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교회의 날 (2)

성경: 요한계시록 21장 1-12절
앞서 우리는 거룩한 성 새예루살렘의 일반적인 의미와 본문의 마지막 부분에 기술된 그 성의 세부사항에 관한 의미를 살펴보았다. 본 반에서는 이 거룩한 성 새예루살렘이 하늘로부터 내려와야 했던 까닭을 살펴보도록 한다. 우리는 스베덴보리를 통해 1770년 6월 19일 본문의 첫 절에서 주어진 예언의 성취가 발표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우리는 6월 19일을 “새교회 날”로 기념한다.
말씀의 글자적인 의미는 사람들을 늘 혼란스럽게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을 배우려하고 그분께서 뜻하신 삶을 살고자 말씀을 읽는 이들에게는 그들을 바르게 인도해 줄 충분한 빛이 구름을 뚫고 비치고 있어서, 그들로 하여금 언제나 빛을 발견할 수 있도록 하며 질서로운 삶에 있는 불변의 법칙이 십계명이란 것도 알게 해주었다. 초기의 사람들은 아주 단순하고 선한 자들로서 주님 안의 어떤 것을 자연에 있는 모든 것에서 보면서 그분으로부터 살았다. 선한 이들 곧 주님께 순종하겠다고 자유롭게 선택한 이들과 더불어 이 지식들은 아브라함의 시대까지 조금이나마 존속되었다. 또한 태고 교회 교인들의 지식이 고대 말씀의 기초가 되었는데, 이로부터 창세기 11장까지의 내용이 비롯된 것이다. 그러나 인간이 자연세계를 공부해가 면서 충분히 알았다고 자부하면서 주님에 관한 사항을 점차 잊게 되었고, 결국 말씀의 진정한 의미에 관한 지식마저 잃게 되었다. 그래서 그들이 점차 슬기롭지 못하고 주님께 순종하려는 이들까지도 확실한 길을 찾을 수 없게 되자 주님 당신께서 인간의 몸을 입으셔서 오신 것이다. 이를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부르고, 이로 인해 그분께서 인간에게 삶의 올바른 방법을 주신 것이다. 하지만 주님은 이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을 것임을 예견하시고, 또 다른 방법으로 오시겠다고 약속하셨다. 즉, 권능과 영광으로 하늘의 구름에 오시겠다고 약속하셨던 것이다. 우리 모두는 그분의 첫 오심에서 사람들이 모두 그분을 인정하지 않았던 사실을 알고 있다. 게다가 세상을 통치하고자 하는 자만심과 이기심이 그분을 거절하면서 그분을 십자가형에 처하시게 했다. 첫 기독교회 곧 선한 자들 사이에서 시작된 교회조차도 스스로 통치하기를 추구하면서 분리되어 여러 그룹으로 분열되기 시작했다. 심지어 인간들이 세상적인 지식을 더욱 발달시킴으로 인해 선한 이들이 더욱 많이 이해하지 않고서는 말씀에 대한 그들의 진정한 믿음을 존속시키기 힘든 시기가 초래 되었다. 그래서 주님은 단지 지상의 지식만으로 슬기롭다고 자부하는 이들로 인해 선한 이들이 현혹되지 않도록 말씀의 내적 의미에 대한 이해를 한 번 더 인간에게 주셔야 했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주님의 재림이다.
말씀의 내적 의미가 발하는 빛 속에서 말씀을 새롭게 이해함이 하늘에서 하느님께로부터 지상에 내려오는 거룩한 성 새예루살렘이며, 이 내려옴은 지상의 선한 이들을 주축으로 새 하늘과 새 땅을 형성하게 된다. 그래서 새예루살렘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교회의 선교란 삶을 공부하고 발견하고자 하는 사람들을 이 새 빛에 의거하여 돕는 교회인 것이다.
본문을 보면 모든 사람들이 이 새 빛을 받는 것은 아님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주님에 의한 통치를 원하지 않고 자신의 잘난 맛으로 살고자 하는 이들이 여전히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천국은 이들을 위한 곳이 아니다. 하지만 거룩한 성의 문은 그 성안에서 살기를 진실로 원하는 자들을 위해 영원히 열려 있다. 다시 말해서, 속으로부터 빛을 발하는 백옥같이 빛나는 그 도성의 벽 안쪽에서 살고자 하는 이들에게 그 도성의 문이 항상 열려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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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교회의 날

