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의 통치와 시민의 통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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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의 통치와 시민의 통치
(Ecclesiastical and Civil Government)

사람들 사이에서 질서 안에 있어야 하는 두 가지 것이 있다. 천국에 속한 것과 세상에 속한 것이다. 천국에 속하는 것은 교회에 속한 것이고 세상에 속한 것은 시민에 속한 것이다.

질서가 유지되려면, 권위를 지닌 인물이 있어, 질서에 따라 발생하는 모든 것들, 질서에 반대될 경우 초래되는 것들을 주지시키고, 질서에 따라 사는 이들에게는 보상을, 질서에 거스리는 삶을 사는 자에게는 형벌을 가해야 유지 존속된다. 이것이 실시되지 않으면 인류는 멸망할지 모른다. 그 이유가 유전성에 의해 타인을 지배하고 싶은 욕구, 타인의 좋은 것을 갈취해 내 것 삼고 싶은 욕망은 모든 이에게 대체로 선천적으로 지니고 있다. 거기로부터 적개심, 시기, 미워함, 복수, 사기, 잔인함, 이 외 수많은 악들이 발생된다. 그러므로 인간은 법에 의해 제한된 상태에 놓이고, 각기 자기들의 사랑에 걸맞는 보상을 수단으로, 즉 선한 자에게는 영예와 이득을 보장하고, 악한 자에게는 형벌을 내리는 방식 속에 살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인류는 멸망을 자초할지 모른다.

그러므로 권위가 부여된 인물은 인간 집단을 질서 안에서 보존하는데 필요하게 된다. 이 인물은 법률에 노련해야 하고, 슬기 있으며 특히 하느님을 경외하는 사람이면 최상일지 모른다. 질서는 권위가 부여된 이들 사이에도 물론 있어야 한다. 이들이 좋아해서 이든 무지함으로해서 이든 질서에 거스르는 악들을 허용하지 않도록, 그럼으로 질서가 파괴되지 않도록 함이 필수일 것이다. 이는 공직 지위가 더 높거나 더 낮거나 하는 계열을 수단으로 종속 관계에서 관리 감독됨으로 보호될 수도 있다.

천국에 속하는 사람들, 또는 교회 조직 사회에 속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권위를 갖도록 앉혀진 사람들을 성직자라 부른다. 그들의 직능은 성직이다. 그러나 세상에 속하는 사람들, 즉 시민들 사이에 앉혀져 권위가 부여된 사람들은 행정 장관, 그리고 그들의 최고직은 왕이라 부른다.

성직자의 경우, 그들은 사람들에게 천국 가는 방법을 가르치고 또한 그 길로 인도해가야 한다. 그들은 말씀으로부터 자기들의 교회의 교리에 의거 그들을 가르쳐야 한다. 그리고 그들이 그 교리에 따라 살도록 그들을 인도해야 한다. 진리들을 가르치고, 진리들을 통하여 생활의 선으로, 고로 주님에게로 인도하는 성직자는 양떼의 선한 목자이다. 그러나 가르치기는 하나 생활의 선으로 인도하지 않는 성직자라면, 그는 나쁜 목자이다.

성직자는 인간의 혼을 지배하는 어떤 힘이 자기들에게 있다고 공언해서는 안될 것이다. 그 이유는 그들은 인간의 내면들이 어떤 상태인지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더욱이 그들은 천국의 문을 열고 닫는 권능이 자기들에게 있다고 주창해서는 안된다. 그 이유는 이 권능은 주님 만에 속하기 때문이다.

위엄과 영예는 그들이 집행하는 거룩한 사항들 때문에 성직자들에게 일치되어야 한다. 그러나 슬기 있는 성직자는 거룩한 것들이 주님으로부터 인 바 주님께 영예를 돌린다. 한편 슬기롭지 못한 이들은 영예를 자기 탓으로 돌리고, 때로는 그것을 주님으로부터 갈취하기도 한다. 자기들이 집행하는 거룩한 것 때문에 자신에게 영예가 있다고 주장하는 성직자는 그들이 돌보아야 할 혼들의 구원보다는 영예나 이득을 더 좋아하고 있다. 그러나 영예를 자신들이 아닌 주님에게 돌리는 이들은 영예나 이득에 앞서 혼들의 구원을 돌보고 있다. 어떤 직능으로부터의 영예는 사람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가 집행하는 공직의 위엄에 따라 사람에게 붙어져 있을 뿐이다. 고로 접합된 것은 그 사람 자신에게 속한 것이 아니다. 그리고 역시 공직과 더불어 분리되어진다. 사람에게 천부적으로 있는 영예는 지혜의 영예, 그리고 주님을 경외함으로부터의 영예이다.

성직자는 사람들을 가르쳐야 하고 진리들을 통하여 사람들을 생활의 선으로 인도해야 하지만, 그렇다고 그 누구도 강요하려 들어서는 안된다. 사람은 자기가 진리이다고 생각하여 자기 심정에 담아놓은 것에 거슬러 믿도록 강요될 수 없다. 성직자와 다르게 믿는 사람, 그런데 어떤 혼란함도 만들지 않는 사람은 평화로이 놓아두어야 한다. 그러나 혼란함들을 만드는 사람은 그 혼란에서 그가 분리되게 해주어야 할지 모른다. 그 이유는 이것 역시 성직 신분이 감당해야 하는 질서일 수 있기 때문이다.

성직자는 신성한 법과 예배에 속하는 것들을 집행하는데 권위가 부여된 사람들이다. 이에 비해 왕이나 행정관들은 시민적 법들과 재판에 속하는 것들을 집행하는데 권위를 부여받은 사람들이다.

