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밀히게 자라나는 씨

은밀하게 자라나는 씨
– 은밀한 하느님의 역사 –

성서 본문: 마가복음 4장 26-29절

26. 예수께서 또 말씀하셨다. “하느님 나라는 이렇게 비유할 수 있다. 어떤 사람이 땅에 씨앗을 뿌려 놓았다. 27. 하루 하루 자고 일어나고 하는 사이에 씨앗은 싹이 트고 자라나지만 그 사람은 그것이 어떻게 자라는지 모른다. 28. 땅이 저절로 열매를 맺게 하는 것인데 처음에는 싹이 돋고 그 다음에는 이삭이 패고 마침내 이삭에 알찬 낟알이 맺힌다. 29. 곡식이 익으면 그 사람은 추수 때가 된 줄을 알고 곧 낫을 댄다.”

하늘 나라

천국은 주님의 사랑과 지혜, 선과 진리로 통치되는 인간 마음이면 어느 곳에서나 건설되는 나라이다. 즉 “하늘 나라는 네 마음속에 있다.” 이 하늘 나라는 주님의 말씀 속에 있는 진리가 그 사람의 마음에 이식되어 형성된다.

씨는 진리이다. 진리라는 씨는 선함이라는 생명력을 진리 속에 담고 있다. 이 생명력은 성장 조건이 존재하는 곳에서는 어디서든지 진리의 씨로 하여금 발아하게 하여 싹을 내서 뭔가가 살아 있게 해준다. 천국은 진리와 선을 받는 모든 사람들 안에 이식되어진다. 즉 옥토에 진리를 받는 자란 그 사람의 자연적 의지가 진리를 사랑해 보려 하는 마음에 이식된다는 말이다. 땅이란 인간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는 바, 그 땅의 상황은 그 사람을 좌지우지해 가는 사랑이 어떠한 것이냐에 달려 있게 된다. 씨는 그릇과 같아서 주님에게서 흘러 나가는 생명을 받아 사용해서 성장한다. 이와 같은 게 인간의 마음이다. 즉 자신의 마음 상태에 따라 그릇처럼 각 인간은 생명의 각기 다른 수준과 품질을 받아 성장한다.

씨 뿌리는 자

본문에서의 씨 뿌리는 자는 인간 자신이다. 다른 비유에서 씨 뿌리는 자는 주님을 표현한다. 그 이유는 씨 뿌림이 주님의 작업 부분으로 취급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 비유에서는 씨 뿌리는 인간의 작업 부분과 주님이 하시는 일과 대비되도록 하고 있다. 인간의 일이란 땅을 잘 고르고, 씨를 뿌리고, 수확하는 부분이다. 그리고 주님의 일이란 씨의 은밀한 성장, 성장할 조건의 공급, 더불어 인간이 계속 노력할 수 있게 떠받쳐 주시는 것이다. 따라서 주님이 주무신다거나, 씨가 어떻게 성장하는지 모르시고 있는 분이라고 말할 수도 없을 것이다.

심는 것

본문에서 씨를 땅에 뿌리는 것은 인간이 주님의 말씀으로부터 진리를 배워 그 진리를 자기 마음에 이식하는 일을 표현해주고 있다. 씨가 싹이 튼다는 것은 인간 이해성 안에서 진리가 받아들여져 역사하는 것을 말한다. 그 싹의 성장이란 그 사람의 의지 속에 진리가 받아들여져 생동하는 것이다.

거듭남은 비밀스런 작업이다

인간의 거듭남은 그 거듭남의 작용과 진보를 인간이 모르는 가운데 성취되고 있다. “바람은 제가 불고 싶은 대로 분다. 너는 그 소리를 듣고도 어디서 불어 와서 어디로 가는지를 모른다. 성령으로 난 사람은 누구든지 이와 마찬가지이다.” 즉 주님의 역사는 결과로만 알게 될 뿐, 그 일의 과정은 인간의 실세계에서는 감지 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자고 일어남

자고 깨고 일어남, 그리고 밤과 낮이란 마음의 어떤 상태를 표현해 준다. 즉 마음이 진리에 대한 명백한 빛 속에 있어 그의 마음이 승강될 때, 그의 마음 상태는 낮인 것이다. 그러나 자기에게 진리가 분명치 않고 오히려 희미할 때, 그는 정신적으로 어둠 속에 있는 바, 그의 정신적 경험들은 밤에 있게 되는 것이다. 우리 마음이 영적 진리라는 빛 속에서 적극적일 때, 우리는 깨어 일어나서 뭔가 선용을 이루어 가게 된다. 그러나 우리가 오로지 감각적이고 자연적인 생각이나 느낌에 빠지게 되어 위대한 영적 원리로 보는 시야를 잃게 될 때, 우리는 잠들어 있다고 말해진다. 따라서 잔다는 것은 자연적 마음뿐인 상태이고, 일어남이라든가 깨어 있음은 영적 마음의 상태 안에 있는 것을 말한다.

교체

위의 두 상태는 삶의 과정 속에서 상태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번갈아 있게 된다. 한 때 우리의 마음은 영적 빛에 열리워져 있어 영적인 것들을 명백하고 확실하게 아는 듯 여긴다. 이런 상태들은 실제적인 사건 속에서 진리를 행하는 상태를 필시 동반하는 바, 생활이라는 공통적인 일상 업무에 그 원리를 적용해 갈 때이다. 그가 진리를 실제화할 때 그는 더 많은 진리를 받을 수 있는 그릇을 준비하게 된다.
이렇게 해서 인간은 교훈을 받아 마음이 강해지는 때와 이 마음을 가지고 일상 생활에서 그 교훈을 체현 해내는 때가 번복된다. 인간은 마음을 의기충천하게 해 주는 빛 속에서 언제나 머무를 수는 없다. 그 이유는 자신의 발전 매 단계에서 원리를 적용해 갈 필요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알게 된 진리를 응용함으로 우리는 알고 있는 진리를 심정에 가져오게 되고 삶에 적용하는 것이다. 발전되는 단계를 가질 때 새 단계는 그로 하여금 진리의 새 빛으로 더 진보하게 해준다.
이리하여 알게 되고 실습된 각 진리는 그 진리에 부응되는 선을 발달시킨다. 각 선이 발달되면 그 선은 더 많은 진리 쪽으로 우리를 인도해 준다. 일어나고 자는 것을 되풀이해서 인간은 한 단계 한 단계 훈육되어지면서 그의 원리는 최 말단에까지 적용 가능하게 되어 그는 일상 생활 속에 그 진리를 고정시키고 그 진리를 확증하게 된다.

변화는 무의식 상태에서

만일 인간이 진리를 보기만 한다면 그는 이론가일 뿐이다. 만일 그가 진리를 보지도 못하면 그는 감각적 인간일 뿐이다. 인간이 자기가 아는 진리에 따라 선을 행하는 동안 거듭남은 인간 속에서 계속 진행된다. 진리의 실습은 자기도 모르게 자기 속을 변화시킨다. 그리고 그는 그 변화를 결과에서 경험하게 되지만 그 변화가 오고 역사되는 것을 인식하지 못한다.
그 이유가 주님은 인간을 인도하시되 사랑을 수단으로 내향적으로 인도하시고 각 사람의 의지인 그의 사랑 안에 흘러드시기 때문이다. 인간의 의지로부터 주님은 그의 이해성이 영향을 받게 하신다. 따라서 우리가 선을 기꺼이 사랑한다면 그럴수록 우리는 진리를 더 많이 알게 되고 심사숙고 할 수 있게 된다. 따라서 인간은 자기 사랑 안에 흘러든 것을 그에 대한 애정을 가지고 느끼는 일반적인 감동 그 이상의 것은 가지지 못한다. 그러나 그는 이해성에 흘러드는 것에 대하여는 명백한 감동을 가진다. 그 이유는 이해성으로의 감동만이 그 사람의 생각 속에서 뚜렷한 형체를 취하기 때문이다.

은밀함은 필수이다

인간이 의지에 선을 받되 은밀하게 받아져야만 한다는 것을 우리는 이해할 수 있다. 그 이유는 주님이 인간으로 자기의 전 인격을 재건설하도록 인도하시기 때문이다. 각 사람의 자연성은 비질서적인 정신 조건에 있다. 그래서 그는 자신 속의 악이 선이요 꽤 쓸만한 것인 듯 착각하고 있다. 그러나 주님은 이런 비질서로부터 인간을 인도해 내시기를 바래신다. 그래서 질서적 조건으로, 그 조건 속에서 그가 악을 미워하고 선을 사랑하도록 배려하신다.
그러나 인간은 주님의 명령이 있다고 해서 자신에 반대되는 쪽으로 기꺼이 움직이지 않는다. 그 이유는 자기가 타인의 강요를 받고 있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님은 인간이 자기 스스로 자기를 인도하는 듯 보이도록 주님의 명령이 나타나게 해주시어 자신의 의도에 일치하는 인격 속에서 변화를 가능하게 해주신다. 이러면 인간은 자유로운 듯 느낀다. 그 이유는 자신의 바깥쪽 생각에서 볼 때 자기가 자기를 강요하는 듯 보이지, 어느 누가 강요한 것이라고는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런 방법으로 가능한 수준에서 주님은 각자가 선을 사랑하려는 의도와 자신의 인격을 변화시키겠다는 의도를 인간 속에 은밀히 이식하신다. 따라서 인간은 선한 애정과 진정한 생각이 어떻게 자기 속에서 일어났는가를 보거나 알지도 못하면서 계속 선을 배양해 가는 것이다.

예증

씨가 어떻게 자라는가는 농부가 알아야 할 필수 조항은 아니다. 만일 그가 자기 역할 부분인 땅을 잘 준비하고, 씨를 심고, 이 씨가 잘 자라도록 협력하는데 자기 지식과 능력을 발휘하여 수확을 거둔다면 그는 씨의 성장 결과로서 빵을 먹을 수 있게 된다.
이와 같이 인간이 진리를 배우고 그 진리가 마음에서 성장하도록 능력을 발휘해서 그 진리의 성장에 협력하면, 그는 마음과 생활에서 진리가 성장되는 실제적인 결과를 붙들게 된다. 아마 자기 속의 진리가 어떻게 이식되어 실지의 선이라는 추수를 거두기까지 성장되었는가를 모른다 해도 문제가 안된다는 말이다.
또 다른 예를 생각해 보자. 우리는 매일 음식을 먹는데 그 음식은 다양한 작용을 수행한다. 즉 소화되고 흡수되어 피와 살로 전환된다. 그러나 우리는 자신의 신체 속에서 일어나는 이런 작용을 명백히 느끼거나 지각하지 않는다. 이런 소화 단계들을 알지 않아도 그 단계들의 결과를 붙잡아 살아간다.
이와 같은 것이 영적 생활에도 있다. 주님은 우리의 지식 없이 우리의 정신적인 조건 속에 많은 것을 수행해 주신다. 농부가 씨를 심고, 자고 일어나 밤과 낮이 바뀌되 그는 그 일이 어떻게 라는 방법에 고심하지 않는다. 우리가 진리를 배우고, 일을 해 가되 영적 상태에서도, 자연적 상태에서도 수행해 갈 뿐이다. 그럼에도 내향적인 성장은 우리가 지각 못하는 순간에도 계속되고 있다. 즉 사랑으로 영원히 지켜보시는 주님에 의해 역사 되고 있다는 말이다.

수호 천사

천사와 영인들을 수단으로 주님은 인간을 가르치고 인도하신다. 그러나 인간은 자기를 이끄는 영들을 보지 못한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영들과 얼마나 친숙한 상태인지, 자기 주위에 현존해 있는 그들을 느끼지 못한다는 말이다.
주님으로부터 자기 속으로 선과 진리가 어떻게 흘러들며, 지옥으로부터 자기 속으로 악과 거짓이 어떻게 흘러드는지 자신 스스로의 감각으로 보지 못하도록 되어 있는 것은 신성한 섭리의 법칙에 해당된다. 따라서 신성한 섭리가 자기 속에서 자기로 하여금 악을 반대하고 선을 좋아하도록 은밀히 어떻게 역사하는지 결코 알지 못한다. 그 이유는 인간이 이런 과정을 안다면 그는 자기가 자유롭다고 느끼지도 않기 때문이고, 자기 이성에 따라 자유롭게 자기 의사대로 행동할 수 있다고 느끼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위와 같은 사항들을 자기 삶의 영적 원리로 알고 인정한다면, 주님의 말씀으로부터 있는 교회 원리로 가르쳐지는 것만으로도 충분할 것이다. 이런 사항들을 우리가 바깥쪽 감각들로 알려드는 것은 각자에게 도움이 되지 못하고 만다. 그 이유는 인간이 자기에게 오는 선한 영향력에 반대되는 행동을 취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예증

위의 내용에 대해서는 자기 몸 속에 들어오는 음식이 어떤 과정을 통해, 어떤 화학작용을 거쳐가는 가를 생각해 봄으로도 쉽게 파악된다. 우리는 입으로 들어가는 음식을 보고 먹을 수 있지만 실상 자기 뱃속에 들어가 버린 음식의 과정을 일일이 지켜볼 수 없듯이, 정신적인 양식이 마음의 각 층이나 각 수준에서 어떻게 소화되고 흡수되어 배분되는 신성한 섭리의 모든 내향적 작용을 간섭해 보려 드는 것은 가능할 수 없는 일에 해당된다.

결과로서 알게 된다

비록 우리는 주님의 역사가 우리 속에서 각 단계나 진보 수준을 거치는 과정을 알 수 없다 해도, 그 과정이 끝난 후의 결과는 아주 명백하게 드러나 보인다. 추수 때가 올 때, 우리는 그 추수를 보고 안다는 말이다. 인간이 거듭나질 때, 각 사람은 주님께서 점진적 성장이라는 많은 단계를 통해 자기를 인도해 주셨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리하여 그는 주님의 인도하심에 반대하지 않는다.

예증

농부가 씨의 성장을 생산할 수도 없고, 그 씨가 어떻게 자라는지 알지도 못하지만, 그에게도 자신이 알고 할 수 있는 많은 부분이 있다. 그는 씨를 심는 방법이나 기술을 연마해 갈 수 있다. 그는 불량한 씨와 우량한 씨를 구별해 내는 법을 배울 수도 있다. 그는 땅을 고르고 잘 돌볼 수 있고, 잡초나 돌을 제거하며 여느 짐승이 씨의 성장을 방해 못하도록 울타리를 칠 수도 있다. 그런데 그가 좋은 작물을 수확하지 못한다면, 거기에는 씨 뿌리고 가꾼 농부의 결함이 존재했을는지 모른다.
영적으로 우리는 할 수 있는 것이 많다. 자신이 지닌 능력을 발휘하여 신성한 진리를 받을 수 있게 마음을 준비하여, 주님의 영향이 자기 마음에 계속 미치도록 한다던가, 그분의 수호 천사가 마음의 성장을 계속하도록 허용하는 등등 우리 쪽의 할 일이 많이 있다. 따라서 진리의 성장함이라는 결과를 받는데 실패함은 우리 쪽의 할 일이 다 진전되지 못한 만큼에서 있게 된다.
우리가 해야 할 부분을 알고 행하는 것만으로도 인간에게는 충분하다. 즉 주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 악을 금하고 선을 행하는 것이다. 물론 영적 사항에 관한 큰 지적인 지식을 가진다는 것은 매우 유익하고 기쁜 일이 아닐 수 없다. 어찌 됐든 “지식은 힘”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힘은 지식이 응용되기 전에는 어떤 쓸모도 없는 것이다. 따라서 악을 금하고 선을 행하는 실제 응용에 소용되지 않는 한 모든 우리의 지적인 지식은 아무 실용성이 없게 될 뿐이다.

협동

주님은 우리가 저항할 수 없는 영향력으로 다가 오시어 선으로 채워 주시고 악은 쫓아내어 주신다고 착각해서는 안된다. 단지 각자의 일상 생활 속에서 선과 진리를 기쁘게 응용하려 하는 한도에서 우리 속의 선과 진리를 성장하게 해주실 뿐이다. 즉, 그분은 선과 진리를 사랑하겠다는 우리의 의지를 더 확장시켜 주시어 그분에게서 더 많은 선과 진리를 받게 해주신다는 말이다. 우리가 진리를 배우고 사용해 갈 때, 그분은 은밀하게 더 받게 해주시는 바 이것이 그분의 경이로운 작업인 것은 확실하다.

땅이 열매를 맺는다

그럼에도 행해지는 모든 것은 인간 스스로 해 놓은 냥 보인다. “…땅이 저절로 열매를 맺게 하는 것인데…” 그러나 이 구절의 말은 글자에서까지도 실제적인 사실은 아니다. 왜냐하면 땅은 능동적으로 행동하는게 아니라 수동적이기 때문이다. 즉 작가의 극본 그대로 움직이는 배우 역할을 한다고 봐야 할 것이다. 열이나 빛, 대기, 기타 여러 가지 조건들이 땅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땅으로 의미되는 인간의 자연적 마음은 그 스스로 열매를 맺는 것 같지만 실상 그렇지 않고 주님으로부터 온 다양한 영향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다.
생명력은 땅에 있는게 아니라 씨 안에 있다. 따라서 인간 마음이 스스로 열매를 맺게 하는 것은 아니다는 말이다. 살아 있게 하는 에너지는 인간 안에 있지 않고 주님으로부터 온 진리라는 씨 안에 존재한다. 그러나 밭이라는 인간 마음은 진리를 받는데 준비된 조건 속에 있어야 하는 것만은 틀림없다.

점진적인 성장

씨는 “처음에는 싹이 돋고 그 다음에는 이삭이 패고 마침내 이삭에 알찬 낟알이 맺힌다.” 인간이 진리를 받는 처음에는 그저 생각 수준에서, 즉 미약한 새싹의 수준에서 진리를 받을 뿐이다. 게다가 그 생각도 자신의 것이라고 간주하고 있다. 그런 다음, 인간은 진리를 받되 기억 속에 저장해 둘 만한 지식, 과학적 상식 정도로 진리를 받는다. 후에 그는 진리를 원리로서 보게 된다. 이러면 그가 믿는 진리들이 되는데 이를 두고 믿음 속의 진리라 한다. 그런다고 그의 자연적인 생각이 진리와 일치되어 있는 것은 아직 아니다. 낟알이 이삭 속에서 형성되기 시작한다. 그러나 이 이삭도 쓸모 있기에는 아직 이른 상태다. 이후, 인간은 실제적인 양상, 즉 자기가 할 수 있는 선한 어떤 것 속에서 진리를 본다. 이것이 삶 속의 진리요, 이삭 속에 낟알이 들어찬 상태, 언제라도 양식으로 삼을 수 있는 상태, 사용할 준비가 된 알이 찬 이삭인 것이다. 이 낟알이 사용될 때 진리들은 이타애라는 행동 속에서, 또는 이웃을 사랑함이라는 행동 속에서 생활의 선이 되어진다.
이렇게 해서 마음이 자라나고, 그 마음과 더불어 진리도 성장해 간다. 즉 진리는 먼저 각 사람의 기억 속에 들어오고, 그 다음 그의 이해성 속에서 정리되어, 마지막으로 그의 의지 안에 자리잡는다. 이 성장은 인간이 자기의 자연적 삶 속에서 주님의 진리에 꼭 순종해야 한다는 원칙을 가지고 그분의 계명을 준수해 갈 때만이 진행되어 진다.

받는 것은 다양하다

인간은 진리를 각기 다르게 받아들인다. 그 이유는 인간 각자가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인간 삶 전체를 망라해서, 만일 그가 거듭 나아가고 있다면, 그는 더욱 더 많은 진리를 받고 있는 것이다. 각 사람이 새 진리를 받는 태도는 마음 상태에 달려 있다. 진리를 수단으로 선이 모든 사람 속에 이식되어진다. 천적 수준의 사람은 선을 사랑함으로 그 사람 속에 선이 이식된 경우이다. 이 사람은 아주 높은 수준에서 거듭나는 것이고, 이 선 역시 진리를 수단으로 이식되기는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그 사람 속의 진리는 기억 안에 머물러 있지도 않고, 이것저것 재 보기 위해 이해성 속에서 되씹느라 머뭇거리지 않는 바, 그의 진리는 즉각 그의 의지, 심정 안에로 이동되어 실제적인 선 속에, 즉 생활 속에서 즉각 즉각 응용된다.
그러나 영적 수준의 인간, 즉 선을 사랑해서 진리를 실천하기 보다 진리를 사랑하기에 진리를 실천하겠다는 사람일 경우, 진리들은 그의 이해성에 들어가 거기서 추론의 대상이 되었다가 점차 그의 믿음 속의 진리로 채택되어진다. 이렇게 되면 양심(conscience, con-science, science with man)이 영적 인간 속에 건설되고, 이로부터 그는 악과 거짓에 대항하여 싸우게 된다.
그러나 천적 인간, 즉 실제적인 선으로부터 모든 것을 받는 인간은 자연적 인간 같이 과학에 의해, 영적 인간 같이 양심에 의해 좌지우지되지 않는다. 그는 자기가 아는 정의의 표준에 의해서만 규율되는게 아니라 정의를 사랑함과 선함 속에서의 기쁨에 의해 규율되고, 이 기쁨으로부터 그는 선과 진리에 관한 지각 속에 있는바, 그는 자기 속의 사랑이 증가되는 만큼 그의 진리도 증가된다.

“곡식이 익으면 그 사람은 추수 때가 된 줄을 알고 곧 낫을 댄다.” 예리한 날을 가진 낫, 이 기구는 밑뿌리로부터 낟알들을 분리시키는 바, 진리를 표현하되, 특별히 필수적인 것과 비필수적인 것을, 또는 악에서 선을 구별해 내어 잘라 내는 능력이라는 측면에서의 주님의 말씀을 표현해 준다.
곡식은 차후 사용을 위해 잘라서 분리되고 있다. 이 절단에 수반되는 것으로 자르는 것과 비슷한 과정이 탈곡(도리깨질)이다. 이와 같은 과정을 마음속에서 찾아보면, 신성한 말씀 글자, 특별히 십계명으로 무장한 마음은 가상적인 진리, 눈에 보이게 그럴듯한 진리로부터 진정한 진리를 자르고 분리시킨다. 특히 합리적 사고를 수단으로 꾸준한 사용을 위해 실용적인 선만을 탈곡해 낼 수 있다.

추수

추수란 농부가 땅을 고르고 씨를 뿌리고 잡초를 뽑는 등등 일련의 작업을 마친 후의 좋은 것들이다. 이와 같이 주님의 섭리 속에서 생활 속에 있는 실제의 선은 주님이 인도하시고 역사 하시는 모든 과정을 망라하여 있게 되는 그분의 목적, 즉 추수이다. 농부가 일하면서 작업 계획이 순조롭게 진행되고 기대하는 대로의 씨의 성장을 지켜보면서 기뻐해 가듯, 주님과 그분의 천사들은 우리 마음이 진보하는 매 단계마다에서 선하고 질서 있는 상황을 마련하여 추수 때를 준비해 가고 있을 때 매우 기뻐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도 자기 자녀들이 거듭남을 향해 질서 있는 길로 진보해 가는 것을 볼 때 흐뭇해하기도 한다. 매 단계마다에서, 우리는 진리의 씨를 위해 준비된 땅을 보고 기뻐하고, 성숙과 추수를 향해 그 씨를 계속 돌본다. 이와 같이 주님과 천사들도 우리가 악을 금하고 선을 행하는 것을 지켜보고 매우 기뻐한다. 천사들은 우리 사랑이 선한 자극을 받는 것에, 모든 진정한 생각이나 쓸모 있는 행위에 기쁨을 감추지 못한다. 그래서 그들은 자기들이 해줄 수 있는 모든 것을 우리에게 해주어 우리를 지혜에로 인도하고 어리석음에서 되돌아 서게 해준다.

해야 할 우리 몫

위와 같이 주님과 천사들은 노력하고 있지만, 이는 가만히 있는 자에게 해당되는 말이 아니다. 우리는 씨를 뿌림 즉 진리를 배우고, 사랑과 선용이라는 일상 생활 속에서 실제의 선을 알이 찬 곡식을 모아들이듯 거두어 가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빵을 만들어야 하고 그것을 먹어야만 한다. 우리에게는 자신이 할 수 없는 일이 많고, 따라서 주님께서 우리 심정 속 은밀한 곳에서 우리를 위해 해주셔야 할 일이 많다. 주님이 일을 하실 수 있으시기 위해 마치 농부가 씨를 뿌려 두면 당연히 싹이 올라 올 것을 믿고 있듯 우리는 주님을 신뢰하여야 한다. “은밀한 일들은 우리 하느님 주님에 속한 것이다. 그러나 그 중에서 우리에게 밝혀 주신 일들은 우리와 우리 자녀에게 속한 것이요, 우리로 그 일의 법칙 속의 모든 말씀을 행할 수 있게 하시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해야 할 일도 많다. 이 일의 성사는 우리에게 책임이 있다. 우리는 자기 속 애정이나 생각, 자기 밖 행동 속에서 악을 금할 수 있어야 한다.

