보는 이들이다; 어쨌든 모든 이와 더불어 존재하는 지각은 행위 자체 안에서 세상작인 것들과 하나되어 있다. 오늘날 누군가의 지각함이 영적인 것들과만 하나되어 있는 자는 없다. 그 이유는 흘러들어 지각을 있게 하는 영적인 것들은 세상 사랑과 자아 사랑의 기쁨을 수단으로 희미해지고 결국 소멸되기 일쑤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의무감이나 관습적인 것들의 제약이 세상 사랑과 자아 사랑의 제멋대로 하려 듦을 제어하는 정도에서 겨우 기사회생되어 있기 일쑤이다; 따라서 만일 의무감에서 해제되고 관습적 제약 조건도 거두어진다면, 위 두 사랑들은 영적인 것들에 대해 퇴짜를 놓고, 증오감마저 느끼기도 하고, 아예 부정해버리기까지 이르른다.
영적인 것들에 지각을 가지는 이들은 반드시 선으로부터 진리에 애착하고 있어야 하고, 진리들을 알려는 바램을 계속적으로 지녀야만 한다. 그러면 이로 인해 그의 지적 부분이 계발된다, 그리고 지적 부분이 계발되어졌을 때, 이때 자신 안쪽에서 내향적으로 어떤 것을 지각하는 것이 그에게 주어진다. 그러나 진리에 애착함에 있지 않은 이들은 자기가 그것이 그렇다하는 것을 자기가 소속한 교회의 가르침으로부터, 그리고 성직자, 장로, 수도사 등등이 그렇게 말했기 때문에로부터 알고 있다. 이상 살핀 바로부터 지각함이 무엇인지에 대하여, 그리고 이것은 세상적인 것 안에 존재하고 영적인 것 안에 존재하지 않고 있다는 것을 알았을지 모른다; 이것은 이런 사실로부터 더 확실해질 것이다: 즉 모든 이는 자신이 출생한 교리 안에 머문다는 것, 예를 들면, 유태인으로, 교회 밖에서 태어나든 거기에 남아 있는다는 사실이다. 더욱이 그가 이교도에서 태어난다면, 그런데 이들에게 최고로 진짜되는 진리들을 말해준다면, 그래서 그들이 이 진리들을 확증조차 했다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것의 진리의 한조각도 지각하지 못한다; 그 이유는 그들에게 그 진리들은 거짓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네 형제에게 말하라. 이는 자연 평면에 있는 교회의 진리들에 관하여를 의미한다 (즉 그것들에 관하여 지각함이 있다는 것). 이는 요셉의 형제들의 표현함이 자연 평면에 있는 교회의 진리들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여기서 바로가 야곱의 아들들을, 그들의 아기들과 여인들과 더불어 초대하고 있다. 그리고 그들과 더불어 그들의 아버지도 초대하고 있다; 바로가 말한다: “네 형제에게 말하라, 이것을 너희는 행하라, 그리고 너의 아버지를 데려오라, 그리고 너는 이집트의 토지로부터 너희의 아기들과 너희의 여인들을 위하여 수레들을 가져가라, 그리고 너의 아버지를 데려와 오게 하라.” 방금 앞 절에서 요셉은 그의 아버지를 초대한다, 그리고 그의 형제들은 자기 아버지의 아들들로서만 초대하고 있다, 이렇게 말했다: “나의 아버지에게 올라가시오, 그리고 그에게 말하시오, 나에게로 오시되 지체하시지 말라; 그리고 당신은 고센의 토지에서 거주할 것이다, 당신은 내 가까이 있을 것이다, 당신, 그리고 당신의 아들들, 그리고 당신의 아들들의 아들들, 당신이 가진 모든 것도 (가까이 있을 것이다); 당신들은 서두르라, 이쪽으로 나의 아버지를 데려오라.” 바로가 야곱의 아들들을 초대했고, 요셉은 그의 아버지를 초대했는데 그에 대한 이유는 내적 의미가 아니면 분명해지지 않는다. 즉 바로에 의해 표현되는 일반적 측면에서의 자연 평면은 야곱의 아들들에 의해 표현되는 교회의 진리들에 더 직접적으로 교통하는 이유에서이다. 그러므로 바로가 야곱의 아들들을 초대하는 말을 한 것이다. 그러나 요셉에 의해 표현되는 천적 평면으로부터의 내적 부분은 야곱의 아들들인 자연 평면의 교회의 진리들과는 직접적인 교통함이 없고, 그들의 아버지인 이스라엘인 영적 선을 통하여서만 교통함을 가진다, 그래서 요셉이 자기 아버지를 초대하는 말을 한 것이다.

이것을 너희는 하라. 너희 짐승들에 (양식을) 실어라. 이는 그들은 모두 각각의 진리를 선으로 채워야 할 것을 의미한다. 이는 “짐승들에 싣는다”는 것은 진리들을 (선으로) 충분히 채운다이다로부터; 그리고 짐승이 실어나르게 되는 양식(grain)은 진리의 선이다. 여기서 “짐승들”이 진리들인 이유는 그것들이 나귀들이었기 때문이다 (창. 42:26, 27; 43:18, 24; 44:3). 그리고 “나귀들”에 의해 기억 속의 지식들이 의미되고, 그리고 중매자를 통하여 내적 선과의 결합이 결과되었기에, 여기서의 나귀인 짐승들은 기억 속의 지식들로부터의 진리들이다; 그러므로 “나귀”라는 표현 대신, 짐승이라는 단어가 사용되어 “짐을 싣는 짐승들(jumenta)”이라 불리운 것이다.

가서, 가나안의 토지에 당도하라. 이는 그들의 거주지, 즉 자연 평면에 있는 교회의 진리들의 거주지를 의미한다. 이는 “가나안의 토지”가 교회 속에 있어왔던 이들의 거주지이다로부터, 고로 선과 더불은 교회의 진리들의 거주지이다로부터, 그 이유는 이 진리들이 교회를 구성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너희 아버지와 너희 집식구들을 데리고, 나에게 오라. 이는 영적 선과 교회 속의 진리들이 자연 평면에 있는 기억 속의 지식에 접근함을 의미한다. 이는 여기서 “아버지”인 이스라엘의 표현함이 영적 선이다로부터; 그리고 그의 아들들의 표현함이 자연 평면에 있는 진리들이다로부터, 그의 아들들로부터의 모든 것이 “집식구들”이다; “오다”의 의미가 접근하다이다로부터; 여기서 “나에게”인 바로의 의미가 일반적 측면에서의 자연 평면의 기억 속의 지식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상 살핀 바를 종합하면, “너의 아버지, 그리고 너희의 집식구들을 데려와서, 나에게 오라”에 의해 영적 선과 교회의 진리들이 자연 평면의 기억 속의 지식들에 접근함이 의미된다.

그리고 나는 너희에게 이집트의 토지의 좋은 곳을 줄 것이다. 이는 기억 속의 지식들을 소유함을 의미한다. 이는 “이집트의 토지”의 의미가 기억 속의 지식들이다로부터; 그리고 그가 “토지의 좋은 곳을 준다”의 의미가 소유함이다로부터, 그 이유가 소유권을 주는 자라면 거기로부터의 좋은 곳을 주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반대의 경우도 해당된다.

그리고 너희는 그 토지의 지방(fat)을 먹을 것이다. 이는 거기서 선을 자기 것이 되게 함을 의미한다. 이는 “먹다”의 의미가 교통되는 것, 결합되는 것, 그리고 자기 것이 되게 하는 것이다로부터; 그리고 지방(fat), 또는 “살찐 것 (지방이 많음, fatness)”, 또는 “토지의”, 즉 이집트의 의미가 자연 평면에 있는 선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지방”이 천적 평면, 또는 선을 표시한다는 것은 말씀의 많은 구절들로부터 분명해진다; 이 지방은 동물로부터의 지방 뿐만 아니라 그 밖의 것들로부터의 것, 즉 버터(butter)나 기름(oil)도 포함된다. 그리고 살찌움에 가담하는 것은 무엇이든 그 정도에 따라 선으로부터 있는 것을 의미한다, 말하자면, (넓게 말해서) 젖이나 꿀, 내지 수지 등도 포함된다는 말이다.
“지방이 많음”이 천적 선, 고로 주님으로부터 있는 사랑의 표현물이었다는 것은 번제물과 (희생) 제물들로부터, 즉 이 제물들에 있는 모든 지방은 제단에서 태워졌고, 그것으로부터의 냄새는 “여호와의 쉼의 냄새”이었다로부터 분명해진다; 또한 이런 이유로 이스라엘의 아들들은 지방을 먹는 것을 금지했다. 이런 대목으로부터, 이외의 많은 대목들로부터 이스라엘족들 사이에 제정된 사항들은 천적이고 영적인 것들의 표현물이었다는 것, 고로 그것들은 거룩한 사항들을 포함했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동물의 모든 지방을 제물로 바치는 것, 그것의 타는 냄새가 여호와의 쉼의 냄새이다는 것, 또는 피처럼 지방을 먹지 못하게 하신 것에 대한 신성한 이유가 있어질리 만무했을 것이다. 만일 이런 사항들 안에는 저장된 어떤 의미가 있지 않다고 믿는다거나, 또는 단순히 지방을 여호와께서 기뻐하신 물품인가 하는 식의 막연한 생각에 자신을 생각을 멈추고 있다면, (요즈음 시대로 보면, 지방을 많이 먹으면 살쪄 건강에 해로우니까 태우라 명령하신 것은 아닌가 따위의 생각) 정녕 이런 생각의 소유자는 거룩한 말씀에 막돼먹은(gross) 해석을 들이댄 것에 불과하지 않을까? 이런저런 주님으로부터의 법령에 의해 포함된 것에 관한 지식을 얻어 보고자함은커녕 아예 개의치 않는다면, 이것이야말로 지상적, 육체적 수준일 것이다; 이는 말씀 속의 의미나 영원한 삶을 알려는 애착이 없다는 표시이다.
“지방”에 관하여 우리는 모세의 책에서 이렇게 읽는다:
너희는 내장을 덮은 모든 지방, 그리고 간 위의 대망막, 그리고 콩팥 위의 지방을 가져올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제단 위에서 태울 것이다 (출. 29:13, 22; 레. 3:4, 5, 9, 10, 14, 15; 4:8, 9, 19, 26, 31, 35; 7:3, 4).
가슴의 지방 또한 제물로 바쳐졌다 (레. 7:30, 31). 이것이 “여호와께 쉼의 냄새” 였다. 고로:
이것은 쉼의 냄새를 위하여 여호와께 태워바치는 빵이다 (레. 3:16).
성직자는 여호와의 제단 위에서 피를 뿌릴 것이다, 그리고 여호와께 쉼의 냄새를 위하여 지방을 바칠 것이다 (레. 17:6).
그리고 다른 구절에서:
수소, 그리고 양의 첫 배 새끼의 지방은 제단 위에서 태워질 것이다, 여호와께 쉼의 냄새를 위하여서 이다 (민. 18:17);
“쉼의 냄새”는 사랑의 선으로부터 감사하는 것을 의미한다.
지방이 이스라엘의 아들들에 의해 먹어지지 않았다는 것:
모든 지방은 여호와의 것으로 있게 하라. 그러므로 이것은 모든 너희의 거처에서 대대로를 위한 영원한 규례이다; 너희는 어떤 지방, 또는 어떤 피도 먹지 말라 (레. 3:16, 17).
다른 구절에서:
이스라엘의 아들들에게 이야기하여, 말하기를, 너희는 어떤 지방도, 그것이 소의 것이든, 양의 것이든, 또는 염소의 것이든 먹지 말 것이다; 여호와께 불로 만드는 제물인 짐승의 지방을 먹는 자는 자기 백성들로부터 잘리울 것이다; 너희는 어떤 피도 먹지 말 것이다 (레. 7:23, 25, 26).
태워 바침과 제물들은 이 백성과 더불어 신성한 예배의 주요한 부분을 구성했다, 그러므로 일반적 측면에서 태워바침과 제물에 의해서서는 예배가 의미되었다, 그리고 제물로 바친 것들, 또한 제물을 바치는 괴정에 의해서는 예배의 품질이 의미되었다, 그리고 지방과 지방을 태움에 의해서는 신성한 천적 평면 자체가 되었다, 이것은 주님으로부터의 사랑의 선이다. 이것이 아래 구절로부터 나타난다:
오 야곱아, 너는 나에게 은으로 달콤한 줄기(cane) 사지 않았고, 네 제물의 기름을 가지고 너는 나를 채우지 않았다; 오직 너는 나에게 네 죄들을 통하여 섬김을 만들었다 (이. 43:24)
“너는 은을 가지고 달콤한 줄기를 사지 않았다”란 너는 네 자신을 위하여 신앙의 진리들을 포획하지 않았다를 표시한다; “그리고 네 제물의 지방을 가지고 너는 나를 채우지 않았다”란 사랑의 선이 포획되지 않았다를 표시한다.
다윗서에서:
저는 당신에게 살찐 것의 태워 바침을 숫양들의 향기와 더불어 바칠 것입니다 (시. 66:15);
“살찐 것을 태워 바침”은 사랑으로부터의 예배를 표시한다. 모세의 책에서:
이렇게 말해질 경우, 즉 그들의 제물들의 지방을 먹었고, 그들의 음료 바침의 포도주를 마셨던 그들의 하느님들, 그들이 의지했던 바위는 어디 있느냐? (신. 32:37, 38);
위 말은 신들이 이런저런 것들을 가지고 먹여졌을 것이다고 상상했던 이방인들에 의해 말해졌을지도 모른다; 이들이 완전히 알아채지 못하는 것은, 제물의 지방은 예배에서 천적 평면, 또는 사랑의 선이다는 것이다; 그리고 음료 바침의 포도주는 사랑의 선으로부터 파생되는 신앙의 진리이다는 것이다. 실상 제물이 바쳐질 때, 천사들은 이런 의미들로 감명받았다; 그리고 천국이 표현과 상응을 수단으로 인간 가까이 있도록 하시기 위하여 이런 규례들이 명령된 것이다.
다윗서에서:
여호와께서는 모든 너희의 제물들을, 그리고 너희가 지방을 태워 바치는 것을 기억하실 것이다 (시. 20:3);
“지방을 태워 바침으로 만드는 것”은 예배를 선이 되게 하는 것을 표시한다. 이사야서에서:
이 산에서 여호와 체바욷께서는 모든 백성에게 기름진 것들의 잔치를, 재강(lees, 포도주의 찌끼라기 보다는 오래 저장한 포도주일 것같다. 역자주)의 잔치를, 골수가 가득한 기름진 것의 잔치를, 잘 걸러진 재강의 잔치를 만드실 것이다; 그분은 영원히 죽음을 삼키실 것이다; 그리고 주 여호비가 모든 얼굴들에서 눈물울 닦으실 것이다 (이. 25:6, 8);
“잔치”는 천국과 거기서 사랑과 선행을 통하여 천사들과 결합함을 표시한다; “살찐 것”은 사랑과 선행의 선들이다. 이사야서에서:
어찌하여 너희는 빵이 아닌 것을 위하여 은을 소비하느냐? 그리고 만족하지 못하는 것을 위하여 너는 노동을 하느냐? 진정으로 나에게 경청을 하라, 그리고 너희는 좋은 것을 먹는다, 그리고 너희의 혼이 살찌움에서 기뻐해지게 하라 (이. 55:2)
예레미야서에서:
나는 그들의 슬퍼함을 기쁨으로 바꿀 것이다; 그리고 그들을 위로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을 그들의 슬픔으로부터 즐거움으로 만들 것이다; 그리고 나는 살찌움을 가지고 성직자의 혼을 채울 것이다, 그리고 나의 백성은 내 선으로 충분히 만족할 것이다 (예. 31:13, 14);
“살쪘음(fatness)”은 선을 명백하게 표시한다, 그 이유가 “그들의 혼은 충분히 만족될 것이다”라고 말해지기 때문에서 이다; 그리고 이것이 “여호와의 선”이라 불리운다, 이는 그분으로부터 있는 천적 평면 외에 더 아니다. 다윗서에서:
내 혼은 살쪘음과 지방으로 충분히 만족할 것이다, 그리고 나의 입은 노래들의 입술로 찬양할 것이다 (시. 63:5);
위 구절의 뜻도 비슷하다. 다시:
당신은 당신의 선하심의 해에 왕관을 씌우신다, 당신의 길들에 살쪗음을 떨어뜨리신다 (시. 65:11).
다시:
사람의 아들들은 당신의 날개들의 그늘을 신뢰하신다; 그들은 당신의 집을 살찌움으로 채우셨었다; 그리고 당신은 그들을 기쁨들의 시내를 마시게 만드신다 (시. 36:7, 8).
이사야서에서:
그때 여호와께서 너의 씨에게 비를 주실 것이다, 그것을 가지고 너는 토지에 씨를 뿌릴 것이다; 그리고 토지의 소출로부터의 빵, 그리고 그것은 지방이 되고 풍부할 것이다 (이. 30:23).
계시록서에서:
살찌고 화려한 모든 것들이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너는 그것들을 더 이상 발견하지 못할 것이다 (계. 18:14);
위는 바빌론에 관해서 이다; “살찌고 화려한 모든 것들이 사라져 버렸다”는 사랑의 모든 선들과 신앙의 진리들이 그렇게 되어졌다를 표시한다. 모세의 책에서:
그분은 그를 바위로부터 꿀을 빨게, 그리고 바위의 틈새로부터 기름을 빨게 만드셨다; 목축의 버터, 그리고 양떼의 젖, 어린 양의 지방, 그리고 바산의 아들들의 숫양, 그리고 숫염소들, 밀의 콩팥의 지방과 더불어 (먹게 하시며); 그리고 포도의 피로부터 너는 순수한 포도주를 마신다 (신. 32:13, 14)
위는 고대의 영적 교회에 관하여 이야기 하고 있다. 이들의 다양한 선들이 하나하나 열거되고, “꿀,” “기름,” “버터,” “젖,” 그리고 “지방”을 수단으로 의미되고 있다.
“지방”이 선을 표시하기에, 이것은 자체로는 지방이 아닌 이런저런 것들에 인접되어 있기도 하는데, 여전히 선들을 의미한다. 고로 “지방”과 “선”은 마치 같은 것인 냥 있는 경우도 있다. 인용하는 구절에서의 “밀의 지방”이다. 마찬가지가 다윗서에도 있다:
나는 밀의 지방으로 그들을 먹일 것이다 (시. 81:16).
그리고 다른 구절에서:
그분은 네 경계를 평화로이 있게 하신다, 그리고 너희를 밀의 지방으로 충분히 만족하게 하신다 (시. 147:14).
모세의 책에서:
순수한 기름의 모든 지방, 그리고 새로운 포도주의 지방, 그리고 곡식의 모든 지방, 이것은 첫 열매들이다, 그 이유는 그것들은 여호와의 것이기 때문에 아론에게 주여졌다 (민. 18:12).

