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었던 아들
– 주님께 되돌아 온 죄인 –
성서 본문: 누가복음 15장 11-32절
11. 예수께서 또 말씀하셨다. “어떤 사람이 두 아들을 두었는데 12. 작은 아들이 아버지에게 제 몫으로 돌아 올 재산을 달라고 청하였다. 그래서 아버지는 재산을 갈라 두 아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13. 며칠 뒤에 작은 아들은 자기 재산을 다 거두어 가지고 먼 고장으로 떠나 갔다. 거기서 재산을 마구 뿌리며 방탕한 생활을 하였다. 14. 그러다가 돈이 떨어졌는데 마침 그 고장에 심한 흉년까지 들어서 그는 알거지가 되고 말았다. 15. 하는 수 없이 그는 그 고장에 사는 어떤 사람의 집에 가서 더부살이를 하게 되었는데 주인은 그를 농장으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다. 16. 그는 하도 배가 고파서 돼지가 먹는 쥐엄나무 열매로라도 배를 채워 보려고 했으나 그에게 먹을 것을 주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17. 그제야 제 정신이 든 그는 이렇게 중얼거렸다. ‘아버지 집에는 양식이 많아서 그 많은 일꾼들이 먹고도 남는데 나는 여기서 굶어 죽게 되었구나! 18. 어서 아버지께 돌아 가,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19. 이제 저는 감히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할 자격이 없으니 저를 품꾼으로라도 써 주십시오 하고 사정해 보리라.’ 20. 마침내 그는 거기를 떠나 자기 아버지 집으로 발길을 돌렸다. 집으로 돌아 오는 아들을 멀리서 본 아버지는 측은한 생각이 들어 달려 가 아들의 목을 끌어 안고 입을 맞추었다. 21. 그러자 아들은 ‘아버지, 저는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이제 저는 감히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할 자격이 없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22. 그렇지만 아버지는 하인들을 불러 ‘어서 제일 좋은 옷을 꺼내어 입히고 가락지를 끼우고 신을 주어라. 23.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내다 잡아라. 먹고 즐기자! 죽었던 내 아들이 다시 살아 왔다. 잃었던 아들을 다시 찾았다’ 하고 말했다. 그래서 성대한 잔치가 벌어졌다.
25. 밖에 나가 있던 큰 아들이 돌아 오다가 집 가까이에서 음악 소리와 춤추며 떠드는 소리를 듣고 26. 하인 하나를 불러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물었다. 27. 하인이 ‘아우님이 돌아 왔습니다. 그분이 무사히 돌아 오셨다고 주인께서 살진 송아지를 잡게 하셨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28. 큰 아들은 화가 나서 집에 들어 가려 하지 않았다. 그래서 아버지가 나와서 달랬으나 29. 그는 아버지에게 ‘아버지, 저는 이렇게 여러 해 동안 아버지를 위해서 종이나 다름없이 일을 하며 아버지의 명령을 어긴 일이 한 번도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저에게는 친구들과 즐기라고 염소 새끼 한 마리 주지 않으시더니 30. 창녀들한테 빠져서 아버지의 재산을 다 날려 버린 동생이 돌아 오니까 그 아이를 위해서는 살진 송아지까지 잡아 주시다니요!’ 하고 투덜거렸다. 31. 이 말을 듣고 아버지는 ‘얘야, 너는 늘 나와 함께 있고 내 것이 모두 네 것이 아니냐? 32. 그런데 네 동생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 왔으니 잃었던 사람을 되찾은 셈이다. 그러니 이 기쁜 날을 어떻게 즐기지 않겠느냐?’ 하고 말하였다.”
요약
이기적 목적에 써 버린 지식, 지식의 남용은 인간을 재난에 빠트린다. 그러나 그가 재난의 원인을 인식하고, 주님을 인정하는 가운데 진리를 사랑하여 실제에 적용하면, 신성한 영향력은 그를 질서 있는 조건에로 회복되도록 진력한다. 진리나 질서 체계의 한계선을 무너트린 사람이 발견하는 최종의 것은 자기가 바꾼 주인이 얼마나 잔인했는가 일 뿐이다. 주님을 떠난 이후의 인간은 자신의 욕망, 지옥의 사슬에 얽매인 노예로 전락되고 만다. 이 때 그가 배우는 것은, 자기가 탈피하려 했던 천국의 삶, 그 삶의 힘이 자신이 자초한 재난에서 구조해 준다는 것이다. 그 반면, 자연적 수준의 마음, 설사 그 마음이 외견상 질서가 있다 해도, 그 마음은 영적 수준의 마음이 갖는 경험, 또는 신성한 사랑의 품성을 음미하지도 못한다. 그러나 비록 죄인이라 해도 그 사랑 속에서 영적 수준의 마음이 봉기되면, 자연적 수준의 마음이 기껏해야 도달되는 도덕적 품성보다 더 높은 영적 삶에 있는 품성도 음미할 수 있다.
세 비유의 연결
두 비유가 이 비유 앞에 놓여 있다. 세 비유 모두 주님의 사랑을 인간에게 보여주고 있다. 더불어 인간을 죄와 악에서 구원하시려는 주님의 꾸준한 노력을 알게 해주고 있다. “잃었던 양”의 비유는 우리가 선한 어떤 애정을 잃었을 때를 다루는데, 그 슬픔은 잃은 애정을 다시 발견해서 정신 속의 양떼에 합류시킬 때까지 계속되었다. “잃었던 은전”의 비유는 중요한 진리 어떤 하나를 잃는데 대해, 그것을 잃은 이유가 진리를 가볍게 여겨 사용치 않은데 있었음을 다루고 있다. 본문의 비유는 특별하게 죄인이 회개하여 주님께 돌아오는 것, 동시에 주님께서 신속하게 그의 귀향과 협동하심을 나열해 놓고 있다. 주님에게 되돌아오고자 하는 죄인의 바램이 주님 자신에 의해 격려되었듯이 세 비유 모두에서 우리는 인간을 복되게 하시려는 신성의 적극적 활동에서 있게 되는 세 가지 다른 국면을 살필 수 있다.
어떤 사람이 두 아들을 가졌는데…
본문의 “어떤 사람”은 신성한 인간, 주님, 그분 자신이시다. 그래서 “두 아들”이란 교회 안에 있는 인간의 두 부류를 말한다. 교회는 진리를 수단으로 형성되어 있다. 그러나 진리의 지식을 가진 사람은 두 가지 부류로 나뉜다. 하나는, 진리의 지식을 외적으로 갖고 있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형식상으로는 교회 멤버일 수도 있고, 더 나아가 교회의 교리로 자신의 행동을 규율하려는 노력까지 하고 있을는지 모른다. 또 하나의 부류는, 진리를 내면으로 이해하는 사람, 그래서 교회의 내면적 멤버, 또는 그렇게 되어 가고 있는 사람들이다.
첫 부류, 즉 외적 멤버에 속한 이들은 영적 삶 즉 내면의 삶이 없는 선하고 도덕적 삶까지는 쉽게 달성할 수 있을 것이다. 둘째 부류의 경우, 어떤 이는 아주 충동적이어서 삶의 죄 가운데서 방황하기 쉽다. 이런 사람이 방황 속에서 헤어나려면 오로지 회개와 개혁에 의해서만 가능해진다. 그 중의 어떤 사람은 애정 측면보다 지성 측면이 더 현저하게 돌출 되어 있고 또 다른 이는 이와 반대의 측면에서 돌출 되기도 한다. 가끔 어떤 이들은 지성과 애정이 균형을 잘 맞추고 있기도 한데, 이것이 가장 완전한 인격이다.
착하고 도덕적인 사람, 그런데 외적일 뿐인 사람이 이 비유에서 형이고, 죄를 지었으나 회개함으로 높은 품성을 지니게 된 사람이 동생이다. 그러나 죄를 지은 무게가 더 높은 영적 상태에 도달되는데 있어서 필수 조건이라고 착각해선 안된다. 다시 말해 죄를 지어야 높은 영적 상태에 도달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우리는 가능만 하면 죄를 짓는 생활 속에 빠지지 않으면서 우리 속에 든 죄에 빠지려 드는 경향성까지 억누를 수 있어야 한다. 죄를 덜 지으면 지을수록 자신에게 더 바람직하고 더 복된 것이 된다.
본문의 배경
이 비유는 바리사이파인들, 바깥쪽으로 볼 때 매우 질서 있는 삶을 영위하고, 안쪽에는 비이타애와 악한 느낌들을 숨겨 놓는 바리사이파인들, 그 반면 악에 푹 빠졌었으나 이제는 회개하고 개혁되어서 거듭나고 있을지 모르는 사람, 이 두 부류에 대하여 한 비유로 명백한 답을 제시해 주고 있다. 보다 감정적인 사람들이 후자에 속할 때가 흔하다.
비유 속의 동생은 아버지의 집에 함께 사는 것이 자신에게는 속박같이 느껴서 더 큰 자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되는 곳을 갈망했다. 그 바램의 수단으로 쾌락을 사랑하고자, 그는 아버지에게 재산을 나눠 달라고 요구했다.
