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해설 제 9장

제 9 장

성경 본문

1. 그리고 하느님께서 노아와 그의 아들들을 축복하셨다, 그리고 그들에게 말하셨다, 열매를 많이 맺으라, 그리고 번성하라, 그리고 땅을 다시 채우라.
2. 너를 두려워하고 너를 무서워함이 땅의 짐승 각각 모두 위에, 하늘의 새 각각 모두 위에, 지면이 기어다니게 만든 모든 것 조차도, 그리고 바다의 모든 물고기들에게 있게 하라. 이것들이 네 손에 주어져 있게 하라.
3. 살아 있어 기는 것 각각 모두가 너를 위한 식품일 것이다. 마치 야채 풀잎 같이 나는 너에게 이것 모두를 준다.
4. 너는 혼이 있는 살과 피를 먹지 말라.
5. 나는 네 혼을 지닌 네 피를 확실히 요구하리라. 나는 그것을 들짐승 각각 모두 로부터도 요구하리라. 그리고 사람의 손으로부터, 그 사람 형제의 손으로부터도 나 는 사람의 혼을 요구하리라.
6. 사람에게 있는 사람의 피를 흘리게 하는 누구든지 그의 피도 흘릴 것이다. 그 이유 는 그분께서는 사람을 하느님의 형상으로 만드셨기 때문이다.
7. 그리고 너는 열매를 많이 맺고 번성하라. 땅에서 풍성하게 산출하라, 그리고 너는 거기서 번성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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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그리고 하느님께서 노아에게, 그리고 그의 아들들에게 말하셨다.
9. 그리고 나, 보라, 나는 너와 네 후손들과 내 언약을 세운다.
10. 그리고 너와 함께 있는 생명 있는 혼 각각 모두와, 새, 짐승, 그리고 너와 더불은 땅의 야생 동물 각각 모두와, 방주에서 나온 모든 것, 땅의 야생 동물에 이르기까지 와 내 언약을 세운다.
11. 그리고 나는 너와 내 언약을 세우리라. 모든 육은 더 이상 홍수의 물로 잘라지지 않으리라. 홍수가 땅을 파괴하는 일은 더 이상 없으리라.
12. 그리고 하느님께서 말하셨다, 이것은 내가 나와 너와 함께 있는 생명 있는 혼 각 각 모두와, 대대손손을 위하여 만드는 언약의 표시이다.
13. 나는 구름에 내 활을 놓아 두었다, 그리고 이것은 나와 땅 사이에 있는 언약의 표 시를 위해 있을 것이다.
14. 그리고 장차 내가 땅 위에 구름을 가져 올 때, 활이 구름에서 보여질 때,
15. 나는 내가 너와 모든 육의 생명 있는 혼 각각 모두 사이에 세운 내 언약을 기억 하리라. 그리고 물들이 모든 육을 파괴하기 위하여 홍수가 되는 일은 더 이상 없으 리라.
16. 그리고 활이 구름에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것을 보고, 나는 하느님과 땅 위 에 있는 모든 육의 생명 있는 혼 각각 모두 사이에 있는 영원한 언약을 기억하리라.
17. 그리고 하느님께서 노아에게 말하셨다, 이것은 내가 나와 땅 위에 있는 모든 육 사이에 세워진 언약의 표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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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그리고 방주에서 나온 노아의 아들들은 셈, 그리고 함, 그리고 야벳이었다. 그리 고 함은 가나안의 아버지이다.
19. 이 세 명이 노아의 아들들이다. 그리고 이 셋으로부터 온 땅은 가득 찼다.
20. 그리고 노아는 지면의 사람이 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는 포도원을 설치했다.
21. 그리고 그는 포도주를 마셨고 술취했다. 그리고 그는 그의 천막 한 가운데에서 덮 혀있지 않은채 있었다.
22. 그리고 가나안의 아버지, 함은 자기 아버지의 벌거벗음을 보았다, 그리고 밖에 있는 자기 형제에게 말했다.
23. 그리고 셈과 야벳은 의복을 찾아들고, 그것을 두 사람의 어깨 위에 얹고, 뒷걸음 으로 가서 자기 아버지의 벌거벗음을 덮었다. 따라서 그들의 얼굴은 뒤쪽을 향했는 바 그들은 자기 아버지의 벌거벗음을 보지 않았다.
24. 그리고 노아는 그의 포도주로부터 깨어났다, 그리고 자기의 작은 아들이 자기에게 했던 짓을 알았다.
25. 그리고 그는 말했다. 가나안은 저주된다. 자기 형제들에게 종들의 종일 것이다.
26. 그리고 그는 말했다, 복 있음이 셈의 하느님 여호와이시다; 그리고 가나안은 그의 종일 것이다.
27. 하느님께서 야벳을 번창시켜 주시기를 빕니다, 그리고 그가 셈의 천막에서 거주하 기를 빕니다. 그리고 가나안은 그의 종이 되리라.
28. 그리고 노아는 홍수 이후 삼백 오십 년을 살았다.
29. 따라서 노아의 모든 날들은 구백 오십 년이었다. 그리고 그는 죽었다.”

각 절의 내적 의미

1절. 그리고 하느님께서 노아와 그의 아들들을 축복하셨다, 그리고 그들에게 말하셨다, 열매를 많이 맺으라, 그리고 번성하라, 그리고 땅을 다시 채우라. “하느님께서 축복하셨다”란 주님의 현존과 그분의 은총을 의미한다. “노아와 그의 아들들”은 고대 교회(the Ancient Church)를 의미한다. “열매 맺으라”란 선행으로부터의 선들을 의미하고, “번성하라”는 믿음으로부터의 진리들을 의미하는데, 이 진리들이 이제 불어 난다. “땅을 다시 채우라”란 외적 인간 안에서를 의미한다.

“하느님이…축복하셨다”란 주님의 현존하심과 은총을 의미함은 “축복하심”의 의미로부터 분명해진다. 말씀에서 “축복하심”의 외적 의미는 지상적, 물질적, 육체적 모든 좋은 것을 풍부해지게 함을 말한다. 이는 외적 의미에 거주하는 이들, 예를 들면 고대인과 유대인, 기독인, 특히 오늘날의 기독인이라 할 수 있는데 이들에 의해 설명되어진 바에 따른 축복의 의미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신성한 축복을 재물 안에, 모든 것들의 풍부해짐에, 그리고 자기 영광됨에 있게 만들었다. 그러나 내적 의미에서의 “축복하심”은 영적, 천적인 모든 선으로 풍요해짐이고, 이 축복은 주님 아니고는 존재할 수 없고 누구도 줄 수 없다. 이렇기에 이것은 그분의 현존과 은총을 의미한다. 그분의 현존과 은총은 인간들에게 영적인 선과 천적인 선을 필수적으로 가져다 준다. 여기서 현존이라 말해진 이유는 주님 만이 선행 안에 계시기 때문이고, 여기서 취급된 주제가 선행으로부터 행동하는 거듭난 영적 인간이기 때문이다. 실로 주님은 모두 각각의 인간과 현존하신다. 그러나 인간이 선행으로부터 멀어진 것에 비례해서, 그만큼 주님의 현존도 있게 된다. 말하자면, 그만큼 더 부재하신 셈, 더 멀리 계신 셈이다. 여기서 자비가 아닌 은총이 언급된 이유는 천적 인간은 은총이 아닌 자비로부터 이야기한다. 한편 영적 인간은 자비로부터가 아닌 은총으로부터 이야기 한다. 이야기하는 방식은 여건에 바탕을 두는데, 천적 (평면의) 인간의 경우, 인간 종족은 불결, 추잡함 밖에 없다는 것, 그 자체가 배설물이나 지옥이다고 인정한다; 그러므로 그들은 주님의 자비를 애원한다. 그 이유가 이런 조건에서는 자비가 서술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에 비해 영적 (평면의) 인간일 경우, 이들 역시 인간 종족이 위와 같은 줄 알고는 있지만, 그들은 그것을 인정하지는 않는다, 그 이유는 그들은 그들의 자기 자신 안에 있고, 그들은 자기 자신을 아직 사랑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들은 자비로 이야기하는 것은 거북스럽고 은총이라 말해야 마음이 편하다. 언어상의 이런 표현 차이는 인간 부끄러워함, 겸허함으로부터 결과된 산물이다. 누군가가 자신을 사랑하고 자신으로부터 선을 행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구원은 자신의 공적 덕분인 바, 당연히 구원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에 비례하여 그는 주님의 자비를 덜 애원한다. 누군가가 주님을 부를 때 은총을 덧붙여 부르는 동안 그는 자신 안에서 자비를 발견하기에, 그는 주님으로부터는 조금, 자기로부터는 많이 자비를 발견하므로 자비라 말하는 것은 부담되는 언어 수준인 바, 그 대신 은총이라는 표현이 자신의 영적 수준에 맞는 것 같아, 이것으로 간구하는 것이 관습으로 되어진 것이다.

“노아와 그의 아들”은 고대 교회를 의미한다는 것은 이미 살핀 바에서, 또한 이어지는 구절로부터도 분명해진다.

“열매를 많이 맺으라”는 선행의 선을 의미한다는 것, 그리고 “번성하라”는 신앙의 진리들을 의미한다는 것, 이것들이 지금 증가되어진다는 것이 말씀에 있는 두 고, “번성하는 것”은 신앙을 일관되게 서술한다. 이에 관한 말씀으로부터의 확증을 위해 아래에서 더 살핀다.:
돌아서라, 다시 잘못에 빠져드는 아들아; 나는 나의 심정에 따라 목자들을
네게 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너를 지식과 총명으로 먹일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네가 땅에서 번성하고 열매를 많이 맺게 해줄 것이다 (예. 3:14-16).
위 구절에서 “번성하는 것”은 지식과 총명이 자라남, 즉 신앙이 자라남을 표시한다. “열매를 많이 맺는 것”은 선행의 선들을 표시한다; 그 이유가 이것은 교회의 이식을 의미하는 바, 이때 신앙, 또는 “번성함”이 먼저 있기 때문이다. 다시:
나는 내가 몰아내쳤던 모든 토지들로부터 내 양떼를 모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을 그들의 양우리로 데려 올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열매를 많이 맺고, 번성할 것이다 (예. 2:3).
이미 심어진 교회를 이야기하고 있다. 그 결과 “열매를 많이 맺게 만듦”은 선행의 선들에 관련하여서 이고, “번성해짐”은 신앙의 진리들에 관련하여서 이다. 이와같이 모세의 책에서:
더 나아가 나는 너희를 쳐다 볼 것이다, 그리고 너희로 열매를 많이 맺게 할 것이고, 나는 너희를 번성해지게 만들 것이고, 내 언약을 너희와 더불어 세울 것이다 (레. 26:9)
천적 (수준의) 교회를 내적 의미에서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므로 “열매를 많이 맺는 것”은 사랑과 선행의 선들을, “번성하는 것”은 신앙의 선들과 진리들을 서술한다. 스가랴서에서:
나는 그들을 되찾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그들이 번성해왔던 것 같이
번성해질 것이다 (슷. 10:8).
“번성해지는 것”이 위 구절에서 신앙의 진리를 서술한다는 것은 그들이 “되찾아 짐”으로부터 분명하다. 예레미야서에서:
성이 그녀 자신의 더미 위에 건설되어질 것이다 그리고 그들로부터 고백이
진행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음성은 흥겨움을 만들 것이다, 나는 그들로
번성해지도록 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줄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들의 아들들 역시 예전과 같이 있을 것이다 (예. 30:18-20).
위 구절에서는 진리에 애착함과 신앙의 진리들에 애착함에 관해서 이야기한다. 전자는 “고백함, 그리고 흥겨움을 만드는 그들의 음성”에 의해, 후자는 “번성해짐”에 의해 표시되고 있다; “아들들” 역시 여기서 진리들을 표시한다.

“땅을 계속 채우라”가 외적 인간에서를 의미하는 것은 이미 여러 번 살핀 바 있다. 거듭난 인간에 있는 선행의 선들과 신앙의 진리들에 관해서 이것들이 그의 양심에 심어졌는 바 조금 다시 살핀다: 그것들이 신앙을 수단으로, 또는 말씀을 들음으로 해서 심어졌기 때문에, 그것들은 처음에는 그의 기억 안에 심어지는데, 이 기억은 외적 인간에 속한다. 인간이 거듭나고 있을 때, 그리고 (거듭나져서) 내적 인간이 행동할 때, 모두 열매를 맺음과 번성함은 똑같이 거행되는 바, 선행의 선들이 외적 인간의 애착들 안에 놓여지고, 신앙의 진리들은 외적 인간의 기억 안에 놓여지고, 각각은 증가하고 번성한다. 이 번성해감은 거듭난 각 인물에게 잘 알려져 있을 것이라 생각된다. 그 이유가 확증한 것들이 말씀으로부터, 합리적 인간으로부터, 지식들로부터 (저축 예금에 이자가 붙어 불어나듯) 쉬지않고 불어나는 바, 더욱 확증이 있는 셈이다. 이것은 선행의 결과인데 주님 만이 선행을 통하여 이 결과를 빚어 주신다.

2절. 너를 두려워하고 너를 무서워함이 땅의 짐승 각각 모두 위에, 하늘의 새 각각 모두 위에, 지면이 기어다니게 만든 모든 것 조차도, 그리고 바다의 모든 물고기들에게 있게 하라. 이것들이 네 손에 주어져 있게 하라. “너를 두려워하고 너를 무서워함”이란 내적 인간이 지배함을 의미한다. “두려워함”은 악이 내적 인간을 두려워함이고 “무서워함”은 거짓이 내적 인간을 무서워함이다. “땅의 짐승 각각 모두 위에”란 마음 속에 있는 그리워함들 위에..를 의미한다. “하늘의 새들 각각 모두 위에..”란 추론에 속하는 거짓들 위에..를 의미한다. “지면을 기는 모든 것”이란 선에 애착함을 의미한다. “바다의 모든 고기들”이란 기억된 지식들을 의미한다. “이것들이 네 손에 주어져 있게 하라”란 내적 인간이 외적 인간에서 소유함을 의미한다.

너를 두려워하고 너를 무서워한다. 이는 내적 인간의 통치권을, “두려워함”은 악들에 관련한 통치권을, “무서워함”은 거짓들에 관련한 통치권을 의미한다. 이는 거듭난 인간의 상태로부터 분명하다. 거듭나기 전 인간의 상태는 그리워함(yearning, 또는 갈망, craving)들과 거짓들이고, 이것은 외적 인간 속에 있고, 계속적으로 지배권을 갖고 있다, 이로부터 전투가 발생한다; 그러나 거듭난 이후, 내적 인간이 외적 인간, 즉 그리워함들(갈망함)과 거짓들을 지배한다. 이때 인간은 악들을 두려워함과 거짓들을 무서워함 안에 있다. 이 둘은 양심에 반대된다. 양심에 반대하여 행동하는 바, 거듭난 자로 전율을 느끼게 한다. 그렇기는 하나 악을 두려워하고 거짓을 무서워하는 것은 내적 인간이 아니고 외적 인간이다. 그러므로 이 절에서 “너를 두려워하고 너를 무서워함이 땅의 모두 각각의 짐승 위에, 하늘의 모두 각각의 새 위에 있게 하라” 하고 말해지는 것이다. 즉 모든 그리워함 위에가 여기서 “짐승들”에 의해, 모든 거짓들 위에가 여기서 “하늘의 새”에 의해 뜻해지는 것이다. 여기서의 “두려워함”과 “무서워함”이 마치 인간의 자기 자신인 것처럼 나타난다. 그러나 그것들은 다음 원인으로부터 발생한다. 이미 서술했었던 바 같이, 모두 각각의 인간은 자기와 더불어서 최소한 두 명의 천사들과 두 명의 악령들이 있어, 천사를 통해 천국과 교류하고, 악령을 통해 지옥과 교류한다는 것이다. 거듭나는 인간의 경우같이 천사가 다스릴 때, 악령은 선하고 참된 것에 반대되는 어떤 것도 행하려 감히 시도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그들이 속박된 상태이기 때문이다; 악령이 악한 어떤 것을 행하고, 거짓된 어떤 것을 말하려 시도하면, 그것들은 즉시 어떤 종류의 지옥의 두려움과 무서움에 사로잡힌다. 이 두려움과 무서움이 양심에 반대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과 무서움으로 인간 안에서 지각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거듭난 자가 양심에 반대되는 어떤 것을 말하거나 행동할 때, 그는 시험에 들어가고, 양심의 격심한 아픔 안으로, 즉 일종의 지옥적 고통 안으로 들어간다. “두려움”이 악이고, “무서움”이 거짓들이라 말한 것의 경우는 이렇다: 인간과 더불은 영들은 악을 행하기를 두려워하기 보다는 거짓을 말하기를 무서워한다. 그 이유는 인간은 다시 태어나 신앙의 진리를 통하여 양심을 받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영들은 거짓된 것들을 선동하는 것이 허용되지 않는다. 이 영들 각각은 악일 뿐이다. 고로 그들은 악에서 살고 있다; 그들의 본래의 모습 그리고 그들의 모든 노력은 악이다; 그들이 악 안에 있기 때문에, 그리고 인간에게 어울리는 생명은 악에 있기 때문에, 악이 어떤 쓸모 있음을 섬길 경우, 악행에 대해 관대해진다. 그러나 그들에게 거짓된 것을 말하는 것은 허용되지 않는다. 이런 질서에서 그는 참된 것을 배울런지 모른다. 그리고 가능한 만큼에서 수정될지도 모른다, 그리하면 그것들은 수준 낮은 쓸모 있음을 섬길런지 모른다; 이 주제를 두고 차 후 주님의 신성한 자비로부터 더 말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이런 상황은 거듭나는 자와 더불어도 비슷하다. 그 이유가 그의 양심은 신앙에 의해 가르쳐진 진리들로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의 양심은 올바르게 고침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들에게 있어서 누군가가 범한 악은 실제로는 거짓이다, 그 이유는 그 악은 종교적(신앙의) 진리를 위반했기 때문이다. 지각을 가졌던 태고 교회인의 경우는 달랐다. 이들은 누군가가 범한 악을 악으로, 누군가가 믿는 거짓을 거짓으로 지각했다.

땅의 모두 각각의 짐승 위에. 이것은 보다 낮은 마음의 그리워함들 위에서를 의미한다는 것은 말씀에서 “짐승들”의 의미로부터 분명하다. 말씀에서 짐승들은 애착(열정)들, 또는 그리워함들(열망함들)의 어느 쪽을 의미한다. 따라서 선에 대한 애착은 온화하고 쓸모있고 깨끗한 짐승들에 의해; 그리고 악에 애착함들, 또는 그리워함들은 맹렬하고, 쓸모없고, 불결한 짐승들에 의해 의미된다. 이 구절의 경우, 그리워함들을 의미하는 바, 짐승들은 들판의 짐승이 아닌 “땅의 짐승”이라 불리운다. 거듭난 자는 그리워함들을 통치할 수 있다든가, 거듭난 자는 그 스스로 악들을 통치할 수 있다고 아는 것은 매우 큰 실수이고 결단코 그렇지가 않다. 그 이유가 인간은 악 밖에 더 가진 것이 없기 때문에; 모든 그의 의지력은 단지 악이다; 이를 두고 8:21에서 “인간의 심정의 상상은 그의 젊은 때로부터 악하다”라고 말해진 것이다. 살아있는 경험에 의해 내게 보여진 것이 있다. 인간과 영, 천사 조차도 자신을 두고, 그의 자기 자신의 모든 것을 두고, 천박한 배설물 밖에 더 아니다는 것, 자신 만을 떼어놓아둔다면, 그는 증오, 복수, 대부분의 더러운 간음질 같은 것으로 숨쉰다는 것이다.
이런 것들이 인간의 자기 자신이다; 이런 것들이 인간의 의지이다; 만일 인간이 곰곰이 자신을, 단지 자기 자신의 것만 가지고 가늠한다면, 인간은 태어날 때 모든 야생 동물들과 짐승들 사이에서도 가장 수치스러운 살아있는 창조물임에 틀림없다는 것이 분명해진다. 그리고 그가 성장하고, 자신의 주인이 될 때, 법 같은 외적 속박들, 그리고 이익과 영예, 재물의 목적 때문에 자신에게 짐지워주는 것이 없다면, 그는 모든 범죄 안으로 돌진하고, 그가 온 우주를 복종시키고, 온 우주의 재물을 다 긁어모을 때까지도 쉬지 않을 것이다; 그는 그의 겸손한 종들이기를 감내하는 이 외에는 어떤 나눔도 없다. 이런 상태가 인간의 본래의 모습이다. 이것을 알아채지 않고 있는 이유는 인간 당사자가 권력이 없어서 그가 이런 것을 시도할 엄두도 못내고 있기에, 또는 무언가를 달성하는데 따른 제약으로 인간 본래의 모습이 노골화되지 않아서 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에게 가능성, 능력, 제약도 느슨해지게 하면, 인간은 자기 본성의 그리워함의 충족을 향해 최대한 돌진할 것이다. 야생 동물이라해도 이런 본성을 보여주는 일은 없다. 이것들은 자기들의 본성에 관한 어떤 질서 안에서 태어나진다. 맹렬하고 육식하는 동물들은 다른 창조물들에게 상처를 입힌다. 그러나 자기 방어에서일 뿐이다. 그들이 동물을 잡아먹는 것도 그들의 배고픔을 완화시키는 것에 한정되어 있다. 배고픔이 사라지면 그것들은 어떤 것도 잡아죽이지 않는다. 그러나 인간의 경우는 철저히 다르다. 이상 설명으로부터 인간의 자기 자신과 의지력의 본래의 모습이 무엇인지는 분명해졌으라 본다.
인간이 악하고 배설물에 불과하기에 인간은 자신 스스로로는 악을 통치할 수 없음이 분명하다. 이는 악이 악을 통치할 수 있다는 것, 악 뿐만 아니라 지옥도 통치할 수 있다는 것과 완전 대비된다; 그 이유가 모두 각각의 인간은 악령을 통하여 지옥과 교류된다. 이것에 의해서 인간에 있는 악은 선동되어진다. 이로부터 모든 이가 알런지 모르고, 건전한 마음이 결말낼런지 모르는 것은, 주님만이 인간 안에 있는 악을, 그와 더불은 지옥을 통치하신다는 것이다. 인간에 있는 악이 복종 상태에 있기 위해, 즉 인간 안에서 매 순간 기회만 되면 겨루겠다고 돌진하고, 인간을 영원히 파괴하려드는 지옥의 다스림이 성사되려면, 인간은 주님에 의해 거듭나서 양심인 새로운 의지력을 수여받아야 한다. 이를 통하여 주님 만이 모든 선을 수행하신다. 신앙의 요점은 이렇다: 인간에게는 악 밖에 없다는 것; 그리고 모든 선은 주님으로부터 있다는 것이다. 이 사항들을 인간은 알아야 할 뿐 아니라 인정하고 믿어야한다; 그러나 그가 육체의 삶에서 인정하지 않고 믿지도 않았다면, 그는 장차의 삶으로부터 그에게 알려진다.

그리고 하늘의 모두 각각의 새 위에. 이것이 추론함으로부터의 거짓들을 의미함은 “새”의 의미로부터 분명해진다. 말씀에서 “새들”은 지성적인 것들을 의미한다. 유순하고 유용하고, 아름다운 새들은 지적 측면에서의 진리들을; 그리고 맹렬하고 쓸모 없고 추한 새들은 지적 측면에서의 거짓들을 의미한다. 이로부터 “새”는 추론함들과 그로부터의 거짓들을 의미함은 분명하다. 아래 인용 구절을 살펴서 이 의미를 확증하기 바란다. 예레미야서에서:
나는 그들을 네 가지 (방법으로) 방문할 것이다, 여호와께서 말하신다; 죽이는 검,
그리고 물어끌고가는 개들, 그리고 게걸스럽게 먹어치우고 파괴하는 하늘의 새와
땅의 짐승들 (이다) (예. 15:3).
에스겔서에서:
그의 파멸 위에 하늘의 모든 새들이 거주할 것이다, 그리고
들판의 야생 동물들이 그의 가지들 위에 있을 것이다 (겔. 31:13).
다니엘서에서:
결국 역겨움들의 새 위에 황폐함이 있을 것이다 (단. 9:27).
계시록에서:
바빌론은 모두 각각의 불결하고 미워하는 새가 소유권을 쥐었다 (계. 18:2).
시체를 공중의 새와 들판의 짐승에게 먹이로 주어지는 대목이 예언서에서 많이 등장한다 (예. 7:33; 19:7; 34:20; 겔. 29:5; 39:4; 시. 79:2; 이. 18:6). 이 구절의 표현을 수단으로 의미되는 것은, 그들이 “하늘의 새들”인 거짓들에 의해, “땅의 짐승들”인 악들, 또는 그리워함들에 의해 파괴되리라는 것이다.

거짓을 지배함도 악을 지배함과 똑같다: 인간은 자신들로부터는 이것들에 대한 지배권을 조금도 가질 수 없다. 여기서의 주제는 거듭난 자가 그리워함들을, 또는 “땅의 짐승들”을, 그리고 거짓들을, 또는 “하늘의 새”를 통치함인 바, 알고 있어야하는 것은, 그가 선행이 그의 신앙의 제일인 것을 인정하고 믿지 않으면, 또는 그가 이웃을 향한 사랑으로 감동되어, 이웃에게 자비를 가지고 있지 않으면 그는 거듭난다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의 새로운 의지는 선행으로부터 만들어내진다. 선행을 통하여 주님께서는 선을 가져오신다. 이로인해 진리도 가져오신다. 그러나 선행 없는 신앙을 통하여는 아니다. (막연한) 순종만으로 선행의 일들을 수행하는 사람도 있다. 그 이유는 주님께서 명령하셨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 뿐이다. 그는 아직 거듭나지 않고 있다. 이들이 만일 자기들의 일들이 의롭다고 우기지 않는다면, 다른 삶에서 거듭나질 수 있다.

지면이 기어다니게 만든 모든 것 조차도. 이 말이 선에 애착함을 의미하는 것은 앞에서 진행된 것과 “지면”, 지면으로부터 그것들이 생산되고 기어다녀진 것의 의미로부터 분명해진다; 먼저, 진행된 것의 경우, 그 대목에서 악들과 거짓들이 취급되었고, 악들과 거짓들을 거듭난 자가 통치하고, 그러므로 여기서는 선에 애착함이 등장하고, 이것이 거듭난 자의 손에 주어진다; 그리고 그 다음, “지면”의 의미로부터 이다. 지면으로부터 그것들이 생산되고 기어다녀진다. “지면”이 일반적 측면에서 교인, 그리고 교회 속에 있는 어떤 것이든 인 바, 여기서는 주님에 의해 내적 인간을 통하여 외적 인간 안에서 생산되는 어떤 것이든 이다. 지면 자체는 외적 인간 안에, 그의 애착들과 기억 안에 있다. 그런데 마치 인간이 선한 것을 생산하는 것처럼 이렇게 말해진다. “지면이 기어다니게 만드는 모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외관일 뿐이다; 선은 내적 인간을 통하여 주님에 의해 생산되어진다. 여러 번 말했듯이, 주님으로부터가 아니면 선과 진리는 없다.

그리고 바다의 모든 물고기들에게. 이 말이 기억 속의 지식들을 의미한다는 것은 물고기의 의미로부터 분명해진다. 말씀에서 “물고기들”은 기억 속의 지식들을 의미하는데, 이는 감각 속의 것들로부터 튀어나온다. 기억 속의 지식들에는 세 종류가 있는데, 지성적, 합리적, 감각적 측면에서의 지식들이다. 이 세 측면 모두는 기억들 안에 심어져 있고, 이 세 종류의 지식들은 거듭난 인간 안에서 내적인간을 통하여 주님께서 불러내신다. 감각 속의 것들로부터 있는 이 기억 속의 지식들은 인간이 육체에서 살 때, 그 인간의 감각(sensation)과 지각(perception)에 온다. 그 이유가 그가 이것들로부터 생각하기 때문이다. 내면인 것인 나머지 것은 인간이 육체를 벗고 다른 삶에 들어갈 때까지 지각에 그리 많이 오지 않는다. “물고기들”, 또는 물들이 생산한 기는 것들이 기억 속의 지식들을 의미하는 것은 제 40항을 참조하면 더 알게 된다; “고래”, 또는 “바다 괴물”은 이런 지식들의 총체물(generals)을 의미한다. 이는 아래의 인용 구절로부터도 분명해진다. 스바냐서에서:
나는 인간과 짐승을 실패하게 만들 것이다;
나는 하늘들의 새들과 바다의 고기들을 실패하게 만들 것이다 (습. 1:3).
하박국서에서:
당신은 인간을 바다의 물고기들과 통치자가 없는 기는 것으로 만드십니다 (합. 1:14).
위 구절에서 “인간을 바다의 물고기들로서 만듦”은 그가 모두 감각적이다를 뜻한다. 호세아서에서:
그러므로 땅은 슬퍼할 것이다, 그리고 그 안에 거주하는 모든 이는
들판의 야생 동물과 하늘들의 새와 더불어 쇠약해질 것이다;
그렇다, 바다의 물고기들 역시 모아질 것이다 (호. 4:3).
위 구절에서 “바다의 물고기들”은 감각의 것들로부터 있는 기억 속의 지식을 표시한다. 다윗서에서:
당신께서는 당신의 발 아래 모든 것들을 놓으셨습니다; 모든 양과 수소들,
그렇습니다, 그리고 들판의 짐승들, 공중의 새, 그리고 바다의 물고기,
바다들의 길들을 통과하는 무엇이든 (시. 8:6-8).
위 구절은 인간 안에서의 주님의 통치권에 관련하여서 이다. “바다의 물고기”는 기억 속의 지식들을 표시한다. “바다들”은 지식들이 함께 모아져 있음을 의미한다. 이사야서에서:
어부들이 애통할 것이다. 그리고 강으로 갈고리를 던지는 모든 그들이 애통할 것이다,
그리고 물들의 얼굴 위에 그물을 펼치는 그들은 녹초가 될 것이다 (이. 19:8).
“어부들”은 감각 속의 것들로 있는 것만을 신뢰하는 이들을 표시한다, 그리고 이들로부터 거짓들이 부화되어 나온다; 주제는 이집트, 또는 기억 속의 지식의 영역이다.

네 손 안으로 그것들이 주어져 있게 하라. 이 말씀은 외적 인간으로부터 내적 인간이 소유권을 가짐을 의미한다. 이는 이미 말해진 것으로부터, 그리고 “손”의 의미로부터 분명해진다. 이렇게 말해진 이유는 이와 같은 표현이 말씀의 외관이기 때문이어서 이다.

3절. 살아있어 기는 것 각각 모두가 너를 위한 식품일 것이다. 마치 야채 풀잎 같이 나는 너에게 이것 모두를 준다. “살아서 기는 것 각각 모두”란 생동하는 선이 있는 모든 기쁨들(pleasures)을 의미한다. “너를 위한 식품일 것이다”란 그들이 즐기는 즐거움(delight)을 의미한다. “야채 풀잎 같이”란 기쁨들 중에서 비천한 것을 의미한다. “내가 이것을 너에게 모두 준다”란 쓸모있음 때문에 있는 즐김(enjoyment)을 의미한다.

살아있는 기는 것 모두 각각. 이는 살아있는 선을 지닌 모든 기쁨들을 의미하는데, 이미 살핀 “기는 것”의 의미로부터 분명해진다. 여기서의 기는 것은 깨끗한 모든 짐승과 새를 뜻한다. 그 이유가 기는 것이 식품으로 주어지기 때문이다. 적절한 의미에서 기는 것은 모든 것 중에서 가장 멸시할 만한(천박한) 것, (예를 들면, 레. 11:23, 29, 30에서 명명하는 것들) 그리고 불결한 것이다. 그러나 넓은 의미에서, 여기서의 경우 같이, 식품을 위해 주어지는 동물들이다; 여기서 동물, 짐승 같은 단어도 있는데 굳이 기는 것이라 말해진 이유는 그것들이 수준 낮은 기쁨(lower pleasure)들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애착들이 말씀에서 깨끗한 짐승들에 의해 의미되어진다. 그러나 인간의 애착들은 수준 낮은 기쁨들에서만 지각되어지기에, 인간은 그의 애착을 실제로는 기쁨(pleasure)이라 부르고, 여기서 그것들이 “기는 것”이라 불리우고 있다.
수준 낮은 기쁨들은 두 종류가 있다. 의지력에 속하는 것과 이해력에 속하는 것들이다. 일반적으로 말하면, 토지나 재물을 소유함으로부터 오는 기쁨들, 명예나 고위직에서 오는 기쁨들, 결혼의 사랑과 유아나 어린이를 사랑함에서 오는 기쁨들, 우정이나 동료와의 대화에서 오는 기쁨들, 읽고, 쓰고, 알고, 슬기로워짐에서 오는 기쁨들, 그 외 많을 것이다. 감각의 기쁨도 있다: 청각의 기쁨, 이는 음악이나 노래의 달콤함으로부터 있는 일반적인 것이다; 시각의 기쁨, 이는 여러 가지 다양한 아름다움들로부터 있는 일반적인 것들; 후각의 기쁨이다, 이는 달콤한 냄새로부터 있다; 미각의 기쁨도 있다, 이는 식료품의 기분좋음과 건강에 좋음으로부터 이다; 촉각의 기쁨도 있다, 이는 자기에게 쾌적함을 주는 많은 감정들로부터 이다. 신체에서 있는 기쁨의 종류도 있다. 그러나 이것은 내면의 애착으로부터 존재하고 존속해가지 않으면, 그리고 내면의 애착은 사용과 목표가 들어있는 한 단계 더 깊은 내면의 애착으로부터 존재하고 존속해가지 않으면 신체 안에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
이런 것들은 정규적인 질서에서는 가장 깊은 내면으로부터 시작하여 있는 내면들인데, 이것들은 육체 안에서 사는 동안 일 경우 인간에 의해 지각되지 않는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기쁨의 내면이라는 것이 있는지, 더구나 이것의 근원은 어디로부터인지 거의 알지 못한다; 또한 내면의 것들로부터가 아니면 외적인 것들은 결코 존재할 수 없다는 것 역시 모른다. 사실상 기쁨은 최말단에 있는 결과들일 뿐이다. 내면의 것들은 그것들을 곰곰이 되새겨보는 이들에게가 아니면, 육체에 사는 이상, 인간이 볼 수 있게 열려져 놓이지 않는다. 다른 삶에서의 처음에 기쁨의 내면들은 천국을 향하여 주님에 의해 승강되는 질서 안에서 시야에 전개된다. 내면의 애착들은 각기 그것의 즐거움과 함께 영들의 세계 안에서 그 자체를 분명히 나타낸다. 천사같은 영들의 천국에서는 더 분명히 나타낸다. 천사들의 천국에서는 그것들의 행복과 더불어 한층 더 분명히 나타낸다. 그 이유가 세 천국들이 있기 때문이다. 첫째 천국 보다 두 번째 천국이, 두 번째 천국 보다 세 번째 천국이 더 완전하고 더 많은 행복과 더불어 그 자체를 나타내보인다. 이런 내면들은 다른 삶에서는 지각에 진열되어 있듯 확실히 보인다; 그러나 인간이 육체에 사는 한, 인간은 물질적인 것들에 관한 생각과 관념에 몰두되어 있기 때문에, 이런 내면의 것들은 마치 잠든 듯, 물질적인 것 안에 침수되어 있다. 그래도 곰곰이 되새겨보는 자에게 분명해질런지 모르는 것은, 모든 기쁨들은 질서상에서 더욱 더 내면인 애착들과 같다는 것, 기쁨들은 그것의 모든 실체와 품질을 더욱더 내면인 애착으로부터 받는다는 것이다.
질서상에서 더욱 더 내면인 애착들은 가장 바깥쪽 것들, 즉, 신체 안에서, 기쁨으로 느껴지는 바, 이 기쁨들이 “기는 것들”이라 불려진다. 그러나 이 기쁨들은 내적인 것들로부터 영향을 받은 육체적인 것일 뿐이고, 이것이 모든 이에게 시각과 시각의 기쁨으로부터 분명해지고 있다. 내면의 시각이 있지 않으면, 어떤 눈도 볼 수 없다. 눈의 시각은 내면의 시각으로부터 존재한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죽은 이후에도 육체의 눈으로 볼 때나 마찬가지로 보고 있고, 오히려 육체의 눈으로 볼 때 보다 더 잘 보기까지 한다. 육체의 삶에서 소경이었던 이들은 다른 삶에서 볼 뿐만 아니라 더불어 이들은 예리한 환상을 가졌다. 인간이 잠들었을 때, 그는 깨어있을 때 만큼이나 명료하게 본다. (아마 우리가 잠들어 꿈을 꾸었을 때, 깨어나 그 꿈을 생각해보면 지상에서 실지 본 것 만큼 명료하다고 생각든 적이 있는 경험을 되돌아 보면 납득될지 모른다.) 나는 다른 삶에서 내적 시력을 수단으로 세상에서 보는 것 보다 더 명료하게 볼 수 있는 경험이 주어졌었다. 이 모든 사항으로부터 명백해지는 바, 외적 시각은 내면의 시각으로부터 나온다는 것, 내면의 시각은 더 내면의 시각으로부터, 더 내면의 시각은 더욱 더 내면의 시각으로부터 나온다는 것이다. 시각 외의 다른 감각과 다른 기쁨도 위의 설명과 같다.
기쁨들은 본 구절 외 다른 구절에서도 “기는 것들”이라 불리운다. 그러나 깨끗한 것과 불결한 것, 즉 살아있는 것으로부터 즐기는 천국의 기쁨과 죽은 것으로부터 즐기는 지옥의 기쁨 사이에 구분은 있다. 호세아서에서:
그 날에 나는 그들을 위해 들판의 야생 동물과 더불어, 그리고 하늘들의 새와 더불어,
그리고 지면의 기는 것들과 더불어 언약을 만들 것이다 (호. 2:18).
여기서 들판의 야생 동물, 하늘들의 새, 그리고 기는 것은 이미 말한 바 같이 인간에 있는 여러 가지 것을 의미하는데, 주제가 새 교회이다로부터 분명해진다. 다윗서에서:
하늘들과 땅이 여호와를 찬양하게 하라, 바다들과 그 안에 기는 모든 것 (시. 69:34).
바다들과 그 안에서 기는 것들이 여호와를 찬양할 수 없다. 이것들에 의미되는 인간 안에 있는 것들, 그리고 살아있는 것들이 찬양할 수 있다. 그런고로 그것들 안에 살아있는 것으로부터 이다. 다시:
여호와를 찬양하라, 너희 야생 동물과 모두 각각의 짐승,
기는 것과 날개달린 새들아 (시. 148:10).
위 구절도 앞 인용 구절과 비슷한 의미이다. 즉,
“기는 것”에 의해 선한 애착들로부터 있는 쾌락들임은 기는 것들이 이 백성들과 더불어 불결해 있음으로부터 분명해진다. 아래 구절로부터도 분명해진다. 다시:
오 여호와여, 땅이 당신의 부유함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이 바다, 크고 넓고,
그 안에 셀 수 없는 기는 것들이 있습니다; 이것들 모두는 당신께서 철에 맞추어
그들에게 식품으로 주실 때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당신은 그들에게 주시고, 그들은 모아
들입니다; 당신께서 당신의 손을 여시고, 그들은 선으로 만족해집니다 (시. 104:24-28).
위 구절의 내적 의미에서 “바다들”은 영적인 것들, “기는 것들”은 영적인 것들로부터 살아있는 모든 것들을 의미하고; 이를 즐김이 그것들을 철에 맞게 그들에게 식품으로 주심, 그리고 그들이 선으로 만족해짐에 의해 의미되고 있다. 에스겔서에서:
강들이 가는 모든 장소에서 기는 살아있는 모두 각각의 혼이 살 것이다;
그리고 아주 많은 물고기가 있을 것이다, 그 이유는 물들이 그리로 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은 치료될 것이다, 강이 가는 어디든지 모든 것이 살 것이다 (겔. 47:9).
위 구절은 새 예루살렘의 물들이 뜻해지고 있다; 이 물들은 천적 근원으로부터 있는 영적인 것들을 표시한다; “기는 살아있는 혼”은 선에 대한 애착들, 그리고 이 애착으로부터의 기쁨들, 이는 육체로부터와 감각들로부터 모두; 이것들이 “물들”로부터, 또는 천적 근원으로부터의 영적인 것들로부터 살고 있다가 뜻해져 있다.
더러운 기쁨들 또한 있는데, 이는 인간의 자기 자신에 근원이 있고, 거기로부터의 더러운 탐욕들 안에 근원이 있다. 이것 또한 “기는 것”이라 불리우는데, 에스겔서로부터 분명해진다:
그리하여 나는 들어가서 보았다; 그리고 보니, 기는 것과 짐승의 형체, 역겨운 (형체),
그리고 이스라엘 가문의 모든 우상들, 벽을 빙돌아가며 초상화해 놓았다 (겔. 8:10).
위 구절에서 “기는 것의 형체”는 내면들의 탐욕들인 불결한 기쁨들(pleasures)을 의미한다. 이들의 내면들은 증오함들, 복수들, 잔인함들, 간음들이다; 이런 것이 “기는 것들”, 또는 자기와 세상을 사랑함으로부터, 또는 인간의 자기 자신으로부터 있는 기쁨들을 즐김이다. 이것들이 그들의 “우상들”이다. 그 이유는 그들은 그런 것들에서 즐거움을 찾고, 그것들을 사랑하고, 그것들을 신들로 가지고, 그것들을 숭배하기 때문이다. 표현 교회(the representative church)에서 이런 기는 것들은 천박하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어서, 마치 불결한 것과 같이 취급하여 그것들을 만지지 못하게 했다; 그리고 그것들에 닿은 자는 불결해졌다 (레. 5:2; 11:31-33; 22:5, 6 참조).

너희를 위한 식품 일 것이다. 이것이 그들이 즐길 그것의 즐거움(delight)들을 의미하는 것은 이로부터 분명하다. 즉 어떤 기쁨이든, 그것은 그 인간에게 영향을 끼칠 뿐만 아니라 그를 지탱하게 한다. 마치 인간과 음식물의 관계와도 같다. 즐길 수 없는 기쁨들은 기쁨이 아니다. 이럴 경우, 그것은 생명 없는 어떤 것인 바, 육체적 기 쁨(pleasure)은 정신적 기쁨(joy)으로부터서만 존재하고, 또한 기쁨이라 불리운다. 다시 말해, 물질적이고 감각적인 것들은 그 자체로서는 물질일 뿐, 생명 없고, 죽은 것이다; 그러나 내면들로부터 질서 안에 오는 기쁨들로부터 육체적, 물질적 기쁨들은 생명을 가진다. 이로부터 분명한 바는, 내면의 생명들은 기쁨 안에서 즐거움을 주는 기기쁨으로 있다는 것이다. 그 이유가 기쁨들 안에 생명이 있기 때문이다. 주님으로부터의 선이 있는 기쁨 만이 살아있다. 그 이유는 이럴 때만이 기쁨은 선의 참 생명으로부터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이 구절에서, “살아있는 기는 것 모두 각각이 너를 위한 식품 일 것이다” 하고 말해진다. 즉 즐김(enjoyment)을 위하여서 이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생각하기도 한다. 다른 삶에서 행복해지기를 원하는 자는 육체와 육체의 감각들로부터의 기쁨들 안에서 살아서는 안 된다는 것, 그것들은 물질적이고 세상적인 것이므로 우리를 영적이고 천국의 생명으로부터 떼어 놓는 바 포기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는 이들, 그래서 고생을 자초하는 이들은 세상 삶에서 제대로 된 정보나 지식을 얻지 못한 까닭이 클 것이라 생각된다. 누구에게도 신체나 그것의 감각들의 기쁨, 즉 토지나 재물을 소유함의 쾌락; 명예나 고위 직급을 지님의 기쁨; 결혼 사랑의 기쁨; 유아나 어린이를 사랑함의 기쁨; 우정이나 동료와의 교제로부터의 기쁨; 음악을 들음의 기쁨, 또는 노래함의 달콤함의 기쁨; 보는 것의 기쁨, 아름다움들, 멋진 옷을 입는 것, 좋은 가구를 지니고 좋은 집에서 사는 것, 아름다운 정원을 지니는 것, 등등 형체와 색깔의 하모니로부터 자아내지는 기쁨; 냄새로부터의 기쁨, 향기로움의 기쁨; 맛의 기쁨, 음식의 향미로부터의 기쁨; 접촉(touch)의 기쁨, 등등 이다. 이런 것들은 내면의 애착으로부터 발생하는 가장 외적, 또는 신체적 애착, 애정들이다. 이는 이미 설명했다.
내면의 애착들(interior affections), 이것은 살아있다. 이 애착은 그것의 기쁨을 선과 진리로부터 끌어낸다; 그리고 선과 진리는 그것의 기쁨을 선행과 신앙으로부터 끌어낸다. 선행과 신앙은 주님으로부터, 고로 생명 자체로부터 끌어낸다; 그러기에 각각의 근원으로부터 애착들과 기쁨들은 살아있다. 순수한 기쁨들은 이 근원으로부터이기에, 그것들은 누구에게서도 금지되지 않는다. 실로 기쁨들이 이 근원으로 언제나 그것들의 즐김을 가질 경우, 비교적으로 불결한 기쁨, 즉 이 근원으로부터 있지 않은 기쁨을 언제나 능가한다. 결혼 사랑의 기쁨을 예를 들면, 이 기쁨이 그것의 진정한 결혼 사랑으로부터 가지게 되면, 이 근원으로부터 있지 않은 결혼 사랑의 기쁨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능가한다. 진정한 결혼 사랑은 천국으로부터 내려오기 때문에 진정한 결혼 사랑 안에 있는 이들은 천국의 기쁨과 행복 안에 (현재) 있다. 이것은 태고 교회의 사람들에 의해 인정되어졌다. 간음자들에 의해 느껴진 기쁨들은 태고인들에게는 너무나 역겨운지라, 그들은 이것을 생각만해도 덜덜 떨었다. 이상으로부터 우리는 두 기쁨, 즉 생명의 참 원천으로부터 흐르지 않는 경우와 주님으로부터 흐르는 경우를 생각해보았다.
위에 열거한 기쁨들은 누구에게도 금지되지 않는다는 것, 그것들이 그것의 진정한 근원으로부터 올 때, 금지된 것과는 먼 거리, 처음으로 실지의 기쁨들이 되어 있다는 것, 이는 세상에서 권력과 위엄과 부유함에서 살았던 이들, 육체와 감각 모두에서 풍요로운 쾌락을 가졌던 이들도 천국에서 복되고 행복한 이들 사이에 있다는 사실로부터 알게 된다. 지금 그들과 더불어 내면의 기쁨들과 행복들은 살아있다. 그 이유는 그것들이 선행의 선과 주님에 대한 신앙으로부터의 진리들 안에 그것의 근원을 갖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기들의 모든 기쁨들이 선행과 주님에 대한 신앙으로부터 임을 중요시했기 때문에, 그들은 그것들의 쓸모있게 함(use)도 중요시했다. 쓸모있어짐이 그들의 목표이기 때문이다. 쓸모있어짐(use) 자체가 그들에게 수준 높은 기쁨이 되어 있고, 이로부터 그들의 수준 낮은 기쁨도 왔다 (945항도 참조).

“야채 풀잎”이 가장 천한 수준의 기쁨을 의미하는 것은 이미 말한 것으로부터 분명해진다. 이 기쁨들이 세상적이고 물질적, 또는 외적 측면에서만 있기 때문에 야채 풀잎이라 불리운 것이다. 인간의 육체적, 또는 바깥쪽 것에 있는 기쁨들은 계속적으로 더욱 더 내면에 있는 기쁨들에 그것의 근원을 가진다. 가장 바깥쪽, 또는 육체적인 것들에서 지각되는 기쁨들은 상대적으로 수준이 낮다. 그 이유는 모든 기쁨들의 본성은 그것이 외적인 것들 쪽을 향하여 나아감에 비례하여 낮은 수준이 되어지고, 내적인 것들 쪽을 향하여 전진함에 비례하여 수준 높은 것, 즉 더 고귀(행복)해지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외적인 것들이 벗겨내짐에 비례하여 기쁨들은 더 즐겁고 행복한 기쁨이 된다. 이는 인간이 육체의 삶 이후, 영들의 세계에 와서 누리는 기쁨에 비해 지상에서 누렸던 기쁨은 얼마나 더 수준이 낮은지로부터 분명해진다. 그 차이가 얼마나 크던지 저 세계의 선한 영들은 육체의 기쁨들에는 콧방귀 뀌어 경멸한다. 그들은 온 세상 것을 다 준다 해도 그 기쁨들에로 되돌아가지 않는다.
이 영들의 기쁨, 앞서 살핀 방식대로, 선한 영들이 주님에 의해 천사같은 영들의 천국으로 들리워질 때, 그들이 지녔던 기쁨은 천사같은 영들이 지닌 기쁨에 상대적으로 수준이 낮음으로 인하여 입장한 선한 영들은 자기들의 기쁨을 내던진다. 그 다음 주님에 의해 천사같은 영들이 천사들의 천국, 또는 세 번째 천국에 들리워질 때 역시 같은 방식으로 있게 된다. 이 안에서 내적인 것들은 살아있고 상호간의 사랑(mutual love)만 있는 바, 행복함은 말로 표현할 수 없다 (545항도 참조). 이상 살핀 바로부터, “내가 너희에게 이것 모두를 야채 풀잎으로 준다”에 의해 의미된 것이 분명해졌으리라 생각한다. 기는 것이 육체의 기쁨들과 감각을 즐김 모두를 의미한 까닭에, 이로부터 야채 풀잎도 (같은 뜻에서) 서술되고 있다. 원어에 있는 단어는 “야채(식용에 적합한 것)”와 “녹색인 것” 모두를 의미하는 단어이다. “야채(esculent)”는 의지 측면으로부터의 기쁨들, 또는 천적 (수준의) 애착들로부터의 기쁨들에, “녹색(green)”은 이해 측면으로부터의 기쁨들, 또는 영적 (수준의) 애착들에 관련된다.
“야채 풀잎”과 “녹색 풀잎”이 낮은 수준인 것을 의미하는 것은 말씀에서도 분명해진다. 이사야서에서:
니므림의 물들이 황폐해질 것이다; 그로 인해 풀이 말라졌다,
풀잎이 소진되었다, 녹색인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이. 15:6).
다시:
그들의 주민들은 손이 짧아졌다(힘이 약해졌다), 그들은 낙담해졌다,
그리고 수치함에 놓였다; 그들은 들판의 풀잎이, 그리고 녹색의 풀잎이,
지붕에 있는 풀이 되었다 (이. 37:27).
“녹색의 풀잎”이 가장 낮은 수준인 것을 표시하고 있다. 모세의 책에서:
너희가 소유하려고 가는 토지는 너희가 빠져 나온 이집트의 토지 같지 않다.
이집트에서 너희는 씨를 뿌리고 풀잎들의 동산 같이 네 발로 물을 대었다 (신. 11:10).
“풀잎들의 동산”은 낮은 수준인 것을 표시한다. 다윗서에서:
악한 자는 풀 같다, 그들은 갑자기 잘리운다,
그리고 녹색의 초본 같이 소진될 것이다 (시. 37:2).
“풀”과 “녹색의 초본”은 가장 낮은 수준인 것을 표시한다.

나는 그것 모두를 너희에게 준다. 이것은 쓸모 있기 때문에 있게 되는 즐김을 의미하는데, 그 이유는 그것이 “식품을 위해” 있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식품을 위해 있는 것은 무엇이든 쓸모가 있으려고 있기 때문이다. 쓸모 있음(use, 선용, 유용)을 주목해보자: 선행 안에, 즉 이웃을 사랑함(이로부터 수준 낮은 기쁨이 살아있는 기쁨이 되어있다)에 있는 이들은 쓸모 있음 때문을 제외하고는 기쁨의 즐김을 중요시하지 않는다. 그 이유가 선행의 일들을 별도의 문제로 하는 선행은 없기 때문이다; 선행이 존재하는 곳에는 선행이 실행 중이거나, 또는 쓸모 있음에 있기 때문이다. 이웃을 자신 같이 사랑하는 자는 선행이 실행 중에, 또는 쓸모 있음 안에 있지 않을 경우는 그로부터의 기쁨은 지각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선행의 생명은 쓸모 있는 것들의 생명이다. 전체 천국의 생명도 이와 같다; 주님의 왕국은, 그것이 상호간의 사랑의 왕국이기 때문에 쓸모 있음의 왕국이다. 그러므로 선행으로부터 있게 되는 모두 각각의 기쁨은 쓸모 있음으로부터 기쁨을 가진다. 쓸모 있음이 더 고상하면, 더 큰 기쁨이 있게된다. 결과적으로 천사들은 그들의 쓸모 있음의 실체와 품질에 따라 주님으로부터 행복을 가진다.
모두 각각의 기쁨의 경우도 같다. 쓸모 있음이 더 고상하면, 더 큰 그것의 기쁨이 있다. 예를 들어서 결혼 사랑을 생각해보자: 이 사랑은 인간 공동체의 양성소(seminary), 그렇기 때문에 천국들에 있는 주님의 왕국의 양성소이다. 이것은 모든 쓸모 있음 중에서 가장 큰 쓸모 있음이다. 이 사랑은 아주 많은 기쁨을 가지고 있는 바, 이것은 천국의 참 행복이다. 여타 다른 기쁨들 또한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쓸모 있음의 특출함에 따른 차이는 있다. 쓸모 있음은 아주 다양하므로 종들(genera) 이나 속들(species)로 거의 분류할 수 없는데, 어떤 것은 주님의 왕국에, 또는 주님에 더 가깝게, 또는 더 직접적으로, 어떤 것은 더 멀게, 또는 더 간접적으로 있다. 결론적으로 말해보자. 모든 기쁨은 인간에게 수여되어 있다는 것, 그러나 쓸모 있음을 위하여서만 수여되어 있다는 것, 그러므로 쾌락은 그 안에 있는 쓸모 있음의 차이에 따라, 천국 행복의 몫을 받고 그것으로부터 산다는 것이다.

4절. 오직 그것의 혼과 더불은 살, 그것의 피를 너는 먹지 말라. “살”은 인간의 의지 부분을 의미한다. “혼”은 새로운 생명을 의미한다. “피”는 선행을 의미한다. “먹지 말라”란 뒤섞지 말라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그것의 혼이 있는 살, 그것의 피를 먹지 말라”에 의해 거룩한 것에 모독된 것을 뒤섞지 말라가 뜻해진다.

“살(flesh)”은 인간의 의지 부분을 의미한다. 이는 “살”의 의미로부터, 즉 인간이 죽어 썩을 때를 상상해보면 쉽게 알아진다. “살”은 일반적으로는 전체 인간을 의미하고, 특별하게는 물질적(육체적, corporeal, 고기 덩어리) 인간을 의미함은 574항에서도 살핀 바 있다; 그리고 살이 전체 인간, 그리고 물질적 인간을 의미하므로, 살은 인간에게 어울리는 것, 결과적으로 그의 의지 부분을 의미한다. 인간의 의지 부분, 또는 의지력은 악 밖에 없다; 그러므로 “살”은 인간이라 단언된다, 그 이유가 인간이 이와 같기 때문에, 모든 탐욕, 또는 모든 현세에의 욕망을 의미한다. 그 이유가 인간의 의지력은 탐욕이기 때문인데, 이미 살핀 바 있다. [105, 568,594, 801:1, 977:2항] “살”이 이 의미를 가졌기 때문에, 백성들이 사막에서 먹기를 갈망한 고기 덩어리의 의미 또한 위와 같다. 모세의 책에서:
그들 사이에 섞여 있는 무리가 갈구함에 빠졌다; 이 때로부터 백성들은 다시 울었고
말했다, “누가 우리에게 먹을 고기덩어리를 줄 것인가?” (민. 11:10).
위 구절에서 살은 갈망(욕망)이라 명백하게 불리우고 있다, 그 이유가 “누가 우리에게 고기 덩어리를 줄 것인가?”라고 말하여, 갈망함에 빠졌기 때문이다. 아래 구절 역시 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
고기가 그들의 이빨 사이에 아직 있는 동안, 고기가 씹히기 전에, 여호와의 분노가
백성을 향하여 지펴졌다, 그리고 여호와께서는 매우 큰 재앙으로 백성을 치셨다;
그리고 이 장소의 이름은 욕망의 무덤들(the Graves of Lust)이라 불려졌다,
그 이유는 거기서 그들이 갈구했던 백성들을 묻었기 때문이다 (민. 11:33, 34).
모든 이가 분명히 해두어야 하는 점은, 이와 같은 재앙이 백성들 사이에 보내진 것은 그들이 고기를 쫓아 갈구함 때문이 결코 아니다는 것, 혹은 고기를 위하여 갈구함 때문이 아니다는 것이다. 그 이유가 인간이 고기를 먹고 살다가 오랫동안 먹지 못한채 있었을 경우, 즉 이 구절의 백성들이 광야에서 있던 모습 같을 경우, 고기를 먹고 싶어한 것은 당연히 있어지는 욕구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사건의 배경안에 더 깊은 이유가 감추여 놓여 있다. 즉 영적인 것이다. 이 때의 백성들은 만나에 의해 의미되고 표현된 것에 몹시 진저리를 내는 본성 속에 있었다. 이는 민. 11:6으로부터 분명해진다. 그리고 “고기”에 의해 의미되고 표현된 것, 즉 그들 자신의 의지 속의 것들, 즉 탐욕 속에 있는 것들, 그 자체 배설물적이고 모독적인 것들에 불과한 것만을 원했다는 것이다. 이 교회는 표현 교회에 속하기 때문에 그들이 하는 말이나 행동 같은 것의 표현으로부터 있기 때문에, (주님의) 교회가 배설물에 불과한 것으로 충족되려는 욕구에 상응하는 표현은 이런 큰 재앙을 자초한다; 이 백성들 사이에 있었던 것은 천국에서 영적으로 표현되어졌다. 만나는 천국의 것을 천국에서 표현했다, 그리고 그들이 뒤쫓은 고기는 그들 자신의 의지 속의 불결한 것을 천국에서 영적으로 표현되어졌다. 이런 이유를 위하여, 그들이 이런 본성 속에 있기 때문에 그들에게 처벌이 따라온 것이다. 위 인용 구절, 다른 구절로부터도 분명해지는 것은, “살”에 의해 의지 속에 있는 것, 본문의 경우, 인간의 의지 속에 있는 것, 즉 불결함이 의미되어진다. 이 불결함은 9:2의 “땅의 짐승”이 취급된 대목에서도 살핀 바 있다. [987항]

“혼”이 생명을 의미하는 것은 말씀의 여러 장소에 있는 “혼”의 의미로부터 분명해진다. 말씀에서 “혼”은 일반적으로는 모든 생명, 즉 내적 측면에서, 또는 내적 인간의 것, 그리고 외적 측면, 또는 외적 인간의 것, 모두를 아울러 의미한다. 혼이 모든 생명을 의미하기 때문에, 혼은 그것이 서술되는 인간의 생명도 의미한다. 이 본문의 경우, 혼은 인간의 의지와 분리된 생명, 즉 거듭나는 인간의 생명을 서술하고 있다; 그 이유가, 이미 말한 바와 같이, 거듭난 영적 인간이 주님으로부터 받는 새로운 생명은 의지로부터, 또는 인간의 자기 자신으로부터, 즉 인간의 자기 자신의 생명으로부터 완전히 분리되어 있다. 인간의 자기 자신의 생명은 비록 생명이라 인간에 의해 불리고 있지만, 그것은 죽은 것이다. 그 이유는 그것이 지옥적 생명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그들이 먹지 않아야 하는 “그것의 혼과 더불은 살”은 그것의 혼과 더불은 살과 함께를 의미한다; 즉 그들은 주님의 것인 이 새로운 생명을 인간의 것인 배설물 같은 생명, 즉 그의 의지 또는 자기 자신과 뒤섞지 말아야 한다를 의미한다.

“피”가 선행(charity)을 의미하는 것은 많은 것들로부터 분명해진다. 선행은 거듭난 영적 인간이 주님으로부터 받은 새로운 의지 부분을 의미한다. 새로운 의지 부분은 선행과 동일한 것이다. 그 이유는 새로운 의지는 선행으로부터 만들어내지기 때문이다. 선행 또는 사랑은 실체(본질) 자체 또는 의지의 생명이다. 그 이유가 어떤 것을 선택함 없이, 또는 사랑함 없이, 그 어떤 것은 뜻해질 수 없기 때문이다. 선행으로부터 있는 이 새로운 의지가 여기서 “피”이다. 이 의지는 인간의 것이 아니라, 인간안에 있는 주님의 것이다. 이것이 주님의 것이기에 (비록 인간 안에 있어 자기 것인듯 착각할지 몰라도 어쨋든) 인간은 더러운 것, 즉 인간의 의지 속의 것들과 뒤섞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표현 교회에 명령된 것은, 그들은 그것의 피 또는 혼과 더불은 살을 먹어서는 안된다는 것, 즉 둘(살과 피)을 함께 뒤섞지 말라는 것이다.
“피”는 이것이 선행을 의미했기 때문에 거룩한 것을 의미했고; 그리고 “살”은 그것이 인간의 의지를 의미했기 때문에 모독된 것을 의미했다. 이 둘은 반대되고, 분리된 것인 바, 그들은 피를 먹는 것이 금하여졌다; 그 이유가 피와 함께 살을 먹는 것에 의해 천국에서는 모독, 또는 신성한 것에 모독된 것을 섞는 것을 표현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당시 이 표현은 천국에서 천사들을 무서움으로 여길 수 밖에 없게 했기도 했다; 그 이유가 그 당시 교회의 사람과 더불어 존재한 모든 것들은 천사들 사이에서 내적 의미에 있는 것의 의미와 일치하여 상응하는 영적 표현들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모든 것들의 본성은 그것들이 서술하는 인간의 것에 의해 결정되어지는 것과 마찬가지로 “피”에 관한 의미도 그러하다. 거듭난 영적 인간에 관련하여 “피”는 선행, 또는 이웃을 향한 사랑을 의미한다; 거듭난 천적 인간에 관련하여서는 주님을 사랑함을 의미한다; 그러나 주님에 관련하여서는 모든 그분의 인간 실체, 결과적으로 사랑 자체, 즉 인간 종족을 향한 그분의 자비를 의미한다. 이로부터 “피”는, 그것이 사랑 또는 사랑으로부터 있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천적인 것들, 주님 만에 속하는 것들을 의미한다; 그리고 인간에 관련하여서는 인간이 주님으로부터 받은 천적인 것들을 의미한다. 거듭난 영적 인간이 주님으로 받은 천적인 것들이 천적인 것으로부터의 영적인 것(celestial spiritual, 영적 평면에 있는 천적인 것)이다. 이에 관하여는 주님의 신성한 자비로부터 그 밖의 장소에서 더 말해질 것이다.
“피”가 천적인 것, 최고 의미에서 주님의 인간 실체, 고로 사랑 자체, 또는 인간 종족을 향한 그분의 신성한 자비를 의미하는 것은 피가 유대인의 표현 교회에서 계속 신성함이 유지되도록 명령되어져 있음으로부터도 분명해진다. 이런 이유에서 피는 언약의 피라 불리워졌고, 백성들 위에, 아론과 그의 아들들이 기름부음을 받을 때 그들 위에 뿌려졌다; 그리고 태워바치는 제물과 제물의 피는 제단 위와 주위에 뿌려졌다 (출. 12:7, 13, 22, 23; 24:6, 8; 레. 1:5, 11, 15; 4:6, 7, 17, 18, 25, 30, 34; 5:9; 16:14, 15, 18, 19; 민. 18:17; 신. 12:27을 참조하라).
그리고 피는 아주 신성시되고 인간의 의지는 아주 모독적인 것으로 계속 붙들고 있어야 하기 때문에, 피를 먹는 것은 거룩한 것에 대한 모독이기 때문에 심각하게 금하여졌다. 모세의 책에서:
너희가 지방과 피를 먹지 않는 것은 너희 모든 거처에서
너희 대대로 영구한 규례일 것이다 (레. 3:17).
위 구절에서 “지방(fat)”은 천적인 생명을, “피”는 천적인 영적 생명(celestial spiritual life)이다. 천적인 영적인 것(the celestial spiritual)은 천적 (평면)으로부터 있는 영적 (평면의) 것이다; 태고 교회에서 주님을 사랑함이 그들의 천적인 것이었는데, 그 이유는 그들의 의지 안에 심어졌기 때문이다; 그들의 천적인 영적인 것은 거기로부터의 신앙이었다. 그러나 영적 인간과 더불어서는 천적인 것이 존재하지 않고 천적인 것으로부터의 영적인 것이 존재하는데, 그 이유는 선행이 그의 지적 부분 안에 심어졌기 때문이다. 다시 모세의 책에서:
이스라엘 가문의 누구이든, 그들 사이에 체류하는 누구이든, 어떤 방식으로라도
피를 먹지 말라, 나는 피를 먹는 혼에 맞서 내 얼굴을 놓을 것이고, 그를 그의 백성
사이로부터 자를 것이다; 그 이유가 육의 생명은 피에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그것을 너희 혼이 보상을 받게 만들려고 너희에게 제단 위에서 주었다; 그 이유가
혼을 위해 보상을 만드는 것이 피이기 때문이다. 모든 육의 혼은 그것의 피이다;
피를 먹는 자는 누구든지 잘리울 것이다 (레. 17:10-11, 14)
위 구절은 육의 혼이 피 안에 있다는 것, 그리고 육의 혼은 피이다는 것, 또는 천적인 것, 즉 거룩한 것, 주님의 것임을 명백히 보여준다
다시:
네가 피를 먹지 않는 것을 확실히 하라; 그 이유가 피가 혼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너는 살과 더불어 혼을 먹지 말 것이다 (신. 12:23-25).
위 인용 구절로부터 명백해지는 바는, 피가 혼, 즉 천적 생명, 또는 천적인 것이라 불린다는 것이다. 이것이 이 교회의 태워바치는 제물과 제물에 의해 표현되어져 있다. 그리고 같은 방법에서, 천적인 것, 주님의 자신인 것, 이것 만이 천적이고 거룩한 바, 이것에 인간 자신의 것, 이는 모독적인 것을 섞지 말라는 것이 그들은 누룩있는 것 위에 제물을 바치지 말 것, 또는 제물의 피를 바치지 말라고 명령 되었다. (출. 23:18; 34:25 참조). 누룩 넣은 것은 부패된 것과 더럽힌 것을 의미했다. 피가 혼이라 불리고, 선행의 거룩함을 의미한 이유, 그리고 사랑의 거룩함이 유대 교회에서 피에 의해 표현된 이유는 육체의 생명이 피 안에 존재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육체의 최말단의 혼이다. 그러므로 피는 육체의 혼이라고 말해질런지 모른다, 또는 이 피 안에 인간의 육체적 생명이 있다 말해질런지 모른다; 그리고 표현 교회에서 내적인 것들이 외적인 것들에 의해 표현되는 만큼에서, 혼, 또는 천적 생명이 피에 의해 표현되어졌다.

너희는 먹지 말라. 이는 함께 섞지 말라를 의미하는데 이것이 방금 위에서 말한 것에 뒤이어진다. 고기를 먹는 것은 그 자체를 주목해서 보면, 모독의 어떤 것이다. 그 이유가 태고 시절에서 그들은 어떤 짐승이나 새를 결코 먹지 않았고, 오직 씨, 특히 밀로 만든 빵, 또한 과일, 야채, 여러 종류의 젖들, 이 젖으로 만든 제품들, 즉 여러 버터들, 등등을 먹었기 때문이다. 동물을 죽이고 그 고기를 먹는 것은 그들에게 사악함이고, 마치 들짐승 같은 것이었다. 그들은 짐승이나 새들로부터 오직 섬김과 쓸모 있음만을 위해 가져왔다. 이는 창. 1:29-30으로부터 분명해진다. 그러나 시간이 경과하면서, 인간들이 들짐승 만큼 사나워졌을 때, 아마 더 흉포해졌을 때, 그때 그들은 동물들을 죽여 그것들의 살을 먹기 시작했다; 사실상 인간의 본성이 이와같기 때문에, 이런 행위를 하는 것이 인간들에게 허락되어졌다. 이는 오늘날도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그가 양심으로부터 이것을 행하는 한, 그 만큼에서 그것은 그 인간을 위해 적법하다. 그 이유가 그의 양심은 그가 진리이고 적법하다고 상상하는 모든 것으로부터 만들어져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고기를 먹는다고 해서 비난 받지도, 비난하지도 않는다.

이런 사항으로부터 이제 분명해지는 바, “그것의 혼과 더불어 살을, 그것의 피를 먹지 않는 것”은 거룩한 것에 모독적인 것을 섞지 말라는 것이다. 피와 더불어 고기를 먹음을 수단으로 모독적인 것을 거룩한 것에 섞지 말라는 것에 대해 주님께서 마태복음에서 이렇게 명료하게 가르치신다: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인간을 더럽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입으로부터 나오는 것,
이것이 인간을 더럽힌다; 그 이유가 입으로부터 진행하는 것들은 심정으로부터
나오기 때문이다 (마. 15:11, 18-20).
유대 교회에서도 피와 더불어 먹는 것이 금하여졌는데, 그 이유는 이미 말했듯이, 고기를 피와 더불어 먹음이 그때 당시 천국에서 모독을 표현했기 때문이다. 이 교회에서 행해진 모든 것들은 천국에서 상응하는 표현들로 바뀌었다. 즉 피는 거룩한 천적인 것으로; 살은 제물의 바깥쪽 측면인데, 그 이유는 살이 그리워함들을 의미했기 때문에 이것이 모독으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피와 고기를 같이 먹는 것은 거룩한 것을 모독적인 것과 섞는 것으로 바뀌었다. 그때 당시의 상황이 이러했기에 아주 격하게 금지하였다. 그러나 주님이 오신 이후, 외적 의식들이 폐지되었을 때, 그로부터의 표현이 중지되어 지상에서의 표현들이 더 이상 천국 안에서 상응하는 표현들로 바뀌지 않았다. 인간이 내적인 것들에 관하여 가르침을 받고, 내적으로 되어갈 때, 외적인 것들은 그에게 중요 사항이 아니다. 그때 그는 거룩한 것이 무엇인지, 즉 거룩함 자체로부터의 선행과 신앙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그는 자기가 아는 내적인 것들에 따라 그의 외적인 것들 역시 주목해서 본다. 다시 말해 선행과 주님에 대한 신앙에 따라 그는 외적인 것들 안에 있는다는 말이다. 주님이 오신 이래, 천국에서 인간의 외적인 것들이 중요시되지 않고 그의 내적인 것들이 중요시되었다. 만일 누군가에 대해 그의 외적인 것들을 중요함의 범주에 끼워넣었다면, 그는 필시 순박한(천진난만한) 사람이어서 이다. 그의 순박함 안에 순진과 선행이 있다. 이것이 그의 외적인 것들에 있는 것이다. 즉 그의 외적 예배 안에, 주님으로부터, 인간의 지식 없이 있는 경우이다.

5절. 나는 네 혼을 지닌 네 피를 확실히 요구하리라. 나는 그것을 들짐승 각각 모두로부터도 요구하리라. 그리고 사람의 손으로부터, 그 사람 형제의 손으로부터도 나는 사람의 혼을 요구하리라. “나는 네 혼을 지닌 네 피를 확실히 요구하리라”란 선행을 괴롭힌 폭력은 스스로 처벌될 것을 의미한다. 이 구절에서의 “네 피”란 폭력이다. “혼”은 폭력을 가한 자들이다. “들짐승 각각 모두로부터”란 인간에 있는 폭력적인 모든 것으로부터를 의미한다. “사람의 손으로부터”란 그의 의지력 모두로부터 이다. “그 사람의 형제의 손으로부터”란 그의 이해력 모두로부터 이다. “나는 사람의 혼을 요구하리라”란 모독을 되갚는 것이다.

나는 네 혼을 지닌 네 피를 확실히 요구하리라. 선행을 괴롭힌 폭력은 스스로 처벌될 것을 의미하고, “피”는 폭력을, 그리고 “혼들”은 폭력을 휘두른 자들임은 진행되고, 이어져가는 구절로부터 분명해진다. 즉 “피”와 “혼”의 반대 의미로부터 이다. 진행되는 것으로부터인 이유는 진행되는 것들 안에 피를 먹음이 취급되고, 이것이 모독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어지는 구절로부터인 이유는 다음 절이 피를 흘림을 취급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여기서의 주제는 신성한 것에 모독인 것을 섞는 자의 상태와 그에 대한 처벌이다. “피”의 반대적 의미로부터인 이유는 피의 순수한 의미가 천적인 것, 그리고 거듭난 영적 인간에 관련해서는 그의 천적인 것인 선행을 의미하나; 반대적일 경우, 선행을 괴롭힌 폭력, 결과적으로 선행에 반대되는 것, 즉 증오함, 복수함, 잔인함, 특별히 모독이기 때문에서이다. “혼”의 반대적 의미로부터인 이유는 말씀에서 “혼”이 일반적으로 생명, 고로 살고 있는 모두 각각의 인간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인간이 이러하고, 이러한 것이 그의 생명인 바, 폭력을 가져온 인간 또한 의미한다. 이는 말씀의 많은 구절로부터 확증되지만, 아래에 한 군데만 소개한다:
피를 먹는 자, 나는 피를 먹은 혼에 맞서 내 얼굴을 놓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의 백성 사이로부터 그것을 잘라낼 것이다; 그 이유가 살의 혼은 피 안에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그것을 너희 혼들을 위해 보상을 받게 만들기 위해 너희에게 제단 위에서
주었다; 그 이유가 혼을 위해 보상을 받게 만드는 것이 피이기 때문이다
(레. 17:10-11, 14).
위 구절에서 “혼”은 세 겹의 의미에서의 생명을 표시한다. 선행을 괴롭힌 폭력은 그 스스로가 처벌할 것임은 뒤이어지는 구절로부터 분명해질 것이다. [1011-1012항]

모두 각각의 들짐승의 손으로부터. 이것은 인간에 있는 폭력적인 모든 것으로부터를 의미하는 것은 “들짐승”의 의미로부터 분명해진다. 말씀에서 “들짐승”은 살아있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반대적인 의미에서 이것은 들짐승 처럼 있는 것, 고로 인간에 있는 야성적인 것은 무엇이든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이것은 이와같은 생명으로부터의 인간, 폭력적인 인간, 또는 선행에 폭력을 휘두르는 인간을 의미한다; 그 이유는 이런 본성이 들짐승 같기 때문이다. 인간은 사랑과 선행으로부터 인간인 것이지, 증오, 복수, 잔인함으로부터서는 들짐승이거나 그 이하이다.

사람[homo]의 손으로부터. 이것은 그의 의지력의 모두로부터인 것, 그리고 “형제 사람의 손으로부터”는 그의 지적 능력의 모두로부터인 것을 의미함은 “사람”의 의미로부터 분명하다. 그 이유가 사람의 실체와 생명이 그의 의지력인 바, 그의 의지가 이러하면, 그 사람도 이러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형제 사람”의 의미로부터, 인간 안의 지적 능력이 형제 사람이라 불리우는데, 이 지적 능력이 진정한 지적 능력이든, 가짜 지적 능력이든, 거짓 지적 능력이든, 이것 모두는 여전히 “형제 사람”이라 불리운다; 그 이유가 이해력이 “남자[vir]” 라 불리우고, “형제”는 의지로부터이기 때문이다. “사람”과 “형제 사람”이 여기서 언급되어진다, 그리고 불결한 의지와 불결한 지성이 그렇게 불리운다, 그 이유는 여기서 모독이 취급되기 때문인데, 모독에 관련하여서는 천국에서 관대히 다루어 언급하거나 표현된 적이 없다. 오히려 즉시 거절되어진다. 이런 이유 때문에 여기서 온건한 용어들이 사용되고, 이 절의 단어들의 의미 역시 애매모호한 태도 안에 있는데, 그 이유가 모독의 것들이 이 구절 안에 포함된 것이 천국 안에서 알려지지 않게 의도적으로 그러한 듯 추측된다.

내가 사람의 혼을 요구할 것이다. 이는 모독을 되갚는다를 뜻하는 것은 진행되는 구절과 이 구절에서 말해진 것으로부터 분명해진다. 그 이유가 주제가 피를 먹는 것, 이를 수단으로 모독인 것이 의미되기 때문이다. 모독이 무엇인지 아는 이가 거의 없다, 더욱이 그것의 처벌이 다른 삶에서 무엇인지 아는 자는 더더욱 적다. 모독은 다양하다. 신앙의 진리들을 아주 부정하는 자는 신앙들을 모독하지 못한다. 마치 교회 밖이나 신앙 지식의 밖에 머문 자의 경우와 같다. 그러나 신앙의 진리들을 아는 자가 신앙을 모독한다. 특히 신앙의 진리들을 인정하고, 자기 입으로 증거하고, 설교하고, 그 진리들을 채택하도록 타인을 설득해댄 자, 그럼에도 증오나 복수, 잔인함이나 강도질, 간음질하는 자, 말씀으로부터 추출한 많은 것들로 자신을 확증한자가 그것들을 뒤집고, 그것들을 더러운 악들에 침수시키는 자가 모독한다. 이는 대단히 간략히 살핀 모독이지만 어쨌든 인간에게 죽음을 가져다 준다. 이로부터 알게 되는 바는 저세상에서 모독인 것과 거룩한 것은 완전히 분리되어 하나는 지옥에, 하나는 천국에 있다는 것이다. 모독자가 육체의 삶에서와 같은 생각 속의 관념 안에서 다른 삶에 올 때, 거룩한 것에 모독적인 것이 꽉 달라붙어 있다. 거기서 그는 달라붙어 있는 모독된 것이 대낮에 보이듯하게 보여짐이 없어 거룩한 것에 관한 단 한 조각의 관념도 산출할 수 없다. 다른 삶에서는 타인의 관념들을 대낮에 보듯 하는 지각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고로 거기서는 그가 (표현하지 않더라도) 생각만 하는 모든 것 안에 있는 모독이 명명백백하기 때문이다. 천국이 모독을 몹시 싫어하므로 모독자는 지옥 아래로 내던져질 수 밖에 없다.
생각(idea)들의 본성은 누구에게도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그것들은 단순한 어떤 것이라 상상되고 있다; 그러나 사고로부터의 각각의 생각은 무수하게 있고, 다양하게 결합되어 어떤 형체를 만든다, 이로부터 인간은 형상을 그린다, 이것이 다른 삶에서는 모두 지각되어지고 보여지기 조차 한다. 예를 들어 한 가지만 생각해보자. 장소에 관한 생각이 떠올랐을 경우이다. 그 장소가 지방이나 성읍, 집이든지 착상되면, 그 다음 인간이 거기서 했었던 모든 것들의 생각과 형상이 도출되고, 그것들은 모두 천사나 영들에 의해 보여진다; 또는 그가 어떤 인물을 증오함에서 붙들고 있으면, 그 생각이 그가 그 인물을 향하여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했던 모든 것으로부터 도출되어진다. 이런 식으로 다른 모든 생각들에서도 있는다; 그것들이 떠올랐을 때, 그가 의문 속에서 주제에 관하여 인상지워지고 품고 있었던 일반적, 세부적 모든 것들이 시야에 보이도록 나열된다. 결혼에 대한 생각이 발생할 때, 만일 그가 간음자였다면, 간음에 관한 더럽고 외설적인 모든 것들이, 그것에 관해 생각했던 것 조차도 나타난다; 이와 마찬가지로 그가 간음들에 관하여 확증해왔던 모든 것, 감각으로부터의 것이든, 이성으로부터의 것이든, 또는 말씀으로부터의 것이든, 모두가 나타난다. 그리고 그가 어떻게 말씀 속의 진리들을 간음질하고(섞음질하고), 남용했는지도 나타난다.
더욱이, 한 가지 것에 관한 생각이 또다른 것의 생각 안으로 흐르고, 그것에 색깔을 준다, 마치 검게하는 조금의 것이 물에 들어가 전체를 검게 하는 것과 같다. 그런고로 영들은 그의 생각(idea)들로부터 알려진다, 그리고, 경이롭다 말해지는 바는, 그의 것 속의 모두 각각의 생각 안에 자신의 형상과 모습이 있다는 것, 모독자의 생각이 시야에 나타날 때, 너무나 이글어진 형태여서 보기만해도 소름끼친다. 이로부터 다른 삶에서 거룩한 것을 모독하는 이들의 상태, 외관이 어떠할지는 짐작되리라 본다. 그러나 천진난만한 이들이 외관에 따라 말씀 안에서 말해진 것을 믿었던 결과 진실되지 않았었다 해도 그들이 거룩한 것을 모독했다고는 결코 말해지지 않는다. 이 외관에 관하여는 589항을 다시 참조하기 바란다.

6절. 사람에게 있는 사람의 피를 흘리는 누구든지 그의 피도 흘릴 것이다. 그 이유는 그분께서는 사람을 하느님의 형상으로 만드셨기 때문이다. “사람에게 있는 사람의 피를 흘리게 함”은 선행을 소멸시킴을 의미한다. “사람에게 있는…”은 사람과 더불어이다. “그의 피도 흘릴 것이다”란 그가 죄있음을 의미한다. “그 이유가 그분께서는 사람을 하느님의 형상으로 만드셨기 때문이다”란 선행을 의미한다. 선행(charity)이 하느님의 형상이다.

사람 안에 있는 사람의 피를 흘리는 누구든지. 이는 선행을 소멸시킴을, 그리고 “사람 안에”는 사람과 더불어 있음이다를 의미하는 것은 이미 살핀 “피”의 의미가 선행의 거룩함이다로부터, 그리고 이것이 “사람 안에 있는 사람의 피”라고 말해진 것으로부터 분명해진다. 이것이 인간의 내적 생명을 의미하고, 이 생명은 인간 안에 있지 않고 그와 더불어 있다; 그 이유가 주님의 생명은 선행이기 때문이다. 이 선행은 인간 안에 있지 않은데, 그 이유는 인간은 더럽고 모독적이기 때문에 인간과 더불어 있는 것이다. “피를 흘림”이 선행에 폭력을 휘두름이다는 것은 인용된 말씀의 구절로부터 분명해지는데, 거기서 선행에 휘둘러진 폭력이 “피”라 불려짐이 보여지고 있다. “피를 흘림”은 글자 의미에서는 죽이는 것이다. 그러나 내적 의미에서는 이웃을 향하여 증오함을 갖는 것인데, 주님께서 마태복음에서 가르치신다:
너희는 옛 시대로부터의 그들에 의해 말해진 것, 즉 너희는 살인하지 말라; 그리고 살인하 는 자는 누구든지 재판의 위험에 있을 것임을 들었었다: 22 그러나 나는 네게 말한다, 이 유 없이 자기 형제에게 성 내는 자는 누구든지 재판의 위험에 있을 것이다 (마. 5:21, 22)
위 구절에서 “성 내어 있음”은 선행으로부터 물러남을 의미한다 (357항 참조), 결과적으로 증오이다.
증오함에 있는 자, 그는 선행을 가지지 않고 있을 뿐만 아니라, 선행에 폭력을 휘두른, 즉 “피를 흘린”자이다. 증오 안에 실제의 살인이 누워있다. 이로부터 명백해지는 바, 미워함에 있는 자는 자기가 미워한 자를 죽이는 것 밖에 바라는 게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가 외적 속박에서 풀려나 있다면, 그는 필시 그를 죽일 것이다. 이 이유 때문에 “형제를 죽임과 그의 피를 흘림”은 증오함이다; 그리고 이것이 증오함이기에, 이것은 그를 향한 그의 모든 생각 안에 있다. 이것은 모독과 더불어서도 같다. 말씀을 모독하는 자는 이미 말했듯이, 증오 안에 진리를 붙잡고 있을 뿐만 아니라, 진리를 소멸하고 죽인다. 이것은 다른 삶에서 모독을 범했던 이들로부터 분명해진다; 모독자들이 이 세상에서 외관상으로 제 아무리 곧바르고, 슬기롭고, 경건했다해도 그들은 다른 삶에서 주님을 증오심 안에서 붙잡는 바, 죽은 주님을 붙잡고 있는 셈이다. 또한 사랑의 모든 선들과 신앙의 모든 진리들에 관련해도 마찬가지 인데, 그 이유는 그들의 내향의 것들, 증오, 강도질, 간음질 등등을 그들이 거룩함으로 포장해두고, 한편 그들은 자신들을 좋아하는 쪽으로 사랑과 신앙의 진리들을 섞음질하고 있다.
“피”가 모독을 뜻하는 것은 374항에서 인용한 구절 뿐만 아니라 아래 구절의 모세의 책으로부터도 분명해진다:
이스라엘의 집으로부터 있는 자는 누구든지, 진영 안에서이든, 진영 밖에서이든 소, 또는 어린 양, 또는 염소를 죽일 경우, 4 그리고 그것을 만남의 문으로 가져와 주님에게 봉 헌물로 그것을 바치지 않을 경우이다, 즉 피는 그 사람에게 귀속되어질 것이다. 그는 피를 흘렸다. 그리고 그는 자기 백성 사이로부터 잘리울 것이다 (레. 17:3-4).
성막 근처인 제단 외의 다른 장소에서 제물을 바치는 것은 모독을 표현했다; 그 이유가 제물을 바침은 거룩한 것이었으나, 진영 안에서이든, 진영 밖에서이든 모독이었다.

그의 피가 흘려질 것이다. 이것이 그의 죄있음을 의미하는 것은 이미 말해진 것으로부터 분명해진다. 피를 흘리는 사람, 또는 살해자는 죽음의 형벌에 처해진다는 것은 글자 의미에 따른 것이다. 그러나 내적 의미에서는 이웃을 향해 증오를 가진 자는 그것 때문에 죽음의 유죄 판결되어진다는 것, 즉 지옥에로 보내진다는 뜻이다. 주님께서 마태복음에서 가르치신다:
그의 형제에게 너는 바보다 라고 말하는 자 누구든지
불의 지옥에 들어갈 위험에 처해진다 (마. 5:22)
그 이유가 선행이 소멸될 때, 인간은 자신에게, 그의 자기 자신에만 남아있고, 더 이상 양심으로부터 있는 내적 유대 관계를 통하여 주님에 의해 통치되지 않고, 외적 유대 관계들, 법들로부터 있는 것, 또는 자신에게 재물과 권력을 만드는데 필요한 유대 관계 같은 것들에 규율되어진다. 그리고 이런 묶음들이 느슨해진다면, 다른 삶의 경우 같으면, 그는 가장 큰 잔인함이나 추잡함, 고로 그의 자신의 유죄됨 안으로 돌진하고 만다. 피를 흘린 당사자가 피를 흘리게 하여 처벌하는 것이 고대인들에게 잘 알려진 보복의 법이고, 이에 따라 그들은 범죄와 잘못들에 대해 판결되었는데, 말씀에서도 많은 장소에서 찾아 읽을 수 있다. 즉 이 법은 보편적인 법, 즉 다른 이가 내게 하기를 원치 않으면 나도 그에게 하기를 원치 않아야한다 (너는 사람들이 나에게 해주기를 바라는 것은 무엇이든, 너는 그들에게 똑같이 행하라) (마. 7:12)에 근원을 두고 있다; 이로부터 역시, 다른 삶에서도 보편적인 질서는, 악은 자체를 벌한다는 것, 거짓도 마찬가지로 벌한다는 것이다; 고로 악과 거짓 안에는 그것 자신의 벌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악이 자신을 벌하는 질서와 마찬가지로 악한 자는 그의 악에 응답하여 처벌 안으로 돌진하였기 때문에, 이로부터 고대인들은 그들의 보복의 법을 연역하였는 바, 여기서와 같이 피를 흘린 누구든지, 그의 피가 흘려질 것, 즉 그는 정죄됨으로 돌진한다는 것이다.

“사람 안에 있는 사람의 피를 흘린 누구든지, 그의 피가 흘려질 것이다”의 글자적 의미는 또다른 사람의 피를 흘리는 것이다; 그러나 내적 의미에서 이것은 또다른 사람의 피가 아니라 사람 안에 있는 선행이다. 이 이유 때문에 “사람 안에 있는 사람의 피”라고 말해진다. 때로 위와 같이 짧은 구절 안에서 같은 두 단어가 글자 의미에서 말해질 때, 오직 하나만이 내적 의미에서 뜻해진다. 내적 인간이 사람 안에 있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내적 인간으로부터 있는 선행을 소멸하는 자, 또는 내적 인간 자체를 소멸하는 자, 그의 피가 흘려질 것, 즉 그는 자신을 죄있다고 판결한다.

그 이유가 하느님의 형상 안에서 그분은 인간을 만드셨기 때문이다. 이것이 “하느님의 형상”인 선행을 의미하는 것은 결과로서 뒤잇고 있다. 앞 절에서 선행이 취급되어졌고, 이것이 “피”에 의해 의미되었다는 것, 그리고 이것이 소멸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 “피를 흘리지 말라”에 의해 의미되어졌다. 여기서 지금 뒤잇는 것은, 그분이 인간을 하느님의 형상으로 만드셨다 이다; 이로부터 선행이 하느님의 형상임은 분명하다. 하느님의 형상이 무엇인지를 아는 자는 오늘날 매우 귀하다. 그들은 말한다. 하느님의 형상은 아담이라 부르는 첫 인간에서 잃어버렸다는 것, 그리고 첫 인간은 자기들도 모르지만 본성의 어떤 완전함이 있었다는 것이다. 실로 완전함은 있었다. 그 이유가 “아담”에 의해, 또는 “사람”에 의해 태고 교회가 뜻해지기 때문이다. 이 교인은 천적 인간이었다, 그리고 지각을 가졌다, 이와 같은 본성을 이 후 교회는 가지지 못했다; 이런 이유에서 이 교인은 주님의 모습(likeness)이었다. 주님의 모습은 그분을 사랑함이다.
시간의 과정에서 이 교회가 멸절된 후, 주님은 새로운 교회를 창조하셨는데, 이것은 천적 교회가 아닌 영적 교회였다. 이 교회는 주님의 모습이 아닌 주님의 형상이었다. “형상”은 영적 사랑, 즉 이웃을 사랑함, 또는 선행을 의미한다 (50-51항 참조). 이 교회가 영적 사랑, 또는 선행으로부터 주님의 형상이었다는 것은 이 절로부터 분명해진다; 그리고 선행이 주님의 형상 자체인 것은 그것이 “하느님의 형상에서 그분은 인간을 만드셨다”라고 말해졌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선행 자체가 그를 그렇게 만들었다 라고 말해진 것으로부터 분명해진다는 말이다. 선행이 “하느님의 형상”이다는 것은 사랑의 참 실체, 또는 선행으로부터 가장 또렷하게 분명해진다. 사랑과 선행 만이 누군가의 형상과 모습을 만들 수 있다. 사람의 실체와 선행은 둘을 만들고 있으나 마치 하나인 듯 하다. 어떤 자가 누구를 자신 같이 사랑할 때, 자신 보다 더 사랑할 때, 그러면 그는 다른 사람을 자신 안에서 보고, 다른 사람 안에서 자신을 본다. 이것은 우리가 초점을 사랑에, 서로 사랑하는 이들에게 만에 둔다면 알런지 모른다. 즉 이 사람의 뜻이 다른 사람의 뜻이 되어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내향적으로는 마치 함께 결합되어져 있다. 오직 육체로만이 서로가 구분되어 있는 것이다.
주님을 사랑하는 것은 인간을 주님과 하나로 만든다. 즉 그분의 모습을 만든다. 마찬가지로 선행, 또는 이웃을 향한 사랑도 인간을 주님과 하나로 만든다, 그리고 그분의 형상을 만든다. 형상은 모습은 아니나 모습에 따라 있다. 이 하나임은 주님을 사랑함으로부터 발생한다, 요한복음이 이를 묘사하고 있다:
그들 모두 하나 되기를 바람니다; 당신, 아버지, 내 안에서 [계시듯], 그리고 내가 당신 안 에, 그들 역시 우리 안에서 하나 되게 하십시오: 당신이 나에게 준 영광을 나는 그들에게 주었습니다; 우리가 하나 인 것 같게 그들이 하나 이게 해주십시오: 나는 그들 안에, 당신 은 내 안에 (요. 17:21-23).
이 “하나로 있음”은 누군가가 곰곰이 생각하는 신비적 합일(union)이고 이것은 사랑 만에 의해 있게 된다. 다시:
그 이유는 내가 살기 때문에 너희 역시 살 것이기 때문이다. 그 날에 너희는 내가 나의 아 버지 안에 [있고], 너희는 내 안에, 나는 너희 안에 있는 것을 알 것이다; 내 명령들을 가 진 자, 그리고 그것들을 지키는 자, 그가 나를 사랑하는 것이다; 만일 사람이 나를 사랑하 면, 그는 내 말들을 지킬 것이다: 그리고 나의 아버지는 그를 사랑하실 것이다, 그리고 우 리는 그에게 올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거처를 그와 더불어 만들 것이다 (요.14:19-23).
이로부터 분명한 바, 사랑이 결합하게 한다는 것, 주님은 그분을 사랑하는 자와 더불어 그의 거처를 가지신다는 것, 그리고 그의 이웃을 사랑하는 자와 더불어 그분의 거처를 가지신다는 것, 그 이유가 이것이 주님을 사랑함이기 때문이다.
이 합일, 모습과 형상을 만드는 합일은 인간 사이에서는 뚜렷이 보여질 수 없으나 모든 천사들이 상호간의 사랑으로부터 하나로 있는 천국에서는 보여진다. 각 공동체, 아주 다양하나, 마치 한 사람인 듯 구성되고 있다. 그리고 모든 공동체 함께-또는 전체 천국-은 한 사람을 구성한다. 이 한 사람을 웅대한 사람(the grand man)이라 불리운다. 전체(보편적인) 천국은 주님의 모습이다, 그 이유는 주님이 거기 안에 있는 모두 안에 있는 모두 되시기 때문이다. 그렇게 각 공동체 역시 모습이고, 각 천사도 역시 모습이다. 천적인 천사들은 모습들이고 영적인 천사들은 형상들이다. 고로 천국은 그 곳 천사들 같이 주님의 많은 모습들로 구성된다. 그리고 이것은 상호간의 사랑을 통하여서 만이-자신 보다 타인을 더 사랑함 만을 통하여 이루어진다 (548-549항 참조). 일반적, 또는 보편적 천국이 모습이기 위하여서는 부분들, 또는 개개인의 천사들도 모습이어야만 하고, 형상들은 모습들에 따라서 있어야만 한다. 일반적인 것이 그 자체와 같은 부분들로 구성되지 않으면, 하나를 만드는 일반적인 것은 없다. (천국에서) 하느님의 모습과 형상, 즉 주님을 사랑함과 이웃을 사랑함을 만드는 것은 원형(archetype, pattern)으로부터 어떤 제품을 생산하는 것과 비슷하다고 연상해도 될런지 모른다; 결과적으로 거듭난 영적 인간 모두 각각은 주님으로부터 있는 사랑, 또는 선행으로부터 그분의 형상이다. 그리고 주님으로부터의 선행 안에 있는 자는 “완전함” 안에 있다; 이 완전함에 관하여는 차 후 주님의 신성한 자비로부터 (더 살필 것이다).

7절. 그리고 너는 열매를 많이 맺고 번성하라. 땅에서 풍성하게 산출하라, 그리고 너는 거기서 번성하라. “너는 열매를 많이 맺고 번성하라”란 내면의 인간에서 선과 진리가 불어남을 의미한다. “열매 맺음”은 선의 증가를, “번성함”은 진리의 증가를 서술하고 있다. “땅에서 풍부하게 산출하고, 거기서 번성하라”란 외적 인간에서 있게 되는 선과 진리의 증가를 의미하는데, “땅”은 외적 인간을 말하고, “풍부히 산출함”은 선의 증가를, “번성함”은 진리의 증가를 각각 서술한다.

너는 열매를 많이 맺고 번성하라. 이는 내면의 인간 안에서 선과 진리의 증가를 의미한다는 것, “열매를 많이 맺음”은 선들을 서술하고, “번성함”은 진리들을 서술한다는 것은 9:1절에서 이미 살핀 바와 같다. 내적 인간 안에서 증가가 있다는 것은 이어지는 것으로부터 분명해진다. 즉 “너는 거기서 번성하라”에서 이다. 이 말에 어떤 특별한 의미가 있어 앞의 부분으로부터의 구분이 없다면 불필요한듯 중복된 것으로 느끼기 십상이다. 여기서와 앞서 말해진 것으로부터 분명해지는 바, 열매를 많이 맺고 번성함은 내면의 인간에 있는 선들과 진리들을 서술한다는 것이다. 내면의 인간이라 말해진 이유는 주님 만에 속하는 천적인 것과 영적인 것에 관련하여서만이 인간은 내적 인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합리적인 것에 관련하여서 그는 내면 또는 중간적인 인간, 즉 내적 인간과 외적 인간 사이에 있는 중간(intermediate)에 해당하는 인간이다; 그리고 선에 대한 애착들과 기억 속의 지식들에 관련하여서는 그는 외적 인간이다. 그러나 육체 안에서 사는 동안 우리는 이것을 알지 못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우리가 육체에 관한 것 안에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내면의 것들이 있는 지 조차 모른다. 게다가 내면의 것들이 분리된 질서에서 구분되어 놓여 있다는 것은 더더욱 모른다. 하지만 사실들을 곰곰이 되새겨 본다면, 우리에게 분명해지는 것은 있다. 즉 우리가 육체로부터 물러난 사고함 안에 있다면, 그리고 자기 영 안에 있는듯 하여 생각한다면 우리에게도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는 말이다. 열매를 많이 맺음과 번성함이 내면, 또는 합리적 인간을 서술하는 이유는 내적 인간의 일함은 내면의 인간 안에서 대단히 일반적 방식이 아니면 지각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내면의 인간 안에 있는 무수한 세부 사항들이 한 개의 일반적인 것으로 우리의 시야에 표출되기 때문이다; 아마 사실상 극도로 일반적인 것으로 우리에게 나타난다.

땅에서 풍성하게 산출하라, 그리고 너는 거기서 번성하라. 이것이 땅인 외적 인간에 있는 선과 진리의 증가를 의미한다는 것, “풍성하게 산출하는 것”은 선들을 서술하는 것, “번성하는 것”은 진리들을 서술한다는 것은 지금 말해진 것으로부터, 그리고 “땅”의 의미가 외적인간이다는 것으로부터 분명해진다. “땅에서 풍성하게 산출하라, 그리고 너는 그 안에서 번성해져라”하고 말해진 것에 관련된 경우는 이렇다: 선행의 결과로서가 아니면, 거듭난 인간과 더불어 그의 외적 인간에서의 번성함은 없다. 즉 받은 선과 진리의 증가가 외적 인간 안에서 없다는 말이다. 선행은 봄철과 여름철의 열과 같다. 이 열이 풀과 식물과 나무들이 자라게 하는 원인이다. 선행 없이, 영적 열 없이, 아무 것도 자라지 못한다, 이런 이유 때문에 이 구절의 앞 부분에 “땅에서 풍성함을 산출하라”하고 말해진다. 이는 선행으로부터 있는 선들을 서술한다, 이를 수단으로 선과 진리의 번성이 있다. 어떤 애착함들이 없으면 인간 안에서도 증가함도 번성함도 없다. 뿌리를 내게 해주고 번성하게 하는 것들이 애착의 기쁨들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모든 것은 애착의 영향력에 의존된다. 인간은 자기가 사랑하는 것을 마음대로 배우고, 간직하고 흠모한다. 이것 모두는 어떤 애착을 지지하고 있다. 지지하지 않는 것들을 인간은 돌보지 않는다, 중요시함도 없다, 거절하기까지 한다. 그러나 애정이 있는 한, 그것의 번성함이 있다. 거듭난 자와 더불은 애착은 주님에 의해 주어진 선행으로부터의 선과 진리에 관한 것이다. 그러므로 선행의 이 애착을 좋아하는 무엇이든 그는 배우고 간직하고 흠모한다, 그리고 자신을 선과 진리 안에서 확증한다. 이것이 “땅에서 풍성하게 산출하라 그리고 너희는 그 안에서 번성해져라”에 의미되어있다.

번성함이 애착 같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을 예를 들어 생각해보자. 선행의 일을 하지 않는다 해도 신앙만으로 구원된다는 원리를 받은 이들의 경우이다. 비록 그가 선행을 가지고 있지 않더라도, 그리고 선행으로부터 신앙을 분리한 자이더라도, 그는 이 원리를 어린 시절로부터 받았기 때문, 뿐만 아니라, 그가 이렇게 상상했기에, 즉 만일 선행의 일들, 또는 선행 자체가 신앙의 실체라고 불러야 한다면, 자기는 그 일들이 자신의 공적일 수 밖에 없다 하고 상상하는데, 이를 통하여 그는 잘못된 상상을 하고 있다. 그런고로해서 어쨌든 그는 선행을 거절하고, 선행의 일들을 쓸모없게 만들고, 신앙의 실체, 즉 선행 없는 신앙 아닌 것의 신앙에 대한 생각 안에만 머무르고 있다. 이 원리를 자신 안에서 확증하면서도 그는 이 확증을 선에 대한 애착으로부터는 전혀 하지 않고, 기쁨에 대한 애착으로부터 하는 바, 그는 그의 그리워함의 탐닉 안에 살런지 모른다. 그리고 많은 것들을 동원해서 신앙 만으로 구원됨을 확증하는 부류의 사람에 속하는 누구는 이것 마저 진리에 대한 애착으로부터 하지 않는다. 그러나 자신의 영광을 위한 애착으로부터 하는 바, 그는 타인 보다 더 위대한 자 인 듯, 더 학식자인 듯, 더 고상한 자인 듯 처럼 여긴다. 그는 재물과 명예에 있는 이들 사이에서 더 높은 자리를 꿰차려 진력할지 모른다; 그런고로 그는 이것을 애착의 기쁨으로부터 실행한다. 그리고 이 기쁨은 확증하는 것들을 번성하게 한다. 일반적으로, 원리가 거짓일 때, 이 원리로부터 흐르는 것은 거짓들 밖에 없다; 그 이유가 모든 것들은 그 자체를 첫 원리에 순응되게 한다. 참으로 나는 (영계에서의) 경험으로부터 알았는 바, 신앙만으로 구원됨이라는 원리 안에서 확증하고, 선행은 없는 이들, 선행에 관심도 없는 이들, 마치 주님께서 사랑과 선행에 관하여 말하신 수많은 구절에는 듣지 못한 듯, 읽지 않은 듯 있는 이들에 관하여 주님의 신성한 자비로부터 따로 살필 기회가 있을 것이다. 아래 인용 구절은 주님께서 사랑과 선행을 두고 하신 말씀이다. (마. 3:8, 9; 5:7, 43-48; 6:12, 15; 7:1-20; 9:13; 12:33; 13:8, 23; 18:21-23, 그리고 끝절까지; 19:19; 22:34-39; 24:12, 13; 21:34, 40, 41, 43; 막. 4:18-20; 11:13, 14, 20; 12:28-35; 눅. 3:8, 9; 6:27-39, 43 로부터 끝 절까지; 7:47; 8:8,14,15; 10:25-28; 12:58, 59; 13:6-10; 요. 3:19, 21; 5:42; 13:34, 35; 14:14, 15, 20, 21, 23; 15:1-19; 21:15-17).

이 장의 1절에 있는 “너희는 열매를 많이 맺거라, 그리고 번성하라”가 이 구절에서 다시 말해진 이유는 여기서의 경우는 결말 이다는 것, 인간이 피를 먹음과 피를 흘림에 의해 의미된 것을 금한다면, 즉 만일 그들이 증오함과 모독함에 의해 선행을 소멸시키지 않는다면 모든 것들은 잘 되어, 열매를 많이 맺고, 번성할 것이다는 것이 결론이다.

8절. 그리고 하느님께서 노아에게, 그리고 그의 아들들에게 말하셨다. “하느님께서 노아에게, 그리고 그의 아들들에게 말하심”이란 영적 교회에 수반되는 것들에 관한 진리를 의미한다. 영적 교회가 노아와 그의 아들들로 뜻해지고 있다.

이런 것들이 의미되어져 있다는 것은 모든 것들, 즉 창세기 첫 장에서 11장의 에벨까지 역사적으로 기록된 것들은 글자에서 나타나는 것들과 아주 다르다는 것, 그리고 역사적 시리즈는 태고인들의 방식에 따라 만들어낸 역사일 뿐이다는 것, 즉 태고인들은 어떤 것에 관해 진리임을 증명하려 할 경우, 그들은 그것을 “여호와께서 말하셨다”라고 선언했는데, 이와 같은 것도 그들의 방식 중의 하나였다는 사실로부터도 분명해진다. 이 구절의 경우는 “하느님”이 말하셨다라고 말해졌는데, 그 이유는 취급된 주제가 영적 교회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진정한 어떤 것이 닥쳐오거나 그렇게 행해져버릴 때 이야기의 주제에 일치하는 형식을 사용했다. 그래서 여호와 대신 하느님이 사용된 것이다.

“노아와 그와 더불어 그의 아들”에 의해 고대 교회가 의미된 것은 앞서 살폈다. 그리고 이어지는 구절로부터 분명해질 것이다.

9, 10절. 그리고 나, 보라, 나는 너와 네 후손들과 내 언약을 세운다. 10 그리고 너와 함께 있는 생명 있는 혼 각각 모두와, 새, 짐승, 그리고 너와 더불은 땅의 야생 동물 각각 모두와, 방주에서 나온 모든 것, 땅의 야생 동물에 이르기까지와 내 언약을 세운다. “나, 보라, 나는 내 언약을 세운다”란 선행에서 주님이 현존하심을 의미한다. “너와”란 거듭나는 영적 인간을 의미한다. “네 후손들과”란 새로이 창조되는 이들을 의미한다. “너와 함께 있는 생명 있는 혼 각각 모두와”란 거듭나고 있는 영적 인간에게 있는 모든 것을 일반적으로 의미한다. “새”는 거듭나는 영적 인간의 이해함에 관한 것을 특별히 의미하고, “짐승”은 그의 새로운 의지에 관한 것을 특별히 의미한다. “땅의 야생 동물 각각 모두”란 그의 이해함에 속한 것 중에서 수준 낮은 것들과 이로부터 오는 그의 의지에 속한 것을 의미한다. “너와 함께 있는..,”이란 거듭나는 영적 인간에게 있는 것을 의미한다. “방주에서 나온 모든 것”이란 교회 속의 사람을 의미하고, “땅의 야생 동물 각각 모두”란 교회 밖에 있는 사람을 의미한다.

그리고 나, 보라, 나는 내 언약을 세울 것이다. 이는 선행 안에 주님이 현존하심을 의미하는데, 이는 “언약”의 의미로부터 분명해지고, 이 의미는 666항에서 살폈다. 거기서 살핀 바, “언약”은 거듭남, 그리고 실로 사랑을 수단으로 주님께서 거듭난 인간과 결합함을 의미한다; 그리고 천국의 결혼은 순전한 언약 자체이다는 것, 결과적으로 천국의 결혼은 거듭난 인간 각각 모두와 더불은 언약이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결혼, 또는 언약은 전에 취급하였다. 태고 교회의 사람과 더불어 천국의 결혼은 그의 자기 자신의 의지부분에서 있었다. 그러나 고대 교회의 사람과 더불어 천국의 결혼은 그의 지적 부분의 자기 자신에서 있었다. 이렇게 결혼의 대상이 바뀐 것은, 인간의 의지 부분이 완전히 썪었을 때, 주님은 인간의 부패된 의지 부부으로부터 그의 지적 부분을 기적적으로 떼어내셨기 때문인데, 그리하여 그의 지적 부분의 자기 자신 안에 그분은 새로운 의지를 만들어내셨다. 이것이 양심이다. 이 양심 안으로 선행을 은근히 심으셨다, 그리고 선행 안으로 순진을 심으시고, 그분 자신을 인간과 결합하셨다. 같은 말로 인간과 언약을 만드셨다. 자기 자신 중에서 인간의 의지 부분이 지적 부분과 분리되는 한에서는 주님은 인간과 더불어 현존하실 수 있다, 또는 그분 자신을 결합 하실 수 있다, 또는 인간과 언약을 하실 수 있다. 시험들과 거듭남의 시험 비슷한 수단들은 인간의 의지 부분의 자기 자신이 숨 죽이고 있도록, 마치 죽은 듯 고요해지게, 그 의지 부분이 없는 듯 하게 해준다. 이것이 실행되는 동안 주님께서는 인간의 지적 부분의 자기 자신 안에 심으신 양심을 통하여 선행 안에서 작업하실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이 여기서 “언약”이라 불리우는 것이다.

너와 함께. 이것은 거듭난 영적 인간을 의미하는 것은 전에 말해진 바로 분명해진다. 즉 노아와 그의 아들들은 태고 교회를 계승한 영적 교회를 의미한다는 것; 그리고 교회가 이렇게 의미되기 때문에 교회인 역시 마찬가지여서 거듭난 영적 인간을 의미하는 것이다

너 이후의 네 씨(후손)와 더불어. 이것이 새로이 창조되고 있는 이들을 의미하는 것은 “씨”의 의미로부터와 그 뒤를 잇는 것으로부터 분명해진다. “씨”의 의미로부터서 분명해지는 것은, “씨”는 글자 의미에서 후손을 의미하지만, 내적 의미에서는 신앙을 의미한다; 그리고 자주 말했듯이, 선행이 있지 않은 신앙은 없다. 그러므로 “씨”에 의해 내적 의미에서 뜻해지는 것은 선행 자체이다. 뒤잇는 것으로부터 분명해지는 것은, 교회 안에 있는 사람을 뜻할 뿐 아니라 교회 밖의 사람, 고로 인류 전체를 뜻한다는 것이다. 선행이 있는 곳은 어디든지, 교회로부터 아주 멀리 있는 나라(민족)에서 조차에도 “씨”는 있다. 그 이유가 천국의 씨가 선행이기 때문이다. 자신으로부터 선을 행하는 자는 아무도 없다. 모든 선은 주님으로부터 있다. 이방인이 행하는 선 역시 주님으로부터 있다. 이들에 관하여 주님으로부터의 신성한 자비로부터 차 후 살핀다. 그리고 그밖의 장소에서도, 신앙은 선행으로부터 있는 신앙이 뜻해진다; 그 이유가 선행으로부터의 신앙 외에 다른 신앙은 없기 때문이다,
“씨”가 명명되는 말씀의 다른 장소에서도 위와 동일한 의미를 가지는데, 마치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씨”라 불려지는 대목 같은 경우이다. 이를 수단으로 사랑 또는 선행이 의미되어진다. 아브라함은 천적 사랑, 이삭은 영적 사랑을 표현했고, 이 두 사랑은 내적 인간으로부터 있다. 야곱은 자연적 사랑을 표현했고, 이는 외적 인간으로부터 있다. 이것은 예언서 뿐만 아니라 역사서에서도 그러하다. 말씀의 역사 줄거리는 천국에서 지각되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역사에 의해 의미되는 것을 지각한다. 말씀은 인간 만을 위해 씌여진 것이 아니라 천사들을 위해서도 씌여진 책이다. 인간이 말씀을 읽을 때, 인간이 글자 의미 밖에 얻지 못할 때도 천사들은 글자 의미를 취하는 것이 아니라 내적 의미를 얻는다. 물질적, 세상적, 육체적 생각들을 가지고 인간이 말씀을 읽을 때, 천사들은 영적, 천국적인 생각을 지니고 말씀을 읽는다. 마치 인간이 아브라함, 이삭, 야곱에 관하여 읽을 때, 천사들은 그들을 생각하는 게 아니라 그들에 의해 표현되고 의미된 것을 생각한다는 말이다.
마찬가지로 노아, 셈, 함, 야벳과 더불어서도 천사들은 이 인물들을 아는 것이 아니라 고대 교회라는 것 외에 더 지각하지도 않는다; 내면의 천사들은 교회를 지각하는 것조차 하지 않고 이 교회의 신앙, 그리고 취급되는 것들의 상태에 따른 신앙 만을 지각한다. 그런고로 “씨”가 말씀에서 언급될 때, 여기서의 경우, 언약이 노아의 씨와 더불어, 그들 이후 그들의 씨와 더불어 만들어지지만, 천사들은 이와같은 후손을 지각하지 않는다; 그 이유가 노아는 있지 않았고, 고대 교회가 그렇게 불렸기 때문이다; 그리고 “씨”에 의해 천사들은 이 교회의 신앙의 실체인 선행을 이해한다. 그리고 다시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역사에서 그들의 “씨”가 말하여질 때, 천사들은 이 세 사람들의 후손을 결코 생각해내지 않고, 교회 내에, 또는 교회 밖에, 천국의 씨, 즉 선행이 있는 우주의 모든 이를 생각해낸다; 그리고 내면의 천사들은 사랑 자체를 지각한다. 추상적으로 사랑 자체가 천국의 씨이다.
“씨”에 의해 사랑이 의미된다는 것, 또한 사랑이 있는 모든 이가 의미된다는 것은 창세기의 아래 인용 구절로부터 분명해진다:
그리고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셨다, 그리고 말하셨다,
네 씨에게 나는 이 토지를 줄 것이다 (창. 12:7).
네가 보는 모든 토지, 네게 나는 이것을 줄 것이다, 그리고 네 씨에게 영원히 줄 것이다;
그리고 나는 네 씨를 땅의 먼지 만큼같이 만들 것이다 (창. 13:15-16).
글자 의미의 범주에 있는 이들은 “씨”에 의해 아브람의 후손 밖에 더 납득하지 못한다, 그리고 이 “토지”가 가나안의 토지라는 것, 이 토지가 그의 후손에게 주어졌다는 것 이상 납득하지 못한다. 그러나 내적 의미에서 있는 이들, 마치 전체 천국에서 같이, “아브람의 씨”는 사랑이다는 것; “가나안의 토지”는 천국들과 땅의 주님의 왕국이다고 지각한다; 그리고 그들에게 주어진 토지라는 말에서도 그들은 그것이 표현한 것 만을 지각한다. 주님의 신성한 자비로부터 차 후 더 언급할 것이다. 다시 아브람에게 말씀하셨다:
그리고 그분은 그를 밖으로 인도했다. 그리고 말하셨다, 지금 하늘을 쳐다보라,
그리고 네가 별들을 셀 수 있다면 그것들을 세어보아라, 그리고 그분은 그에게 말하셨다,
그렇게 네 씨도 있을 것이다 (창. 15:5).
위 구절 역시 아브람이 명명되는데, 그 이유는 그가 사랑, 또는 구원하는 신앙을 표현했기 때문이다.
다시:
그리고 나는 내 언약을 너와 네 대대 후손의 사이에 세워서 영원한 언약을 삼고 너와 네 후손의 하느님이 되리라; 나는 너에게, 그리고 네 후손에게 네가 머무른 이 땅, 가나안의 모든 땅을 주어 영원히 소유로 삼게 하리라. 그리고 나는 그들에게 하느님이 되리라; 이것 은 내 언약이다, 이는 나와 너, 그리고 네 후손 사이에서 지켜질 것이다, 모든 남자는 너에 게서 할례를 받아라 (창. 17:7-8, 10).
위 구절에서 “그분의 언약을 세우심” 역시 주님께서 사랑을 수단으로 우주를 망라하여 인간들과 결합하심을 의미한다. 이 사랑이 아브람에 의해 표현되어졌다. 이로부터 분명한 바, 그의 “씨”에 의해 의미된 것은 사랑을 가진 우주에서의 모두이다는 것이다. 여기서 취급된 언약은 할례였다, 이를 가지고도 천국에서는 육체의 할례가 아니고 심정의 할례, 즉 사랑을 가지는 이들의 할례로 납득한다. 할례는 사랑을 수단으로 거듭남에 대한 표현이다. 이는 모세의 책에서 명료하게 설명되고 있다:
그리고 여호와 네 하느님이 너희의 심정을, 네 후손의 심정을 할례할 것이다,
그리하여 너희는 네 모든 심정으로, 네 모든 혼으로,
네 여호와 하느님을 사랑하며 너는 살런지 모른다 (신. 30:6).
위 구절로부터 할례가 내적 의미에서 무엇인지 분명해진다; 그러므로 할례가 언급되는 어디에서든지, 할례는 사랑과 선행, 그리고 이로부터의 생명이 뜻해진다.
“아브라함의 씨”에 의해 사랑을 가진 우주에 있는 모두가 의미된다는 것은 주님께서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하신 말씀으로부터도 분명해진다. 아브라함이 주님께서 명령하신대로 이삭을 제물로 기꺼이 바친 후에 말하셨다:
나는 너를 확실히 복있게 할 것이다, 그리고 네 씨를 극히 번성하게 할 것이다, 마치 하늘 의 별들 만큼 같이, 해변의 모래 만큼 같으리라. 그리고 네 씨는 네 적들의 문을 상속받을 것이다; 그리고 네 씨 안에서 땅의 모든 나라들이 복있을 것이다 (창. 22:17-18).
위에서 “씨”가 사랑을 가진 우주에 있는 모든 이를 뜻한다는 것은 아주 분명하다.
이미 말한대로 아브라함이 천적 사랑을 표현했듯, 이삭은 영적 사랑을 표현했다; 그러므로 “이삭의 씨”에 의해 영적 사랑, 또는 선행에 있는 모두 각각의 사람을 의미했다. 이삭에 관해 이렇게 말해졌다:
이 토지에서 체류해라, 그리고 내가 너와 함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너를 축복할 것이다. 너에게, 네 씨에게, 나는 이 모든 토지를 줄 것이다, 그리고 나는 네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맹세했던 그 맹세를 세워둘 것이다; 그리고 나는 네 씨를 마치 하늘의 별들 같이 번성하게 할 것이다. 그리고 나는 네 씨에게 이 모든 토지를 줄 것이다, 그리고 네 씨 안에서 땅의 모든 민족들이 복 있을 것이다 (창. 26:3-4, 24).
위 구절에서 모든 민족(나라)들은 선행에 있는 이들을 뜻한다. 천적 사랑이 이삭에 의해 표현된 영적 사랑의 아버지로서 아브라함에 의해 표현되어졌다; 그 이유가 영적인 것은 천적인 것으로부터 출생되기 때문이다.
야곱은 교회의 외적 측면들을 표현했는데, 외적인 것들은 내적인 것들로부터 산출된다, 그런고로 사랑과 선행으로부터 외적 인간에서 튀어나오는 모든 것들을 표현한다. 그러므로 그의 “씨”에 의해서는 내적 예배를 안에 지닌 외적 예배, 주님으로부터의 선행이 안에 있는 선행의 일들이 의미된다. 이 “씨”에 관해 야곱이 꿈에서 사다리를 본 후 야곱에게 말해졌다:
나는 여호와, 네 조상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삭의 하느님이시다; 나는 네가 누워있는 토지 를 네게 줄 것이다; 그리고 네 씨는 땅의 먼지 만큼 같게 있을 것이다. 그리고 네 안에서와 네 씨 안에서 지면의 모든 족속들이 복있을 것이다 (창. 28:13-14; 32:12; 48:4).
이와 같은 씨의 의미는 이미 살핀 인용 구절로부터도 분명해지는 바 다시 참조하기 바란다; 그리고 이사야서에서:
그러나 너, 이스라엘, 내 종, 내가 선택한 야곱, 아브라함의 씨, 나의 친구 (이. 41:8).
위 구절의 주제는 인간의 거듭남이다, 이럴 경우 자주 나타나는 것은 이스라엘과 야곱 사이를 구분지음이다, 그리고 “이스라엘”에 의해서는 영적 교회의 내적 측면을, “야곱”에 의해서는 영적 교회의 외적 측면을 의미하게 된다. 이 둘 모두 “아브라함의 씨”, 즉 천적 교회의 씨라 불리운다. 그 이유는 천적, 영적, 자연적 측면은 서로가 계승되어지기 때문이다. 예레미야에서:
나는 너를 순전하게 고귀한 포도나무, 진리의 씨로 심었다; 어찌하여 너는 나에게 이상한 포도나무의 타락한 것들로 변했느냐? (예.2:21).
위 구절은 영적 교회를 두고 말해졌다, 영적 교회가 “고상한 포도나무”이다. 이 교회의 선행, 또는 선행으로부터의 신앙이 “진리의 씨”라 불리운다.
다시:
하늘들의 군대가 세어질 수 없듯, 바다의 모래를 측량할 수 없듯, 그렇게 나는 내 종 다윗 의 씨를 불릴 것이다, 그리고 나를 섬기는 레위인들도 그렇게 불릴 것이다 (예. 33:22).
위 구절에서 “씨”는 천국의 씨를 분명하게 표시한다. 그 이유가 다윗이 주님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다윗의 씨가 하늘들의 군대를 셀 수 없었듯이 많이 있지 않았다는 것, 바다의 모래가 측량할 수 없듯이 많게 있지 않았다는 것은 모든 이에게 자명하기 때문이다. 다시:
보라, 날이 온다, 여호와께서 말하신다, 나는 다윗에게서 의로운 가지를 일으킬 것이다, 그 리고 그는 왕으로서 통치할 것이고 총명하게 행동할 것이다, 그리고 토지에서 공정과 정의 를 행할 것이다; 그의 날에 유다는 구원될 것이고, 이스라엘은 확신을 갖고 거주할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그분의 이름이 되어 불리울 것이다. 즉 여호와 우리의 정의이다; 그러므로 보라 날이 오고 있다, 여호와께서 말하신다, 그들이 더 이상, 이집트의 토지로부터 이스라 엘의 아들들을 데려내오신 여호와께서 사심 같이라 말하지 않고, 북쪽 지방으로부터 이스 라엘 가문의 씨를 인도하고 데려내오신 여호와의 사심으로 말할 것이다 (예. 23:5-8).
위 구절에서 글자에서 나타나는 것들과는 아주 다른 것들이 의미되고 있다. 다윗이 “다윗”에 의해 뜻해지지 않고, “유다”도, “이스라엘”도 그러하다; 그러나 “다윗”에 의해 주님이, “유다”에 의해 천적인 것이, “이스라엘”에 의해 영적인 것이 뜻해진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씨”에 의해 선행을 가진 이들, 또는 선행으로부터의 신앙이 뜻해지고 있다.
다윗서에서: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너희들아, 그분을 찬양하라; 너희 야곱의 모든 씨들아, 그분에게 영광 을 돌려라; 그리고 너희 이스라엘의 모든 씨들아, 그분을 경외하라 (시. 22:23).
위 구절의 “이스라엘의 씨”는 영적 교회를 뜻한다. 이사야서에서:
거룩함의 씨는 거기로부터의 지주이다 (이. 6:13).
이는 거룩함인 리메인스를 뜻하는데, 그 이유는 그것들이 주님의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나는 야곱으로부터 씨를 산출하고, 유다로부터 내 산의 소유자(를 산출할 것이다); 그리고 내가 뽑은 자가 그것을 소유하게 할 것이고, 내 종들이 거기에 거주할 것이다 (이. 65:9).
위 구절에서는 천적 교회의 외적, 내적 측면이 취급되고 있다. 다시:
그들은 곤경을 발생시키지 않을 것이다; 그 이유가 그들은 여호와의 복된 자의 씨이기 때 문이다, 그리고 그들과 더불은 그들의 자손(도 그러하다) (이. 65:23).
위 구절의 주제는 새 천국들과 새 땅이다, 또는 주님의 왕국이다. 그 안에 있는 이들은 사랑, 또는 거듭남이 “발생시킨” 이들인 바, “여호와의 복된 자의 씨”라 불리운다.

너와 함께 있는 살아있는 모두 각각의 혼과 더불어. 이것은 거듭난 인간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을 일반적으로 의미한다는 것은 진행하는 것들로부터와 이어지는 것들로부터, 그리고 “살아있는”의 의미로부터 분명해진다. 모든 것은 주님으로부터 생명을 받으면 “살아있다”라고 불리운다, 그리고 거듭난 인간 안에서 살고있는 모든 것은 “살아있는 혼”이라 불리운다. 그 이유가 거듭난 인간이 받는 생명에 따라, 그 인간 안에 있는 모든 것은 살아있다. 즉 그의 이성 뿐만 아니라 애착도 살아있다; 그리고 이 생명은 천사들의 시야에서는 그의 생각과 말의 모든 것에서 나타난다. 인간들의 시야가 아니다.

새. 이것이 거듭난 자의 이해력으로부터의 것들을 의미하는 것은 이미 살핀 바 있다.

짐승. 이는 거듭난 자의 새로운 의지로부터의 것들을 의미한다.

그리고 땅의 야생 동물 모두 각각. 이는 거듭난 자의 이해력으로부터의 보다 수준 낮은 것들과 거기로부터 그의 의지력으로부터의 것들을 의미하는 것은 이미 살핀 “야생 동물”의 의미에 관한 것으로부터 분명해진다. 모두 각각의 인간과 더불어 내면의 것들과 외면의 것들이 있다. 내면의 것들은 이성에 속한 것들인데, 여기서 “새”에 의해 의미되고 애착들은 “짐승”에 의해 의미되어져 있다. 외면의 것들은 지식들과 쾌락들에 관한 것들이다. 이것이 여기서 “땅의 야생 동물”에 의해 의미되어져 있다. “새, 짐승, 야생 동물”에 의해 새, 짐승, 야생 동물이 의미되는 것이 아니라, 거듭난 인간 안에 살아있는 것이 의미된다. 하느님께서 사람도 아닌 들짐승 등등과 언약을 맺는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고 누구나 결말을 낼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내 언약을 너와 함께 있는 모두 각각의 살아있는 혼, 새, 짐승, 너와 함께 있는 땅의 야생 동물과 세울 것이다”하고 말해져 있다. 따라서 그것들에 묘사된 내면들과 외면들 측면에 관련하여 인간과 더불어 언약을 세운다는 말이다.