왕 한사람이 모든 것을 집행할 수 없는 바, 왕 아래 권위를 이양받은 사람들이 서열별로 내려가며 위치하고 있다. 이들은 왕으로서도 실시하기에는 능력이 부족한 업무를 왕 대신 처리한다. 이런 사람들이 모두 집합해 왕정의 구성 요소가 되고 있다. 그러나 왕 자신은 권위 측면에서 최고이다.

진짜 왕정은 사람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에게 붙어있을 뿐이다. 왕권이 자신 고유에 속한 것이라고 믿는 왕, 그리고 자기 직권의 위엄이 자기 고유의 것에 속한다고 착각하는 행정관은 슬기롭지 못하다.

왕정은 공정의 원리로부터 왕국의 법들에 따라 집행함에, 그리고 이 법들에 의거 재판함에 있다. 법을 자기보다 더 높은 위치에 두는 왕은 슬기롭다. 그러나 자신이 법 위에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어리석다. 법이 자신 위에 있는 것으로 간주하는 왕은 법 안에 왕정을 둔다. 그리고 법들이 그 자신마저 통치한다. 그 이유가 그는 법이 정의를 뜻하고 모든 정의는 신성이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신이 법 위에 있다고 간주하는 사람은 자신 안에 왕정을 놓고 있다. 그는 자신이 법이라고 믿거나 정의인 법이 자신으로부터 나왔다고 착각하고 있다. 신성 아래 자신을 두어야 할 그가 오히려 신성인 것 마저 자신에게로 가로챈다

정의인 법은 슬기롭고 하느님을 경외하는 입법자에 의해 왕국 안에서 제정되어야 한다. 그리고 왕과 신하 모두 그 법에 따라 살아야 한다. 제정된 법에 따라 사는 왕은 그의 신하들에게 본을 보이는 바 진실로 왕이다.

자기에게 절대적 권력이 있다고 믿는 왕, 그리고 그의 신하는 자기의 노예나 다름 없는 바 그들의 소유물이나 삶을 좌지우지할 권리가 있다고 상상하는 왕은 만일 그가 이런 권리를 행사한다면 그는 왕이 아닌 폭군이다.

순종은 왕국의 법들에 따라 왕에게 하기로 예정되어 있다, 그리고 시민은 순종 때문에 말에 의해서 이든 행위에 의해서 이든 결단코 상처받아져서는 안된다. 그 이유가 이것 위에 공공의 안전이 의존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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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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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The Lord)

한 분 하느님이 계시고, 그분이 우주의 창조자이시며 우주의 보존자이시다. 또한 그분이 천국의 하느님이시고 지상의 하느님이시다.

인간과 더불어 천국 생명의 구성 요소에는 두 가지가 있다. 그것은 사랑의 선과 신앙의 진리이다. 이 생명을 인간은 주님으로부터 끌어낸다. 그리고 이 생명에 관한 것은 무엇이든 인간으로부터서 끌어 내진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러므로 교회의 제 1의 것은 하느님을 인정하고, 하느님을 믿는 것, 그리고 그분을 사랑하는 것이다.

교회 내에서 태어난 이들은 주님, 그리고 그분의 신성과 인간을 인정해야 한다. 그리고 그분을 믿고 그분을 사랑해야 한다. 그 이유가 모든 구원은 주님으로부터 있기 때문이다. 이를 주님께서 가르치신다. “아들을 믿는 자는 영원한 생명을 가진다. 그러나 아들을 믿지 않는 자는 생명을 보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하느님의 진노하심이 그 사람에게 거한다.” (요한 3:36) 다시, “이것은 나를 보내신 그분의 뜻인즉, 아들을 보고 그분을 믿는 모든 이는 영원한 생명을 가질 것이다. 그리고 나는 마지막 날에 그를 들어올릴 것이다.” (요한 6:40) 그리고 다시, “예수께서 그녀에게 말하셨다, 나는 부활이고 생명이다. 나를 믿는 자는 비록 그가 죽더라도 살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요한 11:25,26)

그러므로 교회 내에서 주님과 그분의 신성을 인정하지 않는 이들은 하느님과 결합될 수 없고, 고로 그들은 천국에서 천사들이 거주하는 어떤 장소도 할당 받을 수 없다. 그 이유는 누구도 주님으로부터, 주님 안에서가 아니면 하느님과 결합될 수 없기 때문이다. 주님으로부터가 아니면 아무도 하느님과 결합될 수 없음을 주님께서 이렇게 가르치신다. “하느님을 본 사람은 없다. 독생자이신 그분이 하느님을 나타내었다.” (요한 1:18) 다시, “너희는 어느 때이든 아버지의 음성을 들은 적이 없고, 그분의 모양을 본적도 없다.” (요한 5:37) 다시, “아들, 그리고 아들이 그분을 계시할 사람 외에는 아버지를 알 사람은 없다.” (마태 11:27) 그리고 다시, “나는 길이고 진리이며 생명이다. 나를 수단으로 하지 않고서는 아버지께로 올 자는 아무도 없다.” (요한14:6) 누구도 주님 안에서가 아니면 하느님에게 결합되어질 수 없는 이유는 아버지는 아들 안에 계시고, 그 두 분은 하나이기 때문에서이다. 그분이 이렇게 가르치신다. “만일 네가 나를 알았다면, 너는 내 아버지 역시 알았을 것이다. 나를 보는 사람은 아버지를 보고 있다. 내가 아버지 안에, 아버지가 내 안에 있는 것을 너는 믿지 못하느냐?” (요한14:7-11) 그리고 다시, “아버지와 나는 하나이다…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있다는 것을 너희는 알고 믿을 것이다.” (요한 10:30,38)

