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21장 해석

21

이런 비평가의 견해도 있다. 원래의 요한의 복음서는 앞 장의 마지막 구절로 끝난다는 것, 이 장은 사도 자신에 의한 보충물이든지, 또는 어떤 사람의 손으로 만들어져 추가된 것 이든가 한다는 견해이다. 이에 대한 근거로 이 장은 다른 부분에 있는 통상적인 요한의 표현 방법과 경미하지만 차이가 있다는 것, 무의미한 것으로 추정된다는 것, 내용물이 시시하다는 것을 제시하고 있다. 이와 견해를 달리하는 비평가들이 있다. 요한복음의 모든 사본에서 이 장이 발견되고 있다는 것, 교회의 가장 영적이고 지적인 천국아버지께서 이 장에 상징적인 해석을 주셨다는 것이다. 이들이 요한의 복음서의 이 부분에 관해 위와 같은 견해를 발견한 이유, 이 복음 그리고 말씀의 다른 부분의 경우에서도 마찬가지지만 그 말씀이 진짜인지를 판정하는데 크게 영향을 주었거나 결정의 근거가 된 것은 그들이 말씀의 영성을 떠나서 글자의 의미와 구조에 집중적으로 초점을 맞추는 것이다. 어쨌든 거룩한 성서 본문을 연구하느라 일생을 헌신한 학자들은 경의를 받아 마땅하다. 동시에 우리는 더 수준 높은 비평가의 주장, 즉 분석적이 아닌 종합적인 측면에서 성서를 관조해야 한다는 주장도 수용해야 한다. 위 비평 모두는 거룩한 성서 본문을 완성해 주는 견해가 요구된다는 것이다. 위의 주장들 어느 한쪽만 가지고는 성서 본문의 진짜 여부를 가릴 수 없는바 양측의 증거를 병합해서 균형을 맞추어 보아야 할 것이다. 비록 이 장의 세부사항에 관한 우리의 설명이 초기 성서 주석자의 것과 다른 양상을 띄운다 해도 이 복음서의 결론을 맺는 이 부분, 단지 글자만으로 볼 경우 무가치한 것을 사도들이 기록한 듯 여길는지 모르는 이 대목에서 교훈적인 유익한 내용을 감지하리라 믿는다.
1. “이 일들 후에 예수께서는 디베랴 바다에서 제자들에게 다시 자신을 보이셨다, 그리고 이는 그분이 자신을 보이신 경위이다.” 요한에 따르면 이번에 주님께서 제자에게 나타나심은 세 번째요 마지막이다. 이 광경은 애착이 넘치는 아름다움이 있는데 그렇다고 교훈적 내용이 그보다 덜 한 것도 아니다. 디베랴 바다, 이곳은 예수께서 첫 제자들에게 그분의 모습을 처음 나타내시고 그들의 천한 직업으로부터 사람의 어부가 되도록 부르셨던 곳이다. 이제 이곳은 그들에게 마지막 그분의 모습을 나타내셔서 그들과 그분의 언약을 확증하시고 그분의 말씀을 섬기는 자로서의 그들에게 그분의 교훈과 지시를 하사하신 곳이 되었다. 바다는 폭넓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 바다는 세상을 의미하고 말씀을 의미한다. 세상이란 죽지 않는 영혼으로 구성된 세상을 말하고 말씀이란 영원한 진리들로 구성된 말씀이다. 말씀은 세상이 만들어지고 구속하게 된 그분으로부터 온 계시이다. 그리고 인간에게 잘 숙박되도록 배려되어 보내진 그분의 신성한 뜻과 지혜이다. 그러므로 사람의 어부가 될 사람은 하느님의 말씀에 대해 더욱 특별한 수색자이어야 한다. 그 이유가 말씀 속의 진리들은 영혼을 세상에서 끌어당겨 하느님께 이르게 하는 수단이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몸소 그의 제자들에게 디베랴 바다에서 그들이 세상으로부터 인간을, 말씀으로부터 진리를 끌어올리기 위해 어떻게 반드시 진행되어야 하는가를 보여주셨다. 그야말로 복음의 선교라는 위대한 일에 이제 막 진입하는 이들로서의 그들을 가르치시기 위해 그분이 고안하셨던 교훈을 보여주셨다. 물론 이 사항은 본문의 제자 외에도 모든 제자와 관련되는 교훈이다. 모든 사람은 제각각의 길을 가면서 어부가 되어져 있다. 참된 모든 제자는 자신의 교훈을 받기 위해, 자신이 사람의 선생이 되든 그렇지 않든지 말씀에서 진리를 끌어내야만 한다. 말씀은 종교적 진리의 근원이다. 에스겔이 보았던 새 성전의 환상에서 성전 문지방으로부터 흐른 물은 그 물이 닿는 곳은 어디에든지 생명을 실어다 주어서 바다를 치료하여 많은 물고기가 우글거리게 했다(47장). 이 환상은 주님의 오심에서 그분에 의해 건설되는 교회를 묘사하고 있다. 그리고 성전 문턱에서 흐르는 물은 마치 계시록에서 말해진 하느님과 어린 양의 옥좌로부터 흐르는 생명수의 순수한 강처럼 영원한 말씀 속의 영이다. 이것이 씌어진 말씀으로 흘러 내려 정도를 벗어난 인간이 더럽혀 놓은 씌어있는 말씀, 중독 되게 한 인간의 썩은 것들을 정제한다. 그리고 그 안으로 새 생명과 건강을 실어다 주는바, 즉 말씀의 진짜 진리들을 영성화 한다. 그 이유가 교인을 훈육하고 훈도 함이 영적 어부이기 때문이다.
2. 이제 복음서 기자는 예수께서 자신을 보이셨던 주변을 살피고 있다. “시몬 베드로, 그리고 디두모라 불리는 도마, 갈릴리의 가나 사람 나다나엘, 세배대의 아들들, 그리고 그분의 제자들로부터의 다른 두 명이 함께 있었다.” 일곱 제자가 거기 있었다. 일곱은 거룩한 숫자이다. 일곱 명이 함께 있다는 것은 그들이 하나 되고 하모니를 이루고 있다는 것을 표현한다. 일곱 명중 베드로와 도마는 부정했고 나머지 사람은 믿지 못했었던 경력이 있다. 이들이 먼저 거론된 것은 마치 신실하고 깊은 회개로 얼마나 행하여질 수 있는가를 보여주기라도 하는 듯 보인다. 더불어 신앙 이 베드로로 표현되는바 신앙은 위 일곱 품성을 이끄는 품위이라는 것도 보여주고 있다. 그 이유가 모든 경우에서 첫 번째 언급되는 사람은 누구든지 전체에 품격을 주기 때문이다. 여기서의 시리즈는 첫째가 베드로, 쌍둥이라 불리는 도마, 갈릴리 가나 사람 나다나엘 인데 이들은 의지 안의 신앙 , 이해성 안의 신앙 , 그리고 생활에서의 신앙 을 표현한다. 그 다음 세베대의 두 아들은 내적 인간 안에서 하나 되어 있는 선행과 신앙을 표현한다. 그리고 이름이 거론되지 않은 나머지 두 사람은 외적 인간 안에서 하나 된 선행과 신앙을 표현한다. 예수께서는 세 번째 나타나심을 이들에게 만드셨는 바, 이는 우리에게 위 원리들이 마음 안에 함께 존재하고, 마치 위 제자들이 이번 경우에서 가졌던 것같이 한 가지 목적 즉 거룩한 생활에 사용하려고 말씀으로부터 교훈을 끌어올리려는 목적으로 활성화 될 때 주님은 현존하시어 자신을 명백히 보이신다는 것을 가르치기 위해서였다. 이런 목적이 지도자격인 제자 베드로에 의해 나머지 사람들에게 하는 말 속에 표현되어 있다.
3. “시몬 베드로가 그들에게 말한다,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간다, 그들이 그에게 말한다, 우리 역시 당신과 함께 간다. 그들은 가서 즉시 배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그 밤에 아무 고기도 잡지 못했다.” “베드로가 말한다”란 베드로로 표현된 것인 의지 안의 신앙 으로부터 실시되는 심사숙고함을 뜻한다. 많은 경우에서 베드로는 대변인이었는데 아마 지금의 경우가 대변인 역할을 가장 잘 감당하고 있다고 보인다. 그 이유가 지금까지 제자들은 사람의 어부라는 것을 결코 실감해보지 못했지만 이제 그런 어부가 되려는 찰나에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의 행동은 지금까지 그들이 불완전하게 이해했고 수행했던 영적 일의 예징이 되어주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은 예수께서 신성화 되셨고, 세상의 복음화, 인간 영혼의 거듭남이 마치 새로이 시작되듯 움트고 있다. 어쨌든 이런 운동은 제자들이 그리스도의 왕국이 무엇이며, 그들이 전파할 것이 무엇인지 이해해야 만 가능해 있다. 지금까지, 지금조차도 그들은 왕국의 영적 본성을 알지 못했다. 그리고 그 나라 안으로 가져다 놓이게 될 이들 안에서 결과 되어야 하는 영적 변화도 전혀 알지 못하고 있다. 그런 상태를 본문이 적절히 표현했는데, 그것은 그들이 갈릴리 의 어두운 바다에서 물고기를 잡고 있는 밤으로 표현되었다. 그들이 수고한 결과는 그들의 고기잡이에 관한 것과 같다. 즉 그들은 밤새워 수고했지만 잡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생명 있는 진리의 저장소 라는 측면에서의 말씀에 관련해서 이것을 관조해보자. “나는 고기를 잡겠소”란 영혼의 삶을 지탱시켜주는 진리를 말씀으로부터 획득하고 싶다는 기독 제자의 바람을 표현한 것이다. 신앙 이 말한 이 바람은 다른 기독 품위와 상호 협조하고 동시에 발생되고 있다. 어쨋든 본질적으로 보면 이해성의 자극이다. 그들이 수고했던 밤은 유대교회의 밤이었고, 이런 상태는 제자들이 바다에 던진 그물 안으로 어떤 것을 끌어당기는 일을 어렵게 했다. 그러나 밤은 교회의 상태일 뿐 아니라 그들 자신의 상태도 묘사하고 있다. 그들의 마음은 복음이라는 하늘의 처방에 직, 간접적으로 희미한 상태였다. 열매 없는 노동의 이런 밤은 기독 제자들에게 공통되는 경험 중 하나이다. 그리고 그것은 참 빛이신 주님이 사라지셨을 때, 또는 자신 스스로의 능력과 총명으로 해보겠다고 할 때 그 사람 스스로 발견하고야마는 정신적 희미함이라는 상태이다.
4. 이제 위 상태에 대한 밝은 면모이다. “지금 아침이 왔을 때, 예수께서 해안에 서계셨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분이 예수이셨음을 몰랐다.” 지금까지 우리는 주님과 분리된 상태의 제자들, 그들 스스로 행동하는 제자들, 밤 가운데 있는 제자들을 보았었다. 여기서 우리는 주님과 함께 한 제자, 제자들과 함께 하신 주님, 그분의 직접적인 지시 하에 그들이 행동한 결과를 보게 된다. 이른 아침, 즉 태양이 아직 떠오르지 않고, 보여지지도 않는 아침, 그러나 대기를 통해 산꼭대기에 빛이 뿌려지고 있는 이른 아침이란 이런 마음의 상태, 즉 하느님의 사랑이 심정 안에 뿌려졌으나 진리의 빛은 그 강함이 아직 부상되지 못한 채 신앙의 눈에 보이고 있는 마음의 상태를 상징한다. 이런 상태가 지금 예수께서 호숫가에 서 계셨을 때의 아침이었다. 해안가는 땅과 바다의 경계선이어서 언제나 그 선이 변화하는 곳이다. 그래서 선과 진리가 만나는 곳인 마음의 외적 또는 감각적 부분을 표현한다. 그리고 이를 말씀에 관련시켜보면 해안가란 선과 진리의 원리가 합해지는 곳인 외적 또는 글자적 의미를 표현한다. 여기에서 주님이 제자들에게 나타나시되 자기들의 영적 삶을 받쳐 줄 생명 있는 진리를 말씀으로 끌어올리려 했지만 성공하지 못하고 있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시고 있다. 이런 경우에서 주님은 보여지면서도 보여지지 않는 것, 다시 말해 아는 것 같은데 지각되지 않고 있는 상황이다. 이런 독특한 상황은 기독교인의 체험의 어떤 상태에서도 표현되고 있다. 우리는 성경을 읽고 성경이 가르치는 진리, 더욱이 인간의 구세주로서의 예수와 관련된 사항에 이르기까지의 진리를 배울는지 모른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 사항들을 알지 못할는지 모르고, 그 본성에 관한 영적 식별력도 지니지 못하고, 더욱이 그 진리의 권능에 관한 체험도 없을 수 있다. 우리는 그 진리의 형체를 보면서도 그 실체는 보지 못한다. 마치 제자들이 주님을 보았는데도 그분이 누구였는지 몰랐던 것과 같다.
5. 주님께서 자신을 제자들이 알아보도록 하시기 위해 사용한 수단들은 현재까지도 그분께서 신실하나 어두움에 있는 그분의 추종자들에게 자신을 밝히 알리는데 고용되는 것들을 상징적으로 그려주고 있다. “그때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한다, ‘어린이들아, 너희는 어떤 음식이라도 가지고 있느냐?’ 그들이 그분에게 대답했다, ‘아닙니다’” 그분께서 제자들을 부르시되 어린 아이를 귀엽게 부르고자 할 때 사용하는 호칭을 사용하시고 있는바, 이는 부모와 자식 간의 사랑을 표현하시어 이어지는 구절이 입증하듯 부모의 자식에 대한 권위 같은 것으로 가르치심을 표현하고 있다. 또 다른 측면에서 보면 그들은 아직 어린 아이 같은 수준, 지식 수준에서 어린 아이 같아서 성인의 수준에로 아직 자라지 못한 지식 수준까지 표현하고 있다. 주님께서 그들에게 물으셨으되 그들이 고기를 성공적으로 많이 잡았는지 이를 묻지 않으시고 단지 어떤 음식(meat)을 가졌는지를 물으셨다. 여기서 사용된 단어 음식(meat)은 빵은 아니고 생선(fish)같은 것, 식사할 때 함께 먹게 되는 어떤 것을 뜻한다. 그러나 용어 음식은 진리와 구별해서 선에 관한 원리를 의미하는바, 이 질문은 중요하고 탐문하는 것에 해당된다. 즉 영혼의 양식을 구성하는 생기 있는 원리의 어떤 것을 획득했는가? 이것을 획득하지 않으면 우리가 요구하는 모든 것은 헛될 뿐이라는 것, 이것을 획득하지 않은 상태에서의 모든 우리의 수고는 쓸모 없다는 것을 짐작하도록 해주시고 있다. 이 질문은 바야흐로 주님께서 그분의 영의 영향력과 말씀의 가르침을 수단으로 진지한 마음 안에서 그 마음을 향해 암시하시고 있다. 제자들의 대답은 “없습니다” 였다. 얻으려고 애를 써왔으나 결핍되었을 뿐임을 알고 인정한다는 것은 그런대로 나마 성공의 서곡이다.
6. “그분은 그들에게 말하셨다, ‘그물을 배 오른쪽에 던져라. 그리고 너희는 발견할 것이다’, 하여 그들은 던졌고, 지금 그들은 많은 물고기 때문에 그물을 끌어 당길 수 없었다.” 이 대목을 자연적 의미만으로 생각하려는 사람이라면 아마 이렇게 되물을는지 모른다. “하필이면 왜 배 오른쪽에…”그러나 위 주님의 명령은 기적 그 이상의 어떤 것을 우리에게 전달해주고 있다. 성경에서 오른쪽은 선행을 표현하는 한편 왼쪽은 신앙을 표현한다. 이렇게 이해를 시작해보면 위 신성한 명령은 얼마나 교훈적인지! 우리를 가르치는바, 우리가 복음을 배우든, 가르치든 성공 여부는 우리가 어떤 원리로부터 행동하는가, 어떤 원리에서 진행되는가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지성과 신앙 으로부터 행동한다면 우리는 온 밤을 지새워 수고해도 소득이 없겠지만 우리가 심정과 선행으로부터 행동한다면 우리의 노력은 성공이라는 면류관을 쓰게 된다는 것이다. 우리가 신앙 으로부터 행동하는 한, 우리는 상대방의 영적 개선과 행복에 마땅히 관심을 기우려 주지도 않으면서 우선 자신의 특이한 교리로 전환하라고 노력해댄다. 대신 우리가 선행으로부터 행동하는 한, 우리는 상대방이 자신의 견해에 찬동하라고 단순히 설득하지 않고 그의 심정을 하느님께로 돌리는 변화를 기대한다. 우리 자신 만에 국한해서 말씀을 공부하는 태도를 들여다보자. 우리가 지적인 신앙으로 성경 공부를 진행한다면 결국 자신의 종교적 견해를 확증해댈 증거를 찾을 목적으로 진리를 획득하려 애쓴다. 그러나 우리가 선행으로부터 행동하면서 말씀을 공부하면 기독교 생활의 품위와 미덕을 함양할 목적으로 진리를 획득하려 애쓴다. 위 활동의 두 종류가 한 인물에 의해 연속적으로 나열될는지 모른다. 전자는 그의 자연적 마음이 영적 마음보다 더 적극적이었을 때이다. 이것은 그에게 영적인 밤이다. 그 이유가 밤과 낮은 마음의 상태, 즉 밤은 자연적 인간이 영적 인간을 압도할 경우이고, 낮은 영적 인간이 자연적 인간을 종속시킬 경우의 마음 상태이다. 이 상태들은 거듭남의 수준이 제아무리 높은 수준에 있게 된 인간이라 해도 교차되는 마음의 상태들이다. “땅이 있는 한 뿌리는 때와 거두는 때, 추위와 더위, 여름과 겨울, 밤과 낮이 쉬지 않고 오리라” (창세기8:22). 이런 교차됨은 필수적이라 할 만큼 유용하다. 이런 교차됨이 없이 어떤 상태도 완전해 질 수 없다. 작용과 반작용은 평형(equilibrium)을 보존하고 건강한 활력과 발달을 증진시킨다. 기독인에게 있어서 그의 영적 힘과 원리들이 적극적일 때, 천국적 사랑의 따뜻함과 천국적 진리의 빛이 그의 마음과 생활에서 적극 활동할 때 당사자는 낮이라는 상태에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의 자연적 애착과 생각이 적극적이 되고, 자연적 삶의 일과 그 일의 충동이 한동안 우위를 점하고 적극성을 띌 때 그 사람 주위는 밤으로 둘러 쳐진다. 실망과 보답 없는 노동의 밤이라는 상태는 또 다른, 더 나은 것을 준비시킨다. 그리하여 빛과 희망, 주님이 나타나시는 곳, 그분의 진리의 소리와 그분의 사랑의 영향이 그의 심정을 격려하고 마음을 더 행복된 결과로 인도해간다. 이 결과가 제자들이 배 오른편에 그물을 던졌을 때 맞이한 성공 안에 그림자같이 드리워있다. 그리하여 지금 “제자들은 그물을 끌어올릴 수 없을 만큼 많은 고기를 잡았다.” 수가 많음(multitude)은 진리에 적용되는 단어이고, 양이 많음(magnitude)은 선에 적용하는 단어이다. 많은 고기는 많은 사람, 특히 이방 사람이 많다는 것을 어렴풋이 보여주고 있다. 이들이야말로 제자들이 복음의 신앙으로 전환하게 될 사람들이다. 그들이 기독 원리의 시대, 지금 그들 위에 드리우는 새벽인 기독교 원리의 시대에 오고, 지금 주님이 나타나시듯 그분의 가르침 아래 있게 되어 이 세상에 속한 왕국이 아닌 영적이고 영원한 왕국에로 인도 받는다. 또한 이 구절이 투영하는 의미는 진리들의 증가, 즉 선행의 영향 아래에서 성경을 수색하는 이들에게 말씀이 산출해 주는 진리의 증가이다. 선은 진리의 생명이요 진리가 증가하는 근원이다. 그 이유가 선은 진리를 수단으로 유용함의 수단과 권능을 확장시킨다. 선이 풍부해 있는 곳은 어디든지, 선이 가득 차 있을 때는 어느 때이든지 진리들이 불어난다. 그래서 아마 처음 진리를 수확할 때 예상했던 우리의 차원을 훨씬 넘어 “끌어올릴 수 없을 만큼” 배가 된다.
7. 이런 기적적인 증가의 결과 중 하나로 확신하게 되는 것은, 그것을 하신 분이 주님이시라는 것, 그 주님은 예수 외에 더 다른 분이 아니시다는 것이다. “예수의 사랑을 받던 제자가 베드로에게 ‘저분은 주님이십니다’ 하고 말하였다. 주님이시라는 말을 듣자 (벌거벗고 있던) 시몬 베드로는 몸에 어부의 외투를 두르고 자신을 바다 에 던졌다.” 그들의 노력에 방향을 정해주고 또한 더욱 번창하게 하신 분이 주님이라는 생각은 그 자체 요한에게 먼저 표출되고 그 다음 베드로에게 암시하고 있다. 그 이유가 신성한 유입은 의지 안으로, 그 다음 의지를 통해 이해성 안으로 있어 지거나 선행을 통해 신앙 안으로 있어지기 때문이다. 이는 마음이 주님과 결합하는 쪽으로 노력하게 한다. 마치 베드로가 예수에게 가겠다고 결정했던 것과 같다. 그런데 베드로는 벌거 벌었다. 그는 고기잡이 옷을 둘렀다. 이 구절, 그리고 성경의 다른 장소에서 등장되는 벌거벗음(naked)은 겉옷이 없음을 뜻한다. 그러나 이 단어가 사용된 것은 영적인 벌거벗음을 뜻하기 위해서라는 것은 의심할 바 없다. 이는 진리의 결핍이다. 옷과 몸의 관계 같은 것이 진리와 마음의 관계이다. 외투(coat)로 사용된 이 단어는 신약성경의 어떤 부분에서도 발견되지 않는다. 다만 동사적 형태로서 고린도후서 5장 2,4절에 등장할 뿐이다. 거기서 사도가 말한다. “지금 육신의 장막을 쓰고 사는 우리는 옷을 입듯이 하늘에 있는 우리의 집을 덧입기(clothed upon)를 갈망하면서도 신음하고 있습니다…이 장막에 머물러 있는 동안 우리는 무거운 짐에 짓눌려 신음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이 장막을 벗어버리고자(unclothed)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하늘의 집을 덧입음(clothed upon)으로써 죽음이 생명에게 삼켜져 없어지게 되기를 갈망하고 있습니다.” 이 구절에서 육체가 영혼(soul)의 의복으로 말해지고 있다. 자연적인 몸은 이 세상을 위한 영혼의 의복이고 영적인 몸은 저 세상을 위한 영혼의 의복이다. 모든 실체(essence)가 형체(form)를 가져야하듯 모든 영혼(soul) 또는 영(spirit)은 몸(body)을 지녀야만 한다. 신앙 의 영은 마치 겉옷을 걸치듯 신앙 의 진리로 옷 입혀져 있다. 신성한 존재의 경우 빛으로 옷 입으시고 있다. 신앙 이 그 신앙 에 합당한 진리가 없을 경우 그것은 방어벽이 없는 것, 말쑥한 형체가 없는 것, 화려한 장관이 없는 것이다. 이런 신앙 은 미적지근했던 라오디게아 교인들, 즉 “…스스로 부자라고 하며 풍족하여 부족한 것이 조금도 없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네 자신이 비참하고 불쌍하고 가난하고 눈멀고 벌거벗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 경우와 같다 (계시록3:17). 베드로의 벌거벗음이 함축하는 것은 그가 위 계시록의 언급같이 결핍된 상태, 부끄러운 상태, 즉 어떤 자각심도 없는 뻔뻔한 상태가 아닌 그 반대의 상태이다. 즉 그는 자신이 벗었음을 발견한 한편 옷 입기를 바랬다. 그리하여 그의 흥분어린 애착 의 대상이 된 그분 앞에 나서고 싶어서 였을 뿐이다. 이 제자가 자신을 옷입힌 진리들은 주님과 결합하는 수단들이다. 이런 연유에서 말씀 가운데에는 옷에 관한 언급이 상당히 많고 합당한 의복을 입어야 할 필요성을 언급하고 있고, 특히 천국 결혼에 입장하려면 결혼예복을 입어야 하는 것을 꼬집어 언급해두고 있다. 베드로가 자기 겉옷을 두르는 모습은 기독교인이 주님 앞에로 입장하고 그분과 결합하려면 신앙의 진리로 입어야 함을 표현한 것이다. 옷을 두른 베드로는 물에 뛰어 들었다. 겉옷을 얼른 걸치는 잽싼 그의 행동은 그의 열망을 보여주었다. 이것은 자기들 스스로 해보려 했으나 할 수 없었던 것을 그분이 해주심을 수단으로 그들에게 그분이 밝히 알려졌을 때 주님과 함께 있기를 바라는 신실한 자의 열띤 바람도 표현하고 있다. 이 구절의 예에서 주님이 제자들을 위해 해주셨던 것을 후에 그분은 그들을 수단으로 이루셨다. 그분은 그들의 수고함을 번영되게 하셨다. 베드로가 했던 것은 진지한 신앙 이 제자들 더러 하라고 자극하는 것, 자신을 졸라매는 것, 그리고 물을 통해 그분께 가는 것, 더불어 “죽음도 감히 너희를 덮치지 못하리라” 라는 약속에 관한 본보기였다.
8. “다른 제자가 작은 배 안에 왔다. (그 이유가 그들은 육지로부터 멀리 떨어지지 않았기 때문, 그러나 이백 큐빗 정도,) 물고기들을 가진 그물을 끌어당기고 있었다” 나머지 제자들이란 신앙으로 들어가 신앙을 드높이고 확증하는 선함과 진리에 관한 원리들이다. 이들은 신앙이 인도하는 곳, 즉 선하고 참된 모든 것의 저자이시고 신앙 의 최고 대상으로서 주님에게 인도되는 대로 따라간다. 따라서 그들은 배로 상징된 것인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을 통해 간접적으로 주님께 왔다. 이 제자들이 탓던 것은 작은 배였다. 양이 많음은 선에 관계되고 수가 많음은 진리에 관계된다고 앞에서 언급했었다. 나머지 제자들이 “작은 배”로 왔다는 것은 그들이 주님께로 오게 된 수단인 지식이 선함에 바탕을 두었긴 했으나 그것이 작은 것이었음을 암시하고 있다. 그들은 주님에 관해서, 자신의 참된 천직이 무엇인지에 관해서 아는바 있긴 하나 그것이 아주 조금이었다는 말이다. 그러나 그 조금만 가졌어도 그들에게 뭔가 생산해주는데, 예수께로 그들을 데려오는데에, 기적적인 어획고를 올린 그물을 끌어오는데에, 세상으로부터 교회에로 데려와지는데에, 충분했다. 이런 모습을 우리는 모든 시대의 제자들과 관련해 생각해 볼 수도 있다. 예수의 제자들은 이로부터 배우는바, 그들의 수단을 측량하는 것은 규모의 큼이 아니라는 것, 그들의 성공을 보장하는 것까지도 규모의 큼이 아니라 주님의 영과 말씀이라는 것이다. 그분의 힘으로 일하는 이들은 스승의 일을 해내는데 자기들의 배가 너무 작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 이 대목에는 또 다른 격려의 교훈이 담겨 있다. 제자들이 작은 배로 그물을 끌고 올 때 그 곳은 육지에서 멀지 않은 곳으로부터였다. 주님이 더 직접적으로 현존하는 말씀은 세상으로부터 멀지 않다. 오히려 신실하고 열성적인 사람들에 의해서는 언제나 닿을 수 있게, 그리하여 노동의 열매를 가질 수 있게 되어 있다. 또 다른 교훈이 이 구절에 있다. 그 이유가 땅과 바다(호수)는 선과 진리를 상징하기 때문이다. 제자들이 주님이 계신 육지로 가기로 한 것은 선함 자체이신 그분께 선함의 상태인 안쪽으로 자신을 강요하는 것을 표현한다. 200 큐빗(cubit)역시 땅으로부터 떨어진 거리를 말하는바 이는 선함과 진리의 결합, 선행과 신앙의 결합의 어떤 수준을 표현하고 있다.
9. “그들이 육지에 올라와 보니 숯불이 있고 그 위에 생선이 놓여 있었다. 그리고 빵도 있었다.” 이 사건은 그 주위에 초자연적 모양새를 띄우고 있다. 불, 고기, 빵 같은 물건들이 언제, 왜 준비되었을까? 예수께서는 지금 이런 물질적 존재의 어떤 것도 필요치 않으셨다. 부활하신 그분이 어디서 거주하셨을까, 어떤 옷을 입으셨을까, 무엇을 잡수셨을까하는 등등에 관한 상상은 부활하신 그분의 몸의 본성에 관한 물질주의적 견해의 산물일 뿐이다. 주님의 몸은 지금 신성이셨다. 그분이 제자들을 위해 준비하셨던 것들은 육체를 위한 게 아니라 영혼을 위한 음식이었다. 제자들이 주님을 보았으되 그것은 그들의 자연적 눈이 아닌 영적인 눈으로 본 것이다. 이와 똑같이 그들은 그분께서 자기들을 위해 만든 설비도 보았다. 합리적인 모든 사람은 본문의 경우가 위와 같다고 보아야한다고 하지만, 어떤 이들에게서는 영적 삶의 주제를 이해하는데 곤란해 할 것같아 이에 관한 설명이 필요할 것이라 본다. 영계는 자연계만큼 실재적이다. 그래서 이 세상의 것들이 육체의 감각에서 느껴지는 것만큼 영계의 것도 영혼의 감각에 사실적이다. 영혼이 육체에 가깝게 있는 만큼 영계도 자연계와 가깝다. 그러므로 요구되는 전부란 인간으로 하여금 영계와 감지할 수 있는 연결이 있도록 해서 그들에게 영적 대상을 감지할 수 있는 지각을 주는 것, 이 영적 지각을 수단으로 보고 듣고 느끼게 함으로서 그들의 영원한 상태에 관해 한정된 체험을 주는 것이다. 이런 일시적인 상태는 신,구약 성경에서 천사를 보고 있고 그들을 접대한 사람들 모두에게 권유된 상태이다. 이런 감각에 의해서만이 제자들은 부활하신 주님을 뵐 수 있었고, 그분이 그들을 위해 준비한 모든 것, 그들 앞에서 하신 것, “구운 생선과 벌집”을 잡수신 것 (누가24:42) 까지도 볼 수 있었다. 영적 감각이 열리는데 어떤 극단적인 변화가 있어질 필요성은 하나도 없다. 이를 체험했던 이들은 변화가 있었는지 의식조차 없었다. 영 안에 있을 경우 모든 것은 자연계에서의 것과 동일하게 나타나므로 당사자는 자신이 살고 있던 이 세상에 속한 것을 보고 있다고 알뿐이기에 더 다르게 감지하지 못한다. 그들은 이중적으로 환상을 향유했을는지 모른다. 즉 영계와 자연계에 속한 대상을 동시에 본다는 말이다. 비록 영적인 눈이 열릴 때 자연적 눈은 닫히는 것이 일상적 법칙임에도 불구하고 영과 몸의 시야가 동시에 활동될 수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우리는 이 구절이 나타낸 초자연적 명백함의 영적 의미 파악이 가장 중요하리라 본다. 이 광경은 그 당시 직접적 대상인 제자들을 위해서 였을 뿐 아니라 그들 뒤를 잇는 참된 모든 제자들에게까지 교훈을 주시려는 목적으로 만들어진 모습이다. 제자들이 본 불은 신성한 사랑의 불에 대한 상징물이었다. 이제 인간 구속을 완성하신 저자가 지상 안에, 교회 안에, 신실한 이들의 심정 안에 불을 지펴놓으신 것이다. 이 불 위에 생선이 놓였고, 그리고 빵을 제자들이 보았다. 이 생선과 빵의 개수는 매우 특이하다. 그 이유가 한 마리의 고기와 한 개의 빵만을 여러 사람이 먹으라고 그분이 준비하셨기 때문이다. 이는 기적적으로 그들에게 식사를 공급해주심으로 수많은 군중을 먹이셨던 바로 그분이심을 제자들로 확신하게 하시려는 의도에서였을 것은 명백하다. 그러나 여기에는 또 다른 교훈을 가르치시고자 의도해놓으시고 있다. 이는 차후 제자들이 종사하게 될 영적 일에 관계되는 것, 그들의 가르침이 생산하게 될 영적 결과에 관계되는 것에 관해서이다. 빵과 생선은 선함과 진리라는 원리를, 불은 사랑을 상징하고 있다. 불 위에 놓인 생선은 사랑의 선을 수단으로 자연적 인간이 개혁됨을 표현한다. 이 묘사에는 교회가 완전히 황폐된 결과에 있는 그 당시의 모든 사람이었다. 이 절을 시작하는 말은 제자들이 육지에 올라오자마자 이 모든 것을 보았다고 말해놓고 있다. 이는 바다와 육지가 의미하는 것인 진리로부터 선으로 진보하는 이들은 그들이 선함의 상태를 달성할 때는 언제든지 그들을 위해 주님께서 준비하신 것을 보게 된다는 것을 가르치시고 있다.
10,11. 그들이 육지에 올라왔을 때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방금 잡은 고기를 가져오너라’ 하고 말씀하셨다. 시몬 베드로는 배에 올라가서 그물을 육지로 끌어 올렸다. 그물 속에는 백 쉰 세 마리나 되는 큰 고기가 가득히 들어 있었다. 그렇게 많은 고기가 들어 있었는데도 그물은 터지지 않았다.”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준비해둔 빵과 고기를 먹으라고 즉각 초대하시지 않고, 먼저 그들에게 방금 잡은 고기를 가져오라고 하셨다. 영적 총명과 신앙의 근원은 두 가지, 즉 주님과 그분의 말씀이다. 이 두 가지로부터 받을 때만이 우리는 이해할 수 있고 믿을 수 있다. 생명 있는 원리로서의 선과 진리는 주님 자신으로부터 오지만, 지식으로서의 선과 진리는 씌어있는 말씀으로부터 온다. 영감이 불어넣어져야 생명 있는 신앙이, 참된 신앙이 있어진다. 그래서 이 두 가지는 진짜 기독교인이 될 수 있기 전에 반드시 마음 안에 공존하고 함께 만나야 한다. 생명 있는 원리로서의 선과 진리는 주님께서 제자들을 먹이시려고 만드신 준비물로 표현되어있고, 지식으로서의 진리는 제자들이 잡은 고기로 표현되어 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그들을 위해 준비된 생선을 주시기 전에 그들이 방금 잡은 고기를 가져오도록 명령했다. 내적인 선물과 내적인 획득물이 함께 가져와지고 있다. 제자들 전체에게 내려진 명령인데도 베드로에 의해 집행되고 있는데, 이는 신앙의 행동이다는 것, 이 행동에는 다른 모든 품위가 포함되어 있다는 것도 암시하고 있다. 주님의 명령에 순종함은 신앙이 승강되게 해준다. 마치 본문에서 베드로가 배에 “올라” 갔던 것과 같다. 자연적 수준의 신앙 은 마음의 자연적 영역에서 영적 영역으로 드리워짐으로 영적 신앙으로 바뀐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가 획득한 소유물을 그분께로 가져오라는 그분의 명령에 순종하여 행동할 때 결과 되어진다. 그리고 그것들이 그분의 발 앞에 가져다 놓이되, 겸허하게 인정함으로, 즉 그분의 능력과 안내해주심 덕분에 획득된 내 것인 바, 진정 그것은 내 것이 아니라 그분의 것임을 인정함과 더불어 행동되어야 한다. 베드로가 그물을 육지에 끌어내림은 획득된 진리가 선과 연결되도록 하는 것, 또는 그것들을 이해성에서 들어올려 의지 안으로 가져다 놓는 것, 또는 자연적 마음으로부터 들어올려 영적 마음으로 가져다 놓는 것을 의미한다. 해안가에 끌어다 놓은 그물은 큰 고기로 가득했다. 용어 크다(great)는 선함의 품질을 표현하는 바, 이 구절에 대한 영적 의미란, 주님의 직접적인 지시를 받고 이타애의 영향 아래 행동되어 획득된 진리는 단지 지적일 뿐인 진리가 아니라 실지의 진리, 그 내용물이 선함으로 가득해 있는 진리이다는 것이다. 이 고기들은 클 뿐 아니라 많았다. 양이 많음(magnitude)은 선함 측면에서의 품질에 관계되나 숫자(number)는 진리 측면에서의 품질에 관계된다고 이미 언급한 적이 있다. 큰 고기는 백 쉰 세 마리였다. 이 세 숫자들은 말씀이 포함하는 세 가지 다른 종류 또는 수준의 지식, 그리고 말씀으로부터 교훈을 받아들이는 세 가지 다른 계층의 사람들, 그리고 교훈을 수단으로 교회로 끌어 올려지는 것들, 즉 천적, 영적, 자연적 교훈들, 또는 사랑의 진리, 신앙의 진리, 순종의 진리를 받는 이들까지 일괄하여 표현해 놓고 있다. 여기서 주목해둘 만한 사실은 그물이 부서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와 비슷한 상황에 있었던 다른 사건과 연계해 생각해 보면 더욱 의미심장함을 느끼고야 만다. 이 본문의 경우 우리가 발견하는 바, 사건의 시작은 기적적인 고기잡이고 그 마무리는 주님이 땅 위에서 제자들과 교제하고 계신 모습이다. 누가는 다른 복음서 기자가 기록하지 않은 것, 즉 그분께서 뱃일을 하고 있는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부르시는 사건을 기술해 놓고 있다 (누가 5:1-9). 이 대목을 보면 주님은 군중을 시몬의 배에 올라 가르치셨는데 그 뒤 베드로에게 깊은 데에 그물을 쳐 고기를 잡으라고 분부하자 베드로는 밤새도록 애썼어도 잡지 못했지만 선생님이 말씀하시니 그물을 치겠다고 하여 그대로 하였더니 엄청나게 많은 고기가 걸려들어 그물이 “찢어졌다.” 그래서 겁을 먹은 베드로가 예수의 발 아래 엎드려 “주님, 저는 죄인입니다. 저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예수께서 대답하시기를 “두려워 말라. 너는 이제부터 사람들을 붙들을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위 두 사건에 있는 고기잡이와 어획고는 상징적이다는 것이 분명히 보여지고 있다. 또한 디베랴 바다에서 같은 기적이 반복된 것 역시 상징적이라고 암시해 볼 수 있다. 첫 경우에서는 그물이 찢어졌으나 두 번째 기적에서는 그렇지 않았다는 것은 우리에게 사람을 잡는 수단에서 그들의 부름 받는 초기 때에는 덜 완전했고, 복음을 전파하라는 마지막 위촉을 받는 때는 보다 더 완전해 있었다는 것을 가르쳐주고 있다. 구속과 신성화하심이라는 일은 두 번째 기적의 때에 완성되어졌다. 그러므로 진리를 획득하고 나누어주는 능력이 증가되어졌다. 구원의 수단은 더 넉넉해지고 완전해졌다. 그물은 많은 고기를 에워쌌을 뿐 아니라 버텨냈다. 그물(마태 4:18)은 교리를 의미한다. 또한 진리의 지식을 의미하고, 그 결과 아는 능력, 이해력까지도 의미한다. 이런 것들은 교회나 개개인의 거듭남의 시작에서는 약해서 획득한 것을 단단히 붙잡지 못한다. 그러나 주님이 신성화하시고 인간이 구속되었을 때 그 자질들에 기운이 보강되어졌다. 그리고 추론하는 힘과 진리를 지탱시키는 힘 역시 배가되었다.
12.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하신다, ‘와서 식사하자.’ 그리고 제자들의 누구도 그분에게 ‘당신은 누굽니까?’ 하고 감히 묻지 않았는데, 이분이 주님이셨음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제자들이 초대받은 식사는 통상 우리가 말하는 저녁 식사는 아니고 아침 식사일 것이 분명하다. 이 사건의 주변 상황이 그것을 암시하고 있다. 이런 모든 것은 새로운 상태, 그리고 선함과 진리의 새롭고 더 높은 원리들로 충당됨을 표현한다. 이것은 부활이후 주님께서 생명의 요소를 수단으로 제자들과 교류하신 첫 번째는 아니다. 그러나 그분 스스로 식사를 준비하시고 먹도록 초대하신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분께서 그들을 위해 만드신 이 첫 준비가 이 중대한 날 그들의 첫 식사, 신성화 하신 그들의 구속자의 교회에서 일꾼들의 새 날에 대한 예징이 된다는 것은 매우 적절하다. “와서 먹어라.” 이는 제자들, 즉 의에 주리고 목마른 이들에게 주게 될 초대장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주님께서 설비해 두셨던 좋은 것들로 채워지도록 배려되고 있다. 그리고 이제는 예외 없이 누구에게나 자유로이 제공되고 있다. 특이한 대목이 있다. “와서 먹어라”고 초대하실 때 “당신은 누구시오?” 라고 묻는 제자가 아무도 없었다는 점이다. 이는 그들이 심오한 존경심으로 그분을 대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그들은 그분의 현존에 너무 위압되어서 신비스런 그분의 모습에 관해 아무도 물을 수 없었다. 그들은 알았음에도 감히 묻지 못했다. 그들은 묻고 싶었지만 감히 말을 뱉지 못했다. 그들은 주님을 알았다. 그러나 그것은 그분의 바깥쪽 나타남으로부터가 아니라 그분이 그들을 위해 수행하신 기적으로부터, 그리고 주변 환경으로부터 알았다. 마치 엠마오로 가고 있던 두 사람에게 그분이 알려질 때도 이와 비슷했다. 즉 그분이 알려진 수단은 그분의 외관, 즉 목소리가 아닌 빵을 떼시는 것으로였다. 기독인의 체험에서 이에 부응되는 어떤 것이 있을까? 바울이 말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부터 아무도 세속적인 표준으로 판단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전에는 우리가 세속적인 표준으로 그리스도를 이해하였지만 이제는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고린도후 5:16). 제자들은 객관적으로든 주관적으로든 세속적 표준으로 주님을 알았었다. 그들은 그분이 육 안에 계셨을 때 그분을 알았다. 그리고 그들 스스로 육적으로 있었을 때 그분을 알았다. 이런 경우는 모든 제자들에게도 한결같다. 그가 육적인 태도만으로 그분을 알게 되는 이상 그는 육적인 표준으로 주님을 알고 있는다. 그러나 그의 마음이 영적 수준으로 될 때 그는 더 이상 육적인 표준으로 주님을 알지 아니하고 영의 표준으로 알게 된다. 그런 다음 그는 그분의 권능, 지혜, 사랑을 수단으로 해서, 그분이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고 뜻하도록 우리 안에서 역사하는 그분을 수단으로 주님을 알게 된다. 그는 신성한 권능을 앎으로 해서 신성한 진리의 바깥쪽 형체를 안다. 마치 이 권능이 심정과 이해성에 영향을 미치는 것에서 신성한 진리를 안다. 그래서 그는 “당신이 누구십니까?” 라고 감히 묻지 않는다. 그는 지금 자기 앞에 나타난 그대로의 진리의 정체에 대해 질문하지 않는다. 육적 표준으로 알았었던 진리를 지금 영적 표준으로 알고 있는다. 진리는 그 자체에 증거를 동반하고 있다. 그는 구원을 위한 하느님의 권능에 대해 알고 느낀다. 이제 이 대목이 아래에서 더 충분히 명백해 지고 있다.
13. “예수께서 오시고, 빵을 가져가 그들에게 주시고, 물고기도 그와같이 주신다.” 그분께 오도록 제자들을 초대하셨던 그분이 이제는 그들에게 다가가시고 있다. 주님께서는 그분 자신을 우리에게 주시기 위해 그분에게로 우리를 끌어당기신다. 하나 됨은 상호성(reciprocation) 없이 결과 되지 않는다. 그분이 우리 안에, 우리가 그분 안에 있는 것이 결합(conjunction)의 법칙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 집에 들어가서 그와 함께 먹고, 그도 나와 함께 먹게 될 것이다” (계시록 3:20).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주신 빵과 생선은 영적인 음식, 신성한 선함과 진리이다. 이는 주님께서 그분의 백성의 영혼, 즉 와서 먹어라 는 신성한 초대를 응낙하는 이들을 먹이실 때 주시는 것들이다.
14. 요한이 상술한 바, “이것은 예수께서 죽은 자로부터 일어나신 후, 그분이 제자들에게 자신을 보이신 세 번째에 해당된다.” 예수가 제자들에 의해 보여진 것을 모두 합한다면 세 번 이상이다. 물론 그분 스스로 보이신 것과 제자들이 보게 된 것을 구분 지어 말하느라 세 번이라는 언급이 있었는지 모른다. 어쨌든 말씀의 언어는 자연적 의미보다 더 높은 의미를 포함하도록 골격이 짜여 있다. 여기서 의도된 셋이란 숫자는 명백히 나타내 보이심의 완성을 표현했다는 것은 의심할 바 없다. 이는 그들의 신성화 하신 구세주, 모든 충만함으로 거하시는 한 분으로서의 예수를 알도록 제자들에게 주신 충분히 그리고 마지막으로 보여주심을 뜻한다. 이는 단지 그분스스로가 하느님-인간이시다는 것만이 아니라, 그분이 그들 안에 있는 모습, 인성의 완전함, 구속과 구원에서 신성화 하신 모습, 그들 안에서 죽은 자로부터 일어나신 모습, 그리고 더 이상 죽지 않으시는 그분의 모습을 보여주신 것을 뜻하고 있다.
15-17. 주님께서 제자들을 먹이신 뒤 상징적 행동을 수단으로 그들을 가르치시고자 의도된 신성한 교훈에로 그들을 이끄신다. “그렇게 그들이 식사했을 때, 예수께서는 시몬 베드로에게 말하신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이들 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 그가 그분에게 말한다, ‘예, 주여, 내가 당신을 사랑하는 것을 당신은 아십니다.’ 그분이 그에게 말한다, ‘내 어린 양들을 먹이라.’ 그분이 그에게 다시 말하신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그가 그분에게 말한다, ‘예, 주여, 내가 당신을 사랑하는 줄을 당신은 아십니다.’ 그분이 그에게 말한다, ‘내 양을 먹이라.’ 그분이 그에게 세 번째 말하신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는 그분이 자기에게 세 번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라고 물으셨기 때문에 슬퍼졌다. 그리고 그는 그분에게 말했다, ‘주여, 당신은 모든 것을 아십니다. 내가 당신을 사랑하는 것을 당신은 아십니다.’ 예수께서 그에게 말하신다, ‘내 양을 먹이라.’” 주님께서 베드로를 통해 그분의 제자들을 가르치시는 일반적 교훈은 마치 그분께서 그들을 먹이셨 듯 그들도 그분의 교회를 먹여야 한다는 것이라고 알게 하려는 듯 비치고 있다. 비록 그분의 명령은 베드로에게 내려졌으나 그렇다고 그분의 명령이 다른 사도들에게 해당 안 되는 것은 아닌바 그 명령은 베드로가 표현한 품성에 놓여진 명령이다.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실 때 수단이 된 이름은 지금 베드로에게 마지막으로 지시하시는 직능에 걸맞은 품질을 지니는 누군가에 속하는 품성을 표현하고 있다. 그 이유가 요한의 아들 시몬은 선행으로부터 파생된 신앙을, 시몬은 듣고 순종함을, 요한(Jonas)은 선행의 상징물인 비둘기를 뜻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지시가 비록 베드로 개인에게 떨어졌긴 해도 그가 받은 임무는 베드로 한 사람에게 국한되는 게 아니라 모두에 해당된다. 그 이유가 그는 신앙 이라는 품위, 또는 지적 측면의 원리를 표현한 인물일 뿐이기 때문이다. 이 품위 또는 원리에 주님의 양떼를 안내하고 자양분을 공급하는 임무가 위탁되어져 있다. 베드로는 진리로 건설된 이들, 신앙 에 강한 이들, 가르치고 싶어하는 경향성이 강한 이들을 표현한다. 그러나 신앙은 사랑으로부터 생명을 가지지 않으면 구원해주지 못하는바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그가 가장 중요한 품위를 소유했는지 묻고 계신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이들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는 질문에 불확실한 게 있다. 그것은 네 형제가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 인지, 또는 네가 지금 종사하는 일시적인 세상 것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 인지에 관해서이다. 베드로의 대답은 간단하고 소극적이다. “예, 주님, 아시는 바와 같이 저는 주님을 사랑합니다.” 그의 사랑의 고백에는 어떤 과장도 없이 주님 자신에 직접 호소하고 있다. 그야말로 어느 누구도 주님을 사랑하는 자기를 증거해 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고백이다. 그 이유가 주님이 더 잘 아시기 때문이다. 어쨌든 베드로가 세 번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하리라고 예견해 말하셨을 때 베드로가 사용한 언어 태도와 지금 구사하는 언어는 얼마나 다른지 모른다. 그 당시의 경우 그는 지니지도 않은 불변함을 떠벌렸다. 지금 그는 자기가 소유한 사랑을 자랑하지는 않고 있다. 그의 사랑에 대한 보증을 위해 그는 지금 자기 심정에 주님 사랑을 이식하신 분, 자기가 자신을 아는 것보다 더 자기를 잘 아시고 계신 분, 이런 것을 쓴 경험으로 배우게 하셨던 분께 자기가 주님을 사랑한다고 호소하고 있다. 예수께서는 그의 호소에 대해 그에게 이런 큰 의무, 그보다는 이런 드높은 특전, 즉 “내 어린 양을 먹이라”고 위탁하심으로 응답하시고 있다. 이것을 뾰족한 수준에서 말하면 교회의 성직자들에게 위촉된 임무이다. 물론 이것은 그들 만에 한정된 임무는 결코 아니다. 그 이유가 모든 사람은 서로서로 돌보고 섬겨야 하기 때문이다. 반면 보다 내적 측면의 의미에서 모든 사람은 주님께서 각자의 마음에 쌓아두신 것, 즉 주님께서 아껴두신 순진과 선행을 먹여 키우고 보존하도록 요구되고 있다. 순진과 선행이 어린 양과 양으로 의미되고 있다. 이것들이 그분의 백성의 마음 안에서 원리로서 간주되고 있든지, 어느 정도라도 적극적인 존재로서 간주되고 있던지 어쨌든 그것은 주님의 것이다.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던진 질문은 세 번 반복되고 있다. 세 번씩이나 주님께서는 베드로에게 그분의 양을 먹이고 보호하도록 엄숙한 임무를 놓으시고 있다. 세 번 이르시는 말이 전부 동일하게 번역되어 있긴 하지만 두 가지 다른 단어가 사용되었다. 첫 번째에서는 먹을 것을 주라는 것(feed)이고, 나머지는 돌보라(tend)는 것이다. 베드로가 세 번 질문 받은 것은 교회의 시작부터 마지막까지의 완전한 시기를 의미한다. 그 이유는 셋이란 숫자가 완성, 충만 됨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베드로가 질문 받아진 세 번째란 교회의 끝을 의미하는데, 여기서 베드로는 주님께서 세 번씩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시는 바람에 슬퍼졌다고 말해지고 있다. 세 번이란 단어가 교회의 시작부터 끝까지에 이르는 모든 시기를 의미하듯, 그 단어는 교회의 계속적이고 하강하는 상태를 의미하고 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맨 먼저에서는 베드로에게 그분의 어린 양에 먹을 것을 주라고 하시고, 그 다음 그분의 양에 먹을 것을 주라고 말하신 것이다. 주님께서 처음 말하신 어린 양(lamb)은 순진의 선 가운데 있는 이들을, 두 번째 말하신 양(sheep)은 선행의 선 가운데 있는 이들을, 세 번째의 양은 신앙의 선 가운데 있는 이들이다. 개인적인 교인 차원에서 이해해본다면, 이 대목이 우리를 가르치는바, 이는 주님의 신성한 사랑의 열렬한 바람 이다는 것, 즉 그분의 자녀들은 그분께서 그들의 심정과 지성에 이식하신 순진, 선행, 신앙에 자양분을 공급하고 보호해주어서 이것들이 그분의 양떼로 잘 성장하도록, 그리고 그분의 양우리에 가져다 놓이도록, 그들 고유의 목자로서 그분 아래 있게 되기를 간절히 바래시고 있다는 말이다. 혹 어떤 이들은 세 번 질문한 주님의 의도는 그가 세 번 주님을 부정했기 때문에서라고 말하기도 하지만 온유하신 주님께서 그가 상심하라고 그의 죄과를 들추어내시는 분이 아닐 것은 굳이 설명할 이유가 없을 것이다. 셋이란 숫자의 의미에 위 두 사건이 바탕을 둔 것은 우연의 일치일 뿐이다. 전자는 옛 교회 처방에서 주님이 충분히 부정된다는 것을 표현한 것이고, 후자는 새로운 교회 처방에서 주님이 충분히 인정된다는 것을 표현한 것이다. 각 개인의 거듭남에서도 옛 사람에 의한 것과 새 사람에 의한 것도 위와 같다.
18,19. 주님에 의해 언급된 세 번이란 표현이 베드로가 표현하는 신앙에 관한 교회의 연속되는 시기들을 의미했는바, 주님께서는 교회의 시작 시기와 마지막 시기에 있는 신앙의 다른 품질을 묘사하시고 있다.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그의 임무를 다 말하신 후 이런 놀랄만한 말을 그에게 전하시고 있다. “‘참으로, 참으로, 내가 너에게 말한다, 네가 젊었을 때, 너는 네 자신 허리띠를 매고 네가 원하는 쪽으로 걸었다. 그러나 네가 늙었을 때, 너는 네 손들을 내뻗을 것이다, 그리고 또 다른 자가 너에게 허리띠를 맬 것이다, 그리고 네가 원하지 않는 쪽으로 너를 운반할 것이다.’ 이것을 그분은 이야기하셨다, 이는 어떤 죽음으로 그가 하느님을 신성화 할 것인지를 의미하고 있다. 그분이 이것을 이야기하셨을 때, 그분은 그에게 말하신다, ‘나를 따르라.’” 글자적 의미 차원일 경우 이 대목은 베드로 스스로 이해했던 것(베드로후1:14)같이 그의 순교와 관계되고 있다. 그러나 영적 의미에서 이 구절들은 교회의 시작과 끝에 있는 신앙의 상태와 조건들과 관련되고 있다. 젊은 시기의 베드로는 교회의 초기에 있는 신앙 같은 것이다. 노령기의 베드로는 교회의 말기에 있는 신앙 같은 것이다. 이렇게 이해해보면 이 구절이 신앙의 상태에 관해서, 그리고 초기 때와 마지막 때의 인간 이해성에 관해서 얼마나 비유적으로 묘사된 대목인지 놀랄만하다. 베드로가 젊었을 때 그는 스스로 띠를 매고 자기가 뜻하는 대로 걸었다. 그가 늙게 되었을 때 그는 팔을 벌리고 다른 사람이 그에게 띠를 매어 그가 뜻하지 않는 곳으로 끌고 갈 것이다. 전자는 자유롭다는 생각이 들게 하지만 뒷부분에서는 속박되었다는 생각을 갖게 한다. 교회의 초기 시절에서 이해성은 계발되고 두려움 없는 신앙의 안내 아래 자유로이 행동한다. 교회의 말기 시절에서 이해성은 소경 되고 겁많은 신앙의 암시에 굴복되어 있다. 교회 초기, 신앙이 젊었을 때 교회는 스스로 띠를 띠고 본인이 원하는 데로 걸었다. 즉 교회가 진리를 자유로이 탐사하고 획득한 다음 자유로이 결정해서 그것에 따라 살았다는 말이다. 이렇게 믿어지고 행동된 것은 주님으로부터의 신앙이고 행동이다. 이것의 봉사는 완전한 자유이고, 이것의 사랑은 걱정을 몰아낸다. 그러나 속방 당함으로부터 믿어지고 행동된 것은 세상과 자아로부터인 바, 이것의 봉사함이란 갇힌 상태이고 그들의 두려움은 사랑을 몰아낸다. 이것이 노령기의 베드로가 팔을 벌리고 다른 사람이 띠를 매는 것으로 묘사되고 있고, 이것은 교회의 말기에서의 신앙의 조건과 상태를 기술한 것이다. 그런 다음 마음의 실질적 능력과 지적능력은 인간의 의지에 종속된 상태에 있다. 그리고 마음은 신성한 진리의 자유 안에 보존되는 대신 인간 오류라는 속박 아래 놓여지고 만다. 이런 상태는 이해성이 신앙의 권위 안에 붙잡혀 있게 되는 것, 신학적 격륜(maxim)의 작동으로 본보기화 되어 있다. 참으로 이 대목은 마치 신앙에 모든 권능이 서임 되어 있는 듯 하게 들리게 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신앙은 인간 견해에 폭정을 가하는 이름밖에 더 아니고, 신앙의 이름 아래 구호를 외친다. 이리하여 마음이 기독교의 자유를 박탈할 때 마음의 자질은 강압 당하고 그릇된 지시를 받고, 그 삶은 하느님의 의지가 아닌 인간의 뜻에 의해 결정되고 만다. 결국 신앙은 제가 원하지 않는 쪽으로 걷게 된다. 이는 신앙이 젊고 자유로웠던 때, 사도들의 시대 때의 조건과 폭넓게 다른 신앙이다. 신앙이 인간의 의지와 지혜에 속박된 상태에 놓일 때 그런 상황의 신앙에 신앙이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을까? 신앙이 사멸하면 그 대신 가짜가 그 자리에 들어앉는다. 그러나 신성한 자비는 교회의 이 처방에서 신앙이 종료될 때 또 다른 교회 처방에서 새로워지게 해서 그것의 죽음까지도 하느님을 영광되게 하는 수단이 되도록 인간의 마음 안에서 신성한 진리를 드높이도록 설비하신다. 이와 같은 것이 베드로의 끝에 관한 주님의 예견이었다. “예수의 이 말씀은 베드로가 장차 어떻게 죽어서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게 될 것인가를 의미하신 것이다.” 죽음에는 두 측면이 있다. 그러므로 두 의미가 있다. 자연적 측면에서는 육체의 붕괴이다. 영적 측면에서는 육체로부터의 이탈(emancipation)이다. 교회의 경우도 이와 같다. 이 측면에서는 교회의 끝이고 저 측면에서는 교회의 시작이다. 이를 암시하신 주님이 베드로에게 “나를 따르라”고 말하셨다. 그분의 가르침을 따르고 그분이 보이신 본보기를 내 발걸음으로 삼아 걸을 때 신앙은 주님을 따른다. 베드로에 대한 주님의 이 명령은 이런 요구, 즉 신앙은 그분 자신 외 어느 것도 따르지 말라는 요구도 포함하고 있다. 그이유가 그분만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바, 그분을 쫓아 걷지 않는 신앙은 어둠 가운데 걷는 격이기 때문이다.
20,21. “베드로가 돌아다보았더니 예수의 사랑을 받던 제자가 뒤따라오고 있다. 그 제자는 만찬에서 그분의 가슴에 기대었고, 주님에게 당신을 배반하는 자가 누구입니까? 라고 말했던 제자이다. 그를 보는 베드로가 예수에게 말한다, ‘주여, 이 사람은 어찌 될 것입니까?’” 앞 사건은 베드로와 관계되고 이 사건은 요한과 관련이 있다. 이 두 제자는 종교의 두 필수 요소, 그러므로 교회의 두 본질 되는 요소를 표현했다. 현재 사건에서 그들에 관해 기록된 것은 주님에 대한 그들의 관계에서, 그리고 후기 시대에 그들에게 닥치게 되는 것도 관계되고 있다. 기록된 상황은 매우 특이한 것이고 엄숙한 하나의 역사로 도입되는 특별한 측면이 있는데도 그 자체로 보면 크게 중요한 듯 보이지 않는다. 즉 이 대목은 신앙 이든, 실제에 관해서 이든 어떤 교훈도 가르치지 않는 것 같고, 품성 면에서도 눈에 띄는 예언적 모습이 아무 것도 없다. 더구나 그것이 상징적인지 여부도 비치고 있지를 않는다. 그러나 이미 살핀 바와 같은 베드로에 관련해 관조한다면 깊은 교훈이 있다. 베드로는 신앙에 대한 예징(type)이고 요한은 사랑 또는 선행에 대한 예징이다. 여기서 요한은 자신을 과거 만찬에서 그분의 가슴에 기대고 그분을 배반할 자가 누구냐고 물었던 그분의 사랑을 받던 제자로서 기술해놓고 있다. 예수께서는 제자들 안에 있는 그분으로부터 파생된 그 사랑을 사랑하신다. 사랑은 그분과의 결합을 준다. 이것이 그분의 가슴에 놓여 있다. 그리고 사랑은 적들의 수중에 진리를 팔아 넘기는 것에 관한 계시를 신성한 지혜의 입술로부터 끌어낸다. 베드로는 신앙에 관한 예징이다. 여기서 베드로와 요한은 둘 다 예수를 따르는 것으로, 베드로는 명령에 의해, 요한은 자발적으로 따르는 것으로 표현되었다. 베드로는 뒤돌아서 요한이 따라오는 것을 보고, 주님께 묻되 그의 동료 제자를 앝보고 시기하는 듯한 어떤 암시를 풍기는 표현을 써서 묻고 있다. 베드로의 돌아섬은 신앙이 스스로 주님으로부터 돌아서서 뒤를 쳐다보는 것을 상징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래서 신성한 지혜가 우리에게 말한다. 쟁기를 붙잡은 채 뒤돌아보는 사람은 하늘나라에 적합치 않다는 것이다. 주님을 따르라는 명령이 있은 직후 요한을 경시하면서 뒤돌아보는 베드로가 의미하는바, 이는 교회가 개시된 후 머지않아 신앙은 주님으로부터 뒤돌아서고 선행을 가볍게 여기거나 경멸할 것이라는 것이다. 이런 경우가 사실이 된 것은 잘 알려져 있다. 초기 교회 지도자들은 신앙에 관한 그들의 온전함을 이내 잃기 시작했다. 더불어 상호간의 사랑과 선행이라는 따뜻함도 상실되기 시작했다. 동시에 진리에 관한 논쟁, 특히 주님에 관련된 진리를 토론하기 시작하면서 그들 신앙의 유일한 대상이요 중심 되는 그분으로부터 돌아서고 서로간의 말다툼 속에서 선행은 경시되고 있었다. 그래서 이 대목은 참 교회의 멤버라고 자신을 생각하는 모든 이들에게 주는 엄숙한 교훈을 포함하고 있다. 교회가 참된 교회이고, 교인이 교회의 참된 멤버가 되는 것은 그들이 주님을 꾸준히 찾고 따를 때, 신앙과 사랑이 선한 일 안에서 하나 될 때 뿐이다.
22. 베드로의 질문에 주님께서 대답하셨다.“내가 올 때까지 그가 체류하기를 내가 바란다면 그것이 네게 무엇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 이 대목의 여건이 특이한데 비해 위 대답은 특이한 것 같지가 않다. 이 대답이 알려주는 내적 의미가 없다면 글자적 의미로는 질문에 대해 만족 할 만한 설명이 없는 것 같다. 주님의 오심은 하늘의 구름 안에서의 그분의 오심이다. 그분의 두 번째 강림은 끝을 맞게 되리라고 그분이 예견하셨던 것 대신에 새로운 교회를 일으키시는 것이다. 요한에 관한 주님에 예언적 선포가 발표하는바, 사랑과 선행에 관한 어떤 것은 주님이 오시는 때까지 교회 안에서 보존되리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오류와 부패함이 극성을 부리고, 신앙 자체가 주님에게 등을 돌리고, 설사 신앙 자체가 죽음에 놓여지고 만다 해도 선행의 어떤 것은 주님이 두 번째 오실 때까지 생존하리라는 말이다. 주님께서 본문 외의 다른 곳에서 가르치는 경우가 본문의 교훈일 것이다. 그분이 말하신다. “사람의 아들이 올 때 땅 위에서 신앙을 발견 할까?” 이는 아무 신앙도 발견하지 못할 것이라는 말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분은 사랑과 선행이 완전히 소멸한다고는 말하시지 않는다. 이에 관해 그분이 말하신다. “죄악 때문에 많은 사람들 속의 사랑이 찬 상태가 될 것이다.” 많은 사람들과 더불어 사랑이 차진다 해도 소수의 사람들과 더불어서 따뜻함이 보존되도록 설비되어 있다. 그 이유가 선행에 관해 아껴 두신 것 없이는 새로운 교회는 시작될 수 없기 때문이다. 본문의 상황 안에는 또 다른 진리가 포함되어 있다. 교회가 종말을 맞이하면, 그 다음 주님께서 건설하시는 교회는 또 다른 처방, 더 높은 처방으로 이어진다. 교회에 관한 이 두 처방은 베드로와 요한 사이의 특징있는 차이점과 같은 동일한 상이함이 있다. 기독교회에 관한 첫 처방은 사도 베드로의 교회였다고 말할 수 있을는지 모른다. 그것은 신앙의 교회였다. 진리가 교회에서 우위적인 힘을 가졌고 신앙이 교회의 중심 되는 품위였다. 그렇게 되는 것은 필요한 조치였다. 진리의 각 한 팔이 세상의 오류와 대적하는데 요구되었고, 교훈적인 지혜가 교회를 가르치도록 요청되었었다. 교회의 두 번째 처방은 사도 요한의 교회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사랑의 처방이다. 추측해 보는 바, 요한은 이런 연유로 두 번째 처방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계시록을 쓰도록 선택되었으리라는 추측이다. 그러므로 베드로가 첫 처방이었듯 요한은 두 번째 처방의 사도로 상징적이 되어 주님이 오실 때까지 체류하게 되었다. 일반적 교회 측면의 처방에 관련된 위와 같은 진리 외에도 개개인이 제자 된다는 측면에서도 교훈을 담고 있다. 교회 측면에서 처럼 개인 측면에서도 진리는 선에 앞서 진행되고 신앙은 선행에 앞서 온다. 참으로 제자인 사람들은 베드로의 명령과 요한의 약속을 받아야 할 것을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다.
23. “하여 이 말하심이 형제들 사이에 널리 퍼졌다, 즉 이 제자는 죽지 않으라라는 소문이다. 허나 예수께서는 그에게 ‘너는 죽지 않을 것이다’ 고 말하셨던 게 아니라, ‘만일 내가 올 때 까지 그가 체류하기를 바란다면, 그것이 네게 무엇이냐?’ 하고만 말하셨을 뿐이다.” 주님의 말씀은 믿는 형제들 사이에서 이런 의견, 즉 요한은 주님이 오시는 것을 보기 위해 살아있을 것이고, 한편 베드로는 그분을 따라 그의 스승처럼 십자가에서 죽어 진리에의 순교자가 되리라는 의견이 분분했다. 복음서 기자는 이런 항간의 오류를 쓸어내기 위해 주님께서 자신에 관해 실제 말했던 것을 반복해 놓고 있다. 그가 말한 것은 자연적 의미로만 간주하면 확실하고 충분하게 이상야릇한 것이다. 예수께서는 요한이 죽지 않으리라고 말하시지 않고, 반면 만일 제자들이 주님이 오시는 때를 알았었다면 그것과 동등한 뜻을 염두에 두어야만 한다는 것을 말하셨다. 형제들 사이에 떠돈 소문은 글자대로는 틀렸으나 주님의 말씀의 영의 측면에서는 맞는 말이다. 그럼에도 그들이 요한에 관해 믿게 된 것은 주님이 말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신성한 언어가 특수한 의미를 가지고 있듯이 이 사건의 경우도 마찬가지로 간주해야 한다. 요한의 체류(John’s tarrying)를 표현하기 위해 사용된 원어는 이 뜻 외에도 머무르다(abiding), 거주하다(dwelling), 그리고 명사로서 주거(dwelling), 저택(mansion)도 뜻하고 있다. 요한복음 1장 38절을 보면, 세례자 요한의 제자 중 두 명이 예수께 “어디서 묵고 계십니까?”라고 물었고, 그들에게 와서 보라고 초대되었을 때, “그들은 그분이 주무시는 곳에 와서 보고 그 날 그분과 함께 머물렀다.” 주님께서 약속하신 바,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말을 지킬 것이고 나의 아버지는 그를 사랑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에게 와서 그와 함께 우리의 처소를 만들리라” (요한 14:23). 천국적인 삶을 따르려고 성실히 노력하는 이들에게, 비록 각자의 성취가 차이가 있다 해도, 그들에게 이런 행복한 보증, “내 아버지 집에는 많은 저택들이 있다” (요한 14:2)는 보증을 주시고 있다. 그분이 오실 때까지 사랑 받은 제자가 체류하기를 그분이 바라신다고 하는 요한에 관련된 주님의 신비스런 말씀은 이런 약속을 포함하고 있다. 비록 신앙이 실패할지라도 선행은 끝까지 생존하리라는 것이다. 교회가 황무지로 된다 해도 선행은 곤경의 때에 피난처로서 지낼 곳을 발견하리라는 말이다. 또한 체류함 또는 거처를 정함(dwelling or abiding)이라는 단어는 의지 안에 선함이 거처를 두겠다고 고집 하는 상태도 표현한다. 이것이야말로 본문에서 묘사되는 것에 꼭 맞는 상태이다. 어쨌든 많은 교회들이 진리의 뒤집음과 추론으로 황폐될는지 몰라도 선에 관한 어떤 것이 순박한 사람의 마음 안에 보존되고 있다. 주님께서 이 마음에 평화의 길로 선행의 발을 안내하기 위해 새 빛을 주시고자 오실 때 진리는 보존된 이 선 위에 접목될 것이다.
여기서 주님의 말하심과 행동하심에 관한 요한의 기록이 끝나고 있다. 그리고 이 결론은 희망과 위로로 가득차 있다. 이것은 시작을 쳐다보는 끝이고, 이것은 그분의 첫 강림의 교회가 두 번째 강림의 교회로 건너갈 수 있기 위해 보존되는 수단을 밝히 알게 하고 있다. 깊은 구렁에 다리를 놓는 것은 선행이다. 선행은 길을 만든다. 이 길을 수단으로 주님께서는 옛 것으로부터 새 것으로 건너신다. 선행의 선 가운데 있는 이들은 새로운 처방의 핵을 형성하기 위해 건져지는 남겨진 자, 사방에서 모은 뽑힌 자들이다. 이들은 주님의 오심에서 그분을 영접한다.
24. “이 제자가 이런 것들을 증언하고, 이런 것들을 적었다. 우리는 그의 증언이 진실이다고 알고 있다.” 요한의 선포, 예수가 사랑하셨던 그 사람, 만찬 때에 그분의 가슴에 기대었던 그가 이 일들을 증언하는 제자이다는 선포는 사랑의 예징이었던 그 사람에 의해 씌어진 바대로의 주님의 생애에 관한 역사는 믿는 자의 심정에서 사랑이라는 품위를 생산하고 강화시켜 주는데 아주 적합한 국면에서 주님의 품성과 생애가 표현되었다는 말이다. 이것은 모든 사람에게 계시된 바로서의 요한의 복음에 대한 특이하고 드높일 품성이기도 하다. 이외 이런 사실은 각자에게도 특이하게 응용되는 점이 있다. 우리의 구원이 결과 되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우리를 위해 씌어졌어야 할 뿐 아니라 우리 안에서도 그러해야 한다. 요한의 이 복음서, 사랑의 이 복음서는 사랑이 우리의 이해성에 사랑의 진리를 증언하고, 우리 심정에 그 사랑의 진리를 새겨야 우리 안에서 복음이 되어 질 수 있다. 이런 다음에 우리는 그의 증언이 참되다는 것, 예수 안에 있는 참 진리를 알게 된다. 사랑은 진리의 가장 높은 증거이다. 이해성이 이 증거를 인정할 때 우리는 그 증거가 참된 것임을 믿는다. 심정이 그 증거를 승인할 때 우리는 그 증언이 참되다고 알게 된다. 지성이 주제를 논리적으로 생각해내 결론을 맺게 하는 자질인 것은 틀림없다. 그럼에도 이해성 자체는 예, 아니오를 말하는 의지의 영향을 받고 있다. 의지에 의해 나누어 받는 긍정적, 부정적 경향성이 우리의 모든 지적 작용 안에 있다. 이것은 특히 도덕적, 종교적 경우에서 더욱 두드러지는 바, 우리의 이해성과 의지가 하나 되어 진리에 동의해야 우리는 그것이 진리임을 아는 것이 된다. 그래서 사도는 말한다. “그리고 우리는 그의 증언이 참되다는 것을 알고 있다.”
25. “예수께서 행하신 많은 다른 일들 역시 있다, 만일 그것들을 낱낱이 기록하려 한다면, 세상 자체 까지도 씌어져 있을 책들을 담을 수 없을 것이라 헤아린다.” 이 구절은 수많은 글로 적히지 않는 주님의 생애를 표현한 것이다고 생각되어지고 있다. 의심할 것 없이, 복음서 기자가 기록한 것들 외에도 그분의 공적 생애 동안 만 가늠해 보아도 많은 일들이 주님에 의해 말해지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신성한 지혜의 보물 안에 감추여 있는 깊은 것들 중의 하나이다. 육을 입은 말씀에 의해 말해지고 행해졌던 것 만큼이나 계시로 충만된 씌어진 말씀, 말씀이 육이 된 것의 말로 된 형체인 씌어진 말씀 안에 기록되지 않았으리라는 것이다. 그렇다고 주님이 말하셨고 행하셨던 것들이 잃어진 것은 하나도 없다. 그분이 말했던 모든 단어, 그분이 수행하셨던 모든 일은 천국 안에 씌어져 있고 그분 자신의 인성 안에 새겨져 있다. 그 이유는 그것은 그분의 구속하심과 신성화 하심의 일부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말씀이 알려지도록 만든 이런 영원한 실재 안에 항구적으로 고정되었다. 신성화 된 말씀은 지상에서 있었던 주님의 위대한 일의 결과들을 그것 안에 적어 놓았다. 그리고 말씀으로부터 지금은 천국들의 천국까지의 모든 세계들, 모든 천국들 넘어 까지도 신성화되었다. 신성한 영향은 직접적으로, 그리고 말씀을 통해 밝히 알리는 두 방법으로 천국 안의 교회에, 이로부터 지상의 교회에 내려와 그들이 하나 되게 하면서 주님의 신성한 인성의 완전한 형상으로 하나를 만든다.
“아멘”은 교회의 응답이다. 더불어 이는 사랑 받은 사도가 인류에 밝히 알리는 선택된 도구였다는 위대하고 위로를 주는 진리들에 대한 인간 심정의 응답도 되어야 할 것이다.

