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엘상 21장 해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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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상 제21장

불레셋으로 피신하는 다윗

주님을 내향으로 신뢰하기 위해 기독인은 저항이라는 외향의 수단과 하나가 되어야 할 때도 있다. 다윗은 주님을 신뢰하면서도 골리앗의 칼을 지참했다. 때로 필요한 경우가 있다면 이 칼이 수호 역할을 했던 다윗의 진짜 적군에게 돌아 설 수 있다. 그는 이제 사울의 분노를 피할 은신처를 찾아 거인의 출신지인 불레셋 성 안으로 진입하고 있다.

다윗의 역사를 주님의 역사로서 조명해보면 그분이 참아 내신 박해와 고통에 관해 미미한 착상이라도 우리 마음에 부상되게 해주고, 그런 모든 것을 극복하시고 그것 넘어로 일어 나신데 대한 상상 까지 우리로 가늠해 볼 수 있게 해준다. 기독인의 제자들에게 말하셨고 지금도 말하시고 있는 것은 “너희는 세상에서 고난을 당하겠지만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 일 것이다 (요한 16:33). 본문의 역사 속에서도 역시 순수함과 더없는 기쁨에로 인도해주는 섭리를 보리라 생각된다. 이 길은 어둠과 고통만이 그 전부는 아니다. 어둠과 고통 만이 전부라고 말한다면 영들 모두는 실패 뿐이고 그들에게 응당 돌아 가야 할 상급 역시 잃어지고 말는지 모른다. 영계에서도 자연계의 삶 처럼 환난이나 어둠 보다 평화와 빛이 더 존재한다. 영적 측면을 더 중시하는 사람들이 고통 받을 때 그들에게는 고통만 있는 게 아니다. 거기에는 위로함이 부가적으로 언제나 존재한다.
이세상에서 우리가 고난을 겪을 수밖에 없다 해도 우리가 천국의 삶으로 더 높이 부상할 수 있다면 그 고난은 우리를 내향적으로는 덜 괴롭힌다. 어제나 내일이나 영원히 똑같으신 그분께 더 가까이 가면 갈수록 우리는 정착된 평화와 영원한 빛의 고요함 안으로 더욱 진입될 수 있다.
어쨋든 시간에 제약받는 이세상 삶 동안 위쪽을 향한 노력은 아직 우리 앞에 놓여 있다. 우리가 모든 것을 정복할 수 있을는지도 모르지만 어느 누구도 정복할 수 없는 마지막 것이 있다. 고난은 현재의 삶에서만 끝날 뿐 그 속에 있던 각종 우리의 원리는 결코 지워지지 않고 오히려 더 확고부동해져 영원히 그대로 살아가야 한다. 이런 상태에 대해 성경은 상징적 언어로 매우 자주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본문의 역사는 고난이라는 그 자체에 직접 관련되어 언급되고 있지는 않다. 다시 말해 괴롭힘을 당하고 있는 영혼이 내향으로 오는 박해를 일시적이나마 피하고저 할 때 그 길을 발견하는 어떤 안정제 같은 역할과는 직접적인 관계는 없다는 말이다.
그러나 우리는 성경의 다른 부분에서 이에 관한 예를 쉽게 발견할 수 있다. 그 중 하나는 티스베 사람 엘리야의 줄거리이다. 아합의 죄로 인해 하늘이 삼 년 육 개월간 닫혀 가믐과 기근이 그 땅에 내렸는데 그 때 이 예언자는 요르단 강 그릿 개울로 가서 개울물을 마시고 까마귀가 날라다 주는 음식을 먹도록 명령받았다. 그 뒤 개울물 마저 마르자 그는 사렙다 과부에게 가도록 명령받았고 거기서 자기 스스로 공급한 양식으로 지탱해 갔다. 또 다른 엘리야의 줄거리도 있다. 그가 이사벨의 분노를 피해 목숨을 부지하고저 도망쳐 거친 들로 나가 싸리덤불 아래 누워있었을 때 천사가 그를 깨웠다. 그리고 말하기를 “일어나 먹어라” 엘리야가 깨어보니 머리맡에 “불에 달군 돌에 구워 낸 과자와 물 한 병이 놓여 있었다.” 이외의 예들이 성서에 더 있지만 그 중 놀랄만하게 중요한 한 가지만 더 살펴보자. 주 예수께서 아기이셨을 때 헤로데의 분노를 피해 보존되시도록 에집트로 운반되셨고 거기서 그분은 헤로데의 위험이 사라질 때 까지 머무셨다.
이와 비슷한 행동 강령이 주님의 가르침에도 있는데 이렇게 제자들에게 명령하섰다. “…이 성읍이 박해하거든 다른 성읍으로 피신하여라.”
몇 가지 성경 기사를 살폈는데 이런 모든 것은 우리의 방향 설정과 위로를 위해 씌어져 있다. 이런 구절들은 우리가 고난을 받을 때, 위험에 빠졌을 때 어떻게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설비해 주시는가, 우리가 무었을 해야 하는지를 낱낱이 가르쳐 주고 있다.
엘리야의 경우가 가르치는바, 내적 인간의 하늘이 닫히고 영적 진리라는 비가 더 이상 내려오지 않고 영적 총명이라는 개울물이 더 이상 흐르지 않을 때, 게다가 마음마저 지독한 고뇌에 파묻혀 허덕일 때, 그러면서도 내향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듣게 되는 순종과 평화가 깃드릴 때 주님께 신실한 사람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어떻게 그분에게서 원조받아야 하는지에 관해서이다.
하늘의 창문이 닫혀 높은데서만 내려올 수 있는 축복이 끊겨 우리 마음이 사막으로 변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축복을 하늘 위쪽에서 찾으려 하지 않고 세상 바깥에서 찾으려는 게 악이 아닐까? 불변하는 축복을 영적 측면에서 구하기 보다는 자연적 측면에서 추구하고 영원한 것에서가 아닌 한정된 것들에서 구하려는 것이 악이 아닐까? 자아를 신뢰하는데 뿌리를 둘 경우 그것이 악이 아닐까? 주님을 신뢰하는데 뿌리를 둔 것이 선이 아닐까? “주님을 신뢰하고 선을 행하라. 참으로 네가 먹여지리라.” 이런 신뢰를 배우도록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무엇을 보여 주실까? “까마귀를 생각해 보아라. 그것들은 수고도 길쌈도 하지 않는다. 곡간에 모아 들이지도 않는다. 하느님께서 먹여 주신다. 너희는 이런 새들보다 더 귀하지 않느냐?” 하느님께서는 까마귀를 먹여주실 뿐아니라 예언자를 먹이시기 위해 까마귀를 보내신다. 그리고 까마귀가 우리의 선생 노릇을 하게해서 가르치시기도 한다.
현재 필요한 것과 미래에 필요할 것 까지 포함해서 준비한다면 내일을 위해 곡간에 모아 들이지 않는 공중의 새들 보다 더 만족스러울 듯 여겨지리라 생각된다. 그러나 내일을 위해 어떤 걱정이나 어떤 불안한 생각을 갖지 않는 것을 새들로부터 배워야 할 때도 있다. 특히 영적 태도나 영적 사항들 속에 있으면서 바깥쪽인 기억이라는 지상적 창고에 우리의 보물을 쌓아 두지 않게 된다면 우리의 영적 인간에서 우러 나오는 사랑의 애정은 주님으로부터 천국을 통해 내려오는 진정한 양식, 즉 그분의 살로 먹여져 의에 굶주린 우리 영혼은 날마다 채워질 것이다.
위에서 살폈듯이 배고픈 때, 기근의 때에 추구하는 안전함이나 생명을 유지 존속 시켜주는 물건들의 중요도는 당사자인 고통받는 자가 당한 처지 보다는 덜한 편이다. 불레셋이나 에집트 같은 지역이 체류지로서 성경에 드물게 등장한 것은 아니다. 아브라함과 이사악은 불레셋 땅에, 야곱은 에집트에 체류했었다. 야곱의 경우 가나안의 가믐을 피해 요셉의 도움으로 그 가문 전체가 에집트에 체류했다. 그 곳에 아기 구세주가 보존되기도 했다. 이렇게 체류한데 대한 이유는 각 지역이 표현하는 품성에 의해서만 알 수 있다. 불레셋은 총명을, 에집트는 지식을 표현한다. 그 곳으로 내려감은 종교 생활의 진보를 위한 수단으로 지식과 총명을 받는 것을 표현한다.
사울의 얼굴을 피해 도망하는 다윗은 과거 골리앗의 출신지이기도한 불레셋 성읍, 갓다라 왕 아기스를 찾아 갔다. 그러나 그는 거기서 오래 머물지 않고 유다 지역으로 다시 건너와 안전한 피신처로서 아둘람 동굴을 발견했다.
아기스를 찾아 가던 도중 그는 성직자 아히멜렉에게서 성소에 놓는 떡과 골리앗의 칼을 얻었다.
이 역사 부분은 마태복음 12장의 사건과 관계를 맺고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제자들이 밀 이삭을 안식일에 잘라 먹는 것을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보고 그들이 안식일 규정을 어긴다고 예수께 비난하자. 오히려 이렇게 물으셨다. “너희는 다윗의 일행이 굶주렸을 때에 다윗이 한 일을 읽어 보지 못하였느냐? 그는 하느님의 집에 들어가서 그 일행과 함께 제단에 차려 놓은 빵을 먹지 않았느냐? 그것은 성직자들 밖에는 다윗도, 그 일행도 먹을 수 없는 빵이었다.” 더 나아가 “사람의 아들이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제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에게 확실히 선포하셨다. 안식일에 밀 이삭을 먹게 내버려 두심으로 예수께서 안식일의 주인이심을 보여 주셨다면 제사떡을 먹는 다윗의 행동은 그분이 성전의 주가 되심을 표현하도록 의도되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 이유가 최상의 측면에서 다윗은 주님을 표현했고 다윗의 일행은 그분의 제자들을 표현했기 때문이다. 성전은 가장 거룩한 장소요 안식일은 가장 거룩한 날이었는바 이 둘은 거룩한 분으로서의 그분을 상징한다. 사실 실제의 성전은 다윗 시대 까지는 건축되지 않았었고 단지 성막 만이 존재해왔다. 그러나 이 두 성소 모두 하느님의 집으로 거룩한 의미를 지녔는데 오늘날 정식으로 주님이 예배되는 장소가 있다면 모두 같은 의미를 지니리라 생각한다. 성전과 안식일이 그분을 표현하는 만큼이나 성전의 제사떡이나 들의 밀도 영원한 생명의 빵이 되시는 분으로서의 그분을 표현해준다. 주님을 한 분 인격자로서 생각해본다면 그분은 성직자 되실 뿐아니라 왕이 되셨다. 그분은 제자들을 성직자와 왕으로 세우시겠다고 약속하시고 있다. 사랑을 나누어 주신다는 수준에서 그분은 사제이시고 그분의 사랑을 받는 그릇이라는 수준에서 제자들도 성직자이다. 진리를 나누어 주신다는 수준에서 그분은 왕되시고 그분의 진리를 받는 그릇이라는 수준에서 제자들도 왕이다.
성직자 만이 먹어야 할 떡을 다윗과 그의 일행이 먹었다는 것은 예수께서 성소 안으로 들어가셔야 한다는 것, 그분의 제자들에게 교회의 거룩한 사항들을 알려 주신다는 것, 그래서 영혼에 자양분을 공급해주는 영적 선함에 관한 원리를 제자들이 먹도록 하신다는 미래의 사항을 미리 보여준 것이다. 이렇게 공급되는 거룩한 선함은 본문에서 다윗이 처한 것 같은 영적 삶의 상태에는 말할 수 없이 귀중하다. 자기 나라도 아닌 땅에서 보호를 받고자 사울의 영역을 벗어나 탈주하는 다윗이나 이세벨의 추격을 피해 달아나는 예언자 엘리야가 도중에서 음식을 제공받아 힘을 얻어 안전한 곳 까지 달려간 것은 영적 상황이 비슷한 처지에 놓여있는 사건들이다. 이런 위급 상황에서 받게 된 음식은 발버둥치는 고난의 시기 동안 내향의 인간이 힘을 얻도록 하느님으로부터 받는 자양분이다. 주님 스스로도 이런 음식으로 지탱하셨다. 이런 음식을 가리켜 주님 스스로 이렇게 제자들에게 말하셨다. “나에게는 너희가 모르는 음식이 있다.” 이 음식이란 신성한 선이요 이것을 그분은 안에 계신 아버지로 부터 내향적으로 받으셔 갔는바 어느 누구도 알았을 리 만무하다. 이 음식이야말로 거룩함을 입은 빵인바 그분 외에 어느 누가 먹는다는 것은 타당치도 않고 가능할 수도 없다. 그분 자신 외 어느 누구도 신성의 충만, 거룩함 속에서 이 빵을 받을 자 진정 없으리라.
다윗 만 거룩한 떡을 받은 게 아니라 그의 일행 까지 그 떡을 받아 먹었다. 주님의 추종자도 성별된 떡을 받아 먹는다. 그러나 주님과는 매우 다른 수준에서 떡을 받을 뿐이다. 주님께서는 그분 스스로 받았던 떡을 제자들도 받게 해주셨다. 그들이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그분을 통하여서만 가능했다. 이렇게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아들 외에 아버지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리고 매우 중요한 말씀을 덧붙이셨다. “아들에게만 그분을 밝히시리라.” 이는 경건함의 신비, 하느님이 육 안에서 밝히 드러내 보여주신 신비이다. “아버지를 본 자는 아무도 없다. 아버지의 소리를 들은 자도 없고 그분의 모습을 본 자도 없다.” 아들이 아버지를 볼 수 있게 하지 않았더라면 모든 사람은 아버지를 영원히 보지 못한 채, 듣지 못한 채, 알지 못한 채 있을 뻔 했다. 빌립보에게 하신 이 말씀, “…나를 보았으면 아버지를 본 것이다. 그런데도 아버지를 뵙게 해달라니 그게 무슨 말이냐?” 는 얼마나 의미심장하고 위로에 넘치고 축복으로 가득해 있는지!…납득이 불가능한 신성이 인성을 수단으로 납득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 이것이 육을 입은 영광이다. 이리하여 신성은 내려와 기독인의 체험 안에서 언제나 함께 계신다. 그 이유는 그분의 인성이 인간의 모든 체험을 통과 하셨기 때문이다. 주님께서도 목말라 하시고 배고파하셨다. 그러나 그것은 멸해 질 빵을 위해서도 아니고 떨어질 물을 위해서가 아닌 영혼을 먹일 수 있는 거룩한 빵을 위해서였고 영원히 그리고 무한히 그분에게서 솟는 생명수를 마시게 해주시려는 배려 때문이였다. 이런 빵과 물 때문에 배고파 하시고 목말라 하시어 잡수시고 마셨기 때문에 이제 그분께서는 그분의 자녀들이 필요로 하는 영적 요구를 채워 주실 수 있었다.
이런 떡이 고뇌 속에 빠진 우리들에게 주어진다는 것은 얼마나 위로되는지 모른다. 영혼이 진통을 겪는 동안 성소의 떡으로 채워 주신다. 보통의 수단으로 버티기 힘들 때 생명의 떡을 수단으로 내향적으로 버텨내시면서 이 양식이 주는 힘으로 우리는 사십 일 광야 여정을 끝낼 수 있다.
다윗은 아히멜렉에게 칼이나 창이 없느냐고 물었다. 영적 삶도 자연적 삶 처럼 버텨내기도 해야 할 뿐만 아니라 방어도 필요하다. 이 방어의 수단이 전쟁 무기로 의미되고 있다. 본문의 대화체가 암시하는 세부적인 질문은 다윗이 골리앗의 칼을 얻는 모습 속에 들어 있다.
다윗과 골리앗이 일대 일로 대결했던 앞 장의 사건에서 우리는 거인의 목을 자른 거인의 칼에 관한 의미를 살폈었다. 무기는 방어용이든 공격용이든 순수한 상태의 진리나 왜곡된 상태를 상징하는데 이 진리를 수단으로 원리들은 존속되고 방어도 한다. 악이 선에 대항하려고 고용하는 무기라고 해서 절대적인 거짓만 있는 것은 아니다. 엄밀히 구분해 보면 절대적인 거짓들은 선에 맞설 힘을 가지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왜곡되어 응용되는 진리들이 맞서는 힘을 갖고 있다. 성경의 가르침을 잘못 해석하여 오류가 일어나 선을 현혹시키는 만큼에서 왜곡된 진리는 선에 대항할 수 있게 된다. 골리앗의 칼이란 왜곡된 말씀 속의 진리를 표현한다. 다시 말해 당사자의 생명 상태가 어떠하든 믿는다는 고백만으로도 구원이 획득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거짓 원리가 그럴듯해서 부추키는 진리를 표현한다. 이런 골리앗의 칼이 다윗에 들려 골리앗의 목을 자르게 되었을 경우, 이는 왜곡된 진리였지만 이 진리는 진정한 제 모습을 회복해서 골리앗이라는 악을 파괴하는데 고용되고 선을 지지하는 편에 서있는 것이다. 게다가 이 칼이 성소에 뉘여있는바 이제는 하느님을 섬기는데로 성별된 상태가 되어 있다. 이 칼이 아히멜렉 성직자를 통해 기름부어진 왕 다윗에게 건네졌다. 이는 어둠을 정복하시고 구속을 성취하시기 위해 신성이 인성을 그 수단으로 취할 때의 진리를 표현한다. 이런 높은 의미를 기독인들에 관계시켜 생각해보면 성소로부터 얻은 이 칼은 선으로부터 나오는 진리, 충만함과 권능이 있는 생명이 나오게 하는 진리를 표현한다. 아히멜렉이 이런 칼밖에 없다고 다윗에게 말했을 때, “그만한 무기가 어디 또 있겠습니까?” 라고 대답하고 있다. 왜곡됨을 당한 진리가 악에서 해방될 경우 그 진리는 여느 다른 진리 보다 더욱 선을 잘 섬길 수 있다는 것, 가장 강력한 적, 세상과 자아 사랑이라는 가장 깊은 악에 매우 효과적으로 대처할 수 있게 변혁된 진리 임을 뜻한다.
이 본문이 가르치는바, 우리가 궁핍과 고난 속에 있을 때 성소에로 나아 간다면 필요로 하는 치료제를 얻게 된다는 것이다. 생명을 존속시켜주는 빵과 방어해주는 칼은 받을 자격이 있는 이들을 위해 성소에 놓여져 있다. 이방인의 영토로 들어 가고, 심각한 시련에 푹 빠질 수밖에 없었고, 하느님의 사랑과 빛이 더 이상 마음 안에 없는 듯, 그분을 신뢰하여 얻는 기쁨이 하나도 없는 듯 하여 통곡할 때에도 주님께서는 우리 영혼이 살아있게 해주시는 영적 선물을 우리에게 보내주시어 다시금 평화로이 본향을 찾을 수 있게 배려하신다.
고난을 견뎌내 보겠다는 결심으로 노력하고 간구할 경우 관대한 섭리가 우리에게 수여하는 각종 수단을 긴요하게 사용해야 할 것이다. 역경의 시기는 개선의 계절이라 말할 수 있다. 역경은 번영의 계절에 앞서 우리를 준비시키는 시기이다. 전진이라는 목적을 위해 허용되는 것이 고난의 시기이다. 주님께서는 받으신 고통을 통해 그분의 나라를 건설하시고 그분의 평화와 쉼을 이룩하셨듯이 우리 역시 고난을 통해 인도해 가심으로 그분의 나라가 우리에게 임하도록 배려하시고 있다. 고난 속에 있는 우리에게 용기를 주시어 우리의 심정을 강건하게 하신다.
다윗이 피신했던 이방인의 땅 역시 자기 동포가 내몰았던 위험이나 마찬가지여서 그로서는 거기서도 안전을 찾지 못하였다. 골리앗의 칼을 얻고 음식을 먹은 다윗은 “사울을 피하여 그 날로 갓나라 왕 아기스를 찾아 갔다.” 거기에 도착했을 때 아기스의 신하들이 “그 나라의 왕 다윗임에 틀림없습니다. 사람들이 춤추며, ‘사울은 수 천을 치셨고 다윗은 수 만을 치셨다네’ 하며 찬양하던 그 사람입니다.” 라는 말에 다윗의 두려움은 다시 일어났다. 아기스 왕을 두려워한 다윗은 “일부러 미친 시늉을 하고 발작을 일으키고 성문짝에 글자를 되는 대로 써 갈기기도 하며 턱수염에 침을 흘리기도 했다.” 그의 연극이 성공하여 그는 아기스 왕을 안심시켜 위험을 모면했다. 이런 성공적인 다윗의 연극과 걸맞는 성서 구절이 서간문에 있다. “…그렇다고 여러분에게 또다시 우리 자신을 내세우려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우리를 자랑할 수 있는 근거를 여러분에게 주어 아무 것도 자랑할 것이 없으면서도 겉만 가지고 자랑하는 자들의 말을 반박할 수 있게 해주려는 것 뿐입니다. 우리가 미쳤다면 그것은 하느님을 위해서 미친 것이고 우리가 온전하다면 그것은 여러분을 위해서 온전한 것입니다” (고린도후 5:12,13). “멸망할 사람들에게는 십자가의 이치가 한낱 어리석은 생각에 불과하지만 구원받을 우리에게는 곧 하느님의 힘입니다” (고린도전 1:18). “…그러나 자연적 수준의 사람은 하느님의 영에 속한 것을 받지 않는다.그 이유가 그에게는 그것들이 어리석게만 보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영적인 것을 알지도 못하는데 그 이유가 영적인 것들은 영적으로만 식별되기 때문이다” (고린도전 2:18). 심정이 할례 받지 않은 자, 즉 영적 불레셋 사람들에게 주님 자신이 어떻게 비쳐졌을까? 요한복음을 읽어보자. “…그는 마귀가 들렸소. 그런 미친 사람의 말을 무엇 때문에 듣는 거요?” (10“20). 성경에 등장하는 자연적 수준의 인간이 진리에 관해 뭐라고 말할 수 있을까? 이 수준의 사람들은 어리석다는 것을 아무렇게나 갈겨쓰고 있는 게 진리라고 생각하지 않을까? 죄진 여인을 기소하는 위선자들을 정죄하시는 표시로서 예수께서 쪼그리고 앉아 땅 위에 글을 쓰셨을 때, 소경의 눈에 바르시기 위해 땅에 침을 뱉아 흙을 개셨을 때에도 그분께서는 진리의 올바른 사용법과 그 진정한 의미를 주신 것이지만 믿지 않는 이들에게는 본문의 다윗이 미친 시늉을 하여 아무렇게나 글을 써 갈기고 턱수염에 침을 흘린 정도로만 나타났을 뿐이다. 이후 우리는 이 본문과 대조되는 부분 즉 사울의 분노를 피해 또 다시 아기스 왕을 찾을 때 그에게서 환대 받는 장면에서 다윗의 둘째 방문에 대한 의미를 본문과 비교하여 살펴보게 된다. 어쨋든 주님께서 기름부은 자, 미래의 왕은 현재로서는 어떤 은신처도 없이 날고 있는 산 속의 새와도 같아 사냥꾼의 표적만 되고 있을 뿐이다.
시편 56편은 본문의 다윗과 연결되는 부분이다. 이 시편의 다윗과 본문의 다윗은 상황이 다른 듯 여길 수 있겠지만 어쨋든 그가 박해와 곤경에 빠졌던 상황은 공통되고 있다. 이 상황 속의 다윗은 기독인의 고난이나 위험에 대한 표본이어서 영적 측면에서의 고통자들에게 많이 읽히기도 한다. 이 시편에 대해 선견자는 이렇게 설명해준다. “이 시편은 주님이 겪으신 시험을 취급하고 있다. 이 시험 속에서도 그분께서는 아버지에게 그분의 신뢰를 두셨다. 또한 이 시편은 주님께 신뢰를 둔 기독인의 시험도 취급하고 있다.” 신성한 자비를 간구하는 기도는 신성한 보호로 그 확증을 갖는다. 56편을 직접 읽어보자. “하느님, 이 몸을 불쌍히 여기소서. 사람들이 들볽습니다…이렇게 무서울 때 나는 당신만을 의지하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찬양하오며 하느님을 신뢰해 두려운 것 없사오니 인간들이 감히 이 몸을 어찌하오리까?” 신뢰로 가득한 기도의 효력이 본문의 다윗의 체험으로 이렇게 우리에게 본보기가 되어주고 있다. “…내가 부르짖는 날 나의 원수들은 물러가고 나는 하느님께서 내 편인 줄을 알 것입니다…하느님, 당신께 서원한 것 갚아 드리려 감사의 제사를 바치려 하오니, 이는 내 목숨 죽음에서 건져주시고 내 발이 넘어질까 붙드시어 생명의 빛 받아 하느님 앞을 거닐게 하셨기 때문이옵니다.” 이 시편은 각 개인의 체험에도 매우 적절히 응용되리라 확신한다.

사무엘상 20장 해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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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상 제20장

다윗의 도망과 요나단의 도움

본 장의 주제는 침통하면서도 흥미있고 다정다감한 정서를 생산해주고 있다. 정의에 관한 가르침과 마음을 고치기 위한 영감을 준다는 측면에서는 여느 다른 장과 다름 없다. 어쨌든 우리가 원하는 것에 비해 보다 넓은 측면에서의 관찰만이 가능할 것 같이 보인다. 다윗과 요나단의 우정은 이미 앞에서 살핀 바 있으므로 생략할 것이다.
사무엘을 찾아 가려 했던 사울의 역사 이야기는 단지 그가 접신되어 벌거벗은 미치광이 상태로 앞 장에서 일단락되고 있다. 이런 사울의 모습이 다윗에게 알려졌다 해도 다윗으로서는 그것만으로 자기의 신변이 안전하다고 생각될리 만무했으리라. 본 장은 이렇게 시작된다. “다윗이 라마에 있는 나욧에서 도망하여 요나단을 찾아 가 항의하였다. ‘내가 무슨 짓을 했단 말인가? 내가 무슨 못할 짓을 했는가? 자네 아버님께 무슨 잘못을 저질렀기에 이렇게 내 목숨을 노리신단 말인가?’” 이렇게 다윗은 사울의 분노를 피할 방도를 궁리하다 못해 자포자기해서 이렇게 말을 내뱉고 있다. “나는 한발만 까닥해도 영락없이 죽을 몸이야. 이것은 하느님도 아시고 자네도 아는 일 아닌가?” 영혼의 쓰라림은 다윗의 주님의 영에 있었던 무기력한 형상 즉 “지금 내 마음이 괴로워 죽을 지경이니…” (마태 26:38)와 같은 모습이다. 이는 매우 격렬한 영적 시련에 의해 생산되는 마음의 상태를 적절히 표현해주고 있다. “시험에는 황폐함, 황량함, 자포자기됨, 그 결과 슬프고 외로운 느낌이 늘 동반되어진다.” 이와같이 시련과 시험은 인간 본성 속에 있는 악들이 악령에 의해 흥분되는바 기독인에게는 자신의 자연적 수준의 마음 상태를 들여다 볼 수 있는 찬스를 주게 된다. 이럼으로 해서 자연적 수준의 본성이 유전적으로 받은 악과 자신이 벌어 들인 악이 거하는 곳임을 알게 해준다. 이런 것들은 위와 같은 쓰라린 느낌을 생산해주고도 남을 것이다. 우리 속의 이런 악들을 통해 시험이 오고 있다. 악들이 우리 본성을 흥분시킴으로 해서 우리는 자신 속을 보아 왔고 보고 있어 그 악을 정죄해왔고 정죄하고 제거할 수 있기 위해 시험이 우리에게 오도록 허용된다. 우리 속에 든 악을 보고 혐오하는 것이 우리의 내적 인간(inner man)이다. 여기서 표현되고 있는 상태가 사도에 의해서 이렇게 표현되고도 있다. 기독인 속의 내향적 인간은 하느님의 법을 반기지만 한편 기독인 속에는 마음의 법칙에 반대하여 싸우려 하는 다른 법이 있다는 것을 보게 된다. 이 법은 그로 하여금 자기 속에 있는 죄의 법에 종이 되게 한다 (로마서 7: 22,23). 이를 예수님의 측면을 놓고 생각한다면, 그분은 내향의 인간에 의해 하느님의 법을 반기셨을뿐 아니라 그분의 내향적 인간은 법 그 자체이시고 이 법에 반대하는 마음 속의 법은 단지 자연적 수준의 마음일 뿐이다. 이 마음은 그분의 창조물과 공통되는 것으로 그분의 인간 부모로부터 상속되어 있었다. 우리와 공통되는 속성을 상속받으신 결과 그분께서도 우리처럼 갖가지로 시험당하셨다. 우리와 차이가 있는 가장 중요한 점은 그분은 죄 없이 시험을 맞이하셨다는 것이다. 주님에게 있었던 악한 경향성들은 악행으로는 결코 결과 되지 않았다. 그 악들이 시험의 원인은 되었지만 적극적 상태로 이어지지 않았다. 마치 예방주사로 앓는 것과 직접 병을 앓는 차이를 덧붙여 생각해보면 이해에 도움이 될는지 모른다. 거듭나고 있는 경우라 해도 그들은 자기 속의 악을 바라고 있다는 것을 느낄뿐 아니라 죄로 까지 결실을 맺기도 한다. 살아 있는 인간치고 죄짓지 않는 자가 없고, 시험동안에 그리스도가 받아 이긴 수준의 시험에 노출된 자 역시 아무도 없다는 것 또한 진정한 추론이다. 본문의 다윗은 “내가 무슨 못할 짓을 했는가?” 라고 말할 수 있었지만 예수께서는 “너희 중 누가 자신이 죄 없다고 나를 확신시켜 줄 자 있느냐?” 라고 단언하실 수 있다. 그분의 죄 없으심은 다윗의 죄 없다 와는 완전히 다르다. 그럼에도 다윗의 순진함은 현재의 억울함이나 괴롭힘을 당하는 처지를 감안해도 그의 순진은 장차 있게 될 실체에 관한 그림자로서는 무가치한 것은 아니다.
다윗이 사울로 인해 괴로움을 당해도 사무엘의 보호를 받았을 경우 앞 장에서와 같이 그의 생명은 전혀 위협받지 않았던 것으로 보여지고 있다. 따라서 그가 안전 지대를 택하지 않고 다시 사울의 식탁에로 되돌아 오는 모습은 조금 이상한 듯 여겨질 수도 있다. 그가 요나단에게 이렇게 말한다. “내일이 초하루, 내가 임금님의 정찬에 나가야 하는 날이 아닌가?” 이 말은 사울의 폭력이 반복될 것을 예상하여 두려워하는 모습이다. 그래서 다윗은 삼일 저녁 까지 들에 나가 숨어 있고 요나단은 다윗이 문중의 주년제가 있어 속히 고향 베들레헴에 다녀오기 위해 휴가를 청하더라고 사울에게 핑계를 대도록 약속했다. 초하루 행사는 이스라엘 교회의 지정된 축제일로 명령되어 있었다 (민수기 10:10). 초하루는 새로운 상태의 시작을 표현한다. 그러므로 번제와 친교제를 드리면서 은나팔을 불었다 (10:10). 이는 신앙이 선행의 애착을 표현하는 수단임을 말해주고 있다. 어쨋든 다윗에게는 초하루 행사가 기뻐할만한 날일 수는 없었다. 이 은나팔이 그에게는 신앙과 사랑을 말해줄 수 없고 그 반대인 불성실과 미움만을 느끼게 할 뿐이었다. 사울 속의 악은 평화롭고 환호를 올리는 이 날을 전쟁 소리와 경보를 울리게 하는 날로 바뀌게 하고 만 것이다. 이런 초하루 행사는 다윗으로 사울의 만찬에 빠질 수밖에 없도록 다윗을 만들었다.
사울이 다윗에게 품은 적개심은 자연적 수준의 인간이 영적 수준의 인간에게 품는 적개심을 표현한다. 따라서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고 시도하는 것은 적개심이라는 악으로부터 일어나는 시험 속의 다툼을 표현하는바 이런 특이 사항들은 기독 생활에 관련된 어떤 것과 그 체험으로부터서도 배울 수 있다. 더구나 우리 신앙의 저자되시고 마무리지으시는 분인 예수님의 체험에서도 발견된다. 이분은 자신 앞에 장진되어 있는 기쁨을 위해 십자가의 고통, 조롱함을 참아내셨고 하느님의 옥좌 오른쪽에 앉으셨다. 죄인들에게서 이렇듯 심한 미움을 받으시고도 참아내신 그분을 생각해보면 우리는 지치거나 낙심하는 일이 없을 것이다 (히브리 12: 2-3). 이 사도 외에 또다른 증거자 선견자가 전하는 용기와 경고도 있다. “인간이 시험 가운데 있을 때 그의 내적 측면인 영적 인간은 천사를 수단으로 주님의 통치 아래 있는다. 그러나 그의 외적 측면 즉 자연적 인간은 지옥의 영들의 지배 아래 있는다. 이 둘의 대결이 인간에게 시험으로 감지된다. 저항은 자연적 인간으로부터 발생된다.”
만일 다윗이 사무엘에게 있을 때와 같은 안전 지대를 떠나 위험한 곳인 줄 알면서도 되돌아 간 것은 아마 의무감 때문이다. 예수님 역시 그분의 생명을 노린 이들로부터 피하시기도 했다. 그러나 투쟁의 장소로 되돌아 오셨다. 그 이유는 유익한 쪽을 선택하시고저 했기 때문일 것이다. 기독인의 경우도 여기서 예외는 아니다. 우리는 빤히 보이는 위험일 경우 거기서 빠져나와 그분의 천사들 사이 거룩한 성소에로 피신하고 싶어한다. 그러나 기독인의 의무라는 부르심에 순종하고자 다시 위험한 곳으로 뛰어든다.
되돌아 간 다윗이 행한 첫 일은 자기 생명을 노리는 사울인데도 그를 왕으로 잘 섬겼다는 것을 요나단에게 인정시키는 것이었다. 본 장과 이 후 이어지는 대목들을 보면 요나단은 사울과 다윗 사이에서 착실하게 책임을 수행해 가고 있다. 이런 줄거리에서도 주님과 인간에 관련되는 또 다른 진리에 관한 본보기를 살필 수 있다.
요나단, 그는 자기 친구에게는 격려를 보내고, 자기 아버지의 분노는 누구러지게 하려고 애쓰고 있다. 그가 중매자로서의 품성을 지녔다는 것은 사건 줄거리에서도 여실히 나타나고 있다. 불일치되는 것들이 재회할 수 있게, 특히 내향의 인간과 외향의 인간이 재회하는 것, 각각이 한 쌍이 되어 새로운 인간이 되게 해주는 것이 중매자이다.
이제 위 본문을 간략히나마 곰곰히 생각해 볼 차례이다. 종교에 관한 섭리, 자연계와 영계의 모든 섭리에 관해서이다. 진공 상태에서는 어떤 것도 행동할 수 없듯이 우주 인력도 우주의 매개체가 필요하다. 이 매개체는 온 공간에 확장되어 있는 에테르를 수단으로 공급된다. 그리고 땅과 물을 관통하면서 땅 위의 것이든 물속의 것이든 모두 하모니를 이루게 하고 그 하모니가 규칙적으로 교차되도록 해주고도 있다. 태양은 대기라는 매개체 없이는 열과 빛을 땅 위에 운반해줄 수 없다. 이와 똑같은 법칙으로 영계도 통치된다. 영계에서도 매개체를 통해 따로 구분되는 것들끼리 연결을 갖고 서로 일치 안되는 것들이라 해도 매개체를 통해 재회한다. 이 법칙은 가장 낮은 것에서 가장 높은 것에 이르기까지 공통된다. 주님께서도 인성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하느님과 인간이 재회하고 하나를 이룬다. 그뿐만이 아니다. 아버지의 뜻은 “그분의 처방이 때가 차면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게 하시는 것” (에베소 1: 10), 그리고 “지상에 있는 것이나 하늘에 있는 것이든 모든 것이 그분께 일치되게 하신다” (골로새 1:20). 본문의 경우에서도 내적 인간과 외적 인간이 연결되게 하고 일치시켜 주는 매개체가 있다. “내적인 것은 매개체 없이 외적인 것과 어떤 교류도 할 수 없다. 내적인 것과 외적인 것 중간에 내면 또는 합리적 인간이 있는데 이를 통해 내적인 것이 외적인 것에로 흘러든다. 이 합리적 인간이 없다면 위 둘 사이에는 어떤 교류도 있을 수 없다.” 거듭나아 가는 일, 즉 내적 인간과 외적 인간이 일치되어 가는 일, 영적인 것과 자연적인 것이 일치되어 가는 일에도 매개체는 언제나 존재한다. “거듭나아 가는 인간의 과정은 중재 역할을 하는 어떤 선 안에 주님에 의해 보존되어진다. 이 선이 거듭나는 사람에게 순수한 선과 진리들을 소개한다. 거듭남에 관한 지식 또는 새 사람에 관한 어떤 지식을 가진 사람들이라면 새 사람은 옛 사람과 완전히 다르다는 것을 납득할 수 있을 것이다. 그이유가 그는 자기의 기쁨과 축복됨을 구성하는게 영적인 것 내지 천적인 것에 대한 사랑이기 때문이다. 그 반면 옛 사람은 세상적 내지 지상에 속한 것을 사랑하는 가운데 있고 이것이 옛 사람의 기쁨과 만족을 구성하고 있다. 그러므로 새 사람은 천국적인 것에 목적을, 옛 사람은 세상적인 것에 목적을 두고 있다. 이로부터 명백해지는바, 새 사람은 옛 것과는 전혀 딴 판이다는 것이다. 옛 사람의 상태에서 새 사람의 상태로 인도되기 위하여 그는 반드시 세상적 욕망을 벗어 던지고 천국의 애착으로 옷입어야 한다. 이는 무수한 수단으로 결과되는데 이 수단은 주님만이 아시고 그 중 일부는 주님으로부터 천사들에게 알려지고 극히 일부가 인간에게도 알려지지만 이는 거의 알려지지 않는다고 하는 편이 더 나을지 모른다. 그럼에도 이 모든 사항들이 말씀 속 내적 의미로는 명백히 나타나고 있다. 그러므로 인간이 옛 사람에서 새 사람으로, 또는 거듭나는 것이 어떤 이들이 착각하듯 어느 순간에 바뀌는게 아니라 수많은 세월 속의 과정, 전 생애 아마 죽는 마지막 시기에 이르기까지 계속된다. 그 이유는 그의 욕망이 폐기되면서 천국 애착이 그 대신 은근히 심어져 전에는 그가 전혀 지니지 못했던 새로운 관념을 형성한다. 이리하여 그의 생명의 상태는 수많은 변화를 겪어 가는데 이때마다 그는 이 단계에서 저 단계로 승강할 때 마다 단계와 단계 사이에 있게 되는 매개체적인 선, 즉 세상과 천국이라는 양 쪽에 걸칠 수 있는 선 가운데 보존되어야 한다.
사울이 자기 아들 요나단을 죽이려는 모습 속에서 영적 인간의 영향력에 저항하려는 자연적 인간의 양태를 찾아 볼 수 있다. 영적 수준에 적개심을 품는 자연적 수준을 제거해 주려는 진정한 진리의 매개체의 노력을 엿볼 수 있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 활개치고 있는 무가치한 우리의 목적들, 이 목적을 떠받드는 각 종의 오류들을 제거하려는 중간 매체의 역할을 말한다. 그러나 자연적인 목적이 우세하여 세력을 떨치고 있는 한 사울의 창이 길 듯 거짓 원리는 오랬동안 버티고 서 있어서 어떤 경로를 통해 진리가 오든, 그 진리가 무슨 종류이든 모두 내팽개칠 적개심으로 꽉차 있다. 다윗을 미워하는 사울에 대한 요나단의 분노는 단지 영적인 것과 자연적인 것이 화합하지 못하는 것을 표현하는 형태에 불과하다. 이는 아끼는 자식에게 어머니가 화를 내는 수준이다. 이런 분노가 하느님 측면에서 언급될 경우가 성서에서 많이 등장하는데 이럴 경우 이는 신성과 인간 마음 사이의 불일치를 표현하고 있다.
사울 앞에서 화가 난 채 밖으로 나온 요나단은 다윗이 숨어있는 곳으로 그를 사랑하면서 찾아 갔다. 요나단이 아버지 사울의 다윗에 대한 기분을 확인 할 때까지 다윗은 숨어 있기로 두 친구는 약속하고 있었던 터이다. 다윗이 숨어 있는 곳에 이르러 요나단은 세 번 활을 쏘았다. 시종에게 미리 화살의 방향을 정해 놓음으로 다윗은 자기가 안전하려면 도주해야 한다는 것을 눈치채었다. 무기고인 하느님의 말씀으로부터 오는 진리들, 날개 달린 특사(천사)가 상징적으로 보여 주듯 이 진리는 사물의 조건에 관해 우리 마음을 가르치고 그 여건이 진리를 승인하거나 요구할 경우 하지 않는게 좋지 않을까 또는 열심히 해보는 게 어떨까 라는 충고를 제시해 준다.
이제 화살을 쏘는 장면으로 이어진다. 다윗은 요나단과 미리 약속한 장소인 에셀 바위 옆에 가서 숨어 있었다. 요나단이 이렇게 말해 두었다. “내가 과녁을 맞추는체 하고 그 쪽으로 활을 세 번 쏘고 시종을 시켜 화살을 집어 오게 하면서 그 시종에게 ‘화살이 이 쪽에 있다. 집어 오너라’ 하면 주님께서 살아 계신바와 같고…‘화살이 저쪽에 있다. 집어 오너라’ 하면 주님께서 자네를 떠나가게 하는 것일세…‘” 위협당하는 자신의 처지를 놓고 다윗이 읊은 구절이 시편에 있다. “…이 재난이 지나기 까지 당신의 날개깃 그 속에 이 몸을 숨기렵니다” (57:1). 이는 이사야가 말한 것과도 매우 유사하다. “내 백성아, 어서 너의 골방으로 들어 가거라. 들어 가서 문을 꼭 닫아 걸어라. 이 분노가 가실 때 까지 잠깐 숨어 있어라” (26:20). 우리가 곤경에 빠져 있을 때 주님은 우리의 피난처이시다. 그러나 우리가 그분을 피난처로 삼으려면 우리의 생각과 애정을 위쪽으로 들어 올리거나 또는 안쪽으로 돌아가게 해야만 한다. 그 이유가 우리 속 천국 안에 주님이 거하시지 않으면 우리 밖의 천국을 찾아보는 쓸모는 거의 없기 때문이다. 마음의 내면은 자연적 인간의 분노가 가셔질 때 까지 영적 인간이 안전하게 보존될 수 있는 밀실이다. 말씀 역시 안전한 장소이다. 그이유는 주님께서 그분의 말씀을 수단으로 우리 안에서 우리와 더불어 현존하시기 때문이다, 이것이 에셀 바위, 우리가 곤경에 처해 있을 때에 머물어야 하는 곳이다. 또한 말씀은 시금석(touch stone)과 같아서 이를 수단으로 우리의 상태와 운명은 결정지어진다. 요나단이 돌을 과녁으로 삼아 쏘았다면 이는 안전함을 표시하지만 돌 넘어를 과녁으로 삼아 쏘았을 경우 이는 위험함을 표시하게 된다. 이 바위 안쪽은 말씀의 영이고 바깥은 말씀의 글자이다. “글자는 사람을 죽이고 영은 사람을 살린다” (고린도후 3:6). 말씀은 에셀이라는 말의 뜻 처럼 우리에게 방법을 보여준다. 설사 이 방법이 떠나라는 말일지라도 그 말은 우리로 위험을 벗어나게 해주고 악으로부터 탈주하는 방법에 해당된다.
요나단의 시종이 화살을 모아 성 안으로 돌아가자, “다윗은 그곳에서 남쪽으로 향하여 일어나 세 번 땅에 엎드려 절을 하고는 서로 얼싸 안고 실컷 울었다.” 남쪽을 향하여 일어난다는 것은 영적인 빛과 총명의 상태에로 일어난다는 것이다. 땅에 얼굴을 대고 세 번 절을 한다는 것은 부끄러움(humiliation)을 깊이 느끼는 상태에 있다는 말이다. 서로 키스한다는 것은 사랑으로 하나 되는 것이다. 서로에게 공통되는 곤경으로 슬피 울고 외압에 못이겨 헤어져야 한다는 것은 자연적 인간과 영적 인간 사이에 놓인 불일치에 대한 통탄을 표현한다. 이로 인해 선함과 진리가 분리되는 것, 천국과 행복을 구성하는 하나 됨 내지 일치함이 깨지는데 대한 슬픔 까지 포함한다. 이 절단은 모든 통탄함의 기초이다. 이는 모든 인간의 눈에서 눈물을 생산하게 하는 원천이기도 하다. 기쁨이 벅차거나 슬픔이 북받처 울게 되는 사실 역시 위 진리와 무관하지만은 않다. 또한 눈물을 생산하는 느낌 역시 분리의 어떤 종류와 연결되어 있다. 심정으로부터 솟아 눈을 통해 흘러 나오는 격렬한 기쁨이라 해도 그것 역시 오래 장진되었던 슬픔이 봉인된 채 있다가 터지는 샘줄기일 뿐이다. 예수께서 슬피 우셨다. 그분의 눈물은 통탄과 사랑, 슬픔과 기쁨 모두를 표현하고 있다. 그분께서는 파멸이 다가온 예루살렘을 보시고 우셨고, 라자로의 무덤에서도 우셨다. 거기서의 눈물은 기쁨 뿐만 아니라 깊은 동정심에서 나온 슬픔 까지 표현해주고 있다. 그 이유가 그분께서는 죽은 자로부터 나사로를 이제 일으키신다는 것을 알고 계셨고, 한편 나사로의 죽음으로 슬피 우는 자매들은 나사로가 다시 살아난다는 것을 몰랐기 때문이다. 나사로의 부활이 이방인들 사이에서 교회를 일으키는데 대한 모형임을 생각해 볼 때 주님께서 나사로의 무덤에서 우신 것은 그분 앞에 장착된 기쁨의 한 부분으로 간주해야 할 것이다.
본문을 우리 자신과 관련해서 잠간 더 정리해 보자. 우리 속의 다윗은 이렇게 권고한다. “그분이 진노하시지 않도록 그 아들에게 키스하여 진노로 인해 멸망하지 말라” (시편 2:12). 다시 말하면 사랑을 수단으로 주님과 결합하려고 애쓰라고 권고한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받는 고통을 우리와 함께 나누시며 동정하신다. 우리가 죄 가운데 있는 동안 그분은 슬피 우신다. 우리가 죄로 슬퍼하여 회개의 눈물을 흘릴 때 우리 안에서 함께 우신다. 우리가 회개한 후 기뻐서 울 때도 같이 우신다. 구세주와 구원받는 자 사이에 있는 이 동정심은 우리의 연약한 점을 몰라 주시는 분이 아니고… 우리와 마찬가지로 모든 일에 시험을 받으신 그분의 존재로부터 일어나고 있다 (히브리 4;15). 게다가 우리 안에서 우리와 함께 우시되 다윗과 요나단의 경우와 같이 우리의 심정에서 일어날 수 있는 최대한 즉 “한껏, exceed” 우시고 있다는 점을 조금이라도 감지해야 하지 않을까? 하느님 다운 슬픔, 천국 같은 기쁨은 그분 만으로부터이다. 모든 것을 공급해 주시는 그분은 공급해 준 모든 것 안에 공급된 것 보다 더 많게, 더 크게, 더 높게 계신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동정하실 뿐아니라” 그분께서는 스스로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는 바 시험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실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확신하고 있어야 하리라 (히브리 2:18).
지독할 정도로 서로를 염려해 주는 두 친구가 헤어지기 전 요나단은 다윗에게 둘이서 주의 이름으로 우정을 맹세한 약속을 상기시켜 주고 이 약속은 두 사람의 후손 사이에서도 언제까지나 서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주님과 기독인의 언약은 각 사람의 심정과 이해성 안에서 계속적으로 잉태되는 사랑과 신앙의 모든 상태에 고루 퍼져 삶 안에서 태어난다. 이런 삶. 거듭나는 삶은 영원히 이어진다.