방주에서 나온 모든 것. 이것이 교회의 사람들을 의미한다는 것, 그리고 “땅의 모두 각각의 야생 동물에 이르기까지”는 교회 바깥에 있는 사람을 의미하는 것은 내적 의미에 있는 것들의 시리즈로부터 분명해진다; 그 이유가 방주로부터 나간 모든 것은 앞서 명명되어졌기 때문, 즉 모두 각각의 살아있는 혼, 새, 짐승, 그리고 땅의 야생 동물-그리고 다시, “방주로부터 나가는 모든 것, 땅의 야생 동물에 이르기까지”라고 말해진다. 고로 “땅의 야생 동물”은 확실히 두 번 명명되고 있다, 그리고 이 반복에 어떤 뜻이 있지 않을리 만무하다. 그리고 또한 뒤잇는 것, “나는 너와 더불어 내 언약을 세우겠다” 역시 앞서 말해진 것의 반복이기도 하다. 이로부터 분명해지는 바, “방주로부터 나가는 것들”에 의해 거듭난 자, 또는 교인이 의미되고, “땅의 야생 동물”에 의해서는 교회 밖에 있는 우주의 모두를 의미한다는 것이다.
“땅의 야생 동물”이 말씀에서, 살아있는 것이 뜻해지지 않을 경우, 보다 더 열등한 것, 그리고 많든 적든 야생적 본성이 참가된 어떤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것은 주제에 일치하여 서술되어진다. 이것이 인간 안에 있는 것을 서술할 경우, “땅의 야생 동물”은 외적 인간과 육체 속에 있는 더 수준 낮은 것들을 의미한다. 이 절에 있는 것들이다. 고로 더 열등한 것을 의미한다. 이것이 전체 공동체를 서술할 경우, 이것은 혼성의 사람, 또는 인물이라 불리울 경우, “땅의 야생 동물”은 교회 속에 있지 않은 이들을 의미한다, 그 이유는 그들이 더 천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주제에 따른 다른 경우가 이렇게 서술된다. 호세아서에서:
그 날에 나는 그들을 위해 들판의 야생 동물, 그리고 하늘들의 새,
그리고 땅의 기는 것들과 더불어 언약을 만들 것이다 (호. 2:18).
이사야서에서:
들판의 야생 동물이 나를 존경할 것이다,
그 이유는 내가 광야에 물을 주기 때문이다 (이. 43:20).
에스겔에서:
하늘들의 모든 새들이 그의 굵은 가지들에 자기들의 둥지들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의 가지들에 들판의 모든 야생 동물들이 새끼를 낳았다, 그리고
그의 그늘 아래 모든 큰 민족들이 거주했다 (겔. 31:6)

11절. 그리고 나는 너와 내 언약을 세우리라. 모든 육은 더 이상 홍수의 물로 잘라지지 않으리라. 홍수가 땅을 파괴하는 일은 더 이상 없으리라. “내가 너와 내 언약을 세우겠다”란 선행을 가지고 있는 모든 사람과 더불은 주님의 현존을 의미한다. 이 현존은 방주에서 나온 것들과, 땅의 야생 동물 각각 모두, 즉 교회 내의 사람과 교회 밖의 사람에게도 해당된다. “모든 육은 홍수의 물로 더 이상 잘라지지 않으리라”란 고대 교회의 사람은 태고 교회의 마지막 후손들 처럼 멸망하지 않을 것임을 의미한다. “홍수가 땅을 파괴하는 일은 더 이상 없으리라”란 죽일 듯하게 숨막히는 설득(persuasion)은 등장하지 않을 것임을 의미한다.

그리고 나는 너와 더불어 내 언약을 세울 것이다. 이것은 선행을 가지고 있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주님께서는 현존하신다를 의미한다. 이 현존은 방주에서 나온 것들과, 땅의 야생 동물 각각 모두, 즉 교회 내의 사람과 교회 밖의 사람에게도 관련되고 있다. 이는 방금 앞에서 말해진 것으로부터도 분명해진다. 즉, 주님께서는 교회 밖에 있는 이방인들과도 언약 안으로 들어가신다, 또는 선행을 수단으로 자신을 그들과 결합하신다는 것이 지금 보여질 것이다. 교회의 사람들은 교회 밖의 사람, 즉 이방인들이라 불리는 사람들은 구원되지 못할 것이라 상상한다. 그 이유는 그들은 신앙에 관한 지식들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그러므로 주님에 관해 통째로 무지하기 때문, 신앙 없이, 주님에 관한 지식 없이 구원은 없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그들은 교회 밖의 모든 사람들은 정죄되고 만다고 말한다. 그리하여 자기들과 같은 의견을 지니지 않은 자는 구원되어질 수 없을 것이라고 까지 격해진다. 그러나 이런 비합리적 설득에 넘어가 그 대열에 동참하는 것도 문제이다. 어쨌든 이것이 전혀 그렇지 아니한 것은 굳이 깊이 생각 안 해도 금방 알아 차려지지 않을까? 주님께서는 특정한 어느 교파의 하느님이 아니시고 인간 종족 전체를 아우르는 하느님이시요 그들 모두를 향하여 자비를 가지시고, 우주에 있는 모두를 그분에게로 끌어당기신다.
주님의 자비가 무한하다는 것, 그리고 교회 내에 있는 소수에게 한정되도록 그 자체를 내버려두시지 않는다는 것, 오히려 그 자체를 온 세상에 있는 모두에게 넓히시고 있다. 교회 밖에서 태어나고 신앙에 무지한 것, 이런 것은 그들의 과오가 아니다; 그가 주님에 관하여 무지할 때, 주님에 대한 신앙을 가지지 않았다고 하여 정죄된 자는 아무도 없다. 그렇게도 많은 무지한 무리가 영원한 죽음에 이르기 위해 태어난다면 주님이 그대로 내버려두신다고 합리적인 자는 수긍할 수 있을까? 두말할 것 없이 이는 신성에 반대된다. 그분의 자비에도 직반대 된다. 교회 밖에 있는 이들, 이방인들이라 불리는 이들이 교회 내에 있는 이들보다 더 놀라울 정도로 훨씬 더 도덕적 삶을 살고, 진정한 교리를 훨씬 더 쉽게 포옹한다. 모든 이 중에서 가장 열악한 자가 소위 기독교계로부터 온다, 그들은 증오로 이웃을 붙잡고, 주님에 대해서조차 그러하다. 전체 세상 누구보다 그들은 진리 측면에서 더 간음자들일 경우가 많다.
(기독교계가 아닌) 세상의 다른 부분들로부터 온 이들과 더불어서는 그렇지 않다. 우상들을 숭배해온 이들 중의 많은 자들이 증오함과 간음을 혐오하는 경향 속에 있었다. 그래서인지 그들은 자기들이 혐오하는 것을 지닌 기독인 때문에 그들을 두려워하기 까지 한다. 실로 이방인들은 천사들이 신앙의 진리에 관하여 가르칠 때 이의없이 들으려는 경향을 보이고, 주님이 우주를 통치하신다는 가르침에도 심취되어 자기들의 우상들을 즉각 내던진다. 이런 이유 때문에, 도덕적 삶을 살았고, 상호간의 선행과 순진 안에서 살았던 이방인들은 다른 삶에서 거듭나진다. 이들이 세상에서 사는 동안, 주님은 그들과 함께 현존하셨다. 그 이유는 선행과 순진은 주님으로부터만 존재하기 때문이다. 주님께서는 그들에게도 그들의 종교에 따라 올바르고 선한 것에 대한 양심을 주셨다. 그리고 그들의 양심 안에 순진과 선행을 은근히 심으셨다; 그리고 순진과 선행이 양심 안에 있을 때, 그들은 선으로부터 있는 신앙의 진리에 쉽게 심취되어진다. 주님 자신 누가복음에서 이렇게 가르치신다:
그리고 누구가 그분에게 말했다, 주여, 구원될 자가 아주 적습니까? 그리고 그분은 그들에 게 말하셨다, 너희는 아브라함, 이삭, 야곱, 그리고 모든 예언자들은 주님의 왕국에 있고, 네 자신은 밖에 있는 것을 볼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동쪽으로부터 서쪽까지, 그리고 북쪽 으로부터 남쪽 까지에서 올 것이다, 그리고 하느님의 왕국에 앉을 것이다; 잘 보라, 첫 째라는 자가 꼴찌되어 있고, 꼴찌라는 자가 첫째되어 있을 것이다 (눅. 13:23, 28-30).
위 구절에서 “아브라함, 이삭, 야곱”에 의해 사랑을 가진 모든 이가 뜻해진다.

그들의 종교에 따라 이방인들에게 주어진 올바르고 선한 것에 대한 양심의 경우는 이렇다: 양심, 일반적으로, 참되거나, 가짜이거나, 거짓이거나 이다. 참된 양심은 신앙의 진리들로부터 주님에 의해 만들어내진 양심이다. 인간이 이것을 선물받았을 때, 그는 신앙의 진리들에 반대하여 행동하는 것을 두려워한다. 그 이유는 그가 양심에 반대하여 행동할 것이기 때문이다. 신앙의 진리들 안에 있지 않은 이들은 이 양심을 받을 수 없다, 그러므로 기독교계에의 많은 이들이 이 양심을 받지 못하고 있다. 그 이유는 각각의 교인이 자기 자신의 교조(독단적 주장, dogma)를 신앙의 진리라고 우기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거듭나지고 있는 이들은 선행과 더불어 함께 양심을 받는다. 그 이유는 양심의 참 바탕이 선행이기 때문이다. 가짜 양심은 자기들의 종교적 예배 안에서 태어나 교육된 이방인들에게 만들어진 양심이다. 이들은 자기들에게 있는 양심에 반대되어 행동하는 것은 양심에 반대되어 하는 것이라고 여기는 경우이다. 그들의 양심은 선행과 자비에, 그리고 순종에 기초를 두었을 때, 그들은 다른 삶에서 참된 양심을 받을 수 있는 상태에 있다. 그래서 그들 역시 참된 양심을 받는다. 그 이유가 그들은 이전에 아무것도 사랑하지 않았고 신앙의 진리가 미치지 않는 곳에 있었기 때문이다. 거짓 양심은 내적으로부터가 아닌 외적인 것으로부터 만들어진 양심, 선행으로부터가 아닌 자기와 세상 사랑으로부터 만들어진 양심이다. 그들이 이웃에 적대하여 행동할 때, 그것이 양심에 반대되어 행동하는 것을 자신들도 안다. 그래서 내향적으로 고통도 느끼기도 한다. 그러나 반대되게 행동하지 않을 경우, 자신들의 명성, 이익, 등등이 위태로울 수 있다는 생각이 스치면 양심에 반대되더라도 멈추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들은 자신들의 양심에 상처를 입힌다. 어떤 이들은 심정의 유약함에서 이것을 상속 받아 있다, 어떤 이는 이것을 고의로 획득한다. 어쨌든 이것은 거짓 양심이다.

모든 육이 홍수의 물들에 의해 더 이상 멸절되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고대 교회인들은 태고 교회의 마지막 후손들이 멸해지듯 멸해지지 않을 것임을 의미한다. 이는 홍수 이전 사람에 관하여, 그리고 홍수의 물들로 멸해진 이들에 의해 의미된 것으로부터 분명해진다. 이 경우가 어떠한 것인지는 310항에서도 살폈었다. 즉 태고 교회의 마지막 후손의 본성은 마음의 의지 부분과 지적 부분이 모두 썪어버린 상태여서 지적 부분이 의지 부분과 분리되고, 새로운 의지가 지적 부분에서 만들어내 질 수가 없었다. 그 이유가 마음의 두 부분들이 함께 밀착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이 예견되었었기 때문에, 또한 주님에 의해 설비된 것은, 지적 부분이 의지로부터 분리되어 있어 (지적 부분에서) 새로워지는 것이다. 이럴 경우, 홍수 이전의 인류는 홍수 이후 존재해서는 안된다는 것, 그러므로 여기서, “모든 육은 홍수의 물들로 더 이상 멸절되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해진다.

홍수가 땅을 파괴하는 것도 더 이상 없을 것이다. 이는 죽일듯하게 숨막히는 설득(persuasion)은 더 이상 출현하지 않을 것이다를 의미하는데, 이는 이미 살핀 멸절된 홍수 이전 사람들에 비교하여 홍수에 대한 의미로부터와 그들에게서 발생한 끔찍한 설득력들로부터 분명해진다; 또한 “노아”라 불리는 이어지는 교회에서 보여지는 것으로부터도 분명해진다; 그리고 무지개에 관한 이어지는 것으로부터도 분명해진다.

12, 13절. 그리고 하느님께서 말하셨다, 이것은 내가 나와 너와 함께 있는 생명 있는 혼 각각 모두와, 대대손손을 위하여 만드는 언약의 표시이다.13 나는 구름에 내 활을 놓아 두었다, 그리고 이것은 나와 땅 사이에 있는 언약의 표시이리라. “하느님께서 말하셨다”란 그와 같이 이루어졌음을 의미한다. “이것은 언약의 표시이다”란 선행에 주님의 현존이 있겠다는 암시를 의미한다. “나와 너 사이에 만들…”이란 주님께서는 선행을 수단으로 인간과 결합함을 의미한다. “너와 함께 있는 생명 있는 혼 각각 모두”란 거듭나아져 온 인간에 있는 모든 것을 의미한다. “대대손손을 위하여”란 끊임없이 새로이 창조되고 있는 모든 것을 의미한다. “나는 구름에 내 활을 놓아 두겠다”란 거듭난 영적 인간의 상태를 의미하는데 이 상태는 마치 무지개 같다. “구름”은 천적 인간에 있는 밝은 빛에 비교할 때 더 어두운 빛을 의미한다. “이것은 나와 땅 사이의 언약의 표시이리라”란 선행에 주님의 현존이 있는다는 암시를 의미한다. “땅”은 이 구절의 경우 인간의 자기 자신(man’s own)이다. 위 사항 모두는 거듭난 영적 인간을 주목해서 보는 서술인 바. 이는 영적 (평면의) 교회(두 번째 천국의 교회)에게도 해당된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말하셨다. 이는 그와 같이 이루어졌다를 의미한다. 이에 대해서는 이미 설명한 바도 있다. “하느님의 말하심”, 또는 “여호와의 말하심”은 그렇게 이루어졌다가 의미되는 이유는 태고인들은 교회에 관한 것을 역사의 형체로 정리정돈해 두었는데, 이때 어떤 것이 그렇게 이루어졌다는 것을 확언하기를 원했을 때, 그들은 “하느님이 말하셨다”, 또는 “여호와께서 말하셨다”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이 표현이 태고인들의 단호한 주장과 확증의 한 가지 형태였다.

이것이 언약의 표시이다. 이것은 선행 안에 주님의 현존하심이 있을 것을 암시함을 의미한다. 이는 “언약”의 의미와 “언약의 표시”의 의미로부터 분명해진다. “언약”은 선행 안에 주님이 현존하심을 의미한다. 이에 대하여는 창. 6:18, 그리고 9:9에서 살핀 바 있다. “언약”이 사랑과 선행 안에 주님의 현존이 있다는 것은 언약의 본성으로부터 분명해진다. 모두 각각의 언약은 결합을 위해 존재한다. 즉 상호간의 우정 관계, 또는 사랑을 위하여서 이다. 결혼 역시 이런 이유 때문에 언약이라 불리운다. 주님과 인간과의 결합은 사랑과 선행을 빼면 없다; 그 이유가 주님은 사랑과 자비 자체이시기 때문이다. 그분은 모든 이를 구원하시어 그분의 권능의 힘으로 천국으로, 즉 그분 자신에게로 그들을 끌어 당기려 뜻하신다. 이로부터 모든 이가 쉽게 결말 지을 수 있는 것은 인간 자신이 그분과 결합하려면 그분의 본성과 비슷해지는 것, 즉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자신 같이 사랑하는 것 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것 만이 결합이 결과되게 한다. 이것이 언약의 최고의 실체이다. 이로부터 결합이 있을 때, 주님이 현존하심은 당연지사임은 누구나 부인 못한다. 실로 거기에 만이 모두 각각의 인간과 더불은 주님의 참 현존이 있다. 물론 주님의 현존이 일률적인 것은 아니다. 보다 가까이, 또는 먼 듯한 주님의 현존은 사랑에의 접근, 사랑으로부터의 거리에 따라 차이는 있기 마련이다.
“언약”이 사랑을 수단으로 인간과의 주님의 결합이기 때문에, 다시 말해서, 사랑과 선행 안에서 인간과 더불은 주님의 현존이기 때문에, 말씀에서 이를 두고, “평화의 언약”이라고도 불리운다; 그 이유가 “평화”가 주님의 왕국이기 때문이고, 주님의 왕국은 상호간의 사랑 안에 있기 때문이다. 상호간의 사랑 안에서 만이 평화는 존재한다. 이사야서에서:
그 이유가 산들이 떠날 것이고, 언덕들이 옮겨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의 자비는 너 희로부터 떠나지 않을 것이고, 내 평화의 언약은 옮겨지지 않은 것이다. 네게 자비를 가지 신 여호와께서 말하신다 (이. 54:10).
위에서, 자비, 이는 사랑으로부터 있고, “평화의 언약”이라 불리운다. 에스겔서에서:
나는 한 목자를 그들 위에 일으킬 것이다, 그리고 그가 그들을, 내 종 다윗까지도 먹일 것 이다; 그가 그들을 먹일 것이다, 그리고 그가 그들의 목자일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들과 평화의 언약을 만들 것이다 (겔. 34:23, 25).
위에서 “다윗”에 의해 주님이 뜻해짐은 분명하다; 그리고 거듭난 자와 더불은 그분의 현존이 그들을 “먹임”에 의해 묘사되어 있다.
다시:
내 종 다윗이 그들 위에서 왕일 것이다; 그리고 그들 모두에게 한 목자가 있을 것이다, 그 리고 나는 그들과 평화의 언약을 만들 것이다; 이것은 그들과 더불은 영원히 지속되는 언 약일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들을 자리잡아 앉히고 그들을 불어나게 할 것이다, 그리고 언 제까지나 그들의 한 가운데에 내 성소를 둘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들의 하느님일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내 백성일 것이다 (겔. 37:24, 26-27).
위 구절 역시 주님이 “다윗”에 의해 뜻해진다; 사랑은 “그들의 한 가운데 있는 그분의 성소”에 의해 뜻해진다; 사랑 안에서 주님의 결합과 현존이 “그분이 그들의 하느님이 되심”과 “영원히 지속되는 언약”에 의해 뜻해진다. 이것이 “평화의 언약”이라 불리고, “영원히 지속되는 언약”이라 불리운다. 말라기서에서:
너희가 아는 바, 내가 이 명령을 너희에게 보냈다는 것, 내 언약이 레위인들과 더불어 있다 는 것이다. 군대들의 여호와께서 말하신다; 나의 언약은 생명들과 평화로부터의 그와 더불 어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것들을 그에게 경외함 안에서 주었다, 그리고 그는 나를 경외할 것이다 (말. 2:4-5).
“레위”는 최고 의미에서 주님이시다, 그리고 이로부터 사랑과 선행을 가진 인간도 뜻한다. 그러므로 레위와 더불은 생명들과 평화의 언약은 사랑과 선행 안에 있다.
비느하스를 두고 말하는 모세의 책에서:
보라, 내가 그에게 평화의 언약을 준다; 그리고 이것은 그에게,
그의 뒤를 잇는 후손들에게, 영원한 성직에 대한 약속일 것이다 (민. 25:12-13).
위에서 “비느하스”에 의해 비느하스를 뜻하지 않고, 그에 의해 표현된 성직이 뜻해진다. 이는 사랑과 사랑으로부터 있는 것을 의미한다. 이 교회의 모든 성직 역시 같은 의미이다. 비느하스가 영원한 성직을 가진 것은 사실상 아니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안다. 다시:
여호와 네 하느님, 그분이 하느님이시다; 그분을 사랑하고 그분의 명령을 지키는
자들과 더불어 언약과 자비를 지키시는 신실하신 하느님이시다 (신. 7:9, 12).
“언약”은 사랑을 수단으로 주님이 인간과 더불은 결합이기에, 사랑에 속하는 모든 것들에 의해서도 역시 그러한 바, 이는 신앙의 진리들, 그리고 가르침들이라 부르는 것들이 이에 해당된다; 그 이유가 모든 가르침들, 실로 율법과 예언들은 한 개의 법, 즉 모든 것에 앞서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자신 같이 사랑하는 것에 기초를 두기 때문이다. 이는 마. 22:34-40; 막. 12:28-34에 있는 주님의 말씀들로부터 분명해진다. 그러므로 열 개의 명령들이 씌어진 돌판(table)이 “언약의 돌판”이라 불리운다. 언약, 또는 결합이 사랑의 법들 또는 가르침들을 통하여 결과되기에, 유대 교회에 주님에 의해 주어진 공동체의 법들, 즉 “법도들(증언들, testimonies)”을 통하여서도; 또한 주님에 의해 명령된 교회 의식들, 즉 “율례들(ststutes)”을 통하여서도 결과된다. 이 모든 것들이 “언약”으로부터 있다고 말해진다. 그 이유는 그것들이 사랑과 선행을 중요시하기 때문이다. 요시아왕에 관한 대목을 읽어보자:
왕은 기둥 위에 섰다, 그리고 여호와 앞에서 언약을 만들었다, 여호와를 따라 걷는 것, 그 분의 명령들을 지키는 것, 그리고 그분의 법도들과 그분의 율례들을 모든 심정으로, 모든 혼으로, 이 언약의 말씀들을 세우기로 했다 (왕하. 23:3).
이것으로부터 지금 “언약”이 무엇인지, 언약은 내적이다는 것이 분명해진다. 그 이유가 인간과 더불은 주님의 결합은 내적인 것에 의해 거행되고, 내적인 것에 분리된 외적인 것 만에서는 결단코 거행되지 않기 때문이다. 외적인 것들은 내적인 것들의 유형(type)과 표현(representative)들이다. 마치 인간의 행동이 그의 생각과 뜻을 유형화한 표현인 것과 같다; 그리고 마치 선행의 일이 내부, 즉 심정과 지성에 있는 선행을 유형화한 표현(a type representative)인 것과 같다. 유대 교회의 모든 의식들은 주님을 표현하는 예징물(types representative), 결과적으로 사랑과 선행, 그리고 이로부터의 모든 것들을 표현하는 예징물이었다. 그러므로 인간의 내적인 것들을 통하여 언약과 결합은 만들어지고, 외적인 것들은 언약의 표시일 뿐이다. 언약과 결합이 내적인 것을 통하여 만들어지는 것은 예레미야서에서도 분명해진다:
보라, 날이 온다, 여호와께서 말하신다, 나는 이스라엘의 가문과, 그리고 유다의 가문과 새 언약을 만들겠다; 내가 너희들의 조상들과 만든 언약에 따라서가 아니다. 그들은 내 언약을 무익하게 만든 까닭이다; 그러나 이것은 내가 이 날들 후에 이스라엘 가문과 만들 언약이 다, 여호와께서 말하신다; 나는 그들의 내향의 부분들에 내 법을 놓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 의 심정에 그것을 쓸 것이다 (예. 31:31-33).
위에서 새로운 교회가 취급된다. 최고의 언약은 내적인 것들을 통하여 있다고 명백하게 서술했다, 그리고 실로 양심 안에 법이 새겨진다는 것, 이로부터의 모두는 사랑으로부터 있다는 것. 이는 이미 말한 바 있다.
외적인 것들은 그것에 내적인 것들이 결합되어 있지 않으면 “언약”이 아니다, 그런고로 외적인 것은 내적인 것과 하나로서, 같은 원인에서 합일된 행동으로 있어야만 한다; 그리고 외적인 것들은 언약의 “표시들”일 뿐이다. 마치 주님을 기억 안에 간직하는데 있어 주님을 표현하는 예징물을 수단으로 기억하는데 사용될 뿐이다. 이는 안식일과 할례가 언약의 “표시들”이라 불리는 사실로부터도 분명해진다. 안식일이 그렇게 불리는 것을 모세의 책에서 읽는다:
이스라엘의 아들들은 안식일을 준수할 것이다, 그들 세대들을 망나하여 안식일을 준수하는 것이다. 그 이유가 항구적 언약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나와 이스라엘의 아들들 사이에 영원 하게 있는 표시이다. ( 출. 31:16-17).
그리고 할례 역시 그렇게 불리운다, 같은 책에서:
이것이 나의 언약이다, 너희는 이것을 지켜라, 이것은 나와 너, 그리고 네 후손 사이에 있 다; 모든 남성은 네게 할례를 받을 것이다; 그리고 너는 너의 포피의 살을 할례할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나와 너 사이에 언약의 표시를 위하여 있을 것이다 (창. 17:10-11).
이런 사실에서 피 역시 “언약의 피”라 불리운다 (출. 24:7-8).
외적인 의식들은 “언약의 표시들”이라 불리운다. 그 이유는 간단히 말해서, 내면의 것들이 외적인 것들을 수단으로 마음 안에 그것들에 의해 의미된 것들이 보존될런지 모르기 때문이다. 유대 교회의 모든 의식들은 이밖에 더 다른 것은 없다. 이런 이유 때문에 그들 역시 “표시들”이라 불리고, 백성들이 외적 표현들을 수단으로 내면의 것들을 기억하도록 했다. 예를 들면, 손과 머리에 중요한 명령을 묶어두는 것이다. 모세의 책에서:
너희는 모든 심정을 다하여, 네 모든 혼을 다하여, 그리고 네 모든 힘을 다하여 여호와 네 하느님을 사랑할 것이다; 그리고 이 말씀들을 너희는 표시를 위해 네 손 위에 묶고, 네 눈 사이에서 이마에 붙인 장식으로 있게 할 것이다 (신. 6:5, 8; 11:13, 18).
위에서 “손”은 의지를 의미한다. 그것이 힘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힘은 의지로부터 있기 때문이다; “눈 사이의 이마에 붙인 장식(frontlet)들”은 이해력을 의미한다; 고로 “표시”는 중요한 명령, 또는 총괄적인 법을 기억함을 의미한다. 그리하여 이것은 의지와 생각 안에서 계속적으로 있을런지 모른다. 즉 주님의 현존과 사랑의 현존이 모든 의지와 모든 생각 안에 있을런지 모른다. 이와 같이 주님의 현존과 그분으로부터의 상호적인 사랑의 현존이 천사들과 더불어 있다. 계속적인 현존은 주님의 신성한 자비로부터 차 후 더 살필 것이다. [1276-1277, 6849, 7926:2, 9682항 참조] 마찬가지 방식에서, 현 구절에서, “이것은 내가 나와 너 사이에 만드는 언약이다; 나는 구름에 내 활을 장착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나와 땅 사이에 언약의 표시를 위해 있을 것이다”라고 말해짐은 선행 안에서 주님의 현존의 암시, 고로 인간 안에서 그분을 기억함 외에 더 다른 표시는 아니다. 그러나 어떻게 거기로부터, 또는 구름에 있는 활로부터 표시와 기억함이 있는지는 주님의 신성한 자비로부터 이어지는 대목에서 말해질 것이다.

내가 나와 너 사이에 만드는 것. 인간과 주님의 결합은 선행을 수단으로 함을 의미한다는 것은 지금 언약에 관해 말해진 것과 언약의 표시로부터 분명해진다. 그 이유가 “언약”은 선행 안에서의 주님의 현존이기 때문이다. “나와 너 사이에”란 거기로부터의 결합이다. “만듦”은 있게 하는 원인이다.

그리고 너와 더불어 있는 모두 각각의 살아있는 혼. 이것은 거듭나지고 있는 인간에 있는 모든 것들을 의미함은 “살아있는 혼”의 의미로부터 분명해진다. 이는 10절에서 보여졌다. 말씀에서 “혼”은 내적, 외적 모두에서 모든 인간의 생명을 의미하고, 더 넓게는 인간 안에 있는 것을 의미하는 동물들의 혼 조차도 인간의 생명을 의미한다. 그러나 가장 적절한 “살아있는 혼”의 의미는 주님으로부터 생명을 받는 것, 즉 거듭나는 것이다, 그 이유는 이것 만이 살아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혼”이 내적, 외적 모두에서 인간의 생명을 의미하기 때문에, “살아있는 혼”은 한 복합체 안에 있는 거듭나아져 온 모든 것을 의미한다. 인간 안에는 의지 속의 것들과 이해함 속의 것들이 있고, 이 둘은 최고로 구분되어져 있다; 그리고 살아있는 인간과 더불어 이 둘 모두, 일반적, 세부적 모두에서 역시 살아있다; 그 이유는 인간이 이러하면, 그 사람에 있는 모든 것, 일반적이든, 세부적이든 그러하기 때문이다 (우리 속담에 한 가지 하는 짓을 보면 그의 열 가지 할 짓을 짐작한다를 연상해 볼 수 있다); 그의 일반적 측면 자체는 모든 것 안에 있다.
그 이유가 모든 일반적인 것은 구성하고 있는 모든 항목들로부터 파생되어지기 때문이다. 마치 그것 자신의 세부사항들로부터 같다; 어떤 일반적인 것이 존재 안으로 오는 데는 이 외 다른 방법은 없다. 그 이유가 일반적이라 불리는 것은 세부 사항들로부터 공표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삶이 일반적으로 이러이러한 양상이다 하면, 그의 극히 작은 의도나 행동도 이러이러한 양상이다는 말이다. (말하자면 일반적 측면의 것과 세부적 측면의 것은 규모나 형태만 다를 뿐 품질에서의 차이는 별로 없다는 것이다) 오만한 자가 있다고 하자. 그는 그의 의지의 단하나의 노력에도, 그의 생각의 단하나의 관념에도 오만함은 스며있다. 탐내는 자도 마찬가지 방식에서 있고, 그것이 결국 이웃을 미워하는 결과를 자초한다. 우둔한 자와 더불어 역시 그의 의지와 생각의 모든 것에서 우둔함이 있다. 사악한 자와 더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이것이 인간의 본래의 모습이기에, 다른 삶에서는 그의 품질이 그의 생각의 단 한 조각으로부터도 그의 모든 품질이 알려진다.
인간이 거듭나져가고 있을 때, 그때 그 사람 안에 있는 모든 것들, 일반적, 세부적 모두에서 역시 거듭나져간다. 즉 생명을 가진다는 말이다. 그리고 그가 가지는 생명은 그의 자기자신의 의지, 즉 더럽고 죽은 것은 그가 주님으로부터 받은 새로운 의지와 지적인 것으로 분리되는 정도에 정확히 비례해 있는다. 그러므로 여기서 취급된 주제는 거듭난 인간인 바, “생명있는 혼”은 거듭나져온 인간에 있는 모든 것을 의미한다. 이는 일반적 측면에서 그의 이해력과 그의 의지력으로부터의 내, 외면의 모든 것들이다. 이것은 10절에서도 표현되어졌는데, “새, 짐승, 그리고 땅의 야생 동물”에 의해서이다; 그 이유가 “나는 너와 함께 있는 살아있는 모두 각각의 혼, 즉 새, 짐승, 그리고 땅의 야생 동물”과 더불어 내 언약을 세우겠다“하고 말해지기 때문이다.

대대 손손을 위하여. 이는 끊임없이 새로이 창조되는 모든 것을 의미하는 것은 “대대 손손”의 의미로부터 분명해진다. “손손(generations)”은 앞서 있어왔던 이들로부터의 후손들, 마치 부모로부터 있는 것과 같다. “대대, of an age)”란 끊임없는 것이다. 여기서의 주제는 거듭나져오는 것들이다, 그러므로 “대대 손손”은 끊임없이 거듭나지고 있는 이들, 즉 새로이 창조되고 있는 이들을 뜻한다. 내적 의미에서 모든 것들은 취급되어진 것에 의해 결정된 의미를 낳는다.

나는 구름에 내 활을 놓아두었다. 이는 거듭난 영적 인간의 상태를 의미한다,이 상태는 마치 무지개 같다. 누군가는 이런 의아함을 가질지 모른다. “구름에 있는 활”, 또는 무지개가 언약의 증거로서 주어진 표(token)를 위해 말씀에서 취해지고 있는데, 자신이 무지개를 생각해본다면, 이는 빗방울에 햇빛의 광선들이 굴절 반사됨으로부터 나타남 밖에 더 아니다는 것, 고로 자연적 현상의 어떤 것일 뿐이다는 것, 차라리 방금 위에서 살폈듯 할례같은 언약의 표시만도 못한 것 같다고 여길지 모른다. 그리고 “구름에 있는 활”이 거듭남을 표현한다는 것, 그리고 거듭난 영적 인간의 상태를 의미하는 것은 어떻게 이런 경우가 있는지를 보고 알도록 (주님으로부터) 주어지지 않으면 알 도리가 없다. 영적 천사들, 이들은 영적 교회의 거듭난 이들이다. 이들이 다른 삶에서 (누군가가) 보도록 나타나질 때, 머리 둘레에 무지개 같은 것과 더불어 나타난다. 그리고 보여진 무지개는 그들의 상태에 따라 있다. 그런고로 무지개에 따라 그들의 품질이 천국에서, 영들의 세계에서 알려진다. 무지개의 나타남이 보여진 이유는 그들의 영적인 것에 상응하는 그들의 자연적인 것이 이와 같은 외관을 표출하기 때문이다. 즉 그들의 자연적인 것 안에서 주님으로부터의 영적인 빛이 변경(굴절 반사)된다. 이 천사들은 “물과 거룩한 영”으로부터 거듭나진다고 말해지는 거듭남에 속하는 이들이다. 그러나 천적 천사들은 “불로” 거듭나진다고 말해진다.
자연적 색깔을 주목해보자. 색깔의 존재는 어둠과 밝음, 또는 검은 색과 흰 색 둘의 어떤 것을 요구한다. 햇빛의 광선들이 이 두 색에 떨어질 때, 어둠과 밝음, 또는 검은 색과 흰색의 다양한 정도에 따라 빛으로부터 유입되는 광선의 변경으로부터 색깔이 생산되어진다. 이것 중의 어떤 것은 어둠과 검은 색이 보다 많이, 어떤 것은 보다 적게 참가된다. 이로부터 다채로움이 있다. 비교해서 말하면, 영적인 것들에서도 똑같다. 영적인 경우 어둠은 인간의 지적 부분의 자기 자신, 또는 거짓이다; 그리고 검은 색은 인간의 의지 부분의 자기 자신, 또는 악이다; 이것은 빛의 광선들을 흡수해 소멸한다. 그러나 밝음과 흰색은 인간이 자신으로부터 행한다고 상상하는 진리와 선이다. 이것은 빛의 광선들을 자체로부터 반사하거나 되던진다. 이것들 위에 떨어지는 빛의 광선들은, 그리고 그것을 변경시키는 광선들은 주님으로부터 있다. 즉 지혜와 총명의 태양으로부터 이다; 그 이유가 영적인 빛의 광선들은 여타 다른 근원은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연적인 것들과 영적인 것들은 상응하고 있기 때문에 다른 삶에서 거듭난 영적 인간 주위에 있는 것이 보이도록 표출될 때, 이것은 구름에 있는 활 같이 나타난다, 이 활은 그의 자연적인 것들 안에서 그의 영적인 것들의 표현이다. 거듭난 영적 인간에서 그의 이해력의 자기 자신 안으로 주님께서는 순진, 선행, 자비를 은근히 심으신다. 인간이 이 선물을 받는 양상에 따라 그의 무지개의 외관의 아름다움은 눈에 보이도록 표출될 때 달라진다. 이 아름다움은 자기 의지력의 자기 자신이 얼마나 옮겨지고, 복종하고, 순종으로 되돌아서느냐에 달려있다.
예언자들에 의해서 역시, 그들이 하느님의 환상에서 있을 때, 구름에 있는 활 같은 활을 보았다. 에스겔에 의해:
거룹들의 머리 너머 광활한 공간 위쪽에 왕좌의 모습이 있었다, 이는 사파이어 돌의 외 관 같았다; 그리고 왕좌의 모습 위에는 위쪽 그것 위에 사람의 모습으로서의 모습이 있었 다; 그리고 나는 불타는 숯의 모습으로 보았는데, 마치 빙둘러 그것 안쪽에 불의 외관으로 있는데, 이는 그의 허리 위쪽의 외관으로부터 이고, 그의 허리 아래쪽의 외관으로부터는 나 는 마치 불의 외관 같이 보았다, 그리고 그분 주위는 밝게 빛남이었다; 비온 날 구름에 있 는 활의 외관이었다. 이렇게 빙둘러 빛남이 있었다; 이것은 여호와의 영광의 모습의 외관이 었다 (겔. 1:26-28).
모든 이에게 분명해짐이 틀림없는 것은, 보여진 분이 주님이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분에 의해 천국이 표현되어졌다. 그 이유가 그분이 천국이시기 때문이다. 즉 그분은 천국의 모든 것들에 있는 모두 되신다. 여기서 말해지는 “사람”은 그분이시다; “왕좌”는 천국이다; “허리 위쪽으로부터 불의 외관으로 숯의 불”은 사랑의 천적 평면이다; “허리 아래쪽으로부터 빙두른 마치 불의 빛남 같은, 구름에 있는 활로서”는 천적인 영적인 것(천적인 것으로부터 있는 영적인 것, celestial spiritual)이다. 그런고로 천적(평면의) 천국, 또는 천적 천사들의 천국은 허리 위쪽으로부터로 표현되어졌다, 그리고 영적 (평면의) 천국, 또는 영적 천사들의 천국은 허리 아래쪽으로부터로 표현되어졌다. 그 이유가 웅대한 사람에서, 아래쪽인 것, 즉 허리로부터 아래쪽으로 발을 통하여 발바닥까지는 자연적 (평면)의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또한 명백해지는 것은 인간의 자연적인 것은 주님으로부터의 영적인 빛에 의해 밝게된다는 것이다. 마치 구름에서 활이 나타나는 현상과 꼭같다. 위 환상과 비슷한 환상을 요한도 보았다 (계. 4:2-3; 10:1).

“구름”은 천적 인간에 비교해 볼 때의 영적 인간에 있는 희미한 빛을 의미한다는 것은 “활”에 관해 말해진 바로부터 분명해진다; 그 이유가 활, 또는 활의 색깔은 구름이 아니면 존재하지 못한다. 앞서 말한대로, 이것은 구름의 어둠이다, 이를 통하여 태양의 광선이 비추인다, 그리고 색깔들로 바뀌인다; 고로 색깔은 광선의 빛남이 접촉된 어둠과 같다. 영적 인간의 경우가 이와 같다. 영적 인간과 더불어, 여기서 “구름”이라 불리는 어둠은 거짓이다. 이는 그의 이해력의 자기 자신과 동일한 것이다. 순진, 선행, 그리고 자비가 주님에 의해 이 자기 자신 안으로 은근히 심어질 때, 이 구름은 더 이상 거짓으로 나타나지 않고, 주님으로부터의 진리와 함께 진리의 나타남 같이 나타난다. 그러므로 색깔 있는 활의 모습이다. 여기에는 결단코 묘사되어질 수 없는 어떤 영적 변경(modification)이 있다, 그리고 이것이 색깔과 그것들의 근원의 수단이 인간에 의해 지각되지 않으면, 나는 인간의 납득력에 설명될 수 있는 방법을 모른다.
이 “구름”의 본성은 거듭나는 인간과 더불어 거듭남 이전 그의 상태로부터 알런지 모른다. 인간은 그가 신앙의 진리들이다고 상상하는 것들을 통하여 거듭나진다. 모든 이들은 자기의 독단적 주장을 진리이다고 상상한다. 이로부터 그는 양심을 획득한다. 왜냐하면 그가 양심을 획득한 후, 신앙의 진리로서 그에게 인상지워져왔던 것에 반대하여 행동하기 위해 추론하는 것은 그에게는 양심에 반대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모두 각각의 거듭난 사람도 이와 같다. 그 이유가 많은 이들이 모두 각각의 독단적 주장 안에서 주님에 의해 거듭나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이 거듭나져갔을 때, 그들은 어떤 직접적인 계시(밝히 알게 함)를 받지 않는다. 그러나 말씀을 통하여, 그리고 말씀에 관한 설교를 통하여 그들 안으로 은근히 심어지는 것만에 의해, 고로 매우 간접적인 계시를 통해 받을 뿐이다. 그러나 그들이 선행을 받기 때문에, 주님은 선행을 통하여 그들의 구름 위에 작업하신다. 이로부터 빛이 솟아오른다. 마치 태양이 구름을 두드리는 것과 같다. 이때 구름은 빛을 반사하고 색깔들로 다양해진다. 그런고로 활의 모습이 구름에서 발생한다. 구름이 더 엷으면, 즉 혼합된 신앙의 진리들이 더 많아지면, 활은 더 아름다워진다. 그러나 구름이 더 두터우면, 즉 신앙의 진리들이 더 적어지면, 활은 덜 아름다워진다. 순진은 활의 아름다움에 많은 것을 추가한다. 즉 색깔들에 생명있는 빛남을 더한다는 말이다.
진리의 모든 외관(나타남, appearance)들은 구름들이다. 인간이 말씀의 글자 의미 안에 있을 때, 인간은 구름 안에 존재한다. 그 이유가 말씀의 언어는 외관에 의거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이 천진난만함(simplicity)으로 말씀을 믿을 때, 그리고 선행을 가지고 있을 때, 설사 그가 외관들 안에 머무르고 있다 해도, 이 구름(진리의 외관)은 상대적으로 엷다. 이 구름 안에서 양심은 교회 내에 있는 사람과 더불어 주님에 의해 만들어 내진다. 진리에 대한 모든 무지함들 역시 구름들이다. 인간이 이 구름 안에 있는 경우란 그가 신앙의 진리가 무엇인지 모를 때이다, 또한 일반적으로 말씀이 무엇인지 모를 때이다, 더 나아가 그가 주님에 관해 듣지 못한 경우이다. 이 구름 안에서 양심은 교회 밖에 있는 이들과 더불어 주님에 의해 만들어 내진다; 그 이유가 인간의 대단히 무지함에서도 순진은 있을런지 모르고, 선행 역시 있을런지 모르기 때문이다. 모든 거짓들 또한 구름들이다; 그리고 구름들은 어둠이다. 이 구름들은 거짓 양심을 지닌 이들이든가, 또는 아무 양심도 가지지 않은 이들이든가 이다. 위에서 살핀 여러 가지 구름들은 일반적 측면에서의 구름의 품질들이다. 구름의 덩어리에 주목해보면, 실상 인간과 더불은 구름 덩어리는 너무나 두껍고 밀도가 높아 만일 인간 당사자가 이것을 알았다면, 아마 그는 빛의 광선들이 주님으로부터 이 엄청난 구름을 통과하여 빛을 발해 무지개의 색깔을 내줄 수 있을지 의아해지고 만다. 또는 이 구름 덩어리의 두께로 보아서 과연 내가 거듭나질 수 있을지 의아해지고 말 것이다. 자신의 구름 덩어리는 과히 두껍지 않다고 자평하는 이가 때로는 아주 큰 구름 덩어리를 부등켜 안고 있다. 때로는 자신의 구름 덩어리가 매우 두껍다고 자평하고 근심했는데, 상대적으로 오히려 덜 두꺼울 수도 있다.
영적 인간의 경우는 위와 같을 수 있으나, 천적 인간의 경우는 위와 같지 않다. 그 이유는 그의 의지 부분에 심어진 주님을 사랑함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영적 인간 같이 양심을 통하여서가 아닌 주님으로부터 (직접적 계시로) 받는 방법, 즉 선을 지각함, 그리고 이로부터 진리를 지각함에 의해서 받는다. 인간의 의지 부분이 천적인 불꽃으로부터의 광선을 받을 수 있을 때, 그의 지적 부분은 그것을 수단으로 계발되어진다, 그리고 사랑으로부터 그는 신앙의 진리들인 모든 것들을 알고 지각한다. 이때 그의 의지 부분은 조그만 태양처럼 있다, 이로부터 광선들이 그의 지적 부분 안으로 빛을 발한다. 이런 상황이 태고 교회의 사람에게 있었다. 그러나 인간의 의지 부분이 통째로 썩어 지옥적이 되어, 양심이라는 새로운 의지가 그의 지적 부분에 만들어진다. 이것이 고대 교회의 사람과 더불은 경우이고, 영적 교회의 모두 각각의 거듭난 인간과 더불어서도 그러하다. 이때 그의 구름은 상당히 두껍다. 그 이유가 그는 선하고 참된 것을 배울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즉 그는 그것이 이러한지 아닌지에 대한 지각력이 없기 때문이다. 하여 거짓은 그의 검은 의지 부분으로부터, 즉 지옥으로부터 (두꺼운) 구름의 어둠을 통하여 계속적으로 흘러든다. 이런 이유로 천적 인간의 경우와 달리 영적 인간의 경우는 그의 지적 부분이 계발되어질 수 없다. 그러므로 영적 인간을 취급하는 이 대목의 “구름”은 희미한 빛을 의미한다. 이는 명료한 빛(계발된 지적 부분)을 지닌 천적인간에 비교해서 하는 말이다.

그리고 이것은 나와 땅 사이에 언약의 표시를 위해 있을 것이다. 이는 선행 안에 주님의 현존이 있음에 대한 표시를 의미한다. 그리고 “땅”은 여기서의 경우, 인간의 자기 자신을 표시한다. 이는 이미 살핀 바 있다. “땅”이 인간의 자기 자신을 의미하는 것은 땅의 내적 의미로부터, 그리고 여기서 발생하는 연결로부터도 분명해진다. 왜냐하면 앞에서, “이것은 내가 나와 너, 그리고 너와 함께 살아있는 모두 각각의 혼 사이에 만드는 언약의 표시이다”이고, 이를 수단으로 거듭나져왔던 것은 무엇이든이 의미되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서 말해진 바는 다르다. 즉 “이것은 나와 땅 사이에 언약의 표시를 위해 있을 것이다”이다. 이로부터 그리고 “언약의 표시”라는 말의 반복으로부터 여기서 어떤 것이 의미됨은 분명하다. 그리고 사실상 “땅”은 거듭나지 않는 것, 거듭나질 수 없는 것을 뜻한다. 이는 인간의 의지 부분의 자기 자신이다.
거듭날 때 인간은 그의 지적 부분은 주님의 것이나, 그의 의지 부분은 그의 자기 자신이다. 영적 인간 안에서 이 두 부분들은 반대되어 있다. 그러나 비록 인간의 의지 부분이 반대되어 있을지라도, 여전히 그것은 현존해 있을 수 밖에 없다; 그 이유는 그의 지적 부분에 있는 모든 희미함, 또는 그의 구름의 모든 빽빽함이 인간의 의지 부분으로부터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인간의 의지 부분으로부터 계속적으로 흘러서 그의 지적 부분에 있는 구름은 두터워진다; 그러나 이것이 제거됨에 비례하여, 구름은 엷어진다. 고로 “땅”은 여기서 인간의 자기 자신이 의미된다. “땅”이 인간의 육체적(물질적) 부분을 의미하는 것, 그 외 다른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앞서 살핀 바도 있다.

의지력과 이해력 사이에 있는 조건은 마치 우정의 언약에 의해 원래부터 결합되어 있는 것처럼 태고 교회인의 의지력과 이해력에서 있었으나. 이 우정 관계가 깨어지고, 불화가 발생했다. 이는 인간이 자기의 의지 부분을 통째로 썩게 했을 때 발생된 것이다. 그리고 다시 언약이 있게 되자, 적대감 있는 부분은 마치 언약이 그것과 더불어 있는 것처럼 있었다, 즉 언약이 그것과 더불어 있다는 것은 아니다는 말이다. 그 이유는 이 두 부분들은 완전하게 반대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흘러든 것은 그것과 더불어, 즉 이해력의 자기 자신과 더불어 있다. 언약의 표(token), 또는 표시는 이것이다, 즉 주님의 현존이 이해력의 자기 자신 안에 있음에 비례하여 의지의 자기 자신도 똑같이 비례하여 제거될 것이다. 천국과 지옥의 경우가 이런 점에서 똑같다. 주님이 현존하는 선행으로부터 거듭난 인간의 지적 부분은 천국이다. 천국인 만큼 지옥은 멀어져 있다. 그 이유가 그 자신으로부터서는 인간은 지옥 안에 있다, 그리고 주님으로부터서는 천국 안에 있다. 그리고 인간은 지옥으로부터 천국으로 들리워진다, 그가 들리운 만큼, 그의 지옥은 제거되어 있다. 그러므로 주님이 현존하신다는 “표시” 또는 암시는 인간의 의지 부분이 제거된 것이다. 지옥의 제거됨의 가능성은 시험들을 수단으로, 그리고 거듭남의 많은 다른 수단들에 의해 결과되어진다.

이상 위에서 진행한 내용들은 거듭난 영적 인간, 또는 영적 교회에 주목한 것이다. 뒤잇는 내용들은 일반적으로 모든 사람들에 주목하여 있다; 그리고 그 후에, 특별하게는 거듭나질 수 있는 사람에도 주목하여 있다.

14, 15절. 그리고 장차 내가 땅 위에 구름을 가져 올 때, 활이 구름에서 보여질 때, 15 나는 내가 너와 모든 육의 생명있는 혼 각각 모두 사이에 세운 내 언약을 기억하리라. 그리고 물들이 모든 육을 파괴하기 위하여 더 이상 홍수가 되지 않을 것이다. “장차 내가 땅 위에 구름을 가져올 때”란 인간의 의지 부분의 자기 자신 때문에 선행으로부터의 신앙이 나타나지 않는 때를 의미한다. “활이 구름에서 보여질 것이다”란 인간이 아직은 거듭나질 수 있는 상태에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나는 나와 너 사이에 있는 내 언약을 기억할 것이다”란 거듭나는 이들, 그리고 거듭나질 수 있는 이들을 향한 주님의 자비를 의미한다. “모든 육의 생명있는 혼 각각 모두”란 온 인류를 의미한다. “물들이 모든 육을 파괴하기 위하여 홍수가 되지 않을 것이다”란 인간의 지적 부분은 태고 교회의 후손에게 있었던 것 같이 파멸될 정도로는 더 이상 설득 당해질 수 없을 것임을 의미한다. 위 사항은 일반적 측면일 경우 모든 사람들을 주목하고 있다.

그리고 장차 내가 땅 위에 구름을 가져올 때. 이는 선행의 신앙이 인간의 의지 부분의 자기 자신 때문에 나타나지 않을 때를 의미한다는 것은 방금 땅, 즉 인간의 의지 부분의 자기 자신에 관하여 위에서 말해진 것으로부터 분명해진다. 즉 이것 (인간의 의지 부분의 자기 자신)은 인간의 지적 부분 안으로 애매 모호한 것(희미해지게 하는 것, obscure), 또는 거짓을 계속적으로 쏟아부은다. 이 희미해지게 하는 것이 이 구절의 구름을 가져옴의 현상인 어두워짐(“clouding over”)이고, 이것(인간의 의지 부분의 자기 자신)은 모든 거짓의 근원이다. 이것은 인간의 의지로부터 있는 것, 즉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이 증오함 밖에 없다는 사실로부터 충분히 분명해진다. 그 이유가 누군가가 자신을 사랑하는 만큼 그는 이웃을 미워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사랑이 천국의 사랑에 반대되어 있기 때문에, 이웃을 증오함 같은 것들은 상호간의 사랑에 반대되는 어떤 것이 인간의 의지 부분의 자기 자신으로부터 계속적으로 흘러드는 것을 필요로 한다. (흘러든) 이 모든 것들은 지적 부분 안에서 거짓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의 지적 부분의 모든 어둠과 희미함이 온다. 거짓은 진리를 흐려지게, 애매모호해지게(becloud)한다. 마치 검은 구름이 태양의 빛을 가리는 격이다. 그 이유는 거짓과 진리는 함께 있을 수 없기 때문에, 즉 어둠과 밝음이 함께 할 수 없기 때문에, 명백한 귀결은 하나가 떠나면, 다른 하나가 온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교대할 때, 여기서 “내가 땅 위에 구름을 가져올 때”, 즉 의지 부분의 자기 자신을 통하여 선행의 신앙, 또는 진리로부터 파생되는 선과 더불은 진리가 나타나지 않을 때, 더욱이 선으로부터 파생하는 진리와 더불은 선이 나타나지 않을 때, 라고 말해진다.

활이 구름에서 보여질 때, 이는 인간이 여전히 거듭나질 수 있는 상태에 있을 때를 의미하는 것은 “구름에 있는 활”의 의미로부터 분명해진다. “구름에 있는 활”은 거듭남에 대한 표시, 또는 암시함인데, 앞에서 말했다. 구름에 있는 활을 주목해본다면, 이러하다. 인간의 품질, 또는 육체가 죽은 후 혼의 품질은 즉시 알려진다; 주님에 의해서는 이것은 영원으로부터 알려져 있다. 그리고 이것이 영원히 어떠할지도 알려져 있다. 천사들에 의해 그의 품질은 이 혼이 가까이 오는 순간 지각되어진다. 내뿜는 어떤 영역이 있다. 여기서는 자기의 본래의 모습으로부터, 또는 자기 안에 있는 모든 것으로부터 (그의 품질을) 내뿜는 영역이다; 이 영역이 말하기에 경이할 수 밖에 없는 것은, 이 영역에서 인간이 어떤 신앙을 가졌는지, 어떤 선행을 가졌는지가 지각된다는 것이다. 이 영역에서 주님이 흡족해 하실 때, 이 영역에서 (혼이 내뿜은 것이)활 같이 되어 눈에 보여진다. 이 영역에 관하여는 차 후 주님의 신성한 자비로부터 설명할 것이다. 이로부터 분명해지는 바, 이 구절의 구름에서 보여질 때의 활에 의해 의미되는 것은, 인간이 거듭나질 수 있는 상태에 있을 때이다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나와 너 사이에 있는 내 언약을 기억할 것이다. 이는 주님의 자비, 특히 거듭난 자와 거듭나질 수 있는 자에 대한 주님의 자비를 의미한다. 그 이유가 주님의 경우에서 “기억하신다”란 자비를 가지신다이기 때문이다. 기억하심이란 표현이 주님을 서술할 수 있는 적절한 표현은 못된다. 그 이유는 영원으로부터 그분은 일반적이든, 세부적이든 모든 것들을 아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비를 가지신다는 것은 그분을 서술하는 적절한 표현이다. 그 이유는 그분은 인간의 품성이 이러한지를 아시기 때문이다. 즉 인간의 자기 자신은 지옥적이다는 것, 그것은 그 인간의 참 지옥이다는 것을 아신다는 말이다. 그 이유가 그의 의지를 수단으로 인간은 지옥과 교류한다. 그리고 인간은 지옥으로부터, 그리고 그의 자기 자신 자체로부터서는 지옥으로 던지기를 아주 많이, 아주 강하게 바라고 있다. 인간은 자신으로부터서는 이와같은 악마이기에, 그리고 주님은 이를 아시기에, 뒤잇는 말씀은 그분께서 “언약을 기억하심”이고, 이는 인간 위에 신성을 가지심 밖에 더 다른 뜻은 없다. 그리고 신성한 수단에 의해 그를 거듭나게 하고, 권능의 힘에 의해 그를 천국으로 끌어당기신다. 그러나 이는 인간 당사자가 이 가능성에 자기 자신을 포기하고 양보하는 만큼에 비례해서 이다.

그리고 모든 육의 살아있는 모두 각각의 혼. 이는 전체 인간 종족을 의미하는데, 이는 “모든 육의 살아있는 혼”의 의미로부터 분명해진다. 모두 각각의 인간은 자기 안에 살아있는 것으로부터 살아있는 혼이라 불리운다. 만일 인간이 자기 안에 살아있는 어떤 것을 가지지 않으면 그는 사람으로 사는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해 그가 순진의 어떤 것, 선행의 어떤 것, 그리고 자비의 어떤 것, 또는 이런 것과 비슷한 어떤 것, 그것에 필적하는 어떤 것을 가지지 않으면 살아있는 혼이 될 수 없다는 말이다. 순진, 선행, 자비의 어떤 것을 인간은 주님으로부터 그의 유아와 어린 시절 동안 받는다. 이는 유아의 상태와 어린 시절의 상태로부터 분명해진다. 이때 인간이 받은 것은 각자 안에 보존되어진다. 보존되어 있는 것들이 말씀에서 “리메인스”라고 불러지고, 이것은 인간 안에 주님만으로부터 있다. 그런고로 보존된 것은 그가 성년이 될 때, 그 사람으로 인간되게, 인간으로 되어질 수 있게 한다.

인간이 유아 시절과 어린 아이 시절 동안 가졌던 순진, 선행, 자비가 그 당사자에게 사람일 수 있게 하는 원인이 된다는 것은 이런 사항을 살피면 분명해진다. 즉 인간은 훈련된 생활의 어떤 상태에서 태어나지지 않는다. 마치 야수들이 제각각의 생활 수단을 본능적으로 지니는 것 같지 않다는 말이다. 그러나 인간은 습득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고 이것으로 모든 것을 소유한다. 그리고 그가 배운 것을 계속 활용하여 몸에 배게 하는데, 얼마 뒤에는 배운 것이 마치 배우지 않고 자신에게 당연히 있는 듯한 정도 까지에 이른다. 인간은 배울 때까지 걷지도, 말 할 수도 없다. 이밖에 다른 것도 마찬가지이다. 배운 것을 사용함으로해서 마치 자신에게 본능적으로 있기라도 한 듯 한 정도까지 이른다. 순진, 선행, 자비의 상태와 더불어서도 위와 같다. 인간은 이런 방식에서 유아때로부터 순진, 선행, 자비의 상태가 스며들게 된다. 그리고 이 상태들이 없으면, 그는 야수보다 더 천박할 것이다. 그럼에도 이 상태들은 실상 인간이 배우지 않는 상태들이고, 주님으로부터 선물로서 받는다. 그리고 이 선물을 주님은 각자 안에 보존하신다. 신앙의 진리들 역시 “리메인스”라 불리는 것들에 속하고 이것도 주님만으로부터 있다. 성년이 된 인간이 이 상태들을 소멸시키는 만큼에서, 그는 죽은 자이다. 인간이 거듭나질 때, 이 상태들은 거듭남의 시작 선상에 놓여있다. 그는 그것들 안으로 인도되어진다; 그 이유가 주님은 리메인스를 통하여 일하시기 때문이다.
모두 각각의 인간과 더불은 이러한 리메인스들이 이 구절에서 “모든 육의 살아있는 혼”이라 불리운다. “모든 육”이 모두 각각의 인간을 의미하는 것, 그런고로 전체 인간 종족을 의미하는 것은 말씀 여러 곳에 있는 “육”의 의미로부터 분명해진다. 이는 574항에서도 이미 보여진 바 있다. 마태복음서에서:
이 날들이 짧아지지 않으면, 어느 육도 구원되지 않을 것이다 (마. 24:22; 막 18:20).
요한 복음서에서:
예수께서 말하셨다, 아버지께서 당신의 아들을 신성화 하소서, 마치 당신께서 그에게 모든 육을 다스리는 권능을 주셨듯이 (요. 17:2).
이사야서에서:
그리고 여호와의 영광이 밝히 알리실 것이다, 그리고 모든 육이 함께 그것을 볼 것이다
(이. 40:5).
그리고 다시:
그리고 모든 육이 나 여호와가 너희들의 구세주임을 알 것이다 (이. 49:26).

그리고 물들이 모든 육을 파괴하기 위해 홍수가 더 이상 되지 않을 것이다. 이는 인간의 지적 부분은 과거 태고 교회의 후손을 파멸로 유도한 것과 같은 설득력을 더 이상 옷입지 않을 것을 의미한다. 이 의미는 앞서 홍수의 물들, 멸절된 홍수 이전 사람들을 주목해서 본 대목에서 이미 살핀 바에서 분명해진다. ; 즉 그들과 더불어 의지 부분, 뿐만 아니라 지적 부분도 파괴되어 지옥적이 되었다. 그런즉 그들은 거듭나질 수 없었는 바, 새로운 의지가 그들의 지적 부분에 형성되어진 것이다.

16절. 그리고 활이 구름에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것을 보고, 나는 하느님과 땅 위에 있는 모든 육의 생명있는 혼 각각 모두 사이에 있는 영원한 언약을 기억하리라. “활이 구름에 있을 것이다”란 인간의 상태를 의미한다. “그리고 나는 그것을 보고…”란 인간의 상태는 거듭나질 수 있음을 의미한다. “나는 영원한 언약을 기억할 것이다”란 주님은 선행에서 거듭나는 사람과 현존하실 수 있음을 의미한다. “하느님과 땅 위에 있는 모든 육의 생명 있는 혼 각각 모두 사이에…”란 위 언약은 모든 사람에게도 가능함을 의미한다. 특별히 위 내용은 거듭나질 수 있는 사람을 주목하고 있다.

그리고 활이 구름에 있을 것이다. 이는 인간의 상태를 의미한다는 것, 이는 활에 관련하여 말해진 내용으로부터 분명해진다, 즉 다른 삶에서 인간, 또는 혼은 그가 있는 영역(sphere)으로부터 천사들 사이에 알려진다는 것, 이 영역은 주님이 흡족해하실 경우, 무지개 같이 색깔들에 의해 표현된다는 것, 즉 주님에 대한 신앙, 고로 신앙으로부터의 선들과 진리들에 비례해서 각 인물의 상태들에 따라 다양하게 나타난다는 것, 다른 삶에서의 색깔들은 지상에서 보여지는 색깔들의 아름다움을 측량할 수 없을 정도로 능가하는 빛남과 광휘로부터 보여지게 표출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각 색깔들은 천적이고 영적인 어떤 것을 표현한다. 이 색깔들은 천국의 빛으로부터 있고 영적인 빛의 다채로움으로부터 있다. 이는 이미 살핀 바 있다. 천사들이 사는 곳의 천국의 빛은 세상의 빛과 비교하건대, 태양의 정오 때의 빛과 촛불의 빛의 차이쯤 되고, 그나마 이런 빛은 태양의 떠오름에서 있으나마나한 정도의 빛이 되고 만다. 천국에는 천적인 빛과 영적인 빛 둘 다 있다. 이 두 빛을 비교해 말하면, 천적인 빛은 태양의 빛, 영적인 빛은 달의 빛이라 말할 수 있다. 어쨌든 이 빛은 빛을 받는 천사들의 상태에 따라 그 강도의 차이는 달라진다. 색깔들 역시 이와 같이 다양한데, 그 이유는 빛으로부터 있기 때문이다. 주님 자신이 천적 천사들에게는 태양이시고, 영적 천사들에게는 달이 되어 있으신다. 이런 사항들은 사 후 혼이 사는 것에 대한 개념을 갖지 못한 이들에게는 황당할 것이나, 이는 여전히 진리이다.

그리고 나는 그것을 볼 것이다. 이는 그가 거듭나질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누구를 “보는”것이 주님을 서술할 경우, 인간의 품질을 아는 것을 뜻함으로부터 분명해진다. 그 이유가 주님은 영원으로부터 모두를 아시기 때문에 누군가를 본다는 것 자체가 사실상 필요 없기 때문이다. 누군가가 거듭나질 수 있는 상태에 있을 때, 주님에 관하여 기록되는 표현은, 그분이 그를 “보신다”, 또는 그분의 모습을 그 사람에게 들어 올리신다 이다. 그러나 그가 거듭나질 수 없을 경우, 위 같은 표현은 없고, 그분이 그 사람으로부터 “그분의 눈을 돌리셨다”, 또는 “그분의 얼굴을 돌리셨다”라고 표현되어 기록되나, 사실상 돌아서는 것은 주님이 아니라 인간이다. (성경의 기록자 역시 인간이고 인간은 성경 기록 시대나 지금이나 자기 주의적이기에 이런 표현이 있었을 뿐 변함없는 사랑 자체이신 주님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9:14, 인류 전체가 취급되는 구절에서, 인류 안에 거듭나질 수 없는 인간이 많기에, “내”가 구름에 있는 활을 볼 때, 라고 말해지지 않고, 활이 구름에서 “보여질 때” 라고 표현되고 있다. 이를 주님에 주목해보면, “보시는 것”과 “기억하시는 것”은 동일하여 내적 의미에서 두 표현 모두 자비를 가지심을 의미한다.

나는 영원한 언약을 기억하리라. 이는 주님이 선행 안에서 그 인간과 더불어 현존하실 수 있다를 의미하는데, 이는 “언약”의 의미에 관하여 살핀 내용으로부터 분명해진다. 즉 “영원한 언약”은 주님을 사랑함과 이웃을 향한 사랑 밖에 더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영원하다. 그 이유는 영원으로부터 (시작하여) 영원까지 이기 때문이다. 천국 전체는 사랑에 기초를 두고 있다. 마찬 가지로 전체 천국의 본성은 사랑이다; 그 이유가 이 본성 안에 있을 수 있는 것- 합일과 결합의 어떤 것- 활기를 띠고 있든 그렇지 않든 사랑으로부터 파생되지 않은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 이유가 자연적인 것은 영적인 것으로부터 존재 안으로 오고, 영적인 것은 천적인 것으로부터 존재 안으로 오기 때문이다. 이는 이미 말한 바 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 또는 사랑과 유사한 것은 일반적, 세부적 모두에서 모든 것들 안에 심어져 왔다; 인간에서 만이 사랑이 없거나 그 반대의 상태에 있다. 그 이유는 인간이 (천국) 본성의 질서를 자신 안에서 파괴했기 때문이다. 어쨌든 인간이 거듭나질 수 있을 때, 또는 다시 회복되었을 때, 또는 질서의 궤도에 진입했을 때, 그래서 상호간의 사랑을 받을 때, “언약”이, 또는 선행을 수단으로 결합함이 있다. 이것이 이 대목에서 취급되었다.

하느님과 땅 위에 있는 모든 육의 살아있는 모두 각각의 혼 사이에 이는 이것이 가능할 수 있는 모두 각각의 인간과 더불어가 의미되는데, 이는 이미 말해진 것으로부터 분명해진다. 즉 여기서 취급된 주제는 거듭나질 수 있는 인간이라는 것이다. 이외 다른 사람은 “모든 육의 살아있는 모두 각각의 혼”일 수 없기 때문이다.

17절. 그리고 하느님께서 노아에게 말하셨다, 이것은 내가 나와 땅 위에 있는 모든 육(flesh) 사이에 세워진 언약의 표시이다. “하느님께서 노아에게 말하셨다”란 교회(the church)는 이를 알아야 한다를 의미한다. “이것은 내가 나와 땅 위에 있는 모든 육 사이에 세워진 언약의 표시이다”란 선행 안에 주님의 현존하심에 대한 암시는 교회 내의 사람 뿐만 아니라 교회 밖의 사람에게도 있었다를 의미한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노아에게 말하셨다. 이것이 교회는 이를 알아야 한다를 의미하는데, 이는 취급된 시리즈의 것들로부터 분명해진다. 이는 내적 의미로부터가 아니면 나타나지 않고, 내적 의미 안에서 시리즈의 연결로부터 이다: 첫째, 교회에 있는 거듭난 영적 인간이 취급된다는 것; 둘째, 모두 각각의 인간이 보편적으로 취급된다는 것; 셋째, 거듭나질 수 있는 모두 각각의 인간; 그리고 결말인 즉, 교회는 이것을 알아야 한다 이다. “노아”는 앞서 보여진 교회, 실로 일반적 측면에서 영적(평면의) 교회이다. 그 이유가 노아에게만 말하듯 이 구절이 표현되어 있기 때문이다. 교회가 알아야하는 것이 이 뒤를 이어 있다.

이것은 내가 나와 땅 위에 있는 모든 육 사이에 세워진 언약이다. 이는 선행 안에서 주님이 현존하심에 대한 암시는 교회 내의 사람 뿐만 아니라 교회 밖의 사람에게도 있었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는 “모든 육”의 의미가 모두 각각의 사람, 그 결과 전체 인간 종족임으로부터 분명해진다. 전체 인간 종족은 교회 내와 교회 밖 둘 다를 뜻하는 것은 “모든 육”이라고 말해진 것, 뿐만 아니라, 16절의 “모든 육의 살아있는 모두 각각의 혼”이라고 말해지지 않고, 더 명백하게 “땅 위에 있는”의 표현을 추가한 대목으로부터 분명해진다. 교회 밖에 있는 이들, 이방인들이라 불리는 이들과 더불어서도 주님은 교회 내에 있는 이들과 마찬가지로 선행 안에 동등하게 현존하신다. 어쩌면 주님은 이방인들과 더 현존하실지 모른다. 그 이유가 이방인들이 어떤 측면에서는 기독교인들 보다 지적 부분의 구름이 상대적으로 덜 두꺼울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이방인들은 말씀에 무지하다, 그들은 주님이 누구신지 모른다, 결과적으로 신앙의 진리가 무엇인지 모른다; 그러므로 그들은 주님에 맞서 있을 수 없고, (그들의 지적 부분은) 신앙의 진리에 반대된 상태일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의 “구름”은 주님에, 신앙의 진리에 맞서 있지 않는 바, 이 구름은 그들이 계발될 때 어렵지 않게 흩트러진다. 이에 비해 기독인의 구름은 주님에, 신앙의 진리에 맞서 있는 구름인 바, 아주 밀도가 높아 어둡고, 따라서 흩트러짐도 쉽지 않다. 어쨌든 선행 대신에 증오가 자리잡았을 때, 두꺼운 구름층이 되고 만다. 한층 더 두꺼운 구름층은 신앙의 진리를 모독할 경우이다. 이방인들의 경우 이를 할 수 없는데 그 이유는 그들이 신앙의 진리에 무지하기 때문이다. 당사자가 본성, 또는 존재 여부를 모를 경우, 누구도 모독할 수 없다. 이런 이유로 기독인들 보다 이방인들이 더 많이 구원된다. 주님의 말씀도 참조하기 바란다 (눅. 13:23, 28-30). 이어서 주님의 왕국에 속하는 모든 어린 아이들에 관한 구절도 더 읽기 바란다 (마. 18:10, 14; 19:14; 눅. 18:16).

18절. 그리고 방주에서 나온 노아의 아들들은 셈, 그리고 함, 그리고 야벳이었다. 그리고 함은 가나안의 조상이다. “방주에서 나온 노아의 아들들”이란 고대 교회를 구성한 것들을 의미한다. “방주에서 나갔음”이란 거듭나아지는 이들을 의미한다. “셈”은 내적 교회를 의미한다. “함”은 부패된 교회를 의미한다. “야벳”은 외적 교회를 의미한다. “그리고 함은 가나안의 조상이다”란 부패된 교회로부터 내용 없는 껍데기 만의 교회가 솟구침을 의미한다. 이런 예배가 “가나안”으로 의미된다.

방주에서 나온 노아의 아들들. 이는 고대 교회를 구성한 이들이 의미된다는 것, “방주로부터 나간” 이들은 거듭나는 이들을 의미하는 것은 이 뒤를 잇는 모든 사항으로부터 분명해진다; 이로부터 이 경우가 어떠한지 분명해질 것이다.

“셈”은 내적 교회를, “함”은 부패된 교회를, “야벳”은 외적 교회를 의미한다는 것은 이어지는 것들, 즉 그들의 품질이 묘사되는 곳으로부터 분명해진다. 모든 교회에서와 같이 고대 교회에서도 내적이었던 인간들, 내적이었고 부패되었던 인간들, 외적 이었던 인간들이 있었다. 내적인 이들은 선행을 신앙의 제 1로 만드는 이들이다; 내적이고 부패된 이들은 선행 없는 신앙을 자기들 신앙의 제 1로 만드는 자들이다; 그리고 외적인 이들은 내적 인간에 관하여 생각함이 거의 없는 이들, 그러나 선행의 일을 수행하고, 교회의 의식들을 신성시하여 준수하는 이들이다. 영적 교회라 불리는 이들에게 이외 다른 종류는 없다; 그리고 그들이 교회의 모든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그들은 “방주로부터 나갔다”고 말해진다. 고대 교회에서 내적 인간들이었던 이들은, 즉 선행을 자기들 신앙의 제 1순위에 두었던 이들이 “셈”이라 불리운다; 내적이고 부패된 이들, 선행 없는 신앙을 제 1로 만든 이들은 “함”이라 불리운다; 외적이었고 내적인 것은 거의 생각하지 않고, 그러나 선행의 일을 수행하며 교회 의식들을 신성시하여 준수하는 이들이 “야벳”이라 불리운다. 각각의 본성은 이어지는 세부 사항들로부터 보여질 것이다.

그리고 함은 가나안의 조상이다. 이는 부패된 교회로부터 내적인 것들 없는 외적인 것들에 있는 예배가 튀어나왔음을 의미하는데, 이 예배가 가나안에 의해 의미된다. 이것 역시 이어지는 구절로부터 분명해진다; 그 이유가 이 절에 포함된 것들은 이어지는 구절들에 대한 전체로서 말해지기 때문이다. “함”이 부패된 교회를, 즉 선행으로부터 분리된 신앙을 자기들 신앙의 제 1 순위로 만드는 이들을 의미하는 것은 다윗서로부터 분명해진다;
그분은 이집트의 첫 출생, 함의 천막들에서, 힘의 시작을 치셨다 (시. 78:51).
“이집트의 첫 출생”에 의해 선행 없는 신앙이 표현되어졌다. 신앙이 교회의 첫 출생이라 불리운다; 그리고 첫 출생이기 때문에 신앙이 “힘의 시작”이라 불리는 것은 창. 49:3에서 알런지 모른다. 여기서 르우벤에 대해 말해진 내용에서 그는 야곱의 첫 출생이었기 때문에 신앙을 표현했다. 그리고 “힘의 시작”이라 불린다. “함의 천막들”은 거기로부터 있는 예배이다. “천막들”이 예배를 의미하는 것은 414항에서 알런지 모른다. 이 사실에서 이집트는 “함의 토지”라 불리운다. 고대 교회에서 “함”이라 불려진 이들은, 그들이 모든 탐욕들의 삶을 살았고, 자기들이 어떻게 살았든 구원받아질 수 있다고 떠벌였는 바, 고대의 사람들에게 검게 나타났다. 검은 이유는 그들이 지닌 탐욕의 열로부터이고, 이로부터 “함”이라 불리운다. 함이 “가나안의 조상”이라 불리는데, 그 이유는 이런 종류의 사람들은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는 도통 관심이 없고, 단지 신성시한 의식들을 자주 제공하면 된다고 했던 자들이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그들은 여전히 어떤 예배를 바라기 때문이다. 그러나 외적 예배는 그들을 위한 유일한 예배이다; 오로지 선행에 속하는 내적 예배를 그들은 거절한다. 그렇기 때문에 함은 “가나안의 조상”이라고 말해진다.

19절. 이 세 명이 노아의 아들들이었다. 그리고 이들로부터 온 땅이 그득 찼다. “이 세 명이 노아의 아들들이다”란 세 종류의 교리들을 의미한다. 이 교리들이 일반적으로 교회들 속에 있다. “이들로부터 온 땅이 그득 찼다”란 그들로부터 참되든 거짓되든 모든 교리들이 파생되었음을 의미한다.

이 세 명이 노아의 아들들이었다. 이들이 교리들의 세 종류들, 일반적으로 교회들 속에 있는 세 종류의 교리들을 의미하는 것은 방금 전에 보여주었다. 실로 덜 보편적인 교리의 종류는 셀 수 없이 많으나, 보편적인 종류는 이 세 종류의 범주에 있다. 선행과 신앙을 인정하지 않는 이들, 외적 예배조차 인정하지 않는 이들은 교회로부터 있지 않는 이들이다. 그들은 여기서 취급되지 않는다, 그 이유는 취급되는 것이 교회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들로부터 온 땅이 그득 찼다. 이는 그들로부터 참되든, 거짓되든 모든 교리들이 갈라져나갔음을 의미하는데, 이는 “땅”의 의미로부터 분명해진다. “땅”, 또는 “토지”, 말씀에서, 다양한 의미들을 가지고 사용되어진다. 보편적 의미에서, 이는 교회가 존재하는 장소, 지역, 또는 교회가 있었던 곳, 마치 가나안의 토지, 유다의 토지, 이스라엘의 토지 등을 표시한다. 그런고로 이것은 교회에 속해있는 모든 이들도 표시한다. 그 이유가 토지는 그 안에 있는 사람도 서술하는데, 우리 역시 일상 언어에서 이런 식의 표현은 자주 있는 편이다. 그러므로 고대 시대에서 사람들이 “온 땅”이라 이야기할 때, 그들은 온 지구를 뜻하지 않았고, 교회가 있었던 토지 만을 뜻했을 뿐이다, 그런고로 교회 자체를 뜻하기도 했다; 이는 아래 인용한 말씀으로부터 분명해진다. 이사야서에서:
잘 보라, 여호와께서 땅을 텅비게 만드신다; 땅은 지독하게 텅비어질 것이다; 땅은 슬퍼할 것이고 혼동스러워질 것이다; 땅은 역시 거기로부터의 거주민들 아래 오염될 것이다; 그러 므로 저주가 땅을 삼킬 것이다; 그러므로 땅의 거주민들은 태워질 것이다, 인간은 유약해져 남을 것이다. 높은 데로부터의 큰 폭포가 열려지고, 땅의 원천들이 흔들린다; 땅은 깡그리 부셔진다; 땅은 깨끗이 녹여져 있다; 땅은 극도로 움직여진다; 비틀거리는 땅은 술취한 자 같이 비틀거릴 것이다, 그리고 오두막집 같이 이리저리 움직여질 것이다. 그리고 거기로부 터의 위법은 그것 위에 무거울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추락하고, 다시 일어나지 못할 것이 다 (이. 24:1-3, 3-6, 18-20).
위 구절에서 “땅”은 그것 안에 있는 사람들을 표시한다, 사실상 교회 사람들, 고로 교회 자체, 그리고 황폐된 교회를 표시한다. 그리고 교회가 황폐된 상태일 때, 그것들은 “텅 비었다”, “극도로 움직였다”, “술꾼 같이 비틀거린다”, “이리저리 움직인다”, 그리고 “추락하고, 다시 일어나지 못한다” 라고 말해진다.
“땅”, 또는 “토지”에 의해 인간이 의미되는 것, 그 결과 인간으로부터 있는 교회도 의미하는 것은 말라기서에서 볼 수 있을 것이다:
모든 민족들이 너더러 행복하다 말할 것이다;
그 이유는 너는 매우 유쾌한 토지이기 때문이다 (말. 3:12).
“땅”이 교회를 표시하는 것은 이사야서에서 보여진다:
너희는 땅의 기초들을 이해 못하느냐? (이. 40:21).
위에서 “땅의 기초들”은 교회의 기초들을 표시한다. 다시:
잘 보라, 나는 새 하늘들과 새 땅을 창조한다 (이. 65:17; 66:22; 계. 22:1).
위의 “새 하늘과 새 땅”은 주님의 왕국과 교회를 표시한다. 스가랴서에서:
여호와, 하늘들을 펼치시고, 땅의 기초를 놓으신 분,
그리고 그분과 더불어 인간의 영을 만들어내신 분 (슥. 12:1).
위는 교회를 뜻하고 있다. 또한 창세기서에서:
시작에서 하느님께서는 하늘들과 땅을 창조하셨다 (1:1).
그리고 하늘들과 땅이 마무리되어졌다 (2:1).
하늘들과 땅의 태생들이 이러하다 (2:4).
위 세 구절의 땅, 각각은 교회를 표시하고, 이것이 창조되었고, 형성되었고, 만들어진 것이다. 요엘서에서:
땅이 그분 앞에서 흔들렸다, 하늘들이 떨었다, 태양과 달이 어두워졌다 (욜. 2:10).
위는 교회와 교회에 있는 것들을 뜻한다; 이것들이 황폐해질 때, “하늘과 땅”이 흔들린다고, “태양과 달”이 어두워진다고, 즉 사랑과 신앙이 (식어진다고) 말해진다.
예레미야서에서:
나는 땅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보라 공허하고 텅빔을;
그리고 하늘들, 그리고 그것들은 빛을 가지고 있지 않다 (예. 4:23).
여기서 “땅”은 교회의 어떤 것이 있지 않은 인간을 명백하게 표시한다. 다시:
온 땅이 삭막해질 것이다; 여전히 나는 깡그리 살라지게 만들지는 않을 것이다;
그 이유는 땅이 슬퍼하고, 위의 하늘들이 검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예. 4:27, 28).
위에서도 역시 교회가 뜻해진다, 교회의 외면들이 “땅”이고, 내면들이 “하늘들”이다, 이에 관해 말해지는 바, 그것들이 그것들 안에 빛이 없어 검어질 것이다, 이는 교회 안에 선의 지혜와 진리의 총명이 더 이상 없기 때문이다. 그때 땅 역시 공허하고 텅빔이다; 그리고 교회이어야 할 교회의 인간도 마찬가지 방식이다. 다른 구절에서 “온 땅”이 교회만을 뜻하는 것을 다니엘서에서 보여질지 모른다:
네째 짐승이 땅 위 네째 왕국일 것이다. 이 왕국은 모든 왕국들과 다르게 있어,
온 땅을 삼킬 것이고, 밟아뭉개고, 조각낼 것이다 (단. 7:23).
“온 땅”은 교회와 교회 속에 있는 것을 표시한다; 그 이유가 말씀은 여느 모독된 저술같이 군주적 왕국들을 취급하지 않고, 거룩한 것들과 교회의 상태들을 취급하는 바, 이것이 여기서 “땅의 왕국들”에 의해 의미된다. 예레미야서에서:
큰 비바람이 땅의 맨끝 부분으로부터 일어날 것이다; 그리고 그 날에
여호와의 죽이심이 땅의 이쪽 끝으로부터 땅의 다른 쪽까지 있을 것이다 (예. 25:32, 33).
위에서 “땅의 이쪽 끝으로부터 땅의 다른 쪽까지”는 교회와 교회 속에 있는 모든 것을 뜻한다. 이사야서에서:
온 땅이 쉼에 있고 조용하다; 그들에게서 노래가 터져나온다 (이. 14:7).
위에서 “온 땅”은 교회를 표시한다. 에스겔서에서:
온 땅이 기뻐환호할 때(겔. 35:14).
위에서 “온 땅”은 교회를 표시한다. 이사야서에서:
나는 노아의 물들이 땅을 넘어 더 이상 가지 않도록 맹세했었다 (이. 54:9)
위에서 “땅”은 교회를 표시한다, 그 이유는 거기서 교회가 다루어지기 때문이다.
말씀에서 “땅”, 또는 “토지”가 교회를 의미하기 때문에 교회이지 않은 것도 의미한다. 그 이유는 모든 단어들이 반대되는 뜻도 상황에 따라 뜻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이방인들의 여러 다양한 토지들의 경우; 일반적으로 이 토지는 가나안의 바깥쪽이다. 그러므로해서 이 토지는 사람들을 지칭하기 위해 사용될 경우, 이는 교회 바깥쪽 사람들, 따라서 외적 인간, 외적 인간의 의지, 즉 인간의 자기 자신, 등을 의미한다. 온 인간 종족이 교회에서이든, 아니든 그들의 상태에 주목하는 것을 제외하면, 온 세계라는 말은 말씀에서 거의 사용되지 않는다. 땅은 지면을 포함하고, 지면은 들판을 포함하는 바, “땅”은 지면, 들판 등등을 다 포함하는 셈이어서 의미 또한 다양하고 많은 것들을 내포한다; 따라서 땅이 갖는 의미는 그 대목의 주제에 관련해서 판단되어진다. 이리하여 분명해지는 것, 노아의 아들들에 의해 가득 찼다는 “온 땅”은 온 세계, 세상, 또는 온 인간 종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교회들 속에 있었던 참되든, 거짓되든, 이 모든 교리들을 의미한다는 말이다.

20절. 그리고 노아는 지면(ground)의 사람이 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는 포도원을 설치했다. “그리고 노아는 지면의 사람(농군)이 되기 시작했다”란 일반적 측면에서 인간은 신앙의 교리적인 것들로부터 가르쳐짐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는 포도원을 설치했다”란 이런 교리들로부터의 교회를 의미한다. “포도원”은 영적 (평면의) 교회이다.

그리고 노아는 지면의 사람되기를 시작했다. 이는 일반적으로 인간은 신앙의 교리적인 것들로부터 가르쳐짐을 의미한다인데, 이는 “지면”의 의미가 교회의 사람, 또는 교회임으로부터 분명해진다. 이 지면에 대하여는 268, 566항에서 살핀 바 있다; 교회가 “지면”이라 불리우는데, 그 이유는 교회가 신앙의 씨, 또는 신앙의 진리들과 선들을 받기 때문이다. “지면”은 “땅”으로부터 구별되어진다. 물론 땅도 교회 역시 의미한다. 그러나 그 다른 점은 신앙과 선행의 차이와 같다. 이는 선행이 신앙을 담고 있는 그릇이듯, 땅은 지면을 담고 있는 그릇의 관계이다. 그러므로 교회가 일반적으로 취급될 때, 이 교회는 “땅”이라 불리우고, 교회가 특별하게 취급 될 경우, 이 구절 같은 경우, “지면”이라 불리운다. 그 이유가 일반적이다라 함은 파생되는 모든 것의 복합체라 말해야하기 때문이다. 고대 교회의 사람에 의해 소유된 교리물들은 태고 교회의 계시들과 지각물로부터 였고, 이것이 보존되어졌던 것이다. 이는 이미 살핀바 있다; 이것 안에서 그들은 신앙을 가졌는데, 오늘날 우리가 말씀을 가지고 신앙을 가진 것과 동일하다. 그들에게 이 교리적인 것들은 그들의 말씀이었다. 노아가 “지면의 사람” 되기를 시작함이란 인간이 신앙의 교리물들에서 가르쳐짐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는 포도원을 설치했다. 이것이 거기로부터의 교회, 포도원은 영적 (평면의) 교회이다는 것은 “포도원”의 의미로부터 분명해진다. 말씀에서 교회들이 “동산들”로, “동산의 나무들”로도 묘사되는 일은 자주 있다. 아예 그렇게 명명하는 경우까지도 있다. 이것은 사랑과 선행에 속하는 그것들의 열매들로부터 이다; 그러므로해서 인간은 “그의 열매를 수단으로 알아진다”라고 성경에서 일컫고 있다. 교회들을 “동산들”, “나무들”, 그리고 “열매들”에 비교하는 것은 천국에서 있는 표현들로부터 유래된다. 거기서 표현할 수 없는 아름다운 동산들이 신앙의 영역에 일치하여 때로 시야에 표출되어진다. 이런 근원으로부터 천적 (평면의) 교회는 갖가지 종류의 나무들이 있는 낙원의 동산으로 묘사되고 있다; 그리고 이 동산의 “나무들”에 의해서는 이 교회의 지각함들이 의미되었다. 그리고 “열매들”에 의해서는 모두 각각의 종류의 사랑의 선들이 의미되었다. 그러나 고대 교회, 영적 (평면의) 교회는 “포도원”에 의해 묘사되었다. 그것의 열매들인 포도들은 선행의 일들을 표현하고 의미하였다.
이는 말씀의 많은 구절들로부터 분명해진다. 이사야서에서:
나는 내 사랑하는 자에게 그의 포도원을 어루만지는 내 사랑하는 자의 노래를 부를 것이 다; 내 사랑하는 자는 기름의 아들의 뿔에 포도원을 세웠다; 그리고 그는 그것 둘레에 울 타리를 만들었다. 그리고 그것을 돌들로 울타리를 했다, 그리고 가장 우량한 포도나무로 포 도원을 설치했다. 그리고 그것 한 가운데에 망대를 지었다, 또한 그 안에 포도즙틀을 설치 했다; 그리고 그는 포도들이 산출할 것이라고 바라보았다, 그리고 이 포도원은 들포도들을 산출했다; 그리고 지금, 오 예루살렘의 주민들과 유다의 사람들아, 나는 나와 내 포도원 사 이를 판결하기를 바란다; 만군의 여호와의 포도원이 이스라엘의 가문들이다
(이. 5:1-3, 7).
위에서 “포도원”은 고대 교회, 고로 영적 (평면의) 교회를 의미한다, 그리고 이것이 이스라엘의 가문이다고 명백하게 말해지고 있다; 그 이유가 말씀에서 “이스라엘”은 영적 (평면의) 교회를, “유다”에 의해서는 천적 (평면의) 교회가 의미되기 때문이다. 예레미야에서:
다시 나는 너를 건설할 것이다, 그리고 너는 건설 될 것이다, 오 이스라엘의 처녀여: 다시 너는 소고를 치고, 즐거움울 만드는 그들의 춤에서 나아갈 것이다; 다시 너는 사마리아 의 산들 위에 포도원을 창설할 것이다 (예. 31:4, 5).
위에서 “포도원들”은 영적 (평면의) 교회를 표시한다; 그리고 주제가 이스라엘인 바, 이를 수단으로 영적 교회가 의미되어진다.
에스겔서에서:
내가 사람들로부터 이스라엘의 가문을 그러모았을 때, 그들은 확신하여 토지에서 거주할 것이고, 집을 건축할 것이고, 포도원들을 세울 것이다 (겔. 28:25, 26).
위에서 “포도원”은 영적 교회, 또는 “이스라엘”이다; 그리고 “포도원을 세우는 것”은 신앙의 진리들과 선들로 가르쳐짐이다. 아모스서에서:
나는 시들어짐과 흰가루병으로 너희를 칠 것이다; 네 동산들의 많은 것과 네 포도원들과 네 무화과 나무들과 네 올리브나무들을 과수 해충이 삼킬 것이다; 이렇게 나는 네게 행할 것이다 (암. 4:9, 12).
위에서 “동산들”은 교회 속의 것들을 표시한다. “포도원들”은 교회의 영적인 것들을, “무화과 나무들”는 교회의 자연적인 것들을, “올리브나무들”은 교회의 천적인 것들을 표시한다; 그런고로 “포도원들”은 영적 교회, 또는 이스라엘 속의 것들을 표시한다. 다시 아모스서에서:
나는 포로된 내 백성 이스라엘을 다시 데려올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황폐된 성들을 건설 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거주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포도원들을 세울 것이다, 그리고 거기로부터 포도주를 마실 것이다; 그들은 동산 역시 만들 것이다, 그리고 그것들로부터의 열매를 먹을 것이다 (암. 9:14)..
“포도원을 세우는 것”은 영적 교회를 세우는 것을 표시한다. 고로 “포도원”은 영적 교회, 또는 이스라엘을 뜻한다.
“포도원”이 영적 교회를 의미하듯, “포도나무” 또한 그렇다; 그 이유가 포도나무는 포도원의 일부분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것들은 교회와 교회 속의 사람도 의미한다. 이를 예레미야서에 찾아볼 수 있다:
이스라엘이 종이냐? 만일 그가 집안에서 태어났다면, 어째서 먹잇감이 되었느냐? 나는 너 를 진리의 씨, 완전히 훌륭한 포도나무로 심었다; 어찌하여 너는 나에게 이상한 포도나무의 뒤틀린 가지들로 변하였느냐? (예. 3:14, 21).
위에서 “포도나무”는 영적 교회를, 또는 이스라엘을 표시한다. 에스겔서에서:
너는 이스라엘의 제 1인자들을 위하여 애곡을 하여라; 네 어머니는 물가에 심어진 이유로 잎이 무성하고 열매가 많이 열리는 포도나무 같은 네 모습이었다 (겔. 19:1, 10).
“포도나무”는 고대의 영적 교회를 표시한다, 이것이 “어머니”이다; 고로 “이스라엘”이 “네 모습에서” 라고 말해진다. 호세아서에서:
이스라엘은 텅빈 포도나무이다, 이것은 자신을 닮은 열매를 내놓는다 (호. 10:1).
“포도나무”는 영적 교회, 또는 이스라엘을 표시한다. 그런데, 위 구절의 경우, 황폐해졌다. 다시:
오 이스라엘아, 네 하느님 여호와에게 돌아오라; 나는 이스라엘에게 이슬로서 있을 것이다; 그의 그림자 안에 거주하는 그들이 돌아올 것이다; 그들은 곡식을 되살릴 것이다, 그리고 포도나무로서 꽃피울 것이다; 그를 기억함은 레바논의 포도주로서 있을 것이다
(호. 14:1, 5, 7).
위에서 “포도나무”는 영적 교회, 또는 “이스라엘”을 표시한다. 모세의 책에서:
실로가 오시기 까지; 그의 어린 나귀가 포도나무에 매여 있고, 그리고 그의 나귀의 새끼는 아름진 포도나무에 매여 있다 (창. 49:10, 11).
이는 주님에 관한 예언이다; “포도나무”와 “아름진 포도나무”는 영적 교회를 표시한다.
포도원의 일꾼들이라는 주님의 비유에서도 마찬가지로 영적 교회들이 의미되었다 (마. 20:1-16; 21:33-44; 막. 12:1-12; 눅. 20:9-16). “포도나무”가 영적 교회를 의미하고, 영적 교회의 제 1의 것이 선행이고, 그 안에 주님은 현존하신다, 그리고 선행을 수단으로 그분은 자신과 인간을 결합하시고, 그리고 그분 자신 만이 모든 선을 작업하신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자신을 포도나무에 비교하시고, 교회의 인간, 또는 영적 교회를 묘사하신다, 이 말씀을 읽어보자, 요한 복음에서:
나는 진정한 포도나무이다, 그리고 나의 아버지는 농부이시다; 열매를 맺지 않는 내 안에 있는 모든 가지를 그분은 가져가신다; 그리고 열매를 맺는 모두 각각의 [가지], 그분은 그 것을 깨끗이 하신다, 그러면 그것은 더 많은 열매를 산출한다; 내 안에 머무르라, 그리고 나는 너희 안에; 가지가 포도나무에 머무르지 않으면, 그 자신으로부터 열매를 맺을 수 없 듯, 너희가 내 안에 머무르지 않으면 너희는 더 이상 (열매를 맺지 못한다); 나는 포도나무 이다, 너희는 가지들[이다]; 내 안에 머무르는 자, 그리고 내가 그 사람 안에 머무르는 자, 동일한 사람은 많은 열매를 산출한다; 그 이유가 나 없는 너희는 아무 것도 할 수 없기 때 문이다; 이것이 나의 명령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했듯,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요. 15:1-5, 12).
위 말씀으로부터 영적 교회가 무엇인지는 분명해진다.

21절. 그리고 그는 포도주를 마셨고 술취했다; 그리고 그는 그의 천막 한 가운데에서 덮혀있지 않은채 있었다. “그리고 그는 포도주를 마셨다”란 영적 교회(인간)이 신앙 속에 있는 것들을 조사하고 싶었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술취했다”란 영적 인간은 조사해보다가 오류에 빠졌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는 자기 천막 한 가운데에서 덮혀 있지 않은채 있었다”란 오류에 빠진 결과 뒤집혀지고 말았다를 의미한다. “천막 한 가운데”란 신앙 속의 교리들 중에서 제일 가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는 포도주를 마셨다. 이는 그가 신앙 속의 것을 조사하고 싶었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는 “포도주”의 의미로부터 분명해진다. “포도원”, 또는 “포도나무”, 이미 살핀 바대로 영적 교회, 또는 영적 교회인 이다; “포도”, “포도송이”는 포도나무의 열매이다. 이는 선행, 또는 선행으로부터 있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포도주”는 선행으로부터 파생된 신앙을 의미한다. 그리고 신앙에 속하는 모든 것들도 의미한다. 그런고로 “포도”는 이 교회의 천적 측면이고, “포도주”는 이 교회의 영적 측면이다. 천적 측면은 의지력으로부터 이고, 영적 측면은 이해력으로부터 이다. 그가 “포도주를 마심”은 그가 신앙에 관한 것을 조사하고 싶었다는 것, 이 조사는 추론들을 수단으로 하였음이 그가 술취함, 즉 오류들에 빠짐으로부터 분명해진다. 그 이유가 이 교회의 사람은 태고 교회인들 같은 지각을 가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선하고 참된 것을 신앙의 교리적인 것들로부터 배워야만 했다. 이 교리적인 것들은 태고 교회의 지각으로부터 수집되고 보존된 신앙에 관한 것들, 한마디로 고대 교회의 말씀이다. 말씀 같이 신앙의 교리적인 것들도 지각 없이는 믿어질 수 없는 많은 경우들이 있었다; 그 이유가 영적인 것들과 천적인 것들은 인간의 납득력을 무한하게 넘어 있기 때문이다. 이러므로 추론이 발생한다. 그러나 자신이 그것들을 납득할 때까지 믿지 않는 자는 결코 믿어질 수 없다. 이는 종종 살핀 바 있다.

말씀에서 “포도들”은 선행과 선행으로부터 있는 것을 의미하는 것, 그리고 “포도주”는 선행으로부터 파생된 신앙, 그리고 그 신앙에 속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래 인용 구절로부터 분명해진다. 이사야서에서:
내 사랑하는 자는 기름의 아들의 뿔에 포도원을 가졌다, 그리고 그는 그것이 포도들을 산 출할 것이다고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것은 들포도를 산출했다 (이. 5:1, 2, 4).
위에서 “포도들”은 선행과 그것의 열매들을 표시한다. 예레미야에서:
내가 정녕 그것들을 그러모을 것이다; 포도나무에 포도가 없다,
무화과 나무에 무화과가 없다 (예. 8:13).
위에서 “포도나무”는 영적 교회를 표시한다; “포도들”은 선행을 표시한다. 호세아서에서:
나는 이스라엘이 광야에 있는 포도들 같음을 발견하였다; 나는 네 조상을 시작에서 무화과 나무에 있는 첫 익은 것으로 보았다 (호. 9:10).
“이스라엘”은 고대 교회를 표시한다; “포도들”은 고대 교회가 선행을 옷입었음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야곱의 아들들을 표시할 때 이 의미는 반대적이다. 미가서에서:
먹을 포도송이가 없다; 내 혼은 첫 익은 무화과를 바란다. 거룩한 사람은 땅으로부터 멸절 되어졌다, 그리고 인간들 사이에 직바른 자는 아무도 없다 (미. 7:1).
“포도송이”는 선행, 또는 거룩한 것을 표시한다; “첫 익은 무화과”는 신앙, 또는 올바른 것을 표시한다.
이사야서에서:
그런고로 여호와께서 말하신다, 포도송이에서 새로운 포도주가 발견되는 바, 누가 말한다, 그것을 파괴하지 말라, 그것 안에 복됨이 있다 (이. 65:8).
위에서 “포도송이”는 선행을 표시한다, 그리고 “새로운 포도주”는 선행의 선들과 이 선에서 파생된 진리들을 표시한다. 모세의 책에서:
그분은 그분의 의복을 포도주에서 빠셨다.
그분의 속옷을 포도들의 피에서 빠셨다 (창. 49:11).
이는 주님에 관련된 예언이다. “포도주”는 천적인 것으로부터의 영적인 것을 표시한다. “포도들의 피”는 영적인 교회들에 관련이 있는 천적인 것을 표시한다. 그런고로 “포도들”은 선행 자체, “포도주”는 신앙 자체를 표시한다. 계시록에서:
천사가 말했다, 그대의 날카로운 낫을 보내라. 그리고 땅의 포도나무의 포도송이들을
그러모으라; 그 이유가 그녀의 포도들이 충분하게 익기 때문이다 (계. 14:8).
위 구절의 주제는 신앙이 없는 때, 즉 선행이 없는 때인 마지막 때이다; 그 이유가 신앙은 선행 외에 다른 것은 아니기 때문, 실체적으로는 선행 자체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어떤 신앙도 더 이상 없다고 말해지면, 이는 선행이 없다가 뜻해진다.
“포도들”이 선행을 의미하듯, “포도주” 역시 선행에서 파생된 신앙을 의미한다. 그 이유가 포도주는 포도로부터 있기 때문이다. 이는 이미 포도원과 포도나무에 관하여 인용한 구절들에서 분명해진다. 또한 아래 구절을 더 보자. 이사야서에서:
즐거움이, 갈멜로부터의 환희가 거두어 가버렸다; 그리고 포도원들에서 노래함이 있지 않을 것이다, 기뻐 떠듬도 있지 않을 것이다; 포도주틀에서 포도주를 밟는 자도 없다;
내가 포도수확의 외침을 그치게 만들었다 (이. 16:5).
“갈멜”인 영적 교회가 황폐해짐을 뜻하고 있다; “포도즙틀에서 포도주를 밟지 않는 것”은 신앙 안에 있는 자가 더 이상 있지 않음을 뜻한다. 다시:
땅의 주민들이 태워졌다, 그리고 사람은 유약하게 남을 것이다; 새로운 포도주가 슬퍼할 것 이다, 포도나무가 시들어질 것이다; 그들이 노래와 더불어 포도주를 마시지 못할 것이다; 독주가 그것을 마시는 그들에게 쓸 것이다; 포도주 때문에 거리들에서 울음이 있을 것이다 (이. 24:6, 7, 9, 11).
위 주제는 황폐된 교회이다, 그리고 “포도주”는 신앙의 진리들을 표시한다. 그것을 무익하게 붙잡고 있다. 예레미야애가에서:
그들이 자기들의 어머니에게 말할 것이다. 곡식과 포도주는 어디 있습니까? 이는 그들이 도성의 거리들에서 부상당한 자되어 혼미해질 때이다 (애. 2:12).
“곡식과 포도주가 어디있습니까?”란 사랑과 신앙이 어디있습니까? 를 의미한다; “도성의 거리들에서”는 진리들을 뜻한다; “그것들 안에서 부상당해짐”은 신앙의 진리들이 무엇인지 모름을 의미한다.
아모스서에서:
나는 포로된 내 백성 이스라엘을 다시 데려올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황폐된 도성들을 건 설하여 그것들에서 거주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포도원들을 세울 것이다,
그리고 거기로부터 포도주를 마실 것이다 (암. 9:14).
위 구절은 영적 교회, 또는 이스라엘을 두고 말함인데, 이 교회가 포도원을 창설하고, 거기로부터 포도주를 마심인데, 이는 선행으로부터 신앙을 가짐 같이 되어갈 때를 서술한다. 스바냐서에서:
그들은 집들을 지을 것이나, 그것들에서 거주 못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포도원들을 가꿀 것이나 거기로부터 포도주를 마시지 못할 것이다 (습. 1:13, 암. 5:11).
위 구절은 반대적 상황이 묘사되고 있다. 이는 영적 교회가 황폐될 때이다. 스가랴서에서:
그들은 힘센 에브라임 같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심정은 포도주를 통하여 기뻐 환 호 할 것이다; 그렇다, 그들의 아들들이 그것을 보고 즐거워 하리라 (슥. 10:7).
위는 유다의 가문을 두고 말해진다, 이는 신앙의 선들과 진리들로부터 그렇게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계시록에서:
그들은 기름과 포도주를 다치게 말아야 한다는 것 (계. 6:6)
천적인 것과 영적인 것을 다치게 해서는 안된다는 것, 또는 사랑과 신앙에 속하는 것에 상처입히는 행동은 있어져서는 안된다는 것을 뜻한다.
“포도주”가 주님에 대한 신앙을 의미하기에, 유대 교회에서 신앙은 포도주를 제물로 바침으로 표현되었다 (민. 15:2-15; 28:11-15, 18-끝절까지; 레. 23:12, 13; 출. 29:40). 그러므로 호세아서에서:
타작마당과 포도즙틀이 그들을 먹이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새로운 포도주가 거기에서 속 일 것이다; 그들은 여호와의 토지에서 거주 못할 것이다; 그러나 에브리임은 이집트로 되돌 아 갈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아시리아에서 불결한 것을 먹을 것이다; 그들은 여호와께 포 도주를 붓지 못할 것이다, [그들의 헌주가] 그분을 흡족하게 못할 것이다 (호. 9:2-4).
위 대목의 주제는 이스라엘, 또는 영적 교회이다. 그리고 이 교회 안에 있는 이들이 지식들과 추론들을 수단으로 신앙의 거룩하고 참된 것을 조사하려듬으로 해서 뒤집고 더럽혔다를 뜻한다. “이집트”는 사실에 입각한 지식(기억 속의 지식), “아시리아”는 궤변(비틀어 추론함)을, “에브라임”은 비틀어 추론하는 이들이다.

그리고 술취했다. 이는 그것에 의해서 오류들에 빠졌음을 의미한다는 것은 말씀에서 “술취함”의 의미로부터 분명해진다. 자기들이 납득한 것 외에는 믿지 않는 자가 술취한 자라 불리운다. 그리고 그는 납득하기 위해 그의 이성이 신앙의 신비들을 수색한다. 그리고 이 수색을 위해 이성은 기억으로부터 이든, 철학이든, 감각적인 것들로부터 행해지기 때문에, 인간은 그것 때문에 오류들 안으로 빠질 수 밖에 없다. 그 이유가 인간의 사고는 단지 지상적, 육체적, 물질적이고, 이로부터 있는 바, 그것에로 꾸준히 기울려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간의 사고 속의 관념들 역시 이것들에 기초를 두고, 종결된다. 이런 것들로부터 신성한 것들에 관하여 생각하고 추론하는 것은 오류들과 곡해함 안으로 그의 자기 자신을 가져다 놓는다; 이런 방법에서 신앙을 포획하는 것은 낙타가 바늘 귀를 통과하는 것과 같다. 이 근원으로부터 있는 오류와 광기가 말씀에서 “술취함”이라 불리운다. 실로 다른 삶에서 신앙의 진리들을 추론하거나 신앙의 진리에 맞서 따지는 혼들, 또는 영들은 주정꾼이 되어 그들 같이 행동한다; 이들에 관한 것은 차 후 주님의 신성한 자비로부터 더 말하겠다.
영들은 그들 서로로부터 선행의 선 안에 있는지, 아닌지에 관하여 완전하게 구별되어진다. 선행의 신앙 안에 있는 이들은 신앙의 진리들에 관하여 추론하지 않는다, 그러나 어떤 것이 그렇다고 말하고, 가능하다면 감각과 기억을 수단으로, 그리고 이성의 분석을 수단으로 그렇다를 확증할 뿐이다; 그리고 그들이 지각 못한 진리가 자기들의 방식 안으로 들어오고 이에 대해 불명확해질 때 그들은 이것을 보류해놓을 뿐, 결코 그것을 의심 안으로 끌고 들어가지 않는다. 하여 그들은 자기들이 납득할 수 있는 것은 매우 조금이었다고 말한다. 그들은 자기들이 납득할 수 없다는 이유로 진리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은 미친짓이라고 여긴다. 선행 안에 있는 이들은 이런 방식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반대의 경우에 있는 이들, 즉 선행 안에 있지 않은 이들은 오로지 어떤 것이 그러한지를 추론하지 않고 어떻게 그것이 그러한지 따지기를 열망할 뿐이다. 그들은 이것이 어떻게 있는지를 알지 않으면, 이것이 그렇다를 믿을 수 없다고 말한다. 이것 만으로부터도 이들의 신앙 없음이 즉시 알려지고, 동시에 모든 것들을 의심할 뿐아니라, 자기의 심정에서 부정하기 까지 한다는 표시이기도 하다; 설사 그들이 이것이 어떻게 그런지를 가르침을 받아도 여전히 불신앙에서 꿈적하지 않고 갖가지 반대될 것을 찾는데 골몰할 뿐, 묵묵히 따름은 영원히 없다. 이런 불순종에서 버티는 이들은 오류에 오류 더미를 쌓는다.
이들, 또는 이들과 비슷할 때, 이들을 두고 말씀에서 “포도주나 독주에 술취한 자”라 일컫는다. 이사야서에서:
이들은 포도주를 통하여 정도를 벗어나고, 독주를 통하여 엉뚱한 길로 가버린다; 성직자들 과 예언자들은 독주를 통하여 잘못한다. 그들은 포도주를 단 번에 꿀꺽들이키고, 그들은 독 주를 통하여 배회한다; 그들은 환상 안에서 실수한다; 모든 식탁들은 토한 것과 더러운 것 으로 차있다. 누구에게 그분은 지식을 가르칠 것인가? 그리고 누구에게 그분은 통보한 것 을 이해하게 만드실 것인가? 젖 떼어져 어미 품으로부터 끌어내진 이들에게 (이. 28:7-9).
위 구절이 뜻하는 것이 무엇인지 분명할 것이다. 다시:
너희는 바로에게 나는 지혜로운 자의 아들이다, 나는 고대의 왕들의 아들이다고 어떻게 말 하려느냐? 그때 네 슬기로운 자들은 어디 있느냐? 그들로 너에게 지금 말하게 하라; 여호 와께서 그녀의 한 가운데에 심술궂음의 영을 섞으셨다; 그리고 그들은 자기들의 일로부터 이집트로 잘못된 길로 접어들게 했다, 마치 술주정꾼이 토하면서 엉뚱한 데에서 헤메듯이 말이다 (이. 19:11, 12, 14).
위 구절에서, “술주정꾼”은 기억적 지식으로부터 천적이고 영적인 것들을 조사하기를 바라는 이들을 표시한다. “이집트”는 이런 지식들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그 자체를 “슬기로운 자의 아들”이라 불리운다. 예레미야서에서:
너는 마시라, 술취하라, 그리고 토하거라, 그리고 자빠져라,
그리고 더 이상 일어나지 마라 (예25:27).
위는 거짓들을 뜻하고 있다.
다윗서에서:
그들은 이리저리 술취한 자같이 비틀거린다,
그리고 모든 그들의 지혜는 다 삼켜져버렸다 (시. 107:27).
이사야서에서:
너희는 오라, 내가 포도주를 가져오겠다. 그리고 우리는 독주로 술취할 것이다;
그리고 오늘 풍부함 같이 내일도 그렇게 있을 것이다 (이. 56:12).
위는 신앙의 진리들에 반대되는 것을 두고 말해진다. 예레미야서에서:
모든 병이 포도주로 채워질 것이다; 예루살렘의 모든 주민들은 술취해질 것이다.
(예. 13:12, 13).
위에서 “포도주”는 거짓을 표시한다; “술취함”은 오류들을 표시한다. 요엘서에서:
깨어라, 너 술주정꾼아, 그리고 슬피 울라; 악쓰거라, 너 포도주를 마신 자들아, 새 포도주 때문이다, 그 이유가 그것이 네 입으로부터 잘리울 것이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어떤 민족 이 내 토지에 다가와 있기 때문이다; 그는 내 포도주를 황폐해지게 방치했다 (욜. 1:5-7).
위는 신앙의 진리 측면에서 황폐해질 때의 교회를 두고 말해졌다. 계시록에서:
바빌론은 모든 민족들을 그녀의 음행의 분노의 포도주를 마시게 했다; 땅에 거주하는 그들 은 그녀의 음행의 피로 술취하게 만들어졌다 (계. 14:8, 10; 16:19; 17:2; 18:3; 19:15).
“음행의 포도주”는 섞음질 된 신앙의 진리를 뜻한다, 이로부터 술취함이 서술된다. 예레미야서에서:
바빌론은 여호와의 손에 있는 금 잔을 가지고, 모든 땅을 술취하게 만들었다; 민족들이 그 녀의 포도주로 술취했다. 그러므로 민족들이 미쳐있다 (예51:7).
“술취함”이 신앙의 진리들에 대한 광기를 의미하기 때문에 이 의미를 표현하고 동시에 아론과 그의 아들들에게 금하여졌다, 그런고로:
네가 만남의 천막으로 갈 때, 네가 죽지 않도록 너는 포도주나 독주를 마시지 말라, 네 아 들들 역시 그러하다; (술취함이 없어야) 너희는 거룩한 것과 모독인 것 사이의 차이를, 깨 끗한 것과 불결한 것 사이의 차이를 구별할런지 모른다 (레. 10:8, 9, 10)
감각과 기억 속의 것들을 수단으로 납득되지 않으면 믿지 않는 이들이 “마시는 영웅들”이라 아래에서 말해진다. 이사야서에서:
자신의 눈에서 슬기롭다, 자신의 얼굴 앞에서만 총명하다 하는 자들에게 화가 있다! 포도주 를 마시기에 영웅들인 자들에게, 독주를 혼합하는 용사들에게 화가 있다! (이. 5:21, 22).
그들이 “자신들의 눈에서 슬기롭다, 자신들의 얼굴 앞에서 총명하다” 불리운다, 그 이유는 신앙의 진리들에 반대하여 추론하는 이들은 타인들 보다 자신이 더 슬기롭다 생각하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말씀과 신앙의 진리들에 아무 관심도 없는 이들, 신앙에 관하여 알려들지 않는 이들, 신앙의 첫째되는 원리들을 부인하는 이들은 “포도주 없이 술취함”이라고 불리운다. 이사야서에서:
그들은 술취해 있다, 그러나 포도주가 아니다; 그들은 비틀거린다, 그러나 독주를 마셔서 가 아니다; 그 이유는 여호와께서 너희 위에 깊은 잠의 영을 부으시어, 너희 눈이 닫혀졌기 때문이다 (이. 29:9, 10).
이런 것이 그들의 품질임은 이 예언서의 앞 뒤 문맥으로부터 분명해진다. 이와 같은 “술취한 자들”은 자신들이 타인들 보다 더 폭넓게 깨어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들은 깊은 잠에 빠져있다. 시작에서의 고대 교회는 이 절에서 묘사된 것 같았다, 특히 태고 교회의 지주로부터 있던 이들이다.

그리고 그는 자기 천막의 한 가운데에서 덮혀져 있지 않았다. 이는 술취함에의해서 곡해된 것을 의미하는데. 이는 “덮혀져 있지 않음”, 또는 “벌거벗음”의 의미로부터 분명해진다. 그 이유가 그는 포도주의 술취함으로부터 덮혀져있지 않음이라 불리우기 때문, 즉 노아에게 신앙의 진리들이 없기 때문, 더 나아가 노아 안에서 신앙의 진리들이 곡해되었기 때문이다. 신앙의 진리들이 그 자체만 생각하면 선행의 선들, 또는 선행 자체를 덮는 의복들에 비교된다; 그 이유가 선행은 몸 자체이기 때문, 그러므로 진리들은 몸의 의복이다; 또는 똑같은 비교로, 선행은 혼 자체이고 신앙의 진리들은 몸과 같고, 이것이 혼을 옷입히고 있다. 신앙의 진리들은 말씀에서도 역시 “의복들”, 그리고 “덮개”라 불리운다. 그러므로 23절에서 셈과 야벳이 의복을 가져다가 자기 아버지의 벌거벗음을 덮었다. 천적인 것에 관련해 영적인 것들은 혼을 덮는 몸과 같고, 신체를 옷입히는 의복들과 같다; 그리고 천국에서 영적인 것들은 의복들에 의해 표현되어진다. 이 구절에서 그는 덮혀져있지 않고 누워있다라고 말해지기 때문에, 그가 신앙의 진리들을 감각 속의 것들과 감각으로부터 추론함을 수단으로하여 신앙의 진리들을 조사하기를 바램으로 인해 오히려 자신으로부터 신앙의 진리들을 벗긴 것이다. 포도주로 술취함으로부터 벗은 채 누움을 수단으로 말씀에서 같은 것이 의미되어진다; 예레미야애가서에서:
우스 토지에 거주하는 에돔의 딸아, 기뻐환호하고 즐거워하라; 잔이 너를 통과해 갈 것이 다; 너는 술취할 것이다. 그리고 네 자신을 벌거벗게 만들 것이다 (애. 4:21).
그리고 하박국서에서:
동료의 벌거벗음 쳐다보려고 자기 동료를 마시게해서
술취하게 하는 자들에게 화가 있다 (합. 2:15).

“천막의 한 가운데”는 신앙의 제 1의 것을 의미하는데, 이는 “한 가운데”와 “천막의 한 가운데”로부터의 의미로부터 분명해진다. 말씀에서 “한 가운데”는 가장 안쪽을 의미한다, 그리고 “천막”은 선행, 선행으로부터의 예배이다. 선행이 가장 안쪽이다, 즉 신앙과 예배의 제 1의 원리이다. 그런고로 “천막의 가장 한 가운데”이다.

22절. 그리고 가나안의 아버지, 함은 자기 아버지의 벌거벗음을 보았다, 그리고 밖에 (나가) 자기 두 형제에게 말했다. “함”과 “가나안”은 앞 절에서와 같은 의미이다. 즉, “함은 부패된 교회를, “가나안”은 내적 예배 없는 외적 예배를 의미한다. “자기 아버지의 벌거벗음을 보았다”란 부패된 교회가 위에서 언급된 것 즉 오류와 뒤집혀져 곡해된 사항들을 관찰했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의 두 형제에게 말했다”란 부패된 교회가 오류와 곡해된 것을 보고 비웃었음을 의미한다. 그들이 자기 “형제들”이라 불리우는데, 그가 신앙을 고백했기 때문이다.

“함”이 부패된 교회를 의미하는데, 이는 함에 관해 앞에서 말해진 바로부터 분명해진다. 교회가 말씀을 인정하고, 진정한 교회의 것과 비슷한 어떤 예배를 드리고 있으나, 여전히 선행으로부터 신앙을 분리하는 바, 신앙의 실체로부터와 신앙의 생명으로부터 떼어내는 바, 이로인해 신앙은 죽은 일상의 일 같은 수준으로 전락된다. 이에 따른 필연적 결과가 교회가 부패되는 것이다. 이때 교인이 되어가는 모습은 그들이 양심을 가지고 있지 않다 인데 이는 곰곰이 생각만 해도 왜 그런지가 분명해진다; 그 이유가 진짜 양심인 양심은 선행으로부터가 아니면 존재가 가능할 수 없기 때문이다. 선행이 양심을 만든다. 즉 선행을 통하여 주님께서 양심을 만드신다. 간단히 말해서 양심은 누군가에게 악행을 하지 않는 것, 그가 잘되기를 바라는 것 밖에 더 없지 않을까? 그런고로 양심은 선행에 속한다, 그리고 신앙이 선행으로부터 분리되는 상황에서 양심은 결코 없다. 이런 자가 양심을 가졌다고 우긴다면, 그것은 가짜 양심일 뿐이다; 그들이 양심 없이 있기 때문에, 그들은 바깥 제약 조건이 느슨해졌다 하면 모든 사악함 안으로 돌진해간다. 그들은 선행이 무엇인지 아는 것도 없다. 단지 뭔가를 의미하는 단어이겠지의 수준에서 아는 것 뿐이다. 그들이 선행 없이 있을 때, 그들은 신앙이 무엇인지 모른다. 설사 신앙이 무엇이냐고 질문 받을 경우, 그들은 그것은 일종의 생각함이다고, 어떤 이는 그것은 확신함이다고, 어떤 자는 신앙의 지식들이다고 답한다. 신앙에 관한 위의 진실이 그들에게 말해지고 곰곰이 생각해 볼 기회를 준다면, 그들은 모든 사랑은 자기로부터이다고, 자신과 자기 가족을 돌보지 않는 자는 이교도 보다 더 나쁘다고 말할 뿐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자신과 세상 밖에 더 공부할 것은 없다. 그로부터 그들을 맞이하는 것은 자기 자신 안에서 사는 것이다. 이런 자들이 “함”이라 불리운다.

여기서 “함”, 그리고 “가나안”이라 불리는 자들, 즉 신앙을 선행으로부터 분리하는 자들, 예배를 외적인 것에 한정시키는 이들은 양심이 무엇이며, 어디로부터 있는지를 알 수 없는 바, 간략히 적어둘 필요가 있다. 양심은 신앙의 진리들을 수단으로 만들어진다. 그 이유가 그가 들었고, 인정했고, 믿었던 것이 양심을 만들기 때문이다. 그 후에 이런 것들에 반대되어 행동하는 것은 그에게 있어서는 양심에 반대되는 행동을 하는 것이 된다. 이는 설명하지 않아도 모든 자에게 자명하다; 이렇게 인간은 듣고, 인정하고, 믿는 신앙의 진리가 있지 않으면, 그에게 진정한 양심을 가지는 것도 가능할 수 없다. 그 이유가 주님이 선행 안에서 일하시는 신앙의 진리를 통하여 인간은 거듭나지기 때문, 그러므로 신앙의 진리들을 통하여 그는 양심을 받는다. 양심은 새로운 인간 자신이다. 이로부터 분명한 바, 신앙의 진리들은 수단이다는 것, 즉 인간은 신앙이 가르치는 것에 따라 산다는 것, 신앙의 제 1의 원리는 주님을 무엇보다 먼저 사랑하고, 그의 이웃을 자신 같이 사랑하는 것을 살아내는 것이다. 그가 이렇게 살지 않으면, 그의 신앙은 왁자지껄한 소리의 단어들의 나열에 불과한 텅빈 일상 업무 수준, 천국의 삶과는 무관해진, 하여 일말의 구원 가능성도 가지지 않은 신앙 밖에 더 무엇이겠는가?
인간이 어떻게 산다 할지라도, 그가 신앙을 가진 조건이라면 그는 여전히 구원될 것이라고 믿는 것, 이는 만일 그가 선행을 가지지 않은 상태, 따라서 양심이 없는 상태, 즉 그가 자기 삶을 증오와 복수, 강도 간음질, 한마디로 선행과 양심에 반대되어 죽음 직전까지도 살았다 해도, 그가 믿는다고 아멘 하는 말을 계속하는 한, 그는 구원될 수도 있다고 말하는 것이나 한 가지이다. 거짓 원리 안에 있는데, 거짓된 양심 아닌 진정한 양심을 만들어 줄 무슨 신앙의 진리들을 그가 지니고 있을까? 이런 자라해도 자기는 양심을 가지고 있다고 상상한다면, 이는 필시 외적인 속박에 의한 것, 법의 두려움, 명예 손실의 걱정, 등등의 속박 때문에 억제된 행동에서 비롯된 것일 뿐이다. 이것 가지고 그들은 양심이라 말한다. 이것은 이웃에게 피해를 입히지 않고 더 나아가 이웃에게 선을 행하도록 인도해주지 못한다. 단지 자기 명예나 얻고저 하는 것에 필요할 경우에서만 그를 선한 일로 인도하는 바, 그에게 선행은 겉치레 수준이다. 이것이 양심도, 선행도 아니기 때문에 그를 억누른 제약이 풀린다면, 그는 겉잡을 수 없는 사악함으로 즉각 매진한다. 그러나 이런 경우도 있을 수는 있다. 그가 신앙 만으로 구원받는다고 선포는 했지만, 여전히 선행의 삶을 사는 이들의 경우이다; 그 이유가 그들의 신앙 안에는 주님으로부터의 선행을 가졌기 때문이다.

“가나안의 아버지”는 내적 예배 없는 외적인 것들만의 예배를 의미하는데 앞에서 이미 말했다. 선행으로부터 분리된 신앙으로부터서는 이와 다른 예배는 출현할 수 없다; 그 이유가 내적 인간이 선행인 바, 선행 없는 신앙은 결코 없다; 선행이 결여된 자는 내적인 것 없는 외적 예배 외의 다른 예배는 가질 수 없다. 그리고 이런 예배는 선행으로부터 분리된 신앙으로부터 출시되기 때문에, 함은 “가나안의 조상”이라 불리운다. 그리고 뒤잇는 것에서는 함이 취급되지 않고 가나안이 취급된다.

자기 아버지의 벌거벗음을 보았다. 이는 그가 오류들과 곡해된 것들을 관찰했다를 의미하는데, 이는 “벌거벗음”의 의미로부터 분명해진다. 벌거벗음은 악하고 곡해된 것(타락한 것, 뒤집힌 것)이다. 여기서 선행으로부터 분리된 신앙 안에 있는 이들이 “자기 아버지의 벌거벗음을 보는”, 즉 그의 오류들과 곡해됨들을 관찰하는 “함”에 의해 묘사되고 있다; 그 이유가 이 품성 속에 있는 이들은 인간 안에서 오류와 곡해된 것 외의 것들은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와는 정반대의 품성 속에 있는 이들, 즉 선행의 신앙 안에 있는 이들은 인간 안에 있는 선한 것을 주목하고, 그리고 만일 그들이 악하고 거짓된 어떤 것을 보면, 그것을 수정해주려 노력한다. 마치 본문의 셈과 야벳의 경우와 같다. 선행 없는 곳에는 자기를 사랑함이 있다. 그러므로 자기를 좋아하지 않는 자를 향해서는 증오만 끓어오른다. 결과적으로 이런 인물들은 이웃 안에서 악한 것만을 본다, 그리고 만일 그들이 선한 어떤 것을 본다면, 그들은 그것은 별 것 아닌 것으로 치부하든가, 그것에 나쁜 해석을 덧붙인다. 선행 안에 있는 이들의 방법은 이와 아주 다르다. 이 차이를 수단으로 인간들의 두 종류는 서로로부터 구별되고, 저세상에 오면 극명하게 구별된다. 그 이유가 선행 없는 자와 더불어 증오의 느낌은 그의 사사건건에 표를 내기 때문이다; 그들은 모든 이를 조사하고 싶어한다. 아예 판단하기조차 한다; 그들은 타인에게서 악한 것을 발견하고 싶은 것 외에 더 바라지 않는다. 그 이유는 그들은 타인을 단죄하고, 처벌하고, 고통을 안기는 것만을 꾸준히 하려는 경향이 강하다. 그러나 선행 안에 있는 이들은 타인의 악을 거의 보지 않는다, 그러나 타인에게 있는 모든 선들과 진리들에 주목하고, 그들의 악하고 거짓된 것에 선의의 해석을 주려 모색한다. 이런 경우가 모든 천사들이다. 그들은 이런 경향성을 모든 악을 선으로 구부리시려 하는 주님으로부터 가지고 있다.

그리고 밖에 있는 자기 두 형제에게 말했다. 이는 그가 비웃었음을 의미하는데, 이는 말해져왔던 것의 결말로서 뒤잇는다. 그 이유가 선행 없는 이들에게 따라붙어다니는 타인을 경멸함, 또는 조롱함은 타인에게서 오류들이 발생하면 그때마다 떠들어댐 같은 짓은 계속 하기 때문이다. 그들이 공개적으로 이런 짓을 즐기지 않는 경우란 그들에게 있는 외적 속박, 즉 법의 두려움, 생명의 손실, 명예나 이득의 손실, 등등 자신에게 불리할 경우 뿐이다; 그들이 이런 짓을 내향적으로 흠모하고, 외향적으로는 친구인체 한다. 이 방법에서 그들은 두 영역을 획득하는데, 저세상에서는 분명하게 지각된다; 하나는 내면의 측면, 증오들로 차있다; 다른 하나는 외면의 측면, 선한 것을 흉내내는 것이다. 그런데 이 두 영역들은 완전 불일치하는 바, 그것들은 충돌할 수 밖에 없다. 그러므로 외면의 영역이 그들로부터 거두어지고, 그들은 내면의 증오들을 숨길 수 없게되어 그들은 모든 사악함으로 치닫는다; 이것이 거두어지지 않을 경우, 그들이 내뱉는 모든 말 하나하나는 증오함이 잠복하고 있다. 이것이 지각되는 바, 이로부터 그들의 처벌과 고통이 온다.

그들이 “자기 형제”라고 불리운 것은 그가 신앙을 고백했기 때문인데, 즉 선행은 신앙의 형제이다.

23절. 그리고 셈과 야벳은 의복을 찾아들고, 그것을 둘의 어깨 위에 얹고, 뒷걸음으로 가서 자기 아버지의 벌거벗음을 덮었다. 따라서 그들의 얼굴은 뒤쪽을 향했는 바 그들은 자기 아버지의 벌거벗음을 보지 않았다. “셈은 내적 교회를 의미함은 이미 말했다. “야벳”은 내적 교회에 상응되는 외적 교회를 의미한다. “의복을 찾아 들었다”란 이 두 교회는 오류와 뒤집혀진 교리를 조롱하지 않고 좋은 쪽으로 해석했음을 의미한다. “의복을 둘의 어깨 위에 얹었다”란 이 두 교회는 성의를 다해 좋은 쪽으로 해석했음을 의미한다. “뒷걸음으로 갔다”란 이 두 교회는 오류와 곡해된 사항에 동의하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자기 아버지의 벌거벗음을 덮었다”란 이 두 교회는 오류와 곡해된 것을 너그러이 보아주었음을 의미한다. “그들의 얼굴은 뒤쪽을 향했는 바 그들은 자기 아버지의 벌거벗음을 보지 않았다”란 오류나 곡해된 사항을 두고 악담이나 조롱하기 보다는 너그러이 보아 주되 추론함으로부터 야기되는 오류나 실수에 동의해서는 아니됨을 의미한다.

