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엘상 11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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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상 제11장

사울이 암몬을 쳐 이기다

주변에 널려 있는 강력한 적들로부터 백성을 건지고자 이스라엘에 왕이 세워진지 얼마 되지 않아 이 새로운 왕의 힘을 필요로 하는 사건이 터졌다. 나하스가 야베스 길르앗을 공격, 포위하였던 바, 야베스 사람들은 목숨을 살리고자 굴욕적인 조약인 자기들의 오른쪽 눈을 빼내야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런 조건은 그 주민들의 복종을 의미하는 것일 뿐 아니라 어떤 이스라엘 백성도 포위된 성읍의 주민들을 구해 줄 수 없다는 수모까지 겹친 표시에 해당되었다. 이런 마당에 칠 일간 여유를 주어 이스라엘 온 지역에 구원을 요청하는 특사를 보내도록 나하스가 허용하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의 조직 상태는 매우 미미하고 비조직적인 것이 주변 국가들에 널리 알려져 있었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도 된다.
이런 소식이 사울이 사는 기브아에도 전달되었는데, 길르앗 주민들은 자포자기로 인해 목놓아 우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이런 역사적 상황에서 등장하는 사울의 모습은 본문의 이야기에 담긴 섬세한 부분들과 일치를 이루게 하고 있다. 그는 본래의 직업에로 되돌아가서 소 떼를 치던 중 귀가하면서 위의 소식을 접하고 있다. 비통한 자기 백성들에 관한 소식을 듣는 중에 하느님의 영이 그에게 내려 왔고, 백성들로 전율과 공포를 느끼게 하는 방법으로 그는 대 군대를 소집해서 포위 공격당하는 성읍을 건져내고 있다.
이런 역사의 주변 상황들은 말씀이 씌어진 목적의 하나인 기독교인의 생활과 체험의 여러 상태 중의 하나를 표현적 방법으로 묘사하여 우리 앞에 놓임으로서 흥미를 갖게 해 주고 있다.
인간 생활의 면모 중 하나가 전투 행위이다. 육은 영에 반대되는 것을 열망하고, 영은 육에 반대되는 것을 갈망한다. 두 반대되는 것들은 자주 다투기 마련이고, 우리 본성 속에 든 악이 우세해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꼭 필요한 것은 그것을 잘 감시하여 언제나 그것이 종속된 상태에 놓이게 하는 것일 게다. 이런 악들은 아주 다양하고 무수하며 강력하기도 하다. 이런 악들이 이스라엘에 적의를 품는 주변 국가나 백성들로 성경에서 표현되어지고 있다. 악들의 각 하나 하나는 어느 정도 서로 떨어진 상태에 속한 악들이고, 하느님을 사랑하고 인간에 대한 선행에서 솟아나는 선에 직, 간접으로 반대된다. 이런 악들 중 하나가 암몬족으로 표현되고 있는 바, 이제 우리는 그 악의 본성을 생각해 보기로 하자.
모압과 암몬은 롯이 자기 딸들과의 근친 상간으로 태어난 두 아들이었다. 그들과 그 후손들은 성경에서 좋은 의미와 나쁜 의미, 양면으로 등장하고 있다. 좋은 의미일 경우, 모압과 암몬은 자연적인 선함과 진리 가운데 있는 이들을 의미한다. 나쁜 의미일 경우, 그들은 선함과 진리를 뒤집고 모독하는 이들을 의미하고 있다. 과거 이스라엘 족들이 출 애굽 해서 가나안으로 가는 여정에서 롯의 후손이 거주하는 지역에 당도했을 때, 모압과 암몬 후손들과 어떤 다툼도 있어서는 안 되고 그 지역을 점령해서 피해를 입히지 말라 고 명령되어 있었다. 그 이유가 그 지역을 그 후손들에게 주셨기 때문이었다. 그들을 괴롭히지 않도록 명령한 이유는 그들이 거인족들을 무찌르고 난 뒤 거주한 지역이기 때문이다. 선함과 진리, 그것이 자연적 수준의 것이라 해도, 그것들에게서 악과 거짓이 제거되고 각기 제 위치에 있을 경우, 주님은 그것들을 혼란케 하시거나 상속을 박탈하시지 않으신다. 그 반면 자연적 선함과 진리는 자칫하면 영적 선함과 진리에 반대되는 쪽으로 방향을 틀기 쉬운 게 흠이다. 이런 모압과 암몬이 표현한 의미들에 관한 예를 오늘날의 경우에서도 쉽게 볼 수 있다. 비록 자연적 수준이지만 선함과 진리에 있는 사람들, 그러면서도 악과 거짓에 속한 것을 몹시 싫어하여 금하고 있는 이들임에도 영적인 모든 것에는 반대하는 경우를 볼 수 있다. 그럼에도 그들이 평화롭게 사는 것, 즉 적대감이 있는 반대 세력이 없을 경우에는 평화 속에 묻혀 있을 수 있다. 그들의 선함과 진리, 마치 롯의 후손이 자기 딸을 통해 이어졌듯이, 그것들은 허위의 애착들의 증거나 영향으로 중독된 지적 행동을 야기 시키기까지 한다. 그들이 적극적으로 반대할 때, 특별히 그들이 영적인 것을 뒤집고 모독할 때, 그들은 적으로 간주되어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이것이 모세와 예언자를 통해 발표될 경우, 결국 그들은 저주 아래 놓이게 되는 것이다. 선함을 모독한 이들이 영적인 모압이요, 진리를 모독한 이들은 영적인 암몬이다. 이를 우리 마음이라는 논제에 적용해 볼 때, 암몬은 모독된 진리 자체, 그 모독으로부터 발생하는 거짓 추구나 죄악 된 실지 행동을 표현해 주게 된다. 그런데, 진리를 모독함, 그 모독으로 인한 거짓 추구나 죄악 된 행동을 우리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진리를 모독한다는 것은 진리의 의미를 뒤집고, 진리의 가르침을 왜곡시켜 악을 좋아하는 쪽으로 유도해 버리는 것이다. 진리는 선함의 선생이요 목사이다. 선함과 관련이 없는 진리는 엉터리 선생, 속이 없는 이름뿐인 진리이다. 이 진리는 어떤 품질도 나타내지 않고 쓸모 있는 목적에 방향을 두고 있지도 않은 것이다. 그러나 진리는 어떤 대상, 주제에 관련되는 것 없이는 거의 생각될 수 없는 바, 진리만의 발견은 거의 불가능하다. 만일 진리가 선함에 관련이 없다고 하면, 대체로 그것은 악에 관련을 가진 것에서 발견된다. 그러나 그 때의 진리는 뒤집혀진 상태로 발견된다. 그렇게 뒤집혀진 상태에서도 그 진리는 아주 높게 경외 받고 있을 경우도 있다. 예를 들면, 오로지 악할 뿐인 사람 자신 속에 있는 진리, 그래서 진실로 선한 어떤 것도 생산하지 못하는 경우이다. 이런 진리가 뒤집힌 채 계속 유지될 때, 선한 일이라 불릴 수 있는 그 사람의 어떤 것도 정작 그의 구원에는 아무 기여도 해주지 못한다. 이리하여 등장하는 것이, 인간은 그리스도의 공로에 자신의 구원에 대한 신뢰를 두어야 한다는 식의 논리이다. 이런 진리가 한 걸음 더 진전된 모독을 하게 되면, 즉 전적으로 부패될 때, 인간은 악 외에는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것, 그러므로 악은 신앙을 통해 의로워진 이들을 단죄 못한다는 원리를 붙잡고 늘어진다. 사실 인간 스스로 선한 어떤 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은 진정한 말이다. 그러나 그 말과 대등한 것은, 인간은 그리스도가 자기에게 힘을 주시게 되면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뒤집혀진 진리가 옷 입고 있는 교리 형체, 자기들 위에 놓인 진리가 억제하려는 데서 자유로워지고 싶은 바람과 노력 속에서 심정 속의 악들에서 부상한 교리적 형체들 외에도, 일상 생활을 작동시키는 마음 속도 거의 동시적으로 위의 형체와 비슷한 양상을 띠고 있다. 인간 본성을 주의 깊게 관찰하는 사람들은, 사회 속에는 두 가지 부류의 인간이 공존함을 알고 있으리라 본다. 한 부류는 자기가 안 원칙에 자신의 실제가 접목되게 하려고 분투 노력하는 부류이고, 또 다른 부류는 자기가 안 원칙을 자신의 실제에 갖다 맞추려고 끊임없이 골몰하는 부류이다. 전자에 속하는 이들은 자기가 진리라고 믿어지는 것을 양심적으로 채용해서 자기 삶에서 그 진리를 실현해 보려고 분투하는 이들인 반면, 후자에 속하는 부류는 그것이 올바른 원리라고 알고 고백은 하면서도 관습이나 필요성 등 현실을 구실로 삼아 원리가 실제에 맞춰지게 하는 바, 자신들을 정당화하려고 계속 애를 쓰는 부류이다.
암몬의 특성을 각 개인의 마음에 응용해 보려고 할 경우, 또는 하느님의 진정한 교인일 경우, 그들에게 암몬이 표현하는 악이 실제 존재한다고 가정해 보는 것은 꼭 필요한 사항은 아니리라 본다. 즉 거듭나는 삶 안에 실지 진입한 이들이 진리의 모독자로 행동한다고 가정해 볼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될 수도 있고, 때로는 정말 그럴 때도 있는 바, 더욱이 진리를 모독하는 큰 죄를 범하도록 유혹될 수도 있는 것이다. 어떤 것에 의해 실지로 범하여졌던 악들은 모든 것 안에 잠재적으로 존재하고, 그것이 생활 안에 모습을 나타내지 못하도록 예방되는 것은 신중한 생각이나 진리의 교정력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거듭나는 삶의 발전 과정에서, 우리 본성 속의 악들은 없는데서 끌어내는 행동과 연결되어 우리 속에서 꿈틀대는 악령의 영향으로 흥분되어 진다. 즉 기독교인들은 타인들이 대수롭지 않는 듯 넘어가 버리는 것들로부터 오는 시험에 고통 당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말이다. 기독인의 생활에서의 완전은 악이 저질러져서도 안 될 뿐 아니라, 악에 기울려 하는 경향성을 극복해야 하는 것까지 요구하고 있다. 악이 성경에서 뾰족하게 돌출 되어 주제로서 많이 거론되는 이유, 선을 행하기 보다 악을 금해야 할 필요성을 성경이 더욱 많이 돌출 시켜 놓는 이유 중의 하나가 위의 논지에서이다. 어찌됐든 선이 행하여지는 것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악이 범해져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심정 속에 악이 근절 안 된 상태에서도 선은 실시될 수 있지만, 악의 근절은 선을 행하는 가운데 결과가 확실해 진다. 악이 제거되기 전에 행해진 선은 오로지 바깥 측면에서의 선 일 뿐이고, 악의 제거를 수반한 선은 안쪽 측면에서의 선 인 바, 구원에 필요한 요소이다.
위와 같은 특별한 의미로 본 장에서 서술된 역사를 재음미 해 보자. 진리를 모독하는 시험이 암몬의 나하스가 야베스 길르앗을 쟁취하려 드는 것으로 표현되면서 장소, 백성, 주변 정세 등 모든 것이 본문의 주제 속에 빛을 던지고 나하스를 습격하는 결과 등으로 우리에게 교훈을 담아 주고 있다. 그 이유가 시험되는 것이 이스라엘이요, 시험하는 쪽이 나하스이기 때문이다.
길르앗은 요르단 강 건너 쪽이다. 그곳은 므나쎄 반쪽 지파에게 상속으로 주어진 땅이었다. 과거 이스라엘 백성이 거룩한 땅 입구에 다다랐을 때, 2½ 지파에게 강을 건너기 전의 땅을 그들의 상속분으로 허락한 곳인데, 그 이유는 소 떼를 키우기에 적절한 목초지가 풍부했던 까닭에서였다. 그런데 므나쎄에 관하여는 조금 특이한 점이 있다. 그 지파 반쪽은 가나안에 자기들 몫을 할당받았고 나머지는 길르앗에 체류했기 때문이다. 가나안에 자리잡은 반쪽 지파는 인간 안쪽에 있는 교회의 원리를 표현하고, 가나안 밖인 길르앗에 체류한 반쪽은 인간 바깥쪽에 있는 교회의 원리들을 표현한다. 그래서 므나쎄는 인간의 안과 밖을 결합하는 매개체를 표현한다. 요셉의 두 아들, 므나쎄와 에브라임은 영적인 선함과 진리 또는 선행과 신앙을 표현한다 .그러나 가나안 밖의 므나쎄 반쪽 지파는 자연적 마음에 있는 선행이나 선함을 표현한다. 그러므로 므나쎄 반쪽 지파에 속하게 된 야베스 길르앗 사람들은 자연적 마음, 또는 외적 인간에 있는 선행, 또는 상호적인 사랑을 표현한다. 이들이 성안에 있었다는 것은 교리를 의미하는 바, 야베스 길르앗은 상호적인 사랑 또는 선행에 관한 교리를 표현하게 된다. 교리는 교리가 함유하는 원리들에 대한 방어 벽이다. 마치 성벽이 그 안에 있는 주민들을 보호하는 것과 같다. 야베스가 의미하는 것, 그런 이름으로 불리운 것은 그 지역 위에 있는 태양의 열 때문인데, 그 까닭은 그 지역이 산 위에 위치하기 때문이다. 오늘 본문 이전 이 성이나 주민들에 관한 성경의 언급은 꼭 한번 있었다. 그래서 이 언급은 영적으로 생각되는 위험의 본성과 원인을 살피는데 도움을 주고 있는데, 이 사항이 오늘 본문에 노출되어 있는 것이다. 이 사항들이 판관기에서 단 한번 취급되어(판관기 21장) 연결을 이루고 있는 바 아래와 같다.
자기 집으로 돌아가는 여행을 하던 레위인이 밤을 맞아 베냐민 성읍 중의 하나에서 묵게 되었는데 그 성읍의 무뢰한 자들이 그의 첩을 잔인하게 욕보여서 죽게 만들었다. 레위인은 그녀의 시체를 열 두 조각 내어 이스라엘 온 지역에 두루 보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끔찍한 범죄자를 처단하고자 하나로 뭉쳐 일어났다. 그리하여 동족간의 비참한 살육이 감행되었다. 그 결과 베냐민 지파의 대부분이 죽게 되었는데 그들끼리 서약하기를, 다시는 베냐민 지파에 딸을 주지 않기로 맹세하였다. 그러나 이내 이 백성들은 뉘우쳐 통곡했는데, 그 이유는 딸을 주지 않으면 베냐민 지파 하나가 자기들 지파에서 사라져야 했기 때문이다. 이 전투에서 살아남아 도망친 베냐민 젊은이들이 있어 베냐민 지파의 명맥을 이을 수는 있겠지만, 자기들끼리 한 맹세는 그들에게 여자를 보내는 것을 허용치 않았었던 바, 그 지파의 사멸은 피할 수 없는 듯 했다. 그런데 미스바에 모여 딸을 베냐민 가문에 시집 보내지 않겠다고 맹세할 때 빠진 지파가 하나 있었음을 발견하였는데, 그것이 야베스 길르앗 주민이었다. 만 이천 명의 군인이 야베스로 떠나 그 주민을 칼로 쳐죽이고 사 백 명의 처녀를 찾아내어 살아 남은 베냐민 지파 사람의 아내가 되게 했던 것이다.
레위인의 아내에 대한 사악한 베냐민 사람의 끔찍한 위법 행위는 모독이라는 범죄가 포함되어 있다는 것은 쉽게 알 수 있다. 이 중대한 불법을 처단하는데 협력하지 않은 야베스 길르앗 사람들의 경우, 그들이 이 범죄를 묵인한 결과가 되므로 그들도 이 범죄에 가담한 자로 처단되었다. 그리하여 사 백 명의 처녀만 제외하고 모두 죽고 말았다는 것은 실로 중대한 악의 거짓에 더럽혀지지 않고 하나 되지 않은 애착들 만이 보존될 수 있고 진리와 하나가 된다는 것을 표현해 주고 있다. 범죄를 저지른 베냐민 지파, 그것에 동의했던 야베스 사람 중 일부를 제외하고 모두 죽은 뒤, 그 지파의 잔류민과 또 다른 지파의 잔류민인 여자들이 보존되어 새롭게 지파를 건설하게 되었다. 이런 모습은 영적 측면에서 똑같다. 종교의 행로와 원리에서의 이탈은 아주 심각해지게 되면 진리에 대한 모든 지각과 선함에 대한 모든 애착이 거의 소멸 상태에까지 치닫고 만다. 그러나 주님의 섭리에 의해 그들 중 나머지가 보존될 수 있는데, 그것은 회개와 수정이 거행될 때인 바, 이 때 선하고 진정한 것들의 나머지들이 서로 모여 삶의 새로운 개시를 하도록 하나가 된다. 나하스가 야베스 사람들을 살벌하게 위협하는 조항에 있는 모독과 판관기에서의 야베스인들의 범죄는 똑같은 성질이어서 비슷한 공격을 당하는 것으로 생각해 볼 수 있을는지 모른다. 또는 그것이 실제로는 똑같지 않다 해도 최소한 표현적 특성 면에서 본문의 공격을 받는 근거를 이루고 있을 것이라 본다. 사실 판관기 시대의 야베스 사람과 본문 시대의 야베스 사람은 같은 사람이 아니다. 그러나 그들이 표현하는 성격이 바뀐 것은 아니다. 본문의 경우에서도 알 수 있는 것은, 나하스가 공격 포위하자, 그들은 나하스에 굴복하여 암몬을 섬기겠다고 제의했다. 그들은 자기들을 강요하는 어려운 조건만에 의해 제지될 뿐인데, 이런 조건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본문에서 살펴보자.
육체의 눈은 마음 속의 이해성과 상응한다. 오른쪽 눈은 선을 이해하는 것, 왼쪽 눈은 진리를 이해하는 것과 상응한다. 눈에 관한 어떤 의미, 특별히 오른쪽 눈에 관한 의미도 신성한 언어의 방식으로부터 명백히 알 수 있는데, 이를 신약성서에서 발견할 수 있다. “몸의 등불은 눈이다.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몸이 밝을 것이며 네 눈이 병들었으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다” (마태 6:22,23). 마음은 영적인 몸이다, 그리고 물질로 말해지는 모든 것은 영적으로도 진정한 것이다. 눈이 병들면, 병든 눈, 또는 눈 속에 든 병(evil)은 제거되어야 육체 자체가 보존 될 것이다. “눈(right eye)이 죄를 짓게 하거든 그것을 빼어 던져 버려라. 두 눈을 가지고 불붙은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는 한 눈을 잃더라도 영원한 생명에 들어가는 편이 더 낫다”(마태 18:9). 하느님의 뜻에 순종해 보고자 오른쪽 눈을 뽑는 것과 하느님의 적과 같은 인간의 의지에 복종하겠다고 오른쪽 눈이 뽑히는 것은 정 반대이다. 전자는 선함을 지각하는 것을 방해하는 악을 이해성에서 제거하는 것이고, 후자는 선함이 지각되어지는 능력 자체를 파괴하는 것을 포함하고 있다. 이 파괴는 진리를 모독한 결과이다. 이것은 선함을 지각하는 힘을 강탈하는 것이고, 이것이 본문에서 언급하는 오른쪽 눈알을 뽑는 것이다. 따라서 이것은 모든 이스라엘족에 치욕적인 것이다. 그 이유는 선함에 대한 이해성이 파괴될 때, 온 마음이 어두울 것이기 때문이다. 신앙에 관한 사항에 있는 실수는 이해성을 흐리게는 하나, 심정을 부패시킨다고 볼 수는 없다. 이런 실수들이 눈에 있는 티끌이다. 이 티끌은 눈이 물체를 명확하게 보는 것을 방해한다. 그러나 시야를 완전히 가려 버리는 눈 속의 대들보 같은 것은 아니다. 우리가 오른쪽 눈을 뽑힐 경우, 이는 우리가 주님의 군사가 되어 우리 심정 속의 악, 우리 영혼 속의 적들과 싸워 가시는 우리 구원의 대장이신 주님을 따라갈 수 없게 하고 만다.
