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엘상 31장 해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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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상 제31장

이스라엘의 패전과 사울의 죽음

이스라엘 왕국의 역사를 기록한 거룩한 저자는 이 나라의 통치자나 백성에 관계된 것이라면 무엇이든 돌출시켜 지면을 할애하고 이야기의 주요한 주제와 연결되는 주변 국가들에 대해서는 소개하는 수준에 그치게 하고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인간의 일상사와 마음 안에 있는 신성한 사랑과 지혜의 정부, 즉 하느님의 나라는 영감된 기록의 장엄한 주제이고 그외 원리나 힘은 하늘 왕국의 번성을 도와 주거나 방해하는 정도로 소개하고 있다. 하느님의 왕국이 말씀 안에 있듯 우리 안에도 있다. 주님의 나라는 우리가 관심을 두고 가장 중요시하는 제일 가는 목적이다. 그외 다른 모든 것들은 이 목적을 안정되게 발전시키는데 영향을 미치는 수준에서 관심을 둘 뿐이다. 28장 1절, “불레셋군과 이스라엘군이 싸우려고 군대를 집합시켰다”는 대단히 짧은 기록에 이어 사울과 엔도르의 무당, 그리고 다윗이 아기스와 함께 있었고 그가 아말렉을 공격했다는 긴 이야기를 전개해 놓고 있다. 양쪽 군대가 전쟁 준비를 했다는 짧은 서술 뒤에 본문의 첫 절이 이어진다. “불레셋군이 이스라엘을 공격하였고 이스라엘군은 불레셋군에게 쫒겨 도망치다가 길보아산에서 마구 죽어 나갔다.” 이 짧은 문구에 얼마나 많은 의미를 담아 공표되고 있는지! 전쟁과 패전이 짧고도 평범한 글로 기록되어 있다. 그럼에도 이것은 전쟁 자체로나 그 전쟁 결과로 보나 평범한 전투는 절대 아니다. 이 전투는 이스라엘 왕국의 운명을 판가름 지은 것은 아니지만 그 나라의 첫 왕의 운명을 결정지어 주었다. 동시에 그 왕과 백성이 주님과 어떤 관계에 있는지 그 조건과 상태를 여실히 드러내준 전투였다. 전쟁 자체가 이스라엘을 질책한 원인은 아니지만 그 패배는 백성들이 타락했다는 표시가 되었다. 전투에서 숫적으로 열세해서 이스라엘의 군대가 불레셋을 피해 도망친 것은 아니다. 만일 사울이 이스라엘의 강함을 확실히 믿고 있었다면 적의 어떤 강함도 그를 격파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사울은 혼백을 불러내는 영을 지닌 그들에게서 해결책을 모색했다. 그래서 지금 그는 자기의 도덕적 약함과 실지의 불신앙이 초래하는 결과를 보았다. 자기 종교를 미신으로 대체할 때, 또는 “생명 있는 것이 죽은 것에서 해결책을 구할 때 위 사울의 신세가 되고 만다. 하느님에 대한 살아 있는 신앙을 가지지 못할 때 죽은 신앙을 지닌 이들에 의해 처벌되어진다. 불신앙의 이스라엘은 믿음만을 표현하는 불레셋에 쫒겨 도망쳤다. “악이 사악한 자를 도륙하리라.” 사실 본문 전,후의 글자상에서 보면 사울만이 악과 불신앙을 지닌 것처럼 여겨진다 그런데 왜 백성들까지 사울의 죄로 고통당해야 할까? 자녀들은 부모의 죄 때문에 고통 받고 신하는 제 통치자의 잘못 때문에 욕을 당하고, 군인들은 장군의 무능력으로 억울한 죽음을 맞이한다. 그렇다고 이 역사의 이스라엘 백성에게 책임이 없는 게 아니다. 그들은 다윗을 추격하는 사울과 합세했다. 사실 그들은 나라에 공헌한 자가 누구인지 알고 있었어야 했고 자기들을 도울 최고의 군인이 누구인지 구별했어야 했다. 게다가 다윗 군대로 인해 급박한 죽음을 모면한 크일라 주민이 사울의 수중에 다윗을 넘긴다는 것은 너무 비도덕적 양심 소유자의 소행이었을 뿐이다. 지브 사람들은 사울에게 다윗의 은둔지를 비밀리에 가르쳐 주었다. 이렇게 그들이 사울의 범죄에 동참했듯이 사울이 받는 벌에도 마땅히 동참할 수밖에 더 다른 길이 없다. 이런 자연적이고 도덕적 법의 집행 말고도 그 법칙에 근거한 영적 법칙의 작용도 있다. 이 법칙은 우리의 정신적, 영적 삶을 규율하는 법칙이다. 우리가 첫 번째 준수해야 할 원리를 그르칠 때 그에 따른 부수적 단계는 올바른 길과 참 목적에서 더 멀리 떨어져 있게 된다. 목적이 악하면 그에 동원되는 수단은 사기 책략들이고 행동 결과는 죄뿐이다. 통치하는 사랑이 더 수준 낮은 애착 안으로 진입한다. 그리고 그 사랑의 속성에 일치하는 품성과 결정을 애정에 주게 된다. 더구나 그 사랑과 전혀 다른 속성까지도 지배해 버릴 때도 많다.
이런 원리와 꼭 맞아 떨어지는 게 사울의 역사이고 그의 운명은 우리에게 위의 원리를 나열해 보여주고 있다. 이스라엘 군대가 불레셋 군대에 쫒겨 도망치자 불레셋군은 겁에 질린 졸병보다는 거물급에 목표를 집중시켰다. “불레셋군은 계속 사울과 그의 아들들을 추격하여 사울의 세 아들 요나단, 아비나다, 말기수아를 쳐죽였다. 전세가 이미 다 기울어진 판에 사울마저 적의 화살에 맞아 부상당하고 말았다. 사울은 자기의 무기당번에게 일렀다. ‘저 오랑캐들에게 붙잡혀 욕을 당할 수는 없다. 차라리 네가 칼을 뽑아 나를 찔러라’ 그러나 무기당번은 감히 칼을 뽑지 못하고 망설였다. 그러자 사울은 손수 칼을 뽑아 자결하였다. 그리하여 그날, 사울과 그의 세 아들과 무기당번과 사울의 부하들이 모두 죽고 말았다.” 어떤 큰 사건도 이 전투의 결과만큼 큰 것은 없을는지 모른다. 제아무리 황폐해진다 해도 이 패배만큼 처절할 수 없다. 아마 이 사건과 상당히 비슷하다고 여겨지는 성경의 사건이라면 그것은 하느님의 궤가 옮겨지면서 엘리의 두 아들이 살해되고 엘리 마저 의자에서 넘어져 죽는 사건일 것이다. 이 경우는 비록 패배했다 해도 전멸당한 것은 아니다. 엘리의 죄가 대 이변의 원인 중 한 가지였고 사울의 죄도 또 다른 대 이변이지만 그것을 자초했다. 각각의 경우 그 계승자는 전임자가 무가치하게 통치했지만 합법적인 통치 시기 동안에 신성하게 미리 임명되었다. 그리고 계승자는 전임자 자신들에 의해 부분적으로 양육되었다. 사무엘이 엘리 밑에서 가르쳐 길들여 졌고 다윗은 사울 밑에서 어느 정도 나마 그러했다. 두 사건 모두 같은 일반적 교훈을 가르친다. 다른 점은 판관과 왕으로서의 표현적 속성뿐이다.
영적 의미와 실제적 교훈을 배울 의도에서 이 역사를 생각하고 있다면 우리는 사울 자신이 관련된 대 이변에 관한 상세한 것에서 너무 지체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사울 자신은 물론 백성, 자기 하느님의 적들과 마지막이요 운명적인 전투가 될 거라고 사울 자신도 의심할 바 없었던 전투인데도 전투를 강행한 무모한 용기에 감탄할 어떤 점이 없지는 않다. 이 점만이 불레셋과 교전한 사울 왕에 관해 좋게 말해줄 수 있는 전부일 것 같다. 사울이 전쟁에 참가하는데 있어 용기가 부족했다고는 생각되지 않으나 충실도가 부족했다. 충실해지는 것은 용기를 내는 것보다 더 어렵고 더 중요하다. 자아 사랑이나 사리 사욕도 본래 가지지 않았던 용기나 담력을 흡입하는 것은 과히 어렵지 않으나 성실함은 자아 사랑이나 사리 사욕의 포기를 종종 요구한다. 의무나 책임에 성실하려면 우리가 가장 아끼는 자연적 애착을 부정해 버리도록 요구한다. 사울도 즉위 초기 시절, 즉 자신이 별 큰 인물이 못된다고 여기고 있던 그 당시에는 나름대로 고상한 행동도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였다. 아각 왕을 살려 놓았을 때 그는 꽤 관대함으로 통치하는 듯 자신을 평가했을는지 모르나 그것은 하느님의 소리와 이성을 거역한 것이었다. 다윗을 향한 그의 행동에서 그는 자연적 인간의 속성을 명백히 드러냈다. 자연적 인간의 좋아함과 싫어함은 원칙에 바탕을 두고 있는 게 아니라 줏대 없이 작동한다. 자연적 인간의 상냥함이나 안심함이 타인을 측량할 때 그런 좋은 자질이 자신 안에 있는 정도에 따라서가 아니라 자신과의 관계가 어떠한지로 이루어진다. “너를 사랑하는 사람만을 사랑한다면 네게 무슨 보상이 있을까? 세리들도 그만큼은 하지 않느냐?” 종교적 윤리를 표준으로 판단한다면 사울 통치의 후기는 거의 악마적인 속성을 암시하고 있다. 잔인하고 저속한 모든 열정의 부모격인 자아 사랑의 본성이 다윗을 향해서 공포적인 행동으로 적나나하게 드러내고 있다. 이런 그의 행동은 다윗이 그의 목숨을 살려주는 사건에서는 더욱 대조적으로 가증스럽게 드러나고 있다. 후기 통치에서는 관용, 아량, 용서 같은 보다 고상한 태도는 아예 비쳐지지도 않는다. 이미 살핀바 있듯이 사울은 통상적인 표준에 의해 판단되어지지 않는다. 우리는 그를 완전하게 건전한 마음의 소유자였다고 할 수 없다. 그가 언제나 그런 것은 아니나 그의 직무 경력의 많은 기간 동안 악마에 홀려 있었다. 이런 관점에서 그의 행동은 더 인상적인 교훈을 우리에게 남기고 있다. 그이유가 자연적 인간의 본래의 품성, 또는 우리의 자연적 마음의 본래의 품성은 이보다 더 완전하게 보여줄 방도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사울의 체험에서도 우리가 보게 되는 것은 죄와 더불어 있게 되는 비참함과 가엾음이다. 그의 마지막에서 그가 하느님을 버리고 이미 떠난 영과 개인적으로 접촉해서 해결책을 알려고 하는 우리의 병든 모습의 결과를 보여주고 있다.
사울의 개인적 행동을 들여다 보는 것도 우리에게 도움이 되지만 특히 그의 생을 마감하는 장면, 마지막 전투인 본 장을 그를 통해 표현된 품성 측면에서 잘 생각해보는 것도 더욱 유익할 것이다. 그는 주님께서 최대한 양보하신 상태에서 타락의 속성을 어머니로부터 입은 자연적 마음의 품질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사울의 품성을 우리에게 반영시켜 볼 수 있고 같은 영적 영향력에 신하 노릇을 할 수 있다고 상상해 본다면 그의 품성은 우리에게 거울이 되어 줄 것이다.
이 사건과 주변 상황이 가르치는 영적 교훈을 숙고해보면 그것은 사울의 표현적 품성과 행동에 관해서 이고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중시하는 교훈이기도 하다. 사울에게 수여되어진 기능 자체는 거룩하고, 표현적 측면에서는 신성이고 영적이다. 이 기능이 개인에게 붙어 있다 해서 그 개인과 동일시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사울은 주님의 기름부은 자로서 거듭나는 인간을 표현하고 육체 안에 계신 주님까지 표현하고 있다. 그럼에도 사울의 개인적 품성에서는 위 두 가지 모두와 부합되지 않는다. 다윗은 자기애 관하여 이 구별을 명백히 만들었다. 다윗은 자기를 박해하는 자를 죄 있는 자로, 기름부은 자로서의 자기는 거룩하게 지키고 있었다. 사울의 적인 불레셋과 그외 여러 민족들도 다윗과 싸웠고 다윗도 그들과 교전했으나 그것은 개인 차원이 아닌 공적 차원, 즉 그들이 지배하길 원했던 왕국의 왕의 차원에서 였다. 그러므로 이런 전쟁들은 주님과 그분의 왕국에 대항해서, 또는 그분의 나라를 위한 전쟁, 영적 전쟁들을 표현했다. 그러나 이스라엘 왕국에 대항하는 임무가 주어진 이들이 표현한 영적 전쟁들은 주님 개인 차원에 대해 주어진 임무로 이해되서는 안 된다. 개인적인 교전은 그분에 대항해서 한 번 수행될 수 있었을 뿐이다. 그분이 육 안에서 나타나실 때 개인적 차원에서 공격당하실 수 있었다. 그리고 그분 자신과 그분의 나라의 적, 어둠의 영들에 의한 것은 악마와 사탄으로 불린다. 어느 전투에서든지 주님은 정복자이셨다. 그러면 사울과 불레셋 사이의 마지막 전투, 이스라엘이 패배하고 사울도 죽게되는 전투는 그분의 전투 중 어떤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시험- 싸움에서 정복하는 이들의 외관에는 패배의 외관이 언제나 있다. 주님의 마지막 그리고 가장 격렬한 시험, 십자가의 고난이 이 외관을 표출했다. 그분의 죽음은 어둠의 영들에게는 승리의 쾌거로 비쳐졌다. 드디어 그들은 그분을 정복했다. 그러나 부활 아침에 그분은 죽음의 끈을 모두 끊어버리고 모든 권능을 가진 영화된 인성으로 일어나셨다. 이긴 듯 보인 승리는 패배로 갑자기 바뀌어 그들 자체가 끌어내려져 영원히 그분께 종속되어 버렸다. 이 한 개의 예만이 가시적이었지만 모든 시험은 똑같은 가상과 실상을 가지고 있다. 모든 시험이 극에 달하면 자포자기가 뒤이은다. 그래서 시험당한 자가 자포자기되면 시험자에게 승리가 있는 듯 보인다. 또한 모든 시험에는 죽음과 부활이 뒤따른다. 옛 사람의 어떤 것이 죽고 새 사람의 어떤 것이 살아난다. 옛 사람의 죽음은 악령에 의해 결과되는바 이것이 악령에게는 승리인 듯 보인다. 새 사람의 부활은 천사에 의해, 또는 천사를 통해 주님에 의해 결과되는데 이것은 악령에게 실제의 패배이다. 그러므로 악령에게는 통치하는 사랑이라는 일반적 측면과 애착과욕망이라는 세부적 측면 모두에서 옛 사람의 죽음을 가져오게 하는 각종 수단들이 허용된다. 악령은 제 죽음의 장례를 치르는 죽은 자이고 새 사람은 신성한 명령 “너는 나를 따르라”에 순종한다 (마태 8:22).
그러므로 사울의 죽음, 그의 아들의 죽음, 이스라엘 군대의 패전을 주님의 신성화 하심, 인간의 거듭남에 관련시켜 이해해 볼 때 그것은 우리에게 있어서 영의 패배와 죽음이 아니라 육의 패배와 죽음을 뜻한다. 이를 두고 사도들은 우리가 그분과 살기 위해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 것, 육의 죄를 벗는 것으로 말하고 있다.
위 설명에 걸맞지 않는 듯 여겨지는 사울의 죽음에 관한 한 가지 세부사항이 있다. 사울은 적이 자기를 죽이는 것을 허용치 않았다. 그는 자기 생명을 스스로 끊었다. 그럼에도 이 사항도 주님께서 자신의 죽음에 관해 선포하신 진리 측면에서 주님을 표현한 것으로 고려되고 있다. 그분께서 말씀하셨다. “나는 내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바친다… 누가 나에게서 목숨을 빼앗아 가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바치는 것이다. 나에게는 목숨을 바칠 권리도 있고 다시 얻을 권리도 있다. 이것이 바로 내 아버지에게서 내가 받은 명령이다” (요한 10:15,18). “말씀의 가장 깊은 의미는 주님 만을 취급한다. 그리고 이 의미 안에는 그분의 인성이 신성화 하심 또는 인성이 신성과 하나 됨에 관한 모든 상태가 묘사되어 있다. 마찬가지의 모든 상태들은 지옥을 종속시키고 천국의 모든 것까지 포함해서 질서에로 환원하신 것까지 포함되어 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이스라엘 군대의 전멸, 사울과 그의 아들들의 죽음은 가장 깊은 의미에서 어둠의 권세와의 그분의 싸움, 승리, 인성의 신성화와 관계되고 있다는 것이다. 사울의 군대가 도망치고 사울 스스로 죽는 광경은 주님께서 마지막 고난을 당하시기 직전에 있던 모습과 매우 비슷한 게 있다. 예수께서 높은 성직자가 보낸 무리들에게 잡혔을 때 모든 제자들이 그분을 버리고 달아났다. 주님의 작은 무리가 도망친 것은 사울의 큰 군대가 도망친 것보다 훨씬 더 중대한 사건이다. 그분께 복종당하지 않으려고 전력을 다했던 악령들은 주님이 잡히자 대 성공이라고 기뻐했을 것은 의심할 바 없다. 중대한 순간에 주님의 제자들이 도망했을 때 주님 스스로 피할 방도를 구하지 않으셨고 잡히는데 어떤 저항도 않으셨고 적의 손에 그분 자신을 내맡겼다. 자신의 생명을 얼마든지 구해낼 수 있는 사람이 분명 죽게 된다는 것을 알면서 자신을 내어 놓고 있다면 이는 자기 희생, 산제물이 아닐까? 물론 이 모습이 비록 불완전하지만 하나의 인간으로서, 주님의 기름부어진 자로서의 마지막 행동에 의해 표현적 백성의 역사 안에서 기름부은 자, 메시아의 모형을 특징짓고 있지 않을까?
또하나 기억해둘 게 있다. 시험받고 죽는 것은 주님의 인성에 있는 신성으로부터의 진리(truth Divine)이라는 것이다. 신성처럼 여겨지는 진리 즉 신성으로부터의 진리는 사람의 아들로 의미되기도 한다. 이는 천사나 인간의 납득력에 걸맞도록 유한하게 있는 신성한 진리, 천사나 인간이 영적인 것과 신성에 관해 느끼고 생각해 볼 때 그들의 상태에로 내려오는 가상으로 옷입은 진리이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그분의 개인적 고통과 죽음에 관해 말하는 신약 성서의 어느 곳에서든지 그분은 언제나 자신을 하느님의 아들이 아닌 사람의 아들로서 언급하신다. 사람의 아들이라는 용어를 수단으로 주님은 말씀 측면의 그분 자신에 관해 언급하신다. 현재로서는 더 이상 주님은 시험당하시거나 개인적으로 죽음에 놓여질 수 없다. 이제는 그분에게 가해진 모든 것, 육체 안에 계실 당시 그분이 받으신 모든 고통은 말씀, 진리의 성경, 그리고 그분의 교회와 백성에게는 가능하다. 인간 본성으로 옷입혀진 영원한 말씀으로서의 주님 사이에도 상응이 존재한다. 주님이 입으신 인간 본성은 인간의 유전적인 불완전을 가졌다. 그리고 계시된 말씀이 인간에게 내려오느라 입혀진 언어는 타락된 인간의 납득력에 의거한 진리를 표현하고 있다. 그러므로 과거 유대인이 주님을 취급한 것같이 현재의 기독인도 주님의 말씀을 취급하는 것은 가능하다. 기독인이 진리를 부정하고 진리에 반대할 수 있다. 마치 유대인이 주님을 부정한 것과 같다. 유대인이 주님을 죽인 것같이 기독인도 진리를 파괴할 수 있다. 이런 기독인은 자기 손으로 새로이 하느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박고 욕을 보이는 셈이다 (히브리서 6:6). 이런 바탕에서 우리가 성경에서 주님이 받으신 대접, 그 대접이 구약에서 기록된바 같이 그분을 표현한 이들에서든지, 신약에서 그분 자신에 직접 가한 대접이든지 어느 것이든지 이는 말씀이 가르치는 선함과 진리의 원리에 반대되는 이들에게서 말씀이 대접받는 것을 묘사하고 있다. 그리고 말씀이 정죄하는 악하고 거짓된 원리에 있는 이들이 말씀을 취급하는 것을 묘사한다.
이런 상응은 아직 더 있다. 주님과 그분의 말씀에 관련된 것은 무었이든 그분의 교회(the Church)에도 관계된다. 그이유가 이 교회는 주님의 신비로운 몸, 그분 자신의 거룩한 몸의 형상이고 그분의 말씀 속의 진리로부터 형성되어 그 진리로 떠받쳐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 교회가 신실한 사람의 일반적 몸을 구성하는 것으로만 간주하는 것은 금물이다. 이 교회는 선함과 진리의 원리를 인정함까지 다 포함해서 이다. 그러므로 유추의 고리와 그것의 연결은 말씀을 통해 주님으로부터 천국과 지상의 그분의 교회에, 그리고 주님으로부터 가장 미미한 그분의 제자들에게 까지 내려온다. 한 가지에 관련된 것은 무엇이든 모든 것에 관련되고, 장소에 따라 각각에 관해 다른 점은 내려오는 규모를 말하고, 그 규모는 첫 원인으로부터 마지막 결과에 까지 이다.
말씀의 글자적 의미는 자연계에 소속된 것 같이 그 대부분이 진리의 외관(가상)으로 존재하고 있다. 이런 외관들은 그것 자신의 교정을 위한 수단 그 자체 내에 보유하고 있다. 외관적 진리들은 진짜 진리들이 어느 정도라도 발견되거나 밝히 알려질 때 그것이 하느님의 말씀에서이든, 그분의 일 속에서이든, 진짜 진리에 선천적으로 모순되는 것으로 해서 그것이 가상(외관, 껍질)이라는 것이 입증되어 질 수 있다. 말씀의 외관적 진리들은 참으로 어떤 영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 영적 의미는 글자가 함유한 영(soul) 또는 생명이어서 글자가 죽을 때 글자 속의 의미는 살아 남는다. 그러나 이 원칙은 성경의 모든 글자에 해당되는 게 아니고 외관적 진리들에 국한된다고 조심스럽게 이해해 두어야 한다. 그 이유가 성경의 글자적 의미에는 외관적 진리들 뿐만 아니라 진짜 진리들도 존재하기 때문이다. 진짜 진리(real truth)는 글자 안에서도, 영혼에서도 참된바 언제나 바뀔 수 없어 영원하다. 외관적 진리(apparent truth)는 영혼 안에서는 참되나 글자에서는 그렇지 않은바 바뀔 수 있어 일시적이다. 예를 들어 보자. 주님은 누구에게나 선하시고 그분의 온유한 자비는 그분이 하시는 모든 일에 넘쳐나고 있다는 것은 글자에서도, 영혼에서도 참이다. 그 반면 주님은 날마다 사악한 자에게 화를 내신다는 것은 영혼의 경우는 참이지만 글자의 경우 그렇지 않다. 위와 같은 예에서라면 영혼은 글자에 반대되는 상태이다. 그 이유가 영적 의미에서 주님의 자비는 사악한 자, 그들의 모든 상태에까지, 주님의 본성에 상반되는 상태에까지 퍼져가지만 그분의 사랑은 사악한 자가 느끼기로는 그분이 성내신 듯, 아예 자기를 미워하는 듯 여기므로해서 그렇게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글자 의미는 반드시 죽고 영적 의미는 살아나야 한다. 참으로 단어들이 함유하고 있는 진짜 진리인 영적 의미가 발견되어지고 밝히 알려질 때 글자 의미는 마치 제 스스로 자결하듯 죽는다. 주님의 영의 칼, 순수하고 영적 의미로 있는 하느님의 말씀은 가상적인 진리를 쳐서 떨어뜨린다. 이것은 말씀의 전체 측면이나 부분 측면에서나 똑같이 적용된다. 성경의 어느 한쪽 부분이라해도 그 속의 순수하고 영적인 의미가 알려지면 거기에 소속된 가상적 진리는 자연스레 죽어지는 게 아니라 폭력적으로 죽어진다. 죽는다 해도 가상적 진리는 계속 성서 안에 체류한다. 마치 자연계와도 같다. 그러나 더 이상 진짜 진리로 간주되지 않는다. 더 이상 가상적 진리는 삶의 안내도, 교리의 원천도 되지 못한다. 더구나 불레셋이 그것을 남용할 수도 없고 최소한 타인의 신앙을 파괴하는데 남용되지 못한다. 그들은 생명없는 몸을 움켜쥐고 모욕해버릴 수 있겠지만 영만큼은 모욕할 수도 없고 남용도 할 수 없다.