요한복음 20장 해석

20

우리는 앞 장에서 잔인하게 대우받으시고 십자가형에 처해지는 고통의 주님의 역사를 간략히 살폈다. 이 대목의 중요한 모양새는 복음서 전체에서 주어지고 있는데 특히 마태복음에서 이미 설명한바 있다. 이제 우리는 주님의 부활이라는 희망으로 밝게 빛나는 영광의 본문에 당도해 있다. 더불어 거기에는 온유하고 교훈적인 사건이 연계되고 있다.
1. “한 주간의 첫째 날, 아직 어둠이 깔린 일찍 막달라 마리아가 무덤으로 오고 있다. 그리고 무덤으로부터 옮겨진 돌을 보고 있다.” 구속과 신성화 하심이 완성된 첫날의 새벽은 사람의 아들이 땅의 심장에 놓여 있었던 삼 일 밤낮을 계승했다. 아직 어둠이 깔려 있는 이른 새벽에 막달라여자 마리아가 무덤에 오고 있다. 일곱 번 깨끗해진 마라아의 영혼은 구세주에 집착되어 두려움을 던져버리게 하는 사랑으로 자극 받아 있는바, 그녀는 십자가형을 받은 그분의 몸에 경건한 애착 의 마지막 의무를 다하려고 그분의 시신이 놓여있는 무덤에 아직 컴컴한 시각이지만 그녀의 행보를 서두르게 하고 있다. 막달라 여자 마리아 만이 무덤에 제일 먼저 왔던 것으로 요한의 복음서는 기술하고 있다. 비록 그녀 한 사람만이 여기서 언급된다 해도 마태나 마가의 증언에 의한 바와 같이 다른 사람이 그녀와 함께 있었다는 견해를 배척하는 것은 아니다. 사실 한 두 사람의 동료가 거기에 있었다는 것은 두 제자에 대한 마리아의 말에서도 수긍이 간다. 즉 “그들이 주님을 꺼내갔습니다. 우리는 그들이 그분을 어디에 모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에서 “우리”라는 단어가 위 짐작을 뒷받침한다. 그러나 막달라 여자 마리아 만이 무덤에 온 것으로 말해진 것은 요한을 인도한 성령의 어떤 의도가 있었지 않았을까 하고 추리해 볼 수 있게 하고 있다. 요한은 사랑의 사도이고 그의 복음서는 이 품성이 인간에 대해서 뿐 아니라 주님을 향해서도 활동하는 것을 묘사하고 있다. 막달라 여자 마리아는 가장 순수한 사랑의 모형(type)이었다. 그 이유는 가장 충분하게 순수해진 사랑, 즉 사랑으로서의 그분을 사랑함, 주 구세주를 사랑하는 대상의 최고인 분으로 사랑하는 경우에 대한 모형이기 때문이다. 마리아가 왔을 때 그녀는 돌이 무덤에서 치워진 것을 보았다. 주님을 안장했던 무덤은 말씀을 표현했는데 그것은 굴욕된 그분의 상태에 국한되는 말씀을 표현했다. 그리고 무덤 입구를 막았던 돌은 말씀의 바깥쪽에 해당되는 의미, 즉 내향의 영적 의미를 에워싼 자연적 의미를 상징화하고 있다. 어쨌든 마리아가 주님을 아는 수준은 신성화하시지 않은 인성의 주님, 자연적 마음에 의해 납득되는 것, 자연적 의미에 의해 지각되는 주님만을 아는 수준이다. 마리아 같은 이들에게 주님의 신성은 그분의 어머니쪽 인성을 통해서 빛을 발했다. 따라서 그것은 칙칙한 유리를 통해 보여지는 수준에 불과하다. 이제 주님은 그분의 어머니 쪽의 모든 인성을 벗으시고 신성화된 신성한 몸으로 일어나셨다. 그러므로 돌이 무덤입구에서 치워져 내면이 열려 있게 된 것이다. 단순한 역사적 의미에서 추론한다면 돌은 주님의 부활을 인정하도록 하기 위해 하늘로부터 내려온 천사에 의해 치워졌다고 말할 수 있을는지 모른다. 그러나 이런 추측은 굳이 필요한 것 같지 않다. 그이유가 이제 천상천하의 모든 권능을 가지신분, 문을 잠그고 들어앉은 제자에게 나타나신 바 있는 주님이신데 무덤에서 나가는 일에 어떤 천사의 도움도 필요 없으셨을 것이기 때문이다. 돌이 그분을 위해 치워진 게 아니라 제자들을 위해, 그리고 우리를 가르치시기 위해, 즉 주님의 신성화하심과 부활하심은 내적 의미로 있는 말씀을 여신 것, 즉 주님에 관계되는 의미, 그분의 신성화 하심을 기술하는 가장 깊은 말씀의 의미에 제자들이 들어가는 것을 허용하셨다는 것을 가르치시기 위해서 였다. 예수의 증언은 예언의 영이다. 그리고 가장 깊은 의미에서 모든 말씀은 그분에 관한 예언이다.
2. 무덤을 들여다 본 첫 결과는 깜짝 놀램과 실망이었다. “그다음 그녀는 달려, 시몬 베드로에게, 그리고 예수께서 사랑하셨던 다른 제자에게 가고 있다. 그리고 그들에게 말한다, 그들이 무덤으로부터 주님을 옮겼다, 그리고 우리는 그들이 그분을 어디에 뉘셨는지 모른다.” 상태가 바뀔 때 대체로 불확실함과 흥분, 그 중 하나가 따라 붙기 마련이다. 옛것이 사라졌다. 그러나 모든 것이 아직 새로워지지 않고 있다. 우리의 영적 존재 안에 공백이 있다. 참으로 밤이 지나고 새 날이 밝아졌다. 샛별이 심정 안에 떠올랐다. 그래서 애착은 주님을 찾도록 부추킨다. 그러나 이해성은 아직 어둡다. 이해성은 살아난 진리에 관한 명확한 지각을 획득하지 못했다. 예언자에 의해 예견된 독특한 상태, 즉 “주님만이 아시는 그 날, 낮도 밤도 아니다. 빛이 밝지도 어둡지도 않을 때, 저녁때에 빛이 있을 것이다” (즈가리야14:7). 이것은 무덤에 왔을 때의 마리아의 마음 상태이다. 주님의 시신을 보지 못한 그녀의 실망은 그녀로 하여금 시몬 베드로와 예수께서 사랑하셨던 다른 제자에게 달려가는 일이었다. 이 달려감은 마리아의 느낌이 격렬해진 결과이고 이는 마리아가 표현했던 이들의 마음 상태, 즉 뭔가 해결책을 기대하고 성급히 원조를 요청하러 나서는 마음 상태를 상징하고 있다. 마리아가 베드로와 요한에게 달려감이 묘사하는바는 어떻게 마음이 최상의 애착으로 강한 자극을 받으면 공포에 휩쓸린 두 제자로 표현된 잠들어 있는 신앙 과 선행을 활동하도록 일깨우는가에 대한 것이다. 마리아는 두 제자에게 실망 섞인 말로 이렇게 전달하였다. “그들이 무덤에서 주님을 꺼내갔습니다. 우리는 그들이 그분을 어디에 두었는지 모릅니다.” 주님의 진리를 실지로 부정하고 미워함으로 주님께서 교회 안에서 십자가형을 받게 되는 마지막 때에 그분을 구세주로 영접했던 소수의 사람들은 무거운 시련에 직면하게 된다. 정의의 태양이 어두워질 때 마치 십자가형이 진행될 때 이 세상의 태양이 어두워졌듯 신실한 자의 마음까지도 어둠으로 깔리고 만다. 그래도 그들은 아직 주님을 붙들고 있다. 그리고 그들의 가장 나은 애착 으로 그분께 향유를 바르고 싶어한다. 그러나 이런 경건한 직무를 수행하고 싶은 한편 그들은 그분을 발견하지도 못하는 무덤 안에서 그것을 추구하고 있다. 비록 무덤이 주님의 굴욕적인 상태에 관한 말씀을 표현한다 해도 더 멀리로는 그분의 신성화하심을 표현하고 있다. “그분은 여기 계시지 않는다. 그분은 일어나셨다.” 신실한 사람들은 그분의 적들이 그분을 꺼내갔다고 생각한다. 주님 자신의 가르침, 즉 그분은 십자가형을 당하고 삼 일만에 죽은 자로부터 일어나시리라는 가르침을 여타 다른 그분의 희망적인 가르침과 함께 그들의 기억에서 깡그리 사라졌다. 제자들의 상태도 이 역사의 시점에서는 믿는 자나 믿지 않는 자나 다를 게 별로 없는 수준이었다. 주님은 사악한 자에게서 뿐 아니라 의로운 자에게서도 죽음을 당하신다. 그러나 의로운 자 쪽에서는 같은 죽음이라도 대단히 큰 차이가 있다. 비록 주님이 그들 안에서도 십자가형을 당하신다 해도 그것은 의로운 자에 의해 당하시는 것이 아니다. 그런 결과 주님은 의로운 자 안에서는 일어나시고 사악한 자 안에서는 죽어 계신다. 의로운 자 안에서 주님이 십자가형을 당하시고 죽으신다고 말하든지, 우리의 옛 사람이 십자가형을 당해 죽는다고 말하든지 마찬가지 말이 된다. 그 이유가 주님 안에서 죽은 것은 제자 안에서도 역시 죽는 것이기 때문이다. 연약하기 그지없는 인간성의 생명은 내려놓여지고 매장되어야 신성화 하신 인성이 심정 안에서 참 생명과 권능으로 일어난다. 텅빈 무덤이란 주님의 진리가 자연적 납득의 대상이 되어 있을 경우 주님의 진리가 송두리째 옮겨진 것, 그리고 마음이 기댈 수 있도록 남아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는 영적 황폐함의 상태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텅빈 무덤이란 새로운 모든 것을 받도록 준비되기 위해 옛 모든 것이 마음으로부터 완전히 제거됨을 의미한다.
3,4. “베드로가 달려갔다. 그리고 다른 제자, 그리고 무덤으로 왔다. 그렇게 그들은 모두 함께 달렸다. 그리고 다른 제자는 베드로 보다 더 빨리 뛰었다. 그리고 무덤에 먼저 왔다.” 활동을 개시한 신앙과 사랑이 퇴거해 은둔했던 마음으로부터 나와서 그들이 잃었던 것을 곰곰이 생각하고 스스로 말씀에로 향한다. 그리고 진리의 생명을 박탈한 이들이 전과 같이 그것을 거두어 갔는지 자신들 스스로 검사하고 확인한다. 마리아가 달려간 경우같이 제자들이 달려감은 강렬한 바람을 암시하고 있다. 요한이 베드로보다 더 빨리 달려가 먼저 무덤에 왔다는 것은 자연적 차원에서 일 경우 그가 베드로보다 더 젊어서 그렇게 된 것이라고 속단해 버릴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거기에도 의미가 없는 것이 아니다. 요한이 표현하는 품위가 더 정력적이고 활동적임을 표현한 것이다. 사랑은 신앙 보다 더 빨리 달린다. 요한이 무덤에 먼저 도착했듯 사랑은 거듭남에 관련되는 모든 것 중에서 제일이다. 시간상으로 먼저라는 말은 상태 상으로 우위라는 말이다.
5-8. “그리고 그가 구부려, 그리고 안을 들여다 보았다, 고운 아마포 천이 뉘여있는 것을 보았다, 그럼에도 그는 들어가지 않았다. 그의 뒤를 따라 시몬 베드로가 온다, 그리고 무덤 안으로 갔다, 그리고 고운 아마포 천이 뉘여 있는 것을 본다. 그리고 수건, 그분의 머리를 둘러 있었는데, 고운 아마포 천과 함께 뉘여 있지 않고, 별도의 장소에 함께 감아져 있었다. 그 다음 무덤에 먼저 온 다른 제자 역시 안에 갔다, 그리고 그는 보고 믿었다.” 요한이 몸을 굽힘은 겸손의 상태를 표현한다. 여기서 몸을 구부린 것은 예배의 표시로 엎드리는 것과 같은 종류는 아니지만 어쨌든 존경심이 가득하여 진지한 상태로 살펴보는 것이다. 이런 수준의 살펴본다는 말이 등장하는 곳이 신약성경 중에서 베드로전서 1장12절과 야고보서 1장25절이다. 영적으로 이것은 존경어린 탐색과 깊이 생각함을 뜻한다. 두 행동 중에서 “몸을 구부림”은 의지의 행동이고, “살펴봄”은 이해성의 행동을 묘사하고 있다. 이 관점에 일치되어 요한의 복음서는 의지로부터 되어진 행동, 그런고로 애착 의 가장 깊은 바탕으로부터 이루어진 행동을 기술하는바, 이 구절에서 요한이 몸을 구부렸다고 말해지고 있다. 누가복음(24:12)의 경우 몸을 구부려 살핀 사람은 무덤에 제일 먼저 왔던 베드로라고 말하고 있다. 우리의 가장 깊은 겸손과 가장 진지하게 주님을 찾는 것은 사랑으로부터이다. 사랑이 강력하게 적극적일 때 그 사랑은 신앙 에 선행한다. 한 때 동안 주님은 우리에게 생각보다는 애착 의 대상이 되어주신다. 그분의 형상은 이해성보다는 심정에 새겨진다. 참으로 이런 경우는 느낌이 크게 흥분될 때 흔히 있는 경우이다. 어떤 때에 우리는 본문의 베드로와 요한이 가졌던 느낌과 상응되는 것 이상으로 느끼게 될까? 잃은 죄인 하나를 찾게 될 때 온 하늘이 기뻐하는바, 진지하고 사랑 있는 영혼이 잃은 구세주를 발견할 때에 기쁨이 가득해야 할 것이다. 이 아름다운 대화체의 주제 역시 이보다 덜 한 게 하나도 없다. 마음이 깊이 낙담했던 상태로부터 높은 희망을 가지는 상태로 일깨워져서 바랬던 대상을 추구할 때 사랑이 무덤에 먼저 오는 것은 이상할 게 하나도 없는 순서이다. 그러나 생각은 느낌을 돕기 위해 때맞춰 와진다. 마치 본문에서 베드로와 요한의 경우 같다. 반사적인 생각은 흥분되어진 느낌이 하지 않은 것도 한다. 생각은 느낌이 발견했던 것만을 세세하게 들여다보고 검사한다. 마치 늦게 당도한 베드로는 무덤에 들어갔으나 먼저 도착했던 요한은 들여다 보았을 뿐 들어가지 않은 경우와 같다. 그리고 생각은 세부사항을 발견해서 느낌이 미처 눈치채지 못했던 것까지 구분한다. 마치 베드로도 요한처럼 수의가 흩어져 있는 것을 본 것에 더해 수건이 잘 개켜져 있는 것까지 본 것과 같다. 이 구절에 기록된 세부사항들은 우리를 가르치는 영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 거기에는 우리의 시선을 먼저 끌게 하는 교리적인 특성 하나가 더 있다. 예수의 몸을 감았던 수의가 무덤에서 발견된 반면 예수의 시신은 발견되지 않은데 대해 유대인들은 누군가가 훔쳐 갔거나 옮겼다는 자기들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증거로 삼고 있다. 그러나 또 다른 중요한 사실을 증거하고 있다. 부활 때에 주님의 몸은 더 이상 물질적이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나사로가 무덤에서 나오라고 불리웠을 때 그는 손발이 베로 묶인 채, 얼굴은 수건으로 감긴 채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주님께서 그를 풀어 주어 가게 하라고 명령하실 때까지 묶인 채 있었다. 부활에서 주님은 그분의 몸을 감았던 수의와 머리를 둘렀던 수건을 남겨 두셨는 바, 이제 그분의 몸은 매장될 때와 같은 몸이 아니었다는데 대한 명백한 증거가 되지 않을까? 무덤에 남겨 둔 수의로부터 우리가 배우는 영적 교훈은 우리의 거듭남과 주님의 신성화 하심에 관한 것이다. 이 수의들은 예수를 증언하는 말씀 속의 진리에 관한 상징물이다. 그분이 몸을 감았던 수의들은 말씀의 영적 의미에 있는 진리들이고, 머리를 감았던 수건은 말씀의 천적 의미 속의 진리들이다. 이 두 진리들은 주님께서 그분의 인성을 영적 수준에서와 천적 수준에서 신성화하시어 그분의 영적 왕국과 천적 왕국이 신성한 그분의 일 안에 포함하도록 하셨다는 것을 증언하고 있다. 그분의 인성은 모든 수준, 즉 가장 높은 수준으로부터 가장 낮은 수준, 가장 안쪽에서부터 가장 바깥에 이르는 모든 수준에서 신성화하셨다. 수건과 수의는 처음과 나중, 시작과 끝이 되시는 신성화 된 그분의 인성에 관해 그분을 증언하고 있다. 이를 수단으로 주님께서 천적, 영적 수준 모두에서 구세주 또는 거듭나게 해주는 분이 되셨다. 이것들, 그리고 그들의 거듭나는 수단들은 따로따로 구분된다. 이 구분은 주님께서 세상에 오셨을 때 구속이 결과되고 그분의 인성이 신성화 하셨을 때 더 충분하게 명백해졌다. 이것이 몇 가지 표적들로 묘사되고 있는바 그 표시들 중 본문에서 묘사되는 것은 무덤에서 수건이 발견된 것, 잘 개켜져 있는 수건이 발견된 것들로 묘사되고 있다. 베드로가 무덤을 검사하고 수의가 흩어진 것을 보았고 수건은 잘 개켜져 있는 것을 본 뒤 “그제야 무덤에 먼저 다다른 제자도 들어가서 보고 믿었다.” 요한이 무덤에 맨 먼저 당도했으나 그 안에 들어간 첫 번째 사람은 베드로였다. 사랑은 활동 면에서 가장 빠르고 식별하는 것도 재빠르다. 신앙은 탐색 면에서 가장 적극적이다. 그래서 우리가 발견하는바 요한이 무덤에 와서 들여다 보았다는 것, 그리고 베드로가 무덤 안으로 가서 검사한 후 요한 역시 베드로가 발견한 것을 들어가 보았다는 것이다. 신앙 또는 이해성이 어떤 주제에로 들어가서 보고 믿는다. 이리하여 이해성 속의 신앙은 의지 속의 신앙 과 마찬가지가 된다. 이럴 때 신앙은 완성된다.
9. 그러나 베드로와 요한은 마리아가 전한 말, 즉 유대인들이 주님의 시신을 꺼내갔다는 것만을 믿고 있었다. 무덤의 상태가 암시하는 어떤 것도 그들에게 나타난 게 없었다. 그 이유가 “아직까지도 그들은 성경에서 그분은 죽은 자로부터 다시 일어나야만 한다는 말씀을 알지 못했다”. 신앙과 희망은 이전보다 더 짓눌려 있었다. 그들의 신앙의 대상은 죽었을 뿐 아니라 아예 누군가가 시체마저 꺼내갔다. 그들의 희망의 닻은 꺽여 있고 유약한 그들의 배는 몰아치는 바다에 휘감겼다. 그래서 그들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나 이런 암흑의 때를 맞이한 그들이 영영 가버렸다고 상상되어버린 그분은 이 큰 환난에 그들과 함께, 그들 안에서, 그들을 붙잡아 주시고, 그들이 바랐던 천국에로 그들이 알지 못했던 길로 해서 안내하시고 있었다. 신앙과 사랑의 큰 시련에 있는 기독제자의 이 체험에서 누군들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갈 때를 알지 못할까?
10. 이렇게 두 제자가 그들의 모든 희망의 끝을 보았을 때, “그런 다음 제자들은 자기들 자신의 집으로 다시 떠나 갔다.” 여기서 숙소로 번역된 것, 그 숙소가 함축한 것은 글자대로 그들 자신, 본래의 그들 자신(their own)이다. 영적으로 이해하면 기독제자의 이런 상태가 지금 표현한 것은 얼마나 인상적인지! 그들의 마음이 무감각의 상태로부터 열띤 행동 중 하나로 일깨워졌으나 자기들이 잃어버렸다는 것만을 확인시키는 행위가 되었을 때 희망 없는 이전의 상태로 더 더욱 가라앉고 만다.
11,12. “그러나 마리아는 무덤 밖에서 슬피 울며 서있었다. 그리고 그녀가 슬피 울었을 때, 그녀는 구부려, 그리고 무덤 안을 들여다 보았다. 그리고 흰옷을 입은 두 천사, 하나는 머리쪽에, 다른 하나는 발쪽에 앉은 것을 본다, 거기는 예수의 시신이 눕혀 있었던 곳이다.” 이제 무덤은 앞서 두 제자에게 표현했던 것과는 대단히 다르게 마리아에게 새 광경을 표출하고 있다. 이 천국의 특사는 마리아에게 맨 먼저 주님이 일어나셨음을 발표하고, 그녀를 통해 교회에도 전달하였다. 이것은 천사의 사명 중 한 가지 목적이었다고 믿어진다. 그러나 그들의 나타남에는 또 다른 의도, 훈도 해주는 의미를 가르치는 것이 있다고 생각되지 않을까? 천사들은 베드로와 요한에게는 나타나지 않았다. 왜 부활의 소식이 두 제자에게 먼저 알려지도록 되어지지 않았을까? 신성한 지혜는 다른 방도를 강구하셨다. 우리는 기록된 상황을 수단으로 어떤 특별한 목적이 응답되어졌다고 합리적으로 결론 맺을 수 있을는지 모른다. 영적 교훈에서 이 주제를 들여다보자. 이 주제는 이미 우리가 생각해보았던 사항들과도 연결되어있다. 비록 사랑과 신앙 을 가진 마음이 희망 없는 비활동의 이전 상태로 붕괴되어 있다 해도 아직 심정 안에는 선함의 가장 깊은 애착이 생명력과 깨어있음을 유지하고 끌어당기는 사랑의 힘의 중심 가까이에서 머뭇거리고 있다. 마치 마리아가 무덤 가까이에서 머뭇거렸던 것과 같다. 아직 마리아는 큰 상실감으로 흐느끼고 있다. 흐느낌은 가장 깊은 슬픔을 표현한다. 그리고 경건한 슬픔은 선함과 진리가 결핍되었다는 것을 느끼어 발생하는 고통이다. 그러나 그녀는 슬피 울면서도 굽혀 무덤을 들여다보고 예수의 시신이 놓였던 곳에 두 천사가 앉은 것을 보게 된다. 앞에서는 수의만이 보여졌을 뿐이나 지금은 두 천사가 나타나고 있다. 수의는 죽은 지식으로서의 말씀에 관한 진리들이다. 천사는 생명 있는 원리로서의 말씀에 관한 진리를 의미한다. 이 생명 있는 진리들은 주님의 신성화 하심, 그리고 인간의 거듭남에서 처음과 마지막 상태에 이르러 있는 가장 높은 것과 가장 낮은 것과 관계된다. 한 천사는 머리맡에, 다른 천사는 발치에 있었다. 그들은 앉아 있었다. 이런 자세는 의지 안에 수용함으로 오는 내면적이고 확증된 상태를 표현한다. 이 진리들은 지식들이 원격적으로 암시할 수밖에 없는 것들을 곰곰이 되새겨 확신을 낳게 해준다.
13. 이 생명 있는 진리들은 마음에 직접적으로 호소하고 환난과 슬픔의 원인에 관해 반성해보도록 한다. “그리고 그들이 그녀에게 말한다, ‘여인이여, 왜 너는 슬피 우느뇨?’ 그녀가 그들에게 말한다, ‘그들이 내 주님을 옮겼기 때문, 그리고 나는 그들이 그분을 어디에 뉘였는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슬픔에 대한 이유를 주도록 천국의 부탁을 받는 것, 이 두 가지는 서로 다른 사랑이다. 또한 두 가지 다른 결과를 가진다. 그 이유가 천국적인 심정의 수색은 자기 검증 쪽으로 인도해서 마음에 확신을 가져다주어 마음이 한 단계 승강하도록 고안되어 있기 때문이다. 천사들의 질문에 마리아는 제자들에게 전했던 말로 이렇게 대답한다. “그들이 제 주님을 꺼내갔습니다. 나는 어디에다 모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지금 마리아는 예수를 “제” 주님으로 부르고 있다. 이는 그분과 더 가까이 더 다정한 연결을 표현하는 말이다. 이는 예수가 자기의 구세주임을 느끼고 자신을 구원하려면 그분이 필요함을 느끼는 말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그녀는 자기를 구원해줄 자를 보지 못하고 있다. 더구나 자기의 죄와 슬픔에서 해방된 전망조차 파악 못한 처지이다.
14. 위와 같이 진행된 상태는 마음이 뒤바뀌는 쪽으로 인도한다. “그녀가 이렇게 말했을 때, 그녀는 자신을 뒤로 돌아섰다, 그리고 예수가 서있는 것을 보았는데, 그분이 예수였는지를 몰랐다.” 마리아가 돌아섬을 우리가 과감하게 생각해본다면, 이는 천사들이 말했던 결과가 아니다. 그 여자 뒤에 서 계셨던 주님이 하신 결과였다. 다시 말해 천사들의 말보다 그분의 영향으로 그녀가 뒤돌아 섰다는 말이다. 주님께서는 사랑하는 마리아를 그분께 돌아서게 한다. 참고로 계시록 1장 12절을 보면 요한에 관한 기록이 있는데, 그는 뒤에서 오는 음성을 듣고, 자기에게 말하는 그 음성을 보기 위해 돌아섰다. 머리의 뒤쪽, 소뇌가 있는 그 곳은 의지와 상응된다. 대뇌가 있는 얼굴은 이해성과 상응된다. 계시록의 요한에 관한 기록의 의미는 이러하다. 신성한 영향력은 먼저 의지로 돌어가 영향을 주는데 귀라는 기관이 이에 대한 직접적인 신체기관이다. 그 다음 의지를 통해 눈이라는 신체기관을 이용해 이해성으로 들어간다. 그래서 어떤 것이 인간의 의지에 영향을 주면 그는 그것을 보고 이해하기 위해 이해성을 뒤돌린다. 마리아가 자신을 뒤로 돌렸을 때 그녀는 자기에게 영향을 느끼게 했던 주님에게로 자신을 돌렸던 것이다. 그러나 비록 그분이 그 여자 앞에 지금 서 있는 셈이 되었지만 그녀는 그분을 인식하지 못했다. 그녀는 그분이 예수인 줄 몰랐다. 그녀는 그녀와 구세주 사이에 드리워 있는 그녀 자신의 상태인 베일(veil)을 통해 그분을 인식할 식별력을 아직도 원했다.
15. 주님께서는 이런 마리아에게 천사가 했었던 말을 보내고 있다. “여인이여 왜 너는 슬피 우는가?” 첨가하시기를, “너는 누구를 찾고 있는가?” 주님에 의해 물어지고 있는 이 질문은 천사들에 의해 물어진 것보다 더 깊은 의식세계의 바탕으로부터 이다. 그러므로 슬픔의 원인인 손실이 얼마나 큰지도, 그 손실이 회복되기를 열렬히 바라는 쪽으로 그녀를 인도했다. 그러나 그녀는 위 질문의 말이 누구에게서 있어졌는지 몰랐다. 단지 “그녀는 그를 정원지기로 상상하면서, 그분에게 말한다, ‘나으리, 당신이 여기로부터 그분을 운반했다면, 당신이 그분을 뉘인 장소를 나에게 말해주세요, 그러면 내가 모가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이런 상황은 주목할 만 하다. 주님의 제자들은 그분께서 그분을 알아 볼 수 있는 어떤 특별한 수단을 허용하실 때까지, 즉 그분의 나타남은 이전과 더 이상 똑같지 않다는 증거, 그분의 몸은 더 이상 물질적이지 않다는 증거를 내리실 때까지 그분을 알아보지 못했다는 점이다. 주님께서 물질적인 것을 벗으셨는바, 모든 사람에게 각자의 상태에 따라 나타나는 영계의 법칙에 의해 그분의 나타남이 그분과 그의 제자들 사이에서 지금 실행되고 있다. 참으로 그녀는 주님이 현존하신다고 생각지 못했다. 그녀가 그분을 인식 못한 진짜 원인은 그녀가 그분을 부활자, 생명자로서의 그분의 진짜 품성에 관해 생각하지 않은데 있다. 이것은 예수가 보여지지 않았던 원인일 뿐 아니라 그분이 더 친밀하게 알려져 있었던 이들에게도 부활 후에 그분이 알려지지 않은 원인이기도 했다. 이런 경우가 발생한 것은 기적과 비유, 양 면으로 생각해볼 수 있을는지 모른다. 그렇다고 과거 그분이 제자들과 함께 계신 동안에서 그분이 하셨고 말하셨던 것들보다 덜 아름답고 덜 교훈적인 것은 더욱 아니다. 동산에 있는 마리아는 이런 사항 중 어느 하나를 관찰한 목격자이다. 거기서 발생했던 것은 우리의 교훈을 위해 기록되어 있다. 말씀 안에서 교회는 동산, 포도원, 양우리로 비교된다. 그리고 주님은 농부, 포도원지기, 목자로 비유되고 있다. 무덤에 있는 예수는 인성 측면에서의 주님이다. 십자가형을 받은 그분의 몸이 놓인 무덤은 교회에서 주님에 관련한 신성한 진리가 부정될 때와 같다. 주님이 일어나셨음을 발표하는 천사가 있는 무덤은 교회가 말씀 안에 영적이고 천적인 의미가 포함된 것을 보게 되는 때, 말씀이 주님의 신성화하심에 관한 본성과 사실을 가르친다는 것을 교회가 알게 되었을 때의 말씀이다. 주님이 부활하셨음을 아직 듣지 못한 것처럼 여겨지는 마리아는 그분이 인간의 손으로 무덤에서 치워진 것처럼 느꼈고, 아마 동산지기가 그분을 옮긴 장본인이 아닐까 라고 상상하고 있었다. 그러나 주님이 그녀에게 나타나시고 동산지기로 착각 받는 상태는 이런 영적 생각, 즉 그녀는 그분 자신, 신성이 아니라 인간적 품성에서 그분을 아직도 볼 수 있을 뿐이라는 생각을 표현하고 있다. 동산지기로 착각된 상태를 두고 그녀가 말한 것은, “만일 당신이 그분을 어디론가 옮겼다면 그분이 모셔진 곳을 나에게 말해달라. 내가 그분을 모셔가겠다” 이다. 그녀는 자기에게 말했던 사람이 그분의 전능하신 권능으로 죽음에서 일어나신 주님이라는 것은 거의 생각지 못했다. 마리아는 죽은 자 가운데서 그분을 찾고 있었다. 그녀는 그분이 살아있는 자 가운데 계셨다는 것, 생명 자체, 영원히 살아 계신 분이라고는 아직 몰랐다. 그녀가 그분을 죽은 자 가운데서 찾은 이유는 그분이 그녀에게는 죽은 상태였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그녀의 가장 깊은 애착 안에서 까지 죽은 것은 아니고 그녀의 가장 바깥쪽 생각 안에서 죽어 있기 때문, 또는 그녀 안에서 아직 일어나시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그분은 그녀의 자연적 마음에서는 죽으셔 있고, 그녀의 영적 마음 안에서 의식적으로는 아직 일어나시지 않고 있는 것이다. 그녀는 주님이 무덤에서 옮겨졌다고 생각했는바 그분을 모시려면 그분이 옮겨진 곳을 알기를 원했다. 그녀는 주님이 계신 곳을 발견하고 싶은 바람이 있었다. 이 바람이야말로 예수께서 말하실 수 있는 준비가 그녀에게 완료된 것이다.
16. “예수께서 그녀에게 말한다, ‘마리아야,’ 그녀는 자신을 돌아서게 했다. 그리고 그분에게 말한다, ‘랍비시여,’ (바꿔 말해, 선생님이여,)” 그녀의 이름이 직접 발음된 것은 말하는 사람이 누구였는지를 밝히 알게 했을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그럼에도 여기에서 조차 곰곰이 생각하게 하는 대목이 있다. 비록 그녀가 그분의 모습이나 음성에 익숙해 있었을 것은 틀림없다 해도 마리아가 자기에게 말한 분이 누구이신지를 식별한 것은 더 이상 그녀의 눈과 귀가 아니었다. 보는 것과 듣는 것은 그녀를 실패하게 했다. 오히려 지금의 예수는 그녀의 눈이 보아 왔었고, 그녀의 귀가 들어왔었던 과거의 모습은 더 이상 아니었다. 그녀가 지금까지 보았던 형체, 들었던 소리는 거기에 더 이상 있지 않았다. 예수는 변모되었다. 지금 그분은 제자들의 상태에 따른 모습과 품성으로 그들에게 나타나셨다. 그들은 내향으로 그분을 품고 있던 모습대로 바깥쪽에서도 그분을 보았다. 그렇다고 그분의 몸이 지금까지 그들에게 있어왔던 그분이 몸보다 덜 실체적인 것이 아니다. 지금까지 그들과 현존한 것도 덜 실감나는 것이 아니었다. 지금 그분은 자연적 감각의 대상이 아니고 영적 감각의 대상이 되어 있으셨다. 영적 감각은 이런 특이함, 즉 보는 것과 생각, 그리고 듣는 것과 애착 이 일치하는 특성이 자연적 감각과 구별되는 점이다. 눈과 지성, 귀와 의지는 동일한 능력이 단지 전자는 외적 측면에서, 후자는 내적 측면에서 일뿐이다. 그리고 행동은 두 개가 일치하여 있는 것이다. 위 본문, 주님께서 막달라 여자를 부르신 것, 그렇게 부르심으로 그녀가 그분을 알아보게 되는 상황에는 깊은 영적 흥미가 담겨 있다. 영적 의미에서 어떤 인물의 이름은 그의 전체 품성을 표현한다. 저 세상에서는 말로 자신을 나타낸 이름을 모든 이가 각자 가지고 있다. 그래서 그의 이름은 그의 온 마음에 대한 생각을 주고 있다. 주님께서 그녀를 이름인 마리아로 불렀을 때, 그것만으로도 그분은 그녀의 가장 깊은 심정을 알고 있었던 분으로서 그녀에게 전달되었다. 그녀의 가장 깊은 심정이 그녀 자신에게 유일한 바로 그분 – 그녀의 주님, 구세주인 예수라고 말했다. 마리아는 다시 자신을 돌아서게 한다. 즉 자신을 주님께, 실재로는 주님이 자신에게 그녀를 돌아서게 하신다. 돌아섰을 때 그녀는 그분께 라뽀니, 선생님이라고 말하고 있다. 선생이란 단어의 사용은 신성한 진리, 주님의 신성화하심으로 그분의 인성을 지금 만드셨던 신성한 진리로서의 주님을 인정하고 지각하는 것을 함축한다. 그리고 거듭나는 삶에 상응되는 단계에 맞추어 기독인의 제자가 되게 하는 신성한 진리의 주님을 인정하는 것도 함축한다. 지금 주님께서는 단 한마디 마리아라는 말로 사랑하시는 제자에게 인사하고 그녀 역시 선생님이라는 한마디로 그분께 답하고 있다. 이 두 단어들 안에, 두 말이 발음되는 순간에 마리아가 수용할 수 있는 만큼에서 계시가 온통 전달되었다. 순간적 황홀함에서 마리아는 자신을 주님의 발치에 던져서 그분의 무릎을 붙잡으려 하고 있다.
17. “예수께서 그녀에게 말한다, ‘나를 만지지 말라, 그 이유가 내가 아직 아버지에게 승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네 형제들에게 가라, 그리고 그들에게 말하라, 나는 내 아버지, 그리고 너희의 아버지에게 올라간다, 그리고 나의 하느님, 그리고 너희의 하느님.’” 이 대목 역시 매우 특이한 상황이다. 우리가 마태복음(28:9,27)에서 읽는바, 여인은 무덤에서 되돌아 가다가 예수를 뵈었고 그분의 발을 붙잡고 경배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도마에게 못자국을 만져보고 옆구리에 손을 대어 보도록 하셨다. 그런데 여기서 그분은 마리아에게 만지지 말라고 말하시고 있다. 마태복음의 상황과 본문의 상황이 일치될 관점을 두고 다양한 학설이 제안되었었다. 위 두 상황을 역사적 의미에서만 생각할 때 위 상황의 곤란한 대목에 만족할 답변을 누구도 주지 못했다. 구세주를 만지지 못하는 금지 명령이 놓여 있는 이유는 “나는 아직 내 아버지께 올라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말씀이 신성하게 영감 되어 있다면 마지막 구절까지도 모두 한결같이 영감되어있다는 관점을 가져야만 한다. 그것은 영적인 계발이다. 16절에서 우리가 주목한바, 지금 주님은 물질적인 것을 벗으셨다는 것, 모든 사람은 그의 상태에 따라 주님을 보게되는 영계의 법칙에 따라 그분과 제자들 사이에서도 실시되도록 하시고 있다는 것이다. 이에 근거해서 제자들 중 누구는 주님을 만지도록 허용하신 반면 어떤 사람에게는 금했다. 즉 그들의 상태에 맞추어 그들의 체험도 허용되어 졌다는 말이다. 주님께서 마리아에게 자신을 만지지 말라고 명령하셨을 때 그녀에게 주신 그것에 대한 이유는 우리에게 위 상황을 설명하는 수단이 되어준다. 주님께서는 세상에 계셨을 때 그분의 인성을 신성한 진리로 만들어 가셨다. 그리고 세상을 벗어나실 때 그분의 인성을 신성한 선으로 만드셨다. 바로 이 과정이 지금 진행되고 있다. 아버지께로의 승강은 이 신비스런 과정의 완성이었다. 그리하여 인성은 형체에서도 신성한 사랑 자체가 되었다. 그러나 왜 이런 상황이 마리아 더러 그분의 승강에 앞서 그분을 만지지 말라 하셨고, 한편 다른 사람은 만져보도록 허용하거나 권유까지 하셨을까? 그 이유가 다른 사람들의 상태는 주님의 인성의 현재 상태와 상응되었던 반면, 마리아의 상태는 주님의 인성에 속한 것에 상응되었으되 지금의 상태가 아닌 그분께서 아버지께 올라 가신 후에 있어질 인성의 상태와 상응되었기 때문이다. 이미 살핀바 같이 마리아는 거듭나는 상태중 대단히 높은 상태, 즉 사랑이신 주님을 사랑하는 상태에 있는 이들을 표현한다. 이럴진대 우리는 “나를 만지지 마라. 내가 아직 내 아버지께 올라가지 않아서 이다” 라고 주님이 마리아에게 명령하신 대목의 깊은 의미를 보지 못할까? 이 금지 명령에서 그분이 암시해주신바, 마리아로 표현된 천적 수준의 것은 그분의 인성을 신성한 사랑 자체로 만드실 때까지 그분과의 결합을 획득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녀를 통하여 우리가 배우는 바 천적 수준의 사랑의 상태에 있는 이들은 신성한 진리로서의 주님과 결합될 수 없고 오직 신성한 사랑으로서의 그분과만 결합되어 질 수 있다는 것이다. 막달라 여자 마리아 같은 이들은 선생으로서의 주님과의 결합을 추구해서는 안되고 아버지로서의 주님과 결합해야 한다. 그러므로 이들은 주님의 승강을 위쪽과 앞쪽에서 찾아야 한다. 실제적으로 이것은 그분께서 더 이상 진리가 아니고 선함이신 곳, 천적 사랑의 최고의 대상인 선함으로 계신 곳인 가장 깊은 심정 속의 천국에로 주님의 승강이 있는다. 그분을 만지는 대신 주님께서는 마리아 더러 형제들에게 가서 “나는 내 아버지와 너희의 아버지 내 하느님과 너희의 하느님에게로 올라간다”고 말하라고 이르시고 있다. 여제자는 의지 속의 애착에 대한 모형(type)이고 남제자는 이해성 속의 생각에 대한 모형인바, 위 분부가 마리아를 통해 주님의 형제들에게 보내지는 것은, 주님의 진리가 의지를 통해 이해성으로, 애착을 통해 생각으로 들어가는 것을 묘사한 것이다. 더 특별하게 묘사한 것은, 주님께서는 심정 속의 가장 높은 애착, 즉 그분을 사랑하는 애착을 통해 거듭나는 사람의 마음으로 들어가신다는 것이다. 주님의 유입(influx)은 사랑을 통해 이타애 안으로도 있어진다. 이런 까닭에 본문에서 제자들을 두고 주님께서는 “내 형제”라고 높이 불러주신 것이다. 형제(brethren)란 선행 또는 형제다운 사랑으로 서로가 하나 된 이들이다. 선행으로 주님에게 합쳐진 이들은 영적으로 그분의 형제이다. 마리아는 제자들에게 주님께서 올라가신다는 것, 특히 이 놀라운 말씀, “ 내 아버지와 너희의 아버지, 내 하느님과 너희의 하느님”께로 올라가신다는 것을 발표하였다. 이 대목은 이 진리, 즉 주님께서 그분 자신과 아버지를 거론하실 때, 그것은 그분의 인성과 신성을 두고 하신 말씀이라는 놀라운 증거이다. 아마 삼위일체에서 그분이 두 번째 서열의 인물(person)로 위 구절에서 말해졌다고 생각해본다면 그분은 그분의 아버지를 그분의 하느님이라고 부르실 수 없었을 것이다. 이는 그분께서 자신과 제자들을 똑같은 하느님과 아버지의 관계에 놓으신 대목에서 더 명확해진다. “내 아버지와 너희의 아버지, 내 하느님과 너희의 하느님”이라는 대목만으로 따로 떼어낼 경우 이 말은 예수와 그의 제자들 사이에 있는 완전한 동등성을 가르치는 것으로도 간주해 볼 수 있다. 이 대목은 신약성서의 위대한 진리인 이런 진리, 즉 예수는 마치 제자들이 인간이듯 인간이셨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다. 하느님이 사람이 되셨다. 그래서 그분의 인성은 인간성과 교통하고 있다. 마치 그 인간성이 그분의 제자들과 교류했듯 온 인류에 대해서도 그러하시다. 주님의 인성은 제 아무리 드높여진다 해도 인성은 역시 인간일 뿐이다. 인성은 신성화되었기 전이라 해서 더 인간적이었던 것도 아니다. 사람은 하느님 형상에서 창조되었다. 그가 더 하느님의 형상일수록 더 사람인 것이다. 사람으로서의 예수는 아버지가 표현된 형상이다. 그러므로 그분, 그분만이 완전한 사람이시다. 주님께서 마리아를 거처 제자들에게 보낸 메시지는 일반 측면에서 기운을 북돋아 주는 희망적인 것이고 세부적으로는 모든 제자에게 그러했던 대목이다. “나는 올라간다”는 그들도 승강할 가능성이 있음을 발표하신 것이다. 그들은 인간성의 이런 드높여짐에서 그분과 공통된 흥미를 가지고 있다. 그분이 올라가신다고 그들에게 말하신 것은 그들도 올라 갈 수 있다는 것, 그분이 계신 곳에서 그분과 함께 있을 수 있다는 것을 그들에게 말하시는 것이다.
18. “막달라 사람 마리아가 제자들에게 가서 자기가 주님을 뵈었다고, 그분이 자기에게 이런 것들을 이야기하셨다고 말했다.” 주님의 메시지는 신실하고 정성어린 마리아에 의해 제자들에게 전달되었다. 이런 식으로 주님의 생명 있는 말씀은 의지 안에 있는 선함이라는 가장 깊은 애착을 통해 이해성에 있는 진리의 지각으로 내려와 주님의 신성화 하심과 자신의 거듭남 모두에 관한 지식을 마음에서 교통되게 하는바, 이제 막 완성되고 있는 것이다. 마리아는 무덤을 처음 갔을 때 그녀는 예수의 시신을 발견할 수 없어서 제자 중 두 사람에게 달려가 말했었다. 두 번째 무덤을 방문했을 때 그녀는 주님을 뵈었고 그분의 메시지를 전하라는 지시를 받아서 전체 제자들에게 그 소식을 전하러 왔던 것이다.
19. 주님께서 여인에게 자신을 보여주셨던 이른 아침으로부터 이제 우리는 그분께서 사람들에게 자신을 명백히 나타내시는 저녁으로 접어들고 있다. 그분은 제자 중 엠마오로 여행하는 두 사람에게 자신을 보여주셨다. 어쨌든 열 한 명의 제자 모두는 믿지 않는 채 있었다. 다른 기록을 보면 그들은 헛소문이려니 하고 있었다. 제자들에게 나타내 보이시는 방법은 그들을 확신시키는데 충분하고도 남음이 있다. “같은 날 저녁, 한 주의 첫째 날, 제자들이 유대인들이 두려워 문을 잠그고 모여 있었는데, 예수께서 오셔서 그들 한가운데 서셨다, 그리고 그들에게 말한다,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주님께서는 제자들이 문을 닫아걸고 있었는데도 직접 그들 사이에 나타나셨는데 우리는 이것을 입증해보려고 논쟁할 필요는 이제 없어도 될 것이다. 그 이유가 글자와 영의 관계가 이를 설명해주기 때문이다. 이것은 주님의 몸이 더 이상 물질적이지 않다는 것을 말해주는 증거이다. 안식일 다음 날이라는 단어는 부활의 날에 마리아가 무덤에 갔다고 기록된 1절에서 사용되었는데 여기서 그 단어가 다시 사용되고 있다. 비록 안식일 다음 날이라 해도 안식일이라는 단어가 이 부분에서 사용된 것은 주님께서 부활하신 날이 안식일임이 표현되도록 의도되었다는 것, 여호와 자신의 명령으로 제정된 안식일이 표현하는 모든 것이 실감나지도록 의도된 것임은 의심치 않는다. 안식일의 주기로 보면 이 날은 한 주간의 첫째날, 새 주일의 시작, 거룩함과 쉼의 상태를 소개함(introduction)에 해당된다. 혹은 여기서 사용된 안식일이라는 용어를 다른 부분(마태28:1, 마가 16:9, 누가18:12)의 경우같이 한 주일을 뜻하는 것으로 생각한다면 기독인의 주간(week)은 그 첫날 주님의 부활로 거룩해진 안식일임을 암시하고 있을는지 모른다. 일곱째 날에 있는 유대인의 안식일은 노동의 상태에 보답되는 쉼의 상태를 표현했다. 그러나 기독인의 안식일은 계속 일어나는 고생의 상태 안에서 거룩한 상태가 팽창되는 것이다. 유대인들이 무서워 제자들이 문을 닫아걸고 있었고, 예수께서 들어오시어 그들 가운데 서 계셨던 것은 새로운 거룩함의 첫 날 저녁이었다. 이리하여 “저녁에 빛이 있을 것이다” 라는 예언이 성취되었다. 세상의 빛이요 빛 자체이신 그분이 그들 사이에 서 계셨다. 낙담으로 하루가 지나갔다. 지금 제자들은 불신앙이라는 희미함 가운데 있었으나 그들은 주님께 헌신함이라는 한가지 공통됨 감정으로 한데 모여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유대인이 두려워 문을 잠그고 있었다. 그러므로 가장 깊은 고뇌가운데서 생각과 애착 이 하나 되어 있고, 악이 진입하지 못하도록 문을 닫아걸었을 때 주님께서는 우리 사이에, 우리 삶의 중심에, 우리 마음의 내면의 생각과 애착 에 나타나신다. 더불어 이렇게 말하신다. “너에게 평화가 있기를!” 그 이유가 주님께서 그분의 사랑과 진리로 우리 심정과 지성 안의 가장 높은 장소를 차지할 때 모든 것은 평화의 상태에 놓이기 때문이다. 최고 의미에서 평화는 주님이라는 인물 안에서 신성과 인성의 하나 됨이다. 둘째 높은 의미에서 천국과 교회와 더불어 그분이 결합함이다. 개개인의 차원일 경우 이는 인간의 마음 안에서 선함과 진리의 결합이다. 평화는 하루 중 아침과 같고, 일 년 중 봄과 같다. 그래서 그것은 자연의 새로움과 아름다움으로부터 모든 기쁨과 즐거움을 수용할 마음을 갖게 한다. 평화는 그 안에 있는 이들 사이에서 선함과 진리의 결합으로 발생하는 심정과 영혼에 대한 축복이다. 그러므로 선함과 참된 것과 악하고 거짓된 것 사이의 싸움, 또는 영적 불일치나 전쟁이 없게 된다. 이것이 평화이다. 이 안에서 선함의 결실이 있고 진리의 배가가 결과 되고 있다. 그러므로 역시 거기에는 총명과 지혜도 있다. 평화가 주님 만으로부터 천국의 천사와 교회의 사람 사이에 있게 될 때 최고 의미에서의 평화는 천국과 교회의 관계 측면에서 주님을 의미하고, 이로부터 역시 그 평화 안에 있는 이들 사이에 있는 진리와 결합된 선도 의미한다.
20. “그분이 그렇게 말하셨을 때, 그분은 그들에게 그분의 손과 옆구리를 보여 주셨다. 그들이 주님을 보았을 때, 제자들은 기뻤다.” 그분 자신의 정체를 밝히는 증거, 십자가에 달렸었던 예수와 동일인 임에 대한 증거를 주심으로 그분은 제자들의 허약함 안에 그분 자신을 숙박시키실 수 있었다. 비록 우리가 그분의 상처가 아직도 그대로 열린 채 있다거나, 그 상처가 부활한 몸의 손과 옆구리에 있다거나 하는 것을 상상해 볼 수 없다 해도 주님은 각자의 상태에 따라 인간과 천사들에게 나타나신다는 법칙에 의해서 제자들이 그분을 뵙기를 간절히 기대했던 바로 그 때에 나타나셨다. 그분의 몸, 더 이상 물질적이지는 않으나 실체적이었다. 그 몸이 비물질적이다는 것은 주님께서 문이 잠겨 있는데도 들어오심으로 증명되었다. 그분의 실체성은 제자들이 그분을 만져보고, 여타 의심할 여지가 없는 표시들로 증거 되었다. 더구나 주님께서 그분의 손과 옆구리를 보여주신 것은 상징적인 행동이기도 하다. 즉 주님은 그들을 위해 십자가형을 당한 구세주이시다는 것, 예수는 죽었고 다시 살아나시고 영원히 사시는 분이라는 것을 참된 제자에게 증거 해주시는 행동이었다. 주님의 손은 그분의 권능을 상징하고 그분의 옆구리는 그분의 사랑을 상징한다. 그분께서는 “육으로는 죽음에 놓이셨으나 영으로는 깨어나신” (베드로전3:18) 이후, 그분의 손과 옆구리를 보이신 신실한 제자들에게 신앙 과 사랑에로 다시 그들을 갱신하심으로 그분의 사랑의 힘과 진리의 권능을 그들 안에서 명백히 보이신다. 그분이 손과 옆구리를 제자들에게 보였을 때 “제자들은 주님을 뵙고 매우 기뻐했다.” 그분의 죽음이 조절할 수 없는 비탄으로 그들을 몰아 넣었었는데 살아 계신 그분을 뵈었으니 제자들의 기쁨이야말로 최고에 달했을 것임은 틀림없다. 시험의 어두운 밤, 위로되기를 거절했던 그 밤이 지나고 제자들은 주님께서 일어나셨다는 체험을, 참으로 그들의 심정 안에서 일어나신 체험을 여지없는 표시로 그들의 이해성에 증언된 체험으로 결국 확증을 받고 있다. 이 체험이야말로 얼마나 순수하고 드높은 것일까? 거룩한 기쁨은 부착물의 잃은 부분이 회복되는 데 있게 되는 자연적 애착 의 기쁨이 아니라 새로운 심정의 영적 애착 의 기쁨이다. 그리고 이 기쁨은 마지막 시험에 의해 완전해졌는바 이를 통해 그들은 죽음으로부터 생명으로 건너갔다.
21. “예수께서 다시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내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 하고 말씀하셨다.” 평화의 선물과 인사는 이런 경우 얼마나 꼭맞는지! 제자들은 과거 갈릴리 바다에서 자기들을 삼키려 들었던 폭풍과도 비교가 안 되는 더 큰 환난의 상태를 통과해갔다. 격동하던 바다 위를 걸어오신 그분은 “잠잠해라, Peace, be still” 라고 말하시자 큰 고요가 바다에 흘렀었다. 이제 무기력하고 어찌할 바 모르고 있어 환난의 바다에서 허우적대는 그들에게 고요가 오고 있다. 그 때와 똑같은 전능의 단어, 평화라는 단어는 괴로워하던 그들의 영들을 잠잠해지게 하고 말 할 수 없는 기쁨으로 그들을 채우고 있다. 더구나 주님의 인사와 평화를 선물하신 데 대한 적합한 이유가 더 있다. 지금 예수께서는 큰 전투를 끝내셨고 위대한 승리를 쟁취하셨다. 그리고 정복과 신성화하심의 확실한 반석 위에 평화를 건설하셨다. 그분 스스로 달성하신 평화가 지금의 제자들, 굴욕으로 그분을 따랐던 제자들에게 수여되었다. 그분의 평화를 그들에게 수여하시는 한편, 그분께서는 이런 임무를 그들에게 주셨다. 즉 자신들이 받았던 것을 다른 사람에게 나누어주라는 것이다. 그들이 주님의 평화를 받았을 때 그들은 그분의 구원하시는 일이 더 진척되게 함으로 그분의 본보기를 따라야 하는 것이다. “내 아버지가 나를 보내셨듯 나도 너희를 보낸다.” 그분이 시작해 놓으신 인간의 거듭남이라는 일은 그분의 제자들에 의해 수행되어야 한다는 것이 위 말씀에 가장 적합할 것이다. 왕국의 복음은 이제 새로이 전파되어지는 것이다. 제자들은 메시아의 강림에 관한 기쁜 소식을 선포하도록, 강림이 복주신 결과로 그분의 통치가 시작된 것을 보여주도록 파견되어졌다. 지금 그들은 자기들의 일을 새로이 시작하게 되었다. 그리고 새로워진 그들의 일을 하되 더 높은 목적과 더 순수한 동기로부터 해야 했다. 주님의 나라에 관한 참된 본성이 그들에게 이제 막 열어 보여지고 있다. 그리고 새 영향력이 이제 막 그들 위에 내려왔다. 새로운 모형이 그들의 노력에 방향을 주기 위해 그들 앞에 놓여졌다. 아버지가 아들을 보내셨 듯 아들이 제자들을 보냈다. 신성이 인성을 보냈다. 신성한 진리가 신성한 사랑에 의해 보내졌다. 이렇게 주님이 이행하셨듯이 제자들도 해야한다. 그분은 가신 것이 아니라 보내졌다. 진리로서의 그분이 사랑에 의해 보내졌다. 제자들의 경우도 이와 같다. 사랑은 제자들의 모든 일 속에서 움직이게 하는 원인이어야만 한다. 진리는 움직이게 하는 도구적인 수단이어야 한다. 일하는 신앙 뿐만이 아니라 사랑에 의해 일하는 신앙이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22. “그분이 이것을 말하셨을 때, 그분은 그들에게 숨을 내뿜으셨다, 그리고 그들에게 말하신다, ‘너희는 성령을 받으라.’” 주님의 이 행동은 매우 교훈적이고 의미심장하다. 이것은 성령이 주님의 사랑과 진리의 복된 하느님의 영이라는 것, 그 영은 그분의 신성화 하신 몸으로부터 제자들의 심정과 지성 안으로 진행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내쉰 영은 그분께서 신성화 하시기 전에는 주실 수 없으셨던 하느님의 영이었다. 그 이유가 그 당시의 영은 거듭나는 하느님의 영(7장39절)으로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신성한 존재로부터 발산되는 것인 하느님의 영은 언제나 있어왔다. 이에 관해서는 구약성서에서 자주 읽는다. 그리고 신약성서일 경우 동정녀에게 드리운 하느님의 영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이 하느님의 영의 본성과 그 효과는 육을 입으신 전과 후에서 매우 다르다. 지금 주님으로부터 진행되는 성령(Holy Spirit)은 여호와의 영이 아닌 예수의 영, 창조하는 영이 아니라 구속하는 사랑과 권능의 영인 것이다. 이 영이 죄와 잘못으로 죽어 있었던 이들에게 영적 생명의 숨을 쉬게 한다. 그리하여 그들의 삶을 순종과 정의의 삶으로 회복하신다. 주님께서 그분의 제자들에게 불어넣은 영은 간단히 말해서 거듭남의 영(the Spirit of regeneration), 이 영을 받게 되면 인간으로 새 피조물이 되게 하는 거듭남의 영이다.
23. 주님께서 사도들에게 그분의 영을 내쉬셨을 때 그들에게 말하신다. “너희가 용서하는 죄들은 무엇이라 해도 용서를 받아질 것이다. 그리고 너희가 유지하는 죄들은 무엇이라도, 그것들은 유지되어진다.” 여기서 사도들에게 주어진 권한은 이런 진리, 즉 죄는 하느님 만에 의해 용서될 수 있다는 진리로 일관되게 이해되어야만 한다. 주님의 위 말씀이 일반적으로 간주하는 의미란, 사도들은 참회하는 죄인들에게 용서를 발표하는 것은 가능하다는 것이다. 죄의 면제란 실지로는 죄가 제거되는 것인데 무한한 자비와 은총 조차도 어떤 방법으로든 죄를 삭제할 수 없다는 것을 생각할 때 주님은 그분 스스로 소유하시지 않은 권능을 그의 종들에게 주실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죄는 참회로 청산되어진다. 죄를 용서해주고 해주지 않는데 있어서 사도들의 임무는 그들의 개인적 품성 측면에서 뿐만 아니라 그들이 갖는 표현적 측면에서 위 주님의 말이 그들에게 전달되었다는 것으로 간주하면 가장 잘 알 수 있게 된다. 선함과 진리의 원리를 표현하는 것으로 생각해보면 우리는 어떻게 그들의 죄를 용서하거나 용서받지 못한 채 남아 있는가를 알 수 있다. 말씀 속의 진리들은 그 진리가 죄를 제거할 때 용서한다. 이것은 진리들이 당사자에게 그가 죄지었음을 확인하게 하고 회개함으로 삶의 새로움에로 인도해 갈 때 용서도 있어진다. 또한 말씀 속의 진리들은 죄가 용서받지 못한 채 남아 있게도 한다. 그 이유가 정죄하는 것이 진리이기 때문이다. 진리는 “멸망당할 사람에게는 역겨운 죽음의 악취가 되고 구원받을 사람에게는 감미로운 생명의 향기가 된다” (고린도후2:16). 죄를 용서하거나 용서받아지지 않은 채 있게 하는 권능이 사도들에게 주어졌다는 말씀은, 복음의 빛은 율법 속의 빛보다 선과 악의 구별을 더 명백하게 한다는 것, 그래서 더 충분하게 그 결과도 밝히 알린다는 것도 암시하고 있다. 주님께서 이렇게 말하셨다. “나는 세상에 빛으로 왔다. 나를 믿는 자는 누구든지 어둠 가운데 있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도 말씀하셨다. “이것이 정죄이다. 자기들의 행위가 악해서 빛이 세상에 왔는데도 사람들이 빛보다 어둠을 오히려 더 사랑한 것이다.”
24,25. “디두모라 불리는 열 둘 중의 하나, 도마가 예수께서 오셨을 때, 그들과 함께 있지 않았다. 그러므로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말했다, ‘우리는 주님을 뵈었소,’ 그러나 그는 그들에게 말했다, ‘내가 그분의 손들에서 못자국을 보고, 내 손가락을 못자국 안에 놓고, 그리고 내 손을 그분의 옆구리에 밀어넣어 보지 않고서는 나는 믿지 않을 것이다.’” 열 두 사도들 각각의 품성이 서로 간에 상당한 차이가 있도록 구성되어졌다는 것은 주목할 만하고 또한 그것은 신성한 목적의 일부라는 것도 의심할 바 없다. 품성의 다양함이 필요하게 된 것은 그들을 통해 교회 멤버 사이에 있는 다양한 모든 품성과 상태, 교회 멤버 각각에게 들어가 형성하는 원리들의 표현이 가능하도록 배려하시기 위해서였다. 토마는 감각의 증거 위에 신앙 을 앉히고 있는 이들을 표현한다. 그렇다고 해서 토마가 믿지 않으려고 미리 작정했다거나 부정하는 상태에 있는 이들을 표현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자기 심정 안에 신앙이라는 원리를 가졌다. 단지, 그의 마음의 조건과 상황에 걸맞은 충분히 고정된 신앙을 보증 받으려면 완전한 증거가 있어야 하는바 그것을 원했을 뿐이다. 토마는 그의 동료 제자들 보다 한 단계 뒤에 있었을 뿐이다. 사실 모든 제자들이 부활에 관한 여인의 증거를 믿기를 거절했었다. 그들이 보고 들었던 부활의 사건은 그들에게 허황된 이야기처럼 보였었다. 도마는 이런 동료 사도들의 증거를 받기를 거절한 것이다. 열 명의 제자와 토마ㅍ사이에 이런 차이가 있다. 아마 이는 각기 좋아하는 측면의 차이일 것이다. 열 명은 예수를 뵌 것에 만족했는 한편, 도마는 뵙는 것뿐 아니라 십자가형을 당한 몸의 상처를 만져서 그분을 느껴보아야 하는 것을 요구했다. 만진다는 감각은 감각 중에서도 가장 낮은 수준이다. 그러나 다른 감각들의 기초이다. 이 감각은 신앙 의 고리 중에서 마지막 서열에 해당되고 이를 넘어 신앙의 요구는 갈 수 없다. 우리는 주님께서 계속적으로 나타내주신 사람들의 품성에서 위 신앙의 등급에 관한 어떤 것을 볼 수 있다. 우리가 발견한 바, 주님은 맨 처음 막달라 여자 마리아에게 나타나셨고, 그 다음 다른 여인들에게, 그 다음 엠마오로 가는 두 남자 제자에게, 그후 열 제자에게, 마지막으로 토마에게 나타나셨다. 이리하여 주 예수께서 보여주신 바, 그분의 언성은 가장 높은 수준으로부터 가장 낮은 수준에 이르는 모든 인물과 상태를 포함하고 공명하신다는 것, 그분은 그분께 나아오는 이들을 구원하실 수 있을 뿐 아니라 십자가에서 그분이 받은 상처를 그분의 몸에서 확인해 보아야 하는 이들까지도 구원하실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26. “팔일 후 다시 그분의 제자들이 안에 있었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 도마. 그때 문이 잠겨 있는데 예수께서 오시어, 한가운데 서셨다, 그리고 말하셨다,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이 만남은 한 주간의 첫째 날, 주님의 날, 노동과 시련의 상태가 그 사이에 끼어 있는 날 이후에 다시 있어졌다. 본문에서 이 날은 여드레 뒤라고 말하고 있다. 그 이유가 여덟은 일곱같이 완성된 상태만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 새로운 것의 시작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번의 만남에서는 도마도 다른 제자들과 함께 있었다. 다시 문은 잠겨 있었는데 다시 주님은 그들 가운데 서시고, 전에 제자들에게 주셨듯이 부활한 그분의 실제의 존재가 확인되도록 증거를 토마에게 주시고 있다. 주님께서는 다시, 세 번째 그들에게 평화의 인사를 하신다. 이 인사는 지금 막 그들 사이에 그분이 나타나신 목적을 완성하신다는 표시이다. 이 상황을 각 개인 자신과 대조해 들여다보면 이는 내향의 체험이 외향의 사건에서 묘사된 것 같은바 우리는 교훈적인 어떤 것을 알 수 있을는지 모른다. 우리가 깊은 시련의 상태에 빠져있을 때 마치 본문의 사도들 같았을 때, 우리의 마음이 불완전한 관점과 느낌을 벗게 하는 수단으로 새로운 확신과 애착 이 점진적으로 생산되어진다. 이 새 국면에서 진리가 우리 마음에 표출되어 질 때 이 진리는 마음의 더 낮은 등차나 자질에 내려가 있는바 이런 더 낮은 마음이 진리를 받는 것은 더 어렵다는 것을 발견한다. 설사 이 진리가 마음의 의지나 지성에 의해 기쁘게 인정되고 지각된 이후 였다 해도 이의제기가 감각의 오류로부터 들썩거려 돌출한다. 감각적 원리, 토마같이 자기 본성에 걸맞은 증거가 없으면 믿기를 거절한다. 이런 때 조차 에서도 주님께서는 확신을 담아 주시려 애쓰신다.
27,28. “그다음 도마에게 말하신다. ‘네 손가락을 이쪽에 닿게 하라, 그리고 내 손들을 바라보라, 그리고 네 손을 이쪽에 닿게 하라, 그리고 그것을 내 옆구리에 밀어 넣어라, 그리고 비신뢰로 있지 말고 믿어라.’ 도마가 대답하여 그분에게 말했다, ‘나의 주, 나의 하느님이시여.’” 제자들 사이에 즉각 나타나심으로 주님은 그분의 무소부재하심을 보이셨고, 그분이 하셨던 것을 도마에게 말하심으로 그분이 전능하심을 보이셨다. 예수께서는 도마에게 그의 불신앙과 그가 적절한 증거 제시를 요구하고 있다는 것을 이미 알고 계신다는 것을 보여주셨다. 그리고 그가 요구했던 증거를 그에게 제공하시고 의심을 버리고 믿으라고 권면하셨다. 토마에 대한 이 두 가지 호소에는 그가 부활하신 주님의 몸을 만졌는지, 만지지도 않았는데 의심을 버렸는지는 나타나지 않고 있다. 어쨌든 확실한 것은 확실한 원인이 무엇이었든지 그 확신이 완성되었다는 점이다. 그의 확신은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이라는 고백의 외침이 그로부터 터져 나올 정도로 그의 영혼에 깊이 뿌리박혔다는 것은 틀림이 없다. 우리는 도마의 이 외침을 두고 이것은 신앙의 표현은 아니다 라든가, 놀랜 결과로 있는 함성 같은 것으로 간주하겠다는 이들과는 아예 대화 자체를 하고 싶지 않다. 이 외침은 예수에 대한 그의 신앙에 관한 인정인 것을 복음서 기자의 언어는 보여주고 있다. 도마는 엉겹결에 외침으로서 그의 말을 내뱉은 게 아니라, “그는 그분께 ‘나의 주여… 나의 하느님이시여!’” 라고 예수께 고백했다. 그러므로 그의 말이 관계된 분은 예수였다. 이 인정함은 제자 모두에게 전달되고 있다. 지금까지도 예수를 주님이요 하느님으로 믿지 않는 제자들에게 보내는 절대적 인정이었다. 여기에는 예수의 신성을 교리적으로 인정하는 것 외에 한 가지 사항이 더 있다. 즉 예수를 자기의 주님이요, 자기의 하느님으로 인정하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그의 신앙과 사랑의 살아있는 대상으로서 그의 이해성과 심정 안으로 순간적으로 들어가셨다. 참으로 예수는 주님이요 하느님 모두이시다. 이런 위대한 진리에 도마의 고백만이 유일한 증언인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그의 고백은 참으로 가치 있는 증언이다. 시련과 의심, 그리고 부정함이 있은 후, 예수에 관한 진리가 꼼짝할 수 없게 하는 증거에 의해 우리의 이해성과 심정에 즉각 가져다 놓이면 예수가 우리의 주님이고 하느님이시다는 것을 보고 느끼게 된다. 그분은 그분의 사랑을 수단으로 심정의 주님이시고, 그분의 진리를 수단으로 이해성의 하느님이시다. 주님에 적용된 이 두 이름은 그분의 사랑과 진리를 표현하고 있다.
29. “예수께서 그에게 말하신다, ‘도마야, 네가 나를 보았기 때문에 너는 믿었다. 보지 않고, 그럼에도 믿는 자는 복 되다.’” 이 말씀은 도마에 대해, 그리고 그를 통해 “보이지 않는 것에 관한 증거”인 신앙을 위한 외적 증거를 요구하는 모든 사람에 대한 부드러운 꾸지람으로 의도되었을 것이라는 데는 의심치 않는다. 주님은 자신을 숨겨 두시는 하느님이시다. 그분 안에서 우리는 살고 움직이고 자기 존재를 가진다. 그런데도 우리는 각자 안에 있는 신성한 현존과 그 작업하심에 대해 의식으로 증거를 잡지 못하는 것은 물론 감지조차도 할 수 없다. 그분의 섭리는 우리 위에 계속 운행되고, 그분의 영은 우리와 언제나 함께 계신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런 사항들을 보지 못하고 느끼지도 못한다. 참으로 하느님이 계시고 그분이 그분신의 우주 안에서 통치하신다는 진리에 대한 증거는 있다. 이보다 그분께서 우리의 심정과 삶을 통치하실 때 우리는 더 나은 증거, 더 확신케 하는 증거를 가진다. 참으로 이에 대한 증거, 또는 종교의 모든 것에서 증거에는 두 종류, 내적 증거와 외적 증거가 있다. 말씀과 주님의 신성에 대한 최상의 증거는 그 진리가 영혼에 내향의 빛과 평화를 가져올 때 운반하는 증거일 것이다. 이것은 내적 증거이다. 이로부터 일어나는 신앙 은 그 자체에 신성한 축복을 실어 나른다. 전통이나 권위, 기적, 또는 감각의 증거를 배경으로한 신앙은 주님이 도마에게 “나를 보았기 때문에 믿었느냐?”고 말하신 범주에 속하는 것들이다. 외적 품성에 기대는 사람의 신앙은 위와 같은 것들을 열망한다. 이런 수단들이 그들에게 허용되는 것은 그들로 “의심을 버리고 믿도록” 배려하시는 그분의 자비 덕택이다. 그러나 천국적인 신앙은 더 높은 증언, 말씀 안에서 밝히 알리는 바와 같은 진리의 증언, 심정 안에서 밝히 알리는 진리의 영의 증거에 기초를 둔다. 이것이야말로 진실로 복되다. 그 이유가 이것은 이성의 가장 높은 요구를 만족시키고 심정의 가장 순수한 바람을 만족시키기 때문이다.
30,31. “예수께서는 이 책 안에 씌어지지 않은 많은 다른 표시들을 그분의 제자들의 현존에서 진실로 행하셨다. 이것들이 씌여진 것은, 예수가 그리스도, 하느님의 아들이시다는 것, 믿고 있는 너희는 그분의 이름을 통하여 생명을 가짐을 믿게 하려 해서 이다.” 예수께서 하신 많은 표적들, 신성한 지혜가 복음서에 기록하지 않은 채 남겨둔 많은 사건들을 잃어버린 것으로 간주되어서는 안 된다. 그것들은 그분이 수행하셨던 위대한 일들 안에 씌어있고, 그 위대한 일이란 그분이 천국으로 승강하기위해 준비과정으로 영계에서 수행된 일까지 포함된다. 우리가 감히 상상해보는 것은 그 일들은 그분의 부활과 승강 사이에 주님의 인성에 결과 되었던 신비스런 변화에 공헌했다는 것, 이 변화로 주님은 그분의 인성을 신성한 선으로 만드셨고 이리하여 그분은 아버지께 오르셨다는 것이다. 복음서 기자가 써 놓은 사항들은 주님의 제자들의 신앙 을 건설하기 위해 주어졌다. 따라서 그것을 소유하는 것은 우리의 특전이기도 하다. 복음서 기자의 이 구절의 말들은 가장 간단한 의미에서 파악되어야 할 것인바, 이는 예수께서 죽음에서 일어나신 후 제자들 앞에서 하셨던 많은 일 중의 몇 가지만으로도 예수가 그리스도시오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그들에게 확신시키는데 충분하다는 것을 가르치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리라. 이 표적들은 주님의 부활의 증거로 간주되어야 하고, 그 자체는 그분이 그리스도요 하느님의 아들이시다는 증명이다. 그리고 이 증거는 그것을 요구하는 이들에게 이 진리를 확신시키는데 유용하게 고용되어야 하리라. 제자 자신들은 이 증거들을 주님의 정체에 관한 증거로 우선적으로 삼았다는 것은 의심할 바 없다. 일반적으로 이 표적(sign)들은 주님이 초인간적 일 뿐 임을 증명하는 품성에 속한다기보다는 십자가 이전에 그분이 보였던 표적 중 어떤 것에 해당될 것이다. 참으로 주님께서 십자가형을 받기 전에 행하셨던 모든 것보다 더 큰 표적이 두 가지 있다. 그분 자신의 권능으로, 똑같은 말로 아버지의 권능으로 결과 된 그분의 부활은 나사로를 죽은 자로부터 일으키신 것보다 훨씬 더 큰 표적이었다. 물론 이것은 여기서 요한이 말하는 표적 가운데 포함되는 것은 아니다. 이 기적은 그 자체에서뿐 아니라 그 결과에서 측량할 수 없게 더 위대한 것이었다. 나사로는 다시 살았지만 다시 죽었다. 그러나 예수는 죽은 자로부터 일어나 더 이상 죽지 않으신다. 복음서 기자가 언급하는 표적 중의 하나란, 예수께서 하느님의 아들임을 놀라웁게 증명하는 것인데, 이는 그분께서 순간적으로 나타나고 사라지시고 하는 것, 다시 말해 인간으로서의 그분은 더 이상 시간과 공간에 구애받지 않으심을 보여 증명하신 사항이다. 이는 그분이 하느님의 아들임을 증거한다. 그 이유가 예수는 그분의 인성(Humanity) 측면에서 하느님의 아들이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인성(humanity)이 신성화 하심으로, 즉 유한함을 벗고 무한함을 입으심으로 진실로 완전하게 하느님의 아들이 되었다. 이런 인성은 무소부재하신바 나타나고 사라질 수 있었다. 이는 장소가 변하여서가 아니라 제자들의 영적 시야가 열리고 닫힘으로, 인간의 상태가 변함으로 나타나시고 사라질 수 있으셨던 것이다. 예수께서 행하셨던 일들과 기타 다른 표적들이 예수를 그리스도, 하느님의 아들로서 참된 영적 신앙 이 생산되도록 하기 위해서 요한의 복음서에 씌어진 바대로 우리에 의해 읽혀져야 하고, 우리의 이해성과 심정에 씌어진 대로도 읽혀져야 한다. 이것들은 체험의 문제가 되어 우리 자신의 생명의 책에 씌어져야 한다. 우리 삶의 책에 씌어지지 않았지만 주님께서 우리의 현존 안에 해두셨던 많은 다른 표적들이 있다. 거듭남은 우리의 의식 세계에 결코 오지 않는 경이로운 일들을 포함하는 일이다. 그리고 거듭남은 우리의 가장 높은 개념을 초월하는 일이다. 우리의 지식과 개념에 오는 거듭남의 일만 가지고도 예수를 그리스도로서, 하느님의 아들로서, 본질적으로 신성한 진리와 신성한 선으로서 믿는 신앙을 생산하기에 충분하고도 남는다. 그리고 이 신앙을 통해 그분의 이름으로 생명을 우리에게 주신다. 그분의 이름으로 생명을 가진다는 것은 그분 안에서 산다는 것, 그분의 이름이 표현하는 권능과 영으로 산다는 것이다. 우리의 하느님과 구세주로 예수를 믿는 생명 있는 신앙은 우리에게 영적이고 영원한 생명을 준다.