이런 악이 주님의 백성의 대장으로서 사울이 행동을 개시하게 되는 첫 목표물로 등장되고 있다. 그가 야베스 주민이 처한 곤경, 굴욕을 강요당해 온 소식을 접했을 때, 하느님의 영이 그에게 내려와서 그의 분기가 치솟았다. 진리의 영으로 생동하는 진리가 그에게 열정을 불어넣은 것이다. 이것은 진한 감정으로서의 분노 같은 것이다. 고결한 분노가 열정(zeal)이다. 이는 잘못된 것에 대한 이타적인 의분(indignation)이요, 불법 행위에 대항해서 순진을 옹호하겠다는 열렬한 바람이다. 이런 측면에서 열정은 통상적인 분노와 다르다. 열정은 그 속에 사랑을 가지고 있으나, 분노는 그 안에 악을 가지고 있다. 이들은 바깥쪽 형태에서는 아주 비슷하나, 안쪽 상태에서는 아주 다르다. 분노와 열정 사이에 있는 외관의 유사성으로 인해 분노가 성경의 글자에서 하느님께로부터 인 듯 여겨지게 만든다. 그 이유가 성경의 글자적 의미는 외관에 나타나는 대로 씌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경의 영적 의미에 있는 것, 즉 진정한 진리는 주님이 성내시는 하느님이 아니라 언제나 열정만 가지신 분이시다는 것이다. 진리의 영 그리고 그 열정이 구원이라는 결과를 갖기 위해서 마음 속의 생각과 애착들이 행동에 나타날 때까지 계속 마음 속에서 번성하여 퍼져 가야만 한다. 그러므로 사울은 곤경에 빠진 동포를 구출하기 위해 온 이스라엘이 즉각 일어서도록 진행을 맡았던 것이다. 그는 황소 한 쌍을 끌어다가 각을 떠, 온 이스라엘에 보내어 야베스 주민을 구출하는데 협력치 않는 자는 이 황소 조각 같은 취급을 받으리라고 위협했다. 이렇게 해서 우리를 훈육시켜 주는 것은, 모든 이, 특별히 겨리 아래 있는 이들은 부름에 기꺼이 순응해서 신성한 진리의 깃발 아래 악하고 거짓된 것들과 대적해야 한다는 것, 진리가 명하는 것에 순종하지 않는 이들에게 진리는 그들을 산산조각 내는 칼이 된다는 것, 자연적 마음 속에 있는 모든 지각과 애착들은 찢기어 흩날리고 말리라는 것 등이다. 본문의 경우 이 부름에 널리 응답되고 있다. 주님을 두려워함이 그들 위에 내려앉았고, 그들은 한 사람같이 똘똘 뭉쳐졌다. 이 두려움은 사울을 두려워해서가 아니요, 사울이 으름장 놓는 표시에 두려워 한 것도 아니라, 신성한 사랑의 표현인 신성한 이름, 여호와를 두려워 한 것이다. 그들은 사랑으로부터 순종했다. 왜냐하면 사랑으로부터의 순종이 거룩한 두려움(경외함)이기 때문이다.
베젝에 집합한 수를 세어 보니 이스라엘 사람이 삼십 만, 유다 사람이 삼 만이었다. 베젝은 유다 성읍 중의 하나였는데, 이 성은 과거 가나안 왕 아도니 베젝으로부터 빼앗은 성이었다. 그 당시 이 왕은 엄지손가락과 엄지발가락이 잘리면서 포로가 됐는데, 그 때 그가 인정한 것은, “내가 엄지 손가락과 엄지 발가락을 자르고 내 상 밑에서 부스러기를 주워 먹게 한 왕이 칠십 명이나 되더니, 하느님께서 내가 한 대로 나에게 갚으시는 구나” 이었던 것이다 (판관기 1:4). 이와 같이 잔인한 처벌, 수족을 절단하는 관습은 악이 악을 저지른 자 위에 가져오는 힘의 박탈에 대한 상징이다. 보복이라는 법칙, 성경 시대의 경우 부지 중에 일어나는 것이었다 해도, 우리가 타인에게 행한 대로 나에게도 돌아온다는 것은 천국과 지옥에서 똑같이 우세한 영원한 법칙의 결과인 것이다. 위와 같이 유다의 적에게 가해진 형벌과 본문에서 므나쎄의 적이 그들에게 요구하는 형벌은 그 본성과 의미에서 매우 유사하다는 것을 쉽게 외울 수 있게 되어 있는데, 이 지파들이 한군데 모여 점호를 받고 있다. 온 지파를 일컬을 때 유다와 이스라엘이라고 명명할 때가 성경에서 많은데, 오늘 본문의 경우 성경에서 처음 등장되는 곳이기도 하다. 이 후 이 두 이름이 거론될 때는 대체로 두 개의 보편적인 교회의 원리, 즉 선함과 진리, 또는 사랑과 신앙을 표현해 준다. 이 두 원리가 주님의 왕국과 교회를 구성하는 요소이다. 백성을 점호하는 것, 이것이 신성한 뜻과 지혜에 따라서 행해질 때, 교회의 원리를 올바른 질서에 따라 배열하여 종속되어 그 모든 원리는 주님 자신이 머리가 된 그 밑에서 조화를 이루어 하나가 되는 것을 표현한다. 숫자 자체는 원리들, 즉 은총과 미덕들, 교회와 종교를 구성하는 원리 속의 품질이 서로 짜깁기된 모습을 표현한다. 1000은 선함과 관계되고, 3은 진리와 관계가 있다. 진리의 법칙에 의거 그들 사이에 있는 질서의 일반 원리가 삼군으로 군대를 편성하는 것에서 한 걸음 더 진전된 암시를 우리에게 주고 있다. 이는 의지와 이해성, 그리고 행동, 또는 사랑, 신앙, 그리고 일이라는 삼위일체에 관계된다. 이런 가운데서 교회의 원리들은 충만해지고 능력을 지닌다.
도움을 구하려 왔던 특사들은 햇볕이 한창 내리 쬐는 이튿날 야베스 사람들이 구원되리라는 소식을 들고 떠났다. 그들의 심정을 기쁘게 한 이 소식, 그러므로 해서 그들이 이튿날 항복하러 가겠다고 적들에게 통보 가능하게 했다. 이 날은, 추측해 보건대, 칠 일의 여유 기간 중 마지막 날이었을는지 모른다. 그래서 이 통보는 암몬족들로 야베스 사람들이 자기들 동포에 도움을 호소했지만 결국 허사가 됐다는 억측을 하게 끔 만들었을 것이 틀림없다. 그러나 내일은 새로운 전황이 초래되었다. 새벽녘에 사울은 군대를 삼군으로 나누어 적의 진지 한복판으로 곧장 쳐들어가서 햇볕이 내리 쬘 때까지 암몬군을 분쇄했다. 살아남은 자들은 뿔뿔이 흩어져 도망했다. 이른 아침 시간이란 새로운 상태의 새벽, 시험에서 건져지는 상태이다. 빛의 상태는 사랑의 상태로 진보한다. 아침으로부터 대낮에 이르면서 암몬족은 완전하게 흐트러져 하나도 그 자리에 서 있지 못했다. 학살이 수반된 적의 파괴란 어떤 악과 거짓도 함께 있지 못하도록 하는 완전한 단절이다. 선과 진리가 단합되면 정의의 힘이 솟구치듯, 악과 거짓도 합세하면 사악이라는 권세를 드날리는 바, 이 연결이 분쇄되면 그들의 권세는 사라지고 만다.
전투가 끝나 지도자로서의 사울의 인품이 건립되었을 때 승리로 흥분된 백성들은 사울이 이스라엘의 구원자 됨을 경시한 자들을 끌어내 죽여 버리자고 사무엘에게 요구했다. 그러나 고상한 상태의 진정한 사울은 말했다. “안될 말이오. 야훼께서 이스라엘에 승리를 안겨 주신 이 날에 사형이 웬 말이오?” 이 말은 보통이 아닌 말이다. 그럼에도 진정한 것은, 한가지 시험을 극복하는 것은 때로 또 다른 시험으로 인도한다. 우리가 자신의 능력으로 시험을 극복해 버렸다고 생각하는 한, 자신의 구원에 대한 공적이 자기에게 있다고 하는 시험에 빠지고 만다. 그래서 우리가 자신에게 공적이 있다고 주장하는 한, 우리는 또 다른 것도 부정해 버린다. 사울의 말은 위의 이중적인 악을 바로 잡고 있다. 그는 이날 이스라엘이 구원된 것을 주님에게 돌리고, 가장 높은 이의 구원하시는 능력이 명백히 보여진 이 날, 사람이 죽음에 놓여서는 안된다고 선포하고 있다. 죽음이 아닌 생명이 진정한 영적 승리의 상태를 특징 지워 준다. 그러므로 선의 무한한 근원에 모든 능력, 모든 공적을 돌림으로 마음 속에서 일어나는 보다 낮은 생각들은 꾸짖어져 교정 받게 된다.
사무엘이 백성에게 “자, 길갈로 가서 즉위식을 올립시다” 하고 말하자 백성들은 모두 길갈로 올라가 사울을 야훼 앞에서 왕으로 모셨다. 사울을 왕으로 만들었던 사건은 이번이 세 번째이다. 사무엘이 기름 붓고 제비를 뽑는 방법으로 해서 그는 임명되어 확증되었었다. 세 번씩 그가 왕임을 재 천명하는 것에는 사울이 표현하는 특성과 관련되어 뭔가 의미 심장한 점이 분명히 있다. 처음과 두 번째의 경우, 사울은 백성들의 자발적 행동, 또는 어떤 직접적인 선택의 기회가 없는 상태에서 왕으로 선임되었다. 백성들은 제비뽑는 방법이 하느님이 임명하시는 것으로 아무 의심 없이 인정했다. 그러나 본문의 경우는 그들 스스로의 자발적이고 잘 생각된 후의 행동이었던 것이다. 영적으로 주님의 백성도 이와 같다. 이 백성들은 진리를 볼 수 있고 그 진리가 주님으로부터임을 인정한다. 다시 말해서 진리가 말씀을 통해 그들에게 와지고, 법과 증거에 의해 입증되어진다는 말이다. 그러나 자신의 경험으로 진리를 증거 할 때까지, 특히 말씀 속의 진리로 악을 극복하여 구원을 획득할 때까지, 그리하여 자신 스스로 진리가 진리임을 확증하면서 자신의 심정과 삶을 통치하게 할 때까지 실지로 진리를 인정하는 것은 아니다. 즉위식이 새롭게 거행된 장소 역시 확실시 해주는 행동으로 그 속에 뜻이 없는 것은 아니다. 길갈은 이스라엘족의 역사에서 두 개의 매우 중요하고 의미 심장한 행동이 있었던 관계로 상당히 중요한 장소로 기억되는 곳이다. 이곳은 여호수아가 요르단 강 한복판에서 열 두 돌을 가져다 기념비를 세운 곳이고, 거룩한 땅을 밟게 되었을 때 이스라엘 온 남자가 할례를 받은 곳이다. 이 장소가 길갈로 불린 것도 할례와 관련되어 나온 지명이다. 즉 “야훼께서 여호수아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오늘 너희에게서 에집트인들의 수모를 벗겼다’ 그리하여 그 곳 이름을 지금까지 길갈이라고 한다.” 이는 진정으로 영적 새 삶의 시작, 영적 가나안의 삶으로 자연적 에집트의 삶과 분명히 구별되는 삶인 것이다. 그러므로 해서 길갈은 교회를 소개시켜 주려고 일하는 자연적 진리를 의미한다. 그런데 거듭남의 질서에서 첫 번째에 있던 것은 마지막 번째에 해당된다. 그 이유는 이미 여러번 살폈던 바와 같이, 영적 삶, 그 안에 있게 되는 세부적 상태들은 최말단(ultimate)에서 시작해서 끝을 맺기 때문이다. 사실 첫 번째에 있던 상태와 마지막에 있는 상태는 매우 다르다. 마지막 상태에서의 마음은 지식과 경험이 쌓여 첫 상태에로 되돌아온다. 그리고 자신에게 획득된 것이 무엇인지 첫 상태 속에서 확증됨을 발견한다. 길갈에서 새롭게 즉위하는 것은 거듭나는 마음이 신성한 진리를 확증하는 것을 표현한다. 이를 수단으로 각자의 생각과 애착이 통치된다. 사울의 즉위식이 끝난 후 백성들은 주님께 제물과 친교제를 드렸다. 그리하여 왕과 백성 사이에는 상호 기쁨이 넘쳤는 바, 이는 거듭나는 마음 속의 왕국에 질서가 건립되고, 그 속의 모든 원리들, 즉 통치하고 통치 받는 원리들이 서로 관련을 갖고 하모니를 이루면서 함께 기뻐할 때 결과되는 주님과의 결합임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다.

사무엘상 10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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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상 제10장

사울이 왕으로 기름 부어지다

사울이 잠깐 서 있을 때 “사무엘은 기름 한 병을 꺼내어 사울의 머리에 붓고 입을 맞추며 이렇게 말했다. ‘여호와께서 그대에게 기름을 부어 당신의 백성 이스라엘의 수령으로 성별해 세우시는 것이오.’” 의식 행위인 기름 붓는 것은 특별한 공직에 어떤 사람을 취임하게 한다는 표시, 또는 어떤 것을 특별한 용도에 헌납하는 것을 표시했다. 통상 성직자나 왕들이 기름 부어졌는데, 그뿐 아니라 성전의 집기들, 전쟁의 무기까지 기름 부어지기도 했다. 이 기름 부음, 또는 기름을 바름(unction, 도유)은 중요한 진리를 우리에게 가르치시기 위해 고안되어져 있었다. 기름은 성경에서 사랑을 상징한다. 기름이 사랑을 상징하는 성경의 예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라 하면, 아마 신랑을 맞으러 나가는 복음서에 있는 “열 처녀의 비유” 일 것이다. 슬기로운 다섯 처녀는 등과 더불어 기름도 준비해 두었는데, 미련한 다섯 처녀는 등은 준비했지만 기름을 준비하지 않았다. 한 밤중, “저기 신랑이 온다. 마중 나가라” 라는 소리가 들리자, 슬기로운 처녀들은 불을 켜 들고 마중 나가 그분과 함께 결혼에 들어갔지만, 미련한 처녀들을 등불이 꺼져 그분을 따라갈 수 없었는 바, 결혼 식장의 문은 닫히고 말았다. 기름이 불꽃의 생명이 되듯, 사랑은 믿음 속의 생명이다. 사랑이 없을 경우 믿음 자체가 존재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어리석은 처녀의 등불은 꺼졌고, 그들은 단지 지식만을 상징하는 텅빈 등만을 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교회에서의 기름 부음은 기름 부음을 받는 사람이 거룩한 상태로 진입하는 것이요, 하느님의 사랑이 그 사람의 심정에 들어가 그 영향력 하에 행동함으로서 거룩한 목적에 헌신되는 것을 표현했다.
유대 교회라는 하느님의 처방 속에서 거행되어진 기름 부어진 모든 것, 특히 왕이나 성직자에게 기름 부어진 것은 왕이나 성직자 측면에서의 주 예수 그리스도 자신을 기름 붓는 것에 관한 표현이었다. 이런 표현적 행동 측면에서 이런 의식은 주님과 관련되어서는 가장 높고 가장 거룩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 의식은 그분에게 메시아와 기름 부음을 의미하는 그리스도라는 칭호를 주기도 했다. 그분에게 있어서 기름 부음은 순수한 신성한 행동이었다. 그분은 신성한 사랑의 기름으로 기름 부어지셨다. 주님은 신성한 진리로 세상에 자신을 드러내 보여 주셨다. 다시 말해서 말씀이 육신이 되셨던 것이다. 신성한 진리는 아들로, 신성한 사랑은 아버지로 나타내 보여 주셨다. 신성화 하심을 수단으로 그분은 기름 부어진 자가 되시어 그분의 인성 안에서 신성한 사랑과 신성한 지혜가 하나를 이루어 존재하시는 바, 그분의 인성은 신성한 사랑과 지혜의 유한한 형체가 되셨다. 그래서 그분은 신성한 인격(person)이 되시고, 아버지와 아들 양쪽에서 존재하신다. 그리하여 그분 안에서 육적으로 신성이 충만해 있으신 것이다.
주님의 신성화 하심은 인간 거듭남에 관한 모형이다. 그분이 신성한 사랑과 지혜를 그분 스스로 하나 되게 하심으로 그분의 인성을 신성하게 만드셨기 때문에, 그분은 그분의 제자들을 영적으로 만드시는 것도 그들의 마음과 삶 안에서 사랑과 진리를 결합시킴으로 이룩하신다. 그들이 획득한 진리는 계시, 즉 없음으로부터였다. 그들이 획득할 수 있는 사랑은 영감(inspiration, 숨을 들이 쉼)을 수단으로 되었는 바, 이는 위로부터, 또는 안으로부터이다. 우리를 하느님의 자녀가 되게 하는 것은 사랑이다. 진리 역시 참으로 필요한데, 그 이유는 진리가 없으면 우리는 사랑이 무엇인지, 우리가 사랑해야 하는 사람, 사랑해야 하는 것을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리가 진리를 획득한 사람의 마음 속에서 거룩하게 되려면 사랑이라는 거룩한 기름이 부어져 성별 되어야만 한다. 또는 진리가 거룩한 용도에 실지로 사용되어야 한다. 주님의 백성을 통치하는 자가 되는 사람의 즉위식에서 일 경우, 기름 붓는 의식은 더욱 필요한 바, 그 이유는 교회를 통치하는 진리, 교인의 마음을 통치하는 진리는 반드시 사랑에 기초를 두어야 한다는 신성한 질서의 법칙이 그 의식에 의해 표현되고 있기 때문이다. 진리 안에 사랑을 처음 받는 것은 영적 생명이 혼(soul) 안에서 실지로 업무를 개시하는 것인데, 그 이유는 사랑이 생명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심정이 주님의 뜻을 행해 보겠다고 진정으로 바라게 하는 것이 사랑이다. 그리고 사랑은 바람을 실천하는 가운데 기쁨과 즐거움을 갖게 해준다. 말씀의 글자에서 획득한 진리가 사랑과 결합될 때, 우리는 육신이 된 영화로운 말씀을 받는 것이 되고, 시편 기자의 다음과 같은 영감된 말씀, “땅에서는 진실이 돋아 나오고, 하늘에선 정의가 굽어보리라…” 이 선포가 이렇게 실제로 이어지는 바, “사랑과 진실이 눈을 맞추고, 정의와 평화가 입을 맞추리라”를 실감하게 된다.