살아감
인간이 살아가는 것, 또는 살아가는 수단이라는 것을 영적으로 볼 때, 그것은 자신이 어떻게 살 것인가를 가르쳐 주는 지식의 공급,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을 말한다. 이런 지식들이 본문에서 언급되는 재산이다. 이것 없이 인간은 실로 가난할 뿐이다. 이런 재산이란 주님의 말씀, 또는 교회에 있는 가르침이나 교리들이고, 이를 실생활에 응용함으로 인간은 영적으로 살게 된다.
작은 아들의 요구
작은 아들은 아버지의 집에서 함께 살 마음이 없어 자기에게 돌아올 재산을 나누어주기를 원했고, 그것을 가지고 어딘가로 가려고 했다. 이런 생각을 가진 작은 아들이 표현하는 정신적인 모습은, 인간이 자기 속에 든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이 제 소유라고 주장하여 그것이 주님과 연결을 갖고 있는데서 분리되기를, 제 소유임을 인정받기를 바래는 마음 상태이다.
주님의 도움 없이도 자신에게 필요한 선과 진리를 발견하는데 있어 자신은 아주 총명하다고 생각하는 사람, 또는 자신에게 필요한 진리를 알기 위해 주님께 가야만 한다는 것은 자기 위풍 밑에 있는 수준이라고 자처하는 사람이 위의 작은 아들이다. 그래서 그는 자기 지식을 주님과의 연결에서 분리시키고 자기 스스로 그 지식은 자기 것이라고 간주해 놓는다. 이런 심정 상태는 매일의 삶이 주님의 섭리에 의존되어 있음을 인정하는 사람, 즉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라고 진실로 기도하는 사람이 갖는 상태와는 정반대이다.
분가함
작은 아들은 아버지에게서 자기 몫을 떼어 냄으로서 분가하게 되었다. 주님이 주신 삶의 법칙에서 자신을 떼어 내겠다는 사람, 자신의 고집대로 살겠다는 사람은 분가함으로써 자기가 주인이 되었다고 느끼게 마련이다. 그 이유가 인간이 진리를 받되 그 진리가 주님의 진리임을 인정치 않을 때, 그는 그 진리가 자기 소유라고 주장하는 셈이 된다. 이럴 때 그도 역시 교리로서 진리의 어떤 인식 속으로 인도되어 질 수는 있다. 그 마지막 단계, 응용 단계, 훈련 단계에서 그는 자기의 우둔함을 볼 수 있게 되어 회개하고 주님을 인정하기도 한다. 다시 말해 자신이 똑똑하므로 허용이 있어야만 한다. 그 뒤 실패할 때까지 기다리면, 그는 자신의 허점을 자신 스스로 똑바로 확인하게 된다는 말이다. 그러면 주님이 가르치시는 것, 그분이 인도하는 데에 기꺼이 응하게 된다. 이럴 경우만이, 악을 행하는 자유는 지옥의 자유, 죄에 노예가 되는 자유일 뿐, 진정한 자유는 주님의 계명을 준수함 속에 있음이 자연스럽게 가르쳐질 수 있다.
아버지를 떠남
“며칠 뒤에 작은 아들은 자기 재산을 다 거두어 가지고 먼 고장으로 떠나갔다.” 자기 속에 든 지식이 모두 자기 것이라고 소유권을 주장할 때, 과거 주님께 의존해 왔던 그의 마음 상태가 사라지는 것은, 며칠, 또는 몇 단계의 상태 변화도 거치지 않는다. 다시 말해 감각적 마음 상태에 내려가는 것은 금방 이루어진다는 말이다.
작은 아들은 아버지 집에서 쫓겨나서 집을 나가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집이 자기를 속박하고 있는 듯하여 나간 것이다. 따라서 그는 이기적 욕구로 심정을 꽉 메우고 있었다.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아버지가 자기를 위해 베푼 것을 조금이라도 되돌려 드려야 하지 않겠느냐라는 식의 의무감마저도 그의 생각 속에는 아예 있지도 않았다. 그는 자아로 똘똘 뭉쳐져, 세상을 보는 것도 자신이 구심점이 되어서만 볼뿐이다. 세상의 삶이 본문의 “먼 고장,” 아버지 집에서 멀리 떨어진 삶을 말한다. 그런 마음의 상태는 오로지 감각적이고 비질서적이어서 인간 영혼의 고향, 아름다운 집, 아버지의 집에서는 아주 멀리 떨어져 있다.
방탕한 생활
먼 고장에 도착한 아들은 감각적 쾌락에 기울었고, 그 쾌락을 얻고자 “재산을 마구 뿌리며 방탕한 생활을 하였다.” 하늘 아버지와 영적 고향에 관한 사항들은 그의 생각에서 아주 멀리 떨어져 있다. 쾌락만을 추구하는 사람은 자기의 어리석음을 경고해 주려고 일어나는 자기 속의 생각들을 몰아내려고 애를 쓴다. 몰아내려는 유일한 방법이 자기 재산을 마구 뿌리는 것, 자기의 정신적 재산인 지식, 그 지식 속의 실체가 모두 사라질 때까지 감각적 욕망과 쾌락 속에 몰입한다.
흉년
위와 같이 마구 뿌렸으니 “돈이 떨어졌고 그 고장에 흉년까지 겹치자, 그는 알거지가 되고 말았다”는 것은 과히 이상할 것이 없는 일이다. 그의 진리가 그것의 근원이자 생명이신 주님으로부터 분리 될 때, 그가 지닌 진리는 생명력을 잃게 되어 인간 영혼을 떠받칠 수 없게 된다. 진리를 감각적으로 소비해버린 결과로, 그 탕진의 결과로 기대했던 쾌락까지도 남겨 놓지 않는다. 결국 그 마음은 쾌락 같은 즐거움까지도 머지 않아 사라지게 된다. 참으로 그 땅, 그 마음에는 흉년이 오는 것이다. 인간은 영적 삶을 위해 살게 되어 있다. 언제까지나 자기 영혼을 떠받칠 수 있는 것은 영적 생명밖에 없다. 비질서적인 세계, 감각적인 삶에는 언제나 영적 흉년이 있게 마련이다. “사람이 빵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리라.” 이 말씀을 우리는 되새겨야 한다. 그리고 이렇게 기도해야 할 것이다. “당신의 말씀으로 우리는 살 수 있고, 당신의 말씀 안에만 우리의 생명이 있사오니. 저를 회복시키시어 살아 있게 해주소서…”
영적 진리의 빛으로 본다면, 주님을 잊은 지성인, 자기 스스로 총명해질 수 있다고 자부하는 사람보다 더 가련한 대상은 없을 것이다. 그런 자부심에 비해 그는 순수한 인간 생명의 제일 가는 원리에 아주 무식하다. 죄인이 되는 첫 단계는 그가 세상을 자기 종으로 만들 수 있다고 자부하는 것이고, 그의 의기양양한 정복의 결산은 그가 세상의 노예가 된 처절한 모습이다. 이 상태 즈음이면 그는 자기가 지닌 모든 것을 다 탕진한 때이다. 세상은 그 사람으로부터 생명에 속한 모든 것을 다 빨아 낸 뒤, 그를 헌신짝 버리듯 던진다. 알맹이를 까먹고 해안가에 버려져 수두룩하게 쌓인 조개 껍질 수준만이 그에게 남아 있는다.
돼지 치는데 종사함
알거지, 빈 껍질만 남은 작은 아들, 그럼에도 그는 자기 아버지에게 되돌아가지 않았다. “너는 생명을 받기 위해 나에게 오지 않는다.” 이런 사람은 하늘 아버지를 잘못 이해하고 있어서 그분께 되돌아오지 않는 것이다. 따라서 그는 한 단계 더 밑인 외적 상태, 자신을 떠받쳐 줄 수 있다고 생각되는 “그 고장의 어떤 사람”에게 가서 “더부살이,” 즉 거짓 원리의 얼마를 추구해 보는 삶에로 더 처지게 된다. 그 고장의 어떤 사람(citizen), “주인은 그를 농장으로 보내 돼지를 치게 했다.”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돼지 치는 것은 가장 천한 직업이었고, 유대인에게 있어서도 돼지는 불결의 상징이었다. 에집트인들의 경우에도 자기들 성전에 들어가지 못하게 한 유일한 사람은 돼지치는 자였을 정도였다.