요한복음 19장 해석

19

이 장에서 우리는 예수를 구해보려 한 빌라도의 유약한 노력, 그리고 유다인과 이방인들이 그분께 잔인함을 가한 후 십자가형에 처하는 사건을 살피게 된다. 이 장의 사건은 마태복음에 관련해 볼 때 여러 세부사항들이 빠져 있는가 하면 다른 세 복음서에 없는 것을 기록하고 있다. 따라서 첫 복음서에 포함된 것은 간략히 다루면서 요한의 복음서에만 특별히 게재되어 있는 것은 보다 더 상세히 살필 것이다.
유다인과 이방인들이 온유하시고 끝까지 참으시는 사람의 아들에 가하는 잔악함들을 읽게 될 때 앞서 유대인들이 죄지은 선조들을 두고 한 말, “만일 우리가 조상들 시대에 살았더라면 우리는 예언자의 피를 흘리는데 가담하지 않았을 것이다”는 구절로 즉각 반문하게 될는지 모른다. 그러나 기독인들은 예언자들 보다 더 크신 분의 피에 연루되고 있을는지 모른다. 예수는 예언자가 가르쳤던 정의와 진리라는 영원한 원리가 인물화 되어 있는 것이다. 인간이 이 원리에 반대하여 저지르는 모든 죄는 사람의 아들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행동이다. 주님께서는 정의와 진리의 원리들을 아주 완전하게 본을 보여주셨고, 그분의 거룩한 말씀 안에서 우리에게 밝히 나타내어 주셨다. 따라서 인간이 씌어 있는 말씀을 존경하거나 불손하게 취급하면 그것은 육을 입으신 말씀, 즉 인간 사이에 인물로 나타나신 그분을 존경하거나 업신여기거나 하는 것과 같다. 우리가 주님의 고통 받고 죽으신 사건을 읽되 올바른 영 안에서 진짜 유익한 것들을 이끌어 낼 수 있게 하는 것은 그 사건에 관련된 지식들이다. 구세주의 거룩한 인물(person)에 가해진 잔혹함을 읽게 되면 심정 안에 동정심 같은 것들, 수치스러운 것들 등등의 느낌이 생산될 수 있고 이런 것들 역시 가치나 씀씀이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주님의 인물 측면에서의 취급이 그분의 말씀에 관한 취급, 또는 영원한 원리에 관한 취급을 표현하고, 그 결과라는 것을 보게 될 때만이 성서의 이 기록들은 모든 시대의 모든 사람을 위해 참된 가치가 있게 된다. 주님이 인간 사이에 오신 것은 그분께 위탁되는 본질적 가치가 있어서라는 것은 의심할 바 없다. 만일 인간이 그분의 품성 속의 순수함과 아름다움을 위해 그분을 사랑할 수 없었다면 그 사람은 그분을 전혀 사랑할 수 없게 된다. 그럼에도 유대인들이 그분을 미워하고 박해한 것은 그분의 행동적인 아름다움 때문이었다. 이것은 오늘날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분 삶의 거룩한 기록을, 그분의 고통과 죽으심에 관한 기록을 읽게 될 때, 우리 자신의 속성 역시 그분이 육으로 계실 당시의 사람들이 표출해냈던 것들을 얼마나 내놓고 있는지 가늠해 보아야 하리라.
1-3. “그러자 빌라도는 예수를 데려갔다, 그리고 그분을 채찍으로 쳤다. 그리고 군인들이 가시로 왕관을 엮어, 그것을 그분의 머리에 놓고, 그들은 그분에게 자색 도포를 입혔다. 그리고 말했다, ‘만세, 유대인들의 왕이시여!’ 그리고 그들은 자기들의 손으로 그분을 쳤다.” 가시로 관을 엮어서 그분의 머리에 씌우고 자색 도포를 입혔다는 것은 자칭 왕이라 부른 것을 놀려대기 위해서였다. 주님의 왕권이 인간 심정 안에 있는 신성한 진리와 그 진리의 통치를 표현하는 바, 놀려대는 이 모습은 주님의 왕 되심이 표현하는 모든 것에 모독을 가하는 것을 표현했다. 우리가 자신의 악한 목적을 위해 말씀 속의 진리를 뒤집을 때, 우리는 사람의 아들에 채찍질하는 것이다. 우리의 악들을 정당화하기 위해 교묘한 잘못의 체계를 조립할 때, 그러므로 해서 자신의 지혜를 예수의 지혜보다 더 높다고 우쭐댈 때, 우리는 가시로 관을 엮고 그것을 그분의 머리에 씌우는 것이다. 우리가 자신의 정의를 가지고 그리스도의 정의를 대체시킬 때 우리는 자색 도포로 그분을 입히는 것이다. 우리가 바깥쪽에서는 그분을 예배하면서 안쪽에서는 자기를 숭배할 때, 그분에 대한 우리의 경배는 “유대인의 왕이여, 만세!” 라는 인사로 놀려대는 경배일 뿐이다. 그러면서 우리가 범하는 철면피한 죄들은 사람의 아들을 때린다. 인간이 타락했을 때 땅에 관해 말해진 것은, 땅은 그를 위하여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내리라” (창세기 3:18) 이었다. 그러므로 사람의 아들은 죄가 처음 세상에 진입되었을 때 죄의 표시오 그 결과인 가장 특색 있는 것으로 관을 쓰게 되었다. 인간을 위해 저주된 땅이란 하느님으로부터 돌아섰을 때의 인간의 심정이다. 이 심정이 가시덤불을 생산했다. 그리고 지금도 생산되고 있다. 그것이란 심정의 부패함에서 자라나는 욕망이다. 우리의 죄짓고 싶어함이 부패되고 썩은 토양에서 생산한 가시덤불을 가지고 지금도 관을 만들고, 초라한 구세주의 이마에 눌러 씌우며 잔인한 조롱을 퍼붓고 있다. 우리가 사람의 아들에게 쌓아 놓은 오만불손이란 그분 자신이신 진리에 쌓는 것들이다.
4,5. 이 조롱과 잔인한 행위가 총독 관저에서 있은 후, “빌라도가 다시 밖으로 나가서, 그들에게 말한다, ‘보라, 나는 그를 너희에게 데려온다. 하여 너희가 그 사람 안에서 어떤 과오도 찾지 못한다는 것을 보이기를 원한다.’ 그다음 예수께서 나오시는데, 가시 왕관과 자색 도포를 입으시고 계셨다. 그리고 빌라도가 그들에게 말한다, ‘이 사람을 바라보라!’” 왕권을 조롱하는 표지를 달고 예수를 유대인에게 데려 온다는 것은 빌라도에게 그분을 존경함이 없다는 것을 나타내 보인 것이고 예수에게는 아무런 혐의도 찾지 못했다는 말을 한 것도 억지인 듯 비치고 있다. 심정이 타락하고 이해성이 부패했을 경우 설사 올바른 판단이 서도 잘못 쪽으로 쉽게 유인되고 만다. 그럼에도 악한 심정은 진리쪽을 선호하여 증거를 주는 이해성을 완전히 침묵시킬 수 없다. 때로 진리 자체가 증거가 되는 경우도 있다. 그 이유가 본문의 경우같이 예수 자신이 유다인에게 나왔고, “자, 이 사람이다” 라고 말해지기 때문이다. 우리의 번역에서는 빌라도가 말한 듯 나타나지만 여기서 빌라도의 이름은 발생되고 있지 않는다. 더구나 이 말은 예수 자신에 의해 말해진 듯 느껴지게 하고 있다. 어쨌든 누가 말했던지, 이 문구, “Ecce Homo”는 위대한 진리를 표현한다. 주님은 참 사람(The Man)이시다. 그 이유가 그분이 완전한 하느님이시듯 그분만이 완전한 사람이시기 때문이다. 육을 입으심을 필요로 하게 한 퇴화의 표시들 중 하나가 이렇게 기술되어 있다. “내가 본즉 사람이 하나도 없다”(이사야 41:28). “내가 왔었을 때 사람이 없었다” (이사야 50:2). 진실로 사람인 모든 것은 인간들로부터 멸망되었다. 하느님의 형상 말고 또 무슨 인간인 것이 있을까? 진실로 인간인 모든 것은 신성의 형상이다. 인간성에 속한 무엇이든 우리 안에서는 유한하고 하느님 안에서는 무한하다. 하느님은 무한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우리는 무한한 사람의 모습이 된 만큼에서 유한한 사람이다. 그러나 인간 또는 인간성은 하느님이 육 안에서 명백히 나타내신 바인 주 예수 그리스도라고 단정할 수도 있다. 그 이유는 그분이 사람(Man)이시기 때문인데, 이는 그분이 창조되고 유한한 인간이 근원 되는 모든 것을 그분의 신성 안에 가지셨을 뿐 아니라 양쪽 세계에 거주하는 자로서의 창조된 인간 안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가지셨기 때문에서이다. 주님께서는 창조된 세계 안에서 뿐 아니라 타락된 세계 안에서의 인간 본성을 입으셨다. 참으로 그분은 그분이 입으신 모든 허약한 것, 모든 유한한 것을 벗으심으로 입으셨던 인성을 신성화하셨다. 그렇게 해서 그분이 입으셨던 그 인성까지 포함해서 그분은 완전한 사람이시고, 그 완전한 사람은 하느님-인간, 또는 신성한 인성이다. 그러므로 “보라, 이 사람이다” 라고 예수께서 말하셨을 때, 그분은 그 당시 그분을 보았던 이들뿐만 아니라 모든 시대의 모든 사람의 시선을 인간성의 모형이신 참 사람(The Man)에게, 그분만이 스스로 참 사람 되신 이래 참으로 인간인 모든 것이 파생될 수 있는 오직 한 사람에게로 시선을 집중시키셨다. 참 사람으로서 주님은 신앙과 예배의 참 대상(object)이시다. 우리는 이제 더 이상 아무도 본적이 없고 볼 수도 없는 무한하고 납득 안되는 실체로서 하느님을 섬기고 믿도록 요구되지 않는다. 이제 우리는 이런 분, 부활후 제자들에게 나타나셨던 분, 승천 후 요한에게 나타나셨던 바로 그분, 일곱 황금등경 사이를 걸어다니신 분, 발까지 내려오는 긴 옷을 입으셨고, 허리에 금띠를 두르셨고, 머리와 머리털이 눈같이 양털같이 희셨고, 눈은 불꽃같고, 발은 풀무불에 단 놋쇠 같았고, 음성은 큰 물소리 같았으며 얼굴은 대낮의 태양처럼 빛났던 그분, 한마디로 신성한 인간 안에서 그분을 알고 경배하는 특전을 받았다. 이분은 과거 빌라도에게 끌려와서 병사들의 막대기에 피를 흘리시고, 자색 도포를 입으시고, 가시관을 쓰시고, 사나워진 군중의 야유와 적개심에 노출되셨던 예수와 정확히 똑같은 존재이시다. 지금 그분의 영광 안에서 모든 천군 천사에 의해 경배되고, 이후 한없이 증가하는 땅 위 신실한 사람들에 의해 경배될 것이다.
6. “최고 성직자들과 관리들은 예수를 보자 ‘십자가에 못박으시오. 십자가에!’ 하며 큰소리로 외쳤다.” 이 모습은 악과 더불어 언제나 있다. 특히 교회의 부패된 멤버와 더불어서는 더욱 그러하다. 그리고 노골적으로 수치를 그분께 안겨준다. 그분에 대한 그들의 분노가 더 거세지고, 십자가에 못박으라는 소리가 더 커질수록 더욱 그들은 신성한 형상을 스스로 일그러지게 한다. “빌라도가 그들에게 말한다, ‘너희가 그를 데려가라, 그리고 그를 십자가에 못박으라. 그 이유가 나는 그 사람 안에서 어떤 과오도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다시 법과 정의의 바탕에서 유대인에게 호소하고 있다. 교회에서 선고한 것을 확인하거나 무시해 버릴 수 있는 특권을 지닌 빌라도가 예수에게 아무런 흠도 발견 못했다고 선포하고 있다. 그럼에도 그는 이 진행 절차에서 예수의 운명에 거의 어떤 관심도 보여주지 않았다. 그 이유가 이 불공정한 판결을 집행하는 것은 유대인 스스로 하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이 예수를 미워하는 한편 이방인들은 부정한 처벌로부터 그분을 구해줄 만큼 충분한 열성을 보이지 않았다.
7. 나는 그에게서 어떤 잘못도 찾지 못하였다고 빌라도가 반복해 선포하자, “유대인들이 대답했다. ‘우리는 율법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법에 의하면 그는 죽어 마땅합니다, 그 이유가 그는 자신을 하느님의 아들로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참고한 율법은 이것이다. “야훼의 이름을 모독한 자는 반드시 사형에 처해야한다… 너희가 알지도 못하는데 따라가서 그를 섬기자고 말하는 예언자나 꿈장이가 있거든 죽여야 할 것이다” (레위기 24:16, 신명기 13:1-5). 유대인들은 예수를 모독 죄로 고발했다. 그 이유는 그가 사람인데 자신을 하느님으로 만들었다는 것 때문이다 (10장 33절). 그리고 그들이 그를 죽이려 했는데 그 이유는 그가 하느님이 자기 아버지라고 말하고 자신을 하느님과 동등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5장 18절). 그러나 그들이 자신들의 성경을 제대로 이해했더라면 메시아는 하느님이 육으로 명백히 나타나시는 것밖에 다른 도리가 없다는 것, 그분을 섬기는 가운데 그들의 하느님을 섬기게 된다는 것을 알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원했던 메시아는 지상의 왕이고 지상의 왕국을 회복시킬 자였다. 그분이 메시아의 왕국은 이 세상 속에 있지 않다고 선포하셨기에 그들은 그분의 가르침과 삶을 미워하고 박해했다. 이와 똑같은 지상적 바람은 예수를 미워하는 모든 사람의 바탕에, 그분을 밝히 알리는 진리를 미워하는 자들의 바탕에 깔려 있다. 이 바람은 판결하는 율법을 가지고 있다고 고백해대고 있다. 편견을 내세우는 한편 욕정은 진행절차를 정당화하고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율법을 뒤집고 꿰맞춘다. 교회 안에서 신성하고 영적인 주제에 관해서 인간들은 성경 자체에서 그들의 법을 발견하고 그들의 악은 그것 자체의 용도에 맞게 그 법을 뒤집어 놓는다. 주님의 시대에 있던 유대인들은 그들의 전통을 수단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쓸모 없게 만들었다. 그들의 전통이란 인간의 명령을 위한 교리를 가르치는 것이다. 메시아에 관한 사랑도 마찬가지이다. 그가 자신을 하느님의 아들로 만들었기 때문에 예수를 죽여야 한다고 하는 신성한 법이 있을까? 어떤 것도 아니다. 그러나 그들의 대꾸는 법을 뒤집어 응용함으로 꿰맞춘 억지이다. 악마가 예수를 시험하기 위해 진리를 사용했던 것 같이 악한 자들은 그분을 부정하는데 진리를 채택한다. 그러나 양쪽 모두의 경우에서 진리는 그들 고유의 것과 씨름질 하고, 그들이 자기 것이라고 믿는 동안 자신을 파멸에 빠트린다. 그 이유가 진리를 거절하는 자는 자신의 영혼을 파괴하기 때문이다.
8,9. “이런 말함을 들은 빌라도는 더욱 두려워졌다. 그래서 재판정으로 다시 가서 예수에게 말한다, ‘너는 어디로부터 왔느냐?’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에게 대답을 주지 않으셨다.” 이렇게 관찰되어지고 있다. 처음에 유대인들은 치안 방해죄를 가지고 빌라도에게 예수를 고발했다. 그러나 빌라도가 예수에게서 사회법을 위반한 죄목을 찾지 못했다고 발표하자, 그 다음 그들은 예수가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자신을 일컬음으로 종교적인 법을 위반했다고 기소했다. 이것 때문에 그들의 율법에 의거 그는 죽어 마땅하다고 소리질렀다. 그러므로 그들은 로마법에 의해 그를 단죄하는데 실패하자 모세 법으로 죄목을 찾으려 했던 것이다. 빌라도는 예수가 유다인들의 어떤 법을 위반하여 기소했다는 것을 듣고 더욱 두려운 마음이 생겼다. 우리는 분별없이 생각하지 않는 바 이렇게 관찰된다. 빌라도는 이렇게 생각했다. 예수가 정치적으로 죄를 지은 게 없는 무고한 사람이라는 것, 병사들이 그를 짐승같이 다루고 조롱하는데도 그의 품행에는 위엄과 온유함이 흐르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 사람을 두고 새로운 죄목을 유대인들이 꺼내들자, 예수를 단죄하는데, 의심쩍고 불명확한 정치적 범법자를 죽이라고 유대인에게 동의한다는 것에 빌라도는 두려움을 느꼈다고 상상된다. 그러므로 그는 다시 관저로 들어가서 예수를 심문했다. 너는 어디로부터 왔느냐는 그의 질문은 주님의 고향에 관한 질문이 아니라 그분의 근원에 관계된 것이다. 이것은 무신론자가 늘 제의하는 질문이다. 그러나 그 질문의 답은 언제나 직접적으로 받지 못한다. “예수께서는 그에게 대답을 주지 않으셨다.” 주님의 침묵, 이는 온화하나 엄한 문책이 표현되고 있다. 진리의 근원에 관하여 제안된 모든 질문에 답을 요구하는 망설이는 무신론자, 뿐만 아니라 답을 제공하겠다는 무식한 열광자와 주의 깊은 논쟁자를 향한 근엄한 질책이기도 하다. 진리는 그것 자신의 근원뿐만 아니라 본성까지도 밝히 알려준다. 그러나 진리는 꾸밈없는 마음에 자신을 밝힌다. 그들에게 진리의 천국적 근원을 밝히는데 그들이 진리가 어디로부터인지 알기를 바라는 이유는 밝히 앎으로 그들은 진리와 더불어, 진리를 수단으로 진리가 온 구원인 그분께로 승강하기 때문이다.
10,11. “나에게도 말을 하지 않을 작정인가? 나에게는 너를 놓아줄 수도 있고 십자가형에 처할 수도 있는 권한이 있는 줄을 모르느냐?” 빌라도의 언어는 주님의 침묵에 대한 이유를 공급하고 있다. 그는 자신에게 사람을 십자가형에 처하거나 석방해줄 권한이 있다고 말하고 있다. 참으로 모든 사람은 진리와 잘못, 선과 악을 판단하고 선택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 권한은 인간에 속한 게 아니라 하느님께 속하는 권한이다. 예수께서 빌라도에게 하는 이 대답은 모든 사람에게 하는 대답이기도 하다.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그것이 위로부터 네게 주어지지 않으면 너는 나에 맞서 전혀 권능을 가지지 못한다. 그러므로 나를 네게 넘긴 자는 더 큰 죄를 가지고 있다.” 이 표현은 이중의 진리를 표현하고 있다. 이것은 우리가 판단하고 선택하는 수단인 합리성과 자유라는 능력은 하느님께서 꾸준히 주시는 선물이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다. 그리고 모든 선이 신성한 섭리 속에 있듯 모든 악은 신성한 허용 속에 있다는 것도 가르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신성한 허용을 그분께서 악을 찬성하고 있다고 이해해서는 안 되고 단지 그분이 그것을 절대적 차원에서 막으시지 않는다는 것, 어떤 한계 내에 그것을 억류하시고 있다는 것, 악이 허용되는 때란 선을 향상시키는데 도움이 되는 경우, 더 큰 악의 예방을 위해 덜 큰 악을 선 안에 포함되도록 해야 하는 경우에서만 있어진다. 악에 대한 신성한 허용은 인간의 자유의지를 간섭하지 않는 바, 인간의 책임에도 간섭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말하신다. “나를 너에게 넘겨준 사람의 죄가 더 크다.” 죄가 얼마나 더 크냐는 지식의 분량에 비례된다. 유다인은 이방인보다 죄가 더 큰데 그 이유는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이 가지지 못했던 자기들을 인도하는 법을 가졌기 때문이다.
12. “이후로부터 빌라도는 그분을 석방하려고 애썼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소리쳤다. 말하기를, ‘당신이 이 사람을 가게 한다면, 당신은 가이사의 지지자가 아니다. 자신을 왕으로 만드는 자는 누구든지 가이사에 맞서서 말한다.” 예수를 석방하려는 빌라도의 노력은 부패되고 외고집 센 심정의 경향성에 대항하는데 있어서 절반밖에 확신이 서 있는 이해성의 버둥거림과 같았다. 빌라도는 예수를 석방하려 애썼으나 그에게 영향을 미치는 두 세력, 하나는 유다인들, 또 하나는 가이사가 있었다. 영적 동기와 일시적인 동기가 하나를 이룰 때 그 동기가 온전히 서서 버틴다는 것은 그 얼마나 힘든지! 가이사의 압제로부터 자기들을 해방시키지 못했다고 하여 예수를 미워한 유대인들은 지금 예수가 가이사와 라이벌되는 왕이라는 것을 단죄의 빌미로 삼았다. 그러므로 그들은 영적인 것이 일시적인 것에, 천국의 것이 세상의 것에 종속되어야 한다고 주장한 셈이다. 유대인들이 표현했던 이것들은 교회 안에서 진리를 뒤집는 이들에 대한 것이고 그들은 신성한 질서를 거꾸로 놓는다.
13. “빌라도는 이런 말함을 듣고, 그는 예수를 데리고 나와 히브리어에서는 가바다, 포장된 자리 라 불리는 장소에 있는 재판석에 앉았다.” 우리는 자연적 인간의 흔들거림, 반대해대는 힘을 맞이하되 얼마나 그쪽으로 휘기 쉬운 주체에 불과한지를 보게 된다. 다시 빌라도는 예수를 데리고 나와 그분의 적 앞에 세웠다. 한편 그는 스스로 포장도로에 있는 재판석에 앉는다. 돌 깔아 놓은 장소(stone-paved place)는 그 단어가 뜻하는 바대로 집정관 밖에 있었다. 여기에서는 재판석이 유대인의 면전에 놓여졌다. 이 장소로부터 발표되는 선고(sentence)는 진리에 일치해야 했다. 그러나 돌은 참된 것 뿐만 아니라 거짓된 것도 상징한다. 이 구절에서 돌의 상징적 의미는 너무나 완전하게 증명되고 있다. 포장도로(the Pavement)를 위한 히브리 단어의 의미는 그 단어의 뿌리가 두 갈래에서 파생되기에 어느 쪽에 속하느냐에 따라 표면(surface), 또는 승강(elevation)을 뜻하기에 오로지 추측만으로 만 그 의미는 헤아려질 수밖에 없다. 그리스어뿐 아니라 히브리어의 이름이 우리를 가르치는 바, 사람의 아들에게 발표된 판결은 유대인의 마음 뿐 아니라 이방인의 마음 안에 그 바탕을 두었다는 것, 거룩한 분에 대한 부정한 재판이 마지막으로 유출된 이 장소를 수단으로 표현된 상태는 교회와 세상 모두에서 신성한 진리에 반대된 상태였다는 것이다. 법정에 “앉은” 빌라도는 이제 막 만들어지고 있는 마지막 결정과 공존하는 마음의 더 내면적이고 항구적인 조건도 표현하고 있다.
14. “그 날은 유월절 준비일이었고, 때는 제 6시쯤이였다.” 이렇게 해서 유대인과 기독인의 유월절 준비는 동시에 있는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 차원에서 동시에 일어나는 게 아니라 하느님 차원에서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유월절 양으로 희생되셨다…” (고린도전서 5:7). 이는 세상의 죄를 제거하는 하느님의 어린 양(요한복음 1:30)은 유월절 어린 양을 죽이는 그들의 손에 의해 죽임을 당하되, 세상이 죽음으로부터 해방을 위해 흠 없는 동물의 피보다 더 나은 것을 얼마나 필요로 하는지 보여주고 있다. 빌라도가 재판석에 앉았을 때의 시각은 제 육시쯤이었다. 마가는 제 삼시라고 말한다. 아마도 이 불일치는 조정의 가망이 있을 듯 하다. 그리고 그에 대한 설명들은 성서의 역사적, 글자적 의미를 명료하게 하려고 자신의 재능을 다 쏟은 이들의 주석에서 제공되고 있다. 거기에도 영적 의미가 있다고 간주해 보면, 모순되는 것은 없고 다양함만이 있는 바, 각 서술은 다른 것과 조화를 이루면서 구분된 생각의 기초가 되고 있다. 숫자 3과 6은 영적 차원 특히 6은 쉼이라는 안식일에 선행되는 노동과 시련이라는 상태의 마지막을 표현한다. 그러므로 충만과 완전함을 위해 요한의 복음서에서 언급되기에는 숫자 6이 더 적합할 듯 여겨진다. 그 이유가 요한복음은 타 복음에서 기술되는 상태보다 더 높은 상태를 묘사하기 때문이다. 이 시각에 빌라도는 예수를 위해 유대인들에게 “보라, 너희의 왕이다” 라고 마지막으로 호소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둘 것은, 예수는 유대인들에게 사람으로서, 그리고 왕으로서, 즉 본질적인 선함으로서의 사람, 그리고 본질적인 진리로서의 왕으로 모습을 보였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와 같은 두 개의 구분되는 특성 아래 그분은 모든 사람들에게, 우리 개개인에게 나타나신다는 점이다.
15. “그들은 외쳤다, ‘그를 없애시오, 그를 없애시오, 그를 십자가에 못박아 주시오’, 빌라도가 그들에게 말한다, ‘내가 너희의 왕을 십자가에 못박으란 말이냐?’ 최고 성직자들이 대답했다. ‘우리에게는 가이사밖에는 왕이 없소이다.’” 빌라도의 호소에 이렇게 응답하는데 섬뜩 놀라지 않을 수 없을지 모른다. 그럼에도 덜 놀라운 것은 그들이 구세주의 품성 측면에서 주님을 거절하기 보다 단죄했다는 것이다. 어쨌든 예수에 대한 이 부정, 공언하고도 부끄러워하지 않는 이 부정은 말씀을 신성으로 받는다고 고백하는 한편 그리스도의 본성이 신성하다는 것, 그분의 품성은 완전히 거룩하다는 것에서 돌아서는 이들에 의해서는 범죄성을 초과하고 있다. 악과 거짓은 종교의 가장 건전한 지적 관점과 연결되어 존재할는지 모른다. 이들은 “죽이시오.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시오” 라고 함성을 지를는지 모른다. 그 이유가 이런 외침은 의지와 이해성 모두에 의해 신성한 사랑과 진리를 미워하거나 반감을 갖는 것을 표현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가 너희의 왕을 십자가형에 처하란 말이냐?”는 빌라도의 질문에 대사제는 “우리에게는 가이사밖에는 왕이 없다”고 대답한다. 우리는 이 대답에서 진리로서의 주님, 온 심정과 마음의 최고 통치자가 되어야 할 주님을 거절한다고 말하는 것뿐 아니라 자아를 사랑함과 세상을 사랑함에 근원을 두는 세상적일 뿐인 권세를 주님 대신에 최고 통치의 자리에 앉히는 것을 표현하고 있다. 탈무드가 말한다. “우리는 가이사밖에 왕이 없다.” 이는 급히 서두른 미봉책일는지 모르지만 어쨌든 이런 변화는 하느님을 예배함에서 인간을 예배함으로 교회의 변화된 상황을 표현했다. 그렇다고 이것이 유대인에게만 국한된 죄는 아니다. 이는 영적인 것보다 일시적인 것을 추앙하는 모든 이들에게 뻗쳐있는 죄이다.
16,17. 이제 우리는 십자가형에 관한 주님의 사건을 살핀다. 이 가운데에서 요한복음이 다른 복음서를 보충해 주는 세부 사항들은 상세하게 주목할 것이다. “그래서 빌라도는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그들에게 넘겼다. 그들은 예수를 데려갔다. 그리고 그분을 끌어갔다. 십자가를 짊어진 그분은 해골의 장소, 히브리어에서 골고다라 불리는 장소로 갔다.” 여기서 표출된 광경은 참으로 가장 정감어리되 가장 굴욕적이다. 주님께서 달리시게 될 십자가를 메시고 있는 이 광경보다 주님의 공생애에서 더 애통을 느끼게 하는 장면이 있을까? 가장 순수하고 복주는 혜택을 직접 맛본 그들에게 가장 잔인하고 비열한 범죄자로 몰려 십자가에 달리시는 것보다 더 치욕적이라 할 수 있는 게 있을까? 그럼에도 이런 일련의 장면들은 인간 구속의 일을 완성하는 슬기롭고 자비로운 목적을 위해 허용되었다. 그러나 여느 다른 악이나 마찬가지로 신성한 섭리의 불가결한 법에 일치되게 허용되었다. 즉 악이 압도하면 그만큼 선을 위해서 그 악을 제압하기 위해 꾸준히 섭리를 펼치는 것이다. 창조 속에 있는 법칙과 같이 섭리의 법칙은 자연적, 영적 모든 것에서 균형의 상태를 보존하고 동시에 행동의 자유도 보존한다. 자유로운 행동은 두 개의 동등한 힘의 영향 아래, 또는 작용과 반작용이 균등할 때 있어진다. 지구는 두 개의 반대되는 힘에 의해 자기 궤도를 보존하고 있다. 하나의 힘은 태양을 향해 지구를 끌어당기고 있고, 또 하나의 힘은 지구를 태양에서 멀어지게 끌어당긴다. 만일 그 어느 한쪽의 힘이 우세해져 끌어간다면 어느 쪽에서이든 파멸되고 말 것이다. 영적 존재로서의 인간은 그 창조 때에 상응하는 균형(equilibrium)의 주체이었다. 의식(consciousness)과 이성(reason)은 두 개의 힘이고, 이 두 힘의 균형을 수단으로 인간은 자유로이 선택하고 행동하는 능력을 소유하였다. 밝히 알게 해 주심(revelation)으로 계발된 이성은 이렇게 말한다. 창조된 유한한 존재로서의 우리의 생명은 하느님으로부터 계속적으로 파생되고 있다. 그 반면 의식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의 생명은 우리 고유였던 것 외에는 우리에게 영향을 미치는 게 없다. 이 자각 없이 우리 중에서 누구도 유한한 개체성의 상태로 존재할 수 없었다. 이것이 우리 자신(propertius), 우리의 자아(self)로 구성한다. 이것이 박탈되어진다면 우리는 신성(Deity)에로 흡수되어질 것이다. 마치 원심력을 상실한 행성일 경우 태양으로 빨려드는 현상과 같다. 이와 반대로 이성과 계시가 그들의 능력을 상실하게 한다면 우리는 우리의 생명의 중심이 되는 하느님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나가 어둠과 죽음의 영역에서 배회할 것이다. 이것은 인간이 타락을 맞이하는 상황이다. 주님께서 세상에 오신 것, 아흔 아홉 마리의 양을 남겨두고 잃은 한 마리를 찾기 위해 오신 것은 타락 안에 있는 인간의 상황을 질서의 궤도에로 되돌아가게 하는 것, 그들에게 빛과 생명의 즐거움을 회복시켜 주시는 것이다. 타락으로 잃어졌던 영적인 균형은 개인적인 인간뿐만 아니라 인류에게서 상실되었고 자연계, 영계 모두에서 그 상실은 퍼져 있었다. 지상의 삶에서 악한 삶을 스스로 확증했던 이들은 정의의 태양이신 하느님으로부터 지혜의 빛과 사랑의 따뜻함을 공급받는 천국에서 살 수 없었다. 그러므로 이런 이들에게는 천국에 반대되는 왕국, 즉 어둠과 죽음의 왕국이 주어졌다. 이와 같이 반대되는 두 왕국 사이에, 두 왕국 각각이 인류에 영향을 미치는 힘에 균형이 있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악은 선보다 더 강력해져 인간은 선택해서 선을 행하는 능력을 박탈당한다. 이것은 어느 정도까지인지는 정확히 가늠 못해도 실상이 되어 왔다. 천국과 지옥 사이에 있는 균형의 회복, 뿐만 아니라 인간이 자신 안에서 침해당하고 거의 파괴될 뻔한 이 균형의 회복은 주님이 세상에 오신 장엄한 목적 중 하나였다. 이 회복이 성취되기 위한 유일한 방법은 주님께서 인간이 되시는 것뿐이다. 육 안에서 이루어진 그분의 모든 일은 악이 파괴해 놓은 질서를 회복하는 수단이었다. 그분이 참아내신 격렬한 고통과 죽음은 악의 모든 권세가 그분께로 집중되도록 하시기 위해 허용되었던 것이다. 그렇게 해서 악의 권세가 깨트려지고 천국과 지옥 사이의 균형이, 선과 악 사이의 균형이 회복되도록 하셨다.
이제 우리는 죄를 위해 기꺼이 제물이 되신 분으로서의 주님에 관련된 세부 사항의 일부를 간략하나마 언급해 보자. 빌라도는 유대인들에게 예수를 십자가형에 처하라고 내어주었다. 예수에게 특별히 나쁜 감정을 가진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그를 석방해야겠다고 특별히 노력한 것도 없는 어정쩡한 빌라도의 태도는 유대인들로 함성을 지르는 결과만을 산출한 셈이 되었다. 그래서 자기 스스로 예수에게는 아무런 죄가 없다고 실토했으면서도 유대인의 손에 예수를 넘겼다. 개인적 차원으로 생각해본다면 빌라도는 의도는 선량하나 공정과 정의에서 확실한 원리를 갖지 못하고 있는 자연적 인간의 품성을 적나라하게 나열하고 있다. 자연적 선함이라도 자기 품성의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사람일 경우 이 세상일지라도 그런 사람으로부터서는 악이 행동되지 않게 되어 있지만 그런 사람의 선함이 올바르고 유용한 행동으로 돌출 되게 인도하는 원리가 부족할 경우 그는 굳이 잘못을 범하고 싶지 않은데도 설득과 압력이 있게 되면 올바르지 않은 것을 창출하는 쪽으로 기우는데 얼마나 잘 준비되어 있는지 모른다. 따라서 진리 없는 선은 선이 아니다. 이것은 이방인 같은 선이다. 그래서 이런 선은 교회 밖 이방인 사이에, 또는 교회 내의 이방인 같은 상태에 있는 이들에게 존재할는지 모른다. 따라서 진리 없는 선은 선이 아니다. 이것은 이방인 같은 상태에 있는 이들에게 존재할는지 모른다. 빌라도는 이방인이었고 복음서에서 이방인을 일반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방인으로서의 그는 예수가 십자가형에 처하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의 바람은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아 달라는 유대인의 함성을 초래하게 했다.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 그분의 죽음에 비록 범죄성에 수준의 차이는 있다 해도 관심이 있었다. 그리고 예수는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에 의해 죽으셨고 그들 모두를 위해 죽으셨다. 빌라도는 예수를 유대인에게 넘겼고, 유대인들은 그분을 십자가에 못박기 위해 끌고 갔다. 이 두 표현에서 우리는 두 개의 부패된 원리의 합일을 보게 되고, 이 합일 아래 유대교회는 예수를 향해 행동했다. 그 이유가 그분을 데려갔다(to take him)는 것은 의지의 행동을 표현하고, 그분을 끌고 갔다(to lead him away)는 것은 이해성의 행동을 표현하기 때문이다. “그분은 십자가를 짊어지시고 해골의 장소라 불리는 장소로 가셨다.” 죄인을 처벌하는 십자가는 속죄해야 할 악에 대한 표시라고 그들은 생각했다. 유대인들이 예수에게 그분의 십자가를 메고 가도록 강요했을 때 그들의 의도는 그분이 죄를 지었다는 표시가 되게 하려는 계산에서였다. 그러나 그들이 그분께서 무고하시다는 것을 알았을 때, 그것은 진실로 그들 자신의 죄에 대한 표시였다. 따라서 그들이 그분의 말씀에 저질렀던 것을 표현했다. 다시 말해 그들이 말씀 위에 그들의 불법을 얹어놓고 그 불법의 짐을 말씀더러 지고 가도록 강요한 것을 표현했다. 주님께서는 십자가를 메신 다음 “해골의 장소”로 가셨다. 그들이 말씀에 저지른 행동과 똑같은 이 장소의 이름이 암시하는 바, 유대인 자신에 관한 한 말씀은 그 생명을 박탈당했고 죽은 글자 외에 그들에게 남은 것은 하나도 없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권능이 없는 진리의 형체만 남아 있었다는 말이다. 이 장소에 대한 히브리 이름은 이런 생각을 표현하기 위해 주어진 이름임은 의심할 바 없다. 즉 주님의 죽으심은 유대인 뿐만 아니라 히브리 교회 안에 있는 생명 있는 원리는 파괴되었다는 것이다. 히브리 교회란 고대 교회의 연속이었다. 이 교회는 노아라 불리는 교회와 이스라엘이라 불리는 교회 사이에 시간상으로, 그리고 품성 측면에서도 중간에 위치해 있었다. 그래서 고대 교회의 어떤 것들이 이 교회를 통과해 이스라엘 교회로 건너갔다. 교회 속의 모든 것, 그것이 내적이든 외적이든 유대인들 사이에서 멸망되었다. 따라서 하느님의 예언자(oracle)를 소유하는 바로서의 유대교회라는 하늘의 처방은 영적인 골고다 였다.
18. “거기서 그들은 그분을 십자가에 못박았다. 그리고 그분과 함께 두 명의 다른 사람을 양쪽에, 그리고 중앙에 예수를.” 유대인들에게는 두 종류의 치명적인 처벌이 있었다. 그것은 돌로 치는 것과 목을 매다는 것이다. 어떤 이들의 견해에서, 목을 매다는 것은 살아있는 자에게 큰 고통을 입히지 않는 바, 이 처형이 중요한 처벌 방법에 첨가된 이유는 범죄가 심각했다는 것을 표시하기 위해서일 뿐이라고 말한다. 이렇게도 말한 구절이 있다. “… 나무에 매달린 자는 하느님께 저주를 받은 것이다…” (신명기 21:23). 이와 비슷한 예가 여호수아 10장 26절에 있다. 그외 여호수아 8장 29절, 에스더서 7장 9절에서도 읽어볼 수 있다. 처벌의 이런 두 종류는 분리해서 또는 병합해서 사용되었다고 말하는 게 더 그럴듯한 말이다. 그것들은 영적 죽음의 두 종류, 거짓을 생산한 영적 죽음은 돌로 치는 것으로, 악을 생산한 영적 죽음은 나무에 매다는 것으로 표현되고 있다. 돌은 거짓을, 나무는 악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은 십자가에 못박는 것을 목을 매다는 것과 같은 것으로 간주했다. 바울은 목을 매다는 것이 더 불명예스러운 처벌이고 큰 목적이 그것에 첨부되어 있다고 인식했다. “‘나무에 달린 자는 누구나 저주받을 자다’ 라고 성서에 기록되어 있듯이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저주받은 자가 되셔서 우리를 율법의 저주에서 구원해 내셨습니다” (갈라디아 3:13). 성경을 순수하게 자연적 관점에서 보는 사람들은 이 구절이 이것을 뜻한다고 이해한다. 예수께서는 율법의 저주를 자신이 입으셨고, 그분의 죽음으로 우리로부터 저주를 제거했다는 것이다. 율법의 저주란 무엇일까? 어떻게 예수는 우리를 위해 저주가 되셨을까? 그렇게 하심으로 어떻게 그분은 저주로부터 우리를 구속하셨을까? 율법이 불순종하는 자에 대해 발표하는 저주는 죽음이다. 그러나 그것은 영적인 죽음 또는 하느님과 인간을 사랑함이 심정에서 소멸되는 것이다. 그 이유가 이 사랑이 영적이고 영원한 생명이기 때문이다. 온 인류가 천성적으로 놓이는 저주란 신성의 어떤 악담(malediction) 또는 죽음의 선고 같은 게 아니라 죄 안에서 태어나야 하는 창조물의 피할 수 없는 조건, 죄를 질 수밖에 없게 하는 유전적 경향성이 아주 강한 상태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이런 유전적 저주를 가진 우리 본성을 자신에게 입힘으로 우리를 위해 저주받은 자가 되셨다. 그분은 입으셨던 인성이 저주를 하지 않음으로 해서 우리를 구속하셨다. 이를 수단으로 그분은 인간의 경우에서도 저주를 하지 않음을 설비해 두셨다. 예수의 십자가형, 이를 영적 국면에서 생각하면, 이는 그들과 그들 조상에게 밝히 알려 주었던 신성한 진리로서의 말씀을 완전히 거절한 것을 표현했다. 주님의 십자가형은 부패된 세대에서만 저질러질 수 있었던 범죄였다. 그런데 이것이 사제직에 있는 자들에 의해 결과됐는 바 이것은 부패된 교회에 의해서만 저질러질 수 있는 것이었다. 주님께서는 유대인들이 믿노라고 고백하고 존경한다고 했던 그 말씀 속의 원리들을 생활로 본을 보이셨고 그분의 가르침에서 강요하셨다. 그들은 자신들의 법이 요구했던 가장 순수한 삶을 연출했던 사람을 미워하고 십자가에 못박았다면, 그렇게 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들이 자기들의 법이 명령했던 것, 거룩함을 위한 진실 된 모든 사랑을 그들 심정으로부터 박살내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씌어있는 말씀을 다룬 것과 똑같게 주님을 취급했다. 유일한 차이는 씌어있는 율법은 외형상 존경을 받았는데 비해 말해지고 행동된 율법은 노골적인 미움과 박해의 대상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 박해는 십자가형에까지 이르렀다. 처벌의 고통을 더 큰 모욕으로 만들기 위해 그분의 십자가 양쪽에다 두 사람을 같이 처형했다. 이 모습은 역시 주님 자신이 그들의 상태를 드러내 주셨던 것과 유사한 표시였다. 이 두 사람, 그 중 하나는 참회하는 강도였는데 그는 선과 진리 가운데 있는 이들을 표현했고, 참회하지 않는 강도는 진리 가운데만 있는 이들을 표현했다. 그러나 추상적 의미에서 그들은 선과 진리 자체의 원리를 표현한다. 이들이 예수의 양쪽에 있고, 그들이 합쳐지는 곳, 가운데에 그분이 있으셨다.
19. “빌라도가 표제를 썼다, 그리고 그것을 십자가에 놓았다. 그 씀은 이러했다, 유대들의 왕 나사렛 사람 예수.” 유대인들의 왕이라는 칭호가 예수에게 적용된 경우는 꼭 두 번이었는데 그분이 태어나실 때와 죽으실 때였고 모두 이방인이었다는 것은 주목해 볼만하다. 그분은 동방의 현자에 의해 유대인의 왕으로 태어나셨고, 서방의 총독에 의해 유대인의 왕으로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물론 이렇게도 추측되어질 수 있다. 이방인이 예수를 왕으로 생각했다면, 예수가 유대인으로 태어난 것을 아는 유대인들이 그를 유대인의 왕으로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 아니냐는 것이다. 의심할 바 없는 추측의 하나는 빌라도가 써 붙인 죄명은 그분의 적인 유대인들로부터 얻은 지식에서 발출되었을 것이라는 점이다. 이보다 더 명확한 증거는 이후 구절에 기록된 것으로부터의 암시이다. 즉 유대인들은 빌라도가 적은 표제에 이의를 제기 했으나 빌라도가 그것의 정정을 거절해 버린데서 알 수 있다. 표제 그 자체만을 생각해 보면 네 복음 모두 거의 같지만 각 복음은 세부적으로 약간씩 차이가 있고 특히 요한의 경우는 다른 세 복음서가 언급하지 않은 부분을 함유하고 있다. 마태의 경우, “유대인의 왕 예수”이고, 마가는 “유대인의 왕,” 누가도 “유대인의 왕”인데, 요한복음만이 “유대인의 왕 나사렛 예수”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런 기록의 차이가 있게 된데 대해 어떤 이들은 사도들의 기록이 성경의 지휘감독을 받지 않고 자신에게 있었던 감화력에 의해서, 또는 성령이 불러준 대로 받아쓰는 방식이 아닌 그들이 보고 들었던 것을 기록함에서 있게 되는 개인적 특질이 문자에 주는 영향의 차이 그 이상은 없다고 말하고 있다. 이와 견해를 달리하는 이들의 경우, 즉 말씀의 기록은 큰 테두리 뿐만 아니라 미미한 글자에 이르기까지 신성한 권위가 담겨 기록된 것이라고 믿는 사람들은 이 네 복음서의 기록의 차이 역시 거기에 어떤 의미를 담고 있다고 주장한다. 요한에 의해 기록된 십자가 위의 명패(inscription)는 마태와 요한에 의해서는 자세하고 완성된 것, 특히 요한의 경우는 마태보다 더 완성된 상태를 주고 있다. 일반적으로 시리즈의 첫 번째와 마지막은 가장 중요하고, 특히 마지막 째는 첫 번째보다 더 중요하다. 그 이유가 마지막 안에는 그에 앞서 있는 모든 것이 동시적으로 충만 되어 있기 때문이다. 네 복음서 중 가운데의 두 복음은 유다의 왕이라 기록할 뿐 이나 첫 번째는 예수가, 마지막에는 나사렛 예수로 기록해 놓고 있다. 요한복음의 경우는 거듭남의 가장 높은 상태에 도달하는 이들에게 나타나는 것, 즉 천적 수준의 품성을 기술하고 있는 바, 그가 기록한 명패 역시 네 복음 중에서 가장 충만된 상태의 표제를 사용하고 있다. 따라서 이 명패는 주님의 구원하시는 사랑과 지혜를 가장 높고 가장 깊은 수준에서 실감하는 교회 안의 사람에게 알려져 인정되는 바와 같은 것, 즉 구세주의 신성화 된 인성(the glorified humanity of the Saviour)을 표현해 놓고 있다. 예수는 주님의 사랑 측면을 표현하는 그분의 이름이고, 왕은 그분의 지혜 측면을 표현하는 칭호이다. 그런데 그분이 나사렛 예수라고 불리울 때 이는 그분을 충만된 상태의 신성한 사랑으로 묘사한 것이고, 그분이 유대인의 왕이라 불리울 때 이는 그분을 권능으로서의 신성한 지혜로 묘사한 것이고, 그분이 유대인의 왕이라 불리울 때 이는 그분을 권능으로서의 신성한 지혜로 묘사한 것이다. 예수가 세상에서 입으신 인성에 관련해서 그분은 나지르인이라 불리운다. 그리고 이 인성이 신성화된 상태가 신성한 자연성(Divine Natural)이다. 그분이 유다인의 왕이라 불리고 유다의 왕으로 표현된 것은 그분의 신성한 지혜에 관련되는 바, 이는 천국과 교회라는 정부, 특히 그분의 천적인 왕국을 구성하는 이들을 통치하는 정부를 나열한 것과 같다. 십자가 위에 적힌 표제를 쳐다본다는 것은 마치 우리에 의해, 우리의 체험에서 이렇게 읽혀지게 되는 것과 같다. 나사렛 예수가 유다인의 왕이 되는 것은 그분의 지혜가 우리의 이해성을 통치하고, 이로부터 우리의 언어까지 관할할 때이다. 또는 그분의 사랑으로부터 그분의 지혜를 수단으로 해서 예수가 우리가 존재하고 소유하고 행하는 모든 것의 주인이 될 때이다.
20. “이 표제를 많은 유대인들이 읽었다. 그 이유가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장소는 성읍으로부터 가까웁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은 히브리말로, 그리고 그리스어로, 그리고 라틴어로 씌어졌다.” 이 표제가 이방인에 의해 씌어졌고 유다인들에 의해 읽혀졌는 바, 이는 장차 이방인의 세상에 의해 예수가 인정된다는 것, 그분을 믿지도 않는 유대인들이 그분에 관한 지식을 지니고 있었다는 것에 관한 그림자 역할을 하고 있다. 이 표제는 많은 유대인들에 의해 읽혀졌다. 그 이유가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곳이 성읍에서 가까웠기 때문이다. 예수의 십자가형의 집행이 도성 밖에서 거행됨으로 죄를 위한 유대인의 제물에 관한 표징적인 법을 충족시키고 있다. “유대인의 성직자는 짐승의 피를 지성소에 가지고 들어가서 속죄의 제물로 바칩니다. 그러나 그 짐승의 몸은 진영 밖에서 불살라 버립니다. 이와 같이 예수께서도 당신의 피로 백성을 거룩하게 만드시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히브리서 13:11). 이미 여러 번 주목한 바는 예수께서는 그분 자신의 몸 안에서 우리의 죄를 짊어지셨다는 것 (베드로전서 2:24), 이는 타락된 어머니로부터 파생된 것을 지니신 그분은 죄를 짓기 쉬운 우리의 유전적 경향성을 모두 짊어지셨다는 말이다. 어머니 쪽의 인성, 무르고 약한 인간성은 마치 속죄를 위한 제물의 몸이 거절되어 진영 밖으로 운반되었던 것같이 (레위기 4:11) 벗어야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속죄 제물은 우리가 그에 관한 충분한 의미 파악과 올바른 응용을 볼 수 있기 전에 반드시 다른 사항들, 특히 번제물과 관련해서 생각해 볼 기회를 가져야 한다. 속죄 제물의 경우 내장을 덮은 기름과 두 콩팥은 번제물의 제단에서 태웠다. 이 제단 아래에서 피가 뿌려진 후의 남은 피가 부어졌다. 다리와 피부를 지닌 동물의 몸은 진지 밖으로 옮겨 태웠다. 번제물의 경우, 동물 전체가 제단 위에 놓여지고 온전히 불살랐다. 위와 같은 두 종류의 제물에 관련된 사항은 인간의 거듭남과 주님의 신성화하심의 발전 과정에 있는 두 가지 구분된 행동들, 두 개의 일반적 단계들을 표현했다. 속죄제물에서 피와 내장을 덮은 기름기는 하느님께 바쳐졌는데, 이는 내향의 인간의 거듭남을 예징적으로 묘사한 것이었고, 번제물에서 동물 전체가 살라지는 것은 인간 전체, 즉 안쪽과 바깥쪽의 인간, 마음과 생활 모두가 거듭나는 것을 표현했다. 주님의 신성화하심은 인간 거듭남이 더 드높여진 형체인 바, 위와 같은 제물과 그것의 바침 역시 양쪽 모두에 관한 예징적인 묘사에 해당된다. 그러므로 주님의 인성 중 내적 측면의 신성화하심이 속죄제물에 의해, 그분의 인성 전체의 신성화하심, 즉 내적 측면과 외적 측면, 모두의 신성화 하심은 번제물에 의해 표현되어졌다. 그런데 왜 동물의 일부만 바쳐지는 속제제물이 그분의 인성이 완전히 신성화되고 신성에 하나되는데 대한 마지막 행동인 주님의 십자가형에 적용될 수 있을까? 주님의 십자가형은 그분의 신성화하심의 마지막 행동이었으나 그분의 부활과는 양립할 수 없다. 십자가에 달리심은 속죄제물이었고 부활하심은 번제물이었다. 십자가형을 수단으로 그분은 어머니쪽 인간성을 벗으셨다. 그 이유가 이때 마리아의 아들은 죽었기 때문이다. 부활을 수단으로 그분은 신성한 인성을 입으셨다. 그 이유가 그때 그분은 하느님의 아들로 일어나셨기 때문이다. 주님께서 흠없는 자신을 하느님에게 생명 있는 제물로 바치신 것이 부활에서 입게 된 몸이었다. 그 다음 완전히 신성이 된 인성이 본질적인 신성과 하나가 되었고 영원히 한 분(one Person)으로 계시게 되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던 장소는 성문 밖이되 그 도성과 가까운 곳이라고 이 구절이 말해놓고 있다. 가까웠다고 언급한 이유는 많은 유대인들이 십자가 위의 표제를 읽었다는 상황을 설명하기 위해서였다. 이것은 유대인들로 그분을 단죄하려고 애쓰고 그 결과가 있게 한 그들의 부패된 원리와 아주 가까운 연결을 아직 갖고 있었다는 것을 그들 스스로 보여준 것이다. 그들이 읽었던 표제는 그 세상에 있는 세 언어로 씌어 있었다. 신약성경 자체에서는 이 세 언어는 그냥 세상으로 말해지는 때도 있다. 이 표제가 세 언어로 씌어 있었다는 것은 사람의 아들의 폭넓은 지배권에 관한 표시로 이해해 볼 수 있을는지 모른다. 마치 그분께서는 모든 나라와 언어들에 그분의 왕권을 휘두르실 것이라는 예언의 선포와 같다. 이렇게 더 암시되고 있다. 오순절에, “… 그 소리가 나자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그리고 사도들이 말하는 것이 사람들에게는 저마다 자기네 지방말로 들리므로 모두 어리둥절해졌다” (사도행전 2:6). 명패가 세 언어로 씌었다는 기록은 누가와 요한에 의해서만 언급되고 있는 바, 이는 거듭남이 더 진보된 상태를 달성한 이들에 의해 실감되는 것을 암시하고, 두 기록의 유일한 차이는 요한의 경우 히브리말이 처음에 언급되었다는 것인데 이는 그의 복음서의 특성과 일치하고 또한 그가 서술한 영적 질서와 삶의 상태와도 일치하고 있다. 표제에 사용된 세 언어는 유대인의 왕이라는 주님의 칭호가 알려져 인정되는 사람들 사이에 존재하는 세 가지 특징 있는 일반적 차이도 표현하고 있다. 또한 누가이든, 요한이든, 어느 쪽이든 그 질서에 따라 각 개인이 주님을 고백하는 세 가지 요소들도 표현하고 있다. 히브리, 그리스, 라틴말을 각 백성의 특징적인 것들로 판단해보든, 그들의 언어나 문학 같은 것들로 이루어 생각해보든 이 세 언어는 의지, 지성, 행동에 응답하고 있고, 사랑, 총명, 힘이라는 마음의 올바른 조건과도 응답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21,22. “그때 유대인의 최고 성직자들이 빌라도에게 말했다, ‘유대인들의 왕 이라 쓰지 마시오. 그러나 그가 나는 유대인들의 왕이다 하고 말했다 하고 쓰시오.’ 빌라도가 대답했다. ‘나는 썼었던 것을 썼었다.’” 이 최고 성직자들은 주님을 사랑하고 예배하는 이들을 표현하는 대신, 자아를 사랑하고 숭배하는 이들을 표현한다. 이런 사람들은 주님이 유대인의 왕이라고 선포되는 것에 동의할 수 없다. 더구나 그분을 고발해서 십자가에 매단 후 씌어진 표제에서조차 만족치 못한다. 최고 성직자들은 그분이 스스로 유대인의 왕이라 말했다는 식으로 고쳐져야 한다고 제의했다. 그러나 예수는 그렇게 말하시지 않았다. 그들이 그분을 두고 왕이라고 한 것을 확인했을 뿐이고, 단지 그분의 왕국은 이세상 속에 있지 않다고 말하셨을 뿐이다. 그러므로 그들의 제안을 사절했다. 부정한 판결을 받은 자를 보호할 권한이 있고 그렇게 해 보려 했던 이방인, 그러나 그렇게 행동하기에는 충분한 원리가 그에게 없었던 이방인이 아직도 그분의 십자가 위에 그가 유대인의 왕이었다는 죄명을 쓰게 된 것이다. 예수께서 이 칭호를 주장한 것으로 암시하는 것밖에 어느 다른 빛으로 달리 간주하기는 거의 힘들 것처럼 보인다. 범죄자의 십자가 위에 적힌 것은 그가 고통받아야 하는 범죄일 거라고 유대인들이 알았는 바, 주님의 십자가에 적힌 것은 “죄목”이라 일컫는 것으로 이해되었음에 틀림없다. 때로 진리는 조소받고 있는 중에 말해지기도 한다. 이 구절의 경우는 이에 꼭 맞는 예임이 확실하다. 이 예증에 있는 것같이 말해지거나 씌어짐이 표본적인 사람을 수단으로 했다. 또한 이방인 상태로 교회 내에 있는 이들은 헛된 철학을 통해 망가졌다. 그들은 마치 빌라도가 그랬듯이 진리에 적개심을 갖지 않고 오히려 자기가 아는 한도에서는 호의적인데도 진리의 적들로부터 오는 정보로부터 진리를 판단하고 취급하고 단죄하는 쪽으로 쉽게 동조한다. 빌라도는 진리 자체의 증거로 진리를 판단해서 진리를 볼 수 있으나 다른 것을 증거로 들이댈 때 쉽게 자신의 처음 판단에서 물러나고 마는 이들에 대한 표본이다. 어쨌든 빌라도는 자기가 쓴 것을 고수했다. 신중한 행동을 수단으로 마음에 새겨졌던 것이 남아 있기 마련이다.
