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계시록 22장 해석

22

1. 요한에게 거룩한 예루살렘을 보여 주었던 천사는 이제 도성으로부터 또 다른 광경을 보도록 그의 시선을 돌리고 있다. “그리고 그는 나에게 하느님과 어린 양의 왕좌로부터 나오는 수정 같이 맑은 생명의 물의 순수한 강을 보여주었다.” 거룩한 도성이 하느님으로부터 천국을 통해 내려 온 것과 똑같이 그 도성을 받쳐주는 수단도 되어 주고 있다. 지상의 교회는 천국에 있는 교회로부터 내려 올 뿐만 아니라 천국의 교회와 연결되어야 살아 있다. 다시 말해 인간들은 주님과 함께 있는 천사들을 통해서, 천사들과 함께 살아간다. 끝없는 창조로 자연계가 버티듯 교회 역시 마찬가지이다. 말씀이 창조한 것에 주님의 영은 생명으로 채우신다. 하느님의 영을 쏟아부으심은 신성한 모든 일 중 월계관에 해당되는 행동이다. “하느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을 때…그분의 영이 물 위에 휘돌고 있었다” (창세기 1:1-2). 아담을 창조하셨을 때 하느님께서 그의 코에 숨을 넣으시어 그는 살아있는 영(soul)이 되었다. 마른 뼈가 살로 채워져 군사가 되자 영들이 그들 안으로 와서 살아났다. 이와 같이 주님이 육 안에서 그분의 일을 완성하시어 지상에 그분의 교회를 세우신 다음 드높게 승강하셨을 때 그분은 성령강림의 날에 제자들에게 그분의 영을 쏟아부어 주셨다. 주님의 두 번째 강림의 교회가 세워졌을 때 진리의 영이 수정 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이 되어 그 영 안으로 흘러들어 그 물이 어디로 흐르던 그 곳에는 생명이 있어지고 열매가 풍성하다. 이 강물은 신비로운 성전 문턱 아래로부터 흘러나오는 물이고 (에스겔47:1), 예루살렘으로부터 흘러나가는 물 (스가랴14:8)이다. 이런 강물의 줄기들이 하느님의 도성, 지존의 거룩한 처소를 즐겁게 한다 (시편46:4). 진리의 하느님의 영은 진리의 하느님의 말씀과 연결되어 행동한다. 이 영의 영향으로 말씀 속의 가르침은 생기를 갖는다. 하느님의 영이 없는 말씀은 마치 영이 없는 육체나 다름없다. 하느님의 영은 그분의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와진다. 하느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지식을 주고 하느님의 영은 사랑인 생명과 지혜인 빛을 우리에게 준다. 물을 생명 있게 해주는 게 사랑이요 물을 수정 처럼 맑게 해주는 게 지혜이다. 하느님의 왕좌와 어린 양의 왕좌로부터, 다시 말해 주님의 신성과 인성으로부터 진행되는 신성한 진리는 그 진리 깊은 속에 그분의 사랑과 지혜를 담고 있다. 천국은 하느님의 왕좌이다. 그 이유가 그분이 천국을 통치하시기 때문이다. 주님의 사랑과 지혜는 천국을 통해 교회에 내려오되 각 교회가 받기에 적절한 수준으로 내려온다. 그리하여 “…천국에서 이루어 진 것 같이 땅에서 이루어지게” 한다. 주님으로부터 인간 마음에로 유입(influx)되는 경로는 두 가지, 직접 경로와 간접 경로가 있다. 거룩한 영(The Holy Spirit)은 마음의 영역 중 가장 깊은 수준에로 들어가고 심정의 순수한 의도와 참다운 생각에 영향을 미친다. 천사들의 영향력은 위보다 수준 낮은 애착과 생각에 영향을 주어 성령의 하강이 있을 때를 위해 마음을 준비시킨다. 인간의 영향력은 보다 외면에 속하는 생각과 느낌들이 영향을 받게 한다. 인간과 천사가 끼치는 영향력은 생명과 빛이 주님의 영으로부터 인간 안쪽으로 흘러드는 것을 준비하는 과정에 불과하다. 하느님의 영은 인간 내면으로부터 언제나 행동되지만 인간과 천사는 인간 외면으로부터 그 인간에게 영향을 주는 행동이 있을 뿐이다. 진리가 인간과 천사의 마음에 영향을 끼치는데 어쨌든 그것의 주인은 주님이시다. 이런 진리의 영향력이 주님의 섭리 중 간접 경로에 해당된다. 천사나 인간이 소유하는 선하고 참된 모든 것은 주님으로부터서 만 존재한다. 올바른 행동은 그 행동 안에 계신 주님으로부터 있어진 것이고 그런 행동을 수단으로 그분께서 영향력을 행사하실 뿐이다. 그러므로 그분은 모든 것의 저자이시오, 따라서 선하고 참되어진 모든 공적은 그분에게만 있다.
2. 생명수의 강이 왕좌로부터 흐를 뿐아니라 “도성의 길 한가운데에서 흐르고, 강의 이쪽과 저쪽에는 생명의 나무가 있어, 열 두 과일들을 맺는데, 그 나무의 과일은 매 달 산출되고 있었다; 그리고 나무의 잎들은 나라들을 치료하기 위해 있었다.” 생명나무는 하느님의 손으로 에덴에 있는 동산의 한가운데에 처음 심어졌다. 이제 이 나무는 새 예루살렘의 거리 한가운데에 있다. 마지막째의 교회도 최초의 교회에서나 마찬가지로 주님은 사랑으로 계셔서 주님을 사랑함이라는 원리가 모든 원리들의 생명 되고 그 중심되고 있다. 사랑은 생명이다. 주님은 사랑 자체이신바 그분은 생명 자체이시다. 그분은 지혜 자체이신바 주님은 빛 자체이시다. 그분을 사랑함, 이는 우리 안에 있는 그분을 사랑함이고 이 사랑은 영적 측면에서의 생명이요 천국의 생명이다. “하느님은 사랑이시다. 사랑 안에 머무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 머무는 것이고, 하느님은 그 사람 안에 머무신다” (요한1서4:16). 사랑은 종교의 품위(grace) 중 최고 높은 품위인바 인간 모든 심정의 가장 깊은 안쪽에 있어져야만 한다. 그 곳에 존재해야 그 사랑은 마음의 모든 영역으로 골고루 흩어질 수 있어 기타 다른 모든 품위에 달콤한 향기가 나는 생명으로 채워 인간 마음 전체를 아름다운 사랑의 형상으로 탈바꿈되게 한다. 생명나무의 열매대신 지식의 나무 열매로 지성을 살찌우려 한 것이 인간을 타락시킨 원인이요 에덴으로부터 추방되고 파라다이스의 문이 닫히우게 한 원인이고, 방랑자, “헛되고 헛된” 인생이 되게 하는 원인이다. 그러나 두 번째 아담이 뱀의 머리를 짓부숨으로 생명나무에 이르는 길이 열렸다. 다시 말해 인간으로 생명을 되찾아 되돌아가는 힘을 주신 역사, 이 위대한 역사가 구속의 역사이다. 그러나 완전한 삶에서 너무 멀리 떨어진 이들이 원위치로 돌아가는 것은 단번에 이루어질 수 없고 오로지 점진적으로만 가능하다. 수많은 천국의 처방들이 잃었던 인간의 특전을 되찾기 위해 첫 강림의 교회를 통해 있어져 왔다. 이에 뒤이어 두 번째 강림의 교회를 통해 잃어버린 상속분을 되찾기 위해 섭리되고 있다. 그 문들은 열려 있고 결코 닫혀지는 일도 없다. 생명나무가 다시 서 있되 결코 시드는 일도 없다. 그러나 이 나무와 이 나무가 선 위치는 인간의 조건에 부응되도록 바뀌어 있다. 지금 이 나무는 동산에 있는 게 아니라 도로에 있다. 이제 그 나무는 양식을 위한 열매만 생산하는 게 아니라 치료를 위한 잎까지 생산하고 있다. 이는 바뀐 인류의 조건과 상태를 얼마나 잘 표현하는지! 인간 문명이 자연의 자리를 대신 점유하고 인간의 죄가 순진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그럼에도 문명이 자연에 정면 대결하는 것만이 아니듯 죄와 순진의 관계도 그러하다. 생명나무는 작은 숲들이 연대를 이루듯 붐비는 거리에 심어져 번창할는지 모른다. 이 나무가 심어진 곳은 어디든지 그 곳의 한가운데에 위치해야 한다. 사업이나 쾌락 같은 것이 종교에 유해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이 생명 있도록, 순수함이 있기 위해, 그것 자체대로 덕목을 갖기 위해 종교가 그런 것들의 중심을 차지하고 있어야 한다. 세상 모든 것은 생명 있는 원리를 그것 속에 지녀야 한다. 생명이 없다면 이는 죽은 형체일 뿐이다. 교회들은 교회 생명의 형체에 어울리지도 않는 중요성을 놓는 잘못을 저질러와서 교회의 필수되는 본성을 소홀히 해왔다. 마치 이브와도 같이 교회들은 뱀에 귀기울임으로 생명나무가 있어 왔던 에덴의 한가운데에 지식의 나무를 놓아두었다. 생명에 관한 왜곡된 과학은 참된 실제적 지혜의 자리를 찬탈해버렸다. 잃어버리고 말았던 참된 질서가 이제 회복되어 있다. 생명의 나무는 이제 한가운데에 놓여 있다. 사랑은 종교의 중심되는 품위이다. 그 외의 모든 품위는 사랑의 품위 주위에 놓여 있어 사랑으로부터 생명을 갖게 된다. 인간 삶의 형태가 태고시대와 아주 다르다 해서 사랑의 생명을 덜 받아도 된다는 것은 아니고, 사랑에 의해 성결되어 드높여지는 것 역시 덜 되어도 괜찮은 것도 아니다. 종교가 있어야 할 제 위치인 심정 중앙에 종교가 있게 될 때 심정의 모든 주변은 거룩하게 된다. 그러나 생명에 관한 모든 의무들을 정결되게 해서 고상하게 해주는 종교는 반드시 순수해 있어야 한다. 종교의 모든 품위에 생명을 주는 사랑은 반드시 슬기로워야 한다. 그래서 생명의 나무는 거룩한 도성의 거리 가운데에 있을 뿐아니라 생명수의 강 양쪽에도 있었다. 태고적 파라다이스, 에덴에서 발원한 강이 동산을 적시웠듯 거룩한 도성에서도 옥좌로부터 발원한 이 강이 생명의 나무에 물을 대주고 있다. 사랑은 진리를 수단으로 순수해지고 자양분을 공급받는다. 바깥 측면에서는 씌어진 말씀 속의 진리를 수단으로, 안쪽 측면에서는 영원한 신성과 신성한 인성, 하느님과 어린 양이신 그분으로부터 직접 발출되어 나오는 진리의 영(the Spirit of truth)을 수단으로 역사된다. 이 강의 물은 주님께서 말하신 것, “나를 믿는 사람은 성서의 말씀대로 그 속에서 샘솟는 물이 강물처럼 흘러나오리라” (요한7:38)와 똑같다.
생명의 나무, 생명수의 강물로 적시어지는 생명나무는 열 두 가지 열매를 생산하고, 또 달마다 열매를 맺는다. 이 나무의 잎은 백성을 치료해준다. 열매는 나무에게 있어 제일가는 유용함(use)에 해당되고 사실 나무가 존재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래서 모든 나무는 그 열매로 식별되어 진다. 정의(righteousness)가 생명나무의 열매이다. 선함(goodness)이 사랑의 열매이다. 우리는 사랑을 생각하되 사랑의 활동성 즉 유용하고 유익하게 하는 활동을 사랑함으로부터 분리해서는 절대로 생각할 수 없다. 사랑은 가장 높은 수준의 행복이지만 사랑은 가장 높은 수준의 의무이기도 하다. 사랑은 율법을 충만되게, 완성되게 한다. 그 이유는 “우리가 하느님의 계명을 지킬 때 그분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요한1서5:3). “만일 누가 나를 사랑한다면 그는 내 말을 준행하리라” (요한14:23). “내 계명을 지니고 그것을 지키는 사람은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요한14“21). 실용적인 사랑은 마음에 양식을 공급해서 영적 생명을 유지 보존되게 한다. 생명나무의 열매는 양식을 위해 존재하고 그 잎은 치료를 위해 존재한다. 주 예수, 이분은 스스로 생명나무이셨을 뿐만 아니라 참 포도나무되시고 제자들은 그 나무의 가지가 되는바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 음식은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행하여 그분의 일을 끝내는 것이다” (요한4:34). 자연적 음식 뿐만 아니라 영의 음식도 노동의 열매이다. 진리의 노동, 시련의 땀 흘림은 사랑의 노동에 앞서 있다. 이는 인류차원에서도 개인차원에서도 참된 질서이다. 생명의 나무로부터 내쫓긴 아담은 그가 취해진 흙으로 되돌아 갈 때까지 얼굴에서 흘러내리는 땀으로 얻어지는 빵을 먹게 되었다. 생명의 나무가 회복된 지금이라 해도 인간들은 그 나무에 이르는 자기 길을 만들어야 한다. 다시 말해 자아를 부정하는 생활을 통하여 사랑의 삶, 사랑이라는 생명, 최고의 행복을 쟁취해야 한다. 생명나무에 풍요로움과 다채로움을 주는 것들은 생명나무에 이르기 위해 진보해간 상태들이다. 앞에서 행동되어온 모든 상태들이 지닌 덕목들은 마지막 상태와 병합되어 있다. 종교에 있게 되는 모든 품위들은 사랑 안에서 만났다. 그 이유가 기독인이 도달해야할 가장 높은 상태, 마지막 상태가 사랑이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추측해 볼 때 마지막 교회의 사랑과 생명은 처음의 교회보다 더 다양하고 더 탁월해 있을 것같다. 처음의 에덴에 있는 나무는 한 가지 종류의 열매만을 생산한 듯 우리에게 비쳐지고 있다. 두 번째 에덴에 있는 나무는 열 두 가지 열매를 맺는다고 표현되어 있다. 처음의 나무는 한 가지 상태만 우리에게 표현하고 있지만 두 번째의 나무는 달마다 열매를 맺는다고 했다. 이는 심정상태들이 연속적으로 이어져 가는 것을 표현하고 있다. 참으로 우리가 처음의 교회(the first church) 내지 태고 교인(primeval man)을 놓고 상상하지 말아야 할 게 있다. 그들은 사랑 내지 사랑의 생명에 이르되 단번에 그렇게 했을 거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사실, 그들을 가장 높은 품위에 도달하게 한 상태들의 연속은 타락한 인간의 후손이 사랑이라는 최고점을 향해 위쪽으로 투쟁해 간 상태들의 연속과는 다른 종류의 연속이었을 것은 재삼 설명할 필요도 없다. 그들은 사랑의 상태와 더불어 믿음의 상태도 지녔다. 즉 그들의 해가 낮을 주관했을 뿐 아니라 그들의 밤은 달이 주관했다는 말이다. 그러나 그들의 상태들은 현 우리의 것과는 다르다. 그들의 경우, 믿음은 사랑의 수행원 수준밖에 안되었다. 단지 낮이라는 밝은 상태, 적극적인 사랑의 노동에 이어 저녁이라는 그늘이 드리울 때 사랑의 빛을 되반사하는 수준에서 그들의 믿음은 머물었다. 우리 세대의 경우, 믿음은 더 나은 어떤 것이 되어있다. 어떤 이들은 태고적 질서, 참된 질서를 거꾸로 해서 사랑을 믿음의 수행원, 보조자로 간주해버리고 있다. 사실 우리가 신앙과 사랑의 진정한 관계를 잘 인식하고 있다 해도 믿음은 사랑의 등불에 언제나 머물고 있지를 않는다. 때로 신앙이 거듭나려는 자신에게 사랑에서 독립된 신앙 자체 인 듯 여겨질 때가 허다하다. 어느 진짜 믿음도 사랑 없이 존재할 수 없다. 그러나 종교적 삶의 초보단계에서 신앙이 형이 되고 사랑은 동생 되는 듯 여겨진다. 신앙이 우리를 사랑으로 인도하는 듯 여겨지는 동안 이라 해도 진짜로는 사랑이 믿음을 수단으로 사랑 자체에로 우리를 인도하고 있다. 모든 진짜 삶에서 사랑은 적극적인 힘이 되어 있으나 믿음은 반동적인(reactive) 힘만을 발휘한다. 이런 논리가 우리 자신과 거리가 멀고 알아채릴 수 없다 해도 어찌됐든 사랑은 거기에 있다. 어찌됐든 사랑 없이는 생명도, 생명의 진보도 아무 것도 있을 수 없다. 믿음의 빛은 사랑의 빛이 반사된 수준 그 이상이 결코 될 수 없다. 거듭나는 삶의 진보에서 어느 때가 온다. 그 때란 달의 빛이 태양의 빛같이 될 때이다. 그리고 태양 빛이 칠 일 동안의 햇빛같이 일곱 겹이 될 때이다. 그 때란 믿음의 차가운 빛이 사랑의 따뜻한 빛으로 변할 때, 그래서 사랑이 거룩함으로 완전해질 때이다. 이런 변화를 있게 하는 것, 우리의 믿음을 점차적으로 발전되게 해서 그 믿음을 통해 정의로운 행동이 있게 인도해주는 것, 그것은 은밀하게 역사하는 사랑이다. 외관상으로 보고 인간들이 믿음의 열매라고 부른 것도 자세히 음미해 본체를 파악한다면 그것은 사랑의 열매이다. 단지 열매를 생산하는데 수단이 된 신앙때문에 사랑의 품질에 차이가 있는 것 뿐이다. 사랑은 열매를 맺게 한다. 그러나 그 결실의 성과는 믿음에 따라 차이가 난다. 생명의 나무는 그 열매를 “달마다” 산출했다. 이 구절의 달(month)이란 음력으로 된 달이다. 성경에서 언급되는 달(moon)은 신앙(믿음)을 상징한다. 어쨌건 계절이 매 달마다 한바퀴 돌면서 수확이 있다는 것, 이 얼마나 기묘한가! 그러나 이 구절은 이런 유익한 교훈을 주고 있다. 살아 움직이는 믿음의 상태는 사랑의 상태인바 정의라는 평화로운 열매를 산출한다는 것이다. “일이 없는 신앙은 실상 죽어있다.”
생명의 나무는 열매 외에도 우리의 현재 상태에 필수되는 어떤 것까지 생산하고 있다. 우리는 양식을 공급받아야 하지만 치료도 받아야 할 필요가 있다. 우리를 죽게 하는 질병이 도사리고 있는 이상 우리 영혼이 자양분을 제대로 흡수할리 만무하다. 미워함이 사라지지 않았는데 사랑함에 힘이 있을리 만무하다. 악의 권세가 득세하는데 선함이 어떻게 세력을 넓힐 수 있을까? 악을 고집한다면 그것은 선함이 발전하는 도중에서이든 그 본질 측면에서 이든 그 둘은 절대로 양립할 수 없다. 어쨌든 생명나무가 심정에 이식되면 그 나무는 건강을 유지시켜주는 잎과 양분을 공급하는 열매를 생산해준다. 열매에 앞서 잎이 먼저 출현해야 하듯 우리가 열매를 즐기는 선용이 있기에 앞서 잎이 가진 치료하는 효능을 먼저 체험해야 한다. 그 이유가 여기서 말하는 것은 기독인의 실생활에 관계해서 하는 말이지 명목상의 기독인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는 삶의 바깥쪽에서 획득한 종교적 지식이 아니라 내면의 생명에서 솟아나는 영적 진리를 두고 하는 말이다. 다시 말해 기억 안으로 수집된 종교가 아닌 심정에서 자라 오르는 종교 체험을 일컫는 말이다. 이런 심정의 옥토에서만이 생명나무는 뿌리를 확장할 수 있어 치료하는 잎과 열매의 풍성함이 가능하다. 그러므로 생명나무에서 생겨나는 잎사귀란 의지에서 싹이 터 지성에서 자란 진리들, 또는 애착으로부터 생각 속에 있는 진리들을 말한다. 따라서 이런 진리들은 사실(fact)들이 아닌 직감(perception)들이다. 이 진리들은 합리적으로 납득되어 있는 영적 진리들이다. 물론 합리적 진리들이 언제나 영적 수준의 진리인 것만은 아니나 영적 진리만은 언제나 합리적이다. 새 예루살렘에서는 어떤 진리도 이성(reason)에 상반되는 것을 참되다고 인정할 수 없다. 어쨌든 진리를 테스트할 때의 기준은 합리적 임에 있다기보다는 유용함(utility)에 있다. 진리는 실수(error)라는 것 보다 악에 더욱 반대되어 있다. 우리가 진리를 지녔는지를 확인하는 가장 큰 징표는 진리가 자신에게 자기의 죄를 확신시켜 주는 정도에 의존된다. 이것이 만국 백성을 치료해주는 생명나무의 잎사귀로 형상화되어 있다. 주님 자신이 생명 나무 되신다는 것은 누구나 인정할 것이다. 그리하여 그분으로부터 영적 음식을 공급받듯 그분은 유일한 의사도 되어 주시어 우리의 영적 질병을 치료해주신다. 둘째가는 수준에서 생명나무는 그분이 밝히 알게 하신 말씀(His revealed Word)이시다. 말씀이 가르치는 사랑과 선함은 영의 음식을 위한 열매이고 말씀이 가르치는 신앙속의 진리는 영의 치료를 위한 잎사귀이다. 약이 진리와 상응되는바 의사는 진리를 섬기는 사람들과 상응된다. 천국의 처방으로 내려오는 지상의 새 교회에서 치료를 위한 진리들은 합리적으로 설명된 영적 진리들이다. 제 아무리 영적 진리가 영혼을 치료할 수 있다 해도 우리가 그 진리를 합리적으로 이해되지 않으면 치료되지 않는다. 말씀의 합리적 이해는 우리의 이성을 만족시켜주고 마음에 확신이 서게 한다. 만족과 확신을 주는 진리가 삶에 응용될 때 악이 제거된다. 따라서 진리를 제아무리 많이 알고 있다해도 그것들 모두가 제 영혼의 치료약이 되어주지 못한다. 진리에는 두 가지 기능이 있다. 악행을 중단하게 하는 기능과 선행을 증진시키는 기능이다. 악을 금하게 하고 행실을 고쳐주는 진리는 생명나무의 치료하는 잎사귀이고, 가르쳐 삶을 인도하는 진리는 완전한 혼(perfect soul)과 선함이라는 열매이다.
3,4. 죽음과 슬픔과 아픔이 제거된 상태에 “그리고 거기에는 저주받은 것이 없다” 라는 신성한 약속이 이 구절에서 첨가되고 있다. 22장 14절에서 “그분의 계명을 행하는 사람은 복이 있다”라고 언급하고 있다. 그 반대가 계명을 행하지 않을 경우이고 이때 저주가 있다. 이 대목은 모세가 이스라엘 후손들을 향한 엄한 훈계에서 발견된다. “보아라. 오늘 내가 너희 앞에 축복과 저주를 내 놓는다. 주 너희 하느님의 명령에 순종하면 복이 있을 것이고 순종치 않을 경우에는 저주를 받을 것이다” (신명기11:26). 위 주제를 두고 신약과 구약의 가르침에는 차이가 전혀 없다. 그러나 축복과 저주라는 단어의 근원과 본성이라는 측면에서의 이해에는 다른 점이 있다. 유대인들은 이 두 단어를 일시적, 바깥 측면, 재판이라는 측면을 중시해서 이해했다. 기독인들 역시 유대인의 생각 쪽에 어느 정도 기울어 있지만 다른 점은 일시적인 축복과 저주가 영원히 있을 축복과 저주로 바뀌었다는 점이다. 그 결과 기독인은 축복과 저주라는 단어를 보상과 벌로 이해해 왔다. 새 예루살렘의 빛은 위 두 부류의 생각에 더 밝은 조명을 드리워 중요한 문제를 규명되게 한다. 하느님은 단지 바깥쪽 측면의 보상을 내리신다 거나 바깥쪽 측면만으로 처벌하시는 일도 결코 없다. 흔히 우리가 말하는 축복과 저주란 내면상태의 바깥쪽 결과일 뿐이다. 축복은 내향의 선함의 결과요 저주는 내향의 악의 결과이다. 우리는 선함 때문에 보상받는 게 아니라 선함을 통하여 보상을 받는다. 우리는 악 때문에 벌을 받는 게 아니라 악을 수단으로 벌을 받는다. 하느님은 복을 주시는 분이시다. 그러기 때문에 그분은 선함의 저자(the Author of goodness)이시다. 그분은 저주를 처방하시는 분이 아니시다. 그러기에 그분은 악의 저자(the Author of evil)가 아니시다. 선한 자에게 무보상이란 있을 수 없다. 그 이유는 선함은 선함 자체가 그 보상이기 때문이다. 악한 자는 처벌을 피할 수 없다. 그 이유는 악은 악 자체가 처벌에 해당되기 때문이다. 이런 원리는 이 세상에서는 위의 설명처럼 분명하지 않다. 그 이유가 이 세상은 수습기간(probation)에 해당되는 삶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저 세상은 축복있는 현실과 끔찍한 현실이 있을 것이다. 그 이유가 그 곳은 결실(fruition)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저 세상에서는 축복과 저주의 근원과 본성이 이 세상에서보다 더 분명하게 보여지고 느껴진다. 그 이유가 선과 악이 확실하게 직감되기 때문이다. 이런 어정쩡한 생각도 있을는지 모른다. 선이냐 악이냐 또는 정의냐 죄이냐는 그 자체의 본성으로 언제나 결정되는 게 아니라 그것들을 금하거나 명령하는 법에 의해서라고 생각할 때이다. 만일 이런 견해가 우세해지면 사람들은 본질적으로, 영원히 반대되는 위 두 품성, 선과 악에 관해 충분히 살펴 알려 들지 않을는지 모른다. 그리하여 선과 악이란 것은 우리로는 어쩔 수 없는 상속분으로 이해를 굳히면 하느님의 어떤 명령도 소용에 닿지 않게 된다. 그분의 뜻에 일치한다면 그것은 선이고 그 반대는 악이다. 다시 말해 그분의 속성에 일치한다면 그것은 선이고 그 반대는 악이다. 그 이유가 그분의 속성과 뜻은 하나이기 때문이다. 저주를 피하고 축복을 확고히 하기 위해 선과 악에 따라 오는 그 결과와 그 본성을 우리가 알고 있어야만 악을 금하고 선행을 도모하리라.
새 예루살렘에는 저주가 더 이상 없을 것이고 “하느님과 어린 양의 왕좌가 그 안에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분의 종들이 그분을 섬길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그분의 얼굴을 볼 것이다, 그리고 그분의 이름이 그들의 이마에 있을 것이다.” 하느님의 왕좌는 저주받은 자 또는 저주받을 것과는 정반대 된다. 천국은 하느님의 왕좌이고 이 왕좌는 공정과 정위 위에 건설되어진다. 공정과 정의가 있는 곳은 어디든지, 그곳이 교회이든, 각 개인의 심정과 지성이든 그곳에는 하느님의 옥좌가 펼쳐진다(시편89:44). 주님께서 심정과 지성에 있는 공정과 정의 위에 왕좌를 펴실 때 악이나 거짓된 것들의 통치는 막을 내리고 선함과 진리의 통치가 드디어 시작된다. 전자는 저주이고 후자는 축복이다. 불순종이라는 저주가 제거될 때 주님의 왕좌가 건설되고 그분의 종들이 그분을 섬긴다. 한 개의 왕좌에 두 분이 앉은 둣, 또는 왕좌가 둘이 있는 듯 그럼에도 하나인 듯 생각되게 위 구절이 말하는 듯 보인다. 그러나 이 구절 역시 중요한 가르침, 즉 주 하느님 전능하신 분과 어린 양은 신성과 인성으로 구성된 한분 신성한 인물(one Divine Person), 마치 영혼과 육체가 둘이지만 언제나 하나이듯 한분 그리스도밖에 더 다른 게 아니다는 것을 가르치는 또 다른 성경의 예에 해당된다. 이 구절에서 다시 언급되는 데는 특별한 이유가 있다. 이중성(duality)과 하나 됨(oneness)이 부각되도록 표현된 이유는 교리적 측면에서 알아야 할 뿐아니라 실제 응용에서도 주목해야 할 게 있기 때문이다. 교인이라면 첫 번째로 알아야 할 중요한 대목이 있다. 예배를 드리는 대상에 관한 올바른 관점(a just view)을 갖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 하나로 된 삼위일체(Trinity in unity)에 관해 혼돈하지 않고 미혹당함 없이 분명하고 만족하는 가운데 예배의 대상을 생각할 수 있다. 이 위대한 진리는 교인의 마음 안에서 등불로서 빛을 내고 있어야 한다. 그러나 교리적 진리(dogmatic truth)는 똑같은 것을 다른 면모로, 또는 납득을 또 다른 방식으로 해서 같은 것을 함유할 때도 있다. 그러기에 신성과 인성이라 말한 것을 사랑과 지혜로 표현하기도 한다. 마치 한 인간이 영혼과 몸으로 구성되지만 또 다른 면모로 볼 때 한 인간이 의지와 이해성으로 구성되는 것과 같다. 주님 안에서 사랑과 지혜는 따로 따로 구분되는 둘임에도 하나임이 분명하다. 그런 이유로 위 구절에서 한 왕좌에 둘이 언급되면서도 하나로서 말해지고 있다. 사랑과 지혜가 주님 안에서 하나이듯 우리 안에서도 하나이어야 한다. 우리에게는 하느님으로부터 파생된 사랑 외에 진실 된 사랑은 없다. 동시에 하느님으로부터 파생된 진리 외에 참된 지혜는 없다. 우리의 사랑과 지혜, 선행과 신앙이 선한 일 안에서 하나 되어질 때 하느님의 형상이 된다. 이럴 때만이 우리는 그분의 종이 되고 그분을 뵐 수 있고 우리 이마에 그분의 이름이 씌어진다. 우리의 의지가 그분의 계명을 행할 때 그분을 섬기는 것이다. 우리의 이해성이 그분의 지혜를 직감할 때 그분의 얼굴을 뵙게 된다. 우리의 심정이 그분의 사랑의 힘을 느낄 때 우리 이마에 그분의 이름이 씌어 있게 된다. 한마디로 우리가 그분의 뜻을 생각해본 뒤 그 뜻에 일치할 수 있게 행동할 때 그분의 이름이 우리 이마에 새겨진다.
5. 주의 종들이 그분을 뵈온 높은 산, 그분의 얼굴이 해같이 빛났던 그 곳, “그리고 거기에는 밤이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등이 필요없고 태양의 빛도 필요 없다, 그 이유는 주 하느님께서 그들에게 빛을 주시기 때문이다;” 앞 장(21:23-25)에도 위 구절과 비슷한 서술이 있었다. 그러나 또 다른 순서와 형태와 연결이 서로 사이에 있다. 어떤 독자의 경우 왜 두 서술이 불과 몇 절을 띄워놓고 금새 반복되어야 했을까? 라고 자문해볼는지 모른다. 거기에는 확실한 이유 하나가 있는바 그 자체가 우리에게 교훈이 되리라 본다. 앞 장은 도성 안으로 영광과 영예를 지닌 백성과 왕들이 거룩한 성에 아직 들어오지 않았거나 최소한 들어오는 도중과 관계되고 있다. 이 구절은 도성 안에 실지 들어와 있는 사람들, 그분을 섬기는 주의 종들과 관계를 이루고 있다. 다시 말해 교회에 들어오고 있는 사람과 이미 들어와 있는 교인은 상당한 차이가 있다는 말과도 비슷하다. 영적 사항과 영적 상태의 서로 관계되는 중요성과 질서는 거듭나는 삶의 진보과정을 거치면서 상당한 변화가 일어나 우리가 첫째간다고 생각했던 것이 꼴찌가 되고, 꼴찌라고 우습게 여긴 영적 사항의 어떤 것이 가장 중요한 것, 첫째 자리에 앉는 경우가 빈번하다. 이것이 앞 장과 본 장의 관계 측면에서 부각되도록 표현되어 있다. 앞 장의 경우 “밤이 없음”은 하느님의 빛이 영원히 비친다는 서술 뒤를 잇고 있다. 본 장의 경우 이 서술은 거꾸로 되어 있다. 앞 장은 도성의 문과 연결된 서술이지만 본 장은 도성 자체와 연결되어 언급되고 있다. 그러므로 문은 개종자(proselyte)와, 도성은 거주민과 연결되고 있다. 두 군데에서의 표현과 형상 역시 다양하다. 앞 장의 경우 도성을 비칠 해나 달이 필요 없는 반면 주의 종들에게 햇빛과 등불이 필요 없다고 말함으로써 양쪽의 형상과 순서가 바뀌어 있다. 앞 장의 경우 하느님의 영광이 도성을 비추고 있는 반면 어린 양이 등불이고 주 하느님이 빛을 주시고 있다. 그러므로 새 예루살렘 안에서는 달이라는 자연계 수준의 빛도, 등불이라는 인공적인 빛도 없다는 말이다. 새 교회 안에서 사람들은 그들의 믿음을 자연적인 수준의 빛으로도, 자기가 창작한 총명으로부터 서도 파생되지 않고 오로지 주님의 소유인 빛으로부터, 그분의 영을 수단으로 말씀 안에서 주시는 빛에 의해서만 믿음을 지닌다는 말이다. 자연의 빛은 새 교회인을 거룩한 도성의 문으로 들어가게 할 수 없다. 자기 총명의 빛은 도성 안에서 아무 쓸모가 없다. 태양이 떠오르면 달빛이든 등불 빛이든 우리 시야에서 힘을 쓸 수 없듯 인간에 속하든 자연에 속하든 모든 빛은 정의의 태양(the Sun of Righteousness) 광선의 한줄기만 비쳐와도 사라져 흔적도 없게 된다. 주님이 빛의 근원 되고 빛을 주시는 분으로 인정되어질 때만이, 그분의 권세의 왕좌가 그분의 종들의 심정에 설치될 때만이 “그들은 영원히 다스리게 되리라.” 3장 31절에서 “승리하는 자는 마치 내가 승리한 후에 내 아버지와 함께 아버지의 왕좌에 앉은 것 같이 나와 함께 내 왕좌에 앉게 하여 주겠다”라고 약속되어져 있다. 그리고 구속받은 사람들은 자기들을 하느님에게 왕과 성직자로 만드신 구속자를 찬양한다. 어쨌든 위 본문 같이 사도들의 영원한 통치란 무엇일까? 승리를 거두고 천국에 있는 교회 멤버가 그들일까? 새 예루살렘의 빛은 이 문제에 더 깊은 곳을 관찰할 수 있게 조명을 드리우고 있다. 천국에서 다스리는 이들이란 천국이 다스리는 이들이다. 승리한 사람들은 예수와 더불어 그분의 왕좌에 앉아 있다. 그들의 정복이 그들 자신을 넘어 있었듯이 그들의 다스림도 그러하다. 그들의 마음이 그들의 왕국이다. 그들의 생각과 애착, 열정, 욕구 등등이 그들의 신하들이다. 그들이 이런 자기 속의 모든 것을 정의로 통치할 때 그들은 자기를 모두 다스리는 셈이다. 그들이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함이라는 원리로 꾸준히 다스림을 계속한다면 “그들은 세세토록 통치할 것이다.”
6-9. “그리고 그는 나에게 말했다, 이 말들은 신실하고 참되다. 그리고 거룩한 예언자들의 주 하느님이 그분의 천사를 속히 행해져야만 하는 것들을 그분의 종들에게 보이시려고 보내셨다. 그리고 나는 빠르게 온다; 이 책의 예언의 말을 준수하는 자는 행복하다. 그리고 나 요한은 이런 것들을 보았고 들었다; 그리고 내가 들었고 보았을 때, 나는 이런 것들을 나에게 보여준 천사의 발 앞에 경배하려고 엎드렸다. 그런데 그는 나에게 말한다, 너는 그렇게 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보아라; 그 이유가 나는 너의 동료-종이다, 그리고 네 형제 예언자들에 속하고 이 책의 말들을 준수하는 그들에 속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하느님을 경배하라” 이 절에서 나타나는 세부항목들은 앞 장에서 이미 등장했던 말씀들이다. 물론 우리는 앞 부분의 설명과는 별도로 본 장에 특이한 사항을 중점으로 살피고저 한다. 반복된 말들이라 해서 불필요한 언급이 있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되리라 본다. 똑같은 의미를 기억에서 새롭게 강조해 마음에 더 깊이 새겨지게 의도된 것이라고도 생각해선 안 된다. 짧은 지면인데도 “이 말씀은 신실하고 참된 말씀이다” 라는 사항을 여러 번 확인하여 주고 있다. 더불어 “나는 빠르게 간다”는 선포도 그러하다. 요한이 경이로운 광경을 보여준 천사에게 엎드려 경배하려 했던 것도 두 번이다. 인간의 작품이 아니고 하느님의 영감으로 이루어진 책이 말씀이다 고 생각한다면 말씀의 어느 한 구절도 헛되거나 무용지물하다거나 의미 없이 반복했다거나 하는 등등의 결론은 결코 존재할 수 없다. 반복이 있다면 거기에는 다른 조건에 똑같은 진리의 선언, 다른 인간 상태에 같은 진리가 적용되는 것이다. 말씀이 신성하지만 같은 태양 광선이라 해도 통과하는 매체에 따라 그 빛의 굴절 내지 빛깔이 달라지듯 말씀도 그러하다. 6절의 말씀은 세 가지 형태로 우리에게 접근하고 있다. 19장 9절에서는 “이 말씀은 하느님의 참된 말들이다.” 21장 5절의 경우, “이 말들은 참되고 신실하다. True and faithful.” 22장 6절은 “이 말씀은 신실하고 참되다. Faithful and true.” 이 세 가지 형태의 표현은 인간 상태의 진보를 표시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우선 하느님의 말씀은 참되다고 보여지고, 그 다음 참되니 믿을 수 있게 되고, 마지막으로 믿어보니 정말 참됨을 확증하는 신앙의 발전 단계를 생각나게 한다. 세 표현 중 중간과 마지막의 경우는 같은 단어가 위치만 서로 바뀌고 있다. 이런 표현은 심정 상태의 바뀜을 말해준다. 즉 진리가 선으로 인도하고 그 다음 선은 진리를 수단으로 행동하는 신앙 생활의 상태이다.
이런 확증을 요한에게 준 천사가 말을 계속하고 있다. “거룩한 예언자들의 주 하느님이 그분의 천사를 속히 행해져야만 하는 것들을 그분의 종들에게 보이시려고 보내셨다. ” “행해져야만 하는 사항들”은 계시록의 모든 사항을 포함하고 있다. 납득 가능한 관점에서 이런 사항들은 세 가지, 즉 교회의 상태가 까벌려지고, 일반적 심판에 의해 그 교회가 끝을 보도록 놓여지고, 그 교회 대신 새로운 교회가 구성되는 것이다. 이런 세 가지 조건들과 분리할 수 없는 연결이 되는 사항은 주님의 오심이다. 그분은 방문-심판-회복이라는 세 수단으로 오신다. 구약성서의 예언에서 이런 사항들은 끊임없는 계속과 연결 가운데서 발견되는데 마치 신약성서의 예언에 있는 사항이 사도 요한의 예언에서 대부분 충만되고 있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해서 거룩한 예언자들의 주 하느님은 이런 사항들을 요한에게 보이시려고 천사를 보내신 것이다. 기독교회가 거쳐 온 각종 상태들은 기독교회 이전의 천국이 내린 처방에서 이어져온 단계와 비슷하다. 기독교에 앞서 존재한 교회같이 기독교도 기울고 끝을 본다. 본래의 순수함이나 단순함이 간직되어 오지 않는 것, 교파 끼리 책임을 묻는 질책 말고는 자기 교회의 부패를 솔직히 고백하는 자가 매우 적다는 것, 이런 것 외 모든 것도 그대로 허용될 것이다. 마지막 시대에는 적 그리스도, 냉소하는 것 등등들이 교인의 욕망을 타고 득실거림이 등장한다는 것 정도는 누구나 인정한다. 게다가 교리나 생활의 부패로 예고되는 끝이 이 세상의 끝인 듯 상상한다. 그러나 성경에 등장하는 “세상의 끝, 종말”이라는 말을 그것에 상응되는 영적인 것 또는 종교적 측면의 의미로 생각해보면 그 말은 교회의 종말이 된다. 이성과 과학, 이것이 뜻하는 그대로와 같이 이성이 건전하고 과학이 참되면 성경의 진짜 의미를 확증하는 수단이 되어준다. 신약의 예언과 구약의 예언을 비교해보고 같은 언어라면 같은 영적 수준의 해석을 똑같이 주어보라. 그러면 과거 주님의 제자들이 같은 예언 구절을 가지고 생각해도 유대인들 보다 훨씬 더 높은 수준에 머물었듯이, 성경의 글자에 있는 자연적 수준의 형상들은 그것이 영적 수준의 진리로 바뀌면 제 아무리 세상에서 세력을 떨치는 해설이 있다해도 그 해설을 훨씬 넘어서게 되리라. 영적 수준의 해석은 “나는 빠르게 온다” 라는 간단한 선포문에서도 얼마나 필수적으로 요구되는지 금새 판가름된다. 수많은 교회가 이 천 년이 넘도록 위 구절의 말씀을 기다려 왔다. 그런데도 아직 주님이 오실 징조는 없다. 어쨌든 우리에게 상기되는 말은, “주님이 오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냐?…” 고 조롱하는 사람에 대한 베드로의 응답, “주님에겐 천 년이 하루 같고 하루가 천 년 같다”, “그분은 누군가가 꾸물거림을 세어보듯 그분의 약속에 대해 꾸물거리시지 않는다. 그분은 누군가가 멸망을 초래하는 것을 원하시지 않고 더구나 모든 이가 회개하도록 우리 쪽을 향해 오래오래 참으시고 있으신 분이다…” 일는지 모른다. “…빠르게 온다”는데 대한 반복된 보증은 그분이 시간 넘어 계신 분, 가장 긴 시간이나 가장 짧은 시간이나 똑같다는 것을 암시해주고 있다. 동시에 시간의 제한이 있는 위 보증하는 말의 표현에는 시간의 제한이 없는 생각이 담아 지도록 의도되어 있다는 것까지 암시 받게 된다. 엄격히 잘라 말하면 시간은 물질계의 생각이다. 영계 또는 영적 사항에서는 물질계에 속하는 시간이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 세상에 시간이 존재하듯 교회나 천국에는 상태(state)가 존재한다. 자연계에서의 발전(progress)은 시간의 전진(progress)과 어느 정도 일치한다. 그 이유가 지상에서의 상태는 시간 안에서 형성되고 발달되기 때문이다. 상태가 시간 안에 들어 있다해서 시간이 상태 안에 들어갈 수 없다. 상태는 시간 내에 있음에도 시간을 넘어서도 있는데 이는 마치 마음과 육체의 관계와도 같다. 시간의 상태와 상응되는바 본문이 “빠르게 오심” 또는 짧은 시간과 상응되는 것은 무엇일까? 시간 개념에 속하는 “빠름, quickness”은 상태 개념에서는 확실함(certainty)이다. 주님께서 속히 오신다는 말은 그분께서는 확실히 오신다는 약속을 뜻한다. 더구나 그분은 저주하는 분이 아니고 복의 근원되시는 바 그분이 확실히 오신다는 이 보증은 그분의 오심을 소개받는 인간 상태에 대한 영화로움과 복을 내리심에 대한 약속도 된다. 그러므로 “빠르게 온다” 는 말씀에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사람은 복이 있다” 는 선포가 이어진다. 이 사람들 만이 그분의 오심에서 주님을 영접한다. 이들 만이 주님의 오심을 지켜보면서 주님의 집안식구를 먹여 살리는 믿을 수 있는 슬기로운 청지기들이다. 이들만이 주님의 부재 시에도 그분의 솜씨로 고용하는 선하고 충직한 종들이다. 이들 만이 등을 들고 신랑을 맞되 기름 채우기를 잊지 않는 사람들이다. 이런 종들에게서 만이 주님이 오셨을 때 그분 같은 행함이 발견된다. 결론적으로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자만이 행복하다.” 예언들은 그 예언이 현실로 나타날 때까지는 좀처럼 이해되기 힘들어서 사전에 예언의 내용을 준비한다거나 그 예언에 참가하는 것 등등은 매우 힘들다. 그래서 우리가 신약성서의 의미들을 가르침으로 간주하면서도 계시록을 읽을 경우 이 책으로부터 서는 실생활에 직접 응용되는 가르침의 거의 없는 듯 여긴다. 그러나 계시록의 선포 내용들이 의미심장하게 여겨 “예수의 증언이 예언의 영”이 된다는 것으로 받아들인다면 “이 책의 예언이 말하는 것”에 대해 글자대로가 아닌 영의 차원에서 지키고, 반드시 지켜진다면 새 예루살렘 시민이라는 복된 인간 조건을 확고히 하리라. 예수의 증언은 모든 예언의 예수를 인간의 주님이시오 구세주 되심에 귀결된다는 것을 확인시켜 줄 뿐 아니라 예수는 구원과 영원한 생명이 되는 새 심정과 올바른 영을 주시는 바로 그분 되심에 대해서도 내향의 증인이 된다. 예수는 우리에게 새 의지와 이해성을 창조하심으로 우리로 새 피조물이 되게 하시는데 이런 과정에서 그분은 우리에게 내향의 증거를 주신다. 이 내향의 증거는 주님께서 계시록의 정점에 해당되는 새 예루살렘을 소개해 줄 수 있도록 신앙자들로 예언의 말씀을 지킬 수 있게 한다. 이 책이 말하는 것은 결국 새 교회(the New Church)에 관한 것, 그 교회의 교리와 원리들이다. 이 원리란 이미 진행해온 긴긴 해설에서 살핀 바 같고 간략히 말해 주님 사랑과 인간에 대한 사랑이고 이 사랑은 죽은 신앙과 죽은 행함과 전혀 다르다. 이 책 뿐만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 전부에서 이르는 말들을 내향적으로 관조한다면 사랑과 선행 외에 아무 것도 없다. 그러므로 요한은 이런 사실을 보여준 천사를 너무 거룩하게 여겼던 바 그의 발 아래 엎드려 경배하려 했고 요한 스스로 이 책은 이 책이 말한 것을 지키는 사람을 위해 존재한다는 것을 선포하기에 이른 것이다. 사랑과 선행(love and charity)은 천국의 원리이자 교회의 원리이다. 요한은 예언자의 한 명이 되어왔다. 주님의 첫 오심과 그 왕국에 관한 예언을 말한 사람이 이사야나 다니엘이라고 한다면 요한의 경우는 주님의 재림과 그 왕국을 예언한 것이고 지금 그는 자신에 의해 선포된 예언을 새롭고 더 눈부신 빛 가운데 보았으리라 생각된다. 그는 예언이라는 깜깜한 언어로 말했던 것을 지금 그는 천사의 지혜라는 빛으로 보았다. 천사가 요한에게 보여준 사항들, 그리고 요한이 환상 속에서 보고 들은 사항들은 천사의 경우 환히 아는 사항들이고 천사의 시야가 도달 가능한 만큼에서 사람들에게도 열려져 있다. 요한은 이미 천국적 예루살렘에 있으면서 지상의 예루살렘에도 있었다. 그래서 그는 천적 수준의 방법을 따라 그 예루살렘의 실체와 형상도 알고 있었다.
비록 요한의 지혜나 직감이 천사의 수준이었다 해도 그의 능력은 아직 신성한 존재로부터 서는 거리가 아주 먼 상태에 불과하다. 사실 천사들의 지혜만 가지고도 인간과 비교하면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여서 본문에서 요한이 천사에게 했듯이 천사 앞에 꿇어 경배할는지 모르지만 천사들은 하느님으로부터서 무한히 먼 위치에 있음을 아는바 주님 앞에서 자기들은 아무 존재도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 천사들이 아는 바, 무한과 유한은 비교가 되지 않는다는 것, 가장 높은 천사의 지혜도 마치 자기들이 무한한 분의 유한한 형상이듯 무한한 지혜를 유한하게 납득한 그 이상의 지혜는 없다는 것 등등이다. 의심할 여지없이 천사들은 지혜 자체, 선함 자체로부터 무한히 먼 거리에 위치한다는 것을 더 명백히 직감하는바, 자신이 얼마나 불완전한 존재인가에 대해서도 더 깊이 느끼고 있다. 천사들이 인간보다 더 진실 되게 보고 느끼는 것은 자기들의 지혜나 선함은 주님으로부터 있어졌다는 것, 자기들의 모든 선물, 즐거움은 그분께만 전적으로 의존해야만 된다는 것이다. 물론 요한이 제 영혼을 채운 경이로움보다 더 눈부시게 아름다운 천적 수준의 존재가 자기 앞에 있는지라 꿇어 경배하려 했던 것은 새삼 이상한 행동이 아니다. 누구라도 그럴 수 있다. 요한이 신성한 존경을 받으라고 천사에게 제의하자 그는 거룩한 두려움에 오그라져 “이러지 말아라” 하고 선포한다. 그 이유가 인간과 비교해서 제 아무리 높은 천사라 해도 과거 인간이었다는 점에서 모두 같다. 천사나 인간 공히 동료 수준의 종들에 불과하다. 두 부류는 형제이다. 모두 생명의 동일한 법칙에 종속되어 있다. 모두 순종을 요구하는 한분 신성한 스승, 하늘에 계신 한분 아버지를 모신다. 이 스승이자 아버지란 천사가 요한에게 경배할 대상을 말했듯, 모든 천사가 경배해야 할 하느님, 주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10.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사람에게 복이 있음을 요한에게 보여 준 천사가 더 말한다. “그리고 그는 나에게 말했다, 이 책의 예언의 말들을 인봉하지 말아라, 그 이유가 때가 가까웁기 때문이다.” 다니엘이 주님의 첫 오심으로 이루어지는 일들을 환상으로 받아 보았을 때 그에게 “이것은 장차 정해진 날에 틀림없이 이루어지겠지만 오래 있다가 될 일이니 비밀에 붙여 두어라” (다니엘8:26) 라고 당부하였다. 이 구절에서 말한 “오랜 날”은 시간으로 계산해볼 때 계시록의 위 구절에서 말하는 “그 때”까지 만큼의 오랜 날이 걸린 것도 아니다. 더구나 시간은 상태를 표현하기 위한 단어에 불과하다는 것이 이젠 밝혀진 상태여서 오랜 날이라고 생각해 볼 필요도 없다. 그러나 왜 다니엘의 환상은 비밀에 붙이라고 했고 요한의 환상은 봉하지 말라고 명령되었을까? 두 환상에 연결된 주변 환경과 그 상태들은 매우 다르다. 유대교회는 교회를 죽이는 글자라는 총체적 어둠 속을 기어 들어가 결국 그들에게 말씀 자체는 봉인된 책이 되어버렸다. 기독교회, 역시 근본적인 순수함, 또는 말씀을 진정으로 이해함으로부터서 멀어지기는 했지만 유대교회와 똑같은 정도로 말씀이 닫힌 것은 아니다. 유대교회는 메시아의 강림을 부정하고 거절함으로 말씀, 특히 예언적 말씀을 통째로 닫히게 했고 아마도 영영 닫혀 있을는지 모른다. 기독교회는 주님만이 신성함, 그리고 그분의 인성이 신성함(the Divine of His Humanity)을 거절하는 만큼에서 말씀을 닫히게 했다. 그러나 그분만이 신성한 한분 존재라고 인정 못했다 해도 신성한 분은 한분이심을 어렴풋하게 나마 인정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말씀은 열린 채 놓여 있다. “봉하지 말라”는 천사의 명령은 계시록에만 국한되어 명령한 듯 여겨질는지 모른다. 직접적으로는 그러하다. 그러나 간접적으로 볼 때 이 명령은 말씀 전체에 관계된다. 그 이유는 성경의 증거는 오로지 하나에 초점이 모아지기 때문이다. 계시록에 관해서만 생각해본다면 요한에게 내려진 위 명령은 얼른 이해되기는 힘들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어떤 의미 측면에서 요한은 말씀을 봉하고 또는 열어 두어야 한다는 말일까? 요한의 역할은 해석하는 게 아니라 밝히 알게 함(계시, reveal)에 있다. 그가 예언을 남겼을 때 그가 말씀을 닫은 것도 아니고 열어 둔 것도 아니다. 또한 그것을 봉한 것도 아니고 봉하지 않은 채 방치한 것도 아니었다고 생각해 볼 수도 있다. 예언의 말씀을 봉하지 말라는 것은 명령일 뿐만 아니라 약속, 즉 때가 가까웠다는 약속, 예언이 언급한 교회의 상태는 확실히 있어진다는 약속, 이런 상태가 극에 달할 때 책의 열림이 있게 될 것이라는 약속이기도 하다. 참으로 책의 열림은 때가 가까웠든, 때가 아직 확실히 온 것은 아니었든 마지막이라는 최극점 이전에 거행된다. 이런 때가 계시록이 집중적으로 관계를 갖는 때이다. 계시록의 예언은 누누이 설명했듯이 역사적 측면이 아니라 영적 측면이다. 계시록은 때를 다루는 게 아니라 상태를 다루고 있다. 계시록은 교회가 일어설 때의 상태를 묘사하는 게 아니라 교회가 자기들을 결정짓는 날(타작마당)을 위해 스스로 만들어 온 단계가 무르익었을 때 까벌려 놓인 교회들의 상태를 묘사하고 있다. 계시록의 언어들이 예언의 언어임을 고려해본다면 우리는 계시록이 주어졌었던 때 그 뒤로 생각을 되돌려 가선 안된다. 오히려 계시록이 묘사한 상태가 시간 안에 명백해지는 때가 언제일는지 몰라도 앞 쪽으로 생각을 가져다 놓는 게 더 낫다. “속히 온다라”, “때가 가까웠다”라는 말씀은 그 말이 관계되는 사건 자체의 저녁 때 쯤에 발표된 예언으로 이해하는 편이 더 나을지 모른다.
11. 천사가 선포한 때가 가까웠다는 그 때란 주님이 오시는 때, 마지막 심판의 때이다. 교회가 기울고 기울어 더 이상 주님이 요구하는 것을 더 이상 영적 측면에서 만날 수 없게 될 때 심판은 거행된다. 각 개인의 경우처럼 교회들도 질병이 만연되거나 쇠퇴라는 자연스런 과정에 의해 사그러 없어지거나 이런저런 매개체가 복합적으로 발생해 끝장을 볼는지 모른다. 죽은 뒤의 심판이라는 것은 개인 뿐만 아니라 교회에도 정해진 운명이다. 그러나 모두에게는 죽은 자로부터서 부활한다는 것도 약속되어 있다. 계시록에서 약속된 새로운 천국의 처방은 그 전의 모든 천국의 처방들이 새롭고 더 높은 생명의 수준에서 일어난다는 약속, 즉 더 영적 차원에서, 더 젊은 싱싱함에서, 더 활기 있게 된다는 약속이다. 이것이 생명으로의 부활이다. 그러나 죽음으로의 부활도 있다. 부활이 이러하듯 심판에도 죽음과 생명이 있다. 마지막 때에 천국의 처방 아래 살아왔던 모든 이들은 심판되어진다. 그래서 어떤 이는 영원한 생명을, 어떤 이는 영원한 파멸로 가도록 판정되고 그 뒤 각자에 따른 모든 그의 상태는 고정되고 만다. 이러면 아래의 진리들을 실감한다. “부정한 자, 여전히 부정하라; 그리고 불결한 자, 여전히 불결하라, 그리고 올바른 자는 여전히 올바르라; 그리고 거룩한 자, 여전히 거룩하라.” 영혼의 상태, 그 영혼이 지상에서 어떠했든 저 세계에서는 그대로 바뀌지 않는 채 영원히 있게 된다는 엄숙한 경고이다. 그렇다고 이것이 신성의 어떤 칙령에 의해 고정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다시 말해 하느님의 심판은 인간 세계의 법적 처리 같이 보상이나 처벌 또는 유죄의 유무를 가리는 틀에 짜인 판결이 아니다. 신성한 심판은 인간 껍질을 마지막으로 벗기는 것, 그와 동시에 인간을 변장시킨 것들을 완전히 벗겨 영혼 그대로가 나타나도록, 불의하든, 욕심 가득했든, 올바르던, 거룩하던 모든 영혼이 적나라한 상태에 놓이게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만일 악과 거짓을 억누룰수 없어 그 쪽으로 기울기를 좋아하는 경향성을 지녔다면 그는 이를 수단으로 지옥에로 내려가 태어나는 셈이 되고 만일 선과 진리 쪽으로 기울려는 경향성을 지녔다면 천국으로 들리워 진다. 그래서 다니엘서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그 동안 많은 사람들이 단련을 받아 깨끗해져서 빛날 것이다. 악한 사람들은 끝내 눈이 열리지 않아 악한 짓을 계속하겠지만 슬기로운 지도자들은 눈이 열려 환하게 알 것이다…슬기로운 지도자들은 밝은 하늘처럼 빛날 것이다. 대중을 바로 이끈 지도자들은 별처럼 길이길이 빛날 것이다”(12:10,3). 저 세계에서 지니는 선과 악, 진리와 거짓의 식별 그리고 그것들의 분리는 자연계에서의 선과 악, 진리와 거짓의 식별 내지 분리시킴으로 야기된 결과에 해당된다. 그런 결과 불의와 불순, 정의와 거룩함 등등 모든 것은 그것 자체의 진짜 품성으로 보여진다. 사실 지상에서도 본성은 바뀔 수 없고 제 품성에 전혀 반대되는 쪽을 계속 견지할 수 없지만 대체로 선과 악 그리고 진리와 거짓은 너무 불완전하게 차이를 보여주고 악이나 잘못들이 우세할 경우에는 아예 혼합되어 있기까지 한다. 그러나 심판은 이런 판결에 있는 허점을 제거해준다. 하느님의 심판이 지상에 있게 될 때 세상 주민들은 정의를 배운다 (이사야26:9). 주님이 세상에 오신 것은 심판을 위해서 였는데 이 심판은 볼 수 있는 자를 볼 수 없게, 볼 수 없던 자를 볼 수 있게 해주시는 것이었다 (요한9:39). 모든 신성한 심판의 최말단 목적은 도덕적 수준의 것을 순수해지게, 정신적인 시야를 맑아지게 해서 선과 악 사이의 영원한 구분이 더 분명하고 절대로 실수 할 수 없게 만드는 것이다. 이런 심판의 범주에 위 구절이 포함되고 있다.
12. 심판은 꼭 있는다는 약속은 악을 억제시키고 가장 큰 힘을 발휘한다. “그리고 잘 보아라, 나는 빠르게 온다; 그리고 내 보상은 각자의 일이 있어지는 바에 따라 모든 이 각각에게 주려고 나와 더불어 있다.” “빠르게, quickly” 란 확실함이다. “…그런 자가 하느님의 심판을 면할 것 같습니까?…하느님께서는 각 사람에게 그 행실대로 갚아 주시리라” (로마2:3,6). 본문이 주는 보증은 위협받으라는 게 아니라 약속일 뿐이다. 따라서 위 말씀은 두려움을 야기시키는데 의도를 둔 것이 아니라 희망을 불어넣어 주려는데 있다. 즉 “내가 보상을 주려고 간다”는 말에 힘이 실려 있다. 주님의 첫 강림에 관한 장엄한 약속이 이렇게 표현되고 있다. “위로하여라. 나의 백성을 위로하여라. 너희의 하느님께서 말씀하신다…주 하느님께서 저기 권능을 떨치시며 오신다. 팔을 휘둘러 정복하시고 승리하신 보람으로 찾은 백성을 데리고 오신다. 수고하신 값으로 얻은 백성을 앞세우고 오신다. 목자처럼 당신의 양떼에게 풀을 뜯기시며 새끼 양들을 두 팔로 안아 가슴에 품으시고 젖먹이 딸린 어미 양을 곱게 몰고 오신다” (이사야40:1,10,11). 이사야 62장 11,12절에도 위와 비슷한 기록이 있다. “수도 시온에게 일러라. 너를 구원하실 이가 오신다. 승리하신 보람으로 찾은 백성을 데리고 오신다. 수고하신 값으로 얻은 백성을 앞세우고 오신다. 사람들은 그들을 ‘거룩한 백성’ 이라 ‘야훼께서 구해내신 자들’ 이라 부르겠고 너를 ‘그리워 찾는 도시’, ‘버릴 수 없는 도시’라 부르리라.” “자기행적에 따라 갚아 주기 위해서”는 선한 자와 악한 자에 내려지는 심판을 표현한다는 것은 더 생각해 볼 여지가 없다. 그러나 “…보상을 주려고 간다”는 말은 의로운 사람에 한정된 약속이다. 그러나 죽음 또는 심판에 의해 주님께서 오시어 각자 행적대로 갚아 주기 위해 상을 가지고 오실 때 의로운 사람을 위한 위로나 용기란 어떤 것일까? 우리는 자연계에서 있어지는 보상을 생각하는 데는 익숙한 편이다. 그러나 보상의 진짜 가치 또는 진정한 보상을 실감하는 데는 상당히 덜 익숙해 있다. 기독인의 보상은 내향으로 받게 된다는 확신을 깊이 느껴보는 것 조차 쉽지는 않다. 게다가 주님 스스로 보상을 내리신다면 그분이 주실 수 있는 보상 중 가장 드높은 보상만을 주신다는 것은 상상조차 힘든 게 우리 인간이다. 주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말하셨다. “나는 너에게 방패이고, 너의 지극히 큰 상금이다” (창세기15:1). 이 구절은 그분께서 가장 위대한 보상자 되셨음을 뜻한다고 이해해 볼 수 있겠지만 더 나아가 더 명료하고 더 엄격한 진리를 표현하고 있다. 주님은 거룩한 인생을 꾸리면서 그분을 꾸준히 찾고 있는 이들에게 보상자가 되실 뿐 아니라 그분은 아예 보상 자체이시다. 지상에서 뿐만 아니라 천국에서도 행복의 바깥쪽 수단과 표시들이 있다. 그러나 천국의 행복은 내향의 거룩함을 통해 지상에서 보다 더 직감적으로 와진다. 설사 우리가 각자에게 수여된 행복을 영적 차원, 영원한 보상 차원이라고 생각하는 때일지라도 주님만이 그분의 행복의 척도를 우리에게 주심으로 우리를 행복되게 만드실 수 있다고 확신할 수 도 있을는지 모른다. 그분의 행복은 그분의 선함의 결과인바 그분은 그분의 선함에서, 그 선함을 통해서만 그분의 행복을 우리에게 수여하실 수 있다. 그러므로 그분은 각자의 행적에 의거 그분의 행복을 주신다. 일, 행적(work)이라는 단어가 성경에서 사용될 경우 이는 실지의 선함(practical goodness)을 뜻한다. 심정의 선함은 생활의 선함으로 이어진다. 이 선함이 주님으로부터이듯 행적의 보상이기도 하다. 따라서 일(work)은 보상을 담는 그릇(capacity), 행복을 재는 잣대이다. 그러므로 기독인은 각자의 일에 대한 보답 차원에서 보상되는 게 아니라 일을 한 실적에 따라 보상된다. 주님이 주시는 보상은 그분과 함께 있다. 따라서 그분을 영접하는 이들이 그분의 보상을 받는다.
13. 주님이 선함을 심정에 받아들이고 생활에서 그 선함을 명백히 보여주는 이들에게 주님은 “알파와 오메가, 곧 처음과 마지막이며 시작과 끝이다.” 그분을 인물(person) 차원에 국한시켜 생각하면 예수는 영원한 신성 측면에서 처음 되고, 신성한 인성은 마지막이 된다. 마치 창조자와 구속자의 차이와 같다. 그러나 천국에서, 교회에서, 그리고 인간 마음 안에서 그분은 각 개인의 믿음의 저자요 끝마무리 지으시는 처음과 마지막 분이 되신다. 그분은 동기를 불러일으키시고 판결을 계발시켜 주시어 우리 삶의 방향타가 되신다. 그분은 심장 안에 있는 사랑의 근원되시고 마지막이 되신다는 점에서 알파와 오메가이시다. 그분은 지성에 있는 지혜의 근원되시고 마지막이 되신다는 점에서 시작과 끝이 되신다. 사랑, 지혜 그리고 사용(use) 또는 선행, 신앙 그리고 일(work)은 종교를 구성하는 세 요소이고 동시에 천국과 교회를 구성하는 요소들이다.
14. 위 세 요소가 종교를 구성하지만 그 중 특별히 따로 떼어 강조된 것이 일(work)이다. “그분의 명령들을 지키는 그들은 행복하다, 그들의 능력은 생명의 나무에 있을 런지 모른다.” 이 말씀은 복음서를 대표하는 가르침이다. “…제가 무슨 선한 일을 해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라는 부자 청년의 질문에 주님께서는 “네가 생명의 나라로 들어가려거든 계명을 지켜라” 하고 대답하셨다 (마태 19:16-17). 이 구절과 일치하여 늘 선포되는 것은 사람은 자기 일에 따라 판결된다는 것이다. 계명을 준수할 때 생명의 나무를 차지할 권리가 주어진다. 그 이유가 모든 종교는 삶과 관계를 가지고 있고 모든 종교의 생활(생명)은 선을 행하는 것(All religion has relation to life, and the life of relgion is to do good)이기 때문이다. 인간 뿐만 아니라 창조된 모든 것은 사용함(use)이라는 어떤 것을 위해 존재한다. 창조물의 본성 내지 특성은 창조물의 사용함이 무엇이냐에 의거 결정된다. 다시 말해 각 창조물은 각각의 용도에서 그 품질 내지 품성이 체현되고 있다는 말이다. 어떤 나무의 성질이나 구조적 특성 등등 모두는 씨 안에 함유되어 있다. 이 씨를 위해 생산된 게 열매인바 열매 안에 그 나무의 모든 것이 함유되어 있다. 이런 이유로 열매를 보면 어떤 나무인지, 인간은 각자의 행실을 보면 그 사람이 어떤 인간인지 알 수 있다. 한 가지 진리 되는 말은, 사랑과 신앙 없이 일은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다. 동시에 일함도 없이 사랑과 신앙 역시 존재될 수 없다. 행동함은 사랑함과 믿고 있음이라는 두 가지를 함유하고 있다. 행동하고 있음은 행위 안에 사랑하고 있음과 믿고 있음이다. 사랑함과 믿고 있음이 행위 안에 존재하지 않으면 그 둘은 실지로 존재하는 게 아니다. 이런 이유로 성경은 계명을 행하고 준수해야 한다는 것을 셀 수 없이 많이 강조하고 있다. 이와 같이 사랑하고 있음과 행동하고 있음은 분리될 수 없기에 사랑함은 행동함이고 행동하고 있음은 사랑하고 있음이라는 공식이 세워진다. “만일 네가 나를 사랑한다면 너는 내 말을 지키리라” (요한14:23). “내 계명을 지니고 그것을 준행하는 사람은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요한14:21). “우리가 하느님의 계명을 지킬 때 그분을 사랑하는 것이다.” 이와 똑같은 진리가 계시록에서 요한에 의해 또 다시 선포되고 있다. 그분의 계명을 행하는 사람은 생명의 나무를 차지할 권리를 가지게 된다. 생명의 나무란 사랑이라는 품위(grace of love)이다. 사랑은 생명이다. 계명들은 생명의 법칙들이어서 과거 유대인들이 믿은 방식인 바깥쪽 생명만을 말하는 게 아니라 거기에 더해서 주님이 설명하신 그대로 안쪽 생명까지 포함하고 있다. 대체로 우리가 하느님의 계명을 지켜야 될 것 같다고 판단하는 때는 혼란한 사회질서에 혐오를 느껴 정의의 필요성이 강력히 대두될 경우, 또는 죽어야만 한다고 심각해질 때이다. 이런 경우 역시 사랑의 표현, 약속된 생명의 표현이라고 말하는 편이 나을는지 모른다. 인간이 부딛치는 극한 상황은 과연 죽음을 피하려면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하는지, 생명을 획득하려면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가르친다. 어쨌든 무엇이 생명일까? 그것은 사랑이다. 사랑은 자체에 천국을 함유하고 있다. 사랑 없이 천국도 없다. 사랑을 획득하는 이들은 생명을 획득한다. 계명을 지킴으로 사랑이 획득되고 보존된다. 계명은 하느님이 인간에 대한 사랑의 표현이자 사랑의 증거이기도 하다. 따라서 우리가 계명을 준수하는 것은 그분을 사랑한다는 표현이요 증거이기도 하다. 행동함 없는 사랑은 무익한 정서여서 당사자나 타인에게나 유익함이 없다. 이런 상태는 흡사 푸르름 없는 봄, 끝없는 여름, 열매 없는 가을 같다. 우리는 이웃을 사랑함으로 하느님께 대한 사랑을 표현한다. “네 형제 중 가장 보잘 것 없는 이에게 베푼 것이 바로 나에게 베푼 것이다” (마태25:40). 이웃을 향한 사랑의 행동들은 하느님을 사랑함으로부터 행해진바 우리 주위에 이 사랑이 널리 퍼지게 되어 우리 심정에서도 이 사랑은 강세를 얻고 더욱 확증을 갖게 된다. 이웃에 대한 사랑의 행동이 없는 곳에는 하느님을 향한 사랑의 행동은 그 낌새조차 있을 수 없다. 계명을 지키는 이들만이 생명의 나무를 차지하는 권리를 가진다고 했다. 이를 달리 번역하면 생명의 나무를 획득하는 힘(권능)을 가진다는 말이다. 계명을 지키지 않는 이들은 성문을 통해 성 안에 들어 갈 수 없다고 했다. “나더러 ‘주님, 주님’하고 부른다고 다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천국에 계신 네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이라야 들어간다” (마태7:21). 계명을 지킬 때만이 우리는 복음서의 일반적 교리에 관한 지식을 얻을 수가 있고 우리로 교회에 입문하게 하는 주님에 관한 교리도 얻게 되어 거룩한 도성의 진주 문을 통과할 수 있다. “계명대로 사는 사람이 슬기를 깨친 사람이다” (시편111:10).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려는 사람이면 이것이 하느님으로부터 나온 가르침인지 또는 내 생각에서 나온 가르침인지를 알 것이다” (요한7:17). 계명대로 사는 것이 진리의 길이요 생명의 길이다. 그분의 계명을 준행하는 사람에게 복이 있다. 그들은 행복하게 지내는 곳, 거룩함의 도성인 새 예루살렘의 성벽 안쪽에서 거닌다. 인간이 생명나무에 이르는 권리를 잃고, 파라다이스의 문이 자신에게서 닫히게 한 것, 그리하여 자기 머리에 저주만 남아 있게 한 것, 모두의 원인은 불순종이었다. 따라서 생명의 나무를 되찾는 권리를 회복하고 파라다이스 도성의 문이 자신에게 활짝 열리게 해서 영원한 복을 다시 확보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꼭 한 가지, 그분의 계명대로 사는 것뿐이다.
15. 위의 상태와 대조되는 모습이 그려지고 있다. “그러나 밖에는 개들, 마술사들, 색골들, 살인자들과 우상숭배자들, 거짓말을 사랑하고 행하는 자들이 있다.” 도성 밖에 있는 사람과 안에 있는 사람의 차이는 계명을 지키는 사람과 지키지 않는 사람의 차이점과 똑같다. 위 구절의 사람들은 십계명에서 금하는 악들의 범주에 들어가 있다. 21장 8절에서 언급된 사람들, 불과 유황이 타오르는 바다 만이 그들의 몫이라고 열거된 악행자들과 위 구절은 거의 비슷하지만 한 가지만이 다르다. “개”에 관한 것이다. 더구나 이 구절 맨 앞에서 언급되고 있다. 사실 성경에서 개는 대체로 나쁜 의미를 표현하도록 등장하는 경우가 더 많다. “개에게 거룩한 것을 주지 말라” (마태7:6). 그럼에도 긍정적 측면도 있다. “개는 주인의 식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는다” (마태15:27). 제가 토한 것을 도로 먹는 개라는 불결함 (베드로후2:22, 잠언26:11)이 나사로의 종기를 핥게 해서 깨끗하게 한다 (누가 16:21). 개는 수준 낮은 바람 또는 동물적 본성 수준의 갈망을 상징한다. 감각이 요구하는 것을 충족시키기 위해 사는 사람이 도성 밖에 있는 개들에 해당된다. 영적 측면에 정반대 되는 것이 감각 측면이다. “성령이 없는 감각적 인간이 육을 쫒아 사는 이들이다” (유다1:19). 교회 내에 있는 감각적 인간은 교회 밖의 감각적 인간보다 영적 인간에 더욱 반대되어 있다. 마치 진리의 빛에 거슬러 저질러진 죄가 자연의 빛에 거슬러 빚어진 죄보다 그 심각도가 더한 것과 같다. 개가 성경에서 그런 대로 좋은 측면에서 등장하는 경우가 신약에서 두 군데 있는데 그 경우 모두 이방인들과 관련을 가지고 있다. 자녀들의 식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라면 개도 먹을 수 있는 것 아니냐고 예수께 반문함으로 딸을 낫게 한 여인은 이방인이었다. 이사야가 교회의 목사(pastor)에 관해서 이렇게 말한다. “보초라는 것들은 모두 앞 못보는 소경이요, 집지킨다는 개들은 짖지도 못하는 벙어리, 드러누워 공상이나 하다가 졸기가 일쑤구나. 먹어도 먹어도 게걸스런 저 개들, 저 무지막지한 목자들, 모두 제 멋대로 놀아나, 저만 잘되겠다고 욕심부리는구나” (56:10,11). 이 구절은 개가 상징하는 것을 잘 그려놓고 있다. 우리의 감각들은 개처럼 보초를 서거나 주인을 잘 섬기는데 사용되도록 고안되어진 기관들이다. 따라서 이 기관들은 생명에 속하는 수단을 우리에게 공급하거나 생명을 위협하는 것에 대해서는 경고를 보내준다. 그런데 종이 주인이 되는 경우, 감각 본성이 영적 본성을 지배할 경우가 “벙어리 개, 게걸스런 개” 라고 위의 이사야는 언급하고 있다. 이런 개는 참 생명, 내적 생명에 유해한 것이 접근할 때는 벙어리여서 침묵뿐이다. 주인의 재산과 생명을 지켜 방어해야 하는데 제 욕심에만 급급해 있다. 이런 품성의 감각적 인간이 “문 밖에 남아 있는 개들”이다. 악행의 선두격이 감각 본성으로 저질러진 악행이기에 본문의 각종 악행자 중에서도 첫째 자리에서 언급되고 있다. 다시 말해 감각 측면의 사용여하에 따라 악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악, 가장 기본적인 악을 결정짓게 된다는 말이다. 그 외의 악행자에 대해서는 이미 앞 장에서 살핀바 있다. 그러나 앞 장과 본 장의 언급에서 나타나는 다른 점이 한 가지 있다. “거짓을 일삼는 자” 대신 본문은 “거짓을 사랑하고 일삼는 자” 라고 표현한 것이다. 어떤 이들은 거짓을 수단으로 삼는바 거짓말을 도입한다. 어떤 이들은 거짓말을 목적으로 삼는바 그것을 사랑한다. 악마는 거짓의 아버지라 불린다. “너희는 악마의 자식들이다. 그래서 너희는 그 아비의 욕망대로 하려고 한다. 그는 처음부터 살인자였고 진리 쪽에 서 본적이 없다. 그에게는 진리가 없기 때문이다. 그는 거짓말을 할 때마다 제 본성을 드러낸다. 그는 정녕 거짓말쟁이며 거짓말의 아비이기 때문이다.” (요한8:44). 악마는 악에 대한 또 다른 이름이다. 악은 거짓말의 부모격이 된다. 따라서 거짓말을 사랑하든 거짓을 만들든 그것은 악이다.
16. 이제 장엄한 구절, 가장 깊은 신비를 밝히 보여주시는 구절을 살피게 된다. “나 예수는 내 천사를 너에게 교회들 속의 이런 것들을 증명하려고 보냈었다; 나는 다윗의 뿌리, 그리고 (그의) 후손, 빛나는 아침의 별이다.” 예수는 이 예언의 시작이시며 끝이 되신다. 계시록의 모든 사항들을 요한에게 보여주시기 위해 천사를 보내시어 그로 하여금 교회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증언하게 하신 분은 바로 예수이시다. 예수께서 천사를 수단으로 증언한 사항 중 가장 위대하고 가장 장엄한 사항은 그분에 관련된 사항들이다. 그분은 파노라믹 환상(panoramic vision)의 한 중앙을 점유하신다. 그분 주위는 어둡고 두통거리로 꽉 차있어 모든 것은 변하고 사라지지만 그분만은 영광의 빛남 속에 있으신다. 그분은 흔들림 없는 평정으로 계시면서 사라지고 있는 세상을 새로운 창조로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히 대체해 주시고 있다. 이런 창조, 이런 사라짐을 자연계의 창조, 변화 등등으로 생각하면 안 된다. 이것은 교회에 관련된 사항들이다. 그분이 누구라고 밝히신 위 구절은 세상에 관련된 게 아니라 교회와 그분과의 관계에 관련된 말씀이다. “나는 다윗의 뿌리요 자손이다.” 그분이 창조자이셨다는 측면에서가 다윗의 뿌리이고, 그분이 구속자이셨다는 측면에서는 다윗의 자손 되신다. 신성과 인성이라는 두 본성은 그분 안에서 하나 되어져 있다. 이것은 위 주제의 명백한 의미이다. 그러나 이 정도의 의미로 끝나는 것은 아니다. 예수라는 한 인물 안에서 신성과 인성의 하나 됨은 창조자와 창조물이 그분의 인격 안에서의 하나 됨을 뜻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태어나는 자연적 수준의 하강을 수단으로 예수는 하느님의 아들이 되셨을 뿐 아니라 다윗과 아브라함의 후손도 되셨다. 동정녀로부터 탄생하심으로 그분의 인성은 여느 사람의 인성과 같아졌다. 그러나 그분이 신성화 하셨을 때 그분의 인성은 더 이상 연약한 인성도 아니고 물질적인 한계에 부딪치는 인성도 아니요, 유한하지도 않은 인성이 되셨다. 인간적 부모로 파생된 모든 것은 고통 받으시고 죽으심과 더불어 사라지고 결코 고통이 있거나 죽지도 않는 인성으로 다시 일어나셨다. 그분의 인성은 불멸할 뿐만 아니라 그 인성만이 불멸이다 (디모데 전6:16). 그분의 인성은 살아 계실 뿐아니라 그 인성만이 참 생명을 가지고 있다. “아버지께서 생명의 근원이신 것 처럼 아들도 생명의 근원이 되게 하셨다 (요한5:26). 주님의 인성이 이와 같을 진대 어떤 측면이나 의미에서 그분은 다윗의 후손이란 말일까? 통상의 자연적 차원의 의미에서 말하는 것, 자식은 그 아버지의 후손된다는 차원이 아니다. 예수는 한분 아버지 즉 하느님 만을 가지고 있다. 그분이 육을 지녔을 때 조차에서도 그분은 마리아의 아들 임을 결코 인정 않으셨듯이 다윗의 후손인 것도 결코 인정 않으셨다. ”예수께서 바리새인들이 모여 있는 것을 보시고 ‘너희는 그리스도를 어떻게 생각하는냐?’ 하고 물으셨다. 그들이 ‘다윗의 자손입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께서 다시 물으셨다. ‘그러면 다윗이 성령의 감화를 받아 그를 주님이라고 부른 것은 어떻게 된 일이냐? 주 하느님께서 내 주님께 이르신 말씀, 내가 네 원수를 네 발 아래 굴복시킬 때까지 너는 내 오른편에 앉아 있으라 하고 다윗이 읊지 않았느냐?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님이라고 불렀는데 그리스도가 어떻게 다윗의 자손이 되겠느냐?’ 그들은 한마디도 대답하지 못하였다. 그리고 그날부터는 감히 예수께 질문하는 사람이 없었다” (마태22:42-46). 위 질문에 기독인이 대답한다면 그리스도는 다윗의 주님이요 다윗의 후손이라고 답할 것이다. 다시 말해 다윗의 주님은 신성 측면의 주님이고 다윗의 후손은 인성 측면에서의 주님이다. 예수께서는 참으로 하느님이시자 인간이셨다는 말은 가장 참된 진리이다. 그분은 다윗 이전에 계시다가 다윗의 계보로부터 하강하셨다. 그러나 이 하강은 인간적 어머니 쪽만을 통하는 다윗의 후손에 해당되는 말이다. 따라서 그분에게는 인간적 아버지는 없다는 말이다. 이 부분이 여느 인간과 한분 인간으로서의 예수에 큰 차이가 있게 한다. 우리의 인간 본성은 한쪽 부모로부터 파생된 속성으로는 구성되지 않는다. 어머니 쪽은 우리의 바깥쪽, 보다 낮은 측면의 본성을 공급한다. 아버지 쪽은 우리의 내면에 속한 것, 더 강한 쪽의 인간 본성, 더 바뀌기 힘든 쪽의 본성을 공급한다. 다시 말해 우리는 어머니 쪽보다는 아버지의 자녀 되는 측면이 더 강하다는 말이다. 같은 이유에서 예수께서도 어머니 쪽보다 아버지의 아들 쪽에 탄생 때부터 더 기울어 계셨다. 인간의 경우에서도 아버지와 어머니로부터 상속받는데 따른 차이점이 있을진대 그분의 경우 더 더욱 심할 것이다. 인간의 부모는 유한하고 죄가 있으나 그분의 경우는 무한하고 완전하시다. 많은 기독교인들은 “영원으로부터 탄생, be gotten from eternity” 이라는 신성한 본성 측면만으로 예수가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다시 말해 시간 안에 탄생된 그분의 인성 측면도 하느님의 독생자이다는 것까지는 굳이 강조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럼에도 이 사항에 대해서 성경은 많이 가르치고 있다.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탄생된 측면에서도 예수는 하느님의 독생자 되셨다. 신성한 아버지로부터 수태됨으로 파생된 예수 안에 있는 것은 하느님의 아들이었다. 예수 안에 내재한 신성은 이런 점에서 구분되고 사실 아버지 자신이셨다. 예수 안의 순수한 신성은 예수 안에 계신 아버지이셨다. 아버지로부터 수태되는 게 인간의 내적 본성이고 그 안에 아버지가 내재한다. 어머니로부터 취해지는 인간의 외적 본성은 그분이 인간 사이에서 거하실 수 있게 한 육이고 이 육신을 통해, 이 육신이 그분의 영광을 우리로 보게 했다. 이분에게 은총과 진리가 충만했다 (요한1:14). 예수는 하느님의 아들과 사람의 아들 양 측면에서 생각하시고 말하시고 바라시고 행동하셨다. 그러나 우리가 구분해 생각해야 할 점이 있다. 그분이 생각하고 바라신 것은 내적 인성으로부터(from His inner Humanity)가 아니라 외적 인성 안에서(in His outer Humanity)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예수의 생각이나 바람의 모든 뿌리는 예수의 내적 인간 안에 있었지만 그 자체가 드러나 명백해진 것은 외적 인간을 수단으로 이루어졌다. 사실 인간 존재 모두에게도 위의 절차는 있다. 생각과 언어는 서로 구분된다. 생각은 내적 인간에 속하고 언어는 외적 인간에 소속된다. 그러나 사람들이 생각할 때 그는 말을 가지고 생각한다. 생각을 실어 나르는 수송수단이라는 점에서 보면 생각의 근원이 언어에 있다고 우겨도 될는지 모른다. 주님의 인간 본성 역시 우리의 것과 똑같은 법칙에 따르고 있다해도 그분의 생각과 행동은 우리의 것과 다르다. 마치 부모의 근원이 우리와 아주 다르다는 것과 비슷하게 상당한 차이가 있다. 우리와 견주어 볼 때 이런 말을 해야 적당할 것같다. “천국이 지상보다 더 높듯이 그분의 방법은 우리의 방법보다 더 높고, 그분의 생각은 우리의 생각보다 더 높다.” 한마디로 예수는 신성한 인간(a Divine man)차원에서 생각하셨다. 그분의 생각들은 사랑과 지혜에 관한 생각들, 전 인간 종족을 위한 사랑, 인간 구속과 구원을 위한 사랑의 힘이 표현되는 지혜에 관한 생각들이었다.
예수께서는 본인을 신성한 인간으로서 생각하셨기 때문에 그분께서는 마리아의 아들이라고, 다윗의 아들이라고 자신을 인정하거나 말하신 적이 없다. 마리아로부터, 다윗의 씨로부터 받은 예수의 인간 측면은 일시적인 거주지, 내려오는 데 필요했던 성막, 파괴되어져야 할 성전에 불과한 것들이었다. 예수가 무덤에서 일어나신 이후의 인간 측면은 더 이상 물질적이지 않았다. 그것은 영적인 것, 정녕 신성이었다. 이런 인성으로 계신 예수께서 일곱 금빛의 촛대 사이에 계신 것을 요한은 보게 된 것이다 (계시록1:12-16). 위에 열거한 내용 중 어느 것이 “마리아의 아들” 또는 “다윗의 후손”된다고 우길 수 있을까?
어쨌든 본문에서 예수께서는 자신이 다윗의 자손이라고 선포하시고 있다. 요한이 그분을 영 안에서(in the Spirit)에서 뵈옵듯 위 본문 글자는 자연계의 글자가 아닌 영계의 글자로서 생각해야 마땅하다. 물론 계시록의 글자 모두가 그러하다. 다윗은 주님의 한가지 예징(type)으로 성경에 등장하고 있다. 그는 왕 측면에서의 주님을 표현했다. 주님은 천국과 교회, 인간의 심정에 있는 그분의 왕국을 통치하시는 왕이시다. 이런 왕국이라는 것과 관련하여 주님께서는 이 본문에서 그분이 다윗의 뿌리요 그 후손이라고 말하시는 것이다. 그분의 사랑이 다윗의 뿌리요 그분의 진리는 다윗의 후손이다. 주님의 사랑이 심정을 통치하고 주님의 진리가 이해성을 통치할 때 예수는 그 사람에게 다윗의 뿌리요 다윗의 후손 되신다. 이를 다른 말로 표현하면 선행은 신앙의 뿌리이고 신앙은 선행의 후손이기도 하다.
다윗의 뿌리요 후손이신 예수는 빛나는 샛별이시다. 야곱의 별과 베들레헴의 별 모두 총명과 지혜의 빛에 앞서 있게 되는 지식의 빛으로 예수를 향해 있다. 밝아오는 하루를 알리고 태양이 떠오를 것을 시사하는 빛나는 샛별은 계시록의 끝 부분, 새 교회의 시작이라는 천국의 새 처방을 주제로 삼은 계시록 끝 부분을 장식하는데 매우 적절하다. 베드로의 말, “이것으로 예언의 말씀이 더욱 확실해졌다. 여러분의 마음 속에 동이 트고 샛별이 떠오를 때까지는 어둠 속을 밝혀주는 등불을 바라보듯이 그 말씀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베드로후1:19). 그의 말 역시 새 처방이라는 사건을 암시하고 있다. 신앙자에게 있게 되는 새 삶의 시작은 빛과 사랑의 새 처방이 그에게 있다는 말이다. 새 날이 세상에 여명을 주고 샛별은 일반적 계발이라는 시대를 약속해줄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 지성에 동이 트고 우리 심정에서 샛별이 떠야만 가능하다.
17. 천사를 통해 예수의 메시지는 이런 화답으로 이어진다. “참 영과 신부가 말한다, 오라; 그리고 듣는 자가 오라 하고 말하고 싶다면 그렇게 하라; 그리고 목마른 자가 오고 싶다면 그렇게 하라; 그리고 생명의 물을 값도 치룸 없이 가져가고 싶다면 그렇게 하라.” 참 영과 신부란 천국과 교회를 뜻한다. 참 영은 그분이 거하시는 이들을 통해, 그들 안에서 말하신다. “성령은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라는 것을 증거한다…성령은 연약한 우리를 도우신다. 우리는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로마서8:16,26). 기도에서 거룩한 바람을 성취하려면 천사이든 인간이든 모두 성령의 은혜를 입지 않고는 불가능하다. 어린 양의 아내, 신부는 자기 안에 내재하는 성령이 사랑할 수 있는 바람을 주지 않으면 신랑이 오시라고 기도할 수 없다. 그럼에도 위 구절에서 성령과 신부가 동시에 거론된 이유는 천국의 교회와 지상의 교회가 하나 되어 기도해야 한다는 것, 교인의 경우 그의 심정과 지성이 하나 되어 기도해야 한다는 것을 표현하기 위해서이다. 성령은 지성 안에 있는 진리의 영이고 신부는 심정에 있는 사랑의 애착이다. 이런 상태가 조성된 곳에서 주님의 증언은 충실한 증거를 발견한다. 따라서 그분이 오신다는 약속 역시 진지하고 열렬한 응답이 있다. 주님의 오심을 위해서는 본문 같이 동시에 기도해야 한다. 다시 말해 심정에 가득차 넘친 것이 말로 표현된다. 또 하나 꼭 응답하도록 타일러지고 있는 우리의 자질, 또 다른 계층이 있다. “듣는 자가 오라 하고 말하라” 이다. 듣는다는 것은 경청해서 순종한다는 뜻이다. 타인이 말한 것을 듣고 되풀이한다는 것은 타인의 권위에서 받아들여 행동한다고 하기보다는 오히려 제 자신의 확신이 있어 받아들여 행동한다고 해석하는 게 더 나을 것이다. 이를 한 개인에 국한해서 응용해보면 외적 인간 또는 자연적 수준의 마음이 영적 수준의 마음에 경청하여 응답하는 모습에 해당된다. 그 이유가 내적 측면의 인간에 소속되는 것이 의지와 이해성 또는 생각과 애착인 반면, 외적 측면의 인간에 소속되는 것은 말과 행동이기 때문이다.
위와같이 되는 데는 또 다른 중요한 요소가 더 있다. 우리에게 오셔 달라고 기도해야 할 뿐 아니라 우리가 그분께 나아가야만 한다. 처녀들이 신랑을 기다리고 있는 한 밤 중에 이런 큰 소리가 있었다. “보라, 신랑이 온다. 그분을 맞으러 나가라.” 본문의 경우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성령과 신부가 오소서 라고 말하는 한편, 그 말을 듣는 사람도 오소서 라고 말하도록 권면되고 있다. 목마른 사람도 오도록 초대되고 그가 원하면 생명의 물을 거저 마시도록 보증되고 있다. 상호성(reciprocation)은 구원의 필수적 조건이다. 그 이유가 이것은 거듭남의 필수적 수단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주님께서 오시도록 기도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분을 영접하기 위해 자신을 준비해야 하고 그분을 뵙기 위해 밖으로 나가기까지 해야 한다. 이 진리가 옳을 것이라고 대다수가 인정하지만 그 이해는 불완전해 있는 듯 하다. 성경의 이런 서술은 한가지 총명한 결론으로 맺어지도록 조심스럽게 비교되고 병합되지 않으면 마음에 혼동된 인상만을 남길는지 모른다. 구원은 하느님의 일로서, 인간의 일로서, 그리고 양쪽 모두의 일로서 말해진다. 이 모두는 진실이다. 그러나 이 세 가지의 일이 동등하게 진리인지는 명백하게 보여지지 않고 있다. 널리 유행해진 생각은 이러하다. 하느님은 전능하시고 인간은 무력한바 구원은 인간의 일이라기보다는 하느님의 일이라고 생각된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진리인즉, 개개인의 일로서의 구원은 하느님의 일이라기보다는 인간의 일이라고 생각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하느님의 구원의 은총이 모든 사람에게 나타났습니다” (디도서2:11). “우리의 구세주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다 구원을 받게 되기를 바라신다” (디모데전2:4). 그리고 “…누구라도 멸망하는 것을 바래시지 않는다” (베드로후3:9). 이상 살핀 바 같이 우리의 구세주 하느님의 뜻에만 의존한다면 모든 사람은 구원될 것이다. 그러나 모든 이러한 예들을 가지고 생각해본다 해도 우리의 구세주께서는 목적 측면 뿐만이 아니라 수단 측면에서도 구원이 있기를 바래신다. 그분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비신앙적인 욕망을 지닌 자신을 부정하고, 진리의 지식에로 오고, 회개하기를 바래신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우리가 구원되기를 바라신다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우리 역시 구원받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어야 하고, 그에 따른 우리의 몫을 감당해야 하는바,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자신의 구원을 위해 힘써야 할 것이다 (필립보서2:12). 또 하나 참된 것은, “우리 안에 계셔서 우리에게 당신의 뜻에 맞는 일을 하고자 하는 마음을 일으켜 주시고 그 일을 할 힘을 주시는 분은 하느님 이시다는 것이다 (필립보서2:13). 여기에 곤란한 점이 있다. 만일 우리의 의지와 행동들이 하느님의 일이라 하면, 우리의 선택과 능력은 어디에 있는 걸까? 우리의 자연적인 삶은 이런 수수께끼 같은 질문의 답을 얻는데 도움을 준다. “우리는 그분 안에서 숨쉬고 움직이며 살아간다” (사도행전17:28). 그럼에도 우리는 자연적인 삶을 규율해가고 자연적인 움직임을 통제하는데 하느님으로부터 자유롭다. 이는 우리의 영적 활동이나 영적 상태를 우리 스스로 조절하거나 선택하지 못한다고 믿는 이들에 의해서까지도 용인된다. 이는 하느님의 모든 방법, 모든 일 처럼 신비롭다는 것은 의심할 바 없다. 우리가 이를 더욱 탐사한다 해도 알게 되는 것은 결국 일부에 불과하다. 경이로움은 이해의 범주를 넘어 놓여 있다. 이런 사항은 우리를 겸양있게 만드는데 그렇다고 우리가 회의적인 시각으로 치닫을 필요는 없다. 그 이유가 우리는 알고 있는 것만 가지고도 믿음을 지휘 감독하는데 부족하지 않기 떄문이다. 우리가 아는바,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선택의 자유가 있는 창조물로서, 그리고 우리가 만든 선택에 책임이 있는 창조물로서 대우하신다. 인간이 자유를 지녔다고 해서 하느님의 뜻을 완전히 충족시키는데 이겨낼 수 없는 곤란은 하나도 없다. 창조자 자신이 우리에게 자유의 선물을 주신게 아니어서 일까? 게다가 그분이 근원적으로 수여하신 것을 꾸준히 보존할 필요가 없어서 일까? 하느님의 완전한 충족과 인간의 자유-의지는 서로 상반된 생각이 아니고 둘 다 공히 합리적이고 필수적인 진리이다. 생명의 근원이 한분 하느님이듯 선의 근원도 한분인 하느님이다. 그분 없이 우리는 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 우리는 포도나무의 가지들이다. 포도나무와 연결되어 있을 때 만이 우리는 영적으로 살아 있고 번성해서 열매를 맺을 수 있다. 그러나 포도나무에 붙어 있는 것, 그 반대로 포도나무로부터 잘라 낸 채 있는 것, 어느 것이든 그 선택은 우리에게 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누구든지 나에게서 떠나지 않고 내가 그와 함께 있으면 그는 많은 열매를 맺는다.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나를 떠난 사람은 잘려 나간 가지처럼 밖에 버려져 말라 버린다.” (요한15:5-6). 여기에 가장 깊은 우리의 책무와 높은 특전이 있다. 우리가 전능하신 구세주 안에서 살고 있다 해서 우리의 그 삶이 소극적인 차원이 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분이 우리 안에서 일하시나, 우리는 그분과 더불어 일해야 한다. 그분의 일도 우리의 협동이 없으면 우리를 구원하실 수 없다. 그렇다면 우리의 협동이란 무엇일까? 그것은 그분께서 우리에게 수여하신 자질을 십분 발휘하는 것, 그분이 설비하신 수단들을 사용하는 것, 그분이 우리에게 주신 선물을 타인에게 분배함으로 그분께로 그분의 선물을 되돌리는 것이다. 이런 노력 안에 자아 정의나 자아 공적 같은 것을 위한 어떤 바탕이 있을까? 거기에는 심정의 겸손함과 온유함, 성실과 순종, 은택과 사랑의 큰 움직임(cause)만이 있을 뿐 자만이나 허용 같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분께서는 우리를 예수께로 끌어 당겨주는 바람에 영감을 불어넣으신다. 그분은 목마름을 창조하실 뿐 아니라 그것을 해갈시켜주는 물도 공급하신다. 그럼에도 이 바람은 마치 그것의 첫 근원이 우리의 의식세계 깊은 곳에 있는 듯 거의 우리 자신의 것인 냥 되어있다. 이렇게 독립된 채로 있다는 것은 그 얼마나 경이로우면서도 은택의 일인가! 의식세계가 자아의 것이라고 주장하는 한편, 계시에 의해 계발된 이성은 그것을 하느님의 것으로 돌린다. 이리하여 자연적인 지각은 영적인 믿음을 수단으로 균형을 갖게 된다. 모든 선을 주님께로 돌리는 것, 그렇게 해야 하는 의무, 아마 우리의 행복이라 말할 수 있는 이 생활은 결말짓는 이 말씀으로 우리에게 밝히 알게 하고 있다. “생명의 물을 원하는 사람은 거저 마시십시오.” 이 구절이 가르치는바, 선물은 가져갈 수 있겠지만 구매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이 선물은 돈 없이, 가격 없이 제공되어진다. 이 선물은 자유로운 선물, 자유롭게 받아야만 한다. 받을 자격이 없는데도 자유롭게 제공되었다. 대단히 귀중한데도 값을 치르지 않는다. 이런 견해도 세상에 있다. 그것은 우리를 위해 구입되어 왔었다. 따라서 비록 주는 자(the Giver)로부터는 공짜(free)가 아니라 해도 받는 자에게는 공짜로 받는 셈이 된다는 것이다. 이런 의견은 어두운 시대였던 탓 때문이겠지만 새 예루살렘을 비추는 하느님의 빛 앞에서는 즉각 시들고 만다. 선물을 제공하는 예수는 그 선물을 근원적으로 소유하신 그분 자신이었다. 그분께서 행동하시기 위해 육 안에 오셨던 것, 그리고 그것을 확증하시기 위해 참 영(the Spirit)으로 오시는 것은 하느님으로 하여금 생명의 물을 값없이 주실 수 없던 것이 가능해진다는 차원이 아니라 인간으로 그것을 가져갈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참으로 한 개의 방법이 있었다. 창조자께서는 인간과 관련하여 그분의 권능을 배가 시키셨다는 것이다. 그분께서는 인간 본성을 입으시고 그것을 신성화 하셔서 그분의 창조물과 새롭고 더 가까운 관계에 그분 자신을 가져다 놓으셨다. “자녀들이 피와 살의 분담자이듯 그분께서도 그들과 같은 피와 살을 가지고 오셨다가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악마를 멸망시키시고 한 평생 죽음의 공포에 싸여 살던 사람들을 해방시켜 주셨다” (히브리서2:14,15). “그분은 친히 유혹을 받으시고 고난을 당하셨기 때문에 유혹을 받는 모든 사람을 도와 주실 수 있으시다” (2:18). “그래서 온전함을 만드셨은즉 그분은 그분께 순종하는 모든 그들에게 영원한 구원의 저자가 되셨다” (히브리서5:9).
18,19. 생명의 물을 거저 가져가는 이들에게 이런 주의사항이 뒤따르고 있다. “나는 이 책의 예언의 말들을 듣는 모든 사람에게 증명하기 때문에, 만일 누구가 이런 것들에 더한다면, 하느님께서는 이 책 안에 씌어진 재앙들을 그에게 더할 것이다. 그리고 만일 누구가 이 예언의 책의 말들로부터 뺀다면, 하느님께서는 생명의 책으로부터와 거룩한 성으로부터의 그의 몫을 빼실 것이다, 그리고 이 책에 씌어진 것들.” 이 구절은 성경의 완성된 정경(canon)으로부터 떼어 내거나 첨부하는데 대한 엄한 경고라고 일반적으로 이해되고 있다. 이와 같은 경고는 모세에 의해서도 주어지고 있다 (신명기4:2,12:32). 그러므로 묵시록에 있는 증언은 묵시록 자체를 두고 한 말이다. 이해관계적인 동기로부터 인간은 거룩한 성경에 어구를 삽입하거나 일부 삭제하거나 해서 그 책을 부패시킬 수 있다는 것은 가능하다. 어떤 경우 그렇게 하였다고 알려져 있기도 하다. 이런 범죄에 가담된 이들은 무거운 책임을 면하지 못한다. “하느님의 말씀은 순수하다…거짓말쟁이라고 꾸지람을 듣지 않도록 그분의 말씀에 아무 것도 더 보태지 말라” (잠언30:5,6). 비평문들은 판단의 잘못으로부터 성경의 원문에 상해를 입힐는지 모른다. 그러나 이것은 무지의 죄이고 어떤 위법이라 말할 수는 없다. 이 구절에서 언급된 경고는 거룩한 원문의 보존이라기 보다는 그 원문 속의 가르침의 권위, 그 진리들의 순수함의 유지 보전에 더 치중하고 있는 것 같다. 말씀은 많은 고통을 받아 왔는데 그 중 어느 책도 아마 계시록의 부분만큼 자연적 수준의 해설자들의 수고로 고통 받은 책은 없을 것이라 생각된다. 해설자들의 직능은 거룩한 원문의 의미를 파악하는 것이다. 어느 해설자도 충만 된 수준의 의미를 파악하지 못했다. 영감 받은 오직 한 사람만이 의미파악을 흠 없이 할 수 있다. 모든 사람 각각은 어느 정도나마 보태거나 떼어내야만 했다. 각자는 자기 것의 어떤 것은 보태고 주님의 어떤 것을 떼어내야만 했다. 이런 결과는 가장 낮고 가장 현명하다는 주석자로 하여금 도덕적이고 지적인 미완성과 떨어질 수 없게 하고 있다. 이런 경우도 있다. 지적 자만, 또는 부분적으로 성령의 감동이 있었다고 해서, 신학적 열정이 들끊어 자신을 자극시킨 이들은 사악한 방법을 따르거나 재간을 부려서 자신이 당초 의도하고 싶었던 목적에로 성서 해설이 되도록 유도해간다. 이런 인물은 말씀을 열심히 공부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는 성경의 가르침을 따르려 해서라기 보다는 제 의견을 확증하기 위해서 일 뿐이다.
위와 같은 해설자는 지금 우리가 살피고 있는 구절의 경우에서도 위와 같은 수법을 동원한다. 따라서 이 구절은 제한된 어떤 사람들 내지 어떤 부류의 계층에 해당된다고 그들은 말한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이 책의 예언의 말을 듣는 모든 이에게 증언하시고 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을 읽거나 듣는 모든 사람에게 이 경고는 주어지고 있는 것이다. 순박함(simplicity)과 고결함(integrity) 안에서 보존되어야 하는 이 책의 내용물은 우리 기독교의 신앙과 실제에 관계되는 원리와 위대한 진리들이다. 두 개의 큰 진리는 이 예언이라는 옷감 전체를 꿰매고 있는 금실(threads of gold) 같다. 주님과 그분의 법, 또는 하느님으로서, 인간의 구세주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신앙 그리고 그분의 가르침에 따른 삶은 수없이 다양해지는 형체로 나타난다. 이것은 기독종교의 필수되는 두 원리들이다. 이 원리들은 과거 유대종교에서는 덜 발달된 상태로 있었고, 더구나 세상이 시작된 이래 모든 다른 종교에서도 대단히 미숙된 상태에 있었다. 그런 이유가 이 두 원리는 천국과 교회의 기둥들이기 때문이다. 기독교인, 유대인의 경우 같이 한분 주님 밖에 없다. 이스라엘의 하느님이 우리의 하느님이시다. 그 하느님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분을 무엇보다 먼저 사랑하고, 자기 이웃을 제 몸같이 사랑하는 것은 율법과 예언을 충만 되게 한다. 주님에 관한 지식과 이웃에 관한 지식을 포함하는 이 두개의 명령은 모든 종교의 총계(sum)이다. 그 이유가 이 두 가지 명령은 영적 삶에 관련되는 모든 법칙의 총계이기 때문에서이다.
어떻게 사람들은 이 두 가지 큰 주제의 가르침에 관련해서 이 책의 예언의 말에 더하거나 떼어 냈을까? 이 똑같은 경고를 두고 유대인들은 어떻게 행동했을까? 유대 율법학자들은 그들 성경의 원문을 감시하는데 얼마나 꼼꼼했던지 그들은 모든 책의 단어와 글자를 세었다. 그들은 더하거나 빼지 말라는 명령에 이렇게도 조심을 해온 반면 글자의 영은 소홀히 취급했는바, 자기들의 전통을 수단으로 명령이 아무 효과 없게 만들고 말았다. 그들은 본질적으로 요구되는 법의 영향력을 떼어내고 쓸모 없는 예식조항이라는 짐을 그 법 위에 놓아 무게를 더 했다. 거룩한 원문을 기특하리만큼 존경하고 또한 세심한 주의까지 기울인 기독인들인데 원문의 신성한 진리의 순수성을 보존하는데 있어서는 세심한 배려가 충분치 않았다. 이 진리에 그들은 보탰고, 이 진리로부터 그들은 떼어냈다. 말씀의 가르침에 의거 주 예수 그리스도는 세상의 창조자요 구속자이시다. 사람들은 이렇게 간단하고 장엄한 진리에 세 분 하느님에 관한 교리를 가르침으로 해서 “그리스도의 인성 안에는 하느님의 완전한 신성이 거주하시는” (골로새2:9) 그분에게 두 개의 다른 인물(Person)을 보태놓았다. 어떤 사람들은 주님이 육을 입은 천사 또는 단순히 한 인간으로 간주해 그분의 신성을 부정함으로 위 진리를 원문에서 떼어냈다. 게다가 그분의 신성한 본성을 인정하는 이들까지도 그분의 인성의 신성함을 부정함으로 주님에 관한 진리로부터 그것을 떼어냈다. 계명과 계명에의 순종이란 점에서 사람들은 두 가지 다른 방법에서 그 것들에 더해 왔는데, 이것은 얼핏보기에는 반대되는 듯 하나 그 양 끝은 서로 만난다. 어떤 이들은 명령을 충족시키는 것이 있다고 간주한다. 또 다른 어떤 이들은 계명의 충족은 대단히 어려운 과제이고 아마 불가능할 것으로 간주한다. 이런저런 의견들이 교회의 권위로 세워졌을 때 사람들은 그런 의견을 “보태거나 떼어내는” 죄를 유발한다고 전혀 생각해보지도 않은 채 신학적 견해로서 받을는지 모른다. 견해 자체만 가지고는 정죄 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모든 잘못, 비록 그 자체로는 흉악하다고 말할 수 없겠지만 그것은 죄가 되는 쪽으로 간접적으로 인도한다. 그것이 악을 좋아하는 만큼 우리의 잘못은 우리로 죄의 재앙을 받게 한다. 그것이 선을 저평가하는 만큼, 그것은 생명의 책으로부터, 거룩한 성으로부터, 이 책 안에 씌어진 것들로부터 우리의 몫을 떼어낸다. 진리는 우리가 바래는 대상이어야 하는데 그 이유가 진리는 순수해서 우리를 순수함으로 인도하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말씀은 순수하다. 그분이 너희를 꾸짖지 않도록 그분의 말씀에 보태지 말라” (잠언30:5).
이 책의 말씀 또는 성경의 말씀에 어떻게 더하고 떼어 내지는가를 본다는 것은 쉽지 않다 해도 이 책이 밝히 알리는 본질적 진리를 신앙과 실제에서 고집스럽게 떼어 낸다는 것이 얼마나 크고 치명적인 악인가는 쉽게 알 수 있다. 여기서 주어지는 경고는 과거 시대 만큼이나 현시대의 교인들에게 발표되고 있다. 듣는 이들 만이 아니라 이해하는 이들까지, 심지어 듣고 이해한 것에 동의하는 이들에까지 이 경고는 주어지고 있다. 이 책의 말씀에 보태는 이들에게 재앙이 보태질 것이고, 이 책의 말씀으로부터 떼어내는 이들에게 생명의 책으로부터 그들의 몫이 떼어지게 된다. 이 책에 씌어진 재앙들이란 이미 살핀바 같이 바깥쪽 처벌을 받게 하는 것이 아니라 내향의 상태에 대한 표현이다. 생명의 책으로부터 제거됨은 심정과 지성으로부터 생명의 책의 원리가 제거된다는 것이다. 그가 자신의 생명의 책으로부터 그 목차를 삭제할 때까지 생명의 책에서 삭제당한 자는 아무도 없다. 생명의 책의 전체 항목은 주님과 이웃을 사랑함이라는 두 계명 안에서 납득되어 진다. 이 계명들을 심정으로부터 떼어낼 때 우리의 몫도 생명의 책에서 떼어진다. 어떤 비평가들이 번역하듯, 하느님께서는 “생명나무”로부터 그의 몫을 떼어 내실 것이라고 성경을 읽는다면 덜 놀라웁게 우리를 가르치는 셈이다. 만일 그분의 계명을 지키는 이들이 생명나무에 대한 권리를 가진다면 그분의 계명을 지키지 않는 이들은 그 권리를 상실한다. 글자적 의미에서 두 개의 악한 행동과 그들을 위협하는 결과는 다른 인물들에 관계되는 듯 보인다. 영적 의미에서 그것들은 같은 인물에 있는 두 개의 연결된 상태와 관계되고 있다. 우리가 악을 사랑하고 행하는 만큼 우리는 선을 사랑하고 행동하는 것을 중단하게 된다. 우리가 더하는 만큼 우리는 떼어낸다. 우리가 죄의 재난을 자신에게 초래되게 하는 만큼 우리는 생명나무에서, 또는 생명의 책에서 우리의 몫을 잃는다.
생명의 말씀으로부터 뭔가를 떼어내는 이들에게 닥치는 두 가지 다른 재난이 있다. 하느님께서는 거룩한 도성으로부터, 그리고 이 책에 씌어진 것들로부터 그들의 몫을 떼어내신다. 거룩한 도성이란 교회이고, 이 책에 씌어진 것들이란 교회의 진리들이다. 우리가 교회를 말할 때 우리는 교회의 원리를 뜻하게 된다. 우리가 교회의 진리들을 말할 때 교회 조직의 믿음(belief)에 관한 문제가 아니라 생명의 원천을 이루는 신앙과 실제를 뜻한다. 우리 안의 진리가 살아 계신 하느님의 거처를 짓는 만큼에서 우리는 하느님의 진리 안에 있는 것이다. 이런 모든 소유물은 잃어질는지 모른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에서 사랑과 선행의 생명을 떼어내는 행동들로 해서 이런 모든 소유물은 상실될는지 모른다. 두 개의 위험이 새 교회(the New Church) 속에 있는 이들을 따라 다닌다. 신앙의 진리에 합리적으로 들어가는 것을 허용한 이들은 지적 자만에 희생되는 위험이 따라붙게 된다. 이해성을 신앙에 복종시킴으로 해서 정도를 벗어나는 사람들이 있듯이 위의 사람들은 그 반대인 신앙이 이해성에 복종하는 과오를 범하기 쉽다. 다시 말해 “너희는 그저 ‘예’ 할 것은 ‘예’ 하고 ‘아니오’ 할 것은 ‘아니오’ 라고 말하여라. 그 이상의 말은 악에서 나오는 것이다”는 구절을 정식으로 숙고하지 않는다. 이러므로 해서 그들은 하느님의 순수하고 완전한 진리에 뭔가를 더하는 위험에 빠지게 된다. 계명을 지켜야 한다는 요구사항을 구원의 조건으로서보다는 수단으로서 간주하는 그들은 계명을 지킨데 따른 보상이 품위(grace)속에 있지 않고 일 속에 있게 된다. 그러므로 그들의 정의는 칭찬 받아 마땅한 정의가 된다. 공적주의(merit)는 주님에게서 그분의 영광을 강탈하는 도둑이고, 인간이 향유할 구원을 그 사람에게서 찬탈하는 도둑이다. 이런 큰 악에서 우리를 지켜야 하리라는 것은 그 얼마나 마땅한 일인가!
20. 다시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것들을 증명하는 그분이 말하신다, 정녕 나는 빠르게 온다, 아멘. 그렇다 온다, 주 예수.” 이렇게 되는 이유가 예수는 그분의 신부 되는 교회에 오시는 신랑으로서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주님은 그분의 뜻을, 교회는 그분의 바람을 표현하고 있다. 어린 양의 결혼이 도래했다. 그분의 아내는 자신을 준비해 놓았다. 그들이 하나 되는데 놓인 장애물은 점진적으로 제거되어 왔다. 결혼식을 위한 준비는 진척을 이루어가고 있다. 그분의 오심은 개인적이든 일반적이든 오심을 바라면서 그 오심을 준비한 한도 내에서 주님께서는 그분의 강림을 만드실 수 있다. 주님의 첫 강림이 있기 전의 경우, 그 당시 존재했던 체계의 어느 것도 공급할 수 없는 결핍된 것, 그 체계의 어느 것도 만족시킬 수 없는 갈망함이 있었다. 구세주는 모든 나라의 바람이 되어 갔었다. 인간의 마음은 그 마음을 개선하는 수단보다도 더 빨리 성장하고 말았다. 이런 상태가 큰 도덕적 타락과 일치 않는 것도 아니다. 병든 영혼이 건강을 바란다. 그리고 건강의 법칙을 위반하면서 살고 있는 때에서조차도 그 영혼은 회복의 수단을 얻으려 갈망한다. 똑같은 상황이 주님의 두 번째 강림에서도 선행되고 있다. 교회는 순수성을, 종교는 그 능력을, 성경은 그 권위를 잃었다. 그들은 학식의 회복과 더불어 재발견하지 못했던 것을 어두운 시대에서 상실해버리고 말았다. 교회가 한번 기울기 시작하면 본래의 상태로 회복되는 것은 거의 불가능이다. 설사 교리가 그것을 할 수 있었다 해도 변경된 인간 마음의 조건에 부적당해질 것이다. 마음은 어떤 것을 더 요구하고 갈망하고 있다. 진보하는 수단은 그 정도를 벗어 성장하고 말았다. 그러므로 그 필요성이 요구하는 것을 위해 어떤 설비가 마련되었다. 옛 것은 가버리고 모든 것은 새 것으로 만들어졌다. 그럼에도 옛 것은 새 것의 싹틈을 마련한다. 그 이유가 옛 것이 새 것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마치 씨 안에 식물의 배아(germ)를 담고 있는 것과 같다. 그러나 옛 것이 땅에 떨어져 죽을 때까지 새 것의 생명은 튀어 오르지 않는다. 생명력은 되돌아오는 봄의 햇볕과 비의 도움을 받아 새 형체를 생산하고, 때가 되면 잎으로 옷입고 꽃으로 장식한다. 마치 신부가 단장하는 것 같다. 그 이유가 이것들은 처녀라는 식물의 결혼 예복 같기 때문이다. 인간이 관심을 두는 것들은 마음의 새로운 상태나 조건 없이 새로이 만들어지지 않는바, 새로운 조건으로서만 인간은 새로운 영향과 새로운 선물을 받을 수 있고 되돌릴 수 있다. 바램이 없는 곳에 수용함이 있을 리 만무이다. 수용함이 없는 곳에 되돌림이 있을 수 없다. 되돌림이 없는 곳에 결합이 있을 수 없다. 주님께서 교회를 사랑하시는 바 교회는 그분의 사랑을 받아야만 한다. 그리고 받은 그분의 사랑을 다시 그분께 되돌려 드려야 한다. 주님은 교회에 언제나 오시고 있다. 그러나 교회가 그분의 오심을 받을 때까지 그분은 실지로 오실 수 없다. 이 오심이 이 구절에서 마치 때가 더욱 더 가까워진 것처럼 전진되어 있는 것으로 분명하게 표현되었다. 이전에도 이 응답은 있었지만 지금의 경우는 더 즉각적이고 진지하다. “오소서 주 예수여”는 약속된 신랑의 오심에 신부의 감격적인 바람이 표현되어 있다. 그분께서는 그분의 사랑과 선함이 더욱 표현되는 칭호와 이름으로 인사 받으시고 있다. 이는 응답하는 신부의 상응되는 품위들을 암시하고 있다. 그 이유가 교회는 자신 안에 있는 그분의 사랑과 선함으로부터 사랑과 선함이신 주님을 사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세부적 측면에서 이는 거듭나는 사람에게 있게 되는 주님의 오심을 말하고도 있다. 그분께서는 그들의 심정과 지성에로 하강하신다. 신랑과 신부란 사랑과 신앙이라는 품위(grace)이다. 이 둘의 하나 됨(union)이 천국적 결혼을 구성한다. 안쪽에 있는 사랑과 바깥쪽의 신앙은 서로 간에 관련을 맺는 첫 번째 조건이다. 사랑은 마음의 가장 깊은 데를 통해 직접적으로 오고, 신앙은 들음을 수단으로, 들음은 하느님의 말씀을 수단으로 한다. 심정 안에 있는 사랑이 이해성 안에 있는 신앙에 의해 받아들여지고 상호 주고 받을 때, 그들은 하나 될 때까지 서로 간에 점진적으로 접근한다. 기독인의 마음 안에서의 이 둘의 하나 됨은 가장 참된 언약이고, 이것은 기독교인이 주님과 하나 됨, 주님이 교회와 하나 됨의 시작과 바탕이다. 전체는 부분들이 모여 구성된다. 교회는 사랑과 지혜, 선함과 진리로 구성되는데, 이는 추상적 원리로서가 아니라 심정과 지성의 품위들로서, 그리고 기독인의 생활이라는 덕행을 구성한다. 마음이 이 품위로 풍부해진 이들, 그들의 생활을 이 덕행으로 단장한 이들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교 속에 있고 종합적인 몸으로서의 교회를 구성한다. 이는 비록 사람들 앞에서 나타나는 외관이 어떠하든 하느님 앞에서 나타나는 모습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마음은 이 책 안에 기록되어 취급된 모든 것의 무대 장면이요 주제된다. 여기서 “확실히 나는 곧 간다” 라고 그분이 증언하신다. 그리고 여기서 “아멘 오소서 주 예수여” 하는 응답이 있다. 이는 사랑이 심정 안에서 말하고 사랑의 신앙이 이해성으로부터 응답하고 있는 것이다.
21. 상호적인 사랑(reciprocated love)은 복된 상태와 함께 천국적인 결혼을 준비하게 하고 그 결혼의 필수적인 조건이다. 여기에 천국이 존재하고, 여기로부터 가장 드높여진 유용함(uses)과 형용할 수 없는 더 없는 행복(beatitude)이 솟아오르는바, 묵시적인 환상이 마감되고 있다. 첨가된 축복기도(benediction)이다. “우리의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품위, grace)이 네 모두와 더불어 있기를.” 이는 결론일 뿐아니라 그 결과이고, 종결일 뿐아니라 뺌(deduction)이기도 하다. 우리 주님의 품위(grace)는 그분의 은혜(favor)만이 아니고 그분의 사랑이다. 신성한 그분의 사랑은 신성한 그분의 인성 안에서 우리에게 더 가까이 가져와 진다. 이것을 시편 기자는 육을 입으신 주님이 교회와 결혼하시는 것을 예언적으로 취급할 때 이렇게 노래한다. “당신은 인간의 자녀보다 더 아리따웁고, 은총이 당신의 입술 안으로 부어졌는바, 하느님께서는 영원히 당신을 복주신다”(시편45:2). 사람의 아들(the Son of Man)은 사람들의 자녀보다 더 아름다우시고, 신성한 품위를 받는 그릇이다. 더구나 그것은 참 근원이다. 언제나 복된바 언제나 복주시고 있다. 예수는 완전함의 모형, 선을 주시는 분, 행복의 분배자이시다. 그분 안에 신성이 완전하게 거주한다. 그 이유는 그분 안에 모든 신성이 거주하여 완전함으로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신성한 인성(Divine Humanity) 안에서 그분은 임마누엘,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느님이시다. 예수의 품위는 하느님의 품위, 그러나 하느님-인간(God-Man)의 품위, 모든 사람에게 제공되는 무한하고 영원한 사랑의 품위이다. 그분의 품위가 우리와 더불어 있고, 우리 안에 있기를 그분은 바라시고 있다. 그분의 이 바람에 우리는 경건한 심정으로 “아멘”이라고 말해야 되리라.