돼지떼는 인간을 비굴하게 만드는 이기적인 열정, 감각적 마음속에 있는 낮고 천한 욕망을 표현한다. 정신적으로 돼지를 친다는 것은 돼지가 표현하는 것들, 비굴한 열정들을 키운다는 말이 된다. 우리가 거짓 원리를 채택해서 세상 삶의 낮은 상태, 부절제한 탕진 수준까지, 인간 영혼의 고향인 영적 상태에서 아주 멀어질 때, 양떼를 치는 대신 돼지 떼를 치게 될 때, 우리는 영적으로 “먼 고장의 어떤 사람, 주인”과 결합하게 된다. 돼지 떼가 육적 욕망, 추잡함을 의미한다는 것은 복음서의 기사에서, 주님이 악마들을 내쫓으셨을 때, 그 악마들이 돼지떼에 들어가게 해 달라고 하는 줄거리에서도 살펴볼 수 있다. 이 젊은이에게 돼지 치는 일을 맡긴 주인이란, 그 젊은 이(작은 아들)가 자기 스스로 쾌락의 추구에 가담하고자 채택한 거짓 원리, 삶에 관한 거짓된 견해, 비뚤어진 삶의 목적들을 뜻한다. 주님을 떠난 모든 사람들, 빠르던, 조금 늦던, 조만간에 그는 돼지 치는 일에 종사하고야 만다.
쥐엄나무 열매 (껍질, 찌꺼기, husk, pod)
돼지를 치던 이 젊은이는 너무나 배고파서 돼지가 먹는 찌꺼기라도 먹어 보려 했다. 그가 먹으려 했던 찌꺼기(husk)는 쥐엄나무의 꼬투리(열매)였다. 이 열매들은 돼지를 치는 사료로 사용되는데, 식량이 상당히 위급해졌을 경우, 가난한 자의 식량으로 대체되기도 하는 열매이다. 껍질, 또는 찌꺼기란 외적인 것, 오로지 바깥쪽에 속한 것, 인간 영혼을 지탱시킬 영양분이 하나도 없는 것을 표현한다. 그나마 “그에게 그것을 주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껍질은 인간 마음을 인간답게 해줄 양식을 공급할 수 없다는 말이다.
바닥까지 내려온 작은 아들, 이 젊은이는 철저한 실험을 거친 셈이고, 그 결과 침통한 슬픔 속에 잠겼다. 가고 싶은 데까지 가보고, 하고 싶은 대로 해보되 더 이상 해볼 수 없는 막바지에 이른 순간, 그 순간이야말로 신성한 힘이 그에게 다가올 찬스이다. 그 사람 속에 남겨 두신 상태, 그 사람의 구원을 위해 주님이 그의 마음 속 깊은 곳에 아껴 두신 선과 진리에 관한 상태, 이 그루터기에서 뭔가가 움틀거리기 시작한다. 하느님의 자비하심 속에서 이 젊은이는 보다 나은 본성, 조금밖에 안되지만 뭔가 더 나은 본성이 그로 회개함이 있도록 부추긴다.
자신에게 돌아옴 (제 정신이 듦)
“그제야 그는 제 정신이 들었다.” 과거 이 젊은이는 자기의 어리석음 속에 있었는바, 영적으로 미쳐 있었는 바, 그는 자기를 바깥쪽에 방치해놓고 있었던 것이다. 인간은 합리적일 때 그 합리성이 올바른 자신이다. 합리적으로 생각함을 내팽개칠 때, 인간은 광기가 솟아오르고, 감각적 쾌락 속에 풍덩 빠진다. 이성을 되찾을 때, 인간은 자신 안에 돌아온다. 그리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가 자기 아버지임을 인정할 때 인간은 제정신이 든다. 그 이유는 주님과 결별하고서는 어떤 인간도 인간다울 수 없기 때문이다. “너희는 나를 떠나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제 정신이 들 때 인간은 과거 자기가 타락했던 만큼, 자신 밖으로 멀리 간 만큼, 미래에 더 나은 것을 위한 자신의 용적에 비례되는 만큼의 큰 슬픔과 창피함으로 적셔진다.
종 (하인)
깊은 슬픔 속에 있는 이 젊은이는 과거를 되씹어 본다. “아버지 집에는 양식이 많아서 그 많은 일꾼들이 먹고도 남는데 나는 여기서 굶어 죽게 되었구나!” 아버지의 일꾼이란 보다 수준이 낮은 진리, 자연적인 진리들이다. 이 진리들이 주님과 연결을 맺고 있는 이상, 그 진리도 인간을 선한 생활로, 행복에로 인도해 준다. 주님을 섬기는 상태에 있는 모든 인간은 각자 용적에 따라 충분한 양식이 언제나 준비되어 있다. “주님을 자기 하느님으로 모신 자가 행복하다.” 세상의 감각적 삶이라는 돼지를 치는 가운데 있는 사람들, 영적으로 배고파 허덕이는 사람들에게 하늘 아버지의 집에는 만인을 위해 영적 양식이 풍부함을 늘 일깨워 주시려는 것, 이것이 주님의 자비이다. 이 젊은이가 집을 떠나기 전 위의 사항을 알고 있었을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인간이란 존재는, 대체로 “자기가 강건해진 것은 하느님 덕분이 아니라, 자기 재물, 지식이 풍부해서라고, 자기의 섬뜩한 성질이 자기를 강하게 했다”고 뽐내는 게 인간 아니던가?
배고픔
그런 인간이 이제 확실히 쥔 것은 인간 영혼은 세상이 공급할 수 없는 양식을 갈망하고 있다는 것이다. 하늘 아버지의 지시를 따르고, 그분께 인도 받기를 거절한 자의 종착점은 악마에 노예가 되어 있는 신세뿐임을 확실히 발견한다. 돼지 떼의 양식, 헛것을 열망하는 수준, 낮고 낮아 더 낮아 질 수 없는 바닥까지 내려간 자기, 천사들의 양식에 불만족을 토했던 자기를 확실히 보게 된다. 주님이 인도해 주지 않아도. 세상을 쥐고 흔들겠다고 한 그는 세상 속의 고통스런 것들, 악만을 확실히 보게 되고, 급기야 그는 자기 주위에 찌꺼기들이 풍부하게 널려져 있어도 영적 배고픔으로 죽어 가는 자기를 본다.
이 아들은 자기가 세상에 관해, 진짜 즐거움에 관한 모든 것을 알았다고 생각했다. 고된 경험으로부터 교훈을 배우도록 아버지가 허용하실 수밖에 없었던 이유도 알았다. “경험은 아주 고된 학교임에도 어리석은 자는 그 외의 방법으로는 배우려 들지 않는다.” 그러나 인간 안에 어떤 영성이 남아 있다면, 그는 감각이라는 먼지로 그 영성을 오랫동안 덮어 둘 수는 없다. 돼지 떼나 먹어야 할 껍질 가지고 자신 속의 더 고상한 바램을 만족시킬 수 없는 것이다. 아주 비굴한 삶, 잘못 불러들인 쾌락의 소용돌이에서 그의 불멸의 영혼을 위한 먹이는 없는 바, 영적 기근으로 멸해지고 만다. 이런 상황에서 설사 그 사람이 지옥의 불로 자신을 덥게 해보려 발버둥쳐도, 감각 속의 어떤 것도 따뜻하게 할 수 없는 바, 그의 안쪽에 있는 인간다움은 추위에 덜덜 떨고 있는다.
신성한 인도
인간이 재난을 자초했어도 주님의 사랑은 여전히 그를 따라다니면서, 기회만 되면, 가능한 한 빨리 그를 일으켜 세우시려 하신다. 그래서 그의 기억 속에 숨어 잠적해 버린 어떤 진리 또는 어린 시절에 품었던 어떤 애정 중에 남아 있는 것들, 육의 욕망이 절대로 채울 수 없는 어떤 고상한 허덕거림을 시발점으로 삼으신다. 이리하여 하느님의 사랑은 일을 시작하신다. 이 사랑은 돼지 같은 인간이 그의 껍데기 수준에서 단번에 탈피되도록 보채시지 않는다. 그 대신 가능한 시기에 조금씩 그 사람 속에 더 높은 기운을, 더 고상한 배고픔을 일으키시어 창조하신다. 이 창조가 작동을 시작할 때, 인간은 돼지 떼들이 구역질이 나게 싫어진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의지로, 기꺼이 돼지 떼를 떠나면서 “어서 아버지께 돌아가자”하고 중얼거린다.
이 비참한 사람, 과거 감각적일 뿐인 이스라엘 후손들 같이, 애당초 잘 선택했더라면 덜 고생길로 접어들어 축복의 고향에 당도했겠지만, 이젠 먼길, 우회해서 가야 하는 길을 따라 그의 고향으로 인도된다. 인간 생명에는 보다 더 심오한 생명이 있다는 것을 결코 경험한 적이 없는 젊은 시절의 자연적인 마음에 어떤 확신을 갖게 해준다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지 모른다. 또는 인간다움 속의 진정한 생명은 인격의 영성(spirituality) 안에 존재하지, 감각적 차원 속에 있지 않는다는 것, 인간 삶의 목적, 그 본성을 이해하려면 경험자나 목격자들의 충고 안에 지혜가 들어 있다는 것, 또는 질서 있는 마음과 삶으로 자신이 생활하는지를 소홀히 점검하여 감각적 부절제에 쉽사리 풍덩 빠진 이들은 영적으로 보면 미친 짓을 하는 것이고, 가련한 어리석음 안에 있다는 것, 등등을 젊은이들이 경험하지 않고 확신한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노릇이다.
