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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비평가의 견해도 있다. 원래의 요한의 복음서는 앞 장의 마지막 구절로 끝난다는 것, 이 장은 사도 자신에 의한 보충물이든지, 또는 어떤 사람의 손으로 만들어져 추가된 것 이든가 한다는 견해이다. 이에 대한 근거로 이 장은 다른 부분에 있는 통상적인 요한의 표현 방법과 경미하지만 차이가 있다는 것, 무의미한 것으로 추정된다는 것, 내용물이 시시하다는 것을 제시하고 있다. 이와 견해를 달리하는 비평가들이 있다. 요한복음의 모든 사본에서 이 장이 발견되고 있다는 것, 교회의 가장 영적이고 지적인 천국아버지께서 이 장에 상징적인 해석을 주셨다는 것이다. 이들이 요한의 복음서의 이 부분에 관해 위와 같은 견해를 발견한 이유, 이 복음 그리고 말씀의 다른 부분의 경우에서도 마찬가지지만 그 말씀이 진짜인지를 판정하는데 크게 영향을 주었거나 결정의 근거가 된 것은 그들이 말씀의 영성을 떠나서 글자의 의미와 구조에 집중적으로 초점을 맞추는 것이다. 어쨌든 거룩한 성서 본문을 연구하느라 일생을 헌신한 학자들은 경의를 받아 마땅하다. 동시에 우리는 더 수준 높은 비평가의 주장, 즉 분석적이 아닌 종합적인 측면에서 성서를 관조해야 한다는 주장도 수용해야 한다. 위 비평 모두는 거룩한 성서 본문을 완성해 주는 견해가 요구된다는 것이다. 위의 주장들 어느 한쪽만 가지고는 성서 본문의 진짜 여부를 가릴 수 없는바 양측의 증거를 병합해서 균형을 맞추어 보아야 할 것이다. 비록 이 장의 세부사항에 관한 우리의 설명이 초기 성서 주석자의 것과 다른 양상을 띄운다 해도 이 복음서의 결론을 맺는 이 부분, 단지 글자만으로 볼 경우 무가치한 것을 사도들이 기록한 듯 여길는지 모르는 이 대목에서 교훈적인 유익한 내용을 감지하리라 믿는다.
1. “이 일들 후에 예수께서는 디베랴 바다에서 제자들에게 다시 자신을 보이셨다, 그리고 이는 그분이 자신을 보이신 경위이다.” 요한에 따르면 이번에 주님께서 제자에게 나타나심은 세 번째요 마지막이다. 이 광경은 애착이 넘치는 아름다움이 있는데 그렇다고 교훈적 내용이 그보다 덜 한 것도 아니다. 디베랴 바다, 이곳은 예수께서 첫 제자들에게 그분의 모습을 처음 나타내시고 그들의 천한 직업으로부터 사람의 어부가 되도록 부르셨던 곳이다. 이제 이곳은 그들에게 마지막 그분의 모습을 나타내셔서 그들과 그분의 언약을 확증하시고 그분의 말씀을 섬기는 자로서의 그들에게 그분의 교훈과 지시를 하사하신 곳이 되었다. 바다는 폭넓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 바다는 세상을 의미하고 말씀을 의미한다. 세상이란 죽지 않는 영혼으로 구성된 세상을 말하고 말씀이란 영원한 진리들로 구성된 말씀이다. 말씀은 세상이 만들어지고 구속하게 된 그분으로부터 온 계시이다. 그리고 인간에게 잘 숙박되도록 배려되어 보내진 그분의 신성한 뜻과 지혜이다. 그러므로 사람의 어부가 될 사람은 하느님의 말씀에 대해 더욱 특별한 수색자이어야 한다. 그 이유가 말씀 속의 진리들은 영혼을 세상에서 끌어당겨 하느님께 이르게 하는 수단이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몸소 그의 제자들에게 디베랴 바다에서 그들이 세상으로부터 인간을, 말씀으로부터 진리를 끌어올리기 위해 어떻게 반드시 진행되어야 하는가를 보여주셨다. 그야말로 복음의 선교라는 위대한 일에 이제 막 진입하는 이들로서의 그들을 가르치시기 위해 그분이 고안하셨던 교훈을 보여주셨다. 물론 이 사항은 본문의 제자 외에도 모든 제자와 관련되는 교훈이다. 모든 사람은 제각각의 길을 가면서 어부가 되어져 있다. 참된 모든 제자는 자신의 교훈을 받기 위해, 자신이 사람의 선생이 되든 그렇지 않든지 말씀에서 진리를 끌어내야만 한다. 말씀은 종교적 진리의 근원이다. 에스겔이 보았던 새 성전의 환상에서 성전 문지방으로부터 흐른 물은 그 물이 닿는 곳은 어디에든지 생명을 실어다 주어서 바다를 치료하여 많은 물고기가 우글거리게 했다(47장). 이 환상은 주님의 오심에서 그분에 의해 건설되는 교회를 묘사하고 있다. 그리고 성전 문턱에서 흐르는 물은 마치 계시록에서 말해진 하느님과 어린 양의 옥좌로부터 흐르는 생명수의 순수한 강처럼 영원한 말씀 속의 영이다. 이것이 씌어진 말씀으로 흘러 내려 정도를 벗어난 인간이 더럽혀 놓은 씌어있는 말씀, 중독 되게 한 인간의 썩은 것들을 정제한다. 그리고 그 안으로 새 생명과 건강을 실어다 주는바, 즉 말씀의 진짜 진리들을 영성화 한다. 그 이유가 교인을 훈육하고 훈도 함이 영적 어부이기 때문이다.
2. 이제 복음서 기자는 예수께서 자신을 보이셨던 주변을 살피고 있다. “시몬 베드로, 그리고 디두모라 불리는 도마, 갈릴리의 가나 사람 나다나엘, 세배대의 아들들, 그리고 그분의 제자들로부터의 다른 두 명이 함께 있었다.” 일곱 제자가 거기 있었다. 일곱은 거룩한 숫자이다. 일곱 명이 함께 있다는 것은 그들이 하나 되고 하모니를 이루고 있다는 것을 표현한다. 일곱 명중 베드로와 도마는 부정했고 나머지 사람은 믿지 못했었던 경력이 있다. 이들이 먼저 거론된 것은 마치 신실하고 깊은 회개로 얼마나 행하여질 수 있는가를 보여주기라도 하는 듯 보인다. 더불어 신앙 이 베드로로 표현되는바 신앙은 위 일곱 품성을 이끄는 품위이라는 것도 보여주고 있다. 그 이유가 모든 경우에서 첫 번째 언급되는 사람은 누구든지 전체에 품격을 주기 때문이다. 여기서의 시리즈는 첫째가 베드로, 쌍둥이라 불리는 도마, 갈릴리 가나 사람 나다나엘 인데 이들은 의지 안의 신앙 , 이해성 안의 신앙 , 그리고 생활에서의 신앙 을 표현한다. 그 다음 세베대의 두 아들은 내적 인간 안에서 하나 되어 있는 선행과 신앙을 표현한다. 그리고 이름이 거론되지 않은 나머지 두 사람은 외적 인간 안에서 하나 된 선행과 신앙을 표현한다. 예수께서는 세 번째 나타나심을 이들에게 만드셨는 바, 이는 우리에게 위 원리들이 마음 안에 함께 존재하고, 마치 위 제자들이 이번 경우에서 가졌던 것같이 한 가지 목적 즉 거룩한 생활에 사용하려고 말씀으로부터 교훈을 끌어올리려는 목적으로 활성화 될 때 주님은 현존하시어 자신을 명백히 보이신다는 것을 가르치기 위해서였다. 이런 목적이 지도자격인 제자 베드로에 의해 나머지 사람들에게 하는 말 속에 표현되어 있다.
3. “시몬 베드로가 그들에게 말한다,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간다, 그들이 그에게 말한다, 우리 역시 당신과 함께 간다. 그들은 가서 즉시 배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그 밤에 아무 고기도 잡지 못했다.” “베드로가 말한다”란 베드로로 표현된 것인 의지 안의 신앙 으로부터 실시되는 심사숙고함을 뜻한다. 많은 경우에서 베드로는 대변인이었는데 아마 지금의 경우가 대변인 역할을 가장 잘 감당하고 있다고 보인다. 그 이유가 지금까지 제자들은 사람의 어부라는 것을 결코 실감해보지 못했지만 이제 그런 어부가 되려는 찰나에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의 행동은 지금까지 그들이 불완전하게 이해했고 수행했던 영적 일의 예징이 되어주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은 예수께서 신성화 되셨고, 세상의 복음화, 인간 영혼의 거듭남이 마치 새로이 시작되듯 움트고 있다. 어쨌든 이런 운동은 제자들이 그리스도의 왕국이 무엇이며, 그들이 전파할 것이 무엇인지 이해해야 만 가능해 있다. 지금까지, 지금조차도 그들은 왕국의 영적 본성을 알지 못했다. 그리고 그 나라 안으로 가져다 놓이게 될 이들 안에서 결과 되어야 하는 영적 변화도 전혀 알지 못하고 있다. 그런 상태를 본문이 적절히 표현했는데, 그것은 그들이 갈릴리 의 어두운 바다에서 물고기를 잡고 있는 밤으로 표현되었다. 그들이 수고한 결과는 그들의 고기잡이에 관한 것과 같다. 즉 그들은 밤새워 수고했지만 잡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생명 있는 진리의 저장소 라는 측면에서의 말씀에 관련해서 이것을 관조해보자. “나는 고기를 잡겠소”란 영혼의 삶을 지탱시켜주는 진리를 말씀으로부터 획득하고 싶다는 기독 제자의 바람을 표현한 것이다. 신앙 이 말한 이 바람은 다른 기독 품위와 상호 협조하고 동시에 발생되고 있다. 어쨋든 본질적으로 보면 이해성의 자극이다. 그들이 수고했던 밤은 유대교회의 밤이었고, 이런 상태는 제자들이 바다에 던진 그물 안으로 어떤 것을 끌어당기는 일을 어렵게 했다. 그러나 밤은 교회의 상태일 뿐 아니라 그들 자신의 상태도 묘사하고 있다. 그들의 마음은 복음이라는 하늘의 처방에 직, 간접적으로 희미한 상태였다. 열매 없는 노동의 이런 밤은 기독 제자들에게 공통되는 경험 중 하나이다. 그리고 그것은 참 빛이신 주님이 사라지셨을 때, 또는 자신 스스로의 능력과 총명으로 해보겠다고 할 때 그 사람 스스로 발견하고야마는 정신적 희미함이라는 상태이다.
