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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왕기상 12장
유다와 이스라엘의 두 왕국
하느님께서 휘저어 솔로몬 왕에 맞서게 손을 들어준 사람은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이었다. 그는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의 분리가 표현한 영적인 분리의 기초가 놓인 원리를 명확히 표현하고 있는바 그의 역사를 더 들여다 볼 필요가 있어 11장으로 되돌아 가본다.
여로보암에 관해 우리가 배운 첫 사실은 그가 에브라임 지파였다는 것이다. 요셉의 둘째 아들의 후손인 에브라임 지파는 므나쎄 지파가 마음의 자발적 부분을 표현한데 비해 지적 부분을 표현했다. 그러므로 요셉의 두 아들은 두 왕국으로 결국 나뉜 유다와 열 지파 사이에 있는 특징적 차이점과 함께 이스라엘 온 가문으로 표현되는 것의 축소판(epitome)이었다. 에브라임이 마음의 지적 기능을 표현했듯, 그는 또한 과정의 문제로서 영적 원리 자체를 표현했다. 여로보암의 아버지 쪽의 이름도 이에 부합되고 있다. 느밧이 뜻하는 것은 찾는 것, 관심인데 이것은 지적 시야를 표현하는 단어이다. 그러나 여로보암의 어머니는 과부였고 그녀의 이름은 스루아였다. 과부란 선함 가운데 있으면서 진리를 바래는 자이다. 그러나 여로보암의 과부된 어머니는 나병 환자(Leper)라는 이름도 달고 있었다. 따라서 그녀가 표현한 선함은 악과 혼합된 것, 어느 정도 까지 모독된 것을 표현하고 있다. 참으로 이런 것들은 고대 교회, 또는 영적 교회를 구성한 이들의 지성의 뿌리였고 이는 영적 천국 자체 의 뿌리도 되고 있다. 영적 차원과 더불어 근원적인 의지는 부패되고 이것은 결코 갱생되지 않는다. 마치 하느님의 모양에 따른 천적 차원이 잃어진 것과 같다. 영적 차원과 함께 새로운 의지는 마음의 지적 부분에서 형성되어진다. 진리를 수단으로 형성되는바, 이 의지는 선함으로부터의 의지라기 보다는 진리로부터의 의지이다. 다시 태어난 이들과 함께 있는 이 새로운 의지는 옛 의지를 종속시키고 마음의 실제적 힘을 잡고 근원적 기능을 경질시킨다. 그럼에도 옛 의지는 완전하게는 결코 파괴되지 않는다. 모든 사람은 부패된 의지를 느낀다. 때로 이 부패된 의지는 하느님의 자녀 조차도 통곡의 원인이 될 경우도 있다. 이 나병적인 의지는 바울로 하여금 그가 선을 행할 때 악이 자기와 함께 현존했음을 선포하게 했다. 그래서 그는 영의 쓰라림에서 이렇게 외친다. “누가 이 사망의 육체로부터 나를 해방시킬 것인가?” 이것은 하느님의 마음에 종속되지 않는 힘, 종속될 수 없는 육적인 마음이다. 비록 이 육적인 것이 영적인 것과 함께 회복되거나 소멸될 수 없다 해도 종속될 수 있다. 이 사실의 모두에서 똑같은 사도가 실험적인 증거를 낳고 있다. 다투는 두 법칙에 관해 말한 후 이렇게 소리친다. “나는 과연 비참한 인간입니다. 누가 이 죽음의 육체에서 나를 구해줄 것입니까? 고맙게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구해 주십니다. 나는 과연 이성으로는 하느님의 법을 따르지만 육체로는 죄의 법을 따르는 인간입니다” (로마서 7:24,25).