미친 짓(insanity)
수용소를 메우는 많은 정신 착란증은 이기적 열정에 몰두하고자 정신적 생활이나 절제 있는 생활 규범을 이탈한 직접적 결과일 때가 많다. 이런 광기 있는 삶은 방지될 수도 있었던 것들이다. 특히 초기 삶, 인격이 깨끗하고 고결하면서도 단순했던 초기 삶을 수단으로 주님을 신뢰하는데 만족하는 영과 접합을 이루었다면 돌이킬 수 없는 지경까지 당도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인간 내면의 정신 상태가 무엇 무엇이라고 우리는 똑바르게 단정지을 수는 없다. 그러나 우리의 도덕적인 상태, 자연적 수준의 외면에 속한 것은 어떠 어떠하다고 말할 수 있다. 그래서 올바른 질서 속에, 올바른 원리를 사랑하여 늘 생각하며 행동에 적용하려 노력한다면, 주님께서 우리에게 발달되도록 애써 주시는 선한 영적 인격에 속한 모든 요소 요소들을 떠받쳐 줄 주님의 발판을 마련해 드리게 된다. 한 마디로 우리는 주님의 영을 받는 그릇이 되기 위해 계명을 준수하는 것, 선용을 수행하는데 행복을 느껴야 하는 우리 몫을 감당한다면 나머지는 주님께서 채워 주시어 우리의 “잔은 넘칠 것이다.”
겸손 (humility)
이 비유가 우리에게 명백히 가르치는 것 중 하나는, 겸손이나 순진은 이기적인 번영을 추구해 보겠노라는 사람에게 있어서는 매우 맛없는 메뉴들이라는 것, 따라서 그는 그런 것들을 회피하려 한다는 것, 결국 지속성이 강한 선을 획득하려면, 그는 고통스런 방법, 참아 내야만 된다는 각오로 점철되는 길을 결국 걸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꺼내 보이기를 꺼려하면서, 동시에 그쪽으로 기울고 싶어하는 죄들은 우리를 먼 고장에로 이동시켜 놓고 돼지 떼나 치도록 만든다. 그러나 우리가 솔직 담백하게 털어놓는 죄들, 그 죄가 더 확대되지 않도록 만방으로 애써 중단된 죄들은 우리에게서 떨어져 나간다. 그리고 우리는 아버지의 집을 향해 롯의 아내같이 되돌아보는 일이 없이 총총한 발걸음으로 먼 여행을 하게 된다.
거듭나는 우리의 체험 속에 늘 드리워 있는 것의 하나는, 우리가 어떤 사건에 접해서 뭔가 꼭해야 한다고 생각되는 데도 우리 속 한쪽에선 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하는 소리, 지옥의 자만(pride)이 언제나 꿈틀댄다는 것, 그러나 결국 고쳐야만 되는 자기 속의 자만, 일찌감치 정정하려 했으면 창피함(humiliation)을 겪지 않아도 되었을 것을 이제는 굴욕적인 것을 감수하고라도 해야 하는 지경에 처한다. 이런 모습은 성경에 있는 이스라엘 후손들이 표현해 준 줄거리 곳곳에 스며 있다. 거룩한 땅을 정탐한 뒤 겁에 질려 싸우고 싶지 않았던 이들 중 전진하자고 제의한 두 명만 제외하고 모두 광야에서 죽어야만 했다. 이와 같은 상태는 우리가 거듭 나아가는 삶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반역적인 옛 기질, 이기적인 것만 사랑하려는 품성, 거짓된 생각, 이런 구세대의 것들은 우리가 거듭난 상태, 거룩한 땅에 진입하기 전 시험이라는 광야에서 몽땅 죽어야만 되는 것들이다.
삶 속의 영성은 주님을 진실로 인정하여 그분의 가르침과 인도를 간절히 소망하는 때에야 비로소 존재하기 시작한다. 악마는 주님의 인도에 얼굴을 돌리나 천사들은 그분의 인도를 더욱 사랑하려 한다. 악마는 모든 것을 노예 상태에 놓고 있지만, 천사들은 자유로움 속에 간수한다. “사악한 자에게는…평화가 없다.” 인간 영혼에는 오로지 한 개의 고향, 한 분 아버지밖에 없다. 그분에게서 분리되고, 그 고향을 떠나서는 진정한 어떤 기쁨도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 삶이 주님 안에 있음을 기뻐하는 수준이라면, 자비의 하느님은 그 영혼을 지옥의 악마가 가로채 가게 방치하시지 않는다.
어서 일어나…
“어서 일어나 아버지께 돌아가자.” 오늘 비유를 영적으로 곰곰이 생각해 보면, 이 비유는 정신적으로 일어섬, 또는 보다 더 높은 목적과 계획 쪽으로 마음과 삶을 승강시켜야 함을 취급하고 있다. 비질서적 생활로 자신 속의 영적 실체를 낭비하고 있음을 보게 될 때, 절대 필요한 다음 단계는 더 높고 더 나은 경력을 쌓은 데로 자신을 들어올리는 일이다. 이 일을 진행하려면 그가 알고 있는 모든 진리가 상기되어진다. 이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일어나라, 이제 가자”라고 말하신 대화 속에도 들어 있다. 불멸의 영혼을 결코 만족시켜 줄 수 없는 낮고 낮은 수준으로 생각하고 느끼고 행동한 것에서 툴툴 털고 일어나야 한다. 이 사람, 이 죄인이 이제 보는 것은 자기의 유일한 희망은 주님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중얼거리는 말, 아버지께 돌아가야겠다는 것, 이제라도 내 아버지께 자신 속의 잘못된 것들, 죄들을 고백하여 신성한 자비를 무가치하게 여겼던 것이 자기 심정임을 솔직히 그분 앞에서 인정해야겠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제 주님께서 새로워진 삶을 주시도록 그분의 사랑을 찾게 된다.
품꾼
참회하는 죄인은 무진장 겸손하다. 그는 자기 아버지의 집에서 그분의 상속자요 아들로서 복귀하게 해 달라고 요구하지 않는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이제 저는 감히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할 자격이 없으니 저를 품꾼으로라도 써 주십시오.” 완전히 성장한 아들은 자유 속에 있게 되나, 하인은 주인의 밑에 있다. 결국 죄인이 실감하는 것은, 자기가 죄에 잘 빠지는 경향성 속에 있을 경우, 진리를 사랑하여 그대로 사는 사람이 누리는 자유를 자기는 이제 누릴 수 없다는 것, 오히려 자기는 품꾼, 자연적 마음, 자연적 진리의 지식 속에만 거할 수 있을 뿐이라는 것, 낮은 본성이 언제나 이의를 제기하려 드는 법칙에 순종해 보려면 강한 거부감만이 돌출한다는 것, 등등일 것이다. 따라서 이제 그는 아버지의 명령에 따라 그분을 섬길 수 있는 곳, 자신 스스로 영적 자유를 조절해 가기에는 자신은 너무 미흡한 고로 자기 처지에 알맞은 수준, 낮고 천한 신분, 품꾼의 지위만을 찾는다. 이 죄인의 고백은 그야말로 100% 자신을 드러내는 허심탄회한 고백이다. 그래서 그는 자신을 변명하고자 타인을 혹평해 대는 식의 태도는 갖지 않는다. 이런 등등이 그가 신실하다는 증거가 된다. 비 신실한 자는 언제나 변명을 늘어놓아 자아 사랑을 감출 은신처를 찾느라 그의 눈동자는 쉴 새가 없다. 진실한 참회자는 악과 죄들이 자기 것임을 인식하면서 공정하고도 자유롭게 자기가 죄를 범했음을 완전히 고백한다.
죄는 주님과 반대
비록 인간이 잘못되어 있다 해도, 죄는 오로지 선하신 주님께 반대되는 것이라는 정도는 삐뚤어진 사람도 인정은 한다. “아버지, 저는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라고 본문의 아들은 고백하고 있다. 이 말은 주님에 관한 측면에서 좀 더 세분해 볼 때, 죄는 신성한 사랑에 반대되고, 신성한 지혜에 의해 까벌려지며, 신성한 법칙에 의해 금하는 것들임을 함축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잘못을 깊이 통회하는 다윗은, “제가 얼마나 마음이 이랬다 저랬다 하는지를 알고 있습니다. 저의 죄는 언제나 제 앞에 드리워 있습니다. 저는 당신에게 죄를 범했고, 당신 앞에서 악을 행하였나이다”라고 고백한다. 주님 앞에서 스스로 겸허하지 않는 자는 어떤 선함도 실제로 달성하지 못한다. 그 이유는 그의 자아 사랑이 여전히 자신을 지배하여 그를 악 가운데 있게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겸손은 자아 사랑을 내려놓게 하고 마음을 하늘로 열리게 해서 아버지께 돌아가게 해준다.