4. 이제 위 상태에 대한 밝은 면모이다. “지금 아침이 왔을 때, 예수께서 해안에 서계셨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분이 예수이셨음을 몰랐다.” 지금까지 우리는 주님과 분리된 상태의 제자들, 그들 스스로 행동하는 제자들, 밤 가운데 있는 제자들을 보았었다. 여기서 우리는 주님과 함께 한 제자, 제자들과 함께 하신 주님, 그분의 직접적인 지시 하에 그들이 행동한 결과를 보게 된다. 이른 아침, 즉 태양이 아직 떠오르지 않고, 보여지지도 않는 아침, 그러나 대기를 통해 산꼭대기에 빛이 뿌려지고 있는 이른 아침이란 이런 마음의 상태, 즉 하느님의 사랑이 심정 안에 뿌려졌으나 진리의 빛은 그 강함이 아직 부상되지 못한 채 신앙의 눈에 보이고 있는 마음의 상태를 상징한다. 이런 상태가 지금 예수께서 호숫가에 서 계셨을 때의 아침이었다. 해안가는 땅과 바다의 경계선이어서 언제나 그 선이 변화하는 곳이다. 그래서 선과 진리가 만나는 곳인 마음의 외적 또는 감각적 부분을 표현한다. 그리고 이를 말씀에 관련시켜보면 해안가란 선과 진리의 원리가 합해지는 곳인 외적 또는 글자적 의미를 표현한다. 여기에서 주님이 제자들에게 나타나시되 자기들의 영적 삶을 받쳐 줄 생명 있는 진리를 말씀으로 끌어올리려 했지만 성공하지 못하고 있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시고 있다. 이런 경우에서 주님은 보여지면서도 보여지지 않는 것, 다시 말해 아는 것 같은데 지각되지 않고 있는 상황이다. 이런 독특한 상황은 기독교인의 체험의 어떤 상태에서도 표현되고 있다. 우리는 성경을 읽고 성경이 가르치는 진리, 더욱이 인간의 구세주로서의 예수와 관련된 사항에 이르기까지의 진리를 배울는지 모른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 사항들을 알지 못할는지 모르고, 그 본성에 관한 영적 식별력도 지니지 못하고, 더욱이 그 진리의 권능에 관한 체험도 없을 수 있다. 우리는 그 진리의 형체를 보면서도 그 실체는 보지 못한다. 마치 제자들이 주님을 보았는데도 그분이 누구였는지 몰랐던 것과 같다.
5. 주님께서 자신을 제자들이 알아보도록 하시기 위해 사용한 수단들은 현재까지도 그분께서 신실하나 어두움에 있는 그분의 추종자들에게 자신을 밝히 알리는데 고용되는 것들을 상징적으로 그려주고 있다. “그때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한다, ‘어린이들아, 너희는 어떤 음식이라도 가지고 있느냐?’ 그들이 그분에게 대답했다, ‘아닙니다’” 그분께서 제자들을 부르시되 어린 아이를 귀엽게 부르고자 할 때 사용하는 호칭을 사용하시고 있는바, 이는 부모와 자식 간의 사랑을 표현하시어 이어지는 구절이 입증하듯 부모의 자식에 대한 권위 같은 것으로 가르치심을 표현하고 있다. 또 다른 측면에서 보면 그들은 아직 어린 아이 같은 수준, 지식 수준에서 어린 아이 같아서 성인의 수준에로 아직 자라지 못한 지식 수준까지 표현하고 있다. 주님께서 그들에게 물으셨으되 그들이 고기를 성공적으로 많이 잡았는지 이를 묻지 않으시고 단지 어떤 음식(meat)을 가졌는지를 물으셨다. 여기서 사용된 단어 음식(meat)은 빵은 아니고 생선(fish)같은 것, 식사할 때 함께 먹게 되는 어떤 것을 뜻한다. 그러나 용어 음식은 진리와 구별해서 선에 관한 원리를 의미하는바, 이 질문은 중요하고 탐문하는 것에 해당된다. 즉 영혼의 양식을 구성하는 생기 있는 원리의 어떤 것을 획득했는가? 이것을 획득하지 않으면 우리가 요구하는 모든 것은 헛될 뿐이라는 것, 이것을 획득하지 않은 상태에서의 모든 우리의 수고는 쓸모 없다는 것을 짐작하도록 해주시고 있다. 이 질문은 바야흐로 주님께서 그분의 영의 영향력과 말씀의 가르침을 수단으로 진지한 마음 안에서 그 마음을 향해 암시하시고 있다. 제자들의 대답은 “없습니다” 였다. 얻으려고 애를 써왔으나 결핍되었을 뿐임을 알고 인정한다는 것은 그런대로 나마 성공의 서곡이다.
6. “그분은 그들에게 말하셨다, ‘그물을 배 오른쪽에 던져라. 그리고 너희는 발견할 것이다’, 하여 그들은 던졌고, 지금 그들은 많은 물고기 때문에 그물을 끌어 당길 수 없었다.” 이 대목을 자연적 의미만으로 생각하려는 사람이라면 아마 이렇게 되물을는지 모른다. “하필이면 왜 배 오른쪽에…”그러나 위 주님의 명령은 기적 그 이상의 어떤 것을 우리에게 전달해주고 있다. 성경에서 오른쪽은 선행을 표현하는 한편 왼쪽은 신앙을 표현한다. 이렇게 이해를 시작해보면 위 신성한 명령은 얼마나 교훈적인지! 우리를 가르치는바, 우리가 복음을 배우든, 가르치든 성공 여부는 우리가 어떤 원리로부터 행동하는가, 어떤 원리에서 진행되는가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지성과 신앙 으로부터 행동한다면 우리는 온 밤을 지새워 수고해도 소득이 없겠지만 우리가 심정과 선행으로부터 행동한다면 우리의 노력은 성공이라는 면류관을 쓰게 된다는 것이다. 우리가 신앙 으로부터 행동하는 한, 우리는 상대방의 영적 개선과 행복에 마땅히 관심을 기우려 주지도 않으면서 우선 자신의 특이한 교리로 전환하라고 노력해댄다. 대신 우리가 선행으로부터 행동하는 한, 우리는 상대방이 자신의 견해에 찬동하라고 단순히 설득하지 않고 그의 심정을 하느님께로 돌리는 변화를 기대한다. 우리 자신 만에 국한해서 말씀을 공부하는 태도를 들여다보자. 우리가 지적인 신앙으로 성경 공부를 진행한다면 결국 자신의 종교적 견해를 확증해댈 증거를 찾을 목적으로 진리를 획득하려 애쓴다. 그러나 우리가 선행으로부터 행동하면서 말씀을 공부하면 기독교 생활의 품위와 미덕을 함양할 목적으로 진리를 획득하려 애쓴다. 위 활동의 두 종류가 한 인물에 의해 연속적으로 나열될는지 모른다. 전자는 그의 자연적 마음이 영적 마음보다 더 적극적이었을 때이다. 이것은 그에게 영적인 밤이다. 그 이유가 밤과 낮은 마음의 상태, 즉 밤은 자연적 인간이 영적 인간을 압도할 경우이고, 낮은 영적 인간이 자연적 인간을 종속시킬 경우의 마음 상태이다. 이 상태들은 거듭남의 수준이 제아무리 높은 수준에 있게 된 인간이라 해도 교차되는 마음의 상태들이다. “땅이 있는 한 뿌리는 때와 거두는 때, 추위와 더위, 여름과 겨울, 밤과 낮이 쉬지 않고 오리라” (창세기8:22). 이런 교차됨은 필수적이라 할 만큼 유용하다. 이런 교차됨이 없이 어떤 상태도 완전해 질 수 없다. 작용과 반작용은 평형(equilibrium)을 보존하고 건강한 활력과 발달을 증진시킨다. 기독인에게 있어서 그의 영적 힘과 원리들이 적극적일 때, 천국적 사랑의 따뜻함과 천국적 진리의 빛이 그의 마음과 생활에서 적극 활동할 때 당사자는 낮이라는 상태에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의 자연적 애착과 생각이 적극적이 되고, 자연적 삶의 일과 그 일의 충동이 한동안 우위를 점하고 적극성을 띌 때 그 사람 주위는 밤으로 둘러 쳐진다. 실망과 보답 없는 노동의 밤이라는 상태는 또 다른, 더 나은 것을 준비시킨다. 그리하여 빛과 희망, 주님이 나타나시는 곳, 그분의 진리의 소리와 그분의 사랑의 영향이 그의 심정을 격려하고 마음을 더 행복된 결과로 인도해간다. 이 결과가 제자들이 배 오른편에 그물을 던졌을 때 맞이한 성공 안에 그림자같이 드리워있다. 그리하여 지금 “제자들은 그물을 끌어올릴 수 없을 만큼 많은 고기를 잡았다.” 수가 많음(multitude)은 진리에 적용되는 단어이고, 양이 많음(magnitude)은 선에 적용하는 단어이다. 많은 고기는 많은 사람, 특히 이방 사람이 많다는 것을 어렴풋이 보여주고 있다. 이들이야말로 제자들이 복음의 신앙으로 전환하게 될 사람들이다. 그들이 기독 원리의 시대, 지금 그들 위에 드리우는 새벽인 기독교 원리의 시대에 오고, 지금 주님이 나타나시듯 그분의 가르침 아래 있게 되어 이 세상에 속한 왕국이 아닌 영적이고 영원한 왕국에로 인도 받는다. 또한 이 구절이 투영하는 의미는 진리들의 증가, 즉 선행의 영향 아래에서 성경을 수색하는 이들에게 말씀이 산출해 주는 진리의 증가이다. 선은 진리의 생명이요 진리가 증가하는 근원이다. 그 이유가 선은 진리를 수단으로 유용함의 수단과 권능을 확장시킨다. 선이 풍부해 있는 곳은 어디든지, 선이 가득 차 있을 때는 어느 때이든지 진리들이 불어난다. 그래서 아마 처음 진리를 수확할 때 예상했던 우리의 차원을 훨씬 넘어 “끌어올릴 수 없을 만큼” 배가 된다.