이상 살핀 내용은 본장에 관한 일반적 관점이다. 이 지식을 가지고 역사의 세부사항을 살핀다면 더 흥미가 있게 되리라.
이스라엘 사람들이 불레셋을 피해 달아나다 길보아 산에서 마구 죽어나갔다. 길보아란 샘(fountain)이라는 뜻이고 거기에 샘이 있다. 이 샘은 이즈르엘 골짜기 근처에 있었고 이스라엘 군대가 집결한 곳이고 거기서 이스라엘 군대가 부상당해 쓰러졌고 사울의 아들들도 살해되고 사울 자신도 자결해 버린 곳이다. 영적이고 영원한 생명인 영적 사랑을 상징하는 산, 길보아가 최소한 한동안이지만 자연적 사랑을 상징하고 있다. 이 자연적 사랑이 통치하면 영적인 영원한 죽음이다. 가장 좋은 것도 뒤집히면 가장 나쁜 것이 되어 버린다. 이와 같이 최상의 의미도 반대되는 법칙에 의하면 최악의 의미를 가지게 된다. 시온은 높은 산이 되어 구세주의 오심을 선포하도록 명령되어 있다(이사야 40:9). 그러나 그분이 오셨을 때 악마는 그분을 높은 산으로 데리고 올라가 그분을 시험했다 (누가복음 4:5). 율법이 시나이산에서 선포되었으나 갈보리산에서는 모독되어졌다. 이런 구절의 예를 보면 산은 하느님을 사랑함이라는 거룩한 원리를 상징하지만 자아를 사랑함이라는 부정한 원리도 상징하고 있다. 이와 같은 측면을 우리는 말씀의 많은 부분에서 찾을 수 있다. “우리를 쫒는 자, 하늘의 독수리보다 빨라 산등성이에서 끈질기게 따라오고…” (예레미야 애가 4:19). “나는 너의 살코기를 산에 내다 버리고 네 시체로 골짜기를 채우리라” (에제키엘 32:5). “네 군대는 다시 모을 길 없이 이 산, 저 산에서 흩어졌다” (나훔서 3:18). 본문의 역사로 표현된 것 같이 교회의 진리가 세상의 오류 앞에서 도망칠 때, 또는 종교의 원리나 참된 개념들이 거짓된 자들 앞에서 퇴각할 때, 그 한계점은 삶에 관계된 것들이다. 참된 것의 종착지는 선이고 거짓의 종착지는 악이다.
불레셋 군대가 이스라엘 졸병들을 도망치도록 했을 때 그들은 사울과 그의 아들들을 추격해 따라 잡았다. 그리하여 불레셋은 세 아들을 죽였고 설사 사울이 자결하지 않았다해도 필시 불레셋의 칼에 죽었을 것이다. 우리는 사울과 그의 아들, 그리고 이스라엘 군대가 전체 속의 세 구성요소를 표현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사울은 통치하는 원리 자체, 아들들은 원리 자체로 규율된 이끌어 가는 원리, 이스라엘 군대는 통치되는 보통의 원리들이다. 보통의 원리들은 더 높은 원리가 안주하는 기초를 형성하고 받쳐준다. 따라서 보통의 원리가 제각기 도망친다면 그외 다른 원리, 제아무리 높은 원리라 해도 파멸된다. 말씀 측면에서 이를 생각해보자. 글자 속의 보통 진리들은 그외 더 높은 진리의 기초를 형성하고 더욱이 그것 안에 신성한 진리가 충만과 권능으로 안주한다. 교회 측면에서 생각해보자. 생활과 예배에 관한 보통의 원리들은 믿음과 사랑에 속하는 더 높은 원리의 기초를 이룬다. 인간 측면에서 생각해보자. 그 사람의 말과 행동은 그의 생각과 애정의 기초를 이룬다. 기초를 이룬 모든 것은 더 높은 원리들을 떠받친다. 따라서 기초가 조각날 때 그 위, 그 안의 모든 것은 당연히 멸해지고 만다. 이스라엘 군대가 도망치자 사울의 아들들이 살해되고 사울마저 죽는다. 그러므로 영감된 이 역사 기록은 글자적 사실과 함께 영적 진리까지 한꺼번에 이렇게 표현해 놓고 있다. “…전세가 다 기울어진 판에 사울마저 적의 화살에 맞아 부상당하고 말았다…그리하여 그 날 사울과 그의 세 아들과 무기 당번과 사울의 부하들이 모두 죽고 말았다.” 과거 야곱이 요셉에게 내린 축복의 아래 구절처럼 위 사건도 한 가지 중요한 다른 점이 있다. “활 쏘는 자가 그를 학대하며 그를 쏘며 그를 군박하였으나 요셉의 활이 도리어 그를 견강하며 그의 팔이 힘이 있으니 야곱의 전능자의 손을 힘입음이라 그로부터 이스라엘의 반석인 목자가 나도다” (창세기 49:23,24). 이는 마치 사울에 관한 것이 표현했듯 주님에 관한 예언이다. 요셉은 주님의 인성의 영적 부분을, 사울은 자연적 부분을 표현했다. 거듭나는 인간에게도 이는 마찬가지이다. 요셉을 쏜 사수란 영적 교회의 사람을 반대하는 이들을 뜻한다. 그이유가 사수(archer)는 영적 인간을 말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활은 교리를, 화살은 교리에 소속된 것들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교리 속의 진리는 진리 안에 있는 이들과, 교리 속의 거짓은 거짓 안에 있는 이들과 함께 한다. 요셉과 사울 모두 화살을 받아 활 쏘는 자 때문에 곤란을 겪고 있다. 그러나 둘 사이에는 이런 차이가 있다. 요셉의 활은 강했다. 그이유가 야곱의 전능하신 하느님의 손에 의해 강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울의 활은 강하지 못했다. 그이유가 그의 손은 야곱의 전능하신 분의 손에 의해 강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울로부터가 아니라 다윗으로부터 이스라엘의 반석, 목자가 나왔다. 천국은 주님의 육을 입으시기 전의 인성으로부터가 아니라 지상에서 육을 입으신 인성으로부터 였다. 신성으로부터의 진리로부터가 아니라 신성한 진리로부터 성전의 모퉁이 돌, 양의 목자가 왔다. 어머니쪽의 유한한 것은 벗으시고 아버지쪽의 무한한 것을 입으셨다.
이 비극적인 전투에서 언급 않고 지나칠 수 없는 전사자가 있다. 사울의 무기당번이다. 그는 제 상전의 찌르라는 명령을 거절하고 사울의 뒤를 따라 그와 함께 죽었다. 무기당번은 상전의 전쟁 장비를 간수하는 사람이다. 무기당번과 그의 상전의 관계는 진리와 선함과의 관계, 또는 외적 측면과 내적 측면의 관계와도 같다. 진리는 선을 섬기고, 외적 측면은 내적 측면을 위해 봉사하고 섬긴다. 사울이 자연적 마음을 표현하는바 사울과 그의 무기당번은 자연적 마음의 내면과 외면에 해당된다. 자연적 마음의 내면은 우리의 동기가 자리잡는 곳이고 그 외면은 우리의 수단들이 자리잡는 곳이다. 전자는 주인 격이고 후자는 도구에 해당된다. 내적 측면과 외적 측면이 완전한 일치에 있을 때 그들은 하나되어 행동한다. 일치 않을 경우 외적 측면은 내적 측면이 간절히 부탁해도 순응하지 않는다. 사울의 무기당번은 찌르라는 상전의 명령을 따르지 않았다. 그이유는 심히 두려워서였고 그것도 제 상전을 생각해서가 아니라 자신을 생각해서였다. 그러나 사울이 자기 칼 위에 엎드려지자 그의 무기당번도 자기 칼 위에 엎어졌다. 내적 측면이 엎어지면 외적 측면도 엎어진다. 내적 인간이 죽으면 외적 인간도 그와 더불어 죽는다.
이 전투의 또하나 비극적인 결과가 이어진다. “그 곳 골짜기 건너편과 요르단 강 건너편에 있던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스라엘 군이 도주하는 것을 보고 모두 저희의 성읍을 버리고 도망치자 불레셋 사람들이 거기에 와서 살게 되었다.” 이스라엘이 거주한 성읍은 생명 있는 진리들로 가득 찬 교회의 교리를 표현했다. 이 성읍이 이스라엘 사람에 의해 버려지고 불레셋이 거주한다는 것은 생명 있는 진리가 텅비고 거짓들로 점령당한 교회의 교리를 표현한다. 위 사항이 무엇을 뜻하냐고 물어 온다면 몇 가지 예를 들어 답해야 하리라 본다. 삼위일체의 교리가 가르쳐질 때, 하느님 안에 세 가지 신성한 본질이 있다고 가르쳐지고 있다면 그 교리는 진리로 가득 차 있는 셈이다. 그러나 하느님 안에 신성한 세 분(persons, 인물들)이 있다 라고 가르쳐진다면 필시 그 교리는 거짓으로 꽉 찬 것이다. 대속의 교리를 가르치되 하느님 자신과 세상이 재회하기 위해 하느님이 그리스도 안에 계신 것이라고 가르친다면 진리를 내포하게 되지만, 아버지 되시는 하느님과 세상이 재회하기 위해 하느님의 아들이 그리스도로 계신 것이라고 가르친다면 거짓을 내포하게 된다. 부활의 교리를 가르치되 삶이 끝나면 영체로 일어난다고 가르치면 진리로 이 교리는 차있는 것이지만, 세상 끝에 자연적 몸으로 일어난다고 가르치면 그 교리는 거짓들로 꽉 찬 엉터리에 불과하다. 신앙의 교리가 진리로 차있으려면 사랑으로부터의 신앙(faith of love)이 구원해준다고 가르쳐야 한다. 그러나 신앙 만으로(faith alone) 구원된다고 가르치면 그 교리는 거짓들에 소유당한 것이다. 교회의 본질 되는 것이 완전히 바뀌었는데도 교회라는 이름은 남아서 존속하는 것, 이것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성읍을 버리고 도망치고 불레셋 사람들이 거기에 들어와 사는 것”과 같다.
그 이틑날 불레셋 군은 길보아 산에 올라, 죽은 군인들의 옷을 벗기다가 사울과 그이 세 아들들이 쓰러져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그들은 사울의 목을 자르고 갑옷을 벗겨 불레셋 땅 방방곡곡에 보내어 저희의 우상과 백성에게 기쁜 소식을 알렸다. 그리고 나서 그가 입었던 갑옷은 야스다롯 신당에 보관하고 시체는 벳산 성벽에 못박아 달아 놓았다. “ 불레셋이 사울의 몸에 가한 모욕, 목베기와 일종의 십자가형은 유대인이든 기독인이든 영적 불레셋에 의해 진리에 가해진 모독을 표현한다. 그리고 한분 인물 안에 진리로서 계신 주님과 계시된 진리로서의 그분의 말씀에 가해진 모독까지 표현한다. 주님의 말씀의 내적 측면과 외적 측면의 연결을 파괴하는 것, 결국 종교 자체의 내적인 것과 외적인 것의 연결을 파괴한다면 이것은 기름부은 자, 사울의 목을 잘라 그의 머리와 몸을 분리시키는 것과 같다. 악의 공격에 선을 방어해주는 진리를 말씀에서 제거한다면 그것은 영적 불레셋이 사울의 갑옷을 벗기는 것이다 거짓 원리가 참된 원리를 뒤엎고 모든 그들의 예배와 생활로 당당히 들어간다면 그것은 영적 불레셋이 저희의 우상과 백성에게 기쁜 소식을 알리는 격이다.
불레셋 군이 사울의 갑옷을 아스다롯 신당에 보관하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여신 아스다롯이 달을 표현한다고 믿어지는 좋은 이유가 있다. 성경에서 달은 신앙을 상징한다. 불레셋을 달과 관련해 생각한다면 신앙 만의 원리를 표현하고 이 원리를 절대 중시함이 아스다롯을 예배하는 것으로 표현되고 있다. 선함을 방어해야 할 진리가 선함 없이도 구원은 가능하다고 주장하는 신앙 만의 교리를 섬기게 된다면 그것은 사울의 갑옷이 아스다롯 신당에 있는 셈이다.
불레셋이 사울의 시체를 못박아 놓은 성벽이 있는 벳산은 과거 므낫세 지파의 상속분이었는데 그 지파 사람들은 그곳의 가나안족들을 다 몰아내지 못했는데 이스라엘 자손이 강해지면서 그들에게 공물을 바치게 했다 (여호수아 17:11-13, 판관기 1:27). 벳산이란 이름은 쉼의 집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신실한 사람들은 진리에의 순종으로 획득한 선 가운데서 자신이 쉴 집을 발견한다. 그러나 불성실한 자들은 악 가운데에서 저들이 쉴 집을 발견한다. 그들은 악을 선이라 부르고 있고 진리가 자기들에게 순종하게 만들어 정착한다. 진리가 벗겨지고 그 능력이 박탈된 선이 놀림감이 된 모습이 사울의 시체를 벳산 성벽에 매단 것과 같다. 므낫세의 성읍은 선을 방어하는 진리를 표현해왔지만 불레셋의 성읍이 되면 악을 방어해주는 거짓을 표현한다. 두 종류의 유신론자가 있다. 두 종류 모두 “선은 제가 옳다고 우겨대지 않는다”라고 가르친다. 그러나 어느 한쪽의 경우 “악은 정죄되지 않는다”라고 가르치고 있다. 악 가운데 있는 사람의 신앙이 공개되지 않는 이상 이것은 비밀 속에 놓여 있다. 그러나 비록 이 세상에서 드러나지 않는다 해도 저 세상에서는 명백해 질 것이다. 또한 진리는 진리를 알고 싶어하는 이들에게 알려질 것이다. “당신이 자연적 빛을 벗어나 영적 빛으로 들어갈 때, 마치 사후 있어지는 모습 같을 때 신앙이 무엇인지, 선행이 무엇인지 묻게 된다. 그때 신앙은 형체에서 선행이라는 것, 그러므로 선행은 신앙의 모든 것이 된다는 것, 마치 애착이 생각 속에, 소리가 언어 속에 있는 것과 같음을 당신은 명백히 알 것이다.”
비록 사울의 시체가 벳산 성벽에 매달렸지만 거기에 그렇게 방치되도록 허용되지는 않았다. “야베스길르앗에 살던 사람들은 불레셋군이 사울을 이렇게 해치웠다는 소식을 듣고 용사들이 모두 길을 떠나 밤을 도와 벳산에 이르러 사울 부자의 시체를 그곳 성벽에서 내려다가 야베스로 옮겨 화장한 다음 그 뼈를 야베스에 있는 나무 아래 매장하고 칠 일간 단식하였다.” 야베스길르앗은 과거 이 성읍이 암몬족에게 공략 당했을 때 사울이 군인다운 용기와 왕권적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했던 첫 장소이다. 그래서 사울은 야베스 사람들에게는 평판이 매우 좋았다. 그런 연고로 그들은 적이 입성한 벳산 성벽에서 사울 부자의 시체를 구해내기 위해 과감한 용기를 발휘했다. 그리고 왕의 장례식에 걸맞도록 그들을 매장했다. 야베스 사람들에게 과감한 용기가 있게 한 또 하나의 사실이 있다. 야베스는 요르단 저 편에 있는 므낫세 반 쪽 지파에 소속되고 있다는 점이다. 마치 벳산이 요르단 이 쪽의 반 쪽 지파에 소속된 것과 같다. 그러므로 두 므낫세 반 쪽 지파들은 영적 선함이라는 같은 원리의 외적, 내적 측면을 의미해준다. 그이유가 요셉의 큰 아들로부터 나온 지파가 영적 선함을 표현했기 때문이다. 불레셋에 의해 이 쪽 성읍에서 모욕 당한 진리가 저 쪽 성읍 야베스 사람에 의해 회복되어지고 있는 것이다. 야베스 사람들은 과거 다윗을 대우한 크일라 사람과는 매우 다르게 사울을 대우한 것이다. 의심할 바 없는 중요한 이유란 다윗의 시련은 아직 진보되어가는 중에 있었고 사울의 고난은 이제 끝장을 보아야 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의 첫 왕의 표현적 역사를 마무리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매장이라는 과정이다. 그이유가 매장은 부활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어느 누가 야베스길르앗 사람들보다 더 효과적인 의미에서 사울을 매장할 수 있었을까? 야베스길르앗 지역 외 어디서 사울의 재가 사울에게 꼭맞는 휴식처를 발견할 수 있을까? 야베스 용사들의 과감한 행동은 성실하게 수행된 어떤 선한 행위도 잃지 않는다는 것, 맨 처음 이식된 선은 마지막에 이식된 선에서 실감되고야 만다는 생명의 신성한 법칙을 본보기화해주고 있다. 야베스 사람들에게 보인 사울의 영웅적 자질의 첫 왕권적 행동으로부터 사울 시체에 대한 야베스 사람의 영웅적 자질의 마지막 행동에 이르기 까지의 사이에는 수많은 어두운 낯과 밤이 그 세월 사이에 끼여 있었다. 모형 되는 품성 차원에서의 사울, 영적 마음에 적개심을 보이는 자연적 마음을 표현하는 다윗의 추격자로서의 사울을 생각해 보면 우리가 알 수 있는 이런 것이 있다. 자연적 측면이 죽거나 벗어 던질 때 그것은 마치 땅에 뿌려진 씨와 같이 새로운 나무가 싹이 터 나온다는 것이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아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요한 12:24). 그러나 사도들이 말하는 이런 구절도 있다. “…구원을 얻되 불 가운데서 얻는 것같이…” (고린도전 3:15). 주님께서 육을 입는다는 예언 중에 스가랴에게 이렇게 말하신다. “거기 안에 있는 삼분의 이는 잘리우고 죽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불을 통해 삼분의 일을 데려오리라. 그리고 이들을 은이 정련되듯 정련하고, 금이 연단되듯 연단하리라” (스가랴 13:8,9). 말라기가 말한다. “그분은 대장간의 불길 같고, 빨래터의 잿물 같다. 그는 은에서 쇠똥을 걸러내는 자로 자리잡을 것이다” (말라기 3:2,30. 사울 부자의 시신을 태운다는 것은 위와 같은 종류의 걸러냄, 순수해지게 함을 암시한다. 시신을 화장하는 것이 평범한 유대인의 장례 관습은 아니었다. 설사 이 사건의 경우 특별한 이유가 있었을 것이라고 가정해 본다 해도 야베스 사람들의 이런 조치에 담긴 특별한 의미가 덜 명확해진다거나 덜 교훈적이지는 않다. 이 의미는 거듭나는 과정에만 국한된다고 이해되어서는 안 되고 인간 체험의 고된 모든 시련을 통과하신 그분에 관한 일부를 표현하는 것으로도 이해되어야 하리라.
야베스 사람들은 시체를 화장한 뒤 나무 아래 묻고 칠 일간 단식하였다. 이 두 가지 행동은 구약 성서에서 언급되는 행동들이다. 리브가의 유모 드보라가 죽었을 때 그녀를 상수리나무 아래 묻었고 그곳을 울음의 상수리라 불렀다 (창세기 35:8). 요셉이 아버지를 안장하러 올라 갔을 때 칠 일간 곡을 했다 (창세기 50;10). 얼핏 보기에 단순한 사건 같은 드보라의 죽음과 매장에도 주님과 거듭나는 인간에 관련된 중대한 진리가 내포되어 있다. 유모인 드보라는 주님께서 그분의 어머니로부터 받은 것, 이를 수단으로 그분은 유아일 때 자양분을 공급받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렇게 어머니쪽에서 공급되어진 주님의 것들은 그 자체 연약하고 악한 유전적 본성이고 주님은 이 본성과 싸우셔서 그것들을 추방하시어 마리아의 아들이 되는 것이 중단되게 하셨다. 자연적인 마음으로부터 유전적인 악을 완전하고 영원히 거절함이 드보라가 상수리나무 아래 매장되는 것으로 의미되고 있다. 야베스에 있는 나무 아래 사울 부자의 뼈가 묻히는 것도 위 드보라의 경우에 담긴 의미와 맥락을 같이 한다. 그러나 이런 질문이 떠오를 수 있다. 왜 매장이 거절과 부활 모두를 의미할까? 그이유는 옛 것의 거절은 새 것의 일어남, 부활을 함축하기 때문이다. 이는 주님 자신의 경우였다. 그분은 인간 쪽 어머니의 생명을 내려 놓으셔서 신성 쪽 아버지의 생명을 들어 올리셨다. 그이유는 “마리아의 아들이 죽을 때 하느님의 아들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사울의 뼈를 묻고 왕을 잃은데 대한 슬픔의 표현으로 실시된 야베스 사람들의 칠 일간의 단식은 진리와 선함을 잃은 것, 진리와 선함의 패배에 대한 통곡을 뜻한다. 이 의미는 단식이 지닌 의미 중 한 가지이기도 하다. 상응성이 없어도 유사성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주님이 기름부은 자로서의 사울과 주님 자신 사이에는 유사성과 상응성 모두가 있지 않을까? 양쪽 모두 적에 의해 못박힘을 받았고 친구들에 의해 안장되었다. 주님의 경우 제자들이, 사울의 경우 신하들이 스승과 상전을 잃은데 따라 곡하고 슬퍼했다. 양쪽 모두 이스라엘을 구원하리라고 기대했던 희망이 꺽인데 대해 슬퍼했다. “이스라엘의 모든 바람”이 되어 왔고 불레셋의 압제에서 해방되도록 군대를 이끌고 전투를 치뤄야 할 그가 적에게 되려 정복 당하고 만 것이다. 사울과 그의 아들, 그의 군대는 더 이상 존재 않는다. 요르단강 양쪽의 당황하는 이스라엘족들은 성읍을 버리고 달아나고 그들을 쫒던 적들이 진입해 점령했다. 불레셋은 기뻐 소리치고 있었다. 가장 값진 트로피, 승리의 트로피가 제 아들에 의해 받게 된 불레셋의 신들은 여호와를 눌렀다고 의기양양해 하고 있다. 자포자기해 버린 이스라엘은 모든 것을 잃어 버린 듯 여기고 있다. 그러나 머지 않아 더 광채있는 날이 이 백성에게 밝아 올 것이다. 허나 이 시간 만큼은 단식만이 그들 상태에 꼭맞는 표현 방법이다. 영적 이스라엘도 여기서 예외는 없다.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터인데 그때에 가서는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 (마태 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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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상 29-30장 해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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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상 제29-30장