아버지가 주님 안에 계시고, 주님과 아버지는 하나이시기에, 그리고 주님은 믿어져야하고, 그분을 믿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가지는 바, 명백한 것은 주님이 하느님이시다는 것이다. 주님이 하느님이시다는 것을 말씀 역시 이렇게 가르친다,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 그리고 말씀은 하느님과 더불어 있었다. 그리고 하느님은 말씀이셨다. 모든 것들은 말씀을 통하여 만들어졌다. 그리고 말씀 없이 만들어진 것은 어떤 것도 있지 않았다. 그리고 말씀이 육을 만들었다. 그리고 우리 사이에 거주하셨다. 그리고 우리는 그분의 영광, 아버지의 독생자의 것과 같은 영광을 바라보았다.” (요한1:1,3,14) 그리고 이사야서에서(9:6), “우리에게 어린 아이가 태어나, 우리에게 한 아들을 주셨다. 그리고 통치가 그의 어깨 위에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의 이름은 하느님, 영웅, 영원의 아버지, 평화의 왕자라 불릴 것이다.” 그리고 다시 “보아라, 처녀가 임신하고 낳을 것이다, 그리고 그분의 이름은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느님이라 불릴 것이다.” (이사야7:14, 마태1:23) 그리고 예레미야에서(23:5,6, 33:15.16), “보라, 때가 이르면, 나는 다윗으로부터 의로운 가지를 들어 세울 것이다. 그리고 한 왕이 통치하고 번창할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그의 이름인즉 그들은 그분을 여호와 우리의 정의라 부를 것이다.”

교회 속에 있는 모든 사람, 천국으로부터의 빛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은 주님 안에 있는 신성을 본다. 그러나 천국의 빛으로부터가 아닌 이들은 주님 안에서 인성 밖에 더 이상의 것은 보지 못한다. 어쨌든 신성과 인간은 주님 안에서 하나되어 있는 바, 그 둘은 하나이다. 주님께서 이렇게 이를 가르치신다. “아버지, 나의 모든 것이 당신의 것이고, 당신의 모든 것이 나의 것입니다.” (요한17:10)

교회에 알려져 있는 바, 주님은 아버지 여호와로부터 임신되셨다는 것, 고로 임신으로부터서도 그분은 하느님이셨다는 것, 또한 그분은 몸 전체와 더불어 다시 일어나셨다는 것, 그 이유는 그분은 무덤에서 그분 뒤에 남긴 것이 하나도 없었기 때문. 이 주제에서 역시 그분은 후에 제자들에게 확증하시어 말하시기를, “보라, 내 손과 발을, 이것은 나 자신이다. 나를 만져라 그리고 보아라. 영은 살과 뼈가 없지만 너희 보는 바 같이 나는 가지고 있다.” (누가24:39); 그리고 비록 그분이 살과 뼈에 관한 점에서 사람이셨다 할지라도, 그분은 여전히 닫힌 문으로 들어오셨다. 그리고 그분이 자신을 명백히 하신 후에 그분은 눈에 보일 수 없게 되셨다. (요한20:19,26, 누가 24:31) 이런 경우의 것은 모든 사람과 더불어 모두 다르다. 그 이유가 그분은 그분의 몸에 관하여가 아닌 영에 관하여서는 단독으로 다시 일어나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분은 어떤 영 같이 있지 않았다고 말하심에서 주님은 자신은 또 다른 사람 같이 있지 않았다고 말하셨다. 이로부터 주님 안에 있는 인간 역시 신성임이 분명하다.

모든 사람은 인간 아버지로부터 혼(soul)이라 불리는 것 , 즉 그의 생명의 실재를 가진다. 이 실재로부터 몸이라 불리는 것, 즉 생명의 실체가 있다. 그러므로 몸은 혼의 인형(effigy, 초상)이다. 혼은 이 인형을 통하여 저 좋을대로 자신의 생명을 활동하게 한다. 그러므로 인간 존재는 부모를 닮아 태어나지고, 가족들은 서로서로 구별되는 것이다. 이로부터 몸의 어떤 종류, 즉 주님이 가지셨던 인간은 어떤 종류이었냐가 드러난다. 즉 그것은 그분의 생명의 실재(esse)인 신성 자체와 같았다는 것, 또는 아버지로부터의 혼 같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분은 말하셨다,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는 것이다.” (요한 14:9)

주님의 신성과 인간이 한 분 인물(one Person)이다는 것은 기독교계에 두루 받아진 신조와 일치하고 있다. 다음과 같다: “비록 그리스도가 하느님과 인간일지라도, 그분은 아직 둘이 아닌 한분 그리스도이다; 인물의 통일성을 수단으로 전부가 하나이다. 몸과 혼이 한 사람이듯, 그렇게 하느님과 인간은 한 분 그리스도이다.” 이 말들은 아타나시안(Athanasian) 신조로부터 취해진 것이다.

신위(Deity)에 관련하여 세 인물들이다는 생각을 견지하는 이들은 하느님이 한 분이시다는 생각을 지닐 수 없다. 입술을 가지고 그들이 하나라고 말한다 해도 여전히 그들은 셋을 계속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신위에 관련해 한 분 인물 안에 세 가지 신위가 있다고 생각하는 이들은 한 분 하느님을 생각할 수 있고, 역시 하느님은 한 분이시다고 생각한다.

한 분 인물 안에 셋에 관한 생각은 아버지가 주님 안에 있음으로서, 그리고 성령은 그분으로부터 진행하는 것으로서 생각할 때 윤곽이 잡힌다. 그러면 삼위일체가 주님 안에 있다; 즉, 아버지라 불리는 신성 자체, 아들이라 불리는 신성한 인간, 그리고 성령이라 불리는 신성한 진행(Proceeding)이다.