입을 맞추는 키스는 사랑을 수단으로 결합하는데 대한 성경적인 상징이다. 가장 적절한 의미에서 키스는 진리와 사랑의 결합이다. 이 결합을 사무엘은 사울의 머리에 기름 부을 때 그에게 증여한 것이다. 그 이유는 기름 붓는 사제로서의 사무엘, 기름 부어진 왕으로서의 사울은 선행과 신앙, 사랑과 진리라는 인척 관계인 두 원리들을 이전보다 더 완전하게 표현했기 때문이다. 이후 이 결합이 계속되어 더욱 단단하게 결합되어 갔더라면, 사울이라는 왕과 왕국은 더 번성되고 행복해져서 늙은 예언자, 사무엘이 통곡하는 쓰라림도 있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영혼을 가로질러 버리고 마는 불행한 변화, 사울 통치의 일그러진 모습은 기독인의 생활 속에 있는 흥망성쇠에 꼭 들어맞는 모습, 즉 주님의 초기 경험들, 그분의 양상이 여느 사람보다 더 보기 싫은 상태였을 때, 한마디로 우리가 그분께 바라고 싶은 게 하나도 없을 정도의 너무나 인간적인 초기의 그분의 상태 동안의 사람의 아들로서의 그분을 충직하게 그려내 주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조심스럽게 관찰해야 할 것은, 주님을 표현한 표본적 인물들이 죄를 범했고, 때로는 아주 비통한 죄들까지 범했지만, 그들의 죄들은 그분의 시험을 표현했을 뿐, 표본적 인물이 범한 죄 자체를 주님의 시험에서 범해졌다는 것은 아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악들은 인간의 눈으로 보여지기에는 너무나 깊은 곳에 있는 악들이어서 유한한 마음으로는 납득되지 못하는 악, 인간 악의 근원이 되는 악들이다. 그러므로 주님의 시험들은 우리의 관념을 넘어서는 깊이와 밀도를 가졌다.
사울을 떠나 보내기 전, 사무엘은 그에게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그대에게 기름을 부어 당신 백성의 수령으로 성별해 세우신 표시가 뒤따를 것이라고 했다. 이 표시는 믿는 이들에게 따라 오는 표시로 존재하는 바, 우리는 이 표시의 내용에도 시선을 모아 보자.
사울이 떠났을 때 그는 라헬의 무덤 근처에서 두 사람을 만났고 그들은 사울이 찾던 나귀를 발견했다고 말해 주었다. 이 징조는 사울 자신에게 그 진리가 인정되는 것이나, 그것은 사울이 표현한 것들과도 관련되는 의미 있는 사건이다. 라헬은 사울이 소속된 지파의 아버지인 베냐민을 낳은 어머니였다. 그 여자가 야곱을 제일 먼저 사랑했는데, 비록 그 여자가 야곱의 첫 아내는 아니었다 해도 야곱이 가장 사랑한 아내였다. 이 여자는 진리에 대한 영적 애착을 표현했고, 이 여자의 언니인 레아는 자연적 애착을 표현했다. 라헬은 야곱이 바딴 아람을 떠나 가나안으로 여행하는 도중 베냐민을 낳으면서 죽었다. 베들레헴 – 유프라데, 이곳은 아주 의미 심장하고 감동적인 사건이 전개된 곳, 즉 세상의 구세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출생지로 거룩한 예언과 역사에서 따로 분류해져 있는 지역이다. 유대의 왕이 탄생하셨다는 소문으로 그분을 죽이려고 두 살 이하의 어린 아이들을 대량 학살하는 모습이 “라마에서 들려 오는 소리, 울부짖고 애통하는 소리, 자식 잃고 우는 라헬, 위로마저 마다는 구나”로 표현되고 있다. 이 예언은 주님에 의하지 않고는 회복될 수 없는 순진, 그 파괴된 순진에 교회가 자포자기하여 슬퍼하는 것을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베냐민이 출생하면서 라헬이 죽고 매장되는 것은 그 여자가 표현했던 애착이 거절되어 소멸함을 말하는게 아니라, 그 애착이 삶의 새로운 형태로 부활함을 뜻하는 것이다. 육체가 죽어 매장 될 때 그 영혼은 존재의 새로운 더 높은 상태로 진입하는 바, 죽음과 매장은 부활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영적인 부활은 생명으로의 진입인 거듭남이기도 하다. 라헬의 무덤에서 발생한 사울의 첫 징조는 거듭남이 진전되는 첫 단계, 즉 진리의 영적 애착은 먼저 옛 사람을 중단시키고 새 사람을 입혀 준다는 것을 우리로 알게 해 준다. 이런 단계의 상태는 베냐민 지역 셀사에 있는 라헬의 무덤에 사울이 왔을 때 첫 징조가 있게 되었다는 말로 더 상세히 묘사하고 있다. 베냐민 지역, 이는 베냐민 자신 같이, 진리의 선, 즉 행동에 놓여 있는 진리를 표현했다. 그 이유가, 지극히 중요한 종교에 진입한 사람이 사랑으로부터 온 진리의 삶에 실지로 들어갈 때, 그는 새로운 상태, 천국 상태에 진입하기 때문이다. 셀사에 관해서 우리는 그 위치나 이름 정도밖에는 알 도리가 없다. 그 이름이 지닌 뜻, 태양열로부터의 그늘은, 사무엘이 새벽에 옥상에 있는 사울을 떠나 보내기 위해 그를 깨울 때의 새벽으로 표현된 업무 개시가 이어지는 상태를 표현할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이 상태는 빛에 속한 상태라기 보다 사랑에 속한 상태, 또는 선이 진리에 더해져 가는 상태 중의 하나이다. 여기서 사울에게 주어진 징조 자체는 사무엘이 선견자임을 사울에게 또 다른 증거로 제시해 주고 있다. 그러나 그것도 지금 표현된 영적 진보 단계에 관련되는 영적 진리의 표현이다. 사울은 두 사람과 만났는데, “그들은 그대의 부친이 그대가 찾아다니던 암나귀를 찾아냈으므로 나귀 걱정은 놓았지만 그대들이 걱정되어 ‘내 아들이 어찌 되었느냐’는 말만 되풀이한다고” 했다. 잃은 나귀를 찾는 사울의 모습은 잃었던 것을 찾기 위해 오신 주님을 표현함은 이미 살핀 바 있다. 그리고 잃었던 것을 찾으시는 가운데 그분은 왕국도 발견하셨다. 그러나 사울 자신이 잃었던 나귀를 발견했던 것은 아니다. 따라서 사울이 추구한 것과 구세주가 추구한 것 사이의 유사성이 있는 듯 여겨지지 않고, 또한 구세주가 추구했던 것이 사울이 추구했던 것을 회복시켰다고도 우리에게 말해지지도 않는다. 그런고로 이 사항은 중요한 의미를 갖게 된다. 거룩한 말씀 속에 있는 모형(type)과 그 반대의 모형(anti-type)사이에는 외형상의 상응 뿐만 아니라 심오함도 존재한다. 거기에는 내적이어서 보이지 않을 뿐 아니라 외적이어서 눈으로 발견되는 것이 존재한다. 신실한 자들은 그들이 아들을 수단으로 충분하게, 마지막으로 구속되기 전, 내적으로 회복되어 아버지와 하나가 된다. 주님은 인간을 거듭나게 하는 질서와 동일한 방법으로 그분의 인성을 신성화 하셨다. 그러므로 그분의 내적 인간은 그분의 외적 인간에 앞서 신성화 되셨다. 이것은 서로 구분되는 불연속적인 행동들이다. 이에 대해 참고가 되는 구절로서 요한복음 12장 28절을 보면, “‘아버지, 아버지의 영광을 드러내소서.’ 그 때에 하늘에서 ‘내가 이미 내 영광을 드러냈고 앞으로도 드러내리라’ 하는 음성이 들려 왔다.” 주님의 인성이 내적으로 신성화 하심과 동시에 인류와 천적 천국의 내적인 구속이 있었다. 그리고 중간 상태에 있는 신실한 자들은 즉각적으로 주님의 내적 인간, 또는 아버지와 내적으로 결합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아버지가 주님 안에 내재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구속의 역사가 성취되기 전, 아버지의 소유 안에 이미 들어가 있다는 것을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셨다. “나는 그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준다. 그래서 그들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고 아무도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아 가지 못할 것이다. 아버지께서 내게 맡겨 주신 것은 무엇보다 소중하다. 아무도 그것을 아버지의 손에서 빼앗아 갈 수 없다. 아버지와 나는 하나이다” (요한 10:28-30). 이 때의 아버지와 아들의 하나 됨은 오직 내적 측면에서였을 뿐이다. 마치 사울과 그의 아버지 키스의 관계처럼 그들은 내적으로 하나였으나 외적으로는 서로 떨어져 있다. 아버지와 아들, 또는 신성과 인성이 완전히 하나가 되는 것은 아주 극단적인 시험, 즉 십자가의 고통 같은 것을 수단으로 결과되어졌다. 그리고 이 고통 가운데서 아버지는 아들을 위해 슬퍼하셨다. 예수는 슬픔의 사람이었다. 우리는 아버지가 슬퍼한다고 성경에서 읽지 않고 사람의 아들이 슬퍼한다고만 읽는다. 오직 페트리페시안(patripassian)들만이 신성이 고통 한다고 상상했다. 이런 모습들은 인성에 대한 신성의 동정심, 고통 속에 있는 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동정만을 표징적으로 표현했을 뿐이다.
인간의 거듭남에 관련지어 생각해 볼 때, 나귀는 아주 수준 낮은 진리들, 즉 기억에 속하는 진리들을 의미하는 반면, 사울은 나귀보다 높은 진리, 즉 이해성에 속하는 진리들을 의미한다. 키스의 들판에서 길을 잃어 배회하는 나귀란 사울 아버지로 표본이 되는 것, 즉 가장 낮은 진리들이 소속되어야 할 선과 연결을 이루고 있지 않은 상태를 말하고, 나귀를 찾았다는 것은 그것들이 소속되어 섬길 수 있는 선과 재연합 또는 그 선이 회복되었음을 표현하고 있다.
사울에게 주어진 세 번째 징조는, 베델로 올라가는 세 사람과 마주친다는 것인데, 한 사람은 염소 새끼 세 마리를 안고, 한 사람은 떡 세 덩어리를 가지고, 나머지 한 사람은 술 한 자루를 메고 올 것이라는 것, 그리고 서로 인사로 나눈 뒤 떡 두 덩이를 받게 된다는 것이다. 베델로 올라가는 이 세 사람은 진리로부터 진리의 선까지 우리의 의지와 이해성, 삶이 거듭 나아가는 진보 과정을 묘사하고 있다. 이 사람들이 베델로 올라가는 이유는 하느님의 궤가 있는 곳에서, 아마 성막에서 예배드리려고 갔을 것임은 의심할 바 없다. 그리고 염소 새끼, 빵, 포도주는 그들의 예물이었는 바, 염소 새끼는 순진이 든 신앙, 빵은 영적 선, 포도주는 영적 진리를 의미한다. 사울은 그들로부터 빵 두 덩어리를 받도록 되어 있었다. 이 모습은 다윗이 성막에서 사제로부터 제사 떡을 건네 받는 모습과는 똑같지는 않지만, 그 모습의 본성이나 표징에 있어서는 비슷한 점이 있다. 왜냐하면 두 빵들은 성전 예배를 위한 것이라는 것, 그러므로 하느님께 바치는 봉헌물이었는 바, 어느 정도까지는 거룩한 빵이라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거룩한 것을 선물로 받는 것, 물론 사울이 받는 빵은 아직 성별된 빵은 아니었다 해도, 이 빵이 사울에게 건너왔다는 것은 성직자 측면의 속성 중 어떤 것을 그는 소유해야 한다는 것, 그리고 성직자적인 기능의 어떤 것을 그는 발휘해야 할 것이라는 것, 성직자를 위해 설비된 거룩한 빵을 수단으로 그의 영혼은 버티어 나가야 할 것이라는 것을 인식하게 하려는 징조였던 것이다. 거듭 나아가는 사람의 측면에서, 이 빵은 영적 선 즉, 선행의 선과 사랑의 선인데 이것이 심정 속에 있는 사랑을 생명 있게 해준다.
세 번째 징조는 불레셋 수비대가 있는 하느님의 언덕에서 사울은 예언자들의 무리를 만나게 된다는 것이다. 이 언덕이 무엇인지는 정확히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 이름은 영적 의미에서 마음의 어떤 상태를 함축하는데, 하느님의 언덕이란 진리를 사랑하는 마음의 상태, 통치하는 원리를 의미해 주고 있다. 그러나 그 마음의 상태는 진리와 반대되는 거짓 원리가 다 제거되지 않은 마음의 상태를 의미하는데, 그 이유가 거짓 원리가 불레셋 수비대에 의해 의미되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사울은 그가 이스라엘의 영도자가 되어 정복해야 할 악 중의 하나를 볼 수 있게 데려와진 셈이다. 이와 같이 해서 기독교인들은 훈육되고 상기되어진다. 다시 말해서 속 사람에 있는 진리의 사랑이 바깥 사람에 있는 거짓의 사랑에 의해 묵시적으로이든 공개적이든 반대되는 방식, 말을 바꾸어 말하면, 하느님을 신뢰함이 신앙 만의 근본 바탕인 자아를 신뢰함과 대립함으로 훈육된다. 사울이 자기들 영토를 노예 상태로 전락하게 한 기념물인 수비대를 본 후 만난 예언자들의 무리는 불레셋 수비대와는 정 반대에 해당된다. 왜냐하면, 예언자들은 종교 속의 순수한 진리들, 즉 이타애의 신앙을 가르치고 삶을 선한 쪽으로 인도하는 진리들에 대한 모형이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앞의 세 사람은 베델로 올라가고 있는 중이었고 예언자들은 하느님을 예배했을 것이라고 생각되는 산당에서 내려오는 중이었는 바, 그들의 찬양은 관, 현악기로 소리를 냈다. 이런 악기들은 선함과 진리에 대한 애정, 또는 사랑과 믿음에 대한 애정을 표현하도록 고안되어져 있다. 올라감과 내려옴은 상태의 반복을 표현하고, 그 반복의 결과로 있게 되는 진보를 말한다. 이런 진보는 거듭남을 꾸준히 추구해 가는데서 있어지는데, 이런 상승과 하강을 야곱은 이 지역에서 자던 중 그의 꿈 속에서 보게 되었기도 하다. 이리하여 그는 이 지역을 베델, 즉 하느님의 집이라고 이름 지었다. 그가 그렇게 부를 수밖에 없었던 것은, 신비한 사다리가 지상에서 하늘까지 놓여져 있고 그 사다리에서 하느님의 천사들이 올라가고 내려가고 했는 바, 인간이 하느님과, 하느님이 인간과 연결되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애착과 생각들은 찬양하며 기도하는 가운데 위쪽인 하느님께로 향하게 되고, 다시 아래쪽인 생활 속에서 의무를 수행하는 가운데 성별 되고 용기를 준다. 예언자들의 무리가 산당에서 내려오면서 그들의 독특한 의무를 수행하고 있을 때, 주님의 기운이 사울을 내리 덮쳐 그도 예언자들 사이에서 예언하게 되었다. 본문에서의 예언하는 선물이 미래 사건을 예견하는 능력을 가졌던 것은 아니다. 단지 예언하는 것을 즐기는 사람들이 선견자나 계시자로 만들었던 것이고 자신들을 황홀해지는 상황에로 집어 놓고서는 정상적인 생활 영역을 넘는 말을 하거나 몸짓으로 나타냈던 것이다. 예언하는 선물이 무엇이었든지 간에 사울은 이들을 만났을 때 그들과 같은 행동을 하게 되었다. 이 때 주님의 영이 사울 위에 내려 그도 그들과 더불어 예언했다. 예언하는 선물, 또는 영은 다른 사항들과는 어떤 관련이 있을까? 하느님이 또 다른 심정에 주시는 영이 있다. 그것은 진리의 영이다. 의지가 새롭게 만들어질 때, 이해성은 새롭고 더 높은 진리들을 보도록 계발되어 진다. 이것들은 지적인 진리 뿐만 아니라 심정 속의 진리들이다. 그 이유는 그 심정의 소유자들은 선을 목적으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마음을 일으켜 세워 알고 믿는 통상적인 상황을 넘어서 진리를 보고 사랑하는데 까지 이르고, 모세의 간절한 소원, “차라리 여호와께서 당신의 영을 이 백성에게 주시어 모두 예언자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말한 것을 실감하기까지 한다 (민수기 11:29). 상태의 변화가 이런 위대함이고, 어떤 경우에서는 인격의 개선으로 아주 명확해지는 바, 이런 상태를 진리의 영은 생산해 준다. 그래서 사울을 전부터 아는 사람들은 그가 예언자들과 함께 신들린 것을 보고는 수군거리기를 “키스의 아들이, 저게 어찌된 일이냐. 사울도 예언자들 중의 하나던가” 라고 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상황은 더 이상 예언자 키스의 아들이 아니다. 그래서 거기에 있던 사람 중 하나가, “이들이 도대체 누구네 집 아들이냐?, But who is their father?” 로 적절하게 대답해 졌다. 영적으로 이와 같은 상황은 하느님의 아들이다. 하느님의 자녀는 “혈육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욕망으로 난 것이 아니라 하느님에게서 난 것이다” (요한복음 1:13). 하느님이 그의 아버지이다. 그래서 “사울도 예언자들 중 하나더냐?” 라고 속담이 되어 버린 것이다. 이는 마치 나다나엘의 예수님에 관한 질문, “나사렛에서 무슨 신통한 것이 나올 수 있겠소?” 하고 묻는 것과 같다. 예언자는 예언자의 계보에서만 와지고, 위대한 자는 남들과 다른 족보, 중요한 장소에서만 태어난다고 우리는 자칫 생각해 버리기 쉽다. 그럼에도 성경 이야기나 교리가 꾸준히 가르치는 바는, 신성한 섭리는 낮은 것, 인간이 보기에 부적당하다고 여겨지는 수단으로 위대한 일을 성취하신다.
사울이 예언하는 것을 마쳤을 때 그는 예언자들이 내려온 산당으로 갔다. 이렇게 해서 자기를 쓸모 있는 수단으로 위대해지게 인도하신 주님을 예배하는 높은 상태의 상징인 산당으로 올라감으로 해서 그의 뜻 깊은 진보는 막을 내린다.
사울이 집에 오는 광경은, 그가 아버지에게 갔다는 말로 읽지 않고 그의 삼촌으로부터 듣고 있다. 삼촌(uncle)은 아버지로 표현되는 같은 종류의 선을 표현하나, 아들로 표현되는 진리와 연결이 되므로 이는 관계성이 아닌 유사성과 연결된다. 그래서 진리의 지식으로 진입할 수 있기는 하나 그 지식을 통치하는 힘은 없다.
사울을 기름 부은 사무엘은 백성을 미스바로 불러 주님 앞에 모아 놓았다. 본문의 미스바는 과거 라반과 야곱이 돌무더기를 세워 서로의 증거로 삼았던 장소는 아니다. 이 장소가 미스바라 명명된 것은 라반이 “우리가 헤어져 있는 동안 여호와께서 우리를 감시하실 것이다”(창세기 31:49) 라고 말한데서 비롯된다. 이 미스바는 요르단 건너쪽 길르앗에 있고, 본문의 미스바는 베냐민 지파 구역 안에 있다. 그럼에도 이 두 장소는 같은 이름을 가지고 있어 같은 일반적 의미를 가지게 되어 있다. 미스바란 라반으로 표현되는 이방인들 속에 있는 선 안에 야곱으로 표현된 주님의 신성한 자연성이 현존함을 영적으로 의미한다. 본문의 경우 라반과 야곱 대신, 사무엘과 사울이 등장해 있다. 예언자이자 사사인 사무엘은 말씀 측면에서의 주님을, 왕으로서의 사울은 말씀 측면의 주님에게서 오는 진리를 각기 표현한다. 이 말을 다른 말로 바꾸어 놓는다면, 사무엘은 신성한 진리(Divine Truth)를, 사울은 신성으로부터의 진리이다. 본문의 미스바는 주님의 인성 속의 신성한 자연적 원리에 영적인 것의 현존, 즉 신성으로부터의 진리에 신성한 진리가 현존함을 의미한다.