23,24. “그때 군인들, 그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았을 때, 그분의 겉옷을 가져가, 그것을 군인 각자가 한 부분을 취하게 네 부분으로 만들었다. 그분의 속옷 역시. 이제 속옷은 이음새 없이 위로부터 통째로 짜깁어져 있었다. 그들은 그들 자신 사이에서 말했다, 우리가 그것을 찢을 수 없다, 그러니 그것을 위해 제비를 던져 누구의 것일런지 정하자. 성경이 말한바, 그들은 자기들 사이에서 내 의복을 나누었다, 그리고 내 속옷을 위하여 그들은 제비를 던졌다는 말씀이 성취되었다. 이런 것들을 군인들이 행했다.” 요한은 마태나 마가에 의해 기록된 것보다 한층 더 정밀한 기록을 우리에게 주고 있다. 여기서도 다시 요한의 복음서가 갖는 특성을 볼 수 있다. 관점이 깊을수록 세부사항도 더 구분되게 보여진다. 더 세세할수록 더 납득력이 있다. 군인들이 주님의 옷을 나누어 갖는 역사적 모습에는 흥미 있고 귀감 되는 영적 의미가 있다. 그분을 표현했던 여느 예언자처럼 주님도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의 표시(sign)였다. 그분이 견뎌낸 것은 참으로 끔찍한 실재였던 것이나 그것은 이스라엘 교회가 말씀에 저질렀던 것에 관한 결과로 그것에 대한 표시였다. 말씀을 품성측면에서 생각해 보면 주님의 겉옷과 속옷은 말씀의 바깥쪽과 안쪽에서의 의미(sense)를 표현했다. 가장 깊은 본질 측면에서 말씀은 참 신성한 진리, 가장 높은 천국 위에 있는 진리, 그러므로 천사와 인간의 유한한 능력을 초월하는 진리이다. 이 진리를 생물적인 마음에 의해 납득할 수 있게 만들기 위해 신성한 진리는 인간의 것이 아닌 하느님의 의지와 지혜로 천사와 인간의 생각이라는 섬유를 가지고 깁어진 옷을 가지고 그 자체를 입혔다. 이 옷들이 말씀의 영적 의미와 글자적 의미들이다. 말씀의 영적 의미는 천사들 사이에 존재하는 것과 같은 신성한 진리이고, 글자적 의미는 사람들 사이에 존재하는 것과 같은 신성한 진리이다. 이 진리는 인간이 거룩한 성경 안에서 소유하고 있는 계시 안에 있다. 비록 영적 의미가 본질적으로는 천사를 위해서 있다 해도 그 의미가 인간의 눈으로부터 완전히 감추여 놓여있다고는 이해되지 않는다. 영적 존재로서 인간은 영적 의미에 관한 얼마간의 지각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글자적 의미를 통해, 다시 말해 간접적으로 보게 된다. 즉 칙칙한 유리를 통해 보는 것과 같다. 그 반면 천사들은 자연적 매체의 방해를 받지 않고 말씀의 의미를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천국의 빛으로 직접 본다는 말이다. 우리가 본문의 주님을 말씀으로 간주하고, 그분의 겉옷과 속옷을 말씀의 안쪽 의미와 바깥쪽 의미를 표현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그 의미는 천사와 인간의 납득력에 잘 숙박될 수 있는 의미로서 생각할 때, 군인들이 그분의 겉옷은 나누어 가지되, 속옷은 제비뽑아 가져가는 본문의 상황 안에 담겨 있는 신비로운 의미를 볼 수 있게 된다. 이렇게 이해해 보건대 그분의 겉옷은 찢어서 나누되 속옷은 통채로 보존하는 모습이야말로 얼마나 의미심장한지! 말씀의 글자적 의미는 이교의 창시자들(heresiarchs)에 의해 찢겨지고 나누어졌다. 그리고 각자는 그 한 부분씩을 가져가고 있다. 그러나 영적 의미는 온전하게 언제나 보존되고 있다. 유대교회에서 그 교회의 말기 때에 말씀은 서로 경쟁하는 당파에 의해 조각으로 찢겨졌다. 모든 교회의 말기에는 이와 똑같은 모습이 나타난다. 각 당파는 자기들에 걸맞는다고 생각되는 것을 말씀에서 뽑아내감으로 말씀의 분리된 몫을 챙기고 있다. 그리하여 각 당파는 전체로서의 진리에 파괴적인 교의(tenet)들을 챙겨간 파편에 불과한 말씀의 부분들로 건설한다. 이보다 더 통탄스러운 것은 교회 안에 있는 서로 다르다고 하는 당파들은 말씀을 나누어 가지면서 동시에 그분의 말씀 안에서 하느님에게 함께 연합되었던 것까지 찢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그들은 선행과 신앙을, 신앙심(piety)과 실행(work)을 나뉘게 하고 있다는 말이다. 이런 분리는 신앙 만을 수단으로 구원됨이라는 교리를 존속시킴으로, 뿐만 아니라 그 교리를 생각과 생활의 모든 부분으로 운반함으로서 괴변적으로 이루어졌다. 이것이 본문에서 주님의 거룩한 겉옷을 네 조각으로 나눈 것으로 의미되어 있다. 그 이유가 숫자 넷은 숫자 둘처럼 선행과 신앙, 신앙심과 일이 하나 되어 있음을 의미하고, 네 조각으로 나눔은 그들의 분리를 의미한다. 이것이 결과 될 때 진리(the Truth)의 통일과 교회(the Church)의 통일은 파괴되어진다. 말씀에 관한 한, 이것은 말씀의 글자적 의미에서만 있을 수 있다. 그리고 교회(the Church)의 말기에서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다른 것은 알지 못하고 인정도 않는다. 그렇게 되는 것도 주님의 섭리 속에 있다. 가상의 진리(apparent truth)를 우선시해서 구성되는 글자적 의미는 다양하게 해석되어질 수 있고, 각 해석자는 진리의 어느 부분을 획득하나 전체를 소유하는 자는 아무도 없다. 그러나 영적 의미는 실재의 진리(real truth)로 구성되고 있다. 그래서 다양한 해석자의 가지각색의 관점에 순응되도록 구부리려 가지각색으로 설명되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말씀의 글자적 의미는 내적 의미를 진실 되게 바라는 이들에게 내적 의미에 관한 지식을 소개한다. 내적 의미는 안으로 들어감으로 진리를 모독하는 이들을 저지시킨다. 그 이유가 그들은 성소 안에서 발견하기를 바라는 모든 것을 문턱에서 발견하기 때문이다. 말씀의 글자적 의미는 사방으로 돌고 있는 불붙은 칼이다. 이 칼이 에덴의 문에 놓여있고 거룹이 생명의 나무에 이르는 길을 지키고 있다. 영적 의미는 글자 의미와는 달리 가지각색으로 해석할 수 없는 바 나뉘어지지도 않는다. 주님의 속옷처럼 혼 솔 없이 통으로 짜여있다. 이 의미는 모독은 할 수 있을지 몰라도 나뉘어질 수 없다. 말씀의 영은 선행과 신앙 의 통일을 대단히 명백하게 가르치는 바, 어떤 인간의 재주로도 말씀의 영의 증거를 뒤틀어 중대한 이 문제를 하찮은 쪽으로 처박을 수 없다. 그러므로 악한 시대에서 무지는 진짜 의미를 모독하는 것을 예방하는 안전판이다. 이 모독은 성령을 거스른 죄이다. 이것을 예방하기 위해 영적 의미는 교회의 마지막 때에 퇴각되어 있다. 비록 그 의미가 물러서 있다 해서 그것이 잃어진 게 아니라, “제비로 정하는,” 즉 더 나은 때를 위해 보존되어진다. 인간이 기회라 부르는 것을 천사들은 섭리라 부른다. 섭리는 이 귀중한 보물이 더럽혀지지 않게 보존한다. 그래서 새롭고 더 높은 교회의 처방 아래 사용되기 위해 가져다 놓는다. “이 모든 것은 성서의 말씀, ‘그들은 내 겉옷을 나누어 가지며 내 속옷을 놓고는 제비를 뽑았다’는 것이 성취되도록 있어졌다.” 인용된 이 말씀은 시편 22편에 놓여 있는데, 이 말씀은 외관상으로는 메시아를 언급한다고 비쳐지지 않지만, 세상 안에서의 주님의 삶을 얼마나 완벽하게 그려서 구약성서 안에 그림자로 드리워 놓여 있다. 다윗은 주님을 예징하는 인물인 바 그를 수단으로 말해진 모든 것, 그에 관해서 기록된 모든 것까지도 주님을 예징한다. 예견과 그 사건 사이에 연결되는 모든 것이 예수의 메시아 되심에 대한 증거를 제공하고 있다고는 합당하게 상상할 수 없다. 그러나 그것은 말씀의 신성과 영성을 보여주도록 고안되어 있다는 것, 그래서 그 책은 가치 있는 교훈을 운반하고 있다는 것, 그 속의 영감된 모든 것은 정의에 관한 교훈을 위해 유익할 수 있다는 것이다.
25-27. 이 구절은 고통스런 모습의 시리즈로부터 잠시나마 아주 다른 품성의 하나로 돌아가서 휴식을 취하는 느낌을 주는 것 같다. “지금 예수의 십자가 옆에 그의 어머니, 그리고 그의 어머니의 자매,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 그리고 막달라 마리아가 서있었다. 예수께서 그의 어머니, 그리고 그가 사랑했던 제자가 옆에 서있는 것을 보시고, 그의 어머니에게 말하신다, 여인이여, 당신의 아들을 바라보라! 그다음 그분은 제자에게 말하신다, 네 어머니를 바라보라! 그 시각으로부터 이 제자는 그녀를 자신의 집으로 모셔왔다.” 이 아름다운 모습은 요한에 의해서만 언급되어져 있다. 그리고 그의 복음서의 특징을 잘 간직하고 있다. 이 구절은 회복된 낙원의 참 공기를 호흡하게 하고, 격렬하지만 단련된 사랑의 부드러운 달콤함을 엿보이고 있다. 세 기독인의 품위, 세 마리아가 구세주의 온화한 감화력 아래 십자가의 발 아래에 서 있다. 그분은 큰 고통 가운데서조차 그들에게 진저리나는 땅에서 큰 바위 그늘이 되시고 있다 (이사야 32:2). 그분께서는 죽음의 고통, 그분의 마지막, 가장 큰 시험을 견디시면서 한편으로 그의 어머니 마리아를 인정하고 돌보고 계신다. 인간으로서의 예수는 여느 인간과 다를 바 없다고 하는 이들보다 덜 인간적이었다거나, 그분은 우리의 공통된 본성이 느끼는 것에 덜 민감하셨다는 식으로 생각하려 드는 것은 이 본문을 보면 사라지리라 본다. 모든 것에서 예가 되신 그분이 그를 낳은 그녀에 대해 자식으로서의 효성이 결핍될 수 없었다. 오히려 모든 인간적 애착 속에 있는 유약한 것이 아무 것도 없었을 것이다. 물론 복음서의 어느 곳에도 예수께서 마리아를 그의 어머니로 말하거나 전달한 실예가 없는 것은 사실이다. 그분 삶에 관한 영감된 기록이 그녀를 그렇게 불렀다는 것도 덜 진리인 것은 아니다. 주님은 마리아를 그 이름으로 부르시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신성화된 만큼에서 그분은 유한하고 죄있는 어머니이기를 중단하셨고, 그만큼 의로우신 아버지와 신성의 아들이 되셨기 때문이다. 따라서 어머니(Mother)라는 단어는 지금 드높게 완전해진 인성의 본성을 표현하도록 배려하시고 있다. “여인이여, 네 아들을 보라” 라고 말하심으로 주님께서는 과거 마리아와의 관계에서 차지하고 계셨던 자리를 사랑 받던 제자에게 양도하시고 있다. 그리고 이것은 미래의 모든 세대에게 이런 것을 가르치시고 있다. 요한은 그분을 사랑하는 것, 이웃을 사랑하는 것에서 예증(type)이 되고 지상에서 그분의 표징이라는 것, 그는 교회에 의해 그녀의 아들로서 간주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분께서 사랑 받던 제자에게 “보라 네 어머니이다” 라고 말했을 때, 그리하여 마리아를 그의 정감어린 보호에 위탁했을 때, 이 모습이 모든 인간을 이렇게 가르친다. 사랑은 모든 생명 있는 것의 어머니로서의 교회를 소중히 여기고 보호하는 것이다. 그리고 사랑이 생명이 된 이들만이 살아 있다는 것이다. 이 신성한 훈계의 성취로서 계속 기록된 바, “그때로부터 그 제자는 그녀를 자기 집에 모셨다” 라고 말하고 있을 때, 우리를 훈육하신 것은, 주님을 사랑함이 있는 곳, 인간에 대한 선행(charity)이 명백히 드러나고 있는 곳은 어디든지 거기에 주님의 교회가 존재한다는 말이다. 우리가 이 아름다운 광경을 개인 차원에서, 또는 더 세부사항적으로 들여다본다면 그 안에서 추가적인 교훈을 더 얻게 된다. 여기 십자가 아래에 세 명의 여인이 있다. 그들을 지칭한 단어 자체로부터 우리는 그들이 어머니, 아내, 딸이라는 여인의 세 속성을 표현하는 것으로 간주해 볼 수 있다. 십자가에서 거룩한 불굴의 정신을 가지고 올려다보는 그 여인들 안에서 고통 받고 슬퍼하는 자를 동정하며 섬기는 모든 것을 언제나 발견하게 된다. 순수한 영적 의미에서 이 세 여인들은 세 가지 천적 수준의 애착 들, 주님 사랑, 서로간의 사랑, 이 두 사랑에서 결과되는 씀씀이(use)의 사랑에 대한 애착 을 본다. 천적 수준의 왕국(celestial kingdom)에 있는 서로의 사랑(mutual love)은 영적 수준의 왕국에 있는 이웃사람다운 사랑(neighbourly love)에 유추된다. 이 두 사랑의 차이는 친구관계(friendship)와 자매 같은 애착 (sisterly affection)의 차이와 같다. 이웃사람다운 사랑은 친구 사이의 사랑 같고, 서로의 사랑은 자매(sister) 사이의 사랑 같다. 그러므로 글로바의 마리아는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의 자매라 불리우고 있다.
28-30. 그분의 마지막 의향을 표현하시어 요한과 마리아의 관계가 정립되었다. 그리고 그분의 교회는 사랑과 이타애의 선을 가진 집에서 발견된다. “이후 모든 것들이 이제 완성되셨다는 것을 아신 예수께서는 성경이 성취되기를 바라셔서, 말하신다, 나는 목마르다. 거기에는 식초가 가득한 그릇이 놓여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해면을 식초로 채워, 그것을 히솝 위에 놓아, 그것을 그분의 입에 놓았다. 예수께서 식초를 받으셨을 때, 끝내졌다 하고 말하셨다. 그리고 그분은 그분의 머리를 떨구시고 숨을 포기하셨다.” 이 예견과 그것의 성취는 역사적 목적보다 훨씬 더 높은 목적을 가졌다. 예언자들과 복음서 기자들 사이가 연결되는 것은 그들의 진리에 대한 증거이고, 더불어 성경은 신성한 영감에 의해 씌어졌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것이 하모니로 대답함으로 의도된 전부는 아니다. 사건들 자체는 신성한 지혜의 문서 보관소에 쌓여 있는 바, 그것은 거룩한 상태와 거룩한 것의 표징이고, 그 안에서 하느님의 자녀들이 영적이고 영원히 흥미를 가진다. 목이 타는 듯한 갈증은 십자가형에 따른 자연적인 결과이다. 그러나 고통을 주면서 죽게 하는 격통을 불평의 중얼거림 없이 견디었던 그분은 이것 역시, 그분께서는 고통을 완화되게 하려 했다는 원인이 되게 하실 수 없었고 하시지도 않았다. 그분의 갈증은 영적이거나 신성한 목마름, 죄짓고 멸망하는 창조물의 구원을 강렬히 바래심이었다. 이것이 그분이 느꼈던 목마름, 성경이 성취될 수 있게 한 목마름이었다. 그 이유가 성경은 처음부터 끝까지 인류의 구원을 주체와 객체로 모두 가지고 있고 그것이 육을 입으신 유일한 목적의 성취였기 때문이다. 쓸개를 탄 신포도주(마태 27:34), 또는 몰약을 탄 포도주(마가 15:23)가 예수에게 제공되었으나 받지 않았다. 그러나 그분은 신 포도주만을 받으셨다. 이는 그분이 모든 사람의 구원을 열렬히 바래신다는 것, 그럼에도 악과 혼합된 잘못 가운데 있는 모든 사람은 그분을 받지 못한다는 것, 그러나 악은 없고 잘못 가운데에만 있는 이들은 받게 된다는 것을 표현해 놓고 있다. 죄라 할 수 있는 고집스런 악만이 천국나라로부터 인간을 축출시킨다. 뻔뻔한 죄와 연결되지 않은 잘못은 천국에의 입장을 승인 받는데 넘지 못할 장벽이 없다는 것을 표출하신 것이다. 이에 대한 이유는 이러하다. 이와 같은 잘못은 말씀의 글자적 의미에 의해 지지되었을는지 모른다. 마치 신포도주를 적신 해면이 갈대에 놓은 것과 같다 (마태 27:48). 동시에 말씀의 도덕적 교훈들은 악으로부터의 생활을 깨끗하게 하는데 사용될는지 모른다. 마치 해면을 꿴 갈대가 히솝(우슬초)이었던 것과 같다. 그 이유가 갈대는 말씀의 글자적 의미를 의미하고 히솝은 깨끗케 함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종교에 있는 잘못은 일반적으로 교육의 결과이다. 진실 되게 종교적인 마음들은 주로 기억 안에 주재하고 있다. 그런데 기억은 잘못들로 꽉 차 있을는지 모른다. 마치 십자가 앞에 놓인 그릇이 신 포도주로 채워져 있는 것과 같다. 그리고 생각들은 기억으로부터 잘못들을 흡수할는지 모른다. 그리고 주님을 예배하도록 그 잘못된 생각을 일으킬는지 모른다. 마치 해면이 신 포도주로 듬뿍 적셔지고 다시 구세주의 입술에로 들어올린 것과 같다. 그럼에도 만일 그것이 그분의 목마름을 소진할 의도로 행하여졌다면, 다시 말해 그들의 구원을 바라는 그분의 사랑을 만족시키려고 했다면, 심정의 고백적인 기도가 시편 기자의 이런 고백, “누가 그의 잘못들을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당신께서는 은밀한 과오들로부터 저를 깨끗하게 하십니다” 이었다면, 이와 같은 예배는 바깥쪽 나타남을 보시지 않고 심정 속을 헤아려 보시는 그분에 의해 열납될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셨을 때, “이제 다 끝났다” 라고 말하셨고, “고개를 떨어뜨리시며 숨을 거두셨다.” 이 신성한 선포를 얼마나 납득할 수 있을지! 인간 본성을 입도록 제안된 신성한 사랑의 모든 것은 성취되었다. 고난이라는 마지막 시험을 통해 어둠의 권세를 복종시킴으로 인간 구속이라는 위대한 일이 끝내어졌다. 지금 인성의 신성화하심이 끝내어졌다. 이를 수단으로 예수는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느님으로 충만된 상태에서 영원히 계신다. 신실한 자들이 예징(type)과 전조(shadow)를 통해 그들 모두의 실체와 충만으로서 메시아를 기대해 왔는데 이제 그런 처방은 끝내어졌다. 신성한 섭리가 모든 것을 준비해왔었던 큰 사건들, 영계와 자연계에서 지금 완성되었다. 지금 여인의 후손이 뱀의 머리를 짓부수었다. 이 큰 싸움에서 뱀은 여인의 뒤꿈치를 물었다. 구세주로 하여금 구속하는 작전을 펼치는 영역 내에 신성한 권능을 허용시키는데 필수인 그분이 입으신 죽을 운명(mortal), 그것은 인간 본성 속의 것과 같었는 바 싸움에서 졌다. 그러나 불멸의 운명으로 다시 일어나셨다. 불멸의 운명을 가지신 예수는 싸움을 통해 그분께 오는 모든 이들에게 영원한 생명의 저자가 되셨다. 이를 수단으로 그분은 그분의 영광으로 들어가셨고 모든 인류에게 언제나 가능하고 상대적으로 쉬워지게 만드셨다. 예수께서 “이제 다 이루었다” 하시고 고개를 떨어뜨리시며 숨을 거두셨다고 기록하고 있다. 주님께서 머리를 떨구심은 자연적으로 생각하면 생명력이 없다는 표시와 결과이고 이는 죽음에 선행된다. 그러나 그분의 죽음은 자발적인 행동이었고 여인에게서 태어난 바 같이 그분이 상속받은 유약한 인성 속의 생명을 내려놓는 것과 동시에 있어진 행동이다. 그분께서 머리를 떨구심을 영적으로 생각해 본다면 인성의 완전한 굴종(humiliation)에 대한 표시였고 이를 수단으로 시험의 바탕이 되는 유전적 생명의 모든 것이 소멸되는 것, 아버지쪽 인성과 반대되는 어머니쪽의 자연적 또는 유전적인 생명의 모든 것이 완전히 중지됨을 우리에게 뜻해준다. 이것은 또한 그분이 영을 포기하셨다에서도 암시되고 있으나 두 표현에 차이는 있다. 머리를 떨구심은 의지의 소멸이고, 영을 포기하심은 이해성 쪽의 생명이 소멸됨, 또는 어머니 쪽 인성의 자발적인 생명과 지적인 생명의 소멸을 의미하고 있다.
31-37. 예수의 죽음을 기록한 요한은 이제 죽은 그분의 몸에 관련해 두 가지 세부사항을 첨부하고 있다. “유대인들, 때가 유월절 준비 기간이었는바, 시체들이 안식날에 십자기 위에 남아 있어서는 안된다는 것, 그 이유가 이 안식날은 높은 날 이었기 때문, 하여 시체들의 다리를 꺽고 가져갈 수 있게 빌라도에 간청했다. 그러자 군인들이 와서, 그분과 더불어 십자가에 못박혀진 첫째의 다리를, 그리고 다른 사람의 다리를 부러트렸다. 그러나 그들이 예수에게 왔을 때, 그분이 이미 죽어 있었다는 것을 보고 그들은 그분의 다리들을 꺽지 않았다. 그러나 창을 가진 군인들 중의 하나가 그분의 옆구리를 찔렀다. 그리고 그 즉시 피와 물이 나왔다. 이것을 본 자가 기록을 낳았다. 그의 기록은 진정하다. 그는 자기가 진정함을 말하는 바, 너희가 믿도록 하려 해서 이다. 이런 것들이 행해진 것은 성경의 말씀, ‘그분의 뼈는 부러지지 않을 것이다’ 가 성취되려 해서이다. 그리고 다시 성경의 또 다른 구절이 말한다. ‘그들은 자기들이 찌른 그분을 쳐다볼 것이다.’” 사건의 작은 부분, 상징적 품성의 보편적 인식이 영감된 페이지 안에 자리를 두고 있다는 것을 이 구절이 말해주고 있다. 예식에 대한 유대인의 용의주도함은 예수와 관련해 그들이 진행한 실질적 품성과 얼마나 고통스럽게 대비를 이루는지 모른다. 그들은 예수의 피로 그들의 양심을 얼룩지게 했다. 그러나 안식일의 예식적 거룩함은 꼼꼼하게 챙겼다. 모세의 법에 따르면 누군가의 시체를 나무에 매단 채 밤을 넘기지 말고 그 날로 묻어서 땅을 더럽히지 말라고 되어있다(신명기 21:23). 이 엄한 명령은 영원한 죽음의 상징이 되어 왔던 것, 즉 시체를 묻지 않고 나무에 매단 채 밤을 지새우는 것이 표현하는 영원한 죽음을 예방하기 위해 주어졌던 것이다. 주님의 경우, 유대인의 용의주도함뿐만 아니라 신성한 섭리에서 부활과 생명이신 그분이 영원히 부활과 생명에 반대되는 것을 표현해 왔던 것에 종속 당하지 않도록 율법이 그들에 의해 준수되었다는 것은 의심할 바 없다. 이 법집행은 유대인이 빌라도에게 청원한 이유로서 언급되지 않는다. 물론 이것이 그것 안에 포함된 것으로 이해되기는 한다. 그들은 안식일이 더럽혀지는 것이 두려웠다. 특히 대 축제에 해당되는 유월절에 더럽혀지는 것은 더더욱 두려웠다. 주님의 죽으심이 유월절 때에 거행되었어야 한다는 것, 그분의 몸이 안식일에 무덤에 누워 있어야 하고 십자가에 놓여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은 유다인의 신중한 계획 안에 들어가 있는 어떤 것보다는 훨씬 더 높은 이유에 근원된 이런 상황이 있다. 유월절, 이는 이스라엘이 이집트로부터 해방된 것을 기념하는 것, 주님의 구속을 예징화한 것이다. 그리고 안식일, 이는 창조의 육일에 이어지는 쉼으로서 주님의 신성화하심을 표현했다. 그래서 이 두 사건, 구속하심과 신성화하심, 비록 서로 구분은 된다 해도, 함께 완성되었다. 시체가 안식일 동안 십자가에 남아있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 주님의 몸에 관련해서 대수롭지 않은 상황으로 여겨버리는 것을 예방하기 위해 요한은 이 상황이 두 예견의 성취로서 아주 조심스럽게 기록해 놓고 있다. 첫 번째, “그분의 뼈는 부러지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입으로 말해진 예언으로서 이것은 시편 34편 20절에서 발견된다. “뼈 한마디도 부러지지 않도록 고이고이 지켜 주신다.” 유월절 어린 양에 관한 율법에서 이렇게 추적된다. “…뼈를 꺾어도 안된다” (출애굽기 12:46). 요한의 이런 서술은 복음이 구약성서의 예징적인 속성을 얼마나 명백하게 인지하고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그 이유가 본문은 메시아에 대한 눈에 띄는 어떤 암시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유월절 어린 양에 관련해서, 뼈가 부려 트려져서는 안 된다는 것과 같은 법이 왜 집행되었어야 하는 것일까? 이보다 더 중요한 문의는, 왜 하느님의 어린 양의 뼈를 꺾어서는 안 된다고 하셨을까? 이런 문의를 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우리는 이 사건이 예견을 증명하기 위해서라는 목적 외 다른 목적을 가졌다고 상상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예견과 이 사건이 표현한 예외적인 상황은 영적이고 신성한 의미를 가졌다. 예수께서 조롱 받고 십자가형을 받는 것, 그분의 옷이 조각으로 찢기는 것은 허용되어졌으나 그분의 뼈가 부러지지 않도록 설비되었다. 이미 살핀바 같이 유대인들은 그들이 그분의 말씀을 향해 행동한 것과 상응되는 태도에서 주님을 향해 행동했다. 그들이 주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후, 그분의 다리를 꺾어야 한다고 요구한 것이 상징적으로 표현한 바, 그들이 말씀의 높은 원리들을 모두 파괴한 후의 그들의 바람, 즉 다리나 뼈로 표현된 것들, 즉 말씀의 최말단적인 모든 원리들까지도 부러트리고 흩어버리고 파괴해야 한다는 바람을 표현한 것이다. 유대인 또는 유대교회가 그들 스스로 종교의 기초되는 최말단 원리를 파괴했다는 것은 주님이 달린 십자가 양쪽에 매달린 두 사람의 다리가 꺾인 것으로 의미되고 있다. 최말단 원리(ultimate principle)는 그것보다 더 높은 원리가 그들의 반석으로서 안주하게 해준다. 만일 이 반석이 파괴되었다면, 정의는 힘이 없고 또한 계속 존재조차 할 수 없다.
주님이 세상에 오신 것은 최말단 수준의 인성을 입으시기 위해서였다. 이 수준의 인성은 가장 최말단의 조건 뿐 아니라 가장 타락된 상태의 인성이었다. 그 이유가 그렇게 하심으로 그분이 입으신 인성은 모든 다른 세계에 존재하는 것과 같은 인성을 포함하게 되었다. 그럼으로서 참으로 그분의 구원하시는 작전은 최고 끝까지 도달되었다. 뼈가 인성의 아주 최말단 원리를 표현하는 바, 부활 후 주님께서는 그분의 실제적이고 절대적인 인성이 구분되는 표시로서 그분의 뼈에 관해 말하셨다. “영은 뼈와 살이 없으나 보다시피 나는 가지고 있다.” 똑같은 이유 때문에 주님 자신은 기초요 모퉁이 돌이라 불리셨다. 그 이유가 그분이 입으신 인성은 보편적인 영적 존재가 안주하는 기초이기 때문이다. 천국과 교회가 큰 사람(the Grand Man)을 구성한다고 생각해 볼 때 지상의 교회가 천국의 교회와 비교되듯, 뼈는 살과 비교된다. 주님께서 살과 뼈로 구성된 그분의 인성에 관해 말하셨을 때, 또는 인간 구조가 두 부분으로 구성된다고 말할 때, 그분은 자신을 두고 천국과 교회 모두에, 영계와 자연계 모두에 존재하는 사람으로서의 참 존재로서 말하신 것이다. 신성하게 설비된 바, 통상의 관습에 반대되는 것, 본문의 경우 예외로 적용된 것, 즉 예수의 뼈는 꺾이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한편 설비되고 허용된 것은 통상의 관습에 반대되는 바, 그분의 옆구리는 창으로 찔린 것, 거기로부터 피와 물이 나오게 된 것이다. 유대인에 관련해 보면 이 행동은 말씀으로서의 주님에게 휘두른 폭력, 거절을 표현했다. 주님의 옆구리로부터 흘렀던 피와 물은 영적, 자연적 차원의 신성한 진리, 다시 말해 영적, 자연적 진리에서의 말씀을 명시하고 있다. 따라서 주님의 옆구리를 찌른다는 것은 창으로 상징된 거짓들에 의해 말씀의 두 측면에 있는 진리 모두가 파괴되는 것이다. 이런 행동들이 그 행동을 저지른 당사자에게서는 악이지만, 주님 편에서는 선이다. 그 이유가 그분은 악을 선의 수단으로 돌려놓으시기 때문이다. 십자가에 달린 몸으로부터 흐른 피와 물은 인간의 깨끗해짐과 구원을 위해 그분의 신성화된 몸으로부터 흐르는 선함과 진리의 영을 상징한다. 그리고 인간의 구원과 깨끗해짐은 그분의 가슴으로 의미되는 그분의 신성한 사랑으로부터 진행된다. 기독인에게 거의 보편적이 되다시피 하여 인식된 것에 이런 것이 있다. 주님의 역사의 이 부분은 상징적이라는 것, 그분이 십자가에 흘린 피는 면제가 없다는 피를 밖으로 흘리신 표시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내용이 우리에 대한 표시로서 너무 흔하게 이해되고 있는 바는 이러하다. 하느님께서는 이 피를 잘못된 정의의 요구를 훙족시키기 위해 흘린 것으로 간주하신다는 것, 그리고 사람의 아들이 인간의 죄를 모두 보상하는 제물이 되어 피를 흘리셨음을 신앙으로 우리의 죄가 면제되어진다는 것이다. 어쨌든 십자가의 고난이 없었다거나, 주님의 피가 흘려지지 않았다거나 하였다면 그것이 의미하는 것에는 어떤 구속함도, 구원도 없게 되었을 것이다. 그 이유가 거기에는 어둠의 권세의 정복도, 주님의 인성의 신성화하심도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주님의 인물 안에서 인간이 하느님과 재회함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죄로부터 깨끗하게 한다는 피는 주님의 자연적 피가 표현한 의미 속에 있다. 이 피는 무한한 사랑의 가슴으로부터 생명 있는 시내 안으로 흐르는 신성한 진리이다. 이 진리를 심정과 이해성이 받아들이면 인간을 깨끗하게 만든다. 그리고 그들을 사악함으로부터 씻어낸다. 이 씻어냄으로 진리는 심정으로부터 거룩한 삶이라는 행동 안으로 흐른다. 요한이 자신에 관해 서술한 한가지는 주목해둘 필요가 있다. 그는 자기가 관련된 것에 관한 진리를 우리에게 보증한다. 그는 자신 스스로 눈으로 목격했다고 증거하고 있다. 그는 보았고 기록했고 그것이 참된 것임을 알고 있다. 그가 쓴 것으로부터, 이 글 안에서 성령은 우리에게 이런 교훈을 주고 있다. 만일 우리가 요한이 자연적으로 본 것을 영적으로 보려 한다면 우리의 마음 상태가 요한의 상태 안에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우리는 사랑으로부터 보아야만 한다는 말이다. 그 이유가 그는 사랑의 사도, 기독인의 품위 중 가장 높은 품위를 표현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 상태에 도달할 때, 우리 역시 위의 사실들이 포함하는 진리를 지각으로 알게 되고 심정으로 그것들을 믿으리라.
38-40. “이 후 예수의 제자 이긴 하나 유대인들이 두려워 은밀하게 제자 된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빌라도에게 자기가 예수의 시신을 가져가게 해달라고 청원했다. 그리고 빌라도는 그에게 허가를 주었다, 하여 그는 와서 예수의 시신을 모셔갔다. 그리고 니고데모 역시 왔는데, 그는 처음에 예수에게 밤에 왔었던 자인데, 그가 몰약과 침향을 섞은 것, 약 백 파운드를 가져왔다. 그들은 예수의 시신을 모셔와, 유대인들의 방법이 매장하는 관례대로 향료와 함께 고운 아마포 천으로 시신을 감았다.” 이 구절에 관련된 상황은 모든 복음서 안에 기록되어 있다. 간략히 말해 주님의 시신을 빌라도로부터 받아 무덤에 놓는 모습이다. 세 복음서는 이 장례가 아리마대 사람 요셉에 의해 있어졌다고 서술하고 있다. 요한은 요셉이 경건한 의무수행에서 니고데모와 협동했다고 언급하고 있다. 그 두 사람은 비공개된 주님의 제자였다고도 언급한다. 이들은 옛 교회 안에 있는 선하고 신실한 사람을 표현했다. 이 사람들은 진리가 모독됨으로부터 보존하기 위해, 그리고 그 진리를 휴식처로 옮겨져 그것의 부활을 준비하도록, 그리고 새 교회에 의해 영접되고 인정되도록 하는데 주님의 손에 있는 도구들이다. 매장은 두 가지 서로 반대되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참으로 매장은 언제나 부활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 부활은 생명으로의 부활과 단죄됨으로의 부활 중 어느 하나를 의미한다. 주님의 매장은 가장 걸출한 측면에서의 부활을 의미하는 바, 그 부활이 지니는 표징적 특성과 영적 의미를 위해 꼭 필요한 것은, 그분의 매장은 불신앙의 적들의 불경한 손에 의해서가 아닌 신앙심 있는 친구들의 경건한 손에 의해 치러져야 했다는 것이다. 그분의 적들이 그분을 십자가에 못박는 것은 적절하다. 그리고 그분의 친구들이 그분을 묻는 것도 필수적 순서이다. 요한은 니고데모가 시신에 바르기 위해 침향을 섞은 몰약을 한 백 파운드쯤 가져 왔다고 언급하고 있다. 이것은 유월절 어린 양에 사용했던 쓴 나물에 유추된다. 향료(spice)는 애착과 지각을 의미한다. 달콤한 향료는 기뻐하는 애착과 감사하는 지각을, 쓴 향료는 성경에서 영혼의 쓰라림(사무엘상 1:10)이라 불리는 상태를 의미한다. 신성한 진리가 참으로 지각과 애착의 대상이 되어 있는 때에도 사랑의 부드러움과 지각의 감사함과 혼합된 영혼의 쓰라림이 있다. 그 이유가 영혼은 진리에 가해진 폭력이나 진리의 결핍, 또는 손실에 슬퍼하기 때문이다. 향료 안의 쓴 것은 완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떨쳐 버리기 전, 사랑 안에 있는 두려움 같다. 본문의 경우 쓴 향료가 사용되었다. 이 향료는 방부처리하는데 아주 적합하다. 그 이유가 여기서 슬픔이 있는데, 이는 죽음이 합당한 빛에서 바라보이고 있는 때 조차에서도 슬픔은 있기 마련이다. 이와 반대로 희망을 가지지 않은 이들에게 슬픔도 없다. 슬픔과 희망이 섞여 있다. 슬픔은 잃었기 때문에, 희망은 다시 얻기 때문에 있게 된다. 이런 것들은 모든 충만 안에서 설비되어졌다. 그 이유가 향료는 약 백 파운드쯤 된다고 말해졌기 때문이다. 아리마대 사람 요셉은 시신을 붙잡았고, 니고데모는 향료를 샀다. 요셉은 사랑의 선을 원리로 삼는 이들, 니고데모는 신앙 속의 진리를 원리로 하는 이들을 표현했다. 니고데모는 밤중에 예수께 갔던 사람이고, 주님 자신으로부터 진리를, 특히 거듭남에 직접 관계되는 진리로 가르침을 받았던 사람이다. 요셉이 신성한 선함인 예수의 시신을 획득한 반면, 니고데모는 진리의 지각을 의미하는 향료를 구입하고 있다. 이 두 제자를 개별적으로 보면, 그들은 의지와 이해성, 주님이 영접되는 수단인 그들에 속한 선과 진리를 표현한다. 두 제자가 이런 준비를 마쳤을 때, “예수의 시체를 모셔다가 유대인들의 장례 풍속대로 향료를 바르고 고운 베로 감았다.” 예수의 시체란 뒤집어진 교회의 멤버에 의해 사랑의 모든 생명이 박탈된 주님의 신성한 선이다. 그러나 부패된 교회가 모르는 채로 그 교회 안에서 보존되어 왔었던 사랑 있고 신실해 있는 사람에 의해 그분의 시신은 영접 받고 소중히 여겨졌다. 주님의 신성한 선을 영접하는 이들은 그 선을 진리 안에서 받고, 이 진리로 그들은 선을 감싼다. 선은 주님 자신으로부터 있고, 진리는 씌어진 말씀으로부터 있다. 선은 내부로부터 존재하고 진리는 외부로부터 존재한다. 이 경건한 제자들이 예수의 시신을 두룬 아마포천(linen cloth, 삼베옷)은 교회들이 거절하고 파괴해 버린 선을 신실한 자들로 받게 하는 진리를 표현했다. 모시옷(fine linen)은 성도들의 정의이다 (계시록 19:8). 정의(righteousness)란 실제에로 환원된 진리이다. 이 진리는 제자들로 주님의 신성한 선을 받게 하고 그 선을 보존시키고 심정 안에서 새로운 생명으로 부활하기 위해 그 선을 준비시킨다. 두 제자는 예수의 시신을 방부처리 하는데 있어 유대인의 풍속을 따르고 있다. 매장에 관련된 유대인의 관습과 풍속은 부활의 수단을 표현했다. 주님의 인성과 그 인성의 신성화하심에 관련해서 성실한 두 제자의 위와 같은 행동은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 경건한 사람들에 의해 수행된 장례 예식은 특이한 것은 아니고, 통상적인 것, 살아있는 사람이 죽은 자에게 바치는 애착 의 관습적 표시였다. 옛 시대로부터 그들에게 내려오고 있는 이 예식은 표징적이었고 정작 이 예식을 치르는 이들에게는 그 의미가 알려지지 않았다. 방부처리를 한다든가 기름을 붓는 방법으로 자연적인 몸을 보존하는 것은 연고(ointment)나 고약(unguent)이 상징했던 것, 미점(grace)과 미덕(virtue)을 수단으로 영적인 몸을 보존하는 것을 표현했다. 유대교회의 모든 예식은 주님과 관계를 가졌다. 기름붓는 것과 방부처리하는 것은 칭호가 기름 부어진 자(the Anointed)이셨고, 거룩한 분으로서의 그분은 썩지 않아야 한다고 약속되어 있는 그분의 경우에 독특하게 걸맞고 아주 드높은 의미 심장한 일이었다. 주님의 시신을 성급히 방부처리한 것은 부패함에서 시체를 보존하려는 수단이었다고 상상하는 것은 금물이다. 이것은 자연적 수준의 표시요, 섭리적으로 장치된 기름부음이요, 방부처리이다. 즉 주님의 인성이 그분의 신성으로부터 받은 것이다. 주님의 시신이 실지로 방부처리되게 한 향유나 향료는 신성한 사랑과 지혜이었고, 사랑과 지혜의 교통을 수단으로 신성은 인성에게 신성이 되도록 했다. 주님의 시신에 부어진 향유는 그분의 경우에서 특이하게 어울린다. 그 이유는 최말단에 이르기까지 모두 포함된 그분의 인성의 신성화하심은 그분이 죽은 자로부터 영광된 몸으로 일어나시기 전, 신성화하심의 완성의 저녁에 해당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몰약과 침향은 그분의 인성 속의 감각적이고 육적인 원리에 속해있던 선과 진리에 대한 애착 을 상징했다. 그리고 이 애착 은 주님이 교회와 세상에 의해 거절당하고 십자가에 못박히셨을 때조차 주님을 썩지 않게 한 것들에 부속되어 있었다. 두 정성어린 제자에 의해 주님의 시신이 방부처리되는 모습을 읽으면서 우리는 주님을 예언한 것으로 널리 알려진 시편 45편의 이 부분과 연결시켜 상상해 볼 수 있을는지 모른다. “몰약과 침향과 육계향기로 당신 옷들이 향내를 피우고 상아궁에서 들리는 거문고 소리도 흥겹습니다.” 이 시편에서는 참으로 주님은 굴욕된 상태가 아닌 영광의 상태로, 십자가에 달린 몸이 아닌 신성화된 몸으로, 비밀리에 동반하는 제자가 아닌 왕들의 딸들이, 한편 그분의 오른쪽에는 오빌의 황금으로 단장한 여왕이 서 있는 것으로 묘사되고 있다. 그런데 위 구절같이 주님이 교회와 합일되는 경축에서 그분의 결혼 예복은 몰약과 침향의 향기를 풍기는데, 이에 더하여 그분의 시신을 방부하는데 사용되지 않은 육계(cassia, 계피)의 향기까지 풍기고 있다. 계피는 향료 중에서 가장 귀중했다. 이 계피는 성막과 그 안의 모든 내용물, 아론과 그의 아들이 임명될 때 사용된 거룩한 향유의 구성 요소였다 (출애굽기 30:24). 이 계피는 가장 깊은 진리를 표현하는데 이 진리는 선으로부터 직접 진행되어 몰약과 침향으로 의미되는 보다 낮은 수준의 진리에 들어가 더 드높여지게 한다. 그리고 낮은 진리들과 한데 어울려 천적, 영적, 자연적 수준이라는 세 가지가 한 조가 되어 가장 깊은 것을 형성하고, 셋으로 된 한 조(trinity)는 주님과 말씀 안에서 무한하게 존재하듯이 천국과 교회에서 유한하게 존재한다.
41.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신 장소에 동산이 있었다. 그리고 동산에는 어떤 사람도 뉘인 적이 없는 새로운 무덤이 있었다.” 글자대로라면 이 동산은 주님이 십자가에 못박히신 장소 안에 있는 게 아니라 근처에 있었다. 글자적 의미보다 더 높은 의미에서 부활은 십자가형을 당한 곳에서 가까울 뿐만 아니라 그 구역 안에 있다. 어쨌든 이것은 죽은 자에서 부활을 획득한 이들과 더블은 경우이다. 그들에게 죽음은 생명의 문이고 죽음은 세상에로의 육체의 감각을 닫히게 하고 하늘에로의 영혼의 감각을 연다. 정의로운 자에게 육체의 죽음은 행동들의 시리즈에 있는 마지막 행동이고, 이 행동으로 자연적 인간의 생명은 내려놓이고 영적 인간의 생명은 집어 올린다. 그럼에도 우리가 한계를 두어 생각해둘 것은, 이런 과정은 그것을 그렇게 만들 수 있는 주님을 따라 온 이들 만에 해당된다는 것이다. 그 이유가 그분만이 그들을 위해 그렇게 만드셨기 때문이다. 그분은 고통의 광경을 승리의 광경으로 만드시면서 십자가로부터 왕국에로의 대단원을 여셨다. “그분이 십자가에 달리셨던 곳에 동산이 있었다.” 십자가가 세워졌던 곳, 죽음의 상징인 해골의 장소로부터 무덤이 터지고 부활이 거행된 곳, 생명의 빛나는 상징인 동산까지는 오직 한 걸음에 불과했다. 동산에서, 그러므로 십자가 근처에 아무도 장사지낸 일이 없는 새 무덤이 있었다. 이것이야말로 얼마나 의미 심장한지! 무덤은 부활의 상징이다. 주님이 놓이셨던 무덤이 아무도 놓인 적이 없는 새 것이었다는 것은 인성을 새로이 만드신 첫 번째 사람이 주님이셨다는 것을 표현한 것이다. 그분은 자연적 죽음의 잠자는 자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영적 죽음으로 잠든 자들을 위해 그들의 첫 열매이였다. 이 죽음으로부터 주님은 인류를 구원하신다. 그분은 부활과 생명이셨다. 주님은 죄가 꾀어 들이는 죽음, 영적이었던 죽음으로부터 부활을 획득한 첫 번째이시다. 영적 죽음은 모든 인간을 거쳐간다. 그 이유가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기 때문이다. 육체의 죽음은 타락의 결과가 아니다. 인간은 이 세상에서 영원히 살도록 창조되지 않았다. 육체 역시 먼지로 되돌아 갈 때 다시 생명을 회복하도록 고안되지 않았다. 자연적 죽음이 생명의 문이도록 근원적으로 고안되어 있다. 이런 행복한 때인 육체적 붕괴가 죽음으로 간주되어 있지 않고 그럴 수 없고, 오로지 그것은 감옥의 벽을 헐어 내리는 것, 육체라는 장막을 걷어내는 것, “인간 손으로 만들지 않은 천국의 영원한 집”을 발견하도록 일시적인 집에서 영혼이 풀려나는 것이다. 인간이 그들의 고향으로 천국을 삼기에 앞서 이 세상을 사랑해서 지상적이고 감각적이 된 자들만이 죽음을 현세의 삶의 끝으로 간주한다. 기독인에서조차 자연적 육체의 죽음을 죄의 저주로 간주하기도 한다. 그래서 그들은 주님의 부활로 그들을 위해 구매해져야 했던 게 구원이라고 간주한다. 주님이 그분의 백성을 구원하시기 위해 오신 죽음은 영적이고 영원한 죽음, 또는 죄로 인한 죽음이다. 그분만이 이런 죽음으로부터 구원하실 수 있다.
42. “그들은 예수를 거기에 뉘었는데, 그 이유는 유대인의 준비일이기 때문. 게다가 무덤이 아주 가까웠기 때문이다.” 주님의 매장은 성급히 치러졌다. 유대인들이 명절을 준비하는 날이기 때문에 두 경건한 제자들은 그들이 방부처리한 주님의 거룩한 시신을 가장 가까운 무덤에로 운반했다. 성급히 일이 진행되었다는 것과 유월절에 음식을 성급히 먹는 것, 이집트 땅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어서 나가 달라고 재촉한 것은 유사한 점이 있다 (출애굽기 12:11,33). 성급함(haste)은 애착 측면의 표현이다. 그 이유가 성급한 모든 것은 어떤 애착이 흥분되어서 발생하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백성의 경우 그들이 유월절 음식을 서둘러 먹고, 그들을 속박한 땅을 황급히 떠나는 것은 떼지어 몰려드는 이들로부터 분리되려는 애착을 의미했다. 본문의 성급함도 이와 유사하다. 요셉과 니고데모의 성급함도 유대인스스로 쓸모없고 진저리가 나서 내팽겨 쳤던 신성한 진리, 그들 스스로 파괴해버린 신성한 진리를 그들로부터 옮겨 분리하는 애착 을 표현했다. 이 제자들에 의해 예수의 시신은 황급히 매장되었다. 그러나 그들에게 허용된 시간이 매우 짧았지만 경건한 배려와 원칙은 준수되었다. 주님의 거룩한 시신을 불경한 자들의 손으로부터 분리해야 한다고 하여 있게 된 이 성급함은 또 하나, 즉 그 시신이 놓이는 새 무덤을 설비하게 해 주었다. 그 이유가 그 무덤이 가까이 위치해서 성급한 매장을 가능케 했기 때문이다. 주님이 십자가에 못 박힌 장소는 죽음의 표상이었고, 그분이 매장되신 곳은 생명의 표상이었다. 생명은 죽음 가까이 있다. 천국조차도 지옥 가까이 있다. 그럼에도 그들은 큰 구렁에 의해 분리되고 있다. 주님은 이 구렁을 맨 처음 통과하셨다. 그래서 그분의 창조물들이 죽음에서 생명으로, 지옥에서 천국으로조차도 건너는 것이 가능하게 만드셨다. 그들이 이것을 할 수 있는 것은 마치 나무가 한번 넘어지면 영영 그대로 누워있듯이 그들이 영원히 건너 간 후가 아닌, 그들이 준비되는 세계의 거주민으로 있는 동안 가능할 수 있다. 유대인들이 유월절 기념을 준비하는 그 날은 또 다른 더 높은 준비, 죽음과 무덤의 정복자로서, 죄로 죽는 모든 이들을 구원하여 정의로 살게 하는 영원한 구원의 저자로서 주님의 부활이 준비되고 있었다. 그런데 주님의 매장과 부활 사이에는 삼 일 낮과 밤이라는 간격이 있었다. 그리고 주님이 땅의 심장에 남아 있는 것을 예언하듯, “땅은 빗장들을 영영 내려 버렸다” (요나 2:6) 고 말했듯, 수심에 잠긴 제자들에게 주님은 “영원히” 매장되어 있을 것처럼 여겨졌다. 이 신비스런 침체(slumber) 후에 구세주는 그분의 권능 안에서 일어나셨다. 그들은 아직 이것을 알지 못했다. 장례를 경건하게 마친 두 제자는 이제 죽음의 지배 아래 “생명의 왕”을 둔 채 떠났다. 그 때까지 세상에 있었던 밤중에서도 가장 어두운 밤이 지금 그들 주위에 가까워지고 있다. 그들은 더 이상 그분을 뵙지 못하리라고 예상하면서 그분께 사랑과 은택의 의무를 성실히 마치고 떠났다. 그러나 그들의 끝은 신비 안에 포함되었다. 그들은 아직 이해할 수 없었다. 그 어둠으로 쌓인 밤이 그들에게 내려왔다. 그들을 내려 눌렀고 당혹케 했던 모든 것 위에 드리우는 새 날은 아직은 밝아 오지 않고 있다.