7. 이런 기적적인 증가의 결과 중 하나로 확신하게 되는 것은, 그것을 하신 분이 주님이시라는 것, 그 주님은 예수 외에 더 다른 분이 아니시다는 것이다. “예수의 사랑을 받던 제자가 베드로에게 ‘저분은 주님이십니다’ 하고 말하였다. 주님이시라는 말을 듣자 (벌거벗고 있던) 시몬 베드로는 몸에 어부의 외투를 두르고 자신을 바다 에 던졌다.” 그들의 노력에 방향을 정해주고 또한 더욱 번창하게 하신 분이 주님이라는 생각은 그 자체 요한에게 먼저 표출되고 그 다음 베드로에게 암시하고 있다. 그 이유가 신성한 유입은 의지 안으로, 그 다음 의지를 통해 이해성 안으로 있어 지거나 선행을 통해 신앙 안으로 있어지기 때문이다. 이는 마음이 주님과 결합하는 쪽으로 노력하게 한다. 마치 베드로가 예수에게 가겠다고 결정했던 것과 같다. 그런데 베드로는 벌거 벌었다. 그는 고기잡이 옷을 둘렀다. 이 구절, 그리고 성경의 다른 장소에서 등장되는 벌거벗음(naked)은 겉옷이 없음을 뜻한다. 그러나 이 단어가 사용된 것은 영적인 벌거벗음을 뜻하기 위해서라는 것은 의심할 바 없다. 이는 진리의 결핍이다. 옷과 몸의 관계 같은 것이 진리와 마음의 관계이다. 외투(coat)로 사용된 이 단어는 신약성경의 어떤 부분에서도 발견되지 않는다. 다만 동사적 형태로서 고린도후서 5장 2,4절에 등장할 뿐이다. 거기서 사도가 말한다. “지금 육신의 장막을 쓰고 사는 우리는 옷을 입듯이 하늘에 있는 우리의 집을 덧입기(clothed upon)를 갈망하면서도 신음하고 있습니다…이 장막에 머물러 있는 동안 우리는 무거운 짐에 짓눌려 신음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이 장막을 벗어버리고자(unclothed)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하늘의 집을 덧입음(clothed upon)으로써 죽음이 생명에게 삼켜져 없어지게 되기를 갈망하고 있습니다.” 이 구절에서 육체가 영혼(soul)의 의복으로 말해지고 있다. 자연적인 몸은 이 세상을 위한 영혼의 의복이고 영적인 몸은 저 세상을 위한 영혼의 의복이다. 모든 실체(essence)가 형체(form)를 가져야하듯 모든 영혼(soul) 또는 영(spirit)은 몸(body)을 지녀야만 한다. 신앙 의 영은 마치 겉옷을 걸치듯 신앙 의 진리로 옷 입혀져 있다. 신성한 존재의 경우 빛으로 옷 입으시고 있다. 신앙 이 그 신앙 에 합당한 진리가 없을 경우 그것은 방어벽이 없는 것, 말쑥한 형체가 없는 것, 화려한 장관이 없는 것이다. 이런 신앙 은 미적지근했던 라오디게아 교인들, 즉 “…스스로 부자라고 하며 풍족하여 부족한 것이 조금도 없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네 자신이 비참하고 불쌍하고 가난하고 눈멀고 벌거벗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 경우와 같다 (계시록3:17). 베드로의 벌거벗음이 함축하는 것은 그가 위 계시록의 언급같이 결핍된 상태, 부끄러운 상태, 즉 어떤 자각심도 없는 뻔뻔한 상태가 아닌 그 반대의 상태이다. 즉 그는 자신이 벗었음을 발견한 한편 옷 입기를 바랬다. 그리하여 그의 흥분어린 애착 의 대상이 된 그분 앞에 나서고 싶어서 였을 뿐이다. 이 제자가 자신을 옷입힌 진리들은 주님과 결합하는 수단들이다. 이런 연유에서 말씀 가운데에는 옷에 관한 언급이 상당히 많고 합당한 의복을 입어야 할 필요성을 언급하고 있고, 특히 천국 결혼에 입장하려면 결혼예복을 입어야 하는 것을 꼬집어 언급해두고 있다. 베드로가 자기 겉옷을 두르는 모습은 기독교인이 주님 앞에로 입장하고 그분과 결합하려면 신앙의 진리로 입어야 함을 표현한 것이다. 옷을 두른 베드로는 물에 뛰어 들었다. 겉옷을 얼른 걸치는 잽싼 그의 행동은 그의 열망을 보여주었다. 이것은 자기들 스스로 해보려 했으나 할 수 없었던 것을 그분이 해주심을 수단으로 그들에게 그분이 밝히 알려졌을 때 주님과 함께 있기를 바라는 신실한 자의 열띤 바람도 표현하고 있다. 이 구절의 예에서 주님이 제자들을 위해 해주셨던 것을 후에 그분은 그들을 수단으로 이루셨다. 그분은 그들의 수고함을 번영되게 하셨다. 베드로가 했던 것은 진지한 신앙 이 제자들 더러 하라고 자극하는 것, 자신을 졸라매는 것, 그리고 물을 통해 그분께 가는 것, 더불어 “죽음도 감히 너희를 덮치지 못하리라” 라는 약속에 관한 본보기였다.
8. “다른 제자가 작은 배 안에 왔다. (그 이유가 그들은 육지로부터 멀리 떨어지지 않았기 때문, 그러나 이백 큐빗 정도,) 물고기들을 가진 그물을 끌어당기고 있었다” 나머지 제자들이란 신앙으로 들어가 신앙을 드높이고 확증하는 선함과 진리에 관한 원리들이다. 이들은 신앙이 인도하는 곳, 즉 선하고 참된 모든 것의 저자이시고 신앙 의 최고 대상으로서 주님에게 인도되는 대로 따라간다. 따라서 그들은 배로 상징된 것인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을 통해 간접적으로 주님께 왔다. 이 제자들이 탓던 것은 작은 배였다. 양이 많음은 선에 관계되고 수가 많음은 진리에 관계된다고 앞에서 언급했었다. 나머지 제자들이 “작은 배”로 왔다는 것은 그들이 주님께로 오게 된 수단인 지식이 선함에 바탕을 두었긴 했으나 그것이 작은 것이었음을 암시하고 있다. 그들은 주님에 관해서, 자신의 참된 천직이 무엇인지에 관해서 아는바 있긴 하나 그것이 아주 조금이었다는 말이다. 그러나 그 조금만 가졌어도 그들에게 뭔가 생산해주는데, 예수께로 그들을 데려오는데에, 기적적인 어획고를 올린 그물을 끌어오는데에, 세상으로부터 교회에로 데려와지는데에, 충분했다. 이런 모습을 우리는 모든 시대의 제자들과 관련해 생각해 볼 수도 있다. 예수의 제자들은 이로부터 배우는바, 그들의 수단을 측량하는 것은 규모의 큼이 아니라는 것, 그들의 성공을 보장하는 것까지도 규모의 큼이 아니라 주님의 영과 말씀이라는 것이다. 그분의 힘으로 일하는 이들은 스승의 일을 해내는데 자기들의 배가 너무 작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 이 대목에는 또 다른 격려의 교훈이 담겨 있다. 제자들이 작은 배로 그물을 끌고 올 때 그 곳은 육지에서 멀지 않은 곳으로부터였다. 주님이 더 직접적으로 현존하는 말씀은 세상으로부터 멀지 않다. 오히려 신실하고 열성적인 사람들에 의해서는 언제나 닿을 수 있게, 그리하여 노동의 열매를 가질 수 있게 되어 있다. 또 다른 교훈이 이 구절에 있다. 그 이유가 땅과 바다(호수)는 선과 진리를 상징하기 때문이다. 제자들이 주님이 계신 육지로 가기로 한 것은 선함 자체이신 그분께 선함의 상태인 안쪽으로 자신을 강요하는 것을 표현한다. 200 큐빗(cubit)역시 땅으로부터 떨어진 거리를 말하는바 이는 선함과 진리의 결합, 선행과 신앙의 결합의 어떤 수준을 표현하고 있다.