그리고 지금 명령했다, 이것을 너희는 실시하라. 이는 뜻함을 의미한다.

너희는 이집트의 토지로부터 수레들을 가져가라. 이는 기억 속의 지식들로부터의 교리물을 의미한다. 이는 “이집트의 토지”의 의미가 기억 속의 지식들이다로부터; “수레들”의 의미가 교리적인 것들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말씀에서 이집트가 취급되는 곳에서는 대체로 병거들과 말들이 등장하는 경우가 많은 편이다, 이때 “병거(chariot)들”에 의해서는 교리적인 것들이 의미되는데, 때로는 거짓 교리, 때로는 진정한 교리가 취급된다, 그리고 “말”에 의해서는 지적인 것들이 양쪽 의미에서 취급된다. “병거”가 교리적인 것들이다에 관하여는 이미 취급했다. 거의 마찬가지가 “수레(cart)”이지만 이것들에 의해서는 기억 속의 지식들로부터의 교리적인 것들이 의미된다. 기억 속의 지식들로부터의 교리적인 것들은 말씀의 글자 의미로부터 있는 교리적인 것들이다, 그리고 이것은 특히 교회가 소유한 내면의 진리들, 예를 들면, 선은 고아나 과부, 거리의 가난한 자 등등에게 먼저 베풀어져야 한다는 것, 또는 십계명의 가르침 같은 것이 해당되는데, 이런 진리들을 받아들이는 처음 시기에 있는 이들에게 유익함을 제공한다. 이런 교리적인 것들이 “이집트의 수레”에 의해 의미되고 있다. 이런 교리적인 것들은 인간이 배우는 시기에는 처음에 해당되고, 나중에는 최말단의 평면으로 쓰여진다; 그 이유가 발전이 더 내적인 것들 쪽으로 있게 되었을 때, 그것들은 최말단을 형성하기 때문이다. 더욱이 천적이고 영적인 것들은 이것들에서 실제로 종결점을 가진다. 그리고 그것들을 이용해 서기도 하고 그것 안에서 쉬기도 한다. 그 이유는 영계는 자연계를 마치 그의 발과 발바닥인 듯 가지기 때문이다. 인간은 그의 영적 삶의 측면에서 기억 속의 지식들로부터의 교리적인 것들 안에 그의 영적 생명을 가지고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말씀의 내적 의미는 말씀의 글자 의미 안에서 그것의 생명을 가지고 있다. 이런 교리적인 것들을 의미하는 “수레들”은 말씀의 몇 군데 외에서만 언급되어져 있다. 이 “수레”는 원어 그대로에 의해 언급되는데, 그 대목이 있는 곳은, 궤를 실어 운반하는 장면이 등장하는 대목에서 이다 (삼상. 6:7, 8; 삼하. 6:3), 그리고 성막이 성별될 때에서 이다 (민. 7:3). 궤가 천국을 표현했던 바, 천국은 기억 속의 지식들의 교리적인 것들 위에서 서기도 하고 그 안에서 쉬기도 한다.

너희의 아기들을 위하여, 그리고 너희의 여인들을 위하여. 이는 아직 알지 못하는 이들을 위하여를, 즉 교회의 더 내면의 것들을 위하여를 의미한다. 이는 “아기들”의 의미가 이런저런 사항들을 알지 못하는 이들이다로부터; 그리고 “여인들”의 의미가 진리에 애착함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여기서 야곱의 아들들인 “남자들(viri)”이 진리들을 의미할 때, 그들의 여인들은 진리에 애착함들을 의미한다; 한편, “남자들(viri)”이 선들을 의미할 때, 그들의 여인들은 진리들을 의미한다. 실상 이럴 때의 남자들은 남편으로 불리우는 경우가 많다. 사실상, 여기서의 여인들인 진리에 애착함들은 “남자들”인 진리들을 수단으로 하지 않으면 교회의 더 내면적인 것들을 알지 못한다. 진리들이 없는 애착들은 마치 이해력으로부터의 것도 없이 있는 의지력과 같다. 의지가 어떤 것을 알려하거나 보려는 경우, 의지는 이해력을 통하여 그것을 성취해야 한다; 그 이유가 이해력에 의지력의 시각, 또는 눈이 달려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너희 아버지를 모시고, 오라. 이는 그들의 섬김과 접근을 의미한다. 이는 “너희의 아버지를 모셔 옴”의 의미가 섬김(service)이다로부터 (아래에서 살핀다); 그리고 “오다”의 의미가 접근함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너희의 아버지를 모셔옴”에 주목해보면, 이렇다: 보다 더 낮은 것들은 내면의 것들을 섬겨야 한다. 수준 낮은 것들이 자연 평면에 있는 교회의 진리들이고, 이것이 야곱의 아들들에 의해 표현되고 있다; 한편, 내면인 것은 영적 선이고, 이것은 그들의 아버지 이스라엘에 의해 표현되고 있다. 보다 수준 낮은 것들은 섬김의 것들이 되어 있는 것 외에 더 이상을 위해 만들어져 있지를 않다, 즉 낮은 수준의 것들은 내면의 것들이 그것들 안에서 살아가고 행동하기 위해 만들어져 있는 것이기 때문, 만일 내면의 것들을 그것들에서 거두어 가버린다면, 그것들은 생명과 행동함이 없는 그릇들밖에 더 아닌 바, 실상 죽은 것이나 다름 없기 때문이다. 이것이 영과 육체의 관계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영이 물러갈 때, 육체는 즉시 죽는다. 이와 같은 상황은 내적 인간과 외적 인간의 경우도 같다, 또한 내적 인간과 주님의 경우도 마찬가지 이다; 그 이유가 내적 인간은 주님으로부터 생명을 받아가고 있기 때문, 그리고 그분의 생명의 기관밖에 더 아니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내적 인간은 그분을 사랑함과 이웃을 향한 선행에 요구되는 모든 사용을 위해 주님을 섬기려고 만들어져 있다, 하여 처음에는 자연계 안에서, 후에 영계에서 이다.

그리고 너희의 눈이 너희의 물자를 아끼려 하게 말라. 이는 도구적인 것들은 돌보아야 할 필요가 없다를 의미한다. 이는 “물자, 재료(stuff)” 또는 “그릇들”의 의미가 도구적인 것들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것들이 돌보아야할 필요는 없다는 “너희의 눈이 아끼려는 것을 보게 하지 말라”에 의해 의미되어져 있다. 일상 생활을 포함 대부분의 일에서는 필수적인 것들과 도구적인 것들이 있다. 제아무리 필수적인 것이 중요하다해도 그것을 행동으로 작업되게 하는 도구적인 것이 없다면 무용지물일 때가 많다. 도구가 만들어내는 것과 꼭 같이 있는 것이 행동이다. 예를 들면, 육체는 영의 도구이다; 외적 인간은 내적 인간의 도구이다; 기억 속의 지식은 진리의 도구이다; 그리고 진리는 선의 도구이다 (3068, 3079항) 등등이다.
말씀에서 도구적인 것들이 “그릇들(vessels)”이라 불리운다; 여기서의 경우는 “물자”이다, 그 이유는 그것들이 이주함에, 고로 집 안에 있는 것들의 이사함에 관련하여 말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필수적인 것들은 말씀에서 “것들(things)”이라 불리우고, 이것들은 도구적인 것들을 수단으로 행동한다. 고로 내면의 것들은 외면의 것들을 통하여 행동한다, 고로 내면의 것들은 상대적으로 필수적인 것에 해당한다. 도구적인 것들은 돌보아져야 할 필요가 없다는 의미란 이것들이 목적으로 간주되어서는 안되고 필수적인 것들 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 이유가 도구적인 것들이 목적으로 중요시하는 만큼 필수적인 것들은 물러나지고 때로는 사라져버리기 때문이다. 고로 만일 기억 속의 지식이 목적으로 중요시 된다면, 진리들은 돌보아지지 않는 바, 결과적으로 진리들은 흐지부지되어 급기야 어떤 진리 한조각도 지각되어질 수 없다. 더욱이 지상적, 육체적, 세상작인 것을 목적으로 가진 이들의 경우, 그들은 천국의 것들에 대해서는 하등 관심이 없는바, 그들에게서는 천국의 것들은 사라져버려 천국의 것들의 존재 조차 인정하지 않는다. 이런 사항들이 본문, “너희의 눈을 너희의 물자를 아끼려함에 있게 하지 말라”에서 의미되고 있다.
알아야 할 것인즉, “필수”와 “도구”의 상대적인(relative, 관계 있는, 친척뻘이 되는) 단어이다는 것이다; 즉 필수적인 것은 그것의 도구 또는 기관을 수단으로 즉 자체 외의 또 다른 것을 수단으로 행동하기에 그렇게 불리운다. 그러나 또 다른 필수적인 것이 앞서의 필수적인 것을 도구를 삼아 행동할 경우, 이전의 필수적인 것은 도구 수준에서 있는다는 말이다. 더욱이 창조된 우주에서는 자체적으로 필수라고 할 어떤 것도 있지 않다; 자체적으로 필수인 것은 오직 가장 높으신 분, 즉 주님 안에서만 존재할 뿐이다; 이 분만이 있음(Esse), 또는 자체적으로 필수되심(본질, 가장 중요함, Essential in itself)이신 바, 있음(esse, being)으로부터 “여호와”라 불리우신다. 따라서 이외 모든 것들은 (사실상) 도구일 뿐이다. 이로부터 분명해지는 것은, 본질적인 것만이 목적으로 중요시 되어야만 한다는 것, 도구적인 것들이 아니다는 것, 고로 주님만이 그렇게 중요시되어야 한다.

그 이유는 이집트의 온 토지의 좋은 것,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있기 때문이다. 이는 그들은 자연 평면 안에서 제일 가는 것을 가지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는 “이집트의 토지”의 의미가 자연적 마음이다로부터; “온 토지의 좋은 것”에 의해서는 제일 가는 것이 의미된다. 이 구절도 앞의 구절과 거의 같은 뜻을 담고 있다; 즉 만일 도구적인 것들이 아닌 필수적인 것들이 돌보아진다면, 그들은 도구적인 것들을 (당연히) 풍부해져 있을 것이다는 말이다. 예를 들면: 만일 진리들이 돌보아진다면, 그들은 “온 이집트의 좋은 것”인 기억 속의 지식들을 풍부히 가진다는 것. 마찬가지로 만일 선이 돌보아진다면, 그들은 진리들을 풍부히 가질 것이다. 기억 속의 지식들, 또한 진리들을 돌보아져야만함은 틀림이 없다, 그러나 인간은 목적으로서는 선만을 중요시해야 한다. 만일 눈을 목적 안에서 선 위에 두고 있다면, 그 눈의 소유자는 그 결과로 이어지는 것들을 완전히 잘 관조하게 된다, 또는 관조의 결과로 있는 이런저런 것들을 지각한다, 이 지각함은 선이 목적으로 있지 않으면 결코 가능하지 않다, 다시 말해 선이 당사자의 각각 그리고 모든 것을 보편적으로 통치하지 않으면 가능성은 한 조각도 없다는 말이다.
이런 경우는 육체와 혼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다. 인간은 반드시 자기 육체를 돌보아야 한다, 하여 자기 육체에게 자양분을, 옷입힘을 조달한다, 그리고 세상의 기쁨들을 즐기게도 한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육체를 위하여서가 아니고 혼을 위하여서, 즉 혼이 건장한 육체 안에서 상응되고 올바르게 행동하게 해주기 위하여, 고로 혼에 완전 고분고분한 기관 수준으로서 육체를 가지기 위하여야 한다. 고로 혼이 목적임에 틀림이 없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럼에도 혼 자체도 완전 목적이 아닌 중간 목적일 뿐이다, 그 이유가 인간이 돌보아야 하는 것은 자신을 위함이 아닌 양쪽 세계에서 반드시 수행하여야만 하는 쓸모 있는 자(the uses)로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이 목적으로서 (이웃의 선에게) 쓸모 있는 어떤 것을 수행할 때, 그는 목적으로서 주님을 소유한다, 그 이유가 주님은 쓸모 있음을 위하여 배열 배치함을 만들어 가시기 때문, 그리고 유용함 자체를 배치하시기 때문이다.
목적으로 가지는 것이 무엇인지 아는 자가 너무 적어 여기서 좀 더 살펴야 할 것 같다: 목적으로 가지는 것은 인간 당사자가 무엇보다 우선적으로 사랑하는 것이다. 그 이유가 인간이 사랑하는 것을 그는 목적으로 가지기 때문이다. 인간이 목적으로 가지는 것은 분명하게 식별되어지는데, 그 이유는 그것이 당사자 안에서 보편적으로(사사건건에서) 통치, 간섭하기 때문이다; 고로 당사자 자신이 자기의 목적을 의식하지 않는 때조차도, 또는 생각하지 않는 때일지라도 그것은 계속적으로 당사자 안에서 표출되고 있다, 그 이유가 그것은 내부에 자리를 잡았기 때문, 그리고 그의 내면의 생명(삶)을 만들기 때문, 고로 은근히 당사자의 각각 그리고 모든 것을 통치하고 있기 때문 이다. 예를 들면, 자기 부모를 심정으로부터 존경하는 자의 경우, 이 존경심은 그의 부모가 계신 자리에서이든, 안계신 자리에서 이든 한결 같이 각각 그리고 만사에서 존경이 표출되고 있다. 이 존경심은 그의 제스추어나 말하는 태도 같은 것에서도 감지될 정도이다. 마찬가지로 하느님을 두려워하고 경외하는 신앙인의 경우, 이 두려워함과 경외심은 그가 생각하고, 이야기 하고 행동하는 만사에서 표출된다, 그 이유는 이것이 당사자 안에 있어, 교회 건물 안에 있지 않은 때일지라도, 즉 교리와 거리가 먼 듯한 사업장에서도 비록 직접적 표출된 것은 느껴지지 않을 지라도 그 사업 까지도 통치하고 있다. 그 이유는 이것은 보편적으로 통치하기 때문, 따라서 세부적인 것도 관여한다. 인간 안에서 통치하는 것은 다른 삶에서 분명하게 지각되어진다, 그 이유가 그가 발산하는 그의 온 생명의 기운이 거기로부터 파생되기 때문이다.
이 모두로부터 분명해지는 바, 하느님은 눈 앞에서 언제나 간직되고 있어야만 한다는 것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어야 하는지 이다. 이것은 꾸준히 생각함 뿐만이 아니라, 그분을 사랑함, 또는 경외함이 보편적으로 통치하고 있어야만 한다는 것, 이런 경우야말로, 하느님이 모든 세부적 측면에서도 눈 앞에 간직하는 것이 된다. 이럴 진대, 인간이 그분을 생각하지도, 이야기하지도 않는다든가, 또는 그분에 맞서는 것을 행동하고, 그분을 불쾌하게 했다면, 보편적으로 통치하는 당사자 안에 감추여 놓인 것이 당사자의 생각, 말, 행동 자체를 까벌려지게 해주고 훈계한다.