영적 상태와 자연적 상태

따라서 실용적인 관점이 즉각 떠오를 것이다. 우리는 자신의 처지에 너무 골몰할 필요가 없다. 그 이유가 인간의 마음 상태는 심오하고 영적 상태에 언제나 있는게 아니기 때문이다. 마음의 높은 상태를 언제나 유지해야 한다고 작정된 것도 아니다. 이런 문제는 자기가 세상에서 떠나 언제나 고고하게 날으기를 추구하겠다는 세속 탈피주의자들의 미묘한 실수에 해당되는 말이기도 하다. 주님은 우리로 자고 일어나는 밤과 낮을 주셨다. 즉 자연적 상태와 영적 상태 사이를 오가도록 해서 우리로 진리를 배워 더 함양된 상태에도 있게 해주시는가 하면, 그걸 가지고 자연적 상태에서 실습하도록 배려도 하신다는 말이다.
그러나 우리가 영적 상태에 오래 있을 수가 없어 자연적 상태에 더욱 자주 있게 된다면, 우리는 악한 자연적 상태를 그만큼 모르게 될 수 있다. 따라서 실지로 위험한 것은 우리 밖인 세상에서 떠도는 악한 상태들이 아니라 우리 속에서 부추겨지는 악들인 것이다. 따라서 재삼 강조해야 할 것은 선한 자연적 삶 속에서 계속 살아가되 주님의 말씀을 계속 배워야 한다는 것, 자신이 계명에 순종하고 있다해서 그것을 뽐내지 말고 당연하게 생각하고 지켜 가야 하는 것, 뭔가 큰 주님의 일을 해내겠다고, 세상에 뭔가 나를 드러내 보겠다는 식으로 포부성을 가지고 계명을 지키려 든다거나 주님 말씀에 관한 지식을 추구하려들지 말 것, 오로지 평탄하고 지극히 단순한 일상 생활 속에서 계명의 준수, 말씀의 실현에 만족해야 하며, 그런 삶 속에 옮겨다 놓은 모든 진리를 주님께서 추수하신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용기

위의 사항들을 우리가 해낼 수 있기 때문에 아마 자기 스스로 자신을 격려해 줄 수 있으리라 믿는다. 위의 일을 해내는데 우리에게는 크나큰 자연적 지식, 학식, 재물, 사회적 지위, 미모 등등 어떤 자연적 조건도 요구되는게 없다. 요구 사항은 계명을 지키는 것, 악을 금하고 선을 행하는 것뿐이다. 이를 행할 때, 주님은 장차 우리가 들어갈 세계에서 쓰게 될 우리 인격을 이타적인 소망과 열망들로 채워 주시어 내향적 성장을 이룩해 주신다.
이 세상은 학교 기숙사일뿐, 오게 되는 저 세상이 진짜 삶이다. 극히 적은 외부 사항들이 지상에서의 행복한 삶에 요구될 뿐이다. 더욱이 외적인 풍요로움이 진짜 행복을 생산하는 것도 아니다. 거듭 나아가는 영적 삶의 요소들을 채우는 이 세상 조건들은 극히 미미한 것뿐이다.

우리 자녀

이 비유는 자녀들에 대한 부모의 의무, 그들이 자연적 세계에서만 자라지 않고 영적 세계에서도 성장하게 해주어야 한다는 것, 그들에게 순수한 진리를 가르쳐야 한다는 것, 그들에게 좋은 본보기가 되어 주어야 한다는 것, 주님이 그들 마음속에서 일하실 수 있도록 그들이 준비하는 것을 도와야 한다는 것 등등을 암시하고 있다. 씨의 성장이 은밀한 비밀이듯이 성장의 실패 역시 비밀이다. 그 비밀에 우리는 간섭할 수가 없다. 그 이유가 우리는 자신의 마음속이든, 자녀의 마음속이든, 되어 가는 그 일을 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마음속의 일이 잘 되어 가게 노력만 해야 할 것이다. 아마 때로 잘 안되어 갈 수도 있을 것이다. 악한 잡초 씨가 땅 밑에서 은밀하게 성장하고 있을는지 모른다. 번드르한 외용물이 오히려 진리의 씨가 성장하는데 더 나쁜 상태일런지도 모른다. 따라서 최선을 다하는 것, 즉 땅을 잘 준비하고, 잡된 씨를 걸러 낸 우량한 씨를 선발해 심고, 자라 오르는 잡초를 계속 뽑아야 하고, 튼튼한 울타리를 내 마음 밭 주위에 둘러쳐 두어야 하는 등등의 우리 몫을 슬기롭게 잘 처리해야 하는 것뿐이다. “만일 네가 이런 사항들을 알고 그대로 행한다면 복 있는 자이다.”

포도나무와 그 가지

포도나무와 그 가지
– 신성과 인간 생명 –

성서 본문: 요한 복음 15장 1-10절

1. “나는 참 포도 나무요 나의 아버지는 농부이시다. 2. 나에게 붙어 있으면서 열매를 맺지 못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모조리 쳐내시고 열매를 맺는 가지는 더 많은 열매를 맺도록 잘 가꾸신다. 3. 너희는 내 교훈을 받아 이미 잘 가꾸어진 가지들이다. 4. 너희는 나를 떠나지 말라. 나도 너희를 떠나지 않겠다. 포도 나무에 붙어 있지 않는 가지가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는 것 처럼 너희도 나에게 붙어 있지 아니하면 열매를 맺지 못할 것이다. 5.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누구든지 나에게서 떠나지 않고 내가 그와 함께있으면 그는 많은 열매를 맺는다.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다. 6. 나를 떠난 사람은 잘려나간 가지 처럼 밖에 버려져 말라 버린다. 그러면 사람들이 이런 가지를 모아다가 불에 던져 태워 버린다. 7. 너희가 나를 떠나지 않고 또 내 말을 간직해 둔다면 무슨 소원이든지 구하는 대로 다 이루어질 것이다. 8. 너희가 많은 열매를 맺고 참으로 나의 제자가 되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다. 9.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해 왔다. 그러니 너희는 언제나 내 사랑안에 머물러 있어라. 10.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 사랑안에 머물러 있듯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안에 머물러 있게 될 것이다.”

요약

신성한 사랑은 만물의 아버지 되시고, 우주의 생명이다. “그분 안에서 우리는 살고, 움직이며, 자기 존재를 갖는다.” 창조물은 생명의 유일한 근원이신 그분과 연결을 맺는 가운데, 그 연결을 수단으로 해야만 살아 있다.

표현적 의미

이 비유는 심어진 포도나무와 그 나무가 농부에 의해 돌보아 지는 것을 묘사해 놓고 있다. 자라는 나무, 기타 다른 식믈은 마음안에서 자라는 여러 가지 원리들을 표현한다. 농부는 아버지, 신성한 선, 신성한 사랑, 예수 그리스도라는 인성에 내재하는 신성이시다. 인성은 신성한 진리, 또는 신성한 지혜이다. 영화하심 속에서, 신성한 인성은 유일한 하느님, 주 예수 그리스도라는 한분 속에서 본체이신 신성과 하나를 이루셨다. 그래서 주님은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다.” “나를 본 것은 아버지를 본 것이다.” 라고 말씀 하셨다. 사랑은 진리속에 내재하는 생명이다. 그래서 사랑과 진리는 우리가 거듭날 때까지 둘로 존재한다.

포도나무

주 예수 그리스도는 “참 포도나무” 이시다. 그 이유가 그분은 신성한 사랑이 체현되어서 명백해진 신성한 진리이시기 때문이다. 그분은 한 분(one Person) 이신 유일한 하느님이시지만, 인간에게는 사랑과 지혜, 권능이라는 세 국면으로 알려지고 있다. 기독교, 특히 새교회 안에서만 주 예수 그리스도의 속성은 총명하게 이해될 수 있다. 그분은 “참 포도나무” 이시며, 신성한 사랑, 즉 아버지로 속이 채워져 있는 신성한 진리 이시다.

포도원

포도원은 마음안에 있는 교회이다. “만군의 야훼의 포도원은 이스라엘 가문이다” (이사야 5:7). 포도원에 있는 포도나무는 교회안에 있는 주님의 진리이다. 다시말해 교회속에 있는 사람들 안에 있는 주님의 진리이다. 신성한 진리가 인격화(personification) 되었을 경우, 주님은 신성한 사랑이 세상에 심으신 “참 포도나무” 이시다. 아버지로부터 아들이 있듯이, 사랑으로부터 진리는 파생된다. 농부가 포도나무를 심듯이, 아버지인 신성한 사랑은 신성한 인간을 내보내셔서 인간 구원을 위한 교회를 형성해 주시기 위해 세상에 “참 포도나무”를 심으셨던 것이다. 농부가 포도나무를 정성스럽게 가꾸듯, 신성한 사랑은 신성한 인성, 곧 신성한 진리를 돌보신다. “나, 주는 그 나무에 매 순간마다 물을 주며 잘 가꾸리라. 그 나무가 어떤 해도 입지 않도록 밤낮으로 돌보리라.” 신성한 사랑은 신성한 인성을 통하여 우리가 아는 모든 진리들 안에 내재하시어 역사하신다. 진리, 그것만 가지고는 어떤 생명력도 없다. 진리의 생명은 그 진리안에 내재하는 신성한 사랑으로부터 존재한다.

포도나무 가지를 잘라 냄

포도원에서 농부는 죽은 가지를 잘라 내고 살아있는 가지를 정돈해서 더 나은 열매가 맺히도록 한다. 이와 같이 주님은 우리의 마음속에 진리의 포도나무를 심으시고 돌보신다. 악과 거짓이라는 죽어있는 것들을 거두어 내시고, 훈련을 수단으로 우리속에 있는 선한 것들을 깨끗하게 하시어 전 보다 더 나은 선한 것이 되게 해주신다.

가지들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가지에 해당되는 것은 그분의 자연적 어머니로부터 파생된 인간적 애정들이다. 그분은 그런 것들 중 죽은 것은 거두어 내셨고, 좋은 것은 순수하게 하셔서 신성한 생명이 그분안에서 충만 되도록 하시었다. 그러나 인간의 경우 포도나무 가지란 진리는 받는 개개인이다. 가지의 생명은 우주의 한 생명으로부터 뻗쳐나가 있다. 가지가 나무로부터 생명을 받듯, 인간은 주님으로부터 생명을 받는다.
우리를 주님의 포도나무 가지로 만드는 것은 우리 속에 있는 주님의 현존(Lord’s presence) 이시다. 교회는 “주님의 신비한 몸” 이라 불리운다. 유아시절 우리는 포도나무 가지처럼 순진 가운데에 있는다. 그러나 우리가 성숙함에 따라 자아 의지가 튀어 나올 때, 주님은 시험을 통하여 악한 것 곧 죽은 것들을 거두어 내심으로 더 순수해지게 하시고, 좋은 것 곧 살아있는 것을 더 생생하게 하심으로 그분과 더 가까운 하나를 이루도록 역사하신다.

포도나무에 붙어있지 않은 가지

진리를 알고는 있지만, 그 진리를 사랑하지 않아서 실제에 사용하지 않는 모든 사람은 자기를 주님에게서 스스로 분리해 버린다. 진리가 마음 속에서 살아 움직여서 이타애와 사랑을 성장 시키지 않으면 가지들은 열매를 맺지 못할 것이다. 주님은 인간을 위해 그분이 하실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해 주고 계신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인간이 악에 저항하여 그 악을 금하려고 애쓰는 한, 우리 속의 죽은 것, 악한 것을 모두 거두어 주시고, 우리가 받겠다고 애쓰는 한 선한 모든 것을 주신다.
어느 때가 우리에게 있어 행복한 순간일까? 그 때란 주님께서 우리속에 있는 죽은 것인 악한 것을 거두어 가시고 부분적으로 나마 선한 것을 순수하게 해주시겠다고 역사하시는 그분의 일을 우리가 방해하지 않을 때이다. 더 나아가 악에서 건져내어 선쪽으로 한 걸음 더 진전되게 하는 수단이 시련과 훈련임을 스스로 인정하여 기쁜 마음으로 그것을 수용할 때이다. 신성한 사랑은 진리로 우리에게 온다. 따라서 우리가 그 진리를 반갑게 맞이하여 순종한다면, 주님은 더 위대한 선쪽으로 우리를 인도해 주실 것이다.

인간 안에 계신 주님

진리라는 포도나무는 인간 안에 존재 한다. 주님은 인간의 의도, 생각, 행동이라는 의식세계 안에서만 거하실 수 있다. 우리 삶의 모든 환경은 우리의 가지를 쳐내어 정리정돈하는 모든 영적 필요성에 꼭 맞게 되어 있다. 우리 마음에 심어진 주님의 포도나무는 우리가 되어 가기를 원하는 쪽으로 꼭맞추어 성장해 간다. 각양각색의 인간이 있듯이 각양각색의 진리가 존재하고, 한 인간 개체의 경우도 그의 발전 단계에 따라 각기 다른 단계의 진리가 존재 한다. 그러므로 거듭남에 있어서의 우리의 성장이란 우리속에 있는 진리라는 포도나무가 가지를 쳐내 순수하게 되어가는 과정인 것이다. 우리 속의 진리라는 포도나무를 우리가 어떻게 돌보느냐는 것은 주님을 우리가 어떻게 생각하느냐와 맞먹는 것이다. 그 이유는 신성한 진리로서의 주님이 우리안에 있는 포도나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본문에서 이렇게 읽게 된다. “포도나무에 붙어있지 않는 가지가 열매를 맺을 수 없는 것처럼 너희도 나에게 붙어있지 않으면 열매를 맺지 못할 것이다.” 그 이유는 진리의 진정한 열매가 선함이요, 이 선함이 우리속에 있는 주님의 현존인 바, 우리가 그분안에, 그분이 우리안에 거해야 하기 때문이다.

포도나무를 쳐냄

우리가 진보해가는 가운데 있어지는 모든 단계는 종점이 아니고 오로지 발전하고 있는 상태일 뿐이다. 하나의 단계에 도달되는 진보는 더 나은 진보를 위한 준비 단계이다. “열매를 맺는 가지는 더 많은 열매를 맺도록 잘 가꾸신다.” 즉 더 많고 품질이 더 나은 열매를 맺도록 하신다는 말이다. 우리의 영적 진보에 관한 단계들이 이스라엘 족속들의 다양한 여행, 즉 에집트에서 가나안으로, 그리고 가나안의 정복등으로 표현 되어 있다. 아마 더 위대한 정복을 위해 더 많은 여행이 필요할는지 모른다. 우리가 시련을 불행으로 간주하고 있는 동안에도, 그 시련은 우리의 영적 열매를 증가시키기 위해 포도나무를 깨끗이해도 좋다고 우리 자신이 허락하였었다는 것을 기억함으로 시련의 아픔이 옯겨지게 된 때도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구속(the redeemed) 의 역사도 크나큰 시련의 역사를 감수해야 한다. 불필요한 인생 훈련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자신 속의 악들에 저항하려는 노력을 십분의 일이라도 감수하려 들면, 아마도 우리는 머지않아 자기 속의 악들로부터 자유로워 진다.

말씀으로 깨끗하게 함

“너희는 내 교훈을 받아 이미 잘 가꾸어진 나무들이다.” 이 구절에 대해 구번역을 보면, “너희는 내가 일러준 말(Word)로 이미 깨끗하였으니…” 그분이 우리에게 그분 자신을 밝히 알게 해주지 않으시면 우리는 주님을 알 도리가 없다. 그분은 신성한 삶과 인간 삶의 원리들을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밝혀 주심으로 말씀이 삶의 매개체가 되도록 하셨다. 신성한 말씀의 글자적 의미는 감각이라는 우리의 바깥쪽 삶에 와 닿는다. 그리고 안쪽에 해당되는 영적의미는 우리를 영적 총명으로 인도해 준다. 이렇게 말씀을 수단으로 주님은 우리를 위쪽으로, 안쪽으로, 우리의 생각을 들어 올리시고, 우리의 애정을 순수하게 하시며, 행동을 질서속에 놓도록 인도해 가신다. 정신적 포도나무를 쳐내서 개운하게 하신다는 것은 신성한 진리의 영에 일치 않는 모든 느낌이나 생각, 행동을 거절해 가도록 인도하신다는 말이다.
어떤 자연적 물이나 피도 우리를 영적으로 씻어주지는 못한다. 오로지 말씀 속의 진리만이 그 일을 해낼 수 있다. 물이나 피가 가진 상징적 의미는 이러하다. 하느님의 말씀 중 글자는 물이라 불리우고, 영적 의미는 피라 불리운다. 물은 자연적 진리, 즉 행동에 놓이는 진리를 표현한다. 따라서 물로 베풀어지는 세례란 바깥쪽 삶을 씻겠다는 각오를 표현한다. 그러나 거룩한 성찬은 주님의 영적인 피, 즉 신성한 진리와 더불어 있게 된다. 그래서 포도주는 성경 글자에서 까지 “포도의 피” 라고 불리고 있는바, 이는 영적 진리를 표현하는 것이다.

주님 안에 거함

“너희는 나를 떠나지 말라. 나도 너희를 떠나지 않겠다.” 또는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안에 거하리니…” 주님은 모든 것 안에 내재된 생명이시다. 그러나 인간이 이 생명을 받기 위해서, 그분의 생명이 각자 안에 있기 위해서 우리는 반드시 주님안에 거해야 한다. 마치 포도나무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어야 살아있을 수 있는 것과 같다. 모든 인간 각자의 삶의 질과 양은 주님과 각자와의 관계가 갖는 질과 양에 일치 된다. 포도나무 가지는 포도나무가 공급해주는 생명을 사용할 수 만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우리는 주님에 의해 공급되는 생명을 사용하는 태도에 따라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있다. 그래서 주님이 우리에게 나누어 주실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는 질과 양, 그분이 주시는 것을 받겠다는 마음이 열리는 정도에 의존 된다. 거듭나는 인간이 하는 것은 모두 주님으로부터 있어진 것들이다. 주님 없이는 어떤 인간이라도 제 아무리 작다고 말하는 선도 행할 수 없다.
이와 같이 우리의 심정과 삶이 주님과 보다 가깝게, 보다 완전하게 결합될 때, 더 풍성한 열매가, 더욱 품질 좋은 열매가 생산 되는 것이다. 주님이 말씀속에서 그분 자신을 알게 해 주시는 바, 그분의 말씀이 없게 되면 우리는 어떤 선도 행하지 못한다. 그 이유는 우리가 영적 원리에 관해 아는게 아무것도 없게 되기 때문이다. 우리속에는 생명을 유지 보전하게 하는 어떤 것도 없다. 생명은 주님에게서 우리에게로 한 순간, 한 순간 마다 공급되어 진다. 마치 시냇물이 공급지인 샘으로부터 끊임없이 물을 공급받기에 시냇물이 되어 있는 것과 같다. 포도나무 가지 속의 수액(sap)은 포도나무로부터 이다. 육체 속의 피는 심장으로부터 순환된다. 가지와 나무도 비슷하다. 이와같이 인간은 주님과 비슷하게 선을 생산 한다. 물론 그 선 속에 주님의 생명이 순환되는 한도 내에서만 순수한 선이다.

밖에 버려짐

“나를 떠난 사람은 잘려나간 가지 처럼 밖에 버려져 말라 버린다.” 생명의 근원과의 계속적인 연결을 중단하는 사람은 생명의 공급을 잃게 마련이다. 그는 주님에 의해 밖으로 내던져 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인격에 의해 스스로 내던져 지는 것이다. 그는 포도나무에 붙어있지 않겠다고 해서 포도나무로부터 자신 스스로를 자르는 것이다.
“그러면 사람들이 이런 가지를 모아다가 불에 던져 태워 버린다.” 자아만을 사랑하는 원리에 모든 애정이 쏠릴 때, 그 인간은 악한 인간이 되어 스스로 “가지를 모으는” 격이 된다. 그들은 품질면에서 자기들과 비슷한 영계의 사람들과 연합하여 서로 모인다. 그리고 자아들이 빚어낸 지옥의 불인 악한 열정의 불속에 서로 뛰어 든다. 이런 거룩치 못한 욕망의 불속에서 그들에게 남아 있던 모든 천국적인 것들은 그들에게서 사라진다. 지옥은 하느님의 분노가 만든 처벌이 존재하는 곳이 아니다. 영적으로 말한다면 이와 같은 분노는 없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이다. 지옥은 하느님이 내리시는 축복의 사랑을 거절하고, 선을 악으로 돌려 버리는 결과로 있게되는 것을 피할 수 없는 곳이다. 하느님은 각 인간에게 하느님의 심정을 주시고, 그 심정이 서로 사랑하도록 하셨으나, 미움을 사랑하는 쪽으로 돌아선 사람들이 자신의 심정안에 지옥을 만든다. “보아라. 나는 오늘 생명과 죽음, 행복과 불행을 너희 앞에 내놓는다” (신명기 30:15). 생명과 행복은 주님이 인간에게 주신 것을 사용하는데 존재하고, 죽음과 불행은 주님이 주신 것을 남용하는데 존재한다.

구하는 것 (뜻할 것을 물어, asking what we will)

“너희가 나를 떠나지 않고 또 내말을 간직해 둔다면 무슨 소원이든지 구하는 대로 다 이루어 질 것이다 (If ye abide in Me, and My words abide in you, ye shall ask what ye will, and it shall be done unto you).” 인간의 모든 삶, 안쪽으로나, 바깥쪽으로나, 즉 의도면에서나 행동면에서, 영적 측면에서나 자연적 측면에서, 신성한 법에 일치 할 때, 그는 가지가 나무에 붙어 있듯 주님안에 거하게 된다. 그러면 하느님의 생명은 그 인간에게 흘러들고, 채워주시어 복을 받게된다. 이런 식으로 천국의 모든 힘은 인간에게서, 그 인간을 통해 역사되는 바, 그 사람이 하고저 하는 것을 위해 힘을 주신다. 이런 상태에서의 인간은 천국 질서안에 놓여져 있는 것이다. 그가 되고자 하는 것, 하고자 하는 것, 모두는 주님이 뜻하시는 것과 같게된다. 그는 주님이 자기를 인도해 주시는 것을 사랑한다. 그가 바라는 모든 것은 주님으로부터 그에게 오는 것들과 같다. 그는 자기가 뜻하는 모든 것을 이룬다. 그 이유는 그가 천국적 삶과 일치 되는 것만을 뜻하려 하기 때문이다. 그는 악과 거짓을 정복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 그이유는 천국이 그 사람에게 존재해서 지옥을 누르기 때문이다. 그는 주님의 말씀으로부터 가르침을 받는다. 더욱이 그는 말씀안에 계신 주님 자신으로부터 가르쳐진다.
위와 같이 아름다운 인간 삶속에 천국의 복들이 만족되게 주어진다. 모든 바램은 신성한 사랑으로부터, 모든 생각은 신성한 지혜로부터 흐르게 되며 모든 행동은 신성한 힘으로부터 이어진다. 이 사람이 가지고 싶어 바라는 모든 천국 속의 것을 그는 소유할 수 있다. 이 사람이 가지고 싶어 바라는 것 중 천국 밖의 것은 하나도 없다. 자기가 원하는 것에 위와 같이 충분하고도 자유롭게 만족하는 조건에서 그 이상 더 바람직한 것이 있어질 수 있다고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우리의 바램이 보증됨

자기가 원하는 모든 것을 얻는다고 누가 보증할 수 있을까? 아마 아래의 두 가지 경우에만 보증될 것이다. 즉 자기가 자연적으로 바라는 모든 것을 획득하기 위해 그 획득에 반대되는 세력을 누를 힘을 가져야만 하든지, 또는 올바른 것에 대한 어떤 표준을 자기가 인정한 뒤, 자기가 바라는 것들을 그 표준에 맞추어 가든지 해야 할 것이다. 이를 달리 말해 본다면, 자기가 원하는 모든 것을 가질 수 있는 능력을 소유 하든가, 자기가 가질 수 있는 것만을 원하는 쪽으로 자신을 가져다 놓아야만 할 것이다. 그런데 누구나 다 아는 쉬운 것은, 어느 누구도 만물을 자기에게 종속시키고, 만물 속의 법칙을 마음대로 움직이는 주인이 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자기가 원하는 모든 것을 가지는데 성공할 수도 있는데, 이는 자신을 바꾸어지게 함으로서 가능하다. 우리가 주님안에 거하고, 신성한 의지에 자기를 종속 시키는 것, 자기 생각을 신성한 생각에 맞추는 것, 자신의 행동을 주님의 계명에 따라 움직이게 하는 것으로 가능해 진다. 이 사람은 자기가 갖지 못할 어떤 것도 바라지 않는데에 이른다. 그 다음 그는 자기가 하고저 하는 것을 주님께 묻게 되고, 묻는(ask ) 것이 그에게서 이루어 진다. 이루어 지는 이유는 주님이 주시고 싶어 하시는 것만을 주님께 요구(ask)할 것이기 때문이다. 거듭나는 사람, 천국적인 본성은 천국적인 것 외에는 어떤 것도 묻거나 요구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가 자유롭게 가질수 있는 것을 사용하는 면에서 자유롭게 모두 다 사용한다. 포도나무 가지라는 측면에서 그 사람은 포도나무를 통해 순환하는 생명의 모든 혜택을 향유한다. 주님께 거하는 천사들의 지혜는 얼마나 위대할까? 주님의 자비에 저항하는 악마들의 어리석음은 얼마나 처참할까? 각자 헤아려 보라.