백성들이 다 모였을 때, 사무엘은 그들에게 그들의 왕이 이미 기름 부어졌다는 것, 그래서 그들이 따라야만 하는 왕에 대해 설명하기 위해 지파들을 집합시켰다고도 말하지 않았다. 하느님이 임명한 통치자에 관한 한 마디 언급도 없이 그는 온 지파를 내세우고 제비를 뽑음으로서 뽑히는 사람이 왕으로서 수많은 이스라엘 백성에서 신뢰가 가도록 했다. 제비뽑는 관습은 이스라엘 족들이 신성에 직접 호소하여 그 결정을 하느님께 맡기는 것으로 널리 인정되어 있었다. 그리하여 사무엘은 말했다. “이제 지파별, 씨족 별로 여호와 앞에 나와 서시오.” 이스라엘 백성으로 표현된 교회란 지파별, 씨족별로 표현된 선함과 진리라는 두 개의 큰 원리로 나뉘어 배열되어 진다. 이 큰 원리가 계속 갈라져서 주님이 선택하고자 하는 사람에게 제비가 떨어질 때까지 이어진다. “사무엘이 이스라엘 온 지파를 내 세우고 제비를 뽑자 베냐민 지파가 뽑혔다. 다시 베냐민 지파를 갈래별로 내세우고 제비를 뽑자 마드리 갈래가 뽑혔다. 다시 마드리 갈래를 한 사람씩 내세우고 제비를 뽑자 키스의 아들 사울이 뽑혔다.” 이 모습은 일반적인 것에서 세부적인 것으로, 그리고 이어서 세부 사항 중 하나 하나로 갈라져 가는 것임을 확실히 알 수 있다. 베냐민 지파가 표현한 일반적 원리는 이미 살핀바와 같이 최말단 형태, 또는 행동에 있는 진리의 상태이다. 기둥 되는 나무에서 출발하여 배열되는 세부적인 진리들, 부모라는 가지에서 선이 뻗쳐 나오는 모습이 마드리 갈래로 의미되고 있다. 그리고 그 가지로 부터 있는 한 개 한 개의 진리, 즉 최말단의 진리가 사울로 의미된다. 이것이 지상에서 드러나지게 되는 천국에 있는 신성으로부터의 진리이다. 그러나 이 진리는 수많은 변화를 통과하게 되고, 이 변화는 진리가 완전해지기 전, 수많은 고통을 통과하여 결과된 변화를 거쳐, 결국 정의로 건설되는 왕국 속의 완전한 통치자가 된다.
그런데 새롭게 뽑히는 왕과 연결되는 또 다른 신비한 주위 환경이 있다. 제비가 키스의 아들 사울에게 떨어져서 사람들이 그를 찾았으나 발견하지 못했다. “사람들이 여호와께 ‘그 사람이 여기에 와 있습니까?’ 하고 묻자 여호와께서 ‘그렇다, 저기 짐짝들 틈에 숨어 있다’ 하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사람들이 뛰어가 그를 데리고 나왔다.” 사울이 자신을 숨겼다는 것은 그가 매우 얌전했다는 증거가 된다. 그러나 그 주변 환경에는 더 깊은 의미, 더 교훈적인 의미가 담겨 있다. 사울이 표현한 진리는 백성들로 표현된 교회가 발견할 수 없었다. 그 진리는 과학물이라는 것들 속에 그 자체를 숨기고 있다. 짐짝(stuff)으로 번역된 이 단어를 더 직바로 번역한다면 그릇들(vessels)이라 생각된다. 그리고 그릇은 과학에 속하는 것을 나타내는 상징물이고, 이는 진리를 담는 그릇(receptacle)이다. 주님이 세상에 오셨을 당시에도 이 진리는 그 진리를 찾아 헤매던 이들 조차도 발견할 수 없었다. 이 진리는 과학에 속한 사항 속에, 종교적인 과학물 아래에 숨겨 놓여 있으면서 오로지 하느님께 물어 오는 사람에게만, 신성한 안내에 의해서 발견될 수 있었다. 이와 똑같은 처지가 표본이 된 백성의 역사에서 또 다른 사실로 가르쳐지고 있는 것이다. 아브라함이 아들 이사악을 제물로 바치고자 하여 제물이 된 아들을 칼로 찌르고자 손을 들어올린 순간 하늘로부터의 소리가 그를 저지시켰을 때, 그가 뒤를 돌아보니 수양 한 마리가 그의 뿔이 덤불에 걸려 꼼짝 못하는 것을 보고, 그것을 잡아 아들 대신 제물로 바쳤던 성경 줄거리가 있다. 덤불에 걸린 수양과 그릇들 틈에 숨은 사울은 똑같은 일반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 수양은 진리의 상징물이다. 그리고 뿔로 말미암아 잡혀 있게 한 덤불(thicket)이 과학물(scientifics)이다. 주님에 의해 해방될 때까지 진리는 덤불에 서로 얽혀 있거나 속박되어 있다. 역사의 내적 의미 안에 구속의 역사와 연결된 사건들이 취급되는데, 이 차원에서 수양은 주님이 인성을 신성화 하시어 해방시켜 줄 때까지 중간 상태에서 감금된 채 있던 영적 사항들을 표현한다. 그리고 그것은 이사악의 잠재적인 제물로도 표현된 것이다. 그러나 역사적 의미가 각 개인과 관련될 경우, 그 사건의 영적 의미는 원리들에 관계된다. 사실 영적 마음에 있는 원리는 그 자체가 과학물에 포로가 되어 얽혀져 있다. 그러나 그 원리들은 주님이 해방시켜 줄 수 있는 희망 있는 죄수 같은 것이다.
사울이 숨은 곳에서 끌려 나와 사람들 가운데에 서자 그들 중 가장 키가 컸다. 그리고 “사무엘이 백성에게 ‘여호와께서 뽑으신 이를 보아라. 이 나라에는 이만한 인물이 없다’ 하고 선포하자 온 백성이 ‘우리 임금 만세’ 하고 외쳤다.” “임금 만세, live the king” 라는 표현은 환호하는 표현 중 더 의미 있는 표현에 속한다. 이는 왕이라는 진리가 생명을 가지기 위해 그 안에 사랑을 가져야 할 것이라는 소원을 표현하는 형체이다. 왜냐하면 사랑이 생명인 바, 진리가 사랑을 담아야만 살아 있을 수 있기 때문이요, 믿는 자들이 자기 신앙을 사랑을 수단으로 생명을 불어넣어야 그 믿음은 확고 부동한 믿음이 된다.
사울에 관한 두 개의 선거, 하나는 직접 임명하는 방식이고, 또 하나는 제비 뽑는 방식이지만 이 둘 모두 주님에 의거한 방식으로 하나는 내적 인간, 또 하나는 외적 인간에 속한 선거이다. 이 선거 방식은 왕과 왕국에 관한 마지막 정착지는 아니었다. 또 다른 사항은 다음 장에 기록되어 있다.
환호하는 갈채로 사울이 왕으로 승낙되어졌을 때, 사무엘은 백성에게 군주제도를 말해 주고 책에 기록하여 주님 앞에 보관해 두었다.
모든 미래가 현재에 존재하는 신성한 지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왕을 바랠 것이며, 그들이 선택할 왕도에 관하여는 모세의 법에서 주어지리라는 것을 보셨다. 즉 “너희는 너희 하느님 여호와께서 주시는 땅에 들어가서 그 땅을 차지하고 자리를 잡으면, 이내 주변에 있는 모든 민족들처럼 왕을 세우고 싶은 생각이 들 것이다. 그런 생각이 들면 너희는 반드시 너희 하느님 여호와께서 골라 주시는 사람을 왕으로 세워야 한다. 같은 동족을 임금으로 세워야지, 동족이 아닌 외국인을 임금으로 세우면 안된다” (신명기 17:14,15). 교회의 상태가 사랑이 지배하지 않고 진리의 지배를 받는 상태일 때, 무엇보다 먼저 필요한 것은 통치하게 되는 진리가 순수해야 하지, 겉치레식의 진리이어서는 안 된다는 것, 그 진리는 반드시 말씀으로부터 있어야만 되고 그 외의 것에 근원을 두어서는 안 됨을 위 구절은 말해 주고 있다. 한가지 더 필요한 것은, 이 진리는 선함과 관련되어 있어서 교회 속의 믿음이 선행으로부터 파생되도록 해야 할 것이다. 이 사항이 같은 동족으로부터 왕을 세우도록 하는 명령 속에서 가르쳐 지고 있다. 형제란 선행의 은총을 의미하는데, 그 이유는 선행 만이 형제 관계로 묶어 주는 결합력이 있기 때문이다.
위 구절의 뒤를 이어 더 명령되는 것은, “왕이라고 해도 군마를 많이 기르는 일만은 하지 못한다. 백성을 이집트로 다시 보내어 군마를 많이 얻어 오게 해도 안 된다…. 왕은 또 많은 후궁을 거느리지 못한다. 그러면 마음이 다른 데로 쏠릴 것이다. 은과 금을 너무 많이 모아도 안 된다” (신명기 17:17). 이 절이 가르치고 있는 바는, 진리는 이집트의 말(horse)로 의미되는 자연적인 것들에 관한 지식들에 의해 부패되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진리 자체는 영적 마음에 거주하고 있지만, 이 진리와 연결되는 과학, 애착, 지식들은 자연적 마음에 속해 있는데, 이 마음 자체가 이집트이다. 그래서 왕은 군마를 불릴 목적으로 백성을 이집트로 되돌아가게 해서는 안 된다고 명령하고 있으시다. 그 이유가 위와 같은 짓은 기껏 해방되었던 마음의 상태에서 되돌아가, 영적인 것들이 자연적인 것에 종속되는 것, 다시 말해 진리를 과학 밑에 두는 격이기 때문이다. 이런 상태가 서간문에서 사도들에 의해 잘 묘사되고 있다. “그러나 이제는 여러분이 하느님을 알고 있을 뿐 아니라 하느님께서 여러분을 알고 계신데 왜 또 다시 그 무력하고 천한 자연숭배로 되돌아가서 그것들의 종노릇을 하려고 합니까?” (갈라디아 4:9)
군주 제도를 백성에게 말해 준 것 외에, 사무엘은 그것을 책으로 써서 주님이 현존하시는 곳, 성막의 주님 앞에 보관해 두었다. 살아 계신 하느님의 성막, 또는 성전은 거듭나는 마음들이다. 군주 제도란 주님 왕국의 원리들이요, 이 원리들은 거듭나는 마음 안에 씌어져 보관되고 있다. 심정에 새겨질 때 신성한 현존 안에 놓인다. 비록 군주 제도를 두루마리에 기록한 것이 미래 행동을 의심하지 않게 했다 해도, 이 행동과 기록된 사건들과는 영적 연결이 있다. 왜냐하면 왕국의 법칙이 내적 인간 안에 새겨질 때, 왕국을 형성한 모든 진리들은 나아가 각자의 선 안으로 들어간다. 마치 사무엘이 온 백성을 자기 집으로 돌려보내는 것과 같다. 여기서 특별히 언급되는 것은, 사울도 역시 기브아에 있는 집으로 돌아갔다는 것일 게다. 두 장소가 이 이름을 가지고 있다. 하나는 유다 지역에 있고 본문의 경우는 베냐민 지역에 있다. 유다에 있는 것은 오랫동안 궤가 머물러 있던 장소로 유명한데, 이 장소로부터 궤는 다윗의 시대 때 예루살렘인 위쪽으로의 진보를 시작했다. 궤의 진보는 최말단에서 가장 깊은 데로의 진보, 마치 이 천국에서 저 천국으로, 가장 높은 천국까지 전진하는 교회의 진보를 표현했다. 궤의 진보가 개시된 곳인 기브아는 교회의 최말단, 즉 교회의 자연적 원리를 의미한다. 두 기브아는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지만, 유다의 기브아는 올라가는 상태가 시작되는 가장 낮은 것, 베냐민의 기브아는 내려가는 상태가 끝나는 가장 낮은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런 의미들도 최말단 수준을 표현하는 사울과 관련되어 한 목소리를 내듯 하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기브아를 글자대로 뜻을 보면 작은 산(hill), 즉 언덕이다. 본 장 10절의 경우에서 이 뜻에 대한 예를 찾아 볼 수도 있다. 언덕은 선을 의미하는 바, 최말단의 선은 사울이 표현한 최말단 진리의 집이다. 사울이 기브아로 돌아갈 때, 그를 따르도록 마음을 내키게 한 군인들도 함께 따라 나섰다. 이 군인들이란 거짓에 대항할 각오가 선 진리들, 진리를 열심히 바라는 이들, 영적 삶을 강건하게 해 보겠다는 것, 이런 강건은 신념 측면 뿐아니라 진리를 사랑함 속에서, 그들의 신앙은 지적 측면 뿐아니라 심정 측면에서도 주님이 사랑의 불로 건드려 주신 심정으로 강건해 지게 하려는 사람들을 말한다. 추상적 의미에서 볼 때 이런 군인이란 진리 자체를 말하고, 이런 것이 교회를 지배하기 시작한 진리에 더 추가되어야 하는 것이요, 신실할 마음에 더 추가되어야 하는 것들이다.
그러나 진리가 마음속에서 강력하게 행동하게 되면, 그로 인한 결과의 하나는 그것에 속하는 악들이 흥분된다는 것이다. 사울을 따라 나선 군인들이 있는 반면, 그를 멸시한 자들은 “이 친구가 어떻게 우리를 구할 수 있으랴?” 라고 말하면서 얕잡아 보고 선물도 바치지 않았다. 이렇게 주님을 표현한 역사물은 세상에 계셨을 때의 주님과 꼭 같다. 하느님께서 마음을 건드려 주신 자들이 그분의 제자가 되어 주님을 따랐고, 그 반면 유대인, 특히 성직자의 경우, 이 사람(예수)이 우리를 구할 수 있을까? 라고 불평했던 것이다. 그들은 주님을 멸시해서 어떤 선물도 바치지 않았다. 그러나 주님은 본문 마지막 절과 같이 잠잠해 하셨다(held peace). 아마 이를 더 직바로 표현해 본다면, 그분은 귀머거리 같았다 라고 말해진다. 이사야 42장 19,20절을 보면, “내 종과 같은 소경이 또 있으랴? 내가 보낸 심부름꾼과 같은 귀머거리가 또 있으랴? 나의 사명을 띠고 가는 자와 같은 소경이 또 있으랴?… 너는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는 청맹-과니,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 귀머거리다.” 주님의 귀는 그분의 자녀들이 외치는 것에는 열려져 있으나, 방자한 자를 향해서는 닫혀져 있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이렇게 읊고 있다. “여호와여, 당신께서 사람의 죄를 살피신다면, 감당할 자 누구이리까? 그러나 용서하심이 당신께 있사오니 이에 당신을 경외하리이다” (시편 130:3,4). 왕은 백성들의 심정 안에 진리와 정의를 새김으로 통치하여야 할 것임이 왕으로서의 주님을 맨 처음 표현하는 이스라엘의 초대 왕의 선거에 요약되어 있다..

사무엘상 9장 15-27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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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상 제9장 15-27절

사울을 대접하는 사무엘

사울과 그의 종이 성 안으로 들어갈 때, 사무엘은 성 밖으로 나오고 있었다. 그들은 개인적으로는 알지 못하는 사이였다. 그러나 선견자, 그는 전날 사울이 올 것임을 미리 하느님께로부터 통보 받은 터인지라, 그는 자기 앞에 서 있는 사람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주님께 울부짖어 호소했던 것, 불레셋의 수중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구해 내도록 기름 부워질 사람이라는 것을 감지하고 있었다. 이제 신성한 존재가 이스라엘에 왕을 세워 주려고 하는 특별한 이유를 본문에서 배우게 된다. 왕을 세우는 이유는 백성들을 흡족하게 해 주려는 것만이 아니라 그들의 적들로부터 구해 주려는데 있었다. 이 적들 또한 그 적과 맞붙도록 왕을 요구한 것과 같았다. 가나안 지역에 있는 각 나라들은 교회가 맞서 싸워야 할 각기 다른 악과 거짓 원리들을 표현한다. 그 중에서도 아주 끈질기게 강력한 이스라엘의 적인 불레셋 족은 교회가 대대로 싸워야 하는 적, 그러면서도 쉽게 그 적에 노출되고 마는 적, 즉 가장 질긴 거짓 원리 중의 하나를 표현했다. 이 거짓 원리 또는 거짓 신조란, 사랑하고 행동하지 않아도 알고, 믿기만 하면 구원받을 수 있다고 하는 원리, 아주 간략히 말하면 신앙 만(faith alone)으로 구원된다는 원리이다. 이 원리의 본성을 곰곰이 생각해 보면, 믿음만이라는 것은 악에 바탕을 둔 거짓 신조인데, 그 이유가 그 원리는 거짓 신조 안에 뿌리를 박고 있을 뿐 아니라, 그 원리를 끌고 가기 때문이다. 이런 거짓의 반대는 선함에 바탕을 둔 진리인데, 이것이 왕으로 표현되어지고 있다. 사사 시대부터 불레셋 족은 이스라엘을 괴롭혀 왔다. 그래서 그 시대 이스라엘의 가장 큰 영웅인 삼손까지도 그들을 정복하지 못한 채, 붙잡혀 눈이 뽑히고, 감옥에서 연자맷돌을 굴리면서 마지막에는 그들의 노리갯감이 되는 수모를 겪어야 했다. 이는 신앙 만을 신봉하는 교인들이 자신들을 자유롭게 해 주는 진리에 눈멀게 하고, 자신들을 안내해야 할 이해성의 눈이 뽑히게 하며, 오류를 좋아하도록 추론을 비비꼬아 밀어붙임으로 지성이라는 연자맷돌을 돌리게 만들면서, 부패된 애착들을 탐식하는 노리갯감이 되게 하고 만다는 것을 상징하고 있다. 삼손은 단독으로 불레셋에 맞섰었다. 그러나 사울은 백성들의 수령이 되어 전투에서 그들을 이끄는 대장이 되었다. 이런 구조적 차이점이 이스라엘로 하여금 왕국을 만드는 계기가 되어 지도자를 지닌 이스라엘은 불레셋과 그들 국가로 표현되는 반대되는 것과 대비를 이루게 된다.