21-23절. 그리고 이스라엘의 아들들이 그렇게 행동하였다. 그리고 (요셉은) 그들에게 바로의 입에 따라 수레를 주었다, 그리고 그들에게 길 양식을 주었다. 22 그리고 그들 모두에게 바꿔 입을 의복을 주었다. 그리고 베냐민에게 그는 은 삼백 조각을 주었다, 그리고 다섯 번 바꿔 입을 옷을 주었다. 23 그리고 그의 아버지에게는 이 방식에 의거 보냈다, 그리고 열 마리의 나귀가 이집트의 좋은 것을 운반하고, 그리고 열 마리의 암나귀가 길을 떠나는 그의 아버지를 위해 곡식과 빵과 자양분을 나르는 것이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아들들이 그렇게 행동하였다. 이는 자연 평면 안에서 영적 진리들로부터의 결과를 의미한다. 이는 “행했다”의 의미가 결과이다로부터; 그리고 이스라엘의 아들들의 표현함이 영적 진리들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자연 평면에 있는 영적 진리들이 무엇인지는 설명하고 지나가야 할 것 같다: 인간, 영, 또는 천사의 바깥 측면에 있는 신앙의 진리들은 신앙의 진리들이 아니다, 그 이유가 그것들이 어떤 주제에 적용되어, 이런저런 것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들이 인간, 영, 또는 천사에게 주제로서 적용될 때, 이때 그 진리들은 신앙의 진리들이 되어간다, 그러나 각자의 삶의 상태에 따라 차이는 있다. 처음 그 진리들을 배운 이들과 더불어서는 그것들은 기억 속의 지식들로만 있는다. 이후에 만일 어떤 이가 이 진리들에 경건하게 존경심을 가진다면, 진리들은 더 발전한다, 그리고 교회의 진리들이 된다; 그리고 그 진리들이 그 사람에게 감동을 주었을 때, 그리하여 그것들에 살고 있을 때, 이때 그 진리들은 영적 진리들이 된다; 그 이유가 영계로부터서만 있는 사랑의 선과 선행의 선이 신앙의 진리들을 채워 살아있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그 진리들로 감명되고 그 진리들에 따라 사는 것은 이 선으로부터 이기 때문이다. 신앙의 진리들이라 불리우는 진리들의 품질, 이것들에 따라 사는 자와 살지 않는 자가 나에게 보여졌다. 그것에 따라 살지 않는 자와 더불어 그것들은 흰 섬유(실) 같이 나타났다; 그리고 이 진리들을 가졌던 이들과 더불어 선은 전혀 없었다. 그것들은 부스러지기 쉽게 보였다; 그러나 이 진리들에 따라 살아간 이들과 더불어 그것들은 영으로 채워진 뇌로부터의 섬유들 같이 나타났다, 그리고 부드럽다. 고로 이 후자의 진리들은 살아있어 움직이나 전자의 경우는 꼼작 않는 죽어 있다. 이로부터 아는 바, 인간과 더불어 있는 진리들의 품질의 상태는 각자의 삶의 상태에 따라서 이다는 것이다. 야곱의 아들들에 의해 표현된 진리들은 영적이지 않은데, 그 이유는 삶에 적용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아들들로서의 그들에 의해 표현된 진리들은 영적인데, 그 이유는 삶으로 만들어져왔음으로부터 그 진리들은 사랑의 선과 선행의 선으로 채워져 왔었기 때문이다. 이 후자의 진리들이 이 대목에서 뜻하여진다, 그 이유는 취급되는 주제가 (야곱의 아들들인) 자연 평면의 진리들이 (요셉인) 내적 선과 (베냐민인) 중매자, 또한 (이스라엘인) 영적 선을 통하여 결합함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요셉은] 그들에게 바로의 입에 따라 수레를 주었다. 이는 내적 부분으로부터 그들은 자기들이 기뻐하는대로 교리적인 것들을 가졌음을 의미한다. 이는 이것들을 “주는” 자인 요셉의 표현함이 내적 선이다로부터; 그리고 “수레들”의 의미가 교리적인 것들이다로부터; 그리고 “바로의 입에 따라”의 의미가 기뻐하는대로, 즉 이스라엘의 아들들인 영적 진리들이 기뻐하는대로 이다로부터; 그 이유는 이런저런 진리들이 바로에 의해 표현되는 자연 평면에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교리적인 것들을 의미하는 수레들도 그들의 의향에 놓여져 있었기 때문이다. “기뻐하는대로”라고 말해진 이유는 “이집트의 수레들”에 의해 의미된 교리적인 것들이 말씀의 글자적 의미로부터 이기 때문이다, 이 의미는 내적 의미 없이 어떤 선이든지에 적용될 수 있다. 그 이유가 주님께서는 누군가에게 진리를 가르치실 때 공개적(노골적)으로 가르치시지 않고, 선을 통하여 참된 것을 생각하는 쪽으로 인도하신다, 그리고 당사자에게 알려지지 않는 방법에서 그분은 지각을 느끼게 하여 결과적으로 이런저런 것이 참된 것이구나 하는 것을 선택하도록 하시는데, 선택의 이유는 말씀이 그렇게 선포하기 때문, 그리고 이런 저런 것이 말씀에 일치하기 때문이다. 고로 주님께서는 각 인간이 받아들인 선에 걸맞는 진리를 내보이신다; 그리고 이것은 각 인물의 애착에 따라서, 고로 자유함에서 거행되는데, 여기서 “기뻐하는대로” 라고 말해지고 있다.

그리고 그들에게 길 양식을 주었다. 이는 한동안 선과 진리로부터 지탱함을 의미한다. 이는 “양식(provision)”의 의미가 선과 진리로부터 지탱함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리고 그들 모두에게 바꿔 입을 의복을 주었다. 이는 진리들이 선 안에서 시작함을 의미한다. 이는 “의복(garment)”들의 의미가 진리들이다로부터 (아래에서 살핀다). 고로 “바꿔 입을 의복”은 새로이 있는 진리들이다; 그리고 진리들은 그것들이 선 안에서 개시될 때 새로워진다, 그 이유는 그때 생명을 받기 때문이다. 지금 취급되는 주제는 자연적 인간이 영적 인간과, 내적 인간이 외적 인간과 결합함이다. 결합이 결과될 때, 이때 진리들은 바뀌어지고 새롭게 된다, 그 이유가 그것들은 선의 유입으로부터 생명을 받기 때문이다.
말씀에서 “의복들”에 의해 진리들이 의미된 이유는 (뇌에서는) 섬유들이 [살아 움직이는]영이듯, 혈관과 피의 관계 같이 진리들이 선을 옷입히기 때문이다. “의복들”이 진리들을 의미하는 이유는 영들, 또한 천사들이 의복을 입고 나타나기 때문, 그리고 각자에게 속하는 진리들에 따라서 옷을 입기 때문이다. 선인 것을 통하여 신앙의 진리들 안에 있는 이들은 흰 의복을 입고 나타난다, 또한 선으로부터 있는 신앙의 진리들을 안에 있는 이들은 밝은 빛을 내는 의복을 입고 있다; 그 이유가 선이 진리를 통하여 빛을 내기 때문이다, 그리고 광휘를 준다.
영과 천사들이 의복을 입고 나타나는 것을 말씀으로부터 볼 수 있다. 천사들이 보여졌던 마태복음서에서:
주님의 무덤에서 앉아 있는 천사의 나타남은 번개 같았고, 그리고 그의 의복은 눈 같이 희었다 (마. 28:3).
계시록서에서:
왕좌 위에 나는 흰 의복을 입은 이십 사 원로들이 앉은 것을 보았다 (계. 4:4).
계시록서에서:
흰 말 위에 앉으셨던 그분은 피로 물들인 의복으로 입혀져 있었다; 그리고 그분의 이름은 하느님의 말씀이라 불리었다. 천국에서 흰 말 위의 그분을 뒤따르는 그분의 군대들은 희고 깨끗한 고운 아마옷을 입었다 (계. 19:11, 13, 14);
“눈 같이 흰 의복들”, 그리고 “고운 흰 아마포(옷)”은 거룩한 진리들을 의미한다, 그 이유는 흼과 희게 빛을 냄은 거룩한 진리를 서술하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흰 것들이 빛에 가장 가깝게 접근된 색이기 때문, 그리고 주님으로부터 있는 빛은 신성한 진리이기 때문; 그러므로 주님께서 변모하셨을 때, 그분의 의복들은 빛 같이 나타났다: 즉
예수께서 변모하셨을 때, 그분의 얼굴은 태양 같이 빛나셨다, 그리고 그분의 의복들은 빛 같이 되었다 (마. 17:2).
위의 “빛”이 신성한 진리이다는 것은 대부분의 교회에 알려진 사항이다. 이 진리가 “의복”에 비교되는 구절이다: 즉
여호와께서는 빛을 의복으로 삼으시어 자신을 덮으신다 (시. 104:2).
“의복들”이 진리들이다는 것은 많은 구절들로부터 분명해지는데, 마태복음서에서:
왕이 (초대) 손님들을 보려고 들어 왔을 때, 그는 거기서 결혼 예복을 차려 입지 않은 자를 보았다; 그래서 그는 그에게 말했다, 친구여, 결혼 예복도 입지 않은 채 여기에 온 것은 어찌된 것이냐? 그러므로 그는 바깥 어둠 쪽으로 내던져졌다 (마. 22:11-13);
위 구절의 “결혼 예복을 입지 않은 자”에 대하여는 이미 살핀 바 있다. 이사야서에서:
깨어라! 깨어라! 너의 강함을 입으라, 오 시온아; 너의 장식으로 꾸민 의복을 입으라, 오 예루살렘아, 거룩함의 도성아; 그 이유는 할례받지 않은 자와 불결한 자가 너희에게 더 이상 오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52:1);
“장식으로 꾸민 의복”은 선으로부터의 진리들을 표시한다.
에스겔서에서:
나는 수를 놓는 작업으로 너를 입혔다, 그리고 너를 오소리 (가죽)으로 신겼다, 그리고 나는 고운 아마 (끈)으로 허리를 매었다, 그리고 비단으로 덮었다. 너의 의복들은 고운 아마포, 그리고 비단, 그리고 수놓는 작업으로 된 것이었다; 너는 고운 곡식가루, 꿀, 그리고 기름을 먹었다
(겔. 16:10, 13);
위는 예루살렘에 관하여서이다, 위 구절을 수단으로 태고 교회가 기한이 만료된 후 주님에 의해 세워졌던 고대 영적 교회가 뜻해졌다. 이 교회에게 수여되었던 진리들이 “의복들”에 의해 묘사되었다; “수놓는 일”은 기억 속의 진리이다, 이 지식이 순수할 경우, 마치 수놓은 작품, 레이스 (lace) 같다; “고운 아마포와 비단”은 선으로부터의 진리들이다; 그러나 천국에서, 빛 안에 있는 바, 이것들은 밝게 빛나고 투명하다.
같은 책에서:
이집트로부터의 수 놓은 일로 된 고운 아마포가 너의 돛이었다; 엘리사아섬으로부터의 푸르고 심홍색 (천)은 너의 덮개였다 (겔. 27:7);
위는 두로에 관하여서이다, 이를 수단으로 진리와 선에 관한 지식들이 표현되어졌다, 이것이 순수할 경우, “수놓는 일로 된 고운 아마포”이다; 파생되는 선, 또는 진리의 선은 “푸르고 심홍색 (천)”이다.
다윗서에서:
왕의 딸은 모든 영화로웁다; 금을 섞어 짠 것으로부터 그녀의 의복이 있다; 수놓은 (의복을) 입고 그녀는 왕에게로 데려와질 것이다 (시. 45:13, 14);
“왕의 딸”은 진리에 애착함을 표시한다; “금을 섞어 짠 것으로부터 그녀의 의복이 있다”란 안에 선이 들어 있는 진리를 표시한다; “수를 놓은 (의복)”은 가장 낮은 진리들을 표시한다. 계시록서에서:
너는 자기들의 의복들을 더럽혀 오지 않아왔던 몇 이름들을 사르디스에서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들은 흰 의복을 입고 나와 함께 걸을 것이다, 그 이유는 그들은 그럴만하기 때문이다. 극복하는 자는 흰 의복들을 입을 것이다 (계. 3:4, 5);
“의복들을 더럽히지 않음”은 진리들을 거짓들로 더럽히지 않음을 표시한다.
계시록서에서:
지켜보고, 자기 의복을 간수하는 자는 복 있다, 하여 그는 벗은 채로 걷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그의 부끄럼을 보고 있다 (계. 16:15);
위 구절의 “의복”도 진리들을 표시한다. 말씀으로부터 있는 신앙의 진리들이 이 “의복들”에 의해 적절히 의미된다. 그 근원(말씀)으로부터 이런 것들을 획득하지 않았던 자, 또는 이방인들의 경우 같이 자기의 종교적 신념으로부터 진리들 또는 진리와 유사한 것이라도 획득하지 않았던 자, 하여 자신의 생활에 그것들을 응용하지 않았던 자는 자신이 선 안에 있다 라고 상상할 지라도 그는 선 안에 있지 않다. 그 이유는 그가 말씀으로부터, 또는 자기의 종교적 확신으로부터 진리들을 가지지 않았던 바, 그는 선한 영에 의해 인도되는 만큼 악령이 추론을 수단으로 자신을 끌어가는 것도 허용했기 때문이다. 고로 그는 천사들에 의해 방어되지 못한 것이다. 이것이 위 구절의 권면인, “지켜보고 자기 의복들을 간수한 자에게 복 있다, 그는 벌거벗지 않고 걸을 것이고, 그들은 자기의 부끄럼으로 본다”에 의해 뜻해진 것이다.
스가랴서에서:
여호수아는 더럽혀진 의복들을 입고 있었다; 그렇게 그는 천사들 앞에 섰다, 그 앞에 섰던 누구가 말했다, 여호수아로부터 더러워진 의복을 제거하라. 그리고 그에게 그는 말했다, 보라 나는 너의 불법을 너로부터 건너가게 했다, 그래서 너를 의복을 바꿔 입힌다 (슥. 3:3, 4);
“더럽혀진 의복들”은 악으로부터 있는 거짓들에 의해 오염된 진리들을 표시한다; 그러므로 이 의복들이 제거되고, 다른 의복을 입을 때, 말해진다, “보라 나는 너의 불법을 너로부터 건너가게 했다.” 아마 누군가는 의복을 바꿔 입는다고 불법이 건너갈리 만무함을 알 것이다. 하여 이로부터 의복을 바꿔 입는 것이 무엇인가를 표현할 것이라는 결말도 가질 것이다. 또는 이와 유사한 다른 말씀에서의 경우, 즉 백성들을 순수해지게 하여야 할 때, 마치 시내 산 가까이 왔을 때(출. 19:14), 의복을 빨으라고 명령된 것이라든가, 그들이 불순함들로부터 깨긋해져야 할 때 (레. 11:25, 40; 14: 8, 9; 민. 8:6, 7; 19:21; 31:19-24) 에서의 경우에서도 그러하다.
그 이유가 불순한 것으로부터 깨끗해짐은 신앙의 진리들을 통하여 결과되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이 진리들이 선이 무엇인지를, 선행이 무엇인지, 이웃이 무엇인지, 신앙이 무엇인지, 주님이 계신다는 것, 천국이 있다는 것, 영원한 삶이 있다는 것을 가르치기 때문이다.
진리가 가르치지 않으면 이런저런 것들이 알려지지 않는다, 아예 이런 저런 것들이 존재하는지 조차 모를 수도 있다. 자신을 사랑함의 선과 세상을 사랑함의 선이 인간에 딸린 유일한 선이라는 것, 이 두 선으로부터 그의 생명의 기쁨이 있다는 것 외에 더 달리 자신으로부터 알 자가 누가 있을 까? 그리고 신앙의 진리가 아니면, 인간에게 적용될 수 있는 또다른 선이 있다는 것, 즉 하느님을 사랑함의 선, 이웃을 향한 선행의 선, 그리고 이 선 안에 천국의 생명이 있다는 것; 또한 이 선은 주님으로부터 천국을 통하여 흘러든다는 것, 이 흘러듦은 인간이 타인 보다 자신을 덜 사랑하는 만큼에서, 천국보다 세상을 덜 사랑하는 만큼에서 이다는 것을 누가 알 수 있을까? 이런 모두로부터 분명해지는 바, 의복들을 빰에 의해 표현된 깨끗해짐은 신앙의 진리들에 의해 결과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베냐민에게 그는 은 삼백 조각을 주었다. 이는 중매자는 선으로부터의 진리로 가득해졌음을 의미한다. 이는 베냐민의 표현함이 중매자이다로부터; 그리고 (은 조각을) “주는” 요셉의 표현함이 내적인 선이다로부터; “삼 백”의 의미함이 충만한 것이다로부터 (아래에서 살핀다); 그리고 “은”의 의미가 진리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위 모두로부터 분명한 바, “그가 베냐민에게 은 삼 백 조각을 주었다”에 의해 그는 중매자에게 선으로부터의 진리를 충분하게 주었다가 의미된다는 것이다; 베냐민이 표현하는 중매자는 천적 평면으로부터의 내적 부분으로부터 유입을 통하여 있는 내면의 진리이다. “300”이 충분한 것을 의미하는 이유는 이 숫자가 3×100에서 오기 때문이다. 그리고 “3”은 충분한 것을, “100”은 많은 것을 의미한다; 만들어내진(합성된) 숫자는 단일 숫자로부터 그것이 무엇인지가 보여진다.
“300”은 이 숫자가 등장하는 다른 구절에서도 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
노아의 방주는 길이가 300 큐빗이었다 (창. 6:15);
또한 기드온이 미디안을 대적하여 군사 삼 백 명으로 대승했는데, 사사기서에서:
자기의 입에서 자기의 손으로 (물을) 튀겨먹은 자의 숫자는 삼백 명이었다. 여호와께서 기드온에게 말하셨다, 물을 튀긴 이 삼백 명을 가지고 나는 미디안을 너의 선에 줄 것이다. 기드온은 삼 백 명을 세 부대로 나누었다, 그리고 그는 그들의 각각의 손에 나팔을 주었다, 그리고 텅빈 단지들, 그리고 단지 한가운데에 횃불을 (담았다). 그들이 삼 백개의 나팔들을 소리냈을 때, 여호와께서는 그들 모두 각각의 검이 자기 동료들을 향하게, 그리고 온 진영을 향하게 놓으셨다
(사. 7:6, 7, 16, 22);
위 구절에서도 “300”에 의해 충분한 것이, 또한 300명이 나뉜 세 부대 역시 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 각 부대의 숫자인 “100” 은 많고 충분하다를 의미한다, 결과적으로 그들이 미디안을 쳐부수는데 충분했다. 더욱이 숫자 말고도 이런 모든 것들은 표현적이다; 즉 물을 튕겨먹은 이들만 뽑아 군사가 된 것, 각각은 나팔을 가졌다는 것, 그리고 횃불을 담은 단지들 등등이다; 그리고 이런 것들이 미디안에 맞섰기 때문인데, 미디안은 진리가 아닌 진리를 표현했는데, 그런 이유는 생활의 선이 없기 때문이다. 이런 사항들의 각각은 주님의 신성한 자비로부터 다른 곳에서 살필 기회가 있을 것이다. 숫자들 또한 표현적인데, 다른 구절로서는 여호수아서에서 그들이 여리고를 공략할 때 등장하는 숫자 “7”도 있다. 즉 (성을 공략하기 앞서) 성직자가 궤 앞에서 일곱 쥬빌리(jubilee) 나팔 (일곱 양각 나팔)을 잡고, 칠일 째에는 성을 일곱 번 도는 대목 등등이다 (여. 6:4).