성경: 요한계시록 22장 13-21절

우리는 분명 새 시대에서 살고 있다. 우리는 과학자들에 의해서와 젊은이들이 부모의 사상을 반박하기 위해서 새 시대라는 표현을 쓰는 것을 종종 볼 수 있다. 인간의 기준과 기술은 늘 변하지만 하느님의 법칙은 변하지 않는다. 우리가 아는 계명들은 사실 인류 아주 초기 때부터 알려져 있던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약 3500년 전쯤에 시나이 산에서 계명들을 음성으로 모든 사람들의 귀에 들려주시고 손가락으로 돌 판에 새겨 주심으로서 그것들이 인간들이 만든 법칙이 아니라 하느님의 근본적인 법칙임을 입증해 주셨다. 그리고 약 2000여 년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요한의 환상 속에서 “나는 알파와 오메가 곧 처음이자 마지막이며 시작과 끝이다. 생명의 나무를 차지 할 권세를 얻고 성문으로 그 도성에 들어가려고 자기 두루마기를 깨끗이 빠는 사람은 행복하다”하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은 요한에게 하느님께서 계시는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거룩한 성을 보여 주신 뒤 있어진 말씀이었다.(계시록 21:1) 그리고 요한의 마지막 환상은 “그 뒤에 나는 새 하늘과 새 땅을 보았습니다. 이전의 하늘과 이전의 땅은 사라지고…”라고 시작된다. 우리가 새로운 시대를 살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올바른 느낌과 생각 그리고 행동에 대한 법칙은 하느님의 법칙이며, 이것은 모든 시대를 통해 똑같다. 우리는 이를 결코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우리는 날마다 선택에 직면하게 되는데, 이는 생각하고 선택할 수 없다면 우리는 단지 동물에 불과할 것이기 때문이다. 동물은 본능에 의해 행동하고 살아감으로서 스스로의 의지로 선택할 수 없다. 그러므로 동물들은 그들을 창조한 하느님을 인식하지 못한다. 우리가 옳고 그름을 고려하지 않고 단순한 쾌락이나 즐거움만을 위해서 선택하게 되면, 우리는 스스로를 동물로 전락시키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천국적인 지식은 영원하다. 그렇기에 이 지식은 지상적인 지식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 그 이유는 지상의 지식은 우리가 지상에 사는 동안만 도움이 될 뿐이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는 날마다 행하는 자신의 선택으로 영원히 가지고 살아야 할 자신의 인격을 형성 시키고 있음을 항상 인식해야 할 것이다.
1770년 6월 19일 주님께서는 그분만이 통치하신다고 선포하도록 영계 전체에 사도들을 보내셨다. 새 하늘과 새 땅은 주님께서 다시 오셔서 우리에게 주신 천국적인 삶과 지상적인 삶에 관한 새로운 지식이다. 이런 이유로 우리는 6월 19일을 “새교회 날”이라고 부른다. 새 시대란 우리 각자를 위한 새 하늘뿐만 아니라 새 땅도 의미한다.