신성 전체가 주님 안에 있기에 그분에게 천국들 안에서와 땅 위에서 모든 권능이 속해 있다. 이를 그분께서 이렇게 선포하신다. “아버지께서는 아들의 손에 모든 것을 주셨다.” (요한 3:25) 다시, “아버지는 아들에게 모든 육을 제압하는 힘을 주셨다.” (요한17:2) 그리고 마태복음 11장 27절에서, “아버지의 모든 것이 나에게 전달되었다.” 다시, “모든 권능이 천국과 땅에서 나에게 주어졌다.” (마태 28:18) 이 권능은 신성이다.

주님의 인간(성)을 또 다른 사람의 것과 비슷하게 만드는 이들은 참 신성으로부터 그분에 관한 개념을 가질 수 없다. 그들은 모든 이의 몸이 그의 혼의 인형이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은 그분의 부활이 그분의 몸 전체를 가지고 있어졌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분의 얼굴이 태양 같이 빛난 그분의 변모하심이 어떻게 그렇게 나타나게 되셨는가 하는 것에도 관심이 없다. 주님께서 그분에 대한 신앙에 관해 말하신 것들, 아버지와 하나된 주님의 존재에 관하여도, 그분의 신성화 하심에 관하여도, 그리고 천국과 땅의 모든 권능에 관해서도, 즉 이런 것들이 신성하다는 것, 그리고 그분의 인간성에 관해 말해진 것도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은 주님이 그분의 인간성에서 조차 편재하신다는 것을 기억하지 않는다. (마태 28:20) 그럼에도 성찬에서 그분이 편재하신다는 믿음은 일으켜 세웠다. 그러나 편재함(omnipresence)은 신성이다. 뿐만아니라 그들은 성령이라 불리는 신성이 주님의 인간성으로부터 진행된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 같다. 그럼에도 성령은 그분의 신성화된 인간성(His Glorified Human)으로부터 진행된다. 그 이유가 이렇게 말해졌기 때문이다. “성령은 아직 있지 않았다, 그 이유는 예수는 아직 신성화되시지 않았기 때문이다.” (요한 7:39)

주님께서는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세상에 오셨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인간은 영원한 죽음에서 멸해졌을 것이다. 그리고 그분은 세상에 태어나는 모든 사람에게, 세상을 떠나는 모든 사람에게 만연되어 있었던 지옥들의 세력들을 복종하게 하심으로, 동시에 그분의 인간성을 신성화 하심으로 인류 구원이라는 것을 작업하셨다. 이렇게 하셨기에 그분은 지옥을 영원한 복종 아래 묶어 둘 수 있으셨다. 지옥을 복종하게 함, 동시에 그분의 인간성을 신성화하심은 그분이 어머니로부터 가졌던 인간성 안으로 침입한 시험들을 극복해가심을 통하여 결과되었다. 십자가 위에서의 그분의 수난은 마지막 시험이었고 (마무리 짖는) 완전한 승리였다.

주님이 지옥들을 정복하셨다는 것을 그분 자신이 가르치셨다. 십자가의 수난이 가까워졌을 때 그분은 말하셨다, “지금은 이 세상의 심판이다. 지금 세상의 제1인자가 내던져질 것이다.” (요한 12:31) 다시, “힘내어라, 내가 세상을 정복했다.” (요한16:33) 그리고 이사야서에서, “에돔으로부터 오는 이가 누구냐? 아주 큰 그분의 힘 안에서 여행하신다. 구원하는 힘이다. 나 자신의 팔이 나에게 구원을 가져왔다. 이렇게 그분은 그들의 구세주가 되셨다.” (63장, 59:16-21) 주님이 그분의 인간성을 신성화 하셨다는 것, 그리고 십자가의 고난은 마지막 시험이었다는 것, 그리고 완전히 승리하셨다는 것, 이를 통하여 그분은 신성화를 이루셨다는 것을 주님께서 요한 복음(13:31,32)에서도 마찬가지로 가르치신다. “유다가 나갔을 때, 예수께서 말하셨다, 이제 사람의 아들은 신성화된다. 그리고 하느님은 자신 안에서 그분을 신성화 하실 것이다. 그리고 곧 그분을 신성화 하실 것이다.” 다시, “아버지, 시간이 오고 있습니다. 당신의 아들을 신성화하시고, 아마 당신의 아들도 당신을 신성화 할런지 모릅니다.” (요한 17:1,5) 그런 다음 다시, “지금 내 혼이 괴로워하고 있다. 아버지, 당신의 이름을 영광되게 하소서. 그런다음 천국으로부터의 음성이 있어 말하기를, 나는 둘 다를 영광되게 하였다, 그리고 다시 그것을 영광되게 할 것이다.” (요한 12:27,28) 다시 누가복음(24:26)에서,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겪어 그분의 영광 안으로 들어가야 하지 않겠느냐?” 이런 말들은 주님의 수난에 관해 말해졌다. 영광되게 함은 신성으로 만듬을 뜻한다. 이로부터 나타나는 바, 주님이 세상에 오시어 사람이 되시지 않으면, 그리고 이를 수단으로 그분을 믿고 사랑하는 모든 이들을 지옥으로부터 해방되게 하시지 않으면,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의 구원은 있어질 수 없었을 것이다. 고로 이해되는 것은, 주님 없이는 구원도 없다는 것이다.

주님은 그분의 인간성을 충분하게 영광되게 하셨을 때, 그분은 어머니로부터 입었던 인간성을 벗으셨다, 그리고 아버지로부터의 인간성을 입으셨다, 이것이 신성한 인간이다. 그러므로 더 이상 그분은 마리아의 아들이 아니었다.