미래의 이스라엘 왕이 누구인지 알고 있는 예언자 앞에 서게 된 “사울이 성 문간 안에서 사무엘에게 다가가서 물었다. ‘여기 선견자 한 분이 계시다는데 그분의 댁이 어딘지 가르쳐 주십시요.’” 사무엘과는 아주 달리 키스의 아들은 계시를 받은 적이 없었는 바, 그는 자기가 묻고 있는 상대방을 알아 볼 리 만무이다. 영적 상황 속에서 더 높은 것은 비록 더 낮은 것이 더 높은 것을 알아보지 못할 때도 더 낮은 것을 알아 볼 수 있는 차이가 서로간에 있다. 그 이유가 유입(influx)은 마음의 안쪽에 들어간 다음 바깥쪽으로 건너가기 때문이다. 이렇게 건너감이 있어지는 곳은 합리적 마음이라는 문간이요, 이곳에서 영적인 것이 자연적인 것과, 자연적인 것이 영적인 것과의 쌍방간의 교통을 수단으로 해서, 자연적인 것이 영적인 것에 문을 열게 되어, 영적인 것은 바깥쪽을 둘러보고, 자연적인 것은 안쪽을 살필 수 있게 되면서 서로 접근이 가능해져 만나는 중간 구역, 이 구역이 문간(gate)으로 여기에서 사울과 사무엘이 만난 것이다. 자연적인 것이 영적인 것에 접근하고 싶을 때, 특별히 내적인 진리가 거하고 있는 선을 알고 싶어 할 때, 이것이 본문에서 사울이 예언자의 집이 어디에 있는지 알고자 묻는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다. 그러면 내적 인간은 즉시 스스로 밝혀 준다. “바로 내가 그 선지자요.” 자신에 관한 간단한 사실과 교통을 이루면서, 사울은 사무엘에 앞서 산당으로 올라간다. 그 이유가 그 날 사울은 사무엘과 더불어 잔치 음식을 먹어야 했기 때문이고, “내일 아침에 그대가 걱정하고 있는 일을 다 일러준 다음 떠나도록 해 주리이다. 사흘 전에 잃어버린 암나귀 일로 더 이상 마음 쓰지 마시오. 나귀는 찾았소. 이스라엘의 모든 기대가 누구 어깨에 걸려 있는지 아시오? 그대와 그대의 가문에 걸려 있기” 때문이다. 위와 같은 기적 같은 지식이 영적 진리를 상징한다. 영적 마음은 자연성에 속하는 모든 것을 알고 있다. “어떤 사람이 사람 속에 존재하는 것을 알고 있어 인간 속에 있는 영을 구해줄까?” 사흘이란 시간과 상태 모두가 충만해졌음을 상징하는 숫자이다. 이는 잃었던 것이 회복되었음을 보게 한다. 그래서 진리 측면의 신성은 그 진리에 소속된 모든 선과 더불어 마음이 공통적으로 원하는 원리의 바램, 마음을 통치하는 힘이 되어 간다.
얌전하고 겸손한 표현으로 사울은 자신이 전혀 기대하지도 않았던 영예를 사양한다. “그렇지만 저는 베냐민 사람이 아닙니까? 저희 지파는 이스라엘 지파 중에서도 가장 작은 지파입니다. 저의 문벌은 베냐민 지파 중에서도 가장 초라합니다. 그런데 어찌 저에게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자신에게 주어지는 높은 지위와 자신을 비교해 보건대 자신이 너무 미약하다고 생각하게 만든 그의 족보 역시 신성한 선택에 포함되는 것이었다. “하느님께서 내노라 하고 우쭐대는 것들을 좌절시키는데 약한 것을 선택하신다. 육에 속한 것 치고 그분 앞에서 자랑될 것은 하나도 없다.” 이는 하느님 자신의 권능을 과장해 보이시려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그분이 차지할 영광을 인간이 강탈하려 드는 것을 미리 차단하시고자 함은 더욱 아니다. 그렇게 행하시는 이유는 오만함이 신성한 역사를 방해하려 들기 때문이고, 그런 인간이 애쓰는 최대의 노력 역시 진리와 정의를 위해 패배되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자기 지파나 가문에 대해서 사울이 말한 서술에는 어떤 동양적 스타일이 담겨 있는 듯 하다. 이런 말투는 자신의 겸손함을 나타내는데 많이 사용된다. 사실 사사 시대 때에 베냐민 지파에서 있었던 참혹한 학살이 그 지파를 세력 없게 만들었을는지도 모른다. 어쨌든 9장 첫 절에서 언급된 키스에 관한 묘사는 유지, 즉 힘 있는 자라고 표현한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사울의 가문이 베냐민 지파 중 가장 초라한 가문이었다고 생각되지 않게 해 준다.
이제 사무엘은 사울과 그의 종을 식당(거실, parlour)으로 데리고 들어 가 삼십 명 가량 모인 손님들의 상좌에 앉혔다. 이들이 음식을 먹으러 들어간 방은 본문에서 사용한 식당이라는 단어가 함축하는 것보다 더 거룩한 특성을 지닌 방이었을 것임은 의심할 바 없다. 이 단어가 식당으로 번역된 것은 유일하게 이 구절에서 일 뿐이다. 그러나 번역에서 자주 등장하는 것은 깊은 방, 중요한 방, 즉 침실, 회의실(chamber)에 상당하는 단어들로 반복해서 나타나는데, 특별히 성전 속의 방으로 나타난다. 에스겔에게 영감을 넣어 보여준 성전의 방 중 하나는 제단의 관리 임무를 가진 당직 성직자나 봉직자를 위한 방이었다 (에스겔 40:45,46). 그리고 느헤미야서를 보면, 어느 방의 경우, 율법에 의거 백성들이 성직자나 레위 지파 사람, 합창 대원을 위해 가져온 예물을 저장하기도 했음을 배운다 (느헤미야 13:5). 사울이 들어 온 방은 제물이 바쳐지고 먹게 되는 거룩한 장소에 있었다. 그리고 거룩한 사람들과 함께 자리에 앉아 거룩한 잔치에 참석하고 있는 것이다. 그 당시의 이 방에는 하느님의 이름으로 초대된 손님들 외에는 아무도 들어가지 못했던 방이고, 어느 누구도 그 방에서 함부로 음식을 먹을 수 없었던 방, 오로지 거룩한 교제만이 거행되었던 방이었다. 이 방은 내적 인간 안에 존재하여 이 방을 어떤 악도 결코 뚫고 들어오지 못하고, 거기서는 거룩한 애착과 생각들만 있는 곳으로 주님이 소개되는 방이요, 그분이 내리시는 사랑 속에서 기뻐 뛰며 그분의 이름을 드높이는 방이다. 우리가 이 방에 자의식을 가지고 들어 갈 수 있는 때란 오로지 세상에 대한 관심을 넘어설 때만이 가능하다. 본문에서 표현되는 이 방의 경우, 우리 속의 모든 애착과 생각들을 통치하는 애정과 생각, 더욱이 내적 인간 속의 애착과 생각들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방에 있는 애착과 생각들을 말하고 있다. 사울이 앉은 자리는 삼십 명 가량 되는 손님의 좌석 중에서 가장 중요한 좌석이 배정되어 있다. 말씀 속에 있는 여느 숫자들처럼 본문의 숫자, 삼십 역시 상징적이다. 삼십은 보다 높은 충분함을 의미하는 숫자이다. 이 숫자에는 새로운 상태의 시작과 시작된 상태의 본성 – 싸움 후에도 또다른 싸움을 위해 남아 있는 것이 충분함을 뜻한다. 20세 이상 된 남자가 군인으로 전쟁에 나갈 의무 기간(warfare)이 삼십 년이듯, 레위인의 만남의 장막에서의 임무 수행 기간은 삼십 년이었다 (민수기 8:24,25). 다윗이 통치를 시작한 것도 삼십 세 되어서였다. 그리고 주님 자신도 그분의 공생애에 진입하시는 데까지 삼십 년이 걸리셨다. 이상과 같은 몇 가지 경우는 삼십 년간 준비된 후 투쟁에 들어가는 삼십에 관한 사항이다. 본문의 경우, 삼십이란 숫자는 햇수에 관계된 것이 아니라 사람 숫자에 관계되고 있다. 따라서 이 사람들이란 새로운 애착들과 생각들이고, 이것들의 획득은 진실로 새로운 상태로 들어가는 것, 더욱 확실한 것은 전투가 뒤따라 있게 된다는 것이다. 좌우지간, 현재의 사울은 새롭게 승강되고 있다. 사울이 대접받아지도록 손님들에게 미리 통보해둔 사무엘은 사울을 위해 아껴둔 넓적다리를 가져와 사울 앞에 차려 놓도록 명령하였다. 그 날 사울은 사무엘과 함께 음식을 먹었다. 사울 앞에 차려진 고기는 양으로나 질로나 볼 때 특별히 구별된 손님임을 명시하는 그 당시의 관습이었다. 과거 요셉이 그의 형제들을 만나고 야곱을 모시러 그들이 떠날 때, 베냐민에게 내 준 옷은 타 형제들 것보다 다섯 배나 많이 준 것도 위와 비슷한 예에 해당된다 (창세기 46:22). 특히 사울을 위해 따로 떼어논 넓적다리 고기는 아주 구별되는 고기 부위에 해당된다. 레위인의 규정에 의거, 넓적다리는 쳐들어 바치는 예물로서 아론과 그의 아들들의 몫이고, 가슴(갈비)고기는 모세의 몫이었다 (출애굽기 29:26-28). 이렇게 된 이유는, 넓적다리는 결혼적인 사랑(conjugial love)을, 가슴은 선행(charity)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사울 앞에 놓여진 고기는 성직자의 몫에 해당된 것이었다. 여기에는 위의 설명 외에 특별한 상징성이 담겨 있다. 그것은 이스라엘의 통치가 성직자로부터 왕으로 이전되는 것을 표현한 징조였던 것이다. 사울과 더불어 식사를 한 사무엘은 동석한 손님들에게 자신의 권위가 이전된다는 것을 인식하게 해 주어야 했다. 사무엘은 사사 이자 예언자 였다. 이제 그는 성직자 로서의 직책만을 수행하게 된다는 것을 실지로 비친 셈이다. 우리가 역대기서의 역사적 기록을 인정한다면, 사무엘은 비록 성직자 계급에는 속하지 않았다 해도 최소한 레위 지파에 속해 있음을 알 수 있다 (역대기상 6:16,28 구번역).
잔치가 끝나자, 사무엘과 사울은 산당에서 성으로 내려왔다. 마음이 하느님께로 승강되는 것은 언제나 인간의 일상 업무에로 내려오는 것을 수반한다. 산당에서 성으로 내려감은 성에서 산당으로 올라감만큼이나 필요한 행동이라는 말이다. 우리가 하느님께 예배하는 것은 우리로 인간에 대한 의무감이 더 강해지게 하려는 것일는지도 모른다. “너희가 작은 것에 행한 그것이 곧 나에게 행한 것이다.” 이와 같은 예배가 진실로 하느님을 섬기는 것이다. 비록 사무엘과 사울이 산당의 방으로부터 성으로 내려왔다 해도 그들은 옥상으로 올라가 거기서 앞으로 개시될 왕국에 관련된 모든 문제들을 친밀하게 이야기했다. 그들은 수준 높은 주제들을 다루었을 뿐 아니라, 더 높은 마음의 상태, 내면의 상태에서 대화를 나누었던 것이다. 고귀한 동기나 높은 관점들은 백성들의 복지라던가, 주변 국가들의 우상 숭배가 범람하는 가운데서도 주님을 예배하는 순수성을 간직하면서 그분의 이름에 관한 지식을 보존하기 위해 하느님의 은총으로 건립되는 나라에 관한 높은 주제들에 관해 서로 이야기하는데 적합한 상태이다. 사무엘이 자기 심정 속에 있는 모든 것을 사울에게 말했을 것이고, 그가 진리의 빛 가운데 있으면서 인간을 다루는 방법들을 보여주고, 진정한 왕이요 백성의 진정한 통치자로서 주님을 어떻게 모시어야 하는지 등등의 대화가 오갔을 것이라 생각된다. 이와 같은 경우가 우리 마음 속에도 적용된다. 우리 심정과 지성 안에서 주님의 왕국이 통치되는데 대해 신성한 예언자, 말씀, 또는 그분의 영을 통해 우리를 훈육하시면서 우리 자신의 비밀스런 생각들에 관해 우리에게 조언해 주시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중대한 하루가 마감되었다. “날이 새자 사무엘이 옥상에 대고 ‘일어나 길을 떠납시다’ 하고 사울을 불렀다. 사울은 일어나 사무엘과 함께 밖으로 나갔다. 그들은 성읍의 끝에까지 걸어 내려갔다.” “날이 새서… 일어났다”로 번역된 본문에 대해 어떤 성서 번역자의 경우, 이는 어깨에 짐을 놓는다라든가, 여행을 위해 짐승에 짐을 지우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하고 있다. 우리가 전 날 밤 대단한 결심을 하고 다음 날 아침 일찍 일어났다고 생각해 보면 본문의 날이 새서 일어나 길을 떠나는 사울과 사무엘의 심정 상태를 헤아릴 수도 있을 것이다. 사울은 전 날 깊은 영향을 받기만 한 것이 아니다. 오늘 그는 새로운 것을 받게 되어 있다. 이제 그는 자신이 선택된 자임을 알았고, 오늘 그는 주님이 기름 부을 자임도 알고 있다. 아마 높은 업무를 맡도록 하는 취임식 자체가 최소한 그를 새 사람으로 만들게 된다. 이 새로운 날은 진실로 새로운 상태의 시작인 것이다. 이 날에 관련된 본문 구절의 단어가 새로움을 암시하고 있다. 사무엘과 사울은 일찍 일어났다. 아마 어둠이 채 가시기 전인 새벽이었을 것이다. 이른 아침, 또는 새벽은 신성한 빛이 마음을 새로워지게 흔들어 깨우면서도 새벽 자체가 통상 의미하는 것, 내향의 고요함과 평화가 깃들이는 것을 의미한다. 가장 높은 측면에서 새벽은 주님 자신인 정의의 태양을 의미한다. 그분은 일찍 일어나셔서 그분의 종, 즉 예언들을 보내신다고 말해지고 있고, 그분의 오심은 언제나 아침과 연결되어 있고, 새벽에 비교된다. 낮은 의미를 포함하는 넓은 측면에서 새벽은 새로운 교회의 개시(commencement)이다. 그리고 세부적 측면에서 볼 때, 새벽은 거듭남인데, 그 이유는 한 인간 안에 있는 주님의 왕국이 새롭게 만들어져, 그가 하나의 교회가 될 때를 말하기 때문이다. 아주 세세한 측면에서 볼 때, 새벽은 사랑과 신앙의 선이 인간 안에서 실행될 때와도 같다. 그 이유는 이 선 속에서 주님의 오심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야곱의 이름이 이스라엘로 불리게 한 천사와의 씨름이 승리로 끝난 때도 새벽이었다. 이는 기독교의 제자가 시험을 극복했을 때이다. 이런 씨름에 승리한 새벽에 우리는 자연적 상태를 넘어 영적 상태가 된다. 이런 새벽에 사무엘은 승강된 마음을 표현하는 옥상으로부터 사울을 불렀다. 이 때 사무엘은 사울과 담화를 한 게 아니라, 그를 멀리 떠나 보낸다. 즉 그를 그의 아버지의 집으로 보내되, 왕의 직무를 맡는다는 인장을 지참하게 해서 서둘러 보내지고 있다. 이렇게 해서 그들은 밖으로 나갔다. 밖으로 나가는 것은 내적인 것으로부터 외적인 것으로 진행되는 것, 또는 내향의 원리를 외향의 행동으로 옮기는 것이다. “그들은 성읍의 끝에까지 걸어 내려갔다. 거기에서 사무엘이 사울에게 일렀다. ‘종을 먼저 보내고 그대는 잠깐 여기에 서 있으시오. 내가 하느님의 말씀을 전해 드리리다.’” 사울이 사무엘을 처음 만난 곳은 성문 근처였다. 그리고 사무엘이 사울을 해고시켰던 곳도 성문께였다. 그러나 두 상황은 얼마나 큰 차이가 있는지! 취임과 해임 사이에 얼마나 많은 사건이 지나갔는지! 삶의 회전은 언제나 원 위치한다. 그러나 삶의 시작과 끝은 얼마나 큰 차이가 있는지! 사무엘과 사울이 성문의 끝에 당도 했을 때 사무엘은 사울에게 하느님의 말씀을 전해야겠으니 멈추어 서 있으라(stand stil)라고 말했다. 이는 이스라엘족들에게 명령하신, “멈추어 서서 하느님의 구원하심을 보라.” 그리고 간곡히 권유하는 말씀, “멈추어 있으라. 그리하여 내가 하느님인 줄 알아라,” 위 말씀은 자아에 근원을 두고 있는 모든 활동을 중단하라는 것, 모든 것을 하느님께 의존하라는 뜻이다. 이 뜻은 그분의 백성에게 하신 말씀, “너의 힘은 조용함과 신뢰 안에 있다.” 그리고 그들에 관해 예언자가 말한다. “그들의 힘은 멈추어 앉아 있는 것이다” (이사야 30:7,15). 앉아 있다는 것은 의지 또는 사랑의 상태와 관련을 가지고, 서 있다는 것은 이해성 또는 신앙의 상태와 관련이 있다. 위와같은 서 있음(stand still)을 사무엘은 사울에게 요구하고 있다. 즉 우리로 하느님의 말씀을 받을 수 있게 하는 것은 지적 이기심의 활동이 멈추어 서 있을 때임을 암시하고 있다. 왜냐하면 진정한 믿음은 하느님께 신뢰를 두는 것, 이 신뢰야 말로 자신에게 신뢰를 두고 활동할 때 보다 더욱 잘 활동할 수 있게 해 준다. 이렇게 지적 이기심을 멈추어 서게 하는 것은 예언자에 의해 사울이 기름 부워지는 것으로 표현된 성별(Sanctification)을 준비하는 것이 된다. 그 이유는 사무엘이 멈추어 서 있으라는 요구에 사울이 응한 것이 그로 하여금 왕으로 기름붓게 한 이유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주제는 다음 장에서 취급되어진다

사무엘상 9장 1-14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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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상 제9장 1-14절

아버지의 나귀를 찾는 사울

신성한 존재는 백성들이 왕을 세워달라고 하는 요구에 동의 하셨고, 신성한 섭리는 왕을 선택하는 쪽으로 인도하시어, 신성한 지혜는 그 시대와 그 백성에 가장 적절한 왕을 보았다. 높은 의미에서 볼 때, 표현적 특성을 가장 잘 수행해낼 인물을 보신 것이다.
사울, 그는 베냐민 지파에 속하는 키스의 아들인데, 그는 아버지가 기르던 나귀가 없어져서 찾아 오라는 명령을 받았다. 사울은 나귀를 오랬동안 부지런히 찾았지만 헛수고를 하여 종에게 그만 돌아 가자고 제의 하자, 종은 이를 선견자에게 물어 보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제안했다. 한편, 사무엘은 사울이 오고 있다는 것, 사울에게 해야 할 일들에 관한 신성한 명령을 받고 있었던 것이다. 그 결과, 사무엘은 하느님의 백성을 다스리는 수령으로 사울을 기름 부었다.
위의 간단한 줄거리는 매우 단순하지만 그 곳에는 자연적인 것과 초자연적인 것, 직접적이고도 간접적인 태도나 수단들로 섭리가 그 목적을 결과하게 하는 것을 보여 줌으로 우리의 흥미를 끌어가고 있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신성하고 영적인 사항들이 특징지워지도록 성경 이야기의 바깥 사건을 지휘해 가심으로 하느님의 방법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는 바, 교훈적이면서도 흥미를 잃지 않게 한다. 영적 빛은 우리로 하여금 앞에 놓인 구절들을 곰곰히 생각해 보겠끔 제안하고 있다.