요한복음 18장 해석

18

주님께서 아버지에게 보낸 앞 장의 기도는 이 장의 사건 시리즈로 해서 주님께서 거듭 말해오셨던 것, 즉 그분께서는 죽게 될 것이고 다시 삼 일만에 일어난다는 예견의 성취로 직접 이끌어 가는 복음의 역사가 뒤를 잇게 하고 있다.
1. “예수께서 이 말들을 이야기하셨을 때, 그분은 제자들과 나아가, 기드론 시내를 건너시어, 동산이 있는 곳, 그곳 안으로 그분은 들어 가셨다, 그리고 그분의 제자들.” 예수께서는 예루살렘성으로부터 “가셨고”, 그분이 자주 가신 장소는 게세마니 동산인데 거기서 그분은 큰 고뇌와 더불어 배반도 당하셨다. 그분이 건너신 개울은 도성과 올리브산 사이의 깊은 골짜기를 통하여 흘러서 사해에로 떨어지고 있다. 이 장소는 구약성경에서도 자주 언급되는 곳이다. “온 백성이 광야 쪽으로 나가려고 기드론 개울을 건넜고 다윗왕도 따라 건넜다. 사람들은 개울을 건너면서 통곡했다” (사무엘하15:23). 솔로몬이 시므이에게 명령하기를, 예루살렘에서 살고 여기로부터 나가 키드론 시내를 건너면 정녕 죽으리라 했는데, 시므이는 삼 년이 지날 무렵 그의 종들이 달아나자 그들을 추격하느라 이 개울을 건너게 되어 죽고 말았다 (열왕기상2:36-46). 위 인용한 구절은 본문과 어떤 유사성을 가진 것으로 생각된다. 개울의 이름은 이 개울과 연결되는 주변상황을 잘 표현하고 있다. 개울 기드론(cedron)은 검은 흙탕의 시냇물을 뜻한다. 예수께서 지금 건너신 검은 흙탕물의 시냇물은 이제 그분이 진입하시게 되는 검은 상태, 곤경스런 상태를 암시한다는 것은 자연적 수준의 마음도 느낄 수 있다. 어쨌든 성경의 역사적 사건과 연결되는 주변 여건은 단순히 시적 상상을 북돋기 위한 것으로 간주하기보다는 우리의 이해성을 계발하기 위한 영적 유추물로서 간주해야 마땅할 것이다. 예루살렘, 그리고 거룩한 땅의 모든 다른 부분들은 예징적(typical)이었다. 가나안은 교회를 표현했다. 가나안 땅에 있는 예루살렘은 지적 부분에서 가장 안쪽에 해당되는 지적인 것, 즉 교리 측면에서의 교회 또는 교회 속의 교리를 표현했다. 예루살렘 맞은편 너머의 올리브산은 거룩한 사랑, 특히 주님을 사랑함이라는 원리를 표현했다. 도성과 올리브산을 분리시키면서 흐르는 검은 시냇물은 마치 요단 강이 가나안을 광야로부터 분리했듯, 그리고 불어난 요단 강물을 이스라엘 백성이 건널 때의 경우 같이 시험을 상징하였다. 물 자체는 진리의 상징물, 거룩한 말씀 속의 진리까지도 상징한다. 그러나 진리는 그 자체의 본성이 언제나 같지만 진리가 흐르는 마음의 상태로부터 영향을 받게 된다. 진리는 마음이 어떤 상태이냐에 따라 깨끗하거나 흙탕물, 밝거나 검은 물, 순조롭거나 곤경의 물이 된다. 진리는 마음의 상태를 반사시킨다. 이를 수단으로 진리는 우리로 하여금 마음의 상태를 보고 정정할 수 있게 한다. 말씀이신 바, 진리 자체이셨던 우리의 주님은 우리 자신이 경험하는 것과 같은 상태의 주체이셨지만 그런 상태에 복종 당하시기도 했다. 그 이유가 그분은 말씀이 아니라 말씀이 육이 되신 그분이셨기 때문이다. 육(flesh)은 진리 위에 육의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운다. 이것은 진리의 평화스러움을 어지럽히고 진리의 깨끗한 물을 더럽힌다. 이런 것이 벌어질 때, 그것은 환난의 때이다. 주님이 키드론 개울을 건너신 것은 동산으로 들어가시기 위해서 였다. 그 동산은 게세마니 동산이었다. 이 이름은 올리브 기름을 짜는 것(olive-press)을 뜻한다. 거기서 주님은 홀로 올리브 기름틀을 밟으셨다. 다시 말해서 주님은 거기서 어둠의 모든 권세로부터 오는 가장 깊은 극단적인 종류의 시험을 견뎌내셨고, 이 시험의 정복은 인간 해방을 위해 필요했다. 에덴의 동산은 첫 아담이 시험 당했고 시험에 나가떨어진 곳이다. 게세마니의 동산은 두 번째 아담이 시험을 견디어 극복한 장소였다. 동산을 영적으로 생각해보면, 이는 선에 대한 애착 과 진리에 관한 지각이 주님에 의해 이식되는 마음 자체, 그리고 생명의 나무나 죽음의 나무를 선택하는 마음 자체이다. 두 번째 아담은 생명의 나무를 선택해서 죽음이 군림했었던 마음 자체에 생명을 이끌어들였다. 이런 점에서 그분의 제자들은 그분을 따라야하는 것이다. 그들 또한 시험에 진입해야만 한다. 비록 그들이 예수께서 체험하셨던 고난과 똑같은 깊이의 고난을 견뎌낼 수 없다 할지라도 그들은 계속 그분의 시험 안에서 그분과 함께 견디어야 한다 (누가22:28).
2. 예수께서는 내부로부터 어둠의 권세의 맹렬한 공격을 받았을 뿐아니라 외부로부터 오는 것, 세상과 타락한 교회의 공격도 받으셔야 했다. “그분을 배반했던 유다 역시, 그 장소를 알았다. 그 이유가 여러 번 예수께서 그분의 제자들과 그쪽으로 가셨기 때문이다.” 유추는 없다 해도 게세마니 동산에서 거행된 것과 에덴 동산에서 거행된 것의 기록 사이에서 유사함이 이런 세부사항에서 더 추적해볼 수 있을는지 모른다. 에덴은 태고적 인간의 기쁨, 뿐만 아니라 태고적 인간의 시험과 타락의 정경을 가졌었다. 게세마니는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가끔 모이던 곳, 그 곳에서 평화롭게 휴식을 취하면서 정답게 어울리던 곳이었다 (시편 55:14). 그러나 올리브 나무 그늘 아래에서 제자들이 태고적 낙원의 아담을 순진과 지혜에서 훨씬 더 능가하는 음성에 열중하는 동안 뱀은 거기에서 잠행하면서 에덴에서 일으켰던 파멸보다 더 큰 파멸을 바래고 있었다. 그 이유가 만일 예수께서 적들의 손에 넘어가는 것을 피하고 대신 죄로 돌아섰다면 인류는 참말로 타락했었을 것이고 그분의 법 위반 안에서 그분과 함께 돌이킬 수 없이 타락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그분의 계획에 성실히 매달리지 않으셨더라면 어떤 육체도 구원되었을 리 만무하다. 예수와 더불어 동산에서 머물곤 했던 제자 중에는 유다도 있었다. 그는 인간 타락이 성취되게 하는 인간 본성 속의 원리를 예정했다. 지식의 나무의 뱀과도 같이 유다는 순진의 배반자였다. 악마이고 사탄인 옛 뱀은 구세주의 목적을 헛되게 해버릴 수 있는 적절한 도구를 유다 안에서 발견했다. 다시 말해 지옥의 권세를 복종시키게 되는 것, 즉 구속이라는 그분의 일의 완성을 방해할 도구를 발견할 것이다.
3. “사람들로부터의 한 떼와 최고 성직자들과 바리새인들로부터의 관리들을 인계받은 유다가 등불과 횃불, 무기들을 소지하고 그쪽으로 오고 있다.” 지금 유다는 예수를 팔아 넘긴 최고 성직자의 첩자로서 행동하고 있었다. 물욕(cupidity), 대단히 빠져들기 쉬운 이 유혹이 지금 크나큰 범죄에 가담하도록 유다를 자극하고 있다. 개인적 차원에서 생각하면 유다의 케이스는 하나의 경고로서 의도된 것임은 의심할 바 없고, “탐내는 것을 경계하라” 는 것, 탐욕이 모든 악의 근원이다는 것을 우리로 납득하게 유인하고 있다. 돈 자체를 위해 돈을 사랑하는 것, 돈을 선용하는 것을 중시하지 않는 탐욕은 관심을 두어서 획득하려는 목적이 씀씀이에 있지 않은 지식, 지식 자체를 위해 지식을 사랑하는 것과 상응된다. 이런 품성의 사람들이 유다로 표현되고 있다. 그러므로 그는 돈을 담은 자루를 운반하였고, 그는 도둑이었다. 이미 살핀 바같이 (돈)자루는 기억이고, 이곳에 악들이 자기들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악들의 지식을 쌓아놓고 악 자신을 위해 꺼내 쓰는바 그들은 영적인 도둑들이다. 물론 유다가 예수를 팔아 넘겨받은 은전은 악이 탐내는 영적 진리에 관한 지식을 표현했고, 이 지식을 소유하기 위해 그들은 진리 자체를 적의 수중에로 팔아버린다. 이 배반을 결과하기 위해 유다는 대사제와 바리새인사람으로부터 보내진 경비병과 하인들을 데리고 예수께로 몰려갔다. 그들은 악한 세계와 뒤집어진 교회의 권능을 가지고 갔던 것이다. 이제 그들의 이기적인 목적을 성취하는 도구로 그것 자체를 만들고 있다. 유다와 그를 따라간 무리들이 가는 길을 밝히고 찾아내려는 대상을 가려내고자 들고 간 등불과 횃불이란 자연적 인간의 왜곡된 빛들이고, 이 빛이 교회의 밤에 채용되었고, 이 빛은 인간으로 어둠의 일을 할 수 있게 한다. 그들이 무장한 무기란 악의 지배 아래 진리 자체를 가져다 놓기 위해 진리에 반대하여 사용할 준비를 갖춘 거짓 원리들이다.
4. “그분에게 닥칠 모든 것들을 아시는 예수께서 앞으로 나가서, 그들에게 말했다, 너희는 누구를 찾느냐?” 예수께서는 과거 군중이 그분을 붙잡으려 했을 때 그들을 피했던 경우(10:39)와는 아주 다르게 행동하셨다. 지금 그분의 시간이 가까워지고 있다. 그래서 그분은 죽임을 당하는 어린 양같이 자신을 노출시키고 있으시다. 이 경우에서의 주님의 행동, 이제 집행되기 시작하는 끔찍한 많은 경우에서도 마찬가지지만 그분의 행동들은 그분의 천국적 가르침이나 복을 베푸신 일만큼이나 아름답고 장엄한 그분의 품성을 나열하고 있다. 참으로 그분은 장차 있게 될 모든 것, 십자가의 죽음까지 다 아셨다. 그래서 그런 고난을 잘 준비하시기도 했다. 그분께 가해진 바깥쪽의 모욕이나 신체적 고통들은 그분이 겪으셔야 했던 부분 중 미미한 것밖에 더 아니었다. 예수께서는 그분의 적들을 단숨에 패배시킬 수 있는 권능을 지니신 채 그분을 잡겠다고 하는 무리들에게 조용히 자신을 내놓으시고 있다. 우리가 주님의 조용한 항복을 존경해야 하는 한편 잊지말아야 할 것은, 그런 주님의 행동은 그분의 실제적인 삶이었을 뿐 아니라 우리의 본보기가 되시기 위해서 였다는 것이다. 어쨌든 본문에서 글자로 나타낸 광경은 글자 그 이상의 더 깊은 의미를 갖고 있는바 우리는 그것을 숙고해 보아야 하리라. 이 바깥쪽 세게, 수세기 전에 천사와 인간의 눈 앞에서 행동되었던 이 광경은 참된 모든 제자의 의식세계인 내적 세계에서, 한편 변절자의 의식세계에서 지금 행동되고 있다. 우리는 주님과 제자 안에서 새사람을, 유다와 경비병들 안에서 옛 사람을 가진다. 유다 안에서 우리는 인간 자아의 참 본성을 보고 있다. 그야말로 순진의 그늘 아래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는 단순한 인간 자아가 아닌 지혜와 세상의 권위가 동원되어 무장한 모습의 끔찍한 인간 자아를 보고 있다. 우리가 새 사람을 말할 경우, 이는 거듭남으로 획득되는 새로운 원리와 품성을 뜻한다. 이것은 주님, 즉 그분의 신성한 사랑과 진리로 머무시는 신성한 인간으로서의 주님으로부터 받는 새 본성이다. 그 반면 옛 사람이란 우리가 부모로부터 상속받은 옛 본성을 뜻한다. 그러나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우리가 원리와 실제에서 부모로부터 받은 옛 본성을 채택하여 만든 자기 자신을 뜻한다. 거듭남을 발전시키고 있는 이들 안에서 옛 본성과 새 것은 함께 현존하면서 실제적이다. 복음서 역사의 이 부분은 두 본성 사이의 마지막 싸움을 진열해 놓고 있다. 거듭나지고 있는 이들 안에서 새 본성은 안쪽에 있고 옛 것은 바깥쪽에 있다. 싸우는 목적은 자연적인 것과 영적인 것 중 어느 것이 통치할 것인지를 결정하는 것이다. 영적 싸움의 어느 경우에서도 악은 선을 공격하나 선은 방어만 한다. 더구나 가장 높은 상태일 경우 선은 악에 저항조차 하지 않는다. 관리들을 데리고 온 유다가 예수를 잡으러 오고 있다. 그들은 선과 진리 자체이신 그분에 폭행을 가하려고 한다. 예수께서 앞으로 나서시며 누구를 찾는지 물으신다. 신성한 진리는 내적 측면으로부터 악이 있는 곳, 즉 악이 공격하는 곳인 외적 측면으로 나서신다. 그리고 악과 거짓이 추구하려는 것이 무엇인지 묻는다. 그렇게 해서 그들이 미워하고 추구해대는 것에 관해 다시 생각해보도록 일깨운다. 다른 많은 경우에서와 같이 이 구절에서도 예수는 여느 사람과는 아주 다르게 그분이 가르친 그대로를 완벽하게 행동해 내시고 있다.
5,6. 예수께서 그들이 무엇을 찾는지 물었을 때, “그들이 ‘나사렛 사람 예수를 찾소’ 하자 ‘내가 그 사람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예수를 잡아 줄 유다도 그들과 함께 서 있었다. 예수께서 ‘내가 그 사람이다’ 라고 말씀하셨을 때 그들은 뒷걸음을 치다가 땅에 넘어졌다.” 최고 성직자와 바리새인들이 예수를 찾아내는데 제자의 도움이 필요했다는 것은 우리로서는 납득이 잘 안되는 대목이지만 그 이유인즉, 유다는 군중이 없는 틈을 타서, 즉 떠들썩함 없이 예수를 배반할 기회를 노렸기 때문이고, 이 계략에 최고 성직자나 바리새인들도 동의했기 때문에서이다 (누가22:6). 이렇게도 생각된다. 바리새인들이 예수를 붙잡는데 제자의 도움을 기꺼이 수락한 것은 과거 예수를 붙잡으려다가 실패했던 때와 같지 않게 체포를 완벽히 해내고 싶어서 였을 것 같고, 그 당시의 관리들은 이교도인 였는바, 그들은 예수의 이름은 들었을는지 몰라도 정작 그가 누군지 확실히 몰랐기 때문에서 일 것이다. 이 관리들로 표현된 자연적인 합리성은 진리를 알되 진리를 모른다. 예수 자신이 진리를 밝히 알리시고 진리 안에서 드러내시고 있다. 마치 그분께서 “내가 그 사람이다” 하고 무리들에게 말하신 것과 같다. 그러나 자연적 이성이 악의 영향 아래 있을 경우, 진리를 밝히 알게 함은 선의 영향 아래에서와 똑같은 결과를 가져오지 않는다. “그분을 배반한 유다도 그들과 함께 있었다.” 비록 예수라는 이름과 참 존재 사이의 연결을 밝히 알림이 자연적 이성을 영성화 되게 하지는 못한다 해도 그것이 위압당하고, 마비되게 한다. 어떤 마음에서, 또는 어떤 상태 안에서 이든 주님의 현존은 강력한 영향을 줄 것이라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있을 수 없다. 사실 군인들은 메시아로서의 예수에 대해 적개심 같은 느낌을 가졌을 리 만무하다. 아마 그들이 설사 그것을 알았다 해도 무관심했을 것이라 생각된다. 그렇다 해도 그들 역시 예수로부터 진행되어 나오는 신성의 기운 아래 놓여질 수 있다. 영적으로 생각해 보건대, 내적 인간으로부터 선과 진리가 외적 인간에 있는 악과 잘못들에 유입된 결과가 이 구절에서 묘사되고 있다. 뒷걸음질한다는 것은 주님으로부터, 그리고 그분의 말씀 안에서의 신앙으로부터 퇴각하는 것, 특히 말씀이 육을 만드신 분이 그분이시다는 신앙으로부터 뒷걸음질하는 것이다. 주님을 버리는 이들이 뒷걸음질한다고 말해지고 있다 (예레미야15:6). 그리고 뒤를 향하고 앞을 향하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다 (예레미야7:24). 뒷걸음질하는 것이 진리로부터 멀어지는 것인 반면 뒤로 넘어짐은 선으로부터 하강하는 것, 그리하여 지상적인 것이 되는 것이다.
7. “주님께서 다시 묻는다. ‘너희는 누구를 찾느냐?’ 그들이 다시 대답한다. ‘나사렛 예수요.’” 말씀에서 반복되는 것은 마음 안에서의 행동이 반복되는 것, 즉 의지 안에서 거행된 것이 이해성 안에서 반복되는 것, 또는 내적 인간 안에서 있었던 것이 후에 외적 인간 안에서 있게 되는 것이다. 똑같은 질문이 반복될 때 그 대답도 똑같은 것을 받는 것은 대답이 표현한 목적물 안에서 마음이 확증된다는 표시이다. 군인들은 예수에게 아무런 적개심도 가지지 않았지만 나사렛 예수를 찾고 있었다. 그러나 군인들을 동원한 이들이 그분을 찾아 나선 것은 그분을 파괴하려해서 였고 그야말로 심정과 지성으로 그 일을 도모하고 있다. 유다와 최고 성직자와 바리새인이 보낸 무리는 똑같이 그분을 죽이는 것이 목적이었다. 나사렛 예수란 신성한 인성 측면에서의 주님이시다. 특히 그분이 세상에 오실 때 입으신 신성한 자연성 측면에서의 주님이시다. 이에 대해 세상과 세상적 원리들은 적개심을 품고 있는 것이다. 세상적인 것들이 격렬한 시련과 시험 후 주님 안에서 신성화 되었듯이 우리 안에서 신성화 될 수 있다.
8,9.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내가 그 사람이라고 하지 않았느냐? 너희가 나를 찾고 있다면 이 사람들은 가게 내버려두어라’ 하고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예수께서는 ‘나에게 맡겨주신 사람을 하나도 잃지 않았습니다’ 라고 말씀을 이루려고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다.” 단순한 역사적 의미만을 추켜든다면 주님께서 그들에게 물으시고 답을 기다린 것은 제자들은 내버려두게 하고 그분만을 붙잡도록 하시고 그분께서 맡았던 사람들을 하나도 잃지 않는다는 예언이 성취된 것으로 의미의 이해가 한정된다. 그러나 그분의 행동과 말씀이 포함하는 의미가 위와 같은 수준만 있다고 상상해볼 수 없다. 이 구절을 가지고 더 많은 의미를 찾는 노력을 가져보자.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자신을 주시는 진리의 본보기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그분은 자신을 붙잡아 가도록 기꺼이 응낙하시지만 그분의 제자들은 자유로이 가기를 바래셨다. 목자로서의 그분이 죽음을 각오하면 양들은 흩어질 뿐 잃지는 않는다. 제자들이 이 당시 붙잡혀 갔다고 가정한다면 그들의 신앙 은 산산이 부서져 사라지고 말았을 것이다. 그들의 때는 아직 오지 않았다. 주님이 그분의 큰 시련을 다 통과하시지 않으면 제자들은 제아무리 작은 시련도 통과할 수 없다. 그분이 시험받지 않으면 제자들이 시험받을 때 그들을 지원하실 수 없다. 그분이 죽음을 통과하시기 전에는 죽음을 건너 생명으로 가는 그들의 여행을 받쳐줄 수 없다. 아버지에 의해 예수에게 주신 바로서의 제자란 주님의 사랑을 수단으로 그분의 진리에 이끌려 왔었던 이들을 표현한다. 그러나 그들의 현 상태에서 그들은 그분의 진리를 수단으로 그분의 사랑에 인도되지 않았다. 이런 상황은 이미 살핀바 있지만 한번 더 생각해보고 넘어가는 것도 유익하리라 본다. 알려지지 않은 영향력 차원에서의 사랑은 우리를 진리에로 끌어당긴다. 그 다음 계발해주는 안내 차원의 진리는 우리를 알게 된 힘으로서의 사랑으로 우리를 인도한다. 자연적 삶의 어린 시절에 우리는 앎에 대한 사랑을 수단으로 지식의 획득에로 이끌려진다. 그후 그 지식은 통치하는 원리로서의 사랑의 달성에로 인도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영적 삶의 어린 시절에 주님은 그분의 은밀한 사랑의 영향을 수단으로 그분의 지혜를 획득하는 쪽으로 우리를 이끄신다. 그 다음 그분의 지혜를 수단으로 그분의 사랑을 의식해서 소유하는 쪽으로 인도하신다. 이 방법에서 하느님의 사랑은 지혜를 수단으로 우리로 하여금 하느님을 사랑함에로 인도하신다. 그 이유가 우리가 하느님을 알 때까지, 그분을 사랑함이 의미하는 것을 알 때까지 우리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 없기 때문에서이다. 이것은 아버지께서 이끌어내신 이들 외에 누구도 아들에게 올 자는 없고, 아들이 안내한 이들 외에 누구도 아버지께 올 수 없다고 말하셨을 때 그분께서 가르치신 진리이다. 그분의 제자들은 이렇게 해서 그분께로 이끌려졌고, 그러므로 그들은 아버지께서 그분에게 주신 이들이다. 예수께서 적들의 수중에 붙잡히시는 때에 비록 그분의 제자들이 아버지에 의해 그분께 주신 바 되는 이들이라 해도 아직 그들은 아들에 의해 아버지께로 인도되었던 것은 아니다. 예수께서 아버지께로 가시기 전에 그분의 제자들은 갈 수 없었다. 아들이 아버지와 하나 되시기 전에 제자들이 아버지와 아들을 통해 하나될 수 없었다. 아들은 십자가의 고난을 겪고 연약한 인성을 내려 놓으실 때까지 아버지와 하나될 수 없었다. 제자들은 자아의 생명을 내려놓기 위한 준비를 마무리 할 때까지 아버지와 하나될 수 없었다. 그들이 얼마나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던가는 주님을 버리는 모습만 가지고도 충분히 증명된다. “너희가 나를 찾고 있다면 이 사람들은 제 갈 길로 가기 해라” 고 예수께서 말하셨을 때 그분이 참작하신 것은 그분의 제자들이 그분께서 이제 당하게 되는 것과 같은 시련에 노출되기에는 너무나 부적합하다는 것이다. 제자들, 개인 차원에서 언급되는 것 말고도 그들은 교회를 표현하는 것으로 이 구절, 그리고 다른 구절에서도 언급되고 있다. 인성이 강타 당할 때 교회는 흩어졌다. 그러나 교회 속의 원리들이 상실되지 않도록 장치되어 졌다. 정말 그렇다. 연약함 안에서의 주님의 십자가형은 권능 안에서 그분의 부활에 대한 수단이었다. 이와 같이 사도들의 흩어짐은 그들의 신앙 의 수준에 확증을 주고, 또한 그들의 하나됨에 대한 수단이었다. 주님께서 완전히 신성화하셨을 때 그분의 신성한 인성은 그분의 교회가 건설된 완전하고 진실 된 반석이 되셨다. 그리고 그분의 교회에 대해 지옥의 권능이 감히 대들 수 없게 되었다. 이리하여 처음과 마지막이 되신 다음 처음과 마지막 사이에 끼어있는 모든 것과 존재들은 질서에 가져다 놓이고 질서 안에 보존되어 하나됨 안에서 함께 있다.
10. “그때 검을 가진 베드로가 그것을 집어빼어 높은 성직자의 종을 쳐서, 그의 오른쪽 귀를 잘랐다. 이 종의 이름은 말고 였다.” 이 사건은 마태복음 26장 51절에도 기록되어 있는데, 그 곳에서는 이렇게 설명되고 있다. 베드로는 신앙 안에 있는 이들을 표현한다. 그의 검은 진리의 상징물이다. 왜곡되게 사용된 진리는 왜곡된 것으로 돌아가진다. 높은 성직자의 종의 귀를 자름은 이런 표시였다. 교회의 마지막 날에서는 지각하는 능력이 파괴되고, 이 파괴와 함께 모든 영적인 들음과 순종도 파괴될 것이라는 말이다. 요한이 기록한 이 사건의 특이함은 귀가 잘린 종의 이름을 말한 것이다. 말고라는 단어는 히브리어 멜렉(melch), 왕(king)에서 파생된 것으로 일반적으로 이해되고 있다. 왕은 순수한 의미일 경우 진리를 의미하고 반대 의미 일 경우 거짓을 뜻한다. 지금의 경우 왕은 사제와 관계되고 종은 주님과 관계되고 있는바, 이름 말고가 지닌 의미는 선에 관계된 진리나 악에 관계되는 거짓인데, 그 중 후자가 말고가 표현한 품성일 것은 의심할 바 없다. 참으로 높은 성직자의 종이 거짓 자체라는 원리를 표현하는 것은 아니고, 자연적 진리 또는 지식들이 악의 지배 아래 있는 것을 표현한다. 그 이유가 자연적 진리나 지식은 악 뿐만 아니라 선을 위해서도 일하기 때문이다. 현재의 경우 높은 성직자가 주님에 반대되듯이 높은 성직자의 종은 주님의 종에 반대되고 있다. 우리 모두 아는바, 말씀의 인간적 해석에서 이런 진리가 저런 진리에 반대될 수 있다. 특히 말씀의 가상적 진리는 순수한 진리에 반대될 수 있다는 말이다.
11. “그러자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네 검을 칼집에 놔두거라. 나의 아버지가 준 잔, 나는 그것을 마시지 않을 것이냐?’ 하고 말씀하셨다.” 주님께서 베드로가 높은 성직자의 종을 친데 대해 나무라신 그 속의 원리란, 그분께서 교회를 위해 내려 놓으셔야 했었던 것, 그리고 그분께서 스스로 언제나 본보기화 하셨던 것, 즉 “악을 방해 말라, resist not evil”이었다. 이것은 천적인 천사와 천적 인간의 원리이다. 천적 인간은 사악한 자를 습격하거나, 악에 저항하는 것조차도 결코 없다. 우리가 자신 안에 악을 가진 만큼에서만 악은 우리에게 피해를 입힐 수 있는바, 악은 악을 수단으로 하지 않고서 선함에 해를 가할 수 없다. 이것은 주님 자신과 더불어서도 그러했다. 어머니로부터 상속받은 악은 그분이 시험받는 바탕이었다. 그리고 이런 악들의 공격은 그런 악들이 극복되고 제거되는 수단이었다. 그러므로 해서 우리의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내 아버지께서 나에게 주신 이 잔을 내가 마셔야 하지 않겠느냐?” 하고 말씀하셨다. 잔(cup)은 그 잔에 담겨진 것에 대한 공통된 모양(figure)이다. 성경에서 잔은 좋은 의미와 나쁜 의미 양쪽에서 언급되고 있다. 우리는 구원의 감사잔(시편116:13)과 진노의 잔(이사야51:17), 즉 주님의 격노의 잔에 대해 읽어볼 수 있다. 이것은 예수께서 아버지가 마시라고 그에게 주셨다고 말하시는 잔이다. 말씀 안에 존재하는 순수한 진리와 가상의 진리 사이의 구분을 알지 못하는 이들은 하느님께서 인간과 백성들의 죄에 대한 심판에서 그들에게 그분의 분노하심과 불쾌하심을 쏟으신다고 믿는다. 그리고 인류는 그들의 악한 상태와 죄짓는 행동 때문에 분노를 받아 마땅하다고 생각한바, 인간이 응당치러야할 그들의 죄인 신성한 분노의 모든 무거운 짐을 예수께서 짊어지고 견뎌내셨다고 믿고 있다. 또한 이것이 아버지께서 예수에게 마시라고 주신 잔이라고 이해하고 있다. 게다가 예수께서는 마지막 한 방울까지 다 마셨다고 이해한다. 이런 어둡기만 하고 무가치할 뿐인 견해들은 점차 거두어져 가고 있어 머지 않아 다 사라질 것으로 믿는다. 인간들은 이제 그들이 이해하고 있는 것의 진상을 볼 날이 올 것이고, 그 때 그분은 본질적으로 사랑이시다는 것, 그분에게 분노이든, 진노이든 그런 것은 하등 존재한 적이없으시다는 것, 그분께 오는 모든 이들을 구원하시기를 바라고 계신 분이라는 것을 이해하게 되리라. 성경의 언어, 분노라는 의견이 안주하는 성경의 언어는 가상의 언어이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상태와 일치해서 나타나신다. “한 마음으로 당신을 위하면 당신께서도 한 마음으로 위해 주십니다. 흠없이 당신을 위하면 당신께서도 흠이 없이 위해 주십니다. 두 마음을 품지 않고 당신을 받들면, 당신께서도 두 마음 품지 않고 붙들어 주십니다”(사무엘하22:26-27). 이렇게 주님께서는 인간에게 있으셔야하는 바대로 말씀 안에서도 자신을 묘사하시고 표현하신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에게 그들의 죄 때문에 가할 수밖에 더 다른 방도가 없었던 처벌을 예수에게 가했다는 관념은 하느님이 통치하는 정부는 보상과 처벌을 수단으로 유지된다는 학설의 한 부분에 불과하다. 하느님의 법에 순종함은 행복을 확실히 생산하고, 불순종함은 재난을 생산한다. 그렇다고 해서 이것이 순종자에 대한 보상과 불순종자에 대한 처벌로부터 야기되는 게 아니라 이런 사실로부터, 즉 선함은 선함 고유의 보상이 있어서인데 그 이유는 하느님이 선함 안에 계시기 때문에서 이고 악은 악 자체의 벌이 있는데 그 이유가 하느님이 악 안에 계시지 않기 때문이다. 하느님과 조화를 이루고 결합하는 것은 행복을 생산하고, 하느님과의 비조화와 불결합은 재난을 생산할 뿐이다. 그러므로 주님이 육 안에서 명백히 보이신 행동은 신성한 분노를 견뎌내신 행동이 아니다. 참으로 그분은 여느 어느 인간도 고통받은 적이 없는 고강도의 고통을 견디어 내셨다. 그러나 그분의 그런 고통은 하느님의 분노로 인한 게 아니라 악마의 분노로부터이다. 그분이 마셨던 잔은 하느님의 분노를 가라앉히기 위해서가 아니라 악의 권세를 정복하기 위해 그분이 견디어내신 시험의 잔이었다. 이 고통의 잔은 아버지께서 그분께 주어졌다고 말하시고 있다. 그분의 고통의 잔과 똑같은 의미에서, 동일한 목적을 위해 고뇌는 의로운 자에게 주어지고, 이는 그들이 순수해지도록, 거룩함 안에서 완전해지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고뇌는 하느님의 사랑의 증거라고 성경에서 이렇게 선포되고 있다. “나는 내가 사랑하는 자일수록 책망도 하고 징계도 한다” (계시록3:19).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셨던 잔은 주님께서 그분 고유의 신성한 사랑으로부터 받았던 고뇌의 잔이었다. 그렇다고 그분의 고통받음이 그분의 사랑에서 기인된 것이 아니라 그분의 사랑이 고통을 견디도록 그를 자극했다는 것, 그분의 사랑이 고통 아래에서 그를 참고 견디게 한 것이다.
12. “그 때에 무리와 대장과 유대인들로부터의 관리들이 예수를 붙잡았다. 그리고 그분을 결박했다.” 유대인들이 예수께 가한 것들은 유대교회가 말씀에 저질렀던 것을 표현했다. 지금 기록된 행동의 시리즈는 마태복음, 그 외 다른 복음서와도 비슷하다. 무리와 대장이 예수를 붙잡아 결박하는 것은 교회 안에서 악으로부터 파생된 모든 거짓들이 말씀 속의 신성한 진리들을 붙잡아 결박하는 것을 표현하고 있다. 신성한 진리들이 그것과 반대되는 오류 아래 놓일 때 그 진리는 붙잡혀 결박되는 셈이다. 그러면 죄를 나무래고 정의를 가르치는 행동의 자유가 박탈되고 만다.
13,14. 이렇게 결박했을 때, “그리고 먼저 안나스에게 이끌었다. 그가 그 해의 높은 성직자였던 가야바의 장인 이었기 때문이다. 이 가야바는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해 죽는 것이 더 유익하다고 유대인들에게 조언했던 자였다.” 주님이 안나스에게로 끌려갔다고 기록한 것은 요한복음 뿐이다. 그 이유가 요한은 다른 복음서보다 더 내면에 속하는 교회의 상태를 취급하기 때문인 것은 의심할 바 없다. 따라서 높은 성직자의 장인은 높은 성직자 자신보다 더 내면의 원리를 표현하고 있다. 장인과 사위라는 측면에서 생각해볼 때 안나스와 가야바는 의지와 이해성 측면에서의 교회를 표현하고 있다. 그들이 참된 교회의 진정한 성직자였더라면 그들은 성직자직으로 예징되는 것, 즉 선에 관한 의지와 이해성을 표현했을 것이다. 그러나 부패된 교회의 악한 성직자 였는바, 그들은 악에 관한 의지와 이해성을 표현하고 있다. 우리는 이 당시와 다른 때와를 비교해서 그들이 도덕적으로 타락했다고 상상해보는 것은 필요할 것같지 않다. 우리는 그들이 그리스도와 기독교신앙의 적으로서 말하고 있고 그들이 주님의 단죄에서 가졌던 몫을 말할 뿐이다. 우리가 그들의 이름의 의미로부터 모든 성경적 품성의 영적 의미를 정확히 확인하는 것은 아마도 안전치 못하다. 설사 글자적 의미 수준이라 해도 그렇다. 그러나 만일 안나스가 자비스럼을 뜻하고 가야바가 바위를 뜻한다면, 그들의 이름은 의지와 이해성이라는 구분되는 본성에 그만큼 관계된다. 그들이 맡은 거룩한 직능에 관련해보면 비록 그 직능 자체에 반대되기는 하지만 어쨌든 그 쪽에 해당되는 의미를 갖고 있다. 두 사람은 요한과 베드로가 서로 관계되는 것과 같은 관계를 보이고 있다. 예수가 있는 곳, 높은 성직자의 관저 안에 들어간 두 제자와 두 높은 성직자는 동시에 생각해보면 예수의 이쪽 편에는 진리 자체와 조화를 이루는 도덕적이고 지적인 권능이 있고 저쪽 편에는 이와 대조되는 권세가 위치하고 있는 셈이다. 안나스와 가야바의 구분되는 품성은 그들을 표징적 차원에서 고려한다면 심문되는 내용 안에 그들에 관계되는 것이 특별히 나타나고 있다. 안나스는 예수께 그의 제자들과 교리에 관해 질문을 했다. 그리고 가야바에게 넘겨졌다. 가야바가 지적 측면의 품성을 표현한다는 것은 그가 했던 말, 한 사람이 온 백성을 대신해서 죽는 편이 낫다고 뱉은 말에 의해 암시되고, 그는 실제로 이 예언을 성취시킨 장본인이다. 가야바만을 언급하는 마태는 높은 성직자의 관저에 예수의 뒤를 따라 들어간 사람으로 베드로만을 언급하고 있다. 한편 안나스와 가야바를 언급한 요한은 주님의 제자 두 사람이 들어갔다고 말하고 자기가 둘 중 한사람 임을 암시하고 있다. 그러므로 두 복음서를 영적으로 간주해보면 두 복음서의 차이점은 보다 덜 완전하거나 보다 더 완전한 종교적 상태에서 사건을 묘사해 놓은 것이다. 요한의 기록에 따르면 예수께서는 먼저 안나스에게 끌려 가셨는데, 이것은 예수라 명명될 때 의미되는 주님의 신성한 선함은 의지 안에 있는 악에 의해 시간 차원뿐 아니라 상태 차원에서도 먼저 교회 안에서 반대된다는 것, 그 다음 둘째로 이해성 안에 있는 악을 수단으로 반대된다는 것을 표현하고 있다. 그분이 넘겨진 가야바는 유대인들에게 한 사람이 온 백성을 위해 죽는 편이 더 낫다고 조언했던 사람이다. 어떤 이들은 그것은 예언자인 체하는 발표로 단지 예수를 죽음에 처하게 하기 위한 사제의 계획에 백성들이 찬동하게 하려 했을 뿐이라고 일축한다. 이보다는 이스라엘 처방 아래 다른 초자연적 선물 중에서 예언의 선물을 주었다는 성직 직능 때문에 그가 말한 예견으로서 간주하는 편이 더 낫지 않을까 생각된다. 이런 선물은 한 개인의 품성에는 의존되지 않는다. 그러나 높은 성직자로서의 그의 직책의 결과로 그에게 합병된 것이다. 그러나 성직자는 자신의 개인적 품성에 일치되어 행동할 수 있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 그는 예언적 영으로부터 말할 수도 있었다. 그이유가 인간은 “예언의 선물과 모든 신비와 지식을 이해하면서도 소리내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15. 지금 생각해보게 되는 거룩한 역사의 이 부분은 가야바가 아닌 안나스의 관저에서 일어나는 사건으로 우리에게 주어져 있다. 이것은 다른 복음서 기자들의 사건과 아주 다른 점이다. “시몬 베드로가 예수를 뒤쫒았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또 다른제자도 그렇게 했다. 이 제자는 높은 성직자에게 알려져 있었다. 하여 그는 높은 성직자의 관저 안으로 예수와 더불어 갔다.” 요한은 자기 이름을 들먹여 자신을 말하고 있지 않다. 베드로를 두고서는 그의 이름을 말하고 있지만 자신을 두고서는 또 다른 제자라고만 부르고 있다. 그가 쓴 복음서 안에 있는 “다른 제자”는 그의 이름을 가지고 자신을 결코 말하지 않고 있다. 이것은 그의 겸손함으로부터 있게 된 것으로 사료되고 있다. 요한이 표현했던 선행 또는 사랑이라는 품위는 이기주의와는 가장 거리가 멀다. 사랑은 “자랑하거나 우쭐대지 않는다.” 요한이 자기 이름을 거론하지 않는 이유는 또 하나 더 있다. 이름은 품질을 표현한다. 이름 속에서 품질이 밝혀진다. 사랑은 스스로 자신의 품질을 밝히지 않는다. 사랑이 의지 안에 있을 경우 이름이 없다. 오로지 사랑이 이해성에로 하강할 때 품질과 이름을 얻는다. 그리고 지혜의 형체로 옷입는다. 시몬 베드로와 요한은 예수를 따라갔다. 처음에 모든 제자들은 그분을 버리고 달아났다. 그러나 위 두 사람은 되돌아 와서 비록 공개적인 것은 아니지만 대사제의 관저에까지 그분을 뒤따랐다. 주님은 아직 그분의 제자들 사이에서 사랑과 신앙의 목적이었다. 그러나 이 두 품위들은 아직은 너무 미약하고 비확고적 이다. 그 이유는 자아와 세상을 사랑함이 완전히 절단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쨌든 제자들 중에서도 가장 높은 위치에 있었던 두 제자, 신앙과 사랑이라는 가장 높은 품성을 표현했던 두 제자가 주님을 뒤따라오고 있다. 심문 당하는 상황에서 두 제자의 행동은 신앙 과 사랑의 상태를 묘사하고 있다. 이는 마치 그들이 제자들 사이에 존재했던 것과 같다. 또한 그것은 교회 말기에서 발견되는 종교의 두 본질 되는 품위를 예언하고 있다. 베드로와 요한이 표현했던 두 품위 중에서 사랑은 더 고정되고 변치 않는다. 이런 특성은 요한의 일반적 행동으로부터, 본문의 경우 주님을 대사제 관저 안에까지 따라 온 것에서도 미루어 알 수 있다. “이 제자는 높은 성직자에게 잘 알려져 있었다.” 여기서 주목해둘 바는 높은 성직자라 불리우는 사람은 안나스였다는 점이다. 비록 안나스가 가야바 같이 대단한 적개심으로 예수를 대하지 않았다 해도 그가 구세주에게 친구되는 것으로 간주하는 것은 금물이다. 사도행전 4장 6절에서 우리가 발견하는바 그는 주님이 죽으신 뒤 머지 않아 기독교신앙을 억압하는 유다지도자와 사제들 중에 그도 끼어 있다는 것이다. 어쨌든 우리가 곰곰이 생각해볼 것은, 직무와 공무원, 사제직과 사제 임무를 담당하는 사람 사이를 구분 지어야 한다는 점이다. 모독하는 어떤 개인에게 어떤 직책이 수여되어 있다 해도 그 직책은 거룩해 있다. 말씀 안에서 우리가 주의해야만 하는 것은 직책과 직능이다. 그 이유는 직책들이 특별하게 표징 해주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요한이 대사제가 요한을 알고 있다고 하는 이 구절의 대목도 직책 차원에서 의미의 연계를 헤아려야 한다. 예수의 겸손한 추종자가 높은 성직자에게 알려져 있다는 사실은 아주 특이한 것으로 생각되어 오고 있다. 어떤 연고에서 요한과 안나스가 서로 안면이 있게 되었는가를 캐보는 것은 오늘날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니다. 단지 두 사람이 말씀에서 표현하는 관계를 영적 측면에서 살피는 게 중요한 것이다. 요한은 사랑 또는 선함의 원리를 표현했다. 이 원리는 성직 직능으로도 표현되고 있다. 제자가 높은 성직자에게 알려져 있다는 것이 표징하는 바, 마치 요한과 높은 성직자로 표현된 것같이 기독인의 선과 유대교회의 선 사이에는 동족관계 같은 어떤 연결이 존재했다는 것이다. 요한이 제자로서가 아니면 이 구절에서 말해지지 않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원리 자체는 알려진다 해도 그가 표현했던 선의 진짜 본성은 눈에 띄지 않게 있다는 것을 우리로 추리해 볼 수 있게 되어 있다. 모든 교회에서 선에 속하는 어떤 그루터기는 보존되어진다. 신앙 이 지독하게 실패해도 사랑이 깡그리 소진되는 일은 결코 없다. 만일 이렇게 소진된다면 어떤 새로운 교회도 옛 교회의 잿더미로부터 솟아오르는 일도 없게 된다. 주님께서 약속하신 바, 그분께서 건립하셨던 교회 처방의 말기를 점철하는 타락의 와중에도 교회에 생명을 이루는 요소의 어떤 것은 보존하시리라는 것, 두 번째 오심에 까지 보존하시리라는 것이다. 이 약속은 요한 자신에 관련되는 이런 상징적 언어, “내가 올 때까지 그가 머물기를 내가 바란다 해서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하고 베드로에게 말하심으로 주어졌다. 이 제자는 이 말씀이 그 제자가 죽지 않으리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했다. 이를 영적으로 이해하면 그들의 이해는 옳았다. 그 이유가 사랑은 결코 죽지 않기 때문이다. 이 진리를 발화시키는 불꽃의 한 조각이 모든 교회 안에, 모든 영혼이 세상에 살고 있는 동안 보존되고 있다. 이 불꽃 마저 꺼진다면 새 시작의 가능성이 전혀 없는 끝장 만이 우리를 대기하게 된다. 유대교회 안에서 까지 선의 이런 남겨짐이 보존되었음을 본문으로부터 알게 된다. 이것은 주님을 인정해서 따르는 제자됨의 바탕을 형성했다. 또한 기독교와 유대교회를 연결해주는 실오라기를 형성했다. 이것은 우리자신의 시대에서 옛 교회와 새 교회가 접촉하게 해주는 디딤돌도 되었다. 옛 것 속의 선은 새것 속의 선을 돕는다. 마치 용의 박해를 받을 때 땅이 여인을 도왔던 것과 같다 (계시록12:16). 비록 참 진리 자체가 부패된 교회의 심판에 기소당한다 해도 마치 요한이 자신을 수단으로 대사제의 관저 안으로 예수와 함께 들어갔듯이, 부패된 교회 안에서 조차 더 높은 선을 소개하는 수단으로서의 선은 남아있다.
16. “베드로는 대문밖에 서 있었다. 그때 높은 성직자에게 알려져 있는 다른 제자가 나왔다. 그리고 문을 지키는 소녀에게 말했다, 그리고 베드로를 안으로 데려갔다.” 선과 사랑의 어떤 것이 교회로 진입하는 동안, 신앙과 진리는 문밖에 서 있었다. 그럼에도 진리는 선을 수단으로, 신앙은 사랑에 의해서 소개받는다. 그리고 애착 에 있는 선과 사랑의 영향력을 수단으로 소개하는 이것이 문을 지키는 하녀로 의미되고 있다. 비록 베드로가 소개되었다 해도 그가 높은 성직자를 알고 있는 것은 아니다. 참으로 곧바로 그는 소녀와 다른 하인들에게는 인식되어졌다. 그러나 오직 예수라는 사람의 범죄에 공범이라는 제자로서만 인식되었다.
17. 신앙이 교회와 마음에 입장하도록 승인하게 한 영향력인 애착은 이제 그 신앙 의 대상과 근원에 관해 면밀히 조사한다. “그때 문을 지킨 소녀가 베드로에게 말한다, ‘당신 역시 이 사람의 제자들 중의 하나가 아니냐?’ 그는 말한다, ‘나는 아니다’” 예견된 바 같이 베드로의 신앙의 시련이 이제 시작되고 있다. 그리고 시작부터 낙방하고 있다. 이 구절, 그리고 다른 예들에서도 베드로는 그 당시 교회 안에 존재하였던 그대로의 신앙을 표현했다. 그러나 이 주제를 올바르게 이해하기 위해, 우리가 생각해야하는 것은, 베드로의 행동은 전에 주님께서 “사람의 아들이 올 때 땅에서 신앙을 발견할까?” 라고 말하시어 묘사되었던 상태, 첫 기독교회의 마지막에 있는 바대로의 신앙의 품성을 표현했다는 것이다. 이 대목의 베드로의 역사는 교회의 신앙 의 역사이다. 다시 말해 이 행동은 역사적인 예견, 이런 표징적인 가르침, 즉 교회 말기, 자아와 세상사랑이 사람 사이에서 득세를 해서 본질적 차원에서 사랑과 진리 되시는 주님과 대적할 때 신앙 은 땅에 떨어지고 신앙 의 근원과 대상인 그분을 부정하는 것을 표징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베드로는 하녀가 당신은 예수의 제자가 아니냐는 추궁에 간단한 어구지만 단호한 부정으로 응답하고 있다. 우리는 다른 복음서를 통해 이 사건을 읽을 경우 그의 세 번 부정은 점점 더 부정의 강도를 높여 가는 말투를 사용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그가 진리를 처음 부정할 때 어떤 느낌을 지니고 있었는지에 관해서는 우리에게 말해지고 있지 않다. 그러나 그가 대담하게 죄를 짓고 있는 가운데 어떤 양심의 가책이 있었다는 것은 우리가 추리해 볼 수 있다. 그는 진리로부터 첫 번째 떠남을 만들었다. 만일 그 떠남이 오직 한 번이었다면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 속의 모든 다른 멤버들에게 엄숙한 경고로서 남는 사건이 되었을는지 모른다. 첫 번째 부정에서 그것이 우리를 가르치는바, 죄짓는 첫 단계, 그리고 이 구절의 경우에서 가르치는바 불성실이라는 죄는 조심스럽게 피해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 이유가 죄짓는 또 다른 단계는 첫 단계를 허용할 경우 더 큰 죄임에도 오히려 더 쉽게 뒤를 잇기 때문에서이다. 첫 단계는 의지의 행동으로 생각해 볼 수 있고 두 번째 단계는 이해성의 행동으로 죄짓는 힘을 더 모으는 단계이고, 세 번째는 생활 속의 행동으로 결정적이다.
18. “종들과 관리들이 거기 섰는데 그들은 숯불을 만들었다. 추웠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을 따뜻하게 했다. 그리고 베드로는 그들과 함께 섰다, 그리고 자신을 데웠다.” 종들과 관리들이란 높은 성직자로 표현되는 교회에 종속되는 원리나 멤버들이다. 이 교회 말기에 추위가 그 교회를 내습했다. 이 추위란 순수한 사랑의 따뜻함이 떠났을 때의 상태, 또는 많은 사람들의 사랑이 찬 것으로 덮여 있을 때의 상태이다. 해가 질 경우 그 교회의 멤버들은 밤이라는 어둠뿐 아니라 추위에 떠는 상태에 노출된다. 그러면 자기들의 자연적 수준의 사랑의 숯불을 지펴서 자신을 덥힌다. 신앙 이 사랑으로부터 생명을 가지지 못했을 경우 그 신앙 까지도 자연적 마음 속의 욕망과 욕구가 지펴놓은 불로부터 따뜻함을 얻는다. 대사제의 하인들이 불을 지폈고 예수의 종이 그 불로 따뜻함을 얻고 있다. 불이 사랑을 상징한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거룩한 불은 천국으로부터 오고, 이 불은 죄를 깊이 뉘우치는 심정에 주님께서 불어넣으시는 거룩한 사랑의 상징물이다. 인간이 지피는 불은 그 근원과 품성에서 지상적인 사랑의 표현물이다. 우상숭배자들은 그가 우상을 만들고 남은 나무토막으로 불을 피워놓는 것으로 표현되고 있다. 게다가 “아, 뜨뜻하게 불까지 쬐니 좋기도 하구나” 하고 흥얼거린다 (이사야44:16). 어둠에서 걸으며 빛을 가지지 못한 이들은 주님을 신뢰하고 그 하느님께 머물도록 권면되고 있다. 그러나 이 뒤를 이어 위협적인 경고가 첨부되고 있다. “너희는 하나같이 불을 피우고 화살을 달구는 구나. 너희는 모두 스스로 피운 불 속에 뛰어 들어라. 스스로 달군 화살이 날아오르는 속으로 들어가거라. 너희는 이것을 내 손에서 받아야 한다. 그리하여 견딜 수 없는 괴로움으로 뒹굴리라” (이사야50:11). 신실한 사람이 인간이 지펴놓은 불에서 따뜻함을 구할 때, 또는 주님과 이웃을 사랑함 속에서 발견해야할 따뜻함을 자아와 세상을 사랑함이라는 자연적 수준의 사랑에서 찾고자 할 때, 이것은 그가 주님의 생명과 빛으로부터 자신의 사랑과 총명의 생명과 빛으로 돌아섰다는 표시이다.
19. 베드로가 종들과 관리들과 함께 불을 쬐고 있는 동안, “높은 성직자 안나스는 예수에게 그분의 제자들에 관해서, 그분의 교리에 관하여 물었다.” 이 질문과 그분의 응답은 마태복음(26:62,63)에 기록된 것들과는 아주 다르다. 안나스 앞에서 있었던 심문, 비록 안나스가 공식적으로 높은 성직자는 아닐지라도 관습상 있었던 것에 대하여는 이미 주목한바 있다. 주님의 제자와 교리 또는 가르침에 관해 그가 물었던 이유는 예수를 기소할 구실을 그분의 대답으로부터 찾으려 했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주님 역시 그렇게 짐작하셨을 듯 보인다. 그렇다 해도 가야바가 그의 입으로 주님을 단죄하는 것과 위 심문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그러므로 안나스는 요한이 알고 있는 높은 성직자라고 말해진 것 같기도 하다. “그분의 제자와 교리” 라는 말의 의미는 대략 이러하다. 주님은 교리 자체이시다. 그 이유가 교리 전체가 그분으로부터 진행되고 그분과 관련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의 제자들이란 그분의 교리를 받고 그 교리에 따라 사는 사람들이다. 말씀 속의 모든 교리는 두 가지 상황, 즉 두 개의 큰 계명, 무엇보다 먼저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제 몸같이 사랑하라는 것과 관계되고 있다. 이것이 주님의 교리이고 이 교리에 따라 살고 있는 이들이 그분의 제자들이다. 악한 자도 이런 교리에 관해 문의하고 그 교리를 가르치는 말씀에 관해 알고 싶어한다. 그러나 그들이 알려 하는 것은 그 교리를 존경하려 해서가 아니라 그들의 호기심을 만족시키겠다는 것, 또는 말씀에 흠집을 낼 어떤 건수를 포착해볼까 하는 계책 때문일 뿐이다. 그러나 헤로데가 세례자 요한을 취급한 것같이 대사제도 그러했는지는 우리로서는 말할 수 없을 것 같다.
20,21. 예수께서는 높은 성직자에게 그분의 교리에 관해 말하시지 않고 그분의 가르침을 들었던 백성에 관해 언급하시고 있다. “예수께서는 그에게 대답하셨다. ‘나는 세상에 공개적으로 이야기했다. 나는 유대인들이 언제나 가는 쪽, 회당에서, 성전에서 가르쳤다. 내가 은밀하게 말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런데 왜 나에게 묻느냐? 내가 그들에게 말했던 것을 들었던 자들에게 물어라. 보라 그들은 내가 말한 것을 알고 있다.” 무가치한 목적을 위해 말씀을 심문하려드는 이들은 말씀 자체로부터 그들이 바라는 대답을 받지 못한다. 그것은 그들 자신의 생각과 느낌을 통해 그들에게 오고 있다. 예수께서는 세상에 공개적으로, 아무 두려움 없이 말하셨다. 일반적으로 교회는 주님의 진리를 받는 그릇이다. 그분이 그분의 말씀 안에서 가르치는 교훈은 그분의 신성한 인성이라는 성전으로부터, 그리고 그 인성에 관계되는 교리로부터 오고 있다. 유대인들이 예배와 행동지침을 삼기 위해 실지로 원했든, 형식적으로 원했든 상관없다. 그분은 비밀리에 말한 적이 없으셨다. 예수께서 그분의 제자를 두고서는 개인적으로 가르친 적은 있다. 그렇다고 그들을 따로 떼어 말했던 교리 역시 군중으로부터 감추여야 할 교리였던 것은 절대 아니다. 오히려 공개적으로 가르치신 것보다 더 깊은 의미를 담았을 뿐이다. 이것은 제자들만이 이해하도록 준비된 것들이다. 왕국의 신비를 알도록 주어진 대상은 제자들이고 그 외 사람들에게는 비유였다. 그분이 군중에게 가르치셨던 것을 제자들에게 해설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대사제에게 “왜 나에게 묻느냐? 나에게서 들었던 사람들에게 물어보아라” 하고 말하신 것이다. 이 대답의 힘을 보기 위해 우리는 회상해야 하는 것은 대사제는 예수께서 백성을 가르쳤던 교리가 무엇인지 알고 싶어했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그에게 “…사람들”을 암시하셨다. 말씀의 일반적 교리들은 교회 내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가르쳐진다. 세부적인 가르침 또는 계발되는 것은 그들이 아는 진리를 실제에 응용한 이들에게 교통될 수 있다. “진리를 실천하는 사람은 빛에로 온다.” 이런 연유로 우리의 주님은 사람들이 듣고 싶어하는 것을 가르치시는 것을 자주 거절하셨고, 오히려 그들이 믿고 싶지 않고 응용해보고 싶어 않는 것을 가르치셨다.
22. “이렇게 그분이 말하셨을 때, 곁에 섰던 관리들 중의 하나가 손뼘으로 예수를 쳤다, 말하기를 너는 이런 식으로 높은 성직자에게 대답하느냐?’” 주님께서 높은 성직자와 그 외 다른 사람들이 물어온 것들에 답을 거절하신 한 가지 이유는 모독을 예방해 주시기 위해서 였다. 공생애의 많은 예에서 보듯이 그분은 하늘나라의 진리들을 똑똑하고 신중하다는 이들에게는 감추여 있게 하시고 어린이에게는 밝히 보이시고 있다. 진리를 모독하고 훼손시키려는 기질이 본문에서 높은 성직자의 관리들의 행동에 의해서도 드러나고 있다. 때린다는 것은 파괴하는 것이다. 인간이 진리에 폭력을 휘두를 때 진리는 파괴된다. 그렇게 폭력을 휘두르는 이유는 진리가 잘못된 것을 들추기 때문이다. 이런 폭력행사가 우리에게 복주시는 주님을 관리들이 막대기(이 구절을 아주 엄격하게 번역할 경우임)로 친 것으로 표현되고 있다. 이 막대기란 악으로부터 진행되는 거짓 원리를 의미한다.
23. “예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만일 내가 악을 말하였다면, 악인 임을 증거하라. 만일 선을 말하였다면, 왜 너는 나를 치느냐?’ 하셨다.” 주님께서 그분 자신을 판단하고 행동하는 테스트로서 주셨던 것은 그분의 말씀을 심리하라는 테스트이다. 말씀의 가르침은 정당한 심판을 열게 한다. 만일 말씀이 악을 말하고 가르친다면 인간은 악의 증거를 낳을 것이나 만일 말씀이 진리와 정의를 가르친다면 왜 말씀이 매질을 당해야 할까? 그럼에도 주님이 얻어맞으시듯, 그분의 말씀은 매질을 당한다. 그 이유가 말씀이 악을 질책하고, 죄 있는 자의 욕심을 거절하며 그들의 목적에 걸맞은 조언을 기대하려는데 비난만을 주기 때문이다.
24. “안나스는 예수를 묶은 채 높은 성직자 가야바에게 보냈다.” 안나스와 가야바는 유대교회의 자발적 측면과 지적 측면의 원리들을 표현하고 있다는 것은 이미 거론해둔 바 있다. 이 원리들은 그분의 이름 예수가 함축하는 본질적 측면에서의 선함에 정반대 된다. 다시 말해 그분의 말씀 안에서 밝히 알게 하는 선함, 또한 말씀이 육을 만드신 측면에서의 선함에 정반대 되는 원리라는 말이다. 안나스가 가야바에게 예수를 보내는 모습은 의지와 이해성 모두가 신성한 선함과 진리에 계속해서 반대함을 표징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첫째이고 본질적인 반대인 의지의 반대가 있고, 그 다음 이해성의 반대가 있다. 안나스가 예수를 “묶은 채” 보냈다는 것은 신성한 말씀이 교회에 복종 당함으로 해서 말씀의 가장 중요한 특성 중의 하나인 자유가 박탈되는 것, 신성한 의지가 인간의 의지에 종속되는 것을 표현하고 있다. 주님이 가야바에게 보내지는 것은 말씀이 이해성의 판결에 노출되기도 전에서 조차 인간 의지의 지배를 당하는 것을 표현한다. 이럴진대 그것의 단죄밖에 더 어떤 것을 우리는 예상할 수 있을까?
25. 말씀이 위와 같은 대접을 받고 있을 때 신앙의 또 다른 시련이 오고 있다. “시몬 베드로가 서서 자신을 덥히고 있었다, 그들이 그에게 말했다, ‘당신은 그의 제자들 중의 하나 아닌가?’ 그는 그것을 부정했다, 그래서 ‘나는 아니다’ 하고 말했다.” 베드로는 서서 자신을 따뜻하게 했다. 이 모습은 신앙 이 천국으로부터가 아닌 세상으로부터, 자아사랑으로부터 따뜻함을 얻을 때의 상황에 꼭 맞다. 이런 사랑의 영향 아래에서 교회의 신앙은 주님을 부정하는 것 말고 다른 것을 할 수 있을까? 이것은 베드로의 두 번째 부정이다. 그러나 더 대담한 부정이 이 뒤를 잇고 있다.
26,27. “그 때 높은 성직자의 종으로서 베드로한테 귀를 잘린 사람의 친척 되는 자가 말한다, ‘나는 예수와 더불어 동산에서 당신을 보지 않았던가?’ 베드로가 다시 부정했다. 그 즉시 수탉이 울었다.” 지금 베드로의 언행일치가 심각한 테스트를 받게 되었다. 그가 예수와 함께 보여지는 시간과 장소는 그가 예수의 제자 중 하나임을 언급하는 셈이지만 한편 그의 이기적인 두려움은 그로 하여금 준비된 부정, 성내는 부정을 하도록 마치 사악한 자가 모독된 맹세로 단언해버리는 짓을 하도록 자주 하고 있다. 거듭나는 삶에 진지하게 진입해 있는 때에서조차 인간의 자연적인 부패행위의 힘과 영향력은 얼마나 놀라운지 이 구절이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영은 간절하나 육이 약하구나”, “내가 선을 행할 때 악이 나와 함께 있다”는 진리를 입증하고 있다. 영적 시련의 때에는 악령이 고소하고, 그로부터 사탄이 형제의 고소자라 불린다. 그러나 악령은 인간 안에 있는 악을 불러일으킨다. 그리고 그를 단죄해서 그가 구원을 포기하도록 유인한다. 여기서 하인들은 베드로를 악행자로 고소하고 있는 것은 아니고 과거 그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그리고 그의 긍정적 측면을 그의 과거 행동에 담아주고 있다. 그런데도 유대인 패거리의 평가에서 선은 악이었다. 베드로에게서도 이 상황에서 선이 악인 듯 비쳐졌다. 진리가 자신을 불리하게 하는 궁지로 몰아 세우지나 않을까 전전긍긍했다. 이 대목에서 대사제의 종들은 자연적 인간이 소유한 이런 지식들, 즉 선한 쪽이든 악한 쪽이든 어느 쪽에서도 사용될 수 있는 지식들을 표현하고 있다. 세 번째로 베드로를 추궁한 대사제의 종은 앞서 베드로의 칼에 귀를 잘린 종의 친척되는 자였다. 그러므로 이 종은 말코스로 표현되었던 원리에 친척되는 원리를 표현하고 있다. 주님께서는 베드로가 종의 귀를 자르는 성급한 행동을 나무라셨는데, 지금 그 피해를 당한 사람의 친척으로부터 “나는 당신을 예수와 함께 동산에서 보았는데 왜 그러시오?” 라는 추궁을 당하고 있다. 귀를 잘랐던 사건으로 있게 된 이 질문의 세부사항과 직선적인 질문 자체는 베드로로 하여금 그의 부정을 더 강력하게 하도록 한 원인인 듯 보여지고 있다. 어쨋든 위의 추궁한 문장 자체는 무었을 의미할까? 예수와 함께 동산에 있다는 것은 그분과 함께 시험 속에 있다는 것, 내적인 신앙 과 인정함을 수단으로 그분과 교통하고, 또 동반자 관계에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베드로의 약함 중 하나란 이전에는 주님을 위해서 행동했던 것같이 지금은 자신을 위해서 행동하는 것,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반대하는 것이다. 그는 주님이 번창하고 있는 상황에서는 그분의 제자로 있고 싶었으나 궁지에 몰린 상황에서는 그분의 제자라는 말을 듣고 싶지 않았다. 그의 상태에 위기가 닥쳤다. 이 순간에서 그는 뻔뻔한 죄지음을 밀고 나갔고, 그 다음 순간에서 그는 가장 깊은 회개의 먼지 속에서 겸손해졌다. 베드로의 세 번째, 마지막 부정이 있자 닭이 울었다. 요한은 이 예견된 사건이 베드로에게 있어진 후의 결과를 기록하고 있지 않다. 그러나 다른 복음서로부터 이 부정함은 그에게 얼마나 갑작스럽고 깊은 상태의 변화를 초래했는지 짐작하게 해주고 있다. 그렇다고 품성이 본질적으로 바뀌었다는 말은 아니다. 생명과 죽음을 달고 있는 저울이 오르락 내리락 하는 재난의 위기에서 있어지는 변화에 불과하다. 닭이 운다는 것은 베드로에게 주님의 날, 구원의 날, 새 날의 여명이 있게 된다는 것이다.
28. 이제 천사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구세주의 적들에 의해 연출되는 끔찍한 드라마의 또 다른 행동이 전개되고 있다. “사람들이 예수를 가아바로부터 재판정으로 이끌었다.” 예수는 처음에 안나스에게, 그 다음 가야바에게, 마지막으로 빌라도에게 끌려가셨다. 신성한 진리가 의지의 반대에, 이해성의 반대에, 행동의 반대에 놓여졌다는 말이다. 빌라도는 영적인 것에 결과를 주는 시민적 권능을 표현했다. 여기서 소개되는 로마 총독, 빌라도는 이제 펼쳐질 장면에서 중요한 부분을 담당하는바, 빌라도와 유대인들 사이에서 그의 통치력이 지니는 표현적 품성을 관계적 측면에서 살펴두는 것이 유익하리라 생각된다. 로마 세력에 복종해야 하는 상태에 있는 유대인들은 세상에 복종당해 있는 교회, 또는 자연적 측면에 복종 당해 있는 인간 안의 영적 원리들을 표현한다. 그러나 로마인이 표현했던 세상과 자연적 수준의 원리란 이방인들 사이에 있는 것들, 또는 단순한 사람들에게 있는 것과 같다. 모든 주석자들에 의해 평을 받았던 빌라도의 품성에 관한 특징이 있다. 그는 예수에 대한 적개심을 가진 것으로 나타나지 않고 오히려 예수의 편을 들고 싶었던 듯하다. 그는 예수에게서 아무 잘못도 없다고 말하고 있다 (19장4절). 그는 예수를 석방하는 기회를 찾고 있었다(12절). 그는 그렇게 할 수 있는 권한도 가졌다(10절). 그는 예수를 유대인에게 십자가형에 처하도록 내어주었다(16절). 그리고 무고한 사람이 피를 흘리는데 자기에게는 책임이 없다는 표시로 그의 손을 씻었다. 이런 빌라도의 모습은 자연적 인간에게서 흔히 관찰되는 것들, 원리의 결핍이다. 그들은 올바른 것을 보고 그것에 호의적이고 그것을 행할 능력도 가지고 있을는지 모르나, 실제에 부딪치면 그들의 행동은 원리가 아닌 편리주의에 의해 결정되고 만다. 자연적 동기로 규율되는 자연적 인간은 설사 나쁜 호의를 나타내고 있지 않을 때 조차에서도 선에 의해 인도될 수 있을 만큼 악에 의해서도 쉽게 이끌리고 만다. 그 이유가 세상의 자녀들이 빛의 자녀보다 그들 세대에서는 더 지혜롭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의 설득력은 그들을 안내하는데 더 높은 빛을 가진 이들의 설득력보다 더 강하다. 빌라도는 예수를 좋게 보고 있는 자신의 판단으로부터 행동하지 않고 예수에 반대하는 유대종교 의회의 결정에 따르고 있다. 유대인들이 예수를 총독 관저로 끌고 간 “그때는 이른 아침이었는데 그들은 자기들이 유월절 음식을 먹어야 하는데, 자기들이 더럽혀지지 않을까 해서 였다.” 예수를 심리한 유대인의 회의는 밤새 동안 개최되었다. 어둠 속의 그들의 행위, 마치 심리가 있던 밤중처럼 교회가 그 끝에 도착되었다는 것을 표시한 것이다. 그 교회의 밤은 왔다. 새 날의 새벽이 개시되었다. 물론 이 새 날은 빛과 희망의 날은 아니었다. 시간 차원의 달력 가운데서도 가장 어두운 날, 거룩한 분이 십자가에 달리는 날이었다. 이 날은 태양 자체가 어두워졌던 날, 그래서 정의의 태양이 어두워지는 것과 상응을 이루는 날이다. 이 날은 십자가의 수난동안 사람의 아들이 마지막 시험 가운데 있는 날이었다. 유대인들은이 무고한 분을 단죄해달라고 로마 총독에 넘기는 죄악상을 펼치면서도 그들의 예식 법규에는 충실하려는 위선까지 저질러 그들 스스로 부정을 타서 유월절 음식을 먹는데 방해받지 않으려 하고 있다. 이보다 더 교회의 종말을 암시하는 게 있을까? 안으로는 불경하고 겉으로는 거룩할 때 교회는 끝장을 맞이한다. 마치 회칠한 무덤같이 겉은 아름다우나 그 속에는 죽은 인간의 뼈와 온갖 부패된 것이 들어있는 것과 같다.
29. 유대인들이 빌라도에게 가지 않자, “결국 빌라도가 밖으로 나와 그들에게 왔다.” 빌라도는 유대인들에 의해 자신의 집으로부터 이끌려 나오고 있다. 이는 자신의 상태로부터 밖으로 나가 그들 안에 자신을 놓는 것이다. 이렇게 자신을 그들의 영향 아래 놓으면서 그들에게 “너희는 어떤 죄명으로 이 사람에게 맞서느냐?” 하고 물었다. 이는 마치 심판이 이성으로 주관되는 이해성이라는 좌석을 떠나서 격정이 통치하는 곳인 의지에 와서 순진을 고발해대는 소리를 듣고자 하는 것과 같다.
30. “그들은 대답하여 그에게 말했다, ‘그가 죄인이 아니었다면, 우리는 당신에게 그를 넘기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이것은 격정과 편견이 을러대는 기소와 똑같다. 예수는 범죄자로 고소당했다. 그러나 어떤 법위반도 그 고소를 받쳐주지 못하고 있다. 어쨌든 유대인들은 예수를 심문했고 죽여 마땅하다는 결론을 맺어 놓은 것으로 이해되어진다. 그러나 집행할 권한이 없는 터에 그들은 로마 총독에게 자기들이 결론 맺은 죄목을 확인해서 형을 집행하라고 외친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죄인으로 몰아 세운 증거가 없는바 그분의 범죄자라고 소리쳐댐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31,32. 로마 총독은 예수가 유대인의 법률을 위반한 것으로 생각하면서 “그를 데려가서 너희의 법에 따라 그를 재판하라’ 하고 말하였다. 유대인들이 그에게 말했다, ‘우리가 누군가를 죽음에 놓는 것은 적법하지 않습니다.’ 이리하여 예수께서 하신 말씀, 그분이 어떤 죽음으로 죽으시라는 것을 성취하시고 있는 셈이다.” 유대인들은 누군가를 죽음에 놓이게 하는 법률적 권한이 그 당시 박탈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그분이 어떻게 죽으실 것인가를 두고 하신 말씀은 유대인들이 살리고 죽이는 권한이 박탈되기 전, 말해졌을 것같이 여겨진다. 예수께서 유대인에 의해 죽음에 놓여졌다면 필시 돌을 던져 죽이는 방법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십자가형에 의해 집행된 것은 그것이 로마인에 의해서 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예견되어 말해진 것은 그분이 이방인의 손에 넘겨져 조롱 당하고 채찍질 당하며 십자가형을 받으리라는 것이다. 로마인들은 이방인이었고, 그들을 수단으로 주님의 예견은 성취되었다. 이것은 이방인들이 불신해서라기보다는 유대인들이 불신한 것을 반영하는 방법으로 성취되었다. 유대인들은 의지를 가졌고 로마인들은 권한을 가졌다. 그래서 전자의 의지가 후자의 권한으로 행동되어서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 그분의 왕국을 무너트리려는 사탄의 의도가 집행된 것이다. 주님께서 “이방인의 손에 넘겨지고, 조롱 당하고, 채찍질 당하고 십자가형을 받으신다”는 이런 모습에는 섭리적인 목적이 깔려 있을 것임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분은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모든 사람을 위해 죽으셨다. 그분이 모든 사람을 위해 죽으신 이유는 모든 사람이 그분의 법을 어기고 죄 가운데 죽기 때문이었다. 유대인들이 이런 측면에서 죄인이라면 이방인들은 저런 측면에서 죄인이었다. 유대인들은 그분께 직접적으로 반대하여 죄를 지었고 이방인들은 간접적으로 죄를 지었다. 유대인들은 그분이 죽기를 바랐고 이방인들은 그 뜻을 결과 되게 했다. 이런 대목에서 발견되는바, 계시된 진리, 명백히 나타난 진리에 대한 이방인들의 적대감은 진리 자체에 대한 적대감이라기보다는 그 진리를 독점하면서 주창하는 이들에 의해 반영된 진리에 대한 적대감이라고 보는 편이 낫다는 것이다. 교회 밖에 있는 이들은 교회 내에 있는 이들의 행동을 수단으로 진리를 판단한다. 말씀을 가지고 있으면서 그 가르침에 따라 걷지 않는 이들은 타인들로 하여금 진리를 좋지 않게 여기게 만들어 진리를 때리고 침뱉게하고 십자가형에 처하게 하는 원인이 된다.
33. 이방인 부류와 그 품성에 속하는 이들이 본래 그들의 상태로 되돌아오게 되면 진리 자체로부터 오는 진리에 관한 것을 듣고 싶어한다. 이것이 지금 로마 총독에 관한 기록으로 표현되어 있다. “빌라도가 다시 재판정으로 들어가서 예수를 불러 놓고 ‘네가 유대인들의 왕인가?’ 하고 물었다.” 빌라도가 다시 재판정으로 들어감은 마음이 내부 자체, 특히 지적 자질 자체, 즉 이성이 예증을 드는 곳, 판단이 있게 되는 곳에 머무는 것을 표현한다. 그가 예수를 부름은 진리 자체가 인간적인 심판의 법정에 불리울 때의 마음의 상태를 묘사한다. 그러나 그것은 심판이 형성될 증거를 진리 자체로부터 받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바람에서이다. 빌라도가 예수께 묻는 질문은 “네가 유대인들의 왕인가?” 였다. 말씀 안에서 주님은 천국과 교회를 구성하는 왕국, 그분의 왕국의 통치자로서 왕이라 불리신다. 어쨌든 주님께서 실시하는 정부에는 두 종류가 있다. 그분은 사랑으로부터, 그리고 진리로부터 통치하신다. 이 구분은 그분 자신의 뜻으로부터 있어지는 게 아니라 그분의 통치 아래 복종하는 이들의 상태로부터이다. 그분은 사랑으로부터 모든 이를 통치하기를 바래신다. 만일 모든 그분의 신하들이 무엇보다 먼저 그분을 사랑한다는 것을 원리로 삼고 있다면 그분의 나라는 하나일 것이고 통치하는 방법은 사랑의 주권일 것이다. 그러나 어떤 이는 사랑에 의해 통치되지만 또 다른 이는 진리에 의해 규율된다. 그러므로 천국과 교회는 두 왕국, 즉 천적인 왕국과 영적인 왕국으로 구성되고 있다. 비록 이들이 구분은 된다 해도 그들은 분리되어 있지 않고 더구나 서로에게 훨씬 덜 적대적이다. 그들은 인간 안에 있는 의지와 이해성 같아서 서로 구분되는 자질이지만 한 마음을 구성하는 것과 같다. 주님의 시야에서 천국과 교회가 한 사람으로 있듯이 두 왕국은 이 큰 사람(Grand Man)의 의지와 이해성을 형성한다. 의지와 이해성이 마음의 모든 것에 들어가 있듯이 두 왕국은 천국과 교회 전체에 들어가 그것을 구성한다. 표징적 교회(representative church)에서 주님의 이 두 왕국은 유다와 이스라엘 왕국으로 표현되어져 있다. 복음서에서 예수께서는 이스라엘 왕과 유다의 왕 모두로 불리우시고 있다. 그러므로 빌라도가 예수께 유다의 왕인지를 물었을 때 그것은 그가 사랑 또는 선함에 관한 그분의 통치 주권에 관해 물은 셈이다. 물론 빌라도에 이런 의미를 그의 질문에 담고서 물었던 것은 참으로 아니다. 그러나 말씀 안에 기룩된 모든 것은 그 안에 영적 의미를 담도록 섭리에 의해 규율되고 있다. 그리고 사건과 그것에 연계되어 말한 것은 거룩한 이들 역시 신성한 영감에 의해 안내되고 있다. 빌라도의 질문 역시 영감의 저자만이 그 말에 담을 수 있는 의미로 채워져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빌라도가 예수께 한 질문을 역사적 의미에서 읽는 동안 영적 의미에서 빌라도가 표현한 것들을 수단으로 진리들을 탐색하고 정신적으로 반영하는 행동을 취한다. 그가 이방인들, 그리고 이방인의 상태에 있었던 이들, 진리에 적대적이라기보다는 더 호의적 상태에 있는 이들, 그러나 진리의 정의에 관한 의문을 해결하는데 독립적으로 판단하기보다는 오히려 타인들에 의해 자기 판단이 영향을 더 많이 받는 이들의 상태를 표현한다.
34.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이것을 자신으로부터 말하는지, 또는 나에 관해서 다른 사람이 말하는 것을 말하는지를 말하라’” 주님께서는 빌라도의 질문에 다른 것을 묻는 방식으로 답하고 있다. 그 이유가 그분은 그분 자신에 관한 것을 그분께 묻는 이들이 자기들의 심정과 이해성으로부터 튀어나와 반사된 것인지 아니면 외부로부터 기억에 들어와서 묻는 것인지, 또는 마음 자체의 자극으로부터 라기보다는 다른 사람에 의해 암시되었던 것을 묻는 것인지를 확실히 해두셔야 했기 때문이다. 심정이 갈망했다는 것과 호기심으로 막연히 묻는 것은 폭넓은 차이가 있다. 우리 자신의 원함이라는 느낌으로부터 발생하는 것들과 흥미로부터 진행되는 것들 사이에는 우리 자신의 경험을 넘어 놓인 주제들이 있음을 느낀다. 역사적 의미에서 볼 때 주님이 빌라도의 질문에 대답하시되 그 대답은 그분이 알았던 것이 진리이다는 것을 인정하도록 빌라도를 이끌려 의도하셨다는 것, 그리고 로마 총독은 과거 대사제나 바리새인들로부터 예수에 관해 들었던 것들로부터 질문을 던지게 되었다는 것은 의심할 바 없다. 그러므로 보여주는바, 빌라도는 이 고소가 어떤 유대인의 법에 관계된다는 것, 로마법의 관할 사항이 아니라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가 바란 것은 예수가 유다인의 통치자라는 어떤 주장을 하는지 확인하고 싶었다.
35. “빌라도는 ‘내가 유대인 이냐? 네 자신의 백성과 최고 성직자들이 너를 나에게 넘겼다. 너는 무엇을 했느냐?’ 하고 물었다.” 이 답변에서 빌라도는 자기가 유대인이 아니라 이방인이다는 것, 이미 결론을 맺어 고소한 이들이 아닌 자유로이 재판하는 사람이다는 것을 인정했다. 동시에 빌라도에 의해 예수께 전달된 이 질문은 그분으로부터 유대인들이 그분을 고발한 것을 인정 또는 부정을 끌어내려는 것, 유다의 왕임을 주장하는 것, 그리고 유대인들이 가이사에 대한 충성에서 멀어지는지 그 여부에 대한 답을 유도하려 했다는 것은 의심할 바 없다. 예수께서 이 질문에 답하지 않으시고, 유대인의 왕이냐는 것에도 대답하지 않으셨을 때 그는 예수가 한 일이 무엇이냐고 물으면서 네 동족들이 너를 범죄자로 내게 넘겼다고 말하고 있다. 종교인들이 이교도들을 다룰 목적으로 세속의 권한을 사용할 경우 그것은 대단히 선량한 사람의 안전까지 피해를 끼치는 큰 원인이 된다. 인간적 신조에 이의를 제기하는 것이 신성한 계명의 위반보다 더 큰 범죄라고 생각할 때 어떤 덕행이나 경건함도 이교적인 의견을 보존하는 것을 정당화 해준다고 기대되지 않는다. 이에 관해 우리 주님은 본보기가 되셨다. 그러나 그분 자신의 경우는 그분의 제자라고 고백한 이들의 행동에 너무 적은 영향력을 주었을 뿐이다. 이런 것이 우리의 내적인 삶에 적용될 경우 우리 개개인과도 관계를 맺는다. 진리가 저질의 의지에 의해 소경된 이해성 또는 거꾸로된 이해성이 재판하도록 넘겨질 때, 공평한 재판은 거의 예상될 수 없다. “네 백성과 최고 성직자들이 너를 내게 넘겼다” 라고 빌라도는 예수께 말했다. 말씀 안에서 의지의 원리, 그것이 선하든 악하든 그 원리를 표현하는 것이 이름들인데 이 구절의 경우는 악한 원리임이 분명하다. 빌라도가 예수께 “너는 무슨 일을 했느냐?” 라고 묻는다. 이 질문은 고소 내용을 함축하지만 주님께서는 아무 것도 말하시지 않는다. 그분은 말하시되 또 다른 것, 더 높은 주제로 건너가신다. 그러나 그분이 유대인의 왕임을 이런 식으로 주장하신다.
36.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내 왕국은 이 세상 속에 있지 않다. 만일 내 왕국이 이 세상 속에 있었다면 나의 종들이 싸웠을 것이고, 내가 유대인들에게 넘겨지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나의 왕국은 여기로부터 있지 않다.’” 빌라도에 대한 주님의 대답은 이 세상의 일시적인 권력을 추구하려는 것에 대한 빌라도의 의심의 바탕을 제거 해버렸다. 동시에 그분의 나라가 이 세상 속에 있지 않음을 선포하심으로 그분이 왕임도 선포했다. 그리고 지상의 어느 권력가의 경쟁자도 아니라는 것을 선포하신 것이다. 동시에 그분은 위대한 진리를 서술하셨고 위대한 원리를 내려놓으셨다. 예수는 참으로 왕이시다. 왕들 중의 왕이시기까지 한다. 그분은 왕국을 가지고 계신데 그 왕국은 여느 다른 왕국 너머에 있다. 제 왕과 왕국들은 그분에 의해 규율되고 존재한다. 신성한 진리 차원에서 그분은 모든 진짜 권능, 모든 정당한 법, 모든 참된 통치의 근원이시다. 그분의 왕권과 왕국은 지상의 왕 또는 왕국과 충돌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 안으로 그분의 왕국이 들어가기를 추구하신다. 그래서 그들은 진리와 정의라는 영원한 원리로 호흡되게 하신다. 비록 그분의 왕국이 이 세상 안에(in) 있도록 의도되고 있다 해도 그 나라는 이세상 속에(of) 있는 게 아니다. 그분께서 우리로 사용하도록 주신 기도 중의 하나는 “당신의 나라가 올 수 있기를” 간구하는 것이고, 예언의 언어가 우리를 가르치는바는 이 세상의 왕국들이 주님과 그분의 그리스도의 왕국이 되어갈 때를 기대하라는 것이다. 이 예언은 주님께서 이 세상의 통치자와 백성들의 심정 안에서 그분의 사랑과 진리로 통치하실 때 완성될 것이다. 다시 말해 그분의 나라가 하늘에서 있듯이 그분의 뜻이 지상에서 있어질 때이다. 교회는 지상에서 눈에 보이는 그분의 왕국이다. 그러나 그분의 참된 옥좌는 인간 심정 안에 있다. 그분이 그 곳을 통치하실 때, 인간의 영적인 일들, 뿐만 아니라 일시적인 모든 일들, 모든 곳을 통치하시게 된다. 이런 관점에서 주님의 왕국은 지금까지 존재해온 바 같은 이 세상 속의 왕국과 구별되는 것이다. 그 왕국은 평화의 왕국이다. “만일 내 왕국이 이 세상 속에 있다면 내 종들은 내가 유대인들 손에 넘어가지 않도록 싸울 것이다.” 그분은 싸우지도 않고, 거리에서 그분의 목청을 돋구는 일도 없다는 것은 예언에서 주어진 메시아의 특색 중 하나이다. 스승을 보호하기 위해 말고의 귀를 자름으로 이 세상의 왕국과 싸웠던 일이 있었다. 이때 그분은 그 제자를 나무라셨고 이런 모습의 제자를 통해 무력으로 그분의 대의를 돕거나 방어하려 들지 말라고 경고하셨다. 주님께서는 이것을 그분의 나라가 비세상적인 데에 근원과 본성을 두고 있다는 증거로서, 그분의 왕국은 이 세상 속에 있지 않다는 증거로서, 그분의 종들은 싸워서는 안 된다는 증거로서 주시고 있다. 진리는 방어를 위해 육욕의 무기를 사용하지 않는다. 진리는 그것 고유의 공로 위에 서 있다. 그리고 진리에 부수되는 힘에 의해 규율되려고 애쓴다. 만일 이 힘이 방어력을 충분히 갖추지 못했다면 기꺼이 고통을 감내하고 친구의 전투적 기질에 의탁해서 곤경을 헤쳐나가는 것보다는 적들의 손에서 고통 받는 쪽을 선택한다. 이것은 유다인의 손에 넘어간다든가 악의 지배 아래 놓이든가 하는 것이다. 아마 죽기까지 박해 당할는지 모른다. 그러나 이전의 권능보다 더 강력한 권능으로 다시 일어나게 된다. 그분의 바깥쪽 적들의 손에 자신을 무저항으로 노출시킴으로 죽음으로부터 일어나시고 천상천하의 모든 권능을 가지셨다.
37. 그분의 왕국에 관한 그분의 선포를 듣던 “빌라도는 그분에게 말했다, ‘그러면 너는 왕이냐?’ ‘내가 왕이다고 너는 말한다. 나는 진리에 증거를 낳으려고 태어났고, 이 원인을 위해 세상에 왔다. 진리 속에 있는 모든 이는 내 음성을 듣는다.’” 빌라도는 예수를 고발한 유대인들로부터 그가 왕이라고 했다는 것을 들었었다. 그리고 주님이 그분의 왕국에 관해 말하신 것도 들었다. 이 총독은 “아무튼 네가 왕이냐?”고 질문하여 그분이 왕임을 인정하는 올바른 추정을 이끌어냈다. 예수께서는 이 질문에 긍정적으로 대답하시고 있다. 그 다음 왕이심을 선포하시면서 진리이심도 선포하시고 있다. “나는 진리를 증언하려고 태어났고 그것 때문에 이 세상에 왔다.” 이렇게 말하시는 가운데 주님께서는 그분의 왕권에 관한 자신을 표현하셨다. 왕권의 첫 번째 원리가 진리이심을 선포하신 것이다. 왕이란 통치자이다. 그리고 진리는 통치하는 원리이다. 진리가 통치한다 또는 법이 규율한다 라고 우리가 말하든 결국은 같은 맥락이다. 그 이유가 진리는 질서의 법들이고, 이에 따라 모든 올바른 통치는 실시된다. 신성한 진리는 주님이 통치하는 수단이다. 그러므로 진리가 통치한다 라고 말하든가 진리가 왕이라고 말하든가 같은 뜻을 전달한다. 주님은 왕이시다. 그리고 그분의 통치는 하늘과 땅 너머 있다. 그 이유가 그분은 신성한 진리 자체이시기 때문이다. 이것이 그분이 세상에 오신 특성이었다. 그분은 모든 무질서를 내려 놓게 하고 정의의 그분의 왕국을 건설하시기 위해 신성한 진리로서 오셨다. 무질서의 왕국은 어둠의 왕국, 그분이 굴복시켜야할 왕국이고, 정의의 왕국은 빛의 왕국, 그분이 사람 사이에 세우시고 회복시켜야 하는 왕국이다. 이 목적을 위해 그분은 태어나셨고, 이것 때문에 그분은 세상에 오셨다. 이 목적과 이 원인 때문에 그분은 지금도 우리에게 오시고 있다. 그분의 진리가 우리 심정에서 태어나고 이해성에 올 때 그분은 우리 안에 있는 악과 잘못의 무질서를 내려놓고 그 대신 정의의 그분의 왕국을 세우신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더 말하신 것은, “진리 속에 있는 모든 사람은 내 음성에 귀를 기울인다”이었다. 진리를 사랑하는 모든 사람은 진리이신 그분의 음성을 듣고 싶어할 것이다. 그리고 그분의 음성을 듣는다는 것은 그분이 가르치는 것을 청종해서 순종하는 것이다. 이 복음서를 쓴 이 사도는 이렇게도 증언하고 있다. “그들은 이 세상에서 나왔기 때문에 이 세상 일을 말하고 세상은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느님께로부터 왔습니다. 하느님을 아는 사람은 우리의 말을 듣지만 하느님께로부터 오지 않은 사람은 우리의 말을 듣지 않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진리의 성령과 사람을 속이는 악령을 가릴 수 있습니다” (요한1서4:5-6). 그래서 진리 편에 있는 이들은 진리를 행하는 이들이다. “이러므로 진리 속에 있다고 하는 이들은 말로나 혀끝으로 사랑하지 말고 행동으로 진실하게 사랑합시다” (요한1서3:18). 진리 편에 있는 이들은 주님의 음성을 듣는다. 주님의 음성은 생명 있는 애착 을 가진 진리이다. 이 진리를 듣는 이들은 그 진리를 귀담아 듣고 순종한다. 두 견해사이에 서 있는 자들, 특히 외부로부터의 증거를 수단으로 진리를 납득하려는 이들에게 위 말씀은 그 얼마나 교훈적인가!
38. “빌라도는 예수께 ‘진리가 무엇인가?’ 하고 물었다.” 빌라도 같은 이들에 의해 이런 때에 제안되었다는 것은 아주 당연한 듯 여겨질는지 모른다. 사실 이 질문은 그 시대의 현자에 의해서도 엄청나게 토론되었던 것이고, 우리 시대 역시 옛날 시대만큼이나 연이어 토론되는 질문이다. 참으로 그리스도의 제자라고 고백했던 이들 까지에서 존재했던 것은 진리가 진실로 무엇인지, 참으로 진리인 것에 관한 지식이 없었다는 점이다. 우리의 주님께서는 빌라도의 질문에 응답하시지 않았는데 우리가 추측해본다면, 빌라도는 진리에 대한 명확한 정의이든, 진리 그 자체이든 받을 상태에 있지 않았기 때문일 것 같고, 또 한편으로는 진리가 알려지려면 보여져야 만 하기 때문에서 일 것 같다. 최고 높은 의미에서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진리이다. 그러나 어떤 점에서 그러한지를 알지 못하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 예수 그리스도는 영원한 말씀, 또는 신성한 지혜가 명백히 드러난 것이었다. 영원한 지혜를 통해 모든 것은 존재하고 생명을 보존하는데, 아마 모든 것 안에 그것이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흔히 말로 표현된 참된 것이 진리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진리는 모든 것의 실체(substance)이다. 신성한 진리는 신성한 사랑으로 창조와 구속함이라는 결과를 가져다 주는 하느님 안에 있는 원리이다. 진리는 영원한 질서의 법이라고 말해 볼 수도 있고, 이에 따라 하느님은 필수적으로, 불변하게 행동하신다. 이것은 그분의 본성 속의 법, 그러므로 그것은 사랑의 법이다. 진리를 수단으로 하지 않고서는 사랑이 우리에게 올 수 없고 우리가 사랑에로 나아갈 수도 없다. 그런고로 진리를 받아야 할 필요가 있고, 진리를 행해야 하는 이유가 있다. 아마 빌라도같이 묻는 이들은 빌라도 같이 이렇게 처신할는지 모른다. “나는 이 사람에게서 어떤 과오도 찾지 못하였다.” 동시에 그들의 뜻에 그분을 맡겨버린다. 예수가 무고한 사람이라고 판단되었다면 빌라도는 그분을 석방했어야 지당하다. 그러나 그는 공적에 관한 깨끗한 지각이 없었은 듯 여겨진다. 그래서 정당한 분의 운명은 시골뜨기 수준의 편협한 총독외 변덕스러움에 의해 결정되어졌다.
39,40. 예수가 무고한 자임을 발표하는 한편 빌라도는 유대인에게 말했다. “‘너희는 관례를 가지고 있는데, 내가 유월절에 너희에게 한 사람을 석방해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유대인들의 왕을 석방하기를 바라느냐?’ 그때 그들 모두는 다시 소리쳐 말하기를, ‘이 사람이 아니고 바라바요’, 지금 바라바는 강도 였다.” 저명한 범죄를 동반하는 유대인들 앞에 그들이 선택을 결정짓게 유보되는데 이 관습이 놓여졌다는 것은 매우 독특하다. 유월절 자체는 순진한 자는 구하고 죄 있는 자는 죽이는 신성한 심판의 행동을 기념하기 위해 제정되었다. 그들 조상들은 천사들이 압제자들을 지나가면서 파괴했던 그 밤에 자비심의 무관심을 체험했다. 그런데 그들의 후손인 유대인들은 신성한 절차의 순서를 뒤엎었다. 즉 그들은 죄 있는 자를 석방하는 기회를 만들므로서 제정된 유월절을 모독했다. 이 시기의 경우 더 놀랄만하고 호된 시련은 더 격렬하다. 강도와 구세주 모두 예수라 명명되고 있었다는 것을 믿는다면 말이다. 바라바라는 이름은 아버지의 아들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아주 초기에 속하는 사본의 어떤 것에서 초기 선조에 의해 인용된 바, 바라바는 역시 예수로 명명되기도 했는데 이것이 후기 기독교의 복사자의 마음에 매우 거리킴을 준 탓에 그들이 생략한 것으로 여겨진다. 이 대목에서 선과 악이 가장 놀라운 방법으로 유대인들 앞에 제출되어 있다. 이름으로는 그들이 똑같은데 실제로는 그 둘은 얼마나 다른가! 어쨌든 이름의 정체가 정말로 존재했든지, 그렇지 않았든지 선과 악이 유대인 앞에, 그리고 우리들 앞에 놓여 있는 예를 우리는 가지게 된다. 현재의 예에서 제출된 태도 중 선 쪽을 더 선택하도록 암시 받고 있다. 그 이유는 빌라도가 예수를 석방하면 어떻겠느냐고 제의한 상태이기 때문이다. 물론 예수의 석방이 유대인들을 달래는데 무력했던 것은 사실이다. 그들은 길들여지기를 거절하는 귀먹은 독사 같다. 사랑과 진리의 소리도 듣고 싶지 않았는데 그들이 어떻게 길들여질 수 있을까? 따라서 “그들은 악을 쓰며 ‘그 자가 아니라 바라바를 놓아주시오’ 하고 소리질렀다.” 이런 유대인의 행동으로부터 엄숙한 교훈을 배워야 할뿐 아니라 상기해야 하는 것은 이와 똑같은 선택의 기회가 우리들 앞에도 장착되어 있다는 것,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함과 진리, 지옥으로부터 오는 악과 거짓된 것들은 우리의 일상업무나 꾸준히 되풀이하는 사건들 안에 제출되어져 있다는 것이다. 거기서 양 편 중 하나를 택일하도록 우리를 강요하고 있다. 악을 선택하고 선을 거절하는 선택을 경계해야 한다. 특히 주님을 사랑하는 선은 가장 높은 선이요, 이 선에 정반대 되는 가장 수준 낮은 악은 자아를 사랑하는 악임을 우리는 늘 상기 해야 하리라. 18장의 사건 기록의 마지막 문장인 “바라바는 강도였다”는 구절도 의미가 없는 게 아니다. 그가 표현한 인간 심정 속의 가장 깊이 박힌 악은 우리로부터 귀중한 모든 것, 그리스도의 사랑과 진리에 관한 모든 것, 이 세상과 저 세상의 참된 행복에 들어 있는 사랑과 진리를 강탈해간다.