사무엘상 19장 해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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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상 제19장

요나단이 모함을 당하는 다윗을 변호하고, 미갈이
그를 사울의 분노에서 구해주다.

사울이 직접 다윗을 죽이려한 시도나 블레셋의 손을 빌어 죽게 만들려 했던 계략 까지도 좌절되었을 때, “그는 아들 요나단과 온 시종들에게 다윗을 죽이겠다는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이 구절만 보아도 사울이 불행을 더 크게 확대시키고 그의 마음이 균형을 잃었다는 것을 스스로 자백하고 있다. 사울이 자연적 인간을 표현하는바, 그는 주님께서 강림하실 때의 상황까지 표현하고 있다. 그 당시의 상황은 많은 이들이 악령에 휘말려 있었는데 그들 중 일부는 정신이상으로 미치광이가 되어 있기도 했다. 사울의 불건전한 마음은 미래에 있게 될 그의 행동에 대한 징조를 보여주고 있다. 정신이상의 초기 단계 중 하나는 어떤 때는 올바른 이성으로 일을 처리하지만 곧바로 이전의 망상 상태로 빠져들고 하는 상태이다. 사울의 미래 역사에서도 이런 현상이 가끔씩 발생하고 있는데 오늘 본문은 그 중의 하나에 해당된다. 그러나 사울과 요나단은 자연적 인간의 상태 중 두개의 다른 단계를 표현한다는 것을 고려해 본다면, 사울은 외관에 의거 외향적으로 판단하는 단계이고, 요나단은 외관에 의거 내향적으로 판단하는 단계이다.
외관(appearance)에 의거 판단할 경우, 영적인 수준은 자연적 수준에 상반되는 듯 여겨진다. 세상적인 사람은 종교는 자기들의 최상의 이익에 반대만 한다는 것이다. 요나단이 다윗을 판단한 것은 공의로운 판단이었다. 그 이유는 그 판단은 진짜 진리의 판단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사울에게 이렇게 아뢰고 있다. “아버님, 아버님의 신하 다윗을 억울하게 하지 마십시요. 다윗이 아버님께 최선을 다해서 잘 해 드린 것밖에 무슨 잘못이 있읍니까? 그는 목숨을 걸고 불레셋 장수를 죽였읍니다. 그래서 야훼께서 온 이스라엘에게 대승을 안겨 주신 것을 보시고 아버님도 기뻐하시지 않으셨읍니까? 그런데 어째서 다윗을 죽여 죄없는 피를 억울하게 흘리게 하시렵니까?” 그의 감동적인 호소는 설득력이 강한 진리에 기초하고 있다. 따라서 그의 호소는 왕의 이해성 뿐만 아니라 심정까지 움직이는데 실패할리 만무하다. “사울은 요나단의 말을 경청하고 ‘야훼께서 살아 계시는 한, 다윗을 죽이지 않겠다.’” 요나단이 다윗에게 귀띔해 준 것은 “아버지가 자네를 죽이려고 하니 내일 아침은 숨어서 꼼짝 말고 몸조심하게… 아버지의 마음을 떠보고 나서 자네에게 알려 주겠네”이었다. 이와 같이 위험한 시기에 영적 원리들은 은밀한 장소에 숨는데, 숨는 수단은 마음의 내적 측면에로 들어가는 것이다. 그래서 외적 감시의 반경을 벗어난다. 그 뒤 새로운 상태인 아침에 요나단은 자기가 명상한 좋은 결과를 말해줄 수 있고, 그런 다음 사울에게 다윗을 데려오게 된다. 그리하여 예전과 같이 그는 사울의 면전에 있는다. 이렇게 매개체적 원리를 수단으로 영적인 것과 자연적인 것은 서로간에 재회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재회도 단 기간일 수밖에 없는 게 흠이다. “전쟁이 다시 일어나자, 다윗은 전쟁에 나가서 불레셋과 싸워 그들을 크게 무찔러 쫓아 버렸다.” 겉으로 보아 좋게 여긴 것, 좋은 해결책으로 사울을 확증케 한 것도 사울의 옛 습관인 증오심만을 더 섬기게 했을 뿐이다. 다시 “사울이 궁에서 창을 들고 앉아 있을 때 야훼에게서 온 악령이 그에게 내렸으므로 다윗이 그 앞에서 수금을 탓다. 그 때, 사울이 창으로 다윗을 벽에 박으려고 했으나 다윗이 왕의 창을 피하는 바람에 창이 벽에 꽂혔다. 다윗은 도망쳐 나왔다.” 그래서 그는 그 밤을 피하였다. 사울은 다윗을 벽에 박으려고 두 번 시도하였고 다윗은 두 번이나 그의 면전을 피해야했다. 이는 사울이 자기 속셈을 드러내는 더 결정적인 노력일 뿐이다. 그 이유는 창이 비록 다윗을 비꼈다 해도 벽에 박혔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윗은 도망하여 그 밤을 피하면서 결코 사울 앞에서 수금을 켜지 않게 된다. 벽에 박아 버린다는 것은 죽이려는 것 뿐만 아니라 품위를 격하시키겠다는 것까지 포함된다. 영적으로도 이 모습은 그에 상응되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벽은 집 자체의 의미 중에서 외부 측면에 해당된다. 이 집은 사울의 집이고, 사울 자신이 자연적인 인간을 표현하는 바 그 집의 벽이란 자연적인 마음을 의미한다. 다윗을 그 집의 벽에 박는다는 것은 영적인 것을 자연적 것의 외부로 바꿔 못박겠다는 말이다. 이렇게 된다면 생명에서 영적인 것이 박탈되고 게다가 개혁하고 거듭나질 수 있는 자연적 능력 자체까지 결여되고 만다. 이런 현상이 모독의 죄를 표현하고, 이는 영성을 불순한 자연성에 푹 잠기게 하고 거룩한 것이 거룩하지 않은 것과 연결되어 결국 회복이 가능한 참 능력마저 파괴되고 만다. 따라서 벽에 다윗이 박히는 것은 허용되지 않은 것이다. 세 번씩이나 사울이 죽이려 시도한 상황에서 목숨을 건진 다윗은 이제 도망하고 있다. 비록 그가 사울로부터 달아났다 해도 그의 안전이 확실한 것은 아니다. 다윗이 사울의 창을 피해 달아났을 때 그는 부하들을 다윗의 집에 보내 경계 하다가 아침에 죽이라고 명령했다. 이런 위급 상황에서 요나단이 다윗을 위해 남자다운 지혜를 발휘했던 것 같이 미갈은 여자다운 책략을 사용했다. 물론 요나단이 화해시키는 역할을 했는데 비해 그녀가 그렇게는 못했다 해도 어찌됐든 자기 남편의 목숨을 구해주고 있다. 왕가의 집안에서 일어나는 이 상황은 어쨌든 이상한 것이 아닐까? 이런 모습은 주님께서 말하신 대목에 적합한 모형이 아닐까?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아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 나는 아들은 아버지와 맞서고 딸을 어머니와, 며느리는 시어머니와 서로 맞서게 하려고 왔다. 집안 식구가 바로 자기 원수다”(마태 10:34-36). 주님은 갈라지게 하는 무고한 원인이시다. 마치 다윗이 사울의 집안으로 하여금 갈라지도록 하는 원인이 된 것과 같다. 주님의 경우도 다윗의 경우같이, 그분을 미워하고 반대해댄 것은 옛 사람 이었고 그분을 사랑하여 친구가 된 것은 새 사람이었다. 본문의 다윗의 역사는 주님의 말씀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내 사람이 될 자격이 없다…”(마태10:37) 는 구절을 미리 예상하도록 본보기로 우뚝 서고 있다. 요나단과 미갈이 사울을 덜 사랑했던 것은 아니다. 단지 그들은 다윗을 더 사랑했던 것이다. 사울이 자식들을 자기 적인 듯 여겨지게 한 원인은 사울 자신의 행동 때문이다.
다윗이 사울 앞을 피해 집에 돌아왔을 때 그가 아내에게 그 사실을 말했을 것은 의심할 바 없다. 도망자를 경계하기 위해 보내진 군졸들을 보고 그들의 의도를 알아맞히고 있는 “다윗의 아내 미갈이 남편에게 ‘목숨을 건지려거든 이 밤으로 도망치셔요. 그러지 않았다 가는 내일은 죽게 될 것입니다.’하고 말하였다.” 시련과 시험의 밤, 즉 세상과 어둠의 권세가 판을 치는 동안 영적 진리의 원리들이 몰살되려 하는 때 그 원리들은 마음의 내면에 있는 그 원리의 고향으로 은둔한다. 그 곳은 천국적 결혼으로 하나 된 선함의 원리들이 거주하는 곳이다. 자연적인 마음과 분리되어있는 이 선, 이 애착으로부터 영적 마음은 자연적 마음을 샅샅이 뒤질 수 있다. 적들로부터 야기되는 위험한 것뿐 아니라 음험한 책략을 피할 방법까지 찾아낸다. 그래서 미갈은 다윗을 창문으로 내려 보내어 빠져 나가게 하였다.” 집에 설치된 창문은 육체에 있는 눈과 같고 마음에 있는 이해성 같은 역할을 한다. 창문은 빛이 들어오게(admit)하고 집안과 밖을 볼 수 있게 해준다. “몸의 등불은 눈이다.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며 네 눈이 병들었으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다”(누가11:34). 주님께서는 상응을 통해 마음의 눈이 이해성인 것을 묘사하시고 있다. 게다가 성경은 창문 자체만을 예로 들어 위의 의미를 전달하고도 있다. 즉 예레미야(9:21)가 이렇게 말하는 대목에서이다. “죽음이 창을 넘어 들어 왔네. 궁전에까지 들어 왔네, 거리에서 놀던 아이들을 모두 잡아 갔다네. 장터를 거닐던 젊은이들을 모두 끌어 갔다네.” 예레미야는 유추법을 사용해서 이해성을 통해 의지 안으로까지 들어오는 악, 이 악이 순진과 총명의 모든 것을 파멸시키는 것을 묘사해놓고 있다. 정탐원들이 가나안 땅을 정탐하러 파견되어졌을 때 예리고의 왕은 스파이들이 투숙한 라합의 집에 특사를 보냈다. 그 뒤 정탐원들은 라합이 내려준 밧줄을 타고 창문으로 해서 탈출했다. 그리고 라합은 분홍 줄을 그들이 탈출한 창문에 매달아 놓았는데 이것은 이스라엘 군이 예리고를 함락할 때 그녀의 집을 얼른 알 수 있게 하여 그녀의 집안이 구원되도록 하는 표시였다(여호수아 2장). 이 줄거리도 역시 창문은 이해성과 총명을 상징하고 있다. 이를 수단으로 해야 사악한 자들의 음모가 좌절되게 할 수 있다. 더불어 선한 것이 악으로부터 피신할 수 있게 된다. 이스라엘 군이 예리고 성을 공격하는 동안 창문에 분홍색 줄(scarlet thread)이 놓여 있는 상태란 이해성에 선행이 있는 것, 또는 진리 안에 선함이 있는 것, 신앙안에 사랑이 놓여 있는 상태이다. 그 상태에는 심판의 때, 결정해야 할 순간에 보호와 구원이 항시 뒤따른다.
그런데 다윗의 안전을 보장하기 위해서 아직 실시되어져야 할 것이 더 있다. 다윗이 도망친 줄을 사울의 부하들이 알게되면 그를 잡으러 추격할 것임을 미갈은 짐작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집안 수호신을 가져다 침대에 누이고 염소털로 짠 것을 그 머리에 씌운 다음 옷으로 덮어 놓았다. 사울이 보낸 군졸들이 다윗을 잡으러 왔을 때 그가 와병 중이라고 하였다.” 사울의 군졸을 속이기 위해 사용한 수호신(the image)은 아마 인간 형태를 한 우상일 것으로 여겨진다. 테라빔(teraphim), 이 단어는 번역하지 않고도 그대로 사용하기도 하는데, 이는 라헬이 아버지 라반에게서 훔쳤던 우상(image)과 같은 말로서 그 구절에서 그 형상을 자기들 “신들(gods)”이라고 부르고 있다 (창세기 31:19,30). 그리고 판관기를 보면, “미가는 그 신상을 집에 모셨는데… 레위인이 그것을 훔쳐 달아났다…”(17:5, 18:20). 위의 인용한 구절이나 본문의 구절에서이든 이 형상들에 존경을 표하는 상태가 암시 되도록 말해지고 있지는 않다. 그러나 말씀의 다른 부분들의 경우 미신에 사로잡힌 존경의 대상물로 말해지고 있다. 에제키엘이 말한다. “바빌론 왕이 두 갈래로 갈리는 길목에 멈추어 서서 점을 칠 것이다. 화살을 흔들어 보기도 하고 수호신(teraphim)들에게 물어 보기도 하고 간(liver)으로 점쳐 보기도 할 것이다”(21:21). 스가랴가 말한다. “그런데 우상(teraphim)은 헛소리나 하고 점쟁이들은 허깨비를 보고 계시를 받았다고 하니…”(10:2). 부패된 유대 교회 안에서 이런 형상들이 언급되는데 열왕기하에 이렇게 언급되고 있다. “요시아는 또 유다와 예루살렘에서 도깨비나 귀신을 불러 물어 보는 자들과, 가문의 수호신과 온갖 역겨운 우상들을 눈에 띄는 대로 쓸어 버렸다”(23:24). 선견자에 의하면, “테라빔은 하느님에게 물어보고자 할 때 상의하거나 조회해보는데 응용한 우상들이다. 이 백성들이 받은 응답들은 그들에게 신성으로부터의 진리이였는 고로 그 진리들이 그것들에 의해 의미되어지게 되었다. 호세아서를 보면, ‘이스라엘 백성도 그처럼 오랫동안 왕도 대신도 없고 희생제물도 석상도 없으며 에봇도 수호신도 없이 지낼 것이다’(3:4). 에봇과 테라빔(수호신)은 신성으로부터의 진리를 명시하는 말이다. 이것을 그들은 응답으로 여겼다. 그 이유는 그들이 하느님께 문의 할 때 에봇을 걸쳤기 때문이다.” 질책의 말이 언급되지 않으면서 성경에 등장하는 테라빔의 경우, 그것은 주로 순박한 상태의 사람들, 즉 라반이나 미가 같은 사람들에 의해 사용되어졌다. 이럴 경우 테라빔은 가상적인 진리들을 표현하도록 등장되고 있다. 이런 진리들은 말씀의 글자적 의미에 있는 진리와 비슷하다. 이 글자적 의미는 단순한 사람들의 이해력이 신성한 진리를 채택한 경우의 수준이다. 그러나 이럴 경우 쉽게 진리가 뒤집히는 결점이 있다. 총명이 더 진전된 상태에서도 테라빔이 사용된 것으로 보아도 우리는 위의 사실을 입증 받을 수 있다. 선견자가 사용한 어구 “신성으로부터의 진리, truth Divine”은 위에 살핀바 같이 가상적인 진리(눈에 나타난 대로의 진리,apparent truth)를 뜻한다. 이 진리는 진짜 진리, 절대적인 진리 즉 신성한 진리(Divine truth)와는 매우 다르다.
위에서 살핀 사항을 기초로 이제 우리가 이해해 볼 것은 미갈이 취한 행동 즉 다윗의 침대에 테라빔(수호신)을 눕히고 염소털로 짠 것을 베개로 놓고 (머리에 씌운 다음) 옷을 덮어 놓은 모습이다. 다윗이 표현하는 신성한 진리가 그 진리를 파괴하려드는 이들의 시야에서 섭리적으로 옮기어질 때 가상적인 진리가 신성한 진리의 자리에 들어앉게 된다. 이것은 교회 자체의 기능(agency)에 의해 결과 되는데 가장 깊은 의미에서 미갈이 그 교회의 기능을 표현하고 있다. 인간이 말씀 속의 진짜 진리(real truth)를 더 이상 받지 못하게 될 때 진짜 진리는 그들의 시야로부터 슬기 있게 그리고 자비롭게 감추어진다. 그 결과 그들이 볼 수 있도록 허용되는 진리는 오로지 가상적인 진리 뿐이다. 그 이유는 그 수준의 사람이 수용할 수 있는 전부가 그 진리 뿐이기 때문이다. 만일 위와 같은 수준, 자연적 수준의 상태에 있는 사람에게 영적인 진리들을 볼 수 있게 허용된다면 그들은 영적 진리를 모독하고 파괴할 것이다. 마치 사울이 부하를 보내 다윗을 죽이려 한 것과 같은 상태이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영적 진리를 슬기롭고 신중하다는 이들에게는 감추이시고 어린 아이들에게 그것을 밝히 알게 하신다 (마태 11:25). 교인이 악 속에 있게 될 때 주님께서는 허용의 섭리로 그들이 거짓 추구에 몰입되는 것을 허락하신다. 그 이유는 올바르지 못하게 진리를 붙잡는 것보다는 차라리 거짓말을 믿는 게 그들에게 덜 해를 끼치기 때문이다. 미갈은 다윗을 죽이러 보낸 사울의 군졸들에게 그가 와병 중이라고 둘러댔는데 이것이 위의 원리를 표현하고 있다. 그리고 사울이 자기 딸 미갈에게 아버지를 속이고 원수 놈을 도망치게 했다고 문책했을 때 그 여자의 대답은 ‘빠져나가게 해주지 않으면 저를 죽이겠다는 데 어떻게 합니까?”에서도 위 원리가 표현되고 있다. 이런 미갈의 비진리적인 것이 신성하게 명령된 사건이라 말할 필요는 없고, 또한 거기서 영적 생각을 탐사할 수 있도록 영감되어 있다고 굳이 이해하려 애쓸 필요도 없다. 그 여자의 말들은 그녀에게서 자발적으로 나온 말들이다. 그렇다고 해도 영감된 필자에 의해 씌어져 있고 이 줄거리 역시 거룩한 역사, 즉 신성한 지혜가 천국적이고 신성한 진리의 본토라 할 수 있는바, 그 줄거리 역시 새롭게 다른 품성을 획득하고 있다. 이런 대목도 주목해야 하는 이유는 이와 같은 종류의 서술은 구약성서의 많은 부분에서 발생되기 때문이다. 이런 대목이 진리를 위반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되고, 또한 그 시대에 대한 하느님의 처방 밑에서 양심을 넘어 섰다는 식으로도 생각해서는 안 된다. 악의 있는 거짓말과 인정 많은 비진리 사이, 다시 말해서 악한 영향을 일으키려고 말해진 거짓말과 악한 영향을 예방하겠다고 말해진 거짓말 사이의 구분은 어느 시대에서나 폭 넓게 존재한다. 진리에서의 이탈은 어떤 상황을 막론하고 허용될 수 없다고 어떤 이들은 강력히 주장한다. 그러나 진리의 원인은 진리를 절대적으로 고수하라고 우리에게 요구하지 않은 위치에 있다. 모든 해악된 거짓말과 사심에 쏠린 사기들이 실제의 거짓말인바, 이것들이 지상으로부터 추방되어 질 때에야 진리는 어떤 불평도 말하지 않을 것이고 어떤 비난적인 판결도 발표하지 않을 것이다.
이제 본문에로 되돌아 가보자. 미갈의 수호신에 관한 것 중 우리가 주목하고 넘어가야 할 세부사항이 있다.
인간의 마음 속에서 가상적인 진리가 순수한 진리의 자리에 대신 들어 앉을 때 말씀 속에 있는 가상적인 진리는 순수한 진리의 형상(image)밖에 안되는바 순수한 진리가 없는 가상적 진리는 더 이상 생명을 가지지 못한다. 따라서 그 진리는 자기들의 방법을 교회의 교리에서 발견 할 수밖에 없다. 이것이 미갈이 침대에 다윗 대신 수호신(image)을 눕혀 놓은 것으로 표현되고 있다. 이런 해석의 근거는 성경에서 침대는 교리를 상징하고 있기 때문이다. 육체가 침대에서 휴식을 취하듯 마음은 교리에 머무른다. 다윗 스스로 시편에서 이렇게 노래한다. “…자리에 들어도 악한 짓만 궁리하고 나쁜 길에 버티고 서서 악을 고집 한다” (36:4). 교리에 관한 거짓 원리를 궁리해 낼 때 위 시편 구절 같은 짓을 인간은 행한다. “자리에 누워 반성하여라. 고요를 깨지 말아라”(4:4). 인간이 진정한 교리를 표준삼아 자신의 심정을 검증할 때의 모습을 위 구절은 표현하고 있다. 더 나아가 진정한 교리의 가르침을 수단으로 더욱 자기 심정이 고요해지는 것까지 표현하고 있다. 한 때 주님께서 병자를 치료해 주신 뒤 “일어나 네 침상을 들고 집으로 가라” 하고 명령하시기도 했다 (마태9:6). 이 말씀이 우리를 가르치는 것은 비록 제대로 교리를 이해 못했다 할지라도 병든 상태에서도 우리를 지탱하게 해주었던 그 교리는 건강한 상태에서까지도 우리 속에 살아 있어야 한다는 것, 이는 그 병든 상태가 육체이었든, 마음이었든 모두 해당된다. 다시 말해 우리의 심정 상태가 어떠하느냐를 결정짓게 하는 것은 병든 상태에서 느끼고 생각한 것들이 아니라 건강한 상태에서 우리가 생각하고 느낀 것들이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다시 오시는 때, 심판의 때에 “두 사람이 한 침상에 누워 있다면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다” (누가17:34). 즉 하나는 구원되고 하나는 구원되지 못한다는 말이다. 교리 속에 생명이 없는 이들은 구원을 상실하나 교리에 따라 살고 있는 이들은 구원된다는 뜻이다. 그래서 비록 교회 마지막 때에는 순수한 교리 역시 없겠지만 만일 교회가 가르치는 교리를 신실하게 믿으면서 선한 생활을 동반한다면 그것만 가지고도 구원이 가능해진다. 교회의 교리가 순수한 진리 대신 가상적인 것만을 포함하게 될 때 다윗이 드러누웠던 침상에 테라빔(수호신)이 있는 것이다. 이것이 필수로 대두되는 이유는 순수한 진리의 파괴를 방지하면서 빛에 반대하여 죄짓는 결과로 초래되는 정죄에서 인간을 구해주시려는 주님의 자비로운 섭리 때문이다.
미갈은 다윗 대신에 그의 침대에 수호신을 놓았을 뿐 아니라 염소털로 짠 것을 베개로 놓고 옷으로 덮어놓았다. 말씀에서 염소, 이 구절에서 이해해 볼 염소털은 믿음과 관련을 가지고 있다. 양의 경우 선행과 관련을 가진다. 그런 이유로 해서 진정한 교인은 양이라 불리는데 그 이유는 그가 신앙 뿐만 아니라 선행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 반면 거짓된 교인은 염소라 불리는데 그 이유가 그가 선행 없는 신앙을 가졌기 때문이다. 다니엘의 환상에서 수양을 짓밟아 버린 수염소(다니엘 8장), 심판의 날 심판자의 왼편에 자리잡은 염소란 신앙을 고백하였으나 선행이 요구되는 이들, 주여, 주여 부르면서도 그분이 말한 사항을 행치 않은 이들이다. 그리고 그분의 오른편에 자리잡은 이들은 신앙의 목적이자 생명이 되는 선행을 실지 행했던 이들이다 (마태24:31-46). 위의 사항은 염소의 나쁜 의미이다. 그러나 염소도 좋은 의미로 성경에 등장하기도 한다. 그 이유는 진정한 신앙(true faith)은 선행(charity)을 당연히 내포하기 때문이다. 마치 진정한 선행이 당연히 신앙을 내포하는 것과 같다. 염소와 양은 제물로 바치도록 지시되고 있다 (레위기1:10). 염소털과 수양가죽은 성막을 짓는데 사용되고 있다.(출애굽25:4,5) 따라서 의롭게 되는 것, 구원받는 품위로서 신앙만 있으면 된다고 고집할 경우 진정한 신앙이 중단 될 뿐이다. 염소털로 된 베개(the pillow of goat’s hair)가 테라빔의 머리 밑에 있다는 것은 신앙 또는 믿음으로 구원됨이 교회 교리의 일번 순위를 점유하게 되는 것을 말한다. 종교적인 모든 잘못들이 성경에서 축출되어 나올 경우, 그것은 성경의 가상적인 진리로부터 있게 되고 신앙은 그들을 떠 받혀주는 수단으로 존재되고 만다. 그런데 이 수호신(image 우상)은 머리에 베개를 하고 있었을 뿐 아니라 천으로 덮여 있었다. 천 (헝겊, 옷,cloth)이 신체를 위한 옷이나 침대를 위한 덮개로 사용될 경우 선을 덮거나 보호하는 수단으로서의 진리를 상징한다. 이사야를 보면 “침대는 짧아서 길게 눕지 못하고, 이불은 좁아서 (narrow) 몸을 덮지 못한다” 라는 구절이 있다(28:20). 이는 교회의 신조(creed)가 너무나 조이고 있어서(짧아서) 마음의 능력들이 충분히 뻗어 가는 것을 방해하고 있고, 그 신조의 증언 역시 옹색해서(narrow) 합리적인 요구를 만족하게 할 수 없는 종교의 상태에 대해 예언자가 탄식하는 말이다. 영적 의미를 엄격하게 취급해보면 길이와 넓이는 선함과 진리에 관계되고 있다. 따라서 침대가 너무 짧고 이불이 너무 좁다는 말은 교회의 교리가 선함에 대한 의지의 요구도, 진리에 대한 이해성의 요구도 만족하지 못할 때를 말한다. 미갈이 수호신을 덮은 천이란 말씀의 글자에서 확증하는 진리이고 이 진리가 가상적인 진리에게 진짜 같이 나타나 보이도록 돕는데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
다윗은 도망하여 라마에 있는 사무엘에게 가서 사울이 자기에게 저지른 일을 고하였다. 사무엘은 다윗의 영적인 아버지였다. 그가 사울 대신 이스라엘의 왕이 되도록 다윗에게 기름 부었었다. 극도의 곤경에 빠져 있을 때 자기의 모든 애로점을 말 할 수 있는 사람을 찾아가 다 털어놓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다. 그 사람만이 상의하고 용기를 줄 수 있다는 것은 지당한 일이 아닐까? 자신의 고향마저도 안전을 보장 못 받는 다윗으로서는 예언자의 품성이 지닌 신성 만이 자기 주위를 막아 주는 후원자인바 거기에 자신을 맡길 수밖에 없다. 그러나 사울은 다윗이 안전하다고 여긴 성소의 거룩함을 마음에 두고 있는 인물이 아니다. 다윗이 나욧에 있다는 말을 전해들은 사울은 그 곳에 군졸을 보내어 다윗을 잡아오라고 했다. 그러나 거룩한 장소는 아예 침입할 수 없었고 성소의 거룩함은 제단의 뿔로부터 온 박해의 순진한 희생자가 뿌리는 눈물로 더럽혀 지지도 않았다. 사울의 목적은 그가 상상할 수도 없는 방법, 예상 밖의 방법으로 무산되고 말았다. 한 가지 것은 이 경우의 상황과 전적으로 일치되고 있다. 파견된 군졸들은 적으로서 싸워진 게 아니라 한 순간에 친구같이 되었다. “그들이 와 보니 예언자들 한 무리가 사무엘 앞에서 신이 들려 있었다. 그 순간 사울의 군졸들에게도 하느님의 신이 내려 그들도 신들린 상태에 빠져 버렸다.” 이 소식을 접한 사울은 다른 군졸을 보냈으나 그들 역시 그렇게 되었고 세 번째로 보낸 군졸 역시 신들린 상태에 빠져 버렸다. 인간이든, 신성이든, 사울 앞에는 보이는 게 없는 듯 그는 직접 나섰다. 그가 “세구라는 곳에 있는 큰 물웅덩이(샘,well)에 이르러 사무엘과 다윗이 어디 있느냐고 묻자 라마에 있는 나욧에 있다고 대답하였다.” 세구(Sechu)와 나욧(Naioth)이란 지역의 이름은 말씀에서 이 부분 외에서는 언급되지 않고 있다. 따라서 이 지역에 관해 알려진 것은 아무 것도 없는 형편이다. 그러나 이 지역 이름 자체의 의미는 성경적 품성에 대해 어느 정도의 착상을 갖게 해준다. 세구는 망대(watch tower)라는 뜻인바 진리와 관련을 갖는다. 그리고 나욧은 거주지(habitation, 주택)라는 뜻인바 선함과 관련을 갖는다. 본문의 줄거리에 있는 것과 같은 핍박 속에서 혼(Soul)은 진리라는 망대 안에 있는 것보다 선함이라는 주택 안에 있는 것이 더 안전하다. 사울이 당도했던 큰 샘(큰 웅덩이), 거기서 사울은 사무엘과 다윗에 관해 문의했는데 이 샘이 세구라는 장소에 있다는 것은 특유한 사항이다. 구약성서에는 일반적으로 우물같이 보여지는 두개의 단어가 있다. 하나는 물줄기를 지닌 우물이고 또 하나는 물줄기가 없으나 물이 있는 상태 즉 일종의 작은 저수지(cistern, reservoir)같은 우물이다. 사울이 당도해서 자기가 찾고자 한 대상을 물어 볼 때의 우물은 후자의 것 즉 큰 물웅덩이에서였다. 마음 자체에서 솟아오르는 진리는 이해성을 그릇으로 삼고 있고 이해성이 없는 데에 집합되어 있는 진리는 기억을 그릇으로 삼고 있다. 기억 속에 신성과 영적 사항에 관한 지식이 제아무리 많다 해도 선함과 진리에 대한 진짜 사랑과 비례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선함과 진리를 미워하고 반대할 경우가 많다. 큰 물웅덩이라는 말 중 크다(great)는 순수한 의미로는 선함을 표현하나 나쁜 의미로는 악을 표현한다.
사울이 직접 나욧으로 향하고 있지만 그도 역시 그가 보낸 군졸과 같은 상황이 벌어졌다. “하나님의 신이 그에게도 내려 라마에 있는 나욧까지 줄곧 신들린 상태로 걸어갔다. 사울도 옷을 벗어 던지고 사무엘 앞에서 신들린 상태에 빠져 하루 밤낮을 알몸으로 쓰러져 있었다. 그래서 ‘사울도 예언자들 중의 하나더냐?’하는 말이 나오게 되었다.” 사울과 그의 부하들에게 내린 한 가지 결과, 즉 하느님의 사람의 거룩한 기운 속에 있게 되는 것은 신약성서의 또다른 사건, 즉 사울 같이 악의를 품은 어떤 이들이 하느님- 인간의 거룩한 기운 속에 있어 느꼈던 것과 비슷하다. “성전 경비병들이 그대로 돌아 온 것을 보고 최고 성직자들과 바리새인들은 ‘어찌하여 그를 잡아오지 않았느냐?’하고 물었다. 경비병들은 ‘저희는 이제까지 그분처럼 말하는 사람은 본 적이 없읍니다’하고 대답하였다”(요한7:45,46). “이렇게 군중은 예수 때문에 서로 갈라졌다. 몇 사람은 예수를 잡아가고 싶어하였지만 예수께 손을 대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예수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않았기 때문이다”(요한 7:30.46). 유다가 예수를 잡으러 높은 성직자의 부하를 몰고 온 그날 밤에는 더욱 적극적인 결과가 생산되었다. “너희는 누구를 찾고 있느냐? 하고 물으셨을 때 그들은 ‘나사렛 사람 예수를 찾소’하자 ‘내가 그 사람이다’라고 말씀하셨을 때 그들은 뒷걸음치다가 땅에 넘어졌다”(요한18:6). 이런 비슷한 결과는 저 세계에도 있다. 죽을 듯하게 느끼고 있는 악령이 천사들의 기운 속에 오게 될 때 그들은 마비되어지고 종종 천국과 지옥의 기운이 매우 상반된 사실 때문에 숨이 막힌다. 이를 더 높은 주제에서 찾아볼 수 있다.
주님이 세상에서 통과하신 상태는 두 가지가 있는데 그것은 창피함(humiliation,굴욕)의 상태와 신성화 하시는 상태이다. 이 두 상태는 서로 교차되어 발생된다. 시험받는 상태는 그분께서 창피를 당하시는 상태이고, 그 시험에 승리하는 상태는 그분께서 신성화 하시는 상태이다. 주님께서 이겨내신 모든 시험에는 승리가 꼭 수반된다. 그 이유가 그분은 정복자 그 이상 되신 분이시기 때문이다. 주님의 시험들, 인간의 경우도 마찬가지로 크게 세 가지 다른 등차로 구성되는데 이것은 광야에서의 세 가지 시험으로 표현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거기서 그분은 악마에게 유혹 받아지도록 영(Spirit) 속으로 이끌리셨다. 세 번이나 사울은 다윗을 잡으려고 부하를 보냈으나 그 때마다 굴복 당했다. 그래서 원치 않는 상태로 변했고 자기들을 정복한 힘에 대한 증거자만 되고 말았다.
극도의 시련을 받으실 때 예수께서는 천사들 사이에 있는 천국의 신성을 가지시고 적의 박해로부터 안식처를 구하였다. 본문의 다윗이 사울의 박해로부터 예언자 무리들이 있는 나욧에서 사무엘을 찾아 피신했던 것과 같다. 거기서 그는 안전했다. 그 이유는 비록 시험하는 권세가 천국까지 올라갈 때, 마치 사울과 그의 부하들이 왔다 해도 그들의 힘은 끊겨지고 오히려 그들이 예언자의 영향을 받아 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선견자는 우리에게 말한다. 악인과 악령은 천국의 빛 안으로 들어가 천사들 같이 진리를 볼 수 있도록 승강 될 수 있고 더욱이 그들의 의지가 진리에 일치되기까지도 허락된다. 그러나 그들은 그 상태를 오래 지탱할 수 없어 그들 고유의 자연적 조건에로 붕괴되고 만다. 사울의 상태는 그의 부하들보다 더 완벽했었던 것같이 보인다. 그가 옷을 벗어 던지고 하루 밤낮을 알몸으로 쓰러져 있었기 때문이다. 마음의 옷은 지적 생각들, 그것이 진정한 생각이든 거짓 생각이든 지적인 사상으로 구성된다. 그런데 이 옷들을 벗어 던질 때 마음은 알몸으로 나타난다. 사울을 꼴사납지 않게 해주던 덮개를 벗어 던지면 알몸으로 있는 사울이 되는바 자연적 이기심은 감각적인 것, 지옥적인 것인 땅 위에서 뒹굴 수밖에 없다.