각자의 바램들

주님은 악한 인간이 바라는 것이 행동화 되는 것을 억제하는 쪽으로 운행하신다. 왜냐하면 그와 같은 만족은 더 깊은 재난으로 빠지게 할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각자 삶의 매 단계에 있는 본성에 일치되는 것만을 간절히 바랜다. 따라서 그의 본성이 바뀌면, 그가 원하는 것도 변한다. 모든 것은 그것들의 조직화된 상태에 맞추어 바라게 된다. 즉 두 눈은 빛을, 귀는 소리를 바랜다. 물고기는 물을, 새는 공중을, 목축떼는 풀밭을, 육식동물은 고기와 피를 요구한다. 모든 것은 각각의 본성을 먹일 것을 위해 외쳐 호소한다.
위와 똑 같은 법칙에 의해 악마는 복수나 탐욕을 꼭 필요로 하고, 천사는 사랑과 순수성을 위해 겸손히 기도한다. 악마는 그 악마보다 더 사악한 악마에 의해 행동이 자제 되어야 하는 반면, 천사들은 즉각적으로 충만해지는 기쁨이 없는 바램이 아니면 숨도 쉬기 힘들다. “주님은 곧 바로 걷는 이들에게 어떤 선도 유보 하시지 않는다.”

만족

우리의 바램을 충분히 만족하게 하는 길, 영화로운 진리는 우리의 자아 의지가 모든 것을 정복함으로서 되는 것이 아니라, 자아 의지를 주님의 계명에 복종 시키는데에 존재한다. 우리는 무질서 속에 인간 조직이 내어 놓는 기묘한 혜택의 미끼 때문에 서로의 사이가 뒤틀어져 있다. 그래서 이 우주는 각자의 바램과 반대되어 있는 듯 여겨진다. 그러나 우리가 자아 의지에 재갈을 물리고, 천국 질서에로 귀환하면, 온 우주는 우리를 친구로 환대하는 쪽으로 돌아서고, 우리 발 아래에는 각자가 바랠수 있는 것들이 선물로서 놓여진다.
인간은 천국 삶을 위해 창조되어 있다. 인간이 이 삶안에 진입하면 즉각 새로운 세계의 문이 열린다. 그리고 사는 것이 진정으로 시작되었음을 스스로 발견한다. 그 다음 이들은 자기들이 뜻하고저 하는 것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고기는 물을 요구하고, 눈은 빛만을 추구할 것임을 주님께서 아시는 바, 이들이 묻는 쪽으로 이동하게 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주님께서는 만민이 요구할 수 있는 모든 것을 각 인간을 위해 설비해 두셨다. 온 우주를 보라. 그것이 영적이든 자연적이든 인간을 위한 집으로 창조되어 있다. 그리고 인간 조직에 필요한 모든 것이 공급되고 있다. 주님의 선물을 남용하지 않고 사용하는 사람은 그들이 바라는 것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다. 이들에게 꼭 요구되는 한 가지 조건은 그들이 주님안에 거하고 그분의 계명을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 이 조건의 충족없이 인간은 천국적인 복을 받을 수 있는 상태에 도달 할 수 없다.

열매를 맺음

“너희가 많은 열매를 맺고 참으로 나의 제자가 되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다.”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때란, 신성한 사랑이 그분의 자녀들의 삶 안에서 명백하게 들어날 때이다. “너희도 이와 같이 너희의 빛을 사람들에게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 (마태복음 5:16). 주님의 계명을 진실로 지키는 이들은 아버지, 즉 신성한 사랑을 자기의 심정과 삶으로 드높인다. 그들은 자신들의 행동에서 계명을 실천함으로 자기가 주님의 진정한 제자라는 본보기로 증거자가 되어 주님의 선함을 드러낸다.
어떤 진리도 그것이 실제에 사용되어 열매를 맺어야 살아있는 진리가 된다. 영속성을 지닌 씨는 꽃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열매속에 존재한다. 아름다운 진리를 단지 감상적으로만 보는 때가 얼마나 흔한지 모른다. 우리는 자주 진리에 대해 토론하며 생각하기도 한다. 제 아무리 토론하고 생각해도 일상 생활이라는 실제에 놓여지지 않으면 무슨 가치가 있는 것일까? “…열매를 맺지 않는 가지는… 모두 잘리운다.”

열매 맺지 않는 가지들

우리의 영적 조직 안에 있는 어떤 원리들이 체현되지 않을 경우, 그 원리들이 실제 사용될 때까지 그 속의 진리는 우리에게 심각한 진리로 존재한다. 어떤 진리가 매우 옳다고 여겨 반갑게 맞아 들였으나 실제에 사용하지 않았을 경우, 각자의 심판 때에 그 진리들은 영적 삶을 위한 열매를 맺지 않은 죽은 가지인 바, 그 진리들은 우리들에게서 잘리어 진다.

주님의 사랑 안에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해 왔다. 그러니 너희는 언제나 내 사랑 안에 머물러 있어라.” 신성이 사랑을 수단으로 인성과 하나를 이루셨듯이, 신성한 인간은 신성한 진리를 수단으로 살아가는 이들과 사랑 안에서 하나를 이룬다. 신성한 사랑은 신성한 진리 안으로 흘러 들고, 이 신성한 진리는 인간에게로 내려와 꽃을 피우며 신성한 사랑이 열매 맺어지게 한다. 신성한 사랑이 신성한 진리로 하여금 신성한 진리가 되도록 하였듯이, 포도나무인 신성한 진리는 인간이라는 가지들 안에 신성한 생명을 보내준다. 우리가 계속해서 주님을 사랑할 때, 우리는 계속해서 주님의 사랑 안에 있게 된다. 그이유가 주님은 그분을 기쁘게 영접하는 이들 안에 언제나 거하시기 때문이다.

계명을 지킴

“내가 내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 사랑 안에 머물러 있듯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물러 있게될 것이다.” 입으셨던 인성이 신성한 뜻을 성취함으로해서 신성과 하나를 이루셨듯이, 우리가 주님과 하나됨은 신성한 진리에 순종함으로서만 결과를 볼수 있다. 열매를 맺겠다는 인간의 모든 지식이나 지혜 등등 모든 것은 그 인간으로 하여금 악을 죄로 알고 금하고, 주님의 계명을 지키는 쪽으로 인도해 주어야만 된다. “모든 종교는 삶에 관련이 있고, 종교의 생명은 선을 행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계명을 지킴으로 인간은 주님의 형상과 모양을 따라가게 된다. 그렇게 되는 이유는, 계명이 신성한 생명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인간이 주님의 선에 의거 선을 사랑하고 행하는 만큼에서 그는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모든 악은 주님과 진정한 인간 삶의 정반대 이다. 신성한 명령을 준수하는 것은 우리 속의 심정과 삶에 신성한 사랑이 흘러들게하여 더 새롭고 광대해진 삶을 이루게 하며, 더욱 가지를 뻗는 바, “사람의 자, 곧 천사의 자”로 되는 충만을 향해 더욱 정진하게 한다.

삶 속의 진리

우리가 초심자일 경우, 진리의 발견에 매우 흥미있어 한다. 이때의 우리는 진리에 관하여 말을 한다고 하여 보아야 고작 적은 것, 낮은 수준에 불과 하다. 그나마 그 말들이 과거의 이야기들로 되어간다면, 그나마 그 진리는 삶 속에 열매를 맺지도 못한다. 이러면 우리의 가지들은 쳐내지고 깨끗케 할필요가 있게 된다. 우리는 주님의 포도나무에 소속되지 않는 가지, 즉 죽은 것들을 잘아 내어야 한다. 가장 큰 문제는 우리가 얼마나 많은 진리를 알고 있느냐가 아니라, 우리 사랑의 품질, 삶의 품질이 어떠하냐 이다. 우리가 진리에 흥미를 잃고 있다면, 우리는 포도나무에 붙어있지 않게 되어 포도나무의 생명이 우리에게 흘러들지 않는 바, 좋은 열매를 생산하지 못한다. 우리들 안의 어떤 것이 포도나무로부터의 생명의 흐름을 멈춰지게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진리에 대한 우리의 관심도, 진리를 위한 우리의 일, 진리에 반대되는 우리의 바램이나 생각들을 던져 버리려는 우리의 각오 등등은 교회 생활에서 발전하는 우리의 수준, 또는 그 반대인 뒤로 미끄러지는 정도를 측량하게 해주는 계기같은 역할을 담당한다. 그래서 만약 우리가 진리에 대한 흥미를 계속 간직하고 있다면, 이는 마치 큰 포도나무에 붙어있는 성장하는 가지가 되어 날마다 새 순을 더 내고, 새로운 꽃을 피워 새 열매를 산출하는 것과 같아 진다.

새교회 속의 진리들

자기가 갱신되고 있다는 것을 느끼고, 나날이 새롭고 더 나은 성장되는 삶 속에 있다고 느끼는 영혼(soul)의 경우 교회의 진리들은 하느님의 말씀으로부터 끌려 나와지고, 결코 늙거나 케케묵은 것이 되지 않는다. 위쪽으로 올라가고, 그리고 안쪽으로 깊이 들어가는 새로운 단계들은 두 개의 세계, 자연과 영(spirit)이라는 세계에서 새로운 빛과 국면 가운데서 나타난다. 즉 자라고 있는 영혼(soul)이 계속 전시 되면서, 주님의 자비와 선함을 보는데 있어서도 계속 새로운 관점이 자라 오른다. “이런 것들로해서 인간이 살고, 이런 것들 안에 내 영의 생명이 있사옵니다.” 사랑받아진 진리, 삶 속에 있는 진리는 늙거나 녹스는 일이 결코 없다. 진리의 사용(use)은 그 진리를 우리 속에서 생동하게 한다. 마치 계속적인 연습이 신체의 근육을 단련시켜 주는 것과 같다. 진리라는 포도나무의 성장은 계속 새로워 지는 바, 헌 가지는 버리고, 새 가지를 돋아 내서 팽창해가는 내향의 힘으로 움직여 진다.
신성한 말씀 속에 있는 속 뜻을 알게 해주는 새교회의 교리를 안다는 것은 말할 수 없는 큰 특전이다. 그러나 아는 것 만큼이나 책임도 증가 된다. 더욱이 장엄하고 천국적인 진리에 흥미를 잃어간다는 것은 우리가 향해야 할 더 높고 더 거룩한 삶에 흥미가 없다는 말이다. “저에게 깨끗한 심정을 창조하여 주소서. 하느님이시여… 올바른 영이 저에게 있도록 새롭게하여 주소서.”
진리에 대한 흥미가 이전보다 덜해져 간다면, 이는 수많은 세상의 관심사들, 또는 외적 환경에서 과오를 낳게 할 심각한 실수를 저지르는 격이 된다. 세상적 관심사에 더 신경을 써야 하겠다면, 자신의 방향을 결정지워 줄 진리들이 더욱 필요해진다. 좌우지간 우리가 진리에 자꾸 무관심해지고 있다면, 그 원인을 찾기 위해 자신의 심정을 관조할 필요가 있다. 우리가 주님의 진리에 흥미를 잃는다면 우리는 주님 자신에 대한 것 까지 흥미를 잃는다는 결과를 빚는다. 주님께서 이렇게 말하셨다. “너희가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물러 있게 되리라.

선한 목자

선한 목자
-신성한 사랑-

성서 본문: 요한복음 10장 1-16절

1. 예수께서 또 말씀하셨다. “정말 잘 들어 두어라. 양우리에 들어 갈 때에 문으로 들어 가지 않고 딴 데로 넘어 들어 가는 사람은 도둑이며 강도이다. 2. 양치는 목자는 문으로 버젓이 들어 간다. 3. 문지기는 목자에게 문을 열어 주고 양들은 목자의 음성을 알아 듣는다. 목자는 자기 양들을 하나 하나 불러 내어 밖으로 데리고 나간다. 4. 이렇게 양떼를 불러 낸 다음에 목자는 앞장 서 간다. 양떼는 그의 음성을 알고 있기 때문에 그를 뒤따라 간다. 5. 양들은 낯선 사람을 결코 따라 가지 않는다. 그 사람의 음성이 귀에 익지 않기 때문에 오히려 그를 피하여 달아난다.”
6.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 비유를 말씀해 주셨지만 그들은 그 말씀이 무슨 뜻인지 깨닫지 못하였다.
7. 예수께서 또 말씀하셨다. “정말 잘 들어 두어라. 나는 양이 드나드는 문이다. 8. 나보다 먼저 온 사람은 모두 다 도둑이며 강도이다. 그래서 양들은 그들의 말을 듣지 않았다. 9. 나는 문이다. 누구든지 나를 거쳐서 들어오면 안전할뿐더러 마음대로 드나들며 좋은 풀을 먹을 수 있다. 10. 도둑은 다만 양을 훔쳐다가 죽여서 없애려고 오지만 나는 양들이 생명을 얻고 더 얻어 풍성하게 하려고 왔다.”
11. “나는 착한 목자이다. 착한 목자는 자기 양을 위하여 목숨을 바친다. 12. 목자가 아닌 삯꾼은 양들이 자기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리가 가까이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도망쳐 버린다. 그러면 이리는 양들을 물어 가고 양떼는 뿔뿔이 흩어져 버린다. 13. 그는 삯꾼이어서 양들을 조금도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14. 나는 착한 목자이다. 나는 내 양들을 알고 내 양들도 나를 안다. 15. 이것은 마치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과 같다. 나는 내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바친다. 16. 나에게는 이 우리 안에 들어 있지 않은 다른 양들도 있다. 나는 그 양들도 데려와야 한다. 그러면 그들도 내 음성을 알아 듣고 마침내 한 떼가 되어 한 목자 아래 있게 될 것이다.”

목자

우리의 주님은 신성한 목자이시다. 그분의 신성한 사랑은 우리를 인도하시고 신성한 지혜는 우리를 가르치신다. 그리고 신성한 권능은 우리를 보호하신다. 우리는 이 세 가지 신성한 속성의 하나 됨 속에서, 주 예수 그리스도를 천상 천하의 한 분 하느님으로, 창조자, 구속자, 거듭나게 해주시는 분으로서 보게 된다. 주님은 구약 성서에서, “여호와는 나의 목자이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라…”라고 하여 여호와로서 알려져 있고, 신약성서에서, “나는 선한 목자라…”라고 선포하신다. 오늘 본문, 여타 많은 구절에서,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다” 라고 하시어 예수님은 한 분, 유일한 하느님, 여호와가 그분 자신임을 명백히 해 놓고 있으시다.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은 세 국면인 사랑과 지혜, 그리고 권능에서 신성한 생명을 인간에게 충분히 보여 주었다. 신성한 목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인간은 신성한 섭리의 지키심 아래 천국적 양우리로 인도되어진다.

정확한 의미로 국한해서 볼 때, 양(sheep)은 이타애의 원리, 또는 이웃을 사랑함을 표현한다. 넓은 의미에서, 양은 인간의 애정으로부터 있게 되는 모든 선한 원리를 표현한다. 개인적 측면에서, 주님의 양이란 주님의 사랑과 지혜를 많이 받고자 마음 문을 열고, 받아 자기 삶에서 체현할 준비가 된 이들을 말한다.

양우리 (sheepfold)

양우리는 천국에 있는 주님의 교회, 뿐만 아니라 지상의 교회가 주님께 신실하여 순종하고 있다면 그 교회까지 표현한다. 따라서 양우리는 천국적 조건을 갖춘 모든 이들, 그들이 영계에 있든, 자연계에 있든 모두를 망라하는 주님의 천국적 왕국을 말한다. 개인 측면에서 볼 때, 양우리는 거듭나는 삶 속에서 하나를 이루는 천국적인 선과 진리가 있을 때 우리 마음에도 존재한다. 비교 측면에서 양우리는 포도원으로 표현되는 영적 교회에 비해 천적 교회이기도 하다. 목자는 가르치고 인도하는 사람을 표현한다. 성실한 지도자와 선생은 내면의 사랑과 영적 생명에 의해 움직여지고, 타인들의 영적 생명이 발달되도록 도우려는 사랑으로 움직여진다. 양떼란 지도와 가르침을 받는 이들이다.

인간은 진리로 가르쳐지고 사랑으로 인도되어진다. 그런데 인간이 진리를 사랑할 수 있기 전, 또는 진리에 순종하기 전, 반드시 인간은 그 진리를 알아야만 된다. 이 진리는 영적 삶에로 가는 입구 역할을 한다. 따라서 영적 진리에 관한 지식은 인간으로 영적 삶에 들어가게 하는 문에 해당한다. “만일 너희가 생명의 나라에 들어가려거든 계명을 지켜라.” 그러나 인간이 계명을 지킬 수 있기 전 그는 반드시 계명에 대해 먼저 배워야 한다. 따라서 진리에 관한 지식은 진리의 삶에 인간을 소개시켜 주는 문인 것이다.
신성한 진리 측면에서 주님은 양우리의 신성한 문이시다. 문을 통하여 양우리에 들어가는 것은 진리를 수단으로 주님을 알고, 그분께 나아가, 그분의 신성한 인격 측면에서 그분을 인정하고 믿고 사랑하여 순종하는 것을 말한다. 신성한 인성 측면에서 주님께 접근하는 이들은 그분께 스스로 문을 열고, 양으로 표현되는 영적 선과 진리에 관한 원리들을 스스로 살아 있게 간직한다.
동양의 양우리는 돌담 같은 울타리로 사방이 둘러 쳐져 있고 한쪽에 문이 있어 밤에 모든 양이 들어가고 나면 잠그고, 아침에는 목자가 와서 문을 열고 양떼를 이끈다. 따라서 도둑이나 이리는 문을 열지 않고 다른 방법으로 침입할 것이다.

문지기 (porter, doorkeeper)

문지기란 우리의 합리적 능력, 또는 생각하는 능력을 표현한다. 이 능력은 마음의 문을 지키고 있으면서 우리의 생각과 애정 속으로 들어오려 하는 각종 사항들을 점검한다. 만일 우리가 삶에 관한 주님의 선하고 참된 원리들을 사랑한다면, 그래서 그분의 신성한 섭리들을 신뢰하고 있다면, 주님이 말씀 속에서 자신에게 밝혀 준 진리들은 자신 속에서 문으로 존재한다. 이렇게 우리에게 알려지고 수용한 진리 외에도, 우리의 합리력 역시 문으로서 계속 존재한다. 자신이 알고 인정한 진리의 문을 통과해서 들어가는 것은 무엇이든지 그에게 목자가 된다. 그것들은 천국으로 가는 길을 가르치고 인도한다.

딴데로 넘어 감

그러나 모든 악과 거짓된 영향력은 신성한 진리의 문이 자기들을 점검하기를 거절한다. 그들은 공인된 문으로 들어가지 않고, “딴데로 넘어 들어가려고” 애쓴다. 다시 말해, 우리의 감각적인 열정이나 편견 등을 통하는 부당한 방법을 써서 우리의 생각과 애정에로 들어간다. 자신에게 밝히 알려진 진리 외의 다른 방법, 즉 자신이 선하고 진정하다는 것, 꽤 쓸만하다고 여겨져서 우리 안에 들어오는 모든 것은 우리 영혼을 해치려고 하는 영적인 도둑이며 강도인 것이다. 악에 잘 기울려는 우리의 경향성(즉 우리의 자존심, 분노, 타인을 경멸함, 기타 지옥적 열정)을 통하여 우리에게 영향을 미치려 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환대한다거나 귀를 기울여서도 안된다. 마치 양들이 도둑이나 강도, 이리떼를 양우리에 들어오라고 환영할 수 없는 것과 같다. 이런 사실을 깊이 새겨 둔다면, 지옥이 내뿜는 영향력에 대항하여 투쟁할 때 과히 힘들지 않게 이를 물리칠 수 있을 것이다.
주님은 우리가 신성한 말씀에서 끌어내서 밝혀져 인정한 진리라는 문을 통하여 그분의 천국 영향력을 가지고 우리의 내향적 마음에 들어오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신성한 도움, 영적 생명을 공급받는데 있어서 신성한 말씀을 통하지 않고 삶의 여타 다른 길로 오려는 지옥의 영향, 세상적 방법에 기대해서는 안된다. “너희가 말씀에 의거 말하지 않으면, 너희 안에 빛이 없는 것이다.”

목자와 그의 양떼

동양에서 목자와 양 사이의 관계는 매우 친밀하다. 일반적으로 목자는 양떼의 소유자일 경우가 많다. 초지는 여기 저기 흐트러져 있어 목자와 양떼는 풀밭을 찾아 다녀야 한다. 게다가 물을 마시려면 더욱 먼 거리를 이동해야 했다. 이럴 경우 각종 사나운 들짐승의 공격을 받기 일쑤인 바, 양떼는 목자에 의존되는 일이 다반사였다.

양을 이름지어 부름

우리가 개나 말에 이름을 지어 부르듯, 목자들은 양을 이름지어 부른다. 그래서 양들은 자기 이름을 알고, 목자의 소리도 알고 있다. 양들은 목자를 신뢰해서, 목자가 부를 때 쉽게 다가와 목자가 어디로 가든 그를 따른다. 이와 같이 주님의 양들은 신성한 목자에 신뢰를 갖고 있다. 그들은 그분의 소리를 듣고, 그분의 소리임을 인식하여 그분의 진리에 순종한다. “주님은 그분의 양들을 이름으로 부르신다.” 이름이란 어떤 개인을 표시하기 위해 주어진다. 이름을 근원적으로 살펴보면, 각 개인은 자기들의 품질, 또는 인격의 생김새에 따라 이름이 주어져 있다. 이런 일은 북미의 인디안이나 기타 많은 국가에서 행해져 왔다. 이와 같이 이름은 품질을 표현한다.

양을 부름

우리의 목자 되신 측면에서 주님은 그분의 양들을 이름을 수단으로 해서 부르신다. 즉 노력해서 달성해야 할 영적 삶의 어떤 품질을 우리에게 밝혀 주실 때, 영적 삶의 상태나 품질을 우리에게 밝히 알리실 때, 그분은 진리를 수단으로, 즉 이름을 지어 부르신다. 주님께서는 각 인간의 삶의 매 단계에 있는 품질과 조건에 정확하게 맞도록 그분의 가르침과 인도하심을 채택하신다. 영적으로 그분은 각자에게 필요한 진보, 영적 조건에 채택 가능하기 위해, 순간적으로 그리고 정확하게 신성의 인도가 있기 위해, 그분의 양을 이름지어 부르시고 있다.

밖으로 데리고 나감

위와 같이 해서, “주님은 인간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신다.” 즉 선하고 진정한 원리와 그것을 이해함으로부터 일상 생활에 적용함이라는 데까지 이끄신다. 밖으로 데리고 나가시되 그분은 우리 앞에 서시어 데리고 나가신다. 다시 말해 돼지 떼를 몰아치듯 하는 충동이나 자극을 우리에게 주어 밖으로 몰아내시지 않는다. 마치 양들이 목자에게 인도되듯, 그분은 우리를 인도하신다. 이런 인도하심을 주님은 인간들 앞에서 보여 주신 선한 삶의 예를 가지고 성취하신다. 따라서 주님은 그분의 가르침과 본보기 속에서 언제나 인간 앞에 서 계신다.

목자를 따라감

“양들은 그를 뒤따라간다.” 즉 주님을 사랑하고, 자기 의지를 그분의 의지에 복종되게 하여 그분의 계명을 지킴으로 그분의 사랑 안에 거한다는 말이다. 그래서 그들은 신성한 섭리로 보호되어진다. 그들은 실제의 삶에서 그분을 따른다. 양들은 그분의 목소리를 안다. 즉 그들은 그분의 진리를 이해한다는 말이다. 진리에 순종하기를 기뻐 맞이하는 이들은 진리를 이해하는 상황에 자신을 가져다 놓게 된다. “네가 진리를 알게 되면 진리가 너를 자유케 하리라.” “주님의 뜻을 행하고 있는 그 사람은 교리가 하느님에 속한 교리인지 그렇지 않은지 알게 될 것이다.”