9. “그들이 육지에 올라와 보니 숯불이 있고 그 위에 생선이 놓여 있었다. 그리고 빵도 있었다.” 이 사건은 그 주위에 초자연적 모양새를 띄우고 있다. 불, 고기, 빵 같은 물건들이 언제, 왜 준비되었을까? 예수께서는 지금 이런 물질적 존재의 어떤 것도 필요치 않으셨다. 부활하신 그분이 어디서 거주하셨을까, 어떤 옷을 입으셨을까, 무엇을 잡수셨을까하는 등등에 관한 상상은 부활하신 그분의 몸의 본성에 관한 물질주의적 견해의 산물일 뿐이다. 주님의 몸은 지금 신성이셨다. 그분이 제자들을 위해 준비하셨던 것들은 육체를 위한 게 아니라 영혼을 위한 음식이었다. 제자들이 주님을 보았으되 그것은 그들의 자연적 눈이 아닌 영적인 눈으로 본 것이다. 이와 똑같이 그들은 그분께서 자기들을 위해 만든 설비도 보았다. 합리적인 모든 사람은 본문의 경우가 위와 같다고 보아야한다고 하지만, 어떤 이들에게서는 영적 삶의 주제를 이해하는데 곤란해 할 것같아 이에 관한 설명이 필요할 것이라 본다. 영계는 자연계만큼 실재적이다. 그래서 이 세상의 것들이 육체의 감각에서 느껴지는 것만큼 영계의 것도 영혼의 감각에 사실적이다. 영혼이 육체에 가깝게 있는 만큼 영계도 자연계와 가깝다. 그러므로 요구되는 전부란 인간으로 하여금 영계와 감지할 수 있는 연결이 있도록 해서 그들에게 영적 대상을 감지할 수 있는 지각을 주는 것, 이 영적 지각을 수단으로 보고 듣고 느끼게 함으로서 그들의 영원한 상태에 관해 한정된 체험을 주는 것이다. 이런 일시적인 상태는 신,구약 성경에서 천사를 보고 있고 그들을 접대한 사람들 모두에게 권유된 상태이다. 이런 감각에 의해서만이 제자들은 부활하신 주님을 뵐 수 있었고, 그분이 그들을 위해 준비한 모든 것, 그들 앞에서 하신 것, “구운 생선과 벌집”을 잡수신 것 (누가24:42) 까지도 볼 수 있었다. 영적 감각이 열리는데 어떤 극단적인 변화가 있어질 필요성은 하나도 없다. 이를 체험했던 이들은 변화가 있었는지 의식조차 없었다. 영 안에 있을 경우 모든 것은 자연계에서의 것과 동일하게 나타나므로 당사자는 자신이 살고 있던 이 세상에 속한 것을 보고 있다고 알뿐이기에 더 다르게 감지하지 못한다. 그들은 이중적으로 환상을 향유했을는지 모른다. 즉 영계와 자연계에 속한 대상을 동시에 본다는 말이다. 비록 영적인 눈이 열릴 때 자연적 눈은 닫히는 것이 일상적 법칙임에도 불구하고 영과 몸의 시야가 동시에 활동될 수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우리는 이 구절이 나타낸 초자연적 명백함의 영적 의미 파악이 가장 중요하리라 본다. 이 광경은 그 당시 직접적 대상인 제자들을 위해서 였을 뿐 아니라 그들 뒤를 잇는 참된 모든 제자들에게까지 교훈을 주시려는 목적으로 만들어진 모습이다. 제자들이 본 불은 신성한 사랑의 불에 대한 상징물이었다. 이제 인간 구속을 완성하신 저자가 지상 안에, 교회 안에, 신실한 이들의 심정 안에 불을 지펴놓으신 것이다. 이 불 위에 생선이 놓였고, 그리고 빵을 제자들이 보았다. 이 생선과 빵의 개수는 매우 특이하다. 그 이유가 한 마리의 고기와 한 개의 빵만을 여러 사람이 먹으라고 그분이 준비하셨기 때문이다. 이는 기적적으로 그들에게 식사를 공급해주심으로 수많은 군중을 먹이셨던 바로 그분이심을 제자들로 확신하게 하시려는 의도에서였을 것은 명백하다. 그러나 여기에는 또 다른 교훈을 가르치시고자 의도해놓으시고 있다. 이는 차후 제자들이 종사하게 될 영적 일에 관계되는 것, 그들의 가르침이 생산하게 될 영적 결과에 관계되는 것에 관해서이다. 빵과 생선은 선함과 진리라는 원리를, 불은 사랑을 상징하고 있다. 불 위에 놓인 생선은 사랑의 선을 수단으로 자연적 인간이 개혁됨을 표현한다. 이 묘사에는 교회가 완전히 황폐된 결과에 있는 그 당시의 모든 사람이었다. 이 절을 시작하는 말은 제자들이 육지에 올라오자마자 이 모든 것을 보았다고 말해놓고 있다. 이는 바다와 육지가 의미하는 것인 진리로부터 선으로 진보하는 이들은 그들이 선함의 상태를 달성할 때는 언제든지 그들을 위해 주님께서 준비하신 것을 보게 된다는 것을 가르치시고 있다.
10,11. 그들이 육지에 올라왔을 때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방금 잡은 고기를 가져오너라’ 하고 말씀하셨다. 시몬 베드로는 배에 올라가서 그물을 육지로 끌어 올렸다. 그물 속에는 백 쉰 세 마리나 되는 큰 고기가 가득히 들어 있었다. 그렇게 많은 고기가 들어 있었는데도 그물은 터지지 않았다.”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준비해둔 빵과 고기를 먹으라고 즉각 초대하시지 않고, 먼저 그들에게 방금 잡은 고기를 가져오라고 하셨다. 영적 총명과 신앙의 근원은 두 가지, 즉 주님과 그분의 말씀이다. 이 두 가지로부터 받을 때만이 우리는 이해할 수 있고 믿을 수 있다. 생명 있는 원리로서의 선과 진리는 주님 자신으로부터 오지만, 지식으로서의 선과 진리는 씌어있는 말씀으로부터 온다. 영감이 불어넣어져야 생명 있는 신앙이, 참된 신앙이 있어진다. 그래서 이 두 가지는 진짜 기독교인이 될 수 있기 전에 반드시 마음 안에 공존하고 함께 만나야 한다. 생명 있는 원리로서의 선과 진리는 주님께서 제자들을 먹이시려고 만드신 준비물로 표현되어있고, 지식으로서의 진리는 제자들이 잡은 고기로 표현되어 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그들을 위해 준비된 생선을 주시기 전에 그들이 방금 잡은 고기를 가져오도록 명령했다. 내적인 선물과 내적인 획득물이 함께 가져와지고 있다. 제자들 전체에게 내려진 명령인데도 베드로에 의해 집행되고 있는데, 이는 신앙의 행동이다는 것, 이 행동에는 다른 모든 품위가 포함되어 있다는 것도 암시하고 있다. 주님의 명령에 순종함은 신앙이 승강되게 해준다. 마치 본문에서 베드로가 배에 “올라” 갔던 것과 같다. 자연적 수준의 신앙 은 마음의 자연적 영역에서 영적 영역으로 드리워짐으로 영적 신앙으로 바뀐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가 획득한 소유물을 그분께로 가져오라는 그분의 명령에 순종하여 행동할 때 결과 되어진다. 그리고 그것들이 그분의 발 앞에 가져다 놓이되, 겸허하게 인정함으로, 즉 그분의 능력과 안내해주심 덕분에 획득된 내 것인 바, 진정 그것은 내 것이 아니라 그분의 것임을 인정함과 더불어 행동되어야 한다. 베드로가 그물을 육지에 끌어내림은 획득된 진리가 선과 연결되도록 하는 것, 또는 그것들을 이해성에서 들어올려 의지 안으로 가져다 놓는 것, 또는 자연적 마음으로부터 들어올려 영적 마음으로 가져다 놓는 것을 의미한다. 해안가에 끌어다 놓은 그물은 큰 고기로 가득했다. 용어 크다(great)는 선함의 품질을 표현하는 바, 이 구절에 대한 영적 의미란, 주님의 직접적인 지시를 받고 이타애의 영향 아래 행동되어 획득된 진리는 단지 지적일 뿐인 진리가 아니라 실지의 진리, 그 내용물이 선함으로 가득해 있는 진리이다는 것이다. 이 고기들은 클 뿐 아니라 많았다. 양이 많음(magnitude)은 선함 측면에서의 품질에 관계되나 숫자(number)는 진리 측면에서의 품질에 관계된다고 이미 언급한 적이 있다. 큰 고기는 백 쉰 세 마리였다. 이 세 숫자들은 말씀이 포함하는 세 가지 다른 종류 또는 수준의 지식, 그리고 말씀으로부터 교훈을 받아들이는 세 가지 다른 계층의 사람들, 그리고 교훈을 수단으로 교회로 끌어 올려지는 것들, 즉 천적, 영적, 자연적 교훈들, 또는 사랑의 진리, 신앙의 진리, 순종의 진리를 받는 이들까지 일괄하여 표현해 놓고 있다. 여기서 주목해둘 만한 사실은 그물이 부서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와 비슷한 상황에 있었던 다른 사건과 연계해 생각해 보면 더욱 의미심장함을 느끼고야 만다. 이 본문의 경우 우리가 발견하는 바, 사건의 시작은 기적적인 고기잡이고 그 마무리는 주님이 땅 위에서 제자들과 교제하고 계신 모습이다. 누가는 다른 복음서 기자가 기록하지 않은 것, 즉 그분께서 뱃일을 하고 있는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부르시는 사건을 기술해 놓고 있다 (누가 5:1-9). 이 대목을 보면 주님은 군중을 시몬의 배에 올라 가르치셨는데 그 뒤 베드로에게 깊은 데에 그물을 쳐 고기를 잡으라고 분부하자 베드로는 밤새도록 애썼어도 잡지 못했지만 선생님이 말씀하시니 그물을 치겠다고 하여 그대로 하였더니 엄청나게 많은 고기가 걸려들어 그물이 “찢어졌다.” 그래서 겁을 먹은 베드로가 예수의 발 아래 엎드려 “주님, 저는 죄인입니다. 저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예수께서 대답하시기를 “두려워 말라. 너는 이제부터 사람들을 붙들을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위 두 사건에 있는 고기잡이와 어획고는 상징적이다는 것이 분명히 보여지고 있다. 또한 디베랴 바다에서 같은 기적이 반복된 것 역시 상징적이라고 암시해 볼 수 있다. 첫 경우에서는 그물이 찢어졌으나 두 번째 기적에서는 그렇지 않았다는 것은 우리에게 사람을 잡는 수단에서 그들의 부름 받는 초기 때에는 덜 완전했고, 복음을 전파하라는 마지막 위촉을 받는 때는 보다 더 완전해 있었다는 것을 가르쳐주고 있다. 구속과 신성화하심이라는 일은 두 번째 기적의 때에 완성되어졌다. 그러므로 진리를 획득하고 나누어주는 능력이 증가되어졌다. 구원의 수단은 더 넉넉해지고 완전해졌다. 그물은 많은 고기를 에워쌌을 뿐 아니라 버텨냈다. 그물(마태 4:18)은 교리를 의미한다. 또한 진리의 지식을 의미하고, 그 결과 아는 능력, 이해력까지도 의미한다. 이런 것들은 교회나 개개인의 거듭남의 시작에서는 약해서 획득한 것을 단단히 붙잡지 못한다. 그러나 주님이 신성화하시고 인간이 구속되었을 때 그 자질들에 기운이 보강되어졌다. 그리고 추론하는 힘과 진리를 지탱시키는 힘 역시 배가되었다.