여로보암은 힘센 용사였다. 솔로몬이 밀로궁을 짓고 다윗의 성을 보수할 때 그는 왕의 마음에 들어 요셉 지파의 부역 총 책임자로 임명되었다. 밀로궁은 시온산의 요새였다. 그 성은 애당초 다윗이 지었다 (사무엘하 5:9). 요셉 가문의 임무는 “왕 솔로몬이 자신이 산 집, 그리고 밀로궁, 주님의 전, 예루살렘의 성곽을 보수하기 위한” 것임은 의심할 바 없다 (9:15). 다윗성의 터진 곳을 수리하게 된 여로보암은 결코 수리될 수 없는 다윗의 왕국의 깨어짐에 도구가 되었다. 어쨋든 솔로몬, 여로보암, 요셉 가문 모두는 좋은 일을 하고 있는 셈이다. 그리고 한 가지 불필요하고 일치 안 되는 것은 왕국이 둘로 깨지는 것 일 게다. 그러나 솔로몬과 그의 신하는 이 쪼개짐을 위해 제각기 다른 길에서 준비하고 있던 참이다.
솔로몬 왕에 맞서 여로보암의 손을 들어 준 원인은 비록 그로 하여금 솔로몬 생전에는 적대적 행동을 금했다 해도 포부의 동기는 가슴에 담고 있었을 것이다. “여로보암이 예루살렘에서 나가다가 실로 출신의 예언자 아히야를 길에서 만났다. 그 예언자는 말쑥한 새 옷을 입고 있었다. 들에서 단 둘이 있게 되자 아히야는 자기가 입고 있던 새 옷을 벗어서 열두 조각으로 찢었다. 그러면서 여로보암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이 열 조각을 받으십시오. 이것은 이스라엘의 하느님 야훼께서 하시는 말씀입니다.’ ‘잘 들어라. 내가 솔로몬의 손 안에 있는 이 나라를 찢어 너에게 열 지파를 주리라.’” 이 표시의 의미는 이스라엘의 왕국에 관련된 것임은 누구나 쉽게 파악할 수 있다. 그러나 하나인 왕국이 나뉨에 관련되어 지니는 이 구절의 상징성은 쉽게 파악되지 않을 것이다. 겉옷은 진리의 상징물이다. 그 이유가 겉옷이 몸을 감싸듯 선을 감싸는 것이 진리이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아론의 겉옷을 준비하는데 아주 세세한 지침이 내려졌기도 하다. 아론의 겉옷은 주님의 영적 왕국을 표현했다. 이 표징성 때문에 하느님 자신도 빛을 겉옷같이 두르셨다고 말해지고 있다. 그 이유가 그분이 입으신 겉옷은 그분의 신성과 선함을 덮고 있는 신성한 진리이기 때문이다. 또한 나뉠 수 있거나 여러 조각으로 찢어질 수 있는 게 진리이다. 선함은 하나이나 진리는 선을 어떻게 수용하느냐에 따라 다양해진다. 설사 진리가 나뉘지 않는다 해도 수정, 변경, 가감되면서 선과 연결된다. 제아무리 인간에 의해 다양한 진리들이 받아들여져도 모든 이가 선함에 의해 작동된다면 모든 이는 하나이다. 비록 교회가 교리 측면에서 다양해 있을지라도 주님의 교회는 선함과 사랑 측면에서는 하나일는지 모른다. 천적 천국과 영적 천국이 진리 측면에서는 구분되지만 사랑 측면에서는 합일되어 있다. 주님의 교회는 진리와 교리 측면에서는 나뉘어 있지만, 영 안에서는 하나일는지 모른다. 비록 이스라엘이 두 왕국으로 나뉘어졌지만 서로는 평화로이 살 수 있는 것과 같다. 천국이 두 왕국으로 나뉘어 있지만 선행을 수단으로 하나 되어 있다.
