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왕기상 12장 해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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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왕기상 12장

유다와 이스라엘의 두 왕국

하느님께서 휘저어 솔로몬 왕에 맞서게 손을 들어준 사람은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이었다. 그는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의 분리가 표현한 영적인 분리의 기초가 놓인 원리를 명확히 표현하고 있는바 그의 역사를 더 들여다 볼 필요가 있어 11장으로 되돌아 가본다.
여로보암에 관해 우리가 배운 첫 사실은 그가 에브라임 지파였다는 것이다. 요셉의 둘째 아들의 후손인 에브라임 지파는 므나쎄 지파가 마음의 자발적 부분을 표현한데 비해 지적 부분을 표현했다. 그러므로 요셉의 두 아들은 두 왕국으로 결국 나뉜 유다와 열 지파 사이에 있는 특징적 차이점과 함께 이스라엘 온 가문으로 표현되는 것의 축소판(epitome)이었다. 에브라임이 마음의 지적 기능을 표현했듯, 그는 또한 과정의 문제로서 영적 원리 자체를 표현했다. 여로보암의 아버지 쪽의 이름도 이에 부합되고 있다. 느밧이 뜻하는 것은 찾는 것, 관심인데 이것은 지적 시야를 표현하는 단어이다. 그러나 여로보암의 어머니는 과부였고 그녀의 이름은 스루아였다. 과부란 선함 가운데 있으면서 진리를 바래는 자이다. 그러나 여로보암의 과부된 어머니는 나병 환자(Leper)라는 이름도 달고 있었다. 따라서 그녀가 표현한 선함은 악과 혼합된 것, 어느 정도 까지 모독된 것을 표현하고 있다. 참으로 이런 것들은 고대 교회, 또는 영적 교회를 구성한 이들의 지성의 뿌리였고 이는 영적 천국 자체 의 뿌리도 되고 있다. 영적 차원과 더불어 근원적인 의지는 부패되고 이것은 결코 갱생되지 않는다. 마치 하느님의 모양에 따른 천적 차원이 잃어진 것과 같다. 영적 차원과 함께 새로운 의지는 마음의 지적 부분에서 형성되어진다. 진리를 수단으로 형성되는바, 이 의지는 선함으로부터의 의지라기 보다는 진리로부터의 의지이다. 다시 태어난 이들과 함께 있는 이 새로운 의지는 옛 의지를 종속시키고 마음의 실제적 힘을 잡고 근원적 기능을 경질시킨다. 그럼에도 옛 의지는 완전하게는 결코 파괴되지 않는다. 모든 사람은 부패된 의지를 느낀다. 때로 이 부패된 의지는 하느님의 자녀 조차도 통곡의 원인이 될 경우도 있다. 이 나병적인 의지는 바울로 하여금 그가 선을 행할 때 악이 자기와 함께 현존했음을 선포하게 했다. 그래서 그는 영의 쓰라림에서 이렇게 외친다. “누가 이 사망의 육체로부터 나를 해방시킬 것인가?” 이것은 하느님의 마음에 종속되지 않는 힘, 종속될 수 없는 육적인 마음이다. 비록 이 육적인 것이 영적인 것과 함께 회복되거나 소멸될 수 없다 해도 종속될 수 있다. 이 사실의 모두에서 똑같은 사도가 실험적인 증거를 낳고 있다. 다투는 두 법칙에 관해 말한 후 이렇게 소리친다. “나는 과연 비참한 인간입니다. 누가 이 죽음의 육체에서 나를 구해줄 것입니까? 고맙게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구해 주십니다. 나는 과연 이성으로는 하느님의 법을 따르지만 육체로는 죄의 법을 따르는 인간입니다” (로마서 7:24,25).
여로보암은 힘센 용사였다. 솔로몬이 밀로궁을 짓고 다윗의 성을 보수할 때 그는 왕의 마음에 들어 요셉 지파의 부역 총 책임자로 임명되었다. 밀로궁은 시온산의 요새였다. 그 성은 애당초 다윗이 지었다 (사무엘하 5:9). 요셉 가문의 임무는 “왕 솔로몬이 자신이 산 집, 그리고 밀로궁, 주님의 전, 예루살렘의 성곽을 보수하기 위한” 것임은 의심할 바 없다 (9:15). 다윗성의 터진 곳을 수리하게 된 여로보암은 결코 수리될 수 없는 다윗의 왕국의 깨어짐에 도구가 되었다. 어쨋든 솔로몬, 여로보암, 요셉 가문 모두는 좋은 일을 하고 있는 셈이다. 그리고 한 가지 불필요하고 일치 안 되는 것은 왕국이 둘로 깨지는 것 일 게다. 그러나 솔로몬과 그의 신하는 이 쪼개짐을 위해 제각기 다른 길에서 준비하고 있던 참이다.
솔로몬 왕에 맞서 여로보암의 손을 들어 준 원인은 비록 그로 하여금 솔로몬 생전에는 적대적 행동을 금했다 해도 포부의 동기는 가슴에 담고 있었을 것이다. “여로보암이 예루살렘에서 나가다가 실로 출신의 예언자 아히야를 길에서 만났다. 그 예언자는 말쑥한 새 옷을 입고 있었다. 들에서 단 둘이 있게 되자 아히야는 자기가 입고 있던 새 옷을 벗어서 열두 조각으로 찢었다. 그러면서 여로보암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이 열 조각을 받으십시오. 이것은 이스라엘의 하느님 야훼께서 하시는 말씀입니다.’ ‘잘 들어라. 내가 솔로몬의 손 안에 있는 이 나라를 찢어 너에게 열 지파를 주리라.’” 이 표시의 의미는 이스라엘의 왕국에 관련된 것임은 누구나 쉽게 파악할 수 있다. 그러나 하나인 왕국이 나뉨에 관련되어 지니는 이 구절의 상징성은 쉽게 파악되지 않을 것이다. 겉옷은 진리의 상징물이다. 그 이유가 겉옷이 몸을 감싸듯 선을 감싸는 것이 진리이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아론의 겉옷을 준비하는데 아주 세세한 지침이 내려졌기도 하다. 아론의 겉옷은 주님의 영적 왕국을 표현했다. 이 표징성 때문에 하느님 자신도 빛을 겉옷같이 두르셨다고 말해지고 있다. 그 이유가 그분이 입으신 겉옷은 그분의 신성과 선함을 덮고 있는 신성한 진리이기 때문이다. 또한 나뉠 수 있거나 여러 조각으로 찢어질 수 있는 게 진리이다. 선함은 하나이나 진리는 선을 어떻게 수용하느냐에 따라 다양해진다. 설사 진리가 나뉘지 않는다 해도 수정, 변경, 가감되면서 선과 연결된다. 제아무리 인간에 의해 다양한 진리들이 받아들여져도 모든 이가 선함에 의해 작동된다면 모든 이는 하나이다. 비록 교회가 교리 측면에서 다양해 있을지라도 주님의 교회는 선함과 사랑 측면에서는 하나일는지 모른다. 천적 천국과 영적 천국이 진리 측면에서는 구분되지만 사랑 측면에서는 합일되어 있다. 주님의 교회는 진리와 교리 측면에서는 나뉘어 있지만, 영 안에서는 하나일는지 모른다. 비록 이스라엘이 두 왕국으로 나뉘어졌지만 서로는 평화로이 살 수 있는 것과 같다. 천국이 두 왕국으로 나뉘어 있지만 선행을 수단으로 하나 되어 있다.
첫 주님의 교회의 끝과 두 번째 주님의 교회의 시작과 더불어 의지와 이해성이라는 인간의 두 기능 사이에 결과 된 분리는 천국이 구분되는 두 왕국으로 나뉨에 필수적으로 수반되고 있다. 천국은 그 안에 있는 것들의 상태와 형체로부터 천국 자체의 형태와 상태를 갖는다. 거듭나는 사람은 아주 작은 천국이다. 천국은 가장 큰 거듭난 사람이다. 의지와 이해성의 기능들이 한 인물 안에서 분리될 수 없게 하나 되어 있다면 큰 사람 안에서의 그들의 표징성도 분리된 존재로 있을 수 없다. 인간 마음이 하나로만 있다면 거듭난 인간 마음으로 구성되는 천국도 하나이다. 인간 마음이 나뉘게 되자 천국 역시 그에 상응되는 나뉨이 실행되었다. 두 왕국으로 천국의 나뉨은 육을 입으시는 때까지 거행될 수 없었다. 고대 교회가 영계에서 마지막 심판에 의해 완전한 끝을 맞이할 때 까지 천국은 나뉠 수 없었다. 이 사건을 두고 주님께서 언급하신 대목이 있다. “이제 이 세상의 심판이 있다. 지금 이 세상의 왕들이 내던져질 것이다.” 그리고 말하셨다. “나는 사탄이 번개 같이 천국으로부터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 여기서 이 세상은 영적으로는 주님의 교회를 의미한다. 그리고 사탄은 영계에서 출몰하고 천국에 반대하는 저 세계에 있는 이들을 뜻한다. 그들은 천국에 승강 되기 앞서 준비를 위한 영역이라 할 수 있는 중간 상태에서 주님이 일어나시고 높은 곳에 승강하실 때 까지 보존되고 있었다. 사탄이 떨어졌다는 천국은 가상의 천국, 즉 지상의 주님의 교회에 있던 불성실한 자와 거짓된 자들이 영계에서 자신들을 위해 형성된 천국이고 이 안으로 육을 떠난 모든 영들이 처음 입장한다. 홍수 시대로부터, 그리고 노아 시대 또는 고대 교회가 개시된 때로부터 중간 상태에 보존된 신실한 자들이 영적 천국 또는 두 번째 천국 즉 영적 왕국이라 말할 수 있는 천국을 이루었다.
그러나 두 번째 천국 즉 영적 왕국은 영들의 세계에서 보존되었던 이들 만으로 구성되지 않았다. 천적인 주님의 교회였던 태고 교회에 속했던 이들로 형성된 천국, 근원적으로는 이 천국 만이 천국을 구성했었는데, 아직도 천적 왕국을 구성하며 영적 왕국과 구분되어 있다.
비록 근원적으로 한 천국, 한 왕국밖에 없는 게 사실이지만 그 안에는 지금 보편적 천국을 구성하는 두 왕국과 세 천국에 관한 모든 필수 요소를 가졌다. 큰 사람(The Grand Man)은 위와 같은 점에서 하나의 개인적인 사람이다. 그의 첫 창조로부터 인간은 정신적으로 의지와 이해성 그리고 행동으로 구성되었다. 홍수 때에 인간 마음의 조건에 있어진 변화를 수단으로 마음에 더해지거나 빠져 나간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똑같은 기능이 여전히 남아 있지만 달라진 것은 세 기능 서로에 관계된 형편이 달라진 것이다. 그들은 분리된 개별성을 획득했다. 이는 독립된 존재는 아니고 분리된 존재일 뿐이다. 마음은 이중적인 의식 세계 같은 것을 획득했다. 즉 생각함과 뜻함이 따로 움직인다는 말이다. 큰 사람 역시 근원적으로 보면 의지, 이해성, 행동으로 구성되고 있다. 이것들은 세 천국과 두 왕국의 요소들이다. 천적 천국은 큰 사람의 의지에, 영적 천국은 이해성에, 가장 바깥 천국은 행동에 속해 있다. 근원적으로 모든 이것들은 하나로 합일되어 있다. 마치 이것들은 한 개인의 행동이, 구분된 의식이 없고, 구분된 행동도 없는 듯 동시에 나타나는 것과 같다. 천국이 두 왕국을 형성했을 때 이 천국은 고대 교회 또는 영적인 교회에 속했던 이들로 이루어진 두 번째 천국으로부터 형성된 게 아니라 아담적 교회 시대 동안 이 세상에 살았던 이들로부터 형성된 천적 천국 자체가 나뉨으로 형성되었다. 천적 천국은 내적, 외적 측면이 필수적으로 있었다. 하느님께서 인간의 본성을 입으실 때 그것이 상태의 변화와 조건의 변화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고, 신성화 하심으로 그분의 인성을 천상 천하에 있는 모든 질서의 큰 원형(Archetype)으로 만드셨는 바, 그분께서는 이 세상에 있는 인간 본성 안에서 만드신 것에 상응되도록 천국 안에서도 유기적인 변화를 만드셨다. 주님의 인성은 신성한 천적, 신성한 영적, 신성한 자연적 등차에 계신다. 그분 안의 이것들은 세 천국들, 즉 천적, 영적, 자연적 천국의 원형이다. 그러면서 이 세 천국들은 두 왕국을 구성하고 있다. 천적, 영적 천국들이 두 왕국을 형성한다. 그이유가 가장 낮은 천국, 즉 자연적 천국은 그 자체 하나의 왕국을 형성하지 않으나 천적, 영적 왕국의 기초가 되고 있다. 이 바깥 천국은 두 종류의 천사들, 즉 천적-자연적, 영적-자연적 천사들로 구성된다. 그리고 천적-자연적 천사들은 천적 천국의 바깥들, 영적-자연적 천사들은 영적 천국의 바깥을 형성하고 있다.