12.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하신다, ‘와서 식사하자.’ 그리고 제자들의 누구도 그분에게 ‘당신은 누굽니까?’ 하고 감히 묻지 않았는데, 이분이 주님이셨음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제자들이 초대받은 식사는 통상 우리가 말하는 저녁 식사는 아니고 아침 식사일 것이 분명하다. 이 사건의 주변 상황이 그것을 암시하고 있다. 이런 모든 것은 새로운 상태, 그리고 선함과 진리의 새롭고 더 높은 원리들로 충당됨을 표현한다. 이것은 부활이후 주님께서 생명의 요소를 수단으로 제자들과 교류하신 첫 번째는 아니다. 그러나 그분 스스로 식사를 준비하시고 먹도록 초대하신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분께서 그들을 위해 만드신 이 첫 준비가 이 중대한 날 그들의 첫 식사, 신성화 하신 그들의 구속자의 교회에서 일꾼들의 새 날에 대한 예징이 된다는 것은 매우 적절하다. “와서 먹어라.” 이는 제자들, 즉 의에 주리고 목마른 이들에게 주게 될 초대장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주님께서 설비해 두셨던 좋은 것들로 채워지도록 배려되고 있다. 그리고 이제는 예외 없이 누구에게나 자유로이 제공되고 있다. 특이한 대목이 있다. “와서 먹어라”고 초대하실 때 “당신은 누구시오?” 라고 묻는 제자가 아무도 없었다는 점이다. 이는 그들이 심오한 존경심으로 그분을 대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그들은 그분의 현존에 너무 위압되어서 신비스런 그분의 모습에 관해 아무도 물을 수 없었다. 그들은 알았음에도 감히 묻지 못했다. 그들은 묻고 싶었지만 감히 말을 뱉지 못했다. 그들은 주님을 알았다. 그러나 그것은 그분의 바깥쪽 나타남으로부터가 아니라 그분이 그들을 위해 수행하신 기적으로부터, 그리고 주변 환경으로부터 알았다. 마치 엠마오로 가고 있던 두 사람에게 그분이 알려질 때도 이와 비슷했다. 즉 그분이 알려진 수단은 그분의 외관, 즉 목소리가 아닌 빵을 떼시는 것으로였다. 기독인의 체험에서 이에 부응되는 어떤 것이 있을까? 바울이 말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부터 아무도 세속적인 표준으로 판단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전에는 우리가 세속적인 표준으로 그리스도를 이해하였지만 이제는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고린도후 5:16). 제자들은 객관적으로든 주관적으로든 세속적 표준으로 주님을 알았었다. 그들은 그분이 육 안에 계셨을 때 그분을 알았다. 그리고 그들 스스로 육적으로 있었을 때 그분을 알았다. 이런 경우는 모든 제자들에게도 한결같다. 그가 육적인 태도만으로 그분을 알게 되는 이상 그는 육적인 표준으로 주님을 알고 있는다. 그러나 그의 마음이 영적 수준으로 될 때 그는 더 이상 육적인 표준으로 주님을 알지 아니하고 영의 표준으로 알게 된다. 그런 다음 그는 그분의 권능, 지혜, 사랑을 수단으로 해서, 그분이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고 뜻하도록 우리 안에서 역사하는 그분을 수단으로 주님을 알게 된다. 그는 신성한 권능을 앎으로 해서 신성한 진리의 바깥쪽 형체를 안다. 마치 이 권능이 심정과 이해성에 영향을 미치는 것에서 신성한 진리를 안다. 그래서 그는 “당신이 누구십니까?” 라고 감히 묻지 않는다. 그는 지금 자기 앞에 나타난 그대로의 진리의 정체에 대해 질문하지 않는다. 육적 표준으로 알았었던 진리를 지금 영적 표준으로 알고 있는다. 진리는 그 자체에 증거를 동반하고 있다. 그는 구원을 위한 하느님의 권능에 대해 알고 느낀다. 이제 이 대목이 아래에서 더 충분히 명백해 지고 있다.
13. “예수께서 오시고, 빵을 가져가 그들에게 주시고, 물고기도 그와같이 주신다.” 그분께 오도록 제자들을 초대하셨던 그분이 이제는 그들에게 다가가시고 있다. 주님께서는 그분 자신을 우리에게 주시기 위해 그분에게로 우리를 끌어당기신다. 하나 됨은 상호성(reciprocation) 없이 결과 되지 않는다. 그분이 우리 안에, 우리가 그분 안에 있는 것이 결합(conjunction)의 법칙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 집에 들어가서 그와 함께 먹고, 그도 나와 함께 먹게 될 것이다” (계시록 3:20).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주신 빵과 생선은 영적인 음식, 신성한 선함과 진리이다. 이는 주님께서 그분의 백성의 영혼, 즉 와서 먹어라 는 신성한 초대를 응낙하는 이들을 먹이실 때 주시는 것들이다.
14. 요한이 상술한 바, “이것은 예수께서 죽은 자로부터 일어나신 후, 그분이 제자들에게 자신을 보이신 세 번째에 해당된다.” 예수가 제자들에 의해 보여진 것을 모두 합한다면 세 번 이상이다. 물론 그분 스스로 보이신 것과 제자들이 보게 된 것을 구분 지어 말하느라 세 번이라는 언급이 있었는지 모른다. 어쨌든 말씀의 언어는 자연적 의미보다 더 높은 의미를 포함하도록 골격이 짜여 있다. 여기서 의도된 셋이란 숫자는 명백히 나타내 보이심의 완성을 표현했다는 것은 의심할 바 없다. 이는 그들의 신성화 하신 구세주, 모든 충만함으로 거하시는 한 분으로서의 예수를 알도록 제자들에게 주신 충분히 그리고 마지막으로 보여주심을 뜻한다. 이는 단지 그분스스로가 하느님-인간이시다는 것만이 아니라, 그분이 그들 안에 있는 모습, 인성의 완전함, 구속과 구원에서 신성화 하신 모습, 그들 안에서 죽은 자로부터 일어나신 모습, 그리고 더 이상 죽지 않으시는 그분의 모습을 보여주신 것을 뜻하고 있다.