첫 주님의 교회의 끝과 두 번째 주님의 교회의 시작과 더불어 의지와 이해성이라는 인간의 두 기능 사이에 결과 된 분리는 천국이 구분되는 두 왕국으로 나뉨에 필수적으로 수반되고 있다. 천국은 그 안에 있는 것들의 상태와 형체로부터 천국 자체의 형태와 상태를 갖는다. 거듭나는 사람은 아주 작은 천국이다. 천국은 가장 큰 거듭난 사람이다. 의지와 이해성의 기능들이 한 인물 안에서 분리될 수 없게 하나 되어 있다면 큰 사람 안에서의 그들의 표징성도 분리된 존재로 있을 수 없다. 인간 마음이 하나로만 있다면 거듭난 인간 마음으로 구성되는 천국도 하나이다. 인간 마음이 나뉘게 되자 천국 역시 그에 상응되는 나뉨이 실행되었다. 두 왕국으로 천국의 나뉨은 육을 입으시는 때까지 거행될 수 없었다. 고대 교회가 영계에서 마지막 심판에 의해 완전한 끝을 맞이할 때 까지 천국은 나뉠 수 없었다. 이 사건을 두고 주님께서 언급하신 대목이 있다. “이제 이 세상의 심판이 있다. 지금 이 세상의 왕들이 내던져질 것이다.” 그리고 말하셨다. “나는 사탄이 번개 같이 천국으로부터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 여기서 이 세상은 영적으로는 주님의 교회를 의미한다. 그리고 사탄은 영계에서 출몰하고 천국에 반대하는 저 세계에 있는 이들을 뜻한다. 그들은 천국에 승강 되기 앞서 준비를 위한 영역이라 할 수 있는 중간 상태에서 주님이 일어나시고 높은 곳에 승강하실 때 까지 보존되고 있었다. 사탄이 떨어졌다는 천국은 가상의 천국, 즉 지상의 주님의 교회에 있던 불성실한 자와 거짓된 자들이 영계에서 자신들을 위해 형성된 천국이고 이 안으로 육을 떠난 모든 영들이 처음 입장한다. 홍수 시대로부터, 그리고 노아 시대 또는 고대 교회가 개시된 때로부터 중간 상태에 보존된 신실한 자들이 영적 천국 또는 두 번째 천국 즉 영적 왕국이라 말할 수 있는 천국을 이루었다.
그러나 두 번째 천국 즉 영적 왕국은 영들의 세계에서 보존되었던 이들 만으로 구성되지 않았다. 천적인 주님의 교회였던 태고 교회에 속했던 이들로 형성된 천국, 근원적으로는 이 천국 만이 천국을 구성했었는데, 아직도 천적 왕국을 구성하며 영적 왕국과 구분되어 있다.
비록 근원적으로 한 천국, 한 왕국밖에 없는 게 사실이지만 그 안에는 지금 보편적 천국을 구성하는 두 왕국과 세 천국에 관한 모든 필수 요소를 가졌다. 큰 사람(The Grand Man)은 위와 같은 점에서 하나의 개인적인 사람이다. 그의 첫 창조로부터 인간은 정신적으로 의지와 이해성 그리고 행동으로 구성되었다. 홍수 때에 인간 마음의 조건에 있어진 변화를 수단으로 마음에 더해지거나 빠져 나간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똑같은 기능이 여전히 남아 있지만 달라진 것은 세 기능 서로에 관계된 형편이 달라진 것이다. 그들은 분리된 개별성을 획득했다. 이는 독립된 존재는 아니고 분리된 존재일 뿐이다. 마음은 이중적인 의식 세계 같은 것을 획득했다. 즉 생각함과 뜻함이 따로 움직인다는 말이다. 큰 사람 역시 근원적으로 보면 의지, 이해성, 행동으로 구성되고 있다. 이것들은 세 천국과 두 왕국의 요소들이다. 천적 천국은 큰 사람의 의지에, 영적 천국은 이해성에, 가장 바깥 천국은 행동에 속해 있다. 근원적으로 모든 이것들은 하나로 합일되어 있다. 마치 이것들은 한 개인의 행동이, 구분된 의식이 없고, 구분된 행동도 없는 듯 동시에 나타나는 것과 같다. 천국이 두 왕국을 형성했을 때 이 천국은 고대 교회 또는 영적인 교회에 속했던 이들로 이루어진 두 번째 천국으로부터 형성된 게 아니라 아담적 교회 시대 동안 이 세상에 살았던 이들로부터 형성된 천적 천국 자체가 나뉨으로 형성되었다. 