요한계시록 21장 해석

21

우리는 위대한 묵시록 드라마가 결론을 맺는 곳에 다가 와 있다. 지금까지의 모든 것이 이 장을 향해 있고, 이 장 안에서 신비했던 모든 여건이 각기 해결점을 발견한다. 그리고 이 장은 극적인 장엄함 그 이상의 어떤 것들로 관을 쓰고 있다.
1. “그리고 나는 새 천국과 새 땅을 보았다, 그 이유가 이전의 천국과 땅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다는 더 이상 있지 않았다.” 성경에는 국가적인 변화, 교회의 변화 같은 큰 변화들에 관한 예들이 아주 많은데, 이것들이 땅과 천국의 변화로 묘사되고 있고, 어떤 경우는 그 하늘과 땅의 파괴와 재창조로까지 묘사되고 있다. 더욱이 계시록을 사려 깊게 읽는 독자라면 이 책의 예언적 선포는 비유적이거나 영적인 특성이 있다는데 별 의심을 가지지 않으리라 본다. 그렇다 해도 위 사항에 대한 증거로서보다는 설명을 위해서라도 성경 자체가 이 책의 결말을 어떻게 명백해지도록 지적해 주는지, 새 하늘과 새 땅이라는 웅대한 비유적 표현에 관한 진실 되고도 정확한 의미 쪽으로 우리를 인도해 줄 수 있는 빛이 얼마나 되는지 간단하게라도 가늠해둘 필요가 있다고 본다. 예언의 의미를 확인하는데 가장 만족할만한 방법은 말씀의 다른 부분에 있는 비슷한 예언과 비교해 보는 것이다.
“내가 하늘을 흔들면 땅이 진동하여 제자리에서 밀려나리라” (이사야13:13). “땅이 주정꾼처럼 비틀거린다. 원두막처럼 흔들린다…달은 창백해지고 해는 부끄러워 얼굴을 붉히리라” (이사야24:20,23). “땅을 내려다보니 끝없이 거칠고 하늘을 쳐다보니 깜깜합니다…위로 하늘은 상복이나 입고 아래로 땅은 애곡이나 하여라 하시더니” (예레미야4:23,28). “야훼께서 시돈에서 고함치시고, 예루살렘에서 소리치시니, 하늘도 떨고 땅도 떠는구나” (요엘4:16, 또는 3:16). “하늘이 두루마리인양 말리고” (이사야34:4). 이상의 구절에 대해서 깊게 논하는 것은 별 필요가 없으리라 생각되어 생략하기로 한다. 이상의 예들에서 하늘과 땅이 가진 분명한 것은 그것들이 모두 비유적이라는 것, 성경 각 처에 있는 영적 의미들 같이 내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것, 더불어 본문의 하늘과 땅도 같은 성격에 속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각 구절의 의미가 무엇인지는 문맥으로부터나 그 단원이 관련되는 사건으로부터 서도 명백히 알 수 없는 것도 사실이다. 이사야서의 또 다른 단원의 경우는 조금 더 명백한 빛을 주는데, 그 이유가 그 구절은 주님의 오심에 관련된 예언 부분이요, 유대교회가 끝날 때의 기독교회 건설에 관한 예언이기 때문인 듯 하다. “눈을 들어 하늘을 바라보아라. 땅을 굽어보아라. 하늘은 연기처럼 스러지고, 땅은 옷처럼 헤어져 주민이 하루살이처럼 깨지리라. 그러나, 내가 베풀 구원은 영원하고 내가 세울 정의는 넘어지지 않는다…나는 너희 입에 나의 말을 담아주고 나의 손 그늘에 너희를 숨겨둔다. 하늘을 펴고 땅을 세우면서 시온을 향해 선포한다. ‘너는 나의 백성이다’ ” (이사야51:6,16). 하늘과 땅이 이 구절에서는 교회의 모양새로 명백하게 고용되고 있다. 그래서 연기처럼 스러진 하늘, 옷처럼 헤어진 땅은 유대교회를 의미하고 있다. 하늘을 펴고 땅을 세우심은 기독교회를 의미한다. 본문의 서술과 가장 정확하게 평행을 이루는 구절이 이사야 65장에 있다. “보아라, 나 이제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한다. 지난 일은 기억에서 사라져 생각나지도 아니하리라. 내가 창조하는 것을 영원히 기뻐하고 즐거워하리라. 나는 ‘나의 즐거움’ 예루살렘을 새로 세우고 ‘나의 기쁨’ 예루살렘 시민을 새로 나게 하리라…그렇다, 내가 지을 새 하늘과 새 땅은 무너지지 아니하고 내 앞에 남아 있으리라. 야훼의 말씀이시다. 그처럼 너희의 자손과 이름도 이어가리라” (65:17-18, 66:22). 이 문맥에서 명백한 것은 위 예언은 주님이 육으로 오시는 때와 관련된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이 구절에서의 변화됨이란 끝을 맞게 되는 유대교회를 이어갈 기독교회의 시작이다는 의미 외에는 다른 의미가 없다.
본문의 새 천국과 새 땅의 창조, 계시록에서 언급된 이 창조는 유대교회 뒤를 이어왔던 교회가 장엄한 흰 왕좌에 앉으신 그분의 면전을 떠날 때, 새 교회의 건립에만 관계되고 있다는 것을 모순 없이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예보(prediction)의 형태에 공통되는 어떤 것이 있는데 이것은 우리가 그 예보들을 글자대로 이해해야 할 것이냐 또는 비유적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냐를 가늠할 수 있게 해주고 있다. 세상의 끝(the end of the world)에 관한 예보들, 그 예보가 영성을 제공하는 것을 빼놓고 생각한다면 그 예보가 글자대로 성취되어지리라는 것은 상상 해보기에도 거의 힘든 사건들로 표현되어 있는바 글자대로 이해할 수 없게 되어있다. 세상이 파괴될 때 그 세상에는 새 창조에 의해 다시 놓여지고 있다. 사도 베드로에 의한 세상 끝에 관한 유명해진 예보는 비유적 성격에 관한 증거를 가지게 한다. 그의 둘째 서간에서 말하는바, “주님의 날은 도둑처럼 갑자기 올 것입니다. 그 날에 하늘은 요란한 소리를 내면서 사라지고 천체는 타서 녹아 버리고 땅과 그 위에 있는 모든 것은 없어지고 말 것입니다.” (3:10) 이 구절은 여느 구절보다 사실적으로 그려 나타내었다고 생각된다. 그럼에도 이 구절 역시 지상이 통째로 파멸되는 것을 가르치고자 함은 아닌 것 같다. 이 사도는 “마지막 날(그날)”을 시대와 비교하면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물에 잠겨서 옛날의 세계는 멸망해 버렸습니다. 사실 하늘과 땅은 하느님을 배반하는 자들이 멸망당할 심판의 날까지만 보존되었다가 불에 타 버리고 말 것입니다” (3:6,7). 사도가 거론한 사건과 노아 시대의 사건, 모두가 같은 성질에 속한다고 말한다면 누군가가 찾는 마지막 파멸은 두려워해야 할 이유도 없고 예상할 필요도 없는데, 그 이유는 노아 시대 때에 있었던 홍수 사건은 하늘과 땅이 파멸된 게 아니라 사람들이 파멸되었을 뿐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노아의 홍수는 자연적 차원의 대홍수도 아니었다. 사람의 아들(예수) 시대 때의 불 역시 자연적 차원의 어떤 것도 포함되어 있지 않다. 위 두 가지 모두 히브리서에서 언급된 모양새, “…단 한번 당신 자신을 희생 제물로 드리심으로써 죄를 없이 하셨다” (9:26)라는 종말이다. 위 두 사건의 차이란, 하나는 거짓이라는 홍수로, 또 하나는 악한 사랑이라는 불로 멸해진 것 뿐이다. 어찌 됐든 본문과 베드로의 서간에서 하늘과 땅의 파멸이 오고 있다고 언급하면서도 베드로도 계시록의 요한처럼 새 창조에 관한 어떤 희망을 주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하느님의 약속을 믿고 새 하늘과 새 땅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거기에는 정의가 깃들어 있습니다”(3:13).
현 세상에 종말이 있게 된다는 주장은 일반화 되다시피 한 신조이다. 그 반면 새 땅의 창조에 관한 생각에서는 별로 심각해 하지 않는 것도 사실이다. 이렇게 생각할 경우 어쩌면 이런 사람들에게 있어서 새 땅은 장애물로서만 여겨질런지도 모른다. 세상에 널려 있는 신조에만 의거하면 세상의 파멸은 아담의 종족이 끝나고 그리스도의 가족으로 완성된다는 것이다. 그 다음 주님의 중재적인 통치는 막을 내리고 아들은 왕국을 포기하여 하느님이 모든 것 안의 모든 것으로 존재하시도록 아버지께 내어드리는 것이다. 그러면 어떤 목적을 위해 새 창조가 있어야만 하는 것일까? 어떤 이들은 상상하기를, 새 땅은 부활하는 성도들의 거처가 될 것이라고 말한다. 또 다른 사람들의 경우, 이런 예언을 영적 측면에서 그 일부를 수용하고 한편으로는 다른 부분의 예언은 글자대로 받은 뒤 두 가지를 접합시켜 생각하기를, 새 땅은 부활하는 성도들의 지상에서의 새 육체를 뜻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요한이 발표한 새 땅의 창조는 글자대로 이해될 수 없다는 다른 암시도 있다. 즉 새로운 땅에는 더 이상 바다가 없다고 말했다. 물이 없는 땅에서 인간은 거주할 수 없다. 따라서 그 땅의 거주민은 현재의 땅 위에서 사는 사람들과 완전히 달라야 할 것이다. 그런데 새 땅이 이전 땅보다 더 완전할 것이라 말할 경우, 새 땅의 거주민이 더 행복하다고 할 경우 바다가 없는 것은 그 거주민을 위해 더 편리하고 안락하게 해주는 한 걸음 진보된 것이라고 이해해야만 할 것이다. 사실 저자의 경우 이런 사항들은 상상도 하기 힘든 말들이다. 어찌됐든 새 땅이 새 교회를 표상(figure)한다고 간주할 경우 바다가 없는 것에 불완전이 있지 않다 라는 것을 발견할는지 모른다. 이미 살핀바 있는바, 바다는 이방인들, 그리고 교회 안,밖에 있는 이방인 같은 상태에 있는 이들을 상징한다는 것이다. 주님이 재림하는 때에는 더 이상 이방인에 속한 사람들이 존재 않을 것이다. 주님에 관한 지식은 물이 바다를 덮고 있듯 땅을 덮게 될 것이다. 따라서 주님을 아노라 말하는 그의 이웃을 더 이상 가르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거기에는 한 개의 양우리와 한 분의 목자만이 계실 것이다. 참으로 예언 자체가 말하는바, 이방인들은 이방인으로 존재하지 않을 것인바, “만국 백성들이 그 빛 속에서 걸어다닐 것이며 땅의 왕들은 그들의 보좌를 가지고 그 도성으로 들어 올 것이다” (21:24). 이 예언의 참 현상을 이사야는 이렇게 선포하고 있다. “바다의 보물이 너에게로 흘러오고 뭇 민족(이방인)의 재물이 너에게로 밀려오리라” (60:5). 더 이상 바다가 없다는 땅에 관한 약속은 교회 내에 더 이상 무지가 없고, 더 이상 미신적 관습이 없겠으며, 더 이상 우상숭배도 없고, 실제의 이교도라 할 수 있는 유명무실함도 없게 되고 오로지 하느님의 성막이 드넓게 인간과 함께 존재할 것이고, 주님만이 그들의 하느님이 되고 그들은 그분의 백성이 될 것이다. 새 땅에 바다가 없다는 것은 교인들에 대한 약속일 뿐 아니라 훈계의 측면도 담겨 있다. 다시 말해 새 교회(the New Church)의 사람은 “바다는 자기 안에 있는 죽은 자들을 토해내는” 심판에서 비쳐진 죽은 예배를 갖지 않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도 역시 더 이상 바다는 존재 않는다.
그러므로 새 천국과 새 땅(the new heaven and the new earth)이란 인간들에게 있게 될 영적인 생명력 또는 종교 생활에 관한 새로운 질서 또는 새로운 조건이다는 것밖에 더 다른 의미는 없다. 이는 인간이라는 세대들이 원리 측면에서 새롭게, 생활 측면에서도 새로워진다는 말이다. 이들이 새 천국과 새 땅이요, 이들이 새 교회(the New Church)를 구성한다. 이제 위 사항들을 개인적으로 응용하는 경우를 생각해보자. 천국은 천국의 형상(image)인 영적 마음 또는 인간의 안쪽 부분을 말하고, 땅(earth)은 세상의 형상인 자연적 마음 또는 인간의 바깥 부분을 말한다. 이들이 새로이 창조될 때, 즉 위로부터 태어날 때 21장 첫 절의 선포는 각자의 가장 실제적인 측면에서 실감되어 진다. 그 이유는 하느님의 창조에서 재창조(re-created) 또는 거듭난 인간 영혼 그 이상의 더 영광스러운 것은 없기 때문이다. 인간의 재창조는 주님에게 있어서 위대한 모든 일들을 마감 짓는 원인이요 최말단의 결과이다. 그분의 역사 모두는 인간 재창조, 거듭남과 관련되어 있다. 그 외 다른 그분의 일들이 있다 해도 그것 하나 하나는 모두 인간 거듭남에 관한 모형(type)이다. 그 이유가 목적에 존재하는 것은 목적을 위한 수단 안에 모두 존재하고, 그 수단의 진행 속에는 첫 원인이 된 것부터 최말단의 결과까지 들어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자연은 인간과 그 인간의 재창조에 속한 것들로 꽉 차있고 하느님은 말씀 안에서 그분의 일(work)에 있는 표현물(representative)들을 수단으로 인간과 인간의 재창조를 기술해 놓으시고 있다.
주님의 교회가 각 사람 안에 존재하는 만큼에서 인간 사이에서도 실제로 존재할 수 있다. 그렇긴 하지만 넓은 의미에서의 처방으로 교회를 생각할 때 새 교회(the New Church)가 새 천국과 새 땅으로 의미되고 있다고 우리는 간주한다. 가장 폭넓은 일반적 관점에서 “새 천국”은 새 천국에 있는 새 교회, “새 땅”은 지상에 있는 새 교회이다. 천국에 있는 교회 또는 새 기독교인의 천국은 기독교라는 처방의 시대 동안 살았던 의로운 모든 사람, 어린 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모든 이들로 형성되어졌다. 지상의 새 교회는 이제 인간에 알려진 교회의 원리들에 따라 살아가는 모든 사람으로 구성된다. 그리고 보편적 형체로 볼 때 새 교회는 각 사람의 신조(creed)가 어떤 것이든 모든 나라 안에, 모든 교회 안에 있는 선한 사람들까지 포함된다. 조금 덜 광범위한 측면에서 볼 때 새 천국과 새 땅은 땅 위 새 교회의 내면과 외면을 구성해준다. 교회의 내부란 교회의 원리들이고, 외부란 원리들이 실제 응용된 형체로 구성된다. 이 교회의 내부는 주님을 사랑함이고, 외부는 이웃을 사랑함이다. 그 이유는 주님을 사랑함은 인간을 사랑함에서 그 품성이 명백해지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사랑은 종파(sectarianism)에 관해서는 아무 것도 모른다. 사랑으로부터 온 모든 것을 중시하는 교회인 새 교회(the New Church)는 타인들 안에 있는 사랑이 명백해질 때 이것이 기독교인의 품성이 일하는 것으로, 이것을 기독인의 형제애의 끈으로 인식한다. 새 교회는 인간을 그들이 지닌 신앙으로 판단하는 게 아니라 그들의 행위에 의해 판단한다. “너희는 그 행위를 보아 그들이 어떤 사람인지 알리라” (마태7:20).
2. 요한이 새 천국과 새 땅을 본 뒤, 그는 또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느님으로부터 천국의 안에서 밖으로 나오는데 마치 신부가 그녀의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이 준비된 것을 보았다.” 새 예루살렘이 교회를 상징한다는 것은 널리 인정되고 있다. 그러나 거룩한 성은 지상의 교회를 표상하는 게 아니라 천국에 있는 교회를 상징한다고 믿는 것도 일반화 되어 있다. 세상의 끝장을 뜻한다고 이해되고 있는 하늘과 땅이 사라진 뒤 물질적 세계가 존재 않게 되는 고로 천국에 새 예루살렘을 놓아야 할 필요가 있었다 라고 말하는 이도 있다. 그러나 이런 추측들은 새 천국과 새 땅을 설비하고 있는 본문에 명확히 불일치 되는 소리이다. 게다가 본문은 거룩한 성이 하느님께로부터 천국을 통해 지상에 내려오는 것이 보였다고 서술하고 있다. 사도 바울은 “위에 있는 예루살렘”으로 천국에 있는 교회를 서술하는데 그것은 진정한 말이다. 그렇지만 그 서술이 위의 궁금증을 달래 줄 수도 없다. 천국은 신성화 된 상태 그리고 가장 높은 완전함에서의 교회이다. 이 책 예언의 앞 부분에서 교회는 태양을 입고 있는 천국의 여인으로 표현되어져 있다. 현 본문은 그 여인이 천국으로부터 내려오는 것을 표현하고 있다. 이는 우리도 계속 살폈던 것인데 교회는 천국에서 시작되는 고로 지상에 존재하기 위한 교회는 하느님으로부터 천국을 통해 반드시 내려와야만 한다. 바울은 천국적인 예루살렘을 “우리 모두의 어머니”로서 말하기도 한다. 그러면 천국에 있는 교회는 땅 위 교회의 부모라고 이 사도는 가르치는 게 아닐까? 이 말의 가장 정확한 의미는 새 예루살렘은 땅 위 교회를 의미한다는 것이다. 구약성서에서 예루살렘은 교회의 모형(type)이라고 언급하고 있다. 새 예루살렘이 새 교회이다 라는 뜻 외에 무엇이 더 있을까? 영적 의미에서 교회는 새 땅과 새 도성 양쪽으로 표현되고 있다. 땅은 교회의 일반 원리라는 측면에서, 도성은 교회의 교리라는 측면에서 각기 교회를 표현한다. 구약성서에서 교회는 도성과 처녀로 자주 언급되고 있다. 구약도 본문처럼 두 가지 형상(image)이 두 가지 다른 사상들로 표현되고 있다. 종교 속의 교리 그리고 여타 다른 외부적인 것들 자체는 내재하는 애착들과 따로 구분된다. 마치 주위가 아름답고 높은 탑들과 궁전으로 가득 찬 시온, 더욱이 장엄함을 지닌 시온, 그런데 이 시온에 거주민이 없을 경우 화려한 고독 밖에 더 있을 게 없다. 교회 속의 교리가 생명 있는 애착의 거처가 아닐 경우 그 교리는 위와 같은 시온밖에 더 아니다. 예언자들은 애착이 병합된 교리를 시온과 예루살렘의 딸로, 본문의 경우 어린 양의 아내, 신부로서 인격화 해놓고 있다. 이 애착들이 교리 속의 생명을 구성한다. 이 생명, 애착을 수단으로 교회는 주님과 결합한다. 선함과 진리는 애착에 의해, 이 애착이란 차원에서 교회는 어린 양의 신부와 아내이다. 새 교회를 신랑과 아내로 만들게 해주는 가장 뛰어난 애착은 주님을 사랑함이다. 새 교회의 장엄한 교리는 예수 그리스도만이 신성하시다는 것, 그리고 이 교리에 안주할 수 있는 애착만이 진정한 생명으로 살아 있을 수 있다는 것, 이 애착만이 숭배의 유일한 대상으로 그분을 사랑한다는 것이다. 주님을 사랑하는 애착은 이웃을 사랑함과 연결되어 있고, 그 사랑에서 모습을 확실히 가진다. 제일가는 사랑을 가진 사람들은 두 번째 가는 사랑 없이 존재될 수 없다. 그런고로 주님을 사랑함은 교회로 하여금 주님의 신부와 아내가 되게 해주는 애착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생명 있는 애착은 그 애착이 담긴 교리로부터 구별되는 고로 요한은 거룩한 도성 새 예루살렘이 하느님께로부터 천국을 통해 내려오되 남편을 위해 단장한 신부로서 본 것이다.
사랑에 관한 애착 특히 주님을 사랑함에 관한 애착이 교회로 하여금 그분의 신부가 되게 한다면 결혼식을 위한 준비수단인 단장함은 무엇일까?
바빌론이 패망되고 어린 양의 혼인 잔치가 있고, 그분의 신부가 몸단장을 끝냈을 때 빛나고 깨끗한 모시옷을 입게 되었다 (계시록19:7,8). 본문의 경우 그 여자는 단순히 몸단장을 끝냈다(array) 라고 말해지지 않고 잘 차려 입었다(adorn)라고 말해지고 있다. 19장의 경우, 교회는 스스로 준비되었는데, 이는 어린 양의 신부가 몸단장을 끝낸 것, 빛나고 깨끗한 모시옷인 말씀 속의 순수하고 진정한 진리들로 훈육 받은 사람들에 의해 교회가 형성된다는 말이다. 사랑은 결혼에 필수이다. 그러나 사랑은 사랑하게 될 대상의 인물(person)과 품성(character)에 관한 지식을 기초로 해야만 한다. 이런 지식을 수단으로 교회는 자신을 준비해서 신성한 남편과의 결혼에 임하게 된다. 교회는 그분의 인물이 여호와-예수, 한분 주님, 그분의 이름은 하나 뿐 임을 알아야 한다. 그분의 품성이 사랑 자체와 지혜 자체임을 알아야 한다. 이런 주님의 인물과 품성에 관한 지식 없이 그분의 사랑의 대상이 진정으로 될 수 없다. 이 지식은 새 교회가 타 교회와 구별되는 탁월한 내용 중의 하나이다. 이 탁월함 때문에 주님의 신부는 희고 깨끗한 고운 모시옷을 입게 된 것이다. 거룩한 진리로 가르침을 받아 그 가르침을 실행하는 것, 성도들의 올바른 행위라는 고운 모시옷을 먼저 입은 것에 더하여 지금 이 교회는 남편을 위해 준비된 신부, 잘 차려 입은 신부로 나타나고 있다. 교회가 잘 차려 입는다는 것은 거룩한 말씀 속의 진리들이 요구(enjoin)하는 일을 해내서 자기가 획득한 진리들을 잘 가꾸어 나간 결과인 교회의 품위와 미덕들이다. 이를 수단으로 하면 주님과의 결합은 확고하게 이루어진다. 장엄한 결혼 축시인 시편 45편을 영적으로 이해해 보면, 주님과 그분의 교회가 결혼하는 것을 축하하고 있다. 그래서 신부, 왕들의 딸(공주)들은 “모든 영화를 지니고 금으로 수놓은 옷을 입고 왕에게로 인도 될 것이다” 라고 읊고 있다. 금으로 수놓은 신부 옷이란 사랑의 진리들과 총명으로 형성된다. 사랑은 이러한 것들, 심정과 지성 그리고 삶 속의 진리가 되어야 한다고 이해하는 옷들로 입혀진다. 이런 진리들은 예루살렘이 입어야 하는 “아름다운 옷들”이다 (이사야52:1). 주님은 그들을 신실한 자들에게 입혀 주시는 구원의 옷으로 입히시고 정의가 펄럭이는 겉옷, 신랑처럼 빛나는 관, 패물로 단장한 신부같이 꾸며주신다 (이사야61:10). 이런 상징적인 것들은 자연 안에서 더욱 완전하게 찾아 볼 수 있다. 대지는 초록으로 자신을 옷입힌다. 식물들은 수많은 싹들로 해서 꽃을 피워 자신을 옷 입힌다. 이 모든 것들은 결혼예식을 위해 준비되고 있다. 이 결혼으로부터 황금의 수확이 와서 맛있는 과일로 끝을 맺는다. 그러므로 이사야는 구원의 옷, 신부가 걸친 패물에 관한 서술에 이어, “땅에서 새싹이 돋아나듯 동산에 뿌린 씨가 움트듯 주 야훼께서는 만 백성이 보는 앞에서 정의가 서고 찬양이 넘쳐흐르게 하신다” 라는 말로 끝맺고 있다 (61:11). 3절은 한 걸음 더 진전된 깊은 감명을 받게 해주고 있다.
3. 요한이 교회를 도성으로, 신부로 보았을 때, 그는 “천국의 안에서 밖으로 나오는 큰 음성을 들었다, 말하기를, 잘 보아라, 하느님의 성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다, 그리고 그분은 그들과 더불어 거주하실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그분의 백성들과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분 자신이 그들의 하느님으로 그들과 함께 있을 것이다.” 하느님의 집(성막)은 하느님께로부터 천국을 통해 내려오는 거룩한 성의 중심 되는 필수요소로 생각되도록 본문은 서술하고 있다. 성막, 이는 새 예루살렘에서도 특별한 시선을 끌게 하는 대상으로 뽑혀지고 있다. 이 성막은 천국에서 따로 떼어놓은 대상으로서 이미 보여져 왔었다. 이렇게 이미 보여져왔던 성막이 이제는 사람들과 함께 있다 고 말해지고 있다. 15절에서 요한은 말한다. “나는 하늘에 있는 성전이 열리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성전은 증거의 천막이었습니다.” 지상에 성막이 나타나기 전에 증거의 성막이 열리는 것은 옛 것이 완전히 끝을 내기 전 새로운 것이 언제나 개시된다는데 대한 섭리적인 부분의 하나이다. 증거의 성막의 성전이 열린다는 말은 말씀의 영적 의미가 열린다는 뜻이고, 이를 수단으로 말씀의 내면에 있는 진리가 밝히 알려진다는 말이다. 교회들이 충분히 황폐되기 전 말씀은 내면적으로 또는 영적 의미에 관하여 밝히 알려진다. 그 이유는 이렇게 알려져야 새 교회(the New Church)가 건립될 것이고, 이 안으로 이전 교회에 소속되었던 사람들이 초대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새 교회를 위해서 내면에 있는 신성한 진리들이 밝혀져야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내면의 진리들은 새 교회의 사용을 위해 존재하는바, 옛 교회가 끝나기 전 미리 밝혀져야 함이 지당할 것이다. 그 이유는 새 것이 시작되는 수단이 바로 내면의 진리들이기 때문이다. 옛 것 속에 아껴두신 것들(remains)이 새 것의 시작이 되어야만 한다. 유대인의 마지막 번째가 기독교인의 첫 번째가 되었다. 기독교회 속의 진리들은 유대교회 속의 사람들 모두에게 일단 발표되어졌다. 그러나 그들 중 일부, 즉 자기들 선조들의 교회 안에 남아 있던 선하고 진정한 것들을 잘 보존했던 사람들만이 기독교회 속의 진리들을 영접했다. 이 영접함에 새롭고 더 높은 기독교회의 원리들이 접붙여졌다. 가장 높은 의미에서 성막은 성전처럼 신성한 인성에서의 주님 자신을 표현한다. 성막과 성전의 의미를 좀 더 세밀히 구분해 본다면, 성전은 신성한 진리 또는 지혜 측면에서의 주님의 인성, 성막은 신성한 선 또는 사랑 측면에서의 주님의 인성을 표현한다. 주님은 보다 높은 차원의 표현물을 수단으로 새 예루살렘과 연결되어 표현되고 있다. 그 이유는 새 교회에서 주님은 최고도의 진리 측면보다는 오히려 최고도의 선의 측면에 중심을 두어 예배하기 때문이다. 천국에서 보여진 성막과 성전은 합병되어 있다 (15장5절). 새 예루살렘에서 성막 만이 보여지고 있다. 성막 만 볼 수 있었던 것은 요한이 그 안에서 성전을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성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다고 하는 천국으로부터의 큰 소리는 신성한 사랑 자체의 소리요, 그 뜻은 주님이 신성한 인성으로 사람들 사이에 현존하신다는 기쁜 소식이 천국을 통해 선포한다는 것이다.
성막은 주님 자신의 영광스런 몸을 표현하는 한편 그분의 신비한 몸인 교회도 표현한다. 본문에서 성막은 한편으로는 도성에 관련을 갖고 있고 또 한편으로는 성전과 관계를 가지고 있다. 거룩한 성, 이미 살핀바와 같이 교리 측면에서의 교회를, 성막은 예배 측면에서의 교회를 뜻한다. 이런 이유로 본문이 도성에 이어 성막까지 언급하고 있다. 그러나 교회의 예배는 성막에 의해 표현될 뿐 아니라 성전에 의해서도 표현된다. 성막과 성전은 교회의 예배를 표현하는 것, 즉 예배의 대상으로 주님과 관계된다는 점에서는 비슷하다. 그러나 좀 더 세밀하게 구분하면 성막은 사랑으로부터의 교회의 예배를, 성전은 신앙으로부터의 교회의 예배를 표현한다. 사랑과 신앙이라는 천국적 품위(grace) 모두가 없다면 진정한 예배도, 진정한 교회도 존재할 수 없다. 그러나 교회의 예배의 품성(character)은 교회 자체의 품성처럼 두 품위들이 서로의 위치를 어떻게 갖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영적 교회의 경우 신앙이 우선 순위에, 사랑이 그 다음 순위에 있다. 천적 교회의 경우 사랑이 첫 자리를, 신앙이 둘째 자리를 점령한다. 이 차이는 기독교인의 생활이 진보해 가는 순서로부터 발생되어 표현되고, 이를 집합해서 생각하면 각 기독교회가 발전해 가는 순서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기독교인은 사랑의 품위를 획득하기 전에 믿음의 품위를 획득한다. 물론 각 기독교인의 삶의 진보 첫 단계에서조차도 사랑 없이 믿음은 존재되지 못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첫 단계부터 사랑이 그 사람의 가장 높은 품위로 존재하는 게 아니다. 그런고로 그는 사랑이 자기 심정 속에서 최고의 애착이 되도록 애쓰게 된다. 사랑이 그의 가장 높은 애정일 때 그는 기독인의 품성과 삶에서 가장 높은 상태에 도달되어 기독인의 가장 순수한 기쁨(joy)들을 누리게 된다. 이 상태에서 믿음은 사랑 안에서 잃는바 되면서 사랑은 모든 것 안의 모든 것으로 존재한다. 한마디로 거기에는 성전이 없고, 하느님의 성막(집)만이 그와 함께 있는다. 오히려 그 사람 자신이 지고하신 분의 거처(성막)라고 말해도 될 것이다. 그 이유는 주님께서는 그분을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하시기 때문이다.
기독교회의 진보(progression) 역시 기독교인의 삶의 것과 비슷한 순서를 밟아 왔다. 첫 기독교회는 주님의 성전이 첫 순위이고 두 번째가 성막이었다. 기독교회에 있는 상태들의 이런 진보는 이스라엘 교회에 있었던 예징(Type)들과 닮은 것은 아니다. 이스라엘 교회의 경우 성막이 성전에 앞서 존재했기 때문이다. 주님이 육으로 오시기 이전의 교회는 점진적으로 계속해서 하강했던 것이고, 그 이후 교회의 진보는 위쪽으로 향해 있다. 첫 기독교회는 유대교회보다는 더 완전하다. 두 번째 기독교회는 첫 번째 보다 더 완전하다. 두 번째 기독교라는 처방에 있는 더 높은 품성은 이 책 예언에서의 중대사요 결론이다. 이 안에서 예언을 통해 주어지는 약속들, 두 번째 교회에 있게되는 영광되고 평화로운 상태가 실감되어진다. 또한 종교적 지식과 정의가 보편화 될 때, 만민과 나라들이 서로 돕고 사랑하는 것을 종교의 의무로서, 그리고 영적 흥미로 알게 될 때 그들은 부유하고 위대해지며 슬기롭고 선해질 것이다. 위 사항은 기독교국이라 자칭하는 나라와 백성들까지 포함되어 배워야 할 교훈이다. 서로간에 치고 받는 다툼과 시기함으로 물든 이해관계는 기독인의 진정한 본성을 얼마나 조금 납득했는지 여실히 드러내는 것이고, 자비로운 영, 사리사욕 없는 영의 영향이 얼마나 적은지 실감나게 만든다. 이런 지저분한 것들은 하느님의 집이 사람들과 함께 하는 것을 사라지게 하고 있다. 하느님의 집이 사람들과 함께 함에서 결과되는 축복 중의 하나는 그분이 그들과 함께 거하신다는 것, 그들은 그분의 백성이 된다는 것, 하느님 스스로 그들과 함께 하시어 그들의 하느님이 되신다는 것이다. 하느님이 계신다(the presence of God)는 말은 보편적인 말, 아마 신앙인이라면 모두 다 친숙한 말에 해당된다. 그 이유가 그분은 만물의 창조자시오 보존자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현존은 존재라는 축복 외에는 어떤 것도 보증 못해주고 있다. 그것은 우리를 고결한 삶, 행복한 삶을 만들어 주지 않는다. 단지 그것은 행복되게 할 수 있는 자질 또는 능력만을 보존하고 있을 뿐이다. 우리를 거룩하고 행복하게 만드는 하느님의 현존(Divine Presence)은 우리 안에(in us)있게 될 때이다. 바로 이 사항이 말씀 안에서 하느님의 현존이 우리와 함께(with us)함에 대한 의미이다. 그분이 우리의 심정과 지성 또는 의지와 이해성 안에 거하실 때 하느님은 성경책의 의미 안에서 우리와 함께(with us) 거하신다. 개인이라는 측면에서 생각해본다면 거듭나는 의지는 하느님이 건설하시어 영원히 앉히실 새 성막이다. 이 성막 안에서 그분은 인간과 더불어 영원히 거하신다. 의지가 새로워질 때 이해성도 새로워지는바, “그의 눈은 아늑한 보금자리, 옮겨지지 않을 성막, 예루살렘을 보리라. 그 말뚝이 다시는 뽑히지 아니하고 그 줄 하나도 끊어지지 아니한다” (이사야 33:20). 그리고 “나는 그들과 평화의 계약을 맺을 것이다. 그들과 맺은 이 계약은 영원히 깨지지 아니하리라. 나는 그들을 불어나게 하고 나의 성소를 영원히 그들 가운데 둘 것이다. 나는 나의 집을 그들 가운데 둘 것이다. 나는 그들의 하느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되리라” (에스겔37:26,27). 우리의 주님은 분명한 언어로 똑같은 교리를 이렇게 가르치신다. “너희가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물리라” (요한복음15:10). “나를 사랑한다면 내 말을 지킬 것이다” (요한 복음14:23). 그러면 시편 기자처럼 우리도 말할 수 있으리라 “야훼여? 당신 성막에서 살 자 누구입니까? 당신의 거룩한 산에 머무를 자 누구입니까? 허물없이 정직하게 살며 심정으로부터 진리를 말하는 자…이렇게 사는 사람은 영원히 흔들리지 아니하리라” (15편). 그런데 하느님의 현존은 조건이 없는 것도 발견된다. “아버지께서는 악한 사람에게나 선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비를 내려주신다” (마태복음5:45). 우리 안에 그분이 계시는 것은 그분과의 계약을 지키느냐의 여부에 의존된다. 계약은 쌍방의 동의인바, 서로가 계약내용을 준수할 때만 성립되는 것이다. 신성한 법은 하느님과 그분의 백성 사이의 조건을 담고 있다. 법의 글자는 옛 계약이고 법 속의 영은 새 계약에 해당된다. 그 계약은 이러하다. “그 날 내가 이스라엘 가문과 맺을 계약이란 그들의 가슴에 새겨 줄 내 법을 말한다. 내가 분명히 말해둔다. 그 마음에 내 법을 새겨주어, 나는 그들의 하느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다” (예레미야31:33). 이것이 기독인과의 계약이다. 이 계약은 “사람들이 하느님의 백성이 되고 하느님께서 친히 그들과 함께 하시고 그들의 하느님이 되신다”는 약속이 기대어 쉬고 있는 곳이다. 주님과의 모든 결합은 그분의 사랑과의 상호성에 의해 결과 된다. 그분은 만민을 사랑하시고 그들 모두와 결합되기를 바라시고 있다. 만일 인간이 주님께서 그들을 사랑함으로 구원될 수 있다면 누구든지 다 구원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구원될 수 있는 것은 그분이 그들을 사랑하심으로가 아니라 그들이 그분을 사랑함으로, 다시 말해 그분의 사랑을 그분께 되돌림으로 가능하다. 주님은 모든 사람 안에 거하신다. 그러나 그분이 그들 안에 거하신다고 해서 그들 모두가 구원되는 게 아니라 그들이 그분 안에 거함으로 구원되는 것이다. 이는 참으로 명심해야 할 진리이다. 이 진리는 믿는다고 입술로 고백만 하면 즉각 주님의 자비가 쏟아지고 그 즉시 구원되었습니다 라고 공공연히 발표해대는 이들 속의 관념에 담긴 거짓 희망의 기초를 뒤흔들어 준다. 주님께서는 포도나무와 그 가지라는 아름다운 비유로 위의 상호성(reciprocation)의 교리를 가르치시고 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누구든지 나에게서 떠나지 않고 내가 그와 함께 있으면 그는 많은 열매를 맺는다.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다…너희가 나를 떠나지 않고 또 내 말을 간직해 둔다면 무슨 소원이든지 구하는 대로 다 이루어질 것이다” (요한복음15:5,7). 이와 같이 그분 안에 있는 것이 우리로 그분의 백성이 되게 하고 하느님 친히, 주 예수 그리스도까지 포함해서 우리와 함께 계시고 우리의 하느님이 되신다.
4. 주님의 성막이 사람들과 함께 한 또 다른 축복의 결과, 그리고 그분이 그들과 함께 하심으로 오는 직접적인 결과가 이제 기술되고 있다. “그리고 하느님은 그들의 눈으로부터 모든 눈물을 닦으실 것이다, 그리고 죽음이 더 이상 있지 않을 것이고, 슬퍼함도, 외쳐댐도 있지 않을 것이고, 더 이상 수고함이 있지 않을 것이다, 그 이유는 이전 것들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이 구절을 글자대로 이해한다면, 새 예루살렘은 천국 안에 있는 교회를 뜻한다 라는 견해를 잘 받쳐주는 근거를 제공할 것이다. 그 이유는 거기에서만 위와 같은 일들이 실감될 수 있기 때문이다. 공통된 생각 속에 진상에 가까운 것이 있다. 고통과 죽음을 면제받는 약속은 중간 상태 또는 영들의 세계에 있는 신실한 사람들의 상태와 직접 관계되는 말이다. 그 세계에서 이루어진 심판은 이전 것들에 종지부를 찍었다. 거기서는 더 이상 죽음이 있을 수 없다. 그 이유는 죽음이 불 못에 던져졌기 때문이다. 거기서는 더 이상 슬픔도 울부짖음도 고통도 있을 수 없다. 그 이유는 여인을 박해하고, 여인의 후손과 전쟁을 했던 용이 결국 그가 있을 자리에 처박혔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악과 잘못이라는 영들이 떼지어 다니던 중간 상태인 영들의 세계에 있던 신실한 자들은 천국으로 들리워졌는바 그들의 적들에 의해 당했던 고통이나 슬픔에서 자유로워졌다. 이와 같이 본문의 예언은 영들의 세계에 있는 신실한 자들에게는 즉각적인 결과인 반면, 똑같은 사건으로부터 결과하는 변경된 상태인 자연계와도 관계가 있다. 넓은 의미에서 천국과 땅은 천국에 있는 교회와 지상의 교회를 뜻한다. 그러므로 새 천국(a new heaven)은 천국에 있는 새 교회(a New Church), 새 땅(a new earth)은 지상의 새 교회(a New church)를 뜻한다. 지상에 있는 새 교회(the New Church)의 경우, 이 교회는 천국에 있는 새 기독교회(the New Christian Church)로부터 이고, 이 문단이 의미하는 천국에 있는 교회이다. 이 교회에 더 이상 눈물도 죽음도, 슬픔도, 울부짖음도, 더 이상의 고통도 없게 된다. 그 이유는 이전 것들이 다 지나갔기 때문이다. 그러나 새 처방(the New Dispensation) 아래에서는 어떤 측면이나 의미에서이든 슬픔이나 죽음이 중단될 것이라고 외골수 같이 이해해서는 안 된다. 인간이 자연계에서 태어나는 한, 악에 잘 기울려는 경향성이 있다. 그리고 재-탄생되어가서 영적이고 천적으로 만들어져야 함이 요구되고 있는 한, 거기에는 슬픔도 울부짖음도 죽음까지 존재한다. 그 이유는 슬픔의 종말이 기쁨의 시작이요 죽는 것은 영생의 출발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죄라는 것, 죽어야만 한다는 인간의 운명이 자연적 차원에서 폐지된다는 것이 아니다. 또한 우리가 익히 아는 기독교 삶에 있는 모든 자연적 차원의 시련들이 더 이상 없다는 것도 절대 아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이전의 처방에 속하는 악이나 잘못들이 생산하는 슬픔이나 죽음은 더 이상 없다는 말이다.
이 구절의 약속은 완전한 성취를 받게 될 것이라는 의미도 담고 있다. 처방 그 자체는 결코 죽지 않는다. 또한 이전의 처방들이 나열해 온 쇠퇴의 징조나 질병이 발생하는 조짐 따위는 보여주지 않을 것이다. 새 예루살렘(the New Jerusalem)이 내려옴은 거룩한 이 책 자체, 묵시적인 환상의 광경에 관을 씌우는 것에 해당되는 바, 새 교회(the New Church)는 하느님의 땅 위 처방에 관을 씌우는 것에 해당된다. 이 처방 안에서 주님의 신성한 목적, “교회로 하여금 티나 주름이나 그 밖의 어떤 추한 점도 없이 거룩하고 흠 없는 아름다운 모습으로 당신 앞에 서게 하심”이 천천히 그러나 온전히 성취되어 갈 것이다 (에베소5:27).
이제 이 구절의 언어가 지상의 교회에 관련하여 무엇을 뜻하는지 살펴보자. 다시 성경이 스스로 주석을 달아 놓은 곳을 찾아가보자. 세상에 오시어 주님이 하시는 일에 관해 이사야는 이렇게 말한다. “이 산 위에서 모든 백성들의 얼굴을 가리우던 너울을 찢으시리라. 모든 민족들을 덮었던 보자기를 찢으시리라. 그리고 죽음을 영원히 없애 버리시리라. 야훼, 나의 주께서 모든 사람의 눈물을 닦아 주시고, 당신 백성의 수치를 온 세상에서 벗겨 주시리라. 이것은 야훼께서 하신 약속이다” (이사야25:7,8). 주님이 죽음을 이긴 승리는 죽음의 권세를 가졌던 자(악마)에 대한 승리이셨다 (히브리2:14). 이를 수단으로 그분은 인간 구속이라는 위대한 일이 결과되게 하셨다. 주님이 인류를 해방시켜 주실 상태들이 예언서에서 죽음을 포함하는 고통이나 고뇌, 슬픔 등등 중의 하나로 묘사되어 있다. 그리고 주님이 지상에 계실 때 병자를 고치시고 고뇌하는 자를 위로하시며 죽은 자를 일으키시는 등등의 유익을 주는 일들은 인간에게 영적 건강과 생명을 회복시켜 주시는 한 걸음 더 진전된 위대한 일들을 표현한다. 그 다음 주님이 건설하시는 교회는 그분이 시작한 위대한 선한 일을 수행하게 되어 있다. 한 때이긴 하지만 교회는 정복하고 정복해 갔다. 그러나 일치 단결한 믿음, 사리사욕이 없는 사랑, 지칠 줄 모르는 노력이 계속되지 못한 것도 사실이다. 계시록은 악과 잘못들의 시작과 그 발전을 폭로해 놓고 있다. 그 폭로는 푸르스름한 말, 죽음이라는 이름을 가진 자가 탄 말, 그 뒤에 지옥이 따르는 이 말, 초기 교회에 심어졌던 아름답고 선한 모든 것, 이 교회 후손에게 유업으로 남겨졌던 아름답고 선한 모든 것을 마구 짓밟는 이 말에 대한 것까지 포함되어 있다. 이 모든 것이 미리 보여지고 미리 말해지고 있는 바 그에 대한 치료약 역시 준비되어야 한다. 주님은 두 번째 오시어 두 번째 교회를 건설하시기로 되어 있었다. 이 새로운 처방은 첫째 되는 부활, 두 번째 죽음을 제거하심으로 진행되기 위한 것이었다. 교회는 사람의 새로움 안에서 일어나기로 되어 있었다. 거기에는 더 이상 죽음도, 슬퍼함도, 외쳐댐도, 고통도 없게 되어 있었다. 그 이유는 이전 것들이 다 지나갔기 때문이다. 위의 세부사항들은 각기 하나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 의미 안에서 교회 속의 멤버들은 위로를 받고 계몽도 있게 될 것이다. 더 이상 없다고 하는 죽음은 영적인 죽음이다. 영적 죽음이란 영적 생명의 소멸을 말하는바, 이 영적 생명은 사랑과 신앙이다. 중단될 눈물, 슬퍼함 외쳐댐, 고통들은 소위 죽음의 한 부분들이다. 그 이유는 이것들은 죄의 결과들이고 그 중에서 죽음은 그 보상에 해당되기 때문이다. 죽음이 총액에 해당된다면 이것은 할부금에 해당된다. 따라서 죽음이 폐지되면 이것들 모두 역시 중단된다. 만일 악과 거짓의 확증된 상태의 죽음 이다면 죽기 전 고통의 상태는 죽음의 시작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충분히 이해되기 위해서는 그 원인들이 충분히 추적되어야 할 것이다. 슬퍼함의 뿌리에 놓인 것은 의지 안의 악이다. 눈물과 외쳐댐을 생산하는 것은 이해성에 있는 거짓이다. 그 반면 고통이나 수고함은 생활이라는 것에서 발생된다. 눈물과 외쳐댐은 서로 비슷한 의미를 가지고 있을 듯 여겨질 것이다. 그런데도 본문에서는 각각 언급되고 있다. 그 이유는 죄를 뉘우침에 두 가지가 있기 때문인바, 눈물(tear)은 진리의 손실을 슬퍼하는 표현이고, 외쳐댐(crying)은 진리 안에 있는 선의 손실을 탄식하는 표현에 각기 해당된다. 거듭나는 삶에는 경건하게 슬퍼함, 눈물짓는 회개, 그리고 악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으려는 꾸준한 수고함이 있다. 이미 살핀바와 같이 이런 사항들은 거듭나는 사람에서는 폐지 될 수 없는 절대요소이다. 이 약속은 위 요소를 충족시키는 사람에게 해당되는 약속이다. 이들에게는 정복 못하고 있는 악과 죄들로부터 슬퍼하는 경험은 더 이상 존재 않는다. 더 이상 있지 않게 된 죽음, 슬퍼함, 외쳐댐은 행복한 사건인 거듭나는 삶의 진보 동안 참회자가 고통하는 것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참회할 게 없다는 이들이 삶을 끝낼 때 고통 받는 회개 않은 죄의 결과들이다.
5. 하느님께서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시겠다는 약속을 하시고 죽음의 통치도 끝났고 슬퍼함도 외쳐댐도 고통도 사라졌음을 선포하신 뒤 이제 새로운 왕국의 시작을 발표하신다. 그 안에서 생명과 건전함 그리고 평화의 축복을 즐기게 된다. “그리고 왕좌에 앉으신 그분이 말하셨다, 잘 보아라, 나는 모든 것을 새로이 만든다. 그리고 그분은 나에게 말했다, 적어라; 그 이유가 이 말들은 참되고 신실하기 때문이다.” 새 천국과 새 땅이 나타났다. 새 예루살렘이 하느님께서 계시는 천국으로부터 신랑을 맞을 신부가 단장한 것처럼 차리고 내려오고 있다. 하느님의 집은 사람들이 사는 곳에 있다고 선포하셨다. 죽음과 슬픔은 더 이상 없다. 이전 것들이 다 사라져 버렸다. 다 새로워져 버린 것 같은 데 왜 모든 것을 새롭게 하시겠다는 말씀을 하셨을까?
이 하느님의 발표는 중간 상태에 있는 것들, 즉 선한 자는 천국에 올려지고 악한 자는 지옥에 던져지는 심판으로 생산되는 중간 상태의 새로운 모든 조건에 직접 관계하고 있다. “사라져버린 이전 것들”로 의미되는 중간 상태에 있는 것들의 상태는 의로운 자의 영으로부터 일어났으되 아직 온전해진 상태가 아니다. 그리고 불의한 자들의 영은 제 부끄러움을 모른 채 서로 혼합된 상태이다. 그래서 다니엘은 이런 변화의 본성과 결과를 이렇게 기록해 놓고 있다. “그 동안 많은 사람들이 단련을 받아 깨끗해질 것이다. 악한 사람들은 끝내 눈이 열리지 않아 악한 짓을 계속할 것이다…” (12:10). 선한 자이든 악한 자이든 모두 내향의 본질이 된 삶의 단순한 상태에 들어가서 끼리끼리 모이면서 이전 상태의 것들은 막을 내린다는 말이다. 옛 것이 끝남과 함께 새 것이 시작된다. 비록 이런 끝남과 시작이 원인의 세계인 영계에서 먼저 거행되었다 해도 결과의 세계인 자연계에서도 계속되어진다. 그렇다 해도 원인에 속한 것이 결과에 속한 것들에서 우리에게 꼭 같게 보여진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그 이유가 영계에서 변화된 것이 자연계에서 발생된다 해도 그것은 등차별로 상응에 의해서 일 뿐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위 발표 안에 표현되어 있다. 그 이유는 왕좌에 앉으신 분께서 뭔가를 만드시겠다고 말하시지 않고 모든 것을 새롭게 만드신다고 말하시기 때문이다. 이는 새 예루살렘의 하강에 관한 요한의 말과 일치한다. 그는 새 예루살렘이 하느님으로부터 천국을 통해 내려오는 것을 보았다. 이는 진리가 계속 내려오는 것을 표현하고 이 진리가 인간 마음에 계속 받아들여지는 것, 그리하여 세상에로 내려오는 것까지 표현하는 것이다. 이런 가운데서 주님께서는 그분의 영과 말씀을 수단으로 꾸준히 역사하시어 모든 것을 새롭게 만드신다. 그러나 우리가 예상하려 해서는 안 되는 것이 있다. 어떤 큰 변화가 자연계에서 있었을 경우 그 원인되는 것과의 연결을 인식할 수 있으리라는 것에 대해서이다. 비록 이런 연결은 있을지언정 알려지지는 않는다. 이외에도 영계에서 있어진 크고 유익한 변화들의 결과가 영적 품성 속에 언제나 있는 것도 아니고 그것들이 천국의 원인을 암시하도록 언제나 나타난다고 일괄적으로 상상하고 있어도 안 된다. 이렇게 말하는 이유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자연계에서이다. 사실 이는 영계에서도 마찬가지라 생각된다. 모든 것을 새롭게 한다는 것은 이전 것의 사라짐이 반드시 선행되어야 한다는 것, 그 이유는 옛 것들의 심판도 없이 끝을 맞이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주님께서는 전쟁이나 격변 또는 환난 같은 것이 먼저 있으면서 그분의 오심이 있다고 말하시고 있다. 진짜와 진짜인 듯 보이는 것, 진짜와 가짜, 선과 악 사이의 구별을 명확히 하려는 경향이 있는 것은 무엇이든, 그 둘 사이를 구분하려드는 것은 무엇이든, 그리고 선을 드높이고 악을 내던지는 것, 이런 것들 모두가 심판의 속성이다. 그래서 이런 것들은 싸움이나 환난 같은 것 없이는 좀처럼 결과 되지 않는다. 이런 효과를 가지는 세계에서 거행되는 것은 무엇이든지 정의의 통치에 관한 약속이다. 둘째는 인간의 영적 측면에서 이다. 인간의 영적 상태는 그 자체가 시민 생활이나 도덕적 생활 안에서 뿐만 아니라 종교적인 견해나 행동지침 안에서 분명해진다. 영적 원인들은 가장 적극적인 생활 국면에서 결과 된다. 인간 마음의 동기나 총명들은 그것과 잘 어울리는 수단으로 해서 목적을 달성한다. 그러므로 비록 원인이 영적이라 해도 직접적이고 보일 수 있는 결과들은 자연적일는지 모른다. 참으로 영적 원인의 자연적 결과가 먼저 나타날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은 타당할 수도 있다. 그 이유는 진보의 질서로 보면 영적인 것이 먼저라 할 수 없고 오히려 자연적인 것이 먼저이면서 그 뒤를 이어 영적인 것이 오기 때문이다. 각 개인 또는 세상도 낮은 측면에서 높은 측면으로 삶이 이루어져 간다. 다시 말해 더 높은 것들은 더 드높은 선용이 결과 되게 하기 위해 낮은 것들을 도구로서 채용하거나 낮은 것 안으로 들어가 그것들을 도구로 사용해서 높은 것의 성취를 가져오게 한다. 마치 지상의 삶이 천국의 삶으로 승강되는 수단으로 지정되어 있는 것과 같다.
이미 말했던 바는 중간 상태의 모습, 심판에 앞서 있던 것, 즉 수많은 영들에 관한 것이다. 그들의 마음은 어둠에 쌓여 있어서 이들은 진리의 빛이 하느님께로부터 천국을 통해 인간의 마음에로 내려오는 것을 방해하고 있었다. 마치 짙은 구름이 지상에 닿으려 하는 태양광선을 차단하는 것과 같다. 이 어둠이 생산한 정신적 희미함은 이미 언급한바 있다. 이 장애물이 거두어졌다. 그래서 정의의 태양으로부터 오는 빛은 이제 어떤 장애도 없이 인간 마음에로 흐를 수 있다. 이렇게 안쪽으로 흐르는 진리의 빛과 더불어 동시에 사랑의 불이 그 안에 있어 진리에 관한 지식을 새로이 밝히 알게 해준다. 이렇게 안쪽으로 있는 영향과 바깥쪽에 있게 되는 수단들이 하나로 묶여진 행동으로 새로운 자극과 방향이 마음에 주어져 더 진정한 믿음, 더 순수한 사랑, 더 거룩한 삶을 얻으려고 노력하게 한다. 어찌됐든 확실히 해둘 말이 있다. 이런 신성한 의도가 성취되는 것도 단순한 종교적 감정 위에서 행동하는 것만으로는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이유가 빛은 선한 자이든, 악한 자이든, 영적 수준이든, 자연적 수준의 마음이든 똑같이 비쳐주어 각 마음의 주제나 추구함이 각기 특이한 연구를 형성하도록 계발해주기 때문이다. 모든 지적인 빛의 근원은 신성이고 그 본성은 영적이다. 주제가 무엇이든 진정한 빛이 뿌려져서 그 빛을 받은 마음에서 설사 자연적 수준이 된다 해도 어찌됐든 그 빛은 영적일 뿐이다. 따라서 올바르게 방향이 잡혀 있다면 그 빛은 영적 삶을 위한 선용에 이바지하여 종교적 선함과 진리의 원인을 진보시켜 준다. 과학자나 학문을 경주하는 사람들이 자기 분야를 연구하는데 열심을 내도록 하는 동기가 무엇이든 간에, 그 결과 끌어내지는 결말이 무엇이든 간에 그것들 모두는 이집트인에 불과할 뿐이다. 과학이나 각종 학문들은 이집트인과 같이 이스라엘을 풍부하게 해주지만 때로 망쳐 놓기도 한다. 이런 것들의 운명은 기브온 족(여호수아9:27)과 같아 하느님의 집을 위해 나무를 패고 물을 길어 올리는 일에 한정되어야 할 것이다. 과학의 발전이나 지식의 확장은 신성한 빛의 새로운 유입의 결과들에 존재한다. 어쨋든 지식을 생산해서 배분해주는 이들은 문명사회에 기여하는 개척자로서는 칭찬할만한 업적이라 생각된다.
모든 것을 새롭게 만드신다고 선언하신 뒤 요한에게 명령된 것은 “기록하라. 이 말은 확실하고 참된 말이다” 이었다. 기록함이란 확증이다. 그 이유는 씌어진 것은 정착되어 고정되기 때문이다. 인간 측면에서 이를 생각해본다면, 각자의 원리들이 행동에 옮겨져 생각과 애착에 관한 그의 상태가 확증될 때 그것은 각자의 심정이라는 돌 판에, 또는 자기 생명의 책에 새기게 된다. 이렇게 새긴 것은 영원히 남아 있게 된다. 새 피조물이 된 이들과 함께 “확실하고 참된 말”이 그들 존재의 전부라고 기록된다. 이 말은 주님의 말씀이다. 이 말이 요한의 손에 의해 기록된바 이는 신성한 진리들이 사랑의 힘에 의해 심정에 기록된다는 뜻이다.
6. 위 발표에 이어 “다 되었다”라고 말씀하셨다. “다 되었다. It is done” 라는 신성한 선포는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때 하신 말씀, ”다 끝났다. It is finished!” 라는 선포와 같은 취지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본문의 선포는 십자가로부터가 아니라 왕좌로부터이고 고통으로부터가 아닌 신성화 된 인성으로부터이다. 그럼에도 위 두 말씀은 비슷한 사건에 연루되어 있다. 십자가의 예수께서 “다 끝났다” 라고 말하심은 유대교회의 끝장을 선언하신 것이다. 본문의 “다 되었다”는 첫 기독교회의 끝장을 선포하신 것이다. 그러나 어떤 처방의 종료는 새로운 처방의 시작이다. 유대교회가 막을 내렸을 때 기독교회가 시작되었다. 마찬가지로 첫 기독교회의 끝에서 두 번째 기독교회가 시작되었다. 첫 강림의 교회가 사라졌을 때 두 번째 강림의 교회가 나타났다. 위 두 사건은 똑같은 성질이고 유추적이다. 그러므로 두 번째 교회의 본성은 첫 번째 교회의 본성에서 유추하여 알 수 있을는지 모른다. 그러므로 간략히 비교해보자.
비록 주님께서 “다 끝났다”고 선포하신 것이 유대교회의 끝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유대교의 성경의 끝은 아니었다. 다시 말해 성경이 폐지된 게 아니라 그 면모가 변화되었던 것이다. 율법과 예언서는 그대로 존재하면서 유대주의가 사라져 버리고 그 대신 기독주의가 도래했다. 예식에 관한 법들은 글자 그대로에서는 폐지되었다. 그러나 그것이 영의 차원에서 건설되었다. 성직수행에 관한 법은 그리스도의 제물에서 가장 높게 성취되었다. 그래서 그분은 그것을 십자가에 못박아 제거하셨다. 하느님께 우리를 산제물로 바치는 예배와 의무수행 속에서 위의 법들은 우리에게서도 영적으로 성취되고 있다. 도덕적 수준의 법 역시 그대로 있지만 그것은 유대인들에게 있어 왔던 것같이 하나의 규율이라는 것 대신 기독인들 사이에 원리로서 건립되어 있다. 한마디로 더 높고 더 순수한 정의가 더 낮은 수준의 정의를 계승한 것이다. 그림자가 실제에 길을 놓아 준 셈이다. 유대주의는 사라지고 그 대신 기독사상이 일어섰다. 참으로 유대주의는 붕괴된 것이다. 온전하게 유대주의가 남아 있다고 하는 것조차도 끝을 맺지 않고는 계속되지는 못했을 것이다. 어쨌든 유대주의는 또 다르고 더 나은 것을 위해 길을 예비할 의도로 처방된 일시적인 것 그 이상은 결코 아니다. 한마디로 인간을 그리스도께로 데려오는 학교의 선생 수준에 불과했었을 뿐이다.
이상 살핀 순서로 첫 기독교회와 둘째 기독교회에 관해서도 말해야 할 것 같다. 참으로 기독교회 자체는 최종적인 처방이다. 그러나 처음 건설된 기독교회는 완전함에 있어서 충분할 수가 없었다. 비록 유대교회보다 더 높은 수준에 선 것은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가장 높게 승강된 것은 아니다. 인류의 영적 측면은 그리스도가 등장하실 때까지 계속 아래로만 향하고 있었다. 맨 바닥까지 이른 상태에서 시작된 첫 기독교회가 단번에 진리의 전부를 붙잡는다거나 가장 높은 우수함을 실감할 수 없는 일이다. 슬기로운 계획에 따라 주님께서는 첫 기독교회가 진리를 청종 할 수 있는 만큼에서만 그분의 진리를 주셨다. 그분께서 제자들에게 미리 말해두신바, “나는 아직 할 말이 많지만 지금의 너희는 그것을 들을 수가 없다” 이었다. 만일 교회가 총명과 미덕에서 더 높은 상태에로 부상했다고 생각해본다면 이것은 기독교 자체가 더 높게 발달해서 달성된 게 아니라 선함을 더 완전하게 발휘하고 진리를 더 분명하게 식별함으로 달성된 것이라고 생각해야 할 것이다. 큰 변화는 알아차릴 수 없는 수단과 분명히 구분되는 등차를 수단으로 결과 되어졌다. 자연계 안에서 생명은 계속적인 발달과 더불어 불연속적인 등차에 의해 성숙된 결과를 만들어 낸다. 어린 아이가 성인이 되지만 그것은 몸이 성장하고 마음이 팽창되어서만이 아니라 태어나기 전에 존재한 능력들, 그리고 마음이 생명과 총명에 있는 분명히 구분되는 더 높은 등차로 승강함으로 해서 이루어진 결과이다. 이런 방법으로 더 높은 처방은 더 낮은 처방을 계승해 간다. 따라서 두 번째의 교회는 이미 첫 번째의 교회 속에 있었다. 마치 성인이 아기 속에 이미 있었던 식이다. 두 번째 교회는 발달 단계나 완전함에서 첫 번째 교회보다 더 높은 상태이다. 옛 것들은 사라져 버렸다. 모든 것은 새롭게 되었다. 첫 기독교회는 붕괴되었다. 이제 새로운 교회가 요구되는 것 외에 더 다른 것은 없으리라. 그러나 타락 때문에 요구되어 진다고 말하기보다는 목적에 다가가는 과정으로 또 다른 교회를 수단으로 완성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왕좌에 계신 주님께서 “다 되었다” 라고 말하신 뒤 첨가하신 말씀이다. “나는 알파요 오메가, 곧 시작과 끝 이다.” 이 책의 첫 부분과 마지막 부분에서 발견하는 이 선포는 모든 완전함이 되신 그분, 무한한 사랑과 지혜, 교회 원리의 근원이자 목적이 되는 분, 우리 신앙의 저자이시며 마무리 지으시는 분과 연결되는 새로운 질서를 표현하기 위해 도입된 말씀이다. 그러므로 이렇게 계속하신다. “나는 목마른 자에게 값을 치룸 없이 생명의 물의 원천으로부터 줄 것이다.” 주님은 근원되시고, 그분의 말씀은 살아있는 원리, 생명을 주는 원리로서의 진리의 샘이다. 진리의 생명은 사랑이다. 근원적 측면의 진리는 살아 있다. 그 이유가 근원되는 측면 안에서 신성한 진리는 신성한 사랑과 하나 되어 있기 때문이다. 오로지 인간 마음 안에서만 이 둘은 분리되어 질 수 있을 뿐이다. 이 분리가 파멸의 원인이 된다. 따라서 이 분리는 교회 파멸의 원인도 되는 것이다. 교회가 파괴되는 원인은 사랑과 진리의 분리이고 교회가 회복되는 원인은 사랑과 진리의 하나 됨이다. 회복되는 교회에 주님께서는 다시 생명수를 주시는 분으로서 그분 자신을 밝히 알게 하신다. 그러나 그것은 목마른 자에게만 주어질 뿐이다. 그 이유는 진리를 바라고 있어야 주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진리 자체를 위해 진리를 바라는 사람, 이는 선을 위해 바라는 것인바, 진리가 가르쳐지고 진리를 받게 된다. 그 외 누구도 생명의 물을 마실 자는 없다. 사랑 없는 진리는 실제 분야인 쓸모 있음 속에 있는 진리가 아니다. 마치 얼음이 되어버린 물과 같다. 따라서 따뜻함이 얼어붙은 것을 자유롭게 할 때까지 물로서의 사용을 충족시키지 못한다. 그래서 시편 기자가 이렇게 노래한다. “당신 말씀 보내시어 모두 녹게 하시고 바람 불게 하시어 물 흐르게 하신다” (147:18). 목마른 자에게 거저 주어지는 물의 의미는 무엇일까? 태양이 그 영향력을 보류할 수 없는 것보다 하느님의 선물은 더 보류할 수 없다. 이사야가 노래했듯 “돈 없이 ….값없이” 수여되는 것이 하느님의 선물이다 (55:1). 하느님의 선물을 두고 제 것이라고 주장할 수 없다. 그 선물과 동등한 어떤 것도 가져다 놓을 수 없다. 그것들을 받게 될 때 그것이 자신 고유에 속한다고 간주할 수 없다. 독선에 속하는 모든 사상, 이 사상으로 싹틔운 모든 느낌이 없는 것이 주님의 새 나라에 있게 되는 독특하게 구별되는 품성들이 지니는 특질이다. 이 나라에 속한 사람들은 왕의 선물을 공적을 내세우지 않는 순수한 자비 속에서 자기들에게 대가 없이 주어지는 선물로서 간주한다. 이와 같은 진리가 주님에 의해 제자들에게 가르쳐지고 있다.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마태10:8). 그런데 이런 진리들이 뒤집혀 있다. 은총은 인간에게 값 없이 온다고 여기면서도 그것은 하느님으로부터 값 없이 오는 게 아닌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그리스도가 그것을 구매했다. 예수께서 모든 값을 다 지불했고, 인간은 그분을 믿기만 하면 구매된 선물을 받는다고 설득하고 있다. 그리하여 값 없이 주신다는 하느님의 말씀을 박탈해서 하느님의 영광을 가리고 있다. 색깔이 다른 정의에 있는 믿음에 구원이 의존되도록 인간은 유도되고 있는 것이다.
7. 원 저자로부터 값 없이 받게 되는 선물인 진리는 그것을 받는 이들에 의해 사용되어야 한다. 그 진리의 첫 번째 사용은 제 잘못과 악을 극복해 가는데 있다. 더불어 선함과 진리를 실지로 획득해서 영원히 소유하게 하는 필수적인 수단이 되어야 한다. 이럴 경우 거저 주는 선물에 대해 다음의 선포가 따라온다. “극복하는 자는 모든 것들을 상속받듯 소유할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의 하느님 일 것이다, 그리고 그는 나의 아들 일 것이다.” 극복함이 의미하는 것은 이미 살핀바 있다. 극복해 냄(이겨 냄)은 일곱 교회의 공통된 의무사항이었기 때문이다. 이 구절에서는 모든 것을 상속받는 행복한 결과만을 지적해 본다. 선하고 참된 모든 것은 악하고 거짓된 모든 것을 극복하는 사람에게 상속된다. 이는 영원한 법칙이요 변경이 없는 질서이다. 이런 사항이 매우 이상한 듯, 또는 매우 위험한 교리를 담고 있지 않을까 라는 생각도 들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에 대한 설명 자체가 그 진리를 이해하게 해줄 것이다. 악이 인간 심정의 땅을 이루고 있는 한 어떤 선도 그 땅에 뿌리를 내릴 수 없다. 다행히 악이 제거된다면 진리의 씨를 옥토가 받게 되는바 풍성한 결실을 갖게 된다. 그러므로 악의 제거는 선을 받고 행하는 필수적인 수단이다. 안쪽에 있는 악을 극복하지도 않은 채 바깥쪽에서 선을 행할 수도 있다. 이럴 경우의 선은 겉치레의 선이거나 위선일 수밖에 없다. 이는 선을 사랑해서 결과 된 선행이 아니다. 선행으로 기대되는 보상인 명성, 칭찬을 위해 외관을 중시한 선행 일 뿐이다. 그러므로 모든 것을 상속받는 이들은 승리한 자들이어야 할 것이다. 이들은 천국인 모든 품위들을 내향으로 상속받은 다음, 외향의 상속인 천국 자체 즉 순수성과 미덕의 거주지인 천국을 받게 된다. 자신 속에 든 악을 정복하는 이들은 자기 하느님으로 주님을 가지고 있는바 하느님의 아들이다. 하느님에게서 태어난 자라야 하느님의 아들이다. 이렇게 새로이 출생하려면 완전한 변화 즉 옛 것이 사라지고 모든 것이 새로워졌을 때 가능하다. 이런 개별적인 변화는 모든 다른 것들이 변화되게 해주는 바탕이 된다. 그러므로 “천국과 땅이 사라지고 새 천국늘과 새 땅이 창조되고… 모든 것이 새로워진다”가 암시한 넓은 측면의 변화에 이어 개별적인 변화가 첨가되어 있는 것이다.