예증

여러분이 목마르고 배고플 때, 자기 육체가 무엇을 원하는지 안다. 그래서 먹고 마실 것을 발견했을 때 여러분은 그것이 먹고 마셔야 할 양식임을 금방 눈치챈다. 그리고 열심히 그것을 먹고 마신다. 그것을 먹어야 하느냐 먹지 않아야 하느냐라는 따위의 어떤 논쟁도 여러분 앞에 필요치 않을 것이다. 영적으로도 이와 같아서,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은 만족을 얻게 되는데, 그 이유는 그들도 자기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알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기 앞에 있는 선과 진리를 금방 눈치챈다. 그들은 천국 원리에 마음이 열리어 있어서 직바로 그 원리에 응답한다. 그들은 선에 속하는 좋은 품질, 진리에 신실해야 함을 직감하고 있다. 이 직감력(intuition)은 동물이 자기 먹이를 찾는 것이나 자기에게 부적당한 것을 경고해 주는 어떤 본능과는 아주 구별되는 능력이다.
주님의 양떼 각각 속에 있는 심정과 이해성은 선하고 진정한 원리에 응답한다. 이는 마치 눈이 빛에, 귀가 소리에 응하는 속도와 같을는지 모른다. 주님에 대한 그들의 사랑, 그분을 따르는 신실함은 영적 원리를 내향적으로 인식하게 한다. 그들이 아는 것은 논쟁 따위로 아는 것도 아니요, 자연적 감각으로 아는 것도 아니고, 심정으로부터 “사랑이 스스로 확신하게 해주는” 가운데 아는 것들이다. 주님의 영적 양들은 진리의 소리를 안다. 그 이유는 진리가 주님처럼 되라고 그들을 가르치기 때문이다.
주님이 산에서 가르치심을 끝내자, “군중은 그의 가르치심(doctrine)을 듣고 놀랐다. 그 가르치시는 것이 율법학자들과는 달리 권위가 있기 때문이었다.” 율법학자들도 교리를 가르쳤지만, 인간의 권위, 전통의 권위를 추켜세웠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분 자신의 권위, 영적 빛으로 진리를 가르치셨다. 볼 눈이 있는 자는 그리스도의 복음서 안에서 진리의 빛을 쉽게 본다.

낯선 사람

주님의 양떼들은 낯선 사람을 따라가지 않을 것이다. 그 이유는 영적으로 낯선 자란 주님과 우리 사이를 이간질하는 자, 주님을 사랑하지도 따르지도 않는 자이기 때문이다. 추상적 측면에서, 낯선 자란 신성한 진리로 볼 때 이상한 것, 즉 거짓 원리이다. 주님을 사랑하여 따르는 사람은 거짓된 설득이나 악한 영향력에 이끌려 가지 않는다. 그들은 그런 영향력을 거절하고 금한다. 악과 거짓에 대한 직감적 거부 반응은 지옥의 영향력이 모습을 드러낼 때마다 자동으로 울리는 경보 장치와 같은 것이다.

표현들

때때로 어떤 이들이 불평한 것 중 하나는, 양과 같이 힘이 없고 무방비 상태인 동물을 가지고 주님을 따르는 자들을 표현한다는 것은 부적당하지 않느냐 하는 것, 오히려 뭔가 더 강력하고 자기 방어력이 있는 짐승이 선한 자들의 표현물로 사용하는게 더 타당치 않을까 하고 말한다. 그러나 이들의 제시는 상응이나 상징의 본성에 무식한 자기를 폭로하는 것밖에 안된다. 자존심이 강하고, 강하다는 자만심으로 꽉 찬 전투성이 강한 짐승, 제 몸을 잘 지킬 수 있는 짐승들은 우리 속의 이기심, 타락하는 마음, 즉 구세주가 필요 없다고 하는 마음을 표현한다. 그러나 인도자를 꼭 구해야 한다는 양의 무력함은 거듭나는 인간, 자신을 구원하는데 자신은 무능력함을 느끼는 인간, 그래서 신성한 인도자가 필요함을 절실하게 느끼는 사람을 표현한다. 양의 유순함, 다정 다감한 속성은 내면이 바뀌어 거듭나는 인간을 표현한다.
이 비유는 일부 바리사이파인을 포함해서 군중을 향해 말해졌다. 그들이 이 비유를 깨닫지 못하는 것은 이상할게 하나도 없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더 가르치셨다. “나는 양이 드나드는 문이다.” 신성한 진리 측면에서 그분은 목자이신 신성한 사랑에로 인도하는 문, 그분의 교회, 천국인 양우리로 들어 갈 수 있는 문이다.

도둑과 강도

“나보다 먼저 온 사람은 모두 도둑이며 강도이다.” 이 말씀은 세상적인 시간이나 개인에 관련시킬 경우 글자대로는 아니다. 그 이유가 주님께서 주님 앞에 먼저 세상에 와서 가르치고 지도한 사람을 저주하실 리 만무이기 때문이다. 이 구절을 영적으로 볼 때, 주님 앞에 먼저 온 모든 것이란 중요도에 있어서 주님보다 자신을 먼저 놓는 모든 것들, 신성한 말씀 속의 진리보다 자신의 논리를 추켜 대는 자들, 주님이 밝혀 주시지 않아도 제 스스로 진리를 알 수 있다고 느끼는 자들을 말한다.
추상적 측면에서 살펴본다면, 악하고 거짓된 모든 원리들은 주님 앞에 자기 것을 먼저 놓으며, 그분 보다 자기 것들이 더 낫다고 추켜올린다. 악한 원리는 선이 자기 것이라고 주장하여 주님으로부터 선을 분리시키려 들므로 그것들은 강도이다. 주님으로부터 선과 진리를 신성한 것들로 여겨 받지 않으면 어느 누구도 그것을 받을 수 없다. 선과 진리가 주님으로부터 분리될 경우, 팔이 신체에서 잘려 나가 있는 것 같이 생명력을 상실하고 만다.

주님에 대한 믿음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신성한 속성을 믿는 것은 영적인 빛에 마음이 열리게 하여 영적으로 총명하게 해준다. 이런 믿음이 없을 경우, 인간은 자연적 빛에서만 살게 되어 영적 빛으로 올라서지 못한다. 천상 천하의 유일한 하느님이 주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인정하는 것은 영적 삶에로 들어가는 문인 것이다. “나를 수단으로 하지 않고는 누구도 아버지께 올 자가 없다.” 즉 신성한 속성과 개성을 알게 만드는 신성한 진리를 수단으로 하지 않고는 어느 누구도 신성한 사랑을 납득할 수 없고, 접근도 불가능하다는 말이다. 주님을 통하여 인간은 내면의 삶인 영적 삶에로 “들어가고,” 실제적 삶인 자연적 삶에로 “나오기도” 하는 바, 신성한 목자에 의해 인도되고 가르쳐지고 보호된다. 그래서 매일 해야 하는 적극적 삶 속에서 천국의 풀밭을 발견해 갈 수 있다. 다시 말해 이들은 신성한 속성의 내면적 이해에로 “들어가고,” “밖으로 나가” 일상 생활의 행위들에 천국 원리를 적용하게 된다.

목숨을 바침

선한 목자로서의 예수님은 인성을 입고 그 인성을 영화시키심 속에서, 마리아에게서 얻게 된 인간적인 모든 것을 죽이심 속에서, 신성한 인간이 신성 자체와 결합됨으로 해서 그분의 생명을 양들을 위해 주셨다. 이런 과정은 우리에게 본보기가 되는 과정이다. 우리가 영적으로 살기 위해 악에 관한 모든 것은 죽어야만 되는 것이다. 거짓 되고 악한 원리들, “도둑이며 강도”인 그것들은 인간에게 와서 모든 선과 진리들을 탈취하려 든다. 그러나 주님은 인간에게 오셔서 더욱 많은 선과 진리를 주시고 악과 거짓에서 선과 진리를 구해 주신다.

삯꾼

비유의 글자에는 선한 목자로서의 주님과 삯꾼 또는 악한 목자로서의 유대인의 지도자들과의 비교가 담겨 있다. 주님은 “목자처럼 그분의 양떼에게 풀을 뜯기시고, 새끼양들을 두 팔로 안아 가슴에 품으시고 젖먹이 딸린 양들을 곱게 몰고 오신다” (이사야 40:11). 그러나 삯꾼은 삯을 받기 위해 일하는 사람이지 자기가 할 수 있는 선을 위해 일하는 것은 아니다. 선한 사람, 비록 그가 적절할 대가를 받고 일하고 있다 해도 자기 일이 유용하기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이 때의 대가는 그의 삶이 기대하는 목적이 아니라 수단일 뿐이다. 이와 같이 영적 마음을 지닌 사람은 음식을 먹되 먹기 위해 사는게 아니라 살아서 유용한 인간이 되기 위해 먹는 것뿐이다. 삯꾼은 자아와 세상을 사랑하는 사람이요, 이기적 목적을 위해 이기적으로 일한다. 삯꾼의 경우, 세상적 소득이 중요한 과제이겠지만, 선한 자의 경우, 그것이 첫 번째 과제가 아니다.
삯꾼은 양을 소유하지 않는다. 즉 그는 삶에서 자신의 원리로 채택된 선한 원리가 없고, 자기 삶에서 그 원리가 체현되지도 않는다. 그는 양의 안전을 전혀 돌보지 않는다. 이런 삯꾼일지라도 원리에 관한 얼마간의 지식은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 지식에 실제로 흥미가 없다. 따라서 악들이 자신 속에서 일어날 때, 그는 그 악들에 투항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리에게 그것들을 내버려 두어 주님이 자신에게 기껏 가르치셨던 선하고 참된 원리들을 흐트러지게 하며 잡히게 한다.

이리

이리란 거짓 원리를 사랑함이다. 이 사랑은 세상적 마음으로부터 선을 포획하고 진리를 흐트린다. 그러므로 이리는 죄인 자신의 심정 속에 존재한다. 그래서 시험이 일어날 때, 즉 악과 거짓이 습격을 감행할 때, 악령이 자기를 덮칠 때, 그 사람 속의 원리의 수준이 삯꾼이어서 선한 원리라는 영적인 양을 내향적으로 돌보지 않는다면, 그는 영적인 양을 보호하기 위해 자기의 이기적 삶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그는 악령과의 대결을 회피함으로 악과 거짓의 진격을 허용하여 주님이 자신의 마음속에 이식해 두신 선과 진리 쪽으로 기울려 하는 품성까지 파괴되게 하고 말 것이다.

안다는 것과 알아지는 것

주님께서는 자기 양을 자기 것으로 알고 계신다. 양들은 그분을 사랑하여 그분 안에 거하고, 그분은 영원한 생명을 그들에게 주신다. 그런데, 주님과 아주 친하다고 떠벌리는 다른 것들도 있다. 심판 있게 될 때,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이렇게 말하신다. “나는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노라.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나에게서 떠나거라.” 그 반면, 주님은 이렇게 말하신다. “나는 내 양들을 안다.” 즉 주님을 사랑하여 삶으로 그분을 따르는 이들은 그분을 구세주로서 안다. 이에 대해 그들은 어떤 논쟁도 요구하지 않고, 인간적 권위로된 주장이나 교조도 필요 없다. 이들은 여인의 외침에 예수님을 뵈러 나온 사마리아인들, 그 뒤 그 여자에게 “우리는 당신의 말만 듣고 믿었지만 이제는 직접 그분의 말씀을 듣고 그분이야말로 참으로 구세주라는 것을 알게 되었소” 라고 말한 사마리아 사람들이다 (요한복음 4장).
세상적 인간은 그리스도에 관해 논하고, 그리스도의 자격 여부를 가지고 말다툼한다. 그러나 영적 인간은 그분을 보고 알고 그분을 사랑하고, 이해하고, 그분을 따라 영적 삶의 축복 안으로 들어간다. 진리는 인간의 영(spirit)에 호소한다. 육체적 눈에 보이는 기적 같은 외적인 사건은 우리의 감각들로 감탄과 경이를 뿜어내도록 강요한다. 그러나 기적들은 인간으로 영적 진리를 확신케 하지 못한다. 열린 영혼(soul)안에만 진리를 진리로서 아는 능력이 있다. 이 능력은 감각에 호소되는 것을 훨씬 멀리 초월한다. 영적 인간에게는 진리 그 자체 이상의 어떤 명백함이 없다. 영적 인간에게는 외부로부터의 어떤 보증(endorsement)도 필요 없다.

순백함(simplicity)의 필요

인간에게 가장 크게 필요한 것은 영(spirit)의 순박함, 삶의 여정에서 주님을 따르는데 필요한 조건들, 겸손, 사랑 있는 온유한 심정이다. 따라서 열이 있는 흥분, 이기적 포부, 예사롭지 않은 사건을 열망하는 따위는 없애야 한다. 그리고 선한 목자의 돌보아 주심 밑에서 일상 생활을 유용하게 만드는 것에 만족할 수 있어야 한다. 신성한 아버지(Divine Father)가 신성한 인성(the Humanity)이라고 인정하면서 신성한 인성은 영화하심(glorification)을 통해 신성한 아버지와 하나를 이루셨다는 것도 인정해야 한다. 이와 같은 상황, 선한 목자로서의 주님이 그분의 양을 인정하시고, 또한 그분의 양들은 각자의 수준에 따라 그분을 인정하면서 거듭남 속에서 그분과 하나를 이룬다.

다른 우리 (the other fold)

어떤 측면에서 볼 때 주님의 양우리란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다. 따라서 이 우리 안에 있지 않은 그분의 다른 양떼란 이방인들, 아직 교회에 들어와 있지 않은 이들, 그러나 가르침을 받아 인도될 사람들이다. 이를 좀더 꼼꼼한 측면에서 살핀다면, 두 우리(the two folds)란 주님의 왕국들, 하나의 거대한 천국을 이룰 천적 왕국과 영적 왕국이다. 영적 천국은 주님께서 육을 입고 오심과 영들의 중간 세계(intermediate world)를 정리 정돈하셨을 때 형성되었다. 이 때 영적 천국은 영들의 세계에서 오래 기다려 온 사람들로 형성되었다. 이렇게 해서 주님은 천적 양우리에 소속되지 않는 이들을 모으시어 한 목자 아래 영적 천국을 이루시게 함으로 그분이 보시기에 천국 전체는 하나의 거대한 양우리가 되었던 것이다.

새 생명을 얻으라

예수님께서는 그분의 생명을 다시 얻기 위해 목숨을 내려 놓으셨다. 이와 같이 거듭남 속에서 우리는 자신 속의 자연적이고, 이기적이며 세상적인 생명을 내려놓고 새로운 영적인 천국 생명을 얻어야 한다. “제 목숨을 살리려고 하는 사람은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얻을 것이다” (마태복음 16:25). 우리가 주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는 때, 그분을 더욱 절대적으로 신뢰하는 때, 이러한 때를 갖게 하는 것은 우리가 세상에서 근심 걱정 없고, 잘 먹고 잘 사는 잘되어 간다는 인생 시기, 가상적인 삶에서 보다 시련과 슬픔의 인생의 시기에 있는 경우가 더 많다. 이 경우에서 우리는 그분의 위대함, 그러면서도 온유하신 그분의 팔이 막다른 골목에 처박힌 극한 상황 넘어로 우리를 들어올리시는 것을 느껴 볼 수 있다. 팔레스타인에 있는 양들 같이 우리에게도 최고의 풀밭은 가파른 암벽 투성이의 산 남쪽 등성이에 펼쳐져 있다. 이 등성이에 도달하기 위해 우리에게는 강함, 용기, 인내가 필요하다. 그런데 신성한 목자는 우리의 강한 정도에 따라 인도해 주시고 유용한 쪽으로 우리 스스로 진력하도록 모든 강함을 주신다.

바리새인(바리사이파 사람)과 세리

바리사이파 사람과 세리
-독선-

성서 본문 : 누가 복음 18장 9-14절

9. 예수께서는 자기네만 옳은 줄 믿고 남을 업신여기는 사람들에게 이런 비유를 말씀하셨다. 10.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갔는데 하나는 바리사이파 사람이었고 또 하나는 세리였다. 11. 바리사이파 사람은 보라는 듯이 서서 ‘오, 하느님! 감사합니다. 저는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욕심이 많거나 부정직하거나 음탕하지 않을 뿐더러 세리와 같은 사람이 아닙니다. 12. 저는 일주일에 두 번이나 단식하고 모든 수입의 십분의 일을 바칩니다.’ 하고 기도하였다. 13. 한편 세리는 멀찍이 서서 하늘을 우러러보지도 못하고 가슴을 치며 ‘오, 하느님! 죄많은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 하고 기도하였다. 14. 잘 들어라. 하느님께 올바른 사람으로 인정받고 집으로 돌아간 사람은 바리사이파 사람이 아니라 바로 그 세리였다.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면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면 높아질 것이다.”

요약

회개하는 죄인이 자기가 선하다고 떠벌리는 자들 보다 더 나은 영적 조건을 갖추고 있다. 도덕적으로 외관이 깨끗한 사람이라 해도 그 심정은 악과 결합되어 있을 수도 있다. 오늘 비유는 풍유적이 아니라 아주 실제적이다. 따라서 그 교훈은 비유에 의해 가르쳐지지 않고 실례에 의해 가르쳐지고 있다. 이 비유는 독선(self-righteousness)을 꾸짖으시기 위해 주어지고 있다.

바리사이파 사람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유대인의 한 계층으로, 이들의 특징은 종교적 행사나 예식에 아주 엄격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들 중의 대다수가 독선적이어서 남을 깔보고 자신들이 타인들 보다 더 거룩하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그들은 겉으로는 매우 친절하고 관대하지만 속으로는 악한 인격의 마음을 표현한다. 이들을 두고 주님은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파사람들아, 너희 같은 위선자들은…” 라고 말씀하셨다 (마태복음 23장).

세리

세리들은 정복자인 로마제국이 유대인들에게 부과한 세금을 거두어들이던 사람들이다. 이 세리들도 대체로 같은 유대인들이었지만 배신자 취급을 당해 왔다. 본문에 등장하는 세리는 겸손한 세리이다. 이들은 자신이 잘났다고 우쭐대지 않는 사람 곧 겸허한 상태에 있는 마음을 표현한다.

성전, 기도, 등등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간다는 것은 우리의 심정이 주님께 말하는 것을 뜻한다. 기도란 주님께 내향의 마음을 여는 것이다. 바리사이파 사람은 보라는 듯이 서서 기도하였다. 그는 자신이 남보다 더 낫다고 느꼈다. 그는 행동 면에서 그것을 보여주고 있다. 게다가 타인에게 이렇게까지 말할 것이다. “나는 혼자 서서 기도해야 한다. 나에게 가까이 붙지 말라. 너 보다 더 거룩하기 때문이다.” 그는 중요한 자리를 자신을 위해 우선 선택한다. 주님께 감사드리는 체 하면서 그는 자신이 선하다고 떠벌리며 타인을 경멸한다.

심정 속의 악

그러나 주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치시는 바, 악은 심정 속에 있다는 것, 심정 속의 악 중 어떤 것은 아직 바깥쪽의 잘못된 행동으로 나올 기회가 없어서일 뿐 밖으로 표출된 악 보다 더 큰 악들이 있을는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자기의 본성이 지독하게 미운 것임을 발견할 때까지 제 눈에 보이는 자신의 모습에 우쭐대는 것이 우리들이다.
선한 사람은 타인이 지니지 못한 어떤 특출함을 자신이 가지고 있다는 것을 스스로 알게 되었다 해도 그것 때문에 으쓱거리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 때문에 주님을 찬양한다. 그는 자신의 장점을 잘 이용해서 많은 이들이 주님께로 인도 되도록 노력한다.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자기의 인격과 경건한 행동을 떠벌렸다. 자기들은 매우 신앙심이 깊어 어김없이 십일조를 바친다고 상상하나, 주님께서는 그들을 두고, “… 정의와 자비와 신의 같은 아주 중요한 율법들을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라고 꾸짖으셨다.

바리사이파 사람의 기도

바리사이파 사람의 기도의 특색은 놀랄 만 하다. 그 기도에는 자기 죄를 인정하는 것도 없고 도움을 필요로 한 것도 없다. 그는 회개할 필요성과 하느님이 도우실 필요를 전혀 느끼지 못하고 있다. 한마디로 자기 만족에 도취되어 있는 것이다. 그들은 자신 속에는 악이 없다고 보는 한편, 타인들의 죄에는 매우 날카로운 시선을 보낸다. 그리하여 타인을 깎아 내림으로 자신을 더 추켜 세우는 것을 추구한다.

타인을 경멸함

고결한 영혼은 고상한 인간을 믿는다. 그러나 교활한 인간은 타인의 동기를 언제나 의심한다. 부패된 영혼은 타인 속에도 미덕이 있다는 것을 믿고 싶어하지 않는다. 타인을 추정해 보는데 자신의 동기가 지닌 품질이 반영될 수밖에 없는 것이 인간이다.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예수님을 부패한 사람으로 간주하였다. 그들이 그렇게 간주한 이유는 주님께서 죄인들과 어울렸다는데 있다. 그들은 인간을 다루시는 데에 있어서 사랑과 동기에 중심을 두시는 주님의 속성을 음미하려 들지 않았다. 우리는 그분의 속성 측면에서 그분께 접근함으로 그분을 이해할 수 있다.
그래서 만일 누군가가 죄인이라 해도, 우리는 그를 동정하여 돕는 쪽에 있어야지 그를 경멸하여 분리하려 해서는 안될 것이다. 그 이유는 모든 인간은 거듭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목적을 위해서라면 누구든지 도울 필요가 있는 것이다. 아마 그도 죄에 빠지기 전, 우리가 심한 시험에 저항했던 것 같이 그도 자기 속의 악한 경향성에 저항해 보려고 노력 했었을는지 모른다.
독선은 악중에서도 가장 지독한 악으로 정복하기에 가장 힘든 악이다. 자신이 성인 군자에 맞먹는다고 상상하거나, 자기가 죽으면 아마 천국 중에서도 상석에 앉게 될 것이라고 어림잡는 이들은 천국적 삶의 조건을 지독하게도 음미하지 못할 것이고, 미안하지만 천국의 하석도 차지하지 못할 것임을 저절로 발견하리라.
타인을 경멸하는 누군가를 발견하면 필시 그에 따른 악도 발견되는 게 통상적이다. 그 사람이 의로운 듯 착각되었다면 그의 의는 필시 외향적 측면일 뿐 심정 측면에서의 의는 아닐 것이다. 선한 자는 악을 미워하되 특별히 자신 속의 악을 미워한다. 따라서 그는 죄인을 미워하지 않으며 업신여기지도 않는다. 이 사람은 죄인을 그의 죄로부터 분리해 낸다 그러나 저 잘났다는 외적인 사람은 죄인을 그의 죄로부터 분리하지 않는다. 그는 타인 속에 있는 악은 경멸하나 자신 속에는 그런 것이 없다고 착각한다.

세리

세리의 조건은 위와 다르다. 경멸과 차별 대우를 받아 온 그는 성전 멀찍이 서서 자신은 성전에 가까이 다가설 존재도 못된다고 여긴다. 그는 낮은 위치, 겸손한 지위만을 취한다. 그는 자신의 눈을 하늘로 감히 들어올리지도 못한다. 자신에 대한 무가치함과 죄의식으로 그는 자신의 인격이 비천하다고 느낀다.
영적으로 세리는 진리로 잘 훈련되지 않은 마음, 진리를 높은 관점으로 끌어올리는데 있어 자기 이해성이 준비 안된 마음, 그럼에도 하느님의 명령에 자신이 불성실했음을 인정하는 마음을 표현한다. “저의 불법이 저를 사로잡아 위를 쳐다보지 못했나이다.” “주님이시여! 정의는 당신의 것일 뿐, 저에게는 잡동사니뿐입니다” 라고 고백하는 마음을 표현한다.

가슴을 침

세리가 자기 가슴을 쳤다는 것은 악의 근원이 자기 심정이요, 이 악은 정죄 되어야 마땅한 것, 그것들에 자신이 반대되게 하려고 무척 노력한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그는 자신 속의 어떤 선함도 떠벌리지 않고 자신이 죄인이라고 솔직하게 인정한다. 그래서 그는 어떤 변명도 늘어놓지 않으며 자기가 의롭다고 어깨를 으쓱대지도 않는다. 그는 어느 누구의 잘못도 혹평하지 않는다. 오로지 이렇게 외친다. “오, 하느님! 죄많은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 그는 자신을 깎아 내리고 주님을 드높인다. 자기만 옳은 줄 아는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제 잘난 척 하는 것만 내놓을 뿐이어서 그들은 주님의 도움을 전혀 느끼지도 않는다. 그러나 회개하는 세리는 “당신 보시기에 어느 누구라도 의롭게 산다고 감히 말할 수 있겠습니까? 부디 당신의 종을 심판하지 마소서…” 라고 간구하는 바, 이 기도의 영은 다음의 시편과 같이 느낀다. “당신은 제물을 즐기지 아니 하시며, 번제를 드려도 받지 아니 하십니다. 하느님, 내 제물은 찢어진 마음 뿐, 찢어지고 터진 마음을 당신께서는 얕보지 아니 하실 것입니다” (51:16,17).

집, 올바름

그래서 주님께서는 “잘 들어라. 하느님께 올바른 사람으로 인정받고 집으로 돌아간 사람은… 바로 그 세리였다.” 라고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마음 속의 집이란 우리의 의지이다. 악은 의지 속에서 시작된다. 그러나 자신 속의 자연적인 악들에 대항하게끔 자기 의지를 놓고 거듭남을 추구하기로 작정해 버리면 언젠가 우리는 결국 “올바른 사람,” 심정과 삶에 의를 만드는 때를 맞이하고야 만다. 성전에서 집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내향적인 영으로부터 자연적인 마음에로 내려가는 때를 말한다. 이때 우리는 실제 행동에서 무언가를 이루게 된다. 집이란 단어를 둘로 대비하여 생각한다면, 인간의 내향적 의지는 하느님의 집(성전)이고, 그의 자연적 의지는 지상에 있는 인간 자신의 집이다.
내향적 의지를 가지고 죄를 뉘우친 세리는 주님을 만나 자기 죄과를 인정한 뒤 자연적 마음과 삶에로 내려가 주님의 자비와 진리라는 측면에서 그의 행동을 올바르게 만들었을 것이다. 세월이 지난 후 그는 자기 속에서 “자비와 진리가 함께 만나고, 정의와 평화가 서로 입맞추었다.” 라고 고백할 것이다. 그가 자신을 보건대 의롭지 못하다고 평가하겠지만, 이제 그는 주님 보시기에 올바른 사람이 된 것이다. 그 까닭은 그가 자신의 무가치함을 위의 것과 동시에 가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는 자기가 행하는 모든 선함을 주님의 공로로 돌리리라.