천적 천국은 내적, 외적 측면이 필수적으로 있었다. 하느님께서 인간의 본성을 입으실 때 그것이 상태의 변화와 조건의 변화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고, 신성화 하심으로 그분의 인성을 천상 천하에 있는 모든 질서의 큰 원형(Archetype)으로 만드셨는 바, 그분께서는 이 세상에 있는 인간 본성 안에서 만드신 것에 상응되도록 천국 안에서도 유기적인 변화를 만드셨다. 주님의 인성은 신성한 천적, 신성한 영적, 신성한 자연적 등차에 계신다. 그분 안의 이것들은 세 천국들, 즉 천적, 영적, 자연적 천국의 원형이다. 그러면서 이 세 천국들은 두 왕국을 구성하고 있다. 천적, 영적 천국들이 두 왕국을 형성한다. 그이유가 가장 낮은 천국, 즉 자연적 천국은 그 자체 하나의 왕국을 형성하지 않으나 천적, 영적 왕국의 기초가 되고 있다. 이 바깥 천국은 두 종류의 천사들, 즉 천적-자연적, 영적-자연적 천사들로 구성된다. 그리고 천적-자연적 천사들은 천적 천국의 바깥들, 영적-자연적 천사들은 영적 천국의 바깥을 형성하고 있다.
이미 말한 바 같이 천국은 하나의 천국, 하나의 왕국을 형성하되 그 안에 세 천국들의 요소가, 한 왕국 안에는 두 왕국의 요소가 들어 있다. 천적 왕국은 실제적으로 존재하고, 영적 왕국은 잠재적으로 존재하는데 영들의 세계에 있는 이들 안에서 뿐아니라 천국 안에 있는 이들의 부분 안에서도 그렇게 존재한다. 각 천국들 안에 있는 것 같이 한 천국도 내적, 외적 측면으로 구성되고 있다. 내적 측면은 천적인 것, 외적 측면은 영적인 것이다. 내적 측면은 주님을 사랑함이고 외적 측면은 이웃을 사랑함이다. 주님을 사랑함은 천적인 원리이고 이웃을 사랑함은 영적인 원리이다. 주님이 영화하신 결과로 거행된 천국들의 배열에서 천적 천국의 외적 측면은 퇴조해져 결국 영적 천국의 핵심이 되었다. 여기에 영들의 세계로부터 승강된 이들이 추가되었다. 이 모두가 함께 두 번째 천국과 영적 왕국을 형성했다. 그러므로 천적 천국의 외곽을 형성했던 이들이 지금은 영적 천국의 내부가 되었다. 그 이유가 천적 천국의 바깥에 해당되는 이웃을 사랑함이 영적 천국에서는 안쪽에 해당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두 천국이 서로 구분되고, 두 왕국을 이루고 형성하면서도 그들은 이웃 사랑을 수단으로 합일되어 있다. 어쨋든 이들 안에 두 왕국이 존재하듯 이웃다운 사랑의 특성에서는 차이가 있다. 비록 이것과 저것이 동질 관계에 있는 것은 사실이나 그렇다고 똑같다는 말은 어울리지 않는다. 천적 천국에 있는 이웃을 사랑함은 상호 간의 사랑이고 영적 천국에 있는 이웃을 사랑함은 선행이다. 상호 간의 사랑은 마치 형제 자매 사이에 있는 사랑 같고, 선행은 친구나 연고자들 사이에 있는 사랑과 비슷하다. 즉 혈족과 동족 사이의 차이점 같을 것이다. 어쨋든 이러한 애착들은 비록 서로는 차이가 있다 해도 서로서로에 부응되고, 두 천국과 왕국을 함께 연합하는 수단이다. 천국이 두 왕국으로 구분됨, 그들 사이에 있어 연결해주는 고리는 과거 천국 자체를 표현한 가나안으로 진입한 후의 열두 지파의 나뉨에서 표현되고 예증될는지 모른다. 아홉 지파는 가나안 땅에 그들의 상속분을 할당 받았고 두 지파는 요르단 강 저쪽 길르앗 지방에 자리 잡았다. 그러나 나머지 지파의 경우, 그들 중 반 지파는 가나안에, 또 반 지파는 길르앗에 정착했다. 이 지파는 므나쎄 지파였는데, 그 지파는 천국에 있는 두 왕국이 연합되고 함께하는 수단이 되는 원리를 표현했다.