그리고 다섯 번 바꿔 입을 옷을 주었다. 이는 자연 평면으로부터의 많은 진리를 의미한다. 이는 “5”의 의미가 많다 이다로부터; 그리고 “바꿔 입을 의복들”의 의미가 선 안에서 개시된 진리들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것이 자연 평면으로부터 있기 때문에 “의복들”은 자연 평면을 서술하고 있다. 베냐민에 의해 표현된 중매자가 자연 평면의 진리를 가졌다고 말한 이유는 중매자는 양쪽 평면 즉 일부는 내적 부분에서, 일부는 외적 부분에서 참가하기 때문이다. 내적 부분으로 있는 것은 중매자가 선으로부터의 진리가 충분히 가지고 있음 인데, 이것은 앞 구절에서 “은 삼 백 조각”에 의해 뜻해졌다. 외적 부분으로부터 있는 것은 자연 평면으로부터 진리가 많다인데, 이것은 “다섯 번 바꿔 입을 의복들”에 의해 의미되고 있다.

그리고 그의 아버지에게 이 방식에 의거 보냈다. 이는 영적 선에 무료로 주어지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여기서 “아버지”인 이스라엘의 표현함이 영적 선이다로부터; 그리고 “보내다”의 의미가 무료로 주는 것이다로부터 알려진다. 내적인 것을 통하여 외적인 것 안으로 주님으로부터 흘러드는 모든 것은 무료로 주어지고 있다. 여기에는 영적 선 안으로 흘러드는 것조차도 포함되는데, 그 이유는 “이스라엘”인 영적 선은 자연 평면으로부터의 선이기 때문이다. 실로 주님께서는 굴종함, 숭배함, 감사함, 이외 많은 것들을 인간으로부터 요구하시고 있다. 따라서 주님께서 수여하시는 것은 그분이 요구하신 것을 받은데 따른 되갚으심이어서 사실 상 그분이 수여하시는 것은 무료가 아닌 듯하다; 그러나 주님은 그분 자신을 위하여 위의 사항 같은 것을 요구하시지 않는다. 그 이유는 신성은 인간의 굴종, 숭배, 감사함 따위로부터 영광을 가지시지 않기 때문이다. 신성 안에 자아 사랑의 어떤 것이 있으라라는 것은 상상조차 불가능하다, 즉 그분 자신이 자신을 위하여는 자아 사랑 같은 것을 (안에 내포하고) 이르는 말이다. 위의 하느님의 요구 사항들은 인간 자신을 위하여 있다. 그 이유가 인간이 굴종 안에 있을 때, 그는 주님으로부터 선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그가 장애물인 자아 사랑과 그것의 악으로부터 분리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주님은 인간 자신을 위하여 인간에게 굴종의 상태를 요구하신다; 그가 이 상태에 있을 때, 주님은 천국의 선을 가지고 흘러드실 수 있다. 이런 굴종 말고도 숭배함의 경우도 이와 매우 비슷하다. 물론 감사를 받으심(thanksgiving)의 경우도 마찬가지 맥락이다.

그리고 열 마리의 나귀가 이집트의 좋은 것을 운반하고. 이는 더 많은 섬김을 위한 [더 좋은] 기억 속의 지식들을 의미한다. 이는 “10”의 의미함이 많다 이다로부터; “나귀들”의 의미함이 기억 속의 지식들이다로부터, 여기서는 가장 낮은 기억 속의 지식들이다; 그런 이유는 나귀들이 내면의 것들을 운반하는 서비스 용역을 담당하기 때문에서이다; 그리고 “이집트의 좋은 것”의 의미가 기억 속의 지식들이다로부터, 그러나 교회에 관한 기억 속의 지식이다; 이런저런 것이 “이집트”에 적절히 의미되기 때문이다. 이런 것들이 “이집트의 좋은 것”이라고 말해진 이유는 그것들이 요셉에 의해 이스라엘에게, 즉 천적 평면으로부터의 내적 부분에 의해 영적 선에게 보내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열 마리의 암나귀가 …곡식과 빵을 나른다. 이는 더 많은 섬김과 더불은 선으로부터의 진리와 진리로부터의 선을 의미한다. 이는 “10”의 의미가 많다 이다로부터; “암나귀”의 의미함이 섬김에 속하는 것들이다로부터; “곡식(낟알)”의 의미가 진리의 선이다로부터, 그러나 여기서는 선의 진리이다, 그 이유는 “요셉”인 천적 평면으로부터의 내적 부분으로부터 이기 때문; “빵”의 의미가 이 진리의 선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곡식(grain, 낟알)”이 다른 구절들에서는 진리로부터의 선을 의미하지만, 여기서는 선으로부터의 진리(선의 진리, truth of good)를 의미한다는 것에 주목하면 이렇다: 곡식의 의미는 유입이 천적 평면의 내적 부분으로일 때와 영적 평면으로부터의 내적 부분일 때의 경우 달라진다. 전자로부터 흐르는 것은 선밖에 없다, 실로 이 선 안에 진리가 있다, 고로 이 진리 또한 선이다. 그러나 후자로부터 흐르는 것은 진리밖에 없다, 이것이 (생활에의 응용을 통해) 생명이 되어갈 때, “진리의 선”이라 불리운다. 그러므로 곡식의 의미는 때로는 선의 진리, 때로는 진리의 선인데, 여기서는 선의 진리이다, 그 이유는 요셉인 천적 평면으로부터의 내적 부분으로부터 이루어지는 유입이기 때문이다. 암나귀가 곡식과 빵을 운반하고, (숫)나귀는 이집트의 좋은 것을 운반하고 있다, 그 이유는 “숫나귀”는 진리에 관련되는 만큼에서의 섬김의 것들을 의미하고, “암나귀”는 선에 관련되는 만큼에서의 섬김의 것들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두 나귀가 서비스 용역에 각각 참가하고 있다. 그렇지 않으면 나귀를 두고 암나귀이냐, 숫나귀이냐 언급할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길을 떠나는 그의 아버지를 위한 자양분. 이는 한동안 영적 선을 위한 내면의 진리를 의미한다. 이는 “자양분(nourishment)”의 의미가 내면의 진리이다로부터, 그 이유가 이 자양분이 선의 진리와 진리의 선으로부터 출시되기 때문, 이것이 “곡식과 빵”에 의해 의미되고 있다, 더욱이 내면의 진리는 영적 선을 위한 자양분이다; 여기서 “아버지”인 이스라엘의 표현함은 영적 선이다; 그리고 “길을 위하여, 또는 길을 떠나는”의 의미가 한동안, 즉 완전 결합이 결과되기 이전, 또는 이 결합이 당도하기 이전이다.

24-28절. 그리고 그는 그의 형제들을 떠나 보냈다, 그리고 그들은 출발했다. 그리고 그는 그들에게 말했다, 길에서 다투지 말라. 25 그리고 그들은 이집트로부터 올라갔다, 그리고 가나안의 토지로 그들의 아버지 야곱에게 왔다. 26 그리고 그들은 그에게 말했다, 말하기를, 요셉은 아직 살아있습니다, 그리고 그는 이집트 온 토지의 통치자입니다. 그리고 그의 심정은 낙담하였는데, 그렇기 때문에 그는 그들을 믿지 않았다. 27 그리고 그들은 요셉이 자기들에게 말한 요셉의 모든 말들을 그에게 이야기를 했다. 그리고 그는 요셉이 자기를 모시려고 보낸 수레를 보았다, 그리고 그들의 아버지 야곱의 영은 되살아 났다. 28 그리고 이스라엘은 말했다, 흡족하다, 나의 아들 요셉이 아직 살아 있다. 나는 내가 죽기 전에 가서 그를 보리라.

그리고 그는 그의 형제들을 떠나 보냈다, 그리고 그들은 출발했다. 이는 숨겨짐 (concealment)을 의미한다. 이는 “떠나 보내다”의 의미가 자신으로부터 옮겨지는 것이다로부터, 결과적으로 이전처럼 그들과 함께 함은 더 이상 없다를 의미한다; 그리고 “가다”, 또는 “출발하다”의 의미가 살아간다, 또는 더 멀리서 살아간다, 또한 떠나다(leave)이다로부터; 고로 종합하면 숨겨지는 것이다를 의미하게 된다. 천적 평면으로부터의 내적 부분으로부터 옮겨짐, 또는 그것으로부터 숨겨짐이 지금 취급되는 이유는 그것들의 이어지는 내적 의미로부터 분명해진다.
영들의 삶, 또는 천국들에서의 천사들의 생활상이 어떤지를 알지 못하고 있는 이들이라면, 진리의 숨겨짐, 또는 선의 숨겨짐이 지금 왜 취급되는지 알지 못하고, 그들(이스라엘의 아들들)이 방금 전까지도 진리와 선의 빛 안에 있었었다는 사실도 알지 못한다. 천국에서 영들과 천사들은 그들의 아침, 정오, 저녁, 박명(황혼, 해뜨기와 해질 무렵), 다시 아침 등등의 상태가 있다. 주님이 현존하시고 명백한 행복으로 그들에게 복 주실 때가 그들의 아침이다: 이때 그들은 선을 지각함의 상태에 있다. 그들이 진리들의 빛 안에 있을 때가 그들의 정오이다; 그리고 이때의 경우, 주님은 그들에게서 좀 더 멀리 계신 듯, 감추여 계신 듯 나타난다. 천국의 모든 이들은 이런 상태의 계속적인 교차를 겪어가며 통과해가는데, 이외 달리 그들이 보다 더 발전된 완전 쪽으로 전진해가는 방법은 없다. 그 이유가 그들은 이런 교차됨에서 대비되는 상태도 경험하기 때문이다. 사실 이런 정반대의 상태, 즉 선이 아닌 것, 진리가 아닌 것을 아는 과정에서 행복하지 않은 것의 상태를 겪으며 선인 것, 진리인 것의 행복한 상태를 진지하게 경험하여 보다 더 굳건한 지각을 획득하기 때문이다.
놀라운 것은, 이 사람의 상태와 저 사람의 상태가 완전 같은 상태에 있게 되는 경우가 영원히 없다는 것, 또한 이 영과 천사가 통과하는 상태를 저 영과 천사가 통과하는 경우도 없다는 것이다. 그런 이유는 각자의 선과 진리가 각기 수준이 다르기 때문이다; 이 사람의 얼굴과 저 사람의 얼굴이 같지 않은 것과 같다 (마치 수 백 명이 같은 영화 장면을 보고 있다해도 그들의 얼굴 표정이 완전 같지 않은 것과 비슷할는지 모른다 역자주). 그럼에도 이런 (무한한) 다양함으로부터 주님께서는 하나를 만드신다. 일반적 규범(canon)인 것은, 어떤 품질을 가지는 모두 각각의 하나는 하모니의 일치함을 수단으로 그들 모두가 하나로서 나타나는 이런 저런 만장일치 쪽으로 환원되는 다양한 것들로부터 출시된다는 것이다. 고로 천국들에서는 만들어낸 통일(unity), 또는 합일(union)은 사랑과 선행을 통하여 결과되어진다.
“요셉이 자기 형제들을 떠나 보내고 그들이 출발함”에 의해 의미된 숨겨짐이 말씀에서 “저녁”이라 불려지고, 주님이 현존하심을 천사들이 지각하지 못할 때에 숨겨짐이 발생한다; 그 이유가 천국에서는 주님을 지각함이 계속적으로 있기 때문이다. 그들이 비 지각함의 상태에 있을 때, 그들은 선에 감동되지 않는다, 그들은 진리를 이전 같이 보지 못한다; 이것이 그들을 곤란하게 하지만, 곧 이어 새벽이 오고, 아침을 맞는다.

그리고 그는 그들에게 말했다, 길에서 다투지 말라. 이는 그들이 고요함 안에 있어야 하리라고 주어진 지각을 의미한다. 이는 “그들에게 말하다”의 의미가 “요셉”인 내적 부분에 의하여 주어진 지각이다로부터; 그리고 “길에서 다투지 말라”의 의미는 고요함(평온함)에 있는 것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 이유가 누군가와 다툼은 비 고요함이기 때문, 이것은 수준 낮은 마음의 소동(혼란)이기 때문이다. 방금 앞 문단에서 살핀 다른 삶에서 다양해지는 상태들은 거기 있는 이들의 선과 진리의 지각함에 따라서이다. 고로 주님의 현존을 그들이 지각함에 따라서 이다. 이 지각함에 따라 그들은 고요함도 가진다; 그 이유가 주님의 현존을 지각함에 있는 이들은 자기에게 닥치는 각각 그리고 모든 것들을 그들의 선 쪽으로 구부리고, 악들은 자기들에게 도달하지 않게 하는 지각 안에 있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그들은 고요함 안에 있다. 주님 안에서 이런 신뢰, 또는 신앙 없이 누구도 평화의 고요함 안에 와질 수 없다, 고로 환희 안에 있는 행복(천국의 기쁨)을 향유할 수 없다, 그 이유가 이런 더없는 행복(bliss)은 평화의 고요 안에 거주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은 이집트로부터 올라갔다. 이는 교회의 기억 속의 지식들로부터 물러남을 의미한다. 이는 “거기로부터 올라감”의 의미가 물러남이다로부터 (“이집트로부터 가나안의 토지 쪽으로는 올라감이라 말해지고, ”가나안의 토지로부터 이집트 쪽으로는 내려감이라고 말씀에서 언급된다, 이에 대하여는 이미 설명한 바 있다. 여기서는 “올라감”이고 이는 출발함이 의미된다.); 그리고 “이집트”의 의미로부터, 이에 대한 적절한 의미는 교회의 기억 속의 지식들이다. 이 기억 속의 지식들이 여기서 의미되는 이유는 그들이 요셉과 더불어 이집트에 있을 때 교회의 기억 속의 지식 안에 있었기 때문이다. 선에 속한 것, 진리에 속한 것들로부터 옮겨짐, 고로 교회로부터 있는 것들로부터 옮겨짐이 여기서부터 이 장의 마지막 절까지에서 취급된다. 이 옮겨짐이 앞 문단에서의 숨겨짐을, 여기서는 물러남을 뜻하고 있다. 말씀에서는 이 상태가 저녁에 의해 의미되어진다.인간이 이 상태에 있을 때, 그들은 천국적이고 영적인 것들로부터 물러나 있다, 그리고 천국적이고 영적이지 않은 이런저런 것들에 동의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숨겨짐은 주님께서 자신을 숨겨서, 또는 물러나셔서 발생된 것이 아니고, 인간 자신들에 의해 그렇게 되는 것이다; 즉 그렇게 붙드는 것이 자신들에게 적합하지가 않아서 더 이상 붙들고 싶지가 않아서 이다; 그러므로 그들이 자기 자신 쪽으로 떠났을 때 이런 상태에 도착한다; 그들이 천국에 속한 것으로부터 물러나 있는 만큼, 선은 그들에게 비 지각되고, 진리는 희미한 상태에 있다. 이상 살핀 바로부터 분명해지는 바, 주님은 자신을 숨기시지 않는다는 것, 그러나 인간, 영, 천사가 자신을 숨긴다는 것이다.