교회에서 첫째이자 맨 먼저인 것은 한 분 하느님을 알고 인정하는 것이다. 이 지식과 인정함을 떠나서는 결합도 없다. 주님을 인정함 없이 있는 교회의 경우를 주님께서 이렇게 가르치신다. “아들을 믿는 자는 영원한 생명을 가질 것이다. 그러나 아들을 믿지 않는 자는 생명을 보지 못할 것이다. 게다가 하느님의 진노가 그 사람에게 주재한다.” (요한 3:36) 그리고 또 다른 장소에서 “너희는 내가 있다는 것을 믿지 않으면, 너희는 너희 죄들 안에서 죽을 것이다.” (요한8:24)

주님 안에 삼위(trinity)가 있다는 것, 즉 신성 자체, 신성한 인간, 진행되는 신성이 있다는 것은 천국으로부터 있는 신비이다. 그리고 거룩한 예루살렘 안에 있을 이들을 위하여 계시되었다.

섭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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섭리
(Providence)

천국에서, 그리고 지상에서의 주님의 통치는 섭리라 불리워진다. 사랑 속에 있는 모든 선, 신앙 속에 있는 모든 진리, 이로부터 구원이 있고, 이는 그분으로부터 이고 사람으로부터서는 절대 아닌 바, 명백한 사항은 주님의 신성한 섭리는 인류의 구원에 이바지하는 모든 것, 그리고 각각의 것 안에 있다는 점이다. 이를 주님께서 이렇게 가르치신다. “나는 길이고 진리이며 생명이다.” (요한 14:6) 그리고 다시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있지 않으면 가지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지 않으면 너희는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나 없이 너희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요한 15:4,5)

주님의 신성한 섭리는 인간 삶의 지극히 작은 세세한 것들에까지 이르른다. 그 이유가 생명의 유일한 한 개의 원천이 주님이시기 때문, 이 분으로부터 우리는 살고 행동하기 때문이다.

세상적인 것들로부터 신성한 섭리에 관하여 생각하는 이들은 섭리는 단지 보편적인 사항에 국한되고 세세한 것들은 인간과 더불어 있을 뿐이다고 결말 짓는다. 이들의 헛점은 자기들이 천국의 신비함에 정통하지 않은 것이다. 그 이유가 그들은 자기들의 추론을 자아와 세상 사랑, 그리고 그 사랑으로부터의 쾌락으로부터서만 도출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들이 선한 자 보다는 사악한 자가 영예로운 지위에, 그리고 재물도 더 많이 축적하는 것을 볼 때, 더우기, 그들의 구상을 밀어붙여 성공하는 것을 볼 때, 자기들의 심중에 말하는 바, 신성한 섭리가 모든 것, 그리고 각각에 존재한다면 이런 경우가 발생해서는 안될 것이다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들은 신성한 섭리는 순간적으로 지나가는 지상의 것인 인간의 생명과 더불어 종지부를 찍는 것들은 중시하지 않고 영원히 지탱할 것들, 끝이 없는 것들에 깊은 관심을 둔다는 것을 고려하지 않는다. 끝이 없는 것이 존재를 가진다는 것, 그러나 끝이 있는 것은 상대적으로 존재를 가지지 않는다는 것도 간과하고 있다. 혹은 그들로 하여금 수 천 년과 영원을 비교해 생각하게 해보자. 아마 그들은 그 둘이 같지 않다는 것을 지각할 것이다. 그러니 한 백년 남짓한 세상에서의 인생 기간과 영원으로 이어지는 저세상 인생은 어떠할 것인가?

정직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세상에서의 재물과 등급은 비록 인간이 그것들로부터 있는 쾌락으로부터 그것들이 신성한 축복이다고 순간적으로 생각할지 몰라도 실상 그것은 진짜 신성한 축복들이 아니다는 것을 알런지 모른다. 그 이유는 그것들은 소멸해 버리고, 뿐아니라 많은 것들을 부추켜 천국으로부터 돌아서게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원한 삶, 그것의 더 없는 행복이야말로 신성으로부터 있는 진정한 복들이다. 이를 주님께서 이렇게 가르치신다. “네 기대에 어긋나는 일이 없는 천국들 안에 네 자신을 위하여 보물을 준비하라. 거기는 도둑의 접근이 없고, 썪는 일도 없다. 네 보물이 있는 곳에 네 심정 역시 거기에 있다.” (누가 12:33,34)

사악한 자가 자기들의 계획을 추진함에서 성공이라는 왕관을 쓰는 이유는 이러하다. 그들의 계획한 바가 신성한 질서에 일치했기 때문이다. 즉 인간이 행하는 것은 무엇이든 이성으로부터 실행되어야 한다는 것, 마찬가지로 자유함으로부터 행동이 있어야 한다는 것. 그러므로 그의 이성에 따라 자유로부터 행동하도록 인간을 놓아두어야 한다는 것, 결과적으로 신성한 질서에 일치되는 쪽에서 창안된 것들은 사악한 자의 창안이다 해도 성공되어야 그나마 사악한 자라도 영원한 생명을 받는데 적합해 질 기회를 만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영원한 생명은 당사자가 자유할 때, 그리고 그의 이성이 계발될 때 인간 안으로 조금씩이라도 스며들기 때문이다. 강제성이 동원된 것은 그 사람의 것으로 남아 있지 않는 바, 어느 누구도 선 쪽으로 강요 당하지 아니한다. 그 이유는 강요당할 경우 그의 것이 안되기 때문이다. 그의 것이 되는 것은 그의 이성에 따라 자유함에서 행동된 것들이다; 그리고 자유함으로부터 행동된 것은 그의 의지로부터, 즉 그의 사랑으로부터 행해진 것이다. 그의 의지, 즉 그의 사랑은 인간 자신이다. 만일 인간이 뜻하지 않은 것을 강제로 하게 해도, 그는 꾸준히 그의 의지가 뜻하는 쪽으로 기울고 있다. 대체로 모든 이는 금해진 것을 얻으려 애쓰는 경향이 짙다, 게다가 감추여 놓인 원인으로부터 더욱 그러하게 애쓴다. 그 이유가 모든 이는 자유를 쟁취하려 노력하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명백한 바, 인간이 자유 안에 보존되지 않으면 선은 그를 위해 준비되어질 수 없을 것이다.