전쟁 준비- 아말렉이 시글락을 약탈하다- 다윗이 모두를 되찾다

사울 위에 드리운 구름은 더욱 그의 마음과 기대를 어둡게 하고 급속도로 더 짙은 먹구름으로 변해가면서 그를 위협하고 있다. 수넴으로 집합하던 불레셋군이 지금은 아벡에 총 집결하고 있고 이스라엘도 이즈르엘 샘가에 진을 쳤다. 사울이 다윗을 자기 휘하에 계속 거느리는 총명이 있었다면 불레셋이 두려워하고 신하들이 사랑하는 견고한 망루를 확보하고 있는 셈이 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지금 사울이 자살적인 행동을 이끌어낸 어리석음을 속으로 는 통탄하고 있을지 모른다. 지금 사울은 자기를 강력히 보조할 다윗을 잘라내어 정말 큰 적인 불레셋의 팔 안으로 내던졌다. 그래서 공포의 군대가 그를 몰아 붙이고 천국은 그에게서 영영 닫혀지고 대신 그는 황천의 문을 두드리며 죽음과 상의하고 있다.
불레셋 군대가 이스라엘이 진을 친 이즈르엘로 행군하려고 “불레셋 추장들은 백명씩, 혹은 천명씩 부대를 편성하였고 다윗의 일행은 아기스와 함께 후방 부대를 편성하였다.” 이 본문을 읽으면 마치 다윗과 그의 부하들이 자기 나라와 싸우겠다고 하는 적들과 연합한 것으로 여겨지고 그가 적의 대열에 서서 자기 백성과 싸울 것인지의 여부를 결정할 수 없다. 다윗의 이런 곤경은 불레셋 그들 자신에 의해 미연에 막아지게 되었다. 어쨋든 만일 다윗이 전투에 임했다고 가정한다면 불레셋 추장들이 그를 의심한 것, 즉 “그가 싸움터에서 제 상전의 환심을 사려고 돌아설지도 모른다”는 의혹이 판가름날 수 있을는지 모른다. 다윗이 배반할 수 있다고 불레셋 추장들이 믿은 또 한 가지 증거는 다윗이 골리앗을 죽이고 귀환할 때 “사울은 수 천을 치셨고 다윗은 수 만을 치셨다네” 라는 여인들의 노래이다. 아마 다윗은 쓴맛 나지만 성실하게 처세했든가 아니면 철저히 아기스를 속였든가 어느 한쪽에 해당될 것은 틀림없다. 그래서 아기스가 다윗에게 불레셋 추장들의 결정을 전해줄 때 다윗이 항의하듯 되묻는다. “내가 무엇을 했다는 말입니까? 이 날까지 당신을 모시고 있었는데 그동안 나에게 무슨 허물이 있었다고 싸우러 나가지 못하게 합니까?” 아기스가 다윗을 믿는 신뢰는 변함이 없다. “내가 보기에 장군은 하늘이 보낸 사람처럼 훌륭하오. 그럼에도 불레셋 지휘관들이 장군과 함께 싸우러 나가지 못하겠다고 하오. 그러니 내일 아침 일찍 부하들을 데리고 정해준 곳으로 떠나시오. 그래서 다윗은 부하들을 데리고 아침 일찍 길을 떠나 불레셋 땅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불레셋은 이즈르엘로 진군해 갔다.” 다윗의 대답은 위에서 추정했던 두 가지에 모두 일치하는 듯 하다. 그러나 지난번 아기스에게 신분을 위장해 완전한 속임수를 썼던 것만큼이나 지금은 완전히 그에게 충복을 바치고 있는지에 대한 근거는 없는 것 같다.
본문의 각 개인들로부터 파생되는 교훈은 단지 도덕적 반영 뿐만 아니라 영적 해석에 의해 생각하면 우리에게 흥미를 주는 게 있다. 만일 다윗이 영적 인간의 모형이고 신성한 진리로서의 주님 자신에 대한 모형이 되고 있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정녕 그는 매우 좋은 것, 매우 고상한 품성만을 드러내야 할 것 같은데 그러지 않고 있다. 또한 대상자의 상태에 따라 표현적 인간의 행동 역시 다른 모양새를 가진다. 주님께서는 인간 당사자의 상태에 따라 각각의 사람에게 나타나신다. 시편이 이렇게 설명한다. “두 마음을 품지 않고 당신을 받들면 당신께서도 두 마음 품지 않고 붙들어 주신다” (18:26). 이 구절은 본문 역사의 상황을 시편 기자에 의해 발음된 것이다. 즉 “이 노래는 야훼께서 사울을 비롯한 모든 원수의 손에서 다윗을 건져주셨을 때 부른 것이다.” 이 시편은 가장 깊은 의미에서 주님에 관해 예언한 것이고 그분이 겪게 될 체험이 다윗의 삶으로 모형화 되어 있는 것이다.
다윗은 아말렉을 습격했는데 아기스에게 유다 지방을 털었다고 표현되어 있었음을 27장에서 살핀바 있다. 이 거짓 표현은 신앙 만의 교리를 지닌 이들이 신성한 진리의 가르침을 형성할 때 있어지는 거짓 개념을 상징화 한 것이고, 이 거짓 개념은 그 개념이 독선이라 불리우는 데는 적개심을 보이나 자아 사랑이라 불리는 데는 적개심을 보이지 않는 마음의 상태까지 상징화되어 있다. 현재 다윗의 위치는 과거 그의 위치와 한 가지 점에서 다르다. 현재의 경우 그가 부하와 함께 자진해서 이스라엘과 싸우려 한다고 믿기우고 있다. 지난 번의 경우 그는 이스라엘 뿐만 아니라 불레셋과도 싸워야 했다. 이 번의 경우는 다르다. 적 또는 경쟁자가 약해지는 것은 자신의 입지가 강화되는 반사 효과를 얻을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 일이 자신 또는 자신이 결부된 타인에 의해 있어져야 그 효과가 나타날 것이다. 제 삼자가 우리의 적과 적군 상태에 있으면서도 우리에게 친구 상태가 아닐 수 있다. 다윗은 이스라엘 백성이 피해를 입는 게 바람직하다고 상상해왔을는지 모른다. 그럼에도 그는 이스라엘의 정복을 위해 다른 국가를 도우고 싶지도 않았을 것이다. 불레셋 추장들이 이런 견해를 지녔고 그들이 전쟁터에서 다윗이 반기를 쳐들 흑심이 있다고 판단하고 있었다. 아기스 만은 다윗을 친구로 간주했고 다윗이 전쟁터에서 자기를 도우리라고 진심으로 믿고 있었다. 다윗과 불레셋 추장들 사이에 관한 본문의 기록은 일찍이 불레셋에 거주한 적이 있는 아브라함과 이사악에 관련한 기록을 상기시켜 준다. 이 두 열조는 자기 아내가 누이라고 하여 아비멜렉 왕을 속였었다. 그럼에도 이 사건에는 높고 거룩한 의미가 들어 있다는 것을 안다. 즉 합리적 진리는 신성한 진리를 받을 수 없는 이들에게 허용된다는 것이다. 합리적 진리는 자매와 형제 측면에서의 선과 관련되고 신성한 진리는 아내와 남편 측면에서의 선에 관련되어 진다.
다윗이 연루된 본문의 상황은 과거 아브라함과 이사악의 아내가 사라와 리브가였다는 것을 알았을 때 있어졌던 상황과 유사하다. 이 사건으로 아브라함과 이사악은 그 곳을 떠나야 했다. 적어도 이사악이 그 곳을 떠난 이유는 다윗을 전쟁터에서 돌아가라는 불레셋 추장의 요구와 유사하다. 즉 “아비멜렉이 이사악에게 ‘너는 우리보다도 훨씬 강해졌으니 여기에서 물러가라’ 고 말했다” (창세기 26:16). 이사악과 아브라함의 경우는 숨긴 사실이 발각된 것이고 다윗의 경우는 의혹이 제기된 것이다. 변증 같은 논리학에서 나쁜 논쟁은 그것을 유발한 당사자에게 되돌아 간다. 종교적 논증에서 극도의 경우 역사의 확실성이든, 원문의 진실성이든 확실히 알든지 또는 강한 의혹을 갖든지 하여 부정해버리는 쪽으로 기울고 만다. 예수의 기적적인 잉태의 사건을 주는 신약 성서 부분에 대한 진실성마저 예수를 단지 인간 수준으로 믿는 이들은 부정한다. 어떤 이들은 주님의 기적이 정말 있었는지, 그분이 정말 부활했는지까지 의혹을 던지고 부정해버린다. 말씀의 가상적 진리만을 전부라고 믿는 이들이 불레셋으로 표현되고 위와 같은 결과가 이런 불레셋 사람 같은 특성을 지닌 이들에게서 나타나는 현상이다. 이들은 하느님이 자신들과 완전히 같지는 않다 해도 상당히 많은 부분이 유사하다고 간주하려든다. 참으로 대단히 많은 왜곡된 생각들이 신성한 속성이나 창조물에 대한 그분의 섭리 측면에 관한 생각 속에 침투되어 있다.
다윗과 그의 부하들이 사흘 만에 시글락에 도착했을 때, “이미 아말렉이 네겝과 시글락을 약탈하고 불을 질러놓고 여자를 비롯하여 거기에 있던 사람은 하나도 죽이지 않고 높은 사람 낮은 사람 할 것 없이 모두 사로 잡아갔다.” 불레셋 군대를 따라간 사이에 다윗과 그의 부하들에게 재난이 불어 닥친 것이다. 이는 우리의 시련 중 하나를 표현한다. 우리의 관심과 노력이 새로운 어떤 모험적 계획에로 돌아 설 때 우리의 중요한 이익은 보호되지 않은 채 남아있게 된다는 것을 표현한다. 아말렉은 자기들의 속성과 똑같게 본문에서도 행동하고 있다. 그들은 방어자가 없는 틈을 이용해서 시글락을 약탈했다. 내면의 선에 바탕을 두는 진리가 빛으로부터 퇴조할 때, 마치 다윗이 아기스와 연합하려고 불레셋 군대를 뒤따를 때와 같을 때 내면의 악에 바탕을 둔 거짓은 돌진할 채비를 갖춘다. 참으로 이런 마음의 조건, 즉 진리가 직감의 수준에서 추론의 수준으로 내려올 때 이해성보다는 심정 쪽에 속하는 내향의 믿음에 거짓 암시가 은근히 이식되기 십상이다. 이 때 거짓 암시는 선함의 애착에서 오는 진리의 직감을 박탈하는데 마치 아말렉이 다윗과 그의 부하들의 자식들을 생포하는 것과 같다. 애착들이 포로가 될 때, 영적 포로 상태인 시험의 상태에 빠지면 생명의 모든 기쁨은 사라진다. 마치 본문에서 “다윗과 함께 있던 무리들이 소리쳐 울부짖다가 지쳐서 더 이상 울 기운조차 없게 된” 모습과 같다. 그리하여 “온 무리는 아들 딸을 잃고 격분해서 다윗을 돌로 쳐죽이자고 수근거렸고 다윗은 곤경에 빠지게 되었다.” 출애굽기 17장 4절을 보면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이 마실 물이 없어 헐떡거리자 모세를 돌로 쳐죽이려고 위협했던 모습과 비슷하다. 격렬한 시련의 상태에서, 영혼의 쓰라림에서 마음은 자멸의 막바지까지 이르게 된다. 이 상태에서 신앙 속의 모든 진리와 진리 속의 모든 믿음이 저절로 소멸되게 하는 시험의 늪에서 허덕이게 된다. 이것이 모세를 돌로 치려는 백성의 위협이요, 다윗을 돌로 치려는 부하들의 위협이다. 극도의 이런 위협적 폭동은 모세의 경우 같이 힘을 얻을 수 있는 유일한 곳을 찾도록 인도하고 있다. “다윗은 자기의 하느님 야훼를 믿고 힘을 얻었다.” 진리는 사랑으로부터 힘을 끌어낸다. 끌어낸 진짜 효과, 마치 시련의 진정한 목적 같이 진리와 사랑을 묶는 끈이 더 강하게 되는 것, 먼저 내적 측면에서, 그다음 외적 측면에서 더욱 강건해진다.
내적 인간은 사랑으로부터 힘을 얻고자 할 뿐 아니라 지혜의 나아갈 방향까지 찾는다. 다윗은 성직자 아비멜렉의 아들에게 에봇을 가져오게 한 다음, “다윗이 야훼께 여쭈었다. ‘이 강도떼를 쫒아가면 따라 잡을 수 있겠습니까?’ 야훼께서 ‘쫒아가거라. 따라 잡을 뿐 아니라 모든 것을 도로 찾을 수 있다.’ 하고 대답하셨다.” 이 신성한 대답은 자포자기된 다윗의 부하들에게 희망을 안겨주었다. “다윗은 부하 육 백 명을 이끌고 나섰다. 브솔 개울에 다다랐을 때 뒤에 처지는 사람들이 생겼다. 다윗은 지쳐서 브솔 개울을 건너지 못하는 이 백 명을 거기에 남겨두고 사 백 명만을 데리고 계속 쫒아갔다. 다윗의 추격은 판관기 7장에 기록된 것, 즉 기드온이 미디안과 아말렉, 동방 백성들과의 전투 준비 때와 흡사한 점이 있다. 두 가지 유사점이 있다. 육 백 명의 군인들을 다 동원해도 시글락을 침입한 군대를 공격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데 추격에 참가한 군인은 사 백 명으로 줄어 들었다. 숫자 넷은 둘처럼 선과 진리의 결합을 표현한다. 다윗이 추격하는 것을 영적으로 해석한다면 그것은 결합을 회복하는 것이다. 아말렉이 다윗과 그의 부하들의 아내를 끌어 갔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영적 결혼이 단절된 상태를 회복시키는 것을 표현하고 있다. 다윗의 경우 그의 군대 숫자가 너무 많다거나 물을 마시는 방법으로 숫자를 줄이거나 하는 등등은 말해지고 있지 않다. 다윗의 부하들은 기력이 빠졌을 뿐 기드온의 군대같이 겁쟁이였던 것은 아니었다. 그들이 지친 이유는 며칠 동안의 강행군 때문 이였다. 그들은 기꺼이 싸우고 싶었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는 것이다. 그들 모두가 개울까지 추격해 갔지만 그곳을 건널 수 없었다. 개울이나 강은 진리를 상징한다. 그러나 이 강을 건너간다는 것은 시련과 시험을 통과하는 것을 상징한다. 이 의미는 이스라엘 백성이 요르단 강을 건너는 것으로도 표현되고 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구속해줄 이들에게 이렇게 약속하신다. “네가 물결을 헤치고 건너갈 때 내가 너를 보살피리니 그 강물이 너를 휩쓸어 가지 못하리라” (이사야 43:2). 다윗의 부하 중에서 힘이 없어 개울을 건너지 못하는 이들이란 선함을 가지고 있지만 그에 상당하는 진리를 지니고 있지 않아 자기들 앞에 놓인 시련을 통과할 수 없는 이들을 뜻한다. 선함 홀로, 또는 진리 홀로만으로는 아무 힘이 없다. 진리는 선함으로부터 모든 힘을 얻는다. 선함은 진리를 수단으로 모든 능력을 언제나 발휘할 수 있다. 진리가 없는 선함을 지닌 이들이어서 영적 삶의 전투 중 어떤 전투는 참가할 수 없고 시련을 통과하기 힘들다 해도 타인들이 획득한 전리품을 나눠갖는 특전은 있다. 이것이 이 본문에서 본보기가 되어 있다.
이스라엘이 적을 추격하고 있다가 “벌판에서 에집트 사람 하나를 만나게 되었는데 그를 다윗에게 데려왔다.” 이 종은 그가 병들자 상전인 아말렉 사람이 버리고 가서 그는 사흘 밤,낮으로 아무 것도 먹지 못하고 있었다. 그가 먹고 마시어 정신이 들자 아말렉이 저지른 일부터 지금 그들이 있는 곳까지 다 알게 되었다. 악한 자를 섬기던 과학은 선한 자도 섬길 수 있다. 지식은 허위와 진실을 섬기는데 고용될 수 있는 도구이다. 지식 없이는 허위도 거짓도 존재할 수 없다. 그이유가 알려져 있는 어떤 것이 허위인지 진리인지를 확증도 부정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지식은 사실들 속에 있다. 진리이냐 허위이냐 하는 그것들은 우리가 지식들로부터 끌어낸 결론이고 그것들이 확증하는 것을 섬겨주는 원리이다. 과학은 신앙인이 계시된 종교 속의 진리들을 확증하는 것을 돕는다. 마찬가지로 비신앙인이 부정하는 것도 도와준다. 과학은 참되고 선한 것으로 채워질 수 있고 반대로 악하고 왜곡된 것으로도 채워질 수 있는 그릇이다. 마치 에집트 종을 아말렉이 보살필 수 있고 이스라엘도 보살펴 줄 수 있는 것과 같다. 또 과학은 병들어 있거나 건강한 상태에 있을 수도 있다. 또한 판단에 따라 더 이상 쓸모 없을 경우 주인이 폐기시킬 수도 있다. 악한 자의 목적을 섬기느라 과학이 피로해졌는데도 악한 자가 그것을 경멸하고 거절할 때 병들게 된다. 인간이 공개적으로 사악해질 때 과학은 악한 자가 의롭다고 떠드는 억지를 받쳐주려고 더 이상 노력하지 않는다. 과학물에서 악과 거짓이 빠지면 선함과 진리, 자연적이고 영적인 것이 마치 에집트인이 사흘을 굶다가 빵과 물, 무화과와 건포도로 배를 채우듯 빈자리를 채운다. 그러면 진리를 섬기고 파괴와 모독함을 벗어난다. 마치 다윗이 에집트인을 제 상전에게 되돌려 보내지도 않고 죽이지도 않겠다고 하느님을 두고 그에게 맹세해준 것과 같다. 그러면 이런 과학적 지식은 과거 마음을 약탈하던 악의 거짓들을 찾아내는데 긴요한 길잡이가 되어 준다.
에집트인의 안내를 받은 다윗은 “아말렉이 깔려있는 곳, 불레셋 지방과 유다 지방을 털어온 것들을 먹고 마시며 흥청거리고 있는 곳을 발견했다.” 자연적 마음이 감각적 쾌락으로 휘청거리고 더 높은 품성이 낮은 품성인 욕망의 전리품으로 전락되어 있는 모습이 아말렉 진영의 풍경이 지닌 의미이고 이 진영은 육욕적인 마음과 육적 인간에 대한 참 형상이기도 하다. 감각적 즐거움에 다 내어준 자연적 인간 같은 아말렉은 자신들이 안전하리라 생각하고 경계를 소홀히 하고 있다. 한 마디로 진리의 심판은 자기들에게 오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때와 상황이 같다. 여느 심판과도 같이 아말렉에 대한 심판도 밤중에 떨어졌다. “다윗은 황혼부터 .이튿날 해질 무렵까지 그들을 처부수었는데 겨우 사백 명 정도가 낙타를 타고 도망쳤을 뿐이었다.” 황혼(twilight)은 새로운 상태의 새벽이고 이때에 영적 빛이 마음에 드리워 마음의 품성을 밝히 알게 해서 심판하는 신성한 진리의 작업 아래 그 마음을 가져오게 한다. 이 심판의 완벽함이 황혼부터 다음 날 해질 무렵까지 살륙이 계속된 것으로 암시해주고 있다. 도망친 사백 명이라는 숫자는 아말렉 군의 숫자에 관한 어떤 착상을 줄는지 모른다. 그러나 사백 명만이 낙타를 타고 도망쳤다는 이 구절의 묘사는 역사적 사건 그 이상의 의미를 전달해 주고 있다. 아말렉의 살아남은 사 백 명이란 아말렉으로 표현된 원리를 확증한 수준은 아니고 단지 일반적 지식 수준에 머무른 이들을 말하고 그들이 타고 도망친 낙타란 참되고 선한 지식에 대한 애정을 뜻한다. 다윗은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글자대로 성취했다. “다윗은 아말렉군이 털어갔던 것을 모두 되찾고 두 아내도 살려내었다. 모든 사람들이 그들에게 약탈당했던 것을 되찾았다. 다윗은 높은 사람, 낮은 사람, 아들 딸은 물론 그들에게 빼았겼던 물건까지도 하나도 잃지 않고 모두 되찾았다.” 이는 과거 아브람이 반역한 왕들에게 강탈당했던 모든 것을 되찾은 사건과 역사적 사실이나 그 의미에서 까지 똑같다. “아브람과 그의 부하들은 여러 패로 나뉘어 밤을 틈타 그들을 기습, 다마스커스 북쪽에 있는 호바까지 추격해 가면서 모든 것을 되찾아 냈다” (창세기 14:15,16). 아브람의 경우에도 아말렉족이 거론되고 있다. “그돌라오멜은 동맹을 맺은 왕들과 출동하여….아말렉족의 온 땅을 쳐부수었다” (창세기 14:1-7). 영적 인간을 지배하려던 자연적 인간으로부터의 완전한 자유가 다윗의 사건에서 표현되고 있다.
되찾은 물건외에도 승리의 전리품인 소떼와 양떼를 앞세우고 돌아 오던 다윗은 뒤에 쳐저 있던 부하 이백 명을 만났다. 실지 전투에 참가했던 이들 중 어떤 부하들은 그들에게 처자만을 주고 전리품을 나누어 주어서는 안 된다고 이의를 제기했다. 그러나 다윗은 주님께서 자기들에게 주신 것을 그렇게 할 수 없다고 하면서 “싸우러 나갔던 사람의 몫이나 뒤에 남아 물건을 지킨 사람의 몫이나 다 한가지로 똑같이 분배해야 하오.” 라고 결정했다. 그래서 “다윗의 그날 판결은 이스라엘의 관습법이 되어 지금까지 통용되고 있다.” 너무 지쳐서 개울을 건너지 못해 뒤에 처진 사람들이란 선을 원리로 삼고 있지만 영적 삶의 싸움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할 진리가 충분치 못한 상태를 뜻한다고 이미 살펴본 바 있다. 진리는 선으로부터가 아니면 능력을 가지지 못하고 선은 진리를 통하지 않고는 힘을 가지지 못한다는 것도 이미 거론한 바 있다. 사실 선과 악은 직접 대결하지 않는다. 선은 진리를 수단으로, 악은 거짓을 수단으로 싸운다. 그래서 모든 악이 제각기에 걸맞는 거짓을 수단으로 악 자체를 방어하듯 모든 선도 제각기에 어울리는 진리로 자체를 방어한다. 악에 대항해 싸울 수 있는 사람만이 진리를 가지고 있고 뿐만 아니라 악에 반대되는 선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전투에 임하지 않은 사람들은 물건을 지키고 있었다. 이 물건(stuff)이란 다윗 군대의 보급품이다. 사울이 제 몸을 숨긴 “짐짝(stuff)”에 관해 이미 살핀바 있듯이 이것은 글자대로 보면 용기(vessel)들을 뜻한다. 용기는 과학물 또는 지식들을 의미하는데 이것은 진리들은 아니고 단지 진리를 담거나 내포할 수 있는 그릇에 불과하다. 우리가 알고 있는 진리들은 지식들이다. 우리가 이해하는 지식들이 진리들이다. 따라서 지식은 이해함에 앞서 온다. 우리가 진리를 이해하기에 앞서 우리는 진리를 알아야만 한다. 그리고 우리가 진리를 올바르게 사용할 수 있기 전 우리는 진리를 이해해야만 한다. 진리를 이해하는 사람들만이 그 진리에 반대하는 거짓과 싸움을 벌일 수 있다. 그러나 진리를 알고 있기만 하는 이들, 비록 그것 가지고 전투는 할 수 없다 해도 다른 사람에게 그 지식을 공급해 줄 수 있고 언제인가는 자신들에게도 거짓에 대항하는 진리, 악에 대항하는 선을 옹호하는 수단이 되어 줄 수 있다. 영적 이스라엘 백성을 위한 규칙은 이러하다. 동일한 선한 목적 때문에 노력들이 서로 병합되고 있다면 그것을 달성하는데 있어서의 방법이 다르다 해도 전리품은 똑같이 나누어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집에서 물건을 지킨 아내도 밖에 나가 더 적극적으로 물건을 획득한 남편과 똑같은 배분의 권한이 있다는 말이다. 하느님의 교회에서는 선물은 다양하지만 그 영은 하나이다. 사랑의 똑같은 영으로 영향받은 모든 이들은 각자의 선물이 무엇이든 간에 전체 습득물의 혜택을 똑같이 나누어 갖게 된다.
선견자의 “비망록”을 보면, 전리품을 똑같이 나누는 사건에 담긴 의미는 포도원 주인이 일꾼을 고용하는 비유에 담긴 의미와 같은 진리를 가르친다고 말하고 있다. 한 시간 일한 일꾼이 온 종일 뙤약볕에서 수고한 사람들과 똑같은 대우를 받고 있다. 그의 저서를 보면, 일꾼이 고용된 각각의 시간은 삶이 각기 다른 상태를 뜻하는 것으로 설명되고 있다. 3시- 6시- 9시에 고용된 이들은 진리의 상태에 있는 이들이고, 11시에 고용된 이들은 진리의 상태에 있지는 않으나 선한 상태에 있는 이들, 그래서 진리를 받을 수 있는 이들, 다시말해 이해성이 아직 성숙되지 않았을 뿐 마음씨 고운 젊은 이들 같은 상태에 속한 이들이다. 이 마지막 일꾼이 본문에서 물건을 지킨 군인들에 해당된다. 이들은 진리를 알지만 이해 못하고 있어 전투에 임할 수가 없다.
모든 부하들에게 동등한 몫을 나누어 준 다윗은 “시글락에 돌아와 친분이 있는 유다 장로들에게 전리품을 보내면서 말을 전하였다. ‘야훼의 원수들에게서 털어온 것을 선물로 드립니다.’ 그리고 여러 성의 장로들, 자기와 부하들을 거느리고 드나들던 모든 지방의 장로들에게도 선물을 보냈다.” 이런 다윗이 표현한 주님에 관해 이렇게 언급하고 있다. “…그분은 권세와 세력을 못쓰게 만드셔서..” (골로새서 2:15). “…그는 강한 자와 전리품을 나누리라” (이사야 53:12). 구속자가 굴욕을 받은 어느 곳에서든지 그분의 축복은 그분이 드높혀짐으로 내려올 것이다. 어둠의 권세에 승리하시고 인성을 영화하심으로 그분께서 획득하신 전리품을 신실한 모든 자들과 나누신다. 이를 본문에서 강조하고저 “다윗의 전리품”이라고 언급되고 있다. 아말렉이 포로로 삼은 자들을 구해내는 사건으로 다윗은 그분 스스로 시편에서 예언적으로 기리신 신성한 구원을 표현적으로 수행한 것이다. “당신께서 높은 곳에 오르셨다. 당신께서는 사로잡은 자를 포로로 끌고 가셨다. 당신께서는 인간을 위해, 또한 반역자들을 위해 선물을 받으셨다. 이는 주 하느님께서 그들 사이에 거하시기 위해서이다” (68:18).