올바르지 못한 것

그러나 개혁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의를 만들지도 못할 것이다. 그 이유는 자신 속 깊은 곳에 감추어져 놓인 악을 내던지려 노력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기들이 첫째라고 간주하겠지만 천국에서 평가할 때 꼴찌에 지나지 않는다. “너희의 정의가 바리사이파 사람들이나 율법 학자들의 정의를 넘어서지 않고서는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아, 너희 같은 위선자들은 화를 입을 것이다. 너희는 겉은 그럴싸해 보이지만 그 속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썩은 것이 가득차 있는 회칠한 무덤 같다. 이와 같이 너희도 겉으로는 옳은 사람처럼 보이지만 속은 위선과 불법으로 가득차 있다.” 거듭남의 초기에 우리는 마음속에 바리사이파 사람과 세리, 즉 독선과 겸손 둘 다를 지니고 출발한다. 거듭나는 작업은 전자를 추방하고 후자를 발달시키는 과정이다.

우쭐댐

이 비유는 원리를 실제적인 서술로 요약해 놓고 있다. 즉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면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면 높아질 것이다.” 물론, 이 서술이 포함하고 있는 것은 겸손해지되 차후에 우쭐대려고 처음에는 겸손한 척 하는 겉으로만 겸손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이런 자는 자신의 의지, 이해성, 그리고 신중함이 하느님의 선과 진리, 그리고 섭리와 비등하거나 조금 더 높다고 우쭐댈 소질이 충분한 것이다. 이런 자의 행동은 자신을 더 낮은 영적 조건에로 빠뜨리고 말아 실제로 자신이 낮아지고 마는 것이다.
주님께서 그를 벌주기 위해 낮은 데로 빠뜨리는 것이 아니라 저 스스로 인격 면에서 낮은 표준에 머물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의지나 이해성을 신성한 의지나 진리에 종속시켜 그분의 명령에 의해 사는 사람은 실지로 삶의 높은 영적 표준을 채택한 셈이 된다. 인격 면에서 그는 드높임을 받게 된다. 고백도 회개도 하지 않은 죄는 우리와 더불어 남아 있게 되나, 진실로 고백하며 회개해서 더 이상 짓지 않게 된 죄는 우리들로부터 떨어져 나간다. 마치 잘못을 저질렀던 이전의 인격으로부터 멀리 여행하는 듯이 된다.
주님께서 강경하게 정죄하신 악 중에서 자기를 뽐내는 악(self-exaltation)보다 더 큰 악은 없을 것이다. 자기 본위로 움직이고 있는 그분의 제자들에게 겸손을 보여 주시기 위해, “…하늘나라에서 가장 위대한 사람은 자신을 낮추어 이 어린이와 같이 되는 사람이다” (마태복음 18:4) 라고 가르치셨다.

신성한 도움

인간이 자기 스스로 악의 사슬을 끊는다는 것은 아주 어렵다. 그러나 회개는 그의 마음이 신성한 도움을 받을 수 있게 해준다. 그러나 우쭐대는 자는 회개를 추구하지 않는다. 인간이 자기 스스로 행한다고 하여 생산된 선은 순수한 선이 아니다. 이 선은 자기 공적이라는 것으로 이미 색칠해져 있을 뿐이다. 천사들은 주님의 인도와 도움 없이는 어떤 조그마한 선도 행할 능력이 없음을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악마는 어떤 천국적인 선도 받고 싶어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인간이 우쭐댈 때, 그는 인간 삶의 필연적 결과로 자신이 창피를 당해야 한다.
이런 법칙이 어떻게 작동되는가를 우리는 명확히 볼 수 있다. 인간이 자기 생명을 주님으로부터 천국을 통해 끌어당기겠다면, 그는 주님과의 연결을 반드시 가지고 있어야 한다. 이 연결 관계가 더 충분하게 솔직한 관계로 되면 될수록, 더 충만 되고 완전한 삶이 그의 것이 된다. 이 연결 고리를 끊어지게 하는 갖가지 것들은 신성한 축복을 방해하는 요소이다. 자기 본위로 움직이겠다고 하는 인간 속의 갖가지 것들은 천국 생명을 받지 못하게 하여 자신에게 올 수 있는 인격의 생명 고리를 끊어지게 만든다. 인간은 주님으로부터 생명을 받는 단순한 그릇에 불과하다. 이 그릇은 유입되는 생명을 썩게 할 수도 있고, 그 생명을 고결하게 받을 수도 있는 그릇이다.

인간 영역

모든 인간은 각자 자기를 지배하는 사랑으로부터 인격의 품질을 갖게 된다. 이 품질은 인간 전체에 고루 퍼져 있으면서 활동 영역에서 각 인간의 모습을 드러내 준다. 이것은 인간을 두루 감싸고 있는 어떤 분위기인데, 우리는 이를 영역(sphere)이라고 부른다. 식물의 경우, 장미이든 독성이 있는 잡초이든 모두 제 나름대로의 영역을 가지고 있어 그 영역 때문에 우리는 각 식물을 식별한다. 개는 냄새라는 예민한 감각으로 주인의 영역을 알아내서 주인을 따르게 된다. 우리의 영역은 영적이고 자연적인 것 둘 다를 가지고 있다. 주님께서 참생명을 인간에게 흘려 보내실 때, 이 생명은 인간 고유의 영역을 통과하지 않고는 인간에게 흘러들 수 없다. 깨끗한 비라 해도 죽어 썩어 가고 있는 시체에 떨어질 경우 그 비의 영향이 바뀌듯, 인간의 영역은 흘러드는 생명의 품질에 영향을 미친다.

생명의 말씀

천국 생명이라는 동일한 품질이 주님으로부터 모든 인간에게 흐르는 바, 두 가지 부류의 인간이 똑같이 이 생명을 받는다. 그리고 각각은 그 생명을 자기의 고유 품질로 변화시킨다. 악마는 지옥의 영역이 감싸고 있으므로 선을 악으로 부패시키는 바, 주님의 축복을 저주로 바뀌게 한다. 애당초 주님께서 내보내신 생명은 천국적인 것이지만 이 생명은 악마 속에서 지옥이 된다. 주님께서 순수하게 주시는 것들을 인간은 자신의 불순물 안으로 흡입한다. 그런고로 주님은 악마에게 천국을 주실 수 없다. 그 이유는 천국에서와 같이 받지 않기 때문이다. 악으로 빽빽해진 영역은 모든 선과 진리를 질식시켜 썩게 만든다. 마치 유독 가스로 꽉 찬 항아리에 신선한 공기가 유입될 경우 그 공기마저 같은 품질로 떨어져 버리는 격이다. “너의 불법이 너와 하느님 사이를 갈라지게 한 것이다. 너의 죄가 그분의 얼굴을 가리운 것이다.”
주님은 악 속에 거하실 수 없다. 오로지 우리가 받아들인 그분의 선과 진리 속에서만 거하실 수 있다. 그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는 높고 거룩한 곳에 있되, 회개하는 겸손한 영과 더불어 그곳에 있는다. 그리하여 뉘우치는 자들의 심정을 재활시켜주고 겸손한 영을 다시 살려 주리라.” 그러나 저만 옳은 줄 여기는 마음은 이기심과 악이라는 침침한 영역만을 창조하여 천국 원리가 뚫고 들지 못하게 한다. 그러나 겸손은 인간 영역을 부드럽게 하며 신성한 태양이 비치도록 허용하고 굶주리고 목마른 영혼에 천국의 영향이 스며들도록 한다. 그리하여 겸손한 자는 자기가 행한 선함, 자기가 아는 진리들이 자신 스스로에게서 근원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신성한 생명이 계속 자기 속에 흘러듦으로 자기는 한 순간이라도 버틸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있다. 죄를 뉘우치는 겸손한 사람은 자신의 인격과 주님의 인격 사이의 차이점을 보게 된다.

예증

때로 주님께서는 인간이 큰 죄에 빠지는 것까지도 허용하신다. 그 이유는 그가 그렇게 빠지지 않고서는 달리 자기 속의 악을 보고 회개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과정을 거쳐 회개한 사람은 신성한 도움의 절실함을 고통스럽게 의식한다. 그리하여 그는 주님의 도움을 추구하고, 그 도움에 자신의 마음을 연다. 그러나 독선적인 사람은 주님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느끼지 않는 고로 마음 문을 열 필요도 느끼지 않는다.
겸손은 야곱의 사다리와도 같이 인간 마음에 놓여져 천국과 주님에게 까지도 도달 가능하게 해주고, 주님의 특사인 천사들이 내려오는 도구로 사용되어 인간으로 하여금 한 계단 한 계단 높은 위치에로의 인격의 상승이 가능하게 한다. 이런 사람은 “힘에 힘을 보태어 시온의 하느님 앞에 나와 선다.” 인간이 자신의 선함을 떠벌릴 뿐, 자기 속에 악이 있음을 부인할 때, 그는 자기 속의 악을 자기의 것으로 채택하는 바, 그 악 자체가 곧 그 사람 자신이 된다. 이러면 사람 속의 어떤 악도 그 사람으로부터 분리될 수 있는 길이 없다. 죄를 고백하는 겸손한 사람은 그 죄를 자신에게서 분리하고, 자기 속의 악을 거절하며 미워한다. 이런 사람에게 주님은 접근 하실 수 있고, 그가 고백하고 미워하는 죄로부터 그가 멀리 떨어지도록 그를 인도하여 주신다.
자기를 추켜 대는 사람이 자신의 선함을 떠벌려 자기 속의 악도 선이라고 우기는 동안, 겸손한 사람은 이렇게 외친다. “하느님, 선한 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어지신 분이여, 내 죄를 없애 주소서. 허물을 말끔히 씻어 주시고 잘못을 깨끗이 없애 주소서. 내 죄 내가 알고 있사오며 내 잘못 항상 눈앞에 아른거립니다” (시편 51:1-3).

외적인 겸손, 선한 일

인간 겸손의 증거는 그 사람의 예절(manner) 속에서도 발견되지 않는다. 오로지 그의 삶속에서만 발견이 가능하다. 위선은 그 목적을 감추기 위해 겸손의 탈을 뒤집어쓰고 나타나는 때가 아주 흔하다. 경건한 외모 그 자체는 신앙의 등차와 비례하지 않는다. 그것들이 안에 있는 내용물과 상응 될 때, 즉 내향의 원리가 밖으로 빠져 나온 만큼에서만이 비례가 성립된다. 속에 원리가 없는 껍데기는 죽은 것이나 다름없다.
주님을 인정하고 사랑하는 가운데 행하지 않는 인간의 일들은 선이 아니라는 것을 근거로 선한 일은 구원에 필수 요건이 아니라는 것을 더욱 부각시키려 들면 우리는 또 다른 착각의 그물에 걸리고 만다는 것도 미리 눈치채고 있어야 한다. 일만 가지고 인간이 구원되는 것도 아니고 믿음만 가졌다고 가능한 것도 아니다. 오로지 선한 원리로부터 착수된 선한 일 속에 사랑과 믿음이 담겨 있어야 구원이 가능하다. 회개, 그것이 인간을 구원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회개는 인간이 악에서 돌아서게 해서 선 쪽으로 향하게 해준다. 본문의 세리는 갑자기 의로워진 것이 아니라, 사랑과 믿음, 주님께 순종하는 삶을 영위한 결과 점차적으로 올바른 사람이 된 것임을 우리는 간과해서는 안된다.

세련됨 (culture)

오늘 주제는 우리에게 또 하나의 경고도 보내 주고 있다. 즉 외모로 볼 때 세련 되게 보이는 것이 거듭남이라고 착각하지 말라는 것이다. 아주 도덕적이고 세련된 듯 보이는 사람이 더러운 심정을 소유할 수도 있다. 찬란한 깃털로 덮인 새가 지저귀는 소리가 불협화음일 때가 많다. 그 반면 지극히 평범한 깃털을 지닌 새일 지라도 그 소리는 매우 달콤함을 귀에 전달하여 주기도 한다. 감각적인 측면, 즉 외모의 세련됨은 낮고 천한 인격을 덮고 있을 때가 많음을 우리는 유의해야 할 것이다. 악행을 저지른 본산지인 바빌론을 문화적 측면에서 본다면 세련됨의 중심이었다.
외적 세련됨에 도사린 한가지 특별한 위험은 세련되게 보이지 않는 타인을 깔보려는 경향이 짙다는 것이다. 그러나, “하느님은 속마음을 헤아리신다.” 자아를 찬양하는 영, 자아 사랑으로 자신이 부유하다고 느끼는 영은 세상을 향해 자신을 뽐내 보이고, 자만 보다 더 나을 것이 없다고 간주하는 바, 마치 바보들이 돌진하는 곳에서 천사들이 밟힐까 걱정해야 하는 격이다. 이런 영의 소유자는 영적 삶을 위한 최적의 기회를 모두 놓치고 만다. 그러나 겸허한 영, 유전적인 악한 경향성 속의 못된 것들을 인식하는 영의 경우, 설사 아주 힘든 환경 여건에서까지도 거듭날 수 있는 성장의 기회를 주님의 자비는 발견하게 해 주신다. 마치 삭막한 바위틈에 떨어진 씨, 죽음을 피할 수 없는 바위라는 여건 속에서도 씨는 자신의 뿌리를 위한 발판을 발견하고, 더 길고 더 강한 뿌리를 내려보내 얼마 안되는 흙으로부터 성장의 기회를 포착한다. 그리고 그 뿌리는 더욱 힘찬 뿌리를 생산해 바위틈을 비집고 내려가 견고한 기반을 형성해 뭇 나무들처럼 성장을 영위한다. 진실로 “주님께서는 올바르게 살고자 하는 이들로부터 어떤 선도 유보하시지 않는다.” “이 사람아, 야훼께서 무엇을 좋아하시는지 무엇을 원하시는지 들어서 알지 않느냐? 정의를 실천하는 일, 기꺼이 은덕에 보답하는 일, 조심스레 하느님과 함께 살아가는 일, 그 일밖에 무엇이 더 있겠느냐? 그의 이름을 어려워하는 자에게 앞길이 열린다” (미가 6:8).

핑계들

핑계들
– 천국 삶에 무관심 –

성서 본문: 누가복음 14장 16-24절

16.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어떤 사람이 큰 잔치를 준비하고 많은 사람들을 초대하였다. 17. 잔치 시간이 되자 초대받은 사람들에게 자기 종을 보내어 준비가 다 되었으니 어서 오라고 전하였다. 18. 그러나 초대받은 사람들은 한결같이 못 간다는 핑계를 대었다. 첫째 사람은 ‘내가 밭을 샀으니 거기 가 봐야 하겠소. 미안하오’ 하였고 19. 둘째 사람은 ‘나는 겨릿소 다섯 쌍을 샀는데 그것들을 부려 보러 가는 길이오. 미안하오’ 하였으며 20. 또 한 사람은 ‘내가 지금 막 장가들었는데 어떻게 갈 수가 있겠소?’ 하고 말하였다. 21. 심부름갔던 종이 돌아 와서 주인에게 그대로 전하였다. 집주인은 대단히 노하여 그 종더러 ‘어서 동네로 가서 한 길과 골목을 다니며 가난한 사람, 불구자, 소경, 절름발이들을 이리로 데려 오너라’ 하고 명령하였다. 22. 얼마 뒤에 종이 돌아 와서 ‘주인님, 분부하신 대로 다 했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자리가 남았습니다’ 하고 말하니 23. 주인은 다시 종에게 이렇게 일렀다. ‘그러면 어서 나가서 길거리나 울타리 곁에 서 있는 사람들을 억지로라도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도록 하여라. 24. 잘 들어라. 처음에 초대받았던 사람들 중에는 내 잔치에 참여할 사람이 하나도 없을 것이다.”

요약

천국은 자기 인격을 천국 인격으로 만들고자 하는 이들에게 항상 열려져 있다. 그 이유가 천국은 어떤 장소 속에 존재하지 않고 조건(condition) 속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와 반대로 천국 품질을 사랑치 않는 자를 강요해서 천국 인격으로 만들 수 있는 힘은 누구에게도 있지 않다. 천국을 바래지 않는 자에게는 설사 그것이 선물로 주어졌다 해도 받고 싶어하지 않는다. 거룩한 성의 문은 언제나 열려 있지만, 악인은 성 밖에 있기를 더 좋아한다. 그 이유는 그가 선한 인격 바깥쪽에 있기를 더 선호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떤 선한 것에도 배타적인 사람은 설사 주님 자신으로부터 초대를 받았다 해도 선한 인격에로 입문하려 들지 않는 것이다.

잔치

동방에서의 잔치는 걸출한 장소에서 벌어지는데, 흔히 주최자의 지위나 부에 따라 잔치의 규모가 달라진다. 결혼 잔치는 종종 칠일간 계속되었다. 아마 가장 큰 잔치가 있게 되는 경우라면 왕의 취임식에 뒤이은 잔치일 것이다. 그 이유는 그 나라의 남편 격으로 사람들이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주님의 오심에서 그분은 신랑으로, 교회는 신부로 표현되었던 바, 거듭나는 삶은 흔히 결혼 잔치에 비유되어 왔기도 하다.
비유에서 언급하는 “큰 잔치”는 꼭 저녁 만찬이랄 수 없겠지만, 그 날 중 가장 중요한 때이었을 것이라 생각된다. 그러나 핑계(변명)들이 주어진 정황으로 볼 때 즉 그들이 밭을 보러 간다던가, 황소를 부려 보러 간다는 핑계들을 미루어 짐작컨대 낮 동안이었을 것으로 사료된다. 본문의 잔치가 저녁 만찬(supper)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역시 옳다고 생각된다. 그 이유는 저녁은 옛 교회가 기우는 것을 표현하기 때문이다. 잔치란 심정과 지성에 영양분을 공급하는 영적인 선과 진리로 벌어지는 마음의 잔치를 표현한다. 따라서 큰 만찬(great supper), 또는 하루 중 제일 중요한 식사란 각자를 주도하는 사랑(ruling love)과 합리적인 총명에 속한 것들에 영양을 공급하게 되는 정신적 잔치를 표현한다. 한 마디로 이 만찬은 “영혼의 흐름과 이성의 잔치”이다.

어떤 사람

“큰 잔치”를 준비한 어떤 사람이란 신성한 인간, 주님이시다. 그분은 거룩한 말씀 속에 모든 선과 진정한 원리로 영적 잔치를 차려 놓으시어 “선에 굶주린 영혼을 만족하게” 해주신다. “이 산 위에서 만군의 야훼, 모든 민족에게 잔치를 차려 주시리라. 살진 고기를 굽고 포도주를 잘 익히고 연한 살코기를 볶고 포도주를 맑게 걸러 잔치를 차려 주시리라” (이사야 25:6). 주님께서는 그분의 은혜로운 초대에 기쁘게 응낙하는 이들을 위해서 천국 양식으로 차려 놓은 그분의 식탁을 언제나 준비해 놓고 계신다. 이 잔치의 충만함, 이 잔치에 참석 한데 따른 기쁨은 오로지 경험에 의해서만 알 수 있는 충만이요, 기쁨일 뿐이다. 그분의 거룩한 말씀 안에는 인간 영혼에 꼭 필요한 모든 양식이 들어 있다. 선한 애정과 진정한 생각들에 있는 모든 다양함은 심정과 지성을 지탱시켜 주는 양식들이다. 이것이 잔치요, 이 잔치에서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만족을 얻게 된다.”

초대

넓은 측면에서 주님은 그분의 거룩한 말씀을 인간에게 가르치심으로 모든 인간을 천국 잔치에 초대하고 계신다. 그래서 말씀을 듣게 되는 이들은 자신이 주님에게 초대되었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런데, “잔치 시간이 되자,” 즉 인간이 자기 마음으로 하여금 주님의 진리에 더 가까이 접근시키어 소득을 올릴 준비가 되었을 때, 주님의 종들은 그에게 와서 천국 잔치가 준비되었음을 통보한다. 그래서 그 사람에 대한 주님의 특별한 초대는 “그 영과 그 신부에게 어서 오라”고 말해진다.

한결같이…

그러나 비유에서 초대된 손님들은 “한결같이 못 간다는 핑계만 대었다.” 이 핑계는 주최자와의 어떤 동의로, 또는 그와의 불일치로 참석 못하는게 아니라 각자의 목적(purpose) 때문이었다. 목적에 이의가 없어 찬성한 것은 결과나 목적과도 일치를 이룬다. 이 세상 모든 것은 원인과 똑같게 결과를 산출한다. 짐승이나 새들도 같은 종류는 같은 종류의 습관을 가지고 있다. 울새(robin)들은 언제나 같은 노래를 부르고, 어디에 거처를 두던 같은 종류의 둥우리를 친다. 이와 같이 같은 종류의 통치하는 사랑을 가진 마음들은 그 사랑이 서로에게 보이지도 않고 알고 있지 못하다 해도 그들에게 공통된 목적에 의해 말하고 행동하고야 만다.
무수한 형체로된 자아들, 그 인격의 내향적 품질 역시 무수하게 다르겠다고 생각되지만 무수한 그 성질의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공통점이 존재한다. 그것들은 한결같이 선함을 적대시하고, 진리에는 무관심하다. 거룩한 말씀 속의 진리들이 인간의 자연적 마음에 심어졌기는 했지만 감각적 생명인 가시와 엉겅퀴들이 자라 올라 말씀을 질식시키고 열매 없게 만든다.

역사적 응용

천국과 지상 사이에 교통이 있게 유대인들 앞에는 구약성서라는 잔칫상이 펼쳐져 있었다. 따라서 말씀이라는 빛을 가진 유대인들은 빛 가운데 걸었어야 할 것이었다. 그러나 각종의 세상적인 것과 이기적 목적으로부터 그들은 자기들의 감각적 영혼이 즐기기 싫어하는 천국 잔치에의 참석을 피하느라 이리저리 핑계를 대어왔다.

세 핑계

본문에서는 세 핑계만이 주어지고 있다. 그럼에도 초대받은 모든 이들이 한결같이 못 간다는 핑계를 대었다고 말하고 있다. 따라서 본문의 세 핑계는 타락되어 가는 사람의 일반적 상태를 특징 있게 말해 주는 것이다. 각기 특별한 핑계는 세 가지 일반적인 머리 글자로 분류할 수 있다. 즉 거짓 교리로 있게 된 핑계, 악한 애정 속에 있는 이들의 핑계, 잘못된 삶으로 인해 악과 거짓에 결합된 이들의 핑계이다.

첫 핑계

첫 번째 사람은 “밭을 샀으므로” “거기 가보아야겠다”라고 핑계 대었다. 씨가 뿌려지는 밭(field)이란 진리가 뿌려지는 마음을 표현한다. 따라서 마음 중에서 지적 측면을 말한다. 이 사람은 주님의 말씀 속에서 선과 진리라는 큰 잔치에 초대받았다. 그러나 그는 선과 진리라는 음식을 먹고 싶지 않았다. 그는 어떤 거짓 원리에 이미 그의 입맛을 다시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그 원리를 사서, 내 것 삼겠노라고 작정하고 있던 차였다. 지금 그는 그 거짓 원리에로 자기 애정을 가지고 “가서,” 자기 생각을 가지고 더 충분하게 “보아” 확실히 자기 것임을 확인하고 싶기만을 바랬다. 한마디로 그는 그것들이 자신이라고 여기기를 원했다는 말이다. 그는 주님 말씀 속의 선과 진리에 관한 원리 보다 거짓 원리에 더 군침을 흘리고 있었다. 그러하니 그는 주님의 잔치에 갈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주님께서 그분의 종들, 즉 명백한 진리로 이 사람에게 자기 의무를 다하도록 말했을 때, 그는 주님 말씀인 잔치를 원칙적으로는 용납하고 있었지만, 자기의 이기적인 관심거리가 그의 마음을 먼저 점령했던지라, 당장은 갈 수 없다고 핑계를 대어 발을 뺀 것이다.