8. 선에 속한 모든 것이 자아를 충실하게 부정하는 사람들에게 상속되는 반면, 불성실한 이들은 자기들의 죄과라는 참혹한 결과로 위협받게 된다.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 신실하지 못한 자, 역겨운 자, 살인자들, 색골들, 마술사들, 우상 숭배자들, 모든 거짓말쟁이들은 불과 황이 타고 있는 호수 안에 자기들의 몫이 있을 것이다; 이것이 두 번째 사망이다.” 심정과 생활 속에 든 악을 정복함에 반대되는 이들은 그 악을 탐닉하는 이들이다. 천국적인 상속에 반대되는 것이 불과 유황이 타는 것이다. 하느님에게서 태어남에 반대되는 것이 둘째 죽음이다. 이러한 두 가지 부류 또는 상태는 또 다른 교훈을 가르쳐 주기 위해 날카롭게 대조를 이루고 있다. 새로운 상태는 선과 악, 진리와 진리의 왜곡됨 사이의 분명한 구분을 야기시킨다. 교회 또는 종교가 퇴조될 경우 위 구분은 더욱 덜 분명하게 보여져 아예 구분이 없을 정도까지 쇠퇴된다. 자각 의식, 이는 자기 심정이 선과 악 중 어디에 있는지를 구분해 준다. 또는 하느님에 속한 것과 자신에 속한 것이 어떤 것인지 구별해주는 의식 세계이지만 쇠퇴되는 교인들은 이 의식을 상실하게 된다. 이들은 악을 극복하기 전에 반드시 그 악이 죄가 되고야 만다는 것을 알아야만 한다. 그 악과 싸우겠다고 결심하기 전에 그 악이라는 멍에 밑에 남아 있게 되면 필시 맞이하게 될 참혹한 결과에 대해 정식으로 통감하고 있어야만 한다. 모든 잘못들은 이해성을 흐리게 하고, 양심을 무디게 하려는 경향성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이 경향성은 거짓된 안전의 상태로 유인해낸다. 한마디로 선과 악, 생명과 죽음 사이에 놓인 구분을 말살시킨다. 모든 진리는 이와 정반대 되는 경향성을 가지고 있다. 우리 속의 잘못된 것들은 행동보다 신앙을 드높이려 한다 든가, 필수되는 내향의 경건함보다는 형식적인 경건을 치켜세워 보려는 결과를 낳게 한다. 진리는 매우 귀중하다. 그 이유는 이해성 위에 뿌려놓은 왜곡된 신앙이 덮고 있는 베일을 찢어 그 본성이 드러나게끔 해주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심정의 진정한 상태가 어떤지 밝히 알게 해준다. 따라서 악이 그 자체를 방어하고 은닉하는 수단인 궤변을 간파하게 해준다. 진리는 선의 조언자요 성직자이다. 이외 더 다른 기능이 진리에게는 없고 더 다르게 사용되지도 않는다. 이 구절과 비슷한 표현이 22장 15절에 다시 있으므로 그곳에서 한꺼번에 설명하겠다.
9,10. 요한은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느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 오는 것을 보았다. 이제 그는 또 다른 관점에서 이 성을 보게 된다. 이 관점은 그로 하여금 세세한 부분까지 감지해서 서술할 수 있게 해주고 있다. “그리고 일곱 마지막 재앙들로 채워진 일곱 대접을 가진 일곱 천사들 중의 하나가 나에게 왔다, 그리고 그는 나에게 말했다, 말하기를, 오라, 내가 어린 양의 아내, 신부를 너에게 보여주겠다. 그리고 그는 나를 영 안에서 크고 높은 산 위로 운반했다, 그리고 나에게 하느님으로부터 천국의 안에서 밖으로 내려오는 큰 도성, 거룩한 예루살렘을 보였다,” 이 성에 관한 새로운 관점, 그것에 딸린 주변 모습들에 귀감되는 의미가 담겨 있을 것임은 의심할 여지가 누구도 없으리라 본다. 평지에서도 볼 수 있었던 이 성을 보기 위해 왜 이 선견자는 크고 높은 산꼭대기로 들리워야만 했을까? 이는 심정 상태의 변화와 그에 상응되는 어떤 행동을 표현해주기 위해서 였다. 다시 말해 요한이 영으로 본 것을 교인도 보려면 요한같이 들리워져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주고 있다. 요한이 처음에 본 새 예루살렘에 관한 모습은 일반 측면에 속하는 것, 즉 전체로서의 윤곽을 본 것이다. 이제 그가 보게 되는 도성은 세부 측면에 속한다. 일반적인 것을 보고 그 다음 세부사항을 다시 보는 절차는 교회의 교리를 보고 이해하는 모든 사람들에게도 똑같이 적용되는 절차이다. 교인들이 처음 납득하는 것은 넓은 측면의 교리들이고 두 번째 납득되는 것은 세세한 측면이 된다. 보다 더 내면에 속한 광경은 마음에서 열려지는 영적 지각이 보다 더 내면의 수준에 있어야 한다. 이 선견자가 들리워진 크고 높은 산이란 보다 더 내면에 속하는 수준이다. 그런 이유가 본성 측면에서 높다는 것은 영에서는 내면에 속하는 것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어찌됐든 이 선견자가 승강된다는 말 자체만으로도 교훈적이다. 천사가 요한에게 “오라” 라고 말했다. 이 천사는 마지막 일곱 재앙이 담긴 일곱 대접을 손에 든 일곱 천사 중의 하나였다. 이 천사들은 천국에서 열리워진 증거 장막의 성전에서 왔다. 이들은 가장 높은 천국, 천적 수준의 사랑인 주님을 사랑함으로 이루어진 천국의 천사들이다. 이런 사랑으로 구별되는 이 천국이 본문의 크고 높은 산이다. 가장 완전함 속에서 진리를 보려면 가장 높은 천국에 있어야 한다는 것, 따라서 우리도 이렇게 되려면 가장 높은 천국의 천사들이 원리로 삼는 가장 높은 사랑의 상태로 올라가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시고 있다. 요한이 들리워진 이 천국의 천사들은 무엇보다 먼저 주님을 사랑한다. 그들이 이렇게 높은 사랑 안에 있듯 가장 순수한 빛 가운데도 있다. 그 이유는 사랑과 빛은 언제나 상응되기 때문이다. 이 천사들은 더 높은 수준에 도달해서 거룩한 성을 처음 보게 된 이들을 거기로 초대해서 빛과 영광이 충만된 상태에서 그 성을 볼 수 있게 해준다. 이들은 자기들이 거기로 운반되기를 기다린다. 그들은 자신 스스로의 능력이나 총명으로는 올라갈 수 없다. 그들은 천사들의 영향력에 의해 끌어당겨지고 천사들의 지혜가 안내해 주어야만 가능하다. 간단히 말해 하느님의 영향을 받아 그분의 지혜로서만 거기에 오를 수 있다는 말이다. 그 이유가 천사란 그분에 대한 특사 또는 그분을 대리하는 이들이기 때문이다. 산에 오를 의무 그리고 거룩한 성을 잘 볼 수 있는 유리한 위치를 확보해야 하는 등등 모두가 “크고 높다”라는 말로 표현되고 있다. 크다(great)란 선함을, 높다(high)란 진리를 표현한다. 선함과 진리를 획득하지 않고서는 어떤 것으로도 사랑의 상태에 도달할 자는 없다. 우리가 주님을 선함과 진리 자체로서 여겨 사랑할 때 주님을 사랑하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진리와 선함을 수단으로 사랑 안으로 승강되어야 한다. 이런 수단들을 사용해서 주님을 사랑함이라는 “크고 높은 산” 위에 서게 될 때 요한이 보았던 것을 볼 수 있으리라.
사랑의 이 산은 성경의 특별한 장소들을 점령하고 있다. 모세는 사랑의 법을 받기 위해 시내산 꼭대기에 올라갔다. 그럼에도 이 계명의 첫 돌 판은 백성들의 죄로 인해 깨어졌다. 요한이 거룩한 성을 보기 위해 산에 올려졌듯이 모세는 느보산 비스가 봉우리에 올라 거룩한 땅을 관망했다. 예수께서는 세 제자를 데리고 변모하신 산에 오르셨다. 그런데 산의 의미는 반대적 측면도 있다. 그것은 자아를 사랑함(self-love)이요 이것은 하느님을 사랑함에 정반대 되는 사랑이다. 이를 잘 표현하는 대목은 예수께서 광야에서 시험받으실 때이다. 악마는 예수를 드높은 산에 올려놓고 세상 모든 왕국을 보여 주면서 내 앞에 절을 할 경우 이 모든 것을 가지도록 해주겠다고 유혹했다.
요한이 높은 산에로 들리우기 전 그는 신부되는 교회를 보았었다. 천사는 신부이자 아내로서의 교회, 어린 양의 신부요 아내인 교회를 요한에게 보여주었다. 교회가 주님과 결합하기 위해 단장했을 때 그 교회는 그분의 신부가 된다. 결합했을 때 그 교회는 그분의 아내가 된다. 처음에는 거룩하다고 불렸던 이 도성은 크다(great)라고도 불리고 있다. 그 이유가 거룩(holy)은 진리와 신앙 측면에서의 교회의 상태를 표현한 것이고 크다(great)란 선함과 사랑의 측면에서 교회의 상태를 표현하기 때문이다. 거룩함에 크다 라는 말이 덧붙여진 것은 마음이 더 높게 승강될 경우 더 높은 상태를 가져오기 때문이다. 한 개의 거룩한 예루살렘인 듯 보이면서 도성이 내려오고 있다. 그 이유는 거룩한 도성이 존재하게 해주는 원리 또는 그 원리로 되어지는 교회는 인간의 심정과 마음 안으로 하느님께로부터 천국에서 계속 하강하기 때문이다. 참으로 교회는 교리와 예배에 관한 유기적인 형체를 가지고 있다. 모든 생물체처럼 교회도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과 지혜라는 생명의 원리를 받도록 의도되어 있다. 마치 자연의 유기적인 형체들에 태양의 열과 빛이 흘러가는 것과 똑같다.
그냥 지나칠 수 없는 두 개의 서술이 있다 거기에는 서로 구분되는 사항이 있다. 먼저 거룩한 성은 하느님께로부터 천국에서 내려온다고 말해진 2절(…from God out of heaven)과, 천국에서 하느님께로부터(…out of heaven from God)라는 10절의 구분이다. 사실 두 문장은 글자대로 라면 어구의 위치(transposed)가 바뀐 것 외에는 하등 차이가 없다. 그러나 영적 의미일 경우 이는 단어(word)로 되는 게 아니라 생각(idea) 차원이므로 거기에는 확실한 전환(transposition)이 존재한다. 전자는 하느님이라는 단어가 앞에 놓이고 후자는 뒤에 위치되어 있다. 이는 천국과 교회에 속하는 모든 것에서, 그리고 신앙 수준에서 선행 수준으로, 지혜 수준에서 사랑 수준으로 건너가는 이들 안에서 처음과 마지막이 되심을 표현하기 위해서이다.
11. 교회를 구성하는 세부사항들, 탁월한 아름다움의 형체를 만들도록 조화를 이루는 배합이 어떠한지 이제 이렇게 묘사되고 있다. 이 교회의 첫 모습, “(이 성은) 하느님의 영광을 가지고 있고, 그녀의 빛은 마치 수정 같이 빛나는 벽옥 같은 귀한 돌 같았다.” 영광과 빛(glory and light), 이는 형상(image)이나 비유(analogy)만큼이나 잘 표현되고 친밀감이 있어 매우 비슷한 듯 여겨지기도 하지만 서로 구분되는 의미는 살펴두어야 할 것이라 생각된다. 영광은 빛 속의 광채이다. 차후 23절에서 언급되겠지만 이 도성의 영광과 빛은 태양과 달의 빛에 상당하는 말이다. 빛은 진리의 상응물이고 빛 속의 광휘(radiance of light)는 사랑의 상응물이다. 성경에서 반복되는 하느님의 영광은 신성한 사랑으로 빛나는 그분의 신성한 진리이다. 열이 없는 빛은 영광이 빠져 있는 것과 같다. 달빛은 말 그대로 매우 아름답지만 광휘가 없다. 태양의 따뜻한 빛은 그 빛을 받은 모든 것에서 방광(irradiate)한다. 태양이 뜨고 저무는 광경, 정오의 뜨겁게 밝은 태양빛은 새 예루살렘을 밝히는 하느님의 영광에 대한 어렴풋한 형상(image)이다. 거룩한 성의 빛은 그 성의 영광과 구별되는바 그것은 수정만큼 맑은 벽옥같이 지극히 귀한 보석과 같다. 새 예루살렘의 기초 중의 하나인 이 벽옥에 관해서는 차후 언급될 것이다. 이 구절에서는 이 보석이 매우 귀중하다는 것, 수정만큼 맑다는 점만을 강조함으로 충분하리라 본다. 돌(stone)은 진리의 표현물이다. 주님은 진리 자체되시는 분으로서 돌(the Stone)이라 불리신다. 말씀을 진리로 이해할 때 이로부터 교회는 즉각 교회의 빛과 영광이 파생된다. 이때 돌은 진리의 글자적 수준의 의미를, 빛은 진리의 영적 수준의 의미를, 영광은 진리의 천적 수준의 의미에 대한 표현물이다. 말씀의 글자적 수준의 진리 가운데서도 어떤 진리의 경우는 보통으로 흔한 것, 그 다음 어떤 것은 귀한 것, 마지막으로 어떤 것은 다른 진리보다 더욱 귀할 경우가 있다. 귀한 돌 즉 흔히 보석이라 불리는 돌은 빛을 투과시키거나 아름다운 색깔로 빛을 되튀겨 준다. 보다 완벽하게 빛을 투과하거나 되튀겨 줄수록 더 귀한(값진) 돌이다. 말씀의 글자적 수준에 있는 진리에서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글자적 수준의 진리가 정신적인 눈에 영적 의미를 보다 더 완전하게 투과하거나 되튀겨 준다면, 정확히 말하면 우리 속에서 영원히 빛나는 “정의의 태양”의 빛을 보다 완전하게 되튀겨 줄수록 말씀의 글자는 더욱 값진 보석이다. 그렇다고 이렇게 구분해보는 진리의 품질은 본질적 측면에서가 아니라 관계 측면에 불과할 따름임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말씀 안에 있는 똑같은 진리라 해도 마음의 수준이 다를 경우 다르게 된다. 어떤 마음속에서는 모든 진리가 한결 같이 평범한 돌밖에 안되지만 어떤 마음 속에서는 한결같이 보석일 경우가 있다는 말이다. 새 예루살렘의 구조물에 들어가 있지 않은 보석은 하나도 없다. 새 교회 안에서 말씀 속의 모든 진리들은 투과성을 지니고 있다. 그래서 말씀의 글자는 말씀의 영광을 감추여 놓이게 하는 덮개가 더 이상 아니고 영광을 전달하는 매개체가 되어 있다. 말씀의 글자는 “지극히 귀한 돌, 수정처럼 맑은 벽옥(jasper stone)” 이다. 벽옥이 영적 의미에서는 빛을 발하는 말씀의 글자적 의미가 지니는 일반적 품성을 표현한다. 이런 이유로 벽옥은 이 도성의 구조물에 다른 보석보다 더 많이 들어가 있기도 하다 (18절). 어찌됐든 기억해 둘 것 하나는, 귀중하고 영화로운 도성에 거하게 될 사람은 그 도성에 걸맞은 자격을 갖춘 이들, 그들 안에 귀중함과 영화로움을 지닌 이들이라는 것이다. 그들 마음의 성벽에서는 겸손이 발견되고 그들의 행동은 정의로 건설되어 있다.
12-14. “(이 성은) 크고 높은 벽을 가지고 있고, 열 두 문들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문 위에 천사들이 있고, 거기에 이름들이 쓰였는데, 그것은 이스라엘의 아들들의 열 두 지파의 것들 이다. 동쪽에 세 문들, 북쪽에 세 문들, 남쪽에 세 문들, 서쪽에 세 문들(이 있다). 그리고 도성의 벽은 열 두 기초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것들에 어린 양의 열 두 사도들의 이름들(이 있다).” 도성은 안전을 위해 성벽이 있다. 이 교회는 보호가 필요하다. 그러므로 방어의 수단이 장치되어 있다. 보호가 필요한 이유는 죄의 결과들 때문만이 아니다. 더구나 교회 방어의 수단이 인간의 계획이나 책략 같은 것도 아니다. 이런 것들은 인간의 일에 속한 것일 뿐이요 오히려 하느님의 일에 그늘만 남길 뿐이다. 자연을 총망라하고 인간의 육체까지 포함해서 각 본체들의 안쪽에 있는 지극히 중요한 부분들은 섬세한 덮개로 씌워 있고 바깥으로는 강한 벽에 의해 보호되고 있다. 내향에 속하는 생명의 원천 되는 교회의 원리인 사랑과 선행은 보호되어야 할 중요도가 자연물 그 이상일 것은 재삼 거론할 필요도 없을 것이리라 본다. 이 법칙은 마음의 영역 모든 세계에 해당되고 더구나 하느님의 보좌까지 미치고 있는 법이다. 이를 말해주는 것이 왕좌 둘레에 있는 거룹들(cherubim)이다. 하느님의 보좌인 천국도 그 보존을 위해, 뿐만 아니라 유지 존속되기 위한 섭리 측면에서 보호가 요구된다. 천국도 보호가 필요한데 교회의 경우는 더욱 요구 될 것이다. 그럼으로 시온은 성벽과 성루를 가진 것으로 묘사되고 있다 (시편48:13). 그리고 주님께서는 천국을 말씀하실 때, 포도원을 세우고 거기에 술틀과 망대, 울타리까지 처놓은 사람에 비교하고 있다 (이사야5:1-2). 주님께서 시험받으실 때 그분 스스로도 적에 대한 방어 수단을 고용하셨다. 그분이 고용한 그 수단은 무엇인가? 사탄의 공격과 간계를 격파하는데 그분께서는 씌어있는 말씀 속의 진리를 사용하셨다. 이와 똑같은 진리들이 교회의 성벽을 형성한다. 그리고 이 진리들은 도성 자체와 친밀하게 하나되어 적의 공격을 방어한다. 교회의 적들에는 사악한 인간과 악령 뿐만 아니라 교회가 낳은 자녀들의 심정을 부패시키고 교회의 원리를 파괴함으로 교회를 황폐하게 하려는 이들 모두가 포함된다. 추상적 측면에서 볼 때 교회의 적에는 교인들 속의 자연적 수준의 마음에 있는 악에 기울려는 경향성과 거짓 암시까지 포함된다. 그 이유가 이런 경향성과 암시들은 교인 속의 영적 수준의 마음에 있는 천국적인 원리에 대항하려는 준비가 완료되어 있기 때문이다.
말씀 속의 거룩한 진리들, 이를 수단으로 교회는 자신을 방어한다. 따라서 이 진리들은 새 예루살렘 성벽의 열 두 기초를 장식하는 보석들이다. 교회에 있는 내향의 생명의 원리를 보호하는 진리들이란 말씀의 글자적 의미에 있는 진리들이다. 참으로 말씀의 글자적 의미는 말씀의 영적 의미를 보호하는 방어 벽이다. 교회에 관해 말할 경우 엄밀히 보면 말씀에 관해 말하고 있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리라. 교회는 말씀으로부터 존재한다. 교회의 품성은 말씀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 결정된다. 사랑과 선행, 이는 교회 속의 생명 되는 원리들이고 말씀 속의 생명 있는 원리이다. 그러므로 글자적 의미 속의 진리들은 교회와 말씀을 에워싸고 방어해서 보존시켜 준다. 이 도성의 벽은 크고 높다. 내향의 생명의 원리를 보호하고 방어하며 보존하는 수단들 중 새 교회(the New Church)의 수단들은 지금까지 처방되어 존재한 여타 교회의 수단보다 더 완전하다. 교회를 방어해주는 진리들은 말씀의 글자적 의미 안에 포함된 것들이다. 그 이유가 이것들이 내향에 있는 영적 진리를 방어하는 덮개를 형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성벽이 크고 높다 라고 말해진 바, 이는 두 개의 본질 되는 요소, 선과 진리를 표현하기 위한 것, 그리고 선과 진리라는 두 요소는 말씀 어디에서나, 가장 수준 낮은 의미인 글자적 의미에서 조차도 이 두 요소는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표현하는 것이다. 크다(great)는 것은 선함 측면을, 높다(high)는 진리 측면을 표현하는 말이다. 따라서 두 원리는 악과 거짓의 공격을 방어하기 위해 모든 각 수준의 마음 안에 존재해야만 한다. 그 이유는 일반적으로 교회의 참된 것은 세부 측면에서의 교회의 참된 것도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제 말씀 속의 진리는 역사 이래 처방된 여타 교회가 안 것보다 더 밝히 알게 되었다. 말씀의 글자 속의 진정한 진리는 이제 확실하게 알려졌다. 글자 속의 모든 진리, 그것이 내면에 속하든, 외면에 속해 있든 그것들을 통해 빛을 발하는 그것들 속에 있는 영적 의미를 수단으로 이제는 수정같이 맑게 되었다. 이런 모든 진리들은 사랑과 선행에 관계된다는 것이 이제는 밝혀져 있다. 그 이유는 영원히 변경될 수 없는 위 두 개의 단어에 모든 율법과 예언이 의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성벽에는 “열 두 대문이 있었고 그 열 두 대문에는 천사가 하나씩 있었고 이스라엘 자손 열 두 지파의 이름이 하나씩 적혀 있었다.” 도성의 문이란 출입을 위한 것이다. 동시에 방어를 위해서도 충분히 견고하다. 도성의 문은 자연계 속에서 특히 인간 구조 속에서 그 성격을 파악해 볼 수 있다. 우리의 감각들(senses)은 육체(body)뿐만 아니라 영혼(soul)의 출입구가 된다. 이를 수단으로 영혼은 바깥 세계와, 바깥 세계는 영혼과 교통한다. 이것들은 큰 도로이자 보초역할도 한다. 이것들은 육체와 마음 모두를 위해 유용한 것과 해로운 것, 친구인 것과 적이 되는 것 사이를 구별한다. 이것은 유쾌하게 여겨지는 것은 수용하라고 감각에게 말하고 불쾌하게 여겨지는 것은 거절하라고 말한다. 많은 사람들이 흔히 잘못 생각하는 것은 우리가 지각하고 판정을 내리는 힘이 감각에 있는 듯 여기는 것이다. 사실 이 능력은 영혼에 소속되어 있다. 영혼은 감각을 통해 지각하고 판단한다. “문마다 천사들이 있듯” 영혼 속의 자질들이 감각 내에 존재한다. 감각과 사람의 관계와도 같이 감지된 지식과 교회도 마찬가지이다. 이런 지식은 엄밀히 말해서 종교가 아니다. 그러나 그것 없이 종교가 존재될 수 없다. 사실 지식과 신앙은 따로따로 존재한다. 그러나 우리가 모르는 것, 감지 못한 것을 우리는 믿을 수도 없다. 지식은 문이다. 지식은 소개 역할을 담당한다. 지식은 우리로 선과 악, 진리와 거짓을 식별하고 판단할 수 있게 해서 우리로 이것은 선택하고 저것은 거절하게 도와준다. 천국 사항에 속한 것이라고 판단하게 해주는 지식이 성서의 진리에 관한 지식들이다. 세속의 지식(secular knowledge)도 마음을 세련되게 해준다. 그러나 인간의 학식은 종교에 찬성할 수도 있고 반대할 수도 있다. 말씀으로부터 파생된 지식만이 교회를 소개하는 역할을 해준다. 이 지식만이 거룩한 성의 문이다. 이 성의 문은 열 두 개이다. 숫자 열 둘은 새 예루살렘의 구조와 형체가 얼마나 큰지를 가늠하게 하는 숫자요, 이는 지파 열 둘과 사도 열 둘에 관계를 맺고 있는 숫자이다. 지파들과 사도들이 교회 전체 또는 교회 속의 모든 원리를 표현하듯 열 두 문은 교회의 모든 원리에 관한 완결된 지식을 표현한다. 여기서 사용된 단어, 완결(complete)은 총망라함(exhaustive)을 뜻하는 게 아니라 납득됨과 다양함, 또는 마음의 갖가지 상태나 용량에 알맞다는 뜻에서 사용한 단어임을 첨부해둔다. 바깥쪽에서 획득되었을 경우의 종교적 지식 그 자체는 사람을 구원해줄 힘이 없다. 지식은 외부로부터 오고, 신앙과 사랑은 내부로부터 온다. “진리는 땅에서 솟아오르고 정의는 천국에서 내려다 본다.” 이 진리와 이 정의가 하나 될 때 신앙이 생산된다. 우리는 지식으로부터 믿는 게 아니라 지식에 의거 믿는 것이다. 감각기관이 감지하고 판단하는 능력을 가진 것으로 많은 이들이 생각해왔다. 그러나 이 능력은 실지로는 마음에 속한 능력으로 단지 감각을 통해 마음이 감지하여 판단할 뿐임을 위에서 이미 거론했다. 선하고 참된 것을 갈구하는 쪽으로 끌리는 마음(애착)은 지식을 획득해서 그 애착이 목적하는 의도가 결과 되게 그 지식을 사용하도록 자극한다. 애착과 생각은 우리 속에서 있어지는 삶이요 지식의 영혼(soul)에 해당된다. 애착과 생각이 문에 있는 천사들이다. 생각과 애착은 영혼의 성직자요 안내자이고 그것들은 지식을 수단으로 선과 악, 진리와 잘못을 구분해서 그 구분된 것에 의해 허용과 금지 중 하나를 선택한다. 지금 우리가 말하는 생각과 애착은 오직 선한 애착과 선한 생각, 추상적으로 볼 때 선과 진리 자체들이다. 이것들만이 천사적이고 천국적일 뿐이다. 이것들만이 도성의 문에 서 있을 수 있고 생명의 나무로 가는 길목을 지킬 수 있다. 감지되는 지식 그 자체가 입장을 허가 받아 교회 안으로 들어오는 것들은 선하고 참된 것에 관한 지식들이다. 그러므로 새 예루살렘의 문에는 이스라엘 열 두 지파의 이름이 적혀 있다. 이 지식이 과학보다 더 상위라고 인식될 때 선과 진리의 품질은 그 지식 위에 새겨진다. 열 두 천사와 이스라엘의 열 두 지파는 선함과 진리의 원리를 상징한다. 천사란 이 원리가 천국 안에 있을 경우를, 열 두 지파란 교회 안에 이런 원리가 있는 경우이다. 사실 천국에 있는 교회와 지상에 있는 교회는 하나이다. 이 하나는 마치 영혼과 육체, 또는 글자와 글자 속의 의미(spirit)의 관계처럼 존재한다. 말씀의 글자와 영은 언제나 함께 있다. 그러므로 새 예루살렘의 문에는 천사와 열 두 지파가 함께 있다. 그 이유가 새 교회를 소개하는 지식은 말씀의 글자와 영, 양 측면에 관한 지식 모두가 해당되기 때문이다.
이 열 두 문은 “동쪽에 셋, 북쪽에 셋, 남쪽에 셋, 서쪽에 셋”이 있다. 사방에서 도성으로 들어가게 해주는 이 문들이란, 하느님의 교회로 가는 길을 열어 주는 지식은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바래는 자 그리고 선하고 참된 것을 진실로 사모하는 마음의 상태나 용량에 알맞도록 해주신다는 것을 상징적 언어로 선포한 것이다. 진실로 교회가 보편적, 포괄적이기 위해서 교회는 선함과 진리를 사랑하는 마음을 가진 이들을 성벽 안으로 받을 수 있어야 한다. 교회는 그들의 원리에 관한 지식을 수단으로만 선함과 진리를 바래는 이들을 납득시켜 성 안으로 받을 수 있다. 그 이유가 인간이 교회로 입문되는 것은 당사자에게 교회의 원리를 소개하여 그들의 심정에 접목됨으로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종교가 설명도 안 되는 애매한 어떤 것(mystery)으로 있으면서 거기에 맹목적인 믿음을 부착시키는 한, 그 종교는 진짜가 아닌 명목상의 종교, 미신(superstition)일 뿐이다. 진정한 교회는 모든 측면에서 열려 있다. 이 교회는 모든 이의 마음에 잘 적응되고 모든 이의 갖가지 상태를 잘 섬겨준다. 이 교회는 지성이 요구하는 모든 것, 심정이 바라는 모든 것을 충족시킬 수 있다. 이런 사항들이 사방에 문을 가진 도성이 포함하는 뜻도 된다. 북쪽과 남쪽은 지적 측면의 모든 상태를, 동쪽과 서쪽은 품행 측면의 모든 상태를 포함하고 있다. 이해성을 수단으로 인도되는 모든 사람은 북쪽과 남쪽 문으로 간다. 의지를 수단으로 인도되는 모든 사람은 동쪽과 서쪽 문으로 간다. 문들이 위치하고 있는 네 방위에 관한 상징적 의미는 그 근원을 하느님의 형상인 태양에 두고 있다. 그래서 태양의 열은 그분의 사랑을, 태양의 빛은 그분의 지혜를 상징한다. 동쪽과 서쪽은 우리에게 아침과 저녁에 관한 생각을, 남쪽과 북쪽은 한낮과 한밤을 생각하게 한다. 동쪽과 서쪽은 낮을, 북쪽과 남쪽은 밤에 관한 생각을 준다. 동쪽과 서쪽이 지닌 의미는 사랑에 속한 모든 수준들, 심정에서 사랑이 일어나 삶에서 그 사랑이 마감 짓는데 까지의 모든 수준을 납득하게 한다. 남쪽과 북쪽은 지혜에 속한 모든 수준들, 이해성이 가장 명확해 있는 상태로부터 가장 희미해 있는 상태 까지를 납득하게 한다. 이런 문이 사용되는 경우 중 하나는 주위 민족들이 도성으로 입장하게 해주는 것이다. 이 민족들은 사방 즉 동과 서 그리고 북과 남으로부터 모여든다는 것도 누가복음 13장 29절을 통해 배울 수도 있다. “북쪽 나라” 또는 “북방”에 있는 사람들까지도 자유로운 입장이 제공되고 있다. 밤은 잘못이라는 어두움, 무지라는 어두움을 상징한다. 무지한 이들이 북방 민족이고 이들은 북문을 통해 주님의 성에 들어온다. 어찌됐든 선함과 진리를 사랑하는 마음을 지녔다면 그들의 상태가 어떠하든 어느 문으로도 입장할 수 있다. 북쪽도 다른 측면처럼 세 문을 가지고 있다. 그 이유는 일반적인 모든 상태는 각기 세부적인 상태들을 포함한다는 이유에서이다. 뿐만 아니라 숫자 셋은 세 겹 즉 세 개가 하나(trine)된 것을 표현하기 때문이다. 이 세 겹은 서술된 주제 또는 상태에 관련되는 모든 것을 포함하는 말이다. 일반적인 모든 상태 안에는 세 가지 세부적인 상태들이 있다. 그러므로 이는 일반적인 계층을 형성하고 있는 사람들의 세 계층을 뜻한다. 간략히 설명을 덧붙인다면, 종교에 관해 어떤 이는 의지 측면에서 더 접근하고, 어떤 이는 이해성 측면에서, 어떤 이는 행동 측면에서 더 접근한다. 이 세 가지 부류 모두 합당하다. 이와 같이 열 두 문을 생각하면 이해가 가능하리라 본다. 세 지파가 한 묶음으로 해서 네 계층을 구성하고 있다. 각 세 지파는 의지와 이해성 그리고 삶을 하나 되게 하는 세 원리 즉 사랑과 신앙 그리고 순종을 표현한다.
“그 도성의 성벽에는 열 두 주춧돌이 있었는데 그 주춧돌에는 어린 양의 열 두 사도의 이름이 하나씩 적혀 있었다.” 사도 바울은 하느님의 가족이 되는 이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여러분이 건물이라면 그리스도께서는 그 건물의 가장 요긴한 모퉁이 돌이 되시며 사도들과 예언자들은 그 건물의 기초가 됩니다. 온 건물은 이 모퉁이 돌을 중심으로 서로 연결되고 점점 커져서 주님의 거룩한 성전이 됩니다. 여러분도 이 모퉁이 돌을 중심으로 함께 세워져서 신령한 하느님의 집이 되는 것입니다” (에페소2:20-22). 이 구절은 믿음의 가족이 되는 멤버들에 관해 말해지고 있지만 이것이 교회를 실지로 구성한다. 비록 말씀에 밝혀진 그대로의 교리가 교회의 몸체라고 지적 측면에서 생각해 볼 수 있다 해도 생명 있는 종교 단체로서의 교회라면 말씀 속의 원리들을 밝히 아는 이들로 구성되어야 생명 있는 성전 또는 성막을 지을 것이다. 교회가 원리로 이루어 졌다고 하든, 사람들로 이루어졌다고 하든, 교회는 사도들과 예언자들의 가르침에 기초를 두는데 이를 근원적으로 본다면 그 기초는 주님의 가르침에 있다. 그래서 성벽의 기초에 열 두 사도들의 이름이 적혀 있는 것이다. 어쨌든 성벽은 “건물”의 매우 중요한 부분인 것은 틀림없다. 성벽 없이 도성은 안전할 리 만무한바 성벽이 없으면 도성도 존재할 수 없다. 성벽과 거룩한 성의 관계처럼 말씀의 글자와 말씀의 영도 마찬가지이다. 말씀의 글자적 수준에서의 의미는 영적 수준의 의미를 에워싸서 보호해주어 보존되게 한다. 영적 의미는 글자적 의미에서 종결되고 또한 거기서 휴식을 취한다. 말씀의 글자적 의미 안에서 신성한 진리는 충만 된 상태로, 거룩함 자체로, 진리의 능력 자체로 있다. 교회의 모든 교리는 말씀의 글자적 의미로부터 끌어내지고 그 의미를 수단으로 확증하고 방어도 한다. 이런 기능이 도성의 성벽에 존재하고 도성의 문에서 교회의 존재와 보존을 가능하게 하는 모든 기능들(agencies) 즉 천사와 열 두 지파, 열 두 사도를 발견한다. 이 도성 안에 전능하신 주 하느님 어린 양, 그 도성의 성전 되시는 분, 도성의 빛과 영광 되시는 분이 계신다. 위 모든 것이 교회의 참 생명을 구성한다. 교회를 방어하는 교리라는 성벽, 교회를 소개해주는 지식이라는 문을 교회가 가지고 있을 때 사랑과 지혜의 신성한 생명이 보존되게 한다. 문에는 안내하는 천사들이 있고 문 위에는 열 두 지파의 이름이 적혀 있다. 그리고 열 두 주춧돌에는 열 두 사도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열 두 사도의 이름은 신약 성경 속에 있는 교리와 진리를, 열 두 지파는 구약성서 속의 교리와 진리를 표현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어쨌든 열 두 사도와 열 두 지파가 표현하는 의미는 본질적으로는 똑 같다. 차이가 있다면 그것은 구약이 신약을 소개한다는 정도뿐이다.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가져다주는 선생의 위치에 율법이 있는 것은 과거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열 두 지파의 이름들이 문 위에 씌어 있고 그 문을 통해 도성에 들어가는 것이다. 사도들은 직접적인 도구들이고, 이 도구를 수단으로 주님께서는 그분의 교회를 발견하고 건설하신다. 그러므로 그들의 이름은 새 예루살렘 성벽의 주춧돌인 것이다. 어쨌든 사도들은 자기들이 가르쳤던 그 교리의 예징(type)일 뿐이다. 그들의 가르침은 본질적으로 볼 때 과거 세례자 요한이 외친 “보라 이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 양!” 이라는 말과 같다. 그들이 세상에 있었을 때 그들은 어린 양의 사도들이었다. 그러나 지금 그들은 주님께서 신성화 하신 인성으로 드높게 계시듯이 왕좌 둘레에 있으면서 그분의 사도로 있다.
15. 새 예루살렘을 보여주었던 그 천사는 이제 도성의 크기를 잰다. “나에게 말하던 그 천사는 그 도성과 대문들과 성벽을 재려고 금빛의 갈대를 가졌는데, 도성과 그곳의 문들과 벽을 측량하기 위해서 였다.” 요한이 성전을 재도록 명령받았던 11장에서 측량자에 관한 것은 이미 살핀바 있다. 측량함이란 평가하는 것, 어떤 규율을 적용해서 어떤 것의 품질을 확인하는 것을 뜻한다. 이 구절과 11장의 경우에 있는 측량함에는 우리가 주목해 볼만한 두 가지 차이점을 찾을 수 있다. 앞 장의 경우 천사가 명령해서 요한이 성전을 측량했으나 본문의 경우 천사 스스로 거룩한 도성을 측량한다. 요한이 측량한 성전이란 천국에 있는 교회를 뜻하고 천사가 측량하는 도성은 지상의 교회를 뜻한다. 그 이유가 요한이 측량했던 성전은 천국이 열려 그가 보았을 때의 성전이었고, 천사가 측량한 도성은 천국으로부터 내려오는 것을 요한이 보았을 때의 도성이었다. 이를 정리해 생각해보면, 인간이 천국적인 것을 측량하고 천사는 지상적인 것을 측량하고 있다. 분석하고 종합하는 것, 조사하고 판가름하는 행위는 천사나 인간에게 똑같다. 따라서 분석과 종합해봄은 자연적 수준의 것 뿐만 아니라 영적 수준의 것 까지 획득하게 한다. 분석함은 우리로 자연적 수준으로부터 영적 수준까지 지적 측면에서 승강하는 과정이다. 종합해봄은 우리로 영적 수준으로부터 자연적 수준에로 하강하는 과정이다. 두 과정은 천사와 인간, 내적 인간과 외적 인간에 의해 상호적으로 사용된다. 외적 인간은 그 자체 내적인 진리를 받을 수 있는 능력을 측량해 봄으로 내적 측면의 품질을 평가한다. 내적 인간은 그 자체와 외적 인간 사이에 있는 상응 내지 일치되는 정도를 보아서 외적 측면의 품질을 평가한다. 보다 낮은 수준이 보다 높은 수준을 가늠하는 권한 내지 특전에 대해 사도들이 이렇게 말하고 있다. “우리가 천사를 가늠하는 것을 너는 알지 못하는가?” 그래서 천사들같이 사도들 스스로 사람을 판단하는 것으로 말해지고 있다. 천국적 상태에 속한 것을 평가함에 있어 우리가 올바르게 처리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요한이 표현하는 속성인 선행의 선 안에 있어야 한다. 다시 말해 요한처럼 천국으로부터 측량자를 받아야 한다. 그 이유는 만일 우리가 자연적 수준의 선으로부터 자연적 수준의 진리로 가늠한다면 영적이고 천국적인 것들에 관한 우리의 결말은 자연적일 뿐이어서 잘못투성이로 전락될 것이기 때문이다. 성전과 도성을 재는 두 측량의 차이점의 또 하나는 재는 도구가 다르다는 것이다. 요한은 성전을 지팡이, 막대기 같은 측량자로 재었고, 천사는 금측량자를 사용했다. 도구의 차이는 인간과 천사가 각기 품질을 평가하는 방식이 다르다는 것을 표현할 뿐만 아니라 재려는 대상물의 차이까지 표현하고 있다. 요한이 측량하도록 명령받은 성전은 천국에 있는 교회를 표현했다. 그러나 이 교회는 지상의 교회에 소속되었던 이들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므로 그 교회에 포함되는 교인까지 표현하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천국에 있는 성전이 표현한 교회는 영적 수준의 교회이고 거룩한 도성이 표현한 교회는 천적 수준의 교회이다. 전자가 후자와 구별되는 특별한 것은 그 교회의 원리가 이웃을 사랑함에 있고 후자는 주님을 사랑함에 있다는 것이다. 이 차이점은 성전을 잰 것은 보통의 측량자였고 도성을 잰 것은 금으로 만든 측량자였다는 측량자의 재료로도 표현되고 있다. 측량한 결과는 똑같았을는지 모른다. 그 이유는 수준은 서로 다르다 해도 각 수준에서 완전해야 하는 것은 동일하게 필수사항이기 때문이다. 각 측량자의 재료가 지닌 수준이 상응의 언어로 우리에게 말해 주는바 전자는 이웃을 사랑함이 잣대의 표준이고 후자는 주님을 사랑함이 그 표준이라는 것이다. 천사가 거룩한 도성을 잰 금 측량자는 주님을 사랑함이다. 이러한 천적 수준의 사랑이라는 금 측량자 외에 어떤 측량자로 유리같이 맑은 순금 자체인 이 도성을 재볼 수 있을까? 천사는 이제 도성 뿐 아니라 문과 성벽까지 재고 있다. 교회의 필수 되는원리, 교회에로 입문하게 해주는 진리, 그리고 교회를 에워싸 방어해주는 외적 진리, 각각이 도성과 문과 성벽으로 의미되고 있고 이런 사항들 역시 동일한 규칙에 따라 평가되어 진다. 그 이유가 수단의 차원에 있는 것들도 목적의 차원에 있는 것들과 동일한 속성이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만일 교회나 종교의 본질 되는 요소가 주님과 이웃을 사랑함이고 진리가 이 사랑에로 인도해주고 이 사랑을 보존되게 해주고 있다고 한다면, 이러한 각종 원리들은 반드시 동일한 품성으로 나열되어야 하리라.
16. 이제 천사가 금 측량자로 도성을 잰다. “그 도성은 정사각으로 놓여 있다, 그리고 길이는 넓이와 같다: 그리고 그가 갈대로 도성을 쟀더니 일만 이천 스타디아 였다; 그리고 도성의 길이와 넓이와 높이는 같았다.” 이미 살핀바 있듯이 이 측량은 여느 지상에 있는 도성의 면적이 되어질 수 없다. 1500마일이나 되는 도성은 도성이라고 생각조차 해볼 수 없다. 게다가 길이, 넓이, 높이가 똑같다는 것은 건축 공학의 차원에서 균형을 맞출 수 있는 어떤 착상도 불가능하게 한다. 단지 한결같음, 균등함 등등의 생각만이 떠오르게 해줄 뿐이다. 지형학적인 측면에서 원과 정사각형은 통일성과 강함을 다른 도형에 비해 가장 강한 인상을 우리에게 준다. 도형에 기초한 정사각에 관한 비유적 표현은 도덕적으로 특출함, 즉 인간 본성의 여러 요소들이 완전한 인격이 되도록 서로 잘 부합된 상태를 암시해 준다. 종교적 측면에서 정사각형의 비유적 표현은 도덕적 측면과 다르지만 보다 세련되고 더 승강되어 있다는 정도에서만 다르다. 도덕은 자연적 수준의 종교이고 종교는 영적 수준의 도덕이다. 종교의 품성을 가름하는데는 두 가지 요소가 관여된다. 선함과 진리이다. 선함은 심정에, 진리는 지성에 소속되어 있다. 이를 달리 표현하면 선함은 의지에, 진리는 이해성에 소속된다. 종교적 인격의 완전함은 이 두 요소가 균형을 이룬 결과이다. 이해성이 찬성하는 것을 심정이 사랑할 때 그 인격은 완전하다. 이때 의지와 이해성은 균형을 이루고 하나된다. 양심이 흡족해 하면서 마음이 고요해지고 생활은 앞뒤가 맞는다. 인격 속의 이 두 요소가 “거룩한 도성의 길이와 넓이”이다. 모형의 각 측면이 균등할 때 길이와 넓이를 말할 수 없지만 거룩한 도성에서 길이는 동으로부터 서쪽까지, 넓이는 북에서 남쪽까지를 말한다. 이들은 각기 사랑과 지혜 또는 선함과 진리에 관계된다. 이것과 각 기독인과의 관계에 대해서는 이미 언급한바 있다. 그러나 이 요소들은 교회의 요소들이고 계시된 종교의 원리들이기도 하다.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것, 그에 대해 계시된 모든 것은 그 근원이 선함과 진리에 있고 그것들로 구성되어 있다. 그 이유가 모든 것은 하느님으로부터 생겨났고 많든 적든 그분의 형상을 닮고 있는데, 그분만이 선함 자체요 진리 자체되시기 때문이다. 영원한 이 두 요소의 균등함 내지 하나 됨은 하느님의 완전 뿐만 아니라 천사나 인간의 완전함을 구성한다. 그 중 하느님만이 절대적으로 완전한데 그 이유는 그분은 무한한 완전이시기 때문이다. 천사나 인간의 완전함은 그분의 완전함에 대한 형상(image)밖에 더 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천사나 인간의 완전함은 제 각각의 수준을 가지고 있다. 천사나 인간의 완전은 측량될 수 있으나 그분의 완전은 측량할 수 없다. 천국에서조차 완전이라는 주님의 선물은 동일하지 않은바 품성과 기능 또한 다양하다. 아버지의 크나 큰 집에는 많은 저택들이 있다. 이 저택은 각각으로나 집합적으로나 차이를 가지고 있다. 보다 높은 천국이 있는가 하면 보다 낮은 천국도 있다. 교회에도 이와 상응되는 차이들이 존재한다. 인간 내지 천사가 도달하는 완전함의 수준이 무엇이든 완전함에는 의지와 이해성 그리고 삶이 서로 연관되어 있게 되는 인격의 하나됨이 존재한다. 즉 “길이와 넓이와 높이가 똑같다.” 이 세계보다 영의 세계에서는 더 완벽한 균형이 있어야 할는지 모른다. 어쨌든 균등함은 반드시 있어야 한다. 이 균형 없이 어느 누구도 참된 교인이 될 수 없고 참된 교인이기 위해 그는 가장 조그만 형체의 진정한 교회이어야 한다. 이런 세 겹의 균등성은 교회의 원리 안에도 있다. 이 원리의 길이와 넓이와 높이는 똑같다. 따라서 교인들은 그들 스스로 교인이 되도록 세 가지를 균등하게 받을 수 있다. 새 교회의 원리를 따르는 이들은 금측량자로 잴 때 새 예루살렘의 치수에 화답되어야 할 것이다. 12,000펄롱(furlong)은 완전한 치수이다. 12는 진리 측면에서의 완전한 치수이고 1000은 선함 측면에서 완전한 치수이다. 펄롱이란 선함과 진리가 삶속에서 진보해감을 표현한다. 그 이유가 자연계의 공간은 영계의 상태와 상응되기 때문인데 이미 14장 20절에서 살핀바 있다.
17. 도성의 길이와 넓이와 높이에 관한 측량 외에 성벽을 특별히 재고 있다. “그리고 그가 도성의 벽을 쟀는데, 일백 사십 사 큐빗이었고, 이는 천사에 속하여 있는 사람의 척량이다.” 성벽이란 교회를 방어 해주어 교회가 보존되게 하는 모든 것을 일괄해서 뜻한다. 이런 방어와 보존은 교회의 교리가 파생되는 말씀의 글자 속의 진리를 수단으로 이루어진다. 성벽의 치수는 말씀의 글자에서 주어지는 의미 그대로 신성한 십계명이 조화를 이루고 있다는 것을 표현하고 있다. 12*12, 이 곱하기는 144라는 신비로운 숫자를 만드는데, 이는 도성의 길이와 넓이 안에 함축되어 있는 똑같은 품질과 균등을 표현한다. 그 이유가 선함과 진리에 관한 교리가 교회를 구성하는 원리 자체를 나열해주고 방어도 해주기 때문이다. 이 치수는 사람의 자 곧 천사의 자로 재었을 때라고 언급하고 있다. 사람과 천사는 새 예루살렘을 측량한 특사(messenger) 안에서 하나 된다. 지상의 교회와 천국의 교회는 거룩한 도성 안에서 하나 된다. 이 하나 된 교회가 천국으로부터 내려 왔다. 이 교회는 그 본질에서 천사적이고 인간적이다. 하느님을 사랑함이라는 금측량자는 투쟁하여 승리를 끌어 안는 교회에 있어야 할 모든 품성의 표준이다. 이 교회가 땅 위 주님의 왕국이요, 이 교회는 상응을 수단으로 천국에 있는 그분의 왕국과 하나를 이루어 결합한다. “사람의 자”가 “천사의 자”이기도 할 때만이 교회는 참된 교회이다. 그 이유가 천사는 과거 사람이었고 사람은 장차 천사가 되도록 의도되어 있는바 사람의 자와 천사의 자는 똑같기 때문이다.
18. 이제 도성과 그 성벽의 구성에 관한 묘사가 있어진다. “그리고 도성의 벽의 구조물은 벽옥 이었다, 그리고 도성은 순수한 유리 같은 순금 이었다.” 이 구절에서 우리는 도성과 성벽을 구성한 재료의 다른 점만을 살펴보자. 성벽은 벽옥(jasper)이고 도성은 순금이다. 도성을 에워싸서 방어하고 있는 성벽이 벽옥으로 되어있는 이유는 그 돌이 보석, 귀중한 돌이기 때문이다. 이 보석은 성벽의 재료이면서 성벽의 기초석 중의 하나이다. 그래서 이 보석은 우리가 말씀의 의미를 글자적 수준에서 지니고 있는 그대로의 신성한 진리를 상징한다. 말씀의 글자적 수준에 있는 진리들은 교회의 외부를 형성하는바 교인들이 말씀의 글자적 수준의 진리대로 실천할 때가 이 벽옥에 해당된다. 위에서 살핀 바와 같이 벽옥은 글자적 수준에서의 말씀의 의미, 또는 최말단들에 놓여진 신성한 진리 자체(Divine Truth itself in ultimates)에 관한 상징물이다. 도성의 구성 재료인 금은 사랑을 상징하는 금속이다. 여러 가지 금속들이 종교의 품위들을 상징하도록 성경에 고용되고 있다는 것은 누구나 인정하는 사실이다. 교회의 영광을 예언적으로 묘사하는 이사야서의 경우, 주님께서 말하시기를, “내가 놋쇠 대신 금을 들여오고 쇠 대신 은을 들여오리라. 재목 대신 놋쇠를 들여오고 돌 대신 쇠를 들여오리라” (60:17). 이 예언은 보다 낮은 품위들이 그 보다 높은 천국의처방 밑에서 보다 높은 품위들로 대체되고 있음을 다루고 있다. 이와 같이 금속들은 기독인의 품위를 나타내고 있는바 그 중에서 가장 귀한 금은 기독인의 가장 높은 품위를 상징한다. 그런데 이 도성은 금으로 온통 되어있다. 순금의 도시! 이 얼마나 특이하고 그 성읍의 내용을 잘 표현하고 있는지! 순금이 표현해주는 교회란 순수한 사랑, 오류로 때묻지 않은 사랑, 악과 혼합 안 된 사랑 외 더 다르게는 있을 수 없다. 이런 교회는 순수하고 천국적인 교리 가운데 영원히 남아 있을 것이다. 주님의 새 교회는 사랑밖에 없고 이 교회의 교리는 사랑밖에 가르칠 게 없다. 참된 교회란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교회요 이 교회의 교리는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만 가르친다. 하느님은 사랑이다. 그런고로 그분의 몸이 되는 교회 역시 사랑이어야 마땅하다. 사랑이신 그분의 형상을 닮는 교인을 가르치는 교리 역시 사랑이어야 한다. 참으로 하느님은 사랑 이실 뿐 아니라 지혜 이시다. 교회는 이런 점에서도 주님의 형상이 되어 있어야 한다. 사실 신성한 지혜는 또 다른 형체에서의 신성한 사랑일 뿐이다. 오히려 지혜는 사랑의 형체, 본체를 표현한 형상이다. 지혜와 사랑은 불과 빛, 빛과 불의 관계와 똑같다. 이 둘은 이론상 구분되지만 실제로는 언제나 하나이다. 사랑은 빛으로 옷입은 생명 자체이다. 따라서 생명이 빛의 본체이고 빛은 생명을 밝히 드러내 주었을 뿐이다. 그러므로 영원한 말씀되시는 분으로서의 주님을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그분 안에 생명이 있었고 그 생명이 사람들의 빛이었다” (요한1:3). 그러므로 교회의 생명이 교회의 빛이고, 순수한 사랑이 교회의 지혜 되어야 교회는 참되어진다. 교회의 생명으로서 주님의 사랑을 지닌 만큼에서 교회는 빛으로서 지혜를 가진다. 거룩한 도성이 순금으로 되어있는데 이 순금은 투과하는 유리, 그 맑음 같았다. 순금이되 수정같이 맑다는 것은 얼마나 이상한 일인가? 두 성질이 결합된 위 순금은 완전한 분의 형상과 모양에 따라 새로 창조된 교회 내지 마음 안에 존재하게 되는 영적 품질의 결합 상태를 표현한 것이다. 사랑이 심정 안에 존재하게 되는 영적 품질의 결합 상태를 표현한 것이다. 사랑이 심정 안에 존재할 때 빛은 이해성 안에 존재한다. 애착이 순수할 때 직감(perception)은 맑다(명료하다). 그래서 이를 두고 주님께서 복을 내리셨다. “심정이 순수한 사람은 복이 있나니 하느님을 뵙게 될 것이다” (마태5:8).
19,20. 성벽과 도성의 구조를 기술한 요한은 이제 성벽의 열 두 주춧돌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 “그리고 도성의 벽의 기초들은 모두 각각 귀중한 돌로 장식되어 있었다. 첫 기초는 벽옥, 둘째 남보석, 셋째는 옥수, 넷째는 녹보석, 다섯째는 홍마노, 여섯째는 홍보석, 일곱째눈 황옥, 여덟째는 녹옥, 아홉째는 담황옥, 열째는 비취옥, 열한째는 청옥, 열 둘째는 자수정 (이었다).” 이제 거룩한 도성의 성벽의 기초를 이루는 주춧돌에 관해 살피게 된다. 따라서 그 돌들을 구성하는 보석들이 지닌 상징성을 살펴두면 유용할 것 같다. 자연에 관한 철학은 그 보석들이 의미하는 것을 상상하는데 많은 기초를 제공하고 있다. 보석은 자체가 지닌 투명도 내지 광채, 즉 빛을 굴절하고 반사하여 빛깔을 내는 능력으로 결정된다. 사실 보석이 진열해주는 아름다움은 보석 자체에 있는 게 아니라 보석을 투과해 간 빛에 있다. 보석이 자신의 것이라 불릴 수 있는 것은 돌이라는 특질 뿐이다. 보석이 지닌 다양하게 아름다운 빛깔은 태양의 흰빛이고 보석들은 무수하게 프리즘으로 광선을 분해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 뿐이다. 따라서 보석들의 현 외관이나 근본적인 구조관계는 태양에 의존되는 셈이다. 발광체들은 빛을 투과시키거나 무지개같이 반사시킨다. 그리하여 이것들은 보는 사람의 눈에서 장관을 이룬다. 태양을 두고 말해본다면 태양은 간접적으로 그것을 만드신 분에 대해 말해준다. 또한 그분은 그분의 도구요 형상으로서 태양을 통해 역사 하신다. 그분과 태양은 이쪽이 저쪽을 설명하는 불가분의 관계에 놓여 있다. 하느님의 말씀은 그분이 하시는 일과 똑같은 관계에 놓여있다. 말씀 속의 진리들, 창조라는 목적물에서와 같이 참 빛에 의해 생산되어져서 인간의 이해성을 투과해 가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받아들여지고 투과되는 빛은 두 원리들, 화성(causticity)과 투명성(lucidity) 즉 태우는 능력과 밝게 하는 능력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두 성질은 빨강과 흰 광선에 그 근원이 있다. 두 빛깔 사이에 검정빛이 개재하여 다양한 빛깔로 변경된다. 태양의 불과 빛은 한분 신성의 사랑과 지혜를 표현하는 대표적인 상징물이다. 이 두 본질은 인간 마음이라는 어두움의 배경에 연출하면서 수없이 다양한 인간과 천사들의 애착과 사상을 배출시킨다. 마치 무지개가 어두운 구름을 배경으로 아름다움이 표출되는 것과 같다. 동쪽 하늘에 있는 구름으로부터 떨어지는 빗방울에 저무는 태양의 광선이 투과할 때 우리의 눈에 무수하게 병합되면서 하모니를 이루는 무지개 색조를 드리운다. 이와 같이 씌어있는 말씀 속의 진리들은 마치 말씀의 글자라는 구름으로부터 하강한 다음 자연적 수준의 마음에 있는 보다 높은 애착 안으로 들리우면 영적인 태양의 빛이 되어 각 구성요소들로 나뉘어 흘러간다. 그 다음 이 빛은 따로따로 구분되면서도 하모니를 이루는 사상이라는 다양한 아름다움을 정신적 납득이라는 것으로 표현한다. 말씀의 글자적 수준의 의미는 구름이고 이 글자적 의미 속의 진리는 빗방울이다. 이 빗방울을 수단으로 영적 태양에 있는 빛이 무수한 인간 구성요소들로 분산되어 흘러든다. 천국의 태양, 이는 말씀 속의 영적 의미에 있는 빛 같아서 우리가 그 빛을 쳐다 보기에는 너무나 순수해서 그 빛에 너무 노출되면 우리의 영적 눈은 멀고 만다. 그래서 영적 진리의 빛은 말씀의 글자적 수준의 의미 안에서 우리의 자연적 수준인 납득력에로 내려온다. 이렇게 되면 영적 진리의 빛은 보다 완화된 강도로 빛을 발하고 더욱이 각각에 특별히 구분되는 품질로도 빛을 드리운다. 이런 근거에서 거룩한 도성의 주춧돌을 이루는 보석들은 다각도로 나타내는 말씀의 글자적 수준의 진리에 대한 상징물이 된다. 이 진리들은 말씀의 영적 의미라는 빛을 투과시키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이 영적 의미란 온전해진 영, 천사에게 숙박하는(accommodate) 신성한 태양의 빛이다. 어쨌든 신성한 태양은 사랑과 지혜로 구성되어 있다. 이 두 본질은 자연계의 열과 빛이라는 형상에서 발견된다. 이 둘은 특별히 빨강과 흰색으로 자연계에 존재하면서 자연계의 모든 색깔의 근원이 되어준다. 그러므로 자연 속에서 빨강은 사랑, 흰색은 지혜의 표현물이다. 빨강과 흰색이 혼합되어 있는 만큼 사랑과 지혜도 하나 된다. 이 원리로 모든 보석은 성경 속에 놓여 있는바 세부적이든 일반적이든 성경 속의 보석들이 지닌 의미나 그 상징성은 우리에게 많은 흥미를 주고 중요성 역시 부각되어 온다. 새 예루살렘의 열 두 주춧돌, 또는 성경에서 그것들이 놓여 있는 어느 구절에서이든 아론의 가슴받이에 박힌 열 두 보석과 동일한 의미를 지닌다. 그리고 7장에 언급된 봉인이 찍힌 이스라엘의 열 두 지파가 지니는 의미와도 동일하다. 위의 경우 열 둘은 셋 씩으로 나뉘는데 그 각각은 모두 같은 의미이다. 가슴받이와 거룩한 도성의 열 두 주춧돌에 있는 보석은 서로간에 매우 가까운 유사성을 지니고 있다. 열 두 보석이란 교회의 기초를 이루는 말씀 속의 모든 진리들을 표현한다. 그러므로 그것 모두는 사랑과 선행 이라는 두 보편적인 원리와 관계를 이루고 있다. 사랑과 선행 각각으로 이룩된 두 왕국에 천국과 교회는 기대어 있다. 나열된 보석 중 첫 여섯 번째까지는 주님을 사랑함이라는 원리로 통치되는 나라, 즉 천적 수준의 왕국에 있는 진리들을 표현한다. 그 외 여섯 개의 보석은 선행 이라는 원리로 통치되는 나라, 즉 영적 수준의 왕국에 있는 진리들을 표현한다. 각 왕국 안에는 다시 내적 측면과 외적 측면이 있고 각각 안에는 삼위일체가 존재한다. 첫 세 보석은 선함 측면에서의 천적 수준의 사랑을, 둘째 번의 세 보석은 진리 측면에서의 천적 수준의 사랑을, 셋째 번의 세 보석은 선함 측면에서 영적 수준의 사랑을, 넷째 번의 세 보석은 진리 측면에서의 영적 수준의 사랑을 각각 표현한다. 각각의 보석이 지닌 특성은 위의 원리와 부합되고 있다. 첫 부류의 보석을 이끄는 빛깔은 빨강이고, 두 번째 부류는 빨강으로부터의 청색이며, 세 번째 부류는 흰색으로부터의 청색이고, 네 번째 부류는 청색으로부터의 흰색이다. 빨강은 선함에 근거를 두는 천적 수준의 사랑과 상응되고, 빨강으로부터의 청색은 진리에 근거를 두는 천적 수준의 사랑과 상응되고, 흰색으로부터의 청색은 선함에 근거를 두는 영적 수준의 사랑과 상응되고, 청색으로부터의 흰색은 진리에 근거를 두는 영적 수준의 사랑과 상응을 이룬다. 천적 수준의 사랑이란 주님을 사랑함이고, 영적 수준의 사랑이란 이웃을 사랑함 또는 선행 이다. 이상의 간략한 설명은 아론의 가슴받이에 박힌 보석들의 의미이고, 본문의 경우도 이와 같다. 가슴받이의 보석에 새겨진 이스라엘의 열 두 지파나 거룩한 도성의 보석에 새겨진 열 두 사도는 모두 비슷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한 가지 첨부할 게 있다. 아론의 가슴받이에 있는 보석과 새 예루살렘의 주춧돌을 이루는 보석을 언급한 성서의 배열은 부분적으로 뒤바뀌어 있어 마치 내려가는 시리즈와 올라가는 시리즈를 연상하게 하고 있다. 처음에 언급한 보석이 맨 뒤에서 마감 짓고 있다. 에봇에서 마지막 돌인 벽옥은 거룩한 도성에서는 첫 번째 돌이 되어 있다. 그럼에도 이 순서들은 적절하게 배치되고 있다. 그 이유가 첫째가는 주춧돌은 가장 낮은 수준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비록 에봇의 마지막 돌이 거룩한 도성의 성벽에서는 첫 번째의 돌이었지만 성벽의 마지막 돌이 에봇에서 첫 번째 돌인 것은 아니다. 에봇의 첫 번째 돌은 홍옥수(fire-red sardius)이고 마지막 돌은 우유빛 벽옥(milk-white jasper)인데, 이는 가장 높은 형체인 사랑으로부터 가장 낮은 형체인 진리로 내려가는 시리즈를 표현하고 이는 처음이요 마지막 되시는 그분 안에서 하나를 이루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성벽의 주춧돌에서 첫 번째 돌은 벽옥(jasper)이고 마지막 돌은 자수정(amethyst)이다. 두 시리즈는 모든 여타 관점에서 상응되지 않는다. 더구나 이쪽에서 발견되는 돌이 저쪽 시리즈에 없는 경우도 있다. 게다가 양쪽 시리즈에 공통으로 발견되는 돌 역시 서로 상통하는 위치에 있는 것도 아니다. 이런 차이점을 놓고 관찰해 볼 것이 세 가지가 있다. 하강하는 시리즈와 승강하는 시리즈는 본체이든, 형체에서이든 서로서로 언제나 정밀하게 답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셋씩 묶어서 네 파트로 이루어지는 각 시리즈의 첫 돌은 그 시리즈 전체에 대한 특성을 주고 있다. 똑같은 특성이라 해도 관계되는 장소가 다르면 약간 다른 의미를 가질는지 모른다. 아래에다 새 예루살렘 성벽에 있는 보석과 관련해서 참고적으로 기술해 보았다. 그러나 어느 경우에서이든 각 보석이 무엇을 의미해주는지에 대해서 확실하게 알려지고 있지 않다.
열심 있는 탐구자들이 이렇게 결말짓고 있다.
1. 벽옥(jasper) – 다양한 색깔, 즉 흰색, 자주색, 빨강, 젖빛색.
2. 남보석(사파이어, sapphire) – 하늘색, 투과성
3. 옥수(chalcedony) – 일반적으로 흰색 또는 푸른색, 반투과성
4. 녹보석(에머랄드, emerald) – 녹색(grass-green), 투과성
5. 홍마노(sardonyx) – 빨간 줄이 있는 얼룩마노(red-veined onyx), 반투과성
6. 홍보석(루비, sadius or ruby) – 적홍색(fire-red), 투과성
7. 황옥(귀감람석, chrysolite) – 엷은 푸른색(olive-green), 투과성
8. 녹옥(녹주석, beryl) – 창백한 녹색(pale sea-green), 때로는 푸른 색갈이 보이기도 함, 반투과성
9. 담황옥(topaz) – 다황색(wine or golden yellow), 투과성
10. 녹옥수(비취옥, chrysoprasus) – 황녹색(golden green), 투과성
11.청옥(풍신자석, jacinth) – 적황색(pomegranate yellow), 투과성
12. 자수정(amethyst) – 깊은 자주색(deep purple or violet), 투과성.
“첫째 주춧돌은 벽옥이다.” 위 보석들의 설명에서 가장 의심스러운 설명은 벽옥이라 생각된다. 계시록에서 언급되는 벽옥이나 기타 특별히 벽옥을 취급해서 말하는 어떤 저자의 다음 글은 주목해둘만하다. “고대인들의 보석을 확인하는 것은 언제나 곤란스럽다. 그 이유가 원어상의 이름들이 일목요연하게 사용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고대 시대에서의 벽옥의 경우가 그 대표적이다. 그리이스 사람들의 벽옥은 히브리 사람과 동일한 명칭을 사용했다. 그러나 이것은 어떤 동사로부터 파생되지 않았던 바 벽옥에 관한 중심 되는 생각을 근원적으로는 끌어 낼 수 없다. 벽옥이 지닌 다양한 색깔 중 한 가지 색은 계시록 4장 3절에서 명백히 나타나고 있다. 이 구절은 신성의 품성 내지 본성에 대해 상징적인 생각을 우리로 가지도록 의도되어 있다. 그러나 벽옥은 다양한 색깔을 갖고 있다. 따라서 사도 요한에게 어떤 색깔을 갖게 했는지를 확인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아마 우유빛 같은 흰 벽옥이 가장 적합할는지 모른다.” 아론의 가슴받이에 박힌 돌을 취급한 스웨덴보리(출애굽기 28:20)는 그 구절에서의 벽옥은 희고 투명하다고 말하고 있다. 이 색깔은 벽옥에 관한 사도 요한의 묘사 즉 수정같이 맑음과 가장 흡사할 것같이 여겨진다. 벽옥의 색깔은 4절에 기록된 사실, 즉 왕좌에 앉으신 그분은 벽옥과 홍옥같이 보였다는 묘사로부터 가장 나은 암시를 얻을 수 있다. 이 구절에서 주님이 순수한 지혜와 사랑이심을 표현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벽옥의 우유빛 흰색과 루비의 불꽃같은 색깔은 위 생각과 화답된다. 그 이유가 그 외 어느 보석도 위의 지혜와 사랑에 대한 상징성을 지닌다는 암시를 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새 예루살렘 성벽의 첫 주춧돌을 이루는 벽옥의 의미는 무엇일까? 그리고 어느 사도의 이름이 그 돌 위에 씌어 있을까? 거룩한 도성의 열 두 주춧돌을 이루는 열 두 보석은 교회가 건설되어 기초를 두어야 하는 근본 되는 진리 또는 교리를 표현하는바, 첫 주춧돌, 여타 다른 모든 교리나 진리가 기대어 있어야 할 첫 번째 진리는 무엇일까?