사무엘상 28장 해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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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상 제28장

사울과 엔도르의 무당

사울이 엔도르의 무당과 인터뷰를 하는 모습이 주는 호기심 있는 흥미와 함께 대단히 엄한 훈계라는 두 측면의 특이함은 여느 성서 구절도 여기에 버금갈 수 없을 것이다.
여인이 소유했거나 또는 소유했을 거라고 상상되는 초자연적 능력의 본성과 그 범위, 그녀가 사무엘을 불러내는 실상과 가상 또는 환영 등등은 지금까지 많은 학자들에 의해 토의되어 왔다.
위와 같은 비평적 견해를 떠나 단순히 역사적 사실 자체만을 생각해 본다면 이 본문의 사울은 자기가 지닌 품행을 통해 하느님과 재물 (God and Mammon)을 동시에 섬기고 싶어하는 마음 바탕의 그림은 얼마나 무시무시한지 여실히 표현하고 있다. 사울은 하느님의 명령을 집행하는데 무척 게을렀다. 그럼에도 하느님의 도움이 필요하다 싶으면 잽싸게 기대려 들었다. 그는 사무엘의 생존시 그의 충고를 우습게 여기고 묵살했다. 그러나 사무엘이 죽은 지금 그의 충고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 사울은 자기 왕국 내에서 무당들을 추방했는데, 지금 그는 자기가 섬멸하려고 했던 불법적인 능력이 꽤 쓸모있어 지기를 소원하고 있다.
그의 행동이 보여주는바 종교에 진정한 관심이 없을 경우 그런 마음은 미신의 영향 하에 있어지기 쉽다는 것과 자기를 안내해 줄 종교적 원리가 정착되지 못한 마음의 조건에서는 행동이 변덕스러워지기 쉽다는 것 등등이다.
위 두 가지는 이런 질문을 유발한다. 사울이 부탁한 여인이 과연 죽은 자를 불러내는 능력이 있는 것인지 혹은 있는 척 한 것인지, 이 여인이 능력을 가졌다고 인정하기로 한다면 그 여인이 불러낸 사람은 과연 사무엘 자신인지, 또는 예언자의 역을 맡은 연기자 같은 또 다른 사람인지이다. 어쨋든 추론만 가지고는 만족스런 결론에 도달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우리가 성경을 믿는다면 그분에 대한 믿음에 상반되는 어떤 증거도 성경 안에는 없다는 것, 산 사람이 죽은 자와 느낄 수 있게 교통할 수도 있다는 것을 인정하여야만 한다. 말씀 자체도 이런 사실에 풍부한 증거를 제공하고 있다. 과학의 경우 그 실마리를 전혀 모르고 있을 경우 불가사의한 듯 여겨지지만 알게 되면 보통의 일로 되어진다. 이 세상을 떠난 사람도 육체를 지녔던 때와 똑같은 사람으로 살고 있다는 것, 영혼의 거주지인 영계는 자연계만큼이나 가깝게 있다는 것, 그리고 영혼과 육체의 경우 같이 영계와 자연계는 친밀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안다면 본문의 사건에 대해서는 크게 의아해 할 필요가 없을 줄로 안다. 물론 인간이 자기 육체의 눈으로 영을 볼 수 없고 귀로 들을 수는 없다. 그러나 인간이 자연계에 살고 있는 동안이라 해도 자신의 영적 몸의 기관을 가지고 영들이 보고 듣고 하는 상태에 놓이는 게 가능하다는데 의심을 제기할 이유도 있을 수 없다. 육체가 자연적 감각을 지녔듯 영체에도 영의 감각이 있다. 영들이 거주하도록 창조된 인간 영혼과 영계는 최소 규모에서 물질계의 몸과 물질 체계 만큼 진짜이고 실체이다. 영적 대상을 보는 게 당사자에게 좋을 때 신성한 지혜가 이를 허용하면 영적 대상이 표출되고 물질적 몸의 방해 없이 영적 감각을 수단으로 인지되어진다. 천사나 영들이 인간에게 보여지고 만져지고 대화하는 성경의 기록들은 물질적 감각이 아닌 영적 감각에 의한 것들이다. 천사들이 물질적 몸을 입고 나타난 게 아니라 인간이 영적 상태에 놓여진 것이다.
영적 교통이 가능함을 인정할 경우 교통하는 능력이 인간 의지에 의해 실시될 수 있다고 상상하는 것, 특히 본문의 엔도르 무당이 하듯이 신성한 질서의 법칙에 상반된 것을 하는 누군가에 의해서도 가능하다는 것은 모순된 듯 여겨질는지 모른다. 같은 원칙에서 에집트의 마술사가 실시한 기적의 능력도 그것이 사람을 미혹한 것이 아니라 그 능력이 발휘되었다는 자체를 인정하고 싶지 않을는지 모른다. 이런 저런 경우를 두고 생각할 때 우리는 주님과 빌라도 사이에 오고 간 대화를 사용해볼 수 있다. 빌라도가 예수께 말한다. “나에게는 너를 놓아 줄 수도 있고 십자가형에 처할 수도 있는 권한이 있는 줄을 모르느냐?” 빌라도의 이 말에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네가 하늘에서 권한을 받지 않았다면 나를 어떻게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런 권한이 발휘되는 어느 곳에서든 그것은 신성한 허용에 의한 것이다. 하느님께서 이와 같은 것들을 허용하시되 이 허용은 그것들을 바래셔서가 아니라 한없는 사랑과 끝없는 지혜 되신 분으로서 무한하고 영원한 목적을 위해 인간의 의지와 지혜를 넘은 영역에서 작업되도록 허용하는 것이다. 더불어 그분 스스로 인간에게 부여하신 자유 의지, 그러기에 그분도 위반할 수 없는 자유 의지, 이것이 파괴되지 않고는 악이 예방되어 질수 없을 때 악의 허용이 있어진다. 능력 자체만을 떼어 생각한다면 그것은 신성이다. 마술적인 기적, 또는 불법적인 영적 경이로운 일들은 천국으로부터 훔쳐져서 어떤 통로를 지나 신성한 법칙을 뒤집는데 응용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엔도르의 무당이 사울에게 영계와 교통할 수 있게 하는 것이나 그외 성경의 이와 비슷한 증거들이 영적 교섭의 법칙에 모순되는 것은 아니다. 한 가지 의문으로 남는 것은 엔도르 무당이 불러낸 영이 사무엘의 영인지 아니면 예언자일 듯한 영인지에 관한 것이다.
선견자 자신이 출판한 새 교회의 저서에서도 엔도르의 무당의 경우와 관련되거나 그와 비슷한 경우에 관한 언급은 없다. 그러나 제18장에서 언급했듯 그의 단편 저서들, 사후 출간된 책들 안에 이와 관련된 글들이 있다.
본문의 사건에 대해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죽은 사무엘이 무당에 의해 나타난 게 아니라고 생각하는 편이 나을 것이라 본다. 이것은 오류의 한 가지 종류이다. 이것은 또 다른 어떤 것이다. 즉 사무엘을 흉내낸 어떤 것이다. 그 이유가 악령에게 허용이 있게 되면 악령은 워낙 교묘해서 제가 이미 알고 있는 누군가를 거의 완벽하게 똑같이 표현해 낼 수 있기 때문이다. 이에 관해서 나는 어떤 영을 매개체로 하여 여러 차례 경험한 바 있다. 이 영은 과거 내가 그의 인생을 알고 있는 사람을 내 앞에 데려다 놓아 나는 그들과 오랜 동안 대화했는데 그들은 지상 생활 때와 똑같은 듯 여겼다. 이렇게 영들은 자기들이 등장시키고저 하는 누군가를 표현해내는 힘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나는 사무엘이 아니라 그를 흉내낸 악령이라는 것을 더 명백히 알게 되었다. 또한 사무엘이 아니었다는 것은, ‘지하에서 유령이 올라 오는 것이 보입니다’ 라고 13절에서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울과 그의 아들들이 죽고 이스라엘이 패배할 것을 예견하는 점에 대해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악령이 미래에 관한 것을 선포하고 있는데 이것은 주님으로부터이다. 그리고 이것은 선한 영을 통하여 주어지고 이 영들에게 주어진 것이 악령의 언어로 바뀐 것이다. 무수한 예를 통해 나는 악령이 마치 어떤 사건 등등을 예견하는 듯 말하는 것을 관찰했었다. 그러나 여호와 하느님 외에 누구도 미래를 알 수 없다.”
어쨋든 본문의 세부사항은 흥미와 더불어 그 역사가 기록하는 영적 현상의 근원과 본성에 만족할만한 관점을 찾도록 우리를 직접 인도하고 있다. 게다가 우리의 주요 관심사는 사건의 영적 의미와 실제적 응용에 관한 것이다.
본문의 사울도 표현적 품성 측면에서 생각해 보면 그는 깊은 영적 재난의 상태에 빠진 자연적 마음의 상태와 경험, 또는 열정이 다투는 결과에서 자연적 인간이 애쓰는 모습의 상태나 경험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불레셋이 다시 이스라엘을 침공하자 사울도 이와 맞서기 위해 이스라엘 전군을 집결시켰다. 그러나 승리를 보장해주는 확신감이 이번에는 사라졌다. 사울은 이번 전투가 두려웠고 그의 심정은 크게 떨렸다. 이스라엘 백성, 특히 그 지도자들이 믿고 신뢰하라고 가르쳐져온 으뜸가는 진리 중 하나가 있다. 즉 “주님께서 우리를 도와만 주신다면 적의 수가 많든 적든 무슨 상관이 있느냐” 라는 진리이다 (사무엘상 14:6). 사울이 무시해버리고 있었던 이 진리가 시련을 눈앞에 둔 그에게 절대적으로 부각되고 있는 것이다.
사울이 표현하고 있는 영적 시련은 완전하고 충분한 하느님의 섭리를 신뢰 못하는 느낌을 수반하고 있다는 것은 의심할 바 없다. 이런 경우는 어느 때든지 우리의 믿음과 사랑의 결함에서 발생한다. 확신을 불어넣는 것이 믿음과 사랑이다. 그 이유가 주님은 우리 안에 있는 그분에게서 파생된 그분의 원리들을 통하여 우리를 받쳐 주시기 때문이다. 그분은 그분 자신에 속한 것이 아닌 어떤 것 안에도 거하실 수 없다. 따라서 우리가 사랑과 진리인 그분 나라의 원리를 수단으로 내적 삶을 형성시킨 만큼에 비례해서 주님은 그분을 신뢰할 수 있도록 우리 심정에 영감을 불어 넣으실 수 있어 무가치한 두려움을 사라지게 해주실 수 있다. 솟구치는 두려움이나 비신뢰는 생활이 정상일 때는 느껴지지 않을는지 모른다. 물론 은밀하게는 우리에게 영향을 주고 있다. 따라서 자신의 말이나 행동, 느낌, 생각을 매우 엄격하게 영적 분석을 시도한다면 발견이 가능할는지 모르나 아마 어느 누구도 삶이 평안할 때 제 마음 상태를 해부해보려 시도할리 만무하다. 어떤 특별한 요구가 우리에게 있어질 때 은밀히 작용하던 사랑과 믿음에 관한 우리의 비신뢰는 급부상해 느낄 수 있게된다. 즉 우리의 영적인 어떤 적이 우리와 맞서려고 포진할 때 과연 싸워 이길 수 있을까 하고 쉽게 두려움이 먼저 앞선다. 그러나 이런 적들이란 우리 심정 속에 있는 어떤 것들이라고 곰곰히 생각해볼 때 원인분석의 실마리가 열린다. 심정 속의 악들, 이해성 속의 거짓들이 우리가 느낄 수 있게 활동하지 않는 한, 우리의 마음은 고요하고 생활은 행복하다. 그러나 경험의 정상적인 과정을 벗어나는 어떤 것이 있어 우리 속의 악과 거짓이 행동 개시할 건수를 만들어 줄 때 시련의 때는 다가오고 두려움과 겁에 질리게 된다. 이런 것들을 허용하는 하느님의 의도는 우리로 각자 자신의 진짜 상태, 진짜 자기 모습을 느낄 수 있게 만들어 주시어 개선되는 결과가 있게 해주려는데 있다. 바꿔말해 우리의 진짜 모습은 평범한 조건에서는 자기에게 존재 않는 듯 여겨지고 특별한 조건 즉 비상 상태에서는 존재하는 듯 보인다는 말이다.
불확실함, 곤경 같은 모든 상태를 당하면 하느님의 자녀들은 끊임없는 위로와 진실한 조언의 근원을 하느님 안에 가지고 있다. 큰 임무를 수행하게 될 때, 특히 전투가 막 개시되려 할 때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은 주님께 조언을 구했다. 이때 지도자이든, 백성이든 속죄되지 않은 죄가 있는지의 여부에 따라 하느님으로부터 응답을 받거나 받지 못하거나 했다. 이 책 14장에서 이에 대한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적들을 다 추격할 때까지 어떤 음식도 입에 대지 말라는 사울의 명령이 있었는데 요나단이 꿀을 맛보았다. 물론 요나단의 행동은 사울의 명령을 하달 받지 못한 상황에서 있어진 것이다. 그런데도 하느님의 응답은 보류되었다. 이 사건이 가르친다. 모든 악이 행동으로 불거질 때, 설사 무지로 인한 악이라 해도 언제든지 모든 악은 하느님의 영향력의 하강을 가로막는다는 것이다. 더구나 비의도적인 악과 의도적인 악 사이에는 폭 넓은 차이가 있다. 어느 쪽도 비록 수준에는 차이가 있지만 상처를 주는 결과 만이 있다. 이에 대한 이유는 명확하다. 바깥쪽의 악은 유전적인 본성에 있는 안쪽의 악이 돌출된 것이다. 양쪽의 악은 비록 어느 한쪽이 알려지지 않은 때일지라도 동시적으로 발생한다. 요나단의 실수에서 살폈듯이 악이 행동으로 반복되어 돌출되다 보면 생활의 습관이 되어간다. 그리고 악한 습관은 그것을 생산되게 한 우리 속 악한 경향성을 더욱 굳혀 강화시킨다. 그런 이유로 덕행을 쌓는 것, 질서 있는 습관을 몸에 배게 하는 것, 더구나 올바른 원리들을 계속 획득해가는 것은 얼마나 중요한지 모른다. 아마 젊은 세대의 교육에 이런 원칙의 응용은 상당히 중요하리라 본다. 현실의 악 또는 행동하는 악, 설사 비의도적으로 범하여졌다 해도 그것을 범한 당사자에게 피해를 입히는 결과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유대교의 의식에서 의식적인 죄 뿐만 아니라 무지의 죄를 위해 제물을 바치도록 되어있다. 이런 의식은 실지의 악, 비록 경미하다 해도 당사자가 하느님과 교통할 수 있기에 앞서 실용적인 회개를 통해 제거되어야만 한다는 것을 표현하고 있다. 요나단이 미처 몰라서 지은 죄까지도 하느님의 응답의 길을 가로 막았을 정도인데 하물며 사울의 경우는 어떠할까? 실수의 죄보다 의도된 죄는 얼마나 더 하느님의 응답을 가로막을 것인가는 더 생각할 필요도 없으리라.
불레셋의 군대를 본 사울, 곤경에 빠진 사울은 주님께 승리의 길을 조회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에게 꿈으로도, 환상으로도 대답하지 않으셨다. 이 세 가지 매체는 하느님과 교통되게 하는 방법들이다. 잠들어 있을 때 꿈을 통해 주어지는 것은 주님의 영이 마음 안으로 흘러드는 것이다. 환상으로 주어지는 것은 말씀 속의 진리를 통해 오는 것이다. 예언자로 해서 주어지는 것은 교리적 가르침을 통해 주어지는 것이다. 사울의 경우, 그가 소속된 교회는 표현뿐인 교회라는 수준에서 그에게는 위의 사항들이 보류되어 있다. 그러나 영적 체험에 관한 문제라는 점에서 영적 교통의 위 세 가지 경로는 하느님께 반대되는 죄로 인해 닫혀진다. 이사야가 말한다. “너희가 악해서 너희와 하느님 사이가 갈라진 것이다. 너희가 잘못해서 하느님의 얼굴을 가리워 너희의 청을 들으실 수 없게 된 것이다” (59:2). “두 손 모아 아무리 빌어보아라. 내가 보지 아니하리라. 빌고 또 빌어보아라. 내가 듣지 아니하리라. 너희의 손은 피투성이,” (1:15). 천국으로부터 오는 빛과 위로가 차단되고 나아갈 방향이 제시되지 않을 때 이보다 더 끔직한 일이 있을까? 이렇게 낙담될 때 무엇이 행해지게 될까? 적법한 순서는 당사자가 요구한 대답을 거절하는 것이다. 그이유가 조회자가 잘못됐을 때 주님과 그분의 말씀은 답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사야가 더 말한다. “몸을 씻어 정결케 하여라. 내 앞에서 악한 행실을 버려라. 깨끗이 악에서 손을 떼어라…야훼께서 말씀하신다. ‘오라, 와서 나와 시비를 가리자. 너희 죄가 진홍같이 붉어도 눈과 같이 희어지며 너희 죄가 다홍같이 붉어도 양털같이 되리라’” (1:16,18). 우리가 바라고 요구한 것들을 받지 못할 때 그 원인이 우리 자신 안에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원인 그 자체가 우리를 가르칠는지 모른다. 다시 말해 고백과 애원, 회개와 착한 행실로 그분의 응답이 오는 것을 저해하는 원인을 제거하는 게 우리의 지혜요 의무이다. 자신이 바란 것을 획득하는 수단을 찾는 데에서나, 가장 슬기롭고 가장 나은 소원이라 해도 그것을 달성하는데 있어지는 장애물을 찾아낼 때도 우리는 자신 밖만을 점검하려 드는지! 이런 점검으로 생산된 판단의 왜곡된 형태는 우리를 더욱 큰 악을 범하는 쪽으로 유인해 간다. 다시 말해 신성하게 지정된 큰 길과 질서 있는 수단들을 우습게 여김으로 우리 자신에서 닫혀진 것들을 불순한 경로와 금지된 수단을 통해서라도 자신의 요구를 관철하려 든다는 말이다.
사울은 통회의 재를 둘러쓰고 하느님 앞에서 자신을 낮추는 대신, 신성한 법과 자신이 선포한 법이 정죄하고 있는 매개체를 통해 자신이 원한 것을 획득하려 했다. 하느님의 법은 이렇게 선포되어 있다. “너희 가운데 자기 아들이나 딸을 불에 살라 바치는 자가 있어서는 안된다. 또 점장이, 복술가, 술객, 마술사, 주문을 외는 자, 도깨비 또는 귀신을 불러 물어 보는 자, 혼백에게 물어보는 자가 있어서도 안된다. 이런 짓을 하는 자는 모두 야훼께서 미워하신다…너희는 한 마음으로 너희 하느님 야훼만 섬겨라” (신명기 18:10-13). 사울이 위와 같은 하느님의 법을 따르기 위해서였든지, 자신의 왕명을 내세우고 싶어서였든지 그는 나라에서 혼백을 불러내는 무당과 박수를 몰아내었다. 그런데 궁지에 몰리자 그는 자기가 근절시키라고 했던 무당을 오히려 찾아 나섰다. 이런 식으로 우리가 사울을 모방할 때가 많다. 자기 판단에서 잘못된 것이라고 하여 정죄해버린 것에 상황이 위급하다는 핑계로 편리주의를 도모해 자기 심정을 거기에 기대고 타인의 어떤 행동이 대단히 비뚤다고 핀잔했던 것을 자기 스스로 버젓이 재현한다. 꼭 배워야할 큰 교훈의 하나는 자기 고유의 영혼에 신뢰를 두라는 것이다. 그 이유는 그 속에 하느님께 충실함도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의무는 주 하느님 만을 잘 받드는 것, 그분은 우리의 모든 선함의 샘이시며 모든 생명의 저자로, 살아계신 하느님으로 그분께 접근하고 그분의 말씀과 진리의 교리들을 통해 그분의 얼굴을 보려하고 그분의 뜻을 헤아려 행함으로 그분을 섬기는 것이다.
영적 의미에서 본문 같은 초자연적 지식의 불법적인 유통은 악한 심정이 자신의 이기적이고 세상적인 목적 달성을 위해 진리와 선함을 설득하려드는 것을 표현하고 있다. 신성한 뜻에 반대되는 일꾼들, 무당이나 강신술사 같은 사람은 인간의 썩어진 이기심에서 근원하는 각종 편법 수단을 표현한다. 이런 방법으로 그들은 하느님에게만 속한 분야요 그분만이 발휘할 수 있는 권능을 자기 목적을 위해 발휘하라고 억지를 부린다. 이런 편법과 그 노력은 기회만 있으면 선을 위압하려든다. 발람이 이스라엘을 저주하도록 발락에게 고용되었을 때의 경우가 성경의 대표적인 예에 해당된다 (민수기 22-24장). 발람은 저주가 아닌 축복을 하도록 하늘로부터 강요당하고 말았다. 그럼에도 그는 여전히 점장이였다. 그래서 이스라엘이 미디안에게 원수 갚을 때 그도 살해되었다 (민수기 31:8). 민수기의 이런 사건은 본문의 경우와도 똑같다. 사울은 금기된 능력 안으로 제 스스로 뛰어들었다. 그러나 그는 정작 제가 원했던 것과는 너무 상반된 답변 만을 받았다. 제깐에 영리해서 불순한 경로를 이용한다 해도 받아야 할 벌은 피할 도리가 없다 주님께서는 이스라엘을 불레셋의 손에 넘기고 그와 그의 아들들도 그 전투에서 죽게 된다고 말하시고 있다.
사울이 처한 이런 모습은 오늘날 우리가 시험에 푹 빠진 것, 진리의 생명이 소멸된 상태를 표현한다는 것은 의심할 바 없다. 영적 삶을 발전시켜가는 이들과 관련해 생각해보면 사울의 죽음은 옛사람의 남은 찌꺼기의 생명이 죽는 것, 그리고 진짜 생명인 다윗이 새 능력을 더해 더 드높혀지는 것까지 암시한다.
성서의 무당들, 영적 의미로 이해해 본다면 그들은 신앙의 진리에 자아 사랑이라는 악의 거짓을 접합하는 사람이다. 그들의 술수는 모독의 죄를 포함하고 있다. 사울이 하느님께서 지정한 예언자를 버리고 엔도르의 무당과 상의하는 것, 살아계신 하느님의 신뢰를 버리고 죽은 예언자인 무당에 신뢰를 둠으로 그는 신성한 것에 더러운 것을 혼합시켜 자멸로 빠져들고 말았다.
사울이 찾아 나선 무당은 전부터 사울이 알고 있던 무당은 아니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을 변장했다. 옷을 바꿔 입고 두 신하와 함께 밤중에 그녀에게 갔다. 이 모습은 거룩함에서 모독함으로 돌아선 사람들의 상태와 행동을 얼마나 강력하고도 간단하게 표현하는지! 그들은 자신을 위장한다. 그들은 진리의 옷을 거짓의 옷으로 갈아 입는다. 이렇게해서 의지와 이해성이 충족되면 “오로지 악만 계속 있을 뿐인 자기 심정의 생각에 대한 망상”에 관해 혼백을 불러내는 무당에게 문의하려고 낮의 빛을 피해 밤의 어두움을 이용한다. 사울이 원하는 내용이 하느님에게 물어 보아야할 것들이었다는 점을 생각해본다면 그가 하느님을 신뢰하여 그분께 묻는 것을 결코 거절한 것도 아니다. 어쨋든 그가 거룩하지 못한 매체를 통해 원한 것을 획득했다고 결론지어 보아도 그의 생각 속에 떠오르는 것이 있다. 한 때 그가 죄악시하여 섬멸하려던 짓을 자신이 행동하고 있다는 것에 대해서이다. 마치 무당이 은밀한 방문자에게 사울의 명령 사항, 즉 이 땅에서 무당과 박수를 몰아내었다는 점을 상기시켜 주는 것과 같다. 그러나 마음이 잘못된 쪽으로 크게 기운 이상 자신의 행동이 삐뚤었다고 판단하여 자기 의도를 철회하는 것은 매우 힘들어 진다. 그래서 사울은 “이 일로 자네에게 죄가 돌아가는 일은 결코 없으리라” 하고 쉽게 보증까지 서주고 있다. 바람이 탐닉될 때 그 결과는 어떻게 벌어질까? 왕의 명령에 따라 이 여인이 사무엘을 불러내었을 때 그 여자는 큰 소리를 쳐 말했다. “왜 나를 속이셨습니까? 당신은 사울 왕이 아닙니까?” 왜 유령은 방문자가 사울이라고 여인에게 경종을 울려주고 확신시켰을까? 이에 대해 상상해보는 것은 곤란한 일이다. 그러나 영적 이유가 거기에 없을까? 예언자 사무엘은 말씀, 그리고 말씀이 가르치는 진리를 표현했다. 그리고 말씀 속의 진리는 인간 심정에 매우 잘 숨겨진 비밀까지 밝혀준다. “이스라엘에는 엘리사라는 예언자가 있는데 그는 임금님께서 침실에서 은밀히 하신 말씀까지도 다 알고 낱낱이 이스라엘 왕에게 말해줍니다” (열왕기하 6:12). 그러나 두려움도 이내 누구려뜨린다. 마음이 어떤 목적물을 향해 완전히 구부러졌기 때문이다. 사울은 무엇을 보았느냐고 여인에게 묻는다. 사울의 이 물음은 아직 그가 유령 자체를 보지 못했다는 표시이다. 영은 자연적인 눈으로는 보여질 수 없고 영적인 시야가 신성한 능력으로 열려질 때 보여진다는 것, 그래서 이쪽은 저쪽을 보고 있지만 저쪽이 이쪽을 보지 못하는 경우가 발생한다는 사실과 확실히 일치하고 있다. 주님께서 영혼의 눈에 덮힌 베일을 벗겨 주시겠다 할 때 나타난 영이 시야에 들어온다. 사울이 열린 이 환상을 받기 전 어느 정도 시간적 간격이 있었던 것같이 여겨진다. 그 이유가 사울이 여인에게 유령의 모습을 물었기 때문이다. 여인이 대답했다. “도포를 입은 노인이 올라옵니다.” “이 말에 사울은 그가 사무엘인 줄 알고 땅에 대고 절을 하였다.” 사무엘은 사울에게 왜 나를 성가시게 하느냐고 말했다. 사울은 이 예언자의 유령에게 자기가 곤경에 처해 있다는 것, 주님께서 자기를 떠나셨다는 것, 그분께서는 더 이상 예언자로도 꿈으로도 대답해 주시지 않는다는 것, 그래서 어찌하면 좋겠는가를 사무엘에게 물으러 왔다고 말했다. “야훼께서 이미 너를 떠나 네 원수가 되셨는데 어쩌자고 나에게 묻느냐?” 선이 하나도 없는 그를 진리가 어떻게 도울 수 있을까? 선은 선함을 떠나버린 이들로부터서 만 떠난다. 이럴 경우 진리는 심판의 말만을 들려주게 된다. 진리만의 심판은 자비 없는 심판이다. 자신의 행동 안에 심판의 자비를 제거해버린 이들은 자비 없이 심판될 것이다 우리는 심판하는 대로 심판받게 된다. “남을 판단하지 말아라. 그러면 너희도 판단받지 않을 것이다. 남을 판단하는 대로 너희도 하느님의 심판을 받을 것이고 남을 저울질 하는 대로 너희도 저울질을 당할 것이다” (마태 7:1-2). 사울은 스스로 선함이 강탈된 진리의 심판에 귀를 기울여야만 했다. 이 진리는 말하기를, 불순종 때문에 왕국이 몰수되었고 그 왕국은 다른 사람에게 넘겨졌다는 것, 당장 들이 닥친 전투는 참혹해진다는 것까지 들려주고 있다. “내일이면 너와 네 아들들이 나와 함께 있게 되리라 게다가 야훼께서는 이스라엘 군대도 불레셋 군의 손에 붙이실 것이다.”
이 엄청난 미래에 관한 소식을 듣자 “사울은 그만 땅바닥에 번 듯이 쓰러졌다. 하루종일 그리고 밤새도록 아무 것도 입에 대지 못해 기운이 빠진데다가 사무엘이 하는 말에 겁을 먹고 기절했던 것이다.” 사울이 쓰러질 수밖에 없었을 것임은 의심할 여지도 없다. 사건 줄거리로 짐작해 보건대 사울이 쓰러진 것은 참회로 인한 자발적인 엎드려짐이 아닌 자포자기로 인한 비자발적인 엎드려짐이다. 그 외에 그에게는 아무 기력도 없었다. 그는 먹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그의 단식은 “억울하게 묶인 이를 끌러주고 멍에를 풀어주는 것, 압제받는 이들을 석방하고 모든 멍에를 부수어 버리는” (이사야 58:6) 진정한 단식으로 주님을 경외해서가 아니다. 여인이 사울에게 다가와서 뭔가 먹어야 하지 않겠느냐고 권했다. 그는 거절했다. 그러나 “신하들과 그 여자의 청에 못이겨 일어나 침상에 앉았다.” 그가 앉은 침상은 참된 교리라는 침상이 아니었다. 그 침상은 여자 점쟁이 (pythoness)의 침상이었다. 그녀가 마련한 살진 송아지는 거룩한 송아지가 아닌 부정한 살코기(학개 2:12, 에제키엘 4:14)이고 하느님께 드리는 제물로서가 아닌 악마에게 바치는 제물로 우리는 간주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사울에게 친절을 다하는 여인 무당까지 위 사항에 포함시킬 필요는 없으리라 본다. 사울의 처절한 모습이 그녀에게 더 나은 느낌을 생산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사울의 불쌍해진 모습을 지켜보는 그 순간이나마 그녀는 자신이 무당이라는 존재를 떠나 있었다. 표징적인 역사의 일부를 형성한다는 점에서 그녀의 행동은 다른 품성을 가지고 있어 또 다른 교훈을 우리에게 가르치도록 기록되어 있다. 우리가 악한 수단을 채용해 거기에 몰두될 때 공급된 그 수단으로부터 우리의 힘을 끌어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사울 역사의 이 부분으로부터 우리는 얼마나 엄한 교훈을 배워야 하는지! 심정이 하느님으로부터 돌아설 때 마음은 참된 모든 위로를 잃으며 올바른 방향마저 박탈된다. 이런 상황은 난국이나 위험한 때에 진열되고 느껴져 온다. 굳은 날, 잔혹한 시련의 날이 미래에 있는 이상 우리는 주님의 소리에 성실히 답변하려 애써야 하고, 그분의 섭리적 보호에 의존해야 한다. 그래서 정작 시련에 진입되고 싸움을 거쳐야 하는 상황에 서게 될 때 그에 대처하는 능력, 인내가 이미 우리 속에 장진되어 있음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하리라.