요한의 환상의 끝

성경: 요한계시록 22장 8-21절

우리의 공부는 요한이 거룩한 성 새예루살렘을 보는 성경의 마지막 두 장, 즉 “나는 또 거룩한 도성 새예루살렘이 신랑을 맞을 신부가 단장한 것처럼 차리고 하느님께서 계시는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것”이라는 21장과 22장을 마지막 단원으로 끝맺고 있다. 거룩한 성은 천국에 있는 새교회이고, 이 교회를 수단으로 하여 지상의 새교회도 건설된다. 우리는 성경의 첫 장의 첫 구절인 “한 처음에 하느님께서 하늘과 땅을 지어내셨다”는 구절을 기억한다. 이는 우리 속에 하늘과 땅이 있다는 것 또는 우리 안에 천국적인 부분과 지상적인 부분이 있음을 의미한다. 주님의 기도에는 “당신의 나라가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 지리이다.”라는 부분이 있다. 이는 우리가 지상에서 순수한 선을 행하고자 하면 선함과 진리를 우리의 마음과 이해성에 가져야만 한다는 것이다. 주님의 “신부” 또는 “태양을 입고 있는 여자”인 거룩한 성은 지상의 사람들이 열려진 말씀속의 진리를 배우고 그에 따라 살면서 그것을 얼마나 빨리 사랑하느냐에 따라 하늘로부터 내려와지는 시기가 결정된다. 이것은 새교회인으로서의 우리의 책임이자 의무이다. 따라서 교회 조직으로서의 새교회는 진정한 새교회를 이루는 데에 필수적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우리가 이 세상에 사는 동안 우리의 육체가 영혼에 필수인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우리가 명심해야 할 사항은 하늘에 계시는 하느님께로부터 내려오는 진리에 순종할 때만이 진정한 새교회가 된다는 것이다.
본문은 이러한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우리는 제 22장의 첫 구절에서 요한이 본 생명수의 순수한 강과 그 강 양쪽에 생명나무들이 있음을 보게 된다. 이 생명나무들은 에덴의 동산 중앙에 있던 나무와 같은 나무이다. 이는 생명나무가 신성한 사랑의 측면에서의 주님이기 때문이다. 그 열매는 순수한 선한 일을 의미한다. 따라서 생명수의 강이란 주님의 말씀으로부터 우리에게 오게 되는 그분의 진리를 의미한다. 생명수의 물은 과거 주님이 야곱의 우물가에서 사마리아여인에게 언급하신 생명수이기도 하다.
이제 본문 14절을 읽어보도록 하자. 만약 우리가 주님의 계명을 배워 행하지 않으면, 우리는 거룩한 성에서 살고 있는 것이 아니며 이 지상에서 순수한 선을 행하는 것도 아니다. 또한 사후에 거룩한 성으로 들어가지도 못하며, 그 성내에 있는 생명나무의 열매도 먹지 못하게 된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사항은 요한이 거룩한 성과 그 성의 경이로움을 보여준 천사에게 절하려 하자 천사가 그렇게 하지 말라고 당부하면서 자기 역시 요한처럼 지상에 있었던 한 사람에 불과하며 단지 말씀의 계명을 지켜온 것뿐이라고 말한 것이다. 간혹 어떤 교회에서는 천사들이 지상에 존재했던 사람들이 아니라 주님의 보다 높은 창조물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들은 시편 8편 5절의 “저를 천사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Thou hast made him a little lower than the angels(King James version)”를 그들의 주장의 근거로 제시한다. 그러나 천사로 번역된 히브리어 “Elohim”은 사실은 “하느님”이란 뜻이다. 우리 모두는 천사가 될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제 10절의 “때가 가까 왔다”와 12절의 “내가 곧 가겠다”라는 구절을 접하면서 주님의 재림을 의미함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그래서 요한에게 이 책을 봉하지 말라고도 말해진 것이다. 재림이란 주님이 말씀을 여심으로써 내적 의미를 밝혀 주심을 뜻한다. 어떤 이들은 “그렇다면 지상의 새교회가 이다지 규모가 작은 까닭은 무엇인가?” 또는 “왜 사람들이 주님이 밝혀주신 경이로운 말씀의 내용들을 보지 못할까? 라는 의문을 제기하기도 한다. 이에 대한 답은 본문의 후반부에서 열거되고 있다.
“이것이 진실 된 것이야.”라고 확신하며 진리를 명백하게 인정할 때마다 그 진리에 따라 살아야 할 책임이 부가된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눈먼 소경 쪽으로 붙으려고 한다. 앞서 우리는 요한복음 9장에서 날 때부터 소경인 자를 고치시는 기적을 공부했다. 우리는 주님께서 소경의 눈을 뜨게 해주신 후 바리사이파인들에게 하신 말씀을 상기해야 할 것이다. 주님은 당신이 말씀을 열어 주셨다고 해서 모든 사람들이 즉시 변화되지 않을 것임을 알고 계셨던 것이다. 주님은 본문 11절에서 이 내용을 또 다시 언급하고 계신다. 우리는 자기 뜻대로 살 것인가 아니면 주님의 인도를 받아 살 것인가를 스스로 선택해야 한다. 그러나 제 17절에서 주어진 초대장은 만민에게 보내지고 있다. 이는 말씀의 진리를 원하는 사람이면 누구에게나 도달 가능하도록 장치되어 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18절과 19절에서 주님은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을 있는 그대로 받지 않으면 안 된다고 경고하고 계신다. 우리가 자신의 생각을 말씀에 덧붙이거나 또는 어느 부분의 말씀을 순종하고 싶지 않아서 주님이 말씀하시는 어떤 것을 거절한다면, 우리는 주님 앞에 자아를 내려놓는 것이 아닌바 주님께서 더 이상 우리를 안전하게 지켜주실 수 없으실 뿐만 아니라 천국으로 우리를 인도해주시지도 못하게 된다. 즉, 우리가 천국에 도달하지 못하게 되는 것은 우리의 책임이지 주님의 소홀함 때문이 아니라는 말이다. 주님은 요한복음 12장 47-48절에서 제자들에게 “어떤 사람이 내 말을 듣고 지키지 않는다 하더라도 나는 그를 단죄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이 세상을 단죄하러 온 것이 아니라 구원하러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를 배척하고 내 말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을 단죄하는 것이 따로 있다. 내가 한 바로 그 말이 마지막에 그를 단죄할 것이다.”라고 당부해 두셨다.