이미 말한 바 같이 천국은 하나의 천국, 하나의 왕국을 형성하되 그 안에 세 천국들의 요소가, 한 왕국 안에는 두 왕국의 요소가 들어 있다. 천적 왕국은 실제적으로 존재하고, 영적 왕국은 잠재적으로 존재하는데 영들의 세계에 있는 이들 안에서 뿐아니라 천국 안에 있는 이들의 부분 안에서도 그렇게 존재한다. 각 천국들 안에 있는 것 같이 한 천국도 내적, 외적 측면으로 구성되고 있다. 내적 측면은 천적인 것, 외적 측면은 영적인 것이다. 내적 측면은 주님을 사랑함이고 외적 측면은 이웃을 사랑함이다. 주님을 사랑함은 천적인 원리이고 이웃을 사랑함은 영적인 원리이다. 주님이 영화하신 결과로 거행된 천국들의 배열에서 천적 천국의 외적 측면은 퇴조해져 결국 영적 천국의 핵심이 되었다. 여기에 영들의 세계로부터 승강된 이들이 추가되었다. 이 모두가 함께 두 번째 천국과 영적 왕국을 형성했다. 그러므로 천적 천국의 외곽을 형성했던 이들이 지금은 영적 천국의 내부가 되었다. 그 이유가 천적 천국의 바깥에 해당되는 이웃을 사랑함이 영적 천국에서는 안쪽에 해당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두 천국이 서로 구분되고, 두 왕국을 이루고 형성하면서도 그들은 이웃 사랑을 수단으로 합일되어 있다. 어쨋든 이들 안에 두 왕국이 존재하듯 이웃다운 사랑의 특성에서는 차이가 있다. 비록 이것과 저것이 동질 관계에 있는 것은 사실이나 그렇다고 똑같다는 말은 어울리지 않는다. 천적 천국에 있는 이웃을 사랑함은 상호 간의 사랑이고 영적 천국에 있는 이웃을 사랑함은 선행이다. 상호 간의 사랑은 마치 형제 자매 사이에 있는 사랑 같고, 선행은 친구나 연고자들 사이에 있는 사랑과 비슷하다. 즉 혈족과 동족 사이의 차이점 같을 것이다. 어쨋든 이러한 애착들은 비록 서로는 차이가 있다 해도 서로서로에 부응되고, 두 천국과 왕국을 함께 연합하는 수단이다. 천국이 두 왕국으로 구분됨, 그들 사이에 있어 연결해주는 고리는 과거 천국 자체를 표현한 가나안으로 진입한 후의 열두 지파의 나뉨에서 표현되고 예증될는지 모른다. 아홉 지파는 가나안 땅에 그들의 상속분을 할당 받았고 두 지파는 요르단 강 저쪽 길르앗 지방에 자리 잡았다. 그러나 나머지 지파의 경우, 그들 중 반 지파는 가나안에, 또 반 지파는 길르앗에 정착했다. 이 지파는 므나쎄 지파였는데, 그 지파는 천국에 있는 두 왕국이 연합되고 함께하는 수단이 되는 원리를 표현했다.
한 천국이 두 왕국으로 나뉨은 스가랴의 예언, 즉 주님의 오심과 구속과 심판이라는 그분의 일에 관련되는 예언에서 상징적으로 이렇게 묘사되고 있다. “그 때 야훼께서 싸움이 터질 때마다 적진을 향해 돌진하셨듯이 출동하시리라. 그 날, 그가 예루살렘을 동편에서 마주 보고 있는 올리브 산에 우뚝 서시면, 올리브 산이 갈라져 절반은 북쪽으로, 절반은 남쪽으로 물러나 큰 골짜기가 동서로 뻗을 것이다” (14:3,4). 그리고 더 이어지는 예언이다. “빛이 청명하지도 않고 어둡지도 않을 것이다. 밤도 낮도 아닌 야훼 홀로 오시는 그 날 저녁 때에 빛이 있을 것이다. 그 날에 예루살렘에서 생명의 물이 터져 나와 반은 이전의 바다로, 반은 뒤쪽의 바다로, 여름과 겨울에 흘러 가리라. 야훼께서 온 세상을 통치하는 왕이 되시는 그 날에 온 세상에는 한 분 주님만 계시고 그분의 이름은 하나일 것이다” (14:6-9). 이 문단에서 저녁 때란 심판이 거행되는 주님의 교회의 마지막 때이다. 그 이유가 그 때에는 악한 자에게는 저녁 때이지만 선한 자에게는 빛이 있는 때이기 때문이다. 이런 것은 이 구절의 세부 사항들에 포함되어 의미되는 영적 의미로부터 나타난다. 여러 나라에 맞서 싸우러 앞장 서시어 나가시는 여호와는 악한 자에 대한 마지막 심판을 의미한다. 앞장 서시고 싸운다란 심판을 집행하는 것이고, 여러 나라란 악들이다. 이것이 신성한 사랑으로부터 결과 된다는 것은 주님의 발이 올리브 산 위에 있으셨음으로 의미된다. 그 이유가 올리브 산이 주님과 관련될 경우 이는 신성한 사랑을 의미하고, 예루살렘은 진리 측면에서의 주님의 교회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동쪽은 신성한 선함을 의미한다. 올리브 산의 한 가운데가 갈라져 반 쪽은 동쪽을 향하고, 바다를 향해 움직여 그 사이에 큰 골짜기가 있게 된다는 것은 악 가운데 있는 자들로부터 선한 자를 분리하심을 뜻한다. 그 이유가 이미 언급했듯, 올리브산은 신성한 사랑을, 동쪽은 신성한 선 가운데 있는 이들을, 바다는 악 가운데 있는 이들을 뜻하기 때문이다. 산의 절반, 절반이 남쪽을 향해, 북쪽을 향해 움직임은 선으로부터 파생된 진리 가운데 있는 이들을 분리함을 의미한다. 위 설명에서 산이 쪼개짐이 선한 자로부터 악한 자를 분리함을 뜻한다고 말해지는데, 이것이 심판의 직접적인 결과이다. 그러나 이 의미 안에는 심판으로 결과되는 또 다른 분리도 있다. 이렇게 읽어지기 때문이다. “올리브 산은 사랑과 선행의 선의 측면에서의 천국을 표현했고, 이 대목에서 취급되는 주제는 주님과 그분의 오심에 관한 것이다. 즉 올리브 산은 사랑과 선행의 선, 이것들이 주님의 교회를 구성하는바 주님의 교회도 의미하고 있다. 주님의 교회가 유대 국가로부터 퇴조되어 이방인들 사이에서 건설된다는 것이 산이 동쪽, 서쪽을 향해, 남쪽, 북쪽을 향해 쪼개짐으로의미되고 있다.” 이는 주님의 교회, 천국에 적용될 때의 의미인바, 그 안에서 결과되어진 분리를 수단으로 두 왕국으로 나뉜 것을 묘사하고 있다. 이 나뉨은 이해성을 통치하는 의지가 계속 부패해져 급기야 “인간 심정의 생각 속의 모든 궁리는 계속 악할 뿐”일 때 마음의 두 기능 사이에 기적적으로 결과된 나뉨이었다 (창세기 6:5).
한 왕국이 둘로 분리된 한편, 한 천국은 셋으로 나뉘었다. 이 세 천국은 과거 주님의 교회를 향한 세 처방, 즉 태고 교회, 고대 교회, 이스라엘 교회가 영계에서 천적, 영적, 자연적 천국을 형성하고 있다. 지상에서 주님의 교회에 대한 이 세 처방은 종교적 삶에서 내려가고 있는 세 가지 인간의 상태로부터 발생된 것이다. 그러나 이 세 천국은 두 왕국만을 형성하고 있다. 그 이유가 인간의 본질을 이루는 기능은 두 가지, 즉 의지와 이해성, 마치 육체의 두 큰 기관, 즉 심장과 폐가 있듯, 영적 생명의 원리의 두 가지, 즉 선함과 진리, 또는 사랑과 신앙이 있듯 두 가지뿐이기 때문이다. 참으로 세 번째 것도 있다. 즉 행동, 또는 종교에 있는 일이다. 그러나 이것은 위 두 기능이 병합될 경우의 결과로 있는 사용(use)이다. 이는 최말단 형체이다. 행동 또는 일이라는 이 최말단은 이스라엘 교회 처방인데 앞서 두 교회 처방에서 이미 있게 된 것이다. 따라서 일이라는 처방에는 이전의 두 처방으로부터 내려오는 생명을 담고 있을 뿐 그 자체로는 생명이 없다. 다시 말해 이스라엘 교회는 내용상으로는 교회가 아니고 교회라는 이름만 빌려 단순히 표현된 것일 뿐이다. 이스라엘 처방이 지닌 큰 덕목, 즉 두드러진 특징은 순종, 즉 법이나 의식에 담긴 의미나 목적을 지각함도 없이 단순히, 무조건 순종하는 것이다. 따라서 세 천국에서 가장 높은 천국은 사랑이고, 둘째는 선행, 마지막은 순종이다. 이 세 천국이 인간 본성의 세 요소, 영적 생명의 세 등차로부터 생산되어 왔는바. 이 세 요소는 지상에서의 방랑 생활 동안 인간 영혼의 그릇이요 영원한 거처가 되고 있다. 주님이 육을 입으신 때에 수행하신 일 중의 하나였던 위와 같은 천국의 배열은 과거의 결과였고 미래의 인류의 상태에 적합하다. 그러므로 불완전한 인간 상태에 신성한 선함과 지혜가 압축되어 있다.
열 지파가 반역하고 여로보암 아래 두 번째 왕국이 건설되자 솔로몬의 왕위 계승자 르호보암은 “유다 가문과 베냐민 지파에 동원령을 내렸다. 그는 정병 십팔 만을 뽑아 이스라엘 가문을 무찌르고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의 국권을 되찾으려고 하였다. 그러는데 야훼의 말씀이 하느님의 사람 스마야에게 내렸다. ‘유다왕,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과 유다와 베냐민의 모든 집안과 그 밖의 다른 백성들에게 이 말을 전하여라. 야훼가 말한다. 이렇게 된 것은 다 나의 뜻이니 너희는 동족인 이스라엘 백성을 치러 올라가지 말고 각자 집으로 돌아 가거라.’”
첫 번째 본래의 모습을 보전했더라면 주님이 세상에 오실 필요도 없었고, 천국 역시 교회나 마찬가지로 하나였을 것이다. 그러나 교회의 타락은 예견되었고 그 치료약 역시 준비되어 있었다. 하느님이 육 안에서 드러내심은 신성한 사랑이 본래의 모습을 이탈한 인간의 조건에 준 대답이었다. 신성한 선함과 자비의 이런 기적적인 행동의 모든 결과는 인류의 구원과 행복을 설비하는 수단이었다. 주님께서는 아래쪽으로 향하는 인간을 뒤따르시면서 인간의 상태나 필요성에 그분의 처방이 맞추어지고 천국 역시 변경된 조건에로 그 자체 건설되었다. 인간의 기울어짐과 그 회복을 설비한 수단들이 이미 기울어 버린 인간의 상태로부터 더 높은 상태에로 승강하게 할지의 여부는 여기서 논해져야 할 부분은 아닐 것 같다. 어쨋든 희망 있는 대답이 있을 거라 생각된다. 인류의 역사는 개인의 역사와도 비슷하다. 개인적 인간 뿐만아니라 집합적 인간도 각기 유아기, 소년기, 성년기를 가지고 있다. 참으로 타락된 자의 유아기와 타락하지 않은 자의 유아기에는 중요한 차이가 있다. 둘 다 순진으로 자기의 특성을 기술하고 있다. 초기 인간의 순진은 현재의 인간의 경우 같이 무지의 순진은 아니었다. 본래 지혜는 순진에 새겨졌다. 마치 본능이 동물에게 자동으로 상속되는 것과 같다. 지금 지혜는 인간에게 상속되는 게 아니고 습득해야 한다. 인간은 무지한 채 태어나서 모든 것을 배워야한다. 그는 지식을 획득해야 하고 이 지식을 발판으로 총명을 획득하고, 이 총명을 발판으로 지혜를 획득해야 한다. 그러므로 현재의 인간은 초기의 인간이 끝난 곳에서 시작한다. 그러나 초기의 지혜는 지금 달성 가능한 지혜와 달랐다. 초기 인간과 더불은 지혜는 지식을 응용한 게 아니었다. 우리에게 지식이란 것이 있듯 초기 인간에게는 지각이 있었다. 그리고 이 지각은 사물의 표면에 그치는 품질 만을 파악한 게 아니라 내면의 본성과 영적 의미를 관통했다. 그의 과학은 창조자와 피조물 사이의 관계, 천국적인 것과 지상적인 것 사이의 관계를 인식하는 것이었다. 지금 우리는 지상적인 것들의 과학으로 시작하고 이것이 우리가 달성이 가능한 습득물의 공통된 기초를 형성한다. 한 가지 의문이 있을 수 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가 가지는 기초는 본래의 것 보다 더 높은 구조물을 지을 수 있을까? 가능하리라 본다. 인간이 타락하지 않았더라면 주님이 육을 입으심도 불필요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 큰 사건이 거행되고 그분의 인간성이 신성화 되어 천국의 태양에 새로운 광휘가 더하여졌다. 주님께서는 그분의 사랑과 지혜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인류를 위해 하셔 왔다. 각자가 지상에서 거듭남을 어느 수준에서 달성하든 그를 위한 저택이 주님의 신성한 지혜로 예비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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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왕기상 11장 29-35절 해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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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왕기상 11장 29-35절