사무엘상 27장 해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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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상 제27장

다윗이 불레셋으로 피신하다

앞 장의 사건을 생각해보면 이젠 다윗의 시름이 끝난 듯 여기게 한다. 사울은 더 이상 다윗을 괴롭히지 않겠다고 약속하면서 되돌아 갔기 때문이다. 그는 다윗을 아들이라고 불러 마치 제 상속자로 우대한 듯 보여지기도 했다. 그러나 본 장은 다윗의 비탄, “나는 언제고 사울의 손에 죽을 것이다” 는 옛시름으로 시작하고 있다. 사울이라는 왕은 자기가 지닌 좋은 감정을 쉽사리 잃고 자기가 엄숙히 약속한 것도 얼마나 빨리 취소해 버리는지 모른다. 그래서 다윗을 죽이려는 그의 옛 적개심만 앙상하게 남아있는다. 어쨋든 세월의 흐름이라는 것은 앞 장과 본 장에 기록된 사건이 분리되게 한다. 시간의 경과가 길었든 짧았던 사울의 행동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교훈은 언제나 인상적이다. 사울이 다윗을 통해 느껴야만 했던 책임감은 제아무리 세월이 지난다 해도 지워질 수 없는 것들이다. 이런 사실들이 우리에게 보여주는바, 사울이 받은 감명은 매우 강했지만 피상적이었고, 그가 받은 느낌은 강렬했지만 금새 수그러 들었다. 강한 분위기로 휩싸여 있어진 그의 결심은 새벽 이슬 같고 돌밭에 떨어진 씨와도 같아 흙이 많지 않은고로 싹은 나왔지만 태양이 강하게 비치면 뿌리가 깊지 않아 시들어 버리고 마는 것과 같다. 정직한 심정이라는 옥토에 뿌리를 내리지 않는 확신이나 정감은 자아 사랑이라는 태양이 솟아오르면 계속 생존하기가 매우 힘들다. 자연적 수준의 느낌이라는 천박한 토양은 진리의 씨와 덕행이 빠르게 성장하게 해줄 수 있을는지 모르나 매우 빠르게 죽어지고 만다. 사울은 돌밭에 떨어진 씨를 확실하게 보여주는 인간 모형이다.
악령이 사울을 다시 덮치면 더 격앙된 추격을 받아 애꾿은 희생자가 될 자기임이 내다보이는바 다윗은 이렇게 생각한다. “불레셋 땅으로 망명하는 것이 상책이겠다. 사울은 나를 이스라엘 안에서만 찾다가 결국 단념하고 말겠지. 그러면 나는 그의 손에서 벗어나게 될 것이다.” 과거 다윗은 불레셋의 영토로 피신해서 갓나라 왕 아기스와 대면했던 때도 있었다. 그때 다윗은 이쪽에서의 위험을 피하려고 저쪽으로 도망했지만 거기서도 위험은 여전했다. 그러나 지금 그는 친절한 대우를 받고 시글락 성읍까지 그에게 맡겼다. 그런 연유로 이 성읍은 이 날까지 유다 왕실에 속하게 되었다. 처음에 다윗이 불레셋으로 피신하였을 때는 혼자였지만 지금은 아둘람의 굴에 숨어있을 때 모여든 군인들로 구성된 육 백 명의 군인까지 합세해 피신하고 있다.
불레셋지역은 다윗이 사울을 피해 달아난 첫 장소이자 마지막 장소이었다. 불레셋은 에집트처럼 신앙자의 여정 중 어떤 한 단계, 즉 바둑판 무늬같은 거듭나는 삶의 체험을 통해 진보해 갈 때 있어지는 어떤 단계이다. 어쨋든 이 단계는 수준 낮은 단계는 아니다. 에집트로 의미된 단계보다 더 진전된 단계, 즉 자연적이 아닌 천적이고 영적인 단계에 속한다. 아브라함과 이사악도 불레셋에 체류했었다. 그러나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은 불레셋의 영토를 통과하도록 허락되지 않았다. 새 삶에서 자연적이 아닌 영적 단계는 불레셋에 소속된 것으로 표현되는 체험들이다. 이 단계의 시련은 과학 수준이 아닌 신앙수준에 관한 것, 지식에 관한 게 아닌 신념에 관한 것, 글자가 아닌 영에 관한 것이다. 다윗의 체류지가 이런 단계인 것은 그가 영적 인간을 표현했기 때문이다. 불레셋은 다윗에게 시련의 장소일 뿐아니라 은둔지이기도 했다. 다윗의 두 번째 체류지와 관련된 사항 중 얼마를 이제 살피게 된다.
다윗이 갓으로 망명하면 사울이 더 이상 추격하지 못할 것이라는 게 망명의 가장 중요한 효과이다. 사울이 다윗을 추격하는 것은 이제 끝장났다. 그렇다고 사울의 포기는 다윗을 추격하고 싶은 욕망이 죽어져서가 아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왕권 제도를 희망한 목적의 하나는 불레셋의 압제에서 벗어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사울은 불레셋의 골리앗을 죽여 불레셋의 압제에서 백성을 해방시킨 불레셋의 정복자를 자기 왕권의 적수로 삼아 군대를 백성의 본래 의도와는 달리 사용해왔다. 게다가 이제는 이스라엘의 가장 좋은 친구를 가장 강한 적의 수중에 넘긴 셈이 되었다. 불레셋을 정복해가야 할 사람이 되려 정복되어 있는 꼴이다. 불레셋은 자기들 땅에 다윗의 진입을 허용함으로 다윗을 구하고 사울의 추격도 저지해주었다. 지금 불레셋은 사울의 어떤 추격에서도 다윗을 보호해주게 되었다. 이런 조치로 불레셋은 자기들을 압도할 사람을 무의식적으로 지켜주고 그의 세력이 더 강해지게 해준 셈이 되었다. 이것은 은혜로운 목적을 향해 섭리하시는 방법 중의 하나이다. 자연적 인간의 힘, 자연적-합리적 인간의 능력도 영적 인간의 힘으로 결코 정복될 수 없다. 서로 다투는 두 열정은 서로를 자제시키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그렇게 자제되는 결과에는 진정한 개혁은 없다. 따라서 그것들 모두를 억제하고 진압해서 자기 스스로 복종하여 하위 서열에 서게 만드는 더 높은 힘이 있어야만 한다. 이 힘이 얼마나 높은 지가 수많은 신성한 수단들, 각양각색의 허용과 설비해두심으로 결과 되어 진다. 주님께서는 어떤 인간이 깨뜨려지지 않을 경우 구부리신다. 또는 사랑으로 인도될 수 없다면 두려움으로 인간을 억제시킨다. 때로는 하느님의 사랑에로 그들을 인도하는데 그들의 이기적 사랑을 도구로 삼으시기도 한다. 우리가 처음 갖게 되는 종교적 자극 안에는 천국의 사랑 보다는 지옥의 두려움이 더 많다. 그래서 두려움 안에 사랑이 존재한다. 두려움이 없는 사랑은 파멸로 가게 하는 넓은 길을 피하고 대신 생명으로 인도하는 좁은 길을 선택하도록 재촉할 수 없다. 초기 신앙 속에는 자기 과신이 있다. 마치 “제가 죽는 한이 있더라도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 않겠읍니다”라고 말할 때의 베드로와 같다. 사실 초기의 믿음이 자기 확신 안에 있지 않으면 베드로 같이 순교도 불사하겠다고 마음먹어 보는 순간 조차 가져볼 수 없다. 처음 지니는 정의 속에는 그 공적의 주인이 자기라는 느낌이 있다. 그럼에도 이런 공적 없이 정의가 그 사람 속에 심어질 수 없다. 한마디로 우리의 초기 종교 안에는 자아라는 재료가 대단히 많이 들어가 있다. 주님께서는 이런 이기심이 가득한 재료에 호소하신다. 그리고 그분을 따르겠다는 이들을 향해 장차 이스라엘의 열 두 지파를 심판하는 옥좌에 않게 하리라고 약속하신다. 주님은 수준 높은 동기가 더 발달될 때까지는 수준 낮은 동기라 해도 그것을 수단으로 우리를 인도하시고자 자신을 낮추시어 다가 오신다. 그 이유가 언젠가 우리가 진지한 종교를 지니게 되면 수준 높은 동기는 수준 낮은 동기 안에 존재할 것이기 때문이다. 마치 나비가 풀쐐기 안에 있는 것과 같다. 수준 낮은 것이 죽을 때 수준 높은 것은 생명을 얻게 된다. 우리의 초보적 두려움 안에 사랑이 있고, 자만심 안에 신뢰가 있고, 자기 공적 자랑 안에 무욕이 있다. 시련과 환난을 수단으로, 뿐만 아니라 인내와 버팀으로 하늘나라가 점차 우리 안에 건설된다. 그리고 우리 스스로 하느님과 하늘 아버지에게 왕과 성직자 역할을 담당한다. 다시 말해 주님의 진리가 우리의 이해성을 통치하고 그분의 사랑이 우리의 심정을 통치하는 수준에 이른다.
불레셋에 있는 다윗은 이미 기름부워진 왕이 되어 장차 이스라엘 왕국의 통치를 위해 위와 같은 방법으로 준비되고 있다. 다윗의 이런 모습은 지상에서 고통 받으심으로 완전해지신 그분에 대한 완전한 모형이다. 그분은 기름부은 자요 거룩한 하느님의 아들이셨음에도 승천하시어 옥좌에 오르시어 천상천하의 통치자가 되시기 까지 고통 받는 삶을 통과해 가셨다.
다윗은 아기스 앞에 나가서 자기가 거주할 지역을 달라고 했다. 그러나 왕이 사는 지역 외 다른 곳을 원했다. 아기스는 다윗에게 시글락을 주었다. 그러므로 해서 오늘까지 시글락은 유다 왕실에 소속되었다. 시글락이라는 성읍의 역사에는 흥미 있는 줄거리가 있다. 이 성읍은 원래 유다지파의 몫으로 할당되었었다 (여호수아 15:31). 그러나 유다 지파의 몫이 너무 많았으므로 시므온 지파의 몫은 유다 지파의 몫에서 떼어 주었다 (19: 1-9). 그래서 시글락은 유다 지파로부터 시므온에게 넘겨진 것이다 (19:5). 그 결과 시므온 지파의 몫은 유다 지파 영역 안에 있어졌다. 이 두 지파는 서로에게 의지와 이해성이 되어 있다. 천적 수준의 인간의 이해성은 의지 안에 있고 의지로부터 파생되어진다. 마치 시므온 지파의 몫이 유다 지파 안에 있고 이 지파로부터 할당된 것과 같다. 영적 인간의 의지는 이해성 안에 형성되어진다. 천적 인간의 이해성은 의지 안에 있다. 영적 인간은 자기가 이해하는 대로 뜻한다. 그 반면 천적 인간은 자기가 뜻한 대로 이해한다. 천적 인간의 의지와 이해성은 완벽하게 하나를 이루고 있어 최고 높은 수준에서 한 마음을 형성한다.
시글락 성읍의 역사가 위와 같지만 본문 당시에는 불레셋의 지배 아래 있었다. 마치 진짜가 가짜에 짓눌린 것과 같다. 그러나 이제 시글락은 다윗의 거주지가 되고 있다. 세월이 흘러 오랜 뒤에는 진짜 주인인 유다 왕과 그 지파에 남게 된다.
시글락, “샘이 넘쳐 흐름”, 생명 있는 진리와 그 아름다움을 상징하는 이 장소로부터 다윗은 자기 백성의 원수 중 일부를 향해 맹렬한 습격을 감행했다. “다윗은 부하들을 거느리고 그술족과 기르스족과 아말렉족이 있는 곳으로 올라가 그들을 털곤 하였다.” 세 부족들의 의미 파악은 별로 어렵지 않다. 수르 광야는 이스라엘 백성이 에집트를 떠난 뒤 목이 말라 지쳤을 때 첫 시험이 있었던 곳이다 (출애굽기 15:22). 그리고 씬 광야에서 두 번째 시험이 있었을 때 이스라엘 백성을 습격한 부족이 아말렉족이다 (17:8). 아말렉은 내면의 악에 바탕을 둔 거짓을 표현한다. 본문의 경우 이 부족들은 다윗의 침입과 연계되어 있다. 이 침입에 관해 이렇게 서술되고 있다. “다윗이 남녀를 한 명도 갓으로 끌어오지 않고 모두 죽인 것은 자기가 한 일을 고해 바치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었다. 다윗은 불레셋 지방에 머물러 있는 동안 줄곧 이렇게 해왔다. 아기스가 다윗에게 어디를 털었느냐고 물었을 때 ‘유다 남부와 여라므엘족이 사는 지방 남부, 켄족이 사는 지방 남부를 털어 왔습니다’ 라고 둘러대었다. 그래서 아기스는 그런줄도 모르고 ‘다윗이 제 동족 이스라엘에게서 미움을 사고는 이제 아주 내 종이 되었구나’ 하며 다윗을 철석같이 믿게 되었다.” 이 본문에는 다윗의 두 가지 범죄 행위가 버젓이 기록되어 있다. 남녀 가리지 않고 몰살한 것을 감추고 있고 왕에게도 거짓말로 대답하고 있다. 기독인의 도덕적 표준으로 생각해 본다면 이는 비난을 면키 어렵다. 그럼에도 다윗은 영적 인간의 모형이고 특히 신성한 진리 측면의 주님을 표현하는 인물이다. 그렇다면 본문의 다윗의 행동을 어떤 관점에서 생각해야 할까? 만일 다윗이 자기 영토에서 살고 있으면서 원수들을 습격했다면 이는 칭찬받을만한 행동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다윗은 자기 백성의 적과 함께 살고 있다. 더구나 그는 자기 백성이 원수나 되는 듯 행동해야만 하는 처지이다. 그는 적의 영토 안에서 안식처를 찾아야 하는 만큼 매우 잔인해질 필요성이 있는 것이다. 그리고 장차 자신이 지배하게 될 이 영토에 무관심하거나 불성실해서도 안 된다. 이외에도 지금 그가 거주하는 지역은 과거 아브라함과 이사악에게 하느님께서 선언하시어 그들 후손에게 소속되기로 약속되었던 곳이다 (창세기 13:15, 26:3). 이 지역은 과거 여호수아가 점령하지 못한 곳이기도하다 (여호수아 13:3).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을 시험하고 전쟁을 가르치기 위해 남겨진 부족 중 하나가 불레셋이다 (판관기 3: 1-3). 그리하여 이스라엘족은 정복하지 못한 부족들과 섞여 살았다 (판관기 3:5). 그래서 다윗과 그의 부하들 역시 불레셋 땅에서 외국인 취급을 당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다윗과 부하들과 그 땅의 이스라엘 백성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 섞여 사는 이스라엘 백성은 자녀들을 서로 시집 장가 보내고 그들의 신을 섬겼기 때문이다. 이런 짓은 그들에게 재난을 불러다 주었다 (판관기 3:6-9). 그러나 다윗과 그의 부하들은 이런 악행을 범하지 않았다. 그들은 섞여 사는 불레셋과는 분리되어 있었다. 오히려 그들은 불레셋에 거주할 수밖에 없는 형편을 하늘이 내리시는 기회로 여겼다. 그들을 섬멸할 수밖에는 달리 처방을 내릴 수 없는 그들을 향해 신성한 심판을 대행하는 기회로 삼았다. 그러나 불레셋이 베푼 친절을 악으로 갚는다는 것을 불레셋이 눈치채서는 절대로 안되는 게 다윗의 처지였다. 오히려 다윗은 불레셋의 친구가 아닌 적들을 공격 대상으로 삼고 있다고 믿게 해야만 했다. 다윗으로 표현된 신성한 진리의 가르침과 행동으로부터 그것과 상응되는 결론을 끌어내기 위해 불레셋으로 표현된 신앙의 본성을 살펴 보아야만 한다.
신앙 만 (faith alone)을 원리로 채택하여 실제로 따라가게 되면 신성한 진리의 가르침과 그 작용에 관해 마음의 직감이 둔해져 설사 보는 게 있다 해도 뒤집힌 모습만 보게 된다. 다시 말해 “선을 악이라, 악을 선이라 부른다 던가, 어둠을 빛 대신 빛을 어둠 대신 놓는다. 단 것을 쓰다 하고, 쓴 것을 달다고 말한다” (이사야 5:20). 이런 원리에 의거하면 신성한 진리는 악과 싸우는 게 아니라 선과 싸우게 된다. 이는 난감한 말 처럼 들릴는지 모른다. 그러나 위 원리는 이것을 내포하고 있다. 그리고 만일 이 원리가 합법적 결과를 수행해냈다면 그것은 바깥쪽 측면의 합법적 모양새이다. 위 원리는 아래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신앙 만으로 구원받는다는 교리를 붙들고 있는 사람들의 경우 일은 칭찬받을만 하다는 것에 바탕을 두고 있다. 그러므로 일은 구원에 기여할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다고 한다. 그래서 선한 일이 의로운 사람으로 만들어 주는 게 아니다 라고 믿게 된다. 그 결과 그들에게 악한 일은 정죄되지 않는다 라고 믿는 것도 과히 어려운 난제는 아니다. 오늘날 이런 식의 신앙을 공개적으로 공언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줄로 안다. 그럼에도 신앙 만으로 구원됨이라는 교리는 위와 같은 것을 포함하고 있다. 그래서 언제든 위와 같은 왜곡된 경향성을 늘 품고 있다. 그럼에도 신앙 만이 우리를 구원해준다고 말하는 많은 사람들이 율법을 완성하는 삶을 꾸리고 있다. 이런 사람은 영적 불레셋이라는 교파에 소속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없다. 영적 불레셋 사람이란 선이 의롭게 하는 것도 아니고 악이 정죄되는 것도 아니다 고 믿고 그렇게 행동하는 사람이다. 자기 교파가 공언한 내용을 받들기 위해 열심히 성경을 파고드는 신학 저술가의 지적 노력에서 위와 같은 경향성을 목격할 때가 있다. 이런 학자들은 성경을 열심히 뒤적거리다가 신앙을 우선시하는 듯 보이는 구절이나 사건을 접하면 이를 추켜 올리므로 해서 선행이나 선한 일을 강조하는 성경의 구절은 별로 많지 않은 듯 여기게 사람들의 관심을 돌린다. 설사 이런 구절들이 강하게 그들의 마음을 흔들면 강요나 당한 듯 비키려 한다. “사람은 율법을 지키는 것과는 관계 없이 신앙을 통해서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는다” 는 바울의 서술 (로마서 3:28)을 기독교 교리의 전부나 되는 듯 추켜든다. 그 반면 “사람은 신앙 만으로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가지게 되는 것이 아니라 행함으로 된다” 는 야고보의 서술 (2:24)은 유대교 식을 따른다고 비난해 버린다. 이 서간문의 구절은 지푸라기의 서간인 듯 나타난다고 루터가 이 특출한 편지를 평한 것은 잘 알려져 있다. 위 두 주장, 바울과 야고보의 주장은 두 저자의 주제와 목적을 이해할 경우 완전한 조화를 가진다. 하여튼 위와 같이 성경을 읽는 방식이 아기스가 다윗을 신뢰한 것, 즉 다윗이 그술족과 기르스족과 아말렉족을 습격한 게 아니라 유다 남부와 여라므엘족 남부와 켄족 남부를 습격했다고 말한 것을 신뢰한 것과 같다. 참으로 아기스는 다윗이 그렇게 말했기 때문에 믿었다. 다윗이 아기스를 속인 것이다. 그렇다면 주님 또는 그분의 말씀이 인간을 속인 것일까? 성경은 그렇다고 말하고 있다. 예레미야가 말한다. “야훼여, 저는 어수룩하게도 주님의 꾐에 넘어갔습니다. 주님의 억지에 말려들고 말았습니다” (20:7). 주님께서 에제키엘에게 말하신다. “만일 예언자가 꾐에 빠져 그런 말을 한다면, 바로 내가 그 예언자를 유혹한 것이다” (14:9). 그리고 주님께서는 아합을 꾀어 내기 위해 거짓말하는 영을 채용하셨다 (열왕기상 22:20-23). 이것들은 가상적인 진리들 (apparent truth)이다. 주님께서는 그분의 말씀의 가르침으로 인간을 현혹하시지 않는다. 그러나 인간들이 그분의 말씀에 왜곡된 해석을 덧붙여 자신들을 현혹한다. “계시를 보는 이들에게 ‘계시를 보지말라’ 하고, 예언자들에게 ‘진실을 우리에게 예언하지 말라’ 하며, ‘솔깃한 말이나, 터무니 없는 이야기만 하여라” (이사야 30:10). 사기당할 기질이 종교적 사기의 모든 근본을 이루고 있다. 주님의 말씀이 진리이다 (요한 17:17). 그러나 인간은 하느님의 진리를 거짓과 바꾸었다. (로마 1:25). 다윗이 아기스에게 말한 것은 자연적으로나 영적으로나 다윗이 했던 것과 반대된다. 더구나 다윗이 말했던 장소나 백성들 역시 반대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 아말렉은 내면의 악에 바탕을 둔 거짓이고 유다 남부란 내면의 선함에 바탕을 둔 진리이다. 기르스족은 추론으로 생겨난 거짓이고 여라므엘족이란 총명으로부터의 진리이다. 그술족은 과학으로부터의 거짓이고 켄족 남부란 자연적 선함 안에 근거를 둔 진리이다. 그러므로 위 세 가지는 천적, 영적, 자연적 진리와 그 반대되는 거짓과 관계된다. 모든 남,녀를 다 죽였다는 것은 글자대로의 역사적 사실로 간주하면 매우 참혹하지만 이는 모든 민족을 향해 발표된 신성한 심판이 수행된 것이다. 다시 말해 하늘 나라를 구성하는 신성한 진리와 선함의 우월성에 반대하는 모든 생각과 애착을 소멸한다는 것에 대한 모형이다.
“아기스는 그런 줄도 모르고 ‘다윗이 제 동족 이스라엘에게서 미움을 사고는 이제 아주 내 종이 되었구나’ 하며 다윗을 철석같이 믿게 되었다.” 다윗의 제 동족 이스라엘이란 주님의 신성한 진리를 제 스승으로 인정하는 사람들이다. 불레셋이란 주님의 진리를 제 종으로 만들고 싶어하는 사람들이다. 모든 진리는 선함으로 인도해준다. 그래서 모든 종교는 삶과 관련된다. 우리가 종교의 가르침을 따를 때만이 우리는 주님의 신하요 종이 된다. 그러나 주님의 진리가 다른 사람의 선함을 신뢰하는 대로 인도하고, 모든 종교는 신앙과 관계된다고 믿는다면 앞과 뒤라는 올바른 질서관계를 뒤엎게 되어 진리가 우리에게 신하가 되고 종이 되게 만든다. 그이유가 우리의 견해와 목적에 진리가 맞추어야 하기 때문이다.