그리고 가나안의 토지로 그들의 아버지 야곱에게 왔다. 이는 영적 선이 아닌 자연적 선이 있던 거주지를 의미한다. 이는“가나안의 토지”의 의미가 교회이다로부터, 고로 교회를 표현한 이들의 거주지이다로부터, 즉, 알려진 바, 이들은 야곱의 후손들이 교회를 표현했다; 그리고 야곱의 표현함이 자연적 선이다로부터, 그러나 영적 선은 아닌데, 그 이유는 영적 선은 이스라엘에 의해 표현되었기 때문이다. 당신이 자연적 선이라고 말하든지, 교회의 외적 부분이라고 말하든지 이는 같은 말이다; 또는 영적 선과 교회의 내적 부분의 경우도 그러하다; 그 이유가 자연적 선이 교회의 외적 부분을 구성하고, 영적 선이 교회의 내적 부분을 구성하기 때문이다.
천국의 빛 안에 있는 것이 영적 수준이라 불리우는 이유는 이 빛 안에 있는 것은 선에 애착함과 진리를 지각함 안에 있기 때문이고, 이 빛은 주님으로부터 있다; 그러므로 영적 선과 진리 안에 있는 이들은 교회의 내적 부분 안에 있고, 그들의 머리 측면은 천국 안쪽에 있다. 그러나 세상의 빛 안에 있는 것은 자연적 수준이라 불리우고, 이 빛 안에 있는 것은 선에 애착함과 그 자체 안쪽에서 진리를 지각함이 없고, 그 자체 바깥쪽으로부터 지각함을 가진다; 그 이유가 천국의 빛이 흘러들어 빙둘러 있는 것을 계발하기 때문, 고로 안쪽의 계발이 아닌 바깥쪽의 계발이다; 따라서 선이 선으로서 알게, 진리를 진리로서 알게 하는 원인은 그것들이 그렇게 말해졌기 때문이지, 이것이 그러하다고 지각하여 아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머리는 천국 안에 있지 않다, 그러나 그들의 머리들은 바깥으로부터 계발된다. 야곱이 지금 “이스라엘”이 아닌 “야곱”이라 불린 이유는 지금 그들이 외적 부분의 것들 안에 있기 때문이다. 이는 위의 설명으로부터 분명해진다.

그리고 그들은 그에게 말했다, 말하기를. 이는 유입과 주목함을 의미한다. 이는 “말하다(tell)”의 의미가 교통과 결합이다로부터, 고로 유입 또한 의미한다, 그 이유가 말해진 것은 생각 안으로 흘러들기 때문이다; 그리고 “말하다(say)”의 의미가 말씀의 역사 부분에서의 경우, 지각함이다로부터 알려진다, 또한 주목함도 의미한다.

요셉은 아직 살아있습니다. 이는 내적 부분이 거절되지는 않았음을 의미한다. 이는 “요셉”의 표현함이 내적 선이다로부터; 그리고 “살아 있다”의 의미가 아직 존재한다, 고로 거절되지 않았다 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살아 있다”가 거절되지 않았다인 이유는 요셉에 의해 표현된 내적 부분이 애당초에는 야곱의 아들들에 의해 거절되어졌고, 그들의 아버지는 악들과 거짓들에 의해 멸해지고 말았다고 믿었었기 때문이다; 고로 지금 “살아 있다”에 의해서는 그것이 그렇지 않다가 의미된다.

그리고 그는 이집트 온 토지의 통치자입니다. 이는 자연적인 마음이 그것의 권위 아래 있음을 의미한다. 이는 “통치자”의 의미가 그것의 권위 아래 있다 이다로부터 분명해진다; 그리고 “이집트의 토지”의 의미는 자연적 마음이다.

그리고 그의 심정은 낙담하였는데, 그렇기 때문에 그는 그들을 믿지 않았다. 이는 자연 평면 속에 생명이 결여되어 있음 그리고 그로부터 이해력에도 생명의 결핍이 있음을 의미한다. 이는 “심정이 낙담함”의 의미가 생명의 결핍이다로부터; 그리고 이것이 야곱에 관련해 말해졌기 때문에, 그에 의해서는 자연적 선이 표현되기 때문에, 이것은 자연 평면의 생명의 결핍이 의미된다; 그리고 “믿지 않다”의 의미는 이해력의 결핍이다. 본문에서 그렇기 때문에 (thence)라고 말해진 이유는 의지로부터 있는 생명이 앞서 있고, 그 뒤를 이해력의 생명이 잇기 때문이다. 이렇게 진행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의지 안에만 생명이 있고, 이해력의 생명은 의지로부터서만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은 요셉이 자기들에게 말한 요셉의 모든 말들을 그에게 이야기를 했다. 이는 영적 평면의 천적 부분으로부터 유입이 있다를 의미한다. 이는 “이야기를 하다”가 유입이 있다를 의미함으로부터; 그리고 요셉의 표현함이 영적 평면의 천적 부분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리고 그는 요셉이 자기를 모시려고 보낸 수레들을 보았다. 이는 설득되도록 거기로부터 파생된 교리적인 것들을 의미한다. 이는 “수레들”의 의미가 교리적인 것들이다로부터; “요셉이 보낸”의 의미가 천적 평면으로부터의 내적 부분으로부터 이다; “그를 모시려고”의 의미가 설득되도록 이다; 그 이유가 그가 그를 보려고 자기에게로 그를 모시는 것은 설득하는 것을 표시한다. 그가 수레를 보고서 설득되는 것이 이제 이어지는 말, 즉 “그들의 아버지 야곱의 영이 되살아났다; 그리고 이스라엘이 말했다, 이것으로 충분하다; 요셉 나의 아들이 아직 살아 있다”로부터 분명해진다

그리고 그들의 아버지 야곱의 영은 되살아 났다. 이는 새로운 생명을 의미한다. 이는 “영이 되살아남”의 의미가 새로운 생명이다로부터; 야곱의 표현함이 자연적 선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고로 “야곱의 영이 되살아났다”에 의해 자연적 선쪽으로 새로운 생명이 있다가 의미된다. 생명은 영적인 것이 내적 부분으로부터 자연 평면에 있는 이런저런 것들 안으로 흘러들어 내부로부터 행동할 때 새로이 된다. 그것 때문에 자연 평적은 영적 으로 되어 이스라엘에 의해 표현된 영적 선에 인접한다, 이런 이유로 지금 야곱은 “이스라엘”이라 불리우는 바, 이렇게 말해진다, 즉 “야곱의 영은 되살아났다, 그리고 이스라엘이 말했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말했다. 이는 이제 영적 선이다를 의미한다. 이는 이스라엘의 표현함이 영적 선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말씀의 내적 의미에 친숙하지 않은 자는 왜 야곱이 때로는 “야곱”으로, 때로는 “이스라엘”로 불리우는지를 아는 것이 가능하지 않다; 이 장 이 구절에서 조차 같은 인물을 두고 동시에 야곱이라 하고, 이스라엘이라 말하기까지 한다. 그러므로 거기에는 말씀의 내적 의미가 있음이 분명해진다. 여기서 말해진다, “야곱의 영이 되살아났다, 그리고 이스라엘이 말했다.” 이제 다른 구절도 찾아 읽어보자:
베냐민, 요셉의 형제를 야곱은 그의 형제들과 더불어 보내지 않았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아들들은 (양식을 사러) 왔던 이들의 한가운데에서 왔다 (창. 43:4, 5).
이스라엘은 여행했다; 하느님이 밤의 환상들 안에서 이스라엘에게 말하셨다, 야곱아, 야곱아; 그리고 그는 말했다, 보십시오 제가 있습니다 (창. 46:1, 2).
야곱은 브엘세바로부터 일어났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아들들은 그들의 아버지 야곱을 모셨다 (창. 46:5).
이집트로 온 야곱의 집의 모든 혼들은 칠십 명이었다; 요셉은 그의 병거에 견인줄을 매었다, 그리고 이스라엘을 맞으러 올라갔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요셉에게 말했다 (창. 46:27, 29, 30).
이스라엘은 이집트의 토지에서, 고센의 토지에서 거주했다; 야곱은 이집트의 토지에서 17년을 살았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날들은 죽는 쪽으로 가까이 당겨졌다 (창. 47:27-29).
그리고 누군가가 야곱에게 말했다, 말하기를, 보라 당신의 아들 요셉이 당신에게로 오고 있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자신에게 힘을 내어 침대 위에 앉았다; 그리고 야곱은 요셉에게 말했다
(창. 48: 2, 3).
야곱은 그의 아들들을 불렀다, 그리고 말했다, 너희 자신들을 집합하라, 그리고 들어라, 너희 야곱의 아들들이여; 너희 아버지 이스라엘에게 귀기울여라 (창. 49:1, 2).
그들의 성냄은 격렬한 바 저주받아야 하고, 그들의 분노는 단단한 바 저주받아야 한다. 나는 그들을 야곱 안에서 나누어 낼 것이고 이스라엘 안에서 그들을 흩트리라 (창. 49:7).
그의 손의 무기들은 강력한 야곱의 손들에 의해 힘세어지게 만들어졌다. 거기로부터 목자, 이스라엘 의 돌이 있다 (창. 49:24).
이외에도 예언서들에서도 자주 등장한다.

흡족하다, 나의 아들 요셉이 아직 살아 있다. 이는 내적인 것이 멸해지지 아니했음에 따른 환희를 의미한다. 이는 “요셉”의 표현함이 천적 평면으로부터의 내적 부분이다로부터; 그리고 “살아 있다”의 의미가 멸해지지 않고 있었다, 거절되지 않고 있었다 이다로부터; 이로부터의 감정은 환희(joy, 벅찬 영적 기쁨)일 것은 분명하다.

나는 내가 죽기 전에 가서 그를 보리라. 이는 새로운 것에 앞서 결합을 갈망함을 의미한다. 이는 “가서 보다”의 의미가 결합되는 것이다로부터 분명해진다. “보다”가 결합하는 것인 이유는 영계에서는 내면의 시각이 결합하기 때문이다. 내면의 시각은 생각이다, 그리고 공동체에서 많은 이들이 하나로서 행동할 때, 마치 합창단 같은 행위가 있을 때, 이 사람이 생각하는 것을 저 사람도 생각한다; 고로 생각이 결합한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이 사람이 저 사람을 생각할 때, 저 사람이 눈 앞에 나타난다; 이렇게 해서도 생각은 결합한다. 이로부터 “가서 보다”의 의미는 결합인 것이다. 결합을 갈망한다는 것은 방금 앞 문단의 벅찬 기쁨에 곧 이어지는 표현이다. 그리고 “내가 죽기 전에”의 의미가 새로운 것이 있기 이전이다, 즉 표현들의 새로운 것에 앞서 라는 말이다. 그 이유가 말씀에서 표현들은 이런 식으로 계속 이어지기 때문, 즉 이 사람이 죽을 때, 다음 사람이 또 다른 표현함을 잇는다; 고로 새로운 것인 셈이다; 즉 아브라함이 죽었을 때, 이삭에 의해 표현이 계승되었다; 그리고 그가 죽었을 때, 야곱에 의해 표현은 계승되었다; 그리고 그가 죽었을 때, 그의 후손에 의해 표현은 계승되었다. 이것이 여기서 말한 새로운 것이다.

창세기 44장 해석

창세기 제 44 장

1, 2절. 그리고 그는 그의 집을 다스리는 자에게 명령하여, 말하기를, 사람들의 자루에 그들이 운반할 수 있을 만큼 많이 양식으로 채워라. 그리고 각자의 은은 각자의 자루 아구에 놓아라. 2 그리고 내잔, 곧 내 은잔을 가장 어린 자의 자루 아구에 놓고, 그리고 그의 곡식에 은을 놓아라. 그리하여 그는 요셉이 말한 말에 따라 그대로 했다.

그리고 그는 집을 다스리는 그에게 명령하여, 말하기를. 이는 자신으로부터의 유입을 의미한다. 이는 “명령함”이 유입(influx)이다로부터; 그리고 “그의 집을 다스리는 그”의 의미가 교통된 것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것이 요셉이 표현하는 자신으로부터, 즉 내적 측면의 천적 평면으로부터 이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명령하는”것이 유입인 이유는 천국에서는 아무도 명령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생각함이 교통되어진다, 그리고 교통된 다른 쪽은 거기에 일치하게 기꺼이 행동한다. 어떤 것이 행하여지기를 뜻하는 바램과 더불어 생각의 교통함이 유입이고, 받는 자의 쪽은 지각함이다, 그러므로 본문의 “명령함”은 지각함 또한 의미된다.
더욱이 천국에서 그들은 생각함, 뿐만 아니라 함께 이야기도 나눈다, 그러나 지혜 속의 것들이다; 그럼에도 그들의 대화 안에 서로에게 명령하는 암시는 없다, 하여 주인이 되려하는 바램은 아무에게도 없고, 상대를 종으로 간주하는 일도 없다; 그들은 다른 이를 섬기고 봉사하기를 바라고 있다. 이로부터 천국들을 통치하는 형태가 무엇인지가 분명해진다. 이에 관하여 주님께서 마태복음서에서 이렇게 묘사해두셨다:
너희 사이에 그렇게 있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너희 사이에서 큰 자가 되려거든 너희의 섬 기는 자(minster)이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첫째인 자는 누구든지 너희의 종이어야 한다 (마. 20:26, 27);
그리고 다시:
너희 사이에 큰 자인 자는 너희의 섬기는 자 일 것이다. 자신을 드높이는 자는 낮춰질 것 이다, 그리고 자신을 낮추는 자는 드높여질 것이다 (마. 23:11, 12).
심정으로부터 자기 이웃을 사랑하는 자가 위의 주님의 말씀을 실행하고 있다. 또는 이기적 목적 없이 타인에게 선을 행함에서 진정 기쁨과 복됨을 향유하는 자가 위의 주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자이다; 즉 이웃을 향하여 선행을 가지는 이들이 진정으로 자신을 낮춘 자들이다.

사람들의 자루를 양식으로 채우라. 이는 진리로부터의 선을 가지고 자연 평면 안으로를 의미한다. 이는 “자루(bag)”의 의미가 자연 평면의 외면이다로부터; 그리고 “양식(food)”의 의미가 진리로부터의 선이다로부터 알게 되는 바, 그가 “이 집을 다스리는 자에게 사람들의 자루를 양식으로 채우라고 명령함”에 의해 자신으로부터 진리의 선 안으로 유입됨이 의미된다. “진리로부터의 선 (진리의 선, good of truth)”, 그리고 “선으로부터의 진리 (선의 진리, truth of good)”라는 표현을 자주 사용하는 편인 바, 간단히 나마 짚어보아야 할 것 가다. 천적 (평면의) 교회가 영적 (평면의) 교회와 비교하여 무엇인지를 모르면 위 두 용어의 이해도 풀리지 않는다. 선으로부터의 진리는 천적 (평면의) 교회로부터, 그리고 진리로부터의 선은 영적 (평면의) 교회로부터 있다. 천적 (평면의) 교회 속에 있는 이들과 더불어, 선은 의지 부분에 심어져 있다. 실로 의지 부분은 선이 있어야 할 (본래의) 자리이다, 그리고 이 선으로부터, 즉 주님으로부터 이 선을 통하여 이 교회인들은 진리에 대한 지각을 가졌다; 그러므로 그들은 선으로부터 진리를 가진다. 그러나 영적 (평면의) 교회 속에 있는 이들과 더불어, 선은 진리를 수단으로 지적 부분에 심어진다, 그 이유는 모든 진리가 지적 부분 속에 있기 때문, 그래서 그들은 진리를 통하여 선쪽으로 인도된다; 이들에게서는 진리를 행하는 것이 선이 되어 있다; 그러므로 그들은 진리로부터 선을 가진다. 이 후자가 영적 (평면의) 교회 속에 있는 이들이라 단언된다; 비록 선으로부터 진리가 이 영적 (평면의) 교회인에게 적용하는 것은 적절하지는 않지만, 그들을 두고도 이 용어를 사용하기도 한다. 이에 관해서는 다른 곳에서 더 설명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그들이 운반할 수 있을 만큼 많이. 이는 여유있을 정도로 충분함을 의미한다. 이에 대한 추가 설명은 필요치 않을 것이다.