인간으로 하여금 자신의 자유로부터 생각하고 뜻하라고 내버려두는 것, 법들이 그것을 금하지 않는 한, 인간은 자유함에서 생각하고 뜻하게, 설령 악을 행할지라도 유보하시는 것을 허용하심(permission)이라 부른다.

세상의 복된 것 쪽으로 노련한 계획에 의해 이끌어가는 것이 인간에게는 마치 당사자의 신중함의 결과인냥 나타난다. 그런 가운데서도 여전히 허용함에 의해 신성한 섭리는 그를 거들어, 계속적으로 악으로부터 그가 멀리 떨어지도록 이끌고 있다. 결국 천국의 복된 것들 쪽으로 인도하는 것은 인간 자신의 신중함의 결과가 아님이 알려지게 되고 지각되어진다. 그 이유가 이것은 주님으로부터 이고, 그분의 신성한 섭리에 의해 야기되고, 배열되고, 계속적으로 선 쪽으로 인간을 이끌어 가기 때문이다.

위와같은 경우를 인간은 자연의 빛으로부터는 납득할 수 없다. 그 이유가 이 빛으로부터서는 신성한 질서의 법칙에 관하여 알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섭리와 예견이 있다는 것은 마음 안에 출생되도록 되어 있다. 선은 주님에 의해 설비되나, 악은 그분에 의해 예견되는데, 선과 악이 마음 안에서 함께 있는 것은 사실이다. 인간으로부터 나오는 것은 악 밖에 없으나, 주님으로부터 나오는 것은 선 밖에 없다.

신성한 성경, 또는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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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한 성경, 또는 말씀
(The Sacred Scripture,or Word)

신성으로부터의 참 계시 없이 인간은 영원한 삶에 관한 어떤 것, 또는 하느님에 관하여 조차도 알 수 없다. 그리고 그는 하느님을 사랑함과 그분에 대한 신앙에 관한 것은 더더욱 모른다. 그 이유가 인간은 지독하게 무지한 상태로 태어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간은 자기 이해성을 형성되게 하는 모든 것을 세상의 물체로부터 배워야 한다. 또한 유전적으로 그는 자아 사랑과 세상 사랑으로부터 일어나는 모든 악 안에서 태어나진다. 거기로부터 발생되는 즐거움은 계속적으로 우세하다. 그리고 이 즐거움은 신성에 직반대되어 있다는 것을 당사자에게 암시한다. 이것이 인간은 영원한 삶에 관해서 아는 게 없다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러기에 참 계시의 필요성이 대두되고, 참 계시로부터 인간은 여러 지식을 가질 것이다.

자아 사랑과 세상 사랑의 악들이 사람들을 설득하여 영원한 삶에 속하는 것들에 관하여 무지해 있게 한다는 것은 교회 내에 있는 이들의 경우로부터 오히려 분명해진다. 그 이유가, 비록 그들이 계시로부터 하느님은 계신다…천국과 지옥이 있다…영원한 삶이 있다…이 삶은 사랑과 신앙의 선을 통하여 획득해야만 한다…등등을 알아채고 있는 듯 해도, 그들이 학식이 있든 없든 별 상관 없이 위 사항들을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부정하는 오류에 빠져 있기 때문이다. 이런 예를 가정해 보건대 참 계시가 전혀 없다면 그 부정함의 심각성은 어떠할까?

인간은 사후 살기에, 그리고 영원히 살기에, 이 삶은 그의 사랑과 신앙에 따라 그를 기다리고 있기에, 수반되는 것은, 인류를 향한 사랑으로부터 신성은 이런 삶으로 인도해줄 것들을 계시하였고 이것이 인간의 구원에 이바지하고 있다. 신성이 계시해온 것이 우리와 더불어 있는 말씀이다.

말씀이 신성으로부터의 계시인 바, 말씀의 각각의 것들, 그리고 모든 것들은 신성하다; 그 이유가 신성으로부터 있는 것은 다른 방도로는 존재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신성으로부터 있는 것은 천국들을 통하여 인간에게 내려온다; 그러므로 천국들 안에서는 거기 있는 천사들의 지혜가 편의를 제공하고, 지상의 경우는 거기 있는 사람들의 납득력이 편의를 제공한다. 이 때문에, 말씀 안에는 천사들을 위해서는 영적인 것인 내적 의미가 있고, 지상의 인간을 위해서는 자연적인 것인 외적 의미가 있다. 고로 인간이 천국과 결합하려면 말씀을 통하여야만 가능하다.

계발되어온 이들이 아니면 말씀의 순수한 의미를 이해할 자는 아무도 없다. 그리고 주님을 사랑함 안에서 그분에 대한 신앙을 지닌 이들은 주님에 의해 계발되어진다. 그 이유가 이들의 내면들은 주님에 의해 천국의 빛 안으로 들려지기 때문이다.