사무엘상 26장 해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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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상 제26장

다윗이 사울의 진영에 들어가 그의 창을 가지고 오다

본 장의 주제는 그 특성이 앞 장의 주제와 매우 비슷해서 이 장에서 추론될 주요한 교훈의 얼마쯤은 예상되리라. 도덕적 어조가 달라도 우리는 그것에 대한 설명은 건너뛰려고 한다. 그 이유는 그 사건에 신성이 덜 하거나 덜 교훈적이어서가 아니라 단지 그 사건을 이끄는 모양새가 앞 장과 동일하기에 생략할 뿐이다. 인간 본성의 어두운 측면을 부각시키는 성서 역사의 부분들이 인간 본성의 밝은 측면, 즉 우리로 할 수 있게 격려하는 것 보다 덜 교훈적이라고 생각해선 안 되리라. 아마 인간 본성의 진짜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어두운 쪽이 부각되어야 더 실감할는지 모른다. 어쨋든 성경의 역사적 줄거리를 읽어 가되 우리의 영적 진보와 비슷하게 느껴지는 곳, 더 밝고 새로움을 주는 줄거리에서 머뭇거리는 게 더 유쾌하고 유익할는지 모른다.
성경을 단순한 글자로만 읽게 될 때 많은 부분에서 인간 본성의 타락되고 추잡한 것들과 마주치게 되면 고통스런 암시만 던져주지만 이런 부분들은 성경이 선포하는 진리를 더 확신되게 해준다. 인간의 심정은 그 어떤 것 보다 쉽게 현혹되고 거의 절망적으로 사악해지기 까지 하지만 그런 틈바구니에도 인간 본성의 고귀한 면모의 회복 가능성이 완전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거듭남, 새 창조, 하느님의 형상과 모양으로 회복될 수 있다는 말이다.
자연적 수준의 인간들도 전쟁 중이든, 승리했을 때이든, 평화 시기이든, 창피를 느낄 때이든 인간성의 아름다운 모습을 전시해주는 경우도 흔하다. 이런 모습은 신성이 인간의 근원이 됨을 밝히 알려준다. 설사 당사자가 자기 심정에 하느님이 있으심을 인정 않는 때일지라도 마음이든 인간 사이이든 거기에 하느님의 계심이 있다는 말이다. 자연적 수준에서 선한 것들, 설사 사악한 자에게 남은 선한 것들 까지도 영적 수준이나 의로운 자에게 있는 선한 것과 마찬가지의 근원을 가지고 있다. 선한 분은 한 분 하느님 밖에 없다. 창조물 속의 좋은 것은 창조자로부터 인바 그 사람 안에 있는 좋은 것은 창조자의 것이다. 장미의 향그러움과 수줍듯 피어나는 장미꽃은 자연계의 태양에 절대 의존되어 있다. 인간의 갖가지 느낌과 생각은 천국의 태양에 의존하고 있는데 장미보다 의존도가 더 강할 것이다. 어쨋든 이것들 모두는 의로운 자나 악한 자나 모두에게 똑같이 비추시는 그분의 태양에 그 시작을 연유하고 있다. 시작은 같을지라도 영적 인간과 자연적 인간은 폭넓은 차이가 있다. 한가지 차이점만을 살펴 보자. 영적 인간은 자신이 지닌 선한 것 모두는 그것을 주신 분께 자기 소유의 원인을 둔다. 그러므로 그는 좋고 아름다운 것을 수여하신 그분과 받은 선물을 수단으로 연결을 이루고 있다. 자연적 인간은 자기가 소유하고 사용하는 좋은 것은 무엇이든지 그 근원이 자기에게 있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공적의 원인이 자신이라고 주장함으로 해서 그는 하느님과 상호 결합되는 연결 고리를 자른다. 자연적 인간은 자기가 지닌 게 매우 특출하다 해도 그는 자연적 수준에만 남아 있는다. 그 이유가 그는 자연을 넘어 있는 어떤 것을 보지 못하고 바라지도 않기 때문이다. 그의 덕행은 제 잘남으로 가득 차 있어 그의 내향적 인간은 자연적 부패들로 색칠되어 있다. 영적 인간의 덕행은 영적이다. 그 이유가 주님의 영이 그 행동 안에 있기 때문이다. 이 덕행은 영원에 그 목적을 두고 있어 영원한 존재로 남게 된다.
위와 같이 인간 행동 안에 있는 아름답고 선한 것의 진부를 찬찬히 생각해 보았다면 이에 관한 좋은 예를 성서에서 발견할 수 있고 우리가 지닌 선한 것의 근원이 되는 참 존재에 그것을 되돌려야 할 것이다. 선하고 참된 모든 것은 우리들의 세계에 드리운 그분 날개의 그림자로 간주해야 할 것이다. 그래야 거룩하지 못한 열정의 불이 우리 마음에 뿌린 창백한 빛을 경감시킬 수 있다. 하느님이 완전하시듯 너희도 완전해져야 한다고 복음서가 우리에게 요구하듯 인간 품성의 모든 것은 신성의 어떤 것을 반사하는 바 우리는 완전한 분이 거하실 곳, 그분의 모양을 닮도록 자신을 가꿔가야 한다.
본 장의 사건은 24장의 사건과 세부 사항에서 다른 게 있다. 다윗은 바란 광야를 떠난 뒤 지브 광야에 처소를 두었다. 그러나 다윗의 피를 원하는 사울은 다시 정병 삼천을 거느리고 그를 찾아 나섰다. 지브 광야는 유다 지파의 영역에 있다. 하길라 지역은 과거 사울과 다윗이 마주 섰던 엔게디로부터 그리 먼 곳은 아니다. 사막은 시험의 상태를 그리고 있다. 특히 하길라는 어두움, 음침함이라는 뜻이다. 다른 세부사항도 암시하듯 여기서의 시험 상태는 의지 측면보다는 이해성 측면에 더 직접적으로 관련되어 있다. 이해성과 의지라는 두 여건이 표현되는 말씀의 여타 부분에서도 서로 비슷하다 이것이 의지와 관련되면, 저것은 이해성에 관련되는데 마치 사랑과 믿음이라는 두 원리가 마음의 자질인 의지와 이해성에 거처를 두는 것과 같다. 이것들은 거듭남으로 따로따로 완전해진다. 다윗을 추격해온 사울의 군대가 진을 친 곳은 하윌라의 어두운 언덕이었다. 이곳에서 관대하고 참을성 많은 다윗의 모습이 강력하게 우리 마음에 부각되고 있다. 광야에 거하던 다윗은 사울이 왔다는 소리를 듣고 그가 진을 친 곳에 접근했다. 사실 신성의 어떤 소리를 들었다거나 신성의 어떤 자극도 없이 삼 천 명의 군사로 에워 싼 사울의 중앙 진영에까지 다윗이 감히 접근한다는 것은 우리로서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다. 정말로 사울의 진영은 깊이 잠들어 있엇다. 그러나 이런 상황은 정상적인 군대 진지가 아니다. 이것은 초자연적으로 만들어진 상태, “야훼께서 그들을 모두 깊이 잠들게 하셨기” 때문이다. 이와 똑같은 초자연적인 작용이 다윗에게도 있어져서 그로 하여금 감히 사울의 진영에 진입하게 했다. 그리하여 자기를 지겹게 추격하는 사울을 향한 분노를 내려놓고 추격자로 하여금 감탄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이르러 평화로운 승리를 할 수 있게 하는 고상한 사건으로 매듭짓게 된 것 역시 신성한 영향이 아니라고 부인할 수가 없다.
이런 모습, 조건, 상황은 기독인에게도 마찬가지이다. 위급한 때 주님을 신뢰하고 있는 사람에게 그분은 안전을 설비해 주신다. 다윗 스스로 기독인의 언어로 그가 당한 환난의 때에 대해 말한다. “비록 많은 무리가 나를 에워싼다 해도 내 마음은 두려울 게 없다. 비록 나를 죽이고자 일어선다 해도 내 믿음은 굳건하리라.” 우리의 순진을 끝까지 추격하는 사울과 그의 부하같은 적들이 우리 가슴에서는 어떻게 발견되고 있을까? 우리 심정에서의 전쟁은 육이 영에, 세상이 천국에, 자아가 하느님께, 자연적 마음이 영적 마음에 반대하는 것이다. 자연적 마음이 깊은 잠에 빠져있을 때 영적 마음은 자연적 마음에 내려와 복된 일을 수행한다. 이 일이 사울의 진영에서 일어나는 다윗의 일로 표현되어 있다. 잠들어 있다는 모습으로 표현된 마음의 특별한 상황은 자연적 마음의 욕구나 열정이 무활동의 상태에 놓일 때이다. 병고나 불행이 인간 위에 덮쳐 괴로움에 시달릴 때, 그러면서도 아직 그가 자연적 상태에 머므르고 있을 때 자연적 마음은 압박되어져 자아충족의 욕구나 세상적 추구에의 열정이 온순해진다. 이럴 때 영혼을 위해 과거 자기가 집요하게 요구해왔고 충족된 세상적인 것의 얼마를 포기하거나 영혼의 잘됨을 위해 맞바꾸고 싶은 바램이 일어난다.
돈, 명예, 학식같은 자연적 매체로 맞바꿀 수 없는 훨씬 더 깊은 잠이 자연적 마음을 덮칠 수도 있다. 죽음과 심판의 공포는 종교적 조건을 지닌 마음에 더 큰 영향을 준다. 이 종교적 조건이란 천국의 사랑이 아닌 지옥의 공포이다. 그래서 그의 양심은 변명을 들이대기 보다는 차라리 그를 질책한다. 이런 사람에게 성경이 심판을 말하면 전율을 느낀다. 이 때 그들 속의 반역적 움직임은 한 동안 꼼짝못한다. 자연적 욕구나 열정이 더 심오하게 깊은 잠에 빠지면 처벌의 두려움보다 더 깊은 수준, 즉 죄지은 자라는 느낌과 확신이 그의 마음을 내려누른다. 어떤 원인에 의해 생산된 열망의 잠듦은 주님으로부터이다. 그 이유가 인간을 이런 상태로 가져오는 게 그분의 섭리요 그분의 영이기 때문이다. 어떤 면에서 이런 상태의 효과가 일시적일 수도 있다. 마치 본문의 사울같이 이전 상태로 환원될는지 모른다. 설사 통회함이 일시적이라 해도 무용지물이지만은 않다. 게다가 거듭나고 있는 사람에게 조차에서도 이런저런 수준의 상태가 교차된다. 거듭나는 것은 죄짓고 회개하는 식의 삶은 아니다. 그러나 거듭나는 자들도 혼란과 고요의 때들, 잠들고 깨어있는 때, 기쁨과 슬픔의 때는 가지고 있다. 영적 마음을 가진 이들은 참으로 자신들에 특유한 상태나 체험들, 상반되는 두 삶이 동시에 존재하는 듯 여겨지는 때들을 가진다. 다시 말해 외향으로는 환난에 종속당하고 있는 반면 내향으로는 평화를 즐기고 있다. 바깥쪽 세계에서는 명암이 흐린 상태이지만 내향으로 밝은 빛을 가지고 있다. 그들의 감각적 본성은 깊은 잠에 빠진 반면 영적 본성은 완전히 깨어 있다. 이를 광야에 머무르는 거듭나는 사람과 관련해보면 위 상태가 본문의 역사적 풍경으로 우리 마음에 그려져 있는 셈이다. 사울과 그의 군대가 깊은 잠에 빠져 있는 반면 다윗과 그의 부하들은 사울 진영의 한가운데 까지 깊이 침투해 사울의 물병과 창을 갈취하고 있다.
자연적 인간의 반역적 욕망이 소진될 때, 또는 주님의 섭리적 조치나 영적 어떤 작용으로 주님으로부터의 깊은 잠이 자연적 인간을 덮을 때 영적 인간은 그 마음 아래로 내려가 자연적 생각과 애정의 가장 깊은 속까지 조사해서 영적 생명에 피해를 입히는 어떤 것의 능력을 박탈하거나 자연적 마음과 하모니를 가져올 방도를 검증한다. 이런 기회에서 우리는 개선되지 않을까? 바깥쪽 즐거움이 거두어질 때, 동물적 수준의 영들이 압박당해 있을 때, 어떤 영적 원인이 자연적 마음의 악질인 것을 깊이 잠들게 할 때, 우리는 어두운 침묵 속에서 어떤 두려움 없이 자기 검증을 성실히 하는 기회를 잡지 않을까? 사실 이것은 우리의 의무이다. 자기 반성이라는 우리의 의무가 성실하고 편견 없이 수행된다면 우리 영혼이 위를 향해 일보 전진하는 결과를 맞이한다. 사울의 분노, 비록 일시적이었지만 다윗의 용감성과 슬기와 자비로 인해 거두어졌다. 그리하여 사울은 자신의 삶이 보존되는 근본적 원인을 파악할 마지막 기회가 주어졌다. 앞 사건의 경우 같이 다윗에게 사울을 죽이라고, 원수를 갚을 기회라고 부하가 권면했지만 그는 사울을 기름부워진 자로서의 존경을 버리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앞의 사건 같이 자기가 마음만 먹었으면 그를 죽일 수도 있었을 능력이 있음을 과시할 필요는 있었다. 그래서 그는 사울을 떠받혀 주는 창과 물병을 집어 왔다. 이 두 가지는 사울의 목숨을 전쟁에서 받혀주는데 대단히 긴요한 도구이다. 사울이 깨었을 때 다윗은 가져온 이 두 가지 물품으로 자신의 능력과 자비를 베푼 증거로 보여 주었다.
위의 줄거리가 우리 자신에게 주는 가르침은 무었일까? 자기 검증(self-examination)이 성실하게 있어진다면 자연적 인간의 모든 능력이 영적 능력으로 바뀌는 기회가 될 것이고 더불어 자연적 인간의 생명과 모든 수단들은 영적 인간에 소속된 것임을 자각하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사울의 도포자락을 자를 때의 경우같이 본문의 다윗의 행동은 왕권의 미래 소유자가 누구인지를 알게 하는 예언적 행동이다. 우리 마음속에서도 이와 상응되는 행동들은 상존한다. 영적 마음은 점진적으로, 그리고 계속되는 행동들로 해서 자연적 마음에 대한 지배권을 획득해간다. 그러나 마음이라는 왕국의 전체가 소유될 때까지는 지배권을 확실히 확보한 것은 아니다. 어쨋든 영적 마음의 모든 행동들은 영적 마음의 능력을 자연적 마음으로 하여금 느끼도록 하고 인정하기 까지 만들어 어느 정도는 복종하게 한다. 그래서 무조건적인 복종의 길을 준비하여 마지막으로 항복하게 한다. 창과 물병은 방어와 지탱을 위한 수단으로서의 진리를 상징한다. 현재 자연적 인간을 지지하고 방어해주는 수단이 되어 있지만. 영적 인간에게도 방어와 지탱의 수단이 되어준다. 따라서 창과 물병의 진정한 소유는 영적 인간이다. 다시 말해 자연적 마음이 지닌 선과 진리에 관한 모든 것은 영적 마음에 소속되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이런 소속에 대한 인정 내지 그렇게 보여지는 것은 늘 싸우는 두 인간 본성이 서로 화목하고 하나 되기 까지, 내적 인간과 외적 인간이 진실로 하나 되어야 가능하다.
위와 같은 이상적인 결과는 저절로 되지 않는다. 다시 말해 우리는 환난을 예상해야만 한다. 우리는 고난이 무었이든 시련을 만날 채비를 하고 있되 존경과 인내심, 성실함으로 그 고난을 맞이해야만 한다. 한가지 상상 말아야 할 것은 우리의 시련들이 엄청난 재난 인듯 인식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하루하루의 날들이 날마다 그런 시련들을 가져오기 때문이다. 하루하루마다 우리의 특질, 인내심, 선행, 관용, 견딤 등등의 특질에 어떤 시련을 가져다 준다. 그리하여 우리의 원리들은 그 시련으로 테스트 받아 그 본성이 명백히 드러나고 많은 경우는 아니라 해도 때로 중요한 듯 여겨지는 문제도 발굴된다. 사실 우리의 마음과 행동에서 중요하지 않다고 여겨도 될 작은 사항들은 하나도 없다. 다시 말해 작은 일을 성실히 처리하는 자가 큰 일도 성실히 처리한다는 말씀을 상념해야 하는 게 매우 중요하다. 하루라는 삶속에 놓인 자기 의무를 성실히 이행하는 사람은 인생 전체에 놓인 의무도 성실히 수행할 확률이 높다. 미미한 것이라 생각되는 자기 생각과 행동에 관심을 놓지 않는 사람은 가장 큰 자신의 생각과 행동도 같은 비중으로 처리할 것이다. 어쨋든 시련과 시험이 크고 작은 게 문제가 되는 게 아니라 작든 크든 얼마나 성실하고 신뢰할만한 조치를 취했느냐 이다. 그 결과는 평화이리라.