한 천국이 두 왕국으로 나뉨은 스가랴의 예언, 즉 주님의 오심과 구속과 심판이라는 그분의 일에 관련되는 예언에서 상징적으로 이렇게 묘사되고 있다. “그 때 야훼께서 싸움이 터질 때마다 적진을 향해 돌진하셨듯이 출동하시리라. 그 날, 그가 예루살렘을 동편에서 마주 보고 있는 올리브 산에 우뚝 서시면, 올리브 산이 갈라져 절반은 북쪽으로, 절반은 남쪽으로 물러나 큰 골짜기가 동서로 뻗을 것이다” (14:3,4). 그리고 더 이어지는 예언이다. “빛이 청명하지도 않고 어둡지도 않을 것이다. 밤도 낮도 아닌 야훼 홀로 오시는 그 날 저녁 때에 빛이 있을 것이다. 그 날에 예루살렘에서 생명의 물이 터져 나와 반은 이전의 바다로, 반은 뒤쪽의 바다로, 여름과 겨울에 흘러 가리라. 야훼께서 온 세상을 통치하는 왕이 되시는 그 날에 온 세상에는 한 분 주님만 계시고 그분의 이름은 하나일 것이다” (14:6-9). 이 문단에서 저녁 때란 심판이 거행되는 주님의 교회의 마지막 때이다. 그 이유가 그 때에는 악한 자에게는 저녁 때이지만 선한 자에게는 빛이 있는 때이기 때문이다. 이런 것은 이 구절의 세부 사항들에 포함되어 의미되는 영적 의미로부터 나타난다. 여러 나라에 맞서 싸우러 앞장 서시어 나가시는 여호와는 악한 자에 대한 마지막 심판을 의미한다. 앞장 서시고 싸운다란 심판을 집행하는 것이고, 여러 나라란 악들이다. 이것이 신성한 사랑으로부터 결과 된다는 것은 주님의 발이 올리브 산 위에 있으셨음으로 의미된다. 그 이유가 올리브 산이 주님과 관련될 경우 이는 신성한 사랑을 의미하고, 예루살렘은 진리 측면에서의 주님의 교회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동쪽은 신성한 선함을 의미한다. 올리브 산의 한 가운데가 갈라져 반 쪽은 동쪽을 향하고, 바다를 향해 움직여 그 사이에 큰 골짜기가 있게 된다는 것은 악 가운데 있는 자들로부터 선한 자를 분리하심을 뜻한다. 그 이유가 이미 언급했듯, 올리브산은 신성한 사랑을, 동쪽은 신성한 선 가운데 있는 이들을, 바다는 악 가운데 있는 이들을 뜻하기 때문이다. 산의 절반, 절반이 남쪽을 향해, 북쪽을 향해 움직임은 선으로부터 파생된 진리 가운데 있는 이들을 분리함을 의미한다. 위 설명에서 산이 쪼개짐이 선한 자로부터 악한 자를 분리함을 뜻한다고 말해지는데, 이것이 심판의 직접적인 결과이다. 그러나 이 의미 안에는 심판으로 결과되는 또 다른 분리도 있다. 이렇게 읽어지기 때문이다. “올리브 산은 사랑과 선행의 선의 측면에서의 천국을 표현했고, 이 대목에서 취급되는 주제는 주님과 그분의 오심에 관한 것이다. 