예견된 열 지파의 반역

우리의 작업은 솔로몬 통치의 끝과 함께 마쳐야 되겠지만 이스라엘 첫 세 왕의 표징적 역사의 완성된 관점에 필요한 설명이 본문의 사건을 가지고 있어져야 할 것 같다. 이 첫 세 왕의 통치가 표현했던 주님의 위대한 일은 그분의 부활, 또는 그분의 승천에서 조차 완성되지 않았고, 성령 강림절에 사도들에게 그분의 영을 쏟아 부으시는 가운데 완성되고 있다. 이리하여 그분의 신성한 일의 회전은 완성되었다. 즉 그분의 영의 확산과 더불어 완성된 것이다. 예수께서 지금 완전히 신성화 하셨기 때문에 충만함 가운데 그분의 영의 유포가 있어진 것이다. 이를 수단으로 사도들은 높은 곳으로부터 오는 능력이 수여 되었고, 주님의 교회는 지상에서 실제적으로 개시되었다. 세 왕의 통치가 솔로몬에서 끝난 게 아니라 두 왕국으로 지파가 갈라지는 직접적인 결과로 이어지고 있다. 이는 솔로몬의 죄로 인해 주님께서 발표하셨던 일이다.
지파가 두 왕국으로 갈라지는 것, 비록 이것이 솔로몬의 죄와 르호보암의 우둔함에서 직접 비롯되었다 해도 이는 이전에 하나로 존재했던 주님의 천국이 두 왕국으로 분리되는 사건을 표징하였다. 만일 인간과 지상적 예징(type)과 신성과 천국적 대형(antitype) 사이의 다툼이 아니라면 위의 사건 역시 불일치가 있는 듯 여겨질 것이다. 솔로몬의 죄의 결과인 국가적 재난은 주님의 정의의 결과인 천국적 이익이다. 그럼에도 이런 불균형은 겉치레일 뿐이다. 이 사건이 표현하는 것은 사람이 아닌 직능 측면이라는 일반적 진리 외에도 사제와 예언자 그리고 왕은 주님과 그분의 교회를 표현한다는 특별한 진리도 있다. 그들은 주님 자신의 참된 예징이었다. 아론이 제단에서 의식을 집전했을 때, 그는 주님을 표현했다. 그가 금송아지를 만들었을 때, 그는 그분의 백성을 표현하였다. 호세아가 백성에게 그들의 죄를 질책하고 심판을 받는다고 위협했을 때 그는 주님을 표현했고, 그가 창녀인 아내를 데리고 가라는 명령을 받았을 때 그는 주님의 교회를 표현했다. 다윗이 이스라엘의 적과 맞섰을 때 그는 주님을 표현했고, 그가 백성의 수를 세었을 때 그는 주님의 교회를 표현했다. 주님이 그분을 표현한 성직자나 예언자 또는 왕들과 다른 점은 그분께는 악이 없다는 것, 그분의 입에서는 어떤 간교함도 없으셨다는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는 주님이 그분의 교회를 표현하실 수 없었다. 비록 그분이 하셨던 모든 일에서 그분께서 백성을 표현하지 않았다 해도 그분이 고통 받으신 모든 것에서는 그분의 교회를 표현하실 수 있었다. 어떤 예언자가 그들 사이에 있는 주님의 교회의 상태를 백성의 상태에 대한 표시로 단순히 상징적 행동을 하도록 명령받았듯이 주님께서도 그분이 행하셨고 고통 받으셨던 것들의 일부에서는 그 당시 형성되어저 온 주님의 교회의 상태를 백성에게 표시로서 보여 주셨다. 주님은 말씀이셨다. 유대인이 그분에게 개인적으로 저지른 모든 것, 즉 그분께서 그들의 손아귀에서 고통 받은 모든 것은 유대적인 주님의 교회가 말씀에 저지른 것을 표현했다. 그분의 고통들은 주님의 교회의 상태에 대한 표시였다.
열 지파의 반역, 그리고 이스라엘 국가가 두 왕국으로 영구히 갈라짐에 있는 예징과 대형 사이의 불균형은 겉의 차원일 뿐이다. 하나의 천국이 두 개의 구분되는 천국으로 나뉨은 비록 신성한 배열, 그리고 구속과 신성화 하심이라는 주님의 일의 결과일지라도 아직은 그 자체 불완전함이었다. 그래서 인간 마음의 변경된 조건의 결과는 신성한 선함과 지혜에 의해 또 다른 타락으로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예방할 목적으로 생산되어 졌다.
인간의 마음은 두 개의 큰 능력(faculty)으로 구성된다. 이는 인간 본성에 필수인 의지와 이해성이다. 이 능력 덕택에 인간은 자유와 합리성을 소유하고 있다. 이를 수단으로 인간은 본능과 욕구로부터 행동하는 창조된 모든 동물과 구별된다. 이 능력 덕택에 인간은 창조를 수단으로 하느님의 모양과 형상이 되고 있다. 그 이유가 하느님은 신성한 의지와 이해성으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느님 안의 이 능력들은 능력이 아닌 힘(power)이다. 하느님 안에서 의지는 무한한 사랑이고, 이해성은 무한한 지혜이다. 인간 안에서 의지는 그분의 사랑의 유한한 분량을 하느님으로부터 받는 창조된 유한한 수용 능력이고, 이해성은 하느님으로부터 유한한 분량의 그분의 지혜를 받는 수용 능력이다. 이리하여 인간은 그분의 사랑으로부터 사랑하는 능력을, 그분의 지혜로부터 슬기롭게 추론하고 생각하는 능력을 지닌다.
그러나 인간은 의지와 이해성을 소유한 덕택에 하느님의 형상 만을 지닌 게 아니라 의지와 이해성이 하나 됨으로 분리 안된 한 마음을 형성하고 있다. 하느님은 그분의 신성한 의지와 이해성, 또는 무한한 사랑과 지혜를 가지셨기 때문에 하느님이신 게 아니라 그분의 의지와 이해성, 또는 그분의 사랑과 지혜와 완전하게 하나 되어 언제나 행동되기 때문이다. 그분의 사랑은 그분의 지혜 속에 있고 그분의 지혜는 그분의 사랑 속에 있다. 따라서 그분의 사랑은 지혜의 사랑이고 그분의 지혜는 사랑의 지혜이다. 그런고로 그분의 사랑은 지혜롭게 행동될 수밖에 없고 그분의 지혜는 사랑스러움 외 달리는 행동될 수 없는 것이다. 이외에도 사랑은 신성한 속성에서 실재(Esse)이고 지혜는 실체(Existere)이다. 하느님 안에 있는 사랑은 지혜의 부모이고 지혜는 사랑의 산물이다. 그래서 사랑은 지혜 안에 있고 지혜는 사랑 안에 있다. 사랑은 영원하신 아버지, 지혜는 영원하신 아들이다. 이렇게 성경이 의인화(personified)하여 표현해 놓은 것을 희미한 수준이요 물질주의적에 가까운 신학들이 아예 어떤 한 인물(person)로서 바꾸어 놓았다. 이리하여 그들의 신조 안에서 아버지라는 인물, 아들이라는 또 다른 인물, 성령이라는 또 다른 인물이라 하면서 한편으로 세 인물이 한 분 하느님이라고 말한다. 각각의 세 사람이 어떻게 한 사람이란 말인가!
하느님의 창조된 형상으로서의 인간은 그의 의지와 이해성이 하나로 행동하도록 설계되어 있다. 인간의 본성에서 그의 의지는 실재(esse)이고 그의 이해성은 실체(existere)이다. 또는 그의 뜻함은 생각함의 부모이고 생각함은 뜻함의 산물이다. 인간은 뜻함 없이 생각함이 있을 수 없고 그가 생각함도 없이 의지가 발동되지 않는다. 그가 정직한 상태에 있는 한, 또는 그가 본시 창조된 질서의 상태에 있는 한 그의 마음은 하모니의 상태에서 하느님의 마음과 화합되어 행동한다. 그가 선한 것을 계속 뜻하고 있다면, 자연스럽게 그는 참된 것을 생각할 수밖에 없다. 그 이유가 의지 안의 선한 애착은 동시적으로 이해성에서 참된 생각을 생산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인간의 정상적인 상태요 조건이었다. 그러면 그의 마음은 하느님의 동산 에덴에 있는 것이다. 그의 생명나무로서 하느님을 사랑함이 들의 짐승, 공중의 새, 바다의 고기들, 땅 위 기는 것들이라는 보다 낮은 애착과 욕구를 지배하게 된다.
그러나 거기에는 생명나무 외에 선과 악에 관한 지식의 나무도 자랐다. 반대편에 있는 것의 잠재적 존재는 인간의 실제적 존재로부터 분리될 수 없다. 영적인 것과 불멸의 영혼, 물질적인 것과 멸해질 육체는 한 존재 안에서 서로 반대편에 있다. 하느님과 자아, 천국과 세상, 물질과 영, 감각과 이성, 필멸과 불멸은 생각하고 지각력 있는 인간에 관련해서이지 창조자 하느님에 관련된 사항은 아니다. 이러한 정반대되는 것들이 생명의 나무와 선,악에 관한 지식의 나무이다. 창조된 사람은 지각하는 능력과 선택하는 능력을 가졌다. 합리성은 지각하는 능력이고, 자유는 선택하는 힘이다. 인간은 그의 첫 창조 상태로부터, 자신의 최선의 상태에서 자아를 사랑함과 하느님을 사랑함, 세상을 사랑함과 천국을 사랑함, 육체를 사랑함과 영혼을 사랑함, 필멸을 사랑함과 불멸을 사랑함은 자신의 목적 차원에서 서로 반대편에 서있는바 인간은 반드시 그들 중에서 선택해야만 한다. 슬기로운 선택은 그에게 만족과 기쁨의 폭넓은 범위를 주고 있다. 그는 동산의 모든 실과를 자유롭게 먹을 수 있다. 지식의 나무의 실과는 먹어서는 안 되고 만져도 안 된다. 그 이유는 “먹을 경우 그는 정녕 죽을 것이기 때문이다.”
경험된 이득과 선함의 기쁨, 그리고 신성한 명령을 위반함에 대한 경고 등등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의지는 하느님의 의지를 압도하고 있다. 인간은 금지된 나무의 열매를 먹었고, 위협된 죽음이 그 위반자에 드리우고 그로부터 모든 사람에게도 드리우고 있다. 성경은 표현적인 상응에 의거 어떻게 이것이 거행되었나를 밝히 알게 하고 있다. 인간이 지닌 감각적인 것은 영적인 것을, 동물적인 것이 인간적인 것을 압도 한다. 뱀의 독이 피 안으로 들어 갔고, 이것이 육의 생명 또는 혼이다. 따라서 여인의 후손이 뱀의 머리를 짓부술 때까지 어떤 치료약도 죄가 가지고 오는 것을 되돌릴 수는 없었다.
타락이 결과 되어진 모양새와 그 조건이 표현한 관점은 일치되고 있는 바, 우리는 인간 본성의 조직, 즉 근원적으로 하느님의 손으로부터 왔고, 그분의 모양과 형상으로 형성된 인간 본성의 구조를 말해야 하지 않나 생각된다. 인간이 창조된 질서의 상태 안에서 의지는 마음의 최고 기능이었고 이해성은 의지의 영향 아래 동시적으로 행동했다. 그러므로 악이 소개됨에서 의지가 먼저 꾀어졌고, 이해성은 설득 당하는 영향력에 노출된 셈이었다. 뱀이 이브를 꾀었고 이브는 아담을 설득했다. 유혹의 첫 순서는 남자가 아니라 여자였는데, 유혹자는 만일 자기가 여자를 수중에 넣으면 남자도 당연히 손에 넣게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셈이다. 말씀에서 남자와 여자는 이해성과 의지를 표현하고 상징하고 있다. 그 이유는 남자는 여자보다 더 지성적이고, 여자는 남자보다 더 애정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신성한 계시의 거룩한 상징성을 수단으로 우리는 인간 본성의 근원적인 조건에 일치하는 가운데 어떻게 인류가 생명과 빛의 길로부터 어둠과 죽음의 길로 근원적으로 꾀여졌는지를 교훈 받게 된다.
이제 인류는 자기 조절의 힘이 없는 채로 악의 진로에 들어 서 있다. 이해성이 의지에 종속하는 바, 인간은 의지의 상태를 되씹어 볼 능력이 없다. 그러므로 의지의 품성을 식별해보는 지식도 없다. 따라서 의지의 상태를 판단할 수도 없고, 의지의 조건을 교정할 수도 없다. 의지가 선함을 사랑하고 이해성이 진리의 벗으로 있었을 때 같이 지금 의지는 악을 사랑하고 이해성은 잘못의 어둠에 있다. 소원함은 진실로 생각의 아버지이다. 애당초 인간은 느꼈던 대로 생각했고 기울어지는 쪽을 믿었다. 인간은자기 의지에 반대되는 쪽으로 확신시키는 것은 불가능했다. 이해성은 의지를 반영했을 뿐인 바, 의지의 형상 외에는 더 다른 것은 없었다.
인류가 위의 조건을 계속 견지했다면 인류는 필시 멸해질 때까지 아래쪽 만을 치닫으면서도 점검되지 않았을 것이다. 이것은 세상에 처음 건설된 주님의 교회의 처방 시대 동안 계속되었다. 따라서 우리가 아담이라 부른 원시적 특성으로부터, 즉 첫 교회, 또는 태고 교회 동안은 어떤 구조적 변화가 결과 될 수 없었다.
인류의 구원, 보존의 가능성을 만들도록 요구된 변화는 첫 처방이 끝에 다다랐을 때 급기야 또 다른 처방이 그 뒤를 이어야만 할 때 결과 되었다. 첫 처방의 끝장이 홍수로 묘사되었고, 아껴둔 것들의 보존, 이로부터 새로운 처방이 개시되었는데 이것이 방주를 수단으로 구원된 노아의 가족으로 묘사되었다. 홍수나 방주는 글자대로 납득될 수 없다는 것은 이미 널리 인정되고 있다. 이와 같은 홍수는 발생되지 않았고, 이와 같은 방주도 건축되어 물 위를 떠다니지 않았고, 방주가 지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동물의 보존도 가능치 않았다. 무지의 시대에서는 성서의 창조나 홍수 같은 것들에 관한 대화체들이 하느님에 대한 신앙을 견지하고, 그분의 능력을 믿는 수단으로 지극히 단순하게 받아들여 질 수 있었다. 그러나 신성하게 영감 된 말씀은 모든 시대를 위해 존재하는바 단순한 사람들을 위해서는 단순한 수준에서, 슬기로운 자에게는 지혜로운 수준에서 이해되어진다. 과학적, 세상적 지혜만이 신성한 지식에의 문을 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금물이다. 불칼을 지닌 거룹이 지식의 나무의 실과를 먹은 이들에 맞서 생명 나무로의 길을 지키고 있다. 신성한 지식에의 문은 겸허한 영, 주님을 경외하는 영 가운데서 입장을 허락해주시기를 바래는 이들에게만 열려진다. 특히 이들은 글자 속을 관통하고, 소생된 그의 영은 주님의 모든 말씀이 영이고 생명이다는 것을 추구하게 된다.
거룩한 기록의 영 안에서 이 기록은 마치 온 땅을 집어 삼켜 인간과 동물적 생명의 흔적 까지도 싹 쓸어간 대 홍수가 있었는 듯 여겨진다. 그러나 이 역사는 물의 홍수가 아닌 주님의 교회에 확 퍼져 나가 영적 생명의 호흡을 막히게 하고, 자비로운 섭리가 이런 일반적인 파괴로부터 아껴두신 것을 제외하고는 다 질식시킨 거짓의 홍수였다. 그러나 아껴둔 이 사람도 사실 멸해진 사람들과 같은 근원적인 조건, 즉 이해성이 의지의 영향 하에 완전하게 있었고, 의지는 이해성 까지 부패시킬 정도로 심하게 타락되었고, 이해성은 의지가 기우는 쪽으로만 찬성할 수밖에 없는데 어떻게 더 나은 상태로 회복이 가능했을까? 인류의 개혁을 설비하는 유일한 길, 그들이 새로운 처방 아래 새로운 시작을 가능하게 하는 한 가지 방법이 있다. 그것은 그들에게 자신의 심정 상태를 아는 힘, 심정의 상태를 교정하고 개선해 갈 목적으로 지식을 고용하는 힘을 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은 기적적으로 이해성을 의지로부터 분리시키셨다. 의지의 지배를 받는 조건에서 이해성을 이탈시킴으로 이해성에게 의지의 상태를 곰곰히 되씹어 볼 수 있고, 찬찬히 들여다 보고 진리의 빛으로 비추어 판결할 수 있어 의지의 상태를 교훈하고 계발할 수 있는 힘을 주었다. 이 기능의 열림이 물이 얼마나 빠졌는지를 보기 위해, 마른 땅이 들어 났는지를 확인하기 위해 인간의 생각을 상징하는 날개 달린 특사를 내보내고저 방주의 창문을 여는 것에서 의미되고 있다. 올리브 가지를 물고 온 비둘기는 사고의 날개를 펴서 마음의 상태와 조건을 탐사하는 새로운 지적인 힘의 실시와 결과를 보여주고 있다. 이해성이 의지에 복종하는 대신 마치 의지가 이해성에 종속되었는 듯 보여지게 되었다. 그 이유는 비둘기가 곤경의 홍수 위를 날고 있는 모습 같이 이해성은 의지 위로 들어 올려지고, 인간 마음에, 인류에게 평화를 들려주고, 희망을 불어 넣는 올리브 가지를 꺽어 올 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 마음의 두 기능(능력), 의지와 이해성은 인간 마음의 두 왕국이라 불리운다. 선은 의지를 규율하는 힘이고, 진리는 이해성을 규율하는 힘이다. 근원적으로 이 두 기능은 하나로 함께 행동되었는바, 한 왕국밖에 더 아니었다. 이 두 기능은 다윗과 솔로몬 아래 하나된 유다와 이스라엘 지파 같았다. 이 기능들의 분리는 마음의 두 왕국으로 분리되는 것이었다. 이것이 솔로몬의 아들의 통치 아래 있는 유다 왕국과 열 지파로 구성된 이스라엘의 두 왕국으로 표현되고 있다.
인간 마음의 두 기능들이 근원적으로 하나된 조건은 천사들의 천국의 근원적인 구성의 원인이 되어 있다. 즉 주님이 육 안에 오시기 전, 천사들의 천국은 한 왕국 만으로 조직되었다. 그러나 의지와 이해성 사이의 분리가 만들어짐은 육을 입으신 때에 두 왕국으로 천국이 나누어짐의 원인을 생산했다. 이것이 열 지파의 반역에 의해 표현된 큰 사건이다. 이로부터 영구적인 존재는 유다와 이스라엘의 두 분리된 왕국으로 전진하고 있다. 마음의 본질되는 두 기능의 분리는 본 장의 역사적 사건의 유추에서 명확히 보여진다. 지파들에 관련해서 악은 반역과 분리의 원인이었다. 유다 지파가 열 지파로부터 반역한게 아니라 열 지파가 유다 지파로부터 떨어져 나가 왕국을 세운 것이다. 인간 마음 안에서도 이와 똑같다. 악은 분리의 원인이다. 의지가 이해성에 반역하는 게 아니다. 이해성이 의지로부터 떨어져 나가 새로운 왕국이 되고, 독립된 힘을 발휘한다. 이 유추는 천국에 관련해서도 완전히 같은데 이에 관한 설명은 다른 장에서 있어진다.

열왕기상 11장 42, 43절 해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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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왕기상 11장 42,43절