글자로 있는 말씀은 말씀으로부터 있는 교리를 수단으로 해서만 납득될 수 있다. 단순한 사람들에게서 조차도 말씀의 글자적 의미는 그들의 이해력이 편의를 제공해준다. 그러므로 말씀으로부터의 교리는 글자 의미를 위해 등불 역할을 담당한다,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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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Church)

인간과 더불어 천국의 구성요소가 되는 것은 또한 교회의 구성요소이기도 하다. 그 이유가 사랑과 신앙이 천국을 구성하듯, 마찬가지로 사랑과 신앙은 교회를 구성한다. 따라서 천국에 관해 이미 상술했었던 것으로부터 교회가 무엇인지가 분명해졌을 것이다.

교회는 주님이 인정되어진 곳이다고, 그리고 말씀이 존재하는 곳이다고 말해진다. 그 이유가 교회의 필수 요소는 주님을 사랑함과 그분을 믿는 것이고, 이 둘은 모두 그분으로부터 이다. 그리고 말씀은 인간이 주님으로부터 사랑과 신앙을 받기 위하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가르친다.

교회가 존재한다란 거기에 말씀으로부터의 교리가 있다는 말과 같다. 그 이유는 교리 없이 말씀은 이해될리 만무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인간과 더불은 교회를 구성하는 것은 교리 만이 아니라 교리에 따른 생활도 필수이다. 이로부터 분명한 바, 믿음 만으로 교회가 구성되는게 아니라 선행인 믿음으로부터의 생활도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순수한 교리는 선행에 관한 교리, 동시에 신앙에 관한 교리이다. 즉 신앙의 교리가 선행의 교리에서 떨어져 나가서는 절대 안된다는 말이다. 그 이유가 선행의 교리와 동시에 신앙의 교리는 생명의 교리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앙의 교리가 선행의 교리로부터 떨어진 것은 생명의 교리가 아니다.

교회 밖에 있다 해도 한분 하느님을 인정하고 이웃을 향한 선행 안에서 그들 나름대로의 종교에 따라 살아가는 이들은 교회 속에 있는 이들과 교제하는 가운데 있다고 생각해야 한다. 그 이유는 하느님을 믿으며 선한 생활을 이끌어 가는 사람이라면 그 누구도 지옥에 갈 수 없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분명한 바, 주님의 교회는 세상 두루 어느 곳에도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다. 비록 특수한 측면에서는 조금씩 차이가 있을지라도, 일반적 측면에서의 경우 거기서 주님은 인정되고, 거기에도 말씀은 존재한다.

교회가 존재하는 모든 이는 구원되나 교회가 존재하지 않는 모든 이들은 지옥에 간다.

천국과 지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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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과 지옥
(Heaven and Hell)

인간 영의 생명을 구성하는 두 가지 것이 있다. 사랑과 신앙이다. 사랑은 그의 의지의 생명을 구성하고, 신앙은 그의 이해성의 생명을 구성한다. 선을 사랑함, 그리고 이 사랑으로부터 진리의 신앙이 천국의 생명을 구성한다. 그리고 악을 사랑함, 이 사랑으로부터 거짓의 신앙은 지옥의 생명을 구성한다.

주님을 사랑함과 이웃을 향한 사랑은 천국의 구성 요소이다. 그리고 신앙 역시 위와 마찬 가지이나 단지 위 두 사랑들로부터 존재하는 한 그러하다. 이 사랑들, 그리고 이 사랑으로부터의 신앙 모두는 주님으로부터 인 바, 주님이 천국을 만들고 계심도 분명할 것이다.

각 사람과 더불은 천국은 그가 주님으로부터 사랑과 신앙을 받음에 따라 있다. 그리고 세상에 사는 동안, 주님으로부터 천국을 받는 이들이 사후 천국에 들어간다.

주님으로부터 천국을 받는 이들은 자신들 안에 천국을 가지는 이들이다. 그 이유가 천국은 인간 안에 있기 때문, 주님께서도 이를 가르치시고 있다. “하느님의 왕국이 여기 있다, 저기 있다 말하지 마라. 그 이유는 하느님의 왕국은 네 안에 있기 때문이다.” (누가 17:21)

인간과 더불은 천국은 인간의 내적 부분, 고로 사랑과 신앙으로부터 그의 의지력과 사고력에 주재한다. 그리고 그의 외적 부분은 사랑과 신앙으로부터 말하고 행동하는데 있다. 천국은 내적 부분과 떨어진 외적 부분에는 있지 않다. 그 이유가 위선자의 경우 속과 겉이 다르기 때문이다.

인간이 사후 저 세상으로 올 때는 천국이 그 사람과 더불어 있는지 여부는 즉각 판명되지만, 세상에 사는 동안은 누구도 그렇지 않다. 그 이유가 세상에서는 외적 부분만 나타날 뿐, 내적 부분은 나타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저쪽 삶에서 내적 부분은 분명히 드러나진다. 그 이유가 거기서는 그가 영으로 있기 때문이다.

주님으로부터 주님을 사랑함 안에, 그리고 그분에 대한 신앙 안에 있는 이들은 영원한 행복을 누린다. 이것을 천국의 기쁨이라고도 부른다. 이 기쁨은 이 사랑 안에, 이 신앙 안에 함유되어 있다. 그리고 자신 안에 천국을 지닌 이들은 사후 이 기쁨을 향유한다. 한편 이것은 그의 내적 부분 안에 감추여 있다. 천국들 안에서는 모든 선들을 공유함도 있다. 모든 사람 속의 평화, 총명, 지혜, 행복은 거기서 각자에게 소통되어진다. 허나 이것은 주님으로부터 사랑과 신앙을 받는 정도에 따라 가능하다. 이로부터 분명한 바, 천국에 있는 평화나 총명, 지혜 그리고 행복은 그 얼마나 큰지!