즉 올리브 산은 사랑과 선행의 선, 이것들이 주님의 교회를 구성하는바 주님의 교회도 의미하고 있다. 주님의 교회가 유대 국가로부터 퇴조되어 이방인들 사이에서 건설된다는 것이 산이 동쪽, 서쪽을 향해, 남쪽, 북쪽을 향해 쪼개짐으로의미되고 있다.” 이는 주님의 교회, 천국에 적용될 때의 의미인바, 그 안에서 결과되어진 분리를 수단으로 두 왕국으로 나뉜 것을 묘사하고 있다. 이 나뉨은 이해성을 통치하는 의지가 계속 부패해져 급기야 “인간 심정의 생각 속의 모든 궁리는 계속 악할 뿐”일 때 마음의 두 기능 사이에 기적적으로 결과된 나뉨이었다 (창세기 6:5).
한 왕국이 둘로 분리된 한편, 한 천국은 셋으로 나뉘었다. 이 세 천국은 과거 주님의 교회를 향한 세 처방, 즉 태고 교회, 고대 교회, 이스라엘 교회가 영계에서 천적, 영적, 자연적 천국을 형성하고 있다. 지상에서 주님의 교회에 대한 이 세 처방은 종교적 삶에서 내려가고 있는 세 가지 인간의 상태로부터 발생된 것이다. 그러나 이 세 천국은 두 왕국만을 형성하고 있다. 그 이유가 인간의 본질을 이루는 기능은 두 가지, 즉 의지와 이해성, 마치 육체의 두 큰 기관, 즉 심장과 폐가 있듯, 영적 생명의 원리의 두 가지, 즉 선함과 진리, 또는 사랑과 신앙이 있듯 두 가지뿐이기 때문이다. 참으로 세 번째 것도 있다. 즉 행동, 또는 종교에 있는 일이다. 그러나 이것은 위 두 기능이 병합될 경우의 결과로 있는 사용(use)이다. 이는 최말단 형체이다. 행동 또는 일이라는 이 최말단은 이스라엘 교회 처방인데 앞서 두 교회 처방에서 이미 있게 된 것이다. 따라서 일이라는 처방에는 이전의 두 처방으로부터 내려오는 생명을 담고 있을 뿐 그 자체로는 생명이 없다. 다시 말해 이스라엘 교회는 내용상으로는 교회가 아니고 교회라는 이름만 빌려 단순히 표현된 것일 뿐이다. 이스라엘 처방이 지닌 큰 덕목, 즉 두드러진 특징은 순종, 즉 법이나 의식에 담긴 의미나 목적을 지각함도 없이 단순히, 무조건 순종하는 것이다. 따라서 세 천국에서 가장 높은 천국은 사랑이고, 둘째는 선행, 마지막은 순종이다. 이 세 천국이 인간 본성의 세 요소, 영적 생명의 세 등차로부터 생산되어 왔는바. 이 세 요소는 지상에서의 방랑 생활 동안 인간 영혼의 그릇이요 영원한 거처가 되고 있다. 주님이 육을 입으신 때에 수행하신 일 중의 하나였던 위와 같은 천국의 배열은 과거의 결과였고 미래의 인류의 상태에 적합하다. 그러므로 불완전한 인간 상태에 신성한 선함과 지혜가 압축되어 있다.