“셈”에 의해 내적 교회가, “야벳”에 의해 내적 교회와 상응하는 외적 교회가 의미되는 것은 이미 상술했다. 교회가 있는 곳에는 내적인 것과 외적인 것이 반드시 필요하다; 그 이유가 교회인 인간은 내적이고 외적이기 때문이다. 그가 교회가 되기 이전, 즉 그가 거듭나기 이전, 인간은 외적인 것들 안에 있다; 그가 거듭나질 때, 그는 외적인 것들로부터 인도된다. 즉 외적인 것들을 수단으로 내적인 것들 쪽으로 안내받는 격이다. 이것 역시 살핀 바 있다. 그가 거듭나졌을 때, 내적 인간의 모든 것들은 외적인 것들 안에 종결되어 있다. 그런고로 모두 각각의 교회는 이 둘이 반드시 있음에 틀림없고, 이는 고대 교회에서나 지금의 기독 교회에서나 공히 같은 이치이다.
고대 교회의 내적인 것들은 선행과 선행에서 파생된 신앙으로부터의 모든 것들이었다. 즉 그들의 모든 겸허함, 주님을 경배함은 선행으로부터, 이웃을 향한 모든 선한 애착, 그와 다른 것들 모두 선행으로부터 도래되었다. 고대 교회의 외적인 것들, 즉 제물이나 포도주를 바침, 그외 다른 외적인 것들도 이를 통한 표현을 수단으로 주님에 관계를 가졌고, 그 모든 것에서 주님은 중요시 되었다. 이로부터 그들의 내적인 것들은 그들의 외적인 것들 하나하나에 들어 있다. 그래서 그것들은 하나의 교회를 만들었다. 기독 교회의 내적인 것들 역시 고대 교회의 내적인 것들과는 조금도 다르지 않고 외적인 것들만 다를 뿐이다. 즉 제물이 아닌, 예식이 주어진 것이다. 이 예식으로부터 주님은 중요시되어진다. 그런고로 기독 교회에서도 내적인 것들과 외적인 것들은 하나를 만든다.
고대 교회는 내적 측면에서 기독 교회와 한 조각도 다르지 않다. 단지 외적인 것들에서 다를 뿐이다. 선행으로부터 주님을 예배함은 외적인 것들이 어떻게 변하고 다양해진다 해도 결단코 다르지 않다. 여러 번 반복해 말했듯이 교회는 내적, 외적 모두 있어야 교회이다. 외적인 것 없는 내적인 것은 오리무중한(interminate) 어떤 것인바, 외적인 것에 종결되어야 한다. 그 이유가 인간은 대체로 내적 인간이 무엇인지, 무엇이 내적 인간에 속하는 것인지 알지 못하고 지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외적 예배가 있지 않으면, 그는 거룩한 것에 관한 무엇이든 알지 못한다. 선행과 이에서 파생된 신앙을 가질 때 그는 외적 예배 안에서 자신 안에 내적 예배를 가진다; 그 이유가 이들 안에서 주님께서는 선행과 양심 안에서 일하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의 모든 예배는 내적인 것의 분담자가 되어진다. 선행과 이에서 파생된 신앙을 가지지 않은 경우는 이와는 딴판이다. 그들도 외적 예배를 가지기는 마찬가지 일지 모르나, 내적 예배로부터 분리되어 있고, 마치 그들은 선행으로부터 분리된 신앙을 가진 셈이다. 이와 같은 예배가 “가나안”이라 불리고, 이런 신앙이 “함”이라 불리운다. 그리고 이 예배가 분리된 신앙으로부터 출시되기 때문에, 함은 “가나안의 아버지”라 불린다.

의복을 가져왔다. 그들이 선 쪽에서 해석했음을 의미하는데, 이는 이미 말해진 것으로부터 분명해진다. 누군가에게 “의복을 가져가고 벌거벗음을 덮는다”는 것은 “덮혀있지 않음”과 “벌거벗음”이 오류들과 곡해됨들 이다를 아는 이상 더 다른 의미는 가질 수 없다.

그리고 그것을 어깨 위에 얹었다. 그들이 이것, 즉, 자기들의 성의를 다해(힘닿는대로) 선 쪽에서 해석하고 너그러이 봐 주었다를 의미하는 것은 “어깨”의 의미가 모든 힘이다로부터 분명해진다. 말씀에서 “손”은 힘(power)을 의미한다; 그리고 “팔”은 더 큰 힘을, “어깨”는 모든 힘(전력을 다함)을 의미한다. 아래 인용 구절에서 이를 확인해보자. 에스겔서에서:
너희가 옆구리와 어깨로 밀어뜨린다, 그리고 네 뿔들로 병든 모든 양들을 밀쳐내는데,
너희는 그것들이 뿔뿔이 흩어질 때까지 이다. (겔. 34:21).
“옆구리와 어깨로”란 모든 혼과 힘을 다하여를, “네 뿔들로 밀어냄”은 모든 강함을 다하여를 뜻한다. 다시:
이집트의 모든 주민들은 내가 여호와인 줄을 알런지 모른다. 그 이유는 그들이 이스라엘 가문에게 갈대 지팡이 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너를 손으로 붙잡지만 너희는 부러뜨릴 것 이고, 그들은 모든 어깨를 찟길 것이다 (겔. 29:6, 7).
이는 영적 진리를 기억 속의 지식을 수단으로 탐구하기를 바라는 이들을 두고 말해진다. “갈대 지팡이”란 이런 힘을 표시한다; “손으로 붙잡음”이란 그 속에 신뢰를 둠을 뜻한다; “모든 어깨를 찢음”은 아무 것도 알지 못하게 모든 힘을 박탈함을 뜻한다.
스바냐서에서:
그들 모두는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한 어깨로 여호와를 섬길런지 모른다 (습. 3:9).
한 혼, 고로 한 힘으로를 뜻하고 있다. 스가랴서에서:
그러나 그들은 귀담아듣지 않고, 고집센 어깨를 돌려댔다 (슥. 7:11).
그들은 자기들의 온 힘을 다해 저항했다를 뜻한다. 이사야서에서:
그들이 대장장이를 고용한다. 그는 금과 은을 가지고 신으로 만든다;
그들이 숭배한다, 그렇다, 그들은 엎드려 절한다;
그들은 그것(우상)을 어께 위에 메고 다닌다, 그들은 그것을 운반한다 (이. 46:6, 7).
다시:
그 이유가 우리에게 한 어린 아이가 태어나지고. 우리에게 한 아들이 주어진다; 그리고 통 치함이 그분의 어깨 위에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분의 이름은 경이로우신 분, 위로하시는 분, 하느님, 영웅, 영원의 아버지, 평화의 제 1인 자라 불리실 것이다 (이. 9:6).
이는 주님을 두고 말해진 것, 그분의 권능, 그분의 힘에 관해 말해진다; 그러므로 말해진다. “그분의 어깨 위에.” 다시:
다윗의 가문의 열쇠를 나는 그분의 어깨 위에 놓는다; 그리고 그분은 여시고 아무도 닫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그분은 닫으실 것이다. 그리고 아무도 열지 못할 것이다 (이. 22:22).
이 구절도 앞 구절 같이 주님에 관련해 말하신다. 이 구절은 그분의 권능과 권위를 뜻한다.

그리고 뒷걸음으로 갔다. 이는 그들이 오류들과 곡해됨에 관심의 초점을 두지 않았다는 것은 “뒷걸음으로 감”의 의미가 눈을 비키게함과 보지 않음이다로부터 분명해진다; 이는 뒤이어지는 것으로부터 분명해진다. 거기서, 그들은 아버지의 벌거벗음을 보지 않았다고 말해진다. “보지 않음”은 내적 의미에서 관심을 두지 않음이다.

그리고 자기 아버지의 벌거벗음을 덮었다. 이는 그들이 오류와 곡해된 것들을 너그러이 봐 주었음을 의미하는데, 이는 연결 문맥으로부터, 그리고 “벌거벗음”의 의미가 곡해됨이다로부터 분명해진다.

그래서 그들의 얼굴은 뒤쪽을 향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자기 아버지의 벌거벗음을 보지 않았다. 추론함으로부터서는 오류와 실수가 있을 수 밖에 없는 바, 그것을 탓하기 보다는 너그러이 봐 주어야 하지 않겠느냐를 의미하는데, 이는 말이 반복됨으로부터 분명해진다; 그 이유가 거의 같은 말이 여기서 반복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뒤쪽의 말은 결말을 만들고 있다. 그 이유가 고대 교회의 부모되는 교회, 또는 교인의 특성상 벌어진 사건일 뿐, 악의가 있는 것은 아니고, 천진난만함으로부터 발생된 일이다는 것은 이어지는 말, “노아는 포도주로부터 깨어났다”, 즉 더 나은 가르침을 받았다로부터 분명해진다. 어쨌든 이 구절 만에 집중해보면, 우리는 이렇게 말할런지 모른다. 즉 선행 안에 있지 않은 이들은 이웃을 향해 악 밖에 생각하는 것이 없고, 말하는 것마다 악 뿐이다; 만일 그들이 선한 어떤 것을 말한다면, 이는 필시 자신들을 위해서이고, 또는 친구인 체하며 자신의 이득을 염두에 두고 있다; 이에 반해, 선행 안에 있는 이들은 이웃을 향해 선 만을, 이웃이 잘되기 만을 바란다. 이들은 자기 위주가 아닌 선행 안에서 일하시는 주님으로부터 모든 것의 중요도를 가늠한다. 전자는 인간과 더불어 있는 악령들과 같고 후자는 천사들과 같다, 악령들은 인간 안에 있는 악하고 거짓된 것 만을 휘젖고 그를 단죄한다; 그러나 천사들은 인간 안에 있는 선하고 참된 것만을 흥분시키고, 악하고 거짓된 것은 너그러이 봐 준다. 이로부터 분명한 바, 선행 없는 이들과 더불어서는 악령들이 통치하고, 이를 통하여 지옥과 교류한다는 것, 선행 안에 있는 이들은 천사들이 통치하고, 이를 통하여 그는 천국과 교류한다는 것이다.

24절. 그리고 노아는 그의 포도주로부터 깨어났다, 그리고 자기의 작은 아들이 자기에게 했던 짓을 알았다. “노아는 그의 포도주로부터 깨어났다”란 영적 교회(인간)가 더 나은 가르침을 받았을 때를 의미한다. “자기의 작은 아들이 자기에게 했던 짓을 알았다”란 내적 예배에서 분리된 외적 예배는 타인의 허물을 약점으로 삼거나 조롱거리감으로 여기는 짓 밖에 하지 않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노아는 그의 포도주로부터 깨어났다. 이는 그가 더 나은 가르침을 받아 쓸 때를 의미하는데, 이는 술취함으로부터 “깨어남”의 의미로부터 분명해진다. 즉 그가 “술취했을” 때(21절)는 그가 오류와 곡해된 것에 빠져 있을 때이고, 그가 “깨어남”은 그가 오류들로부터 빠져나옴이기 때문이다.

그의 작은 아들이 자기에게 했던 것. 이는 내적 예배로부터 분리된 외적 예배는 오류와 곡해함들을 비웃는다를 의미한다. 이것은 글자 의미 내지 역사적 의미로부터 마치 함이 노아의 작은 아들에 의해 뜻해진 것처럼 나타나나, 다음 절을 보면 가나안이 뜻해짐이 분명하다. 그 이유가 다음 절에서, “가나안은 저주 받으라”하고 말해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26, 27절도 참고할 수 있다. 그 이유가 가나안은 종이 되어라 하고 말해지기 때문이다. 함이 여기서 언급되지 않은 것은 다음 절에서 살핀다. 여기서는 사람의 이름이 셈, 함, 야벳, 그리고 가나안의 순서로 왜 언급되는지 만을 살핀다. 선행은 교회의 첫 번째, 또는 셈이다; 신앙은 두 번째이고, 함이다; 선행으로부터의 예배가 세 번째이고, 야벳이다. 그리고 신앙과 선행 없는 외적인 것만으로의 예배가 네 번째, 가나안이다. 선행은 신앙의 형제이다. 그러므로 선행으로부터의 예배도 형제이다; 그러나 선행 없는 외적인 것 만으로의 예배는 “종들의 종”이다.

25절. 그리고 그는 말했다. 가나안은 저주된다. 자기 형제들에게 종들의 종일 것이다. “가나안은 저주를 받으라”란 내적인 것에서 분리된 외적인 것은 자신을 주님으로부터 비켜서게 함을 의미한다. “자기 형제들에게 종들의 종이 되라”란 내적 예배에서 분리된 외적 예배는 교회 내에서 가장 천박한 것임을 의미한다.

가나안은 저주된다. 내적 예배에서 분리된 외적 예배는 그 자체를 주님으로부터 비켜서게 한다를 의미한다. 이는 “가나안”의 의미와 “저주됨”의 의미로부터 분명해진다. “가나안”이 내적 예배로부터 분리된 외적 예배를 의미하는 것은 가나안에 관하여 이미 살핀 내용으로부터, 그리고 그에게 “저주됨”이라 말해지고, “종들의 종이 됨”으로부터도 분명해진다. 더구나 셈과 야벳의 종인 자는 교회 자체로부터 분리된 어떤 것, 즉 외적인 것만에 국한된 어떤 것일 수 밖에 없다. 이는 “저주됨”의 의미가 자기를 비켜세움 이다로부터도 분명해진다. 그 이유가 주님은 누구이든 결코 저주하시는 일이 없고, 성내시는 일도 없으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신을 주님으로부터 비켜서게하여 저주하는 자는 정작 그 인간 자신이다. 이에 대한 설명은 이미 되어진 바 있으므로 223, 245, 592항을 참조하기 바란다. 하늘이 땅에서 떨어져 있듯, 주님과 저주함, 성내심은 멀다. 전지전능이신 주님, 그분의 지혜로 우주를 통치하시는 주님, 모든 허약함은 추월해 계신 그분이 인간에게 있는 결함들, 자신이 무엇을 하는지도 알지 못하는 인간들, 악 밖에 지닌 것이 없는 인간의 속성을 뻔히 아시는 주님이 인간의 허약한 것 때문에 성내시고 저주하신다 말하면, 누가 이를 믿을 수 있을까? 그러므로 주님에게 있어 성내심은 가당치 않고 자비하심 만이 가능하시다.
여기에 알카나(신비함)가 내포되고 있다는 것은 이로부터서만 알런지 모른다. 비록 함이 아버지의 벌거벗음을 본 당사자이고 이를 자기 형제에게 말한 자이지만, 여전히 함은 저주되지 않고, 그러나 그의 아들 가나안이 저주 받는다는 대목이다. 가나안은 함의 하나 뿐인 아들도, 첫 출생도 아니고 단지 순서상 네 번째 일 뿐이다. 창. 10:6을 보면 이를 알게 된다. 이 구절에서 함의 아들들이 열거되는데, 그 순서는 구스, 미스라임, 붓, 가나안이다. 더구나 신성한 법에 의하면, 아들이 아버지의 죄를 짊어지지 않는다. 에스겔서를 보면:
죄짓는 혼, 그것이 죽을 것이다; 아들은 아비의 불법을 짊어지지 않는다, (반대로) 아비는 아들의 불법을 짊어지지 않는다. (겔. 18:20; 신. 24:16; 왕하 14:6).
위 인용 구절과 비슷한 대목은, 아비의 벌거벗음을 본 것, 그것을 형제에게 말한 불법이 경미한 듯 여겨져 전체 후손이 이것 때문에 저주 되어질 수 없는 듯 나타나고 있다는 점이다. 이런 정황으로부터 신비함들(arcana)이 여기에 포함되어 있음은 분명해진다.
“함”이 여기서 명명되지 않고 “가나안”이 명명된 것은 “함”이 선행으로부터 분리된 신앙을 의미하지만 이 신앙도 영적 (수준의, 또는 평면에 있는) 교회이기 때문이다. 영적 (평면의) 교회는 (사랑은 아니지만) 진리가 있기에 신앙 안에 거룩함이 있는 교회이다. 그런고로 비록 선행이 없어 신앙이 없는 것이나 별 차이가 없는 (껍데기의) 신앙이지만 신앙에 관한 지식을 수단으로 거듭나아갈 수 있는 한가닥 희망은 있기에, 이 신앙도 어떤 측면에서는 형제이고, (내, 외적 의미 모두에서도) 형제가 될런지 모른다; 그러므로 함이 아닌 가나안이 저주되어졌다. 더욱이 가나안의 토지의 주민들, 유대인들 뿐 아니라 이방인들 모두가 대체로 이런 품성이 도두라져 그들의 모든 예배는 외적인 것들에만 존재하였다. 이런 신비함들(arcana)이 있지 않으면, 함 대신 (이 본문과는 아무 관련도 없는) 가나안이 등장할리 만무했을 것이다. 내적 예배로부터 분리된 외적 예배가 주님으로부터 자체를 비켜서게하여 스스로 저주한다는 것은 외적 예배에 있는 이들이 지상적, 육체적인 것을 중요시한다는 것만 숙고해도 분명해진다; 따라서 이들은 아래쪽 만을 향해 자신의 마음들과 삶을 치닫게하는데, 이에 관하여는 이어지는 대목에서 더 언급될 것이다.

그는 자기 형제들에게 종들의 종일 것이다. 이는 교회에서 가장 천박한 것을 의미한다. 이는 내적 예배로부터 분리할 때 있는 외적 예배의 본성으로부터 분명해진다. 내적 예배가 외적 예배를 거룩해있도록 해주지 않으면, 외적 예배 자체만을 떼놓고 생각하면, 이는 아무 것도 아닌 셈인데, 이는 모든 이도 금방 수긍될 것이다. 심정의 숭배함이 없는 외적 숭배함은 제스쳐(gesture)에 불과한 짓이 아닐까? 또는 마음에서의 기도를 동반하지 않는 입술의 기도는 더듬거리는 말에 불과한 것 아닌가? 또는 어떤 목적도 없이 어떤 일을 하고 있다면 쓸데없는 짓 아닌가? 외적인 것을 그 자체만 중요시하면 죽은 일거리에 불과한 바, 내적인 것이 그 안에 있어야 살아 있다.
다른 삶에 있는 많은 것들로부터 내적 예배로부터 분리될 때의 외적 예배의 본성을 나로하여금 알게 해주셨다. 세상에서 교회도 늘 출입하고 교회 예식도 제법 빠짐없이 참석했던 마술사들이 있었다. 이런 컽치레 덕분에 마술사가 아닌 듯 했지만, 그들은 (마술 때문인지) 여느 사기꾼을 능가했다. 또한 탐욕적인지라 강도짓으로 즐거움을 얻는 자였다. 그래서 거기서도 여전히 그들은 지옥적이었고, 주님과 이웃을 향하여 대단한 증오로 들끓고 있었다. 그들의 외적 예배 안에 있는 내적 예배라는 것은 그들이 세상을 수단으로 보여지는 것이든가, 자기들이 바랬던 세상적, 지상적, 육체적인 것을 획득하는 것, 신성한 듯한 컫치레로 사기치는 것, 이런 등등이다. 이런 인물들은 자기들이 바라는 것과 일치하는 어떤 신이나 우상들을 발견하면 즉시 그것을 숭배한다. 특히 외적인 것들을 매우 중요시한 유대인들의 경우가 이러하여 그들은 쉽게 우상숭배에 빠져들고 만 것이다.
가나안 토지에 있는 이방인들은 바알과 여타 다른 신을 숭배했는데 외적 예배만을 중요시함은 유대인들이나 동일하였다. 그 이유가 그들도 성전, 제단, 뿐만아니라 제물 바침을 가졌다; 그래서 유대인들과의 차이는 그들은 자기들의 신들을 바알, 아스다롯 등등으로 이름불렀고, 유대인들은 여호와로 이름 부른 것이다. 이것이 지금까지도 여전한 것은 여호와라는 이름을 부르는 것만으로도 자기들을 거룩해지게, 뽑힌 자로 만든다고 상상하는 점이다. 이것이 그들로 다른 사람보다 더 정죄받는 쪽으로 기울게 했다. 그 이유가 이 방법에 있으면 거룩한 것을 모독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히려 이방인들은 모독을 할 수 있는 지경까지는 이르지 않았다. 이런 예배가 본문 대목에서 소위 “가나안”이라 불리우고, “종들의 종”이다고 말해진다. “종들의 종”은 교회에서 가장 천박한 것을 표시하는데, 다음 절에서 살핀다.

26절. 그리고 그는 말했다, 복 있음이 셈의 하느님 여호와이시다; 그리고 가나안은 그의 종일 것이다. “복 있음이 셈의 하느님 여호와이시다”란 모든 선은 내적인 것들로부터 주님을 예배하는 이들을 위해 있다를 의미한다; “셈”은 내적 교회이다; “그리고 가나안은 그의 종일 것이다”란 예배를 오로지 외적인 것들에만 존재하게 만드는 이들은 비열한 섬김을 교회 사람에게 제공한다를 의미한다.

복 있음이 셈의 하느님 여호와이시다. 이는 내적인 것으로부터 주님을 예배하는 모든 이들을 위한 모두 각각의 선을 의미하는데, 이는 “복 있음”의 의미로부터 분명해진다. “복 있음”은 모두 각각의 선을 포함한다; 즉 천적, 영적, 자연적 선이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내적 의미에서 “복 있음”에 의해 의미되어진다. 외적 의미에서 “복 있음”에 의해 세상적, 육체적, 지상적 선 모두 각각을 의미한다; 그러나 외적 의미에서의 것들이 복 있음이다면, 그것들은 내적인 것으로부터 반드시 있었어야만 한다; 그 이유는 이것 만이 복되고, 영원이고, 더 없는 행복이며, 복된 것들의 실재 자체이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영원하지 않다면 실지로 무엇이 존재한다는 말일까?. 그렇지 않는 것은 있음을 중단한다. 고대인들 사이에서, “복 있음이 여호와이시다” 라고 하는 관습적 표현이 있었다; 이 표현을 수단으로 그분으로부터 모두 각각의 복 있음, 즉 모두 각각의 선이 있다는 것을 뜻했다; 이와 같은 표현이 주님이 복 주신다, 복 주셨다는 감사함의 관용 표현이 유행되었는데, 다윗서를 찾아 읽기 바란다. 시. 28:6; 31:21; 41:13; 66:20; 68:19, 35; 72:18, 19; 89:52; 119:12; 124:6; 135:21; 144:1.
“복 있음이 여호와이시다”가 여기서 말해지는 이유는 셈, 또는 내적 교회가 여기서 취급되는 주제이기 때문이고, 이 교회가 내적이라 불리는 이유는 선행으로부터 이기 때문이다. 선행 안에 주님이 현존하시고, 여기서 “여호와 하느님”이라 불리운다. 그러나 외적 교회 안에서는 비록 그분이 그 안에도 현존하시지만 이렇게 불리우시지 않는데, 그 이유는 그분이 내적 교회의 사람 안에서 같이 현존하시지 않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외적 교회의 사람은 자기로부터 선행의 선들을 행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외적 교회가 취급되는 주제일 경우, 주님은 “하느님”으로 불리우신다. 다음 절의 야벳이 취급되는 대목에서, “하느님께서 야벳을 번창하게 하실 것이다”가 이에 대한 실예도 된다. 모두 각각의 선은 내적인 것들로부터 주님을 예배하는 이들의 몫이다는 것은 뭔가가 존재하는 질서로부터 분명해진다; 질서는 이렇다: 주님으로부터 천적인 모든 것이 있다. 천적인 것으로부터 영적인 모든 것이 있다. 영적인 것으로부터 자연적인 모든 것이 있다. 이는 만물이 출시되어가는 질서이고, 또한 유입(influx)의 질서이다.
천적 (수준, 평면, 왕국)은 주님을 사랑함과 이웃을 향한 사랑이다. 사랑이 없는 곳에서는 천적 평면, 즉 사랑을 통하여서만 흐르는 주님의 흐름이 끊기는 바, 주님은 현존하시지 않는다. 천적인 것이 없을 때, 어떤 영적인 것(수준, 평면, 왕국)도 가능할 수 없다. 그 이유는 영적인 모든 것은 주님으로부터 천적 평면을 통하여 존재하기 때문이다. 영적 평면은 신앙이다. 그러므로 주님으로부터, 사랑, 선행을 통하지 않으면 신앙이 아니다. 자연적 평면 역시 흐름의 질서는 위와 비슷하다. 이와 동일한 질서에 의거 모든 선들은 (인간 안으로) 흘러 들고, 흘러 내려간다; 이로부터 내적인 것으로 주님을 예배하는 이들은 모두 각각의 선을 향유한다; 이에 반해 선행으로부터 주님을 예배하지 않는 이들은 모조품에 불과한 선 밖에 가질 수 없고 이들의 선은 모조품이라기 보다는 그 자체가 악이라 말해야 지당할 것이다. 따라서 증오나 간음질 같은 것으로부터의 즐거움, 배설물로부터 얻는 즐거움인 바, 다른 삶에서 이런 자는 그런 것으로 바뀌어 있다.

그리고 가나안은 그의 종일 것이다. 이것이 예배를 오로지 외적인 것들에만 존재하게 만드는 이들은 비열한 섬김을 교회 사람에게 제공한다를 의미하는데, 이는 유대 교회에서 표현된 것들을 살핌으로부터 분명해진다. 유대 교회에서 내적 교회는 유다와 이스라엘을 수단으로 표현되어졌다; 유다에 의해서는 천적 교회가, 이스라엘에 의해서는 영적 교회가, 야곱에 의해서는 외적 교회가 표현되어졌다. 그러나 외적인 것들에서만 존재하는 예배를 만든 이들은 이방인들에 의해 표현되어졌다. 유대 교회에서 이들을 외국인(stranger, 모르는 사람)이라 불렀다. 그리고 외국인들은 그들의 종들이었다. 이들은 유대 교회에서 밑바닥 수준의 일을 맡아 했다. 이사야서에서:
외국인들이 서서 너희 양떼를 먹일 것이다, 외국인들의 아들들이 밭을 갈고 포도원지기를 할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여호와의 성직자로 불리울 것이다; 우리의 하느님의 섬기는 자라 너희는 불리울 것이다; 너희는 이방인들의 재물을 먹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영광 안에서 너희는 자신들을 자랑할 것이다 (이. 61:5, 6).
여기서 천적 인간들이 “여호와의 성직자들”이라 불리운다. 그리고 영적 인간들이 “여호와의 섬기는 자”라 불리운다. 외적인 것들에서만 예배를 만드는 이들이 “외국인들의 아들들”이고 이들이 천적, 영적 인간들의 들판들과 포도원들을 섬긴다.
다시:
외국인의 아들들이 네 성벽들을 건축할 것이다,
그들의 왕들이 너를 섬길 것이다 (이. 60:10).
위 인용 구절 같은 방식에서의 섬김이 기브온족에 관련하여 언급되어 있다. 여호수아서에서:
이제 너희는 저주되어진다, 그리고 너는 평생 종노릇해야 할 것이다. 너희는 내 하느님의 집을 위해 장작을 패고 물을 길어와야 할 것이다: 그리고 여호수아는 그 날 그들이 이스라 엘 회중을 위해, 특히 여호와의 제단을 위해 물을 긷고 장작을 패게 했다 (여. 9:23, 27).
위 인용 구절은 그들에게 속아서 사전에 맺은 약속 때문에 그들을 섬멸하지 못한 결과로 있어진 그들에 대한 형벌의 명령이다. 이리하여 외국인들에 대한 법이 전해 내려온 것은, 그들이 성문을 열고, 평화를 원하면, 그들로부터 조공을 받고 자기들을 섬기게 하는 것이다 (신. 22; 왕상. 9:21, 22). 유대 교회에 관련하여 말씀 안에 씌어진 모든 것은 주님의 왕국에 있는 것을 표현하였다. 주님의 왕국은, 이 왕국 안에 누구이든, 무엇이든 어떤 쓸모 있음(use)을 수행해야만 한다. 주님의 왕국 안에서 주님에 의해 중요시되는 것은 쓸모 있음 밖에 더 없다. 지옥에 있는 자들 조차 거기 나름대로의 어떤 쓸모 있음이 있으나, 그것은 최하위의 비열한 쓸모 있음, 악용이라 표현해야 마땅할 것이다. 다른 삶에 있는 이들 중에서 비천한 쓸모 있음을 수행하는 이들은 내적 예배에서 분리된 외적 예배에서만 있는 이들이다.
더 나아가 (다른 삶에서) 유대 교회에 있는 표현물들은 표현한 것이나 인물을 생각하지 않고 그 인물이 물건을 통해 표현된 의미만을 생각한다; 예를 들면, 유대인들의 경우, 그들은 결단코 천적 인간들은 아니었지만, 그들은 천적 인간을 표현했다; 이스라엘의 경우, 그가 영적 인간은 아니었지만, 그는 영적 인간을 표현했다; 야곱과 그의 아들들 역시 이런 식이다. 왕들과 성직자들 역시, 그들을 수단으로 주님의 왕권과 거룩함이 표현되었다. 이는 생명 없는 표현물(물건들)을 두고도 마찬가지이다. 즉 아론의 의복, 제단 자체, 빵을 위한 식탁, 등불, 빵과 포도주, 이 외에도 수소들, 거세된 수소들, 염소들, 양들, 염소 새끼들, 어린 양들, 산비둘기와 집비둘기(호도애). 그리고 유다 (왕국)과 이스라엘 (왕국)의 아들들은 주님의 교회의 내적, 외적 예배를 표현하였다. 이 두 예배 보다 더 외적인 예배, 즉 외적인 것들에만 있는 예배(완전 외적 예배)가 이 본문의 의미에 따르면 “가나안”이라 불릴지 모른다.

“셈”에 의해, “야벳”에 의해 뜻해진 것, 하나는 내적 교회의 사람, 또 하나는 외적 교회의 삶이다; 이로부터 “가나안”에 의해 뜻해진 것은 이 두 교회의 사람의 의미와 차이점을 숙고해보아도 분명해진다. 내적 교회의 사람은 자기가 행하는 모든 선, 그가 생각하는 모든 진리의 공로를 주님께 돌린다; 그러나 외적 교회의 사람도 선인 것을 행하기는 하나 이 선의 원인과 결과를 모른다. 내적 교회의 사람은 선행으로부터 주님에 대한 예배를 만든다. 그런고로 내적 예배가 그들의 예배의 실체를 이루고 외적 예배는 이 예배에 부수적으로 따라 붙는다; 그러나 외적 교회의 사람은 외적 예배를 그들의 예배의 실체를 만든다. 그들은 설사 내적 예배를 가지고 있다 해도 그 예배가 무엇인지 모른다. 내적 교회의 사람은 만일 자기가 내적인 것으로부터 주님을 예배하지 않으면, 자기는 자기 양심에 거슬려 행동한다고 믿는다; 그 반면, 외적 교회의 사람은 만일 자기가 외적 의식을 신성시하게 준행하지 않으면, 자기는 자기 양심에 거슬려 행동한다고 믿는다. 내적 교회의 사람의 양심 안에는 많은 내용물이 있다. 그 이유는 그가 말씀의 내적 의미로부터 많은 것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외적 교회의 사람의 양심 안에는 아주 적은 내용물이 있을 뿐이다. 그 이유는 그는 말씀의 내적 의미로부터서 가진 것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내적 교회의 사람이 “셈”이라고, 외적 교회의 사람이 “야벳”이라 불리우고 있다. 그러나 외적인 것들만에서 (내적인 것은 흔적도 완전히 없는 상태)의 예배를 만드는 이들, 그래서 선행이 없고, 그 결과 양심이 없는 자들이 “가나안”이라 불리운다.

27절. 하느님께서 야벳을 확대시켜 주시기를 빕니다, 그리고 그가 셈의 천막에서 거주하기를 빕니다. 그리고 가나안은 그의 종이 되리라. “야벳”은 내적 교회와 상응되는 외적 교회를 의미한다. “하느님께서 야벳을 확대시켜 주시기를 빕니다”란 이 외적 교회의 계발을 의미한다. “그가 셈의 천막에서 거주하기를 빕니다”란 예배의 내적인 것이 외적 교회 안에 있게 할 수도 있는 질서에서를 의미한다. “가나안은 그의 종이 되리라”란 외적인 것 만으로 예배가 있게 하는 자들은 천박한 예배만을 수행할 수 밖에 없음을 의미한다.

“야벳”에 의해 상응되는 교회가 의미되었다는 것은 이미 상술했다. 또한 외적 교회에 의해 뜻해지는 것, 즉 외적 예배에 있는 이들, 그런 고로 내적 인간에 속하는 어떤 것은 없으나 선행 안에서 살고 있는 이들이 뜻해진다. 이들과 더불어서도 주님은 (내적 예배에 있는 이들에게 현존 하시듯) 동등하게 현존하신다. 그 이유가 주님께서는 선행이 어디에 존재하든 선행이 있는 곳에서 선행을 통하여 역사하시기 때문이다. 이런 측면과 비슷한 예가 아마 어린 아이일 것이다. 이들은 선행이 무엇인지 모른다, 신앙이 무엇인지는 더욱 모른다. 그럼에도 주님은 그들과 현존하시고, 특히 그들이 선행 안에 함께 살 때 어른들이 선행 안에 살 때보다 더욱 강력하게( 더 친밀하게) 현존하신다. 이와 거의 맞먹는 수준일 경우라면, 순진, 선행, 자비를 가진 천진난만한 이들(the simple)과 더불은 주님의 현존일 것이다. 많은 것을 알고 있는데, 그것에 따라 살지 않는 이들의 경우는 이와 반대이고, (다른 삶에서도) 쓸모 없음(useless)이다. 그 이유가 알고 있는 것이 선이 되어가지 않는다면, 안다는 것의 목적은 사라진 셈이기 때문이다. 그가 지닌 앎이 적다해도 그것이 선이 되어 갈 때, 그는 무수히 알고 선은 없는 자에 비해 훨씬 더 많이 알고 있는 셈이다; 그 이유가 후자의 경우는 많은 지식을 수단으로 추구하고 있는 중일지 모르지만, 전자의 경우는 이미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어쨌든 많은 진리들과 선들을 알고, 동시에 선행과 양심을 지닌 이들은 매우 다른 경우이다; 그 이유가 이런 인간이 내적 교회의 인간, 즉 “셈”이다. 적은 것을 알고, 그럼에도 양심을 가진 이들은 다른 삶에서 계발되고, 각자의 역량에 따라 천사가 되고, 표현할 수 없을 정도의 지혜와 총명을 소유해가는데, 이들이 “야벳”에 의해 의미되어진다.

하느님께서 야벳을 확대시켜 주시기를 빕니다 란 이 교회의 계발을 의미한다. 글자 의미에서 “확대하는 것”은 경계선을 넓히는 것, 그러나 내적 의미에서 “확대하는 것”은 계발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 이유가 계발됨은 지혜와 총명의 경계선들을 확대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사야서에서:
네 천막터를 확대하라, 그리고 너희 주택들의 커튼들을 넓게 펼쳐라 (이. 54:2).
영적인 것들에서 계발됨을 의미한다. 외적 교회의 사람은 신앙의 진리들과 선들에서 가르침을 받을 때, 그는 “확대되어진다”; 그가 선행 안에 있을 때, 이것 때문에 그는 더욱 더 확증되어진다; 이 외에도, 그가 가르침을 더 받으면, 더 그의 지적 부분의 구름은 흩어진다. 이 지적 부분으로부터, 즉 이 지적 부분 안에 선행과 양심이 있다.

그리고 그는 셈의 천막들에서 거주할 것이다. 이는 예배의 내적인 것이 외적인 것 안에 있을 수도 있는 질서에서를 의미한다. 이는 앞서 셈에 관한 모든 것으로부터 분명해진다. 즉 “셈”은 내적 교회, 또는 내적 예배이다. 그리고 외적 예배는 내적 예배가 살아있게, 또는 신성하게 해주지 않으면 사실상 죽은 일상적인 일 밖에, 또는 불결한 것의 수준 밖에 더 아니다. “천막들”은 사랑의 거룩한 것, 그리고 이로부터 파생되는 예배 밖에 더 다른 의미가 없다는 것은 “천막”의 의미로부터 분명해진다. “여행함”, “천막들에 거주함”이라 말하는 것은 고대인들의 관습적 표현에 해당되는 말인데, 이를 수단으로 거룩한 예배가 의미되었다. 그 이유는 태고인들은 천막들을 지니고 여행했을 뿐 아니라 천막 안에서 거주했고, 천막 안에서 거룩한 예배를 수행했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여행함”, “거주함”이 내적 의미에서 사는 것을 의미했다.
“천막들”이 거룩한 예배를 의미하는 것에 관한 인용 구절은 살핀바 있는데, 거기에 더하여 아래에 인용을 해본다 다윗서에서:
하느님께서 인간 안에 거주하셨던 천막,
즉 실로의 성막을 그분은 버리고 돌보지 않으셨다 (시. 78:60).
위에서 “천막”은 “성전”과 같은 것을 의미한다. 하느님께서 사랑 안에서 인간과 현존하실 때 이 성전에서 하느님께서는 거주하신다라고 말해진다. 거룩한 예배 안에서 사는 사람을 고대인들에 의해 천막으로 불리웠다. 그 후에 성전이라 불리웠다. 이사야서에서:
네 천막터를 확대하고, 네 주택들의 커튼들을 넓게 펼치라 (이. 54:2).
진정한 예배 속에 있는 사항들에 관한 것이 계발됨을 뜻한다. 예레미야서에서:
전체 토지가 황폐된다, 갑자기 내 천막들이 못쓰게 된다, 그리고
나의 커튼들이 한 순간에 못쓰게 된다 (예. 4:20).
위 구절에서 천막이 천막을 뜻하는 것이 아닌, 거룩한 예배를 뜻함이 분명하다. 스가랴서에서:
예루살렘은 본시 그녀의 장소에 다시 거주할 것이다.
여호와께서 유다의 천막들을 구원하실 것이다 (슥. 12:6-7).
위 구절에서, “유다의 천막들”은 사랑의 거룩함으로부터 주님을 예배함을 표시한다.
위 인용구절들로부터 명백해지는 바, “셈의 천막들에서 거주하는 것”, 즉 내적 예배가 외적 예배 안에 있음이 분명해진다. 그러나 인간 야벳, 또는 외적 교회의 사람이 내적 교회가 무엇인지 잘 알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이에 관해 간략히나마 살피고 지나가야할 것 같다. 인간은 자기가 주님에 관하여와 이웃에 관하여 선한 생각들을 가진다고 느끼거나 지각할 때, 그리고 주님과 이웃에게 친절한 직무를 수행하고, 이 수행이 자신의 이득이나 명예를 얻고저 함이 아니라고 느끼거나 지각할 때. 그리고 누군가가 곤경에 빠져있음에 동정심을 느낄 때, 더욱이 신앙의 교리에 관련하여 오류 속에 있는 누군가에게 뭔가 도울 것이 있다고 느낄 때, 그는 자기가 셈의 천막 안에 있음을 알런지 모른다. 즉 자기는 이런 것을 통하여 주님께서 역사하시는 내적인 것을 자기 안에 가지고 있음을 알런지 모른다는 말이다.

그리고 가나안은 그의 종일 것이다. 외적인 것들에서만 예배가 존재하게 만드는 이들은 천한 직무만을 수행할 수 있음을 의미하는 것은 위에서 말해진 것들로부터, 그리고 25, 26절 아래, 종이다고 말해지는 가나안에 관한 내용으로부터 분명해진다. 이와같은 사람들은 실로 지상에서 주님의 교회의 종들은 아니다. 그 이유가 실지로 이런 부류의 사람들은 지상에서 더 높은 지위를 누리는 자가 허다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사람들, 즉 양심이나 선행이 없고, 예배도 내적인 것 없이 외적인 것들에서만 있게 만든 자들은 다른 삶의 주님의 왕국에서는 종들이다; 그 이유가 그들은 불행해져 있기 때문이다. 거기서 그들이 수행하는 것은 비천한 수준의 섬김들 뿐이다. 거기서 그들이 갖는 비천한 직무는 너무나 많아 여기서 열거하기 힘드나 차 후 주님의 신성한 자비 덕분으로 말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어쨌든 다른 삶에서 인간은 누구나 예외없이 어떤 쓸모있음(use)을 수행해야만 한다. 그 이유는 인간은 자기가 세상에 사는 동안, 자기가 존재하는 사회(공동체)나 이웃에 쓸모 있도록 하려는 목적을 위해 태어나지기 때문이고, 다른 삶에서는 주님이 흡족해하심에 따라 쓸모 있음을 수행해야만 한다. 이런 점은 인간 신체의 경우도 다를 바가 하나도 없다. 신체의 모두 각각의 부분은 제각각의 어떤 쓸모 있음을 수행하고 있다. 즉 마치 아무 가치도 없는 듯한 것들 조차, 그 자체 분비물이나 배설물에 불과한 듯한 것 조차, 침 같은 타액들, 담즙들, 여타 잘 알려지지 않은 대수롭지 않은 듯한 것에 이르기까지 각기 나름대로 신체의 유지를 위해 쓸모 있음을 수행하고 있다. 이런 것들은 신체 밖으로 버려야할 배설물을 분리하든가, 장을 청소하여 청결을 유지하는 등의 섬김을 반드시 수행하고 있다. 신체가 내버린 똥도 똥거름으로 들판이나 포도원에서는 나름대로 쓸모 있음이 수행된다. 이외 더 많은 실예는 각자 생각해도 많을 것이다.

28, 29절. 그리고 노아는 홍수 이후 삼백 오십 년을 살았다. 29 따라서 노아의 모든 날들은 구백 오십 년이었다. 그리고 그는 죽었다.” 위 구절은 첫 고대 교회의 존속 기간을 의미하고 동시에 그 교회의 상태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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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해설 제 8장

제 8 장

성경 본문

1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노아, 그리고 야생 동물 각각 모두, 그리고 방주에서 그와 함 께 있었던 짐승 각각 모두를 기억하셨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땅을 지나가도록 바 람을 만드셨다, 그리고 물들은 줄었다.
2 또한 깊음의 샘들과 하늘의 큰 폭포가 멈추었다, 그리고 하늘로부터의 비가 억눌렸 다.
3 물들은 땅으로부터 가고 되돌아 오고 하면서 물러갔다. 그리고 일백 오십 일 이후 물들은 감소했다.
4 그리고 방주는 일곱 째 달 십칠 일에 아라랏 산맥에서 휴식하였다.
5 그리고 물들은 열째 달까지 가고 줄어들고 하였는데 열째 달, 첫 날에 산봉우리가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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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그리고 사십 일의 끝이 왔을 때 노아는 그가 만든 방주의 창문을 열었다.
7 그리고 그는 까마귀를 내보냈다, 까마귀는 나가서 물이 땅에서 마를 때까지 가고 되돌아 오곤 하였다.
8 그리고 노아는 물들이 지면의 얼굴에서 줄어들었는지 여부를 보기 위해 자기로부터 비둘기를 내보냈다.
9 그리고 비둘기는 그녀의 발 바닥을 위한 쉼을 찾지 못하고, 노아에게 되돌아 왔다, 그 이유는 물들이 온 땅의 얼굴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노아는 그의 손을 내밀 어 비둘기를 잡았다, 그리고 자기에게, 방주 안으로 가져 왔다.
10 그리고 그는 다른 칠 일을 더 머물렀다. 그리고 그는 다시 비둘기를 방주로부터 내어 보냈다.
11 그리고 비둘기는 저녁 무렵 돌아 왔다. 보라, 비둘기 입에는 올리브 잎이 잡아뜯겨 있었다. 그래서 노아는 물이 땅으로부터 줄어든 것을 알았다.
12 그리고 그는 또 다른 칠 일을 머물렀다, 그리고 비둘기를 내보냈다, 그리고 비둘기 는 그에게로 다시 되돌아 오지 않았다.
13 그리고 육백 년 그리고 첫 해, 시작에서, 달의 첫째에서 였다, 물은 땅으로부터 말 랐다. 그리고 노아는 방주의 덮개를 벗겼다. 그리고 보았다, 그리고 보라, 지면은 말 라 있었다.
14 둘째 달, 이십 칠 일, 땅은 말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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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그리고 하느님께서 노아에게 이야기하시어, 말하신다.
16 너와 네 아내, 네 아들들, 너와 함께한 네 아들들의 아내들은 방주에서 나가거라.
17 모든 육체로부터, 너와 함께있는 야생 동물 각각 모두, 즉 새와 짐승과 땅에서 기는 기는 것 각각 모두, 너와 함께 있도록 가져온 것들은 땅에서 자신들을 퍼져 나가고, 땅에서 열매를 많이 맺고, 번성하도록 하리라.
18 그리고 노아는 나왔다, 그리고 그의 아들들, 그의 아내 그의 아들들의 아내들,
19 야생 동물 각각 모두, 기는 것들 각각 모두, 새들 각각 모두, 땅에서 기는 것 각각 모두, 그 가족들에 따라 방주에서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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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그리고 노아는 여호와께 제단을 건축했다. 그리고 모두 각각의 깨끗한 짐승으로부 터, 그리고 모두 각각의 깨끗한 새로부터 가져왔다, 그리고 제단에서 태워바치는 제 물들을 바쳤다.
21 그리고 여호와께서는 휴식의 냄새를 맡으셨다. 그리고 여호와께서는 그분의 심정 에서 말하셨다. 나는 인간의 사건 때문에 더 이상 지면을 다시는 저주하지 않으리 라. 그 이유는 인간의 심정이 제조하는 것은 젊은 시절로부터 악하기 때문이다. 나 는 내가 했던 것 같이 생명있는 모든 것을 더 이상 부수지 않으리라.
22 땅의 모든 날 동안 파종기와 추수, 그리고 추위와 더위, 그리고 여름과 겨울, 그리 고 낮과 밤은 중단되지 않으리라.

각 절의 내적 의미

1절.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노아, 그리고 야생 동물 각각 모두, 그리고 방주에서 그와 함께 있었던 짐승 각각 모두를 기억하셨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땅을 지나가도록 바람을 만드셨다, 그리고 물들은 줄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기억하셨다”란 시험의 끝과 새롭게 함(renovation)의 시작을 의미한다. “노아”는 고대 교회(Ancient Church) 속의 사람을 의미한다. “방주 안에서 그와 함께 있었던 야생 동물 각각 모두와 짐승 각각 모두”란 고대 교회인이 지녔던 모든 것을 의미한다. “하느님께서 땅을 지나가도록 바람을 만드셨고 물들이 줄었다”란 모든 것이 각기 질서에 맞추어 배열됨을 의미한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기억하셨다. 이는 시험의 끝과 새롭게 함의 시작을 의미하는데, 이는 앞 뒤 문맥으로부터 분명해진다. “하느님께서 기억하셨다”는 특별히 그분은 자비하시다를 의미한다. 그 이유는 그분이 회상하심은 자비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시험 후에 특별히 서술된다. 그 이유는 이때 새로운 빛이 비추이기 때문이다. 시험이 계속되는 한, 인간의 입장에서는 그분이 안 계신 듯 상상되는데, 그 이유는 그가 악귀로 말미암아에서 이고, 심할 경우 자포자기함으로 까지 치닫는데, 이럴 경우 어떤 하느님도 있지 않다고 믿어질 뿐이다. 따라서 이 구절의 말, “하느님이 기억하셨다”라는 표현은 외관에 따른 표현인 바, 시험의 끝을 의미하고, 새롭게 함의 시작을 의미한다. 이 구절에서 “하느님”이 기억하신다고 말해지고, “여호와”가 기억하신다고로는 말해지지 않고 있다. 그 이유는 인간은 아직은 거듭남 이전의 상태에 머물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거듭나질 때, 이 장의 20, 21절에서 같이 “여호와”란 표현이 사용된다. 그 이유인즉, 신앙이 선행(charity)과 결합함이 아직 아니기 때문이다. 인간은 그가 선행으로부터 행동할 때, 처음으로 거듭나진다라고 말해진다. 선행 안에 여호와께서는 현존하시지만, 신앙이 선행과 결합 이전일 경우, 신앙 안에도 완전히 현존하신다고 까지는 말해질 수 없다. 선행은 저세상에서 인간의 생명이고 그것 만이 진짜 있음(being)이다; 그리고 있음 자체와 생명 자체가 여호와이신 바, 우리가 여호와를 받아들일 수 있는 삶을 만들기 이전일 경우, 우리와 함께 현존하신다고 말해지는 분은 “여호와”가 아닌 “하느님”일 수 밖에 없다.

“노아”에 의해 고대 교회의 사람이; 그리고 “방주 안에 그와 더불어 있는 모두 각각의 야생 동물, 그리고 모두 각각의 짐승”에 의해 고대 교회인에게 속한 모든 것이 의미된다는 것은 앞 장에서 “야생 동물”과 “짐승”을 말한 대목으로부터 분명해진다 (466항 참조). 말씀에서 “야생 동물”은 두 가지 의미를 지닌다. 그 이유가 인간 안에 있는 죽은 것과 살아있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살아있는 것을 의미할 경우의 이유는 히브리어에서 살아있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태고인들이 자기들의 겸허함 안에서 자신들을 야생 동물들로서 인정했는데, 이 경우의 단어는 인간 안에 죽어있는 것의 유형(type)이 되었다. 본문에서일 경우, 두 가지 의미 모두가 한 복합체 안에있는 것으로 뜻해진다. 통상적으로 이는 시험 후 인간과 더불어 있는 것과 일치하는데, 이 상태 안에 살아있는 것과 죽은 것, 또는 주님에 속하는 것과 인간의 자기 자신에 속하는 것이 있다. 그리고 이 상태는 심하게 혼동된 상태여서 당사자는 무엇이 진리이고 선인지를 거의 알지 못한다. 그러나 주님께서 그것들을 질서 안으로 환원되게 해서 정리정돈해 주신다. 이는 이어지는 구절로부터 분명해진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땅을 지나가도록 바람을 만드셨다, 그리고 물들이 줄었다. 이는 모든 것이 각기 질서에 맞추어 배열됨을 의미한다는 것은 말씀에 있는 “바람”의 의미로부터 분명하다. 모든 영들, 선한 영이든, 악한 영이든, “바람들”에 비교되고 견주어지고 그렇게 불리워지기도 한다. 그리고 원어에서 “영들”은 “바람들”을 뜻하는 단어를 같이 사용하고 있다. 시험들 안에서 (이 구절의 경우 줄어든 물들), 악한 영들은 범람의 원인인데, 이 영들은 자기들의 공상들과 더불어 패거리지어 흘러들어 인간 안에 있는 자기들의 공상과 비슷한 공상들을 선동함으로 그 인간 자체를 침수시킨다; 그리고 이런 영들, 또는 그들의 공상들이 흩어질 때, 말씀에서 “바람”에 의해 행해진다고, 참으로 “동풍”에 의해 행해진다고 말해진다.
이것은 시험 동안 한 인간과 더불어서도 마찬가지 이다. 동요함, 또는 시험의 물들이 중단될 때, 이것은 일반적으로 인간과 더불은 경우인데, 나는 반복된 경험을 통해 이를 알게 되었다; 그 이유가 영들의 세계에서 악령들은 때로는 군대같이 단결하고, 이것 때문에 소동이 야기되는데, 그들이 다른 단결된 영들에 의해 흩어질 때까지 이어진다. 이 다른 영들은 오른쪽으로부터, 즉 동쪽 방위로부터 오고, 그들이 오면 악한 영들 안에 두려움과 공포가 엄습되어 도망가야만 한다는 생각 밖에 더 할 수 없게 한다. 이때 악한 영들과 제휴한 이들은 사방으로 흩어지고, 악한 목적을 위해 형성된 영들의 세계는 해체된다. 이렇게 흩어지게 한 영들의 군대가 (주님의) 동풍(the East Wind)이라 불리운다; 흩어지게 하는 방법들은 이 외에 무수하게 있는데, 역시 “동풍들”이라 불리운다. 이에 관하여 주님의 신성한 자비로부터 이후 살필 것이다. 악령들이 흩어질 때, 동요와 소동의 상태가 있으나 이 뒤에 고요함, 또는 침묵의 상태가 이어진다. 이는 시험에 있어온 인간과 더불어서도 같다; 그 이유가 시험에 있는 동안에서 그는 악령의 군대들 한 가운데 있으나, 그것들이 다 몰아내진 상태, 또는 흩어진 상태에서는 고요한 듯 있기 때문이다. 이때 모든 것들이 질서 안으로 환원되어 배열됨의 시작이 있다.
어떤 것이 질서의 상태로 환원되기 앞서, 가장 통상적인 절차는 어떤 것들은 혼동된 집단에로 되돌리는 것이다. 말하자면, 질서적인 것들과 함께 어울리지 못할 것들은 미리 떼어내는 것이다. 그 다음 주님께서 그 외의 모든 것을 질서 안으로 배열해 주신다. 이 과정은 자연에서 일어나는 것에 비교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자연에서도 전체적, 개별적으로 있는 모든 것들이 질서 안으로 환원되기 앞서 먼저 혼돈된 매체 안으로 환원하는 경우가 있다. 예를 들면, 잡다한(이질적인) 것이 무엇이든 흩트리는 폭풍이 대기에 있지 않으면, 공기는 결코 깨끗해 있지 못하고 해로운 것의 축적으로 치명적인 공기로 되어질 것이다. 인간 신체 안에서도 비슷한 경우가 있다. 피 안에 있는 모든 것들, 이질 성분이든 동질 성분이든, 모두 계속적으로, 연속적으로, 한 개의 심장 안으로 다 함께 뒤섞여 있기 위해 흐르지 않으면, 액체들이 치명적 교착 상태에 있을 것이고, 그래서 각각의 쓸모에 맞게 구분될 수 있는 방도는 없다. 인간의 거듭나는 과정 역시 이와 별반 차이가 없다.
“바람”, 특히 “동풍”은 거짓들과 악들의 흩어짐, 또는 악령들과 악귀들의 흩어짐 외에 더 아니다. 이후에 질서 안으로 배열됨인데, 말씀으로부터 알 수 있을 것이다. 이사야서에서:
네가 그들을 부채질 할 것이다, 그리고 바람이 그들을 운반해 갈 것이다,
그리고 회오리바람이 그들을 산산이 흐틀 것이다; 너희는 여호와 안에서
기뻐 환호할 것이다, 너희는 이스라엘의 거룩한 분 안에서 기뻐 할 것이다 (이. 41:16).
위에서 (떼지어 있던 것을) 흐트림(dispersion)이 “바람”에 비교되고 있다, 그리고 (모이지 못하게 산산히) 흩어버림(scatter)은 회오리바람에 비교된다. 이것은 악들에 관해서 이다. 그 다음 거듭나는 이들이 여호와 안에서 기뻐 환호할 것이다. 다윗서에서:
보라, 왕들이 자신들을 집합시켰다, 그들이 함께 지나갔다; 그들이 그것을 보았다,
그 다음 그들은 놀라워졌다; 그들은 낙담해졌다, 그들은 허겁지겁하였다;
떨림이 거기서 그들을 사로잡았다, 마치 해산하는 여인의 고통과 같다;
동풍으로 당신은 다르싯의 배를 부수십니다 (시. 48:4-7).
위에서 공포와 혼동이 동풍에 의해 발생했음을 묘사하고 있고, 이 묘사는 영들의 세계를 지나가는 것으로부터 취해지고 있다, 이는 말씀의 내적 의미에 포함되어 있다.
예레미야에서:
그들의 토지를 놀람으로 만드는 것: 나는 적 앞에서 동풍으로 하듯이
그들을 산산히 흩어지게 할 것이다,
나는 그들이 평온함의 날에 얼굴이 아닌 목을 응시할 것이다 (예. 18:16, 17).
위에서도 마찬가지 방식에서 “동풍”은 거짓들의 흐트림을 표시하고 있다. 홍해가 말리워진 것, 그리하여 이스라엘의 아들들이 건너간 것 역시 비슷한 동풍의 표현이다. 출애굽기에서:
여호와께서 밤새 내내 강한 동풍으로 바다를 뒤로 가게 하셨다,
그리고 바다를 마르게 만드셨다, 그리고 물들이 나뉘었다 (출. 14:21).
홍해에서의 물들의 의미는 본문의 홍수에서의 물들의 의미와 비슷하다. 사악한 자를 표현한 이집트인들이 익사한 것, 한편 여기서 “노아”로 표현된 거듭나는 자와 이스라엘의 아들들이 건너는 것도 의미 측면에서 비슷하다. “홍해”에 의해, “홍수”에 의해서와 같이 지옥에 떨어짐, 뿐만 아니라 시험이 표현되어지고 있다; 그런고로 “동풍”에 의해 물들의 흐트려짐, 즉 악한 자들이 지옥에 떨어짐, 또는 시험이 의미되고 있다. 이스라엘의 아들들이 홍해를 건넌 후 부른 모세의 노래로부터 분명해진다 (출. 15:1-19); 그리고 이사야로부터:
여호와께서 이집트인의 바다의 혀를 파괴하실 것이다, 그리고 그분의 권능의 바람으로
그분은 그분의 손을 강 위에 흔드실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세게 쳐서 일곱 시내들이
되게 (하실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이 신발을 적시지 않고 행군하게 하실 것이다.
그리고 마치 그분이 이집트의 토지로부터 나오게 한 날에 이스라엘을 위해 있었던 것 같이, 아시리아로부터 남아있을 그분의 백성의 남은 자를 위해 큰 길이 있을 것이다
(이. 11:15, 16).
위에서 아시리아로부터 남아있을 그분의 백성의 남은 자를 위한 큰 길은 질서 안으로 배열하심을 의미한다.

2절. 또한 깊음의 샘들과 하늘의 큰 폭포가 멈추었다, 그리고 하늘로부터의 비가 억눌렸다. 이 구절은 시험이 멈추었음을 의미한다. “깊음의 샘들”이란 의지로부터의 악을 의미한다. “하늘의 큰 폭포”란 이해함으로부터의 거짓들을 의미한다. “비”란 넓은 의미에서의 시험 자체를 의미한다.

여기로부터 6절 까지는 시험 후, 이 교회인의 첫 상태가 취급되어진다. 이 구절에서는 시험의 중단이 의미된다. 그의 시험, 의지력과 이해력 모두에서의 시험은 이전에 다루었다. “깊음의 샘들이 멈춤”에 의해 의지력 측면의 시험의 중단이; “하늘의 큰 폭포가 멈춤”에 의해 이해력 측면의 시험의 중단이 뜻해지고 있다. 이 표현들이 이런 의미를 가진다는 것은 7:11에서 살폈다; 또한 “비”가 시험 자체를 의미하는 것도 7:12에서 살폈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생략된다.

“깊음의 샘들”이 의지 측면에서 있는 것에 관한 시험을, 그리고 “하늘의 큰 폭포”가 이해력 측면에서 있는 것에 관한 시험을 의미하는 이유는, 지옥에 의해 영향을 직접 받는 것이 의지 측면의 것들이기 때문이다. 이해력 측면의 것들은 이것이 의지로부터 있는 탐욕들에 침수되지 않고 있을 경우, 지옥의 영향을 직접 받지는 않는다. 의지력으로부터 있는 악들이 인간을 정죄하고 지옥으로 그를 내던진다, 그리고 거짓들의 경우, 그것이 악들과 결합되지 않은 이상 그렇게 까지는 하지 못한다. 그 이유가 이해력은 의지력을 뒤잇기 때문이다. 이 서술이 진실인 이유는 거짓들 안에 있는데도 여전히 구원되어지는 아주 많은 사람들의 경우로부터 알 수 있을 것이다. 이런 경우는 자연적 수준의 선행과 자비 안에서 사는 이방인 사이에 많이 있다, 그리고 기독인들의 경우, 심정의 천진난만함 안에 신앙을 지닌 이들이 이런 경우에 포함된다. 그들의 무지함과 천진난만함은 그들을 너그럽게 봐주게 한다. 그 이유는 이것들 안에는 순진이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거짓들 안에서 자신들을 확증한 이들, 그리하여 거짓된 삶과 계약을 맺은 이들, 결국 모든 진리를 거절하고 내치는 이들의 경우는 위와 매우 다르다; 그 이유가 거짓으로부터의 이 삶은 진리와 선의 어떤 것이 수정되기 이전 반드시 황폐되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이보다 한 단계 더 나쁜 상황이 있다. 자신들의 탐욕들 아래 거짓들 안에서 확증한 경우이다. 이 경우는 거짓들과 탐욕들이 하나의 생명을 구성하기 때문이다; 이들은 자신들을 지옥에 풍덩 빠트린 자들이다. 의지 측면의 시험이 지옥들인 “깊음의 샘들”에 의해, 이해 측면의 시험들이 비를 오게하는 구름들인 “하늘의 큰 폭포”에 의해 의미되는 이유이다.

3절. 물은 땅으로부터 가고 되돌아 오고 하면서 물러갔다. 그리고 일백 오십 일 이후 물은 감소했다. “물이 가고 되돌아 오고 하면서 물러갔다”란 참된 것과 거짓된 것 사이의 파동(fluctuaton)을 의미한다. “150일 이후 물은 감소했다”란 종결(termination)을 의미한다.

물은 땅으로부터 가고 되돌아 오고 하면서 물러갔다. 이는 참된 것과 거짓된 것 사이의 파동들을 의미함은 이미 말한 바로부터 분명하다: 즉 홍수의 물들, 또는 범람, 노아에 관련하여, 시험들을 의미했다; 그 이유가 주제가 여기서 시험 후 첫 상태를 의미하는 바, “물들이 가고 되돌아 오고 하면서 물러갔다”가 진리들과 거짓들 사이의 파동 밖에 더 아니기 때문이다. 이 파동의 본래의 모습은 시험이 무엇인지 알지 않으면 알게 될 수 없다. 시험 후에 있는 것이 파동이기 때문이다. 시험이 천적 수준일 경우, 파동은 선과 악 사이에 있다; 시험이 영적 수준일 경우, 파동은 진리인 것과 거짓인 것 사이에 있다; 시험이 자연적 수준일 경우, 파동은 탐욕에 속한 것과 탐욕에 반대하는 것 사이에 있다.
시험들에는 많은 종류가 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즉. 크게 구분하면, 천적, 영적, 자연적 수준에서 이다. 천적 수준의 시험들은 주님을 사랑함 안에 있는 이들과 더불어서만 존재한다. 영적 수준의 시험들은 이웃을 향한 선행 안에 있는 이들과 더불어서만 존재한다. 자연적 수준의 시험은 위 두 수준의 시험들과는 구분된다. 이 시험은 엄밀히 말하면 시험이 아니고, 단지 세상에서의 불운, 질병, 또는 신체의 피나 다른 액체들이 악화된 조건들에 습격 당한 자연적 수준의 사랑들로부터 발생하는 근심 불안 일 뿐이다. 이것은 대단히 간략한 설명이지만 이로부터서도 시험이 무엇인지 짐작은 했으리라 본다. 따라서 (심신의) 고통과 걱정은 자신이 사랑하는 것에 반대하는 것은 무엇이든, 그것에 의해 야기되는 모든 시험의 수준에 공통되는 생산물이다. 그런고로 주님을 사랑함 안에 있는 이들과 더불어, 이 사랑이 습격 당하면, 가장 깊은 고통을 생산하고, 이는 천적 수준의 시험이다; 이웃을 향한 사랑, 또는 선행 안에 있는 이들과 더불어, 이 사랑이 습격 당하면, 양심의 고통이 생산된다. 이것은 영적 수준의 시험이다;
그러나 자연적 사랑 안에 있는 이들과 더불어, 이들이 시험들과 양심의 아픔(pang)들이라 부르는 것은 시험이 아니고, 그들의 사랑들이 습격 당함으로부터 일어나는 걱정들일 뿐이다. 이것들은 이 수준의 사람들이 자신의 명예, 재산, 명성, 쾌락, 신체적 생명, 등등 같은 것에 흠집이 나고 손실이 생기는 것이 예견되어 오는 느낌에서 발생되는 불안 걱정일 뿐이다; 그럼에도 이들의 곤경들은 선함 측면의 어떤 것을 쉽게 생산되어지게 해주는 특성이 있다. 더 나아가 자연적 수준의 선행 안에 있는 이들이 시험들을 체험하는 기회를 부여한다. 그 결과로 갖가지 종류의 이교도, 이방인, 그리고 우상숭배자들로 자기들이 흠모하는 자기들 신앙의 생명을 공격 당함으로부터 일어나는 곤경에 의해 시험을 맛볼 수 있다. 이것들은 영적 시험들을 흉내내는 비애(woe)들이다.

시험들이 끝났을 때, 흔들림(wavering)이 있다. 만일 시험이 영적 수준에서 였다면 진리와 거짓 사이에 흔들림이 있다. 이는 이렇게도 설명이 된다. 시험은 거듭남의 시작이다는 것; 그리고 모든 거듭남은 인간이 새로운 생명을 받는 것이 목적이다는 것, 또는 그가 생명을 받는다고 말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그리하여 사람 아님에서 사람 이다로 되는 것, 또는 죽은 자로부터 살아있게 만드는 것, 그러므로 그의 이전 삶, 단지 동물일 뿐인 삶이 시험들에 의해 파괴되는 것이기에, 그는 진리인 것과 거짓인 것 사이에서 흔들림을 경험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진리는 새로운 삶 속에 있고, 거짓은 옛 삶 속에 있다; 따라서 옛 삶이 파괴되지 않으면, 즉 이 흔들림이 거행되지 않으면, 어떤 영적인 씨도 뿌려지는 것이 불가능하다. 그 이유는 영적인 씨를 받을 지면(바탕)이 없기 때문이다.
어쨌든 이전의 삶이 파괴되고, 흔들림이 결과될 때, 인간은 진리와 선인 것을 거의 알지 못하고, 실로 진리인 것 같은 어떤 것도 거의 모른다. 예를 들면, 그가 선행의 선들을 곰곰이 되씹어 볼 때, 또는 사람들이 일컫는대로와 같이, 선한 일들에 관해서, 그리고 자기는 자신스스로로부터 그것들을 행할 수 없다라고 하는 것이 맞는지 틀린지, 내가 행한 선한 일에 나 자신 공적이 있는지 없는지 등등에 대해 불명확함과 어두움 안에 있다는 말이다. 그리고 그의 자기 자신, 또는 자신 스스로로부터는 선을 행할 수 없음이 통보될 때, 나아가 누구도 공적을 소유하지 못한다는 것, 모든 선은 주님으로부터 있고, 모든 공적은 주님 만에 속한다는 것을 통지받으면, 그는 놀라움에서 갈피를 잡지 못한다. 이 외에 신앙의 다른 문제들의 경우도 많다; 그러나 그의 마음의 불명확함과 어둠은 점진적으로, 분별적으로 계몽되어진다.
거듭남은 인간이 유아로 출생하는 것과도 같다. 유아 때의 그의 삶은 매우 희미하다; 그는 아는 것이 없다, 그러므로 먼저 유아는 사물의 일반적인 것들을 받는다, 이것은 점차 세부적으로 구분되어가서 일반적인 것들 안에 삽입되어진다. 그리고 구분된 세부적인 것들 안에 더 세세한 세부적인 것들이 있다. 세부사항들에 의해 예증된 일반적인 것들이 있다. 이런 식으로 아이들은 사물의 존재를 배울 뿐 아니라, 그것들의 본성과 품질까지 배운다. 영적 시험으로부터 빠져나온 이들의 경우도 이와 같다; 그리고 거짓들 안에서 있어온 이들의 저세상 삶과 황폐됨도 이와 비슷하다. 이 상태가 (영적) 흔들림(Fluctuation)이고, 이 구절에서 “물들이 가고 되돌아 오고 하면서 줄어들었다”에 의해 묘사되어 있다.

일백 오십 일 이후에 물들이 감소했다. 이는 시험이 중단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은 이 숫자가 끝남과 시작 점이라고 말해진 바로부터 분명해진다. 여기서는 흔들림의 종결(끝남, termination)과 새로운 삶의 시작을 의미한다.

4절. 그리고 방주는 일곱 째 달 십칠 일에 아라랏 산맥에서 휴식하였다. “방주가 휴식하였다”란 거듭남을 의미한다. “일곱 째 달”이란 거룩한 것을, “그 달의 십칠 일”이란 새로운 것을, “아라랏 산맥”이란 빛을 의미한다.

“방주가 휴식하였다(rested)”가 거듭남을 의미하는 것은 이런 사실로부터 분명해진다. 즉 “방주”가 이 교회의 사람을 의미한다는 것; 방주 안에 포함된 모든 것은 거듭남의 사람 안에있는 모든 것들을 의미한다는 것은 이미 많이 살폈다. 그러므로 방주가 휴식한다라고 말해질 때, 이는 이 사람이 거듭나 있다를 뜻한다. 글자 의미의 연결로도 방주의 휴식함에 의해 시험 후 이어지는 흔들림들의 중단이 의미됨을 함축하는 듯 엿보인다; 그러나 참되고 선한 것에 관하여 불명료함들과 의심들인 흔들림들이 쉽사리 중단되지 않고, 꽤 오래 존속한다. 이는 뒤잇는 구절들로부터 분명해진다. 이로부터 어떤 것의 계속성은 내적 의미에서는 다르다; 그리고 이 의미들은 신비적인 바, 이를 펼쳐 보이도록 내게 허락해 주셨다; 영적 (평면의) 인간도 천적 (평면의) 인간같이 시험을 견디어 낸 후 주님의 “휴식”이 있다; 영적 (평면의) 인간도 천적 (평면의) 인간같이 일곱 째 달이 되어간다 (천적 평면의 인간같이 일곱 째 날이 아님). 이렇게 천적 (평면의) 인간과 영적 (평면의) 인간 사이에 차이가 있는 바, 전자의 “휴식”은 원어에서도 안식일을 뜻하는 단어로 표현되고, 후자는 휴식을 뜻하는 또다른 단어를 사용해 표현하였다. 이 단어로부터 “노아”라고 이름지어졌다, 이는 “휴식”을 적절하게 뜻한다.

“일곱 째 달”이 거룩한 것을 의미함은 앞서 많은 설명이 있었다. 이 거룩함은 천적 (평면의) 인간에 관련되는 것에 상응한다 (2:3 참조): 즉 일곱 째 날은 신성하게 되어졌다는 것, 그 이유는 하느님께서 그 속에서 휴식하셨기 때문이다.

“열 일곱 째 날”이 새로이 있는 것을 의미함은 같은 숫자가 등장하는 7:11에서 말해진 것으로부터 분명해진다. 거기서 이 숫자는 시작을 의미한다; 그리고 모두 각각의 시작은 새로이 있다.

“아라랏 산맥”이 빛을 의미하는 것은 “산”이 사랑과 선행으로부터 오는 선을 의미함으로부터; 그리고 “아라랏”의 의미가 빛(light, 또는 a bit of light, lumen )임으로부터, 그리고 실로 거듭난 자가 향유하는 빛이다로부터도 분명해진다. 새로운 빛(lumen), 또는 거듭난 자의 처음의 빛(light, 또는 glimmer)은 신앙의 진리들에 관한 지식들로부터 그 빛의 존재를 가지는 일은 결코 없고, 오직 선행으로부터서만 가진다. 신앙의 진리들은 빛의 광선(rays, lucis) 같고, 사랑 또는 선행은 불꽃 같다; 거듭나 있는 자의 빛(lumen)은 신앙의 진리들로부터가 아닌 선행으로부터이고, 신앙의 진리들은 선행으로부터 파생된 빛의 광선이다. 그런고로 “아라랏 산맥”은 선행으로부터의 빛(lumen)을 의미한다. 이 빛이 시험 후 지각되어지는 처음의 빛이고, 처음인 바, 이 빛은 어둑하다. 그래서 충분한 빛(lux)이 아닌 빛의 조각(조금, lumen)이라 불리운다.

이상 살핀 바로 이 구절이 내적 의미에서 무엇을 의미하는지 분명해졌을 것이다. 즉 영적 (평면의) 인간은 선행으로부터 있는 새로운 지적인 빛(lumine)의 덕택으로 있는 거룩한 “휴식”이다는 것이다. 이 진리들은 천사들에 의해 다양함에서 아주 경이롭게, 그리고 질서에서 매우 기쁘게 지각되어지는데, 인간은 이를 천사같은 생각에서는 단하나도 획득할 수 없지만, 거기에는 수천의 겹겹의 시리즈가 되어 천사와 인간에게 들어가 감화를 준다. 사실상 이와 같은 것들은 묘사가 가능할 수 없다. 주님의 말씀에서 이런 방식은 내적 의미 두루에 걸쳐 있다. 글자 의미에서 일지라도, 역사 그대로 안에서 조차 그러한 바, 마치 본문, 즉 “방주는 일곱 째 달, 십칠 일, 아라랏 산맥에 휴식하였다”의 경우도 마찬가지 이다.

5절. 그리고 물은 열째 달까지 가고 줄어들고 하였는데 열째 달, 첫 날에 산봉우리가 나타났다. “물이 가고 줄어들고 하였다”란 거짓들이 사라지기 시작했음을 의미한다. “열째 달”이란 리메인스(remains) 속에 있는 진리들을 의미한다. “첫째 날에 산맥의 봉우리들이 나타났다”란 거짓들이 사라지기 시작하면서 믿음 속의 진리들이 보여지기 시작했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물은 가고 줄어들고 하였다. 이것은 거짓들이 사라지기 시작하였음을 의미하는데, 이는 단어들 자체로부터, 뿐아니라 3절에서 살핀 바로부터 분명해진다. 3절의 경우, “물들이 가고 되돌아 오고 하면서 줄어들었다”인데, 이 구절에서는 “물들이 가고 줄어들고 하였다”라고 말해진다. 이 절도 앞 구절 같이 진리인 것과 거짓인 것 사이의 파동들이 의미되어진다. 그러나 여기서는 이 파동들이 감소하고 있다. 이미 말한대로 시험 후 파동들과 더불은 경우, 인간은 진리가 무엇인지 모른다는 것, 그러나 점차적으로 파동은 중단되어 간다는 것, 그리하여 진리의 빛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한 이유인즉, 인간이 이와같은 상태 안에 있는 한, 내적 인간은 주님을 통하여 외적 인간 위에서 행동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내적 인간 안에 리메인스가 있는데, 이는 선한 것과 진리인 것에 대한 애착들이다. 이는 이미 살핀 바 있다 (561, 661:2항 참조); 외적 인간 안에는 그리워함들과 이로부터 파생되는 거짓들이 있다. 이 후자가 종속되거나 소멸되지 않는 한, 길은 내적 인간으로부터 선들과 진리들을 위해 열리지 않는다. 즉 주님으로부터 내적 인간을 통하는 길이 열리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시험들은 인간의 외적인 측면들이 종속되는 것, 그리고 그의 내적 측면들에 순종하게 하는 것에 목적을 두고 있을런지 모른다. 이는 이런 사실로부터 모든 이에게 분명해질지 모른다. 즉, 불행이나 병듦, 마음의 슬픔 같은 것에 의해 인간의 사랑들이 습격당하고 깨지고 한다면, 그의 그리워함들은 가라앉기 시작하고, 동시에 그는 경건하게 말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그가 이전 상태로 되돌아 오면, 그의 외적 인간은 우세하기 시작하고 내적 인간 따위는 거의 생각하지 못한다. 비슷한 상황은 육체의 것들이 소멸하기 시작하는 때인 죽음의 시간에서 발생한다; 그리고 이로부터 모든 사람은 내적 인간이 무엇인지, 그리고 외적 인간은 무엇인지; 또한 리메인스는 무엇인지, 그리고 어떻게 외적 인간 속에 있는 그리워함들과 쾌락들이 내적 인간을 통한 주님의 역사하심을 방해하는지도 알런지 모른다. 이로부터 또한 모든 이에게 명백해지는 바, 시험들, 또는 양심의 찌름이라 불리는 내적인 고통들이 외적 인간으로 하여금 내적 인간에 순종하게 하는 결과를 가져오는지에 대해서이다. 외적 인간이 순종한 결과란 이렇다: 선하고 참된 것에 애착함들이 그리워함들과 이로부터 파생되는 거짓들에 의해 방해받지 않고, 저항받지 않고, 질식되지 않는 것이다. 그리워함들과 거짓들의 중단됨이 여기서 “가고 줄어드는 물들”에 의해 묘사되어지고 있다.

“열째 달”은 리메인스 속에 있는 진리들을 의미하는 것은 “10”이 리메인스이다로부터 분명해진다; 그리고 위에서 말한 내적 인간에 있는 리메인스에 관한 것으로부터도 분명해진다.

“달의 첫째 날에 산들의 봉우리들이 나타났다”란 보이기 시작한 신앙의 진리들을 의미함은 “산들”의 의미가 사랑과 선행으로부터의 선들이다로부터 분명해진다(795항 참조). 인간이 거듭나질 때, 봉우리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그리고 양심을, 선행을 선물 받는다; 사랑과 선행의 선들로부터가 아닌 어떤 다른 바탕으로부터 신앙의 진리들을, 또는 산들의 봉우리들을 본다고 상상하는 자는 완전 잘못된 상상이다; 이것들 없이 유대인들과 모독된 이방인들도 완전 잘못된 상상으로부터 신앙의 진리들을 본다고 할런지 모른다. “산들의 봉우리들”은 나타나는 빛의 첫 여명이다.

이런 것들로부터 명백해지는 또 하나는, 모든 거듭남은 저녁으로부터 아침으로 진행한다는 것이다. 이는 창세기 첫 장, 인간의 거듭남이 취급되는 대목에서 여섯 번 서술된다. 2, 3절은 저녁을, 4, 5 절은 아침이 묘사되어 있다. 본문은 빛의 첫 여명, 또는 이 상태의 아침이 “산들의 봉우리가 나타남”에 의해 묘사되어지고 있다.

6절. 그리고 사십 일의 끝이 왔을 때 노아는 그가 만든 방주의 창문을 열었다. “40일의 끝이 왔다”란 이전 상태의 존속 기간, 그리고 다음 상태의 시작을 의미한다. “노아는 그가 만든 방주의 창문을 열었다”란 신앙의 진리들이 그에게 나타나는 두 번째 상태를 의미한다.

그리고 사십 일의 끝이 왔다. 이것은 이전 상태의 존속 기간과 이어지는 상태의 시작을 의미한다는 것은 “40”의 의미로부터 분명해진다. 이 설명은 730항에서 있었다; 거기서, 주제는 시험이다. 그리고 “사십 일 낮들과 사십 일 밤들”이라 말해진다. 이는 시험의 존속 기간을 의미한다. 그러나 여기서의 주제는 시험 다음에 있는 상태이기 때문에, “사십 일 낮들”이라 말해지고 사십 일 밤은 아니다. 그 이유는 이렇다, 즉 선행, 이는 말씀 안에서 “낮”에 비교되어지고 “낮”이라 불리운다, 이 낮이 지금 나타나고 있다; 그리고 앞서 있는 신앙이 선행과 아직은 결합되어 있지 않은 상태는 “밤”에 비교되고 “밤”이라 불리운다 (창. 1:16에서와 다른 구절에서도). 달이 태양으로부터 빛을 받듯, 말씀에서 신앙은 선행으로부터 그것의 빛을 받기에 밤이라고도 불리운다; 그리고 이로부터 신앙은 “달”에 비교되고 “달”이라 불리운다. 그리고 사랑과 선행은 “태양”에 비교되고 “태양”이라 불리운다. “40일”, 또는 존속기간은 앞의 것과 뒤잇는 것 모두에 관계되는 바, “사십 일의 끝에서” 라고 말해진다; 그런고로 그것들은 이전 상태의 존속 기간과 지금 취급하는 이것의 시작을 의미한다. 여기서 시험 후 이 교회인의 두 번째 상태의 묘사가 개시된다.

노아는 그가 만든 방주의 창문을 열었다. 이는 신앙의 진리들이 나타나는 두 번째 상태를 의미한다. 이는 앞 절의 마지막 단어들로부터, 즉 “산들의 봉우리들이 나타났다”로부터 분명해진다; 이에 더하여 “창문”의 의미가 이해력, 또는 신앙의 진리임으로부터 더 알 수 있다; 그리고 앞 절과 마찬가지로 이로부터도 빛의 첫 여명이 있다. 이해함, 또는 신앙의 진리에 관하여가 “창문”에 의해 의미되는 것은 위에서도 관찰 될런지 모른다. 즉 신앙의 진리는 사랑으로부터, 또는 선행으로부터가 아니면 가능하지 않다는 것, 마치 의지로부터 있지 않은 진정한 이해함은 없는 것과 같다. 만일 당신이 의지로부터 있는 것을 제거한다면, 이해함도 있지 않다; 그리고 만일 당신이 선행을 제거한다면, 신앙은 없다; 그러나 인간의 의지가 단지 탐욕일 때, 이 탐욕 안에 그의 이해력, 또는 신앙의 진리가 침수됨을 예방하기 위해, 주님께서는 경이로운 장치를 마련하셨는데, 그것은 양심이라는 매체를 수단으로 이해력 측면의 것과 의지력 측면의 것을 분리하는 것이다. 이 경이로운 섭리 없이 아무도 구원되어질 수 없었으리라.

7절. 그리고 그는 까마귀를 내보냈다, 까마귀는 나가서 물이 땅에서 마를 때까지 가고 되돌아 오곤 하였다. “노아가 까마귀를 내보냈고, 까마귀는 나가서 가고 되돌아 오곤 하였다”란 거짓들이 아직도 혼란을 만들고 있음을 의미한다. “까마귀”는 거짓을 의미한다. “나가서 가고 오곤 하였다”란 혼란스러움이 그들의 상태였음을 의미한다. “물이 땅에서 마를 때까지”란 거짓들이 외견상으로는 흩어진 듯 여겨짐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는 까마귀를 내보냈다, 까마귀는 나가서…가고 되돌아 오곤 하였다. 이는 거짓들이 여전히 혼란스러움을 만들었다를 의미하는데, 이는 “까마귀”와 “나가서…가고 되돌아오곤 하였다”의 의미로부터 분명해진다. 이에 관하여는 이후 더 말해질 것이다. 이 구절에서 거듭나지는 사람의 두 번째 상태가 묘사되는데, 이는 신앙의 진리가 마치 빛의 첫 여명과도 같이 나타나기 시작하는 때이다. 이 상태의 본성은 거짓들이 계속적으로 혼란함을 만들고 있음인데, 아침 해뜨기 직전의 어스름한 상태와 유사하다. 따라서 밤의 불명료함이 아직 남은 상태의 아침이다. 이것이 “까마귀”에 의해 묘사되어 있다.
영적 (평면의) 인간, 특히 거듭나기 이전일 경우, 그의 거짓들은 짙은 구름의 부분과 같다. 그 이유인즉, 그는 말씀에서 밝혀주는 것으로부터를 빼면 아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말씀의 대부분은 일반적 측면에서 서술하고 있다; 그리고 일반적인 사항(generals)은 구름의 한 부분 밖에 더 아니다. 그 이유가 모두 각각의 일반적 측면은 그것 안에서 수천의 세부 사항(partculars)들을 납득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각 세부사항들은 수천의 낱개들(singulars)에 속하는 사항들을 납득한다. 그리하여 모든 일반적인 사항들은 세부사항들로부터의 낱개 사항들에 의해 예증되어진다. 이런 것들은 인간에게 밝혀진 적이 없는데, 그 이유는 그것들은 어떻게 묘사하거나 마음에 품어 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것들은 (인간에 의해) 인정될 수도, 믿어질 수도 없다; 그 이유가 그것들은 인간 안에 존재하고 인간이 파괴되어지라고 쉽게 허용하지 않는 것인 감각의 오류들에 반대되기 때문이다.
천적 (평면의) 인간, 주님으로부터 지각을 소유하는 이 인간은 위 영적 인간과 아주 다르다; 그 이유가 이 인간 안에는 세부사항들과 세부사항으로부터의 낱개 사항들이 은근히 심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생각해 보자: 진정한 결혼은 한 남자와 한 아내와의 결혼이다; 그리고 이 결혼은 천국의 결혼을 표현한다. 그러므로 천국의 결혼은 이 결혼 안에 있을 수 있으나 한 남자와 여러 아내들과의 결혼 안에 있을 수 없다. 영적 (평면의) 인간은 이를 주님의 말씀으로부터 알고, 묵묵히 따른다, 그리고 여러 아내와의 결혼이 죄이다는 것을 양심의 차원에서 수용하고 있다; 그러나 더 이상은 아는 것이 없다. 그러나 천적 (평면의) 인간은 이 일반적 사항을 확증하는 수천의 것들을 지각한다. 그러므로 한 명 이상의 여러 아내와의 결혼은 생각만해도 혐오스러움을 느끼고 만다. 영적 (평면의) 인간은 일반적 사항들(지식들)만을 알고 있기에, 그의 양심 역시 일반적 사항들로부터 만들어내고 있다. 그리고 말씀의 일반적 사항들은 감각들의 오류들에 숙박하고 있기에, 하나 더 분명해지는 바는, 무수한 거짓들, 이것은 흩어질 수 없다는 것, 말씀의 일반적 사항들 자체가 무수한 거짓들에 인접해 있을 것이고 그것 안으로 은근히 불어넣어지기 까지 하고 있다. 이런 거짓들이 여기서 “나가서, 가고 되돌아오는 까마귀”에 의해 의미되어지고 있다.

“까마귀”가 거짓들을 의미함은 새들에 관해 말해진 것으로부터 일반적인 방법에서는 분명해진다. 즉, 새들은 이해력, 추론력, 기억 속의 지식으로부터의 것들, 또한 그 반대적 의미인 추론함들과 거짓들 까지 의미한다. 이들 모두는 새들의 종류에 의해 말씀에서 묘사되고 있다; 온화하고, 아름답고, 깨끗한 새들에 의해서는 이해력으로부터의 진리들을; 그리고 게걸스럽게 먹고, 보기 싫고, 불결한 새들에 의해서는 거짓들이 묘사되어진다. 또한 진리와 거짓의 종류에 따라 다양하게 묘사된다. 조잡하고 짙은 거짓들이 올빼미들과 까마귀들로 묘사되어진다; 올빼미들은 그것들이 밤의 어두움에서 살기 때문이고, 까마귀는 그것의 색깔이 검기 때문에서 이다. 이사야서를 보자:
올빼미와 까마귀가 거기 안에 거주할 것이다 (이. 34:11)
위 구절은 유대 교회가 단지 거짓들 안에 거주함을 묘사하고 있다. 이 거짓들이 올빼미와 까마귀로 표현되었다.

“가고 되돌아 옴”이 그들의 상태였음을 의미하는데, 이 상태는 시험 후 인간의 첫째와 두 번째 상태 안에 있는 동안, 즉 거짓들이 주위를 나는 것, 가고 되돌아 오고 하는 것이 인간과 더불어 있는 거짓들임으로부터 분명해진다. 그 이유는 위에서 언급된 이유 때문, 즉 시험 후 첫, 둘째 상태의 인간은 가장 일반적인 것들에 관한 지식 안에만 있을 수 있기 때문에서 이다. 이런 일반적 지식 안으로 물질적, 감각적, 세상적인 것들로부터 일어나는 공상들이 흘러드는 바, 이것은 신앙의 진리와 일치 하지 않는다.

물들이 땅에서 마를 때까지. 이는 외견상 거짓들의 흩어짐을 의미하는데, 이는 거듭나는 인간의 상태로부터 분명해진다. 오늘날 모든 이가 믿는 바는 이렇다: 인간 안에 있는 악들과 거짓들은 거듭나는 동안 완전히 분리되고 폐지되어진다는 것, 즉 인간이 거듭나게 될 때, 남아있는 악과 거짓은 없다는 것, 그는 물로 씻고 깨끗해지듯 정의롭고 깨끗하다는 것이다. 이 관념은 어쨌든 깡그리 거짓이다; 그 이유가 단 한 개의 악이든 거짓이든 폐지되어지듯 털어낼 수 없기 때문이다; 하여간 인간은 유아로부터 파생된 유전적인 것 모두, 행위와 행동에 의해 얻어진 모두가 남아 있는 바, 그가 거듭났다 해도 그에게는 여전히 악과 거짓 밖에 더 없음은 사 후 혼들의 삶에서 여실히 보여진다. 이렇게 숙고해보면 더 충분하게 이에 관한 진리를 파악할 지 모른다. 즉 주님으로부터가 아니면 인간 안에는 선에 관한 것, 진리에 관한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것, 모든 악과 거짓은 인간의 자기 자신으로부터 이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인간, 그리고 영, 그리고 천사 조차도 아주 작은 순간 조차라도 그 자신에 머물게 방치해두면, 즉각 지옥으로 돌진하고야 만다; 그러므로 말씀에서 조차 천국은 순수하지 않다 라고 말해지고 있다 (욥. 15:15 참조). 이는 천사들에 의해 인정되는 바이고, 이를 인정하지 않는 천사는 천사들 사이에 있을 수 없다. 주님의 자비만이 그들을 자유하게 해준다. 그리고 그들을 지옥에서 끌어당기시어 그들이 그쪽으로 치닫는 것에서 보호하신다. 그들이 지옥 안으로 돌진함에서 주님에 의해 보호되는 것은 천사들에 의해 분명하게 지각되고 선한 영들도 조금은 지각한다. 악한 영들, 그들은 인간같이 이를 믿지 않는다. 이에 관한 설명은 차 후 주님의 신성한 자비로부터 내 경험으로부터 말해질 것이다.
인간에게 잘 어울리는 생명은 악과 거짓 안에 존재하기 때문에 악과 거짓은 폐지시킬 정도로 까지 털어내질 수 없기에, 주님께서는 신성한 자비로부터, 그분이 인간을 거듭나게 하시는 동안, 시험을 통하여 그의 악들과 거짓들을 굴복시킴으로 그것들은 죽은 듯 하게 나타난다. 비록 죽은 것은 아니다해도 복종 상태이므로 그것들은 주님으로부터 있는 선들과 진리들에 맞서 싸울 수 없다. 또한 동시에 시험들을 통하여 주님께서는 선들과 진리들을 받는 새로운 능력을 주신다. 즉 주님께서는 선과 진리에 대한 애착들과 생각들을 그에게 선물함으로, 이것에 악들과 거짓들이 구부려질 수 있게 하신다, 그리고 인간의 일반 사항들 안에 세부 사항들을, 세부사항들 안에 낱개 사항들을 삽입하시고, 이것들은 인간 안에 저장되나 인간은 이런 것을 아예 모른다. 그 이유는 그것들은 그의 납득력과 지각의 영역 쪽 내면에서 진행되기 때문이다. 이것들은 저장소, 또는 그릇의 역할을 담당하여 주님에 의해 선행이 은근히 심어질 수 있게 하고, 이 선행 안에는 순진이 담겨진다. 인간, 영들, 그리고 천사들과 더불은 이런 유연해짐에 의해 일종의 무지개가 표현될런지 모른다. 그리고 이런 이유 때문에 무지개는 언약의 표시로 만들어졌다 (창. 9:12-17 참조). 이 대목은 차 후 살핀다. 인간이 이렇게 만들어내질 때, 그는 거듭나진다고 말하지만, 그의 모든 악들과 거짓들도 여전히 남아있다. 하지만 이제는 이와 동시에 그의 모든 선들과 진리들도 보존된다. 악한 인간과 더불은 그의 모든 악들과 거짓들은 그가 육체의 삶에서 그것들을 가졌던 것과 꼭같게 저세상에서도 되돌아와서 지옥의 공상들과 처벌로 바뀌어진다. 그러나 선한 인간과 더불어 그의 모든 선과 진리는 저세상에서 친구 관계 같이 선행으로부터, 순진으로부터 다시 불려나와 그것들의 즐거움들과 행복과 함께 강대하게 늘어나고 불어난다. 이런 것들이 물들의 마름에서 의미되어 있고, 이것이 거짓들의 외견상 흐트러짐이다.

8절. 그리고 노아는 물이 지면의 얼굴에서 줄어 들었는지 여부를 보기 위해 자기로부터 비둘기를 내보냈다. “비둘기”는 거듭나지게 되는 사람과 함께하는 진리들과 선들을 의미한다. “그가 보기 위해 그로부터 비둘기를 내보냈다”란 믿음 속의 진리들과 선들을 받는 상태를 의미한다. “물이 줄었는지 아닌지”란 방해 공작을 펴는 거짓들을, “지면”은 교회 속의 사람에게 있는 것들을 의미한다. 이 구절에서는 땅(earth)이 아닌 지면(ground)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데 그 이유가 지면은 인간이 교회가 되어가는 첫 상태이기 때문이다.

“비둘기”는 거듭나지게 되는 인간과 더불어 있는 신앙으로부터의 진리들과 선들을 의미한다. 이는 말씀에서 “비둘기”의 의미로부터, 특별히 주님께서 세례받으셨을 때 그분 위에 온 비둘기의 의미로부터 분명해진다. 마태복음서를 보자:
그리고 예수께서 세례 받으셨을 때, 그분은 물로부터 곧바로 올라오셨다,
그리고 보라, 천국들이 그분에게 열려졌다, 그리고 그는 하느님의 영이 비둘기
같이 내려오고, 그리고 그분 위에 오고 있다.
(마. 3:16; 요. 1:32; 눅. 3:21-22; 막. 1:10-11)
위 구절에서 “비둘기”는 신앙의 거룩함만을 의미한다; 그리고 “세례” 자체는 거듭남을 의미한다; 그런고로 일어날 새 교회에서 주님으로부터 거듭남을 수단으로 받아지는 진리와 선을 의미한다. 비슷한 것들이 유대 교회에서 태워바침과 제물로 바치는 어린 비둘기(young pigeon)들과 호도애(turtle dove)들에 의해 포함되고 표현되었다. 이에 관련된 성경 몇 구절로는 레. 1:14-17; 5:7-10; 12;6, 8; 14:21, 22; 15:14, 29, 30; 민. 6:10, 11; 눅. 2:22-24를 보면 명백해질 것이다. 이런 구절들이 어떤 것을 표현하지 않으면 성경 내에 있을 이유가 없다는 단 하나만의 숙고함으로도 이 구절이 지닌 의미에 긍정하리라 본다. 그렇지 않을 경우 이 구절은 아무 의미도 없고, 신성에 관련된 것도 없게 된다. 교회의 외적인 것은 죽은 생명의 업무처리 일 뿐이고 교회의 살아있음은 내적인 것으로부터 이고, 이는 주님으로부터 있다.
“비둘기”는 일반적 측면에서 신앙의 지적인 것을 의미하는데, 이는 예언서에서 확인된다. 호세아서에서:
에브라임은 어리석은 비둘기 같고, 심정이 없다; 그들은 이집트라 불리운다,
그들은 아시리아로 갔다 (호. 7:11).
그리고 다시, 에브라임에 관하여:
그들은 이집트로부터의 새 같이 두려워져 있을 것이다, 그리고
아시리아의 토지로부터의 비둘기 같이 두려워져 있을 것이다 (호. 11:11).
위에서 “에브라임”은 총명한 자를, “이집트”는 지식을 가진 자를, “아시리아”는 합리적인 자를, “비둘기”는 신앙의 지적인 것들로부터 있는 것을 표시한다; 그리고 여기서 역시 주제는 영적 교회의 거듭남이다. 다시 다윗서에서:
오 여호와시여, 당신의 호도애의 혼을 들짐승에게 넘기시지 않습니다 (시. 74;19)
위에서 “들짐승”은 선행 없음으로부터 있는 이들을 표시한다; “호도애의 혼”은 신앙의 생명을 표시한다. 또한 새들에 관해 말해진 것도 참조하라. 즉 그것들은 지적인 것들을 의미하되, 온화하고, 아름답고, 유용한 새들은 지적인 진리들과 선들을; 그러나 맹렬하고, 보기 흉하고, 쓸모 없는 새들은 반대적 의미, 또는 거짓들을 의미하는데, 이 구절의 까마귀와 같고 여기서 비둘기에 반대되어 있다.

그리고 그는 보기 위해 자기로부터 비둘기를 내어보냈다. 이는 신앙의 진리들과 선들을 받는 상태를 의미하는데, 이어지는 구절들로부터, 즉 시험 후 이 사람의 거듭남의 세 상태들을 취급하는 대목으로부터 분명해진다. 세 상태가 세 번 비둘기를 내어보냄에 의해 의미되어 있다. 여기서의 말들은 대략적으로 그가 탐구함을 포함하고 있다; 그 이유가 그가 “보려고 자기로부터 비둘기를 내어 보냈다”라고 말해지기 때문에서 이다. 즉 물들이 줄었는지; 즉, 선들과 진리들이 받아질 수 없을 정도로 거짓들이 아직도 널려 있는지를 보려고해서 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님의 경우, 탐구는 필요 없다, 그 이유가 그분은 일반적, 세부적, 모두를 알고 계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내적 의미에서의 단어들은 탐구가 아닌 상태를 의미한다, 그리고 여기서는 첫 상태, 거짓들이 아직도 방해하고 있는 때를 의미하는데, 이것이 “물들이 줄었는지 여부를 (보려고)”라는 말들에 의해 의미되어져 있다.

“지면의 얼굴들”이 교회인 안에 있는 여러 가지 것들을 뜻한다는 것, 그리고 “지면”이 언급된 이유는 이것이 인간이 교회가 되어가는 첫 상태이기 때문이다는 것은 “지면”이 교회인이다고 살핀 대목으로부터 분명해진다. 신앙의 선들과 진리들이 교회인 안에 뿌려질 때, 그는 “지면”이라 불리우나, 뿌려지기 이전의 경우에서는, 그는 “땅”이라 불리운다. 예를 들면, 창세기 첫 장에서 인간이 천적 수준의 품성을 획득하기 이전에서 그를 땅으로 묘사되나; 그가 천적 수준의 품성을 획득한 2장에서는 그를 “지면”과 “들판”으로 묘사한다. 본 장의 경우도 비슷한 바, 단어 “땅”과 “지면”으로부터는 내적 의미에서 의미되는 것이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이는 이 대목 뿐만 아니라 말씀 두루에 걸쳐 그러하다. “지면”에 의해 보편적 의미에서는 교회가 의미된다 (82항 참조). 그리고 교회, 교회의 사람이 의미되는 바, 교회의 각 개인도 교회이다.

9절. 그리고 비둘기는 그녀의 발 바닥을 위한 쉼을 찾지 못하고, 노아에게 되돌아 왔다, 그 이유는 물들이 온 땅의 얼굴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노아는 그의 손을 내밀어 비둘기를 붙잡았다, 그리고 자기에게, 방주 안으로 가져 왔다. “비둘기가 그녀의 발 바닥을 위한 쉼을 찾지 못했다”란 뿌리를 내린 신앙 속의 선과 진리가 아직은 하나도 없다는 뜻이다. “비둘기가 그에게 방주로 되돌아 왔다”란 선과 진리는 주님으로부터 신앙 속에 있지만 거듭나아가는 사람에게 그것들이 자신으로부터 있는 듯 여기는 것을 의미한다. “물이 땅의 얼굴 위에 있었기 때문이다”란 아직도 거짓들이 넘쳐 흐르고 있음을 뜻한다. “그가 손을 내밀었다”란 자기 자신의 능력을 뜻한다. “비둘기를 받아 그에게로, 방주 안으로 가져왔다”란 그가 자신으로부터 선한 것을 행했고 참된 것을 생각했음을 의미한다.

여기서 시험 후 이 교회인의 거듭남의 첫 상태가 묘사되어 있다. 이 상태는 거듭나지는 모두에게 공통되는 상태이다; 즉, 그들은 자신들로부터 선인 것을 행하고 진리인 것을 생각한다고 상상한다; 그 이유는 그들이 아직은 큰 희미함 안에 있기 때문인데, 주님께서는 그들이 그렇게 상상하는 것을 내버려두신다. 그러나 이런 상상함에 있는 이상, 그들이 행한 선, 그들이 생각하는 진리는 신앙으로부터의 선과 진리가 아니다. 그 이유가 인간이 자신으로부터 생산하는 것은 무엇이든 선일 수 없다, 그 이유는 그것이 인간 자신으로부터 이기 때문, 즉 불순하고 가장 불결한 근원으로부터 이기 때문이다. 이 불순하고 불결한 원천으로부터 선은 나갈 수 없다. 그 이유가 인간은 언제나 자신의 공적과 정의만을 생각하기 때문이다; 어떤 이들은 자신과 비교해 타인을 경멸하기 조차 한다 (주님께서 이를 눅. 18:9-14에서 가르치신다). 그 외 여러 방법들에서 인간은 실수 투성이이다. 인간 자신의 그리워함들은 그 자체를 뒤섞는 방식을 추가해서 바깥쪽에서 볼 때는 선 인듯 나타나게 하나, 내향적으로는 더러울 뿐이다. 이런 이유로 이 상태에서 행하는 선은 신앙으로부터의 선이 아니다. 그가 생각하는 진리 측면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그가 참된 것을 생각할지라도, 그가 자신의 것으로부터 일 경우, 실로 생각하는 것이 신앙의 진리라 할지라도, 신앙의 선은 그 안에 없다; 그래서 모든 진리, 신앙의 진리이기 위하여서는 반드시 그것 안에 주님으로부터 받는 신앙의 선을 지녀야만 한다. 이것이 처음으로 선과 진리가 되는 때이다.

그러나 비둘기는 그녀의 발바닥을 위한 쉼을 발견하지 못했다. 이는 신앙의 선과 진리가 아직 뿌리를 내릴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는 “비둘기”의 의미가 신앙의 진리를 의미함으로부터, “발 바닥을 위한 쉼”의 의미가 뿌리를 가짐이다로부터 분명해진다. 이것이 뿌리를 내릴 수 없다고 말해진 이유는 뒤잇는 것 안에서 말해지는데, 즉 거짓들이 여전히 넘쳐흐르고 있어서이다. 그러나 뿌리를 내릴 수 없는 이유는 영적 (평면의) 인간의 거듭남이 어떻게 결과되는지를 알지 않으면 가능치 않다.
이 인간과 더불어 신앙의 지식들은 주님의 말씀으로부터 그의 기억 안에, 또는 말씀으로부터의 교리물로부터 그의 기억 안에 심어지게 된다 (고대 교회는 태고 교회에 밝히 알려진 것으로부터 신앙의 지식들을 가졌다). 따라서 영적 (평면의) 인간은 그의 마음의 지적 측면이 가르쳐지게 된다. 그러나 거짓들이 그 안에서 넘쳐흐르는 한, 신앙의 진리들이 씨뿌려져 보았자, 뿌리를 가질 수 없다. 이 진리들은 지면 만에 남아있다. 즉 그의 기억 안에만 남아있다. 지면이 이 씨에 적합한 지면이 되어있지 않아서, 즉 그 안의 거짓들이 나타나지 않게 몰아내어지지 않아서이다(842:4-5, 868:2항 참조).
영적 (평면의) 인간과 더불은 진짜 지면은 그의 지적 마음(intellectual mind)에 준비되어진다. 이 지면이 준비되었을 때, 선행의 선이, 이로부터 양심이 주님에 의해 은밀히 심어지고, 이후에 이 인간은 양심으로부터 행동한다. 즉 양심을 통하여 주님께서는 신앙과 연결하여 선과 진리를 결과 안에 가져다 놓으신다. 그런고로 주님께서는 영적 (평면의) 인간의 지적인 것들을 그의 의지로부터의 것들과 구분되어 있게 장치해두셨다. 그리하여 그것들이 결코 하나로 있지 못하게 만들어 놓으셨다; 그 이유가 그것들이 하나로 있으면, 그는 영원히 멸해질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태고 교회의 사람과 더불어 의지로부터의 것들은 이해력으로부터의 것들과 하나되어 있었다. 마치 천적 천사들과 같다. 그러나 이 고대 교회의 사람과 더불어 그것들은 하나되지 않았고, 이는 어떤 영적 인간에게 있어서도 그러하다. 실로 그가 행하는 선행의 선은 마치 그의 의지로부터 인 것 처럼 나타나나, 이것은 외관 상일 뿐이고 오류이다. 그가 행하는 선행의 선은 주님 만으로부터 있고, 그의 의지를 통하여가 아닌 그의 양심을 통하여 있다. 만일 주님께서 잠간이라도 그의 의지로부터 행동하게 내버려둔다면, 그는 선 대신 악을 자기의 증오, 복수, 잔인함으로부터 행동한다.

위와 같은 경우는 영적 (평면의) 인간이 생각하고 말하는 진리 측면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그가 양심으로부터 생각하고 말하지 않으면, 또는 주님으로부터 있는 선으로부터 생각하고 말하지 않으면, 그는 빛의 천사를 덧 쓴 악마가 생각하고 말하는 것 밖에는 더 아니다. 이 모든 것은 다른 삶에서는 대단히 명백하다. 이런 설명들로부터 어떤 방식에서 거듭남이 결과되는지, 그리고 영적 (평면의) 인간의 거듭남이 무엇인지 분명해진다: 즉 사실상, 그의 지적 부분은 그의 의지 부분으로부터 분리되어 있다는 것, 이 분리 수단은 주님께서 그의 지적 부분에 만들어 놓은 양심을 수단으로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양심으로부터 행해지는 것은 무엇이든 그의 의지로부터인 듯 나타나나, 실지로는 주님에 의해 행해진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녀는 방주로 그에게로 되돌아 왔다. 이는 선과 진리가 마치 신앙으로부터인 것 처럼 나타남을 의미하는데, 이는 말해진 것과 뒤잇는 것으로부터 분명해진다. 내적 의미에서, “방주로 돌아감”은 해방(liberation)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해방은 방주로부터 나가고 되돌아 오지 않음에 의해 의미되기 때문이다. 이는 이어지는 구절로부터 분명해진다, 즉 12절에서, 그는 비둘기를 내보냈다, 그리고 그녀는 더 이상 그에게로 다시 되돌아 오지 않았다; 그리고 더 나아가 15-16절로부터, 노아는 방주로부터 나가라고 명령받는다; 그리고 18절에서, 그는 나갔다. “방주”는 거듭나기 전 이 교회인의 상태를 의미하고, 이 상태 안에 그는 포로된 신세, 또는 감금된 신세같이 있었고, 악들과 거짓들에 의해, 또는 홍수에 의해 사방에서 에워싸여 있었다. 이런 상태인지라 비둘기는 방주로 그에게로 되돌아 온 것이고, 이는 비둘기에 의해 뜻해진 선과 진리가 인간에게 다시 되돌아 왔다가 의미되어진다. 그 이유가 인간이 자신으로부터 행했다고 상상하는 선은 무엇이든 그에게 되돌아가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그가 그것을 자신으로 간주하기 때문이다; 그가 선을 행할 때, 그는 이 선이 세상에서, 또는 천사들 앞에서 과시되기를, 그리고 천국의 한 자리가 그의 것이기를, 기왕이면 천국에서 큰 자이기를 욕심내기 때문이다. 이런 등등은 인간의 자기 자신 안에, 인간 생각의 도처에 스며있다. 단지 바깥쪽 형체에서만 선과 진리인 듯 나타날 뿐이다. 신앙으로부터의 선과 진리는 가장 안쪽 측면의 세계로부터 있는 내향의 선과 진리이다; 즉 신앙으로부터의 모든 선과 진리는 주님으로부터 인간의 가장 안쪽 세계를 통하여 주님으로부터 흐르고 있다. 그러나 인간이 행하는 것이 그의 자기 자신으로부터, 또는 자기의 공적으로부터 일 때, 내면들은 더러워지고, 외면들은 깨끗한 듯 나타난다; 마치 곱다란 모양새를 풍기는 더러운 음녀와 같을지 모른다. 아마도 흰 수의로 둘둘 말아놓은 에티오피아와 이집트의 미이라일 것이다.

그 이유는 물들이 온 땅의 얼굴 위에 있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여전히 거짓들이 넘쳐흐르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는 홍수의 “물들”의 의미가 거짓들이다로부터 분명해진다. 또한 단어들 자체로부터도 명확해진다.

그리고 그는 자기 손을 내밀어 그녀를 잡았다, 그리고 그녀를 방주로 자기 안으로 가져왔다. 이는 그의 자신의 힘을, 그리고 그는 자신으로부터 선인 것을 행했고, 진리인 것을 생각했음을 의미하는데, 이는 “손”의 의미가 힘(power)이다는 것으로부터 분명해진다. 여기서의 경우, 자신의 힘으로 그는 이런 것들을 했음을 의미한다. 그 이유가 “그의 손을 내밀어 비둘기를 붙잡아 그녀를 자신에게로 가져온다”가 “비둘기”에 의해 뜻해지는 진리를 자신의 탓으로 여기는 것이기 때문이다. “손”에 의해 권위(authority), 그리고 자기 과신(self-confidence, 자기 만족, self-assurance)이 의미됨은 말씀의 여러 구절로부터 분명해진다. 이사야서에서:
나는 아시리아 왕의 위대하다 우쭐대는 심정의 열매를 방문할 것이다, 그 이유는
그가 말하기를, 내 손의 강함으로 나는 그것을 행했다, 그리고 내 지혜로
(그것을 행했는데), 내가 총명하기 때문이다 (이.10;12-13).
위 구절에서 “손”은 그가 해낸 것이 그의 자신의 손 이었음을 분명하게 표시한다. 그리고 이것이 그를 방문하는 원인이 되었다. 다시:
모압은 자기 한 가운데에서 그의 손들을 펼 것인데, 마치 수영자가 헤엄치려
팔을 벌리는 것 같다. 그리고 [여호와께서는] 그의 교만을 그의 손들의
큰 폭포(cataract, 수문, floodgate)와 함께 낮게 놓이게 하실 것이다 (이. 25:11).
위에서 “손들”은 인간의 자기 자신의 힘을 표시한다. 그는 이 힘이 다른 사람의 힘보다 우월한 것으로 여기는 것, 고로 교만으로부터 이다.
다시:
그들의 거주민들은 손이 짧아 있었다, 그들은 낙담하였고 수치를 당하였다 (이. 37:27).
“손의 짧음”은 힘이 없음을 뜻한다. 다시:
진흙이 옹기장이에게, 너는 무엇을 만드느냐? 너는 무슨 일을 하느냐?
그는 손들을 가지고 있지 않다 라고 말하겠느냐? (이. 45:9).
여기서 “손들이 가지고 있지 않다”는 그가 힘을 가지고 있지 않다를 뜻한다. 에스겔서에서:
왕은 슬퍼할 것이다, 제 1 인 자들은 망연자실로 옷 입을 것이다, 그리고 토지의 사람들의
손들은 곤경을 당할 것이다 (겔. 7:27).
위에서 “손들”은 힘을 표시한다. 미가서에서:
불법을 고안하는 그들에게 화가 있다, 그들의 침대 위에서 악을 일하는 자는
(화가 있다); 아침이 빛이 있는 때, 그들은 그것을 실습한다, 그 이유는
그들의 손이 그들의 하느님이기 때문이다 (미. 2:1).
위에서 “손”은 그들이 자기들의 하느님으로 신뢰한 자신의 힘을 표시한다. 스가랴서에서:
양떼를 내버려두는 무가치한 목자에게 화가 있다; 검이 그의 팔 위에, 그의 오른쪽
눈에 있을 것이다; 그의 팔은 말리워 깨끗해질 것이다(오그라들 것이다, shirvel),
그리고 그의 오른쪽 눈은 지독하게 어두워질 것이다 (슥. 11:17)
“손들”이 힘들을 의미하기 때문에, 인간의 악들과 거짓들이 말씀에서 “그의 손들의 일”이라고 계속적으로 불리운다. 악들은 인간의 자기 자신의 의지력 측면에서 있고, 거짓들은 그의 이해력 측면에서 있다. 이것이 악들과 거짓들의 근원이다는 것은 악과 거짓 밖에 더 아닌 인간의 자기 자신의 본래의 모습으로부터 충분히 분명해진다. 일반적으로 “손들”이 힘을 의미하기에, “손들”은 말씀의 많은 곳에서 여호와, 또는 주님의 속성이 되어 있어, “손들”은 내적 의미에서 전능으로 이해된다. 이사야서에서:
여호와, 당신의 손이 들리우신다 (이. 26:11),
이는 신성한 힘을 표시한다. 다시:
여호와께서 그분의 손을 뻗치셨다, 모든 것이 살라졌다 (이. 31:3).
위에서 신성한 힘을 표시한다. 다시:
내 손들의 일에 관련하여 너는 나에게 명령하느냐?; 내 손들이 하늘들에 뻗쳤다,
그리고 하늘들의 모든 군대에게 내가 명령들을 주었다 (이. 45:11, 12)
위 구절 역시 신성한 힘을 표시한다. 거듭난 자가 말씀에서 “여호와의 손들의 일”이라 자주 불리운다. 이사야서에서:
나의 손이 땅의 기초를 놓았다, 그리고 나의 오른 손이 뼘으로 하늘들을 재었다
(이. 48:13).
위에서 “손”과 “오른 손”은 전능을 표시한다.
다시:
내 손이 되찾을 수 없을 정도로 짧더냐? 또는 내가 구원해줄 힘을
가지고 있지 않더냐? (이.50:2).
위 또한 신성한 힘을 표시한다. 예레미야서에서:
당신께서는 당신의 위대한 힘을 수단으로, 그리고 당신의 내뻗은 팔을 수단으로
하늘과 땅을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표시들을 가지고, 경이로운 것들을 가지고,
강한 손을 가지고, 내뻗은 팔을 가지고 당신의 백성 이스라엘을 이집트의 토지로부터
데려왔습니다 (예. 32:17, 21).
위 구절도 신성한 힘을 표시하고 있다; 위 구절에서 “힘”은 17절에서, “손”은 21절에서 명명되고 있다. 이스라엘은 “강한 손과 내뻗은 팔”을 사용하여 이집트로부터 데려내왔다는 것은 자주 말해진다 (신. 4:34; 5:15; 7:19; 26:8; 시. 136:11-12 등등). 에스겔서에서:
그러므로 주 여호비께서 말하신다, 내가 이스라엘을 선택한 그 날에, 그리고 내 손을
야곱의 가문의 씨 쪽으로 들었다, 그리고 이집트의 토지에 있는 그들에게
나 자신을 알게 만들었다; 나는 내 손을 그들 쪽으로 들었다.
내가 이집트의 토지로부터 그들을 데려오기 위해서이다 (겔. 20:5-6, 23).
모세의 책에서:
이스라엘은 여호와께서 이집트 위에 집행한 위대한 손을 보았다 (출. 14:31).
“손”에 의해 힘이 의미되는 것은 이상 살핀 구절로부터서도 분명해진다. 실로 “손”은 힘에 대한 함축된 단어이기도 한 바, 표현적 의미 역시 지니게 되었다. 이는 이집트에서 행해진 기적들, 즉 모세가 자기 막대, 또는 손을 뻗치라고 명령받았을 때, 그것들이 그렇게 되었던 대목으로부터도 분명해진다. 출애굽기서에서:
모세가 그의 막대를 하늘을 향하여 내뻗었다, 그리고 여호와께서는 이집트의 토지에
우박을 비가 쏟아지게 하셨다 (출. 9:22, 23); 모세는 그의 손을 하늘을 향하여
내뻗었다, 거기에 짙은 어둠이 있었다 (출. 10:21, 22); 모세가 바다 위에 그의 손을
내뻗었다, 그리고 여호와께서는 바다를 마른 토지로 만드셨다;
그리고 모세가 바다 위에 그의 손을 내뻗었다, 그리고 바다는 되돌아왔다 (출. 14:21, 27).
논리에 맞추어 생각하려는 사람이라면 위 구절의 힘들이 모세의 손이나 막대에 있다고 믿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이 기적은 신성한 힘 때문이라 확신할 것이다. 그러기는 유대 교회에서도 마찬가지였던 바, 손은 그 교회에서 힘의 표현물(representative)이 되었다.
여호수아가 창(javelin)을 내뻗었을 때도 비슷하다. 여호수아서에서:
그리고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말하셨다, 아이를 향하여 네 손에 있는 창을 내뻗어라;
그 이유는 내가 그것을 네 손에 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호수아는 그 성을
향하여 그의 손에 있던 창을 내뻗었다, 그리고 그들은 성 안으로 들어가서 그 성을
점령했다; 여호수아는 아이의 거주민을 진멸할 때까지
내뻗은 그의 손을 뒤로 끌어당기지 아니하였다 (여. 8:18, 26).
위 구절만 가지고도 어떻게 위 사건의 경우가 유대 교회의 외적인 것들인 표현적인 것으로 있게 되었는지, 그리고 어떻게 이런 경우가 말씀과 더불어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 즉 말씀의 외적 의미 안에 있는 것들은 주님과 그분의 왕국이 표현되도록 나타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우리의 마음이 글자의 역사적 세부사항들에 초점을 맞추는 한, 위 구절에서 손을 내뻗음이나 여타 다른 구절들에서나 표현이 주님과 그분의 왕국에 관한 것의 나타냄을 실어 날라다 주지 않는다는 말이다. 또한 유대인들이 모든 예배를 외적인 것들에만 초점을 맞추는 한, 위 인용 구절에서 같이 모세의 막대나 여호수아의 창은 일개 물건에 불과한데 그것에 권능(힘)이 있다고 하는 한, 말씀이나 그들의 교회 의식에 관한 진정한 이해로부터 얼마나 멀리 떨어져있을 것인지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그들이 손이나 막대를 내뻗을 때 표시들이나 기적들이 뒤따른 것은 주님의 권능이 막대나 손에 의해 의미되었기 때문이라고 천국에서는 이해한다.
이런 사건 역시 마찬가지 이다. 즉 모세가 자기 손들을 위로 들어올리고 있을 때, 여호수아가 승세를 잡았고; 모세가 그의 손을 내리자, 여호수아는 뒤로 밀렸다; 그래서 그들은 그의 손들을 위쪽에 머물게 했다 (출. 17:9-13). 그리하여 손들이 성별되어지는 이들 위에 놓이게 되었다(안수함). 마치 레위인들이 백성들에 의해서이듯 하다 (민. 8:9, 10, 12), 그리고 여호수아는 모세에 의해 안수되었는데, 그가 모세를 대신할 때였다 (민. 27:18, 23). 이는 권능이 그렇게 해서 주어지도록 하기 위함이다. 이로부터 즉위식이나 축복식에서도 손을 놓는 행위가 전수되어 왔다. 손이 힘을 의미하고 표현함이 어느 정도까지 인지는 웃사와 여로보암에 관련하여 말씀에서 말해진 것으로부터 쉽게 알 수 있다. 웃사에 관련하여 말해지는 바, 그가 하느님의 궤 쪽으로 (자기 손을) 내밀어 궤를 붙잡았을 때, 그러므로 그는 죽었다 (삼하. 6:6, 7). “궤”는 주님을 표현하였다, 그런고로 거룩한 모든 것과 천적인 모든 것도 표현했다. 웃사가 (자기 손을) 궤 쪽으로 내밈은 인간의 자기 자신의 힘, 또는 인간의 자기 자신인 것을 표현했다; 이 사건에서의 “손”은 모독으로 이해되는 바, 원어에서는 이 단어가 표현되지 않는다. 그 이유는 모독된 것이 거룩한 것에 접촉했다는 것이 천사들에 의해 지각되지 않도록 (주님께서 배려하신 것이다).
그리고 웃사가 그것을 내밀었기 때문에 그는 죽었다. 여로보암에 관련하여 이렇게 말해진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 왕은 제단을 향하여 외치는 하느님의 사람의 말함을 들었을 때,
여로보암은 자기 손을 제단으로부터 내밀어, 말하기를, 그를 붙잡으라; 그리고 그가
내민 그의 손은 오그라들었다(말려졌다). 그리하여 그는 자기 손을 뒤로 가져갈 수
없었다; 그리고 그는 하느님의 사람에게 말했다, 지금 여호와 네 하느님의 얼굴에
청원을 하라, 그리고 나를 위해 기도하라, 내 손이 다시 나에게 회복될런지 모른다;
그리고 하느님의 사람은 여호와의 얼굴에 청원하였다, 그리고 왕의 손은 다시
그에게 회복 되었다. 그리고 이전 같이 되었다 (왕상. 13:4-6).
위 구절 역시 “손을 내밈”에 의해 인간의 자기 자신의 힘, 또는 그의 자기 자신이 의되었다. 이는 모독이다, 그리고 하느님의 사람을 향하여 손을 내밈은 거룩한 것을 위반하기를 원했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손이 오그라졌다; 그러나 여로보암은 우상숭배자였고, 그래서 그는 모독을 할 수도 없는 바, 그의 손은 회복되어졌다. “손”이 힘을 의미하고 표현하는 것은 영들의 세계에 있는 표현물로부터도 분명해진다. 거기서 가려지지 않은 팔이 볼 수 있게 될 때가 있는데, 그 팔은 얼마나 힘이 세던지 사람의 뼈들을 분쇄하거나 비틀어 뼈골이 없게 할 정도여서, 심장을 녹일만큼 공포를 조장한다; 그리고 사실상 이 강함이 (공갈만 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그것 안에 있다.

10, 11절. 그리고 그는 다른 칠 일을 더 머물렀다. 그리고 그는 다시 비둘기를 방주로부터 내어 보냈다. 11 그리고 비둘기는 저녁 무렵 돌아 왔다. 보라, 비둘기 입에는 올리브 잎이 잡아뜯겨 있었다. 그래서 노아는 물이 땅으로부터 줄어든 것을 알았다. “그가 다른 칠 일을 더 머물렀다”란 거듭남의 둘째 상태의 시작을 의미한다. “칠 일”은 거룩한 것을 의미해 주는데 그 이유는 이제부터 선행이 취급되기 때문이다. “다시 그는 방주로부터 비둘기를 내보냈다”란 신앙 속의 선과 진리를 받는 상태를 의미한다. “비둘기가 저녁 무렵 돌아 왔다”란 거듭남에서 신앙 속의 선과 진리들이 조금씩 나타나기 시작했음을 의미한다. 저녁 무렵은 아침이 있기 직전의 박명(twilight)과 같은 뜻이다. “보라 비둘기 입에는 올리브 잎이 잡아 뜯겨 있었다.”란 신앙 속의 진리들이 조금이지만 있음을 의미한다. “잎”은 진리이다. “올리브”는 선행으로부터의 선이다. “잡아뜯겨짐”은 신앙 속의 진리가 신앙 속의 선으로부터 있음을 의미한다. “노아는 물이 땅으로부터 줄어든 것을 알았다”란 신앙 속의 선과 진리들이 조금이나마 자신에게 나타나는 것은 거듭남에 훼방질을 일삼던 거짓들이 이전보다는 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그는 다른 칠 일을 머물렀다. 이는 거듭남의 두 번째 상태의 시작을 의미하는데, 이는 시간의 간격으로부터, 즉 8절과 9절이 첫 상태이고, 10절과 11절은 두 번째 상태인데. 이 두 상태 사이의 간격으로부터 분명해질런지 모른다. 역사적 연결을 유지하기 위하여 시간 간격이 노아의 “머뭄”에 의해 표현되어지고 있다. 어떻게 이 경우가 거듭남의 두 번째 상태와 더불은 것 인지는 거듭남의 첫 상태에서 말해진 것을 염두해두고 생각해보자. 즉, 첫 상태는 신앙의 진리가 아직 뿌리를 내릴 수 없었던 상태, 그 이유가 거짓들이 방해하기 때문이다. 신앙의 진리가 첫 뿌리를 내릴 수 있는 것은 인간이 신앙의 진리를 인정하고 믿기를 시작할 때이지만, 이 신앙의 진리에는 뿌리는 없다. 그 이유가 인간이 말씀으로부터 듣고 그것을 기억 안에 붙잡는 것은 씨뿌림에만 해당되기 때문이다; 인간이 선행의 선을 환영하여 받아들일 때까지 뿌리내림은 결코 시작되지 않는다. 신앙의 모든 진리는 신앙의 선을 수단으로, 즉 선행의 선을 수단으로 뿌리를 내린다. 다시 설명하면, 이는 지면이 찬 겨울에 씨뿌려진 것과 같다는 말이다; 그것들은 겨울 동안 지면에 드러누워 있을 뿐, 뿌리를 내리지 않는다. 그러나 지상의 봄 시기에 태양의 열이 땅을 따뜻하게 하자마자, 씨는 먼저 그 내부 자체에서 그것의 뿌리를 밀어내기를 시작한다. 그 후에 그것을 지면으로 내보낸다. 이식되는 영적인 씨도 위의 예와 비슷하다; 이 씨는 선행으로부터의 선이 이 씨를 따뜻하게 할 때까지 결코 뿌리를 내리지 않는다; 이 씨도 첫 시기에 내부에서 밀어내기를 시작하고, 그 후에 그것을 내보낸다.
인간 안에는 의견이 서로 일치할 수 있고 결합할 수 있는 세 층(layer)의 평행물(parallel, 수준, level, 평면, plane)이 있다. 즉 자연적, 영적, 천적인 평행물(수준, 평면)이다. 자연적 수준은 영적 수준으로부터만 생명을 받는다, 그리고 영적 수준은 천적 수준으로부터만 생명을 받는다. 천적 수준은 생명 자체되시는 주님으로부터만 생명을 받는다. 이렇게 한번 더 서술하면 더 나은 관념을 마음에 가질지 모른다: 자연적 수준은 영적 수준을 받아 담는 저장소(receptacle, reservoir), 또는 쏟아부어지는 영적 수준을 받는 그릇(vessel)이다; 그리고 영적 수준은 천적 수준을 받아 담는 저장소, 또는 그릇이다. 우리는 천적 수준을 통하여 주님으로부터 생명을 받는다. 이와같음이 (추가 설명하면, 이와 같이 생명이 내려오는 질서가) 유입(influx)이다. 천적 양상(모습, 외관, aspect)은 신앙으로부터의 모든 선이고, 영적 인간 안에서 이 선은 선행으로부터의 선이다. 영적 양상은 진리인데, 이 진리는 그것 안에 신앙으로부터의 선, 즉 주님으로부터 생명 자체가 있는 선행으로부터의 선이 있지 않으면 신앙의 진리가 되지 않는다. 더 명료한 관념을 만들기 위해 한번 더 생각해보자: 선행의 일은 인간의 자연적 차원(dimension)에서, 손이나 입 등등, 육체의 기관들을 수단으로 진행된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일 자체는 죽어 있다. 그리고 일 안에 영적 차원의 것이 담겨 있지 않으면 살아있지를 않다; 영적 차원 역시 천적 차원의 것이 담겨야 살아있다. 천적 차원은 주님으로부터 살아있다. 이렇게 된 질서로부터의 일 이어야 만이 선이라 말해진다. 그 이유가 주님으로부터가 아니면 선은 없기 때문이다.
이럴진대, 모든 이에게 분명해지는 것은, 선행의 모든 일(work)에서 일 자체는 물질적인 업무 처리(affair) 수준 밖에 더 아니다는 것, 그리고 살아있는 일이 되는 것은 그것 안에 신앙의 진리가 있기 때문이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신앙의 진리는 그 안에 신앙의 선이 없으면 생명없는 업무 처리 수준일 뿐이다는 것; 더 나아가 신앙의 선은 생명 자체, 선 자체이신 주님 만으로부터가 아니면 살아있지 않다. 이것은 왜 천적 수준의 천사들이 신앙에 관하여 듣는 것에 마음내켜하지 않는지, 일에 관하여 듣는 것은 더욱 마음내켜하지 않는지에 대한 설명의 일부도 된다. 이렇게 마음 내켜하지 않는 이유가 그들은 신앙과 일 둘 다를 사랑의 탓으로 여기기때문이고, 신앙을 사랑으로부터 있도록 만들고, 신앙의 일 조차도 사랑으로부터이다고 만들므로, 천사들과 더불어서는 일과 신앙 둘 다 자취를 감춘다. 그리하여 사랑과 사랑에서 파생되는 선 만이 남아있다. 천사들의 사랑 내부에 주님이 계신다. 이런 관념의 결과, 천적 평면의 천사들은 영적 평면에 있는 천사들과 분리되어 있다. 천적 수준의 천사의 참 생각(그리고 이 생각으로부터 파생되는 말까지 포함해서)은 영적 천사들의 생각과 말 보다 파악하기 더욱 어렵다.