솔로몬의 죽음과 매장

오랫동안 솔로몬의 작품이라고 여겨 왔으나 솔로몬 시대 이후 또 다른 사람의 작품일 수 있다고 믿어지는 전도서에서, 슬기롭고 저명했던 왕, 솔로몬에게 꼭 맞아 떨어지는 교훈 중 하나가 다음과 같이 있다. “죽은 파리들이 향기름으로 고약한 냄새를 풍기게 하듯, 한 두 개의 어리석은 행동이 지혜와 영예로 명성을 얻은 자를 망하게 한다” (전도서 10:1). 어리석은 행위는 제아무리 지상적 조건이 특출할 때 조차에서도 우리의 타락한 본성으로부터 분리될 수 없다. 인간이라는 조건만 가지고도 설사 자신을 남 보다 더 뛰어나게 하는 특성을 보이고 있을 때 조차에서도 실패의 예를 진열하는 경우가 많다. 성경은 이런 것에 대한 예증을 풍부히 함유하고 있다. 유대인의 첫 대 성직자 아론은 그의 의무가 여호와에 대한 예배를 순수하게 보존하는 것인데도 금송아지를 만들고 세웠다. 모세는 므리바의 샘물에서 화를 참지 못한 결과 가나안 땅에 들어 가지 못했다. 신약 성서에서 베드로는 주님을 모른다고 정식으로 부정했다. 주님께서 가장 예뻐했다는 요한은 주님을 거절하는 이들을 살라 버리도록 하늘로부터 불이 내려 오기를 원했다. 솔로몬의 실패는 비록 그의 과거 업적, 즉 주님의 성전을 지었던 그의 경건함과 종교적 고백과는 불일치되겠지만 그의 자연적인 차원의 부패됨과는 꼭 들어 맞고 있다. 규모에서 크든 작든 모든 사람에게 공통되는 이런 실패는 이런 위대한 진리, 즉 참 포도나무에 접목된 이들이라 해도, 그들이 새 생명을 받고 새 열매를 맺고 있다 해도 그의 낡은 본성, 부패된 이기심은 그대로 유지되고 있는바 실패 없는 주 구세주의 자비의 권능에 의해서만 크나 큰 악과 깊은 지옥에 떨어짐으로부터 보존될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순수하고 거룩하신 그분께만 의지하려 노력할 것, 불순종하려드는 자신에 대한 심오한 부끄러움을 언제나 느끼고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솔로몬의 죽음도 그의 일생의 한 부분인바 이를 주님과 기독 제자와 관련하여 생각해보아야 하리라. 이렇게 양 쪽에 관련해 볼 때 솔로몬의 결점은 실제적인 악들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다. 솔로몬의 흠은 죄를 범하게 하는 시험을 표현한다. 만일 그의 흠이 실제적인 악, 즉 죄를 내포한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불완전 인간의 모든 행동 전부가 다 포함될 수 있다. 그 이유가 어떤 인간도 죄짓지 않고 살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가장 높은 표징적 의미에서 솔로몬의 죽음이 주님의 죽음을 표현해야 한다거나 그분의 부활 등등 까지를 표현해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표현적인 품성에서 죽음은 주님의 신성화 됨, 우리의 거듭남의 진보되는 일에 따른 어떤 변화인 바, 죽음은 완성을 향한 계속적인 등차를 수단으로 수행되는 것일 뿐이다. 어쨋든 죽음은 우리에게 부활을 생각할 수밖에 없게 한다. 그 이유가 육체에 대한 죽음은 영혼에 대한 부활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솔로몬의 죽음은 그분의 부활 보다는 그분의 승천을 표현하고 있다. 그분은 일어나시기 위해 죽으셨고, 승강하시기 위해 일어 나셨다. 그분의 신성화 하심은 출생부터 천국에의 입장 까지에 이르는 우리 거듭남의 모형이셨다. 모든 사람은 각자 자기의 죽음과 부활과 승강을 가지고 있다. 육체가 죽으면 영혼은 영들의 세계에서 일어난다. 신약 성서에 있는 황천(HADES)은 일어난 영들이 영원한 세계에로의 첫 입장에서 그들을 수용하는 곳이다. 거기서 필요한 준비가 마무리되면 의로운 자는 천국에로 승강되어 주님과 영원히 있다. 신성화 하심이 요구된 예수는 인간 거듭남에 요구되는 모든 상태들을 통과하셔야만 했다. 그분의 부활은 영들의 세계에서 있어졌다. 사십 일 후 그분은 천국에로 승강하셨다. 참으로 그분은 몇 번이나 제자들에게 나타나셨다. 그러나 그들은 자기들의 자연계의 눈과 귀로는 그분을 보지 못했고 듣지 못했다. 그들의 자연계의 감각은 그분을 인식하지 못했다. 다시 말해 그들은 그들의 영적인 감각으로 그분을 느꼈다. 이 감각들은 물질적인 몸이 한쪽으로 놓여질 때 과거 자연계의 감각이 자연계에 있는 대상물을 인식하듯 똑같이 과거 주님께서 언제나 말하시고 행동하셨던 것과 일치되는 가운데 상응되도록 제자들을 베다니에로 인도하셨다. 그 곳은 주님께서 죽은 나사로를 일으키신 곳이다. 이 기적은 주님의 교회를 새로이 일으키시는 것을 표현했다. 이 기적 주변에 있던 마리아와 마르다는 천적, 영적 애착을 표현했고 나사로의 형제들은 죽은 상태로부터 회복시키는 진리를 표현했다. 제자들이 그들의 영적인 눈으로 주님의 승강을 바라 보았을 때 사실상 그들은 영계에 현존한 셈이었다. 지상과 천국 사이에 있는 중간 세계인 영계로부터 주님은 실제로 승강하셨다.
사도 바울이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그런데 승강하셨다는 말은 또한 땅 아래의 세계에 까지 내려가셨다는 말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리로 내려가셨던 바로 그분이 모든 것을 완성하시려고 모든 천국들 너머로 승강하셨습니다” (에베소서 4:9,10). 이 사도는 처음으로 더 낮은 지상에 내려가신 분이 주님이다고 말하고 있다. 그는 무엇을 뜻하고자 이 말을 했을까? 그분이 내려가셨다는 지상의 더 낮은 부분은 무엇인가? 혹자는 그 말이 우리가 거주하는 지상의 더 깊은 부분을 뜻한다고, 예수께서는 모든 것을 완성하시려고 모든 천국 너머 뿐아니라 지상의 깊은 부분 까지 글자대로 내려가셨음을 뜻한 것이라고 이해하고 있다. 이와같은 무의미한 것을 사도가 가르쳤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부활 후 주님께서 내려 가셨다는 지상의 더 낮은 부분은 영들의 세계에서의 더 낮은 부분이고 이것이 더 낮은 땅이라 불리우고 있다. 그 곳은 주님이 세상에 오실 때 까지, 그리고 그분이 구속과 인성의 영화하시는 일을 완성하시어 속박된 상태에 있는 것들을 해방시키시고 아무도 접근할 수 없는 빛으로 모든 천국들 위로 승강하실 때 의로운 영들을 천국으로 데려간 곳, 또는 사람을 떠난 영들이 보존되어 왔던 곳이다. 사도 베드로가 감옥이라 부른 더 낮은 땅, 그리고 그가 감옥 안에 보존된 이들을 감옥에 있는 영들이라 불렀는데, 그래서 아주 많은 추측을 불러 일으켜 주목을 받았던 그의 말은 아래와 같다. “그리스도께서는 여러분의 죄 때문에 죽으셨습니다. 죄 없으신 분이 죄인을 위해서 죽으신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단 한 번 죽으심으로써 여러분의 죄를 용서해 주시고 하느님께로 인도해 주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몸으로는 죽으셨지만 영적으로는 다시 사셨습니다. 이리하여 그리스도께서는 갇혀 있는 영혼들에게로 가셔서 기쁜 소식을 선포하셨읍니다. 그들은 옛날에 노아가 방주를 만들었을 때 오래 참고 기다리셨지만 끝내 순종하지 않던 자들입니다. 그 방주에 들어 가 물에 빠지지 않고 구원을 받은 사람은 겨우 여덟 사람 뿐이었습니다. 그것은 오늘날 여러분에게 구원을 가져다 주는 세례를 미리 보여 준 것입니다. 세례는 몸에서 더러운 때를 벗기는 것이 아니라 깨끗한 양심으로 살겠다고 하느님께 서약을 하는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늘에 올라 가셔서 하느님의 오른 편에 계시며 천사들과 세력과 능력의 천신들을 당신에게 복종시키셨습니다” (베드로전서 3:18-22). 위 구절은 주석자들에게 모호하게 나타나고 있고 중간 상태의 존재를 부정하는 이들에게는 어둡게 나타나야만 하는 구절이다. 주님의 새 교회의 교리 속의 진리에 대해서는 가치있는 증거를 제시하는 대목이다.
주님께서는 영적 세계를 구원하시기 위해 세상에 오셨다는 것, 모든 사람은 노아의 시대, 또는 고대 교회의 시작 이후 살아 왔던 이들의 특질 또는 영적 특성 속에 있다는 것은 이미 거론해본 바 있다. 타락 후 죄인을 위한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 밖에는 없었다는 것이 공통된 기독인의 신조이다. 그러나 살다가 죽은지 오래 오래 될 때 까지 결과되지 않았던 구속에 의해 어떻게 구원될까? 어떻게 그들의 믿음이 그들을 정의로운 자라고 간주할 수 있었을까? 믿음은 정의의 선구자였다. 육을 입으시기 전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은 육을 입으신 후 그리스도의 정의에 의해 완전해졌다. 아무도 거듭남이 없이는 구원될 수 없다. 그리고 주님이 신성화 하실 때 까지 아무도 거듭날 수 없었다. 그분은 잠자던 이들의 첫 열매, 모든 창조물의 첫 출생, 하느님의 창조의 시작이셨다. 성경의 선포가 포함한 것은 무엇이든 간에 그것들은 가장 중요한 진리, 즉 주 예수 그리스도가 원저자이시다는 것, 그 이유는 그분이 인류가 타락하여 빠진 영적 죽음의 잠으로부터 영적 세계를 깨우는 시작이 되셨기 때문이다. 이것이 그들을 그리스도께서 그들에게 주시고자 한 생명을 받도록 준비시켰다. 주 예수는 타락한 인간성이 다시 태어난 피조물의 첫 번째 되신 분이셨다. 이런 새로운 시작을 수단으로 인간은 새 피조물이 되었다.
어떻게 주님의 오심이 있기 전, 살았던 신실한 자들이 과거에 지은 그들의 죄의 용서를 구속을 통해 그분으로부터 받을 수 있었는지는 위 문단에서 이미 말했다. 주님이 죽은 자로부터 일어나시고, 그분이 세상에서 수행하신 구속과 영화하심의 일로 해서 그분은 전에는 완전하게 결과할 수 없었던 거듭남의 일을 그들 안에서 완성하실 때 까지 그들은 중간 상태의 영역, 희망의 감옥에 머물러 있었다. 그러므로 이렇게 해방을 기다렸던 노아의 시대로부터 살았던 이들은 영적 차원이었다. 주님의 강림 때에 영들의 세계에서 거행된 심판은 고대 교회, 또는 고대 교회 처방의 때로부터 살았던 이들에게 있어졌다. 비록 히브리 교회와 이스라엘 교회가 서로간에는 구분되는 특성을 가지고 있었다 해도 그들은 고대 교회의 연장에 불과했고 그들 안에는 고대 교회로부터 파생한 것 외에는 영적 생명력은 없었다. 그들은 주님이 세상에 오시는 그 때가 찰 때까지 영적 교회의 존재가 연장되기 위해 존재했을 뿐이다.
솔로몬의 통치가 주님의 신성화 하시는 과정, 즉 그분의 인성을 신성한 선으로 만드시는데 있어진 과정을 더 특유하게 표현 했는 한편, 그분의 부활과 승천하심 사이에서 거행된 영계에서의 주님의 일을 표징적으로 포함하고 있다. 새 교회의 저술을 제외하면 두 큰 사건 즉 부활 후 승천까지의 40일 동안 주님이 어디에 계셨으며 그분이 무엇을 하셨는지에 관한 만족할만한 견해를 접하지 못한다. 구속자가 영계에서 위대한 일을 수행했었다는 것을 조금이라도 비추는 생각은 전혀 없는 것 같다. 더구나 노아 시대 이래 자라난 밀과 가라지를 분리하는 추수에 관한 생각은 더더욱 없는 듯 하다. 마치 이스라엘 백성이 에집트 사람과 분리되어야 하듯 악으로부터 분리되어야 할 뿐아니라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를 건너고 광야를 여행하여 요르단을 통과해 가나안에 진입해야 하는 과정을 거쳐야만 한다. 선한 자들은 지상에서 마무리하지 못했던 완성되는 과정을 통과해야만 한다. 즉 시편 기자의 이런 예언적인 말들이 그들 안에서 완성됨을 받아야 한다. “주께서 높은 곳으로 오르시며 사로잡은 자를 끌고 선물을 인간에게서, 또는 패역자 중에서 받으시니 여호와 하느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려 하심이다” (시편 68:18).
솔로몬의 죽음은 다윗의 죽음이 그분의 부활을 표현하는데 비해 주님의 승천을 표현하고 있다. 이는 역사 자체로부터 더 드러나진다. 다윗 처럼 솔로몬도 40년간 다스렸다. 두 왕이 주님을 예징하는바, 그들의 40년 통치는 주님이 광야에 계셨을 때의 40일, 부활과 승천 사이에 놓인 40일과 평행을 이루고 있다. 주님이 광야에 계셨던 때의 40일은 세상에서의 그분의 시험의 기간을 표현했다. 그 이유가 광야는 시험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40은 그것이 40일 이든 40년 이든 시험의 기간을 표현한다. 주님의 부활과 승천 사이의 40일도 시험을 표현했다. 그러나 그 시험은 주님의 시험이 아니고 영들의 세계에서 구속됨의 시험이었다.
“솔로몬은 사십 년 간의 통치를 마치고 그의 조상들과 함께 잠들었다.” 이런 아름다운 문구는 구, 신약 성경에서 자주 등장하는데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육적 수준에서만 부드러운 느낌을 전달하지만, 기독인에게는 아름다운 영적 진리를 표현해주고 있다. 기독인은 이 문구를 읽을 때 죽음을 생명의 문으로서 생각할 수 있게 한다. 죽음은 당사자를 자연적 친족들 뿐만아니라 영적으로 신실한 자들의 집단에도 소개하게 된다. 영적 의미에서의 죽음과 매장은 저 세계에서의 단순한 부활, 즉 선한 자와 악한 자 모두에게 해당되는 부활만을 뜻하는 게 아니라, 영적 생명의 새로운 상태, 즉 영적인 사랑과 신앙의 상태로 부활함을 뜻한다. 이 부활은 신실한 자들에게는 특별하다. 이것은 죄라는 죽음으로부터 정의라는 생명으로 부활함을 말한다. 사악한 자의 경우 그는 이것을 알지 못한다. 그는 결코 경험해보지 못한다. 이런 이유로 유대인들 사이에서 큰 범죄를 저지른 자는 매장이 거절되기도 한다. 그리고 죽음과 무덤 자체는 인간 존재의 완전한 끝을 함축하는 것처럼 자주 말해져 왔다. 그러나 본문의 구절 같이 죽은 자가 조상에 돌아가 합류되었다고 말해질 경우 거듭남이 달성하는 특별한 상태가 그 구절에 함축되어 있다. 그 이유가 아버지라는 단어는 선함의 원리를 표현하고, 아들은 진리의 원리를 표현하기 때문이다. 신성한 존재 자신에 관련해서도 아버지와 아들은 신성한 선함과 진리밖에 더 의미되는 게 없다. 주님께서 자기는 아버지로부터 와서 아버지께로 돌아 간다고 선포하셨을 때 이는 신성한 진리로서의 그분이 신성한 선함으로부터 왔다는 것, 또는 신성한 지혜가 신성한 사랑으로부터 왔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것이다. 거듭남과 신성화 하심의 일이 결과된 후 그분은 신성한 선함 또는 진리에로 돌아 가셨다. 즉 그분은 세상에 계셨기 전의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광으로 되돌아 가신 것이다. 그러나 그분이 말씀이 육이 되고 신성화 하신 것으로 되돌아 가셨다. 가장 높은 표징적 의미에서 본문은 주님의 신성화 하신 인성에서 아버지에게 되돌아 가셨음을 언급하고 있다. 그래서 이 되돌아 감은 세상에서 그분의 인성을 신성한 진리로 만드신 후 세상을 떠난 후에는 그분의 인성을 신성한 선으로 만드시어 아주 친밀한 하나 됨을 표현한 것이다. 그분의 인성을 신성한 선으로 만드심은 완전하게 만들어진 의로운 자의 영들과 더불어 40일간 현존하심과 연결되고 그것을 표현하고 있다. 기독인과 관련하여 이 언어는 상응하는 일의 표현인 것이다. 거듭나는 자는 그들이 진리의 상태로부터 선함의 상태로 건너 갈 때, 또는 지혜의 상태로부터 사랑의 상태로, 또는 신앙의 상태로부터 선행의 상태로 건너 갈 때 그들의 조상에게로 돌아 가는 셈이다. 이와 같은 상태의 변화는 주님께서 아버지께 돌아 가신다는 표현의 형상밖에 더 아니다. 그이유가 신실한 자들이 달성할 수 있는 생명의 상태는 주님께서 그분 스스로 결과하셨던 것들의 그림자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분이 살아 계시기에 우리 역시 살아 있는 것이다. 그분께서 그분의 인성을 지상적 상태로부터 들어 올리셨기 때문에 그분은 지상적 상태로부터 들어 올려지길 바라는 모든 사람을 그분에게로 끌어 올려 주실 수 있다. 그분께서 그분의 아버지에게로 되돌아 가셨기 때문에 우리도 우리의 아버지로서 그분께로 승강할 수 있다. 그분께서 그분의 인성을 신성한 사랑 자체가 되셨는 바 우리도 사랑의 상태로 올려질 수 있다.
솔로몬은 조상들과 함께 잠들었을 뿐아니라 “그의 선왕 다윗의 성에 안장되었다.” 다윗은 신성한 진리로서의 주님을 표현했다. 그러나 본문에서의 경우 그는 아버지로서 말해지고 있다. “선왕 다윗”, 즉 아버지로서의 다윗은 신성한 선으로부터 파생된 신성한 진리를 표현하고 있다. 거듭나는 자와 더불은 진리는 두 가지 다른 상태에서 존재한다. 다시 말해 거듭나는 자는 거듭남의 두 일반적 단계에서 소유하게 되는 두 종류의 진리가 있다. 선함으로 인도하는 진리가 있고, 선함으로부터 파생되는 진리가 있다. 거듭나는 삶의 첫 일반적 단계에서 기독인은 선함에 관한 지식을 획득하고, 이 지식을 수단으로 그는 선함을 얻으려고 애쓴다. 그러므로 그의 첫 번째 진리는 진리 안에 선함을 가지고 있는 게 아니다. 그의 첫 믿음은 그 안에 사랑을 가진 게 아니다. 그 이유는 그가 아직은 선함과 사랑을 쟁취하려고 애쓰는 단계였을 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선함과 사랑의 수준에 도달될 때 그의 진리와 신앙의 특성은 바뀐다. 그의 진리는 선함과 하나 되고, 그의 믿음은 사랑과 하나 된다. 이로부터 그의 진리는 더 이상 선을 추구하고 달성하려는 도구나 수단이 아니고 진리를 수단으로 선의 목적을 작업해갈 뿐이다. 신앙 역시 사랑을 쟁취하는 수준이 아니라 사랑을 수단으로 믿음이, 신앙을 수단으로 사랑이 사랑의 목적을 작업해 간다. 이와 같은 것이 거듭난 자의 진리요 믿음 인 바, 이는 거듭나고 있는 사랑의 것들과는 아주 다르다. 이런 새로운 상태의 생명으로의 진입이 솔로몬이 그의 아버지 다윗의 성에 안장되었음에서 영적으로 의미되고 있다. 이 도성은 시온이었다. 도성으로서의 시온은 최고로 높은 진리, 즉 선함에 바탕을 둔 진리, 주님을 사랑함으로부터 나오는 선함을 표현하고 있다. “선왕 다윗의 성”이란 신성한 선 자체의 신성한 진리로부터 파생된 주님의 교회의 진리이다. 거듭나는 자와 관련하여 이스라엘 위대한 왕의 죽음과 매장은 영혼이 천국적 사랑과 진리의 생명으로 새로이 출생함을 표징적으로 의미심장하게 지적해 놓고 있다. 이는 숭고한 일을 완성하는 것, 이는 주님의 신성한 일의 시작과 끝인 것, 인간 영혼의 거듭남과 구원의 시작과 끝이다.