주목해 볼 첫 번째 사항은 이스라엘의 첫 왕은 베냐민 지파에서 뽑혀졌다는 것이다. 둘째 왕의 경우는 유다 지파로부터인바, 두 지파는 이스라엘 후손을 출생 순서가 아닌 계급별로 분류할 경우, 계시록 7장 3-8절에서 표현된 바와 같이, 둘째 왕은 첫째에, 첫째 왕은 마지막에 해당되는데, 이 두 지파는 하느님의 왕국을 구성하는 원리들의 첫째와 마지막을 표현하게 되고, 가장 높은 의미에서 볼때, 주님이 입으신 처음의 인성과 나중의 인성, 즉 신성화하신 인성을 표현한다. 첫째와 마지막 사이에 놓이는 모든 원리들은 첫째와 마지막을 거론하게 되면 일괄해서 포함되어 진다. 그러므로 유다와 베냐민 지파는 이스라엘의 열 두 지파 모두를 망라하는 바, 이는 교회를 구성하는 선함과 진리에 관한 모든 원리들을 표현하는 것이다. 표현된 모든 원리들은 주님이 세상에서 입으시어 신성화시키셨다. 왜냐하면 선함과 진리에 속한 모든 원리들이 인성을 구성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사람 모양으로 생겼다고 해서 사람인 것이 아니라, 자기를 지은 분의 형상을 만드는 자신의 품성에 따라 사람이 되는 것이다. 주님께서 육을 입으셨을 당시, 인간 본성들은 하느님의 형상을 잃고 있었다. 다시말해 인성을 구성한 원리들은 거의 뒤집혀 있는 상태였다. 육을 입으심으로 주님은 최말단에서의 인간이 되신 것인데, 그분이 입으시고 신성화 하신 최말단에서의 인성들이 다윗과 솔로몬, 사울로, 그리고 유다와 베냐민으로 표현되어지고 있다. 이스라엘의 첫 왕이 뽑혀진 지파가 베냐민 지파라는 것은 주님의 왕국의 기반이 선함과 진리의 가장 낮은 수준에 놓여진 뒤, 차츰 승강되어 가장 높은 수준에 도달할 때까지 승강된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치시기 위한 것이다.
그런데 신성한 역사는 단번에 우리의 시선이 주목되도록 사울을 소개하지 않고 있다. 먼저 키스라는 사람에게 친숙해지게 하고 있다. 이는 후에 다윗이 소개될 때도 아버지 이새를 먼저 소개받고 나서 다윗으로 이어졌듯 오늘 본문의 경우도 마찬가지 과정이다. 고대 시대 때는 아버지를 통해 아들이 소개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는데, 거기에도 영적 이유가 있다. 성경에서 아버지와 아들은 선함과 진리를 의미한다. 그 외, 쌍으로 언급되는 경우에서도 같은 뜻을 지닐 때가 많다. 단지 그 연결이나 수준의 상황은 다르다. 아버지는 선을 뜻하는데, 이로부터 진리가 파생되고, 아들은 진리를 뜻하고, 이로부터 선이 파생되어진다. 이는 주님 자신에 관련시켜 생각해도 같은 의미를 갖는다. 아버지는 신성한 선함, 아들은 신성한 진리이시다. 왜냐하면 아들이 아버지로부터 오듯, 진리는 선함으로부터 오기 때문이다. 그 외에 신성한 아버지와 신성한 아들에 관한 의미는 더 이상 없다. 그래서 사울의 아버지가 우리에게 먼저 소개되는 이유는 사울로 표현되는 진리가 파생되는 것은 선으로부터 임을 우리에게 가르치시기 위해서이다. 우리가 성경에서 거론되는 자연적인 이름에서 영적 의미를 찾아 본다는 것은 언제나 쉽지는 않다. 그러나 그 사람을 특징지워 묘사하는데서 그 의미의 파악에 대한 실마리를 가질 수는 있다. 키스는 세력있는 사람, 즉 유지였다. 힘이 있다함은 종종 부유함까지 덧붙여 뜻할 때가 많다. 한 단어가 힘이 세다는 것과 부유하다는 것을 함께 의미할 때도 하나는 선의 힘을, 다른 하나는 진리의 힘을 뜻한다. 그 둘 중 어느 하나도 하나만으로는 어떤 힘을 갖지 못하고 오로지 둘이 연합할 경우만 힘을 발휘한다. 왜냐하면 선은 진리를 수단으로 하지 않고서는 힘이 없고, 진리는 그 근원을 선에 두지 않고서는 힘이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 둘은 언제나 따로 따로 구분되어진다. 힘에는 두 종류가 있게 되는데 그것은 의지의 힘(power of will)과 지성의 힘(power of intellect)이다. 그런데 의지는 지성 없이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지성은 의지 없이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어찌됐든 이 둘 각각은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 의지가 지성보다 강할 경우도 있고 그 반대로 지성이 의지보다 강할 경우, 판단에 약점이 나타난다. 지성이 의지보다 강할 경우, 양심적인 것, 즉 성실도에 흠집이 생긴다. 이 둘의 균형과 하나된 행동이 완전한 인간을 만든다. 이 균형과 하나됨이 세력있는 유지, 키스에서 표현되고 있다.
그런데, 키스 당사자만 본문에서 언급되는 게 아니라 그의 사 대 선조까지 우리에게 소개되고 있다. 네 선조 역시 키스의 묘사에서 표현된 균형과 하나됨을 다시 지적하고 있다. 그 이유는 넷은 둘처럼 결합(conjunction)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네 선조들에 관해 관심을 더 가지고 시간과 지면을 할애한다면 그 이름들은 본문의 영적 의미를 위해 기초를 제공할런지도 모른다. 최소한 한 사람의 이름만은 우리가 언급해 보아야 할 줄로 생각된다. 키스의 아버지는 아비엘(Abiel)이라고 명명되고 있다. 이 이름은 두 단어, 아비(Abi) – 아버지, 그리고 엘(El) – 하느님의 합성어이다. 이미 살핀 바와 같이 선함의 원리는 아버지로 의미되어지고, 진리의 원리는 신성한 이름 엘(El)로 의미되어진다. 구약 성서에서 신성한 존재를 말하는 두 개의 일반적인 이름이 있는데, 하나는 여호와(Jehovah)와 엘로힘(Elohim)이다. 여호와는 영어 성경에서 주님으로 번역되어 우리에게 친숙해 있고, 엘로힘은 하느님으로 번역되어 우리에게 친밀해진 단어이다. 그래서 이 두 개의 거룩한 이름은 신성한 본성의 두 가지 필수 요소, 즉 사랑과 지혜, 또는 선함과 진리를 표현한다. 엘(El)은 엘로힘의 단축형이다. 이 엘이 사람이나 천사들의 이름의 한 부분을 구성할 때, 이 단어는 힘을 뜻하게 되는 바, 아비엘은 세력있는 아버지(powerful father)를 의미한다. 그러나 그 이름이 글자에서 아버지 + 하느님으로 구성되지만 영적 의미에서는 연합된 선과 진리, 진리를 수단으로 있게 되는 선의 세력을 표현하는 것이다. 이상에서 살핀 내용들이 이스라엘의 첫 왕, 사울의 뿌리였다. 이와같은 내용을 전혀 의식치 못하는 키스의 아들이 2절에서 소개되고 있다.
“이스라엘 사람 가운데 그만큼 잘 생긴 사람이 없을 만큼 끼끗하게 잘 생긴 아들이었다. 누구든지 그의 옆에 서면 어깨 아래에 닿았다.” 이렇게 본문은 사울을 묘사하고 있다. 끼끗하게 잘 생겼다(choice and goodly)라는 말은 보통의 잘 생긴 것 이상이라는 말이다. 이 서술 속에서 우리는 진정하고 좋은 것이 서로 묶여 있음을 보게 된다. 이스라엘 사람 가운데 그만큼 잘 생긴 사람은 없었다. 천국과 교회에 있는 모든 진리에서 주님이 떠맡으시어 신성화 하신 선함에 필적되는 진리는 아무 것도 없다. 사울은 끼끗하고 잘 생겼을 뿐아니라 키도 컷다. 누구든지 그의 옆에 서면 어깨 아래에 닿았다. 큰 용모를 뜻하는 성경 용어로는 교만함(high-minded)이 있는데, 이는 영적 의미에서 곧 잘 사용되고 있다. 그러나 이 의미는 오늘 본문의 키가 크다는 것에 포함되어질 수는 없다. 후에 사울은 정말로 교만해져 버렸다. 그는 왕으로 추대된 후 자신의 짧은 시야에 의지하려고 했다 (사무엘 15:17). 그러므로 키가 큰 사울의 용모는 높이를 수단으로 영적으로 표현되는 것, 즉 높고 낮은 등차에서 높은 선함과 진리, 감지할 수 없는 점진적 변화로 작아지거나 커지지 않는 선함과 진리, 그러나 뚜렸한 경계선을 가지고 서로 서로 구분되어 서로 오갈 수 있는 선함과 진리를 표현해 주고 있다. 이와같은 방식으로 전 천국은 세 개의 특별한 천국으로 구별되어진다. 이 세 천국은 분리되지 않으나 그들은 서로 서로 구분되어진다. 세 천국 각각은 자체 속에 감지 안 되는 점진적 변화로 건너가게 되는 등차들을 지니고 있다. 이와 비슷한 것이 자연계의 무지개 일런지 모른다. 거기에는 몇 개의 구분되는 색갈들이 있다. 천국은 무한한 숫자의 다양한 색조로 되어 있고, 그 색조는 계속적으로 변화해서 희미해져 서로 구별되는 등차로 건너간다. 그리하여 각기 다른 색갈을 나타낸다. 사울이 천국에 있는 신성한 진리, 다시 말해서 세상에 오시기 전의 주님의 인성을 구성하는 신성한 진리를 표현하는 것으로 곰곰히 생각해 본다면, 사울의 용모에 관한 주변 상황에서 좀더 뾰족한 의미를 볼 수 있을런지 모른다. 천사들의 지성으로 흘러들듯 주님의 신성한 진리는 인간 형체를 입으셨다. 인간 마음 속에서 신성한 진리는 유한해져 있고, 진리의 의미 역시 불완전한 개념일 뿐이다. 이것은 천국을 통해 하강하는 가운데서 주님이 입으시는 천국에 있는 진리 측면의 신성이었고, 이렇게 그분이 신성한 진리를 이루시되 마지막으로 세상에서 영화하심을 수단으로 신성한 선을 이루셨다. 그러나 주님이 세상에 오시기 전, 지금 있는 천국과 같은 세 개로 구분되는 천국은 없었다. 지금으로서는 가장 높은 천국에 해당되는 천국 하나만이 실지로 존재했다. 이 천국은 아담적 교회(Adamic Church)를 구성한 이들로부터 있어진 천국이다. 다른 천국들, 비록 그 천국들이 실지로는 존재 못했고 잠재적으로 존재했다. 가장 높은 천국, 천적 천국(celestial heaven)은 태고 교회(the Most Ancient Church)의 타락 이후 천국으로 올려진 이들이 천적 천국의 외곽을 형성하여 존재했다. 이들은 둘째 천국, 즉 영적 천국(spiritual heaven)의 핵심을 구성했다. 그러나 영적 천국, 뿐만 아니라 가장 낮은 천국, 첫 천국(the first heaven)이 계속 뒤를 이어 구성되어 존재하면서 영들의 세계까지 이어졌다. 그러나 주님이 인성을 입으시고 신성화 하시기 전에서는, 영적 천국은 천적 천국의 외곽을 정식으로 형성한 것은 아니다. 그리고 영적 천국과 영들의 세계 역시 서로 구분되는 왕국으로 형성된 것도 아니다. 위의 이야기를 상술한 것은 앞으로 있게 될 과제인 이스라엘의 분단, 즉 여로보암 지휘 아래 열 지파가 갈라져 나가게 되어 생기는 두 왕국, 유다와 이스라엘 왕국을 살피게 됨을 미리 예상하여 오늘 과제에서 그에 대한 유용한 설명을 추가한 것이다. 그 과제 속의 어떤 사항은 사울의 용모에 관한 것이 소개 하는 수준에서 언급될 것이라 본다. 사울은 진리 측면에서의 신성, 또는 실지로 형성된 천국에 존재하는 주님의 인성을 표현하는 반면, “이스라엘 사람” 또는 “백성”(구번역 참조)은 영들의 세계에 있는 이들, 즉 실지로 존재하는 천국의 한 부분을 아직 형성하고 있지 않은 이들을 표현한다. 왜냐하면 주님은 영들의 세계를 구하시기 위해 오셨으나, 영들의 세계 뿐만 아니라 자연계 까지도 구하시기 위해 오셨기 때문이다.
천국을 전체적으로 본다면, 광대한 사람(the Grand Man), 즉 가장 완전한 신성한 사람의 형상이다. 이 사람 속에서 가장 높은 천국은 머리를 형성하고, 둘째 높은 천국은 몸 부분을, 가장 낮은 천국은 팔 다리를 형성한다. 낮은 천국이 실제 형성되어 존재되기 전에 이미 그와 똑같은 광대한 사람이 완전하게 존재해 왔었다. 머리 없는 몸체만 있는 형상 같은 천국은 생각해 볼 수도 없는 것이다. 비록 낮은 천국이 실제로는 없었다 해도 이미 말했듯이 잠재적으로 존재해 왔던 것이다. 그 외에도 각각의 미세한 천국 역시 사람 형체로 존재하는데, 이는 사회적 측면에서, 천사 한 사람의 경우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그 이유가 천국은 전체로서도, 세분된 미세한 부분으로서도 주님의 형상을 따라 존재하기 때문이다. 각기 다른 존재는 그것을 구성하는 부분들을 더 완전하게, 더욱 많아지게 변화해 가게 한다. 천국의 형성과 성장은 인류의 시작과 발전에 유사하게 있어왔고, 아마 거의 동시에 있었을런지 모른다. 그리고 천국과 인류, 모두는 개개인의 시작이나 발전과 비슷하다. 따라서 일반 주제에 관한 어떤 생각도 세부적인 것을 공부함으로 획득되어질 수도 있다. 태아로서 시작되는 인간 존재의 형성의 경우도, 처음에는 주축을 이루는 높은 부분들이 형성되고, 다음에 낮고, 외곽을 이루는 부분이 형성되어진다. 그럼에도 모든 부분은 시초에서부터 함께 존재한다. 그러나 형태를 구성시키는 어떤 힘이 잠재성으로부터 실제의 존재로 놓여지기까지 미 발달된 채로 놓여있던 것 뿐이다. “누구든지 그의 옆에 서면 어깨 아래에 닿는” 사울은 천국의 형상을 표현하되, 주님이 세상에 오시기 전의 그분의 인성을 형성한 천국을 표현하는데, 이는 중간 상태 수준에 있던 이들보다 위에, 그리고 자기들을 구원해주기를 바라고 왕을 달라고 요구한 백성들 같이 육을 입으신 하느님에 의해 구원될 때를 기다렸던 이들 위에 군림하고 있었다. 어깨는 힘을, 머리는 지혜를 상징한다. 사울이 지닌 남다른 키와 외모에 관해 표현된 용어들은, 비록 주님께서 우리 같은 본성을 입으셨을 때도, 그분께서는 권능과 지혜에서 모든 인간을 초월하신다는 것, 그분의 인성이 여느 천사들 사이에도 있는 신성으로부터의 진리(truth Divine)이셨을 뿐일 때도 모든 인간이나 천사를 초월하셨다는 것, 그 이유가 어떤 진리도 인간들에게서는 존재가 중단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는 것, 등등을 우리에게 가르치시기 위해 있어진 용어들이다.
사울의 족보나 특성, 그의 개인적 외모에서만 보아도 그는 왕의 직무를 맡을 만한 자격이 있었는데, 이제 우리는 섭리가 향하고 있는 목적으로 그가 인도되도록 조성되는 주변 환경에 관해 살피기로 하자.
“하루는 아버지 키스가 기르던 암나귀들이 없어졌다. 그래서 그는 아들 사울에게 종 하나를 데리고 암나귀를 찾아 오라고 하였다.” 사울은 그가 암나귀를 찾고 있을 때 왕국이 발견되었다. 다시 사울과 다윗을 비교 고찰해 볼 경우 특이한 점은, 사울은 그가 아버지의 암나귀를 찾던 중 이스라엘의 왕으로 불리웠고, 다윗은 아버지의 양떼를 돌보던 중 보좌로 불리웠다. 같은 왕권에로 불리우는데 있어 두 사람이 표현하는 특성이 그들이 불리울 때 하고 있던 일의 차이점이 잘 나타내 준다. 성경 비유를 따라 생각해 보면, 나귀는 자연적 생각(natural thought)에 관한 것을 상징하고, 양은 영적 애착(spiritual affection)에 관한 것을 상징한다. 서양의 경우, 나귀는 무시 당하고 업신여겼지만, 고대 동양의 경우는 존경되고 추켜 세우는데 사용되어졌다. 그래서 이스라엘족들 사이에서 사사의 아들은 나귀를, 왕의 아들은 황소를 탔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의기양양하게 예루살렘에 마지막 입성하실 때 어린 나귀를 타셨다. 이런 행동들 모두는 예언의 주제가 되어 오기조차 해 왔는데, 이런 행동들은 주님의 인성에 속한 것 중 자연적인 것들이 합리적이고 영적이며, 천적이고, 신성에 속한 것들에 전적으로 종속되어 순종하도록 해야 함을 표현한 것이다. 사울의 경우, 그는 나귀를 잃어 버렸다. 즉 나귀들이 표현해 주는 영적 사항들은 주님이 세상에 오시어 잃어버린 것을 찾아 주실 때까지, 즉 그분이 타신 나귀, 어린 나귀를 발견하심으로 표현된 것들을 회복하실 때까지 잃어버려져 있었다는 말이다. 이를 위해 그분은 매여져 놓여 있는 어린 나귀를 끌고 오도록 마을로 두 제자를 보내셨고, 그 제자들은 주인에게 주님께서 쓰시겠다는 말 한 마디로 끌고 올 수 있었다. 일반적으로 잃어진 것은 양에 의해 표현되는 경우가 많은데, 그 이유가 잃은 양을 찾을 때까지 목자가 계속 찾는다는 이유에서 인 것 같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잃은 것(the lost)이란 어떤 개인 만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니라 원리들을 잃었을 경우에도 그렇게 말해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여러가지 동물들을 상징적으로 사용할 때 각 동물들이 암시하는 원리나 품질을 두고 말하여질 때, 즉 “곰 같은 자”이라든가 “여우 같은 여자” 등등의 경우를 생각해 보면 위의 말에 대한 타당성을 발견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어떤 사람을 잃어버렸다는 것은 그를 구할 수 있는 그 사람 속의 미덕이나 품위를 잃어 버렸다는 말이다. 주님께서는 그분의 백성들이 잃어버린 것을 회복시켜 주심으로 구원해주신다. 그분은 나귀나 나귀 새끼로 표현되는 지식과 믿음, 양으로 표현되는 선행(charity)을 그분의 백성에게 도로 갖다 놓으심으로, 즉 구원이 가능해지는 미덕이나 품위(the graces and virtues)들을 회복시키심으로 그들을 구원하신다. 마태복음 18장 11절에서, “사람의 아들은 잃어 버린것(that which was lost)을 구원하시기 위해 오셨다.” 이 절의 “잃어 버린 것”에서 “것”이란 중성을 표시하는 단어를 사용하여 어떤 사람만을 언급하고 있지 않고 사물(things)까지 포함하여 언급되고 있다. 사실 사람을 구해주시는 게 그분이 오신 목적임은 두 말할 여지가 없다. 그러나 그 사람 속에 있어야 할 품질을 회복시키시는 것은 그 사람의 구원을 위해 불가결한 수단이다.