“일곱”이 거룩한 것을 의미하는데, 그 이유는 현 주제가 선행을 취급하기 때문에서 이다. 이는 “7”의 의미로부터 분명해진다. 더 나아가 “일곱”이 여기에 삽입된 이유는 역사적으로 시종일관됨을 위해서이고, 내적 의미에서는 “7”과 “7 일들”이 거룩함을 추가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 두 번째 상태의 품질은 천적 양상으로부터 가진다. 즉 선행으로부터 이다.

그리고 다시 그는 방주로부터 비둘기를 내보냈다. 이는 신앙의 선들과 진리들을 받는 상태를 의미한다. 이는 이와 비슷한 단어가 있는 8절에서 말해졌다 (871항 참조). 그러나 이런 차이는 있다. 8절의 경우, 그는 비둘기를 “자기로부터” 내보냈다라고 말해진다; 이에 대한 의미는 인간 거듭남의 첫 수준은 선한 것을 행하고 참된 것을 생각함이 자신의 공적으로부터 라고 여기는 수준이었다. 다시 말해 그는 그것들이 자신의 힘으로부터 라고 믿었다는 말이다. 이것이 단어, “자기로부터”에서 뜻해진다.

그리고 비둘기는 저녁 무렵 그에게 되돌아 왔다. 이는 신앙의 선들과 진리들이 조금씩 나타나기 시작했다는 것, 그리고 아침 이전 희미한 빛(박명, twilight)과 같은 것을 뜻하는 “저녁 무렵”은, 8절에서 말해진 것으로부터 분명해진다; (참고: 여기서 “8절”은 라틴 첫 출판 원문에 따른 것이나, 학자들은 9절이어야 할 것으로 견해가 모아짐) 뿐만 아니라 저녁의 시간이 여기서 언급된 것으로부터도 분명해진다. “저녁”에 관련하여서는 창세기 1장을 참조하면 도움이 더 될 것이다. 거기서 “저녁이 있었고 아침이 있었다”가 여섯 번 말해진다. “저녁”은 거듭남의 용어이다. 거듭남에서의 저녁의 상태란 인간이 아직 그늘에 있는 상태, 또는 아직은 빛이 조금 그에게 나타나고 있는 때이다. 아침 자체는 이 장, 13절, 노아가 방주의 덮개를 제거하고 보는 것에 묘사되어 있다. “저녁”이 아침 이전 희미한 빛을, “저녁”은 유대 교회와 연결하여 많은 곳에서 언급되고 있다. 위와 똑같은 이유에서 그들의 축제나 안식일들은 저녁에 시작했다. 그리고 아론은 저녁에 거룩한 등불로 빛이 있게 하라고 명령받았다(출. 27:20-21).

그리고 그녀의 입에 올리브 잎이 잡아 뜯겨 있었다. 이는 신앙의 진리의 조금을 의미한다; “잎”은 진리를, 그리고 “올리브”는 선행의 선을; “잡아 뜯겨짐”은 선행으로부터 있는 신앙의 진리를 뜻한다. 그리고 그것이 보여진 “그녀의 입에”는 올리브 나무의 의미로부터 분명해진다. 그리고 단어들 자체로부터도 반짝이고 있다. 그리고 조금만 있다는 것은 거기에 오직 잎 하나 이다로부터 나타난다.

“잎”이 진리를 의미하는 것은 말씀의 많은 구절로부터 분명해진다. 여러 구절에서 인간이 나무에 비교되거나 나무라고 불리우고, “열매”들은 선행으로부터의 선을 의미하고, “잎”은 선행으로부터의 진리를 의미한다 (선행과 진리와 열매와 잎은 기능면에서 비슷하다); 에스겔서에서:
그리고 강 가, 강 둑, 이쪽과 저쪽에, 식품을 위한 모두 각각의 나무가 올라오고 있다.
이들의 잎은 시들지 않고, 열매가 소진되는 일도 없고; 그것은 모두 각각의 달에
다시 태어난다. 그 이유는 물들이 성소로부터 유출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거기로부터의 열매는 식품을 위해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잎은 치료약을 위해 있을 것이다 (겔. 47:12; 계. 22:2).
위 구절에서 “나무”는 주님의 왕국을 안에 지닌 교회인을 표시한다; 그 나무의 “열매”는 사랑의 선과 선행의 선을 표시한다; 그 나무의 “잎”은 그 나무로부터 발달하는 진리를 표시하고, 인간 종족의 기르침과 그들의 거듭남을 위해 봉사한다. 이런 이유로 잎은 “치료약”을 위해 있다라고 말해진다. 다시:
그가 거기로부터 뿌리를 잡아당기지 않겠느냐?, 그리고 열매를 잘라내고 그것이
시들지 않겠느냐? 그것의 싹을 잡아뜯겨 모두 시들지 않겠느냐? (겔. 17:9)
위 구절은 포도나무, 즉 황폐해짐에 있는 교회에 관해서 말해진다. 이 교회의 선은 이 포도나무의 “열매”이고, 이 교회의 진리는 싹의 잎인데 잡아뜯기고, 시들고 만다.
예레미야에서:
여호와를 신뢰하는 자는 복있다; 그는 물가에 심은 나무같을 것이다;
그의 잎은 푸를 것이다; 그리고 그는 가뭄의 걱정을 하지 않을 것이고,
열매 열림이 중단되지 않을 것이다 (예. 17:7-8).
위 구절에서 “푸른 잎”은 신앙의 진리, 고로 선행으로부터 있는 참 신앙을 표시한다. 이와 아주 비슷한 의미를 지닌 구절이 시편 1:3절에도 있다; 다시 예레미야서에서:
포도나무에 포도가 없다, 무화과나무에 무화과가 없다, 그리고 잎이 떨어진다 (예. 8:3).
“포도나무에 포도”란 영적 수준의 선을 표시한다; “무화과 나무에 무화과”란 자연적 수준의 선을 표시한다; “잎”은 진리를 표시하는데, 이 경우에서는 그것이 “떨어지고” 있다. 이. 34:4에서도 이와 비슷하다. 또한 같은 의미에서, 예수께서 지나가시다가 무화과 나무를 보셨는데, 잎만 있고 열매를 발견 못하시자, 시들어지고 말았다는 대목도 있다 (마. 21:9, 20; 막. 11:13-14, 20). 특별하게 무화과 나무에 의해 유대 교회가 뜻해졌고, 이 교회 안에 자연적 선이 더 이상 있지 않았음이 뜻해졌다; 이 교회 안에 보존되었던 종교적 가르침 또는 진리는 “잎들”이다; 황폐된 교회는 진리를 알고 있으나 깨닫고 싶어하지 않는다. 이와 유사한 것이, 진리는 알지만 선행의 선은 없는 자이다; 이들은 잎만 가진 셈인데, 그것은 시들어진다.

“올리브나무”는 선행으로부터의 선을 의미하는데, 이는 “올리브나무” 뿐만 아니라 “기름”의 의미로부터 분명해진다. 향료와 함께한 올리브 기름이 있다. 이는 성직자들과 왕들에게 기름붓기 위하여서 이다, 그리고 등불의 연료로서 사용되었다 (출.30:24; 27:20). 기름 부음과 등불을 위해 사용된 올리브 기름은 천적인 수준의 품질에 속하는 모든 것, 그러므로 사랑과 선행으로부터의 모든 선(선한 결과들)을 표현했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기름은 나무의 참 실체, 마치 나무의 혼 같다. 마치 천적 인 수준에 있는 것, 또는 사랑으로부터와 선행으로부터 있는 모든 선이 신앙의 참 혼에 해당되는 것 같다. 이로부터 “기름”은 그 표현성을 지닌다. “기름”이 천적 등급에 속한 것, 또는 사랑으로부터의 선과 선행으로부터의 선을 의미한다는 것은 말씀의 많은 구절에서 확증될 것이다; 여기서는 본문에 관련하여 몇 구절만으로 그 의미를 확증해보자. 예레미야서에서:
여호와께서 네 이름을 훌륭한 열매로 예쁜, 푸른 올리브 나무라고 불렀다 (예.11:16)
위 구절에서 태고 교회, 또는 천적 수준의 교회가 이렇게 불리운 것이다. 이 교회는 유대 교회의 기초 교회였다; 그리고 그러므로 유대 교회의 모든 표현물들은 천적인 것들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를 통하여 주님을 바라보았다.
호세아서에서:
그의 가지들은 펼칠 것이다, 그리고 그의 영예는 올리브 나무같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의 냄새는 레바논으로부터 같이 있을 것이다 (호.14:6).
위 구절은 심어지게 되는 교회에 관해서 말해진다. 이들의 영예(honor)는 “올리브 나무”, 즉 사랑으로부터의 선과 선행으로부터의 선이다; “레바논으로부터 같은 냄새”는 사랑과 선행으로부터 있는 신앙의 진리에 애착함이다. “레바논”은 삼나무(cedars)들을 암시한다. 이 나무는 영적 실재물(entity)들, 또는 신앙의 진리들을 의미했다. 등불대(lampstand)에 관해서 말하는 스가랴서에서:
등불대 옆에 두 올리브나무들이 있는데, 하나는 사발의 오른쪽 측면에,
그리고 다른 하나는 사발의 왼쪽 측면에 있다;
이들은 온 땅의 주님에 의해 서 있는 순수한 기름으로부터의 두 아들들이다
(슥. 4:3, 11, 14).
위 구절에서 “두 올리브 나무들”은 천적인 것과 영적인 것을 표시한다. 그리하여 사랑은 천적 (왕국의) 교회의 특징을 나타내고, 선행은 영적 (왕국의) 교회의 특징을 나타낸다. 이 교회들은 주님의 “오른쪽”과 “왼쪽”에 서 있다. “등불대”는 여기서의 경우 유대 교회 안에서 이것이 표현되고 있는 바, 주님을 의미한다; 등불대의 “등불”은 영적 특성(attribute)을 산출하는 천적 특성(attribute)을 의미한다. 마치 불꽃(flame)으로부터 빛의 광선들, 또는 빛이 진행되는 것과 같다. 다윗서에서
네 아내는 네 집의 측면들에 있는 열매 풍성한 포도나무로서 있을 것이다;
네 아들들은 올리브 묘목들 같이 있을 것이다 (시 128:3).
위 구절에서 “포도나무로서의 아내”는 영적 (평면의) 교회를 표시한다; “아들들”은 신앙의 진리들을 표시하는데, “올리브 묘목들(sapling)”이라 불리우는데, 그 이유는 선행의 선으로부터 있기 때문이다. 이사야서에서:
아직 거기에 어렴풋한 빛이 남아있을 것이다. 마치 올리브 나무로부터의 흔듦에서 같이,
가지 꼭대기에 두 세 개가 남는 것과 같다 (이. 17:6).
위 구절이 취급한 주제는 인간안에 있는 리메인스(remains)이다; “올리브 나무로부터의”란 천적 등급의 리메인스를 표시한다. 미가서에서:
너는 올리브를 밟을 것이나, 그 기름을 바르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포도 수확이 있으나 포도주를 마시지 못할 것이다 (미. 6:15).
그리고 모세의 책에서:
너희는 포도원들을 세우고 그것들을 가꿀 것이나, 너희는 포도주를 마시지 못할 것이다;
너희는 네 모든 경계에 올리브 나무를 가질 것이나,
너희는 그 기름으로 네 자신을 바르지 못할 것이다 (신. 28:39-40).
위 구절의 주제는 신앙으로부터의 선들과 진리들에 관하여 교리적인 가르침들이 풍부했다 이다, 이것을 그들의 특별난 본성 때문에 그들은 거절했다. 어쨌든 위 인용구절로부터 명백해지는 것은, “잎”은 신앙의 진리를, “올리브 나무”는 선행으로부터의 선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본문에서 비둘기가 그녀의 입으로 가져 온 “올리브 잎”도 같은 것을 의미한다; 즉 고대 교회 안에 선행의 선으로부터 신앙의 진리가 약간 나타났다는 말이다.

물들이 땅으로부터 줄었다는 것. 이는 방해하던 거짓들이 이전 보다는 덜 풍부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8절의 같은 단어들로부터 분명해진다. (이 절에서 언급하는 상태가) 거듭남의 두 번째 상태인데, 이것이 취급되고 있는 바, 상황은 이렇다; 인간이 획득해버린 모든 거짓들은 남아 있는다, 즉 아무도 자기의 거짓들을 철폐할 수 없다는 것은 이미 말한 적이 있다; 그런고로 인간이 거듭나질 때, 진리들은 주님에 의해 구부려진 거짓들에 이식되는 바, 거짓들은 마치 쫓아버린 것처럼 나타나 있는데, 이는 주님께서 선물로서 주신 선들을 수단으로 성취된다.

12절. 그리고 그는 또 다른 칠 일을 머물렀다, 그리고 비둘기를 내보냈다, 그리고 비둘기는 그에게로 다시 되돌아 오지 않았다. “그가 또 다른 칠 일을 머물렀다”란 세 번째 상태의 시작을 의미한다. “칠 일”은 거룩한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비둘기를 내보냈다”란 신앙의 선들과 진리들을 받는 상태를 뜻한다. “비둘기가 다시 되돌아 오지 않았다”란 자유롭게 된 상태를 의미한다.

그리고 그는 또 다른 칠 일을 머물렀다. 이것은 세 번째 상태의 시작을 의미한다. 그리고 “일곱”은 거룩한 것을 의미함은 같은 단어가 등장하는 두 번째 상태에서 설명되었다.

그리고 비둘기를 내보냈다. 이는 신앙의 선들과 진리들을 받는 상태를 의미한다는 것은 같은 단어가 등장하고, 단지 차이는 두 번째 상태라는 점 뿐이고, 10절로부터 분명해진다 (882항). 세 번째 상태는 비둘기가 되돌아 오지 않음, 그리고 또한 노아가 방주의 덮개를 제거함, 그리고 마침내 그가 방주로부터 나감, 그 이유는 지면의 얼굴이 말랐고, 땅이 말랐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녀는 그에게 더 이상 다시 되돌아 오지 않았다. 이는 자유롭게 된 상태를 의미한다. 이 의미는 비둘기 (또는 신앙의 진리) 외에 다른 새들, 짐승, 노아까지도 홍수의 물들 때문에 방주에 더 이상 갇혀있지 않게 됨이 뒤잇는 것으로부터 알게 된다. 그가 방주 안에 있는 한, 그는 노예같은 상태, 즉 속박된 상태, 감금된 상태에서 홍수의 물들, 또는 거짓들에 의해 이리저리 뒤흔들리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시험의 상태와 함께 있는 이 상태는 7:17에서 물들이 불어나고 이 물들이 방주를 떠메서 땅위로 들어올려 묘사되었다; 또한 다음 절에서 물들이 거세어지고 방주는 물들의 얼굴에서 오가는 것으로 묘사되었다. 8:15-18 에서는, 인간의 자유롭게 된 상태가 노아가 방주에서 나감, 그리고 그와 더불어 있던 모두가 나감에 의해 묘사되는데, 그 첫 번째 나감이 비둘기, 즉 선으로부터의 신앙의 진리이다. 그 이유가 모든 자유해짐은 신앙의 선으로부터, 즉 선을 사랑함으로부터 있기 때문이다.

인간이 거듭나질 때, 처음 동안에서 그는 이전의 노예같은 상태에서 자유한 상태로 온다. 탐욕들과 거짓들이 통치하는 것이 노예 상태이고, 선과 진리에 대한 애착이 통치할 때가 자유한 상태이다. 탐욕들과 거짓들이 통치하는 한, 인간은 지각을 하지 못하고, 오직 그가 자유한 상태 안으로 와 있어야 가능하다. 그가 노예같은 상태에 있을 때, 즉 탐욕들과 거짓들이 통치하는 동안, 이것들에 복종하는 인간은 자기가 자유한 상태에 있다고 상상한다; 그러나 이는 완전 거짓이다. 그 이유가 그는 탐욕들로부터의 즐거움과 쾌락들에 의해, 즉 자기의 사랑들에 의해 끌려가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이 즐거움에 의해 실행되었기 때문에 그에게는 이것이 자유하다고 나타나는 것이다. 모두 각각의 인간, 그가 어떤 사랑에 의해 인도되는 동안, 그리고 그가 어디로이든지 끌려가는 동안에서는, 그 자신 자유하다고 상상한다. 하지만 그는 악마적 영들의 떼거리 안에서 급류에 휩쓸려 있는 모습일 뿐이다. 그러나 이 인간은 최고의 자유를 만끽하고 있다고 상상하여, 이 자유를 잃는 것은 극도로 불운해진다고, 생명이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 이다고 믿는다; 그가 이렇게 되는 이유는 그가 어떤 다른 삶의 존재를 알아채리지 못해서일 경우가 있고, 알아채고 있는 자 일 경우, 천국은 고난이나 가난, 쾌락의 포기가 아니면 아무도 가지 못한다 하는 것 등등으로 마음에 강한 인상 자국을 가졌기 때문에서 이다. 그러나 이런 강한 인상 자국이 얼마나 거짓인지를 주님께서는 (영계에서의) 많은 경험을 통하여 나로 알게 해주셨다. 이에 관하여는 이 후 주님의 신성한 자비로부터 말해보겠다.
인간은 그가 거듭날 때까지, 그리고 선하고 참된 것을 사랑함을 통하여 주님에 의해 인도될 때까지 자유해진 상태에 와 있을 수 없다. 그가 거듭난 상태에 있을 때, 처음 동안, 그는 자유가 무엇인지를 알 수 있고 지각도 한다, 그리고 삶의 진정한 즐거움이 무엇인지, 그리고 행복이 무엇인지도 알고 지각한다. 거듭남 이전 일 경우, 그는 선이 무엇인지 조차 모르는 바, 그는 가장 지독한 악을 가장 위대한 선이라 부르는 경우도 있다. 주님으로부터 자유해진 상태에 있는 이들은 탐욕들과 거짓들의 삶을 볼 때, 더 나아가 느낄 때, 그들은 마치 지옥이 자기들 눈 앞에 열려져 그 안의 인간이 하는 짓들 같이 느껴져 몹시 혐오하고 만다. 어쨌든 자유해진 삶이 무엇인지에 대하여 알려진 것이 거의 없는 바, 매우 간략하게라도 정의를 내려두어야 할 것 같다. 자유, 또는 자유한 삶은 주님의 인도하심에서만 온전히 있는 것이다. 이렇게 매우 간단한 몇 마디 인데도 이를 인간이 깨닫지 못하게 방해하는 것들은 수도 없이 많다. 그런 이유는 인간은 악마적 영들의 지배 아래로부터 자유해지기 위해 시험들을 거치기 때문; 그리고 인간은 자기를 사랑함과 세상을 사랑함으로부터 있는 탐욕들의 즐거움 외에 다른 즐거움은 없다고 알기 때문, 뿐만 아니라 천국의 삶에 관한 거짓된 견해를 마음에 품고있어, 영의 세계에서의 살아있는 (나의) 경험담과 영계에 관한 (나의) 서술들이 교육적 측면에서 덜 효과적이 되고 만다. 따라서 주님의 신성한 자비로부터 이 후 이에 관해 더 보충 설명을 해 볼 것이다 (2870-2893항 참조).

13절. 그리고 육백 년 그리고 첫 해, 시작에서, 달의 첫째에서 였다, 물은 땅으로부터 말랐다. 그리고 노아는 방주의 덮개를 제거했다. 그리고 보았다, 그리고 보라, 지면은 말라 있었다. “600년 그리고 그 첫 해”란 마지막 경계(선), [또는 마감](last boundary, close)을 의미하고, “첫 달 시작”은 처음의 경계(선), [또는 다시 시작함](first boundary, recommencement)을 의미한다. “물이 땅에서 말라 있었다”란 거짓들이 나타나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노아가 방주의 덮개를 열고 보았다”란 거짓을 제거하면서 신앙의 진리들의 빛이 있었고, 이를 인정하고 이 빛에서 신앙을 가진 것을 의미한다. “지면의 물이 말라 있는 것을 보았다”란 거짓들이 더 이상 나타나지 않는 것, 즉 거듭남을 의미한다.

그리고 육백 년 그리고 첫 해 였다. 이것이 마지막 경계(선)을 의미하는데, 이는 숫자 600의 의미로부터, 이에 관해 설명한 7:6 (737항)으로부터 알 수 있다. 7:6의 경우 시험의 시작을 의미하나, 여기서는 의도적으로 시험의 끝이 같은 숫자를 사용하여 되는 바, 본문의 600은 지나온 모든 햇수까지 포함됨을 암시하도록 하면서 (시작이) 거행된 것이 햇수의 끝에서 임이 강조되도록, 이어지는 말, “시작에서, 달의 첫째에서”가 추가되어 있다. 이를 수단으로 처음의 경계(선) (또는 다시 시작함)이 의미되었다. 어떤 전체 기간이 말씀에서는 비록 백년, 천년이다 할지라도 “날”. “주”, “달”, “해”로 의도되어 있다. 예를 들면, 창세기 첫 장에서는 “날들”에 의해 태고 교회인의 거듭남의 기간들이 뜻해진다; 그 이유가 “날”이나 “해”는 내적 의미에서 시간외에 더 다른 의미는 없기 때문이다. 그것들이 시간을 의미하기 때문에 그것들은 상태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말씀에서 “해”는 시간과 상태의 의미로 계속적으로 사용되어진다. 이사야서를 보자:
여호와께서 받아들일 수 있는 해, 그리고 우리 하느님의 복수의 날을 선포하는 것;
슬퍼하는 모든 자를 위로하는 것 (이. 61:2).
위 구절은 주님의 오심이 취급된다. 다시:
그 이유가 복수의 날이 나의 심정 안에 있었다,
그리고 나의 되찾음의 해가 왔었다 (이. 63:4).
위 구절에서 “날”과 “해”는 시간과 상태를 표시한다. 하박국에서:
오 여호와시여, 햇수들의 한 가운데에서 당신의 일이 되살아나소서,
햇수들의 한 가운데에서 알려지게 만드소서 (합. 3:2).
위 구절에서 “햇수”는 시간과 상태를 표시한다. 다윗서에서:
당신은 하느님 자신입니다, 그리고 햇수들이 소진되지 않았습니다 (시. 102:27).
위 구절에서 “햇수들”은 시간들을 나타내고, 하느님과 더불어서는 시간이 없다를 보여주고 있다. 이와 같이 본문에서 홍수의 해(year)는 특정한 년도(year)를 지목해서 언급된 것이 결코 아니다. 그러나 이 시간은 (우리가 달력으로 아는) 고정된 년도를 수단으로 결정된 것이 아니다는 것, 동시에 상태도 의미한다는 것이다.

시작에서, 달의 첫째에서. 이는 첫 경계(선) [또는 다시 시작함]을 의미한다는 것은 이미 살핀 것에서 분명해진다. 여기에 더 추가해서 알아둘 것이 있다. 이 구절에 포함된 것은 인간 거듭남이 완성되는 것, 그리하여 그가 “나는 지금 완전하다”라고 말할 수 있는 때까지, 시간으로 계산되는 명확한(정해진) 기간은 없다는 것 외에 더 묘사되어 깊게 감추인 것이 있음을 (암시한다); 그 이유가 모두 각각의 인간과 더불어 악들과 거짓들의 상태는 무한하다 말해야 되기 때문이다. 이 무한한 상태는 단순한 상태들로도 무한하지만 혼합되어서도 무한하기 때문에, (일일이 하나씩 집어내기는 인생 삶의 햇수에 비해 너무 많아 불가능할지 모르기에) 일단은 흔들어 터는 방식으로 해서 더 이상 나타나지 않게 하는 것이다. 이는 앞에서 말했다 (719항 참조). 그런고로 육체의 삶에서 거듭나져왔던 이들, 그래서 주님에 대한 신앙과 이웃을 향한 선행 안에서 살아왔었던 이들은 저세계에서 계속적으로 완전해간다.

물들이 땅으로부터 말리워졌다. 이는 거짓들이 나타나지 않았음을 의미하는데, 말해졌던 바로부터 분명할 것이다. 이 구절이 뾰족하게 의미하는 것은, 이 교회인의 의지로부터 거짓들이 분리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땅(earth)”은 여기서 인간의 의지를 의미하는데, 인간의 의지에는 탐욕 밖에 더 다른 것은 없다; 그러므로 “물들이 땅으로부터 말리워졌다”라고 말해진다. 그의 “지면(ground)”, 이미 말한 바 같이, 그의 지적 부분이다. 이 안에 진리들이 뿌리워진다. 그의 의지 부분에는 결코 뿌려지지 않는다. 영적 (평면의) 인간에서 의지력과 지력은 분리되어 있다. 그러므로 이 절 뒷 부분에서 “지면”의 얼굴이 말리워 있다고 말해진다. 태고 교회인과 더불어 지면은 그의 의지력 안에 있었고, 이 안에 주님께서는 선들을 뿌리셨다. 그 다음 이 선들로부터 인간은 진리를 알고 지각할 수 있었다. 또는 사랑으로부터 신앙을 가질 수 있었다; 그러나 만일 이 방법이 지금 실행된다면, 인간은 영원히 멸절되어지고야 만다. 그 이유가 인간의 의지는 전체적으로 썩어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의지 부분에 씨뿌려짐의 방법, 그리고 인간의 지적 부분에 씨뿌려짐의 방법에 대하여는 이렇게 한 번 더 생각해봄으로 명료해지지 않을까 생각된다. 계시(밝히 앎)들이 태고 교회인에게서는 그의 유아 시절로부터 선들과 진리들에 관한 것이 지각을 수단으로 시작되어(initiate)졌다. 그러나 이런 계시들이 그의 의지 부분 안에 씨뿌림이 있었을 때, 그는 더 다른 가르침(instruction)의 추가됨 없이 무수한 것들을 지각했다; 즉 주님께서는 한 개의 원리를 주셨는데, 그는 한 개의 원리로부터 세부 사항들(particulars, particular ideas)을 알았고, 지금의 인간들이 배워서 알아야 하는 낱개 사항들(singulars, individual details)들까지 섭렵해 버렸다는 말이다. 지금의 우리는 그들이 안 것의 수천 분의 일도 알지 못하고 있다.
씨뿌림의 후자를 생각해보자. 영적 (평면의) 교회인들은 자기가 배운 것들 밖에 아는 것이 더 없다, 그리고 자기가 안 것들을 기억해두고, 그것이 진리이다고 믿는다. 실로 그가 거짓인 것을 배웠을 때 조차도, 이것이 진리로서 그의 마음에 강한 자국을 남기고, 그는 이것을 믿는다. 이렇게 믿는 이유는 그가 이것이 그러하다 라고 설득되어질 때, 이것이 그러하다는 것 외에 다른 지각을 가지지 못하기 때문이다. 양심을 가진 이들이 양심으로부터 어떤 지령(dictate, inner voice)을 가지기는 하나, 그들이 들었고 배웠던 것 때문에 있는 진리인 것 이상의 더 다른 지령은 가지지 못한다. 다시 말해 그들의 양심을 만들어내는 것은 그들이 들었고 배웠던 것들이 재료로 쓰인다는 말이다. 이는 잘못 인도된 양심을 지닌 이들로부터 분명해진다.

그리고 노아는 방주의 덮개를 벗기고 보았다. 이는 거짓들이 치워짐에서 그가 신앙의 진리들의 빛을 인정했고, 이 빛 안에서 그가 신앙을 가졌음을 의미한다. 이는 “덮개를 벗김”이 빛의 비추임을 차단한 장애물을 치워냄이다로부터 분명해진다. “방주”에 의해 거듭나지는 고대 교회인이 의미되어지는 바, 방주의 “덮개”는 하늘을 보는 것, 또는 빛을 보는 것을 방해하는 것 밖에 더 다른 의미는 없다. 가로막은 것은 거짓이었다; 그러므로 그는 “보았다”라고 말해진다. 말씀에서 “보는 것”은 이해하는 것과 신앙을 가지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의 경우, “보았다”는 진리들을 인정했다는 것과 그 진리들 안에서 신앙을 가졌다는 것을 뜻한다. 진리들을 아는 것, 그 진리들을 인정하는 것, 그 진리들 안에서 신앙을 가지는 것, 이 세 가지는 별개의 것이다. 아는 것은 거듭남의 첫 번째의 것이고, 인정하는 것은 두 번째의 것이고, 신앙을 가지는 것은 세 번째의 것이다. 이 세 가지의 차이는 이렇게 살필 수도 있다. 아주 나쁜 인간들도 알고 있되 인정하지 않는다는 사실로부터 이다. 마치 유대인들 같이, 그리고 이상한 논쟁을 수단으로 교리적인 것들을 파괴하려 시도하는 이들의 경우이다; 그리고 불신앙자들도 인정할런지 모른다. 그리고 어떤 상태들(어떤 사회적 분위기)에서 일 경우, 이들도 전도하고, 확증하고, 열성으로 설득하러 나선다. 그러나 불신앙자가 신앙을 가질 수 있는 경우란 없다.
신앙을 가진 이들은 알고 인정하고, (그리고) 믿는다, 그들은 선행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양심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신앙은 누군가로부터 단정하여 말해질 수 없다. 다시 말해 아무도 자기가 신앙을 가지고 있다 라고 말해질 수 없으나, 위의 세 가지의 특징들을 소유한 자 만이 가능할 것이다. 이 때에 비로소 거듭나아지는 것이다. 신앙으로부터 있는 것을 단지 알고만 있는 것은 그의 이성의 찬동 없이(합리적 마음의 동의(assent) 없이) 그냥 그의 기억으로부터 있는 것이다. 신앙으로부터 있는 것을 인정하는 것은 어떤 목적들을 위하여, 그리고 어떤 원인들에 의해 야기된 합리적 찬성이다. (다시 말해, 신앙의 것들을 인정함은 합리적 마음 부분의 어떤 동의가 요구됨이고, 이는 어떤 목적들을 바라보면서 어떤 심사숙고함에 의해 생산된 마음의 상태이기도 하다.) 신앙을 가지는 것은 양심으로부터, 즉 양심을 통하여 주님께서 일하심으로부터 있다. 이는 저세상 삶을 사는 이들로부터 분명해진다. 알고만 있던 이들의 많은 자들이 지옥 안에 있다. 인정한 이들 중 많은 자들이 지옥에 있다. 그 이유는 육체의 삶에서 그들이 인정함은 어떤 분위기에 발맞추어서만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른 삶에서 그들이 지상에서 자기들이 타인들에게 설교했고, 가르쳤고, 설득했던 것들이 진리라고 지각했을 때, 그들은 아주 기이하게 여겼다. 그러나 이것은 당신들이 지상에서 설교했던 것이라고 그의 기억에 상기시켜주면 이를 인정한다. 그러나 신앙을 가졌던 이들은 모두 천국 안에 있다.

이 본문의 주제가 거듭날 때의 고대 교회인인 바, “봄 (seeing)”에 의해 인정함과 신앙을 가짐이 의미되어진다. “봄”이 이런 의미를 가진다는 것을 말씀으로부터 찾아보자. 이사야서에서:
너희는 그것에 관하여 제조하신 분을 주목하지 않았다,
그리고 멀리로부터 그것에 관하여 만들어내신 분을 너희는 보지 않았다 (이.22:11).
위 구절은 시온 성을 이야기하고 있다; “멀리로부터 만들어내신 분을 보지 않는 것”은 인정하지 않는 것, 더 나아가 신앙을 갖지 않는 것이다. 다시:
이 백성의 심장을 비대해지게 만들어라, 그리고 그들의 귀들은 무겁게,
그들의 눈들은 흐리게 하여, 그들이 자기들의 눈들로 보지 않도록, 자기들의
귀들로 듣지 않도록, 그리고 그들의 심정이 깨닫지 않도록, 그리고 다시 돌아서지 않도록 그리고 치료되지 않도록 (하라) (이. 6:10).
“자기들의 눈들로 보는 것”은 인정하고 신앙을 가짐을 표시한다. 다시:
어둠에서 걸었던 백성이 큰 빛을 보았었다 (이.9:2).
위 구절은 신앙을 받았던 이방인들에 관해 말해졌다; 본문의 경우, “노아는 방주의 덮개를 벗기고 보았다”와 같은 경우이다. 다시:
그리고 그 날에 귀머거리가 거룩한 책(the Book)의 말들을 들을 것이고,
소경의 눈들이 흑암으로부터와 어둠으로부터 볼 것이다 (이. 29:18).
위 구절은 이방인들이 신앙(을 받음)쪽으로 전환할 것에 관하여 이야기하고 있다; 그리고 “보는 것”은 신앙을 받음을 표시한다. 다시:
들어라, 너희 귀머거리여; 그리고 바라보라 너희 소경이여,
너희는 볼런지 모른다 (이. 2:18).
위 구절 역시 의미는 비슷하다. [2] 에스겔서에서:
볼 눈을 가진 자가 보지 못하고, 들을 귀를 가진 자가 듣지 못한다;
그 이유는 그들은 반역적인 가문이기 때문이다 (이. 12:2).
위 구절은 이해할 수 있고, 인정하고, 신앙을 가질 수 있는 이들, 그럼에도 그렇기를 원하지 않는 이들을 뜻한다. “본다”는 것은 신앙을 가진다는 것을 의미함은 주님께서 과거 광야에서 구리뱀을 본 자들은 모두 치료되었음을 가지고 표현하신 대목으로부터도 분명해진다; 모세의 책에서:
너희에게 불같은 뱀을 만들어라, 그리고 그것을 지주(standard)로 세워라;
그리고 모든 자가 (뱀에게) 물리우는 때가 올 것인데, 그때 이 지주로 세운 뱀을 볼 때,
그는 살 것이다; 그리고 뱀이 누구를 물었을 때가 왔는데,
그가 구리 뱀을 쳐다보자, 그는 살았다 (민. 21:8, 9).
위 인용구절로부터 모든 이는 “보는” 것이 신앙을 의미함을 알 수 있다. 이 경우에서 주님에 대한 신앙의 표현 말고 무엇이 소용에 닿을까? 또한 야곱의 장자 르우벤이 “보다”로부터 그렇게 이름지어졌는데, 르우벤은 내적 의미에서 신앙을 의미한다.

그리고 보라, 지면의 얼굴들이 말라졌다. 이것이 거듭남을 의미하는 것은 “지면”의 의미가 교회인 임으로부터 분명하다. 거짓들이 더 이상 나타나지 않을 때, 지면의 얼굴이 “말랐다”라고 말해진다.

14절. 둘째 달, 이십 칠 일, 땅은 말랐다. “둘째 달”은 거듭나기 전의 모든 상태를 뜻한다. “27일”이란 거룩한 것을, “땅이 말랐다”란 그가 거듭났음을 의미한다. 이 말들은 거듭나기 전에 진행되어 왔던 것의 결말을, 그리고 또 다른 거듭남의 시작을 말한다.

둘째 달. 이는 거듭나기 이전의 모든 상태를 의미하는데, 이는 말씀에서 “둘”의 의미로부터 분명해진다. “2”는 “6”과 같은 의미를 지닌다. 즉 거듭남이 진행하는 전투와 노동이다; 그런고로 여기서의 경우, 인간 거듭남의 완성에 앞서 있는 전체 상태이다. 말씀에서 큰 시간의 간격이든, 짧은 시간의 간격이든 “3” 또는 “7” 안에서 흐트려진다(spilt). 그리고 날들, 주들. 달들, 해들, 또는 “시대들”이라 불리운다. 3과 7은 거룩하다, 그러나 2와 6은 거룩하지는 않고, 상대적으로 모독적이다. 3과 7 모두는 마지막 심판을 서술한다는 추가적인 이유 때문에 모두 신성하다. 마지막 심판은 “셋째”, 또는 “일곱째” 날에 오고 있다. 마지막 심판은 전체적으로든, 세부적으로든, 주님이 오시는 때가 모든 이에게 온다. 예를 들면, 주님이 세상에 오셨을 때, 마지막 심판이 있었다, 그리고 그분이 영광 안에서 오실 때 마지막 심판이 있을 것이다; 세부적 측면이 무엇이든 주님이 어떤 사람에게 올 때, 마지막 심판이 있다; 각자가 죽을 때 마지막 심판이 있다. 각 개인의 마지막 심판이 “셋째 날”과 “일곱째 날”에 의해 뜻해지는데, 선한 생애를 꾸린 자는 거룩해지고, 악한 생애를 꾸린 자는 거룩하지 않다. 그런고로 “셋째 날”과 “일곱 째 날”은 영벌을 선고 받는 자, 영생을 선고 받는 자 모두를 각각 서술해준다; 그러므로 이 숫자들은 영벌을 선고 받는 자에게는 거룩하지 않은 숫자를 의미하게 되고, 영생을 선고 받는 자에게는 거룩한 숫자를 의미해준다. 3과 7에 앞서 있는 2와 6은 3과 7의 단계에 앞서 진행된 모든 상태와 일반적 측면에서는 관련이 있고 의미하고 있다. 이것은 어떤 주제를 가지고도, 이 숫자가 서술하는 어떤 문제들에서도 공히 2와 6의 의미인 바, 뒤이어 살피는 숫자, 27에서 분명해질 것이다.

“이십 칠 일, seven and twentieth day”이 거룩한 것을 의미한다는 것은 숫자 27이 3 만을 두 번 곱하여 완성되기 때문이다. 즉 3×3=9, 그리고 9×3=27이다. 그러므로 27을 지배하는 숫자는 3이다. 이런 식으로 태고인들은 숫자들을 계산했다, 그리고 그들은 어떤 품질을 나타내는지(뜻하는지)를 순수하게 이해했다. 3이 7과 똑같은 의미를 가진다는 것은 바로 앞에서 말했다. 주님께서 셋째 날에 일어나신 데에 대한 감추인 이유가 있다. 주님의 부활 자체는 모든 거룩함을, 그리고 모든 자의 부활을 포함하고 있다. 이것이 왜 유대 교회에서 이 숫자가 표현적 방법으로 사용되어졌는가와 왜 이 숫자가 말씀 안에서 거룩한 숫자가 되어있는가에 대한 이유이기도 하다. 이런 상황은 천국에서도 유사한데, 거기에는 숫자가 없는 바, 3과 7 대신 그들은 (3과 7을 읽거나, 듣거나 할 때) 그들은 부활과 주님의 오심에 관한 일반적 거룩한 생각만을 가질 뿐이다.
3과 7이 거룩한 것을 의미하는 것은 말씀의 아래 인용 구절들로부터도 분명해진다. 모세의 책에서:
죽은 자와 접촉한 자는 칠 일 동안 불결해 있을 것이다; 이 자는 그로부터
삼일 째 날에 속죄할 것이고, 일곱 째 날에 깨끗해질 것이다; 그러나 만일 그가
자신을 셋째 날에 속죄하지 않으면, 일곱 째 날에 그는 깨끗하지 않을 것이다.
검으로 죽임을 당한 자, 또는 죽은 몸, 또는 사람의 뼈, 또는 무덤에 접촉한 자는
칠 일 동안 불결할 것이다; 깨끗한 자가 셋째 날에, 그리고 일곱 째 날에
불결한 자 위에 [물을] 뿌릴 것이다; 그리고 일곱 째 날에 그는 자신을 속죄할 것이다,
그리고 그는 자기 의복들을 빨 것이다, 그리고 물로 자신을 목욕할 것이다,
그리고 저녁에 깨끗하다 (민. 19:11, 12, 16, 19).
위 구절 속의 것들이 표현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 즉 바깥쪽 것들이 안쪽 것들을 의미한다는 것은 아주 명료하다. 그 이유가 죽은 몸, 죽임을 당한 자, 사람의 뼈, 무덤에 접촉한 자가 불결할 것이라 생각되는 것은 누구에게나 자연스럽게 다가와지기 때문이다. 더구나 이런 더럽게 하는 것들이 내적 의미에서 보면 인간에 어울리는 것들을 의미한다. 즉 인간 측면의 것들은 죽어있고 모독적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물로 씻고 저녁에 깨끗해진다는 것도 표현성을 지닌다. 그리고 셋째 날과 일곱 째 날 역시 그렇다. 이 날은 거룩한 것을 의미하는데, 그 이유는 이 날에 그가 속죄하고(atonement) 깨끗해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위와 마찬가지 방식인데, 미디안족과의 전투로부터 돌아온 이들에 관해서이다:
너희는 진영 밖에서 칠 일 동안 진영을 꾸려라; 혼을 죽인 자는 누구든지,
그리고 살해된 자를 만진 자는 누구든지, 너희는 네 자신을 셋째 날과
일곱 째 날에 속죄 할 것이다 (민. 31:19).
위 구절의 말에 만일 의식을 치루는 수준의 의미밖에 없다면, 그래서 셋째 날과 일곱 째 날이 거룩함을 표현함도, 의미함도 없다고 한다면, 이는 죽은 것, 마치 원인 없는 것, 목적 없는 원인 같은 것, 또는 원인으로부터 분리된 어떤 것 같은 것, 목적으로부터 분리된 원인 같은 것, 그런고로 그 말씀에는 신성이 없다는 식으로 되어버리고 말 것이다. “셋째 날”이 거룩한 것에 대한 표현성을 지녔다는 것, 그런고로 거룩한 것을 의미했다는 것은 시내산 위에 주님께서 내려 오실 때, 이를 위해 명령하신 바로부터 분명해진다:
그리고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했다, 백성에게로 가라, 그리고 그들을 오늘과 내일
신성해 있게 하라, 그리고 그들이 자기들의 의복들을 빨아라, 그리고 셋째 날을
준비하게 하라; 그 이유가 셋째 날에 여호와께서 시내산 위에 모든 백성의 시야에서
내려오실 것이기 때문이다. (출. 19:10, 11, 14, 15).
똑같은 이유로 여호수아가 셋째 날에 요단을 건넜다:
여호수아는 진영 한 가운데를 통과하며 명령했다, 그리고 백성들에게 명령했다,
말하기를, 너는 음식을 준비하라, 그 이유가 삼일 내에 너희는 토지를 상속받기 위해
이 요단을 건너야 한다 (여. 1:11; 3:2).
요단을 건넘은 이스라엘의 아들들의 입문, 즉 거듭나는 이들이 주님의 왕국 안으로 입문함이다; 그들을 이끈 여호수아는 주님을 표현했다; 그리고 이 건넘은 셋째 날에 실행되었다. 그 이유는 셋째 날이 거룩하였기 때문이고, 일곱 째 날도 마찬가지 이다, 십일조의 해가 제 삼년 째 해 이다는 것, 백성들은 선행의 일들을 해서 자신이 거룩함을 보여야 한다는 것을 제정해 주셨다 (신. 26:12-15); “십일조”는 리메인스를 표현했다. 이 십일조가 거룩한 것은 그것들이 주님 만으로부터 있기 때문이다. 요나가 사흘 밤과 낮을 물고기의 뱃속에서 있었다는 것 (욘. 1:17)은 주님이 매장되심과 셋째 날 부활하심을 또렷하게 표현했다 (마. 12:40).
“3”이 거룩한 것을 의미하는 것은 예언서에서도 분명해진다. 호세아서에서:
이틀 후에 여호와께서 우리를 살리실 것이다; 셋째 날에 그분은 우리를 일으키실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그분 앞에서 살리라 (호. 6:2).
위 구절 역시 “셋째 날”은 주님의 오심과 그분의 부활하심을 명백하게 표시한다. 스가랴에서:
모든 토지에서 삼분의 이는 떼어내고, 죽을 것이나, 그 안에 있는 삼분의 일은
남겨질 것이다, 그리고 나는 삼분의 일을 불을 통하여 데려올 것이다,
그리고 그들을 은이 정제되듯 정제할 것이다. 그리고
금을 제련하듯 그들을 시험해 볼 것이다 (슥. 13:8-9).
위의 “1/3”은 “3”과 같이 거룩한 것을 표시한다. 3에 의해 포함된 것과 같이 1/3에 의해서도 같은 의미를 포함한다. 또한 1/3의 1/3에 의해서도 같은 의미를 포함하는데, 본문의 경우가 이에 해당된다. 즉 27의 1/3의 1/3이 3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본문의 27도 3과 같이 거룩한 것을 의미하게 된다.)

땅이 말랐음이 인간이 거듭났음을 의미한다는 것은 이미 살핀 7절과 13절로부터, 즉 물들이 땅에서 말랐다와 지면의 얼굴이 말랐다로부터 분명해진다.

15,16절. 그리고 하느님께서 노아에게 이야기하시어, 말하신다.16 너와 네 아내, 네 아들들, 너와 함께한 네 아들들의 아내들은 방주에서 나가거라. “하느님께서 노아에게 말하심”이란 이 교회의 사람과 더불은 주님의 현존을 의미한다. “방주에서 나가라”란 자유를 의미한다. “너와 네 아내”란 교회를, “네 아들들, 그리고 너와 함께 한 네 아들들의 아내들”이란 진리들, 그리고 진리들과 결합된 선들, 이것들이 거듭나는 자 안에 있었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노아에게 이야기하셨다. 이는 이 교회인과 더불은 주님의 현존하심을 의미하는 것은 말씀의 내적 의미로부터 분명해진다. 주님께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이야기하신다. 그 이유가 인간이 생각하고 뜻하는 선하고 참된 것은 무엇이든 주님으로부터 있기 때문이다. 모두 각각의 인간과 더불어 최소한 두 악령들과 두 천사들이 있다. 악령들은 자기의 악들을 선동하고, 천사들은 선하고 참된 것들을 불어넣는다. 천사들에 의해 불어넣어진 선하고 참된 모두 각각의 것은 주님으로부터 있다; 그러므로 주님은 인간과 더불어 계속 이야기하고 계신 셈이다. 그러나 모든 사람에게 일률적이 아니고 각각의 사람과 더불어 계심은 각각 다르다. 악령이 자신을 이끌도록 허용한 자에게는 주님이 안 계신 듯, 또는 멀찍이 계신 듯 한 바, 그분이 말을 하시지만 당사자에게는 거의 말하지 않는 듯 여긴다. 그러나 주님의 인도를 받는 이들과 더불어, 주님께서는 더 가까이 현존하시어 (직접적으로) 말하신다; 이는 아무도 주님으로부터가 아니면 선하고 참된 어떤 것도 생각하지 못한다는 사실로부터 충분하게 분명해질런지 모른다.
주님의 현존은 인간이 지니는 신앙의 상태와 이웃을 향한 사랑의 상태에 따라 가깝든지, 멀든지, 또는 규모 등등이 결정되어진다. 이웃을 향한 사랑 안에 주님은 현존하신다. 그 이유는 그분은 모든 선 안에 계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랑이 결핍된 신앙 안에서의 경우는 그렇지 않다. 사랑과 선행 없는 신앙은 연결되어 있지 않은, 분리된 것, 또는 떼어내진 것이다. 결합이 있는 어디에서든지, 결합하게 하는 매체가 있음에 틀림 없고, 이 매체는 사랑과 선행 밖에 더 없다. 이는 이런 사실, 즉 주님께서는 모든 이에게 자비하시다는 것, 모든 이를 사랑하신다는 것, 모든 이로 하여금 영원히행복해지도록 뜻하신다는 것으로부터 분명해짐에 틀림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타인에게 자비롭고, 타인을 사랑하고, 타인이 행복해지게 만들기를 뜻하는 이런 사랑 안에 있지 않으면, 우리는 주님과 결합될 수 없다. 그 이유는 우리가 그분 같지 않고 그분의 형상 안에 전혀 있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가 추측한 신앙의 렌즈(lens)를 통하여 주님을 응시하는 것, 동시에 이웃을 미워하는 것은 주님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서 있게 할 뿐아니라 우리 자신과 주님 사이에 심연(abyss, gulf)이 놓여지게 한다. 이런 우리가 만약 주님에게 가까이 접근하면, 그는 이 심연에 빠지고야 말 것이다. 그 이유가 이웃을 미워함이 양쪽 사이에 놓인 심연이기 때문이다.
주님의 현존이 처음 가능해지게 하는 것은 인간이 이웃을 사랑할 때이다. 주님은 사랑 안에 계신다; 그리고 인간이 사랑 안에 있는 만큼에서 주님도 현존하신다; 주님이 현존하는 만큼에서 그분은 인간과 이야기하신다. 인간은 자신 스스로로부터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 단 한 개의 생각, 아마 생각의 한 조각도 자신으로부터 있지 않다는 것을 알아채지 못한다; 즉 인간은 자기의 악한 것과 거짓된 것을 지옥으로부터의 악령들을 통하여 가진다는 것, 그리고 인간은 자기의 선하고 참된 것을 주님으로부터 천사를 통하여 가진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한다는 말이다. 이와같은 것이 인간과 더불어 있는 유입(influx)이다. 이 유입으로부터 인간은 자기의 생명이 있고, 몸과 더불은 그의 혼의 상호 작용(interaction)이 있다. 위의 설명으로부터 “하느님께서 노아에게 이야기하셨다 (spake)”라는 말에 의해 뜻해지는 것이 분명해진다. 그분이 누구에게 “말하심(saying)” (예를 들면, 그분께서 창. 1:29, 3:13, 14, 17; 4:6, 9, 15;6:13; 7:1에서 말하심 같이)은 그분이 누구에게 이야기하심(speak)과는 다르다. 여기서의 경우, 그분이 노아에게 이야기하심은 현존하심을 표시한다. 그 이유는 지금의 주제가 선행을 선물 받은 거듭난 인간이기 때문이다.

방주로부터 나가라. 이것이 자유를 의미한다는 것은 이미 말해진 것과 글의 문맥의 연결 자체로부터 분명해진다. 노아가 방주 안에 있고, 홍수의 물들에 둘러싸여 있는 한, 그는 포로 신세나 다를 바 없어, 그는 악들과 거짓들에 의해 이리저리 흔들려지고 있다. 다시 말해 악령에 의해 점화된 시험의 전투에 종사하는 중이었다. 그러므로 “방주로부터 나감”은 자유를 의미한다. 주님의 현존은 자유를 포함한다. 말하자면 시험을 이겨냄의 결과가 자유이다는 말이다. 더 주님의 현존이 있으면, 인간은 더 자유해진다는 말이다; 즉 인간이 선과 진리를 더 사랑하면, 그는 더 자유하게 행동한다. 이것이 천사들을 통하여 있는 주님의 유입 (주님의 영향력의 본성)이다. 한편, 악령을 통한 지옥의 유입은 강제적이고, 격렬하고, 지배하려 분투한다; 그 이유가 이런 영들은 인간을 완전 복종되게함 밖에, 그리하여 인간은 아무 것도 아닌 것, 악령이 모든 것이 되게 하는 것 외에 더 관심되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이 영들이 모든 것일 때, 인간은 그 모든 것 속의 하나, 아마 그 하나조차도 되지 못해 결국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전락될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그 영들의 지배로부터, 그들의 멍에로부터 자유해지게 하실 때, 전투는 필수적으로 수반된다; 그러나 인간이 자유해질 때, 즉 거듭났을 때, 이 인간은 천사의 섬김을 통하여 주님에 의한 인도가 있는데, 이는 아주 온유해서 거기에는 멍에나 지배함 따위는 무엇이든 없다; 그 이유가 그는 자기의 즐거움과 행복함을 수단으로 인도되고, 사랑받고, 존중받기 때문이다. 이것을 주님께서 마태복음에서 가르치신다:
내 멍에는 쉽다, 그리고 내 짐은 가볍다 (마. 11:30).
위 구절의 반대되는 인간의 상태가 악령들의 멍에 아래 있어, 아무 것도 아닌 인간 취급을 당할 때의 경우이다. 게다가 악령들은 할 수만 있다면, 인간에게 매 순간이라도 고통을 안기려 골몰한다. 이에 관하여는 주님께서 많은 경험을 하게 하시어 나로 알게 해주셨는데, 차 후 주님의 신성한 자비로부터 (말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너와 네 아내”가 교회를 의미하는 것은 마찬가지 방식인 (문맥의) 연결로부터 분명해진다. 또한 “너와 더불은 네 아들들과 네 아들들의 아내들”은 거듭난 자 안에 있는 진리들, 그리고 진리들과 결합된 선들을 의미한다. “너”가 교인을 의미하는 것은 분명하다. 그리고 그의 “아내”도 교회를 의미한다, 그리고 그의 “아들들”은 진리들을, 그리고 그의 “아들들의 아내들”은 진리들과 결합된 선들을 의미한다. 이에 대한 것은 이전에도 반복적으로 설명되어왔기에 설명은 생략할 것이다 (668, 742, 769-770항 참조).

17절. 모든 육체로부터, 너와 함께 있는 야생 동물 각각 모두, 즉 새와 짐승과 땅에서 기는 기는 것 각각 모두, 너와 함께 있도록 가져 온 것들은 땅에서 자신들을 퍼져나가고, 땅에서 열매를 많이 맺고, 번성하도록 하리라. “너와 함께 한 모든 육체에 속한 야생 동물 각각 모두”란 이 교회의 사람과 더불어 생명있게 만들어진 모든 것을 의미한다. “새”는 이해력에 속한 것을, “짐승”은 의지력에 속한 것을, 이것들 모두는 내적 인간에 관한 것임을 의미한다. “땅에서 기는 기는 것 각각 모두”란 외적 인간 안에서 내적 인간의 것과 닮은 듯하게 상응하는 것들을 의미한다. “너와 함께 있도록 가져 옴”이란 자유의 상태를 의미한다. “그것들이 땅에서 자신들을 퍼져나가게 함”이란 내적 인간이 외적 인간 위에서 시행함(operation)을, 다시 말하면 안쪽 자체가 바깥쪽에 작용함(act)을 의미한다. “열매를 많이 맺음”은 선이 불어남을, “번성함”은 진리가 불어남을, “땅에서”란 외적 인간에서를 의미한다.

모든 육체로부터 너와 함께 있는 모두 각각의 야생 동물. 이는 이 교회의 사람 안에서 살아있게 만들어진 모든 것을 의미하는데, 이는 “야생 동물”이 지금 거듭난노아를 서술한다는 것, 그리고 이어지는 것들, 즉 새, 짐승, 기는 것과 관련된다는 것에서 분명해진다; 그 이유가 “모든 육체로부터 너와 함께 있는 모두 각각의 야생 동물”은 새에 관하여, 짐승에 관하여, 그리고 땅에서 기는 기는 것에 관하여 임이 명백하기 때문이다. 이 구절에서 “야생 동물”로 번역된 원어의 적절한 의미는 생명, 또는 살아있는 것이다; 그러나 말씀에서 이 단어는 살아있는 것을 위하여도, 살아있지 않은 것을 위하여도, 또는 야생 동물을 위하여도 사용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내적 의미를 알지 않으면, 우리는 때로는 그 단어가 무엇을 뜻하는지를 볼 수 없는 경우가 발생한다. 이런 두 겹의 의미를 지닌 이유 때문에 태고 교회인은 주님 앞에 설 경우 그들의 본성은 면목 없음,무가치함에 불과한 바, 자신들은 살아있지 않은 자로, 짐승 수준 조차도 아닌 것 같아, 야생 동물로서 인정했다; 그 이유가 이 사람들은 자기 자신만에 주목해보았을 때, 또는 자기 자신 안에만 있을 때, 그런 수준밖에 안됨을 알았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단어 하나가 두 가지 뜻, 즉 살아있는 것과 야생 동물을 뜻한다.
먼저 “살아있는 것”을 뜻하는 구절을 찾아보자. 다윗서에서:
당신의 야생 동물이 거기 안에 거주할 것입니다 [즉, 하느님의 상속물 안에];
당신, 오 하느님, 당신의 선함으로 불쌍한 자를 굳세지게 할 것입니다 (시. 68:10).
위 구절에서 “야생 동물”이 하느님의 상속물 안에 거주하기 때문에, “야생 동물”은 거듭난 사람을 뜻한다; 위 인용구절 처럼 본문도 이 사람 안에 있는 살아있는 것을 뜻한다. 같은 시편서에서:
숲의 모두 각각의 야생 동물, 그리고 수많은 산들에 있는 짐승들도 나의 것이다;
나는 산들의 모든 새들,
그리고 내 들판의 야생 동물이 나와 함께 있다는 것을 안다 (시.50:10-11).
위 구절에서 “나와 더불은” 내 들판의 야생 동물, 즉 하느님과 더불은 내 들판의 야생 동물은 거듭난 인간을, 고로 거듭난 사람 안에 있는 살아있는 것을 표시한다. 에스겔서에서:
하늘들의 모든 새들이 그의 굵은 가지들에 그들의 둥지를 만들었다, 그리고
그의 가지들 아래 들판의 모든 야생 동물들이 새끼를 낳는다 (겔. 32:6).
위 구절에서는 심어진 영적 (평면의) 교회가 의미되고, 그 교회인 안에 있는 살아있는 것을 표시하고 있다. 호세아서에서:
그 날에 나는 들판의 야생 동물과 더불어, 그리고 하늘들의 새와 더불어
그들을 위해 언약을 만들 것이다 (호. 2:18).
위 구절은 거듭나지는 이들, 이들과 더불어 언약이 만들어짐이 뜻해진다. 그러므로 야생 동물의 의미가 살아있는 것임을 강력하게 시사한다. 에스겔에 의해 보여진 거룹들, 또는 천사들도 “네 야생 동물들”이라 불리운다 (겔. 1:5, 13-15, 19; 10:15).
야생 동물의 반대적 의미인 살아있지 않은 것을 취한 말씀 역시 많은 구절에서 발견되지만 아래 몇 구절만을 확증을 위해 열거해 본다. 다윗서에서:
야생 동물에게 당신의 호도애(turtle dove)의 혼을 넘기지 마소서 (시. 74:19).
스바냐에서:
어찌하여 성이 황무해져, 야생 동물이 드러눕는 장소가 되었는가 (습. 2:15).
에스겔서에서:
그리고 그들은 더 이상 민족들에게 전리품이 되지 않을 것이고,
땅의 야생 동물이 그들을 먹지 않을 것이다 (겔. 34:28).
그의 파멸 위에 하늘들의 모든 새가 거주할 것이다, 그리고
들판의 모든 야생 동물이 그의 가지들 위에 있을 것이다 (겔. 31:13).
호세아서에서:
나는 사자 같이 그들을 없애버릴 것이다;
들판의 야생 동물이 그들을 찢을 것이다 (호. 13:8).
에스겔서에서:
나는 너희를 땅의 야생 동물에게, 그리고 하늘의 새에게 음식으로 주었다 (겔. 29:5).
위 구절 같은 표현은 말씀에서 종종 있는 편이다. 그리고 유대인들은 글자 의미만에 완전히 달라붙어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야생 동물을 야생 동물로서만, 새는 새로서만 이해했다, 또한 말씀의 더 깊은 의미를 알고 싶지도 않았고, 배우려하지도 않았다. 그 결과로서 그들은 잔인했고 야생적이었는 바, 그들은 전투에서 죽인 적의 시체들을 묻는 것을 거절하고, 새들과 야생 동물들에 의해 먹히도록 방치함에서 쾌락을 발견했다; 이런 것도 인간 존재가 야생 동물인 것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새”가 그의 이해력에 속한 것들을, “짐승”은 그의 의지력에 속한 것들을 의미하고 이것들은 내적 인간 측면에 있다. 그리고 “땅에서 기는 기는 것”은 그의 외적 인간에서 상응하는 것들을 의미함은 앞서 살핀 새로부터, 그리고 “짐승”으로부터 분명해진다. “땅 위를 기는 기는 것”이 외적 인간에서 상응하는 것들을 의미함은 지금 분명해진다. 그 이유가 여기서의 기는 것들은 “새”(이해력 측면)와 “짐승”(의지력 측면) 양쪽과 관계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태고인들은 신체의 감각적인 것들과 쾌락들을 (땅을 )기는 기는 것이라 불렀다. 그 이유는 그것들이 땅위에서 기는 것과 똑같기 때문에서 였다. 태고인들은 인간의 신체를 땅, 또는 지면에 견주었고, 심지어는 땅, 또는 지면이라 부르기까지 했다. 본문에서도 “땅”은 외적 인간 밖에 더 아니다.

“기는 기는 것”이 외적 인간에 있는 상응하는 것을 의미함에 관하여는 이러하다. 거듭난 인간에서 외적인 것들은 내적인 것들에 상응하고 있다. 즉 외적인 것들에 값을 매김, 다시 말해 외적인 것들이 내적인 것들에 얼마나 순종하느냐에 의거 외적인 것의 가치가 정해진다는 말이다. 인간이 거듭나질 때, 외적 인간은 순종함 쪽으로 환원되어진다. 그때 그는 천국의 형상이 된다. 그러나 인간이 거듭나지기 이전의 경우에서, 외적인 것이 내적인 것을 통치했는 바, 그 당시 그는 지옥의 형상이었을 것이다. 천적인 것이 영적인 것을 통치하고, 영적인 것이 자연적인 것을 통치하고, 마지막으로 위의 것들을 통하여 지상적인 것들을 통치해 내려가는 것이 질서이다; 그러나 물질적이고 자연적인 것들이 영적인 것들과 천적인 것들을 통치할 때, 질서는 파괴되어진다. 그리고 인간은 지옥의 형상이다; 그러므로 주님은 거듭남을 수단으로 질서를 회복하신다. 그리하여 주님께서는 인간을 지옥으로부터 끌어내시고, 그를 천국으로 들어올리신다.
외적 인간이 내적 인간에 상응하는 것에 관련하여 몇 마디 말하고 지나가야 할 것 같다. 모든 거듭나는 인간은 천국의 축소형이다. 즉 그는 전체 천국의 형상, 또는 모델(model)이다. 이런 이유에서 말씀에서 거듭나는 자의 내적 인간을 천국(하늘)이라 부르고 있다. 천국 안에서의 질서는 주님께서 천적인 것을 통하여 영적인 것을, 영적인 것을 통하여 자연적인 것을 통치하는 것이다. 이런 방법에서 그분께서는 전체 천국을 한 사람을 통치하듯 하신다. 그런 이유에서 천국은 웅대한 사람이라 불리운다; 또한 천국 안에 있는 모든 이에게도 똑같은 질서가 응용된다. 인간 역시 이런 질서에서 있을 때, 그는 천국의 축소판, 주님의 왕국이기도 하다. 그 이유는 주님의 왕국은 인간 안에 있기 때문이다. 이 인간 안에서 외적인 것들은 내적인 것에 상응하고 있다. 즉 외적인 것들이 내적인 것에 순종하는 것, 이것이 천국 안에서 실행되고 있다. 세 천국들에서, 영들은 천국의 바깥쪽 자체를 형성하고, 천사같은 영들은 중간 천국 자체를, 천사들은 안쪽 자체를 형성하고 있다. 천국의 도면은 이렇게 그려지지만, 이 세 차원은 한 개인의 형상을 표출한다.
위와 반대의 경우도 있다. 오로지 물질적인 것 만으로, 즉 그리워함들로, 쾌락들로, 욕구들로, 감각들의 탐익들로, 자아와 세상을 사랑함 말고는 즐거움을 지각하지 못함으로, 자기를 섬기지 않거나 좋아하지 않는 이들에 증오만을 가지는 것들로 자신의 생명을 만드는 이들이 위와 반대되는 이들이다. 이런 자들과 더불어, 물질적이고 자연적인 것들이 영적이고 천적인 것들을 통치하기 때문에, 거기에는 외적인 것의 순종이나 상응은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 이는 질서의 정반대, 고로 질서는 완전히 파괴되어 있다; 이렇게 파괴되었기 때문에 그들은 지옥의 형상 외에 달리 있을 수 없다.

너와 함께 있도록 가져온 것. 이것은 그들의 상태가 자유임을 의미한다는 것은 앞 15절, 905항에서, “방주에서 나감”의 의미가 자유해짐을 의미한다로부터 명백해진다.
그것들은 땅 위에서 자신들을 퍼져가게 하라. 이것은 내적 인간이 외적 인간 위에서 시행함을 의미한다는 것, 그리고 “열매를 많이 맺는 것”은 선이 증가함을, “번성하는 것”은 진리의 증가를, 그리고 “땅 위에서”는 외적 인간에서를 의미한다는 것은 각각의 것들의 연결로부터, 그리고 이미 살핀, “열매를 많이 맺음”과 “번성함”의 의미가 선의 증가와 진리의 증가를 의미함으로부터 분명해진다. “땅”이 외적 인간을 의미함은 이전에 여러 번 살핀 바 있어 여기서의 설명은 생략한다. 여기서의 주제는 인간이 거듭난 이후 내적 인간이 외적 인간에게 시행함인 바, 이 시행 처음에, 즉 외적 인간이 순종함, 또는 상응할 때, 보여주는 것은 선이 열매를 많이 맺는 것, 진리는 불어나는 것이다. 이 보여줌은 거듭나기 전에서는 결코 가능할 수 없었다. 그 이유는 물질적인 것이 선한 것에 반대하고, 감각적인 것이 참된 것에 반대하고 있기 때문이다. 전자는 선을 사랑함을 꺼지게하고, 후자는 진리를 사랑함을 소멸되게 한다. 선의 열매를 많이 맺음과 진리가 번성함은 외적 인간에서 거행된다; 그의 애착들에서 선의 열매맺음이, 그의 기억에서 진리가 불어남이 있다. 외적 인간이 여기서 “땅”이라 불리우고 있다. 이 위에 그들은 자신들을 퍼져나가게 하고, 이 위에서 그들은 열매를 많이 맺고 번성한다.

18, 19절. 그리고 노아는 나왔다, 그리고 그의 아들들, 그의 아내 그의 아들들의 아내들, 19 야생 동물 각각 모두, 기는 것들 각각 모두, 새들 각각 모두, 땅에서 기는 것 각각 모두, 그 가족들에 따라 방주에서 나왔다. “나왔다(went forth)”란 그렇게 행하여졌음을 의미한다. “노아와 그의 아들들”은 고대 교회 속의 사람을 의미한다. “그의 아내와 그의 아들들의 아내들”은 그 교회 자체를 의미한다. “야생 동물 각각 모두, 기는 것 각각 모두”란 그의 선들을 의미한다. “야생 동물”은 내적 인간의 선들을, “기는 것”은 외적 인간의 선들을 의미한다. “새들 각각 모두, 땅에서 기는 것 각각 모두”는 진리들을 의미하는데, “새”는 내적 인간의 진리들을, “땅에서 기는 것”은 외적 인간의 진리들을 의미한다. “그 종류대로”란 쌍(pairs)들을 의미한다. “방주에서 나왔다”란 그렇게 행해졌음이다. 동시에 자유의 상태도 의미한다.

그의 “나감”은 그렇게 행해졌음을; “노아와 그의 아들들”은 고대 교회의 사람을; “그의 아내와 그의 아들들의 아내들”은 이 교회 자체를 의미한다는 것은 시리즈로 연결되어가는 사항들로부터 분명해진다. 이 구절은 고대 교회가 만들어진 것들을 포함하고 있다. 그 이유가 이것들은 앞서 간 것들에 대한 마지막 서술, 또는 마감하는 서술이기 때문이다. 말씀에서 교회가 묘사될 때, “남자(vir)와 그의 아내”, 또는 “사람(homo)과 그의 아내” 로 묘사되어진다; “남자와 그의 아내”로 묘사될 경우, “남자”는 이해력, 또는 진리를, “아내”는 의지력, 또는 선을 의미한다; “사람과 그의 아내”로 묘사될 경우, “사람”은 사랑의 선, 또는 사랑을, “그의 아내”는 신앙의 진리, 또는 신앙을 의미한다. 그리하여 “사람”은 교회의 본질(essential)되는 것, “아내”는 교회 자체를 의미한다. 이는 말씀을 통털어 그러하다. 위 내용을 본문과 연결하여 생각하면, 현 성경의 앞 뒤 큰 틀은 태고 교회의 멸망 시점에서 새로운 교회의 형성을 다루는 것인 바, “노아와 그의 아들”은 고대 교회의 사람에 해당되고, “그의 아내와 그의 아들들의 아내들”은 이 교회 자체이다. 그러므로 16절과 18절, 각 절에서 불러지는 이름들의 순서가 다르다. 16절에서의 경우, “방주에서 나가거라, 너와 네 아내, 그리고 너와 함께 있는 네 아들들과 네 아들들의 아내들”이라 말해진다. 이 구절의 경우, “너와 네 아내”는 함께 결합되어 있다. 그리고 “네 아들들과 네 아들들의 아내들”도 함께 결합되어 있다. 그런고로 “너”와 “네 아들들”은 진리를 의미하고, “네 아내”와 “네 아들들의 아내들”은 선을 의미한다. 그러나 18절의 경우, 우리는 순서가 다른 말씀을 생각하고 있다. 그 이유인즉, 이미 말했던 것, 즉 “너와 네 아들들”이 교회의 사람을 의미하고, “아내와 아들들의 아내들”은 교회 자체를 의미하는 바, 앞서 진행되어온 것에 대한 결말이기 때문에서 이다. (역자가 한 번 더 위 글을 간단히 정리하면, 16절은 너와 네 아내, 아들과 아내라고 서술되어 남편과 아내임을 강조하듯 결합된 것을 강조하고, 18절은 6,7,8장을 아우르는 결말인지라, 노아와 아들(고대 교회의 실체), 그리고 아내들(고대 교회의 실재)을 구분하여 서술해서, 고대 교회의 출현 과정을 마무리지음을 암시하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사실상) 노아는 고대 교회를 구성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아들들, 셈, 함, 야벳이 이 교회를 구성하는데 이미 언급한 적이 있다 (773, 788항 참조). 말하자면, 이 세 인물, 즉 세 교회들이 이 고대 교회를 형성했다는 말인데, 차 후 주님의 신성한 자비로부터 이에 관하여 언급할 것이다. 그리고 이 교회들은 “노아”라 불리는 한 개의 교회로부터 출생한 듯 앞으로 나서고 있다; 그러므로 이 구절에서 “너와 네 아들들”, 그리고 또한 “네 아내와 네 아들들의 아내들”이라 말해진다.

“모두 각각의 야생 동물과 모두 각각의 기는 것”은 이 교회인의 선들을 의미한다; “야생 동물”은 내적 인간의 선들을; “기는 것”은 외적 인간의 선들을 의미한다; 그리고 “모두 각각의 새와 땅 위에서 기는 모든 것”은 진리들을 의미한다; “새”는 내적 인간의 진리들을; 그리고 “땅 위에서 기는 것”은 외적 인간의 진리들을 의미한다. 이에 대한 의미 파악은 창. 8:17에서 야생 동물, 새, 기는 것에 관해 말해진 것에서 분명해진다. 17절에서, “기는 기는 것”이라 말해진 이유는 외적 인간의 선과 진리가 의미되었기 때문에서 이다. 또한 여기서 말해진 까닭은 앞서 진행한 것에 대한 결말이기 때문에 여기에 이 교회 속에 있는 것들, 즉 선들과 진리들이 첨가된 것이다; 이것들을 수단으로 이 교회의 품질이 암시되게 하고 있다. 즉 이 품질은 영적 (평면의) 수준이다는 것, 따라서 선행 또는 선이 이 교회의 제 1의 순위에 있다는 것을 암시해놓고 있다; 그러므로 이 구절은 “야생 동물과 기는 것”을 먼저 언급하고, 그 뒤에 “새와 기는 것”을 언급하고 있다.
교회가 선행, 또는 선행의 선으로부터 행동할 때 그 교회는 영적 수준이라 말해진다. 교회가 선행 없이 신앙을 가지고 있다라고는 결단코 말해지지 않는다. 그 이유는 이럴 경우, 교회라는 단어 자체를 사용할 자격 조차 안되기 때문이다. 선행의 교리를 빼놓고 신앙의 교리를 거론한다면 그것이 무엇일까? 신앙이 가르치는 것을 인간이 실행해야 함을 빼놓고 말한다면 신앙의 교리는 무슨 목적으로 있는 것일까? 신앙이 가르치는 것을 알고 생각하는 것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신앙이 가르치는 것을 실행해져야 한다. (이는 지극히 평범한 논리 수준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영적 (평면의) 교회는 선행으로부터 행동할 때 교회라는 것이 시작된다. 그리고 선행은 신앙의 참 교리(실체)이다. 같은 말이지만 한번 더 말하면, 교인은 선행으로부터 행동할 때 축소판 교회가 되어 있는다. 이것도 생각해보라: (명령이란 무엇인가?) 명령이 무엇 때문에 주어져 있는가? 주님의 명령은 알고 있기만 하라고 준 것이 아니라 안 즉시 그것을 실행하라고 주어진 것이다. 이 실행 안에 있는 자는 자기 안에 주님의 왕국을 가진다. 그 이유는 주님의 왕국은 오로지 상호적인 사랑과 이로 인한 행복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선행으로부터 신앙을 분리하는 이들, 그리고 선행의 선한 일들 없는 신앙에 구원이 있다고 구원론을 펼치는 이들은 선행인 아우 아벨을 살해한 가인족이다. 그들은 시체 위에서 맴도는 새와 같다; 그 이유가 이런 신앙이 새이고, 선행 없는 인간이 시체이기 때문이다. 그들 역시 자신들을 위한 가짜 양심을 만들어낸다. 그렇게 하여 그들은 악마들 같이 살고, 증오로 이웃을 붙잡아두고 그들을 핍박하면서, 간음질로 전 생애를 꾸려도 결국은 구원받고야 만다. (이는 극단적 서술일지 모르지만) 이와 비슷한 것이 기독교계에 알려져 있다. (17세기 스베덴보리 시절 전후는 너무나 문맹적 시기인지라 “신앙만으로” 의롭다함을 인정받는 식의 위의 논조도 대중에게 먹혔겠지만 현재의 대중에는 지적 수준이 여느 신학교의 지적 수준을 능가하는 자가 수없이 많이 포진된 관계로 스베덴보리의 신학이 꼭 아니더라도 옛 교리의 주장에 절대적 지지를 보내지는 않을 것 같다고 역자는 생각된다) 자신이 소, 돼지만 못한 수준에서 살고 있다해도 구원된다고 하는 논리 만큼 인간 당사자에게 이보다 더 달콤한 언어적 접근은 없을 것이다. 제대로 된 이방인들은 이것이 가짜임을 즉각 알아챈다. 그래서 이들 중 많은 이들은 이런 기독인들이 사는 것을 주시할 때, 기독교의 교리를 몹시 싫어한다. 신앙의 이런 품질(가짜 양심)은 기독교에서만 발견되는 특이 사항이다.

그것들의 가족들(families)에 따라. 이것이 쌍들을 의미하는 것은 이미 살핀 것, 즉 창. 7:2, 3, 15로부터, 거기서 말해진 바, “깨끗한 것은 일곱씩”, “불결한 것은 둘씩” 방주로 들어갔다; 한편 여기서는 들어간 것들이 나오는 대목인데, 그들은 “그 가족들에 따라” 하고 말해지고 있다. 이렇게 말해진 이유는 모든 것들이 지금은 주님에 의해 질서에로 환원되었으므로 그것들은 가족들을 표현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거듭나는 인간에서 선들과 진리들, 또는 선행과 신앙에 관한 것들은 서로가 혈연 관계나 결혼 관계로서 같이 서로 관련되고 있다. 다시 말해 이것들은 천국에서 한 지주, 또는 부모로부터 있는 가족들 같이 있다. 선들과 진리들은 이런 질서 안으로 주님에 의해 가져와진다. 특별하게 여기서의 경우, 모든 선들은 일반적, 세부적 측면 모두에서 그것들 자신의 진리들을 중요시 하고 있다. 물론 그것들은 결혼으로 결합된 상태이기는 하다; 일반적 측면에서 선행이 신앙을 중시하는 것과 같이, 세부적 측면에서 선은 진리를 중시한다; 그 이유가 일반적인 것은 그것이 세부적 측면에서 존재하고 있지 않으면 일반적 차원이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일반적인 것은 그것의 존재를 가지게 하는 세부사항에서 보여져야 한다는 말이다. 이는 모두 각각의 인간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인간 전체에 적용되는 규칙은 그의 애착이나 생각의 경미하게 여겨지는 세부 사항에서도 있어져야 한다. 이런 세부 사항이 모아져 한 인간의 전체가 구성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거듭나지고 있는 인간은 일반적 측면에서와 똑같게 아주 작은 세부 사항도 한 부모 아래의 가족들 같이 되어 있어야 한다.

방주에서 나갔다. 이는 자유의 상태를 포함한다는 것은 16절의 방주에서 나감으로부터 이미 말해진 바이다. 영적 (평면의) 인간의 품질은 그가 양심을 통하여 주님에 의해 규율되어짐 이다를 숙고해보면 알게 된다. 양심에 의해 규율되는 자, 또는 양심에 따라 행동하는 자는 자유하게 행동한다. 영적 (평면의) 인간에게 있어 양심에 거슬러 행동하는 것 이상 그의 비위를 거슬리게 하는 것은 없다. 양심에 거슬러 행동하는 것은 그에게는 지옥이고, 양심에 따라 행동하는 것은 그에게는 천국이다; 이로부터 양심에 따라 행동함이 자유임을 누구도 알 수 있다.
주님께서는 선하고 참된 것을 자신들에게 보여주는 양심을 통하여 영적 (평면의) 인간을 통치하신다; 이 양심은 인간의 이해력에서 만들어내진다. 이에 대하여는 이미 말했었다. 그런고로 그의 의지력에 속한 것과는 분리되어 있다. 그리고 이렇게 의지력에 속한 것으로부터 분리된 이유에서, 분명해지는 것은, 인간은 자신으로부터 선한 어떤 것을 결코 행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신앙의 모든 진리가 신앙의 선으로부터 있기 때문에, 명백해지는 것은, 인간은 자신으로부터 진정한 어떤 것을 결코 생각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오직 주님만으로부터 이다. 그가 자신으로부터 이런 것들을 행하고 생각하고 하는 듯 여겨지는 것은 오로지 가상일 뿐이다; 이것이 그러하기에 영적 (평면의) 인간은 이를 인정하고 믿는다. 이로부터 분명해지는 바, 주님에 의해 영적 인간에게 주어진 양심은 마치 새 의지력과 같다. 이리하여 새로이 창조되는 인간은 새 의지력을 수여받고, 이로부터 새 이해력도 수여받는다.

20절. 그리고 노아는 여호와께 제단을 건축했다. 그리고 모두 각각의 깨끗한 짐승으로부터, 그리고 모두 각각의 깨끗한 새로부터 가져왔다, 그리고 제단에서 태워바치는 제물들을 바쳤다. “노아가 여호와께 제단을 건축했다”란 그가 주님을 표현함을 실행함(the practice of representing the Lord, 또는 a representative of the Lord)을 의미한다. “모두 각각의 깨끗한 짐승으로부터, 모두 각각의 깨끗한 새로부터”란 선행의 선들과 신앙의 선들을 의미한다. “제단에서 태워바치는 제물들을 바쳤다”란 거기서부터 있는 모든 예배를 의미한다.

이 절에는 일반적 측면에서 고대 교회의 예배가 묘사되어져 있다. 이는 “제단”과 “태워바치는 제물”이다. 이 두 가지는 모든 표현적 예배에서 제 1 의 것 이었다. 어쨌든 우선적으로 우리는 태고 교회에 존재했던 예배를 묘사해 볼 것이다. 그리하여 이로부터 표현적 방법 안에 주님을 예배함이 어떻게 근원되게 되었는가를 보일 것이다. 태고 교회인들은 내적 예배 밖에 더 다른 예배는 없었다. 이는 천국에서 가지는 예배와 같은 예배이다. 이것 가지고 천국은 인간과 연락되었다. 그렇게 해서 이 둘은 하나를 만들었다; 그리고 이 전달 수단은 지각이었다. 이에 관하여는 우리가 이전에 종종 이야기 하곤 했다. 이 교회인들은 천사적이고 깊이를 지녔기 때문에, 비록 그들 역시 세상적인 것과 육체적인 것을 도외시 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나, 이런 것들이 자신들의 삶의 중요도의 중심에 있게 하지 않았다. 그들은 감각으로부터 있는 갖가지 것들로부터 오히려 신성한 것, 천국의 어떤 것을 지각했다. 예를 들면, 그들이 높은 산을 보았을 때, 그들은 어떤 생각을 지각했는데, 그것은 산에 관한 것이 아니고, 승강함에 관해서, 이로부터 천국과 주님에 관해서 생각했다. 이리하여 세월이 흐르면서 주님은 가장 높은 곳에 거주하신다라고 말해지게 되었다. 그분도 자신을 “최고 높고 드높은 분”이라 부르셨다; 그 후에 주님을 예배함이 산들에서 개최되었다. 다른 예를 생각해보자. 그들이 아침을 주목하였을 때, 그들은 하루 중의 아침이 아니라 천국인 것, 천국적인 것은 인간 마음들에서 아침과 새벽 같다는 것을 지각했다. 이로부터 주님은 “아침”, “동쪽”, “새벽”, “동틀녘”이라 불리셨다. 이런 식으로 그들은 나무와 그것의 잎과 그것의 열매를 보았을 때도, 그들은 그것들 안에서 나무는 인간을, 그것의 열매는 사랑과 선행을, 그것의 잎은 신앙을 보았다; 그리고 이로부터 교인을 나무에, 낙원에 비교했고, 그 사람 안에 있는 것은 잎들과 열매에 비교했다. 이렇게해서 그들은 천국적 생각과 천사적 생각 안에 있었다.
모든 이가 아는 바, 일반적 생각이 모든 세부 사항들을 통치한다는 것이다. 그런고로 우리는 감각들의 모든 대상들, 보는 것 뿐만 아니라 듣는 것 등등에서도 그것들이 인간의 일반적 생각 안으로 흐른 것을 제외하고는 관심을 두지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의 심정에 기뻐함이 있을 경우, 우리는 보고 듣는 모든 것들이 미소짓고 기뻐하게 나타난다.; 그러나 심정에서 슬퍼함이 있을 경우, 그가 보고 듣는 모든 것은 슬퍼하고 애통함으로 나타난다. 이런 이유는 일반적 애착은 세부적인 모든 것에 나타나기 때문이다. 거꾸로 세부적인 것들이 일반적인 애착에서 보여지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그 반면, 모든 다른 것들이 나타나기 조차 하지 않고, 마치 부재 중인 것 처럼, 또는 별 소용 없는 것 인듯 되어있는 경우도 있다. 이런 양상이 태고 교회인과 더불어 있었다: 그들이 자기들 눈으로 본 것은 무엇이든 자기들을 위한 천국적인 특성을 지녔다. 그리하여 모든 것은 그들을 위해 절대적으로 살아있는 것처럼 보였다. 이것이 하느님에 대한 그들의 예배가 무엇 같았는지를 암시한다: 이 예배는 내적이었고 외적인 것은 결코 아니었다는 것이다.
이 교회가 기울어졌을 때, 즉 그의 후손에서의 경우인데, 그들은 지각 또는 천국과의 교류함을 잃게 됨이 시작되면서, 또다른 상태의 것이 시작되었다. 그 다음 그들은 감각의 대상물 안에서 천국적인 어떤 것을 지각하는 과거 그들이 즐겨했던 것은 더 이상 있지 않았다. 그리고 오로지 세상의 것만 있게 되고, 자기들의 지각을 잃어가는 정도에 비례하여 세상적인 것에 대한 사랑은 증가했다. 마침내 홍수 직전의 이 교회를 마감하는 후손은 대상물 안에서 자기들에게 보이는 것은 세상적, 물질적, 지상적인 것 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천국은 인간으로부터 분리되었고, 그들은 아주 먼 방법 외에는 교류는 있지 않았다; 그리고 인간에게 지옥과의 교류함이 열려졌다. 거기로부터 인간의 일반적 생각이 왔다. 거기로부터 모든 세부 사항들에 대한 생각이 흘러들었다. 이는 이미 살펴본 바 이다 인간에게 어떤 천국적 생각이 표출될 때, 이것은 그들에게 대수롭지 않은 것으로 전락하였다. 결국 그들은 영적이고 천적인 것이 존재한다는 것 조차도 인정하고 싶은 생각이 사라졌다. 이리하여 인간의 상태는 위 아래의 위치가 바뀌어지고 말았다.
주님께서 인간의 상태가 이러할 것 임을 예견하셨을 때 그분은 신앙의 교리적인 것들을 보존하시려 준비하셨다. 이 교리적인 것들은 인간으로 천적인 것과 영적인 것을 알게 해준다. 이 교리적인 것들은 “가인”이라 불리는 이들과 “에녹”이라 불린 이들을 수단으로 태고 교회의 사람들로부터 수집되었다, 이 두 사람에 관한 것은 앞에서 살핀 바 있다. 그러므로 가인에 관해 말해지기를, 누구도 그를 죽이지 못하도록 표가 가인 위에 놓여졌다 이다 (창. 4:5, 393, 394항 참조); 에녹의 경우는 하느님께서 데려갔다 이다 (창. 5:24, 521항 참조). 이 교리적인 것들은 의미(significative, 또는 상징적 언어) 안에만 존재했다. 그러므로 이 교리적인 것들은 (타락한 인간의 입장에서 보면) 마치 수수께끼를 이야기한 것들(인 듯 여겨지는 것들 안에), 즉 땅에서 발견되는 것을 수단으로 의미하고자 하는 것을 말함 안에 존재했다. 예를 들면, 산들은 천적 수준의 것들과 주님을 의미한다는 것; 아침과 동쪽도 이와 똑같은 의미들을 가진다는 것; 다양한 종류의 나무들과 그것들의 열매들은 인간과 그의 천국적인 것들을 의미하는 등등이다. 이런 식의 것들 안에 교리적인 것들이 존재했는 바, 이것의 모두는 태고 교회의 의미들(표시물과 상징물)로부터 수집되었다; 결과적으로 그들의 저술(writing)들 역시 위와 똑같은 본성으로부터 있었다. 그리고 (저술 안에 등장하는) 표현물을 두고 그들이 칭찬을 아끼지 않았던 바, (과분한 칭찬의 연속의 결과) 드디어 그 표현물로 해서 신성한 것과 천국의 것들을 보기 조차 하는듯 여겨지기에 이르렀다. 자기들이 보는 표현물과 똑같은 것이 태고적(antiquity)에도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태고적의 것과 비슷한 것들을 가지고 그들의 예배가 시작되어지고 허용되어졌다. 이것이 산 위에서, 숲에서, 나무들 한 가운데에서, 또한 야외에 설치한 상이나 기둥들에서, 그들의 예배가 있어진 근원이다. 드디어 제단들과 태워바치는 제물들이 등장했는데, 이후 이것은 예배의 제 1 의 항목이 되었다. 이 예배는 고대 교회에 의해 시작되었고, 이후 이 후손을 지나가면서 모든 민족들에 퍼졌다. 이외 다른 사항들은 주님의 신성한 자비로부터 차 후 살핀다.

그리고 노아는 여호와께 제단을 건축했다. 이것이 주님을 표현함을 실행함을 의미하는 것은 앞서 말한 것에서 짐작했으리라 본다. 고대 교회의 모든 의식들은 주님에 관한 것을 표현했다. 유대 교회의 의식도 이 범주에 속한다. 그러나 후기 시대에 이르러서 제 1 의 표현물(representative)은 제단이었다. 동시에 태워바치는 제물 역시 제 1에 해당되는 항목이었다. 이 제물은 깨끗한 짐승들과 깨끗한 새들로 구성되고, 그것들이 의미한 바에 의거 그것들의 표현함도 있어졌다. 따라서 깨끗한 짐승들은 선행의 선들을, 깨끗한 새들은 신앙의 진리들을 의미했다. 고대 교회의 사람들은 이런 것들(표현물)을 바쳤을 때, 자기들은 주님에게 이런 선들과 진리들의 선물을 바친 것으로 간주해버렸다. 그분이 기뻐하시도록 주님에게 바쳐질 수 있는 것은 (사실상) 아무 것도 없다. 이들의 후손은 이방인들이나 유대인들 같이 그들의 실행함(practice)을 부패되게 했다. 그 이유는 자기들이 실행한 예배(제단이나 제물 등등의 표현물)가 어떤 상징적 의미를 가졌는지를 실감하지도 않으면서 실행(실습)만 되풀이 한 것, 그러므로 예배를 외적 수준에 머물게 한 것 때문이다.
제단이 주님을 표현하는 주요한 대상물이다는 사실은 제단들은 이방인들 사이에도, 다른 의식들이 조직되기 이전에도, 궤가 조립되기 이전에도, 성전이 건축되기 이전에도 이미 있었다는 사실들로부터 분명해진다. 이것은 아브람으로부터도 분명해진다. 그가 벧엘의 동쪽 산에 당도했을 때 그는 제단을 일으켜세우고,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 (창. 12:8); 그 후에 그는 제단에 태워바치는 제물로 이삭을 바치라는 명령을 받았다 (창.22:2, 9). 마찬가지로 야곱은 루즈, 또는 벧엘에 제단을 건축했다 (창. 35:6-7); 그리고 모세는 시내산 아래 제단을 건축했다, 그리고 제물을 바쳤다 (출. 24:4-6). 이런 모두는 [유대인들의] 제물 바침 이전에 조직되었다, 그리고 궤가 조립되기 앞서 있었고, 후에 광야에서 이런 예배가 수행되어진 것 뿐이다. 제단들이 이방인들 사이에도 있었다는 것은 발람이 발락에게 지시한 것, 즉 일곱 제단들을 건축하고, 일곱 거세한 수소들과 일곱 수양들을 제물로 준비시킨 것 등으로 미루어 보아도 분명해진다 (민. 23:1-7, 14-18, 29-30). 또한 민족들의 제단들을 파괴하라는 명령으로부터 분명해진다 (신. 7:5; 사. 2:2). 그런고로 제단과 제물을 수단으로 하는 신성한 예배는 유대인들과 더불어 조직된 새로운 것은 아니었다. 참으로 제단들은 인간들이 제단 위에서 소나 양을 잡아바친다라는 생각을 가지기 이전 기념물로서 건축되어졌었다.
제단이 주님을 표현함을 실행함이고, 태워바치는 제물이 그분을 예배함인 것은 예언서들 안에서, 또한 모세가 성직 직분을 수행하는 레위인들에 관련해 말한 것에서도 분명해진다:
그들은 야곱에게 당신의 정의들을, 이스라엘에게 당신의 법을 가르칠 것이다;
그들은 당신의 콧구멍에 향을 놓을 것이다, 그리고
당신의 제단 위에 온전한 태워바치는 제물을 바칠 것이다 (신. 33:10).
위 구절은 모든 예배를 뜻한다; 그 이유가 “야곱에게 정의를, 이스라엘에게 법을 가르치는 것”은 내적 예배를 표시하고; “당신의 콧구멍에 향을 놓는다와 당신의 제단에 온전한 태워바치는 제물을 바친다”란 내적 예배에 상응하는 외적 예배를 표시하기 때문이다. 이사야서에서:
그 날에 사람은 자기를 만든 분을 쳐다볼 것이고, 그의 눈이 이스라엘의 거룩한 분을
경외할 것이며, 자기가 만든 작품, 제단들을 쳐다보지 않을 것이다 (이. 17:7-8).
위 구절에서, “제단을 쳐다보는 것”은 일반적 측면에서의 표현적 예배를 표시하는데, 이것이 철폐되어졌다. 이사야서에서:
그 날에 이집트의 토지 한 가운데에 여호와에게 제단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거기로부터의 경계에 여호와께 대한 기둥이 있을 것이다 (이. 19:19).
위 구절 역시 “제단”은 외적 예배를 표시한다.
예레미야에서:
주님께서 그분의 제단을 내치실 것이다, 그분은 그분의 성소를 몹시 싫어하셨다 (애. 2:7).
위 구절의 “제단”은 우상 예배로 변질된 표현적 예배를 표시한다. 호세아서에서:
에브라임은 제단들을 죄짓는 쪽에서 늘어났기 때문에
제단들이 그에게 죄짓게 하여왔다 (호. 8:11).
위 구절의 “제단들”은 내적인 것에서 분리된 모든 표현적 예배를 표시한다. 고로 우상적 예배였다. 다시:
아웬의 높은 장소들, 이스라엘의 죄, 파괴될 것이다;
가시와 엉컹퀴가 그들의 제단들에서 올라올 것이다 (호. 10:8).
위에서 “제단들”은 우상적 예배를 표시한다. 아모스서에서:
그 날에 나는 그 자 위에서 이스라엘의 불법을 방문할 것이다, 또한
나는 벧엘의 제단들을 방문할 것이다, 그리고 제단의 뿔들을 잘라버릴 것이다 (암. 3:14).
위 구절에서 “제단들”은 표현적 예배가 우상적 예배로 전락했음을 표시한다.
다윗서에서;
그것들이 나를 당신의 거룩한 산과 성막으로 데려가게 하소서. 그리고
나는 하느님의 제단으로, 내 환희의 즐거움이신 하느님에게 갈 것입니다 (시. 4:3-4).
위 구절의 “제단”은 주님을 분명하게 표시한다. 그런고로 고대 교회와 유대 교회에서 제단을 건축함은 주님을 표현하기 위해서였다. 주님을 예배함이 태워바치는 제물과 제물들에 의해 우선적으로 실행되었고, 이런 것들이 표현 예배의 중요한 것들을 의미했는 바, 제단 자체는 이런 표현 예배 자체를 의미한다.

그리고 모두 각각의 깨끗한 짐승으로부터와 모두 각각의 깨끗한 새로부터 가져왔다. 이것은 선행의 선과 신앙의 진리들을 의미하는 것은 위에서 보여진 바 있다; 즉 “짐승”은 선행으로부터의 선들; 그리고 “새‘는 신앙의 진리들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태워바치는 제물은 수소들, 어린 양들, 염소들, 호도애와 어린 비둘기로 바쳐졌다 (레. 1:3-17; 민. 15:2-15; 28:1-31). 이들은 깨끗한 짐승들이고, 그것의 각각은 천국의 어떤 것을 의미했다. 그리고 이 동물들이 고대 교회에서 천국의 어떤 것을 의미했고, 뒤이어지는 교회에서도 같은 것을 표현했기 때문에, 태워바치는 제물과 제물들은 내적 예배의 표현물 외에 더 다른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그것들이 내적 예배로부터 분리되었을 때, 그것들은 우상 숭배가 되고 말았다. 건전한 이성의 소유자이다면 이런 내용 파악은 어렵지 않다. 의미를 담지 않은 자연물의 수준에서라면 돌더미 밖에 더 아닌 것이 제단이고, 짐승을 죽이는 것 밖에 더 아닌 태위바침이나 제물 바침인데 그것이 뭐 대수로울 것인가? 고로 이것이 신성한 예배가 되려면, 예배드리는 자가 알고 인정하는 천국의 어떤 것을 표현하고 있어야 하고, 그것들이 표현한 어떤 분을 그들은 예배해야 한다.
그가 주님에 관한 어떤 것을 이해할 마음이 있는 이상, 누구나 이런 사항들이 주님을 표현할 거라는 정도의 이해에 무지할 수는 없다. 표현되어진 그분이 보여지고, 인정되어지고, 믿어져야 하는 수단은 내적인 것들, 즉 선행과 선행으로부터의 신앙이다는 것이 예언서들에서 분명해진다, 예를 들면, 예레미야에서:
그런고로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느님께서 말하신다, 네 제물들에 네 태워바친
제물을 추가하라, 그리고 너희는 고기를 먹으라; 그 이유가 내가 이집트의 토지로부터
그들을 데려내온 날에 나는 너희 조상에게 태워바치는 제물과 제물에 관하여 말하지
않았고, 명령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이것을 나는 그들에게 명령했다. 말하기를,
내 음성에 귀기울여라, 그리하면 나는 너희 하느님일 것이다 (예. 7:21-23).
“귀기울이는 것”, 또는 순종하는 것, “음성”은 법에 순종하는 것이다. 이 법 모두는 한 가지 명령, 즉 모든 것 위에서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자신같이 사랑하는 것과 관계된다. 그 이유가 이 안에 율법과 예언들이 있기 때문이다 (마. 22:35-40; 7:12). 다윗서에서:
오 여호와, 제물과 공물을 당신께서는 바라시지 않습니다, 태워바침과 속죄 제물을
요구하시지 않습니다; 나는 당신의 뜻을 행하기를 바랍니다; 그렇습니다,
당신의 법이 내 심정 안에 있습니다 (시. 40:6, 8).
사무엘서에서, 그가 사울에게 말했다,
여호와께서는 그분의 음성에 귀기울이는 것 만큼 태워바침이나 제물에서 큰 기쁨을
가지실 것인가? 잘 보시오, 순종하는 것이 제물보다 낫고,
귀기울임이 수양들의 지방 보다 낫다. (삼 상. 15:22).
“음성에 귀기울임”에 의해 뜻해진 것이 미가서에서 알런지 모른다:
제가 한 살된 암소를 태워바치는 제물로 하여 여호와 앞에 나오면 되겠습니까?
여호와께 수 천의 수양들을 가지고, 강물 만한 수 만의 기름을 가지고
여호와 앞에 오면 되겠습니까? 그분께서는 너희에게 선한 것을 보이셨다,
오 사람아, 여호와께서 네게 요구하는 것은 이것이다. 공정을 행하는 것, 자비를
사랑하는 것, 네 하느님과 함께 걸음에서 네 자신을 겸허히 하는 것이다 (미. 6:6-8).
위 구절이 “깨끗한 짐승과 새들로부터의 태워바치는 제물과 제물”에 의해 의미되는 것이다. 아모스서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비록 네가 나에게 너의 태워바치는 제물과 선물을 바친다 할지라도 나는 그것들을
받지 않을 것이다. 공정을 물 같이 흐르게 하라, 정의를 힘차게 흐르는 강 같이 하라
(암. 5:22, 24).
“공정”은 진리이다, 그리고 “정의”는 선이다, 모두 선행으로부터 이다, 그리고 이것들이 내적 인간의 “태워바치는 제물과 제물”이다. 호세아서에서:
나는 자비를 바라지 제물이 아니다,
그리고 태워바치는 제물 보다는 하느님에 관한 지식이다 (호.6:6).
이런 인용 구절들은 선행과 신앙이 있지 않을 경우 제물과 태워바치는 제물이 무슨 품질을 가지는지를 보여준다; 또한 깨끗한 짐승들과 새들이 선행으로부터의 선과 신앙으로부터의 선(진정한 생각들)을 의미했다는 것, 그러므로 그것을 표현도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제단에 태워바치는 제물을 바쳤다. 이는 거기로부터의 모든 예배를 의미하는데, 이는 이미 말해진 것으로부터 분명해진다. 태워바치는 제물은 표현 교회의 예배의 제 1의 항목이었다. 이를 이어 제물들도 중요 항목이었다. 이에 관하여는 차 후 주님의 신성한 자비로부터 더 말할 것이다. “태워바치는 제물”을 총괄하여 취급하면, 모든 표현적 예배를 의미한다는 것은 예언서에서도 분명해진다, 또한 다윗서에서:
여호와께서는 성소로부터 도움을 네게 보낼 것이다, 그리고 시온으로부터 너를
강건해지게 하실 것이다; 그분은 네 모든 제물을 기억하실 것이다, 그리고
네 태워바치는 제물을 지방이 많아지게 만들 것이다 (시. 20:2-3).
이사야서에서:
안식일이 모독됨에서 그것을 지키는 자, 그들을 나는 내 거룩한 산으로 데려갈 것이다;
그들의 태워바치는 제물들과 그들의 제물들은 내 제단 위에서 열납될 것이다
(이. 56:6-7).
위에서 “태워바치는 제물들과 제물들”은 모든 예배를 표시한다; “태워바치는 제물들”은 사랑으로부터 있는 예배를, “제물들”은 사랑에서 파생되는 신앙으로부터 있는 예배를 표시한다. 여기서도 예언서의 평범한 표현법 인, 내적인 것들이 외적인 것을 수단으로 묘사되어 있다.

21절. 그리고 여호와께서는 휴식의 냄새를 맡으셨다. 그리고 여호와께서는 그분의 심정에서 말하셨다. 나는 인간의 사건 때문에 더 이상 지면을 다시는 저주하지 않으리라. 그 이유는 인간의 심정이 제조하는 것은 젊은 시절로부터 악하기 때문이다. 나는 내가 했던 것 같이 생명 있는 모든 것을 더 이상 부수지 않으리라. “여호와께서 휴식의 냄새를 맡으셨다”란 선행과 선행으로부터의 신앙에서 비롯되는 예배는 주님을 기쁘시게 함을 의미한다. “여호와께서 그분의 심정에서 말하셨다”란 더 이상 홍수로 파멸되는 일은 발생하지 않을 것을 의미한다. “나는 더 이상 지면을 저주하지 않으리라”란 인간이 자신을 뒤틀어 버리는 일은 더 이상 없을 것임을 의미한다. “인간의 사건”이란 태고 교회의 후손들이 저지른 것을 의미한다. “인간의 심정이 제조하는 것은 젋은 시절로부터 악하다”란 인간의 의지는 온통 악임을 의미한다. “나는 내가 했던 것 같이 생명있는 모든 것을 부수지 않으리라”란 인간이 자신을 이런 식으로는 더 이상 파괴할 수 없을 것임을 의미한다.

그리고 여호와께서는 휴식의 냄새를 맡으셨다. 이는 거기로부터의 예배가 주님을 기쁘시게 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선행과 선행으로부터의 신앙으로부터의 예배가 주님을 기쁘시게 했다는 말이다. 이것이 “태워바치는 제물”에 의해 의미되어져 있다. 이는 앞절에서 이미 서술했다. 말씀에서 종종 말해지는 것은 여호와께서 “휴식의 냄새를 맡으셨다”이다. 특별히 태워바치는 제물로부터 이다; 그리고 이것은 항상 기뻐하시는 것, 열납하실 수 있는 것을 뜻한다; 즉 그분은 태워바치는 제물로부터 “휴식의 냄새를 맡으셨다” (출. 29:18, 25, 41; 레. 1:9, 13, 17; 23:12-13, 18; 민. 28:6, 8, 13; 29:2, 6, 8, 13, 36), 그리고 다른 제물로부터의 경우도 있다 (레. 2:2, 9; 6:15, 21; 8:21, 28; 민. 15:3, 7, 13). 이것들은 또한 “여호와의 휴식의 냄새를 위해 불로 만듦”이라 불리운다. 이를 수단으로 그것들이 사랑과 선행으로부터 이다가 의미되어졌다. 말씀에서 “불”, 그리고 “불로 만듦”이 주님에 관련해서, 그리고 그분을 예배함에 관련해서 서술될 때, 사랑을 의미한다. “빵” 역시 마찬가지이다. 이런 이유에서 태워바치는 제물들과 제물들에 의한 표현 예배는 “휴식의 냄새를 위해 불로 만든 제물의 빵”이라 불리운다 (레. 3:11, 16).
“냄새(odor)”는 기뻐하시는(grateful, pleasing) 것과 열납하실 수 있는(acceptable, welcome) 것을 의미한다. 이런 결과 유대 교회에서 냄새는 기뻐하시는 것을 표현했다. 그리고 그들은 냄새를 여호와로부터 기인한 것으로 여겼는데, 그 이유는 선행의 선과 선행으로부터의 신앙의 진리가 달콤하고 상큼한 냄새(향기)에 상응하기 때문이다. 이 상응에 관한 사실과 냄새의 본성은 천국에서 영들과 천사들의 기운(영기, aura, sphere)들로부터 논증할 수 있다. (그 이유가) 거기는 명백하게 지각되는 사랑과 신앙으로부터의 기운들이 있(기 때문이)다. 이 기운은 이런 것이다. 주님이 기뻐하실 때면 언제든지 선한 영, 또는 천사, 또는 선한 영의 공동체, 또는 천사들의 공동체가 가까이 오고, 그것은 즉시 지각되어지는데, 더 가까이 접근함에서, 이 영, 천사, 공동체의 사랑과 신앙이 무슨 품질을 지녔는지를 더 뚜렷하게 지각한다. 이것은 거짓말 같지만, 완전한 진리이다. 이는 다른 삶에 있는 교류(communication)이고 지각이다. 그러므로 주님을 기쁘게 하면, 혼, 또는 영의 품질을 조사하려고 많은 방법을 동원할 필요가 없다; 그 이유가 접근되자마자 알아버리기 때문이다. 이런 기운에 상응하는 지상의 냄새로부터의 기운이다. 주님이 기뻐하실 때, 영들의 세계에 있는 사랑과 신앙의 기운들은 달콤하고 기쁨을 주는 냄새들로 바뀌어지고, 명백하게 그것을 지각한다는 사실로부터 위와 같은 상응 관계가 분명해진다.
이런 사항들로부터 이제 명백해지는 바, “휴식의 냄새”가 어디서, 왜 기뻐하시는 것을 의미하는지, 그리고 냄새가 유대 교회에서 왜 표현물이 되었는지, 그리고 왜 “휴식의 냄새”가 여호와, 또는 주님에 기인하여 있는지에 대해서이다. 휴식의 냄새는 평화 속의 하나, 또는 평화 속의 깊이 감사하는 느낌이다. 평화를 전체로서 간주해보면, 평화는 주님의 왕국의 모든 것들을 일반적, 세부적 측면 모두에서 껴안고 있다. 그 이유가 주님의 왕국의 상태가 평화의 상태이고, 이 상태 안에서 사랑과 주님에 대한 신앙으로부터 결과하는 행복한 모든 상태들이 생겨나기 때문이다. 이상 살핀 바로부터 명백해지는 바, 어떻게 냄새가 표현물이 되고 있는지, 뿐만 아니라 왜 유대 교회에서 향이 사용되었는지, 왜 (성막의) 베일(veil)과 자비석(mercy seat) 앞에서 향이 사용되었는지에 대해서이다; 왜 제물에서 유향의 바침이 있었는지; 또한 왜 여러가지의 향신료들이 향 (제조)에, 유향 (제조)에서, 기름부음을 위한 기름 (제조)에서 사용되었는지에 대해서 이다; 그리하여 말씀에서 “휴식의 냄새”, “향”, 그리고 “향신료” 라는 말을 수단으로 의미되는 것은 사랑으로부터의 천적 (수준의) 것들과 사랑으로부터 파생되는 신앙의 영적 (수준의) 것들; 총괄해서 말하면, 사랑과 신앙으로부터 우러나는 깊은 감사의 모든 것이다.
에스겔서를 보자:
내 거룩함의 산에서, 이스라엘의 높은 산에서, 전체 토지에 있는 이스라엘의
모든 가문이 나를 섬길 것이다; 거기서 나는 그들을 받을 것이다, 그리고 거기서
나는 너의 봉헌물과 네 선물의 첫 열매들을 너의 거룩한 모든 것들과 더불어
찾을 것이다; 휴식의 냄새로서 나는 너를 받을 것이다 (겔. 20:40-41).
여기서 “휴식의 냄새”가 태워바치는 제물들과 선물들에 꼭 들어맞고 있다. 그 이유가 선행과 선행으로부터 있는 신앙의 예배가 태워바치는 제물과 선물에 의해 의미되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이 예배는 받으실 수 있다는 것, 이것이 “냄새”에 의해 뜻해지고 있다. 아모스서에서:
나는 미워한다, 나는 네 축제들을 거절했다, 나는 네 휴일의 냄새를 받지 않을 것이다,
그 이유가 너희가 나에게 너의 태워바침과 선물들을 바쳤어도 내가 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암. 5:21-22).
여기서 “냄새”는 기뻐하시는 것 또는 받으실 수 있는 것을 의미한다. 에서(Esau) 대신 야곱을 축복하는 이삭에 관한 대목을 읽어보자:
그리고 야곱이 가까이 왔다, 그리고 그는 야곱에게 키스했다; 그리고 그는 그의 의복의
냄새를 맡았다, 그리고 그를 축복했다, 그리고 말했다,
보라, 내 아들의 냄새는 여호와께서 복을 내린 들판의 냄새 같다 (창. 27:27).
“그의 의복의 냄새”는 자연적 선과 진리를 의미한다, 이 자연적 선과 진리는 천적, 영적 선과 진리에 일치하기 때문에 기뻐하시는 자연적 선과 진리이다. 기뻐하심의 이 품질이 “들판의 냄새”에 의해 묘사되고 있다.

여호와께서 그분의 심정에서 말하셨다. 이는 홍수로 파멸하는 사건은 더 이상 발생하지 않을 것임을 의미하는데, 이는 뒤이어지는 대목으로부터 분명해진다. 여호와를 두고 그분이 “말하신다”라고 서술되었을 경우, 그것에는 어떤 것이 이런저런 방법에서 발생하는지, 발생하지 않는지 만을 뜻할 뿐이다. 그 이유가 그분을 놓고 말할 수 있는 것은 그분은 (스스로) 있으시다, He is 외에는 달리 말할 수 있는 것은 엄격히 보면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말씀의 많은 곳에서 여호와를 두고 표현된 말들은 인간의 납득력을 넘어 있는 것을 그 인간의 납득력에서 받을 수 있기 위하여, 또는 받으려고 그 인간을 위한 편의상의 방편으로 사용된 것일 뿐이다. 이것이 말씀 대부분에서 발견되는 글자 의미가 지닌 본래의 모습이다. 천진난만한(simple) 심정은 인간과 더불어 있는 외관으로부터 가르쳐질런지 모른다. 그 이유가 그들은 감각의 것들로부터 파생되는 지식들 넘어로(악용하는 쪽으로) 거의 가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에게 말씀의 언어는 그들의 납득력에 순응되어진다; 예를 들면, 바로 이 구절의 “여호와께서 그의 심정에서 말하셨다”이다.

나는 인간의 사건으로해서 지면을 더 이상 저주하는 일은 다시 없을 것이다. 이는 태고 교회의 후손들이 저질렀던 것 같이, 자신을 뒤틀어버리는 일이 인간에게 없을 것임을 의미하는데, 이는 이 후손에 대해 앞서 말해진 것으로부터 분명해진다. “저주함”이 내적 의미에서 자신을 비틀어버림을 의미하는 것은 223, 245항을 참조하면 알런지 모른다.
이런 형세, 즉 인간은 태고 교회인 같게는 더 이상 자신을 비틀지 못할 것, 인간은 다시 그런 식으로 해서 자신을 파괴할 수 없으리라는 것에 대하여는 멸절된 태고 교회인에 관하여, 그리고 “노아”라 불리는 새로운 교회에 관하여 이미 말해진 것으로부터 분명해진다. 이미 살핀 바는 이렇다(310:1; 398; 640; 875:4항 참조). 태고 교회의 사람은 의지력과 이해력이 한 개의 마음을 형성하도록 설립되어졌다. 또는 사랑이 인간의 의지 부분에 심어짐과 동시에 신앙도 주어졌다. 그리고 이것이 그의 다른 부분, 또는 그의 마음의 지적 부분도 채웠다. 이로부터 이 후손들은 의지와 이해함이 하나를 만든 조건을 상속 받았다; 그러므로 자기를 사랑함, 이의 결과인 광적인 그리워함들이 주님을 사랑함과 이웃을 향한 선행이 있던 의지 부분을 꿰차고 들어 앉을 때, 의지와 이해가 하나된 결과로 이해 부분, 지적 부분 역시 깡그리 뒤집혀졌다. 태고 교회의 마지막 후손이 그들의 그리워함들 안에 있는 거짓들에 완전 침수된 모습이 “느빌림”이라 성경에서 이름 불러진다. 이들은 회복이 불가능했는데, 그 이유는 두 마음들이 한꺼번에 썪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렇게 될 줄을 주님께서는 예견하셨던 바, 인간의 개량(upbuild)을 설비하셨는데 이러하다. 인간은 마음의 두 번째 부분, 즉 지적 부분에서 개혁되고 거듭나져야 하리라는 것이다. 개혁되고, 거듭나진 지적 부분에 양심인 새로운 의지를 심는 것이다. 이 양심을 통하여 주님께서는 사랑(또는 선행)의 선과 신앙의 진리가 행동들에 놓여지게 하신다. 이 방법에서 인간은 주님의 신성한 자비로부터 회복되어지는 것이다. 이상의 것들의 이 구절의 말, “나는 인간의 사건 때문에 더 이상 지면을 다시는 저주하지 않으리라. 그 이유는 인간의 심정이 제조하는 것은 젊은 시절로부터 악하기 때문이다. 나는 내가 했던 것 같이 생명있는 모든 것을 더 이상 부수지 않으리라”에서 의미되어져 있다.

그 이유는 인간의 심정이 제조하는(fabricate) 것은 그의 젊은 시절로부터 악하기 때문이다. 이는 인간의 의지 부분은 완전히 악이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는 방금 말한 것만 가지고도 분명해진다. “심정이 제조하는 것”은 온통 악 밖에 없다를 의미한다. 인간은 자기가 선한 것을 위한 의지를 가지고 있다고 상상하나 이는 완전 실수이다. 그가 선을 행할 때, 이것은 그의 의지로부터가 아니고, 주님의 것인 새로운 의지로부터 이다; 그러므로 그는 주님으로부터 선을 행하는 것이다. 그가 참된 것을 생각하고 이야기할 때, 이는 새 의지력으로부터 있는 새로운 이해력으로부터 이다. 고로 참된 것을 생각하고 이야기함도 주님으로부터 이다. 거듭나는 인간의 모두는 주님에 의해 만들어내지는 새로운 인간이다. 이런 이유로 거듭나는 인간은 새로이 창조되어진다라고 말해지는 것이다.

나는 내가 했던 것 같이 생명 있는 모든 것을 부수지 않으리라. 이는 인간이 자신을 이런 식으로는 더 이상 파괴할 수 없을 것임을 의미하는데, 지금 설명으로 분명해진다. 인간이 거듭나질 때, 당사자는 자기가 자기 안에 있는 악과 거짓으로부터 억제되어 있음을 보면서, 그는 자신으로부터 선한 것을 행하고, 참된 것을 생각하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은 없다고 지각한다. 어쨌든 이것은 그가 억제되어 있음, 아마 아주 센 억제되어 있음으로 야기된 외관, 또는 오류일 뿐이다. 악과 거짓으로부터 억제된 결과로 그는 자신을 파괴할 수 없다; 하지만 만일 억제됨이 조금만 느슨해지게 허용된다면, 그는 모든 악과 거짓 안으로 돌진할 것이다.

22절. 땅의 모든 날들 동안 파종기와 추수, 그리고 추위와 더위, 그리고 여름과 겨울, 그리고 낮과 밤은 중단되지 않으리라. “땅의 모든 날 동안”이란 모든 때를 의미한다. “파종기와 추수”란 거듭나아져 가는 사람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교회(the church)도 의미한다. “추위와 더위”란 인간이 거듭나고 있는 동안 신앙과 선행을 수용하는 상태라고 바꿔 말할 수 있다. “추위”는 신앙과 선행이 없음이고, “더위”는 신앙과 선행이 있음이다. “여름과 겨울”은 거듭나는 사람이 지니는 새로운 의지의 상태에 관련하여서 인데. 이 의지는 마치 여름철과 겨울철이 교차하는 것 같다. “낮과 밤”은 거듭나는 사람이 이해하는 상태에 관련하여서 인데, 이는 마치 낮과 밤 같이 밝게 이해함과 불분명하게 이해함이 반복된다는 것이다. “중단하지 않으리라”란 위의 일들은 일생 동안 있을 것임을 뜻한다.

땅의 모든 날들 동안. 이는 모든 때를 의미하는데, 이는 “날”의 의미가 때인 바로부터 분명해진다; 그러므로 “땅의 날들”은 땅이 지속되고 있는 한에서의 모든 때, 말하자면 거주민이 (지구)행성(planet)에 남아 있는 한에서의 모든 때를 뜻한다. 거주민이 처음 끝이 나는 것은 더 이상 어떤 교회도 있지 않을 때이다. 그 이유가 교회가 없을 때, 천국과의 인간의 교류도 더 이상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교류가 중단될 때, 모든 거주민은 멸한다. 우리가 앞에서 살핀 바같이, 교회의 경우도 인간의 심장과 폐의 관계 같다; 심장과 폐들이 건전해 있는 한, 그만큼 오래 인간은 산다; 그리고 이것은 보편적 천국인 웅대한 사람의 경우도 그러하다. 교회가 살아있는 한, 보편적 천국이 있다. 그러므로 여기서 말해진다, “땅의 모든 날들 동안, 씨뿌림과 수확, 그리고 추위와 더위, 그리고 여름과 겨울, 그리고 낮과 밤은 중단되지 않을 것이다.” 이로부터 땅은 영원히 지속되지는 않을 것, 그것 역시 그것의 끝을 가질 것이다가 나타날런지 모른다. 그 이유가 “땅의 모든 날들 동안”, 즉 땅이 지속되는 한 이라고 말해지기 때문이다.
땅의 끝장이 성경에서 미리 말한 최후 심판(the Last Judgment)과 똑같은 것이라 믿는 자들이 있다. 성경에서 묘사된 심판은 시대의 종말, 방문의 날, 그리고 마지막 심판들인 바, 위와같이 믿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그 이유가 교회가 황폐되었을 때 , 또는 어떤 신앙도 교회 안에 더 이상 있지 않았을 때, 모두 각각의 교회에 대한 마지막 심판이 있었다. 태고 교회에 대한 마지막 심판은 홍수 이전 마지막 후손에서와 같이 그들이 멸절 될 때 있었다. 유대 교회에 대한 마지막 심판은 주님이 세상에 오셨을 때 있었다. 또한 주님이 영광 안에서 오실 때 마지막 심판이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땅과 세상이 멸절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가 멸절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때 새로운 교회가 주님에 의해 언제나 일으켜진다; 예를 들면, 홍수의 때에는 고대 교회가 있었고, 주님이 오시는 때에는 비 유대인들에서 소박한 [기독인의] 교회가 발생되었다. 주님이 영광 안으로 오시는 때 또한 새로운 교회가 있을 것이다. 이것이 새 하늘과 새 땅에 의해 뜻해져 있다 (이. 65:17; 66:22; 계. 21:1). 거듭나아가는 인간도 방식은 같다. 그는 교회의 사람, 또는 교회가 되는데, 그가 새로이 창조되었을 때, 그의 내적 인간은 새로운 천국, 그의 외적 인간은 새로운 땅이라 불리운다. 더 나아가 인간이 죽을 때, 모든 이 각각에게 마지막 심판이 있다. 그 이유가 그가 육체에서 행해진 것에 따라, 그는 죽음이든, 생명이든 결정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시대의 종말을 수단으로 해도, 날들의 끝장을 수단으로 해도, 또는 마지막 심판이라 말해진 대목을 살펴보아도 세상의 파멸이 뜻해진 곳은 없다는 말이다. 한번 더 짚어보고 가기 위해 주님의 말씀을 읽어보자. 누가복음에서:
그 밤에 한 침대에 두 여인이 있을 것이다;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남을 것이다;
두 여인이 함께 맷돌질을 할 것이다; 하나는 데려가지고, 다른 하나는 남을 것이다
(눅. 17:34-36).
위에서 마지막 때가 “밤”이라 불리운데, 그 이유는 신앙이, 즉 선행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가 “남아 있다”에 의해 세상은 멸절되지 않을 것임이 암시되어져 있다.

“씨뿌리는 때와 수확”은 거듭나지는 인간을, 고로 교회를 의미하는 것에 대한 말씀으로부터의 확증은 꼭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그 이유가 인간이 들판에 비교되고 견주어지는 것은 흔히 접하는 말들이고, 이에 따라 씨뿌림과 씨뿌리는 때 역시 친숙해진 언어 형체들이기 때문이다. 여기서의 경우, 모두 각각의 인간이 일반적으로 취급된다. 즉 주님으로부터의 씨뿌림이 없는 인간은 있지 않을 것이다는 것, 그가 교회내에 있든 그렇지 않든 모두에게 주님의 씨뿌림은 있다는 것; 즉 그가 말씀에 친숙해 있든, 그렇지 않든 모두에게 씨뿌림은 있다는 것이다. 주님에 의한 씨의 뿌림 없이 인간은 선을 행할 수 없다. 선행의 모든 선, 이방인의 경우라 해도 주님으로부터의 씨이다; 그리고 비 기독인이 행한 선이 진정한 신앙의 결과는 아니지만, 이 선도 교회내 사람들 사이에 있을 경우, 신앙의 선이 되어질 수 있다. 그 이유가 이 세상에서 선행을 늘 실행하며 살다가 저 세상에 온 이방인들이 천사들에 의해 교육받게 되면, 기독인들 보다 더 쉽게 선행으로부터의 신앙과 진정한 신앙에 관한 교리를 껴안아 받기 때문이다. 이에 관하여는 주님의 신성한 자비로부터 차 후 살핀다. 어쨌든 여기서 특별히 취급되는 것은 거듭나지는 사람과 교회가 땅 위 최소한 한 곳에라도 존재하는 것이 중단되는 일은 결코 없다는 것이다. 이것이 여기서 땅의 모든 날에서 파종과 수확은 있을 것임에 의해 의미되어져 있다. 파종과 수확, 또는 교회는 언제나 존재 안으로 오는 바, 이 절은 앞 절에서 말해진 것, 즉 인간은 태고 교회의 마지막 후손에 의해 저질러진 것 같은 것으로 더 이상 자신을 파괴할 수 없다의 의미와 연결을 이루고 있다.

“추위와 더위”는 거듭나질 때의 인간의 상태를 의미한다. 이는 신앙과 선행을 받음에 관련되고 있다. “추위”는 신앙과 선행이 없음을, “더위”는 선행을 의미한다. 이는 말씀으로부터 분명해진다. 말씀 안에서 이것들은 거듭나아질 이들, 거듭나지는 이들, 또는 교회의 사람에 관하여 서술되어진다. 이는 여기서도 앞 절과 뒷 절의 연결로부터 분명해진다; 그 이유가 주제가 교회인데, 앞 절의 경우, 인간은 그와 같이 자신을 다시 파괴할 수 없다 였고, 이 절의 경우, 어떤 교회가 존재 안으로 언제나 오고 있다 였다. 처음 것은 인간이 교회가 되기 위해서 거듭나아질 때, 존재 안으로 오는 방법에 관하여, 그 다음 거듭난 사람의 품질이 취급된다; 이리하여 주제의 취급 범위는 교회의 사람의 모든 상태를 아우르고 있다.
우리가 거듭나고 있을 때 우리는 추위와 더위라는 국면(phase), 즉 신앙과 선행이 없는 상태에서, 다시 신앙과 선행이 있는 상태를 통과하는데, 이에 대한 이해는 경험으로부터, 실로 경험을 곰곰이 되새겨 봄으로부터가 아니면 분명해지지 않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거듭나지는 자는 매우 적고, 거듭난 자 사이에서도 자기들의 거듭남의 상태를 되새기는 자, 또는 되새겨 볼 수 있는 자는 매우 적기 때문에 우리는 이 주제에 몇 마디 말을 해야 할 것 같다. 인간이 거듭나질 때, 그는 주님으로부터 생명을 받는다; 그 이유가 받기 이전일 경우, 그는 살아있었다고 말해질 수 없기 때문, 세상의 삶과 육체의 삶은 생명이 있지 않기 때문, 그러나 오직 천국적이고 영적인 것 만이 생명이 있기 때문이다. 거듭남을 통하여 인간은 주님으로부터 진짜 생명을 받는다; 그리고 그는 이전에 생명을 가지지 않았었기 때문에, 생명 없음에서 진짜 생명이 있음으로 교대(alteration)한다. 즉 신앙과 선행 없음으로부터와 얼마간의 신앙과 선행이 있음으로가 교대한다는 말이다. 이 구절의 경우, 선행과 신앙이 없다가 “추위”로, 얼마간의 선행과 신앙이 있다가 “더위”로 의미되고 있다.
이 주제에 관련된 상황은 이렇다: 인간이 그의 물질적이고 세상적인 것들 안에 있을 때는 언제든지, 신앙과 선행이 없다. 즉 “추위”가 있다. 그 이유는 물질적이고 세상적인 것들, 결과적으로 그의 자기 자신인 것들이 적극적으로 활동하기 때문이다. 인간이 이런 상태 안에 있는 한, 그는 신앙과 선행으로부터 멀리 있거나 그것들이 없는 상태에 있다. 그리하여 그는 천국의 것과 영적인 것에 관하여는 곰곰이 생각해보는 기회조차 없다. 이런 연유로 천국의 것과 물질적인 것은 인간 안에 함께 있을 수 없다. 그 이유가 인간의 의지 부분은 완전히 파멸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의 육체와 의지 속의 것들이 활동하지 않을 때, 즉 정지한 상태일 때, 그때 주님은 그의 내적 인간을 통하여 일하신다, 그때 그는 신앙과 선행 안에 있다, 이것이 “더위”라 불리운다. 그가 육체 안으로 되돌아 올 때, 그는 다시 추위 안에 있는다; 그리고 육체, 또는 육체에 속한 것이 정지할 때, 없는 듯 할 때, 그러면 그는 더위 안에 있다. 한마디로 (임무) 교대가 있는 셈이다. 이런 교대가 인간의 조건 일 수 밖에 없는 것은, 천국과 영적인 것들이 인간의 물질적이고 세상적인 것을 따라서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 교대는 거듭나아지는 모든 이 하나하나에게서 거행되고 있다. 그리고 그가 거듭남이 진행형에 있는 한 이런 교대함도 진행형이다; 그 이유가 이런 방법 외에 달리 인간은 거듭나질 수 있는 방법, 죽은 자로부터 산 자로 만들어지는 방법은 없기 때문이다. 이미 말했듯이, 인간의 의지는 완전하게 파멸되어졌다는 것, 그러므로 인간의 의지는 새로운 의지로부터 완전하게 분리되어 있다는 것, 이 새 의지는 인간의 것이 아닌, 주님의 것이고, 인간은 주님으로부터 받아야 한다. 이상 설명으로부터 “추위”와 “더위”에 의해 의미된 것은 분명해졌으리라 본다.
위와 같은 경우가 거듭나는 사람이라면 그의 경험으로부터 알런지 모른다. 즉 그가 물질적이고 세상적인 것들에 있을 때, 그는 내적인 것들로부터 멀어져있는 듯, 아마 그것은 없는 것 인듯 하여 있다. 그리하여 그는 내적인 것들에 관한 생각은 가지지 않을 뿐 아니라, 설사 생각을 가질 기회가 있을 경우, 추위를 느낀다; 그러나 물질적이고 세상적인 것들이 정지되는 때, 그는 신앙과 선행 안에 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자기에게서 이런 교차됨이 있다는 것을 자신의 경험으로부터 어느 정도라도 감지하고 있을지 모른다. 그러므로 물질적이고 세상적인 것들이 초과 상태가 되어 규율될 필요가 대두될 때, 심통(distress)과 시험들이 온다. 이 위기는 외적 인간이 내적 인간에 고분고분하는 상태로 환원되어질 때까지 지속된다. 이런 고분고분해짐은 사실상 외적인 것들이 정지된 듯, 아마 없는 듯 하는 수준까지 이르지 않으면 오지 않는 상태이기도 하다. 태고 교회의 마지막 후손은 거듭나질 수 없었다. 그 이유는 여러번 말했듯이, 그들과 더불은 이해력의 것들은 의지력의 것들로부터 분리되어질 수 없었기 때문이다. 즉 그들에게서는 교대함, 한 때는 천국과 영적인 것을 추구하다가, 다른 때는 물질적 세상적인 것을 추구하는 식의 앞으로, 뒤로 왔다 갔다하는 교차 방식이 없었다는 말이다. 그들은 천국적이고 영적인 것들을 향하여는 영구히 “춥다”함이었고, 그들의 그리워함(yearning, 욕구, desire)들을 향하여는 “따듯하다”함을 영구히 지닌 상태에 있었다. 한마디로 그들에게는 교대하는 상태가 없었다는 말이다.