거룩한 성

성경: 21-22장

본문 첫 장의 2절은 모든 새 교회인들이 꼭 기억해야 하는 것이다. 그 이유가 이 구절은 상징적으로 우리 교회의 이름에 대한 이유를 주기 때문이다. 구약성서나 복음서에서 알 수 있듯이, 예루살렘은 교리적 측면의 새 교회를 의미한다. 또한 거룩한 성에 대한 환상의 모든 세부 사항은 그 교회와 교리의 영화로움 그리고 권능에 관해서 언급하는 것이다. 교리에 따른 삶은 교회를 “신부, 어린 양의 아내”로 만들어 준다.
스베덴보리는 성령에 감동된 요한을 데리고 간 “크고 높은 산”은 가장 높은 천국이라고 말한다. “크고 높은 산”은 모든 진리를 싸서 보호하는 말씀의 글자적 의미이다. 열 두 대문이란 선과 진리에 관한 모든 지식을 말하며 이에 의해 교회로 들어오게 된다. 각 방면의 세 개의 문은 분리된 입구 하나씩으로 해서 세 개의 문이기보다는 겹 문, 즉 바깥 문과 중간 문 그리고 안쪽 문으로 생각해야 할 것이다. 각 방면의 문들은 주님에 대한 세 가지 평면에서의 열림을 표현한다. 성의 주춧돌은 십계명과 같은 말씀의 글자적 의미 안에 있는 교리에 관한 것이다. 성의 길이와 넓이가 같다는 사실은 교리안의 선과 진리는 동등한 치수로 나타남을 의미한다. 보석들이란 교리 속의 모든 아름다운 진리들을 의미한다. 그것들은 마음 안에서 각기 다른 모습을 취하지만, 주님에 관한 지식을 살아 냄으로 이루어지게 된다. 순금으로 된 거리란 섬김을 사랑하는 것을 말하며, 이로 인해 우리는 진리 속의 아름다움을 보게 된다. 21장 22절과 23절은 천국의 새 교회에 속한 이들이 그들 자신에게는 진리가 없고 주님만이 모든 선함과 진리를 갖고 계신다고 기쁘게 인정함을 의미한다. 이와 같은 생각은 제 22장에서 생명나무가 자라는 생명수의 강으로 다시 나타난다. 우리가 모든 지혜와 선함의 근원으로서 주님을 찾는다면, 그분은 우리에게서 “선한 일” 곧 우리 안에 순수한 선함을 가진 행동이 우리의 진리가 발전하는 각 단계 마다 나타나도록 해 주신다. 이것이 바로 매 달 열리는 열두 가지 열매이다. 만국 백성을 치료하는 나뭇잎이란 생명나무로 그려진 원리로부터 발달되는 합리적인 진리들을 뜻한다. 이 세상의 모든 이들의 생각과 행동이 주님을 순종함에 따라 규율된다면 이 세상의 모든 질병 역시 더욱 신속하게 치료될 것이다.
성의 문들이 언제나 열려 있지만, “신성을 모독한 자”는 결코 들어가지 못함을 주목해야 한다. 그 이유는 생명을 위해 진리를 갈망한 이들만이 성에 다가갈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그들이 배우고 말한 진리대로 삶을 엮기를 원치 않는다면, 이는 한낱 외적인 기억에 불과해 죽을 때에 그 진리들은 닫혀져버리고 만다. 진리대로 살았던 것만이 그 사람의 심정 속에 쓰여 져 있는 것이다. 제 20장 12절을 읽어 보자. 열려진 다른 책이란 말씀이며 인간은 말씀과 각자의 삶 의 비교로 심판된다. 우리 각자는 날마다 삶이라는 자기 책을 집필하고 있다. 우리 자신의 것으로 만들기로 선택한 모든 생각과 느낌은 우리 내적 삶의 한 부분이 되어 간다. 이는 바깥쪽과 자기 속의 생각 그리고 느낌이 다르다하더라도 관계없다. 이 세상을 떠날 때 우리는 바깥쪽 부분은 남겨두고 안쪽 부분만이 실제의 나로서 나타난다. 주님이 우리를 심판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스스로를 심판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요한 계시록 전체에 걸쳐서 우리에게 가르쳐 지는 것이다.
제 22장 12절과 19절에서 주는 경고는 아주 심각하다. 우리는 성경공부를 더욱 깊이 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하느님의 말씀을 변경시키자 하는 시험을 겪게 되는 것, 말씀을 그대로 행하기보다는 자기주장을 대변시킬 자료 수집을 위해 말씀을 이용하는 것 그리고 자기 이론의 근거로 삼기 위해 성경을 왜곡하는 경우를 보게 된다. 이러한 경우는 머지않아 말씀의 글자마저 신뢰하지 않는 신앙으로 빠지게 되어 성경을 하느님의 작품이 아닌 인간의 작품으로 등락시켜 버린다. 그리하여 말씀 자체의 의미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닌 성경에 등장된 사람들의 역사 안으로 들어가서 탐구하게 된다. 따라서 하느님의 생각보다는 인간들의 생각을 극구 찬양하게 되어 말씀이 가져올 빛을 스스로 차단시켜 버린다. 우리가 말씀이 전달하는 내용을 명확하게 이해하지 못하는 이유는 말씀에 어떤 결점이 있어서가 아니라 우리의 무지 때문이다. 즉, 주님이 엠마오로 가는 길에서 두 제자에게 말씀하신 바와 같이 우리는 “미련하여 선지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더디 믿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성서의 끝을 장식하는 본문의 말씀이 주는 경고가 지니는 중요성을 꼭 기억해야 할 것이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