사무엘상 18장 해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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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상 제18장

요나단과 다윗의 우정

구약성서에서 요셉이 자기 형제를 사랑했던 줄거리를 제외하면 다윗에 대한 요나단의 사랑만큼 순수하고 고상한 품성은 발견하기 힘들다. 요나단의 경우는 요셉이 형제들을 사랑했던 것과는 달리 상호간의 사랑이었다. 두 사랑의 품성 중 유사한 점이 서로를 끌어당기고 있고 국가적 해방을 성취하는 일로 인해 밖
으로 돌출 되면서 서로는 더 가깝고 더 오래 지속되는 우정으로 자리잡아가고 있다. 여러 가지 유사점 중에서도 헌신적인 친구들 중의 하나로서 요셉에게 근사한 것이 요나단에게 있다. 도덕적 차원에서 수행이 가능한 자기 희생의 가장 고귀한 행동들 중의 하나는 요나단의 따뜻하면서도 관대한 사랑일 것이다. 이제 본문으로 돌아가 보자. 골리앗을 죽이고 불레셋 군대가 패하여 도망치는 전쟁터로부터 다윗이 귀환하고 있다. 그리고 요나단의 애국심이 장차 이스라엘의 왕좌에 오를 영웅의 애국심과 사귀어지고 있는바, 이렇게 묘사되고 있다. “요나단은 입고 있던 겉옷을 벗어 다윗에게 주고 칼과 활과 허리띠까지도 다 내주었다.” 이 행동은 이스라엘의 영예를 스스로 입증한 사람에게 합법적인 권위와 권세가 있어야함을 보여주는 것이다. 게다가 주님의 원인(cause)을 유지 존속하는 사람에게 있어야 할 당연한 행동이기도 하다.
우리 앞에 전개되는 역사는 드높은 애국심, 사리사욕 없는 우정 관계에 관한 아름다운 실예를 꼭 하나 공급하고 있는 반면, 이 아름다운 우정관계에 천박하게 무례하고 악의에 찬 행동을 대비시켜 그들의 우정이 더 인상 깊어지게 하고 있다. 사울, 자기 영예가 존속되게 해주었고 그의 왕국도 건져준 사람은 사실 다윗이다. 그래서 그는 한 동안에 불과하고 말았기는 했지만 젊고 용감한 용사로 다윗을 환대하고 흐뭇하게 여겼었다. 그러나 그는 다윗을 숙명의 적으로 만들어버렸다. 어찌됐든 사울과 다윗이 만난 초기에 그들은 전쟁터에서 예기치 않은 승리를 이스라엘에 가져오곤 했기 때문에 여인들이 이렇게 노래했다. “사울은 수천을 치셨고 다윗은 수만을 치셨다네!” 이 노래는 사울의 귀를 거슬리게 하여 시기와 질투심을 불러일으켰다. “그날로부터 사울은 다윗을 주목하게 되었다.” 그날로부터 다윗의 수금 소리도 사울의 마음 속에 있는 악령을 몰아 낼 힘을 잃었는 듯 여겨진다. 그래서 악령이 덮친 사울을 위해 수금을 뜯는 다윗을 벽에 박아 버릴 생각으로 창을 던졌던 것이다. 이제 사울이 다윗에게 했던 모든 것, 다윗을 이뻐했던 모든 것까지도 다윗을 죽이려는 쪽으로 치닫기만 하고 있다. 그는 그의 아들과 신하들에게도 다윗을 죽이라는 명령을 내리고 있다. 그리고 요나단이 아버지의 불의한 행동이나 명령이 철회되도록 간청도 했지만 자기까지 다윗과 한패로 몰리기도 했다. 궁지로 몰아가는 상황에서도 다윗에 대한 요나단의 사랑은 여전히 흔들리지 않고 있었다. 하느님의 보호로 다윗은 간신히 목숨을 부지하였다. 결국 두 친구들은 우정을 맹세하면서 마지막 작별을 하고 말았다.
사울과 그의 아들 요나단의 품성과 행동의 차이점들로부터 매우 유익한 교훈들을 끌어 낼 수 있으리라 본다. 이 두 사람이 이스라엘 왕국에 대한 관심도는 똑같았다. 그런데 그와 관련된 생각과 행동은 상당한 차이가 있다. 두 사람 모두 다윗이 기름 부어진 왕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경건하고 순종하는 이스라엘 사람이라면 이스라엘 왕국은 주님의 것이요, 그분이 기뻐하시는 방향으로 겸손히 따라가야 마땅한 것일 게다. 요나단은 그렇게 행동했다. 그는 하느님께 경건했을 뿐만 아니라 친구의 우정으로 행동했다. 그 반면 사울의 개인적 성격, 아버지라는 그의 입장에서의 감정 모두가 두 젊은이들의 주장에 반감을 품고 있다. 요나단의 행동으로부터 우리는 중요한 교훈을 배울 수 있는 바 각자의 개인적 느낌은 하느님의 의지에 복종시켜야 한다는 것, 우리의 사사로운 관심사항은 공적인 선 아래 있어야 한다는 것, 자아를 떠나 타인의 장점을 인정할 준비가 되어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 반면 사울의 행동들로부터 무례함, 시기, 질투라는 악덕에 대해 우리에게 경고를 보내주고 있다. 이 정도의 사항은 본문의 역사 줄거리를 읽으면서 느끼게 되는 사항일 것이라 본다. 그러나 이 줄거리 속에서 빛나는 영적 의미는 우리로 한층 더 높은 교훈을 받게 해줄 것이다.
성경의 역사물들에 빛이 드리워짐으로 우리는 내적 의미 안에 있는 신성과 영적 의미를 볼 수 있을 것이라 본다. 이스라엘의 세 왕은 이미 살핀 바와 같이 각기 주님을 표현하되 주님께서 그분의 인성을 만들어 가시는 세 단계 즉 신성으로부터의 진리(truth Divine), 신성한 진리(Divine truth), 신성한 선 (Divine good)을 표현한다. 사울은 그분께서 인성을 신성으로부터의 진리로 만드시는 단계, 또는 유사한 인간의 이해에 와 닿는 신성으로부터의 진리 즉 천사들이나 세상의 인간 사이에 존재하는 것과 같은 진리를 표현한다. 엄격히 말해서 신성한 존재 안에서가 아니면 절대적 진리는 존재 않는다. 순수한 진리는 제아무리 높은 총명이 있다 해도 그 총명의 납득력을 초월하고 있다. 그 이유는 순수한 진리는 무한하기 때문이다. 무한과 유한 사이를 비교할 수 있는 것은 어떤 것도 존재 않는다. 따라서 둘 사이에는 언제나 상응(correspondence)만이 존재할 뿐이다. 그러므로 말씀 안에는 세 가지 유한한 진리의 등차가 있는데 그것은 자연적, 영적, 천적 등차이다. 이 등차 안이나 이 등차 너머에 순수하게 신성으로부터의 진리도 존재한다. 그러나 비록 유한한 존재에게 절대적 진리 또는 순수한 진리는 존재하지 않는다 해도 그 안에 순수한 진리와 유사하거나 그 진리와 관계되는 진리는 존재한다. 천국 안에는 진리의 가상(appearances,외관)들이 존재한다. 가상이긴 하지만 우리는 그 진리를 진짜 가상들이라 부르는데 그 이유는 순수한 진리가 감각의 대상으로서 진리 자체를 표현할 경우 진짜 진리들이 입고 나타나는 것이 진리의 가상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순수한 진리들은 그 진리를 생산해 주는 상태와 연결되어서만 존재하기 때문에 그 진리들이 표현하는 실재와 틀리는 일이 결코 없고 상반되게 이해되어지지도 않는다. 그러나 지상에서 의 상항은 다르다. 지상에 있는 가상적인 진리들은 인간 마음 안에서 순수한 진리와 똑같은 주제와 연결되어 존재하거나 그로부터 진행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지상의 가상적인 진리들은 변함이 없어 그 진리가 이 상태와 있든 저 상태와 있든 똑같다. 예를 들면 태양이 떠오르고 지는 가상들은 변함이 없고 모든 이에게 공통으로 존재한다. 이런 사실(가상적 진리)은 진짜 진리를 아는 이에게나 모르는 이에게나 똑같이 존재해 준다. 지상에 있는 만물이 지니는 이런 속성 때문에 말씀의 글자나 자연적 진리는 아주 많은 가상적 진리 (apparent truth)들을 내포하고 있다. 자연적 진리조차 가상으로 옷을 입고 있다고 한다면 영적 진리들이 자연계로 내려오고 인간의 자연적 마음에서 그 진리가 스스로 표현하려 할 때 얼마나 더 두껍게 가상이라는 옷을 입을까 는 짐작되리라 본다.
본문에서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사울과 요나단은 말씀의 가상과 실상을 표현한다. 글자적 의미도 이런 식으로 존재하고 있다. 이 관점에 의거해 보면 왜 다윗이 사울의 무장을 입고 전투에 나가는 것을 거절했지만 전투에 승리한 후 요나단의 옷과 무기는 기꺼이 입었는지에 대한 이유를 가늠할 수 있을 것이다. 다윗은 천국 너머에 존재하는 진리, 신성한 진리를 표현한다. 그리고 신성한 진리 측면에서의 주님은 말씀의 가상적인 진리를 입으시고 싸우시지 않으셨다. 다시 말해 그분은 다윗이 전투에 나가기 전 사울의 무장을 입어보았듯이 가상적인 진리들은 입어보시고 평가만 해보셨을 뿐 다시 그것을 벗으시고 그분의 단순한 무기만을 취하셨을 뿐이다. 이 무기야말로 인간 자신의 도구로 들어올릴 수 없는 무기요 인간 총명으로 결코 다듬어지지 않은 무기이다. 비록 주님께서 말씀의 가상적인 진리를 입으시고 싸우시지는 않으셨다 해도 싸움이 끝나고 승리하셨을 때 말씀의 진짜 진리를 입으셨고 신성한 진리로서의 그분 자신과 하나 되심으로 모든 것을 드높이시고 영화되게 하셨던 것이다. 이런 관점은 사울이 다윗을 계속해서 증오해 갔는가에 대한 원인, 그것들에 대한 영적 의미도 발견할 수 있게 해준다. 그 이유가 주님이 더 완전해져서 그분의 인성이 더 신성한 진리로 되어 가면 갈수록 신성한 진리와 신성으로부터의 진리 사이의 간격은 더욱 크게 벌어져 양쪽의 차이가 분명해져 가서 결국 가상적인 진리가 완전히 제거될 때까지 계속되어 결국 끝장을 보고야 만다. 위 내용을 토대로 우리에게 관련되는 상응에 속한 것이나 보다 낮은 영적 의미들로 초점을 맞추어보자.
이제 개개인의 경험이라는 범주에 성서 역사를 가져다 놓는 해석의 원리에 관점을 맞추어 보자. 사울, 다윗, 솔로몬은 거듭나는 삶으로 진보해 가는 사람들의 마음 안에서 연속적으로 존재하는 신성한 진리를 표현한다. 다시 말해 거듭나는 마음은 자연적 수준에서 영적 수준으로, 다시 영적 수준에서 천적 수준으로 계속적으로 주님의 진리를 지각하거나 사랑해 간다. 사울 통치의 역사는 자연적 마음, 마음의 자연적 수준이 거듭나는 것을 표현해 주고 있다. 그러므로 사울은 자연적 마음 자체라고 간주해도 무방할는지 모른다. 그러나 요나단과 관련시켜 생각할 때의 사울은 자연적 마음의 거듭나는 상태 중에서 첫째에 해당되고 요나단은 두 번째에 해당되는 상태를 표현한다. 그렇지만 이 둘은 자연적 마음 안에 있는 순수한 진리에 관련을 갖는 가상적 진리라는 점에서 서로 일치하고 있다.
거듭나아 가는 진보 과정에서 인간 마음은 계속 완전해지는데, 이 완전해 가는 과정은 계속적인 단계들 또는 우리가 지각 할 수 없는 어떤 등급을 밟아 결과된다. 더불어 보다 더 완전한 등급은 보다 덜 완전한 등급을 발판으로 해서 생산되어진다. 첫 단계에 있는 자연적 마음은 주님과 천국에 속한 사항보다는 세상과 자아에 관한 것들로부터 오는 애착과생각들을 영적 사항이라고 간주한다. 그래서 이 마음은 사랑보다는 두려움이 더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 이런 마음은 정의의 왕국에 속하는 새롭고 더 높은 동기들이 마음에서 진정한 질서로 건립될 때까지 마음이라는 왕국의 왕이 되어 있다. 이와 같은 자연적 마음, 첫 단계로서의 자연적 마음이 사울로서, 둘째 단계는 요나단으로서 간단히 생각해 볼 수도 있다. 그러므로 진리의 가상들로 규율되는 자연적 마음의 첫 단계가 사울로 적절히 표현되고 둘째 상태 즉 순수한 진리의 방향 아래에 오게 될 때의 상태는 요나단으로 표현됨은 지당할 수밖에 없다. 첫 단계의 자연적 마음은 마치 사울이 다윗을 대우했던 모양대로 영적 마음에 적의를 품고 있다. 그러나 둘째 단계의 자연적 마음은 요나단이 다윗을 대우했던 것 같이 영적 마음과 하모니를 이루고 통일을 이루고 있다. 마음의 계속되는 상태를 이렇게 이해하게 되면 왕들의 역사 부분에 있게 되는 주변 여건에 담긴 의미도 명백히 보게되어 그 의미 또한 유용하게 응용되리라 믿는다.
다윗이 골리앗의 머리를 들고 사울 앞에서 보고를 마치자 마자 요나단의 영은 다윗의 영과 한데 깁어졌다. 미혹하는 영, 기만하려드는 추론인 골리앗, 즉 천국이나 행복은 하느님을 우러르는 신앙의 힘과 실제 생활 없이도 가능하다고 하는 추론을 타도하고 나면, 자연적 수준에 있는 것과 영적인 수준에 있는 것은 서로 깁어져 절대 풀어 질 수 없는 끈으로 하나 되게 한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말을 지킬 것이다. 그러면 나의 아버지께서도 그를 사랑하시겠고 아버지와 나는 그를 찾아가 그와 함께 살 것이다”(요한복음14:23). “ 사랑은 율법을 완성되게 한다.” 사랑함과 행함이 없는 신앙은 생명 없는 신앙이다. 그 이유는 일이 없는 신앙은 죽은 상태이기 때문이다. 이런 죽은 신앙이 내다보는 천국은 일하다가 쉬는 장소가 아니라 일에서 손을 떼고 쉬는 장소인 줄 착각한다. 아마 이런 삶이 천국이라면 오히려 김빠지고 지루한 영원한 삶이 될 것이다. 이런 삶일 경우 그 삶은 유용한 것도 행복한 것도 실상 되지 못한다. 정의로웠던 사람이 들어가는 사후의 쉼이란 그들이 자연계에서 필히 부딪쳐야 했던 자연적 생각, 악에 잘 기울려는 경향성으로 인해 야기되는 각종 잘못과 악들을 물리쳐 승리했음으로 획득되는 평화의 상태를 말한다. 또 한 가지 더 첨부할 것은 아마 위의 쉼의 상태는 이 세상에서도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얼마라도 획득해서 즐길 수 있다는 점이다. 참으로 외향의 시련이 있는 동안에도 내향의 평화는 존재할 수 있다. 바로 우리 주님의 경우가 그 실례 이다. 그분께서는 제자들에게 평화를 수여하시면서 동시에 경고하시기를 너희들은 이 세상에서 박해를 당할 것이라고 하셨던 것이다. 자연적 마음이 영적 마음과 짜깁어질 때, 두 마음 사이에 내적 동의가 있을 경우에는 설사 자연적 마음에 있는 악들이 다 제거되기 전이라 해도, 핍박을 당하고야 말 처지가 눈 앞에 있다 해도, 거기에는 내향의 평화가 존재한다. 영적인 것에 조화되도록 자연적인 것들을 가져다 놓는 것이 일하고 있는 사람인 것이다. 이 목적을 달성하는데 제일 먼저 대두되는 것, 가장 필요한 첫째가는 일은 두 마음 사이에 적대감을 형성시켜 분리를 시도하고 있는 악과 거짓의 정복이다.
요나단의 영과 다윗의 영이 짜깁어졌을 때, 그리고 사울의 상속자가 이스라엘 왕국의 합법적인 미래의 왕에게 그 표시로 그의 옷과 무기를 주고, 띠를 매어 주었을 때, 그 둘은 서로 약속을 맺게 되었다. 이리하여 그들은 자기들 속에 존재했던 사랑과 그 둘이 하나임에 대해 실제의 결과로 나타나게 했다. 이렇게 언약된 우정은 이후 사울의 푸대접과 쓰라린 경험을 겪는 동안에도 다윗의 영에게 위로와 달콤함을 느끼게 했었을 것이 틀림없다. 이와 같은 모습은 기독인에게도 여지없이 적용되는 사실들이다. 내향의 인간과 외향의 인간 사이에 언약이 이루어져 하나 되어 내면으로 존재하게 되면 그 언약은 그 사람으로 하여금 영적 박해에서 견뎌내게 하고 이후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때를 맛보게 해준다. 이 내향의 상태야말로 박해에서 버티고야 말게 해주는 것은 물어볼 것도 없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영적 고난은 내향의 인간에 따라 하느님의 법도에 즐거워하는 이들에게만 있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음의 이런 법칙에 자꾸 도전해오는 또 다른 법칙도 존재한다. 이런 또 다른 법칙이 다윗의 경우에서 발견된다. 내향적 인간의 애착들이 하느님의 법도를 높이 찬양하는 모습이 전쟁터에서 돌아오는 사울과 다윗을 보고서는 다윗을 사울보다 더 칭송하는 줄거리에 담겨있다. 그런데 이 칭송은 외향의 인간을 불쾌하게 만들고 분노를 치밀게 하고 있다. 더불어 인간 내에서 왕이라고 여겼던 자연적 인간은 그 지위를 잃을까 두려워하게 된다. “이 자연적 인간(사울)은 왕국이라는 것 외에 더 나은 무엇을 더 지닐 수 있을까?” 의지에 있게 되는 사울의 상태는 즉각 생각의 영역으로 들어가 경계 태세에 골몰하게 한다. 마치 사울이 그 날로부터 다윗을 점찍어 주목하게 된 것과 같다. 이보다 한 걸음 더 진전된 나쁜 상태가 즉각 뒤따르고 있다. “이튿날 하느님께로부터서 온 악령이 내리 덮쳤을 때이다.” 우리가 나쁜 감정을 갖게 될 때 악령들은 우리 안에 재빨리 들어와 우리를 규율하게 된다. 이 악령들은 의지 속의 악들을 은밀하게 흥분시켜 이해성 안에 거짓된 생각을 넌지시 귀띔해준다. 의지가 은근히 심으려 드는 거짓들이란 진리의 가상을 뒤집어 쓰려고 의도하는 것, 한마디로 진리를 왜곡시키려는 것이다. 주님이 광야에서 시험 당하실 때도 사탄은 말씀 속의 진리를 가지고 유혹했었다. 유혹은 언제나 이런 식으로 오고 있다. 우리는 진리의 가상을 통하여 시험받아진다. 이런 진리의 가상들 모두는 올바른 길에서 벗어나 구부러져 있으면서도 자기 것이 상대방의 것과 유사하다고 인정받으려 한다. 결론적으로 악이 선인 듯 나타나게 하려든다. 사울 안에 들어온 악령은 그로 하여금 예언하게 만들었다. 악령이 예언하는 능력을 선물로 증여한다는 것은 기묘한 일인 듯 여겨질지 모른다. 비록 점쟁이 이긴 하지만 발람도 예언하는 능력을 가졌었다. 그러나 주님이 허락하시는 것 외의 어느 것도 예언할 수는 없었다. 예언자들은 닥쳐 올 사건을 예보했을 뿐 아니라 선생이기도 했다. 거짓 예언자들이 때로는 진정한 예언을 발표 할 수 있듯이 거짓 선생도 진정한 교리를 가르칠 수도 있다. 사울이 예언한 것들의 본성이나 주제가 무엇이었던 간에 중요한 것은 악령에 사로잡힌 그의 영혼이 예언한다는 사실 자체는 앞뒤가 맞지 않는 것이다. 계발되어졌거나 훈육 받은 이해성일 경우라면 불순한 심정과 연결될 수 있을는지 모른다. 그 이유는 뒤쪽에서는 악행을 저지르면서도 앞에서는 올바른 소리를 내뱉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가능성은 슬기로운 용도를 위해 허용되기도 한다. 인간의 정상적 상태는 자기가 생각한 것을 말하고 자기가 뜻하는 것을 행동하는 것일 게다. 이것이 인간의 근원이 되는 상태이다. 그러나 심정이 타락되었을 때, 필요한 작업은 의지의 절대적 지배에서 이해성은 이탈되게 하여 인간이 자기 심정을 똑바로 들여다 보고 그 상태를 가늠해서 무법천지 같은 동기를 조절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이 참다운 선물 역시 남용 될 수도 있다. 그 이유가 인간은 자기 의도를 감추기 위해, 또는 자기 의도가 더 큰 재주를 발휘하기 위해 생각이라는 자기 능력을 고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울은 악령으로 인해 예언을 중얼거리면서도 한편으로 다윗을 창으로 벽에 박으려고 궁리했고 과거 다윗이 수금을 탓을 때에는 악령이 가셔져서 제 정신을 차릴 수가 있었는데 본문의 경우에는 그러지 못했다. 다윗이 두 번이나 몸을 피할 수 있었던 것은 진정한 이해성에 선한 심정이 결합된 결과로부터이다.
다윗을 죽이고 싶도록 미워했던 수준에서 이제 사울은 다윗을 두려워하게 되었다. 그 이유는 “야훼께서 자기를 버리시고 다윗과 함께 하시는 줄 알았기 때문이다.” 그의 두려움은 사랑에 앞서 있어지는 두려움이 아니다. 그의 두려움은 사랑을 책략을 써서라도 사랑 대신 자리를 차지하여 앉겠다고 골몰하는데서 오는 두려움이다. 그리하여 마음의 중심을 점령하고 사랑을 밖으로 내몰겠다는 두려움이다. 그래서 사울은 “다윗을 궁에서 내보내어 천인 부대를 거느리는 지휘관으로 임명하였다.” 사울이 다윗을 지휘관으로 배치한 것은 다윗의 인기가 백성들 가운데 올라가게 해주어 다윗의 용감성을 입증되도록 하려는데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그의 명령이 담긴 위 구절은 거듭나는 마음 안에서 자연적 수준을 능가하는 영적 수준들이 힘을 확장해가고 있는 것을 표현하고 있다. 그 이유가 이 부분에서 표현되는 상태는 영적 수준이 자연적 수준에 종속되어 있는 상태, 그러나 그 상태에서 자연적 수준이 제 스스로 자기가 빠질 함정을 파고 있는 것을 묘사하기 때문이다. 이런 모습은 마음 안에서 뿐만 아니라 세상 속에서도 잘 발견된다. 이를 시편에서 이렇게 노래하고 있다. “인간의 분노는 당신의 영광을 더 할 뿐이요 당신의 진노에서 살아 남은 자들이 당신의 축제를 지키리이다”(시편76:10). 신성의 뜻에 인간이 반대하는 것, 자연적인 것이 영적인 것에 반대하는 것은 오히려 신성과 영적인 것을 강하게 만들고 더 드높여 줄뿐이다. 다윗은 번영해 갈 수밖에 없었다. 그 이유는 주님께서 그와 함께 하시어 만사를 슬기롭게 처리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모든 이스라엘과 유다가 그를 사랑했다. 그는 앞장 서서 싸우러 나가고 돌아와서는 그들 품에 다시 안겼기 때문이다. 가장 높으시면서 가장 낮으신 분이 우리와 함께 하실 때 누가 감히 우리와 맞서 오리오? 우리 속의 인간, 내향의 인간이 모든 일에서 슬기로워져 있어 시작부터 끝까지 줄곧 그렇게 행동한다면 어떤 악도 우리 앞에서 나가 떨어지고 오로지 선함만이 우리 안을, 우리 주위를 감싸주리라, 다윗이 백성들의 사랑을 더욱 많이 받게 될수록 다윗에 대한 사울의 두려움은 더한층 깊어져 갔다. 그리하여 또 하나의 음모가 다윗을 죽이려고 꾸며지고 있다. 사울은 자기 딸을 다윗에게 주겠다고 제안했다. “내 맏딸 메랍을 네 아내로 줄 터이니 나를 위하여 야훼께서 앞장 서시는 싸움을 용감하게 싸워다오.” 그러나 이 말은 “자기의 손을 쓰지 않고 불레셋 사람의 손을 빌어서 다윗을 죽이려는 속셈이었다.” 사울에게는 두 딸이 있었다. 이 줄거리에서 상기되는 성경 줄거리는 라반에게 있던 두 딸 레아와 라헬이다. 야곱과는 달리 다윗은 두 자매와는 결혼하지는 않았다. 사울이 다윗에게 결혼시켜주마고 했던 맏딸의 경우에서는 부마로 삼는데 대한 특별한 과제가 할당되었었다고는 볼 수 없다. 그러나 둘째 딸을 주기로 하는데 대해서는 구체적인 음모가 꾸며지고 있다. 결혼이 성사되는 조건으로 불레셋 사람의 포경 백 개를 잘라 오라는 것이었다. 둘째 딸 미갈은 라헬처럼 진리를 사랑하는 내면의 마음(애착)을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미갈이 표현한 애정이 라헬이 표현했던 애착과 똑같은 영적 수준이라고 단정짓기에는 곤란하다. 그 이유가 미갈은 사울의 품성을 상당히 소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미갈이 표현한 애착은 내면에 있는 자연적 애착이라고 보아야 타당할 것 같다. 더구나 성서는 다윗이 미갈을 사랑했다고 말하고 있지 않고 오로지 미갈이 다윗을 사랑했다고만 언급하고 있다. 그래서 과거 야곱이 라헬을 사랑하고, 라헬이 야곱을 사랑한 상호적인 사랑이 다윗과 미갈 사이에는 존재하지 않고 있다. 그럼에도 그는 미갈을 신부로 맞는 조건을 쾌히 승낙하고 있다. 이리하여 다윗은 사울이 쳐 놓은 함정에 빠진 듯 했지만 그 덫을 지혜롭게 피해가면서 왕이 요구한 백 개보다 두 배나 더 많이 잘라다가 바쳤다. 하는 수 없이 사울은 자기 딸 미갈을 다윗의 아내로 삼게 했다. 사울은 다윗 스스로 죽음의 함정을 파게 하고 싶었으나 이제 그는 나라 안에서 자기 지위보다 더 확고한 위치로 부상하고 있었다. 한마디로 왕좌에 더 가까이 다가 오고 있었던 셈이다. 아마 포경 이 백 개를 받은 사울의 표정을 영화 장면으로 확대해서 본다면 어떠했을까? 이 포경들은 사울의 심정 역시 할례 받지 못했음을 뜨끔하게 가르쳤을 것이다. 그 반면 다윗은 훗날 그에게 주어지는 명령을 내다보면서 순종한 셈이 되었는데 이에 대한 것은 의식 규례에 늘 포함되어 있었다. 이와 관련되는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 하시는 말씀 한 구절을 찾아보자. “유다 국민들아 예루살렘 시민들아, 너희는 스스로 할례를 받아 네 심정의 표피를 벗기고 나에게 속하라” (예레미야4:4). 이와 같은 한 개의 명령 속에도 두 개의 대립되는 상태가 존재하고 있고 이것은 우리 속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주님께서 “자기를 버리고 다윗과 함께 하시는 것”을 사울이 눈으로 똑똑히 보아 알고 있다는 것에 대해서는 우리로 별 의심을 갖지 않게 하지만 자기 딸이 다윗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보고 나서는 “다윗이 점점 더 두려워져서 끝까지 그를 원수로 여기게 되었다”는 대목의 경우에서는 의아해질 수밖에 없다. 그 이유는 자기 딸과 다윗이 결혼한다면 장인 어른이 되는바 자기가 겁먹을 이유가 없을 것 같기 때문이다. 그러나 본문 글자대로 사울이 표현하는 것은 육욕적인 마음이다. “육적인 마음(carnal mind)은 하느님을 원수로 여긴다. 그 이유가 그런 마음은 하느님의 법에 종속되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결코 종속 될 수도 없다.” 육에 속한 마음은 바뀌어 영적 마음이 될 수 없다. 유일한 방법은 그 마음을 잘라내는 것이다. 이 육적 마음은 썩어짐, 쇠퇴함이라는 자연스레 있어지는 붕괴 과정에 의해서가 아닌 싸움이라는 충돌에 의해 잘라 내진다.

사무엘상 17장 해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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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상 제17장