아버지와 아들이 만남
인간이 비록 천국 조건에서는 멀지만, 그가 그 조건에로 돌아가겠다는 노력을 시작했을 때, 아버지는 멀리 있는 그를 만나는데 성급해지시고 깊은 애정으로 그를 받아 주신다. “아버지가 아들을 보았다”는 것을 영적으로 생각하면 주님께서는 언제나 인간을 관찰하고 계신다는 것을 인간이 인식하는 것을 말한다. 이것이 인간 이해성에 운행하시는 하느님의 섭리이다. “아버지가 측은함(compassion)을 가졌다”는 말은 주님의 사랑이 인간의 의지에서 행동하는 것, 즉 주님은 언제나 인간을 사랑하신다는 것을 당사자에게 보여주신다는 말이다. 아버지가 그를 만나러 “달려갔다”는 것은 주님의 역사가 인간 생명에 작용하시는 것, 즉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가 그분의 계명에 의거 행해진 인간 사랑의 각각에 어떻게 대하시는 가를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인간이 주님께 돌아 올 때, 주님이 자기에게 달려오시는 듯 인간에게는 여겨진다. 그러나 실상, 주님은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시고, 주님이 오시도록 인간이 마음 문을 얼마나 더 여느냐는 만큼에서 더 가까워지는 것이다.
아버지의 “키스”는 하나 됨의 상징이요, 서로 사랑한다는데 대한 상징적 행동이다. 또한 다시 만났다는 표시(token)이기도 하다. 참회자가 진리를 외적으로 잘 지켜 가는 것밖에 자기는 할 수 없다고 고백하지만, 그가 주님에게서 새 생명을 받으면, 그는 사랑의 자유 속에서, 또는 진리를 영적으로 잘 지켜 갈 수 있게 된다.
하인들, 제일 좋은 옷 등등
아버지는 “하인들에게 말했다.” 이는 신성한 사랑이 말씀에서 오는 삶에 관한 교훈인 실용적인 진리를 수단으로 신성한 사랑의 목적과 계획과 교통하는 것을 뜻한다. 선은 거듭남을 수단으로 말씀을 통하여 참회자에게 도달된다. “제일 좋은 의복” 또는 예복이란 제일 가는 진리, 필수적인 진리들에 관한 지식이다. 이 지식들이 참회자에게 주어져서, 그는 내면의 삶과 외면의 삶, 양면에서 필수로 요구되는 원리들로 옷입혀지게 된다. 주님께 돌아오는 과정 중 제일 처음 있게 되는 것은 주님이 어떤 분이신지, 어떻게 그분이 자신을 도우시는 지에 관한 지식을 새롭게 하는 것이다.
가락지, 신 (ring, shoes)
회개자의 손에 “가락지”를 끼운다는 것은 주님이 그를 사랑하고 도우신다는데 대한 확증이요 서약이다. 통상 반지는 뭔가를 확증하는 것에 대한 징표로 사용되어 왔다. 봉인에 사용된 반지의 경우, 자기 편임을 입증하는데, 또는 동의를 표시하는데 사용되기도 했다. 때로 매우 위급하게 특사를 파견하는 경우, 왕의 가락지를 특사에게 들려 보내 그가 지닌 메시지의 권위를 입증하기도 했다. 특히 결혼에서의 가락지는 결혼의 동의, 서로 묶여졌음을 확증하는 징표로 사용되고 있다.
발을 위한 신은 노예가 맨발로 다니는데 비교해서 자유로움의 표시였다. 신은 일상 생활에 관한 교리들, 또는 지침 사항들을 표현한다. 그러므로 집에 오는 아들을 다시 반기며, 그에게 옷을 입히는 등등은 그가 자유로운 사람, 합리적 인간이 된다는 것을 명시하는 말이다. 그리고 그에게 내면, 외면, 양면에서의 생활 지침을 위해 영적인 진리, 자연적인 진리, 모두를 주신다는 것, 그의 모든 진리들은 사랑의 근원에서 비롯되고 있음을 확증해 주신다는 말이다.
살진 송아지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내다 잡아라. 먹고 즐기자.” 과거 유복한 가정이 잔치를 위해 살진 송아지를 키워 두는 일은 매우 흔한 일이었을 것이다. 본문의 잡는다(kill)로 사용된 단어는 제물을 의미한다. 그리고 제물은 거룩하게 만듦을 뜻한다. 그래서 기쁨이 있게 되는 사건은 상태가 어떤 변화에서 수반되는 영적 기쁨을 표현하고, 이로 말미암아 더 충만된 영적 삶이 받아들여진다.
“살진(fat)”이란 기름이 풍부한 고기인데, 기름(oil)은 따뜻하게 해줌, 선을 부드럽게 사랑하는 것을 표현한다. 자연적 애정인 어미 소의 다음 세대인 송아지는 선한 자연적 애정을 수단으로 발달된 새로운 영적 세대, 즉 영적 애정을 표현한다.
살진 송아지(fatted calf)를 잔치를 위해 준비한다는 것은 우리가 주님께 더 충만하게, 더 신실하게 나아갈 때, 주님이 우리와 교통하실 더 나은 애정에 있게 될 새로운 상태에 진입될 마음을 준비하는 것을 명시하고 있다. 이런 애정들은 새로운 마음 상태에 먼저 오는데, 이 선한 자연적 애정은 천적 애정과 영적 애정의 씨눈을 담고 있다. 그 이유는 모든 선한 자연적 애정들의 내면은 영적이고 천적인 것들로 채워 있기 때문이다. 함께 먹고 즐긴다는 것은 주님과 결합된 사람들, 천국적 삶의 품질이 비슷한 사람들이 갖는 즐거운 회합, 또는 마음이 맞는 사람들의 협의회 같은 것을 표현한다.
이렇게 해서 회개한 사람들은 각자의 신실한 정도에 따라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기쁨을 누리게 된다. 집주인과 더불어 잔치에서 먹는다는 것은 자신의 심정과 지성, 그리고 삶에서 천국적 기쁨을 음미하는 것을 말한다. 하늘 아버지, 주님에게 되돌아옴은 회개한 영혼으로 주님과 하나 되고, 더불어 주님을 사랑하는 모든 이들과도 하나를 이루는 축복을 향유하게 한다.
죽었다가 다시 살아옴
기쁜 잔치에서 방탕아의 아버지는, “죽었던 내 아들이 다시 살아왔다. 잃었던 아들을 다시 찾았다”라고 선포한다. 죄인은 선하고 진정된 것, 즐거운 모든 것에 대하여 죽은 상태이다. 그는 그의 영적 고향, 하늘 아버지의 집에 대하여도 죽어 있고 천사들의 연합에서도 탈퇴하여 죽어 있다. 그의 가족인 온 천국에 대해서도 죽어 있는 셈이다. 한 마디로 그는 생명의 유일한 근원인 주님에게서 떠나 악과 죄로 죽어 있다. 그러나 그가 회개 속에 개혁되어 거듭남을 진척시키면서 그는 영적 생명을 다시 살린다. 그는 천국 진리가 인도해주지 않는 관계로 죄 속에 헤매다가 잃어버린 상태이다. 그러나 거듭나는 가운데 그는 발견되어 진다. 그 이유는 그가 주님께 되돌아 왔기 때문이다.
즐거움이 만들어짐
“그래서 성대한 잔치가 벌어졌다. and they began to be merry.” 애정과 생각 속에 있는 것은 기뻐 뛰는 행동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다. 마치 좋은 뉴스를 받고 어쩔 줄 몰라 하는 모습일 것이다. 내면에 즐거움이 충만하면 그 즐거움에 상응하는 몸짓이 나타나기 마련이다.
희망
비유가 우리에게 보증하는 것은, 비록 우리가 죄인이라 해도 자포자기할 필요까지는 없다는 것, 천국 조건에 맞도록 되돌아 갈 힘이 지독하게 미약하다 해도, 무한하게 한계 없는 부드러운 하늘 아버지의 사랑은 우리를 언제나 보살펴 잃었던 것을 찾으려 애쓰시며 항상 더 낮고 더 높은 삶을 향해 진실로 노력하는 그 노력에 적절한 원조를 계속 해주신다는 것 등등이다.