성경: 요한계시록 21장 1-27절

일곱 번째 봉인이 떼어짐과 여섯 번째까지의 나팔 소리는 주님께서 부활하신 때로부터 그분의 재림까지의 사이에 영계에 모아진 기독교회 인들의 영혼의 본모습을 밝히고 있음을 의미한다. 기독교인들에게는 그들이 세상에서 가졌었던 것들에 비례해서 천국에 가도록 허용되었다. 또한 그들은 자신들이 여전히 살아 있음을 발견하여 자신들이 천국에 있게 될 것이라고 믿었었다. 스베덴보리는 이러한 상태를 “가상의 천국들”이라고 부른다. 이러한 가상적인 상태가 깨어지는 것의 시작이 제 6장 4절에서 기술되고 있다. 이 구절에서는 여섯 번째 봉인이 떼어진 후 “하늘은 두루마리가 말리듯이 사라져 버렸고”라고 읽게 된다.
일곱 번째 나팔소리와 더불어 악과 천국의 권능 사이에 싸움이 시작되었고, 악은 그들의 마지막 처소인 지옥에 자리 잡게 되었다. 그런 다음 선한 이들은 주님에 의해 잘 간수될 수 있는 곳으로 올려졌다. 그런 다음 그들은 주님의 재림에 의해 밝혀진 더욱 심오한 진리들로 훈육되어 진정한 기독교인의 천국을 이루게 되었다. 이 천국과 더불어 지상의 새 기독교회가 형성 되었고, 이 둘은 서로 연결되어 진다.
우리가 말씀 속에서 밝혀지는 더 깊은 진리를 공부하고 그것에 따라 살려고 노력한다면, 우리는 우리 모두의 소망인 새 하늘과 새교회에 소속될 것이다. 본문은 바로 이 새 하늘과 새교회에 관한 것이다. 말씀에 있는 진리에 대해 보다 더 깊은 이해가 주어졌음이 21장 1-2절에서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내려오는 광경으로 기술되고 있으며, 이에 따라 새교회는 “새 예루살렘 교회” 또는 약칭하여 “새교회”라고 부른다.
성의 경계를 지어주며 보호해주는 성벽이란 말씀의 글자를 의미하고, 그 성이 가진 열 두 대문이란 선한 삶을 이해할 수 있도록 우리를 인도해 주는 모든 진리들을 상징한다. 그리고 그 성벽의 주춧돌이란 기독교 신앙에 근본이 되는 큰 진리들을 상징한다. 이스라엘의 열 두 지파나 열 두 사도란 우리에게 가능하도록 하는 모든 선과 진리들을 상징한다는 것은 앞서 수차례 언급되었다. 따라서 우리는 그들의 이름이 대문과 주춧돌에 씌어 있었던 이유를 이해할 수 있다. 보석들이란 말씀 안에 든 갖가지 진리들을 상징한다. 주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이러한 진리들을 응용해 보도록 빛을 주실 때 진리들은 제각기 아름답게 진리의 빛을 투영하는바, 우리가 알게 되는 각 진리들을 의미하게 된다.
새 예루살렘 성의 각 면에는 문이 셋씩 있었고, 각 대문은 “종일토록 대문을 닫는 일이 없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종일토록 대문을 닫는 일이 없을 것이라는 말씀은 세상에 모든 이들이 각기 다른 환경에서 각기 다른 재능을 가지고 세상을 출발하여 서로가 모두 다르지만 주님께서 그들로 하여금 거룩한 성으로 가는 길을 발견할 수 있도록 진리에 대한 지식을 그들 각자에게 그 나름대로 주신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늘 더욱 선하게 되고자 주님의 진리를 진실로 원한다면 주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거룩한 성으로의 길을 발견할 수 있도록 배려하신다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이 결국 자신의 길을 발견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되는 사람은 본문의 마지막 절과 요한복음 3장 19절을 읽어 보아야 할 것이다. 모든 사람이 거룩한 성의 빛 가운데 살기를 원하는 것은 아니다. 그 이유는 거룩한 성의 빛은 우리가 우리속의 이기심을 극복하면서 주님만을 예배하게 될 때 그분에게서 오는 빛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22절과 23절로 의미되고 있다. 우리가 성경을 꾸준히 공부해야 하는 것은 날마다 생명의 책과 우리 삶의 책을 비교해 보기 위함이다.
우리가 염두 해야 할 구절은 16절이다. 길이는 성경에서 사랑 또는 선함의 척도로서 사용되고, 넓이는 진리에 대한 이해의 척도로서 사용되고 있다. 높이는 “제각기의 수준에서 함께 하는 선과 진리”를 상징한다. 그 이유는 진리를 더욱더 배워가는 것을 수단으로 하여 진리를 실천함을 사랑하게 될 때 우리의 영혼이 올라가 주님께 도달되고 그분의 영 또한 우리에게 내려와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를 깊이 생각해 보면, 성을 측량했던 측량자가 “사람의 자 또는 천사의 자”라고 말해지는 이유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지금까지 공부해온 성서 공부 과정, 즉 한 해 동안 배워온 모든 교리를 거룩한 성의 성벽과 주춧돌의 한 부분으로서 여겨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가 명확하게 이해한 여러가지 진리들을 우리의 사고 속에 자리 잡도록 하면서 그에 따라 우리의 삶을 엮어 간다면 우리의 삶은 본문에 있는 빛나는 보석들과 같이 될 것이다. 이러한 삶을 더욱 신실하게 지켜나간다면 언젠가 우리의 성벽이 아름답게 투영되는 벽옥으로 쌓여 나타나짐을 발견하게 될 것이라고 확신한다.