열왕기상 11장 14-27절 해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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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왕기상 11장 14-27절

솔로몬의 적들

비록 솔로몬의 통치가 평화로운 통치 였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평화스러웠던 것은 아니다. 단지 다윗의 시대 처럼 내, 외부에서의 반란, 다른 나라와의 큰 전쟁 같은 것이 없었을 뿐이다. 심각한 피해를 줄 수는 없다 해도 적극성을 띈 적들은 있었다. 그래서 그들을 내려 누르는 힘이 약해지기만 하면 곧 터져나올 듯 대기 중인 적들은 사방에 있었다. 솔로몬이 외국 여인의 꾐에 넘어가 이방 신들을 섬기게 된 이후 주님께서 그에게 화를 내시고 나라를 쪼갤 것이라고 말씀하신 대목에 바로 이어 이렇게 기록되고 있다. “주님께서는 에돔 사람 하닷을 일으키시어 솔로몬에게 반기를 들게 하였다….하느님은 또 엘리아달의 아들 르손을 일으켜 솔로몬에게 반기를 들게 하였다. 그는 자기의 임금인 소바 왕 하디데젤을 버리고 도망쳤던 자이다…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은 에브라임족에 속한 스레다 사람으로서 솔로몬의 신하였다. 그도 또한 왕에게 반기를 들었다. 그의 어머니는 과부 스루아였다.” 솔로몬 왕국 주변의 부족들이 솔로몬에게 반기를 든 것은 하느님께서 그들의 마음을 휘저어서라고 기록되지만 모든 부족에 해당된다고는 상상되지 않는다. 그 이유가 르손은 솔로몬 시대 내내 적이 되어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쨋든 행동으로 드러내는 모든 악은 먼저 마음 안에서 경향성(inclination)으로 존재하고 있다. 솔로몬이 늙자 노출 시킨 악은 그의 초기 삶에서 그의 마음 안에 잠재된 것으로서 지니고 있었다. 노령은 초기 삶으로 되돌아 가라는 자연적 자극이 있어지는 때이다. 정력이 왕성한 성년 시기 동안 잠재된 경향성은 이성의 힘이나 흥미의 주장에 밀려 억눌려 있을 뿐 종교의 원리에 의해 거듭나지 않고 있었다면 차후 정신적 육체적 정력이 쇠하여 짐에 따라 거기에 걸맞는 악들이 성나게 되어 바깥쪽으로 돌출하고야 만다. 악의 현존은 그것이 행동 선상에 있든 경향성으로 내재하고 있든 결국 휘저어져 압박된 상태에서 풀려나 반기를 드는 기회를 주게 된다. 만일 그것들이 제거되지 않는다면 적들은 교정의 도구가 된다. 이를 성경에서 찾아 이해해보자.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의 거주민을 몰아내도록 명령받았을 때, 이 백성들에게 이런 경고가 있었다. “만일 그 땅에서 주민을 쫒아내지 않고 남겨두었다가는 그들이 너희 눈에 가시가 되고 옆구리에 박힌 바늘이 되어 너희가 살아 갈 그 땅에서 너희를 괴롭힐 것이다” (민수기 33:55). 말씀의 역사적 부분에서, 특히 판관기나 열왕기서에서 이렇게 읽는다. 즉 백성들이 죄를 지었을 때 주님께서는 백성들을 벌하시기 위해 적들을 일으키셨고, 그 백성들이 역경으로부터 지혜를 배우고 주님께 울부짖을 때 그들을 구해주시고자 판관을 들어 세우셨다. 본문의 경우 이와 반대이다. 왕의 죄에 대한 결과는 한 가지 뿐이었다. 즉 “너희 마음이 이러하고, 내가 너와 계약을 맺으면서 일러둔 법들을 지키지 않았으니 내가 반드시 이 나라를 너에게서 쪼개어 너의 신하에게 주리라. 그러나 너의 아비 다윗을 보아서 네 생전에는 그렇게 하지 않겠고 너의 아들의 대에 가서 이 나라를 쪼개리라. 그러나 이 나라를 쪼개어 다 내주지는 않고 한 지파만은 네 아들에게 주어, 내 종 다윗의 뒤를 이어 내가 지정한 예루살렘에서 다스리게 하리라.”
주님께서 솔로몬에게 반기를 들도록 휘저은 적들은 과거 판관 시대 때와 비슷하게 솔로몬이 지은 죄 속의 악과 특별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좋은 의미일 경우 에돔은 주님의 인간적 본질, 힘, 또는 자연적 마음의 선을 의미한다. 반대 의미일 경우, 에돔은 모든 진리를 경멸하고 거절하는 자아 사랑에 근원을 두는 자연적 인간을 의미한다. 시리아, 좋은 의미일 경우, 선함과 진리에 관한 지식을 소유한 이들, 그래서 슬기롭다고 불리는 이들을 의미한다. 그러나 반대 의미일 경우 위의 지식을 뒤집는 이들 그리하여 우상적인 목적에 응용하는 이들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에돔과 시리아는 의지와 이해성과 관련이 있다. 이 두 왕국이 이스라엘과 적이 될 경우 특히 솔로몬에게 반기를 들 경우 그들은 영적 마음에 반기를 드는 자연적 마음의 의지와 이해성을 표현한다.
본문에는 솔로몬의 두 적들에 관한 기록이 있다. 하닷은 에돔의 왕족이었다. 그에 관한 특별한 기록을 읽어 보자. “다윗이 에돔을 쳐들어 갔을 때 군 사령관 요압을 시켜 전사자를 묻어 주게 했는데, 요압이 에돔의 남자를 전부 죽인 일이 있었다. 요압은 전 이스라엘 군대를 거느리고 육 개월간 에돔에 주둔하면서 모든 에돔 남자를 죽였었다. 그러나 하닷은 부왕을 섬기던 신하 몇 사람과 함께 에집트로 망명하였다. 그 때 하닷은 어린 소년이었다.” 모든 남자가 살육 되었다고 생각했을 때 생존자가 있어 피신했다. 다윗의 살육 을 피한 이 고독한 어린 아이가 솔로몬 시대 내내 이스라엘의 적이 되어 있었다. 그가 그렇게 된 것은 하등 이상할 것도 없다. 그러나 이 사건이 가르치는 영적 교훈은 글자적 역사로부터 발생할는지 모를 자연적 생각과 동떨어져 있을런지 모른다. 이러하다. 악이 뿌리채 뽑혀질 때 조차 만일 그 씨가 남는다면 악은 반드시 이전의 힘을 지니고 튀어나오고 때로 이전 보다 더 강력한 힘을 지닐 수도 있다는 것이다.
하닷이 에집트에 갔을 때 “에집트의 왕 파라오는 그에게 집을 주고 음식을 대어 주었다. 그리고 농토도 주었다. 파라오는 하닷이 마음에 들어 자기의 처, 다비니스 왕비의 동생을 그에게 주어 아내로 삼게 하였다.” 하닷이 에집트의 왕비의 동생과 결혼한 것은 솔로몬이 에집트 왕의 딸과 결혼한 것에 반대되는 것이었다. 이리하여 하닷은 솔로몬의 옆구리의 가시로서 세력을 키우게 되었다. 즉 자연적 의지가 영적 의지와 반대되어 있는데 각각은 어느 편도 좋아하고 지지할 수 있는 과학의 애착과 결합되어 있다. “하닷은 다윗 왕이 별세하고 군사령관 요압이 죽었다는 소식을 에집트에서 듣고는 파라오 왕에게 조국으로 돌아 가게 해달라고 간청하였다. 그러나 파라오는 선뜻 허락하지 않고 ‘무엇이 부족하여 나와 함께 있기를 마다고 고국으로 가려느냐?’ 하고 물었다. 하닷은 ‘부족한 것은 없습니다 그러나 제발 저를 보내 주십시오’ 하고 재차 간청하였다.” 하닷은 자기가 고국으로 돌아가는 목적을 파라오에게 말하지 않았다. 그는 아버지의 옥좌를 다시 세울 요령이었다. 과거 다윗은 에돔 지역에서 공물을 바치도록 했고, 거기에 수비대를 배치해 놓았다. 따라서 하닷은 강력한 다윗 왕이 죽고 유명한 장군이 죽은 지금 이스라엘의 멍에를 부수기를 바랐을 것이다. 하닷의 이 목적은 그의 생각대로 성공한 것 같이 보이지는 않지만, 25장을 읽어보면 그는 솔로몬에게 골치 아픈 존재였음은 틀림없다.
솔로몬의 다른 적으로서는 르손이 있는데 그는 과거 다윗이 정복한 왕과 연관이 있었다. 하닷과 르손은 사무엘하 8장에 함께 기록되고 있다. 르손은 하닷과 달리 왕족은 아니었다. 그는 소바 왕 하다데젤의 심복이었는데 전쟁 중에 왕을 버리고 도망쳤고, 후에 사람들을 모아 두목이 된 다음 다마스커스의 왕이 되어 있었다. 다윗 시대 때에 다마스커스의 시리아 사람들이 소바 왕을 도우러 왔으나 패배했는데, 그 때 다윗은 시리아 사람 이만 이천 명을 죽이고 거기에 주둔군을 두어 다윗의 속국으로 만들고 조공을 바치게 했다. 다윗이 정복해서 주둔군을 배치했던 이 나라들이 또 다른 지도자 솔로몬 왕 시대 때에는 봉기하려 꿈틀거리고 있었다. 사실 그들의 시도는 솔로몬 왕국을 뒤엎을 만큼 강력하지는 못했다. 이상은 외부로부터의 사건들이나 내부에서도 또 다른 적이 봉기하고 있었다. 즉 솔로몬의 신하였던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이 바로 그 사람이다. 그는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가 영구히 두 나라로 갈라지는데 공을 세운 격이 되었다. 이 대목에 관해서는 본 장에서 세세하게 거론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다만 본 장을 보면 왕국의 쪼개짐이 이스라엘 왕국 자체 내에 뿌리가 있고 도구 역시 들어 있었다는 점이다. 솔로몬 왕국이 쪼개지는 결과는 외부로부터의 공격이 직접적인 원인이 된게 아니라 내부로부터의 공격 때문이었다는 것이 우리에게는 매우 교훈적인 대목이 될 것 같다. 참으로 모든 시험은 우리 자신의 마음 안에 있는 악에 바탕을 둔다. 시험되기 전에 욕망이 있었기 마련이다. 즉 자신의 욕망과 유혹에 이끌려 질 때 시험을 당하게 된다는 말이다. 그러나 우리를 외부로부터 공격하는 악령은 내부에 있는 악과 연통하지 않고서는 우리를 정복하지 못한다. 만일 우리가 참된 원리에 머무르겠다고 다짐한다면 시험은 오직 우리를 더욱 강건하게 만들 뿐이다. 그러나 우리의 적이 우리 집 속에 있을 때 그 위험도는 한층 커진다. 시험이 시작될 때, 그 시작이 우리 심정의 수동적이 아닌 적극적 바램으로부터 일 때, 우리의 이해성과 취미가 같은 성질의 거짓으로부터 일 때, 비록 우리가 시험을 어느 정도 까지는 눈치를 챈다 해도 악령은 우리의 친구가 된 채 우리 자신 속에서 파멸의 도구를 찾아내 지니고 있는다. 다윗의 통치 기간 동안 그가 지녔던 가장 큰 애로는 자기 백성들의 불만과 자기 자녀들 간의 싸움이었다. 주님에 앞서 출현한 선구자들의 주요 목적 중 하나는 아버지의 심정을 자녀들에게, 자녀들의 심정을 아버지에게 돌리는 것, 즉 내향의 하모니가 일을 창조하는 것, 개인적 차원에서 뿐아니라 주님의 교회의 원리 차원에서, 평화의 왕으로서 주님의 오심을 준비하는 차원에서였다. 내부적으로 하나를이루고 조화를 이룰 때, 외부의 적이 아무리 강력해도 심각한 피해를 입힐 수 없고, 때로는 선을 증진하는 도구 역할을 담당할 수도 있다. 다시 말해 악의 출현이 간접적으로 자신의 악을 바로 잡는 계기가 되어 준다.

열왕기상 11장 1-13절 해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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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왕기상 11장 1-13절