그리고 각자의 은을 각자의 자루 아구에 놓으라. 이는 자연 평면의 외면에서 진리와 새로이 함께를 의미한다. 이는 “은”의 의미가 진리이다로부터; 그리고 “자루의 아구”의 의미가 자연 평면의 외면의 문지방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새로이 진리라고 말한 이유는 은이 이전에 그들의 자루 아구에 놓인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창. 42:25, 27, 28, 35).

그리고 내 잔, 곧 은잔을 가장 어린 자의 자루 아구에 놓으라. 이는 중매자에게 수여된 내면의 진리를 의미한다. 이는 “은 잔”의 의미가 선행의 선으로부터 있는 신앙의 진리이다로부터, 그리고 이 잔이 “내 잔”, 즉 요셉의 것이라 불리우는 바, 이것은 내면의 진리이다; 중매자로서의 베냐민을 서술할 경우에서, “자루 아구”는 중매자가 자연 평면에 인접되는 곳이 의미된다; 그 이유는 중매자가 중매자이기 위하여는 외적, 내적 측면 양쪽과 교통하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자연 평면의 외면이다; 그리고 여기서 “가장 어린 자”인 베냐민의 표현함이 중매자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상 살핀 바에서 요셉이 자기 은잔을 베냐민의 자루에 놓음에 의해 의미된 것이 분명해졌을 것이다.

그의 곡식(값)인 은. 이는 선으로부터의 진리를 의미한다. 이는 “은”의 의미가 진리이다로부터; 그리고 “곡식(grain)”의 의미가 선이다로부터; 그 이유가 내적인 천적 부분(internal celestial)으로부터 진행하는 내면의 진리, 또는 영적 진리, 이것이 “요셉”이고, 선으로부터의 진리이다.

그리고 그는 요셉이 말한 말에 따라 했다. 이는 그것이 그와 같이 행해졌음을 의미한다. 이는 별도의 설명이 필요 없을 것 같다.

3-5절. 아침이 빛을 자라게 했다. 그리고 사람들은 떠나갔다, 그들과 나귀들도. 4 그들이 도성을 나와 얼마 가지 않아서 였다, 그리고 요셉은 자기 집을 다스리는 그에게 말했다, 사람들을 뒤쫒아 가라, 그리고 네가 그들을 따라 잡을 때 그들에게 말하라, 어찌하여 너희는 선을 악으로 되돌리느냐? 5 이것은 내 주인이 마실 때, 그리고 그분이 점을 칠 때 쓰는 것 아니냐? 너희는 이렇게 하여 악을 행했다.

아침이 빛을 자라게 했다. 이는 그 때 당시 계발되는 상태를 의미한다. 이는 “아침”과 “빛이 자라남”의 의미가 계발되는 상태 이다로부터 알려진다. “아침”은 최고 의미에서 주님이시다; 그리고 그러므로 “아침이 빛이 자라게 했다”라고 말해질 때, 이것은 계발되는 상태를 의미한다, 그 이유가 모든 계발됨은 주님으로부터 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떠나갔다, 그들과 나귀들도. 이는 자연적 인간의 외적 측면이 그것의 진리와 기억 속의 지식과 함께 어느 정도 제거되었다를 의미한다. 이는 여기서 “사람들”이라 말해지는 야곱의 아들들의 표현함이 자연 평면에 있는 교회의 진리들이다로부터, 그러므로 외적 인간이다로부터; “나귀들”의 의미함이 기억 속의 지식들이다로부터; 그리고 “떠나가다 그리고 멀리 있는 것은 아닌 것, 즉 얼마 가지 않은 것”은 자연적 인간의 외적 측면이 그것의 진리들과 기억 속의 지식들과 더불어 얼마 정도 이동되었다가 의미된다. 즉 요셉에 의해 표현되는 내적 부분인 천적 평면(internal celestial)으로부터 얼마 정도 이동되었다가 의미된다.
“나귀들”에 주목해보자, 나귀들은 두 용도로, 즉 사람을 태우거나 짐을 운반하거나 할 때 사용된다는 것은 누구나 익히 아는 바이다; 사사(judge, 판관)들, 왕들, 그리고 그들의 아들들은 암나귀나 숫나귀, 또한 노새를 탓다, 이때 이 짐승들은 합리적 평면을, 또한 자연 평면을, 진리와 선을 의미했다; 이런 이유로 재판관과 왕으로서 주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을 때, 그분은 망아지가 딸린 나귀를 타셨다; 그 이유는 이 모습이 재판관과 왕권의 지위에 대한 표(mark, sign)이기 때문이다. 한편, 여기서와 같이 나귀가 짐을 운반하는 용도에 충당될 때, 그것들은 기억 속의 지식들(memory-knowledges, 또는 factual knowledges, 사실에 입각한 지식들)을 의미했다. 이런 지식들은 짐을 실어 운반하는 나귀와 (쓰임새에서) 다를 바 없다. 인간의 내면의 것들을 놓고 이것은 기억 속에 있는 지식들 그 이상은 아니다하여 그 이상의 생각의 발전이 없는 자는 인간의 모든 것은 이 지식들에 존재한다고 상상하고, 이 지식들이 인간 안에서 최하위 수준의 지식들이다는 것, 아마도 이런 지식 대부분은 육체가 죽을 때 함께 벗어야하는 지식인 줄을 알아채지 못하고 있다; 거기에서는 단지 진리와 선에 애착함과 더불은 (애착된) 진리와 선 만이 남는다; 기억 속의 지식은 진리와 선에게 혼에 대한 몸의 관계 같이 있다. 인간이 세상에 있는 한, 그는 진리와 선, 또는 거짓과 악을 기억 속의 지식 안에 가진다, 그 이유는 이 지식들이 그것들을 함유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지식들은 내면의 것들을 운반하는 바, 짐들을 운반하는 나귀들에 의해 의미되고 있다.

그들이 도성을 나와 얼마 가지 않아서 였다. 이는 이동된 양을 의미한다. 이는 앞에서 살핀 바 있다.

그리고 요셉은 자기 집을 다스리는 그에게 말했다. 이는 지각과 유입을 새로이 함을 의미한다. 이는 “말하다(say)”가 말씀의 역사물들에서의 의미는 지각하는 것이다로부터; 이 지각은 듣고 들은 것을 수용하는 자에 관련되는 지각인 바, 말하는 자에 관련한 유입이 된다; 그 이유가 이 둘은 서로 상호적으로 대답하기 때문이다.

사람들 뒤를 따라 올라가라. 이는 지금 그들을 자체쪽으로 인접하게 할 것임을 의미한다. 이는 “사람들 뒤를 따라가서 그들을 따라 잡는다”가 인접해지는 것이다로부터; 그 이유가 “뒤따르는 것”이 인접하고저 하는 의향을 표시하기 때문이고, “따라 잡다”는 인접함이기 때문이다. 이 장의 나머지는 야곱의 아들들의 귀환이고, 다음 장은 요셉이 자신의 정체를 드러냄, 이를 수단으로 자연 평면의 진리들이 영적 평면의 천적 부분과 결합함이 의미되고 있다. 그러므로 “사람들을 뒤따름”에 의해서는 그들을 자체에 인접되게 하는 것이 의미된다.

그리고 네가 그들을 따라 잡을 때. 이는 중간 정도로 인접함을 의미한다. 이는 그들이 요셉의 집을 다스리는 자에 의해 따라 잡힐 때의 의미가 중간 정도의 인접함이다가 분명해진다.

그들에게 말하라, 어찌하여 너희는 선을 위하여 악으로 되돌리느냐? 이는 떠나간 이유를 의미한다. 이는 “선을 위하여 악을 되돌리는 것”이 떠나감(돌아섬, return away)을 의미한다로부터, 그 이유는 악이 선에게 할 수 있는 것은 떠나감밖에 더 없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악 안에 있는 자는 선에 대해, 즉 선행과 신앙으로부터 있는 영적 선에 코방귀를 뀌기 때문이다. “악”이 떠나감이다는 것은 다른 삶에 있는 악한 자로부터 분명해진다; 그 이유가 그들은 천국의 빛에서는 발이 위쪽으로, 머리는 아래쪽으로 하여 있기 때문(3641항), 고로 완전히 거꾸로하여 있는 바, 돌아섬과 같기 때문이다.

이것은 내 주인이 마실 때 쓰는 것 아니냐. 이는 그들과 더불어 있는 내면의 진리는 천적 평면으로부터 받은 것이었음을 의미한다. 이는 “잔(cup)”의 의미로부터, 즉 “이것은 내 주인이 마실 때 쓰는 것”에 의해 뜻해진 것이 내면의 진리이다로부터; 그리고 여기서 “나의 주인”인 요셉의 표현함이 영적 평면의 천적 부분이다로부터, 여기서는 천적 평면인데, 그 이유는 내면의 진리가 취급되고, 이 진리는 영적인 것이고, 천적 평면으로부터 진행되기 때문이다. 이것을 받는 것이 요셉의 명령에 의해 베냐민의 자루 아구에 놓여진 잔에 의해 의미되고 있다.
그들은 마치 자기들이 잔을 가져간 것처럼 고소당하고 있다. 고소당하는 이유는 잔이 거기에 있어왔다는 사실(fact)만 가지고서 인데, 이유는 내적 의미로부터 분명해진다. 즉: 주님에 의해 수여되는(bestow, 또는 주님께서 나누어 주신, impart) 진리는 처음에는 그것이 주님으로부터 수여되지 않은 듯한 상태에서(주님이 나누어 주신 것이 아닌 듯한 상태에서) 받아진다; 그 이유가 거듭나기 이전에서의 인간은 자신이 진리를 포획했다고 상상하기 때문이다. 그가 이렇게 상상하는 동안, 그는 영적 도둑이 되어 있는 셈이다. 진리와 선이 자신의 것이라고, 이것은 자신의 정의와 공적의 결과물이라고 하는 한, 그는 그분의 것인 진리와 선을 자신에게로 갈취한 것이다. 이 상황이 표현되기 위하여 요셉에 의해 명령된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도둑으로 몰린 이유는 결합이 결과되기 위함이었다. 인간이 거듭나기 이전일 동안은 그는 자신의 선함, 정의, 공적이 자신의 잘난 탓이라고 믿는 것을 완전히 탈피하지 못한 영적 도둑으로 있는다는 말이다. 실로 그는 입술로는 신앙의 모든 진리와 선행의 선이 주님으로부터 이다는 것을 교리로부터 말하지만, 그가 심정으로부터 인정하는 때인, 신앙이 선 안에 심어질 때까지 실로 그는 자기가 말한 그 교리를 믿지 않고 있다.
교리로부터의 고백은 신앙으로부터의 고백과 아주 다르다. 선 안에 있지 않은 누구라해도 그는 교리로부터 고백할 수 있다, 그 이유가 이들에게 있어서 교리는 지식 수준이기 때문이다; 누구이든, 그가 영적 선 안에, 즉 이웃을 향한 선행 안에 있지 않으면, 그는 신앙으로부터 고백할 수 없다. 결합이 야기되기 위하여 야곱의 아들들이 도둑으로 고소당하고 있다는 것은 이것을 빌미로 요셉이 그들을 되돌아오게 하고, 한동안 자기들이 했던 것에 대해 되돌아 보는 한편, 그 사이에 요셉이 자신의 정체를 밝혀 자신을 그들에게 결합되게 한다.

이것으로 그가 점을 친다. 이는 천적 평면은 감추인 것들을 그것의 신성으로부터 안다를 의미한다. “점을 친다”란 감추인 것들을 아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이 신성으로부터 이다인 이유는 “요셉”인 영적 평면의 천적 부분이 신성으로부터의 진리를, 또는 신성이 안에 있는 진리를 표현하기 때문이다.

너희는 이렇게 하여 악을 행했다. 이는 그것이 자신들의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신성한 법에 반대된다를 의미한다. 이는 “도둑”의 의미가, 즉 여기서 “그들이 했던 악”에 의해 뜻해진 것의 의미가 주님에 속한 것을 자기 것이라고 요구하는 것, 요셉의 은잔에 의해 의미된 진리가 자기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것이 신성한 법에 반대되는 것은 분명하다. 인간이 주님으로부터 인 것을 자신의 것이라고, 즉 진리와 선이 자신의 것이라고 주장해서는 안되는 이유는 그가 진리 안에 있기 위하여서 이다; 그가 진리들 안에 있는 만큼에서, 그는 천사들이 있는 천국의 빛 안에 있는다; 그가 이 빛 안에 있는 만큼에서, 그는 총명과 지혜 안에 있다, 그리고 그가 총명과 지혜 안에 있는 만큼에서 그는 행복함 안에 있다이것이 인간이 심정의 신앙으로부터 모든 진리와 선은 자신으로부터 있지 않고 주님으로부터 있다를 인정해야 하는 이유이다. 이것이 당연한 진리임을 인간은 인정해야 한다.

6-10절. 그리고 그가 그들을 따라 잡자, 그는 그들에게 이런 말들을 이야기했다. 7 그리고 그들은 그에게 말했다, 어찌하여 내 주인께서는 이 말들에 따라 이야기를 하십니까? 당신의 종들은 이런 말과는 거리가 멈니다. 8 보시다시피, 우리는 우리 자루의 아구에서 발견했던 은도 우리는 가나안의 토지로부터 당신에게 되가지고 왔습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우리가 당신의 주인 집에서 은, 금을 훔치겠습니까? 9 그것이 발견되는 자는 누구이든지 그는 죽을 것이며, 우리 또한 내 주인에게 종이 되어 있을 것입니다. 10 그리고 그는 말했다, 이제 네 말에 따라 그렇게 하겠다. 그것이 발견되는 자는 나에게 종이 될 것이고, 너희는 죄없으리라.

그리고 그는 그들을 따라 잡았다. 이는 인접함이 중간 정도에 와 있다를 의미한다. 이는 이미 설명했다.

그리고 그는 그들에게 이런 말들을(요셉이 지시했던 것을) 이야기했다. 이는 이런 것이 유입됨을 의미한다. 이는 “이야기 하다(speak)”가 유입이다로부터; 그리고 “말들”의 의미가 어떤 것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어떤 것”, 그리고 “말들”은 원어에서는 동일한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그리고 그들은 그에게 말했다. 이는 지각을 의미한다. 이는 말씀의 역사적 부분에서 “말하다”가 지각하다임에서 알려진다.

어찌하여 내 주인은 이 말들에 따라 (이런 식으로) 이야기를 하십니까? 이는 이와 같은 것이 왜 흘러드는지 반영해봄을 의미한다. 이는 “이야기를 하다”가 흘러듦이다로부터; 그리고 “이 말들에 따라”의 의미는 이런 것, 또는 저런 것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어찌하여”라는 단어 안에 반영해봄이 포함되었는데, 이는 자신에게 묻는 단어로 사용되고 있다.

이런 말들에 따라 행동하는 것은 당신의 종들에게는 거리가 멈니다. 이는 그것이 의지로부터가 있지 않다를 의미한다. 즉 진리를 자신들의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에 대해서이다. 이는 “행동하다”의 의미가 의지쪽으로 이다로부터; 그 이유가 모든 행위는 의지로부터 있기 때문이다. 행위 자체는 자연 평면이고, 의지는 행위의 영적 근원이다. 고로 “당신의 종과는 거리가 멀다”는 의지로부터 있지 않다가 의미된다.