심판과 거룩한 성

성경: 요한계시록 20장 1-15절; 21장 1-7절

성경의 마지막 책인 계시록은 사도들의 전도로 세워지게 되는 기독교회에서 일어날 일들에 관한 예언이다. 사도들의 헌신적인 복음전파로 교회들이 세워지지만 악과 거짓 사상들이 이내 그 교회 사람들에게 스며들게 된다. 계시록은 대부분 선과 악의 대립, 진리와 거짓간의 싸움 그리고 악과 거짓이 인간의 영혼을 어떻게 파멸로 이끄는가에 대한 상징적인 표현들로 이뤄져 있다. 계시란 말은 글자 그대로의 뜻에 의하면 [감추어져 있던 것이] 벗겨서 보이게 됨을 의미한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사는 동안 가식적인 모습으로 우리 속의 나쁜 것들을 어느 정도 덮어서 드러나지 못하도록 할 수 있다. 그러나 저 세상에 가서는 우리의 진짜 인격이 있는 그대로 드러난 채로 살게 된다. 그리고 우리의 영원한 인격의 바탕이 형성되는 곳이 바로 이 세상이며 여기서 우리의 인격을 바로 세워야만 한다. 왜냐하면 사후에는 악에서 선으로 거짓에서 진리로 개과천선하는 것과 같은 근본적인 변화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본문이 상응을 통해서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바는 200여 년 전 주님이 재림을 이루셨을 때 영들의 세계에서 마지막으로 발생한 사건들의 모습이다. 주님께서 재림을 이루셔야 했을 때 기독교회로부터 올라 온 모든 사람들은 선함과 악함에 상관없이 이 세상에서처럼 저 세상에서 섞여 살면서 마지막 심판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는 주님께서 말씀을 여셔야만 마지막 심판이 시작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말씀에서 비롯되는 하느님의 진리만이 우리의 인격으로부터 선과 악이 분리되기 전 우리로 하여금 이 두 가지의 명백한 차이점들을 비교 검토하여 알도록 해준다. 이러한 과정이 중요한 이유는 우리가 선을 선택하든 악을 선택하든 간에 분명히 알고 선택해야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더욱 중요한 것은 우리가 마음에서 우러나온 선을 행해야한 다는 것이다. 즉, 모든 계명을 글자 그대로는 잘 지키는 사람들의 행실이 선할지라도 그들의 마음은 선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실제로는 아무도 죽이지 않았지만 누군가를 죽이고 싶다는 마음을 가진 것을 예로 들어 보자. 그는 사람을 죽이면 받게 되는 법적 혹은 사회적인 처벌이 두려워서 살인을 하지 않았을 뿐 마음으로는 이미 살인을 한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즉, 몸으로는 하지 않았더라도 마음으로 죄를 짓게 되면 그것은 죄를 지은 것과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 주님께서는 마태복음 5장 21-26절에서 분명히 강조하고 계신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형성한 인격이 바로 우리가 영계로 들어 갈 때 가지고 가는 우리의 생명책이다. 우리는 살아있는 동안 날마다 이 책을 집필해가는 것이다. 우리가 날마다 의를 행하고자 노력하는 것을 선택해간다면, 즉 주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을 배우며 행해간다면, 저 세상에서 펼쳐지게 될 우리의 책은 요한의 환상에서 보이는 옥좌위에 앉으신 분의 오른손에 들려 있는 생명책과 같은 것이 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생명의 책 안에 써진 것을 발견한다는 내용의 의미이다. 성경의 다른 부분에서는 사람의 이름이 생명의 책에 기록되어 있다고도 전한다. 말씀에서 이름이란 한 개인 또는 어떤 사물에 대한 성질(性質)을 의미한다. 따라서 지상에서의 삶 동안 자신만의 길을 고집하며 이기적이고 외적인 삶만을 중시해온 사람들은 생명의 책 안에서 그들의 이름을 발견하지 못하게 된다. 요한의 환상 중에 있는 악한 자들이 던져지는 불 못이란 지옥에 대한 표현이다. 지옥에 있는 자들은 한결같이 이기적인 자들로서, 시기심이나 탐욕 또는 증오와 같은 악한 애정들로 훨훨 타고 있는 것이다.
제 21장의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란 재림과 마지막 심판이 있기 전에 있었던 영계에서의 기독교인들의 삶의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새 하늘과 새 땅이란 심판 후에 선으로 형성된 진정한 기독교인의 천국을 뜻한다. 하늘이란 내적인 상태를, 땅이란 외적인 상태를 의미한다.
그 다음에 있게 되는 요한의 환상은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으로, 이는 하느님께로부터 천국을 통해서 내려오는 것이다. 말씀에서 성이란 교리를 상징한다. 교리란 가르침이라는 말의 유의어다. 따라서 성이란 각 개인이 받아들여 그대로 살아가는 체계적인 가르침을 뜻하게 된다. 그리고 예루살렘 성이란 교리적인 측면에서의 교회를 말한다. 새 예루살렘이란 살아가는데 중심이 되는 새 교리를 가진 교회를 의미한다. 이것이 바로 새교회이며, 새 교회의 정식 이름은 새 예루살렘으로부터 있게 되는 교회 또는 새 예루살렘교회이다. 20장 3-4절에서는 새 예루살렘 성이 상징하는 교리로 살아가기를 선택한 이들에게 주님께서 주실 수 있는 큰 축복에 대해서 알려주고 있다. 새교회의 교리에 따르면 하느님은 주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또한 그분은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시며 우리를 돌보는 분 곧 성령이기도 하다. 요한의 환상에 따르면 주님은 생명의 물 곧 천국으로 인도해주는 하느님의 진리를 값없이 주신다. 하느님의 아들이 된다는 것은 거듭 나아짐이요 곧 다시 태어남을 말한다. 이는 선조들로부터 우리에게 이어진 이기적이며 악한 경향성을 극복하고 하늘 아버지로부터 이어 내려져 온 것 곧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이타적인 사랑을 우리의 마음과 삶 안에 배양해감으로써 이뤄지는 것이다.