다윗이 골리앗을 쳐죽이다

하느님의 말씀이 우리를 선도하는 대상 중 하나는 큰 사건에 비해 보기에 작고 부적당한 방법일지라도 그것을 수단으로 성취될 수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치시는 것이다. 구약성서에서 의로운 사람에게 이렇게 약속하신다. “한 사람이 천 명을, 두 사람이 만 명과 싸우리라” 이 사항은 이스라엘의 구원의 역사에서 글자대로 성취되었다. 그리고 신약성서에서, “하느님께서는 지혜 있다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이세상의 어리석은 사람들을 택하셨으며, 강하다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이세상의 약한 사람들을 택하셨읍니다”(고린도전1:27). 이 구절이 가르치려는 교훈 중 가장 중요한 한 가지는, 모든 능력은 하느님께 속한다는 것, 그분에게 만사는 가능하시다는 것, 그리고 그분을 믿는 이에게는 만사가 그분같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 진리는 본문에서 갑옷으로 무장한 불레셋의 거인 장수를 비무장한 나이 어린 베들레헴의 목자가 쳐 눕히는 사건 속에도 담겨있다. 이 대결의 결과로 불레셋 군대가 제압 당하여 이스라엘은 강력한 적의 손아귀에서 해방되고 있다. 위의 간단히 열거한 역사적 사실은 그 자체가 지닌 비범하고 흥미를 주는 내용 말고도 선택된 국가의 행동에서 인간 능력보다 더 높은 중재 역할의 증거로 우리를 가르쳐 주고있다. 본문의 줄거리는 대결과 승리라는 상황 속에 교회의 역사 과정에 있는 상태와 거듭 나아가는 인간 마음의 과정을 표현하여 진실 된 영적인 품성과 그 품성을 우리로 잘 탐사하도록 해주고 있다. 교회나 교인이라는 차원 속에서 우리는 이스라엘 군대와 불레셋 군대, 살아 있는 하느님의 군대에 당당하게 도전하는 갑옷으로 무장한 불레셋 대장, 이에 맞서게 되는 목자 지팡이와 돌팔매 끈과 돌 몇 개, 언뜻 보기에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 할 수 없게 보이는 무기들, 등등을 발견 할 수 있다. 이스라엘 군대는 믿는 자들의 몸을 구성하는 수많은 요소들, 그러나 이 요소들을 신앙 자체 만에 관련된 수많은 원리들로서의 교회를 말한다. 이스라엘 군대가 살아 있는 하느님의 군대라고 불릴 경우, 그들은 선함 자체시요 진리 자체 이신 하느님으로부터 파생된 교회 속의 선함과 진리에 관한 원리들, 그리고 이 원리들이 하느님의 질서로 잘 배열되어 있는 교회의 상태를 표현해준다. 그리고 이 배열 상태가 군대를 암시하는 전투적 생각을 포함하게 되므로 우리는 살아 계신 하느님의 군대들이 진정한 교회 속의 사람들에게 도전해 오는 원리에 대치하고 있는 것을 고려해야 한다. 이미 살핀바 있지만, 불레셋의 일방적 의미는 어떤 설득이나 그 설득의 근원인 바램, 즉 행복이란 것은 생활의 거룩함과 심정의 깨끗함에서 기인하는 것보다 더 쉽고 더 빠른 지름길로 쟁취될 수도 있다고 하면서 이를 타인에게 설득시키는데 실재보다는 허울로, 행동보다는 생각 속의 믿음으로 유혹하는 것이다. 이런 원리가 종교측면에서 작용할 경우, 도덕적 차원의 율법의 실천 없이 신앙 만으로 구원된다는 교리의 틀을 만든다. 이 틀이 옳다는 착각으로 인해 실제에 놓여지면 아무 능력도 없는 신성의 틀이 되고 만다. 이런 틀이 비록 교회 내에서 발견된다 해도 이 교리는 진정한 교회의 가장 큰 적의 하나이다. 그 이유는 생명 있는 종교에 반대되기 때문이고 생명 없는 교회일 경우 그 교회는 이름과 껍질만 있는 교회일 뿐이다. 이런 불레셋으로 의미된 원리들은 그런 견해를 가지고 있는 이들이나 그 원리를 실제화 하는 이들만이 상기해보아야 하는 게 아니다. 그런 원리를 실제에 적용하고 사는 사람들은 자기들 신조가 무엇이든 간에 실지로 그 원리를 담고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이런 원리에 잘 기울어지려는 경향성은 우리 모두에게 있는 유전적 속성이고, 그런 원리에 쉽게 넘어가는 시험에 누구를 막론하고 노출되어있다. 이 적이야말로 우리가 완전히 정복하여 끝장을 보기 아주 힘든 골치 아픈 적에 해당된다. 이 적은 정복된 듯 보여도 또 다시 강성해져 우리와 대적하게 된다. 따라서 늘 경계함으로 그 적이 우리 속에서 강성해지는 것을 미리 감지하는 것이 최상의 방법이 된다. 지적으로, 도덕적으로 위 교리를 간직하는 사람들은 그들 스스로 불레셋이 되어 살아 계신 하느님의 군대와 대치하게 된다. 위 교리가 마음속에서 자칫하면 노골화 되는 양태 중의 하나는 지적 오만이다. 이 오만은 아주 발달된 변증적인 기술인데 그런 기술을 연습한 이들이 위 교리를 사랑과 선행의 필요성을 주장하는 하느님의 말씀과 접합시킬 때 창출된다. 교회의 모든 신학 중 한 분파의 경우 사도 바울의 서술 중 한 구절을 잘못 이해한 그 위에 기초를 놓고 있다. 즉 율법의 행위 없이 신앙 만으로 우리는 의로워진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구절은 그 신학의 모든 체계 밑에다 중요하다는 표시인 밑줄 긋기로 사용되고 있다. 다시 이 교리는 다음과 같은 생각, 예수 그리스도는 율법을 성취하셨고, 율법의 깨뜨림을 위해 우리들 대신 죽으셨는 바, 우리가 육을 입으신 그분의 삶과 죽음을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다는 사상에 접목되어있다. 인간 속에 있는 것은 무엇이든지 자기를 추켜 올리려는 경향이 강하다. 그 경향성이 비록 당사자의 무의식 세계에 있다해도 그것은 그 사람의 신앙의 본성 속에 존재하면서 그것을 수단으로 자아 찬양을 부추긴다. 이런 지적 오만이 불레셋 장수 골리앗이다. 이 오만이 살아 계신 하느님의 군대에 당당히 싸움을 걸어와 자기와 맞설 자를 내세우라고 으름장을 놓는다. 그가 입고 있는 갑옷과 투구, 그가 들고 나온 무기란 논쟁들을 말한다. 이를 수단으로 지적 오만은 자신을 방어하면서 자기와 맞설 논쟁을 묵사발 되도록 하는데 사용한다.
거인이 그 당시 있었다는 것은 성경 역사에서 특별히 흥미를 갖게 하는 항목 중의 하나이다. 거인의 특성이나 그 근원에 대한 암시가 있었던 것은 성경에서 홍수 전에 있었던 큰 영적 부패가 인류에게 있었을 때이다. 그리고 거인들은 하느님과 그분의 백성의 적들로서가 아니면 결코 말해진 적이 없다. 주님이 오시기 전에 존재했던 모든 교회는 표현적 교회였었다. 그래서 그들의 내향의 상태는 신체라는 표현물에서 명백해졌는데, 마치 우리의 도덕적 결과들이 행동에서 나타나는 것과 비슷하다. 표현적 교회에 속한 사람 중 신체가 큰 사람은 지적 오만의 표현물에 적합했다. 이 거인들이 타인들의 마음에 미치는 공포란, 진리를 이해하고 확증하는 지성의 올바른 기능과 이런 기능이 뒤집힌 것, 즉 진리같이 보이는 이론으로 골격을 짠 가짜 이론을 식별할 수 없는 삶 위에 덮치는 허무맹랑한 총명의 힘과 똑같은 것이다. 교회 내에서 무의식 중에 일어나는 종교에 관한 잘못된 교리들은 말씀의 글자적 의미에 기초하면서 확증되고 있다. 이런 교리들은 종교적 마음에 큰 영향을 미치게 하는데 그들의 주장이란, 자기들의 교리가 성경의 글자에 기초하는바, 자기들 교리도 성경의 권위와 맞먹는다고 자연스럽게 돌려대고 있다. 진리의 성경이 잘못들의 골격을 만드는데, 그 잘못이 정당하다고 확증하는데 제공될 수 있을까? 말씀의 글자적 의미는 거의 대부분이 가상적 진리들로 구성되어있다. 이 안에 신학적 오류들이 있고, 이 오류들은 인간 마음에 근원을 두고 있으면서 인간 마음이 그 오류를 받치고 있다. 성경의 가상적 진리들로 기반을 만들고 종교적 교리들을 검사하는 방법을 취하면 정작 종교적 교리들을 끌어내며 그 위에 건설되어야할 성경의 진정한 진리들을 가상적 진리들은 아무 효력 없게 만든다. 가상적 진리에서 뽑아낸 교리에 권위를 더 하는데 있어 인간 지혜는 추론을 수단으로 해서 확증하는데 있어서 결코 쩔쩔매지 않는다. 이런 추론들이 갑옷과 무기들이다. 이를 수단으로 거인은 이스라엘이 내보낼 장수와 맞서려고 준비하고 있다. 그가 입은 무장의 세세한 묘사는 교회의 적들이 교회의 원리를 죽이는데 고용되는 영적 전투의 도구들이 무엇들인지 우리로 잘 살펴 볼 수 있게 해준다. 골리앗의 갑옷에 관한 몇 가지 부분들, 성경에서 언급하는 완전한 옷 한 벌로서 그에 대한 의미는 그리스도의 갑옷을 묘사한 이사야와 그리스도인들의 갑옷을 묘사한 바울 서간들에게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주님에 관해서 예언자는 이렇게 말한다. “몸을 감싼 갑옷에선 정의가 뻗어나고 머리에 쓴 투구에선 구원이 빛난다. 몸을 감은 속옷에는 응징이 숨어있고 그 걸친 겉옷에선 열성이 흩날린다” (59:17). 사도는 기독교 제자들에게 이렇게 권고하고 있다. “속임수를 쓰는 악마에 대항할 수 있도록 하느님께서 주시는 무기로 완전 무장을 하십시요. 우리가 대항하여 싸워야 할 원수들은 인간이 아니라 권세와 세력의 악신들과 암흑 세계의 지배자들과 하늘의 악령들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하느님의 무기로 완전 무장을 하십시요. 그래야 악한 무리가 공격해 올 때에 그들을 대항하여 원수를 완전히 무찌르고 승리를 거둘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굳건히 서서 진리로 허리를 동이고 정의로 가슴에 무장을 하고 발에는 평화의 복음을 갖추어 신고 손에는 언제나 신앙의 방패를 잡고 있어야 합니다. 그 방패로 여러분은 악마가 쏘는 불화살을 막아 꺼 버릴 수 있을 것입니다. 구원의 투구를 받아 쓰고 성령의 칼을 받아 쥐십시요. 성령의 칼은 하느님의 말씀입니다”(에페서6:11-17). 이외 데살로니가전 5장 8절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우리는 대낮에 속한 사람이므로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믿음과 사랑으로 가슴에 무장을 하고 구원의 희망으로 투구를 씁니다.” 주님께서는 평화의 왕으로서 뿐만 아니라 전쟁의 사람으로 지상에 오셨다, 그 이유는 그분의 백성에게 평화를 줄 수 있으시기 전 어둠의 권세를 정복하셨기 때문이다. 인간 본성을 입으셨을 때 무한하신 분의 갑옷과 투구란 무엇일까? 말씀에서 언급하는 주님의 머리, 가슴, 발은 그분의 신성한 천적 측면과 영적 측면 그리고 자연적 측면, 또는 세 천국의 천사 안에 담겨지는 그분의 사랑과 지혜, 천사들과 교통되는 지상의 사람에게 담겨지는 그분의 사랑과 지혜이다. 그분이 쓰는 구원의 투구는 진리요, 이를 수단으로 그분은 천적인 것을 방어하시고, 가슴에 무장한 정의는 영적인 것을 방어하는 진리들이다. 몸의 아래 부분을 위한 무장이 언급되고 있지 않은데, 그 이유는 주님의 인성에 있는 진리 같은 자연적인 것들은 적의 공격에 노출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시험자들과 싸우게 되는 차원이 여인의 후손이라는 말로 표현되면서 이렇게 말해지고 있다. “나는 너(뱀)를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리라. 네 후손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라. 너는 그 발꿈치를 물려고 하다가 도리어 여자의 후손에게 머리를 짓밟히리라”(창세기3:15). 그리고 주님의 고통받으심이 묘사된 다윗의 고백에서, “그들은 내 손과 발을 찔렀다.” 진리적 자연성, 이것은 주님의 어머니 쪽 인간성 안에 있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리고 말씀의 글자도 이와 같아서 진리가 가상으로 옷 입혀져 있어 말씀의 글자는 사악하고 왜곡을 즐기는 해석에 의해 찔림을 받고 상처받을 수 있다. 또한 복수나 열정이라는 단어들이 내포되어있는 것이다. 그 다음 기독인의 갑옷과 투구는 무엇일까? 이에 대한 의미는 구원의 대장이 되신 분의 것을 유추해 보면 될 것이다. 기독인의 투구는 기독인의 가장 높은 품위, 즉 주님을 사랑하는 품성을 방어하는 진리이다. 기독인의 가슴받이판은 그 다음 높은 품위, 이웃을 사랑하는 품성을 방어하는 진리이다. 믿음은 악이 직접 공격 할 수 있는 기독인의 미덕을 가장 폭 넓게 보호하는 방패이다. 성령의 검인 하느님의 말씀은 진리 자체에 반대되는 모든 것, 그리스도 복음의 정의에 반대되는 모든 것을 이겨내는 무기이다.
이제는 불레셋 거인 장수가 지닌 갑옷과 투구들에 대한 상징적 특성들을 살펴보자. 오류의 원인을 존속되게 하는 수단들은 비록 본질 면에서는 진리가 떠받쳐지는 것과 다르다고 해도 형태에서는 유사한 데가 많다. 모든 오류도 진리라고 주장한다. 오류가 지니는 공격이나 방어를 위한 무기도 진리를 방어하고 존속되게 하는 무기와 같은 종류들이다. 성경책들은 종교적 증거들 모두의 공통된 근원이다. 그러나 이교(heresy)는 성경의 진정한 가르침을 엉뚱하게 해석해서 뒤집어 놓는다. 그리하여 자기들 원리가 요구하는 대로 책 속의 진리들을 왜곡해 버린다. “오류(error)속에 있는 사람들이 말씀 자체와 싸우는 게 아니다. 그 이유는 그들도 말씀 자체를 거룩하고 신성하다고 부르기 때문이다. 그들이 말씀으로부터 자기들 거짓을 확증하되 글자만으로 이해해서 이기 때문인데, 글자의 어떤 부분은 이교적 견해를 확증할 수도 있게 표현된 부분이 많기 때문이다. 이 부분들을 대체로 감각적이고 눈앞에 나타나는 대로 받아들이는 젊은 층이나 단순한 자들의 납득은 합당하게 여긴다. 글자에서 만의 말씀은 위와 같아서 생활의 악으로부터 거짓 가운데 있는 이들까지 말씀을 가지고 자기 거짓을 합리화 시킨다. 따라서 말씀이 왜곡되고 마는 것이다. 이런 과정 속에서 신앙과 선행을 분리한 이들은 말씀을 왜곡한다. 예를 들면, 말씀 속에서 행동이나 일에 관한 언급이 수많이 거론되고 있지만 이런 단원들을 거쳐 갈 경우, 그들은 거기에는 아무 의미가 없다는 식으로 건너뛰는 방식을 사용한다.” 거인의 투구, 비늘 갑옷, 정강이 받이 등등은 말씀의 가상적 진리들로부터 꿰매어 맞춘 거짓들이다. 이것들은 말씀의 진정한 진리,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향한 선행, 선한 일에 관한 말씀 속의 참 진리를 뒤엎으려 한다. 방패는 왜곡된 신앙의 방어 수단이고 이 수단으로 진짜 신앙에서 자신을 방어한다. 이런 방어용 장비 외에도 골리앗은 창, 표창, 칼을 가지고 있었다. 이 무기들은 표창(target)이라 불리기도 하지만 대체로 창(spear, lance)으로 번역하고 있다. 이 무기들은 상당히 무겁다고 말해지고, 세 가지 방어용인 투구, 가슴받이판, 정강이 받이판의 세 가지 종류에 응하는 것들이다. 방어용은 놋으로 되어 있고 공격용인 창날은 쇠로 되어 있었다. 놋과 쇠는 자연적 선과 진리에 상응하는데, 여기서 반대적 의미로 사용되므로 자연적 악과 거짓을 의미한다. 한가지 특이하게 묘사하는 것은 창대가 베틀 용두머리만큼 굵었다는 것이다. 글자적으로 이 표현은 창의 크기가 굉장히 크다는 생각을 들게 해주고 마는 듯 여겨지나 영적으로는 창의 본성을 표현하는 말이다. “베틀은 천적 원리, 또는 의지에 관련되는 원리를 의미한다. 그 이유는 의지가 이해성 안으로 흘러가 의지의 모양을 만들기 때문인데, 마치 이해성 안에 있는 것들이 의지로 깁어지는 것과 같다.” 나무와 철로 창대와 창날을 만드는데, 일반적 의미에서 이것은 선과 진리에 상응되나 반대 의미로는 악과 거짓에 상응된다. 의지 안의 악에 모양을 주는 이해성 속의 거짓들이 골리앗의 창날이요, 베틀 용두머리 같은 창대이다. 이 거인의 무장에 대해 언급하는 것 중 특이한 점 하나는 무장에 대한 무게의 언급이다. 그리고 숫자를 다루면서 우리가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이 거인의 상징이다. 그의 신장은 6 큐빗 한 뼘이었다. 그의 비늘 갑옷은 오 천 세겔이고, 창날은 육 백 세겔이었다. 무게와 키는 선 또는 악에 관한 것의 상태에 상응하고, 키나 무게를 표현하는 숫자들은 그 상태의 품질을 의미한다. 6이란 전투를 표현하는 숫자인데, 그 이유는 거듭남에 관련 될 경우 안식일에 앞에 선행되는 노동의 육일은 기독인이 쉼의 상태로 들어가기 전 통과해야만 하는 노력과 다툼의 모든 상태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거듭나는 사람은 악과 거짓에 맞붙어 싸워야 하지만 타락하는 사람은 선함과 진리에 대적한다. 이것들은 전투인바, 이 거인의 키는 여섯 큐빗으로, 창날은 육 백 세겔로 표현된 것이다. 그런데 이 거인의 키는 여섯 큐빗 한 뼘이었다. 큐빗은 팔뚝으로, 한 뼘은 손바닥으로 측량되는 길이 이다. 따라서 이 장수의 키는 나의 팔, 나의 오른 손이 나를 불리하게 했다고 말하는 오만을 표현해놓고 있다. 비늘 갑옷의 무게는 오 천 세겔이다. 둘과 셋으로 구성되는 다섯은 각 숫자가 의미하는 선함과 진리의 연합을 표현한다. 그러나 본문의 경우 반대 의미를 취하고 있는바, 이는 악과 거짓의 연합을 표현하고 있다. 100과 1000은 거기에 딸린 숫자를 변경시키는 게 아니라 그 숫자들을 더 강화해줄 뿐이다. 그러므로 악과 거짓이 연합된 힘이 얼마나 큰 지를 본문은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 힘은 선함과 진리의 천국적 결혼에서 신앙과 짝을 이루는 선행의 원리 자체에 얼마나 크게 반대되는지를 표현하여 우리로 실감케 해준다.
위와 같이 따로따로 명시해서 나타낸 것들은 거인 같은 이교, 구원의 희망과 바탕을 신앙 한쪽 만에 둔 원리들이다. 위 문단의 세부사항들은 단지 교리 측면으로 말해지는 게 아니라 원리 측면에서도 이해해야 옳을 것이다. 교리란 악의 원인과 결과 양 쪽이다. 원리 안에 있는 것들이 실지로 할례 받지 않은 군대들, 그리고 거인 장수에서 표현되어진 것들이다.
이 거인이 이스라엘 군대가 들으라고 날마다 고함친 도전이란 자기와 맞서 싸울 자를 내보내라는 것이었으나 응답이 없었다. 사울, 그의 키도 이 거인의 키와 비등했을는지 모르지만 용감성이나 싸움 기술에 있어서는 매우 모자랐다. 아마 왕 단독으로 싸움에 붙기에는 너무 수준이 낮을는지 모른다. 확실한 것 하나는 이스라엘 군과 사울이 불레셋의 무시하는 고함 소리를 들었을 때 그들 모두는 한결같이 벌벌 떨었다는 것일 게다. 하느님을 두려워함이 없는 정도에 비례해서 인간의 두려움은 증가된다. 군인들과 왕 모두 이런 처지에 있는 셈이다. 어찌됐든 이 백성들을 구원하는 시기는 아직 오지 않고 있다. 그 이유는 그들로 구원받게 할 당사자가 아직 이스라엘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때가 이제 다가 오고 있다. 다윗, 왕으로 기름 받았으나 즉위하지 않은 자, 그가 이제 나타나 도전을 받아들여 도저히 정복할 수 없는 듯 여겨진 적의 정복자가 되고있다.
이제부터는 긴 서술이 따르고 있다. 다윗이 아버지의 심부름으로 사울과 함께 전투에 참가한 형 셋을 만나러 이스라엘 진영에 오고 있다. 그리하여 적 장수가 매일 나와 떠드는 소리를 듣게 되고 그 소리로 인해 이스라엘 군인들이 겁에 질려있는 모습을 목격하면서, “우리 왕께서는 저자를 죽이는 사람에게 후한 상을 내리실 뿐만 아니라 부마로 삼고 그 집안 식구들에게는 모든 징발을 면제 해주신다더군” 이라는 말까지 듣게 된다. 그리고 그는 경멸하는 표현으로, “저 불레셋의 오랑캐 녀석이 도대체 누구기에 살아 계시는 하느님께서 거느리시는 이 군대에게 욕지거리를 하는 겁니까?” 다윗의 이 말이 퍼져 사울의 귀에까지 들어가자, 그는 다윗을 불러 들였다. 양치기 출신인 다윗은 즉각 왕에게 이렇게 고한다. “저자 때문에 상심하지 마십시요. 소인이 나가 저 불레셋 놈과 싸우겠읍니다.” 그러나 사울은 다윗을 보고 맞붙기에는 너무 불공평하다고 말린다. “네가 나가 저 불레셋 놈과 싸우다니, 어림도 없는 일이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싸움으로 몸을 단련해온 자인데, 너는 아직 나이 어린 소년이 아니냐?” 그러나 목자로서 단련된 그의 경험은 전쟁의 용사와 맞서 싸울 능력이 있다는 확신을 다윗에게 불어넣었다. “소인은 아버지의 양을 쳐 왔읍니다. 사자나 곰이 나타나 양 새끼를 한 마리라도 물어 가면 소인은 한사코 뒤쫓아가서 그 놈을 쳐 그 아가리에서 양 새끼를 빼내곤 했읍니다. 그놈이 돌아서서 덤벼들면 턱수염을 휘어잡고 때려 죽였읍니다. 소인은 이렇게 사자도 죽이고 곰도 죽였읍니다. 저 불레셋의 오랑캐 놈도 그렇게 해치우겠읍니다. 살아 계시는 하느님께서 거느리시는 이 군대에게 욕지거리를 퍼붓는 자를 어찌 그냥 내버려 두겠읍니까?” 다윗의 직업, 그의 체험, 자기 힘에 대한 확신들은 모두 다윗의 주님에게 있는 속성들을 표현하고 있다. 주님은 아버지의 양떼를 돌보셨다. 이 양떼는 실로 아버지의 것이었으나 아버지는 양떼를 예수께 주신 것이다. 아무도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아 가지 못한다(요한복음10:28,29). 사자와 곰과의 다윗의 싸움, 어린 양의 구출은 주님의 어둠의 권세와의 전투, 먹어 삼키려는 이빨에서 인류의 해방을 표현하고 있다. 그 이유는 으르렁대며 걸어다니면서 먹이를 찾는 사자의 모습이 악마이기 때문이다. 사자와 곰은 악마와 사탄을 상징한다. 이를 수단으로 주님께서는 광야에서 시험되셨다. 그분은 광야에서 들짐승과 함께 계셨다고 말해지고 있다(마가복음1:13). 들짐승을 만나고 죽이는 다윗의 이야기에는 좀 더 특이한 대목이 있다. 마치 들짐승이 한번에 그의 양떼를 공격한 듯 말해지면서 다윗은 한 마리(him)를 죽였다고 말하는 듯 보여진다. 어린 양이 사자의 아가리에서 빼내어졌는데도 어린 양은 마치 생생하게 살아 있는 듯 우리로 느끼면서 본문을 읽도록 해준다. 다윗이 짐승의 턱수염을 잡아서 쳐 부셨다는 것은 삼손과 맞먹는 힘을 연상하게 한다. 이런 세부사항들 어느 하나에도 의심간 것은 없고 단지 한 개의 싸움에서 보여진 모양새는 악마와 사탄에 의한 주님의 시험을 더 정확히 표현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어린 양을 살아 있게 구출함은 사탄이 포로로 만들고 집어삼키려는 죽음에서 인간을 해방시키시는 모형을 우리로 볼 수 있게 해주시고 있다.
먹이를 잡아채는 강한 힘을 소유한 짐승을 붙잡아 때려뉘는 힘을 지녔던 무장도 하지 않았던 목자는 그 싸움의 승리가 자기 때문이 아니라고 고백하고 있다. 계속해서 다윗이 말하였다. “사자와 곰으로부터 소인을 살려내신 야훼께서 저 불레셋 놈에게서도 소인을 살려내실 것입니다.” 이것은 그의 승리의 바탕을 이루는 대목이다. 주님께서 말하신 바, “나는 무슨 일이나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다”(요한복음5:30). “내가 너희에게 하는 말도 나 스스로 하는 말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면서 몸소 하시는 일이다”(요한복음14:10). 주님의 확신은 그분 안에 아버지가 현존 하시는데 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하셨다.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다”(요한10:30). 인성 속의 신성은 그분의 능력의 근원이자 승리의 원천이셨다.
다윗의 용기, 더욱이 자신의 승리를 하느님께 철저히 의존하고 있는 다윗의 말에 흡족해한 사울은 이렇게 말한다. “그러면 나가거라. 야훼께서 너와 함께 하시기를 빈다.” 그러나 사울은 이 젊은이가 비 무장한 상태로 사자와 곰과 대결했듯이 거인 장수와 대결시키고 싶지 않았다. “사울은 자기 군복을 다윗에게 입힌 다음, 머리에는 놋투구를 씌워주고 몸에는 갑옷을 입혔다. 그리고 자기 칼을 다윗의 군복에 채워주었다.” 그러나 사울의 무장은 다윗에게 어울리지 않았다. “다윗은 이런 것을 입어 본 일이 없으므로 몸을 제대로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래서 다윗은 사울에게 ‘이런 것을 입어 본 적이 없읍니다. 이래 가지고는 몸을 제대로 움직일 수가 없읍니다’ 하고는 그것을 모두 벗어 버렸다.” 이런 대목은 비록 영적 의미를 가지고 있지 않다고 예상된다 해도 비유적 측면에서 씌어진 성서 구절 중의 하나이다. 영적 의미는 성서 구절에 우연히 있어진 의미가 아니라 본래부터 내재된 의미요 가르침이다. 그 의미는 영감 속에 존재하는 신성한 영 그 자체이다. 우선 우리가 고려해야 하는 것은 사울과 다윗은 가장 높은 표현적 속성들과 관련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신성한 진리(Divine truth)는 신성으로부터의 진리(truth Divine)로 무장을 하고 전투에 나갈 수 없다. 신성으로부터의 진리의 차원에서 주님은 말씀의 가상적 진리를 가지시고 천국과 교회의 적들과 싸우셨다. 그분은 가상적 진리를 수단으로 한 때 나마 제자들을 인도해 주시기까지 하셨다. 즉 그들이 거듭나는 동안에 이스라엘 열 두 지파를 심판하러 열 두 보좌에 앉게 된다고 약속하실 때의 경우가 그러하다. 사울의 무장은 말씀의 가상적 진리를 표현한다. 그러나 이 진리도 골리앗의 무장이 표현하는 부패되고 뒤집혀진 상태의 진리에는 반대된다. 이 무장은 사울이라는 인격에는 어울리지만 다윗이라는 인격에는 적합치 못하다. 사실 다윗이 사울의 무장을 입은 것은 다윗 스스로가 아니라 사울이 입혔던 것이다. 그래서 다윗은 그것을 벗어버렸다. 불완전한 모든 것, 가상적 진리까지 포함해서 그 모든 것은 외부로부터 다윗에게 온 것인바, 그는 내부로부터 오는 자신의 의지와 힘으로 그것을 벗어 던졌다. 어찌됐든 다윗은 사울의 무장을 하고 싸울 수 없었다. 그 이유는 그가 그것들을 입어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신성한 진리 차원의 주님은 전투 시에 신용할만한 무장으로 가상적 진리를 입으신 적이 없으시다. 사울은 무장을 갖추고 있었지만 불레셋과 위험을 무릅쓰고 맞붙지를 못했다. 그러나 불레셋 장수와 대적하게 되는 다윗은 사울의 무장을 하고 싸우지 않고 오히려 전쟁에 걸맞지도 않는 듯 여겨지는 것, 그러나 사울의 무장보다 훨씬 더 효능적인 도구를 선택했다. “다윗은 자기의 막대기를 집어들고 개울가에서 자갈 다섯 개를 골라 목동 주머니에 넣은 다음 돌팔매 끈을 가지고 그 불레셋 장수 쪽으로 걸어갔다.” 엄청난 장수와의 결전에 비해 이 도구는 얼마나 단순한가! 그 결과는 얼마나 위대한가! 이 간단한 무기가 얼마나 효능적인지 다윗은 알고 있었다. 주님께서도 훨씬 더 강한 적들과의 싸움에서 위와 같이 알고 계셨고 그분의 전투는 이스라엘의 노예 상태를 자유케 하는 것이 아니라 전 인류의 적에 대한 싸움이셨다. 아마 기독인들에게 있어서도 위와 같은 것, 즉 잘못이나 죄의 속박에로 다시 들어가게 하는 자신의 적과 싸워야만 할 때, 진리가 자신을 자유롭게 하게 만들어 보려 할 때 위의 다윗같이 느끼거나 최소한 줄거리의 의미에 신뢰를 들것이라 본다. 목자의 막대기에 대해서는 본문 이후 이렇게 그가 노래하고 있다. “야훼는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어라. 푸른 풀밭에 누워 놀게 하시고 물가로 이끌어 쉬게 하시니 지쳤던 이 몸에 생기가 넘친다. 그 이름 목자이시니 인도하는 길, 언제나 곧은 길이요, 나 비록 음산한 죽음의 골짜기를 지날지라도 내 곁에 주님 계시오니 무서울 것 없어라. 막대기와 지팡이로 인도하시니 걱정할 것 없어라” (시편 23:1-4). 다윗은 자신의 능력에 의존치 않고 신성의 능력에 신뢰를 놓고 있다. 다시 말해 그는 자신의 의지와 신중성에 의존하지 않고 그분의 선함과 지혜에 만사를 맡기고 있다. 그러나 다윗은 적극적인 공격 수단을 마련하여 스스로를 준비시켜 두어야만 했다. 그래서 그는 개울가에서 자갈 다섯 개를 집어들었다. 여기서 번역된 개울(brook)이라는 단어는 때로 개울의 바닥을 암시하는 말인 계곡(valley)으로도 번역하기도 한다. 그러나 개울(brook)이 가장 근원적 차원에 해당되리라 보는데, 아마 어떤 이들의 경우 그 돌들은 산골짜기의 급류가 흐르는데서 취했는가, 아니면 그런 개울물이 마른 상태에서 개울바닥에서 주었는가 하고 추정해 보기도 하지만 이는 모두 불확실한 생각일 뿐이다. 다윗이 선택한 돌들은 최소한 개울에서 물의 작용으로 마모된 돌인 것만은 틀림없다. 이런 매끈매끈해진 돌(자갈)은 거룩한 말씀에서 나오는 명백한 진리들을 표현한다. 개울, 시내, 그리고 강들은 샘, 연못, 호수, 바다와 같이 거룩한 말씀을 상징한다. 이 말씀이란 하나의 책으로 있는 말씀 뿐만 아니라 마음 속에 있는 말씀까지 포함된다. 이런 물에 두 가지 구별되는 양상이 있다. 하나는 흐르는 물과 흐르지 않는 물이다. 흔히 흐르는 물(running water)은 때로 살아있는 물(living water)이라 부르기도 하는데, 이 물은 이해성과 삶 안에 있는 진리를 의미하고, 고여 있는 물(standing water)은 기억 속에 든 진리를 의미한다. 다윗이 개울에서 선발한 다섯 개의 자갈은 말씀인데, 뾰족히 말해서 총명과 살아있는 신앙의 근원이 되는 말씀, 그런고로 전통적인 믿음, 죽어있는 믿음과 반대된다.
이 돌에 관해서는 우리로 좀 더 살펴볼 수 있게 하는 몇 가지 세부사항이 있다. 이 돌들은 매끈매끈한 돌이었다. 총명하고 실용성 있는 믿음은 진리를 위해 일하되, 특히 신앙을 방어하는데 고용되는 진리를 위해 일을 한다. 개울의 물들이 흐르면서 돌에게 작용하는 것, 돌의 못난 형태와 꺼칠꺼칠한 형태를 벗겨 둥글고 매끈매끈하게 하듯, 실제에 사용되고 있는 믿음은 진리에 선함의 품질과 형태를 나누어준다. 이 돌이 다섯 개였다는 것은, 이런 진리들이 선함과 진리의 품질들을 스스로 하나 되게 한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그 돌들을 선발했다는 것은, 진리들을 삶의 각 용도에 알맞도록 식별하여 잘 골라야함을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다. 이 돌을 목동 주머니(보따리, scrip, shepherd’s bag)에 담았다는 것은, 진리들은 삶이 사용해야겠다고 요구할 때까지 교리 속에 놓여야만 한다는 것을 우리에게 암시하고 있다.
보따리(주머니, scrip)에 관련된 주님의 가르침을 살펴보자. 주님께서 복음을 전하는 평화로운 선교에 제자들을 보내실 때 전대(scrip)를 지니지 말라고 분부하셨다. 그러나 과월절 밤 세상의 권세와 싸우게 되는 때가 가까워 올 때 그들에게 경고하시기를 “그러나 지금은 돈주머니가 있는 사람들은 그것을 가지고 가고 식량자루(scrip)도 가지고 가라. 또 칼이 없는 사람은 겉옷을 팔아서라도 칼을 사 가지고 가거라”(누가22:36). 이 구절을 참작하면 주머니(scrip)는 싸움이라는 상태와 연관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따라서 다윗이 골리앗과의 싸움에서 주머니는 악과 거짓을 파괴시킬 진리를 담아 운반해주는 교리적인 형체를 의미해준다. 이 주머니와 더불어 그가 집어 담은 돌과 더불어 사용될 도구까지 지참하고 있다. 돌팔매끈(sling)은 활과 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 활은 싸우는 교리를 의미한다. 교리는 두 가지 주요한 용도가 있다. 그 하나는, 성경 내에 산재하는 다각적인 진리를 한 가지 주제에 관련하여 모아놓고 병합해주는 것이다. 이 경우 돌이 모여있는 주머니나 화살을 담고 있는 화살통과 같은 쓰임새이다. 다른 하나는, 진리에 방향과 힘을 주는 경우이다. 진리가 악이나 오류와 싸우는데 고용될 경우인데 활과 돌팔매끈이 이에 해당된다.
이렇게 무장한 다윗은 싸우기 위해 앞으로 나아갔다. 그는 불레셋에 더 가까이 접근했다. 불레셋 장수도 다윗에게 가까이 접근했다. 불레셋 장수가 다윗에게 말한다. “막대기는 왜 가지고 나왔느냐? 내가 개란 말이냐?” 때때로 사람들은 자신의 위엄을 역설하는 가운데 자기 스스로 자신의 인격을 그려 내줄 때가 있다. 이 경우가 골리앗에 해당되고 있다. 그 이유는 할례 받지 않은 자란 감각적인 자를 표현하기 때문이데, 이것 또한 개에 대한 성경적 의미도 된다. 이 불레셋 장수는 자기 신을 불러 다윗을 저주함으로 자기의 표현적 품성을 더 적나라하게 나열해주고 있다. 심정과 지성이 거짓을 가지고 진리를 모독하는 것이다. 더불어 이렇게 불러대고 있다. “나오너라. 네 살점을 하늘의 새와 들짐승의 밥으로 만들어 주마.” 이는 진리의 선을 찢어 버리고 육욕적 마음의 욕망과 생각으로 먹어치우겠다는 말이다. 이 거인의 함성에 대한 다윗의 응답은 고상한 단순함의 하나요, 전적으로 하느님을 신뢰함이요, 그분에게 예상되는 승리의 영광을 다 돌리는 응답의 소리이다. “네가 칼을 차고 창과 표창을 잡고 나왔다만, 나는 만군의 야훼의 이름을 믿고 나왔다. 오늘 야훼께서 너를 내 손아귀에 넣어 주셨다. 나야말로 네놈을 쳐서 목을 떨어뜨리고 네 시체와 불레셋 전군의 시체를 하늘의 새와 들짐승의 밥으로 만들어 주리라. 그리하여 이스라엘이 모시는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 천하에 알리리라. 여기 모인 모든 사람은 이제 야훼께서는 칼이나 창 따위를 써서 구원하시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리라. 야훼께서 몸소 싸우시어 네 놈들을 우리 손에 넘겨주실 것이다.” 이 응답의 소리는 싸움에 대한 확신성 만을 표현한 게 아니라 예언의 언어에 속한다. 이런 방식으로 말한 사람은 단지 그것을 밝히 알게 해준 삶 외에는 어느 누구도 없다. “살과 피는 너에게 그것을 밝혀주지 않지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해주시리라.” 이 말씀은 더 높은 견지의 예언적 말씀이다. 그 이유는 다윗은 오시는 구속자의 모형으로서 그분의 이름이 만군의 주이심을 말하기 때문이다. 이제 진행되는 줄거리 속에서 다윗의 말에 대한 의미를 보게 될 것이다.
불레셋 장수가 한걸음 한걸음 다가오자, 다윗은 재빨리 대열에서 뛰쳐나갔다. “그리고 주머니에서 돌 하나를 꺼내어 팔매질을 하여 그 불레셋 장수의 이마를 맞혔다. 돌이 이마에 박히자 그는 땅바닥에 쓰러졌다.” 돌팔매질의 결과는 대단했다. 믿지 못할 정도이겠지만 우리는 그 사실을 믿는다. 동시에 우리가 잊어서는 안 되는 것은, 힘과 기술면에서 있게 된 이와 같은 묘기는 표현적 처방이라는 측면에서 초자연적 원인과 초자연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원인들의 세계인 영계는 원인들을 밝히 알게 해주는 빛이 오는 세계이기도 하다. 말씀의 영적 의미라는 빛 속에서 볼 때, 간단한 수단으로 다윗이 쉽게 승리하는 것은 악과 오류에 대적하는 기독교인의 승리를 표현하고 있다는 것을 쉽게 알게 해준다. 그 자체 만만찮은 적, 성경을 남용했음을 알면서도 반박할 수 없을 정도의 완벽한 추론들, 이것들은 순수한 교리를 수단으로 말씀의 명백하고 단순한 진리를 적용하면 즉각 타파할 수 있다. 오류의 복합성에 대한 특효약은 진리의 단순성 외에는 어느 것도 없다. 종교의 필수가 되는 원리들은 성경 안에서 명백하게 밝혀져 있으므로 아주 단순한 마음도 그 정도는 이해할 수 있다. 만일 기독인이 다음과 같은 확신, 싸움은 주님이 해 주시는 일이라는 것, 오류는 하느님의 말씀에서 밝혀지는 신성한 진리로만 극복할 수 있다는 확신 속에 안주할 수 있다면 만사는 해결된다. 다윗의 주머니에 든 돌들 중의 어느 하나, 어느 한 개의 진리만 가지고도 “믿음으로만…”이라는 오류에 대적해 낼 수가 있다. “무엇보다 주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내 계명을 가지고 그것을 지키는 사람은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너희가 생명의 나라로 들어가려거든 계명을 지켜라. 그 이유는 모든 이는 그리스도 심판대 앞에 서서 육체를 가졌을 때 있었던 행위대로, 그것이 선했든, 악했든 그것에 따라 심판을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 진리들 중 어느 하나만 가지고도 오류의 앞머리를 관통시킬 수 있다. 이마(forehead)는 가장 깊은 마음, 가장 높은 마음과 상응된다. 그러므로 진리 중에서 으뜸 되는 원리, 또는 오류 중에서 으뜸 되는 원리를 말하게 된다. 사도 요한이 환상으로 본 짐승도 불레셋으로 표현된 것과 같은 거짓 신앙을 상징하는데, 이 신앙(종파)의 추종자들로 오른손과 이마에 표를 받게 하고 있다(계시록13:16). 오른손에 표를 받는다는 것은 거짓 신앙을 삶이라는 바깥쪽으로, 이마는 마음이라는 안쪽으로 받게 된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거인의 이마란 거짓의 내면을, 돌이 이마에 박혔다는 것은 진리가 거짓의 깊은 속을 관통해서 그 힘을 꺾었다는 말이다. 우리 역시 주님의 말씀 속에 있는 진리를 응용할 때 이런 일을 경험할 수 있다. 이 경험은 삶의 행동이나 말 속에서 뿐 아니라 심정 속의 의도나 생각 속에서까지 가능하다.
다윗의 승리는 돌이 이마에 박히는 것으로 끝내지는 게 아니다. 거인이 쓰러지자 그는 달려가서 거인의 목을 밟고 서서 그의 칼로 목을 잘랐다. 거인의 칼이 거인의 목을 스스로 자르도록 되돌려지는 방법을 주님의 말씀에서 또 한번 찾을 수 있다. “칼을 휘두르는 자는 칼로 망한다”(마태복음26:52). 이는 분명한 영적인 법칙인바 그 작용은 언제나 불변한다. 진리를 꺼꾸려트리려고 거짓이라는 칼을 휘두르는 사람은 반드시 그 칼로 멸해지고 만다. 거짓이 진리를 뒤집고자 정면 대결을 요구해 올 경우 죽음만이 놓여진다. 말씀의 글자적 의미는 생명나무로 가는 길을 지키고 있는 칼이다. 글자에 있는 진리의 가상에 기초를 둔 어떤 교리적 오류들, 그것들이 단순성과 신실함을 견지하고 있다면 영적 생명을 파괴 시킨다고 까지 볼 수는 없다. 그러나 정교한 추론이 오류를 확충하면서 진리를 무효화 시키려는데 고용될 때 영적 생명의 파괴는 야기된다. 오류는 악을 좋아하고 진리는 악을 정죄하기 때문이다. 이래서 거룩치 못한 싸움을 지속하려드는 이들은 칼을 빼어 쳐든 사악한 자들과 같은바, “제 칼에 염통이 터지고 활은 부러지고 만다”(시편37:15).
다윗의 승리는 불평등한 대결의 구경꾼이었던 양 진영의 군대에 당연한 효과를 가져다 주고 있다. “불레셋군은 저희 장수가 죽는 것을 보고 도망치기 시작하였다. 이스라엘과 유다 군대는 때를 놓치지 않고 함성을 지르며 불레셋군을 추격하여 갓을 지나 에크론 성문에까지 이르렀다. 그리하여 사하라임에서 에크론에 이르는 길에는 불레셋군의 시체가 뒹굴게 되었다.” 사하라임은 유다의 성읍인데 그 이름의 뜻은 두개의 문이다. 갓은 골리앗의 출생지로 포도주 틀이라는 뜻이다. 에크론은 불레셋 신들 중의 하나가 있는 불레셋의 우두머리가 되는 성읍으로 뿌리째 뽑음(uprooting)이라는 뜻이다. 이런 세부사항들로부터 우리가 배우는 바, 주도하는 원리가 성공하거나 실패할 때, 그것과 상통하는 원리들은 새 활력을 얻거나 포기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본문의 경우 진리와 선들이 생각과 애착속에서 승강되어 말과 행동으로 튀어나가 내면으로 침공한 악과 거짓을 축출해내면서 그것들이 점령하여 우상 신들을 모셨던 최말단 바깥 부분까지 영향력을 미치게 된다. 에크론은 유다 지파에게 할당된 성읍이었다. 비록 불레셋이 아직 그 지역을 점령하고 있다 해도 그 지역은 어떤 상태, 즉 악이 외적 인간으로부터는 아직 제거되지 않고 있는 상태를 표현한다. 그러나 그 외적 인간 속의 악까지 뿌리째 뽑혀야 하도록 운명으로 정해져 있고, 이는 지식이라는 문을 통하여, 시험이라는 포도주 틀을 수단으로 하여 가능하도록 운명되어 있다. 이 과정에서 반격하는 진리의 칼들이 악과 거짓을 무력하게 만들고야 만다.
이스라엘 군대가 당황해진 불레셋 군대를 추격하는 동안 다윗은 골리앗의 머리를 들고 예루살렘으로 향하고 있었다. 여부스족이 점거하고 있는 예루살렘에 자기의 전승물을 왜 가지고 갔는지에 대해 많은 궁금증이 있어 왔다. 훗날 다윗은 예루살렘의 정복자가 되었다. 장차 나라를 통치하게 될 왕국의 수도에 이스라엘의 강적에게서 취한 전승물을 운반해 놓아야 한다는 것은 지당한 말이 될는지 모른다. 그리고 이 거인의 무기를 다윗은 자기 천막에 보관하였다. 골리앗의 무기는 무기라는 자체로만 보면 선하고 진정한 것들을 표현한다. 그의 무기도 말씀으로부터 획득되었던 것인데 악한 용도에 충당되었을 뿐이다. 이것들이 선을 더럽혀지게 했을 때, 그것들은 반드시 본래의 상태로 되돌려져야만 한다. 그 이유는 그것들이 선을 방어하는 데만 사용되고 악의 방어에 사용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그러면 그것들은 마음 속에 간직될 수 있는바, 다윗이 자기 천막에 골리앗에게서 취해온 것들을 보관하는 것과 같다.
불레셋 장수와 대결하러 나가는 것을 본 사울은 다윗에 대해 궁금하여 사령관 아브넬을 시켜 그가 누구의 아들인지 알아보도록 명령한다. “다윗이 그 불레셋 장수를 죽이고 돌아오는데 아브넬이 그를 사울 앞으로 인도했다. 그의 손에는 불레셋 장수의 목이 들려 있었다. ‘이 젊은이는 누구의 아들인가?’ 하고 묻자 다윗이 ‘저는 베들레헴에 사는 임금님의 종인 이새의 아들입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이 대목의 성경을 읽는 사람들이 얼른 이해하기에 곤란한 것은, 다윗은 사울의 무기당번을 지냈고 사울 앞에서 하프를 연주했던 기록으로 보아 사울과 다윗은 서로 낯이 익은 사이 일텐데 어떻게 이 구절의 경우 서로가 전혀 모르는 듯 대화가 오가고 있느냐는 것일 게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제안하는 것은 이 줄거리의 한 부분이 생략되었다거나 위치가 바뀌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이다. 그렇다고 이 줄거리의 어떤 부분에 이의를 달게 하는 어떤 비평적인 것도 없다. 단지 불일치한 듯 여겨지는 것뿐이다. 더구나 거룩한 문서의 한 부분을 거절할 수 있는 충분한 이유도 있을 수 없다. 이 줄거리에도 이 대목을 계속 유지 존속하게 하는 더 높은 이유들이 있으리라 본다. 사울에게 처음 알려지는 듯한 인상을 갖도록 되어 있는 데에는 영적 원인이 있다. 다윗은 이제 새로운 사람이었다. 그는 더 이상 왕의 무기당번이 아니리 큰 대결의 영웅이다. 그는 보기만 해도 떨리게 했던 장수를 죽이고 적의 군대를 흐지부지하게 만들었다. 그런 다음 다윗 앞에서 누구도 대결이 불가능하다는 힘의 표시로서 골리앗의 머리를 손에 들고 사울 앞에 서있는 모습은 사울 자신의 가슴까지 흔들리게 하고 있다.