요한복음 17장 해석

17

지상의 공생애를 마치시는 대목에 해당될는지 모를 앞장에서 제자들에 대한 강연을 마치신 주님께서 이제 하늘을 우러러보시면서 기도하시어 그분의 영을 아버지의 손에 맡기시고 있다. 이 기도는 가장 높은 수준에서 장엄하고 감명적인바, 우리의 겸손과 존경 어린 생각을 가지게 하고도 남는다. 예수께서 기도하신 기록이 몇 군데 있는데, 그 중 한가지 경우는 주님이 산으로 물러가셔서 하느님께 온 밤을 지새워 기도하셨다. 그러나 그분이 제자들에게 되돌아와 말하신 감사나 나사로의 무덤에서, 게세마니에서 괴로워하신 짧은 기도, 십자가 위에서의 자포자기하시는 울음의 말 같은 짧은 대목을 제외하면, 예수께서 아버지에게 헌신적으로 보내는 언어나 주제들에 관한 기록이 복음서에는 포함되고 있지 않다. 요한이 보존한 이 장의 기록은 주님께서 길게 기도하신 유일한 것이다. 이 기도는 그것을 말하신 분이 참 존재되신다는 점에서, 그 기도를 싣고 있는 책의 비중에서도 그 가치가 있다. 이 기도는 구속하시는 사랑의 참 영으로 호흡하고 있다. 이 기도는 기도의 표현에서 같이 하느님에 대한 순수한 사랑과 인간을 향한 사랑의 모형(pattern)이다. 이 기도는 죄를 대신해 희생한 제물로서 구세주의 고통 또는 순종 때문에 죄인들을 용서해달라는 청원 같은 것은 그 흔적조차도 포함하고 있지 않다. 이 기도는 하느님과 인간의 중재자(Mediator)이셨던 그분의 기도로서 꼭 알맞다. 이 기도의 취지(burden)는 육을 입으시도록 움직이게 한 원인으로서의 인류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 구속을 결과하게 하는 원인으로서의 아들 안에 있는 아버지의 사랑, 그리고 거듭남을 실행시키는 원인, 즉 구세주의 형상으로 새로이 창조하는 것같이, 그들을 하느님과 하나를 만들고, 그리고 그들을 참 행복이 되시는 그분과의 하나 됨을 회복시키는 원인으로서 인간을 사랑하시는 것과 아들과 교통하는 것이다.
예수께서 기도하시는 주변여건 자체는 비록 어떤 점에서는 신비로울지는 몰라도 깊은 흥미를 자아내고 있다. 유약하고 죄 있는 창조물인 우리는 우리라는 존재의 저자요 자비의 저자에게 도와달라고 청원을 보낼 필요가 있다. 그러나 인간이실 뿐 아니라 하느님이셨고, 죄인들과는 분리되는 거룩하고 더럽혀지지 않으셨던 예수께서 신성의 지지를 받을 필요를 느끼셨을 것이라는 것, 그분의 영혼을 하느님께 쏟아내야했다는 것, 등등은 설명할 수 없을 듯 여겨진다. 참으로 이런 상상도 가능하다. 육 안에서 주님의 일은 죄인들 대신에 서서 희생하신 것, 그분의 순종과 죽음처럼 그분의 기도도 그분 안에 있는 그들의 것이라고 상상하는 것이다. 빌립 서 2장 6-8절을 읽어보자. “그리스도 예수는 하느님과 본질이 같은 분이셨지만 굳이 하느님과 동등한 존재가 되려 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의 것을 다 내어놓고 종의 신분을 취하셔서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 되셨습니다. 이렇게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나 당신 자신을 낮추셔서 죽기까지, 아니, 십자가에 달려서 죽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신성한 존재이신 그분은 그분의 신성을 상실할 수 없었고 자기가 신성하다는 의식을 빼앗길 수도 없었다. 그리고 마치 그분이 종인 것처럼 행동하는 것은 그분의 기도, 뿐만 아니라 그분이 받은 고통, 순종까지도 비실재적으로 만들었을 것이다. 신성은 고통 받을 수도, 기도할 수도 없다. 그분이 진실로 겸비하고 순종하며 고통받고 간구하는 상황이 있을 수 있도록 의존하는 상태에 올 수 있는 방법은 한가지밖에 없다. 그것은 인간의 생각과 느낌과 인간의 의식을 가진 우리의 본성을 입으시는 방법이다. 예수의 기도, 실제의 기도가 있기 위해서는 우리와 똑같은 본성안에 있어야만 한다. 어쨌든 그분의 기도는 깊이에서, 순수성에서, 신뢰도에서 인간의 기도를 능가하고 있었을는지 모른다. 이것 또한 참되다. 비록 주님의 기도가 본성 측면에서 인간적이라 해도 근원 측면에서는 신성했다는 점이다. 그러나 이 사항에서 그분의 기도는 여느 다른 인간의 기도와 유사했다. 하느님이 기도의 대상이요 저자이시다는 성경의 교리에서이다. 우리가 기도에서 표현되는 모든 거룩한 바람과 생각은 기도가 전달되는 그분에 의해 영감된 것이다. 어느 기도라 해도 천국으로부터 내려오지 않았다면 천국으로 승강될 수 없다. 따라서 예수의 기도가 인간의 기도의 품성을 가지기 위해서 신성한 생각은 천국에서 하강하면서 인간의 생각으로 변화되었어야 하거나, 주님께서 어머니쪽 인성의 유한한 자질을 입으시어 신성이 그 안에 내려오실 때 필요했던 사항같이 인간 생각으로 신성한 생각을 옷입혔을 것이 틀림없다. 어떻게 예수께서는 그분 안에 내재하신 신성에 분리된 존재로서 기도를 보낼 수 있었는지를 착상해보는 것은 곤란할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 곤란은 어쨌든 대단히 심각한 수준의 것은 아니다. 신성과 인간의 의식은 무한한 차이가 있다. 그 결과 두 의식을 소유하는 이들에게 이 두 의식은 무한하게 먼 거리를 느끼게 한다. 주님의 인간적 의식은 신성과 분리된 듯, 아주 멀리 떨어진 듯 여겨졌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그분은 우리 자신 같았다. 비록 하느님보다 더 가깝게 우리에게 접근할 수 있는 자는 없다 할지라도 어느 누구도 우리로부터 더 멀리 있다고 여기지 않는다. 분리됨이라는 감각은 공간 차원이 아니라 상태 차원이다. 무한과 유한 사이에는 비례(proportion)라는 것이 없다. 예수께서 시험 당하고 고통 받으신 상황 같은 굴욕 받는 상태에 계셨을 때 그런 상태가 그분에게는 마치 아버지께서 자신과는 분리된 존재, 아주 멀리 떨어져 계신 분처럼 여겨졌다. 그 이유가 그런 상황에서 그분은 유한한 의식을 가진 어머니쪽 인성 안에 계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분이 신성화되는 상태에 있으셨을 때에는 유한한 개체성이라는 감각을 가지시지 않았다. 그 이유가 그 때에는 아버지쪽 인성 안에 있으셨고, 아버지와 그분은 하나로서 말하셨기 때문이다. 현재 그 둘은 완전하게 하나이다. 하나인바 인성은 분리라는 어떤 느낌도 수용할 수 없다. 지금 주님은 과거 지상에서 하셨던 중재자적인 기도를 하실 수 없다.
이 장의 기도에서 첫째가는 일괄적인 청원은 이것이다. 아들이 신성화 되고 아버지가 그분 안에서 신성 되시라는 것, 그 신성 됨 안에서 인간이 구원을 가지도록 하시는 것이다. 주님의 신성화 하심이 완성되고, 그분의 인성이 신성이 되셨을 때 예수는 인간의 방식에 따라 더 이상 기도하실 수 없었다. 인류에 대한 사랑, 인류의 구원을 바래시는 것은 여전하시다. 이것은 그분의 기도 안에서 표현되고도 있고, 그분 안에서 무한하게 행동되고, 그분의 성령을 통해 꾸준히 실시되어서 죄인들이 그분 자신과 재회하도록 하시고, 그들의 하느님이요 구세주로서의 그분과 더 친밀하고 영원히 지속되는 하나 됨 쪽으로 그들을 끌어내시고 있다. 바람이 기도의 필수이듯, 인간 구원을 위한 주님의 기도는 비록 더 이상 발음되지는 않는다 해도 기도의 방식과 언어에서 여전히 묘사되고 있다. 똑같은 이유로 주님이 보내는 성령은 발음될 수 없는 소리(groaning)로 우리를 위해 중재를 만드는 것으로 표현되고 있다 (로마서8:26). 이것은 지금 그분이 계신 것같이 주님 자신에 관련된 이 장의 언어의 사용을 위해 만족스런 이유를 공급한다. 성령의 중재는 비록 우리를 위해서이지만 기도의 영감을 주는 자로서 우리 안에 실재로 있다. “성령께서는 연약한 우리를 도와주십니다.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도 모르는 우리를 대신해서 말로 다 할 수 없을 만큼 깊이 탄식하시며 하느님께 간구하십니다” (로마서8:26). 비록 주님 자신이 기도하지 않고 기도할 수 없다 해도 여전히 그분은 우리 안에서 기도하신다. 이 신성한 영향력은 그분 자신의 언약한 인성 안으로 내려오셨고, 실재적이고 진지한 기도 안에 있는 그분의 인간적 심정과 입술로부터 승강하셨고, 지금은 그분의 신성화된 인성으로부터 유약한 우리의 인간성으로 내려오시고, 우리의 심정과 입술로부터 그분께로 마치 그분이 아버지께로 오르셨듯 오르시려 하시고 있다. 이것이 거행될 때, 이 신성한 기도의 마지막 목적, 즉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고 그 사랑이 그들 안에 있고 나도 그들 안에 있게 하려는 것”이 성취되어진다.
1. “이 말들을 예수께서 이야기하시고, 천국으로 눈을 들어올리시고, 말하셨다, ‘아버지 시각이 옵니다. 당신의 아들을 신성화 하소서, 하여 당신의 아들 역시 당신을 신성화 되게 할런지 모릅니다.’” 감각 속의 하늘(heaven)은 혼(soul) 속의 천국과 상응된다. 마음의 눈이 방향을 바꿀 때 육체의 눈도 그렇게 된다. 눈을 천국 쪽으로 들어올리는 것은 생각을 하느님의 옥좌에로, 그 위에 앉으신 그분께로, 그런고로 천국적이고 신성한 모든 것에로 승강시키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하늘을 우러러보신 것은 내향의 승강, 즉 인성에 내재하는 신성을 더 내면적으로 지각함을 주었다는 것에 관한 바깥쪽 표시였다. 또는 그것은 그분의 내적 인간 안에 있는 신성한 선을 향해 주님의 외적 인간 안에서 신성한 진리가 승강함을 표현했다. 내적 인간이 아버지가 계시는 하늘로 의미되었고, 외적 인간은 아들이 계셨던 땅으로 의미되었다. 그 이유가 주님의 영광됨은 그분의 인성 안에서 선과 진리의 하나 됨, 그로부터 그분의 인물(person) 안에서 신성과 인성의 하나 됨에 있다. 아들이 찾았던 아버지, 그분이 하나 되기를 열망했던 아버지는 그분의 내적 인간 안에 있는 신성한 선 또는 신성한 사랑이었다. 우리가 주님의 인성 안에서 선과 진리의 하나됨에 관해 말하든, 또는 신성과 인성이 그분 안에서 하나 됨에 관해 말하든 그것의 결론은 똑같다. 그 이유가 이것은 저것을, 저것은 이것을 함축하고 있기 때문이다. 서로가 서로 안에서, 서로가 서로를 수단으로 아버지와 아들이 영광됨은 13장 31절에서 이미 살폈다. 거기서 주님은 지금 그분이 아버지에게 보내는 사항과 유사한 말들을 제자들에게 전달하시고 있다. 여기서 우리가 더 살펴볼 것은, 아들에 관한 아버지의 신성화 하심이 아버지에 관한 아들의 신성화 하심에 필수적이다는 것이다. “아들을 신성 되게 하시고 아들이 아버지도 신성 되게 하도록 해주십시오.” 이것은 질서의 법에 따른 것이다. 선이 작용하고 진리가 협조하여 작용한다. 선이 행동하고, 진리가 다시 행동한다. 선은 진리를 자체에 하나 되게 해서 승강시키고, 진리는 승강되고 하나 되기 위해 스스로 감내한다. 그러므로 그들 사이의 하나 됨은 상호적이다. 신성이 인성과 하나 됨, 인성이 신성과 하나 됨은 선이 진리와 가지는 신성한 결혼, 주님 안에서 진리가 선과 가지는 신성한 결혼이고, 이로부터 천국적 결혼, 인간 안에서 선함과 진리의 결합이 온다. 주님 안에서 신성과 인성의 하나 됨은 그러므로 서로의 작용이고 상호적이다.
2. 그분의 인성이 그분의 신성과 하나 됨을 위해 기도하신 주님은 지금 그 하나 됨의 의도와 목적을 위해 기도하신다. “당신은 모든 육을 정복하는 힘을 그에게 주셨듯, 그는 당신께서 자기에게 주신 만큼의 사람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줄 것입니다.” 주님의 신성화 되심의 직접적인 효과는 모든 육(flesh)을 지배하는 권능을 그분에게 주는 것이었다. 이것은 위대하고 중대한 진리이다. 주님께서는 육을 다스릴 권능을 가지기 위해 세상에 오셨다. 그분은 인간 본성을 능가하여 구원하는 권능을 획득하기 위해 인간 본성을 입으셨다. 신성한 권능은 그 자체로서는 언제나 똑같지만, 그 권능을 인간에 연계해 생각하면 악의 창궐로 말미암아 인간에 대한 신성한 권능이 쇠약해진 듯 되었다. “모든 육체의 일들이 땅위에서 썩어 있었다” (창세기6:12). 그래서 주님께서 스스로 이 육체를 입는 것밖에 더 다른 회복의 수단은 없었다. 이 방법만이 그분 자신을 인간에게 상대적이나마 더 가까이 가져오게 하였다. 주님께서 모든 육체를 지배하는 권능을 획득하신 것은 억측(assumption)에 의해서가 아니라 육체의 신성화됨에 의해서 였다. 이로부터 아버지에 대한 그분의 기도의 언어는 “아버지께서는 아들에게 모든 육체를 다스릴 권능을 주셨다” 로 되어있다. 모든 육체를 다스릴 권능을 주님은 그분의 인성을 신성화하심으로 획득하셨다. 그리고 이것은 아버지에 의해 결과되었다. 신성한 인성이 모든 육체를 다스릴 권능을 가진 것은 기꺼이 거듭나겠다고 하는 모든 사람 안에 있는 유한한 인성을 주님 안에 있는 인성의 모습으로 만들기 위해서였다. 이것이 육을 입으심의 큰 신비이다. 즉 하느님은 인간과 함께 구원하는 현존을 획득하셨다는 것, 그리고 인성을 신성화 하심 안에서, 신성화하심을 수단으로 그들을 지배하는 권능을 획득하셨다는 것, 이 권능을 신성은 인성에 주셨는데 그 수단은 인성을 신성으로 만드심으로 하셨다. 모든 육체를 다스리는 이 권능 때문에 주님께서는 아버지께서 그분에게 주셨던 모든 사람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실 수 있었다. 이 구절의 숫자를 두고 아버지께서는 인류의 어떤 숫자만을 뽑아서 그분께 주셨고 그 사람만이 구원되고 구속된다는 의미가 담겼다는 식의 오판은 있어서는 안 된다. 엄격한 글자적 의미는 이와 반대되어 있다.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셨던 직접적이고 제한된 숫자는 열 두 사도, 오히려 아마도 그들의 주님과 구세주에 충직히 남았던 열 한 명이라는 숫자뿐일 것이다. 그럼에도 이들은 복음의 첫 열매밖에 더 아니고, 이 씨로부터 풍부하고 한없이 증가하는 수확을 거두어들이게 되어 있다. “그분의 통치와 평화에 관한 그들의 것은 끝이 없을 것이다.” “인종과 말이 다른 뭇 백성들이 그분을 섬길 것이다. 그분의 주권은 스러지지 아니하고 영원히 갈 것이며 그의 나라는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다” (다니엘7:14). 주님의 주권의 보편성이 개개인의 선택 안에서 제한을 받는 것과 모순된다고 생각해서는 안될 것이다. 본문의 주님의 말들도 열 두 명이라는 신성하게 임명된 제한된 숫자와도 그 자체 모순된다. 그 이유가 아버지께서는 아들에게 “모든” 육체를 다스릴 권능을 주셨음에도 구원하시는 그분의 작전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구절과 엇비슷한 언어로 표현된 구원함에 한계가 있는 것을 몇 번 말한 적이 있다. 그 때 우리가 살핀 것을 본문과 같이 생각하면,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사람들이란 그분의 사랑의 영향력을 받아들이고, 그분의 지혜 속의 거듭나게 하는 권능을 수단으로 자신이 그분께 끌려지기 위해 고통을 감내하는 모든 이들이다.
3. 그래서 지금 주님께서는 무엇이 이런 약속된 영원한 생명인지 선포하신다. “이것이 영원으로부터의 생명인 바, 그들은 당신을 유일한 진정한 하느님이시다고,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 그를 당신이 보냈다는 것을 알런지 모릅니다.” 아들의 기능, 그것이 여기서 암암리에 가르치고 있는 바같이, 인간에게 유일한 참된 하느님, 그리고 그 참된 하느님께서 보내셨던 분으로서 자신에 관한 것같이, 아버지에 관한 지식을 주는 것이다. 그 지식 안에 영원한 생명이 있다. 주님께서는 아버지는 유일한 참된 하느님이라 부르고, 자신을 구세주, 즉 세상에 보내신 기름부은 자로서 말하신다. 독단적인 견해를 펼친다면 이 구절에서 예수께서는 아버지와 아들이 구분되는 두 인물들일뿐 아니라 아버지에는 아들이 들어가 있지 않다는 것을 가르친다고 상상해볼는지 모른다. 그러나 이것과 모순되는 것으로 우리를 마주치게 하는 언어 자체의 한 가지 특이사항이 있다. 영원한 생명은 유일한 참된 하느님, 그리고 그분이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데 있다고 말해지고 있다. 이는 아들에 관한 지식도 아버지에 관한 지식과 동등하게 중요하고 영원한 생명에 동등하게 필요하다는 것이다. 유일한 참된 하느님, 그리고 그분이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란, 주님의 신성과 그분의 인성, 그리고 그분의 신성한 사랑과 지혜이다. 두 본질은 비록 완전하게 동등하고 하나되고 있다 해도 완전하게 구분된다. 주님의 신성한 말씀에 포함된 위대한 진리는 이러한즉, 아버지와 아들에 관한 지식은 영원한 생명을 구성한다는 것이다. 어떤 이들은 아버지를 알고 믿습니다 라고 고백하고, 구원은 이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아들을 알고 믿는다고 고백하는 어떤 이들은 그분이 아버지보다 한 등급 아래 있다고 믿는다. 그 이유가 그들은 아들이신 그분의 인성은 여느 다른 사람의 인성 같은바, 그들이 아버지라 부르는 신성보다 무한하게 한 등급 아래 일 수밖에 없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분의 영원한 신성과 신성한 인성에 관한 지식은 다함께 영원한 생명을 구성한다. 주님의 신성은 유일한 참된 하느님이고, 그분의 인성은 유일한 참된 인간이시다. “하느님은 한 분뿐이시고 하느님과 사람 사이의 중재자도 한 분뿐이신데 그분이 바로 사람으로 오셨던 그리스도 예수이십니다” (디모데전서2:5). 주님 안에서 하느님과 사람은 마치 영혼과 육체같이 하나이다. 뿐만 아니라 주님 안에서 하느님은 사람이시고 사람은 하느님이시다.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지식이 없는 참된 하느님에 관한 지식은 지나가 버린 교회에 불과 한 지식, 유대인의 하느님에 관한 지식일 뿐 기독교인의 지식이 아니다. 기독교라는 교회의 처방 아래에서 하느님에 관한 지식은 주 예수 그리스도라는 인물로 명백히 나타난 지식들, 아버지와 더불어 있었다가 우리에게 명백히 나타내 보이신 영원한 생명을 포함하고 있고 그 생명을 주고 있다. 그래서 진실로 우리는 아버지와 그분의 아들 예수그리스도와 친구관계를 가진다 (요한1서2:3). 아들 안에 아버지가 계심을 알고 그분과 친구 관계를 가진다는 것은 기독교인의 특전이다. 이것은 그분의 신성한 인성 안에 계신 여호와, 또는 그리스도 안에 계신 하느님을 알고 교류하고 결합하는 것이다.
4. 계속 아버지께 기도를 보내는 주님이 지금 말하신다. “나는 땅에서 당신을 신성화 했습니다. 나는 당신이 나에게 하라는 일을 끝냈습니다.” 주님은 지상에서 아버지를 영광되게 했고, 그분의 일을 마쳤다고 말하고 있다. 주님의 신성화 하심은 점진적일뿐 아니라 계속적인 일이었다. 그것은 연속적인 등차 일 뿐 아니라 불연속적, 구분되는 등차에 의해서도 결과 되었다. 이것이 원문 자체에서 표현되고 있는바 읽기가 애매하지만 그대로 번역한다면 “나는 신성화 되었다. 나는 끝냈다” 로도 될 것이다. 이것은 신성화 됨의 특별한 행동, 이미 말했듯이 특별한 단계와 관련되는 것으로 이해될는지 모른다. 그런 측면에서 주님께서 아버지의 일을 끝냈다고 말하실는지 모른다. 그 이유가 그분의 일이 끝났다고 하기에는 너무나 중요한 부분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그분은 아버지에게, “나는 지상에서 당신을 신성화 했습니다” 하고 말하시고 있다. 의심할 바 없이 예수는 그분께서 가르치신 신성한 지혜의 교훈과 그분이 수행하신 자비의 많은 신성한 일들로 땅 위에서 아버지를 신성 되게 하셨다. 그러나 그분 자신이라는 한 인물에 관련시켜 신성됨을 생각한다면, 땅은 그분의 인성의 지상적, 자연적 부분을 표현한다. 그리고 아버지가 지상에서 신성 되신 것은 주님께서 그분의 인성의 외적인 것을 신성으로 만드신 만큼에서 였고, 신성과 인성이 본질적으로 하나 되기 까지 했을 때이다. 그 둘은 신성화됨의 행동으로 완전하고, 영원한 하나로서는 아직 아닌데, 그 이유가 다음 절에서 주님이 이렇게 기도하시기 때문이다.
5. “지금, 오, 아버지, 세상이 있기 전 내가 당신과 함께 가졌던 영광을 가지고 당신 자신의 자아와 함께 나를 신성화 하소서.” 이 말들은 매우 놀랄만하고 대단히 중요하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이 기도의 근원과 목적(object)을 생각해보아야 한다. 이 장의 머리 글에서, 바람은 기도의 본질이라고 말했었다. 이 구절의 청원은 우리를 “무엇이 바람의 본질인가?”에 대해 더 깊이 더 멀리 조회하는 쪽으로 인도하고 있다. 거룩한 바람은 진리가 선을 위해 가지고, 선이 진리를 위해 가지는 친화력(affinity)이다. 이것과 본문과 연결되는지는 명확하지 않을는지 모르나 연결되고 있다. 창조의 질서 안에 있는 우주 안의 모든 것은 선함과 진리와 관계되고 있다. 모든 완전함은 그 둘의 하나 됨(union)으로부터 발생한다. 모든 불완전함은 그 둘의 분열(disunion)로부터 발생한다. 따라서 인간 존재 안에서 상태의 완전함은 행복을, 불완전함은 불행을 생산하는바, 행복과 불행의 수준은 모든 것의 원리들인 선함과 진리의 하나 됨과 분열됨의 수준에 의한다. 이로부터 야기되는 불완전함과 불행의 느낌은 우리에게 기도에서 표현됨 바람을 주고 있다. 사악한 자에게 있어서는 어쨌든 선함과 진리의 분열, 뿐만 아니라 악과 거짓의 하나됨이 있다. 이 하나됨에 관해 꼭 말해두어야 할 것은 이것은 불행 뿐만 아니라 재난도 생산한다는 것이다. 그들 또한 자기들의 바람들을 가지고 있고, 이것들은 그들의 생명을 구성하는 원리에 그들의 근원을 두고 있다. 거룩한 바람이 선함과 진리 사이에 존재하는 친화력이 있듯이 불경한 바람도 악과 거짓사이에 존재하는 친화력이 있다. 선은 진리를, 진리는 선을 바랜다. 마찬가지로 악은 거짓을, 거짓은 악을 바랜다. 전자나 후자에 속하지 않는 인간의 바람은 사실상 없다. 완전과 불완전, 그 결과인 행복과 불행을 현 주제와 관련해 말한다면 그것이 기독 제자 안에 존재하는 것으로 말해볼 수 있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의 제자이다면 불완전하다는 느낌, 이로부터 발생하는 불행은 기도에서 표현되는 바람을 주고 있다. 우리의 바람의 직접적인 대상이 무엇이든 간에 우리의 심정과 지성에 있는 선함과 진리의 하나 됨은 만일 우리가 신실하다면 우리 기도의 첫 번째 원리이고 궁극적인 목적이다. 행복은 우리의 목적과 목표이다. 따라서 완전함은 이 목적이 도달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다. 선함과 진리의 천국적 결혼은 완전함과 행복의 참 바탕이요 유일한 바탕이다. 모든 것에서와 같이 이 안에서도 주 예수는 우리의 선생이요 모형이다. 그 이유는 우리가 거듭나듯 그분은 신성화 되셨기 때문이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분은 완전함이 존재하는 이 하나됨, 그분 안에서 사랑과 지혜의 하나 됨을 위해 우리가 노력하는 것보다 더 직접적으로, 더 강렬하게 바라시고 기도하셨을 것이라는 점이다. 이와 같은 점이 지금 그분께서 아버지에게 전달하는 청원이다. “아버지여 세상이 있기 전에 내가 가졌던 그 영광으로 당신과 함께 신성화 하소서.” 이것은 기도하는 신성한 지혜이다. 그리고 그분의 기도는 “당신 자신과 더불어 나를 신성화 되게 하소서” 인바, 이 기도는 절대적 측면에서 신성이 육체적으로 충만 되어 머무시는 그분만에 의해서만 제공될는지 모른다. 이 기도는 아버지께서 자신을 아들에게 주신다는 것, 신성이 그것의 모든 특질을 인성의 소유가 되도록 한다는 것, 인성이 신성이 되는 것 등등밖에 더 다른 의미는 있을 수 없다. 이것이 결과 되었을 때, 신성과 인성은 충분히 하나 되어 주님이 기도하신 목적인 완전한 하나 됨을 이룬다. 우리가 인성이 신성과 하나 됨에 관해 말하든, 또는 신성한 사랑과 지혜가 인성 자체 안에서 하나 됨에 관해 말하든, 결과는 똑같다. 그 이유가 주님의 신성과 인성의 하나 됨은 인성 자체 안에서 사랑과 지혜의 하나 됨과 일치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어진 기도의 말은 “세상이 있기 전에 내가 당신과 함께 가졌던 영광으로 나를 신성화 하소서” 이였다. 세상 창조 전에 예수께서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광은 무한한 사랑과 더불어 하나 되어 있는 무한한 지혜의 영광이었다. 신성이 기도할 수 없는바, 현재의 청원은 스스로 계셨던 바와 같은 영원한 말씀에 의해 제공될 수 없었고 인성 안에 계셨던 바와 같은 영원한 말씀에 의해 제공될 수 있었다. 참으로 인성 안에서는 완벽하게 신성화 되지 않는다. 신성한 지혜로서의 예수에게 신성한 사랑으로서의 아버지로부터 분리되었다는 느낌을 준 것은 육을 입으심이었고, 이것이 하나 되고저 하는 열망, 그분과 다시 하나(reunion)되고자 하는 열망을 높이 치솟게 했다. 이 하나 됨이 신성화 하심이었고, 주님의 신성화 하심은 신성한 지혜가 세상이 있기 전에 가졌던 영광으로 귀환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귀환은 주님께서 세상에서 입으셨고 신성화하신 인성 안에서, 인성과 더불어 있었다.
6. 이 기도 전체가 제자들과 관계되는 점에서 지금 표현되는 관점과 이렇게 일치하고 있다. “나는 당신이 세상으로부터 나에게 준 사람들에게 당신의 이름을 분명히 보여주었습니다. 그들은 당신의 것이었고, 당신이 나에게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당신의 말을 지켰습니다.” 하느님의 이름이 그분의 본성을 표현해 준다. 예수는 이름일 뿐 아니라 하느님의 속성들, 즉 신성한 뜻과 지혜를 명백히 나타내고 있다. 그리고 이 속성들을 그분은 그분의 인물에서, 그리고 그분의 말과 일들에서 명백히 나타내셨다. 그분은 이것들을 아버지께서 세상으로부터 그분께 주셨었던 사람들에게 명백히 나타내셨다. 아버지께서 세상으로부터 그분께 준 이들이란 하느님을 사랑함을 수단으로 세상을 사랑함으로부터 끌어내지도록 자신을 허용한 이들이다. 주님께서 그분의 사랑의 힘을 수단으로 그분 자신과 연결을 맺을 수 있는 모든 이들은 그분이 아버지께 “그들은 당신의 것입니다” 라고 말한 이들이다. 그리고 주님의 사랑에 의해 그분의 진리를 받아들이도록 끌어질 때, 주님께서 “당신은 그들을 나에게 주었습니다” 라고 말하시는 이들이다. 단순한 선(simple good)에 있는 이들, 그들이 어른이든, 아이이든, 기독교인이든, 이교도이든, 그들이 주님의 사랑을 수용하는 만큼에서 그분 자신과 천국과 연결되어 보존된다. 그러나 선만이 기독교인과 천사적 특성을 만들지 않는다. 그것은 선과 진리가 하나 됨으로만 형성될 수 있다. 그러므로 주님의 섭리와 은총의 꾸준한 목적(object)은 선 안에 있는 모든 이들이 그분의 진리를 인정하고 그에 관한 지식에로 끌어내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버지께서는 인간을 아들에게로 언제나 이끄시고, 아들은 인간을 아버지에게로 언제나 인도하신다. 그 이유가 선을 통하여 주님은 인간에게 진리를 추구하고 진리를 받도록 배려하시고, 그분의 진리를 수단으로 그들의 선이 형성되게 하신다. 그리고 그 선을 그분의 사랑이 머물 수 있는 것으로, 그 선에 의해 그분의 사랑이 명백히 나타낼 수 있는 것으로 만드신다. 아버지에 의해 아들에게 주어진 이들이란 주님께서 그분의 사랑을 수단으로 그분의 진리에로 끌어낸 이들과 같다. 그러므로 첨가하신 말은 “그들은 당신의 말씀을 지켰습니다” 이었다. 주님의 말씀이란 그분의 진리이다. 진리가 아버지의 말씀이라 불리울 때 그것은 사랑으로부터 오는 진리를 뜻한다. 사랑에 의해 진리에로 이끌리는 이들은 주님의 말씀을 “지킨다.” 그들은 그것을 알뿐 아니라 그것을 살아낸다. 그리고 그것을 살아냄으로 그들은 자신 안에서 그것을 실감한다.
7. 주님의 말씀을 들음은 아버지의 지식을 아들에게 준다. “지금 그들은 당신이 나에게 준 것은 무엇이든 모든 것들이 당신으로부터 이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아들이 소유했던 모든 것들을 아버지로부터 받았다. 그러므로 그것 모두는 신성한 것이었다. 제자들은 지금 이것을 알고 있다. 이 지식의 획득은 모든 참된 제자된 신분에 상응하는 단계에 소속되고 있다. 제자들이 아버지의 말을 지킬 때까지 그리스도의 참 신성, 즉 그분의 인성의 신성하심은 성경적인 의미에서 알려지지 않는다. 주님의 인성의 신성의 형상(image)이 우리 자신의 체험 안에서 반사(reflect)될 때까지 우리는 그것을 결코 진실로는 알지도 못하고 믿지도 않는다. 우리 안에 있는 영성(spirituality)이 주님 안에 있는 신성의 형상이다. 아들이 가진 모든 것이 아버지 속에 있다는 것을 안다는 것은, 신성한 진리의 모든 것이 신성한 선 속에 있다는 것, 신성한 선의 실체를 표현한 형상(히브리서1:3)이다는 것도 더불어 안다는 것이다. 본질(essence)은 형체(form) 속의 모든 것이고, 실체(substance)는 형상(image) 속의 모든 것이다. 주님의 신성한 진리, 또는 신성한 인성은 신성한 선이 형체로 있는 것밖에 더 아니다. 따라서 자신의 진리는 자신의 선함의 형체와 형상, 또는 예수에 대한 신앙 은 예수를 향한 그의 사랑의 형체와 형상이라는 것을 알 때, 제자들은 이것을 알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8. 주님께서 계속 이으신다. “그 이유는 내가 당신이 나에게 준 말들을 그들에게 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것들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내가 당신으로부터 왔다는 것을 확실하게 알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당신이 나를 보냈다는 것을 믿었습니다.” 주님의 말들은 비록 표현에서 인간적이다 해도 근원과 본성 측면에서 신성이었다. 그리고 비록 진리의 말들이다 해도 사랑의 말들이었다. 주님의 말씀은 제자들이 사랑 안에서 받았을 경우 그것은 사랑의 말씀이었다. 이것이 제자들로 확실히 알게 한 것은, 신성한 진리 자체는 신성한 사랑으로부터 나왔다는 것, 그 진리의 사명이 무엇이든 그것은 인간의 구원과 행복을 위해 무한한 사랑과 자비에 의해 보내진 특사라는 것에 대해서이다. 8장42절에서 살폈듯이 신성한 진리는 그 스스로 왔던 것이 아니라 신성한 사랑이 보낸 것이다. 만일 신성한 진리가 그 스스로, 그것만 왔다면 그 진리는 모든 사람을 단죄했었을 것이다. 진리는 사랑이 보냈기 때문에, 그리고 사랑이 진리 안에 머물었기 때문에 그 진리는 모든 사람을 구원하러 왔던 것이고, 사랑 안에서 그 진리를 받는 모든 사람을 구원하고 있다. 사랑 없이 받은 진리는 아직도 단죄한다. 그 이유가 진리를 알고 있을 뿐 사랑하지 않는 이들은 이렇게 심판 받기 쉽다. “내가 말했던 그 말들이 마지막 날에 너를 심판할 것이다.” 이로부터 주님의 기쁨은 그분의 제자들이 그분이 하느님으로부터 왔다는 것을 확실한 알게 된 것에 있다. 어쨌든 이 정도조차도 그들이 참된 제자라면 소유하도록 요구되는 지식의 절반만 소유했다고 보아야 한다. 그들은 예수께서 하느님께로부터 오셨다고 확실히 알았으나, 그들은 그분이 하느님께로 다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을 아직 알지 못했고 또 그것을 기꺼이 배우려 하지도 않았다. 한 마디로 그들은 그분이 신성화되셔야만 한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그 이유가 그분이 이런 사항을 그들에게 말했을 때 슬픔이 그들의 심정을 메웠을 뿐이기 때문이다.
9. “나는 그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나는 세상을 위해 기도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당신이 나에게 준 그들을 위해서. 그 이유가 그들은 당신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세상 속의 사람들은 지금 주님의 기도 대상이 아니다. 세상의 원리를 구성하는 추상적 의미의 세상 자체는 존재 않았고 존재될 수도 없다. 아버지에 의해 아들에게 주어진 이들은 세상을 구성하는 이들과 반대되는 사람들이다. 아버지의 것은 선한 이들이고, 세상의 것은 악한 이들이다. 주님의 현재 기도의 목적은 세상으로부터, 세상너머로 들어올려져 왔었던 이들, 그리고 선함을 수단으로 진리를 인정함에로 가져와졌었던 이들이 그 안에서 보존되도록 하시려는 데 있다. 주님의 기도에는 이런 사항 역시 포함되고 있다. 모든 제자들의 마음 안에서 진리를 지각함과 하나 되어 왔었던 선에 대한 애착 이 보존되고 완전해지도록 하시려는 것이다. 주님은 세상을 위해 기도하시지 않았다. 다시 말해 그분은 제자들이 예수로부터 받았던 천국적 원리와 혼합된 세상적요소를 위해 간구하신 게 아니었다. 오히려 이것은 간구하셨다는 표현보다는 반대하셨다고 하는 편이 더 나을지 모른다.
10. “그들은 당신의 사람들입니다” 라고 기도하시면서 첨가하신다. “모든 나의 것은 당신의 것이고, 당신의 것은 나의 것입니다. 그리고 나는 그들 안에서 신성화 됩니다.” 이 말들을 주님 자신의 측면에서 보면, 아버지의 신성이 아들의 인성에 속해 있다는 것, 아들의 인성은 아버지의 신성에 속해 있다는 것,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은 사람이시고 사람은 하느님이시다는 것을 뜻하고 있다. 진실로 아들의 것인 모든 것, 모든 개인들은 아버지의 것도 되고, 실지로 아버지의 것인 모든 것은 아들의 것도 된다. 진리 안에 진실로 있는 모든 이들은 선함 가운데도 역시 있고, 선함에 실지로 있는 이들은 진리 안에서도 역시 있다. 신앙을 가지고 있는 모든 이들은 사랑 역시 가지고 있고, 사랑을 가지고 있는 모든 이들은 신앙 도 가지고 있다. 거듭나는 동안 제자들은 선과 진리를 모두 가지고 있으나, 그것들은 모두 불완전하고 그 하나 됨은 불완전해 있다. 이것은 저것에 의해 완전해진다. 진리는 선을 순수하게 하고 계발시켜 주고, 선은 진리를 따뜻하게 하고 드높인다. 전자가 순수해지고 후자가 드높여질 때, 그들은 하나 되고, 그들의 하나 됨이 거듭남을 구성한다. 그러면 전자가 가진 모든 것은 후자의 것이다. 선은 진리에 속하고 진리의 생명이다. 그리고 진리는 선에 속하고 선에게 빛을 준다. “나의 모든 것은 당신의 것이고, 당신의 모든 것은 나의 것”이라는 주님의 말씀이 제자들과 관련될 때 위의 설명은 제자들의 상태이다. 그리고 주님이 거듭나는 이들 안에서 영광되실 때, 거듭나는 사람 안에서 “나는 그들 안에 신성화 되었다” 라는 신성한 말씀이 성취된다. 영광(glory), 이 단어를 주님에 관계시켜 볼 때, 그분으로부터 진행되는 신성한 진리를 뜻한다. 그 이유는 신성한 진리가 천국의 빛이기 때문이고, 이로부터 천사와 인간에게 모든 총명과 지혜가 파생될 뿐 아니라 마찬가지로 모든 행복도 나오기 때문이다. 영광이 이러한바, 주님의 영광은 천사와 인간을 계발해주고, 그들에게 총명과 지혜를 주며, 행복 되고 즐거운 모든 것으로 축복하고, 천국에 있는 모든 것에 장려한 아름다움을 준다. 그러므로 신성한 영광은 인간의 영광과는 공통되는 게 하나도 없다. 그 이유가 인간적 영광은 자신의 탁월함만을 추구하나 신성한 영광은 타인들에게 실례를 들어 설명하는 것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11. 주님께서 계속하신다. “지금 나는 세상에 더 이상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세상 안에 있습니다. 그리고 나는 당신에게 갑니다. 신성한 아버지, 당신 자신의 이름을 통하여 당신이 나에게 준 이들을 지켜주소서, 하여 우리가 있듯, 이들도 하나이게 하소서.” 주님은 세상에 더 이상 계시지 않았다 (16장33절). 제자들은 세상을 아직 이겨내지 못했다. 그러므로 그들은 세상 안에 아직 있다. 그러나 예수는 세상을 정복하셨는 바, 그분의 제자들 역시 이겨낼 수 있게 해 놓으셨다. 그분의 제자들이 아직 세상에 있으면서 세상의 고난을 건너가면서, 그들 자신의 심정 안에서 그것을 이겨내느라 분투하는 동안, 주님의 바람과 기도는 “거룩한 아버지, 당신의 이름을 통해 당신이 내게 주셨던 그들을 지켜 주십시오”이었다. 아버지라는 간단한 이름으로 신성에 청원을 보냈던 예수께서 지금 그분을 거룩한 아버지라고 부르신다. 교회 멤버를 보존함이 원하고 바라던 복됨일 경우 하느님이 거룩함으로 불리는 게 타당하다. 주님께서는 아버지가 그분의 이름으로 제자들을 지켜 주시기를 간구하시고 있다. 가장 높은 측면에서 예수 자체가 아버지의 이름이다. 그 이유가 예수가 아버지를 알려지게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거룩함은 여호와 예수 모두에게 있는 특출한 품성이다. “당신은 옥좌에 앉으신 거룩하신 분, 이스라엘이 찬양하는 분” (시편22:3). 예언적으로 예수는 거룩한 분으로 불리우고 있다 (시편16:10). 그분은 임신되신 때부터 거룩하셨다 (누가1:35). 천국에서 그분은 거룩이신 유일한 분으로 찬양되었다 (계시록15:4). 주님 자신이 거룩하신바, 천국은 그분의 거룩함의 옥좌이다 (시편47:8). 그리고 거룩함은 땅 위 그분의 집이 된다 (시편93:5). 주님은 거룩한 하느님이시고, 그분의 교회 멤버는 거룩한 백성이다. 제자들을 거룩한 아버지의 이름으로 지킨다는 것은 그들을 거룩함의 상태로 보존한다는 것이다. 예수의 제자임을 특징짓게 하는 거룩함은 예수 자신을 특징 지워주는 것, 그분만이 있는 거룩함, 그분만이 인간에게 나누어 줄 수 있는 거룩함에 속한 것이다. 이 거룩함은 마치 그분의 신성의 형체 또는 이름으로서 그분의 인성 안에, 또는 그분의 사랑의 표현, 또는 이름으로서 그분의 진리 안에 있다. 그런데 주님께서 거룩한 아버지께서 그에게 주셨던 이들을 보존해 달라고, 사랑에 의해 진리에로 이끌려 왔었던 이들을 똑같은 영향력에 의해 신앙 을 유지하게 해달라고 기도하신다. 이것의 목적은 “우리가 하나이듯 그들도 하나이도록” 하는데 있다. 제자들의 하나 됨은 아버지와 아들의 하나 됨의 형상이요 효과이다. 아버지와 아들, 신성과 인성은 하나이다. 마치 영혼과 몸이 하나이듯, 의지와 이해성이 하나 이듯, 선과 진리가 하나이듯 한 것과 같다. 주님 안에서 신성과 인성의 이런 하나 됨(unity)은 인간 안에서 하나 됨의 큰 원형(grand archetype)이요 인간 사이에 있는 하나 됨의 큰 원형이다. 인간의 마음 안에서, 그리고 인간들 사이에 있는 모든 불일치는 영과 육, 의지와 이해성의 분열(disunion), 불화에 그 원인이 있다. 이를 위해 섭리가 장치되었다는 것은 그 얼마나 다행인가! 이것을 바래어 간구하신 이 기도는 그 얼마나 자비로운가! 우리 속의 하나 됨이 아버지와 아들의 하나됨같게 되는 것, 그들이 하나이듯 우리 모두가 하나 되는 것이야말로 가장 큰 성취(consummation)이다. 우리가 육의 욕망을 이겨내고, 자연적 모든 욕망과 더불어 옛 사람이 영적인 모든 애착과 더불은 새 사람에게 자리를 내어줄 때, 의지의 바람과 이해성의 생각들이 일치된 상태에 있을 때, 인간이 자기가 생각한대로 뜻하고, 뜻한대로 생각할 때, 선함과 진리, 선행과 신앙이 마음과 삶의 모든 행동 안에서 하나되어 있을 때, 영과 육은 하나이다. 이것은 주님께서 그분 자신 안에서 결과 되었던 하나 됨으로 결과된 것이고, 이것만이 그분 안에서 모든 것은 화합시키고, 각각 안에서, 그리고 모든 사람 사이에 있는 하나 됨이다.
12. 우리의 주님께서 말하신다. “내가 그들과 함께 있었는 동안, 나는 당신의 이름 안에서 그들을 지켰습니다. 당신이 나에게 준 이들을 나는 지켰습니다. 그리고 그들 중의 누구도 잃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멸망의 아들(만 잃었습니다). 성경이 성취되도록 해서 입니다.” 주님이 세상에 계셨던 동안 그분은 아버지의 이름으로 제자들을 지켰다. 그런데 그분이 더 이상 세상에 있지 않는 지금, 아버지 스스로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지켜달라고 기도하시고 있다. 우리의 주님께서 말하시는 두 시기는 모든 제자들의 체험에서 발생하는 두 상태들이다. 첫 번째 상태는 진리의 힘으로 선함을 간직하고 있는 상태이고, 두 번째 상태는 선함의 힘으로 진리를 간직하는 상태이다. 주님 자신은 아버지와 아들, 선 자체와 진리 자체 모두 이시다. 첫째 상태에서, 진리가 제자들을 선으로 인도하는 가운데 그분이 그들과 더불어 계셨고, 둘째 상태에서, 선이 그들을 진리를 수단으로 인도하는 가운데 그분이 그들 안에 계신다. 이렇게 해서 주님은 아버지께서 그분께 주셨던 모든 이들, 즉 그분의 사랑의 영향력으로 말미암아 그분의 진리에 이끌려 왔었던 모든 것을 간직하셨다. 제자들 중에 멸망의 아들 안에 있는 한 가지 예외가 있다.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셨던 이들 중의 한 명인 유다가 바로 한 가지 예외이다. 그는 사랑을 수단으로 진리에로 이끌려 왔던 사람이었으나 후에 타락해서 모든 죄 중에서 가장 심각한 죄인 모독죄를 짓는 사람을 표현하고 있다. 일반적 의미에서 유다는 유대교회를 표현했다. 그 교회가 말씀을 소유하면서 말씀 속의 진리를 뒤집었다. 마치 유다가 주님이라는 인물로 육이 된 말씀을 배반한 것과 같다. 유다는 인간 본성 속의 육에 속한 원리들도 표현했다. 이 원리는 진리를 뒤집는 것의 근원이다. 그러므로 유다는 인간 사이에 있는 육적인 마음도 표현한다. 이 마음은 자신의 이익을 증진시키는 도구로 진리를 이용해버린다. 진리가 자신의 심정을 깨끗하게 하는 대신 진리를 자신의 이기적이고 세상적인 목적에 사용하고 있다면 그들은 진리를 모독하고 있다. 그러면 그들은 하느님의 아들인 대신 멸망의 아들인 것이다. 멸망(perdition)으로 번역된 단어는 완전한 파괴를 뜻한다. 그리고 끝없이 깊은 구렁으로부터 연기가 올라오는 곳, 메뚜기 군대의 왕이 되었던 끝이 없는 구렁의 천사의 이름으로 계시록(9:11)에 나타난 것과 같은 이름이다. 메뚜기란 감각적 원리의 상징체이다. 이 원리가 통치할 때 모든 선과 진리의 완전한 파괴, 멸망이 결과된다. 그 이유가 인간이 그의 감각에 노예가 되고 있을 때 그는 모든 영적인 선과 진리를 뒤집고 부정한다. 그러므로 메뚜기는 왕을 가졌고, 그의 이름은 아폴리온, 파괴자이다. 지금 유다는 인간 본성의 가장 낮은 감각적, 또는 육적 원리를 표현했다. 멸망의 아들을 잃게 된다는 것은 성경이 성취되는 것이었다고 말해지고 있다. 누군가가 멸망의 아들, 악마의 자녀라고 불리울 때, 이것은 그가 확증하여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그 이유가 이미 살핀 바대로(1장13절), 어느 누구도 하느님의 자녀로서, 또는 악마의 자녀로 처음부터 시작되는 게 아니라, 어느 쪽에 속하느냐는 그 자신을 통치하는 사랑의 목적이나 대상이 되는 것을 닮아감으로 태어나져 결정되기 때문이다. 더 뾰족한 측면에서 보면, 멸망의 아들이란 악으로부터 바깥쪽으로 출생한 거짓 원리이다. 그 이유는 진리가 선함의 산물이듯, 거짓은 악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멸망의 아들은 잃게 된다고, 성경이 성취되기 위해서 라고 말해지고 있다. 유다에 관한 예언은 시편 109편에 있다. 이 시편은 주님의 깊은 시험을 취급하고, 가장 격렬한 저주가 적을 향해 말해지고 있다.
13. “지금 나는 당신에게 갑니다. 이런 것들을 내가 세상에서 말하는 것은, 그들이 자신들 안에서 나의 환희가 충만해졌으면 해서 입니다.” 주님의 인물 안에서 인성이 신성과 하나 됨이 지금 가까워졌다. 거룩한 기도의 이 구절, 그리고 다른 구절에서 예수께서는 그 하나 됨이 마치 성취되신 것처럼 말하시고 있다. 이것은 말씀이 미래사건들을 말할 때 있는 것으로 대단히 흔하다. 특히 그것들이 주님께 개인적으로 관계될 경우 마치 그 사건들은 현재인 것처럼 다루어지고 있다. 예를 들면, “…우리에게 한 아이가 태어나는데-너는 내 아들, 오늘 내가 너를 낳았다”(이사야9:6). 그러나 본문의 경우 추가되는 이유가 있다. 이미 우리가 살폈듯, 주님의 신성화하심은 계속적인 등차를 수단으로 결과 되었다. 그리고 각 등차(degree)는 두 가지 구분되는 행동들, 즉 내적 인간에서의 행동과 외적 인간에서의 행동들로 구성되고 있다. 주님의 내적 인간의 신성화하심이 지금 결과된 것이다. 그리고 위대한 일을 완성하는데 요구되어졌던 모든 것은 십자가의 수난이었고, 이를 수단으로 외적 인간, 그분의 몸까지도 신성으로 만들어지게 되었다. “지금 나는 당신께로 옵니다, now come I to thee”는 그분의 말은 지금 때가 된 것, 이미 성취하셨다고 말하셨던 것, 즉 인성이 신성과 완전히 하나 되었음을 표현하고 있다. 이렇게 해서 비록 그분이 세상에 더 이상 있지 않는다 해도 그분의 제자들은 아직 세상에 있었다. 그런고로 ”내가 세상에서 이런 것을 말한 것은 그들이 자신들을 내 기쁨으로 가득 채우도록 하려 해서” 였다. 영적 측면에서 세상은 장소가 아니라 상태인데 주님은 이 측면을 말하시고 있다. 글자대로 보면 주님은 그분의 제자들과 함께 있으면서 아버지께 기도를 보내고 있다. 영적으로 이것은 그분이 지금 무엇을 하시는지를 묘사하고 있다. 그래서 세상이 아직 그들 안에 있는데 그 세상은 온전히 이겨내지 않은 상태에 있다는 말이다. 모든 시대에 걸쳐 있는 제자들에 관련해 생각하면, 주님의 이 기도는 심정 안에 있는 그분의 사랑과 하나된 후 이해성에 있는 그분의 진리의 열망(aspiration) 이다. 그리고 이 하나 됨의 복된 결과가 천국적 기쁨으로 충만 되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이 기쁨을 그분의 기쁨이라고 부르시고 있다. 주님께서 그분 자신의 기쁨이라 부른 기쁨은 진리가 선과 하나될 때 그 진리가 가지는 기쁨이다. 거듭남은 노동과 슬픔의 일인바 거듭난 후의 기쁨이야말로 어떤 기쁨인지 곰곰이 되새겨보면 위의 주님의 기쁨을 감지 할 것이다. 진리를 수단으로 거듭남이 결과되는바, 진리는 실질적인 대리인(agent)이다. 진리는 이런 일을 자연적 마음 속의 악과 싸워서 그것을 몰아냄으로 수행해낸다. 악과 싸울 때는 슬픔의 때이다. 그러나 전투가 끝나고 진리가 선과, 신앙 이 사랑과 하나 될 때 이 슬픔은 기쁨으로 바뀐다. 이 기쁨이 기도의 내용인바, 이 기쁨은 아직 실감되지 않았다는 말인데, 이것은 진리가 아직 자연적 마음 안에 있다는 것을 함축하게 된다. 이 마음은 개인적으로, 실험적으로 세상을 말한다. 주님이 기도하신 이 기쁨은 그분 자신인데, 그 이유는 거듭남이 그분의 신성화하심의 형상 때문만이 아니라 더불어 거듭나는 상태의 기쁨은 우리 안에 주님 자신의 기쁨이 가득차는 것이기 때문이다.
14. 거듭남은 신성한 진리가 자연적 마음 속의 악과 싸워서 결과 된다고 위에서 말했다. 이에 관해 우리 주님께서 말하신다. “나는 그들에게 당신의 말씀을 주었습니다. 그리고 세상은 그들을 미워했습니다, 그 이유는 그들이 세상 속에 있지 않기 때문인데 내가 세상 속에 있지 않은 것과 동등합니다.” 거듭남의 도구인 진리는 진리만이 아니다. 선함으로부터 온 진리가 새 삶, 기독인의 체험의 실지의 시작을 형성하는 진리이다. 이 구절에서 주님이 말하시는 진리가 바로 위의 진리이다. 그 이유가 그분이 제자들에게 주셨던 말은 아버지의 말이었기 때문이다. 세상적 사랑과 적대관계에 있는 품성 속에 위 진리는 있다. 그래서 제자들을 세상에 속하지 않게 만든다. 우리 속에 있는 세상은 지식의 형체로 있는 진리에는 대항하려 봉기하지 않지만 선함의 형체로 있는 진리에는 일어나 대항한다. 세상은 아버지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이들을 미워한다. 그이유가 천국적 사랑으로부터 오는 진리는 세상적 사랑으로부터 오는 거짓에 반대되기 때문이고, 언제나 미움과 적대감만을 일으킨다. 이런 진리는 제자들을 세상 속에 있지 않게 만든다. 마치 선함으로부터 오는 진리 자체로서의 주님이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것과 같다.
15. “나는 당신이 그들을 세상으로부터 데려가라고 기도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악으로부터 지켜달라고 기도합니다.” 이 기도, 자연적 의미에서 생각해도 대단히 유익하고 유용한 교리를 가르치고 있다. 세상은 천국을 위한 학교이다. 세상 속에서의 의무들, 만족들, 시련들은 더 높은 세상에 있는 유용함(usefulness)과 행복을 우리에게 교육하는 수단으로 모두 신성하게 허용되거나 위임되어 있는 것이다. 이세상에서 기독교인은 그의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함이라는 원리를 실습할 현장을 발견한다. 격리된 생활이 정신적인 종교나 바깥쪽 경건함에 더 적당할 듯 여겨질지 모른다. 그러나 종교는 하느님을 생각해보는데 있지 않고 그분의 뜻을 행하는데 있다. 그것은 형식이 아닌 본질적인 경건함에 존재한다. 하느님이 우리의 모든 생각, 말들, 행위들에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우리가 그분의 사랑과 진리의 영향력 아래에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할 때 우리 관심사의 직접적인 대상이 세상이든 천국이든 관계없다. 이세상 속에서 노력하고 이 세상을 돌보는 것이 천국적 삶을 가꾸는데 불리하게 한다는 관념은 천국적 삶이 무엇인지에 관한 완전한 잘못에서 근원 되고 있다. 주님의 왕국은 씀씀이(use)의 왕국이다. 현재의 우리 삶의 모든 것은 위 왕국의 씀씀이와 의무들을 우리가 시작하는데 가장 적합한 수단이 되도록 창조와 섭리의 법칙을 수단으로 질서 잡혀 있다. 정의를 실습하는 학교인 이 세상은 덕행을 자극할 뿐만 아니라 악행을 행하도록 하는 시험도 받게 한다. 죽음의 나무는 아직도 생명의 나무 옆에서 자라고 있다. 그리고 참다운 덕행은 선을 선택하고 악을 거절하는데 있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세상에서 데려가시는 것을 바라시지 않는 한편 그들이 악으로부터 지켜지기를 기도하시고 있다. 그분은 악으로부터 그들을 지켜야 한다는 것을 바래신 게 아니라 그들이 악으로부터 자신을 지켜야 한다는 것만을 바라시고 있다. 세상 안에서 죄있는 행동으로 존재하는 악은 죄짓고 싶어하는 경향성으로 우리 자신 안에서 상존한다. 따라서 자신 안에서 악을 분리시키지 않으면 바깥 세계에서도 악은 분리되지 않는다. 그렇다. 그것은 우리에게 피해를 줄 것이다. 그것은 세상을 극복할 기회를 우리에게서 박탈한다. 그 이유가 세상을 사랑함이 극복되어지는 행동과 그 반대 행동이 있는 동안 세상을 사랑함과 세상 자체의 연결도 끊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덕 있는 행동은 시험을 피함으로서 있어지는 게 아니라 시험을 정복함으로 결과된다. 우리가 세상에 속하지 않으려면 세상으로부터 은둔해 생활하면 되어지는 게 아니라 세상 안에서 세상에 속하지 않은 생활로 가능하다. 우리가 세상을 실지로 정복할 수 있는 것은 세상 안에 있을 때뿐이다. 그 이유가 우리의 원리들이 실지로 테스트 받는 것은 이 세상뿐이기 때문이다. 세상에서 도피함으로 혜택을 잃는 것외에 우리가 생각해야하는 것은 그분이 수여하는 혜택이다. 우리가 이 세상에 가져다 놓인 것은 우리 자신만이 아니라 타인을 위해서 이기도 하다. 그것은 안쪽으로 우리 자신을 누르는 것만 아니라 기독인의 여행길에서 타인을 돕는 것도 있다. 그러므로 기독인의 삶의 영역이 이 세상에 속해 있는 동안 주님의 바람은 세상의 참 악들을 선의 수단이 되게 하는 것이다. 그 이유가 그분만이 악의 시험에 저항하는 참된 선함이시기 때문이다. 우리가 세상에 관해 말하는 가운데 부분적이나마 들추었던 세상에 대한 순수한 영적 의미는 우리 안에 있는 세상이다는 것이었다. 이런 의미에서 제자란 선함과 진리의 원리들이다. 이것은 주님에 의해 마음 안에 이식되어져 왔다. 세상은 자연적 마음 자체이다. 그리고 이 세상의 악이란 자연적 마음 안에 자리잡고 있는 유전적인 악, 그리고 우리가 획득한 악이다. 영적인 선이 삶의 원리가 되도록 하는 것은 그 원리대로 살았어야만 한다. 영적인 선이 마음의 의도로서 존재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그 선은 삶의 행동과 습관으로 존재해야만 한다. 그러므로 선은 세상이나 세상의 업무에 관심을 두지 않은 채 추상적 원리에서는 발달되지 않고, 세상과 연결된 채 존재하는 악으로부터 지켜질 때 발달된다. 이런 발달을 도모하는데 필요한 것은 선이 악과 섞이지 말아야 한다는 것, 조금이라도 악과 뒤죽박죽 되어서는 안 되는 것, 또는 악에 의해 오염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주님은 인간 마음 안에서 선을 악으로부터 절묘하게 분리하신다. 그리고 그분 자신으로부터 온 것과 세상으로부터 있는 어떤 것들과 혼합되지 않고 보존되도록 꾸준히 섭리하시고 있다. 선과 악을 혼합하는 것은 거룩한 것을 모독하는 것이고 이것은 영혼을 가장 깊은 재난으로 빠지게 한다. 제자들이 이 세상에 있되 악에서 지켜져야 한다는 것은 주님께서 이 구절에서 그분 스스로 말하신 기도이지만 이 기도는 모든 참된 제자의 심정에 지금도 영감을 불어넣고 있다. 그리고 이 기도의 내용은 모든 제자가 실감하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목적이기도 하다.
16.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하심으로 위 진리를 더 명백한 빛에 놓으시고 있다. “그들은 세상 속에 있지 않은바, 내가 세상 속에 있지 않은 것과 동등합니다.” 주님이 보이신 본보기는 경건하든 또는 감정적이든 추상적인 모든 종교 형체에 대한 실제의 꾸지람이다. 그분은 세상의 인간 사이에서 지혜를 가르치고 선을 베푸셨다. 그분은 그들을 회당에서, 성전에서, 장터에서, 길에서 만나셨고, 슬퍼하고 있는 집에도 들어가셨고 잔치석상에도 앉으셨다. 세상에서 그분의 삶은 짧았다. 그분이 공생애를 시작한 나이는 30세이었다. 그 나이 이전에 그분이 어떻게 살으셨는지에 관한 기록이 거의 없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기록되지 않은 그분의 삶은 기록되어진 삶을 준비시켰다. 그분의 삶의 세부적인 형체가 무엇이었는지를 우리는 알지 못하나 그것은 그분의 무한한 선행과 가장 순수한 거룩함의 삶 안에서 발견하게 되어있다. 그분만이 세상에서 살고 있으시면서 “나는 세상 속에 있지 않다” 라고 진정 말하실 수 있다. 그분은 세상의 원리들을 동기로 하여 하신 것이 하나도 없었고, 세상의 불순물로 때묻은 적도 없으셨다. 그분은 거룩하셨고, 더럽혀지지 않았고 죄인들과는 분리된 상태였다. 이와 같은 상태들은 얼마큼의 분량일지는 몰라도 기독제자들의 것이 되어야한다. 그리고 참된 제자는 그와 같다. 주님께서 그분 자신의 제자들, 그리고 모든 참된 제자들에 관해서 이렇게 말하신다. “내가 세상에 속해 있지 않은 것같이 그들도 세상에 속해 있지 않다.” 주님으로부터 오는 모든 것은 그분 자신과 같은 것이다. 우리가 진실로 그분의 제자인 것을 아는 수단 중의 하나는 우리 자신의 마음과 삶 속에 있는 비세상적인 품성이다. 세상 안에(in)가 아니라 세상에 속해(of) 있지 않은 것은 주님께서 그분의 참된 추종자에 관해 주시는 묘사이다. 인간을 참된 제자로 만드는 것은 그 원리 자체에 있다. 그들은 세상 안에 있다 해도 세상 속에 있지 않다. 이런 점에서 그들은 주님 자신과 닮아있다. 주님으로부터 오는 모든 진리는 그것의 본성에서 비세상적이고, 비세상적인 것이 파생되는 신성한 진리와 같다. 그래서 비세상적 원리는 제자들을 비세상적 삶으로 안내한다.
17. 세상에 속해 있지 않은 제자들은 영적인 순수함과 온전함을 발전시킬 수 있다. “당신의 진리를 통하여 그들을 신성하게 하십시오. 당신의 말씀이 진리입니다.” 정화한다(sanctify)는 것은 거룩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정화는 신성한 진리에 의해 결과되어진다. 그러나 이 진리는 이해성에 접수된 상태의 신성한 진리 만으로가 아니라 신성한 사랑으로부터 진행된 신성한 진리, 즉 심정 에 접수된 신성한 진리에 의해 결과된다. 그러므로 정화되게 하는 신성한 진리는 말씀 – 씌어있는 말씀이다. 말씀은 거듭나게 하고 구원해주는 모든 진리의 직접적인 샘이고, 가장 높게는 주님, 즉 말씀이 육을 만드신 바대로의 주님, 진리의 근원, 진리를 주시는 분으로서의 주님이다. 씌어진 말씀 속의 모든 효력은 말씀 안에 머물고 있는 생명 있는 말씀으로부터이다. 그리고 말씀으로서의 주님은 신성한 사랑으로부터의 신성한 지혜이시다. 아버지라 불리는 신성한 사랑 또는 선함은 모든 정화되게 함과 구원받음의 근원이다. 그러나 신성한 선함은 이해성에 의해 언제나 행동한다. 우리가 이 구절이든, 신,구약 성경의 여느 다른 구절에서이든 하느님의 말씀을 들을 때 우리는 그 말씀을 인간에 의해 발음된 단어들로 생각하여 지나치기 쉽고, 기껏해야 어떤 마음이 또 다른 마음에 사상을 운반해주는 생각의 표현으로 간과하기 쉽다. 단어들은 이런 식의 범위에 한정되어 있지 않다. 인간이 발음하는 단어들은 그의 온 마음을 포함하고 있다. 그이유가 생각과 애착 의 참 본질은 모든 표현 안에 체현되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의 마음은 유한하고, 그의 말들은 그의 유한함과 불완전함을 함께 나누고 있다. 이런 것은 설사 그가 진리를 말할 때조차, 그것이 사랑 안에서 말해질 때 조차에서도 그러하다. 신성한 존재의 경우 이 경우는 다르다. 그분은 진리를 말할 뿐 아니라 말해진 그 진리 자체이다. 그분은 사랑으로부터 진리를 말하실 뿐 아니라 그 사랑 자체이시다. 최고 높은 측면에서 주님 자신은 진리이시고, 이 진리를 통해, 이 진리 안에서 제자들은 정화된다. 그리고 그분 자신이 진리이신 말씀이다. 그분 안에 정화됨이 있다. 아버지께서는 그분의 말씀으로 제자들을 정화하신다. 그분의 신성한 사랑으로부터의 주님은 그분의 신성한 진리를 수단으로 그분의 백성들을 깨끗하게 하고 거듭나게 하신다.
18. 진리로 정화된 후 제자들은 그것을 선포하려 파견되어진다. “당신이 세상으로 나를 보냈듯, 나 역시 세상으로 그들을 보냈습니다.” 제자들은 모든 다른 일과 같이 세상을 기독교에 귀의시키는 일에 신성한 스승을 따르게 되어있다. 주님의 말씀에는 이것보다 더 깊고 또 다른 의미도 있다. 그분이 내려오신 세상, 그분이 수고하신 세상은 타락된 인성이라는 세상이였다. 주님이 타락된 이브의 딸로부터 입으신 인성 안에서 온 세상이 이해되어졌다. 주님은 신성한 진리로서 죄로부터 세상을 구하고, 세상을 정의로 회복시키려고 이 세상에 오셨다. 그러나 그분은 단순히 오신 게 아니라 파견되어졌고, 특히 아버지로부터 보내졌다. 즉 그분은 신성한 진리만으로 오시지 않고 신성한 사랑에 의해 보내졌다. 신성한 진리는 신성한 사랑으로부터 진행되었다. 다시 말해 사랑의 품으로부터 나온 것이다. 진리는 사랑의 영향 아래 행동하였다. 그래서 진리의 모든 역사는 사랑의 복 주시는 목적을 실어오고 있다. 아버지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셨듯이 아들은 제자들을 세상에 보냈고 지금도 보내고 있으시다. 만사에서 제자들은 예수께서 하셨던 대로 행하게 되어있다. 주님이 보내졌던 방식같이 그들도 보내져야 한다. 그래서 그분의 진리의 힘과 그분의 사랑의 영 안에서 일해야 한다. 그들은 그들 주위의 세상에 가든지. 자신 속의 세상에 들어가서 이든지 이것을 행해야 한다. 그들의 일, 그 일이 자신의 거듭남을 위해서 이든, 타인의 거듭남을 위해서 이든 그 일은 우리 주님이 수행하셨던 일의 형상이다. 아버지께서 그분을 보내셨듯이 그분은 우리를 보내시고 있다.
19. 주님께서는 아버지에게 그분의 진리를 통하여 제자들을 정화시켜 달라고 기도하셨다. 이 구절, 여타 다른 경우에서나 마찬가지로 주님 자신은 그들의 본보기이셨는 바, 지금 그분께서 그것을 선포하신다. “이 목적을 위하여 나는 나 자신을 정화 한 바, 그들 역시 진리를 통하여 정화되어졌으면 해서 입니다.” 우리 주님의 이 선포는 기독교 신앙의 본질, 즉 육을 입으심의 직접적인 목적, 그리고 구원을 위한 인간적 희망의 바탕을 포함하고 있다. 이 구절은 장엄하지만 단순한 이런 진리, 주님께서 그분 자신 안에 있는 인간 본성을 정화하신 것은 그분의 제자들 안에 있는 인간 본성이 정화되도록 해주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이미 우리가 자주 살펴왔던 것은, 주님께서는 타락되고 퇴보된 상태 안에 있는 인간 본성을 입으셨다는 것, 그 이유는 그분 자신의 인물 안에서 그 인간 본성을 완전함으로 회복시키기 위해서 였다는 것, 무한한 권능의 소유자라 해도 타락한 인간성을 근본적인 질서와 행복의 어떤 것으로 회복시키는데 유일한 수단은 위 순서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 복된 말씀의 구절보다 더 직접적이고 더 명백하게 위 내용의 진리를 선포한 구절은 없다. 우리가 이 구절으로부터 배우는바, 주님은 자신을 정화하셨다는 것, 그분이 정화하신 것은 그분의 제자들도 정화되도록 하기 위해서 였다는 것이다. 인간이 이 위대한 진리를 이해하지 못하는 한 그들은 육을 입으심, 그리고 구원의 참 본성에 관한 진짜 의도에 무지해있고 그것을 어떻게 사용할지도 모른다. 인간의 정화되는 것이 주님이 오신 목적이요 의도라고 기독교인이 믿는 것은 올바르다. 그러나 구세주가 인간을 정화 되게 하시기전, 그분 자신을 먼저 정화하셨어야만 했다는 것을 알고 있거나 짐작이라도 하는 기독교인이 드문 것도 현실이다. 이와는 거리가 더욱 떨어진 채로 흔히 믿고 있는바, 그분은 죄의 유전적인 모든 결과로부터 자유되도록 하려고 세상에 오셨다는 것, 이미 거룩하신 채 계신 그분의 여건이 구세주로서 일하실 능력의 바탕이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믿는 이유가, 예수는 인간의 죄를 귀속(imputation)시킴으로 자신 위에 놓아 그들의 죄를 짊어지시고, 그들 대신 죄 없는 희생자로서 죽어감으로 그분의 백성을 구속하셨다는 논리 때문이다. 이 구절의 주님의 선포는 위와 같은 논리와 불일치되고 있다. 제자가 정화됨도 예수의 정화됨과 나란히 하고 있다. 둘의 정화는 유사하고 결과도 비슷하다. 이것은 이런 견해를 붙잡고 있는 이들, 즉 그리스도가 죄인을 대신해 죽으셨다고 믿는 이들을 곤란하게 하는 대목이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은 이 대목을 이렇게 관찰한다. “정화되는 것, 그리스도에 적용한다면 성화 되는 것(consecrate)만을 의미한다. 이로부터 제자들에 응용한다면, 정화됨은 이전에 정화되었던 것에 추가되는 생각을 가진 성화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 이유가 거룩한 것만이 헌물로서 나아갈 수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정화는 거룩하게 만드는 것을 뜻하지 않고 단지 성화됨만을 의미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그 이유인즉, 그리스도가 순수해 계시지 않았다면 제물로 만들어질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완전한 진리이다. 예수는 죄 없는 자신을 가지시지 않았다면 자신을 제물로 만들 수도 없었을 것이다. 제단에 바치는 모든 동물은 흠 없어야 한다는 유대교의 법은 제물들 모두가 표현했던 것인 주님께 드리는 이런 제물을 통하여 보았던 법이었다. 예수는 흠없는 분으로 태어나셨다고 상상하는데 있게 된 큰 잘못 하나는 그분은 우리 모두가 상속받는 본성 속의 부패된 것으로부터서도 자유로웠다고 상상한 것이다. 하느님의 아들 측면에서 그분은 참으로 거룩하셨으나, 마리아의 아들 측면에서 그분은 인간 연약함의 모든 것을 상속받았다. 죄를 대신 지는 것은 불가능하고 그분이 죄를 짊어지는 유일한 방법은 그분도 모든 악의 씨가 포함되어있는 인간 본성을 입으시는 것이다. 우리의 타락된 본성을 상속받은 결과 예수께서는 우리가 시험받는 모든 측면에서 시험되실 수 있었다. 이런 시험을 이기는 가운데 그분은 자신을 정화하셨다. 그분은 흠 없는 삶을 영위하심으로 자신을 흠 없게 만드셨다. 이 대목에서 그분이 제물이 된 효력이 존재했다. 그 이유가 “그분이 스스로 우리의 죄를 깨끗케 하셨을 때 그분은 높은 곳에 계신 위엄의 우편에 앉으셨기 때문이다” (히브리1:3). “이러한 높은 성직자는 우리에게 거룩하고 악이 없고 더러움이 없고 죄인과는 분리되고, 하늘보다 높이 되시었다. 그분은 높은 성직자가 먼저 자기 죄를 위해, 그 다음 백성의 죄를 위해 실시했던 것을 할 필요가 없는 분이 되셨다. 그분은 한번 자신을 제물로 드려서 끝내셨다” (히브리7:26-27). 그리스도의 순수성은 유전적인 악에서 자유로워서 있어진 게 아니라 실제의 죄로부터 자유로워 있는데 있다. 유전적 악 없이 태어난다면 수고하여 얻는 것이 있을 수 없는바, 실지로 죄 없이 사는 것에 큰 공적이나 보람이 있는 것이다. 만일 예수가 죄를 짓게 하는 유전적인 경향성 없이 태어나셨더라면 죄 없는 삶을 살으신 그리스도이지만 거기에는 큰 공적이 있다고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분이 입으신 인간 본성 안에는 죄 짓게 하는 시험의 바탕을 이루는 것들과 통상 우리가 갖는 모든 경향성을 담고 있기에 죄 없이 살으신 그분의 삶의 큰 공적이 인정되는 것이다. 예수께서 여느 인간이 가진 죄지으려는 경향성 없이 지내셨다면 구세주와 구원받는 자 사이에 실제의 유사함이 있을 수 없었을 것이다. 한가지 점에 있어서 제자들은 그의 스승 위에 있어야 할지 모른다. 그 이유가 악에 대한 경향성이 없는 의로운 자가 되는 것보다 죄에 대한 시험뿐 아니라 경향성을 지닌 의로운 자가 되는 것이 더 어렵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구절에 인간적 해설을 추가하지 않고 말씀 그대로를 추켜들어 보면, 제자의 일과 주님의 일이 종류 측면에서는 완전히 비슷하다 해도 수준 측면에서는 매우 다르다는 것을 언제나 이해하면서 그분의 일은 그분의 제자들 안에서 반복되어져야 한다는 것을 더 명백히 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우리 주님께서 되풀이하여 가르치시려는 위대한 진리를 구성하는 것과 주님의 말에 요점을 주는 것 사이는 완전히 평행한다. 그분이 세상에 오신 것은 인간이 스스로 할 수 없게 된 것을 그분이 해내셨던 것같이 인간도 하도록 하기 위해서 였다. 주님께서는 그분의 인성을 거룩함 자체로 만드심으로 자신을 성화하셨다. 거룩하게 만든 이 인성으로부터 그분은 지금 인간을 거룩하게 만들 수 있으시다. 그분은 완전하신 그분만큼까지도 인간을 만드실 수 있다. 이와 같은 내용이 이 구절에서 가르치는 장엄한 진리이다. 우리가 결코 충분하게 헤아릴 수 없는 것하나는, 우리가 이 진리를 심정에 제아무리 조심스럽게 새기고 있다해도, 또는 체험에서 실감해보려 제아무리 노력해도 그 새김이나 노력은 결코 충분치 않다는 점이다. “그들을 위해 나는 나 자신을 정화해서 그들도 진리를 통해 정화되기를 바랍니다.” 예수 자신은 우리를 정화시키는 진리이시다. 그분 자신은 우리의 정화됨이다. “너희는 하느님께로서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느님께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으니 기록된바 자랑하는 자는 주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니라” (고린도전1:30).
20. 예수께서는 “당신이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같이 나도 그들을 세상에 보냈습니다”라고 그분 자신과 제자들에 관해 말하셨다. 이제 그분은 아버지께 그분의 종들이 모든 땅에 운반하고 모든 창조물에 전파하는 구원의 메시지를 받게 되는 이들을 위하여 기도하고 있다. “나는 이들 만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말을 통하여 나에 관해서를 믿을 사람들을 위해서도 기도합니다.” 우리 주님이 성취하신 보편적인 구속은 모든 인간에게 영원한 생명을 받는 수용력을 회복시켰다. 구속과 구원은 구분된다. 모든 사람이 구속되었다. 그 이유가 구속은 주님께서 어둠의 권세를 복종케 하고 심지어 신체적 기관까지 점유하면서, 사탄이 붙들고 있었던 영적 속박의 상태로부터 인류를 해방되게 함으로 결과 되었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은 구속을 수단으로 영적 자유의 상태로 회복되었다. 주님께서 인간의 구속을 결과 되게 한 것이 어둠의 권세의 정복이고, 주님께서 구원을 설비하신 것이 인성의 신성화 되심이다. 인간은 거듭남으로 구원된다. 주님이 신성화 하셨기 때문에 인간은 거듭날 수 있다. 더 작은 일은 더 큰 일의 형상과 결과이다. 모든 인간이 구속되어졌듯이 모든 사람은 구원될 수 있다. 구원은 모든 이에게 제공되어 있다. 예수는 이 구절에서 모든 이를 위해 보편적으로 기도하시는 게 아니라 사도의 가르침을 통해 그분을 믿게 되는 이들을 위해서 간구하신다. 그러나 현재 그분의 목적은 인간의 구원이 아니라 그분이 제공한 은총과 자비를 수납하는 모든 이들이 그분과 하나 되는 것에 관해서이다. 이것이 다음 절의 말씀에 표현되고 있다.
21. “그들 모두 하나 되기를 바랍니다. 당신, 아버지, 내 안에서 계시듯, 그리고 내가 당신 안에, 그들 역시 우리 안에서 하나 되게 하십시오. 하여 세상이 당신이 나를 보냈다는 것을 믿게 하십시요.” 이 기도는 네 가지 흥미 있는 요점을 포함하고 있다. “땅에는 평화, 사람들 사이에는 선한 의지…”는 예수께서 구세주로 탄생하실 때 천사가 부른 영광의 노래였다. 복음의 목적은 평화이다. 그리고 평화는 그것이 영 안에, 진리 안에 받아들여지는 한도에서 결과를 보게 된다. 불화와 전쟁은 악의 열매이고, 조화와 평화는 주님의 것이다. 주님이 우리의 정의이듯이 그분은 우리의 평화이시다. 주님께서는 그분과 아버지가 하나이듯이 제자들도 하나이기를 기도하시고 있다. 주님께서 말하시는 단일성(oneness)은 육을 입으시기 전, 하느님과 말씀 사이에 존재했던 단일성이 아니다. 이것은 기독교다운 단일체(unity)의 원인과 모형이 아니다. 그러했다고 가정한다면 말씀이 세상에 오셨어야 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기독교다운 단일체의 원인이요 모형은 주님의 신성과 인성의 단일성(oneness)과 합일성(union)이다. 주님께서 인간의 본성을 그분 자신에 일치시켰고(reconciled) 결합(united)시킨 터에 그분은 지금 인간을 서로에게 일치시키고 하나 되게 하실 수 있다. 그럼에도 우리가 곰곰이 되새겨보아야 하는 것은 인간 사이의 단일체는 주님의 신성과 인성 사이에 존재하는 단일체의 모습뿐이라는 점이다. 그분 안에서 이 둘은 한 인물(one person)이다. 주님 안에 있는 이 단일체에 의해 생산되는 것, 즉 사람들 사이의 단일체는 인간들이 할 수 있는 단일체의 본성에 의거한 것이다. 주님께서도 “그들이 우리 안에서 하나가 될 수 있게 해주십시오” 라고 그분의 제자들에 관해 기도하시고 있다. 그분께서는 제자들의 말다툼을 가라앉히시고 그들 사이에 단일체가 있어야한다는 의무를 가르치신 적이 몇 번 있었기도 했다. 지금 그분은 그들의 단일체가 그분의 기도의 주제를 만드시고 있다. 주님과의 합일, 마치 형제간의 단일체같이 그들 자신의 마음 안에 있는 영적 단일체를 통하여 생산되어진다. 교회 멤버의 마음 안에서 사랑과 신앙, 또는 선함과 진리의 합일은 그들을 주님과, 그리고 서로 서로 단일체가 되게 한다. 이것 없이 진정한 단일성은 있을 수 없다. 인간의 마음 안에 있는 선함과 진리의 합일은 주님의 인물 안에 있는 신성과 인성의 합일과 가장 가깝고 가장 참된 형상이다. 그리고 인간 사이에 있는 합일은 두 번째 가장 가까운 형상이다. 개개인이 주님과 닮은 것을 통해 제자들은 그분 안에서 하나일 수 있다. 그들 사이에 있는 하나 됨, 주님 안에 있는 하나 됨은 이런 목적, 예수는 아버지에 의해 보내졌다는 것을 세상이 알도록 하는 목적을 위해 바람직하다. 주님은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그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들은 너희가 내 제자라는 것을 알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었다. 예수의 제자들 사이에 있는 합일은 예수가 하느님으로부터 보내졌다는 증거이다. 참으로 그분이 천국으로부터 계셨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형제 사이의 단일체는 각자 안에 있는 선행과 신앙의 합일로부터 발생된다. 이와 같이 세상 안에 있는 일반적인 신앙은 그 신앙을 구성하는 개개인 안에 있는 개별적인 신앙에 의해 생산되어진다. 영적 차원에서 세상은 인간의 자연적 마음이다. 제자들 사이의 합일은 영적 마음 속의 원리들 사이에 존재하는 조화와 통일이다. 이로 인한 결과, 인간의 작은 세상이라 부를 수 있는 자연적 마음 안에서도 신앙이 생산되어진다. 자연적 마음이 영적 마음으로 될 때 주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지듯이 땅에서도 이루어진다.
22. “당신이 나에게 준 영광을 나는 그들에게 주었습니다. 우리가 하나 인 것 같게 그들이 하나 이게 해주십시요.” 14절에서 주님은 제자들을 두고, “나는 그들에게 당신의 말씀을 주었습니다” 라고 말하셨는데, 이 구절에서는 “아버지께서 자기에게 주었던 영광을 그들에게 주었습니다” 라고 말하시고 있다. 영광은 신성한 진리의 광휘이다. 진리가 마음을 계발할 때 진리는 영광이고, 하느님의 영광이라 불리운다. 신성이 인성에게 준 영광도 이보다 더 다른 것은 없고, 그분의 인성이 인간에게 준 영광도 신성한 진리의 광택 외 더 다른 것은 없다. 어쨌든 진리가 광택 또는 영광을 가지는 것은 선으로부터이다. 아버지는 신성한 사랑이고 아들은 신성한 지혜이다.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준 영광은 신성한 사랑이 신성한 지혜에게 준 영광이다. 주님께서 인간을 거듭나게 할 때 그분은 제자들에게 이 영광을 준다. 거듭나는 자의 영광은 그분 자신의 영광의 형상이요 그 결과이다. 그런고로 이 말씀, “우리가 하나된 것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여 주십시오”가 있는 것이다. 주님 안에서 신성과 인성의 통일은 인간이 하느님과 결합하는 근원이고 모형이다. 이로부터 인간 사이에 있는 모든 통일성, 조화, 평화가 있다.
23. 주님께서 이런 합일의 본성과 방식을 설명하신다. “나는 그들 안에, 당신은 내 안에, 하여 그들은 하나 안에서 완전을 만들게 하십시오. 그리고 세상이 당신이 나를보낸 것을, 그리고 당신이 나를 사랑하시듯, 그들을 사랑했다는 것을 알게 하십시요.” 신성이 인성 안에 있고, 이 인성이 제자들 안에 있다. 이는 이런 위대한 진리, 즉 주님이 세상에서 입으시고 신성화 하신 인성은 신성의 권능과 영광이 인간의 마음으로 내려오는데 중매역할(medium)을 한다는 것을 얼마나 명백하게 표현하는지! 인간이 자신을 하느님으로부터 분리시켰기 때문에 하느님은 인류와의 결합과 교류의 매체가 되도록 인성을 입으셨던 것이고, 그분은 그분의 인성 안에 계시면서 이 인성을 통해, 그분의 백성들 사이에 있으시게 된 것이다. 예수는 중개자(mediator)이시다. 이는 죄인에게 일치되라고(reconcile) 하느님에게 간청하는 두 번째 신성으로서의 중개자가 아니라 그분에게 일치되어야 한다고 죄인에게 탄원하는 신성한 인간으로서의 중개자로서이다. 그분의 인성은 하느님과 인간이 만나는 참된 속죄판(mercy-seat), 또는 서로서로가 교통하는 속죄소(propitiatory)이다. 이 속죄판은 증거의 궤 위에 있고, 사랑과 자비의 거룹 사이에 있어 그들은 영원히 지속되는 평화의 계약에로 들어갈 수 있다. “나는 그들 안에, 그리고 당신은 내 안에”는 육을 입으심(Incarnation)의 신비가 설명된 것이다. 위 말씀은 지상의 교회와 천국이 하나 안에서 완전을 만드는 수단이고, 지상에 있는 것이든, 천국에 있는 것이든 모든 것이 그분과 일치되는 수단이다 (고린도전1:20). 그러나 인간 안에 있는 모든 것이 하나 안에서 완전해질 수 있을 뿐 아니라 지상의 교회와 천국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모든 애착과 생각들이 한 개의 통치하는 사랑 아래 통일될 때 그것들은 하나 안에서 완전을 만든다. 그것을 통치하는 사랑은 하느님을 사랑함이다. 제자들은 이렇게 해서 완전해진다. 이 구절을 글자대로 추겨들어도 주님의 말씀은 매우 교훈적이고 용기를 준다. 제자들은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수여하신 무한한 사랑의 똑같은 대상이 된다는 것이다. 참으로 신성한 사랑은 모든 이에게, 모든 이 안에서 똑같아야만 할 것이다. 차이가 있게 되는 유일한 것은 그 사랑을 받는 그릇의 차이이다. 아들은 하느님의 영을 무한정 받으신다. 그러나 모든 인간과 천사의 수용력은 한정되어 있고 어느 두 개의 수용력도 똑같은 것은 하나도 없다. 그럼에도 신성한 사랑은 모든 이에게 그 자체를 제한 없이, 통째로 주시고 싶어하신다. 만일 그것이 가능하다면 주님은 모든 사람을 그분과 동등하게 일으키실 것이다. 글자적 의미에 있는 주님의 말씀이 그 글자 속 영적 의미에 있는 위와 같은 천국적 진리를 가르치시는 한편, 또 다른 교훈도 포함하고 있다. 이는 이미 여러 번 서술한 적도 있는 교훈이다. 즉 제자들은 신성한 사랑의 대상일 뿐 아니라 주제가 된다는 것, 다시 말해 주님의 신성은 근원(Source)이고, 그분의 인성은 원천(Fountain)이시다는 것이다.
24. 앞으로 그분의 제자가 이루어야할 것에 대해 기도하시면서 그들이 있어야 할 곳에 관한 그분의 바람을 표현하시고 있다. “아버지, 바라옵기는, 당신이 나에게 준 그들 역시 내가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는 것, 그들이 당신이 나에게 준 나의 영광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세상의 기초가 놓이기 전, 나를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두 가지 사항을 바라시고 있다. 즉 그분의 제자들이 그분이 계신 곳에 그분과 함께 있는 것, 그리고 그들이 그분의 영광을 보게 하는 것이다. 주님의 바람은 그분의 백성들이 그들을 위해 주님께서 설비하셨던 영원한 고향으로서의 천국 안에서 그분과 함께 있는 것이다. 더구나 이 기도는 이보다 더 많은 것을 내포하고 있다. 그분이 계신 곳에 그분과 함께 있기 위해 그분의 제자들은 그분이 계신 장소 안에 있어야 할 뿐 아니라 그 상태 안에도 있어야 한다. 주님이 계신 곳은 천국이다. 천국은 거룩함의 상태 때문에 행복의 장소이다. 영원한 세계에서 상태와 장소는 동시에 있고 조화를 이루고 있다. 각 사람은 자기의 상태가 준비해준 장소 외 더 다른 곳에 있을 수 없다. 의로운 자는 천국에 가고 사악한 자가 지옥에 가는 이유는 각자가 그의 가슴에 천국 또는 지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분의 제자가 그분이 계신 곳에서 그분과 함께 있기를 바라는 그분의 기도는 깊은 실용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것은 그분이 신성화 하신 것같이 그들도 거듭나야 한다는 기도이다. 이로부터 더 진전된 기도는 그들이 그분의 영광을 보기를 바라는 기도이다. 이 기도가 의미하는 것은, 그들은 구세주께서 그들을 일으키시어 있게 된 개인적 영광의 광경이 아니라 마치 그분의 일 안에서 구속과 신성화 하심이 진열된 것같이, 그리고 천국의 태양이 천사와 인간의 마음 안에서 빛나는 것같이, 양쪽 세계에서 인간의 흥미와 총명의 모든 대상과 주제들을 계발하시는 그분의 지혜의 장려함을 지적으로 보는 것을 뜻한다. 더 세세하게 이 기도를 생각해보면 이 기도는 또다른 목적을 가지고 있는 것이 뚜렷이 보인다. 주님께서는 아버지께서 그분께 주셨던 이들을 위해 이 축복을 간구하시고 있다. 영적으로 이해해 보건대 그분의 기도는 이런 바람의 표현, 즉 그분의 사랑의 영향으로 끌리어 오고 있었던 모든 사람들은 그분의 지혜의 충만된 빛에로도 가져다 놓이게 되어서 그들 거듭남의 원형과 원인으로서 그분의 신성화하심을 이해함으로 그분의 영광을 보기를 바라시는 것이다. 우리는 지상에 사는 동안에서도 주님이 있는 곳에 있고 그분의 영광을 볼는지 모른다. 그러나 천국에서 주님의 인성의 신성화 하심은 천사들의 깊은 명상 중 가장 높은 주제이고, 그에 관한 지식은 천사들의 지혜가 도달할 가장 높은 지점이다. 주님께서는 그분의 청원을 아버지께서 세상의 기초가 있기도 전에 그분을 사랑하셨다는 바탕 위에서 제출하시고 있다. 앞 구절에서 예수께서는 세상이 있었기 전,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광을 말하셨었다. 지금 그분은 그분에 대한 아버지의 영원한 사랑에 관해 말하시고 있다. 영광은 아들에 붙어 다니고 사랑은 아버지에 어울린다. 아들의 영광은 아버지로부터이고, 아버지의 사랑은 아들 안에 있다. 지혜는 사랑의 영광이고 사랑은 지혜의 생명이다. 그러므로 그 둘은 세상의 기초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 신성한 주제를 개인적인 측면에서 생각해볼 수 있을까? 아들이 아버지의 사랑의 객체이다는 측면에서의 주제에는 가치가 있을 의미가 없다. 그러나 아들이 아버지의 사랑의 주체이다는 주제에는 장엄한 의미가 있다. 신성한 지혜 안에서 신성한 사랑은 즐거워한다. 그 이유가 지혜는 사랑이 의식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신성 안에서 지혜를 수단으로 무한한 사랑은 창조하고 규율해간다. 지혜를 수단으로 무한한 사랑은 세상을 구속하고 구원한다. 유대교라는 교회 처방 아래에서 유대인들 조차도 이에 관한 진리를 어느 정도 지각했다. 솔로몬이 창조적인 지혜에 관해 말한 잠언서에 이렇게 잘 나타나고 있다. “그가 하늘을 펼치시고 깊은 바다 둘레에 테를 두르실 때에 내가 거기 있었다. 구름을 높이 달아 매시고 땅 속에서 샘을 세차게 솟구치시며 물이 바닷가를 넘지 못하게 경계를 그으시고 땅의 터전을 잡으실 때, 나는 붙어 다니며 조수노릇을 했다. 언제나 그의 앞에서 뛰놀며 날마다 그를 기쁘시게 해드렸다” (잠언8:27-28).
25. 지금 주님께서는 간구하신다기 보다는 감사의 말씀을 하시고 있다. “오, 정의로우신 아버지, 세상은 당신을 몰랐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당신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이들은 당신이 나를 보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세상이 정의를 몰랐기 때문에 아버지를 알지 못했다. 그 이유가 어느 누구도 자기 안에 그분의 정의의 어떤 것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 정의로운 존재로서의 하느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위의 품성 아래에서 아버지를 알고 계셨다. 그 이유가 그분 자신이 정의로운 분이셨기 때문이다. 주님께서는 그분의 간구하심 중 하나를 거룩한 분으로서의 아버지께 전달하였다 (11절). 여기서 그분은 아버지를 정의로운 분으로 부르고 있다. 그분께서 아버지를 거룩하신 분으로 지칭하며 기도하실 때, 주님은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셨던 이들을 아버지의 이름을 통해 지켜달라고 간구하셨다. 여기서 그분은 세상이 아버지를 모르나 아들은 아버지를 알고 있었다고 선언하시는 이 때의 경우 그분은 아버지를 의로우시다고 부르고 있다. 교회와 특별히 관련지어 볼 때 하느님은 거룩한 분이시고, 세상과 특별히 관련될 때는 의로우신 분이시다. 거룩한 하느님의 영의 행동중 하나는 세상으로 하여금 정의를 납득시키는 것이다. 예수가 아버지께로 가시기 때문에 그분은 이 행동을 하시게 되었다. 비록 세상이 정의로운 아버지를 몰랐다 해도 그분은 아버지를 알았다. 주님에게 있어서 안다는 것은 소유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특출한 측면일 경우 예수만이 아버지를 알았고, 그분만이 여타 모든 다른 신성한 속성에 관한 정의의 근원 되시는 그분을 알고 있으시다. 어느 누구도 스스로 계신 바로서의 하느님을 볼 수 없고 알 수도 없다. 아버지로부터 태어난 아들(the only begotten Son), 아버지의 품 안에 있는 그 아들만이 그것을 볼 수 있도록 되어있다. 제자들의 경우, 정의로우신 아버지께서 사람들 앞에서 그분의 정의를 선포하고 명백히 밝히시기 위해 예수를 세상에 보냈다는 것을 아는 것만으로 족하다. 이것은 제자들을 유익하게 하고 그들에 소속되는 지식이다. 예수는 아버지를 안다. 제자들은 예수를 아버지의 아들로서 알고 있다. 그리하여 그들은 아들 안에 있는 아버지를 알고 있다. 이것은 이 기도의 전체에 흐르고 있는 선율이다. “나도 당신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사람들도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26. 지금 신성한 기도의 이 결말로 주님께서는 앞 구절들에 있는 몇 가지 간청의 말들 안에서 표현하셨던 전체적인 진리를 요약하시고 있다. “나는 그들에게 당신의 이름을 선포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선포할 것입니다. 당신이 나를 사랑하셨던 그 사랑이 그들 안에 있게 하십시오, 그리고 나는 그들 안에.” 여기서 신성한 이름은 신성한 본성, 신성한 속성들, 신성한 품성을 뜻하는 말이라는 것은 대단히 명백하다. 주님께서는 이런 그분의 이름을 그분의 말씀에서, 기적에서 선포하셨을 뿐 아니라 그분의 흠 없고 복 되신 삶으로도 선포 하셨는바, 이것은 완전한 인간 안에 완전한 하느님이 전시된 것이다. 주님께서는 그분의 인성 안에 있는 그분의 신성에 관한 이름, 즉 품성을 선포하셨을 뿐 아니라 아직도 그분은 그것을 밝히 알리시고 있다. 그 이유가 주님 자신이 아버지의 이름이기 때문이다. 완전을 이루어 실시하는 모든 것과 더블은 신성이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가까이 가져다 놓였고 우리에 의해 납득될 수 있다. 그러나 아버지의 이름을 분명히 밝히신 주님의 의도는 무엇일까?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셨고 그 사랑이 그들 안에 있고 나도 그들 안에 있는 것이다.” 주님이 신성한 이름을 선포하시고, 그 이름이 지니는 의도와 목적은 그분이 아버지로부터 받았던 그 사랑이 인간에게 교통되게 하려는 것이다. 주님의 바람은 그분의 신성한 사랑이 인간의 심정 안으로 내려오는 것, 주님이 그들을 사랑하신 것같이 그들이 서로 사랑하는 것이다. 더불어 주님이 기대하는 다른 한 가지 목적도 있다. 그분은 아버지의 사랑이 그들 안에 있기를 바라셨을뿐 아니라 신성한 지혜로서 그분도 그들 안에 있기를 바라셨다. 그분은 그분의 사랑이 그들의 심정 안에 머물고, 그분의 지혜가 그들의 이해성에 머물기를 바라셨다. 이 구절의 기도에 표현된 진리는 주님께서 이외 다른 구절에서 선포했었던 것, 즉 그분과 아버지 모두가 그분의 완전한 제자들과 함께 그들의 처소를 차지하리라고 약속하셨던 것과도 비슷하다. 그러나 이 구절에서는 이 진리가 더 큰 충만함에서 똑똑히 발음되고 있다. 아들에 의해 제자들과 교통되었던 것과 같은 사랑은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했던 것과 같은 사랑인데, 이 사랑은 주님의 인성 안에서 그들에게 더 가까이 가져다 놓인 바대로의 신성한 사랑이다. 신성한 사랑은 주 예수라는 인간적 삶을 수단으로 인간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분의 인간성을 사랑의 참 형체로 만드시었다. 지금 그분은 죄있고 고통받는 인간에게 사랑의 샘이시다. 사랑만이 주어진 게 아니라 지혜도 주어져서 우리는 사랑의 애착 을 심정 안에로 주입 받을 뿐아니라 이해성에 사랑의 법을 새길 수 있다. 마음 안에서 사랑과 지혜가 합일되는 것, 생활 안에서 사랑과 지혜가 일치되어 움직이는 것은 새로운 인간을 형성시켜주고, 주님과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 즉 신성한 사람이라는 가장 높은 형상을 만들어준다.