주님을 사랑함과 이웃을 향한 사랑이 인간과 더불은 천국의 구성 요소이듯, 자아 사랑과 세상 사랑은 그것들이 인간 안에서 우세해질 경우, 지옥의 생명의 구성 요소가 된다. 그 이유가 이 후자의 두 사랑은 전자의 두 사랑에 직반대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자아 사랑과 세상 사랑이 지배권을 쥐게 한 사람은 천국으로부터 오는 어떤 것도 받을 수 없고 지옥으로부터 오는 것만을 받을 수 있다. 그 이유가 인간이 사랑하는 것은 무엇이든, 그가 믿는 것은 무엇이든 천국이나 지옥이나 어느 한 쪽으로부터 오기 때문이다.

자아 사랑과 세상 사랑이 득세하고 있는 이들은 천국과 천국적 행복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그리고 그들은 자아 사랑과 세상 사랑 외에 어느 사랑 안에서 행복함이 가능할지 조차도 가늠하지 못하는 듯 여겨진다. 어쨌든 자아 사랑과 세상 사랑이 목적하는 것에서 제거되는 정도에 비례해 천국의 행복은 그 사람에게 들어갈 수 있다. 이 옮겨짐에 뒤 따르는 행복은 실로 너무나 커서 인간의 모든 납득력을 초월한다.

인간의 생명은 사후에는 바뀔 수 없다. 이 생명은 지금까지 있어 왔던 그대로 그곳에서도 남아 있는다. 그 이유가 인간의 영은 자기 사랑들의 품질에 따라 전적으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옥의 사랑은 결단코 천국의 사랑으로 변형시켜질 수 없다. 그 이유는 그 둘은 직반대되기 때문에서이다. 이것이 성경에서 지옥에 있는 부자에게 아브라함이 한 말에서도 의미되고 있다. “너와 우리 사이에는 큰 구렁텅이가 있어 여기서 네게 건너가고자 해도 갈 수 없고, 거기서 우리에게 건너오고자 해도 갈 수 없다.” (누가 17:21) 이로부터 확실한 바, 지옥에 가는 이들은 거기서 영원히 머물러야 한다는 것, 천국에 가는 이들은 거기서 영원히 머무르게 된다는 것이다.

부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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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
(Resurrection)

인간은 그의 내적 인간에 관련해서는 그가 죽을 수 없도록 창조되어져 있다. 그 이유가 그는 하느님을 믿을 수 있고, 또한 하느님을 사랑할 수 있기 때문, 그러므로 그는 신앙과 사랑을 수단으로 하느님과 결합할 수 있다. 하느님과 결합함은 영원한 삶을 뜻한다.

내적 인간은 태어나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있다. 그의 외적 인간은 내적 인간을 수단으로 신앙과 사랑에 속하는 것들을 행한다. 내적 부분은 소위 영이라 불리우고, 외적 부분은 몸이라 불리운다. 몸이라 불리는 외적 부분은 자연계에서 사용하기에 적합하다. 이것은 인간이 죽을 때 벗어 던진다. 그러나 영이라 불리는 내적 부분은 영계에서 사용하기에 적합하다. 이것은 죽지 않는다. 만일 당사자가 세상에서 선한 쪽에 있어 왔다면 그의 내적 부분은 선한 영과 천사이다. 그러나 세상에 있는 동안 악한 쪽에 있어 왔다면 그것은 악령이다.

몸이 죽은 후, 인간의 영은 영계에서 인간 형체로, 마치 자연계에서 있던 그대로의 모양으로 나타난다. 또한 그는 자연계에서 했었던 그대로 보고, 듣고, 말하기를 즐긴다. 그리고 그는 자연계에 있었을 때 같이 생각하는 능력, 뜻하는 능력, 행동하는 능력을 부여받는다. 한마디로, 그는 세상에서 입고 있었던 몸 전체를 입고 있지 않다는 것 외에는 각각 그리고 모든 것들에서 사람이다. 그는 죽을 때 세상을 위한 몸을 남기고 다시는 그것을 되찾지 못한다.

삶의 이런 연속이 부활에 의해 의미되고 있다. 사람들은 죽게 되면, 눈에 보이는 온 세상이 멸망하는 때인 마지막 심판 이전에는 일어나지 못한다고 믿고 있다. 이렇게 믿는 이유는 그들이 말씀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서 비롯된다. 그리고 감각적 인간이 몸 안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 그러므로 이것이 다시 생명을 얻지 않으면 인간 전부는 끝장일 것이다고 믿고 있다.

사후 인간의 삶은 그의 사랑의 삶과 그의 신앙의 삶이다. 그러므로 그가 자연계에서 지니고 살아왔었던 그의 사랑과 신앙의 삶이 그대로 그를 기다리고 영원까지 이어진다. 자신만을, 세상의 것만을 위해 자연계의 삶을 소비한 사람은 지옥이 기다리고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하느님을 사랑했고 자신인 듯 이웃을 살핀 이들은 천국의 삶을 이어받는다. 이 후자가 신앙을 지닌 이들이다. 전자는 신앙을 가진 것이 아니다. 천국의 삶은 소위 영원한 삶이라 불린다. 그리고 지옥의 삶은 영적인 죽음이라 부른다.

사후에도 인간은 산다는 것을 말씀이 가르치고 있다. 예를 들면, “하느님은 죽은 자의 하느님이 아니시고 산 자의 하느님이시다는 것” (마태 22:31), “라사로는 사후 천국으로 운반되었으나 부자는 지옥에 던져졌다는 것” (누가 16:22,23), 그리고 “아브라함, 이삭, 야곱이 천국 안에 있다는 것” (마태 7:11, 12:31,32, 누가 20:37,38), 예수께서 강도에게 “오늘 너는 낙원에서 나와 함께 있을 것이다” 라고 말하신 것 (누가 23:43), 등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