“추위”는 사랑 없음, 또는 선행과 신앙 없음이고, “더위”, 또는 “불”은 사랑, 또는 선행과 신앙을 의미한다는 것은 아래의 말씀으로부터의 인용구절로부터도 분명해질 것이다. 계시록에서 라오디게아 교회에게 말하셨다:
나는 네 행위들을 알고 있다, 너는 차지도 뜨겁지도 않았다;
나는 네가 차던지, 뜨겁던지를 바랬다; 이렇게 너는 미지근하기 때문에,
차지도 뜨겁지도 않은 바, 나는 너를 내 입으로부터 토해낼 것이다 (계. 3:15-16)
위에서 “차다”란 선행 없음, “뜨겁다”는 선행 많음을 표시한다. 이사야서에서:
그런고로 여호와께서 나에게 말하셨다, 나는 잠잠히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내 장소에서 바라 볼 것이다. 마치 빛에 있는 열기의 빛남 같이, 추수의 열기에서
이슬의 구름같이 이다 (이. 18:4).
위 구절의 주제는 심어지게 되는 새 교회이다; “빛에 있는 열기”와 “추수의 열기”는 사랑과 선행을 표시한다. 다시:
여호와의 불이 시온에 있고, 그분의 불가마가 예루살렘에 있다 (이. 31:9).
위에서 “불”은 사랑을 표시한다. 거룹들을 에스겔이 본 바, 말해진다:
살아있는 창조물에 관하여, 그들의 외모는 불타고 있는 숯불 같고, 횃불(또는 등불)의
외모 같다; 이 불은 살아있는 창조물 사이에서 (창조물을) 따라서 움직이고 있다;
그 불은 빛났다, 그리고 이 불로부터 번개가 나왔다 (겔. 1:13).
그리고 다시 같은 장에서 주님이 묘사된다:
거룹들의 머리 넘어있는 광활한 공간 위에 사파이어 돌의 외모같은 듯 여겨지는 것,
왕좌 같은 것이 있었다. 왕좌의 모습 위에 사람의 외모같은 것이 위쪽 높이 있었다.
그리고 나는 불타는 숯불 같은 것, 그분의 내부와 빙둘러서 있는 불의 형체,
이는 그분의 허리 위쪽의 외모이고, 허리 아래쪽은 빙둘러 빛남을 지닌
불의 외모로서 보았다 (겔1:26,27; 8:2).
여기서 다시 “불”은 사랑을 표시한다. 다니엘서에서:
고대의 어떤 분이 앉아 있었다; 그분의 왕좌는 불 속의 불꽃들 이었다, 그리고
거기로부터의 바퀴들은 불타는 불이었다; 불타는 시내가 그분 앞으로부터 유출되어
나갔다, 천의 천(명의 사람)이 그분을 섬기고, 만의 만(명의 사람)이
그분 앞에 서 있었다 (단. 7:9-10).
여기서 다시 “불”은 주님의 사랑을 표시한다. 스가랴서에서:
여호와께서 말하신다, 나는 그녀에게 빙둘러 있는 불의 벽일 것이다 (슥. 2:5).
새 예루살렘이 취급되어지는 곳이다. 다윗서에서:
여호와께서는 영들을 그분의 천사들로, 불꽃이글거리는 불을 그분을 섬기는 자들로 만드신 다 (시. 104:4).
“불꽃이글거리는 불”은 영적인 천국의 어떤 것(the celestial spiritual, 역자가 조금 더 부연 설명하면, 영적 왕국에 있는 천적 왕국으로부터의 어떤 것… 불 안에 불꽃이 있듯 천적인 것은 영적 왕국의 핵심이다)을 표시한다.
“불”이 사랑을 의미하기 때문에, 불은 주님을 표현하게 되었다. 이는 결단코 꺼지지 않는 태워바침의 제단에 있는 불로부터 분명해진다 (레. 6:12-13). 이 불은 주님의 자비를 표현한다. 이런 근거에서, 아론은 자비석 쪽으로 안으로 가기 앞서, 그는 태워바침의 제단으로부터 불을 가져가서 향을 피웠다 (레. 16:12-14). 같은 이유 때문에, 주님에 의해 열납된 예배가 하늘로부터 불이 내려와 태워바침의 제물을 살라버림으로 의미되어 있다 (레. 9:24 참조). 또한 “불”은 말씀 안에서 자기 사랑과 이 사랑의 탐욕도 의미하는데, 이 사랑과 천국의 사랑은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 그러므로 아론의 두 아들들이 태워졌는데, 그 이유는 이상한 불을 가지고 향을 피웠기 때문이다 (레. 10:1-2). “이상한 불”은 자기를 사랑함과 세상을 사랑함의 모든 것, 그리고 이 사랑들로부터의 모든 탐욕들이다. 더욱이 천국의 사랑은 사악한 자에게는 태우는 불, 살라없애는 불로서 나타난다. 그러므로 말씀에서 살라버리는 불은, 마치 시내산에서의 불 같이 주님을 서술하고, 사실상 불은 주님의 사랑, 또는 자비를 표현하지만 시내산 아래 있는 백성들에게는 이 불이 살라없애 버리는 불로 보여졌다. 그러므로 백성들은 모세에게 자기들로 여호와 하느님의 음성을 듣지 않도록, 큰 불을 보지 않게 하여 자기들이 죽지 않게 해달라고 요구했다 (신. 18:16). 주님의 사랑, 또는 자비는 자아와 세상을 사랑함 안에 있는 이들에게는 위와 같은 외관을 가진다.

“여름”과 “겨울”은 거듭난 사람의 새로운 의지 측면에서의 상태를 의미한다는 것, 이 상태의 교대는 여름과 겨울 같다는 것, 이는 추위와 더위에 관해 말해진 사항으로부터 분명해진다. 거듭나져가는 사람에게 있는 교대함은 추위와 더위에 견주어지고, 거듭나져 갔던 사람에게 있는 교대함은 여름과 겨울에 견주어진다. 전자의 경우는 거듭나아가는 사람이고, 후자는 거듭난 사람인 것은 언어의 순서로부터도 알게 된다. 즉 전자는 추위가 먼저 언급되나, 후자는 여름이 먼저이다. 그 이유가 거듭나지게 되는 사람은 추위로부터, 즉 신앙과 선행 없음으로부터 시작한다; 그러나 그가 거듭나져갔을 때, 그는 선행으로부터 시작한다.
거듭난 사람에게도 교대함이 있다는 것-지금 선행 없음, 그리고 지금은 선행이 조금 있음-같은 교대함이 있는데, 그 이유는 모든 이, 설령 거듭났다 해도, 각자가 지닌 것은 실상 악 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선한 모든 것은 주님 만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자기 안에 악 밖에 없는 관계로, 그는 교대함을 수행할 수 밖에 없다. 즉 여름인 선행 안에 있는 것, 한편 겨울인 선행 안에 없는 것을 교대해서 가질 수 밖에 없다는 말이다. 이런 교대함이 있는 이유는 거듭난 자들이 더욱더 완전해지기 위해서, 더욱더 행복해지기 위해서이고, 이는 이세상에서 뿐만 아니라 저세상에서도 그의 의지 측면의 여름과 겨울의 교대함 없이는 더 완전해지고, 더 행복해짐이 가능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른 삶에서 이런 교대함의 여름과 겨울은 지상의 온대 지방의 여름과 겨울 같고, 봄철에 있는 낮과 밤 같다.
이런 상태들이 예언서에서 “여름과 겨울”에서 묘사되어 있다; 스가랴서에서:
그리고 그 날에 살아있는 물들이 예루살렘으로부터 나갈 것이다; 그 물들의 절반은
동쪽의 바다를 향하여, 그리고 그 물의 절반은 서쪽의 바다를 향할 것이다;
여름에서와 겨울에서도 그것은 (그렇게) 있을 것이다 (슥. 14:8)
위 구절은 새 예루살렘을 다루고 있다. 또는 천국과 땅에 있는 주님의 왕국, 그리고 새 예루살렘에 있는 두 종류의 상태, “여름과 겨울”이라 불리는 상태를 취급하고 있다. 다윗서에서:
낮은 당신의 것, 밤도 역시 당신의 것입니다; 당신은 빛과 태양을 준비하셨습니다,
당신은 땅의 모든 경계들을 놓으셨습니다,
당신은 여름과 겨울을 만드셨습니다 (시. 74:16-17).
아래 구절도 같은 것을 포함하였다. 예레미야서에서:
낮의 언약, 그리고 밤의 언약이 헛되이 있지 않아야한다는 것,
낮과 밤은 그들의 때에 있어야 하리라는 것 (예. 33:20).

“낮과 밤”도 위에서 살핀 바대로 거듭난 사람에 관한 상태를 의미하되, 그의 이해력 측면에 관해서이다. 이 측면에서의 교대는 낮과 밤의 교대 같이 있다. 이는 방금 말해진 여름과 겨울이 추위와 더위로부더, 그의 의지력 측면에 있는 것을 서술함에서 분명해진다. 이렇게 의지쪽이 서술된 반면, “낮과 밤”은 빛과 어둠으로부터, 그의 이해력 측면에 있는 것을 서술한다. 이런 대비적인 내용은 자체 스스로 증거되기 때문에 말씀의 다른 구절 없이도 확증이 가능하다.

위 모두의 말씀으로부터 분명해지는 것은, 주님의 말씀의 본래의 모습은 내적 의미에 있다는 것이다. 글자 의미에서 주님의 말씀은 반드럽지 않은 것처럼 보일 뿐이다. 본문의 경우만 해도, 씨뿌림과 추수, 추위와 더위, 여름과 겨울, 낮과 밤이 비록 고대인의 교회, 또는 영적인 교회에 속한 것을 포함한다고 누군가가 짐작한다해도 정작 어떤 힌트 하나도 없이 그에게 읽혀지기 때문이다. 실제로 문자로 표현된 (말씀의)말들은 이런 방법, 즉 힌트 없는 방법, 잘 닦아내지 않아 내부가 무엇인지 모르는 상태에서 행동하고 있다. 다시 말해 지극히 평범한 용기(container) 안의 아주 많고 아주 위대한 천국의 신비들을 누군가가 탐구한다면 신비함의 백만 분의 일도 가늠하지 못할 정도로 지극히 중요함에서 정제된 세부 사항들을 담아두고 있다. 천사들이 지상의 지극히 평범한 단어들, 매일 사용하는 일상의 언어들에서 추출된 말씀들을 주님의 눈을 가지고 읽을 때, 그들은 거듭남의 전체 과정을 알 수 있다. 더불어 거듭나아가는 자와 거듭난 자들이 끝도 없는 다양함 안에 있지만 그들의 각각의 상태도 알 수 있다. 그 반면, 인간은 거의 어떤 것도 알 수 없다.

창세기 해설 제 7장

제 7 장

성경 본문

1 그리고 여호와께서 노아에게 말하셨다, 너와 네 모든 집은 방주로 들어가라. 내가 이 세대에서 내 앞에서 너의 의로움을 보았었기 때문이다.
2 너는 깨끗한 모든 짐승은 남자와 그의 아내 일곱을, 깨끗하지 않은 짐승은 남자와 그의 아내 둘을 너에게로 취하여라.
3 하늘들의 새 역시 남성과 여성 일곱을 온 땅의 얼굴에서 씨가 살아있게 보존하라.
4 지금부터 칠 일 후 나는 사십 일 주야로 땅에 비가 오게 할 것이다. 그리고 내 가 만들었던 모든 물질을 지면에서 파괴하리라.
5 노아는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명령하신 모든 것에 따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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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그리고 노아는 육백 세가 된 아들 이었다. 그리고 물들의 범람이 땅에 있었다.
7 그리고 노아는 홍수의 물들이 있기 앞서 방주 안으로 그의 아들들과 그의 아내와 그의 아들들의 아내들과 함께 들어갔다.
8 하느님께서 노아에게 명령하신 대로 깨끗한 짐승, 깨끗하지 않은 짐승, 새와 지면에 서 기는 모든 것들이
9 둘과 둘, 남성과 여성이 노아에게, 방주 안으로 들어 갔다.
10 그리고 일곱 날이 지나자 홍수의 물들이 땅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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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노아의 삶이 육백 년째 된 둘째 달, 십칠 일, 바로 그 날에 큰 깊음의 모든 샘들이 깨어졌고, 하늘의 큰 폭포가 열렸다.
12 그리고 비가 땅에 사십 일 주야로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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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바로 그 날에 노아와 그의 아들들, 셈과 함, 그리고 야벳, 노아의 아내와 그의 아 들들의 아내가 방주로 들어갔다
14 그들, 그리고 각기 종류대로 모든 야생 동물, 그리고 각기 종류대로 모든 짐승, 그 리고 각기 종류대로 땅에서 기는 모든 기는 것들, 각기 종류대로 모든 새들, 모든 나는 것들, 모든 날개 달린 것들.
15 그리고 그들은 노아에게 와서 둘과 둘, 생명들의 호흡이 있는 모든 육체가 방주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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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그리고 안에 들어간 그들, 하느님께서 그에게 명령하신 대로 모든 육체의 남성과 여성이 들어갔다. 그리고 여호와께서 그의 뒤에서 닫으셨다.
17 홍수가 땅에 사십 일 동안 있었다, 그리고 물이 불어났고, 그리고 방주를 덮쳤다, 그리고 방주는 땅으로부터 떠올랐다.
18 그리고 물은 더욱 거세졌고, 땅에 더욱 불어났다. 그리고 방주는 물의 얼굴에서 오 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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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물이 땅에서 극도로 거세졌다, 그리고 온 하늘 아래 있던 모든 높은 산들을 덮었 다.
20 물은 십오 큐빗 위쪽에서 압도하고 있었다, 그리고 산들을 덮었다.
21 모든 육체, 즉 땅에서 기는 것, 새, 짐승, 그리고 야생 동물, 그리고 땅을 기는 모 든 기는 것들, 그리고 모든 사람이 죽었다.
22 코로 생명들의 호흡을 하고 있는 모든 것, 마른 육지에 있었던 모든 것이 죽었다.
23 그리고 그분은 지면에 있었던 모든 물질, 즉 사람으로부터 짐승, 기는 것까지, 하 늘의 새들까지 파괴하셨다. 그래서 그것들은 땅으로부터 파괴되었다. 그래서 노아 만이, 그와 함께 방주에 있었던 것들 만이 남았다.
24 그리고 물은 일백 오십 일 동안 거세어져 있었다.

각 절의 내적 의미

1절. 그리고 여호와께서 노아에게 말하셨다, 너와 네 모든 집은 방주로 들어가라. 내가 이 세대에서 내 앞에서 너의 의로움을 보았었기 때문이다. “여호와께서 노아에게 말하셨다,”란 그렇게 실현되었음을 의미한다. (“여호와”란 단어가 사용되고 있는데 그 이유는 선행이 이제 취급되어지기 때문이다) “너와 네 모든 집은 방주로 들어가라”에서 “집”은 의지에 속한 것들을, “방주로 들어감”은 준비되어짐을 의미한다. “내가 이 세대에서 너의 의로움을 보았었기 때문”이란 그가 선을 가졌고, 그로 말미암아 그는 거듭나아지리라는 것을 의미한다.

707. 1-5절 까지는 앞 장의 구절과 거의 같음이 발견된다. 말씀의 내적 의미에 친숙하지 않은 사람의 경우, 이는 단지 반복에 불과하다 여길 수도 있다. 이와 비슷한 예들이 말씀의 따른 부분에서도 발생하는데, 특히 예언서의 경우이다. 거기에서 같은 것이 다른 말들로 표현되고 있다; 그리고 때로는 다시 그 단어들까지 채택되거나 두 번씩 서술되기도 한다. 그러나 이전에 말한 바 같이, 그 이유는 인간 안에는 서로가 구분되는 두 능력-의지력과 이해력-이 있기 때문이고, 말씀에서 이 두 능력들이 구분되어 취급되기 때문이다. 이것이 반복되는 이유이다. 여기서 뒤이어지는 구절로부터 분명해질 것이다.

여호와께서 노아에게 말하셨다. 이것이 그렇게 되어감을 의미한다는 것은 여호와를 두고 우리가 할 수 있는 말은 있으심(esse, 스스로 계심) 밖에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생각함으로 분명해진다: 그분이 말하시는 것이 때가 이르고 이루어지는 것; 앞 장 13절의 경우, 그 밖의 구절에서도, “여호와께서 말하셨다”라는 표현은 그것이 와지고 이루어졌음 이다.

이름 “여호와”가 여기서 사용되는데, 그 이유는 지금 선행이 취급되어지기 때문이다. 앞 장 9절에서 끝 절까지 “여호와”가 아닌 “하느님”이 말해진다, 그 이유는 거기서 취급된 주제는 “노아”를 준비하심(“노아”라 불리는 교회인을 준비하심) 이기 때문이다. 이는 이해력 측면에 관한 것들, 신앙에 관련되는 것들이다; 이에 반해 여기서 취급되는 주제는 의지력에 관한 것들, 사랑으로부터의 것들이 취급된다. 이해력에 관한 것, 신앙에 관계된 것이 주제로 취급될 때, “하느님”이라는 이름이 사용되나, 의지력에 속한 것, 사랑으로부터의 것들이 취급될 때, “여호와”라는 이름이 사용되어진다. 그 이유가 이해력, 신앙에 속한 것들이 교회를 구성하는 것이 아니라, 의지, 사랑에 속한 것들이 교회를 구성하기 때문이다. 여호와는 사랑과 선행 안에 계시지 신앙 안에는 계시지 않는다. 그러나 신앙이 사랑으로부터, 선행으로부터 있을 경우에는 그 신앙 안에도 계신다. 그러므로 말씀에서, 신앙은 “밤”에, 사랑은 “낮”에 비교되어진다; 창세기 1장의 경우, “큰 빛들”이 말해지고, “더 큰 빛”, 또는 태양, 이것은 사랑을 의미하고, 낮을 규율한다, 그리고 “덜 큰 빛”, 또는 달, 이것은 신앙을 의미하는데, 밤을 규율한다 (창. 1:14, 16); 그리고 예언서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예. 31:35; 33:20; 시. 136:8, 9; 계. 8:12).

너와 네 모든 집은 방주로 들어가라. 이것이 의지 속에 있는 것들을 의미하는 것은 분명하다. 이해력에 속한 것들이 있는 앞 장에서의 경우는 다르게 표현되고 있다. 즉: “너는 너와 네 아들들, 그리고 네 아내, 그리고 너와 더불어 네 아들들의 아내들(과 함께) 방주로 들어가라” (18절). “집”이 의지와 의지로부터 있는 것을 의미함은 말씀의 많은 구절들에서 분명해진다; 예레미야서의 경우:
그들의 집들이 타인의 것들로 변할 것이다, 그들의 들판들과 그들의 아내들도 (예6:12).
여기서 “집들”과 “들판들”과 “아내들”은 의지로부터 있는 것들과 관련이 있다. 다시:
너희는 집들을 짓고 그것들 안에 거주하라;
그리고 동산을 심고 그것들의 열매를 먹어라 (예. 29:5, 28).
위 구절에서 “집들을 짓고 그것 안에서 거주함”은 의지 측면에 관련되고 있다; “동산을 심는 것”은 이해 측면에 관련되고 있다; 그리고 이는 다른 구절에서도 같다. “여호와의 집”은 많은 장소에서 언급되는 말인데, 이는 사랑을 제 1의 원리로 삼는 교회를 의미한다; “유다의 집”은 천적 (왕국의) 교회를, “이스라엘의 집”은 영적 (평면의) 왕국을 의미한다. “집”이 교회를 의미하는 바, 교인의 마음(의지와 이해함에 속한 것들, 또는 사랑과 신앙에 속한 것들이 있는 마음) 역시 “집”에 의해 의미되어 진다.

“방주로 들어가는 것”이 준비되어지는 것이다 함은 앞 장 18절에서 이미 서술했다. 그러나 거기서는 신앙으로부터의 진리들인 이해력에 속한 것들 측면에서의 구원을 위한 준비였다; 그러나 여기서는 의지 측면에 관한 것, 즉 선행으로부터의 선들이다. 인간이 준비되지 않으면, 즉 진리들과 선들을 공급받아 지참하지 않으면, 그는 결코 거듭나아질 수 없고, 시험 받아질 수 없다. 그 이유가 인간과 더불은 악령들은 어떠한 때에 그의 거짓들과 악들을 흥분시킨다; 그런데 만일 진리들과 선들이 현존하지 않고 있다면, 주님께서는 인간을 그가 이미 지닌 진리들과 선들 쪽으로 구부려주시거나, 진리들과 선들을 수단으로 악들과 거짓들을 흐트시는데, 이것들이 가능하지 않는 바, 그는 (악과 거짓에) 굴복하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때에 주님께서 사용하시는 진리들과 선들이 이런 때의 사용을 위해 주님에 의해 보존된 리메인스들 이다.

그 이유가 나는 이 세대에서 의로움을 네게서 보았기 때문이다. 이는 그가 선을 가졌기 때문에 그것으로 말미암아 거듭나아지리라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은 이미 앞 장 9절에서 서술했고 보여주었다. 이 9절에서 “정의로운” 또는 “올바른”이 선행의 선을 의미한다; 그리고 “완전한”은 선행의 진리를 의미한다. “세대들”이라 하여 복수로 말해지는데, 그 이유는 이해력에 속한 것이 취급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세대”라 하여 단수인데, 그 이유는 의지력에 관한 것들이 취급되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의지 부분은 이해 측면의 것을 그 자체에서 납득하지만, 이해 부분은 의지 측면의 것을 그 자체로는 납득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2절. 너는 깨끗한 모든 짐승, 남자와 그의 아내를 일곱씩을, 깨끗하지 않은 짐승, 남자와 그의 아내를 둘씩을 너에게로 취하여라. “깨끗한 모든 짐승”이란 선에 대한 애착을, “일곱”은 선에 대한 애착의 거룩함을, “남자와 그의 아내”란 진리들이 선들과 결합되어짐을, “깨끗하지 않은 짐승”이란 악한 애착을, “둘”이란 악한 애착의 모독스러움을, “남자와 그의 아내”란 거짓들이 악들과 결합되었음을 의미한다.

선에 대한 애착함들이 “모두 각각의 깨끗한 짐승”에 의해 의미되는 것은 짐승에 관해 살핀 내용으로부터 분명해질 것이다. 애착들이 이렇게 의미되는 이유는 인간 자체, 그리고 그의 자기 자신에 주목해보면, 짐승과 별반 차이가 없다. 그는 짐승이 지닌 감각들, 식욕, 욕구들과 매우 유사하다; 그의 선, 아니, 그의 최고의 사랑들도 매우 유사하다; 자기와 같은 종류의 동료를 사랑함, 제 새끼를 사랑함, 제 아내를 사랑함, 등등은 별반 차이가 없다. 그러나 인간이 인간인 것, 짐승보다 더 나은 것은 그가 내면의 생명을 지니는 까닭이다. 이것을 짐승들은 가질 수 없고 결코 가지지 못한다. 이 생명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신앙과 사랑의 생명이다. 그리고 만일 이 생명이 그가 가진 짐승과 공통되는 모든 것 안에 있지 않다면, 그는 짐승 밖에 그 외 어떤 것일 수가 없다. 한 예로 동료들을 사랑함을 취해보자: 만일 그가 자신을 위해 동료들을 사랑한다면, 그의 사랑 안에는 천국으로부터, 또는 신성으로부터의 것은 하나도 없을 것인 바, 그는 이로부터서는 사람이라 불리울 수 없다. 그 이유는 그것이 짐승과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의 의지 안에 주님으로부터의 사랑의 생명과 그의 이해력 안에 주님으로부터의 신앙의 생명이 없다면, 그는 사람이 아닐 것이다. 그가 주님으로부터 가진 생명 덕택에 그는 사 후 살게 된다; 주님이 그를 그분 자신에게 인접되게 하시기 때문이다. 그런고로 그는 천사들과 더불어 그의 천국 안에 있을 수 있다, 그리고 영원히 산다. 그리고 비록 인간이 야생 짐승 같이 살고, 자신 밖에, 자신을 중시하는 것 밖에 사랑하는 것이 없다 할지라도, 여전히 주님의 자비는 위대해 있으시어-그 이유가 이 자비는 신성이고 무한이기 때문-그분은 그를 떠나지 않는다. 그러나 계속적으로 그 사람 안으로 천사들을 통하여 그분 자신의 생명을 불어 넣으신다; 그리고 그가 그것을 다른 방법 없이 받으리라 상상조차 하시는 바, 이것이 그 사람으로 하여금 어떤 것을 놓고 도덕적, 시민적, 세상적, 또는 물질적인 것에 관련하여 선인지, 악인지를 생각하고, 반성해보고, 이해해 볼 수 있게 한다. 그러므로 그것이 진리인지, 거짓인지도 가늠할 수 있게 한다.

태고인이 알았고 겸허하게 인정했던 것은, 자기들은 짐승이나 들짐승 밖에 더 아니다는 것, 단지 자기들이 주님으로부터 가진 것 덕택에 사람 노릇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자신들에 속하는 것은 무엇이든 짐승 등등에 비교했을 뿐 아니라 짐승 등등의 이름으로 부르기 조차 했다; 그래서 의지력으로부터의 것을 짐승에 비교했고, 그리고 짐승들로 불렀다; 그리고 이해력으로부터의 것은 새들에 비교했고 그렇게 불렀다. 그러나 그들은 선한 애착들과 악한 애착들을 구별했다. 선한 애착들을 그들은 어린 양들, 양, 염소 새끼들, 암염소들, 숫염소들, 숫양들, 어린 암소들, 황소들에 비교했는데, 그 이유는 이 짐승들이 선하고, 온화하고, 그들의 식품이 되어주고, 그것의 가죽과 털은 의복을 만들 수 있어 생활에 요긴하기 때문이다. 이 짐승들은 제1의 깨끗한 짐승들이다. 그러나 악하고 맹렬하여, 생활에 요긴하지 못한 짐승은 불결한 짐승들이다.

거룩한 것들이 “7”에 의해 의미된다는 것은 일곱 째 날, 또는 안식일에 관하여 말해진 것으로부터 분명해진다. 즉 주님은 일곱 째 날이시다는 것; 그리고 그분으로부터 모두 각각의 천적 (왕국의) 교회, 또는 천적 (왕국의) 인간이 일곱 째 날이다는 것, 그리고 참으로 천적 (왕국) 자체이다는 것, 이는 최고로 거룩하다는 것, 그 이유는 이것이 주님 만으로부터 있기 때문이다는 것 등등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말씀에서, “일곱”은 거룩한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사실상, 여기서와 같이, 내적 의미에서는 “7”이 숫자라는 생각을 전혀 할 수 없게 까지 하고 있다. 실지로 내적 의미에만 머무는 이들, 마치 천사나 천사같은 영은 숫자가 무엇인지 조차 모른다. 그러므로 7이 무엇인지 모른다. 그러므로 깨끗한 모든 짐승들의 일곱 쌍들이 취해졌다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또는 마치 일곱이 둘 보다 더 많은 듯이 악한 짐승 보다 선한 짐승이 더 많이 취해졌다는 것도 뜻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 교인의 의지 부분에 선들이 공급되었다는 것, 그 선들은 거룩하다는 것, 이것 때문에 그는 거듭나아질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앞서 말해졌기도 하다.
“일곱”이 거룩인 것, 또는 거룩한 것들을 의미하는 것은 표현 교회(the representative church)의 의식(ritual)들로부터 분명해진다. 이 의식에서 숫자 일곱은 자주 발생한다. 예를 들면, 그들은 피와 기름을 일곱 번 뿌렸는데, 레위기서를 보자:
그리고 모세는 기름붓는 기름을 가져왔다, 그리고 성막에 발랐다, 그리고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에도 발랐다, 그리하여 그것들을 신성하게 했다. 그리고 그는 제단
위에 그것을 일곱 번 뿌렸다, 그리고 제단과 그것의 모든 기구들, 그리고 물두멍과
그것의 받침에 발라서 그것들이 신성해지게 했다 (레. 8:10-11.
위 구절에서 “일곱 번”은 만일 그 숫자가 거룩인 것을 표현하지 않았다면 통째로 아무 의미 없이 있었을 것이다. 또다른 구절에서: 아론이 거룩한 장소 안으로 왔을 때 말해졌다:
그리고 그는 수소의 피를 가져 와라, 그리고
그것을 동쪽 자비석 위에 그의 손가락으로 뿌려라. 그리고 자비석 앞에서
그는 자기 손가락으로 피를 일곱 번 뿌려라 (레. 16:14).
그리고 제단에서도:
그리고 그는 자기 손가락을 가지고 일곱 번 그것 위에 피를 뿌려라, 그리고 그것을 깨끗해 지고 신성해지게 하라 (레. 16:19).
위 구절의 세부사항들, 각각 그리고 모두는 주님 자신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사랑의 거룩함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피”, “자비석,” 그리고 피가 뿌려진 방향인 “동쪽”, 그러므로 “일곱” 또한 주님 자신을 의미한다.
제물의 경우도 마찬가지인데, 레위기서를 보자:
만일 어떤 혼이 잘못을 통하여 죄짓는다면, 그리고 만일 기름부은 성직자가
죄를 지어 백성들에게 죄있게 하였다면, 그는 여호와 앞에서 거세한 수소를
죽일 것이다, 그리고 성직자는 피에 자기 손가락을 담글 것이다, 그리고 피를
성소의 베일을 향하여 여호와 앞에서 일곱 번 뿌릴 것이다 (레. 4:2-3, 6).
위 구절에서도 “일곱”은 거룩인 것을 의미한다; 그 이유는 취급된 주제가 죄를 씻음이고, 죄를 씻음은 주님 만으로부터 있고, 그러므로 취급된 주제가 주님이기 때문이다. 비슷한 의식이 나환자에 관련하여 제정된 구절에 있다, 이에 관해 레위기서를 보자:
새의 피로부터, 삼목, 주홍색(실), 우슬초와 함께, 성직자는 나병 환자임으로부터
깨끗해지게 되는 사람에게 일곱 번 뿌려, 그를 깨끗하게 만들어라. 같은 방식에서
그에게 그의 왼쪽 손바닥에 있는 기름을 여호와 앞에서 일곱 번 뿌려진다, 그리고
그렇게 나병환자가 있던 집에도 하는 바, 그는 삼목, 우슬초, 주홍색(실)을 가져오고,
그리고 새의 피를 가지고 일곱 번 뿌린다 (레. 14:6-7, 27, 51).
위 구절에서도 “삼목”, “주홍색(실)”, “기름”, “새의 피”, 그리고 “일곱” 등등이 거룩한 것에 대한 표현이다는 것을 제외하면, 그것들의 의미는 더 이상 없다고 생각될지 모른다. 그리하여 거룩하다는 것을 빼놓으면 남아있는 모든 글자는 죽은 듯, 또는 모독적인 우상을 섬기는 듯하다. 그러나 위 구절이 신성한 예배를 담은 거룩한 것임을 의미한다면, 위 글자는 외면적인 것들에 의해서 내면적인 것들을 표현만 해줄 뿐이다. 위 글자를 그대로 사용한 유대인들은 자기들의 이런 의식이 무엇을 의미했는지 몰랐다; 물론 오늘날의 경우에도 “삼목”, “우슬초”, “주홍색(실)”, “새”에 의해 의미된 것을 모르기는 별반 차이가 없다. 그러나 그들이 자기들이 몰랐던 거룩한 것들 안에 포함된 것을 알고 싶어하고, 그렇게 하여 주님을, 또는 오실 메시아를 예배했다면, 그리하여 자기들의 나병을 치료했다면, 즉 그들이 거룩한 것들을 모독함에서 벗어났다면, 그들은 구원되었을 것이다. 그 이유가 그렇게 생각하고 믿은 자들이 저쪽 삶에서 왔을 때 그들이 바란다면 위 구절이 표현한 모두, 그리고 각각의 의미들을 즉시 가르침을 받아 온전히 이해함을 가질 것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붉은 어린 암소에 관해 명령되어졌다:
성직자는 그녀의 피를 그의 손가락으로 가져다가 그녀의 피를 만남의 천막의
얼굴을 향하여 일곱 번 뿌릴 것이다 (민. 19:4).
“일곱째 날” 또는 “안식일”이 주님을, 그리고 주님으로부터의 천적 (왕국의) 인간, 그리고 천적 왕국 자체를 의미한 바, 유대 교회에서 일곱 째 날은 그들의 모든 종교적 준수 사항 중에서 가장 거룩한 준수 사항 이었다; 이로부터 칠 년 마다 “안식일 중에서도 안식일”이 왔다 (레.25:4), 그리고 “희년”이 년 수들의 일곱 안식일들, 또는 칠 년씩 일곱 번이 지난 후에 선포되어졌다 (25:8-9). 최고 의미에서 “7”은 주님, 이로부터 사랑의 거룩함을 의미함은 금빛의 촛대와 그것의 일곱 등불로부터 분명해진다 (이에 관하여는 출. 25:31-3, 37; 37:17-19, 23; 민. 8:2, 3; 슥. 4:2 참조) 그리고 이에 관해 요한에 의해 씌어진 바:
일곱 금빛의 등잔들; 그리고 일곱 등잔들 한 가운데 사람의 아들 같은 분 (계. 1:12-13).
위 구절에서 “일곱 등불들을 가진 등잔”은 주님을 의미한다는 것, 그리고 “등불들”은 사랑의 거룩한 것들, 천적 수준의 것들이다; 그러므로 등불들은 “일곱”이다.
그리고 다시:
왕좌로부터 불로부터의 일곱 횃불들이 나와서, 왕좌 앞에서 타는데,
이것은 하느님의 일곱 영들이다 (계. 4:5).
위 구절에서 주님의 왕좌로부터 나온 “일곱 횃불들”은 일곱 빛들, 또는 등불들이다. 예언서에서 숫자 “7”이 발생하는 경우, 같은 의미를 지닌다. 이사야서에서:
달의 빛이 태양의 빛 같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태양의 빛은 일곱 날의 빛 만큼으로
일곱 배가 되어 있을 것이다. 이 날에 여호와께서 그분의 백성들의 명령 위반(breach)을
싸매주실 것이다 (이. 30:26).
위 구절에서 “일곱 배가 된 빛, 마치 일곱 날들의 빛”은 일곱 배를 의미하지 않고, 그러나 사랑이 거룩하다가 태양에 의해 의미되어졌다. 창세기 4장 15절에 보여준 숫자 “7”에 관한 것도 참조하라. 위 모든 구절로부터 다시 확인되는 바는 숫자 일곱이 단지 7을 의미하려고 사용된 것이 아니다는 것이다 (6:3도 참조).

여기서 취급된 주제가 인간의 의지 측면에 관한 것들이다는 것, 또는 의지 부분이라 단언되는 인간에 있는 선 또는 거룩한 것들임이 분명해진다. 그 이유가 그분께서 “깨끗한 짐승을 일곱씩을 가져와라”하고 말해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새”에 관하여도 다음 절에서 똑같이 말해진다. 그러나 6장 19-20절의 경우, “일곱”이라 말해지지 않고 “쌍, 또는 둘씩”이라 말해진다; 그 이유는 이해력에 관한 것들이 취급되기 때문이다; 이해력에 속한 것들은 그 자체로는 거룩하지 않으나, 의지력으로부터 있는 사랑으로부터 거룩하다.

“남자(vir)와 아내”는 진리들이 선들과 결합되어짐을 의미하는 것은 “남자”가 진리, 이해력에 속한 것, 그리고 “아내”는 의지력에 속한 것, 선이다는 의미로부터, 또한 남자가 생각이나 애착, 행동의 어느 것도 의미하지 않는다는 사실, 남자 단독으로는 그것 안에 의지력과 이해력의 어떤 종류의 결혼도 의미해지지 않는다는 것으로부터도 분명해진다. 인간의 각종 기관 형체, 그것이 합성되어 있든 하나만 가지고 관찰해 보든, 거기에는 최고로 단순한 조직에 이르기까지 비활성(passive, 수동적)과 활성(active, 능동적)이 있고, 이것들이 결혼 같은 식의 쌍, 즉 남자와 그의 아내라는 쌍을 이룬 관계에 있지 않다면, 거기에 존재 조차 하지 않을 것이고, 어떤 것을 생산하는 것은 더 더욱 불가능하다. 이는 보편적 본성이다. 이것들의 끊임 없는 결혼들이 천국의 결혼에 그것의 근원을 가지고 도출되어진다. 주님의 왕국에 관한 생각, 즉 이 왕국은 결혼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이 생물이든 무생물이든 보편적 본성이 되어 모든 것 안에서 강하게 인상지워져 있다.

악한 애착들이 “깨끗하지 않은 짐승”에 의해 의미된다는 것은 깨끗한 짐승들에 관한 내용에서 미루어 짐작될 수 있을 것이다. 그것들이 “깨끗하다”라고 불린 이유는 그것들이 온순하고, 선하며, 쓸모있기 때문이다. 불결한 것-이것도 종들과 속들이 있는데-반대적인 것, 맹렬하고, 악하며, 쓸모가 없다. 말씀 안에서 이것들은 이리들, 곰들, 여우들, 돼지들, 이외 여러 가지로 묘사되고 있다; 이것들에 의해 다양한 그리워함들과 악한 기질들이 의미되고 있다. 그런데 불결한 짐승들 (즉 악한 애착들)도 방주 안으로 데리고 가라고 말하여지고 있다. 진실인 즉 이렇다: 여기서 이 교회의 교인의 품성 측면의 것들이 기술되고 있다. 즉 방주, 그리고 방주 안에 있는 것들, 또는 방주 안으로 데려간 것들을 수단으로 교인들의 품성이 기술된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 이 교회인이 거듭나기 전 이 교회인 안에 있던 것들이다는 말이다. 이들은 거듭나기 전 주님으로부터 선들과 진리들을 공급 받았다; 그 이유가 진리들과 선들 없이는 누구도 거듭나아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 안에있는 악들이 말하여진다. 이것이 불결한 짐승들에 의해 의미되어 있다. 인간 안에는 거듭나는 동안 반드시 흐트러져야만 하는 악들이 있다. 다시 말해 인간 안의 악들은 거듭나는 동안 선들에 의해 느슨해지고 부드러워져야만 한다는 말이다. 그 이유가 인간에 있는 실제의 악과 유전적인 악은 완전히 파괴될 정도로까지는 사라지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은 여전히 심어진 채로 남아있다; 그리고 단지 상해를 주지 않을 정도로 만큼 주님으로부터의 선들을 수단으로 느슨해지고 부드러워질 뿐이다. 그리하여 나타나 보이지 않고 있다. 이는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은 신비이다. 또한 느슨해지고 부드러워지는 악들은 실제의 악들이고 유전적 악들은 아니다; 이것 역시 알려져 있지 않은 것들이다.

“쌍들”이 상대적으로 모독인 것을 의미함은 숫자 2의 의미로부터 알게 된다. “쌍,” 또는 “둘”은 결혼, 특히 천국 결혼을 서술할 경우, 거룩한 숫자일 뿐아니라, 이것은 6과 같은 것을 의미한다. 즉 노동의 육 일은 쉼의 일곱째 날, 또는 거룩한 날과 관계되듯, 2는 3과 관계된다. 그러므로 말씀에서 셋째 날은 일곱 째 날을 위해 사용되기도한다, 그리고 이 두 숫자의 의미는 많이 비슷하다. 그 이유는 주님의 부활이 셋째 날에 있었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주님이 세상에 오심, 그리고 영광에 계심, 그리고 주님의 오심 모두와 각각이 “일곱째”와 셋째 날에 의해 동등하게 묘사되어진다. 이런 이유로 셋째 날에 앞서 있는 둘째 날은 상대적으로 모독적이다. 그러므로 호세아서에서:
오라 그리고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그 이유가 그분이 상처나게 하셨다,
그리고 그분이 우리를 치료하실 것이기 때문; 그분이 치셨으나 우리를 싸매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이틀 후에 그분은 우리는 살아나게 하실 것이다; 셋째 날에 그분은
우리를 일으키실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분 앞에서 살 것이다 (호. 6:1-2).
그리고 스가랴서에서:
모든 토지에서 있을 것이다, 여호와께서 말하신다, 그 토지 안에 있는 두 부분들(2/3)이
절멸할 것이고 죽을 것이다, 그리고 삼분의 일이 그 토지 안에 남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불을 통하여 삼분의 일 부분을 데려 올 것이다,
그리고 그들을 은을 정제하듯 정제할 것이다 (슥. 13:8-9).
그리고 은은 일곱 번 순수하게 했을 때 가장 순수했다고 시편 12:6에서 나타난다; 위구절로부터도 “일곱”은 숫자 7이 아니라 거룩한 것을 의미하듯, “쌍들”이 쌍들을 의미하지 않고 상대적으로 모독적인 것을 나타낸다; 그러므로 그 뜻은 깨끗한 짐승들, 또는 선한 애착들에 비교해 불결한 짐승, 또는 악한 애착들이 7대 2의 비율로 적었다는 뜻이 아니다. 그 이유가 (사실상) 인간 안에 있는 악들은 선들 보다 훨씬 더 숫자가 많기 때문이다

“남자와 아내”에 의해 악들과 결합된 거짓들을 의미함은 깨끗한 짐승을 설명한 대목으로부터 알고 있을 것이므로 설명을 생략한다. 그 이유가 앞 구절 부분에서는 선들과 결합한 진리들이고, 여기서는 악들과 결합한 거짓들을 의미한다. 주제에 따라 서술도 일치해야 하기 때문이다.

3절. 하늘들의 새 역시 남성과 여성 일곱을 온 땅의 얼굴에서 씨가 살아있게 보존하라. “하늘들의 새”란 이해력에 속하는 것들을 의미한다. “일곱”은 이해력에 속한 것들의 거룩함을, “남성과 여성”이란 진리들과 선들을, “온 땅의 얼굴에서 씨가 살아있게 보존하라”란 신앙 속의 진리들을 의미한다.

“하늘들의 새(fowl)”가 이해력에 속한 것들을 의미함은 이미 살핀 바 있으므로 설명을 생략한다.

“일곱”은 이미 설명한 것과 마찬가지로 거룩한 것들을 의미하는데, 이는 거룩한 진리들이고, 거룩한 이유는 그것들이 선들로부터 온다는 사실 때문이다. 어떤 진리도 그것이 선들로부터 오지 않으면 거룩하지 않다. 사람들이 말씀으로부터 많은 진리들을 발음할지 모른다. 그러므로 그의 기억으로부터 말할런지 모른다. 그러나 이것이 사랑 또는 선행으로부터 생산된 진리들이 아니면 어떤 거룩함도 그 진리들에 두고 서술되어질 수 없다. 그러나 만일 그가 사랑과 선행을 가지고 있다면, 그때 그는 위 설명을 인정하고 믿는다. 그리고 이것은 (기억으로부터가 아닌) 심정으로부터 온다. 신앙의 경우도 같다. 많은 이들이 신앙 만이 구원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신앙이 사랑이나 선행으로부터 있지 않으면, 신앙이 아닌 것이다. 주님은 사랑과 선행 안에 계신다. 그러므로 신앙이 선행으로부터 분리되어 있다면 그 안에 주님은 계시지 않는다. 분리된 신앙은 인간 자신이고, 그 안에는 불결함 밖에 더 없다. 그 이유가 신앙이 사랑으로부터 분리될 때, 그의 심정에서 그를 움직이게 하는 원인은 그의 자만, 그에게 유리한 것 밖에 더 없다. 그는 이런 것들로부터 말한다. 이런 사항은 모든 이들이 자신의 체험으로부터 익히 아는 사실이다. 어떤 이에게 자기는 당신을 사랑한다, 다른 누구 보다도 더 당신을 사랑한다 라고 말하는데, 그것이 입이 내뱉는 말일 뿐, 심정은 딴판일 경우도 있다. 이러면 이 자는 상대방을 조롱한 것이다. 신앙도 별반 다르지 않다. 이는 (저 세계에서의) 많은 경험으로 나로하여금 알게 해주셨다. 육체 속의 삶 동안 달변과 위장된 경건심까지 가세해 청중들의 감탄을 한 몸에 받을 정도로 주님과 신앙을 설파했으나 정작 자기 심정으로부터는 그렇게 하지 않은 자들이 저쪽 삶에서는 주님을 향한 증오함 안에 있고, 신실한 자들을 박해하는 이들 사이에 끼여 있었다.

“남성과 여성”에 의해 진리들과 선들이 의미되어지는 것은 앞서 살핀 것, 즉 “남자”와 “남성”은 진리를, “아내”와 “여성”은 선을 의미한다. 그러나 “남성과 여성”은 이해력으로부터의 것들을, “남자와 아내”는 의지력으로부터의 것들을 서술한다. 그 이유가 결혼을 표현함에서 남성과 여성의 결혼이라 말하기 보다는 남자와 아내가 더 친근한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진리는 제 스스로 선과 더불은 결혼 관계에 들어갈 수 없으나, 선은 그렇게 할 수 있다; 그리하여 선으로부터 생산되지 않은 진리, 선과 짝을 이루지 않은 진리는 없다. 만일 당신이 진리로부터 선을 철수시킨다면, 단어들 밖에 남아있는 것이 없을 것이다.

온 땅의 얼굴 위에서 씨가 살아있게 보존하라. 이것이 신앙 속의 진리들을 의미한다는 것은 이 교회에 의해 씨가 살아있게 보존됨으로부터 분명해진다. “씨”에 의해 신앙이 뜻해진다. 태고 교회의 후손들의 나머지들은 더러운 그러워함들과 끔찍한 설득력들을 수단으로 그들 안에 있는 천적(왕국의) 씨들과 영적 (왕국의) 씨들을 파괴했다. 그러나 천적 (왕국의) 씨들은 멸해질 것이나 “노아”라 불린 이들은 영적 (왕국의) 씨들을 수단으로 거듭나졌다. 이것들이 의미되어지는 것들의 (요약이다). 이것들이 주님의 생명을 받아 “살아있게 보존되라”고 말해지는 이들이다. 그 이유가 생명은 주님으로부터 있는 것들에만 있기 때문이다. 이는 영원으로부터 있지 않은 것들 안에 생명이 없다는 사실로부터, 또는 영원한 생명을 주시하지 않는 것들 안에는 생명이 없다는 사실로부터 모든 이에게 분명해진다. 영원하지 않은 생명, 짧은 시간에서 멸해지는 생명은 생명이 아니다. 있음(being, esse)은 있음이 중단되는 것을 두고 있음이라 단정될 수 없다. 오로지 있음이 중단되지 않을 경우에만 해당되는 말이다. 그런고로 살아있음과 있음(living and being)은 주님, 또는 여호와로부터 있는 것들에 만 있다; 모든 있음과 살아 있음이 영원하기 위해서는 그분으로부터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영원한 생명을 수단으로 영원한 행복이 뜻해진다. 이에 관하여는 290항을 다시 찾아 보기 바란다.

4절. 지금부터 칠 일 이면 나는 사십 일 주야로 땅에 비가 오게 할 것이다. 그리고 내가 만들었던 모든 물질을 지면에서 파괴하리라. “지금부터 칠 일”이란 시험의 시작을, “비가 내림”이란 시험을, “사십 일 주야”란 시험의 지속 기간을, “나는 내가 만든 모든 물질을 지면에서 파괴하리라”란 사람의 자기 자신(the Own of man)은 그가 거듭나질 때 마치 파괴되어 버린듯 함을 의미한다. 또한 자신들을 파괴했던 태고 교회 속의 것들의 소멸도 의미한다.

“지금부터 칠 일”은 여기서의 경우 시험의 시작을 의미한다는 것은 이 절에 포함된 모든 내적 의미로부터 분명해진다. 이 구절에서는 “노아”라 불리는 사람의 시험이 취급되어진다. 일반적으로 이 장은 “노아”라는 사람의 시험, 그리고 태고 교회인들과 그들에 관련되어 서술되어 왔었던 내용들이 멸절되어짐을 취급한다. 그러므로 “지금부터 칠일”은 시험의 시작 일 뿐아니라, 황폐되어짐의 끝장이기도 하다. 이런 것들이 “지금부터 칠 일”에 의해 의미된 이유는 “7”이 거룩한 숫자이기 때문이다 (7:2; 4:15; 84-87항 참조). “칠 일”은 주님께서 세상에 오심, 그리고 그분의 오심은 영광되심에서, 그리고 세부 측면에서 주님의 모두 각각의 오심을 의미한다. 모두와 각 개인에게 따라붙는 주님의 오심은 거듭나아지려는 이들에게는 거듭남의 시작, 황폐되어져야만 하는 이들에게는 끝장의 시작에 해당된다. 그런고로 이 교회인에게 주님의 오심은 시험의 시작이었다; 그 이유가 인간이 유혹될 때, 그는 새로운 사람이 되기 시작하고 거듭나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동시에 그들이 절멸될 수 밖에 없었던 태고 교회인의 끝이었다. 주님이 세상에 오셨을 때 역시 이와 같았다. 그 당시 교회는 황폐함의 마지막 상태에 있었다, 그리고 그때 새로운 (교회가) 만들어졌다.
이와 같은 것들이 “지금부터 칠 일 후면”에 의해 의미되어 있다는 것이 다니엘 서에 분명해 있다:
칠십 주들이 네 백성 위에, 네 거룩한 성 위에, 위법을 끝장을 내라고, 죄들을
가두어버리라고, 불법을 깨끗하게 하라고, 그리고 대대로 의로운 자를 가져오도록,
환상과 예언을 가두라고, 그리고 지극히 거룩한 자에 기름을 부으라고 포고되었다.
그러므로 알고 지각할 것은, 예루살렘을 회복하고 건설하기 위해 이 말이
나감으로부터 제 1 인 자 메시아 까지 칠 주일 것이다 (단. 9:24-25).
위 구절에서 “칠십 주들” 그리고 “칠 주들”은 “칠 일”과 같이 주님의 오심을 의미한다. 그러나 여기서의 경우 명백한 예언인 바, 숫자를 중복하는 방법, 즉 7개 한 벌(septenary)을 수단으로 시간들이 신성하게, 확실하게 더 한층 강화되도록 의도 되었다. 그런고로 시간들에 적용된 “일곱”은 주님의 오심 뿐 아니라 그 당시 새로운 교회의 시작 역시 “지극히 거룩한 자”, 그리고 “회복되고 건설되는” 예루살렘에 의해 의미되었다. 동시에 마지막 황폐되어짐이 “칠십 주들이 거룩함의 성 위에 죄들을 가두고, 위법에 끝장을 보라고 포고되었다”라는 말들에 의해 의미되었다.
말씀의 다른 구절, 에스겔서에서 에스겔이 자신에 관해 말하는데:
나는 델아빕에 포로된 그들에게 와서 그발 강 가에 앉았다, 그리고 나는 거기서
칠 일 동안 그들 사이에서 깜짝 놀란 상태로 있었다;
그리고 칠 일의 끝에서 여호와의 말씀이 나에게 왔다 (겔. 3:15-16).
위 구절 역시 “칠 일”은 방문의 시작을 표시한다; 그 이유가 칠 일 후, 그가 포로된 자들 사이에 앉아 있는 동안,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왔기 때문이다. 다시:
그들은 곡을 매장할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토지를 일곱 달 동안 깨끗해지게
할런지 모른다; 일곱 달의 끝에서 그들은 살필 것이다 (겔. 39:12, 14).
위 구절도 마찬가지로 “일곱”은 황폐시킴의 마지막 한계를, 그리고 방문의 처음을 표시한다. 다니엘서에서:
느부갓네살의 심정이 인간의 것으로부터 바뀔 것이다, 그리고 짐승의 심정이
그에게 주어질 것이다, 그리고 일곱 번 그를 지나갈 것이다 (단. 4:16, 25, 32).
위 구절도 마찬가지 방식에서 황폐됨의 끝, 그리고 새로운 사람의 시작을 표시하고 있다.
바빌론에 “칠십 년”을 포로화 됨도 같은 것을 표현하였다. 숫자가 “칠십”이든, 또는 “칠”이든 같은 의미를 포함한다. 또한 칠 일 또는 칠 년, 또는 칠십 년을 만드는 일곱 세대들도 마찬가지의 의미를 포함한다. 황폐됨이 포로됨의 칠십 년에 의해 표현되어졌다; 자유해짐과 성전의 재 건축에 의해 새로운 교회의 시작이 표현되어졌다. 이와 비슷한 의미가 야곱이 라반을 섬김에 의해 표현되었다:
나는 라헬을 위해 칠 년을 봉사할 것입니다; 그리고 야곱은 라헬을 위해 칠 년을
섬겼다; 그리고 라반이 말했다, 이 주(week)를 채우라, 그리고 나는 네게 그녀 역시 줄 것 이다. 또 다른 칠 년을 너는 나에게 봉사해야 한다; 그리고 야곱은 그렇게 했다,
그리고 한 주를 채웠다 (창. 29:18, 20, 27-28).
위 구절에서 봉사함의 “칠 년”도 같은 의미이다. 칠 년이 지난 후, 결혼과 자유함이 왔다, 칠 년의 이 시기가 다니엘서에서 “주(week)”라 불리웠다.
같은 의미가 여리고 성을 “일곱 번” 돌라고 하는 명령에서도 표현되었고, 그리하여 성벽이 무너졌다;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일곱 째 날, 그들은 새벽에 일어나서 같은 방식에 따라 일곱 번을 돌았다,
그리고 일곱 번째 돌았을 때 일곱 성직자들이 일곱 나팔을 불었다.
그리고 성벽이 무너졌다 (여. 6:10-20).
위 구절 역시 우리가 위에서 살핀 의미를 가지지 않았다면, 성을 일곱 번 돌라는 명령, 일곱 성직자들과, 일곱 나팔이 주어지는 일은 결코 없었을 것이다. 이 외에 여러 구절들에서 더 살필 수도 있는 바, (욥. 2:13; 계. 15:1, 6-7; 21:9) “칠 일 후면”은 새로운 교회의 시작, 그리고 옛 교회의 끝을 의미한다. 본문 역시 “노아”라 부른 교인, 그리고 그의 시험, 그리고 자신을 파괴한 태고 교회의 마지막 후손을 취급하는 바, “지금부터 칠 일 후면”은 노아의 시험의 시작과 태고 교회의 끝 또는 마지막 황폐됨과 시효가 만료됨 외의 다른 의미는 없다.

“비가 옴”에 의해 시험이 의미된다는 것은 7장의 서문에서 말했기도 하다. 즉 “홍수” 또는 “물들의 범람”, 이 구절은 “비”를 수단으로 묘사되는데, 시험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황폐함 역시 의미한다. 그리고 이어지는 페이지(page)들에 등장하는 홍수에 관해 말해지는 것에서도 같은 의미가 나타난다.

“사십 일 낮과 밤”에 의해 시험의 기간이 의미됨은 주님의 말씀으로부터 명백하다. “사십”이 시험의 지속 기간(duration)을 의미함은 주님 자신 사십 일 동안 자신을 유혹받게 내버려두신 사실로부터 온다 (마. 4:1,2; 눅. 4:2; 막.1:13). 그 외 주님께서 오시기 전, 유대 교회와 다른 표현 교회 안에 제정되어 있는 것들 모두와 각각이 그분에 관한 예징(type)들이 듯, 그렇게 사십 일 낮과 밤도 일반적으로 모든 시험을 표현했고 의미했다. 또한 특별하게는 대상이 무엇이든 시험의 지속 기간을 의미했다. 그리고 인간은 시험 안에 있을 때 그의 자기 자신으로부터 있는 모든 것들, 그리고 육체로부터 있는 모든 것들에 관하여 황폐해짐 안에 있기 때문에 이런 이유에서 “사십일 낮과 밤”은 황폐해짐의 지속 기간도 의미한다 (그 이유가 그가 새로운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기 전, 또는 영적, 천적 인간으로 만들어지기 전, 그의 자기 자신으로부터의 모든 것들, 육체로부터의 모든 것들은 반드시 죽어야 하기 때문); 또한 여기서의 주제도 “노아”라는 새로운 교회의 시험과 홍수 이전 사람들의 황폐해짐 둘 다인 것과 맥락을 같이 한다.
숫자 “사십”이 규모가 크든, 작든 시험과 황폐해짐의 지속 기간을 의미한다는 것이 에스겔서에서 분명해진다:
너는 네 오른 쪽으로 누워있어라, 그리고 유다 가문의 불법을 사십 일 동안 짊어져라,
(오른 쪽으로 누운) 하루를 일년으로 쳐서 나는 네게 정해준 것이다 (겔. 4:6).
위 구절에서 “사십”이 유대 교회의 황폐해짐의 계속 기간을 표시하고, 주님의 시험 받으심도 표현한다. 그 이유가 그가 “유다 가문의 불법을 짊어져야 한다”고 말해지기 때문이다. 다시:
나는 이집트의 토지를 황폐해지게 만들 것이다, 황무함의 황폐이다, 인간의 어떤 발도
그것을 통과하지 못할 것이다, 짐승의 어떤 발도 그것을 통과하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사십 년 동안 거주되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나는 이집트의 토지를 황무한
토지들 한 가운데 있는 황무함으로 만들 것이다, 그리고 성들의 한 가운데에서
그녀의 성들은 황폐된 채로 놓여 쓸쓸한 사십 년을 있을 것이다 (겔. 29:10-12).
위 구절 역시 “사십”은 황폐해짐과 황무해짐의 지속 기간을 표시한다; 그리고 내적 의미에서 사십 년이 뜻해지지 않고, 일반적으로 신앙의 황무해짐 만을, 그것이 시간 측면에서 규모가 크든 작든 그것 만을 의미한다. 계시록에서:
성전 밖인 뜰은 내쫓고 그것은 재지 마라; 그 이유가 그것은 이방인들에게 주어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은 거룩한 성을 마흔 두 달 동안 짓밟을 것이다 (계11:2).
그리고 다시:
그리고 거기서 그에게 큰 것들과 신성 모독을 말하는 입이 주어졌다;
그리고 거기서 그에게 마흔 두 달 동안 일할 권한이 주어졌다 (계. 13:5).
(위 구절은) 황폐해짐의 존속 기간을 표시하는데, 아마 누구도 시간의 마흔 두 달이 뜻해지지 않는다는 정도는 알고 있으리라 본다. 그러나 (숫자 “사십 이”가 “사십”과 같은 의미를 가지는 이유는) 이 인용 구절의 마흔 두 달은 “칠 일”이 황폐해짐, 그리고 새로운 시작을 의미한다는 것, 그리고 “여섯”은 노동의 육 일, 또는 전투함의 육 일로부터 노동을 의미함으로부터, 7에 6을 곱한 숫자가 42인 바, 이는 거룩함을 안에 지닌 거듭나지는 인간의 황폐해짐의 지속 기간과 시험의 지속 기간, 또는 노동과 전투를 의미한다. 사실 위 인용 구절에서 보여주듯, 대략적인(rounding) 숫자 40은 대략적이 아닌(not-so-round), 즉 정확한(exact) 숫자인 42를 위해 채용되어져 있다.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의 토지로 데려가지기 앞서, 사십 년을 광야에서 인도 되었는데, 이것 역시 시험의 지속 기간, 또한 황폐해짐의 지속 기간을 표현하고 의미했다. 시험의 지속 기간은 사십 년 후에 그들이 거룩한 토지 안으로 진입함에 의해 표현되고 의미되었고, 황폐해짐의 지속 기간은 이집트를 빠져나간 이십 세 이상의 모두가 여호수아와 갈렙 만을 빼고 광야에서 죽었음에 의해 표현되고 의미되었다 (민. 14:33-35; 32:8-14). 이 백성들이 자주 불평했던 것들은 시험들을, 이 백성위에 닥친 재앙들과 파멸됨은 황폐해짐들을 의미했다. 이런 사항들이 시험과 황폐해짐을 의미한다는 것은 차 후 각 해당하는 구절을 만날 때 설명한다. 이런 것들에 관해 모세의 책에 쓰인 바:
너희가 기억해야 하는 것은, 여호와 너희 하느님께서 너희를 사십 년 동안 광야에서
인도하신 모든 방법들, 너희를 괴롭히시고, 너희를 시험하시고, 너희 심정에 있는
것들을 알게 하시고, 너희가 그분의 명령들을 준수하는지, 아닌지를
(보신 것 등등이다) (신. 8:2-3, 16).
모세가 사십 일 낮과 밤을 시내산에서 있었다는 것 역시 시험의 지속 기간을 의미한다, 즉 모세가 백성을 진멸하시지 않도록 탄원하면서 먹지도 마시지도 않고 사십 일 주야를 산에 머문 것이 주님의 시험을 의미함은 분명하다. (신. 9:9, 11, 18, 25-29; 10:10).
“사십 일”이 시험의 지속 기간을 의미한 이유는 방금 말했듯이, 주님께서 사십 일 동안 악마의 유혹을 허용하신 것 때문이다. 그리고 모든 것들이 주님에 대한 표현인 바, 시험에 관한 생각(idea)이 천사들과 더불어 표출될 때, 이 생각은 이 세상에 있는 것과 같은 것들을 수단으로 영들의 세계에서 표현되어졌다. 이는 천사들이 영들의 세계 안으로 하강하는 동안 벌어지는 모든 천사같은 생각들과 더불은 경우이다: 즉 그들이 표현적으로 표출되어짐 이다. 그리고 같은 방법에서 시험에 관한 생각이 주님께서 사십 일 동안 유혹되셨기 때문에 숫자 “40”에 의해 표현되어졌다. 주님과 더불어, 그 결과 천사같은 천국과 더불어서도 어떤 것이 현재 있든지, 장차 있을 것이든지 모두 똑같다; 올 것이 현재 있고, 또는 이루어질 것이 이루어져 있다. 이로부터 표현(representative) 교회에서 “40”을 수단으로 시험에 관한 표현이 있다. 황폐해짐의 표현도 그러하다. 그러나 이런 것들이 아직은 잘 납득되지 않는다, 그 이유는 영들의 세계 안으로 천사같은 천국의 유입이, 이런 유입의 본성이 알려져 있지 않기 때문이다.

내가 만든 물질(substance)을 나는 지면의 얼굴로부터 파괴할 것이다. 이는 인간이 생기있어질 때 마치 인간의 자기 자신(own)은 파괴된 것 처럼 되어있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은 자기 자신에 관해 이미 설명한 바로부터 분명해진다 (154-155, 164항 참조). 인간의 자기 자신은 모든 악과 거짓이다. 이것에 계속 집착해 있는 한, 그는 죽어 있다; 그러나 그가 시험들 안으로 올 때, 그것은 흩어진다. 즉 주님으로부터 있는 진리들과 선들을 수단으로 느슨해지고 부드러워진다는 말이다. 그런고로 해서 인간은 생기 있어지고 마치 악들과 거짓들은 현존하지 않는듯, 사라진듯 나타난다. 이렇게 나타나 있지 않고 더 이상 해를 입히지 않는 것이 “파괴함”에 의해 의미되어지고 있다; 그럼에도 이것은 파괴되는 것이 아니라, 남아 있는다. 이것은 흑과 백의 색깔과 거의 같다. 이 둘이 빛의 광선에 의해 가감되어질 때, 이것은 아름다운 빛깔들, 푸른색, 노랑색, 보라색 등등과 같은 빛깔들로 바뀌는 것과 같다. 즉 그것들의 배열에 따라 사랑스럽고 호감이 가는 엷은 빛깔들, 마치 꽃들의 경우 같이 표출되어진다. 그럼에도 근본적이고 필수적인 빛깔인 검은 색과 흰 색은 여전히 남아 있다. 그러나 여기서 태고 교회로부터 있는 이들의 황폐됨이 취급되는 바, “나는 지면의 얼굴로부터 내가 만든 존재하는 모두 각각의 것들을 파괴할 것이다”에 의해 절멸해지는 이들도 의미되고 있다 (이 절과 23절에도 있다). “내가 만든 물질”은 안에 천국의 씨, 또는 교회 속에 있는 모든 것, 모두 각각의 인간이다; 그러므로 이 구절과 다음 절 모두에서, “지면(ground)”이 언급되고 있고, 지면은 선과 진리가 심어져왔었던 교회인을 의미한다. “노아”라 불린 이들 안에서 이 씨는 이미 말했듯 악과 거짓이 흩어짐에 (비례해서) 점진적으로 성장했다; 그러나 절멸된 홍수 이전 사람들 안에 있던 이 씨는 가라지들을 수단으로 소멸되어졌다.

5절. 노아는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명령하신 모든 것에 따라 했다.. 이는 이런 식으로 실현되었음을 의미하는데 앞에서의 구절과 같다. 앞장 22절과 비교해보면 노아가 두 번씩 “…했다”라고 기록되고 있으나 이 구절에서는 한 번 뿐이다. 22절에서는 하느님이 등장하나 여기서는 여호와이시다, 그 이유는 앞 절은 이해력으로부터의 것을 취급했고, 이 구절은 의지력으로부터의 것을 취급하기 때문이다. 이해력에 속한 것들은 의지에 속한 것을 생각할 때 자기들과 매우 다르고 구분된다고 여긴다; 그러나 의지력에 속한 것들은 이해력에 속한 것들을 자기들과 하나되는 것, 또는 하나로 간주하고 있다. 그 이유는 이해함은 의지로부터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런고로 앞 절에서는 두 번 “…했다”고 기록되고 이 절에서는 한 번만 “했다” 라고 기록되었다 또한 이는 왜 “하느님”이 명명되고, 왜 “여호와”가 명명되었는지에 대한 설명이기도 하다.

6절. 그리고 노아는 육백 세가 된 아들 이었다. 그리고 물들의 범람이 땅에 있었다. “노아는 육백 세가 된 아들 이었다”란 그의 시험의 첫 상태를 의미한다. “물들의 범람이 땅에 있었다”란 시험의 시작을 의미한다.

앞 장(창. 6:13-22)에서 이해력 측면인 진리들이 취급되었다. 거기에서 “노아”라 불리는 교인이 그가 거듭나기 전 주님에 의하여 가르침을 받았다; 그리고 이 장(1-5절)에서 의지 측면인 선들이 취급되어지는데, 그는 주님에 의해 선들을 증여받았다. 위와 같이 성경 두 부분에서 이를 취급하는 바, (글자로만 보면) 이것이 반복된 듯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지금 6-11절에서 그의 시험이 취급되고, 이 구절의 경우, 첫 상태와 시험의 시작이다; 그리고 모든 이도 알 수 있는 바, 반복이 다시 발생한다는 점이다. 그 이유가 이 절에서 “노아는 육백 세 된 아들이었다”라고 말해졌는데, 11절에서 홍수가 땅 위에 왔을 때, 이것은 “노아의 육백 년째, 둘째 달, 그 달의 십칠 일”에 있었다라고 말해진다. 그리고 7절에서 노아는 그의 아들들과 그들의 아내들과 더불어 방주 안으로 갔다고 말해졌는데, 마찬가지로 13절에서도 언급되고 있다. 그리고 다시 짐승들이 노아에게로 (와서) 방주 안으로 들어갔다고 8, 9절에서 말해지는데, 14, 16절에서 다시 언급되고 있다. 이로부터 분명한 것은 여기서도 앞서 말한 것의 반복이 있다는 점이다. 글자 의미 만에 머무는 이들은 그것은 반복된 역사적 문제일 뿐이라고 밖에 생각할 수 없다. 그러나 말씀은 (우리가 말씀 속의 신비를 다 알지 못해서 이지) 어느 단어 하나, 마침표에 이르기까지 헛되이 사용되지 않는다. 그 이유가 주님의 말씀이기 때문이다. 즉 주님은 반복되는 것 안에 또 다른 의미를 지니지 않으면 반복하시지 않는다. 앞서 말한 그대로 여기서도 이는 첫 번째 시험이다는 것, 이는 이해함 측면에서의 시험이고, 그 후에는 의지 측면에서의 시험이 있다. 시험은 거듭나는 이들에게 이 측면 뒤에도 다른 측면이 뒤를 이어 온다. 그 이유가 이해력 측면의 시험과 의지력 측면의 시험은 아주 다르다. 이해력에 속한 시험들은 가벼운 편이고, 의지력 측면의 시험들은 통렬하다.

이해력 측면에 관련된 시험, 또는 인간 안에 있는 거짓들에 관련된 시험이 가볍다라고 말한 이유는 인간이 감각들의 오류들 안에 있는 고로, 인간은 감각들의 오류들 안에 들어갈 수 밖에 없기 때문, 그리고 쉽게 떨쳐버릴 수도 있기 때문에서 이다. 그러므로 이해력 측면의 시험은 인간의 납득력에 따라, 또는 인간의 감각들의 오류들에 따라 말하는 말씀의 글자 의미 안에 머무는 모든 이들과 더불어 있다. 만일 주님의 말씀이기에 성경을 믿는다는 단순함에서 신앙을 가졌다면, 그들이 오류를 지녔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자신이 가르침을 받도록 쉽게 자신을 내어준다. 예를 들면, 주님은 성내시고 벌 주시고 사악한 자에게 악을 실행하신다고 믿을 때, 이런 신앙은 글자 의미로부터 도출된 것인 바, 이런 사람에게는 진정한 진리가 무엇인지를 쉽게 알려줄 수 있다. 또는 누군가가 자신 스스로 선을 행할 수 있다고 단순하게 믿는다면, 그리고 자기는 스스로부터 선하다고 단순히 믿고 있다가 저세상에 가면 거기서 그는 보상을 받을 것이고, 더불어 그가 행한 선이 주님으로부터 이다는 것도 쉽게 가르쳐질 수 있다. 그리고 그분의 자비에서 주님은 무료로 보상을 하신다. 그러므로 이해 측면의 문제로서 시험이 올 때, 또는 오류 측면에서 시험이 있을 때, 그들은 가볍게 유혹될 수 있을 뿐이다. 그리고 이것이 첫 시험이고, 이 시험은 거의 시험 같이 여겨지지도 않는다. 이것이 지금 취급되고 있다. 그러나 심정의 단순함 안에 있지 않은 이들과 더불어 말씀을 믿는 경우는 이와 다르다. 이들이 거짓들이나 오류들을 확증하는 이유는 그것들이 자기들의 그리워함을 지지하기 때문에서이다; 그리고 이런 동기를 수단으로 몰아채는 이들은 거짓인 것을 진리라고 하기 위해 자신들로부터, 그리고 기억 속의 지식들로부터 많은 추론들을 다함께 가져다 놓고, 그것도 모자라면 말씀에서 확증하고, 자신들을 설득해 간다.

“노아”, 또는 이 새로운 교회의 사람에 초점을 모아 보면, 그는 그가 태고 교회로부터 가졌던 것을 단순 소박하게 믿는 품성을 지녔다. 이는 교리 측면에 관련된 것들이고, 이것은 “에녹”이라 불리워진 이들에 의해 어떤 교리적 형태로 환원되어 수집되었었다. 그래서 (노아에 속하는) 이들은 멸종되는 홍수 이전 사람들, 즉 “네피림”이라 불린 이들, 즉 자기들의 더러운 그리워함들에 신앙의 교리적인 것들을 침수시켜 끔찍한 설득력을 임신하였고, 이로부터 제 아무리 누군가가 그들의 설득력의 잘못을 보여주고 수정하도록 가르쳐 보려 해도 꿈쩍도 하지 않았던 이들과는 전혀 다른 천성(genius)으로부터 있었다. 오늘날의 경우도 이와 꼭 같지는 않지만, 이런 천성, 또는 본성을 지닌 이들이 있는가 하면 그와 다른 천성이나 본성를 지니기도 한다. 그리하여 어떤 사람은 거듭남이 쉽게 진행되는 한편, 또 다른 이는 힘든 경우도 있다.

노아는 육백 세의 아들 이었다. 이것이 시험의 첫 상태를 의미하는 것은 분명하다. 그 이유는 여기 그리고 제 11장의 에벨에 이르기까지에서 등장하는 숫자들이나 년 수 기간과 이름들이 제 5장과 더불어 순수하게 상징적 의미만을 지니기 때문이다. “육백 년”이 여기서 시험의 첫 상태를 의미하는 것은 숫자 600을 지배하는 숫자가 10과 6이고, 10이 두 번 곱해졌음(6x10x10)에서 분명하다. 그리고 숫자가 커지든 작아지든 같은 약수(factor)에서 출발하면 그 의미는 바뀌지 않는다 (10과 100은 동일한 의미를 지닌다. 단지 100은 10이 강조된 것, 계시록의 666도 6의 뜻이 강조되고 또 강조를 한 것이다-역자의 의견임). 숫자 “10”에 주목해보면, 이는 이미 6:3에서 살폈는데, 리메인스(remains, 아껴두신 것들)를 의미한다; 그리고 “6”은 노동과 전투를 의미한다는 것은 말씀의 많은 구절로부터 분명해진다. 이 경우는 이렇다: 앞서 살핀 것에서, 주제는 시험을 위해 노아라 불리는 인간이 준비되는 것, 주님께서 그의 이해력에 진리를, 그의 의지력에 선들을 공급하심으로 시험을 위해 준비하신 것이다. 이 진리들과 선들이 리메인스이다. 이 아껴두신 것들은 인간이 거듭나질 때까지는 인식되도록 인간에게 가져다 놓이지 않는다. 시험을 통하여 거듭나지는 이들의 경우, 인간 안에 있는 이 리메인스는 그와 함께 있는 천사들을 위해 있고, 인간 안에 있는 거짓들을 흥분시키고 그를 맹렬히 습격하는 악령에 맞서 천사가 그를 위해 방어할 때 꺼내어 사용한다. 리메인스가 “10”에 의해 의미되고, “6”에 의해서는 전투들이 의미되는 바, 이런 이유 때문에 년 수들이 “육백”이라고 말해지고, 이 안에서 지배하는 숫자가 10과 6인 바, 시험의 상태를 의미한다.
“6”을 세부 측면에서 주시해보면, 이것이 전투를 의미한다는 것은 창세기 1장으로부터 분명하다. 그 장에서 육 일이 묘사되고, 이 안에서 인간이 천적 수준으로 되기 앞서 거듭나진다. 이 육 일 안에서 계속적인 전투가 있다. 그러나 일곱 째 날에 쉼이 있다. 이런 이유에서 노동의 육 일이 있고, 일곱 째 날은 쉼을 의미하는 안식일이다. 이로부터 히브리 종은 육 년을 봉사하고, 칠년 째에는 자유해졌다 (출. 21:2; 신. 15:12; 예. 34:14); 또한 그들은 육년 동안 토지에 씨를 뿌리고, 열매를 모아들였다, 그러나 칠년 째에는 씨뿌리지 않았다 (출. 23:10-12). 포도원 역시 같은 방식을 따랐다; 그리고 일곱 째 해는 토지에게 “안식일의 안식일, 여호와에게 안식일” 이었다 (레. 25:3, 4). “6”이 노동과 전투를 의미하는 바, 숫자 여섯은 거짓들의 분산(흩어짐)을 의미한다. 에스겔서에서:
잘 보니 여섯 사람들이 북쪽을 향하여 바라보는 위쪽 문의 길로부터 왔다,
그리고 모든 이가 자기 손에 분산(dispersion)시키는 자기 무기를 가졌다 (겔. 9:2).
그리고 다시, 곡을 향하여:
나는 다시 너를 돌아서게 만들 것이다, 그리고 너를 여섯 째로 만들 것이다,
그리고 너를 북의 측면으로부터 올라오게 만들 것이다 (겔 39:2).
위에서 “여섯” 그리고 “여섯 째로 줄임(reduce)”은 분산을 의미한다; “북”은 거짓들을; “곡”은 외적인 것들로부터 교리의 주제들을 이끌어내는 자들, 그럼으로 해서 그들은 내적인 예배를 파괴한다. 욥기에서:
여섯 곤경들 안에 그는 너를 넘길 것이다, 그렇다, 일곱 째에서 어떤 악도 너를
건드리지 못할 것이다 (욥. 5:19).
위는 시험의 전투를 뜻하고 있다.
그러나 “여섯”이 노동, 전투, (거짓의 ) 분산을 의미하지 않는 경우도 발생한다. 즉 신앙의 거룩함을 의미하는 경우인데, 이는 “열 둘”에 관계될 경우이다. 열 둘은 한 복합체(one complex)에서 신앙과 신앙의 모든 것들을 의미한다; 그리고 “3”은 거룩을 의미한다. 이 “3”으로부터 숫자 “6”의 진짜 의미가 파생된다; 에스겔서(40:5)를 보자. 이 구절에서 사람의 갈대를 가지고 이스라엘의 거룩한 성을 측량했더니, “6” 큐빗들이었다; 그리고 다른 구절들에서도 예를 들어 볼 수도 있다. 이렇게 “6”의 의미가 있는 이유는 신앙의 거룩함은 시험의 전투들 안에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노동과 전투의 6 일은 거룩한 일곱 째 날을 주시하고 있다.

여기서 노아가 “육백 년의 아들” 라고 불리운다. 그 이유는 “아들”이 이해력 측면의 진리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는 이미 말했다. 그러나 11절에서 그는 “아들”이라 불리우지 않는데, 그 이유는 의지 측면에서의 그의 시험이 취급되기 때문이다.

“물들(waters)의 홍수”에 의해 시험의 시작이 의미되었다는 것은 여기서 이해력 측면의 것들에 관한 시험이 취급되는 것으로부터 분명해진다. 이 시험은 먼저 있어지는 시험, 그리하여 가벼운 시험인데, 이는 앞에서 말했다; 이런 이유에서 여기서의 홍수는 “물들의 홍수”라 불려지고 17절 같이 “홍수”라 단순히 불려지지 않고 있다. 그 이유가 “물들”은 인간의 영적인 것들, 신앙의 지적인 것들, 반대 의미에서는 신앙의 거짓들을 특별하게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는 말씀의 여러 구절로부터 확인해 볼 수 있을런지 모른다.
“홍수”, 또는 물들의 “범람”이 시험을 의미하는 것은 7장 서문에서 살폈다. 마찬가지가 에스겔서에 있다:
그러므로 주 여호비께서 말하신다, 나는 내 격노함을 헤치고 나가도록 폭풍의 바람을
만들 것이다, 그리고 범람하는 비가 내 성남의 (자리에) 있을 것이다, 그리고
우박들이 분노 안에 (있어), 종말을 (볼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너희가 부적당한
것을 가지고 칠해 놓은 벽을 파괴할런지 모른다 (겔. 13:13-14).
위 구절에서 “폭풍의 바람”과 “범람하는 비”는 거짓들의 황폐됨을 표시한다; “부적당한 것 가지고 칠한 벽”은 진리같이 나타나는 지어낸 이야기(fiction)이다. 이사야서에서:
여호와 하느님은 범람으로부터 방어되신다, 폭염(heat)으로부터 그늘이시다,
그 이유가 광폭한 자의 숨이 벽을 향하여 범람함 같이 있기 때문이다 (이. 25:4).
여기서 “범람함”은 이해력 측면에서의 시험을 표시한다, 그리고 “폭염”이라 불리는 의지 측면의 시험과 구별되어진다.
다시:
잘 보라 주님은 강력하고 힘센 자를 가지고 있으시다, 그리하여 우박의 범람같이,
파괴하는 폭풍같이, 강력한 물들의 범람함같이 넘쳐 흐르신다 (이. 28:2).
위에서는 시험의 등급들이 묘사되어 있다. 그리고 다시:
네가 물들을 통과할 때 나는 너와 함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강들을 통하여 (갈 때),
그것들이 네 위에서 넘쳐 흐르지 않을 것이다; 네가 불을 통과하여 걸을 때
너는 태워지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불꽃이 네 위에서 불붙지 않을 것이다 (이. 43:2).
위에서 “물들”과 “강들”은 거짓들과 공상들을 표시하고, “불”과 “불꽃”은 악들과 그리워함들을 표시한다. 다윗서에서:
이를 위해 거룩함이 있는 모든 이는 발견하심의 때에서 당신에게 기도합니다,
그리하여 많은 물들의 범람에서 그것들이 그에게 도달하지 않을 것입니다; 당신은
제가 숨는 장소 입니다; 당신은 곤경으로부터 나를 보존되게 하십니다 (시. 32:6-7).
위에서 “물들의 범람함”은 “홍수”라 불리는 시험을 표시한다. 시편에서:
여호와께서는 홍수에 앉아 계신다;
그렇다, 여호와는 영원히 왕으로 앉아 계신다 (시. 29:10).
위 구절로부터, 그리고 7장의 시작에서 전제한 것으로부터, “홍수” 또는 물들의 “범람”이 비록 태고 교회를 묘사한 방식을 따라 역사적 (스타일)로 묘사되었을지라도 시험들과 황폐됨만을 의미함은 분명하다.

7절. 그리고 노아는 홍수의 물들이 있기 앞서 방주 안으로 그의 아들들과 그의 아내와 그의 아들들의 아내들과 함께 들어 갔다. “홍수가 있기 전 노아가 방주로 들어 갔다”란 그가 시험 중에 보호되었음을 의미한다. “아들들”은 진리들을, “아내”는 선들을, “아들들의 아내들”은 선들과 결합된 진리들을 의미한다.

노아는 홍수의 물들이 있기 앞서 방주 안으로 들어 갔다. 이것은 그가 보호받았음을 의미한다는 정도는 누구나 익히 알고 있을 것이다. 시험들은 인간과 더불어 있는 (두 세력), 즉 천사들과 악령들의 전투들이다. 악령들은 모든 잘못된 것들, 인간의 유아기 때부터 있던 악들과 거짓들, 그것이 행동되었던 것이든 생각만에 있던 것이든 모두 소집한다. 악령들에게는 이 짓을 하는 것 이상 더 큰 즐거움은 없다. 그 이유가 그들의 참 기쁨이 그것들 안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천사를 통하여 주님께서는 인간을 지키신다. 그래서 한계를 넘는 악령과 악귀(genii)들을 제지하시고, 인간 당사자가 감당할 수 있는 정도를 넘어선 인간이 침수 당함으로부터 지키신다.

“아들들”에 의해 진리들이, “아내”에 의해 선들이, 그리고 “아들들의 아내들”에 의해 선들과 결합한 진리들이 의미된다는 것은 6:18에서 살폈다. 비록 여기서 아들들과 아내들로 말해지는 진리들과 선들이지만 이것들은 “노아”라 불리는 사람 안에 있는 진리들과 선들을 뜻한다. 이런 문장체는 역사적 방식과 연결시켜 말하는 태고인들의 스타일이다. 그러나 천국의 신비들을 포함하고 있다.

8, 9절. 하느님께서 노아에게 명령하신 대로 깨끗한 짐승, 깨끗하지 않은 짐승, 새와 지면에서 기는 모든 것들이 9 둘과 둘, 남성과 여성이 노아에게, 방주 안으로 들어 갔다. “깨끗한 짐승”이란 선에 대한 애착을, “깨끗하지 않은 짐승”은 그리워함들을, “새”는 일반적으로 생각들을, “지면에서 기는 모든 것”이란 감각적인 부분과 그것의 모두 각각의 쾌락을, “둘과 둘”이란 상응하는 것들을, 그들이 “방주 안으로 들어 갔다”란 그들이 보호되었음을, “남성과 여성”이란 진리와 선을, “하느님께서 노아에게 명령하신대로”란 그렇게 실현되었음을 각각 의미하고 있다.

선을 애착함들이 “깨끗한 짐승들”에 의해 의미되는 것은 이 장 2절에서 살폈으므로 생략한다. 그리워함들, 즉 악한 애착들은 “깨끗하지 않은 짐승”에 의해 의미됨도 이미 살폈다.

“가금류(fowl)” 또는 “새(bird)”에 의해 일반적으로 생각들이 의미되는 것은 새들에 관해 말해졌던 것으로부터 알런지 모른다. 즉 그것들은 이해력 측면의 것들, 또는 합리적 측면의 것들이 의미된다. 그러나 앞에서는 “하늘들의 새(fowl)들”이라 불리웠고, 여기서는 “새(fowl)”라고만 불릴 뿐이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일반적 측면에서의 생각들을 의미한다. 그 이유가 여러 종류의 새들, 깨끗한 새, 불결한 새가 있고, 14절에서는, “새”, “나는 것”, 그리고 “날개 달린 것”으로 구별되기도 한다. 깨끗한 새들은 진리를 생각함이다; 불결한 새는 악한 생각들이다; 이에 관하여는 차 후 주님의 신성한 자비로부터 더 살핀다.

지면 위에서 기는 모든 것. 이것이 감각적 부분과 그것의 모두 각각의 쾌락을 의미하는 것은 전에 살폈다. 태고인들은 인간의 감각적인 것들과 그것의 쾌락들을 파충류나 기는 것들에 비교하고 비유했다. 그리고 그것들을 그렇게 (직접적으로) 부르기 조차 했다, 그 이유는 그것들이 가장 바깥 것 쪽에 해당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감각적 부분은 인간의 표면에서 마치 기는 듯하다, 그리고 그 부분들은 그 자체 더 높게 들어 올려지는 것이 허용되지 않아야만 한다.

“둘씩”이 상응하는 것들을 의미함은 그것이 쌍(pair)들 임으로부터 알런지 모른다; 쌍은 서로에게 상응하지 않으면 쌍일 수가 없다. 예를 들면, 진리와 선, 또는 거짓과 악 같은 형태이다. 모든 것들 안에는 결혼, 또는 짝지움(coupling)과 매우 유사함이 있다. 마치 진리들이 선들과, 악들이 거짓들과 같다. 그 이유는 이해력과 의지력의 결혼, 또는 의지력과 이해력의 결혼이 있기 때문에서 이다. 실로 모든 것은 그것들의 결혼, 또는 짝지움이 있다. 이것 없이는 살아가 질 수 없다.

그들이 “방주 안으로 감”이란 그들이 보호되어졌음을 의미한다는 것은 노아와 그의 아들들과 그들의 아내들에 관해 말해진 구절, 7절에서 살폈다.

“남성과 여성”이 진리와 선을 의미하는 것은 2, 3절에서 살폈는데, 거기서 “남성과 여성”은 새들에 관련해서, “남자와 아내”는 짐승들에 관련해서 서술되었다. 그 이유 역시 서술하기를, 즉 그것들 자체를 주시해서 보면, 이해력 부분이 의지력 부분과 결혼한다고 말하기 보다는 의지력 부분이 이해력 부분에게 결혼한다 말해야 할 것이다. 전자는 남성과 여성에 해당되고 후자는 남자와 아내에 해당된다. 이 구절의 주제는 이해력 측면에서 이 인간의 시험을 다루는 바, “남성과 여성”이라 말해진다, 그리고 이해력 측면의 시험, 또는 전투가 뜻해진다.

하느님께서 노아에게 명령하셨다. 그렇게 되어감을 의미하는데, 이는 6:22, 7:5에서 살폈다.

여기서의 주제는 “노아”라 불리는 새로운 교회인의 시험이고, 시험들의 본성을 아는 자가 별로 많지않아 시험에 관해 간략한 설명이 추가되어야 할 듯 싶다. 이미 말했듯, 시험의 때에 악령들은 인간의 거짓들과 악들을 소집한다. 사실상 인간의 유아 때로부터 그가 생각했고 행하기도 했던 것은 무엇이든 그의 기억으로부터 불러낸다. 악령들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악의와 노련함으로 실행에 옮기는데, 이때 인간과 더불은 천사들도 그의 선들과 진리들을 끌어내서 그를 방어한다. 이 전투가 인간에게 고통과 양심의 가책을 일으킴에 의해 느껴지고 지각된다.
두 종류의 시험들이 있다, 하나는 이해력 측면에서의 시험이고, 또 하나는 의지력 측면에서의 시험이다. 인간이 이해력 측면에서 유혹될 때, 악령들은 그가 죄라고 느끼고 있어왔던 악한 것들(여기서는 “불결한 짐승들”에 의해 의미되었다)을 소집할 뿐이다, 그리고 그를 기소하고 정죄한다; 악령들은 그 인간의 선한 행위들(여기서 “깨끗한 짐승들”)도 불러낸다. 그리고 수 천 가지 방법으로 뒤집는다. 동시에 악령들은 그 인간이 생각한 것(여기서는 “새”), 이와 비슷한 것인 여기서는 “지면 위에서 기는 모든 것”에 의해 의미된 것도 불러낸다.
그러나 이 시험은 가볍다, 그리고 어떤 흥분됨과 마음에 상기하는 방식에 의해서 지각되어진다. 그러나 인간이 의지 측면에서 유혹되어질 때, 그의 생각들과 행동들이 소집되기 보다는 악귀들이 있어 이것들이 인간 당사자가 물들여져 있는 그의 그리워함들과 더러운 사랑들을 가지고 불을 지핀다. 그런고로 전투는 인간의 그리워함 자체들을 수단으로 벌어지는 것이고, 악귀들이 아주 악의있게, 아주 은밀하게 진행하므로 시험이 그리워함들로부터 있는 지 조차도 믿어지지 않는다. 게다가 악귀들은 인간 당사자의 그리워함의 생명 안으로 자신들을 한 순간에 주입시킨다, 그리하여 거의 순간적으로 선과 진리에 애착함을 악과 거짓에 애착하도록 뒤집고 바꾸어 놓는다, 이렇게 순식간에 있음으로 해서, 인간은 이렇게 뒤집히고 바뀐 것이 자기 자신으로부터 이루어졌다고, 그리고 자기 자신의 의지로부터 나온 것이라고만 알 뿐 이것이 악귀로부터인지를 아는 것은 가늠할 수 없다. 이 시험은 아주 통렬하고, 내향의 고통과 고문하는 불로서 지각되어진다. 이에 관하여는 더 언급이 있을 것이다. (주님께서는) 위와 같은 경우를 나로 하여금 알고 지각하도록 여러 번 경험하게 하셨다; 또한 악령들 또는 악귀들이 언제 어떻게 흘러들고 범람하는지에 관해서도, 그것들이 누구이며 어디서인지도, 이런 것들에 관한 경험들은 주님의 신성한 자비로부터 특별하고 세부적인 언급이 차 후 있을 것이다.

10절. 그리고 일곱 날이 지나자 홍수의 물들이 땅에 있었다. 이는 시험의 시작을 의미한다.

“일곱 날들”에 의해 시험의 시작이 의미된다는 것은 4절에서 살폈다; 그리고 앞에서의 것을 참조하면, 이 시험은, 이해력 측면의 것에 관한 시험이고, 시험의 시작, 또는 첫 시험이다는 것이다; 사실상 이는 결말을 말한 것이기도 하다. 또한 이 첫 시험이 이해력 측면이기 때문에 7절에서 같이 “홍수의 물들”이라, 6절에서도 마찬가지로 묘사되어 있다. 이것 모두 설명한 바 같이 시험을 의미한다.

11절. 노아의 삶이 육백 년째 된 둘째 달, 십칠 일, 바로 그 날에 큰 깊음의 모든 샘들이 깨어졌고, 하늘의 큰 폭포가 열렸다. “(나이) 600세, 2월, 17일”이란 시험의 두 번째 상태를 의미한다; “큰 깊음의 모든 샘들이 깨졌다”란 의지 측면에서의 시험의 극단(extreme)을 의미한다; “하늘의 큰 폭포가 열렸다”란 이해 측면에서의 시험의 극단을 의미한다.

“육백 년째 해, 둘째 달, 십칠 일”에 의해 시험의 두번 째 상태가 의미되어졌다는 것은 지금까지 말해진 것으로부터 미루어 알게 된다; 그 이유가 6절로부터 11절 까지에서 취급된 시험은 이해력 측면의 시험들이었다. 지금은 의지력 측면의 시험, 시험의 두번 째 상태가 취급되는데, 그 이유는 그의 나이가 다시 말해지기 때문에서이다. 앞 절에서 그의 나이는 “육백 년의 아들이었다”, 그리고 여기서는 홍수가 “그의 인생의 육백 년 째에, 둘째 달에, 그리고 십칠 일에” 왔다. 노아의 나이의 년 수들, 그 속의 달들, 날들에 의해 무엇이 특징지워져 있는지, 의지 측면의 시험의 상태가 뜻해지는지 아무도 상상조차 할 수 없다. 이미 말했듯이 이와 같은 표현은 태고 사람들의 언어구사 또는 작문 방식의 하나이다는 것이다; 그리고 특별하게 그들은 시간들이나 이름들을 일일이 열거함에서 기쁨을 발견하기도 했다. 그럼으로해서 실제 역사와 비슷한 대화체를 조립한 것이다; 그리고 이것 안에 그들의 지혜가 있었다.
6절에서 살핀 바 같이 “육백 년”은 시험의 첫 상태를 의미하는데, 여기서도 같은 의미를 가질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시험의 둘째 상태가 의미되기 위하여 이 구절은 달과 날이 첨가되어 있다; 그리고 실로 두 달들(two months) 또는 “둘째 달에”는 전투 자체를 의미한다. 이 의미는 숫자 2에 관한 의미를 살핀 6:2절로부터 분명하다. 즉 2는 6과 같은 의미, 즉 노동과 전투, 또한 분산함을 의미한다. 그러나 17은 시험의 끝과 시작 둘 다를 의미한다. 그 이유는 17이 7+10으로 구성되기 때문이다. 이 숫자가 시험의 시작을 의미할 경우, 이것은 일곱 째 날까지를, 또는 일곱 날들의 한 주(week)를 함유한다; 그리고 이 시작함의 의미는 7;4에서 살폈다. 그러나 7이 시험의 끝을 의미할 경우, 이때의 “7”은 거룩하다; 이것에 “10”이 합쳐졌다. 그 이유가 리메인스 없이 인간은 거듭나질 수 없기 때문이다.
숫자 “17”이 시험의 시작을 의미하는 것은 예레미야서에서도 분명해진다, 예언자가 아스돗에 있는 그의 삼촌의 아들, 하나멜로부터 들판을 사도록 명령받았을 때; 그는 그에게 돈으로 은 17세겔을 달아주었다 (예. 32:9). 이 숫자가 바빌론에의 포로됨을 의미하고, 이것이 신실한 자의 시험과 불성실한 자의 황폐됨을 표현한다는 것, 그리고 시험의 시작과 동시에 시험의 끝을 의미한다는 것은 32장의 36절에서의 포로됨과 37절에서의 자유함, 그리고 뒤잇는 구절까지로부터 분명해진다. 이렇게 이 숫자가 의미를 가지지 않았다면 예언서에 나타날리도 없었을 것이고, 다른 말씀들의 경우도 감추인 의미를 포함했다.
“17”이 시험의 시작을 의미한다는 것은 요셉의 나이로부터, 즉 그가 “17세”였을 때, 그는 그의 형들에게 (심부름을 위해) 보내졌는데, 이집트로 팔려졌다 (창. 37:2). 그가 이집트로 팔림 역시 비슷한 의미를 가진다. 이는 주님의 자비로부터 그 장의 해설에서 살핀다. 역사적 큰 사건(event)들은 표현물(representative)이고, 이것은 묘사된 바 대로 실제로 거행되었다; 그러나 여기서의 경우 의미적(의미를 담기 위한) 역사적 작은 사건(incident)이 조립되었다(compose). 이것은 글자 의미에서 묘사된 바 대로 거행되지 않았다. 그리고 여전히 실제의 대 사건들은 천국의 비밀을 포함하고 있다. 사실상, 사건들의 모두 각각의 단어에 천국의 비밀을 포함한다. 정확히 만들어 낸 역사물들로서 천국의 비밀을 포함한다. 이 역사물들을 읽을 때 이상야릇할 수 밖에 없다. 그 이유는 마음(mind)은 어떤 역사적 사실 또는 서술이 표현되는 곳에서 글자 안에 붙잡혀지고 글자로부터 마음 자체를 풀어 놓을 수 없기 때문이다.
말씀의 생명이 주재하는 곳은 내적 의미 안 이다 (글자 안이 아니다, 글자 의미는 내적 의미 없이는 죽어 있다). 이는 총명한 사람이면 누구나 수긍할 것이다. 내적 의미가 없다면, 말씀에 있는 어떤 역사적 서술이라도 어떤 모독된 작가에 의해 작성된 역사적 서술과 얼마나 달라질까? 그리고 본문의 경우, 홍수가 거행될 때인 노아의 나이, 달, 날을 아는 것이 만일 그 말에 천국의 비밀이 포함되지 않았다면 우리에게 무슨 쓸모가 있을 것인가? 그리고 이런 말, “큰 깊음의 샘들이 터지고, 하늘의 큰 폭포가 열려졌다”하는 말이 예언적인 말임을 누가 눈치채지 못할까? 더 많은 설명은 있지 않아도 될 듯 싶다.

“큰 깊음의 모든 샘들이 깨어졌다”는 것은 의지 측면의 시험의 극단(extreme)을 의미하는 것은 방금 앞에서 시험의 두 종류에 관한 설명으로부터 분명해진다, 즉 시험은 두 종류가 있다는 것, 하나는 이해력 측면에서이고, 또 하나는 의지 측면에서 이다는 것, 그리고 후자는 전자와 비교해서 상대적으로 더 맹렬하다는 것이다; 이 지점까지가 이해력 측면에서의 시험이 취급되었다. 앞서 살핀 것과 마찬가지 임이 “깊음”, 즉 그리워함들과 이로부터 파생된 거짓들(18항 참조)의 의미로부터 분명하다. 그리고 이것은 말씀의 아래 구절들로부터도 분명해진다. 에스겔서에서:
그러므로 주 여호비께서 말하신다, 내가 마치 아무도 거주하지 않는 성들 같은
황무한 성을 네게 만들 때, 내가 네 위에 깊음을 가져올 때,
그리고 많은 물들이 너를 덮을 것이다 (겔.26:19).
위에서 “깊음”과 “많은 물들”은 시험의 극단을 표시한다. 요나서에서:
물들이 저를 휘감았습니다, 혼 까지 조차; 깊음이 저를 빙둘러 있었습니다 (욘. 2:5),
위 구절도 마찬가지로 “물들”과 “깊음”은 시험의 극단을 표시한다. 다윗서에서:
깊음이 물들이 솟구치는 시끄러움에 깊음을 부른다;
네 모든 부서지는 파도와 물결이 내 위에 있다 (시. 42:7).
위에서도 역시 시험의 극단이 명백하게 표시되고 있다. 다시:
그분은 홍해 역시 꾸짖으셨다, 그리고 그것은 말리워졌다; 그리고 그분은 그들을
광야에서 (통과함) 같이 깊음들을 통과하게 만드셨다, 그리고 그분은 그들을
미워한 자들의 손으로부터 그들을 구하셨다, 그리고 그들을 적의 손으로부터
되찾으셨다, 그리고 물들이 그들의 적들을 덮었다 (시. 106:9-11).
위에서 “깊음”은 광야에 있는 시험들을 표시한다.
고대 때에, 지옥이 “깊음”에 의해 뜻해졌다; 그리고 공상이나 거짓된 설득력은 물들과 강들에 비유했었다. 또한 깊음으로부터의 연기같은 것에도 비유했다. 그래서 누군가의 지옥들은 그렇게 나타난다, 즉 깊음들과 바다들 같이 나타난다. 이에 관하여는 주님의 신성한 자비로부터 차 후 살핀다. 이런 지옥으로부터 황폐케하는 악령들이 온다, 또한 인간을 유혹하는 악령도 온다; 그리고 그것들이 쏟아붓는 공상들도 거기로부터 온다, 그리고 악령들이 인간을 불붙이는 그리워함도 그쪽에서 온다. 거기로부터 범람과 (분노 등의)폭발도 온다. 그 이유가 앞에서 말한 바 같이, 악령을 통하여 인간은 지옥과, 천사를 통하여 천국과 결합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깊음의 모든 샘들이 깨어졌다”라고 말해질 때, 이런 것들이 의미되는 것이다. 지옥이 깊음이라 불리는 것, 그리고 더러운 방사물들이 강들이라 불리움이 에스겔서에서 분명해진다:
그런고로 주 여호와께서 말하신다, 그가 지옥에 내려가던 날 나는 슬퍼해지게 했고,
나는 그 위에 깊음을 덮었다, 그리고 나는 거기로부터의 강들을 억제시켰다,
그리고 큰 물들이 머물렀다 (겔. 31:15).
지옥이 역시 “깊음”, 또는 “심연(abyss)”이라 불리운다. 계시록도 참조하라 (계. 9;1-2, 11; 11:7; 17:8; 20:1, 3).

하늘의 큰 폭포가 열려졌다. 이것이 이해력 측면의 시험의 극단을 의미하는 것은 이미 살핀 바로부터 분명하다. 의지력 측면의 시험, 또는 그리워함에 관한 시험은 이해력 측면의 시험과 분리되어 있을 수 없다; 그 이유는 만일 분리되어졌다면, 어떤 시험도 있지 않았을 것이고, 그러나 범람함이 있고, 이런 경우는 그리워함들의 불 속에서 사는 이들과 더불은 경우인 바, 마치 그들은 지옥의 영들같이 자기들의 생명의 즐거움을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하늘의 큰 폭포”라 불리운 것은 거짓들, 또는 추론함들의 범람으로부터 이다; 이에 관해 이사야서에서:
두려움의 시끄러움으로부터 도망하는 자는 구덩이로 떨어질 것이다; 그리고
구덩이의 한 가운데로부터 올라오는 자는 덫에 걸리고 말 것이다; 그 이유가
높은 데로부터 큰 폭포가 열려져 있고, 땅의 기초들이 흔들리기 때문이다 (이. 24:18).

12절. 그리고 비가 땅에 사십 일 주야로 내렸다. 이는 시험이 계속되었음을 의미한다. “비”는 시험을, “40일 밤, 낮”이란 시험의 존속 기간을 의미한다.

“비”가 여기서 시험을 의미하는 것은 이미 말해진 것들로부터, 즉 “홍수” 그리고 “범람함”에 관한 내용들로부터 분명해진다; 그리고 “깊음의 샘들이 깨어졌다”와 “하늘의 큰 폭포가 열려졌다”가 시험인 바로 부터도 알게된다.

“사십 일 낮과 사십 일 밤”이 지속 기간을 의미함은 4절에서 살폈다. 즉 “40”은 시험이 크던 작던, 시험의 모두 각각의 지속 기간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 시험은 맹렬한 시험이고, 의지력 측면에서 있는 시험이다. 그 이유가 이어지는 쾌락들을 수단으로, 그리고 자기를 사랑함들과 세상을 사랑함들을 수단으로, 그 결과 이런 사랑들의 활동들과 연결된 그리워함들을 수단으로, 인간은 이런 사랑의 생명을 자신의 생명으로 획득해버렸기 때문이다. 이 생명은 천국의 생명과 일치됨은 불가능이다; 그 이유가 누구도 두 반대되는 사랑을 동시에 지닐 수 없기 때문이다. 세상적인 사랑은 아래쪽을 주시하고, 천국의 사랑은 위쪽을 주시한다. 우리는 자신을 아주 적게 사랑할 수 있고, 동시에 이웃을 적게 사랑할 수 있고, 그렇게 주님도 적게 사랑할 수 있다. 자신을 사랑하는 자는 자기를 섬기지 않는 자를 미워한다; 그리하여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은 자아를 사랑하기 보다 이웃을, 무엇보다 먼저 주님을 사랑하는 천국의 사랑과 선행으로부터 아주 멀다. 이로부터 인간의 생명은 천국의 생명으로부터 얼마나 멀리 옮겨져 있는지 분명해진다. 그러므로 인간은 시험을 통하여 주님에 의해 거듭나진다, 그리고 (주님과) 일치됨 쪽으로 그를 데려다 놓기 위해 (그를) 구부리신다. 이것이 시험이 맹렬하다라고 말한 이유이다. 그 이유가 이 시험은 인간의 진짜 생명을 건드려야 하고, 그 생명을 공격하고, 파괴하고, 변형시키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것이 이런 말로 묘사되어지고 있다: “깊음의 샘들이 깨어졌다, 그리고 하늘의 큰 폭포가 열려졌다.”

인간 안에서 있게되는 영적 시험은 인간과 함께 있는 악령과 천사의 전투이다는 것, 이 전투는 그의 양심 안에서 흔히 느껴진다는 것은 이미 상술했다. 그리고 이 전투에 관하여 알고 있어야 하는 것은, 천사들이 계속적으로 방어한다는 것, 그리고 악령들이 그에게 가하려는 악들을 비키게 하고 있다는 것이다. 게다가 천사들은 인간에 있는 악하고 거짓인 것까지도 방어해주려 한다. 그 이유는 천사들은 인간의 거짓들과 악들이 어디로부터 인지를 잘 알기 때문이다. 즉 악령들과 악귀들로부터임을 진즉 알고 있다. 인간은 자신 스스로로부터 거짓과 악한 어떤 것을 생산할 수 없다, 그러나 그것을 생산하는 자는 그와 더불어 있는 악령이다. 악령은 생산함과 동시에 그것이 인간 스스로 생산한 듯 인간을 믿게 만든다. 이런 것이 악령의 악의(malignity)이다. 더 나아가 악령은 생산한 악과 거짓을 인간에게 주입시키고 강제로 끌어들인 순간, 그 인간을 기소하고 정죄한다. 이에 관하여는 나의 많은 경험으로부터 확증할 수 있다. 주님에 대한 신앙을 가지지 않은 자는 그가 자신으로부터 악을 행한다고 믿지 않도록 (즉 악령 때문에 그 자신이 악을 행한다고) 납득하게 할 수 없다. 그 결과, 그는 악을 자기 것 되게 하고, 그와 더불어 있는 악령 같이 자기도 되어간다. 이와 같은 과정이 인간에게 있다. 천사들은 이를 알기 때문에 거듭남의 과정에서 인간의 거짓들과 악들 역시 방어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 그가 굴복당할 것은 당연지사 임을 알기 때문이다. 또한 인간에게는 악과 악에서 파생된 거짓 밖에 없어, 인간은 악들과 거짓들의 집단 또는 합성(체)에 불과하다.

그러나 영적 시험들은 오늘날 매우 적게 알려져 있다. 게다가 옛적에 있었던 영적 시험의 등급은 알도록 허용되어 있지도 않다. 그 이유는 인간이 신앙의 진리 안에 있지 않기 때문, 그러므로 굴복당할 것이 확실하기 때문이다. 이런 시험들 대신에 있는 시험과 유사하게 인간이 여기는 것은 불행, 슬픔, 걱정, 자연적, 육체적 원인으로부터 야기되는 것, 즉 병듦, 신체의 질병 등등인데 더 이상은 열거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이것들은 어느 정도까지에서 인간의 쾌락과 그리워함들의 생명을 복종시키고 깨뜨린다. 그리고 내면과 종교적 주제들을 생각하게 하여 위쪽을 향하게 하는 계기를 마련해준다. 그렇다고 이것들이 영적인 시험들은 아니다. 영적인 시험은 진리와 선에 관한 양심을 주님으로부터 받았던 이들에 의해서만 경험이 가능하다. 양심 자체가 시험의 평면(들판, plane, field) 이고, 이 안에서 그것들은 작업된다.

이제까지 시험들이 취급되어 왔다. 뒤이어지는 것은 시험의 끝, 또는 목적이다, 시험의 끝은 새로운 교회가 존재 안으로 와지는 것이다.

13절. 바로 그 날에 노아와 그의 아들들, 셈과 함, 그리고 야벳, 노아의 아내와 그의 아들들의 아내가 방주로 들어갔다. “방주에 들어갔다”란 그들이 구원되었음을 의미한다. “노아”는 교회로부터 있었던 것을 의미한다. “셈, 함, 야벳”은 교회로부터 있었던 것에서 파생된 교회들로부터 있는 것을 의미한다. “노아의 아들들”은 교리적인 것들을 의미한다. “이 아들들의 세 아내들”은 거기로부터 파생된 교회들 자체를 의미한다.

이제까지 “노아”로 불린 교인의 시험을 다루어 왔다. 먼저 이해력 측면의 시험이었다, 이는 신앙의 진리들이다 (6-10절). 그 다음 의지력 측면의 시험인데, 이는 선행의 선들이다. (11-12절). 시험들의 끝, 또는 목적은 태고 교회가 멸절됨을 바라보면서 시험을 수단으로 새로운 교회, 또는 (새로운 품성을 소유하는) 교인이 다시 출생하는 것이다. “노아”라 불린 이 교회, 이미 언급했듯이, 태고 교회와 아주 다른 품성, 즉 영적 (평면의) 교회, (또는 영적 종교) 였다. 이 교회 내지 이 종교의 특성은 (한마디로) 신앙 속의 교리적인 교훈들(precepts, 제재들, matters)을 수단으로 재 출생되는 것이다. (즉,) 이 교훈들이 심어진 후, 양심이 (거듭나는) 인간 안으로 서서히 주입되어지는데, (주입된 만큼에서) 인간 당사자는 신앙이 얼싸안고 있는 진리와 선에 거슬러 행동하지 못한다; 그리고 이렇게 진리와 선에 반대되는 행동을 하지 않음 가운데에 있는 그는 (주님으로부터) 선행(charity)이 증여되어지고, 이 선행이 양심을 통치하고, 통치된 양심으로부터 그는 행동하기를 시작한다. 이로부터 이제 영적 (평면의) 인간이 무엇인지 분명해있을 것이다; 이 인간은 선행없는 신앙이 (자기를) 구원하리라고 믿지 않고, 오히려 선행을 신앙의 본질로 삼고, 이로부터 행동하는 사람이 다. 이런 부류의 인간, 또는 교회가 일어나리라는 것이 예상되는 끝(end)이다. 그러므로 교회 자체가 다루어지고 있다. 교회가 지금 취급된다는 것은 같은 주제를 반복하는 것인냥 말해지는 대목에서 분명해진다; 즉, “바로 그 날에 노아와 그의 아들들, 셈, 그리고 함, 그리고 야벳, 그리고 노아의 아내, 그의 아들들의 세 아내들”이라고 말해졌다; 마찬가지로 7절에서, “그리고 노아는 들어 갔다, 그리고 그의 아들들, 그리고 그의 아내, 그리고 그의 아들들의 아내들, 방주 안으로 (들어 갔다).” 그러나 지금은 교회가 다루어지는 바, 아들들의 이름들, 셈, 함, 야벳이 라고 이름이 불려지고 있다. 세 이름이 명명될 경우, 이는 교회 속의 사람이 뜻해지고, 단지 아들들로만 명명될 경우, 이는 신앙 속의 진리를 뜻하게 된다. 이 외에도 방주 안으로 들어간 짐승들과 새들에 관한 8, 9절이 14, 16절에서 반복되어 말해지고 있으나 그 차이가 교회의 주제에 적용할 수 있고, 일치되고 있다.

그들은 방주 안으로 들어 갔다. 이것은 그들이 구원되었음(이 구원은 “노아”였던 교인, 그리고 여기서 말해진 이 사람들로부터 파생되고 이어지는 다른 교회들을 포함하여)을 의미하는것은 “방주로 들어감”에 관하여 이미 말해진 것으로부터 분명해진다

“노아”에 의해서는 교회 속에 있는 것, “셈, 함, 야벳”에 의해서는 거기에서 파생된 교회에 속한 것을 의미하는 것은 여기서 7절 같이 아들들이라 말해지지 않고 그들의 이름들이 불러진 사실로부터 분명해진다. 그런고로 이름들이 불러질 때 그들은 교회의 사람을 의미한다. 교회의 사람은 교회 자체 만이 아니라, 교회에 속하는 모든 것이다. 이는 교회에 속하는 것은 무엇이든 모두라고 납득하는 일반적 술어(통칭함)이다고 생각하면 된다. 이미 태고 교회에서 살폈듯, 이 교회는 “사람(man)” 이라 불리었다. 이는 이름으로 불러지는 다른 교회들도 마찬가지이다. 그런고로 “노아”에 의해, 그리고 “셈”, “함”, “야벳”에 의해 한 복합체에서 교회 속에 있는 무엇이든, 그리고 교회로부터 파생된 교회의 무엇이든, 모두가 의미되어진다.
위와 같은 것이 말씀에서 이야기되어지는 스타일이고 방식이다. 그런고로 예언서에서 “유다”라고 이름 불러지는 대목이 있으면, 거기서 천적 (평면의) 교회가 우선적으로 의미되고, 아울러 그 교회에 속하는 모든 것도 의미한다. 또는 “이스라엘”이 명명될 경우, 영적 (평면의) 교회가 우선적으로 의미되고, 아울러 이 교회 속에 있는 모든 것도 의미한다; 또는 “야곱”이 명명될 경우, 외적 교회가 의미되어진다; 그 이유가 교회의 모두 각각의 사람과 더불어서 교회의 내적 측면과 외적 측면이 있다. 진정한 교회는 내적 측면에 존재하고, 외적 교회는 내적 교회로부터 파생된 것인데, 후자가 “야곱”이다.
그러나 인간이 이름 불러지지 않을 경우는 상황이 달라진다. 그 이유가 이름이 불러질 경우, 그 불러진 이름이 주님의 왕국의 어떤 것을 표현하는 바, 불러진 이름을 듣는 이로 왕국의 어떤 것을 상기되게 하기 때문이다. 주님 만이 사람이시고, 그분의 왕국의 모든 것 되신다; 그리고 교회가 땅 위에서 그분의 왕국인 바, 주님 만이 교회의 모든 것이시다. 교회의 모든 것은 사랑과 선행이다; 사람( 또는 이름에 의해 불러진 것)은 사랑 또는 선행, 즉 교회의 모든 것을 의미한다; 그 다음 그의 “아내”는 거기로부터 파생된 교회를 단순하게 의미한다. 여기서도 이와 같다. 그러나 “셈, 함, 야벳”에 의해 어떤 종류의 교회가 의미되는지는 차 후 주님의 신성한 자비로부터 말 할 것이다.

“노아의 아들들”에 의해 교리적인 것들이 의미되는 것은 앞서 살핀 “아들”의 의미로부터 분명해진다; 그 이유가 교리적인 것들 없이 교회가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의 이름이 명명되고, 더불어 그의 “아들들”이라고 보태어 말하고 있다.

노아의 “아내”에 의해 교회 자체가 의미되고, “그들과 더불어 그의 아들들의 세 아내들”에 의해서는 이 교회로부터 파생된 교회 자체들이 의미되는 것은 방금 전에 말해진 것으로부터 분명해진다. 즉 교회의 사람이 이름 불러질 때, 교회의 모든 것이 뜻해진다는 것, 또는 이름은 교회의 머리인 것 같이 뜻해진다는 것이다; 그 다음 그의 “아내”가 교회 자체인 것은 252, 253항을 보면 알게 된다. “남자와 아내”, 또는 “남성과 여성”이 말씀에서 이름 불러질 때 다른 각도에서 불러진다는 말이다. 즉 “남자”와 “남성”은 이해력에 속한 것들을, 또는 신앙으로부터의 진리들을; “아내”와 “여성”은 의지력에 속한 것들을, 또는 신앙으로부터의 선들이 의미되어진다.

말씀에 있는 모두 각각의 표현은 주님으로부터 있기에, 표현 안에는 신성인 것을 가지고 있는 바, 각 단어, 내지 미소한 것(쉼표 등등) 조차 어떤 것을 포함하거나 의미하지 않는 것은 없다. 여기서의 경우, 표현상 미소한 차이에 불과한 말들, 즉, “세 아내들”, 그리고 “그의 아들들의” 아내들, 또한 “그들과 더불어” 에도 차이가 있는 의미를 지닌다는 말이다. 그러나 우리가 이렇게 세세한 부분까지 짚고 넘어가기는 힘들 것 같다. 따라서 이런 말들이 지니는 일반적 취지만을 아는 것으로도 이 책의 역할은 다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14, 15절. 그들, 그리고 각기 종류대로 모든 야생 동물, 그리고 각기 종류대로 모든 짐승, 그리고 각기 종류대로 땅에서 기는 모든 기는 것들, 각기 종류대로 모든 새들, 모든 나는 것들, 모든 날개 달린 것들. 그리고 그들은 노아에게 오고,15 둘과 둘, 생명들의 호흡이 있는 모든 육체가 방주로 들어갔다. “그들”은 일반적으로 교회의 사람을 의미한다. “각기 종류대로 모든 야생 동물”은 모든 영적 선을, “각기 종류대로 모든 짐승”은 모든 자연적 선을, “각기 종류대로 땅에서 기는 모든 기는 것들”은 모든 감각적이고 물질적인 선을, “각기 종류대로 새”란 모든 영적 진리를, “나는 것들”은 자연적 진리를, “날개 달린 것들”은 감각적 진리를 의미한다. “그들이 노아에게 와서 방주로 들어 갔다”란 그들이 구원되었음을 의미한다. “둘과 둘”은 쌍을, “생명들의 호흡이 있는 모든 육체”란 새로운 피조물, 또는 그들이 주님으로부터 새 생명을 받았음을 의미한다.

“그들”에 의해 일반적으로 교회의 사람, 또는 이 교회 속에 있는 모든 것을 의미하는 것임은 방금 전에 언급한 사람들, 노아, 셈, 함, 야벳인 네 사람인데, 비록 넷이라 할지라도 다함께 하나를 구성한다는 것으로부터 분명해진다. “노아” 안에, 그를 수단으로 일반적 측면에서의 고대 교회가 뜻해지고, 마치 부모 또는 씨 같이 노아라는 교회로부터 파생된 교회들을 포함하였다; 이런 이유에서 “그들”에 의해 고대 교회가 의미되었다. “셈, 함, 야벳”이라 불리우는 모든 이런 교회들이 고대 교회라고 불리는 교회를 다함께 구성한다.

“각기 종류대로 야생 동물”에 의해 모두 각각의 영적 선이, “각기 종류대로 짐승”에 의해 모두 각각의 자연적 선이, 그리고 “땅 위를 기는 기는 것들”에 의해 감각적이고 물질적인 모두 각각의 선이 의미된다는 것은 앞서 서술되고 살핀 바 있다. 얼핏 읽고 판단할 경우, “야생 동물”이 영적 선을 의미할 수 없을 듯 나타날런지 모른다; 그럼에도 이에 대한 진정한 의미는 표현의 시리즈로부터 나타나고 있다. 즉 첫 표현은 “그들”이고 이는 교회의 사람을 뜻한다; 다음은 “야생 동물”이고; 그 다음은 “짐승”; 마지막으로 “기는 것”으로 짜여져 있다. 이런 시리즈로 볼 때, “야생 동물”은 “짐승” 보다 더 높은 가치와 특출한 것을 포함하게 된다. 또 하나 이유는 히브리어원에서 표현되는 “야생 동물”은 생 혼이 안에 있는 동물 또한 의미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기서 평범한 야생 동물이 뜻해지는 것이 아니라, 생 혼이 있는 모두 각각의 동물을 뜻한다. 그 이유가 단어가 같기 때문이다. “동물들”, “짐승들”, “땅위에서 기는 기는 것들”이 의지 부분에 속한다는 것은 이미 설명한 바 있고 이내 뒤잇는 곳, 즉 새들이 말해지는 곳에서 조금 더 살필 것이다.

본문에서 각각에 대해 “각 종류에 따라”라고 말해지는데, 그 이유는 모든 선들에는 종들(genera)과 속들(species)이, 영적 측면과 자연적 측면이, 파생되는 감각적이고 물질적인 선들이 있고, 영적 진리들도 마찬가지여서 그것들은 헤아릴 수 없기 때문에서 이다. 천국 안에, 모든 선들과 진리들, 천적 선들과 영적 선들은 그것들의 종들 안에서 아주 잘 구분되어 있고, 속들 안에서도 그러한 바, 그것들 중의 작은 것도 확실히 구분되고 있다; 그리고 그것들은 무수하여, 독특한 차이들을 말하려면 한도 끝도 없다. 이 정도로만 생각해도 인간의 지혜는 얼마나 하찮고 거의 존재하나마나 한지 모른다. 인간의 지혜는 어떤 것이 영적 선이고 영적 진리인지 모르고, 영적 선과 영적 진리가 무엇인지는 더 더욱 모른다. 천적, 영적 선들과 이로부터 파생된 진리들로부터 유출이 있어 자연적 선들과 진리들로 내려간다. 영적 선으로부터 흘러나가지 않은 자연적 선과 진리는 하나도 없다. 그리고 천적 선으로부터 흘러나가지 않은 영적 선은 하나도 없다. 그리고 모두는 같은 것으로부터 생명을 보존한다. 만일 영적인 것이 자연적인 것으로부터 철수한다면, 자연적인 것은 아무 것도 아닌 것이 되고 만다. 모든 것들의 근원은 이런 방식으로 존재한다; 모든 것들, 일반적이든, 세부적이든, 주님으로부터 있다; 그분으로 천적 평면(등급)이 존재한다; 그분으로부터 천적 평면을 통하여 영적 평면이 생겨난다; 영적 평면을 통하여 자연적 평면이 생겨난다; 자연적 평면을 통하여 물질적이고 감각적 평면이 생겨난다. 이것들 모두는 이런 방법을 통해서 그분으로부터 존재한다. 우리 모두 익히 아는 바, 생존(subsistence)은 존재 안으로 영구히 오고 있음을 말한다는 것이다. 존재 안으로 옴과 어떤 것이 생겨남에 관하여 위와 다른 개념을 가진 자들은 마치 자연을 예배하고 자연으로부터 어떤 것의 근원들을 연역하는 이들 같은 바, 그 원리는 확실히 죽은 원리이므로 숲의 들짐승의 공상들이 훨씬 더 제정신일지 모른다. 이러함에도 자기는 지혜에서 다른 이들 보다 낫다고 착각하는 이들이 많은 것도 현실이다.

“각기 종류에 따라 모두 각각의 새”가 모두 각각의 영적 진리를, “날으는 것”은 자연적 진리를, “날개 있는 것”은 감각적 진리를 의미한다는 것은 새에 관해 설명한 40항으로부터 분명해진다. 태고인들은 인간의 생각들을 “새들”에 비유했다. 그 이유는 의지 측면에 상대적인 것인 생각들이 새들 같기 때문이다. 여기서의 언급은 “새” , “나는 것”, “날개 있는 것”으로 되어 있는데, 이는 인간에 있는 지적, 합리적, 감각적인 것과 같다. 이렇게 의미되는 이유를 성경의 다른 구절로부터 예증하여 의심이 없도록 해두는 것이 좋을 듯 싶고, “새”가 등장하는 구절들에 방금 앞에서 살핀 “짐승”들도 등장하는 경우가 많으므로 다함께 살펴볼까 한다.
다윗서에서:
당신께서는 그분을 당신의 손들의 일들 위에서 지배권을 가지게 하십니다:
당신은 그분의 발 아래 모든 것들을 놓습니다; 모든 양과 수소들, 그렇습니다,
그리고 들판들의 짐승들, 하늘의 새, 그리고 바다의 물고기 (시. 8:6-8).
위 구절은 주님을 두고 말해지고 있다. 그분의 다스림이 인간 위에, 인간에게 속하는 것 위에 있다는 것이 묘사되어 있다. 그렇지 않다면 “짐승들”과 “새들” 위에서 지배함이 뭐란 말인가? 다시:
열매 풍성한 나무들과 모든 삼나무들, 야생 동물과 모두 각각의 짐승,
기는 것들과 나는 새, 그것들이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하게 하자 (시. 148:9-10, 13).
“열매 풍성한 나무”는 천적 (평면의) 인간을 표시하고, “삼나무(cedar)”는 영적 (평면의) 인간을 의미한다. “야생 동물”, 그리고 “짐승”, 그리고 “기는 것”은 우리 앞에 있는 역사에서(본문에서) 같이 그들의 선들이다; “날으는 새”는 그들의 진리들이다; 이런 선들과 진리들로부터 그들은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할 수 있다. 야생 동물, 짐승, 기는 것들, 그리고 새들은 주님의 이름을 결코 찬양 할 수 없다. (찬양 할 수 있는 것은 새나 짐승이 아니라 사실상 인간, 인간 속의 것들이 아닐까?) 어떤 세속의 저작자라면 이런 표현을 과장법 문체로 이용할지 모르나, 주님의 말씀 안에는 과장법은 없고 오로지 표현해주고 의미하는 문체 밖에 없다.
에스겔서에서:
바다의 물고기들, 그리고 하늘의 새들, 그리고 들판의 야생 동물,
그리고 땅 위에서 기는 모든 기는 것들, 그리고 땅의 얼굴 위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내 현존에서 흔들릴 것이다 (겔. 38:20).
위 구절에서 “짐승들”과 “새들”에 의해 이와 같은 것들(인간의 자연적 선과 영적 진리)이 의미되는 것이 분명하다. 그 이유는 물고기들, 새들, 그리고 짐승들이 흔들린다해서 어떻게 여호와의 영광을 기릴 수 있단 말인가? 이런 구절에 거룩한 것이 포함되고 있지 않다면 이런 표현이 거룩하다고 누가 상상할 수 있을까? 예레미야에서:
나는 잘 보았다, 그리고 오, 거기에 사람이 없었다,
그리고 하늘들의 모든 새들이 달아났다 (예. 4:25).
위 구절은 모든 선과 진리를 표시하고 있다; “사람” 역시 사랑의 선을 표시하고 있다. 다시:
그것들이 불태워졌다, 그리하여 아무도 지나갈 수 없고, 사람들이 가축떼의 소리를
들을 수 없다; 하늘들의 새와 짐승이 달아났다, 그것이 가버렸다 (예. 9:10).
위 구절과 같은 방식에서 모든 진리와 선이 떠났음을 표시하고 있다.
그리고 다시:
얼마나 오랫동안 토지가 슬퍼하고, 모두 각각의 들판의 풀잎이 시들어야 합니까?
그 토지에 거주하는 자들의 사악함 때문에 그들이 말하기를, 그는 우리의 최후를
보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기 때문에 짐승과 새들이 다 없어졌습니다 (예. 12:4).
위에서 “짐승들”은 선들을, “새들”은 진리들을 표시하고, 이것이 멸해졌다. 스바냐서에서:
나는 사람과 짐승을 없앨 것이다, 나는 하늘의 새들과 바다의 물고기들을 없앨 것이다,
그리고 사악한 자와 더불은 장애물도 (없앨 것이다);
그리고 나는 지면의 얼굴로부터 사람을 멸절 할 것이다 (습. 1:3).
위 구절에서 “사람과 짐승”은 사랑과 사랑의 선으로부터 있는 것들을; “하늘의 새들과 바다의 물고기들”이해력으로부터 있는 것들, 그런고로 진리로부터 있는 것들을 표시한다. 이것들이 장애물이라 불리우는 이유는 자연계의 짐승이나 새가 사악한 자에게 장애물이 되어서가 아니라 선들과 진리들이 사악한 자에게는 장애물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것들은 “사람”을 두고 말해진다는 말이다. 다윗서에서:
여호와의 나무들은 기대에 어긋나지 않는다, 레바논의 삼나무들은
(기대에 어긋나지 않는다), 거기에 새들이 자기들의 둥지들을 만든다 (시. 104:16-17).
“여호와의 나무들”과 “레바논의 삼나무들”은 영적 (평면의) 인간을 표시한다; “새들”은 영적 (평면의) 인간의 합리적, 또는 자연적 진리들을 표시한다, 이 진리들은 영적 (평면의) 인간에게 “둥지” 역할을 한다.
“새들이 가지들에 자기들의 둥지들을 만들 것이다”라는 흔히 사용하는 표현 형체가 있는데, 이 형체에서의 (둥지도) 진리들을 의미하고 있다. 에스겔서를 보자;
이스라엘의 높은 산 위에 나는 그것을 심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가지를
들어올릴 것이다, 그리고 열매를 맺는다, 그리고 훌륭한 삼나무이다; 그리고
그것 아래 모두 각각의 날개 있는 모두 각각의 새들이 거주할 것이다;
거기로부터의 가지들의 그늘에서 그들은 거주할 것이다 (겔. 17:23).
영적인 이방인들의 교회를 표시하고 있다. 이 교회는 “훌륭한 삼나무”이다; “모두 각각의 날개 있는 새”는 모두 각각의 종류로 있는 진리들을 표시한다. 다시:
하늘들의 모든 새들이 그의 굵은 가지들에 자기들의 둥지들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것의 가지들 아래 들판의 모든 야생 동물들이 새끼를 낳는다,
그리고 그것의 그늘 아래 모든 민족들이 거주할 것이다 (겔. 31:6).
이것은 아수르(Assur)를 두고 말해진다, 이는 영적 교회여서 “삼나무”라 불리운다; “하늘들의 새들”은 영적 교회의 진리들을 표시한다; “짐승들”은 영적 교회의 선들을 표시한다. 다니엘서에서:
거기로부터의 잎은 고왔다, 그리고 거기로부터의 열매는 많았다, 그리고 그것은
모두를 위한 음식 이었다; 들판의 모든 짐승들이 그것 아래 그늘을 가졌다,
그리고 하늘의 새들이 거기로부터의 가지들에 거주했다 (단. 4:12, 21).
위에서 “짐승들”은 선들을, “하늘들의 새들”은 진리들을 표시한 것은 모든 이들도 그렇다고 생각될 것이다. 그 이유가 인간을 위해 이런 의미를 전달하지 않으려면 새와 짐승이 거기에 산다고 말씀이 굳이 말해야 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이와 거의 비슷한 주님께서 말하신 대목이 있다.
하느님의 왕국은 누룩 씨의 한 알에 견주어 볼 수 있다. 사람이 이 씨를 가져다가
그의 동산에 던졌다, 그리고 그것은 자랐고, 그리고 나무가 되었다, 그리고
하늘의 새들이 거기로부터의 가지들에 숙박했다 (눅. 13:19; 마. 13:31; 막 4:31, 32).