사무엘상 16장 해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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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상 제16장

사무엘이 다윗을 기름붓다

사무엘과 사울이 헤어진지 16년이 지나면서 한 메시지가 주님으로부터 예언자에게 내려와 말하시기를, “내가 사울을 이스라엘 왕의 자리에서 파면시켰다고 해서 너는 언제까지 이렇게 슬퍼만 하고 있을 셈이냐? 기름을 뿔에 채워 가지고 길을 떠나거라. 내가 너를 베들레헴에 사는 이새라는 사람에게로 보낸다. 그의 아들가운데서 내가 왕으로 세울 사람을 하나 보아 두었다.” 이미 우리는 사울과 다윗이 표현하는 차이점, 사울은 신성으로부터의 진리를, 다윗은 신성한 진리를 표현해준다는 것을 살펴 본 바 있다. 신성으로부터의 진리(truth Divine)는 근원 측면에서 신성이나 그릇이라는 차원에서는 유한한 속성을 지닌다. 그러나 신성한 진리는 근원 측면이나 그릇 차원의 양 측면에서 신성한 진리이다. 이에 더해서 살폈던 것은, 말씀의 가장 깊은 의미에서 볼 때, 사울의 역사는 주님께서 그분의 인성을 신성 으로부터의 진리로 만드시는 과정을 묘사한 것이고, 다윗의 역사는 주님께서 그분의 인성을 신성한 진리로 만드시는 과정을 묘사한 것이다. 이제 우리가 초점을 맞추게 되는 항목은 같은 시기에 있는 이스라엘의 두 왕이라는 독특한 여건에 대해서이다. 사울이 왕으로서의 자격을 주님께서 박탈하시고 그 대신 다윗이 기름 부어졌음에도 상당한 세월동안 사울의 통치가 있도록 허락되고 있다. 이 상황은 사울이 죽는 때까지 계속되는 역사 부분에서 주목할만 하면서도 감미롭기도 한 사건들의 발생을 야기시키고 있다. 사건 하나하나는 사울과 관련을 가지면서도 다윗의 능력이 더욱 부상하는 것을 그리고 있는데 이는 인간 본성의 진정되고 교훈이 되는 관점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사건들 각각은 거듭나는 삶의 어떤 상태를 통과하는 때의 경험들을 표현적으로 묘사하고, 주님 자신 측면에서는 그분의 인성이 영화되시는 단계와 상응을 이루고 있다. 사울과 다윗 모두 왕의 직능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사울은 실제적인 왕이고, 다윗은 잠재적인 왕일 뿐이다. 두 왕의 존재가 계속되는 동안 사울은 다윗의 적이요, 박해자였던 반면, 다윗은 사울의 친구요, 보호자였다. 사울이 죽게 되고 다윗이 실제의 왕이 되게 하는 사건의 경우에서도 다윗은 가장 슬픈 애착과 감정이 넘치는 탄식을 할 정도였다.
사울의 통치 기간에 다윗이 선택되어 기름 부어진 이유, 그렇게 되어서 이스라엘에 왕이 둘 씩 있게 된 이유는 인간 거듭남에 관한 신성한 경륜, 특별히 다윗과 연결을 갖고 있는 사울의 역사에서 거듭남의 발전 단계를 찾아봄으로 알게 된다. “인간이 거듭나는 과정 동안 그 사람은 주님에 의해 중개 역할을 하는 선들 가운데 있게 된다. 이 선은 순수한 선과 진리를 소개해 주는 역할을 담당한다. 그러나 이런 선과 진리가 소개된 후, 중개한 선은 순수한 선과 진리들로부터 분리된다. 새 사람은 옛 사람과 아주 다를 것이라는 정도는 거듭남에 관한 지식이 조금만 있어도 누구나 납득할 것이다. 그 이유는 새 사람은 영적이고 천적인 사항을 사랑하는 가운데 있기 때문이다. 새 사람은 천국에 목표를 두고 옛 사람은 세상에 목표가 있다. 이로부터 명백해지는 바, 새 사람은 옛 것과 전혀 다르다는 것이다. 인간이 옛 사람의 상태로부터 새 사람의 상태로 인도되려면 육욕을 벗고 천국의 애착으로 입혀져야 한다. 이런 과정은 무수한 수단들에 의해 결과되어지는데, 이 사항은 주님만이 아시는 사항이다. 이에 관한 것 중 일부는 주님으로부터 천사에게 알려지기도 하지만 인간이 아는 경우는 극히 소수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수단의 각각이나 모두는 말씀의 내적 의미 안에서는 자체를 명백히 드러내놓고 있다. 옛 사람이 새 사람으로 만들어지는 것, 즉 거듭나는 것은 한 순간에 되는 것이 아니라 수 년의 세월, 전 인생 기간을 걸쳐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 이유는 각자의 육적 욕망이 폐기되어 가면서 천국적 애착들이 그 사람 속에 은근히 심어져 그는 이전에 가지지 않았고, 아마 생각에도 없었을는지 모를 생명을 선물로 받게 된다. 삶의 상태가 위와 같이 크게 바뀌게 될 때 그는 중간 층의 선함, 즉 세상의 애착과 천국의 애착 양쪽에 다리를 걸치는 선함에 한 동안 머무를 필요가 있게 된다. 이 중간의 선에 당사자가 보관되지 않으면 그는 결코 천국적 선과 진리를 받아 들이지 않는다. 그러나 천국적 선과 진리를 중간의 선이 섬길 때 끝이 있게 되면서 서로는 분리된다. 이상의 원리는 인간의 상태가 유년에서 소년에로 변하는 것을 살핌으로 예증해 볼 수 있다.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은, 인간은 유아에서 소년, 청년, 성년, 그리고 노년의 상태를 거친다는 것이다. 그리고 각 세대는 서로서로 구분된다는 것도 알고 있다. 각 인간은 소년기로 접어들 때 유아기를 벗는다. 이렇게 벗어감으로 우리는 노년기까지 통과해 간다. 위 서술이 간단하지만 그것을 잘 숙고해 보면, 더 알게 되는 것은 각 세대는 그 세대 나름대로 기쁨을 가지고 있고, 이런 기쁨이 수단이 되어 그는 뒤를 잇게 되는 세대에 소개되어진다. 따라서 그 기쁨은 그를 다음 세대로 가져다 주는데 섬김 역할을 하게 된다. 그리하여 마지막 노년기에는 총명과 지혜의 기쁨에 들어가게 해준다. 이로부터 명백해지는 바, 전자는 후자가 옷 입혀 질 때 뒤에 남게 된다는 것이다. 거듭남에서 기쁨은 수단으로 사용되어 인간이 계속 이어지는 다음 상태로 들어 갈 때 전 상태는 뒤에 남기어지면서 전자와 후자는 각기 다르면서도 모두 함께 있게 된다. 그리고 그는 자연적 방법에서 인도되는 게 아니라 주님에 의해 초자연적 방법으로 이 상태에서 저 상태로 인도되어 진다. 어느 누구도 위에서 말한 중간 매체 역할을 하는 선을 수단으로 하는 것, 또는 주님 만에 의해 설비되어지는 거듭남을 수단으로 하지 않고는 어느 상태에도 도달할 수 없다.
위의 긴 발췌는 본문의 주제와 직접 관련된 서술은 아니지만 본문 역사에 있는 내적 의미를 살펴보는데 명백한 빛을 주고 있다. 자연적 애착과 영적 애착, 진리에 대한 지각, 보다 낮은 것이 보다 높은 것에 반대하려는 상황이 마음 안에서 동시에 존재함은 말씀의 여러 부분에서 주제를 달리하면서 취급되어지고 있다. 예를 들면, 이사악의 두 아들, 야곱과 에서로, 야곱의 두 아내 레아와 라헬로, 요셉의 두 아들 에브라임과 므낫세로 표현되고 있고, 본문 시대에는 이스라엘의 두 왕 사울과 다윗으로 표현되고 있다. 이스라엘 왕국에서 함께 있는 두 왕이 표현하는 것은, 거듭나는 마음에서 영적 수준의 마음이 열리어 진리가 영입되지만 영적 마음이 자연적 마음보다 우세하지 못하여 자연적 마음에서 우러나는 기쁨이나 가상적인 진리와 분리를 이루지 못하는 상황을 표현해 주고 있다. 다윗에 대한 사울의 행동은 영적 인간에 대한 자연적 인간의 행동을 묘사하고 있다. 처음에 사울은 다윗을 매우 좋아했는데, 그 이유는 다윗이 사울의 적들을 쳐 부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기름 부어진 왕임을 알았을 때 다윗을 적으로 간주했다. 자연적 수준과 영적 수준이 같은 의견에서 행동하는 동안은 서로 동의하고 있지만 자연적 수준의 우위성이 영적 수준에 의해 위협되는 듯 여겨지면 전자는 후자와 싸우게 된다. 사울이 다윗을 미워하고 박해하는 모습은 자연적 인간이 영적 인간의 통치에 대한 강한 반감을 표현한다. 그 이유는 사울이 다윗을 증오하고 그를 죽이려 계획한 것들 모두의 발생 원인이 다윗이 기름 부어졌다는 것과 그가 왕이 되도록 작정되었다는 것을 알게 된데 있기 때문이다.
사무엘은 베들레헴에 사는 이새에게 가서 주님께서 사울 대신에 왕으로 점지해둔 그의 아들 중 하나를 기름 붓도록 명령받았다. 불순종한 왕 때문에 심히 슬퍼하던 사무엘이 지금은 사울에 대한 두려움을 표시하고 있다. “사울이 알면 저를 죽일텐데 어떻게 갑니까?” 라는 그의 물음에 “암송아지 한 마리를 끌고 가 야훼께 제사를 드리러 왔다”고 말하도록 지시 받는다. 글자적 의미에서만 보면 이 제사는 어떤 의심을 받지 않기 위해 꾸며진 제사인 듯 여겨진다. 그럼에도 영적 의미에서 살필 때, 암송아지와 제사가 표현하는 것은 사무엘이라는 원리의 보존을 위해 필요한 장치에 해당됨을 알 수 있다. 암송아지(heifer)는 자연적 마음 안에 있는 선행과 순진의 선을 의미한다. 암송아지로 드리는 제사는 순진의 선을 가지고 주님과 결합함을 표현한다. 그러면 내적 진리가 보존된다. 이는 또한 영적 선과 그 선으로부터 나오는 진리가 주님과 결합하는 수단이기도 하다. 이것이 목욕재계하고 제사에 초청되는 이새와 그의 아들들로 본문에서 표현되고 있다. 이새의 아들 하나가 사무엘에게 소개되었다. 맏아들로부터 시작해서 아래로 이어져 소개되었다. 그러나 가장 어린 아들이 올 때까지 모두 거절되어 첫째가 꼴찌가 되고 꼴찌가 첫째가 되었다. 사무엘은 이새의 큰아들의 용모를 보고 그에게 기름 부으려 했다. 그러나 신성한 말씀이 내려와 그의 결정을 점검시켜 주었다. “용모나 신장을 보지는 말라. 그는 이미 내 눈밖에 났다. 하느님은 사람들처럼 보지 않는다. 사람들은 겉모양을 보지만 나 야훼는 속마음을 들여다 본다.” 그래서 이새의 아들 모두가 차례로 사무엘 앞에 섰었지만 그들 중에서 주님이 뽑으신 아들이 없다고 사무엘은 말할 수 있었다. 이밖에 아들이 또 있느냐는 사무엘의 질문에 이새는 막내가 하나 있기 한데 양을 치고 있다고 대답했다. “사무엘이 이새에게 ‘사람을 불러 데려오시오.. 그가 올 때까지 우리는 식탁에 앉을 수가 없소’ 하고 일렀다. 이새가 사람을 보내어 데려 온 그는 볼이 붉고 눈이 반짝이는 잘 생긴 아이였다. 야훼께서 말씀을 내리셨다. ‘바로 이 아이다. 어서 이 아이에게 기름을 부어라.’” 사무엘 앞을 지나 간 이새의 일곱 아들들은 거절되었다. 그 이유는 그들이 비록 거룩한 진리들을 표현하고 있다 해도 그들은 이스라엘의 두 번째 왕으로 모형이 되는 메시아의 인격에 있게 되는 모든 충만과 거룩함인 신성한 진리 자체를 표현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이 거절의 근거는 사무엘이 맏아들의 신장이 큰 이유로 엘리압을 기름 부으려 했을 때 그에게 내린 주님의 말씀에서 표현되어지고 있다. “사람들은 겉모양을 본다” 이는 눈으로 헤아린다는 말이고 이는 지성으로 판단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주님은 심정을 보신다” 이는 의지에 의거 판단하신다는 뜻이다. 이것이 다윗을 선택하는 경우에 사용된 주님의 방법이시다. 다윗은 볼이 붉었다(ruddy). 붉음(red or ruddiness)은 사랑을 나타내는 색깔이다. 그리고 그는 지적이었는데, 눈이 반짝이는(fair of eyes, beautiful of countenance) 아이라는 표현이 이를 뜻하고 있다. 위 두 요소가 바깥쪽 선함과 한데 묶여있었는바, 잘 생긴(good to look to, goodly) 아이라는 표현이 이를 뜻한다. 다윗의 바깥쪽에서 보여준 이 품질은 주님에 있는 내적 품질을 표현하고 있다. 물론 주님의 속성을 다윗이 모두 표현했다고 말 할 수는 없다. 이에 더해서 다윗이 표현한 속성은 그의 이름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그 뜻은 가장 사랑함(beloved)이다. 진리는 선함이 가장 사랑하는 대상이다. 그러나 진리 안에 선함이 들어있을 때, 즉 진리가 선함을 그의 생명이요 본질로 여길 때만이 가장 사랑하는 대상이다. 이것이 다윗이 표현하는 진리요 주님이 있으셨던 진리이다. 그분은 말씀이셨고 그분 안에 생명이 있었다. 그분은 무한하고 영원한 진리이셨고, 그 안에는 무한하고 영원한 사랑이 있었다. 이와 같은 것이 말씀이 육이 되신 것, 메시아, 기름 부은 자이시다. 사울 편에서 이미 살핀 바 있는 것은 사울과 다윗의 차이점이다. 사울은 잃어버린 아버지의 나귀를 찾던 중에 사무엘의 인도를 받아 왕으로 기름 부어졌고, 다윗은 양떼를 지키던 중 거룩한 기름부음을 받도록 데려와졌다. 사울은 기브아에서 태어나 이름도 없는 어떤 성에서 기름 부어졌고, 다윗은 베들레헴에서 태어나 그 곳에서 기름 부어졌다. 베들레헴은 주님의 탄생지 일 뿐 아니라 야곱과 라헬의 둘째아들 베냐민의 출생지요 베냐민은 이스라엘 지파의 한 우두머리가 되어있다. 사울을 기름 부을 때 사용된 것은 단순한 기름병이었다. 다윗의 경우는 뿔에 기름을 채워 부어졌다. 뿔에 기름을 가득 채웠다는 것은 진리가 사랑으로 가득 차 있는 상태를 표현하고, 동시에 뿔은 힘을 상징하는 고로 사랑으로 가득한 진리는 능력이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모든 힘은 선함으로부터 파생된 진리 안에 존재한다. 사울이 기름 부어진 것은 사무엘과 사울 두 사람만 있을 때 실시되었다. 다윗이 기름 부어짐은 그를 형제들 한 가운데 세우고 그들이 보는 가운데 실시되었다. 형제(brethren, 종교상의 형제)란 훌륭한 선행이타애(good charity)을, 한가운데서(in the midst)란 가장 깊은 측면(in the inmost)이라는 뜻이다. 하늘나라에서 위대한 자가 누구겠느냐고 묻는 제자들의 질문에 주님께서는 어린 아이 하나를 그들 가운데 세우고 이 어린 아이 같이 되는 자가 하늘나라에서 가장 큰 자가 된다고 말하신 적이 있었다. 이는 주님께서 위대함이라는 말의 중심 되는 품질이 순진(innocence)임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고자 함에서 였다. 주님께서는 자신을 낮추어 보여주심으로 제자들 모두는 서로 같은 형제들임을 상기시켜 주셨다. 그리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만이 그분의 어머니요, 자매요, 형제들임을 훈육하실 때는 신중하셨다(마태18:1-5, 12:46-50).
사무엘이 다윗의 머리에 하느님을 사랑함이라는 성스러운 상징인 거룩한 기름을 부었을 때, 주님의 영이 그 날부터 내려왔다. 율법 시대에 사람에게 주어진 주님의 영이나 복음 시대 이후의 성령은 거듭나는 영에게는 필수 사항까지는 아니다. 이 영들이 심정에서 좋은 품위를 언제나 생산해 주는 것은 아니고 단지 성스러운 직능이 수여되는 이들에게 접합되는 초자연적 영향이다. 비록 왕이나 성직자들에게 오는 참 영(the Spirit), 고위직에 임명될 때 받게 되는 영이 거듭나는 영이 아니다 해도 하느님에게 왕과 성직자로 만들어지는 이들, 그리고 영원히 그분의 통치를 받을 이들에 의해 주님의 영이 내향적으로 영접될 경우 이 영은 거듭나는 영까지 표현하게 된다.
주님의 영이 다윗에게 들어오자 주님의 영은 사울을 떠나고 주님으로부터 온 악령이 사울을 괴롭혔다. 사울이 주님에게서 이탈된 상태에서 그에게 와지는 영적 조건에 대해 우리는 본문에서 매우 간단한 묘사를 보게 된다. 선에 속한 영은 정의의 길을 고수하는 이들과 더불어서는 계속 머무른다. 따라서 선에 속한 영이 그들을 떠날 경우 악에 속한 영이 그들 안으로 들어온다. 사울 안으로 들어온 악령은 주님으로부터 왔다고 본문에서 말하고 있다. 이는 하느님은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모든 것의 창조자이시다는 것을 눈에 비치는 대로 표현한 것이다. 어떤 측면에서 이 말은 틀리지 않는다. 하느님께 근원을 가지지 않은 것은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느님은 뭔가를 창조하시되 악이 되게 창조하신 게 아니라 선이 되게 창조하셨었다. 존재하는 모든 악은 어떤 선이 뒤집혀진 것이다. 악령도 선하게 창조되었으나, 그들 스스로 악을 만든 것이다. 그런데 사울에게 온 악령은 하느님께로부터 라고 말해지고 있다. 이것은 가상적인 진리(apparent truth)이다. 그럼에도 어떤 의미에서 이것은 진정이기도 하다. 주님은 지옥의 열쇠를 가지고 계시고 지옥도 그분의 통제 하에 있다. 그분은 악령을 보내시지 않는다. 그러나 인간의 자유가 훈련(실습)되기 위해 필요하다면 그들이 오는 것을 허용하신다. 그럼으로 악령도 어떤 유용한 목적에 이바지되도록 만들어 질 수도 있다. 현재 상태에서 인간은 악령과의 연결 없이 존재할 수 없었고 악령의 개입 없이 거듭날 수 없었다. 악은 보여지고 느껴지지 않으면 제거되어 질 수 없다. 또한 악이 흥분을 일으키지 않으면 보여지거나 느껴질 수도 없다. 또한 악령의 작용 없이는 어떤 악도 흥분되어질 수 없다. 이래서 현존하는 악령은 선한 이들의 사용에 충당된다. 그렇다고 악이 현존하는 것 자체가 어떤 유익을 창출하는 것은 절대 아니다. 악이 악령과 저희들 스스로 연결을 유인해 낼 때 주님의 섭리가 그렇게 작동 못하도록 발휘되어 인간 의지의 자유의 힘에 비해 인간 의지를 과잉 지배하려 드는 악령의 힘이 초과치 않도록 조절해 주신다. 신성한 허용의 법칙 역시 사랑과 지혜의 법칙이요, 이 법칙은 이러하다. 주님께서는 더 큰 악을 방지하시기 위해 보다 작은 악을 허용하신다. 그러므로 인간을 송두리째 소유하여 구속을 넘어 노예가 되게 하려는 악을 예방하시기 위해 덜 유해한 속성을 지닌 악령을 허용하신다. 마치 우리가 예방접종을 받는 것과도 유사할는지 모른다.
주님이 인간과 더불어 악령이 현존하도록 허용하시는 한편, 그 인간과 함께 하도록 선한 영과 천사들을 설비해 주시어 악한 천사가 되는 것이 방해되도록 조장하신다. 가능한 한 악을 미워하고 선을 사랑하게 해서 인간 속의 악이 선으로 돌려지게 해주려고 애쓰신다. 이와 같은 영이나 천사들은 수금을 타는 다윗과 같다. 선한 애정이 일으켜지고 힘을 얻어 악한 애정을 억누르어 약화시킨다. 이 과정이 계속되면 악한 애착에 불을 붙이고 흥분시키던 악령을 몰아낸다.
다윗이 사울에 처음 소개되었을 때 덕을 보게 한 것은 그의 음악적 재능, 그의 오른손이 수금을 노련하게 잘 타는 솜씨 때문이었다. 사울의 신하들이 수금을 잘 타는 사람을 구해서 악령이 덮칠 때마다 수금을 타면 마음이 개운해 질 것이라는 간청에 사울도 동의했다. 신하 중 하나가 이새의 아들을 추천하기를, 그는 노련한 연주자요, 씩씩하고 날쌘 용사이고, 말도 잘하고 풍채도 좋은데다 야훼께서 함께 해 주는 사람이라고 설명을 붙였다. “그리하여 사울은 이새에게 전갈을 보내어 양을 치고 있는 그의 아들 다윗을 보내라고 하였다.” 이새는 왕에게 바칠 선물을 들려 아들을 보냈던 바, “다윗은 사울을 찾아와 그를 시중들게 되었는데 사울은 다윗을 몹시 사랑하여 그를 자기의 무기당번으로 삼았다. 그리고 이새에게 전갈을 보냈다. ‘너의 아들이 마음에 들었다. 다윗으로 하여금 내 앞에서 시중들게 허락하여라.’ 하느님께서 보내신 악령이 사울에게 내릴 때마다. 다윗은 수금을 뜯었다. 그러면 악령이 떠나고 사울은 회복되어 숨을 돌릴 수 있었다.” 사울과 다윗의 첫 연결이 있는 이 역사에는 로맨스 같은 어떤 것이 있다. 그러나 예기치 않은 모임에 심상치 않은 사건이 발발하듯 두 사람의 결합에는 어렴풋한 형상이 드리워 있다. 그러나 이는 신성한 섭리가 영원한 목적을 수행해내는데 모든 것이 동원되어 참가하고 동원된 각 사람은 선을 위해 일해지도록 불리고 있을 뿐이다. 사울의 신하는 매개체 역할을 하는 진리와 선이다. 이를 수단으로 해서 인간 안에 있는 자연적인 것과 영적인 것은 연결을 맺고 한 군데로 모아지면서 보다 높은 것이 보다 낮은 것에 있는 비질서를 교정해준다. 다윗이 이새로부터 사울에게 선물로 가져온 빵과 포도주, 그리고 새끼 양은 선과 진리, 그리고 순진이다. 이를 수단으로 영적 인간은 자연적 인간의 비위를 맞춘다. 그리하여 사울의 마음이 흡족해 하면서 다윗은 사울 앞에 서게 되었고 다윗을 몹시 사랑하게 되어 무기당번으로 임명했다. 이는 영적 인간이 올바른 생각과 따뜻한 애정을 대상으로 삼는다는 것을 인식한 자연적 인간의 상태를 묘사하고 있다. 그래서 자연적 인간은 자기 적과 싸우는데 사용하는 무기인 교리적 진리를 영적 인간에게 맡겨둔다. 그러나 그의 악한 기분 상태 속에서는 자연적 인간은 사울처럼 그의 친구에게 무기를 사용할 수도 있다. 그러나 다윗의 중요한 직책, 사울을 가장 크게 받드는 직책인 음악 재능은 그에게서 악령을 몰아낼 수 있게 했다. 이 악령이 음악의 영향을 받아 몰아 낼 수 있었다는 것은 억측이나 요행을 거는 주제가 되어왔다. 이스라엘 교회라는 처방에 담긴 본성이 이를 설명해준다 모든 결과들은 상응을 수단으로 생산되어져 있다. 신약성서에서 악령이 인간을 육체나 마음 모두를 점거한 기록이나 본문의 사울의 경우나 그 본성이 비슷하다는 것을 의심할 이유는 하나도 없다. 그리고 주님이 악령에 사로잡힌 자들로부터 악령을 쫓아내 주셨던 사항이나 다윗이 악령을 몰아낸 것이나 크게 다를 바 없다. 다윗이 사울의 영을 개운해지게 한 수단은 위에서 말한바 같이 상응으로부터이다. 사울의 경우와 주님의 경우 달랐던 것은, 주님은 연속적인 악령의 공격과 그로부터 계속적인 해방을 이루어 가셨다는 점에서이다. 그럼에도 주님께서 우리에게 훈육하시는 바 중 하나는, 악령이 사람 밖으로 쫓겨 났다가도 되돌아 올 때는 자기보다 더 악한 다른 일곱 영과 더불어 들어온다는 것이다. 위에 대한 예증으로 사울의 행동을 생각해보면 된다. 시간이 흐르면서 악령은 더욱더 그에게 영향력을 휘둘렀다. 악령에 점유 당하고 그것에서 벗어나 숨을 돌리는 해방이 번갈아 있게 되는 것, 마치 죄짓고 회개하고 또 죄짓고 또 회개하는 상습적인 행위는 심정을 딱딱하게 하여 양심이 더욱더 무뎌지게 해서 결국 벌겋게 달구어진 쇳덩어리같이 마비되고 마는 지경까지 이르른다. 선이 있던 곳에 악이 들어오는 교차는 아예 선이 없던 곳에 악이 들어오는 경우보다 더 독성이 강하다. 인간이 점점 더 큰 불법을 끌어당기면 더 맹렬한 고통이 따르다가 결국 사울같이 패배와 자기 파멸로 막을 내리고야 만다.
이스라엘 역사의 이 부분이 표현하는 의미를 생각하게 되면, 악은 실지 위촉받아 진 게 아니고 악을 범하려는 시험일 뿐이고, 주님의 영이 내적 인간 안으로 물러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악령은 바깥 사람 또는 자연적 마음의 육욕에 들어가 흥분시키는 것일 뿐임을 알게된다. 사울을 점유한 악마에 의해 부추겨진 행동들은 자연적 인간이 기울게 되는 악으로의 경향성을 잘 표현하고 있다. 이와 같이 기독교 제자들도 악령에 의해 시험되어진다. 그러나 다윗의 기능, 그리고 그 기능이 사울의 불건전한 마음을 돌보는 모습에서 우리는 위에서 말한 시험을 피하거나 극복하는 수단을 볼 수 있다. 우리의 마음이 악에 속한 생각, 선에 속하지 않는 것들로 번민할 때, 슬픔과 걱정이 우리의 영을 무겁게 짓누를 때, 이런 상황은 때로 자연적인 경우도 있고, 영적인 경우도 있겠지만 어느 쪽에서 발생하더라도 영적 애정으로부터 내려오는 음악, 이를 통해 천국은 천적사람과 평화의 멜로디를 쏟아 부어서 음침한 분위기를 흩트려 주고 번민하던 영을 고요하게 해주면서 평온과 기쁨에로 마음을 회복되게 해준다. 지상 쪽을 좋아하는 자연적 마음, 땅의 목적이나 영향에 쉽게 작동되고 마는 자연적 마음은 바깥쪽 세계에 속한 것들로 형상 되어지는 상태의 변화에 쉽게 복종하고 만다. 자연적 마음도 자연계와 같이 마음의 낮과 밤, 춥고 더운 것, 여름과 겨울, 빛과 그림자, 폭풍과 고요함 등등을 다 가지고 있다. 어둡고 번민하는 상태에 있을 경우 자연적 마음은 악령의 노리개가 되어 가는데 악령은 자기와 동질 요소를 이 마음 안에서 발견한다. 우리가 악령의 영향 하에 있을 때, 즉 악령이 마음을 흔들어 댄다던가, 선량한 상대방을 위협하려드는 행위가 폭발되려 할 때, 그 치료약은 언제나 우리의 내적 인간 안에 현존하는 천사의 부드러운 영향이 우리에게 미치도록 자신을 놔두는 것이다. 그러면 그 영향이 바깥쪽 인간에게 내려가 더 나은 애착과생각이 더 담대함을 얻어 이로부터 악령의 영향을 수그러 들게 하여 긴장을 완화시켜 준다. 사실 이 영향력의 근원은 사랑과 신앙의 하나 됨에서 발생하는 하모니로 조율되는 영혼 자체 안에 존재한다. 이 하모니란 천국의 분위기 속에서 숨을 쉬는 것이고 거듭나는 마음의 가장 깊은 속에 기회를 두고 있다. 주님은 우리에게 그분이 설비 해두신 우리를 섬겨주는 영들 외에, 그분의 영도 주신다. 성령, 진리의 영을 모든 육체 위에 쏟아 부어 주시고 있다. 이는 마치 하늘로부터 내리 비치는 햇빛이나 소나기와 같다. 이 영은 선한 자든 악한 자든, 의로운 자든, 불의한 자이든 똑같이 오고 있다.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그 빛과 영향을 잘 받을 수 있게 심정과 지성을 활짝 여는 일뿐이다. 아마 우리는 이를 거절할는지 모른다. 아마 그것에 반대하도록 심정은 닫을는지 모른다. 그리고 악령이 하는 확실한 규율에 자신을 노출시키고야 말는지 모른다. 하느님은 우리를 강요하시지 않는다. 그 이유는 강제라는 단어 자체부터 그분이 우리에게 부여하신 자유와 일치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분은 우리가 자유롭게 그분의 영을 받기를 바라신다. 그리하여 노예의 영인 악령을 던져 버리도록 간절히 원하고 있으시다. 그 이유는 악마에 속한 것은 무엇이든 의심, 불만, 자만, 미움, 원한 등등 뿐이기 때문이다. 이런 것들을 내던져야 만이 건전한 마음이 우리 안에 정착되는 게 가능하여 우리 마음은 신뢰와 사랑으로 가득한 심정을 건설할 수 있다.
위와 같은 악령의 소유권은 한 번에 모두 박탈되지 않는다. 그 영은 떠났다가도 거듭거듭 되돌아온다. 주님에 관해 이런 기록이 있다. 광야에서 악마가 그분을 시험한 것이 모두 끝났을 때 “다음 기회를 노리면서 예수를 떠나갔다”(누가4:13). 이 점에서 제자가 스승보다 나을리 만무하다. 그러면 악령이 되돌아 올 때 우리가 해야만 하는 것은 무엇일까? 아마 다윗이 했던 것으로부터 배울 수 있으리라 본다. “하느님께서 보내신 악령이 사울에게 내릴 때마다 다윗은 수금을 뜯었다. 그러면 악령이 떠나고 사울은 회복되어 숨을 돌릴 수 있었다.” 곤란의 때, 더욱이 공포의 순간, 이것들은 시험을 뜻하는 바, 우리는 주님께 재빨리 돌아가야 한다. 그러면 그분은 우리 영혼에 평화를 말해 주실 것이다. “그분은 다윗의 뿌리요 후손이고 빛나는 샛별이시다.” 혼란과 어둠의 시기에 그분을 찾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 심정에서 부상하는 샛별인 주님을 발견할 것이다. 천적인 영들은 은총에 이바지하는 영들이어서 잠잠하게 해주는 사랑을 심정 속에 불어넣어 주는바, 우리는 그 사랑의 그릇이 되고, 거듭나려고 노력하는 종교적 형제들에게까지 사랑을 전달하는 매체가 되게 해준다. 이리하여 천적 영들은 우리의 모든 상태, 슬플 때나 즐거울 때나 우리와 언제나 같은 공감대를 형성한다. 이러므로 해서 회개하는 죄인에게 천국의 기쁨이 있게 되고, 모든 인간 영혼의 새 출생에서 새벽 별들은 함께 노래하고 하느님의 자녀들은 기뻐 소리치게 된다.
마음을 번민케하는 곤경들은 그 세부사항 하나하나 마다 각기 특별한 원리에 원인을 두고 있다. 따라서 그에 대한 치료를 위해서는 각기 특별한 원리에 반대되는 법칙이 채택되어야만 한다. 사울의 공포로 표현된 시험은 “악령”들로부터 발생된 것 중의 하나, 거짓된 것을 사랑함에서였다. 이 악령을 몰아낸 수단은 진리를 사랑함이었다. 진리의 애정을 다윗의 수금이 상징하고 있다. 말씀가운데서 언급되고 있는 여러 악기 중에서 관악기는 선에 대한 애정을, 현악기는 진리에 대한 애정을 의미한다. 수금(harp)은 진리에 대한 애정을 상징한 악기 중 가장 두드러져 지상 뿐만 아니라 천국에서도 이와 같이 사용되고 있다. 영적 천국의 천사들에 의해 주님이 예배될 때, 또는 진리에 대한 영적 애정으로 예배될 때, 이 예배는 그분을 수금으로 찬양하는 것 같이 영계에서 들려진다. 이 예배는 주님과 천국을 더 가깝게 연결해주기 때문에 악령을 몰아내 주어 어둠의 왕국의 기운을 걷어낸다. 말씀 자체는 수금이고 말씀 속의 진리들은 수금의 줄이어서 수금을 탐으로 신성은 황홀한 소리를 생산하여 마음 속에 미워하는 힘을 발휘하게 조장하는 악령을 몰아 낸다. 인간 마음 속의 애착가운데서 응답하는 느낌을 발견할 때는 언제든지 신성이 이렇게 하고 계신 것이다. 말씀 속의 진리들은 그 진리가 정신적인 지각이나 애정의 대상이 될 때만이 능력을 가진다. 이 때만이 진리들은 시험 속의 우리를 받쳐주고 우리가 진리를 진실로 믿고 사랑할 때 악에서 우리를 해방시켜 준다.
거듭나는 삶을 통과하여가는 모든 사람에게는 사울과 다윗이라는 진보의 단계를 거친다. 한편으로는 악령에 시달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악령이 기숙하지 않도록 진리와 선함이 하나를 이루는 하모니로 공존한다. 우리 인간의 바깥쪽 측면, 외적 인간은 쉽게 부패되거나 악한 영향에 너무나 쉽게 노출된다. 그러나 신성과 천국의 영향이 내적 인간 속에 있어 마음 아래로까지 내려오는 상태에 있게 될 때, 악과 성공적으로 대화 될 수 있고 결국 악을 쫓아낼 수도 있다. 기독 생활의 진보 속에서 이런 작용들은 각자의 경험이 되어 알게 될 것이다. 우리는 악령을 늘 재회하고야 말 것이다. 악령의 영향을 느낄 때, 우리를 구원해 주실 수 있는 그분께 재빨리 돌아서라. 온 우주를 조화되게 조율하시는 그분께서 인간 마음 안에 죄를 생산하게 하는 불일치를 제거해주시면서 창조의 다른 부분, 근원적으로 기쁨과 상통하는 부분과 하모니를 이루도록 섭리해주신다.