열 지파가 반역하고 여로보암 아래 두 번째 왕국이 건설되자 솔로몬의 왕위 계승자 르호보암은 “유다 가문과 베냐민 지파에 동원령을 내렸다. 그는 정병 십팔 만을 뽑아 이스라엘 가문을 무찌르고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의 국권을 되찾으려고 하였다. 그러는데 야훼의 말씀이 하느님의 사람 스마야에게 내렸다. ‘유다왕,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과 유다와 베냐민의 모든 집안과 그 밖의 다른 백성들에게 이 말을 전하여라. 야훼가 말한다. 이렇게 된 것은 다 나의 뜻이니 너희는 동족인 이스라엘 백성을 치러 올라가지 말고 각자 집으로 돌아 가거라.’”
첫 번째 본래의 모습을 보전했더라면 주님이 세상에 오실 필요도 없었고, 천국 역시 교회나 마찬가지로 하나였을 것이다. 그러나 교회의 타락은 예견되었고 그 치료약 역시 준비되어 있었다. 하느님이 육 안에서 드러내심은 신성한 사랑이 본래의 모습을 이탈한 인간의 조건에 준 대답이었다. 신성한 선함과 자비의 이런 기적적인 행동의 모든 결과는 인류의 구원과 행복을 설비하는 수단이었다. 주님께서는 아래쪽으로 향하는 인간을 뒤따르시면서 인간의 상태나 필요성에 그분의 처방이 맞추어지고 천국 역시 변경된 조건에로 그 자체 건설되었다. 인간의 기울어짐과 그 회복을 설비한 수단들이 이미 기울어 버린 인간의 상태로부터 더 높은 상태에로 승강하게 할지의 여부는 여기서 논해져야 할 부분은 아닐 것 같다. 어쨋든 희망 있는 대답이 있을 거라 생각된다. 인류의 역사는 개인의 역사와도 비슷하다. 개인적 인간 뿐만아니라 집합적 인간도 각기 유아기, 소년기, 성년기를 가지고 있다. 참으로 타락된 자의 유아기와 타락하지 않은 자의 유아기에는 중요한 차이가 있다. 둘 다 순진으로 자기의 특성을 기술하고 있다. 초기 인간의 순진은 현재의 인간의 경우 같이 무지의 순진은 아니었다. 본래 지혜는 순진에 새겨졌다. 마치 본능이 동물에게 자동으로 상속되는 것과 같다. 지금 지혜는 인간에게 상속되는 게 아니고 습득해야 한다. 인간은 무지한 채 태어나서 모든 것을 배워야한다. 그는 지식을 획득해야 하고 이 지식을 발판으로 총명을 획득하고, 이 총명을 발판으로 지혜를 획득해야 한다. 그러므로 현재의 인간은 초기의 인간이 끝난 곳에서 시작한다. 그러나 초기의 지혜는 지금 달성 가능한 지혜와 달랐다. 초기 인간과 더불은 지혜는 지식을 응용한 게 아니었다. 우리에게 지식이란 것이 있듯 초기 인간에게는 지각이 있었다. 그리고 이 지각은 사물의 표면에 그치는 품질 만을 파악한 게 아니라 내면의 본성과 영적 의미를 관통했다. 그의 과학은 창조자와 피조물 사이의 관계, 천국적인 것과 지상적인 것 사이의 관계를 인식하는 것이었다. 지금 우리는 지상적인 것들의 과학으로 시작하고 이것이 우리가 달성이 가능한 습득물의 공통된 기초를 형성한다. 한 가지 의문이 있을 수 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가 가지는 기초는 본래의 것 보다 더 높은 구조물을 지을 수 있을까? 가능하리라 본다. 인간이 타락하지 않았더라면 주님이 육을 입으심도 불필요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 큰 사건이 거행되고 그분의 인간성이 신성화 되어 천국의 태양에 새로운 광휘가 더하여졌다. 주님께서는 그분의 사랑과 지혜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인류를 위해 하셔 왔다. 각자가 지상에서 거듭남을 어느 수준에서 달성하든 그를 위한 저택이 주님의 신성한 지혜로 예비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