“새”가 영적 진리를, “날으는 것”은 자연적 진리를, 그리고 “날개 있는 것”은 감각적 진리를 의미한다는 것; 그리고 진리들이 이런 식으로 구별된다는 것도 위에서 살핀 바에 따라 이미 분명해져 있을 것이다. 감각적 진리들, 이는 봄과 들음에 속한 것들인데, “날개 있는 것들”이라 불리운다, 그 이유는 그것들이 가장 바깥 수준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은 “날개”의 의미이기도 한데, 다른 것들에 마찬가지로 응용된다.

지금 “하늘들의 새들”이 이해력에 속하는 진리들을 의미하는 바, 생각들도 의미한다. 그런고로 반대 의미일 경우, 공상들 또는 거짓들도 의미한다. 이것들은 인간의 생각 속에 있고 “새들”로 역시 의미되고 있다. 예를 들면, 사악한 자가 “하늘의 새들에게, 그리고 들짐승들에게 음식으로 주어질 것이다”라고 말해질 때, 공상들이나 그리워함들을 뜻한다는 말이다 (이. 18:6; 예. 7:33, 16;4, 19:7, 34:20; 겔. 29:5, 39:4). 주님 자신 역시 공상들이나 거짓 설득력들을 “새들”에 비교하신다:
길가에 떨어진 씨는 발 아래에서 뭉개졌다, 그리고 하늘의 새들이 와서
그것을 삼켰다 (마. 13:4; 눅. 8:5; 막. 4:4, 15),
위에서 “하늘의 새들”은 거짓들만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들은 노아에게 와서 방주 안으로 들어갔다. 이는 그들이 구원되었음을 의미한다는 것은 이미 살폈다. “둘과 둘”이 쌍들을 의미하고 그것들이 무엇인지 창. 6:19에서 알 수 있을 것이다.

생명들의 숨이 있는 모든 육체. 이는 새로운 창조물을 , 또는 그들이 주님으로부터 새로운 생명을 받았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는 “육체(flesh)”가 일반적 측면에서 모든 인류이고, 특별한 측면에서 물질적 인간인 것으로부터 분명해진다. 이는 이미 말했다. 이로부터 “생명들의 숨이 있는 육체”는 거듭나는 인간을 의미한다, 그 이유가 거듭나는 인간 자신 안에 주님의 생명인, 선행과 신앙의 생명이 있기 때문이다. 모두 각각의 인간은 “육체”일 뿐이다; 그러나 선행과 신앙의 생명이 주님에 의해 그 사람 안으로 숨쉬어질 때, 육체는 살아있게 만들어진다, 그리고 영적 (평면의) 인간과 천적 (평면의) 인간이 되어간다. 그리고 새로이 창조되어 왔음으로부터 “새로운 창조물”이라 불리운다 (막. 16:15).

16절. 그리고 안에 들어간 그들, 하느님께서 그에게 명령하신대로 모든 육체의 남성과 여성이 들어갔다. 그리고 여호와께서 그의 뒤에서 닫으셨다. “들어간 그들”이란 교회의 사람과 함께 있었던 것들을, “모든 육체의 남성과 여성”이란 각기 종류대로의 진리들과 선들이 그와 함께 있었음을, “하느님께서 명령하신대로”란 받기 위해 그가 준비되어졌음을, “그리고 여호와께서 그의 뒤에서 닫으셨다”란 이제 사람은 천적 교회의 사람이 향유했었던 방식으로 하늘과의 교류는 더 이상 없음을 의미한다.

15절의 “그들은…들어갔다”로부터 16절의 “안에 들어간 그들…들어갔다”까지를 (연결해보면), 교회가 “노아”라 불리운 이들 안에서 보존되어갔던 것으로 묘사되어왔음이 엿보인다. 이제 이 교회의 상태가 뒤잇고 있다. 이 상태의 대략적인 것은 앞 구절로부터 살폈고, 지금은 세부적인 것, 이 교회의 상태의 품질이 묘사된다. 단 한 절, 단 하나의 단어도 이 교회의 특이함들을 포함한다는 것을 미리 염두하면 좋을듯 싶다. 그래서 지금 이 교회의 상태가 취급되었기 때문에 15절에서 말해진 것이 반복되는데, 여기서는 두 번 말해진다; 즉 “안에 들어간 그들, 모든 육체의 남성과 여성이 들어 갔다”라는 단어들에서 이다; 한편 15절의 경우, “그리고 그들은 노아에게로 와서 방주 안으로 모든 육체의 둘과 둘이 들어 갔다” 말씀에서 있는 이런 반복은 또 다른 상태를 취급함을 의미한다.

“안으로 들어간 그들”이 교회의 사람과 더불어 있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위 문단 항목을 통해 자연스럽게 명백해져 있을 것이다; 그리고 또한 이 말에 “모든 육체의 남성과 여성이 안으로 들어 갔다”가 뒤잇고 있다. 이는 거듭나는 인간과 더불어 모두 각각의 선들과 진리들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이유가 여러 번 말했듯이 “남성과 여성”은 진리들과 선들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하느님께서 그에게 명령하신대로.” 이것은 그가(노아) 그것들(새 생명)을 받기 위해 준비되어 왔었음을 의미한다. 주님과 더불어, “명령”하는 것은 준비되는 것과 행하는 것이다.

그리고 여호와께서 그의 뒤에서 닫으셨다. 이는 천적 (평면에 있는) 교회의 사람이 누렸던 천국과의 교류 (방식)은 더 이상 없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아래 서술로부터 나타날 것이다. 태고 교회의 상태에서, 그들은 천국과 내적인 교류를 가졌다, 그리고 이런 교류로 천국을 통하여 주님과도 (연결되었다). 그들은 주님을 사랑함 안에 있었다. 주님을 사랑함 안에 있는 이들은 천사들과 같아서, 마치 각자가 다른 몸을 가졌으되 같은 옷을 입은 것이다. 그들의 내면들은 가리워져 있지 않았고, 주님으로부터 조차 열리어져 있었다. 그러나 이 새로운 교회는 달랐다. 그들은 주님을 사랑함 안에 있지 않았다, 그러나 신앙 안에 있고, 신앙을 통하여 이웃을 향한 사랑 안에 있었다. 이런 상태는 태고인 같은 식의 내적 교류를 가질 수 없고, 외적 (교류는 가능하다). 내적 교류와 외적 교류의 본래의 모습은 설명하자면 너무나 길지 모른다. 모두 각각의 인간, 사악한 자 까지도, 자기와 함께 있는 천사들을 통하여 천국과 교류를 가진다 (물론 교류 수준에는 차이가 있다). 그 이유가 이런 교류마저 없다면 인간은 존재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교류의 등급들의 차이는 끝이 없다. (하나 더 강조할 것은,) 영적 (수준의)인간은 천적 (수준의) 인간이 가진 교류는 할 수 없는데, 그 이유는 주님은 신앙 안에 계신다라기 보다는 사랑 안에 계신다라고 말하는 편이 더 낫기 때문이다. 이것이 이 구절의 “여호와께서 그의 뒤에서 닫으셨다”에 의미되어 있다.
“여호와께서 닫으신” 이래 천국은 태고 교회의 사람에게 열려졌던 방식으로는 열린 적이 없다. 이에 대해 나는 모세와 아론, 그 외 다른 예언자들 처럼 영들과 천사들과 많은 것을 이야기 했다. 물론 이 대화는 과거 예언자들과는 아주 다른 방법이고, 이는 차 후 언급할 기회를 주님의 신성한 자비로부터 가질 것이다. 이렇게 천국이 닫혀진 이유는 깊이 숨겨져 있다. 그리고 오늘날에도 그렇게 닫혀 있는 이유로해서 사람들은 영들이 있다는 것을 모르고, 천사들이 자기와 더불어 있는 것은 더욱 모르고, 세상에서 동료가 없을 경우 자기는 홀로 있다라고 , 자기는 스스로 생각하고 있다 라고 상상한다. 하지만 여전히 진리인 것은, 그는 영들의 집단 안에 계속적으로 있다는 것, 이 영들은 인간이 생각하는 것, 그가 의도하고 고안하는 것, 등등을 마치 세상에서 지켜본듯하게 충분하고 명백하게 주시하고 지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당사자는 천국이 닫힌 관계로 이런 것에 아주 무지해 있다. 이는 최고로 진리이다. 만일 그에게 천국이 열려 있다고 가정하고, 그런데 그가 신앙이 없다면, 더욱이 신앙의 진리가 없다면, 그리고 선행 안에 있지 않다면, 열린 천국은 그 사람에게 지독하게 위험해질 것이다. 이것이 또한 아래 구절에 의미되어 있다:
여호와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쫓아내셨다, 그리고 그분은 에덴의 동산의 동쪽에서
그룹들을 놓아두셨다, 그리고 생명들의 나무의 길을 지키기 위하여 그 자체
회전하는 검의 불꽃(을 세워두셨다) (창 3:24, 301-303항 참조).

17, 18절. 홍수가 땅에 사십 일 동안 있었다, 그리고 물들이 불어났고, 그리고 방주를 덮쳤다, 그리고 방주는 땅으로부터 떠올랐다. 18 그리고 물들은 더욱 거세졌고, 땅에 더욱 불어났다. 그리고 방주는 물들의 얼굴 위에서 오가고 있었다. “40일”이란 노아라 불리는 교회의 존속 기간을 의미한다. “홍수”는 이 교회를 침수시키려드는 거짓들을 의미한다. “물들이 불어나서 방주를 덮쳤고, 방주는 땅에서 떠올랐다”란 이런 모습이 시험의 파동(fluctuation)이었음을 의미한다. “물들이 더욱 거세졌고 땅에서 크게 불어났고 방주는 물들의 얼굴 위에서 오가고 있었다”란 시험의 파동은 빈번히, 그리고 더 세차게 증가했음을 의미한다.

“40”에 의해 “노아”라 불리는 교회의 존속 기간을 의미한다는 것은 4절에서 이미 살폈다. 그러나 17절에서는 “사십 일”이나, 4절에서는 “사십 일 낮들과 사십 일 밤들”이다; 그 이유가 4절의 경우 시험의 존속 기간이기 때문, 그리고 시험 안에 있는 “밤들”은 걱정, 불안들이기 때문.

“홍수”에 의해 교회를 침수시키려드는 거짓들을 의미한다는 것은 위에 보여준 것으로부터 이어진 의미이다. 그 이유가 “홍수” 또는 “범람”은 거짓들의 범람 밖에 더 없기 때문이다. 6절에서의 경우, “물들의 홍수”가 시험을 의미했다. 이 시험은 악령들이 인간 안에서 선동한 거짓의 범람이다. 여기서도 경우는 같으나 시험이 없는 상태에서이다. 그러므로 “물들의 홍수”가 아닌 “홍수”라고만 언급되고 있다.

물들이 불어났고 방주를 덮쳤다, 그리고 방주는 땅으로부터 떨어져 들어 올려졌다. 이는 이런 모습이 시험의 파동(fluctuation)이었음을 의미한다는 것. 그리고 “물들이 더욱 거세졌고 땅에서 크게 불어났고 방주는 물들의 얼굴 위에서 오가고 있었다”란 시험의 파동은 빈번히, 그리고 더 세차게 증가했음을 의미한다는 것은 “노아”라 불리는 이 교회의 상태가 무엇인지를 먼저 설명해두지 않으면 의미가 위와 같음을 분명히 할 수 없다. “노아”는 고대 교회는 아니었다. 그러나 고대 교회의 씨, 또는 부모격에 해당되는데 이미 말했다 (773항 참조). “노아”는 “셈, 함, 야벳”과 더불어 고대 교회를 구성했다. 이는 태고 교회를 직접적으로 계승했다. “노아”라 불리는 교회의 모두 각각의 사람은 태고 교회의 후손으로부터 였다, 그리고 유전적인 악에 관련해서도 멸절된 후손의 것과 거의 같은 상태였다; 그리고 멸절된 후손과 거의 같은 상태의 인간은 (태고 교회 시절과 같은 방법으로는) 거듭나질 수 없었다. 그러므로 그런 품성을 상속받지 않은 이들의 거듭나는 방법으로는 영적 수준으로 되어야 한다. 그들의 유전적 품질이 무엇인지는 앞에서 서술되었다.
(주제가 더 명료하게 이해되도록) 예를 들면; 야곱의 씨로부터 있는 이들, 마치 유대인들 같은 이들은 이방인들이 거듭나지는 것 만큼 잘 거듭나질 수 없는데, 그 이유는 신앙에 반대되는 것을 선천적으로 가졌기 때문이다. 이는 원리들을 유아 때로부터 흡수해서 후에는 그것을 확증했기 때문 뿐 아니라 유전적 기질로부터도 있다. 이것이 유전적 기질로부터 타고났다는 것은 그들이 지닌 남다른 천성, 남다른 방식, 또한 남다른 모양새, 등등이 다른 사람들과 구별되는 것으로부터도 어느 정도는 감지된다. 이런 특질들을 그들은 상속으로부터 가지고 있다. 그리고 이것은 내면의 품질들과도 똑같다. 그 이유가 방식들이나 모양새들은 내면의 견본(type)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기독교 등으로) 전환된 유대인들은 진리와 거짓 사이에서 다른 사람 보다 더 파동이 심하다. 위의 예는 고대 교회의 첫 사람들과도 같았다. 이들이 “노아”라 불리는 것은 그들이 태고 교회 사람들이라는 종족 또는 씨로부터 있기 때문이다. 이것들이 여기서 묘사된 파도의 넘실거림, 즉 파동(fluctations)들이다. 뒤이어지는 구절 안에 더 있다: 노아는 농부였다, 그리고 포도원을 창설했다; 그리고 그는 포도주를 마셨다, 취해졌다, 그리고 그의 천막 안에서 벌거벗은 채 누워있었다 (창. 9:20-21). 이들의 숫자가 아주 작았다는 것을 (주님께서) 나에게 분명하도록 해주셨는데, 그것은 그들이 좁은 면적의 방에 있고, 키가 크고 홀쭉한 모양새로 표현되어진 사실로부터 이다. 어쨌든 여전히 그들은 신앙의 교리적인 것들을 자기들 사이에서 가졌고 보존했다.

이 교회의 사람의 파동들이 여기서 묘사된다; 첫째로, “물들 (즉 거짓들)이 불어남”이 말해진다; 그 다음, 그것들이 “방주를 덮쳤다”, 그리고 방주는 “땅으로부터 떨어져 들어 올려졌다”; 이 후에 “물들이 거세졌다, 그리고 땅위에 더욱 불어났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방주는 물들의 얼굴 위에서 오가고 있었다.” 이 구절에 있는 파동의 각 등급을 설명하는 것은 너무 장황하고 지루해질런지 모르고 어쩌면 불필요할런지 모른다. 우리는 이 대목이 파동이 묘사되어 있다는 정도를 아는 것만으로 족할지 모른다. 따라서 우리는 방주가 땅으로부터 떨어져 들어 올려졌다, 그리고 물들의 얼굴 위에서 오갔다는 서술이 의미하는 것만을 언급할 것이다. 인간이 어떻게 악들과 거짓들에 (침수당함)으로부터 붙잡아 놓으시는(withhold)지를 알지 않으면 이 구절을 알 도리가 없다. 이것 역시 감추인 것들인 바, 간략히나마 설명이 필요할 듯 싶다. 일반적으로 말하면, 거듭난 사람까지 포함해서 모두 각각의 인간은 만일 주님께서 그를 악들과 거짓들로부터 붙잡아 주시지 않으면 그는 자신을 지옥 안으로 곤두박질 할 것이다. 그야말로 그를 붙잡아 주심에서 한 순간만 놓여도, 그 순간 그는 지옥 안으로 돌진하고야 만다. 이것은 나로 하여금 (주님께서) 경험에 의해 알도록 해주셨는데, 그 일부가 말(horse)에 의해 표현되었음은 이미 소개했다 (187, 188항 참조). 이렇게 악들과 거짓들로부터 붙잡아 놓으심이 방주가 땅으로부터 떨어져 들어 올려짐, 그리고 물들의 얼굴 위에서 오감에 의해 의미되어진 승강(elevation)이다.

이 구절과 다음 절에 있는 “물들”이 거짓들을 의미함은 이 장의 시작에서 예증으로 제시한 말씀의 인용 구절로부터 분명해진다, 그리고 “홍수, 또는 물들의 범람함”이 취급된 6절에서도 분명해질 것이다. 이런 구절에서 물들이 범람함들이 황무해짐들과 시험들을 의미한다는 것은 이미 살폈다. 이것은 똑같은 거짓들을 포함한다; 그 이유는 황무함들과 시험들은 악령이 선동한 거짓들의 범람해진 것 밖에 더 아니기 때문이다. 이와같이 “물들”이 거짓들을 의미하는 것은 말씀에서 “물들”은 일반적 측면에서 영적인 것, 이해력으로부터 있는 것, 추론으로부터 있는 것, 기억 속의 지식 속에 있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물들이 위와 같은 것들을 의미하기 때문에 물들은 또한 그 반대의 것들도 의미한다. 그 이유가 모든 거짓은 기억 속의 지식에 속해있는 어떤 것이고, 추론과 이해함으로부터의 것인 듯 나타나기 때문이다. 또한 거짓들도 생각으로부터 있기 때문이다.
“물들”이 영적인 것들을 의미하는 것은 말씀에서 여러 구절로부터 분명해진다; 그리고 그것들이 거짓들 역시 의미하는 것도 분명해진다. 이미 인용한 구절에 더하여 아래에서 더 살피면 확증에 보탬이 될 것이다. 이사야서에서:
이 백성이 곱게 흐르는 실로아(Shiloah)의 물들을 거절했었다; 그러므로 잘 보라 주님께서
강하고 많은 강의 물들을 그들 위에 가져 온다, 그리고 그는 모든 그의 강둑들을
넘어 갈 것이다 (이. 8:6-7).
위 구절에서 “곱게 흐르는 물들”은 영적인 것들을 표시하고, “강하고 많은 물들”은 거짓들을 표시한다. 다시:
날개들로 어둡게 하는 토지에게 화가 있다, 이 토지는 에티오피아의 강들 저편에 있다;
이것이 바다위에 사절들을 보낸다, 그리고 물들 위에 파피루스로 만든 배들 안에
(태워 보낸다). 가라, 너희 민첩한 사절들이여, 이미 작정되었고(meted out)
짓밟은 민족에게로 (가라), 강들이 그들의 토지를 망쳐놓았다 (이. 18:1-2).
위 구절에서 거짓들이 “날개들로 어둡게 하는 토지”에서 표시되고 있다.
다시:
네가 물들을 지나갈 때 내가 너와 함께 있을 것이다, 네가 강들을 통과할 때에
그것들이 너를 침수시키지 못하리라 (이. 43:2).
위에서 “물들”, “강들”은 곤경들, 그리고 거짓들도 표시한다. 예레미야에서:
너는 실로의 물을 마시려하여 이집트의 길에서 무엇을 하고 있으며,
네가 강들의 물들을 마시려고 아시리아의 길에서 무엇을 하느냐? (예.2:18).
위 구절 역시 “물들”이 추론으로부터의 거짓들을 표시한다.
에스겔서에서:
그런고로 주 여호비께서 말하신다, 내가 너를 마치 아무도 거주 않는 성들 같이
황무한 성을 만들 때, 내가 네 위에 깊음을 가져다 놓을 때, 그리고 큰 물들이
너를 덮을 때, 그 다음 나는 그것들과 더불어 너를 구덩이 아래로 가져다
놓을 것이다 (겔. 26:19-20).
위에서 “물들”은 거기로부터 있는 악들과 거짓들을 표시한다. 하박국에서:
당신께서는 당신의 말들을 타고 바다를, 많은 물들의 습지를 밟으셨다 (합. 3:15).
위에서 “물들”은 거짓들을 표시한다. 계시록에서:
그리고 뱀은 여인의 뒤에서 그의 입으로부터 강물 같은 물을 내뿜어 그녀를 시내를
수단으로 쓸어내버리려 하였다 (계. 12:15-16).
위에서 “물들”은 거짓들과 거짓말들을 표시한다. 다윗서에서:
위로부터 당신의 손을 보내시어, 저를 구출하여 큰 물들로부터, 외국인의 아들들의
손으로부터 해방되게 하소서, 그들의 입은 거짓을 말합니다,
그리고 그들의 오른손은 거짓의 오른손입니다 (시. 144:7-8).
“큰 물들”이 여기서 거짓들을 분명하게 표시한다; “외국인의 아들들” 역시 거짓들을 의미한다.

지금까지 “노아”, 또는 “노아”로 불린 거듭나는 사람을 다루어왔는데, 이들은 “방주” 안에 있었고, 물들 위에 “들어 올려져” 있었다. 지금부터의 주제는 물들 아래 있는, 즉 물들에 의해 가라앉혀진 태고 교회의 후손들일 것이다.

19, 20절. 물이 땅에서 극도로 거세졌다, 그리고 온 하늘 아래 있던 모든 높은 산들을 덮었다. 20 물은 십오 큐빗 위쪽에서 압도하고 있었다, 그리고 산들을 덮었다.
“그리고 물이 땅에서 극도로 거세졌다”란 거짓의 설득(persuasion)은 이런 식으로 불어남을, “온 하늘 아래 있던 모든 높은 산들을 덮었다”란 선행의 모든 선들이 소멸되었음을 의미한다. “십오 큐빗 위쪽에서 물들이 압도하였다, 그리고 산들을 덮었다”란 어떤 선행도 남아있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15”는 거의 어떤 것도 있지 않음을 의미한다.

지금부터 이 장의 끝까지에서 취급되는 주제가 절멸한 홍수 이전 사람들이다는 것은 묘사된 구절 속의 특이 사항들로부터 분명해진다. 이는 내적 의미 안에서 이 구절을 읽는 사람이라면 읽는 즉시 알 것이다. 이들은 실로 단어 하나만에서도, 또는 여러 단어들의 연결된 상황으로부터 금방 눈치챈다. 다른 주제들이 취해질 경우, 즉시 단어들이 달라진다, 또는 같은 단어들이라 해도 다른 연결을 짓는다. 그 이유는 단어들에도 영적 (평면의) 것에 잘 어울리는 것이 있는가 하면, 어느 단어는 천적 (평면의) 것에 어울리기도 하기 때문이다. 또는 이해력 측면에, 잘 어울리거나, 어떤 단어는 의지력 측면에 잘 어울린다. 예를 들면: 단어 황무함(desolation)은 영적 (평면의) 것들을 서술하고, 황폐함(vastation)은 천적 (평면의) 것을 서술한다; “성(city)”은 영적 (평면의) 것을, “산(mouuntain)”은 천적 (평면의) 것들을 서술하는 등등이다. 그리고 (아주 특이한 사항은) 히브리 언어에서 단어들이 단어들의 소리를 수단으로 아주 흔히 구별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 이유가 영적 등급에 속하는 것들 안에서 첫 세 모음들이 지배적이다, 그리고 천적 등급에 속해 있는 단어들에서는 마지막 두 모음들이 지배적이기 때문이다. 이 구절에서 다른 주제들이 취급된다는 것은 이미 말한 바 있듯 (서술의) 반복됨으로부터도 알 수 있다 (435, 683, 707, 734, 765, 782항 참조). 즉 앞 절에서 말한 바 있는 “그리고 물들이 땅 위에서 극도로 거세어졌고…”가 여기서 다시 말해진다. 변경(switch)이 있다는 사실은 뒤잇는 모든 것으로부터 알아내질 것이다.

물들이 땅 위에서 극도로 거세어졌다. 이는 거짓의 설득력들이 (극도로) 불어났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는 “물”에 관해 말해진 것으로부터, 그리고 “물들”에 관한 것으로부터 분명해진다. 즉 홍수, 또는 범람함의 물들이 거짓들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거짓들, 또는 거짓인 것을 (진리라고) 설득해주려 함이 더욱 기승을 부리기에 “물들이 극도로 거세어졌다”라고 말해진다. 원어에서 이 표현은 최상급 표현이다. (여기서) 나는 거짓들을 가지고 거짓된 약속들과 거짓된 설득력들을 의미하려 하고 있다. 그리고 이것들이 홍수 이전 사람들 사이에 광대하게 불어났음은 앞서 말한 바로부터 분명해질 것이다. 인간들이 그리워함(yearning)들에 진리들을 뒤섞을 때, 또는 진리들이 자기를 사랑함과 세상을 사랑함을 편들게 만들 때, (거짓된) 설득력은 광대하게 불어난다; 그 이유가 이런 식의 수 천 가지 방법들로 인간들은 진리들을 악용하고, 자기 사랑과 물질주의에 진리를 강제로 동의하게 하려 들기 때문이다. 거짓 원리에 흠취되어 자신의 사상 기반이 되게 한 누군가가 있다면 자기가 배워 얻은 학식을 다 동원해서라도, 게다가 말씀으로부터도 근거 삼으려 하지 않을 자가 누가 있겠는가? 자신의 거짓 원리를 확증하려 어떤 것들을 말꼬리(lay hold)로 삼지 않을 이교가 있겠는가? 아마 일치하지 않는 것을 강제로라도, 별 수단을 다 동원해 설명하고 비틀고 하여 자기의 거짓 원리들은 불일치가 아니다 우기지 않는 이교를 당신은 본 적이 있는가?
예를 들면, 선행의 선들 없이 신앙 만으로 구원이 있음이라는 원리를 채택한 자가 있다고 하자; 그는 말씀(the Word)으로부터 신학의 전체 체계를 짜낼 수 있을까? 그리고 이런 구절, “나무는 그것의 열매로 알려진다”, “선한 열매를 맺지 않는 모두 각각의 나무는 찍혀서 불에 던져진다”에 관한 구절에는 하등 관심이 없어 생각해보려 하지도 않고 건너뛰는가? (마. 7:16-20; 12:33; 또는 3:10). 육체가 바라는 것에 따라 사는 것보다 더 자신에게 쾌락을 주는 무엇이 있을까? 이런 욕구에 눈꼽만치의 선행도 뒤따라 주지 않는 진리를 보태어 가지는데도 구원은 여전히 가능할까? 인간이 (은근히) 막무가내로 편애하는 자기의 그리워함들이 그 인간의 의지력의 생명을 만들어 내고, 왜곡된 원리나 거짓된 설득력은 그 인간의 이해력의 생명을 만들어 낸다. 이 두 능력들이 하나를 만드는 때는 진리들, 또는 신앙의 교리물들이 그리워함들에 침수되는 때이다. 이리하여 모두 각각의 인간은 마치 혼이라도 되는 냥 그것들을 자신이 되게 만들어낸다. 이것은 사 후 그의 생명이 되어 있게 된다. 그러므로 참된 것을 아는 것 보다 인간에게 더 중요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우리가 참된 것을 알고, 알아낸 참된 것을 그대로 실행하는데 참된 것이 남용될 리 없다. 더구나 참된 것이 그리워함 안에 몽땅 침수되어 절멸하는 결과로 될 리가 없다. 영원히 사는 것에 심정의 초점을 맞추는 것 이상 우리가 무엇을 더 해야 한다는 말인가? 육체의 삶에서 자기 혼을 망가트리면, 그는 영원히 망가진 혼을 부여잡고 살아야 함을 누가 모를까?

전체 하늘 아래 있던 모든 산들이 덮혀졌다. 이는 선행의 모든 선들이 소멸되어졌음을 의미하는데, 이는 태고인들의 산들에 대한 의미로부터 분명해진다. 그들과 더불어 산들은 주님을 의미했다. 그 이유는 산들이 땅에서 보다 더 높은 장소이기 때문이고 그들이 산들에서 그분을 예배했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산들”은 천적 (평면의) 것들 (또는 “지극히 높은 것”들이라 불리기도 함)을, 그 결과 사랑과 선행을, 이로부터 천적 (평면) 인 사랑과 선행으로부터의 선들을 의미했다. 그리고 반대 의미에서, 말씀은 자만심(conceit, vainglorious)이 강한 사람도 “산”이라 일컬었고, 그러므로 자기 사랑 그 자체를 나타내는데 사용하고 있다. 마치 어떤 것들의 시작이 땅 위 넘어 승강된 것들로부터인 듯, 천국인 듯, 말씀에서 태고 교회 역시 “산들”에 의해 의미되어지고 있다.
“산들”이 주님을 의미하고, 그분으로부터 있는 천적 (평면의) 모든 것들, 사랑과 선행으로부터의 선들을 의미하는 것은 말씀 속에서 인용한 아래 구절로부터 분명해진다. 인용 구절들은 세부적 측면에서 의미되는 사항들이다. 그 이유가 말씀에 있는 모든 것들은 일반적, 세부적 모두에서 각 구절이 의도하는 주제에 따라 의미를 가지기 때문이다. 다윗서에서:
정의 안에서 산들이 평화를 가져올 것이다, 언덕들도 (그리 할 것이다) (시72:3).
위에서 “산들”은 주님을 사랑함을; “언덕들”은 이웃을 향한 사랑을 표시한다. 이는 태고 교회의 품질과 같다. 이 품성 때문에 태고 교회가 말씀에서 “산들”과 “언덕들”에 의해 의미되어진다. 에스겔서에서:
내 거룩함의 산에서, 이스라엘의 높음의 산에서, 주 여호비께서 말하신다,
거기서 전체 토지에 있는 이스라엘의 모든 가문들이 나를 섬길 것이다 (겔. 20:40).
위에서 “거룩함의 산”은 주님을 사랑함을; “이스라엘의 높음의 산”은 이웃을 향한 선행을 표시한다. 이사야서에서:
여호와의 집의 산이 산들의 꼭대기에 건립되고,
언덕 위 드높여 있을 날이 나중에 있을 것이다 (이. 2:2).
위에서 “산들”은 주님을 표시하고, 이로부터 천적 (평면의) 모든 것이 있다. 다시:
이 산에서 여호와 체바욷은 모든 백성에게 살진 것들로부터의 축제를 만들 것이다,
그리고 그분은 이 산에서 덮음의 얼굴을 제거하실 것이다 (이. 25:6, 7).
위에서 “산”은 주님을 표시하고, 이로부터 천적 (평면의) 모든 것이 있다.
다시:
그리고 모두 각각의 드높은 산 위에 있을 것이다, 그리고 모든 언덕, 강들,
물들의 시내들 위에 (있을 것이다) (이. 30:25).
위에서 “산들”은 사랑의 선들을 표시한다; “언덕들”은 선행의 선들을 표시하고, 이로부터 “강들과 물들의 시내들”인 신앙의 진리들이 있다. 다시:
너희는 노래를 가질 것이다. 마치 거룩한 축제를 지킬 때의 밤에서와 같다;
그리고 심정의 즐거움을 (가질 것이다), 마치 누가 이스라엘의 바위 쪽으로,
여호와의 산으로 피리를 가지고 갈 때와 같다 (이. 30:29).
위에서 “여호와의 산”은 사랑의 선들에 관련하여 주님을 표시한다; “이스라엘의 바위”는 선행의 선들에 관련하여 주님을 표시한다. 다시:
여호와 체바욷께서 시온산 위에서, 그리고
그로부터의 언덕들 위에서 싸우기 위해 오실 것이다 (이. 31:4).
위에서와 다른 구절에서도 “시온산”은 주님, 그리고 천적 (평면의) 모든 것과 사랑이 있는 모든 것을 표시한다; 그리고 “언덕들”은 더 낮은 등급의 천적인 것, 즉 선행인 것을 표시한다.
다시:
오 시온아, (너는) 좋은 소식을 가져다 준다, 너는 높은 산으로 올라가라;
오 예루살렘아, (너는) 좋은 소식을 가져다 준다, 네 음성을 힘차게 들어올려라 (이. 40:9).
“높은 산으로 오르는 것과 좋은 소식을 가져다주는 것”은 사랑과 선행으로부터 주님을 예배하는 것이다. 이는 가장 안쪽이다. 그러므로 “가장 높다”고도 불리운다, 그 이유는 가장 안쪽의 상태는 가장 높은 상태라고 불리우기 때문이다. 다시:
바위의 거주민들이 노래하게 하자, 그들로 산들의 꼭대기로부터 외치게 하자 (이. 42:11).
“바위의 거주민들”은 선행 안에있는 이들을 표시한다; “산들의 꼭대기로부터 외침”은 사랑으로부터 주님을 예배하는 것이다. 다시:
좋은 소식들을 가져다 주시고, 평화를 공표하시고, 선의 좋은 소식들을 가져다 주는
그분의 발이 산 위에 있음은 얼마나 아름다운지 (이. 52:7).
“산 위에서 좋은 소식들을 가져다 주는 것”은 사랑과 선행의 교리로부터 주님을 전파하는 것과 마찬가지 이다, 그리고 이것들로부터 그분을 예배하는 것이다. 다시:
산들과 언덕들이 당신 앞에서 노래를 일시에 쏟아낼 것이고,
들판의 모든 나무들이 손뼉을 칠 것이다 (이. 55:12).
위에서 “산들과 언덕들”은 사랑과 선행으로부터 주님을 예배함을; 그리고 거기로부터 파생된 신앙으로부터는 “들판의 나무들”이 표시한다.
다시:
나는 모든 나의 산들에 길들을 만들 것이다,
그리고 나의 큰 길들을 드높일 것이다 (이. 49:11).
위에서 “산들”은 사랑과 선행을 표시한다; 그리고 “길들과 큰 길들”은 거기로부터 파생된 신앙의 진리들을 표시하고, 그것들이 그들의 가장 깊은 안쪽과 같은 사랑과 선행으로부터 일 때, 이것이 “드높여진다”라고 말해진다. 다시:
나에게 신뢰를 두는 자는 토지를 상속 재산으로 소유할 것이다,
그리고 내 거룩함의 산을 상속받을 것이다 (이. 57:13).
위는 주님의 왕국을 표시하고, 그 왕국 안에는 사랑과 선행 밖에 없음을 표시한다. 다시:
나는 야곱으로부터 씨를 산출할 것이다, 그리고 유다로부터 내 산들의 상속자를
산출할 것이다, 그리고 내가 뽑은 (자)가 그것을 소유할 것이다 (이. 65:9).
위에서 “산들”은 주님의 왕국과 천적인 선들을 표시한다; 유다는 천적 (평면의) 교회를 표시한다. 다시:
그런고로 영원히 거주하는 높고 드높은 자들아, 이들의 이름은 거룩하다,
나는 높고 거룩한 장소에서 거주할 것이다 (이. 57:15).
위에서 “높은”은 거룩한 것을 표시한다; 그리고 이로부터 땅 위 넘어 그들의 높이 때문에, 산들은 주님과 그분의 거룩한 천적인 것들을 의미한다. 이런 이유로 주님은 시내산으로부터 법을 선포하셨다. 아래 구절에서 사랑과 선행이 주님에 의해서도 뜻해지고, “산들”에 의해, (이 구절이 포함된 마태. 24, 25장에서) 시대의 종말에 관해 이야기하신다. 그분은 말하신다:
그때 유다에 있는 자들은 산들로 도망하라 (마. 24:16; 눅. 21:21; 막. 13:14).
위에서 “유다”는 황폐된 교회를 나타낸다.

태고 교회가 산들 위에서 거룩한 예배를 드렸기 때문에 고대 교회 역시 그렇게 했다. 이로부터 그 시절의 모든 표현적 예배에서, 그리고 모든 민족들에서 산들 위에서, 그리고 산과 비슷해지게 높은 장소를 건설하여 제물을 바치는 것이 유행했다. 이는 아브람에 관련된 역사로부터 분명하다 (창. 12:1; 22:2); 그리고 성전 건축 이전의 유대인들에 관련해서 (신. 27:4-7; 여. 8:30; 삼상. 9:12-14; 19; 10:5; 왕상. 3:2-4); 민족들에 관련하여 (신. 12:2; 왕하. 17:9-11); 그리고 우상숭배하는 유대인들에 관련하여 (이. 57:7; 왕상. 11:7; 14:23; 22:43; 왕하. 12:3; 14:4; 15:3, 4, 34, 35; 16:4; 17:9-11; 21:5; 23:5, 8-9, 13, 15).

위 모두로부터, “물들로 산들이 덮혀짐”에 의해 의미된 것이 분명해졌을 것이다. 즉 거짓된 설득들, 이것이 선행의 모든 선을 소멸했다.

물들은 십오 큐빗 위쪽에서 압도했고, 산들을 덮었다. 이는 남아있는 선행은 하나도 없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15”는 거의 어떤 것도 있지 않을 만큼 적다를 의미함은 창. 6:15에서 살핀 “5”의 의미로부터 분명해진다. “15”는 말씀의 스타일(style)에서, 내적 의미에서, 5와 10으로 구성되는데, “5”는 적음을 의미하고; “10”은 리메인스를 의미한다. 이는 이 사람들과 더불어 어떤 리메인스도 남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그 이유가 거짓으로부터의 설득력들이 너무나 거세어져 그들은 모든 선을 소멸되게 했기 때문이다. 인간 안쪽에 저장된 리메인스에 관하여는 562-563, 571항에서 살폈는데, 거짓된 원리들, 더 나아가 거짓으로부터의 설득력들이 홍수 이전 사람들과 더불어 창궐했기 때문에, 이들이 꺼낼 수 없도록 (영구히) 감추어두는 방법으로 (내적 통로를) 닫으셨다. 만일 그들이 꺼낸다면, 그들은 곧바로 왜곡되게 했을 것이다. 그 이유가 모든 진리를 거절하고, 모든 거짓은 흡입할 뿐아니라 가까이 접근하는 모든 진리를 악용하는 것이 설득력들의 생명이기 때문이다.

21, 22절 “모든 육체, 즉 땅에서 기는 것, 새, 짐승, 그리고 야생 동물, 그리고 땅을 기는 모든 기는 것들, 그리고 모든 사람이 죽었다. 22 코로 생명들의 호흡을 하고 있는 모든 것, 마른 육지에 있었던 모든 것이 죽었다. “땅에서 기는 모든 육체가 죽었다”란 태고 교회의 마지막 후손에 해당되었던 이들이 소멸되었음을, “새도, 짐승도, 야생 동물도, 땅에서 기는 모든 기는 것”이란 그들이 지닌 설득력을 의미한다. “새”는 거짓된 것에 대한 애착을, “짐승”은 그리워함을, “야생 동물”은 쾌락을, 그리고 “기는 것”이란 물질적이고 지상적인 것들을 의미한다. 이상의 것들이 한 복합체 안에 있을 때 “모든 사람”이라 불리운다. “코로 생명들의 호흡을 하고 있는 모두”란 태고 교회 속에 있었던 이들을 의미한다. 이들은 생명인 사랑과 이 사랑으로부터의 믿음을 지녔었다. “마른 육지에 있었던 모두”란 더 이상 태고 교회가 지녔던 품질의 생명이 없음을 의미한다. 그들이 “죽었다”란 그들은 끝났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땅 위에서 기는 모든 육체가 죽었다. 이는 태고 교회의 마지막 후손에 속하는 이들이 소멸되었음을 의미하는데, 이는 뒤잇는 말로부터 분명해진다. 거기서 그들의 설득력들과 그들의 그리워함들에 관하여 묘사되어진다 (803, 806, 808항 참조). 우선 그들이 여기서 “땅 위를 기는 육체”라 불리우고 있다. 그 이유는 그들이 감각적이고 육체적(물질적인, corporeal) 수준으로 되어 갔기 때문이다. 감각적이고 육체적인 것들, 이미 말한 바 같이, 태고인들은 이것을 기는 것에 견주었다; 그러므로 “땅 위에서 움직이는 육체”가 말해질 때, 이는 오로지 감각적이고 물질적으로 치닫는 사람을 의미한다. “육체”는 일반적 측면에서 모든 인류, 그리고 특별한 측면에서는 감각적 인간을 의미한다는 것은 이미 살폈다.

여기서 주어진대로의, 홍수 이전 사람들에 대한 묘사로부터 태고인의 글쓰기 문체가 무엇이었는지, 예언적 문체는 무엇이었는지가 분명해진다. 여기로부터 이 장의 끝까지는 이 사람들을 묘사하고 있다. 이 구절에서는 그들의 설득력들에 관하여, 그리고 23절에서는 그들의 그리워함들에 관하여서 이다; 즉 그들은 먼저 그들의 이해력 에 속한 것들에 관하여, 그 다음 그들의 의지력에 속한 것들에 관하여 묘사된다. 물론 설득력이나 그리워함은 이해력과 의지력에 속한 것들은 실제로는 아니나 반대적 의미에서 이해력 측면과 의지력 측면이라 불릴 뿐이다. 다시 말해, 거짓으로부터의 설득력은 이해력에 속한 것은 결코 아니다. 그리워함도 의지력에 속한 것은 결코 아니다. 홍수 이전 사람들이 먼저 그들의 거짓 설득력에 관하여, 그 다음 그리워함들에 관하여 묘사되고 있다고 내가 말했는데, 그 이유는 21절에 포함된 것이 23절에서 반복되는데, 순서가 뒤바뀌었기 때문이다. 이것 또한 예언적 문체이다.
그 이유는 인간에게 두 생명들이 있기 때문이다; 하나, 이해력에 속한 것들; 다른 하나, 의지력에 속한 것들이다. 이 두 생명들은 서로로부터 완전히 구분된다. 인간은 이 둘 모두로부터 존재한다. 그리고 오늘날, 비록 그것들이 인간 안에서 분리된채로 있을지라도, 여전히 그것들은 이쪽에서 저쪽으로 흘러든다. 그리고 대부분을 위해서는 하나되어 있다. 그것들이 하나되는 것, 그리고 어떻게 그것들이 하나되는가가 많은 예증들에 의해 확고히 되고 명백히 만들어졌다. 인간이 이런 두 부분들, 즉 이해력과 의지력, 그리고 이쪽에서 저쪽 안으로 흘러듬에 의해 존재하기에, 인간이 말씀에서 묘사되어질 때, 인간은 이쪽 부분에 관하여, 그리고 다른 쪽 부분에 관하여 구분하여 묘사된다. 이런 이유로 같은 말이 다른 구절에서 반복된다. 반복됨이 없으면, 묘사는 불완전해진다. 여기서의 이해력과 의지력 측면의 경우는 다른 구절의 경우도 같다. 단지 그 문맥의 상황에 따라 그 주제로부터 발출되는 것에 일치하여 있을 뿐이다; 주제로부터, 즉 실지의 내용으로부터 분리된 어떤 것은 아무 것도 아니다는 말이다. 이런 이유에서 말씀 안에서도 각 구성하는 부분 안에도 전체와 비슷한 방법에서 묘사되고, 이 방법이야말로 묘사를 충만하게 한다.

설득력이 이 구절에서 먼저 취급되고, 23절에서 그리워함들이 취급된다는 것은 이 절에서 “새”가 먼저 언급되고 그 다음 “짐승”이 언급되는 것으로부터 분명해진다. 그 이유가 “새”는 이해력으로부터, 또는 추론으로부터 있는 것들을, “짐승”은 의지력으로부터 있는 것들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리워함들에 속하는 것들이 묘사될 경우, 23절 같이, “짐승”이 먼저 언급되고 그 다음 “새”가 언급된다; 그리고 말했던 대로, 이쪽 부분이 저쪽 부분으로 상호적으로 흐르고, 순서만을 뒤바꾸어 묘사하면두 부분에서 공히 충만한 묘사를 가진다.

새, 그리고 짐승, 그리고 야생 동물, 그리고 땅 위를 기는 모두 각각의 기는 것을 포함하여. 이것들은 그들의 설득력들을 의미하는데, “새”는 거짓인 것에 애착함을, “짐승”은 그리워함들을, “야생 동물”은 쾌락들을, “기는 것”은 육체적이고 지상적인 것을 의미하는 것은 “새”와 “짐승”을 다룰 때 이미 살폈다 “새들”이 이해력, 추론, 그리고 기억 속에 있는 지식에 속한 것을 의미하는 바, 그것의 반대되는 것 역시 의미한다. 즉 왜곡되고 악용된 추론, 거짓들, 거짓된 것에 애착함들을 의미한다. 홍수 이전 사람들로부터의 설득력들은 여기서 충분히 묘사되고 있다. 즉 그것들 안에 거짓된 것에 애착함, 그리워함들, 쾌락들, 육체적이고 지상적인 것들이 있다는 것이다. 이런 것들이 설득력들 내부에 있다는 것을 인간이 알아채지 못하는데, 그 이유는 거짓된 것을 원리라고, 거짓된 것으로부터의 설득력들을 믿으면서, 단순한 것, 하나의 일반적인 것만을 고집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실수를 많이 하고 있다. 그 이유는 사건의 경우마다 각각은 매우 다르다는 것을 간과했기 때문이다. 인간의 모두 각각의 애착도 모두 그의 이해력으로부터, 그리고 동시에 그의 의지력으로부터 그것의 본성과 존재를 끌어낸다. 다시 말해 인간 전체, 그의 이해력과 의지력 모두는 그의 각각의 애착 안에 있다는 말이다. 아주 사소한 애착의 범위 까지도 그 안에 있다.
이것은 많은 경험을 수단으로 나에게 분명하게 만들어졌다. 한가지만을 예로 들면, 저세상에서는 영들의 품질을 그의 생각의 단 하나의 관념(idea)으로부터도 알 수 있다. 실로 천사들은 누구를 응시만 해도 즉시 그의 품성이 무엇인지를 어떤 실수도 없이 꼭집어 즉시 알아보는 능력을 주님으로부터 가지고 있다. 인간 속의 모두 각각의 생각, 애착, 그것이 아주 사소해도 그것 안에는 그 사람의 형상과 모습이 담겨 있다. 즉 그의 이해력, 그의 의지력으로부터의 어떤 것이 가깝게 이든, 떨어져서 이든 현존하고 있다는 말이다. 이런 방법에서 홍수 이전 사람들의 끔찍한 설득력들이 이 구절에서 묘사되었다: 즉 그들 안에 거짓인 것에 애착함들, 악한 것에 애착함들, 또는 그리워함들, 또한 쾌락들, 마지막으로 물질적이고 지상적인 것들을 묘사해놓고 있다. 이 모든 것들이 이런 설득력들 내부를 채우고 있다; 그리고 이렇게 일반적 측면에서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개인들, 설득력들의 지극히 작은 것에 이르기까지에서 물질적이고 지상적인 것들이 세력을 떨치고 있다. 만일 누군가 거짓된 것으로부터의 한가지 원리, 또는 설득력 내에도 얼마나 많은 것들이 있는지 안다면, 금새 소스라치고 말리라. 이것은 지옥의 한 종류이다. 그러나 만일 그것이 순진으로부터, 또는 무지로부터 채용되고 있다면, 그 안의 거짓들은 쉽게 쫓아버려진다.

이 구절에 “모두 각각의 사람”이 첨가되어 있다, 이를 수단으로 위에 살핀 것들이 인간 안에 있음을 의미해주고 있다. 이는 앞서 진행하여 온 모두를 포함하는 일반적 결론내리는 구절이다. 이런 구절들은 자주 첨가되어진다.

코가 생명들의 숨의 호흡함 이었던 모든 것. 이는 코가 생명들의 숨의 호흡함이었던 태고 교회로부터 있는 이들을 의미하고, 이 생명들이란 사랑과 사랑에서 파생된 신앙임은 전에 말했던 바로부터 분명해진다. 태고인들 사이에서, 생명은 “코 안에 있는 숨”, 또는 “호흡함”에 의해 의미되었다. 호흡이라는 육체의 생명은 영적 (평면의) 것들에 상응하고, 심정의 운동(motion)은 천적 (평면의) 것들과 상응한다.
여기서 “코가 생명들의 숨의 호흡함이었던…”라고 말해진다. 그 이유는 홍수 이전 사람들이 취급되기 때문에서이다. 이들에게는 유전적으로 그들의 선조들로부터 천적 (평면)으로부터의 씨를 가졌으나, 소멸, 또는 질식되고 말았다. 이 말들 안에는 감추여놓인 더 깊은 의미 또한 있다. 이에 관하여는 앞에서 살폈다. 즉 태고 교회 사람은 내적 호흡을 가졌다는 것, 이 호흡은 천사들의 것과 일치한다는 것인데, 이에 관하여는 주님의 신성한 자비로 차 후 살핀다. 이 호흡은 내적 인간들의 모든 상태들에 일치되게 다양해졌다. 그러나 시간의 흐름에서 이 호흡은 그들의 후손들 안에서 바뀌어갔다. 결국 마지막 세대에서는 이 호흡이 지닌 천사같은 것이 소멸되기 까지 바뀐 것이다. 그러자 그들은 천사같은 천국과 더 이상 호흡할 수 없었다. 이것이 그들이 절멸되는 진짜 원인이다; 그러므로 지금 말해지는 바, 그들의 “기한이 만료되었다(expired)”라고 말해진다. 그리고 코가 생명들의 숨의 호흡이었던 자들이 “죽었다”라고 말해진다.
이 때로부터 내적 호흡은 중단되었다, 그리고 천국과의 교류도 끊겼다. 그리고 이로 말미암아 천적 (수준의) 지각도 종료되었다. 그 대신 외적 호흡이 계승되었다. 천국과의 교류가 중지되었기 때문에, 고대 교회, 또는 새로운 교회의 사람은 더 이상 태고인 같은 천적 (평면의) 인간일 수는 없고, 영적 (평면의) 인간(은 되어질 수 있었다). 이에 관하여는 주님의 신성한 자비로부터 차 후 살핀다.

마른 [토지]에 있던 모든 것. 이것은 더 이상 생명이 없는 것, 그들의 죽어감은 그들이 기한이 다 찼다는 것을 의미함은 살펴 온 것으로부터 지금 뒤잇고 있다. 사랑과 신앙의 모든 생명이 소진되었기 때문에 “마른 [토지]”라고 말해진다. “마른 [토지]”란 거기에 물이 없다는 것, 즉 영적 (평면의) 것, 더욱이 천적 (평면의) 어떤 것도 없다는 말이다. 마치 영적, 천적 (평면의) 모든 것이 질식한 것과 같다. 이러한 상황의 이해는 조금만 주의를 기울이면 자신들의 많은 경험에서 알 수 있을 것이다. 최고로 거짓인 것 일지라도 그 견해들로 마음에 안착 되어버린 것들에 기울어지기 시작하면, 고집 셈이 들러붙어 제아무리 거짓에 반대되는 것을 들이대도 꿈쩍하지 않고 듣는 것 조차 불쾌해 한다; 그리하여 자기들 눈 앞에 진리가 버젓이 놓여도 자신들에게 그것들이 알려지게 내버려두지도 않는다. 한술 더 떠서 거짓된 것이 신성하다는 생각까지 얹어 숭배하기 까지 한다. 그리하여 모든 진리는 퇴짜를 놓고, 자기들이 뒤집은 진리는 용인하는 바, 결국 공상들 안에 침수되는 것 뿐이다. 여기서 풀도, 물도 없는 “마른 [토지]”로 의미되고 있다. 에스겔서에서:
나는 강들을 마르게 만들 것이다, 그리고 토지를 악인들의 손에 팔 것이다;
그리고 나는 토지를 황무하게 만들 것이다, 그리고 거기로부터 있는 가득함도
황무하게 할 것이다 (겔. 30:12).
“강들을 마르게 만드는 것”은 영적인 어떤 것이 더 이상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예레미야에서:
너의 토지는 마른 [토지]가 되어진다 (예. 44:22).
위에서 “마른 [토지]”는 황무해지고 쓸모 없어진 토지, 그리하여 진리와 선에 관한 어떤 것이 더 이상 없음을 표시한다.

23절. 그리고 그분은 지면에 있었던 모든 물질, 즉 사람으로부터 짐승까지, 기는 것까지, 하늘의 새들까지 파괴하셨다. 그래서 그것들은 땅으로부터 파괴되었다. 그래서 노아 만이, 그와 함께 방주에 있었던 것들 만이 남았다. “그분이 파괴하신 모든 물질”이란 자기를 사랑함 속에 있는 그리워함들을 의미한다. “지면의 얼굴 위에 있던 것”이란 태고 교회의 후손을 의미한다. “사람으로부터 짐승까지, 기는 것 까지, 하늘들의 새까지”란 그들의 악의 본성을 의미한다. 즉 “사람”은 악의 본성 자체를, “짐승”은 그리워함들을, “기는 것”은 쾌락을, “하늘들의 새”는 거짓들을 의미한다. “그들이 땅에서 파괴되었다”란 결말났음, 즉 태고 교회가 기한이 만료되었음을 의미한다. “노아 만이 남았다, 그리고 방주 안에 그와 함께 있던 것들 만이 남았다”란 새로운 교회(the new church)를 구성했던 그들은 보존되었음을 의미한다. “그와 함께 방주에 있던 것들”이란 새로운 교회 속에 있었던 모든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분은 모든 물질을 파괴하셨다. 이는 자기를 사랑함 속에 있는 그리워함들을 의미하는데, 이는 뒤잇는 것으로부터 분명해진다. 거기서 그것들이 표현물들을 수단으로 묘사되고 있다. “물질(substance)”은 의지로부터 있는 것들을 서술하는데, 그 이유는 인간과 더불은 모든 것들은 의지로부터 일어나기 때문이다. 즉 의지로부터 존재 안으로 와져서 실존한다는 말이다. 의지력이 인간의 참 물질, 또는 인간 자체이다. 홍수 이전 사람들의 그리워함들은 자기를 사랑함 속에 있었다. 가장 보편적인 두 종류의 그리워함들이 있다. 하나는 자기를 사랑함에 속하는 종류와 세상을 사랑함에 속하는 종류이다. 인간은 자기가 사랑하는 것만을 바란다. 그러므로 그리워함들은 그의 사랑에 속한다. 이 사람들과 더불어 자기를 사랑함이 통치한다. 결과적으로 그리워함들이 통치한다. 그 이유가 그들은 자신들을 너무나 지독하게 사랑했는 바, 그들은 자신들이 신들이라고 믿게 되었고, 더 나아가 자신들보다 더 높은 신은 없다고 까지 했다; 그리고 이것이 그들의 설득력이었다.

지면의 얼굴 위에 있는 것. 이는 태고 교회의 후손을 의미하는데, “지면”이 교회임으로부터, 그러므로 이 교회 속에 있는 것으로부터 분명해진다 (386, 566-567항 참조). 여기서 “지면의 얼굴 위에 있는 모든 물질”이 “파괴되었다”라고 말해졌을 때, 그 의미는 태고 교회에 속한 이들, 그리고 그들 품성 속에 있는 이들이 파괴되었다 이다. 여기서 “지면”이라 말해지는데, 21절의 경우 “땅”이라 말해진다. 그 이유는 교회는 이해력 측면에 속한 것으로는 결코 서술될 수 없고, 의지력에 속한 것이어야 서술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종교적 지식과 그것에 수반되는 합리적 설득력들은 의지력에 속하는 선행만이 교회, 또는 교회인을 구성한다. 필수적인 모든 것은 의지력으로부터 있다; 결과적으로 교리적인 것이 교회를 만들려면, 일반적으로, 세부적으로 반드시 선행을 주목하고 있어야 한다. 그 이유가 선행이 교리의 목적이기 때문이다. 이 목적으로부터 어떤 종류의 교리인지, 그리고 그것이 교회로부터 인지 아니지도 분명해진다. 주님의 교회, 이는 마치 천국들에서 주님의 왕국같이 사랑과 선행으로만 구성된다.

사람과 짐승 모두, 그리고 기는 것, 그리고 하늘들의 새. 이 말들이 그들의 악의 본성을 의미하는 것; “인간”은 그 본성 자체; “짐승”은 그리워함들을; “기는 것”은 쾌락을; 그리고 “하늘들의 새”는 거기로부터 파생된 거짓들을 의미하는데 앞에서 설명이 있었으므로 세부적 설명은 생략한다.

그리고 그것들은 땅으로부터 파괴되었다. 이것이 결말이다는 것, 즉 태고 교회는 기한이 만료되었다는 것; 그리고 “노아 만이 남았다, 그리고 방주 안에 그와 더불어 있던 것만이 남았다”는 새로운 교회를 구성한 그들은 보존되어졌다가 의미된다는 것; 그리고 “방주 안에 그와 더불어 있었던 것”에 의해서는 새로운 교회 속에 있던 모든 것들이 의미되는데, 더 긴 설명은 필요치 않을 것이다.

24절. 그리고 물은 일백 오십 일 동안 거세어져 있었다. 이는 태고 교회의 마지막 한계를 의미한다. “150일”은 마지막 한계, 그리고 처음을 의미한다.

이는 태고 교회의 마지막 한계를, 그리고 “150”은 마지막 한계, 그리고 처음을 의미한다는 것을 말씀 안에서의 경우, 자주 등장하는 단순한 숫자에 비해 적절히 확증하는 것이 쉬울 것 같지는 않다. 그럼에도 20절에서 살핀 “15”로부터 분명해진다. “15”의 경우, 거의 어떤 것도 있지 않을 만큼 적다를 의미한다; “150”의 경우, 15에 10을 곱해 얻는 방식으로 구성되고 있다. 10은 남아 있는 흔적(remaining trace, 또는 remains)을 의미한다. 적은 것을 곱하는 것(곱하여 적어지는 것), 예를 들면, 1/2을 곱하면(1/2×1/2) 1/4로 줄어가는… 1/10 하는 식으로 계속 줄어저 가게 하는 곱하기이다. 그리하여 거의 아무 것도 있지 않게 되는 것, 결과적으로 끝장, 마지막 한계가 되는 것이다. 숫자 150은 8:3에서도 등장한다. 거기서, “물들이 150일의 끝에서 줄어들었다”라고 말해지는데, 같은 의미이다.
말씀에서 언급된 숫자들은 글자의 것으로부터 완전하게 (분리된 의미인) 추상적 측면에서 의미를 찾아서 이해되어야 한다. 숫자들은 글자 의미에 있는 역사적 시리즈를 함께 연결하기 위해서만 도입되어진다. 그런고로 “일곱”이 발생하는 곳에서 그것은 거룩한 것을 의미한다. 그리하여 숫자에 따라 자주 붙는 말들, 즉 치수나 시간들로부터서는 완전히 동떨어져 있다. 그 이유가 내적 의미를 지각하는 천사들은 치수나 시간 같은 것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없고, 숫자가 가리키는 것은 더 더욱 모른다; 그럼에도 천사들은 말씀이 인간에 의해 읽혀질 때, 그 말씀을 충분하게 이해하고 있다. 천사들은 말씀 어느 곳에서나 숫자가 읽혀질 때, 그들은 숫자라는 생각을 가질 수 없고, 숫자가 의미한 것에 대한 생각을 가진다. 천사들의 경우, 그들은 이 구절의 숫자에서도 그것이 태고 교회의 마지막 한계를 표시한다고 이해하고 있다; 그리고 다음 장 3절에서는 고대 교회, 또는 새로운 교회의 처음 한계를 표시한다고 이해한다.

창세기 해설 제 6장

제 6 장

성경: 6 장 1-8절

1 사람이 지면의 얼굴에서 그 자신을 늘려가는 것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들에 게서 딸들이 태어났다.
2 그리고 하느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을 보니 그들이 선 이었다, 그리고 하느님의 아들들은 자기들이 선택한 모든 것을 그 자신에게 아내로 취했다.
3 그리고 여호와께서 말하셨다, 나의 영은 사람을 영원히 타이르지 않으리라, 그 이유 는 그는 육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의 날들은 일백 이십 년 이리라.
4 그 당시, 땅에 네피림이 있었다. 그리고 특히 하느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에게 들어간 이후, 그리고 그들이 그들에게 낳아 주었는데, 네피림과 똑같은 용사가 되었 고, 이 용사들은 옛날에 있었고 유명한 사람이었다.
5 그리고 여호와께서는 사람 속의 악이 땅 위에 번창했고, 그리고 그의 심정 속의 생 각의 모든 상상들이 매일 악할 뿐임을 보셨다.
6 그리고 이것은 여호와께서 사람을 만드신 것을 후회되게 했다, 그리고 그분으로하 여금 그분의 심정에서 몹시 슬퍼하게 했다.
7 그리고 여호와께서 말하셨다, 나는 내가 지면의 얼굴에 창조했던 사람을 파괴하리 라. 사람과 짐승, 기는 것들, 하늘의 새를 파괴하리라. 그 이유는 나는 내가 그것들 을 만든 것을 후회했기 때문이다.
8 그리고 노아는 여호와의 눈에서 은총을 발견했다.

각 절의 내적 의미

1절. 사람이 지면의 얼굴에서 그 자신을 늘려가는 것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들에게서 딸들이 태어났다. “사람”은 여기서는 그 당시 존재하던 인류의 종족을 의미한다. “지면의 얼굴”은 교회가 있었던 모든 지역을 의미한다. “딸들”은 이 사람의 의지에 관련되는 것들, 결과적으로 그리워함(yearning)을 의미한다.

“사람”에 의해 그 당시 존재한 인류 종족, 실로 악 이었던 종족, 썩어 있었던 종족이 의미된다는 것은 3절, 즉 “내 영은 영원히 사람을 타이르지 않을 것이다, 그 이유가 그가 육이기 때문이다”로부터 나타난다. “사람 속의 악이 번창했고, 그의 심정 속의 생각들의 상상은 오로지 악 이었다” (5절). “나는 내가 창조한 사람을 파괴할 것이다” (7절); 그리고 다음 장 (7:21-22)에서, “모든 육은 죽었다, 땅에서 기었던 것, 코로 생명들의 호흡을 하던 모든 것이 죽었다.” 사람에 관련해 이미 말했던 바, 주님 만이 사람이시다는 것, 그리고 그분으로부터 모든 천적 인간, 또는 천적 교회가 “사람”이라 불리운다. 이로부터 여타 다른 교회들도 모두 사람들이라 불리운다: 개개인의 차원에서도, 무슨 신앙이든 상관없이 야수로부터 구별되고 사람되기는 교회의 경우와 마찬가지 이다. 주님으로부터 있는 것, 즉 리메인스를 가짐을 통하여를 제외하면 사람은 사람이 아니고, 야수와 구별되지 않는다. 리메인스가 우리를 사람이라 불리도록 하는 것을 가능하게 한다, 그리고 리메인스가 이것을 가능하게 하고, 리메인스가 주님의 것이기 때문에, 다시 그것은 우리의 상태가 심히 악하다 해도 주님으로부터 우리로 하여금 사람의 이름을 획득하게 한다. 다시 말해, 우리가 리메인스를 가지지 않으면 사람일리 없고 어쩌면 야수 보다 더 하위일지 모른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다.

“지면의 얼굴들”은 교회가 있는 모든 지역을 의미한다는 것은 “지면”의 의미로부터 분명해진다; 그 이유가 말씀은 “지면(ground)”과 “땅(earth)”을 정밀하게 구분하기 때문이다; “지면”은 교회를 의미한 어디이든, 또는 교회에 속하는 어떤 것이다; “지면”으로부터 “사람”, 또는 “아담”이 오고, 아담은 “지면”을 뜻한다; “땅”은 다양한 장소에서 교회가 없음, 또는 교회에 속하는 어떤 것이 없음이 뜻해진다. 예를 들면, 1장에서는 “땅”만이 명명되고 있다, 그 이유는 아직까지는 교회, 또는 거듭나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2장의 경우, “지면”이 처음 언급된다, 그 이유는 교회가 있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여기서도 말해지고, 다음 장에서(7:4, 23), “모든 물질은 지면의 얼굴로부터 파괴될 것이다”에서도 “지면”은 교회가 있는 지역을 의미하고 있다; 그러나 창. 7:3에서 막 창조되어져야 할 교회에 관해 말하시면서, “지면의 얼굴 위에서 씨가 살아있게 보존하는 것”이 말해진다. “지면”은 말씀 어느 곳에서나 같은 의미를 가진다; 이사야서를 보자:
여호와께서 야곱 위에 자비를 가지실 것이다, 그리고 아직은 이스라엘을 선택하실
것이다, 그리고 그들을 그들 자신의 지면 위에 놓으실 것이다, 그리고 백성들이
그를 데려 갈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장소로 그들을 데려 올 것이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가문은 여호와의 지면 위에서 그것들을 상속 받을 것이다 (이. 14:1-2),
만들어져 있었던 교회에 관해 말하신 것이다; 이에 반해 같은 장에서 교회가 없음이 “땅”이라 불린다 (이. 14:9, 12, 16, 20-21, 25-26).
다시:
그리고 유다의 땅은 이집트에게 공포일 것이다; 그 날에 가나안의 입으로 말하는
다섯 성이 이집트의 토지에 있을 것이다 (이. 19:17-18),
위에서 “지면”은 교회를 의미한다, 그리고 “토지”는 교회가 없는 곳이다. 다시:
땅은 술취한 자 같이 앞 뒤로 휘청거릴 것이다; 여호와께서 높은 곳에서 높은 자의
군대 위에 방문하실 것이다, 그리고 지면 위에 있는 지면의 왕들 위에 방문하실 것이다.
(이. 24:20-21).
예레미야에서:
닳아 해진 지면 때문에, 그 이유는 땅 위에 비가 없기 때문에, 농부는 부끄러워할
것이다, 그들은 자기들의 머리를 덮을 것이다, 그렇다, 암사슴이 들판에서
새끼를 낳았다 (예. 14:4-5),
위의 “땅”은 “지면”을 포함하는 땅이다, 그리고 “지면”은 “들판”을 포함하는 지면이다.
같은 예언서에서:
그분은 이스라엘의 후손을 북쪽의 토지로부터, 내가 그들을 몰아낸 모든 토지들로부터
데려왔다, 그리고 그들은 그들 자신의 토지에서 거주할 것이다 (예. 23:8),
위에서 “토지”와 “토지들”은 교회들이 없는 곳이다; “지면”은 교회가 있는 곳, 진정한 예배가 있는 곳이다. 다시:
나는 예루살렘의 남은 자들을, 이 토지 안에 남은 그들을, 그리고 이집트에 거주하는
그들을 줄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들을 폭동에 넘길 것이다, 그 이유는 악이
땅의 모든 왕들에게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검을, 기근을, 그들 사이에 염병을
보낼 것이다, 하여 그들이 내가 그들에게 주고, 그들의 선조에게 준 지면으로부터
싹쓸어 사라질 때까지 보낼 것이다 (예24:8-10),
위에서 “지면”은 교리와 교리에서 파생된 예배를 의미한다; 그리고 이와 마찬가지가 예. 25:5에도 있다.
에스겔서에서:
나는 너희가 흐트러져 있어 왔었던 토지들(lands)로부터 너희를 그러모을 것이다,
그리고 내가 너희를 이스라엘의 토지 안으로 다시 데려올 때, 내가 너희 조상에게
주려고 내 손으로 들어올린 토지 안으로 데려올 때, 너희는 내가 여호와인 줄을
알 것이다 (겔.20:41-42),
위에서 “지면”은 내적 예배를 의미한다; 내적 예배가 없을 때 “토지”라 불리운다. 말라기서에서:
나는 너를 위하여 너를 소멸되게 하는 그를 견책할 것이다, 그리고 그는 지면의 열매를
너를 위해 썩지 않게 할 것이고, 포도나무가 들판에서 너를 위하여 빼앗김을
당하지 않게 할 것이다. 하여 모든 민족들이 너를 복되다 부를 것이다,
그 이유가 너는 매우 기쁜 토지일 것이기 때문이다 (말. 3:11-12).
위에서 “토지”는 (담는) 용기(container)를 표시한다, 그러므로 이것은 인간임이 분명하다. “지면”이 교회, 또는 교리를 표시할 때, 인간이 “토지”라 불리우고 있다.
모세의 책에서:
노래하라, 오 너희 민족들아, 그의 백성들아, 그분은 그분의 지면을 위하여,
그분의 백성을 위하여 죄씻음을 만드실 것이다 (신. 32:43),
위에서 이방인들의 교회가 분명하게 의미되는데, 이것이 “지면”이라 불리운다. 이사야서에서:
아이가 악을 거절하고 선을 선택하는 것을 알기 앞서, 지면은 버려짐을 당해
있을 것이고, 이것을 너희는 양쪽의 왕들의 면전에서 증오할 것이다 (이. 7:16),
위는 주님의 강림을 말하고 있다; “지면이 버려짐을 당해 있을 것”은 교회, 또는 신앙의 진정한 교리를 표시한다. “지면”과 “들판”은 씨가 뿌려짐으로부터 그렇게 불려진다는 것은 분명하다. 이사야서에서:
그때에 내가 지면에 뿌릴 네 씨에게 비를 주실 것이다; 지면 위에서 노동하는
수소들과 어린 나귀들 (이. 30:23-24).
그리고 요엘서에서:
들판은 황폐해 있다, 그리고 지면은 슬퍼했다,
그 이유는 곡식이 못쓰게 되었기 때문이다 (욜. 1:10).
그러므로 “사람”은 히브리어에서 “아담”이라 불리우고, “지면”은 교회를 의미함이 분명하다.

진정한 신앙의 교리 안에서 훈육된 이들이 사는 모든 지역이 교회의 지역이라 불리운다; 마치 가나안의 토지, 유대 교회가 거기 있었을 때이고, 지금의 경우 유럽 지역, 기독교가 있는 것과 같다; 이 지역 바깥의 토지나 지역들은 교회의 지역, 또는 “지면의 얼굴들”이 아니다. 홍수 이전 교회가 있던 곳은 에덴의 동산에서 흘러나온 강들이 에워싼 토지들로부터 나타날런지 모른다. 이를 수단으로 말씀의 여러 장소에서 가나안의 토지의 경계들이 묘사되고 있다; 또한 “토지 안에” 있었다는 네피림에 관해 이어지는 구절로부터도; 그리고 이 네피림이 가나안의 토지에 거주했고 이들로부터 이다는 아낙의 후손들을 언급한 구절로부터도 알 수 있을 것이다 (민. 13:33).

“딸들”이 이 인간의 의지로부터 있는 것, 결과적으로 그리워함(yearning)을 의미하는 것은 창. 5:4에서 “아들들과 딸들”에 관해 말했던 바로부터 알 수 있을 것이다. 그 구절에서, “아들들”은 진리들을, 그리고 “딸들”은 선들을 의미하고 있다. “딸들”, 또는 선들은 의지로부터 있다. 그러나 인간이 존재하는 것은 그의 이해함이 존재하는 것이고, 그의 의지가 존재하는 것과 같다. 고로 “아들들과 딸들”이 존재하는 것이다. 현재의 구절은 부패된 상태의 인간을 다루고 있다. 하여 그는 의지가 없고 의지 대신 탐욕이 있을 뿐이다. 이 탐욕이 당사자가 상상하기로는 그의 의지인 것이어서 그렇게 불리워진다. 문장에서 서술되는 것은 서술되는 것의 품질과 일치되기 마련이다. 사람으로부터 출생한 딸들이 여기서 서술되는 바, 딸들도 부패된 인간이다.
“딸들”이 의지로부터의 것들을 의미하지만, 거기에 선으로부터의 의지가 없다면 그 의지는 의지가 아니라 그리워함(yearning)에 불과하다; “아들들”이 이해력으로부터의 것들을 의미하지만, 진리를 이해함이 없을 경우, 그 이해력은 공상에 불과하다. 여성 섹스(female sex)의 경우, 의지, 또는 탐욕이 이해력 보다 더 그들 안에서 지배하도록 만들어져 있다. 여성들의 기질의 경향이 이러하고, 그것의 본성이 이러하다. 이에 비해 남성의 경우, 지성, 또는 이성이 마음을 우선적으로 통치한다. 이로부터 두 이성의 결혼은 모두 각각의 인간 안에서 의지와 이해함의 결혼과 같다; 본문 당시 선으로부터의 의지는 없으나, 아직은 지성적인, 또는 합리적인 어떤 것은 주어질 수 있었는데, 이런 이유로 유대 교회에서 아내는 순종하고, 남편의 특권을 법제화 해 둔 이유이기도 하다.
2절. 그리고 하느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을 보니 그들이 선 이었다, 그리고 하느님의 아들들은 자기들이 선택한 모든 것을 그 자신에게 아내로 취했다.
“하느님의 아들들”은 신앙의 교리적인 것들을 의미한다. “딸들”은 그리워함을 의미함은 이미 말했다. “하느님의 아들들은 사람의 딸들이 선 이었다고 보면서, 자기들이 선택한 모든 것을 그 자신에게 아내로 취했다”란 신앙의 교리적인 것들이 그 자체를 그리워함들과 결합시킨 것, 사실상 그리워함이 무엇이었든 모두 교리적인 것들과 결합시켰다는 말이다.

“하느님의 아들들”에 의해 신앙의 교리적인 것들이 의미되는 것은 “아들들”의 의미로부터 분명해지는데, 이는 5장 4절에서 살폈다. 거기서 “아들들”은 진리들을 의미했다. 교회의 진리들은 교리적인 것들이다. 교리적인 것들은 그 자체에서는 진리들인데, 그 이유는 여기서 다루는 이들은 이 교리들을 태고인들로부터 전설(tradition, 구전)을 수단으로 가졌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것들이 “하느님의 아들”이라 불리우고 있다; 그것들이 관계적 차원에서 그렇게도 불리운데, 그 이유는 그리워함이 “사람의 딸들”이라 불리우기 때문이다. 이 교회인의 품질이 여기서 묘사되는데, 즉 그들은 거룩인 것인 교회의 진리들을 그리워함 안에다가 침수시켰다. 그리하여 그 거룩한 진리들을 더럽혔다; 그리고 이 방법 안에서 그들은 자기들을 매우 강하게 설득했던 원리들까지 확증해 버렸다. 이런 일이 어떻게 발생했을까를 짐작해 보려면 아마 각자 자신 속이나 타인 속에서 이런 현상이 지나가는 것을 주목하면 쉽게 가능할지 모른다: 어떤 주제에 관련하여 자신을 설득하는 이들의 경우, 그는 사람들이 진리이다고 상상하는 것, 필요하면 사람들이 주님의 말씀 안에 포함되었다고 발견함을 수단으로 해서라도 자신을 설득한다; 그들이 받은 원리들에 기우는 한편, 설득도 되어가는데, 그들은 모든 것을 그 주제에 동의하고 좋아하게 만든다. 이에 더하여 자기를 사랑함의 영향 아래 더 있을 수록 그는 설득된 주제를 더 견고하게 붙잡는다. 이러한 인종(race)에 관한 것은 주님의 신성한 자비로부터 차 후 더 살필 것이다. 묘한 이야기이지만, 우리가 그들의 무서운 설득들을 취급할 때, 발견되는 것은, 그들이 추론들을 수단으로 해서 흘러드는 것을 결코 허용하지 않고 오직 그리워함을 수단으로 했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그들은 현존하는 영들 안에서 합리적으로 있는 모든 것을 죽인다는 것이다. 이로부터 “하느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을 선 이었다고 보면서, 그들이 선택한 모두로부터 아내들로 자신들에게 취했다”는 구절의 의미가 나타난다, 즉 그들은 그들의 그리워함들에, 사실상 어떤 그리워함이었든지 신앙의 교리들을 결합시켰다는 것이다.

인간이 자기의 신앙의 교리들을 사악한 그리워함들에 침수시키는 품성을 지닐 때, 그는 진리들을 모독한다, 그리고 자신으로부터 리메인스들을 빼앗긴다. 설사 그것들이 남아있다 해도 생산성이 없다. 그 이유가 리메인스가 산출되어 보았자 모독되어 있는 것들에 의해 다시 모독되기 때문에 산출이 있으나마나 이다. 말씀에 대한 모독들은 마치 (피부의) 경결을 생산한다. 이 경결이 폐쇄(obstruction)의 원인이다. 그리고 리메인스의 선들과 진리들을 흡수해 버린다. 그러므로 비록 거짓 원리들 안에 있는 이들이 주님의 말씀이 진리들임을 믿지 않을지라도, 사람들이 주님의 말씀을 모독하는 짓은 피하게 하는 것이 상책인데, 그 이유는 말씀 안에 영원한 생명이 있기 때문이다.

3절. 그리고 여호와께서 말하셨다, 나의 영은 사람을 영원히 타이르지 않으리라, 그 이유는 그는 육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의 날들은 일백 이십 년 이리라.
“나의 영이 사람을 영원히 타이르지 않으리라고 여호와께서 말하심”이란 사람을 더 이상 전과 같은 방법으로 인도하시지 않음을 의미한다. “그가 육체(flesh)이기 때문이다”란 그가 물질적인(corporeal) 인간이 되었기 때문임을 의미한다. “그의 날들은 일백 이십 년 이리라”란 그는 신앙으로부터의 리메인스(remains)를 가져야만 할 것임을 의미한다.

내 영은 인간을 영원히 타이르지 않을 것이라고 여호와께서 말하심에 의해 인간은 더 이상 과거와 같은 방법으로 인도하시지 않으실 것임을 의미한다는 것은 앞서 말한 대목과 뒤잇는 구절로부터 분명해진다. 앞의 구절에서, 인간들은 자신들의 신앙의 진리, 또는 교리들을 그리워함들에 침수시킴을 통하여 그들은 더 이상 타일러 질 수 없게 되었다는 것, 즉 악이 무엇인지 더 이상 알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진리와 선을 지각하는 모든 능력이 그들의 설득들을 통하여 소멸되었는 바, 자기들의 설득들에 일치할 때만 그것이 진리이고 선이라고 믿게 된 것이다. 홍수 이후 교인들은 아주 다르게 되었다. 그들과 더불어서는 양심이 지각의 자리를 계승하였다. 이를 통하여 그들은 타일러 질 수 있었다. “여호와의 영이 질책하심(reproof)”은 내향의 지령, 지각, 또는 양심을 의미한다; 그리고 “여호와의 영”은 참되고 선한 것의 유입을 의미 한다; 이사야서를 보자:
나는 영원히 다투지 않을 것이다, 나는 영원히 화내지 않을 것이다, 그 이유는
영이 내 앞에서 궤멸하고 내가 만든 혼도 (그러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 57:16).

“육(flesh)”은 인간이 물질적이 되어갔음을 의미한다는 것은 말씀에서 육의 의미로부터 나타난다. 말씀에서 육은 일반적으로는 모두 각각의 인간, 그리고 특별하게는 물질적 인간을 의미하는데 사용되어진다. 모두 각각의 인간을 의미하기 위해 사용되는 경우를 보자. 요엘서에서:
나는 내 영을 모든 육 위에 쏟을 것이다, 그리고
너의 아들들과 딸들이 예언할 것이다 (욜. 2:28),
위에서 “육”은 인간을 의미한다, 그리고 “영”은 주님으로부터 진리와 선의 유입을 의미한다. 다윗서에서:
당신께서는 기도를 들으십니다, 당신에게 모든 육이 나아올 것입니다 (시. 65:2),
위에서 “육”은 모두 각각의 사람을 표시한다. 예레미야에서:
인간을 신뢰하는 사람에게 저주가 있다, 그리고 육이 그의 팔을 만든다 (예. 17:5),
위에서 “육”은 인간을 의미한다, 그리고 “팔”은 힘(power)이다. 에스겔서에서:
모든 육이 안다는 것 (겔. 21:4-5).
스가랴에서:
잠잠히 있으라, 모든 육이여, 여호와 앞에서 (슥. 2:13),
위에서 “육”은 모두 각각의 인간을 표시한다.
물질적 인간을 특별하게 의미하는 것의 경우를 보자. 이사야서에서:
이집트인은 인간이지 사람이 아니다, 그리고
그의 말(horse)들은 육이지 영이 아니다 (이. 31:3),
위 구절에서, 그들의 기억 속의 지식은 물질적임을 의미하고 있다; “말들”은 이 구절, 그 밖의 구절에서도 합리성을 표시한다. 다시;
그가 오른 손을 움추릴 것이다, 그리고 배고플 것이다; 그리고 그는 왼손에서
게걸스럽게 먹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만족해지지 않을 것이다;
그들 모든 이가 자기 자신의 팔의 육을 먹을 것이다 (이. 9:20),
인간의 자기 자신은 모두 물질적임을 의미하고 있다. 이사야서에서:
그는 혼으로부터, 그리고 육에 이르기까지 살라질 것이다 (이. 10:18),
위에서 “육”은 물질적인 것들을 의미한다. 다시:
여호와의 영광이 밝히 알릴 것이다, 그리고 모든 육이 그것을 함께 볼 것이다;
음성이 말했다, 외쳐라; 그리고 그는 말했다, 내가 무엇을 외칠 것인가?
모든 육은 풀이다 (이. 40:5-6),
위에서 “육”은 물질적인 모두 각각의 사람을 의미한다.
이사야서에서:
불 안에서 여호와께서는 논쟁하실 것이다, 그리고 그분의 검을 가지고 모든 육과
더불어 (논쟁하실 것이다), 그리고 여호와로부터 죽은 자가 불어나질 것이다 (이. 66:16),
위에서 “불”은 그러워함들을 처벌함을; “검”은 거짓들을 처벌함을; 그리고 “육”은 인간의 물질적인 것들을 의미한다. 다윗서에서:
하느님께서는 그들이 육이었다는 것, 스러지는 숨이다는 것,
그리고 (그것은) 다시 오지 않는다 (시. 78:39),
육(고기를)을 갈망하는(먹고 싶어하는) 광야에 있는 백성들에 관해 말하실 때, 그들은 물질적이었다는 것; 그들이 육을 바램은 그들이 물질적인 것들 만을 바랐음을 표현하였다 (민11:32-34).

인간의 날들이 일백 이십 년이다는 것은 인간은 신앙으로부터의 리메인스를 가져야 한다를 의미함은 창. 5:3-4절에서 살핀 바 있는 “날들”과 “햇수들”이 때들과 상태들을 의미함에서 나타난다; 그리고 태고인들은 간단한 숫자들과 이 숫자들을 합성하여 만든 숫자들을 가지고 교회에 있는 상태들과 변화함들을 의미했다; 그러나 그들이 교회를 평가하여 수치로 나타낸 본래의 모습은 오늘날은 완전히 상실되어져 있다. 이 구절에서도 숫자들이 등장하는데, 그나마 이를 이해해 보려면 최소한 1부터 12까지의 단순한 숫자의 감추어 놓인 의미의 이해가 먼저 되어 있어야 본문의 120년도 그 의미를 가늠해 볼 수 있다. 본문을 글자대로 이해\한다면 사람의 목숨이 120년이다는 말이지만, 홍수 이후에도 더 오래 산 사람들이 11장만 보아도 수두룩하고, 노아의 경우도, 홍수 이후 “350년”을 살았다고 말하고 있다 (창. 9:28). 이렇게만 간단히 생각해 보아도 성경의 숫자들에는 깊은 의미가 내포되어야 할 것이다 라고 짐작될 것이다. 숫자 “120” 안에 포함된 것은 숫자 “10”과 “12”로부터 나타난다. “120”의 의미는 이 두 숫자가 곱해질 때 120이 만들어진다는 것으로부터, 그리고 10과 12의 의미로부터 신앙으로부터의 리메인스를 의미함이 보여질런지 모른다. 숫자 “10”은 말씀에서, “1/10(십분의 일, 열 번째, tenth)”과 더불어, 리메인스(remains)를 의미하고 표현한다. 이 리메인스는 주님에 의해 내적 인간 안에서 보존되어지고, 거룩하다. 그 이유는 이것들은 주님으로부터만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숫자 “12”는 신앙, 또는 한 개의 복합체(complex)에서 신앙에 관계되는 모든 것들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이 두 숫자가 합성되어진 것은 신앙으로부터의 리메인스를 의미한다.

숫자 “십”, 그리고 “십분의 일”이 리메인스를] 의미한다는 것을 말씀에서 확인해 보자:
많은 집들이 크고 아름다우나 거주할 자 없이 황폐해 있을 것이다; 그 이유가
포도원 10 에이커에서 1 바트가 생산되고, 1 호멜의 씨가 1 에바를 산출 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 5:9-10),
위 구절은 영적 (평면)의 것들과 천적 (평면)의 것들이 황폐해짐에 관하여서 이다: “포도원 10 에이커가 1 바트를 만든다”란 영적 평면으로부터의 리메인스가 거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1 호멜의 씨가 1 에바를 산출함”은 천적 평면으로부터의 리메인스가 거의 없음을 의미한다. 이사야서에서:
그리고 많은 것들이 토지 한 가운데에서 버려짐을 당할 것이다. 그럼에도
십분의 일이 그것 안에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되돌아 올 것이다, 그리고
그럼에도 그것은 다 소모되어질 것이다 (이. 6:12-13),
위에서 “토지 한 가운데”란 내적 인간을 의미한다; “십분의 일 부분”은 리메인스가 적음을 의미한다. 에스겔서에서:
너희는 정의로운 추를, 그리고 정의로운 에바를, 그리고 정의로운 밧을 가질
것이다: 에바와 밧은 한 개의 칫수로부터 있을 것이다. 즉 밧은 호멜의 십분의
일을 담는다, 그리고 에바도 호멜의 십분의 일을 담는다. 그것으로부터의 칫수는
호멜에 따라 있을 것이다; 그리고 기름에 관한 규례이다, 기름의 밧, 한 고르는
열 밧, 한 호멜, 그 이유가 열 밧이 한 호멜이기 때문이다 (겔. 45:10-11, 14).
위 구절들에서 여호와의 거룩한 것들이 칫수를 수단으로 몇 종류가 다루어지고 있다; 여기서 “10”은 천적 평면으로부터와 이로부터 파생된 영적 평면으로부터의 리메인스가 의미된다; 이 외에도 이 예언서의 앞 장(40장)의 천국의 예루살렘과 새 성전의 묘사에서 언급되는 여러 칫수 역시 많은 신비들을 포함하고 있다.
아모스서에서:
처녀 이스라엘은 타락했다, 그녀는 더 이상 일어나지 못할 것이다. 고로
주 여호비께서 말하신다, 천 명이 성을 나가면 백 명이 남아 있을 것이고,
백 명이 나가면 열 명이 이스라엘의 가문에 남을 것이다 (암. 5:2-3),
위에서 리메인스를 말하고 있는데, 그것이 매우 적게 남아 있는다는 것, 오직 “십분의 일 부분”, 또는 리메인스로부터의 리메인스 만 있다는 말이다. 다시:
나는 야곱의 자랑거리와 그의 궁전을 몹시 싫어한다, 그리고 성, 그리고
그것의 충만함은 봉쇄될 것이다. 그리고 만일 한 집에 열 사람이 남아 있다면,
그들은 죽기 조차 할 것이다 (암.6:8-9).
거의 남아있지 않는 리메인스를 말하고 있다. 모세의 책에서:
암몬족과 모압족은 여호와의 회합에 오지 못할 것이다.
그들의 열 번째 후대에까지 조차 영원히 여호와의 회합에 오지 못할 것이다 (신.23:3).
“암몬족과 모압족”은 신앙의 영적인 것과 천적인 것을 모독함을 의미한다. 앞 절에서는 리메인스가 말해지고 있다.
이로부터 “십분의 일”이 리메인스를 표현함도 나타나는데, 말라기서를 보자:
너희 모두는 보물 집 안으로 십일조(십분의 일들, tenths)를 가져오라,
하여 내 집 안에 노획물(booty)이 있을런지 모른다, 그리고 그것들로 너희가
이것에서 분발하는지를 나에게 입증하게 하라, (하여) 내가 하늘의 큰 폭포를
열지 않도록, 그리고 네게 축복을 쏟아 내도록 (말. 3:10).
“내 집 안에 노획물이 있을런지 모른다”란 내적 인간 안에 있는 리메인스를 의미한다, 이 리메인스가 “노획물”에 비교되어지고 있다. 그 이유가 이 리메인스는 엄청나게 많은 악들과 거짓들 사이에서 비밀리(by stealth)에 은근히 심어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리메인스를 수단으로 모든 축복이 온다. 모든 인간의 선행은 내적 인간 안에 있는 리메인스를 수단으로 오고 있다는 것, 또한 이것이 유대 교회에서 이런 규례에 표현되어져 있다. 즉 그들이 십일조 바치기를 모두 마쳤을 때, 그들은 그것을 레위인, 외국인, 고아, 과부에게 줄 것이다 (신. 23:3 이하 참조).
리메인스는 주님 만에 속한 까닭에, 십분의 일들은 “여호와께 거룩함”이라 불리운다; 모세의 책에서:
토지의 모든 십분의 일들, 토지의 씨의 모든 십분의 일들, 나무의 열매로부터의
모든 십분의 일들, 그것들은 여호와의 것이고, 여호와께 거룩함이다: 목축의
모든 십분의 일들, 양떼의 모든 십분의 일, 목자의 막대 아래를 지나가는
무엇이든, 십분의 일은 여호와에게 거룩함일 것이다 (레. 27:30-31).
십계명은 “열 가르침들, 또는 열 말(word)들”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 그리고 여호와께서는 그것들을 돌판들(tables)에 쓰셨다는 것은 리메인스를 의미하고, 이것이 여호와의 손에 의해 씌어짐은 리메인스는 주님만으로부터 있다는 것, 그것들이 내적 인간 안에 있음이 돌판들에 의해 표현되고 있다 (신. 10:4).

숫자 “12”가 신앙, 또는 사랑으로부터 있는 것들, 한 복합체 안에 이것으로부터 파생된 신앙으로부터의 것들을 의미함은 성경의 많은 구절로부터 확증이 가능하다. 모두가 익히 아는 대표적 예를 들면, 야곱의 “열 두” 아들로부터와 그들의 이름들, 이스라엘의 “열 두” 지파들, 그리고 주님의 “열 두” 사도들 등등 이다; 창세기 29, 30 장을 취급하는 근처에서 주님의 신성한 자비로부터 차 후 살필 것이다.

본문의 숫자 만 살펴도 주님의 말씀은 그것의 품 안에, 내면의 깊숙한 곳에 얼마나 많은 신비들을 포함하고 있는지, 눈에는 전혀 나타나지 않는 신비들이 있는지는 분명해졌을 것이다. 물론 다른 말씀의 경우도 이와 비슷하다.

여기서 취급된 홍수 이전 사람들과 더불어 리메인스가 거의 남지 않았다는 것이 주님의 자비로부터 차 후 그것들에 관해 말해지는 곳에서 분명해질 것이다; 그리고 어떤 리메인스도 그들 사이에서는 보존될 수 없었는 바, 리메인스를 가질 “노아”라 불리는 새로운 교회가 여기서 말해진다; 이것에 관하여도 역시 주님의 신성한 자비로부터 차 후 살핀다.

4절. 그 당시, 땅에 네피림이 있었다. 그리고 특히 하느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에게 들어간 이후, 그리고 그들이 그들에게 낳아 주었는데, 네피림과 똑같은 용사가 되었고, 이 용사들은 옛날에 있었고 유명한 사람이었다.
“네피림”이란 자기들의 고고하고 탁월한 설득력을 통해 거룩하고 참된 모든 것의 빛을 만든 이들을 의미한다. “그리고 특히 하느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에게 들어 간 이후, 그들이 그들에게 낳았다”란 자기들의 그리워 함 안에 신앙 속의 교리들을 파묻고, 참된 것을 수단으로 거짓된 것을 설득할 때 네피림이 발생함을 의미한다.

“네피림”은 자신의 고고하고 탁월한 설득력을 통하여 거룩하고 참된 모든 것의 빛을 만든 이들을 의미하는 것은 앞 대목과 뒤를 잇는 대목으로부터, 즉 그들은 자기들의 그리워함 안에 신앙의 교리들을 침수시킴이 “하느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에게 들어감, 그리고 그(녀)들이 그들에게 낳아줌”에 의해 의미된 것에서 나타난다. 자기를 설득함과 이 설득의 공상들은 그것들로 들어간 것들이 불어남에 따라서도 증가하는데, 결국 지우려해도 지워지지 않는 때까지 (절대 떼어지지 않는 때까지)에 치닫고 말 때까지 증가 한다; 그리고 신앙의 교리들이 이것에 보태어질 때, 그러면 최고로 센 설득력의 원리들로부터 그들은 거룩하고 참된 모든 것의 빛을 만든다, 그리고 “네피림”이 된다. 홍수 이전에 살았던 이 종족(race)은 이러했다, 즉 그들은 자기들의 끔찍한 공상들을 수단으로 모든 영들을 숨막히게 하여 죽기까지도 가능하게 하는 특성 때문에 (저 세상에 있는) 영들은 (이 네피림의 설득력 때문에) 생각하는 힘을 온통 빼앗기고 반쯤 죽어버리는 느낌을 받는다;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심을 수단으로 이 독 있는 종족들로부터 영들의 세계를 자유해지게 하시지 않았다면, 거기에 존재할 영은 아무도 없었을 것이고, 결과적으로 영들을 통하여 주님에 의해 통치되는 인간 종족은 멸해졌으리라. 그러므로 지금 이 네피림들은 지옥에서 특별한 관리 아래, 즉 안개로 덮힌 육중한 둥근 돌 아래 있는 지옥, 왼쪽 발 뒤꿈치 아래에서 (통제되어), 매우 경미한 일어섬도 허용될 수 없다. 고로 이 최고로 위험한 패거리로부터 영들의 세계는 자유해 있다. 이에 관하여와 이 독 있는 설득력에 관하여는 주님의 신성한 자비로부터 차 후 별도로 언급할 것이다. 말씀 안에서 “아낙”과 “르바임”이 네피림의 후손이라 칭해지고 있다. “아낙”에 관해 모세의 책을 보자:
거기서 우리는 네피림을, 네피림으로부터의 아낙 후손들을 보았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
눈으로 보아도 메뚜기(grasshopper)들 같았고, 그들이 보았어도 그랬을 것이다 (민. 13:3).
그들이 르바임이라 불리운 것도 모세의 책에서 나타난다:
엠족속이 모압 토지에서 전에 거주했는데, 이들은 크고, 많고, 그리고 아낙 같이
키가 컸는 바, 이들은 아낙족속으로, 르바임족속으로 간주되었다,
그리고 모압족이 그들을 엠족이라 불렀다 (신. 2:10-11).
네피림에 관한 언급은 더 이상 없다, 그러나 르바임은 예언서에 묘사되고 있다. 이사야서에서:
아래쪽 지옥이 너 때문에 흥분되어 있는다, 오고 있는 너를 만나려고 해서이다,
그것은 너를 위하여 르바임을 휘저었다 (이. 14:9).
위 구절은 (네피림 비슷한) 영들의 거처인 지옥에 관해서 이다. 다시 이사야서에서:
너희 죽은 자는 살아나지 못할 것이다, 르바임은 일어나지 못할 것이다,
그 이유는 당신께서 방문하시어 그들을 파괴하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의 모든 기억이 멸해지게 만드셨기 때문이다 (이.26:14),
위 구절 역시 지옥이 언급된다, 이로부터 그들은 다시는 더 일어나지 못한다. 다시 이사야서에서:
당신의 죽은 자는 살아날 것입니다. 당신의 시체, 그들은 다시 일어날 것입니다;
깨어나 노래하라, 먼지 안에 거주하는 너희들아, 그 이유가 풀잎들의 이슬이 당신의
이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당신은 르바임의 토지로 내쫓을 것입니다 (이. 26:19).
“르바임의 토지”는 위에서 언급한 지옥이다. 다윗서에서:
당신께서는 죽은 자에게 경이로움을 보이시렵니까? 르바임이 일어날 것입니까?
그들이 당신에게 고백할 것입니까? (시. 88:10),
위 구절 역시 마찬가지 방식에서 르바임의 지옥에 관해 말하는데, 그들이 일어나지 못한다는 것, 그런고로 그들의 설득력으로부터의 끔찍한 독을 가지고 영들의 세계에출몰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인류가 이런 끔찍한 공상과 설득력에 물들어버리는 일이 더 이상 있지 않도록 섭리해 두셨다. 홍수 이전 살았던 이들이 이런 본성과 천성을 지녔는 바, 그들은 상대방을 자신의 것에 물들어지게 할 수 있었다. 그 이유는 아직 알려진 바 없어 주님의 신성한 자비로부터 차 후 (927항)에서 살핀다.

그 후 하느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에게 들어갔다, 그리고 그녀들이 그들에게 낳았다. 이는 그들이 자기들의 그리워 함 안에 신앙의 교리물들을 침수시켰을 때 그들은 네피림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의미는 2절의 “하느님의 아들들”이 신앙의 교리적인 것들, 그리고 “딸들”은 그리워함들이다는 것으로부터 알게 된다. 그것들에 의해서 생산된 출생들은 빛을 만들어 신앙의 거룩한 것들을 모독하는 것 밖에 더 없게 된다. 그 이유가 인간이 그리워하는 것, 자기를 사랑함과 세상을 사랑함으로부터의 것인 바, 모두 거룩하고 참된 것에 반대되어 있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지금 인간 안에서 그리워함들이 득세하는 상황이어서 거룩하고 참된 것, 그리고 이것이 있다고 인정하는 것 마저 그리워함 안에 침수시키는 바, 인간과 더불은 모든 것은 끝장나 있다. 그 이유가 그리워함은 인간에게서 뿌리뽑혀 질 수 없고 분리됨도 불가능해져 있기 때문이다; 그리워함(yearning)은 (우리가 가지는) 모두 각각의 생각(idea)에 꽉 달라붙어 있다. 다른 삶의 경우에서도 서로가 교통하는 수단은 바로 생각(idea)이다. 그리하여 거룩하고 참된 어떤 생각이 산출되면, (그리워함으로 인해) 그 즉시 모독하고 거짓인 것이 이 참된 생각에 붙어 떨어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런 인물들은 분리되어져야만 하고 지옥 맨 아래로 내쳐져야 한다.

네피림이 자기를 사랑함으로부터 “용사”라 불린다는 것은 말씀 여러 곳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예레미야서에서:
바벨의 용사들은 싸우기를 그만두었다, 그들은 자기들의 성채 안에 앉아 있다,
그들의 기력은 떨어진다, 그들은 여인들 같이 되어간다 (예51:30),
위에서 “바벨의 용사‘는 자기를 사랑함을 가지고 먹어치운 이들을 표시한다. 예레미야서에서:
검이 거짓말쟁이를 향하여 있다, 그리고 그들은 미쳐 있을 것이다,
검이 그녀의 용사를 향하여 있다, 그리고 그들은 낙담될 것이다 (예.50:36).
나는 낙담한 그들을 보았다, 그리고 뒤로 돌아섰더니, 그들의 용사들이 산산조각나
있었다, 그리고 되돌아보지도 않고 도망하느라 급급했었다; 두려움이 (용사를) 빙둘러
있었다; 발빠른 자도 도망하지 못할 것이고, 용사도 피하지 못할 것이다, 올라오라,
너희 말들아, 그리고 격노하라, 너희 병거들이여, 그리고 용사들은 앞으로 나아가라,
구스인이여, 붓인이여, 루딤인(Lydians)들이여 (예. 46:5-6, 9),
추론함들로부터 있는 설득력에 관해서이다. 다시:
우리는 용사이다, 전쟁을 위한 강함의 사람들이다 말하는데 어찌된 것이냐?
모압은 황폐해져 있다 (예. 48:14-15).
성이 점령당하고, 그리고 튼튼한 성채가 사로잡혀졌다, 그리고 그 날에
모압의 용사의 심장은 산고로 괴로워하는 여인의 심장 같이 되어 있다 (예.48:41).
마찬가지로 말해진다:
에돔의 용사의 심장 (예. 49:22).
여호와께서 야곱을 되찾으셨다, 그리고 야곱 보다 더 강한 자의 손으로부터
그에게 앙갚음하셨다 (예. 31:11),
위에서 “힘 셈(mighty)”이 (히브리어에서는) 또 다른 단어로 표현되어져 있다. 네피림으로부터 있는 아낙족속이 “용사”라 불리우는 것이 모세의 책에서 보여진다:
너희는 너희 보다 더 크고 더 숫자도 많은 민족들을 소유하러 가기 위해 오늘
요단을 건너라. 그들의 성들은 크고 견고하며 하늘에 닿고 있다. 사람들은 크고
키가 큰데, 아낙의 후손들이다. 너희는 그들을 안다, 그들에 관해서 너희는
(이렇게) 들었다; 아낙의 후손 앞에 설 자 누가 있느냐? (신. 9:1-2).

5절. 그리고 여호와께서는 사람 속의 악이 땅 위에 번창했고, 그리고 그의 심정 속의 생각의 모든 상상들이 매일 악할 뿐임을 보셨다.
“여호와께서는 사람 속의 악이 땅 위에서 번창했음을 보셨다”란 선한 의지가 없어짐이 시작되었음을 의미한다. “그의 심정 속의 생각의 모든 상상은 매일 악할 뿐이었다”란 참됨과 선에 관한 지각이 없었다를 의미한다.

사람 속의 악이 땅 위에서 번창했다란 선한 의지가 없음이 시작되었다가 의미된다. 이는 위에서 말한 것으로부터, 즉 어떤 의지도 더 이상 없고, 탐욕 만이 남았다는 것; 그리고 “땅에 있는 사람”의 의미로부터 분명해진다. 글자 의미에서 “땅”은 인간이 있는 곳이다. 내적 의미에서는 사랑이 있는 곳이다, 그리고 사랑이 의지 속에, 또는 탐욕 속에 있는 바, 땅은 인간의 의지 자체를 뜻하기 위해 취해진다. 그 이유가 인간은 앎이나 이해함으로부터 보다는 뜻함으로부터 인간이기 때문이다. 또한 알고 이해한 것 역시 결국 의지로부터 흘러나오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그가 뜻하지 않은 어떤 것을 말하거나 행동하고 있을 때, 여전히 말이나 행동과는 멀리 떨어져 그를 통치하는 의지의 어떤 것이 있다. “가나안의 토지”, 또는 “거룩한 토지”가 사랑을 표시한다는 것, 결과적으로 천적 인간의 의지를 표시한다는 것은 말씀의 많은 구절로부터 확증될 것이다; 마찬가지로, 다양한 민족들의 토지도 그것들의 사랑들을 표시한다, 이것들은 일반적으로는 자기를 사랑함과 세상을 사랑함이다; 그러나 이런 주제는 앞으로도 자주 등장하는 바, 여기서는 더 언급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위에서 살핀 것과 본문을 연결해서 나타나는 것은, “땅 위 사람의 악”에 의해 그의 자연적 악이 의미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의지 속에 있다, 그리고 이것이 “불어났다”라고 말해진다. 이는 모든 것이 타락된 후에 그 타락된 것이 불어났다가 아니라 처음에는 그들이 타인을 위해 선을 원했다는 것, 이것이 차츰 자신들을 위한 선의 섞임이 불어난 것이다; 뒤집힘이 완성된 것이 “심정의 생각들의 상상”에 의해 의미되어지고 있다.

심정의 생각들의 상상이 날마다 오직 악 뿐이었다란 진리와 선을 지각함이 없었음을 의미한다. 그 이유는, 앞서 말하고 보여준 바대로, 그들은 그들의 더러운 그리워함에 신앙의 교리적인 것들을 침수시켰기 때문, 그리고 이것이 모든 지각을 상실하게 해버렸다, 그리고 지각의 자리를 무서운 설득력이 꿰찾다, 즉 , 최고로 깊이 뿌리박혀 치명적인 공상이 자리를 차지했는 바, 이는 소멸과 질식됨의 원인이었다. 이런 치명적인 설득력이 “심정의 생각들이 상상하는 것”에 의해 의미되어져 있다. 이 말에서 “생각들”을 빼내고 문장을 연결하면 “심정의 상상들”이 되는데, 이는 자기를 사랑함, 또는 그리워함으로부터의 악이 의미되어진다. 이것이 8장에서, 노아가 태워바치는 제물을 드린 후 여호와께서 말하신 것, “나는 인간 때문에 다시는 지면을 저주하지 않을 것이다, 그 이유는 인간의 심정의 상상은 그의 어릴적부터 악하였기 때문이다”에서 나타난다 (창8:21). “상상(imagination)”은 인간이 자신을 위해 창안하는 것이다. 이것 가지고 인간은 자신을 설득한다; 하박국을 보자:
새긴 우상은 조각자가 만든 것이데 그것이 네게 무슨 유익을 주겠느냐?
부어 만든 우상도 주조자가 벙어리 우상을 만들고저 자기 상상에 의지한 것이니
그것도 거짓말하는 선생이 아니더냐? (합. 2:18),
“새긴 상”은 누군가의 자기(self)를 수단으로 임신되고 부화된 원리들을 근원으로 하는 거짓된 설득력들을 의미한다; “새기는 자(fashioner)”는 자기가 자기를 설득하는 자이다. 이 “상상”이 이 사람이라 단언된다. 이사야서에서:
오 너희의 외고집이여! 옹기장이를 진흙이라 여기고, 옹기 그릇이 그것을
만든 자에게 그가 나를 만들지 않았다 하고 말한다; 그리고 모양 지음을 받은 것이
그것에 모양을 준 자에게, 그는 총명이 없다 말해도 되는 것이냐? (이. 29:16)
위 구절에서 “모양 지음을 받은 것”이란 인간의 자기 자신에 근원하는 생각을 의미한다, 그리고 거기로부터 파생된 거짓인 것으로부터의 설득력을 의미한다. “모양 지음을 받은 것” 또는 “상상된 것”, 일반적으로 인간의 심정, 또는 의지로부터 창안한 것이다. 다윗서로부터:
여호와께서는 우리의 방식(fashioning)을 아신다,
그분은 우리가 먼지 임을 기억하신다 (시.103:14).
모세의 책에서:
나는 내가 그를 토지 안으로 데려오기 앞서
오늘날 그가 하는 그의 상상을 알고 있다 (신. 31:21).

6절. 그리고 이것은 여호와께서 사람을 만드신 것을 후회되게 했다, 그리고 그분으로 하여금 그분의 심정에서 몹시 슬퍼하게 했다.
“그분이 후회하셨다”란 자비(mercy)를 의미한다. “그분이 심정에서 슬퍼하셨다” 역시 자비를 의미한다. 단지 “후회”는 지혜 쪽과 관련이 있고, “슬퍼함”은 사랑 쪽과 관련이 있을 뿐이다.

이것은 여호와께서 땅 위에 사람을 만드신 것을 후회되게 했다는 것은 자비를 의미한다는 것, 그리고 “그분이 심정에서 슬퍼하셨다”도 비슷한 의미를 가지는 바, 이로부터 분명해지는 것은, 여호와께서는 결코 회개하시지 않는다는 것, 그 이유는 그분은 일반적, 세부적으로나 모든 것을 영원으로부터 미리 보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분이 인간을 만드셨을 때, 즉 사람을 새로이 창조하셨을 때, 그리고 그가 천적 수준의 인간이 될 때까지 그들을 완전하게 하셨을 때, 역시 그분은 시간의 과정에서 인간이 여기서 묘사된 바 같은 식으로 되어가리라는 것도 미리 보셨다. 이렇게 그분은 미리 보셨기 때문에 그분은 후회하실 수 없었다. 이것이 사무엘이 말한 대목으로부터 명백하게 나타난다:
이스라엘의 무적이신 분은 거짓말 하시거나 후회하시거나 하시지 않는다,
그 이유는 그분은 회개하는 사람이 아니시기 때문이다 (삼상.15:29).
그리고 모세의 책에서:
하느님은 거짓말해야 할 사람이 아니시다, 또는 회개를 해야 하는 인간의 아들도
아니시다; 그는 말하셨고, 행하지 아니하셨더냐? 또는 그분이 말하셨는데, 그리고
그분께서 그것을 선한 쪽으로 만드시지 않더냐? (민. 23:19).
그러나 “회개하는 것”은 자비 있으심을 의미한다. 여호와, 또는 주님의 자비에는 인류를 향하여 주님에 의해 행해지는 모든 것이 포함된다. 다시 말해, 인류는 주님께서 그들 각각의 상태에 따라 불쌍히여겨 주어야 하는 상태에 있다; 그리하여 그분은 처벌받게 허용한 인간의 상태를 불쌍히 여기신다, 또한 선을 즐기도록 수여해준 자도 불쌍히 여기신다; 처벌되어지는 것도 주님의 자비로부터 있다, 그 이유가 자비는 처벌 속의 모든 악을 선 쪽으로 선회하게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선을 향유하게 수여하는 것도 자비로부터 있다, 그 이유는 선인 어떤 것이 자신의 공적 때문이라 할 자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모든 인류는 악하고, 인간 스스로부터서는 모두가 지옥행 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지옥행에서 건져짐을 받는 것도 자비로부터 있다; 자비는 인간을 불행으로부터 건지고, 지옥으로부터 건진다는 사실로부터 그것의 이름을 가진다; 이것이 인간에 관련하여 자비라 불리우는 이유는 인류 모두가 불행한 상태에 있기 때문이고, 자비는 그들 모두를 향한 사랑의 결과이다.

“후회하시고”, 그리고 “심정에서 슬퍼하시는 것”이 주님의 속성이라 단언되고 있다. 그 이유는 인간의 모든 자비에서 그와 같은 느낌이 일도록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도 그러하도록 “후회함”, “슬퍼함”이 외관에 따라 말해진다. 이는 말씀의 많은 구절에서도 마찬가지의 나타남이 등장한다. 주님의 자비가 무엇인지 아무도 알 수 없다. 그 이유는 이 자비는 인간의 이해력을 무한하게 초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의 자비가 무엇인지는 후회와 슬퍼함에 있다고 우리는 안다; 인간은 자신의 납득력에 따라 자비에 관한 그의 생각을 만들어 내지 않으면, 그는 그것에 관한 어떤 개념도 가질 수 없다, 그러면 그는 가르침을 받을 수도 없다; 이것이 왜 인간의 고유성(property)이 주님, 또는 여호와의 속성(attribute)이라 단언되는가의 이유이다. 그래서 마치 인간이 하는 것, 벌 주고, 시험에로 인도하고, 파괴하고, 성내고 하는 것들을 주님도 하신다고 표현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그분은 누구를 처벌하신 적이 없으시고, 누구를 시험 가운데 인도하신 적도 없고, 결코 어떤 것도 파괴하지 않으시며, 성내신 적도 한 번도 없으시다. 주님의 속성이 이러함에도, 후회함이나 슬퍼함이 그분의 속성이라 단언함이 이어진다; 그 이유는 이쪽의 단언이 다른 쪽의 단언을 이해하게 해주기 때문이다. 아래 인용구절로 이를 확실히 짚고 넘어가자.
에스겔서에서:
내 성냄이 극에 다다를 것이다, 나는 내 분노를 쉬게 만들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나를 후회하게 할 것이다 (겔. 5:13).
위에서 “성냄”, “분노”가 서술되고 있기 때문에, “후회함” 역시 서술되어진다. 스가랴서에서: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하신다. 너희 조상들이 나로 성내도록 하였을 때, 내가 악을
행하기로 생각하였고, 나는 후회하지 않았다, 그러나 오늘에 이르러서 다시 나는
예루살렘과 유다의 집에 선을 행하려 생각하고 있다 (슥. 8:14-15).
위 구절에서 여호와께서 “악을 행하시려 생각했다”고 말해지나 그분은 누구에게나 결코 악을 행하지 않으신다. 오히려 모두에게, 각각의 사람에게 선을 베푸신다. 모세의 책에서, 모세가 여호와의 얼굴의 참으심을 간구했을 때:
당신의 성내심의 분노로부터 돌아서소서, 그리고 이 백성을 향한 이 악을
당신께서 후회하소서; 그리고 여호와께서는 이 백성에게 행하려 말하신 것을
후회하셨다 (출.32:12, 14).
위에서 “성내심의 분노”가 여호와의 속성이다, 그리고 “후회하심”도 그분의 성내심의 결과이다고 표현되었다. 요나서에서, 니느웨왕이 말했다:
하느님께서 돌아서시지 않고 후회하시지 않을지, 그리고
그분의 성내심의 화로부터 돌아서시고, 우리를 멸하시지 않을지 누가 아느냐? (욘. 3:9).
위 구절도 앞의 인용구절과 비슷하다. “후회하심”이 “성내심”이 있기 때문이다 라고 서술된다.
호세아서에서:
내 심정이 내 내부에서 돌아섰다; 나의 후회함들이 함께 불켜졌다;
나는 나의 성냄의 분노를 집행하지 않을 것이다 (호. 11:8-9),
위 구절 역시 “후회함들이 불켜진” 심정을 두고 말해지고 있다. 이는 본문에서 그분은 “심정에서 슬퍼하셨다”와 같은 맥락이다. “후회하심”은 큰 자비를 표시함은 요엘서를 보면 명백하다:
여호와 네 하느님에게 돌아서라; 그 이유가 그분은 은혜로우시고 동정심이 많으시다,
성내심은 느리고 자비는 풍부하시다, 그리고 악에는 후회하신다 (욜. 2:13)
위에서 “후회”는 자비를 분명히 표시하고 있다. 예레미야서도 보자:
만일 그들이 청종하여 모두가 그의 악한 길에서 돌아서면, 그것은 나로
(내가 그들에게 내리려던) 악을 후회하게 할 것이다 (예. 26:3),
위 구절은 자비를 가지신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만일 이 민족이 그들의 악으로부터 돌아서면,
이것은 나로 (그들에게 내리려던) 악을 후회하게 할 것이다 (예.18:8),
위 구절 역시 그들이 돌아서는 조건에서 “회개”는 자비를 표시한다. 주님의 자비가 자기로부터 떠나게 하는 자는 정작 인간 자신이다: 주님께서는 인간으로부터 자비를 베푸시기를 철회하신 적이 없으시다.

위의 인용 구절, 내지 수많은 구절로부터 알 수 있는 것은, 말씀이 인간에게 나타나는 것(appearances)에 따라 기록되어졌다는 것이 분명해진다. 그런고로 말씀에 기록된 글자를 근거 삼아 들이대어 거짓 원리들을 확증하기를 바라고 있다면 이는 아주 쉬운 작업이다. 그러나 두 가지 측면이 있다. 하나는 말씀을 수단으로 거짓 원리들을 확증하는 것이다. 또 하나는 말씀 안에 있는 것을 순박하게 믿는 것이다. 거짓 원리를 확증하는 자의 경우, 첫 번째 작업은 자기가 절대 물러서지 않을 원리, 즉 절대 양보 못할 원리 원칙을 가정해 세워둔다. 그 다음 이 원리들을 확증해줄 만한 것들을 어디서이든, 특히 말씀으로부터 긁어 모우고, 축적해둔다. 그리하여 그 자신 더 이상 진리를 찾을 데가 없다고 자신을 스스로 설득할 때까지 축적해간다. 그러나 단순 소박하게 믿는 자의 경우, 그는 물러서지 않을 원리를 세우지 않는다, 그러나 말씀을 놓고 이 말씀은 진리이다고 주님이 말하셨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자신의 이해를 돕기 위해 말씀의 다른 구절로부터 이해함을 증진시켜 확실한 가르침을 얻을 때, 묵묵히 따르며 그의 심정은 기쁨으로 가득해 있다. 단순 소박하게 믿는 사람들 조차도 주님은 성내시고, 처벌하시고, 후회하시고, 슬퍼하신다고 믿는다. 그렇게 믿는 것이 악을 두려워하고 선을 행하며, 해를 받지도 않는다; 그 이유가 이 믿음이 그 사람으로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보신다를 믿게 하기 때문이다; 어쨌든 이런 신앙을 가진 자가 이 세상에서 계발되는 기회를 얻지 못하면, 다른 삶에서 계발되어진다. 이와는 아주 다른 경우가 있다. 자기가 이미 설정해 놓은 원리들로부터 연역하여 나와지는 어떤 것을 자신이 믿어지게 설득하는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 흠취된 이들의 경우이다.

“후회하심”이 지혜와 관계가 있고, “심정에서 슬퍼하심”은 사랑 측면에 관계를 가진다는 것은 인간의 수준에 일치되는 것이 아닌 이상, 즉 외관을 수단으로 하지 않으면 인간의 납득력에 설명되어질 수는 없다. 인간 안에서 생각함 속의 모두 각각의 관념 안에는 이해함으로부터와 의지로부터의 어떤 것, 또는 그의 생각함과 그의 사랑으로 부터의 어떤 것이 있다. 관념(idea)이 그의 의지 또는 사랑으로부터 도출되지 않으면 그것은 관념이 아니다. 그 이유는 그의 의지로부터가 아니면 그는 전혀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다. 생각함과 의지 사이에는 파기할 수 없는 영구적인 결혼 같은 것이 있다. 그리하여 인간의 생각함의 관념 안에는 그의 의지 또는 그의 사랑으로부터 있는 것들이 본시 가지고 태어나기라도 한 듯 점착되어 있다. 인간에 있는 이런 상태로부터 인간은 주님의 자비, 즉 지혜와 사랑 안에 포함된 것을 놓고 마치 알고 있는 듯, 아마 오히려 그에 관한 어떤 관념을 만들어 내는 것이 가능한 듯 착각한다. 고로 예언서들, 특히 이사야서에서, 모든 것에 관련해 이중적 표현들을 사용하는 곳이 의외로 많다. 그렇게 표현한 이유는 이쪽 표현이 영적 (평면)인 것을 서술하면, 다른 쪽 표현은 천적 (평면)을 서술하려는 때문이다. 주님의 자비의 영적 평면은 지혜이고; 천적 평면은 사랑이다.

7절. 그리고 여호와께서 말하셨다, 나는 내가 지면의 얼굴에 창조했던 사람을 파괴하리라. 사람과 짐승, 기는 것들, 하늘의 새를 파괴하리라. 그 이유는 나는 내가 그것들을 만든 것을 후회했기 때문이다. “여호와께서 말하셨다. 내가 사람을 파괴하리라”란 사람이 그 자신을 소멸할 것임을 의미한다. “지면의 얼굴에 내가 창조한 것”이란 태고 교회의 후손에 속하는 사람을 의미한다. “사람과 짐승, 기는 것”이란 그가 의지에 속한 것은 전부 소멸할 것임을, “하늘의 새들”이란 이해 또는 생각 속에 있는 것은 무엇이든 전부 소멸할 것임을 의미한다. “나는 그것들을 만든 것을 후회한다”란 불쌍히 여김을 의미한다.

여호와께서 말하셨다, 나는 사람을 파괴할 것이다. 이는 인간이 자신을 소멸할 것임을 의미한다는 것은 앞서 설명한 것으로부터, 즉 벌하시고, 시험하시고, 악을 행하시고, 파괴하고 죽이고 저주하시는 것이 여호와, 또는 주님의 속성 같이 표현됨에 관련하여 설명한 대목을 다시 생각하면 분명해진다. 예를 들면, 창세기 38:7, 10절에서, 그분은 유다의 첫 출생 엘을 죽이셨다; 그리고 유다의 또 다른 아들 오난도 죽이셨다; 여호와께서는 이집트의 첫 출생 모두를 죽이셨다 (출. 12:12, 29). 그리고 예레미야에서:
나는 나의 성냄과 나의 분노에서 그들을 죽였다 (예. 33:5).
다윗서에서:
그분은 그들을 그분의 성냄의 분노에; 격한 성내심에,
그리고 격노하심과 곤경에 내던지고, 악한 천사들을 보내신다 (시. 78:49).
아모스서에서:
악한 일이 성에 발생하는데, 여호와께서 이것을 하시지 않았겠느냐? (암. 3:6).
계시록에서:
일곱 금빛의 대접이 영원히 사시는 하느님의 분노로 가득 차 있다 (계. 15:1; 16:1).
위 모든 구절에서 하는 말은 비록 그분의 본래의 모습과는 반대일지라도 어쨌든 여호와를 서술하고 있다. 이렇게 반대적으로라도 서술되어야 하는 첫 번째 이유는 주님께서 일반적, 세부적 측면에서 모든 것을 통치하신다는 아주 일반적인 관념을 만들어 줄런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후에 악한 어떤 것도 주님으로부터 있지 않다는 것, 더군다나 누군가를 죽이는 일은 없다는 것을 배운다; 자신 위에 악을 가져오는 것은 인간 본인이다는 것, 하여 자신을 파멸로 치닫게 하는 것이 인간 자신임을 배운다. 설사 이것이 당사자가 직접적으로 자초하지 않은 듯 해도 그를 흥분시키고 유도하는 악령의 짓임을 배운다; 그러나 결국은 인간 자신이다, 그 이유는 그가 믿기 때문에 그가 행위자 되기 때문이다. 본문에서 “나는 사람을 파괴할 것이다”라고 여호와께서 말하시는데, 사실상 인간이 자신을 파괴하고 소멸되게 한다.
이런 모습은 지옥에서 고통 가운데 있는 이들로부터 분명해진다. 이들은 자신들에게 내린 처벌을 계속 애석해 하고 처벌의 모든 악을 주님께 그 탓을 돌리고 있다. 악령들의 세계에서는 타인에게 피해를 주고 처벌하는 일을 자기의 즐거움이자 가장 큰 기쁨으로 만드는 자도 흔하다; 게다가 이 짓을 하는 자들은 이것이 주님으로부터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런 자들에게 악의 어느 한 조각도 주님으로부터 있지 않다는 것, 처벌의 원인은 그들 자신에게 있다고 말하여진다; 그 이유가 악이 악을 행한 자에게 되돌아 오는 공평(equilibrium)의 법칙이 다른 삶에서는 있기 때문이다. 이것으로 해서 악의 처벌이 있다. 누구도 이것에서 예외는 없다. 이것은 악의 수정됨을 위하여 허용된다고 말해진다. 주님께서는 여전히 처벌의 모든 악을 선으로 되돌리신다; 그리하여 주님으로부터 나가는 것은 선 밖에 어떤 것도 없게 된다. 허용(permission)이 무엇인지는 아무도 알지 못해왔다; 허용된 것은 허용한 그분에 의해 행해져 있다고 믿어진다. 그 이유는 그분이 허용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실인즉, 아주 딴 방법으로 이다, 이에 관하여는 주님의 신성한 자비로부터 차 후 살핀다 (2447항 참조).

내가 창조한 사람을, 지면의 얼굴 위로부터. 이 사람은 태고 교회의 후손으로부터의 사람을 의미하는 것은 이미 말해온 것들로부터, 즉 그분이 “창조”한 사람, 즉, 그분이 거듭나게 한 사람; 그리고 그 후에 그분이 “만든” 사람, 즉 완전해진 사람, 또는 천적 수준이 될 때까지 거듭난 사람으로부터 분명해지고; 뿐 아니라 그것의 존재로부터, 즉 “지면의 얼굴 위로부터”에서도 분명해진다. “지면”은 교회가 존재하는 곳이다. 이와 똑같은 것이 자기들의 그리워함 안에 신앙의 교리들을 침수시킨 이들이 취급된 사실들로부터도 분명해진다; 그리고 신앙의 교리적인 것들을 가지지 못한 이들은 그렇게 침수할 수 없었다. 교회 바깥에 있는 자들은 진리와 선에 무지해 있다. 어쩌면 이런 무지에 있는 이들은 신앙의 진리들과 선들에 반대되는 것을 말하고 행동하면서도 어떤 종류의 순진 안에 있을런지 모른다; 그 이유가 이들은 과거 어릴적 자신들이 양육되어온 것, 그때부터 진리와 선이라고 믿어왔던 것으로부터 예배에 대한 어떤 열정으로부터 행동할런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앙의 교리를 확실히 가진 이들의 경우는 이와는 딴판이다. 이들은 진리를 거짓들에 섞을 수 있다, 거룩한 것을 모독된 것과 뒤섞을 수 있다. 이들에게 다른 삶에서 거주하게 할당된 영역은 이방인들이라 불리는 이들 보다도 훨씬 더 열악하다. 이들에 관해 주님의 신성한 자비로부터 차 후 살필 기회가 있을 것이다.

사람과 짐승 모두, 그리고 기는 것. 이 대목이 의지로부터 있는 것은 무엇이든 소멸 하리라는 것을 의미함은 “사람”, “짐승”, “기는 것”의 의미로부터 분명해진다. 인간은 오로지 의지력과 이해력으로 부터서만 인간이고, 이를 수단으로 야수로부터 구별된다; 그 외 여러 측면에서는 인간도 야수들과 비슷한 것이 많다. 본문의 사람들의 경우, 선을 뜻함과 진리를 이해함 모두가 멸하여졌다. 선을 뜻함을 대신하여 광기의 그리워함이 있었다. 진리를 이해함을 대신하여 비상식적인 공상이 있었다. 그리고 이것들이 그들의 그리워함과 뒤범벅이 되었다. 그리하여 그들의 리메인스는 마치 파멸된 것 처럼 있었는 바, 그들은 소멸될 수 밖에 없었다. 의지로부터의 모든 것들이 “짐승들”과 “기는 것들”이라 불리운다는 것은 짐승과 기는 것들을 살핀 앞의 대목으로부터 분명해질 것이다. (44-46; 246항 참조). 그러나 여기서 취급되는 인간의 특성인, “짐승”은 선한 애착을 의미하지 않고, 악한 애착을, 결과적으로 그리워함을 의미한다; 그리고 “기는 것들”에 의해서는 육체적, 감각적인 애착들을 의미한다. 이에 대한 말씀으로부터의 확증은 이미 45, 46, 142, 143항에서 살핀 바 있어 생략한다.