15-17. 주님께서 제자들을 먹이신 뒤 상징적 행동을 수단으로 그들을 가르치시고자 의도된 신성한 교훈에로 그들을 이끄신다. “그렇게 그들이 식사했을 때, 예수께서는 시몬 베드로에게 말하신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이들 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 그가 그분에게 말한다, ‘예, 주여, 내가 당신을 사랑하는 것을 당신은 아십니다.’ 그분이 그에게 말한다, ‘내 어린 양들을 먹이라.’ 그분이 그에게 다시 말하신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그가 그분에게 말한다, ‘예, 주여, 내가 당신을 사랑하는 줄을 당신은 아십니다.’ 그분이 그에게 말한다, ‘내 양을 먹이라.’ 그분이 그에게 세 번째 말하신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는 그분이 자기에게 세 번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라고 물으셨기 때문에 슬퍼졌다. 그리고 그는 그분에게 말했다, ‘주여, 당신은 모든 것을 아십니다. 내가 당신을 사랑하는 것을 당신은 아십니다.’ 예수께서 그에게 말하신다, ‘내 양을 먹이라.’” 주님께서 베드로를 통해 그분의 제자들을 가르치시는 일반적 교훈은 마치 그분께서 그들을 먹이셨 듯 그들도 그분의 교회를 먹여야 한다는 것이라고 알게 하려는 듯 비치고 있다. 비록 그분의 명령은 베드로에게 내려졌으나 그렇다고 그분의 명령이 다른 사도들에게 해당 안 되는 것은 아닌바 그 명령은 베드로가 표현한 품성에 놓여진 명령이다.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실 때 수단이 된 이름은 지금 베드로에게 마지막으로 지시하시는 직능에 걸맞은 품질을 지니는 누군가에 속하는 품성을 표현하고 있다. 그 이유가 요한의 아들 시몬은 선행으로부터 파생된 신앙을, 시몬은 듣고 순종함을, 요한(Jonas)은 선행의 상징물인 비둘기를 뜻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지시가 비록 베드로 개인에게 떨어졌긴 해도 그가 받은 임무는 베드로 한 사람에게 국한되는 게 아니라 모두에 해당된다. 그 이유가 그는 신앙 이라는 품위, 또는 지적 측면의 원리를 표현한 인물일 뿐이기 때문이다. 이 품위 또는 원리에 주님의 양떼를 안내하고 자양분을 공급하는 임무가 위탁되어져 있다. 베드로는 진리로 건설된 이들, 신앙 에 강한 이들, 가르치고 싶어하는 경향성이 강한 이들을 표현한다. 그러나 신앙은 사랑으로부터 생명을 가지지 않으면 구원해주지 못하는바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그가 가장 중요한 품위를 소유했는지 묻고 계신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이들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는 질문에 불확실한 게 있다. 그것은 네 형제가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 인지, 또는 네가 지금 종사하는 일시적인 세상 것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 인지에 관해서이다. 베드로의 대답은 간단하고 소극적이다. “예, 주님, 아시는 바와 같이 저는 주님을 사랑합니다.” 그의 사랑의 고백에는 어떤 과장도 없이 주님 자신에 직접 호소하고 있다. 그야말로 어느 누구도 주님을 사랑하는 자기를 증거해 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고백이다. 그 이유가 주님이 더 잘 아시기 때문이다. 어쨌든 베드로가 세 번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하리라고 예견해 말하셨을 때 베드로가 사용한 언어 태도와 지금 구사하는 언어는 얼마나 다른지 모른다. 그 당시의 경우 그는 지니지도 않은 불변함을 떠벌렸다. 지금 그는 자기가 소유한 사랑을 자랑하지는 않고 있다. 그의 사랑에 대한 보증을 위해 그는 지금 자기 심정에 주님 사랑을 이식하신 분, 자기가 자신을 아는 것보다 더 자기를 잘 아시고 계신 분, 이런 것을 쓴 경험으로 배우게 하셨던 분께 자기가 주님을 사랑한다고 호소하고 있다. 예수께서는 그의 호소에 대해 그에게 이런 큰 의무, 그보다는 이런 드높은 특전, 즉 “내 어린 양을 먹이라”고 위탁하심으로 응답하시고 있다. 이것을 뾰족한 수준에서 말하면 교회의 성직자들에게 위촉된 임무이다. 물론 이것은 그들 만에 한정된 임무는 결코 아니다. 그 이유가 모든 사람은 서로서로 돌보고 섬겨야 하기 때문이다. 반면 보다 내적 측면의 의미에서 모든 사람은 주님께서 각자의 마음에 쌓아두신 것, 즉 주님께서 아껴두신 순진과 선행을 먹여 키우고 보존하도록 요구되고 있다. 순진과 선행이 어린 양과 양으로 의미되고 있다. 이것들이 그분의 백성의 마음 안에서 원리로서 간주되고 있든지, 어느 정도라도 적극적인 존재로서 간주되고 있던지 어쨌든 그것은 주님의 것이다.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던진 질문은 세 번 반복되고 있다. 세 번씩이나 주님께서는 베드로에게 그분의 양을 먹이고 보호하도록 엄숙한 임무를 놓으시고 있다. 세 번 이르시는 말이 전부 동일하게 번역되어 있긴 하지만 두 가지 다른 단어가 사용되었다. 첫 번째에서는 먹을 것을 주라는 것(feed)이고, 나머지는 돌보라(tend)는 것이다. 베드로가 세 번 질문 받은 것은 교회의 시작부터 마지막까지의 완전한 시기를 의미한다. 그 이유는 셋이란 숫자가 완성, 충만 됨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베드로가 질문 받아진 세 번째란 교회의 끝을 의미하는데, 여기서 베드로는 주님께서 세 번씩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시는 바람에 슬퍼졌다고 말해지고 있다. 세 번이란 단어가 교회의 시작부터 끝까지에 이르는 모든 시기를 의미하듯, 그 단어는 교회의 계속적이고 하강하는 상태를 의미하고 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맨 먼저에서는 베드로에게 그분의 어린 양에 먹을 것을 주라고 하시고, 그 다음 그분의 양에 먹을 것을 주라고 말하신 것이다. 주님께서 처음 말하신 어린 양(lamb)은 순진의 선 가운데 있는 이들을, 두 번째 말하신 양(sheep)은 선행의 선 가운데 있는 이들을, 세 번째의 양은 신앙의 선 가운데 있는 이들이다. 개인적인 교인 차원에서 이해해본다면, 이 대목이 우리를 가르치는바, 이는 주님의 신성한 사랑의 열렬한 바람 이다는 것, 즉 그분의 자녀들은 그분께서 그들의 심정과 지성에 이식하신 순진, 선행, 신앙에 자양분을 공급하고 보호해주어서 이것들이 그분의 양떼로 잘 성장하도록, 그리고 그분의 양우리에 가져다 놓이도록, 그들 고유의 목자로서 그분 아래 있게 되기를 간절히 바래시고 있다는 말이다. 혹 어떤 이들은 세 번 질문한 주님의 의도는 그가 세 번 주님을 부정했기 때문에서라고 말하기도 하지만 온유하신 주님께서 그가 상심하라고 그의 죄과를 들추어내시는 분이 아닐 것은 굳이 설명할 이유가 없을 것이다. 셋이란 숫자의 의미에 위 두 사건이 바탕을 둔 것은 우연의 일치일 뿐이다. 전자는 옛 교회 처방에서 주님이 충분히 부정된다는 것을 표현한 것이고, 후자는 새로운 교회 처방에서 주님이 충분히 인정된다는 것을 표현한 것이다. 각 개인의 거듭남에서도 옛 사람에 의한 것과 새 사람에 의한 것도 위와 같다.
18,19. 주님에 의해 언급된 세 번이란 표현이 베드로가 표현하는 신앙에 관한 교회의 연속되는 시기들을 의미했는바, 주님께서는 교회의 시작 시기와 마지막 시기에 있는 신앙의 다른 품질을 묘사하시고 있다.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그의 임무를 다 말하신 후 이런 놀랄만한 말을 그에게 전하시고 있다. “‘참으로, 참으로, 내가 너에게 말한다, 네가 젊었을 때, 너는 네 자신 허리띠를 매고 네가 원하는 쪽으로 걸었다. 그러나 네가 늙었을 때, 너는 네 손들을 내뻗을 것이다, 그리고 또 다른 자가 너에게 허리띠를 맬 것이다, 그리고 네가 원하지 않는 쪽으로 너를 운반할 것이다.’ 이것을 그분은 이야기하셨다, 이는 어떤 죽음으로 그가 하느님을 신성화 할 것인지를 의미하고 있다. 그분이 이것을 이야기하셨을 때, 그분은 그에게 말하신다, ‘나를 따르라.’” 글자적 의미 차원일 경우 이 대목은 베드로 스스로 이해했던 것(베드로후1:14)같이 그의 순교와 관계되고 있다. 그러나 영적 의미에서 이 구절들은 교회의 시작과 끝에 있는 신앙의 상태와 조건들과 관련되고 있다. 젊은 시기의 베드로는 교회의 초기에 있는 신앙 같은 것이다. 노령기의 베드로는 교회의 말기에 있는 신앙 같은 것이다. 이렇게 이해해보면 이 구절이 신앙의 상태에 관해서, 그리고 초기 때와 마지막 때의 인간 이해성에 관해서 얼마나 비유적으로 묘사된 대목인지 놀랄만하다. 베드로가 젊었을 때 그는 스스로 띠를 매고 자기가 뜻하는 대로 걸었다. 그가 늙게 되었을 때 그는 팔을 벌리고 다른 사람이 그에게 띠를 매어 그가 뜻하지 않는 곳으로 끌고 갈 것이다. 전자는 자유롭다는 생각이 들게 하지만 뒷부분에서는 속박되었다는 생각을 갖게 한다. 교회의 초기 시절에서 이해성은 계발되고 두려움 없는 신앙의 안내 아래 자유로이 행동한다. 