솔로몬의 우상 숭배

이스라엘 백성들의 우상 숭배에 대한 집착은 일찌기 아론이 금 송아지를 만들었던 사건으로부터 므나쎄왕이 주님의 성전 안에 우상을 세운 사건 (열왕기하 21)까지에 이르러 명백해지는바 가슴 아픈 일이 아닐 수 없다. 이 주제를 부정적인 견해에서 본다면 이 주제는 그들 사이에 건설된 종교가 무효력 했다는 증거라고 우리로 생각해보도록 할는지 모른다. 이스라엘 백성 사이에 널리 퍼진 우상 숭배에 솔로몬의 우상 숭배도 들어 있다는 것은 어쩌면 그리 놀랄 일은 못될는지 모른다. 솔로몬, 그는 지혜의 선물을 바랬고 대단히 높은 수준에서 그것을 받았다. 그는 성전을 짓고 헌당하여 거기서 여호와께서 그분의 백성들 사이에 거주하시게 했다. 이 성전을 향하여 모든 참 이스라엘 사람들이 충만된 심정 또는 영의 쓰라림 속에서도 기도할 수 있게 했다. 그런 그가 참 하느님의 예배로부터 추락하여 “예루살렘 동편 산 위에 모압의 우상 그모스의 신당과 암몬의 우상 몰록의 신당을 지었다.” 그가 이렇게 한 까닭은 단순하게는 설명할 수 없겠지만, 단지 인간 의지 안에는 악이 있어 그 악과 같은 성질의 오류에로 마음이 기울게 한다는 원리가 설명의 단초는 제공할 수 있다. 솔로몬이 하느님의 이름을 극도로 찬양하던 예배에서 떠나도록 설정된 특별한 이유들이 있다. 그는 부패한 주변 국가로부터 수많은 외국 아내와 결혼했다. 그가 늙자 그의 아내들은 다른 신들을 따르도록 그의 심정을 뒤틀어 놓았다. 그렇게 된 이유가 그가 나이 들어 기력이 쇠약해진 탓도 아닌 것 같고, 외국 출신 아내들의 영향력이 커서 통곡할 변절 쪽으로 끌고 갈 수 있었던 것도 아닌 것 같고, 애당초부터 솔로몬의 마음 속에 우상을 숭배하고 싶은 씨앗 같은 것이 서서히 자라고 있어 그로 하여금 끝내 주님께 등을 돌리는 행위를 자행하게 만들었다고도 생각해 볼 수 없다. 어쨋든 솔로몬이 우상을 숭배하는 왕들의 딸들을 취했다는 사실은 그가 그녀들의 종교적 예배에 기대고 있었다는 것, 적어도 모세의 법이 명령한 사항에 그의 마음이 느슨해져있음을 보여주었다.
구약 성서의 역사적 사건으로부터 그 사건이 가르치는 도덕성을 끌어내는 것은 유용한 일이다. 한편 그 역사물이 운반해 주고저 하는 다른 교훈들도 있다. 이런 저런 성서의 주변 여건은 신성하고 영적인 진리들의 표본이다. 가장 높은 의미에서 그것들은 세상의 구세주, 주님과 관련되고, 종속적인 의미에서 그것들은 인간의 거듭남에 관련되고 있다. 그럼에도 인간 심정의 부패 또는 인간 이해성의 우둔함에 관해 말하는 이런 사건이 모든 것에서 완전하시고 모든 것에서 자비로우신 구속자에 관한 사건이나 일을 표현하도록 고용되고 있다는 점은 아마도 특이한 듯, 또는 성서의 본래 취지에 불일치한 듯 여겨질는지 모른다. 이런 점에서 성서 글자의 의미는 영적 의미와 다르거나 때로는 아주 반대될 경우도 있다. 즉 자비 자체이신 그분이 화를 내셨다는 경우, 선 자체이신 분이 악을 행하신다고 말해질 경우, 빛 자체이신 분이 어둠을 창조하셨다고 선포되는 경우, 바뀔 수 없는 분인데 뉘우쳤다고 말해지는 경우 등등이다. 솔로몬은 본문의 경우를 포함해서 다른 경우에서도 주 예수 그리스도의 품성을 표현하고 있다. 솔로몬이 여러 나라로부터 수많은 후궁을 맞아들이고, 늙어서는 그들의 미신적인 예배에 참석함으로 표현되고 있는 일반적 진리는 인간 구속의 보편성과 보편적인 구원의 가능성을 가르치고 있다. 이와 똑같은 진리가 계시록의 요한의 환상에서 표현되었다 (제7장). 요한은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에서 나와 이마에 도장을 받은 십사 만 사 천 명 외에도 “아무도 그 수효를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사람이 모인 군중을 보았다. 그들은 모든 나라와 민족과 백성과 언어에서 나온 자들로서 흰두루마기를 입고 손에 종려나무가지를 들고서 옥좌와 어린 양 앞에 서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큰 소리로 ‘구원을 주시는 분은 옥좌에 앉아 계신 우리 하느님과 어린 양이십니다’ 하고 외쳤다” 이와 똑같은 주제에서 네 생물과 스물 네 원로는 두루마리를 받아 든 어린 양 앞에 엎드렸고 이렇게 새 노래를 불렀다. “당신은 두루마리를 받으실 자격이 있고 봉인을 떼실 자격이 있습니다. 당신은 죽임을 당하셨고 당신의 피를 수단으로 모든 민족과 언어와 백성과 나라로부터 사람들을 하느님께로 구해주셨습니다.” 인간 구속의 보편성, 나라나 언어가 다를지언정 모든 사람이 구원될 가능성은 구약 성서에서 표현되고 신약 성서에서 밝히 알린 우리에게 위로를 주는 위대한 진리 중의 하나이다.
“솔로몬왕은 수많은 외국 여인들과 사랑을 나누었다. 파라오왕의 딸 뿐아니라 모압 여인, 암몬 여인, 에돔 여인, 시몬 여인, 헷 여인 등 외국 여인들을 후궁으로 맞아 들였다. 야훼께서는 일찍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외국인들과의 결혼을 금지하시고 경고하시기를 ‘너희는 외국 여자를 아내로 삼지 말고 외국 남자를 남편으로 삼지 말라. 그들이 반드시 너희 마음을 꾀어 그들의 신에게 너희를 유인해 가겠기 때문이다’ 라고 하신 적이 있었다. 그런데도 솔로몬은 이 외국 여인들과 깊은 사랑에 빠졌던 것이다.” 솔로몬이 외국 여인을 취한 여섯 나라 중 셋은 히브리와 이스라엘 국가의 선조인 에벨로부터 직계적, 방계적으로 이어져 왔다. 모압과 암몬은 아브라함의 조카인 롯의 후손이었다. 그리고 에돔은 야곱의 형제요 이사악의 아들이었다. 나머지 세 국가인 에집트, 시돈, 헷족을 살피려면 성경의 훨씬 앞 쪽 부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할 것 같다. 이 세 부족들은 노아의 둘째 아들 함으로부터 내려왔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다. 창세기 10장 6, 15절을 보면 “함의 아들들은 구스, 미스라임, 붓과 가나안이었고….가나안에게서 태어난 첫 아들은 시돈이었고, 헷이…있었다.” 미스라임은 에집트, 헷은 헷족, 시돈은 시돈족에 해당된다. 엄밀히 말해보면 역사는 에벨의 시대 까지는 시작된게 아니라고 성경은 우리에게 말하고 있다. 더 엄격히 구분하면 에벨 자신도 아마 역사적 인물은 아니다. 성경의 대화체에서 역사가 에벨과 함께 시작된다면 그가 변천의 상태를 표현한다고 상상해보는 것은 무리가 아닐 듯 싶다. 에벨의 역사에서, 에벨의 직계 후손의 한 부분에서 신화 시대가 실제 시대와 혼합되고 있다. 에벨이 등장한 시대는 글자적이기보다는 풍유적이다. 즉 “에벨은 삼십 사 세 되던 해에 벨렉을 낳았다. 에벨은 벨렉을 낳은 뒤 사백 삼십 년 동안을 더 살면서 아들 딸을 낳았다” (창세기 10:17) 라고 말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솔로몬이 맞아들인 후궁들의 나라에 해당되는 여러 다른 국가를 성경이 추적할 때 이 국가의 역사가 반드시 역사적이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아주 먼 시대의 사건을 우리에게 알려주려고, 또는 고대 국가의 조상이 누구였는지 우리로 알게 하려고 영감에 의해 씌어진 게 아니라 종교적 개선의 수단들을 우리에게 공급하기 위해 씌어져 있는 것이다. 거룩한 역사는 더 높은 의미를 위한 골격, 더 높은 교훈을 실어 나르는 운반체일 뿐이다. 이 골격이 어떤 형체이든, 또는 역사적 사실로 건축되어 있든, 글자적 기록이라는 마른 뼈는 신성한 지혜를 수단으로 모아지고 정렬되어 살과 가죽으로 덮혀지고, 숨을 넣어 살아 있어 큰 군대를 이루고, 이를 수단으로 만군의 주께서는 인간 심정 속의 악, 세상의 악과 싸우신다.
솔로몬의 외국 출신 후궁들의 출신 국가들을 성경의 근원에까지 거슬러 추적하는 목적은 그런 사실로부터 의미를 뽑아내고 싶어서이다. 성경에서 이러한 국가들의 근원은 노아, 히브리, 이스라엘로 거슬러 추적해야 할 것 같다. 노아와 에벨 시대 까지는 고대 교회를 의미하고, 에벨에서 아브라함 시대 까지는 히브리 교회를 표현하고, 아브라함에서 주님의 시대 까지는 이스라엘 교회를 구성하고 있다. 고대 교회 (Ancient Church)는 천적 교회인 태고 교회(Most Ancient Church)와 구별되는 영적 교회였다. 천적 교회의 기본적인 품위(grace)는 주님을 사랑함이고, 영적 교회의 기본적인 품위는 이웃을 사랑함이다. 한편 표현적 교회의 기본적인 품위는 단순히 순종함이다. 이를 더 간단히 표현해본다면 천적 수준의 원리는 사랑(love), 영적 수준의 원리는 선행(charity), 자연적 수준의 원리는 일(work)이다.
주님께서는 영적 교회를 구원하시기 위해 세상에 오셨다. 모든 사람은 태고 교회가 끝난 이후에 존재한 품성 속에 포함되고 있다. 한 가지 유의할 점이 있다. 우리가 여기서 말하는 영적 교회는 천적 교회와 구별하고자 하는 영적 교회이지, 누구나 얼핏 생각하기 십상인 자연계의 교회와 구별되는 영의 교회로 착각하지 않기를 바란다. 이에 대한 추가 설명은 솔로몬과 그의 후계자에 반기를 들어 르호보암 아래 열 지파가 떨어져 나와 영구히 두 왕국으로 갈라지는 대목에서 있을 것이다. 본 장에서 알아야 할 것은 영적 교회가 솔로몬이 사랑한 많은 외국 여인들로 의미되고 있다는 점이다.
주님께서 세상에 오시어 구원하시는 영적 교회 사람은 노아에서 개시된 처방 아래 살았던 이들이었다. 사실 노아와 관련된 사항들, 즉 홍수, 방주, 또는 한 가족 만이 이전 세계로부터 구원되었다는 것 등등을 성경 글자대로를 실제 역사로 고집한다면 이해되어지지 않으나 이 사항들을 상응의 언어로 주님의 교회의 영의 상태, 인류의 영의 상태를 묘사한 것으로, 자연계의 형상들을 수단으로 묘사해서 그 속에 영적 의미를 지니게 한 것이라면 이해가 가능할 것이라 본다. 온 땅을 덮어 가장 높은 산 까지 덮은 홍수는 온 교회에 퍼진 거짓 신앙, 왜곡된 신조라는 홍수가 온 땅으로 의미된 온 교회의 가장 높은 원리 까지, 즉 하느님을 사랑함과 이웃을 사랑함이라는 원리까지 뒤덮는 것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방주에 들어 간 것 외의 모든 사람과 모든 동물이 홍수로 멸해지는 것은 하느님께서 새로운 시작의 수단으로 아껴두신 것을 제외한 모든 영적, 자연적 선함의 소멸을 묘사한 것이다.
홍수 후에 개시된 고대 교회는 주님이 오시는 때까지 잔존했다. 사실 고대 교회에는 노아 교회 말고도 히브리 교회와 이스라엘 교회가 더 있으나 이 두 교회는 고대 교회가 더 연장된 것일 뿐이다. 스베덴보리의 저서에서 히브리 교회는 두 번째 고대 교회이지만 이스라엘 교회는 교회로서 말하지 않고 단지 교회의 유사물이라고 자주 말해지고 있다. 다시 말해 노아 교회는 영적 교회였고, 히브리 교회는 표현적 교회였고 이스라엘 교회는 교회의 유사물이였다. 이는 홍수로부터 육을 입으시는 때 까지 존재해 오면서 계속적으로 교회의 수준이 하강하고 있는 것밖에 더 아니다. 이스라엘 교회가 소유한 생명력은 무엇이든 간에 그들은 자기들을 존재하게 한 이전의 교회 처방으로부터 상속받아진 것이다. 그러므로 포괄적 의미에서 모든 것이 영적 교회라는 명칭 아래 포함되어 있었다.
솔로몬의 수많은 아내와 첩들이 고대 교회를 구성했던 이들이 분가되어 이룬 여러 다른 나라들로부터 취해진 것은 그들이 주님께서 오시어 구하시려 하신 영적 교회의 명칭 아래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표현하기 위해서였다. 이 나라들은 참으로 그들 자체가 썩어 있는 후손들이었다. 즉 그들은 참 하느님으로부터 돌아 서서 거짓 하느님, 벙어리 우상들을 경배하고 있었는바, 그들은 여호와와 그 백성들에게는 적이 되어 있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잃어버린 것을 찾고 구하시기 위해 오셨다고 말씀하셨다. 솔로몬이 많은 외국 여인들을 사랑했다는 주제를 기독교 처방 아래 있는 이방인의 나라에 관련시켜 보면 이로부터 우리는 그들의 구원이 어떻게 결과될 수 있는지 배운다. 성경을 모르는 국가들은 주님께서 직접 밝히신 진리를 수단으로 주님께 인도되어 질 수 없다. 그러나 그들은 자기들이 아는 종교적 지식으로 획득된 선을 수단으로 주님께로 이끌려 질 수 있었다. 다시 말해 이방인 국가들은 이해성과 생각을 수단으로 주님께로 이끌려 질 수 없으나 의지와 애정에 의해서는 가능하다는 말이다. 의지 속의 애착이 여인으로 표현되어 있다. 마치 이해성 속의 생각이 남자로 표현되는 것과 같다. 그 이유가 두 성(sex) 중에서 남성은 생각 쪽에서 더 큰 능력을, 여성은 애착 쪽에서 더 강한 것으로 정신적으로 구별짓기 때문이다. 성경은 아주 단순한 듯 싶은 대목에도 깊은 생각을 포함하는바, 이런 성의 구별은 구,신약을 망라해서 성경 역사 속의 남자와 여자로 기록된 모든 것의 근간이 된다. 주님의 제자들에서 남성과 여성의 구별이 어떻게 잘 구별되는지 모른다. 베다니의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는 그들이 지닌 애정의 강함과 부드러움으로 해서 베드로나 도마, 요한과 얼마나 명확하게 구분되는지 모른다. 이런 여성적 마음의 특성 때문에 주님의 교회는 여인으로 꾸준히 표현되고 있고, 특히 주님의 신부요 아내로 불리고 있다. 솔로몬이 사랑한 대상은 여러 나라 사이에 있는 주님의 교회들이다. 주님의 교회가 이방인들 사이에 존재했다는 생각 때문에 깜짝 놀랄 필요는 없다. 그 이유가 성실한 종교는 어디에 있든지 거기에 주님의 교회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종교적 체계가 엄격하게 볼 때 영적이지 않을는지 몰라도 종교적 원리는 영적이다. 종교적인 선함이 있는 곳은 어디든지 주님의 교회가 있다. 선함에 대한 애정이 존재하는 마음이 있다면 비록 그들이 믿는 것이 특이하다 해도 “만인의 구세주”이신 그분에게 협력하고 있는 셈이다. 하느님과의 결합이 결과되게 하는 두 요소들이 있다. 그것은 선함과 진리, 사랑과 믿음이다. 이 요소 사이에 상호성과 협력함이 있다. 하느님과 인간 사이에 결합은 없다. 하느님은 모든 선한 일의 운영자이시고 모든 선한 선물의 수여자 되신다. 하느님은 사랑과 선함을 수단으로 운영하시고, 인간은 진리와 신앙을 수단으로 그분께 협력한다. 주님은 사랑을 수단으로 그분께로 당기시고, 인간은 신앙을 수단으로 주님께 나아온다. 이를 이 두 대목에서 이렇게 상응의 언어로 가르치셨다.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어 주시지 않으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다” (요한 복음 6:44). 그리고 이와 대조되는 대목이다. “나를 거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요한 복음 14:6). 아버지는 신성한 사랑이고 아들은 신성한 진리이다. 우리를 진리에로 이끄는 것은 사랑이다. 한편 우리를 사랑에로 가져다 놓는 것은 진리이다. 그분께서는 그분의 사랑을 받는 모든 이들을 사랑을 수단으로 그분께로 이끌어 내시나, 오직 그분의 진리를 받고 믿어 그분에게 의식적으로, 실제로 오는 이들만을 이끌어 내신다. 이 신앙자들은 기독인의 신앙의 대상과 기독 생활의 의무를 알 수 있게 하는 진리를 가지고 있다. 그들은 하느님의 전방위적인 사랑으로 이끌어 내질 뿐아니라 널리 퍼져 있는 하느님의 진리에 의해서도 인도된다. 만일 구원이 예수 안에 있는 그대로의 지식에만 절대적으로 의존된다면 하느님은 지상의 모든 국가들에 그분의 진리를 충분히 가져다 놓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선함 또는 사랑이 종교의 첫째가는 요소인바 사랑은 구원의 제일가는 품위이므로 비록 순수성이 각기 다른 수준일지라도 종교의 모든 형체 아래서도 구원을 위한 가장 중요한 조건은 충족되어 있는 셈이다. 선함과 하느님의 지혜는 진리를 주는 것과 그 진리를 붙잡고 있는 것 사이에 비록 지상의 나라나 조건에 따라 차이는 있을지라도 그 수준이나 정도에서 동등하다. 그들을 만드신 분, 그들의 구세주 되시는 분이야말로 그들에게 무엇이 최선이 될 것인가를 가장 잘 아신다. 그분의 온유하신 자비는 그분의 일에 고루 스며 있어 어느 영혼도 구원의 수단 없이 방치되어 있지 않는다. 바깥쪽 수단들이 제아무리 제한되고 불완전하다 해도 보일 수 없는 신성한 영향과 운행은 언제나 현존한다. 설사 보일 수 없는 그분의 권능이 이 세상에서 마음이 고운 이교도 백성들을 그분의 진리에로 이끌지 못했다 해도 저 세상에서는 기필코 그분의 진리에로 이끌어 내주신다. 진실 된 모든 사랑은 진리를 바라고 있다. 이 바람은 이 세상에서 성취 못한다면 저 세상에서는 그들 심정이 어디에 존재하든 만족되고야 말리라.
이렇게 해서 솔로몬이 사랑에 빠진 외국 여인들은 진리에로 이끌려 질 것이다. 참으로 솔로몬은 여인들이 끌어내야 할 진리요 그녀들을 끌어 당기는 사랑이기도 하다. 육을 만든 말씀이 영원한 진리이다. 이 진리는 과거 옷 입지 않은 신성이 인간들의 유약함, 불완전함 때문에 숙박할 수 없었지만, 이제 신성화 하신 인성 안에서 이 진리는 모든 인간 마음 안으로, 모든 인간의 종교들 안으로 들어 갈 수 있다. 예수 안의 여호와, 그리스도 안의 하느님은 모든 사람에게 더 가까이 오시고, 육을 입으시기 전 보다 더 큰 능력으로 각기 다른 신앙과 예배의 형체 안으로 들어 갈 수 있다. 이것은 솔로몬이 많은 외국 여인들과 사랑에 빠졌을 뿐아니라 그녀들의 신에게 절했다는 대목에 대한 거리가 먼 수준에서의 의미이다. “솔로몬은 시돈인들의 여신 아스도렛을 섬겼고 암몬인들의 우상 말콤을 숭배하였다…..솔로몬은 예루살렘 동편 산 위에 모압의 우상 그모스의 신당과 암몬의 우상 몰록의 신당을 지었다. 솔로몬은 외국인 왕비들이 하자는 대로 왕비들이 섬기는 신들에게 분향하고 제물 까지 드렸다.” 아스도렛은 달이고, 그모스는 해이고, 말콤은 몰록의 또 다른 이름으로 이해되고 있다. 이 우상들은 이교도 신들 중에서도 가장 나쁜 것을 대표하는 듯 여겨진다. 해와 달의 숭배는 우상 중에서 가장 나쁜 것에 속하고 있다. 그 우상들은 하느님의 인물됨 (personality of God)으로부터 마음이 멀어지게 한다. 그들은 자아 사랑과 세상 사랑을 표현한다. 인간의 형체를 지닌 우상 중에서도 인간 희생의 피와 부모의 눈물로 덧칠해지는 혐오스러운 몰록은 가장 역겨운 우상이었다. 이런 상황이라 해도 구원은 가능하다. 기독교의 빛 아래 살고 있는 우리로서는 참된 종교적 느낌의 어떤 것이 위와 같은 예배 형체와 어떻게 공존할 수 있을까는 상상해보기도 어려울지 모른다. 또는 참되고 사랑이신 하느님의 영이 피보기를 즐기는 예식을 집전하는 심정 안으로 어떻게 유입될 수 있을까를 추측해보는 것은 더 더욱 혼동스러울 수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참되고 살아 계신 하느님이 자기의 아들을 바치도록 신앙의 조상을 시험하시는 대목을 여전히 읽고 있다 (창세기 21장). 만일 아브라함이 이런 우상 숭배에 젖어 있지 않았다면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이 자기 아들을 죽여 바치는 시험을 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이런 기괴한 헌신의 행동 속에도 구원을 위한 요소는 들어 있다. 헌신자들은 하느님이 가혹할 만큼 대단한 제물을 요구하시고 있다고 믿는다. 그래서 그들은 자기들의 느낌에 폭력을 휘두르고도 정당하다고 여긴다.
이교도 국가의 종교, 우상을 예배하는 것에도 구원이 있다는 것은 솔로몬의 아내와 첩의 숫자로 더 표현하고 있다. 그는 칠백 명의 아내와 삼백 명의 첩을 두었다. 말씀 어디에서이든 숫자 일곱은 거룩한 것을 표현한다. 칠백 명의 아내는 참된 거룩함의 어떤 것이 있는 종교적인 애착들 이다. 거룩한 느낌은 종교의 잘못된 견해와 연결된 채로 마음에 존재할는지 모른다. 그리고 예배의 타락된 형체 안으로 들어갈는지 모른다. 여기에도 두 종류의 예배자가 있다. 즉 심정으로부터 예배하는 이들과 지성으로부터 예배하는 이들, 또는 사랑으로부터 예배하는 이들과 신앙으로부터 예배하는 이들이 있다. 주님의 교회의 울타리 안에서 뿐만 아니라 넘어서 까지에서도 이들 사이에는 구분되는 게 있다. 이 구분은 성별에 의해 크게 본보기화 되고 있다. 여인과 더불어 종교는 심정 쪽에 더 가깝고, 남자와 더불어 종교는 지성 쪽에 더 가깝다. 그런다고 심정이 지성과 서로 몫을 나누지 않는 종교는 실제로 없다. 오히려 서로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단지 등급을 나누어 본다면 심정 속의 종교가 제일 가고, 지성 쪽은 두 번째 된다는 말 일 뿐이다. 어떤 이의 경우 종교는 그의 지성을 통하여 심정에 도달되고, 또 어떤 이의 경우 종교는 심정을 통해 지성에 도달된다. 심정으로부터의 종교가 성경 속의 아내들이고, 지성으로부터의 종교가 성경의 첩들이다. 둘 다 구원받는 종교이나 주님과의 그들의 연결은 더 가깝다와 덜 가깝다의 차이 뿐이다. 그들은 관계적으로 볼 때 천적이고 영적이다. 그뿐 아니라 그들은 두 왕국, 즉 천적 왕국과 영적 왕국을 구성함으로 구별된다. 그렇게 해서 가장 낮은 천국으로부터 가장 높은 천국에 이르기 까지 분포되어 존재하게 된다. 신성은 가장 작은 것에서나 가장 큰 것에서나, 큰 사람 안에서나 각 개인 안에서나 똑같다. 이런 구별은 하느님 자신의 본성 속에 존재하는 것의 형상일 뿐이다.