교회라는 건물은 “모퉁이 돌이 예수 그리스도이어야 하고 사도들과 예언자들이 그 건물의 기초가 되어” 세워져야 한다 (에베소2:20). “보아라, 내가 시온에 주춧돌을 놓는다. 값진 돌을 모퉁이에 놓아 기초를 튼튼히 잡으리니 이 돌을 의지하는 자는 마음 든든하리라. 법이 나의 척도요, 정의가 나의 저울이다…” (이사야 28:16,17, 베드로전2:6). 교회는 사도들과 예언자들이 표현해주고 밝히 알게 한 진리, 그리고 주님이 계시는 진리 위에 건설되어야 한다. 사도와 예언자들이 밝히 알게 한 모든 진리 가운데서 교회의 첫째가는 가장 중요한 기초를 이루는 한 가지가 있다. 이 한 가지에 그 외 모든 구조물이 기대고 있다. 벽옥은 도성의 성벽이자 그 도성의 기초를 이루는 보석이라고 본문은 말하고 있다. 이 진리는 베드로가 고백한 유명한 구절에 표현되어 있다. 이 구절을 다시 읽어보자. “예수께서 빌립보의 가이사랴 지방에 이르렀을 때에 제자들에게 ‘사람의 아들을 누구라고 하더냐?’ 하고 물으셨다. ‘어떤 사람들은 세례자 요한이라 하고 어떤 사람들은 엘리야라 하고 또 예레미야나 예언자 가운데 한 분이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제자들이 이렇게 대답하지 예수께서 이번에는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하고 물으셨다. ‘선생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십니다.’ 시몬베드로가 이렇게 대답하자. 예수께서는 ‘시몬 바르요나, 너에게 그것을 알려 주신 분은 사람이 아니라 천국에 계신 내 아버지이시니 너는 복이 있다. 잘 들어라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죽음의 힘도 감히 그것을 누르지 못할 것이다” (마태16:13-18). 사람의 아들이 하느님의 아들이기도하다 라는 이 귀중한 진리는 새 예루살렘의 교리라는 성벽의 첫째가고 가장 중요한 움직일 수 없는 기초를 이룬다. 지옥의 어떤 권세도 이 진리만큼은 누르지 못한다. 이 교리는 예수 그리스도만이 신성이시다는 것, 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이 신성이라는 것을 가르친다. 그 이유가 예수는 두 번 태어난(twice-begotten) 하느님의 아들이었기 때문이다. 즉 그분은 동정녀의 태내에서 태어나셨고 죽음으로부터 서도 태어나신바 되셨기 때문이다. 부활로 완성된 그분의 신성화 하심(glorification)은 그분의 두 번째 출생이요 이 출생은 우리의 두 번째 출생을 위해 원형(Archetype)이 되어 주셨다. 그 이유가 그분의 부활은 우리의 거듭남과 부합되기 때문이다. 우리가 거듭남으로 하느님의 아들들(sons of God)이 되듯 그분은 신성화 하심으로 하느님의 아들(the Son of God)이 되셨다. 신성화 하심을 수단으로 그분은 하느님에게서 태어나신 것이다. 그분은 인성으로부터, 유한한 어머니 쪽에서 파생되었던 모든 것을 벗으시고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들로 일어나셨는바 그분의 참 인성까지 포함해서 일어나시어 이제는 그분 전체가 신성이 되어 계신다. 이 위대한 진리에 대한 믿음, 또는 신앙 안에서 이 진리를 받는 것 모두는 인간 마음 안에 있는 교회의 첫째 가는 주춧돌이다. 이런 신앙 없이 예수에 관한 진리는 우리 안에서 생명의 원리 또는 우리를 방어해 주는 원리로서 존재하지 않는다. 베드로, 그는 구세주에 관한 이 장엄한 믿음을 고백했다. 그 이후 그는 일반적으로나 세부적으로나 공히 믿음의 모형이 되었다. 이러한바 그는 베드로, 즉 반석(the rock)이라고 명명되었던 것이다. 그가 고백한 이 진리는 교회의 첫 번째 되는 주춧돌이다. 마치 그가 열 두 사도 중 첫 번째로 부름 받아진 것과 비슷하다. 그래서 기독교회의 첫 번째 주춧돌이 그의 마음 안에 놓여졌을 것이라 생각된다. 그의 표징적 품성에 하늘나라의 열쇠가 주어졌고 그의 품성이 주님의 양을 돌보도록 위촉된 것이다. 인간의 마음 안에서 베드로의 고백이 믿음의 진리로서 건설될 때 이는 성벽 자체의 재료요 첫 번째 주춧돌인 벽옥에 해당된다. 이 돌의 상징적 의미는 새 예루살렘을 드넓게 비추는 빛이 벽옥과 비교되는 대목에서 더 확실해진다. 그 이유가 진리는 교회의 빛이요 이 진리는 신앙을 통해 기독인의 마음 안에서 광채를 발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세상의 구속자, 창조자요, 하느님-인간이라는 측면에서의 주님에 관한 교리를 상징하는 벽옥에 새겨진 사도의 이름은 베드로 임에 틀림없다. 그 외의 사도들 역시 그들이 기독교의 품성을 표현해주고 있다고 이해할 때 각 사도는 각기 자기들이 고백한 그 진리의 모형이 되고 그 진리를 지상에 충만 되게 공표한 첫 번째 사람들이 되었으리라 생각된다.
벽옥의 뒤를 잇는 두 돌은 사파이어와 옥수이다. 우선 우리가 다시 주목해둘 게 있다. 새 예루살렘 성벽에 있는 보석들은 아론의 가슴받이에 있는 보석처럼 셋씩 짝지어 네 그룹으로 나뉘어지게 되어 있다는 점이다. 벽옥이 주님에 관한 교리를 표현하는바 첫 세 그룹의 보석들은 인간의 구세주와 하느님 되시는 측면에서 주님에 관한 믿음의 근본되는 원리를 표현한다고 결론을 내려 볼 수 있다. 사파이어는 첫 시리즈의 중간에 놓여 있는데 에봇의 경우 둘째 시리즈의 중간에 놓여 있는바 이 보석은 진리를 천적 수준에서 사랑함을 의미한다. 그러나 사파이어는 폭넓은 의미 또한 지니고 있다. 그 이유가 말씀의 역사적, 예언적 측면 모두에서 몇 번씩 언급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의 칠십 원로들이 이스라엘의 하느님을 뵙게 되었을 때 “그분의 발 아래는 마치 사파이어를 깔아 놓은 듯, 청명한 하늘같았다.” 이런 비슷한 광경이 에스겔에게도 보여졌다 (출애굽24:10, 에제키엘1:26,10:1). 이 구절들에서 사파이어는 신성과 천국적인 감각으로부터 온 반투명, 즉 말씀의 글자적 의미를 포함한다. 신성한 존재에 관한 위의 외관을 설명함에 있어 스웨덴보리는 다음의 말들을 인용하고 있다. “도성의 성벽의 주춧돌은 여러 가지 보석들로 장식되어 있었다. 첫 주춧돌은 벽옥이었고, 둘째는 사파이어, 셋째는 옥수였다.” 여기서 그는 질서의 최말단에 해당되는 신성으로부터의 진리(truth divine), 이것은 글자로 있는 말씀이 사파이어로 의미됨을 말하고 있다. 그는 이에 대한 예증으로 이사야서를 인용하고 있다. “광풍에 시달려 고생하여도 위로를 못 받는 이들아, 보라 내가 색깔로 너의 돌을 놓으며 사파이어로 너의 주춧돌을 놓으리라” (54:11). 이런 돌들이란 말씀 속의 진리들이고, 사파이어로 놓은 주춧돌이란 말씀의 글자적 의미에서 반투명된 진리들이다. 모든 보석 중에서 사파이어는 말씀의 영적 의미로 있는 진리들로부터 반투명된 말씀의 글자적 의미에 있는 진리들을 특별히 표현한다. 마치 사파이어가 주님의 발 아래서 보여졌듯, 그 이후 그분 스스로 벽옥과 청옥으로 나타나신 대목 등등을 집합해 생각해본다면, 성벽의 둘째 주춧돌로서의 사파이어는 첫째 주춧돌로 의미된 주님에 관한 교리를 지지하고 확증시켜 주는 말씀 속의 진리들을 표현한다고 결론지을 수 있다. 옥수(chalcedony)는 성경의 여느 다른 곳에서는 언급되지 않을 뿐 아니라 스웨덴보리의 저서에서도 설명되고 있지 않다. 그러나 이 보석이 지닌 빛깔과 그 보석이 소속된 곳이 첫 시리즈의 마지막이라는 점을 고려해서 그 의미를 가늠할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각 시리즈의 첫 번째는 각 시리즈가 지닌 공통 원리 중 이끌어 가는 원리들, 둘째는 중심 원리를 지지하고 전개시켜주는 진리들을, 셋째는 앞 두 가지를 사용함(use)내지 결과를 표현한다. 이를 다른 말로 바꿔 말해본다면, 이 셋은 원리가 의지 안에, 이해성에, 행동 안에 존재하는 것과 같다. 이는 세 개가 한 개를 구성하는 거룩한 것에 놓여 있는 본질과 형체 그리고 사용함(use)의 이치와도 같다. 각각의 보석과 각각의 사도들의 이름을 연결 짓는 것은 곤란할 것이라 생각된다. 이런 곤란을 무릅쓰고 첫 세 보석을 연결해 말해본다면 위 둘째, 셋째 보석을 빌립보와 안드레와 연결해 볼 수 있다. 이들은 베드로와 더불어 셋이 하나를 이룬다(a trine). 이 세 사람은 주님의 첫 세 제자이었던 것처럼 등장하고 있다. 안드레가 세례자 요한의 제자이었을 때 예수께서 묵고 계시는 곳으로 그분을 보러 갔다. 그는 거기서 예수와 함께 머물다가 되돌아 와서, “먼저 자기 형 시몬을 찾아가 ‘우리가 찾던 메시아를 만났소’ 하고 말하였다. 그리고 시몬을 예수께 데리고 갔는데 예수께서 시몬을 눈여겨 보시며 ‘너는 요한의 아들 시몬이 아니냐? 앞으로는 너를 게바라 부르겠다’ 하고 말씀하셨다. 게바란 바위(stone)라는 뜻이다. 그 이튿날 예수께서 갈릴리로 떠나 가시려던 참에 빌립보를 만나 ‘나를 따라 오너라’ 하고 부르셨다” (요한1:41-43). 빌립보와 안드레는 같은 지역 출신(44절)이라는 점에서 그들은 바깥쪽으로 교리적인 연결 관계에 있을거라는 추측을 가능하게 한다. 그들의 관계가 표현하는 품성의 인척 관계에 관한 것은 그들에 관한 복음서의 기록으로부터 찾아 볼 수 있다. 그리이스 사람들이 예수를 뵙게 해달라고 필립보에게 청했을 때, “빌립보가 안드레에게 가서 이 말을 하고 두 사람이 함께 예수께 가서 그 말을 전했다” (요한12:22). 이런 역사적 사건 말고도 빌립보의 마음 상태에 관한 기사가 더 있다. 이 기록은 그가 주님에 관련되는 말씀 속의 진리들, 그분만이 신성하심을 증거해주는 진리를 어떻게 표현하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인간적 견지에서 말해 본다면 우리는 이 사도로부터 예수와 아버지가 하나이시다는 주님에 관한 가장 완전한 서술을 찾을 수 있다. 도마에게 대답하는 가운데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 ‘너희가 나를 알았으니 나의 아버지도 알게 될 것이다. 이제부터 너희는 그분을 알게 되었다. 아니 이미 뵈었다.’ 하고 말씀하셨다. 이번에는 빌립보가 ‘주님, 저희에게 아버지를 뵙게 하여 주시면 더 바랄 것이 없겠습니다’ 하고 간청하였다. 예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다. ‘빌립보야 들어라.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같이 지냈는데도 너를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 나를 보았으면 곧 아버지를 본 것이다. 그런데도 아버지를 뵙게 해 달라니 무슨 말이냐? 너는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것을 믿지 않느냐? 내가 너희에게 하는 말도 나 스스로 하는 말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면서 몸소 하시는 일이다.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고 한 말을 믿어라. 못 믿겠거든 내가 하는 일들을 보아서라도 믿어라’” (요한14:7-11). 위 인용된 구절을 보면 빌립보의 질문은 그가 그분에 관해 얼마나 불완전한 지식을 가졌는지 알 수 있게 되어 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알지 못하고 있던 사항에 대해 그분의 가르침이 있어지기를 바랐고 그가 이해하지 못했던 것들에 관해 지적인 빛을 획득하기를 열망하고 있다. 이런 모습은 그가 진리를 받아 음미할 준비가 잘 되어 있었다는 것, 더불어 이런 지식을 가진 이후 그런 품성을 잘 표현해주었을 것이 분명하다는 것을 짐작하게 해준다.
안드레아를 살펴보자. 그는 베드로의 형제 되는바 선용으로 본보기를 보여주는 믿음, 믿음의 순종을 표현한다. 이 사항은 보석 자체와 연결해도 어느 정도 확실하다. 옥수는 백색 또는 푸른색의 엷은 빛깔인바, 사랑의 표현물인 빨강에 관한 색은 함유하고 있지 않다. 따라서 이 보석은 진리를 표현하는 보석 종류에 해당된다. 이는 이 구절에서의 상징적 품성이다. 그 이유가 안드레아는 사랑의 선을 표현하는게 아니라 믿음의 순종에 따라 결과되는 선을 표현하기 때문이다.
안드레와 베드로가 주님의 제자가 되는 상황에는 교훈적이면서도 흥미를 주는 대목이 있다. 비록 서열상 베드로가 주님의 첫 제자이지만 실제로 보면 안드레가 첫 제자였다. 그 이유가 안드레를 통해 베드로도 주님의 제자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안드레는 의지에 있는 믿음, 또는 행동에 있는 믿음을 표현한다. 심정으로 믿는 상태와 그 반대인 불신앙의 악한 심정에 관해서 우리는 성경 도처에서 읽어 볼 수 있다. 안드레아가 표현하는 의지 안에 있는 믿음은 지성이 진리를 받을 수 있게 호의적인 심정의 확고한 상태를 말하고, 이 상태는 이해성이 진리를 받게 하는데 마치 안드레가 베드로를 주님께 데려오는 것과 같다. 이는 믿음을 통해 바깥쪽 생활이라는 최말단의 믿음까지 있게 하는데 이것이 믿음의 순종이다. 그래서 이런 신앙자의 품성은 그의 이름이 새 예루살렘 성벽의 셋째 주춧돌에 새겨 있을 것이라고 이해되게 해준다.
그러므로 벽옥, 사파이어, 옥수는 주님에 관련된 교리, 이 교리를 증거하는 진리, 그 교리와 관련된 진리로 본보기를 보이는 생활을 표현한다.
두 번째 시리즈에 해당되는 새 예루살렘 성벽의 주춧돌에 있는 보석들은 녹보석(emerald), 홍마노(sardonyx), 홍보석(sardius)이다.
타 성경(the Authorized Version)에 의하면 에머랄드는 아론의 가슴받이에서 두 번째 열의 첫 보석이다. 이 보석은 이 구절 외에 히브리 성경의 세 곳에서 더 나타나고 있다 (출애굽39:11, 에스겔26:17, 28:13). 스웨덴보리는 히브리어의 이 보석을 녹옥수(chrysoprasus)로 번역하고 있다. 그러므로 통상 영어 성경이 에머랄드로 부르는 에봇에 있는 보석에 관한 스웨덴보리의 설명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위의 여러 구절 외에 에머랄드라는 단어로 명명되는 곳은 계시록 4장 3절이다. “그분의 모습은 벽옥과 홍옥 같았으며 그 왕좌 둘레에는 에머랄드 같은 무지개가 걸려 있었다.” 이 구절에 관해서는 이미 살핀 바 있듯이 이 구절의 에머랄드는 주님의 사랑과 지혜의 바깥쪽 영역을 의미한다. 자연계를 대표할 만한 이 색깔이 암시하는 바는 이러하다. 녹색, 무지개의 중앙에 있는 색인데, 이는 천국 아치(arch)의 양쪽에 있는 푸른색과 노랑색이 혼합되어 나타난 색으로 과거에 생각해 왔다. 그래서 이런 착상들이 우리로 갖게 해주는 것은, 녹색은 자연적 수준에서 있어지는 선함과 진리의 결합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과학자들이 보여주는 바 노랑과 푸른색이 혼합된 광선은 흰색을 생산한다는 것이다. 보다 더 작은 규모에서 볼 때 모든 색깔들은 서로 어우러지면 그 자체가 변형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지금 프리즘에서의 색깔을 말하고 있다. 예술가들의 녹색은 파랑색과 노랑색을 혼합함으로 얻어지는데 이는 그림 물감이라는 재료 때문이다.
비록 녹색이 자연계의 대표격이 되는 색깔이어서 외적 측면의 의미를 지녔지만 이 색깔은 생명이 있음을 표시한다. 연한 풀, 이 풀이 엷은 노랑 색깔이 많을 경우 이는 봄철이라는 우리 마음의 세계, 젊은 시절, 싱싱함, 희망 등등과 연결되는데 이는 자연계에도, 인간 삶에서도 동일하다. 이런 녹색식물에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녹색을 지닌 보석은 교리적 측면에 있는 진리들의 시리즈의 시작을 상징하고 있다. 다른 두 보석, 홍마노(sardonyx)와 홍보석(sardius)는 풀의 더 높은 것에 대한 상징물이다. 홍마노라는 이름은 그 보석에 있는 빨간 줄무늬에서 명명되었다. 홍옥수 또는 루비(ruby)가 이글거리는 불꽃같은 빨간 색이라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이 시리즈의 색깔은 봄, 여름, 가을과 비교된다. 즉 점진적인 성장과 발달이 내향으로 있어져서 최말단의 선용으로 마감되는 상태를 표현한다. 그래서 주님께서 비유로 알리신 거듭나아가는 삶의 세 단계 즉 잎-이삭-낱알로 표현해 볼 수도 있다. 에머랄드는 봄과 잎사귀, 홍마노는 여름과 이삭, 홍옥수는 가을과 속이 가득찬 낟알과 비슷하다. 세 개가 한 개를 이루는 삼위일체에서 생명의 원리 되는 사랑의 요소에 관한 상징물, 즉 사랑의 시작, 발전, 사용함이라는 결과에 관한 모습들을 들여다 볼 수 있다. 첫 시리즈는 주님에 대한 믿음의 원리와 그 원리의 발전을, 둘째 시리즈는 주님을 사랑함에 대한 원리와 그 원리의 발전을 상징하고 있다. 둘째 시리즈의 마지막 두 보석중 홍마노(sardonyx)는 우림과 둠밈을 넣는 가슴받이에서 열거되고 있지 않다. 그러나 얼룩마노(onyx)와 같은 종류이다. 가슴받이에서 얼룩마노는 마지막 줄(시리즈)의 중앙, 즉 녹옥(beryl)과 벽옥 사이에서 열거되고 있다. 홍마노는 얼룩마노(흑색)에 빨간 줄의 맥이 지나간다. 마치 얼룩마노와 홍옥수가 혼합된 듯한 인상을 준다.
위 세 보석과 세 사도의 이름을 연결해 보려 시도할 경우 사도들이 표현해주는 품성을 견주어 생각해본다면 어느 정도는 감지되는데 그들은 바르톨로메오, 야고보, 요한일 것이라 생각된다. 바돌로매는 첫 복음서와 사도행전에서 그 이름만 언급될 뿐이다. 공관복음서와 사도행전의 바돌로매는 요한복음서의 나다나엘일 것으로 이해하는게 일반적인 흐름이다. 안드레, 베드로, 빌립보가 주님을 메시아로 인정하는 복음서의 대화는 어떻게 나다나엘이 제자가 되었는지에 관한 정보를 얻게 한다. 안드레는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확신한 뒤 자기 형제 시므온을 찾아 가고 그를 예수께 데리고 왔다. 이와 비슷하게 빌립보도 예수를 메시아로 영접한 뒤 그의 친구 나다나엘을 찾아가 “와서 보라”고 권유했다. 나다나엘은 나사렛에서 무슨 신통한 것이 있을 수 있느냐고 믿으려 들지 않았다. 예수께서는 나다나엘이 가까이 오는 것을 보시고, “이 사람이야 말로 정말 이스라엘 사람이다. 그에게는 거짓이 조금도 없다” 라고 말씀하셨다. 이때 나다나엘이 예수께 “어떻게 저를 아십니까?” 하고 묻자. 이렇게 대답하셨다. “빌립보가 너를 찾아가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 있는 것을 보았다.” 그가 이렇게 외쳤다. “선생님, 선생님은 하느님의 아들이시며 이스라엘의 왕이십니다.” 예수께서 나다나엘에 주신 품성, 예수를 메시아로 인정하되 심정으로 느껴 직바로 인정하는 그의 대답은 그가 주님을 사랑함이라는 품위의 시작을 얼마나 잘 표현하는지! 영적 차원에서 이스라엘 사람이란 영적 수준의 사랑이 자기의 원리가 되어 살아가는 사람이다. 이 사랑에 어떤 위선 같은 게 숨어 있지 않다면 그야말로 순수함 자체 아닐까! 베드로가 주님께 드린 품성은 “그리스도는 죄를 지으신 일이 없고 그 말씀에도 아무런 거짓이 없었다” 이다 (베드로전2:22). 죄가 없으신 그분이 죄 없다고 발표하는 것은 솔직함이라는 품성이 가능할 수 있는 최고의 증언이다. 야고보와 요한이 표현하는 품성에 관해서는 자세한 설명이 필요 없으리라 생각된다. 그들이 사랑을 표현한다는 것은 너무나 잘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있는 온유함, 헌신적인 것 등등은 주님을 사랑하여 이루어 내는 선함의 모형이 될 뿐 아니라 그 자체가 체현되고 있다.
이상 두 시리즈, 여섯 개의 보석을 일괄해서 생각해보자. 첫 보석은 벽옥이고 마지막은 홍옥수(루비)이다. 이 두 보석은 아론의 가슴받이에 박힌 보석의 마지막과 처음에 박혀 있다. 여기서의 경우 이 두 보석은 처음과 마지막, 또는 주님과 직접 관계되는 주춧돌로서 가장 낮은 수준과 가장 높은 수준에 해당된다고 간주할 수 있다. 아론의 가슴받이에서 마지막 보석이요, 새 예루살렘 성벽의 첫 주춧돌인 벽옥은 최말단(ultimate)에 있는 신성한 진리(Divine Truth)를 상징하고 있다. 이는 세상에 오셨을 때의 주님이다. 말씀이 육을 만드셨을 때 그분은 “마지막”이 되셨다. 그 반대인 영원으로부터 계신 경우 그분이 “처음”이 되셨던 것과 대등한 이치이다. 하느님이 육 안에서 명백해진 사실에 관계되는 그분에 관한 진리는 인간 마음에 있는 교회에서는 첫 번째 주춧돌이다. 그리고 그분을 사랑함은 기독인의 신앙과 사랑, 그리고 예배의 대상으로서의 주님에 관련된 진리 중 마지막 주춧돌이다. 첫 여섯 주춧돌은 주님에 관한 근본되는 원리를 표현하는데 이후 살피게 되는 나머지 여섯 주춧돌 내지 보석은 이웃에 관한 근본되는 원리를 표현하게 된다.
이제 생각해보게 되는 세 번째 시리즈의 세 보석은 황옥(chrysolite), 녹옥(beryl), 담황옥(topaz)이다. 황옥은 에봇에 박힌 보석에서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나 황옥은 첫 열의 중간에서, 녹옥은 마지막 열의 첫 번째에 등장한다. 에봇의 첫 번째나 마지막 째에 있던 두 보석이 본문에서는 한데 모여서 거룩한 도성의 성벽에서 세 번째 시리즈를 형성하고 있다. 이미 인용한 권위자에 따르면 녹옥은 올리브 녹색이고, 녹옥은 바다 녹색(sea-green)이며 담황옥은 포도주 또는 금빛 황색이다. 녹옥은 에봇의 보석들의 이름 사이에 열거되어 있지 않다. 바다 녹색으로 분류하는 녹옥은 스웨덴보리의 저서, [천국의 신비, heavenly secrets]에서는 얼룩마노(onyx)와 벽옥(jasper)과 더불어 분류하는데 그 보석은 푸른색으로부터 파생되어 흰색에 접근하는 빛깔을 지닌 보석으로 분류하고 있다. 담황옥은 비록 그 이름의 근원이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그 빛깔은 빨갛게 불이 타는 빛깔(red flaming color)이라고 위 저자는 생각하고 있다. 위 저자는 욥이 지혜에 관해 했던 말로부터 결론 내리고 있다. “에디오피아의 토파즈도 그것과 동등히 놓이지 않을 것이고 아무리 순수한 금이라 해도 그것과는 가치를 비길 수 없다” (28:19). 이 구절에서 욥이 담황옥에 대해 생각한 것은 그것이 보석이라는 것일 뿐 그 보석의 빛깔을 논한 것은 아니다. 위 저자도 이 구절을 인용해서 빛깔이 무엇이라고 단정하려는게 아니라 그 보석에 가장 걸맞는 빛깔을 생각해보는데 어떤 근거를 제공하려 했을 뿐이다. 그는 영감에 의해 자연적 수준의 지식을 받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의 추측은 보석에 관한 전통적인 지식이 만족시켜 주지 못하는 사항에서까지 거의 진리에 가깝게 각 보석의 색깔을 제공해 주는 것 같다. 그가 담황옥에 관해 말하는바 그 보석은 에봇의 첫 번째 열, 그래서 서열이 가장 높으므로 천적 수준에 속하는 것, 즉 사랑의 선을 의미하고, 녹옥은 에봇의 마지막 열에 속하므로 가장 낮은 수준에 속하는 것, 즉 영적 수준에 있는 것들, 진리의 사랑을 의미한다. 위 두 보석이 등장하는 곳이 바뀐다고 해서 보석의 의미까지 변하는 것은 아닐 것이라 본다. 그러나 등장하는 곳에 따라 그 의미의 변화가 조금씩 있어지리라 본다. 보석의 경우가 그러하듯 열 두 사도의 이름도 그러하고 에봇의 보석에 새겨진 이스라엘 지파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열 두 보석 중 첫 여섯의 보석이 주님 사랑에 관계되는 근본 원리를 표현하고 나머지 보석들이 이웃 사랑에 관계되는 근본 원리를 표현한다는 논리가 정확하다면 이제부터 살피는 보석들은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는 둘째가는 법을 밝히는 교리 내지 원리에 관한 상징물이 된다. 그 이유가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신성한 모든 법을 합친 것과 다름없기 때문이다. 모든 교훈, 진리, 그것들이 신앙이나 사랑, 예배나 생활 어느 것과 관계를 갖든 하느님과 인간에 대한 실제의 사랑 외에 더 다른 목적이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하기 위해서 우리는 그분을 알아야 하고 그분을 믿어야 한다. 이와 같이 우리가 이웃을 사랑하려면 우리는 내 이웃이 누구인지, 이웃을 향한 사랑은 무엇으로 구성되는지 반드시 알아야만 한다. 우리가 이웃을 사랑할 수 있기에 앞서 우리는 내 이웃에 신뢰를 가져야 한다. 우리가 이웃을 사랑하라는 명령을 진실 되게 실시하기에 앞서 우리는 이웃사람다운 사랑의 의무, 뿐만 아니라 효력 있는 신뢰를 가져야 한다. 열 두 주춧돌의 두 번째 분과로 간주되는 나머지 여섯 보석 중 첫 세 보석은 이웃 사랑에 관한 근본 되는 진리들 즉 우리의 이웃이 누구이며, 우리의 이웃이란 무엇인가와 이웃을 사랑한 결과인 유용함은 무엇인가에 관한 진리를 상징화하고 있다. 다시 말해 새 교회의 교리에서 집중 조명되어 밝히는 이웃 사랑에 관한 내용은 새 예루살렘 성벽의 주춧돌을 이루는 매우 귀한 보석의 한 부분을 점철한다.
모든 사람은 내 몸 같이 사랑해야 할 이웃이라는 이름 안에 포함되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누구도 예외 됨 없이 모든 사람을 사랑하게 되어 있다. 그 이유가 우리는 친구 뿐 아니라 원수도 사랑하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정한 교리는 식별력이 없는 사랑이나 무차별한 선행 때문에 야기되는 심각한 악들을 미리 방지해준다. 비록 우리가 선한 자 뿐만 아니라 악한 자까지도 사랑해야 한다고 말할지라도 그들 안에 있는 선과 악을 모두 사랑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이웃을 사랑하라는 명령은 어떤 인간을 통째로 사랑하라고 말하는 게 아니라 그 인간 안에 있는 선을 두고 한 말이다. 그들 속의 선만이 우리의 이웃이 된다. 결론적으로 우리가 사랑해야 할 이웃을 본질적으로 보면 선 그 자체 뿐이다. 이런 원리에서 우리는 모든 사람을 사랑할 수 있고 그들 속의 선을 위해 그들을 사랑하는 것이고 그 선만을 위해 이웃에 무엇인가를 행해야 한다. 극단적으로 이렇게 가정해 볼수 있다. 아무개는 이웃 사랑을 받게 해줄 어떤 선함이 하나도 없다 라고 단정하는 경우이다. 그러나 모든 사람은 선에 관련되어 주님께서 아껴두신 선함을 다소나마 가지고 있다. 이 선함이 제아무리 작다 해도 그 선함은 “이웃을 사랑하라”는 명령의 실천을 위한 건수(품질)에 해당된다. 어떤 개인 안에 있는 선이 본질적 측면에서 우리의 이웃이라면 그 사람 역시 둘째가는 의미에서 우리의 이웃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 이유가 우리는 사람 자체를 사랑함도 없이 그 사람 속의 선만을 사랑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견지로 보면 모든 각 개인은 우리의 이웃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하지만 그 개인이 소유한 선을 감별하여 그 선함을 더 북돋아 주기 위해 각 인간의 품질에 관한 식별력은 여전히 존재해야 하리라.
만일 선이 우리가 사랑해야 할 이웃이라면 구체적으로 사랑의 대상으로 삼게 되는 것은 무엇일까? 이웃 사랑은 그 자체로만 생각하면 선행(charity)이고 이는 상대방을 향한 호의(친절, good will)이다. “사람에게 친절함”이 목적이고, 평화의 복음이 그 열매이다. 의지 안에 선이 있는 상태인 친절(good will)은 이해성에 있는 진리와 반드시 하나 되어 있어야만 한다. 그 이유가 참된 사랑은 계발된 사랑, 즉 진리로 인도되고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안내하는 능력 없이 이웃 간의 사랑은 맹목적인 선한 자극 수준일 뿐이어서 이 선한 자극을 흥분시키는 어떤 객체가 등장할 경우 닥치는 대로 흥분된다. 이럴 경우 어떤 유익한 것도 사라지고 때로는 상처만 남기는 결과도 배제할 수 없다.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것, 그분께서 창조물에 부여하신 모든 특전들은 나름대로 제 각각의 목적을 위해 좋은 것 또는 사용함(use)을 지니고 있다. 특히 인간의 경우, 하느님께서는 인간들끼리 서로 유용해지도록 인간 존재라는 것을 창조해 놓으셨다. 단어 생명으로 납득될 수 있는 모든 것을 위해 서로서로 도와 삶을 영위하는데 있어 어느 창조물도 인간 만큼 잘 해낼 수 없다. 물질 차원의 존재들이 제 아무리 잘 유지되고 있다 해도 정신 차원의 개선 내지 유지는 마음이 마음 위에 행동됨이 없이는 불가능해질 것이다. 그런고로 마음이 진짜 사람이다. 자유와 이성이라는 인간의 자질은 인간으로 여타 창조물과 구별되게 하는바 이 두 특질은 잠재적으로 있는 인간성이다. 그것의 소유자가 잘 방향 잡아 이 특질을 발달시킬 때 그 소유자인 인간은 사람이 되어간다. 동물들과는 달리 인간은 본성에 속하는 위 자질을 상속받는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면서 축적된 지식과 경험으로 그 자질이 풍족해지게 하는 타인의 자질이라는 매체가 없었다면 아마 미발달 그대로 남아 있었을 것이다. 인간적인 매체가 세상의 형상에 제 자질을 깎아 맞추게 하는데 필요조건이었다면 더욱 그 자질에 요구되어야 하는 것은 천국의 형상에 모양을 맞추는 것일게다. 하느님이 영적 측면에서 힘을 주시는 유일한 분이시듯 계시(밝히 알게 함)는 종교적 지식의 근원이다. 인간 매체(human agency)는 한정된 삶의 일과 보다 더 절실한 곳이 있다. 그것은 인간의 마음 측면에서 이다. 그 이유가 영적 사항에 관한 것을 획득하는데, 또는 영원한 생명을 획득하는 것에 관한 특질은 상속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만일 하느님이 천국을 위해 세상을 창조하셨고, 영원한 생명을 위해 한정된 생명을 주신 것이라면 우리는 그분의 계획을 증진되게 하는 과정에서 그분과 더불어 함께 일할 수 있다. 이러면 그분처럼 일시적인 수단을 영원한 것으로 만들게 된다. 이상 살핀 바 는 선행(charity)이 이웃에 보답할 수 있는 최고의 사용함(use)에 관해서이다.
위 세 보석과 짝지어 볼 수 있는 사도의 이름은 도마와 마태와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이다. 마태복음에 의하면 세 사도의 이름은 일곱, 여덟, 아홉 번째에 있고 이 순서는 거룩한 성의 주춧돌에서 황옥, 녹옥과 담황옥이 위치한 순서와 같다. 그러나 각 사도 내지 보석에 할당해 볼 수 있는 표현적 품성들이 꼭 맞는지는 살펴보아야 하리라 생각된다.
도마는 세 번째 그룹 중에서 첫 번째에 위치하는데 그는 마태나 야고보 보다 사도로서는 더 유명한 편이다. 나사로가 죽었다는 소식을 접한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그곳에 가자고 말할 때 쌍둥이라 불리는 도마가 제 동료인 딴 제자들에게 “우리도 함께 가서 그와 생사를 같이 합시다” 하고 말했던 대목이 요한복음 11장 16절에 있다. 이 대목을 보면 그는 주님께 목숨을 바치겠다고 각오할 정도로 헌신적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는 그분이 어떤 분이신지에 대한 지식, 또는 그분의 권능에 대한 믿음은 매우 적었던 것 같다. 그가 주님에 관한 지식이 적었다는 것은 다음 구절에서 더 명백하다. “…나는 너희가 있을 곳을 마련하러 간다…너희는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알고 있다.” 그러자 도마가 “주님, 저희는 주님이 어디로 가시는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그 길을 알겠습니까?” 하고 말하였다 (요한14:2-5). 지식의 부족 뿐만 아니라 믿음도 부족했다는 것은 그를 유명하게 만든 대목에서 알아 볼 수 있다. 주님이 부활하셨다고 동료 제자들이 말할 때,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내 눈으로 그분의 손에 있는 못자국을 보고 내 손가락을 그 못자국에 넣어보고 또 내 손을 그분의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 그러나 이에 대한 확실한 증거를 갖게 되자 그는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 하고 외쳤다. 이는 불신앙을 지녔던 도마가 일깨워져 확실한 신앙을 지닌 도마가 되는 것에 대한 기록이다. 그 외에도 도마는 티베랴 호수에서 다른 제자들과 밤새 헛수고를 하다가 배의 오른쪽에 그물을 던지라는 그분의 충고를 따름으로 많은 고기를 잡게 되었다. 배의 오른쪽이란 선행의영, 또는 이웃간의 사랑을 뜻한다. 위와 같은 사건의 세부사항을 통해 그가 표현한 품성을 알아 볼 수 있는 것 외에도 그의 이름 자체도 표현적 품성을 지니고 있다. 그의 이름은 그가 쌍둥이라는 사실을 표현하고 있다. 거의 동일한 시간에 둘이 출생하는 성경의 예로서 에서와 야곱 (창세기25:25,26), 그리고 베레스와 세라 (창세기38:30)가 있다. 이들은 모두 선행과 신앙의 연결과 관계가 있다. 위 두 사건 각각에서 아우가 실제의 첫 출생자가 되고 있다. 우리의 신앙은 비록 신앙이 먼저 태어난다 해도 선행이 실지로 장자의 권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가르치시기 위해 신성하게 섭리된 역사가 위 쌍둥이들의 사건이다. 다시 말해서 선행(charity)이 실제적 측면에서 형이고, 신앙은 가상적 측면에서만 형이다. 신앙이 있은 후에 있어지는 게 선행 이지만 실지로는 신앙에 앞서 존재한다. 비록 행동으로 선행이 존재하지 않았다 해도 동기 측면에서 선행에 앞서 있다는 말이다. 과감한 결론을 도마에 관해 내려본다면 그가 선행이라는 품성을 표현할 수 있기 위해서 그는 쌍둥이 중에서 형이었을 것 같다. 그러나 그는 두 요소, 선행과 신앙, 주님 사랑과 인간 사랑이라는 요소를 각각 얼마 정도까지는 하나 되게 했을 듯 보인다. 진짜에 속하는 모든 신앙이 선행으로부터 오듯, 생명 있는 모든 선행은 사랑으로부터 온다. 기독인에게 있게 되는 품성이 차이가 나는 것은 각자가 지닌 품성의 발달단계가 차이가 있는데서 비롯된다. 완전으로 가고 있는 사람들 속에서 신앙은 선행 보다 앞선 듯, 더 우월한 듯 보인다. 그리고 선행이 사랑 보다 더 우월한 듯 나타난다. 마치 야곱이 에서 보다 더 우월한 듯 보이는 것과 같다.
마태에 관한 복음서의 언급은 많은 편에 속하지 않는다. 물론 그가 복음서의 기자였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 본문을 다루기 위해 살피는 마태는 사도 라는 측면에서이다. 마태오에 관해 우리가 배우는 것들은 그의 동료 제자들과의 관계 측면보다는 주님과의 관계에서가 더 많다. 그럼에도 복음서라는 거룩한 역사는 그가 죄인들에게도 제 동료에서와 같은 선행을 강하게 느끼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해준다. 그가 부름 받고 나서 큰 잔치를 주님과 제자들을 위해 차렸는데 그 자리에 그는 세리와 죄인들까지 초대했다 (누가5:29). 새로운 사도가 된 그가 감사와 기쁨의 표시로 스승을 위해 준비한 축제같이 이전에 저와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이 자기 같이 변화된 세리가 되기를 바라는 그의 마음을 위 누가복음의 사건이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그의 이름 자체에서도 그가 표현하는 품성에 관해 찾아볼 수 있다. 이름 마태는 “주는 것”을 의미하는 단어로부터 파생되고 있다. “주는 것, to give”는 선행이 지니는 애착을 충분히 표현하는 서술 동사이다. 선행이란 나누어주기를 기뻐함인데 이는 일시적인 이 세상의 선 뿐만 아니라 영적인 선까지도 당연히 포함된다. 사도 마태는 두 복음서 (마가2:14, 누가5:27,29)에서 레위라는 또 다른 이름으로도 불리고 있다. 레위란 결합함(joined)이라는 뜻이다. 이 이름은 레아가 그의 셋째 아들에게 붙였는데 붙인 이유가, “…이제는 남편이 별수 없이 나에게 매이겠지…” (창세기 29:34) 라는 그녀의 바람 때문이다. 이 이름의 취지는 레위 지파가 성직자 직을 신성하게 위촉받는데서 더욱 돋아나 보인다. 가장 높은 의미에서 레위는 주님과 교회를 하나 되게 하는 매체로서의 사랑을 표현한다. 둘째 의미에서, 레위는 각 지파 사이에 섞여 살았듯이 교회에 있는 멤버들을 하나로 묶는 구심체로서의 선행을 표현한다. “선행은 모든 것을 하나로 묶어 완전하게 한다” (골로사이3:14). 선행을 수단으로 진정한 교인 뿐만 아니라 각종 교회에 있는 멤버들, 그 외 모든 교회 멤버들을 하나 되게 하여 일종의 보편적인 교회를 형성한다. 새로운 천국의 처방에서도 선행을 수단으로 모든 나라들은 하나의 공통된 형제애를 갖는다. 이상 살핀 바가 보석이 의미하는 선행 또는 이웃 사랑이다.
세 번째 사도의 경우는 더욱 결정 내리기 힘든 대목이 있다. 그가 알패오의아들 야고보와 갈라디아서 1장 19절에서 언급된 “주님의 동생 야고보”가 동일 인물인지가 확실치 않기 때문이다. 만일 동일 인물이 아니라면 누가 야고보서의 저자인가 이다. 이 서간문은 이웃 사랑의 실지적 부분 또는 실용적 교리를 표현하는 품성을 지닌 사람이었을 것이다. 이 서간문은 신앙 만으로 구원받음이라는 논리에 반대되는 부분, 즉 선한 일들이 구원에 효험있는 행위라는 것을 완벽하게 논증하고 있다. 이 서간문의 저자가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임을 적극적 자세로 주창할 수 없는 상황이라면 다른 서간문에 등장하게 되는 주변 상황으로부터 그가 표현하는 품성을 추측해보아야 할 것 같다.
이상 위에서 우리는 세 보석, 이와 연결되는 세 사도를 살폈는데, 이 셋은 이웃 사랑이라는 테두리 안에 있는 각기 다른 요소들, 좀더 자세히 구분한다면 내적 인간 안에 존재하는 이웃 사랑에 관한 요소들을 표현한다. 이에 비해 아래에서 살피는 마지막 세 보석은 외적 인간 안에 존재하는 이웃 사랑의 요소들이다. 그 이유가 거듭남의 첫 번째는 내적 인간의 거듭남이고 이 거듭남으로부터, 이 거듭남이 있은 뒤 외적 인간의 거듭남이 뒤따르기 때문이다.
거룩한 도성의 성벽 주춧돌을 형성하는 마지막 세 보석은 비취옥(chrysoprasus), 청옥(jacinth), 자수정(amethyst)이다. 비취옥은 황녹색(golden green), 청옥은 보라색(hyacinth), 자수정은 자줏빛(purple)이다. 이 색깔들은 통상적으로 할당된 색들이다. The Authorized Versions 에 의하면, 아론의 가슴받이에 박힌 보석에는 비취옥이나 청옥이 없다. 거룩한 도성의 마지막 주춧돌인 자수정만이 우림과 둠밈에서 아홉 번째에 놓여 있다. 스웨덴보리의 저서에서 비취옥은 네 번째 돌로 에머랄드대신에 언급되고 있다. 이 보석의 색깔은 빨강 색으로부터 근원된 파랑 색이라고 말해지고 있다. 그래서 둘째 시리즈를 구성하는 보석으로서의 비취옥은 선을 천적 수준으로 사랑함을 의미하고, 자수정은 흰색으로부터 근원된 파랑색이라고 말해지고, 이 보석은 영적 수준의 선, 또는 선을 영적 수준에서 사랑함을 의미한다고 설명하고 있다. 더불어 이 사랑은 이웃을 향한 선행 이라고 더 설명되고 있다. 청옥은 이 책의 앞부분(9:17)에서 이미 설명된바 있다. 즉 “그 말들과 그 위에 탄 자들의 모습이 내 눈에 비치었는데 그들은 불빛 같은 붉은 색이나 보라색이나 유황색의 가슴방패를 붙였다…” 이 구절에서 살핀바와 같이 청옥(풍신자석)은 좋은 측면의 의미에서 볼 때 영적 수준의 사랑으로부터 오는 총명을 의미한다. 그러나 나쁜 측면일 경우 자아에서 파생된 총명, 지옥적인 사랑으로부터 오는 총명을 뜻한다. 거룩한 도성의 성벽에 있는 풍신자석은 이웃을 향한 사랑인 영적 수준의 사랑으로부터 오는 총명에 해당된다. 마지막 시리즈의 첫 번째 보석은 영적 수준의 사랑, 두 번째 보석은 영적 수준의 사랑으로부터 오는 총명, 마지막 째의 보석은 영적 수준의 선이 영적 수준의 총명을 수단으로 생산한 유용함, 또는 실지의 선을 말한다.
마지막 시리즈의 보석들과 연결되는 세 사도는 타대오, 가나안 사람 시몬, 가리옷 사람 유다이다. 타대오는 유다서라 불리우는 서간문의 저자이다. 이 유다서에서 이렇게 말을 시작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며 야고보의 동생인 나 유다가 하느님 아버지의 부르심을 받은 여러분에게 이 편지를 씁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여러분을 사랑하시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을 지켜 주십니다” (유다1:1). 그리고 “…오직 한 분이신 하느님만이 영광과 위엄과 권세와 권위를 이제와 또 영원토록 누리실 분”으로 편지를 끝맺고 있다 (1:25). 유다라는 이름 자체 역시 사랑을 표현하는 품성인바 이웃 사랑까지 암시하고 있다. 그 이유가 유다와 유다 지파가 주님 사랑을 표현하는데, 천적 수준인 주님 사랑이 영적 수준에서는 이웃 사랑이 되기 때문이다. 시몬은 그가 열심당원 시몬(Simon Zelotes)이라 불리운 것 외에는 더 기록된 게 없다. 이 기록은 그가 유대 민족주의의 단체 멤버였든가, 아니면 그가 열심 있는 사람이어서 그렇게 불리웠던가 둘 중 하나일 것이다. 어쨌든 그의 이름은 시몬 베드로의 이름이 지니는 원리와 비슷한 원리, 그러나 보다 덜 분명한 원리를 뜻할 것으로 여겨진다. 마지막으로 가리옷 유다의 이름이 거룩한 예루살렘의 성벽 주춧돌에 새겨져 있을 것이라고 상상해보는 것은 선뜻 응낙하기 힘든 부분일 것이라 생각된다. 그 이유가 열 두 주춧돌에 있는 열 두 사도의 이름은 각 사도의 이름이 표현하는 여러 가지 원리를 뜻하기 때문이다. 열 두 사도는 사랑과 진리, 그리고 선함에 관한 모든 원리, 또는 교회를 구성하는 모든 품위와 미덕(grace and virtue)들을 표현했다. 주님에 의해 선택된 사람으로서의 유다는 교회를 완성하는데 필요한 원리들 중 어느 하나를 표현한다. 그러나 주님을 배반한 사람으로서의 유다는 거꾸로 된 원리를 표현한다. 표현적 품성의 두 면을 생각해보면 사도로 신성하게 임명되었던 유다가 지니는 의미는 배반자로서의 유다의 의미와는 전혀 다른 것일 수 밖에 없다. 사도라는 단순한 측면에서 그를 생각해볼 때 유다가 지닌 표현적 품성은 교회나 종교에서 매우 중요한 요소를 실지 지니고 있다. 어떤 한가지 것을 완성하는 부분 중에서 처음의 것과 마지막의 것은 가장 중요한 위치에 있다. 왜냐하면 처음과 마지막은 그 중간에 놓이는 부분들을 한데 모이게 하고 결속시키는 역할 중 가장 중요한 자리에 있기 때문이다. 사도들이 언급되는 구절의 마지막에서 유다가 언제나 등장하고 있는바 그의 이름은 교회의 원리 중에서 마지막에 해당되는 원리를 표현한다. 사실 마지막 번째에서 보다 내적이고 보다 높은 수준의 원리들이 발견되는바 각각의 원리 중 가장 완전하게 어떤 실체를 명백히 나타낸다. 우리의 의식상태, 오감, 본래의 정신(the very senses)이 매우 순수해져 변질된 교리나 지옥의 영향력이 부추킬 때 동요조차 일으키지 않는다면 그 영혼의 거듭남은 최고도로 완성되고 그의 종교생활은 가장 완전하다. 따라서 그것들은 새로이 건립된 심정과 올바른 영에 고분고분 순종하고 그 순종을 기뻐하는 도구가 되어 있는다. 내적 측면에서의 역사적 의미로 볼 때 배반자로서의 유다는 유대교회를 표현하고, 그가 맡았던 돈 자루는 유대인들이 보관했던 말씀을 표현했다. 유다가 돈 자루를 지키되 진짜 주인의 선용을 위하지 않고 자기 것인 듯 꺼내 썼는바 이런 측면의 유다는 도둑이요 영적 측면의 강도를 표현하고 있다.
지금까지 우리는 주님이 부르시어 사도로 임명해서 파견한 열 두 사도의 이름을 살펴왔다. 그런데 혹 어떤 사람의 경우 가롯 유다의 이름이 새 예루살렘성의 주춧돌에 새겨 있다고 생각하고 싶지 않다면 과거 사도였을 때의 유다가 맡은 직능이 표현하는 원리 또는 품성으로 대체해서 마음에 그려보길 바란다.
열 두 보석과 열 두 사도의 긴 설명을 마감했다. 이제 전체를 되살려 보자. 열 두 보석으로 나열된 두 큰 시리즈, 즉 아론의 가슴받이에 있는 보석과 새 예루살렘 성벽 주춧돌의 것과는 이런 점에서 크게 다르다. 전자는 교회 내지 종교의 품위들이 하느님을 사랑함으로 시작되나, 후자에서는 신성한 인성으로 계신 하느님인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으로 시작되고 있다. 따라서 후자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의 수준이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수준으로 승강하는 것이다. 전자의 경우 주님을 사랑함이 이웃을 사랑함을 수단으로 그 사랑 자체가 명백해지는 것이다. 거룩한 성의 주춧돌을 살펴 본 우리는 이제 그 도성의 문들을 살피게 된다.
21. “열 두 문들은 열 두 진주들 이었다; 각각 하나의 문은 한 개의 진주로 되어있었다; 그리고 도성의 거리는 투명한 유리 같은 순금 이었다.” 예수는 양의 문인바 이 문을 통과해서 들어오는 사람은 구원을 받게 될 것이다. 그리고 새 예루살렘의 각 문들을 형성한 단 한 개의 진주란 예수에 관한 지식이다. 이 지식은 값이 대단한(great) 진주이다. 이 지식은 모든 진리에 관한 지식 중에서 가장 귀중한 지식이다. 여타 모든 진리를 납득 가능하게 하는 딱 한 개의 보편적 진리는 예수 그분 자신이 무한하고 영원한 진리요, 그분으로부터 모든 진리는 파생되어 결국 그분께로 되돌아 간다는 것이다. 교회를 소개해주면서 동시에 교회에의 입장을 허가 해주게 되는 예수에 관한 지식, 이 지식은 지성에 정보를 더 제공하는 지적 측면만의 지식 뿐만 아니라 기억 속의 지식을 개혁하는 지식이다. 이를 입구, 문이라는 측면을 더 강조해서 생각해보면 이 문은 거룩한 도성에의 입장을 허가하는 지식인바 우리가 문에서 안쪽으로 들어갈 때만이 우리는 도성을 소개받을 수 있다. 다시 말해 예수에 관한 지식을 알고 만 있는 게 아니라 진리로 걸어감으로 우리는 거룩한 도성에 입장되어 구원된다. 문에서 문 안쪽으로 들어감으로 우리는 구원받은 사람의 거룩한 성을 소개받게 된다. 그 다음 우리에게 그 성의 거리가 소개되어 그 길을 걷게 된다. 도성의 문들은 거리의 입구에 있다. 마치 좁은 문이 생명에로 인도하는 좁은 길의 입구인 것과 같다. 이리하여 도성의 문과 연계해서 언급되고 있는 새 예루살렘의 거리가 발견된다. 진주로 된 이 문들은 금으로 된 거리에로 열려 있다. 도성의 문들과 거리를 차별해 생각해본다면 이는 마치 지식과 진리의 차이와 같을 것이다. 그 이유가 앎은 진리 측면에만 진입하게 하는 출입구(gateway)일 뿐이기 때문이다. 지식은 기억에 속하고 진리는 이해성에 소속된다. 그렇다고 본문의 거리가 이해성 속에 있는 진리를 의미하는 것도 아니다. 금으로 된 거리는 심정 또는 의지에 소속된 진리를 의미한다. 다시 말하면 이는 지혜 속의 진리를 표현한다. 지혜는 머리에 소속되었다고 하기보다는 심정에 소속되었다고 판단해야 한다. 지혜는 선함과 하나 된 진리, 사랑과 하나 된 신앙이다. 우리가 진리를 알고 이해했다고 슬기로워진 것이 아니라, 진리를 사랑해서 진리를 실천함으로 그 진리가 선함으로 바뀔 때 “슬기로운 자”가 된다. 이런 수준의 진리들이 “금으로 된 거리”이다. 거리는 진리의 상징물이고 금은 사랑과 선함의 상징물이다. 주님의 진리는 그분의 사랑에 이르게 하는 길을 열어준다. 지식은 선함에 이르는 길, 믿음은 이타애에 이르는 길을 열게 한다. 도성 자체의 경우 같이 거리를 만든 금은 마치 투명한 유리 같았다. 그 이유가 순수한 사랑은 순수한 빛과 같기 때문이다. 모든 진정한 사랑은 진리 또는 지혜와 하나 되어 있다. 그 이유가 이럴 때 만이 슬기로운 사랑인 진정한 사랑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22. 하느님의 도성의 거리는 하느님의 성전으로 인도한다. 요한은 새 예루살렘, 거룩한 도성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그리고 나는 그 안에서 성전을 보지 못했다; 그 이유는 주 하느님 전능하신 분이 어린 양과 그것의 성전 이기 때문이다.” 성전은 주님의 한 가지 모양새이다. 따라서 성전이 없다는 말을 거기서는 예배가 없다는 것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지상의 교회에 예배가 반드시 있듯 천국의 교회에도 예배는 존재한다. 거룩한 예루살렘 안에 성전이 없었음에도 성전이 있다. 주님 자신이 그 곳의 성전이기 때문이다. 이 말씀은 위대하고 아름다운 진리를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다. 모든 참된 예배는 예배되어지는 한 분 존재에서 종결된다. 주님은 예배의 저자 되시고 그 대상이시다. 우리로 하여금 그분을 알게 하고 사랑하게 하는 우리의 참된 자질은 그분이 주신 귀한 선물이다. 우리가 아는 진리들은 그분께서 밝히 알게 하신(계시) 것이다. 우리가 느끼는 참된 바람은 그분께서 불어넣으신 영감이다. 빛 되시는 아버지로부터 천국을 통해 내려오지 않은 것은 천국에서조차 하나도 없다. 참된 예배는 주님으로부터 왔을 뿐 아니라 그 예배는 우리 안에 계신 주님이시다. 아마 우리가 드리는 예배의 외적 환경, 수단들을 완전히 벗긴다면 우리는 예배 대상과 정면으로 마주보게 되어 신성한 인성의 거룩한 성전 안에서 주님만을 뵈오리라. 이런 사실을 우리의 바깥쪽 눈으로 볼 수 있다고 상상해선 안된다. 그 이유가 거룹 조차도 그분 앞에 엎드릴 때 그들 눈에 베일이 씌워지기 때문이다. 어쨌든 위 요한의 환상이 말하는바, 모든 진정한 예배자는 주님만이 예배의 전부 되심을 내향적으로 보고 실감한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그분 홀로 새 예루살렘의 성전이시다. 새 예루살렘에 들어가 거기에 거주하는 이들이 알고 인정하는 바는 어떤 사람도, 천사도, 어떤 단체도, 개개인도 주님의 예배에 관한 어떤 것 하나도 그분으로부터 받지 않은 게 없다는 것이다. 이들의 눈이 외관(가상)이라는 베일을 관통할 때 그들의 눈에는 주 하느님 전능하신 분과 어린 양-영원한 신성과 신성한 인성, 신성한 사랑과 지혜만이 진정한 예배의 모든 것의 근원이요 그 예배의 본질이 되어 있음이 보여진다. 세 이름, 주, 하느님, 전능하신 분이란 사랑, 지혜, 권능이라는 신성의 세 본질을 표현하는 호칭이다. 그 반면 어린 양은 인류와 관련되는 그분에 관한 것, 주 예수 그리스도로 인류에게 그분을 명백히 보여주셨음을 표현하는 명칭이다.
23. 거룩한 도성에 성전이 없었듯이 “그리고 도성은 그 안을 비추이기 위한 태양과 달이 필요 없다, 그 이유는 하느님의 영광이 그것을 밝게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곳의 등은 어린 양이다.” 이 구절이 표현하는 생각은 앞 절이 표현한 것과 유사하다. 새 교회(The New Church)는 한 개의 참 빛만이 세상에 태어나는 모든 사람을 비추고 있다고 알고 인정한다. 그분은 정의의 태양이시오 그 태양은 떠올라 그분의 날개 안에서 치료하신다. 떠오른 이 태양은 지는 일이 결코 없고 오로지 더 완전한 날이 되고 더욱 더 비추인다. 여타 교회들의 방향을 잡아주고 그들이 계발되도록 요구하는 매개적인 빛 없이 새 교회는 존재하지 않는다. 과학, 자연, 도덕, 영적인 것의 빛, 이성과 계시의 빛이 지금까지 존재해온 교회에 비추인 것보다 더욱 많은 빛을 받아 새 예루살렘에서 빛을 발하리라. 위 각각의 빛은 어떤 분리된 존재, 계발하는 능력으로 간주해서는 안 된다. 이 빛은 계시의 빛이라는 독립된 빛이라고 생각해서도 안된다. 이 빛은 한 분 최고의 것, 유일한 참 빛으로부터서 만 근원된다고 보아야 하고 인정해야 하리라. 그 이유가 하느님의 손가락으로 씌어진 책은 계시의 책 뿐만 아니라 자연이라는 책도 해당되기 때문이다. 또한 계시의 빛이나 자연의 빛이나 똑같은 근원에서 비롯되지 않을까? 모든 빛, 모든 지식, 모든 진리는 한 가지 근원만을 가지고 있다. 자연의 빛과 계시의 빛을 분리시킨 게 사람이요 두 빛을 서로 반대되게 놓은 것도 인간이다. 종교를 축출하려는 게 과학이요 과학을 제명 처분하려 드는 것이 종교이다. 이 둘이 제 각각이라면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는 격이다. 참된 교회는 이 둘을 조화시켜 하나 되게 한다. 더불어 참 교회는 이 둘이 조화와 통일을 위해 서로 필요함을 인식한다.
24. 자연의 빛과 계시의 빛이 하모니를 이룰 때 종교는 과학을 계발시켜 주고 과학은 종교를 풍요롭게 해준다. “만국 백성들이 그 빛 속에서 걸어 다닐 것이며 땅의 왕들은 그들의 보화를 가지고 그 도성으로 들어 올 것입니다.” 구원되는 백성들(nations)이란 생명나무의 잎으로 치료받은 사람들이다 (22:2). 치료받음이란 구원받음이다. 단어 구원(salvation)은 건강함(health)을 뜻한다. 우리의 심정 상태가 자연적 수준일 때 병이 들지만 영적 수준일 경우 건강을 회복하게 된다. 영혼이 자연적 수준일 경우 무지 또한 잘못들이라는 어둠 가운데서 걸어다니지만 영적 수준일 경우 진리의 빛 가운데서 걸어 다니게 된다. 자신의 지적 측면의 부유함과 권능들을 그것을 수여하신 분께 돌릴 때 땅의 왕들은 그들이 지닌 영예와 영광을 가지고 거룩한 도성에 들어오게 된다. 이를 추상적 측면에서 관조할 때 “백성”이란 자연적 수준의 애착들이고, “왕들”이란 자연적 수준의 생각, 또는 자연적 수준의 의지와 이해성을 뜻한다. 자연적 수준의 의지와 애착들이 그것을 인도하고 방향을 잡아 주는 진리로 순수해져 구원될 때 이것은 마치 빛 가운데 걸어다니는 모습과 같다. 자연적 수준의 이해성과 생각들이 종교의 영향을 받게 될 때 그 속의 모든 것이 성결해져 종교적 봉사에 헌신된다. 애착과 생각들이 종교를 드높이기 위해 그것들의 영예와 영광을 종교 아래로 가져 올 뿐만 아니라 그것들은 그것의 저자 되시는 그분께 그 모든 것을 되돌린다.
25. 만국 백성과 땅의 왕들이 들어오게 된 “그리고 그 성의 문들은 낮에 닫혀 있지 않을 것이다; 그 이유가 거기는 밤이 없기 때문이다;” 선함과 진리에 신실한 애착을 지닌 이들에게 교회 또는 종교를 소개하는 것은 그리스도에 있는 하느님에 관한 지식이다. 이 지식은 만국 백성, 땅의 왕들을 들어오게 해준 진주의 문이기도 하다. 새 예루살렘에서 이 문은 계속적으로 열려 있다. 고대 시대 때의 성의 문들은 밤에는 항상 닫히지만 낮에도 닫아 거는 일이 흔했다. 거룩한 도성에는 밤이 없고 그 문은 낮 동안 결코 닫혀 있지를 않는다. 새 교회에서 이 문들은 활짝 열려져 있다. 주님의 신성에 관한 위대한 진리들, 그분께로부터 만 오는 구원의 권능은 너무나 확실하다. 신성한 계시의 충만 된 영광으로 빛이 발해지는 이 도성에 들어오고자 문을 통과하는 신실하고 열심 있는 진리의 추구자들을 초대하기 위해 그분에 관한 모습은 아름답고 단순한 마음 앞에 언제나 놓여져 있다. 불가사의하게 여기는 신비들, 변태적인 교회의 법규들, 불가능하게 보이는 각종 조건들에 의해서도 이 문들은 더 이상 닫혀지지 않는다. 하느님에 관한 모든 것, 인물, 품성 등등 모든 것은 순수한 진리의 빛 안에서는 직접적으로 놓여져 있어 더 이상 반박되지 않고 오히려 호의적이고 신실한 사람들에게 환대 받는다. 거룩한 도성의 문이 열려 있음은 구원의 모든 통로가 열려 있음을 포함하는 함축된 말이다. 교회와 천국의 모든 진리를 내포한 하느님의 말씀은 이제 열려 있다. 그래서 말씀 속에 있는 내면의 빛과 영광은 그것을 보기를 원하고 그 속에 들어 가기를 바라는 모든 사람들이 쉽게 접근할 수 있게 만들어져 있다. 말씀이 열려 있다는 말과 연결되어야 할 것은 열린 말씀 속에 빛이 있음을 인정하고 그 빛을 직감하는 인간 마음의 열림이다. 마음을 도성에 견준다면 도성의 문은 마음의 합리적 자질을 상징하게 된다. 이 자질(능력)을 통해 인간 마음은 그 마음 안에 내재하는 천국과 그 마음 밖에 있는 세상과 교통을 이루면서 결합한다. 주님과 천국에로 인도하는 폭넓은 위 두 도로가 열림은 신성한 사랑에 근원하면서 신성한 지혜의 지휘감독을 받은 보편적 진보의 결과 외에 더 다른 게 없다. 말씀, 교회, 인간의 마음은 다 같이 동시에 발전해야만 한다. 이 셋은 전체라는 하나에 상응되는 부품에 불과한바, 각각은 서로서로 의존해야 하고 상호간의 행동으로 꾸려져야 한다. 이것의 열림은 저것의 열림 없이는 불가능하다. 말씀, 천국, 교회, 인간의 마음, 그리고 악이 닫히는 것, 모두는 점진적으로, 그리고 동시적인 열림으로 통일된 하나를 이룬다. 이제 그분의 두 번째 강림 아래 모든 사람은 영적 발달의 더 높은 단계에 진입해 있다. 이 발달은 세상에 여명을 드리운 한 개의 끝이 없는 대낮을 통해 점진적이고 동시적으로 계속되리라.
“그리고 그들은 그것 안으로 나라들의 영광과 영예를 가져 올 것이다.” 구원된 만국 백성이 도성에서 빛 가운데 걸어 다닌다는 것, 왕들이 도성에 그들의 영예와 영광을 가져온다는 것은 앞에서 살핀바 있다. 그런데 이 구절에서는 백성들이 영예와 영광을 가지고 들어온다고 말하고 있다. 이 백성이란 곧바른 이방인들, 단순한 선 가운데 있는 이들을 표현한다. 24절에서 언급된 백성 또는 이방인들이란 자연적 수준의 선량한 마음씨를 지닌 사람들이다. 지금 언급되는 이들은 선한 일들을 행하는 사람들이다. 종교는 이런 경로를 거쳐 발전한다. 먼저 선한 마음씨가 진리를 획득하게 한다. 그 다음 그 마음은 진리로 순수해지고 계발된다. 이렇게 계발된 선한 마음씨는 선을 행하는 쪽으로 인도된다. 그래서 본문이 우리에게 먼저 “백성”을, “왕들”을, 그 뒤 다시 백성들을 읽게 하는 것이다. 의지 안에 있는 선이 이해성 안에 있는 진리를 통과하여 생활에 있는 선으로 건너갈 때, 주님의 제자들은 그분의 진리에 관한 영광과 그분의 선함에 관한 영예를 교회 안으로 가져와 교회를 퐁요롭게, 더 드높이게 한다. 그 이유가 거듭나는 기독인의 삶은 자신을 위해서가 아닌 이웃을 위해서이기 때문이다. 더 특별한 것은 그가 행하는 선함의 저자가 주님이시오 그분이 선을 행하게 한 주체이신바 선행의 주인이 그분임을 감지해서 그분께 공적을 돌리는 이웃을 위한 삶이다.
26. 이렇게 해서 기독제자들은 선을 행하여 기쁨을 누리지만 한편 악행을 금하느라 분투한다. “그러나 그것 안으로는 불결한 어떤 것도, 가증함을 행한 것, 거짓말은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생명에 관한 어린 양의 책에 씌여진 자는 들어갈 것이다.” 교회 안으로 악이 들어온다고 말하든, 기독인의 마음에 악이 들어온다고 하든 그 둘은 결국 똑같은 결과가 있다. 교회 안에 존재하는 악 또는 잘못들은 인간의 마음을 통해 들어온 것들이다. 교회에 반대되는 요소들의 축출이 이 구절에서 약속되고 있다. 불손한 것이든, 흉측한 것이든, 거짓된 것이든 어느 것이든 그 도성 안으로 들어가지 못한다. 이를 넓은 측면에서의 교회로서 생각해보면, 천국의 새로운 처방은 이전에 처방된 교회가 처해진 것같이 부패되는 일이 없을 것임을 약속하고 있다는 것은 의심할 바 없다. 어느 한 부분, 어느 한 개인이 악 또는 오류에 빠져들는지 모른다. 그러나 전체로서의 새로운 교회는 건전해 있을 것이라는 말이다. 악 또는 잘못들은 거룩한 영역 안에서는 너무 명백해서 그 곳에서는 숨을 곳을 영영 찾지 못한다. 개인적 멤버라는 점에서 볼 때 위 약속은 자연적이고 유전적인 결함을 그대로 갖고 있다는 것을 제외해놓고 하는 약속은 아니다. 이것들은 타락된 인류가 지닌 공통된 상속분이다. 그래서 이것들이 인류에게 공통으로 있는 본성에서 떠나 영영 죽어질 것이라고 기대해 볼 이유도 없다. 그러나 교회 내에서 이런 자발적인 악들이 죄가 되도록 결코 허용되는 일이 없게 된다. 그 이유가 악이 제 쉼터로 발견할 수 있는 잘못의 형체가 없기 때문이다. 진리의 빛이 분명하고 계속적으로 비추일 때 어둠의 행위가 감추여 놓일 수 없다. 따라서 이 교회는 교리를 순수하고 더럽히지 않은 상태로 보존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 교회의 실제는 불법이나 숨김과는 무관하다. 그 중에서도 이 교회에 가장 큰 장점은 각 멤버들이 자신을 판단 하는 게 가능한바 심정 안에 잘 모르는 더러운 어떤 것이 잠행할 수 없어 흉측하게 만들거나 거짓된 어떤 것도 생명의 나라에 입장하지 않게 된다. 어린 양의 생명책에 적히지 않은 자는 누구도 그 도성에 들어 갈 자 없다. 주님과 이웃을 사랑함은 영적인 삶의 원리들이다. 복음서 역시 예언과 율법과 마찬가지로 이 두 원리에 매달려 있다. 세상에서 주님이 하신 일의 목적은 인간으로 무엇보다 먼저 그분을 사랑하게 만드는 것, 그리고 서로가 제 몸같이 사랑하는 것 외에 더 다른 게 없다. 따라서 사랑과 이타애만이 거듭나는 마음 안에 들어가는 원리이고,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들만이 지상의 새 예루살렘의 진정한 멤버들이다. 그 외 누구도 천국에 있는 교회에 들어갈 수 없다. 새 시대의 교회에 침입하는 악과 거짓에 맞설 수 있는 한 가지 위대한 안전장치는 “대단히 맑은 수정” 처럼 맑고 예리한 진리 뿐이다. 이 진리는 죄를 변명해대는 고집스런 악의 흉칙함, 거짓말을 일삼는 입들, 위장된 선함이 얼마나 불손한지 금방 보게 하고 그런 본성은 죽은 자나 다름없다는 것, 신성한 권능과 자비가 마음과 삶에 역사해서 진실 된 회개를 수단으로 그런 더러운 것들이 제거되고 삶의 상태나 목적 자체가 완전히 뒤바뀌지 않는 한, 거기에는 어떤 구원도 불가능하다는 것을 직감하게 한다. 교인들이 교회의 빛이신 그분의 밝은 빛에서 볼 때, 무한한 사랑과 자비가 구속의 역사를 펴지 않는다면 모든 불법에서 구속될 자 없고, 새 심정과 올바른 영의 창조가 우리 속에서 있어질리 만무하다는 것, 자기 기만의 끝장이 불가하다는 것을 직감한다. 따라서 전적으로 새로워진 본성으로 애착과 생각이 되기 위해서는 신성한 자비와 신성한 선함밖에 의존할 데가 없다는 결론에 이른다. 이런 지당한 진리를 받는 이들은 그 진리에 격려를 받고 은혜에 얼마나 감사하는지 모른다. 이 진리를 마음에 담고 있다면 그 진리는 심정을 부패시키고 이해성을 뒤집는 악과 거짓에 대해 안전장치가 되어준다. 심정에 이 진리를 새긴 사람들만이 새 예루살렘에 입장할 수 있다. 그 이유가 그들만이 어린 양의 생명책에 씌어있기 때문이다. 그 외의 사람들은 신실한 영과 교통할 수 있을는지 모르나 교회 자체로서의 교회의 범주에는 있을 수 없다. 자신 속에 주님의 사랑과 진리를 지님으로 거룩한 도성의 신성한 성벽 안쪽에 실지 거주하는 사람들만이 성벽 밖에 있는 사람들에게 존재하는 사기나 썪어짐 같은 요소들의 훼방에서 안전하리라.