보라 우리가 우리의 자루의 아구에서 발견한 은. 이는 진리가 무료로 수여되었을 때를 의미한다. 이는 “은”의 의미가 진리이다로부터; 그리고 “우리가 발견했다”의 의미가 무료로 수여되었다 이다로부터; 그리고 “자루의 아구”의 의미가 자연 평면의 외면의 문지방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우리는 그것을 가나안의 토지로부터 되가지고 왔습니다. 이는 종교의 원리로부터 복종시켰음을 의미한다. 이는 “되가져오다”의 의미가 복종하게 하다 이다로부터; 그리고 “가나안의 토지”의 의미가 종교적인 것이다로부터 알려진다. “가나안의 토지”는 많은 것들을 포함한다, 그 이유는 그 토지는 아주 많은 것들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주님의 왕국, 교회, 결과적으로 교인까지도 포함한다, 그 이유는 한 개인도 교회이기 때문이다. 이런 사항들을 의미하는 바, 교회의 천적 평면, 즉 사랑의 선도; 또한 교회의 영적 평면인 신앙의 진리도 의미한다; 그러므로 교회 속에 있는 종교적 원리까지도 의미한다. 고로 누구도 진리와 선이 자신의 것이라고 주장해서는 안된다 라는 것도 교회의 종교적 원리 속에 있다. 이상 살핀 바만 가지고도 동일한 표현이 여러 가지 사항들을 포함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한 복합체 안에서 몇 개의 사항들을 포함하는 경우, 이것은 시리즈에 따라 있는 내적 의미를 포함한다.

그런데 어떻게 우리가 당신 주인의 집에서 은이나 금을 훔치겠습니까? 이는 어찌 우리가 신성한 천적 평면으로부터인 진리와 선을 우리 것이라고 주장할까를 의미한다. 이는 “훔치다(steal)”의 의미가 주님에 속하는 영적 의미를 자신의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로부터; “은”의 의미가 진리이다로부터; 그리고 “금”의 의미가 선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 44장 전체를 망나해 영적 도둑, 즉 주님으로부터 있는 진리와 선을 자신으로부터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 취급되고 있다. 사실 이 주제는 아주 큰 주제이어서, 사후 이런 인간은 천국 안으로 입장되어질 수 없게 된다. 다시 말해 진리와 선은 주님 만으로부터 있고, 자신으로부터서 있는 악밖에 없다는 것을 심정에서 인정할 때까지 (영들의 세계에 머무를지는 모르나)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 이것이 그러하다는 사실은 사후 인간에게 많은 경험을 수단으로 보여진다. 천국에 있는 천사들은 모든 선과 진리는 주님으로부터 있다는 것을 명백하게 지각하고 있다; 더욱이 주님에 의해 자신들은 악으로부터 보류(억제) 되고, 동시에 선 안에, 마찬가지로 진리 안에 간직된다는 것, 이 역사는 강력한 힘에 의해서 이다는 것을 확실히 지각하고 있다.
이에 대하여 내가 지각하도록 많은 햇수 동안 허락해주셨다. 하여 내가 나 자신에 남아 있는 만큼 나는 악들에 침수되었고, 내가 주님을 수단으로 악들이 억제되는 만큼에서 나는 악으로부터 선 안으로 들리워졌다. 진리와 선을 자기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천국을 통치하는 극히 보편적 진리에 반대된다, 뿐만 아니라 모든 구원은 자비 속에 있다는 것, 자신으로부터서는 지옥 안에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 거기로부터 주님을 수단으로 끌어져 나오는 것도 자비로부터 이다는 것을 인정함에도 반대 된다. 인간은 자신으로부터서는 악밖에 없고 모든 선은 주님으로부터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그는 진정 굴종함(부끄러이 여김, humiliation) 안에 있어질 수 없고, 결과적으로 주님의 자비를 받을 수도 없다 (그 이유는 주님의 자비는 굴종이나 겸허함 안으로만 흘러들기 때문이다). 이 인정함이 결여될 경우, 그는 (선에 관련한 ) 공적을 자신의 (잘난) 탓으로 돌리고, 급기야 자신이 행하는 것은 무엇이든 정의로서 간주하는 지경에 이른다; 그 이유가 주님으로부터 인 모든 진리와 선을 자신의 것이라 주장하는 것이 자신을 정의롭다로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많은 악들의 근원이다; 그 이유가 이때 그는 자기가 이웃에 행하는 모든 것 안에서 자아를 중시하고 있고, 그가 이것을 행동할 때, 실상 그는 자신을 다른 이들 위에서 사랑하고, 이때 그는 다른 이들을 내리깔본다, 물론 입이 아닌 심정에서 그렇다는 말이다. (심정에서 그렇게 있는 것은 결국은 얼굴 표정이나 눈빛 같은 것에서, 챤스만 닿으면 입으로도 까벌리는 경우도 발생하는 것 같다 역자주)

그것이 발견되는 당신의 종은 누구든지 죽을 것입니다. 이는 그렇게 행한 자는 지옥에 떨어진다를 의미한다. 이는 “죽는다”가 지옥에 떨어진다를 의미함으로부터; 그 이유가 영적 죽음은 지옥에 떨어짐밖에 더 아니기 때문이다. 이는 방금 살핀 것 같이, 즉 주님으로부터 있는 모든 진리와 선을 자신의 것이라고 주장하는 자는 천국 안에 있을 수 없다는 것, 그러나 천국 밖에 있어야 한다는 것; 그리고 천국 바깥에 있는 자는 지옥에 떨어질 일만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법칙은 진리로부터의 심판이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심판이 선으로부터 만들어지는 경우도 있다, 즉 당사자의 무지함, 또는 단순함으로부터 진리와 선이 자기 것이라 주장한 자는 지옥에 떨어지지는 않는다, 그러나 다른 삶에서 황폐함(vastation)이라는 방법에 의해 자유한 가운데 놓여 있는다. 더욱이 모든 이는 자신으로부터 참되고 선인 것을 실행해야 하나, 이것의 주인은 주님이심을 믿고 있어야 한다. 이것이 그렇다 하여질 때, 그의 총명과 신앙이 발전하면서, 그는 진리와 선의 근원이 자아이다는 오류를 벗어 던지고, 결국 자신이 행하는 선, 자신이 생각하는 진리의 모든 자신의 노력 까지도 주님으로부터 있었고, 지금도 있다는 것을 심정에서 인정한다. 그러므로 요셉에 의해 보내진 자는 비록 실로 그가 (차후) 확증할 지라도, 현재로서는 잔이 발견되는 자는 죽어야 한다는 판결함을 거절한다; 즉 그가 말한다, “이제 너희 말들에 따라 그렇게 하겠다; 잔이 발견되는 자는 나에게 종으로 있고, 너희는 죄가 없을 것이다.” 이는 보다 관대한 판결문이다. 그러나 무지와 단순성으로부터가 아니고, 신앙에서, 삶에서 확증한 원리로부터 인 경우는 다르다; 허지만 그들이 선인 것을 행한 이상, 주님께서는 자비로부터 거기에도 무지와 단순함이 어느 정도는 있다고 인정해주신다.

그리고 우리 역시 내 주에게 종이 될 것입니다. 이는 그들은 그들 자신으로부터는 자유함 없이 영원히 연계되어 있을 것이다를 의미한다. 이는 “우리 역시”의 의미가 연계됨이다로부터; 그리고 “종이다”의 의미가 자신으로부터의 자유함 없이 있는다 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 이유가 종인 자는 주인 자신과 주인의 자유함에 의존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자아로부터는 자유함 없이 있는다는 것에 대하여는 주님의 신성한 자비로부터 이어지는 페이지들에서 말해질 것이다.

그리고 그는 말했다, 지금 네 말들에 따라. 이는 참으로 그것은 공정으로부터 그렇게 있을 것임을 의미한다. 이는 앞서 설명한 곳으로부터 분명해진다. 이 짓을 한 자는 죽어야 함이 공정함으로부터 임이 “지금 너희 말들에 따라”에 의미되어 있다; 그러나 관대한 판결이 이어진다.

그와 같이 하리라. 이는 관대한 판결을 의미한다. 이 판결이 뒤이어진다.

그것이 발견되는 자는 누구이든지 나에게 종이 된다. 이는 그렇게 있는 자는 그 자신의 자유로움 없이 영원히 있을 것임을 의미한다. 이는 “종”의 의미가 자신 스스로부터의 자유함이 없다 이다로부터 알게 되는데, 여기서의 경우는 이렇다: 요셉의 명령에 의해 베냐민과 더불어 있는 은잔은 내면의 진리를 의미한다. 내면의 진리에 있는 자는 모든 진리와 선이 주님으로부터 이다는 것, 또한 자신으로부터의 모든 자유, 또는 인간 자신으로부터의 자유는 지옥적이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 이유가 그가 자신의 자유로부터 생각하고 행동할 때, 그는 악밖에 더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모든 악은 지옥으로부터 흐르는 바, 그는 악마의 종인 것이다. 또한 이런 상태인 자는 이 자유함에서 기쁨을 느낀다, 그 이유는 자신이 자닌 악과, 자신이 태어난 악과 일치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자신으로부터의 자유는 반드시 중단되어야 하고, 그 대신 천국의 자유를 옷입어야 한다. 이 자유는 선인 것을 뜻하고 그것을 행함에 있다. 인간이 이 자유를 받을 때, 그는 주님의 종이다, 이때 그는 자유함 자체 안에 있고, 그가 전에 지녔던 자유함, 그때 당시 그에게 자유 같이 나타났던 자유에 속박되어 있지 않다.

그리고 너희는 죄없다. 이는 나머지는 그들 자신의 처분대로 맡겨질 터인데. 그 이유는 과오를 나누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는 종에 관련하여 “죄없다, 비난할 점이 없다”는 것은 그들 자신의 처분(아량)에 맡겨도 된다는 것이 의미된다; 즉 과오를 부담질 일 없기 때문인데 이어진다. 이방인들 사이에서 오래된 관습 중의 하나는, 누군가가 죄를 지었을 때, 그의 동료들을 위법자로, 심지어는 그의 모든 집안을 위법자로 간주해 처벌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법은 지옥으로부터 파생된 것들이다; 거기서는 모든 동료들이 함께 악들에 가담하기 때문이다. 거기의 사회들은 선에 맞서 하나로서 행동하므로 이럴 때는 한 형제인 듯 하나, 저들 끼리에서는 서로를 향해 증오함만 증폭시키고 있다. 그들은 강도들의 하나됨, 우정관계이다. 그러므로 지옥의 동료들은 악을 위해 함께 연계되는 바, 그들이 악을 행할 때, 그들 모두가 처벌된다. 그러나 세상에서 지옥에서 같이 행하는 것은 신성한 질서에 반대 된다; 그 이유가 세상에서는 상대의 내면이 드러나 있지 않기 때문이다; 하여 상대를 파악하지 못하여, 세심한 주의력의 결핖 같은 것으로 선한 자가 악한 자에 끼여있는 형국도 많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세상의 인간들을 위한 신성의 법은 자신의 불법에서 처벌됨이다. 즉:
아버지들 (선조)이 아들들을 위하여 죽지 않을 것이고, 아들들이 아버지들을 위해 죽지 않 을 것이다; 모두 각각은 자신의 죄에서 죽임을 당한다 (신. 24:16).
에스겔서에서:
죄지은 혼이 죽을 것이다, 아버지가 아들의 불법을 낳지 않는다. 정의로운 자의 정의가 그 자 위에, 사악한 자의 사악함은 그 자 위에 있을 것이다 (겔. 18:20).
이런 구절들로부터 분명해지는 것은, 본문의 야곱의 아들들의 경우이다: 즉 “그것이 당신의 종들의 누구에게서 발견되든 그는 죽을 것이고, 우리 역시 종으로 내 주에게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셉에 의해 보내진 자는 자기 판단을 바꾸어 말했다, 즉 “발견되는 자는 나의 종이 되고, 너희에게는 죄 없다”; 그러나 여기에 유다가 요셉에게 더 말을 보탠다, “보라 우리는 나의 주에게 종들이다, 우리와 잔이 발견된 자 또한.” 요셉이 말했다, “내가 이것을 행함은 나로부터 멀다; 잔이 발견된 자만이 나의 종이다; 그리고 너희는 너희 아버지에게 평화로이 가라 (16, 17절).

11, 12절. 그리고 그들은 황급해졌다, 그리고 그들은 각자 자기 자루를 땅에 내려놓고, 제각기 자기 자루를 열었다. 12 그리고 그는 뒤졌다. 그는 가장 나이 많은 자부터 시작했다. 그리고 가장 어린 자 까지 뒤졌다. 그리고 잔이 베냐민의 자루에서 발견되었다.

그리고 그들은 황급해졌다. 이는 성마름을 의미한다. 각 개인이 자신을 분명히 할 경우, “황급함”은 성마름을 의미하게 된다.

그리고 각자는 자기 자루를 땅에 내려 놓았다. 이는 그들은 자연 평면에 있었던 것을 감각의 것들쪽으로 내려가게 가져다 놓았다를 의미한다. 이는 “내려가게 만드는 것”이 이어지는 것과 관련지을 때, 가져다 놓다가 의미된다; “자루”의 의미가 자연 평면의 외면이다로부터; 그리고 “땅”의 의미가, 여기서 그들로 “땅에 내려 놓았다”라고 말해질 때의 경우, 최말단, 가장 낮은 것, 고로 감각의 것이다로부터, 그 이유가 감각의 것들은 세상 바깥쪽으로 문지방 자체에 있기 때문이다. 감각의 것들쪽으로 가져다 놓는 것은 어떤 것이 그러한지를 통째로 확증하는 것이다; 그 이유가 주제가 감각의 증거쪽으로 가져와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제 각각 자기 자루를 열었다. 이는 그들은 이런 식으로 이 주제를 자신에게 명백히 할 수 있을런지 모른다를 의미한다. 이는 “자루를 염”이 자연 평면에 있는 것을 여는 것, 고로 주제를 명백히 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는 뒤졌다. 이는 탐사를 의미한다. 설명은 필요 없다.

그는 가장 나이 많은 자에서 시작하여 가장 어린 자에까지 뒤졌다. 이는 질서를 의미한다. 앞에서 살폈다 (5704항).

그리고 잔이 베냐민의 자루에서 발견되었다. 이는 천적 평면으로부터 온 내면의 진리가 중매자와 함께 있었음을 의미한다. 이는 “잔”의 의미가 내면의 진리이다로부터; 그리고 베냐민의 표현함이 중매자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천적 평면으로의 이런저런 진리가 중매자와 더불어 있다는 것은 요셉의 명령에 의해 베냐민의 자루에 놓여진 잔에 의해 의미되는데 이미 살핀 바 있다.

13-17절. 그리고 그들은 자기들 옷을 찢었다, 그리고 각자의 것들을 자기 나귀에 싣고 성으로 돌아 왔다. 14 그리고 유다와 그의 형제들은 요셉의 집으로 들어 갔다, 그리고 그는 아직 거기에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그 앞에서 (얼굴을) 땅으로 떨구었다. 15 그리고 요셉은 그들에게 말했다, 너희들이 한 짓은 대체 어찌된 것이냐? 너희는 내가 점을 하는 자인 줄을 몰랐느냐? 16 그리고 유다가 말했다, 우리가 내 주께 무슨 말을 하리이까? 우리가 무엇을 말할 수 있으리이까? 그리고 어떻게 우리가 정당하리이까? 하느님께서 당신의 종의 불법을 들추어내셨습니다. 보라 우리는 내 주에게 우리 모두 종입니다. 그리고 잔이 발견된 자도 그러합니다. 17 그리고 그는 말했다, 이런 행동은 나로부터는 거리가 멀고, 잔이 발견된 자 만이 나에게 종이 되리라. 그리고 너희들은 너희 아버지에게 평화로이 올라 가라.

그리고 그들은 자기들 옷을 찢었다. 이는 슬퍼함을 의미한다. 이는 “옷을 찢다”의 의미가 진리가 잃어짐 때문에 슬퍼함이다로부터; 여기서는 그들이 자신들의 것이라고 더 이상 주장하지 못하는 진리들 때문에 있는 슬픔인데, 그 이유는 자기들이 요셉의 집을 다스리는 자의 면전에서(9절), 또한 요셉의 면전에서(16절) 종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조건으로 내세운 까닭 때문이다. 이로 인해 그들은 자신들로부터의 자유함 없이, 고로 자신들로부터의 진리들 없이 있을 것이 의미되었다; 자신들로부터의 진리들 때문에 슬퍼함에 주목하면, 이것은 그들이 “자기 옷들을 찢음과 종으로 자신들을 만듦을 제공함”에 의해 의미되고 있는 바, 여기서 알려지는 것은 거듭나지는 이들과 더불어 반전(돌아섬, turn about, 거꾸로 움직임, reversal)이 거행된다는 것이다. 즉 그들은 진리를 수단으로 선쪽으로 인도되고, 후에 선으로부터 진리쪽으로 인도되는 경우이다. 이런 반전이 거행될 때, 또는 상태가 바뀔 때, 이전 것의 거꾸로가 되어 아침이 있다; 그 이유가 그들이 (진리를 수단으로 할 경우) 시험 안으로 놓여지고, 자신의 것이 약해지고, 부셔지고, 그 사이에 선이 은근히 심어지고, 선과 더불어 새로운 의지가, 그리고 새 의지와 더불어 새 자유함이, 고로 새로운 자신이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요셉의 형제들이 요셉에게로 자포자기한 채로 돌아오고, 자신들을 종으로 제공하고, 한동안 그들이 이런 상태에 있는데, 즉 시험 이후 일 때까지 요셉이 자신의 정체를 밝히지 않음을 수단으로 함이 표현되어져 있다; 시험이 정복되었을 때, 주님께서 위로하심으로 그들 위에서 빛을 비추이신다.