요한복음 16장 해석

16

이 장은 제자들을 향한 주님의 강연의 연속이다. 그러나 주님이 이미 그들에게 전달했던 것과 지금 말하시는 것 사이에는 구분되는 점이 있고, 그럼에도 서로 연결되고 있기도 하다. 그분은 두 개의 중요한 주제들에 관해서 이미 그들을 가르치셨다. 그분께서는 그들에게 그분과 아버지 사이에 존재하는 연결의 본성을 설명하시고 선포하셨는데, 즉 그분께서 수행한 권능 있는 일들은 아버지께서 그분 안에 머무시면서 하신 일이라는 것을 그들에게 보여주셨다. 그리고 그분은 자신과 제자들 사이에 존재했던 연결의 본성에 관해서도 가르치셨는 바, 이 연결은 마치 포도나무와 가지의 관계 같다는 것, 그 연결은 아주 친밀하고 생명의 원천을 이룬다는 것, 그들이 그분의 교회의 유용한 멤버로서 참되게 존재하는 것은 그들이 그분 안에 머물고, 그분의 말이 그들 안에 머물고 있는가의 여부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이 장에서 신성한 선생은 성령의 하강으로 그들과 세상 위에 있게 되는 결과에 관해 말하신다.
1. 그들 앞에 놓인 일들을 위해, 그들의 충성과 덕행이 보상되는 영예를 위해 겸손과 선행을 함양함으로서 그분을 사랑하고 그분의 계명에 순종해야 함을 본보기와 교훈으로 상징적으로, 그리고 평범한 가르침으로 그들을 훈육하셨던 예수께서는 지금 이렇게 말을 진행하시고 있다. “이런 것들을 내가 너희에게 이야기했던 것은, 너희가 위반되어지지 않게 하려 해서이다.” 흔들림(offend)은 실족함(stumble)이다. 이 구절의 말씀은 그들을 기다리고 있던 의무와 시련들의 무게를 견디지 못해 가라앉고 마는 것을 예방해 주시기 위해 주님께서는 그들이 마주쳐야만 하는 미움과 박해에 관해 미리 경고하시는 것이다. 미리 경고된다는 것은 대비한다는 것이다. 사실 기독제자들이 그의 영적 순례에서 그에게 닥쳐오게 되는 시련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정확히 알아야 한다는 것은 가능치도 않고 필요치도 않다. 단지 그의 순례여행이 심각하고 혹독한 여행이다는 정도만을 알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그 여행에는 용기와 인내가 필요하다는 것, 성공적인 여행은 주님의 영이 동행하지 않으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아는 것만으로 족하다. 기독인이 알아야만 하는 것이란, 광야를 통과하는 가운데 그는 자기가 걷는 그 길을 먼저 밟고 지나가셨던 안내자요 위로자를 가지고 있다는 것, 그의 구원의 대장은 고통을 통해 완전을 만드셨다는 것, 따라서 그분의 추종자들은 그런 길에서 무력해지고 실족되지 말라는 것등이다.
2. 그러나 주님은 박해당하는 것보다 더 심각한 시련을 제자들에게 말하신다. “그들은 너희를 회당으로부터 밖으로 내놓을 것이다. 그렇다. 너희를 죽이는 자는 누구든지 자기가 하느님의 섬김을 행한다고 생각하는 때가 오고 있다.” 이 말씀은 글자대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우리는 유대인들이 기독인을 죽이는 박해를 가한 것, 더구나 그들끼리도 서로 죽이는 일을 자행한 것을 본다면 위 주님의 말씀에 크게 놀랄 필요는 없다. 그러나 위 구절을 더 깊이 들여다보면 영적이고 실용적인 교훈을 더 발견한다. 위 예견이 글자대로 유대인의 행동에, 다른 것으로는 초기 기독인들에 관계되는 한편, 영적으로는 사도들 자신이 아닌 사도들이 표현했던 원리들에 관계되고 있다. 우리의 주님께서 가르치신 “오게 될 때”란 기독교 자체가 순수한 종교의 원리들을 거절하는 때, 즉 제자로 의미된 것, 즉 말씀 속의 진리 안에서 주어진 순수한 원리가 회당 안에 있을 가치가 없는 것으로 여겨지는 때, 그래서 제자들을 죽이는 것으로 의미되듯 그들이 순수한 원리들로부터 영적 생명력을 박탈하는 때, 결국 이런 짓을 범한 자들이 오히려 하느님을 섬기는 일을 했다고 생각하는 때들이다. 그분이 보낸 것이 인물이든, 원리이든 그것들을 죽임으로 하느님을 섬겼다고 생각하는 것은 이런 마음의 상태, 즉 악을 선이라, 선을 악이라 부르고, 빛 대신 어둠을, 어둠대신 빛을 놓는 것, 하느님과 그분의 말씀에 관한 그들의 관념들이 진리에 반대된 상태를 표현한다.
3. 이렇게 제자들을 죽이고 박해하는 것은 주님 자신이 견뎌낸 박해와 같은 맥락을 지니고 있다. “이런 것들을 그들은 너희에게 행할 것인데, 그 이유는 그들이 아버지도, 나도 모르기 때문이다.” 주님을 박해했던 이들이 그렇게 한 이유는 그들이 아버지를 몰랐기 때문이다. 제자들을 박해하는 이들이 그렇게 했던 이유는 그들이 아버지도 아들도 몰랐기 때문이다. 아버지와 아들이 신성한 사랑과 지혜이고, 제자들은 말씀 속의 진리들을 표현하고, 그 진리 안에서 주님의 사랑과 지혜가 현존하고 있다. 이런 원리들을 거절하는 이들, 스스로 그 원리들을 파괴하는 이들은 그들 안에 계신 주님의 사랑과 지혜를 인식하기를, 받기를 거절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이 이해성으로부터 주님의 지혜를 거절하는 이유는 그들의 심정에 주님을 사랑함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분의 말씀 속의 진리와 교훈을 거절하는 이유는 그들이 그분의 지혜 또는 사랑의 어느 것도 소유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어떻게 인간은 계시로부터가 아니면 주님에 관한 지식을 가지게 될까? 주님에 관한 지적인 우리의 모든 지식은 계시된 말씀으로부터 온다. 그러나 말씀이 우리를 외적 경로로 가르치는 한편, 주님 자신은 내적인 경로, 즉 씌어 있는 말씀이 우리 마음에 운반해 주는 진리 속의 교훈과 사랑으로 영감을 불어넣어 주심으로 우리를 가르치시고 있다. 우리가 심정과 이해성을 제공된 사랑과 빛에 여는 만큼에서만 우리는 바깥쪽 가르침을 진실로 이해하고 받게 된다.
4. “이런 것들을 나는 너희에게 말했다, 하여 때가 올 때, 너희는 내가 그것들에 관해 너희에게 말한 것을 기억할런지 모른다. 이런 것들을 시작에서 말해주지 않은 것은 내가 너희와 함께 있었기 때문이다.” 제자들은 주님께서 그들에게 전달해 주었던 많은 것을 정작 그 사건이 도래할 때까지, 또는 주님이 반복해 말하시어 상기시켜 줄 때까지 까맣게 잊고 있었다. 주님이 그들에게 말하신 목적(object)은 때가 왔을 때 그 전에 말했던 것을 기억하도록 하시려는데 있었다. 그분의 말이 성취됨은 예수에 대한 그들의 신앙 과 신뢰가 한층 더 힘을 얻어 더 의연하게 고통을 받아 낼 수 있게 되리라는 것은 의심할 바 없다. 그러나 위 구절이 우리에게 주는 영적 교훈 역시 위의 내용보다 더 중요할 것이다. 이전에 받았던 진리들은 체험에 의해 확증되어진다. 그리고 진리들이 이렇게 확증되면 그 다음은 내적인 기억으로 건너가서 영원히 그 기억에 새겨져 남아 있는다. 이런 때 우리는 체험으로 알게 되는 것들을 주님께서 먼저 우리에게 말해 주셨었다는 것도 기억하게 된다. 그 이유가 그 진리들은 그 진리의 저자가 주님임을 다시 기억함으로 연결을 이루기 때문이다.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시작하던 그 때에 말하지 않았던 것은 그분이 그들과 함께 있었기 때문이다. 거듭나는 삶의 시작은 모든 것이 빛나는 환희적인 때이다. 새 날이 마음에 드리워지고 아침 햇살이 아름다운 온 풍경을 씻어낸다. 그러나 폭풍과 그늘짐이 때늦지 않게 온다. 태양이 어두워지고 달조차 빛을 주지 않고 참 별이 하늘에서 떨어지면 그 때는 슬픔의 때이다. 우리의 영적인 시작, 마치 우리의 자연적 삶의 시작 같이 빛나고 희망인 것은 우리를 위한 행복이다. 그런 이유는 정의의 태양이 그분의 날개 안에서 치료하면서 우리에게 떠오르고 있기 때문이다. 주님은 외적으로, 그리고 지적으로만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도 진실이다. 우리가 진리를 처음 받을 때 그 진리는 피상적이어서 상당 부분이 자연적 수준이다. 우리는 육에 따라 주님을 안다. 이런 앎은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때이다. 마치 그분이 지상 순례 기간동안 제자들과 함께 계셨던 것과 같다. 이런 초기 상태에서 우리의 구세주는 우리에게 닥쳐올 슬퍼하는 때에 관해 우리에게 말하시지 않는다.
5,6. 어쨌든 때가 되면 그들은 밝히 알아야만 한다. 제자들에게 이런 때가 당도해 있었다. “지금 나는 나를 보낸 그분에게 나의 길을 간다. 그런데 너희 중 누구도 당신은 어디로 가십니까? 하고 묻지 않는다. 내가 이런 것들을 너희에게 말했기 때문에, 슬픔이 너희의 심정을 가득메웠다.” 주님께서 이미 그분의 제자들에게 “너희는 내가 어디로 가는지 알고 있다” 하고 말하셨다. 그런데 왜 “당신은 어디로 가십니까?” 하고 물어 보아야 할까? 그들은 알았으나 몰랐다 – 그들은 알았으나 이해 못했다. 그들은 그분이 떠나는 사건의 밝은 쪽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슬픔에 빠져 있는 것이다. 그들의 심정은 그분이 그들을 떠난다는 생각에 슬픔으로 가득 채웠다. 그들은 저 넘어 있는 그분의 영광을 몰랐다. 그들은 자기들이 외톨이로 남을 것만을 생각했다. 주님은 그분을 보내신 아버지께로 가시고 있었다. 인성이 이제 막 신성화되시는 것, 신성한 지혜가 신성한 사랑의 품으로, 지혜가 근원 되었던 그 품으로 귀환하려는 찰나에 있다. 이를 우리의 개인적 경험에 관련해 생각해 보라. “돌아가심”이란 주님이 자연계에 있으셨던 것 같이 주님의 진리가 우리의 자연적 마음에 있다가 주님이 승천하시듯 영적 마음으로 승강하는 것이다. 어쨌든 이것은 슬픔의 때는 아니다. 제자들은 주님의 승천 때문에 슬퍼한 듯 여겨지지 않는다. 그 다음 그들이 안 것은, 주님은 살아 계시다는 것, 영광으로 건너가셨다는 것, 그분의 나라는 이 세상 속에 있지 않는다는 것 등이었다. 죽음이 그분을 그들로부터 빼았아 갔다고 생각하던 때, 그분이 부활로 오심을 모르고 있던 때, 그들은 슬피 울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그분은 삼 일만에 일어나신다고 말해주었었다. 그러나 그런 모든 것을 기억하도록,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하셨던 것은 무엇이든 상기할 수 있게 하는 하느님의 영이 그들에게 아직 당도하지 않았다. “떠나가심, going away”은 시련의 때이다. 그 이유가 우리의 안내자요 받쳐주는 기둥으로 우리와 함께 있었던 진리를 잃어버린 듯, 우리를 위로해 줌도 없이 훌쩍 떠날 듯 여겨지기 때문이다. 이런 시련의 본성과 심각함을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설명하시는데, 우리 역시 결국 보게 될 것이다.
7. “그럼에도 나는 너희에게 진리를 말한다. 내가 가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유익하다. 그 이유가 내가 가지 않으면, 위안자가 너희에게 오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가 떠나면, 나는 그를 너희에게 보낼 것이다.” 주님께서 세상으로부터 아버지께로 떠나심은 이 일의 완성이었고, 이 완성 없이 구원은 불가능해졌을 것이다. 인성이 신성과 하나 됨이 유일한 수단이었고, 이 수단으로 인류는 하느님과 결합될 수 있었다. 그러므로 주님이 떠나시는 방도만이 제자들에게 유익한 길이다. 만일 그분이 떠나지 않으면 위안자(Comforter)는 오실 수 없었다. 만일 주님의 인성이 고통의 극렬함에 의해 완전해지지 않았다면 성령은 오지 않았을 것이고 인간을 거듭날 수 있게 해 주는 설비도 장치 못하셨을 것이다. 이것은 주님께서 “나는 너희에게 이 진리를 말한다.” 모든 사람이 알 필요가 있다는 진리만큼이나 위대한 진리이다. 이 구절에서 주님이 제자들에게 가르치시고 그들을 통해 우리에게 가르치시는 것은 성령의 현존이 그분 자신의 현존보다 그들을 위해 더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분 자신이 성령이었다. 그래서 성령의 현존은 그분이 그들과 영적으로 현존하시는 것이었다. 더불어 선포하신 것은 만일 그분이 떠나시지 않으면 위안자가 그들에게 오지 않으리라는 것이다. 성령은 구세주로서의 주님의 영인바, 그것은 그분이 떠나실 때까지 올 수 없었다는 것, 그리고 그것은 구원의 하느님의 영으로서 그분 자신으로부터 보냈다는 것이다. 이 구절에서 주님께서는 그분이 제자들로부터 이동하시는 것을 두고 두 가지 다른 용어들을 사용하시고 있다. 두 용어의 글자적 의미는 다르다. 마치 …로부터 가고 있음, going from과 …에로 가고 있음, go to의 차이와 같다. 주님은 신성한 진리로서 제자들로부터 떠나시고 있다. 그리고 주님은 신성한 선으로서 아버지에게로 출발하시고 있다. 주님이 아버지와 완전히 하나 됨을 달성하셨을 때 그분은 신성한 진리가 더 이상 아니고 그분의 인성까지 포함되는 신성한 선이셨다. 그리고 그 다음 신성한 진리는 성령으로서 그분으로부터 진행되어 나온다.
8. 성령이 올 수 있도록 그분이 떠나시는 것이 더 낫다는 것은 성령이 수행하게 될 신성한 일로부터 나타나고 있다. “그가 올 때 그는 세상을 죄에 관해서, 정의에 관해서, 심판에 관해서 꾸짖을 것이다.” 꾸짖는다(reprove)는 단어는 납득시킴(convince)으로 읽는 것이 더 나을지 모른다. 세 개의 구분되는 가장 중요한 행동들이 있다. 주님께서는 이것을 우리에게 그분이 보내는 하느님의 영이 수행하게 된다고 말하시고 있다. 하느님의 영의 임무는 주님의 나라를 지상에 건설하는데 있어 악덕과 잘못들은 방해가 되고, 미덕과 진리들은 도움이 된다는 것을 납득시키는 것, 죄인들의 마음에 죄에 관해, 정의에 관해, 심판에 관한 확신을 가져다 주는 것이다.
9. 하느님의 영이 세상을 납득시키는 첫 번째 일은 죄이다. “죄에 관해서, 그 이유는 그들이 나에 관해서를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죄의 지각은 주님의 구원하시는 권능의 첫 번째 행동이고 첫째 행동은 진짜로 전환하는 것이다. 죄를 자각함은 정의의 새로운 삶의 시작이다. 인간은 그의 죄를 버리는 것을 시작할 때까지 정의로운 삶을 시작할 수 없다. 그리고 그들이 죄인임을 확신할 때까지 죄를 버리는 것을 시작할 수 없다. 그분이 죄에 관해 세상을 납득시킨다는 것, 주님의 영의 일에 관하여 우리에게 얼마나 위대한 생각을 주는지! 죄는 인류를 파멸시켰다. 그리고 주님을 세상에 가져다 놓았다. 그리고 그분을 고통받는 자로 만들었고 죽음에 놓이게 했다. 그래서 지금 하느님의 영은 그분으로부터 내려오신다. 그분은 “죄 있는 육의 모양 안에 오셨다. 그리고 죄를 위해 육에 있는 죄를 단죄하셔서 육에 따르지 않고 영에 따라 걷는 우리 안에서 율법의 정의가 완성되게 하셨다.” 하느님의 영이 죄에 관해 인간을 납득시키도록 와야할 필요가 있다고 하여 그 영을 우리에게 주신 이유는 그들이 그분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영이 인간에게 납득시켜 주는 죄란 주 구세주에 대한 불신앙이다. 그분에 관한 지식 없이 죄가 범해진다면 죄에 관한 참된 지식도 있을 수 없다. 그리고 죄를 용서할 수 있는 유일한 그분을 믿지 않고 죄에 관한 참된 납득도 없다. 불신앙이 죄이다. 그 이유란, 구세주를 인정함을 배척하고 있으면 죄를 인정함도 배척되기 때문이다. 심정 속의 이런 완고함을 제거하고 죄에 대해 뉘우침을 가져오는 것은 하느님의 영의 영향으로부터 파생되어지는 은택 중의 하나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라”는 구세주가 구원해 주어야 한다고 요청하는 이들에 대한 사도들의 답이다. 구원하는 신앙 은 단지 설득함이 아니라 참회하는 심정이 예수를 구세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것은 그 안에 죄의 고백과 뉘우침 그리고 악을 버리고 주님의 계명에 의거한 삶을 살아가려는 신실한 목적과 노력까지 함께 포함하고 있다.
10. 하느님의 영은 정의에 관해 세상을 납득시키기 위해 오신다. 하느님의 영은 주님의 정의에 관해, 구원과 행복의 수단으로서의 정의에 관해 세상에 납득시키려 오셨다. 말씀 자체의 서술에서와 같은 것, 즉 주님은 우리의 정의이시다는 것, 그 정의는 그분께서 율법을 완성하심으로 되신 것, 우리의 정의는 그러한 그분 속에 있다는 것, 등등은 기독인의 신앙 의 한 부분이다. 이 진리는 명백히 서술된 바와 똑같이 확실하게 이해되지 않았다. 그래서 이렇게 믿어져 왔다. 예수께서는 인간이 깨트린 율법을 완성하심으로, 인간이 초래되게 했던 죄지은 것들로 해서 고통받으심으로 인간의 죄를 속죄하려고 세상에 오셨다고 믿고 있다. 그리고 죄인들이 구원되는 것은 그들이 행할 수 있는 정의, 설사 그리스도가 그들에게 힘을 더해주어 행한 정의까지 포함해서 그들의 어떤 정의로서가 아니라 그분이 지상에서 행하셨던 정의 때문이라고 믿고 있다. 구원에 관한 이런 개요의 기초에 놓인 실수는 이것이다. 죄와 정의는 인간의 생명의 책 안에 씌어진 상태들이 아니라 하느님의 기억의 책 안에 기록된 행동들이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믿어지는 바, 예수 그리스도는 율법이 인간으로 하도록 요구했던 것을 행함으로 그분에 반대되게 손으로 쓴 것을 삭제할 수 있었고, 마치 그분이 율법을 스스로 완성했던 것처럼 그분을 수용하기 위해 그분의 정의와 일관되게 할 수 있었다. 구세주의 공적은 신앙자들에게 귀속된다고 상상되어지고 있다. 그렇게 해서 그들 자신의 불순물은 덮어진다. 마치 그리스도의 정의의 흠없는 도포로 하느님의 시야로부터 감추여지는 것과 같다. 신실하게 종교적인 많은 개인들은 이런 교리의 진리에 의문을 던진다면 그만큼 자신이 불경해진다고 간주해 버리는 경향이 짙다. 어쨌든 이 교리는 죄와 정의의 본성 모두에서 그릇된 생각 위에 안주하고 있다. 죄 또는 죄 있음은 양도되어질 수 없고, 정의 또는 공적도 또 다른 사람에게 귀속될 수 없다. 죄를 범한 사람은 죄의 종이다. 정의를 행한 자는 정의롭다. 주님이 세상에 오신 것은 인간으로 죄짓기를 중단함으로 죄인 되는 것을 중단할 수 있게 하는 것, 중단을 권유하시는 것, 정의를 행함으로 정의로워지도록 권유하시는 것이었다. 어떻게 그는 그것을 결과되게 했을까? 아마 우리는 그것이 유일하고 가능한 길이 아니다 해도 최상의 길에 있다고 보증될 것이다. 정의의 법을 완성하심으로 주님께서는 정의로워지셨을 뿐 아니라 정의 자체가 되셨다. 그 이유는 그분께서는 그 정의를 절대적 차원에서 완성하셨기 때문이다. 그분의 인간 삶을 수단으로 그분은 율법을 확대하시고 그것을 존경할 수 있게 만드셨고 율법 자체가 되셨다. 그래서 지금 그분은 그분 고유의 정의의 영과 권능을 수단으로 정의의 길 안으로 우리를 인도하심으로 우리를 정의로워지게 만들려고 노력하신다. 우리가 세상 속에 있는 동안 우리는 자기 고유의 정의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 우리의 정의는 그분 속에 있다는 것, 그리고 그분은 사랑의 영을 가지고 우리에게 영감을 불어넣어 주심으로 우리를 정의로워지게 만드실 것이다는 것, 그렇게 해서 우리의 모든 일들은 그분 안에서 작업되고, 그러므로 그분의 정의가 우리에게 작업되도록 하는 것을 우리에게 납득시키심으로 “그분의 영은 정의에 관해 세상을 납득시키러 오신다.” 하느님의 영의 임무의 근원, 그리고 정의에 관해 세상을 납득시키는 힘의 근원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고, 더 이상 너희가 나를 보지 못하는” 이유에 있다고 우리의 주님은 선포하시고 있다. 그분의 인성이 그분의 신성과 하나 되셨을 때가 예수께서 아버지께로 가셨던 때이다. 이미 아는 바대로 아버지는 신성한 사랑 또는 선함이다. 그분의 인성을 본질적이고 영원한 정의로 만드셨을 때, 그 정의는 우리의 정의가 되어 주셨다. 제자들이 주님을 더 이상 보지 못한다고 말하셨을 때 그분이 뜻하신 바는, 그들이 육체적으로 더 이상 그분을 보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를 영적으로 생각하면 제자들이 아들(the Son)을 더 이상 보지 못한다는 것은 신앙이 그들의 체험 안에서 사랑을 잃었을 때이다. 사도들의 말로 이렇게 표현되어있다. “이리하여 모든 것이 그분에게 굴복 당할 때에는 아드님 자신도 당신에게 모든 것을 굴복시켜 주신 하느님께 굴복하실 것입니다. 그 때에는 하느님께서 만물을 완전히 지배하시게 될 것입니다” (고린도전 15:28).
11. 더구나 하느님의 영은 심판에 관하여 세상을 납득시키려 오신다. “그 이유가 이 세상의 제 1인자가 심판되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이 세상의 제1인자들이 심판된 것은 주님께서 어둠을 정복하셨을 때, 그리고 영계에서 심판을 결과되게 하셨을 때, 이를 수단으로 지상에서 살았던 선한 자와 악한 자를 분리시켰을 때이다. 그러나 영계에서의 이 일의 효과는 자연계에도 미치는 바, 그것은 인간의 마음 안에서 선을 악으로부터 분리해준다. 그리고 그 결과로서 이 세상에서 선한 자는 악한 자와 분리되고 있다. 잘 알려져 있는 것은 시대가 더 부패해지면 해질수록 선과 악, 미덕과 악덕이 덜 구분된다는 것이다. 신성한 심판의 결과 중 하나는 이런 구별을 공표 하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인간으로 하여금 의로운 자와 사악한 자, 하느님을 섬기는 자와 섬기지 않는 자를 식별 가능하게 하심으로 심판에 관하여 세상을 납득시키러 그분의 영을 수단으로 오신다 (말라기 3:18). 이것이 이 세상의 왕들이 심판된 유익한 결과이다. 그 결과는 저 세상에서는 천국과 지옥, 이 세상에는 선과 악 사이의 힘이 균형을 회복하는 것이다. 만일 이 세상에서 악의 힘이 선의 힘을 능가했다면 인간 사회는 더 존재할 수 없었다. 사악함이 이 세상에 있지만 악만큼 선도 최소한 그 안에 있는 것이다.
12. 주님께서 진행하신다. “아직도 나는 너희에게 말해줄 많은 것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너희가 지금으로서는 그것들을 감당할 수 없다.” 이 때로부터 예수께서는 부활 전 이든 후 이든 제자들에게 많은 말씀을 하신 것 같이 나타나지는 않는다. 물론 그분이 죽은 자에서 일어나신 후 그들에게 나타나시어 그들과 대화했던 몇 가지 경우에서 그들에게 많은 것을 말하셨을 것이라 믿는다. 그 중 한가지 기억할 수 있는 예는 그분이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와 여행하셨던 경우이다. 그 때 모세와 모든 예언서에서 시작해서 그분은 자신에 관해 성경 안에 있는 내용을 그들에게 상술하셨다. 그분의 해설의 폭과 깊이는 두 제자 자신들이 이런 증언, “길에서 그분이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나 성서를 설명해 주실 때에 우리가 얼마나 뜨거운 감동을 느꼈던가!” 라는 고백으로도 가늠 된다 (누가 24:32). 이 약속은 어쨌든 그 당시 예수께서 전달하셨던 그 제자들 자신 만에 한정된 게 아니라 미래의 모든 시대에 있게 되는 제자들에게도 주신 약속이다. 교회를 형성하고 표현하는 것으로서 주님의 제자들을 고려한다면 주님의 말들은 그 당시 현존했던 교회 뿐만 아니라 미래에 교회를 만드실 것을 드러낸 것과도 관계된다. 모든 시대와 모든 교회 처방은 그 당시 사람들의 수용력과 필요성에 걸맞은 수준의 진리를 받는다. 빛의 과잉은 더욱 눈멀게 하고 지식으로 그들을 가르쳐 주기는커녕 오히려 수수께끼로 그들을 혼란하게 한다. 참으로 성경은 교회가 요구하는 모든 것, 또는 교회가 계시된 진리에 관해 언제나 요구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포함하고 있다. 게다가 그 진리의 발달은 한계가 없다.
13. “그분, 진리의 참 영이 올 때, 그가 모든 진리 안으로 너희를 안내할 것이다. 그 이유가 그는 자신으로부터 이야기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듣는 것은 무엇이든, 그것을 이야기할 것이다. 그리고 그는 장차 올 것들을 너희에게 보일 것이다” 하느님의 영의 기능이 이 구절 안에 있고 또 이 뒤를 잇는 구절에서 더 명백하게 지적하고 있다. 그것은 제자들을 진리로, 모든 진리 안으로 인도하는 것이다. 성령은 계시의 저자이다. 그 이유가 옛날의 거룩한 사람들은 그들이 성령에 의해 움직여졌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계시가 주어진 지금의 경우 성령은 이해성을 열어서 말씀 속의 가르침을 지각하게 한다. 여호와의 영이 계시를 주었다. 예수의 영은 예증을 주고 있다. 그러므로 부활후 예수께서는 그분의 제자들에게 숨을 내쉬며 “너희는 성령을 받아라” 하고 말하셨다. 그리고 그들의 이해성을 열어서 그들이 성경을 이해하도록 하셨다. 그런데 본문에서 예수께서 하느님의 영에 관해 “그분은 자기 스스로 말하시지 않고 들으신 대로 말하실 것이다” 하고 말하신다. 마치 아버지와 관련된 자신을 말하실 때같이 그분 자신에 관련된 하느님의 영에 관해 말하신다. 아들은 그가 아버지에게서 들은 것을 말한다. 성령은 그가 아들에게서 들은 것을 말한다. 물론 우리는 이 언어를 자연적 수준에서는 이해할 수 없다. 이 언어는 신성한 생각들이 신성한 마음 안에서 진행되고, 마지막으로 인간과 교통하는 순서를 표현하기 위해 의도된 것이다. 이 언어는 세 신성한 인물들을 생각해내어 이해하려 할 때 합리적일 수 있는 의미는 없다. 그러나 세 분이란 세 신성한 본질들이라고 생각하여 이해할 때 이 언어는 드높은 의미를 표현한다. 세 본질들이란 신성, 인성, 펼치심(operation), 또는 사랑, 지혜, 힘(power)들이다.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모든 것은 그분의 사랑에 근원을 두고 그분의 지혜를 수단으로 모양을 이루고 방향을 잡아서 그분의 힘을 수단으로 결과에 가져다 놓인다. 상응의 언어에서 이것은 아버지로부터 아들을 통해 성령을 수단으로 인간에게 교통되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영은 자신 스스로 말하지 않는 것이다. 성령이 나누어주는 것은 성령에 근원을 둔게 아니다. 하느님의 영의 작용은 참으로 권능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권능만이 행사하는 것, 또는 권능만이 우리를 압도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권능의 작용은 지혜만의 방향제시로 되는 것도 아니다. 그 이유가 이럴 경우 지혜는 우리의 의지에 반대하여서도 우리를 확신시키려 할 것이기 때문이다. 오로지 사랑에 의해 움직여지고 지혜에 의해 방향이 제시된 권능의 행사만이 있다. 이것이 우리 심정에, 지성에, 삶에 행동된다. 하느님은 전능하시나 그 권능 스스로는 아무 것도 하시지 않는다. 그 권능은 무한한 지혜로 제시된 무한한 사랑의 에너지일 뿐이다. 주님께서는 이 구절의 말로 제자들을 잘 위로하셨을 것이다. 그런데 제자들을 안내해 주겠다는 하느님의 영은 그들에게 장차 올 것을 보여 주시게 되어 있었다. 이 말씀은 하느님의 영 자체가 오심에 따라 있게 될 것을 뜻하는 게 아니라, 성령이 온 뒤, 이를 따라 발전되어 가는 것들, 주님이 밝히 알리셨던 것들, 또는 거행되어질 사건들을 뜻한다. 그리고 이런 것을 하느님의 영은 제자들이 이해하도록 계발시키고 설명해 준다는 것이다. 사도들은 미래의 사건, 약속에 관한 지식을 선물 받았다고 상상해 본다 해도, 그것이 우리와 관련되는 만큼에서 주님께서는 그분의 영을 수단으로 예수 안에 있는 바대로의 진리를 우리의 이해성이 보도록 열고 우리의 심정이 받게 해서 우리가 계발되고 거듭난다는 희망을 줄 수 있을 뿐이다.
14. 주님께서 성령에 관해 더 말하신다. “그는 나를 신성화 할 것이다. 그 이유가 그는 나의 것을 받을 것이고, 그것을 너희에게 보일 것이기 때문이다.” 앞 구절에서와 같이 이 구절도 인간 방법에 따라 표현된 신성한 진리이다. 우리는 이 구절에서도 역시 한분 신성한 인물이 또 다른 신성한 인물에 속한 것을 가져다가 인간에게 보여준다는 방식은 합리적일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는 신성한 인물의 영이 그분으로부터 진행되어 나와서 수용력 있는 피조물에게 구원의 선물을 운반해 주고, 그들의 영혼이 구원됨에서 그 구원의 선물의 저자 역시 신성 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느님의 영은 주님을 신성 되게 한다. 그러나 그분이 그렇게 하시는 것은 주님의 것을 가져다가 제자에게 보여줌으로 이루어진다. 하느님의 영이 영혼을 거룩하게 해서 구원할 때 끝마치는 그 일에서 구세주를 신성 되게 한다. 인간의 구원이 주님의 신성 되심이다.
15. 하느님의 영이 아들로부터 받는 것은 아들이 아버지로부터 받은 것들이다. “아버지께서 가진 모든 것들은 나의 것이다. 그러므로 진리의 참 영이 나의 것을 가져가고, 너희에게 그것을 보일 것이라고 나는 말했다.” 성령의 시행에 관한 서술의 이 시리즈는 아버지, 아들, 그리고 하느님의 영 사이에 있는 구분되는 점과 연관되는 점의 본성을 가장 명백하고 납득되게 가르치고 있다. 먼저 주님은 하느님의 영에 관해 그분은 스스로 말하지 않을 것이고, 그분이 들은 대로 말할 것이라고 하셨다. 그 다음 말하시기를, “그분은 나의 것을 가져갈 것이고, 그것을 너희에게 보여줄 것이다” 라고 하셨다. 그리고 지금 말하시기를, “아버지께서 가지신 모든 것이 나의 것이다. 그러므로 그분이 나의 것을 가져다가 그것을 너희에게 보여주는 것이라고 말한 것이다” 하셨다. 이런 모든 사항은 그들이 세 분의 구분되는 신성한 인물들이 아니라 세 가지의 신성한 본질들임에 틀림없다는 것을 가르치는 게 아닐까? 이런 진리의 지식들, 즉 그리스도 안의 하느님이 우리에게 하느님이고 우리와 더불어 계신다는 것, 아들 외에 아버지를 아는 자는 아무도 없다는 것, 아들이 그분을 밝히 알리신다는 것, 아버지에게 올 자는 아무도 없다는 것, 아버지는 아들만을 수단으로 하지 않고는 아무에게도 오시지 않는다는 등등의 지식은 우리가 아무리 주의를 기울여 연구해도 부족할 뿐임을 명심해 두어야 한다. 만일 아버지와 아들을 신성한 인물들로서 고려한다면 그것은 명료한 의미를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러나 아버지는 한분 주님의 인물 안에 있는 신성이고 아들은 인성으로 간주할 때 위 신성한 선포는 실제의 의미를 가진다. 이러면 그리스도 안의 하느님은 그분의 인성 측면에서의 하느님이다는 것이 보여진다. 더불어 알 수 있게 되는 바, 하느님께서 그분이 입으셨던 인간 본성을 신성화 하셨을 때 신성의 모든 특질은 인간 본성과 교통되었다는 것이다. 마치 영혼이 생명과 힘을 육체에 부여하는 것과 같다. 그리고 육을 입으신 이래 하느님은 그분의 인성을 매체로 피조물과 교통하신다는 것도 알게 된다. 마치 인간의 영혼이 각자의 몸을 매체로 해서 그의 동료들과 교류하는 것과 같다. 주님의 인성 안에서 신성한 속성들은 인간화 되셨는바, 인간 마음에 영향을 주고 납득시키는데 상대적으로 더 강력해졌다. 신성한 속성들이 인간화 되었기 때문에 그 속성들은 인간의 구원에 더 효험이 있게 되었다. 신성이 인성이고 인성이 신성임을 수단으로 주님의 현존과 권능이 우리와 함께 있는다. 순수하게 신성한 존재로부터, 또는 단지 인간일 뿐인 존재로부터서 구원해주는 효능은 그들의 현 상태 안에 있는 인간의 후손 안에서 진행되어 갈 수 없다. 순수한 신성은 타락된 인간과 접촉할 취지를 가지고 있지 않다. 또한 단지 인간성 측면만이라면 타락된 인간을 회복시킬 힘을 가지고 있지 않다. 우리 주님의 말들이 이것을 놀랄만하게 가르치고 있다. “아버지가 가지신 모든 것은 나의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말했다. 그분이 나의 것을 가져다가 그것을 너희에게 보일 것이다.” 주님이 그분의 제자들에게 보여야만 하는 것들이란 지금 그분 자신의 것이 된 것, 즉 아버지의 것들이었다. 아들의 것이 되지 않은 아버지의 어떤 것이 있다면, 또는 아버지의 것이 되지 않은 아들의 어떤 것이 있었더라면, 제자들에게 어떤 유익한 혜택도 돌아가지 못했으리라. 인성이 된 신성만이, 신성이 된 인성만이 타락한 인간성에 도달해서 일으켜 거룩하게 해서 구원할 수 있었다. 그러나 아버지의 모든 것은 주님의 것이 되었다. “그러므로 성령께서 내게 들은 것을 너희에게 알려 주시리라고 내가 말했던 것이다.” 이 위대한 진리는 모든 기독 제자들의 마음에 깊은 감명을 남겨야 한다. 이 진리는 예수를 자기의 하느님과 구세주로 가지는 것이 말할 수 없는 축복임을 기독 제자들에게 밝히 알게 할 것이다. 그 이유가 예수 안에서 인간이 바랠 수 있고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예수에게는 은총과 진리가 가득한 바, 하느님의 영의 약속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모든 이들, 자기들의 영혼을 위해 쉴 곳을 발견하기를 바라는 모든 이들을 위해 편리하고 필요로 하는 것은 무엇이든 주시겠다는 약속이다.
16. 그분의 마무리된 일의 열매가 그들에 의해 실감되어질 때인 빛나고 행복한 때를 제자들에게 내다보게 하신 주님께서는 현재에로 되돌아 와서 위의 상태가 달성되게 하는 통로인 시련을 상기시키고 있다. “조금 있으면 너희는 나를 보지 못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얼마 안 가서 나를 다시 보게 될 것이다. 그 이유는 내가 아버지에게 가기 때문이다.” 글자대로 일 경우 이는 죽음으로 해서 주님이 제자들로부터 이동되고 부활로 해서 그들에게로 다시 오시는 것이다. 영적으로 이것은 영혼의 체험, 즉 죽음으로부터 영혼으로 건너가는 때와 건너갔을 때가 관련되고 있다. 주님의 죽음과 부활, 그분에게도 개인적으로 한번은 실제였는데, 제자들의 체험 안에서는 아직도 실제이다. 거듭나는 삶 안에서 주님을 따르는 모든 이들에게 이런 때가 오는데, 그 때란 그들이 그분을 육에 따라서는 보지 못하는 때, 그리고 다시 영을 따라서 그분을 보는 때이다. 후에 주님께서는 이 두 상태들의 본성을 묘사하고 있다. 여기서는 이 두 상태 모두가 주님에 관련해 말해지고 있는데 마치 그분께서 제자들의 지적 시각 또는 시야 앞을 지나쳐 갔다가 다시 오는 듯하다. 그러므로 이것은 지적인 상태들 또는 신앙 의 상태들과 관련된다. 우리의 첫 번째 지식과 신앙 은 외적이다. 그 이유가 우리의 자연적 이해성은 자연적 방법에 따라 신성한 것일지라도 보기 때문이다. 우리의 육욕적인 생각들은 신성과 영적 진리들을 육체의 덮개를 가지고 옷입힌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직도 육욕적인 방법 안에서 주님을 보고 안다. 만일 우리가 그분의 계명에 순종하는 삶 안에서 주님을 신실하게 따른다면, 우리는 이 육욕적인 상태를 지나서 영적인 상태로 들어가고, 그 안에서 우리는 주님을 영적인 방법에 따라 보게 된다. 상태의 변화는 시련 없이 결과 되지 않는다. 그 이유가 모든 변천의 상태는 환란 중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시련은 짤막할는지 모르나 그것은 날카롭다. 그러나 모든 시련은 그 나름의 보상을 가져다준다. 일시적인 희미함이 더 명료한 빛의 뒤를 따른다. 달빛이 태양의 빛으로 되어간다. 그래서 태양의 빛은 일곱 날의 빛으로서 일곱 겹이 되어간다. 사랑 없는 신앙의 밤빛 대신 우리는 그분의 날개 안에서 치료하시면서 떠오르는 정의의 태양에 의해 생산된 구름 없는 아침의 명료하고 따뜻한 빛을 가진다. 굴욕 받는 상태의 주님을 보는 대신 우리는 영광으로 계신 그분을 바라본다. 이것들이 주님의 말씀에서 암시되고 있다. 그 안에서 그분은 보는 것을 위해 두 개의 다른 용어를 사용하는데, 그분의 부활 후에 그분을 본다는 것을 표현한 용어는 그분이 육에 계실 때 본다는 것을 표현한 용어 보다 더 강력한 용어이다. 영의 빛 또는 내적 인간의 빛은 육의 빛 또는 바깥쪽 인간의 빛보다 더 우수하다.
17,18. 이런 변화는 확실히 있고 체험에서 실재하지만 아직도 첫 번째 상태에 머물고 있는 제자들은 그 본성을 납득할 수 없다. “그러자 몇몇 제자들이 ‘조금 있으면 나를 보지 못하게 되겠고 또 얼마 안가서 다시 보게 되리라든가, 나는 아버지께로 간다든가 하는 말씀은 도대체 무슨 뜻일까?’ 하고 수군거렸다. 그러면서 그들은 ‘얼마 안가서 라는 말씀이 무슨 뜻인가? 무슨 말씀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군!’ 하고 말하였다.” 깡그리 모르는 제자의 상태, 그들의 전체 역사가 그들에게 주님의 왕국에 관한 것을 보이고 그를 수단으로 건설되는데도 아는 바 없는 제자의 상태가 위 구절에서 그림같이 표현되고 있다. 위 묘사보다 조금도 덜하지 않은 상태들이 제자의 상태와 상응되는 모든 상태의 기독제자의 상태 속에도 존재하고 있다. 미래의 상태들은 미래의 사건들만큼이나 우리의 시야로부터 감추여 있다. 그리고 지금 조차도, 즉 복음서에 기록된 과거 사건들에 드리워 졌었던 상태들에 관해 말할 수 있는 지금 조차에서도 그 상태가 우리의 체험 안에 존재할 때까지 그것들의 참 본성에 관해 아는 게 아무것도 없다. 비록 모든 제자들은 아니고 그들 중 몇몇만이 주님의 신비스런 말하심에 관하여 이야기했다. 그럼에도 빠르게 접근하고 있는 사건들을 납득한 자는 그들 중 아무도 없었다. 그리고 그런 사건들이 말해졌을 때 그들은 믿기를 거절했다. 제자들 모두를 묶어서 생각하면, 그들은 주님의 죽으심과 부활에서 실용적인 진리라고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일종의 신비인 것만을 언제나 발견하고 있다. 체험이 그것을 벗길 때까지 그것은 누구에게나 수수께기이다. 만일 우리가 제자들을 거듭나는 마음의 생각과 애착 들을 표현하는 것으로 생각하면 그들 중의 몇몇은 준비 단계 안에서 이 주제에 관해 어둠밖에 보는 게 없다. 그리고 만일 우리가 제자들을 말씀 속의 진리들을 표현하는 것으로 생각한다해도 똑같은 희미함이 관찰될는지 모른다. 그 이유가 메시아는 일시적인 왕국으로 그들을 인도해주고 심판의 보좌에 그들을 앉히리라는 착각에 빠져 있기 때문이다. 그들이 내부로부터 빛을 내는 참 빛에 의해 자신을 계발할 때까지 주님의 죽음과 부활이라는 주제에 아무런 빛도 드리울 수 없다.
19. 거듭나는 삶의 초기 단계에서 주님의 죽음과 부활이라는 주제에 관한 희미함을 거두어 낼 수 없는 한편, 진리로서의 주님으로부터 계발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제자들 안에 있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이 듣고 싶어하는 낌새를 알아채시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조금 있으면 너희는 나를 보지 못하게 되겠고 얼마 안가서 다시 만나게 되리라고 한 내 말을 가지고 서로들 문의하고 있는 것이냐?” 이 구절은 제자들이 그들의 바람을 표현하기도 전에 알고 계신 또 다른 실례이다. “어느 누가 사람을 증언하는 것은 그분에게는 필요치 않다. 그 이유가 그분은 그 인간 안에 있는 것을 아시기 때문이다.” 이것은 지금도 여전하다. 주님께서는 빛으로 오고 싶은 바람이 강하게 일도록 모호한 말을 하신다. 애매모호한 진리 안에는 알고자 하는 바람과 수용력이 있다. 이렇게 해서 마음은 빛을 수용할 준비가 될 뿐아니라 생명 있는 신앙 을 생산하도록 이해성과 심정도 준비된다.
20. 제자들에게 그분이 떠나시고 되돌아오심이 빠르게 접근하고 있다고 말하신 그분께서는 이 사건들이 그들의 심정에서 흥분시킬 느낌을 들추어내신다. “참으로 참으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슬피 울며 통곡할 것이나, 세상은 환호할 것이다. 그리고 너희는 슬픔에 잠길 것이나, 너희의 슬픔은 환희로 바뀔 것이다.” 주님의 죽음과 부활은 그들의 모든 생각과 느낌에 혁명을 일으키게 되어있다. 그래서 그들은 자연적 상태에서 영적 신앙 과 사랑의 상태로, 지상적 왕국을 생각함에서 천국적 왕국을 생각하는 쪽으로 변화할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생명의 위기에 접근해가고 있다. 그러나 이런 것은 주님을 따르는 모든 이에게 공통된 경험이다. 그래서 그 상태나 결과들을 아는 것도 공통되는바 우리는 자신에 관련해서 그것들을 생각해야만 한다. 교회와 세상의 반대되는 요소들은 우리 안에 있다. 우리의 시련은 서로 반대됨이 싸움질하는데서 비롯된다. 우리들 안에는 구세주를 십자가형에 처하는 세상이 있다. 그래서 잠깐동안 그분은 우리의 영적 지각에서 감추여 있게된다. 그러면 제자들은 슬피운다. 애착 이 그 대상을 박탈당할 때 그들은 고통할 수밖에 없다. 뒤에 남겨진 애착 의 슬픔만큼 심각한 심신의 고통은 없다. 눈물을 흘린다는 것과는 달리 슬피움(weeping)은 심정과 이해성의 즉각적인 슬픔을 표현한다. 그 반면 통탄함(lamentation)은 심정과 이해성의 슬픔에 대한 바깥쪽 표현이다. 그러나 제자들로 울며 통탄하게 한 사건은 세상에게는 기쁨의 원인이 된다. 마치 정복당하기만 하던 그들의 적으로부터 해방된 느낌으로 눈썹을 치켜 휘날리며 자기들의 권능을 떠벌린다. 이것은 일시적인 승승장구일 뿐이다. 마치 이집트군대가 해방된 이스라엘 백성을 추격해와 홍해바다 안의 통로에까지 바짝 뒤따랐던 모습과 비슷하다. 그것은 또한 육욕적인 마음의 원리의 마지막 승리이다. 그이유가 그들에 관해 이렇게 말했졌기 때문이다. “오늘 너희가 보았던 이집트인을 너희는 영원히 더 이상 보지 않을 것이다.” 영혼 안에 있는 사랑과 신앙의 대상으로서 구세주의 부활은 영혼으로부터 통치하는 원리로서의 세상을 영원히 제거한다. 삶의 상태가 이렇게 뒤바뀐다. 천국의 사랑이 세상의 사랑 위쪽으로의 승강을 획득한다. 그리고 상태가 뒤바뀌는 것은 체험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마음은 슬픔을 깊이 느꼈으나 지금 그 슬픔은 환희로 변해진다.
21. 이 슬픔과 환희의 본성을 우리의 주님께서 설명하신다. “여자가 산고 중에 있을 때, 그녀는 근심을 가진다. 그 이유는 그녀의 시각이 다가오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녀가 아이를 건너받자 마자, 그녀는 고통 했음을 더 이상 기억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사람이 세상으로 태어나졌다는 환희 때문이다.” 우리의 주님께서 이 구절에서 주시는 주제에 관한 예증은 매우 중요한 사실에 관한 놀랄만한 예증인바, 그분은 단지 비유의 언어만이 아니라 상응의 언어로도 자신을 표현하셨다. 거듭남은 진실로 새로운 출생이다. 자연적 출생과 영적출생 사이에는 정확한 상응이 있다. 새로운 출생은 심정 안에 탄생(begotten)되었었던 생명의 원천을 이루는 원리를 삶에 실지로 존재하도록 가져오는데 있다. 지금 그것은 우리의 내향의 확신과 원리들을 삶의 큰 노동, 즉 격렬한 시련이 체험되는 행동에로 가져오는 것이다. 우리의 의도 안에 있는 것을 행위 안에 있게 하는 것은 얼마나 힘든지 우리 모두 잘 안다. 이것은 기독인의 성실과 충성을 가장 높게 보이는 본보기의 증거가 되어왔다. 사도 바울도 그가 사랑했고 심정에서 믿었던 것을 그의 삶에서 실감하는데 그의 자연적인 변덕스러움과 선을 행하는데 무력함에 얼만 통탄했는지! 그는 내향의 인간에 따른 하느님의 법에 기뻐했다. 그러나 그는 자기와 더불은 법에 대항하는 그의 멤버들 안의 법을 느꼈다. 그가 선을 행하기를 바랐을 때 악이 그와 함께 현존했다. 그래서 그의 영의 바람과 육의 욕망의 대결로 심한 압박을 느꼈다. 이렇게 그는 강렬하게 외치기까지 했다. “누가 이 죽음의 몸으로부터 나를 해방해 줄 것인가?” 영은 간절하나 육이 약하기 때문에 새로운 출생은 곤경과 곤란이 동반되는 것이다. 자연적 마음은 우리의 유전적인 악들이 자리잡고 있는 곳이다. 그러므로 영적 마음에서 탄생되었던 영적 사랑과 진리의 원리들이 자연적 마음에 하강하는 것을 반대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해산하는 여인의 고통이 그것의 참되고 실용적인 빛에서 우리 앞에 있는 이 주제를 표현할 목적으로 성경에서 말해지고 있다. “여인이 해산할 즈음이면 걱정이 태산같다. 진통을 겪어야 할 때가 왔기 때문이다.” 이 구절은 그분께서 그들로부터 떠나는 때에 제자들의 슬픔을 예증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그러나 주님이 그들로부터 떠나신 것은 그분이 “죽은 자로부터의 첫 출생”이 되도록 죽음을 수단으로 한 것이었다. 옛 사람의 죽음은 새 사람의 출생에 필수적이다. 영적 인간의 출생에 자연적 인간의 저항은 새 사람이 출생하는데 경험되는 슬픔의 원인이다. 그러나 출생이 완성되었을 때 실로 대단히 컸던 슬픔은 대단한 기쁨으로 바뀐다. “아이를 낳으면 사람 하나가 이 세상에 태어났다는 기쁨에 그 진통을 잊어버리게된다.” 아이 출생의 쓰라림은 모성애의 달콤함으로 순간적으로 풍요하게 보상되어진다. 이와 같이 영적 해산의 진통도 새 삶이 영감 받는 새로운 기쁨으로 확실하고 풍부하게 보상된다. 어머니 쪽의 사랑은 하느님을 사랑함을 수단으로 영감 되어진다. 그리고 그것의 기쁨은 사랑이시기에 복되고 그분으로부터 파생되었기에 절묘하다. 영적인 출생들이 선함과 진리의 새로운 상태의 존재를 가져올 때, 그 상태는 천국 안에서 거행되고, 새롭고 더 높은 더 없는 행복의 상태가 끝없이 계속 이어지는 가운데서 체험된다. 그들은 더 완전하고 더 행복하다. 그 이유가 그들은 인간성의 더 높은 상태이기 때문이다. 일반적 의미에서 “여인”이란 교회인데, 이 교회란 우리 밖의 교회가 아니라 우리 안에 있는 교회이다. 그리고 기쁨의 원인인 출생되어진 “사람”이란 새로운 사람 또는 거듭나진 사람, 그리고 거룩한 삶의 행동과 말 안에 실지로 존재하게 된 인간의 참된 원리들이다.
22. 위의 교훈적인 유사점을 다가오는 상황을 맞이할 사도들에 적용하시면서 예수께서 말하신다. “너희는 지금 슬픔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나는 다시 너희를 볼 것이다. 그리고 너희의 심정은 환호할 것이다. 그리고 너희의 환희를 누구도 너희로부터 가져가지 못한다.”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그들은 그분을 보게 되리라고 말하셨다. 그런데 지금 그분은 그들에게 그분이 그들을 보게 되리라고 말하시고 있다. 이것은 상호적인 지식과 결합을 함축하고 있다. 우리가 그분을 뵙고 그분이 우리를 보시는 것은 서로의 짝이고, 지각의 완전함이다. 우리의 생각이 그분을 향한 위쪽을 바라볼 때 우리는 주님을 뵙는다. 그리고 그분의 진리가 우리에게 내려올 때 그리고 자신 안에서 그분을 보도록 우리에게 그분의 진리를 주실 때 그분은 우리를 보신다. 그런고로 우리의 심정은 기뻐한다. 그 이유가 심정 안에 있는 기쁨은 의지와 의지 속의 애착 에 주님의 진리를 수용함으로부터 발생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진리를 볼 뿐만 아니라 진리를 느끼고 진리 안에서 기뻐한다. 주님이 이 기쁨을 불어넣으실 때 그 기쁨은 우리로부터 어느 누구도 빼앗아 갈 수 없다. 악과 잘못의 권능은 깨트려지고 사랑과 진리의 권능이 건설된다. 그리고 거룩한 원리들에 불어넣어진 기쁨은 그것을 빼앗아가려는 세상의 권능 그 너머에 있다.
23. 지금 우리는 새로운 상태와 그 기쁨의 복된 결과를 듣는다. “그 날에 너희는 나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는다. 참으로, 참으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내 이름 안에서 아버지에게 묻는 것은 무엇이든, 그분은 그것을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보통이 아닌 이 선포는 무엇을 표현할까? 제자들이 그분에게 물을 것은 아무것도 없고, 그들의 기도가 보내어지되 아버지에게 요청한다는 의미일까? 제자들은 이것을 그렇게 이해하지 않았다. 그분의 승천 이후 사용되었던 바대로 기록된 그들의 첫 기도는 그분에게 직접 보내어졌다 (사도행전1:24). 언급되어진 두 번째 기도도 첫 순교자에 의해 그분에게 보내지고 있음을 가리키고 있다 (7:59). 지금 공통적으로 이렇게 뜻한다고 이해되고 있다. 기독인들은 그들이 필요한 것은 개인적으로 예수에게 보내서는 안 된다는 것, 그러나 그리스도 때문에 그들의 청원을 수여하도록 아버지께 물어야 한다는 것이다. 한가지 예를 제외하고는 신약 성경에서 이에 대한 암시가 없다. 한가지 예란, 번역자가 원어에 포함되지 않은 생각을 표현한 경우에서이다. 바울이 서로 용서하도록, 마치 하느님께서 그리스도를 봐서 그들을 용서하신 것같이 하라고 에베소인들에게 권면했다 (에페소4:32). 그러나 글자대로 번역되면 이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이 너희를 용서하심같이” 이다. 어쨌든 하느님이 죄인을 용서하는 것은 그리스도가 그들을 위해 용서를 구입하셨기 때문이라는 견해는 여기서 이든 성경 어디에서 이든 가르치지 않는다. 자주 말해서 또 반복할 필요는 없을 것같지만, 아버지와 아들은 두 인물들이 아니고 신성 속의 두 본질들이다. 아버지는 신성한 사랑이고, 아들은 신성한 지혜이다. “그 날에 너희는 나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는다” 고 주님이 말하실 때, 그분이 암시하신바, 그분이 제자들의 심정 안에서 일어나시고, 그들이 그분의 사랑의 영향 아래 행동하고 살아갈 때 제자들이 도달하는 더 높고 더 거룩한 상태에서 그들은 아버지밖에 아들에게 물을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이다. 사랑은 사랑을 묻는다. 그러나 지혜의 이름으로 묻는다. 지혜는 사랑을 계발한다. 그 이유가 사랑이 지혜의 지시를 받을 때만이 참된 사랑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지혜롭게 사랑할 때만이 올바르게 사랑한다. 아버지께 묻는다는 것은 주님으로부터 사랑의 선물을 받고 싶다는 것이고, 아들의 이름으로 묻는다는 것은 지혜의 지시에 일치하는 바람을 표현한 것이다. 우리가 아들의 이름으로 아버지께 구하는 것은 무엇이든 그분은 주실 것이다. 우리의 기도가 사랑에 의해 감화되고 지혜로 안내되는 한, 그들은 하느님의 뜻과 지혜에 일치되고 있다. 그러므로 평화의 답을 받을 것은 확실하다. 우리가 부적당하게 묻기 때문에 받지 못하는 것이다. 우리가 지혜롭지 못하게 물을 때 우리는 부적당하게 묻는 것이다. 우리가 지혜 있게 물을 때, 묻는 것이 무엇이든, 아버지는 우리에게 주실 것이다. 이것이 완전한 기도인바, 우리는 그렇게 기도하려고 노력해야 하리라. 이것은 비록 우리가 절대적으로는 결코 도달 못 한다 할지라도 계속적으로 접근하려 노력해야 하는 대목이다.
24. 제자들은 지금 주님이 기술하신 이 상태에 도달하지 못했다. 그들은 그 상태 근처에 진입하지도 안했다. “지금까지 너희는 내 이름 안에서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물어라, 너희는 받을 것이다. 너희의 환희는 충만해질런지 모른다.” 의심해 볼 것도 없이 그들은 하느님께 물었었다. 그러나 예수의 이름으로 묻지는 않았다. 아직 그들은 그리스도 안에 계신 하느님, 인간 안에 계신 신성, 영원한 지혜 안에서 명백히 된 영원한 사랑을 예배하지 않았다. 그들의 사랑은 아직까지는 지혜를 수단으로 방향을 잡지 않았고 품질도 정해지지 않았다. 그들은 장차 오게 된다는 왕국이 지상적 왕국이라고만 알고 있을 뿐이어서 하늘의 왕국에 속하는 그분의 영 또는 이름으로는 아무 것도 묻지 않았다. 이것을 그들은 머지 않아 행하는 쪽으로 인도되었다. 이것은 그들 삶과 생각의 모든 흐름을 바꾸었다. 그들은 지금까지는 예수의 이름으로 아무 것도 묻지 않았는바,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구하면 받을 것이고 기쁨이 넘칠 것이라는 것을 보증하시면서 그들이 묻도록 조언하시고 있다. 이 보증, 참되고 열렬한 기도의 어떤 성공에 관해서 말씀의 모든 곳에 있는 이 보증은 가장 용기를 주는 대목이면서도 동시에 수색하고 있다. 주님에 의해 숨이 불어넣어진 참된 기도는 그분의 뜻과 지혜를 표현해야만 한다. 그렇게 한 만큼에서만 참될 뿐이다. 모든 참된 기도는 예수의 이름으로 구함이다. 참된 기도 안에는 그분의 이름, 그분의 마음, 그분의 영이 있다. 그분의 마음이 우리의 마음일 때, 즉 우리 자신의 것을 표현하면서 그분의 마음을 말할 때 우리는 진실로 기도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아버지께 구한다. 우리가 주님으로부터가 아닌 나 자신으로부터 기도하는 만큼 우리는 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것이다. 모든 인간의 기도는 죄짓게 하는 불완전함의 어떤 것을 그 안에 담는 일이 흔한 것은 사실이다. 불완전한 만큼 주님의 뜻에 반대되어진다. 이런 반대의 요소가 항상 담겨있을 수밖에 없는 게 우리 기도의 현실이라면 우리의 기도에 나의 뜻대로 마옵시고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소서 라는 주님의 기도를 늘 첨가해야 하리라.
25. 주님께서 아득히 멀리 있는 그분의 제자들에게 전달하신 것을 바로 앞에 있는 제자들이 불완전하게 이해할 수밖에 없다는 것은 가능한 일이다. 다시 말해 장차 본문의 제자들만큼 희미한 이해력을 지닌 모든 다른 제자들에게도 전달하시는 말씀이다. 모든 제자들에게 이런 주님의 말들을 참되다. “이런 것들을 나는 속담에서 너희에게 이야기했으나, 때가 온다. 즉 내가 속담 안에서 너희에게 더 이상 이야기하지 않고, 내가 아버지로부터 명백하게 너희에게 보일 때이다.” 비유(parable)는 친숙치 않은 진리를 표현하기 위해 사용되는 친숙한 형상(image)이다. 제자들에게 주님은 비유였다. 그들은 그분을 한 인간으로 보았다. 그들은 그분이 하느님이시다고 명백히 아는 수준에 아직 도달되지 못했다. 그들은 그분을 본 자는 아버지를 본 것이라는 진리를 아직은 알지 못했다. 그들은 그분 안에 아버지께서 육체적으로 머무신다는 것, 그분은 아버지로부터 나온 말들을 하셨고 그 일을 했다는 것을 아직은 모르고 있다. 제자 중 하나가 자기들에게 아버지를 보여 달라고 물었을 때 그분은 위의 말을 하셨다. 그들은 명백하고 완전무결한 이 위대한 진리를 알 수 없었다. 그 이유가 주님이 그분 자신이든, 그들 안에서이든 어디에서이든 아직 신성화하시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분이 아버지에 관해 그들에게 가르치지 않고 명백히 보여줄 때가 아주 가까웠다. 아버지는 아들 안에서만 보여질 수 있었다. 그 이유가 아버지를 아는 자는 아들밖에 없기 때문이다. 아들이 밝히 알게 해주는 자만이 그분을 알게 된다. 그러나 아버지는 아들이 본질 측면이든 인물 측면이든 아버지와 하나 되실 때까지 아들 안에서 명백히 보여질 수 없었다. 인성이 신성이 될 때까지 신성은 인성 안에서 완전하게 보여질 수 없었다. 그런 다음이면 주님은 비유로 제자들에게 더 이상 말하시지 않는다. 그분의 신성을 감추어 놓이게 했던 연약한 인성이 땅에 떨어져 죽는 씨같이 죽음을 수단으로 벗겨질 때, 그분의 부활에서 새롭고 영광의 인성이 솟아오르고 내재하신 신성의 형상이 표현된다. 그 안에서 주님은 제자들에게 아버지를 명백히 보이셨다. 그분 자신 안에서의 이런 변화는 그분의 제자 안에서도 그와 상응되는 변화를 생산했다. 그분이 그들의 마음에 뿌렸었던 진리의 씨, 정직한 심정이라는 옥토에 떨어졌던 진리의 씨가 지금 죽었고, 씨가 지녔던 영적 진리라는 씨눈은 튀어나와 신성한 인성 안에 계신 주님을 참 대상으로 삼는 생명 있는 신앙으로 성장했다.
26,27. 이런 때와 상태를 말하시면서 주님은 말하신다. “그 날에 너희는 내 이름 안에서 물을 것이다. 내가 너희를 위하여 아버지께 기도할 것이다 라고 나는 너희에게 말하지 않고 있다. 아버지 자신이 너희를 사랑한다. 그 이유는 너희가 나를 사랑했기 때문, 그리고 내가 하느님으로부터 왔다는 것을 믿었기 때문이다.” 주님께서는 제자들이 그분의 이름으로 구하는 것에 대한 확실성을 말하시고 있다. 우리는 그 뒤를 잇는 선포에 우리의 시선을 맞추기만 하면 될 것 같다. 성경의 여타 다른 서술을 대단히 글자적이고 자연적인 관점에서 끌어낸 견해가 있는데, 그것은 예수께서 그분을 믿는 이들을 위해 아버지께 간청하신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구절의 경우 그분이 제자들을 위해 아버지께 기도할 필요가 없다고 말하시고 있다. 대단히 만족스런 이유인즉, 아버지 자신이 그들을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만일 아버지가 사랑 그 자체이시다면, 그분을 설득하려는 기도는 필요가 없다. 아버지께서 제자를 사랑하시는 이유는 그들이 아들을 사랑하고 그분이 하느님으로부터 왔다는 것을 믿기 때문에서이다. 아버지와 아들이 따로 구분되는 개인적인물이라는 인간의 생각을 제껴놓고 아버지와 아들은 분리될 수 없는 한분, 무한하신 하느님 안에 있는 신성한 사랑과 신성한 지혜로 간주하면 우리는 주님의 말씀으로부터 배우는바, 주님의 사랑을 획득하는 길은 그분의 지혜를 사랑하는 것, 그분의 사랑이 발산한 신앙 을 가지는 것이다. 주님의 지혜를 사랑하는 것은 그 지혜가 우리로 이렇게 해야하고 처신하도록 가르치는 것을 그대로 따르는 것이다. 진리는 선으로, 지혜는 사랑으로 인도한다. 진리 역시 선을 바래고, 지혜는 사랑을 바랜다. 그래서 바람이 기도의 본질이고, 기도는 바람의 표현이듯, 진리의 기도는 선에 대한 것이고, 지혜의 기도는 사랑에 대한 것이다. 그러나 둘의 결합이 결과되면 서로의 바람과 기도는 중단된다. 그러므로 우리의 주님께서 그분의 제자들에게 그들이 준비하는 상태를 두고서는 “나는 아버지께 기도하겠다. 그리고 그분은 너희에게 또 다른 위안자를 주실 것이다” 하고 말하셨다. 그러나 그들의 완전한 상태를 묘사하실 경우에서는 “나는 너희를 위해 아버지에게 기도할 것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아버지 스스로 너희를 사랑하시기 때문이다”라고 말하시고 있다. 기도의 목적이 달성될 때 더 이상 기도할 필요가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이 아버지라 불리는 또 다른 인물에게 기도한다는 글자대로가 뜻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되고, 만일 우리가 올바르게 생각하기를 바란다면, 아들이 아버지에게 기도함은 지혜가 사랑과 하나 됨을 위해 가지는 바람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이 바람이 결과 될 때 그 바람은 중단된다. 주님께서는 굴욕당하시던 시절에 아버지께 기도하셨다. 그 이유가 그 때는 주님이 유약한 인성 안에 계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 인성이 신성화되시고 그분의 신성과 영원히 결합하신 지금 그분은 더 이상 그렇게 기도할 필요가 없다. 그분은 우리 안에서만 기도할 수 있다. 우리 안에 있는 그분의 진리가 그분의 선함과 하나 되기를, 그분의 지혜가 그분의 사랑과 하나 되기를 기도하실 수 있다. 그러나 그 하나 됨이 결과될 때 그 성취를 위한 기도는 중단된다. 그러면 주님께서 이 말들로 표현한 진리를 실감한다. “나는 너희를 위해 아버지께 기도할 것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 이유가 아버지 스스로 너희를 사랑하시기 때문인데, 그 까닭은 너희가 나를 사랑했고 내가 하느님으로부터 왔다는 것을 믿었기 때문이다.”
28. 주님께서 그분이 말하셨던 마지막 단어에서 표현된 진리에 제자들의 관심을 끌어당기게 하시고 있다. “나는 아버지로부터 공표되었고, 세상에 와있다. 다시 나는 세상을 떠나, 아버지에게 간다.” 주님에 의해 이 진리가 반복된 것은 그 진리가 신앙의 문제에서 갖는 중요성 때문에서라고 만 설명될 수 있다. 그분은 아버지로부터 왔다. 어떻게 그분이 오셨을까? 두 사람이 같이 있다가 한 사람이 먼 여행을 떠나느라 또 다른 한 사람 곁을 떠난 것은 아니다. 이런 생각은 무한하고 전능하신 존재에 관련하여 한 순간이라도 마음에 품어보아서도 안되는 항목들이다. 주님께서는 말씀이 육을 만드심같이 자신을 명백히 나타내심으로 세상에 오셨다. 하느님의 말씀은 하느님의 지혜이다. 지혜는 빛이 열로부터이듯 사랑으로부터 진행된다. 말씀으로서의 예수는 사랑의 빛, 세상에 와서 만민을 비추는 참 빛이시다. 말씀으로서의 예수는 아버지로부터 왔다. 마치 신성한 지혜가 신성한 사랑으로부터 진행된 것같고, 인간의 본성을 입으심으로 세상에 오셨다. 아들이 세상에 오신 목적(object)은 구속의 일이 결과되게 하는 것, 그 다음 아버지께 다시 돌아가는 것이다. 주님께서 자연적 인간성을 입으심으로 세상에 오신 것 같이, 그분은 신성한 인간성을 입으심으로 아버지께로 돌아가셨다. 육을 입으시기 전에 주님이 사람들 사이에 나타나실 때 그분은 천사적 속성을 입으셨고, 그들과의 교류를 마치고 떠날 때 그 속성을 한쪽에 내려놓으셨다. 그러나 그분이 출생으로 인간의 본성을 입으셨을 때는 그것을 결코 한쪽에 내려놓지 않으셨지만, 그럼에도 그것 속의 모든 불완전한 것을 제거하시고, 신성하게 완전한 하느님으로부터 출생시키셨다. 그러므로 순수하게 하느님의 아들이셨다. 그것은 하느님으로부터 왔던 것을 하느님에게로 귀환시킬 때만 가능한 것이다. 이것이 주님 자신의 말에 나타나 있다. “나는 아버지로부터 나와서 세상에 왔다. 나는 세상을 떠나 아버지에게로 다시 간다.” 신성화 하심을 수단으로 주님은 어머니로부터 파생되었던 모든 것을 벗으셨다. 그러므로 지상적이고 유한한 모든 것을 벗으신 것이다. 그리고 아버지로부터 온 인성, 그러므로 순수하게 신성을 입으셨다.
29,30.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는 대단히 신비하고 알아채릴 수 없는 듯 여겼던 그분의 떠나심, 되돌아오심에 관해 위와 같이 간략한 선포를 보충하시자 그들이 그분께 말했다. “그분의 제자들이 그분에게 말했다, ‘보라 지금 당신께서는 명백하게 이야기하신다. 그리고 속담 없이 이야기 하신다. 이제 우리는 당신이 모든 것들을 아신다는 것, 누구도 더 이상 물을 필요가 없다는 것을 확신합니다. 이럼으로써 우리는 당신이 하느님으로부터 오셨음을 믿습니다.’” 이 말이 증명하는 그들의 태도란 그들이 얼마나 희미한 지각을 지녔는지 금방 눈치채게 해준다. 이후 그들의 역사 역시 이를 풍부하게 증명하고 있다. 어쨌든 그분의 언어는 명백했다. 그래서 그분의 언어는 진지한 청종자들에게 그분의 한정 없는 지식에 관한 확신, 그리고 그들에게 그분의 신성한 근원에 관한 증거 자체를 운반했다. 영적 삶에서 지식에는 진보해감에 따른 수준이 있다. 이것은 계시 속의 진리들이 정신적 발달 수준에 맞추어 열리는 것과 더불어 정신발달의 계속적인 수준을 수단으로 달성되어진다. 주님께서는 그분의 진리를 그분의 자녀들에게 밝히 알리시되 그들이 그것을 해낼 수 있는 수준에서 알리신다. 그리고 그분은 그 진리를 그들에게 추가하고 승강함을 수단으로 밝히신다. 추가함(addition)이란 그들의 이야기들로 확대하는 것이고, 승강함(elevation)이란 그들에게 그들이 소유한 것은 무엇이든 더 높은 관점을 주는 것이다. 우리는 첫 제자들의 역사에서 이런 이중적인 발달과정을 보게 된다. 진리가 그들에게 점진적으로 알려졌고, 천천히 그 취지와 의미가 그들에게 표명되었다. 이것은 주님께서 일어나시고 제자들에게 숨을 내쉬시고 그들이 성경을 이해하도록 이해성을 열어주신 후에야 가능했다. 모든 기독제자들이 체험으로 아는바, 한 때는 수수께끼 같았던 것들이 마음이 열리고 확대됨을 통해 명백히 보여진다는 것이다. 진리, 그것은 보다 수준 낮은 상태에서는 인간 수준인 듯 여겨지고, 보다 높은 상태에서는 신성이라고 보여진다. 진리는 마음에 진리 고유의 신성에 관한 증거를 가져다준다. 이런 증거는 신성한 진리가 어떤 도움도 되지 않는 추론(reason)이 도달 못하는 것들에 관해 밝히 알려주는 자일뿐만 아니라 심정의 의도들과 생각 속의 식별자가 된다는 확신으로부터 온다. 이 확신은 교훈으로 꽉차 있고, 만족으로 넘쳐 거기에는 의심의 빈방이 없다. 거기서는 어떤 사람도 그분께 물어야할 필요가 없다. 이를 수단으로 우리가 참으로 아는바, 영원한 말씀이신 예수는 영원한 사랑의 품으로부터 오셨다는 것, 그분은 영원한 생명의 말씀들을 가지고 있으시다는 것이다.
31. “그러자 예수께서는 ‘너희는 이제는 믿느냐?…’” 이것은 의문문이라기보다는 제자들의 신앙에 대한 확언 또는 용인(admission)이다. 지금 그들은 전보다 더 총명하고 더 굳건하게 예수를 믿고 있었다. 그들의 신앙 은 더 넓고 더 탄탄한 기초 위에 놓였다. 그러므로 머지 않아 그들이 당하게 될 시련을 버텨낼 수 있었다.
32. 그들의 신앙의 시련들을 주님께서 지금 그들에게 밝히 알리신다. “보라, 시각이 온다, 그렇다, 지금 와진다, 하여 너희는 흩어질 것이고 모두 제각각 자신에게로, 그리고 나홀로 남겨질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홀로가 아니다. 그 이유는 아버지가 나와 함께 있기 때문이다.” 제자들에 관한 언어는 매우 감동적이고 의미심장하다. 그들은 늑대의 추격과 공격에서 안전한 곳으로 피하려 제각기 흩어지는 양떼들 같이 흩어지게 되어 있다. 목자가 맹습을 당하면 양들은 흩어지게 된다. 제자들이 예수를 따르겠다고 남아 있지만 폭풍이 그들 사이에 몰아붙여 오면 피난처를 찾게 된다. 자아와 세상을 사랑함에서 주님에게로 돌아선 애착 과 생각들이 제자들로 표현됐는바 그들의 흩어짐은 대단히 인상적인 것이다. 시련과 시험이 극도에 달할 때 애착 과 생각들은 서로 갈라진다. 그러면서 그들이 빠져나왔던 옛 것들과의 연결은 행동은 아니다 해도 최소한 바라는 쪽으로 기운다. 마치 이스라엘 백성이 심각한 시련에 부딪치자 그들이 탈출했던 이집트로 되돌아가기를 바랐던 것과 같다. 극렬한 시험의 상태에서 사랑과 신앙 은 서로로부터, 그리고 그것의 저자요 목적되는 주님과 분리되는 듯 여겨진다. 예수를 영접해서 신앙을 수용하고 그 신앙을 승강시켜 왔던 애착과 생각들이지만 시험의 상태에서는 내던져 진다. 승강되었던 신앙 이라 해도 지탱할 수 있는 단단한 신앙이 아직 못되어 있다면 내향의 시련이 올 때 쉽게 나가떨어지고 만다. 서로를 묶는 끈, 주님과 연결된 끈이 끊어지고 그들은 자연적 마음의 욕망과 어둠 안에 침수되어 있다. 그들이 사랑하는 대상으로 정성과 헌신으로 그분께 기울고 있었던 생각과 애착들에 비하면 버림받은 예수는 그들이 관심을 두었던 비중만큼이나 멀리 떨어져 홀로 계신다. 그런 때조차 그분은 홀로가 아니다. 그 이유는 아버지가 그와 함께 계시기 때문이다. 위로 받게 하는 중요한 진리는 이것이다. 심각한 시련과 시험의 상태에서 주님은 제자들의 보통의 신앙생활을 가질 때보다 더 친밀하게 그들과 현존하신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는 것은 이런 때에 신성한 사랑과 보호하심이 예전보다 더 극진해져서가 아니다. 마음의 상태가 시험을 수단으로 주님과 더 가까운 연결을 가져오는 결과를 생산해서이다. 모든 시험은 영원한 생명의 손실을 두려워하는 것이 동반된다. 이때 어둡고 곤경 받는 때, 심정을 쥐어짜는 괴로움이 발생한다. 생명의 손실을 두려함에서 생명을 사랑하려는 애착은 다른 때보다 더 강렬해진다. 주님은 이 애착 안에 머무시고 있는바 그분이 더 우리에게 가까워지는바, 시련이 더 심각하면 더 우리에게 접근되는 셈이다. 그러나 그분이 현존하시는 곳은 마음의 내면이다. 그분은 거기에서 진리만으로 있지 않고 그분의 진리와 함께 그분의 사랑도 있다. 시험의 용도 중 하나는 주님의 사랑과 진리가 영적 마음에서 더 가까운 연결과 하나 됨을 가져오는 것이다. 그래서 시험이 지나갔을 때 그 둘은 과거 싸움이 체험되었던 자연적 마음 안에서도 역시 더 충분하게 하나 된다.
33. 신앙과 성실이 시련 받은 결과, 시험의 또 다른 복된 결과는 마음에 예수의 평화를 가져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주님께서 그분의 제자들에게 말하신다. “이런 것들을 내기 이야기한 것은 너희가 내 안에서 평화를 가졌으면 해서이다. 세상 안에서 너희는 환난을 가질 것이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정복했다.” 영적 평화는 열정이 정복된 결과, 또는 휩싸였던 의심과 두려움의 열매들이다. 자신 안에서는 영적 싸움 따위는 아무것도 없다고 하는 이들에 의해 경험되는 평화도 있다. 그러나 이것은 자아 만족의 평화이다. 자신 안에 들어 있는 악과 전쟁을 치렀던 이들이 예수의 평화를 가질 수 있다. 이 평화는 모든 수준의 이해성을 통과한 평화요, 세상이 빼앗아 갈 수 없는 평화이다. 이 평화는 세상이 부여할 수 있는 어떤 것으로부터 대단히 멀리 떨어져 있고, 세상이 죽어질 때까지는 결코 완전히 경험되지 못하는 평화이다. 이 세상에서의 삶은 전혀 방해받지 않는 평온을 마음이 확보하게 해 주지 않는다. “이 세상에서 너희는 고난을 가질 것이다” 라고 무한한 지혜는 우리에게 확실히 말하시고 있다. 참으로 “세상”이란 우리가 사는 바깥쪽 세계만을 뜻하는게 아니고 우리 안에서 살고 있는 내적인 세계까지 뜻하는 말이다. 세상적 요소는 많든 적든 우리의 생각과 애착 에 들어오고, 이것들은 주님과 천국이 언제나 생산해내고 보존하려는 고요를 어지럽힌다. 그러나 제자들이 세상에서 체험하는 고난은 슬픔과 낙담이라는 기초만을 제공하는 것이 아니다. 그 반대이다. 기독인의 고난 안에는 용기와 희망이라는 굳건한 바탕도 제공한다. 그 이유가 그리스도 스스로 고난을 견뎌내셨고, 세상을 정복하셨고, 이를 근거로 제자들이 용기를 갖도록 권면하시기 때문이다. 주님의 정복 자체에 우리의 희망이 놓여 있는바 우리도 이겨낼 수 있다. 그분이 세상에 오신 것은 세상을 정복하시기 위해서 였다. 그분은 우리를 위해 이 모든 것을 해내셨고, 그리하여 우리도 극복해낼 수 있도록 배려하셨기 때문이다. 그분은 우리가 상속받는 본성을 입으셨다. 그분은 인간성에서 일어나기 쉬운 모든 시련을 통과하셨다. 그분은 모든 이런 시련들을 이기셨다. 그분은 시험받은 우리를 원조하시기 위해서 시험 당하셨다 (히브리2:18). 그래서 신성한 이 말씀은 그 얼마나 장엄하고 용기를 주는가! “이 세상에서 너희는 고난을 겪을 것이나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정복했다.”