두 짐승이 정복되다

성경: 13장; 19장 11-21절

동물은 우리의 애정과 상응된다. 제 13장에서의 환상에 있는 두 짐승은 용의 말에 솔깃해질 때 지상의 사람들에게 발달되는 일련의 애정(뭔가를 하고 싶어 하는 마음)을 표현한다. 누군가가 주님의 말씀 속에서 자신을 인도해 줄 진리를 찾는 것을 중단하게 되면, 그 사람 속에는 해보려고 하는 이기적인 것들을 부추기는 사상들이 발달하게 된다. 그런 다음 이 사상들은 그의 마음과 이해성 속의 모든 것들이 정작 존재해야 할 것들과 완전히 반대될 때까지 그의 마음속의 악을 증가시킨다. 그 예로 타인이 소유한 것들을 자신이 소유하고 싶어 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받아들이는 것을 들 수 있다. 이렇게 인정하게 되는 이유는 태어나면서부터 우리에게 있는 이기심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탐내지 말라” 혹은 “도적질하지 말라”라는 계명에 자신을 매여 놓고 있으면, 우리는 우리 속의 이기심이 나쁘며 그것과 싸워야 함을 인식하게 된다. 그런데 누군가는 “우리는 이기적으로 태어나서 그렇게 할 수밖에 없어. 자신을 위해 모든 것을 얻으려고 최선을 다하는 것이 굳이 잘못된 것이라고 할 수는 없잖아.”라고 말하기도 한다. 우리는 이러한 말을 듣게 되면, 그 주장의 논리에 슬그머니 자신을 내버려둔다. 게다가 우리는 그러한 주장에 솔깃해져 그에 따른 행동을 삶에서 전개하며, 점점 더 부정직해지고 관대해지지 못하게 된다. 결국 우리는 부와 권력 그 자체를 자신의 인생 목표로 삼아야 한다고 판단하는 지경에 이른다. 이러한 것은 교인이더라도 예외일 수가 없다.
첫 기독교회는 이기적인 권세에 대한 바램으로 인해 타락하게 되었는데, 이는 이전의 교회와 별반 차이가 없는 것이다. 그 타락의 원인은 주님을 예배하겠노라고 고백하며 스스로를 기독교인이라고 자부하면서도 “내 안에 거하라”라는 그분의 분부 대신 이기적인 인간의 논쟁에 귀를 기울였기 때문이다. 이기적인 욕심을 탐닉하려는 마음을 변명하기 위해 발달된 교리가 바로 “믿음만의 교리”라고 불린다. 이 교리의 가르침은 천국을 받을 만한 어떤 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인데, 이는 우리가 본시 죄인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래서 주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써 모든 인간의 죄 값을 지불하여 아버지의 분노를 가라 앉히셨다고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님께서 우리의 죄를 사하는 제물임을 인정하며 이로 인한 그분의 용서를 진실로 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이렇게 하게 되면 지금까지 살아온 삶의 상태와는 상관없이 천국으로 가게 된다고 주장하는 것이 바로 “믿음만의 교리”의 핵심이다.
스베덴보리는 용이 표현하는 것이 곧 이 교리라고 말한다. 두 짐승이란 그 교리를 믿으며 계명에 불순종하는 핑계로 “믿음만으로”라는 교리를 이용하는 사람들을 의미한다. 스베덴보리는 첫 짐승은 그 교리 속에 거하는 평신도며, 둘째 짐승은 성직자들이라고 설명한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사항은 둘째 짐승이 “어린양처럼 두 뿔이 있었다”는 것이다. 이 말은 그 교리에 속한 이들이 자신들의 교리가 진리인 것처럼 보이게 만들려고 말씀을 인용하여 사용하는 것을 묘사하는 것이다. 말씀에는 선함이 결코 우리에게서 비롯될 수 없음을 보여 주는 구절들이 많다. 