요한계시록 20장 해석

20

본 장의 앞 부분은 천년(millennium)이라 불리우는 것을 취급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 주제에 관한 약간의 예비적 소견을 제공하는 것도 유용하리라 본다.
단지 글자적 의미에 기초한 견해가 교회의 시작 때부터 일부 사람들에 의해 이런 식으로 도입되어 왔다. 즉 주님께서 두 번째 강림하시면 그분은 천 년 동안 지상에서 통치한다. 그분의 강림은 의로운 자의 부활을 뒤잇게 한다. 이렇게 부활한 성도는 살아 있는 이들과 함께 그분의 천년 왕국의 주체세력을 형성한다. 이 통치기간 동안 짐승과 거짓 예언자 같이 불잡힌 사탄은 여전히 억류되고 끝없는 구렁에 감금되어서 천 년이 지날 때까지 더 이상 만국 백성을 현혹하지 못하게 된다. 평화와 행복의 천 년 후에 감옥에서 풀려난 사탄은 밖으로 나가 땅 위 사방에 있는 백성들을 현혹한다. 그리하여 바다의 모래 만큼 많아진 그들이 온 세상에 나타나서 성도의 진지와 하느님이 사랑하시는 도성을 에워싼다. 그 때 하늘로부터 불이 내려와서 그들을 삼켜 버린다. 그들을 현혹시키던 그 악마도 불과 유황의 바다에 던져졌는데 그 곳에는 그 짐승과 거짓 예언자도 있는 곳이다. 그 다음 부활과 심판이 거행되고 온 드라마는 세상의 끝으로 결말을 본다.
위의 생각은 예언의 가장 기초되는 글자적 해석에서 조차도 불일치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은 쉽다. 우선 예수와 하느님을 증언한 탓에 목을 잘리운 사람과 짐승의 낙인을 받지 않았던 이들만이 첫 부활의 주인공이라는 점에 대해서 이다. 이런 묘사에는 세상의 시작 이래 살아왔던 의로운 자들까지 포함되었다고 상상하기 힘들다. 둘째로 비록 첫 부활이 언급되었다 해도 바다가 죽은 자를 토해내고 죽음과 지옥이 그들 가운데 있었던 죽은 자를 토해내는 것이 둘째 부활을 의미한다고 추정하지 않는다면 둘째 부활에 관한 언급은 없다는 점이다. 그러나 이것은 무덤으로부터 온 땅의 사악한 모든 자에 관한 부활에 대한 답변은 없다. 그리고 사탄이 성도에 대항하여 모으고 이끄는 대 집단을 만드는 것은 무엇일까? 풀려난 사탄이 온 땅에 널려 있는 나라들, 곡과 마곡을 현혹시키고 불러모아 전쟁을 일으키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부활한 성도와 지상에서 홀로 통치한다는 것은 글자적으로 이해하려고 결코 의도하지 않은 예언의 글자적 납득에 기초되어 있다. 그래서 이는 글자대로 성취된다는 게 불가능하다.
본문에서 취급된 광경은 영계에서 있는 상태라고 이미 말했었다. 관계 그 자체가 이에 관한 증거이다. 그리스도와 함께 통치하기로 된 이들은 예수의 증거를 위해 목을 잘리운 사람들의 영혼이다. 참으로 그들은 부활을 획득했다. 그러나 이를 올바르게 이해한다면 이제 우리가 주목하게 될 진리의 추가적인 증거도 된다. 그 이유가 이미 말했던 바 같이 성경에서의 부활은 자연적인 몸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자연계의 육체는 한번 한쪽으로 놓여지면 다시 되찾지 못한다. 이제 본문을 세세하게 살펴보자.
1-3. 앞장에서 우리가 읽은바, 짐승과 거짓 예언자가 붙잡혀 불 못에 던져졌고, 흰 왕좌에 앉으신 그분과 그분의 군대에 대항하려고 모인 그들의 군대마저 죽임을 당했다. 그러나 짐승과 그의 군대더러 싸우라고 했던 용 그 자체는 아직 붙잡히지 않고 있는바 환상의 이 부분은 그의 포로가 되는 것을 취급하고 있다. “그리고 나는 끝 없이 깊은 구렁의 열쇠와 큰 사슬을 그의 손에 가지고 천국으로부터 내려오는 천사를 보았다.” 이것은 주님께서 죽음과 지옥의 열쇠를 가지고 계시다는 주님에 관한 특징 중 하나 이다 (1장 18절). 비록 끝이 없는 구렁이 불과 유황으로 타고 있는 연못과는 다르다 해도 둘 다 어둠의 왕국의 부분이기는 마찬가지이고, 이는 보편적인 통치자의 휘하에 있다. 그러므로 이 천사는 주님을 표현해야 한다. 열쇠와 사슬은 그분의 권능을 상징할 뿐이다. 마치 그분의 권능이 비신앙적인 사람들에게 작용될 경우에 있는 현상과 같다. 신성한 권능은 언제나 똑같다. 이 권능이 양상이 다르게 나타나는 것은 권능이 작용되는 대상의 차이 때문이다. 주님께서는 의로운 자를 사랑으로 매어 이끄신다 (호세아11:4). 그분께서는 사악한 자를 진리의 사슬로 묶어두신다. 그렇다고 그분께서 이 사람은 사랑하고 저 사람은 미워하시는 게 아니다. 그분께서 정의로운 자를 이끌어주시는 이유는 그들이 그분의 사랑을 받아 들이기 때문이다. 그분께서 악한 자를 묶어두시는 이유는 그들이 그분의 진리에 불순종하기 때문이다. 진리가 알려져 알고 있으나 사랑되지 않고 실제화 되지 않을 때마다 그 진리는 악한자로 어둠의 왕국에 감금되도록 영혼을 묶는 사슬이 되어간다. 그럼에도 엄밀히 말한다면 악한 자로 어둠에 처하도록 포로가 되게 묶는 것은 진리가 아니다. 그것은 뒤집혀져 버린 진리이다. 그 이유가 악은 진리를 거짓으로 변하게 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바 인간 안에 있는 빛이 어둠이라면 그 어둠은 그 얼마나 큰 것인가! 거짓되게 함으로 어두워진 진리의 빛은 지옥을 통치하는 어둠이다. 그것은 무지라는 어둠이 아니다. 무지는 규탄 받게 함 또는 포로 됨을 있게 하지 않는다. 진리를 알고 있는 반면 고집 부려 악한 삶을 영위하는 이들이 진리의 꾸짖음을 받게 된다. 베드로와 유다에 의하면 첫 유산(estate)을 간직하지 않은 천사들이 큰 날의 심판까지 보류해둔 영원한 어둠의 사슬은 그들을 자유롭게 만드는 진리로 날조해낸 족쇄이다. 이와 똑같은 사건은 아니라 해도 똑같은 속성 중의 하나가 이 구절에 묘사되어 있다. “그리고 그는 악마와 사탄인 늙은 뱀, 용을 붙잡았다, 그리고 그를 천 년 동안 결박했다. 그리고 끝 없이 깊은 구렁에 내던졌다, 그리고 잠궜다, 그리고 그 위에서 인봉했다, 그가 천 년이 끝날 때 까지 더 이상 나라들을 꾀지 못하게 하려 해서 였다: 이후 그는 잠간 풀려나야만 한다.” 그러므로 용을 묶어둠은 일시적이다. 그는 장차 오게 될 큰 날의 심판까지 보류되었다. 그는 아직 불 못에 던져지지 않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런 일시적으로 억류됨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4. 이렇게 취급되는 광경은 천국과 지옥 사이에 있는 영계의 영역(region of the spiritual world), 중간에 해당되는 상태(intermediate state)로 이미 살핀 바 있는 영역에 관한 광경이다. 죽게 될 때 여기에 모든 영혼은 들어가는데 이곳은 자기들의 마지막 상태로 건너가지 않은 영혼들이 큰 날의 심판까지 보전되는 곳이고 거기서 심판 자체가 거행된다. 이 구절의 예언이 관련되는 때는 심판 전야이다. 크고 흰 보좌가 놓여지고, 크고 작은 죽은 자들이 보좌에 앉은 심판관 앞에 서 있다. 심판들의 속성에 관한 사건들은 차후 진행된다. 그러나 이것들은 마지막 심판에 선행되는 검색과 분리이다. 늙은 뱀을 묶고 격리시킴은 이런 과정들 중 하나이다. 이것은 악한 자를 선한 자로부터 떼어놓는 것, 악한 자와 선한 자 모두를 닥칠 심판을 위해 준비시키는 것, 즉 악한 자에게서는 자기 것인 듯 붙어 있는 선을 떼어내고, 선한 자에게서는 자기 것인 듯 달라붙은 악을 떼어내는 것이다. 이리하여 전자는 지옥에 내려갈 수 있게 해주고 후자는 천국에 오를 수 있게 준비된다. 밑바닥이 보이지 않는 구렁, 이제 늙은 용을 받기 위해 열려졌다. 이는 9장에서 읽은 바 같이 다섯째 천사의 나팔 소리로 열려졌다. 그 때의 열림은 메뚜기 군대가 나오게 했지만 지금은 용을 집어넣기 위해 열리고 있다. 뱀의 제거로 응답될 즉각적인 의도란 성도들이 평화로이 주님과 함께 통치하도록 허용될는지 모른다는 것이다. 이에 관해 우리는 6장에서 읽었었다. 거기에 기록된바 다섯째 봉인이 떼어질 때 요한은 제단 아래에 하느님의 말씀과 그 말씀을 붙잡고 있기에 죽임을 당한 사람들의 영혼이 있는 것을 보았다. 그들이 해방을 외치자 그들에게 말하기를, 그들 처럼 죽임을 당하기로 되어 있는 형제들의 수효가 찰 때까지 잠시 쉬라고 했다. 해방되는 때가 이제 오고 있다. 그들은 감옥에서 풀려 나와 왕좌위에 앉는다. “그리고 나는 왕좌들을 보았다, 그리고 그들이 그것 위에 앉았다, 그리고 심판이 그들에게 주어졌다, 그리고 그들의 혼들은 예수를 증거했기에, 하느님의 말씀 때문에 목이 잘리웠었다. 그리고 짐승과 그것의 형상을 숭배하지 않았고, 그들의 이마 위에, 그리고 그들의 손에 표를 받지 않았던 자들이었다. 그들은 살아서 그리스도와 더불어 천 년 동안 통치했다.” 이 구절의 순교자는 영적 측면이다. 설사 그들이 자연계에서 그러했다 해도 이는 순수하게 영적 차원이다. 영적 순교자란 기독인의 싸움에서 죽기까지 열심을 낸 이들이다. 그래서 지금 생명의 관을 받고 있다. 그들은 그들의 시대에서 그 시대를 휩쓸었던 오류로 고통 받았었다. 죽은 뒤에 그들은 유혹만 해대는 용의 영들의 권세로부터 그들이 천국으로 올라 갈 준비가 마무리되어 들리울 때까지 보존되었다. 그들이 올리워진 보좌란 그들이 지금까지 확증하면서 건설해왔던 천국의 진리들이다. 그래서 그들이 실시하게 될 심판이란 그들로 하여금 선함과 진리, 신앙과 사랑에 관한 모든 문제를 형성하고 집행할 수 있게 하는 심판이다. 그리스도와 더불어 살고 통치함이란 사랑을 수단으로 그분과 결합하는 것이다. 그들이 다스리는 천 년이란 시간의 어떤 기간을 뜻하는 게 아니다. 그 이유가 영계에는 시간이 없기 때문이다. 자연계에 시간이 있듯 영계에는 상태(state)가 있다. 상태의 품질이 숫자들로 표현된 것이다. 그러므로 숫자 천(thousand)은 그들로 천국에 들어가기에 적합한 상태로 성숙되고 충만 됨을 의미한다. 하느님과 더불어서 천 년은 하루 같고 하루는 천 년 같기도 하다. 영원한 분에게 그러하듯 영원한 세계도 그러한바 고정된 시간대라는 것은 없다. 그 곳의 주민들은 상태의 측정인 가상으로 보여지는 것 외에는 시간에 관해 아무것도 모른다.
5,6. “그리고 죽은 자의 나머지는 천 년이 끝나기 까지 다시 살지 않았다, 이것이 첫째 되는 부활이다. 첫째 되는 부활에 참여한 이들은 거룩하고 행복하다; 이들에게 둘째 사망은 권능을 가지지 못한다, 그러나 그들은 하느님과 성직자들 일 것이다. 그리고 천 년 동안 그분과 더불어 통치할 것이다.” 둘째 죽음의 권세가 아무 힘도 쓸 수 없는 첫째 되는 부활이란 죄라는 죽음으로부터 정의라는 생명으로 영적 차원에서의 부활을 뜻한다. 죽음은 그들 위에 어떤 지배도 하지 못한다. 그들은 죄에서 자유로운바 죄의 결과인 죽음에서도 자유로워 있다. 나머지 죽은 자란 둘째 죽음에 빠지기 쉬운 불의한 자가 아니라 똑같은 환난을 거치지 않아서 똑같은 승리를 향유하지 못하는 이들이다. 첫째가는 부활을 획득한 이들이란 시간의 질서에서의 첫 번째라는 말이 아니라 등급과 특출함에서 첫째 되는 것, 즉 주님을 사랑함을 원리로 삼은 것, 천적 수준의 원리를 획득한 이들을 뜻한다. 그러므로 그들은 하느님과 그리스도의 성직자가 된다고 말하고 있다. 나머지 죽은 자란 영적 수준이라는 등급, 즉 이웃을 사랑함을 원리로 삼은 이들이다. 성경의 상징적 언어에서 이들은 왕이라 불리운다. 비록 이 구절에서는 그렇게 명명되지는 않고 있지만 그들을 왕으로 이해해야 하리라.
7-10. 그런데 “그리고 천 년이 끝날 때, 사탄은 그의 감옥에서 풀려날 것이다. 그리고 땅의 네 모퉁이들, 즉 곡과 마곡을 꾀어서 그들을 함께 모아서 전쟁을 하려고 나갈 것이다; 이들의 숫자는 바다의 모래 같다.” 사탄을 묶어 두고 풀어주는 것은 하느님의 의지만으로 결정되는 것인 신성한 행동들로 간주해서는 아니 되고 그것은 구원의 복된 그분의 일이 더 진전된 행동으로 섭리적 수준의 일반적 작용의 일부로 간주되어야 한다. 심판은 이런 섭리적 행동들 중의 일부이다. 그리고 악령들은 큰 드라마의 일부를 연기하는 것이다. 악령은 정의로운 자를 선동하고 유혹하는데 집착한 대리인밖에 더 아니다. 그들의 권세가 통치되어지고 그들의 의도가 위압하는바, 어떤 것이 의로운 자에게 좋은 것이 되듯 그들에게도 그만큼은 가능할 수 있다. 그들의 악용이란 주님이 선포하신 경우 즉 사탄이 베드로로 하도록 바란 그 일을 하는 것이다. 그 일이 누가복음 22장 31절에 있다. “시몬아, 시몬아, 들어라. 이제는 키로 밀을 까부르듯이 너희를 제멋대로 다루게 되었다. 그러나 나는 네가 믿음을 잃지 않도록 기도하였다. 그러니 네가 나에게 다시 돌아오거든 형제들에게 힘이 되어다오.” 사탄이 정의로운 자에게 영향력을 발휘하도록 허용되는 것은 정의로운 자를 까불어서 그의 밀로부터 겨를 제거하기 위해서이다. 그러나 사탄의 이런 권세부림이 위와 같은 섭리에 불일치 될 경우 그 악용은 섭리적으로 방지되거나 완화되어진다. 사탄을 묶고 푸는 것도 이런 섭리의 법칙에 국한된다. 악령은 정의로운 자에게 체로 까부르듯 힘을 발휘하지만 동시에 사악한 자를 황폐되게 한다. 악령은 악한 자를 악으로 선동함으로 황폐되게 만든다. 그 결과 악한 자를 덮고 있던 가면이 벗겨져 그들의 품성이 적나나해진다. 이런 것이 이제 사탄으로 행하도록 허용된 악이다. 감옥에서 풀려난 사탄은 이제 나라들을 현혹하러 밖으로 나가 그들이 성도들과 전쟁하도록 선동하고 있다. 계시록의 이 부분 속의 상징적 품성, 그리고 그 의미까지도 에스겔에 있는 비슷한 예견으로부터 배울 수 있다. 이것은 주님의 첫 강림 때에 성취된 것으로 이해되어야만 할 것이다. 에스겔서의 38, 39장에서 우리는 곡과 마곡에 대항하는 한 예언자를 발견한다. 주님의 백성 이스라엘이 안심하고 사는 동안 곡이 북녘 그의 장소에서 힘 있는 군대를 가지고 나온다. 그 군대가 구름같이 땅을 덮는다. 이런 강력하고 격렬한 군단의 끝장은 계시록의 군대의 것과 똑같다. 주님께서는 그 군대에 폭우와 함께 큰 우박, 불, 유황불을 퍼붓는다. 이것은 “훗날에 있게 될” 것에 관한 예언이다. 이것들은 유대교회의 훗날이었다. 마치 계시록의 것들이 기독교회의 훗날 인 것과 같다. 이 군대란 교회를 침공해서 파멸을 위협하는 비신앙적인 것과 오류라는 홍수 외에 달리 무엇일 수 있을까? 이것은 유대교회와 기독교회 처방의 훗날에서 똑같이 진실 되다. 땅이 교회를 뜻한다고 알게 될 때 이런 예견은 교회 종말의 조건을 볼 수 있게 해준다. “불법이 팽배해지기 때문에 많은 사람의 사랑이 찬 것으로 칠해질 것이다.” “사람(Man)의 아들이 올 때 그분께서는 땅에서 믿음을 발견하실까?” 사랑과 신앙이 인간(man)의 후손 사이에서 실패할 때 그들 가운데 있는 교회 역시 실패된다. 그 이유가 사랑과 신앙 없는 교회는 이름 뿐이고 형체 밖에 더 있겠는가? 그럼에도 교회 자체의 존재는 결코 중단되지 않는다. 교회가 이 세대에서 실패할 때 섭리적으로 또 다른 세대에서 일으켜 진다. 훗날의 곡과 마곡, 즉 악과 잘못은 “그들은 땅의 폭에서(온 세상에서) 올라 갔다, 그리고 거룩한 사람들의 진영과 사랑되어진 도성을 에워쌌다; 그런데 불이 하느님으로부터 천국의 안에서 밖으로 내려왔고 그들을 태웠다.” 그러나 오히려 공격자만 파멸 당한다. 어쨌든 삭막함이 널리 퍼져도 남겨질 자는 보존되고 있다. 이는 비록 인간의 눈에는 보일 수 없다 해도 영 가운데 있는 이들, 그런 모습을 볼 수 있게 영적인 시야가 열려 있는 이들은 볼 수 있고 영계에서는 공개적으로 진열된다. 지상의 교회가 지상으로부터 영원한 세계로 건너간 이들이 있는 거기에 있다. 시간 차원에서 영원 차원으로 건너간 의로운 자는 도장을 받은 열 두 지파, 유리바다에 집합된 군중, 흰 말을 탄 천국의 군대, 성도들의 진지이다. 시간 차원에서 영원으로 건너간 불의한 자는 메뚜기, 용, 진홍색 여인, 곡과 마곡의 군대이다. 성도들의 진지와 나라들의 군대에서, 우리는 그들의 최말단 조건, 그리고 실제적이고 관계적인 상태에서 표현하는 교회의 두 반대 측면을 볼 수 있다. 진리는 잘못으로, 선은 악으로 둘러싸여 있다. 이것이 훗날의 교회의 상태이다. 이것이 영계에서 진열 된 바 자연계에서 영적으로 진열된다. 영들의 세계에 나타난 환상에 시선을 돌려보자. 우리가 이미 말했던바, 악령이 일하도록 허용된 것은 선한 자 뿐아니라 악한 자의 상태도 열려 놓이게 하는데 그 목적이 있다는 것이다. 이 결과가 하늘로부터의 불이 그들을 삼켰다는 것으로 묘사되고 있다. 이 외관은 불로 살라진다고 말해진 이들의 마음의 상태에 관한 결과이다. 사악한 자를 삼키는 불은 그들 자신의 악령의 불, 악을 사랑함, 탐욕 같은 것들이다. 내려오는 천국도 그들 자신 안에 있다. 모든 사람의 마음의 내면은 천국의 형상이도록 창조되어 있다. 그리고 마음의 외면은 세상의 형상이도록 창조되어 있다. 사악한 자의 마음의 내면이 열려 놓이고 아무런 제약 없이 행동하게 될 때, 영계에서도 그렇게 되고 있는 게 확실한데, 열린 그들의 행동은 올가미가 되고 불과 유황이 쏟아져 내리고, 이것이 그들의 바깥쪽 사람을 잘 꾸며 놓은 그럴듯한 도덕성과 얌전한 외관을 삼켜버린다. 한편 그 격정은 억제되어 있는다. 이것이 사탄의 유혹을 받은 이들의 결과이다. “그들을 꾀었던 악마는 불과 황의 호수에 내던져졌다, 거기에는 짐승과 거짓 예언자가 있다; 그리고 세세토록 밤낮 괴로워하고 있을 것이다.” 용이 악마와 사탄이라 불리고 있다. 이것은 죄와 지옥 자체의 두 요소, 악과 거짓된 것의 하나 됨이다. 용이 나라들을 현혹하러 나갔을 때 그는 사탄이라 불렸다. 그가 그들을 현혹했을 때 그는 악마라 불리고 있다. 악마라는 이름 아래 그는 지금 못에 던져지고 있다. 거짓된 것이 선동한다. 그것이 악에로 유인한다. 악은 왜곡된 것을 수단으로 선동한다. 악이 불 못에로 던지는 것이다. 어쩌면 잘못이란 것도 순진할 수 있다. 비의도적일 경우이다. 어쩌면 그것은 덕스러울 수도 있다. 신실한 신앙을 목적으로 삼고 있을 경우이다. 그러나 악이 알려질 때, 왜곡된 것과 하나 될 때 의도적이 되고, 그것은 부패된 심정의 상태와 결실이다. 이것이 생산될 때 생산된 그 악은 그 자체의 내면 상태가 최말단의 조건으로 있는 불 못에 영혼을 내던진다.
11. 그러나 우리는 이제 심판 자체, 참으로 인상적이고 교훈적인 심판 그 자체, 일반적, 세부적 면모에서의 심판 자체를 접하게 된다. “그리고 나는 크고 흰 왕좌와 그 위에 앉으신 그분을 보았다, 이 분의 얼굴로부터 땅과 천국은 도망하였다; 그리고 그것들을 위한 장소는 발견되지 않았다.” 요한은 4장에서 하늘에 놓인 옥좌와 그 위에 앉으신 분을 보았다. 환상의 이런 부분을 취급하면서 우리가 서술한바, 거기에 놓여진 왕좌는 심판을 상징한다는 것, 거기서 심판이 시작되는 것을 표현했다는 것, 그 반면 예견자가 지금 본 크고 흰 왕좌는 완성되고 있는 심판이라는 것이다. 이 두 심판 사이에 있는 모든 것은 검색과 벗겨냄, 선하든 악하든 그것에 붙은 것을 분리함, 이리하여 마지막으로 심판받을 수 있는 상태로 되어지는 것이었다. 심판에 앞서 있는 분리는 복음서에서 밀과 가라지의 분리, 충성스런 종과 불충한 종을 가름, 슬기로운 처녀와 미련한 처녀의 분리, 양과 염소의 분리 등등으로 표현되고 있다. 지금 우리 앞에 오는 주제는 선한 자와 악한 자의 분리가 아니라, 그들이 마지막 거처로 갈 수 있게 중간 상태에서 그들을 옮기는 것이다. 그래서 선한 자는 그들을 완전해지게 해왔던 상태에 걸맞은 천국으로, 악한 자는 그 반대의 장소, 즉 그들의 내향의 상태에 걸맞은 바깥쪽 조건이 있는 곳으로 옮겨진다. 심판자와 심판에 우리의 관심을 모아보자. 옥좌는 심판을 상징한다. “야훼께서 영원히 왕좌에 앉으시고 재판하실 왕좌를 다지셨으니, 정의로 이 땅을 다스리시며 공정하게 만 백성을 판결하시리” (시편 9:7-8). “야훼께서 공정한 재판으로 그 모습을 드러내신다” (시편9:16). 그분의 심판은 무한한 사랑과 지혜의 결정들이다. 왕좌는 상징적 품성들로 씌어져 있다. 왕좌가 크다(greatness)는 단어는 사랑을 상징하고, 왕좌의 희다(whiteness)는 단어는 사랑에서 진행되는 심판의 지혜이다. “참되고 정의로움이 당신의 심판이다” (계시록16:7).
12. “그리고 나는 하느님 앞에 서있는 작고 큰 죽은 자를 보았다; 그리고 책들이 열려져 있었다, 그리고 또 다른 책이 열려져 있었다, 이 책은 생명의 책이다, 그리고 죽은 자는 그들의 일에 따라, 책들 안에 씌여왔던 것들로부터 심판되어졌다.” 우리가 심판을 생각해보기에 앞서 심판자에 관심을 두어보자. 하느님이 심판자이시다. 그러나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가야만 한다” (고린도후5:10). 그러므로 하느님과 그리스도는 하나일 뿐이다. 이 사도에 의한 또 다른 서술에서는 두 이름이 무관심하게 사용되었다. “…우리는 다 하느님의 심판대 앞에 설 사람이 아닙니까? 성서에도 ‘정녕 나는 모든 무릎을 내 앞에 꿇게 하고 모든 입이 나를 하느님으로 찬미하게 하리라’는 주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그 때에 우리는 각각 자기 일을 하느님께 사실대로 아뢰게 될 것입니다” (로마14:10-12). 하느님만이 인간을 심판할 수 있다. 그 이유는 그분만이 심정 속의 비밀을 아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하느님이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느 누구도 인간을 테스트하는 것은 필요하지 않다. 그 이유가 그분은 인간 안에 있는 것을 아시고(요한2:25) 세상을 심판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분 앞에 인물의 대소를 막론하고 죽은 자들이 서 있는 것이다. 지금 심판의 왕좌 앞에 집합된 죽은 자들이란 자연계의 죽음을 거친 이들, 그리고 지금 중간 상태, 즉 심판이 거행되는 중간 상태에 있는 이들이다. 이들이 지금까지 세상에 살아왔던 모든 사람, 기독교의 시작 이래 살았던 모든 사람까지 지칭하는 것은 아니다. 공개된 사악한 자는 불 못에 던져졌고 확증된 선은 시온산으로 옮겨졌다. 혼합된 품성을 지닌 자들, 바깥쪽의 교류에서 혼합되었던 이들. 그래서 중간 상태에 남은 이들이 일반적 심판을 받고 있는 것이다. 크고 작은 이들, 즉 그들의 조건과 품질이 무엇이었든지 이제 하느님 앞에 선다. 심판의 수단과 과정에는 깊은 흥미를 자아내는 주제가 있다. 그 이유가 이것은 모든 경우에서 똑같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들 각각에 직접 관계된다. 책들이 펴져 있다. 이 책이란 무슨 책인가? 인간 마음 자체가 이 책이다. 이 안에 모든 생각, 말, 행동이 씌어 있다. 모든 것을 드러내 밝히는 빛으로 열리고 읽게 될 때 행하여져 왔었던 모든 행동, 그 행동을 있게 한 생각과 그 행동이 있도록 자극한 동기까지도 씌어진 책 속에서 보다 더 명백하게 추적되고 있는 것이 발견될 것이다. 그래서 인간 언어가 표현할 수 있는 어떤 것보다 더 정밀하고 확실한 의미가 있다. 이것은 마음 자체의 본성에서 결과 된다. 행동하는 힘의 차원에서 볼 때, 마음이 그것의 자질을 선용하거나 악용함으로 되어진 바로 그것이다. 애착과 생각은 마음 안에 쌓여진 것들이 아니라 마음 자체의 상태와 형상들이다. 이것들은 육체의 삶 동안에는 수식되고 변화할 수 있다. 사후 그것들은 고정되어진다. 마치 결정체로 되듯 한다. 그리고 영원히 그대로 남아 있는다. 이것들이 심판에서 열린 책들이고 이 기록으로부터 모든 이는 심판된다.
그런데 또 다른 책이 펴져 있는데 그것은 생명의 책이다. 위에서 언급한 책은 인간에 관한 책들이다. 이 책은 하느님의 책이다. 그들의 심판은 하느님의 책에 씌어 있는 것과 인간 자신의 책에 씌어 있는 것과 일치하느냐 또는 불일치 되느냐에 의거한다. 하느님의 책과 일치되는 책을 지닌 이들, 즉 하느님의 마음과 일치되는 마음을 지닌 자들은 생명으로 판결된다. 그러나 하느님의 마음이나 책과 일치 안 되는 마음을 지닌 자들은 죽음으로 판결된다. 하느님의 책이 생명의 책이라 불리는 이유는 주목할 가치가 있을 것이다. 이 책은 죽음의 책이라 불린 적이 결코 없다. 인간의 책은 생명의 책인 하느님의 책과 불일치할 경우 죽음의 책들이다. 인간의 “이름들”이 생명의 책에 씌어 있는데 이것은 그들의 “품성들”이 생명의 원리와 일치할 때이다. 생명의 원리란 하느님을 사랑함과 인간을 향한 선행(charity)이다. 빌립보서 4장 3절을 읽어보자. “나와 한 멍에를 멘 내 진실한 협력자에게 부탁합니다. 이 여자들을 도와주십시오. 이 여자들은 글레멘스를 비롯하여 다른 협력자들과 더불어 복음을 전하느라고 나와 함께 애쓴 사람들입니다. 그들의 이름은 생명의 책에 올라 있습니다.” 이 책에 씌어진 것만을 수단으로 우리는 심판에 설 수 있다. 마지막 때에 관해 다니엘이 말한바, “…그런 때라도 네 겨레 중에서 이 책에 기록된 사람만은 난을 면할 것이다” (12:1). 한 가지만 생각할 경우 모든 사람은 생명의 책에 씌어있다. 모든 사람은 천국을 위해 의도되어 있다. 출생하는 순간부터 모든 이는 생명의 책에 씌어 있다. 그리고 어린 시절에 죽는 아이는 생명에로 들어간다. 생명의 법칙에 반대되어 살아온 것에 의해 그들의 이름은 생명의 책에서 지워진다. “나에게 잘못을 저지르는 자는 누구든지 그의 이름을 나의 기록에서 지워버린다” (출애굽32:33). “그들의 이름을 생명의 책에서 지워 버리시고 의인들의 명부에 올리지 마소서” (시편69:28). 산 자는 생명의 책에 적혀 있고 죽은 자는 적혀있지 않다는 위와 같은 원리에서 천국적인 사람은 천국에 그들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누가10:20), 그리고 지상적인 사람은 땅에 그들의 이름이 새겨진다 (예레미야17:13).
만일 생명의 책을 밝히 알게 하신(계시된) 하느님의 말씀으로서 간주한다면 그 말씀이 알려진 이들만이 그 말씀에 의해 판결될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가 좀더 곰곰이 생각해야 하는 것은, 하느님의 법칙은 보편적인 법칙들이다는 점이다. 말씀에 씌어진 것들은 그분께서 어떤 방법에서, 그리고 어떤 폭에서 인간 심정에 기록하셨던 법칙의 더 명백한 계시 밖에 더 아니다. 그래서 이 사항은 존재하는 모든 종교에 의해 많든 적든 명백하게 인식되고 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창조하신 때부터 창조물을 통하여 당신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과 같은 보이지 않는 특성을 나타내 보이셔서 인간이 보고 깨달을 수 있게 하셨습니다. 그러니 사람들이 무슨 핑계를 대겠습니까?” (로마서1:20). 우리가 아는바, 하느님은 무한하게 슬기로우시고 선하시다는 것, 공정과 공의는 그분의 왕좌가 있는 곳이다.
13,14. 예언의 상상과 일치되게 할 때 우리가 발견하는바, 심판되어질 사람들은 그들이 누웠던 곳, 또는 틀어 박혔던 곳으로부터 나오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바다가 그것 안에 있었던 죽은 자를 내놓았다, 그리고 죽음과 지옥도 그것들 안에 있었던 죽은 자를 내놓았다; 그리고 모든 이 각각은 그들의 일들에 따라 심판되어졌다.” 이는 마치 앞 부분에서 일어났던 이들은 땅으로부터 왔고 본문에서 일어나게 된 이들은 지옥과 죽음으로부터 나온 듯 비쳐질는지 모른다. 이런 묘사의 상징적 품성은 다른 세부항목들로부터 인 것을 암시하고 있다. 장소가 상태를 의미한다는 원리에서 볼 때 죽은 자가 심판받기 위해 오게 된 그 장소란 그들의 품성이다. 성경에서 바다는 육지를 에워 싼 것으로 생각되어있다. 그래서 섬에 살고 있는 이들은 바다에서 “멀리 떨어진” 것으로 말해왔다. 바다가 포기한 죽은 자들이란 비교적 차원에서 무지와 단순한 상태에 있어 왔던 이들, 다시 말해 악하지는 않으나 무지한 이들, 상대적으로 피상적인 이들, 선한 자연적 인간 또는 외적 인간들이다. 그러나 죽음과 지옥이 석방한 이들은 사악하고 불경한 이들, 법을 위반하고 죄지은 가운데 죽은 이들, 악으로부터 오는 거짓 설득 가운데 있는 이들이다. 단어 황천(hades)이 지옥으로 번역되었다. 그리고 이것은 무덤을 뜻하는 단어로 번역하기는 너무 한계가 있다. 분명한 것은 그것이 어떤 장소라기 보다는 상태를 뜻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중간 상태에 있는 사악한 자의 어느 특별한 부류에 관련되고 있다. 그러므로 죽음과 지옥은 악과 거짓, 사악한 자와 불신앙자이다. 이들은 각자의 행위에 따라 심판되었다. 모든 사람을 판결하는 수단인 의무의 표준은 순수하게 실용적인 것이다. 믿음도, 경건함도, 사랑조차도 아니고 일(work)이 품성의 진정한 기준(criterion)이다. 모든 종교는 삶에 관계된다. 종교가 요구하는 그 밖의 모든 것은 종교의 목적으로 삶을 가지고 있다. 가장 높은 기독인의 품위인 하느님을 사랑함까지도 이웃을 실지로 사랑하는 그 안에서 참된 그분에 대한 사랑을 발견한다. 하느님을 사랑함은 가장 높고 가장 순수하고, 가장 사욕이 없는 선함을 사랑함이다. 이런 사랑을 하는 만큼에서 우리는 하느님을 사랑한다. 우리가 이런 것을 실제화 하는 만큼에서 우리는 하느님의 일을 작업해내게 된다. 하느님의 일을 해냄에 의해서만 우리는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 악한 일을 일삼은 이들이 불 못에 던져진다고 말해지고 있다. 이런 사람들의 마지막 상태는 확증된 자아 사랑과 자기 기만 중의 하나이다. 자아 사랑은 타인을 미워한다. 그것은 하느님의 사랑에 반대이다. 주님을 사랑함이 천국이듯, 자아의 사랑은 지옥이다. 전자는 재창조되고 기쁨이 창출되는 불이고 후자는 허물어지게 하고 통곡을 창출시키는 불이다. 이것이 참으로 두려운 두 번째 죽음이다.
15. 이들 뿐만 아니라, “그리고 만일 누구가 생명의 책 안에 씌어짐이 발견되지 않는다면, 그는 불의 호수 안으로 내던져졌다.” 이 간단한 서술이야말로 얼마나 참되고 인상적인지! 하느님에게는 파멸의 책이 없다. 그분이 가지신 수많은 부피의 책들은 생명을 위해 씌어있는 것뿐이다. 그분의 신성한 법칙에 일치하는 생명을 지닌 모든 사람이 그 안에 씌어 있고 그들은 영원한 생명으로 들어간다. 이 책 안에 씌어있지 않은 모든 사람, 그들의 품성이 사랑과 의무의 법칙과 조화를 이루지 못한 사람은 그들 스스로 불바다에 던져진다. 죄인이라 해도 죽기를 바라지 않는 그분, 모든 사람이 그들의 사악함에서 돌아서기를 바라시는 그분은 생명의 책에서 누구도 제적되기를 바라시지 않는다. 사람들이 생명을 가지도록 하려고, 그 생명을 더 풍부히 가지도록 하려고 오셨던 그분은 생명의 책에 만민이 씌여 있는 것을 발견했으면 하시는 것 밖에 더 바라시는 게 없다. 따라서 그들 자신의 악과 불의한 삶이 어둠의 나라에 종속되게 만든다. 무한한 사랑으로부터 행동되는 무한한 권능까지도 불의한 자를 구할 수 없다는 것은 얼마나 엄숙하며, 곰곰이 생각해보면 얼마나 유익한지! 공정은 하느님에게 사악한 자를 단죄하며 영원히 처벌하라고 강요하지 않는다. 그럴 경우 이것은 하느님의 공정이 아니다. 그러나 그들을 정죄하는 것은 그들 자신의 불공정이다. 만일 그들이 불법을 중단할 수 있다면 그들은 불행해지는 것도 중단할 것이다. 그러면 신성한 공정은 더 이상 그들과 반대되지 않을 것이다. 그 이유는 그들이 더 이상 그것에 반대되지 않기 때문이다. 과거에 지은 빚(debt)을 염두에 두고 추측된 모든 요구(claim)는 한순간에 철회될 것이다. 그들을 감옥에 던져 넣고 감금했었던 이런 빚진 것들을 하느님께서 기억하신다. 그러나 더 정확히 말하면 그들 자신의 본질적 생명의 책 안에, 그들을 통치하고 있는 사랑이라는 생명에, 그로부터 있게 되는 생각 속에, 그들의 말과 행동 속에 기억되어 있다.