둘째 핑계

두 번째 사람은 겨릿소 다섯 쌍을 샀는데, (매매가 마무리되기 전) 부려 보러 간다고 핑계대었다. 소(ox)는 동양에서 농사일에 사용되고 있다. 따라서 겨릿소들을 사기에 앞서 그것들이 과연 잘 훈련되고, 힘세고 건강한지 시험해 보는 것은 아주 중요한 것이다. 소란 자연적 애정을 표현하는데,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이 애정이 주는 느낌을 가지고 활동한다. 그러나 타락하는 사람의 경우, 소는 악한 자연적 애정을 표현한다. 이 애정은 악의 자연적 수준에 있는 탐욕들이다. 이것들은 주님의 잔치에 기꺼이 가지 않는다.
이 소들을 부릴 때 멍에를 메게 하거나 소 전부를 한꺼번에 움직일 수 있게, 즉 부리는 소들이 서로 협동해서 일을 할 수 있게 겨리를 지우기도 한다. 다섯 쌍이란 열 마리의 소이다. 본문에서의 열이란 숫자는 자연적 마음속에 있는 타락해 가는 그들의 애정을 말한다. 우리의 열 손가락, 또는 열 발가락은 우리의 자연적 삶 속에 있게 되는 모든 의무들을 표현하고, 이 의무들은 우리의 모든 애정들로부터 흘러나오게 된다. 정신적인 소들, 이런 자연적 애정들을 증명해 보아야겠다는 것은 그것을 작동시켜 본다는 것이요, 그것들에 몰입한다는 것인 바, 그것들로부터 얼마나 많은 즐거움이 나오는지 알아보겠다는 말이다. 이와 같이 우리가 자신 속의 악한 애정들에 몰입되고 말 때, 우리는 주님의 천국 잔치에 갈 수 없노라고 핑계를 대고야 만다.

셋째 핑계

세 번째의 핑계는 결혼이었다. 아주 중요한 약속이 있으면 참석 안해도 된다는 것이 세 번째 사람의 원칙이다. 사실 본문 글자대로 보면, 그는 핑계를 대기는커녕, “내가 지금 막 장가들었는데 어떻게 갈 수가 있겠소?”라고 대들었다. 천국적 결혼은 우리의 선한 애정과 진정한 생각의 정신적 결혼, 또는 우리의 거듭나는 의지와 이해성이 거듭나는 원대한 목적을 위해 하나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와 정반대 되는 결혼, 즉 우리의 악한 애정과 거짓 생각의 지옥적 결혼, 또는 우리의 타락하는 의지와 이해성이 이기적인 목적을 위해 하나 되는 것도 있다. 이런 조건에서의 사람은 천국 잔치를 싫어하는 바, “여건이 이러이러한데 내가… 어떻게 갈 수 있겠나?” 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들의 관심사는 전혀 다른 곳에 있다. 그들은 자기 자신의 잔치를 더 선호하고 있다.

구실(pretext)들

지금 글자대로 볼 때 본문의 핑계들은 참석하고 싶지 않은 이들에게 있는 구실(명분)들이다. 땅을 산 자는 잔치에 참석하고 난 다음 날 땅을 보러 갈 수도 있다. 소를 샀다는 자도 잔치에 참석한 후 소를 시험해 볼 수 있기도 한 것이다. 마누라를 얻었다는 사람도 그녀와의 약속을 잔치 이후로 미뤄진다 해서 그 결혼이 깨지는 것도 아니다. 그 이유는 그 당시의 시대 환경을 참작한다면, 남성은 여성보다 발언권이나 결정권이 훨씬 강하게 작용했던 시대였기 때문이다. 세 핑계들 모두 잔치에 참석하기를 간절히 바랜 사람이라면 하등 문제가 되는 사항들이 아니다. 이 사람들에게 본문의 구실 거리들이 발생했다 해도 그 구실을 차선에 두었다면 잔치에 참석하는데 하등 지장이 없었을 것이다.
이런 핑계들이 당사자를 정당화시켜 주는 이유는 타락하는 인간이 선과 진리라는 천국 잔치에 초대받았기 때문이다. 이 세 핑계는 오늘날 자신의 영적 문제에 무관심한데 대해 자신을 정당화시키는 모든 범주를 망라해 주고 있다. 사업이 바빠서… 재산을 불리느라고… 집안 청소나 빨래가 밀려서… 이런 등등의 세상사들의 처리가 불필요하다고 우길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따라서 이런 등등의 핑계는 외적 문제에 정신이 쏠린 사람들의 일요일 아침을 휘저어 놓아 그 세상 일이 인생의 전부인 듯 확대되어 비쳐진다. 한 가지 주목해야 할 점은, 이런 모든 사항들의 근원지는 자연적인 것에 기울려는 인간 본성이지, 우리의 판단에서 오는게 아니다는 것이다. 한 마디로 이것들은 논리적인게 못되는 바 쉽게 반박되는 핑계들이다. 그들 모두 정직하지 못한 것이다.

글자에서의 교훈

글자대로 볼 때 비유는 위법 사항을 다루고 있지는 않다. 밭을 사서 보러 간다는 것, 소를 샀으니 부려 보아야겠다는 것, 결혼한다는 것, 모두가 인간을 위해 있어질 수밖에 없는 올바른 행위들이다. 그러나 글자에서의 교훈은 자연적 문제들에 마음이 빼앗기도록 허용함으로서 영적 문제를 소홀히 다룬데 대한 것이다. 사실상 시험은 매우 미묘한데, 그 이유는 어떤 사건이 시험이라고 인식하지 못한 채 빠져 있을 때가 허다하기 때문이다.
결국 우리가 주시해야 할 것은, 과연 바깥 일들에 마음이 빠지도록 한 근원이 무엇인가이다. 그것은 자아(self)인 것이다. 자아는 우리를 주님에게서 멀어지게 하는바, 주님의 잔치에 무관심하게 하거나 아예 무시해 버리게 하기까지 만든다. 밭을 사는 비유가 성서에 또 한군데 있다 (마태복음 13:44). “감추어 놓인 보물”이 묻혀 있는 밭, 보물이 있음을 안 이 사람은 진리라는 밭을 샀다. 그가 그 밭을 산 이유는 황금의 선함이라는 큰 보물이 진리라는 밭에 묻혀 있었기 때문이다. 소를 가지고 밭을 갈아 보는 방법 중에도 타락하는 삶에 빠지지 않고서도 경작이 가능할 수 있다. 더구나 결혼하는데 있어서도 그러한 바, 우리가 천국에서 더 멀어지지 않고 오히려 선함이 진리와 결혼한다면 우리는 더욱 더 천국에 가까워진다.

둘째 집단이 초대됨

초대되었던 사람들이 핑계만을 통보했을 때, “심부름 갔던 종이 돌아와서 주인에게 그대로 전하였다. 집주인은 대단히 노하여 그 종더러 ‘어서 동네로 가서 한 길과 골목을 다니며 가난한 사람, 불구자, 소경, 절름발이들을 이리로 데려오너라’하고 명령하였다.” 이 둘째 집단들은 사회적으로 볼 때 별볼일 없는 사람들, 거지 신세에 가까운 사람들이다. 주인이 노했다고 서술되고 있는 것은 선과 악 사이에 존재하는 대립, 서로가 반대됨을 표현하는 것이다. 주님은 악인에 대해서까지도 노하시는 분이 아니다. 그 이유는 그분은 사랑 자체이시기 때문이다. 오로지 자연적 인간이 자연적 수준으로 상상할 때 주님도 성내실 것이라고 착각할 따름에서 본문에 성냈다는 서술이 있어진 것이다. 잔치가 벌어지면 제일 먼저 초대된 사람들이 배부르게 먹고, 남은 것이 있으면 주위를 맴도는 가난한 자, 거지들까지 와서 잔치 음식을 다 먹어 치우는 일이 흔하다. 따라서 비유에서 명명되는 것들은 꼭 특이한 말은 아닌 것이므로 자연스레 이해될 것이다.

표현적인 의미

잔치에 초대된 사람들은 주님의 말씀을 가졌던 유대인들이다. 그리고 유대인들이 거절했을 때 잔치에 입장하게 된 기타 사람들은 유대인들이 생각할 때 버림받은 자들이라고 간주했던 이방인들이다.
사람들이 집들을 짓는 성읍이란 마음 안에 짓게 되는 체계적인 교리를 표현한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은 인간 마음을 향해 하느님으로부터 천국을 거쳐 내려오는 체계적인 진정한 교리를 말한다. 사람들의 통행 수단인 성읍(동네)의 한 길(street)과 골목(lane)이란 정신적인 방법들, 즉 마음속에 있는 크고 작거나, 또는 일반적이거나 개별적인 측면에서 있는 교리 속의 진리를 표현한다. 이 진리들은 주님의 말씀의 글자 안에 존재한다.
주님의 종, 신성한 진리가 우리의 자연적 애정들을 부르고 우리의 이해성에 발표될 때, 우리 속의 이런 것들은 자신들에게 먼저 관심 있는 것이 있어 주님의 잔치에 참석 않겠다고 초대장을 찢어 버리고 만다. 그러나 주님은 사랑하시는 섭리 속에서 다시 종들을 보내어 우리 속의 이방인 같은 상태들, 즉 훈육은 안되어 있지만 호의적인 심정 상태들로 하여금 잔치에 참석하라고 부르신다. 이렇게 해서 주님의 말씀은 모든 것에 퍼져 가고 모든 것을 구하시려 하신다. 하느님의 말씀에 관한 지식이 우리 기억 속 어느 한 귀퉁이에 쳐 박혀 있다 해도 진리인 주님의 종은 그 구석까지 찾아 들어가 거듭나는 삶이라는 천국 잔치에 그 마음들을 부르시는 것이다.

셋째 집단

“길거리(high-way)나 울타리(hedge)곁에 서 있는 사람들”은 성 외곽에 있는 사람들인 바, 이들은 교회 바깥쪽에 있는 사람, 또는 주님의 말씀에 관한 지식이 없는 사람들을 표현하고 있다. 주님의 잔치에서는 이런 사람들이라도 만일 그들이 악을 멀리 하고 선을 행한다면 그들을 위한 자리가 있다는 말이다.

개인적인 적용

이를 각 개인이라는 측면에서 살펴보자. 우리 주님은 우리 속의 통치하는 사랑과 각자를 이끄는 생각들에 진리를 보내신다. 그런데 우리 속의 그 사랑들이 그분의 천국 잔치에 참석하기를 거절할 때, 그분께서는 이방인 같은 상태, 아직 진리에 경청할 여유가 있는 마음의 구석까지 진리를 보내신다. 우리가 자만심에 빠져 있는 가운데서 우리는 자기 속에서 가장 좋고 귀한 것이 자아라고 간주한다. 그러나 우리 속의 가난한 사람, 불구자, 소경, 절름발이 같은 사람 측에 끼지 못할 것 같은 상태들, 자아 찬양을 부추기는 느낌이나 생각들이 무시해 버린 단순하고 어린아이 같은 상태들, 이것들이 주님의 잔치에 참석하게 되는 상태들이다.
타락하는 삶일 경우, 우리는 더 나은 삶의 시작을 경멸한다. 그럼에도 주님은 우리를 각자의 악으로부터의 구원이 성공되게 하시는데, 이때 주님은 우리 속에 있는 바리사이파인이나 서기관들 같이 짐짓 잘난 체하며 목에 힘이 들어간 정신적 상태를 수단으로 이용하지 않고, 각자가 자기 속에서 경멸해 온 것들, 겸허함이나 상냥함, 어린 아이 같은 순진한 상태를 불러일으키시고, 주님의 진리는 우리 속의 그런 것들을 발달시키심으로 악에서의 구원을 성취하신다.
물론 각자 속의 통치하는 사랑(ruling love)도 거듭나져야만 할 것이다. 그러나 거듭난 후의 통치하는 사랑은 이전의 각자 속에 있었던 통치하는 사랑과는 그 품질이 전혀 딴판이 되어 자신도, 누구도 옛것과 비교가 불가능하다. 자신이 가난하다고 하여 목에 힘을 뺀 인격, 자기 속의 선함은 각종 불순한 것과 뒤섞여 있어 온전한 선함이 아닌 불구자 같은 선함뿐이라고 인정하는 인격, 정신적으로 올바로 걷게 하는 수단인 순수한 진리에 무지하다는 절름발이 같은 인격, 진리를 볼 능력이 없다고 말하는 소경 같은 인격, 이와 같이 초라하게 여겨지는 인격들이 하늘의 도움을 기꺼이 용납하고, 천국의 도움에 호의적인 반응을 보인다. 그 이유는 그것들만이 자신이 무지하고 무가치함을 알고 인정하기 때문이다. 터지도록 배부르다는 자에게 밥을 먹으라고 주는 것 같이 어렵고 어리석은 일은 없을 것이다.

억지로라도…

길거리나 울타리 곁에 서 있는 사람들을 억지로라도 데려다가 집을 채우도록 종들에게 명령되고 있다. 사실 이 구절에서의 억지(compel)란 말은 물리적 힘은 아닐 것이라 본다. 종 한 명이 성 외곽의 배회자나 거지 떼거리에 가서 완력을 사용할리 만무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참석하라고 말하는 수준이었을 것이라 본다. 따라서 이들은 자기들의 경향성이 강요받지는 안했다. 그 이유는 그들이 기꺼이 가고 싶었기 때문이다. 만일 그들이 참석을 주저했다고 가상해 본다면, 그 이유는 그들이 잘나서가 아닌 자신의 무가치함 때문이었을는지 모른다. 단지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참석할 수 있게 용기를 주는 어떤 보증뿐일 것이다.
주님은 거룩한 말씀 속에서 종과 같은 부탁하는 어조로 우리를 “억지로라도” 잔치에 참석하도록 하고 계시지 않을까?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지고 허덕이는 사람은 다 내게로 오너라. 내가 편히 쉬게 하리라.” “나에게 오는 사람을 결코 내쫓지 않으리라” 등등의 말씀이 우리 귓전을 스치고 있지 않을까? 주님께서는 그분의 초대장을 이해성에 먼저 보내시고, 후에 심정에도 보내신다.
오늘 비유는 “왕의 아들의 혼인 잔치”와도 매우 유사한 듯 보이고 있다. 그러나 두 비유는 각기 다른 때에 말해지는 바, 동일한 비유로 착각할 필요는 없다. 그 이유는 두 비유 각각은 각기 특별한 사항을 가르치고 있기 때문이다.

초대에 응한 이들

본문 가운데서 주님의 초대를 거절한 이들은 사회적 신분이 높다는 계층이었고, 초대에 응한 이들은 아주 평범한 이들이었음에 주목해 보아야 한다. 그들이 초대에 응하게 된 이유는 그들 마음이 옛 전통에 사로잡혀 있지 않고 권력이나 현재의 신분 따위로 인한 체면과 관계없었기 때문이다. 진리는 “안다는 사람들과 똑똑하다는 사람들에게는 모든 것을 감추이시고,” “오히려 철부지 어린아이들에게는 나타내 보이신다.” 거듭남의 영적 결혼은 선한 생활로 선과 진리를 결합시키는 이들만에게서 성사되는 결혼이다. 따라서 머리로만 진리를 알뿐 그에 따른 행함이 없는 이들에게는 철저히 감추어져 있다. “선한 것들에 배고파하는 이들은 배부르게 되겠지만, 배부르다고 하는 이들은 텅비게 된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은 만족하게 될 것이다.”
자신을 자아 사랑으로 채워 만족하는 이들은 “내향적 만족이 무엇인지조차 모른다. 그 이유는 그들이 말씀을 읽지 않기 때문이며, 더욱이 주님을 찾지도 않기 때문이다. 오로지 그들은 바깥쪽 것들이 무엇인지만을 알고 그것들로 기뻐한다. 그들은 내적인 만족을 가질 수 없다” (A.E. 1162). 주님은 인간이 천국 생명을 받고자 하면 누구에게나 주신다.

핑계와 이유

이제, 우리는 핑계(excuse)와 이유(reason)를 조심스럽게 구별지어 보아야 한다. 뭔가를 하고 싶었는데 할 수 없었던데 대해서는 적절한 이유가 있을 수 있다. 이유는 일반적으로 긍정적인 상태 쪽에 해당되므로 원인을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핑계는 소극적이고 부정적이어서 흥미의 결핍을 보여준다.
인간 마음을 미리 채우고 있는 상태가 그 인간으로 하여금 진리에 얼마나 무관심하게 하는지 모른다. 새교회의 가르침이 그런 마음에 접근하게 될 때 우리 모두 무관심이란 것을 경험할 수 있다. 수많은 이들의 경우, 그들 마음은 감각적인 바램과 계획들로 마음을 꽉 메우고 있다. 그래서 그들은 어떤 영적인 것에도 배고픔을 느끼지 않는다. 어떤 이들은 자신의 사상들, 편견, 자기 견해만이 똑바르다고 은근히 주장하는 자만심, 또는 탐욕의 원형들로 마음속을 꽉 메우고 있다. 따라서 진리에게 들어가 있으라고 방을 내어 줄 여유가 없는 것이다. 또 다른 경우, 어떤 이들은 세상에서 세력을 확보한 어떤 종파의 이론에 마음을 다 홀려서 어떤 새로운 진리도 기대하지도 않고 설사 그가 새 진리를 접할 기회가 있다 해도 자기 속의 옛 것에 도로 만족하고 만다. 어떤 이들은 자연 과학에 마음이 사로잡혀 있어 영적인 것들에 관한 어떤 암시에도 경멸적이다.
위에 열거된 것들 말고도 더 많은 원인들로부터 우리는 과거 성경 시대에 있어온 함성 소리 같은 소리를 자주 듣게 된다. 오래 전이나 지금이나 같은 소리를 듣게 되는 것은 인간 마음이 주님의 것 이외의 것으로 차 있기 때문이다. 그 때나 지금이나 인간 마음을 점령한 것들은 주님을 거절하고 있다. 그래서 주님은 인간이 예상 못하는 통로로 오신다.

우리의 핑계들

주님이 초대하시는데 어떻게 인간이 거절할 수 있단 말인가? 하고 초대 불응 불가론을 펼지도 모른다. 그러나 각자 삶을 뒤져보자. 우리가 아는 각 진리는 주님의 잔치에 우리를 초대하고자 마음 문 밖에서 서성거리고 있다. 자신이 행해야 할 것이라고 아는 것만큼 하지 못할 때, 우리는 그 실패만큼 주님의 초대를 거절하게 된다. 베드로는 자기가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하지 않을 것이라고 장담했었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을 모른다고 했고 게다가 세 번씩이나 계속했다. 우리는 자신이 포기하기를 별로 원하지 않는 것, 자질구레한 일들이라 간주하는 것, 즉 나쁜 버릇(vice)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되지 않는가? 이런 잘못된 습관이나 성벽이 주님의 초대를 수용하지 못하게 하는 핑계들임을 주지해 본적이 있는가? 우리가 주님의 잔치를 소홀히 해 버리게 하는 것이 우리가 이미 잘 키워 마음과 행동에 자리잡아 옳은 것인 냥 비쳐지는 그릇된 습관이 아닌지… 검토해 보아야 할 것이다.
해야 할 일임에도 자기가 하고 싶지 않아서 핑계를 찾는 것은 얼마나 손쉽게 발견해 내는지 모른다. 이렇게 핑계를 대는 습관은 우리 속에서 쉽게 자라 오른다. 주님의 초대가 우리 속에 보다 더 큰 영성을 길러 주므로 참 좋은 일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정작 주님의 초대가 있을 경우 생각하는 것은, 주님께서는 때를 잘못 맞추신다고 결론짓는다. 그 이유는 우리가 이기적이고 세상적인 계획, 또는 자기가 하고 싶지 않은 때, 주님의 초대를 싫어하는 때 주님의 진리가 우리에게 초대장을 전달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때 우리가 그 진리에 대꾸하는 것, 고작 “잠깐 실례하겠습니다”는 한마디로 그분의 정의를 거절한다. 한가지 확실한 것은 자기 이익만 챙기려는 것, 자기 편리주의라는 우리 속의 자아 사랑이나 세상 것만을 사랑함은 우리 속에서 주도권을 주님의 진리에 이양하고 싶어하는 때는 결코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새로운 자극을 받기 위해, 자신의 느낌과 생각들의 새로운 방향을 위해 “억지로라도” 주님께 나아가야 할 것이라 본다. 아마 자녀를 양육해야 할 부모라면 그 자녀에게 위의 사항은 자질구레한 사항들이라 생각되겠지만, 미래에는 그것이 치유되기 힘든 악한 습관이 됨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좋은 때가 언제 오나

많은 사람들이 “행운이 언제나 내게 오려나?” 하고 무척 갈망한다. 그러나 그중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 행운을 위해 노력하지 않고 있다. 우리가 악을 금하며 주님께 나아가는 것만이 천국 잔치에 참석하는 것이다. 좋은 때란, 자신이 그런 때를 맞고 싶다면, 당장이 최적의 때인 것이다. 우리가 큰 특권을 소유했다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그 특전을 남용하지 않고 슬기롭게 사용하는 일이다. 초대받았다는 것과 잔치에 참석했다는 것은 사회적으로나, 영적으로나 동등한 가치를 지닌 상태가 아니다. 수많은 일들이 우리로 잔치에의 참석을 방해할는지 모른다. 우리 모두가 지닌 인격이란 것은 영적 잔치를 위해 인간에게 아주 적합하기도 하지만, 자주 그 잔치를 인간에게서 배척하게 부추키기도 한다. 따라서 주님의 초대를 기쁘게 응낙하는 가장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수단은 억지로라도 그분의 계명에 순종하는 것밖에 없다. 다시 말해 “만일 네가 영생의 나라에 들어가고 싶다면 계명을 지켜라”이다. 계명에의 불순종은 천국에로 초대하는 주님의 초대장을 찢어 버리는 격이다.
그런고로 주님의 초대는 언제나 지금 존재한다. “너희 마음이 완악하지 않다면, 너는 내 말에 귀를 기울일 것이다.” 두 아들의 비유에서 주님은 우리에게, “얘야, 너 오늘 포도원에 가서 일을 하여라…”고 당부하고 계신다. 주님을 예배하는 것은 단지 교회에 가서 무릎꿇는 것으로 마무리 되는게 아니라, 오늘 악을 금하고 선을 행하려 노력하는데서 결실을 본다. 간혹 사람들은 거액을 투자해 지은 웅장한 교회 건물, 감정을 끓게 하는 설교, 북적거리도록 좌석을 메운 교인, 이런 등등의 외적 핑계에서 만족해한다. 주님께 나아 온다는 것은 악에서 빠져나오는 것이다.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초대받은 사람은 행복하다.” “생명의 나무를 차지할 권세를 얻고 성문으로 그 도성에 들어가려고 계명을 지키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러므로 너희는 양식 아닌 것을 위해 돈을 소비하며 만족하지 못할 것을 위해 애쓰느냐? 나에게 귀를 기울여라. 좋은 것을 받아먹어라. 너희 영혼이 풍족하여 기뻐하리라.”

부정한 재판관

부정한 재판관
– 끊임없는 기도 –

성서 본문 : 누가 복음 18장 1-8절

1.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언제나 기도하고 용기를 잃지 말아야 한다고 이렇게 비유를 들어 가르치셨다. 2. “어떤 도시에 하느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도 거들떠보지 않는 재판관이 있었다. 그 도시에는 어떤 과부가 있었는데 그 여자는 늘 그를 찾아가서 ‘저에게 억울한 일을 한 사람이 있습니다.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십시오.’ 하고 졸라댔다. 3. 오랫동안 그 여자의 청을 들어주지 않던 재판관도 결국 ‘나는 하느님도 두려워 않고 사람도 거들떠보지 않는 사람이지만, 5. 이 과부가 너무도 성가시게 구니 그 소원대로 판결해 주어야지. 그렇게 하지 않으면 자꾸만 찾아 와서 못 견디게 굴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6. 주님께서는 계속해서 말씀하셨다. “이 고약한 재판관의 말을 새겨들어라. 7. 하느님께서 택한 백성들이 밤낮 부르짖는데도 올바르게 판결해 주지 않으시고 오랫동안 그대로 내버려두실 것 같으냐? 8. 사실 하느님께서는 그들에게 지체없이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실 것이다. 그렇지만 사람의 아들이 올 때에 과연 이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 볼 수 있겠느냐?”

요약

거듭나기 위한 끊임없는 노력은 결국은 성취하고야 말 것이다. 거듭남을 추구하는 사람은 자기의 자연적 마음에서 오는 반대적 충동이 있다 해도 영적 마음을 항상 열어 두어 주님의 영향을 받을 필요가 있다. 설사 잘못된 원리가 자신의 자연적 생각을 지배하는 상황에 있다 해도 심정에 있는 성실함, 즉 일상 생활에 사용하기 위해 진리를 갈망할 경우 그 바램은 언제나 그것에 적절한 진리를 얻을 수 있다. 주님께서는 주님을 찾는 이들에게 그분의 신성한 진리로 언제나 함께 하시되 각자의 정신적 수준에 맞추어 지도록 하여 주신다. 그래서 이들이 거듭나는 삶에 들어갈 조건을 구비하면 즉각 그들 속에 있는 적들을 물리쳐 주신다.

도덕

일반적으로 성서의 비유 가운데서 우리는 비유의 도처에서 이야기 속에 있을 도덕적 교훈에 관한 것이 수집되는 경우가 많다. 더욱이 이 비유와 그 다음에 있는 비유의 경우, 각 비유 바로 앞절에서 얻게 되어 있다. 따라서 이 비유의 자연적 수준의 교훈을 찾는 것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 이유는 자물쇠 옆에 열쇠가 놓여 있는 격이기 때문이다. 비유는 영적인 진리를 예증해 주는 자연적인 그림들이다. 각 비유의 그림들은 그림에 앞서 존재하는(pre-exist) 목적(purpose)들로 색이 칠해져 있고, 그 다음 그림 속의 세부 사항들은 목적의 필요성에 따라 배열을 이루고 있다.