결과들
비유에서의 아버지는 자비로우시고 관대하시다. 그런 아버지의 행동에 아들 자신의 조건도 상당히 잘 맞추어져 있었다. 아들의 겸허한 회개가 아버지의 사랑을 생산했다고 말할 수도 있다. 만일 아들이 아버지의 집에 돌아오되 마음이 거만한 상태라면 아마 그 아들을 영접하는 아버지의 태도는 심히 다른 양상이었을는지 모른다. 그가 아들이랍시고 권리를 주장하면서 당당하게 들어와 이렇게 말했다고 가정해 보자. “제가 다시 집에 왔습니다. 그런데 저는 당신이 준 재산을 다 써 버렸습니다. 저는 재산이 더 필요합니다. 저는 지치고 배고파요. 그러니 빨리 나에게 먹을 것, 입을 것을 가져다주시고, 되돌아 온 기념으로 살진 송아지도 잡아서 축제를 준비해 줘요…”
이런 식으로 아들이 되돌아 왔을 경우, 성실한 아버지의 대응은 어떤 것이었을까? 아마 “이 녀석, 아직도 고생을 더 맛보아야겠군…”라는 훈련 과정만을 제시했을는지 모른다. 그러나 본문의 아들, 아주 다르게 변한 아들의 심정 상태는 사랑하는 아버지의 도움을 받을 만한 가치를 입증해 주었다. 죄인이 자기의 악한 처지에서 천국으로 들리게 해 달라고 억지를 쓴다면, 그의 행동, 그 말 자체가 그에게 있는 천국 삶을 받을 능력까지 닫히게 하고 만다. 그 이유는 천국은 어떤 장소가 아니라 마음과 삶의 조건 속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영적인 방탕아(prodigal)
글자에 있는 의미로 볼 때, 아들의 회개는 배고픔과 궁핍으로 인해 시작되었던 것 같이 보인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하고 있어야 할 것은, 이런 글자의 이야기는 정의로움 후에 있는 영적인 배고픔과 목마름을 표현한다는 것이다. 방탕한 아들이란 단지 물질이라는 재산을 마구 낭비한 사람만을 말하는게 아니다. 영적으로 본 방탕한 아들이란 영적 삶을 이루겠다고 하여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을 습득한 교인, 그런데 거짓과 악 속에 빠져 자기가 알고 있는 진리에 순종하지 않는 교회 속의 사람들을 말한다.
예증
방탕아에 관한 본문의 그림은 유명한 미술가의 멋진 스케치가 아니다. 이 그림은 진리를 알고 있으면서 자신 속의 이기적 열정에 몰두하는 남녀들을 꼼꼼하게 베끼듯 해 놓은 초상화이다. 미친 사람을 수용한 곳을 보자. 그곳에 가면 아주 가련한 모습들, 움푹 들어간 눈빛들, 그런데도 자신은 왕이고, 자기를 감시하는 사람을 보고는 자기 노예들이라고 떠드는 것을 목격할 수 있다. 어떻게 그가 이렇게 소리칠 수 있을까? 그가 미쳤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상의 더 낮은 수준을 탐닉함으로서 더 큰 자유와 행복을 찾을 수 있다고 착각하여 지상적 아버지의 집을 뛰쳐나간 젊은이들도 위의 정신병자와 대동소이한 것이다. 게다가 행복을 찾고자 해서 이기적인 삶에 빠져들고, 하늘 아버지의 집에 있는 신성한 법칙의 얽매임(?)에서 풀려나겠다고 발버둥치는 사람도 위의 두 부류와 별반 차이가 없는 수준이다.
조금 빠르던, 조금 늦던, 여하튼 이 사람들도 자신이 탐욕에 노예가 되어 있고 악마의 하수꾼였음을 발견한다. 너무 늦지 않게 그가 자신의 어리석음에서 깨어나 겸손과 회개 그리하여 개혁됨으로 아버지께 돌아간다면 복된 일이다. 마치 무덤 사이에서 나온 악령 들렸던 사람이 옷을 바로 입고 멀쩡한 정신으로 예수의 발 앞에 앉아 있는 것과 같으리라 (마가복음 5:15).
진보 단계들
방탕한 아들은 진보의 다음 여섯 단계를 통과해서 일곱 단계에 진입했다. 즉 자아 의지의 상태 → 어리석은 행동 → 비참해짐 → 자신을 들여다봄 → 회개 → 개혁 → 평화의 단계이다. 주님 안에서 영적 쉼의 안식인 일곱째 상태에 이르는데는 여섯 단계가 요구된다. 이것이 새 창조이다.
주님의 사랑
이 비유는 주님을 비난하는 자들에 조롱할 건수를 만들어 주는데, 예를 들면 인간이 세상에서 할 수 있는 온갖 짓을 다 한 뒤 또는 그 반대로 세상에서 할 수 있다고 생각된 것들을 추구했으나 번번이 실패하여 세상에 실망을 느낀 나머지, 이 사람들의 마지막 방책, 또는 도피처로 성자(saint)가 되는 쪽으로 돌아서도 괜찮지 않느냐는 조롱의 근거로 이 비유의 글자가 사용될 소지를 안고 있다.
그렇다 해도 한계가 없는 사랑이신 주님이 위와 같은 사람들을 성자로 만들어 주신다는 증거로 채택되지는 못한다. 세상적인 사람에게 세상욕을 가지고 마음대로 자신의 영혼이 갈망하는 것을 발견하도록 허용해 줄 때 오히려 세상욕에서 떠나는 이들이 많다. 게다가 세상이 인간 영혼이 원하는 것을 결코 만족시켜 주지 못한다는 것은 우리 주위에서 쉽게 목격되는 것들이다. 기독교적 이타애를 높은 수준으로 결코 끌어 올려놓지 못하는 냉혹한 이기심을 경건이라는 것으로 덮어씌우고 있는 성자같이 보이는 위선자들보다 개혁된 세속인이 훨씬 더 낫다.
주님의 축복이 과거 경력과 언제나 맞아떨어지지 않는다는 것, 외적 측면에 있는 보상이나 처벌만을 생각하는 아이들 수준의 자연적 마음뿐인 사람에게는 위와 같은 주님의 섭리는 신앙의 큰 장애물이 되고 있다. 그러나 기억해 둘 것 중 하나는, 신성한 사랑의 노력은 과거 행실 때문에 인간을 처벌만 하시는게 아니라, 과거 행동의 우둔함을 스스로 보게 하여 그 악에서 빠져 나와 구원하시는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주님은 형사가 아니시고, 위대한 외과 의사이시다. “하느님이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단죄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아들을 시켜 구원하시는 것이다.” “잃은 것을 찾게 해서 구원하시려는” 분이 주님이시다.
모든 죄는 위험하다
그러나 죄라는 경력을 쌓는 것이 자신을 거듭나게 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다고 착각해선 안된다. 모든 죄는 심히 위험하고 무서운 파괴력을 지녔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나쁜 경력에서 회개가 있어졌다 해도, 이미 그는 처음의 선으로부터 더 먼 거리에 자신을 서 있게 했음으로 해서 주님께 되돌아오는데 더 고되고 더 긴 시간이 필요해진다. “주님을 신뢰하며 선을 행하라. 그래야 너희는 그 땅에서 잘 살리라.”
주님의 일
예수께서는 유대 땅을 오가시며 영적, 자연적 삶의 법칙을 가르치고, 이 법이 천국적 행동으로 있어지는 모습들을 예증해 주셨으며, 병자를 고쳐 주셨으며, 악마를 내쫓아 주셨고, 죽은 자를 일으키셨다. 이러한 그분의 일들은 오늘날의 천국적 행동들 속에 영적으로 존재하고, 영적 삶을 위해 그분께 돌아오는 모든 영혼 위에, 거듭남으로 그분을 따르는 모든 이에게 똑같이 역사 되고 있다. 그분은 각 인간을 위해 해주실 수 있는 최선을 언제나 해주시고 있으시다.
큰 아들
이상 살핀 내용들, 즉 죄인의 회개와 개혁, 아버지의 사랑과 관대함이라는 아름다운 모든 그림이 다 그려졌음에도 비유는 그림 그리기를 멈추지 않고 있다. 또 다른 측면, 어둡고 찬 그림자가 아버지의 명백하고 따뜻한 햇빛의 흐름에 곁들여 있다. 큰 아들은 화가 나 있었고, 사랑의 잔치에 어떤 동정심도 없다.
큰 아들의 경우에 대해서는 매우 조심스럽게 생각하도록 해주고 있다. 사랑의 하모니에 갑자기 튀어나온 째지는 소리같이, 왜 큰 아들은 자기 목청을 돋구었을까? 그는 두 가지 특질을 소유한 듯 여겨진다. 성실하게 오랫동안 섬김, 계속적으로 순종하는 측면은 그를 칭찬할 만한 대목일 것이다. 그러나 잃었던 동생의 귀환을 반기는데는 전적으로 실패하고, 오히려 동생의 귀환에 분노와 불평을 토함으로 그는 자기 속의 시기함이나 이기적인 비이타애를 여지없이 드러내고야 말았다. 제 잘났다고 마음속으로 으쓱대며 성전을 오가던 바리사이파인같이, 그는 자신의 선한 측면을 떠벌리면서 더 나은 삶으로 되돌아 온 사람이 동생임에도 불구하고 죄인이라고 경멸하고 있었다. 그 이유는 참회자는 개혁된 것이다는 공식으로 생각할 여유가 큰 아들에게는 없었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뜨거운 사랑이 흘러 넘치는 분위기조차도 큰 아들의 냉랭한 가슴을 훈훈하게 만들 수 없었던 것이다.