요한계시록 19장 해석

19

앞에서 우리는 기독교회 안에 계속적으로 발생한 두 개의 큰 악들의 결과와 본성을 열어 보았고 그것들이 점차적으로 결국 송두리채 교회의 원리들을 뒤엎은 것도 살폈다. 이 악들 중 하나는 자아를 사랑함이고 또 하나는 세상을 사랑함이다. 전자는 주님에 대한 교회의 사랑을, 후자는 이웃을 향한 교회의 사랑을 뒤엎었다. 이것들이 큰 탕녀로, 큰 붉은 용으로 의미되었다. 이것들은 자연계에서 발생되는 순서를 따라 계시록에서 기술되지 않는다. 그러나 영계에 있는 질서에 따라 폭로되고 있다. 이런 이유 때문에 교회 원리의 첫째가는 큰 부패를 표현한 바빌론이 둘째가는 큰 부패인 용의 뒤를 잇고 있다.
비록 표시(sign)와 상징물(symbol)로 표현된 두 악들이 기독교회의 두 큰 분파로 전시되어 왔다 해도 어떤 특정한 종교 단체에 국한되어 소속된 것은 아니다. 지금까지 세상에 존재해왔던 모든 교회는 두 큰 악의 지배 아래 타락되었다. 그 악들은 우리의 타락된 인간성 안에 상속된 악들이다. 이 악들에 흥미를 가지려 하는 경향성이 우리 본성 안에 상속되고 있는 바 모든 사람들은 본 주제에 개인적 흥미를 가진다. 그 이유가 모든 사람은 똑같은 상태에 쉽게 빠질 수 있고 실제로 같은 원리들을 적용해 가기 때문이다.
1,2. 이제 이 환상이 그것 자체를 벗긴다. 그래서 새로운 광경이 나타나고 있다. “이 일 후에 나는 천국에서 큰 군중의 음성 같은 소리를 들었다, 말하기를, 할렐루야, 구원과 영광과 존경과 권능이 주 우리의 하느님에게 있다: 그 이유가 진실과 정의가 그분의 심판들이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그분은 온 땅을 그녀의 매춘짓으로 썪게 한 큰 매춘부를 심판하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분은 그녀의 손에 그분의 종들의 피를 갚으셨기 때문이다.” 바빌론의 멸망으로 말미암은 하늘에서의 기쁨은 지상에서의 승리의 함성 같지는 않다. 지상의 승리의 함성에는 때로 정의나 자비 같은 게 없는 경우도 많기 때문이다. 큰 군중으로 의미되는 가장 낮은 천국의 사람이라 해도 불신앙자, 교인이든 아니든 그들이 재난을 당한 것 가지고 기뻐하지 않는다. 하느님의 심판 뒤에 하늘에서 터져나온 승리의 함성은 선이 악을 이겼기에, 진리가 잘못을 극복했기에, 그로부터 영적 혜택이 결과 되기에 있어진 함성이다. 그러므로 할렐루야의 요지는 구원이다. 이것은 영광과 영예와 권능을 그분의 참되고 정의로운 심판, 즉 음란으로 땅을 망친 그 엄청난 탕녀를 심판하신 주님께로 돌리고 있다. 천사들은 기뻐하며 주 하느님을 영광되게 한다. 그 이유는 그분께서 심판으로 천국의 태양으로부터 오는 열과 빛, 또는 주님으로부터 천국을 통해 지상에 내려오는 사랑과 진리, 또는 교회를 통해 인류에 내려오는 사랑과 진리의 하강을 가로막았던 것들을 제거해주셨기 때문이다. 이것이 천사들에게 기쁨의 원인이다. 이것은 사람에게도 마찬가지이다. 천사들의 행복은 본질적으로 자기가 소유한 것을 교통하는데, 서로 나누는데, 자기들을 파견해 그들을 보살펴서 구원의 상속자가 되도록 한 그 사람들과 교통하는 가운데 존재한다. 자기들이 받은 복을 상대방과 나눔에 있어서 그들은 모든 축복의 저자이신 그분만을 모방한다, 그리고 그분은 복을 더 증가되게 해서 그들에게 재 지불하신다. 그 이유가 유입은 유출에 의거 있기 때문이다. “남에게 주어라. 그러면 너희도 받을 것이다. 말에다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후하게 담아서 너희에게 안겨 주실 것이다. 너희가 남에게 되어주는 분량만큼 너희도 받을 것이다” (누가6:38). 주는 것이 천사의 복이듯 받는 것은 인간의 복이다. 그들이 천사가 주는 자비를 자유로이 받을 때 자비는 두 배로 복이 된다. 그 이유가 받는 이에게도 축복이고 동시에 주는 이에게도 축복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인간의 행복은 받는 것에만 존재하지 않는다. 사람도 천사와 똑같은 질서 아래 있다. 인간의 행복도 천사들의 것과 마찬가지로 주는 것에 존재한다. 인간에게도 유입은 유출에 의거된다. 인간이 받지 못하는 원인 중 하나는 그들이 주지 못했다는 것이다. “남에게 되어주는 분량만큼 너희도 받되 흔들어 넘치도록 담아 주신다.” 즉 받는 용량은 주는 용량으로 증가된다. 천국적 지혜는 기억을 팽창시킴으로 증가되는 게 아니라 심정을 확대함으로 증가된다. 이것은 사랑의 노동으로서 그들의 의무를 행하는 인간에 의해서 행해질 수 있을 뿐이다. 인간이 천국을 통해 자기에게 제공된 것을 받지 못할 때 천사들의 기쁨은 줄어든다. 천사들의 영향을 줄여서 수용하는 원인에는 일반적이고 매체적인 원인 뿐만 아니라 세부적이고 직접적인 원인이 있다. 땅 위 교회의 상태, 그리고 중간(매체)되는 상태 또는 영들 세계의 조건은 인간이 천국의 선물을 수용하는 척도를 가늠하는데 어떤 할당된 몫을 가진다. 이들이 주님의 구원하시는 작전수행의 적당한 도구가 되는데 적합치 않을 때 신성한 선과 진리가 천국을 통해 유입되는 것은 지체되거나 뒤집혀지기까지도 한다. 그래서 구원의 역사가 제재받거나 방해되지 않도록 심판의 작업에서 그것들이 제거되었다. 천사들은 심판이 구원의 수단이 될 때에만 기뻐한다. 심판이 심판의 길을 부패케 한 이들에게 처벌로 떨어질 때가 불행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신앙자에 대한 신성한 심판에서는 보복이라든가 하는 따위 같은 것은 하나도 없다. 음란으로 땅 또는 교회를 부패케 한 엄청난 탕녀를 심판하는 경우에서도 주님께서는 당신의 종들의 피를 흘리게 한 그 여자에게 벌을 내리셨다 라고 말해지고 있을 정도이다. 주님의 종들, 추상적으로 생각하면 이는 그분의 말씀 속의 진리들이다. 그 이유가 진리들은 선함의 종들이요 사랑을 섬기기 때문이다. 말씀 속에 있는 그분의 진리가 왜곡되고 더럽혀질 때 그분의 종들의 피가 흘려진다. 그분께서는 뒤엎어져 생명과 유용함을 박탈 당해 버린 진리의 정당함을 입증하시고 정의에로의 안내자였던 태고적 소산을 회복해 주실 때 “당신의 종들이 피를 흘린 것을 되갚아 주신다.” 개인적 차원에서 생각해 볼 때 하느님의 종들이란 주님을 진리 안에서 섬기는 이들이다. 이들 중 많은 사람들이 진리를 증거한 탓에 순교를 당했다. 바빌론이 표현한 이들의 엄청난 죄는 타인의 신앙과이타애를 왜곡시켜 그들이 영적 생명에 피해를 주거나 파괴해버린데 있다. 영적 순교자들인 그들의 영적 생명, 신앙과 선행은 과거 그들을 억누른 악과 유혹해대던 오류에서 해방시켜주는 심판으로 되갚아 주신다. 그들이 말씀으로부터 획득했던 진리가 각종 거짓 해석과 오류를 돌변시킨 사리사욕적 진리의 응용, 그러므로 해서 진리가 악을 승낙하는 쪽으로 기운데서 자유로워 질 때 “그들의 피는 정당하게 보응된다.”
3. 천국의 군중이 하느님을 자기들의 구원의 저자요 정의로운 심판자로서 찬양을 했을 때 “그들은 두 번째로 말했다, 할렐루야.” 하느님을 찬양함은 두 애착, 즉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부터이다. 이 두 사랑은 그것이 기도이든, 감사에 속하는 예배이든, 모든 예배의 시작과 끝이다. 이 두 사랑은 종교의 총체이다. 그 이유가 종교적 모든 부패는 이 두 사랑이라는 원리가 부패됨으로 변형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두 사랑의 정당성이 입증되면 회복으로 변형된다. 엄청난 탕녀의 심판은 지배함을 사랑함과 자아 만을 사랑하여 부패시키는 영향력으로부터 종교를 해방되게 하고 지켜준다. 이런 해방은 의로운 자에게 기쁨의 원인이 되는데 그것은 일반적 결과 뿐만 아니라 세부적 결과에서도 그러하다. 그들은 부패된 종교를 가졌던 이들과 헤어졌기에 그 해방을 기뻐했다. 그들은 세상에 있는 동안, 그리고 중간 영역의 상태에서 죽음과 심판 사이에 머무르는 동안에 이르기까지 줄곧 자기들을 흡수하려 했던 부패된 종교의 영향권을 벗어났기에 기뻐했다.
의로운 자를 내려눌렀던 영향력에서 그들을 해방시켜 준 심판은 악한 자에게서 그들이 뒤집은 진리, 그들이 더럽힌 선을 빼내고 본래 그들에게 소속된 것인 악과 거짓만을 남겨 둔다. 이상태가 이제 기술되어 있다. “그녀의 연기가 세세토록 올라갈 것이다.” 왜곡시켰던 진리를 빼앗아 그 가면을 벗기면 악은 거짓된 것 외에 더 말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그 이유가 불이 있으면 연기가 동시에 있어지듯 악한 사랑은 당연하고도 동시적으로 거짓 생각만을 생산한다. 그래서 이것을 말씀에서 불의 연기로 의미해놓고 있는 것이다. 심정의 애착으로부터 튀어나와 이해성의 생각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영원무궁토록 올라간다. 이것은 막연히 끝이 없다는 정도가 아니라 그것은 모든 생각, 말, 행동 안으로 들어가 형체를 만들고 그 형상 자체까지 만들려 한다.
4. 하늘에 있는 군중에 의한 주님을 찬양함이 이제 원로들과 네 생물에 의해 화답되고 있다. “그러자 스물 넷 원로들과 네 동물들은 엎드렸다, 그리고 왕좌 위에 앉으신 하느님을 경배하였다, 말하기를, 아멘; 할렐루야.” 더 높은 권능으로 응답하는 아멘과 할렐루야는 더 낮은 천국에서 외친 진리가 더 높은 천국에 의해 확증되는 것이다. 그리고 네 짐승이 가장 높은 의미에서 표현하는 천국 안에서, 뿐만 아니라 천국 위에 있는 말씀 자체에 의해서도 확증되는 것이다. 세부적 의미 차원에서 모든 진리는 개개인의 경험에 관계되는바 낮은 천사의 할렐루야에 더 높은 천사의 화답은 천국적인 곳에 있는 이들, 천국적 상태에 있는 이들의 마음에 있는 더 낮고 더 높은 애착과 지각 사이에 존재하는 하모니와 통일성을 표현하고 있다. 진정한 예배는 내향의 애착으로부터 진행되어 바깥쪽에서 표현된다. 더불어 참된 예배는 내향의 애정으로부터 진행되어 바깥쪽으로 표현된다. 동시에 참된 예배는 그 예배를 있게 한 애착을 강해지게 한다. 만일 바깥쪽 행동이 없다면 내향의 응답도 있을 수 없다. 만일 경건한 느낌이 바깥쪽 예배의 행동에서 그 자체 발생되지 않으면 그것은 시들해져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과 진리의 영이 안으로 흘러드는데서 마음을 닫히게 까지 하고 만다. 이와 반대로 만일 그것이 심정으로부터 찬양과 기도 안에 오고 있다면 마음은 새로운 영향과 선물을 받기 위해 열려진다. 참으로 이것은 참된 모든 예배의 결과요 목적이기도 하다. 이에 관해 다음에서 읽게 된다.
5. “그리고 음성이 왕좌로부터 나왔다, 말하기를, 우리의 하느님을 찬양하라, 모든 너희 종들아, 그리고 그분을 두려워하는 너희 큰 자와 작은 자들 이여.” 왕좌 둘레, 그 아래에 있는 이들의 찬양에 응답하는 왕좌로부터의 이 소리는 주님으로부터 였다. 주님께서는 제아무리 높은 천국에 있는 이들이라 해도 청취할 수 있는 소리로는 말하시지 않는다. 그분께서는 성령 즉 신성한 진리가 안쪽으로 흐르게 하심으로 심정과 지성에 말하신다. 이것이 기도이든, 찬양이든, 참된 모든 예배에 대한 신성한 응답이다. 이 구절의 주제와 관련해볼 경우, 하느님을 경외하고 섬기는 모든 이에게 그분을 찬양하도록 부르심은 말씀 속의 진리를 왜곡시키고 더럽힘으로 교회를 부패케한 길을 제거하신데 대해 하느님을 찬양하도록 지상의 신실한 자와 천국의 모든 이에 대한 권면에 해당된다.
6. 하느님을 찬양하도록 하느님의 모든 종을 불러 주신 왕좌로부터의 소리가 깊은 흥미를 지닌 신하와 대리인들 모두에게 영광으로 답하고 있다. “그리고 나는 큰 군중의 음성 같은 소리, 그리고 많은 물들의 음성 같고, 그리고 대단한 우렛의 음성 같은 소리를 들었다, 말하기를, 할렐루야, 그 이유가 주 하느님 전능하신 분이 통치하시기 때문이다.” 시리즈와의 연결이라는 측면에서 생각해볼 때 처음의 할렐루야는 보다 낮은 천국에 있는 사람들, 즉 “천국에 있는 군중”으로 의미된 이들에 의해 외쳐졌다. 두 번째 할렐루야는 원로로 의미되는 가장 높은 천국에 있는 이들에 의해 외쳐졌다. 그리고 이 구절에서는 큰 군중, 큰 물소리, 요란한 천둥소리로 의미된 모든 천국에 의해 외쳐졌다. 그러므로 보편적인 천국, 진리의 애착으로부터는 많은 물소리로, 선함의 애착으로부터는 천둥소리로 의미되는 바 온 천국이 주 하느님 전능하신 분의 다스리심에 기뻐하고 있다. 그들이 주님, 하느님, 전능한 분으로 의미되는 그분의 사랑, 지혜, 권능의 정부를 인정하고 그 아래로 올 때 주님께서는 교회 안에서, 인간의 심정 안에서 다스리신다. 세상적인 사랑, 지혜, 권능은 인간 안에서 그리고 인간들 사이에서 그들의 권위를 찬탈했다. 그들의 지배는 이제 끝났고 신성한 정부와 왕국이 회복되었다.
7. 군중은 주님의 통치가 시작함에 뒤따르는 또 다른 사건을 경축하고 있다.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그리고 그분에게 영광을 드리라; 그이유가 어린 양의 결혼이 다가오고, 그분의 아내가 자신을 준비하였기 때문이다.” 어린 양은 주 예수 그리스도이시고 그분의 아내는 교회이다. 주님과 교회의 결혼은 이 예언적 환상이 관계된 시대 훨씬 전에 거행되었다. 그러므로 이 결혼은 새로운 것이다. 새로운 결혼은 새로운 교회를 암시하고 있다. 주님께서 그분의 첫 강림 때에 배우자로 삼았던 교회는 불성실로 돌아섰다. 그녀는 주님께서 그녀와 함께 들어갔었던 언약을 깨트렸다. 언약은 이것이다. “나는 그들의 안쪽 부분에 내 법을 놓고 그들의 심정 안에 그 법을 적겠다.” 이것은 교인들이 그분의 백성이 되고 그분이 그들의 하느님이 되어지는 조건이었다. 교회가 이 언약을 영의 수준에서는 물론 글자적 수준에서도 깨트렸고, 교회의 어떤 분파는 공식적으로 율법 자체를 언약으로 간주한다. 이외에도 세 신성한 인물을 인정하는 교회가 어떻게 신성한 한 분과 참된 결혼이 있어 질 수 있을까? 교회라고 해서 세 남편을 가져도 되는 것일까? 이와 같은 믿음은 그 자체 주님과 교회의 결혼을 해체시키는 게 아닐까? 그러나 비록 전체 측면에서의 교회가 불성실을 입증해버리고 그 여자가 첫 번째의 사랑을 떠났다 해도 이 본문 그리고 여타 다른 경우에서 같이 그루터기(remnant)가 될 사람이 보존되어왔고 그들과 더불어 있는 결혼은 완전히 깨지지는 않았다. 이 남겨진 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인정하면서 그분의 인성이 신성이냐 아니냐를 생각하지 않고 그들의 하느님이요 구세주로 신앙과 예배에서 그분께 접근하는 이들로 구성되어 있다. 그들은 결혼을 방해하는 반대 쪽에 있지 않으나 그렇다고 결혼을 완전하게 만드는 찬성 쪽에 서 있는 것도 아니다. 그들은 결혼이라기 보다는 약혼의 수준에 있었다. 그들과 더불은 어린 양의 혼인은 아직 오지 않고 있다. 그분의 아내는 아직은 준비가 되어 있지를 않다. 이들은 어린 양의 아내가 되어질 교회에 들어감으로 결혼까지 성사되게 할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을 준비해야 한다. 어떻게 그들이 자신을 준비할까? 지금 어린 양의 아내라 불리는 교회는 광야에 있었던 여인, 독수리의 날개를 받아 삼 년 반 동안 뱀의 추격을 피해서 광야에서 먹여 살려졌던 그 여인과 똑같은 교회이다. 그녀는 아직 극소수에 그쳐 있는 사람들, 주위 사람과 외견으로는 구별 안 되는 교인들, 두 증인에 관한 메시지를 수락하지 못했고 “사내아이”의 보호와 통치 아래에 자신을 놓지 못한 부류의 사람을 표현한다. 이 상태에 있는 교회가 준비할 때란 새 교회 속에 있다는 이들이 “집합하고, 개시하고, 교육을 받는” 때이다. “집합”하기 위해 그들은 서로 모여 어떤 몸체를 형성해야 할 것이다. 시작하고 교육받기 위해서 그들은 이전에 소유했던 이들과 구별되는 다른 매체와 수단을 가져야 한다. 새 교회가 옛 것과 구분되는 조직적 존재를 가지는 것, 멤버에게 예배나 생활에 관련된 것을 가르치는데 어떤 몸체가 요구하는 수단이나 대리인을 가지는 것 등등 외에 더 다른 의미로는 아직 이해할 수 없다. 그렇다고 옛 것과의 구분이란 단어가 옛 것과의 분리, 기독교회와는 별개의 조직체가 필수조항이라는 것은 아니다.
주님과 교회의 완전한 결혼은 교회가 주님의 신성만을 인정하는 게 아니라 그분의 인성의 신성까지 인정해야 하는바 주님과 교회의 충만된 결혼은 지금까지 거행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을런지 모른다. 주님이 세상에 오시기 전에 존재해왔던 모든 교회들은 표본적 교회에 불과해서 그늘 아래 있는 진리만을 보아 왔다. 그들은 매체를 통해, 또는 간접적으로 천국을 통해 주님과 교통하거나 결합되었다. 그러므로 주님은 천사라는 어떤 인물로 열조들이나 기타 다른 사람들에게 언제나 나타나셨다. 그러나 주님께서 인간 어머니에게서 탄생하심으로, 즉 “그분이 천사의 본성을 입지 않고 아브라함의 후손을 입으신 것”, 즉 세상에 오셨을 때 인간과 더불은 그분의 현존과 교류는 즉각적이고 직접적이었다. 사람들은 하느님을 얼굴과 얼굴을 맞대듯 하여 보았다. 그 이유가 그분을 본 사람들은 아버지를 보았는데도 그들의 생명이 보존되었기 때문이다. 주님께서 그분의 인성을 신성으로 만드셔서 비록 자연적인 눈으로 그분을 뵈는 것은 중단되었다 할지라도 그분은 과거 그들이 생명의 말씀을 글자로만 보고 다루었을 때보다 더 친밀하게 현존하시고 있다. 말씀이 육을 만들고 우리 사이에 거하셨을 때 주님과의 직접적인 교류가 있었듯이 그분과 직접적으로 결합할 수 있다. 그러므로 육을 입으신 이래 주님과 교회의 실제적이고 충만한 결혼이 있게 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기독교회가 완전해지는 쪽으로 계속 가야 한다는 것, 애매모호한 수준이 아닌 정확한 구분이 있는 수준에 의해 완전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조건에서 였다. 이의 첫 단계가 주님께서 육으로 오셨을 때 시작되었다. 이의 두 번째 단계는 그분께서 영으로 오심에서 시작되었다. 둘째 강림인 영 안에 그분이 오심이 세상의 종말로 흔히 이해되고 있다. 그러나 이미 살핀바 있고 아직 더 살펴보겠지만, 주님의 둘째 강림은 참으로 첫 기독교 처방의 종말이고 동시에 둘째 단계의 시작이기도 하다. 주님의 첫 강림으로 인류에게 줄 큰 축복이 베풀어 졌는바 그분의 둘째 강림으로 인류에게는 더 큰 축복이 내려지고 있다. 두 강림 사이의 차이는 이렇게 말해볼 수 있다. 첫 처방은 일반적 진리들에 관한 지식을 받았고, 둘째 처방은 세부적인 진리들에 관한 지식을 받았다. 이런 지식은 아무렇게나 증여된 선물이 아니라 지혜롭고 복 주시는 섭리에 의해 수여된 것이다. 이 처방의 배열은 인류의 정신적 발전에 기초되어 있어 각 처방의 작용은 발전단계들을 생산해주고 있다. 일반적인 모든 진리가 세부적인 진리를 포함하고 있듯이 세부사항에 관한 지식은 진리에 관한 우리의 관점을 계발하고 확장시켜준다. 그 이유가 주제에 관한 일반적인 관점(넓은 측면에서의 관점)은 희미하고 한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것이 기독교회의 첫 번째, 두 번째 처방 사이에 있는 구분의 본성인바, 주님에 관계되는 두 처방의 경우도 똑같이 구분되는 품성을 갖고 있다. 똑같은 진리가 양쪽에 소속되고 있는데 그 이유는 그들이 똑같은 계시를 소유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둘째 처방은 말씀 속의 진리에 더 내면적으로 들어간다. 그러므로 더 내면적 결합으로 들어갈 수 있다. 또는 첫 번째 처방보다 더 완전한 주님과의 결혼으로 들어갈 수 있다. 관계 측면에서 볼 때 첫 번째 교회와 주님의 하나 됨은 약혼의 수준이었다. 둘째 교회와는 결혼 수준이었다. 그럼에도 이 주제에 관한 관점에서도 첫 교회도 주님의 아내였는바 그녀의 불성실함은 치명적인 죄였다. 그 이유가 이스라엘 백성의 사회에서 약혼된 처녀는 서약된 아내로서 간주하여, 남편 될 사람에 대한 불성실은 간음으로 고려되어 죽는 형벌까지 내렸는데 (신명기22:23,24), 이런 법들이 위의 사항을 표본화했기 때문이다. 천국 군중이 기뻐 환호하는 어린 양의 혼인은 약혼이 아니라 충만되고 완성된 상태의 결혼이고 교회 자체와 결코 분해될 수 없을 하나됨이었다.
8. 결혼식이 다가왔고 주님의 아내가 준비를 마쳤는데 대해 군중들이 기뻐했을 때, 이렇게 말해진다. “그리고 그녀가 깨끗하고 빛나는 고운 모사옷을 입도록 그녀에게 주어졌다; 그 이유가 고운 모사옷은 거룩한 사람들의 정의로운 행위이기 때문이다.” 새 교회 속에 있게 될 사람들이 시작해야 하고 가르쳐져야 할 진리들은 주님의 아내가 차려입게 되는 고운 모시옷이다. 그러나 우리가 반드시 주목해야 할 이 교회는 진리에 관한 지식을 획득한 것만 가지고는 고운 모시옷을 차려 있었다고 볼 수 없고 진리를 거룩한 생활 안에 실제로 가져다 놓음으로서만 차려 입을 수 있다. “그 이유가 고운 모시옷은 성도들의 올바른 행위이기” 때문이다. 성도란 거룩한 생활을 이끌어 가는 사람들, 자기들의 옷에 세상의 더러운 게 묻지 않도록 노력한 이들이다. 그러므로 어린 양의 아내에게 수여된 옷은 단순히 고운 모시옷이 아니라 희고 깨끗한 고운 모시옷이다. 사실 말씀 속의 진리는 성도들 안에서 희고 깨끗해 있는바, 그들이 우리를 죄로부터 깨끗하게 할 때까지 우리 속의 진리는 깨끗해 있는 것은 아니고, 그들이 오류로부터 우리를 자유로워지게 할 때까지 희어지지 않는다. 이것들로부터 순수해질 때 정의와 진리는 주님의 참된 교회의 진정한 멤버들의 성도다운 옷을 형성한다. 이럴 때만이 그들은 성도의 정의인 고운 모시옷을 입는다.
9. 모든 것이 이제 완료되고 가장 중요한 발표가 천사에 의해 요한에게 있어진다. “그리고 그는 나에게 말했다, 쓰거라, 어린 양의 결혼 만찬에 불리운 그들은 행복하다. 그리고 그는 말했다, 이것들은 하느님의 참된 말씀이다.” 어린 양의 결혼은 그분의 진정한 품성 측면에서 그분을 인정하는 교회와 주님이 완전하고 충만되게 결합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는 교회가 그분을 교회의 믿음, 사랑, 예배의 유일한 대상으로 삼는 것인바, 이는 초연적인 영광의 사건이다. 그래서 참으로 결혼 잔치에 초대되는 이들은 행복하다. 그런데 이 초대에는 어떤 한계를 내포하고 있을까? 이 부름은 주님의 사랑만큼이나 한계가 없고 그분의 은총만큼이나 자유롭다. 결혼에의 초대장은 마치 생명의 물을 제공 받는 것 같이 모든 이에게 보내지고 있다는 것은 의심할 바 없다. “원하는 이는 누구나 오라.” 그러나 성경에서 부름 받는 이들이 닥치는 대로 아무나 초대된다는 것을 뜻하는 것은 아니고 초대에 응하고 싶은 쪽으로 마음이 기울은 이들이 초대된다는 말이다. 이렇게 주님과 함께 있는 이들은 “그의 부르심을 받고 뽑혀서 충성을 다한” 사람들이라고 말하고 있다 (계시록17:14). 이 구절에서 “부름 받는 자”는 영적 싸움에서 주님 편에 있는 세 부류 중의 하나를 형성한다. 모든 사람이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초대되어 있고 모든 사람이 자유로이 올는지 모른다는 것은 편파적인 선출이라는 좁은 의미의 믿음에 반대되고, 이를 알고 믿는 것은 복된 것이다. 또한 소극적 측면의 복된 것도 있다. 부름을 듣되 감각의 귀로 들을 뿐아니라 순종을 뜻하는 귀로 부름을 듣는 이들은 복된 것이다.
혼인 잔치가 만찬(supper)으로 언급되어 있는데 그 이유는 만찬의 때가 옛 교회의 끝이기 때문이다. 그 다음 거행되는 결혼은 새 교회의 시작이다. 이 처방이 끝날 때 또 다른 처방이 시작된다. 이 둘 사이에는 벌어진 틈이 없다. 이런 상황과 같은 밤, 이런 상황과 같은 때에 주님은 제자들과 함께 유대교회의 마지막 과월절을 지키시고 동시에 기독교회의 첫 성만찬을 거행하셨다. 전자는 지나갔고 다른 것으로 진입하고 있다. 처방들 자체가 이러하다. 옛 것 속에 보존되었던 모든 것이 새 것 안으로 건너가고 있다. 그리하여 새 것에서 새로운 빛과 생명을 얻는다. 어린 양의 결혼 만찬은 주님께서 그분의 새로운 교회와 하나된 것을 경축하는 것일 뿐 아니라 이는 부름받는 이들의 영적 생명을 지탱시켜주기 위해 만들어 놓으신 섭리 장치이기도 하다. 이 설비는 앞서 있어왔던 교회의 처방에서 있어질 수 있었던 어떤 것보다 더 풍요롭다. 그 이유가 인간 마음이 이제는 더 많고 더 높은 진리 안에서 그것을 통해서 교회 발달의 어느 단계에 있어왔던 선함보다 더 완전한 선함을 이룩하기 때문이다. 그 결과 더 완전한 선함과 진리의 결합 즉 천국 결혼이 가능하다. 이런 쪽으로 사람들이 부름 받고 있다. 그 이유가 선함과 진리의 결합이 주님과 결합하는 바탕이 되기 때문이다. 천사가 요한에게 이 복된 발표를 기록하라고 말한 것은 너무나 잘된 일일 것이다. 그 이유가 이것을 기록한다는 것은 그것이 중요하다하여 단순한 기록을 남긴다는 것만을 뜻하는 게 아니라 이는 글자라는 바깥 쪽에서 부름받고 영이라는 안쪽에서도 부름받아 심정에 복 그 자체를 새긴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이 말씀은 하느님의 참된 말씀이다. 그 이유가 새롭고 참된 교회가 지상에 건설되어야 한다는 것, 이 교회는 주님께 충성하고 이 충성이 교회가 존립하는 목적이기 때문이다. 또한 확증된 것이 있다. 천국 결혼에 들어가는 이들은 주님과 결합한다는 것, 그들은 영원히 복되리라는 것이다.
10. 이를 전달한 천사의 영광과 훌륭함을 보고 요한은 그에게 신성한 예배를 드리려 했다. “그리고 나는 그를 경배하기 위해 그의 발 앞에 엎드렸다; 그리고 그는 나에게 말했다, 너는 이렇게 하면 안 된다는 것을 보아라, 나는 너의 동료 종이다, 그리고 예수에 관 한 증거를 가진 네 형제이다; 하느님을 경배하라: 그 이유는 예수의 증거가 예언의 영 이기 때문이다.” 요한에게 기록하라고 명령한 천적 존재, 어린 양의 결혼 만찬에 초대된 자는 복되다고 선포한 이 존재가 유한한 존재의 경의가 드높일 수 있는 것 이상의 더 어떤 것으로 예견자에게 비친 것은 과히 놀랄 사항은 아니다. 이 천사 역시 큰 권능을 가진 것으로 묘사되고 있다. 그가 하늘로부터 땅에로 내려 왔을 때 그는 큰 영광으로 번쩍 거렸었다. 그럼에도 요한은 많은 천사들을 보았는데 그들 중 어떤 천사라도 지금 요한에게 명령한 천사보다 덜 영광스러운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이 선포는 천적 특사의 현존과 연결되는 이들 역시 대단히 인상적인 여건 하에 전달되었었다. 따라서 위 구절 같은 모습이 우리에게 보여지는 것은 큰 교훈을 가르칠 섭리적인 기회의 하나일 것은 의심할 바 없다. 그 중 하나는 연결되어 가는 사건 중 하나와 특별히 관계되고 있다. 요한에게 위 메시지를 적으라고 말한 천사는 18장 2절에서 “큰 도성 바빌론이 무너졌다”고 권능 있게 외친 천사였다. 이 함락 자체는 앞 장에 기술되어 있다. 천사 앞에 엎드린 요한의 태도는 모든 마음들에 상속되어져 어떤 경향성을 표현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그 모습 자체는 바빌론으로 표현된 교회의 모습을 여느 다른 것 보다 더 드러내주고 있다. 이 자연적 경향성은 고대 이교도에 의해 신격화된 사람의 근원이었다. 이 경향성은 기독교회가 성도 요람에 수록한 이들을 신성시하는 쪽으로도 이끌고 갔다. 모든 이런 예배는 천사의 “이러지 말라”는 말로 꾸짖어지고 있다. 순수하게 신성에 대한 예배는 “예배는 하느님께 드려라”는 명령만이 합당한 것으로 선포되고 있다. 그러나 누가 하느님이시며 누구에게만 예배해야 하는가? 주 예수 그리스도만이 예배의 참된 대상이다. 그분에게 있는 모든 것은 하느님이다. 그분의 인성은 신성이다. 그분의 인성은 몸과 영혼의 관계처럼 그분의 영원한 신성과 하나이다. 인간에게서 몸과 영혼은 유한하지만 예수의 그것은 무한하다. 주님의 인성, 그러므로 그분의 인성 안에 있는 주님은 어린 양이고 어린 양이 그분의 교회의 남편이다. 어린 양의 아내 되는 교회에 대한 영감의 언어는 이것이다. “…그는 너의 주님이시니 그 앞에 꿇어 절하여라” (시편45:11). 천사의 이 말을 미루어 짐작하면, 천사는 영화된 인간의 영밖에 더 아니다 라는 직접적이고 소극적인 증거이기도 하다. 더 가르쳐주는바 천사와 인간은 동료 수준의 종들이라는 것, 그래서 예수에 관한 증거를 가지고 있는 형제들이라는 것이다. 그들의 유한성은 마찬가지여서 무한한 분을 경배해야 하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모두 예수께서 구속해주신 은혜을 입어 복을 받고 있다. 모두 그분의 나라를 건설하는데 흥미를 둔 적극적인 대리인이다. 그들 모두 예수 안에 있는 진리의 증인들이고 모든 진리는 이것과 관계된다. 그분은 진리 자체이시다. 모든 진리는 그분에게 근원을 가지고 있고 그분에 관해 증언한다. 예수의 증거는 진실로 예언의 영이다. 그분과 관련이 없는 예언은 아무 의미도 없다. 이럴 경우 어떤 약속도, 어떤 희망도 불어 넣어 주지도 못한다. 예수는 예언의 참 영혼이다. 육으로 명백해짐은 그것의 첫 번째 충만이었고 두 번째 오심의 최말단적 성취의 근원이요 기초가 되었다. 이것은 인류의 구원을 위해 더욱 높은 수단이다.
11. 또 다른 나타남이 이제 표현되었다. 이 표현은 우리에게 특별히 주의를 기울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 이유가 예언을 이끌어 가는 주제와 관련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천국이 열리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자세히 보니 흰말이었다; 그리고 그 위에 앉은 그는 신의와 진실이라 불리웠다; 그리고 정의로 그분을 심판하시고 전쟁을 치루신다.” 방금 앞 절에서 어린 양으로 말해졌던 그분, 그분과의 결혼이 있어졌고 그분의 아내를 단장시켰던 그분이 이제 전쟁하는 사람, 피 묻은 옷을 입고 천군을 거느린 분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 변화는 비록 억지스럽기도 하지만 5장에서 언급된 것, 즉 유다 지파의 사자가 봉인을 떼고 책을 펼 수 있다는 것, 그래서 어린 양이 나타나고 사자되시는 분이 이를 행할 수 있다는 것과 유사할는지 모른다. 갑작스럽고 놀랄만한 이런 변천은 이미 살폈지만 환상의 과정에서 자주 발생된다. 주님의 모습의 이런 큰 변화를 헤아려보는 것은 그리 어렵지는 않다. 어린 양의 결혼, 이는 있게 된다고 말해졌는바, 천국 안에 있는 교회와 거행되었다. 그러나 지상의 교회와는 아직 결과 되지 않는다. 새 기독천국, 이것은 천국에 있는 그분의 새로운 교회인데 이 교회는 도장 받은 열 두 지파와 처녀의 군중들로 표현된 사람들로 형성되었다. 주님께서는 그분의 아내로서 천국에 있는 이 교회와 결합하셨다. 그러나 이 새 교회는 지상에 아직 형성되지 않았다.
새 예루살렘은 하느님으로부터 천국을 통해 남편을 위해 단장한 신부처럼 준비되어 아직은 내려오지 않았다. 주님과 교회가 영계에서 결혼하는 것과, 자연계에 있는 교회와 그분이 결혼하는 것 사이에는 어떤 중요한 일들이 결과 되어야만 하는 것은 틀림없다. 사내 아이를 삼키려고 준비하고 있던 권세는 여인 뒤에서 홍수 같은 물을 보냈고 그녀의 남은 후손과 전쟁을 일으키려 했는바 이 권세야말로 정복되어야 한다. 이 권세는 천국에 교회가 세워진 당연한 결과로 세우려 하시는 것을 가능만 하면 방해하려고 그분의 일이 진전되는 것을 방해하는바, 흰 말의 승마자는 이것과 전쟁을 하고 있다. 그래서 어린 양이 전쟁하는 사람으로 바뀌었듯이 어린 양의 아내도 그분을 따르는 군대로 바뀌었다. 그래서 그들은 그분 아래서 그분의 복 주시는 일을 반대하는 자를 정복하는 도구가 되어 주고 있다.
이 모든 것은 한 개의 큰 사건, 즉 흰 말을 타시고 그분이 오시는 것으로 묘사된 주님의 두 번째 오심과 연결되고 있다. 천국의 구름에서 나타나신다고 말해진 복음서의 주님의 재림에 관한 묘사와 계시록의 이 부분의 재림에 관한 표현 사이에는 큰 차이점이 있다. 물론 양 쪽 모두, 즉 묘사와 표현 모두는 영적으로만 이해되어야 한다. 두 가지 사이의 차이는 어떤 불일치도 발견되지 않지만 의미심장한 구분을 나타내주고 있다는 것만은 감지된다.
구름은 빠른 속도로 움직인다는 점에서 종종 성경에서는 병거와 말과 비교되고 있다. 주님에 관해 이렇게 말해진 대목이 있다. “…그분은 구름으로 병거를 삼으시고, 바람 날개를 타고 다니신다” (시편104:3). “보아라, 야훼께서 빠른 구름을 타신다” (이사야19:3). 똑같은 방법으로 주님께서는 구원의 병거와 말을 타신다고도 말해지고 있다 (하박국3:8). 성경의 상징적 언어에서 구름과 말 모두는 진리의 상징물이다. 둘의 차이란, 구름은 진리에 관한 지식이고, 말은 진리에 관한 이해이다. 하늘이 열려 흰 말을 타신 주님을 보여주신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하늘이 열림은 교회이든 개인 차원에서이든 이는 천국에서 이해되듯 신성한 진리를 이해할 수 있게 하신다는 것이다. 흰 말을 타신 그분의 이름이 이를 암시하고 있다. 그분의 이름은 하느님의 말씀이라 불리우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가 영원한 말씀이다. 그러나 씌어있는 말씀은 영원한 말씀을 밝히 알게 한 것이다. 전자에서 참된 것은 후자에서도 참되다. 씌어있는 말씀은 그 본질 측면에서는 신성이다. 가장 깊은 의미에서의 이 말씀은 주님만을 취급하고 있다. 말씀은 안쪽 의미, 즉 천국적 의미 차원에서는 천국과 천국적인 것들만을 취급한다. 영적 의미는 특별히 천국에 있는 교회의 사용을 위한 것이다. 마치 자연적 의미가 땅 위 교회의 사용을 위한 것과 같다. 그럼에도 땅 위 교회는 영적 의미를 이해할 수 있다. 물론 지상의 교회가 이해하는 수준은 천국에 있는 교회와 비교해보면 짙게 깔린 어둠의 유리를 통해 보는 것 같은 수준이다. 천국적인 의미에서 말씀을 이해함으로 지상의 교회는 천국에 있는 교회와 더 가까운 교류를 가지며 더 친밀한 관계를 이룩한다. 말씀의 영적 의미를 밝히 알게 함(계시)은 주님의 두 번째 오심을 구성한다고 말할 수도 있다. 주님은 말씀 속의 그분의 품성 안에, 즉 이 구절에서 말해지는 “이름” 안에 오신다. 그분의 두 번째 오심은 개인적 인물로 지상에 등장하는 것이 아니다. 그분의 말씀 안에서 그분 자신을 밝히 알게 하시는 방법 밖에 더 다른 오심은 없다. 참으로 말할 수 있는바, 그분은 거기서 그분 자신을 이미 밝혀 놓으셨다고 말해 볼 수도 있다. 우리는 성경을 가지고 있다. 그분께서는 성경에서 그분에 관해 밝히 알게 함으로 기뻐하신다는 것을 교회는 모른 채 있었던 게 아닐까? 참으로 교회는 말씀을 언제나 소유해 왔고 아직도 소유하고 있다. 그러나 교회는 말씀의 참된 글자적 의미 조차도 언제나 몰랐었고 이해 못했다. 교리 측면에 관련해 볼 때, 시대의 흐름에서 글자적 의미는 크게 뒤집어 졌는바 이제 원상복귀가 요구되고 있다. 주님의 재림에 관한 예언에 관해서 이들은 결코 이해 못해 왔다. 그 이유는 그들이 예언을 글자대로만 이해했기 때문이다. 영적 의미를 수단으로 하지 않고는 어느 누구도 그것을 이해할 수 없다. 그럼에도 이 의미는 이 구절의 예언에 제한되어 있지 않다. 오히려 이 의미는 사람들이 글자 의미를 잘 이해하고 깊이 있게 연구해서 산출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깊은 천국적인 지혜를 우리에게 열어준다. 예언이란 말에 관련해 볼 때 주님의 둘째 강림에 관한 예언에 관해 배운 학생들이 알고 있는 게 무엇인가? 그들은 주님께서 구름 안에 오시리라는 것, 그 다음 죽은 자를 일으키고, 세상을 심판하고, 하늘과 땅을 멸하여 모든 것에 종말을 드리운다는 것이다. 성경을 글자적 의미대로만 믿는 이들이 위와 같이 믿어야 하는 것은 당연한 노릇일 것이다. 그러나 이런 관점은 과거 예언이 기록될 당시의 시대에는 먹혀들었지만 과학의 발전으로 그 이론은 버티는 것 조차도 힘들어 졌다. 글자직역주의자들이 뒤로 넘어지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창세기와 함께 그들의 근거가 붕뜨게 되어 이 요점, 저 요점으로 몰려 다녔지만 결국 다투어오던 건수마저 점차 줄어 결국 백기를 들고 만다. 그럼에도 백기를 들게 한 것은 과학은 아니다. 그 적들이란 과학을 수단으로 성경을 공격하는 이들, 그리고 과학에 대항하여 성경을 방어하는 이들이다. 그러나 말씀의 영적 의미는 논쟁의 바탕 자체를 제거하고 있다. 이 의미는 과학이 이 예언들의 글자적 성취라는 것에 반대하는 것을 인정한다. 그리고 과학은 말씀에 포함된 더 높은 의미를 더 낫게 이해하기 위해 자료를 제공하는 도움 자체를 허용한다. 참된 과학과 참된 종교는 언제나 일치를 보고 있다. 그 이유가 과학의 길에 드리운 똑같은 빛이 종교의 길도 비추고 있기 때문이다. 세상에 내려와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된 빛은 한 개 밖에 없다. 그래서 과학의 사람이 그 빛의 덕을 입듯 종교의 사람도 마찬가지이다. 그 저자 되신 하느님은 그러므로 해석자, 자연과 계시의 해석자도 되신다. 그럼에도 자연의 참된 해석은 성경의 참된 해석에 앞서 있다. 성경은 시대의 과학에 일치되어 씌어 질 수밖에 없는 필요성을 지니고 있다. 그 이유가 받아 적는 이들이 이해하거나 믿는 것 외에 더 다르게는 기록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일진대 과학이 등장하는 정도에 맞추어 그들에게도 설명되어질 수밖에 없다. 과학적 진리가 건설되기 전에 마음은 과학이 지적하는 종교의 진리, 또는 과학과 상응되는 종교적 진리의 수용을 위해 준비될 수 없다. 지구는 조그만 평면 밖에 더 아니다 라고 이해되는 수준에서는 주님이 구름 안에 오시기로 되었다는 것을 믿게 하는 것, 그리고 만국 백성이 그분 앞에 집합한다는 것 등등을 믿도록 강요하는 데 별 어려움이 없었다. 점쟁이 같은 사람들이 가르치고 싶어했던 것과 같은 것들, 지상이 죄로 더욱 부패해져가고 시대를 지날수록 더 퇴폐해져가는 한, 세상 끝은 더욱 당겨지고 있다고 사람들로 믿게 만드는 것은 쉬운 일이었다. 이것들은 과학적인 것을 바탕으로, 다시 말해 영적 또는 종교적 진리를 위해 자연적 기초를 더 이상 형성하지 못한다. 새 과학은 새 신학을 위해 길을 준비하고 있다. 다시 말해 성경의 새로운 해석, 세부적으로는 예언의 언어에 관한 새로운 해석을 위해 과학이 길을 준비해 주고 있다.
비록 계시의 부분들이 새로운 과학에 자신을 적용하는 듯 외관상 보일지라도 계시가 과학에게 신세를 지고 있다는 쪽으로의 결론은 성립되지 않는다. 자연적인 지식은 종교적 진리에 선행하는데 이는 이런 법칙, 즉 “영적인 것이 먼저가 아니고 자연적인 것이 첫 번째이다. 그 후에는 영적인 것이 첫 번째가 된다”는 법칙에 따라 선행된다. 그러나 이것은 그들의 존재의 연속이 아니라 나타남의 연속이다. 자연적인 것은 시간 측면에서 첫째이나 영적인 것은 목적 측면에서 첫 번째이다. 영적인 것은 원인이고 자연적인 것은 결과이다. 자연적인 것들은 수단이어서 이를 가지고 영적인 것들은 지혜가 그녀의 집을 지을 수 있게 재료를 수집한다. 그 이유가 자연적인 것은 영적인 것의 결과일 뿐 아니라 그릇이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참된 모든 과학은 그 나름에서 거룩한 바 이것이 종교를 섬기는데 헌신될 때 완전히 거룩해진다. 이 수단들이 말씀을 올바르게 해석하고 인류의 영적 흥미를 섬길 때 과학은 계시의 저자에 경의를 표하고 이 저자의 가장 높고 가장 고상한 선용을 이룩한다. 종교적인 모든 진리는 성경 안에 포함되어 있는데 마치 과학적인 모든 진리가 자연 안에 포함되어 있는 것과 같다. 과학과 자연의 관계같이 신학은 성경의 참된 해석 그 이상의 것은 없다. 신학이든 과학이든 창조력은 없고 단지 밝혀내는 것 뿐이다. 말씀을 밝혀 낸다는 것은 그것의 내적인 영적 의미를 열어 보여 주는 것이다. 말씀의 영적 의미 안에서 주님은 두 번째 오신다. 그분의 오심은 그분 자신과 그분의 나라에 관해 더 높고 더 명백한 관점을 주고 그것들이 그분의 오심을 구성하고 있다. 그것은 그분의 인물과 품성을 더 완전하게 진열해 주고 있다. 그것은 종교가 무엇인지. 교회가 무엇인지. 천국이 어떤지를 더 명백하게 보이고 있다. 그것은 성경의 주제들, 즉 창조와 섭리에 관해서, 구속과 구원 등등의 모든 주제들에 새로운 빛을 드리워주고 있다. 그것은 우리로 천국의 빛 안에서 이런 주제들을 볼 수 있게 한다. 그 이유가 “천국이 열려”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우리가 자연적으로 밖에는 달리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을 영적으로 보게 해준다. 그래서 말씀 중에서 알기 쉬운 의미를 전혀 가리지 않은 대목에서도 유익한 교훈을 얻을 수 있게 해준다. 그 이유가 열린 천국에서 흰 말이 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새 시대에 주님께서 말씀 속의 진리를 통해 그분의 교회에 그분을 밝히 알리겠다는 표시이자 약속이다. 열려 있는 천국은 마음 밖에 있는 천국만을 말하는 게 아니라 그 안에 있는 천국, 내적 인간의 천국, 영적 마음이다. 이 천국을 통해 주님께서는 인간의 마음 안으로 들어가시어 그분의 빛을 드리워 이해하게 하신다. 이 열린 천국을 통해 그분께서는 개개인의 모든 마음에 두 번째 강림하신다. 참으로 꼭 필요한 것은, 주님은 제일 먼저 우리의 세부적인 마음에로 오시어 그분을 영접하는데 가능할 수 있는 바깥쪽, 안쪽의 수단을 준비해두는 것이다. 이런 마음을 통해 성경의 교리적 의미나 영적 의미가 이해되도록 열리고 계발되는바 타인들이 영적 식별의 빛을 추구하고 받는 것을 준비하도록 지식들이 설비된다. 신성한 모든 의도는 내향의 빛과 바깥쪽의 가르침이 하나된 작용으로 수행되어졌다. 내향의 빛 홀로라면, 또는 영의 작용은 빛을 되튀기는 대상물이 없는 빛과 같다. 빛이 어둠을 비추는데 어둠은 그것을 납득 못한다. 바깥쪽의 가르침은 내향의 빛이 드리워질 대상물을 공급한다. 그리고 이를 수단으로 내향의 빛은 마음의 눈에도 반사된다. 그런고로 바깥쪽 계시도 필요한 것이다. 바깥쪽 지식은 객관적인 진리이다. 내향의 빛은 이 진리를 주관적인 진리로 만든다. 바깥쪽 계시가 없이 내향의 빛은 지식을 나누어주지 못한다. 내향의 빛 없이 바깥쪽 계시는 식별력을 주지 못한다. 이 둘은 모두 필수적인데 바깥쪽 계시를 설명하는 것이 내향의 빛이다. 성경의 문법적인 의미를 보여주고 거기에 알맞다는 글자적 의미를 추가 해놓고 이것이 성경을 총망라해 설명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있다. 이는 마치 어떤 사람을 설명할 때 그의 신체 구조를 나열하고 각 신체 기관의 기능을 설명한 다음 이것이 그 사람을 다 설명한 것이다 라고 말하는 것이나 다를 바 없다. 육체가 의지를 행동화하는바 신체 역시 경이롭고 아름다운 도구라 해도 육체는 도구에 불과할 뿐 영혼이 그 사람이다. 말씀 속의 영혼은 영적 의미이고 글자적 의미는 육체에 해당된다. 주님이 창조에서 생명되어 계신 것 같이 그분은 말씀 속의 생명이시다. 어쨌든 말씀의 글자적 의미 역시 얼마나 아름답고 경이로운지! 그럼에도 이 의미는 영적 의미의 의복에 불과하다. 그리고 그 의미는 유용함의 도구가 되도록 의도되어 있다. 지금까지 말씀은 글자적 의미 만으로 이해되어왔다. 말씀 안에 영적 의미가 존재한다는 것은 태고의 교회에서는 일반적으로 인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말씀의 영적 해석의 법칙은 알려지지 않았는바 성경의 영적 해석은 해설자의 마음을 표현했을 뿐 하느님의 마음이 표현된 게 아니었다. 말씀의 영적 의미의 본성은 이 절을 뒤잇는 구절에서 지적하고 있다. 이 구절은 말씀을 그 자체 있는 그대로에서 취급하고 있다. 흰 말을 타신 그분은 “충실과 진실”이라고 불리우고 있다. 충실함과 진실함은 선함과 진리와 똑같은데 이는 신성한 본성의 필수적인 원리들이다. 이는 말씀의 본질적인 원리이기도 하다. 정의로움, 이 안에서 그분은 심판하시고 이를 수단으로 전쟁도 치루는데 정의는 그 실행(operation) 측면에서 선함과 진리 모두를 포함하고 있다. 신성한 모든 심판은 그들이 선함과 진리로부터 행하듯 진행되는바 이는 완전한 정의와 공정의 결정들이다. 모든 신성한 전쟁은 공정이 불공정에 맞서는 것, 정의가 불의와 맞서는 것, 선이 악에, 진리가 거짓에 맞서는 것이다.
12,13. 흰 말을 타신 분에 관해 더 말해지고 있다. “그리고 그분의 눈들은 불의 불꽃 같았고, 그분의 머리 위에는 많은 왕관들이 있었다; 이름이 쓰여 있는데, 그분 자신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그리고 그분은 피에 담근 옷으로 입혀져 있었다; 그리고 그분의 이름은 하느님의 말씀이라 불리운다.” 주님의 눈은 그분의 지혜이다. 불과 유사한 불꽃은 그분의 사랑이다. 그분의 머리에 있는 많은 관은 그분의 사랑과 지혜로부터 진행되는 신성한 진리들이다. 이 진리를 수단으로 그분은 그분의 교회를 통치하시고 그분의 백성의 심정과 지성을 다스리신다. 이것들은 이미 설명했었던 모습들이다. 그 외 다른 것들이 우리의 시선을 기다리고 있다. 승마자의 이름이 주어지긴 했는데 그 이름은 그분밖에는 아는 사람이 없다. 이는 씌어 있는 말씀과 인물에 관한 특징이다. 무한한 분을 알 자는 무한이신 분밖에 더 없다. 씌어있는 말씀을 알 수 있는 것은 그 말씀을 밝히 알리는 영원한 말씀 뿐이다. 그것의 지혜는 무한하다. 그 이유가 영원한 말씀은 가장 깊은 본질 측면에서 말씀 안에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영원한 말씀은 천사나 인간에 무진장한 지혜의 샘이다. 비록 주님만이 그 샘의 깊이와 완전함을 아신다 해서 유한한 존재가 그 샘의 지혜에 관한 모든 지식마저 전무한 것은 아니다. 주님께서 아버지에 관해 하신 말을 여기서 들추어보자. “아버지밖에는 아버지를 아는 이가 없습니다” (마태11:27). 그런데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어 주시지 않으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다” (요한6:44). 주님만이 인간에게 그분의 말씀을 알도록 가르치실 수 있다. 인간은 말씀을 밝히 알게 하는 지혜의 빛을 수단으로 그분이 계시하신 지혜를 이해할 수 있을 뿐이다. “…우리 앞 길은 당신의 빛을 받아 환합니다” (시편36:9). 이와 같이 그들은 자기들의 심정에 그분의 사랑을 받는 만큼에 비례해서 그들의 이해성에 그분의 빛을 받을 수 있다. 진정한 사랑이 없는 곳에는 진정한 빛도 없다. 주님은 무한한 지혜이시다. 아버지(the Father)인 사랑만이 인간을 아들(the Son)인 지혜에로 이끌어 준다. 그 이유가 거기에는 유한한 지혜는 어떤 것도 없고 오로지 사랑의 지혜만 있기 때문이다. 사랑이 없으면 진리 안에 생명, 혼이 없다. 인간이 선함을 사랑하기를 중단하면 그는 진리에 관한 이해를 상실한다. 그리고 그들이 선함 대신 악을 사랑하려할 때 그들은 진리대신 거짓을 채용한다. 진리는 참으로 선함이 지적으로 지각된 것밖에 더 아무것도 아니다. 하느님에 관한 진리는 우리에게 하느님의 선함에 관한 지식이다. 그분의 빛은 신성한 사랑으로부터의 신성한 지혜의 빛이다. 이것이 사랑으로부터 올 때 그것은 우리를 사랑에 인도하려 한다. 어떤 것에 관련된 진리는 그것의 선함 또는 용도에 관한 지각과 지식이다. 어떤 것의 선용은 우리가 그것으로부터 축출할 수 있는 선 또는 우리가 그것을 수단으로 획득하거나 행할 수 있는 선이다. 종교적 진리의 사용은 우리의 발을 정의라는 진리의 길에 있도록 안내해주는 것 외 목적 차원에서 더 없다. 이외로 인도하는데 더 있다고 한다면 그것에는 유용함이 없게 될 것이다. 진리의 생명이 선함이듯 거짓의 생명은 악이다. 거짓은 악 자체를 옷입히는 빛이고 이 거짓을 수단으로 악은 우리의 승낙을 받아 낸다. 참으로 그것은 왜곡된 빛이다. 그러할진대 그것은 왜곡된 선으로 이끌어간다. 이런 가르침을 따르는 이들은 결국에 가서는 악을 선이라 부르는 상태, 선을 악이라 부르는 상태, 어둠을 빛 대신 놓고 빛을 어둠 대신 놓는 상태에 이르고야 만다. 이렇게 말하는 게 너무 심한 듯 여겨질는지 모른다. 그러나 종교적인 모든 잘못은 그 잘못을 나무라는 진리의 빛을 차단하는 어떤 악에 그 근원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그 자체는 악을 변명하거나 감추어 주는 어둠 아래 숨어 있다. 그럼에도 기독인들 사이에서 종교적인 잘못들이 성경으로부터 끌어내지고 또한 성경으로 확증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이 성경의 글자를 수단으로 끌어내거나 확증하되 이 글자가 생명의 영과 분리될 경우 죽는다. 영과 글자의 관계는 선함과 진리, 목적과 수단, 본질과 형체의 관계와 같다. 글자가 영에서 절단될 때 글자는 영이 가르치지도 않는 것을 가르치게 할 뿐아니라 영의 가르침에 반대되는 것까지도 가르치게 만든다. 기독교회의 두 개의 큰 잘못은 이미 말한바 있지만 글자가 말씀의 영에서 절단된 상태로 교회의 존재를 둔 것이다. 그리고 글자를 하느님의 영에 의거하지 않고 인간의 영에 의거 해석한 것이다. 천국을 닫고 여는 권능은 단 한사람에게 있었던 적이 결코 없었고, 말씀의 글자가 그 가르침의 영에서 분리되지 않았다면 구원이 한 개의 품위에만 배당된 적도 결코 없었을 것이고, 말씀의 영과 글자 모두에 관한 가장 직접적인 가르침 중의 어떤 것에 반대되는 인간 견해를 지지한 적도 결코 없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흰 말을 타신 분은 피로 범벅된 옷을 입고 계셨던 것이다. 말씀의 옷이 글자적 의미이고 이 의미가 영적 의미에 옷을 입혀준다. 인간의 잘못과 뒤집음이 말씀을 피로 얼룩지게 하는데 피란 죽임을 당한 진리들이다. 말씀이 가르치는 본질적 진리를 파괴하는 인간의 해석들은 말씀으로부터 생명과 생명을 주는 힘을 박탈한다. 흰 말을 타신 그분의 피로 얼룩진 옷이란 하느님의 말씀과 인간의 영혼 모두에 가해진 폭력을 상징한다. 꾸며진 성경의 권위, 구원할 수 없는 그것 가지고 구원을 추구하도록 방향지을 때 그 종교는 참된 안내자가 되기를 중단하는 것이고 교회는 참된 교회 되는 것을 중단한다. 이럴 경우 교회는 끝장을 보고 만다. 그리고 구원의 수단이 설비되도록 새로운 교회가 조직된다. 주님의 오심은 이런 목적이 결과 되는 것이다. 주님은 증거 없이 그분 자신을 놔두지 않으시고 교회 없이 인간을 방치해 두시지 않는다. 그분께서는 이쪽이 끝날 경우 또다른 것이 그것을 잇도록 언제나 설비하시고 있다. 위기는 심판이다. 심판은 영계에서 교회의 참된 자를 거짓된 자로부터 분리한다. 그리고 심판은 자연계에서 사람 사이에 있는 진리를 잘못들로부터 분리한다. 이것이 주님께서 심판하러 오시는 것으로 표현된 이유이다. 똑같은 이유에서 그분은 말씀으로 묘사되고 있다. 그 이유가 심판하는 것은 말씀이기 때문이다. 말씀의 법과 원리들은 교회와 교인이 심리되는 테스트이요 그들을 측량해주는 표준이기도 하다. 말씀으로서의 주님은 선과 악, 진리와 거짓 모두에 관련되어 표징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그분의 영광스러운 인물은 그분께서 전자를 표현하는 면모이고 그분의 피묻은 옷은 그분이 후자에서 나타나는 면모이다. 이런 이중적인 면모는 심판의 특성인데 이것은 정의로운 자와 사악한 자 모두에 결과 되어지고 있다. 그분의 첫 오심, 이 오심은 역시 심판의 때 였는데 첫 오심에 관련되어 서도 비슷하게 이렇게 기술되어 있다. “에돔에서 온 이분은 누구신가? 붉게 물든 옷을 걸치고 보스라에서 온 이분은 누구신가? 위엄찬 옷을 입고 위세를 떨치며 저벅저벅 걸어 온 이분은 누구신가? ‘나는 구원을 약속하는 자, 도울 힘이 많은 자이다.’ ‘어쩌다가 당신 옷에 붉은 물이 들었습니까? 당신 옷은 마치 포도주틀을 밟다가 물든 것 같군요.’ ‘나는 혼자서 술틀을 밟아야 했다. 나의 백성 가운데 나를 돕는 자가 아무도 없었다. 너무나도 노여워, 나는 그것들을 마구 밟았다. 그들의 피가 내 옷에 튀어 나의 옷이 온통 피투성이가 된 것이다. 원수갚을 날을 정하고 벼르고 있다가 마침내 복수할 해가 왔다” (이사야63:1-4). 주님의 탓으로 기록된 노여움과 복수는 물론 가상적일 뿐이다. 그분에게는 성냄이 없다. “격분은 내 안에 있지 않다.” 그것은 우리의 성냄이 반사된 것이다. 그분의 옷에 물든 피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그것은 포도주틀로부터이다. 그것은 심판되는 이들의 피이다. 거짓과 악을 수단으로 진리의 왜곡자들이 말씀의 글자에 얼룩을 만든 것이다.
14. “그리고 천국에 있는 군대들이 희고 깨끗한 모시옷을 입고 흰말들을 타고 그분을 뒤따랐다.” 주님 자신을 결혼하게 되는 어린 양이라고 말한 뒤 즉각 피로 얼룩진 옷을 입은 용사로 표현되었듯이 그분의 아내라 불리는 그분의 교회를 집합적으로 형성하는 이들이 천국에 있는 군대, 흰 말을 타고 그분을 따르는 군대로 표현되고 있다. 여기서 이 군대들은 천사들의 천국 전체를 뜻하는 게 아니라 말씀을 내면으로 이해해서 주님과 결합하는 교회, 새 기독인의 천국, 천국의 새 교회를 뜻한다. 말씀의 이해는 그들이 탄 말이다. 그리고 말씀의 순수한 진짜 진리가 그들이 입은 깨끗하고 흰 고운 모시옷이다. 어린 양의 아내와 더불은 천국의 이 군대의 정체는 그들의 존재, 그 여자처럼, 희고 깨끗한 고운 모시옷으로 잘 차려 입은 것에서 암시되고 있다.
천국은 그것 외 각기 다른 기능과 용도에 따른 품성과 형체 아래 묘사되고 표현되고 있다. 천국이 주님의 아내, 그분의 몸, 그분의 성전, 그분의 왕국, 그분의 군대로 불리고 있다. 사랑으로 그분과 결합할 경우 천국은 그분의 아내이다. 장엄한 사람(the Grand Man), 그분의 영광스러운 몸의 가장 완전한 형상일 경우 그분의 몸으로, 그분이 더 직접적으로 현존하는 장소일 경우 그분의 성전으로, 그분의 사랑과 지혜의 정부 아래 있을 경우 그분의 왕국으로, 그분 휘하에서 악과 거짓에 반대하고 그것을 정복하는 도구일 경우 그분의 군대로 각기 불리고 있다.
천국의 천사들은 마치 주님이 만군의 주님이라 불리듯이 군대, 군단으로 불리운다. 그 이유가 그분의 진리의 그릇들로서 완전을 만들어 임무를 부여받은 수많은 의로운 자들은 일반적으로나 개인적으로나 지상의 교회가 기독생활의 싸움에 성공적으로 종사하는 것을 보조하기 위한 그분의 손에 있는 도구이기 때문이다. 이 싸움은 자아, 세상, 육과의 싸움이고 이것은 각양각색의 형체로 있는 주님, 천국, 교회의 적이다. 이런 악들의 사랑을 스스로 확증하거나 탐닉하는 이들은 주님과 인간의 개인적인 적들이다. 그들이 말 위에 앉은 그분과 그의 군대에 맞서 전쟁을 일으키는 짐승들, 땅의 왕과 그의 군대들로 표현되어져 있다. 마지막 심판에 앞서 영계에서 거행되는 것인 이런 싸움은 악과 잘못 안에 있는 이들이 선함과 진리 안에 있는 이들에 반대하는 것을 묘사하고 있다. 이 싸움의 본성 중 어떤 것은 흰 말을 탄 그분의 군대와 땅의 왕의 군대 사이에서 일어나고 있다.
흰 말의 승마자는 하느님의 말씀, 천국의 군대라고 불리는데 추상적으로 생각하면 말씀 속의 진리들을 표현하고 있다. 이 진리들은 주님의 권능의 실제 도구들이다. 참으로 명백한바, 심판의 대리인으로서 말해지는 이들은 개인적으로 심판하는 것으로 이해되지 않는다. 주님께서 열 두 사도에게 말하시기를, 그분의 나라에서 그들은 열 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의 열 두 지파를 심판할 것이라고 하셨을 때 그분이 그들에게 말하신 것은, 심판이 결과 되게 하는 진리로서의 그들의 표현적 품성에 관해서이다. 하느님의 말씀이라는 이름을 지닌 그분을 따르는 군대는 그러므로 말씀 속의 모든 천국적 진리들이다. 이 진리들은 주님과 그분의 말씀을 따르고 천국을 유지 지탱하게 한다. 동시에 그분의 말씀은 진리와 정의의 원인이 된다. 천국의 이 군대들이란 그들이 천국에서 지각할 때의 말씀 속의 진리, 즉 말씀의 영적 의미를 표현한다. 그리고 그들이 입고 있는 깨끗하고 흰 고운 모시옷은 바깥쪽에서 빛나는 총명과 흠 없는 정의로움으로 모습을 드러낸 진리들이다. 또한 그들은 말을 타고 있었다. 이것이 표현적으로 가르치는 바, 말씀의 영적 진리는 이제 주님이 건설하기 위해 오시는 교회, 새 교회를 형성하는 이들에 의해 지적으로 받게 될 것이라는 말이다.
15,16. 군대의 지도자로서, 말씀으로서의 주님이 정복하러 나가고 정복하게 된다는 것이 특색 있게 묘사되어 있다. “그리고 그분의 입으로부터 날카로운 검이 나왔다, 그것 가지고 그분은 나라들을 세게 칠 것이다; 그리고 그는 그들을 쇠막대로 돌볼 것이다: 그리고 그분은 전능한 하느님의 성나심과 격노하심의 포도주의 포도즙틀을 밟으신다. 그리고 그분은 그분의 옷에, 그분의 허벅지에 왕들 중의 왕이고 주들 중의 주라고 쓰인 이름을 가지고 있으시다.” 이미 살핀바(1장 16절)대로 주님의 입에서 나오는 검이란 그분으로부터 진행되는 신성한 진리이고, 이 진리가 오류와 싸울 때는 검과 같고, 악과 싸울 때는 쇠막대와 같다. 이 악은 쇠막대로 다스리는 모든 나라로 의미되고 있다. 그분께서 포도즙틀을 밟는 것은 심판 자체이다. 그러나 이 구절에서의 형상은 정복자의 발 아래에서 적들을 짓밟는 것을 표현하고 있다. 그럼에도 이것이 죄 있는 사람 사이에는 너무나 실제에 해당되지만 정의로운 하느님과 더불어서는 오로지 가상 일 뿐이다. 그분의 심판이 그분의 적들에 의해 느껴질 때는 마치 그들이 보복을 당하는 것 같은 느낌, 비록 그들이 자비의 충만 속에 있다 해도 그들의 느낌은 한결같다. 물론 자비는 지혜로 방향지어 진다. 그러나 분노로는 영향력을 결코 발휘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주님 안에 분노가 없기 때문이다. 이것이 그분의 허벅지와 옷에 씌여진 이름에서 상징적으로 표현되고 있다. 그분의 옷으로 의미된 말씀의 글자적 의미에서, 그분의 허벅지로 표현된 말씀의 영적 의미에서, 그분의 신성한 성품은 순수한 지혜와 사랑이라고 보여주고 있다. 신성한 지혜일 경우가 그분이 왕일 때이고, 신성한 사랑일 경우가 그분이 군주일 때이다. 게다가 그분은 왕 중의 왕이요 군주 중의 군주이시다. 그 이유가 그분은 최고 수준의 진리요 최고 수준의 사랑이시오, 천사와 인간들에 있는 모든 진리와 저자이시기 때문이다. 천사와 인간들에게 사랑과 지혜의 원천이신 그분은 모든 것을 지으시고 다스리시는 한 분 위대한 존재(One Great Being)이시다.
17,18. 이후 요한이 말한다. “그리고 나는 태양에 서있는 천사를 보았다: 그리고 그는 큰 음성으로 소리쳤다, 천국의 한가운데에서 날고 있는 모든 새들에게 말하기를, 와라, 그리고 네 자신들을 큰 하느님의 만찬으로 모으라. 그리하여 너희는 왕들의 살, 그리고 수 천의 장군의 살, 그리고 용사의 살, 그리고 말들의 살, 그리고 자유인과 억류된 자, 그들이 큰 자이든, 작은 자이든 모두의 살을 먹어라.” 우리는 살육한 후에 새들이 죽은 자의 살코기를 먹는 전쟁에 관한 형상을 또 다시 갖는다. 그럼에도 이 전쟁에는 더 깊은 의미를 암시하는 것들이 있다. 새들에게 먹이를 주는 것 뿐아니라 천국 가운데서 날고 있는 모든 가금류(fowl)들이 하느님의 큰 만찬에 불리우고 있다. 신성한 의미가 있는바 우리는 이를 확실히 해둘 필요가 있다. 주님께서 죽이신 것은 사람(person)이 아니라 원리들이다. 그분은 악과 잘못에 대해서만 전쟁을 하셨다. 그러나 악과 잘못은 선함과 진리가 뒤집혀진 것이다. 악과 잘못이 죽여질 때도 악과 잘못 속에서 뒤집혀 있던 선함과 진리는 잔존한다. 교회의 원리들은 뒤집혀져 왔었다. 그것들이 심판에 가져와 악이 선에서, 거짓이 진실에서 절단되어야만 한다. 이렇게 될 때 끝을 내는 처방 속에서 뒤집혀 있던 선하고 참된 것이 회복되어 새 처방 속에 있게 될 이들에게 제공된다. 새 처방에 있을 이들이 천국에서 날고 있는 가금류로 의미되고 있다. 가금류란 진리를 찾고 있는 애착의 상징물이다. 본문의 초대는 진리를 사랑하는 마음을 지닌 이들에게 실지로 존재한다. 이 애정들에게 먹이가 공급된다. 그들은 영적 또는 천적 애정들이다. 그들은 천국에서 날고 있는 가름류들이다. 그리고 마련된 잔치는 모든 애착들을 만족시킨다. 그 이유가 이 초대는 천국을 날고 있는 모든 가금류에 대해서이기 때문이다. 이 초대는 태양 안에 서 있는 천사에 의해 주어지고 있다. 천국 안에는 한 개의 태양이 있고 그 태양의 열은 사랑이고 그 빛은 지혜이어서 이 태양은 천사와 인간의 도덕적이고 지적인 자질이 생명 있도록 계발시켜 준다. 이 태양은 정의의 태양으로서의 주님 자신이다. 이 태양이 요한이 본 태양이라고 예상해보는 것은 별로 필요하지 않으리라 본다. 그는 그것의 표현적인 형상 만을 보았고, 그 형상은 주님 자신, 언약의 천사, 하느님과 인간을 결합시켜주는 큰 매체되신 그분의 인성을 표현하고 있다. 주님은 이제 막 그분의 백성과 새 언약을 맺으려 하시고 있다. 이것은 결혼 언약이다. 그리고 이것은 원하는 자는 누구든지 초대되는 결혼 만찬이고, 진리가 진리이기에 진리를 사랑하고, 선이 선이기에 선을 사랑하는 모든 사람이라면 초대되는 만찬이었다. 진리의 선은 참으로 그들이 분담하도록 초대되는 것에 속한다. 그 이유가 가금류는 왕들과 장성들의 고기를 먹으라고 부름받고 있기 때문이다. 진리는 지각의 직접적인 대상이고 선은 그것의 목적과 목표이다. 하느님의 위대한 만찬은 근원과 목적을 선함에 둔 진리를 사랑하는 이들을 위해 설비된 것이다. 사실 주님의 사랑은 한정되었거나 어느 한쪽에 국한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위와 같은 이들 외의 다른 사람은 이 초대를 듣지도 못하고 또는 좋아해서 초대에 응하지도 않는다. 진리를 진실로 사랑하는 이들만이 그분의 오심에서 그분을 영접하려고 마음 자세를 갖추고 있어 제물을 수단으로 그분과 함께 언약에로 들어간다. 천국을 날고 있는 가금류로 의미되는 이들은 “결국에 가서는 부름 받는다.” 이 특이한 잔치에 가금류만이 초대된 것이다. 그럼에도 이 잔치는 그들을 위해 준비된 양식의 영적 의미가 이해될 경우 가금류로 표현된 이들에게 풍요로운 잔치가 된다. 왕이란 말씀에서 파생된 교회 속의 진리들을, 장성(captain)은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들이다. 장사(mighty men)는 교리로부터 오는 박학(erudition)을, 말은 말씀의 이해를, 말 위에 탄 이들은 말씀의 이해로부터 오는 지혜를, 자유인이란 말씀으로부터 직접 이끌어 내진 진리에 관한 지식을, 억류된 자란 다른 채널을 통해 간접적으로 파생된 진리에 관한 지식을, 낮고 높은 자란 정도에 따라 보다 크고 작은 모든 원리들을, 왕으로부터 가장 낮은 백성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사람의 살코기를 먹는다는 것은 갖가지 종류의 선한 원리들을 내 것 삼는다는 뜻이다. 주님께서는 이런 것들에 굶주리고 갈망하는 애정의 소유자에게 각기 수준에 걸맞게 말씀 속의 진리와 말씀에서 파생된 교리를 공급하신다. 이들은 위대한 하느님의 만찬에 초대된 자들이다. 그리고 이것은 그들을 위해 만든 설비(provision)이다
19-21. 위에 반대하는 군대가 이제 기술되고 있다. “그리고 나는 그분과 그분의 군대와 전쟁을 치루려고 함께 모인 짐승, 그리고 땅의 왕들과 그들의 군대들을 보았다. 그리고 짐승은 잡혔다, 그리고 그와 더불어 거짓 예언자도 잡혔다, 이들은 그 앞에서 기적을 실시했었다, 이 기적 가지고 그는 짐승의 표를 받고, 그것의 형상을 숭배했던 그들을 꾀어냈다: 이 둘은 산 채로 황이 타오르는 불의 호수에 내던져졌다. 그리고 나머지는 말 위에 앉으신 그분의 검에 의해 죽여졌다, 이 검은 그분의 입에서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모든 새들은 그들의 살을 물릴 정도로 먹었다.” 16장에서 읽은바, 용의 입과 짐승의 입과 거짓 예언자의 입에서 개구리 같은 더러운 악령 셋이 나왔는데, 이것들은 악마의 영으로서 기적을 행할 수 있는 자들이며 전능하신 하느님의 큰 날에 일어날 전쟁을 위해 온 세계의 왕들을 모으려고 나갔고, 세 악령은 아마겟돈이라고 하는 곳으로 왕들을 모았다. 이것이 본문에 있는 싸움이다. 여기서 적대감 있는 군대들이 함께 모였다. 이것은 선과 진리 그러므로 그것을 가르치는 말씀에 대항하는 악과 잘못들의 마지막 발버둥이다. 개구리 같은 불결한 세 악령은 말씀의 순수한 세 영들, 즉 사랑의 영, 진리의 영, 정의의 영에 광폭하게 직접 대적한다. 흰 말 위에 탄 그분의 인물 안에서 진리가 명백해질 때 이 진리에 대항하는 잘못들을 방어하고 지탱시키려 드는 이들이 하느님의 말씀에 대항하여 싸우는 적들이다. 이 마지막 싸움은 악이 말씀 속의 선과 싸운다고 하기보다는 거짓이 말씀 속의 진리와 싸우는 것이라고 하는 편이 더 낫다. 대적하는 군대들은 신앙 만으로 구원됨 이라는 독단적 주장을 믿고 또 그렇게 살아온 이들로 구성되어 있다. 이들은 주님의 정의를 자기 것으로 귀속하는 것에 의탁할 뿐 그분의 뜻을 행함으로 그분으로부터 정의를 획득하는데 게을렀던 자들이다. 그들은 실제적인 종교에는 거의 관심이 없고 그들의 신조의 그늘 아래서만 꿈틀대며 살고 있다. 그들은 사기 당해 왔다. 그러나 그들은 거짓 예언자가 일으킨 기적을 수단으로 기꺼이 그 사기를 양심에 받았고 평화, 평화, 거기에 평화는 없다고 외침으로 죽어 있는 잠에 빠지도록 양심을 달랜 자들이다. 그 결과가 상징적으로 본문에 묘사되어 있다. 하느님의 말씀이라는 이름을 지닌 흰 말 위에 탄 그분과의 싸움에서 짐승과 거짓 예언자들은 붙잡혔고 유황이 타오르는 불 못에 산 채로 던져졌다. 그들이 잡혀서 산 채로 불 못에 던져지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기 위해서 우리는 죽인다는 말과 죽어있다는 말로 이해되는 것을 곰곰이 생각해야 한다. 선한 자의 경우 죽음은 자기 속에 있는 악한 것은 무엇이든지 소멸됨이다. 악한 자의 경우 죽음은 그들 속에 있는 선한 것은 무엇이든지 소멸되는 것이다. 심판은 이런 죽음을 결과 되게 한다. 이런 분리가 결과되는 것들이 죽임을 당하는 것으로 의미되고 있다. 그러나 이런 분리가 결과 될 수 없는 악한 인물도 있다. 이들은 모독이라는 죄를 지은 자들이다. 모독은 참된 것과 거짓된 것을 섞을 경우, 거룩한 것과 불순한 것을 섞을 경우 발생되는데 이것은 분리될 수 없다. 이들이 바로 잡혀서 산 채로 불 못에 던져진 자들이다. 이 못은 어떤 장소라기보다는 어떤 상태이다. 불과 유황은 불경한 생명을 구성하는 것인 악한 사랑과 거짓된 생각들이다. 불경한 자가 그들의 가면을 벗어 던지고 그들을 억류한 바깥쪽의 금지라는 것에서 자유로워질 때 그들은 스스로 장소 측면에서의 지옥에로 빠져든다. 지옥은 그들 자신의 상태의 형상이요 자기 상태가 돌출된 것이다. 짐승과 거짓 예언자가 잡힌 반면, 나머지들은 말 위에 탄 그분의 칼에 맞아 죽었다. 말씀 속의 신성한 진리는 거짓 설득의 진짜 속성을 열어 보인다. 이로부터 악한 자는 진리에 대적하려고 스스로 덤벼든다. 진리의 칼에 죽임을 당하고 공중의 모든 새들이 죽은 그 고기로 배를 채웠다. 이들은 천사들이 초대한 가금류가 아니고 그들과 똑같은 의미를 가진 것도 아니다. 첫 잔치의 고기는 선함이라는 원리를 뜻하고, 두 번째 잔치의 고기는 악이라는 원리이다. 첫 잔치에 초대된 새의 종류는 천국을 날아다니는 가금류인바 진리와 선함에 대한 천국적 애착들이다. 두 번째 잔치에 오게 된 것들은 악과 거짓에 대한 애착들이다.