하늘들의 새가 이해함으로부터 있는 것, 즉 생각함으로부터 있는 것은 무엇이든을 의미하는 것은 40항에서 알 수 있을 것이다.

8절. 그리고 노아는 여호와의 눈에서 은총을 발견했다. “노아”는 새로운 교회를 의미한다. 그가 “여호와의 눈에서 은총을 발견했다”란 주님께서 인류가 이런 식이라면 구원될 수 있으리라고 예견하셨음을 의미한다.

“노아”에 의해 새로운 교회가 의미되어진다. 이 새로운 교회는 홍수 이전의 교회인 태고 교회와 구별되도록 고대 교회(the ancient church)라 불리우는 바, 고대 교회는 홍수 이후에 있는 교회이다. 위 두 교회들의 상태는 전적으로 달랐다. 태고 교회는 선을 지각하고, 이 지각으로부터 파생된 진리를 주님으로부터 가지는 방식이었다. 고대 교회의 상태, 또는 “노아”는 그들이 선과 진리에 관한 양심(conscience)을 가지는 방식이었다. 이는 지각을 가짐과 양심을 가짐 사이의 차이와 같다고 말해도 무난하다. 더불어 태고 교회와 고대 교회의 차이라 규명해도 하자가 없다. 지각(perception)은 양심이 아니다; 천적 평면(the celestial)은 지각을 가진다; 영적 평면(the spiritual)은 양심을 가진다. 태고 교회는 천적(celestial) 수준이었고, 고대 교회는 영적(spiritual) 수준이었다.
태고 교회는 주님으로부터 직접적인 계시를 가졌다. 그 수단은 영들과 천사들과 한 식구 됨(consort)으로 해서, 또한 환상들과 꿈들로 해서 였다. 이를 통해서 선하고 참된 것에 관한 일반적인 지식을 가지도록 그들에게 주어졌다; 그들이 일반적 지식을 획득한 후, 이러한 이끌어가는 일반적 원리들은 지각들을 수단으로 셀 수 없는 많은 것들에 의해 확증되어졌다; 그리고 이 무수한 것들은 일반적 원리와 유기적인 관계를 갖는 특별 항목, 세부 사항이었다. 그런고로 날이 가면 갈수록 이끌어가는 일반적 원리들은 늘어나는 세부 항목들로 해서 더욱 확실한 원리임이 확증된다; 그들은 일반적 원리에 일치 않는 것은 무엇이든 그것은 아니다고 지각했다; 그 반면 일치하지 않는 것은 그것은 맞다고 지각했다. 천적 평면의 천사들은 이런 품성을 지니고 있다.
태고 교회의 일반적 원리들은 천국의 진리들이고 영원한 진리들이다. 이러하다; 주님이 우주를 통치하신다는 것, 모든 선과 진리는 주님으로부터 있다는 것, 모든 생명은 주님으로부터 있다는 것, 인간의 자기 자신은 악 밖에 없다는 것, 그리고 그 자체 죽어 있다는 것; 이와 유사한 많은 다른 품성들도 있다. 그리고 그들은 이런 진리들을 받쳐주고 확증하게 하는 수도 없는 것들을 주님으로부터 지각으로 받았다. 그들과 더불어 사랑은 신앙의 제 1 원리였다. 사랑을 수단으로 신앙으로부터 있는 것은 무엇이든 지각하도록 주님으로부터 그들에게 주어졌다. 이로 인해 그들과 더불어 신앙은 사랑이었다, 그러나 고대 교회는 판이하게 다르다, 이에 관하여는 차 후 주님의 신성한 자비로부터 살필 것이다.

그는 여호와의 눈에서 은총을 발견하였다란 주님께서 인류를 이런 방식으로 구원하실 것을 예견하셨음을 의미한다. 주님의 자비에는 온 인간 종족의 구원이 포함되어 있고, 주시하시고 있다; 이것은 그분의 “은총(grace)”의 경우도 동일하다. 그러므로 인간 종족의 구원이 의미되고 있다. “노아”는 새로운 교회, 뿐만 아니라 새로운 교회의 신앙도 의미한다. 이 신앙은 선행(charity)으로부터 있는 신앙이었다. 그런고로 주님께서는 선행으로부터의 신앙을 통하여 인류는 구원되어질 것임을 예견하신 것이다 (이 신앙은 차 후 살핀다).
말씀에서 단어 “자비”와 “은총” 사이에 구별이 있다. 그리고 이것들을 받는 이들 사이에 존재하는 차이와도 일치한다; “자비”는 천적인 수준에 있는 이들에게 적용되고, “은총”은 영적인 수준에 있는 이들에게 적용된다. 그 이유가 천적 평면은 자비 밖에, 영적 평면은 은총 외에 거의 어떤 것도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천적 평면은 은총이 무엇인지 모르고, 영적 평면은 자비가 무엇인지 모른다. 다시 말해 천적 평면은 자비만 존재하고 영적 평면은 은총만 존재한다. 이 둘은 각기 다른 겸손(humility, 부끄러워함, humiliation)을 바탕으로 하여 있다. 심정의 겸손함에 있는 이들은 주님의 자비를 빈다(beg); 그러나 생각함의 겸손함에 있는 이들은 주님의 은총을 간절히 구한다(seek); 그리고 만일 후자들이 자비를 간구(pray)한다면, 시험의 상태, 또는 입만 가지고 행하여지는 상태에 있을 경우이다. “노아”라 불리는 새 교회는 영적 수준이지 천적 수준은 아니기 때문에, 여호와의 눈에서 “자비”를 발견하였다가 아닌 “은총”을 발견하였다고 말해진다.
말씀에서도 “자비”와 “은총”에 구별이 있는 것은 여호와께서 “자비로우시고 은혜로우신”이라고 일컬어지는 많은 구절들로부터 분명해진다 (예를 들면, 시편 103:8; 11:4; 145:8; 요엘 2:13). 이런 구별이 있는 구절을 몇 군데라도 찾아보자. 예레미야서에서:
그런고로 여호와께서 말하신다, 검을 놔두고 간 백성들이 광야에서 은총을
발견하였다, 내가 그에게, 이스라엘에게 휴식을 주러 갔을 때이다. 여호와께서
멀찍이서 나에게 나타나셨다; 그리고 나는 너를 영원한 사랑으로 사랑했다;
그러므로 자비 안에서 나는 너를 이끌었었다 (예. 31:2-3),
위 구절에서 “은총”은 영적 평면을 서술하고 “자비”는 천적 평면을 서술하고 있다. 이사야서에서: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은총을 주시려고 기다리신다,
그러므로 너희 위에 자비를 가지도록 자신을 드높이신다 (이. 30:18).
위 구절 역시 “은총”은 영적 평면을 주시하고, “자비”는 천적 평면을 주시한다. 이와 비슷한 대목이 롯이 천사에게 말하는 구절이다:
당신의 종이 간절히 바라는 것은 당신의 눈에서 은총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당신은 자비를 크게 만드셔서 당신께서는 제 혼이 살아있게 만들고저
저와 함께 작업하셨습니다 (창. 19:19).
“은총”은 신앙으로부터 있는, 또는 이해력으로부터 있는 영적인 것들에 관련된다는 것은 위 구절에서, “당신의 눈에서 은총을 발견하였다”로부터 분명해진다; “자비”는 사랑으로부터, 또는 의지로부터 있는 천적인 것들에 관계가 있다는 것은 천사에게 “작업한 자비”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그리고 “혼을 살아있게 만들었음”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말해진 것에서 분명해진다.

창세기 6장 9-22절

9 이것들은 노아로부터의 출생들이다. 노아는 그의 세대에서 올바른 자요 완전한 사 람이었다. 노아는 하느님과 함께 걸었다.
10 그리고 노아는 세 아들들, 셈, 함, 야벳을 낳았다.
11 그리고 땅은 하느님 앞에서 부패되어 있었다. 그리고 땅은 폭행으로 채워져 있었 다.
12 그리고 하느님께서 땅을 보셨다, 그리고 들여다 보니 그것은 부패되어 있었다, 그 이유가 모든 육체가 땅에서 그것의 길을 타락시켰기 때문이다.
13 그리고 하느님께서 노아에게 말하셨다, 모든 육체의 끝이 내 앞에 와 있다. 그 이 유는 땅이 그들의 얼굴로부터 폭행으로 채워져 있다, 그리고 보라 나는 땅과 함께 그들을 파괴하리라.
14 너는 고페르 목재(gopher wood)로 방주를 만들고, 너는 대저택들을 방주에 만들 어라, 그리고 그것을 역청으로 그것을 안팎으로 역청칠을 하라.
15 이런 식으로 너는 방주를 만들어라. 방주의 길이는 삼백 큐빗이고, 넓이는 오십 큐 빗이며, 높이는 삼십 큐빗이다.
16 너는 방주에 창문을 만들어라, 그리고 너는 창문을 위로부터 한 큐빗에서 마무리 하라. 그리고 너는 방주의 문을 옆쪽에 두어라. 너는 가장 낮은 층, 둘째 층, 셋째 층을 만들 것이다.
17 그리고 나는, 내가 땅 위에 물들의 홍수를 가져와서 하늘들 아래로부터 있는 생 명들의 호흡이 있는 모든 육체를 파괴하리라; 땅 위에 있는 모든 것도 소멸할 것이 다.
18 그리고 나는 너와 나의 언약을 세우겠다. 그리고 너는 방주로 들어 가되, 너, 그리 고 너의 아들들, 너의 아내, 네 아들들의 아내들도 너와 함께 들어가라.
19 그리고 모든 육체의 살아 있는 모든 것 각각 한 쌍을 너와 함께 방주로 들어오게 해서 생명이 보존되게 만들어라. 그들은 숫컷과 암컷일 것이다.
20 새는 각 종류대로, 짐승은 각 종류대로, 지면에서 기는 것도 각 종류대로, 모든 종 류가 한 쌍씩 너에게로 들어와서 생명이 보존되게 하라.
21 너는 먹어야 하는 모든 양식을 너에게로 가져오라, 그리고 그것들을 너에게로 수 집하라. 그리고 그것들은 너와 그들을 위한 양식일 것이다.
22 그리고 노아는 하느님께서 그에게 명령한 모든 것에 따라 했다. 그렇게 그는 했다.

각 절의 내적 의미

9절. 이것들은 노아로부터의 출생들이다. 노아는 그의 세대에서 올바른 자요 완전한 사람이었다. 노아는 하느님과 함께 걸었다. “노아로부터의 출생들”이란 새로운 교회로 재구성 또는 거듭남에 관한 특징 열거(description)이다. “노아는 그의 세대에서 올바르고 완전한 사람이었다”란 그에게는 선행이 부여될 수 있었음을 의미한다. “올바름”(just, righteous)“은 선행으로부터의 선에 관련되고, “완전함”(perfect)은 선행으로부터의 진리와 관련된다. “세대들”이란 신앙에 관한 것들이다. “하느님과 함께 걷는다”란 에녹에 관해 말했던 때와 같이 신앙에 관한 교리를 의미한다.

“노아의 출생들”에 의해 새로운 교회로 재구성 또는 거듭남에 관한 특징 열거가 의미됨은 창. 2:4; 창. 5:1에서 살핀 바에서 분명해진다.

노아는 그의 세대에서 올바른 자요 완전한 사람이었다. 이것은 그가 선행을 수여받아질 수 있는 사람임을 의미한다는 것은 “올바름”이 선행으로부터의 선에 관련을 가지고, “완전함”은 선행으로부터의 진리에 관련된다는 것으로부터, 또한 이 교회의 필수 요소가 선행이다는 점으로부터 분명해진다. 이에 관하여는 차 후 주님의 신성한 자비로부터 더 살핀다. “올바름”이 선행의 선에, “완전함”이 선행의 진리에 관련됨을 이사야서로부터 보자:
그들은 내 길들에 관한 지식을 날마다 구하고 바랄 것이다, 마치 정의를 행하고
자기들의 하느님의 공정을 버리지 않는 민족들 같다; 그들은 나에게 정의의 판결을
구할 것이다, 그리고 하느님께의 접근을 갈망할 것이다 (이. 58:2).
여기서 “공정”은 진리로부터 있는 것을 표시한다, 그리고 “정의”는 선으로부터 있는 이들이다. “정의와 공정을 실행함”은 참되고 선한 것을 행함을 위한 설립된 관용적 표현이 되었다 (이. 56:1; 예. 22:3, 13, 15; 23:5, 33:14, 16, 19도 참조). 주님께서 말하셨다:
정의로운 자는 내 아버지의 왕국에서 태양 같이 빛을 낼 것이다 (마. 13:43),
“정의로운 자”는 선행을 수여받는 자를 뜻한다. 시대의 종말에 관하여 그분은 말하셨다:
천사들이 나가서 의로운 자 사이에서 사악한 자를 떼어낼 것이다 (마. 13:49).
위에서도 역시 “의로운 자”는 선행의 선 안에 있는 이들을 표시한다.
“완전함”이 선행으로부터 있는 진리를 의미하는데, 그 이유는 진리는 또 다른 많은 근원으로부터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주님으로부터의 선행의 선으로부터 있는 것이 “완전함”, 또는 “완전한 사람”이라 불리우고 있다. 다윗서에서:
당신의 천막에 누가 체류할 것입니까? 당신의 거룩함의 산에 거주할 자 누구입니까?
완전함에서 걷는 자, 정의를 일삼는 자, 그리고
그의 심정에서 진리를 말하는 사람입니다 (시. 15:1-2).
“완전한” [또는 완벽한] 사람이 여기서 묘사되어진다. 다시:
거룩한 자에게 당신께서는 거룩한 당신 자신을 보이실 것이다; 완전한 사람에게
당신은 완전한 당신 자신을 보이실 것이다 (시. 18:25),
위에서 “완전한 사람”은 거룩함으로부터 그렇게 있는 자, 또는 선행의 선이다. 그리고 다시:
여호와께서는 완전함 안에서 걷는 그들로부터 선을 보류하시지 않는다 (시. 84:11).
“완전한 사람”은 선으로부터 진리인 자, 또는 선행으로부터 진리를 말하고 행하는 자이다는 것은 “걷다”와 “길”이 완전인 것, 즉 온전함(wholeness, entirety)에 자주 적용된다는 것에서, 또한 진리에 속해있는 단어, “직바름(uprightness)으로부터 분명해진다. 다윗서를 보자:
나는 완전한 자에게 그가 나에게 오는데 얼마나 먼 길인지를 가르칠 것입니다.
나는 내 심정의 완전함 안에서 내 집 안에서 걸을 것입니다 (시. 101:2),
그리고 제 6절에서:
완전함 안에서 걷는 자가 나를 섬길 것입니다 (시. 101:6).
길에서 완전한 자, 여호와의 법 안에서 걷는 자는 복되다 (시. 119:1).
완전함과 직바름이 나를 지킬 것이다 (시. 25:21).
완전한 자에 주목하고 직바른 자를 주시하라, 그 이유가
이 사람의 끝은 평화이기 때문이다 (시. 37:37).
위의 여러 구절로부터 분명해지는 것은 “의로운 자”라 불리는 자는 선인 것을 행하는 자, “완전한 자”라 불리는 자는 진리인 것을 행하는 자이다는 것, 이것들 역시 “정의 와 공정”을 행하는 것이다. “거룩함”과 “정의로움”은 신앙의 천적 수준이다; “완전함” 그리고 “공정함(judgement)”은 천적 수준에서 파생된 영적 수준이다.

“세대들”이 신앙으로부터의 것들(신앙 발달의 단계들)이다는 것은 역사적인 것인 글자 의미로부터는 나타나지 않는다; 따라서 여기서는 내적인 것만을 다루는 바, 신앙의 세대들이 의미되었다. 이것은 또한 세대들이 다른 말들과 연결되지 않는 것에서도 분명하다. 이는 말씀의 다른 구절에서도 확인된다. 이사야서에서:
너로부터 있을 자들이 옛 것의 황폐된 장소를 건설할 것이다; 너는 대대로의 기초를
일으켜 세울 것이다; 그리고 너는 파괴함을 수리하는 자라,
작은 길들을 거주하도록 회복하는 자라 불러질 것이다 (이. 58:12).
이 모든 것들은 신앙으로부터 있는 것을 의미한다; “옛 것의 황폐된 장소”란 신앙 속의 천적인 것들; “대대로의 기초들”은 신앙 속의 영적인 것들을 의미하는데, 이것들이 고대 시대로부터 소멸되어 왔다.
다시:
그들은 옛 황폐된 것들을 건설할 것이다, 그들은 이전의 황폐된 것들을 일으킬 것이다,
그들은 황폐한 성들, 대대로의 황폐된 것들을 새로이 할 것이다 (이. 61:4),
이 구절도 앞 구절과 비슷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다시:
그들은 헛되이 노동하지 않을 것이다, 곤경을 위해 산출하지 않을 것이다;
그 이유가 그들은 여호와의 복된 씨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과 더불은 자손도 (그러하다) (이. 65:23).
위에서 “산출함(bring forth, generare)”은 신앙으로부터의 것들을; “노동함(labor)”은 사랑으로부터의 것들을 서술한다. 사랑으로부터의 것들로부터 그들은 “여호와의 복된 씨”이고; 신앙으로부터의 것들로부터 그들은 “자손”이다.

“하느님과 더불어 걷는 것”이 신앙의 교리를 의미하는 것은 지난 번, 에녹 (창. 5:22, 24)을 살핀 대목으로부터 알런지 모른다. 에녹을 두고, “그는 하느님과 함께 걸었다” 하고 말해진다. 이는 후손의 사용을 위해 보존된 신앙의 교리를 의미하고 있는데, 이 후손이 바로 지금 거론되고 있기에 이 구절에서도 같은 어구인 “하느님과 함께 걸었다”가 다시 등장하고 있다.

이 교회 사람의 품질이 9절에서 일반적 수준에서 묘사되어 있다. 엄밀히 구분하면 이 교회는 아직까지는 이 구절 그대로와 같은 수준은 아니다. 그 이유가 이 교회의 형성(formation)이 뒤이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그런 수준이 되어간다는 것; 즉 신앙의 지식을 수단으로 그는 선행을 수여받아질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그렇게 선행으로부터 행동한다는 것, 그리고 선행의 선으로부터 진리인 것을 안다는 것이다. 이런 이유에서 문구 역시 선행의 선, 즉 올바른 자가 먼저 있고, 그 다음 선행의 진리, 즉 완전한 자가 뒤이어진다. 선행, 이미 말한 바대로 이웃을 향한 사랑과 자비이다; 그리고 이는 태고 교회의 사랑, 즉 주님을 사랑함 보다 낮은 수준의 사랑이다. 그런고로 지금은 외적인 쪽으로 더 가 있는 셈이다, 그리고 (사랑이 아닌) 선행이라 불리어진다.

10절. 그리고 노아는 세 아들들, 셈, 함, 야벳을 낳았다. “노아가 세 아들들을 낳았다”란 노아로 의미되는 교리로부터 세 종류의 교리가 출현했음을 의미한다. 이것이 “셈, 함, 야벳”으로 의미되고 있다.

노아는 세 아들들을 낳았다. 이는 거기로부터 세 종류의 교리가 출현했음을 의미한다는 것은 앞서 이름들의 의미를 살핀 곳에서, 이름들은 교회, 또는 교리들 밖에 더 다른 의미는 없음에서 분명해진다. 여기서도 같은 맥락이다; 그러나 여기서의 경우, 이 세 이름들은 주님께서 이 천성을 지닌 사람이 선행을 수여 받을 수 있다는 예견하심의 연결 차원에서 언급될 뿐이다. 이 세 교리는 차 후 셈, 함, 그리고 야벳을 취급하는 곳에서 주님의 신성한 자비로부터 기술될 것이다.

“노아는 의롭고 완전하였다”는 것, 그는 “하느님과 함께 걸었다”는 것, 그리고 이 구절에서 그는 “세 아들들을 낳았다”는 것, 모두가 과거 시제에서 말하여진다, 그럼에도 이 표현들은 미래를 내다보고 있다. 이는 내적 의미에서는 시간과 관련 없음을 알게 해줄런지 모른다; 그리고 이런 (표현법을) 원어에서는 좋아하고 있다. 그래서 원어에서 때때로 한 개 그리고 같은 단어가 (시제가 바뀔 경우) 다른 단어들을 사용하지 않고 어떤 시간대나 무엇이든지에 응용한다. 그 이유는 이를 수단으로 내면의 것들이 더 명확하게 나타나기 때문이다. 언어는 이것을 내적 의미로부터 끌어내는 바, 이것은 누군가가 믿을 수 있는 것 보다 더 다양하다; 그러므로 이 언어 표현은 시간이나 구별함에 의해 제한 받아짐으로 고민하지 않아도 된다.

11절. 그리고 땅은 하느님 앞에서 부패되어 있었다. 그리고 땅은 폭행으로 채워져 있었다. “땅”은 종족(race)을 의미한다. 이 땅은 그들의 무시무시한 설득력 때문에 “부패되어 있었다”라고 말해지고 있다. 그리고 그들의 더러운 그리워 함 때문에 “폭행으로 채워져 있었다.” 이 구절과 이 장의 뒤 구절은 여호와라는 단어가 빠진 단순히 “하느님”이라고 말해지고 있다. 그 이유는 지금 거기에 교회가 없기 때문이다.

“땅”이 종족을 의미한다는 것은 앞서 땅과 지면의 의미를 살필 때 언급된 것에서 분명해진다. “땅”은 말씀에서 매우 자주 사용되는 단어 중 하나이다; 이 단어를 수단으로 주님의 진정한 교회가 있는 “토지(land)”가 의미되어진다, 즉 “가나안의 토지” 같은 경우이다; 또한 교회가 있지 않은 “토지”도 있다. 즉 이집트, 또는 이방인들의 “토지” 같은 경우이다. 그리하여 이것으로 거기 거주하는 종족이 표시된다. 이것이 종족을 표시하는 바, 마찬가지로 거기 거주하는 종족 속의 모든 이도 표시한다. 교회는 천적 사랑으로부터 “토지”라 불리워진다. 이는 “가나안의 토지” 같은 경우이다; 그리고 불순한 사랑들로부터는 “이방인들의 토지”라 불리운다. 그러나 이식되어진 신앙으로부터 “지면”이라 불리운다; 그 이유는 토지나 나라는 지면을 담는 그릇이고, 지면은 들판을 담는 그릇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사랑은 신앙을 담는 그릇이고, 신앙은 이식된 신앙에 관한 지식들을 담는 그릇이다는 말이다. 여기서의 “땅”은 천적인 사랑의 모든 것과 교회의 모든 것이 멸해진 종족을 위해 사용되고 있다

땅이 그들의 끔찍한 설득력들 때문에 “썩어지고”, 더러운 그리워함 때문에 “폭행으로 차있다”라고 말해진 것은 동사 “썩다”와 단어 “폭행”의 의미로부터 분명해진다. 말씀에서 이 말이 저 말을 위해 가져다 쓰는 일은 결코 없다. 그러나 문장의 표현이 한결 같도록 서술하는 단어 만으로도 내적 의미 까지 즉시 나타나게 하는 경우가 있는데, 여기서 사용한 단어 “썩다”와 “폭행”이 그 한 예이다. “썩다”는 그것이 황폐해질 때 이해함 측면의 썩음이고; “폭행”은 그것이 황폐할 때 의지 측면의 폭행이다. 고로 “썩은 것”은 설득력들을 서술하고, “폭행”은 그리워함들을 서술한다.

“썩은 것”이 설득력들을 서술하는 것은 이사야서로부터 분명하다:
그들은 내 거룩함의 모든 산에서 다치지 않을 것이고, 썩지 않을 것이다;
그 이유는 땅이 여호와의 지식으로 가득해 있기 때문이다 (이. 11:9).
그리고 이사야서 65장 25절에서도 “다치는 것”은 의지에. 또는 그리워함에, “썩은 것”은 이해함에, 또는 거짓의 설득력들에 관계되고 있다. 다시:
죄지은 민족, 불법을 일삼는 백성들, 악행 자들의 씨,
썩은 자인 아들들에게 화가 있다 (이. 1:4).
위에서, 그리고 다른 구절에서도, “민족” 그리고 “악행 자들의 씨”는 의지, 그리워함으로부터 있는 악들; “백성들” 그리고 “썩은 자인 아들들”은 이해력, 또는 설득력으로부터 있는 거짓들이다. 에스겔서에서:
너희는 네 모든 길들에서 그들 보다 더 썩었다 (겔. 16:47).
위에서 “썩다”는 이해함, 또는 추론함, 또는 생각함으로부터의 것들을 서술한다; 그 이유가 “길”은 진리를 의미하는 단어이기 때문이다. 다윗서에서:
그들은 썩은 것을 행했다, 그리고 역겨운 일을 행했다 (시. 14:1).
위에서 “썩은 것”은 끔찍한 설득력들을 표시한다, 그리고 “역겨운”은 일 안에 있는 더러운 그리워함을 표시한다, 이 그리워함으로부터 일이 진행되어진다. 다니엘서에서:
62주에 메시아가 중단하실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 그에게 속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을 것이다; 그리고 지도자의 백성은 도성과 성소를 썩게 할 것이다,
그리고 거기로부터 홍수와 더불어 있을 것이다 (단. 9:26).
위 구절 역시 “썩다”는 거짓인 것으로부터의 설득력, 이로부터 “홍수”가 서술되어진다.

땅은 폭행으로 가득찼다. 이렇게 말해진 것은 그들의 더러운 그리워 함들 때문에, 자기를 사랑함, 또는 과도한 거만으로부터 와지는 것들 대부분 때문임은 말씀으로부터 분명해진다. 인간이 거룩한 것들을 모독함으로 그것들에 폭력을 휘두를 때, 마치 홍수 직전 사람들이 갖가지 종류의 그리워함 안에 신앙의 교리적인 것들을 침수해버린 경우 같을 때, 이를 두고 “폭행”이라 말해지는 것이다. 에스겔서에서:
내 얼굴을 나는 그들로부터 돌릴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내 거룩한 [장소]를
모독할 것이다, 그리고 강도들이 내 거룩한 장소 안으로 들어가서 거룩함을
모독할 것이다. 사슬을 만들어라; 그 이유는 토지는 피들의 심판으로 가득하다,
그리고 성은 폭행이 가득하다 (겔. 7:22-23).
“폭행”은 위에서 그들이 누구인지를 서술해준다, 그리고 그들이 우리가 서술한 것과 같다는 것을 서술한다. 다시:
그들은 고독함에서 자기들의 빵을 먹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적막함에서
자기들의 물들을 마실 것이다, 그리하여 그녀의 토지는 그것의 충만함으로부터
황폐될런지 모른다, 그 이유는 거기 안에 거주하는 그들 모두의 폭행 때문이다
(겔. 12:19).
“그들이 고독함에서 먹을 빵”은 천적인 것들, 그리고 “그들이 적막함에서 마실 물들”은 영적인 것들, 이것들에 그들은 폭력을 가하고 모독해버린 것이다.
이사야서에서:
그들의 직물들은 의복들로 되지 못할 것이다 그들은 자기들의 일들 안에서
덮지 못할 것이다; 그들의 일들은 불법의 일들이다, 그리고 폭력의 행위가
그들의 손에 있다 (이. 59:6).
여기서 “직물들” 그리고 “의복들”은 이해함으로부터의, 즉 생각함으로부터의 것들; “불법” 그리고 “폭력”은 의지, 즉 일들로부터의 것들을 서술하고 있다. 요나서에서:
모든 이 각각은 자기들의 악한 길에서,
자기 손에 있는 폭행으로부터 돌아서게 하라 (욘. 3:8),
위에서 “악한 길”은 거짓들을 서술하고, 이는 이해함으로부터 있는 것들이다; 그리고 “폭행”은 악들을 서술하고, 이는 의지로부터 있는 것들이다. 예레미야에서:
소문이 일 년 안에 올 것이다, 그리고 토지 안에 폭행 (예. 51:46).
“소문”은 이해함으로부터 있는 것들, “폭행”은 의지로부터 있는 것들을 표시한다. 이사야서에서:
그분은 폭행을 가한 적이 없다, 그분의 입에서 어떤 사기침도 없었다 (이. 53:9).
위에서 “폭행”은 의지로부터의 것을; “그분의 입에 있는 사기침”은 이해함으로부터 것들을 표시한다.

(진정한) 교회가 있지 않은 상태가 이 대목에서 취급된다는 것은 앞 절의 경우, 단어 “여호와”가 사용되다가, 이 구절 그리고 이 장의 이어지는 구절에서 단어 “하느님”이 사용되기 때문에서 알게 된다. 교회가 있을 경우, “여호와”가 사용되는데, 창세기 첫 장 같이 교회가 없을 경우, 하느님이, 제 2장에서는 교회가 있었는 바, “여호와 하느님”이 사용되고 있다. 이름 “여호와”는 가장 거룩하다, 그리고 교회에 만 속해 있다; 그러나 이름 “하느님”은 가장 거룩하다고 까지 할 만큼 거룩하지는 않다. 그 이유가 인간이 존재하는 모든 곳에 하느님들은 존재하기 때문이다. 진정한 신앙에 관한 지식을 갖지 않으면 누구도 이름 “여호와”를 말하는 것은 허용되지 않았다; 그러나 이름 “하느님”은 누구라도 말할런지 모른다.

12절. 그리고 하느님께서 땅을 보셨다, 그리고 들여다 보니 그것은 부패되어 있었다, 그 이유가 모든 육체가 땅에서 그것의 길을 타락시켰기 때문이다. “하느님께서 땅을 보셨다”란 하느님이 사람을 알았음을 의미한다. “그것은 부패되어 있었다”란 거기에는 거짓 외에는 아무 것도 없음을 의미한다. “그 이유가 모든 육체가 땅에서 그것의 길을 타락시켰기 때문이다”란 인간의 물질적인(corporeal) 본성이 진리에 관한 모든 이해력을 파괴했음을 의미한다.

하느님께서 땅을 보셨다. 이는 하느님이 인간을 알고 계셨음을 의미하는 것은 모든 이에게 분명해 있을 것이다. 그 이유는 영원으로부터 모든 것을 아시는 분이 하느님이시라고 모두가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느님은 인간이 이런지 저런지 보실 필요도 없으셨다는 말도 된다. “보는”것은 인간의 몫이다, 그러므로 이미 지나온 6절이나 그 밖의 경우에서 말씀은 인간이 “보는” 것에 일치되어 말해지고 있다; 어떤 경우는 하느님께서 “눈을 가지고 보신다”라고 까지 (인간 바닥 수준에서) 말해지기도 한다.

그 이유는 모든 육체가 땅에서 그것의 길을 썩혔기 때문이다. 이는 인간의 물질적 본성이 진리에 관한 모든 이해력을 파괴했음을 의미하는데, 이는 “육(flesh)”의 의미로부터 분명해진다 (3절 참조). 육체는 일반적으로는 모두 각각의 인간을 뜻한다, 그리고 세부적으로는 물질적(corporeal) 인간, 또는 육체로부터 있는 모든 것을 뜻한다; 그리고 “길”의 의미가 진리를 이해함, 즉 진리 자체인 것으로부터 위 의미는 분명해진다. “길”이 진리를 이해함, 즉 진리를 서술한다는 것은 이미 여러 인용구절을 살폈는데, 아래 몇 개 더 추가해보자. 모세의 책으로부터:
여호와께서 말하셨다, 일어나라, 너는 여기로부터 빠르게 내려 가라; 그 이유는
네 백성들이 자신들을 썩혔다; 그들은 내가 그들에게 명령한 길로부터 갑자기 돌아섰다;
그들은 자기들에게 부어만든 상을 만들었다 (신. 9:12, 16),
그들의 진리들인 그분의 명령들로부터 돌아서버렸음을 뜻한다.
예레미야서에서:
그분의 눈들은 사람의 아들들의 모든 길들에 열려 있어,
모두 각각의 사람에게 그의 길들에 따라, 그의 일들의 열매에 따라 주신다. (예. 32:19).
위에서 “길들”은 명령들에 따른 삶이다; “그의 일들의 열매”는 선행으로부터의 삶이다. 그런고로 “길”은 진리들을 서술하고 있다, 이것은 가르침들과 명령들로부터 있는 것들이다. 그리고 “사람[homo]의 아들”의 의미와 남자[vir]의 의미는 이미 살폈다. 이 구절과 비슷한 구절이 같은 예언서에서 7:3; 17:10에도 있다. 그리고 호세아서에서:
나는 그의 길들에서 그를 방문할 것이다, 그리고
그에게 그의 일들을 되돌려 갚을 것이다 (호. 4:9).
스가랴서에서:
너는 네 악한 길들에서 돌아가라, 그리고 네 악한 일들로부터 돌아서라.
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의 길들에 따라, 그리고 우리의 일들에 따라
우리에게 행하려 생각했던 것같이 말이다 (슥. 1:4, 6).
위 구절 역시 의미는 비슷하나 그것들이 악한 길들과 악한 일들이므로 반대적 의미이다. 예레미야서에서:
나는 그들에게 한 개의 심정, 한 개의 길을 줄 것이다 (예. 32:39).
“심정”은 선들을 의미한다, 그리고 “길”은 진리들을 의미한다. 다윗서에서:
저로 당신의 명령들의 길을 이해하게 만드십시요; 나로부터 거짓말의 길을 옮겨주십시요; 그리고 제게 당신의 법을 은혜스럽게 수여하십시오. 저는 진리의 길을 선택했습니다.
저는 당신의 명령들의 길을 달릴 것입니다 (시. 119:27, 29-30, 32).
위에서 “명령들의 길”이 “진리의 길”이다 불리운다. 이것의 반대가 “거짓말의 길”이다. 다시:
저로 당신의 길(way)들을 알게 만드십시오, 오 여호와여, 제게 당신의
작은 길(path)들을 가르치십시오. 제 길을 당신의 진리 안에서 인도하십시오,
그리고 저를 가르치십시오 (시. 25:4-5).
위 구절 역시 “길”은 진리를 분명히 표시한다. 이사야서에서:
여호와께서는 누구와 더불어 의논을 하셨는지, 누가 그를 훈육했는지, 그리고
[누가] 공정의 길을 그에게 가르쳤는지, 그리고 [누가] 지식을 그에게 가르쳤는지,
그리고 [누가] 그를 이해함의 길을 알게 만들었는지 (이. 40:14),
위 구절은 진리를 이해함을 위해서가 분명하다. 예레미야서에서:
그런고로 여호와께서 말하셨다, 너희는 길에 서서 보라, 그리고 옛 작은 길들을
물어보라, 좋은 길이 어디 있는지, 그리고 그 안에서 가라 (예. 6:16).
위 구절 역시 “길”이 진리를 이해하기 위해 놓여져 있다. 이사야서에서:
나는 너희 알지 못하는 길에서 눈먼 자를 인도할 것이다, 그들이 알지 못해왔던
작은 길에서 나는 그들을 인도할 것이다 (이. 42:16).
단어 “길(way),” “작은 길(path),” “거리(street),” “도로(road),” “좁은 길(lane)” 등등은 진리를 서술한다. 그 이유는 그것들이 진리로 인도하기 때문이다; 예레미야서에서:
그들은 보조 도로, 즉 다듬지 않은 길에서 걸으려하다가 고대의 작은 길들에서,
자기들의 길들에서 자신들을 걸려 넘어지게 한다 (예. 18:15).
사사기서에서:
야엘의 시절에 작은 길들이 중단되었다, 그리고 작은 길에서 걷던 자들이
구불어진 작은 길을 통해 갔다. 도로들이 이스라엘에서 중단되었다 (사. 5:6).

여기서의 내적 의미는 이렇다. 교회가 있던 토지에 있는 자는 누구이던 “자기의 길을 썩혔다”, 즉 모든 자는 진리를 이해할 수 없었다 이다. 그 이유가 모든 이가 물질적이 되었기 때문, 이 자들은 앞 절의 사람들 뿐 아니라 “노아”로 불린 이들, 특히 이 구절과 다음 구절에 있는 사람들 까지 아우른다. 그 이유가 이들은 거듭나기 전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먼저 말해진 이유는 다음 절에서 그들의 거듭남이 다루어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주 조금 교회의 것이 남은 까닭에 “여호와”가 아닌 “하느님”이 지금은 명명된다. 이 절에서 남은 진리가 없다고 말해졌다. 그리고 다음 절에서 “노아”라 불린 이들이 가진 리메인스 외에는 아무 선도 없다고 말해진다. (그 이유가 리메인스가 없으면 구원도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이 알았던 교리적인 문제들도 남은 것이 없다. 선한 의지가 존재하지 않는 곳에는 진리를 이해함도 없다. 의지력이 있지 않을 경우, 이해력도 있지 않는다; 의지가 있다면, 이해함도 있다. 태고인들은 선한 의지를 가졌다. 그 이유는 그들이 주님을 사랑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로부터 그들은 진리에 대한 이해를 가졌다. 그러나 이 이해력은 의지력과 함께 완전히 사멸됐다. 아무리 그럴지라도 자연적 선, 뿐만 아니라 어떤 종류의 합리적 진리가 “노아”라 불려지는 이들과 더불어 남았다. 그러므로 그들은 거듭나아질 수 있었다.

13절. 그리고 하느님께서 노아에게 말하셨다, 모든 육체의 끝이 내 앞에 와 있다. 그 이유는 땅이 그들의 얼굴로부터 폭행으로 채워져 있다, 그리고 보라 나는 땅과 함께 그들을 파괴하리라. “하느님께서 말하셨다”란 그러하였음을, “모든 육체의 끝이 내 앞에 와 있다”란 인간 종족은 멸해질 수 밖에 없음을, “그 이유가 땅은 폭행으로 채워져 있기 때문”이란 선한 의지가 더 이상 없음을, “보라 나는 땅과 함께 그들을 파괴한다”란 인간 종족은 그 교회와 함께 멸해질 것임을 의미한다.

“하느님께서 말하셨다”는 그러하였음을 의미하는 것은 여호와는 있음(being) 자체이시다는 사실로부터 분명하다.

모든 육체의 끝이 내 앞에 와 있다 란 인간 종족은 사멸할 수 밖에 없다를 의미한다. 이는 문장의 단어들 자체, 그리고 육체의 의미, 즉 모두 각각의 인간은 물질적 인간을 일반적, 특수적 측면에서 뜻함으로부터 분명해지는데 이미 설명한 바 있다.

땅이 폭행으로 가득 차 있다 란 그들이 더 이상 선한 의지를 가지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이는 11절에서 “폭력”의 의미를 살필 때 말했다. 앞 절에서는 진리를 이해함이 말해지고, 여기서는 선한 의지가 말해진다. 그 이유는 이 둘 모두 교인과 더불어 멸해지기 때문이다.

위의 경우에 대한 설명이다. 태고 교회에 속한 사람을 포함해 진리를 이해함과 선한 의지를 갖지 않은 인간은 아무도 없다. 인간이 천적 수준에 이르렀을 때, 그들은 선한 의지와 진리를 이해함을 가져버린 것 처럼 나타난다, 그럼에도 그것은 주님만으로부터 이다. 이것을 천적 인간들 역시 알고 인정하고 지각한다. 천사들 역시 이와 마찬가지이다. 이렇게 알지 않고, 인정하지 않고, 지각하지 않는 자는 선한 의지가 없고, 진리를 이해함도 없다. 모두 각각의 인간, 모두 각각의 천사, 최고로 천적 수준의 누구라 해도 그의 자기 자신(own)에는 거짓과 악 밖에 없다; 이런 이유를 욥기 15장 15절을 참작하면 주님 이전 천국들은 깨끗하지 않았음이 알려져 있었던 것으로 미루어 짐작해도 이해될 것이다. 더불어 모든 선과 진리는 주님만에 속한 것, (주님만으로부터 우리에게 있어지기) 때문이다. 인간이 완전해질 수 있는 만큼에서, 주님의 신성한 자비도 그 만큼 허락되어, 그 만큼 그는 완전해진다. 말하자면, 선한 의지와 진리를 이해함도 그 만큼 받는다는 말이다; 그러나 그가 받을 수 있는 만큼 받은 것마저도 그가 가진 것은 오로지 가진 듯 보이는 것(appear)일 뿐이다. 모든 인간은 완전해질 수 있다 -결과적으로 주님의 자비로부터 이 선물을 받을 수 있다 -그러나 받는 (양과 질은) 두 가지 조건에 따라, 즉 그의 삶의 실제 행동들에 일치되게, 그리고 자기 부모들을 수단으로 이식된 유전적 악에 걸맞추어 결정된다.

진리를 이해함과 선한 의지가 적당한 의미에서 무엇인지를 납득되도록 말하는 것은 지극히 힘든 것 같다. 그 이유가 사람은 자기가 생각하는 것이 이해함(력)으로부터 있다라고 상상하고, 그렇게 부르고 있기 때문이다; 그가 바라는 모든 것을 그는 의지로부터 있다라고 상상하고, 그렇게 부르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을 설명하는데 더 한층 힘들게 하는 것은, 오늘날의 사람들은 이해력 속에 있는 것은 의지력 속에 있는 것으로부터 구분되어 있다는 것에 무지해 있어서 이다. 그 이유가 그들이 어떤 것을 생각할 때 그들은 자기들이 그것을 뜻한다고 말하기 때문, 그리고 그들의 어떤 것을 뜻할 때 그들은 자기들이 그것을 생각한다 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힘든 한 가지 원인이고, 또 다른 힘든 이유는, 인간은 육체에 속한 것 안에만 있다는 것, 즉 자기들의 삶은 극도로 외적인 것 안에 있다고 알고 있는 것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그들은 모두 각각의 사람 안에는 내면(interior)이라는 어떤 것이 있다는 것, 더 나아가 내면 안에 내면이 있는 것, 즉 가장 안쪽(inmost) 내면이 있다는 것; 그리고 그의 물질적이고 감각적인 부분은 가장 바깥쪽(outermost)일 뿐이다는 것이다. 바램(욕구, desire)들, 그리고 기억 속의 것들은 내면이고; 애착(affection)들과 합리적인 것들은 바램과 기억 속의 것들 보다 더 내면적이다; 그리고 선한 의지와 진리를 이해함은 가장 안쪽(inmost)이다. 그리고 이것들은 서로로부터 구분되어 있는데, 어느 것도 구분되어 질 수 없는 것은 없다. 육체적(corporeal) 인간은 위 모든 것을 하나로 만든다, 그리고 그것들을 구별하지 못한다 (confound). 이런 이유 때문에 육체가 죽을 때 모든 것도 죽게 되어 있다 라고 믿는다; 그렇게 믿을 지라도 사실인즉, 죽을 다음, 그는 먼저 살기를 시작한다. 이 삶은 그의 내면들을 수단으로 그것들의 순서 안에서 밀접하게 서로 서로의 뒤를 이어 간다. 만일 그의 내면들이 이렇게 구분이 되지 않고, 그리하여 이것 뒤를 이어 저것이 계승되지 않는다면, 인간들은 다른 삶에서 각자의 내면들에 따라 영들, 천사같은 영들, 천사들로 결코 구분되어 있지 않을 것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세 천국들이 있고, 각 천국은 다른 천국과 (철저히) 구분되고 있다. 위와 같은 추가 설명을 통해 적절한 의미에서 진리를 이해함과 선한 의지가 무엇인지 어림잡아졌으리라 생각한다; 그리고 그것들은 천적 인간, 또는 셋째 천국의 천사들에 만 해당되어 서술될 수 있다.

앞 절과 이 절에서 말해진 것은 홍수 이전 교회의 날들의 끝에서 진리를 이해함과 선한 의지의 모든 것이 사멸되었다는 것, 그리하여 홍수 이전 사람들 사이에 (있던) 끔찍한 설득력들과 더러운 그리워함들은 흔적 조차도 나타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노아”라 불리는 이들과 더불어 그들 안에서는 리메인스가 계속 존재했으나, 이 리메인스(remains)는 이해함(understanding)과 뜻함(will)의 어떤 것을 산출할 수 없었고, 오로지 합리적(rational) 진리와 자연적(natural) 선 만의 산출이 가능했다. 그 이유가 리메인스의 실행(operation)은 인간의 본성(nature, 본래의 모습)에 따라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리메인스를 통하여 이 사람들은 거듭나질 수 있었다; 그리고 설득력들이 (이 거듭남을) 방해하지 못했고, 리메인스를 통한 주님의 역사하심(operation)에 흡수되었다. 설득력들, 또는 거짓의 원리들이 모든 역사함(operation)을 방해함에 뿌리를 둘 때, 그래서 이것들이 먼저 뿌리 뽑혀지지 않으면 인간은 결코 거듭나아질 수 없다. 이에 관하여는 차 후 주님의 신성한 자비로부터 (더 살핀다).

나는 그들을 땅과 더불어 파괴할 것이다. 이는 교회와 더불어 인간 종족이 사멸되리라는 것을 의미함은 “땅과 더불어”라고 말해진 대목에서 분명해진다; 그 이유가 “땅”은 넓은 의미에서 사랑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고로 교회의 천적 수준의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여기에서의 경우, 사랑이 없고, 천적인 것에 속한 것도 남아있지 않은 바, 여기서의 “땅”은 자기를 사랑함, 또는 천적 수준의 것에 반대되는 것들을 의미한다. 그럼에도 거기에 교회의 사람이 있었다. 그 이유는 그들이 신앙의 교리적인 것들을 가졌기 때문이다. 이미 상술했던 바 같이, 땅은 지면의 그릇이고, 지면은 들판의 그릇이듯, 사랑은 신앙의 그릇이고, 신앙은 신에 관한 지식들의 그릇이기 때문이다.

“내가 그들을 땅과 더불어 파괴할 것이다”가 교회와 더불어 인간 종족이 멸해질 것이다를 의미한 이유는 이러하다: 만일 주님의 교회가 땅 위에서 완전히 소멸되어진다면, 인간 종족은 결코 존재 할 수 없고 모조리 사멸된다. 이미 말한 바대로, 교회는 심장(heart)과 같다: 심장이 살아있는 한, 이웃되는 내장이나 조직들이 살 수 있다; 그러나 심장이 죽자 마자, 그것들 역시 모조리 죽는다. 땅위에서 주님의 교회는심장과 같아, 거기서부터 인간 종족, 그것의 한 부분이 교회 바깥쪽일지라 해도 생명을 가진다. 이런 이유는 누구에게도 전혀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이것의 일부라도 알도록 서술해두어야 할 것 같다. 땅위 전체 인간 종족은 여러 부분들을 가진 신체 같이 존재하는데, 그 안에서 (주님의) 교회는 심장을 부분으로 존재한다; 그리고 이 교회가 주님이 천국과 영들의 세계를 통하여 하나이도록 하는 심장으로의 역할을 하지 않으면, 분리됨은 당연할 것이다; 그리고 주님으로부터 인간 종족의 분리됨이 있었다면, 인간 종족은 그 즉시 멸종되었을 것이다. 이것은 인간의 첫 창조로부터 교회가 언제나 있어온 이유이기도 하다. 또한 교회가 멸해질 때이면 언제나 다시 교회는 누군가와 더불어 남아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또한 이것은 주님께서 세상에 오신 이유이기도 하다. 만일 그분의 자비로 그분이 오시지 않았다면, 땅 위 전체 인간 종족은 사멸되고 말았으리라. 그 이유가 그 당시 교회는 그 끝점에 치닫고 있어, 어떤 선과 진리도 거의 살아 남아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인간 종족은 천국과 영들의 세계를 통해 주님과 결합하지 않으면, 인간 그 자체만 주시해본다면, 그는 야수 보다 더 수치스럽기 때문이다. 만일 인간을 자신 안에만 남겨둔다면, 이내 그는 자신의 파멸, 그리고 모든 것의 파멸로 돌진할 것이다; 그 이유가 그가 바라는 것의 전부가 그것이기 때문이다. 그분의 질서는 자신같이 타인을 사랑하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 모든 이가 타인 보다 더 자신을 사랑하고 있다, 그런고로 모든 타인을 미워하고 있다. 그러나 야생 동물의 경우는 아주 다르다: 그들의 질서는 그들이 사는 것에 따른 것이다. 그런고로 그들이 존재하는 질서에 꼭 맞추어 그들은 살고 있다. 인간은 자기 질서(이웃을 자신 같이 사랑함)에 정반대되고 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이런 인간 위에 측은해 하심을 가지시지 않으면, 동시에 인간들을 천사들을 통하여 주님에게 결합되게 하시지 않으면, 인간은 단 한 순간도 살 수 없다; 그러나 인간은 모른다.

14절. 너는 고페르 목재로 방주를 만들고, 너는 대저택들을 방주에 만들어라, 그리고 그것을 역청으로 안팎으로 바르라. “방주”는 이 교회 속의 사람을, “고페르 목재(gopher wood)”는 이 교인들의 강한 욕망(concupiscences, 현세에의 욕망, 색욕, 육욕 등등)을, “대저택(mansion)들”은 인간의 두 부분들, 즉 의지력(will)과 이해력(understanding)을, “그것을 역청(pitch)으로 안팎으로 바름”은 탐욕에 침수됨으로부터 그가 보존됨을 의미한다.

“방주”가 “노아”라 불리는 교회, 또는 이 교인을 의미하는 것은 다음 절에서 방주에 대한 묘사로부터 충분하게 설명되어진다; 그리고 주님의 말씀은 어느 구절에서나 천적인 것들과 영적인 것들을 포함하고 있다는 사실로부터도 분명해진다; 즉 말씀은 영적이고 천적이다는 말이다. 방주가 역청으로 입혀지는 것, 방주의 칫수, 방주의 건축, 그리고 홍수 등등이 글자 대로의 의미 그 이상을 표현하는 것이 없다면, 거기에는 영적, 천적인 의미는 아예 없고, 역사적 어떤 것만 있을 것인 바, 여느 특이한 작가에 의해 서술된 것 이상, 인류를 위해 별 소용이 닿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주님의 말씀은 어느 구절에서나 말씀의 가슴에, 내면에, 영적인 것, 천적인 것, 또는 둘 모두를 한꺼번에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방주와 방주에 관하여 말해진 모든 것에는 지금까지 밝히 알려지지 않은 감추인 것들이 의미되어 있음은 확실하다.
이는 말씀의 다른 장소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예를 들어 말씀에는 대표적인 중요한 세 궤(ark)가 등장한다. 하나는 배라고 하는 궤, 즉 방주이다. 두 번째는 작은 상자, 또는 작은 궤인데, 모세가 이것에 감추여져 강가 사초(sedge)에 놓여졌다 (출. 2:3); 보다 더 고상한 실예는 광야에서의 거룩한 궤이다. 이 궤는 시내산에서 모세에게 보여준 모형에 따라 만들어졌다. 만일 궤에 관련된 각각 그리고 모든 것들이 주님과 그분의 왕국을 표현하지 않고 있다면, (우리의 예배 역시) 일종의 우상 숭배, 우상 예배의 수준 밖에 더 아닐 것이다. 마찬가지 생각에서 솔로몬의 성전 역시 (물질적) 그 자체, 즉 금, 은, 삼나무, 돌 등등 때문에 거룩한 것이 아니라, 그것들이 표현하는 것 때문에 거룩한 것이다. 이 구절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만일 방주와 그 건축, 그리고 그에 따른 세부 사항들이 교회에 관한 감추인 어떤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면, 말씀은 주님의 말씀일 리가 없고, 단지 죽은 글자, 여느 모독적인 작가의 글 수준에 머물 것이다. 그러므로 방주는 “노아”라 불리는 교회, 교인을 의미함이 분명해진다.

“고페르 목재”는 강한 욕망들을, “대저택”은 이 인간의 두 부분들, 즉 의지력과 이해력을 의미한다는 것은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았다. 어떻게 되어 의미가 이런지는 먼저 어떻게 이런 경우가 교회와 더불어 있게 되었는지를 말하지 않으면 아무도 알 수 없다. 태고 교회는 이미 자주 말했던 바 같이 사랑으로부터 신앙 속에 있는 것을 알았다; 다시 말해, 선한 의지로부터 진리를 이해했다는 말이다. 그러나 이 후손들은 유전에 의해 탐욕들도 상속 받았고, 이것이 의지 속에서 그들을 통치했는 바, 이 탐욕 안에 그들은 신앙으로부터의 것들을 침수되게 했다, 그래서 그들은 “네피림”이 되었다.
그리하여 주님께서 만일 사람들이 이런 본성을 계속 지닌다면, 필시 인간은 영원히 사멸하리라고 예견하셨다. 따라서 그분은 의지력을 이해력으로부터 분리하는 것, 인간은 이전 처럼 선한 의지를 수단으로가 아닌, 진리를 이해함을 통하여 선한 의지력 처럼 나타나는 선행을 수여 받아 (거듭남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그런고로 이 새로운 교회는 “노아”라 불리게 된 것이다. 이 교회는 태고 교회와는 아주 다른 본성을 지니고 있다. 사실 이 교회 외에도 그 당시 다른 교회들도 있었다. 창세기 4:26을 보면 에노스라 불리는 교회도 있다. 그 외 다른 교회들은 언급됨이나 묘사됨이 기록상으로는 잔존하지 않는다. 오직 이 교회 “노아”가 여기서 기술되는데, 그 이유는 이 교회만이 태고 교회와 아주 다른 본성을 지녔기 때문이다.

이 노아 교회인은 그가 의지력이라 불리는 부분이 개혁될 수 있기 전 이해력이라 불리는 부분이 개혁되어야 하는 바, 여기서 의지력에 속한 것들이 이해력에 속한 것들로부터 어떻게 분리되는지를 묘사하고 있다. 그리하여 의지력에 속한 것들에 어떤 것도 접촉하지 못하도록 의지 측면의 것들은 덮어서 가려져 있거나 따로 떼어 비축한듯한 상태로 있다. 그 이유가 의지속의 것들이 탐욕들의 부추킴으로 동요될 경우, 멸해지고 말기 때문인데, 차 후 더 살핀다. 이 인간의 두 부분들 -의지력과 이해력- 은 인간 안에서 완전히 구분되고 있어서 아마 이보다 더 완벽한 구분된 어떤 것은 없다. 나에게 이에 대한 확실함을 갖도록 영들과 천사들의 이해력이 (관찰함이) 나에게 주어졌다. 이들의 이해력은 머리 또는 두뇌의 왼쪽 부분 안으로 흐른다, 그리고 의지력에 속한 것들은 오른쪽 부분으로 흐른다; 그리고 얼굴에서도 같았다. 천사같은 영들이 안으로 흘러들 때, 그 흐름은 공기 속의 아주 부드러운 숨 쉼같다; 그러나 악령이 흘러들 때, 끔찍한 설득력들과 공상을 가지고 두뇌의 왼쪽 부분 안으로 범람하듯 밀려든다. 그리고 탐욕들과 더불어 오른쪽 안으로 흘러드는데, 이 흘러듬은 공상과 탐욕들의 범람함 같았다.

위 모두로부터 명백해지는 바, 방주에 관한 첫 묘사, 즉 고페르 목재로 건축함, 대저택들, 역청으로 안과 밖의 표면을 덮음, 등의 묘사는 의지력에 속한 부분이 침수됨으로부터 보존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해력에 속한 부분만이 열려짐이 16절에서, 그리고 가장 낮은 창문, 둘째, 그리고 셋째 창문으로 해서 묘사되었다. 이런 것들이 쉽게 믿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 이유는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의미들은 인간의 무지함을 수단으로 감추어져 있는 최소한의 의미이고 가장 일반적 의미에 불과하다. 만일 하나하나의 세부사항들이 말해진다면 그 하나하나조차도 납득할 수 없을 것이다.

이제 단어들 자체의 의미에 주목해 보자: “고페르 목재”는 강한 욕망을, “대저택”은 인간의 두 부분을 의미한다는 것이 말씀 안에서도 분명해진다. 고페르 목재는 전나무(fir) 같은 유황 성분을 많이 함유한 목재이다. 이런 종류의 나무는 다른 것들도 있다. 어쨌든 나무가 지닌 유황 때문에 이 목재는 강한 욕망을 의미한다, 그 이유는 쉽게 불이 잘 붙기 때문이다. 태고인들은 인간 안에 있는 것들을 금, 은, 놋쇠, 철, 돌, 그리고 목재(나무)에 이렇게 비교했다. 인간의 가장 안쪽 천적 평면의 것은 금에, 그의 보다 낮은 천적 수준인 것은 놋쇠에, 그리고 가장 낮은 것, 또는 물질적인 것은 목재에 비교했다. 그러나 그의 가장 안쪽 영적 평면의 것은 은에, 그의 보다 낮은 영적 평면의 것은 철에, 그의 가장 낮은 것은 돌에 비교했다. 이와 같은 내적 의미가 성경에서 그것들이 언급될 경우 그것들의 의미가 된다. 이사야서에서:
놋쇠를 위해 나는 금을, 그리고 철을 위해 나는 은을, 그리고 목재를 위해 나는
놋쇠를, 돌을 위해 철을 가져올 것이다; 나는 네 관리들을 평화로 만들 것이다.
네 강제 집행 관리들을 정의로 만들 것이다 (이. 60:17).
위 구절은 주님의 왕국과 그 안에 있는 것을 다루고 있다. 거기서의 금속들은 영적이고 천적인 것들이다; 이렇게 의미되는 것은 “평화”와 “정의”가 언급된 것으로부터 분명해진다. “금”, “놋쇠”, “목재”는 각각이 상응하여, 의지력에 속한 것, 또는 천적인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은”, “철”, “돌”은 각각이 상응하여 이해력에 속한 것, 즉 영적인 것들을 의미한다.
[2] 에스겔서에서:
그들은 네 재물들을 망쳐놓을 것이고 네 전리품을 상품으로 만들 것이다;
네 돌들, 그리고 네 목재 (겔.26:12).
위 구절에서 “재물들”, “상품”이 세상의 재물과 상품을 뜻하지 않고, 천적인 것과 영적인 것을 뜻함은 분명하다; 돌들과 목재도 마찬가지이다. “돌들”은 이해력에 속한 것들, 그리고 “목재”는 의지에 속해 있는 것들이다. 하박국에서:
돌들이 (성)벽으로부터 외친다, 그리고 목재로부터의 들보가 대답한다 (합. 2;11).
“돌”은 가장 낮은 수준의 이해력을, “목재”는 가장 낮은 수준의 의지력을 표시하는데, 이것들이 어떤 것이 감각적 지식으로부터 추출되어 나올 때 대답해준다. 다시:
깨어있으라 하고 목재에게 말하는 자에게 화가 있다; 그리고 벙어리 돌에게 일어나라
하고 말하고, 이것이 가르칠 것이다 하는 자에게 화가 있다. 잘 보라 그것은 금과 은으로
씌워져 있다. 그것들에는 숨이 없다.
그러나 여호와는 그분의 거룩함으로부터의 성전 안에 계신다 (합. 2:19, 20).
위 구절에서도 역시 “목재”는 탐욕을 표시한다; “돌”은 가장 수준 낮은 이해력을 표시한다, 그러므로 “벙어리”다는 것과 “가르친다”가 그것을 서술하고 있다; “그것에는 숨이 없다”란 그것은 천적이든, 영적이든 아무 것도 표현하지 않는다는 것, 단지 성전에 있는 돌, 목재, 그리고 이것들이 금과 은과 함께 묶여져 있는 상황일 뿐이다.
예레미야 애가서에서:
우리는 은을 주고 우리의 물들을 마신다; 우리의 목재는 값을 치루고 온다 (애. 5:4).
위에서 “물들”과 “은”은 이해력으로부터의 것들; 그리고 “목재”는 의지로부터의 것들을 의미한다. 다시:
목재에게 말한다, 너는 내 아버지이다; 그리고 돌에게는, 너는 나를 낳았다 (애. 2:27).
위에서 “목재”는 탐욕을 표시하고, 이것은 의지 속에 있다, 거기로부터 임신 한다; 그리고 “돌”은 감각적인 지식이고, 이로부터 “낳는다.” 다른 예언서를 보면, “나무와 돌을 섬기는 것”이 나무와 돌로 만든 우상을 예배하기 위해 놓였다. 이를 수단으로 그들이 탐욕과 공상을 섬겼다가 의미되었다; 또한 예레미야서 3:9을 보면 “나무와 돌을 가지고 간음을 범함”도 있다. 호세아서에서:
내 백성이 그들의 목재들에게 문의한다, 그리고 목재로 만든 지팡이가
그들에게 선포한다; 그 이유는 매춘의 영이 그들을 이끌어갔기 때문이다 (호. 4:12).
위는 그들이 목재로 된 새긴 상에게, 또는 그리워함(탐욕)의 우상에게 문의함을 의미하고 있다.
이사야서에서:
도벳은 어제로부터 준비되어졌다, 쌓아올린 것은 불이고 많은 장작이다,
여호와의 숨이 불타는 유황의 시내 같다 (이. 30:33).
위에서 “불,” “유황,” “장작”은 더러운 탐욕들을 표시한다. 일반적으로, “목재(나무, 장작)은 가장 수준 낮은 의지로부터의 것들을 의미한다; 귀한 목재들, 삼목(cedar) 내지 이와 비슷한 목재들은 선으로부터 있는 것들을 의미한다. 예를 들면, 성전의 삼나무 목재, 나병환자를 위해 사용된 삼나무 등이다 (레. 14:4, 6, 7), 또한 마라에서 나무가 쓴 물들에 던져졌다, 이로부터 물들이 달게 되었다 (출. 15:25), 이에 관한 의미는 주님의 신성한 자비로부터 출애굽기편에서 취급된다. 그러나 귀중하지 않은 목재들, 새긴 우상을 만드는데 사용된 목재들, 사람을 태우기 위해 사용된 장작들은 탐욕들을 의미한다. 본문의 경우는 고페르 목재이다. 그것이 지닌 유황 성분 때문이다. 이사야서에서:
여호와께서 앙갚음하시는 날; 거기로부터의 시내는 역청으로 변할 것이다,
그리고 거기로부터의 먼지는 유황으로, 그리고 거기로부터의 토지는 불타는
역청이 될 것이다 (이. 34:9).
위에서 “역청(pitch)”은 끔찍한 공상들을; “유황”은 역겨운 탐욕들을 의미한다.

“대저택들”이 인간의 두 부분들, 즉 의지력과 이해력을 의미하는 것은 이미 상술했다:이 두 부분들, 의지력과 이해력은 서로가 정확히 구분되고 있다. 이런 이유로 인간의 두뇌는 두 부분들로 나뉘어 뇌반구(hemisphere)들이라 불린다. 왼쪽 뇌반구는 지적인 능력에 속하고, 오른쪽 뇌반구는 의지 쪽에 속한다. 이 구분은 최고로 일반적 구분이다. 이외에도, 의지력과 이해력은 무수한 부분들로 구별되어진다. 그 이유가 인간의 지적 측면의 분활(division)들은 너무나 많고, 의지 측면도 그러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것들은 일반적 종들(genera)과 속들(species)만 가늠한다 해도 셀 수 없다. 인간은 최소한도에서의 천국이기 때문에 영들의 세계와 천국에 상응하고 있다. 인간 안의 의지력과 이해력으로부터의 종들과 속들은 주님에 의해 완전한 질서에서 구별되어져 있어 어느 것 하나도 구별되지 않는 것은 없다. 이에 관하여는 차 후 주님의 신성한 자비로부터 살필 기회를 가질 것이다. 천국에서 이런 분활은 사회(공동체, Society)들이라 불리우고, 말씀에서는 주거지(주소, habitation)라 불리는데, 주님에 의해서는 대저택이라 불린다 (요. 14:2 참조). 본문 역시 “대저택”이라 불린다, 그 이유는 그것들이 방주(ark)를 서술하기 때문, 이것은 교인을 의미한다.

“역청으로 안과 밖을 칠하는 것”은 탐욕들에 침수됨으로부터 보존함을 의미하는 것은 이미 설명했다. 그 이유가 이 교인의 첫 번째 일은 이해력에 관련된 것이 개혁되는(reform) 것이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우선 그는 탐욕들에 침수됨에서 보존되고 있어야 한다. 그 이유가 탐욕이 앞서면 개혁의 모든 일은 (시작도 있기 전에) 파괴되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원문에서는 “역청으로 역청을 칠하라”라고 실지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보호(protection)”를 표시하는 단어가 사용되어져 있다. 이 단어는 단어 “속죄하다(expiate)” 또는 “화해하다(propitiate)”로부터 파생되고 있다. 그러므로 이것은 같은 것을 포함하고 있다. 주님으로부터의 속죄, 화해함은 악에 침수됨으로부터의 보호이다.

15절. 이런 식으로 너는 방주를 만들어라. 방주의 길이는 삼백 큐빗이고, 넓이는 오십 큐빗이며, 높이는 삼십 큐빗이다. 숫자들은 리메인스(아껴두신 것, remains)를 의미하고, 이것이 거의 없었다를 의미하고 있다; “길이”는 그것들의 거룩함(holiness)을, “넓이”는 그것들의 진리를, “높이”는 그것들의 선을 의미한다.

이 구절의 세부 사항들, 즉 숫자들, “삼백”, “오십”, “삼십”은 리메인스를 의미하고, 그것들이 거의 없다를 의미한다; 그리고 “길이”, “넓이”, “높이”는 거룩함, 진리, 선을 의미하나, 이것이 모든 이에게 낯설게 나타날 수 밖에 없다. 그리고 글자의미로는 더욱 멀다. 이 장의 3절에서 일백 이십 년이 신앙으로부터의 리메인스를 의미한다는 것을 살필 때 말해진 것에 더 보태어 설명하면, 선한 영들이나 천사들은 아예 내적 의미 안에 있다. 다시 말해서 그들은 지상적인 것, 물질적인 것, 세상 만에 속한 것을 너머에 있다. 그런고로 그들은 지상에서 사용하는 숫자나 치수 등등을 넘어 있다. 그럼에도 그들에게는 주님에 의해 말씀을 충분하게 지각하는 것을 주신다는 사실을 생각해보면 거리가 먼 듯한 내적 의미에 대해 긍정적 사고를 지닐지 모른다. 이것이 진리일진대, 이 구절들의 세부 사항들은 글자에서는 나타날 수 없는, 글자 의미와는 너무나 거리가 먼 천적, 영적인 것들을 포함하고 있음이 분명해질 것이다. 더 나아가 천적, 영적인 사항들은 일반적, 세부적, 모두에 있다. 그리고 이로부터 더 알게되는 것은, 인간이 감각으로부터의 것들과 지식을 수단으로 신앙의 문제들인 이 구절 같은 말씀을 파헤치고 싶어하고, 자기들의 방법으로 납득되지 않으면 믿고 싶어하지 않는 것이 얼마나 미친 짓 인지 이다.

말씀에서 숫자들과 치수들은 천적이고 영적인 것들을 의미한다는 것은 계시록과 에스겔서에 있는 새 예루살렘과 성전의 치수(measure)들로부터 매우 분명해진다. 그리고 “새 예루살렘” 그리고 “새 성전”이 천국들과 땅 위 주님의 왕국을 의미한다는 것, 그리고 천국들과 땅 위 주님의 왕국은 지상의 치수에 종속되지 않는다는 것 정도를 아는 것은 별로 힘들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길이, 넓이, 높이인 그것의 용적(dimension)이 숫자에 의해 나타내지고 있다. 이로부터 누군가는 숫자나 치수에 의해 거룩한 것들이 의미되어진다고 결론 내릴런지 모른다. 계시록에서:
그리고 나에게 지팡이를 닮은 갈대가 주어졌다; 그리고 천사가 가까이 서서,
말하기를, 일어나라, 그리고 하느님의 성전과 제단, 그 안에서 숭배하는
그들을 측량해보라 (계. 11:1).
그리고 새 예루살렘에 관하여:
(이 성은 )크고 높은 벽을 가지고 있고, 열 두 문들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문 위에
열 두 천사들이 있고, 거기에 이름들이 쓰였는데, 그것은 이스라엘의 아들들의
열 두 지파의 것들 이다. 동쪽에 세 문들, 북쪽에 세 문들, 남쪽에 세 문들, 그리고
서쪽에 세 문들(이 있다). 그리고 도성의 벽은 열 두 기초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것들에 어린 양의 열 두 사도들의 이름들(이 있다). 그리고 나에게 말하고 있었던
그는 금빛의 갈대를 가졌는데, 도성과 그곳의 문들과 벽을 측량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도성은 정사각으로 놓여 있다, 그리고 길이는 넓이와 같다: 그리고 그가 갈대로
도성을 쟀더니 일만 이천 스타디아였다; 그리고 도성의 길이와 넓이와 높이는 같았다.
그리고 그가 도성의 벽을 쟀는데, 일백 사십 사 큐빗이었고,
(이는) 천사에 속하여 있는 사람의 측량이다 (계. 21:12-17).
숫자 “12”는 많은 곳에서 등장한다. 이 숫자는 매우 거룩한 숫자이다. 그 이유는 신앙의 거룩한 것들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 장의 3절 처럼 29-30 장에서도 주님의 신성한 자비로부터 살필 예정이다). 그러므로 위 인용 구절에서도 마지막 첨가된 말은 “사람의 측량, 즉 천사의 측량”이다. 이는 에스겔에서의 새 예루살렘과 새 성전의 경우도 같다. 거기서도 측량함이 기술되어 있다 (40장 3, 5, 7, 9, 11, 13, 14, 22, 25, 30, 36, 42, 47; 41장 1-끝까지; 42장 5-15; 스가랴 2장1, 2). 여기서도 역시 숫자 자체만 주시하면 숫자들은 추상적으로 거룩한 천적이고 영적인 것 밖에 더 없다. 증거 궤의 용적에 관한 숫자(출. 25:10); 자비석에 관하여; 금빛의 탁자에 관하여; 성막에 관하여; 그리고 제단에 관하여(출. 25:10, 17, 23; 26장; 27:1); 그리고 성전의 모든 숫자들과 용적(왕상. 6:2. 3), 그 외 다른 숫자들.

여기서 방주에 관한 숫자나 치수들은 이 교인이 개혁되어질 때 이들과 더불어 있었던 리메인스, 그리고 이 리메인스는 거의 없었다는 것 밖에 더 의미하지 않는다. 이는 이 숫자들 안에서 뛰어난 숫자가 5 이다는 것과 5는 말씀에서 약간(some), 또는 조금(a little)을 의미한다는 사실로부터 분명해진다. 이사야서를 보자:
거기에 이삭 줍기 할 것이 남을 것이다, 마치 올리브 나무를 흔들 때 가지 꼭대기에
남는 두 세 개, 열매 풍성한 것의 가지들에 있는 네 다섯 개 남은 것과 같다 (이. 17:6)
위에서 “두 세 개” 그리고 “다섯”은 적음을 표시한다. 다시:
한 명의 꾸짖음에서 일천 명이; 다섯 명의 꾸짖음에서 너희는 달아날 것이다;
너희가 산 꼭대기 위에서 막대기 같이 남을 때까지 이다 (이. 30:17),
위에서 “다섯”은 적음을 표시한다. 반환 후에 최소한의 벌금이 오분의 일이 추가되었다 (레. 5;16; 6:5; 22:14; 민. 5:7). 그리고 그들이 짐승, 집, 들판, 또는 십일조를 되찾을 때, 최소한의 추가분이 “오분의 일”이었다 (레. 27:13, 15, 19, 31).

숫자에 의해 묘사되는 무엇이든, 거기에서 “길이”는 거룩함을, “넓이”는 진리를, “높이”는 선을 의미하는 것에 대한 말씀으로부터의 확증은 많지는 않다. 그 이유가 그것들은 그 대목의 주제나 취급되는 상황에 따라서 각각 이든, 모두 이든 서술되어가기 때문이다. 그런고로 시간에 적용될 경우 “길이”는 영구함, 그리고 영원함을 의미하고, 시편 23:6, 그리고 21:4에 있는 “날들의 길이”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공간에 적용될 경우, 거룩함을 표시한다. “넓이”나 “높이”의 적용도 이와 동일하다. 지상의 것 모두에는 3부로 된 치수들이 존재한다, 그렇다고 이 모든 것이 천적이고 영적인 것들을 서술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것들이 보다 크든, 보다 작든, 완전함을 뜻하려고 (지상적) 치수들과 별개로 해서 서술될 때, 그래서 양과 질을 서술할 때가 있다; 여기서의 경우, 그것의 품질은 리메인스이고 그것의 양은 매우 적다를 뜻하고 있다.

16절. 너는 방주에 창문을 만들어라, 그리고 너는 창문을 위로부터 한 큐빗에서 마무리 하라. 그리고 너는 방주의 문을 옆쪽에 두어라. 너는 가장 낮은 층, 둘째 층, 셋째 층을 만들 것 이다. “위로부터 한 큐빗에서 마무리 되는 “창문”은 지적인 부분을, “옆쪽에 있는 문”은 들음을, “가장 낮은 층, 둘째 층, 셋째 층”은 지식, 이성, 이해에 속한 것들을 의미한다.

“창문”은 지적인 부분, 그리고 “문”은 들음(hearing)을 의미하는 바, 이 구절에서 인간의 지적 부분이 취급된다는 것은 앞서 서술된 것에서 분명해진다(641, 642항 참조). 특이한 것은, 지적 부분이 이 교회의 사람을 위한 개혁의 수단이라는 것이다. (오늘날에는) 인간은 두 종류의 생명을 가지고 있다는 것; 하나는 의지력이고, 다른 하나는 이해력이다. 그런데 인간에게 의지력은 없고, 그 대신 욕구(desire)가 의지 자리를 차지했을 경우, 그때 의지가 아닌 다른 쪽, 즉 지적 부분이 개혁되어질 때, 이 지적 부분을 통하여 새로운 의지가 주어질 수 있어 이 둘은 여전히 한 개의 생명, 즉 선행과 신앙을 구성한다. 그 이유는 인간은 지금 의지력은 없고, 의지력 대신 탐욕만 있기 때문에, 의지력에 속한 부분은 닫혀지고(14절), 다른 쪽 또는 지적 부분이 열리어졌기 때문이다; 이렇게 열린 다른 쪽이 이 절에서 취급되는 주제이다.

이 경우는 이러하다: 인간이 개혁되어질 때, 이 개혁은 전투들과 시험들을 수단으로 결과되는데, 이때 악령들은 인간과 제휴하여 그 인간의 지식과 이성 측면의 것만을 흥분시킬 수 있다.; 그리고 탐욕들을 흥분시킬 수 있는 악령들은 그 인간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다(접근할 수 없다). 그 이유가 두 종류의 악령들이 있기 때문인데, 하나는 인간의 이성 측면에서, 다른 하나는 인간의 탐욕들 측면에서 활동한다. 인간의 이성 부분을 흥분시키는 악령은 온갖 거짓들을 생산한다, 그리고 그 인간에게 그것이 진리이다고 설득해댄다. 인간은 시험 안에 있을 때, 먼저 이 거짓들과 싸워야 한다; 그러나 실지로 싸우는 것은 그 인간이 아니고 그 인간에게 인접된 천사들을 통한 주님의 싸우심이다. 그리하여 이 전투들을 수단으로 거짓들이 분리될 때, 흡사 사라져버린 듯 될 때, 인간은 신앙의 진리들을 받을 준비를 갖춘 셈이다. 그 이유가 거짓들이 길을 막고 있는 상황이어서 거짓들이 득세하는 한, 인간은 신앙의 진리들을 결코 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가 이렇게 신앙의 진리들을 받을 준비가 완료되었을 때, 첫째로 천적 수준의 씨들이 그 사람 안에 심어질 수 있다. 이 씨들은 선행의 씨들이다. 선행의 씨들은 거짓들이 통치하는 바탕 위에는 심어질 수 없고, 오직 진리가 통치하는 바탕에만 심어질 수 있다. 이것이 영적 (평면의) 인간의 개혁, 또는 거듭남인데, “노아”로 불리는 이 교인도 동일하다. 이로부터 방주의 “창문”, “문”이 말해진다, 그리고 그 창문은 “가장 낮은, 둘째, 그리고 셋째 층들”로 말해진다. 이것 모두가 지적 인간 또는 영적 (평면의) 인간에 속하여 있다.

이것은 오늘날 교회에 알려져 있는 것, 즉 신앙(믿음)은 들음을 수단으로 생긴다고 하는 것과도 일맥 상통하는 점이 있다. 그러나 (유의할 점은) 신앙은 신앙으로부터 있는 것들, 또는 믿어지려고 있는 것에 관한 지식은 결코 아니다는 것이다. 이것은 단지 기억 속의 지식일 뿐이다. 이에 반해 신앙은 인정함(acknowledgement)이다. 그리고 이 인정함은 그 사람 안에 신앙의 원리가 있지 않으면 존재할 수 조차 없다. 이 신앙의 원리는 선행, 즉 이웃을 향한 사랑과 자비이다. 선행이 있을 때, 인정함, 또는 신앙이 있는 것이다. 달리 납득하는 자는 땅과 하늘이 떨어진 만큼 신앙의 지식으로부터 떨어져 있다. 신앙의 선함인 선행이 현존할 때, 그때 신앙의 진리인 인정함도 존재한다. 그러므로 인간이 지식, 이성, 이해함에 속한 것들에 따라 거듭나질 때, 그 끝은 바탕이 준비되는 것, 선행을 받기 위해 그의 마음을 준비하는 것일런지 모른다; 이후 그는 이로부터, 또는 이로부터의 생명으로부터 생각하고 행동한다. 이때 그는 개혁되고 거듭나져 이전의 그가 아니다.

“위로부터 한 큐빗에서 완성(마무리)하게” 되는 “창문”이 지적 부분을 의미하는 것은 지금 말해진 것으로부터, 그리고 방주의 건축이 취급될 때라는 사실로부터, 그리고 “방주”를 수단으로 교인이 의미된다는 사실로부터 알런지 모른다. 지적 부분이 “위로부터 있는 창문”에 비교할만한 다른 표현은 없을 듯 싶다. 말씀의 다른 부분등에서도 이와 같다: 인간의 지적 부분, 즉 인간의 내적 시야, 그것이 이성 이든, 단지 추론함이든, “창문”이라 불리운다. 이사야서에서:
오, 사나운 비바람에 요동치고 위로받지 못하는 너 고뇌하는 자여, 내가 홍보석으로
네 창문들(suns, windows)을, 네 대문을 석류석(carbuncle)으로, 모든 네 경계를
즐겁게하는 돌(보석)들로 만들 것이다 (이. 54:11, 12).
여기서 “햇빛들(suns)”이 창문들을 위해 놓여져 있다. 이 햇빛은 (창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 오도록) 입장이 허가된 빛, 또는 전도(투과)된 빛으로부터 이다. 위 구절에서 창문, 또는 햇빛은 선행으로부터 온 지적인 것들이다. 그러므로 그것들이 홍보석(ruby)에 비교되어진다; “대문(gate)”은 이로부터 파생된 합리적인 것들이다; 그리고 “경계”는 지식과 감각들로부터 있는 것들이다. 주님의 교회가 여기서 취급되어진다.
예루살렘에서 성전의 모든 창문들은 같은 것을 표현했다: 즉 그것들의 가장 높은 것은 지적인 것들을; 중간은 합리적인 것들을; 가장 낮은 것은 지식과 감각들에 속한 것들을 표현했다; 그 이유가 삼층이었기 때문이다 (왕상. 6:4, 6, 8). 에스겔서에 있는 새 예루살렘의 창문들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40:16, 22, 25, 33, 36). 예레미야서에서:
죽음이 우리의 창문 안으로 올라와 있다, 그것은 우리의 궁전들 안으로 들어갔다;
우리의 어린 아이들을 거리로부터, 젊은 사람들을 거리들로부터 절멸한다 (예. 9:21).
중간 층의 창문이 위 구절에서 언급되어진다, 이는 진리로부터 있는 것, 이것이 소멸되어지는 것이다; “거리에 있는 어린 아이”란 시작하는 진리이다.
“창문들”이 진리로부터 있는 지적이고 합리적인 것들을 의미하기 때문에, 그것들은 거짓으로부터 있는 것 역시 의미한다. 그런고로 같은 예언서에서:
자기 집을 정의롭지 않게 짓는 자, 자기 골방들을 공정하지 않게 짓는 자에게
화가 있다; 누가 말한다, 나는 규모있는 집을 나에게 건축할 것이다, 그리고 널찍한
골방들을 지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창문을 잘라서 만들 것이다, 그리고 그 집은
삼나무로 마루를 깔 것이다, 그리고 주홍색으로 칠할 것이다 (예.22:13-14).
위에서 “창문들”은 거짓의 원리들을 표시한다. 스바냐서에서:
짐승들의 떼가 그녀의 한 가운데 드러눕고 있다, 모두 각각의 갖가지 야생 동물,
가마우지(cormonant)와 알락해오라기(bittern)가 거기로부터 석류나무에 숙박할 것이다;
목소리가 창문에서 노래할 것이다; 폐허됨이 문지방에 있을 것이다 (습. 2:14).
위 구절은 아수르(Assur)와 니느웨(Neneweh)에 관하여 말한 것이다. “아수르”는 이해함을 표시하는데, 여기서의 경우 황폐되었다; “창문들에서 노래하는 목소리”는 공상들로부터 추론함을 표시한다.

“옆쪽의 문”에 의해 들음이 의미되는 것은 이제 분명해졌는 바, 말씀으로부터의 더 확증해봄은 필요치 않을 것 같다. 그 이유가 귀와 감각의 내부 기관 사이의 관계되는 것은 옆쪽의 문과 위쪽의 창문의 관계와 비슷하기 때문, 다시 말해, 들음이 귀로부터 있듯, 지적 부분은 내적 감각으로부터 있다.

“가장 낮고, 둘째, 그리고 셋째 층들”에 의해 지식, 추론함, 이해함에 관한 것들이 의미되어지는 것은 이미 살핀 바를 뒤잇고 있다. 인간의 지적 측면에는 세 등급들이 있다; 가장 낮은 등급은 지식으로부터의 것이다; 중간 등급은 합리적인 것으로부터의 것이다; 가장 높은 것은 지적 측면으로부터의 것이다. 이것들은 서로로부터 아주 잘 구분되어 있어 그것들은 혼동되는 일이 결코 없다. 그러나 인간이 이를 알아채리지 못하는 이유는, 그가 생명을 감각과 지식 만에 속한 것에 존재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가 이것에 집착해 있는 동안에서는, 그는 그의 합리성의 부분이 앎에 관심을 가진 것들로부터 구분되어 있다는 것 조차 알 수 없다; 더 나아가 그의 지적 부분은 더욱더 구분되어 있다는 것 역시 알 수 없다. 그럼에도 여전히 진리인 것은, 주님께서는 인간의 지적 부분을 통하여 그의 합리적 부분 안으로, 합리적 부분을 통하여 기억 속의 지식 안으로 흐른다는 것, 이로부터 봄과 들음의 감각에 생명이 와진다. 이것이 진정한 유입이다, 그리고 이것이 혼과 몸의 진정한 상호 작용이다. 주님의 생명이 인간 안의 이해력으로부터 있는 것들 안으로- 또는 오히려 의지력으로부터 있는 것들 안으로 그리고 이를 통하여 이해력으로부터의 것들 안으로-그리고 이해력으로부터의 것들을 통하여 합리적인 것들 안으로, 그리고 합리적인 것들을 통하여 기억 속에 있는 그의 지식들 안으로 유입되지 않으면, 인간에게 생명 있음은 불가능일 것이다. 설사 인간이 거짓들과 악들 안에 있다 해도, 주님의 생명은 그의 이해력과 의지력을 통하여 유입된다. 그러나 안으로 흐르는 것은 악과 거짓의 형체에 따라 그의 합리력 안으로 받아들여진다; 그리고 이 유입이 진리와 선이 무엇인지 인간에게 추론하는 능력(ability), 되씹어 보는 능력, 이해하는 능력을 준다. 이에 관하여는 차 후 주님의 자비로부터 살피는데, 그때 야수에게 속하는 생명과 더불어 있는 경우도 살필 것이다.

인간의 지적인 것들에 속한 세 등급은 일반적으로 이해력, 추론력, 기억 속의 지식인데, 앞서 말해진 것, 예루살렘의 성전의 삼층의 창문들에 의미된 것과 거의 같다 (왕상. 6:4, 6, 8). 또한 제2장 10-14절에서, 즉 동쪽 에덴으로부터 나간 강들에 의해서도 의미를 알 수 있다. “동쪽”은 주님을; “에덴”은 사랑을, 이는 의지로부터 이다; “동산”은 사랑에서 파생된 총명을; “강들”은 지혜, 추론, 기억 속의 지식을 의미한다.

17절. 그리고 나는, 내가 땅 위에 물들의 홍수를 가져와서 하늘들 아래로부터 있는 생명들의 호흡이 있는 모든 육체를 파괴하리라; 땅 위에 있는 모든 것도 종료되게 할 것이다. “홍수”란 악과 거짓의 범람을 의미한다. “하늘로부터 그 아래 생명들의 호흡이 있는 모든 육체를 파괴함”이란 태고 교회의 후손 전부가 자신들을 파괴할 것임을 의미한다. “땅에 있는 모든 것이 종료될 것이다”란 태고 교회 속의 것들이 소멸된다는 의미이다.

“홍수”에 의해 악과 거짓의 범람이 의미된다는 것은 앞서 태고 교회의 후손에 관해 살핀 대목으로부터 분명해질 것이다: 즉 그들은 더러운 그리워함들을 소유했다는 것, 그리고 그들은 이 더러운 그리워함 안에 신앙에 관한 것들을 침수되게 했다는 것, 그 결과 모든 진리와 선을 소멸하는 거짓의 설득력들을 가졌다는 것, 동시에 리메인스를 위한 길은 차단되었다는 것, 그리하여 그들은 (주님의 손길이) 닿을 수 없게 되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자신을 파괴하는 방법 말고는 아무 것도 없게 되었다. 리메인스를 위한 길이 닫히면, 인간은 더 이상 인간이 아니다. 그 이유는 그는 더 이상 천사들의 보호를 받을 수 없어, 인간을 소멸하는 것에만 골몰하는 악령들에 의해 완전히 소유당해지고 만다. 이로부터 홍수 이전 사람의 죽음이 왔다. 이것이 홍수로, 또는 완전한 범람으로 묘사되어 있다. 악령들로부터의 공상들과 그리워함의 유입이 홍수와 거의 닮았다; 그러므로 말씀의 많은 곳에서 “홍수” 또는 범람함이라 불리운다. 이에 관한 것은 이어지는 장들에서 주님의 신성한 자비로부터 보여질 것이다.

하늘들 아래로부터 생명들의 숨이 있는 모든 육체를 파괴하는 것. 이것이 태고 교회의 후손 전체가 자신들을 파괴할 것이다를 의미하는 것은 위에서 말해졌던 바로부터(560, 562-563항), 그리고 이전에 주어진 그들에 관한 묘사로부터 분명해진다: 즉 그들은 유전에 의해 그들의 부모로부터 끔찍한 설득력들에 물든 천성을 계승하였다는 것, 특히 그들은 자기들의 그리워함들 안에 그들이 소유한 신앙의 교리적인 것들을 침수시켜버렸다. 그러나 신앙의 교리적인 것들을 가지지 않은 이들, 그래서 신앙에 완전히 무지한 채로 사는 이들의 경우는 이와는 아주 다르다 이들은 태고 교회인들 같이 행동할 수 없다. 따라서 거룩한 것들을 모독할 수 없다. 이러므로 해서 그들의 리메인스를 위한 길이 막혀 있을 뿐이다. 결과적으로 그들은 주님의 천사들을 자신들로부터 몰아낼 수 없다.
리메인스, 이미 말했던 바 같이, 순진으로부터의 모든 것들, 선행으로부터의 모든 것들, 자비로부터의 모든 것들, 신앙의 진리로부터의 모든 것들이고, 이것은 유아 때 인간이 주님으로부터 받은 것, 그리고 배운 것이다. 이런 것들의 모두와 각각은 저장되어 있다; 만일 인간이 이런 것들을 가지지 않았다면, 순진, 선행, 자비에 관한 어떤 것도 인간에게 있을 수 없고, 그리하여 그의 생각들과 행동들 안에도 선과 진리의 어떤 것도 있을 수 없어 그는 미개한 들짐승 보다 더 열악할 것이다. 이와 동일한 것은, 만일 그가 리메인스를 가졌으나 더러운 그리워함들과 끔찍한 거짓의 설득력들을 수단으로 막아버렸다면 (주님의 생명의 유입이 있게되는) 주님의 역사하심은 있을 수 없다. 이런 상황이 자신들을 파괴한 홍수 이전 사람의 모습이다. 그들이 “하늘들 아래, 생명들의 숨이 있는 모든 육체”이다.
“육체(flesh),” 이미 살핀 바 같이, 일반적으로 모두 각각의 인간, 세부적으로는 물질적 인간을 의미한다. “생명들의 숨”은 일반적으로 모든 생명, 그러나 적절하게는 거듭나아져갔던 이들의 생명, 결과적으로 이 구절의 경우 같이 태고 교회의 마지막 후손을 의미한다. 비록 그들 사이에 남아있는 신앙의 생명은 없다 할지라도, 여전히 그들은 자기들의 부모로부터 자기들을 숨막히게 하는 씨의 어떤 것, 이 구절의 경우, “생명들의 숨”이라 불리는 것, 또는 (7:22에서) “콧구멍들 안에 생명들의 숨을 쉬고 있는”이라 불리는 어떤 것을 획득해 갔다. “하늘들 아래 육체”는 단지 물질적인 것을 의미한다; “하늘들”은 진리로부터 있는 이해성 속의 것들과 선으로부터 있는 의지 속의 것들이고, 이것들은 더 이상 인간과 더불어 있을 수 없어 물질적인 것으로부터 분리되는 것들이다. 인간을 유지지탱되게 하는 것은 천국과의 결합, 즉 천국을 통하여 주님과 결합하는 것뿐이다.

땅에 있는 모든 것은 종료될 것이다. 이것은 이 교회로부터 있는 이들, 그리고 이 교회의 품질을 지닌 이들을 의미한다. 이미 말했던 바, “땅”은 전체 세상을 뜻하는것이 아니라, 교회 속에 있는 이들만을 뜻한다는 것이다. 그런고로 대홍수(deluge)가 여기서 뜻해지는 것이 아니다, 더욱이 보편적 대홍수는 아니다. 그러나 그들이 리메인스로부터 분리될 때, 또는 진리로부터 있는 이해성 속의 것들과 선으로부터 있는 의지 속의 것들로부터 분리될 때, 그러므로 천국들로부터 있는 것들과 분리될 때, 거기 존재했던 이들이 종료됨, 또는 질식함이다. “땅”은 교회가 있는 지역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거기 사는 이들을 의미함은 이미 인용했던 구절에 더 보태어 확증해 보자. 예레미야서에서: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말하신다, 온 땅이 황무해질 것이나, 나는 종말을 만들지
않을 것이다. 이것 때문에 땅은 슬퍼하고, 하늘들은 검어질 것이다 (예.4:27-28).
위에서 “땅”은 황폐해진 교회가 있는 곳에 거주하는 이들을 표시한다. 이사야서에서:
나는 하늘들을 이동할 것이다, 그리고 땅은 그녀의 장소로부터 흔들릴 것이다 (이. 13:13).
“땅”은 황폐해지게 되는 인간을 표시하고 거기에 교회가 있다. 예레미야서에서:
여호와의 죽인 자가 땅의 끝으로부터 땅의 끝까지 조차 그 날에 있을 것이다 (예. 25:33).
여기서 “땅의 끝”은 온 세상을 의미하지 않고, 교회가 있던 지역만 의미했다, 결과적으로 교회 속에 있던 사람들이다. 다시:
나는 땅의 모든 거주민들 위에 검을 불러올 것이다; 야단법석 댐이 땅의 끝까지 조차
올 것이다; 그 이유가 여호와께서 민족들과 논쟁하셨기 때문이다 (예25:29, 31).
이 구절 역시 온 세상이 뜻해지는 것이 아니라 교회가 있는 지역만 뜻한다, 그리고 교인, 또는 거주민 만 뜻한다; “민족들”은 여기서 거짓들을 뜻한다. 이사야서에서:
잘 보라, 여호와께서 그분의 장소로부터 땅의 거주민에 물어볼 것이 있으시어
방문하신다 (이. 26:21).
여기서도 뜻하는 바는 같다. 다시:
너희는 듣지 않았느냐? 시작부터 너희에게 말해왔지 않느냐?
너희는 땅의 기초들을 이해 못하느냐? (이. 40:21).
여호와, 하늘들을 창조하셨다는 것, 하느님 자신이 땅을 만들어 내시고
그것을 만드신다는 것, 그분이 그것을 건립하셨다는 것 (이. 45:18).
“땅”은 교인을 표시한다. 스가랴서에서:
여호와의 말이다, 그분이 하늘들을 펼치셨다, 그리고 땅의 기초들을 놓으신다,
그리고 그분의 한 가운데에서 인간의 영을 만들어 내신다 (슥. 12:1).
위에서 “땅”은 교인을 확실히 표시한다. “땅”은 지면(ground)과 구별되는데, 마치 교인과 교회 자체인 것 같다, 또는 사랑과 신앙의 구별과 같다.

18절. 그리고 나는 너와 나의 언약을 세우겠다. 그리고 너는 방주로 들어 가되, 너, 그리고 너의 아들들, 너의 아내, 네 아들들의 아내들도 너와 함께 들어가라. “언약을 세우겠다”란 그가 거듭날 것임을, “너와 너의 아들들, 네 아들들의 아내”가 “방주에 들어감”이란 그들이 구원되어질 것임을 의미한다. “아들들”은 진리들을, “아내들”은 선들을 의미한다.

앞의 구절에서는 자신들을 파괴한 이들이 취급되었다. 여기서는 거듭나는 이들이 취급되는데, “노아”라 불리운다.

“언약을 세움”은 그가 거듭나짐을 의미한다. 이는 주님과 인간 사이의 언약은 사랑과 신앙을 수단으로 결합한다는 것 외에 다른 언약은 없다는 사실로부터 분명하다. 그러므로 “언약”은 결합을 의미한다. 그 이유가 가장 참다운 언약이 천국의 결혼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천국의 결혼, 또는 결합은 거듭나고 있는 이들과 더불어가 아니면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가장 넓은 의미에서 거듭남 자체가 “언약”에 의해 의미된다. 주님은 그분이 인간을 거듭나게 하실 때, 인간과 더불어 언약 안으로 진입하신다; 그러므로 고대인들 사이에서는 언약은 그 외 다른 것을 표현하지 않았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과의 언약, 그 외 후손들과의 언약이 각 개인에게 관계된 것 밖에 글자 의미로부터는 더 발견되는 것이 없다. 이에 반해 그들은 사실상 거듭나질 수 없는 상황 속에 있었다; 그 이유가 그들은 예배를 외적인 것에 존재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예배의 외적인 것들이 내적인 것과의 연결도 없이 거룩하다고 상상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과의 언약은 오직 거듭남을 표현하는 것 뿐이었다. 그들의 의식도 같은 처지였다. 그리고 아브라함, 이삭, 야곱과 더불어, 그들은 사랑과 신앙으로부터의 것들을 표현했다. 대 성직자들과 성직자들 역시 그들의 품성이 어떠하든, 그 중에는 사악한 자 까지도 마찬가지로 천국의 성직 직분과 가장 거룩한 성직도 표현했다. 표현성에서 인물은 주목하지 않는다. 그 대신 표현된 것에 주목한다. 그러므로 이스라엘과 유다의 모든 왕들, 사악한 왕까지 포함해서, 그리고 요셉을 이집트의 통치자로 세운 바로 까지도 그들은 주님의 왕권을 표현했다; 야곱의 아들들과 자주 하신 언약이 표현성 있는 종교적 의식일 뿐이었다. 이에 관하여는 차 후 주님의 신성한 자비로부터 더 숙고해 본다.

“언약”이 거듭남과 거듭남에 속하는 것 외 다른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은 주님 자신이 “언약”이라 불리우신 말씀의 여러 구절로부터 확인된다. 그 이유는 거듭나게 하시고 거듭남을 돌보시고, 사랑과 신앙 속의 모든 것 안에서 모든 것이신 분이 주님이시기 때문이다. 주님이 언약 그 자체이시다는 것은 이사야서에서 분명하다:
나 여호와가 정의 안에서 너를 불렀다, 그리고 네 손을 잡았고, 너를 간수하고,
그리고 민족의 빛을 위해 백성에 대한 언약을 네게 줄 것이다 (이. 42:6).
위에서 “언약”은 주님을 표시한다; “민족들의 빛”은 신앙이다. 이사야 49:6, 8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말라기서에서:
잘보라 나는 나의 천사를 보낸다, 그리고 네가 찾는 주님이 갑자기 그분의 성전에
오시는데, 네가 바라는 언약의 천사이시기 까지 이다; 잘보라 그분이 오신다;
누가 그분의 오심의 날에 머무르겠느냐? (말. 3:1-2).
위 구절에서 주님이 “언약의 천사”라 불려진다. 안식일은 “영구한 언약”이라 불려지는데(출. 32:16), 그 이유는 그것이 주님 자신을 의미하기 때문, 그리고 천적 인간이 그분을 수단으로 거듭나지기 때문이다.
주님은 참 언약 자체이신 바, 인간이 주님과 결합하는 모든 것은 언약으로부터 이다. – 마치 사랑과 신앙으로부터 인 것과 같다. 그리고 사랑과 신앙으로부터 있는 것은 무엇이든, 이것들은 주님으로부터 있기 때문에 주님은 그것들 안에 계시고, 언약 자체가 그것들 안에 있고, 거기서 그들은 받아진다. 이것들이 거듭나는 인간이 아니면 존재하지 않는 바, 거듭난 자로부터, 또는 주님으로부터 있는 것은 무엇이든 언약으로부터 있고 언약이다. 이사야서를 보자:
내 자비가 너희로부터 떠난 것이 아니다,
내 평화의 언약은 옮겨지지 않을 것이다 (이. 54:10),
위에서 “자비”, 그리고 “평화의 언약”은 주님을 표시하고, 그분에 속하는 것을 표시한다. 다시:
네 귀를 기울이고 나에게 오라, 들어라, 그리고 네 혼은 살 것이다, 그리고 나는
너와 영원한 언약을 만들 것이다, 다윗의 확실한 자비들을; 잘 보라,
나는 그에게 백성에 대한 증거를 줄 것이다, 민족들에게 지도자와 입법자를 (이. 55:3-4).
“다윗”은 여기서 주님을 표시한다; “영원한 언약”은 주님으로부터 있는 이런 것들 안에, 이런 것들을 수단으로 있다. 그리고 이것들이 그에게 감, 들음, 혼이 살 것임에 의해 뜻해진다.
예레미야서에서:
나는 그들에게 한 개의 심정, 그리고 한 개의 길을 줄 것이고, 그들은 모든 날 동안
나를 두려워할 것이다, 그리고 그들 뒤의 아들들도 (두려워 할 것이다).
그리고 나는 영원히 지속되는 언약을 그들과 만들 것이다. 나는 그들로부터
돌아서지 않을 것이고, 그들에게 선을 행할 것이다; 그리고 나는 내 경외함을
그들의 심정에 놓을 것이다 (예.32:39-40).
이것이 거듭나지는 이들에 관해서, 거듭나지는 이들에 속한 것들에 관해서 말해진다, 즉 “한 개의 심정과 한 개의 길,” 즉 선행과 신앙, 이것은 주님으로부터 있고, 마찬가지로 언약으로부터 있다. 다시:
잘보라 날들이 온다, 여호와께서 말하신다, 나는 새로운 언약을 이스라엘의 가문과
그리고 유다의 가문과 만들 것이다; 내가 그들의 조상들과 만든 언약에 따라서가
아니다. 그 이유가 그들은 내 언약을 헛된 것으로 돌려 만들어 버렸다; 그러나 이것은
내가 이 날들 후에 이스라엘의 가문과 만드는 언약이다; 나는 내 법들을 그들
한 가운데 놓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그들의 심정에 쓸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들의 하느님일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내 백성일 것이다 (예. 31:31-33).
여기서 “언약”의 의미가 확실하게 설명된다, 그것은 거듭나지고 있는 이들과 더불어 있는 사랑과 주님에 대한 신앙이다.
그리고 다시 예레미야에서, 사랑은 “낮의 언약”, 그리고 신앙은 “밤의 언약”이라 불리운다 (예. 33:20). 에스겔서에서:
나, 여호와, 그들의 하느님일 것이다, 그리고 내 종 다윗 그들의 한 가운데에서
제1인자(일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들과 평화의 언약을 만들 것이다,
그리고 나는 악한 짐승이 그들의 토지로부터 중단되게 만들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광야에서 안전히 거주할 것이다,
그리고 숲들에서 잘 것이다 (겔. 34:24-25).
여기서 거듭남이 분명하게 취급되어진다. “다윗”은 주님을 표시한다. 다시:
다윗은 그들에게 영원히 제1인자 일 것이다; 나는 그들과 평화의 언약을 만들 것이다.
이것은 그들과 영원의 언약일 것이다;
나는 내 성소를 그들의 한 가운데 영원히 놓을 것이다 (겔. 37:25-26).
여기서도 마찬가지로 거듭남이 취급되어진다. “다윗”과 “성소”는 주님을 표시한다. 그리고 다시:
나는 너와 더불어 언약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너는 나의 것이었다;
그리고 나는 너를 물들로 씻었다, 그리고 네 위로부터 네 피들을 씻어내버렸다,
그리고 나는 기름으로 네게 기름부을 것이다 (겔. 16:8-9).
위 구절 역시 거듭남이 명백하게 뜻해진다. 호세아서에서:
그 날에 나는 들판의 들짐승과 더불어, 그리고 하늘들의 새와 더불어,
그리고 땅의 기는 것과 더불어 그들을 위해 언약을 만들 것이다 (호. 2:18),
거듭남을 뜻하고 있다; “들판의 들짐승”은 의지로부터 있는 것들을 표시한다; “하늘들의 새”는 이해력으로부터 있는 것들을 표시한다. 다윗서에서:
그의 백성들에게 되찾으심을 보낸 그분;
그분은 그분의 언약을 영원히 명령하셨다 (시. 111:9),
위 구절 역시 거듭남을 뜻한다. 이것이 “언약”이라 불려지는데, 그 이유는 그것이 주어지고 받아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거듭나지지 않는 이들, 같은 말로, 예배를 외적인 것에 있게 만드는 이들, 자신을 높이 평가하고 싶고, 자신을 예배하는 이들, 마치 신들이라도 된 듯, 자기가 생각하고 바라는 것을 높이 평가해대는 이들에 관해서, 그들은 언약을 헛되게 만든다 라고 말해진다. 그 이유는 그들이 자신들을 주님으로부터 분리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예레미야에서:
그들은 그들의 하느님 여호와의 언약을 내던졌다,
그리고 자신들을 다른 신들에게 구부려 절했다, 그리고 그것들을 섬겼다 (예. 22:9).
모세의 책에서:
태양, 달, 하늘들의 군대 같은 다른 신들을 섬겨 언약을 위반한 자는
돌로 칠 것이다 (신. 17:2, 3).
“태양”은 자기를 사랑함; “달”은 거짓된 원리들; “하늘들의 군대”는 거짓들 자체를 표시한다. 이상의 모두로부터 이제 명백해지는 바, “언약의 궤”는 그 안에 “언약”이, “증거”가 있는 바, 그것은 주님 자신임을 의미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언약의 책” 역시 주님 자신을 의미했다 (출. 24:4-7; 34:27; 신. 4:13, 23); 그리고 마찬가지로, “언약의 피”(출. 24:6, 8)에 의해서도 주님 자신이 의미되고 그분 만이 거듭나게 하는 자 되심이 의미되었다. 이로부터 ”언약“은 거듭남 자체를 표시한다.

너는 방주로 들어가라, 너와 네 아들들, 그리고 네 아내, 그리고 너와 더불어네 아들들의 아내들도 (들어가라). 이것은 그가 구원되어짐을 의미하는 것은 앞서 살핀 내용과 이어지는 내용으로부터 분명하다: 그는 거듭났기 때문에 구원되어졌다.

“아들들”은 진리들을, “딸들”은 선들을 의미하는 것은 앞서 살폈다 (5:4 참조). 그러나 여기서는 “아들들”과 “아내들”이다, 그 이유는 “아내들”은 진리들에 인접된 선들이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선이 없으면, 또는 선으로부터의 즐거움이 없으면 진리는 생산되어질 수 없다. 생명은 선 안에, 선으로부터의 즐거움 안에 있다. 진리가 선과 선으로부터의 즐거움으로 생명을 가지지 않으면 생명은 없다. 선 또는 선으로부터의 진리는 만들어 내지고 태어나진다. 신앙 역시 마찬가지 질서이다. 진리로부터 있는 신앙은 선에 속하는 사랑을 수단으로 만들어내고 태어난다. 이는 빛이 있는 경우와 같다; 태양, 또는 불꽃으로부터가 아니면 빛은 없다; 불꽃이 빛을 만들어 낸다. 진리는 선의 형체일 뿐이다; 그리고 신앙은 사랑의 형체이다. 진리는 선의 품질에 따라 사랑으로부터 만들어 내진다. 이것이 “아내” 그리고 “아내들”이 언급된 이유이다, 이들이 진리들에 인접된 선들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다음 절에서 말해지는 것은 방주로 들어가는 것들은 쌍(pair)들, 숫컷과 암컷으로 말해진다; 그 이유가 진리들에 인접한 선들 없이 거듭남은 없기 때문이다.

19절. 그리고 모든 육체의 모두 각각의 살아있는 것으로부터 모두의 한 쌍들을 너는 방주로 들어오게 해서 너와 더불어 생명이 보존되게 만들어라. 그들은 숫컷과 암컷일 것이다. “살아 있는 혼(soul)”이란 이해력으로부터의 것들을, “모든 육체”란 의지력으로부터의 것들을, “네가 방주에 들어오게 만드는 모두의 쌍들”이란 그들의 거듭남을, “숫컷”은 진리를, “암컷”은 선을 의미한다.

“살아있는 혼”에 의해 이해력으로부터의 것들이 의미된다, 그리고 “모든 육체”에 의해서는 의지로부터의 것들이 의미됨은 앞서 말해진 것, 이어지는 것으로부터 분명해진다. 말씀에서 “살아있는 혼”은 일반적으로 어느 종류이든, 살아있는 모두 각각의 생물이 의미되어진다 (창. 1:2-24, 29 참조); 그러나 여기서의 경우, “모든 육체”와 즉각 연결되어져 있다. 그러므로 이는 이해력으로부터 있는 것들을 의미한다; 그 이유는 이 교인은 전진(진급, advance)하기에 앞서 지적인 것들의 측면이 거듭나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다음 절에서 “새”(이는 지적, 또는 합리적인 것들)가 먼저 언급되고, 후에 “짐승들”이 언급된다. 짐승들은 의지에 속한 것들이다. “육체”는 특별하게는 물질적인 것도 의미하는데, 이것은 의지 측면에 속한다.

모든 쌍들을 너는 방주 안으로 들어가게 만들어, 그것들이 살아있게 보존하라. 이것이 거듭남을 의미하는 것은 앞 절과 연결됨으로부터 분명해진다; 진리들은 선들과 그것의 즐거움을 통하지 않고는 거듭나질 수 없다; 그러므로 신앙에 관한 것들도 선행으로부터 있는 것들을 통하지 않고는 거듭나질 수 없다. 그러므로 여기서 모두의 쌍들 이라 말해진다. 즉 이해력에 속하는 진리들과 의지력에 속하는 선들, 모두로부터 이다는 말이다. 거듭나지 않은 인간은 이해력을 가진 것이 아니다. 또한 선한 의지를 가진 것도 아니고, 가진 듯 하게 나타나는 것이고, 그저 가졌다라고 편리하게 항간에서 말해지는 것일 뿐이다. 어쨌든 거듭나지 않은 자라 해도 그는 이성으로부터, 지식으로부터 진리들을 받을 수 있다. 그러나 그것들은 살아있지 않다. 그는 의지 속에 어떤 종류의 선한 것을 가질런지 모른다. 마치 이방인들의 경우나 야수들의 경우같은 것이다. 그러나 이것들은 살아있지 않다; 그것들은 단지 유추된 것일 뿐이다. 인간 안에 있는 이런 선은 그가 거듭나질 때까지 살아있지 않다. 그러므로 그것들은 주님에 의해 살아있게 만들어진다. 다른 삶에서는 살아있지 않은 것과 살아있는 것은 분명하게 지각되어진다. 살아있지 않은 진리는 어떤 물질, 섬유질 같은 것으로 지각되어 닫혀진다; 살아있지 않은 선은 어떤 나무 종류, 뼈들, 돌 같이 지각되어진다. 그러나 주님에 의해 살아있게 만든 진리와 선은 열려있고, 활력있고, 영적, 천적인 것으로 가득차 있어, 주님으로부터 열리고 명백해진다; 그리고 이것은 모든 생각에서, 모든 행동에서, 그들의 어느 쪽 지극히 작은 것에서도 그러하다. 이것이 왜 살아있게 보존하려고 쌍들이 방주 안으로 들어가야 하는 지를 말하고 있다.

숫컷은 진리를, 암컷은 선을 뜻하는 것은 앞서 설명했다 (54, 476, 489-491항 참조). 인간의 지극히 작은 것 하나하나에도 일종의 결혼의 모습이 있다. 이해력으로부터 있는 것은 무엇이든 의지력으로부터 있는 것과 쌍이 되어 있다. 이런 쌍을 이룸, 또는 결혼 없이는 아무 것도 산출되지 않는다.

20절. 새는 각 종류대로, 짐승은 각 종류대로, 지면에서 기는 것도 각 종류대로, 모든 종류가 한 쌍씩 너에게로 들어와서 생명이 보존되게 하라. “새”는 지력(intellectual)에 관련된 것을, “짐승”은 의지력에 관련된 것을, “지면의 기는 것”이란 지력과 의지력 둘 다에 관련된 것을 의미하되 그 수준이 가장 낮은 것들을 의미한다. “모든 것의 쌍들이 너에게로 와서 살아있게 보존하라”란 그들의 거듭남을 의미한다.

“새(fowl)”가 지적인 것, 또는 합리적인 것을 의미한다는 것은 이미 말했다 (40항 참조), 그리고 “짐승”이 의지에 속한 것들, 또는 애착들을 의미한다는 것도 살폈다 (45, 46, 143, 144, 246 항 참조). “지면의 기는 것들”은 위 모두를 의미한다, 그러나 그것들의 제일 낮은 수준의 것들을 의미한다는 것는 지면의 기는 것은 지면에서 가장 낮은 것이다는 간단한 사실로부터 분명해진다. “그것들이 살아있게 보존하기 위해 모든 쌍들이 네게로 들어가라”는 그들의 거듭남을 의미한다.

“새는 각 종류대로,” 그리고 “짐승도 각 종류대로,” 그리고 “기는 것도 각 종류대로”라고 말해져 있다. 이는 모든 인간 안에는 이해력으로부터, 의지력으로부터 있는 종들(genera)과 속들(species)이 무수하게 많다는 것,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은 서로가 완벽히 구분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이런 것이 인간에게는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인간의 거듭남 동안, 주님께서는 그것들을 각각 그리고 모두를 그것들의 질서에 따라 끌어내시고, 그것들을 분리하시고 배치하시어 그것들이 진리들과 선 쪽으로 구부려지도록 하시고, 그것들이 결합되게도 하신다. 이 작업은 상태들에 따라 다양성을 가지고 진행된다. 또한 무수하다. 이 모든 것들은 각 종들로서, 각 속들로서, 그리고 각 상태에서 완전해짐은 영원까지 조차 결코 있어질 수 없고, 각각으로 있을 때이든 병합될 때이든 그 숫자는 셀 수 없다는 것을 납득하고야 만다. 이것이 주님께서 거듭남에 관하여 니고데모에게 말하신 것이다:
바람은 그것이 바라고 싶은 곳으로 분다, 그리고 너는 그것으로부터 소리를 들으나,
그것이 어디에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를 말할 수 없다: (참) 영으로부터 태어나지는
모두 각각의 사람도 이와 같다 (요. 3:8).

21절. 너는 먹어야 하는 모든 식품을 너에게로 가져오라, 그리고 그것들을 너에게로 수집하라. 그리고 그것들은 너와 그들을 위한 식품일 것이다. 그가 “먹어야 하는 모든 식품을 자신에게 가져옴”이란 선들과 기쁨(delight)들을, 그가 “자신에게 수집함”이란 진리들을, 그 식품은 “그와 그들을 위한 식품이다”란 선들과 진리들 모두를 의미한다.

거듭나지게 되는 인간의 식품에 주목해보면 이러하다: 인간이 거듭나질 수 있기 앞서, 그의 거듭남을 섬기게 될 모든 것들, – 의지력을 위한 수단으로서 선들과 애착들로부터의 기쁨들, 또한 이해력을 위한 수단으로서 주님의 말씀으로부터의 진리들, 이 진리들을 확증해주는 다른 근원의 것들 까지 공급되어질 필요가 있다. 인간은 이런 것들이 공급되어질 때까지 거듭나질 수 없다; 이것들은 식품을 위해 있다. 이것은 인간이 성년이 될 때까지 거듭나질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러나 각 인간은 그의 거듭남이 진행되기 앞서 주님에 의해 그를 위해 각 당사자만을 위한 특유의 식품이 설비되어진다.

“먹게 되는 모든 식품을 그가 가져옴”이 선들과 기쁨들을 의미한다는 것은 위에서 말해진 바로부터 분명하다: 즉 진리가 아닌 선들과 기쁨들이 인간의 생명을 구성한다는 것; 그 이유가 진리들은 선들과 기쁨들로부터 그것의 생명을 받기 때문이다. 유아로부터 노년에 이르기 까지 선인 것과 기뻐함들을 수단으로 하지 않고는 어떤 지식, 또는 이성도 결코 은근히 심어지지 않는다. 그리고 이와 같은 것들이 “식품”이라 부르는데, 그 이유는 이것들 없이 살 수 없기 때문인 바 이는 조금만 주의를 기울여도 쉽게 알아차려 질 것이다.

“자신에게로 수집함”이 진리들을 뜻하는 것은 분명하다; 그 이유가 “수집함”은 인간의 기억 안에 있는 것들을 서술하기 때문이다. 기억 안에 진리들은 다 함께 모여져 있다. 그리고 이 표현에는 인간이 거듭나기 앞서 선들과 진리들 모두가 수집되어 있을 것임을 함축하고 있기도 하다; 그 이유가 함께 모아진 선들과 진리들이 없으면, 실상 주님께서는 모여진 이것들 가지고 작업을 진행하시는 바, 인간은 거듭나질 수 없기 때문이다. 이는 이미 말했다. 이로부터 “그것은 너를 위해 그리고 그것들을 위해 식품으로 있을 것이다”라고 말해지는 바, 선들과 진리들 모두를 의미하고 있음을 알게 해준다.

선들과 진리들이 인간의 진짜 식품임은 누구에게나 자명할 것이다. 그 이유가 그것들이 결여된 자는 생명이 없어 죽은 자이기 때문이다. 인간이 영적으로 죽어 있을 때, 그가 먹은 식품은 악들로부터의 기쁨들과 거짓들로부터의 쾌락들이다. 이것은 죽음의 식품들이다. 그리고 이것들은 육체적, 세상적, 자연적인 것들로부터 있는 것들이다. 더불어 그것들 안에는 생명의 어떤 것도 없다. 더 나아가 이런 종류의 사람은 말씀에서 “식품” 또는 “빵”이 언급될 때면 언제든지 그것은 육체의 식품을 뜻한다고 상상한다; 예를 들면, 주님의 기도에서, “우리에게 우리의 매일의 식품을 주옵소서”라는 간구를 놓고 그는 육체의 지탱을 위한 어떤 것을 뜻한다고 상상한다는 말이다. 여기에 한술 더 떠서, 이것은 식품 외에 의복, 자산, 등등도 넓혀 포함될 수 있다고 우긴다. 더욱이 그들은 이 기도문이 어떤 다른 식품을 뜻한다는 것을 날카롭게 부정한다; 어쨌든 그들도 본문의 앞 구절과 이어지는 구절들에 천적인 것들과 영적인 것들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 주님의 왕국이 이야기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리라; 그리고 이 외에도, 그들은 주님의 말씀이 천적이고 영적이다는 것을 알게 될런지 모른다.
이로부터와 이와 유사한 실예로부터 오늘날 인간이 얼마나 육적인지는 충분하게 분명하다; 그리고 유대인들 같은 경우, 그들은 말씀을 총체적이고 물질적 의미에서 말씀에서 말해진 것을 가지고 있도록 처방되어져 있다. 주님 자신 말씀에서 “식품”과 “빵”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명백하게 가르치신다. “식품”의 경우를 보자. 요한복음에서:
예수께서 말하셨다, 멸해지는 음식[식품]을 위하여 애쓰지 말고
영원히 생명을 지탱하는 음식을 위하여 노동하라,
사람의 아들은 이 음식을 너희에게 줄 것이다 (요. 6:27).
그리고 “빵”에 관하여 말하신다. 요한복음에서:
너의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다, 그리고 죽었다. 이것은 천국으로부터
내려오는 빵이다. 인간이 이것으로부터 먹으면 죽지 않는다. 나는 천국으로부터
내려온 살아있는 빵이다; 만일 누군가가 이 빵을 먹는다면,
그는 영원하게 살 것이다 (요. 6:49-51, 58).
그러나 주님의 말씀을 듣던 이들 같은 이가 오늘날에도 있어 말한다. “이것은 어려운 말이다; 누가 그것을 들을 수 있느냐?” 그리고 이들은 “물러가서 더 이상 그분과 걷지 않았다” (요. 6:60, 66). 이들에게 주님께서 말하셨다. “내가 너희에게 이야기하는 말들은 영이고, 그것들은 생명이다” (요. 6:63).
그리고 “물”에 관하여도 위와 마찬가지로 신앙의 영적인 것을 의미한다. 이에 관하여 주님께서 요한복음에서 이야기하신다:
예수께서 말하셨다, 이 물로부터 마시는 사람은 누구든지 다시 목마를 것이다:
그러나 내가 그에게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누구든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내가 그에게 주게되는 물은 그 사람 안에서 영구한 생명을 솟아나게 하는
물의 우물일 것이다 (요. 4:13-14).
그러나 주님께서 우물가에서 말하셨을 때 이 말씀을 들었던 여인 같은 이들이 오늘날에도 있어, 말한다. “주여, 우리에게 이 물을 주소서, 그리하여 제가 목마르지 않아, 여기로 물을 길으러 오지 않게 하십시오” (요. 4:15).
말씀에서 식품이 영적 식품과 천적 식품, 즉 주님에 대한 신앙, 그리고 사랑 외에 다른 식품을 뜻하지 않는다는 것은 말씀의 여러 구절로부터 분명해진다. 예레미야서를 보자:
적들이 그의 손을 예루살렘의 욕심낼만한 모든 것들에 뻗쳤다; 그 이유가
그녀는 민족들이 그녀의 성소 안으로 들어간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이들에 관하여
당신께서는 그들이 너희 회중 안으로 들어오게 말라고 명령하셨다. 모든 백성이
슬피운다, 그들을 빵을 찾고 있다; 그들은 혼을 기운나게 하려고 식품을 위해
자기들의 값진 것을 주었다 (애. 1:10-11).
위 구절에서, 영적 빵과 식품이 뜻해지는 것 외에 다른 것은 없다. 그 이유는 주제가 성소이기 때문이다. 다시:
나는 내 사랑하는 자를 위해 외쳤다, 그들은 나를 속였다; 성에 있는
내 성직자들과 원로들이 죽어버렸다, 그 이유는 그들이 자기들의 혼을
소성케하려고 자신들을 위해 식품을 찾았기 때문이다 (애. 1:19),
같은 의미에서, 다윗서에서:
이들 모두가 당신을 기다립니다, 당신께서는 때에 맞추어 그들의 식품을
그들에게 주십니다; 당신은 그들에게 줍니다, 그들은 모웁니다; 당신은 당신의 손을
여십니다, 그들은 선으로 만족해집니다 (시. 104:27, 28).
여기서 더 마찬가지로 영적, 천적 식품이 뜻해진다.
이사야서에서:
오, 목마른 모든 자여, 너희는 물들로 오라; 그리고 은을 가지지 않은 자;
너희는 오라, 사서 먹으라; 그렇다, 오라, 은 없이,
값 없이 포도주와 우유를 사라 (이. 55:1).
위에서 “포도주”와 “우유”는 영적 마심과 천적 마심을 표시한다. 다시:
처녀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다, 그리고 너희는 그분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부를 것이다; 그분은 버터와 꿀을 먹을 것이다, 그리하여 그분은 악한 자를 거절하고
선한 자를 선택할 것이다; 그리고 우유가 풍부해지는 때가 오고 그들은 버터를
먹을 것이다; 그 이유가 버터와 꿀을 그 토지 한 가운데에 남은 모든 이가
먹을 것이다 (이. 7:14-15, 22).
위에서 “꿀과 버터를 먹는 것”은 천적-영적인 것을 내 것 되게 하는 것이다; “남은 자들”은 리메인스를 표시한다. 이들에 관하여 말라기서에서:
너희는 보물집으로 모든 십일조들을 가져오라,
그리하여 내 집에 식품이 있을런지 모른다 (말3:10).
“십일조”는 리메인스를 표시한다. (“식품”의 의미에 관하여는 56-58, 276항을 더 참조하라.)

천적인 식품과 영적인 식품의 본래의 모습은 다른 삶으로 가야만 가장 잘 알 수 있다. 천사들과 영들의 생명은 이 세상에서 같은 식품에 의해 지탱되지 않는다. 그러나 “주님의 입으로부터 진행되는 모두 각각의 말”에 의해서이다 (마. 4:4 참조). 진리는 이렇다: 즉 주님 만이 모든 것의 생명이시다는 것, 그리고 그분으로부터 모든 것들은 일반적이든, 세부적이든 오고 있다는 것. 이렇게 천사와 영들은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한다 악령들 역시 천사들 같이 받는다. 그런데 그들이 악한 것을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이유는 그들이 주님으로부터 있는 모든 선들과 진리들을 받아서 뒤집기 때문이다. 받음과 애착은 그릇에 따라서 있다. 이는 태양의 빛을 받는 다양한 대상들에 비교해 볼 수 있다. 어떤 대상은 빛을 유쾌하지 않거나 불일치할 수 있는 색깔들로 변하게 하는 한편, 다른 대상은 빛을 유쾌하고 아름다운 색상으로 바뀌게 한다. 하여 그것들의 형체에 따라서, 결정함에 따라서, 그들의 부분들이 어떻게 처리되느냐에 따라서 바뀐다. 전체 천국과 영들의 전체 세계는 주님의 입으로부터 진행하는 모든 것을 수단으로 살고있다, 그리고 이로부터 각각의 개인은 생명을 가진다; 온 천국과 영들의 세계 뿐 아니라 온 인류 역시 위와 같게 생명을 가진다. 이런 사항들을 사람들이 믿지 않을 것이라 예상하지만, 수 년 동안의 계속적인 경험으로부터 나는 그것들이 최고로 진실이라고 주장할 수 있다. 악령들의 세계에 있는 악령들은 이것이 그러하다는 것을 기꺼이 믿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들에게는 종종 역설되어 왔었다. 그들이 이것이 진리임을 분노로 치달으며 인정하기 까지 역설되었다. 만일 천사들, 영들, 인간들이 이 식품을 박탈하면, 그들은 그 순간 종료되고 말 것이다.

22절. 그리고 노아는 하느님께서 그에게 명령한 모든 것에 따라 했다. 그렇게 그는 했다. “노아가 하느님께서 그에게 명령한 모든 것에 따라 했다”란 이런 식으로 실현되었음을 의미한다. 그가 “했다”라고 두 번 말해진 이유는 그 실현이 [선과 진리] 양쪽 모두에서 실현되었기 때문이다.

“했다”가 두 번 반복한 것에 주목해 보자. 이는 양쪽, [선과 진리]를 포함한 표현이다. 이는 말씀에서, 특히 예언서들에서 알게 될 것이다. 하나의 것이 두 겹의 방식으로 묘사되고 있다. 이사야서에서:
그분은 평화 안에서 그분이 그의 발로 가지 않았던 길을 통과하셨다.
누가 이것을 작업하고 행하겠느냐? (이. 41:3-4).
위에서 하나의 표현은 선에 관련되고, 다른 하나의 표현은 진리에 관련되고 있다. 또는 하나는 의지에 속한 것에, 다른 하나는 이해함에 속한 것에 관련되고 있다; 즉 “그분은 평화 안에서 지나셨다”는 의지에 속한 것을, 그리고 “그분이 그분의 발로 가본 적이 없는 길”은 이해함에 속한 것을 포함 한다; 그리고 이와 같이 작업했다와 행했다에서 포함되고 있다. 그런고로 의지력과 이해력에 속하는 것들, 또는 사랑과 신앙에 속하는 것들, 또는 천적인 것들과 영적인 것들에 속하는 것들이 말씀 안에서 함께 결합하여 각각과 모든 것 안에서 결혼의 모습이 있고, 천국의 결혼에 관련을 맺는다. 여기서 더 예외는 없는 바, 한 개의 말이 반복되어져 (천국의 결혼이) 표현되고 있다.