외적으로 도덕적인 사람
큰 아들은 자연적 마음뿐인 사람, 바깥쪽 생활이 똑바른 사람, 자연적 평면에서만 거듭나고 있는 사람, 그런데 마음과 삶 속에 영성이 없는 사람을 표현하고 있다. 또한 그는 교회의 진리를 외면에서 받아 교회의 외적 멤버에 속한 사람도 표현한다. 겉보기에 생활 규범이 어긋나지 않고 이웃도 돕는 등등, 선한 생활도 계속하는 그야말로 자신은 “근본적으로 선하다”고 속으로 뽐내는 사람, 그럼에도 영적 애정에 속한 내면의 품성을 납득하지 못하는 사람이다. 그는 경건하다고 자처하는 유대인, 그러나 이방인들을 영접하는 주님의 행동에 시기함으로 끓고 있는 사람이다.
밭에서
회개한 작은 아들이 아버지의 집에 당도했을 시간에, 큰 아들은 “밭에 나가 있었다.” 즉 그는 삶의 외적 사항들을 수행하는 것, 법에 순응하는 영 속에 잠겨 있었다는 말이다. 그는 외적인 일에서 쌓은 공적만을 인정할 뿐 아버지가 동생을 환대하는 것에는 분노했다.
대비
큰 아들은 올바른 삶을 꾸렸고, 그 삶의 기록을 자랑하고, 죄에 빠진 사람들을 향해서는 비동정적이었다. 작은 아들은 악을 행했지만 회개하고 개혁되고, 더욱이 매우 겸손해졌다. 이 비교로 볼 때, 동생의 영적 상태는 형보다 더 나은 것이다.
음악과 춤
큰 아들은 “음악 소리와 춤추며 떠드는 소리를 들었다.” 이는 영적 애정과 자연적 애정의 표현이다. 그러나 그는 집주인의 기쁨에 응답할 마음이 없었다. 그는 하인 하나를 불러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물었다. 자연적 인간의 마음이 영적 애정의 분위기에 접촉되면 그 마음은 영적 사랑의 품질이나 본성에 관해 자기의 바깥 생각에 문의한다. 그래서 아는 것은, 주님의 사랑은 회개하는 죄인을 잘 대우하신다는 것이다.
집에 들어가지 않으려 함
그리고 그는 위와 같은 사랑에 한 푼의 동정심도 지니고 있지 않았다. 따라서 그는 시무룩해져 집에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시기하는 자연적 인간의 마음은 영적 사랑이라는 내면의 분위기에 반대됨을 느끼므로 영적 사랑의 분위기에 기꺼이 합세하려 들지 않는다. 형이 동생의 과거 속에 있던 악에 분노를 터트림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그는 동생의 과거 경력에 집착했을 뿐, 현재 동생이 안전하다는 것에 대하여는 아랑곳하지 않는 실수를 저질렀다. 어쩌면 그는 빈털터리 동생의 귀환으로 남은 재산이 다시 나뉘어야 할 것 아닐까라는 걱정이 앞섰을는지도 모른다.
아버지가 달려나옴
큰 아들이 분에 차 씩씩거릴 때, 아버지가 달려나와 그를 달래면서 동생을 환영 하자고 타이르신다. 주님으로부터 온 진리가 자신에게 기울어 있는 자연적 마음에 흘러들어 가능만 하면 천국의 축복인 영적 애정과 하나 되자고 타이르는 것이다. 그러나 아직 거듭나지 못하고 있는 자연적 마음은 천국적 사랑의 기운에 거부감을 느낀다.
불평
자연적 마음의 불평이란 이것이다. 영적 인간은 과거 악행에도 불구하고 사랑과 기쁨의 높은 상태에 들려지는 반면, 자연적 인간은 성실한 순종에도 불구하고 염소 새끼 한 마리, 즉 믿음의 새로운 상태조차도 주어지지 않느냐는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되는 원인은 자연적 인간 그 자체에 있다. 자연적 인간은 마음과 삶의 새롭고 높은 상태로 들려지지 않는다.
아버지의 대답
아버지가 이렇게 대답하셨다. “얘야, 너는 늘 나와 함께 있고 내 것이 모두 네 것이 아니냐?” 교회의 외적 인간, 법을 신성하게 여기고 순종하는 것은 각자에게 정도의 차이가 있겠지만 주님과 언제나 함께 존재한다. 다시 말해 신성한 법의 순종은 절대로 죄에 연결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 법을 수용하는 정도만큼 천국 속의 모든 것은 그에게 알려지고, 그가 음미하고자 한다면 그의 것이 되고, 그가 하고자 한다면 자기 삶의 원리로 사용할 수 있다. 더 전진한다면, 그는 자기의 거듭남을 더욱 진보되게 할 수도 있다. 그가 천국 원리를 사랑하여 사용하고자 한다면 언제나 주님께서 주신다. 남이 자기보다 더 많이 거듭났다고 해서 우리들은 불평할 수 없다. 그 이유가 천국에 속한 것들은 모든 인간이 자유로이 선택할 수 있게 항상 열린 상태에 있기 때문이다.
본래의 선
인간이 젊은 시절부터 질서적인 삶을 영위해서 거듭나는 높은 수준을 달성하여 “본래의 선”에 있을 수 있다면 가장 복된 일이다. 이 일은 만인이 달성해 보려고 노력해야 하는 이상향이다. 이렇게 되려면, 우리는 반드시 자기 속의 악한 경향성을 보고 알아서 그 악한 경향성을 미워하고 그 경향성이 꼼짝 못하게 얽어매 두어야 한다. 그래서 자기 삶이 자연적 질서, 뿐만 아니라 영적 질서 안에 있도록 해야 한다. 그의 자연적 선은 반드시 영적 선으로 속을 채워야 한다. 잘못 행하는 일은 없어야 원칙이지만 그것과 더불어 어떤 잘못된 생각이나 느낌까지도 미워하여 금해야 한다. 이것이 행해질 때까지, 그가 외적으로 올바르다 해도, 그 올바름이 그 사람으로 영적 애정을 음미하거나 경험하는 쪽으로 마음 문이 열리게 하지 못한다.
세 천국
천국은 세 개의 다른 천국으로 되어 있는데, 그 이유는 거듭나는 삶의 품질, 또는 종류가 아주 넓은 측면에서 자연적, 영적, 천적 수준으로 구분되기 때문이다. 보다 높은 천국이 갖는 특별한 품성은 보다 낮은 천국에 있는 이들이 납득하거나 경험하지 못한다.
두 형제
생활 질서가 똑바르지만 마음이 자연적인 사람, 이 사람은 거듭나고 있다 해도, 그는 거듭나는 첫 단계까지만 달성한다. 본문에서 이것이 큰아들, 첫 태생으로 표현되고 있다. 영적 마음의 상태는 거듭남의 둘째 단계인데, 본문에서 작은아들, 거듭남의 발달 과정에서 새롭게 뻗은 둘째 태생으로 표현되고 있다. 그래서 우리에게 보다 더 새로운 영적 조건이 오게 될 경우, 그것은 그가 시험을 견디어 낸 결과로 오는 것이다. 그런데 많은 이들의 경우, 새로운 영적 조건을 갖추기 전 즉 우리에게 있어야 할 진짜 모습을 인식하고 자신을 들여다보아 과감히 일어나서 하늘 아버지에게 되돌아오기 전, 우리가 지닌 영적 실패가 별 것 아닌 듯 여겨 세상적 삶에 속한 것을 탐닉하느라 영적 실체를 쉽게 낭비해 버린다.
그렇게 낭비해 버린 인간이라 해도, 합리성과 선함이 되돌아오면 우리의 외적인 마음은 즐거워하며 기뻐 뛰어야 할 것이다. 우리 각각 속에는 두 아들이 있다. 형이라는 완고한 자연적 상태, 고마움을 모르는 비판적인 상태, 법률같이 딱딱한 상태가 있다. 그 반면 동생인 보다 애정적인 상태, 영적 마음, 악한 경향성에 투쟁하려는 자세, 그래서 자연적 생각이 도달하는 거듭남 보다 더 높은 거듭남을 달성하는 상태가 있다. 결국 이 둘은 재회하여 하나를 이룬다. 악과 거짓이 우리의 애정과 생각 안에서 탐닉을 즐길 때, 우리의 작은 아들은 한동안 잃어버려 죽은 듯 방치된다. 그러나 회개와 개혁이 우리를 더 높은 상태로 들어올릴 때, 잃었던 것은 찾아지고 죽은 듯한 것이 다시 살아난다.
두려움 없이
이쯤에서 우리에게 오는 암시는, 인간은 과거 삶, 그 삶이 비록 지독한 죄인이었다 해도 걱정 속에 살 필요가 없다는 점이다. 회개와 개혁이 진행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면, 우리가 미워해야 하는 악, 내 속에서 쫓아내야 할 악들을 상당히 쫓아낸 뒤이므로 긴급히 쫓아낼 악이 없는 상태이기 때문이다. 주님은 우리를 상업 장부의 차, 대변 관계에 놓아두시는 분이 아니시다. 오로지 순수한 자비 속에서 그분은 우리가 거듭남을 통해 기쁘게 받고자 원한다면 천국 삶과 기쁨 모두를 제공하고 계신다.