사무엘상 25장 해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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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상 제25장

야박한 나발이 아비가일의 슬기로 죽음을 모면하다

사무엘이 죽었다. 그는 그 당시 위대한 예언자로 존경을 받고 있었기에 온 이스라엘 백성이 라마에 모여 들어 슬퍼하면서 그의 고향에 안장하였다. 자연적인 죽음과 매장은 의로운 사람에게는 영적 삶과 부활이다. 따라서 사무엘의 죽음은 사무엘 자신에게는 생명과 불멸을 암시하고 보좌와 제단에는 더 견고함을, 왕국에는 새롭고 더 높은 건설의 시작을 암시하고 있다.
사무엘의 죽음을 슬퍼하는 곳에 다윗이 나타나리라고는 상상해 볼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런데 사무엘이 죽는 사건 뒤에 즉각 다윗이 거론된다. 그는 바란 광야로 내려 갔다. 바란은 가나안 땅 밖에 있다. 바란 광야는 이스마엘의 고향이었고 (창세기 21:21), 에집트를 떠난 이스라엘 백성이 쉬었던 곳이다. (민수기 10:2). 그리고 이곳에서 모세가 가나안 땅을 정탐하러 스파이를 보냈다 (민수기 13:3). 이 광야의 의미는 모세와 하박국이 말한 의미로부터 알 수 있다. 모세가 말한다. “주님께서 시나이에서 오시고 시날로부터 일어 나시어 바란 산에서 비추신다. 그분은 일만 성도와 함께 오셨고 그분의 오른 손으로부터 그들을 위한 불 같은 법을 공포하셨다.” (신명기 33:2). 그리고 하박국이 말한다. “하느님께서 데만에서 오셨다. 거룩한 이가 바란 산에서 오셨다. 그분의 영광이 하늘을 덮었고 땅은 그분의 찬양으로 가득 찼다 (3;3). 시날과 데만은 천적인 사랑과, 바란 산은 영적인 사랑과 관계된다. 시련의 때에 도피하는 곳으로 바란 광야를 생각할 경우 이 산은 영적 사랑과 관련된 시험을 의미하고 거주지로서의 바란 광야는 성에 관련된 영적 인간의 삶을 뜻한다. 영적 측면에서 바란 자체는 주님의 신성한 인성으로부터의 계발을 뜻한다. 주님의 한 모형되는 다윗을 생각해본다면 “그가 바란 광야로 내려 갔다”는 것은 주님께서 자신을 낮추시어 우리를 위해 어떤 깊은 시험을 이겨내시는 것, 이를 수단으로 그분의 인성을 신성으로 만드신 것, 그리하여 그분의 영광이 천국을 덮고 그분의 찬양이 이 땅에 가득한 것, 그리고 그분의 권능의 오른 손에서 그분의 사랑이라는 불 같은 법이 나오는 것을 묘사하고 있다. 이렇게 설명하는 이유는 모세나 하박국의 말씀들은 모두 주 예수와 관계되기 때문이다. 이런 사항이 본문의 세부 사항과 연결을 이루고 있다.
마온이라는 곳에 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의 기업은 가르멜에 있었다. 그는 양이 삼천 마리, 염소가 천 마리나 되는 큰 부자였다. 그가 가르멜에서 양털을 깍고 있었다. 그의 이름은 나발이요, 아내의 이름은 아비가일이었다. 아비가일은 재색을 겸비한 여자였으나 그 남편은 갈렉 가문 출신으로서 인색하고 거친 사람이었다. 거룩한 성경 기자는 위 줄거리와 다윗을 관련시키고 있다. 다윗은 나발이 가르멜에서 양털을 깍는다는 소리를 듣고 거느리고 있던 젊은이 열 사람을 보내면서 일렀다. “…이 다윗을 댁의 아들처럼 여겨 소인들에게 무었이든지 손에 닿는 대로 집어서 보내 주십시오.” 이 요구사항은 다윗과 그의 부하가 광야에서 그의 목자들을 보호하였고 그의 재산을 지켜준데 대한 대가에 바탕을 두고 있다. 나발은 이런 정중한 부탁을 모욕적으로 거절했다. 이 응답을 들은 다윗과 그의 부하 사백 명은 나발과 그의 재산을 다 없애 버릴 작정으로 노기에 차 올라가고 있다. 이 소식을 접한 아비가일은 다윗 일행을 위한 물품을 가득 지니고 모욕받아 격앙된 다윗 부대를 만나러 갔다. 그 결과 다윗의 노기는 수그러 들었고 아비가일도 평화로이 집에 되돌아 갔다. 집에 돌아온 아비가일은 나발이 마치 왕의 잔치나 되듯 흥겹게 잔치를 벌인 것을 본다. 그러나 아비가일은 신중하게 아무 말도 하지 않다가 아침에 다윗을 만난 일을 말했다. 그 순간 나발의 심장은 돌 같이 굳어졌고 열흘 뒤 죽고 말았다.
이상은 긴 대화체에 대한 일부 줄거리에 불과하다. 이 줄거리 전체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은 선견자의 저서에서 직접 발견되지는 않지만 그의 저서 “천국의 신비”에서 일부는 찾아볼 수 있다. 메시아가 다윗으로 표현되고 유대 백성은 나발로, 고대교회와 매우 흡사한 표징적 교회가 아비가일로 표현되고 있다. 이 교회가 다윗으로 이해된 메시아와 결혼해서 나발로 의미된 이들을 구원하고 있다. 한 가지 더 말해둘 필요가 있는 것은 하늘의 교회 처방이 바뀌어 가고 있어도 주님의 교회 (The Church)는 언제나 똑같이 남아 있다는 점이다. 주님의 교회 자체는 불변의 두 원리, 하느님을 사랑함과 이웃을 사랑함으로 구성된다. 그러나 교회는 위 두 사랑이 어떤 진리와 하나 되느냐에 따라 그 품질이 달라진다. 지금까지 존재해온 주님의 교회들은 마치 남편들에 계속적으로 결혼한 여인 같다. 물론 여인 쪽의 특성은 남편과 하나 되어도 본질적으로 남아 있으나 남편 쪽의 지혜에 따라 여인 쪽의 사랑은 수식되어 진다. 그래서 하느님과 인간을 사랑함이라는 원리는 달라졌는데 그 이유는 이 원리의 이해가 서로 달랐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스라엘 교회라는 처방에서의 이해와 고대 교회라는 처방에서의 이해가 달랐고 이스라엘 교회와 기독 교회의 경우도 달랐다. 어쨋든 이스라엘 교회도 신성한 질서에 따라 존재했는바 비록 그 수준은 낮을지언정 고대 교회의 형체에서 완전히 삐뚤어진 것은 아니다. 만일 이 교회의 설립이 신성한 질서에 따르지 않았다면 표징적 교회가 되어 있을 수 없었을 것이고 아마 여느 어떤 교회도 표현할 수 없었으리라. 어쨋든 계속 있어온 이 처방들은 타락되어 가서 주님이 세상에 오셨을 때의 유대 백성은 나발 처럼 되어 있었다. 이 백성들은 본문의 다윗 같이 목자의 목자요 양떼를 지킨 자라는 그분의 주장에 욕설만 퍼부었다.
나발은 양이 삼천 마리, 염소가 천 마리나 되는 큰 부자였다. 유대 백성은 아내 등급에서 표징적 교인이 되도록 처방되어 있어서 그들은 주변 국가에 비교해볼 때 영적 사항에서 큰 부자였다. 이 백성들은 나발의 양과 염소로 의미되는 것, 즉 선행과 신앙에 관한 원리를 풍부히 지녔지만 그들은 그 원리를 영의 측면 보다 글자 측면에서 풍부히 지녔을 뿐이다. 이 백성의 소유물을 중시해서 생각해 볼 때 이 백성의 특성은 나발의 재산 내역에 이어지는 묘사, 그가 가르멜에서 양털을 깍고 있다는 묘사에서 암시를 주고 있다. 양털을 깍는 모습이 지닌 의미에는 좋은 측면과 그 반대되는 의미도 있다. 그 이유가 양떼보다 양털에 더 관심을 지닌 목자도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악한 목자도 있다. “그들은 젖이나 짜먹고 양털을 깍아 옷을 해입으며 살진 놈을 잡아 먹으면서 양은 돌볼 생각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에제키엘 34:3). 이 구절은 통상 목자나 목사 직분을 지닌 이들 만에 국한된 말씀이 아니라 종교를 내 영혼 구원을 위해서가 아닌 명예와 욕망 충족을 위해 악용하는 모든 이들을 하는 말이다.
나발은 가르멜에서 양털을 깍고 있었다. 본문에서 언급되는 가르멜은 이 산의 풍부함과 아름다움 때문에 칭송되는 성경의 다른 부분에서 등장하는 가르멜과 같은 의미를 표현한다고 말할 수는 없다. 가르멜은 그곳의 포도원 때문에 영적 수준의 교회를 의미한다. 그러나 본문의 경우 풀밭이 널리 깔린 이 산의 어떤 장소를 두고 언급되는 바 아마 위의 의미와 비슷하나 그 수준은 하급일 것으로 여겨진다. 나발이 이 산에서 양털을 깎았다 해도 그가 이 산에 거주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어쨋든 그는 가르멜 사람(30:3, 사무엘하 2:2)이라고도 불리지만 본문에서 그는 가르멜에 자기 재산을 두고 있는 마온의 사람으로 서술되어 있다. 나발이 가르멜 사람이라고 불린 것은 아비가일이 가르멜 출신 여자였던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27:5). 표징적 교회와 인접된 유대 백성은 흡사 마온 사람 나발이 가르멜 출신 여자 아비가일과 결혼한 것과 같다. 유대 백성이 소유한 선행의 애착과 신앙의 직관이라는 속성은 마온 광야보다는 가르멜 산으로부터 근원되고 있다. 마치 나발의 출신에 관한 언급이 아비가일로부터 근원된 것과 같다. 이와같이 유대인들은 주님의 교회(the Church)의 원리들을 소유한 자들이라기보다는 관리자 내지 보관자에 불과하다. 그래서 감추어 놓인 모든 것이 빛 가운데 놓여지고 베일이 벗겨지는 때인 주님의 강림 때까지 그 원리를 껍질 측면, 즉 표징적 차원에서 보존해 왔다.
아비가일은 재색을 겸비한 여자였으나 나발은 인색하고 거친 사람이었다. 주님의 교회가 선한 이해성과 아름다운 용모를 동시에 지닌 아비가일로 묘사되는데 이는 태고 교회와 매우 흡사하다. 이해성(good understanding)이란 교회의 원형되는 것으로 이해성이 구성된 상태이고 아름다운 용모란 내면에 있는 아름다움, 즉 선함이요 가장 깊은 내면에서는 거룩함이다. 남편의 인색함과 무례함은 유대 백성의 기질과 품성을 묘사하고 있고 이런 본성에 아비가일로 표현된 주님의 교회가 그의 아내로서 결합되어 있다.
다윗은 부하를 나발에게 보내 평화의 인사를 전하고 아들로 여겨 그들에게 손에 무엇이 닿든 집어서 보내달라고 부탁하고 있다. 이런 모습은 주님께서 그의 종들을 포도원을 맡긴 농부에게 보내 소출의 얼마를 받아 오도록 명령하는 비유와 비슷하다. 그러나 유대 백성은 마치 나발이 다윗의 젊은 부하를 대했듯 주님의 종들을 취급했다. 나발이 다윗을 인정하기는커녕 되려 모욕했듯이 이 백성도 주님을 메시아로 인정하기를 거절하고 계속 따라다니며 그분을 호되게 매도했다. 마치 포도원의 소작인이 포도원 주인이 보낸 종들을 때리고 죽였고 마지막으로 주인의 아들 까지 상속자인바 아예 죽여 없애 포도원을 차지하려 들었던 것과 비슷하다.
다윗은 무장한 부하와 함께 올라가 나발과 그의 식솔들을 죽이려 했다. 이 모습도 포도원 소작인의 비유에서 주님께서 청종자들에게 물었던 질문, “‘그렇게 했으니 포도원 주인이 돌아오면 그 소작인들을 어떻게 하겠느냐?’ 사람들이 대답하였다. ‘그 악한 자들을 모조리 죽여 버리고 제 때에 도조를 바칠 다른 소작인들에게 포도원을 맡길 것입니다’”에서 잘 표현되고 있다. 이것은 주님께서 유대인들에게 가한 어떤 것이 아니라 그들이 주님의 손에서 받아 가야 하는 처벌인 것이다. 정말로 포도원은 다른 이들에게 넘겨졌다. 누가 유대인들을 죽인 게 아니다. 나발의 목숨이 제 스스로 끊어지듯, 후에 가롯 유다가 자결했듯, 제 스스로 파괴되어졌다.
나발의 인색한 행동의 결과로 빚어진 위기 속에서 그의 젊은 일꾼 하나가 아비가일에게 가서 자초지종을 고한다. 다윗이 광야에서 특사를 주인에게 보냈는데 주인은 그들에게 욕을 퍼부었다는 것, 그러나 그들은 광야에서 자기들과 있을 때 어떤 피해도 주지 않았고 오히려 지켜 주었다는 것, 이런 점을 헤아려 처신해야 온 집안이 화를 입지 않을 것 같다고 아뢰고 있다. 이 대화 역시 유대 교회에 관한 것이다. 이 교회는 메시아에 의해 보존되어 불명예를 당하지 않았다는 것, 게다가 적들로부터서도 구원되어 왔다는 것, 메시아가 그들과 함께 하는 동안 어떤 것도 잃지 않았고 부족했던 게 아무 것도 없었다는 것, 그 이유가 그들이 주님이라고 부르고 있는 이상 메시아가 그들과 함께 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교회, 아내라는 측면에서의 이 교회가 화를 당한다고 목자에 의해 훈계되고 있다. 그러나 나발은 타락자의 후손이다.
아비가일은 그의 종이 일러준 경고를 듣고 “떡 이백 개, 술 두 부대, 요리한 양 다섯 마리, 볽은 밀 열 말, 건포도 백 뭉치, 말린 무화과 과자 이백 개를 서둘러 마련하여 나귀에 실었다. 진지하게 성실함을 지닌 아비가일로 표현된 교회가 다음과 같이 의미되고 있다. 이 교회는 빵과 포도주로 의미된 영적 선과 진리, 양과 건포도로 의미된 영적 선과 진리, 무화과로 의미된 자연적 선, 나귀로 의미된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 과학물들을 성급히 마련하고 있다. 아비가일은 자기보다 앞서 시종들을 보내 다윗을 만나게 하고 있다. “그녀는 나귀를 타고 산굽이를 돌아 내려가다가 부하를 거느리고 내려오고 있는 다윗과 마주치게 되었다….아비가일은 다윗을 보자 나귀에서 급히 내려 땅바닥에 엎드려 절하였다. 그리고 다윗의 발 앞에 엎드렸다.” 깊은 겸허와 자기 부정을 표현하는 위의 동양적 인사법은 주님 덕분에 교회가 살아 있음을 표현하고 있다. 나발의 아내이지만 그녀가 다윗에게 애원한 말로 미루어 보아 그녀가 얼마나 총명한지 짐작되게 하고 있다. “나으리, 죄는 저에게 있습니다.” 그녀의 변론은 인간적 어느 웅변보다 더 높은 뭔가가 있다. 그 이유가 지금 그녀가 하는 말은 주님의 영을 수단으로 하기 때문이다. 그녀의 말은 신성한 어떤 것을 포함하고 있다. 먼저 그녀는 다윗의 발 아래 엎드렸다. 이는 경배를 표현하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잘못했다고 고백한다. 더불어 자기 남편은 이름 그대로 미련한 자라고 평가한다. 미련과 미친 짓이 같은 것임을 주지 시키고 있다. 이런 미친 짓을 한 미련한 자를 처벌하는 것은 공평하지 못하다고 암시한다. 그리고 그녀는 은총을 베풀라고 간청한다. 아비가일은 다윗의 특사가 남편에게 툇자맞는 것을 보지 못했다고도 변론하고 있다. 이 표징적 교회는 태고적 교회 같이 순수했다는 것을 의미해준다. 그래서 아비가일이라는 교회는 표징적 교회의 외형물을 구성한 곡식 예물, 번제물, 제주, 속죄 제물, 친교 예물 등등의 영적인 것들을 선물로 가져오고 있다. 아비가일이 다윗에게 바치는 선물은 교회가 메시아에게 바치는 영적 사항이다.
아비가일은 다윗에게 당신의 하녀가 위반한 죄를 용서해달라고 간구하면서 주님께서 다윗의 집안을 탄탄하게 만드시고 그는 주님의 싸움을 싸우고 있는 바 어떤 재난도 한평생에 겪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는 진실로 메시아에 관한 것, 그분 만에 해당되는 그림이다. 그분 만이 죄를 제거하심으로 용서하실 수 있다. 그 이유가 그분 만이 어둠의 권세와의 싸움에서 승리하셨기 때문이다. 더구나 지금도 그분은 인간 심정에 있는 악들과 대적하시고 뽑아 내시어 그분의 교회를 심정 안에 확실히 세우신다. 삶 속에서 악을 발견할 수 없었던 사람은 주님 뿐이다. 그분 만이 죄 없는 삶을 사셨다.
그녀가 말한다. “설사 나으리를 쫒아 다니며 죽이려는 사람이 있다 하여도…” 다윗이 싸운 주님의 적들과 사울과는 여기서 구별된다. 그 이유가 사울이 다윗과 싸웠지 다윗이 사울과 싸운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두 사람 모두 주님의 전투를 수행했다 해도 다윗의 경우는 내적 투쟁을 견뎌내야 했다. 이에 관한 것은 여러번 살핀 바 있는데 앞으로도 더 살핀다. 즉 성경의 글자와 영이 대립된 듯 보이지만 그것은 모순이 전혀 아니라는 말이다. 다시 말해 글자에 놓인 가상적인 진리들을 통해 시험이 오고 이 시험은 영을 상대로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적”이란 시험하는 악령 자체이고 이것은 사울이 소유했던 악령과 같은 것이다. 아비가일이 말을 잇는다. “그러나 나으리의 하느님 야훼께서 나으리 목숨을 보물 처럼 감싸 주시고 그 대신 원수의 목숨은 팔매돌 처럼 팽개치실 것입니다. 야훼께서 약속하신 온갖 복된 일을 이루시어 나으리를 이스라엘의 수령으로 세우실 터인데 이런 실수를 해서 두고두고 마음에 걸리는 일이 없도록 하십시오. 야훼께서 나으리의 운을 터주시는 날 이 계집종을 잊지 말아 주십시오.” 이 줄거리는 사후의 삶과 심판을 다루고 있다고 선견자는 말하고 있다. 의로운 자의 영혼은 주 하느님과 함께 있는 생명 꾸러미 안에 꾸려지나 그분의 적인 사악한 자의 영혼은 팔매질하듯 내팽겨질 것이다. 그리고 여호와께서 그분에 관해 말하셨던 좋은 모든 것이 이루어질 때 그가 이스라엘을 통치하실 것이다. 나발의 집안에 대한 아비가일의 청원은 마치 아브라함이 소돔을 위한 청원과 비슷하다. 즉 순진한 사람들이 죄인들과 함께 멸해져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아비가일의 부탁 중 마지막 째의 것, “주님께서 나으리를 드높혀 주실 때 이 계집종을 기억해 주십시요”를 영적으로 생각해 본다면 이는 백성의 죄 때문에 그 백성과 하나 되어 있는 교회 까지 파멸되어서는 안된다는 기도, 파멸이라는 하늘의 처방이 있다 해도 주님의 교회는 남아 있어야 한다는 기도이다.
다윗은 아비가일의 청원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 다윗은 자기를 만나도록 그녀를 보내신 이스라엘의 하느님을 찬양했다. 또 자기 손으로 피를 흘릴뻔 했던 실수를 그녀의 충고로 막아주신데 대해 더욱 감사하고 있다. 그리고 그녀가 가져온 선물을 기쁘게 받고 평안히 돌아 가라고 말하고 있다. 이렇게 해서 그녀의 청원이 다윗의 마음을 바뀌게 했다. 그녀의 말에 귀를 기울였기 때문이다. 이 줄거리의 다윗과 아비가일을 주님과 그분의 교회 관계로 이해해 보면 이 주제는 그들 사이의 관계에 관한 것, 서로에 영향을 미치는 관계에 관한 것이다. 성서 글자대로 고집해 보면 주님께서는 백성의 죄 때문에 그에 대한 앙갚음을 하시기로 결정했으나 참회하고 간절히 애원해옴으로 해서 분노를 거두시고 자비와 온화하심 쪽으로 마음을 돌리신 것으로 해석된다. 그러나 우리가 아는 바 하느님에게는 성내심도 없고 그분의 무한한 사랑과 자비에서 순간이라도 돌아서게 하는 어떤 그림자 조차도 없으시다. 또한 하느님의 분노가 죄인에게 나타남은 일종의 참담한 실체를 표현한다. 이는 거룩함과 죄있음, 하느님의 거룩과 인간의 죄 사이에는 양립할 수 있는 그 어떤 것도 존재할 수 없다는 것도 표현한다. 한편 주님의 비위를 맞추려는 듯 여겨지는 경우, 그래서 앙갚음 대신에 자비가 들어 앉는 경우도 있다. 이는 용기를 주는 진리, 즉 참회는 적개심을 제거하는데 결코 실패 않는다는 것, 언제나 재회의 길을 열어 준다는 것을 표현하는 것이다. 다윗은 아침 까지 나발의 집 안에 살아 남은 사내가 없게 하겠다고 위협했다. 아침이란 심판의 때이다. “다윗 왕실에게 나 야훼가 말한다. 바른 판결을 내려라. 억울하게 착취 당하는 사람의 편을 들어 주어라. 그러지 않으면, 너희의 괘씸한 소행을 보고 내가 화가 나서 너희를 불태우리니 아무도 그 불을 끄지 못하리라” (예레미야 21:2). 다윗의 앙갚음은 아침이 되기 전에 있었어야 했다. 그래야 다음 날 새벽에 나발의 집안이 폐허로 발견될 것이다. 이런 관점에 맞추어 보면 이 장의 주제는 유대주의의 끝장과 기독 처방 사이의 중재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다. 이 중재자가 세례자 요한의 등장이고 그의 설교와 세례로 주님이 오시는 길이 준비되지 않았다면 유대인 어느 누구도 주님의 면전에서 버틸 수 없었을 것이다. 다윗의 말과 같이 아침이면 처절한 황폐함 만이 남아 있을 것이다.
나발 집안을 쑥밭으로 만들려 했던 다윗의 분노가 가시운 반면 나발은 제 스스로 그것을 자행했다. 아비가일이 집에 와보니 나발은 잔치를 벌여 놓고 흥에 겨워 취할대로 취해 있었다. 영적으로 보건대 이런 잔치, 왕이나 차릴만한 이런 잔치는 선함과 진리를 모독함이다. 따라서 시대의 종말을 묘사하고 있다. 심판하러 오시는 사람의 아들의 날은 마치 홍수가 덮칠 때가 되도록 먹고 마신 노아 시대 때와 같고, 불과 유황이 하늘에서 쏟아지기 까지 먹고 마셔댄 롯의 시대 같다. 양 시대 모두에서 아껴두셔야 하는 것들 만이 구원된 것도 같다. 아비가일이 나발에게 자초지종을 말해주자 그의 심장은 굳어져 돌 같이 되었다. 열흘 지나 나발은 야훼께 벌을 받아 죽고 말았다. 의지의 생명인 사랑이 꺼질 때 심정은 죽는다. 생명 있는 믿음, 사랑 있는 믿음이 종교에 남아 있지 못하면 그 사람의 심정은 돌 같이 된다. 나발은 마치 롯의 아내가 소금 기둥이 되었듯 돌이 되었다. 이는 진리의 생명이 소진된 것 뿐만 아니라 진리 자체의 전복 까지를 표징적으로 담고 있다.
나발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다윗은 사람을 보내 아내가 되어 달라고 청하였다. 아비가일이 다섯 시종을 거느리고 다윗에게 오는 모습은 결혼하기 위해 신랑을 맞으러 나간 슬기로운 다섯 쳐녀와 같은 그림이다. 그래서 이는 교회가 주님과 영적으로 결혼하는 것이다. 다섯 시종이란 교회에 소속되어 교회를 섬기는 영적 애착과 품위를 표현한다. 그러므로 유대 백성과 결합되어 있었던 교회가 유대주의의 처방의 끝장에서 주님의 신랑과 아내라는 진정한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그 이유가 사람 되어 오신 주님이 그분의 교회 속의 신랑이요 남편 되어 완전한 의미를 갖추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육을 입으심으로 주님께서는 유대인들 사이에 존재했던 교회와 그분 자신을 하나 되게 하셨을 뿐만 아니라 이방인들 사이에서도 그렇게 존재했다. 이 교회가 다윗이 아내로 맞은 이즈르엘의 아히노암으로 표현되어 있다. 그래서 아비가일과 아히노암 모두 다윗의 아내가 되었다. “그러나 사울은 다윗에게 시집보냈던 딸 미갈을 갈림 출신 라이스의 아들 발티에게 주었다.” 이미 살핀바와 같이 사울의 딸 미갈은 자연적 애착을 표현한다. 이에 대한 예증은 앞으로도 더 가질 기회가 있다. 사울이 다윗에게 딸을 시집보낸 것은 다윗을 올가미에 넣으려는 의도에서였다. 그러나 미갈이 그런 짓을 더 이상 시도하지 않자 그녀를 다른 남자에게 넘긴 것이다. 그 당시의 관습으로는 자식을 부모의 재산 같이 여겼던 것 같이 보인다. 마치 삼손의 아내의 경우 같이 부모의 마음 내키는대로 상대방이나 당사자의 동의 없이 타인에게 보내졌다. 사울도 삼손의 아내의 부모가 변론한 것과 비슷한 정의를 내세운 듯 여겨진다. 미갈은 다윗이 도망쳐 피신하는 동안 다윗과 운명을 같이 하지 못했다. 사울은 이것을 빌미로 미갈이 더 이상 다윗의 아내가 아니라고 정당화한 것 처럼 여겨진다. 보다 높은 관점에서 볼 때 미갈의 역사는 다윗의 배우자로서 보다는 사울의 딸이라는 측면에서의 교회를 더 표현한 듯 보인다. 다시 말해서 순수하게 신성한 요소에 속한 것 보다는 단지 인간적인 것, 신성한 진리 보다는 신성으로부터의 진리들을 표현하고 있다. 그럼에도 신성한 진리가 하나 될 수 있었지만 이제는 다른 것과 하나를 이루고 있다. 미갈은 이제 다윗을 떠나 발티와 결합하고 있다. 그러나 발티는 다윗에게 미갈을 되돌려야 했는데 나중에 살핀다.