열왕기상 10장 해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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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왕기상 10장

솔로몬의 군대

다윗은 전쟁의 사람이었고 그의 군인들은 용감무쌍했는바, 우리는 다윗의 통치 열람에서 용사들의 긴 목록을 읽고 그 중에는 비범한 용기까지 발휘한 용사의 기록도 발견한다 (사무엘하 23장). 그러나 솔로몬은 평화의 사람이었다. 비록 그의 통치 시대 때에는 외국인의 침략으로 어수선해진 적이 없어 군대의 절대적 필요성이 별로인 듯 여겨져 그의 통치 권력의 방어 보다는 위엄을 드러내기 위한 들러리 수준 정도로 유지되어 간 듯 보인다. 솔로몬 시대 때에 있었던 군대는 다윗의 시대 때에 이미 있어왔던 군대였다. 솔로몬은 옥좌를 승계 받은 뒤 머지 않아 제단을 붙잡고 있는 요압을 쳐죽인 브니야를 군사령관으로 임명했다 (열왕기상 2:34,35). 요압 대신에 브니야를 군사령관에 앉힌 것은 솔로몬 아래의 왕국은 다윗 왕국 보다 표현적 품성의 수준이 더 높다는 것과 일치한다. 즉 요압은 이새의 가문이고 다윗의 조카였는바 그는 옥좌와 가까웠다. 그러나 브니야는 대 성직자 여호야다의 아들이였는바 그는 제단에 더 가까웠다. 이렇게 되어 브니야는 성직자직으로 표현된 가장 거룩한 품성 속의 선함에서 파생된 진리를 표현했다. 솔로몬은 아버지 다윗에게서 인계 받은 군대 외에도 “병거와 말을 사모으다 보니 병거가 천 사백 대, 마병은 만 이천 명이 되었다. 그는 이 병력의 일부는 병거 주둔성에 배치하고 일부는 왕이 있는 예루살렘에 배치하였다” (10:26). 말의 숫자가 이 구절에서는 언급되지 않지만 이와 연관이 있는 구절이 있다. 즉 “솔로몬에게는 병거를 끄는 말을 둘 마굿간이 사천 간 있었고 말이 만 이천 마리 있었다” (4:26). 병거대나 마병 같은 군대는 사울이나 다윗 통치 아래에서의 군대 편성에는 없었는바 아마도 솔로몬이 군대 편성에 첨가한 것 같다. 이런 기록은 솔로몬의 통치 때에 나라 살림이 얼마나 확대되었는지를 증명해준다. 그리고 더 암시하는 게 있다. 이런 기록은 다윗 보다 솔로몬의 통치가 더 높은 표현적 특성을 상징해주고 있다는 점이다. 말과 병거는 이해성과 교리를 표현한다. 그리고 마병은 총명한 이들, 그들이 이해성을 안내한다. 말과 승마자에 관한 의미는 계시록에서 잘 본보기화 되고 있다. 어린 양이 천상천하의 누구도 열고 들여다 볼 수 없었던 일곱 인을 찍어 봉인한 책을 열었을 때 네 말과 승마자가 차례로 나왔다. 이 네 말들은 주님의 교회의 계속되는 시대에서 거룩한 말씀에 관한 이해를 표현했다. 따라서 말의 색갈과 마병의 특성은 주님의 교회의 몇 세대에서 말씀을 이해하는 품질이 무엇이 되어 있을 것인지를 표현해 놓은 것이다. 첫 번째 말, 그 말의 색갈은 흰색이었고 활을 들고 있는 그 승마자는 계속 정복해 갔는바, 이는 주님의 교회의 첫 번째 시대에서의 말씀에 관한 이해성을 표현했다. 이 흰색은 지적 차원에서의 순수함, 잘못으로부터의 자유로움을 상징하는바, 가장 이른 때의 주님의 교회를 특징화하고 있다. 그 순수함의 결과로 그들은 정복할 수 있다. 마치 사도와 초기 기독교회가 이교도 세계의 반대를 극복했던 것과 같다. 붉은 말과 그 승마자에게는 세상에서 평화를 거두어 버리고 서로 죽이게 하는 권한을 받아 큰 칼이 주어졌는바, 이는 주님의 교회 자체에 슬픔의 시작을 묘사하고 있다. 즉 의견들이 갈라지고 말다툼이 일어나고, 생명인 사랑이 점점 차져간다. 그래서 불화 뿐만 아니라 죽음이 사랑이 평화를 주는 곳, 즉 거룩한 성소를 넘나든다. 검은 말은 주님의 교회에서 말씀의 이해가 어두워지는 것, 즉 진리의 빛이 있던 곳을 오류의 어둠이 차지하는 것이다. 그 결과 영혼의 영적 생명을 떠받쳤던 선함과 진리의 원리들이 대수롭지 않은 원리로 여기는바, 이것이 밀 한 되 아니면 보리 석 되가 한 데나리온에 제공되는 것으로 표현되었다. 창백한 말, 마지막으로 출현한 말인데, 주님의 교회의 마지막 시기에 있는 말씀의 이해, 즉 진리의 빛 뿐만 아니라 사랑의 생명이 소멸된 때의 말씀의 이해를 상징하고 있다. 따라서 그 승마자는 죽음이고 지옥이 그 뒤를 따르고 있다. 그리고 사람의 사분의 일은 칼과 기근과 죽음, 땅의 짐승들을 가지고 죽이는 권한이 주어졌다.
똑같은 주제가 예언자 스가랴에 의해 똑같은 상징성으로 다루어지고 있다. 네 병거들, 붉고 검고 희고 점박이 말 오히려 힘 센 말들이 놋쇠로 된 두 산 사이에서 출현했는바, 이는 말씀의 이해와 교리를 표현했는데 계시록의 주제와 달리 실패해 가는게 아니라 부상하는 주님의 교회에서의 말씀에 관한 이해와 교리를 표현했다. 그 이유가 스가랴 시대의 경우, 예루살렘과 성전의 재 건축, 또는 주님의 교회의 회복이 말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천국으로부터의 네 영들이고, 주님 앞에서 온 지상에로 떠나는 영들이었다. 이 예언의 경우, 흰 말이 뒤를 잇는 검은 말은 북녘 땅으로, 점박이 말은 남녁 땅으로 나가는데, 한편 씩씩한 말들이 온 땅을 순찰하고 있다. 이 예언의 전체는 주님의 오심 즉 그의 이름은 새 싹 (THE BRANCH)에 관련되는 게 분명하다. 따라서 병거와 말이 앞으로 나가는 것은 복음이 권능과 빛을 가지고 전파됨을 비유적으로 기술한 것이다.
말과 승마자의 영적 의미는 아마 계시록 19장을 통해 더 확연해질 것이다. 거기서 요한은 “하늘이 열려 있는 것을 보았다. 거기에는 흰 말이 있었고 ‘신의’와 ‘진실’이라는 이름을 가진 분이 그 위에 타고 계셨다. 그분은 공정하게 심판하시고 싸우시는 분이시다. 그분의 눈은 불꽂 같았고 머리에는 많은 왕관을 썼으며 그분 밖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는 이름이 그분의 몸에 적혀 있었습니다. 그분은 피에 젖은 옷을 입으셨고 그분의 이름은 ‘하느님의 말씀’이라 하였다.” 흰 말, 초기 기독교회에서 있어 왔던 말씀의 이해가 여기서 다시 회복되고 있다. 그 이유가 주님의 교회의 회복이 새 예루살렘이 내려옴으로 취급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회복은 초기 기독교회 보다 더 큰 영광과 권능에서 회복되고 있다. 그 이유가 이 백마를 타신 분은 참 하느님의 말씀이시고, 그분은 옳고 그른 것을 판결하시기 위해 무지와 오류와 악과 싸우시려 전쟁을 일으키기 위해 전진하시기 때문이다. 마지막 주님의 교회는 지적으로 순수한 상태로부터서의 떠남이 예보되고 있지 않다. 흰말을 타신 그분의 의복, 즉 말씀의 글자라는 겉옷은 참으로 끊임없이 시달림을 받은 진리들의 피로 물들여져 있다. 그러나 말씀 속의 흰말은 퇴보의 표시 같은 것이 뒤따르지 않고 있다. 오히려 천국의 군대가 희고 깨끗한 모시옷을 입고 흰말을 타고 그분을 뒤따르고 있다.
성경의 영성과 솔로몬의 표징적인 특성이 있음을 인정한다면, 솔로몬왕이 거느린 수많은 말과 마병을 가진 병거대가 무엇임에 틀림없는지가 성경 자체로부터 명확해질 것이다. 만일 이스라엘의 적들과의 자연적인 전쟁이 주님의 교회의 적들과의 영적인 전쟁을 예징화하고 있다면, 주님의 교회의 무기들은 육체적인 게 아닌 영적인 것인바, 병거와 말 역시 물질적인 것이 아닌 지적인 것임에 틀림없다. 솔로몬의 대형(antitype)으로서 주님에 관련해보면 이 예언은 신성한 존재를 향해 말하는바. 그분은 말을 타시고 구원의 병거를 몰면서 그분의 백성을 구원하시려고, 기름받은 자를 구원하시려고 나오심을 뜻해야만 할 것이다(하박국 3:8,13). 솔로몬이 지은 4000개의 마굿간, 1400대의 병거들, 12000의 마병들은 그것의 풍부함 뿐만아니라 그것들이 표현하는 영적 도구나 매개체들의 품질에 대한 표현이다. 1000으로 세어지는 것은 무엇이든 선함에 바탕을 둔 것, 또는 선함에 근거를 둔 품질을 표현하는바, 숫자 1000은 그것들을 수식하는 다른 요소들을 표현하게 된다. 일반적으로 40은 시험, 전투에 관한 어떤 것, 14는 7처럼 거룩한 것, 12는 참된 것 또는 신앙속의 진리를 암시하는 숫자이다.
솔로몬의 말이나 마병과 연결되되 좋은 측면 같이 여겨지지 않는 두 가지 특이사항이 있다. 영적 상태에 도달된 상태라면 자연적 진리를 수단으로 영적 진리를 확증하고 예증하는 것은 가능하다. 이런 상태가 솔로몬의 왕국과 그의 통치를 수단으로 표현되어져 있다. 그러므로 말을 불리고 말과 병거를 가져오기 위해 에집트로 내려가는 것이 솔로몬에게는 허용될 수 있었다. 마음이 종교의 진리에서 건설될 때, 과학에 관한 이해와 교리들은 진리를 위해 방어하는 수단이요 진리임을 확증해준다.
솔로몬의 통치는 재판이라는 측면에서는 유명해져 있는데 비해 그의 군대는 공격적 전투를 수행한 적이 없는 것 같고 단지 방어적 임무만 수행한 듯 보인다. 참으로 그는 전쟁 도구라 해도 방어를 위한 것만을 만든 듯 말해지고 있다. 즉 “솔로몬왕은 금을 입힌 대형 방패를 이백 개 만들었는데 방패 하나에 금 육백 세겔이 들었다” 라고 기록되고 있으나 그가 창이나 칼을 만들었다는 기록은 없다. 영적 전투의 더 높은 상태는 순수하게 방어적이다. 기독인이 진리로부터 선함으로 발전해 가는 한 그는 공격할 뿐아니라 방어도 한다. 영적 싸움의 참 원리는 방어이다. 이것은 자연적 싸움의 참 원리도 된다. 그러나 자기 방어의 원리는 공격적인 작전이 요구될 때도 있다. 참 원리는 영적이든 자연적이든, 결코 전쟁의 빌미를 만들려 한다거나 침략 같은 전쟁에 몰입하지 않는다. 그러나 종교적 삶 속의 전쟁에서 영적이고 천적인 인간, 또는 신앙의 사람과 사랑의 사람은 다르게 행동한다. 천적 인간의 전투 수행은 영적 인간의 것 보다 품성 면에서 더 순수하게 방어적이다. 사랑은 칼 보다는 방패를 더 사용하고, 믿음은 방패 보다 칼을 더 이용한다. 참 신앙의 사람은 실로 사랑의 영향 아래 진리의 칼을 사용한다. 자기들의 칼과 방패에 기름부워진 이스라엘의 용사들이란 영적 인간 조차도 사랑의 기름이 부워진 진리의 칼을 소지해야만 한다는 것을 표현하는 것이다. 천적 인간은 자기의 전투 수행이 싸움이라 불리우는 한 사랑 자체로부터 싸운다. 솔로몬의 큰 방패와 작은 방패는 사랑의 상징물인 금을 두드려 늘여서 만들었다. 주님께서 지옥의 군대 전체와 싸우셨을 때조차 그분이 공격당하실 때를 제외하고는 그분은 그분 자신과 그분의 백성의 적들과 치고 박지 않으셨다. 그분은 신실한 자의 마음 안에서 도래하신다. 그들의 싸움이 무엇이든 이것은 그들 자신의 자아로부터 임이 분명하다. 신실한 자에 대한 약속은 이러하다. “그분의 진리가 너희의 큰 방패와 작은 방패가 되리라” (시편 91:4). 그분의 진리는 형체이고 그분의 사랑은 실체이다. 그것은 금을 두드려 펴서 만든 큰 방패와 작은 방패이다.
기독인의 삶은 교전 상태일 뿐아니라 순례자 상태이기도 하다. 이를 통과하는 가운데 우리는 사울과 다윗의 깃발 아래에서 뿐아니라 솔로몬의 깃발 아래서도 싸워야만 한다. 모든 싸움 속에서 주님은 우리의 참 지도자시고 우리 앞에서 가시밭 길을 걸으시고 선한 싸움을 하시었다. 그러나 그분은 모든 이 각자의 상태에 따라 그에게 나타나신다. 그분 자신과 그분의 섭리해주심은 언제나 동일하지만 그분은 그분의 사랑과 진리를 영접하는 양과 질에 의거 모든 사람 각자에게 나타나신다. 사랑 보다는 진리를 더 많이 받는 이들은 그분을 전쟁의 참 사람으로서 본다. 진리 보다는 사랑을 더 많이 받는 이들은 그분을 평화의 사람으로서 본다. 가상적 진리 또는 진짜 진리로부터 싸우는 이들은 사울 또는 다윗 같은 그분의 인도를 받는다. 그분께서는 사랑과 지혜의 왕국, 정의와 평화의 왕국으로의 길을 진지하게 추구하는 모든 이들을 이끌어주신다. 그러나 그분은 그들을 이끄시되 자아와 세상, 육과의 싸움을 통하게 하시면서도 한편 그분은 그들을 악으로부터 보호하고 선으로 풍부해져 자기들의 포도 나무와 무화과 나무 아래에서 아무 걱정 없이 지내는 상태와 영 안에서 이끄시기를 바라시고 있다.