창세기 해설 제 5장

제 5 장

성경 본문

1 이것은 사람의 출생들에 관한 책이다. 하느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셨던 그 날, 그분 은 하느님의 모습대로 그를 만드셨다.
2 그분은 그들을 남성과 여성으로 창조하셨고, 그리고 그분은 그들에게 복을 주셨고, 그리고 그들이 창조되던 그날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부르셨다.
3 사람은 일백 삼십 년을 살았다. 그리고 그의 형상을 따라 그의 모습대로 낳았고, 그의 이름을 셋이라 불렀다.
4 그리고 그가 셋을 낳은 후 사람의 날들이 팔백 년 이었다, 그리고 그는 아들들과 딸들을 낳았다.
5 사람이 살았던 모든 날들은 구백 삼십 년 이었다, 그리고 그는 죽었다.
6 그리고 셋은 일백 오 년을 살았고, 에노스를 낳았다.
7 그리고 셋은 에노스를 낳은 후 팔백 칠 년을 살았다, 그리고 아들들과 딸들을 낳았 다.
8 그리고 셋의 모든 날들은 구백 십이 년 이었다, 그리고 그는 죽었다.
9 그리고 에노스는 구십 년을 살았다, 그리고 게난을 낳았다.
10 그리고 에노스는 그가 게난을 낳은 후 팔백 십오 년을 살았다, 그리고 아들들과 딸들을 낳았다.
11 그리고 에노스의 모든 날들은 구백 오 년 이었고, 그는 죽었다.
12 게난은 칠십 년을 살았다, 그리고 마하랄엘을 낳았다.
13 그리고 게난은 그가 마하랄엘을 낳은 후 팔백 사십 년을 살았고, 그리고 아들들과 딸들을 낳았다.
14 그리고 게난의 모든 날들은 구백 십 년 이었다, 그리고 그는 죽었다.
15 그리고 마하랄렐은 육십 오 년을 살았다, 그리고 야렛을 낳았다.
16 그리고 마하랄렐은 그가 야렛을 낳은 후 팔백 삼십 년을 살았다, 그리고 아들들과 딸들을 낳았다.
17 그리고 마하랄렐의 모든 날들은 팔백 구십 오 년을 살았다, 그리고 그는 죽었다.
18 그리고 야렛은 일백 육십 이 년을 살았다, 그리고 에녹을 낳았다.
19 그리고 야렛은 그가 에녹을 낳은 후 팔백 년을 살았고, 아들들과 딸들을 낳았 다.
20 그리고 야렛의 모든 날들은 구백 육십 이 년 이었다, 그리고 그는 죽었다.
21 그리고 에녹은 육십 오년을 살았다, 그리고 므두셀라를 낳았다.
22 그리고 에녹은 그가 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 년을 하느님과 함께 걸었다, 그리고 아들들과 딸들을 낳았다.
23 에녹의 모든 날들은 삼백 육십 오 년 이었다.
24 그리고 에녹이 하느님과 함께 걸었다, 그리고 그는 더 이상 있지 않았다, 그 이유 는 하느님께서 데려가셨기 때문이다.
25 므두셀라는 일백 팔십 칠 년을 살았다, 그리고 라멕을 낳았다.
26 므두셀라는 그가 라멕을 낳은 후 칠백 팔십 이 년을 살았다, 그리고 아들들과 딸 들을 낳았다.
27 그리고 므드셀라의 모든 날들은 구백 육십 구 년 이었다, 그리고 그는 죽었다.
28 그리고 라멕은 일백 팔십 이 년을 살았다, 그리고 아들을 낳았다.
29 그리고 그는 그의 이름을 노아라 불렀고, 말하기를, 그가 여호와께서 저주하신 지 면에서 우리 손들의 수고와 우리의 일로부터 우리를 위로할 것이다.
30 그리고 라멕은 그가 노아를 낳은 후 오백 구십 오 년을 살았다, 그리고 아들들과 딸들을 낳았다.
31 그리고 라멕의 모든 날들은 칠백 칠십 칠 년 이었다, 그리고 그는 죽었다.
32 그리고 노아는 오백 년의 아들이었다. 그리고 노아는 셈, 함, 야벳을 낳았다.

각 절의 내적 의미

1절. 이것은 사람의 출생들에 관한 책이다. 하느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셨던 그 날, 그분은 하느님의 모습 안에서 그를 만드셨다. “출생들에 관한 책”은 태고 교회 속에 있던 이들의 목록표이다. “하느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셨던 그 날”은 그가 영적 (수준)으로 만들어졌음을 표시하고 있다. “하느님께서 그를 하느님의 모습 안에서 만드셨다”란 그가 천적 (수준)으로 만들어졌음을 의미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것은 태고 교회에 관한 묘사이다.

“출생들에 관한 책”이 태고 교회 속에 있는 이들의 목록표이다는 것은 뒤잇는 말씀으로부터 아주 분명하다. 그 이유가 여기로부터 11장, 에벨의 때까지에서 있게되는 이름들은 인물(person)들을 뜻하는 것이 결코 아니고, 실제의 것들이기 때문이다. 태고 때에 인류는 가족(house)들, 가문(family)들, 민족(nation)들로 구별되어졌다; 가족의 구성원은 남편과 아내, 그들의 자녀, 그리고 가족을 섬겼던 이들(종, 하인)이다. 가문은 가족의 수가 많든 적든 집합적 가족들이다. 가문들은 멀리 떨어져 산 것은 아니나, 그렇다고 붙어 산 것도 아니다; 그리고 민족은 많든 적든 가문들로 구성되었다.

그들이 자기들끼리만 거주했고, 가족, 가문, 민족으로만 구별된 까닭에, 이것에 의해 교회가 보존되는 수단이 되어 주었다. 그 이유가 모든 가족, 가문은 그들의 부모에 의존되는 바, 사랑 안에, 진정한 예배 안에 남아 있을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더 주목되는 것은, 각 가족은 가족들 서로로부터 구분되는 특유한 천성 속에 있었다는 점이다; 자녀들, 그 아래 있는 자손들도 그들의 부모로부터 특유한 천성이 파생되어 간다는 것, 이와 같이 표가 나는 특성은 그들의 얼굴에 의해, 그 외 다른 특유함에 의해 구별되게 한다는 것은 누구나 잘 아는 사실이다. 뒤섞이지 않고 정확한 구분이 있도록 그들이 위 같은 방식으로 거주하는 것을 주님께서는 반겨하셨다. 이것은 주님의 왕국에 대한 살아있는 표현이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주님의 왕국은 무수한 사회들로 구성되고, 각 사회들은 그들이 지닌 사랑과 신앙에 따라 서로 구분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이미 주목했던 바 같이, “홀로 산다”, “천막에서 거주한다”를 수단으로 뜻해진다. 같은 이유 때문에 유대인들이 가족, 가문과 민족으로 구분되어지는 것, 모든 이가 그의 자신의 가족 내에서 결혼을 맺는 것을 주님은 반겨하셨다; 이 점에 관하여는 이후 주님의 신성한 자비로부터 (살필 기회가 있을 것이다.)

“하느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날”에 의해 그의 존재가 영적 수준으로 만들어짐이 의미된 것, 그리고 “하느님께서 그분의 모습(likeness) 안에서 만드심”에 의해 그의 존재를 천적 수준으로 만드셨음이 의미된 것은 위에서 말해진 것과 보여준 것으로부터 나타난다. “창조한다(create)”는 표현은 인간이 새로이 창조되어질 때, 또는 거듭나질 때의 경우에 적절한 표현이다; 그리고 단어 “만들다(make)”는 인간이 완전해질 때의 경우에 적절하다; 그러므로 말씀에서 “창조함(creating),” “형성함(forming),” “만듦(making)”을 사용하는데 정밀한 구분이 있음이 제 2 장에서와 같이 관찰되어진다. 제 2 장의 경우, 영적 인간을 천적 인간으로 만드심이 “하느님께서는 그분의 모든 일, 즉 하느님이 만드심 안에서 창조하신 일로부터 쉬셨다”에서 말해진다; 다른 구절 역시, “창조함”은 영적 인간에 관련되고, “만드는 것”, 즉 완전해지는 것은 천적 인간에 관련되어 있다 (제 16, 88항도 참조).

“하느님의 모습”이 천적 인간이고, “하느님의 형상”이 영적 인간이다는 것은 이전에 살폈다. “형상(image)”은 모습에 앞선 준비이다. 그리고 “모습(likeness)”은 실재의 복제(replica)이다. 그런 이유는 천적 인간은 그분의 “모습”대로, 주님에 의해 완전히 규율되어지기 때문이다.

이 구절이 취급하는 것이 태고 교회의 출생, 또는 증식됨인 바, 영적 상태로부터 천적 상태로 가는 것이 먼저 묘사되었다. 그 이유가 증식(propagation)은 이 뒤를 잇기 때문이다.

2절. 그분은 그들을 남성과 여성으로 창조하셨다, 그리고 그분은 그들에게 복을 주셨고, 그리고 그들이 창조되어진 그 날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부르셨다. “남성과 여성”이란 신앙과 사랑의 사이에 있는 결혼을 의미한다.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부르셨다”란 이것이 교회(the church)임을, 뾰족한 의미에서는 사람(Man, homo)으로 불려지는 교회를 의미한다.

“남성과 여성”에 의해 신앙과 사랑 사이에 있는 결혼이 의미된다는 것은 앞서 선포하고 입증도 했다. 거기서 남성, 또는 남자(vir)는 이해력, 그리고 이해력에 속하는 모든 것을 의미한다, 그 결과 신앙에 속하는 모든 것이다; 여성, 또는 여인은 의지력, 또는 의지력에 소속하는 것들, 그 결과 사랑에 속하는 모든 것이다; 그러므로 그녀는 이브라 불리운다. 이 이름은 생명을 의미하고, 생명은 사랑 속에만 존재한다. 그러므로 여성에 의해 교회가 의미된다. 이는 이미 살폈다; 남성은 교회 속의 사람(vir)으로 의미된다. 여기서의 주제가 교회의 상태, 즉 교회가 영적 상태이었을 때, 그리고 이 상태 후에 천적 상태로 만들어졌다. 그러므로 남성이 여성에 앞서 언급된 것인데, 이는 창. 1:26, 27 의 경우도 같다. “창조한다”가 영적 인간에 관련되고 있다; 그러나 결혼이 있게 된 후에, 즉 교회가 천적 상태로 만들어진 후에는 남성과 여성이라 말하지 않고 “사람(homo)”이라 말해진다. 사람은 이 결혼 때문에 남성과 여성 둘 다가 의미에 포함된다; 그러므로 이제 뒤잇는 말은, “그분께서는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부르셨다”이다. 사람을 수단으로 교회가 의미되어진다.

“사람”이 태고 교회이다는 것은 자주 말했고 앞서 살폈다; 그 이유가 최고 의미에서 주님 자신만이 사람이시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천적 교회는 주님의 모습인 바, 사람이라 불리운다. 영적 교회는 주님의 형상이었기 때문에 나중에서야 천적 교회로 불리게 된다. 그러나 일반적 의미에서, 인간의 이해력을 가진 모든 이는 사람이라 불리운다. 그 이유가 이해력 덕택에 인간은 사람이고, 그 이해력에 따라서 이 인물이 다른 인물과 구분되는데, 즉 주님을 사랑함에 바탕을 둔 그의 신앙에 따라 구분지어짐이 있게 된다는 말이다.
태고 교회, 그리고 모두 각각의 진정한 교회, 이 교회 사람, 또는 주님을 사랑함으로부터, 그리고 그분에 대한 신앙으로부터 사는 이들은 특별하게 “사람”이라 불리운다. 이를 말씀으로부터 확인해보자. 에스겔서로부터:
나는 네 위에서, 이스라엘의 모든 가문 위에서, 그것의 모두 위에서 사람이 번성되게
할 것이다; 나는 네 위에서 사람과 짐승이 불어나게 해서 그들은 번성하고 열매를
많이 맺을 것이다; 나는 네 고대의 것에 따라 너희가 거주하게 할 것이다; 그리고
나는 네 시작 때 보다 더 잘되게 할 것이다; 그리고 나는 네 위에서 사람이 걷게
할 것이다, 내 백성 이스라엘이여 (겔. 36:10, 11, 12).
위에서 “고대의 것”에 의해 태고 교회가 의미된다; “시작”에 의해 고대 교회가 의미된다; “이스라엘의 가문”, 그리고 “백성 이스라엘”에 의해 원시 교회, 또는 이방인의 교회가 의미된다; 이 교회들 모두가 “사람”이라 불리운다.
모세의 책에서:
영원의 날들을 회상하라, 너희는 대대로의 햇수들을 이해하라; 가장 높으신 분이
민족들에게 상속분을 줄 것이데, 그 때 그분은 사람의 아들들을 떼어 놓으실 것이다.
그분은 이스라엘 자손의 숫자에 따라 백성의 경계들을 정하실 것이다 (신. 32:7, 8),
위에서 “영원의 날들”에 의해 태고 교회가; “대대로”에 의해 고대 교회가; “사람의 아들들”에 의해 주님을 향한 신앙 안에 있는 이들이 뜻해진다. 이 신앙이 “이스라엘의 자손의 숫자들”이다. 거듭나는 인물이 “사람”이라 불린다, 예레미야로부터 나타난다:
나는 땅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보라 그것은 텅비었고 공허했다; 그리고 하늘들,
그리고 그것들은 빛을 가지지 않았다; 나는 바라보았다, 그리고 보라, 사람이 없다,
그리고 하늘들의 모든 새들이 도망 갔다 (예. 4.:23, 25),
위에서 “땅”은 외적 인간을 의미한다: “하늘”은 내적 인간이다; “인간”은 선을 사랑함이다; “하늘들의 새들”은 진리를 이해함이다.
다시:
잘 보라 내가 이스라엘의 가문, 유다의 가문을 사람의 씨를 가지고,
짐승의 씨를 가지고 씨뿌릴 것이다 (예. 31:27).
위에서 “인간”은 내적 인간을 의미한다, “짐승”은 외적 인간을 의미한다. 이사야서에서:
너는 콧구멍 안에 숨이 있는 사람 인 것을 멈추어라.
그 이유가 어떤 점에서 그를 세어야 하는지 때문이다 (이. 2:22),
위에서 “사람”은 교인을 의미한다. 다시:
땅의 거주민들은 불태워질 것이다. 사람은 매우 조금 남을 것이다 (이. 24:6).
위에서 “사람”은 신앙을 가지는 이들을 의미한다. 다시:
작은 길들이 황폐되었다. 여행자가 길 위에서 중단되었다. 그는 언약을
헛되이 만들었다, 그는 성들을 경멸했다, 그는 사람을 중시하지 않았다,
땅은 슬퍼하고 활기를 잃는다 (이. 32:8, 9),
히브리 발음에서 “에노스(Enosh)”는 사람을 표시한다. 다시:
나는 사람을 정금 보다 더 귀하게 만들겠다, 그리고 오빌의 금 보다 사람을
더 귀하게 만든다; 그러므로 나는 하늘들을 흔들 것이다,
땅들이 그것의 장소로부터 움직일 것이다 (이. 13:12, 13).
위의 사람이란 단어에서 앞쪽은 “에노스”이고, 뒤쪽은 “아담”이다.
그가 “아담”이라 불리운 이유는 단어 “아담”이 사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개역 한글 등등에서는 아담으로 번역되고 있다); 그러나 그가 “아담”이라는 이름을 수단으로 불러지는 것은 결코 적절치 않다. 그러나 “사람(Man)”이어야 한다. 이는 이 구절과 이전 구절들로부터 분명하다. 즉 [어떤 경우] 그는 단수로 말해지지 않을 때도 있다. 그리고 사람은 남자와 여자 모두를 아울러 부르기 위해 사용되고 있다. 이 구절에서도 “그분은 그들이 창조되던 그 날에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부르셨다”라고 말해지는 바, 복수임이 분명하다는 것은 누구나 인정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제 1 장에서, “우리가 우리의 형상 안에서 사람을 만들자, 그리고 바다의 물고기를 그들이 다스리게 하자 (27, 28)”라고 말해지고 있다. 또한 이 구절이 취급하는 주제로부터 더 파악된다. 즉 인류의 첫 사람인 누군가의 창조가 아닌, 태고 교회라는 점이다.

“이름을 부름”, 또는 “이름을 수단으로 부름”이 말씀에서 어떤 것의 품질을 아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은 이전에 이미 살폈다. 현재의 경우 이것은 태고 교회의 품질과 관련되어, 인간이 지면으로부터 취해졌다는 것, 또는 주님에 의해 거듭나졌다는 것을 표시하고 있다. 그 이유가 단어 “아담”은 “지면”을 뜻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후에 그가 천적 수준으로 만들어졌을 때, 그는 주님을 사랑함에서 근원되는 신앙 덕택에 가장 뛰어나게 “사람”이 되었다.

그들이 창조되어진 그 날에서 “사람”이라 불려진 것은 제1장 26,27절로 부터도 나타나고 있다. 즉 여섯 째 날의 끝에서, 이는 안식일의 저녁에 응답하고 있다, 또는 안식일, 또는 일곱 째 날이 시작했을 때에 응답한다; 그 이유가 일곱 째 날, 또는 안식일이 천적 인간이기 때문이다. 이는 이미 살폈다.
3절. 그리고 사람은 일백 삼십 년을 살았다. 그리고 그의 형상을 따라 그의 모습대로 낳았고, 그의 이름을 셋이라 불렀다. “일백 삼십 년”이란 새로운 교회가 일어나기 전 시간을 의미한다. 이 새로운 교회는 태고의 사람들의 교회를 많이 닮지 않았다고 말할 수는 없는 바, 이 교회는 “그의 형상을 따라 그의 모습대로”라고 말해지기 때문에서 이다. 여기서의 단어 “모습, likeness”은 신앙에 관계되고, “형상, image”은 사랑에 관계된다. 이 교회가 “셋”이라 불리우고 있다.
“년들(years)”, 그리고 “년들의 숫자들(numbers of years),” 제 5장에서 자주 발생하는 단어들인데, 이것들이 내적 의미에서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글자 의미에 머무는 이들은 그 숫자들은 몇 세기, 몇 백 년 같은 오랜 세월이라고 상상했다. 그러나 여기로부터 창세기 12장까지에는 글자 의미에서 나타남에 의거한 역사적인 것은 아무 것도 없고, 일반적, 세부적으로 있는 모든 것들은 다른 문제들을 포함하고 있다. 이것은 이름들 뿐만 아니라 숫자들에서도 마찬가지 이다. 말씀에서 자주 언급되는 편에 속하는 숫자로는 3과 7이 있다. 이 두 숫자는 어디서 언급이 있든, 때들(the times), 또는 다른 것들이 포함되거나 표현하는 상태들(the states)에 관련한 거룩한 어떤 것, 또는 아주 신성한 어떤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아주 짧은 시간의 간격과 매우 긴 시간의 간격이나 (예를 들면, 하루-일 년-십 년-백 년 등등과) 같은 의미를 가진다. 그 이유가 부분들이 전체에 속하듯, 아주 작은(짧은) 것이 아주 큰(긴)것에 속해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전체가 부분들로부터, 가장 큰 것이 가장 작은 것들로부터 나오기 위하여 그것에는 반드시 닮음(likeness)이 있어야만 한다. 고로 이사야서에서:
지금 여호와께서 이야기 하셨다. 말하시기를, 삯꾼의 햇수들 같이, 삼 년 내에,
그리고 모압의 영광은 하잘 것 없는 영광으로 될 것이다 (이. 16:14).
다시:
고로 주님께서 나에게 말하셨다, 일 년 내에, 삯꾼의 햇수에 따라,
그리고 게달의 영광은 살라져버릴 것이다 (이. 21:16).
위에서 가장 작고 가장 큰 간격이 의미되었다. 하박국에서:
여호와, 저는 당신의 명성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두려워졌습니다; 오 여호와시여,
햇수들의 한 가운데에서 당신의 일을 되살아나게 하소서,
햇수들의 한 가운데에서 알게 만드소서 (합. 3:2).
위에서 “햇수들의 한 가운데”란 주님의 강림을 의미한다. 보다 적은 간격에서, 이것은 주님의 오심의 모두 각각을 의미한다. 이런 오심은 흔히 인간이 거듭나질 때에 있다.; 보다 큰 간격에서의 경우는, 주님의 교회가 새로이 일어날 때에 있다. “되찾음(구속함)의 해”라 불리는 것도 마찬가지 경우이다. 이사야서에서:
복수의 해가 내 심정 안에 있다, 그리고 내 되찾음의 해가 오고 있다 (이. 63:4).
사탄이 결박되어 있는 천 년 (계. 20:2, 7), 그리고 첫 부활의 천 년 (계. 20:4, 5, 6), 이런 천 년 역시 시간 간격의 천 년을 의미함은 결코 아니고, 그것들의 상태들이다; “날들(days)” 또한 햇수와 더불어 상태들을 표현하는데 사용되어진다. 그리고 상태들은 날들이나 햇수들의 숫자에 의해 묘사되어진다. 이 장의 경우 때들 역시 상태들을 포함한다; 그 이유가 모두 각각의 교회는 각기 유전적으로 지닌 천성에 그 자체 획득한 천성이 합쳐져 달라진 상태에 따라 지각의 상태도 차이가 나는 상태 안에 있기 때문이다.

이 장에서 열거되는 이름들, “셋,” “에노스,” “게난,” “마할랄엘,” “야렛,” “에녹,” “므두셀라,” “라멕,” “노아”는 아주 많은 교회들을 의미한다. 이 교회들 속에서 첫째이고 제1의 교회가 “사람(Man)”으로 불리었다. 이 교회들의 제일 중요한 특성은 지각이었다. 그러므로 이 때에 속해 있는 교회의 차이는 지각의 차이였다. 하여 지금 나는 이 지각(perception)에 관해 잠깐 설명해두어야 할 것 같다. 모든 천국은 선과 진리에 관한 지각이 지배하고 있다. 그러나 이에 대한 묘사는 설명되어질 수 없이 무수하고, 특히 똑같은 두 개의 사회도 존재하지 않는다; 거기에 존재하는 지각들은 대단히 크게 종류들(genera)과 부류들(species)로 구별된다. 종류들은 무수하고, 각 종류는 또한 무수하다; 이에 관하여는 주님의 신성한 자비로부터 차 후 더 언급될 것이다. 거기에 있는 지각의 종류들은 무수하고, 각 종류 안의 부류 역시 무수함에 비교하면, 오늘날의 세상이 천적이고 영적인 것에 관하여 아는 것이 얼마나 미미한지 모른다. 오늘날의 사람들은 지각이 무엇인지 모른다. 설사 지각이 이것이라고 알려준다면, 그런 것의 존재 자체를 믿는 것 조차 하지 않는다; 물론 이외의 사항도 이와 마찬가지이기도 하다. 태고 교회는 주님의 천적 왕국을 표현했다. 이 교회의 지각도 일반적(generic)이고 특수적(specic) 차이들을 갖고는 있다. 그런 반면, 지각의 가장 일반적 본성마저 오늘날은 거의 알고 있지 않다. 따라서 이 교회들의 지각의 종류와 부류들은 부득이 어둡고(dark) 기묘한(strange) 것 인 냥 인간들에게 나타난다. 그 당시 태고인들은 가족(house)들, 가문(family)들, 민족(nation)들로 구별되었을 뿐이고, 결혼 역시 그들의 가족 내지 가문 내에서 이루어져 왔다. 이는 지각의 종류와 부류가 부모로부터 정밀하게 전수되고 보존되기 위하여서 였다. 한마디로 출생적 특성이 대대로 전수되어 보존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태고 교회에 속했던 이들은 천국에서 함께 거주한다.

“셋”이라 불리운 교회는 태고 교회에 가장 가깝다는 것을 서술한 말, 즉 사람이 그의 모습 안에서, 그의 형상을 따라 낳았다, 그리고 그의 이름을 셋이라 불렀다 라고 말한 것으로부터 분명해진다; 단어 모습(likeness)은 신앙에 관련되고, “형상”은 사랑에 관련되고 있다; 그 이유가 이 교회는 사랑과 사랑에서 파생된 신앙에 관하여 태고 교회 같지 않다는 것이, 방금 전에 말한 것, 즉 “남자와 여자로 그분은 그들을 창조하셨고, 그리고 그들에게 복을 주셨다, 그리고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부르셨다”로부터 명백해지는데, 이 구절을 수단으로 여섯째 날의 영적 인간이 의미되어, 이 사람의 모습은 여섯째 날의 영적 인간 쪽 이었다. 즉 사랑이 제일의 원리이라기 보다는 여전히 신앙이 사랑과 결합된 수준이다는 말이다.

이 구절의 “셋”은 4장 25절의 “셋”과 다른 교회가 뜻해진다는 것은 제 435항에서 알런지 모른다. 다른 교리로부터의 교회들이 같은 이름을 수단으로 불리었다는 것은 앞장 17, 18절에서 “에녹”과 “라멕”이 불리었는데, 이 장에서 역시 “에녹”과 “라멕”이(21, 30절) 다른 교회의 이름으로 불리는 것으로부터 미루어 알 수 있다.

4절. 그리고 그가 셋을 낳은 후 사람의 날들이 팔백 년 이었다, 그리고 그는 아들들과 딸들을 낳았다. “날들”은 일반적 측면에서의 때들(시간들)과 상태들을; “햇수”는 특별한 측면에서의 시간과 상태들을 의미한다. “아들들과 딸들”은 태고 교회 사람들이 지각한 진리들과 선들을 의미한다.

“날들(days)”이 일반적 측면에서 때들과 상태들을 의미하는 것은 첫 장, 창조의 “날들”에서 살핀 바 있고, 이외 더 다른 의미는 가지지 않는다. 말씀에서 모든 때를 “날들”로 부르는 것은 통상적인데, 이 장에서도 마찬가지이다 (5, 8, 11, 14, 17, 20, 23, 27, 31); 그러므로 때들의 상태들도 일반적 측면에서는 “날들”로 의미된다; 그리고 “햇수들”이 추가될 때, 하여 햇수들의 계절들에 의해서는 상태들의 품질, 고로 특별한 상태들이 의미된다. 태고인들은 자기들의 숫자들을 가졌다. 이 숫자들을 수단으로 그들은 교회에 관련되는 여러 가지 것들을 의미했다. 예를 들면, “3”, “7”, “10”, “12”, 그리고 이 숫자들이 합성되어 여러 다른 숫자들도 있다. 이를 수단으로 그들은 교회의 상태들을 묘사했다. 그러므로 이 숫자들은 설명에 많은 시간이 요구되는 신비들을 포함한다. 숫자들은 교회의 상태들을 설명하는 것, 또는 판단하는 것이었다. 똑같은 것들이 말씀의 많은 부분에서 발생하는데, 특히 예언서에서 이다. 그리고 유대인의 예식 행위에서도 제물, 식사 공물, 헌물, 등등 여러 예식 안에 숫자들이 있는데, 적용됨에 따라 차이는 있으나 거룩한 것들을 의미한다. 이 장 4절에서의 경우, “팔 백”이다. 다음 절에서서는 “구 백 삼십 년”이다. 그리고 그 뒤를 이어 숫자들이 등장하는데, 이는 그들의 교회의 상태들의 변화이고, 그들의 일반적 상태에 응용되는 바, 자세히 설명하기에는 너무나 많다. 이 책의 미래 부분에서, 주님의 신성한 자비 속에서, 12까지의 단순한 숫자에 한해 설명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이 간단한 숫자를 알지 못하면, 이 숫자로 합성된 숫자의 파악은 불가능하다.

“날들”이 일반적으로 상태들을 의미하고, “햇수들”은 특별한 상태들을 의미한다는 것은 말씀으로부터 나타난다. 에스겔서에서:
너는 날들이 가까이 오게 했다, 그리고 네 햇수까지 와 있다 (겔. 22:4),
역겨운 짓들을 저지른 이들에 관하여, 그리고 그들의 죄들이 가득 차버렸다는 것, 그들의 일반 상태가 “날들”에 의해, 특별한 상태가 “햇수”로 서술되었다. 다윗서에서:
당신께서는 왕의 날들에 날들을 더하실 것이다, 그리고
그의 햇수들은 대대로까지 미치게 하실 것이다 (시. 61:6),
위 구절은 주님과 그분의 왕국에 관해서, “날들”과 “햇수들”은 그분의 왕국의 상태를 의미한다. 다시:
나는 옛 것의 날들을, 시대들의 햇수들을 곰곰이 생각해봅니다 (시. 77:5),
“옛 것의 날들”은 태고 교회의 상태를, “시대들의 햇수들”은 고대 교회의 상태를 의미한다. 이사야에서:
복수의 날이 내 심정 안에 있다, 그리고 내 되찾음의 해가 오고 있다 (이. 63:4),
마지막 때들에 관해 말하시는데, 거기서 “복수의 날”은 지옥에 떨어짐의 상태를, “되찾음의 해”는 복됨의 상태를 의미한다. 다시:
주님이 받아 주실 수 있는 해, 그리고 우리의 하느님이 복수하시는 날을 선포하는 것;
슬퍼하는 모두를 위로하시는 것 (시. 61:2),
위에서 “날들”과 “해들”은 모두 상태들을 의미한다. 예레미야서에서:
옛 것으로부터 같이 우리의 날들을 새로이 하소서 (애. 5:21).
위에서 상태들이 명백히 뜻해진다.
요엘서에서:
여호와의 날이 온다, 그 이유는 그것이 가까이 있기 때문이다. 즉 어둠의 날,
짙은 어둠의 날, 구름 짙고 희미함의 날이다; 이와 비슷한 것은 있은 적이 없다,
이것 이후도 없을 것이다, 대대로의 햇수에서 조차 (없을 것이다) (욜. 2:1, 2),
위에서 “날”은 어둠의 상태, 짙은 어둠의 상태, 구름 짙고 희미함의 상태, 각각이 특별한 측면에서, 그리고 일반적 측면에서는 모두와 더불어이다. 스가랴에서:
나는 하루 날에 이 토지의 불법을 옮길 것이다; 그 날에 너희 네 동료 사람에게 포도나무 아래에서,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외칠 것이다 (슥. 3:9, 10).
그리고 또 다른 장소에서:
여호와께 알려진 날 하나가 있을 것이다, 그 날은 밤도 아니고, 낮도 아니다,
그리고 저녁 시간에 빛이 있을 것이다 (슥 14:7).
위 구절에서 상태가 뜻해짐이 분명하다. 그 이유는 “밤도 아니고, 낮도 아닌 , 저녁 시간에 빛이 오는” 날이라 말해지기 때문이다. 같은 것이 십계명에 있는 표현들로부터 나타난다:
네 아버지와 네 어머니를 존경하라, 네 날들이 길어질 것이고, 지면 위에서
너는 잘되어 갈 것이다 (신. 5:6; 25:15).
위 구절에서 “길어진 날들”을 가진다는 것은 목숨이 길어진다가 아니라 행복한 상태를 위미한다.
글자 의미에서는 마치 “날들”이 시간을 의미하게 나타나는 것을 필요로 하지만, 내적 의미에서는 상태를 의미한다. 천사들은 내적 의미 안에 있는 바, 그들은 시간이 무엇인지 모른다. 그 이유는 그들에게는 시간들을 구별하게 하는 태양도 달도 없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그들은 날들과 햇수들을 모른다, 오직 상태들이 어떤지, 상태가 어떻게 바뀌는지만 알 뿐이다. 그러므로 내적 의미에서 있는 천사들 앞에서 모든 것은 문제(matter)에 관련되고, 시간과 공간은 사라진다. 에스겔서의 이 구절의 글자 의미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날들이 가까웁다, 여호와의 날 조차 가까웁다, 구름의 날이다;
이것은 민족들의 때일 것이다 (겔. 30:3).
그리고 요엘서에서:
오호라 날을 위하여! 여호와의 날이 가까움을 위하여,
그리고 황폐됨으로 그것은 온다 (욜. 1:15),
위 구절에서 “구름의 날”은 구름, 또는 거짓을 의미한다; “민족들의 날”은 민족들, 또는 사악함을 의미한다; “여호와의 날”은 황폐됨을 의미한다. 시간의 관념이 제거될 때, 그 시간에 존재했던 것들의 상태에 관한 관념들이 남는다. 이 장에서 언급되는 “날들”과 “햇수들”에 관련하여서도 똑같다.

“아들들과 딸들”은 그들이 지각으로부터 가졌던 진리들과 선들이다. 실제로 “아들들”은 진리들을, 그리고 “딸들”이 선들을 의미하는 것은 예언서들의 많은 구절로부터 분명해진다; 그 이유가 말씀에서는 옛날 때와 같이 교회의 임신과 출생을 “아들들과 딸들”로 부르기 때문이다, 이사야서에서:
이방인들이 네 빛에 올 것이다, 그리고 왕들이 네 일어남의 빛남에 올 것이다;
네 눈을 들어올려 주위를 빙둘러 보라; 그들이 스스로 모든 것을 가지고 네게 온다;
네 아들들이 멀리로부터 올 것이다, 네 딸들이 네 편에서 유모일 것이다; 그때 너는
보고 멋지게 늘어질 것이다, 그리고 네 심정은 놀라워질 것이다,
그리고 확장될 것이다 (이. 60:3, 4, 5),
위 구절에서 “아들들”은 진리를, “딸들”은 선을 의미한다.
다윗서에서:
외국인의 아들들로부터 우리를 건져주소서, 구출하소서, 그들의 입은 헛됨을
말합니다; 하여 우리의 아들들은 그들의 젊음 안에서 성장한 식물 같이 있을런지
모르고, 우리의 딸들은 성전의 틀에서 자른 모퉁이돌 같이 있을런지 모릅니다
(시. 44:11, 12),
위에서 “외국인의 아들들”은 가짜 진리들, 또는 거짓들; “우리의 아들들”은 진리에 관 한 교리물을; “우리의 딸들”은 선에 관한 교리물을 의미한다.
이사야서에서:
내가 북쪽에게 말할 것이다, 포기하라, 그리고 남쪽에게, 감추어 두려하지 말라;
멀리로부터 내 아들들을 데려온다, 그리고 내 딸들을 땅 끝들로부터 데려온다;
눈 먼 백성들을 데려온다, 그리고 그들은 눈을 가질 것이다; 귀머거리, 그리고
그들은 귀를 가질 것이다 (이. 43:6, 8),
위 구절에서 “아들들”은 진리들을; “딸들”은 선들을; “눈 먼자”는 진리들을 보게 될 이들; 그리고 “귀머거리”는 진리들에 순종할 이들을 의미한다.
예레미야서에서:
부끄러움이 우리의 젊은 시절로부터 우리의 조상의 노동을 삼켰다; (즉)
그들의 양떼들, 그들의 목축들, 그들의 아들들, 그들의 딸들(이다) (예. 3:24).
위에서 “아들들”, “딸들”은 진리들과 선들을 의미한다. “자녀들”, “아들들”이 진리들을 의미함은 이사야서로부터 분명해진다:
이제 야곱은 부끄러워하지 않을 것이다, 그의 얼굴은 이제는 창백함의 밀(납)이
발라져 있지 않을 것이다; 그 이유가 그가 그의 한 가운데에서 내 손의 일로부터
그의 자녀를 볼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내 이름을 신성스럽게 할 것이다,
그리고 야곱의 거룩한 이를 신성하게 할 것이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하느님을
경외할 것이다; 영 안에서 잘못으로 헤메던 그들 역시 이해함을 알 것이다
(이. 29:22, 23, 24),
위에서 “야곱의 거룩한 이, 이스라엘의 하느님”은 주님을 의미한다; “자녀”는 거듭나는 자, 선과 진리의 이해함을 가진 자를 의미한다.
다시:
노래하라, 아이를 못낳는 너, 불모인(자)여, 그 이유가 결혼한 아내의 아들들 보다
황무한 자의 아들들이 더 많기 때문이다 (이 54:1).
위에서 “황폐한 자의 아들들”은 원시 교회(primitive church), 또는 이방인들의 교회 속의 진리들을 의미한다; “결혼한 아내의 아들들”은 유대 교회 속의 진리들이다.
예레미야에서:
내 천막은 황폐된채 있고 내 (천막)줄은 뽑혀져버렸다;
내 아들들은 나로부터 나갔다, 있지 않다 (예. 5:20),
위에서 “아들들”은 진리들을 의미한다. 다시:
그의 아들들은 이전 같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모임(congregation)은
내 앞에 설립될 것이다 (예. 30:20),
위에서 “아들들”은 고대 교회의 진리들을 의미한다. 스가랴서에서:
나는 네 아들들을 휘저을 것이다, 오 시온아, 네 아들들과 더불어,
오 야완아, 그리고 너를 용사의 검 같이 만들어라 (슥. 9:13),
위에서 사랑으로 부터의 진리들이 의미되고 있다.

말씀에서 “딸들”이 자주 선들을 표시하고 있다; 다윗서에서:
왕의 딸들이 네 귀중한 것들 사이에 있었다; 네 오른편에 오빌의 최상의
금 안에 있는 여왕이 있다; 두로의 딸이 선물을 가지고 있다; 왕의 딸은
안쪽에 있는 모든 영화로움이다; 금으로 된 작은 구멍(eyelet)의 일이
그녀의 의복이다; 네 조상 대신 네 아들들이 있을 것이다 (시. 45:10-17),
위에서 선, 그리고 사랑과 신앙으로 부터의 아름다움이 “딸”에 의해 묘사되어져 있다. 이로부터 교회들이 선들 덕택에 “딸들”이라 불리운다. 마치 “시온의 딸”, “예루살렘의 딸”과 같다 (이. 37:22, 그 외 많은 구절에서); 교회들이 “내 백성의 딸들”이라 불리운다 (이. 22;4), “다시스의 딸” (이. 23:10), “시돈의 딸” (이. 23:12), 그리고 “들판에 있는 딸들” (겔. 26:6, 8).

같은 것들이 이 장에서 “아들들”과 “딸들”에 의해 의미된다 (4, 7, 10, 13, 16, 19, 26, 30), 그러나 교회들이 위와 같고, 아들들과 딸들이 위와 같은데, 즉 선들과 진리들과 같다; 진리들과 선들이 따로따로 구분되어 지각되는 듯 서술되는데, 그 이유는 이상 살핀 내용들이 태고 교회를 서술하기 때문이고, 이 교회가 여타 다른 교회들, 계승되어져 가는 모든 교회의 부모격이고 제일 가는 교회이기 때문에서이다.

5절. 사람이 살았던 모든 날들은 구백 삼십 년 이었다, 그리고 그는 죽었다. 여기서 “날들”과 “햇수들”은 때들과 상태들을 의미한다; “사람이 죽었다”에 의해 더 이상 이와 같은 지각이 존재하지 않았음이 의미되었다.

“날들”과 “햇수들”이 때들과 상태들을 의미함에 대한 설명은 더 필요하지 않을 것이나, 세상에서 때(시간)들과 치수들은 필수적이다, 이것에 관련되는 것은 자연의 최말단에 속하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날들과 햇수들, 또한 치수들에 사용된 숫자가 말씀에서 적용될 때는 언제든지 숫자의 의미에 일치하여 때들과 치수들로부터 추상적으로 의미를 가진다; 예를 들면, 일하는 육일, 일곱째 날은 거룩하다는 것; 희년 (jubilee)은 매 49년 째에 선포하고, 50년 째에 기념할 것이다는 것; 이스라엘의 지파들이 열 둘이다는 것, 주님의 사도들이 열 둘이다는 것; 칠십 원로들, 주님의 칠십 제자들; 등등, 숫자들이 적용된 것들로부터 추상적으로 특별한 의미를 가지는 성경에서의 예들은 훨씬 더 많다; 이렇게 추상할 때, 상태들이 숫자들에 의해 의미된다.

그가 “죽었다”가 이와 같은 지각은 더 이상 있지 않았다를 의미하는 것은 말씀에서의 “죽다”에 대한 의미로부터 분명해진다. 즉 어떤 것이 존재해왔었는데 중지되는 것이다. 고로 계시록서에서:
사데에 있는 교회의 천사에게 쓰거라; 이런 것들을 하느님의 일곱 영들, 그리고
일곱 별들을 가지신 분께서 말하신다: 나는 네 일들, 즉 네가 살아있다 그리고
죽어있다는 이름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경계하라 그리고 이제 막
죽으려 하는 그 남은 것들을 강건하게 하라: 그 이유가 나는 하느님 앞에서
완전한 네 일들을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계. 3:1, 2).
예레미야서에서:
나는 네가 낳아지지 않은 또 다른 나라로 너를 낳은 네 어머니를 내쫓을 것이다,
그리고 너는 거기서 죽을 것이다 (예. 22:26),
위에서 “어머니”는 교회를 의미한다. 이미 여러번 말했던 바 대로, 교회와 더불어, 교회는 그 본래의 모습이 차츰 퇴색되고 퇴보해 가다가 급기야 본래의 모습을 상실하는데, 그 주된 요인은 유전적 악이 증가한 탓이다. 이 악은 이어져 내려가는 부모들이 자신들이 상속 받은 악에 자신이 만든 악을 추가해 형성되기 때문이다. 부모에게 있는 모든 실제의 악은 어떤 종류의 본성을 옷입는다, 그리고 이것이 재발할 때, 그들에게 본성이 되어간다, 그리고 이것이 그들의 유전적 악에 보태진다, 그리고 그들의 자녀에게 전이 된다, 하여 후손에게 계속 전이 된다. 이런 방법 안에서 유전적 악은 후손들 안에서 광대하게 증가되어 있다. 이런 것은 자녀들의 악한 경향성이 그의 선조들의 악한 경향성과 꼭 같음이 발견된다는 사실로부터도 극히 일부라도 확인해 볼 수 있다. 아담으로부터 우리 안에 이식되어져 온 악 외에는 유전적 악은 없다고 하는 의견은 완전한 거짓 주장이다 (제313항도 참조). 진실은 이렇다. 즉, 모든 이 각자는 자신의 실제적인 죄들을 수단으로 유전적 악을 만든다, 그리고 이 악을 그가 상속받은 악들에 보탠다. 이런 과정에서 악은 축적되고, 모든 후손들 안에 남는데, 주님에 의해 거듭나아지는 이들 안에서가 아니면 줄어들지 않는다. 모두 각각의 교회 안에서 이것이 퇴보의 제일의 원인인데, 이것은 태고 교회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어떻게 태고 교회가 퇴색되어 갔는지는 지각이 무엇인지를 먼저 알지 않으면 설명되어질 수 없다. 그 이유가 이 교회는 지각하는 교회이고, 이 교회가 오늘날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교회의 지각은 그 교인들이 주님으로부터 선하고 참된 것을 지각함 안에서 존재한다. 마치 천사들의 경우와 같다; 여기서 말하는 선하고 참된 것은 시민 사회의 것과 동등하게 여겨서는 안되고, 이는 주님을 사랑함으로 부터와 주님에 대한 신앙으로 부터의 것임을 확실히 구분지어 생각해두어야 한다. 지각이 무엇인지는 삶에 의해 확증되어져 나오는 신앙의 고백으로부터 알려질 수 있고, 그것이 어떤 존재를 가지는지를 안다.

6절. 그리고 셋은 일백 오 년을 살았고, 에노스를 낳았다. “셋”은 이미 주목했던 그대로 두 번째 교회이다. 이 교회는 아버지격인 태고 교회 보다는 덜 천적 수준이긴 하나 그래도 태고 교회 반열에는 낄 수 있다 (제3절 참조). “그가 일백 오 년을 살았다”란 때들(시간)과 상태들을 의미함은 앞의 구절과 같다. “그가 에노스를 낳았다”란 그들로부터 “에노스”라 불리는 또 다른 교회가 이어져 내려 왔음을 의미한다.

“셋”이 두 번째 교회인데, 이 교회의 부모되는 태고 교회 보다는 덜 천적 수준이지만, 여전히 태고 교회 중의 하나이다는 것은 제3절의 셋에 관해 말했던 것으로부터 나타날런지 모른다, 이미 말했듯, 교회와 더불은 경우에도, 점차적으로, 그리고 시간이 흐르면서, 앞서 살핀 이유 때문에 퇴색되었다.

그가 “에노스를 낳았다”가 그들로부터 또 다른 교회, “에노스”라 불린 교회로 내려갔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은 이 장에서 이름들이 교회들 외 다른 것들은 의미하지 않는다는 사실로부터 분명해진다.

7, 8절. 그리고 셋은 에노스를 낳은 후 팔백 칠 년을 살았다, 그리고 아들들과 딸들을 낳았다. 8.그리고 셋의 모든 날들은 구백 십이 년 이었다, 그리고 그는 죽었다. “날들”과 “햇수들”의 숫자는 앞에서와 같이 여기서도 때들(시간)과 상태를 의미한다. 그가 “죽었다”는 의미 역시 같은 맥락이다.

9절. 그리고 에노스는 구십 년을 살았다, 그리고 게난을 낳았다. “에노스”는 전과 같이 세 번째 교회를 의미한다. 이 교회는 두 번째 교회 보다 더욱 덜 천적 수준이었다. 하지만 이 교회 역시 태고 교회 중의 하나였다. “게난”은 네 번째 교회를 의미하는데 이 교회는 앞의 교회를 계승하고 있다.

교회들이 시간의 과정에서 서로 계속되어간다는 점, 이로부터 이것이 저것으로부터 태어나졌다고 말해지는 바, 이는 마치 열매들, 또는 후손들과 더불은 경우와 똑같다. 이런 것들의 한 가운데, 즉 그것들의 가장 안쪽들 안에, 마치 열매들 속의 열매, 또는 후손들 속의 씨들이 있듯, 이 씨로부터 정규적인 질서 안에서 연속되는 부분들이 살아있는다. 그 이유가 더 멀리 있는 것들은 가장 안쪽으로부터 주변을 향하여 있기 때문, 다시 말해, 열매, 또는 후손의 본질이 그것들 안에서 있되, 바깥쪽을 향하여 가서 가장 안쪽 것의 종착지인 그것들의 덮개, 또는 외피에 도달하며 존재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두뇌의 경우에서도, 외피의 실체라 불리는 미묘한 기간적인 형체들인 가장 안쪽 부분들 안에서, 이로부터, 이를 수단으로 혼들이 진행되어 나간다; 그리고 이로부터 정규적 순서에서, 보다 더 순수한 덮개들이 그 뒤를 이어 받는다, 그 다음 더 밀도 높은 것들이, 그리고 마지막으로 뇌막이라 불리는 일반적 덮개들, 이것은 아직 더 일반적 덮개들에서 종결되어진다. 그리고 마지막 모든 것의 가장 일반적인 것은 두개골이다.

위 세 교회들, “사람”, “셋”, “에노스”가 태고 교회를 구성한다. 물론 각 교회는 지각의 정도에 따라 완전함에서 차이를 지니고 있다: 첫 교회의 지각력은 이어지는 교회들에서 쇠약해져 더욱 일반적 수준이 되어갔다. 이는 위에서 주목한 열매들, 또는 두뇌의 경우와 같다. 완전함(의 수준)은 지각함의 능력이 (얼마나) 명료한지에 따라 (결정된다.) 지각력은 지각함이 덜 명료해지고 더 일반적이 될 때 줄어져 간다. 그리하여 더 불명료한 지각이 더 명료한 지각을 계승하는 것이다. 결국 그것은 자취를 감춘다.

태고 교회의 지각하는 능력은 선하고 참된 것을 지각함 안에 존재했을 뿐만 아니라 덕행(well-doing, 선행)으로부터 올라오는 행복과 기쁨 안에 존재했다. 선인 것을 행함 안에 있는 행복감과 즐거움 없이는 이 지각력은 생명을 가지지 못하나, 이 행복과 즐거움 덕택에 그것은 생명을 가진다. 태고 교회가 향유했던 것과 같은 사랑과 사랑에서 파생된 신앙의 생명은 (나 자신이 세상에서) 쓸모 있음(use)이 되어 있는 동안, 즉 선과 진리가 유용함 안에서 있는 동안 생명을 가진다는 말이다; 쓸모 있음으로부터, 쓸모 있음을 수단으로, 쓸모 있음에 따라 생명은 주님에 의해 주어진다; 쓸모 없음인 것 안에 생명은 없다. 그 이유는 쓸모 없는 것은 (헌 신짝 내던지듯) 내던져지고 말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태고 교회는 주님의 모습이었다. 그러므로 지각하는 힘들(powers)에서 그들은 그분의 형상들이 되었다. 지각하는 힘은 선하고 참된 것을 앎 안에 존재한다, 결과적으로 신앙으로부터 있는 것 안에 존재한다: 사랑 안에 있는 자는 앎 안에서 즐거워하지 않고, 선하고 참된 것을 행함 안에서, 즉 유용함을 추구함 안에서 행복과 즐거움을 누린다.

10, 11절. 그리고 에노스는 그가 게난을 낳은 후 팔백 십오 년을 살았다, 그리고 아들들과 딸들을 낳았다. 11 그리고 에노스의 모든 날들은 구백 오 년 이었고, 그는 죽었다. 여기서도 “날들”, “년 수”, “아들들과 딸들”, 그가 “죽음” 등등이 의미하는 것은 이미 살핀 바와 똑같다.

“에노스”는 앞서 주목한대로, 세 번째 교회로 아직 태고 교회 중의 하나이나, 덜 천적 수준이고, 결과적으로 “셋”의 교회 보다 덜 지각적이다. “셋” 역시 “사람”이라 불린 부모되는 교회 보다는 덜 천적 수준이고 덜 지각적이다. 이 세 교회들이 태고 교회를 구상하는데, 첫 교회는 그 뒤를 잇는 교회에 비해 상대적으로 열매들 속의 핵심이었다. 이에 반해, 나머지 두 교회는 첫 교회의 막질(membranaceous) 부분이었다.
12절. 게난은 칠십 년을 살았다, 그리고 마하랄엘을 낳았다. “게난”은 네 번째 교회를 의미하고, “마하랄엘”은 다섯 번째 교회이다.

“게난”으로 불리는 교회는 앞의 세 교회가 지닌 완전한 것, 즉 지각력에서 위 세 교회 서열에는 낄 수 없다. 즉 앞의 세 교회들과 구분된다는 말이다. 즉 앞의 세 교회가 일반적으로 차츰 되어가는 중 이었음에 비해 이 교회는 아예 일반적이 되어 버렸다는 말이다. 이 상태는 실로 묘사되어지지 않고 있으나, 이후 살피는 “에녹”과 “노아”라 불리는 교회의 묘사로부터 약간은 어림잡을 수 있다.

13, 14절. 그리고 게난은 그가 마하랄엘을 낳은 후 팔백 사십 년을 살았고, 그리고 아들들과 딸들을 낳았다. 14 그리고 게난의 모든 날들은 구백 십 년 이었다, 그리고 그는 죽었다. “날들”과 “년 수들”의 숫자들은 전과 같은 의미이고, “아들들과 딸들” 역시 진리들과 선들을 의미하고 이로부터 교인들은 지각을 가졌으나 앞의 교회 보다 더욱 일반적 방법(general manner)으로 가졌다. 그가 “죽었다”란 지각의 이런 상태가 중지됨을 의미함은 앞의 구절과도 같다.

여기서 주목해 둘 것은 모든 것들은 교회의 상태에 관련됨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이다.

15절. 그리고 마하랄렐은 육십 오 년을 살았다, 그리고 야렛을 낳았다. “마하랄렐”은 다섯 번째 교회를, “야렛”은 여섯 번째 교회를 의미한다.

지각력이 감소해갔을 때, 하여 더 특수한 측면, 또는 명료함에서 더 일반적 측면, 희미함으로 쇠퇴되어 갔듯, 사랑의 생명, 또는 쓸모 있음의 생명 역시 그러했다; 그 이유가 사랑이나 쓸모 있음의 생명과 지각력의 생명은 같기 때문이다. 선으로부터 진리를 아는 것이 천적 수준이다; “마하랄렐”로 불리는 교회를 구성한 이들의 생명은 그들이 쓸모 있음으로부터 얻는 즐거움 보다 진리들로부터 얻는 즐거움을 더 좋아했음에서 비롯되었다. 이에 관하여는 저세상 삶에서 이와 같은 사람 사이에 내가 있어본 경험으로부터 알게 되었다.

16, 17절. 그리고 마하랄렐은 그가 야렛을 낳은 후 팔백 삼십 년을 살았다, 그리고 아들들과 딸들을 낳았다. 17 그리고 마하랄렐의 모든 날들은 팔백 구십 오 년을 살았다, 그리고 그는 죽었다. 이 구절 역시 앞의 구절의 의미와 동일하다.

18절. 그리고 야렛은 일백 육십 이 년을 살았다, 그리고 에녹을 낳았다. “야렛”은 여섯 번째 교회를, “에녹”은 일곱 번째 교회를 의미한다.

“야렛”이라 불리는 교회에 관하여는 관련된 사항이 아무 것도 없다; 그러나 그것의 특성은 “마하랄렐”과 “에녹”으로부터 알 수 있을런지 모른다. 그 이유가 이 둘 사이의 매체, 내지 중간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19, 20절. 그리고 야렛은 그가 에녹을 낳은 후 팔백 년을 살았고, 아들들과 딸들을 낳았다. 20 그리고 야렛의 모든 날들은 구백 육십 이 년 이었다, 그리고 그는 죽었다. 위 말들의 의미는 앞 절과 거의 동일하다. 대 홍수 이전의 사람들의 나이가 앞의 절들이 말한 것 같이, 즉 야렛은 구백 십이 년을 살았다든가, 므두셀라는 구백 육십 이 년을 살았다와 같이 실지로 오래 살지 않았음이 아니라는 것은 모든 이에게 주님의 신성한 자비로부터 다음 장 3절, “그들의 날들은 일백 이십 년이 되리라”는 구절에서 설명해 볼 것이다. 즉 년 수는 어떤 특정한 사람의 나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때들과 상태들을 의미한다.

21절. 그리고 에녹은 육십 오년을 살았다, 그리고 므두셀라를 낳았다. “에녹”은 일곱 번째 교회를, “므두셀라”는 여덟 번째 교회를 뜻한다.

“에녹”이라는 교회의 품질은 다음 절에서 묘사되고 있다.

22절. 그리고 에녹은 그가 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 년을 하느님과 함께 걸었다, 그리고 아들들과 딸들을 낳았다. “하느님과 함께 걷는 것”이란 신앙에 관한 교리를 의미한다. 그가 “아들들과 딸들을 낳았다”란 진리들과 선들에 관한 교리적인 문제들(matters)을 의미한다.

그 당시 태고 교회와 계승된 교회들에서 지각의 문제들(matters)이었던 것들로부터 교리들의 뼈대를 구축해서 이 교리들이 선하고 참된 것을 아는 규칙으로 사용할 수 있게 한 이들이 있었다. 이 인물들이 “에녹”이라 불리었다. 이것이 “그리고 에녹은 하느님과 함께 걸었다”라는 말에 의해 의미되었다; 그리고 그들은 그 교리를 “에녹”이라 불렀다; 마찬가지로 이것은 이름, “에녹”이 “가르치다(instruct)”를 뜻함에 의해서도 의미되기도 한다. 이와 똑같이 “걷는다”라는 표현으로부터, 그리고 그가 “여호와와 더불어서”가 아니라 “하느님과 더불어 걸었다”라고 말해진 사실로부터도 분명해진다: “하느님과 더불어 걷는” 것은 가르치는 것과 신앙의 교리에 따라 사는 것이나, “여호와와 더불어 걷는” 것일 경우, 이는 사랑의 생명으로 사는 것이다. “걷는 것”은 “법 안에서 걷는다”, “규례 안에서 걷는다”, “진리 안에서 걷는다” 등등과 같이 사는 것을 의미하는 관습적 언어 형체이다. “걷는”것은 길(way)에 더 적절히 어울리는 단어인 바, 진리에, 결과적으로 신앙의 교리에 더 친근하다. 말씀에서 “걷는” 것에 의해 의미되는 것이 구절에 따라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대략 아래 구절들로부터 나타날 것이다.
미가서에서:
그분께서 네게 선인 것을 보여주셨다, 오 사람아, 그리고 여호와께서 네게 무엇을
요구하시는 것은, 오직 공정을 행하는 것, 자비로부터의 사랑을 베푸는 것,
그리고 네 하느님과 함께 걸음으로 네 자신을 겸손해지게 하는 것이 아니더냐? (미. 6:8).
위에서 “하느님과 더불어 걷는” 것은 여기서 암시된 것들에 따라 사는 것을 의미한다; 어쨌든 여기서 “하느님과 더불어” 라고 말해지는 한편, 에녹에 관해서는 또 다른 단어 “하느님과 더불어로 부터”가 의미되는 것이 사용되고 있다. 하여 표현이 애매모호하다. 다윗서에서:
당신께서는 충동질 받음으로부터 저를 구해주셨습니다. 하여 나는 산 자의
빛 안에서 하느님 앞에서 걸을런지 모릅니다 (시. 56:13).
위에서 “하느님 앞에서 걷는” 것은 신앙의 진리 안에서 걷는 것, 이는 산 자의 빛이다. 마찬가지가 이사야서에서:
어둠 안에서 걷는 사람들이 큰 빛을 본다 (이. 9:1).
이렇게 주님께서 모세에 의해 말하신다:
내가 한 가운데에서 걸을 것이다, 그리고 네 하느님일 것이다,
그리고 너는 내 백성일 것이다 (레. 26:12).
그들이 법의 교리에 따라 살 것을 의미하면서,
예레미야에서:
사람들은 그들이 사랑하며, 섬기며, 그에 따라 걷고, 추구하던 태양과 달 앞에,
하늘들의 별들에 그것들을 흐트러 놓을 것이다 (예. 8:2).
위 구절에서 명백한 구분이 사랑의 것들과 신앙의 것들 사이에 있다; 사랑의 것들은 “사랑하는,” “섬기는”에 의해 표현되고, 신앙의 것들은 “걸음,” “추구함”으로 표현되어져 있다. 예언적 저술의 모두에서 모든 표현은 정밀하게 되고 있다. 하여 이 단어를 저 단어로 적당히 섞어 쓰는 일은 없다. 그러나 “여호와와 더불어 걷는 것,” 또는 “여호와 앞에서”는 말씀에서 사랑의 생명을 사는 것을 의미한다.

23, 24절. 에녹의 모든 날들은 삼백 육십 오 년 이었다. 24 그리고 에녹이 하느님과 함께 걸었다, 그리고 그는 더 이상 있지 않았다, 그 이유는 하느님께서 데려 가셨기 때문이다. “에녹의 모든 날들이 삼백 육십 오 년 이었다”란 그들이 조금 밖에 없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가 “하느님과 함께 걷는 것”은 신앙에 관한 교리를 의미한다. “그는 더 이상 있지 않았다. 하느님이 데려가셨기 때문이다”란 후세의 사용을 위해 이 교리를 보존하셨심을 의미한다.

“그는 더 이상 있지 않았다, 그 이유가 하느님이 그를 데려가셨기 때문”이라는 말들에 관하여가 후세의 사용을 위해 이 교리의 보존을 의미하는데, 에녹의 경우, 이미 말했던 바 같이, 그는 태고 교회에서 지각의 주제(matter)가 되어왔던 교리로 환원하였다는 것, 그리고 이 교회 때에는 환원된 이 교리를 허용하실 수 없었다는 것이다; 그 이유가 지각에 의해 안다는 것은 교리에 의해 배움으로부터 와는 매우 다른 것이기 때문이다. 지각 안에 있는 이들은 그들이 안 것을 공식화한 교리에 의해 굳이 배울 필요가 없었다. 예를 들면: 어떻게 생각하는 것이 잘하는가를 아는 예술가는 예술의 어떤 규칙에 의해 가르침을 받을 이유가 없다, 그 이유는 가르침을 받는 중에 잘 생각하는 그의 능력이 오히려 손상 입을 가능성도 있기 때문이다. 마치 스콜라식(scholastic, 학교 교육의) 먼지(혼란)로 해서 오히려 궁지에 몰리는 경우도 가능하다는 말이다. 지각을 수단으로 배우는 이들에게 주님께서는 내적 경로를 수단으로 선하고 참된 것을 알게 하셨다; 그러나 교리로부터 배우는 이들에게, 지식이 외적 경로를 수단으로, 또는 신체적 감각들을 수단으로 주어진다; 그리고 그 차이는 빛과 어둠의 차이와 비슷하다. 천적 인간에게는 명세서 같은 자세한 설명이 필요 없다. 그 이유는 그들은 상태나 주위 환경에 일치하여 아주 미세하고 특유한 것들 안으로 들어가기 때문이다. 그러나 태고 교회의 지각력이 멸하여질 것이 예견되었고, 이후 인류는 참되고 선인 것을 교리를 수단으로 배우리라는 것, 또는 어둠을 수단으로 빛에 나아온다는 것이 예견되었는 바, 여기서 “하느님께서는 그를 데려가셨다”고 말해진다. 즉 후세의 사용을 위해 교리를 보존하셨다는 말이다.

“에녹”이라 불리운 이들과 더불은 지각의 상태와 품질이 나에게 알려졌었다. 이것은 어떤 명료함 없는 일종의 희미한 지각이었다; 그 이유가 이런 경우 마음은 마음의 바깥쪽 상황 만으로 교리적인 것들로 결정하기 때문이다.

25절. 므두셀라는 일백 팔십 칠 년을 살았다, 그리고 라멕을 낳았다. “므두셀라”는 여덟 번째 교회를, “라멕”은 아홉 번째 교회를 의미한다.

이 교회의 품질이 언급된 곳은 아무 곳에도 없다; 그러나 그것의 지각력이 일반적이고 희미하다는 것은 “노아”라 불리는 교회의 묘사로부터 분명해진다; 완전함이 퇴조된 만큼, 완전한 지혜와 총명도 퇴조된 것이다.
26, 27절. 므두셀라는 그가 라멕을 낳은 후 칠백 팔십 이 년을 살았다, 그리고 아들들과 딸들을 낳았다. 27 그리고 므드셀라의 모든 날들은 구백 육십 구 년 이었다, 그리고 그는 죽었다. 이 구절도 상기 구절들과 동일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28절. 그리고 라멕은 일백 팔십 이 년을 살았다, 그리고 아들을 낳았다. “라멕”은 여기서 아홉 번째 교회를 의미한다. 그런데 이 교회의 진리와 선에 관한 지각은 대단히 일반적이고 희미해져서 거의 없다시피 된 바 교회는 실상 무용지물의 교회였다. “아들”은 새로운 교회의 출현을 의미한다.

“라멕”은 진리와 선에 대한 지각이 매우 일반적이고 매우 희미해져 지각이 없다고 해야할 정도로만 남아 있는 교회, 결과적으로 교회가 황폐해졌음을 의미하고 있다는 것이 앞 장에서 말해진 것과 다음 절에서 이어지는 것으로부터 나타난다. 제4장에 있는 “라멕”은 제 5장에 있는 “라멕”과 거의 같은 의미인 황폐됨을 의미로 가진다. (4장의 경우, 18, 19, 23, 24절 참조); 그리고 그를 낳은 자 또한 거의 같은 이름인 “므두사엘”인 바, 의미 또한 거의 같다. “므두사엘”과 “므두셀라”는 막 죽으려하는 어떤 것이 의미되어진다; 그리고 “라멕”에 의해서는 파괴되는 것이 의미되어진다.

29절. 그리고 그는 그의 이름을 노아라 불렀고, 말하기를, 그가 여호와께서 저주하신 지면에서 우리 손들의 수고와 우리의 일로부터 우리를 위로할 것이다. “노아”는 고대 교회(the Ancient Church)를 의미한다. “여호와께서 저주하신 지면으로부터 우리 손들의 수고와 우리의 일로부터 우리를 위로함”이란 교리를 의미한다. 이 교리를 수단으로 뒤집혀져 왜곡되어 갔던 것들이 회복되어지게 된다.

“노아”에 의해 고대 교회, 또는 홍수 이후 세 교회들의 부모되는 교회를 의미했다는 것은 노아를 크게 다루는 다음 페이지(page)에서 나타날 것이다

제 5장에 있는 이름들은 교회들, 같은 말로 교리들을 의미한다; 그 이유가 교회는 교리로부터 존재와 그것의 이름을 갖기 때문이다; 고로 “노아”는 태고 교회로부터 남은 교리, 또는 고대 교회를 의미한다. 교회들, 또는 교리들과 더불어 어떻게 이런 경우가 있어지는가는 앞서 서술했었다. 즉 그들이 기운다, 그리고 그 기움은 신앙의 선들과 진리들의 어떤 것도 남아 있지 않을 때까지이다는 것, 하여 교회는 황폐되어져 있다고 말씀에서 말하여진다. 그러나 여전히 리메인스(remains, 아껴두심)는 항상 보존되고 있다는 것, 또는 비록 극소수일지라도 누군가와 더불어 신앙 속의 선과 진리는 남아 있다; 그 이유가 신앙 속의 선과 진리가 이들 극소수 안에서라도 보존되지 않으면, 인류가 천국과 결합하는 일은 없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개인적 차원에서 인간 안에 있는 리메인스를 생각해보면, 이것을 덜 가진 자일 수록, 그가 소유한 지식과 이성은 덜 계발되어진다. 그 이유가 선과 진리의 빛은 리메인스로부터, 또는 주님을 통하여 리메인스로부터 흘러들기 때문이다. 만일 인간 안에 리메인스가 없다면, 사람일 수가 없고 야수보다 더 천박할 것이다; 더 적은 리메인스가 거기 있다면 덜 사람인 것이다. 더 있다면 더 사람이 되어 있다. 리메인스는 천국의 별과 같다. 이 별이 작다면, 빛 또한 보다 작아진다. 더 크다면 빛 역시 더 밝아진다. 태고 교회로부터 남게 된 매우 적은 리메인스들이 노아로 불리는 교회를 구성한 이들 사이에 있었다; 그러나 이 남은 것은 지각으로 부터의 남은 것이 아니고, 완전함으로 부터의 것이다, 그리고 태고 교회 안에 있는 지각으로 부터의 것들로부터 파생된 교리로부터의 남은 것이다; 그러므로 새로운 교회가 주님에 의해 지금 일으켜졌다. 이 교회는 태고 교회와는 완전히 다른 태생적 특성으로부터 이다. 하여 고대 교회라 불리워진다. 고대란 홍수 이전 시대들의 마감에서 존재하여 홍수 이후 첫 기간 동안 존재한 경우를 두고 말해진다. 이 교회에 관하여는 주님의 신성한 자비에 의해 이후 더 말해질 것이다.

“여호와께서 저주하신 지면으로부터 우리의 손들의 수고함과 일로부터 우리를 위로하심”에 의해 이 교리로 해서 뒤집혀만 갔었던 것이 회복되어짐이 의미되어진다는 것은 주님의 신성한 자비로부터 이어지는 페이지(page)들에서 나타날 것이다. “일(work)”에 의해 그들은 노동과 고생을 하지 않으면 참된 것을 지각할 수 없다는 것이 의미되어지고 있다. “여호와께서 저주하신 지면으로부터 우리의 손들의 수고함”에 의해 그들은 아무 선도 행할 수 없다는 것이 의미되어진다. 고로 라멕을 묘사한 것은 황폐된 교회였다. “일과 손들의 수고함”이 있는 때는 자신들로부터, 또는 자기 자신(own)으로부터 인간이 참된 것을 추구하고 선인 것을 행하는 때이다. 이 일과 수고함으로부터 와지는 것은 여호와께서 저주하신 지면으로부터 인 것은 아무 것도 없고 오직 거짓과 악밖에 없다. (“여호와께서 저주하심”에 의해 의미된 것은 제245항에서도 알런지 모른다.) “위로함”은 노아와 관련되고 있다. 이것에 의해 새로운 거듭남, 고로 새로운 교회가 의미되고 이것이 고대 교회이다. 이 교회, 또는 “노아”는 그러므로 마찬가지로 쉼(rest)을 의미하고, 쉼으로부터 오는 위로가 의미되는데, 태고 교회에 관해 말했던 부분, 즉 주님이 쉬신 일곱 째 날이 의미된다. (84-88항도 참조.)

30, 31절. 그리고 라멕은 그가 노아를 낳은 후 오백 구십 오 년을 살았다, 그리고 아들들과 딸들을 낳았다. 31 그리고 라멕의 모든 날들은 칠백 칠십 칠 년 이었다, 그리고 그는 죽었다. “라멕”은 무용지물이 된 교회를 의미한다. “아들들과 딸들”은 이런 교회의 임신과 출생들을 의미한다.

라멕에 관계되는 것은, 그가 아들들과 딸들을 낳았다는 것, 이것은 이와 같은 교회의 임신과 출생이다는 것 외에 더 이상은 없는 바, 이 주제에 더 머무를 필요는 없는 것 같다. 출생들이 무엇인지, “아들들과 딸들”이 무엇인지는 교회로부터 나타난다; 그 이유가 교회가 이런 종류이면 그것으로 부터의 출생 또한 그러할 것이기 때문이다. “므두셀라”와 “라멕”으로 불리운 교회 모두 홍수 전에 기간이 만료되었다.

32절. 그리고 노아는 오백 년의 아들 이었다. 그리고 노아는 셈, 함, 야벳을 낳았다.” “노아”는 고대 교회를 의미한다. “셈, 함, 야벳”은 세 개의 고대 교회들을 의미한다. 이 교회들의 부모는 “노아”라 불리는 고대 교회였다.

“노아”로 부른 교회가 홍수 전에 있는 교회로는 세어지지 않았다는 것은 29절로부터, 즉 “여호와께서 저주하신 지면으로부터 그들의 손들의 수고와 그들의 일로부터 그들을 위로하실” 것이다고 말한 대목으로부터 나타난다. “위로받음”은 교회가 살아남고 참아내는 것이다. 노아와 그의 아들에 관하여는 이후 주님의 신성한 자비로부터 살필 것이다.

앞 페이지들에서 홍수 전에 존재한 교회들에 의해 소유된 지각에 관하여 말했었다, 그리고 오늘날 지각은 거의 알려지지 않고 있다, 하여 어떤 이는 계시의 계속이라 하고…어떤 이는 인간들 안에 이식된 어떤 것이라 하고…혹 자는 상상이라 하고…갖 가지 말들이 제멋대로 나부끼고 있다; 지각은 사랑으로 부터의 신앙 안에 있는 이들에게 주님에 의해 주어지는 참 천적 자체(the very Celesstial itself)와 같다. 그리고 끝없이 다양해지는 보편적 천국 안에 있는 지각과 같다: 그러므로 지각이 무엇인지에 관한 약간의 개념이라도 사람들 사이에 있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주님의 신성한 자비로부터, 천국들 안에 존재하는 주요한 종류의 지각을 이어지는 페이지에서 서술해보게 된다.

창세기 해설 제 4장

제 4 장

성경 본문

1 그리고 사람이 그의 아내 이브를 알았고, 그리고 그녀는 임신했고, 그리고 가인을 낳고, 그리고 말하기를, 나는 여호와(로부터), 남자를 얻었다.
2 그녀는 그의 아우 아벨을 낳아 추가했다. 그리고 아벨은 양떼의 목자였고, 가인은 지면의 경작자였다.
3 그리고 날들의 끝에서 가인은 여호와께 예물로서 지면의 열매를 가져왔다.
4 그리고 아벨, 그도 또한 자기 양떼의 맏배와 그로부터의 지방(fat)을 가져왔다. 그 리고 여호와께서는 아벨과 그의 예물을 지켜보셨다.
5 그러나 가인과 그의 예물을 그분은 지켜보시지 않았다. 그래서 가인의 노염이 극도 로 지펴졌고 그리고 그의 얼굴들은 떨구어졌다.
6 그리고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말하셨다, 왜 너의 노염이 지펴졌느냐? 그리고 왜 네 얼굴이 (땅으로) 떨어졌느냐?
7 만일 네가 잘 행동하고 있다면 (얼굴을)들어 올리지 않겠느냐? 그리고 만일 네가 잘 행동하지 않고 있다면 죄가 문에 드러눕는다. 그리고 너에게 그의 바램이 있다. 그런데 너는 그를 지배한다.
8 그리고 가인이 그의 형제 아벨에게 말했다. 그리고 세월이 지나 그들이 들판에 있 었을 때, 가인이 그의 형제 아벨을 향하여 일어나 그를 죽였다.
9 그리고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말하셨다, 네 형제 아벨은 어디에 있느냐? 그리고 그 가 말했다, 나는 모릅니다, 제가 내 형제의 경호인 입니까?
10 그리고 그분은 말하셨다, 네가 무엇을 저질렀느냐? 네 형제의 피들의 목소리가 지 면으로부터 나에게 소리치고 있다.
11 그리고 지금 너는 지면으로부터 저주되었다. 지면은 네 손으로부터 네 형제 아벨 의 피들을 받으려고 그 입을 열었다.
12 네가 지면을 경작할 때 이제부터는 지면이 너에게 지면의 힘을 더해 주지 않을 것 이다. 너는 땅에서 도망자와 방랑자 일 것이다.
13 가인이 여호와께 말하였다. 내 불법이 제거되어 질 수 있기에는 너무 큼니다.
14 보라 당신께서 나를 지면의 얼굴로부터 오늘 저를 축출하셨고, 그리고 당신의 얼 굴로부터 내가 숨겨졌습니다. 그리고 나는 땅에서 도망자와 방랑자입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 나를 발견하는 사람마다 나를 죽일 것입니다.
15 여호와께서 그에게 말하셨다, 그러므로 가인을 죽이는 자는 누구에게나 그 앙갚음 이 일곱 배나 있게 되리라. 그리고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표를 놓아 그를 발견하는 자가 그를 죽이지 못하도록 하셨다.
16 그리고 가인은 여호와의 얼굴로부터 떠났다, 그리고 에덴의 동쪽을 향하여 놋의 땅에서 거주했다.
17 그리고 가인이 그의 아내를 알았다, 그리고 그녀는 임신했다, 그리고 에녹을 낳았 다. 그리고 가인은 성을 쌓았는데 그 성의 이름은 그의 아들의 이름을 따라 에녹 이라 불렀다,
18 그리고 에녹에게서 이랏이 태어났다. 그리고 이랏은 므두야엘을 낳았고, 므두야엘 은 므드사엘을 낳았고, 그리고 므드사엘은 라멕을 낳았다.
19 그리고 라멕은 두 아내를 취했다. 그 중 한 아내의 이름은 아다였고, 그리고 다른 아내의 이름은 씰라였다.
20 아다가 야발을 낳았고, 야발은 천막들에 거주하는 자의 조상이었고, 육축의 조상이 었다.
21 그리고 그의 형제의 이름은 유발이었고, 그는 하프와 오르간을 연주하는 모든 자 의 조상이었다.
22 그리고 씰라, 그녀는 두발-가인을 낳았고, 놋쇠와 쇠를 다루는 모든 기술공의 선 생이었다. 그리고 두발-가인의 누이는 나아마였다.
23 그리고 라멕이 그의 아내들, 아다와 씰라에게 말했다, 내 목소리를 들어라, 너희 라멕의 아내들이여, 그리고 너희 귀를 가지고 내 연설을 지각하라. 그 이유는 내가 나의 부상을 인하여 남자를 죽였고, 내 상처로 인해 어린 것을 살해했기 때문이다.
24 만일 가인을 위해 일곱 배의 앙갚음이 있다면, 진실로 라멕을 위해서는 칠십 칠 배의 앙갚음이 있을 것이다.
25 그리고 사람이 그의 아내를 다시 알았고, 그녀는 아들을 낳았고, 그의 이름을 셋이 라 불렀다. 그 이유는 하느님께서 나에게 아벨 대신 또 다른 씨를 지명하셨기 때 문이다. 그 이유는 가인이 아벨을 살해했기 때문이다.
26 그리고 셋에게, 그에게도 역시 아들이 태어났다. 그리고 그는 그의 이름을 에노스 라 불렀다. 그때에 그들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했다.

각 절의 내적 의미

1절. 그리고 사람이 그의 아내 이브를 알았고, 그리고 그녀는 임신했고, 그리고 가인을 낳고, 그리고 말하기를, 나는 여호와(로부터) 남자를 얻었다. “사람과 그의 아내 이브”는 태고 교회를 의미한다. 이 교회의 첫 자식, 즉 첫 출생은 신앙(faith)이다. 이 신앙이 “가인”이라 불리고 있다. 그녀가 말한 “나는 여호와(로부터) 남자를 얻었다”란 “가인”이라 불리는 이들이 지닌 신앙은 그 자체 (사랑, 선행과) 따로 떨어져 있는 것으로 인식되고 그렇게 인정했음을 의미한다.

앞의 세 장들에서 “사람과 그의 아내”를 수단으로 태고 교회가 의미되어졌다는 것은 의심함이 없도록 충분히 보여주었다. 그리하여 살핀 것들에 의심이 없다면, 이 교회에 의해 결과된 임신과 출생도 우리가 말했던 것으로부터 있다고 보여진다. 이름들을 주는 것은 태고 교회의 관례에 해당하는 일이었다. 그리고 이름을 수단으로 뭔가를 의미했다. 이것이 족보의 틀을 짜는 셈이기도 하다. 교회 속의 것들도 이런 방식에서 서로에 관련되고 있다. 즉 족보에서 같이 이쪽이 임신하고, 또 다른 것을 출생하는 것이다. 이로부터 말씀에서도 교회 속의 것들을 “임신”, “출생”, “자손”, “유아들”, “작은 아이들”, “아들들”, “딸들”, “젊은 사람들”, 등등으로 불리우는 일이 매우 많다. 말씀의 예언적 부분들에는 이런 표현들이 매우 풍부하다.

“나는 여호와(로부터) 남자를 얻었다”라는 말은, “가인”이라 불리는 이들과 더불어 신앙이 따로 떨어져서 있는 것으로 인식되고 인정되었음을 의미한다는 것은 이 장의 시작에서 말해진 것으로부터 분명하다. 본래 그들은 마치 신앙이 무엇인지에 무지한 것 처럼 있었다. 그 이유는 그들이 신앙 속의 모든 것을 지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이 신앙을 구분된 교리로 만들기를 시작했을 때, 그들은 자기들이 지각으로부터 가졌던 것을 취해서, 그것들을 교리 안으로 환원해 놓고, 그것을 마치 새로운 어떤 것을 발견하기라도 한 듯, “나는 여호와(로부터) 남자를 얻었다”라고 불렀다; 고로 전에 심정에 새겨졌던 것이 단지 앎의 문제 수준이 되고 말았다. 고대 시대 때에 그들은 새로운 모두 각각의 것에 이름을 주었다. 그리고 이런 방식에서 이름들에 포함된것이 설명되었다. 그래서 이스마엘이라는 이름의 의미는 “여호와께서 그녀의 고뇌를 들으셨다” 말함을 수단으로 설명되어진다 (창. 16:11); 르우벤의 경우, “여호와께서 내 고통을 보셨다”라는 표현을 수단으로 (창. 29:22); 이름 시므온은 “여호와께서 내가 덜 사랑받은 것을 들으셨다”라고 말함을 수단으로 (창. 29:33); 그리고 유다의 경우, “이 때 나는 여호와를 찬양할 것이다”를 수단으로 (창. 29:35); 그리고 모세에 의해 지어진 제단이 “여호와는 내 군기” (출. 17:15)라고 불리었다. 마찬가지 방식에서 신앙의 교리가 여기서 “나는 여호와(로부터) 남자를 얻었다”, 또는 “가인”이라 명명되었다.

2절. 그녀는 그의 아우 아벨을 낳아 추가했다. 그리고 아벨은 양떼의 목자였고, 가인은 지면의 경작자였다. 태고 교회의 두 번째 자식(출생)은 선행(charity)인데 이 선행이 “아벨”, “형제”로 의미되고 있다. “양떼의 목자”란 선행의 선을 실행하는 자를 명시한다. “지면의 경작자”란 선행이 전혀 없는 자이다. 신앙이 사랑으로부터 분리되면 그 분리가 어느 정도이든 그것은 신앙이 아니다.

교회의 두 번째 자식이 선행이다는 것은 교회가 임신하고 낳는 것은 신앙과 선행 밖에 더 없다는 사실로부터 분명하다. 똑같은 의미가 야곱으로부터 레아의 첫 자녀를 수단으로 의미되어진다; “르우벤”은 신앙을 표시하고 있다; “시므온”은 행동에 있는 신앙을; 그리고 “레위”는 선행을 표시한다 (창. 29:32, 33, 34). 그러므로 레위 지파는 성직 직분을 받았고, “양떼의 목자”를 표현했다. 선행이 교회의 두 번째 자식인 바, “형제‘라고 불리우고, ”아벨“이라 명명되어진다.

“양떼의 목자”가 선행의 선을 실행하는 자이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명확해 있음에 틀림없다. 그 이유는 이것은 구, 신약 성경에서 친숙한 모양새이기 때문이다. 이끌고 가르치는 이들이 “목자”라 불린다. 그리고 인도받고 가르침을 받는 이들은 “양떼”라 부른다. 선행의 선쪽으로, 선행의 선을 가르치지 않는 자는 진정한 목자가 아니다.; 그리고 선쪽으로 인도되지 않고, 선인 것을 배우려 하지 않는 이들은 양떼 속에 있지 않다. “목자”와 “양떼”에 관한 위의 의미를 확증해보고자 말씀을 인용하는 것은 거의 필요하지 않을 것 같지만, 아래 몇 군데 살피고 지나가자. 이사야서에서:
주님께서는 네가 지면에 뿌린 네 씨에 비를 주실 것이다. 그리고 지면의 소출로부터
빵을 (먹을 것이다); 그 날에 그분은 넓은 풀밭에서 네 가축을 먹이실 것이다 (이. 30:23).
위 구절에서 “지면의 소출로부터의 빵”은 선행을 표시한다.
다시 이사야서에서:
주 여호비께서 목자같이 그분의 양떼를 먹이실 것이다; 그분은 그분의 팔 안으로
어린 양들을 그러모으실 것이다. 그리고 그분의 가슴 안에서 운반하실 것이다.
그리고 어린 것과 함께 있는 양들을 부드럽게 인도하실 것이다 (이. 40:11).
다윗서에서:
귀를 주소서, 오 이스라엘의 목자시여, 양떼같이 요셉을 인도하시는 분이시여;
그룹들 위에 앉으신 분이시여, 빛을 비추이소서 (시. 80:1).
예레미야서에서:
나는 시온의 딸을 미모의 섬세한 여인에 견주었다; 목자와 양떼가 그녀에게 올 것이다,
그들은 그녀 가까이 빙둘러 천막을 고정시킬 것이다,
그들은 모든 이를 그의 자신의 공간(에서) 먹일 것이다 (예6:2, 3).
에스겔서에서:
고로 주 여호비에게 말한다, 나는 그들을 인간의 양떼로서, 거룩한 양떼로서,
예루살렘의 양떼로서 정해 놓은 때들에서 불어나게 할 것이다;
그렇게 황폐된 성들은 인간의 양떼로 채울 것이다 (겔. 36:37, 38).
이사야서에서:
아라비아의 모든 양떼들이 네게로 다함께 모아질 것이다,
느바욧의 숫양들은 너를 섬길 것이다 (이. 60:7).
선행의 선쪽으로 인도하는 자들은 “양떼를 그러모으는” 자들 이다; 그러나 그들을 선행의 선쪽으로 이끌지 않는 자는 “양떼를 흐트는”자들 이다; 그 이유가 모두 함께 모으고, 하나로 연합하는 것이 선행 속에 있고, 모든 흐틈과 해체함은 선행의 결핍으로부터 이기 때문이다.

신앙을, 즉 기억 속의 지식(memory-knowledge)을, 지식(knowledge)을, 그리고 신앙의 교리들을 쓸모가 있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인간이 신앙이 가르치는 것과 같게 되는 것 말고 더 쓸모 있는 것이 있을까? 그리고 신앙이 가르치는 제일의 것은 선행이 아닌가? (막. 12:28-35; 마. 22:34-39). 이것은 신앙이 목표로 삼는 모든 것의 정점이다. 그리고 만일 이것이 달성되지 않는다면, 모든 지식 또는 교리는 단지 텅빈, 아무것도 아닌 것 밖에 무엇인가?

“지면의 경작자(tiller of the ground)”는 선행이 결여된 자 이다. 이 자는 제아무리 많은 사랑으로부터 분리된 신앙 안에 있는다해도 그는 신앙이 없는 셈이다는 것은 뒤이어지는 구절, 즉 여호와께서는 그의 공물을 존중하지 않으셨다는 것, 그가 그의 아우를 살해한 것, 즉 “아벨”로 의미되는 선행을 파괴한 것으로부터 명백해진다.
육체적이고 지상의 것들을 바라보는 이들이 “지면을 경작하는”이들이다. 이는 지나온 구절, 즉 인간이 “지면을 경작하도록 에덴의 동산에서 내쫓김”인 창. 3:19, 23에서 말해진 바 로부터도 분명해진다.

3절. 그리고 날들의 끝에서 가인은 여호와께 예물로서 지면의 열매를 가져왔다. “날들의 끝”이란 시간이 흐름에 따라서가 뜻해진다. “지면의 열매”란 선행이 없는 신앙의 일들을, “여호와께 가져온 공물”은 이 신앙에서 파생된 예배를 뜻한다.

“날들의 끝”은 시간의 경과임은 모든 이에게도 자명할 것이다. 처음에서, 즉 신앙이 순박함 안에 있는 동안, “가인”이라 불리는 교리는 나중에 열납되지 못 할 만큼까지 있지는 않은 듯 나타난다는 사실은 그들이 그들의 자식을 “여호와(로부터) 사람”이라 일컬은 것에서 분명해진다. 고로 처음 당시의 신앙은 “날들의 끝”, 즉 시간이 경과된 후에서 만큼 사랑으로부터 분리되어 있지는 않았다는 말이다; 마치 진정한 신앙의 교리라면 사랑으로부터의 분리를 원하지 않듯 그렇게 처음에는 있었다는 말이다.

“지면의 열매”가 선행 없는 신앙의 일들이 뜻해지는 것은 뒤따라오는 것으로부터 나타난다; 그 이유가 선행이 결핍된 신앙의 일들은 그 자체 죽은 것, 즉 신앙 없음의 일들이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단지 외적 인간 만의 일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예레미야에 쓰여 있다:
어찌하여 사악한 자가 번영을 누립니까? 당신께서 그들을 심으셨고, 그들은 뿌리를
뻗었습니다; 그들은 계속 갔습니다, 그들 역시 열매를 맺습니다; 당신은 그들의 입
가까이에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신장(감정과 애정)으로부터서는 멀리 계십니다;
얼마나 오래 토지가 슬퍼할 것입니까? 그리고 모두 각각의 들판의 풀잎은 얼마나
오래 시들고 있어야 합니까? (예. 12:1, 2, 4).
“그들의 입에 가까이, 그러나 신장으로부터는 멀다”는 선행으로부터 분리된 신앙 속에 있는 이들을 표시한다. 이들에 관하여 “토지가 슬퍼한다”라고 말해진다. 같은 예언서에서 이런 일들이 “열매의 일들”이라 불리운다:
사기침이 모든 것들 너머 있는 것이 심장이라, 그것이 구제 불능인 것을 누가
알 수 있을까? 나 여호와가 심장을 수색하고, 신장을 심리하여 그의 길들에 따라,
그의 일들의 열매에 따라 주기까지 할 것이다 (예17:9, 10).
미가서에서:
토지는 황폐될 것인데,
그 안에 거주하는 그들 때문이다. 그들의 일들의 열매 때문이다 (미. 7:13).
이런 “열매”는 열매가 아니다는 것, 또는 “일”은 죽어 있다는 것, 그리고 열매와 뿌리는 멸해진다는 것이 아모스서에서 선포되어진다:
나는 그들 앞에서 아모리족을 파괴했다. 그들의 키는 삼나무 보다 더 컷고,
그들의 강함은 상수리나무 보다 더 강했다; 그럼에도 나는 위로부터는
그들의 열매를, 아래로부터는 그들의 뿌리를 파괴했다 (암. 2:9).
그리고 다윗서에서:
당신은 땅으로부터 그들의 열매를 파괴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씨를 인간의 아들로부터 (끊을 것입니다) (시. 21:10).
그러나 선행의 일들은 살아있다, 그래서 그것들에 관하여 선포되는 바, 그것들은 “아래쪽으로 뿌리를 뻗고, 위쪽으로는 열매를 맺는다”이다. 이사야서에서:
유다 가문으로부터 탈출한 남은 자가 다시 아래쪽으로 뿌리를 내리고,
위쪽으로 열매를 맺을 것이다 (이. 37:31).
“위쪽으로 열매를 맺는 것”은 선행으로부터 행하는 것이다. 이런 열매가 “빼어난 열매”라고 불리운다. 같은 예언서에서:
그 날에 여호와의 어린 가지가 아름답고 영광스러워 있을 것이다, 그리고 땅의 열매는
이스라엘로부터 도망한 그들을 위해 특출하고 아름답게 (있을 것이다) (이. 4:2).
이것은 또한 “구원의 열매”이다. 그래서 같은 예언서에서 그렇게 불리운다:
위로부터, 아래로 떨어트려라, 너 천국들(heavens)아, 그리고 하늘들(skies)이
정의를 아래로 쏟게하라; 땅이 열리게 하라, 그리고 그것들의 구원의 열매를
산출하게 하라, 그리고 정의가 함께 솟아오르게 하라;
나 여호와가 그것을 창조할 것이다 (이. 45:8).

“공물”을 수단으로 예배가 뜻해진다는 것은 유대 교회의 표현물들로부터 명백해진다. 유대 교회의 여러 종류의 제물들, 뿐 아니라, 땅의 첫 열매들과 땅의 생산물의 첫 소산들, 그리고 첫 출생의 봉헌, 등등이 “공물”이라 불렸는데, 이것들 안에 예배가 존재했다. 그리고 그것들이 천국의 것들을 표현했고, 모든 것이 주님에 관련되고 있는 바, 진정한 예배가 이런 공물들을 수단으로 의미되어져 있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자명할 것이다. 그 이유가 이것을 표현하지 않으면 (성경의) 표현물들은 무슨 (소용이) 있을까?, 또는 일종의 우상 내지 죽음의 것이 아니라면 내적인 것 없는 외적인 것 만은 무슨 소용이 있을까? 라는 반문 때문이다. 외적인 것들은 내적인 것들로부터 , 즉 주님으로부터 내적인 것들을 통하여 생명을 지닌다. 이렇게 숙고해봄으로부터 분명해지는 바, 표현 교회(유대 교회)의 모든 공물들은 주님을 예배함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에 관하여는 주님의 신성한 자비로부터 이어지는 페이지들에서 세부적으로 다룰 것이다. 일반적으로 “공물”이 예배를 뜻한다는 것은 예언서들 두루에서 분명해진다. 말라기서에서:
그분의 오심의 날에 누가 버티어지겠느냐? 그분은 은의 주물자로서 제련자로서
앉으실 것이다. 그리고 그분은 레위의 아들들을 정화하실 것이다. 그들을 금과 은을
걸러내듯 하실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정의 안에서 공물을 여호와께 바칠 것이다.
그 때 유다와 예루살렘의 공물은 여호와께 영원의 날들 안에서 같이,
고대의 햇수들 안에서 같이 기쁨이 될 것이다 (말. 3:2, 3, 4).
“정의 안에 있는 공물”은 내적인 공물이다. 이것을 “레위의 아들들”, 즉 거룩한 예배자들이 바칠 것이다. “영원의 날들”은 태고 교회를, “고대의 햇수들”은 고대 교회를 의미한다. 에스겔 서에서:
내 거룩함의 산에서, 이스라엘의 높이의 산에서, 거기서 이스라엘의 모든 가문,
모든 토지가 나를 예배할 것이다; 거기서 나는 그것들을 받을 것이다, 그리고
거기서 나는 너희의 봉헌물들을, 그리고 너의 모든 거룩해짐 안에 있는
너희 공물들의 첫 열매들을 요구할 것이다 (겔. 20:40).
“봉헌물들”, 그리고 “거룩해짐 안에 있는 공물들의 첫 열매들”은 주님으로부터 선행을 수단으로 거룩해진 일들이다. 스바냐서에서:
에티오피아의 강들 넘어로부터,
나에게 탄원하는 자가 나의 공물들을 가져 올 것이다 (습. 3:10).
“에티오피아”는 천적인 것들, 즉 사랑, 선행, 선행으로부터의 일들을 소유한 이들을 표시한다.

4절. 그리고 아벨, 그도 또한 자기 양떼의 맏배와 그로부터의 지방(fat)을 가져왔다. 그리고 여호와께서는 아벨과 그의 예물을 지켜보셨다. 이미 살핀 바대로 “아벨”을 수단으로 선행이 의미되어진다; 그리고 “양떼로부터의 맏배들”을 수단으로 거룩인 것, 주님으로 부터서만 있는 것이 의미되어진다; “지방”을 수단으로 천적 (평면) 자체, 이것 역시 주님으로부터 있는 것; 그리고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공물을 지켜 보셨다”를 수단으로 선행에 관한 것들과 선행에 바탕을 둔 모든 예배는 주님을 매우 흡족하시게 함을 뜻한다.

“아벨”이 선행을 의미함은 앞서 살폈다. 선행을 수단으로 이웃을 향한 사랑, 그리고 자비가 뜻해진다; 그 이유가 이웃을 자기같이 여겨 사랑하는 자는 이웃의 괴로움들이 자신을 향해서 있는 듯 여겨 이웃에 자비로워져 있기 때문이다.

“양떼의 맏배들”이 주님 만으로부터 있는 것들을 의미한다는 것은 표현 교회의 맏배, 또는 첫 출생으로부터 분명해진다. 이것들은 모두 거룩이었다. 그 이유는 그것들이 주님에 관련을 가지기 때문이다. 즉 주님 만이 “첫 출생”이시기 때문이다. 사랑과 사랑에서 파생된 신앙이 첫 출생이다. 모든 사랑은 주님으로부터 있다. 사랑의 조각 하나도 인간으로부터 있지 않다. 그러므로 주님 만이 “첫 출생”이시다. 이것이 고대 교회에서 여호와에게 거룩하게 바쳐진 인간과 짐승의 첫 출생을 수단으로 표현되어졌다 (출13:2, 12, 15); 그리고 비록 레위가 르우벤과 시므온 뒤를 이어 출생해서 첫 출생은 아니지만, 그가 내적 의미에서 사랑을 의미한 까닭에 신앙을 의미한 위 두 형을 대신하여 첫 출생으로 열납되고, 성직 직분이 할당되었다 (민. 3:40-45; 8:14-20). 모든 것의 첫 출생으로서의 주님에 관하여, 그분의 인간 실체에 관련하여, 다윗서에 이렇게 쓰여 있다:
그는 나를 나의 아버지, 나의 하느님, 그리고 내 구원의 반석이라 부를 것이다.
나는 또한 그를 내 첫 출생으로, 땅의 왕들 위에 높은 자로 만들 것이다 (시. 89:26, 27).
그리고 계시록서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죽은 자로부터의 첫 출생,
그리고 땅의 왕들 중의 제 1인 자 (되셨다) (계. 1:5).

“지방”을 수단으로 천적 (평면) 자체가 의미되어진다. 이것 또한 주님으로부터 있다. 천적 (평면)은 사랑으로부터 있는 모두이다. 신앙이 사랑으로부터 있을 때 그 신앙 역시 천적 (평면)이다. 선행은 천적 (평면)이다. 선행으로부터의 모든 선은 천적 (평면)이다. 이런 모든 것이 제물에 있는 여러 종류의 기름들을 수단으로, 구분해 보면, 간(liver), 또는 대망막(caul)을 덮은 지방을 수단으로; 신장(kidneys) 위에 있는 지방을 수단으로; 내장(intestines)들을 덮거나, 내장들 위에 있는 지방을 수단으로 표현되어지고 있다. 이것들은 거룩했다. 그래서 제단 위에서 태워바치는 공물로 바쳐졌다 (출 29:13, 22; 레. 3:3, 4, 14; 4:8, 9, 19, 26, 31, 35; 8:16, 25). 그러므로 그것들은 “여호와께 쉼을 위한 불을 수단으로 하는 공물의 빵”이라 불리웠다 (레. 3:14, 16). 같은 이유에서 유대 백성들은 “대대로 영원한 규례” 라고 불리는 것을 수단으로 짐승의 지방을 먹는 것을 금해왔다. 이것은 교회가 내적인 것을 인정조차 하지 않았기 때문, 천적인 것은 더 더욱 인정하지 않았다.
“지방”이 천적인 것들을 의미하는 것, 그리고 선행으로부터의 선들을 의미하는 것은 예언서들로부터 분명하다; 이사야서에서:
어찌하여 너희는 빵도 아닌 것을 위해 은을 다느냐? 그리고 만족치도 못하는 것을
위해 너희는 노동하느냐? 너는 나에게 열심히 귀기울여라. 너희는 좋은 것을 먹고,
네 혼은 살찌움 안에서 즐거움에 놓일 것이다 (이. 55:2).
그리고 예레미야에서:
나는 많은 지방으로 성직자들의 혼을 채울 것이다,
그리고 내 백성은 내 선으로 충분히 채울 것이다 (예. 31:14).
위 구절에서 많은 지방이 뜻해지는 것이 아니라 천적 평면으로부터의 영적 선 임이 분명하다. 이와같이 다윗서에서:
그들은 당신 집의 많은 지방으로 채워졌습니다, 그리고 당신은 그들이 당신의
맛있음의 강을 마시게 만듭니다. 그 이유가 당신과 함께 생명들의 원천이 있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빛 안에서 우리는 빛을 봅니다 (시. 36: 8, 9).
여기서 “많은 지방”과 “생명들의 원천”은 사랑으로부터 있는 천적인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맛있음의 강”과 “빛”은 사랑으로부터의 신앙 속에 있는 영적인 것을 의미한다. 다시 다윗서에서:
내 혼은 뼈골과 많은 지방으로 물릴정도로 채워졌습니다,
그리고 내 입은 노래들의 입술들을 가지고 당신을 찬양할 것입니다 (시. 63:5).
같은 방식에서 “지방”은 천적 (평면)을 표시한다. 그리고 “노래들의 입술들”은 영적 (평면)을 표시한다. 이것이 천적인 것임은 이것이 혼을 충분히 채울 것이기 때문이다.
같은 이유 때문에 땅의 첫 출생에 해당되는 첫 열매들이 “지방”이라 불리운다 (민. 18:12).
천적인 것들의 종류(genera)들은 무수하고 이에서 분류되는 종류(species)는더 한층 무수한 바, 그것들이 모세가 백성들 앞에서 암송한 노래 안에 일반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암소의 버터, 그리고 양떼의 우유, 어린 양들과 숫양들의 지방과 더불어,
바산의 아들들, 그리고 염소의 아들들, 밀의 신장(kidneys)의 지방과 함께;
그리고 너는 섞지 않은 포도의 피 안에서 마실 것이다 (신. 32:14).
내적 의미로부터가 아니고는 위 구절의 표현들의 의미들을 누군가가 알아내는 것은 불가능하다. 내적 의미 없이, “암소의 버터”, “양의 우유”, “어린 양들의 지방”, “숫양들과 염소들의 지방”, “바산의 아들들”, “밀의 신장의 지방”, 그리고 “포도의 피”의 표현들은 단어들의 나열에 불과해지고, 더 나아가 아무 것도 아닌 상태에 머문다. 그럼에도 이것들 전체와 각각은 천적인 것들의 종류들과 부류들을 의미한다.

“여호와께서는 아벨, 그리고 그의 공물을 지켜보셨다”란 선행 속의 것들, 그리고 선행에 바탕을 둔 모든 예배는 주님을 흡족하게 한다는 것은 앞서 “아벨”, “그의 공물”을 언급할 때 설명되었다.

5절. 그러나 가인과 그의 예물을 그분은 지켜보시지 않았다. 그래서 가인의 노염이 극도로 지펴졌고 그리고 그의 얼굴들은 떨구어졌다. 이미 서술했듯이, “가인”을 수단으로 사랑으로부터 분리된 신앙, 또는 이런 분리가 가능하다고 인정하는 교리가 의미되어진다. “그의 공물은 지켜보시지 않음”이란 그의 예배는 받을 수 없음을 의미한다. “가인의 노염이 극도로 지펴졌고 그의 얼굴은 떨구어졌다”란 그의 내면이 바뀌었음을 의미한다. “노염”은 선행이 떠났음을 표시했다. “얼굴들”은 내면들을, 이것들이 “떨구어짐”은 내면들이 바뀌었음이다.

“가인”은 사랑으로부터 분리된 신앙, 또는 이런 분리의 가능성을 인정하는 교리가 의미된다는 것; 그리고 “그분이 지켜보시지 않은 공물이란 그의 예배는 열납될 수 없음을 의미하는 것은 이미 살폈다.

“가인의 노염이 지펴졌다”가 선행이 떠났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은 후에 그가 선행을 의미한 자기 아우를 죽인 대목과 관련하여 살피면 명백해진다. 노염(anger)은 누군가가 자기 자신의 사랑과 그것의 탐욕들에 반대되어진 결과로부터 있는 일반적 애착(affection)이다. 이것은 악령들의 세계에서는 확실하게 지각되어진다. 그 이유는 그 세계에 주님에 맞서 있는 일반적 노염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 노염은 악령들의 선행 없음의 결과, 미움 안에 있음, 자기 자신의 사랑과 탐욕들을 좋아하지 않는 것은 무엇이든 흥분을 일으킨 결과물이다. 말씀에서, “노염”, “분노”, “격노”라는 단어가 여호와에 관련해 자주 서술되는 편이나, 이런 것들은 인간으로부터 있는 것, 그것이 인간에게 나타나는 외관 때문이다. 고로 다윗서에 쓰여 있다:
그분은 그들을 향하여 그분의 콧구멍의 노염을, 그리고 분노를, 그리고 격노를,
그리고 곤경을, 그리고 악한 천사들의 훼방질을 보내셨다; 그분은 그분의 노염
때문에 길을 저울질 하셨다. 그분은 죽음으로부터 그들의 혼을
보류하시지 않는다 (시. 78:49, 50).
여호와께서는 누군가 위에 그분의 노염을 보내시지 않는다. 그러나 인간들이 자신들 위에 노염을 보내는 것이다; 그분은 그들 사이에 악한 천사들을 보내시지 않는다. 그러나 인간이 그 천사들을 자신에게 끌어당긴다. 그러므로 그분은 “그분의 노염 때문에 길을 저울질하셨다, 그리고 죽음으로부터 그들의 혼을 보류하시지 않았다”가 첨가되고 있다; 그러므로 이사야서에서 말해진다, “그가 여호와에게 올 것이다, 그리고 그분에게 격노한 모두는 부끄러움을 당할 것이다”(이. 45:24). 이 구절로부터 분명한 바, “노염”은 악들이다는 것, 또는 같은 말로, 선행으로부터 떠남이다.

“얼굴들이 떨구어짐”이 내면들이 바뀌었음을 의미하는 것은 “얼굴”과 “떨구어짐”의 의미로부터 분명해진다. 고대인들과 더불어 얼굴은 내적인 것들을 의미했다. 그 이유가 내적인 것들이 얼굴을 통하여 빛을 내기 때문이다; 그리고 태고 때에는 얼굴이 내적인 것들과 완전히 일치되어 있어 인간의 얼굴로부터 각 사람의 의향이나 마음의 상태를 볼 수 있었다. 그들은 얼굴에 의해 보여진 것이 이것인데, 다른 것을 생각하고 있으면, 괴물같은 것으로 심각하게 생각했다. 내부의 것이 얼굴에 의미되는 바, (속과 겉이 다른 것인) 흉내냄과 속임은 흉측할 뿐이었다. 선행이 얼굴로부터 빛을 발할 때, 그 얼굴은 “들어 올림”이라고 말해진다; 그리고 그 반대가 발생할 때, 얼굴이 “떨구어진다”라고 말해진다. 그러므로 주님에 관해 말해지는 대목인 감사 기도에서, “그분은 그분의 얼굴들을 인간 위에 들어 올리신다”라고 말해진다 (민. 6:26; 시. 4:6). 이를 수단으로 주님은 인간에게 선행을 주신다가 의미되어 있다. “얼굴이 떨구어짐”에 의해 뜻해지는 것이 예레미야로부터 나타난다:
나는 나의 얼굴을 너를 향하여 떨구어지게 만들지 않을 것이다,
그 이유가 나는 자비하기 때문이다, 여호와가 말하신다 (예. 3:12).
“여호와의 얼굴”은 자비이다, 그리고 그분이 누군가 위에서 “그분의 얼굴을 들어올리실 때” 이것은 자비로부터 그분이 그 사람에게 선행을 주심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 반대는 그분이 “얼굴을 떨구어지게 만드실” 때, 즉 인간의 얼굴이 떨구어질 때이다.

6절. 그리고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말하셨다, 왜 너의 노염이 지펴졌느냐? 그리고 왜 네 얼굴이 (땅 쪽으로) 떨어졌느냐?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말하심”이란 양심이 지령(dictate)을 받았다가 뜻해진다. “그의 노염이 지펴졌고 그의 얼굴(안색)이 떨어졌다”란 선행이 떠났고 그의 내면들이 바뀌었음을 의미한다.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말하셨다”가 양심이 지령을 받았다를 뜻한다는 것은 유사한 구절들을 위에서 설명했는 바, 확증은 필요 없을 것이다.

7절. 만일 네가 잘 행동하고 있다면 (얼굴을) 들어 올리지 않겠느냐? 그리고 만일 네가 잘 행동하지 않고 있다면 죄가 문에 드러눕는다. 그리고 너에게 그의 바램이 있다. 그런데 너는 그를 지배한다. “만일 네가 잘 행동하고 있다면 (얼굴을)들어 올린다”란 만일 네가 호의적이면 너는 선을 행할 마음을 가지고 있음을 의미한다. “만일 네가 잘 행동하지 않고 있다면 죄가 문에 드러눕는다”란 만일 네가 호의적이지 않다면 너는 선행 없음 인 바, 악 임을 의미한다. “너에게 그의 바램(desire)이 있다, 그런데 너는 그를 지배한다”란 선행은 너와 함께 있기를 바라고 있다. 그러나 그렇게 되지 않는 이유는 신앙이 선행을 지배하고 싶어하기 때문이다.

“가인”이라 불리는 신앙의 교리가 여기서 묘사되어진다. 이 교리는 사랑으로부터 신앙을 분리한 결과, 사랑의 자식에 해당하는 선행으로부터도 역시 분리되어 있다. 교회라는 것이 있는 곳은 어디이든, 이단들(heresies)이 일어난다. 그렇게 발생되는 이유는 인간이 신앙의 어떤 세부 조항에 집중해버리면, 그는 그 조항을 주요한 것(일 적인 것)으로 만든다; 그 이유가 어떤 하나의 것에 집념하는 동안 그것을 여느 다른 것에 앞서 놓아두려는 것이 인간 사고의 속성이기 때문이다. 특히 그의 상상력이 그것에서 자기 자신을 발견이라도 한 듯 주장할 때, 게다가 자기를 사랑함과 세상을 사랑함이 그것을 부풀릴 때 세부항목이 전체 항목인 듯 대체시켜버린다는 말이다. 하여 모든 것이 그것에 일치하고 확증도 주는 듯 해진다. 이것은 비록 그것이 거짓이다 해도 마침내 그것이 맞다고 맹세하기 까지 치닫는다. 이런 경로에서 “가인”으로 불리는 이들이 신앙을 사랑 보다 더 본질인 것으로 만들었다. 결과적으로 이들이 사랑 없이 살았을 때, 자기를 사랑함과 공상이 다함께 그것을 확증함에 공모했다.

“가인”이라 불리우는 신앙에 관한 교리의 본성이 이 절에서 그것에 관한 묘사로부터 보여진다. 이로부터, 그것은 선행이 신앙에 결합되어질 수 있었다는 것, 하여 신앙이 아니고 선행이 지배권을 가지리라는 것이 나타나고 있다. 이러하기 때문에, 먼저 말해지는 바, “만일 네가 잘하고 있다면, 너는 (얼굴을) 들지 않겠느냐?”이고, 이것이 의미하는 바, 만일 네가 호의적이다면(선량한 마음을 품고 있다면), 선행이 현존하고 있을런지 모른다 이다; 그 이유가 “잘 행함”은 내적 의미에서, 호의적인 마음 자세임을 의미하기 때문, 선인 것을 행함은 선인 것을 뜻함으로부터 나오기 때문이다. 고대 때에 행동과 의지는 하나였다; 행동하는 것을 보면 그들은 상대방의 의지를 알았다. 하여 그때 당시 흉내냄이라는 것은 알려져 있지도 않았다. “들어 올림(uplifting)”은 선행이 현존함을 의미한다는 것은 얼굴을 말할 때 이미 살폈다. ”얼굴을 들어올림“은 선행을 가지는 것이다. 따라서 ”얼굴을 떨굼“은 그 반대이다.

두 번째로, 말해지는 바, “만일 네가 잘하지 않고 있다면, 죄가 문에 누워있다”이다. 이는 만일 네가 호의적이지 않다면, 선행은 현존하지 않는 바, 악이다를 의미한다. “죄가 문에 누워 있음”이 들어가기를 갈망하는 악, 이미 악이다 하는 것은 누구나 쉽게 파악될 것이다; 그 이유가 선행이 없을 때, 거기에는 무자비함과 미움이 있고, 한마디로 모두가 악이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죄(sin)가 “악마”라, 즉 지옥들의 패거리라 불려진다. 이것은 선행이 결여될 때는 언제나 즉시 가까이(“문”)에 존재 한다; 따라서 악마와 그의 패거리들을 마음의 문으로부터 몰아내는 유일한 수단은 주님을 사랑함과 이웃을 향한 사랑 뿐이다.

세 번째 장소에서 말해진다. “너에게 그의 바램(desire)이 있다, 그리고 너는 그를 지배하고 있다”이다. 이 구절을 수단으로, 선행은 신앙과 거주하기를 바란다는 것, 그런데 그렇게 할 수 없는 이유는 질서에 반대되는 것인, 신앙이 선행을 지배하기를 원하기 때문임이 의미되고 있다. 신앙이 지배권을 가지려 추구하는 한, 신앙은 신앙이 아니다. 신앙이 신앙이 되어가려면, 선행이 통치해주어야 한다. 선행은 열과 빛의 본체인 불꽃에 비교될런지 모른다. 그 이유가 열과 빛이 그것으로부터 있기 때문이다; (선행에서) 분리된 신앙은 불꽃 속에서 열이 빠진 빛에 비교되는 바, 이 때는 만물이 움직이지 못하는 계절, 죽어있는 계절인 겨울의 빛이다.

8절. 그리고 가인이 그의 형제 아벨에게 말했다. 그리고 세월이 지나 그들이 들판에 있었을 때, 가인이 그의 형제 아벨을 향하여 일어나 그를 죽였다.
가인이 아벨에게 말했다”란 시간의 간격을 의미한다. “가인”은 사랑으로부터 분리된 신앙을, 아벨은 선행을 의미한다. 선행은 신앙의 형제이기에 여기서도 두 번씩 “그의 형제”라 말하고 있다. “들판”은 교리로부터 있는 모든 것들을 의미한다. “가인이 그의 형제를 향해 일어나 그를 죽였다”란 (신앙과 선행이) 분리되면 신앙은 선행을 절멸시킨다는 것을 의미한다.

선행이 신앙의 “형제”이다는 것, “들판”은 교리로부터 있는 것은 무엇이든을 의미한다는 것, 이 두 가지 외의 다른 것은 비슷한 인용 구절로 확증해 볼 필요까지는 없어도 될 것 같다. 선행이 신앙의 “형제”이다는 것은 신앙의 본질, 또는 실체로부터 누구나 명백해질 것이다. 이런 형제 관계가 에서와 야곱을 수단으로 표현되고, 그들이 다툰 바탕은 장자권과 지배권이었다. 또한 형제 관계가 유다에 의한 다말의 아들들인 베레스와 제라를 수단으로도 표현되어졌다 (창. 38:28, 29, 30); 그리고 에브라임과 므낫세에 의해 (창. 48:13, 14); 그리고 위 두 가지에서, 뿐 아니라 다른 유사한 경우에서, 다툼은 장자권과 지배권에 관한 것 때문이었다. 그 이유가 신앙과 선행, 모두가 교회의 자식이기 때문이다. 가인인 신앙이 이 장의 1절에서 “사람”이라 불리우고 있다. 그리고 선행은 ‘형제“라 불리우고 있다 (이. 19:2; 예. 13:14 참조); 이외 여러 구절에서 그렇게 불리우고 있다. 신앙과 선행의 합일(union)이 ”형제들의 언약“이라 불리우고 있다 (암. 1:9). 가인과 아벨의 형제 관계와 유사한 것은 야곱과 에서의 경우이다; 야곱은 그의 형 에서를 밀어내기를 바라고 있었다. 호세아서를 보자:
야곱을 그의 길들에서 방문하시고, 그의 행동에 따라 그분은 그에게 보응하실 것이다;
그는 자궁 안에서 그의 형 에서를 밀어냈다(호. 12:2,3).
그러나 에서, 또는 에서로 표현되는 선행이 마침내 지배권을 가진다는 것이 아버지 이삭의 예언자적 예견으로부터 나타난다:
검을 수단으로 너는 살 것이다, 그리고 네 아우를 섬길 것이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 너는 지배권을 가질 것이다.
즉 너는 네 목으로부터 그의 멍에를 부러트릴 것이다 (창. 27:40).
또는 같은 것으로 이방인들의 교회, 또는 새로운 교회가 에서에 의해, 유대 교회가 야곱에 의해 표현되어졌다; 그리고 이것이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을 형제들로 인정할 것이라고 자주 말해진 이유이다; 그리고 이방인들의 교회, 또는 원시적인(primitive) 교회에서, 모든 이는 선행으로부터 형제들이라 불렀다. 말씀을 듣고, 그것을 행하는 자는 주님에 의해 형제라 불리우고 있다 (눅. 8:21); 듣는 이들은 신앙을 가지는 것과 같다; 행하는 이들은 선행을 가지는 것과 같다; 그러나 듣고, 또는 자기들은 신앙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고, 행함이 없는 것, 선행을 가지지 않는 것은 형제가 아니다. 그 이유는 주님께서 그들을 바보들이라 부르기 때문이다 (마. 7:24. 26).

“들판”이 교리를 의미하는 것, 결과적으로 신앙과 선행의 교리에 속하는 것은 무엇이든을 의미하는 것은 말씀으로부터 분명해진다. 예레미야서에서:
들판에 있는 오 나의 산이여, 나는 네 소유물들과 모든 네 보물들을
전리품으로 줄 것이다 (예. 17:3).
위 구절의 “들판”은 교리를 의미한다; “소유물들”과 “보물들”은 신앙의 영적 재물, 또는 신앙의 교리에 속하는 것들을 표시한다. 예레미야서에서:
레바논의 눈이 내 들판의 바위로부터 실패 할 것이냐? (예. 18:4).
이것은 시온에 관하여 선포한 것, 즉 신앙의 교리가 심히 궁핍해질 때, 그녀는 들판 같이 갈아엎을 것이다고 선포한 것이다 (예.26:18; 미. 3:12). 에스겔 서에서:
그는 토지의 씨를 가져갔다, 그리고 그것을 씨뿌림의 들판에 놓았다 (겔. 17:5),
위 구절은 교회와 교회의 신앙을 취급하고 있다; 그 이유가 교리가 교회 안에 있는 씨로부터 “들판”이라 불리우기 때문이다. 에스겔서에서:
그리고 들판의 모든 나무들에게 나 여호와가 높은 나무를 내려 놓는다는 것을
알게 하자 (겔. 17:24).
요엘서에서:
들판은 못쓰게 되어졌다. 지면이 슬퍼한다, 그 이유는 곡식이 황폐해졌기 때문이다,
새로운 포도주가 말라진다, 기름이 쇠약해진다, 농부가 부끄러워한다, 들판의 수확이
멸해졌다, 들판의 모든 나무들이 시들어졌다 (욜. 1:10, 11, 12),
위 구절에서 “들판”은 교리를 의미한다. “나무들”은 지식을, “농부”는 예배자들을 의미한다. 다윗서에서:
들판과 그 안의 모든 것이 드높일 것이다,
그 다음 숲의 모든 나무들이 노래할 것이다 (시. 96:12),
위 구절의 경우에서, 들판이 드높일 수 없고, 숲의 나무들이 노래할 수 없는 것은 완전하게 분명하다.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은 인간 안의 것들, 신앙에 관한 지식이다. 예레미야서에서:
얼마나 오래 토지가 슬퍼하고,
모두 각각의 들판의 풀잎이 시들어 있어야 합니까? (예. 12:4),
위 구절에서 토지도 들판의 풀잎도 슬퍼할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이 표현들은 인간 안에 있는 어떤 것이 황폐해 있는 동안과 관련이 있다. 비슷한 구절이 이사야서에서 나타난다:
산들과 언덕들이 네 앞에서 노래부르러 뛰쳐나올 것이고,
들판의 모든 나무들이 손뼉을 칠 것이다 (이. 55:12).
주님께서 시대의 종말을 예견하시는 대목에서 신앙의 교리를 “들판”이라 부르신다:
그때 들판에 두 사람이 있을 것이다. 하나는 데려가지고
하나는 남겨질 것이다 (마. 24:40; 눅. 17:30),
위 구절에서 “들판”은 두 가지 신앙의 교리, 즉 진정한 교리와 거짓된 교리를 뜻한다. 들판이 교리를 뜻하기 때문에, 신앙의 어떤 씨를 받는 자는 누구든지, 인간이든, 교회이든, 또는 세상이든 “들판‘이라 불리운다.

이상으로부터 그 다음을 잇는 것은 다음의 말들, “가인이 그의 형제 아벨을 향하여 일어나 그를 죽였다, 그들이 들판에 함께 있었을 때였다.” 이는 신앙과 선행 모두 신앙의 교리로부터 있는 동안, 사랑으로부터 분리된 신앙은 여전히 선행을 무시하고, 결국 소멸시킨다는 것을 표시하고 있다; 선행의 어떤 일 없이 신앙 만으로 구원이 가능하다는 것은 요즈음의 사람들의 경우이다. 그 이유가 이런 가상 속에서 비록 그들이 사랑 없으면 신앙은 구원하지 못한다고 입술로 고백하고, 알고있다 해도 여전히 선행을 소멸하기 때문이다.

9절. 그리고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말하셨다, 네 형제 아벨은 어디에 있느냐?” 그리고 그가 말했다, 나는 모릅니다, 제가 내 형제의 경호인 입니까?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말하셨음”은 선행 또는 “형제 아벨”에 관한 지령을 내부로부터 있게 한 어떤 지각력(perceptivity)을 의미한다. 가인의 대답, “나는 모릅니다. 제가 내 형제의 경호인 입니까?”란 신앙이 두루 생각해 본 결과 선행이 별 것도 아닌데, 선행에 도움이 되어 줄 필요가 없다는 것, 마지막으로 더 심사숙고 한 결과 모든 신앙이 선행의 모든 것을 거절했음을 의미한다. 이런 식으로 그들의 교리는 되어 갔다.

“여호와께서 말하심”을 수단으로 태고인들이 지각을 가졌음을 의미하는데, 그 이유는 이들은 주님께서 자기들에게 지각하는 능력을 주셨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이 지각은 사랑이 제 1 순위에 머무르는 동안 만 지속될 수 있었다; 그러나 주님을 사랑함, 그 결과인 이웃을 향한 사랑이 중단되었을 때, 지각은 사멸되었다; 그러나 사랑이 남은 만큼에서는 지각도 남아있었다. 이 지각력은 태고 교회에서 번창했다, 그러나 신앙이 사랑으로부터 분리되었을 때, 홍수 이후의 사람들 같았을 때, 즉 선행이 신앙을 통하여 주어졌을 때, 양심이 지각을 계승하였다. 양심 역시 방법은 다르지만, 지령(dictate)을 주기는 한다. 이에 대하여는 주님의 신성한 자비를 수단으로 이후 살핀다. 양심이 받아쓰기를 할 때(지령을 받을 때)도, 말씀에서는 (태고, 고대 시절에서나) 마찬가지 방식인 “여호와께서 이야기 하신다”를 사용하고 있다; 그 이유는 양심은 밝히 알려주신 것(계시된 것, revealed)들로부터, 그리고 말씀으로부터 인식(cognition)된 것들로부터, 그리고 말씀이 이야기할 때, 또는 지령을 줄 때 형성되어 지기 때문이다. 이때 이야기하시는 분은 주님이시다; 이로 인해, 양심에 관한 어떤 주제, 신앙에 관한 어떤 주제를 두고 언급할 때, “주님이 말하신다”라고 하는 표현은 오늘날 대중화되다시피 했다.

“경호인(keeper)”은 유대 교회에서 문지기나 수위 (문지방을 지키는 자)와 마찬가지로 섬기는 것을 의미한다. 신앙은 선행의 “경호인”이라 불리우는데, 이는 섬겨야한다는 사실로부터, 선행은 “가인”이라 불리는 교리의 원리로부터 섬김을 받아야 한다는 사실로부터, 7절에 말한 바 같이 신앙은 통치받아야 한다는 사실로부터 이다.

10절. 그리고 그분은 말하셨다, 네가 무엇을 저질렀느냐? 네 형제의 피들의 목소리가 지면으로부터 나에게 소리치고 있다. “네 형제의 목소리”란 폭력이 선행에 휘둘러졌음을 의미한다. “피들이 소리침”이란 죄있음을 고발함을, “지면”은 종파(schism), 또는 이단(heresy)을 의미한다.

“피들의 목소리”가 폭력이 선행에 저질러졌음을 의미하는 것은 말씀의 여러 구절들로부터 명백해진다. 말씀 안에서 “목소리”는 고발하는 어떤 것, “피”는 어떤 종류의 죄, 특별히 증오함(hatred)을 표시한다; 그 이유가 자기 형제를 향하여 증오함을 낳는 자는 누구든지 자기 심정 안에서 살해하기 때문이다; 주님께서 가르치신다:
너희는 옛 시대로부터의 그들에 의해 말해진 것, 즉 너희는 살인하지 말라; 그리고
살인하는 자는 누구든지 재판의 위험에 있을 것임을 들었었다: 그러나 나는 네게
말한다, 이유 없이 자기 형제에게 성 내는 자는 누구든지 재판의 위험에 있을 것이다:
그리고 자기 형제에게 라가 라고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평의회(에 출석하는) 위험에 놓일 것이다: 너는 바보야 하고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지옥 불의 위험에 있을 것이다
(마. 5:21, 22),
위 구절의 말을 수단으로 증오함의 수준이 뜻해진다. 미움은 선행에 반대된다, 그리고 여하한 방법을 취해서라도 선행을 살해한다. 만일 손으로 살해 못한다면, 영 안에서라도 살해한다. 증오함의 행동은 오직 외적 제약에서만 멈추어 있는 듯할 뿐이다. 그러므로 모든 증오함은 “피” 이다. 예레미야에서:
왜 너희는 사랑을 구하려고 네 길들을 선하게 만드느냐 ?
네 치맛자락에서 조차 궁핍한 순진한 자들의 혼들의 피들이 발견되어졌다 (예. 2:33, 34).
그리고 증오함이 “피”를 수단으로 표시되듯, 갖가지의 불법도 표시한다. 그 이유는 불법의 샘이 증오함이기 때문이다. 호세아서에서:
그들은 거짓 맹세하고, 거짓말하고, 죽이고, 훔치고, 간음을 범한다. 그리고
그들은 피들 안에서 피를 만진다; 그러므로 토지가 슬퍼하고,
그 안에 거주하는 모든 이가 참혹하게 살고 있다 (호. 4:2, 3).
그리고 무자비함에 관해 말하는 에스겔서에서:
너는 피들의 성을 심판하느냐? 그리고 모든 그녀의 역겨운 짓을
그녀로 알게 만드느냐? 성 한가운데에서 피들을 흘리는 성.
너는 네가 뿌린 그들의 피를 통하여 죄있게 되었다 (겔. 22:2, 3, 4, 6, 9).
에스겔서에서:
토지는 피들의 심판으로 차 있다, 그리고 성은 폭력으로 차 있다 (겔. 7:23).
그리고 예레미야에서:
예루살렘 한 가운데에서 정의로운 자의 피를 흘린 예루살렘의 예언자들의 죄들,
그녀의 불법 때문에, 그들은 거리들에서 눈먼채 방황하고,
그들은 피로 오염되어 버렸다 (애. 4:13, 14).
이사야서에서:
주님께서 심판의 영으로, 그리고 불타는 영으로 시온의 딸들의 더러운 것을
씻어내실 때, 그리고 한 가운데로부터 예루살렘의 피들을 정화 하실 때, (이. 4:4).
그리고 다시:
너희의 손바닥들은 피 안에서 더럽혀졌다,
너희의 손가락들은 불법 안에서 더러워졌다 (이. 59:3).
에스겔서에서, 예루살렘의 불법을 이야기하면서, 이것이 “피들”이라 불려진다:
내가 너를 지나쳐갔다, 그리고 너를 보았더니, 네 자신의 피들을 짓밟았다, 그리고
나는 네게 말했다, 네 피들을 살아있게 하라, 그렇다, 나는 네게 말했다,
네 피들을 살아있게 하라 (겔. 16:6, 22).
마지막 때의 무자비함과 증오함이 계시록서에서 피를 수단으로 묘사되어 있다 (16:3, 4). “피들”이 복수 단어로 언급된다. 그 이유는 불의와 역겨운 모든 것은 증오함으로부터 분출하기 때문이다. 이 반대는 선과 거룩한 모든 것이 사랑함으로부터 분출된다. 그러므로 자기 이웃을 향하여 증오함을 느끼는 자는 기회가 생기면 살인을 저지를 수밖에 없다. 어쩌면 기회가 올 때가 아니라 기회를 만들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것이 그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것이다. 이것이 이 구절에서 “피들의 목소리”를 수단으로 의미되고 있다.

“목소리가 외침”, 그리고 “외침의 목소리”는 말씀에서 흔히 사용되는 표현의 형체이다, 그리고 어떤 시끄러움, 동요, 혼란, 또한 행복한 어떤 사건에서도 사용되는 형체이다 (출. 32:17, 18; 습. 1:9, 10; 이. 65:19; 예. 48:3). 이 구절의 경우는 고발함(규탄함, accusation)을 표시한다.

위로부터 “피들의 외침”은 죄지었음을 규탄함을 의미함이 뒤이어진다; 그 이유가 폭력을 사용하는 이들이 죄지음을 껴안고 있기 때문이다. 다윗서에서:
악이 사악한 자를 죽일 것이다,
그리고 의로운 자를 미워하는 그들은 죄있을 것이다 (시. 34:21).
에스겔서에서:
네 성은 네게 뿌린 죄들로 말미암아 죄를 지었다 (겔. 22:4).

“지면(ground)”이 여기서 종파(schism), 또는 이단(heresy)을 의미하는 것은 “들판”이 교리를 의미한다는 사실로부터 분명해진다. 그러므로 교리 안에서 들판을 가지는 “지면”은 종파이다. 인간 자신은 “지면”이다, 또한 “들판”이기도 하다. 그 이유는 교리나 종파, 이단 같은 것들이 인간 안에서 심어지고 싹틔우기 때문이다. 게다가 인간은 자기 안에 심어진 것으로부터 인간이기 때문이다. 즉 선하고 참된 것으로부터 선하고 참된 인간이, 악하고 거짓된 것으로부터 악하고 거짓된 인간이다는 말이다. 어떤 특별한 종파, 또는 이단 안에 있는 자는 그것으로부터 명명되어진다. 이 구절의 “지면”은 인간 안에 있는 종파, 이단을 표시하기 위해 사용된 것이다.

11절. 그리고 지금 너는 지면으로부터 저주되었다. 지면은 네 손으로부터 네 형제 아벨의 피들을 받으려고 그 입을 열었다. “너는 지면으로부터 저주되었다”란 종파를 통해 그는 돌아섰다를 의미한다. “땅이 그 입을 열었다”란 이교가 그것들을 가르쳤음을 의미한다. “너로부터 네 형제의 피들을 받는다”란 선행과 분리된 신앙이 선행에 폭력을 휘둘러 선행을 멸절했음을 의미한다.

이런 것들이 의미되는 것은 “저주됨”이 등장한 245항에서 이미 살핀 바 있다. “저주됨”은 선에 반대됨이다. 그 이유가 불법들과 역겨움들, 또는 증오함들은 인간을 (주님으로부터) 돌아서게 하는 것들이다. 하여 인간이 아래쪽만을 향하게, 즉 육체적, 지상적인 것만을 중요시하게, 결국 지옥으로부터 있는 것들 쪽으로 치닫게 한다. 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