글자적 의미

예를 들면 이 비유의 목적은 거듭남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진지하고 끊임없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예증하는데 있다. 비유의 그림을 자연적 수준에서 볼 때, 그 요점은 계속 졸라대는 것, 성가시게 하는 것을 결코 중단해서는 안될 것이라는데 있다.
그런데 주님을 부정한 재판관과 연관시켜 생각하려 들면 어떤 곤란함이 생각 속에 어른거려지게 된다. 그 이유가 주님은 언제나 정의로우시며 자비하시어 언제나 인간을 복되게 하려고만 애쓰시는 분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본문의 경우 나쁜 재판관의 등장은 의도적인 필요성이 대두 되었기 때문이라고 생각될 것이다. 신속한 판결을 집행해 가는 선하고 의로운 재판관의 등장은 본문의 필요 요소가 되지 못할 것이라는 말이다. 오히려 꾸준히 반복적으로 정의로운 재판을 거절해 온 인격이 본문에서 필요했을 것이라 생각될 것이다.

가상으로 비치는 것

위와 같은 재판관의 속성이 타락하는 자연적 인간에게는 주님의 속성이라고 착각해 버릴수도 있다. 일상사의 고통을 해소 해주는 판결을 기다리다 못해 지쳐 있는 사람에게 주님은 매우 무관심하고 아예 부정직하신 듯 비쳐지고 있다. 그 이유가 그분께서는 애타게 기다리는 기도자에게 이내 응답해 주시지 않기 때문이다. 주님께서 응답을 기다리는 사람들을 못 본척 하시는 듯 여겨지도록 비춰질 때, 마치 기도가 아무 소용없는 듯 여겨져 그들로 기도하는 것을 중단하도록 유혹되어 진다. 사실 주님이라는 분은 그들이 정작 받을 수 있는 복 보다 더 많은 복을 받아 가기를 바라고 계신다는 것, 응답이 더딘 원인이 자기들 심정과 삶의 비수용성에 있다는 것을 위의 사람들은 알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체함

사실 본문은 인간이 무작정 요구한다고 자기가 원하는 것을 다 가질 수 있다고 말하고 있지는 않다. 기도를 응답 받는데 있어 하느님께서 지체하시는 듯 여겨지는 경우를 성경을 포함해서 많은 경우에서 우리는 발견한다. 그러나 사실은 이렇다. 인간이 삶의 개혁으로 받을 수 있는 준비가 될 때까지 주님께서는 인격 속에 영성을 주실 수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주님께서는 인간이 인격의 영성에 진입하는 것 외의 다른 수단으로는 인간에게 영적인 복을 주실 수 없다. 다시 말해서 천국의 복을 향해 마음을 열게 해주는 것은 인격이지 어떤 환경이나, 또는 당사자 주위의 여건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림

비유는 그림, 즉 표현일 뿐이다. 이 그림은 거듭남을 향한 시초에 모든 인간의 마음에 영적으로 놓여진다. 우리는 각자의 마음속에 과부와 재판관 양쪽을 다 가지고 있다. 그래서 우리가 진지하고 꾸준하다면, 주님은 우리 속의 재판관으로 하여금 우리 속의 과부에게 판결을 내려 주도록 강요해 주실 것이다.

교훈

글자에서만 볼 때, 비유가 주는 자연적 수준의 교훈은 다음과 같다. 만일 진지하고 끊임없이 성가시게라도 졸라대면, 냉혹하고 무관심한 사람까지도 자기 편으로 끌어들일 수 있다는 것, 의로운 재판관이신 주님이 설사 우리를 잊고 계신 듯 자신에게 여겨질 때조차도 정의를 베푸신다는 것을 비유는 더욱 확실하게 해주고 있다는 것, 이런 등등에서 맺어지는 교훈은 우리가 인내심을 발휘하여 지속성을 가져야 하되, 설사 하느님의 도우심이 지체되는 듯 여겨질 때에도 충분한 이유가 있음을 알면서 인내심을 발휘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진리들은 개인적으로나 교회라는 집합체에서도 응용해 볼 수 있다. 새로운 교회가 많은 박해에 투쟁하는 가운데 난감해져 있다 해도, 주님께서는 그 교인들의 인격과 삶이 허용하는 만큼에서 빠르고도 충분하게 교회를 건설하고 계신다. 주님이 하시는 일에 우리가 성급해 있다면, 그에 대한 치료약은 당사자의 심정과 이해성, 그리고 삶에서 교회의 원리를 더 확대 적용하는 것일 뿐이다. “주님은 은총과 영광을 주신다. 그분은 의롭게 걷는 이에게서 어떤 선도 유보하지 않으신다.” 과거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신 약속, “네 발이 닿는 곳은 다 너의 것이다.” 이것은 오늘의 우리에게도 적용되는 주님의 약속이시다. 영적 원리 위에서 걷고 있는 이상 어떤 영적 원리도 거두어 가시지 않으신다. 따라서 명심해야 할 것은 주님을 기다리는 것, 기다리면서 일하는 것, 그리고 그분을 신뢰하는 것이다. 기다려야 하는 이유는 소원한 사항에 앞서 더 중요한 일이 우리에게 있기 때문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

언제나 기도하고…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언제나 기도하고 용기를 잃지 말아야 한다고 이렇게 비유를 들어 가르치셨다.” 이 구절 때문에 우리는 하루종일 기도하는 자세로만 있어야 하는지에 대해 고민할 필요가 없다. 그 이유는 하루 종일 무릎 꿇고 기도만 하고 있다면, 우리는 선용을 수행할 기회도, 시간도 가지지 못할 것인바, 주님께서 말씀하신 “언제나” 란 하루 종일이라는 뜻은 아닐 것이라는 말이다. 그러나 인간은 자기가 뜻하고자 한다면 기도하는 마음의 상태, 즉 자기의 악한 경향성을 인정하면서 주님께서 주시고자 하는 것들을 듣거나 받을 준비의 상태로, 하늘을 향해 마음 문이 열린 상태로 생활을 꾸려갈 수 있다. 천국이 우리 마음에 영향을 줄 수 있도록 마음 문을 항상 열고 있다면, 그 사람은 내향적으로 예배하는 상태, 사랑의 예배와 그분을 인정하는 상태에 언제나 놓여져 있을 것이다. 따라서 그의 심정은 “제단에서 계속 타고 있는 불” 같이 언제나 있어질 것이다. 이 사람의 삶은 활력 있는 영적 삶으로 가득차 있을 것이다. 그 이유는 가장 지속적이고 가장 효력 있는 기도는 일상 생활 속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용기 없음(fainting)

그러나 인간이 천국적인 것을 무관심하게 방치한다면, 게다가 천국의 소리에 귀를 막으라는 세상의 왁자지껄하는 소리를 허용해 둔다면, 그의 영적 생명은 활력을 잃어 비활동적이 되고 만다. 우리의 육체가 매일 적절한 영양의 공급을 필수로 요구하듯, 영체도 마찬가지이다. 주님의 속성과 인간의 본성을 알면서, 그리고 기도의 진정한 본성과 사용을 아는 사람이라면 그는 주님으로부터 오는 축복을 받을 수 있는 상태에 자신을 가져다 놓기 위해 매일 아침저녁으로 주님께 기도해야 한다는 것, 말씀을 읽는 가정 예배는 꼭 필요하다는 것 등등을 당연히 느끼게 될 것이다. 이 사람은 이 세상 매일의 삶 속에 널려 있는 자질구레한 것, 그리고 위험한 것, 이런저런 것들로부터 자신을 건강하게 유지해가려면 어떻게 위쪽을 쳐다보아야 하는 지를 체험으로 알고 있을 것이다.

재판관

우리 마음속에 있는 “재판관” 이란 합리적 원리, 생각하는 능력들이다. 이것들이 생각에 도착된 것들을 서로 비춰 보고 비교하여 결정 짓는다. 물론 타락하는 인간의 경우, 그의 합리적 능력 역시 타락적이다. 그래서 타락하는 자연적 인간은 자신과 걸맞게 이기적이고 감각적인 자신의 관점에서 생각하고 추론한다. 그는 자신만을 사랑한다. 게다가 자아 사랑을 부추겨 주는 정도에서 세상도 사랑한다. 그의 합리적 능력은 세상 쪽에 활짝 열려 있고 천국 쪽으로는 굳게 닫혀 있다. 그는 세상적인 빛으로 생각하는 바, 영적 어두움에 존재한다. 이것이 부정한 재판관,“하느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도 거들떠보지 않는”자 이다. 이 사람은 사랑이라는 천국 원리로 움직여지지 않는 사람이요, 인간 정의라는 만민이 인정한 규칙에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거짓 원리가 그 사람의 추론을 지배하고, 사리사욕이라는 원칙이 그의 행동 방향을 결정해 줄 뿐이다.

하느님을 두려워하고 사람도 거들떠봄

영적으로 말해서, 하느님을 두려워함(경외함)이란 사랑이 동반된 두려움, 악을 사랑하여 행하는데 따른 두려움, 하느님을 두려워함이 아니라 하느님께 반대되는 어떤 것을 행하면 안될텐데 할 때 있어지는 두려움이다. 사람을 거들떠본다는 것은 이타애의 원리, 또는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는 원리를 중시하는 것이다. 이 원리는 인간에게 선을 행하는 행위 자체에서 구체화된다. 그러므로 거듭나는 인간 속에서의 합리적 능력은 천국의 영적 빛으로 생각한다. 고로 그 능력은 인간에 정의를 베풀게 해 준다. 우리가 타인에게 하는 것이 그분을 향해 하는 것이라고 그분은 가르치시고 있다. 그러나 사악한 자는 “주님의 면전에서 하느님 두려운 게 없다.”

도시

재판관이 살고 있는 “어떤 도시”란 마음이 거주하는 교리이다. 재판관이 부정하고, 판결에 무관심하기조차도 한 사회의 거리를 상상해 보자. 이런 모습을 이사야 59장 14절에서 읽을 수 있다. “공평은 뒤로 제쳐놓았고, 정의는 얼씬도 못하게 하였다. 성실은 대중 앞에서 짓밟혔고, 정직은 통하지 않게 되었다.” 타락하는 마음속에도 그에 상응되는 상태가 존재한다. 그들의 합리적 능력은 자아 사랑에 고용되어 천국의 원리에는 무관심한 바 하느님을 두려워하고 사람을 거들 떠 볼리 만무하다.

과부

이 도시에 같이 거주하는 “과부”가 있다. 이스라엘로 표현되고 진리로 그 특징을 가진 영적 삶의 등차에서 남편은 진리를 이해함을, 아내는 정의를 사모함을 표현한다. 남편이 죽은 아내, 과부일 경우, 이 여자는 진리를 이해함과 결합한채 있지 못하는 진리를 사모함, 즉 진리에 대한 자연적 애정이다. 이 애정은 자신의 안내와 도움이 결핍되어 있어 늘 곤경의 상태 가운데 처하게 된다.
비유는 마음의 상태를 그리고 있는 바, 이 그림 속에서 합리적 능력은 거짓 원리라는 어두운 배경, 세상의 빛 속에 처해 있다. 그런 반면 같은 마음속에 진리의 빛을 갈망하고 추구하려는 진리에 대한 사랑도 존재하고 있음이 과부로 그려 주고 있다. 그런데 이 사랑은 어떤 만족도 얻지 못하고 있다. 그 이유는 합리적 능력이 이기적 삶에 있는 거짓되고 감각적인 사상에 꽉 붙들려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더 많은 빛을 구하는 애정의 하소연이 상달될 리 만무하다.
과부로 표현된 위와 같은 진리에 대한 자연적 애정은 정의를 행하도록 임명된 재판관, 곧 합리적 능력에 기대를 걸고, 그 애정을 학대하는 모든 정신적 어려움, 모든 의구심에서 자유로워지기를 기대하고 있는 것이다.

올바른 판결 (정의를 추구함)

그래서 과부는 “그를 찾아가서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십시오.” 하였다. 본문을 글자대로 다 읽으면, “그 여자는 늘 그를 찾아가서 ‘저에게 억울한 일을 한 사람이 있습니다.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십시오’ 하고 졸라댔다.” 이 여자가 추구한 것은 원한을 갚아 달라는 것이 아니라 속임수에 넘어가 잃은 자기의 권리를 요구한 것뿐이다. 진리에 대한 자연적인 우리의 애정이 악에 의해 핍박당할 때, 다시 말해 우리 인격이 혼합된 상태에 있을 때, 자신을 구원하기 위해 합리적 능력을 찾아간다. 그래서 악하고 거짓된 것과 선하고 진정한 것을 가려냄으로 자신을 건져내고자 한다.
그러나 우리의 자연적인 악들이 우리의 추론하는 능력에 가담되어 있는 한, 추론력 역시 거짓 원리의 지배하에 있게 마련이다. 따라서 진리에 대한 우리의 사랑이 들먹거려 지는 것을 귀찮아 하게 된다. 그러면 우리 마음은 분단 상태, 즉 어떤 진리를 찾겠다고 하는 사랑의 상태와 자연적 자아 사랑이 우리의 추론력을 그 사랑의 지배하에서 풀어 주지 않으려는 상태, 이런 두 상태에 있게 된다.

판결해 주고 싶지 않은 재판관

위와 같은 마음 상태에서 과부는 정의를 재판관에게 구했다. “그는 오랫동안 그 여자의 청을 들어주지 않았다.” 이 부정한 재판관은 자기 속의 선한 원리로부터 판결하고 싶어하지는 않았다. 단지 그는 정책상 판결해 주어야만 한다고 강요받은 것이다. 확정되어 있는 법보다는 자아 의지의 갑작스런 변덕에 의해 움직이는 것은 독재적 통치자들에게 다분히 있는 경향이다. 다시 말해 백성들이 자기를 좋아하게 만드는 방법을 정의에 기초하기보다는 어떤 바람을 일으키는 것, 즉 정책에 의존하는 데, 이런 일은 현대에서도 흔한 것일는지 모른다. 그래서 가난하고 힘없는 자들이 모여 왁자지껄 할 때 정치가들은 그들의 외침을 정책상 역이용하는 것은 오늘날에도 흔히 있는 일이다.

강요당한 재판관

자연적 마음속에 있는 진리에 대한 애정이 빛이 필요하다고 끊임없이 외쳐 대면, 무관심하고 나태한 추론력도 결국 꿈틀거리고야 만다. 자연적 사랑이 진리를 찾기로 작정하여 열심을 낼 때, 우리의 생각은 일어서게 되고 성가실 정도로 외쳐 대는 자연적 사랑과 대결 상태로 불편하게 있느니 보다는 그 사랑에게도 어떤 길을 선택하도록 타협점을 모색하기에 이르고야 만다.

정책과 원리

그러므로 인간이 자기 애정을 더 낫게 실제에 사용하기 위해 진리를 발견하는데 있어 정책이라는 것이 인간을 부추겨 일하게 해준다. 그 이유는 거듭나 보려는 시초에 있는 인간의 경우 그의 두 마음은 분리된 상태이기 때문이다. 이 분단된 상태에서 주님은 인간의 애정에 역사 하시어 진리를 따르도록 재촉하실 수 있다. 이렇게 애정이 그의 합리적 능력을 재촉해서 일하게 하여 순수한 진리를 붙잡도록 함으로 그가 이전에 지녔던 의심이나 악의 박해를 몰아 낼 수 있게 된다. 그리하여 추론하는 능력이 신성한 진리의 영향 밑에 들어오게 될 때, 주님은 그 능력에 역사 하시어 그 능력 자체도 거듭나게 하심으로서, 선한 원리로서 일하게 해서 더 이상 정책적으로 일하는 것을 멈추게 해 주신다. 따라서 거짓 원리가 우리의 합리적 능력을 점검하고 있다 해도, 우리가 진리에 대한 사랑을 조금이라도 가지고 있다면, 우리의 거짓 관념이 진정한 것이 아님을 볼 수 있는 쪽으로 인도되어 결국 우리는 거짓 관념이나 원리를 거절하는데 이르게 된다. 진리를 바라는 진지함이나 꾸준함은 언뜻 보이기에는 세상욕이나 거짓 관념에 투쟁하고 버티느라고 희망이 없는 듯, 또는 고달픈 듯 여겨질지 몰라도 결국 필요한 진리를 획득하고야 만다.

재판관의 말을 새겨들어라

“이 고약한 재판관의 말을 새겨들어라.” 이 말의 의미는 다음과 같다. 우리는 자연적 마음과 그 삶 안에 있는 것들의 상태를 꼼꼼히 생각해 보아야 한다는 것, 그리고 그 상태에서 누구도 진리를 영적인 빛으로 자연스럽게 생각하지 못한다는 것, 다만 세상의 빛과 감각적인 것으로만 생각한다는 것, 누구도 단번에 진실로 합리적일 수 없고 오로지 거듭나는 단계를 밟아야만 가능하다는 것, 우리 속의 자연적인 합리적 능력은 무관심할 수밖에 없고, 더욱이 주님의 영향하에 우리의 애정이 진리를 추구하라고 재촉할 경우, 천국 빛에 더욱 반대한다는 등등이다. 우리의 애정들은 우리에게 진리가 알려지고, 그것을 사랑하여 실제에 사용하지 않고서는 결코 순수해질 수 없다.

표본적인 법들

이스라엘 족에게 주어진 법에는 불의한 재판이나 과부를 억압하는 데에 관한 많은 경고가 포함되어 있다. 이런 모든 법을 오늘날의 우리에게 영적으로 응용해 본다면, 자기 속의 합리적 능력을 악과 거짓의 쪽에서 추론하거나 선과 진리에 역행하여 추론하는 것을 허용치 말라는 경고를 담고 있다. 더 특별한 것은, 우리 속에서 성장하는 진리에 대한 사랑을 박해하거나 억누르지 말라는 것, 그리하여 영적 삶을 진지하게 바래는 우리 속의 마음을 주님께서 채우실 수 있게 하라는 의미까지 우리에게 전달해 주고 있다.

의로운 재판관

합리적 능력은 마치 의로운 재판관처럼 마음속의 각양 각색의 원리들, 애정과 생각 속의 제 각기 다른 종류들을 두려움 없이 올바르게 판결해 준다. 그리하여 우리에게 인간 의무를 행하는데 자유를 주고 제각기 적절한 위치에서 일할 수 있게 해준다. 더욱이 우리 속의 선한 애정과 진정한 생각들을 격려하고 악한 느낌과 거짓된 생각을 던져 버리도록 해준다.

강요당함(imposition)

보호나 안내를 잃은 과부가 파렴치한 인간에게 사기 당하거나 강요당하기 쉽듯이, 애정의 길잡이인 진리에 대한 이해성이 결핍되면 악한 영향을 쉽게 받게 된다. 마치 재판관에게 판결하라고 압력을 넣을 수 있는 사회적 영향력이나 재판관을 매수할 수 있는 돈을 가지지 못한 가난하고 연약한 과부가 재판관 앞에서 매우 무력하게 보이듯이, 우리 속의 자연적인 마음에 진리에 대한 이해가 없게 될 때, 진리에 대한 우리의 애정 역시 무덤덤해진 합리적 능력을 뒤엎는데 매우 무기력한 듯 여겨지고 만다.

마지막 성공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부의 끈질김은 하느님을 사랑하지도 않고, 인간에게 정의롭지도 않았던 상태를 뒤엎었다. 이와 같이 우리 속의 영적인 것이 제 아무리 어둡다 해도, 우리의 합리적 능력이 진리를 사랑하도록 일해 주는데 도무지 협력하지 않을 것 같이 보인다 해도, 만일 우리가 진리에 대한 어떤 사랑을 가지고 있어 진리를 발견해 보겠다고 갈망하고, 조금 뿐인 진리라도 삶에 적용해 가노라면 결국 우리는 실제에 필요한 모든 진리를 획득하게 될 것이다.

지체 되게 하는 것은 자신이다

뭔가가 이루어지는데 너무 갑갑하게 지체되는 듯 여겨지는 것은 매우 단순한 이유, 즉 주님은 진리를 위해 우리의 심정이 준비되기를 기다리고 계신 까닭에서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삶의 원리로 진리에 순종할 준비가 완료 되기전 오랫동안 우리는 진리를 감상적 수준에서 붙잡고 있기 때문이라는 말이다. 이때 주님의 온유하신 자비는 우리가 심정적으로 진리를 채택하지 못하고 있는 진리의 이해를 보류해 주시어 우리를 보호해 주신다.

택한 자의 부르짖음

“하느님께서 택하신 백성이 밤낮 부르짖는데도 올바르게 판결해 주지 않으실까?” 하느님께서 택하신 자란 그분을 사랑하고, 그분께 순종하는 것을 선택한 이들을 말한다. 이들이 “밤낮으로 부르짖는다”는 것은 계발의 상태에서 그리고 어두움과 의심의 상태에서도 부르짖고 있었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마음과 삶이 모든 상태에서 인도받음과 강건함을 주님에게서 찾았다는 것이 된다. 우리 삶에서 정신적인 밤이란 우리가 진리의 빛을 볼 수 없을 때, 또는 주님은 우리에게 해주실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해주시지 않는다고 상상하는 때이다.
그럼에도 우리가 그분의 계명을 지키고 있노라면, 우리의 준비가 완료 되는대로, 아마도 각자의 정신 속에 상당한 적들이 있다 해도, 혹은 우리 속의 느낌과 거짓 생각들이 상당한 세력을 유지해 가고 있다고 해도, 우리가 처한 모든 역경에서 구해 내어 주실 것이다. 다시 말해 주님께서는 고약한 재판관으로 하여금 정의롭게 우리를 판결하도록 강요해 주실 것이다. 그렇게 해서라도 그분은 우리의 합리적 능력을 거듭나게 하시어, 우리로 천국 진리를 보고 알도록 해 주신다.

오랫동안 그대로 내버려 두실 까? (bearing with them)

글자적 의미로 볼 때, 그분은 택하신 백성에게 긴 시련을 참도록 하신다는 것, 그리고 그분은 그 시련을 그들과 함께 견디신다는 것이다. 택한 백성들은 스스로가 타인들이 자기들을 박해하는 것을 참고 견디고 있다고 생각하겠지만 진실로 참으시는 분은 주님이시다. 그이유가 그분은 택한 백성들이 지닌 자연적인 악과 거짓을 보시고도 참고 기다리기 때문이다.
한번은 주님과 제자들이 배를 탔는데 거센 바람이 불어왔다. 그때 주님께서는 주무시고 계셨다. 그래서 자기들이 위험에 직면했는데도 주님은 무관심 하시다고 제자들은 생각하고 말하기를, “선생님, 우리가 죽게 되었는데도 돌보시지 않으십니까?” 그러자 주님께서는 바람을 꾸짖어 제자들을 구해 주셨다 (마가복음 4:35-41). 주님은 영적인 선 쪽으로 우리를 인도하신다. 따라서 우리가 이와 같은 선을 달성하지 못한 상태라면, 우리는 열심히 노력하며 기다려야 한다. 우리의 눈에 주님께서 지체하시는 듯 여겨질 때, 사실 진짜로 지체되게 하는 원인은 영적인 인간다움에 도달하지 못한 우리에게 있는 것이다.

예증

이웃하여 살고 있는 두 가정을 살펴보자. 한 가정의 경우, 부모들은 아이들이 사랑스러워 그들의 응석을 잘 받아 주었지만, “아니오”가 필요할 때 “아니오”라고 잘라 말할 수 있는 강건한 인격을 세워 주지 못했다. 다른 가정의 경우, 부모들은 자녀들의 인격을 훈련시키는데 매우 적극적이었다. 그래서 이 부모들은 아이들의 요구를 종종 거절했다. 위의 두 부모들중 어느 부모가 인생의 전투에 나가는 아이들을 더 잘 준비시켰을까? 어느쪽 부모가 더 진지한 사랑을 아이들에게 베푼 것일까? 말할 것도 없이 자녀들의 요구에 강경했던 부모가 더 높은 질적 차원의 사랑을 가졌다. 이들은 자녀들을 구원하기 위해 부모들 스스로 시련을 참았다. 그 반면 연약한 부모들은 자녀에 대한 사랑이 “내 새끼인데…”라는 이기적 마음이 발동되면서 자녀를 자신의 일부로만 여겼던 것이다. 따라서 아이들의 응석을 받은 만큼 응석이라는 인격에 아이들을 담근 셈이다. 이 부모들은 아이들이 졸라대는 소리에 타협하는 쉬운 방법을 선택했다. 그 결과 집안에서의 훈련 보다 훨씬 더 큰 시련을 아이들의 장래에 낳게 할 소지를 남긴 것이다. 강한 훈련은 미래의 큰 시련을 작은 시련으로, 해볼 만한 시련으로 만들어 준다.
위의 슬기로운 부모들의 예와 같이, 주님은 그분의 자녀들에게 종종 “NO”라고 말하신다. 그 이유는 그들이 원하는 것을 가졌을 때, 그들이 원하는 것 자체가 그들에게 최상의 것이 아닐 것임을 알고 계시기 때문이다. 그분은 우리의 인격을 단련시켜 주신다. 무엇인가가 너무 느리게 진행되어 속이 터질 듯 우리가 느낀다 해도 굳이 실망하여 주저앉을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신성한 섭리는 가능만 하면 빨리 성취해 주시려는 것이 섭리의 속성이기 때문이다. 주님은 선한 모든 바램에 계신다. 게다가 자신 스스로 해야 할 부분, 즉 자신 속의 잘못된 경향성을 배척하며 계명을 지키고 있다면, 각자의 선한 바램이 성취되도록 주님께서 운행하여 주실 것이다. 끈기(patience)는 우리 인격 속에 가장 좋은 특성을 발달시켜 주어 우리의 자연적 포부에 변화가 오게 한다. 아마 우리에게 배고픔과 목마름이 없다면, 우리가 마시는 물, 먹는 양식은 대수롭지 않은 물건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이해에 보탬이 되리라 본다.