사무엘상 15장 해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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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상 제15장

사울이 아말렉을 쳐부수러 보내지다

신약성서가 지니는 두 번째 가는 중요한 축복이라면 그것은 구약성서를 올바르게 해석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 그리고 기독교라는 처방에 살아있는 특전의 두 번째 가는 것이라면 기독교 출발 이전에 있던 교회의 진정한 본성을 알 수 있게 해준다는 것이다. 그런데 유대교 처방과 기독교 처방의 차이점, 그리고 각 처방에 속해 있게 된 성경을 엄밀하게 구별하지 않음으로 해서 기독교는 유대인이 행했던 실제의 일을 채택하기도 하고 그 영을 흡수하기도 했다. 이스라엘 족들이 하느님의 선택된 백성이요, 그분의 총애를 받은 백성이라고 가정해버리면, 그 민족들이 했던 것은 전부는 아니다 해도 어느 정도까지는 하나님의 뜻과 일치한다고 생각되어 신성한 권위 아래 있다고 간주해버리면서 그들의 행동들은 하느님의 허가로 하느님의 뜻을 모방한 듯 여기고 만다. 어떤 이들은 가상하기를, 유대인의 성경은 유대교의 처방이 끝남과 더불어 그것도 중단되어야 하는바, 기독교를 위해서는 유대인이 말하는 성경은 어떤 권위도 없고 가치도 없다고 까지 잘라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지금 우리를 기쁘게 해주는 빛으로 비쳐본다면, 구, 신약은 큰 차이가 있다는 것, 그런데도 두 성경은 완전한 하모니를 이루고 있다는 것을 알게 해준다. 유대인의 성경과 기독교의 성경은 바깥쪽 형태에서는 폭넓게 다르나, 안쪽인 영적 의미에서는 완전하게 하나를 이루고 있다. 두 처방은 같은 게 없지만 그들은 서로 유사성을 지니고 있다. 유대교는 기독교와 대칭 되는 형으로 되어있다. 그래서 유대인에게 자연적인 것들은 기독교에서는 영적인 것이 되고 있다. 유대인에게 에집트는 그들의 세계였고, 사막을 횡단한 뒤의 가나안은 그들의 천국이었다. 번성하는 것이 그들의 행복이요, 장수하는 것은 그들에게 불멸에 해당되었다. 그들의 적이란 자기들의 일시적일 뿐인 세상적 성취를 가로막고 서는 이들이요, 그들의 전쟁이나 무기는 육욕인 것, 세상적인 것뿐이었다. 이런 그들 역사를 영적으로 통역해놓는다면, 그들 역사는 기독인의 체험을 언어로 묘사해놓은 것이다. 이런 방법으로 우리는 그들의 역사를 읽어야 한다. 그러면 우리는 그 역사 속에서 신성하게 훈육되는 어떤 것, 영적인 가르침을 보게 되리라 확신한다. 가나안의 일곱 나라를 멸절시키는 전쟁은 깊은 도덕적 원인을 가지고 있었다. 그 이유는 한 나라가 통째로 부패될 때 지상에서 제거되어야 마땅한 그 민족이 보존되고 복지를 되찾으려면 그 도덕적 결함의 제거는 꼭 필요하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이 교전한 나라들이 우리의 새로운 본성을 구성하는 선함과 진리의 원리에 상반되는 악하고 거짓된 원리를 표현한다고 생각하게 되면 유대인이 치른 전쟁에 어떤 영적인 교훈이 우리를 위해 담겨있게 된다. 유대인의 적대 국가들은 감각, 특별한 어떤 악이나 거짓원리를 표현하고 있다. 암몬족이나 불레셋 족이 표현하는 것들은 이미 앞 장에서 살핀바 있다. 이제 또 다른 악의 성격, 아주 유한한 것 중의 하나를 이제 살피고자 한다.
아말렉은 가나안 땅 경계선 주변에 거주하는 흉폭한 민족들이다. 이스라엘은 홍해를 건넌 뒤 그들로부터 처음 공격받았다. 이 때 그들은 이스라엘을 정면에서 공격하지 않고 이스라엘이 매우 목말라 허덕거리고 지쳐있는 기회를 틈타 공격을 감행했다. 그럼에도 우리가 기억해보아야 할 것은, 이스라엘이 심히 범죄 하였을 때 그들은 자기들이 위반한 악에 상응하는 속성을 지닌 국가들에 의해 처벌되어졌다는 것이다. 갈증으로 고통 받을 때 그들은 자기들과 함께 하시는 신성을 부정해버리는 정도까지 불평했다. 불평해대는 이스라엘과 그에 앙갚음하듯 공격하는 아말렉 사이에는 표현적 유사함이 있다. 선견자는 이스라엘의 세 왕을 설명하는 가운데 특별히 아말렉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해주고 있다. “어떤 종류의 인격이 아말렉이 표현하는 내면의 악에 근거를 두는지 살펴보는 것이 보다 쉬울 것이라고 본다. 내면의 악(interior evil)은 인간 안에 내향으로 감추어 놓인 것, 그 사람의 의지 안에 축적되어 있는 악, 그로부터 생각 안에도 있게 되는 악, 언어나 행동, 용모 같은 바깥쪽에서 전혀 추적되지 않는 악이다. 이와 같은 악 가운데 있는 사람은 갖가지 방법을 동원하는데, 특히 정직이나 정의, 이웃 같은 사랑의 가상(껍질)속에 그 악을 감추어 숨겨놓는다. 그러면서 계속 그는 악행만을 생각하고 가능하면 타인을 수단으로 그 악을 행하여 자신으로부터 악을 행하지 않았던 냥 한다. 그들은 악 자체를 변장시켜놓아 악처럼 보이지 않게 하고 있다. 이들 삶의 큰 기쁨은 어떤 음모를 꾸미는데 있고 계략도 은밀하게 감행한다. 이것을 우리는 내면의 악이라 부른다. 이 악 가운데 있는 이들은 마귀(genii)라 불리고, 저 세상에서 이것들은 영(spirit)이라 불리는 외면의 악과는 분리되어있다. 이 악귀(evil genii)는 사람 뒤쪽 즉 등쪽에 그들의 지옥을 가지고 있고 그 곳에는 다양한 동굴이 있다. 그러나 악령(evil spirit)은 인간 앞쪽 또는 옆쪽에 그들의 지옥을 가지고 있다. 큰 사람(grand man)측면에서 이 마귀들은 소뇌(cerebellum)의 영역에 소속되고 있고 또한 무의식 부분에 신경과 섬유질을 내보내는 척추 부분에도 있다. 더 주목해 보아야 하는 것은, 이 악에서 비롯되는 거짓은 악령들에게서 비롯되는 거짓과 같지 않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그 자체가 악이기 때문이다. 이 악 가운데 있는 이들은 진리들을 공격하지 않고 신앙의 선들을 공격한다. 그이유가 그들은 타락한 애착들을 수단으로 행동하여 선한 생각까지 뒤집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악들은 거의 인지할 수 없는 방법 안에 숨어있다. 이런 특성을 지녔으므로 그들의 지옥은 악령과 완전히 분리되어 거의 어떤 고통도 있지 않는다. 이렇게 되어있는 이유는 영적 교회의 사람들로부터 격리될 수 있게 하기 위해서이다. 만일 이 악이 그들 지옥에서 흘러나온다면 영적 교회의 사람들은 지독하게 썩어지고 마는데 그 이유는 이 악들이 영적 교회인의 양심에 비밀리 작용하기 때문이고, 타락한 애착들을 흥분시킴으로 양심을 뒤엎기 때문이다. 이 지옥적인 악귀는 인간을 공개적으로는 결코 공격 않는다. 더구나 인간이 그것에 저항할 경우도 절대 공격 않는다. 그러나 인간이 굴복하던가 양보 할 것 같은 지점에 다다른 것 같을 때 모습을 드러내어 그 인간을 완전히 무너지게 한다. 아말렉이 공격하는 모습이 이런 악귀의 공격 수법을 표현하고 있다. 민수기 14장 45절을 보면, 이스라엘 자손이 주님께 등을 돌리고 가나안 국가들에게 겁을 먹었을 때, ‘그 산에서 살던 아말렉 사람들과 가나안 사람들이 달려 내려와 호르마까지 쫓아오며 그들을 무찔렀다.’ 위 구절로부터서도 아말렉이 표현하는 이들의 성격은 명백해지리라고 보고, 아말렉에 내린 주님의 심판에서 그들과 항구적으로 싸워야한다고 왜 그러셨는지, 그들은 천국 아래서부터, 일찌감치 기억 속에서까지 삭제되어야 한다고 하셨는지를 납득하리라 본다.” 이상의 모습은 이스라엘이 르비딤에 도착하였을 때 섭리하시는 하느님, 함께 하시는 하느님을 부정하는 시험에 빠졌을 때 이들을 공격한 아말렉의 모습이다. 이와 같은 시험은 이 세상과 인간 만사에 하느님의 통치가 있음을 부정할 때만 공개적으로 드러난다. 이 악은 불신앙에 뿌리를 두고 있다. 너나나나 할 것 없이 우리들 속에 이 뿌리를 가지고 있다. 우리가 천상천하의 통치자 되시는 분이 하느님이심을 부정한다는 것을 생각만 해도 몸서리쳐진다고 말할지라도, 우리는 신성한 통치인 하느님의 섭리에 진정 의존하지 않고 있음을 보여주기 위해 느끼고 행동하는 경우가 많다. 이 방식이 기독인 이라고 고백하는 이들 사이에 이 악이 거점을 확보하는 형체이다. 이 형체는 하느님을 드러내놓고 부정하는 것보다 더 내향적이고 더 사기성이 강한 형체이다. 이것이 바로 아말렉이 표현한 내면의 악에 바탕을 둔 거짓 원리인 것이다. 르비딤에서 이스라엘 자손이 빠진 시험의 본성 역시 이러한데 뿌리를 두고 있다. 이 때 아말렉의 공격은 여호수아에 의해 격퇴되었다. 그런 다음 신성한 판단은 이렇게 지시하고 있다. 그리고 내가, 아무도 아말렉을 기억하는 사람이 없도록 하늘 아래에서 전멸시키겠다…야훼께서 대대로 아말렉과 싸워 주시리라”(출애굽기 17:14-16). 사울은 지금 이 구절을 실행하도록 위촉되고 있다. 사무엘은 먼저 그에게 상기시키기를 야훼께서 기름 부은 자라는 것, 그러므로 주님의 소리에 순종해야 한다고 했다. 그 다음 이렇게 이어진다. “만군의 야훼께서 하시는 말씀이오. ‘아말렉 사람들이 이스라엘에게 한 짓 즉, 에집트에서 올라오는 이스라엘을 공격한 그 일 때문에 나는 그들에게 벌을 내리기로 하였다. 그러니 너는 당장에 가서 아말렉을 치고 그 재산을 사정보지 말고 모조리 없애라. 남자와 여자, 아이와 젖먹이, 소 떼와 양 떼, 낙타와 나귀 할 것 없이 모조리 죽여야 한다’.” 사실 사울에게는 아말렉을 위와 같이 해치워야할 특별한 건수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위의 사건은 하느님의 기억 속에서 사백여 년 간 남아있던 죄악상들이다. 하느님이 기억하셨다는 말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그분은 과거와 미래 모두가 현재 일 뿐이므로 뭔가를 마음에 되불러 올 이유가 하나도 없다. 따라서 이 표현은 인간의 상태와 관련시켜 신성을 이해해야 한다. 주님이 기억하신다고 말하실 때의 경우란, 그분의 진리를 우리 기억에서 새삼 떠오르게 하실 때 사용된다. 지상에 계셨을 때 주님은 성령을 약속하셨다. 이 성령은 그분께서 제자들에게 말한 것은 무엇이든지 그들 기억에 모두 가져다주게 된다. 그러나 이 약속은 과거의 말들을 재 수집하게 해주시는 것뿐 아니라 이전의 상태를 재생산 하는 것까지 의미한다. 영적으로 기억함이란, 사실을 기억하는 게 아니라 원리를 기억하는 것이다. 그 이유는 내적 삶에 받아들여졌던 것만이 내적 기억 속에 새겨져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영적 으로 기억함이란 내향에 있는 것을 바깥쪽 삶에도 산출하려는 노력과 더불어 이전에 획득된 원리의 재생산밖에 더 다르게 있을 수 없다. 이와 같이 행동과 노력이 주님께서 과거 사막에서 아말렉이 했던 짓을 기억하신다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아말렉은 거의 반복적으로 이스라엘을 공격해왔고 격퇴되었다. 그러나 이제 명령은 그들을 참혹하게 파괴하라는 것이다. 이 파괴가 지금 시도되어지는 이유는 공격할 수 있는 도구가 마련되었기 때문이다. 왕은 선함에서 파생된 진리를 표현하는바, 이는 악에서 파생된 거짓에 정반대 된다. 완벽하게 극을 이루는 원리, 즉 극과 극이 대치하지 아니하면 상대쪽을 완벽하게 제압하지 못한다. 악과 거짓이 선함과 진리에 정반대 된다는 것을 기억나게 함으로 전투의 원인이 되는데 이는 반대되는 악과 거짓이 시험에 의해 흥분 될 때 발생된다. 그리하여 전투는 상대 쪽을 처절하게 파괴하도록 거행된다. 사울이 이러한 하느님의 위탁된 업무를 충실히 집행 못한 것은 사실이다. 그 이유는 신성으로부터의 진리(truth Divine)은 대과업에 합당할만한 자격을 못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신성한 의지를 표현한 하느님의 명령은 부분적이 되었긴 해도 일부 성취되었다. 이 명령을 미숙하게 처리한 탓에 사울은 자기 왕위를 잇지 못하게 되었다 할지라도 그가 성취해야 했던 것은 다윗의 통치와 권력에 의해 더 쉽게 더 확실하게 아말렉의 완전한 정복을 이루게 된다. 이제 사울의 행동사항들에 시선을 모아 보자.
사울이 사무엘을 통해 주님의 메시지를 받고 그는 총동원령을 내려 델라임에서 점호해보니 보병이 이십만 이었고 유다 측에서도 일만이 가담했다. 진리와 선함에 속한 원리들을 다 모아 신성한 질서의 법칙에 의거 정렬해지는 것이 바로 이스라엘과 유다 사람들이요, 델라임에서 수를 세는 모습이다. 지역 이름 델라임은 성경에서 두 번 언급될 뿐인데, 오늘 본문과 이사야 40장 11절에서이다. 이 구절에 연결되어 그 단어가 지닌 의미는 이 본문의 영적 의미에 대해 좋은 착상을 주고 있다. 단어 자체는 아주 어린 양, 새끼 양(young lamb)이라는 뜻이다. 이 단어는 주님의 강림에 관한 아름다운 예언과 연결되어 언급되고 있다. “너, 시온아. 높은 산에 올라 기쁜 소식을 전하여라. 두려워 말고 소리를 질러라. 유대의 모든 도시에 알려라. 너희의 하느님께서 저기 오신다. 주 야훼께서 저기 권능을 떨치시며 오신다. 팔을 휘둘러 정복하시고 승리하는 보람으로 찾은 백성을 데리고 오신다. 목자처럼 당신의 양떼에게 풀을 뜯기시며, 새끼 양(lamb)들을 두 팔로 안아 가슴에 품으시고 젖먹이 딸린 어미 양을 곱게 몰고 오신다.”(40:9-11) 여호와께서 권능을 가지고 오시고 그분의 인성인 팔을 휘둘러 통치하신다. 그분은 원수들 가운데서도 왕권을 행사하실 정도로 강력한 사람으로 오시지만 (시편110:2) 한편 그분은 목자처럼 오시어 새끼 양을 두 팔로 안아 가슴에 품어주시기도 한다. 이와 같은 모습은 영적 싸움에 종사하고 사랑의 영에 감화 받기도 한다. 이 사람들은 델라임에 자기 힘을 모아 계량해야 한다. 델라임은 유다의 땅인바, 그 지역은 지혜의 순진을 상징하고 있다.
사울이 자기 군인들과 함께 아말렉 성이 있는 골짜기에 이르러 먼저 이들과 섞여 사는 켄족들에게 전갈을 보내어 그들에게서 떨어져 나와 이스라엘의 옛 적을 칠 때 불상사를 입지 않도록 했다. 이렇게 켄족이 다치지 않도록 의도한 이유는 과거 이스라엘이 에집트에서 나올 때 이스라엘에게 베푼 친절 때문이었다. 켄족은 미디안 족과 같은 것으로 이해될 수 있는데 모세의 장인 이드로가 미디안의 제사장 이기도 했다(판관기 1:16). 그리고 그는 광야에서 모세를 만나러 왔었다(출애굽기 18:1). 이스라엘이 사막에 진입한 후 아말렉은 그들을 공격한 첫 민족이 된 반면, 켄족은 이스라엘 편을 든 첫 민족이기도 하다. 그리고 우리는 여기에서 아말렉과의 전투에 즉각 뒤따라 켄족의 언급을 발견하게 된다. 그러나 사울의 친절한 연락으로 켄족은 아말렉의 파멸에서 유보되어졌다. 위와 비슷하게 두 민족이 붙어있는 모습이 판관 기드온 시대에서도 언급되고 있다. “미디안 사람과 아말렉 사람과 모든 동방의 백성들이 메뚜기 떼처럼 거기 평지를 덮고 있었다”(7:12). 이렇게 많은 군대들이 개처럼 물을 핥아먹은(튕겨 먹은, lapped) 삼 백명의 군대에 의해 무찔러졌다는 것은, 악은 병치(apposition)상황에서 뿐 아니라 그 반대(opposition)상황에서도 극복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모습이다. 아말렉이란 이름 자체는 개처럼 핥다(lick up)라는 뜻이다. 켄족을 미디안 족과 비슷하게 간주해본다면, 선한 자연적 기질을 지녔으나 그 자체로서는 진리에 관심이 없는 이들을 표현한다. 그러면 왜 이들이 날카롭고 뒤집혀진 이해성을 가진 아말렉 사이에서 발견되고 있을까? 그 이유가 단순히 선한 것은 교묘한 추론에 쉽게 빨려들고, 계획적인 설득에 쉽게 녹아들고 마는 약함이 있기 때문이다. 단순한(멍청한) 선함은 선보다는 악에 더 쉽사리 끌려갈 수 있는 성향이다. 그 이유는 악은 비둘기의 순진(해가 없음)은 없고 오로지 뱀의 신중함 만을 지녔기 때문이다. 그래서 악은 그 사용함에 있어 나쁜 짓을 하는 것이 예사로 되어 있어 “설마 인간이 그럴 리가,” 라고 말하는 단순한 선함의 기대를 쉽게 유혹해내지만, 선은 재촉하여 뭔가를 하도록 독촉하려 들기보다는 뭔가를 확신시키려는 쪽에서 더 강하게 작용할 뿐이다. 위 두 민족이 거듭나고 있는 마음 안에서 표현하는 원리까지 생각해보자. 마음 속에 위 두 원리들이 서로 모여있는 모든 가능한 경우에서도 주님께서는 이 두 원리가 뒤섞이지 않게 설비해 놓으시어 장차 싸움이 있을 경우 선이 악과 더불어 멸해지는 일이 없게 배려하신다. 그러므로 마음은 그 둘을 식별할 수 있게 훈육된다. 켄족이 떨어져 나오자 사울은 아말렉을 공략해서 “하윌라에서 시작하여 에집트 동쪽에 있는 수르까지 따라가며 쳐죽였다.” 수르 광야는 과거 하갈이 자기 여주인의 얼굴을 피해 달아날 때 고생한 장소이다. 지금 아말렉이 거주하는 이 구역은 창세기 25장 18절에서 언급되고 있다. 이 절을 읽어보면 이 구역은 하갈의 아들 이스마엘과 그의 자손이 소유했었던 곳 임을 알게 된다. “이스마엘 사람들은 하윌라에서 수르에 이르는 지방에 퍼져 살았다. 수르는 에집트 동쪽 아시리아로 가는 도중에 있다.” 이 지역은 과학과 추론 사이에 놓이는 표현적 특성을 말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과학, 지식, 추론은 등급별 시리즈를 형성한다. 과학은 기억 속에, 지식은 생활 속에, 추론은 이해성 속에 각기 존재한다. 과학과 추론 사이에 놓인 것이 지식이다. 달리 말하면, 기억과 이해성 사이에 놓인 것이 생각이다. 하윌라와 수르는 에집트와 아시리아와 비슷한 의미를 가지고 있으나 차이점은 에집트와 아시리아는 넓은 측면인 반면 하윌라와 수르는 좁은 측면 즉, 세부 측면에 한정된다. 아말렉을 하윌라에서 수르까지 쫒아가 쳐부순다는 것은 내면의 악에 바탕을 둔 거짓 위에 진정한 진리의 판결이 집행될 때, 과학이 기초를 둔 기억에서부터 추론이 자리를 두고 있는 이해성에까지 이르러 판결은 집행된다는 말이다.
넓은 측면에서 볼 때 아말렉이 쳐 부셔지긴 했지만 완전한 하느님의 목적은 덜 성취된 채 남아있다. “사울이 거느리는 이스라엘 군은 아각 뿐 아니라 양과 소 중에서도 좋은 놈, 기름진 짐승과 새끼 양들과 그밖에 모든 탐스러운 것들을 없애버리기가 아까워 그대로 살려두고 쓸모 없고 하찮은 것들만 없애버렸다.” 싹 쓸어 없애야 하는데 뭔가를 남겨둘 때, 사울이 불순종이라는 죄를 짓게 될 것은 생각해 볼 여지도 없다. 그럼에도 그 죄는 그를 심각하게 벌할 만큼 확대되어 부각되고 있지 않은 듯 보여지고 있다. 이럴 경우 죄는 행동의 본성에만 반드시 존재하는 게 아니라 명령의 위반에 있다고 우리가 인정한다면 그 죄는 행동이 무엇이든 간에 똑같게 된다. 그러나 이 원리는 건전한 것이라고 생각되지 않는다. 이 원리는 말씀의 글자에 국한된 것만을 받쳐 줄 수는 있다. 예를 들면 아담이 금지된 과일을 먹은 것을 생각해보면, 사실 그에게는 불순종이라는 것 외에 악은 없는 듯 나타난다. 그러나 이런 종류의 모든 예들은 글자가 표현하는 것 보다 더 깊은 의미가 있다. 신성한 정의는 너무나 순수해서 해를 주지도 않는 본성 속에 있지도 않은 것을 죄 있는 행동으로 만들지 못한다. 만일 사울의 죄가 영원한 결과를 수반하는 영적 행동을 표현하지 않고 있다면 그의 죄는 그렇게 심각하게 견책되고 처벌되지도 않았을 것이다. 아각을 살려둔 채 잡아 놓고, 기름진 가축 떼를 살려둔 것, 이런 것이 그 소유자의 도덕적 부패나 죄와 관계되지 않은 이상 탐욕에서 진행되지 않으면 그 자체 악에 속한 성격은 아무 것도 없다. 따라서 파괴하라는 명령 역시 아예 없었을는지 모른다. 그러나 사울에게 주님이 내리신 행동 강령은 미래의 모든 세대에 있게 될 교회 소속인들에 대한 영적 교훈을 가르치고 또 그들로 하여금 영적 진리를 탐사할 수 있게 하시려는 목적에서 있어진 명령이다. 몰살시키라고 내린 명령에 포함된 진리, 가르치시고자 의도된 교훈들을 살펴보기로 하자. 우선 우리는 사울의 불순종에서 따른 결과를 곰곰이 생각해 보아야 한다. “이 일이 있은 후 야훼의 말씀이 사울에게 내렸다. ‘나는 사울을 왕으로 삼은 것을 후회한다. 그가 나에게 등을 돌렸고 내가 시키는 대로 하지 않았다.’” 주님이 후회하신다는 것, 그분이 사울을 왕으로 세우신 것을 후회하신다는 말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될까? 인간이 후회한다면 그것은 견해가 바뀐다던가 목적이 변하는 것, 그것이 이해성에 속하든 의지에 속하든 어느 쪽이 변한다는 것을 함축하는 말이다. 이해나 의지가 바뀌는 것은 하느님께 대한 후회(회개)로 성경에 두루 있다. 이 변화들은 불완전한 존재, 죄 있는 존재에게만 있어지는 후회일 뿐 하느님에게는 하등 해당사항이 없는 항목이다. 그런데 사무엘은 이 사항을 명백해지도록 주님께서는 사울로부터 왕국을 찢어내시어 동족 가운데서 그대보다 훌륭한 사람을 주신다는 것을 선포하고 있다. “이스라엘을 비추시는 이는 빈말을 하시거나 변심하시는 분이 아니오.. 그는 사람처럼 변덕을 부리는 분이 아니시오..” 시작에서 끝을 이미 보시는 그분은 결코 실수를 만드시지 않는다. 그러므로 후회할 건수가 전혀 없으신 분이시다. 하느님께서는 후회할 수도 없는 분이라도 해도 성경에서 후회의 탓을 그분께 돌리는 듯 기록되어 있는 구절에도 우리를 가르치는 의미는 가득 차 있다. 그분을 위협해대는 악에 대해 주님이 후회하신다고 말해 질 경우, 이 후회는 자비를 의미한다. 그러나 그분이 행하신 것들, 예를 들면 인간을 만드신 것, 사울을 왕으로 세우신 일들을 후회하신다고 말해질 경우, 거기에는 자비 외에도 어떤 의미를 더 포함하고 있다. 가장 깊은 측면, 천적 의미에서 말씀 전체는 육을 입으신 하느님으로서의 주님을 취급하고 있다. 이 사항은 앞에서 일부 살핀바 있듯이, 사울의 역사는 그분이 입으신 인성이 신성한 진리(Divine truth)로 만드시기 전에 있던 신성으로부터의 진리(truth Divine)으로서의 주님을 표현하고 있다. 여호와께서는 그분이 인성을 입으셨으되 타락한 본성에 든 인간 공통적인 약한 부분까지 입으셨는데 대해 후회할 수 없으셨다. 그럼에도 인간 후회와 아주 비슷한 어떤 것이 일어나는 항목들이 그분의 어린 시절 상태나 경험 안에 있었다. 인간으로서의 주님은 여느 사람들처럼 죄의 상태로부터 의로운 상태로 건너가지 않았고 따라서 회개(후회)가 있으신 적도 결코 없었다. 그러나 회개와 거의 닮은 인간 상태나 그 상태의 변화를 통과하셨다. 참으로 주님은 그분이 영화하시는 과정에서 통상적 인간이 거듭나는 과정의 모든 단계들을 거치셨다. 인간은 자연적, 영적 양면에서 상태의 변화를 거친다. 그분도 유아, 어린 시절, 젊은이 시절, 성인시절 이라는 상태들을 통과하셨다. 더욱이 그분은 삶의 자연적 상태로부터 영적 상태로, 영적 상태로부터 천적 상태에 이르는 더 큰 과정들을 통과하셨다. 게다가 주님은 하느님과 인간 모두로부터 사랑을 받으면서 날로 지혜와 총명을 더 하셨다. 그분은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똑같이 자라셨다. 그래서 신성한 자연적 존재로부터 신성한 영적 존재와 천적 존재가 되셨다. 통상적으로 인간은 자연적, 영적 삶의 낮은 상태에서 더 높은 상태로 건너가면서 자기가 털고 일어선 그 자리(수준)에서 자기의 불완전했던 것을 보게 된다. 그래서 인간은 시험이나 시련 속에 있는 동안 그가 체험하는 것은 고작 그 시련이나 시험의 피상적 본성만을 알 수 있을 뿐이다. 거듭나는 삶의 초기 상태에서 있게 되는 시험은 악의 더 낮은 깊이까지 도달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더 낮은 깊음은 초기 상태에 있는 당사자에게는 느껴지거나 눈치 채이지 않고 더욱이 흥분시킨 악의 진정한 속성을 이해한다는 것은 더욱 불가능하다. 한마디로 그 사람에게 있어서의 악은 일반적인 것일 뿐 세부적인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따라서 그에게는 자신이 생각한 것에 반대되는 것이 일반적 사항에 해당될는지 모른다. 사울은 아말렉 사람들을 다 죽였지만 왕 아각은 살려져 있었고 좋게 보이는 것도 그대로 보존했었다. 이런 것들과 상응되는 상태를 주님은 통과하시면서 그것에 상응하는 경험을 가지셨다. 이런 사항들이 그분의 모형을 그려내는 이들의 행동에 나타나 있는 것이다. 특별히 사울은 이런 모형들 중 더 부각된 모형이라 할 수 있다. 사울과 그의 군인들의 죄들은 그분의 시험을 표현하고 있다. 여느 사람들과 달리 그분은 악의 권세나 악과의 싸움에서 결코 실패하지 않으셨다. 그러나 그분의 초기 삶에 있던 시험이 그분을 공격하는 악의 가장 깊음에까지 접근되셨던 것은 아니다. 주님의 영화하심과 인간의 거듭남은 서로 닮음 꼴을 형성한다는 내용을 취급한 선견자의 저서에서 위 사항을 잘 알게 해 준다. “모든 사람은 지식으로 자기가 획득한 선과 진리에 의해 우선적으로 영적 전투에서 버텨간다. 그리고 그 지식으로부터 그는 악과 거짓들을 판단해 간다. 모든 사람들, 그가 영적 전투에 처음 임하게 될 때 자기를 버티게 해준 선과 진리들이 자기 것, 즉 그것들이 제 잘난데서 비롯되었다고 상상한다. 따라서 그는 자기가 저항해낸 힘이 자기에게 근원 되었다고 생각한다. 인간이 거듭나기 전, 선과 진리는 자신으로부터 있는 게 아니라 모든 선함과 진리는 주님으로부터임을 알고 인정하고 믿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자신의 힘으로는 어떤 악이나 거짓에 저항할 수 없다는 것은 어느 누구도 모른다. 악령이 악과 거짓을 흥분시키고 주입한다는 것, 더구나 악령을 수단으로 자신이 지옥과 교통하고 있다는 것, 지옥은 전력을 다해 자신을 누른다는 것, 마치 파도에 부딪치는 모든 것에 파도가 밀어붙이는 힘과도 같은 악에 저항할 수 있는 힘이 자신에게는 지독하게도 없다는 것을 아무도 모르고 있다. 어찌됐든 거듭나기 이전일 경우 그 사람은 자신의 능력으로 싸우고 있다고 상상할 수밖에 없고 또 그렇게 상상하도록 허용되지만 그 후에 차츰 그는 계발되어진다. 선함과 진리가 자신으로부터 발생되었다고 생각하고, 저항하는 힘 역시 자신의 힘이라고 여기면서 선과 진리를 수단으로 악과 거짓에 맞서는 상태에 있을 경우, 비록 그에게서 선과 진리가 나타나 보인다고 해도 진정한 선과 진리는 아니다. 그 이유는 그의 이기심이 그들 안에 있고 그는 승리의 공적을 자신에게 돌리고, 주님만이 싸워 정복해 주실 수 있는 악과 거짓에 대한 싸움을 자기가 똑똑해서 그런 줄로 떠벌린다. 이런 경우에 있는 진리는 시험에 의해 거듭나는 이들에게만 알 수 있는 것들이다. 주님의 아주 어린 시절 그분이 가장 비통한 악과 거짓의 싸움에 소개되었을 때 그분도 위와 같은 상상을 마음에 품을 수밖에 더 다른 도리가 없으셨다. 뿐만 아니라 그분의 인간성은 계속적인 전투에 소개되고 그분의 신성은 계속 승리해 가서 서로 하나되는 것이 신성한 질서이기 때문에 선과 진리를 수단으로 그분 역시 외적 인간에 소속되어 있는 악이나 거짓과 싸워 가셨던 것이다. 이런 선과 진리들이 모두 신성은 아닌 까닭에 가상적인 선과 진리들이라고 불린다. 그분의 신성 측면이 정복 할 수 있도록 인성 측면에 소개되었던 것이다. 한마디로, 그분의 첫 전투에서 가지고 싸우셨던 선과 진리들은 어머니 쪽에서 받은 유전적인 것의 얼마로 얼룩져 있는 한 그것들은 신성은 아니다. 그러나 점차로 악과 거짓이 정복되어감과 동시에 그것들은 완전해져 신성을 만들었던 것이다. 가상의 선과 진리들을 신성 같이 착각되는 선과 진리들일 뿐 신성한 선과 진리는 아니다. 다시 말해 그것들은 신성으로부터 존재할 뿐 그 자체 스스로 신성은 아니라는 말이다. 이것들은 천사나 인간의 마음 안에 존재하는 것과 같은 형태로서 유한한 자질 안에 받아들여짐으로 유한한 그대로 이다. 이와 같은 것이 주님의 초기 싸움에서 어둠에 맞서졌을 때 가졌던 선과 진리들이고 이를 신성한 진리로 만드시는 준비물로 삼으셨는 바, 이를 수단으로 그분은 그분의 인성을 신성으로부터의 진리로 만드셨다. 이 유한한 것, 즉 눈에 보이게는 선과 진리 같은 것은 어머니 쪽에서 얼마 정도가 유전되어 얼룩져 있었는바, 이것이 사울로 표현되어 있고 우리는 그의 바둑판 같은 역사를 통해 믿기 어려울 정도인 현실 자체를 봄으로서 주님의 내적 삶과 경험 중 초기 부분의 역사를 짐작할 수 있게된다. 주님의 초기 시절 어둠의 권세와의 싸움은 그분의 인간적 어머니로부터 상속받은 불완전을 벗고 그분의 신성한 아버지로부터 상속받은 무한한 완전을 입으셨을 때와 비교한다면 보다 덜 완전하다고 할 수 있다. 이제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본문에서 왜 사울이 아말렉과의 싸움에서 백성은 죽였는데 왕은 살려주었는지, 왜 하찮은 것은 다 없애면서 좋은 것은 아껴두었는지에 대한 이유를 가늠하리라 본다. 악과 거짓의 넓은 측면의 원리들, 백성들은 파괴되었지만, 왕 같은 통치하는 원리는 아직 극복되지 못하고 있다. 시험과 승리가 결국 악의 뿌리 까지 뽑는 마지막 까지 달성하는 것은 이상형일 뿐 아직은 그 뿌리에 접근도 못하고 있다. 내적 인간에 있는 것, 본문의 하찮은 것들, 눈에 보이는 악과 거짓은 무엇이든지 다 없애버렸지만 선하고 진정한 듯 눈에 보이는 것은 보존되었던 것이다. 이제 더 살펴볼 것은, 사울을 왕으로 세우신 데 대해 후회하신 것, 한 걸음 더 나아가 이를 사울이 표현한 그분에 관련하여 생각해 보는 것이다. 후회는 어느 경우라 해도 신성한 마음을 바꾼다는 것을 의미치 않는다. 그러나 이는 모든 경우에서 주님의 신성과 인간본성 사이에 하모니가 있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본문에서도 주님의 신성과 인성 사이에 하모니가 있기를 원하심을 표현하는 것이다. 절대적인 것과 가상적인 것 사이에 있는 선과 진리는 비록 주님 안에 있다해도 그것은 하느님과 인간이었을 뿐 아직 하느님-인간(God-man)은 아니었다. 사울을 왕으로 세운데 후회하시는 신성한 존재란, 연약한 인간성을 입지 않았던 것이 더 나을 뻔 했지 않았을까 라던가, 약한 인간성 속의 불완전함이 악의 권세에 맞서 그분의 초기 싸움부터 명백히 드러나야만 하신데 대한 후회 같은 것이 아니라 인간 속의 불완전함은 신성한 완전함과 도저히 조화되지 않는다는 것, 따라서 그것은 반드시 제거되어야만 한다는 것, 달리 말해 본다면, 신성으로부터의 진리(truth Divine)는 영원할 수 없고 단지 주님의 인성 앞에서 일시적으로 통치하는 원리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그럼에도 어머니 쪽의 인성에 있는 이기심은 통상적 인간 존재 같이 어린 예수 안에서, 즉 그분 속의 유전적 악들이 적극적으로 일하기 시작할 때 그 자체는 명백해지기 시작했다. 이는 정신 발달의 과정 중에 흥분시켜주는 매체에 의해 깨어날 때까지 아담의 모든 아이들의 가슴 안에서 휴면 상태에 있다. 그런고로 해서 주님이 사울을 선택하시고 후회하시는 데에는 불일치 같은 게 우리에게 비쳐질 수밖에 없다. 사울이 왕이 되는 초기에는 그에게 없었는 듯 보인 악한 자질들이 드러나기 전 까지 에서는 그를 왕으로 세우신데 대해 주님이 후회하신 것은 아니었다. 이를 풀어 말하면, 유전적 악이 주님의 어머니 쪽 인성 안에서 그 자체로 전개될 때까지 신성과 인간 사이의 대비되는 사항들은 신성한 존재가 후회하심으로 표현되는 실제가 지각되는 것, 그 자체는 드러내어지지 않았었다.