사무엘상 24장 해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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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상 제24장

다윗이 사울을 살려주다

지금 까지 우리가 보아온 것은 다윗이 사울 앞에서 도망쳐 달아나는 모습 뿐이었다. 그래서 언제인가 무자비한 사울의 추격에 결국 붙들리어 죽을 수 밖에 없는 다윗만을 생각해볼 수 밖에 없지만 본 장 부터서는 상황이 다르게 전개되고 있다. 물론 다윗이 사울을 피해 다니기는 마찬가지지만 사울은 다윗의 능력에 섭리적으로 점차 압도되고 있다.
사울은 불레셋군을 쫒아낸 다음 추격하다 되돌아 갔던 다윗을 다시 쫒아가고 있다. 그는 이스라엘에서 뽑은 삼 천 명을 이끌고 다윗과 그 부하들이 있다는 들염소 바위 쪽으로 갔다. 그곳 길 양 옆에는 양우리가 여기저기 있었는데 그 근처에 동굴이 하나 있었다. 사울이 거기 들어가 뒤를 보았는데 때마침 다윗이 부하를 거느리고 그 굴 속에 숨어 있었다. 그때 다윗의 부하들이 다윗에게 말했다. “야훼께서 장군의 원수를 장군 손에 넘겨주겠다고 하시던 때가 왔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사울의 겉옷 자락만을 잘랐다. 그럼에도 그는 그 일 마저 불손한 행위라고 자책했다. 사울이 동굴 밖을 나섰을 때 다윗이 따라 나와서 외쳤다. “오늘 야훼께서는 임금님을 제 손에 넘겨 주셨지만 야훼께서 기름부어 성별해 세우신 저의 상전을 아끼는 마음에서 죽이지 않았습니다. 보십시오. 여기 제 손에 임금님의 겉옷 자락이 있습니다. 그러니 내가 임금님을 해치거나 반역할 생각이 없었다는 것은 알아 주셔야겠습니다. 내가 임금님께 잘못한 일이 없는 데도 임금님께서는 나를 잡아 죽이려고 쫒아 다니시니 어찌된 일입니까?” 사울의 보다 높은 양심에 호소한 다윗의 이 말에 그의 마음이 녹지 않았다고 가정해 본다면 그는 아마 악인 중의 악인이었을는지 모른다. 어쨋든 이 사건은 사울로 하여금 자신보다 다윗이 더 정의롭다는 것을 충분히 인정하게 했다. 다윗이 장래 왕이 되고 이스라엘 왕국이 그의 손에서 건설되는 것을 막으려고 자신이 억지로 발버둥쳤었다는 사실을 인정한 사울은 다윗에게 자신의 후손을 끊어버리지 않고 자기 이름을 가문에서 지워버리지 않는다는 것을 맹세해 달라고 부탁하고 있다.
비겁했던 사울의 태도에 대한 다윗의 행동이 얼마나 관대하고 고상했는가에 대해서는 부인할 자 아무도 없으리라 본다. 다윗의 행동 속에 담긴 감정은 자연적 수준이라고 할 수 없는 어떤 것 까지 더 스며있다. 이 감정은 하느님을 경건히 모시는 마음에서만 우러나 사울에게 까지 전달되고 있다. 이 감정은 유혹에 약하고 실수 쪽에 쉽게 기울고 마는 인간이라는 존재에서 출발되지 않는다. 이는 기름부은 자의 태도로 부터만 가능할 뿐이다.
위 두 사람의 비교는 종교의 직접적인 영향으로 행동할 경우와 무르디 무른 인간 본성의 자극만으로 행동할 때의 차이에서 늘 발견된다. 아마 다윗의 역사 속에서 그가 보여준 각 종의 상반된 품성들, 즉 관대함과 보복적 행위, 자비로움과 잔인함, 순결함과 불순함이라는 정 반대되는 품성들이 한 인간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이렇게 상반된 속성을 진열해 줄 사람은 거의 없다.
어느 인간도 하느님과 천사의 시야로부터 완전히 벗어날 자 아무도 없다. 그 이유는 어느 인간도 죄있는 육체라는 약점에서 완전히 자유로워 질 수 없기 때문이다.
어찌됐든 진실로 영적인 사람과 단지 경건할 뿐일 사람은 본성 측면이나 수준 측면에서 폭 넓은 차이를 가지고 있다.
자연적 경건함과 영적 경건함의 차이는 순수하고 거룩한 것을 존경하는 느낌과 실지 순수하고 거룩한 상태가 구별되는 것과 동등하다. 경건하되 영적 상태가 아니거나 존경심을 갖되 거룩한 상태에서가 아닌 것은 모두 부드러울 뿐인 감정의 민감함 만을 위한 것이다. 이런 경건과 존경은 외적 조건이 허락되는 경우에서만 가능한 표현이다. 다시 말해 내향의 원리로부터 규율되고 영감된 게 아니라 바깥 조건에 의해 충동된 느낌으로부터 오는 행동 표현일 뿐이다. 위와 같은 품성은 감정 차원이든 행동 차원이든 극히 상반되는 정도 까지 다르게 나타날 수도 있다. 그래서 이들 속의 부패된 본성이 자아 부정이라는 종교적 품성에 의해 제압되어 있지 않으면 외부적으로 강한 충격이 있게 될 때 쉽게 밖으로 돌출되고 만다.
인간의 삶에서 극히 상반되는 품성이 발출될 때면 언제든지 두려움이 있게 되는 그 이유는 제아무리 경건이 흠양되고 있다 해도 영적 차원이 너무 적게 함양되어 있기 때문이다. 어쨋든 영적 차원의 마음이 잘 작동되는 인격의 소유자라고 해서 그가 인간의 허점에 근원을 둔 행동이나 느낌들로부터 완전히 벗어나 있을 수는 없다. 어쨋든 영적 마음이 자연적 마음을 얼마나 제압하고 있느냐에 따라 가늠된다. 다시 태어나는 사람들은 새로운 본성을 받는다. 이런 사람이 세상적이고 육에 속한 옛 사람의 품성만이 발출하는 행위들을 고의로 저지른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럼에도 다윗은 이런 행위들을 저질렀다. 흔히 다윗은 하느님 자신의 심정을 따라 만들어 졌다고 말해진다. 이 두 가지를 다 생각해보면 이런 사실로부터 야기되는 혼동에서 보호되도록 뭔가 더 생각해보아야 할 것이 있다.
다윗 그리고 구약 성서의 특성을 신약 성서와 비교해 보면 구, 신약이라는 두 개의 처방에는 전적으로 다른 품성이 있음을 생각할 수 있다. 구약 성서 속의 인물들은 진정한 교회의 그림자 내지 모형이라는 차원인 반면 신약 성서의 인물은 실체요 실재였다. 그래서 유대 교회 속의 인물이 특출하다 해도 거룩한 사람(saint)의 모형이 되어 주는 것 이상의 수준은 필수적이지 않았다. 그러나 기독 교회 속의 특출한 사람은 실재의 성인이었다. 다윗은 유대교 안에서 하느님의 심정을 따라 된 사람이지만 기독교적 측면에서는 그렇지가 않다. 다시 말해 그의 개인적 내지 영적 품성 측면 보다는 공적이고 표현적 측면에서 그분의 심정을 따라 되어진 사람이다. 다른 예를 들어 보자. 사도 요한은 예수의 사랑받는 제자였다. 이 사랑은 표현적 차원이 아닌 실지적 차원이었다. 그 이유가 그는 자기 안에 예수의 사랑을 누구보다 더 특별히 가졌었기 때문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 중 누군가가 다윗의 특징을 지녔다고 우리가 상상해볼 수는 없다. 그 이유가 다윗 자신은 기독교인의 측면에서 판단해 볼 수 없고 오로지 유대교인의 측면에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기독교인을 유대교 측면에서 가늠해 볼 수 없다. 가장 엄격한 종교 분파에 속한 사람이든, 유대 종교의 가장 걸출한 사람에 해당되든 그들의 정의가 하느님의 정의에 걸맞지 않으면 누구도 하느님의 나라에 입장할 수 없다.
다윗의 역사에 있는 유대교적 경건이라는 실체는 벗어야겠지만 본문에서 보여준 다윗의 행동, 즉 자신을 죽이려 드는 가장 강한 적수를 죽일 기회를 맞이 했으면서도 적에게 관용을 베푸는 사건을 살펴보자. 다윗의 이 행동은 기독인의 미덕 중에서 배워야 할 매우 높은 수준을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다. 우리에게 죄지은 이들을 용서하고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을 본문의 사건은 더 생생한 사실 묘사로 더 강력하게 가르치고 있다. 주님께서 마태복음에서 이렇게 말하시고 있다.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박해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그래야만 너희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아들이 될 것이다. 아버지께서는 악한 사람에게나 선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비를 내려 주신다” (5:44-45). 계발된 기독인의 선행은 유대인에게 내려진 처방 아래 행해진 태도와는 어느 측면에서 아주 다를는지 모른다. 우리가 실시해야 하는 선행이 옛날 보다 덜해져야 한다는 게 아니라 더욱 부드럽고 더 용서하는 태도여야 한다는 말이다. 네 이웃을 사랑하고 원수를 미워하라는 유대 교회의 제도 아래에서 본문 같은 다윗의 행동은 자신에게 죄지은 자를 용서하되 얼마나 더 큰 호의였을까는 짐작되고도 남는다. 본문의 줄거리가 되새겨 주는 주님의 가르침이 더 있다. “너희가 남의 잘못을 용서하지 않으면 아버지께서도 너희의 잘못을 용서하지 않으실 것이다.”
위 가르침, 그리고 관용과 사랑의 실시가 두 사람에게서 나타나는 결과는 우리에게 뭔가를 보여주고 있다. 본문과 같은 다윗의 호의적인 행동에 대한 사울의 보답은 비합리적인 잔인성 만을 차후 다시 드러내고 있다. 어쨋든 잠깐이지만 본문에서는 사울의 그런 태도가 다윗의 관대함에 의해 부드러워져 있다. 다윗이 사울의 목숨을 끊는 대신 그의 옷자락을 자르고 그 옷자락을 든채 사울에게 호소했을 때 완악한 왕의 심정도 부드러워질 수밖에 없고 부끄러움이 사울의 심정을 관통했다. “그는 울음을 터트렸다.” 그리고 “네가 나보다 낫구나. 나는 너를 못살게 굴었는데도 너는 나에게 이렇게 잘해 주었다.” 그리고 그는 이번 일에 대해 주님께서 상을 내리시기를 빌었다. 더욱이 이렇게 스스로 복종하고 있다. “너야말로 임금이 될 사람이다. 이스라엘 왕국은 너의 통치 아래 번영을 누릴 것이다.” 이런 사울의 심정, 더 나은 마음의 구조는 사실 단 기간밖에 유지되지 못했다. 이런 경우에서 우리는 과거 언급한 적도 있지만 진리의 놀랄만한 본보기를 보게 된다. 즉 영적 원인이 결여된 상태에서 야기된 보다 수준 높은 원인은 그 느낌의 원인이 눈 앞에 당장 있는 경우에만 지속될 수 있는 느낌이라는 것이다. 이와같이 사울의 마음은 옛날로 되돌아 갔다. 회개했던 그의 마음은 옛 조건 속에 파묻혔거나 더욱 나빠졌을는지 모른다. 그 이유는 그를 인도하고 지탱시켜 주는 내향의 원리가 없는 까닭에서이다. 이제 본문의 사건에 놓인 영적 의미를 생각해 볼 차례이다.
이스라엘 왕국의 상태에 대한 표현은 이스라엘 교회의 상태를 표현하고 있다. 사울의 도포가 다윗에 의해 잘리우고 그 옷자락이 다윗의 손에 있었다는 것은 왕국이 사울로부터 다윗에게 넘어 간다는 것을 표현했다. 사울 역시 이를 인정해서 실토했다. “나는 이제야 알았다. 이스라엘 왕국은 네 손에서 번영하리라 ”
본문의 주변 여건들은 한층 더 높은 의미 즉 우리 자신 안에 있는 주님의 왕국과 관련시켜 생각해 보면 사울과 다윗은 각각 자연적 수준과 영적 수준의 마음을 표현하고 있다. 따라서 역사 줄거리의 세부 항목들은 각 자의 경험에 있게 되는 영적 상태들을 묘사하게 된다. 그러므로 기독인을 위한 가르침을 담고 있게 된다.
다윗은 영적 인간 내지 영적 수준의 마음을, 사울은 외적 인간 내지 자연적 수준의 마음을 표현한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본문을 읽게 되면 다른 면모에서 보게 되는 아름답고 놀랄만한 진리의 예증을 발견하게 된다. 거듭나지 못한 상태에 있는 자연적 수준의 마음은 영적 수준의 마음을 적으로 여긴다. 그 반면 영적 수준의 마음은 자연적 수준의 마음에 적개심을 품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과 다시 만나 화합하려고 꾸준히 애쓴다. 이런 모습이 다윗과 사울 각각의 성미와 행동 속에서 늘 풍겨 나온다. 더구나 본문에서 다윗의 말과 행동에서 더 세부적으로 묘사되어지고 있다.
광야는 시험을 상징한다. 따라서 시험의 특성은 그 시험을 표현하는 광야에 의해 암시되어진다. 엔게디 광야로 표현되는 엔게디 자체의 영적 의미로 알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 본문 말고 성경에 있는 엔게디라는 단어는 명확한 영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에제키엘 47 장에서 엔게디는 새로운 성전, 신비로운 성전, 즉 성전 동쪽 문턱에서 나와 흐르는 생명수의 강과 연결되어 언급되고 있다. 특히 이 물에 관해 8절에서 이렇게 언급된다. “이 물이 동쪽으로 가다가 메마른 벌판으로 흘러 내려 사해로 들어 간다. 이 물이 짠 사해로 들어가면 사해의 물마저 단 물이 된다. 이 강이 흘러 들어가는 곳이면 어디에서나 온갖 생물들이 번창하며 살 수 있다. 어디로 흘러 들어 가든지 모든 물은 단물이 되기 때문에 고기가 득실거리게 된다. 이 강의 물고기 종류는 지중해의 그것 만큼이나 많아서 엔게디에서 에네글라임에 이르기 까지 그 언덕에는 어부들이 그물을 처놓고 들어 서있으리라. 그러나 수렁이나 웅덩이에 있는 물은 단 물이 되지 않고 여전히 짠 물로 남아 있으리라.”
이 생명수는 유다의 사막 벌판으로 해서 사해로 흘러 들어 간다고 위에서 언급하고 있다. 이 유다 광야는 세례자 요한이 나타나 복음의 기쁜 소식을 맨 먼저 전파한 곳이다. 이런 측면에서 생명수에 관한 에스겔의 환상이 외적으로 표현되어 성취되었다고도 생각해볼 수 있다. 그러나 이를 영적으로 생각해 보자 생명수의 강이 흘러 생명을 되찾아 과실을 맺게 되는 사막과 바다란 자연적 수준의 마음에 있는 의지와 이해성에 대한 상징적인 표현물이다. 자연적 수준의 마음 자체만 생각한다면 이 마음은 황량하여 죽은 상태이다. 그러나 신성한 진리가 그 마음에 흘러 들면 생명이 있어져 열매를 맺게 되는 옥토로 변한다.
이 유다 광야가 엔게디 광야이다. 사해와 인접한 이 광야 근처에 엔게디 성읍이 서있다. 에네글라임은 요르단 저 쪽 모압 땅, 그리고 르우벤 지파가 거주했던 곳에 위치한다. 따라서 위 두 장소는 가나안 땅 내에 거주하는 지파와 요르단 강 건너에 거주하는 지파를 연결지어 준다. 사해 바다를 치료해주는 물 안에는 고기가 득실거리고, 어부들이 엔게디에서 에글라임에 이르는 강 둑에 늘어 서있으리라고 말하고 있다. 이 구절 속에서 언급되는 고기란 생명 있는 진리를 말하고 그 고기를 잡는다란 영적 삶을 위해 그 진리를 획득함이요, 어부란 진리를 추구하여 획득하는 합리적 자질을 뜻한다.
엔게디로부터 에네글라임 까지란 가장 깊은 마음으로부터 자연적 마음이라는 가장 바깥 마음에 까지를 뜻한다. 이런 해석은 두 지명 자체가 지닌 뜻에서도 확실히 알 수 있다. 그 이유가 엔게디란 아이의 샘, 에네글라임은 두 송아지의 샘이라는 뜻을 지녔기 때문이다. 따라서 두 지역 모두 외적 인간 안에 있는 순진의 선을 뜻하는데 아이는 내면에 있는 순진의 선을, 송아지는 보다 외면에 있는 순진의 선을 뜻한다
그러므로 성소의 생명수가 흘러 드는 엔게디 광야는 아직 거듭나지 못한 자연적 수준의 마음, 그러면서도 유다로 표현된 영적 마음 속에 있는 가장 높은 애착과 관련 있는 듯 여겨지는 자연적 수준의 마음을 상징한다. 특히 본문에서는 유다 광야 라는 말 대신에 엔게디 광야라는 말로 언급해서 우리로 위와 같은 영적 의미를 숙고하게 하고 있다.
따라서 엔게디 광야로 표현된 시험이란 자연적 마음의 내면에 상주하고 있는 순진을 공격하는 시험을 뜻한다. 사실 이 순진은 우리의 유아기와 어린 시절에 주님의 섭리로 저장된 선이다. 성인이 되어 이타적인 사랑과 선행이 발휘되어 거듭나는 과정에서 이 순진은 더욱 증가된다. 자아욕을 어린 아이 같이 잊은 채 초기 인간 삶에 구원을 위해 섭리적으로 주님의 보물로서 저장된 순진이 더욱 배가되면서 드높여진다. 그러나 어떤 심정 상태도 시련 없이 개선되거나 확증될 수 없다. 순수한 은은 호된 시련이라는 제련 과정의 불도 없이 불순물과 분리될 수 없다. 이런 시련이 다윗의 역사 속에서 그가 참아 내고 극복해야 할 사건들로 표현되고 있다.
사울과 다윗을 매우 밀접하게 접근이 가능하게 해준 부하들의 간청, 즉 그의 자아 사랑과 자기 유리함이 주는 충동적 느낌 등등이 사울을 죽이도록 유혹했다. 특히 이 동굴은 시련의 상태에서 흔히 야기되는 마음의 희미한 상태를 적절히 상징해두고 있다. 동굴 속의 분위기는 어둑어둑한 상태이다. 즉 일시적 고뇌이든 영적 고뇌이든 이런 것들이 마음을 싸잡을 때 조차에서도 자비와 진리의 법칙에 충직해야 한다는 원칙이 영혼 속에 남아 호소해준다는 것은 얼마나 복된 상태인지 모른다.
비록 사울이 개인적으로는 못됐어도 아직은 주님의 기름부은 자임은 틀림 없다. 그는 신성으로부터의 진리를 표현하고 있다. 이 진리는 다윗이 표현한 신성한 진리에 의해 파괴되는 게 아니라 사탄을 수단으로 체로 쳐내 껍질이 날려지겠지만 밀알은 보존된다. 인간 마음 안에 있는 선한 원리가 파괴되는 것은 구원하시는 그분의 역사가 아니다. 선한 원리가 악한 원리에서 분리되어 보존되는 게 그분의 섭리이다. 내적 인간과 외적 인간이 대결하게 되는 원인은 외적 인간에게 있다. 그러나 결국 내적 인간의 승리로 이어지는 게 신성한 섭리의 목적이다. 그 이유는 이것이 천국적 정부의 질서이기 때분이다. 자연적 마음은 지상 쪽을 더 선호하기 때문에 그 본성을 즉각 넘어 들리워질 수 없다. 아마 들리워질 여건을 만드는 것 조차도 어려웁다. 어쨋든 자연적 인간이 영적 인간의 통치에 계속 반역하여 그 밑에 소속되기를 원치 않고 있는 상황에서도 전체는 아니지만 일부는 복종될 수 있다. 다시 말해 만일 영적 인간이 자연적 인간 전체를 종속되게 할 수 없다 해도 최소한 자연적 인간의 옷자락을 그의 수중에 잡고 있을 수 있다는 말이다. 질병으로 고통 받는 여인이 주님의 옷자락 만을 만졌어도 그녀의 병은 말끔히 나았다. 이 기적은 말씀을 영원한 진리와 생명으로 붙드는 자는 누구이던지, 설사 그 진리의 최 하위 수준 만을 붙잡고 있다 해도 주님의 구원하시는 사랑과 지혜로부터 흘러 나오는 미덕을 획득할 수 있음을 가르치고 있다. 선함의 사랑과 진리의 신앙을 내적 인간이 확증해 가는 것 외에도 영적 시련의 한 가지 큰 작업은 외적 인간으로 하여금 정당한 권리 즉 내적 인간이 왕이 되는 것, 내적 인간의 수중에서 왕국이 건립되어야 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운명임을 확실히 보게 해서 인정하게 해준다. 비록 단 기간이라 해도 이런 결과가 사울, 또는 사울로 표현되는 자연적 인간에게 있게 된다는 것을 본문이 보여주고 있다. 하여튼 권력의 승계는 단번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더구나 영적 마음이 자연적 마음을 통치함에 있어서 평화로운 방법이 통하지 않음을 사울의 역사는 말하고 있다. 우리의 주님 역시 그분의 지상 생애 마지막 까지 싸워가셨다. 결핍된 그분의 상태는 본문의 다윗의 상태와 매우 흡사하다. 이를 두고 말씀하신 게 있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 둘 곳 조차 없다.” 본문의 다윗이 사울에게 호의를 베풀었듯이 주님께서도 그분의 박해자들에게 악을 선으로 되돌려 주셨다. 제자들이 하늘로부터 불이 내려오게 해서 적들을 살라 버리시라고 간청했을 때의 모습은 본문에서 다윗의 부하들이 사울을 죽이도록 간청한 것과 비슷한데 주님께서는 그들은 자기들의 영이 어떤 것인지 모른다 라고만 대답하셨을 뿐이다. 사울에게 자비로운 행동을 보인 다윗이 주 예수의 신실 된 모형이라고 말한다면 그는 주님의 제자들이 어떠해야 하는지에 관한 것도 자연스레 포함하고 있다.
한 가지 구분해 두어야 할 게 있다. 다윗의 적으로서의 사울과 다윗과 사울 모두에게 적이 된 이들, 사울로부터 다윗에게 왕국이 옮겨지는 것을 돌보기는커녕 오히려 그 자체가 몰락되기를 바랐던 이들과의 구분이다. 이 적들 모두는 진정한 질서에 반대되는 것들이다. 마치 이스라엘 땅을 침공한 적들과 다를 바 없고, 성전을 더럽힌 환전상들 같이 모두 척결되어야 할 참 질서의 적들이다. 자연적 마음 자체는 마치 왕들에게 포로가 되었던 롯의 신세 (창세기 14장) 같이 반드시 포로됨에서 구원되어 자유의 상태에서 보존되어야 한다. 자연적 마음 속의 생각과 애착이 영적 마음의 생각과 애착과 차이가 있어 과거 아브라함과 롯의 목부들이 풀밭을 놓고 다툴 때와 비슷하지만 우리의 언어는 언제나 아브람 같어야 한다. 아브람이 롯에게 말했다. “너와 나는 한 골육이다. 나나 너나 네 목자나 내 목자나 서로 다투게 하지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