하느님의 방법

위와 같이 인내심을 동원하여 기다리면서 자칫 우리가 잊기 쉬운 것은,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배상(redress)해 주실 것을 찾으시는 동시에 우리를 박해한 자들 속에 있는 선도 찾고 계신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우리의 인내심은 우리를 억누른 자를 개혁시키는데 참 수단으로 주님께서 사용하신다. 이는 영적으로나 자연적으로나 공히 진정한 말이다. 주님께서 택한 백성에게 갚아 주시되 오래 내버려두시지 않고 “빠르게” 갚아 주신다는 말은 확실하게 갚아 주신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이유는 영적 사항에는 시간 개념이 없는 고로 빠르게 일한다는 생각은 확실하게 일한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사람의 아들이 올 때에 과연 이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볼 수 있을까?” 이 질문이 비유의 끝 부분에 놓여진 것은, 우리 믿음의 품질은 심정과 이해성, 그리고 삶에 있는 우리의 기도에서 보여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자신의 마음과 삶의 상황이 어떠한지 늘 점검해서 신성한 진리가 우리 속에 오게 될 때 그 진리를 받을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주님의 두 번째 오심

진리를 받을 준비가 된 마음과 삶, 여기에 신성한 진리가 영적으로 오는 바, 이때가 주님이 오시는 날이다. 그런데 어떻게 이 진리를 받아야 할까? 얼마나 많은 믿음과 이타애가 세상에 존재할까? 아마 “많은 이의 사랑은 차갑다.” 신성한 인격에 있는 살아 있는 믿음, 주 예수 그리스도 오직 한 분 하느님에 근거한 믿음, 하느님의 말씀 속에 있는 신성한 속성에 근거한 믿음은 거의 없으리라. 우리는 세상이 일컫는 신학, 소위 정통 신학이라는 옛 사상을 벗어나 믿음이 성장되도록 해야 할 것이다. 진리의 새로운 국면을 찾아 나서야 진리를 가질 수 있다. 새로운 교회는 시작되었다. 그 안에서 주님은 그분의 진정한 속성을 밝히 알려 주셨다. 그 안에서 그분은 말씀을 내향적으로, 영적으로 열어 놓으셨다. 이 새로운 교회, 새 예루살렘의 교회를 주님께서는 신성한 원리를 받을 준비가 된 이들의 심정과 이해성, 그리고 그들의 삶 안에 건설하고 계신다. 비록 그 교인들의 악과 거짓에 대항하는 투쟁이 오래 걸려 지체되고 있다 해도, 또는 새로운 교회의 건립에 반대하는 자들로 인해 느리게 움직이는 듯 인간에게 보인다 해도, 이 건설은 개인적으로나 집합적으로나 반드시 이루어 질 것이다. 이 장엄한 결과를 향해 서 있는 사람들에게 주님은 이렇게 격려하신다. “언제나 기도하고 용기를 잃지 말아라.”

보잘 것 없는 종

보잘 것 없는 종
– 자연적인 마음은 영적인 마음을 섬겨야 한다 –

성 서 본 문: 누가복음 17장 7-10절

7. “너희 가운데 누가 농사나 양치는 일을 하는 종을 데리고 있다고 하자. 그 종이 들에서 돌아 오면 ‘어서 와서 밥부터 먹어라’ 고 말할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8. 오히려 ‘내 저녁부터 준비하여라. 그리고 내가 먹고 마실 동안 허리를 동이고 시중을 들고 나서 음식을 먹어라’ 하지 않겠느냐? 9. 종이 명령대로 했다 해서 주인이 고마와해야 할 이유가 어디 있겠느냐? 10. 너희도 명령대로 모든 일을 다 하고 나서는 ‘저희는 보잘 것 없는 종입니다. 그저 해야 할 일을 했을 따름입니다’ 하고 말하여라.”

요약

어느 인간도 주님에 대한 자기의 의무 그 이상을 할 수는 없다. 그 이유가 어떤 선용을 행할 능력이 자기에게 있다는 것을 눈치챌때, 그 선용은 자기의 의무가 되기 때문이다. 주님의 계명을 지키면서 자기의 능력으로 가능한 모든 선은 언제나 인간의 의무가 된다.

글자적 의미

글자적 뜻에 있는 의미는 명백할 것이다. 일상적인 자기의 할일을 해가고 있는 종이 주인에게 어떤 특별한 책임이 있다고 말하지 않듯, 주님의 종인 인간은 자기들이 타인을 섬기는 일을 함에 대하여 어떤 공적도 요구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주인과 종

우리는 두 마음, 또는 마음의 두 부분인 자연적 마음과 영적 마음을 가지고 있다. 주인과 종의 관계는 이 두 마음, 자연적인(외적인) 마음과 영적인(내적인) 마음 사이에 존재한다. 우리의 자연적 마음(자연적 인간)은 내재하는 영의 바램과 명령에 의거해 진리를 배우고, 선을 행한다.

농사 (plowing: 쟁기로 갈아 젖힘)

이 종은 “농사나 양치는 일을 하는 종” 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 종은 작물을 재배하기 위해 씨를 뿌릴 밭을 갈아 엎고 있다. 인간이 밭을 갈아 엎는 것을 영적으로 보면, 그것은 신성한 진리가 그의 일상 생활의 행위에서 자라나도록 진리의 씨를 받을 마음을 준비할 때에 해당된다. 이를 보다 뾰족하게 말한다면, 이는 주님의 말씀으로 부터 신성한 진리를 받기 위해 각자의 이해성을 준비하는 때를 말한다.

양을 침

양떼를 친다는 것은 의지 또는 심정을 계발하는(경작하는) 것을 말한다. 양은 이타애 또는 이웃 사랑에 상응된다. 양을 치는 것, 또는 그것을 관리하는 것은 이타애를 경작하는 것을 표현하고 있다. 이해성이나 의지를 경작한다는 것은 신성한 주인의 명령에 순종하되 신실함과 끈기가 요구되는 높은 질서 수준에 속하는 선용(good uses)들이다.

종의 일

그럼에도 위의 선용은 종, 즉 자연적 마음이 수행하지만 실지로는 영적 마음이 조종하고 있다. 우리는 자신을 강요해서 주님의 가르침을 경청하여 그 가르침을 교훈이나 교리로서 배워야 한다. 게다가 주님이 우리에게 밝혀 주시는 새로운 진리들을 받을 수 있는 상태가 되도록 하려면 자신의 생각과 느낌이 옛 자연적 조건을 탈피(break up) 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의 잘못된 느낌에 저항해야 한다는 것, 그러면서도 주님이 가르쳐 주시는 대로 주님을 향해서, 이웃 동료를 향해서도 가르치신 그대로를 느껴 보려고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밭을 가는 일, 즉 자기 지성을 경작하는 것과 양을 치는 일, 즉 자신의 선한 애정들을 관리하는 것은 주님의 종이 해야 할 날마다의 일인 것이다. 따라서 우리의 자연적 마음은 영적 마음의 종으로서 각자의 수준에서 위의 두 가지 일들을 해야만 한다.

예증

우리가 성질내는 것에 잘 기운다고 하여 분노를 탐익해서는 안되고, 오히려 우리는 그런 인간 경향성에 저항해야 한다.그 이유가 분노는 악에 속한 것이라고 주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치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신 속의 영적 마음이 분노하는 쪽으로 기울기만 하려드는 모든 경향성에서 빠져 나오도록 우리를 받쳐 줄 것이라고 기대해서도 안된다. 우리의 영적 마음은 영향력을 발휘하되 우리에게 무엇이 우리의 의무인가를 볼수 있도록 빛을 제공해 줌으로서, 또는 그 의무를 행하는 노력을 지지함으로서 영향력을 발휘한다. 주인은 종의 일을 하지 않고, 단지 종을 명령하고 지휘 감독하여 종이 열심히 일하도록 할 뿐이다.

영적인 것과 자연적인 것

우리의 외적 부분 즉 자연적 마음과 우리의 내적 부분 즉 영적 마음 사이의 관계를 이 비유는 언급하고 있다. 영적 마음(마음의 영적 부분)은 자연적 마음(마음의 자연적 부분)을 계발하고, 지휘하여 떠받혀 준다. 자연적 마음 그 자체에 국한해 보면 그 마음은 영적 마음의 명령들을 받아 순종한다. 이것이 거듭나는 인간에게 있는 질서요, 천국에 있는 둘 사이의 관계이다. 이 상태에서만 영적 마음과 자연적 마음은 각자의 등차에서 서로 행복으로 채워지게 된다.
그러나 위의 천국 질서가 저지되거나 중단 될때, 인간 전체가 비질서 관계로 돌입되면서 불행으로 그 속을 채워 버린다. 그렇게 되는 이유가 자연적 마음은 영적 마음의 영향력이 없을 경우, 명확하게 볼수 없고 슬기롭게 행동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연적 마음의 실용적인 활동 없이 영적 마음은 반드시 있어야만 되는 바깥쪽 선용을 가질수 없게 된다. 따라서 종과 주인은 서로 기대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들판, 일하고 쉼

“그 종이 들에서 돌아 오면” 에서의 들이란 자연적인 삶이요, 그 삶에서 실제의 일들이 이루어진다. 거기에서 진리들이 배워지고, 선한 애정들도 발달된다. 우리의 상태는 언제나 교체된다. 때로는 일하고 때로는 쉬기도 한다. 일한 뒤의 휴식은 선한 원리를 배워 연마하는 노동 후에 있어지는 평화와 기쁨이라는 정신적인 휴식을 표현해 준다. 우리는 자신 속의 악한 경향성에 저항하느라 노동하고, 선을 행하도록 자신을 밀어부치느라 노동을 한다. 우리는 오로지 영적 마음이 자연적 마음을 지배하는 만큼에서 휴식을 취할수 있다.

먹고 마심

정신적으로 먹고 마신다는 것은 주님의 말씀에 있는 선하고 진정한 원리들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뜻한다. 주님의 말씀에 있는 원리들이 우리의 영적인 양식이다. 주님께서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이루고 그 분의 일을 완성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우리 몸의 자세 중에 앉아 있는 자세란 자신이 하고저 하는 것에 자기의 의지를 고정시킨다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앉아서 먹는다는 것은 주님으로부터 우리에게 오는 선하고 진정한 원리를 음미하며 자신의 의지에 고정시켜 삶에서 자기 원리로 만드는 것을 뜻한다.영적 양식을 이렇게 받게 될 때 즐거운 영적 휴식이 가능해진다.

주인이 먼저 섬겨짐

그러나 자연적 마음은 그 마음의 의무를 수행할 때까지, 혹은 영적 마음이 먼저 채워질 때까지 영적 양식으로 채워지지도 않으며 휴식을 가져볼 수도 없다. 따라서 종이 주인을 대접한 뒤, 자기 저녁 밥도 먹기 위해 앉아야 한다. 그래서 주인이 “내 저녁부터 준비하여라. 그리고 내가 먹고 마실동안 허리를 동이고 시중을 들고 나서 음식을 먹어라” 라고 말하는 것이다.

준비함

준비한다는 것이란, 자연적 마음이 교회의 교리를 배우고 자기속의 악한 경향성을 배척하면서 주님의 계명을 지키도록 하는 등등의 일을 하는 것을 말한다. 종이라는 자연적 마음이 이런 일들을 하게 되는 것이 주인인 영적 마음의 저녁 식사를 준비하는 것이다. 이런 준비가 마무리 되면 우리의 문은 자동으로 열려 주님이 들어 오시어 우리의 영적 마음과 먹고 마신다. 인간이 진리를 응용하기전 그 진리에 관한 지식을 먼저 가지고 있어야 한다. 주님과의 결합은 진리를 수단으로, 진리를 사랑함으로, 진리를 삶에 놓음으로서 이루어 진다. 한마디로 인간은 주님과 반대되는 것들을 던져 버림으로서 주님을 영접할 준비를 해야 한다.

허리를 동임

자기 허리를 동인다는 것은 겉옷의 긴자락을 잘 갈무린 한후 띠로 묶는 것인데, 이렇게 하면 발이 보다 더 자유롭게 움직이게 된다. 겉옷은 지식들,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진리들을 표현해 준다. 이런 진리들은 우리가 사랑에 의거 마음을 상승시킬 때, 그리하여 이 진리들이 보다 더 높은 국면인 영적인 것들을 볼 수 있게 될 때 발을 더 자유롭게 해준다. 따라서 종이라는 자연적 마음도 주인인 영적 마음이 다 먹고 마실때 까지 그 스스로 허리를 동여 매고 봉사해야 한다. 다시말해 신성한 진리로 선한 원리를 실습해감으로서 내향의 영은 주님과 천국과의 결합을 이루게 된다.

섬김 (serving,시중을 듬)

신성한 원리들은 그 원리가 자연적 마음과 삶에서 신실하게 행하여짐으로서 영적 마음 안에서 확증되어 고정 된다. 그런 다음 신성한 영향력이 영적 마음에 흘러들수 있고, 그뒤 자연적 마음 까지 그 영향력으로 채워 진다. 이렇게 해서 주인과 종, 모두가 영적 양식과 물을 먹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자연적 마음이 영적 마음을 섬기기도 전에 그 스스로를 먼저 만족 시키겠다고 세상적 방법을 시도한다면, 진리의 천국적 국면에로 승강되지 않고 오로지 세상적인 것, 자연적인 것만을 받게 된다. 그 결과 무질서와 실수들에 빠져있게 될 것이다. 따라서 영적 마음을 먼저 섬기는 것이 자연적 마음 자체에게도 최선의 방법이 된다. 그 이유는 자연적 마음은 영의 안내로 빛 가운데서 주님을 섬겨야 하기 때문이다. “너희는 먼저 주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외적인) 것도 너희에게 더하여 주시리라.
인간의 역사를 통털어 선에서 이탈하고 인격의 영성과 결별하게 되는 원인은 자연적 마음 그 자체를 먼저 섬기려 시도하는 움직임에 있어 왔다. 이것이 삶의 밑 바닥에 기어 다니는 뱀, 자연적 감각의 조언을 덜컥 삼킴으로 에덴에서 쫓겨나는 것으로 그려진 “인간의 타락”인 것이다. 계발된 영혼의 명령없이 감각만을 수단으로 천국에 도달할 자는 아무도 없다. 그 이유는 자기의 자연적 마음 안에 있는 진리가 주님의 진리라고 인정하여 사랑하고 실천할 때까지 어느 누구도 그 진리 안에 존재하는 선을 음미하여 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거듭나는 질서

우리는 내적인 것, 즉 영혼을 질서속으로 먼저 가져다 놓아야 한다. 영적 마음이 거듭나는 애정으로부터 행동 할때 만이 자연적 마음은 그 속의 자아 의지를 포기하고 영의 안내를 받아 천국적 동인으로부터 행동한다. 천국은 인간에게 내향적으로 온다. “하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다.” 그 다음 영적 마음을 통하여 자연적 마음과 삶도 거듭나는 생명으로 채워진다.
종이 먼저 그의 주인을 섬기고, 그 뒤 먹고 마셔야 한다. 자연적 마음이 영적마음을 어떻게 섬겼느냐에 따라 자연적 마음에 천국적 생명이 채워진다. 영적 마음은 영계를, 자연적 마음은 자연계를 주시하기 마련이다. 인간이 거듭나는 영적 마음으로부터 자연적 마음과 삶도 행동하게 만들면, 그는 천국과 주님으로 부터 행동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가 자연적 마음만으로 행동한다면, 그는 자신 스스로에서 행동하고 있을 뿐인 것이다.

고마워 해야 할 이유가 없다

자연적 마음이 영적 마음을 잘 섬겼다고 해서 영적 마음이 자연적 마음에 고마움을 느낄 필요는 없다. 그 이유가 후자는 영혼을 위해 무언가를 하는 그 이상의 최상의 조건도 달성 할수 없기 때문이다. “그 종이 명령대로 했다고 해서 주인이 고마와해야 할 이유가 어디 있겠느냐?” 다시말해 주인은 종에게 특별히 어떤 고마움을 가질 필요가 없다는 말이다. 이것이 천국의 질서이다. 왜냐하면 육체가 마음을 섬기듯, 외적인 것인 자연적 마음은 내적인 것인 영적인 마음을 섬겨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육체 중에서 피부는 그 속의 심장과 폐 등등을 섬기는 것인데, 그런 질서 속에서 피부는 피부 나름대로의 행복과 긍지를 발견한다.

보잘것 없는 종

“너희도 명령대로 모든일을 다 하고 나서는 ‘저희는 보잘것 없는 종입니다. 그저 해야 할 일을 했을 따름입니다.’ 라고 말하여라.” 다시말해 우리는 자기 삶의 평균 수준 이상으로 주님을 위해 여분의 이익을 생산하지 못한다는 말이다. 주님을 섬기는 가운데 오히려 우리는 자기의 삶을 발견한다. 인간은 자기가 잘났다고 떠벌릴 어떤 것도 없다. 우리는 각자의 의무 그 이상을 해낼 수가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자신의 의무가 무엇인지 찾기 위해 빛을 주시하고 주님께 의존해야 하며 더우기 의무 수행에 지치지 않도록 힘을 달라고 주님께 매달려야 한다.
모든 공적은 주님께 있지 인간에게는 하나도 없다. 주님의 이름으로 하지 않고 어떤 진정한 선을 행할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다. 인간은 오로지 신성한 생명을 받는 그릇일 뿐이다. 인간이 행할 수 있는 최고의 것은 주님을 섬기기 위해 자신을 준비하는 것, 주님의 계명을 지킴으로 행복을 발견하는 것이다. 계명 준수가 인간에게 최고의 이익을 준다고 해서 그것이 어떤 공적이라고 떠벌릴 수 없다.
그러나 타락하는 자연적 인간은 모든 공적을 사사건건 제 잘난 탓으로 돌린다. 그럼에도 “인간은 천국으로부터 주어지는 것 외에 어떤 것도 받을 수 없다.” 작은 시냇물을 보자. 그것들이 모여서 강을 이루고 바다로 흘러 간다. 그런데 강이 바다에 물을 공급했다고 바다에 큰 호의를 베풀었다고 자랑할 수 있을까? 강물은 어디에서, 시냇물은 어디에서 왔는가? 바다로부터 수분의 증발, 구름, 비로부터 야기 된다. 어쩌면 시냇물이 바다를 향해 “나 없이 너는 아무것도 아니야” 하며 우쭐댈런지 모른다. 사실 지상 곳곳에는 주님으로부터 나와 모든 것을 채우고 넘치게 하는 생명의 순환이 존재한다. 그 순환과정 속에서 각기 제 몫을 수행하여 모두가 복을 받고, 감사하는 심정과 거듭나는 삶을 통해 주님께로 되돌아 간다.

겸허

이 비유는 겸허에 관한 교훈을 가르치고 있다. 겸허라는 진리는 저 잘났다고 으시대는 인간에게는 하등의 가치도 없는 진리이다. 우리가 행한 모든 것이란 고작 각자의 의무 이행의 수준을 벗어나지 못한다. 자기 할 일을 다 했다고 자부할 수 있는 인간이 과연 존재할 수 있을까? 그런 인간이 존재한다면, 그 사람은 자신에게 공적이 있다고 권리를 주장하지 않는 사람이리라.

인간의 두 겹 본성

인간 삶에 있는 가장 아름다운 질서는 내적 마음인 영혼이 자연적 마음을 지배하고, 자연적 마음이 그 지배에 기꺼이 순종하는 것에 존재한다. 다시 말해서 동물같은 삶이 거듭나는 영의 지배하에 있을 때이다. 이런 질서속에서 동물적인 본성은 파괴되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세련되어져 사람답게 되어간다. 다시말해 동물적 본성에서 나오는 기쁨이 허용되고, 이에 더하여 그것이 합리적이고 순수하게 되어 간다는 말이다.
절반은 인간이고 절반은 동물인 반인반수의 모습은 고대의 상징적인 신화 같은 것, 즉 스핑크스, 켄타우로스(Centaur)등과 같이 반쪽은 사람이고 반쪽은 사자나 말, 염소로 표현해 놓은 것에서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이런 표현물에서 일치하는 것은, 반쪽 중 위쪽에 사람이 있고 아래쪽은 언제나 동물이 차지 한다는 것이다. 각 경우에 몸체는 짐승이나 그 몸체를 지휘하는 머리 부분은 인간으로 되어 있다. 위의 두 부분중 인간 본성의 측면에서 우리는 위만 쳐다 보는 총명, 잘 세련 되어져가는 애정들을 발견 할 수 있다. 그리고 이것들이 짐승이라는 조잡한 것과 짝을 이루고 있다. 이와 같은 모양을 각자의 유전적 본성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인간의 짐승 부분을 잘 길들일 수 있는 방법, 짐승 수준 너머로 부상하도록 주님은 우리를 도우신다.
짐승 수준 그 이상으로 자신을 올려 놓는다는 것은 힘든 작업이라고 누군가 말할런지도 모른다. 그 이유는 지옥이 천국에 복종한다는 것이 언제나 쉬운 일은 아니기 때문이다. 타락하는 우리의 본성은 언제나 지옥이다. 아래쪽 본성, 수준 낮은 본성이 우리를 더 강하게 붙들수록 그것을 깨뜨리기는 더욱 어려워 진다. 그러나 우리는 이에 대한 완전한 본보기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인성을 입으신 주 예수 그리스도 이시다. 지상에서 그분이 이룩하신 것 처럼 그분은 각자의 수준에 맞게 성취할 힘과 빛을 주고 계신다. 수없는 세대를 거치며 누적된 탐욕이라는 악은 우리의 동물적 본성을 더욱 강한 요새로 발달시켜 놓았다.

이기적 삶

자연적 마음을 완전히 조절해 가야 하는 일, 진실로 사람다운 삶은 종이 주인에게 복종하듯, 외적인 것이 내적인 것에, 자연적인 것이 영적인 것에 복종하는 것이 천국 질서 인데 이를 언제나 상기하며 생활한다는 것이 인간에게는 얼마나 힘든 일인지 모른다.
주인을 먼저 섬겨야 하는 일을 가지고 우리는 얼마나 피곤해 하였을까? 우리의 자연적 마음이 차분히 앉아 제 음식을 먹을 때를 기다리는데 얼마나 지쳐 있는지 모른다. 우리가 천국 질서 쪽으로 향하는 것이란 간단히 말해서 서로가 서로에게 줄수 있는 도움을 찾는 것인데 이를 인식하는데 얼마나 인색 했는지 모른다.

가능성들

모든 인간 존재, 그 존재가 어떤 조건하에 있든지 모든 이들이 우리의 주된 관심의 대상이어야 할 것이다. 우리는 각 개인 속에서 악마와 투쟁하는 인간 영혼을 보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애정, 가능해지는 도움, 영향력 등을 악마에 대항하고 있는 영혼 부분에 쏟아야 하리라.
그럼에도 이런 측면에서의 우리의 활동은 얼마나 미미한지 모른다. 게다가 상대방의 바깥에 관계된 것들, 지위, 실력, 미모, 등등에 우리의 관심을 흘려 낭비 하는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또 다른 측면, 즉 인간의 짐승 부분만을 상대방에게서 끄집어 내려 드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 속에도 의식의 세계에로 깨어나려는 아기 같은 거듭 나려는 삶의 측면도 있다는 것을 눈치채고 있어야 할 것이다. 이런 천국 아기를 실족하게 한다거나, 그 아기를 잘 성장하게 한다거나 하는 두 능력이 각자에게 있다는 것을 자신에게 스스로 되물어 보아야 할 것이다.

영적인 목적

우리는 자질구레한 일상적인 사항까지도 영적인 목적에 짜맞추어 지게 하는 용기를 늘 가지려 노력해야 한다. 대부분 사람들에게 있는 가장 큰 곤란은 그들이 자기들 마음을 승강시켜 영적인 빛 속에서 무언가를 보고 헤아리려 하지 않는 것이다. 그대신 모든 것, 심지어 종교적인 것까지도 조잡한 외적 경로, 감각들로부터 판단해 내려는 습관에 젖어 있다. 그러나 외적인 모든 것은 내적 생명에 종속되어야 한다. 그리고 외적인 것들은 내적인 것들과 연결되어 있는 정도 만큼에서 가치가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