요한계시록 18장 해석

18

새로운 광경, 그러나 한 가지는 이미 숙고해 본 것과 밀접하게 연결되고 있는데 이제 우리 시야에 들어오고 있다. 바빌론의 품성이 앞 장에서 들추어졌고 본 장에서는 바빌론의 심판이 기되어 있다.
1. “이런 일들 후에 나는 천국으로부터 천사가 내려오는 것을 보았는데, 큰 권위를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땅은 그의 영광으로 인해 환해져 있었다.” 또 다른 천사가 등장하는데 그 이유는 또 다른 국면이 전개되기 때문이다. 앞의 천사들은 일곱 대접을 가졌던 천사들 중의 하나였다. 그 이유가 그 때는 조사하는 때에 해당되었기 때문이다. 지금의 천사는 큰 권세를 가진 천사이다. 그 이유가 분리의 날이기 때문이다. 이 천사가 소유한 것은 신성한 선함의 권세, 인간 악의 권세에 반대되는 권세이다. 그래서 땅, 즉 교회가 인간의 영광인 거짓에 반대되는 신성한 영광의 참된 빛으로, 오류의 어둠에 반대되는 진리의 빛으로 환해졌던 것이다.
2. “그리고 그는 큰 음성으로 힘차게 외쳤다, 말하기를, 큰 도성 바빌론은 무너졌다, 무너졌다, 그리고 악마들의 처소가 되었다, 그리고 모든 불결한 영이 소유권을 쥐고 있다, 그리고 모든 불결하고 지겨운 새가 소유권을 쥐었다.” 힘찬 소리는 힘찬 의지를 나타낸 것이다. 심판을 발표하는 신성한 진리의 소리 역시 신성한 사랑의 소리이다. 주님께서는 그분의 모든 심판에서 자비를 기억하신다. 주님께서는 진리 만이 아닌 진리와 사랑이 하나 됨으로부터서 만 판결하신다. 악한 자는 사랑 없는 진리를 가지고 있는 바, 자비 없는 심판을 받는다. “바빌론이 무너졌다. 무너졌다”는 주님의 측면에서 진리의 외침 일 뿐만 아니라 사랑의 외침이기도 하다. 교회의 측면에서 두 번씩의 외침이 발표되었는데 이는 사랑의 무너짐과 진리의 무너짐이다. 바빌론이 “큰” 바빌론이라고 말해졌듯 교회의 무너짐도 크게 무너졌다. 즉 잘못만 있는 게 아니라 악과 잘못이 하나 되어 교회와 교인의 불법이 굉장해졌다는 것, 따라서 그들의 무너짐도 커진 것이다. 진리와 사랑으로부터 타락된 이들은 결국 악마들의 거처가 되고 온갖 더러운 악령을 붙잡고 있으며 더럽고 미움 받는 온갖 새들의 집이 된다. 자아 사랑과 세상 사랑이 악마들이고, 두 사랑과 호흡하는 게 욕망이고 더럽고 미움 받는 새들이란 사악한 생각들이고 이 생각들의 집이 이해성이다.
3. 바빌론을 심판하는 이유이다. “그런 이유가 모든 나라들이 그녀의 매춘짓의 포도주를 마셨고, 땅의 왕들이 그녀와 매춘을 범했고, 땅의 상인들이 그녀의 엄청난 사치품으로부터 부자기 되었기 때문이다.” 서로가 몹시 싫어하는 본성 안에 있는 원리들이 하나 됨 또는 모독된 것들이 혼합되어 있는 것, 이것이 바빌론의 특성인바 위 구절 안에 묘사된 것이다. 선함과 진리는 동종이이서 서로의 뜻이 일치한다. 그래서 그들의 하나 됨은 천국적 결혼을 형성하고 천국 그 자체이다. 악과 거짓은 서로 유사하게 동맹하고 있다. 그래서 그들의 하나 됨은 천국적 결혼에 반대되고 천국 자체와도 반대되어 있다. 어쨌든 서로 사이에 본성이 일치 안 되는데도 병합되거나 결합된 경우도 있다. 즉 선이 거짓과, 진리가 악과 결합된 경우이다. 이것들이 여기서 표현되어 있다. 백성과 왕은 선함과 진리라는 원리들이다. 여인과 그녀의 불순한 포도주는 악과 거짓이다. 선이 거짓된 것과 결합함이 여인의 음행으로 말미암은 분노의 포도주를 백성이 마신 것으로 의미되고 있다. 참된 것이 악한 것과 결합함이 세상의 왕들이 여인과 음행을 저지른 것으로 의미되고 있다. 이런 이상한 혼합은 엄격한 측면에서 선함과 진리의 모독이다. 이런 죄악은 교회 내에 있는 이들에 의해서만 저질러 질 수 있는 죄악이다. 그 이유가 그들만이 선하고 참된 것에 관한 지식을 소유하기 때문이다. 이 지식이 영적 부자인데 그 이유가 지식은 지적 측면의 재산에 해당되기 때문이다. 우리가 지금 생각해보고 있는 품성을 지닌 이들은 거룩한 사항에 관한 지식을 획득하려드는데 적극적이고 동시에 그것을 거룩하지 않은 용도에 사용하기도 한다. 이들이 세상의 상인 즉 교회의 상인들, 그녀의 사치바람에 부자가 된 교회의 상인들이다.
4. “그리고 나는 천국으로부터 또 다른 음성을 들었다, 말하기를, 내 백성아 그녀로부터 빠져나와, 너희가 그녀의 죄악들의 분담자가 되지 아니하여 그녀의 재앙들을 받지 말아라.” 하늘로부터의 새로운 소리는 권면의 소리이다. 우리 역시 잘 경청해야 할 것이다. 자연적 의미에서 이 소리를 생각하면 마치 부패된 종교 단체와는 절교하라는 부름인 듯 여겨질는지 모른다. 이런 사항이 의무에 해당되지 않는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이 소리의 권면 사항은 더 실용적인 측면이 있다. 물론 우리는 어떤 종교 단체가 그들의 악을 버리지도 않은 상태에서라도 그들과 인연을 맺고 있거나 끊을 수 있고, 그들의 죄과에 가담되지 않으면서도 연결된 상태를 유지해 갈 수도 있다. 어쨌든 한 가지 뾰족해지는 사항은 우리가 가담하거나 포기한 단체가 어떤 단체이든 명령적인 기독인의 의무에 해당되는 게 있다. 그리고 이 의무 이행은 우리를 모든 이가 흔히 범하는 죄에서 구원해준다. 자아 사랑은 바빌론적인 원리이다. 이 사랑의 원리는 모든 심정 안에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따라서 모든 공동체, 더 나아가 모든 인간의 일상사 안에 자리매김 되어 있다. 이것은 사회생활, 가정생활, 공적, 사적 측면에서 발생되는 악과 아픔, 쓰라림의 원인의 절반이 넘게 차지하고 있다. 종교적 측면에만 국한 해보아도 이것은 자신들 스스로 정의롭다고 천명하는 개인이나 종파들 안에서도 적나라하게 모습을 드러내면서 타인을 경멸해댄다. 한마디로 개인적이든 집합체로서 이든 우리가 자아 사랑 안에 존재하는 한, 우리는 바빌론 안에 있는 셈이다. 이 악한 사랑으로부터 우리가 빠져 나옴으로 해서 “그 여자의 죄에 휩쓸리지 말고 그 여자가 당하는 재난을 당하지 않아야” 한다. 우리가 이런 악을 포기하기에 앞서 우리는 그 악의 품성과 결과 즉 그 악이 무엇인지를 알아야만 한다. 위 권면의 말씀은 이런 악을 알고 이해하는 사람에게 보내지고 있다. 그들은 주님의 백성이다. 영적으로 백성과 민족은 상대적으로 진리 안에 있는 자와 선 가운데 있는 자들이다. 때로 우리는 진리 안에 있으면서도 자아 사랑 안에 있을는지 모른다. 우리는 주님의 백성이면서도 바빌론 안에 있을는지 모른다. 우리는 바빌론에 포로가 되어 버린 유다 백성일는지 모른다. 그들이 바빌론에 끌려간 것은 그들이 신성한 진리의 소리를 듣지 않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 소리를 귀담아 듣지 않았던 이유에서이다. 우리가 진리를 알고 있으되 선 가운데 있지 않다면 우리는 포로가 된 신세이다. 이렇게 포로된 모든 사람에게 “그 여자에게서 나오라. 내 백성아, 너희는 그 여자의 죄악들의 분담자가 되지 말라” 라는 권면이 보내지고 있다. 그 이유가 죄는 그 죄를 아는 이들에게 귀속되기 때문이다. “너희는 그 여자가 당하는 재앙을 받지 말라” 고 권면하는 이유는 죄로 인한 재난은 그것을 알면서 그 가운데 있기를 고집하는 이들에게 덮쳐오기 때문이다.
5. 바빌론을 심판하는 이유가 위와 같은바 주님의 백성더러 그 여자에게서 나오라고 권면되고 있다. “그 이유가 그녀의 죄악들은 천국에 까지도 도달 하였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그녀의 불법들을 기억하고 있으시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의 취지는 무엇일까? 마치 위 구절은 하느님께서 그 여자의 과거 죄를 자각하실 때, 즉 그 죄가 하늘까지 사무칠 때까지 계속 죄짓도록 허용하시는 듯 비쳐질 수도 있다. 비록 자유-의지가 존재한다 해도 악은 그 한계를 가지고 있다. 악의 한계가 자유-의지를 보존시켜 준다. 자유-의지는 악과 선, 천국과 지옥간의 균형(equilibrium)에 의존된다. 만일 악의 힘이 선의 힘을 압도한다면 그 둘 사이 중 어느 하나를 선택하는 능력은 상실될 것이다. 악의 힘이 자유의지가 의존하고 있는 균형의 존재를 위협할 정도로 증가한다면 악은 심판에 의해 억제되어야 한다. 참으로 마치 폭풍적 결과로 억제된다. 심판은 마치 폭풍같이 균형을 회복시킨다. 그녀의 죄악이 하늘에까지 도달하고 천국의 힘이 흔들릴 때(마태24:29) 바빌론의 불법이 최고 권위에까지 감히 부상하려들고 천국의 안정을 위협할 때, 더구나 이것이 천사와 인간 마음 모두에서 그러할 때 하느님께서는 그녀의 사악함을 기억하신다. 이것이 여기서 밝히는 진리이다. 그리고 죄가 하늘까지 사무치고 하느님이 인간의 죄를 기억하신다는 구절이 언급되는 성경 어디에서이든 같은 내용을 말해주고 있다.
6,7. 바빌론에서 나오라고 주님의 백성에게 권면하신 것 외에 소리는 이런 명령을 더하고 있다. “그녀가 너희에게 주었던 그대로 그녀에게 갚으라; 그리고 그녀의 일에 따라 그녀에게 두 배로 (갚으라); 그리고 그녀가 섞은 잔 안에 두 배로 섞어 (갚으라). 그녀가 자신을 영화롭게 하고 사치스럽게 살았던 만큼 고통과 슬픔을 그녀에게 주라, 그 이유가 그녀는 자기 심정에서 나는 여왕으로 앉아 있고, 과부가 아닌 바, 슬퍼함을 보지 않을 것이다 하고 말하기 때문이다.” 집행하라고 명령되는 이 구절의 보복의 법칙은 천적인 법칙, 즉 남이 너에게 해주기를 바라는 대로 너도 남에게 해주어라 는 법칙에 근원을 두고 있다. 신성한 질서의 법칙이 있고 이 질서는 신성한 정부를 통치할 만큼 보편적이다. 천사와 영적 인간 사이에는 사랑이라는 법칙이 있고, 자연적 인간과 악한 영 사이에는 미움이라는 법칙이 있다. 보복의 법이 모세의 법전에서 발견되도록 허용된 이유는 유대인들이 자연적 수준의 인간이었기 때문이다. 주님께서 영적 수준의 교회를 건설하시러 세상에 오셨을 때 눈에는 눈으로, 이에는 이로 갚으라는 법은 폐지되었고 오히려 앙갚음하지 말라고 기독인들에게 요구하셨다 (마태5:38). 이것은 천국의 법이다. 천국에 반대되는 왕국에서, 천국적 사랑에 반대되는 사랑이 우세할 경우 보복의 법은 존재하여 빈틈없이 그대로 실시되고 참혹한 무자비로 집행된다. 저 세계에서 있게 되는 바깥쪽의 처벌은 모두 그것으로 말미암아 고통을 입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아무도 처벌 않으신다. 오히려 악령들이 상대에게 상해를 입히므로 해서 기뻐한 그 처벌을 온건해지게 해주실 뿐이다. 보복에 관한 모세의 법은 위와 같은 형태였다. 모세가 이런 법을 창안한 게 아니다. 이 법은 자연의 법이고 타락한 본성의 법이다. 이 법은 모세의 출생 훨씬 전에도 존재해왔었다. 유대법이 했던 모든 것은 이런 법을 좀 더 억제하고 조금 더 부드럽게 한 것이다. 저 세상 삶에서도 이렇게 하기는 마찬가지이다. 모세의 법을 주신 그분은 지옥에 있는 보복의 법을 부드럽게 하거나 억제되게 해주셔서 악한 자가 파괴만을 바라는 것을 조금 더 완화시키신다. 보복의 법칙도 교정이 가능한데 그 이유는 그 법도 질서의 법에 근원이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신성한 정부의 통치가 이 법을 통해 집행될 수 있고, 무정부 형태, 무질서의 나라에 존재할 수 있는 외적 질서가 보존될 수 있는 유용한 쪽으로 응용될 수 있다. 똑같은 이유로 해서 말씀의 글자에서 사악한 자의 벌이 주님께서 내리신 것으로 기술되고 있고, 본문에서 주님의 백성에게 그 여자한테서 받은 만큼 바빌론에게 되돌리라고 명령하는 것으로 기술되어 있다. 주님의 백성이 말씀의 진리 안에 있는 교인들이듯, 이를 추상적 측면에서 보면 그들은 진리 자체들이다. 말씀 속의 진리를 모독함으로 사악한 자들은 그들을 처벌하는 법과는 더 먼 거리의 법, 즉 진리의 법에 최초의 근원을 둔 응보를 자신들에게 되돌아오게 한다. “그녀에게 받은 만큼 되돌리라”고 “백성”에게 내린 훈령이 표현하는바, 진리가 모독되어진 만큼 그 법의 지옥 형태가 그 위법자에게 떨어진다는 것이다. 그 여자가 영화와 사치를 누린 만큼 고통과 슬픔이 주어진다는 법이 공포하는 바, 자아 사랑의 자만과 자아 총명의 지적 허영은 다른 빛 안에서 심정의 슬픔과 지적 어리석음으로 변해진다는 것이다. 참고로 누가 복음을 더 읽어보자. “그러나 부유한 사람들아, 너희는 불행하다. 너희는 이미 받을 위로를 다 받았다. 지금 배불리 먹고 지내는 사람들아, 너희는 불행하다. 너희가 굶주릴 날이 올 것이다. 지금 웃고 지내는 사람들아, 너희는 불행하다. 너희가 슬퍼하여 울 날이 올 것이다” (6:24,25). 어쨌든 응보는 갑절의 피해가 있게 된다. 이는 또 다른 법칙을 표현하고 있다. 완성되는 모든 것은 저 세상 삶에서 갑절이 된다. 성경의 영적 의미에서 “갑절”이란 곱해지는 게 아니라 결합을 뜻한다. 그러므로 성경에서는 선과 악의 관계 모두에게 사용된다. 이사야서를 읽어보자. “이스라엘은 갑절이나 수치를 받았고 능욕밖에는 돌아 온 차지가 없었으므로 이제 저희 땅에서 받을 상속은 갑절이나 되고 누릴 기쁨은 영원하리라” (61:7). 사악함의 종말은 악과 거짓이 상호 결합하는 것이다. 정의로움의 완성은 선과 진리의 상호 결합이다. 선과 진리의 결합은 천국을 만들고 악과 거짓의 결합은 지옥을 만든다. 악이 거짓과 결합함이 그 여자의 행위를 갑절로 갚으리라로 의미되고, 거짓이 악과 결합함이 그 여자가 부어준 잔을 “갑절”로 되돌린다는 것으로 의미되고 있다.
이런 재난들이 “나는 여왕의 자리에 앉아 있고 과부가 아니니 결코 슬픔을 맛보지 않을 것이다”는 그녀의 내향적 떠벌림을 덮치고 있다. 악과 선, 거짓과 진리 사이의 차이는 매우 놀랄만하고 교훈적이다. 자만과 겸손, 자아만을 신뢰함과 자아를 부정함은 서로 반대되는 품성들이다. 이것이 개인 차원에서 그러하듯 교회 차원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교회의 부패가 더 할수록 교회는 자신의 우쭐함과 드높여진 지위에 더 신뢰를 두려고 한다. 여인의 영화로움이 이를 잘 드러내놓고 있다. 그녀는 자기 심정 안에서 재잘거리고 있다. 다시 말해 바깥쪽이 아닌 내향의 떠벌림이다. 사람들 안에서와 같이 교회 안에서도 겸손을 흉내내는 자만이 있다. 교회는 자기가 종들 중의 종에 지나지 않는다고 선포하는 반면 드넓게 지배하기를 열망한다. 그리고 이 욕망에 이의를 제기하는 반대자에게 저주가 내리기를 추잡하게 바래면서 조롱자의 발을 성도의 발이 되게 씻는다. 그녀는 이교도의 영혼을 부드럽게 돌볼는지 모르나 그들의 몸을 괴롭히고 불사른다. 더욱이 심중에서 하는 말은 은밀한 생각이란 뜻 그 이상의 의미가 더 있다. 심장이 육체 안에 있듯 의지는 마음 안에 있다. 이것은 공히 생명의 샘이다. 그러므로 거기서 말해지고 행하여 진 것은 전체 체계를 살아 있는 시냇물로서 통과하여 흘러간다. 자아 사랑이 “여왕”이 되어 왕좌에 앉아 명령을 하달하면 그 나라의 가장 먼 구석에까지 그 사랑의 통치력이 전달된다. 그녀의 태도는 안전을 확고히 느끼고 있다. 그녀는 여왕으로 앉아 있다. 그녀는 여왕이라고 천명하면서 한편으로는 과부가 아니어서 슬픔하고는 거리가 멀다고 선포한다. 참으로 그녀는 과부는 아니다. 그렇다고 그녀는 아내도 아니다. 그럼에도 그녀는 언젠가 아내였었다. 만일 아내가 아니었다면 최소한 시집보내지는 처녀, 신부이었다. 그녀는 한 때 주 예수의 신부였었다. 그래서 그녀는 아직도 주 예수의 배우자라고 주장한다. 그래서 과부가 아니라고 단언하는 것이다. 그러나 예언의 소리가 그녀가 되어가는 꼴을 선포할 때 진리의 증거는 그녀가 탕녀라고 결론짓는다. 그녀의 상태는 예언서의 이 말씀, “너희 어미를 고발하여라. 너희 어미는 이미 내 아내가 아니다. 나는 너희 어미의 지아비가 아니다” (호세아2:2)에서 잘 그려져 있다. 이사야서를 더 읽어보자. “야훼께서 말씀하신다. ‘나는 너희 어미를 쫓아내며 이혼장을 써 준 일이 없다. 나는 너희를 채권자에게 판 일이 없다. 너희는 너희의 잘못으로 팔려 간 것이다. 너희가 못되게 굴었으므로 너희 어미가 쫓겨간 것이다” (50:1). 주님과 교회가 분리된 원인은 본문이나 이사야서에서나 똑같다. 이는 사제적인 포부가 아닌 일반적 부패의 결과이다. 사제적인 포부는 일반적 부패가 목사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유일한 형체이다. 교회의 이혼이라는 모든 경우에서 진짜 원인은 어떤 특정한데 있는 것이 아니라 일반적인 것에 있다. 즉 “네가 못되게 굴었으므로 너희 어미가 쫓겨난 것이다.”
8. 교회가 여왕이고 아무 슬픔도 맛보지 않을 것이라고 자신을 추켜 댔기 때문에 “이를 위해 그녀의 재앙들은 하루 동안에 오는데, 죽음과 슬퍼함과 흉년이다; 그리고 그녀는 불로 태워질 것이다, 그 이유가 그녀를 심판하시는 주 하느님은 강력하시기 때문이다.” “하루 사이에..”란 심판의 날이다. 이것은 시간이 아닌 상태에 관한 심판을 말한다는 것은 5절에서 이미 언급했다. 그녀가 타도될 것은 확실하게 보증되고 있다. 그 이유가 심판하시는 주 하느님은 전능하시기 때문이다. 심판의 결과로 와지는 재앙은 신성이 괴롭히려 가한 벌이 아니라 그들의 내향의 상태가 명백해진 결과이다. 이 재앙은 죽음과 슬픔과 기근이다. 생명의 반대인 죽음은 생명을 구성하는 모든 것이 영적으로 소멸된 것이다. 사랑이 생명이다. 주님을 사랑함과 서로 간의 사랑은 영적 생명, 영원한 생명을 구성한다. 이 사랑의 소멸은 영적 죽음, 영원한 죽음이다. 죽음이 소극적인 상태만은 아니다. 하느님과 이웃을 향한 사랑의 소멸은 자아와 세상을 사랑함이 적극적으로 존재한데 기인한다. 이것들이 적극적인 요소들이고 그들이 우세해지면 죽음이라 불리는 상태를 구성한다. 이런 상태는 양 세계에 공통적인 것인데 저 세계의 경우 이 상태는 실지 그러하게 나타난다. 이 세상에서 우리는 죽음 자체보다는 죽음의 그림자를 볼 뿐이다. 이 세상에서 우리는 공포의 그 왕을 정면으로 보기는 좀처럼 힘들다. 그는 고등교육으로 옷입혀져 있고 양반의 행세를 하고 다니며 그의 동기는 교묘함으로 감추여 놓여 있어 그것의 일그러진 형체, 섬뜩한 모양새가 잠깐 들어낸 것만 가지고도 공포에 떨고야 만다. 저 세계의 경우 이 세상에서 버젓이 차려 입은 껍질이 벗겨져 있어 악한 것들은 끔찍하다. 죽음과 함께 슬픔과 기근이 오고 있다. 악의 기쁨은 이 세상에서는 대단하게 즐거울 수 있겠지만 저 세상에서는 그 반대로 변해져 있다. 기쁨이 슬픔으로, 충만함이 텅빔으로 되어 있다. 더 나아가 불은 점화되되 결코 소진될 수 없고 다 타버리지 않고 계속 불타고 있다. 참으로 이 불은 살라지되 선하고 참된 모든 것을 사른다. 그러나 천사들의 사랑, 무한한 사랑과 선함으로서의 주님 자신에 반대하는 꺼질 수 없는 미움으로 계속 타고 있다. 위와 같은 것이 자아를 사랑함인바 이것은 하느님을 사랑함, 사랑 측면의 하나님과 직접 반대되는바 여인의 혹독한 파멸이 그녀를 심판하는 주 하느님의 권능의 탓으로 돌려지고 있는 것이다. 그 이유가 이 심판은 주님이 악한 자와 반대되어서가 아니라 악한 자가 주님에 반대해서 발생된다. 하느님의 사랑에 대한 자아 사랑의 반대가 극에 달할 때 대 화재 같은 결과를 자초해낸다. 마치 불 속에 휩싸인 물체가 불에 저항하려해도 급기야 덮치는 불의 매체로 재빠르게 같은 불이 되어 또 다른 물체를 태우는 경우와 같다. 저항이 더 거셀수록 그 연소작용은 더 완전하다. 하느님을 사랑함에 반대되는 자아 사랑은 꺼지지 않는 지옥의 불에, 영원한 불에 보관된다. 만일 자아 사랑이 그 반대를 중단한다면 지옥 자체의 불은 꺼질는지 모른다. 이미 살핀 바 같이 (17장16절) 성경에서 불사름은 모독자에 가한 벌로서, 세부 차원에서 모독한 바빌론의 벌로 자주 말하여 지고 있다. 나답과 아비후가 성직자 직무를 찬탈해서 주님 앞에 이상한 불을 바쳤을 때 “주님으로부터 불이 나와 그들을 삼켰다” (레위기10:2). 모세나 아론에 대적하여 향을 피워 가지고 나왔던 코라와 다단과 아비람, 그리고 이백 오십 명의 무리도 “주님으로부터 불이 나와 그들을 살라 버렸다”(민수기 16:35).
9,10. 지금까지는 바빌론에 반대한 이들과 관계되었는데 지금 언급되는 것은 그녀에게 합세한 이들에 관해서이다. 이들은 세 부류, 즉 왕, 상인, 선장들이다. 세 부류가 지닌 종교적 의미를 살피게 된다. 먼저 왕에 관해서이다. “그리고 그녀와 매춘짓을 범하고 사치스럽게 살았던 땅의 왕들은 그녀를 태우는 연기를 보고 그녀를 위해 울 것이다, 그리고 소리내어 울 것이다. 그녀의 고통을 두려워하여 멀리 떨어져 서서, 말하기를, 화가 있다, 화 있다, 이 큰 도성 바빌론아, 이 막강한 성아; 그 이유가 한 시간 안에 네 심판은 이르기 때문이다.” 이 왕들, 열 뿔로 표현된 이들과 달라 여인을 미워하지 않고 사랑하고 있다. 그들은 그녀를 욕하는 게 아니라 그녀 때문에 슬퍼하고 있다. 그들 스스로 슬퍼하고 있는 것이다. 그 이유가 왕들은 그녀와 신나게 놀아났고 상인과 선장들은 그녀와의 장사로 부를 축적했기 때문이다. 먼저 그녀는 세상 왕들을 다스렸고 (17장18절), 후에 그녀의 바람이 결과를 맺어 왕들이 그녀의 죄악에 가담한 것이다. 이 왕들이 열 왕들과 다른 점은 그들의 칭호에서 드러나 있다. 그들은 땅의 왕이라 불리고 있는데 다른 것들은 그렇지 않다. 왕은 진리를 상징하고 땅은 교회를 상징한다. 그러므로 땅의 왕들은 교회의 진리를 표현한다. 이 왕들은 진리들 또는 한 때 진리였던 것들을 표현한다. 그 이유가 진리들이 교회에 의해 한 때나마 단순히 붙잡혀 있었는데 지금은 모독되어 있기 때문이다. 진리가 모독되는 이유는 진리를 악한 용도에 응용했기 때문이다. 진리의 올바른 사용은 인간에게 거룩함을 가르친다. “당신의 진리를 통하여 이들이 신성화되게 해주십시오. 당신의 말씀이 진리입니다” (요한17:17). 인간을 거룩함으로 인도 해주었던 것이 내향으로는 불결한데도 바깥으로는 거룩한 어떤 것으로 그들을 인도할 때 그것은 모독된다. 이렇게 해서 진리는 악과 결혼된다. 사실 진리와 악의 결혼은 성립 안 되는바, 이는 불경함으로 빠져드는 것, 악과 범죄적 연결을 맺는다고 말해야 타당할 것이다. 이러면 진리가 불순한 바램, 야망적인 견해를 섬기게 된다. 이것이 “여인과 음란한 일을 벌인” 광경이다. 이러면 의지 안의 악한 기쁨은 이해성 안의 진리가 뒤집혀지게 작당하고, 정작 악을 책망하도록 되어 있는 진리는 이제 악에게 아첨하는 말만 내놓게 된다. 이것이 “그녀와의 방탕한 생활”이다. 교회가 뒤집은 진리는 말씀의 글자에 속한 것들이다. 이로부터 교회의 교리도 파생된다. 이런 진리들이 땅의 왕들로 의미되고 있다. 성경의 글자는 뒤집혀질 수 있다. 그 이유가 글자는 주로 가상적 진리들(apparent truths)로 대부분 구성되었기 때문이다. 어쨌든 이 진리들이 진짜 진리들로 채택되어 그 가르침이 영과 함께 다양한 각도에서의 실제와 견해들을 확증해 버릴 수 있다. 말씀의 글자적 의미가 뒤집혀 피해를 받은 결과 중 한가지 놀랄만한 예를 들면, 주님께서 하늘나라의 열쇠를 베드로에게 주셨다고 말한 대목의 해석이다. 천국의 문을 열고 닫는 권한은 어느 사도에게도 주어진 적이 없다. 게다가 베드로가 그런 권능을 주창하거나 실시했다는 증거가 있은 적도 없다. 이는 베드로의 신앙즉 예수 그리스도는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믿음의 고백을 하는 모든 이들에게 하늘에서 불어넣는 영감이 주어진다는 말이다. 이 진리가 인간의 손에 있는 베드로의 열쇠로 뒤집혔고 자신이 베드로의 승계자요 그리스도의 대리인이라 자처하면서 교회의 머리라 선포하고 자기가 뜻하는 바에 따라 천국에 들어가고 내쫓기도 한다는 말은 그 얼마나 섬뜩한가!
억지를 부려 뒤집힌 이 세상에서의 신성한 진리는 저 세계에서는 격렬한 결과를 수반한다. 뒤집힘으로 해서 악과 한번 결합된 진리는 악과 떼어지는데 참담하리 만큼 혹독함이 없이는 결코 떼어내지지 않는다. 한 마음 안에 존재한 악과 진리는 고대 우화에서 묘사된 조건들, 하늘과 땅에서 번갈아 있게 하는 상황을 생산한다. 진리는 영혼을 천국이라는 위쪽으로 끌어당기고, 악은 지옥이라는 아래쪽으로 파묻으려 한다. 이런 상태는 여느 다른 것보다 더 심하게 미래에 고통 받는 원인이고, 이것이 바빌론의 고통의 뿌리이다. 그래서 그녀를 태우는 불을 보고 왕과 상인과 선장들이 두려워 멀리 서 있었다. 그녀가 심판 받을 때 바빌론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다는 것은 의미심장함이 크다. 영계 또는 영적 사항에서는 공간이라는 게 없다. 서로 닮지 않은 상태가 저 세계에서는 거리가 떨어지는 원인이요 거리의 측정치이다. 그럼에도 바빌론을 동정하는 이들, 또는 바빌론에 소속된 이들이 그녀가 파멸되는 날에 그녀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었다. 악덕으로 이윤을 챙기고 타인의 약점을 찌르는데 앞장 선 이들이 재난 때에 그들을 버리는 것은 이 세상 일에서도 너무나 흔한 일이다. 그러나 두 세상에는 이런 차이가 있다. 이 세상의 경우, 타인의 허점을 찔러 이윤을 챙기고 그들을 부려먹은 이들이라 해도 번영할 수 있다. 그 이유는 이곳은 인생의 수습기간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저 세상에서, 이런 일에 가담하거나 선동만 했다 해도 생산된 파멸이라는 몫을 배당 받는다. 그 이유가 그 곳은 인생의 결실기간에 해당되기 때문이다. 어쨌든 이 구절에서 생각해보는 두 개의 다른 상태가 있는데 하나는 바빌론의 사람에 특유한 것이고 또 하나는 그들과 그 외 다른 사람에게도 공통된 상태이다. 그들에게 특유한 상태는 모독자에 해당되는 것이다. 그들은 거룩한 수단들을 불경한 목적 달성에 사용한다. 불신앙자는 진리를 거절하지만 위선자는 진리를 왜곡시킨다. 왜곡된 진리, 결국 왜곡된 지식과 같이 왜곡이라는 연기를 악의 불이 지피어 낼 때 격렬함을 호흡하고 일깨운 반성 속에서 참담한 결과 안에 있는 자신의 뒤집혀진 마음을 보게 한다. 안심과 불안이라는 상태의 교차가 사악한 자에게 있는 것은 너무나 흔한 일이다. 그들이 자기 사랑의 기쁨에 빠져 있을 경우 그들은 자기 상태의 품성과 결과에 눈이 멀어 있다. 그들이 불안과 고생으로 진입하면 한순간이지만 제 악한 본성을 보고 그로 인해 받게 될 고통에 두려워 떤다. 몹시 후회한 죄인은 자기 죄로부터 한 때이지만 멀리 서 있다. 죄를 사랑함이 그의 내적 생명이다. 그래서 만사가 잘 될 경우 그 생명이 그의 모든 삶, 안쪽, 바깥쪽 생명이 되어 있다. 재난이 올 경우 그가 소유한 어떤 선이 그의 내적 생명을 꾸짖는다. 그래서 그는 한 때라도 겸손해져 악한 품성에서 멀리 떨어져 있고, 또 다른 자아로서 멀리 떨어진 거리에서 자신을 보게 된다.
태우는 연기란 자아 사랑의 불로 발생되는 거짓 원리이다. 심정 안에 있는 악한 사랑은 이해성에 있는 거짓 사상의 발전소이다. 그리고 이것들은 사랑을 지적으로 볼 수 있게 만든다. 마치 생각이 애착을 밝히 알게 하는 것과 같다. 그럼에도 거짓된 생각은 악한 자에게 그의 애정의 본성을 밝히 알게 하지 않는다. 그것 때문에 슬픔을 일으키는 것은 더더욱 없다.
일반적인 납득 차원에서 생각해볼 때 땅의 왕들이란 통치하는 원리 라기 보다 자신의 교리나 의도, 계획 등에 깊숙이 파묻힌 교회 안의 통치하는 인물들이다. 이들의 죄는 그녀와 함께 더 깊숙이 틀어 박혀 있다. 그녀의 쾌락에 더 동참할수록 그들은 그녀의 괴로움이 자아낸 공포에 더 떨고, 그녀가 심판되는 시간이 올 때 “이 강한 도성”의 탄식을 더 밀착된 느낌으로 동참할 수밖에 없다.
11-14. 바빌론에 동정을 보내는 또 다른 부류는 상인들이다. 이 계층은 두 개의 구분되는 분과로 구성되어 있다. 15절에서 다시 언급되는 상인들은 여기서의 상인과는 다르다. 그러므로 우리는 바빌론의 패망에 슬퍼하는 네 개의 다른 특성의 사람들을 보게 된다. “그리고 땅의 상인들이 그녀를 위하여 슬퍼하고 애곡할 것이다, 그 이유는 자기들의 상품을 사는 자는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지상의 상인들은 자연적 삶에 요구되는 것들을 팔고 사는 이들이다. 교회의 상인들은 영적 삶을 받치는데 요구되는 것을 포획하고 나누어주는 사람들이다. 하늘나라가 “장사하는 사람” (마태13:45)으로 비유되고 있다. 그러나 비천국적 마음을 지닌 상인들은 거룩한 것을 불법 거래함으로 자기 명예와 소득을 추구하는 이들이다. 영적 생명을 유지 존속하게 하는 모든 것은 선함과 진리라는 두 개의 보편적 원리라고 납득되어지고 있다. 그러나 이 두 원리는 세부사항에서 끝이 없는 다양함을 포함하고 있다. 이렇게 많은 세부사항이 자연적인 것의 모양새로 이렇게 열거되고 있다. “그 상품은 금과 은, 그리고 귀한 돌과 진주들, 그리고 고운 모시와 자줏빛 옷감, 그리고 각종 향나무, 각종 상아 그릇, 귀한 재목, 그리고 놋쇠와 철로, 그리고 대리석으로 만든 각종 그릇들. 그리고 계피와 향료, 그리고 향유와 유향, 그리고 포도주, 그리고 기름, 그리고 고운 밀가루와 밀, 그리고 짐을 나르는 짐승들과 양, 그리고 말들, 그리고 수레, 그리고 몸들과 사람의 혼들이다. 그리고 네 혼이 바라던 열매들은 너로부터 떠났다, 그리고 모든 지방과 빛나는 것들이 너로부터 떠났다, 그리고 너는 그것들을 더 이상 결코 발견 못 할 것이다.” 바빌론의 부와 교역을 형성한 위의 긴 상품목록은 “큰 도성”의 다종다양하고 방대한 교역량에 대한 그럴듯한 그림을 주려고 소개된 듯 보일는지 모른다. 그러나 모든 자연적 대상물과 산물들이 영적인 것을 상징하듯 위 각각의 상품은 각기 의미를 가지고 영적 친근 관계에 의거 배열되고 있다. 맨 먼저 보여지는 것은 바빌론의 재산과 부유함을 구성하는 것들을 쌓아 놓은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를 더 자세하게 살피면 대단히 흥미 있고 교훈적인 품성으로 분류되는 것을 포함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계시록의 형상들이 유대교회로부터 대부분이 취해졌다는 것은 이미 주목해본바 있다. 계시록은 마치 모세 오경과 같다. 유대교의 종교의식은 표본적으로 다양한 형체들을 체현해 놓은 것이다. 그리고 몇 가지 것들은 각기 적당한 축하 예식을 위해 요구된 것들이다. 이들 중 가장 높은 것이 성막인데 후에는 성전이었다. 바빌론도 교회의 한가지 품새이다. 그러나 크게 부패된 상태에 있는 교회의 품새인바, 이 큰 도성의 재난을 구성한 다양한 물품들은 하느님의 집을 섬기는데 사용되었거나 그 집을 건축하는데 들어간 물품에 응답된다. 성막을 위한 헌납물품은 “금, 은 , 구리, 자줏빛 양털, 붉은 보랏빛 양털, 진홍색 양털, 고운 모시실, 염소털, 분홍색 수양 가죽, 돌고래 가죽, 아카시아 나무, 등잔기름, 향유, 가루향에 넣는 향료, 에봇과 가슴받이에 박을 홍옥수를 포함한 여러 가지 보석들이다” (출애굽기 25:3-7). 계시록의 이 부분에서 언급된 것들은 위의 것과 같은 속성을 가지고 있다.
첫째로(12절), 금, 은, 보석, 진주, 그리고 각종 향나무가 있는데 이것들은 거룩한 주조물을 장식하거나 만드는데 들어간다. 금과 보석은 아론의 가슴받이를 형성했다. 그 다음 고운 모시와 자주 옷감, 비단, 진홍색 옷감이 있다. 이것은 성막의 커튼과 덮개들, 그리고 높은 성직자의 옷감이었다. 끝으로 상아 그릇, 귀한 재목, 놋쇠와 철, 대리석들은 거룩한 집의 성스러운 그릇에 응답된다. 교회가 여인에 비유되듯, 고운 모시옷과 자주 옷감은 높은 성직자의 경우에서와 같이 그녀의 옷으로 생각해 볼 수 있고 금과 보석은 그녀의 장식물로 생각해 볼 수 있다. 여인은 진홍빛 짐승에서 본바와 같이 자줏빛과 진홍색 옷감으로 차려입고 금과 보석과 진주로 치장하였다. 그리고 이 장에서 그녀는 고운 모시옷, 자줏빛과 진홍색 옷감으로 옷입고 금과 보석과 진주로 단장한 저 큰 도성처럼 통곡하고 있다.
둘째로(13절), 계피, 향료, 향유, 유향이 있는데 이는 등불을 위해 거룩한 기름에 첨가한 양념 그리고 향료와 응답되고 있다. 그 다음 포도주, 기름, 밀가루, 밀은 성막의 제주와 곡식예물에 응답된다. 그 다음 소와 양은 제물과 번제물에 응답한다. 그리고 말, 수레, 노예, 사람의 영혼에 관한 사항은 건너 뛰기로 한다.
셋째로(14절), 열매, 네 혼이 바라던 열매, 주님께 성별해 봉헌했던 들판의 여타 생산물과 열매에 응답된다. 즉 그분을 섬기는데 바친 십분의 일의 수확물들이다. 이 십분의 일은 성직자직을 부양하고 각종 예식과 사회활동을 위한 것이다.
이상의 비교는 우연의 일치가 아니라 실제적인 유추이고 종교의 근본되는 요소들에 응답하고 서로간의 관계와 친척 관계에 의거 배열되고 있다. 첫째는 교리에, 둘째는 예배에, 셋째는 사용에 따른 효과, 삶의 즐거움에 관계된다. 이런 분류를 기초로 각 절을 다시 살핀다.
12. 이 절에서 언급된 품목은 교리에 관계된다. 열거된 것들은 세 종류이다. “그 상품은 금, 은, 귀한 돌, 진주, 고운 모시, 자줏빛 옷감, 비단, 주홍색 옷감, 각종 향나무, 상아 그릇, 귀한 재목, 놋쇠, 쇠, 대리석으로 만든 온갖 그릇이다.” 이 품목은 세 시리즈를 구성하면서 각 시리즈는 쌍으로 구성된다. 즉 금과 은, 보석과 진주이다. 그리고 고운 모시와 자주 옷감, 비단과 주홍색 옷감이다. 그리고 각종 향나무와 상아그릇, 귀한 재목와 놋쇠, 쇠와 대리석이다. 이들이 세 시리즈로 구성되었는데 그 이유는 모든 것에는 세 수준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이 쌍으로 배열되었는데 그 이유가 모든 것은 선함과 진리에 관계되기 때문이다. 이 모든 것은 금으로 상징된 주님을 사랑하는 가장 높은 선으로부터 대리석으로 상징된 감각에 속하는 가장 낮은 진리에 이르는 갖가지 종류와 수준에 있는 선함과 진리의 원리를 상징하고 있다. 그리고 그들은 쌍으로 짝지어 배열되는데 그 이유는 모든 교리는 마치 모든 율법과 예언이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향한 이타애에 달려있듯 선함과 진리에 관계되기 때문이다. 향나무와 대리석의 경우 우리가 쌍으로 연결했지만 성경에서 함께 발견되지는 않고 있다. 그 이유는 이러하다. 향나무는 첫째로 언급되고 대리석은 자연적 시리즈에 속하는 것들의 마지막, 또는 자연적 마음에 속하는 원리의 마지막이라 할 수 있는 낮은 진리는 감각에 적용되는 진리들이다. 보다 높은 모든 선은 순종의 선에서 마감되고 그 선 안에 안주한다. 그리고 보다 높은 모든 진리는 외관의 진리, 즉 가상적인 진리에서 마감되고 그 진리에 안주하고 있다.
13. 이 절에 열거된 것들은 예배에 관계되는데 이것들 역시 세 종류이고 쌍으로 짝지어 배열되고 있다. “계피와 향료, 향유와 유향, 포도주와 기름, 고운 밀가루와 밀, 짐을 실어나르는 짐승들과 양, 말과 수레, 몸과 사람의 혼들”이다. 이 쌍들은 선하고 참된 것과, 세 수준, 즉 천적, 영적, 자연적 수준과 관계되고 있다. 그러므로 계피는 사랑으로부터의 예배, 향 또는 향료는 지혜로부터의 예배를 의미한다. 그 이유가 사랑은 지혜를 수단으로 은택스럽고 향기롭게 되기 때문이다. 지혜 없는 사랑은 지각 없이 존재한다. 그러므로 다양함이 없고 그것의 본성과 사용의 알아차림도 없는 것이다. 향유와 유향은 이웃에 대한 사랑을 의미한다. 그래서 그것의 방향을 정하고 품위있게 하는 진리이다. 포도주와 기름은 천적 수준의 근원, 즉 주님을 사랑함에 근원을 둔 진리와 선을 의미한다. 밀가루와 밀은 영적 수준의 근원, 즉 이웃을 사랑함에 근원을 둔 진리와 선을 의미한다. 이 뒤를 잇는 세 쌍들, 즉 짐승과 양은 영적, 자연적 근원으로부터의 진리들이고, 말과 수레는 합리적 근원으로부터의 진리와 선들이다. 그리고 몸과 사람의 혼들은 자연적 근원으로부터의 진리와 선들이다. 몸과 사람의 혼은 동물에 비해 더 월등하다고 생각되겠지만 이것은 인간의 권리가 박탈된 상태라는 점에서 단지 용역의 도구에 불과한 수준에서 언급되고 있다.
14. 바빌론의 재산을 구성한 것들의 세 번째 부류는 교리와 예배의 열매, 종교적 확신과 의무수행의 결과로 영혼이 바라는 것들인 마음의 기쁨과 만족감에 관계되는 것들이다. “네 혼이 바라던 것들”이다. 이런 귀중한 모든 것이란 말씀 속의 귀중한 것들을 의미하고, 이것들이 지식으로 소유되어 있고 소득을 위해 맞바꾸고 있지만 저 세상에서는 그 소유권이 박탈된다.
교리가 참되고 예배가 신실하다면 심정의 기쁨과 마음의 흡족함은 그 열매이다. 그러나 자아 총명이 교리에 우선되고 자아사랑이 예배보다 우선시 될 때 기쁨은 슬픔으로 변하고 마음의 만족은 걱정과 불만에 침식당하고 만다. 부패된 종교는 그것들이 포획한 위엄과 풍요함을 인간의 마음에 준 영향으로부터 일어난다. 저 세상에서 이런 모든 것이 막을 내릴 때 영적 경멸과 타락의 비열한 것밖에 거기에 남아 있는 게 더 있을까? 그들 삶 속의 기쁨은 가버리고 슬픔만이 살아 있는 죽음으로 자기의 존재가 되어 있는다.
15-19. 바빌론 자체가 파괴되었다. 그래서 그녀의 모든 부와 영광은 먼지 속에 묻히고 그녀 자신의 자아 사랑의 불로 살라졌다. “그녀로 인해 부자가 된 이런 것들의 상인들은 그녀의 고통이 무서워 멀찍이 서서 슬피 울며 통곡할 것이다, 그리고 말하기를, 슬픔이, 슬픔이 있다, 이 큰 도성아, 너는 고운 모시와 자줏빛과 주홍색 옷으로 차려 입고, 그리고 금으로 수놓고, 귀한 돌, 그리고 진주들로 치장했다; 그런데 한 시간에 이렇게도 큰 재물이 황폐해졌다. 그리고 모든 키잡이와 배들에 고용된 모든 이, 선원들, 그리고 바다에서 일하는 많은 자들이 멀찍이 떨어져 섰다, 그리고 그들은 그녀를 불태우는 연기를 보았을 때 외쳤다, 말하기를, 어느 도성이 이 큰 도성과 비슷할 수 있는가? 그리고 그들은 먼지를 자기들 머리에 뿌렸다, 그리고 외쳤다, 슬피 울고 통곡하며, 말하기를 슬픔이, 슬픔이 있다, 이 큰 도성아, 바다에서 배들을 가졌던 모든 자들은 그녀의 호화로움 때문에 부자로 만들어졌다; 그런데 한 시간에 그들은 황폐되었다.” 바다와 육지의 상인들이 바빌론의 패망에 슬퍼하고 있다. 바다와 육지, 13장에서 살핀 바 대로 이는 교회를 구성하는 두 계층, 즉 교회의 교리나 예배를 내면적으로 들어가는 부류인 성직자와 바깥쪽에 머무르는 부류인 평신도들을 묘사하고 있다. 상인은 바빌론의 재산을 소유했었던 자이고 선장은 그것의 운반자였다. 그런데 이 두 부류 모두 큰 도성의 파멸에 슬퍼하고 있다. 그 이유는 두 부류 모두 그녀와의 거래에 생계를 걸고 있고 그녀와의 교역으로 부자가 되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바빌론이 도시라 불리고 있다. 그럼에도 고운 모시옷, 자주와 진홍색 옷감으로 옷입고 금과 보석과 진주로 치장한 여인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한 시간 동안에 그 큰 재산들이 사라졌다. 심판은 상태의 본질까지 변화시켜 주지 않는다. 그런데 심판이 결과를 본 것 중 이보다 더 큰 변화는 없다. 종종 심판은 세상을 뒤바꾸어 놓는다. 언제나 심판은 세상적이다. 심판은 모든 외관을 벗겨 내어 참 모습의 수준이 가늠되게 한다. 어떤 변화가 이보다 더 클 수 있을까? 그런데도 아무 변화도 없다. 상태가 재조정되면서 부유함은 가난이 되고 가난이 부자가 되고, 행복이 재난으로, 가엾음이 행복으로, 드높음이 떨어지고 비천함이 드높아 질는지 모른다. 심판이 교회에 가져오는 것은 진짜 아닌 것을 진짜로 대체한다. 종교가 이기심과 지배욕을 위해 외투를 뒤집어 쓸 때, 경건한 척 함이 거룩함의 자리를 차지할 때, 바깥쪽 예의바름이 미덕의 자리에 놓일 때, 그 종말은 재촉되고 종교는 죽어져서 장차 새로운 시작이 있어 새 교회가 형성될 어떤 그루터기도 남을 수 없게 된다. 끝장을 보게 될 때 언제든지 있어지는 것은 온갖 화려하게 살되 자신과 세상적으로만 살았던 이들을 두고 슬피우는 것이다.
20. 비록 심판이 가져오는 끝장이 악과 거짓에게는 통곡이지만 선과 진리에는 기뻐 외칠 사건이다. 그러므로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그녀로 해서 기뻐하라, 오 천국이여, 그리고 네 거룩한 사도들과 예언자들아; 그 이유가 하느님께서 그녀 위에 너의 판단들을 판결하셨기 때문이다.” 천국과 거룩한 사람들은 사악한 어떤 인물이 유죄 판결을 받은 것 때문에 기뻐하지 않고 사악한 원리의 단죄, 정의와 진리의 승리에 기뻐한다. 참으로 이런 기쁨은 천국적인 원리, 거룩한 원리, 올바른 원리 자체의 기쁨이다. 악과 오류가 설칠 때 천국적 영향은 차단되고 정의와 진리의 교훈은 은밀하게, 동시에 공개적으로 업신여겨진다. 그러면 천국은 닫히고 사도와 예언자는 슬퍼한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그들을 위해 정당한 보응을 해주실 때, 죄와 죄인들이 그들에게 덮어놓은 것이 중상모략임을 입증해주실 때, 이렇게 해서 적의 압제에서 해방시켜 주실 때 그들은 기뻐하고 그들을 맞이하는 모든 이들과 심정으로 교통한다.
21. “그리고 한 힘센 천사가 큰 맷돌 같은 돌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그것을 바다에 던졌다, 말하기를 이렇게 사정 봐줌 없이 이 큰 도성 바빌론은 내던져졌다, 그리고 더 이상 발견되지 않을 것이다” 힘센 천사는 신성한 권능, 특히 천국을 통해 실시되는 권능을 상징한다. 행위 자체는 바빌론을 던지는 신성한 권능, 뿐만 아니라 던져지게 된 바빌론의 권능까지 상징하고 있다. 문명화된 생활을 표시하는 첫째가는 가장 흔한 기구인 맷돌은 영적 삶의 첫째가는 가장 공통된 표시 중의 하나를 상징한다. 곡식은 생산된 이후 각기 적절한 용도를 위해 갈아져야 한다. 이와 같이 말씀에서 주어진 천국의 곡식도 영적 사람의 각기 알맞은 용도에 충당되도록 잘 숙고해봄으로 교통되어야 한다. 탐사와 숙고함은 일종의 빻는 작용이다. 그 이유가 이 행위는 하나의 합성물을 성분요소로 분석하는 것, 또는 전체를 세부사항에로 환원시키는 작용이기 때문이다. 말씀의 가르침을 탐사하고 숙고하는 것도 물론 진리를 밝혀 내던가 오류인 것을 확증하든지 하는 것에 목적을 갖고 있다. 잘못된 것을 확증할 경우 이기적 목적을 더 성취시키려 해서 인 바 이것이 천사에 의해 바다에 던져지는 맷돌로 표현되고 있다. 그런 이유로 이 돌이 맷돌이다 라고 말해지지 않고 맷돌 같은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오류를 맞다고 확증하는 인간 자질은 참 이성이 아니라 이성 같은 것일 뿐이다. 잘 교육을 받아 영리하지만 파렴치한 인물은 이성이라는 자질이 아닌 추론력 만을 가지고 있다. 이런 인간은 문제의 어느 쪽이든 확증할 수 있다. 그들은 어느 쪽이냐 에는 무관심해서 자기 이익에 부합되면 어느 쪽이건 상관치 않는다. 오류를 확증하는 힘은 마치 바빌론의 멸망이 상징하는 것 같이 내던져야 할 맷돌 같은 큰 돌이다. 부패된 교회의 힘은 그것의 왜곡된 추론과 결말이 노출될 때 깨지고 만다. 이것은 인간의 논쟁에 의해 되는게 아니라 계발된 이성, 천국으로부터 들어오게 된 빛, 정의의 태양에서 흘러드는 열과 빛을 가로막았던 구름이 심판으로 제거된 후 재개된 천국의 빛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바빌론을 내던진 광폭한 힘은 바빌론으로 표현된 종교 원리가 교회 안에 둥지를 틀었던 그 자리에서 뽑아 내던진 피할 수 없는 권능에 대한 표현이다. 교황적 권위주의와 교황의 말은 절대 확실하다는 종교적 독재가 교회의 목에 맷돌같이 매달려 있지 않았다면 교회는 영적 타락의 밑바닥까지 가라앉지 않았을런지 모른다. 질서의 법칙인 보복의 법칙은 개인에게 적용되듯 교회에도 적용되는바 그녀 스스로 유유히 저지른 악을 자신에게 가져다 놓는다. 이런 교리와 짓으깨는 독재주의가 다시는 그 모습을 찾아 볼 수 없는 것은 인류의 복지를 위한 것이다. 인간의 육체와 영혼에 절대적 재산을 주장했던 교회는 영적, 자연적 자유와는 부합되지 않는다. 참되고 생명 있는 종교는 종교적 시민적 자유 밑에서만 번성할 수 있다.
22,23. 교회 만능주의는 깨질는지 모른다. 그럼에도 그것의 형체와 이름은 남아 있을는지 모른다. 이런 상태가 근대적 바빌론일지 모른다. 안쪽으로는 황폐된 채 겉쪽에서는 화려한 자부심을 내세울는지 모른다. 이 모습이 이 구절에서 잘 표현되고 있다. “그리고 하프 연주자들, 그리고 음악가들, 그리고 피리부는 사람들, 그리고 나팔부는 사람들의 음성이 더 이상 너에게 들리지 않을 것이다; 공예품을 다루는 어떤 장인도 더 이상 너에게서 발견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맷돌의 음성이 더 이상 너에게 들리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등불의 빛이 더 이상 너를 비추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신부와 신랑의 음성이 더 이상 너에게 들리지 않을 것이다; 그 이유가 그들의 상인들은 땅의 큰 자들이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네 마법을 수단으로 모든 나라들이 유혹되었기 때문이다.” 위에서 표현된 형상들은 매우 인상적이고 쉽게 이해된다. 바빌론의 황폐됨이 이러할 것임을 아는 것은 쉽다. 선함과 진리를 위한 애착들의 하모니에서 발생하는 기쁨이 더 이상 없다는 것이 “음악가”들로 의미되고 있다. 총명과 지혜가 더 이상 없다는 것은 “장인”으로 의미되고 있다. 선함과 진리를 탐색하고 문의해옴이 더 이상 없다는 것이 “맷돌 소리”에서 의미되고 있다. 진리의 식별과 계발이 더 이상 없다는 것이 등불에서 의미되고 있다. 이런 모든 것이 결여된 결과로 선함과 진리의 결합도 더 이상 없다는 것, 천국적 결혼을 구성하는 이런 결합, 천국의 자질을 주는 이런 결혼이 더 이상 없다는 것이 “신랑과 신부의 음성”에서 의미되고 있다. 이런 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을 때 거기에는 참으로 피폐함 자체만 있게 된다. 황폐해지는 원인은 무엇일까? 바빌론의 상인들이 땅의 권력자였고 그녀의 마술로 만국 백성이 사기 당했다. 그녀의 사제들은 왕이 되기를 바랐다. 그리고 교인들이 주님의 통치 아래 자유로이 있도록 설득력을 발휘하는 대신 교회의 지배 아래 강제로 끌어다 놓기 위해 권위를 내세우고 이를 위해 영적 차원의 부와 힘 대신 교회 조직의 체력 단련에 정열을 쏟았다. 이런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그들은 마술을 응용했고 파괴적인 원리와 그것의 실제를 수단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중독 시켰다. 이런 모든 짓은 자유로운 생각을 억압하고 좋은 자질의 발휘를 마비시킨다. 이런 짓으로 피해가 특별히 많은 계층이 본문에서 “백성”들로 의미되고 있다. 그들은 사기에 걸려 들어 오류에 파묻혔다.
24. “그리고 그녀 안에서 예언자들과 거룩한 사람들, 그리고 땅 위에서 죽임을 당했던 모든 이들의 피가 발견되어졌다.” 예언자와 성도들은 추상적 측면에서 생각하면 말씀 속의 진리와 선들이다. 이들의 피란 그것들이 왜곡되고 더럽혀져 파괴된 것을 뜻한다. 땅이 교회를 상징하는바 교회에서 죽임을 당한 모든 사람이란 교회의 원리들이 파괴됨을 뜻한다. 말씀 속의 원리가 천국적인 생명을 박탈 당할 때 교회는 멸망되고야 만다. 교회가 말씀에 의해 심판되는 게 아니라 말씀이 교회에 의해 좌우된 것은 로마의 교회, 프로테스탄트의 일부에서 진정하다. 그러나 이런 공갈은 교회의 밤과 종말을 자기 머리에 가져오게 한 성직자적 권위의 소산이다.