열왕기상 9:6-28; 10:11, 12 해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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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왕기상 9장 26-28절, 10장 11,12절

솔로몬의 상선대

성경의 역사 부분의 어느 한 단원도 솔로몬의 상선과 그 업적에 관계될 수 있는 게 별로 없어 이에 대한 탐구나 추론 역시 미약한 편인 것 같다. 이 주제와 관계 될 만한 거룩한 원문들을 설명하려고 뭔가를 제시해본다 해도 솔로몬에게 금과 은, 상아, 원숭이, 공작새 등을 공급한 지역의 위치가 어딘지는 오늘날 까지도 불확실하다. 가능성의 제 1 순위로 인도가 지목될 뿐이다. 그 이유가 거론된 상품의 목록 때문인 듯 싶다. 만일 이 상선대가 지중해 쪽의 항구에서 출항했다면 인도로 가기 위해서는 아프리카를 돌아야 하므로 이 항해는 솔로몬 시대의 항법 수준으로는 거의 불가능 한바, 비록 다르싯이 언급되는 지역이 지중해 쪽이라 해도 아마 출발 항구는 홍해 쪽이고 그 쪽에서 무역을 했을 것이라 생각해본다. 어쨋든 이런 탐구는 우리가 성서 구절의 영적 의미를 이해하는데 크게 필요한 것은 아닌바 더 이상의 상상은 생략할까 한다.
제 10장의 일반적인 목적은 솔로몬이 왕들 중에서 가장 슬기로웠고 부유했다는 것, 지상의 모든 왕이 그의 지혜를 듣고 싶어 왔다는 것, 아주 먼 지역의 왕들 까지도 그를 더 부유해지게 만들었다는 것 등등을 보여 주려는 것인 듯 여겨진다. 솔로몬 왕국의 대단한 재산, 솔로몬의 능력의 위대함, 그의 통치권의 범위 등등이 거룩한 역사가들에게 큰 관심거리 였는 듯 보인다. 띠로의 왕과 세바의 여왕이 솔로몬을 대단히 칭송하고 우방국으로서 솔로몬의 위대함과 화려함에 일조했을 뿐아니라 “세계 각 처에서 사람들이 솔로몬 왕을 찾아 왔는데, 저마다 빈손으로 오지 않고 은집기, 금집기, 놋, 갑옷, 향로, 말, 노새 등을 매 년마다 그치지 않고 가져왔다.” 이 구절은 영적 이스라엘 왕의 지배와 부, 그리고 그 권능이 솔로몬의 것들로 상징화 된 것이다.
따라서 모든 이들이 솔로몬을 존경했다는 것도 예수에 대한 뛰어난 예징이었지만 이 정도도 그분에게는 그림자 수준의 예징밖에 더 아니다. 천국에서 그러했듯 지상의 모든 무릎이 그분 앞에서 꿇어야 하고 지상의 모든 혀들이 그분께 고백해야 하리라. 모든 천사가 가장 값진 선물을 드려 경배하는 그분이야말로 지상의 모든 이가 다가 가서 지혜를 듣고 끊임 없는 섬김을 드려야 할 가장 위대한 한 분 참 대상이시다. 이런 그분의 참 속성이 알려진 주님의 참 교회에서 과거 여러 왕들이 솔로몬에게 표했던 경의와 바쳤던 예물이 끊임 없어야 하리라.
솔로몬이 홍해에 띄운 배는 아마도 이스라엘 왕국과 연결지어서는 첫 번째이자 유일한 배이었던 것 같다. 그 뒤 수세기 후 예수의 제자가 갈릴리 바다에 띄운 배는 아마 솔로몬의 상선에 비해 훨씬 덜 중요하고 시시했을 것이다. 그러나 제자들이 모든 지혜의 부와 지식 안에 거주하시는 그분을 이 장소에서 저 장소로 실어 날랐을 경우 그 배는 훨씬 더 귀중한 배였다. 이 배는 구속과 구원의 모든 축복을 지상의 창조물에게 제한 없이 나누어 주시려 오신 그분을 태웠다. 어찌됐든 위의 두 경우 모두에서 배는 똑같은 의미를 가졌는바 비슷한 영적 교훈을 우리에게 전달하고 있다. 성경에서 배는 지식을 상징한다. 그래서 배의 용도 측면에서 보면 유추가 발견되는 것을 상징한다. 지식은 지혜는 아니나 지혜를 담는 그릇이요 마음에 지혜를 실어 나르는 도구이다. 배를 수단으로 상인들은 먼 거리, 매우 다른 지역을 방문하고 자신의 나라의 생산물을 다른 나라의 상품과 교환하여 두 나라 모두 부유하게 한다. 이렇게 배는 지식을 상징한다. 배는 비록 이렇게 얻는 부유함이 참된 부는 아닐지라도 부를 획득하는 매개체이다. 그릇이나 배는 삶의 목적에 따라 응용되어 예상한 목적에 까지 부를 담아 운반한다. 이런 이유로 지식을 수단으로 신성한 말씀 안으로 들어가는 이들은 구속하는 사랑의 경이로움을 잘 생각하고 구속하는 사랑의 혜택을 실감하게 하는 지혜를 얻는바, 이것이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가 큰 바다에서 사업을 하는 것으로 표현되어졌다. 이들은 주님의 일과 그분의 경이로움을 본다고 말해지고 있다. 똑같은 이유에서 거룩한 지식과 교통을 이룬 신비로운 바빌론에 있는 이들이 바빌론의 몰락을 탄식했는바 이렇게 표현하였다. “모든 선장과 선원과 바다에서 일하는 사람들도 다 멀리 서서….슬피 울면서 ‘무서운 일이다. 이 큰 도시에 화가 미쳤구나! 항해하는 배의 선주들이 모두 그 도시의 사치 생활로 말미암아 부자가 되었건만 그것들이 다 일시에 잿더미가 되고 말았구나’ 하고 부르짖을 것이다.”
솔로몬이 세운 상선대, 이를 수단으로 그는 아주 먼 지역과도 교류하고 무역을 했는바, 이는 복음서 아래 종교적인 빛과 덕목의 축복을 아주 먼 나라에까지 운반하는 지식을 상징하는 것으로 간주될는지 모른다. 또한 주님에 관한 지식은 더욱 더 퍼져서 물이 바다를 덮듯 온 땅을 덮은 것을 상징한다고 생각해 볼 수도 있다. 이런 대단히 일반적인 견해 외에도 우리는 솔로몬의 배를 제자들의 배처럼 이해해 볼 수도 있다. 이 배를 타시고 주님께서는 여행하셨고, 이 배에서 가르치셨고, 이 배에서 바다를 잠잠케 하셨다. 이 배는 그분 자신의 신성한 말씀에 관한 지식을 표현하였다. 이 말씀 안에 그분이 현존하시고 이 말씀을 수단으로 그분은 우리에게 더 접근하시고 우리가 그분께 더 가까이 다가선다. 이 말씀으로부터 그분은 삶과 불멸에 관한 위대한 교리를 우리에게 훈육해 주신다. 그래서 이 교리가 실감되면서 그분께서는 혼동을 일으키는 영혼들에게 평정을 회복시켜 주신다.
솔로몬의 배가 실어다 준 상품 목록들 역시 특이한 영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 금과 은은 내적 인간의 선함과 진리, 상아. 원숭이, 공작새는 외적 인간의 선함과 진리를 의미한다. 금과 은은 아주 귀중한 영적 품위들을 상징하여 모든 이가 즉각 그 의미를 인식하도록 예언자들에 의해 자주 사용되었다. 모든 품위 중에서 사랑은 가장 순수하고 가장 귀중한바 이런 사랑의 품위를 금이 가장 보편적으로 상징하고 있다. 솔로몬의 통치는 사랑의 통치를 표현했기 때문에, 그의 나라는 주님 사랑을 통치의 원리로 삼고 흠모하는 주님의 왕국을 표현했기 때문에, 이것이 표현되도록 솔로몬의 방패는 두드려 편 금으로 만들었고, 그의 모든 잔도 금으로 만들었고, 레바논 수풀궁의 그의 집의 모든 그릇도 금으로 되었고, 은으로 만들어진 것은 하나도 없었으며, 솔로몬 시대에는 은을 귀금속으로 생각하지도 않았고, 예루살렘에서는 은이 마치 돌맹이 처럼 흔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와 같이 금이 풍부하고, 상대적으로 은은 귀하게 여기지 않는다는 표현 양식을 빌려서 우리를 가르치시는 바, 주님을 사랑함이 심정을 통치하고, 선이 이성의 바탕이 되어 있을 때 은이 표현하는 영적 진리는 돌이 표현하는 자연적 진리의 자리를 차지한다는 말이다. 솔로몬의 배가 방문한 나라의 세 가지 자연적 산물 중에서 상아는 합리적 진리를 의미한다. 이 진리는 자연적 인간 또는 외적 인간 속에서 가장 수준 높은 진리이다. 그러므로 솔로몬은 상아로 옥좌를 만들고 순금을 입혔다. 이런 특유한 표현의 의도는 금방 눈에 띈다. 그 이유가 재판은 마음의 합리적 능력의 기능이기 때문이다. 이 기능은 증거의 무게를 달아 보고 비교하고, 잘, 잘못 사이를 식별하고 분리한다. 그리하여 재판은 전체 결말로부터 마무리된다. 그럼에도 재판은 진리 만으로부터 형성되고 발표되는 게 아니다. 비록 진리만으로도 부족한 게 없다 해도 진리만으로는 재판상 너무 가혹해진다. 재판은 진리에 의거하되 자비로 부드러워져야 한다. 재판하는 옥좌는 상아로 만들었으되 금으로 덧입혀 있었다. 합리적 능력은 엄격히 생각하면 내적 인간과 외적 인간 또는 영적 마음과 자연적 마음 사이에서 매개체 역할을 하면서 그 중간에 위치를 정하고 있다. 본문에서 열거된 상품에서도 상아는 내적 인간의 선과 진리를 의미하는 금, 은과 외적 인간의 선과 진리를 의미하는 원숭이, 공작새의 중간에 기록되어 있다. 이렇게 의미를 파악한다는 것이 무리인 듯 여겨질는지 모르나 우리의 목적을 위해서 우리는 원숭이는 짐승이고 공작새는 새인바 이들은 선과 진리의 원리들, 또는 애착과 생각에 상응한다는 것만 알아도 충분하리라 본다. 자연적 마음에 대한 그들의 관련은 동물 자체의 본성에 의해서 단순히 결정되는 게 아니라 그 본성과 더불어 그 동물이 열거되는 장소, 그리고 인간의 자연적 마음은 본성상 동물의 것과 비슷한바 동물은 특히 마음의 자연적 애착과 지각을 의미한다는 것까지 감안하여 결정된다.
위에 열거된 귀중하고 흔치 않은 상품들을 외국의 땅으로부터 이스라엘의 땅으로 들여 오기 위해 이루어진 항해는 한번에 삼 년이 걸렸다. 셋으로 된 것(trine)은 상태를 상징한다. 셋은 세 개가 한 쌍이라는 생각을 포함하는 숫자이다. 이 숫자 안에서 모든 상태의 회전이 완성되고 그 목적이 성취되는바, 이 기간은 거듭나는 상태의 완성을 표현하고, 이를 수단으로 마음 속의 가장 높고 낮은 원리, 가장 내면과 가장 외면의 원리들이 연결짓고 하모니를 가져온다.
솔로몬 상선대의 긴 여행에는 히람의 상선대도 합류하고 있었는바, 9장 27절에서 “히람은 자기 수하에 있던 노련한 선원을 보내어 그 상선대에서 솔로몬의 선원들과 함께 일하게 하였다” 고 기록되고 있다. 사실 이스라엘 국가는 바다에 익숙하지도, 상업 국가도 아니었지만, 고대 세계 속의 영국 같은 페니키아는 해상 무역이 발달해 있었다. 왕자들이 상인이였던 띠로는 지중해 연안과 그 너머에 교역하는 많은 식민지를 가지고 있었다. 띠로가 갖는 이런 상업적인 특성이 성경의 표징적인 특징에서도 잘 반영되고 있다. 이미 살폈듯이 띠로 왕 히람은 솔로몬의 성전 건축을 위해 아주 많은 재료를 공급해주었다. 띠로는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을 표현하고 그들의 배 자체가 이를 상징하고 있다. 성경에 기록된 모든 것이 영적 의미를 위한 것이듯, 솔로몬의 상선대에 합류한 히람의 선원과 배는 마음의 더 높은 능력이 유용한 목적을 수행하는데 더 낮은 능력의 도움을 받기 조차 한다는 사실을 표현하는 것이다. 세상에서 같이 교회에도 선물의 다양함이 있다. 교회의 모든 멤버들은 서로에게 유용할 수 있다. 모든 교회인들이 일반적인 선, 뿐만아니라 상호적인 선을 위해서도 함 께 일한다. 비록 그들이 받은 재능의 선물은 다양하지만 한 분 참 영으로부터 생명을 받고 있다. 어떤 교인은 학문적 측면에 알맞고, 어떤 교인은 행동 측면에서, 어떤 교인은 지식을 획득함으로 특이한 기쁨을 발견하는 경우도있다. 아마 이 마지막 교인, 지식의 획득에 따라 기쁨을 얻는 교인이 히람이나 띠로 사람일 것이다. 머큐리의 영처럼 그들은 지식만으로 기뻐하고 있다. 아마 어떤 측면에서는 하느님의 제단을 위해 물을 긷고 나무를 패는 일을 담당했던 기브온 주민일는지 모른다. 이들은 어쩌면 자신을 위해서 보다는 타인을 위해서 노동한다. 그럼에도 그 노동으로부터 얻어질 수 있는 혜택을 타인들에게 증여하려는 의도도 없어 보인다. 이런 특성, 그것의 유용한 측면과 위험한 측면이 솔로몬의 역사로부터 본보기화 되어 우리에게 주어져 있다. 우선 유용한 측면일 경우, 히람이 다윗과 솔로몬에게 주님의 성전을 지을 재료를 구하는데 많은 도움을 준 것이다. 위험한 측면일 경우, 띠로의 자만으로부터 이다. 이를 놓고 예언자들이 혹독하게 질책하고 있다. 띠로 사람과 히람의 위와 같은 특성이 앞 장의 사건에서도 납득된다. 즉 솔로몬이 그의 위대한 일을 마무리했을 때 히람의 도움에 고마움을 표하고저 그에게 가나안의 성읍 20개를 주었다. 그러나 히람은 그 성읍을 둘러보고 반기지 않고 이렇게 말했다. “‘나의 형제여, 당신이 나에게 준 성읍들이 이게 뭡니까?’ 그래서 이 날 까지 이 지방은 가불의 땅이라 불리고 있다.” 가나안의 갈릴리의 이 성읍들은 주님의 교회의 교리들을 의미한다. 주님의 교리는 바다를 항해하는 배로 표현되는 지식이라는 것보다 더 실용적인 본성과 내적 측면이라는 특성을 지니고 있다. 역사라는 사실만으로 본다면 솔로몬이 자기를 도와준 친구, 히람이 성읍을 보고 좋아하길 바랬다고 생각해야겠지만 성서 글자를 통한 영감된 언어가 우리에게 알려 주는바, 지식만으로 기뻐하는 이들은 주님으로부터 직접 오는 진리, 그리하여 그분에게 직접 인도하는 진리를 두고서는 기쁨을 느끼거나 아름다움을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말하는 사항들은 절대적 차원이 아닌 상대적, 관계적 측면에서 언급하고 있다. 다시 말해 종교의 내향의 모든 원리를 거절하거나 메스꺼워 하는 지식의 바깥쪽 기쁨을 뜻하는 게 아니다. 히람은 비록 유쾌해 하지는 않았지만 솔로몬이 내준 성읍을 받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내향의 진리와 선을 확실히 싫어하고 거절함은 앎을 사랑함의 남용이다. 이럴 경우 지식은 잘난척 하게 되는바 이것이 히로의 마지막 결과이다. 그러므로 띠로를 향한 심판은 “띠로 출신의 귀공자들에게 말하라 주 하느님께서 말씀하신다. 너희의 심정이 들떠 있기 때문이다. 너희는 ‘바다 한가운데에서는 내가 하느님이다’ 라 말한다. 너의 지혜와 이해력으로 너는 부자가 되었고 금과 은을 네 보물 창고에 쌓았다. 너는 하느님의 동산 에덴에 있으면서 각종 보석이 너희의 덮개였다. 너희는 가득한 지혜를 봉해 놓고 아름다움에서 완전하였다. 너의 심정은 그 아름다움 때문에 들떠 있었다. 너는 너의 빛남 때문에 네 지혜를 썩게 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말하신다. 너는 외국인의 손으로 할례 받지 않은 자의 죽음을 맞이하리라.” 띠로는 선함과 진리에 관한 지식을 의미하는바 이것들이 띠로의 재산으로 의미되는데 띠로의 저속한 사용은 주님께 거룩함이 되어야 할 것이라고 말해지고 있다. 불성실한 자가 장사거리로 만들어버린 지식이 그로부터 거두어들이고 신실한 자에게 주어질 때 거룩한 삶을 증진하는 수단이 되고 주님을 섬기는데 헌신된다. 마치 금과 은과 의복이 에집트 사람으로부터 뜯어내 이스라엘의 아들, 딸에게 입혀지고 귀중한 물품의 얼마는 성막 자체를 장식하는데 바쳐진 것과 같다.
솔로몬의 상선대는 에돔의 땅, 홍해에 있는 에시욘게벨에서 창설되어 항해를 시작했다고 이미 말한 적이 있다. 배가 건조되고 항해를 시작한 그 장소는 영적 의미에서 언급된 것이다. 이스라엘이 에집트의 노예 신세에서 해방되는 역사와 연관되어 유명해진 홍해는 영적 사항에 관한 단순한 지식 또는 과학을 의미한다. 특히 에시욘게벨에 의해 뾰족하게 의미되고 있다. 과학으로부터 지식은 파생되어지고, 과학으로부터 마음은 영적 선과 진리의 탐구에 착수한다. 마치 이스라엘이 가나안으로의 여행이 에집트에서 출발된 것과 같다. 종교적인 여행은 종교적인 과학에서 시작된다. 이런 과학, 종교에 관한 과학적 지식은 자연적 선함에 바탕을 두는바, 솔로몬 해군의 기지가 에돔 땅에 있는 것이다. 이렇게 시작하는 상태는 번영을 약속받는다.
영적 삶을 항해에 비교해 본다면 솔로몬 상선대가 성취한 업적은 영혼의 진보에서 있는 중요한 순환을 표징해야 할 것이다. 이로부터 우리는 어떻게 천국의 부는 쌓아지는지 배워진다. 우리는 신성한 말씀의 영적 의미가 열려진 지혜의 영역을 더 깊이 들어 가보고, 더 멀리 항해하는 노력을 게을리 말아야 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