“주님의 말씀이 사무엘에게 내렸다. ‘나는 사울을 왕으로 삼은 것을 후회한다. 그가 나에게 등을 돌렸고 내가 시키는 대로 하지 않았다.’ 사무엘은 애가 타서 밤새도록 야훼께 부르짖었다.” 주님의 초기 상태와 경험에 관해 선견자의 저서에서 살펴보면 우리가 그분을 상상해보는데 큰 도움이 된다. 그분은 선과 진리를 수단으로 악과 거짓에 대항하는 전투를 수행하셨고, 이 수행의 결과로 나오는 능력으로 그분의 도구인 선과 진리들은 그분 자신의 것이 되어 외적 인간 속에 있었다. 이제 본문은 내적 인간 쪽으로 향하면서 외적 인간의 조건을 감지하게 해주고 있다. 그 결과는 내적 비통함, 그런고로 신성 자체와 더욱 가까운 하나를 이루어야 한다는 더욱 강한 바람이 오고 있다. 복음서에서 우리가 읽는바, 주님께서는 산에 오르시어 하느님께 밤새 기도하셨다. 사람의 아들을 수단으로 경험되는 정신적 고난의 어두운 상태가 본문에서 사무엘이 애가 타서 밤새 울부짖는 것으로 비쳐지고 있다. 이와 상응되는 주님의 말씀 “마음은 간절하나 몸이 말을 듣지 않는구나.” 이 내적 담화는 더 간절한 기도로 더 강화되어 외적인 것에도 가져다 놓게 되었다. 그러므로 사무엘이 사울을 만나러 일찍 일어났다는 것은 새로운 상태라는 새벽에 내적 인간에 전달된 진리는 바깥쪽에도 역시 전달되고 있다. 그래서 “누가 그에게 이런 말을 전해주었다. ‘사울 왕은 오는 길에 가르멜에다 자기의 승전비를 세워놓고 그 곳을 떠나 길갈로 내려갔읍니다.’” 본문의 가르멜은 그 이름 자체에서 파생되는 열매 풍성함이나 아름다움을 말해주는 이름은 아니다, 산으로서의 가르멜 이라기 보다는 성읍으로서의 가르멜로 참작하여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따라서 그 뜻은 이해성에 있는 원리는 의지에 있는 원리와 같은 것을 가진다는 것이 되고 자연히 내적인 선과 진리에 관한 교리를 뜻한다. 사울이 승전비를 가르멜에다 세운 것은 아말렉과의 싸움에 관한 것이었다. 이와 비슷한 모습이 사무엘하 18장 18절에도 있다. “그런데 압살롬은 살아 있을 때 자기 이름을 이어 갈 아들이 없다고 해서 왕의 계곡에 돌기둥을 세운 일이 있었다. 그는 그 돌기둥을 자기 이름을 따서 불렀는데 그것을 오늘날까지도 압살롬의 비석이라 부른다.” 사울의 상태나 그가 표현하는 것은 승리로 자기를 추켜세우는 어떤 것에 관한 생각을 지지하는 모습이다. 사울은 가르멜을 떠나 길갈로 내려갔다. 사무엘은 아말렉의 수모를 “벗기기”위해 그의 뒤를 따라가고 있다.
위의 성경 줄거리를 가장 깊은 의미, 즉 인성 가운데 계신 주님에 관련하여 생각해보자. 그러면 우리 자신에 관련되는 내적 의미, 그분의 신성화 하심의 형상인 거듭남이라는 주제를 좀 더 실감 있게 알게 되고, 그분이 연약한 인간 본성, 타락된 인간 본성을 입으신 목적은 인간이 고통 받고 겪게 되는 것을 거쳐가심으로 그분이 이룩하시는 신성으로 만들어 가심에 우리도 참가되도록 하시기 위함이었음을 더 확실히 알게 된다. 말씀 안에 담긴 가장 깊은 의미를 관조 하게 되면 더 심오한 가르침과 영향을 받을 것은 두 말할 여지가 없다. 육을 입으신 상태에서 주님이 행하신 위대하고 자비로운 일들 하나하나는 우리 자신을 위한 원형이요. 근원임이 틀림없다. 그러나 우리가 그 경지에 다가가거나 그 안에 머물기에는 너무 멀고 원대하다. 인간 거듭남의 거울 안에 비쳐지는 모습 같이 라도 주님의 신성화 하심을 관조해간다면 그 정도 만에서도 우리에겐 유익하고 충분해지리라고 본다.
“사무엘이 사울을 찾아 만나자 사울은 이렇게 말했다. ‘야훼께 복을 받으십시요. 저는 야훼께서 시킨신대로 다 하였읍니다.’ 하며 인사를 하였다. 사무엘이 ‘양이 우는 소리가 들리는데 어찌된 일이오? 또 소 우는 소리도 들리는데 어찌된 일이오?’ 하고 물었다. 사울이 ‘군인들이 아말렉에서 빼앗아 온 것입니다. 양떼, 소떼 중에서도 좋은 놈을 살려두었다가 선생께서 모시는 야훼 하느님께 잡아 바치려고 끌어 온 것입니다. 그밖의 것은 모조리 없애 버렸읍니다.” 사울의 즉각적인 응답에서 보여지듯 자기가 주님께 전적으로 순종치 않았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있다. 그럼에도 그는 자기가 주님의 명령을 잘 이해했다는 것이 저절로 보증되도록 사무엘을 만나자 야훼께 복을 받으시라는 말과 자기 행동의 결과를 결합시키고 있다. 사무엘이 묻는 말, 양이나 소가 우는 소리는 어찌된 것이오 라는 질문에 자기에게는 책임이 없도록 교묘하게 대답하고 있는바, 빼앗아 온 것은 군인들의 짓이고 모조리 없애라는 명령의 말에는 자기를 포함시키고 있다. 자연적 수준의 인간이 댓가를 얻어내느라 열심이듯, 사울은 책임을 피하려고 분주하고 있다. 그가 선에 대한 공적이 자기에게 있다고 주장하는 만큼 악에 대해서는 책임지기를 거절하고 있다. 이런 모습에도 영적 진리가 있어 우리를 가르친다. 거듭나는 삶의 초기 수준에서 자연적 마음은 공적과 책임을 알면서도 알지 못하고 있다. 다시 말해 피상적으로 알 뿐 실제적으로는 모른다는 말이다. 종교적 가르침 중 가장 쉽고 가장 먼저 있게 되는 것 중 하나는 하느님은 만물의 창조자 이신 바 자신의 선함을 자기 공로로 돌릴 수 없다는 것, 우리가 자유로운 가운데 악을 행할 경우 그 죄에 대해 변명할 여지가 없다는 것, 그럼에도 자신의 미덕은 자랑하려 들고 악덕에 부끄러워 할 줄 모른다는 것 등등이다. 이 주제에는 가장 중요하고 가장 실용적인 교회의 교리가 있다. 만일 모든 선을 천국으로부터, 모든 악은 지옥으로부터 온다고 우리가 믿고 있다면, 우리는 선을 자기 것 삼지도 않아야 하고 악에 대해 죄의식도 없어야 한다. 선이 자기 것이라고 간주함으로 해서 우리는 자신 속의 선이 자기 것이라고 주장하게 되고, 악이 자기 것이라고 간주함으로 해서 우리는 악을 정당화시키려들게 된다. 그러므로 해서 그 속에서 발생되는 죄과는 거절된다. 이런 상태 속에 있는 자연적 마음을 사울이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영적 마음을 통해 주님의 빛이 들어 올 때 이런 상태는 드러나져 이런 상태가 어떠한 것들인지 자연적 마음 자체가 밝혀진다. 사울이 사무엘에게 변명을 늘어놓자, 사무엘은 지난 밤 야훼께서 내리신 말씀을 전한다. “그대는 본래 자신을 하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했었지만 야훼께서 그대를 기름 부어 이스라엘 위에 왕으로 세우시고 이스라엘 지파의 우두머리로 삼으셨소…” 거듭나는 삶의 초기 과정에 있는 마음은 의지가 이해성의 방향 아래 조절되게 하려드는 것이다. 이 의미가 위의 구절 “사울은 본래 하찮은 사람” 이라는 것에 담겨있다. 그런 다음 사무엘은 주님의 명령을 받은 사울임을 그에게 상기시켜주고 그가 얼마나 불완전하게 임무를 마쳤는지 꼬집고 있었다. 그런데도 사울은 여전히 주님의 명령에 잘 순종해서 주님이 시킨 대로 다 수행했다고 뻐기면서 아말렉왕 아각만 사로잡고 나머지는 다 파괴했다고 우긴다. 단지 군인들이 길갈에서 주님께 바치기 위해 양떼 소떼 중 좋은 놈만 남겼다고 핑계 대고 있었다. 이에 대해 사무엘은 우리에게 기억되는 다음의 말을 해주고 있다. “야훼께서, 당신의 말씀을 따르는 것보다 번제나 친교제 바치는 것을 더 기뻐하실 것 같소? 순종하는 것이 제사드리는 것보다 낫고, 그분의 말씀을 명심하는 것이 염소의 기름보다 낫소.” 예배는 우리가 하나님께 빚지고 있는 의무 중의 하나이다. 그러나 그 의무는 목적에 대한 수단일 뿐이다. 하느님께 드리는 모든 예배의 목적은 우리가 하느님의 뜻을 더욱 잘 수행하기 위해 힘을 더 얻으려는데 있다. 하느님은 자비를 요구하시지 제물이 아니다. 그리고 번제를 바치는 것보다 더 요구하시는 것은 그분에 대한 지식이다. 정규 축제에 관한 율법은 정신적인 율법을 위하여 주어져 있는 것이다. 더욱이 구약 시대의 것보다 신약 시대에 주어진 예배는 정신적 법에 관한 의미를 수행하는데 더 도움을 주고 있다. 예배 속에서 주님을 섬기는 것은 유일한 일임은 틀림없지만 순종이 제사보다, 그분께 경청하는 것이 염소의 기름보다 더 나음을 우리는 잊지 않아야 한다.
만일 순수하고 거룩한 상태의 예배가 순수하고 거룩한 삶을 보조해 주는 두 번째 것이라고 한다면, 하느님의 명령을 위반한 것에 기초한 예배에 대해서는 뭐라고 말해야 될까? 때로 하느님의 뜻을 따르지 않은 것을 예배드림으로 때움질 할 수 있을까? 뉘우침이 심정 속에 존재하면서 기도가 입술에 담겨져야 순서가 맞는다. 그 이유는 심정 속에 든 것이 입으로 말해지기 때문이다. 바쳐지는 제물 자체도 순수해야 한다. 율법 아래의 제물들은 흠 없는 것만을 요구하고 있다. 그 이유는 제단 위에 바쳐지는 동물들은 인간 마음 속의 선한 애착들을 표현했기 때문이다. 이런 제물들은 세상적인 것, 육적인 것으로 얼룩지지 않은 상태에서 하느님께 바쳐져야 할 것이다. 아말렉의 양과 소들은 순수하고 순진한 애착들을 표현할 수 없는 동물들이다. 그 동물 자체만을 두고 생각한다면 얼핏 보기에는 흠이 없는 듯 여겨질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것들의 소유주들은 이미 도덕적인 부패 속에 있어 왔다. 따라서 소유주와 그들의 동물 모두는 완전히 파괴했었어야만 했다. 어떻게 그것들이 주님께 제물로 바쳐질 수 있단 말인가? 탐욕으로 물든 옛 사람은 반드시 십자가형에 처해져야 한다. 새 애정의 새 사랑만이 주님께 바쳐지는 제물이 될 수 있다. 이것들은 영적 삶의 최말단에 있어야 할 조건이요, 영적 싸움에 있어야 할 두 개의 큰 목표물이다. 이것들은 주님 자신의 지상 삶에서의 목표물이기도 했다. 그분은 옛 사람, 마리아로부터 상속받은 연약한 인간성을 십자가에 처해지게 하시어 신성으로부터 오는 인성, 새 사람을 산 제물로 바치셨던 것이다. 이와같은 완전한 신성화 하심, 이와 상응되는 인간의 완전한 거듭남이 위와 같은 사울의 행동에서 표현될 수 없고 더욱이 그의 통치로도 표현될 수 없다는 것은 당연할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을 거절한 사울을 향해 주님께서도 그가 왕으로 있는 것을 거절하셨다고 사무엘은 발표하고 있다. 이 발표는 처음이 아니다. 예언자가 그의 왕국을 몰수하리라는 발표는 두 번 째에 해당된다. 처음의 경우, 사울이 불레셋과의 전투를 앞두고 주님께 제사를 드리기 위해 사무엘을 칠 일간 기다리다가 참지 못하여 성직자가 해야 할 제물 바치는 거룩한 임무를 가로챈 죄를 범했을 때였고, 지금의 경우, 그는 주님께서 받으실 수 없는 제물을 가지고 제사를 올리라고 건의함으로서 주님을 혐오하시게 하고 있다. 왕위에서 물러나게 하겠다는 사무엘의 발표가 있자, 그는 갑자기 자신을 낮추어 빌었다. “내가 죄를 지었습니다. 군인들이 무서워서 야훼의 명령과 선생의 말씀을 무시하고 그들이 하자는 대로 하였습니다.” 이 사울의 말은 왕의 뜻이 군인들에 의해 위압받은 두 번째에 해당된다. 왕의 성급한 명령 때문에 야기된 명령 불복종의 죄에서 요나단을 살리고자 하여 있어진 군인들의 탄원은 옳았다. 그러나 모든 것을 파괴해야 한다는 명령을받고도 쓸만한 것을 유보해둔 본문의 경우는 잘못되었다. 이는 더 낮은 원리가 더 높은 것을 통치할 경우 우리의 마음 상태를 표현하고 있다. 또는 열정이 지성을 통치할 경우와 바람이 의무 측면을 제압할 경우를 말해주고 있다. 본문의 경우에서 아각 왕과 가축떼를 살려두는 결과가 사울에게서 발견된다. 가장 높은 것과 가장 낮은 것, 또는 첫째가는 것과 최말단에 해당되는 것은 아주 중요하다. 이 두 개의 양 극에 있는 원리가 파괴해버려야 할 것을 남겨둘 때 검증하는 작업이 제아무리 정밀히 있어졌다 해도 거기에는 지독하게 불완전한 게 남아 있기 마련이다. 사울은 사무엘에게 죄를 지었다고 고백하면서 같이 예배드릴 수 있게 해달라고 사정했다. “같이 갈 수 없소 그대가 야훼의 말씀을 저버렸으니, 야훼께서도 그대를 이스라엘 왕위에서 밀어내실 것이오.” 이 말을 남기고 돌아서 가려고 하자, 사울이 도포를 붙잡는 바람에 도포자락이 찢어졌다. 사무엘이 그에게 일렀다. “야훼께서는 오늘 이스라엘 나라를 그대에게서 찢어내시어 동족 가운데에서 그대보다 훌륭한 사람에게 주셨소.” 사울이 사무엘의 도포자락을 찢듯이 자기의 심정을 찢었더라면 그의 죄는 용서되고 왕국 역시 그에게 계속 유보되었을는지 모른다. 그러나 이 뒤의 구절에서 알 수 있듯 그의 회개는 깊지 않았고 자기 죄를 느끼는 정도는 그가 지은 죄의 수준에 미치지 못하고 있다.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내가 죄를 지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그는 하느님께로부터 죄를 용서 받게 해 달라고 하지 않고 사람들 앞에서 체면을 세워 달라고 애원하고 있다. “이스라엘과 내 백성의 장로들 앞에서 내 체면을 한번만 보아 주십시오. 내가 선생께서 모시는 야훼 하느님께 예배드릴 수 있도록 선생께서 저와 함께 돌아가 주시지 않겠습니까? 그리하여 사무엘은 사울을 따라 갔다. 사울은 야훼께 예배를 드렸다.” 이상의 구절에서 우리는 사울이 표현하는 진리의 외적 특성, 그것이 영화하시는 주님의 과정에 관련해서 이든지, 거듭나는 인간의 과정에서 이든지 양 쪽 모두에 있게 되는 상태를 알 수 있게 된다. 주님의 측면에서 후회라 불리는 것에 관한 예를 사무엘을 통해 보게 된다. 그는 처음에 사울과 함께 가는 것을 거절했다. 그러나 그가 간절히 애원하는 바람에 응낙하고 있다. 이 모습은 자비에 관한 표시이다. 그러나 이것은 두 번째 간구에 대한 결과였는바, 이는 인간 마음에 있는 상태의 변화는 신성한 마음에 있는 의도가 바뀐 듯 인간의 눈에 비쳐지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진실된 진리는 이러하다. 주님은 자비 자체이시다. 그러나 그분의 자비는 그 자비를 받을 수 있는 준비가 될 때까지 그 인간 안에서 역사할 수 없다는 것이다. 마지막 문단에서 알 수 있듯 사무엘이 사울과 같이 간 중요한 이유가 있다. 즉각 처리되었어야 할 일이 미결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서 사무엘은 아말렉왕 아각을 데려 오라고 하였다. 아각은 마침내 죽을 고비를 넘겼나 보다고 생각하며 좋아서 사무엘 앞으로 나왔다. 그러자 사무엘이 ‘너의 칼에 얼마나 많은 여자가 자식을 잃었는지 아느냐? 네 어미도 그 여자들 처럼 자식을 잃어야 마땅하다.’ 하며 야훼 앞에서 아각을 난도질 하였다.” 아각은 아말렉으로 모형화 된 내면에 있는 것, 내면의 악에 바탕을 둔 거짓을 표현했다. 그러므로 사무엘이 아각을 난도질 했다는 것은 악 또는 거짓 원리는 그것에 정반대 되는 선 또는 진리에 의해서만 파괴될 수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다. 이스라엘의 진정한 왕이라면 그 왕은 아말렉의 왕과 정반대되는 것, 내면이 차있는 외면을 표현해야 마땅하다. 그러나 명확한 것은 사울은 그렇지 못했다는 것, 그래서 그는 아각을 살려두고 있었다.
이상의 줄거리는 오늘날 또 다른 양상으로 늘 나타나고 있다. 옛 것을 다 포기하라는 명령을 받은 기독교의 제자들, 그런데도 한쪽 부분은 아껴두고 싶어하는 기독인들, 그래서 하느님과 세상 것 둘을 함께 섬기려고 발버둥치는 우리들에게서 위의 성경 역사는 되풀이되고 있지 않을까? 불의한 방법으로 얻은 소득의 일부를 주님께 바침으로 신성의 비위를 맞춰보려고 하는 일을 얼마나 쉽게 해버리는지 우리는 알고 있을까? 자신이 하느님과 화해하려 않고 하느님이 자기와 화해하도록 예배하고 그분을 섬기려 드는 일, 얼룩진 죄에서 깨끗해지려 하기 보다 죄를 면제 받으려 그분께 묻는 일이 있지는 않을까? 이런 등등에 더 추가하고야 마는 것은 하느님을 찬양하면서 자기가 찬양되게 부추키는 행위들일 것이다. 이런 결과의 발생은 성경을 글자대로 마구잡아 사용하는데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흔하다. 그러나 글자 속에 내재하는 영적 의미를 살필 때, 우리는 성경 역사의 세부사항들에서 영적 전투에 있게 되는 마음의 작용이나 상태를 추적해 볼 수 있게 된다. 깡그리 파괴하라고 명령된 심정 속에 든 악들은 교활해서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 심정을 얼마나 썩게 하는지 모른다. 이런 악들이 본문에서 모조리 없애라는 것들, 즉 “남자와 여자, 아이와 젖먹이, 소떼와 양떼, 낙타와 나귀” 로 의미되고 있다. 남자와 여자, 아이와 젖먹이는 안쪽 인간 속에 있는 애착과 생각들이다. 양떼와 소떼, 낙타와 나귀는 바깥쪽 인간 영역에 있는 애착과 생각, 지식, 과학들이다. 이보다 더 격렬하고 몰인정한 듯 생각되는 명령을 주님께서는 기독인들에게 복음서에서 부과하시고 있다. “누구든지 나에게 올 때 자기 부모나 처자나 형제자매나 심지어 자기 자신마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누가복음 14:26). 율법과 복음서 양 쪽에 의해 부과된 영적 의무는 옛 사람에 속한 애착이나 욕망은 십자가에 매달아서 새 사람이 살 수 있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의무를 실제에 응용할 때 얼마나 힘든지 모른다. 자기를 즐기게 해줄 것 같은 생명, 자신이 생각할 때 참 생명인 듯 여겨지는 것을 내던지는 것 보다 더 하기 싫은 것은 없을는지 모른다. 이렇게 포기해야만 하는 생명, 부패된 이기심이라는 생명은 거듭남으로 받게 된 생명과 정반대되는 생명이다. 그러나 거듭남으로 얻게 되는 생명 만이 현재이든, 미래이든 진정한 행복을 붙잡게 해준다. 우리 속의 자연적인 의지나 이해성이 자신을 철저하게 검증 못하도록 유인하던가, 자신이 은근히 좋아하는 어떤 특질을 아껴두거나, 더욱이 자연적인 사랑이나 기쁨을 흠모하는 쪽으로 기울게 하는 어떤 영향이나 암시에 우리가 노출되는 것은 과히 이상하게 여길 필요는 없을 것이다. 좋은 게 좋은 거다는 식의 편리주의나 자기에게도 이익이 있다는 것을 암시하는 자연적인 애정이나 생각의 영향에 자연적 마음은 쉽게 누구러뜨려지고 흔들거려 같이 춤춘다. 이것이 소떼, 양떼를 다 죽이지 않은 군인들에 은근히 동조하는 사울의 모습이다. 그러나 영적인 마음, 내적 인간은 사무엘 처럼 더 높은 수준에서 사물을 직시하므로 낮은 수준의 자연적 애정이나 생각의 영향을 받지 않는바 흔들거리는 연약한 자연적 마음의 행동지침에 슬퍼한다. 바깥쪽 인간이 불완전에 허덕이고 연약함을 노출하지만 안쪽 인간은 완전무결 속에 남아 있는다. 그래서 안쪽 인간을 통해 주님은 바깥쪽 인간에게 말하시어 그 인간의 무력함이나 불쾌해지는 결과를 말해준다. 이런 마음의 진짜 본성과 그 작용은 경험을 통해 알 수 있기도 하다. 우리가 이렇게 알 수 있는 이유는 동물적 본성과 구별되게 하는 특성을 지녔기 때문이다. 동물은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 볼 수 없다. 그 이유는 동물적 마음은 설사 그 마음이 어떤 능력을 지녔다 해도 반사적 행동 (반성하는 행동)은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 본성이 지닌 신성의 창조 구성은 우리 자신을 곰곰히 반성해 볼 수 있게 장치되어 있어 자신의 수준 낮은 경향이나 상상등을 판단하여 조절이 가능하게 되어 있다.
사울의 애원을 받아 들인 사무엘은 그를 따라 가서 예배를 드렸다. 그러나 그 제물은 아말렉에게서 빼았은 더러운 것일 수는 없었으리라. 그 제물은 진정한 예배에서 바쳐지는 진정한 애착을 표현하는 이스라엘의 가축떼에서 조달되었을 것이 틀림없다. 이렇게 해서 사무엘과 사울, 내적 인간과 외적 인간이 하나로 움직였을 때, 한 가지 덜 완성된 것, 미결의 행동 하나가 있었다. 예배를 마친 후 사무엘은 아말렉왕 아각을 데려오라고 하였다. “아각은 마침내 죽을 고비를 넘겼나 보다고 생각하며 좋아서 사무엘 앞으로 나왔다. 그러자 사무엘이 ‘너의 칼에 얼마나 많은 여자가 자식을 잃었는지 아느냐? 네 어미도 그런 여자들 처럼 자식을 잃어야 마땅하다’ 하며 야훼 앞에서 아각을 난도질 하였다. 길갈에서 있었던 일이다.” 이 절에 대해 우리의 해설자는 이렇게 알려주고 있다. “아각에 대한 사무엘의 말 속에는 아말렉에 내려진 신성의 저주에 대한 그 원인이 깊게 감추여 놓여 있다. 즉 주님은 그들과 영원히 싸우실 거라는 것, 그들의 이름은 하늘에서 삭제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아각이 좋아하며 앞으로 나오는 모습은 아말렉이 표현하는 악의를 품은 영들이 타인들 앞에서 실지로 해대는 외적인 매력이나 유혹이다. ‘네 칼이 많은 여인들을 자식 없게 만들었다’ 는 사무엘의 말은 위의 악령은 지성에서 나오는 게 아니라 의지로부터 파생되는 악한 애착들이 주도권을 쥐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무엘이 주님 앞에서 아각을 난도질 하였다는 것은 지성으로부터 파생되어 악의 거짓 속에 있는 자들을 따로 분리했다는 말이다. 이리하여 마귀(genii)가 영들로부터 분리되어 졌다.” 위 인용문이 이 세상 사람들에게 어떻게 적용되는지 알아보는 것은 어렵지는 않다. 그러나 그것이 정작 자신에게 어떻게 응용되는지를 찾아 보는 것이 더욱 필요한 일이다. 내면의 악, 그것이 인간에게서 제아무리 감추여 놓여 있다 해도 그 악의 원리는 하느님의 보좌에 정반대 된다는 것, 주님은 그 악에 영원히 맞서고 계신다는 것을 우리가 아는 이상, 우리 역시 그것이 절멸될 때까지 싸움을 멈추어서는 안된다. 이스라엘 역사에서 우리가 배울 수 있듯이 그 악은 우리 속 아주 깊이 자리잡고 있어서 한번의 투쟁으로 뿌리뽑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그것이 뿌리뽑혔다 하여 한숨 돌릴 때, 그 즉시 그 악은 고개를 쳐든다. 따라서 그 악을 계속 발바닥 밑에 두고 밟고 있으려는 끈질긴 노력만이 그 악의 힘을 약화 시키게 될 것이고, 결국 거듭나는 마음의 천국에서 그 이름조차 모두 삭제되어 지리라 본다.
사무엘과 사울은 이제 서로 제 갈길로 갔고 다시는 육적으로 만나지 않았다. 각자는 자기 출생지로 되돌아 갔다. 두 사람 각각이 표현한 진리들은 각 진리가 소속된 영적 마음과 자연적 마음 속에서 은거하게 된다. 비록 그들 사이에 바깥쪽 왕래는 중단되었다 해도 동정적인 연결까지 완전히 절단되었던 것은 아니다. 사무엘은 사울 때문에 통곡하여 마지 않았다. 내향에 있는 애착과 생각은 외향에 있는 부족함과 연약함 때문에 통곡은 그치지 않는다. 통곡한다 해서 외향에 있는 상태가 개선되지는 못한다 할지라도 외향의 연약함으로 잃는 것 때문에 내향의 것들은 통곡 않을 수가 없다. 이렇게 사무엘이 주님 앞에 울부짖음에도 불구하고 그분께서는 사울을 왕으로 세우신 일에 대한 후회를 계속하시고 있다. 어머니쪽 인간성에 있는 신성으로부터의 진리, 사울이 표현한 이 진리는 신성한 사랑의 선과는 일치 않는 가운데 있어 신성한 사랑이 거할 영원한 거주지를 제공하지 못한다. 더구나 천국을 정돈하며, 지옥을 완전히 정복하여 지상에 천국을 건설해줄 매개체 역할은 더더욱 힘들다. 항구적인 거주지와 매개체가 또 다른 원리, 더 수준 높은 원리에서 발견되고 있다. 이 원리를 주님 스스로 설비해두시고 계신다. 이 원리의 취임식이 다음 장에서 거론되는 주제이다.