아버지의 나귀를 찾기 위해 사울은 에브라임 산악 지대를 넘고 살리사 지방도 가보고, 다시 사알림 지방을, 다시 베냐민 지방으로 건너갔지만 보이지 않았다. 사울의 나귀를 찾는 노력은 에브라임, 단, 베냐민 지파들의 구역을 연속 연결하여 이루어졌다. 이스라엘의 지파들은 교회를 구성하는 선함과 진리에 관한 모든 원리들을 표현했다. 사울이 나귀를 찾기 위해 거쳐간 세 지파는 선의 측면 보다는 진리에 관련을 가진 지적인 것에 속하는 것을 표현했다. 유다의 경우는 선에 관한 가장 높은 원리들을 표현 하지만 여기서는 언급되지 않고 있다. 사울이 통과한 세 장소 중 두 장소는 성경의 어느 곳에서도 홀로 언급된 적이 없는 장소이다. 첫 장소와 마지막 장소는 에브라임 구역에 해당되고, 나머지는 단 구역에 해당된다. 사알림은 여우들의 장소, 살리사는 삼각 형태, 수브란 벌집에서 떨어지는 꿀, 혹은 달콤함이란 의미를 각각 지니고 있다. 사알림은 자연적 의지, 살리사는 자연적 이해성, 수브는 자연적 기쁨, 또는 자연적 인간이 선과 진리라고 부르는 것, 그로부터 결과되는 쾌락을 말한다. 이런 곳에서 나귀는 발견되지 않았다. 다시말해 자연적인 수준에 머무는 것들 속에서는 구원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었다는 말이다.
사울이 나귀를 찾기 위해 수브 지방을 통과 했다고는 말하지 않고 있다. 단지 그가 수브 지방에 들어 가면서 그의 종에게, “아버지께서는 암나귀 생각보다 우리 걱정을 더 하시겠다” 라고만 언급된다. 어찌됐든 그는 예언자의 성으로 가겠끔 섭리적으로 인도되고 있다. 그 다음, 종은 자기들이 어떻게 나귀를 찾아야 할지를 선견자에게 가서 물어 보자고 제안했다. 자연적 기쁨이 종결될 때, 영적 기쁨이 시작된다. 잃어버린 것을 회복시키려는 자연적인 노력들이 성공적이지를 못했다는 것이 입증되고야 말 때, 우리는 새롭고 더 높은 방법에서 우리의 노력을 방향지워 가도록 마음의 상태가 바뀐다. 자연적인 것이 실패할 때, 우리는 초자연적인 것으로 더욱 잘 귀환한다. 우리의 총명과 신중성이 자기가 바랬던 것에 대해 불만족한 상태로, 자기가 대상으로 삼은 목적물의 획득이 달성 안된 상태임을 발견할 때, 우리는 하느님의 섭리와 지혜에 의지해 보려 한다. 그리고 우리도 도움과 행복의 진정한 근원으로 자신의 방향을 바뀌게 할 친근한 목소리, 그 소리가 속에서 이든, 밖에서 왔든 상관없이 오로지 필요로 할 뿐이다.
그런데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것 하나는, 더 가치있는 대상을 추구하는 동안 그 소리에 순종하려는 우리 속에 있는 것은 진리에 관한 지식들이다. 이 지식은 우리의 이해성에 별 도움을 주지 않을 듯 보이지만, 주님께서는 이 지식에 은밀하게 영향을 미치시어 우리를 안내해 주신다. 선한 동기를 지닌 모든 이들은 신성한 영향 하에 행동되는 것이고, 그들은 조만간에 선견자가 있는 성으로 도착한다. 그리고 선견자는 그들이 어떻게 신성하게 인도되어졌는가에 대해, 자신들이 추구해 왔던 선함보다 더 높은 선함으로 어떻게 인도되는 가를 밝히 알게 해준다.
사무엘에 대한 종의 논평은 진정한 예언자에 관한 것이요, 모든 진정한 예언자가 표현했던 유일한 한 분에 뚜렷하게 응용된다. “이 성읍에는 하느님의 사람 한 분이 살고 있읍니다. 아주 존경받는 어른이신데 그가 하는 말은 무엇이고 다 들어 맞는다고 하더군요…” 진리의 사람일 때 하느님의 사람이고, 사랑의 사람일 때 존경받는 사람이다. 이 두 사람이 하나의 사람이 되어 있을 때야말로 진정한 예언자, 또는 선견자인 것이다. 선견자(seer)는 미리 내다보고 설비하는 사람이요, 예언자(prophet)는 미리 말해주고 가르치는 사람이다. 예견과 설비는 앞서 오지만 미리 말해주고 가르치는 것 속에 항상 존재한다. 마치 내적인 것이 앞서 있되 외적인 것 속에 존재하는 것과 같다. 이상의 것이 진정한 예언자, 이 예언자만이 우리가 가야 할 올바른 길을 보여줄 수 있다.
종이 선견자에게 가보자고 제안했을 때, 사울이 이렇게 말했다. “간다면 그분에게 무엇을 가지고 가겠느냐? 먹을 것이라곤 하나도 남지 않았는데 그 하느님의 사람에게 드릴 복채가 없으니, 무엇을 드리면 좋겠느냐?” 예언자를 흡족하게 할 수 있는 선물은 하느님의 총애를 구하고, 그분의 축복을 획득하려고 하는 사람들에게 하느님이 요구 하시는 예물과 같은 것이다. 그 예물이란 선한 애착들과 진정한 생각들이다. 이것들이 하느님께 바쳐지게 되어있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통로와 같은 것이어서, 이를 통해서만 하느님의 선물이 그것을 바친 자에게 내려오기 때문이다. 이 예물들 중 첫째가는 제일 좋은 것이 제단에 놓여지는 빵으로, 번제물로 표현되어 있다 (레위기 1-3장 참조). 다윗이 사울에게 처음 소개될 때 그가 사울에게 내 놓은 선물도 빵이었다 (사무엘상 16:19). 그런데 우리가 해산의 고통을 겪는 시기에 각자의 그릇 속에 지녔던 생명의 빵은 탕진되고 말 때가 아주 흔하다. 그리고 우리가 신성하게 현존 하시는 그분께 가게 될 때, 우리는 그분께 내놓을 것이 아무 것도 없는 것을 알고 걱정한다. 자신이 가난한 자임을 의식함은 사실 그 자체로만 보면 미덕이다. 그 이유는 심령이 가난한 자에게 복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분께 드릴 게 아무 것도 없음을 인정한다면, 자신의 잘난 것(merit) 역시 자랑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본문의 경우, 완전한 결핍은 아니었다. 종은 은 사분의 일 세겔을 지니고 있었다. 이는 선(빵)이 다 소비되었다 해도, 아껴두심(remains)은 진리 속에 언제나 존재한다는 말이다. 한 세겔은 이십 게라이다 (출애굽기 30:13). 인구조사가 있을 때 반 세겔을 모든 이스라엘 족이 내놓도록 명령받았는데, 이는 십 게라(반 세겔)를 가진 이들 외에는 주님의 영적 이스라엘로 세어질 수 없다는 것에 대한 표시이다. 다섯, 뿐만 아니라 열은 남은 것(remains)을 상징한다. 그러나 그 수준은 낮은 평면이다. 만일 어떤 이가 다섯 게라, 또는 사분의 일 세겔을 가지고 있다면 이것도 선견자의 집에 입장하는 허가를 얻는 수단이 될 것이다.
사울과 종은 “하느님의 사람이 있는 성으로 갔다… 사울은 종을 데리고 언덕에 올라 그 성으로 가다가 물을 길으러 나오는 처녀들을 만나 ‘여기에 선견자가 한 분 계시다지?’ 하고 물었다. 처녀들이 대답하였다. ‘예, 그분이 저 앞에 가십니다. 오늘 산당에서 이 성의 제사가 있어서 방금 도착하셨읍니다. 성으로 들어 가시면 그분이 산당으로 음복하시러 올라 가시기 전에 만나실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먹지 않고 그분 오시기를 기다리고 있읍니다. 그분이 제물을 축복한 다음에야 손님들이 먹을 수 있으니까요. 지금 올라 가시면 곧 만나실 것입니다.’” 위 구절은 그 시대의 단순한 방법들을 실감나게 그려놓은 인상을 갖게 해 주고 레위인의 법에서 결코 서술하지 않은 제물을 바치는 잔치의 사회적인 성격도 알게 해 준다. 그렇다고 그 속의 영적 의미가 덜 해지는 것이 아니라 더욱더 교훈적이다. 처녀(maiden)란 기쁨을 가지고 구원의 샘에서 물을 길어 올리는 진리의 애착들을 말한다 (이사야 12:3). 이 샘은 거룩한 말씀 안에 있다. 진리를 순수하게 한결같이 사랑하는 사람은 영적 삶에 충당될 생명수를 말씀 속에서 길어 올릴 수 있다. 신성하게 명령되어 이루어지는 본문 속에서, 처녀들은 이미 약정된 목적을 포획하기 위한 설비된 수단의 하나가 되어 있었다. 사울이 처녀들에게 선견자가 있는 곳을 묻는 것은 과녁을 정확히 맞추는 물음이다. 그 처녀들로부터 오는 정보는 선견자가 언제 어디서 발견되리라는 것에 대한 세부사항까지 제공되고 있다. 먼저 처녀들은 사울이 서둘러야 한다고 타이르고 있다. 서둘러 행동함은 재빠른 노력, 열심히 바라는 것으로 그 의도의 바닥에는 진정한 모든 발전, 최말단에서의 성공의 싹이 놓여 있기도 하다. 이 바삐 서두름이 나타나 있는 이유는 선견자가 사울보다 앞서 가고 있다는 것, 그분이 음복하러 산당에 도착하기 전에 만나야 한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선견자가 성을 방문한 것은 백성들의 제사를 집전하기 위해서였다. 공동체가 주관하는 제사는 백성과 주님이 서로 서로 결합하는데 대한 것을 표현했다. 이는 사랑과 선행의 영적 잔치,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원리의 영적 잔치인 것이다. 이런 잔치에서 새 왕이 영접되고 취임되는 기회를 맞이하게 되는 것은 그가 백성의 통치자로서의 주님을 표현하며, 사랑으로부터의 진리로 백성을 통치해야 함이 왕에게 요구된다는 것을 표현해 주는 절호의 계기가 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잔치에 참석해야 하는 사람, 선견자에게는 손님이 되는 초대된 사람으로서 참석해야 하는 사람이었는 바, 잔치가 벌어지기 전, 사울이 사무엘을 보는 것, 그 다음 미래의 왕과 백성이 예배와 더불어 하나됨을 상징하는 종교적 잔치를 축하하는 것은 필수 조항이 될 수밖에 없다. 제사가 있게 되는 산당(high place)은, 우상숭배로 모독되기 전일 경우, 높은 관점과 느낌을 상징하는 장소였고, 이 상징적 의미로부터 신성한 존재는 지존하신 자(the Highest)라고 불리웠고, 그분은 높고 거룩한 장소에 거하시는 분으로 알고 산당에서 그분을 예배드렸던 것이다. 사울은 선견자를 만나기 위해 바삐 서두르면서 선견자가 가는 방향인 산당 쪽으로 가는 중에 성 안에서 만나게 되었다. 이제 선견자의 안내 하에 사울은 선함과 진리에 대한 사랑을 교리로 삼음으로서 승강되는 계기를 갖게 된다.

사무엘상 8장(서문)

사울의 통치
입문
(INTRODUCTORY)
사무엘상 제8장
이스라엘이 왕을 바라다

저자가 오랫동안 바랐던 것은 사울의 통치로부터 솔로몬에 이르는 이스라엘의 역사를 설명해 보는 것이었다. 이 작업은 끈기가 필요하고 아마 모험적이기도 하다는 것을 저자 자신도 느끼고 있다. 그래서 저자의 할당 부분은 역사적 의미의 설명과 역사적 주변 환경을 실지 응용해보는 데에 한계를 긋고 있다. 따라서 독자들의 이해를 흡족하게 해줄 것이라고는 기대하지 않는다. 그렇다 해도 성서의 내적 의미를 다루는 성직자로서 저자의 제일 가는 목적은 성서의 해설을 독자에게 공급해 주는 것 이상의 어떤 것에 두고 있다. 말씀은 그 안에 영적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는 것을 독자에게 전달하는 것인바, 저자의 제일 가는 목적은 말씀의 겉(글자)을 벗겨 그 속 뜻을 응용해보는 것이다. 성경의 글자적 의미는 학식 있는 해설가나 경건한 주석가들의 시선을 받아 왔었다. 따라서 글자적 의미를 취급해야 하는 사람들의 경우 그들은 위와 같은 선배들의 노력으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말씀의 영적 의미를 취급해야 할 경우 위와 같은 처지에 있지는 않다. 그래도 우리는 위대한 해설자, 선견자(swedenborg)의 저술을 통해 세 권의 책 창세기, 출애굽기, 요한 계시록의 경우는 아주 세세한 주석을 가지고 있고 그 외의 책들의 경우도 많은 문단에 걸쳐 설명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상응학(the Science of Correspondence)의 응용으로 말씀의 천국적 신비를 소유하고 있다. 이 학문을 통해 우리는 글자라는 구름 너머에서 찬란히 빛나는 태양의 빛을 가늠해 볼 수 있다. 선견자의 방대한 저술에 흩어져 존재하는 많은 문단들은 마치 태양이 구름을 뚫고 비추듯 천국과 지상을 연결해주고 있으면서 구름을 뚫은 빛이 특별한 장소를 비추듯 성경의 많은 부분들이 그를 통해 빛을 발하고 있다. 선견자를 통해 얻은 많은 지식들이 있다 해도 본 주제에 정확히 접근한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아마 어떤 독자가 이 책의 어느 한 부분 만을 읽어보아도 신성한 말씀의 어느 한 부분의 속을 펼쳐보는데 얼마나 더 많은 상응 지식이 있어야만 할 것인지 가늠될 줄로 본다. 따라서 명백하게 씌어진 의미들이 계발되는데 비해 자신이 소유한 상응 지식이 얼마나 불완전한가도 절감할 수 밖에 없다.
이런 점을 감안해서 저자도 소견을 독자에게 제공하지만 이는 주제들의 난이한 점들을 과장하려든다거나 그 난이점을 해결하고자 애쓴 노력을 추켜세우고 싶은 의도는 전혀 없다. 단지 그런 문제점을 나타내줌으로서 독자의 판단이 관대히 있어지기를 바라고, 독자들이 기대했던 만큼에 비해 저자의 부족한 학식을 너그럽게 보아줄 것으로 기대할 뿐이다.
연설자와 청중의 차원에서 우리에게 적용되는 위의 사항들 외에도 저자와 독자라는 수준에서 하나 더 첨가해보고 싶은 게 있다. 경건하고 공손한 영을 지니고 이 책 속의 주제들에 접근한다면 주제들 어느 것 하나에서도 빠지지 않고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이 있다. 우리가 서 있는 이 땅(책)은 거룩한 땅이라는 것이다. 이 땅을 딛고 서려면 거룩한 경외함과 심오한 겸손함이 절대 필수요건이다. 이 위대한 광경을 보고 싶은 열망을 지녔다 해도 통상적인 생각이나 일시적인 흥미로 인해 너무 성급해져 다른 길로 들어설 수도 있다. 게다가 우리는 발에서 신을 벗지도 않은 채 신성한 영광의 현존에 더 가까이 접근하는 위험을 노출시킬 수도 있다. 다시 말해 감각적이고 세상적인 것에서 오는 피상적인 껍질을 우리 마음으로부터 제거해야만 하는 일이다. 영적 진리는 영적인 빛이 아니고서는 보여질 수 없고, 영적 힘은 영적인 사랑의 영향이 없고서는 아무런 힘도 발휘되지 않는다. 결론적으로 위의 모든 것을 설비해주기를 기도하면서 찾아가야 하리라 믿는다.
이 책의 역사 속에 있는 세부적인 사건들을 하나하나 검사해 가기 전 그 사건들이 연결되어지는 역사적 측면에서의 말씀 속의 다른 부분들을 참조해 가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라 본다. 그렇게 함으로서 우리는 성경의 한 부분을 점유하는 특별한 역사를 확인할 수 있고 그에 따라 일반적 배경과 의미도 더 확실히 알 수 있다.
거룩한 기록은 몇 가지 다른 정부 형태 아래 살고있는 백성들을 표본적으로 연출시키고 있다. 이런 정부 형태는 열조들, 성직자들, 사사들, 왕들에 의해 연속적으로 규율되고 있다. 정치적 관점에서 본다면 이들은 국가 형태로 발달해 가는 자연적인 단계들을 말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이를 교회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각기 다른 정부 형태의 연속은 보다 단순하고 순수했던 데서 보다 더 피상적이고 불완전한 상태로 하강하는 이스라엘 교회를 묘사하고 있다. 이를 통상적인 표현을 써서 말한다면 이스라엘 백성은 근원적으로 신권 정치에서 신성한 통치자라는 직접적인 통치의 영향을 더욱 적게 받게 된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열조나 성직자 라는 통치 형태 밑에 있었을 경우 그들은 신성한 사랑과 정의의 온순하고 부드러운 영향에 기꺼이 종속하려는 교회 상태를 표현했다. 그 반면 사법적이고 입법적인 통치 형태 아래 있었을 경우 그들은 신성한 진리와 판결의 권위적인 법에 강제로 순종하는 교회의 상태를 표현했다. 이와 같은 표현이 이스라엘 역사의 내적인 역사적 의미에 해당된다.
그 역사가 영적 의미에서는 개인적 차원의 영적 삶의 역사를 말해 주는바, 연속적인 이스라엘 통치 형태의 변화는 더 높은데서 더 낮은 상태로 이어지는 인간의 하강을 기술하고 있다. 유아 시기와 어린 아이 시기 동안 인간 존재는 사랑에 의해 통치되어지지만 이 시기(상태)가 퇴조하면서 더 강한 열정과 추론이 증가한다. 이 증가에 따라 마음은 진리가 통치하는 상태에 더욱 진입한다. 그러므로 인간 삶의 초반은 마치 교회가 하강하는 것과 유사하다. 각 개인의 경우 상태가 높은데서 낮은 데로 하강한다는 것이 도덕적, 영적인 것이 고갈되고 마는 과정을 통과한다고 억측해서는 안 된다. 아마 그 반대일 것이다. 그 이유는 인간의 마음이 하강을 하는 동안 재 승강을 위한 지적 능력과 수단의 준비가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랑의 달콤한 영향력이 통치하는데 불충분하다고 스스로 여겨지게 될 때 진리가 통치하게 되면 고집불통인 열정에 재갈을 물려주게 된다. 이렇게 되지 않을 경우 교회와 인간 모두는 돌이킬 수 없는 무질서로 빠져 회복될 수 없는 파멸로 완전히 끝장을 내고 마는바, 진리의 통치 역시 신성한 섭리의 자비와 지혜로 있어지는 단계인 것이다.