교회의 말기 시절에서 이해성은 소경 되고 겁많은 신앙의 암시에 굴복되어 있다. 교회 초기, 신앙이 젊었을 때 교회는 스스로 띠를 띠고 본인이 원하는 데로 걸었다. 즉 교회가 진리를 자유로이 탐사하고 획득한 다음 자유로이 결정해서 그것에 따라 살았다는 말이다. 이렇게 믿어지고 행동된 것은 주님으로부터의 신앙이고 행동이다. 이것의 봉사는 완전한 자유이고, 이것의 사랑은 걱정을 몰아낸다. 그러나 속방 당함으로부터 믿어지고 행동된 것은 세상과 자아로부터인 바, 이것의 봉사함이란 갇힌 상태이고 그들의 두려움은 사랑을 몰아낸다. 이것이 노령기의 베드로가 팔을 벌리고 다른 사람이 띠를 매는 것으로 묘사되고 있고, 이것은 교회의 말기에서의 신앙의 조건과 상태를 기술한 것이다. 그런 다음 마음의 실질적 능력과 지적능력은 인간의 의지에 종속된 상태에 있다. 그리고 마음은 신성한 진리의 자유 안에 보존되는 대신 인간 오류라는 속박 아래 놓여지고 만다. 이런 상태는 이해성이 신앙의 권위 안에 붙잡혀 있게 되는 것, 신학적 격륜(maxim)의 작동으로 본보기화 되어 있다. 참으로 이 대목은 마치 신앙에 모든 권능이 서임 되어 있는 듯 하게 들리게 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신앙은 인간 견해에 폭정을 가하는 이름밖에 더 아니고, 신앙의 이름 아래 구호를 외친다. 이리하여 마음이 기독교의 자유를 박탈할 때 마음의 자질은 강압 당하고 그릇된 지시를 받고, 그 삶은 하느님의 의지가 아닌 인간의 뜻에 의해 결정되고 만다. 결국 신앙은 제가 원하지 않는 쪽으로 걷게 된다. 이는 신앙이 젊고 자유로웠던 때, 사도들의 시대 때의 조건과 폭넓게 다른 신앙이다. 신앙이 인간의 의지와 지혜에 속박된 상태에 놓일 때 그런 상황의 신앙에 신앙이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을까? 신앙이 사멸하면 그 대신 가짜가 그 자리에 들어앉는다. 그러나 신성한 자비는 교회의 이 처방에서 신앙이 종료될 때 또 다른 교회 처방에서 새로워지게 해서 그것의 죽음까지도 하느님을 영광되게 하는 수단이 되도록 인간의 마음 안에서 신성한 진리를 드높이도록 설비하신다. 이와 같은 것이 베드로의 끝에 관한 주님의 예견이었다. “예수의 이 말씀은 베드로가 장차 어떻게 죽어서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게 될 것인가를 의미하신 것이다.” 죽음에는 두 측면이 있다. 그러므로 두 의미가 있다. 자연적 측면에서는 육체의 붕괴이다. 영적 측면에서는 육체로부터의 이탈(emancipation)이다. 교회의 경우도 이와 같다. 이 측면에서는 교회의 끝이고 저 측면에서는 교회의 시작이다. 이를 암시하신 주님이 베드로에게 “나를 따르라”고 말하셨다. 그분의 가르침을 따르고 그분이 보이신 본보기를 내 발걸음으로 삼아 걸을 때 신앙은 주님을 따른다. 베드로에 대한 주님의 이 명령은 이런 요구, 즉 신앙은 그분 자신 외 어느 것도 따르지 말라는 요구도 포함하고 있다. 그이유가 그분만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바, 그분을 쫓아 걷지 않는 신앙은 어둠 가운데 걷는 격이기 때문이다.
20,21. “베드로가 돌아다보았더니 예수의 사랑을 받던 제자가 뒤따라오고 있다. 그 제자는 만찬에서 그분의 가슴에 기대었고, 주님에게 당신을 배반하는 자가 누구입니까? 라고 말했던 제자이다. 그를 보는 베드로가 예수에게 말한다, ‘주여, 이 사람은 어찌 될 것입니까?’” 앞 사건은 베드로와 관계되고 이 사건은 요한과 관련이 있다. 이 두 제자는 종교의 두 필수 요소, 그러므로 교회의 두 본질 되는 요소를 표현했다. 현재 사건에서 그들에 관해 기록된 것은 주님에 대한 그들의 관계에서, 그리고 후기 시대에 그들에게 닥치게 되는 것도 관계되고 있다. 기록된 상황은 매우 특이한 것이고 엄숙한 하나의 역사로 도입되는 특별한 측면이 있는데도 그 자체로 보면 크게 중요한 듯 보이지 않는다. 즉 이 대목은 신앙 이든, 실제에 관해서 이든 어떤 교훈도 가르치지 않는 것 같고, 품성 면에서도 눈에 띄는 예언적 모습이 아무 것도 없다. 더구나 그것이 상징적인지 여부도 비치고 있지를 않는다. 그러나 이미 살핀 바와 같은 베드로에 관련해 관조한다면 깊은 교훈이 있다. 베드로는 신앙에 대한 예징(type)이고 요한은 사랑 또는 선행에 대한 예징이다. 여기서 요한은 자신을 과거 만찬에서 그분의 가슴에 기대고 그분을 배반할 자가 누구냐고 물었던 그분의 사랑을 받던 제자로서 기술해놓고 있다. 예수께서는 제자들 안에 있는 그분으로부터 파생된 그 사랑을 사랑하신다. 사랑은 그분과의 결합을 준다. 이것이 그분의 가슴에 놓여 있다. 그리고 사랑은 적들의 수중에 진리를 팔아 넘기는 것에 관한 계시를 신성한 지혜의 입술로부터 끌어낸다. 베드로는 신앙에 관한 예징이다. 여기서 베드로와 요한은 둘 다 예수를 따르는 것으로, 베드로는 명령에 의해, 요한은 자발적으로 따르는 것으로 표현되었다. 베드로는 뒤돌아서 요한이 따라오는 것을 보고, 주님께 묻되 그의 동료 제자를 앝보고 시기하는 듯한 어떤 암시를 풍기는 표현을 써서 묻고 있다. 베드로의 돌아섬은 신앙이 스스로 주님으로부터 돌아서서 뒤를 쳐다보는 것을 상징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래서 신성한 지혜가 우리에게 말한다. 쟁기를 붙잡은 채 뒤돌아보는 사람은 하늘나라에 적합치 않다는 것이다. 주님을 따르라는 명령이 있은 직후 요한을 경시하면서 뒤돌아보는 베드로가 의미하는바, 이는 교회가 개시된 후 머지않아 신앙은 주님으로부터 뒤돌아서고 선행을 가볍게 여기거나 경멸할 것이라는 것이다. 이런 경우가 사실이 된 것은 잘 알려져 있다. 초기 교회 지도자들은 신앙에 관한 그들의 온전함을 이내 잃기 시작했다. 더불어 상호간의 사랑과 선행이라는 따뜻함도 상실되기 시작했다. 동시에 진리에 관한 논쟁, 특히 주님에 관련된 진리를 토론하기 시작하면서 그들 신앙의 유일한 대상이요 중심 되는 그분으로부터 돌아서고 서로간의 말다툼 속에서 선행은 경시되고 있었다. 그래서 이 대목은 참 교회의 멤버라고 자신을 생각하는 모든 이들에게 주는 엄숙한 교훈을 포함하고 있다. 교회가 참된 교회이고, 교인이 교회의 참된 멤버가 되는 것은 그들이 주님을 꾸준히 찾고 따를 때, 신앙과 사랑이 선한 일 안에서 하나 될 때 뿐이다.
22. 베드로의 질문에 주님께서 대답하셨다.“내가 올 때까지 그가 체류하기를 내가 바란다면 그것이 네게 무엇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 이 대목의 여건이 특이한데 비해 위 대답은 특이한 것 같지가 않다. 이 대답이 알려주는 내적 의미가 없다면 글자적 의미로는 질문에 대해 만족 할 만한 설명이 없는 것 같다. 주님의 오심은 하늘의 구름 안에서의 그분의 오심이다. 그분의 두 번째 강림은 끝을 맞게 되리라고 그분이 예견하셨던 것 대신에 새로운 교회를 일으키시는 것이다. 요한에 관한 주님에 예언적 선포가 발표하는바, 사랑과 선행에 관한 어떤 것은 주님이 오시는 때까지 교회 안에서 보존되리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오류와 부패함이 극성을 부리고, 신앙 자체가 주님에게 등을 돌리고, 설사 신앙 자체가 죽음에 놓여지고 만다 해도 선행의 어떤 것은 주님이 두 번째 오실 때까지 생존하리라는 말이다. 주님께서 본문 외의 다른 곳에서 가르치는 경우가 본문의 교훈일 것이다. 그분이 말하신다. “사람의 아들이 올 때 땅 위에서 신앙을 발견 할까?” 이는 아무 신앙도 발견하지 못할 것이라는 말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분은 사랑과 선행이 완전히 소멸한다고는 말하시지 않는다. 이에 관해 그분이 말하신다. “죄악 때문에 많은 사람들 속의 사랑이 찬 상태가 될 것이다.” 많은 사람들과 더불어 사랑이 차진다 해도 소수의 사람들과 더불어서 따뜻함이 보존되도록 설비되어 있다. 그 이유가 선행에 관해 아껴 두신 것 없이는 새로운 교회는 시작될 수 없기 때문이다. 본문의 상황 안에는 또 다른 진리가 포함되어 있다. 교회가 종말을 맞이하면, 그 다음 주님께서 건설하시는 교회는 또 다른 처방, 더 높은 처방으로 이어진다. 교회에 관한 이 두 처방은 베드로와 요한 사이의 특징있는 차이점과 같은 동일한 상이함이 있다. 기독교회에 관한 첫 처방은 사도 베드로의 교회였다고 말할 수 있을는지 모른다. 그것은 신앙의 교회였다. 진리가 교회에서 우위적인 힘을 가졌고 신앙이 교회의 중심 되는 품위였다. 그렇게 되는 것은 필요한 조치였다. 진리의 각 한 팔이 세상의 오류와 대적하는데 요구되었고, 교훈적인 지혜가 교회를 가르치도록 요청되었었다. 교회의 두 번째 처방은 사도 요한의 교회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사랑의 처방이다. 추측해 보는 바, 요한은 이런 연유로 두 번째 처방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계시록을 쓰도록 선택되었으리라는 추측이다. 그러므로 베드로가 첫 처방이었듯 요한은 두 번째 처방의 사도로 상징적이 되어 주님이 오실 때까지 체류하게 되었다. 일반적 교회 측면의 처방에 관련된 위와 같은 진리 외에도 개개인이 제자 된다는 측면에서도 교훈을 담고 있다. 교회 측면에서 처럼 개인 측면에서도 진리는 선에 앞서 진행되고 신앙은 선행에 앞서 온다. 참으로 제자인 사람들은 베드로의 명령과 요한의 약속을 받아야 할 것을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다.