그리고 각자의 것을 나귀에 싣고, 성으로 돌아 왔다. 이는 진리들이 감각 속의 것으로부터 기억 속의 지식들에로 되돌려졌음을 의미한다. 이는 “나귀”가 기억 속의 지식이다로부터; “나귀에 싣고”에 의해서는 감각의 것들로부터 되돌려 가져옴이 뜻해지는데, 그 이유는 “자기들의 자루를 땅에 내려 놓다”에 의해 자연 평면에 있는 것을 감각 속의 것쪽으로 내려놓음이 의미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것을 들어올림이 여기서 “싣다”에 의해 뜻해진다; 그리고 “도성”의 의미가 교리적인 진리이다로부터 알려진다.
진리를 감각 속의 것들로부터 기억 속의 지식들 안으로 되돌려 가져다 놓는 것을 살펴보자: 감각 속의 것들과 기억 속의 것들, 그리고 진리들은 다르다. 그것들은 서로가 교대로 이어받아 간다(연속적이다); 그 이유가 기억 속의 지식들은 감각 속의 것들로부터 출시된다; 진리들은 기억 속의 지식들로부터 출시된다; 그 이유가 감각들에 의해 들어간 것들은 기억 안에 쌓여진다, 그리고 그것들로부터 인간은 기억 속의 지식들이다는 것에 대해 결론을 내린다, 또는 그것들로부터 그가 배운 기억 속의 지식을 지각한다; 기억 속의 지식으로부터 그는 진리들이다는 것에 대해 결론을 내린다, 또는 그가 배운 진리들을 그것으로부터 지각한다. 모든 이는 이런 발달 과정을 반복하면서 어린 시절로부터 성장해 간다. 그가 아이일 때, 그는 감각으로부터의 것들로부터 어떤 것들을 생각하고 납득한다; 그가 나이 들어감에 따라, 그는 기억 속의 지식들로부터 어떤 것들을 생각하고 납득한다; 후에는 진리들부터 이다. 이런 연속적인 교차 과정이 나이와 더불어 진행되면서 그의 판단력도 성장한다.
이상 간단한 설명만 가지고도 감각으로부터의 것들, 기억 속의 지식들, 진리들이 어떻게 구분되는지를 알았을 것이다. 인간은 때로는 감각으로부터의 것들 안에 있는 만큼에서 그때는 그 만큼 그는 감각들로부터 만나는 것들만을 생각하게 된다. 그가 기억 속의 지식들 안에 있는 경우, 그때는 그는 그만큼 그의 마음을 감각들로부터 승강되게 하여 내면적으로 생각한다. 그가 기억 속의 지식들로부터 결론을 가진 진리들 안에 있는 경우, 그때는 그는 더 내면적으로 생각하고 있다. 아마 각자가 자신을 곰곰이 되살피면, 이런 과정이 자신 안에서 늘 거행됨을 눈치 챈다. 또한 인간은 진리들을 기억 속의 지식 안으로 내려와 가져다 놓고, 이것들 안에서 진리들을 보기도 한다; 그리고 그는 기억 속의 지식들을 감각 속의 것들 안으로 내려다 놓을 수 있다, 그리고 감각들 안에서 그 지식들을 찬찬히 들여다 볼 수 있다, 뿐만 아니라 둘 간에 담화도 한다. 이상 살핀 바로부터 자연 평면에 있는 것을 감각 속의 것쪽으로 내려 놓는 것, 그리고 감각 속의 것들로부터 진리들을 기억 속의 지식들 안으로 되가져다 놓는 것에 대해 분명해졌을 것이다.

그리고 유다와 그의 형제들은 들어갔다. 이는 교회의 진리들과 더불은 교회의 선을 의미한다. 이는 유다의 표현함이 교회의 선이다로부터; 그리고 그의 형제들의 표현함은 자연 평면에 있는 진리들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유다가 들어가서 요셉과 이야기를 한 것이지, 첫 출생인 르우벤이 말하지 않은 것, 더욱이 다른 형제들이 아닌 이유는 유다가 표현하는 것이 선이기 때문에서 이다; 신성으로부터 있는 천적 평면과 교통하는 것은 선이지 진리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진리는 선을 통하여서가 아니면 신성과 교통을 가지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유다가 이야기를 한 것이다.

요셉의 집. 이는 내적 부분과 교통함을 의미한다. 이는 “집에 들어감”의 의미가 교통함이다로부터; 그리고 요셉의 표현함이 내적 부분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집에 들어감”이 교통함을 표시하는 이유는 “집”에 의해 인간 자신이 의미되기 때문이다, 고로 인간을 만드는 것, 즉 진리와 선과 더불은 인간의 마음이 의미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집에 들어감”이 말해질 때, 이는 그의 마음 안으로 들어감을 뜻하는 바, 교통함을 가진다는 말이 된다.

그리고 그는 아직 거기에 있었다. 이는 예견을 의미한다. 이는 그들이 되돌아오리라는 것이 요셉에 의해 예견되었다는 사실로부터 이다; 그래서 그는 집에 머물렀고, 자신을 베냐민에게 밝히 알리려고, 결과적으로는 다른 이들에게까지도 자신을 밝히기 위함이 되었다; 그리고 내적 의미에서 결합이 자연 평면의 진리들과 신성의 천적 평면과 결과된다. 여기서 “예견”이라 말한 이유는 이 의미에서 “요셉”인 주님이 최고 의미에서 취급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은 요셉 앞에서 땅에 엎드렸다. 이는 굴종을 의미한다. 이는 설명 없이 알 것이다.

그리고 요셉이 그들에게 말했다. 이는 그때 그들이 지각함을 의미한다. 이는 “말하다”가 지각하다를 의미함으로부터; 이것이 그들이 지각함인 이유는 이것이 요셉에 의해 말해지고, 요셉에 의해 내적 부분이 표현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적 부분으로부터, 즉 주님으로부터 내적 부분을 통하여 모든 지각함이 오기 때문이다. 지각의 근원은 이외에는 없다, 감각으로부터가 아니다. 그런데 마치 감각으로부터인 듯하게 나타난다, 마치 지각함이 외적 부분으로부터 유입에 의해 오는 듯하게 나타난다는 말이다; 그러나 이것은 오류이다, 그 이유가 내적 부분이 외적 부분을 통하여 느껴지는 것일 뿐이기 때문이다. 육체에 놓여진 감각들은 세상에 있는 것들을 감각할 수 있기 위해 내적 부분을 돕는 기관 또는 도구일 뿐이다; 그러므로 내적 부분이 외적 부분 안으로 흘러들어 외적 부분이 느끼도록 하고, 식별하여 보다 더 완전해지려는 쪽을 향한다. 그러나 거꾸로는 아니다.

대체 너희들은 어떤 짓을 했느냐? 이는 그들의 것이 아닌 것을 자기들 것이라고 우기는 것은 매우 큰 악이다를 의미한다. 이는 그들이 고발당한 원인인 도둑의 의미가 주님에 속하는 진리와 선을 자기들의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것은 내적 의미에서 뜻해지는 “짓, deed, 행위”이다.

너희는 내가 점을 치는 줄을 알지 못하느냐? 이는 이것은 미래와 감추인 것을 보시는 그분으로부터 감추여 있을 수 없음을 의미한다. 이는 “점을 치다, divining”의 의미가 그분의 신성으로부터 감추인 것들을 아는 것이다로부터 알려진다 (5748항), 또한 미래의 것들을 아신다, 그 이유는 여기서 “요셉”인 주님이 최고 의미에서 취급되기 때문이다, 감추여 있을 수 없다는 것은 단어 자체로부터도 분명하다.

그리고 유다는 말했다. 이는 자연 평면 안에서 교회의 선에 주어진 지각을 의미한다. 이는 “말하다”의 의미가 말씀의 역사 부분에서는 지각함이다로부터; 이것이 “주어진다”인 이유는 모든 지각함은 내적 부분으로부터 오기 때문, 즉 주님으로부터 내적 부분을 통하여 흐르기 때문이다; 그리고 유다의 표현함이 교회의 선이다로부터 알려진다. 유다가 표현하는 것에 주목해보면, 그는 최고 의미에서 신성한 사랑 측면에 관련되는 주님을, 내적 의미에서는 그분의 천적 (평면의) 왕국을, 고로 이 평면에 있는 사랑의 천적인 (수준의) 것을; 여기서는 자연 평면의 교회에 있는 사랑으로부터의 선을 표현한다. 그 이유는 지금의 경우는 내적 부분과 결합되어지려는 자연 평면에 있는 것들을 표현하는 이들 사이에 있기 때문이다.

내 주께 무슨 할 말이 있으리이까? 무슨 말을 하리이까? 이는 혼란해짐을 의미한다. 이는 이 말들의 표현의 느낌으로부터 알게 된다.

그리고 우리가 어찌 정당하리이까? 이는 우리는 죄지었음을 의미한다. 이는 “어찌 정당해지겠는가?”의 의미가 (즉 그들은 정당해질 수 없다)가 그들은 죄지었다 이다로부터; 그 이유는 정당해질 수 없는 자는 죄지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자신들이 죄지었다고 인정하는 것은 그들이 요셉에게 종으로 자신들을 제공함으로부터 분명해진다.

하느님께서 당신의 종들의 불법을 찾아내셨다. 이는 고백을 의미한다. 즉 그들이 잘못했음에 대한 고백을 의미한다. 이 잘못이란 그들이 요셉을 판 것에 대한 잘못인데, 내적 의미에서 그들이 진리와 선으로부터 자신들을 멀리 하게 만들었다는 것, 그렇기 때문에 자신들을 내적 부분으로부터 분리되게 했다는 것에 대한 고백이다.

보라 우리는 내 주에게 종들입니다. 이는 그들은 그들 자신의 자유로부터 영원히 박탈되어지게 됨을 의미한다. 이는 “종들”의 의미가 그들의 자신으로부터의 자유함 없이 있다 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들 자신으로부터의 자유함이 박탈되어진다는 것에 대하여는 이미 말한 적이 있으나, 이는 대단히 중요한 주제인 바, 다시 살피는 기회를 가지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외적 인간이 있고, 내적 인간이 있다; 외적 인간을 통하여 내적 인간이 행동한다; 그 이유가 외적 인간은 내적 인간의 도구 내지 기관이기 때문이다. 이럴진대, 외적 인간은 내적 인간에 통째로 종속되어야 함이 틀림이 없다. 이렇게 종속될 때, 천국은 내적 인간을 통하여 외적 인간 안으로 들어가 천국의 이런저런 것들에 따라 배열하고 행동한다.
이와 반대의 경우도 있다. 이는 외적 인간이 종속되지 않을 때, 오히려 통치할 때이다. 이때의 인간은 그의 목적으로 육체와 감각의 쾌락을 가지고, 특히 자아 사랑과 세상 사랑을, 한마디로 천국에 속하지 않은 것을 가진다. 목적으로 가지는 것을 인간은 사랑하고 목적에 관련 없는 것은 사랑하지 않는다. 인간이 위와 같은 목적을 가진다면, 그는 내적 인간이 있다는 것, 육체가 죽을 때 영원히 살게 되는 것이 자신 안에 있다는 것을 믿지 않는다. 그의 내적 인간은 외적 인간이 선과 진리에 반대하여 생각하고 추론하는 것이 가능해지게 하는 것만을 도울 뿐이다. 그 이유는 이럴 경우에 내적 인간이 열려 다른 유입이 없기 때문이다. 이런 인물은 천국 속의 것들을 통째로 경멸하고, 되돌아 서있기 까지 한다. 이상 간단히 살핀 바로도 분명해지는 것은, 외적 인간은 자연적 인간 같이 영적 인간인 내적 인간에 정녕 종속되어 있어야 하리라는 것, 결과적으로 그것 자신의 자유함으로부터 있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자신으로부터의 자유함은 갖가지 종류의 쾌락들에 몰입하고, 자신과 비교해 타인을 경멸하며, 타인을 박해하고 증오함에서 기쁨을 얻는 악 안에 머물게 하고, 의도적이고 사기적으로 휘두르는 일명 무 양심에서 상대를 죽음으로까지 내몰리게 해도 아랑곳하지 않게 된다. 이런 결과들로 치닫는 것이 자신으로부터의 자유함이다. 그러므로 자신으로부터의 자유함에 있는 인간은 껍질만 인간일 뿐 악마인 것이다. 그가 이런 그의 자유함을 스스로 포기하는 기회를 가질 때여야만, 그는 주님으로부터 천국의 자유함을 받게 된다, 그러나 이런 자유는 자신으로부터의 자유함을 가진 자들에게는 지독하게 알려져 있지 않다. 이런 자들이 상상하는 것은 자신의 자유를 잃으면 자신의 모든 생명은 남은 것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진실된 생명 자체는 이때부터 시작된다. 그리고 주님으로부터의 환희와 행복이 있다.

우리 모두. 이는 연루됨을 의미한다. 이는 “우리 모두”라는 말 자체로부터 알게 된다.

그리고 잔이 발견된 손을 지닌 자 역시. 이는 뿐만 아니라 신성으로부터 받은 내면의 진리를 지닌 자도를 의미한다. 이는 “손을 지닌”이 함께 있다를 의미함으로부터; “잔”의 의미가 진리이다로부터; 그리고 요셉의 표현함이 신성의 천적 평면이다로부터 알려진다.

그리고 그는 말했다, 이런 짓은 나로부터는 거리가 멀다. 이는 그것은 결코 그렇게 되어 있어서는 안됨을 의미한다. 이는 설명이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잔이 발견된 자. 이는 신성으로부터 받은 내면의 진리를 가진 자를 의미한다. 이는 앞에서 살폈다.

그는 나에게 종이 될 것이다. 이는 그는 영원히 종속될 것이다를 의미한다. 이는 “종”의 의미가 영원히 자신으로부터의 자유는 없다 이다로부터, 고로 영원히 종속된다 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리고 너희는 네 아버지에게 평화로이 돌아가라. 이는 내면의 진리가 발견되지 않는 교회의 진리는 이전의 상태로 돌아가게 됨을 의미한다. 잔이 발견되지 않은 자들, 즉 “잔”인 내면의 진리가 발견되지 않는 자에 연루되는 것을 야곱의 열 아들들이 표현한다; 그리고 “너희는 너희 아버지에게 평화로이 올라가라”가 의미함이 이전의 상태로 되돌아가는 것, 그 이유가 그들이 “요셉”인 내적 인간에 의해 받아지지 않을 때, 그들을 기다리는 것은 이전 상태뿐이기 때문이다.

18-31절. 그리고 유다는 그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그리고 말했다, 19 저로 하여금 나의 주여, 당신의 종이 내 주의 귀에 한마디 말을 하게 해주십시오, 그리고 부디 당신의 종을 향하여 분노하지 말아주십시오. 그 이유가 당신은 바로와 동등하기 때문입니다. 20 내 주께서 당신의 종들에게 물어 말하기를, 너는 아버지가 있느냐, 또는 네 형제가 있느냐? 그래서 우리는 내 주께 말했습니다, 우리는 아버지를 모시고 있는데, 그는 노인입니다, 그리고 그가 노령에 얻은 아이가 있는데, 가장 어린 형제입니다. 그리고 그의 형은 죽었는바 그의 어머니에게는 그 아이만이 남았습니다, 그래서 그의 아버지는 그를 사랑하고 있습니다. 21 그리고 당신께서 당신의 종들에게 말하시기를, 그를 나에게 데려오라, 그리고 나는 그에게 내 눈을 놓을 것이다. 22 그리고 우리는 내 주에게 말했습니다, 이 소년은 자기 아버지를 떠날 수 없다. 그리고 그가 그의 아버지를 떠나면 그는 죽을 것이다. 23 그리고 당신은 당신의 종들에게 말하셨습니다, 만일 너희의 가장 어린 아우가 너희와 함께 오지 않는다면 너희는 내 얼굴들을 더 이상 보지 못하리라. 24 그리고 한참 시간이 흘러 우리가 당신의 종 나의 아버지에게 올라 갔을 때, 우리는 그에게 내 주의 말을 말했습니다. 25 그리고 우리의 아버지께서 말하셨습니다, 너희는 돌아가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