요한복음 15장 해석

15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그분과 아버지와의 관계, 제자들과 그분과의 관계에 대한 사항을 충분하고도 명백하게 전달하셨다. 그리고 그 말씀들은 그들이 그분께 기대고 있던 식탁에서 일어남에 뒤이어 있었고, 성안으로 그분과 함께 가고 있다. 이때 그들에게 그분의 마지막 그리고 중대한 말씀이 전달되고 있다.
1. 주님께서는 그분과 아버지, 그분과 제자들은 가장 친밀한 관계에 있어야 한다고 그들에게 가르치셨다. 지금 그분은 그 관계의 본성을 예증하시고 있다. “나는 진정한 포도나무이다, 그리고 나의 아버지는 농부이시다.” 포도나무의 비유는 그분과 아버지, 그분과 제자들의 관계를 설명하기 위해 소개된 주제들 중 가장 아름답고 교훈적인 예증이다. 창세기의 시작에서 주님이 그분의 교회에 생명을 주시어 유지 존속 되게 하시는 분으로 교회와 더불어 현존하심이 동산 한가운데 심어져 있는 생명의 나무를 수단으로 비유적으로 묘사되었다. 동시에 그분의 자녀들이 자기들을 영원히 살게 하는 과일을 먹는 것, 또는 그들 스스로 영원한 생명을 확보하려 시도해야 하는 것에 대해서도 묘사되고 있다. 인간은 지식의 나무의 것을 먹음으로 생명의 나무에 대한 자기들의 권리를 상실했다. 주님께서는 뱀의 머리를 짓부수는 여인의 후손으로서, 그분의 자녀들의 권리를 회복시키는 분으로서 오셨을 때 그분은 영혼의 중앙에 사랑이라는 생명의 나무를 새로이 심으시기 위해 오셨다. 이것은 하느님의 낙원으로서 갱신되어지는 것이었다. 주님께서 세상 안에서 입으셨고 신성화하셨던 인성이야말로 진정으로 생명의 나무이다. 이 인성 안에서, 이 인성을 통하여 교회와 교인은 영적이고 영원한 생명을 가진다. “진정힌 포도나무”로서 자신을 보이신 주님께서는 그분이 한편으로는 아버지와, 다른 한편으로는 교회와 서 있는 관계를 설명하신다. 농부와 포도나무의 관계같이 아버지와 아들은 상응되는 관계로 정립되고 있다. 그리고 그분의 교회와 그분과의 관계는 포도나무와 그 가지로 상응되어 있다. 아버지와 아들이 농부와 포도나무의 관계인 것은 그 시작에서나 그 발전과정에서나 공히 같은 관계에 있다. 농부가 포도나무를 심듯, 인성은 신성으로부터 탄생되었다. 주님의 신성이 인성을 처음부터 끝까지, 인성이 완전히 신성화 되는 것까지 모든 과정을 지휘하면서 돌보심은 마치 농부가 포도나무를 가꾸는 것과 같다. 추상적, 또는 내적 의미에서 포도나무는 그분의 신성한 진리 측면에서의 주님을 상징하고, 농부는 그분의 신성한 선의 측면에서의 주님을 예징하고 있다. 신성한 선이 신성한 진리 위에, 또는 그 진리를 통해 작동하심은 비유 전체를 망라해 취급되고 있다. 먼저 신성한 선이 인성 자체에 있는 신성한 진리에, 그 다음 주님의 몸의 멤버에 있는 신성한 진리에 작용하는 순서로 서술되어 있다.
2. 그러나 인성이 그 주체가 되어진 신성의 작업이 더 세세하게 언급되고 있다. “열매를 맺지 않는 내 안에 있는 모든 가지를 그분은 가져가신다. 그리고 열매를 맺는 모두 각각의 가지, 그분은 그것을 깨끗이 하신다. 그러면 그것은 더 많은 열매를 산출하신다.” 우리가 이 비유를 주님 자신에 관련시켜 먼저 생각해 본다면, 가지들은 동정녀 어머니로부터 출생한 그분의 인성에 소속된 인간의 애착들이다. 주님이 입으신 타락된 본성이 뿌리로부터 자라 오른 것들은 그것을 자라게 한 뿌리와 속성이 비슷할 수밖에 없다. 열매가 없었던 인간 본성의 모든 애착은 제거되어졌다. 그리고 열매를 맺었던 모든 애착은 자연적이고 불완전한 것이 숙청되어 더 많은 열매, 더 풍부할 뿐 아니라 더 완전한 열매를 맺게 되었다. 제거되고 깨끗해지는 과정을 수단으로 주님의 인성은 점진적으로 완전해지셨고, 진정한 포도나무-주 구세주의 신성한 인성에 접목되어 가지가 된 이들 안에서 구원의 열매를 생산하기 위해서 정의 자체를 만드셨다. 이런 의미들은 비유의 두 번째 가는 의미를 생각해보도록 우리를 인도한다. 두 번째 의미의 응용에서 포도나무는 주님 자신인 영광의 몸이 아닌 천국과 교회에 의해 형성된 그분의 신비로운 몸에 대한 예징(type)이다. 주님이 이렇게 이해된다 해도 그분은 여전히 제일가는 분이시다. 그 이유가 천국과 교회는 그것들을 조립한 근원적인 것들로 구성되는 게 아니라 천사와 인간들이 주님으로부터 받았던 것, 즉 그들 안에 있는 주님의 것들로 구성되기 때문이다. 간단히 말해서 천국과 교회는 인간이라는 수용체들로 구성되는 게 아니라 그들이 받았던 신성한 사랑과 진리로 구성된다는 말이다. 비록 주님의 선물과 그 선물을 받는 그릇은 분리될 수 없다 해도 그것들은 구별되어질 수는 있다. 다시 말해서 그 그릇에 담긴 주님 만에 속하는 선함과 진리에 속한 모든 것으로 구별될 수 있다. 주님의 몸의 멤버가 된 이들은 진정힌 포도나무의 가지들이다. 그러나 진정한 포도나무의 모든 가지들이 진정한 포도나무 가지는 아니다. 그들이 천국과 교회와의 어떤 연결을 가지고 있는 한 그들은 뿌리로부터 자양분을 얻는 가지가 되어있다. 그리고 모든 사람은 천국과 교회와 어떤 연결을 가지고 있고, 이를 통해 주님과 연결되고 있다. 인생 초기에 모든 사람 각각은 천국과 연결되어 있고 교회와도 직,간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모든 사람은 각기 순진의 상태와 심정이 단순한 상태에 있는 동안 포도나무의 가지들이다. 그러나 그들이 위의 상태를 지나가되 선한 열매를 맺지 못하는 이들은 포도나무와의 연결이 잘리워진다. “나에게 붙어있되 열매를 맺지 못하는 가지를 그분은 쳐내신다.” 열매 없는 가지들은 나무에게는 방해물일 뿐이다.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 외에도 열매를 맺는 가지들의 열매 맺는 것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더구나 선한 열매를 생산하지 않는 가지들은 포도나무의 쥬스(juice)들을 죄를 위한 영양분으로 돌려놓음으로 악한 열매를 생산한다. 그러므로 그것들은 그 자체를 위해서, 다른 가지들을 위해서라도 쳐내야만 한다. 그러나 열매가 아무리 작더라도 열매를 맺고 있는 가지라면 포도나무와의 연결이 계속 존속되고, 그 가지의 불완전함을 깨끗하게 해서 더 열매를 가져 올 수도 있다. 포도나무는 그 나무 가지가 아무리 넓게 퍼져 있다해도 모든 가지에 자양분을 공급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농부는 모든 가지가 유지 존속되기를 바라고 있다. 따라서 가지들이 그 자체 뿐 아니라 다른 가지에 무익하고 해를 줄 때 만에 한해서 그 가지들은 잘라진다. 자기들의 불순물을 기꺼이 잘라내는 이들, 개혁이라는 잘라내는 과정을 기꺼이 수락하는 이들, 그래서 거듭남이라는 완전해지는 과정에 진입하는 이들은 유지 존속되어 그들을 성장하게 한 줄기(stem), 접목되었던 줄기로서 포도나무와 조화를 이룬다.
3.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 말씀을 하시면서 제자들을 그분 자신이신 진정한 포도나무의 가지들로서 이 비유를 응용하시고 있다. “지금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말했던 말을 통해 깨끗해 있다.” 순수해짐(purification)은 진리를 수단으로 결과되는데, 성경에서 물로 상징되어 있다. 아마 주님께서는 방금 전에 “너희는 깨끗하다. 그러나 모두는 아니다” 라고 말하셨을 때인 제자들의 발을 씻는 행동, 즉 의미 있고 상징적인 행동을 암시하고 있으신 듯 여겨진다. 그분의 진리로 순수해지는 효력은 그분의 피가 순수하게 하는 권능이 있다는 것으로도 역시 묘사되어진다. 예수는 “우리를 사랑하셨고, 그분 자신의 피로 우리의 죄로부터 우리를 씻으셨던” 바로 그분이시다 (요한계시록1:5). 그리고 저 수많은 군중은 “큰 환난을 겪어 낸 사람들이고, 그들은 어린 양이 흘리신 피에 자기들의 두루말이를 빨아 희게 만들었던” 바로 그들이다 (계시록7:14, 히브리9:14, 요한1서1:7). 주님의 말씀이 순수해지게 한다. 그분의 말은 인간을 가르치고 악을 금하는 쪽으로 그들을 인도하며 회개의 일을 수행하게 한다. 주님의 말이 순수해지는 일을 결과한다는 것, 그분의 말은 그분으로부터 진행되는 신성한 진리이다는 것, 이 진리 안에는 구속하심과 신성화 하심의 주님의 일들의 권능과 공적이 포함되어 있는바 다시 곰곰이 생각해 보아야 할 중요함이 있다. 이것은 특출한 의미에서 그분의 피로 의미되고 있다. 이 피는 죽은 자의 피가 아니라 살아있는 신성한 몸의 피로서 생각해야 한다. 다시 말해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는 바깥쪽 상징에 불과하다는 말이다. 주님의 피는 깨끗하게 할뿐 아니라 살아있게 하고 살아있도록 생명을 주시고 있다. 이 피란 사랑으로부터 진행되는 신성한 진리이다. 그 이유가 우리의 죄로부터 피로 우리를 씻으신 그분은 “우리를 사랑했던” 그분이기 때문이다.
4. “내 안에 머물러라. 그리고 나는 너희 안에 (머무르겠다), 가지가 포도나무에 머무르지 않으면, 그 자신으로부터 열매를 맺을 수 없듯, 너희가 내 안에 머무르지 않으면 너희는 더 이상 열매를 맺지 못한다.” 그분과 제자들 사이에 존속하는 관계의 본성을 주님께서는 여기서 매우 극명하게 묘사하시고 있다. 가지는 그 가지의 생명 전체, 결과적으로 가지가 열매 맺는 능력까지 포함되는 모두가 포도나무에 연결되어 있다는 것에 은혜를 입고 있다. 참으로 가지는 잎을 통하여 대기로부터, 그리고 뿌리를 통하여 땅으로부터 자양분을 끌어당긴다. 그러나 영양이 공급되는 그 자체의 힘은 그 가지가 포도나무와 연결되어 있는 것에 전적으로 기인되는 것이다. 참으로 예징(type)과 대형(antitype) 사이에 차이가 있듯, 자연계의 포도나무와 그 가지는 자발적이고 선택하는 능력이 결여되어 있으나 영적인 포도나무와 가지는 자유 의지(free will)를 소유하고 있다. 예수께서는 모든 사람이 진정한 포도나무로서의 그분 안에서 가지로 있기를, 그리고 모든 사람이 열매 맺는 살아있는 가지이기를 원하시고 있다. 그분의 교회의 멤버들은 그들이 포도나무와 연결되어 살든지 살지 않든지를 선택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열매 맺을 것인지 열매 맺지 않을 것인지도 선택한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내 안에 머물러라. 그리고 나도 너희 안에 머물겠다” 라고 말하신 것이다. 이 말씀은 권면의 말씀이다. 따라서 이 말씀이 보내지는 이들에게 그들이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머물 것인지 아닌지를 선택하는 자유가 없다면 권면의 말 자체가 무의미해질 것이다. 이 말씀은 제자들에게 호소하심, 죽음보다는 생명을 선택하라는 호소, 생명은 생명 자체이신 그분과 연결된 채 남아있음으로서만 존속된다는 것, 그분으로부터 고집스럽게 떨어져 나가 피할 수 없는 결과인 죽음을 맞이하는 것보다는 생명의 근원에 남아 있는 게 유리하다고 제자들에게 호소하신 것이다.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않으면 그 가지가 열매를 맺을 수 없듯이 너희가 내 안에 머무르지 않으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열매는 포도나무가 존재하는 목적이다. 열매를 생산하는 것은 가지의 직능이요 그 씀씀이 이다. 모든 종교는 삶에 연결되어 있고 종교의 생명은 선을 행하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생각하게 되는 요점은 선을 행해야 한다는 필요성이 아니라 선함 자체이신 그분의 권능을 수단으로 하지 않으면 선을 행함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참으로 인간들은 주 예수와의 영적 연결이 있지 않은 상태에서도 선을 행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선들은 실제의 선이 아닌 가상의 선(apparent good)이다. 다시 말해 가상적인 선은 그것을 받은 상대방에게는 선일는지 모르나 그것을 행한 당사자에게는 선이 아니다. 이 선은 선함의 어떤 동기로부터 실제로 행해지지 않는다. 그것은 주님의 영으로부터 행해진 게 아니라 인간 자신의 영으로부터이다. 이와 같은 선은 그 선의 본성 측면에서 일시적일뿐아니라 그 선이 존속되는 동안에도 일시적이다. 그 선을 행하도록 자극한 동기는 세상 속에 있는바, 세상과 더불어 끝난다. 그것은 천국에로 들어갈 수 없다. 포도나무에서 잘리워지는 열매 없는 가지는 내던져져서 시들고 말 것이다. 그것의 심판은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에 대한 심판과 같다. “이제부터 너는 영원히 열매를 맺지 못하여 아무도 너에게서 열매를 따먹지 못할 것이다” (마가11:14).
5. 농부의 일, 그리고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있어야 할 필요성을 제자들에게 가르치신 주님께서는 이제 그분이 사용하신 형상의 의미를 설명하신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내 안에 머무르는 자, 그리고 내가 그 사람 안에 머무르는 자, 동일한 사람은 많은 열매를 산출한다. 그 이유가 나 없는 너희는 아무것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주님께서 그분과 그분의 제자들 사이의 관계를 묘사하시기 위해 고용한 언어는 그분의 본성과 권능에 관한 가장 빼어난 생각을 주고 있다. 무한하지 않았던 존재는 이 언어를 올바르게 사용할 수 없었다. 이 언어는 예수가 영적으로 살아있고 행동하는 모든 것의 힘과 영적 생명이시다는 것외 무엇을 더 함축할까? 그들은 그분의 생명으로 살고 그분의 힘으로 행동한다. 그분 없이 그들은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그런데 이 언어는 이런 생각, 즉 영적이고 영원한 생명이 그분의 본보기를 모방하고 그분의 가르침을 단지 따라감으로 획득되어진다는 생각과는 일치되지 않는다. 그분의 제자들이 생명을 가지는 것은 예수께서 계셨었고 행하셨던 것으로부터 만이 아니라 그분이 계시고 행하시는 것으로부터라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그분을 본보기로서 뒤돌아보는 것만이 아니라 살아 있는 힘-모든 권능을 가지신 오직 한 분으로서 그분을 찾고 있어 그분 안에 머물음으로 해서 영원한 생명에로 열매가 맺어지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제자들의 생명은 그분으로부터 파생된다는 것, 그리고 그들 안에 그분의 생명이 있어야 한다. 그들은 포도나무에 접목되어야 하고 그 나무의 뿌리로부터 그들의 자양분을 끌어들여야 한다. 열매를 맺음만이 아니라 열매를 더 많이 맺음이 참 포도나무와 연결되어 살아 있는 결과이다. 제자들이 더 많이 받게 되면 그분께서는 더 주시겠다고 하신다. 그분은 선한 모든 일들 안에 충만해 계신다. 그러나 우리가 주님 안에 머물고 주님이 우리 안에 머물음으로 해서 우리는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는 한편, 그분 없이 우리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우리는 스스로 영적이고 천적인 것 어느 것도 할 수 없다. 우리는 나 스스로 행위자의 영혼을 풍부히 할 수 없고, 우리의 심정 안에 정의와 평화라는 주님의 왕국을 건설할 수 없다. 이것은 이 세상에서는 인간에게 나타나거나 명백히 보이게 만들지는 않을는지 모른다. 그러나 사후, 즉 선을 행하기 위한 지상적인 모든 동기들이 죽어질 때, 진리는 밝혀질 것이고, 영혼은 벌거숭이로 남아있게 될 것이다. “나 없이 너희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6. 지금 우리는 참 포도나무로서 주님 안에 머무르지 않은 결과를 배운다. “만일 사람이 내 안에 머무르지 않으면, 그는 가지 같이 내던져지고, 시들며, 사람들은 그것들을 그러모아 불에 그것들을 내던져 태운다.” 열매가 없는 것 뿐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도 없다. 이 구절에서 말해지는 것은 주님께서 인간 안에 머물지 않으신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그분 안에 머물지 않는 것에 대해서이다. 주님께서는 누구로부터서도 그분이 머무시는 것을 철회하지 않으신다. 오로지 인간이 머물지 않음으로 인해 밖에 버려지는 것이다. 주님 안에 머물지 않는 명목상의 제자들은 생명의 원천으로부터 분리된 신앙과 사랑을 원하는 이들이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밖에 내던져져 시들어지는 가지 외에 더 다른 운명이 남아 있지 않다. “사람들이 이런 가지를 모아다가 불에 던져 태워버린다.” 하느님의 영광도 타인의 선을 위해 더 이상 생명 있고 번성하여 열매 맺는 것이 없을 경우 사람들이 모아다가 불에 던져 태워버리는 것밖에 더 합당한 게 없다. 모은다(gathering)란 세부적인 것들을 하나의 전체로서 가져다 놓은 것을 표현한다. 주님께서는 전 인류의 애착들을 하나의 사람이라는 형상으로 되게 하기 위해 통일하신다. 그분은 그분의 나라 안으로 정의로운 자들을 모으신다. 마치 농부가 밀을 곳간에 모으는 것과 같다. 천사들은 뽑은 자를 천국 이쪽에서 저쪽 까지 사방으로부터 모은다. 사악한 자들의 애착이 그 애착을 통치하는 사랑을 수단으로, 그 사랑 주위에 모두 모일 때 사악한 자들은 모아진다. 그리고 그들을 통치하는 사랑이 완전하게 주도권을 쥐어 악의 욕망으로 명백히 나타날 때 사악한 자들은 불에 던져 진다. 그리고 그들이 배웠었던 선하고 참된 모든 것이 살라질 때, 모든 생각과 애착 에 불이 붙여질 때, 그래서 미워함, 복수심, 무자비한 모든 것의 바람으로 태워질 때 사악한자는 불에 타는 것이다.
7. 위와 반대되는 경우를 주님께서 계속 말하신다. “너희가 내 안에 머무르고, 내 말이 너희 안에 머무르고, 너희가 바라는 것을 묻는다면, 그것이 너희에게 행하여 질 것이다.” 주님 안에 머무는 이들은 그들이 묻는 것이 무엇이든 받게 된다. 그 이유가 그들은 주님 자신이 묻기를 바라는 그들에게 영감을 주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기 때문이다. 인간의 뜻이 하느님의 뜻과 일치될 때 그는 신성한 의지에 동의할 수 있는 것밖에 더 이상은 물을 수 없다. 그는 주님이 뜻하시는 것을 뜻한다. 참으로 그는 주님의 의지로부터 행동한다. 그 이유가 주님 안에 머문다는 것은 신성한 본성을 구성하는 신성한 속성들의 사랑 안에 있는 것외 더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사랑과 신앙 의 상태를 확증함이 주님 안에 머무는 것이다. 그리고 신앙 과 사랑 안에서 묻는 그 사람은 주님이 수여하시되 기뻐하시게 되는 것을 달라고 한다. 영적 수준의 마음을 지닌 자는 영적인 것만을 집중적으로 요구하고, 그런 요구야말로 그런 사람에게 가장 합당하다. 만일 그가 시련 또는 고뇌로부터 해방되기를 구한다면 그는 주님 자신이 물으셨던 것같이, “내 뜻대로 마옵시고 당신의 뜻대로 하옵소서” 라고 하여 신성한 뜻에의 복종을 구한다. 우리 같은 인간의 경우 주님이 그분의 기도에서 달성했던 완전해진 높이에 도달 가능해질 자가 없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인간은 주님이 그러하셨던 것을 자신의 분량껏 성실히 바래고 노력하는 가운데 있다면 그의 기도들은 주님의 기도의 본성에 참가할 것이다. 그래서 그가 받는 대답들은 예수께서 받으셨던 것 같은 것이다. 우리는 주님께서 “네가 뜻하는 것을 물어라” 라고 표현하셨 듯 참된 제자의 바람이나 뜻하고자 하는 것에는 할당된 한도가 없다는 것을 발견한다. “무엇을 뜻하든지 구하라”는 말의 밑그림이 우리를 가르치는바, 주님께서는 그분의 제자들이 물어야 하고 또한 열심히 자주 묻기를 바래시고 있다는 것이다. 신성한 뜻인즉, 인간은 높은 데로부터의 영적인 선물을 게으르게 기다리지 말고 그들이 뜻한 것을 획득하려고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동시에 우리는 애원하는 의지가 묻는 것은 무엇이든 획득한다는 약속은 주님 안에 머무는 이들에게만 주어진다는 것, 그 사람 안에 주님의 말이 머물고 있어야 한다는 점을 곰곰이 되새겨보아야 한다. 우리가 그분을 사랑할 때 우리는 주님 안에 머문다. 우리가 그분께 순종할 때 그분의 말이 우리 안에 머물고 있다. 그분의 사랑을 통해 주님은 기도의 영을 주시고 그분의 말을 통해 그분은 기도의 주제를 가르치신다.
8. 그러나 기도의 목적은 받는 것 뿐 아니라 행동하는 쪽으로 인도한다. “이점에서 나의 아버지는 신성화 되신다. 하여 너희는 많은 열매를 맺는다, 그러면 너희는 나의 제자들 일 것이다.” 어떤 측면에서, 어떤 방법에서 많은 열매를 맺는 제자들을 수단으로 아들보다는 오히려 아버지께서 신성화 되실 까? 우리가 아는바, 주님은 아들이실 뿐아니라 아버지이시기도 하다. 사랑 측면에서는 아버지이시고, 지혜 측면에서는 아들이시다. 인간의 일들이 주님의 사랑으로부터 이루어질 때, 다시 말해 주님을 사랑함으로부터 있어질 때 아버지는 인간의 그 일 안에서 신성화 되신다. 그 다음 신성한 사랑은 그것들을 수행하는 제자 안에서 신성화 되신다. 그 이유가 제자들이 사랑의 열매인 선을 행한 만큼 하느님의 사랑은 제자의 심정 안에서 드높여진다. “그렇게 해서 너희는 나의 제자일 것이다.” 주님의 제자들은 주님의 진리를 배워 순종하는 사람들이다. 선을 행함은 진리를 취득하게 하는 쪽으로 인도한다. 사랑과 진리는 서로를 완전해지게 한다. 우리가 더 사랑하면 우리는 더 많은 신앙을 가진다. 우리가 심정 안에서 하느님의 사랑을 더 드높일수록 우리는 하느님의 진리를 이해성 안에서 더 명백히 보게 된다. 우리가 아버지를 더 영광되게 할수록 우리는 아들에게 더욱 신실한 제자가 되어있을 것이다.
9. “아버지가 나를 사랑하셨듯, 나는 너희를 사랑했다, 너희는 내 사랑 속에 계속 있거라.” 주님의 인성이 지닌 중재하는 특성이 여기서 놀라웁게 드러나 있다. 주 예수는 아버지와는 구분된 인물(person)로서 아버지에게 중재하는 일을 맡고 있는 것으로 너무나 흔하게 생각되어 왔다. 그러나 주님의 중재인 같은 일은 실지로 인간을 지도하고 있다. 쌍방에 필요한 것은 일치되는 것 뿐이다. 하느님은 인간에 수여하시려는 구원의 선물을 가지고 계신다. 그러므로 오직 필요한 것은 그 선물을 받을 수 있게 인간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육을 입으시기 전에는 하느님의 선물이 인간에게 교통될 수 있는 적당한 매체가 없었다. 주님이 입으시고 신성화 된 인성은 지금 이와 같은 매체이다. 하느님으로부터 인간에게 직접 건너갈 수 없었던 구원의 선물이 지금은 주님의 인성을 통해 오고 있다. 신성한 사랑은 주님의 인성 안에서 인간이 되어간다. 그리하여 인간의 마음 안에 숙박되어진다. 이것이 아버지께서 그분을 사랑하시고, 아들이 인간을 사랑하신 것으로 표현되고 있다. 그러나 그분의 제자들에 대한 주님의 사랑은 이런 언어로, 즉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했다는 말로 묘사되고 있다. 신성한 사랑이 주님의 인성에서 역사된 똑같은 방법으로 인간의 마음에서도 작업되고 있다. 우리 주님의 말의 글자적 의미에 따른다면, 아들은 아버지 사랑의 대상(object)이고, 인간은 아들 사랑의 대상이다. 만일 우리가 영적 생각에 일치시켜 말한다면, 아들이 아버지 사랑의 주제가 된 것 같이, 인간은 아들 사랑의 주제가 되었다 인바, 이렇게 말하면 우리는 실제로 존재하는 진리를 표현한 셈이다. 이를 다른 말로 말한다면, 인간은 주님께서 신성화 하신 것을 수단으로 그것과 똑같은 과정과 방법에서 거듭나진다는 것이다. 하느님의 사랑이 인간의 심정 안으로 내려오는 매체를 설비하실 목적에서 하느님이 육을 입으셨다는 것, 이 위대한 진리는 그 얼마나 경이로운지! 따라서 주님의 권면, “너희는 내 사랑 안에 계속 있어라”는 말씀은 그 얼마나 중요한가!
10. 지금 우리의 주님은 어떻게 그분의 사랑 안에 계속 머무를 수 있는가를 가르치신다. “만일 너희가 내 명령들을 지킨다면,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무를 것이다. 내가 내 아버지의 명령들을 지켜,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문 것과 같다.” 우리의 주님께서 말하시는 명령들은 구속의 일에 관련되어 아들에게 지운 어떤 특별한 명령들이 아니고, 주님께서 완성하시기 위해 지상에 오셨던 영원한 법들이다. 이와 같이 우리에 대한 주님의 명령들은 특별한 것이 아니고 일반적인 것들이다. 만일 우리가 주님의 말들을 단순한 글자적 의미에서 가져본다면, 우리는 그 의미들로 이런 유용한 교훈, 주님의 사랑의 대상이 계속 되기 위해서 우리는 그분의 명령들을 지켜야만 한다는 것을 배운다. 그분은 불순종하는 자가 아닌 순종하는 자를 사랑하신다. 그분은 만일 우리가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물겠다는 것을 되돌려서 우리는 그분을 사랑해야 한다고 여기서 말하시는 게 아니라 우리는 그분의 명령들을 지켜야만 한다고 말하시고 있을 뿐이다. 물론 상호적인 사랑이 함축되어 있다는 것은 의심할 바 없다. 그러나 사랑함과 행동함은 아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어 이것이 저것 없이 존재할 수 없다. 둘 중에서 순종은 그것 홀로 존재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상상될는지 모른다. 그러나 기쁘게 되돌리지 않을 경우 참된 순종은 없다. 기쁘게 행동된 것은 그만큼 애착 있게 행동된 것이다. 우리의 주님께서 이 구절을 통해 되풀이해서 가르치시는 교훈은 가장 중요한 것이다. 그분께서는 순종이 사랑을 놓는 기초이다는 것, 이 기초 없이 사랑은 실재의 존재를 가지지 못한다는 것을 가르치시고 있다. 심정 안에 있는 사랑은 하느님의 옥좌이고, 생활 안에 있는 순종은 그분의 발판이다. 심판과 공의는 그분의 옥좌를 받친다. 이것들이 있지 않은 심정이라면 그분의 지배도 끝나야만 한다. 이미 살핀바 같이 영적 의미에서 주님의 사랑 안에 머무는 것은 그분의 사랑의 주제요, 그분의 사랑이 우리 안에 머무는 것이다. 이렇게 이해해보건대 우리가 더욱 더 명백히 보게 되는 것은, 만일 우리가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물겠다면 우리는 그분의 계명을 지켜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분의 명령들은 사랑의 법들이다. 이 법들은 그분의 사랑으로부터 진행되고 있고 우리를 그 사랑으로 인도하도록 고안되어져 있다. 그리고 사랑으로 인도될 때, 사랑 안에 우리는 보존된다. 우리가 지옥을 피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신성한 정의가 요구하는 것을 말해주기 위해 신성한 법이 우리에게 주어진 게 아니라 우리가 천국을 얻기 위해 신성한 사랑이 우리에게 행하기를 바라는 것을 가르치기 위해 주어진 것이다. 신성한 명령은 죽음의 법이 아니라 생명의 법이다. 이런 점에서 역시 우리의 주님은 우리의 모형이시다. 우리가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물기 위해, 마치 그분께서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문 것 같이 되기 위해 그분은 우리가 그분의 계명을 지키기를 바래신다. 주님은 모든 사람이 행하도록 요구되는 것을 볼 수 있는 큰 사람(the Man)이시다. 그분의 아버지의 계명을 지킴으로 주님은 그분의 아버지의 사랑 안에 머무시고 있다. 그분은 법 전체를 완성하셨다. 주님이 아버지의 명령들을 행함으로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문 것은 모든 법이 사랑의 법이였기 때문이었다. 영원하고 변경될 수 없는 정의와 질서의 법을 그분의 인성에 새기심으로 그분은 질서 자체와 정의 자체가 되셨다. 그래서 아들은 아버지의 사랑 안에 머문다. 그 이유는 그분이 스스로 신성한 사랑이 바랐던 모든 것, 신성한 지혜가 요구했던 모든 것을 실제화 하셨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가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물겠다면 우리는 각자의 분량 껏, 수준 껏 주님의 명령들을 행해야 한다.
11. 주님의 계명이 생명의 법이라는 것, 그것을 획득하는 수단이 순종이다는 것은 이제 주님께서 발음하신 단어들로부터 더 명백해 진다. “이런 것들을 내가 너희에게 이야기했었던 것은 나의 기쁨(joy)이 너희 안에 남고, 너희의 기쁨(joy)이 충만해질 런지 몰라서 이다.” 주님의 기쁨은 그 기쁨이 주님 자신 안에 있는 것과 같이 그분 자신의 완전함으로부터, 그리고 그 완전함을 인간의 후손들에게 나누어주심으로부터 발생하는 복됨이다. 주님의 기쁨이 우리 안에 남아 있기 위해 우리는 그분의 완전함을 어느 정도인지는 몰라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 이유가 이로부터서만 우리는 그분의 복됨을 어느 정도라도 가지기 때문이다. 주님이 말하시는 기쁨은 그분이 구속의 일을 성취하시어 발생된 특별한 기쁨이다. 인간 종족에 대한 사랑은 주님으로 인간을 구속하기 위해 세상에 오도록 자극했던 사랑이다. 그리고 신성한 기쁨은 신성한 사랑이 실제화 하려 결심했던 의도의 열매였다. 이 기쁨을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나누어주시고 우리 안에서 보존되기를 바라시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주님 자신이 그것을 획득했던 수단 외의 방법으로는 우리에게 나누어 줄 수 없는 기쁨이다. 이런 신성한 기쁨을 가지시기 위해 오셨던 그분은 슬픔의 사람이 되셨었다. 그분은 인간성이 견뎌낼 수 있는 모든 슬픔을 견뎌내셨고 시험을 이겨내셨다. 만일 우리가 우리 안에 그분의 기쁨이 머물게 하겠다면 그분처럼 우리도 그분의 슬픔을 건너가야만 한다. 그리고 우리의 기쁨이 충만 되게 하겠다면 우리는 악마와 세상과 육과의 싸움에서 그것들을 확실히 정복해야만 한다. 물론 주님께서 정복하셨던 만큼 우리도 정복한다는 것은 결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분의 정복하심을 뒤쫓느라 꾸준히 분투해야 하고 그것만으로도 족할는지 모른다. 참으로 우리의 완전은 완전을 향해 계속 가고 있는데 존재한다. 충만된 우리의 기쁨은 계속 증가하고 있는 그 충만 속에 존재한다.
12. “이것이 나의 명령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했듯,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이것은 우리의 주님께서 그분의 제자들에게 주셨던 새 명령이다. 그래서 제 13장 34절에서 이미 살펴본 바 있다. 그런데 이 구절에 소개된 것은 의무감 같은 것을 표현해 주시려는데 있다. 즉 지금 주님께서는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무는 수단으로 그분의 명령을 지켜야 한다는 것을 제자들에게 강조하시고 있다. 주님을 사랑함은 이웃을 사랑함 안에서 모습을 명백히 보인다. 그렇다. 우리 안에 있는 주님의 사랑은 이웃을 사랑함이다. 우리에게 밝혀지고 주어진 바로서의 주님의 사랑은 그분의 창조물의 사랑이다. 그리고 우리 안의 이 사랑은 그 사랑의 본성을 수단으로 서로 사랑하도록 우리를 자극하고, 그분이 우리를 사랑하신 정도에 이르기까지 서로 사랑하도록 자극한다.
13. 사랑은 그것이 수여한 이익, 뿐만 아니라 그것이 만드는 희생을 수단으로 보여지게 되어있다. “사람이 자기 친구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려 놓는 것 보다 더 위대한 사랑은 없다.” 만일 우리가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 같이 서로 사랑한다면, 우리는 모방을 위한 본보기를 우리에 대한 그분의 사랑 안에서 가지고 있다. 그분은 그분의 친구들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분의 적들을 위해서도 그분의 생명을 내려 놓으셨다. “옳은 사람을 위해서 죽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혹 착한 사람을 위해서는 죽겠다고 나설 사람이 더러 있을지 모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죄많은 인간을 위해서 죽으셨습니다” (로마서5:7,8). 그러나 예수는 여느 인간이 아니셨고 특별한 사람(the Man)이셨다. 가장 위대하게 완전함에서의 인간성이 그분 안에서 구체화되었고 본보기화 되었다. 그러므로 그분은 여느 인간이 해낼 수 없는 것을 하셨고 그분은 친구뿐만 아니라 적들을 위해서도 죽으셨다. 이 구절에서 그분이 위와 같은 그분 자신의 품성에 관한 두드러진 점, 즉 경이롭고 비길데 없는 사랑을 과시하고자 하시는 것은 아니다. 그분만이 인간의 모든 사랑들 중에서 가장 위대한 사랑, 즉 친구를 위해 목숨을 내려놓도록 자극하는 사랑에 제자들의 마음이 향하게 하신다. 주님은 제자들을 위해 목숨을 내려 놓으셨다. 그들 심정 속의 적개심은 아직은 온전히 극복된 상태와는 너무나 멀리 있었다. 아직 주님은 크나큰 적, 계속 인류를 붙들고 있을 뿐 아니라 모든 인간 마음을 속박해 놓고 있는 악마를 완전하게 정복하시지 않았다. 지금 그분의 신성한 일 안에서 자기들의 주님을 따라왔던 이들에게, 세상이 미워했던 그분, 즉 어둠의 모든 권세가 병합해서 대들고 있는 그분에게 친구가 되는 만큼에서 제자가 된 이들에게 말하시고 있는 것이다.
14. 예수께서는 그분의 친구들인 우리에게 가르치신다.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이 무엇이든 행한다면 너희는 나의 친구들이다.” 만일 친구로서의 사귐이 사랑을 수단으로 형성되고 단단해진다면, 사랑처럼 친구 관계도 고결한 행동에 놓여 있어야만 한다. 그러나 구세주와 그분의 제자 사이에 친구로서의 사귐의 묶음에는 어떤 특이함이 있다. 친구들은 서로가 상호간의 사랑뿐만 아니라 상호적인 은의, 신세를 지는 관계(obligation)로 묶여져 있다. 이 은의는 그들 서로를 명백히 보이고 유지존속되게 하는 사랑처럼 일반적으로 동등하다. 그러나 주님과 그분의 제자들의 친구됨은 제자들만을 존중히 여기는 조건 위에 놓여 있다. “만일 너희가 내가 명하는 것은 무엇이든 행한다면 너희는 나의 친구들이다.” 그분은 곧 이런 조건들의 저자요 대상이시다. 제자들만이 그 조건에 복종해야 한다. 참으로 주님 편에 있는 수단은 질서의 법들이고, 이 법에 따라 제자들과의 친구됨은 행동된다. 그러나 이 법들은 그분 자신에서 근원된 것이고 그분 자신이다. 그 이유가 신성한 법은 신성한 지혜에 대한 또 다른 이름, 신성한 사랑의 법으로서 지혜가 작동하는 형식밖에 더 아니다. 그분의 지혜는 그분의 제자들에게 법이고, 그들은 이것을 그분으로부터 받게 되고 그들이 순종해야 하는 법이다. 그분이 그들에게 명령하는 것은 무엇이든 행한다면 그 제자들은 그분의 친구들이다. 그분이 그들에게 수여하시기로 약속하는 모든 축복의 조건이 그분의 명령을 지키는 것임을 꾸준히 상기하도록 자극을 주시고 있다는 점은 우리 역시 그 대목에 시선을 집중해볼 가치가 있다. 다음 절에서 주님이 말하시는 종이든 친구이든 모두 순종이란 점에서는 차이가 없다. 둘 다 그분의 명령에 순종하도록 요구된다. 둘 사이에 유일한 차이는 그들의 순종의 품질을 구별지어주는 총명과 동기에 있다. 아브라함은 하느님의 친구라 불리웠다 (이사야 41:8). 그 이유가 그는 주님 사랑을 원리로 삼는 이들을 표현했기 때문이다. 이와 일치해서 사도 야고보는 아브라함이 하느님의 친구라 불린 것은 그가 일을 가지고 그의 신앙 을 보였기 때문이라고 우리에게 말하고 있다 (2:22-23).
15. 주님께서 계속 이으신다. “이후로부터 나는 너희를 종이라 부르지 않는다. 그 이유가 종은 그의 주인이 하는 것을 모른다. 그러나 나는 너희를 친구들이라고 불렀다. 그 이유가 내가 나의 아버지로부터 들었던 모든 것을 나는 너희에게 알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제자들은 종이라는 수준에 있어왔다. 지금 그들은 친구라는 수준으로 승격되었다. 종은 의무감에서, 또는 보상 때문에 주님에게 순종하는 이들이다. 친구는 이해타산이 없는 사랑으로부터 또 다른 사람에게 봉사하는 사람이다. 의무라는 견지로부터의 순종은 영적인 노예상태이다. 사랑의 느낌으로부터의 순종은 영적 자유이다. 제자가 첫 상태에서 둘째 상태로 건너갔을 때, 그는 더 이상 종이 아닌 하느님의 친구이다. 우리의 주님께서는 이런 상태와 수준 사이에 있는 차이의 바탕을 설명하신다. 종은 주인이 하는 일을 모른다. 어떤 종이 충직한 종이 되기에 앞서 그는 주인의 법을 알아야 한다. 그러나 그는 그 법을 그가 순종해야만 하는 권위적인 명령으로서만 알고 있을 뿐이다. 그는 주인의 뜻을 알고 있으나 그 법을 강력히 실시하는 이유와 목적을 모르고 있다. 이유와 목적은 보다 더 높은 상태에 소속되어 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이것을 “내가 아버지에게서 들었던 모든 것을 나는 너희에게 알게 해 주었다”는 말로 서술하시고 있다. 주님께서 아버지라는 단어를 들추어 말하실 때는 언제든지 그 말은 그분의 인성과 구별되는 인성에 내재하는 신성을 두고 하시는 말이다. 또는 그분의 지혜와 구별되는 신성한 사랑을 두고 하시는 말씀이다. 주님께서 아버지로부터 제자들에게 알게 만드는 것은 그분이 그분의 사랑으로부터 그들과 교통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사랑의 법과 메시지를 받는 것이다. 주님은 사랑으로부터 언제나 말하시지만 그분이 말하는 상대방들은 언제나 사랑 가운데서 그분의 말을 듣고 순종하지 않는다. 그러나 주님은 “내가 아버지에게서 들었던 모든 것을 나는 너희에게 알려 주었다” 라고 말하시고 있다. 이것은 성령에 관한 선포, “그가 (모든)진리로 너희를 인도할 것이다”는 것과 비슷하다. 제자의 충만됨은 주님의 충만됨의 형상이다. 위 주님의 표현이 함축하는 바, 우리의 친구로서의 그분은 그분께서 그분의 친구라 부르는 이들에게 한정 없는 그분의 사랑 속에서 그분의 모든 마음을 밝히 알게 하시고, 그들을 그분의 가장 깊고 은밀한 생각들의 저장고로 만드시겠다는 것이다. 그 이유가 “주님의 비밀은 그분을 경외하는 이들과 함께 있기” 때문이다 (시편 25:14).
16. 우리가 종의 신분에서 친구의 신분으로 승격되는 조건 뿐만 아니라 원인은 주님 쪽에 있다. “너희가 나를 선택한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선택해서, 임명하여, 너희는 가서 열매를 산출하라 했다. 그리고 너희의 열매는 남을 것이다. 너희가 내 이름 안에서 아버지에게 묻는 것은 무엇이든, 그분은 그것을 너희에게 줄런지 모른다.” 열 둘이 주님에 의해 사도 신분으로 뽑혔고 복음을 전파하여 노동의 열매로서 영혼을 그분께 가져오도록 임명되었다. 그러나 이 구절에서 예수께서는 단순한 제자들이 아닌 사도로서의 제자들에 대하여 말하고 계신 것인지에 대해서는 의심스럽다. 그분의 연설의 용어와 일반적 의도는 공적인 삶과 품성보다는 오히려 기독인에 더 관계되고 있다. 우리가 그분의 말을 곰곰이 생각하려는 것은 이런 빛 가운데 있다. 주님의 말들은 모든 제자들에게 참되다. 그들이 그분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그분이 그들을 선택하셨다. 그들의 구원은 그분으로 말미암아 시작되었고 운영되었으며 완전해졌다. 그 일은 그들의 동의와 협조 없이 행해지지 않는다. 그러나 주님은 그 일의 저자요 대행자이신 반면, 그들은 그 일을 받는 그릇이요 재대행자일 뿐이다. “하느님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그분을 사랑한다.” 그분이 우리를 사랑함은 우리가 그분을 사랑하는 원인을 생산한다. 우리가 그분을 뽑은 게 아니라 그분이 우리를 뽑았다. 그리고 우리를 뽑았을 뿐 아니라 우리를 임명하셨다. 그분의 사랑으로 우리를 뽑아주셨고 그분의 지혜로 우리를 임명하셨다. 우리가 심정에 그분의 사랑을 받을 때 우리는 뽑혀진 사람이다. 우리가 이해성에 그분의 진리를 받을 때 우리는 그분이 임명한 사람이다. 그 이유가 우리의 애착은 그분의 사랑과 결합함에 도달되고 우리의 생각은 천국적 질서의 상태로 놓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님은 그분의 제자들을 선택했고 임명했으며, 그들이 나가서 열매를 맺도록 하셨고, 그들의 열매가 없어지지 않고 있어야 한다고 말하시고 있다. 주님의 바람과 의도란, 그분의 제자들이 선한 일로 “열매를 맺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선함으로 인도하는 길인 진리와 일치되는 삶을 수단으로 “나가야” 한다. 정의와 성실의 삶 안에서 그들의 사랑과 신앙 을 명백히 나타내 보임으로 “열매를 맺어야” 한다. 그들은 신실한 신앙을 죽음에 이르기까지 견지하고 있음으로 “그들의 열매는 없어지지 않아야” 한다. 이 모든 것을 그분의 제자들이 해내서 그들이 아들의 이름으로 아버지께 구한 것은 무엇이든 아버지께서 해 주시기를 주님은 바라시고 있다. 14장 13절에서 주님께서는 제자들이 그분의 이름으로 아버지께 묻는 것은 무엇이든 그분이 그것을 해 주시겠다고 이미 말하셨다. 이 구절의 경우, 그분께서는 아버지가 그것을 해 주시리라고 말하시고 있다. 아버지로부터 받는다는 것은 주님의 사랑을 받는 것이다. 아들로부터 받는다는 것은 그분의 지혜를 받는 것이다. 그러나 제자들이 원하는 것을 주님의 이름으로 구하라는 것은 제자들의 입술에 그리스도의 이름을 올려놓고 아버지께 접근하라는 것은 확실히 아니고, 주님의 겸허의 영과 그분의 헌신의 영인 온유함으로 채워진 심정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영으로 구하라는 것이다.
17. “이런 것들을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다, 너희는 서로 사랑하라.” 한번 더 반복된 이 교훈은 그 얼마나 감명적인지! 이것, 주님의 새 계명, 서로 사랑하는 것, 그분이 그를 사랑하셨듯 사랑하는 것, 이 사랑을 수단으로 모든 사람은 그분의 제자임을 알게 된다는 것은 모든 주님의 가르침의 대상(object)이요 모든 그분의 명령들의 목적(end)이다. 그래서 신성한 선생님은 몇 번이고 되풀이하여 가르쳐 제자들에게 이 교훈을 인상 깊게 해놓으려 하셨다. 기독인의 의무에 관한 어떤 교훈도 이 계명을 습득하는 것보다 더 어렵지 않다. 그 당시 제자들에게 이 교훈이 반복적으로, 지엄하게 인상지위 놓여야 할 필요가 있었던 그 이상으로 그 이후 시대의 모든 사람에게도 그 필요성은 더욱 더 요구되고 있다. 이 사랑의 얼마나 적은 양, 주님이 제자들을 사랑했던 양의 얼마나 적은 양으로 그들은 서로를 사랑했던가! 자기들 앞에 본보기와 그분의 가르침을 가지고 있다고 고백하는 제자들이 개인적으로 국가적으로 서로 다투지 않았던가! 그분을 믿노라 고백하고 그분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얼마나 많은 사람이 이웃의 복지에는 아랑곳없이 자아 이익에 몰두했던가?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의 제자이기를 바래고 있다면, 우리는 그분의 계명을 지킴으로, 그분을 사랑함과 서로 사랑함이 명백히 보여질 수 있는 참된 방법만으로 우리가 그분의 제자임을 보이려고 노력해야 한다. 제자들은 서로 사랑하라고 명령받는 한편, 세상이 그들을 미워하게 되리라는 것을 예상하도록 경고되고 있다. 주님은 선한 자에게 있어서는 사랑해야할 최고의 대상이 되지만 사악한 자에게서는 미워해야할 최고의 대상이다. 그분은 위로와 격려의 교훈으로서 이런 사항을 제자들에게 주신다. 세상은 제자들을 미워하기에 앞서 그분을 미워한다는 것이다. 이를 적절히 이해해서 차분히 생각해보면 위 말씀은 진실로 격려하고 위로하는 말씀이다. 세상이 제자를 미워함은 그에 앞서 주님께서 미움을 당해왔던 것보다는 덜 위험하다. 그분은 적들과 보복자를 잠잠하게 하셨다. 이렇게 그분이 그것들을 정복한 이후의 세상의 미워함은 만일 악의가 더하지 않다 해도 덜 위험해 있다. 이것을 그분의 연설의 뒷부분에서 가르치시고 있다. 거기서 그분은 세상을 극복한 이래 제자들이 기운을 내도록 권면하시고 있다. 세상의 미워함이 이러할진대 제자들은 그 미워함을 견뎌내어야 한다. 그러나 견딤은 소극적 수단일 뿐이다. 기독제자는 모든 박해를 개선의 수단으로 바꾸어야 한다.
(참고: 18절은 원서에서 생략되어 있음)
19. 세상의 반대는 세상 속에 있지 않은 이들이 예상해야 한다. “만일 너희가 세상 속에 있다면, 세상은 자기 자신을 사랑할 것이다. 그러나 너희가 세상 속에 있지 않기 때문에, 내가 세상으로부터 선택했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한다.” 이 인간이 세상의 일원으로 세상 안에 있는 한 그는 세상으로부터 달갑지 않은 대우를 받지 않을 것이다. 참으로 세상적인 인간은 서로가 미워하고 피해를 입힌다. 그러나 그런 상황이 벌어지는 이유는 그들이 세상적 원리에서 서로 반대되기 때문이 아니라 세상적 목표와 이익추구에서 경쟁하기 때문에서이다. 세상이 세상 속에 있지 않은 이들을 미워함은 원리 수준에서 발견되고 기어이 적대관계를 생산하고야 만다. 그럼에도 우리 주님의 말은 영적 의미에서 보면 그것은 제자 자신의 마음 안에 있는 서로 반대되는 원리로서 이해되어진다. 위 주님의 말을 개인 차원에 응용하면 세상이란 우리 본성 중 세상적인 부분, 즉 자연적 생각과 자연적 수준으로 기우는 경향성을 지닌 자연적 마음이다. 그리고 제자들이란 거듭나는 동안 획득되어지는 영적 원리들이다. 애당초일 경우 우리의 영적 원리조차도 자연적 마음 안에 존재하고 있다. 인간이 거듭 나아가는 생활을 진척해갈 때 영적 원리들은 자연적 마음으로부터 영적 마음으로 승강된다. 그러면 그 원리들은 세상으로부터 가려내진 것이고 세상에 속해 있지 않다. 그러므로 세상이 그 원리들을 미워한다. 우리 자신의 마음 안에 있는 천국과 세상 사이에는 서로간에 반대하고 다툼이 있다. 이 다툼은 세상이 정복될 때까지 계속된다. 그러나 그 정복은 지금 있지 않는다. 새 삶의 단계에서, 특히 주님의 이 시기가 관계되는 단계에서 미워함과 박해는 극에 달할 정도로 왕성하다.
20. 다툼이 계속되는 동안 제자들은 주님의 가르침과 본보기로부터 위로를 끌어당겨내고 강건해짐도 끌어낸다. “종은 자기 주인보다 더 위대하지 않다 라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말을 기억하라. 만일 그들이 나를 핍박했다면, 그들은 너희 역시 핍박 할 것이다. 만일 그들이 내 말함을 지켰다면, 그들은 너희의 것 역시 지킬 것이다.” 영적인 기억은 내적 삶에 속한 것이다. 영적으로 기억함은 우리가 지식으로 획득했던 진리들을 원리로서 재생산 한 것이다. 이러므로 우리가 예수께서 우리에게 말하셨던 말을 기억해야 하는 것은 종은 그의 주인보다 더 위대하지 못하다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이 말을 13장 16절 에서의 강연에서 말하셨었으나 지금 그분께서는 유대인들이 그분을 박해하듯 그들도 박해하리라는 경고의 말을 추가해 놓고 있으시다. 제자들은 예수께서 체험하신 박해를 피하리라고 예상하지 못하고 있다. 그럼에도 주님께서 그분의 바깥쪽 적들로부터 감당한 박해 같은 종류는 오늘날 시대의 많은 제자들에게 흔하지 않다. 그러나 우리 주님이 겪으신 내향의 박해는 모든 시대에 있는 그분의 제자가 견뎌내야 하는 박해이다. 내향의 박해란 시험들이고 이 시험을 주님이 특별히 언급하신 것이다. 제자들은 이것을 피할 수 없다. 그 이유가 이 시험들은 그들이 순수해지고 구원되는 과정에 필요한 부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제자들이 실감할 것으로 예상되는 주님의 체험의 또 다른 행복한 부분도 있다. “만일 그들이 내 말을 지켰다면 그들은 너희의 말도 지킬 것이다.” 제자들이 파견되어지는 세상에는 두 부류, 즉 주님과 그분의 제자들을 박해하고 미워하는 부류, 그리고 주님과 제자들이 가져다주는 기쁜 소식을 받아들이는 부류로 구성되어있다. 주님의 박해를 나누어 가지는 이들은 그분의 성공 역시 나누어 향유한다. 이것이 우리로 힘을 내게 하는 대목이다. 그러나 우리 자신과 우리의 영적 삶에 관련하여 이를 생각해보자. 우리가 자연적 상태에 있을 경우, 우리는 종을 주인 위에, 자아를 하느님 위에, 세상을 천국 위에, 자연적 수준을 영적 수준 위에, 지식을 선함 위에 놓는다. 우리는 거꾸로 된 위와 같은 질서를 개정해야 하고, 종이 그의 주인보다 더 나을 수 없다는 것을 먼저 배우고 기억해야 한다. 마음과 삶에 소속된 모든 문제에서 종을 그의 주인에게 종속시키기 위해서 우리는 박해로 의미된 그런 환난의 주체가 되어 있었어야 한다. 이 박해가 오는 세상은 우리 자신 안에 있는 세상, 통치하는 사랑(ruling love)의 대상이 되는 세상이다. 세상을 사랑함이 극복될 때, 한 때는 반대의 위치에 놓였지만 세상은 주님과 그분의 말을 청종하도록 설득될 것이고 구세주를 인정하고 그분의 말들을 지킬 것이다. 자연적 마음 속의 적개심이 제거될 때, 자연적 마음은 영적 마음에 종속되고 순종하게 된다. 모든 생각은 신성한 권위에 종속되도록 가져다 놓여 모든 것은 그렇게 종속됨을 지원할 것이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주님을 따라야 한다. 그 이유가 그분은 싸움을 수행하셨기 때문, 그리고 반역적인 인간 본성에 있는 모든 반대되는 것을 극복하시어 그것들을 그분의 영원한 신성과 완전한 하모니를 이루게 하셨기 때문이다.
21. “그들은 모든 이런 것들을 내 이름의 위함 때문에 너희에게 행할 것이다, 그 이유는 그들은 나를 보낸 그분을 모르기 때문이다.” 제자라는 측면에서 보면, 제자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어서 초래된 세상으로부터 미움을 받음은 그들이 실제화하고 본보기화 했던 그들 주인의 원리 때문이었다. 우리에 관련해보면, 우리의 영적 삶과 체험에서 우리가 겪는 내향의 박해는 주님을 위해서이다. 우리 자신의 악과 잘못들 쪽에서 반대하는 제일가는 최말단에 해당되는 것은 우리 안에 있는 그분의 진리이다. 여기서 말해지는 미워함과 박해는 제자들에게 직접 향해있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그러나 우리 안에 있는 제자들이란 우리가 주님으로부터 받았던 원리들이다. 따라서 이런 원리가 미움을 받고 반대에 부딪칠 때, 주님이 미움을 받고 반대되는 것이다. 세상이 주님 자신에게 그것을 가했듯이 제자들에게도 그렇게 하는 것은 그들이 그분을 보내신 아버지를 모르기 때문이라고 말해지고 있다. 사람들이 하느님의 사랑을 알지 못하고 느끼지 못할 때, 그들은 하느님의 진리를 미워하고 박해한다. 따라서 우리가 주님의 사랑을 모르는 만큼, 즉 우리 안에 주님 사랑을 가지지 않은 만큼 우리는 그분의 진리에 자연적인 미움을 가진다. 주님의 진리는 그분의 사랑이 파견한 것이다. 다시 말해 진리는 사랑으로부터 진행되는 것, 마치 태양의 빛이 태양의 열에서 오는 것과 같다. 그리고 어둠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빛을 미워하는 바, 그 이유는 빛이 그들의 악을 명백히 보여주기 때문이다. 설사 우리가 새 삶에 진입해 있다 해도 우리의 부패된 근성이 우세해 있는 만큼 우리는 빛을 미워하는데, 그 이유는 진리가 진행되어 나오게 하는 신성한 사랑에 관한 실제적인 지식을 너무나 적게 가졌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런 것을 아들에 행하는 바, 그 이유는 우리가 아버지를 모르기 때문이다.
22. “만일 내가 오지 않고 그들에게 이야기 하지 않았다면, 그들은 죄를 가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그들은 자기들의 죄에 변명을 가지고 있지 않다.” 이를 두고 유대인들이 만일 주님께서 자기들에게 와서 말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죄 없이 살아 갔을텐데 라고 생각한다면, 이것은 우리에게는 이해되지 않는다. 그들이 그분을 개인적으로 미워하거나 박해하는 죄를 짓지는 않았다고 생각해 볼 수 있을는지 모른다. 그들이 그분을 개인적으로 미워한 이유는 그들이 말씀이 육이 되신 분으로서, 참 빛으로서의 그분의 품성의 아름다움과 순수성을 미워했기 때문에서이다. 그들의 지식은 그들이 단죄 받는 원인이었다. “이것이 단죄이다. 빛이 세상에 왔는데 사람들의 행위가 악해서 어둠을 사랑한 것이다.” 그럼에도 주님은 “세상을 단죄하시러 오신 게 아니라 그분을 통해 세상이 구원받도록 하시려고 오시었다.” 그러나 마음씨 고운 사람에게 해당되는 구원은 그 반대되는 품성의 소유자에게는 단죄이다. 그들을 단죄하는 것은 빛이 아니라 빛에 반대됨이다. 빛의 본성은 대상을 명백히 알게 만드는 것이다. 어둠은 악을 덮고 변명해댄다. 이 어둠은 고집부려 있어진 잘못의 어둠이 아니라 본의 아닌 무지의 어둠이다. 빛이 올 때 인간은 그들의 죄에 대한 구실을 가지지 못한다. 변명할 수 없다. 악이 자연적인 경향성으로서 의지 가운데 있고, 이해성 안에 있는 진리로 간파되지 않고 판결 받지 않고 있는 한 그것은 단죄되지 않는다. 빛이 와서 악을 명백하게 만들어 주는 데에도 악을 계속 사랑하여 행하고 있는 사람은 죄를 짓고 단죄될 수밖에 없다.
23. “나를 미워하는 자는 나의 아버지 역시 미워한다.” 주님께서는 세상이 아버지를 몰랐기 때문에 그분을 미워했다고 말하셨다. 지금은 그분을 미워하는 가운데 아버지도 미워한다고 말하시고 있다. 하느님을 사랑함을 지니지 않은 이들이 그분의 진리를 미워하듯, 하느님의 진리를 미워하는 이들은 그 진리를 밝히 알게 하는 그분의 사랑을 미워한다. 사랑과 진리는 하나이다. 사랑은 진리의 생명이고 진리는 사랑의 빛이다. 따라서 전자를 사랑할 수 있으면서 후자를 미워할 자는 없고, 전자를 미워하면서 후자를 사랑할 자도 없다. 주님의 사랑과 진리는 그분의 뜻과 지혜이다. 하느님의 지혜를 미워하는데 하느님의 뜻을 사랑할 자는 없다. 그분의 지혜를 미워함도 없이 주님의 뜻을 미워할 자는 없다. 진리는 빛이다. 하느님을 사랑함을 미워함 없이 하느님의 빛을 미워할 자 역시 아무도 없다.
24. “만일 내가 어느 누구도 행한 적이 없는 일들을 그들 사이에서 하지 않았다면, 그들은 죄를 가지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 그들은 나와 나의 아버지 둘 다를 보았고, 미워했다.” 지금 주님께서는 그분의 일에 관해, 마치 이전에 그분의 말씀들에 관련해 언급하셨던 것같이, 그분의 일을 보고서도 여전히 불신앙자로 남은 것이 유죄인 것같이 말하신다. 주님의 일은 그분의 사랑과 그분의 지혜가 관계되는 것같이 그분의 말과도 같은 관계를 가지고 있다. 일은 의지가 바깥쪽으로 뻗어 나온 것이고 말은 생각이 뻣어나온 것이다. 여기서도 역시 주님께서는 아버지의 본성, 그분 자신의 무한한 사랑의 본성을 공개하시는 것에 관해 말하시고 있다. “내가 한 일은 나의 것이 아니라 내 안에 머무시는 아버지가 하신 일이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만일 내가 일찍이 누구도 하지 않았던 일들을 그들 사이에서 보이지 않았다면 그들은 죄가 없었을 것이다.” 하고 말하신다. 그분의 일은 다른 사람들의 일만큼 탁월하였고, 그분의 본성이 그들의 일 속에 있었다. 다른 사람들도 그분이 하셨던 위대한 기적만큼 큰 기적을 행했다. 죽은 자를 살리는 일까지도 했었다. 그러나 주님의 일 안에 있는 위대함은 다른 사람의 어떤 일에도 없었다. 그분은 일을 그분의 이름으로 하셨고, 다른 사람들은 그분의 권능을 수단으로 기적을 행했다. 물론 기적을 목격한 이들에게는 그런 차이점을 갖지 못했을는지 모른다. 그러나 주님의 일은 그분의 말씀들 같이 권능과 함께 존재했다. 그래서 그분의 바깥쪽, 눈에 보일 수 있는 일들은 여느 사람들의 것같지 않게 유한한 모든 권능과 대행인을 초월하는 가시적인 일들과 내향의 일을 동반했다. 구속함과 신성화 하심의 주님의 일은 병자를 치료하고 죽은 자를 산 자로 일으키시는 그분의 일과 동시에 있었다. 이런 일들은 더 위대한 일들을 동반하고 표현해주었다. 구속의 일은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완전히 회복시켜주는 것이었다. 과거 자유의지는 어둠의 권세가 다소 우세함으로해서 부분적으로 파괴되어있었다. 그래서 이 상태는 선한 것을 선택하지 않고 악을 거절하지 않아도 변명 없이 인간을 방치했다. 인간이 완전한 자유의지를 소유할 때 선한 것을 선택 않고 악을 거절 않는 것은 죄이다. 그리고 인간이 예수의 말을 듣고 그분의 일을 보는데 회개 않고 믿지 않을 때 그들은 아버지와 아들 모두를 보고 미워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그들은 심정으로부터 하느님의 사랑을 거절하고 이해성에서 하느님의 지혜를 거절하는 것이다.
25. “그러나 율법에 씌여 있는 말, 즉 그들은 원인 없이 나를 미워했다는 말이 성취될런지 모르는 때가 오고 있다.” 이 인용문은 시편 35편19절, 69편4절에 씌어있다. 그러나 인용 자체는 그것이 주님의 예언임을 우리로 확실히 해두게 하는 것뿐이다. 유대인들이 미워해대는 것을 주님에 관련해보는 한, 참으로 정당한 원인이 없었다. 그 원인은 그들 자신 안에 있었다. 게다가 그들의 미워함의 모두는 거룩한 분에 대한 것이었다. 원인이 덜 정당할수록 미워함은 더 깊어진다. 유대인들은 위 예언이 그들이 감내해야 한다는 필연성 때문에 주님을 미워하지 않았다. 선견(fore sight)에 선-지명(fore-appointment)이 함축되고 있지 않는다. 개인적 차원인 우리 자신에 관련해 생각해 볼 때, 이것이 “그들의” 율법에 씌어 있다고 말하시는 그 속에 충만된 영향력을 볼 수 있을는지 모른다. 우리를 단죄하는 법은 우리들의 것이다. 신성한 법은 그 법이 우리에게 밝히 알려지고 그 법 안에서 훈육될 때까지 우리를 단죄하는 일이 없다. 우리가 모르는 법은 우리의 법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에 대한 법이 아니다. 법이 없는 곳에 법위반도 없다. 그러나 신성한 법이 우리의 법이 되었을 때, 우리가 주님을 미워한다면 그것에는 그러해야 할 까닭이 전혀 없다. 그 이유가 법은 하느님이 모든 순수함과 자비이시다고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와 같은 존재의 품성을 미워하는데는 정당한 이유가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이유라 부를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 그런데 이런 까닭 없는 미워함까지도 우리의 법에 씌어있다. 만일 우리가 이유도 없이 미워한다면 그것은 우리 내부에 존재하는 법이 성취되는 것이다. 그 이유가 그 법이 말하는바, 만일 우리가 악하다면 우리는 이런 까닭 없는 미워함을 흠모해야 한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우리 자신의 심정 안에 있는 악 자체는 우리 자신의 불순함으로부터 어떤 이유도 없이 순수한 것을 미워만 할뿐이다.
26,27. 새롭고 더 희망 있는 어떤 것들의 상태가 빠르게 접근하고 있다. “위안자가 와질 때, 그를 나는 아버지로부터 너희에게 보낼 것이다. 이는 아버지로부터 진행하는 진리의 참 영과 다를 바 없는데, 그가 나에 관해서 증언할 것이다, 그리고 너희 역시 증언할 것인데, 그 이유는 너희가 시작으로부터 나와 함께 있어왔기 때문이다.” 성령의 하강, 그것의 본성과 결과들이 오순절 때에 기적적으로 나타났다. 그리고 처음부터 주님과 함께 있었던 이들의 증언은 세상에 위대하고 유익한 변화를 생산했다. 제자들이 “평화의 줄로 성령과 하나된 것을 간직함으로 하나의 몸과 하나의 영이었는 한 (에페소4:3-4), 예수의 원인은 번성하였다. 그러나 그들이 세상의 잘못들과 악에 대적하려고 하나 되어 노력하는 대신 그들은 교리의 요점들을 가지고 그들 사이에 분쟁이 오갔을 때, 기독교신앙의 힘은 교회 내에서, 세상에서도 기울고 말았다. 그래서 기독인의 마음을 나뉘게 해서 급기야 냉담한 두 개의 단체로 분리하게한 분쟁의 요점중 하나는 이것이었다. 즉 성령은 아버지로 진행되는 것이냐 또는 아버지와 아들로부터이냐에 대한 것이다. 이것은 개혁하지 않은 교회의 두 큰 종파 사이의 차이점이 되는 요지이기도 하다. 라틴 또는 로마-카톨릭교회는 성령이 아버지와 아들로부터 진행되어 나온다는 견해를, 그리스교회는 아버지로부터서만 진행된다는 견해이다. 아버지와 아들이 두 인물(person)이라고 간주하는 한, 위 논쟁의 의문을 정착시키는데는 곤란한 점이 있다. 그러나 아버지와 아들이 주님이라는 인물안에 있는 신성과 인성을 뜻한다고 이해할 때 이 주제에 있는 진리가 무엇인지 쉽게 볼 수 있다. 하느님의 영(the Spirit)이 아버지로부터 직접 진행되고 아들을 통하지 않는 견지는 이런 견해와 똑같다. 즉 인간의 말과 행동은 그의 영혼으로부터 진행될 뿐 그의 육체를 통하여 나오지 않는다는 것과 같다. 이런 점에서 본문의 주님의 언어는 특별한 시선을 받을 만하다. 그분은 아버지로부터 진행되는 것으로 하느님의 영을 말하시나 그분이 그것을 보낼 것이라고도 말하시고 있다. 아들이 성령을 보낸다고 말해질 때, 그럼에도 그것은 아버지로부터 진행된다고 말해질 때, 이 사항이 우리를 가르치는 바, 하느님의 영이 주님의 신성으로부터 진행되는 한편, 그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인성을 수단으로 구원과 거듭남이라는 하느님의 영의 사명에 보내지고 있는 것, 주님의 인성은 주님이 육안에서 명백히 보인 덕택으로 소유하게된 구원의 모든 권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아버지와 아들을 신성과 인성이라고 부르든지, 신성한 사랑과 지혜라고 부르든지, 우리가 알게 되는바는 아버지는 성령이 우리에게 오는 근원지(from) 측면에서의 주님 안에 있는 원리이고, 아들은 성령이 우리에게 오는 수단(by) 측면에서의 원리이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아버지는 아들을 통해 하느님의 영을 보내지 않고 아들이 아버지로부터 하느님의 영을 보낸다. 주님의 인성은 무한하고 영원하게 활동하고, 이 신성한 영을 내보내고 있으며, 특히 그분의 인성이 지니는 모든 효능을 그 영에 부여하고 있어, 인간을 구세주처럼 만들기 위해, 즉 그분이 자신을 거룩하게 하셨듯 인간도 거룩해지게 하고 있다. 그래서 주님의 신성한 인성 안에 있는 그분의 영이 계시 속의 진리들의 협동함을 수단으로 그분의 영의 작업이 후원 받을 때, 인간 마음, 만일 그 마음이 하고 싶을 경우, 주님의 영에 의해 새로워지는 것을 위해 설비된 모든 혜택을 받을 수 있다. 이런 주제를 우리 개인의 경험에 관련해 생각해 본다면 우리는 그 속에 있는 실용적인 진리를 볼 수 있기도 하다. 주님께서 부패된 우리의 자연적 마음 안에 있는 어둠의 권능을 복종시키고, 우리의 영적 마음으로 신성화되어 승강하셔서, 지금 천국적인 질서의 상태로 가져다 놓였을 때, 그 다음 그분의 영은 오순절 때같이 풍부하게 내려오시어 우리가 그분의 말씀으로부터 획득했던 선과 진리들을 채운다. 마치 과거 그 영이 사도들을 가득 채워서 그들이 새 혀로 말하게 하는 것과 같다. 하느님의 영의 증언과 말씀의 증거가 주님의 구속함과 구원하심 안에서 공표되어 하나가 될 때, 그것들은 세상에서 한번 결과 되었던 것같이, 뿐만 아이라 그것들이 우리의 심정과 마음 안에서 역사 되었던 것같이, 그분은 우리 안에서 영광되시고 우리는 그분 안에서 완전을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