위에서 살핀 여러 가지 사항들은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가장 명확히 추적된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왕을 요구하게 된 직접적인 원인은 사무엘의 아들의 잘못된 행동 때문이었다. 사무엘을 주님이 들어 세우신 것은 엘리의 부패된 집안으로 인해 형성된 부패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있어졌다. 엘리의 아들들은 백성들이 주님께 바치는 제물을 불법으로 처리해 탐닉을 일삼았다. 판관이 된 사무엘의 아들 역시 엘리의 아들과 매우 흡사했다. 그들은 “아버지의 길을 따르지 아니하고 제 잇속만 차려 뇌물을 받고는 법대로 다스리지 못하였다.” 이렇게 하여 성직자들은 자기들의 영향력을 잃었고 판관들도 자기들의 권력을 잃게 되었다는 것은 누구나 쉽게 발견할 수 있는 줄거리이다. 이런 부정은 더 이상 이스라엘이라는 국가를 질서대로 보존할 수 없게 만든다. 따라서 국가의 존립을 위해, 그 국가가 계속해서 표현적 의미를 지니기 위해 왕의 등극은 당연히 뒤따를 수밖에 없게 되어 있다. 사실 이렇게 되는 것은 더 높은 힘을 더 낮은 힘으로 대체하는 것이다.
“모든 이스라엘 장로들이 한 곳에 모여 라마로 사무엘을 찾아가 건의하였다.‘당신은 이제 늙고 아드님들은 당신의 길을 따르지 않으니 다른 모든 나라처럼 왕을 세워 우리를 다스리게 해주십시오’ 하는 말을 사무엘이 듣고 마음이 얹잖아 야훼께 기도하니 야훼께서 이르셨다.‘백성이 하는 말을 그대로 들어주어라. 그들은 너를 배척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왕으로 모시기 싫어서 나를 배척하는 것이다.’”
주님의 사랑 밑에서 그분의 교회와 자녀들이 살고, 진리는 사랑에 종속되어 사랑의 도구가 되어 주는 것이 주님이 바라시는 사항이다. 이것만이 완전한 질서이다. 이 질서 안에서 인간은 창조되어져 있다. 아직도 이 질서 속에서 인간은 그의 유아기와 어린 시절이 통과하도록 섭리되고 있다. 무엇보다 먼저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자신같이 여기는 두 능력은 창조자의 모양과 형상대로 창조된 존재에 가장 걸맞는 조건이다. 하느님은 사랑이시다. 신성한 사랑은 그 사랑이 창조한 그릇들의 심정과 삶 속에서 그분의 사랑 자체가 재생산되기를 바라신다. 인간이 처음 사랑의 법칙을 이탈하였을 때 그것은 자기 위에 군림하는 사랑의 하느님을 가지지 않으려는 이유 때문이었다. 사랑의 법칙보다는 진리의 법칙으로 통치되기를 인간이 바라게 되었을 때, 주님께서 인간에게 진리의 법칙을 수여하신 것은 영원한 조건이 되도록 하기 위해서가 아닌 일시적인 법칙으로, 그분이 바라시는 사항이 아니 할 수 없어 허용하는 수준에서 있게 되는 것들이었다. 그렇게 허용하시는 이유는 선함 또는 사랑으로 인도해주는 것이 진리가 하는 일이요, 진리는 선함의 종이요, 진리의 속성은 사랑을 섬기는 것이기 때문이다.
주님께서 왕을 세워 주라고 허락하시면서도 이의를 제기하신 것이나 다른 성서 부분에서 그분이 화가 나신 가운데 백성에게 왕을 주셨다 라는 언급이나 그분이 분노하심에 그를 거두셨다 라는 등등의 대목들은 교회나 인간 마음 속에 있는 상태의 품질이 하락됨으로 신성한 마음이 불유쾌하게 여기는 것으로 표시되고 있다. 당연한 것은 하느님의 속성에서 성내심은 없다는 것이다. 신성한 존재의 성내심이 표현되는 성경 어느 부분에서든지 그 표현은 신성한 마음에 반대되는 인간의 상태가 표현되게 하려는 의도에서 기록된 언어들이다. 하느님의 사랑이 인간의 마음 안에서 꺼져 갈 때 그 사랑 대신 성냄의 불이 켜진다. 이것이 하느님께서 성내신다고 불러지는데 그 이유가 인간이 타락해 가도 하느님의 사랑은 계속 인간의 마음 안으로 흘러드는데 이 때마다 그 사랑이 정반대로 변하기 때문이다.
위와 같이 우리가 생각해 본 상태의 변화는 정죄되어야 하는 것, 지존하신 분에 이의를 제기한 것이다. 이런 이의신청의 바탕들이 백성들 자신이 처하게 될 조건에 관련하여 사무엘을 통해 이렇게 열거되고 있다. “왕이 너희를 어떻게 다스릴 것인지 알려주겠다. 그는 너희 아들들을 데려다가 병거대나 기마대의 일을 시키고 병거 앞에서 달리게 할 것이다. 천인 대장이나 오십인 대장을 시키기도 하고, 그의 밭을 갈거나 추수를 하게 할 것이며 보병의 무기와 기병의 장비를 만들게도 할 것이다. 또 너희 딸들을 데려다가 향료를 만들게도 하고 요리나 과자를 굽는 일도 시킬 것이다. 너희의 밭과 포도원과 올리브 밭에서 좋은 것을 빼앗아 자기 신하들에게 줄 것이며 곡식과 포도에서도 십 분의 일세를 거두어 자기 내시와 신하들에게 줄 것이다. 너희의 남종 여종을 데려다가 일을 시키고 좋은 소와 나귀를 끌어다가 부려먹고 양떼에서도 십 분의 일세를 거두어 갈 것이며 너희들 마저 종으로 삼으리라.” 한 마디로 백성이 소유한 것은 무엇이든지 마음만 내키면 왕의 것으로 삼게 된다는 말이다. 어떤 원리가 인간 마음이든, 교회이든, 세상이든 통치하게 되면 그 원리는 모든 것을 자신 밑에 종속되게 한다는 것은 누구나 익히 아는 사실일 것이다. 이스라엘에 군림하는 왕권적인 통치는 애착 측면보다는 지적 측면이 우세해져 통치하는 원리에 대한 모형이다. 그래서 종교가 지적 측면을 거세게 강조할 경우 말씀 속의 선과 진리들은 하느님을 찬양하는 쪽보다는 인간을 추켜 세우는 쪽으로 흘러가고 만다. 이스라엘의 아들들이 왕의 병거대나 기마대를 위해, 왕의 전투를 위해, 왕의 행차를 화려하게 하기 위해 착출 되듯이 이 백성들로 표현되는 진리들 역시 지적 인간이 자기의 지적 싸움이나 우월감을 드러내는 것을 보조하는데 착출되고 만다. 백성의 딸들이 요리나 과자를 굽는데 착출되듯 백성의 딸로 표현되는 선에 애착함은 지적 인간의 감각적 바람들을 충족하게 해서 그 인간의 열정과 입맛을 돋구는 것을 도와주도록 남용되고 만다. 왕의 일을 하기 위해 남종, 여종이 착출되듯 과학 속의 진리나 과학에 대한 애착들은 지적 오만이 추켜세워 원리로 삼는 것은 무엇이든지 그게 정의라고 증거 되게 하는 데에 고용되어진다. 이런 것이 교회나 인간에 속한 상태일 때 그 속에 남아 있던 선함과 진리까지도 지적 우월감에 추종 당하게 되는바 이는 선행이 신앙에 종속 당하는 것과 같고 이것이 곡식과 포도, 양떼에서 십분의 일을 거둬 가는 것에 대한 의미이기도 하다. 그야말로 말씀 속에 있는 천적이고 영적인 모든 것, 그것의 일반적 의미 뿐만 아니라 세부사항까지도 한 개인이 지적으로 우월하다는 것을 과시하기 위해 노예 상태에 처하게 한다. 그 이유가 위와 같이 왕이 집권해 가면 결국 모든 이스라엘 백성은 왕의 종이 되고 말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지금 말해가고 있는 것들은 절대적 비질서가 아닌 상대적 비질서 상태이다. 절대적 비질서는 해체된 상태, 혼란한 상태이어야 한다. 이제 이스라엘 백성에게 수여되는 상태는 완전한 자유인 사랑을 법칙으로 하는 것 대신 상대적으로 제한하는 힘이 훨씬 강한 진리를 법칙으로 삼는 질서의 상태, 따라서 더 완전한 질서 대신 덜 완전한 질서 상태이다. 진리의 법칙, 이로부터 있게 되는 조직 형태, 비록 이 형태가 절대적인 최상의 것은 못되지만 그들의 상황으로 보아서는 최적의 것인 셈이다. 이런 사실은 최고도로 중요한바, 인간의 업무들, 공적이든 사적이든 모든 분야에서 응용되고 있다. 완전한 법이 있어 그 법에 순종한다면 그 결과는 완전한 질서이다. 따라서 우리는 그 법을 우리 앞에 놓아두고 그 법에 도달해보려고 노력해야 한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공적이든 사적이든 가장 뛰어나게 우수한 어떤 이상향을 갈망해야 하는데, 그럴 때 우리가 달성해보고 싶었던 이상향에 매우 미흡해 있을 경우 그것이 실패라고 단정해서도 안 된다. 사랑의 법칙이 지상의 국가나 가족들을 통치하는 원리로 실시되고 있다면 인류의 상황은 무척 달라져 있을 것이다. 땅 위는 평화 뿐이고 인간 사이에는 선한 의지만 실행되고 있을 것이다. 악의 세력이 강해지는 것을 제거하느라고 소비되는 에너지와 각종 수단들이 선을 행하는 데에만 쏟아진다면 현 사회의 모습은 엄청나게 달라지리라. 그러나 범죄자를 처벌하는 형사법을 폐지하거나 침범한 타 국가의 포로를 풀어준다고 전쟁이 평화로, 범죄 없는 사회가 될 거라고 누가 상상이나 해볼 수 있을까? 서로를 보호하고 방어하는 수단들이 더욱 복잡해져 가는 것은 인류가 타락해 간다는 증거가 될는지 모른다. 그렇다 해도 그런 법전 없이 어떻게 인류가 현 상태라도 유지할 수 있을까? 범죄, 무정부 같은 혼란 상태 등등은 모두 지배되어져야만 한다. 그러나 그것들이 지배되는 것조차도 짧은 어느 기간에 국한되어져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오히려 사회가 해체되고 인류는 멸해지고 말지 모른다.
따라서 인간의 심정 속에서 사랑의 법칙을 발견 할 수 없을 때 진리의 법칙이라도 그 안에 자리를 잡게 한다는 것은 비록 전자보다는 품질이 떨어지지만 그런데로 그것도 큰 축복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고로 해서 탁월한 예언자 사무엘이 타국가 처럼 왕을 세워 달라는 백성들의 요청을 불쾌하게 여겼을 때 그에게 내리시는 주님의 지시 사항 속에서 우리는 그분의 선함과 지혜를 한꺼번에 보게된다. 왕의 등극은 참으로 이스라엘 백성에게 필요한 질서이다. 성직자 직분은 실패했고, 사사 직분도 그 힘을 잃었다. 모든 백성 각각은 제 눈에 옳게 보이면 그것이 정의가 되어 있다. 각 사람의 눈에 올바른 듯 나타난 것들은 많은 경우에서 비뚤어 있다. 게다가 이스라엘의 적은 그들 앞에서 쑥쑥 자라나 강세해져 있다. 따라서 새로운 힘, 더 강력한 권능이 아니면 그들을 건져줄게 하나도 없는 상태이다. 사무엘이 왕의 등극에 따른 결점을 백성들에게 낱낱이 말해 주었지만 백성의 응답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왕을 모셔야겠읍니다. 그래야 우리도 다른 나라처럼 되지 않겠습니까?” 였다.
이 말을 듣고 주님께 아뢰는 사무엘에게 내린 신성한 명령, “그들의 말대로 왕을 세워주어라”는 이 백성들이 더 타락되는 것을 방지해 줄 뿐만 아니라 그들이 승강 되는 수단을 설비해주시려는 섭리까지 담겨 있다. 사실 첫 세 왕의 통치를 통해 이스라엘은 모든 면에서 더 위대해지고 더 많은 진보를 이룩하여 더 부유해지고 더 강력해진 통일된 국가를 형성했음은 의심할 바 없는 사실이다.
첫 세 왕의 통치 역사에 있는 영적 의미는 이스라엘이라는 사람들의 종교적 삶이 영적으로 진보하는 상태를 기술해주고 있다. 이스라엘 왕국의 시작은 위쪽을 향한 진보, 이 진보를 수단으로 하늘 왕국이 인간 마음 안에서 시작되는 것을 표현한다고 생각해 볼 수 있다. 인간 마음의 세 가지 수준, 자연적, 영적, 천적 상태가 사울, 다윗, 솔로몬으로 표현되고 있다. 이 왕들의 역사를 통해 위 세 상태의 적용, 거듭나는 삶의 단계들을 밝혀 보는 것이 저자의 제일 가는 목표이다.
그런데 위 사항보다 훨씬 더 높은 내용들이 이스라엘의 첫 세 왕과 관련을 갖고 있다. 이 사항은 우리가 상당한 집중력을 발휘하지 않으면 감지 안 되는 사항에 속한다. 거룩한 말씀의 내적 의미(interior sense)는 인간의 거듭남을 취급하고 있다. 이보다 더 깊은 의미(inmost sense)들은 주님의 신성화 하심을 다루고 있다. 그리고 주님께서 그분의 인성을 신성으로 만들어 가시는 과정은 그분께서 인간을 영적으로 만들어 가시는 과정과 유사하다. 이 신성한 주제, 비록 우리에게 너무나 높은 주제인지라 계속 그 주제에 관심을 갖기는 불가능하지만 우리 영혼의 거듭 나아가는 것을 확실히 알려면 그분의 신성화 하시는 단계와 어떤 연결이 있는가 정도는 알아야만 하는바, 그 사항은 매우 중요하다는 것만큼은 잊지 않아야 하리라 본다.
이스라엘의 첫 세 왕의, 최소한 두 명은 주님의 왕권적 품성 측면에서의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예징(type,표본)이 되었다는 것, 그들의 역사는 가장 깊은 의미에서 주님의 내적 삶과 경험이라는 것은 의심할 바 없다. 이런 의미가 지상에서의 우리 본성 속에서 명백해질 때 우리도 약간은 감지할 수 있다. 다시 말해 그분께서 인성을 신성화시키는 한편, 그 과정들은 인간 구속이라는 일을 결과되게 하신다는 말이다.
선견자의 저서는 우리에게 이런 사실을 가르쳐주고 있다. 주님께서는 신성화 해 가시는 진보 단계의 처음, 그분은 인성을 신성으로부터의 진리(truth Divine)로 만드셨고 그 다음 신성한 진리(Divine truth)로, 마지막으로 신성한 선(Divine good)으로 만드셨다(A. C. 7014 참조). 이와 같은 일반적인 신성화 단계가 이스라엘의 첫 세 왕에 의해 표현되었다는 것은 쉽게 알 수 있다. 사울은 신성으로부터의 진리 되시는 그분을, 다윗은 신성한 진리로서의 그분을, 솔로몬은 신성한 선으로서의 그분을 표현했다. 이러한 세 단계를 보다 정밀하고 충분하게 표현하는 것이 세 왕들의 통치 역사이고, 이 역사들은 그분께서 인성을 신성으로부터의 진리로, 신성한 진리로, 신성한 선으로 만드시는 동안 있어지는 주님의 내적 삶과 체험에 관한 모형이다.
우리가 먼저 살피게 되는 것이 사울의 통치이다. 사울의 통치 역사는 다윗의 초기 역사, 그가 기름부어진 후까지 포함되어 두 역사는 짜 깁어 있다. 그래서 우리는 사울이 표현한 신성으로부터의 진리와 다윗이 표현한 신성한 진리의 차이점을 분명하게 볼 수 있다. 신성한 진리와 구별되는 신성으로부터의 진리는 천국 위에 있는 진리가 천국 안에 있는 진리와 구별되는 것과 같다. 신성으로부터의 진리는 신성한 진리의 유한한 상태, 즉 천사를 포함해서 유한한 마음이 납득해서 받아들인 진리들이다. 엄격히 말해 신성한 진리는 유한한 존재의 납득력을 초월하고 있다. 신성으로부터의 진리는 선견자의 저서를 보면 신성으로부터(from Divine)의 진리라고 자주 일컬어지고 있다. 이는 본질적으로 신성인 진리(which is in itself Divine)와 구별된다. 저자는 신성 안에 있다(which is in the Divine)라고 말하지는 않는다. 그 이유는 신성한 진리를 최대한의 납득력 있는 의미로 볼 때 그 진리에는 신성 자체인 모든 진리 즉 주님 자신 안에 있는 것, 뿐만 아니라 가장 높은 유한한 마음들로부터 유한한 마음 사이에 있어지는 간격이나 등차, 영적 기운 등등 모든 것 안에 존재하는 모든 진리까지 포함된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이를 수단으로 해서 무한한 신성한 진리는 천사나 인간의 마음 안으로 들어가는데 적합해지도록 만들어진다.
신성으로부터의 진리 또는 천국에 있는 신성한 진리는 육을 입으시기 전의 주님의 인성을 구성했다. 주님의 신성한 진리가 천사들의 마음 안으로 흘러들 때 그 진리는 그들의 의지와 이해성 안에서 인간 형체를 취했다. 이러한 인간성을 통해서 주님께서는 강림하시기 전까지 인류에 작용 하셨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지상의 인간에게 나타나실 때면 언제든지 천사라는 개인 앞에 계셨었다. 그러나 그분이 늘 나타나시던 방법 즉 천사를 통한 인성이 주님과 인간 사이의 매개체를 통해 주님의 사랑과 진리가 인간의 마음 안으로 흘러들었지만 많은 세월이 경과하면서 인류가 천국에서 멀어지자 그 방법은 효력이 없게 되었다. 그래서 주님께서 세상에 오신 것, 처녀의 자궁 안에서 인성을 입으셨다. 이렇게 해서 그분께서는 그분의 인성을 분리된 존재로 만드시고 그 존재를 신성화 시키시어 그분 자신의 것, 무한하고 영원한 신성과 하나 되도록 들어 세우셨던 것이다. 그리하여 주님께서는 천국 위에, 천국 안에 구원의 매개체를 설비하셨다. 신성화 하신 인성 측면에서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중재자가 스스로 되셨던 것이다.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사랑과 빛은 아직도 천국을 통해 인간 안으로 오고 있다. 그러나 이 매개체적인 유입(influx)외에도 지금은 주님 자신의 인성으로부터 오는 직접적인 유입까지 존재한다. 이를 수단으로 인간 마음은 내면적으로 영향받아질 수 있고 계발될 수 있어 내면적으로 거듭나질 수 있게 되어 있다.
특별한 의미에서 신성으로부터의 진리를 표현하는 사울은 육을 입으시기 전 천국 안에 있는 주님의 인성을 표현했다. 신성한 진리를 표현하는 다윗은 육 안에서 명백해지신 이후의 주님의 인성을 표현했다. 그분께서는 인성을 신성한 진리로 만드셨는데 이를 바꾸어 말한다면 인성을 신성화 하시기에 앞서 먼저 인성을 거듭나게 하신 것이다. 이렇게 거듭나는 동안의 주님의 인성을 사울이 표현했고 신성화 하시는 동안의 주님의 인성을 다윗이 표현했다. 다시 말해서 천국 안에 있는 진리 즉 신성으로부터의 진리로 그분의 인성을 만드실 때가 주님께서 인성을 거듭나게 하신 것이고, 천국 너머에 있는 진리, 어느 인간도 도달할 수 없는 빛으로 들어가신 것 즉 신성한 진리로 인성을 만드실 때가 그분이 신성화 하신 것이라 말할 수 있다.
지금까지 살펴온 것들이 이스라엘의 첫 세 왕의 역사에서 취급되는 영적인 신성한 주제들이다. 이 왕국들의 계속적인 통치에 관한 영감된 기록은 신성한 도움을 받아 추적해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