만약 우리가 용이 가르치려는 바를 신뢰하게 되면, 우리는 그러한 구절들의 일부를 통해 그 용의 논쟁이 타당하다고 여기게 된다. 이러한 경우의 예는 마태복음 19장 25-26절의 “제자들이 이 말씀을 듣고 깜짝 놀라서 ‘그러면 구원받을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께서는 그들을 똑바로 보시며 ‘그것은 사람의 힘으로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무슨 일이든 하실 수 있다’ 하고 말씀하셨다.”라는 구절에서 엿볼 수 있다. 우리는 이 구절과 이 구절이 속한 전 장을 연관 지어 두루 살펴보면 우리에게 해야 할 뭔가가 있음을 깨닫게 된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주님, 믿습니다!”라고 힘주어 외침으로써 구원되는 것이 아니라 그분께로 돌아서서 그분의 안내와 도움 그리고 힘을 구하면서 그분의 계명에 순종하며 우리의 임무를 다할 때 그분이 우리를 도울 준비를 완료하고 계신 분임을 발견하게 된다는 것이다.
짐승의 모양은 믿음만의 교리에 기대고 살 때 사람들의 영적인 모습이 어떻게 되는가를 보여준다. 우선 차후에 기본이 되는 상응공부를 읽고 세 동물이 의미하는 바를 살펴보기 바란다. 숫자 666은 “짐승을 가리키는 숫자”이며, “사람의 이름을 표시하는 것”이라고 말해진다. 따라서 이 숫자란 인간이 주님의 것 대신 누군가가 생각하고 느끼며 행동하는 것에 자기 사상의 근거를 두면 결국에는 그가 자신의 이기적인 욕심을 지지하는 쪽으로 말씀의 모든 것을 왜곡하는 상태에 이르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많은 이들이 이 13장의 마지막 절을 읽고 혼란스러워 하는데, 그들 역시 이 구절에 어떤 의미가 내포되어 있음을 알고 있다. 그들이 이렇게 본능적으로 인식하면서도 당황하게 되는 이유는 그들이 숫자를 그자체로 여기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어떤 사람의 마음이 움직이는 동기와 방법을 이해하게 되면, 우리는 “나는 그의 수를 다 읽고 있지…” 또는 “나는 그의 의중을 간파하고 있어”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숫자들에 담긴 의미 또는 의도도 이해해야 할 것이다.
제 19장은 결국 주님께서 세상에서 더욱 강해져 사람을 사람답게 하지 못하고 짐승으로 만드는 거짓 추론들로부터 인간을 구원하실 것임을 보여준다. 이것이 바로 본문의 서두에서 읽게 되는 “나는 또 하늘이 열려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라는 구절이 의미하는 바이다. 주님은 하늘을 여셨다. 다시 말해서, 주님께서 말씀 속의 내적 의미 또는 천국적인 의미를 여셨다는 것이다. 즉, 주님께서 성경이 진정으로 무엇인지와 성경이 가르치고 있는 바를 우리에게 명백히 보여주시기 위해 말씀을 여시는 방법으로 두 번째 오셨다는 것이다. 흰 말이란 성경을 진정으로 이해함을 뜻하며, 그 위에 타신 분이란 모든 왕의 왕이며 모든 군주의 군주이신 주님인 것이다. “피에 젖은 옷”이란 서로 이용하기 위해 찢어지고 남용된 말씀의 글자를 의미한다. 주님은 17절과 18절에서 성경의 열림이 우리 앞에 펼쳐진 것, 즉 경이로운 잔치에 참석하도록 우리 모두에게 초대장을 주고 계신다. 우리가 이 초대장을 받아 주님의 잔치에 참석한다면 짐승들은 모두 던져지고 말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기적인 탐닉을 변명하고자 거짓으로 해석한 성경을 명백히 보게 되어 ‘내가 어떻게 한순간이라도 그런 교리에 빠졌을까?’라고 의아해 하는 경지에 이르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