거듭남
위대한 원리는 다음과 같이 매우 간단하다. 생명은 하나만이 존재하고 그 하나의 생명은 주님의 생명이시다. 주님과 우리가 올바른 관계, 즉 그분에 대한 사랑과 믿음, 그리고 순종을 유지하는 한 우리는 복되고 행복해진다. 이런 조건은 진실된 선한 원리, 주님의 계명을 지킬 때 형체를 가져 그 존재가 가능해진다. 이런 주님과의 올바른 관계가 이기심과 죄들로 썩어질 때는 언제든지 인간은 행복의 근원이요 수단이 되는 것에서 자신을 스스로 잘라 낸다. 그렇게 잘린 상태에서도 제정신이 들어 회개와 개혁을 강행한다면, 그는 주님, 그리고 행복과의 연결을 회복할 수 있다. 이것만이 주님이 인간을 거듭나게 해주시는 일을 주님으로 하실 수 있게 한다.
무자비 (용서 없음)
큰 아들은 어느 정도, 꽤 쓸만한 외적 질서를 유지했다. 그 반면 그는 모질고 시기하는 것, 무자비한 느낌과 생각을 속으로 흠모했다. 어떤 사건이 돌출 하자마자 그는 자기 속의 위와 같은 인격 속에 든 악한 특성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그는 자신 속에 순진이 있어야 한다는 것도 알고, 또한 자기는 그 순진을 잘 지키고 있다고 자부했지만, 타인의 순진이 타락했을 때 그 사람, 즉 동생을 맹렬하게 단죄했다. 따라서 큰 아들은 거듭 나아가고 있었던게 아니고, 단지 도덕적 삶, 껍데기, 눈으로 보기에 멀쩡한 삶만을 유지했던 것이다. 사실 큰 아들의 행실이 거듭나려고만 한다면, 그가 보다 신실 하려고 했다면, 훨씬 더 빨리, 더 쉽게 거듭날 수 있는 조건을 갖추고 있었던 셈이다. 그는 진리를 보았고 진리로 판단했으되, 진리를 동생에 적용함에 있어서 자기 심정을 채우고 있었어야 할 이타애, 자기의 느낌과 생각을 이끌어 줄 이타애가 결여되어 있었던 것이다. 외적 상태만에 있는 큰 아들, 냉정한 진리만으로 판단한 이 아들이 아버지의 관대한 사랑을 보고 판단하되, 아버지는 정에 매우 약한 분이라고만 결론지은 것이다. 그러나 아버지의 사랑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아버지는 어떤 약함도 없고, 오히려 사랑의 영적 힘만이 드러났을 뿐이다.
독선 (self-righteousness)
도덕적으로, 외적으로 똑바르다는 사람이 죄인을 볼 경우 자기는 최소한 그 사람보다는 더 낫다는 느낌을 갖지 않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이런 느낌을 가진 상태의 사람은 만인이 죄인이라는 것, 단지 은밀해서 탐사가 안될 뿐이요, 공개되지 않았을 뿐이라는 사실을 인정한다는 것도 역시 힘들어 진다. 자기가 남보다 조금은 더 낫다고 하는 우월감은 독선이라는 쪽으로 인간을 기울게 한다. 이 독선은 인간 악 중에서 아주 미묘한 형체로서 독성이 가장 강한 악이기도 하다. 자신이 성자라고 자처한 많은 이들이 죽어 저 세계에 있는 대기소에 들어가면 자신 스스로 큰 실수를 저지르고 있음을 발견한다. “첫째가 꼴찌가 되고, 꼴지가 첫째가 된다”는 것을 많은 이들이 새삼스럽게 발견한다.
독선이라는 악은 바리사이파인들에게 예수님께서 죄인들과 어울리는 모습을 보고 예수도 죄인 아니냐고 상상하게끔 해주었다. 그래서 그들은 그분이 죄를 더 만들어 내려 하고 죄인들을 추방자로 대우하여 정죄하는 대신 오히려 존경받게 한다고, 그리하여 죄를 더 짓게 조장하는 것이 아니냐는 억지를 내뱉게 했던 것이다. 그러나 “세리와 창녀”를 포함한 죄인들은 예수님의 설교에 바리사이파인들과는 수준이 다른 감명을 받았다. 많은 죄인들이 자신들의 모습을 관조하여 회개한 반면, 바리사이파인들은 주님을 향해, 그분이 가르치신 진리, 그분이 인간에게 주신 선을 향해 심정에 있는 문을 더욱 굳게 닫았을 뿐이다.
바리사이즘(Phariseeim)
위와 같은 모습, 그들의 행동 속에 있는 것들을 비유 속의 큰 아들에서 발견할 수 있다. 이 아들은 잃었던 것을 찾으시고자 하는 사랑을 음미하지도 않았고 오히려 분노로 단죄하였다. 게다가 그는 자기 공적에 비등한 보상이 당연히 있어야 할 것, 동생의 죄는 마땅히 그 죄에 꼭 맞는 대가가 치러져야 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런 생각이 돌출 되어 밖으로 나오면서 그는 자기 인격 속에 있어야 할 영성이 결핍되어 있음을 드러냈다. 자신이 매우 올바른 인격이라고 자부하지 않았다면, 그는 동생을 심판하려 들지도 않았을 것이다. 작은 아들이라 해서 만일 그가 자신의 악한 경향성에 잘 저항했을 경우, 그 이상의 높은 상황에 있었던 것은 아니다. 단지, 그는 자신 속의 악을 결코 보지 못하거나, 자신 속에 악이 있음을 결코 인정 안했을 경우보다는 더 높은 영적 조건에 있게 된 것뿐이다. 사실 우리가 하느님께 드릴 제물은 깨어진 우리의 영혼, 그러나 깨진 것을 회개하는 영혼이다. 그분은 깨어진 영혼을 경멸하시지 않으신다.
역사적 적용
주님은 “잃었던 양”과 “잃었던 은전”의 비유로 바리사이파인들에게 그들이 어떻게 행동해야 할 것인가를, “잃었던 아들”에서는 그들이 어떻게 행동했는가를 보여주셨다.
이 비유 안에는 교회가 타락되는 과정인 카인과 아벨, 즉 믿음과 이타애(faith and charity)에 관한 암시가 들어 있다. 형인 카인은 동생 아벨의 제물이 열납되는데 대해 시기하였다. 이 시기심이 결국 아벨을 살해하는 죄악으로 이끌려지게 했다. 이와 똑같은 영이 형의 침통한 분노 속에도 들어 있음을 알게 된다. 잘못된 사람 속에서 믿음과 이타애는 분리되어 있다. 그러나 그 둘은 거듭나는 과정 속에서 다시 하나가 되어야 한다. 인간 속의 의지와 이해성은 인간의 첫 단계에서는 위와 같이 분리되어 있다. 첫 단계란 진리를 알되 진리를 사랑하지 않아 실제에 사용하지 않고 있는 단계이다. 이해성은 관리하기가 쉬운 반면, 의지는 충동적이어서 조절하기가 어렵다. 그러나 거듭남을 일단 시작하면, 의지는 더 높고 더 내면적인 수준까지 달성하게 해준다. 그러면서 의지와 이해성이 하모니를 이루게 된다.
화해 (reconciliation)
비유가 말하고 있지 않은 것 중 하나는, 아버지가 두 아들을 화해시켰는지에 관한 것이다. 비유가 이런 구절을 담을 필요가 없는 이유는 본문이 의지와 이해성, 또는 이타애와 믿음, 혹은 외적 마음과 내적 마음 모두가 거듭나야 한다는 것을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카인과 아벨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가 아는 것은 교회가 타락함에서 “믿음만, faith alone”을 고집하면 이타애가 파멸된다는 것이다. 이 비유에서 알게 되는 것은 새교회에 의해 이타애가 회복된다는 것이다. 형의 반대적인 입장 속에서 알게 되는 것은, 새 예루살렘이 더 높은 인간다움을 회복시켜 가는데 “믿음만”이라는 교리나 종교의 외적인 모든 형체들의 반대 입장에 부딪칠 수밖에 없다는 것이리라.
그러나 아버지는 믿음이라는 형을 설득시켜서 신실한 회개와 개혁, 그리고 거듭남 속에 있는 사랑 또는 이타애라는 동생과 화해되도록 해주실 것이다. 새교회인들이 기독교적인 사랑의 높고 거룩한 삶을 이뤄 간다면, 주님께서는 인간 믿음과 인간 사랑을 거듭남 속에 있는 영적 결혼을 통해 하나 되게 해주실 수 있다. 그러면 새 예루살렘이 하느님께로부터 하늘을 통해 지상의 사람이 사는 곳까지 내려오게 되리라. 그리고 주님은 지상의 왕이 되시고, 그 날에 한 분 주님, 그분의 이름은 하나로만 불리시리라.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