23. “하여 이 말하심이 형제들 사이에 널리 퍼졌다, 즉 이 제자는 죽지 않으라라는 소문이다. 허나 예수께서는 그에게 ‘너는 죽지 않을 것이다’ 고 말하셨던 게 아니라, ‘만일 내가 올 때 까지 그가 체류하기를 바란다면, 그것이 네게 무엇이냐?’ 하고만 말하셨을 뿐이다.” 주님의 말씀은 믿는 형제들 사이에서 이런 의견, 즉 요한은 주님이 오시는 것을 보기 위해 살아있을 것이고, 한편 베드로는 그분을 따라 그의 스승처럼 십자가에서 죽어 진리에의 순교자가 되리라는 의견이 분분했다. 복음서 기자는 이런 항간의 오류를 쓸어내기 위해 주님께서 자신에 관해 실제 말했던 것을 반복해 놓고 있다. 그가 말한 것은 자연적 의미로만 간주하면 확실하고 충분하게 이상야릇한 것이다. 예수께서는 요한이 죽지 않으리라고 말하시지 않고, 반면 만일 제자들이 주님이 오시는 때를 알았었다면 그것과 동등한 뜻을 염두에 두어야만 한다는 것을 말하셨다. 형제들 사이에 떠돈 소문은 글자대로는 틀렸으나 주님의 말씀의 영의 측면에서는 맞는 말이다. 그럼에도 그들이 요한에 관해 믿게 된 것은 주님이 말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신성한 언어가 특수한 의미를 가지고 있듯이 이 사건의 경우도 마찬가지로 간주해야 한다. 요한의 체류(John’s tarrying)를 표현하기 위해 사용된 원어는 이 뜻 외에도 머무르다(abiding), 거주하다(dwelling), 그리고 명사로서 주거(dwelling), 저택(mansion)도 뜻하고 있다. 요한복음 1장 38절을 보면, 세례자 요한의 제자 중 두 명이 예수께 “어디서 묵고 계십니까?”라고 물었고, 그들에게 와서 보라고 초대되었을 때, “그들은 그분이 주무시는 곳에 와서 보고 그 날 그분과 함께 머물렀다.” 주님께서 약속하신 바,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말을 지킬 것이고 나의 아버지는 그를 사랑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에게 와서 그와 함께 우리의 처소를 만들리라” (요한 14:23). 천국적인 삶을 따르려고 성실히 노력하는 이들에게, 비록 각자의 성취가 차이가 있다 해도, 그들에게 이런 행복한 보증, “내 아버지 집에는 많은 저택들이 있다” (요한 14:2)는 보증을 주시고 있다. 그분이 오실 때까지 사랑 받은 제자가 체류하기를 그분이 바라신다고 하는 요한에 관련된 주님의 신비스런 말씀은 이런 약속을 포함하고 있다. 비록 신앙이 실패할지라도 선행은 끝까지 생존하리라는 것이다. 교회가 황무지로 된다 해도 선행은 곤경의 때에 피난처로서 지낼 곳을 발견하리라는 말이다. 또한 체류함 또는 거처를 정함(dwelling or abiding)이라는 단어는 의지 안에 선함이 거처를 두겠다고 고집 하는 상태도 표현한다. 이것이야말로 본문에서 묘사되는 것에 꼭 맞는 상태이다. 어쨌든 많은 교회들이 진리의 뒤집음과 추론으로 황폐될는지 몰라도 선에 관한 어떤 것이 순박한 사람의 마음 안에 보존되고 있다. 주님께서 이 마음에 평화의 길로 선행의 발을 안내하기 위해 새 빛을 주시고자 오실 때 진리는 보존된 이 선 위에 접목될 것이다.
여기서 주님의 말하심과 행동하심에 관한 요한의 기록이 끝나고 있다. 그리고 이 결론은 희망과 위로로 가득차 있다. 이것은 시작을 쳐다보는 끝이고, 이것은 그분의 첫 강림의 교회가 두 번째 강림의 교회로 건너갈 수 있기 위해 보존되는 수단을 밝히 알게 하고 있다. 깊은 구렁에 다리를 놓는 것은 선행이다. 선행은 길을 만든다. 이 길을 수단으로 주님께서는 옛 것으로부터 새 것으로 건너신다. 선행의 선 가운데 있는 이들은 새로운 처방의 핵을 형성하기 위해 건져지는 남겨진 자, 사방에서 모은 뽑힌 자들이다. 이들은 주님의 오심에서 그분을 영접한다.
24. “이 제자가 이런 것들을 증언하고, 이런 것들을 적었다. 우리는 그의 증언이 진실이다고 알고 있다.” 요한의 선포, 예수가 사랑하셨던 그 사람, 만찬 때에 그분의 가슴에 기대었던 그가 이 일들을 증언하는 제자이다는 선포는 사랑의 예징이었던 그 사람에 의해 씌어진 바대로의 주님의 생애에 관한 역사는 믿는 자의 심정에서 사랑이라는 품위를 생산하고 강화시켜 주는데 아주 적합한 국면에서 주님의 품성과 생애가 표현되었다는 말이다. 이것은 모든 사람에게 계시된 바로서의 요한의 복음에 대한 특이하고 드높일 품성이기도 하다. 이외 이런 사실은 각자에게도 특이하게 응용되는 점이 있다. 우리의 구원이 결과 되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우리를 위해 씌어졌어야 할 뿐 아니라 우리 안에서도 그러해야 한다. 요한의 이 복음서, 사랑의 이 복음서는 사랑이 우리의 이해성에 사랑의 진리를 증언하고, 우리 심정에 그 사랑의 진리를 새겨야 우리 안에서 복음이 되어 질 수 있다. 이런 다음에 우리는 그의 증언이 참되다는 것, 예수 안에 있는 참 진리를 알게 된다. 사랑은 진리의 가장 높은 증거이다. 이해성이 이 증거를 인정할 때 우리는 그 증거가 참된 것임을 믿는다. 심정이 그 증거를 승인할 때 우리는 그 증언이 참되다고 알게 된다. 지성이 주제를 논리적으로 생각해내 결론을 맺게 하는 자질인 것은 틀림없다. 그럼에도 이해성 자체는 예, 아니오를 말하는 의지의 영향을 받고 있다. 의지에 의해 나누어 받는 긍정적, 부정적 경향성이 우리의 모든 지적 작용 안에 있다. 이것은 특히 도덕적, 종교적 경우에서 더욱 두드러지는 바, 우리의 이해성과 의지가 하나 되어 진리에 동의해야 우리는 그것이 진리임을 아는 것이 된다. 그래서 사도는 말한다. “그리고 우리는 그의 증언이 참되다는 것을 알고 있다.”
25. “예수께서 행하신 많은 다른 일들 역시 있다, 만일 그것들을 낱낱이 기록하려 한다면, 세상 자체 까지도 씌어져 있을 책들을 담을 수 없을 것이라 헤아린다.” 이 구절은 수많은 글로 적히지 않는 주님의 생애를 표현한 것이다고 생각되어지고 있다. 의심할 것 없이, 복음서 기자가 기록한 것들 외에도 그분의 공적 생애 동안 만 가늠해 보아도 많은 일들이 주님에 의해 말해지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신성한 지혜의 보물 안에 감추여 있는 깊은 것들 중의 하나이다. 육을 입은 말씀에 의해 말해지고 행해졌던 것 만큼이나 계시로 충만된 씌어진 말씀, 말씀이 육이 된 것의 말로 된 형체인 씌어진 말씀 안에 기록되지 않았으리라는 것이다. 그렇다고 주님이 말하셨고 행하셨던 것들이 잃어진 것은 하나도 없다. 그분이 말했던 모든 단어, 그분이 수행하셨던 모든 일은 천국 안에 씌어져 있고 그분 자신의 인성 안에 새겨져 있다. 그 이유는 그것은 그분의 구속하심과 신성화 하심의 일부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말씀이 알려지도록 만든 이런 영원한 실재 안에 항구적으로 고정되었다. 신성화 된 말씀은 지상에서 있었던 주님의 위대한 일의 결과들을 그것 안에 적어 놓았다. 그리고 말씀으로부터 지금은 천국들의 천국까지의 모든 세계들, 모든 천국들 넘어 까지도 신성화되었다. 신성한 영향은 직접적으로, 그리고 말씀을 통해 밝히 알리는 두 방법으로 천국 안의 교회에, 이로부터 지상의 교회에 내려와 그들이 하나 되게 하면서 주님의 신성한 인성의 완전한 형상으로 하나를 만든다.
“아멘”은 교회의 응답이다. 더불어 이는 사랑 받은 사도가 인류에 밝히 알리는 선택된 도구였다는 위대하고 위로를 주는 진리들에 대한 인간 심정의 응답도 되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