요한계시록 17장 해석

17

이 장과 다음 장은 바빌론을 취급한다. 바빌론은 계시록 예언의 중요한 주제 중 하나이다. 바빌론의 특성이 본 장에서 더 특별히 취급되고 있는데 바빌론의 패망과 황폐해짐은 다음 장에 기술되고 있다. 이런 것에 관한 세부항목에 들어가기 전에 예견자는 위대한 바빌론에 관한 것을 주고 있는바 바빌론으로 이해되어야 하는 것을 우선 조사해보는 것이 유용할 것 같다. 이 사항은 성경의 이 부분 뿐만 아니라 다른 부분들에서도 취급되고 있다. 비록 바빌론에 관한 것을 어떤 특정한 종교 단체를 지목해 굳이 적용해 보지 않는다 해도 바빌론 식의 원리는 모든 종교적 공동체, 모든 각 개인에 이르기까지 널리 해당된다. 그 이유가 하느님의 말씀은 원리들을 다루기 때문이고 개인이나 공동체에 적용되는 것은 그들이 얼마나 원리를 응용했느냐에 비례하는 것 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경 안에서 바빌론이 의미하거나 표현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우선 살펴야 할 것이다. 성경에서 바빌론 또는 바벨이 등장하는 첫 구절은 그것의 품성을 알아보는데 손쉽게 해 준다. 홍수 이 후 머지 않아 사람들이 불어났고 온 땅은 한 가지 언어를 사용했다. 그들은 도시를 세우고 꼭대기가 하늘에 닿을 탑을 쌓고 있었다. 이런 일의 목적은 그들 자신의 이름을 날리고 사방으로 흩어지지 않게 하려는데 있었다. 이런 그들의 시도가 전능하신 분에 의해 판단된 바 그것은 자아만의 신뢰와 자아 드높임이 명백해진 것이었다. 다시 말해 이것은 영적 자만과 지배욕을 상징적으로 묘사한 것이다. 그 이유가 이 사건은 글자에 속하는 게 아니라 거룩한 역사의 비유시대에 속하기 때문이다. 시날 지방 사람들의 꿈과 하란 지방에서 야곱의 꿈은 그 취지나 의미에서 그 얼마나 다른지! 시날 지방 사람의 꿈은 솟구친 탑을 수단으로 땅으로부터 하늘까지 자신을 들어올리는 것이었다. 야곱의 꿈은 하늘로부터 땅으로 내려가게 하는 사다리를 수단으로 승강하는 것이었다. 시날 지방 사람의 경로에서 들려온 것이 있다. 그것은 루시퍼(Lucifer)의 발자국 소리, 가장 높은 분 같이 되려고 하느님의 별 위로 자기 자리를 드높이려고 하늘로 승강하겠다는 그의 포부이다. 야곱의 경로에서는 천사들의 발자국 소리이다. 이들은 임무를 수행하고 있다. 그들은 영들을 보살피고 있다. 그들은 인간의 생각과 애착이 하느님께 오르도록 해서 하느님의 선물이 인간에게 내려오게 하는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다. 바벨의 탑은 사실 모든 우상 중의 최악에 해당되는 우상, 즉 자아를 숭배함을 상징한다. 자아사랑(self-love)은 하느님을 사랑함에 정면 대치되는 사랑이다. 그러므로 종교의 영에 직접 반대되는 사랑이다. 그럼에도 이 사랑은 자아의 목적을 에워싸는데 가장 강력한 수단으로 종교 안에서도 발견된다. 자아사랑은 인간 생활의 모든 일과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바빌론 식의 원리는 모든 독재주의, 가정이나 사회, 국가나 교회주의의 근원이다. 독재주의(despotism)가 순전히 악이라고 단정 짓는 것은 아니다. 독재는 무정부 상태와 전제주의 정치 중에서, 보존과 분해 중에서 택일하게 할 때 더 큰 악의 예방을 위해 덜 큰 악이 등장할 수 있는 경우 일 것이다. 다시 말해 주어진 환경에서 최선의 것을 택하는 것일 뿐이다. 때로 국가나 교회에 자유를 가져오는데 전제주의가 학교의 선생 같은 노릇도 한다. 이것은 바깥쪽에서라도 질서 유지와 그 질서에 종속되는 습관을 길러주어 외형상일지라도 질서 있게 한다. 그러면서 합리적인 질서와 자발적인 순종의 원리가 마음에서 성장할 기회와 시간을 제공하기도 한다. 전제주의의 세력이 자유주의에 흔히 반대된다는 것은 의심할 바 없다. 전제주의가 자유주의를 다시 압박할 경우 이것은 흔히 자유주의의 성장을 자극하는 수단이 될 경우가 많다. 이런 사항들은 성경이 그것을 취급하는 종교 생활의 일과나 교회에 있는 활동과 능력에 단지 참고사항에 불과한 것이다. 교회의 거룩한 것을 수단으로 지배권과 권력을 획득하는 이들이야말로 영적, 신비적인 바빌론이다.
자아 사랑과 자아 높임이 역사적 부분이든 예언적 부분에서이든 바빌론으로 묘사되어 있다는 것을 성경에서 알아보는 것은 쉬울 것이다. 단 한군데의 인용으로도 바빌론이 표현한 악의 품성을 보여주는데 충분하다. “웬일이냐, 너 새벽 여신의 아들 샛별아, 네가 하늘에서 떨어지다니! 민족들을 짓밟던 네가 찍혀서 땅에 넘어지다니! 네가 속으로 이런 생각을 하지 아니하였더냐? ‘내가 하늘에 오르리라. 나의 보좌를 저 높은 하느님의 별들 위에 두고 신들의 회의장이 있는 저 북극 산에 자리 잡으리라. 나는 저 구름 꼭대기에 올라가 가장 높으신 분처럼 되리라’”(이사야14:12-14). 참으로 위 구절은 역사적 측면의 바빌론, 대단한 권세와 화려함으로 일어섰던 바빌론에 관해 쓴 것이다. 그러나 역사적 측면의 바빌론은 영적 바빌론 내지 예언적 측면의 바빌론에 관한 한가지 유형이다. 마치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에 억류되고 유다 백성이 포로로 끌려가는 것들이 영적 교회의 유형들인 것과 같다. 유다 왕국이 정복되고 그 백성이 포로가 되는 것은 교회 원리를 지배하는 자아를 표현했다. 그리고 벨사살 왕의 불경한 잔치, 그가 성전에서 거룩하게만 사용해야 할 그릇을 가지고 우상을 찬양하여 마시는 그릇으로 모독되게 사용했을 때 같은 상황은 육적 수준의 마음이 지닌 욕망과 열정을 채우기 위해 거룩한 것을 모독되게 사용한 형상을 표현한 것이다. 바벨탑의 높이가 극에 달했을 때 같이 바빌론의 불경함이 극에 오르자 벽에 나타난 손가락 글씨는 사악함이 언제나 자초하는 신성한 심판의 표시(sign)였다.
성경 속에서 바빌론에 관한 또 다른 특출한 모양새가 우리의 시선을 끌게 한다. 그것은 이름 그 자체에서 표현되는데 이를 살피려면 도시와 탑을 세우는 대목으로 되돌아가야 한다. 주제 넘는 그들의 건축 산업을 중단시키고 야심 찬 그들의 의도를 좌절시키기 위해 주님께서는 그들의 언어를 섞으시고 그들을 온 땅으로 흩으셨다. 그러므로 해서 그것의 이름은 바벨, 또는 혼동(confusion)이라 불렸다. 영적 자만(pride)의 뿌리인 자아사랑이 종교라는 형체로 옷입고 거룩한 수단들로 해서 불경한 목적을 추구할 때 자아 사랑이라는 것은 이름 바벨이 함축한 것, 즉 혼동이 되어간다. 자아사랑, 그리고 이 사랑과 혈연관계 되는 세상사랑은 엄밀히 볼 때 그 자체로는 악이 아니다. 에덴에 있던 뱀의 경우, 하느님께서 창조하셨을 때의 속성에 국한되어 있을 경우라면 그것도 하느님이 보시기에 매우 좋았다. 뱀도 제 용도를 위해 쓰여지는 위치를 벗어나지 않으면 좋은 것에 해당된다. 제 각각의 위치란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원리에 종속된 상태이다. 이것이 참된 질서이다. 이와 반대로 자아사랑이 하느님에 대한 사랑 위로 높여지고 이웃사랑이 세상사랑 아래로 내려가 서열이 뒤바뀔 때 무질서이고 질서 없는 바 이것이 혼동이다. 이것은 하느님의 질서에 거꾸로 이다. 신성한 질서가 인간 행복의 법칙인바 거꾸로 된 법칙은 인간 재난의 법칙이 된다.
뒤집어진 질서는 분명한 표시가 있어도 자기 속성을 팔아 넘기지 않는다. 오히려 비참한 결과를 수단으로 더 자주 자기 속성을 명백히 드러내 보인다. 때로 참된 질서가 파괴되는 더 큰 외관을 보이기까지 한다. 교회 조직체들은 자유로운 구성체보다는 짓누르는 독재주의 아래에서 바깥쪽으로의 질서와 평온은 더 진열할는지 모른다. 권위가 더 명령적이고 훈련이 더 엄격하면 바깥쪽의 복종과 단합은 더 완전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런 조건은 마음이 비굴할 정도로 복종하는 상태로부터 생기는 환경 아래에서나 가능할 뿐이다. 이것은 지금까지 존재한 교회 또는 종교적 처방이 타락할 때의 상태이다. 기독교회, 이 교회에 앞서 있었던 교회처럼 어둡고 수동적 시대를 가졌었고 교회적 독재주의의 건설로 끝을 내고 있다. 이런 결과는 피할 수 없다. 어쨌든 한 동안 그것도 유익한 대목이 있었다. 그것은 강한 손을 수단으로 하는 결합력이 선천적으로 없는 요소들을 한데 모았고, 자기 조절력을 상실한 이들의 바깥쪽 진출을 제한 시켰다. 이것은 더 이상의 자발적 회개가 없는 때에 참회를 강요했다. 이것은 더 이상 참된 헌신이 없는 때 겉치레의 경건심을 북돋았다. 그것은 종교적 신념이 없는 때에 종교적 설득을 인용했다. 사람들이 더 이상 선행을 실시 않을 때 (자선의) 시혜(alm)들을 주었다. 그것은 더 이상 참된 결혼의 성분이 없는 때에 독신생활을 찬양했다. 그것은 더 이상 기독교인을 만들 수 없을 때 개종자들을 만들려고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녔다. 이런 등등은 두 번째 이하의 순위에 있을 덕행들인데 이것이 본질적으로 첫째가는 우수함이 결여된 곳에 공급되어 남녀들이 종교적 의무를 준행하게 만드는 동안 교회 지도자들은 이런 둘째가는 기초 위에 교회 도시를 세워갔다. 그리고 그들의 이름을 날리고 사방으로 흩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 그 꼭대기가 하늘까지 닿는 성직자 계급 제도라는 탑을 세웠다.
그러나 위와 같은 상황의 조건이 불변하고 영속된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인간 마음은 그것들 아래로 가라앉거나 위로 오른다. 종교는 한 때 타락을 경험하면 사멸되는 고통을 당하거나 거듭남을 획득하거나 해야 한다. 다행스럽게도 하느님의 섭리는 악이 완전히 승리하거나 선이 완전히 실패하는 것을 허용치 않는다. 선과 악 사이의 균형(equilibrium)이 크게 상처받을 수는 있어도 그 능력을 깡그리 잃지 않는다. 신성한 권능은 간섭해야 할 최적기를 발견하고 균형(balance)을 회복한다. 간섭해야 할 때와 시기는 전적으로 그분의 손에 있다. 인간이 미처 생각지도 않는 때에 주님은 오신다. 이만하면 확고하다고 생각할 때가 심판의 때일 수가 많다. 사람들이 서로 연합해서 노력하여 항구적인 자기 거주지를 만들었을 때, 영원히 지워지지 않도록 자기 명성을 굳혔다고 할 때, 자기 업적이 훌륭하여 더 이상의 업적이 필요 없을 정도로 가장 위대해 졌다고 생각할 때, 이런 때에 그분이 오실는지 모른다. 도시가 완성되고 탑의 끝이 하늘에 닿는 듯 할 때 주님은 인간의 자손들이 이렇듯 세워 놓은 권세 있다는 구축물을 “보러 내려오신다.” 기독교회는 용서하기 위해 불경스럽게 모른 체 한 죄들을 장려했던 탐닉을 교부하는데 신성의 특권인 자비를 찬탈함으로 증가되는 교회의 암묵적 요구에 관을 씌워주었을 때 주님께서는 교회 조직으로 통치자의 탑을 쌓는 포부를 “보러 내려오신다.” 그분의 오심이 육체라는 형식 안에서 오시지 아니하고 침묵의 영향으로 권능의 영 안에서 오신다고 그것이 덜 참되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그분은 인간의 마음 안으로 내려오시어 이해성을 계발해주신다. 그들이 이런 빛을 인정하여 받아들이면 지극히 높은 분에 거슬러 자신을 일으켜 세우려드는 악과 오류의 어떤 것을 보게 된다. 이 빛의 광선은 다양한 시기에서 어둠을 통과하여 내려쏜다. 그리고 이 빛을 받는 마음을 관통하여 각 개인의 수고함 안에서 결실을 맺는다. 비록 열정적인 결실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해도 효과가 없는 경우는 결코 없다. 인간의 마음이 준비하고 있으면 차후 그 준비된 마음에 도움이 있어진다. 마음의 상태가 준비를 마무리 할 즈음이면 붙들고 있던 그 손에 능력이 와진다. 교회 단체, 이것이 진리와 사랑이 아닌 인간의 능력과 권위의 무게를 수단으로 생산되었다면 이는 지상에 존재할 수 있는 크나 큰 악 중의 하나이다. 이것은 생명 있는 종교의 존재가 의지하는 예배와 생각의 자유를 거두어 간다. 개인적 심판에 관한 원리가 대중의 힘을 얻고 인쇄술의 발달로 성경이 대중들의 수중에 많이 입수된 것은 개혁교파 사람들을 승리로 이끈 값진 기회였다. 이것은 교회 제도적 권위가 저항할 수 없는 세력에 안착했다. 이 순간부터 로마의 무차별적인 공격력은 차단되었다. 그렇다고 완전히 압도당한 것은 아니고 힘이 약화된 것, 또는 그 힘에 있던 약점이 노출된 것이다. 개혁은 거듭남은 아니었다. 회복이란 단어 조차도 그 교파에 적용되지 못했다. 옛 누룩을 일소해버리지 않았다. 교회의 순수성과 건전함을 회복하지 못했다. 오히려 찾아내고 받아들인 것들에 새 오류라는 양념이 첨가되었을 뿐이다. 신앙 만으로 구원된다는 교리가 추가 된 것이다. 이렇게 하여 혼동이 증가되었다. 그런데 이 혼동에 안전함도 있다. 서로 간에 일치 않는 교파들 속의 요소들이 서로 맞서 행동한다. 그래서 서로 병합할 경우 야기될 수 있는 큰 해악을 감소시켜준다. 프로테스탄트 교파의 분열은 안전의 근원이 되고 선의 수단이다. 그것은 정체된 물이 썩는 현상을 방지하고 경쟁을 유발해준다. 종파는 서로의 악과 오류를 억제시키고 선한 일을 서로서로에게 불러일으킨다. 분파가 한데 모아진 것보다 더 낫다. 그것은 액체 속의 미립분자 같고 얼음 덩어리로 고정된 액체와 비슷하다.
로마교회가 개혁교회의 출현으로 받게 된 제지 사항(check)이 계시록의 이 두 장에 기술된 사건은 아니다. 그 이유가 개혁교는 소생된 것이지 새로운 창조는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또 다시 죽어야 할 나사로의 부활 같은 것이다. 그것은 저무는 해를 뒤잇되 시계바늘을 뒤로 조금 되돌려 놓은 것과 비슷하다. 개혁교는 낮의 길이를 길게 했지만 그렇다고 밤의 도래를 막지 못했다. 온 교회를 마감하는 밤이 교회 처방의 완성이요 끝, 마지막 심판이다. 이 밤에 사람의 아들은 도적같이 보이지 않게, 들리지 않으면서, 예상 못한 상태로 오신다. 이런 조건의 오심에서도 놀라지 않는 것은 불신앙자들, 인정치 않는 이들이다. 교회의 마지막, 교회 처방의 마감이 어떤 교회 조직체의 존재를 직접 사라지게 하는 것은 아니다. 심판은 영계에서 거행되는 사건인바 심판의 직접적인 결과는 영적이어서 보일 수 없다. 그 결과는 인간의 상태가 변화를 시작함으로서 바깥쪽 결과를 생산하고 그 모습을 밝히 드러낼 뿐이다. 새로운 계시가 만들어지고 그 영향이 행동을 시작한다. 그렇다고 기존의 병합된 작용보다 더 빠르고 더 폭넓은 것은 아니다. 옛 것이 새 것에 자리를 주게 된다. 이런 명령의 하달은 슬기롭고 복된 섭리의 영역이다. 똑같은 법칙이 모든 큰 영적 변화를 규제하고 조절해서 표본이 되는 교회 안에 자연적 큰 변화를 규율한다. 이스라엘 후손이 그들에게 상속분으로 허락된 땅으로 진입하고 심판이 그 땅의 민족들에 내려졌을 때 신성한 재판관이시자 은혜를 베푸시는 그분이 이렇게 말하셨다. “너희 하느님 야훼께서 그 민족들을 너희 앞에서 점차로 쫓아내실 것이다. 너희는 그들을 단번에 없애 버리지는 못할 것이다. 그렇게 하면 야수가 들끊어 너희를 괴롭힐 것이다” (신명기7:22). 인간에게 종속된 동물적 본성은 무엇이든지 성급하게 제거되지 않는다는 것, 설사 더 높고 더 완전한 통치력으로 대체되는 상황에서도 그러하다. 점진적인 진보가 섭리의 법칙이자 자연계의 법칙이기도 하다. 참된 모든 발전은 주님의 일이고 서두를 때를 결정짓는 것도 그분의 일이다. 이제는 본문의 환상을 살피자.
1,2. 앞 경우에서와 같이 요한은 새로운 광경(scene)에로 안내되고 있다. “그리고 일곱 대접을 가졌던 일곱 천사들 중의 하나가 와서 나에게 말했다, 나에게 말하기를 , 오너라; 내가 너에게 많은 물들 위에 앉은 큰 매춘부가 심판되는 것을 보여 줄 것이다: 그들과 더불어 땅의 왕들은 매춘 짓을 범하였다, 그리고 땅의 주민들도 그녀의 매춘짓의 포도주를 마셨었다.” 이 구절에서 표현된 여인의 오염된 것, 그리고 오염의 품질은 결혼의 고결함과 처녀성의 순결함과 비교해봄으로서만 이해될 수 있다. 위 두 상태와 그것의 위반에 관하여는 성경에서 많이 거론되어 있다. 처녀와 결혼은 그 자체가 신성하다. 그 이유는 자연적이고 도덕적 수준의 결혼과 처녀는 영적이고 영원한 원리에 기대고 있기 때문이다. 눈으로 확인되는 외형적 제도로서의 결혼은 내향적 상태의 결혼이 생산한 결과 또는 형상이다. 내향의 결혼은 영적이고 영원한 원리인 선함과 진리의 하나 됨인데 이것은 먼저 신성한 마음 안에서 이루어지고 그 다음 그로부터 천사와 인간의 마음 안에 이루어진다. 이 천국적이고 영적인 결혼은 두 천국의 원리가 순수하게 보존됨 즉 두 원리의 하나 됨이 결혼을 구성하지 않으면 존재 할 수 없다. 그래서 모세의 법이 음행과 간음을 강경하게 다루고, 예언자들이 종교적 부패나 영적 부패를 묘사할 때는 간음이란 단어를 자주 사용하고 있다. 이런 이유로 진홍색 짐승을 탄 여인이 엄청난 탕녀의 뻔뻔스러움으로 표현되고 있다. 이 여인이 바빌론이다. 우리는 여인을 발견하되 두 가지로 발견하는데 여기서는 부패된 도성과 추잡한 매춘부로, 이후 새 예루살렘에서는 도성과 정숙한 여인으로 발견된다. 여인은 모든 생명의 필수 요소인 애착(affection)을 상징한다. 교회가 지성 측면에서 말할 경우가 도성이고 심정 측면에서 말하면 여인이다. 여인 측면에서 볼 때 바빌론은 자아사랑을, 새 예루살렘은 주님사랑을 표현한다. 어떤 심정에서이든 자아사랑은 통치하는 애착이어서 바빌론 식의 여인이 즉위하여 앉아 있다. 그녀가 앉은 많은 물이 백성과 군중과 나라와 언어들이라고 15절에서 말하고 있다. 백성과 나라의 영적 생각들, 종교적 양상은 그 안에서 어떤 영감으로 간주된 것들이다. 다시 말해 교회 내의 모든 종교들은 그것들이 진리를 올바르게 해석했든, 잘못 해석했든 말씀에서 파생되는바 말씀 속의 진리는 추상적으로 볼 때 여자가 앉은 물이고 그 물 위에서 그녀가 통치한다. 나라들, 마찬가지로 땅의 왕과 주민들도 영적으로 간주되고 있다. 백성과 나라가 말씀 속의 진리이듯, 그것을 통치하는 왕이란 이끌어가고 규율하는 진리이다. 이것들은 자아사랑이 군림할 경우 부패되고 만다. 그 이유가 자아사랑은 모든 것, 설사 가장 높고 가장 거룩한 것이라 해도 자기 목적에 따르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목적이 이기적이면 그밖의 모든 것은 부패된다. 심정 안의 자아사랑은 이해성 안의 모든 진리를 자아 사랑의 이익을 위해 팔아 치우고 모든 생각까지 중독 시킨다. 성경에서 자주 언급되는 술취함은 진리의 남용으로 생산된 지적으로 도취되는 것, 진리를 사용하되 이기적 탐닉을 위해 선용하지 않는 가운데 발생되는 지적 심취이다. 악은 진리를 거짓으로 변질시킨다. 이를 위해 악은 말씀의 가르침을 뒤집고 말씀의 순수한 포도주를 음행의 포도주로 바꾼다.
3. 요한에게 와서 보라고 했던 것들이 이제 보여지고 있다. “그리고 그는 나를 영 안에서 광야 안으로 운반하였다; 그리고 나는 일곱 머리들과 열 뿔들을 가지고 모독의 이름들로 가득한 주홍색의 짐승 위에 앉아 있는 여인을 보았다.” 요한에게 어린 양의 신부와 아내를 보여주었던 천사는 요한을 크고 높은 산에로 데리고 갔다. 진홍색 여인을 요한에게 보여준 천사는 그를 광야에로 데리고 갔다. 전자는 새 땅에서 였고 후자는 옛 땅에서 였다. 바빌론 식의 교회는 광야에 있었다. 광야의 상태는 삭막함이다. 여인이 많은 물 위에 앉아 있는 것으로 천사는 말했는데 요한은 그녀가 진홍색 짐승 위에 앉은 것을 보았다. 이 두 모습 사이에는 어떤 관계가 있을 듯 하다. 이미 살핀 바 같이 물은 말씀 속의 진리들이고 짐승은 말씀 자체를 표현한다. 환상에서 요한에 의해 보여진 주님은 백마를 타셨고 천국의 군대가 그분을 뒤따르고 있었다. 여호와는 거룹을 타고 계셨다 (시편18:10). 주님은 진리의 말씀을 타고 계신다. 이것이 그분을 그분의 교회에, 인간 마음에 더 가까워지게 한다. 말씀의 진리와 교리들은 구원의 말과 병거이다 (하박국3:8). 모든 교회마다 자기들의 근원이 성경(Bible)에 있다고 주장한다. 기독인들은 자기들의 신앙과 희망의 바탕이 되는 것이 성경이라고 고백한다. 그러나 성경은 각기 다른 마음에서 각기 다르다. 성경이 주님에 관련되면 빛나는 거룹이지만 진홍색 여인에 관련되면 머리 일곱에 뿔이 열 개라는 하느님을 모독하는 것으로 가득 채운 짐승이다. 자기 야망을 위한 견해들과 이기적 이익에 하느님의 말씀을 종속시키려는 이들의 경우 하느님을 모독하는 말로 가득 채워진다. 그 이유가 말씀의 거룩한 진리가 모독되기 때문이고 이 모독이 성령모독이기 때문이다. 거룹들, 그것이 성경에 묘사된 그대로를 생각하면 네 머리를 가졌다. 그 이유가 거룹이 상징한 말씀은 인간의 각기 다른 상태, 선함과 진리를 위한 각자의 용량, 이 둘을 결합시키는 능력에 따른 각각의 사람에 알맞게 숙박되는 것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홍색의 짐승은 일곱 머리와 열 뿔을 지녔다. 여기에는 자연적 측면이 없는 바, 뿔의 숫자와 머리의 숫자 사이에는 신비한 어떤 관계가 있을 것이 틀림없다. 상징적 의미에서 숫자는 헤아려진 사물의 품질을 표현한다. 머리는 지성 또는 지성에 속하는 것, 즉 지식, 총명, 진리에 속하는 것의 상징물이다. 머리의 뿔은 지적인 힘을 상징한다. 지식은 힘이다. 종교계에서 하느님의 말씀으로부터 오는 지식은 선하든, 악하든, 힘이다. 말씀이 올바르게 이해되고 성실하게 응용된다면 말씀은 선을 위한 모든 힘이다. 그 이유가 그것은 신성한 진리이기 때문이다. 말씀이 잘못 해석되고 못된 것에 응용된다 해도 말씀은 악을 위해서도 힘이 되어준다. 어느 누구도 정당한 수단으로 나쁜 목적을 성공적으로 달성할 수 없다는 것은 너무 잘 아는 사실이다. 그러나 성경의 권위를 존경하기 때문에 독단적 주장으로 구축해 놓은 것, 교훈으로 가르쳐진 것은 무엇이든 맹목적 신앙으로 수락하는 종교인들에게는 그릇된 해석과 비뚠 응용도 잘 먹혀들고 있다. 이것이 진홍색 짐승을 탄 여인으로 표현된 이들의 행동과 품성이다. 이기심의 상징물, 감각적 사랑의 상징물인 이 여자는 가장 정당한 수단에 의해서, 즉 지혜로 가득 차고 아름다움이 완전한 거룩한 말씀을 가지고도 가장 더러운 목적을 달성해낸다. 불경한 목적을 위해 거룩한 진리가 사용될 때, 이것이야말로 모독의 진짜 행동이다. 모독된 말씀의 거룩한 진리가 짐승의 일곱 머리이다. 이 머리의 열 뿔은 진리 안에 고유하게 있는 힘이다. 이 힘은 선한 자 뿐만 아니라 악한 자도 발휘 할 수 있다. 9-12절에서 짐승의 머리는 산들이고 뿔은 왕이라고 설명되고 있다. 이 설명에도 의미가 있는 바 차후 살핀다.
4,5. “그리고 여인은 자주색과 주홍색과 금으로 수놓아 차려입고, 귀중한 돌과 진주들로 치장하고, 손에는 그녀의 매춘짓의 가증함과 불결함으로 가득한 금 컵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이마에는 신비; 위대한 바빌론, 땅의 매춘과 가증함의 어머니 라는 이름이 씌여 있었다.” 이 상징과 그 명칭은 이 주제를 얼마나 잘 예증하는지! 아름답지만 도덕적으로 오염된 창조물, 이것이 가장 우아스러운 의상을 차려 입고 가장 귀중한 보석으로 사치스럽게 번쩍거리고 있다. 사실 하느님께서 도덕적인 사랑스러움을 신체적으로 표현한 것이 아름다움이다. 아름다움은 그것에 꼭 맞는 장식물을 가지고 있다. 바깥쪽 장식물은 순수함의 아름다움을 더 높여주는바, 저속한 인물도 이것으로 겉을 단장하기를 열렬히 바랜다. 이런 원리는 인간 삶의 모든 것에 골고루 스며 있는데 종교라고 이것에서 예외는 아니다. 참된 것과 거짓된 것이 있는 어디서든지 거짓은 참된 것과 우열을 겨룬다. 때로는 거짓된 것이 참된 것보다 바깥쪽을 치장하는데 더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 그 부분에서 더 우월할 때가 많다. 자연의 풍부함이 덕스러운 자이든 사악한 자에게든 공히 열려 놓여 있듯이 말씀 속의 보물도 성실한 자이든 불성실한 자이든 모두에게 열려 있다. 두 부류 모두 말씀의 빛나는 귀중한 진리들, 즉 자줏 빛과 진홍색 옷, 금과 보석과 진주들로 마음을 풍요하게 하고 잘 꾸밀는지 모른다. 바빌론의 부패된 딸도 예루살렘의 처녀 딸들을 장식한 아름다운 옷과 부유해 보이는 보석으로 치장할는지 모른다. 교회가 신성한 지혜와 지식의 보물을 채용해서 하느님의 영광을 드높이는 대신 교회 자체의 이기적 드높임을 증진하는데 사용한다면 깊숙이 부패될 수 있다. 거룩한 것을 가지고 매춘 행위를 하는 모습이 에스겔서에 상세히 묘사되어 있다. 주님께서 그분의 교회에 이렇게 말하신다. “너를 보석으로 단장하고 팔에는 팔찌를, 목에는 목걸이를 걸어 주었다. 이마에 보석을 박아주고 귀에는 귀고리를 달아 주었고 머리에는 아름다운 족두리를 씌워 주었다. 이렇게 너는 금은패물로 단장하고 모시옷에, 비단옷에, 수놓은 옷을 입었다…그런데 너는 네 아름다움을 믿고 명성을 미끼삼아 몸을 팔았다…네 옷을 가져다가 산당 언덕에 색색으로 펴놓고 그 위에서 몸을 팔았다…또 내가 몸을 장식하라고 준 금은 패물을 가져다가 사내의 형상들을 만들어 놓고는 몸을 팔았다. 수놓은 옷을 가져다가 그 형상들에 입혔다…또 네가 나에게 낳아 준 아들 딸 마저 끌어다가 그 형상들에게 제물로 잡아 바쳤다.” (16:11-20). 이런 식으로 해서 교회는 바빌론이 되어가거나, 유다가 바빌론에 포로가 되듯 하기도 한다. 그 이유가 바빌론에 포로가 됨은 선이 악에, 하느님 사랑이 자아사랑에 종속 당하는 것을 표현하기 때문이다. “이런 교회는 하느님을 부르는 것, 예배되는 모든 것보다 자신을 드높인다. 그리하여 하느님의 성전에 자리잡고 앉아서 자신이 하느님이라고 보여준다” (데살로니가2:4). 이 교회의 손에 들린 신성한 지식의 금잔은 온갖 역겨운 것, 음란의 추잡함으로 가득 채워 있다. 신성한 사항들에 관한 지식은 잔에 불과한바 말씀의 순수한 진리이든, 섞음질 된 진리이든, “핏빛 포도즙” (신명기32:14)이든, “거품이든, 포도주”이든 (시편75:8) 어느 것으로든지 채워 질 수 있다. 그러므로 교회가 제 수중에 붙들고 있는 잔은 “위로의 잔” (예레미야 16:7)이 될 수 있고, “전율의 잔”이 될 수도 있고 (이사야51:17), “구원의 잔”이 될 수도 있고 (시편116:13), “황폐함의 잔” (에스겔23:33)이 될 수도 있다. “바빌론은 한때 야훼의 손에 들린 금 술잔이 되어 온 세상을 취하게 하였었다. 그 술을 마시고 나서 온 세상이 실성을 하였었다” (예레미야51:7). 고대 바빌론이 온 땅을 도덕적으로 술 취하게 했듯이 근대의 바빌론은 온 교회를 영적으로 술취하게 만들었다. 근대 기독종파들은 각자의 왜곡된 견해와 야망적 계획의 포도주로 술취했다. 비록 그들이 여인의 꾀임을 받았다 해도 그녀의 속성이 명백히 쓰여 있고 돌출 되고 있기 때문에 아무도 사기 당하지 않을 듯 보일는지 모른다. 그러나 바빌론 그 자체가 비밀(mystery)이다. 바빌론의 신비는 서로를 구분 짓는 수준에서의 이름이 아니라 바빌론의 품성을 설명해주고 표시해주는 수준에서의 이름의 의미를 알 때까지 어느 누구도 그것을 이해할 수 없다. 기독교의 해설자들이 예언의 이 부분을 어떤 특정한 교회 조직체에 적용하려고 시도했었다. 특히 서로 질타하는 두 큰 종파가 서로를 놓고 이를 상대방에 적용했었다.
바빌론이 부패된 상태에 있는 교회를 상징하도록 의도되어 있을 리가 없다는 견해가 지배적으로 유지되어 왔었다. 그 이유가 만일 그렇다고 한다면 이런 교회는 그리스도의 불실한 배우자로 매춘부가 아닌 간음부로 불려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두 가지 통칭은 한때 주님의 아내였었던 교회를 놓고 사용되고 있다. 뒤로 미끌어진 교회에 보내는 말씀을 읽어보자. “너희 어미를 고발하여라. 너희 어미는 이미 내 아내가 아니다. 나는 너희 어미의 지아비가 아니다. 그 얼굴에서 색욕을 지워버리고 그 젖가슴에서 정부를 떼어버리라고 하여라” (호세아2:2). 교회는 이런 죄 모두를 위반했을는지 모른다. 그 이유가 그녀는 그들이 표현하는 두 가지 영적 악을 위반했을런지 모르기 때문이다. 영적 간음은 종교의 선을 모독하는 것이다. 영적 매춘은 종교의 진리를 모독하는 것이다. 영적 바빌론이 이 두 가지 모두의 죄를 저질렀다는 것은 의심할 바 없다. 그런데 그녀는 여기서 말씀의 진리를 모독한 자로서, 탕녀의 어미로, 세상의 왕들과 음란의 포도주를 마신 자로서 표현되고 있다. 그 이유가 탕녀, 왕, 포도주는 그것이 부패되고 모독되었든, 순수해있든 진리와 관련되기 때문이다.
어쨌든 우리는 19장에서 어린 양의 혼인을 살필 때, 주님과 그분의 재림 때의 교회와의 하나 됨이 주님과 그분의 교회가 완전하고 충만된 결혼이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같은 논리로 여기서 진홍색 짐승을 탄 여인에 적용하는 한 개의 통칭도 제한된 의미에서 이해될는지 모른다.
6. 바빌론의 품성이 그 이름만으로도 잘 표현되었는데 이제 행위로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나는 거룩한 사람의 피로, 예수의 목격자의 피로 술취한 여인을 보았다.” 교회가 초기 시절에 박해로 고통 받았었는데 이제는 그 교회 자신이 박해자가 되었다는 것은 진정한 사실이다. 무신론자 뿐만 아니라 이교도들도 심각한 처벌을 받을만한 범죄로 간주되어졌다. 바빌론 식의 원리는 이런 박해 함을 명확하게 본보기화 하고 있다. 그들의 박해는 종교의 적을 향해 실시 된 것이 아니라 교회의 적이라고 생각된 이들을 겨냥해 실시되었다. 사악한 정교(orthodoxy)가 덕스러운 이교보다 훨씬 덜 범죄적이었다. 교회는 독점적 권리를 확고히 지키고 제 힘을 기르기 위해 교회의 권위를 유지하기로 결정을 보았다. 이런 목적을 위해 교회는 자유로운 모든 생각과 독립된 견해들을 밀쳐내는 쪽으로 시도해 나갔다. 박해함이 시대의 영과 일치할 수 있다고 말했을는지 모른다. 그러나 이것이 복음의 영과도 일치될까? 그것은 복음의 가르침의 참 글자에 반대되었다. 종교적 박해는 교회의 부패함에서 튀어나온다. 그래서 자연적 차원에서 행동된 것은 그것이 영적으로 행동하는 것을 구성하는 표시이기도 하다. 교회는 성도를 만들고 순교자가 되게 하는 영적 원리들을 억누르고 스스로 뒤집었다. 성도를 만드는 것이 거룩함 말고 또 무엇이 있을까? 순교자를 만드는 것이 충성 말고 또 무엇이 있을까? 교회는 이런 덕행을 부정하기보다는 오히려 그것을 뒤엎었다. 그 여자는 가장 높은 거룩함을 바깥쪽 신성한 의무의 쓸모 없는 생명, 즉 헌신만이 연속되도록 만들었다. 마치 하느님께서는 주님의 소리에 순종하는 것 보다 제물을 바치는 것을 더 기뻐하시는 듯, 마치 순종함이 제물보다 더 나은 게 아닌 듯 하게 만들었다. 그 여자는 선행의 생명에 은혜를 입은 신성한 의무에 관한 포상으로 경건함의 생명을 주었다. 그리고 가장 높은 거룩함이 형식적인 헌신을 계속하는데 있는 것으로 만들어 놓았다. 이런 것이 성도들의 피와 예수의 순교자의 피의 첫 번째에 해당된다. 이런 바깥쪽 박해는 내향의 결과밖에 더 아니다. 바깥쪽 행동들이 더 이상 참아지지 않을 때라 해도 내향의 악들은 계속 죄를 저지를는지 모른다. 그리고 이런 것은 모든 교회인, 참 교회에서조차도 죄로 범해질는지 모른다. 그 이유가 자기 스스로 하느님을 사랑하고 인간을 사랑하는 원리를 뒤엎는 사람은 누구든지 성도와 순교자의 피로 술취하기 때문이다. 참된 종교와 위 상태가 얼마나 대비되는지가 기록되도록 하기 위해서 요한은 순교자의 성도의 피로 취한 여인을 보았을 때 탄복하는 경이로움이 아니라 “소스라쳐 놀라는 큰 경이함으로 쳐다보았다.”
7. 요한이 자기 앞에서 보여진 이 광경에 얼떨떨해 있을 때 천국의 소리가 그를 불러서 그 비밀을 해명해주고 있다. “그리고 천사가 나에게 말햇다, 어찌하여 너는 놀라워하느냐? 내가 너에게 여인의 신비를, 그녀를 운반한 일곱 머리들과 열 뿔을 가진 짐승의 신비를 말할 것이다.” 천사는 설명하려고 고백하는 비밀 만큼이나 비밀스러운 언어 속의 놀라운 일을 계속해서 펴놓고 있다. 이미 말했던 바, 여인이 탄 그 짐승은 하느님의 말씀을 상징했다는 것, 이 말씀을 자기 방식으로 해석함으로 교회는 그 교회의 품성이 무엇이든 교의를 떠받치게 하고 교의가 실제화된 것을 정당하게 만든다. 이것이 짐승에 관한 천사의 설명 자체가 설명될 때 더 명확해 질 것이다.
8. “네가 보는 짐승은 있었다, 그리고 있지 않다; 끝없이 깊은 구렁에서 막 올라오고 있다. 그리고 멸망으로 가려하고 있다; 그리고 창세로부터 자기들의 이름이 생명의 책에 씌여지지 않은 땅에 거주하는 그들은 있었고, 있지 않고, 그럼에도 있는 짐승을 보고는 놀라워 할 것이다.” 짐승이 존재하고 동시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을 이해하는데 어려움은 없다. 하느님의 말씀 자체는 있었고 있고 언제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말씀을 썩게 한 교회에 관련해 볼 경우 말씀은 원래대로 있지 않는다. 그 이유가 말씀은 말씀 속의 진리를 알고 인정하여 정의로 붙드는 사람들이 아니면 실제로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부패된 교회는 마치 불성실한 기독인처럼 그들도 말씀은 가지고 있을는지 모르나 동시에 말씀 없이 존재하고 있을 수도 있다. 그들은 이론적으로는 말씀을 거룩한 책이라고 인정하고 받들어 모시지만 실제 응용에서는 그 가르침을 부정하거나 모독한다. 교회가 이런 상태에 있을 경우 말씀이 처한 상황이 본문에서의 짐승의 상황들, 끝없이 깊은 구렁으로부터 올라오고 마침내 멸망한다는 것으로 기술되어 있다. 말씀의 진리가 왜곡될 때 말씀은 끝없이 깊은 구렁 안에 있는 것이다. 말씀의 선이 섞음질 당할 때 말씀은 멸망한다. 끝없이 깊은 구렁은 깊이를 알 수 없는 대양으로부터 그 의미를 갖고 있다. 멸망이란 파괴란 뜻이다. 교회의 하강에서 이런 단계들, 말씀을 이렇게 취급함에서 이런 단계도 그 결과를 가졌다. 기독교회가 하강의 첫 단계에 있는 동안 확정하지 못했던 의문이 있었는데 그것이 평신도의 수중에 성경을 맡겨 놓아도 되는 것인지에 대해서 였다. 하강의 둘째 단계에서 소극적 자세가 확정된 사항이 되었다. 그리고 교회가 개혁되지 않은 채 남아있게 되었다. 이 교회가 성경을 읽는 행위를 어떤 의도가 있어서 금지 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실제에서 그런 정도로 부정된 것이다. 예언의 언어에서 짐승은 깊은 구렁에서 올라와서 멸망하게 된다. 로마 교회는 자기들의 성경 해석은 유일하고 전혀 틀림없다고 주장했을 뿐 아니라 교회의 결정 사항까지 성경의 가르침에 얹어 놓았다. 이 교회의 증거에 따르면 교회는 성경 전에 존재한 것이 된다. 그러니 어떻게 그들의 주장이 성경에 종속될 수 있을까? 이렇게 교회가 높이 뜨는 가운데 그 교회의 함몰도 더 확실해지고 더 빨라졌다. 말씀은 교회에 대해 안내자 일 뿐 아니라 방어자이기도 하다. 교회가 자신을 말씀 위에 놓을 때 의무이자 안전한 길인 좁은 길을 이탈해서 파멸에 이르는 넓은 길로 진입하고야 만다. 교회 밑에 종속된 말씀이 정작 교회를 생존하게 한다고 교회가 알게 될 때 그 교회 자신은 의아해질 수밖에 없다. 이 교회의 끝이 와질 때, “땅 위에 살았던 그들은 전에는 있었고 지금은 없고 그럼에도 존재하는 짐승을 보고 놀랄 것이다 (그들의 이름은 세상의 기초가 놓인 때부터 생명의 책에 적혀 있지 않았다).” “땅”이란 교회를 상징한다. “땅 위에 살고 있는 사람들” 이란 교인들이다. “세상” 역시 교회를 뜻한다. 세상의 기초가 놓였다란 교회의 기초가 놓였다는 말이다. 그런데 세상의 기초가 있던 때부터 생명의 책에 적혀 있지 않았다는 것과 적혀 있었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마치 이 구절의 언어는 선택받은 자와 영벌을 받는 영원한 칙령에 관한 교리를 가르치거나 정당화하는 듯 비쳐질 수도 있다. 교회의 기초가 놓인 때부터 생명의 책에 씌어진 이름 역시 예정되었다(preordination)는 논리를 찬조하는 듯 보인다. 그러나 교회의 기초가 놓인 때란 교회가 시작한 시간을 말하는 게 아니라 교회가 시작될 때의 교회의 상태, 더 내적 의미로 말하면 교회의 기초가 된 원리들을 뜻한다. 사실 교회의 안전성은 교회 원리의 건전함에 달려 있다. 세상의 기초가 놓인 때부터 생명의 책에 적혀 있지 않은 이름들이란 교회의 근본되는 원리와 일치 않는 품성, 즉 생명책에서 밝히 알게 한 근본되는 원리, 하느님의 말씀에 일치 않는 품성을 말한다. 교회 연보록에서 추앙받는 자리에 올라 있는 이름들이라고 해서 생명의 책에 적히는 것은 아니다. 주님을 찌른 자들도 그분이 오실 때 그분을 보게 되듯 말씀의 권위를 짓밟은 이들도 권능과 영광 안에 있는 말씀을 보게 되리라.
9. 천사는 짐승의 비밀을 선포한 후 짐승의 일곱 머리와 열 뿔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설명한다. “이것은 지혜를 가진 지성이다. 일곱 머리들은 일곱 산들이다, 거기서 여인이 그것들 위에 앉아 있다.” 지혜를 지닌 마음이란 자연계와 영계 사이에 놓여진 법칙, 영적인 것과 자연적인 것 사이에 창조되어 존재하는 어떤 관계에 관한 법, 즉 상응의 법칙으로 드러내짐으로 “계시, revelations, 밝히 앎”을 보는 마음이다. 이 법칙에 따르면 산들은 사랑과, 왕들은 지혜와 상응된다. 3절에서 살핀 바대로 짐승의 일곱 머리란 말씀으로부터 파생되는 지식과 총명을 상징하는 표현물이다. 말씀이 가르치는 것은 선함과 진리밖에 더 없다. 다시 말해 사랑과 지혜, 선행과 신앙 외에 더 가르치는 것은 없다. 말씀이 가르치는 선함과 진리라는 원리가 일곱 산과 일곱 왕으로 의미되고 있다. 성경에서 산은 사랑과 선함의 표현물이고 왕은 지혜와 진리의 표현물이다. 여인이 일곱 산 위에 앉아 있다. 처음에 여인은 많은 물 위에, 그 다음 진홍색의 짐승 위에, 그 다음 짐승의 머리인 일곱 산 위에 앉아 있다고 말해져 왔다. 이것은 교회의 계속적인 상태들을 묘사한 것이다. 처음에 교회는 말씀의 글자에 있는 단순한 진리들로 통치되고, 그 다음 말씀 자체로, 마지막으로 말씀이 가르치는 선과 진리를 넘어 통치된다는 말이다. 처음에 교회는 자기들이 말씀의 진정한 해석자라고 주장하고, 그 다음 자기들의 해석이야말로 독자적이고 빈틈없는 해석자라고 주장하고, 마지막으로 자기들의 해석으로부터 선이 행해져야 하는 것, 진리로서 믿어져야 하는 것을 받아 적는다. 이렇게 해서 그녀는 처음에는 주창만 했지만 그 다음에는 움켜쥐었는데 결국 묶어서 꼼짝 못하게 하고 있다.
10. 이제 천사는 일곱 왕에 관한 비밀스런 말을 전달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들은 일곱 왕들이다; 다섯은 무너졌다, 그리고 하나는 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아직 오지 않고 있다; 그리고 그가 올 때, 그는 잠시 동안 남아야만 한다.” 일곱 왕들이란 말씀 속에 있는 으뜸가는 거룩한 모든 진리들이다. 으뜸은 왕이, 거룩은 일곱이 뜻하고 있다. 그런데 이들 중 다섯은 몰락되었다. 이런 상태에 관해 이사야가 말한 것이 있다. “공평은 뒤로 제쳐놓았고 정의는 얼씬도 못하게 하였습니다. 성실은 거리에서 짓밟혔고 정직은 통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성실함이 종적을 감추고 악에서 발을 뺀 자가 도리어 약탈당하는 세상입니다” (59:14,15). 이들은 한 때 땅 위 하느님의 교회와 나라, 하느님의 도성이었던 거리에서 몰락했으나 이제 “큰 도성이 되었고, 이것이 지상의 왕들”을 통치하고 있다. 이것들이 교회의 진리들을 통치하고 있다. 아직 일곱 중의 하나는 살아있고 다른 것은 아직 나타나지 않고 있다. 넘어진 왕들이란 이웃에 관련된 진리들, 즉 정의와 공평, 정직을 가르치는 진리들이고 남아있는 진리란 주님에 관련된 진리들이다. 이 진리는 성경에서 제일가는 두 진리이다. 하나는 그분의 신성을 가르치고, 다른 하나는 그분의 인성이 신성하다는 것을 가르친다. 그리스도를 가르치는 진리, 즉 그리스도를 구세주 하느님으로 가르치는 진리, 그리스도는 천상천하의 모든 권세를 쥐시고 있다는 진리는 교회 안에 존재하고 언제나 인정되어 왔었다. 이 진리가 살아있는 한 명의 왕이다. 이것은 주님의 섭리 하에 있어서 이 신성한 진리는 결코 몰락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이 진리에 교회의 모든 기초가 의존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섭리적으로 신조(creed)안에 보관되어 있었다. 이것은 니가야 종교회의 이래 기독교 국가의 신앙을 형성했다. 그렇다고 이 신조가 주님의 인성이 신성하다는 진리를 포함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이 신조는 예수가 하느님과 인간 이다 라고 가르칠 뿐 예수가 하느님-인간임을 가르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이 진리는 복음서에서 주님에 관련되는 진리 중 가장 높은 진리이다. 주님 자신도 그분과 아버지가 동등함을 자주 표현하셨다. 이 진리야말로 교회가 아직도 명백하게 보지 못하고 있는 진리이다. 이것이 아직은 나타나지 않는 다른 하나의 왕이다. 물론 이 진리는 수많은 토론의 주제가 되어와서 이 진리에 관한 얼마간의 지식은 획득하기도 했지만 그것은 “잠시밖에 살지 못했다.” 이 진리에 관한 사상은 정착된 신학사상 사이에서는 결코 발견되지 않고 있다. 그러므로 이 진리는 사라졌다. 아마 이 진리는 기독교 이전의 어떤 시대 때보다 기독교 신앙에서 더 멀어져 있다. 비록 교회가 그리스도의 신성에 관한 교리를 보존해 온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그 진리가 순수하게 보존되어 오지 않았다. 주님의 신성에 관한 참된 교리는 그분 만에 속하는 유일한 신성이다. 그러나 두 개의 다른 신성한 인물과 함께 그분의 하나 됨은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적으로 거하는(골로새2:9) 완전하고 참된 그분에 관한 신성, 만물을 다스리시는 영원히 찬양 받아야 할(로마9:5) 그분의 신성을 훼손시키고 있다. 부패됨 외에도 이 진리는 모독되어왔다. 천상 천하에 있는 예수의 권능이 자기에게 수여되어 행사하도록 되었다고 불경하게 주창함으로 모독되고 말았다.
11. 비밀스런 천사의 설명 중 또 다른 부분이 남아있다. “그리고 있었고 있지 않은 짐승은 여덟 번째 이고 일곱 번째 속에 있다; 그리고 그는 멸망 안으로 가고 있다.” 이미 살핀 바대로 짐승은 하느님의 말씀이다. 그리고 일곱 산과 일곱 왕은 말씀이 포함하고 거기서 파생되는 선함과 진리에 관한 원리들이다. 그런데 여덟째이면서도 일곱인 짐승, 말씀에 관련해보건대, 그 의미는 무엇일까? 말씀은 선함과 진리의 샘이다. 샘은 거기로부터 흘러나온 시냇가에 있다. 태양은 열과 빛의 샘으로서 태양에서부터 진행되는 모든 광선 안에 존재한다. 그러나 태양은 광선 그 이상의 존재이다. 그리고 광선들로부터 떨어져 있다. 이와 같이 선함과 진리의 샘으로서 하느님의 말씀은 그 말씀으로부터 근원되는 모든 선과 진리 안에 존재한다. 그러나 말씀은 그것들 모두와 구분되고 그것들 위에 존재한다. 말씀이 자기 자체를 묘사하는 비밀스런 언어에서 말씀은 여덟 번째인데도 일곱에 속하는 것이다. 수수께끼 같은 이 언어는 더 내면에 속하는 의미, 더 정확하고 교훈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 숫자 일곱은 거룩함을 표현한다. 숫자 여덟, 마치 그것이 숫자 둘로부터 파생되듯, 이는 하나 됨(union)을 표현한다. 말씀은 거룩하고 거룩함 자체이다. 말씀의 이런 품질이 “일곱과 동류”라고 표현되고 있다. 또한 말씀은 사랑과 지혜, 선함과 진리의 하나됨이다. 말씀의 이런 품질이 “여덟 번째”로 표현되어 있다. 하느님은 사랑 자체요 지혜 자체이시고 그분 안에서 이 두 본질의 하나됨은 그분의 존재와 품성의 완전함, 그러므로 그분의 거룩함의 완전함이다. 주님이 이러하시듯 말씀도 그렇게 존재하고 있다. 말씀은 그것의 가르침을 수단으로 우리로 얼마라도 주님의 품질이 되도록 밝히 알게 하고 있다. 교회의 의무는 이런 말씀을 순수하게 보존하면서 가르치는 것, 말씀이 드높여지고 확대되어 보이게 해서 가장 큰 경의를 받도록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가 자아찬양과 이기적 지배의 수단으로 말씀을 사용할 때 그 교회의 품성은 과연 무엇이 되어 있다는 말일까? 이럴 때 교회는 영원한 진리요 영원한 생명이 되는 수준의 말씀을 타락되게 한다.
12-14. 이 장의 남은 부분은 두 계층의 인물, 서로 간에는 구분되지만 그 둘 모두는 바빌론의 품새로 묘사된 것과는 다른 것을 취급하고 있다. 그 중 첫 부류가 이 절에서 묘사하고 있다. “그리고 네가 본 열 뿔은 열 왕들이고, 아직 왕국을 받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은 짐승과 더불어 한 시간 왕으로서 권위를 받는다, 이들은 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들은 자기들의 권능과 권위를 짐승에게 넘길 것이다. 이들은 어린 양과 싸울 것이다; 그러나 어린 양이 그들을 정복할 것이다; 그 이유가 그분은 주들 중의 주이시고 왕들 중의 왕 이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분과 함께 있는 그들은 뽑힌 자, 그리고 신실한 자들이라 불리운다.” 이 부류를 형성하는 이들은 여인에 반대하는 것으로는 표현되어 있지 않다. 그럼에도 그들의 권력과 권세를 짐승에게 주고 있다. 이 부류란 로마의 교회에 적개심을 갖지 않은 이들, 그러나 교회 스스로 사취한 권력과 권세에 하느님의 말씀을 귀속시키는 이들, 그리고 권력과 권세가 로마 교황에로 이전되었고 형식적 칙령으로 이것을 장치해둔 것이 절대 확실하다고 실지로 주장하는 이들이다. 물론 로마 교회 안에도 교황이 주장하는 것에 반대하고, 사랑의 힘과 믿음의 능력을 말씀에로, 그리하여 주님께 귀속시키는 이들도 얼마 정도는 언제나 있어 왔다. 옛 카톨릭 운동은 이에 관한 폭넓고 놀라운 예이기도 하다. 이 운동의 지도자들은 카톨릭 교회와의 교류를 유지하는 가운데 있고 싶어 한다. 그러나 천사의 언어에서 그들은 한 마음을 가지고 그들의 권력과 권세를 짐승에게 주고 있다. 카톨릭 국가들이 로마 카톨릭에 복종함과 헌신함은 각기 다양했다. 이런 점에서 프랑스와 스페인은 매우 달랐다. 어쨌든 대중적인 정서에서는 별반 차이가 없었다. 카톨릭 프랑스에서 예로 들어 볼만한 몇 명은 얀센파(Jansenist)나 포트 로얄파(Port Royalist) 사이에서 찾아지는데 그들은 자기들의 저서나 행동에서 열 왕인 열 뿔로 상징화된 신성한 진리의 권세를 명백하게 했다. 그런 국가 안에는 교황의 권세를 인정하되 형식적이고 피상적으로 인정하고 교회 안의 최고의 권위를 말씀으로 간주하는 이들도 상당수에 이르고 있었다. 이들이 “아직 나라를 갖지 못했지만 짐승과 함께 한때 왕과 같은 권세를 받는” 이들에 해당된다. 그들은 독립된 정부를 획득하지 못했으나 진리가 증여하는 권능을 가지고 있다. 그들이 이 권능을 짐승과 함께 향유하는 “시간”은 시간이라는 간격을 말하는 게 아니라 삶에 관한 상태이다. 한 시간으로 의미된 상태는 인정(acknowledgement)에 관한 그들의 상태이다. 말씀이 교회에서, 믿음이나 규율이라는 문제에서이든 최상의 권위를 갖는다는 것을 인정하는 그들의 상태는 짐승과 함께 한 시간 동안만 권능을 받고 있다. 주님께서는 승리하는 자에게는 그분의 왕좌에 그분과 함께 앉게 하실 것이라고 약속하시고 있다. 책임이 하나도 없고 틀림이 언제나 없다는 절대 권세를 옹호하는 자신의 잘못과 편견을 타파하고 절대적 권능을 밝혀진 하느님의 말씀에로만 돌리는 이들은 당당한 권능을 말씀과 함께, 말씀으로부터 받을 것이다. 대담하게 말해본다면, 이런 사람들은 계속 증가하고 힘도 얻을 것이다. 밤이 가고 동녘이 터 오르고 대낮이 시작되면 모든 오류가 살 수 있던 어둠은 쫓기고 만다. 주 예수그리스도가 유일한 하느님, 창조자, 구속자, 구세주, 그분의 인성이 신성이라는 진리는 고색 창연한 독단적 주장이라는 멍에에서 자신을 부분적으로 끌러 놓은 이들의 마음에서 강한 저항을 만날 것이다. 그들은 주님의 인성이 신성 이시다는 사상에 저항함으로 “어린 양에게 싸움을 걸게 될 것이다.” 그러나 어린 양은 그들에게 확신시켜 줌으로 그들을 극복할 것이다. 그 이유가 그분은 “왕 중의 왕이요 군주 중의 군주 이시기” 때문이다. 그분은 천국과 교회의 모든 선과 진리의 저자이시다. 말씀이 신성하다는 진리를 수용하는 모든 이들, “왕들”에 속하는 이들은 예수만을 왕들 중의 왕 되시고, 교회의 모든 진리가 파생된 진리 자체이신 분으로, 그들 모두를 이끌어 가는 분으로, 그분만이 신성하심(Divinity of Jesus)을 참으로 유일한 예수의 신성임을 궁극적으로 인정할 것이다.
15. 이제 천사는 여인에 관한 처음의 서술로 되돌아오고 있다. “그리고 그분이 나에게 말한다, 매춘부가 앉아 있는 곳, 네가 보는 물들은 백성들과 군중들, 그리고 나라들과 혀들이다.” 물에 관한 의미는 1절에서 이미 살펴보았다. 여기서는 왜 물이 소개되는지에 관해서만 살피면 될 것 같다. 많은 물이란 말씀 속의 진리들이다. 먼저 진리들이 교회에 복종 당한 것으로, 교회에 의해 매음된 것으로 언급되어져 있다. 그 이유가 진리 위에 앉은 불성실한 자이기 때문이다. 그 다음 진리들은 백성, 군중, 나라들, 언어들이라고 설명되는데 이는 그녀가 지배한 것이 자연적 측면이 아니라는 것, 그녀가 권세를 부린 대상이 되는 사람의 영적 상태의 다양함을 표현한다는 것이다. 이 설명이 여기서 소개되었는데 그 이유는 이들이 예언의 이 부분과 관계되기 때문이다.
16,17. 이제 두 부류 중 둘째 부류에 관해서 말하고 있다. “그리고 네가 짐승 위에서 보는 열 뿔들, 이것들은 매춘부를 미워할 것이다, 그리고 그녀를 황폐케 하고 벌거벗게 만들 것이다, 그리고 그녀의 살을 먹을 것이다, 그리고 그녀를 불로 태워버릴 것이다. 그 이유가 하느님의 말들이 성취될 때 까지 하느님께서는 그분의 마음을 행동하는 것을, 그리고 한 마음을 행하는 것을 그들의 심정에 주셨고, 그들의 왕국을 짐승에게 주셨기 때문이다.” 이 구절의 사람들이 여인으로 묘사된 교회에 직접적이고 공개적으로 반대하고 있다는 것은 확실하다. 이 부류에는 단순히 교황의 주장에 이의를 제기한 이들 뿐 아니라 교회의 도덕적 부패와 일반적 지성을 다소나마 목격해 왔던 이들, 그리고 이런 것들에 강하게 반대한 이들까지 포함된다. 9,10세기는 유럽뿐만 아니라 교회의 역사에서도 가장 어두운 때였다. 12세기에 알비주아파(Albigenses)가 교회의 잘못과 부패에 봉기했다. 그러나 그 종파가 소멸될 때까지 가차없는 격분된 박해를 당했다. 프랑스의 이런 알비주아파 외에도 영국의 위클리프와 독일의 라로드(Lollard)가 재봉기해서 생명의 말씀과 영적 자유에 관한 주장이 계속 살아 있게 했다. 그 이유가 “하느님께서 그들의 심정 안에 그분의 뜻을 이루려는 것을 놓으셨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개혁교파(Reformation)가 일어났다. 이것은 기독교인의 마음에 계속 이어져 왔던 운동의 정점밖에 더 아니었다. 수세기 동안 어둠이 깔려 있었지만 그렇다고 빛이 완전하게 소멸된 적은 없었다. 그들이 악하게 되어 갔다 해서 선이 완전하게 좌절된 것은 아니었다. 교황의 욕망이 극에 달할 때 하느님께서는 그분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많은 사람의 마음에 그분의 마음을 놓아두셨다. 그래서 그들의 왕국을 짐승에게 주셨다. 열 왕이 성취한 것이 하느님의 뜻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고 짐승의 의지를 뜻한다. 이것이 보여주는 바, 짐승은 하느님의 말씀을 상징한다는 것, 말씀의 의지와 가르침은 로마 교회와 교황의 의지와 가르침에 반대된다는 것이다. 이 바탕에서 열 왕들은 그들의 왕국을 짐승에게 주기로 동의했다. 타락한 교회가 있는 모든 시대에 있던 이들은 독재적인 권력에 반대하고 그 권력의 부패를 까벌렸다. 그들이 큰 목적으로 삼은 것은 말씀을 갖가지 종류의 감옥에서 석방시키는 것이었다. 개혁교파인들의 큰 성취는 그들의 왕국을 짐승에게 주는 것이었다. 개혁교파는 하느님의 말씀을 교회 권위의 최고자로 옹호하면서 온 교회는 구원의 샘에서 생명의 물을 퍼올릴 권리가 있다고 주창했다. 이외에도 개혁교파는 교회 부패의 많은 것을 까벌렸고 교회 속의 많은 악을 무력화 시켰다. 그들은 그녀를 미워하여 벌거벗기고 그녀의 살을 뜯어먹고 불살랐다. 그러나 개혁교도는 교회의 질병을 치료되게 한 것은 아니고 증세를 완화시킨 것 뿐 이였다. 이 노력은 처방의 기간을 영속되게 한 것이 아니라 좀 더 깊어지게 했다. 실패 없는 예언에 의하면 그들은 하느님의 말씀이 성취될 때까지 짐승에게 그들의 왕국을 준 것이었다. 말씀의 성취란 옛 처방이 사라지고 새 처방이 도래하는 것이다.
18. 이렇게 천사는 끝맺는다. “그리고 네가 보는 여인은 땅의 왕들을 다스리는 왕국을 가진 큰 도성이다.” 이 구절 그리고 다른 부분에서도 마찬가지로 글자와 영적 의미 간에 우연의 일치가 있었을는지 모른다. 한 때 교회는 기독교계의 모든 왕들을 지배했다. 영적 원인이 자연적 결과를 생산했다. 한때 교회는 기독교국의 지적 측면의 모든 힘을 장악했다. 일시적인 권세 위에 영적인 지배(dominion)가 그 결과였다. 교회의 권세가 인류의 선을 위해 집행되고, 이기적인 것의 확장에 사용되지 않았더라면 교회는 나라들을 노예화하려는 대신 그들을 계발해주는데 기여했을 것이다. 그러나 교회가 교회 속의 진리까지 통치하려 했던 주제넘은 짓들은 땅의 왕들을 지배할 권리까지 주창하는 쪽으로 끌고 가버렸다. 더 일반적인 계발과 더 높은 총명은 그 교회가 움켜쥔 손에서 그 권능을 빼앗었다. 더 나아가 그 교회가 교회 속의 진리를 통치한 것도 그녀의 수중을 빗겨날 때가 오고야 말 것이다.

요한계시록 16장 해석

16

본 장은 대접을 쏟는 광경을 취급하는바 이와 관계되는 교회의 상태가 무엇인지를 우선 생각해보는 게 필요할 것 같다.
일곱 대접을 가진 천사는 앞의 일곱 나팔을 지닌 천사들을 뒤따르면서 그들이 했던 일을 완성하고 있다. 나팔소리와 대접을 쏟는 것 모두는 일반적 심판이 선포된 영계에 있는 이들의 상태를 검색하여 까벌려 놓은 것을 묘사하고 있다. 상징 자체가 암시하는 바대로 대접을 쏟는 것은 나팔소리가 있었을 때 보다 더 자세히 검색하고 더 결정적으로 작용하고 있다. 나팔소리는 그들이 행동했던 것들의 상태와 품성을 들추어 냈다. 그리고 대접을 쏟는 것은 그들을 덮어주고 있던 그럴싸한 컽치레인 그들의 미덕과 총명을 제거했다. 나팔소리와 대접을 쏟는 것 사이에 어떤 연결이 있는데 이는 마지막을 제외한 모든 대접들이 나팔소리로 흔들렸던 똑같은 대상물, 즉 땅, 바다, 샘, 유프라테스, 짐승의 좌석, 해, 등등에 쏟아졌다는 사실로 확실해진다. 그런데 일곱째 대접은 공중에 쏟아졌다. 이 결과는 일곱째 나팔소리가 울림에 이은 결과와 매우 다르다. 재앙의 위 두 시리즈는 과거 모세가 에집트인들에게 가져다 준 심판, 그리고 여호수아가 가나안 주민에 가져다 준 것들과 비교될 수 있다. 이 두 재난의 시리즈 사이에는 광야여행이라는 오랜 간격이 있다. 계시록에도 이와 유사한 게 있다. 이스라엘로 표현된 교회가 광야에서 사십 년 동안 먹여 살려졌다. 교회를 표현한 여인은 뱀의 면전으로부터 삼 년 반 동안 광야에서 먹여 살려졌다.
일곱 나팔을 지닌 천사에 관한 세부사항들을 설명할 때와도 같이 일곱 대접을 쏟는 주제에서도 세세하게 설명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그러므로 예언의 이 부분에서는 요점을 살피는데 그치리라 본다. 나팔소리가 울림으로 야기되는 재난과 대접을 쏟음으로 야기된 재난을 비교해 생각한다면 서로 사이의 구분되는 품성이 무엇인지 확실히 알게 될 것이다.
1. 일곱 천사의 일곱 재앙이 다 마무리 될 때 까지는 열려 있는 성전에 들어 갈 자는 아무도 없다고 서술한 요한은 이렇게 더 말하고 있다. “그리고 나는 일곱 천사들에게 가라 그리고 땅에 하느님의 분노의 대접을 쏟아라 하고 성전에서 나오는 큰 소리를 들었다.” 천사들이 나온 성전은 천국에 있는 증거의 성막의 성전, 즉 가장 깊은 천국, 주님이 그분의 신성한 법과 말씀 안에서 그분의 거룩함으로 계시는 그 곳이다. 그러므로 대접을 쏟음으로 나타낸 검색작전은 주님의 인성의 성전 안에 계신 주님으로부터, 그리고 그분의 신성한 법으로부터 진행된다. 이 법에 의거 모든 사람은 심리되고 심판된다. 일곱 천사에게 각자 지닌 대접을 쏟으라고 한 그 땅이란 교회를 뜻하는 일반적 이름이다. 이 교회의 상태가 더 충분히 영글고 마지막으로 자신들을 구성했던 요소로 환원된다. 대접을 쏟음이란 주님으로부터 신성한 진리가 바깥쪽으로 쏟아짐을 의미하듯, 교회 또는 교인의 마음이 지닌 다양한 자질, 상태, 원리들이 대접이 쏟아지는 땅으로 의미되고 있다. 그럼에도 더 특별하게 의미되는 교회가 이제 예언의 아래 부분들에서 취급되고 있다.
2. “첫째 천사가 가서 땅 위에 그의 대접을 쏟았다; 그리고 거기서 짐승의 표를 가졌던 이들, 그것의 형상을 숭배했던 사람들에게 악하고 유해한 종기가 생겼다.” 첫째 천사가 나팔을 불었을 때 우박과 불덩어리가 피범벅이 되어서 땅에 던져져 땅의 삼분의 일이 타고 나무의 삼분의 일이 탔으며 푸른 풀이 모두 타버렸었다. 이는 악한 사랑과 하나 된 거짓 설득력이 불로 범벅된 우박으로 의미되고 나무로 의미된 선함과 진리가 타버리고, 푸른 풀로 의미된 신앙 안의 생명 있는 모든 것이 타버리는 교회의 상태를 묘사한 것이다. 그러나 대접을 쏟았을 때는 나무들을 태워버린 게 아니라 사람을 괴롭히기만 했다. 이 사람들이란 인간 본성을 구성하는 의지와 지성이라는 자질을 뜻한다. 그리고 그 본성에 끔찍하고 독한 종기가 생겼다. 이 종기란 죄지어 끔찍한 악과 거짓이 마음의 내면에 숨겨져 있다가 발각되어 돌출된 것이다. 그러므로 이는 의지와 이해성의 썪은 상태를 암시하고 있다.
3. “둘째 천사가 바다에 그의 대접을 쏟았다; 그리고 그것은 죽은 자들의 것 같은 피가 되었다, 그리고 바다에 있는 모든 생 혼이 죽었다.” 둘째 천사가 나팔을 불었을 때 바다는 피가 되었다. 그러나 이 구절에서는 죽은 사람의 피같이 되었다. 이는 진리의 거짓화가 더 완전하고 더 깊은 상태임을 표현한 것이다. 그 이유가 피를 뿌림은 진리에 폭력을 휘두르는 것, 진리로부터 선함이라는 생명을 빼앗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썪은 피인 죽은 자의 피란 진리에서 선함의 생명을 강탈한 것 뿐아니라 악의 생명을 수단으로 진리를 모독하고 썩게 한 것까지 뜻한다. 말씀 속의 진리, 그리고 말씀에서 파생된 그대로의 교회 속의 진리가 타락된 심정의 악들로 해서 썪어질 때, 또는 말씀 속의 진리가 오류투성이의 신앙 아래서 힘을 얻어 자라고 있을 경우 진리에 대한 모든 애착과 지각은 죽고 만다. 그 이유가 진리에 관한 지각이나 애착이 바다에 있는 생물로 의미되는바 바다가 죽은 자의 피로 이루어지면 모두 죽기 때문이다.
4-7. 셋째 천사가 나팔을 불었을 때 강과 샘들이 쓴 물이 되었고 많은 사람이 이 물을 마시고 죽었다. “세째 천사가 자기 대접을 강과 산에 쏟았다; 그리고 그것들은 피가 되었다.” 이는 이전에 검색되어 명백해진 것보다 거짓과 악이 더 깊은 상태라는 것을 말해준다. 악한 자의 결과가 이제 발견된다. “그리고 나는 물들의 천사가 당신은 정의 이십니다, 오 주여, 계시고, 계셨고, 거룩하신 분, 그 이유는 당신께서는 이런 것들을 심판하셨기 때문입니다. 그 이유는 그들은 거룩한 사람들과 예언자들의 피를 쏟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당신께서는 그들에게 마실 피를 주었습니다, 그 이유는 그들은 그럴만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나는 제단으로부터 또 다른 천사가 그렇습니다, 오 주 하느님 전능이신 분, 진실과 정의가 심판들입니다 하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 물은 말씀 속의 진리들을 의미하고 물의 천사란 말씀의 영적 의미(spiritual sense)를, 제단에서 나오는 천사란 말씀의 천적 의미(celeestial sense)를 상징하고 있다. 또는 이 둘을 구체적으로 생각해보면 두 천사는 주님의 영적 왕국과 천적 왕국(the Lord’s spiritual and celestial kingdom)을 표현한다. 물의 천사는 주님을 정의로우신 분 또는 공정하신 분으로 말하고 있다. 그리고 정의 또는 공정은 주님의 신성한 사랑 또는 선함을 표현하고 있다. 정의는 그분의 선함에 근원을 가지고 있다. 또한 천사는 그분을 “지금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던 분”으로 말하고 있다. 그런 이유는 이 표현이 무한성과 영원성을 서술하고, 지금 계시고 전에도 계셨던 그분은 자존하신 분, 영원히 존재하시는 분, 이름이 여호와이신 그분을 서술하고 있기 때문이다. 천사들은 그분을 두고 말할 때 “지금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거룩한 분”이라 한다. 공정이 신성한 사랑 또는 선함 측면을 표현하는 한편 거룩함은 신성한 지혜 또는 진리 측면을 표현한다. 이 두 속성은 이미 살핀바 같이 신성한 심판에서 하나 되어 있다. 그러므로 천사들은 정의와 거룩함을 그분의 것으로 돌리는데 그 이유가 그분께서는 그렇게 판결하시기 때문이다. 그들은 성도들과 예언자들의 피를 뿌렸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마시라고 피를 주었다. 그 이유가 그것이 마땅하기 때문이다. 성도란 거룩한 생활을 영위한 이들이다. 예언자란 거룩한 진리들을 가르치는 이들이다. 이를 추상적으로 생각한다면 그들은 거룩함과 진리를 뜻한다. 성도들과 예언자의 피를 흘리게 했다는 것은 거룩한 것을 모독하고 스스로 그것을 뒤엎었다는 것이다. 불성실한 자가 거룩한 것을 스스로 모독하고 뒤집었다면 그들이 모독하고 뒤집어 놓은 것 밖에 가져갈 게 또 있을까? 복 주시는 구세주께서 그들 마음에서 솟아나 흐르게 하는 진리의 샘과 강이 피로 변했는데 마실 것이라곤 피 밖에 무엇이 더 있을까? 불성실한 자는 이외 더 바랄게 없다. 그들은 자기들에게도 지긋지긋한 그 물을 마셔야 한다. 그게 그들에게 마땅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그들이 받을 당연한 보답이다. 이것은 그들 자신의 행함 인 바 그와 달리 그들은 뜻하거나 행동할 수 없다. 그들은 참혹한 체험의 저자이다. “이렇게 심판하시니 주님은 정의로우시다”는 것이 물의 천사에 의해 고백되고 있다. 글자적 의미에서 볼 때 본문의 처벌은 하느님께서 가한 처벌, 유대교회의 보복의 법칙에 의거 가해진 처벌로 표현되고 있다. 그러나 이미 살핀바 같이 이 법은 신성한 질서가 일시적이고 자연적 수준에서 명백해진 것에 불과하다. 이 영원한 법에 의하면 선과 악은 그것을 행한 이들의 가슴에로 되돌아간다. 여느 다른 신성한 법같이 이것도 사랑에 근원을 두고 지혜로 작동된다. 그래서 제단에서 나온 천사는 물의 천사의 증거를 확증하고 있다. 진리의 영과 사랑의 영 모두가 주님은 그분의 심판에서 참되고 공정하시다고 선포하고 있다.
8,9. “네째 천사가 자기 대접을 태양에 쏟았다; 그리고 그것이 그에게 불로 사람들을 그을리려고 주어졌다. 그리고 사람들은 큰 열로 그을리게 되었다, 그리고 그들은 이런 재앙들에 권위를 가진 하느님의 이름을 모독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그분에게 영광을 돌리도록 회개하지 않았다.” 이는 넷째 천사의 나팔소리에 이어 나타난 재앙보다 더 심한 결과이다. 해, 달, 별의 삼분의 일이 타격을 받고 낮과 밤의 삼분의 일이 빛을 내지 못했다. 이 경우에서는 사람들에게 어떤 타격을 주지 않았지만 이 구절에서는 불로 지지고 있다. 해는 사랑의 상징물이다. 이 대접을 쏟음으로 사람들은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이 그들 사이에서 찾아지는지를 심리 받았다. 그러나 이 두 사랑 대신 발견된 것은 자아사랑과 세상사랑이었다. 이 사랑은 인간을 따뜻하게 해주지 않고 인간을 지져댄다. 이 사랑은 참된 인간에 속하는 모든 것을 살라 없앤다. 결과적으로 이 사랑은 하느님의 이름을 모독하도록 인간을 꾀어간다. 그 이유가 자아사랑은 신성한 사랑을 미워함, 신성한 진리를 더럽힘, 이 두 가지 결과의 근원이기 때문이다. 자아사랑의 불은 심정을 죄로 불사르고 양심을 그을리게 해서 심정과 양심을 대단히 무감각하게 만들어 인간으로 하여금 그의 심판자요 구세주 되시는 분으로 하느님께 영광을 돌리도록 회개하려는 것을 거절케 하고야 만다.
10,11. “다섯째 천사가 자기 대접을 짐승의 왕좌에 쏟았다; 그리고 그것의 왕국은 어둡게 되었다, 그리고 그들은 심통 때문에 자기들의 혀를 깨물었다. 그리고 그들은 자기들의 심통과 종기들 때문에 천국의 하느님을 모독하였다, 그리고 자기들의 일들을 회개하지 않았다.” 다섯째 나팔소리의 결과는 이 구절과 다른 듯 보인다. 다섯째 천사가 나팔을 불었을 때 끝없이 깊은 구렁이 열렸고 메뚜기 군단이 그 곳으로부터 출현했다. 어쨌든 실지의 차이점은 없다. 메뚜기의 왕과 군대는 용과 그의 부하의 선구자이었기 떄문이다. 이것들은 발달되는 각기 다른 단계, 명백히 드러나는 형체에서 각기 다른 형체일 뿐이다. 구덩이로부터 출현한 메뚜기는 악한 의도에서 진행되어지는 거짓 생각의 표시이다. 악한 의도는 거짓 설득력의 시작과 근원에 해당된다. 그들이 표현해준 거짓 설득이 지금 그 자체 건설되어 교회를 통치하고 인간의 마음을 좌지우지 하고 있다. 그 이유가 이 구절에서 거짓 설득력을 표현한 게 짐승인데 이 짐승이 왕국과 보좌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 자리에 천사들이 대접을 쏟고 있다. 짐승의 자리, 즉 중심 되는 원리가 이제 신성한 진리의 테스트를 받아야 한다. 그 결과가 기술된 것이다. 그의 왕국은 어둠으로 꽉 차게 된다. 짐승은 신앙 만으로 구원받는다 는 교리를 상징한다고 이해할 때 그 짐승의 자리에 대접을 쏟음으로 그의 왕국이 어두워진다는 것은 우리에게 이렇게 인상적 모양으로 말한다. 이 교리 안에 감추였던 품성이 적나나해지면 진리의 빛은 하나도 없고 오류의 어둠으로 꽉 채워진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것이 그 교리로 삶을 확증한 이들의 상태이다. 이 상태는 진리를 몹시 싫어하고 진리를 뒤집겠다는 쪽으로 흥분된다. 이것이 고통으로 인해 혀를 깨물고 쓰라림 때문에 천국에 계신 하느님을 저주하는 것으로 의미되어 있다. 태양의 광선이 병든 눈에 고통을 주듯이 진리의 빛은 무질서한 마음을 고통스럽게 한다. 이런 마음이 잘못을 뉘우치거나 하느님을 찬양하지 않을 것은 당연하다. 회개는 죄가 면제되는데 하등 쓸모가 없다고 가르쳐져 왔었다. 그들의 죄는 그리스도를 위해 용서되어진다. 회개는 의로워짐에 뒤이어 계속된다. 그러나 의로움을 보증할 힘은 없다. 그러므로 회개하지 않는 죄가 이 믿음의 뿌리에 놓여 있다. 그리고 그것 자신의 어둠이 드러날 때 빛에로 가져와진다.
12. “여섯째 천사가 자기 대접을 큰 강 유브라데에 쏟았다, 그리고 그로 인해 물이 말리워져서, 태양이 떠오름으로부터 왕들의 길들이 준비되었다.” 여섯째 천사의 나팔소리는 유프라테스강에 매여 있던 네 천사를 풀어주었다. 여기서는 유프라테스강의 물이 말라버렸다. 전자에서는 자연적 이성의 본성과 경향성이 묘사되었는데 후자에서는 그 이성의 제거가 표현되었다. 유프라테스는 이성(reason)을 상징한다. 이 강이 낙원의 네 강물 중의 하나일 경우 그것은 하느님의 지혜와 조화를 이루는 가운데 그것으로부터 파생되고 행동도 하는 인간의 이성을 상징한다. 그러나 타락 이래 인간의 이성은 하느님의 지혜와 자연스럽게 반대가 되었다. 그리고 그는 그의 자연적 경향성에 몰입하게 하는 어떤 독단적 주장(dogma)을 옹호하는 쪽으로 추론할 수 있다. 그 이유가 모든 잘못, 오류는 자아 탐구에 양심마저 합세하기를 바래는 가운데 직접적이든 덜 직접적이든 그 원인을 두고 있다. 이것이 죄이기도 하다. 오류를 옹호하는 곳에 하느님의 진리가 방문하게 되면 그것들은 자체 안에 건전한 이성이라고는 하나도 보이지 않게 된다. 위대하고 당당하게 흐르던 강물이 바짝 말라있는 것이다.
강물이 말라버림으로 해서 동쪽의 왕들의 길이 마련되었다. 거짓 추론을 제거함으로 해서 주님으로부터 오는 진리가 이해성 안으로 들어가게 해주는 길이 트인 것이다. 왕이란 진리의 상징물이다. 동쪽, 해돋는 쪽이란 정의의 태양으로서의 주님이시다. 넓은 의미에서 볼 때 새 교회의 시작이 동쪽의 왕들로 의미되고 있다. 그 이유가 태양이 떠오름은 아침과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아침은 주님의 강림, 지상에서 그분의 나라가 시작되는 것이다. 참으로 이런 역사는 장애물의 제거로 결과 된다. 이 결과 교인들은 진리를 영접할 채비를 하게 된다. 이는 정직한 심정이라는 옥토를 지닌 이들을 수단으로 한다. 그러나 교인들은 그럴싸한 추론의 설득력에 의해 영향을 받고 있다. 유프라테스강이 아시리아로부터 동쪽의 가나안 지역을 갈라 놓았었는데 그 강물이 말라버림으로 아시리아로부터 거룩한 땅으로 진입하는 길이 마련되었듯이 왜곡된 추론의 제거는 올바른 추론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이들로 하여금 교회로 들어가게 해주는 길이 트이게 한다.
13-16. 어쨌든 위와 같은 경우는 오류투성이에 있는 자신을 내면적 추론으로 확증해버린 이들, 신앙 만으로 구원된다는 교리로 자신을 너무 깊이 확증해놓고 있는 이들까지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그 반대이다. 그들의 왜곡된 추론이 노출되면 그것들에 적대감이 일어나 또 다른 추론을 일으켜 이를 수단으로 진리에 반대하고 자기 논리를 옹호한다. “그리고 나는 용의 입으로부터, 그리고 짐승의 입으로부터 개구리들 같은 깨끗지 않은 세 영들이 나오는 것을 보았다.” 개구리는 추론의 상징물이다. 용이 신성을 갈라놓은 교리와 신앙 만으로 구원된다는 원리의 상징물이었는데 이제 제 뜻을 실현하고자 나타나고 있다. 이것은 이 원리를 지지한 자들이 참된 신앙과 그 믿음을 지키려는 이들에 대항하여 봉기하는 표시이다. 이들은 악마들의 영이라 말해지고 있다. 이는 그들의 추론이 악에 근원된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이다. 그들이 기적을 행하나 그것은 사기쳐 놀라게 하는 것일 뿐이다. “그것들은 악마들의 영들이기 때문인데, 기적들을 행하려고, 땅과 전체 세상의 왕들에게 떠나가, 그들을 전능이신 하느님의 이 큰 날의 전투에 모으고 있었다.” 땅의 왕과 세상의 왕은 동쪽으로부터 오는 왕들과 품성이 반대되는 것은 분명하다. 그리고 이것들은 진리와 정의의 나라에 반대하도록 용에 의해 고용된 것이다. 전능하신 하느님의 큰 날이란 주님이 오시는 날이다. 그러므로 주님이 심판하러 오신다는 발표가 있다. “잘 보라, 나는 도둑 같이 온다;” 그리고 “그들은 자기들의 부끄럼을 보고 있다.” 오심에 관한 본성을 여기서 말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이 오심은 인물의 오심, 자연적 차원의 오심이 아니라 영적 차원의 오심이라는 것은 이미 살핀바 있다. 여기서 부분적이지만 그분의 오심이 소개된 것은 시련의 날에 보호를 입증하는 진리와 정의를 꼭 붙잡고 있으면서 경계하라고 인간에게 권유하려는데 있다. 그 이유가 “깨어 있어 자기의 의복을 간수하여 자기가 벌거벗은 채로 걷지 않도록 한 사람은 행복하기” 때문이다. 주님은 용을 정복하는 최강의 힘이 있으시다. 설사 그 용이 “히브리말로 아마겟돈이라고 하는 곳으로 땅의 왕들을 다 모았을” 때의 세력까지도 정복하신다. 아마겟돈(Armageddon)이란 단어는 히브리 성경에는 없다. 므기또(Megiddo)와 므기돈(Megiddon), 이로부터 위 이름이 형성되었는데 이곳은 몇번의 피비린내나는 전투가 벌어진 곳이다. 여기서 시스라가 대패했고 선왕 요시아가 패한 곳이다. 비평가들은 단어 아마겟돈의 의미에 관해 서로 일치를 보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계시록 밝힘]의 저자는 더 높은 것, 영적 생각을 우리에게 이렇게 제공하고 있다. “천국에서 아마겟돈은 명예욕, 지배욕을 의미한다. 히브리어에서 아람(Aram or Arom)은 드높음(loftiness)을 뜻한다. 고대 히브리어, 아라비아어 처럼 므기또는 마음의 드높음으로부터 진행되는 사랑을 뜻한다. 이와 똑같은 의미가 스가랴12장 11절, 므기또 골짜기의 하닷림몬으로도 의미되고 있다.” 이곳에서 치뤄진 전투의 본성은 충분히 파악된다. 이는 옛 것과 새 것 사이의 싸움, 주님의 두 번째 오심에서 그분을 영접하고 따르는 이들과 이를 거절하고 악과 오류에 남아 있는 이들 사이의 싸움이다. 그러므로 이 전투는 둘째 강림의 교회에 있는 빛과 첫째 강림의 교회를 침공한 어둠 사이에서 치뤄진다. 오류는 그것을 채택하는 마음에서는 꽉 달라 붙어있다. 그리고 필사적인 투쟁 없이 고착된 상태를 결코 포기하지 않는다. 용, 짐승, 거짓 예언자들로 상징화된 원리 또는 독단적 주장과 동쪽의 왕들로 의미된 진리들 사이의 싸움은 길고도 격렬하다. 이는 몸체라는 교회 측면 뿐만 아니라 교인이라는 개인 측면에서도 길고도 격렬한 싸움이기는 마찬가지이다. 마음 속의 아마겟돈은 옛 설득력과 새 신앙 사이에 벌어지는 내향의 싸움이다. 모든 사람은 의로운 자처럼 신앙으로 살지 않고 믿음 만에 의해 살고 싶어한다. 과거 이스라엘이 이집트에서 해방되었을 때, 주님께서는 그들을 가나안 땅으로 보내시되 더 지름길인 불레셋 지역을 통과하게 하지 않으시고 광야라는 길을 통과하게 하셨다. 그 이유는 그것이 확실했기 때문이다. 정복하는 이들에게 있어지는 싸움, 슬픔, 위로 등등이 스가랴서에 이렇게 기술되고 있다. “그 날이 오면, 내가 몸소 나서서 예루살렘을 침략하는 뭇 민족을 멸하리라. 내가 다윗 가문과 예루살렘 성민들에게 용서를 빌 마음을 품게 하리니 그들은 내 가슴을 찔러 아프게 한 일을 외아들이나 맏아들이라도 잃은 듯이 슬퍼하며 곡하리라. 그 날이 오면, 므기또 골짜기 하닷림몬에서 처럼 예루살렘에 곡성이 터질 것이다…그날이 오면, 샘이 터져 다윗가문과 예루살렘성민들의 죄와 때를 씻어주리라.” (12:9-11,13:1). 이 예언은 육으로 오시는 주님과 관계되고 있다. 그러나 이와 똑같은 상태가 영으로 오시는 주님에서도 발생되고 있다. 이런 차이는 있다. 둘째 강림의 날에 있는 싸움은 첫 강림 때의 싸움보다 더 격렬하다는 것이다. 첫 강림 때의 전투는 므기또이지만 둘째 강림 때의 전투는 아마겟돈이다. 기독교회는 유대교회가 추락했을 때보다 더 높은 상태로부터 추락했다. 교회가 더 밝은 빛에서 이탈할수록 더 큰 어둠이 드리운다. 선이 더 순수해지면 악한 자는 더 거칠어진다. 본 장에서는 아마겟돈에서 전투가 있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단지 용의 군대가 거기 집합했다고 언급하고 있다. 이 싸움의 결과로 서술되는 부분이 19장 19-21절에 있다. 거기서 짐승과 땅의 왕과 그들의 군대가 압도당하는 것을 살필 것이다.
17,18. “일곱째 천사가 자기 대접을 공중에 쏟았다; 그리고 거기 왕좌로부터 천국의 성전에서 나오는 큰 음성이 나와서 다 되었다 하고 말했다. 그리고 음성들, 번개들과 우렛 소리들이 있었다; 그리고 사람들이 땅 위에 있은 이래 있지 않았던 큰 지진, 너무나 큰 지진이 있었다.” 일곱째 나팔소리가 일곱째의 대접을 쏟는 것과 같은 모양새를 가졌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 이유가 소리는 어차피 공기를 매체로 전달되는바 일곱 번의 모든 나팔소리 역시 공중에 쏟아지는 격에 해당되므로 특별히 구분지어 말해질 수 없는 연유에서이다. 어쨌든 말할 수 있는 것 하나는 일곱째의 것들은 존재하는 사물의 상태의 마지막이라는 점에서는 똑같다. 일곱째 나팔이 쏟아진 공기란 인간의 생각을 상징한다. 태양 다음으로 공기는 자연계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이다. 이와 같이 생각은 애착 다음으로 인간 본성 중 가장 중요한 요소이다. 생각을 통해 애착은 마음 속의 모든 자질과 힘을 작동시키고 활성화한다. 폐와 몸의 관계와 같은 것이 지성과 마음이다. 숨쉬는 것이 전자에 해당된다면 생각은 후자라고 할 수 있다. 생각은 모든 것에 고루 미치고 모든 것을 표현하고 있다. 그런고로 대접이 공중에 쏟아졌다는 것은 신성한 진리의 행동이 교회의 모든 것, 마음의 모든 것 안에 즉각 있어졌다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일곱째 천사가 공중에 그의 대접을 쏟았을 때, “다 되었다” 라는 큰 소리가 울려 퍼진 것이다. 모든 상태가 명백해진다는 것은 끝이 충만에 이르렀다는 말이다. 이런 끝장이 여기서 선포되고 있다. 이 소리에 뒤이어 큰 소리와 번개와 천둥이 울렸다. 이는 모든 것이 전복됨을 뜻한다. 이것이 특별히 지진으로, 앞에서 진행되었던 모든 것보다 더 크다 라고 말해진 것이다. 이런 때를 예견하신 우리의 주님께서 이런 지진은 세상의 시작, 즉 교회의 시작 이래 결코 있지 않았고, 결코 있지 않게 될 환난이라고 말하셨다.
19-21. 이 지진은 대단해서 “큰 도성이 세 부분으로 나뉘어졌다, 그리고 나라들의 도성들이 무너졌다; 그리고 큰 바빌론이 하느님 앞에서 기억 안으로 와서, 그녀에게 그분의 노염의 분노의 포도주의 컵이 주어졌다, 그리고 모든 섬이 달아났다, 그리고 산들은 발견되지 않았다. 그리고 무게가 한 달란트나 되는 우박이 천국으로부터 사람들 위에 내려 오고 있다; 그리고 사람들은 우박의 재앙 때문에 하느님을 모독하였다; 그 이유가 그로 인한 재앙이 지독하게도 대단했기 때문이다.” 큰 도성과 모든 나라의 도시들이란 진리와 선, 또는 신앙과 선행에 관한 교리들이다. 도시가 세 조각이 나고 도성이 무너진다는 것은 그들의 교리가 산산조각이 나서 파멸된다는 말이다. 섬들이 도망을 가고 산들이 자취를 감추었다는 것은 마음 속의 진리와 사랑 속의 선 모두가 떠난다는 것, 이에 이어 우박으로 의미된 파괴적인 오류와 거짓들이 있게 된다. 우박 한 개의 무게는 한 달란트이다. 가장 무거운 은전(silver)의 무게 단어가 가장 큰 거짓을 상징하기 위해 고용되고 있다. 사람들은 우박의 재앙 때문에 하느님을 저주했다. 우박은 그들의 극악한 오류들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이것이 그들의 모독의 근원이고 진리의 근원인 말씀을 왜곡되게 한 근원이다. 이런 소요와 뒤집힘 중간에 “하느님께서는 그 큰 도성 바빌론을 잊지 않으시고 그 도성에게 당신의 분노의 잔을 마시게 하였습니다. 곧 심한 진노의 포도주를 마시게 하신 것입니다.” 이 주제와 이 구절 사이에 명확한 연결은 없다 해도 언어 자체는 관련성이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큰 도시가 조각이 나고 도성들이 무너질 때 큰 바빌론이 하느님의 기억 안으로 왔다.
이집트와 바빌론은 포로로 잡혀있게 되었던 두 지역이다. 전자는 이스라엘 후손으로서, 후자는 유다의 후손으로서 포로가 되었었다. 그래서 이 두 지역은 교회가 자기 아버지의 품을 떠날 때 그들을 지배하게 되는 두 원리들을 표현한다. 먼저 오류(error)가, 그 다음 악(evil)의 원리 아래 있게 된다. 먼저 왜곡된 과학, 그 다음 자아찬양 아래 있게 된다. 초기 교회의 내리막길은 지식의 나무를 먹음으로 시작되어 바벨탑을 건립함으로 끝을 냈다. 이스라엘 교회는 이집트에 억류됨으로 시작해서 바빌론의 포로로 끝을 냈다. 기독교회는 아타나시안 신조(Athanasian Creed)로 시작해서 천주교(popery)의 건설로 끝을 냈다. 하강을 위한 이 교회의 첫 큰 단계는 이집트, 또는 왜곡된 신학적 과학이었고 둘째 단계는 바빌론 또는 보편적 지배를 탈취한 것이다. 개혁교(Reformation)는 초기 기독교의 신앙을 회복시키지 못했다. 오히려 교회(the church)를 아타나시안 신조로 되돌아가게 하되 대속함의 오류에 신앙으로 구원받는다는 오류(salvation by faith in subsitutional atonement)를 더 보탰을 뿐이다. 거짓 과학과 이기적인 지배라는 두 원리가 체현된 이 두 신조는 서로 친밀하게 연결되고 있다. 전자가 명백해지면 후자를 기억나게 한다. 이 기억함은 두 신조의 상태와 품성에 관한 서곡일 뿐인데 그 상태와 품성이 다음 두 장의 주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