사무엘상 14장 해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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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상 제14장

요나단의 용맹으로 불레셋군이 참패하다

지금까지 우리는 사울의 역사를 세세하게 검사해 보려 노력해 보았다. 그럼에도 그 설명들은 영감된 말씀이 포함하는 것에 비추어 빈약하기 이를 데 없는 것은 사실이다. 게다가 어느 부분의 경우는 아주 희미한 의미 파악에 그치고 만 경우도 많이 있었다. 아마 성경의 단원과 그 단원에 대한 설명에서 임의적인 경우도 없지 않았다. 첫 세 왕에 관한 전체를 세세하게 살펴 간다면 아마 몇 권의 두꺼운 책이 요구될는지 모른다. 그래서 우리는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일반적 윤곽만을 파악해 가지 않으면 안 될 것이라 생각된다.
본 장에서 우리는 부적절한 수단이지만 그것을 가지고 불레셋을 제압하는 사건을 공부하게 된다.
사울은 육 백 명 가량 되는 군인을 거느리고 게바 변두리 미그론에 있는 석류나무 아래 진을 치고 있었다. 그리고 불레셋군의 전초 부대는 믹마스로 건너가는 길목까지 나와 있었다. 석류나무 그늘은 사울이 진을 치고 있는 상황과 아주 걸맞는 장소이다. 그 이유가 석류는 선과 진리에 관한 과학물들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 과학물은 외적 또는 자연적 인간 안에 있는 기억에 든 말씀에서 온 교리들을 말한다. 이사야서의 한 문단이 위 본문에 관한 설명의 실마리를 갖게 해준다. “아얏에 이르고 미그론을 거쳐 미그맛에서 짐을 풀고 골짜기를 건너 게바에서 하룻밤을 묵으면 라마 사람은 놀라고 사울의 고향 기브아 사람은 달아나리라” (10:28,29). 그리고 다음 장에서 위 인용 구절이 이렇게 이어진다. “이새의 그루터기에서 햇순이 나오고 그 뿌리에서 새싹이 돋아난다” (이사야 11:1). 이 세 절은 오늘 본문과 거의 동일한 의미를 갖고 있다.
미그론에서 움직이지 못하고 있는 사울, 그는 어떤 큰 돌파구가 있어 불레셋의 심장을 관통해 버리기를 희망하고 있었다. 그렇게 해서 이스라엘에 전쟁의 승리에 대한 확신감을 주고 싶어했다. 요나단은 자기 무기 당번과 함께 아버지 곁을 슬쩍 떠났는데, 그들의 목적은 불레셋 진영을 섬뜩 놀라게 해서 혼란에 빠지게 하여 싸움의 기득권을 쥐고자 하는데 있었다. “자! 오랑캐 놈들의 초소로 들어가자. 야훼께서 손을 써 주실 것이다. 야훼께서 우리를 도와만 주신다면 수가 많든 적든 무슨 상관이겠느냐?” 사실 주님께서는 이 백성들이 위급해졌을 때 많은 수에 의존해서 구원해 주시기보다는 오히려 아주 적은 한 두 명의 사람을 선택하시어 구원의 역사를 펼쳐왔다. 그분의 역사는 양에 의존하시지 않고 품질에 의거하시어 승리를 가름하신다. 한 개 만의 순수한 진리, 진정한 진리가 마음속에 자리 잡았다면, 많은 가상적인 진리, 입술만의 진리보다 훨씬 더 강한 능력을 지니게 된다. 사실 잘못된 행위나 죄를 야기시키는 악들의 힘은 가상적인 진리에 의해 발휘되고 있다. 이런 악이나 잘못된 우리의 것들은 오로지 진짜 진리, 실제 속의 진리 하나만으로도 능히 깨트려 진다. 이런 실상이 오늘 본문에서는 요나단에 의해, 이후 다윗이 골리앗을 자갈돌 하나로 쳐부수는 것으로 예증되고 있다.
완전한 성공으로 마무리된 요나단의 대담한 계획은 불레셋 초소로 건너가게 했고 무기 당번의 조력만 가지고도 엄청나게 보였던 불레셋군을 과감히 공격해 버렸다. 그들이 불레셋 진영으로 건너가야 하는 길목 양쪽에는 날카로운 돌기둥이 둘 있었다. 하나는 북쪽에서 믹마스를 향하고, 다른 하나는 남쪽에서 게바를 향하여 서 있었다. 그리고 하나는 보세스라고 하고 다른 하나는 세네라고 하였다. 불레셋이 보다 더 확고한 고지로 믹마스를 선택했음은 의심할 여지없다. 그리고 믹마스와 게바 사이에 놓인 통로는 매우 위험한 길임은 두 바위가 양쪽에 버티고 서있는 것에서 잘 보여주고 있다. 두 바위의 이름, 여느 히브리 이름과 마찬가지로 정확한 탐지가 곤란하다. 권위 있는 어떤 학자에 의하면, 보세스는 빛남, 또는 미광을 발함을 뜻하고 세네는 가시가 많음이란 뜻일 것으로 보고 있다. 이 두 바위의 뜻과 이 길을 통과함에는 아주 유사하다. 양쪽에 서 있는 이 길을 통과해야 하는 곤경은 영적 싸움에서 만나게 되는 어려움을 표현해 주고 있다. 우리 길의 오른쪽, 왼쪽, 남쪽과 북쪽에 장진된 거짓들은 선행과 맞서고, 믿음에 대항하여 버티고 서는 거짓들이다. 그러나 선행 안에 있는 사람, 주님을 신뢰하는 사람, 말씀 속의 순수한 진리로 무장된 사람, 이들 모두에게는 구원을 위해 자기들이 지닌 진리가 많든 적든 관계치 않고 마음속 요새인 심정과 이해성에 버티고 있는 악과 잘못들을 과감히 공격한다. 영적 싸움은 내적 싸움이요, 육과 영 또는 영과 육의 싸움인 것이다. 육(flesh)의 또 다른 이름은 자아(selfhood)이다. 이 안에는 좋은 것이 하나도 거주하지 않는다. 자아는 두 개의 따로 구분되는 부분으로 구성된다. 자발적인 부분과 지적인 부분, 또는 자발적인 행동과 지적인 자아가 있다. 그래서 우리가 성경의 언어를 읽는 가운데 반대적 의미를 적용할 경우 위 둘은 하나의 육 만을 만들 뿐이다. 그러나 새로운 본성, 성경의 언어에서 영(spirit)으로 의미되는 이 본성 역시 두 개의 부분, 즉 자발적 측면과 지적 측면이 있고 이 둘은 한 개의 영 또는 하나의 영적 인간을 만든다. 이 둘은 서로간의 관계적 연결에서 다양하게 묘사되어 표현되고 있다. 이 둘은 남편과 아내, 형과 동생, 주인과 종, 본문의 경우 용사와 무기당번 등등으로 표현되고 있다. 요나단과 그의 무기를 짊어진 젊은이는 의지와 이해성으로서 서로 관계를 갖고 있다. 의지와 이해성은 내적인 것과 외적인 것으로 바꿔 말할 수도 있다. 요나단은 젊은이에게 이렇게 말한다. “자! 오랑캐 놈(할례 받지 않은 놈)들의 초소로 들어가자.” 그러자 젊은 이가 답한다. “생각대로 하십시요. 어떤 결정을 내리시든지 저는 그대로 따를 뿐입니다.” 이 둘, 심정과 지성, 내적인 것과 외적인 것 사이에는 완전한 일치가 존재하고 있다.
위험 천만한 이 모험을 추진하는데 있어서 요나단은 젊은이에게 자기들이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를 가르쳤다. “그럼 좋다. 놈들이 볼 수 있는 데로 건너가자. 그리고 만약 저쪽에서 ‘우리가 갈 때까지 꼼짝 말고 게섰거라’ 하고 소리치면 그 자리에 선 채 놈들한테로 올라가지 말고, 만약 자기들한테로 올라오라고 하면 올라가 치자. 바로 이것으로 이미 놈들은 우리 손에 붙이셨다는 징조를 삼자.” 적에게 올라가는 것과 적이 내려오는 것 사이의 차이는 자연적 상태에서 만큼이나 마찬가지로 영적 차원에서도 큰 차이가 있다. 그 이유는 악과 거짓은 극성을 부리는 동안 선과 진리가 소극적으로 대처하면 이는 패배의 징조가 되고 그 반대는 성공의 표시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 본문의 경우, 위 두 조건 중의 선택은 적들에 의해 결정되고 있다. 불레셋 수비대의 양자 택일은 자기들이 배짱을 내보이기 위한 것, 혹은 두려움에 대한 암시로 이루어지게 된다. 그 결과는 요나단의 예상에 대답한 것이 되어 면민한 판단을 보여주었다. 두 사람이 그들에게 보여지게 되었을 때 불레셋이 말한다. “저 봐라. 히브리 놈들이 숨어있던 구멍에서 기어 나왔다.” 요나단에게 올라오라고 하는 표시가 명확히 보여주는 바는, 겁쟁이들이 군대가 되어 공격자가 된 히브리인들에게 내려가는 것을 두려워했다는 것이다. 그들의 부름에 요나단은 손과 발로 기어올라갔고 그의 무기당번도 그를 따라 올라갔다. 진보에 있어서 이런 모형은 진보가 승강하는데 있는 경사도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나 이 모습은 또 다른 교훈, 더 높은 것을 가르치고 있다. 그 이유는 손과 발은 자연적 양 측면에서 힘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손과 발이 함께 움직여 내는 능력은 큰 장애물을 극복하여 더 높은 성취라는 데까지 부상하게 해준다. 그래서 불레셋은 요나단에게 죽임을 당하고 그의 무기당번도 그렇게 처신했다. “이렇게 요나단과 그의 무기당번은 첫 대전에서 하루갈이 밭을 반이랑 갈아 젖히듯, 이십 명 가량 죽였다.” 영적 의미에서 숫자들은 품질을 표현해 준다. 좋은 측면에서 이십은 마음의 내면에 저장된 선과 진리라는 아껴두신 것에서 결과되는 거룩한 상태를 뜻한다. 아껴두신 것(remains)란 초기 시절의 삶에서 마음에 형성된 상태들이다. 이 상태들은 20세 전 후 합리력이 완성될 때 거절되거나 확증되어진다. 이 아껴둔 것들은 불신앙 또는 이기적이고 세상적 일 뿐인 삶을 옹호하는 신앙에 의해 파괴된다. 다시 말해 이론적 신앙이 진실이 되든지 거짓이 되든지 하는 것은 오로지 실제의 신앙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말이다. 합리적 상태에 도달치 못한 이들은 설사 자기들 삶이 일찍 끝나든, 혹은 계속되고 있든 심판의 상태에 설 수 없다. 그 이유는 진리가 내적 삶의 상태를 생산해 낼 때 만이 언제든지 심판이 거행되기 때문이다. 요나단이 적을 죽인 첫 대전은 영적으로 볼 때 시간상의 “첫”이 아니라 중요도에 있어서의 “시작”을 의미한다. 그래서 이 싸움 뒤에 따라오는 모든 사항들은 첫 대전에 이어 연속되어진다. “첫 대전”은 불레셋 군대를 갈팡질팡하게 하여 서로 치고 박게 만들면서 결국 이스라엘이 제압하는 결과를 가져왔던 것이다. 이런 상태는 “하루갈이 밭을 반이랑 갈아 젖히듯 이십 명 가량 죽였다”는 표현에서 더 많은 것을 암시해 주고 있다. “밭(land)”이란 마음 자체를 상징하고 “반 이랑”이란 그 밭의 품질을 표현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숫자 절반은 두 곱이라는 숫자와 같은 의미를 갖는다. 반대적 의미에서 볼 때 선과 진리가 나뉘게 한 것들은 악이나 거짓과 하나를 이룬다. 신앙과 선행을 따로 따로 구분하는 이들은 실지 무신앙과 무자비와 하나를 만든다. 밭의 범위는 황소 한 마리(a yoke of oxen)가 갈아 엎을 수 있는 것을 가지고 더 특별히 묘사해 놓고 있다. 고대 시대 때에 흔히 사용했던 위와 같은 측량치는 영감된 책에서는 특별한 의미를 가지게 된다. 이 의미의 출처는 황소와 멍에(Yoke)로부터이다. 황소는 자연적 애착 중의 한가지 모양새이다. 이 애착을 조절하는 것이 멍에이다. 멍에를 멘 황소란 적대 국가이든 동맹 국가 사이던 간에 어느 국가의 지배하에 있는 것을 성경에서 흔히 그리고 있다. 몇 가지 예를 살펴보자. 주님에 관해 예언적으로 말해지기를, “당신께서는 그들이 짊어진 멍에와 어깨에 맨 장대를 부러뜨리시고 혹사하는 자의 채찍을 꺾으실 것입니다” (이사야 9:4). 그리하여 그분이 오셨을 때, 구속된 자의 축복된 모습을 이렇게 말하고 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지고 허덕이는 사람은 다 나에게로 오너라. 내가 편히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의 영혼이 안식을 얻을 것이다.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마태 11:28-30). 본문의 경우, 살피고자 하는 것은 멍에 맨 황소 한 마리가 하루 동안 갈 수 있는 땅의 면적이다. 이에 대한 의미는 또 다른 본문을 찾아 읽으면 쉽게 알게 된다. 좋은 측면에서 찾아보면, 엘리야를 만나는 사밧의 아들 엘리사가 황소 열 두 쌍에 겨리를 지워 밭을 갈면서 열 둘째 겨리를 부리고 있었던 모습이다 (열왕기상 19:19). 그 때 엘리야는 자기 겉옷을 그에게 걸쳐 주었다. 이는 엘리사가 예언자의 직분을 맡게 된데 대해 이해해서 순종하는 것, 자연적 애착보다 더 높은 애착을 발휘함으로 더 고상한 유용함의 분야에서 일하겠다는 표시인 것이다. 나쁜 측면을 찾아보면, 주님의 “큰 잔치”의 비유 속에 있는 둘째 사람이다. 그는 잔치에 참석 못하는데 대해 이렇게 변명했다. “나는 겨릿소 다섯 쌍을 샀는데 그것들을 부려 보러 가는 길이오. 미안하오.” (누가 14:19). 이 구절 속의 겨릿소 다섯 쌍이란 천국에서 멀어지게 하는 모든 자연적 애착들을 의미한다. 하루갈이 밭을 반 이상 갈아 젖히듯 하여 요나단이 죽인 군인들이란 선과 진리 또는 신앙과 선행을 분리시킨 결과, 그 각각이 악과 거짓에 하나 되게 만드는 이들, 결국 자기들의 자연적 애착들을 천국에서 더욱 멀어지게 하는 이들을 말한다. 따라서 죄 있음에 자신을 허용하는 이들인 바, 그 이유가 그들은 죄라는 멍에 밑에 자기들 목을 스스로 밀어 넣고 있기 때문이다. 추상적 측면에서 볼 때, 그들은 신앙 만 가지면 된다고 하는 원리를 표현한다. 다시 말해 이 원리에 진리의 능력이 발휘되면 갈팡질팡하고 서로 죽이는 원리임에도 서로 조화를 이루어 하나인 듯 전체 체계를 입증하려드는 오류들을 표현한다. 이 오류에 대해 적군이 자기 편끼리 칼로 치고 찌르는 수라장이 된 모습으로 한 번 더 묘사되고 있는데 이와 비슷한 광경이 판관기에서도 읽어 볼 수 있다. “삼 백 명 군대가 나팔을 불어대고 있는 동안 야훼께서는 적으로 하여금 저희끼리 마구 칼로 찔러 죽이게 하셨다” (7:22).
위와 같은 요나단의 용감무쌍한 행위는 이스라엘의 시선을 모으게 했다. “베냐민 지방 게바에서 보초를 서던 사울의 군인들은 불레셋군이 갈팡질팡하는 것을 보았다.” 영적인 보초들(watchmen)이란 교회의 상태와 그 변화를 감시하는 것들, 그것들이란 마음으로 진리를 지각 가능하게 하는 변화와 상태에 관련되는 진리들이다. 이 진리 자체가 보초자로서 마음이 총명할 수 있게 감시기능을 발휘한다. 마음 속에 존재하는 각기 다른 종류와 상태에 있는 진리들 간에는 서로 연결이 있다. 더 높은 진리는 매개체 역할을 하는 진리를 통해 더 낮은 진리와 교통한다. 그리하여, 더 높은 진리는, 더 낮은 진리 안으로 들어가 그 속에 있는 모든 것을 지각한다. 그러나 더 낮은 진리는 안에 들어와 있는 더 높은 진리가 스스로를 밝힐 때까지 더 높은 진리를 지각할 수 없고 더욱이 더 높은 진리 안에 들어가지도 못한다. 불레셋 군대가 혼란해진 원인이 자기들에게 있었을 것이라고 사울은 결론을 지었다. 그래서 사울은 함께 있던 군인들에게 “인원을 점호하여 우리 가운데서 누가 빠져나갔는지 알아내어라.” 하고 명령하였다. “조사해 보니 요나단과 그의 무기 당번이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사울은 아히야에게 하느님의 궤(에봇)를 가져오라고 했다. 그 당시 하느님의 궤가 이스라엘 자손과 함께 있었기 때문이다. 진리들이 질서 있게 배열을 이룰 때, 어느 진리가 나갔는지 지각되어진다. 선의 애착을 통해 어떻게 되어갔는지 주님께 상의해 보게 된다. 성직자를 통해 주님께 여쭈어 보는 것은 과거 여호수아가 지도자가 되었을 때 그에게 수여된 특전이었는데 사울도 자신에게 이를 적용하고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한 구절 민수기 27장 21절을 읽어보자. “그가 나에게 무엇을 묻고 싶을 때에는 엘르아잘 성직자 앞에 나와야 한다. 그러면 엘르아잘은 우림을 써서 가부간의 결정을 내려줄 것이다. 여호수아는 그의 지시를 따라 백성을 거느리고 들기도 하고 나기도 해야 한다” (민수기 27:21). 그러나 사울은 신성한 지시를 받는 데까지 절차를 진행하지도 않았다. “사울이 성직자에게 말하고 있는 사이에도 불레셋 진영은 점점 더 소란해졌다.” 그래서 사울은 성직자에게 “그만 두어라”하고 말했다. 사울은 그의 통치 기간 동안 성직자를 통해 물어본데 대한 답을 받은 적이 없다. 왜 그럴까? 그 이유는 주님의 인간성 안의 신성으로부터의 진리는 신성한 진리를 위한 진정되고 항구적인 기초를 형성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오로지 신성화 하심을 수단으로 그분은 유한했던 모든 것, 즉 그분의 어린 시절을 시작하게 한 진리의 허상(가상)을 벗으셨던 것이다. 이는 유한한 측정치만을 지닌 인간의 거듭남에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가상이 아닌 진짜 진리만이 영적 진리를 세우는 진정하고 항구적인 기초를 놓게 한다. 이런 이유로 사울이 행했던 모든 것은 불완전했다. 본문의 경우만 해도 사울은 응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그는 “전군을 거느리고 소리치며 싸움터에 다다라보니, 적군은 제 편끼리 칼로 치고 찌르며 수라장을 이루고 있었다. 이제껏 불레셋에 붙어 그들과 같이 싸우러 나왔던 히브리인들이 반란을 일으켜 사울과 요나단이 이끄는 이스라엘 군에 가담하여 싸웠다.” 그러므로 요나단이 불레셋 수비대를 쳐부숨으로 불레셋 진영에는 큰 혼동을 일으켰던 반면, 이스라엘 진영에는 새로운 용기를 불러 일으켰던 것이다. 다시 말해 우리 속의 악과 거짓의 정렬된 모습이 서로간의 다툼과 분열, 공포가 증가해갈 때, 우리 속의 선하고 진정된 것들은 더욱 유대관계를 형성하여 새로운 용기를 생산해 낸다. 그러므로 시련의 날들 속에서는 자신 속의 악한 세력을 도무지 극복해낼 수 없을 듯 보이겠지만 주님의 신성한 섭리에 있는 사랑은 우리의 어두운 시간들 속에서까지 전혀 예상치도 못한 가운데, 전혀 보이지도 않는 가운데 희망의 문과 구원의 길을 여신다. 그리고 우리가 그분에게 신실해 있으면서 그분과 협동하고 있다면, 본문에서 주님이 이스라엘에게 해주셨던 것 같이 오늘의 우리 영혼에도 영적으로 해주신다. “그 날 야훼께서 이스라엘을 도와 주셨으므로 싸움은 벳호론 건너편까지 번져 갔다.” 주님에 대한 믿음, 악에 저항하고자 하여 그분과 협동하는 것, 이것이 우리 죄로부터 구원해 주시는 상태에 해당된다. 그래서 이 싸움은 결실 없는 믿음에 합당한 결과인 벳호론, 즉 허영, 무상함까지 극복하게 해준다. 이 전투와 관련되는 아주 단순한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은 위협 당한 적으로부터 승리의 영광이 안겨지도록 자신을 희생물로 삼은 자, 그를 통해 이스라엘에 구원이 역사 되게 했던 사람이 연루된 사건이다.
사울은 전군에게 맹세를 시켰다. “해 떨어질 때까지는 원수를 갚아야 할 터이니 그 때까지 무엇이든지 먹는 사람은 저주를 받는다.” 그래서 전군은 아무 것도 먹지를 못했다. 그러나 요나단은 아버지가 전군에게 다짐을 준 말을 듣지 못한 터이라, 꿀을 조금 찍어 맛보았다. 이로 인해 그는 군인들의 간청이 없었던들 죽었을는지 모른다. 어찌됐든 이 사건에도 우리를 가르치는 교훈이 담겨 있다.
본문에서 사울이 저주하는 말투는 과거 여호수아가 했던 말과 유사하다. “이 성을 다시 짓겠다고 나서는 자는 야훼께 저주를 받으리라” (여호수아 6:26). 이런 맹세, 강경한 명령은 매우 엄하게 백성들을 얽어매는 것인데, 그 명령 자체가 슬기롭지 못하면 그 결과가 어떠한지를 입다의 서약에서도 한가지 예를 찾아볼 수 있다 (판관기 11장). 사실 이렇게 명령을 내린 사울의 목적은 승리로 진전되어 가는 전투를 방해하는 것이 하나도 있지 않게 하려는데 있었다. 이런 자연적 의미 안에 놓인 영적 의미란, 악이 다 정복될 때까지는 어떤 선도 자기 것으로 삼아질 수 없다는 것, 영적 전투자는 새로운 상태로 진입한다는 것을 뜻하고 있다. 적들을 추격하는 가운데 군인들은 숲(들)에 도착하였는데, 마침 거기에는 꿀이 든 벌집이 있었다. 자연적 마음에 속하는 상태는 희미한 상태지만 거기에도 그 나름대로의 자연적 기쁨과 쾌락이 있다는 뜻이다. “군인들은 벌집 가까이 와서 꿀이 뚝뚝 떨어지는 것을 보고도 손가락으로 찍거나 입에 대는 자가 없었다. 맹세한 일이 무서웠던 것이다.” 그들은 꿀을 먹고 싶었지만 맹세시킨 사항이 두려웠다. 이는 우리가 사랑하는 것을 스스로 부정하는 진정한 자아부정을 연습했다는 말이다. 그러나 요나단, 맹세시킨 줄을 몰랐던 그는 손에 든 막대기 끝으로 벌집에서 꿀을 찍어 먹었는데 눈이 번쩍 뜨였다. 이런 여건 주위에도 주목할 만 한 어떤 것이 있다. 이는 법을 모른 채 법을 어겼음에도 요나단은 자기가 죄 있다 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결과에서 나타나는 사항들이다. 무지해서 죄를 지은 사람도 법 밑에서 죄가 있다하여 그 죄를 받기 위해 속죄 제물을 바치도록 규정되어 있었다. 그 이유가 악을 행동에 가져다 놓는 것은 설사 그 악이 가져오는 죄가 되는 행동을 몰랐다 해도 어찌됐든 그 행동은 악한 습관을 형성케 하는 것을 부채질 해 주기 때문이다. 이 습관은 행동을 일으키는 우리 속의 경향성을 더 강하게 만들어 준다. 그래서 설사 무지에서 행동된 것을 나중에라도 알게 되었을 경우 그 사실을 고백하는 제물과 행동을 수정함으로 속죄 되도록 요구되는 것이다. 어찌됐든 요나단은 죄를 지었음에도 그의 눈은 밝아졌다. 그의 눈이 밝아진 것은 그가 꿀을 먹었을 때였다. 그 이유는 꿀은 자연적 선과 그 기쁨에 상응하고, 이 선은 총명을 주고 계발시켜 줌으로 그가 악을 행했다는 것을 알게 해 준다. 아담과 이브의 눈은 금지된 실과를 먹음으로 열려졌고, 이로 말미암아 그들은 선과 악에 관한 지식을 획득하게 되었다. 이보다 본문의 경우와 더 닮은 구절은 둘째 아담에 관한 이사야의 예언에 있다. “그 아기가 나쁜 것을 버리고 좋은 것을 택할 줄 알게 될 때는 버터와 꿀을 먹게 될 것이요….” (7:15). 첫 아담은 감각적인 과학을 자기 것 삼음으로 선과 악에 관한 지식을 획득했다. 두 번째 아담은 자연적 기쁨과 상응되는 천적 선을 자기 것 삼음으로 악을 거절하면서 선을 선택하는 힘을 획득했다. 요나단의 눈은 밝아져서 사울의 명령이 슬기롭지 못하다는 것을 보았다. 군인 중의 하나가 요나단에게 왕의 명령이 이러이러했다고 말해 주었을 때 그는 이렇게 말했다. “아버지께서 이 지역은 손도 못 대게 하시다니, 꿀 한번 찍어 먹고 나는 이렇게 눈이 다 번쩍 뜨였는데 오늘 적군한테서 닥치는 대로 빼앗아 먹었던들 지금쯤은 불레셋군을 더 죽일 수도 있었을 것이다.” 사울은 군인들로 고통을 받게 했다. 그들이 인내심 있게 참지 않았다면 그 날의 전과는 그나마도 이루지 못했을는지 모른다. 한 방울의 꿀이 한 사람을 위해 큰 일을 해 주었다면, 아마 적들에게서 약탈한 전리품을 자유롭게 사용토록 했더라면 더 많은 전과가 있게 되었을는지 모른다. 합법적인 경우에서 전리품을 먹는다는 것은 선 자체인 것을 선을 수단으로 자기 것 삼는 것을 표현한다. 그러므로 악이 악한 용도에 충당했던 것이 선에 의해 선한 용도에 충당되도록 돌려지는 것이다. 군인들은 기진맥진 해 있는 상태였지만, 그들은 불레셋을 믹마스에서 아얄론에 이르기까지 따라가며 쳐죽였다. 아야론은 단 지파에 소속된 장소이다. 그리고 단 지파 경계에서 불레셋의 영토가 나뉘어지는데, 단 지파 외에도 시므온 지파 역시 불레셋과의 경계선에 위치하고 있다. 시므온 지파는 의지에 있는 신앙을, 단은 선한 일을 표현한다. 그래서 이 두 지파는 행함도 없는 지적인 신앙을 표현한 이들을 대신해서 들어앉는 것을 잘 표현하고 있다. 아얄론은 과거 여호수아가 아모리 다섯 왕과 싸운 장소로 유명하다. “그 때, 야훼께서 아모리 사람들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붙이시던 날, 여호수아는 이스라엘이 보는 앞에서 야훼께 외쳤다. ‘해야 기브온 위에 머물러라. 달아, 너는 아야론 골짜기에 멈추어라’ 그러자 원수들에게 복수하기를 마칠 때까지 해가 머물렀고 달이 멈추었다…” (여호수아 10:12,13). 이 구절에서 달은 신앙을, 기브온 위에 머물렀던 해는 사랑을 상징화 해서 표현하고 있다. 믹마스에서 아얄론에 이르면서 불레셋을 분쇄한 것은 흠 없는 완전한 신앙을 가진 싸움은 생활 속의 선에 관한 지식으로 생겨진다는 것을 영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렇게 불레셋을 쳐부순 나머지, “군인들은 허기지고 녹초가 되어 약탈에 나서 양, 소, 송아지 할 것 없이 마구 잡아다 맨 땅에서 잡고 고기를 피째 먹어 버렸다.” 전투로 인해 몸이 녹초가 되는 것은 시험후의 정신적인 피로를 표현하는 말이다. 매우 피로해져 있다는 것은 일하고 있는 것도 아니고 쉬고 있는 것도 아닌 그 중간 상태에 해당하는 상태이다. 시험의 씀씀이는 악과 거짓된 것을 마음에서 몰아내어 마음을 자유롭게 하면서 선하고 참된 것을 마음이 확증하는데 있다. 그러나 시험이 있는 직후, 마음에는 흔들림이라는 상태가 존재하고 있다. 그 상태에서는 악과 거짓의 영향력이 완전히 말살된 것도 아니고 선하고 참된 것이 전적으로 확증된 것도 아닌 바, 두 측면이 혼합된 상태, 이것과 저것이 교체되는 상태이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상태가 군인들이 약탈에 나선 것, 피채 고기를 먹는 것으로 묘사되고 있다. 이렇게 해서 백성들이 죄를 짓고 있다는 소식이 사울에게 들려지자, 그는 전군에 명령해서 각자 소나 양을 가져다 큰 돌 위에서 잡아먹도록 했다. 자기 속이 악과 뒤섞여 있는 줄을 지각할 때, 마음의 상태가 더럽혀져 있음을 인정하면 분리가 이루어진다. 이 분리가 완성되면 선과 진리가 확증되어 자신을 비난해야만 했던 원인은 벗겨진다. 그리하여 마음은 단순함과 열정으로 주님을 섬길 수 있게 된다. 이제 사울은 주님께 제단을 세우고 있다. 이 제단은 그가 주님께 세운 첫 제단이기도 하다. 악이 종속 당하고 선이 확증 될 때의 심정 자체가 제단인 것이다. 사울의 역사에 있는 이 사건을 주님과 관련되는 가장 높은 의미와 연계해서 곰곰이 생각해 본다면, 주님의 영화 하심에 관련된 신성한 진리를 그 사건 안에서 알 수 있을는지 모른다. 유대 교회에서의 제단은 주님 자신을 상징한 것이다. 왜냐하면 그분의 인성은 우리의 제물이 놓여지는 제단이요, 그 제단은 우리가 바친 예물을 깨끗하게 해준다. 제단은 성막이나 성전 앞에 설치되어 있다. 사실 성막과 성전은 제단을 위해 장소를 제공하기 위하여 지어져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다시 말해 제단에서 번제와 제물이 바쳐지는 바 여기에서 하느님을 예배하기 때문이다. 첫 제단의 건축이 성막과 성전의 첫 기초를 놓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성막과 성전은 제단이 거주할 수 있게, 또는 일종의 덮개로서 제단 주위에 건축되어진 셈이다. 성경에서 대하게 되는 첫 제단은 노아가 쌓은 제단이다. 이 제단은 천적인 것들이 거짓이라는 대 홍수에 의해 살아있는 모든 원리가 끝장을 보면서 새로운 교회의 시작을 형성하도록 몇몇만이 구원되었을 때 세워졌다. 이 교회의 예배가 시작되는 모습이 제단을 쌓는 것으로 묘사된 것은 아주 적절한 표현이다. 왜냐하면 주님은 이 영적인 상태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오셨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그분은 인간 본성을 입으신 뒤 그것 모두를 신성화 시키셨다. 이 섭리는 타락된 인류와 접촉될 수 없는 신성과 교통할 수 있게 하고 결합을 가능하게 하는 매개체가 되었다. 그분의 인성은 그분의 신성에 접근 가능케 하는 매개체이다. 이는 마치 예배드리는 제단이 예배 드리러 오는 사람으로 하느님께 접근할 수 있게 장치된 것과 같다. 표현적 교회의 아버지 격인 아브라함 역시 제단을 쌓았다. 그 제단에 그는 이사악을 바쳤다. 이 부분에서는 주님께서 제단 뿐만 아니라 제물로서 나타나신다. 그 이유가 제단이 주님에 대한 제일 주요한 표본이 되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제단만이 주님의 인성을 표현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은 천적 수준에서 자연적 수준으로 하강하시는 첫 단계의 주님을 표현하고 있고, 사울은 자연적 수준에서 천적 수준으로 상승하시는 첫 단계의 주님을 표현한다. 그러므로 세 열조들같이 첫 왕인 사울도 제단을 세운 것이다. 사울이 세운 첫 제단은 영화하시는 과정 중 첫 기초를 표현한다. 그리고 영화하심의 완성은 솔로몬이 성전을 완성하는 것으로 표현되고 있다.
저녁때까지 불레셋을 추격했던 사울은 오늘밤에 더 추격해서 모두 때려잡자고 제의하였다. 군인들은 대체로 그의 말에 동의했으나 아히야 성직자는 우선 하느님께 여쭈어 보라고 제의했다. 그래서 사울이 하느님께 여쭈었더니 아무 응답도 없으셨다. 뭔가 잘못된 일이 있다는 것을 안 사울은 군대 지휘관들을 불러모으고 그 죄가 누구에게 있는지, 설사 그 죄가 자기 자식 요나단에게 있다 해도 죽이겠다고 하느님께 맹세했다. 그런데도 군인들 가운데 입을 여는 사람이 없자 사울은 이스라엘 군을 한편에 세우고 자기와 요나단은 다른 편에 선 다음, 올바른 제비가 뽑혀지기를 주님께 기도했는 바, 백성들은 아니고 사울과 요나단이 걸렸다. 그리고 두 번째 제비뽑기에서 요나단이 잡혔다. 아버지의 책임 추궁에 요나단은 말했다. “막대기 끝으로 꿀을 좀 찍어 맛보았을 뿐입니다. 그러나 죽을 각오는 되어 있읍니다.” 그리하여 요나단을 사형시키라고 선언할 때 군인들이 사울에게 간청하였다. “이스라엘에 이번 대승을 안겨준 요나단을 죽이시다니 안될 말씀입니다. 살아 계신 야훼를 두고 맹세합니다. 그의 머리카락 하나도 결코 땅에 떨어뜨릴 수 없읍니다. 그는 오늘 하느님과 이 일을 해냈읍니다.” 이리하여 요나단은 군인들 때문에 목숨을 건졌다.
이스라엘 역사에서 몇 번 등장하는 사실 중의 하나는, 누군가 한 명이 명령을 어길 때, 오늘 본문의 경우같이 비록 당사자가 명령을 모르고 저질러진 위반이라 해도 그 행위는 하늘 문을 닫히게 하고, 때로는 지옥을 불러 재난을 초래한다는 것이다. 이런 사실에는 그 사실보다 더 깊은 교훈적 의미가 놓여 있다. 그 의미나 교훈이 사도들의 다음 말이 표현하고 있을는지 모른다. “누구든지 계명을 다 지키다가도 한 조목을 어기면 계명 전체를 범하는 것이 됩니다” (야고보 2:10). 하느님의 법칙은 이와 같은 연결을 갖고 있어서 전체에 대한 위반 없이 한 계명만을 위반할 수 없게 되어 있다. 예를 들면 천국과 지상, 하느님과 인간을 연결하는 계명이라는 10개의 황금 고리 중 한 고리가 빠질 경우 둘 사이의 연결은 끝장나고 만다. 만일 우리의 속 사람과 겉 사람이 서로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있다고 한다면 둘 사이의 하나 됨, 하나로서의 행동은 중지되고야 만다. 만일 마음이 분단되어 있다면 기도의 응답은 없는 채 침묵 속에 처박혀 있게 된다. 그리고 적들은 다 정복하지도 못한 채 그대로 남아있게 된다. 그런데 또 다른 사도가 가르치는 경우 이러하다. “사실 죽을 죄가 있읍니다… 그러나 죽음에 까지는 이르게 하지 않는 죄가 있읍니다” (요한 1서 5:16,17). 사실 요나단의 명령 위반은 죽을 죄 까지 라고 는 말할 수 없다. 그의 위반은 글자상의 위반일 뿐 영의 차원에서는 위반한 게 아니다. 비록 사울이 천명하는 바대로 그는 글자상의 위반을 범했을는지 몰라도 일반적 증거와 명령 속의 영은 군인들 전체가 호소했던 바와 같이 방면 조치하라고 말하고 있다.
사울은 불레셋군을 더 추격하지 아니하고 돌아가고 불레셋군도 자기 고장으로 물러갔다. 전투 상태가 끝났을 때 전투하던 원리들의 휴식이 있게 된다. 그러나 어느 쪽이 상대쪽을 점령해서 있게 된 휴식이 아님을 위 구절은 넌지시 암시해 주고 있다. 사실 사울은 불레셋 뿐만 아니라 여타 다른 적대 국가를 정복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사울은 모압, 암몬백성, 에돔, 소바왕, 불레셋 등 사방에 있는 원수들과 싸울 때마다 승리를 거두어 이스라엘 왕위를 굳혔다.” 신성으로부터의 진리가 통치 형태를 갖출 때, 갖가지 종류의 악과 거짓에 실제로 대적하게 된다. 그리고 비록 악과 거짓을 정복 못한다 해도 그것들을 매우 고달프게 만든다. 점차 악과 거짓의 억류가 느슨해지게 하여 더 흔들거리게 하면서 언젠가 종속시키고야 만다. 이 종속은 정복하는 힘이 획득되어야 가능하다. 어찌됐든 아말렉과 불레셋은 이스라엘의 적들 중 가장 중요한 적에 해당되는데, 아말렉은 내면의 악에 바탕을 둔 거짓을, 불레셋은 외면의 악, 즉 신앙 만으로 된 실제의 형태에 바탕을 둔 거짓을 표현한다. 이 원리(불레셋)는 이스라엘의 모든 왕으로 표현된 선에 바탕을 두는 진리와 더욱 직접 반대되는 원리들이다. 그래서 “사울은 평생 불레셋과 격전을 벌였다.” “신안 만”이라는 원리와의 격전에는 선행과 일을 중요시하는 새로운 진리들의 획득이 꼭 필요하고 그 진리로 이끌어져야만 한다. 그래서 이를 본문은 이렇게 그리고 있다. “그래서 용감하고 힘센 사람은 눈에 뜨이는 대로 등용시켰다.” 본문 마지막 부분에 거룩한 저자는 사울의 가족 상황을 기록하고 있다. 사울의 아들과 딸이란 사울과 그의 아내로 표현된 진정한 선행과 하나를 이룬 올바른 신앙에 의해 생산된 선과 진리에 대한 애착들이다. 사울의 아내 아히노암이란 은총의 형제라는 뜻이다. 군대 사령관은 아브넬이었는데 그는 사울의 삼촌 넬의 아들이었다. 이 사람에 대한 것은 이후 사무엘하 3장 27절에서 살피게 될 것이다. 군대란 거짓에 대항하여 싸우는 교회의 진리들을 의미하고, 그 군대 사령관이란 진리들 중 제일 가는 진리를 의미하는데 이 진리를 수단으로 작은 진리들이 배열 정돈되는 것이다.

사무엘상 13장 해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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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상 제13장

사울이 예언자의 직능을 빼앗고 왕국을 몰수당하다

사울은 암몬족으로부터 야베스 사람들을 구해 냈고, 이제 그는 또 다른 적과 대진했는데, 이 적은 암몬보다 더욱 강한 적이었다. 암몬 후손은 이스라엘 지파 중 한 지파에게 전쟁을 걸어 온 것이지만 불레셋은 전 지파를 자기들 지배 아래에 두고 있었다. 사울의 손은 이제 억압받는 백성을 해방시키기 위해 이 강력한 적과 얼굴을 맞대야 했다. 우리가 역사의 세부 사항으로 들어가기 전, 사울이 치러 가야만 하는 적들의 특성을 미리 알아둘 필요가 있다.
“불레셋”이란 사랑과 분리된 신앙을 표현했다. 이로 인해 그들은 할례 받지 않은 자라 불린다. 이는 영적 사랑이 없는 상태, 오로지 자연적 사랑만 가지고 있는 상태, 종교에 필요한 요소가 없는 것, 더욱이 교회에 필요한 요소는 더더욱 전멸되어 있는 것을 의미한다. 그 이유가 종교나 교회에 속한 모든 것은 신성한 존재, 천국, 영적 삶과 관련을 갖기 때문이다. 이 사항들은 영적 사랑 외의 다른 것과 결합되어질 수 없다. 영적 사랑이 없는 자연적 사랑은 인간 속의 이기심이요 그 자체만을 들여다보면 그것은 악 밖에는 더 다른 구성 요소가 없다. 이스라엘 후손들이 불레셋과 치러야만 했던 모든 전쟁들은 영적 인간과 자연적 인간과의 싸움, 또는 선과 결합한 진리가 선과 분리된 진리, 진리 라기 보다는 거짓 뿐인 것과의 싸움을 표현했다. 선에서 분리된 진리는 선에 관한 생각에서부터 왜곡되었었는데, 그 이유는 진리에 어떤 증거를 제시해 주는 생각 안에도 어떤 영적 사항이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선행에서 분리된 신앙 만에 안주하는 이들의 경우, 그들의 언어나 설교 속의 말씀을 뺀다면, 어떤 진리도 가지지 않은 셈이 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런 사람들이 진리를 생각한 것을 실습하려 들면 즉각 진리에 관한 사상은 소멸되고 만다. 이런 종류의 종교가 교회 안에서 자연적 삶만을 살기를 사랑하는 이들에게 늘 붙어 다닌다. 그러므로 불레셋은 가나안의 여타 민족들 같이 이스라엘에 종속 당하지 않았는 바, 이제 많은 전투가 그들과 있게 된다. 말씀에 있는 역사적 환경은 교회에 있는 것들을 표현하고 있다. 가나안 땅 내의 나라들은 사랑 속의 악들, 신앙 속의 거짓을 확증하려 드는 이교도적인 것을 표현하고, 이스라엘 후손들은 신앙 속의 진리와 사랑 속의 선, 따라서 교회를 표현한다. 그래서 이스라엘이 여호와를 예배하지 않고 다른 신 쪽으로 고개를 돌릴 때 타 국가에 정복당하여 넘겨지기도 했던 것이다. 이렇게 넘겨졌던 기록 중 일부를 보면, 어떤 경우 그들은 18년, 40년간이나 타 국가를 섬겼다 (판관기 10, 13장). 이것은 그들의 예배가 사랑의 선과 신앙의 진리로부터 사랑 속의 악과 신앙 속의 거짓에로 퇴조함을 표현한 것이다. 이와 같은 방식이 사무엘상에도 관련되어 그들은 불레셋에 정복당하여 괴로움을 당하고 있었다 (4,13,28,29,31장). 그러나 이스라엘 후손들이 여호와를 예배함으로, 즉 사랑의 선들과 신앙의 진리에로 돌아 왔을 때, 그들은 불레셋을 쳐부수기도 했는데, 이에 대한 기록이 사무엘과 열왕기서의 여러 곳에 있기도 하다.
“사울이 한 해를 다스렸다. 그리고 그가 이스라엘을 이 년 다스렸을 때, 사울은 이스라엘에서 삼천 명을 뽑아 그 가운데서 이천 명은 자기가 몸소 거느려 믹마스와 베델 산악 지대에 주둔하고, 천 명은 요나단에게 맡겨 베냐민 지방 게바에 주둔시켰다. 나머지 군대는 모두 집으로 돌려보냈다.” 한 해를 통치한 사울은 선으로부터의 진리를, 이스라엘을 두 해 통치함은 선과 진리의 하나 됨이다. 이 사항은 암몬이라는 원리를 정복한 뒤에 수반되는 특별한 상태임은 말할 것도 없다. 그 이유는 영적 삶의 진보는 특별한 상태들을 통과하는데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선과 진리의 결합이 없으면 어떤 한 가지 상태가 완성될 수 없고, 또 다른 진보, 더 나은 상태로의 출발도 있을 수 없다. 이 특별한 상태의 연결은 사울이 삼천 명의 군인을 뽑고 나머지는 집으로 되돌려 보내는 구절에서 더 암시하고 있다. 이 구절은 진정한 질서로 마음 속의 공통된 원리들을 배열하는 것, 보다 더 내면에 속하는 본성들을 통치하는 원리 밑에 배치하고, 보다 외면에 속한 것들은 일상 업무에 충당하도록 하는 것을 표현한다. 그러나 이 구절에서 새로운 인물(agent)이 소개되고 또 하나의 구분이 그와 더불어 연결되고 있다. 우리에게 친숙해 있는 인물 요나단, 사울의 영웅적인 아들, 다윗의 헌신적인 친구가 처음 등장하고 있다. 뽑힌 군인 삼천 명 중 이 천 명은 사울과 더불어 믹마스와 베델 산악 지대에, 천 명은 요나단과 함께 베냐민 지방 게바에 주둔했다. 사울과 다윗 사이의 중재자로서의 요나단의 특성이 이 부분에서 드러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사울 통치라는 연극 중 한 부분의 역할을 담당하는 자로의 표현적 성격을 미리 이해해 두는 것은 중요할 것 같다. 이제 우리는 그가 표현하는 원리가 무엇인지 찾아보기로 하자.
이미 우리가 살폈던 것은, 사울은 신성으로부터의 진리(truth Divine)를, 다윗은 신성한 진리(Divine truth)를, 솔로몬은 신성한 선(Divine good)을 표현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사울의 통치는 주님이 계셨던 생애 중 그분의 인성을 신성으로부터의 진리로 만드시는 때를, 다윗의 통치는 그분의 인성을 신성한 진리로 만드신 때를, 솔로몬의 통치는 그분의 인성을 신성한 선으로 만드시는 때를 각기 표현하고 있다. 이리하여 주님께서는 그분의 인성을 신성의 자연적 상태에서 영적 상태로, 그리고 천적 상태에 이르도록 계속 만들어 가셨던 것이다. 위의 주님에 관한 사항을 말씀의 이해에 적용한다면, 각 사항은 말씀의 자연적 의미, 영적 의미, 천적 의미로 구분된다. 현재의 공부와 관계 있는 신성으로부터의 진리(truth Divine)은 자연 안에 있는 진리, 또는 말씀의 자연적 의미에 있는 진리이다. 그러나 말씀의 글자는 두 종류의 진리들로 구성되어 있다. 그것은 눈에 보여지는 진리(apparent truth)와 진실 된 진리(real truth)가 있다. 다시 말해서 말씀의 글자적 의미가 어떤 부분에서는 외적 상태에 있는 인간에게 있어지도록 나타나는 신성과 영적 사항을 묘사하거나 표현한다. 또 다른 부분에서 글자적 의미는 그 글자에 진정 있어야 할 것에 관해 말하고 있기도 하다. 주님이 그분의 인성을 신성으로부터의 진리로 만드셨을 경우, 그분은 먼저 인성을 눈이 볼 수 있는 진리로 만드셨고, 그 다음 진정한 진리로 만들어 가셨다. 여느 모든 인간 존재와 마찬가지로 주님도 애당초 말씀의 글자에 나타나는 진리들에 소개되셨다. 그 다음 눈에 나타나는 진리를 통과하시어 진정한 진리들에로 진입하셨다. 그분도 말씀의 글자 속의 진정한 진리를 획득해서 음미하시고 그분의 인성을 신성한 자연적 진리로 만드시지 않고는 말씀의 영적 의미로, 그분의 인성을 신성한 영적 진리로 만드실 수 없으셨다. 우리가 교회에서 많은 가르침을 받지만 어느 누구도 순수한 진리 안에 있지 않으면 말씀 속의 영적 의미에 소개될 수 없다. 그분이 인성을 신성화 시키신 과정도 그분이 인간을 거듭나게 하시는 과정과 비슷하다. 말씀의 글자에 나타난 진리를 표현하는 동안 그는 글자 속의 진정한 진리보다는 글자상에 보이는 진리들을 표현했다. 말씀 속의 진정한 진리, 순수한 진리가 요나단에 의해 표현되어지고 있다. 사울과 그의 아들 요나단이 표현해 주는 위와 같은 성격을 알게 될 때, 어떻게 이 두 사람의 삶이 영적으로 특징짓고 있는가, 그리고 다윗과 관련해서는 어떻게 구분되는 가를 실감하게 된다. 다윗은 인간 속의 영적 원리, 말씀 속의 영적 의미를 표현하는 것과 비교 생각해 보라. 다윗에 대한 사울의 증오는 인간 안에서 자연적인 것이 영적인 것을 증오함, 말씀의 글자와 그 속의 영과의 모순, 글자상의 진리 안에만 있을 경우의 모순을 보여준다. 그 이유가 생명을 주는 영과 글자의 불일치는 영을 죽이려 하기 때문이다. 이제 요나단을 생각해 보자. 그는 질서 있는 마음 상태에서의 자연적 마음, 순수한 진리 측면에서의 말씀의 글자를 표현한다. 이런 특성들이 그의 아버지와 다윗 사이에 위치하게 되는 그의 삶에 나열되고 있다. 애당초부터 요나단의 영혼은 다윗의 것과 밀착되어 있었다. 그는 우정 관계의 바른 길을 결코 벗어나지 않았다. 사울의 분노가 왕위에 대한 적수로서 다윗을 향해 터트려졌었다. 그반면 요나단은 다윗이 장차 이스라엘의 왕으로 운명되어져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게 된 뒤에도 그의 영혼은 그 일에 대해 하나도 흔들리지 않았다. 다윗에 대한 그의 애정은 한 군데도 흠집이 나지 않았다. 동시에 요나단은 비합리적이고 변덕스럽기까지 한 아버지에게도 슬기롭고 헌신적인 아들이 되어 주었다. 사울이 다윗을 미워하는 쪽에서 방향이 바뀌도록 아버지 곁에서 노력해 보면서 사랑의 특성인 친화력과 은덕의 법칙으로 아버지의 분노심이 묶여지게 하려 노력했다. 그리하여 사울과 다윗 사이에서 평화를 만드는 자로서 그는 말씀의 글자 속의 순수한 진리를 표현해 준다. 이 진리는 눈에 나타나는 글자적 의미와 영적 의미 사이에 서있으면서 두 의미가 재회하도록 애써 주고 말씀의 영과 글자가 대결하는 순간을 피하도록 해서 대결하려는 글자를 영과 조화되게 한다.
이상 살핀 내용이 요나단으로 표현되는 일반적 의미인 바, 요나단이 사울과 다윗의 삶과 연결해서 있게 되는 의미를 명확히 알게 되리라 본다. 특히 다음 장에 등장하는 불레셋을 쳐부셔서 이스라엘에 승리의 신호를 알리는 요나단의 특성과 사울의 특성과를 비교해 보게 됨으로 더욱 두 사람의 표현적 특성을 간파할 수 있을 것이다. 신앙 만을 위해서 말씀의 눈에 보인 진리로 어느 정도 용모를 갖추었다 할지라도, 그 신앙은 말씀 속의 순수한 진리와는 직접적인 반대 속에 놓여 있다. 요나단의 첫 도전적인 행동은 기브아에 있는 불레셋 수비대를 공격한 것이다. 기브아(Geba)는 제 10장에서 언급된 언덕과 수비대이고, 이곳은 사울이 기름 부어진 후 집으로 돌아가던 코스에 있다. 그 땅의 중심 위치인 언덕 위 레위인 성읍을 불레셋은 군대 진영지로 삼았는데,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위압감을 주려고 진지를 세웠을 것은 의심할 여지없다. 이 모습은 마치 불레셋이 표현하는 거짓이 인간 속의 더 높은 애착에 자기들 진리를 발견하고 거기서 그 인간이 가질 순수한 예배를 더럽히면서 거짓의 세력이 온 마음을 지배하는 듯 자찬 해대는 것과 같다. 사울의 통치에서 불레셋에 대한 첫 공격은 수비대를 목표로 삼아졌고 그것이 요나단에 의해 이루어졌다. 이는 중요한 승리임에는 틀림없다. 그 이유는 이 공격은 두 적대 관계의 왕국들의 온 힘이 일어나서 행동으로 이어지게 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불레셋 사람들 사이에 히브리인들이 반기를 들었다는 소문이 퍼졌다. 한편 사울은 나팔을 불어 방방곡곡에 소집령을 내렸다. 이스라엘 온 국민은 사울이 불레셋의 수비대를 쳐서 불레셋 사람들의 원한을 사게 되었다는 말을 듣고 길갈로 모여 와 합세하였다. 불레셋 군도 이스라엘과 싸우려고 모였다. 그들은 병거가 삼천, 기마가 육 천이나 되었고 보병은 바닷가의 모래알처럼 셀 수 없이 많았다.” 불레셋 군은 이스라엘 군을 숫자로도 압도하고 전쟁 무기도 훨씬 더 나은 듯 보이고 있다. 불레셋 군대에 대한 위의 서술은 불레셋이 표현하는 원리의 품질과 힘에 대해 말하고 있다. 마치 계시록 9장에서 기술될 큰 군대와도 같이 불레셋의 군대는 신앙 만을 고집 하는 원리를, 그들의 병거는 그 원리의 교리들을, 그들의 기마란 그 교리의 추론을, 보병이 바닷가의 모래같이 많다는 것은 과학물로 자기들 원리를 끝도 없이 확증해대는 것을 말한다. 에집트의 수모를 벗기고자 이스라엘이 할례를 받았던 길갈, 이곳에서 이스라엘은 불레셋의 수모를 벗기고자 사울과 합세하여 운집했다. 과거 이스라엘은 과학이라는 에집트의 속박에서 벗어났지만, 이제 그들은 신앙 만(faith alone)이라는 원리의 굴레 아래 있어 온 터인 바, 이 굴레는 자연적 인간에는 적절한 원리이나, 영적인 것에는 만만찮은 적이다. 불레셋이 진을 친 곳은 베다웬 동편 믹마스이다. 믹마스란 보물이란 뜻이고, 베다웬은 허무함의 집 또는 우상의 집이란 뜻이 있다. 자연적 인간의 보물은 지식이요, 그 인간의 우상은 자아와 세상을 사랑함이다. 이 인간의 노력이 집중되는 두 사랑은 허무한 것들이다. 그럼에도 자연적 인간은 그들의 에너지와 정신적 소유물을 그쪽을 목표로 방향 잡고 있다. 보물이 있는 곳에 마음도 역시 있게 된다.
위 구절과 같은 두 군대를 비교해 볼 때 “이스라엘 군은 전세가 불리한 것을 보고 저마다 굴이나 바위틈이나 구덩이나 웅덩이를 찾아 몸을 숨겼고, 더러는 요르단 여울을 건너 가드와 길르앗 지방으로 달아났다”는 이야기에는 하등 이상할 점이 없이 당연했을는지 모른다. 이 비열한 두려움은 실로 그들이 얼마나 살아 계신 하느님에게서 멀어진 신앙을 소유했었는지 여실히 알게 해 준다. 그들은 이 약속, 주님께서 자기들을 위해 싸워 주시고 자기들 아래 적들이 짓밟히게 해 주겠다고 한 약속은 까맣게 잊고 있었던 것이다. 주님의 위와 같은 약속 역시 조건이 붙은 약속이다. “만일 너희가 내 규례 가운데서 걸어가고 내 계명을 지켜 행한다면, 너희 중 다섯 명이 백 명을, 너희 중 백 명은 천 명과도 맞설 수 있게 해 주겠다.” 이런 그분의 약속이 이스라엘을 통해 우리에게 본보기를 보여 주시고 있다. 우리가 그분을 찾지 않고 그분의 계명을 지키지 않는 한, 우리는 자신을 방어하고 치켜올릴 수 있는 힘을 잃어, 우리의 불성실함을 이용하는 가공할 적 앞에서 기가 죽어 도망칠 수밖에 없다. 이 주제를 각 개인의 체험에서 찾아보자.
거짓 원리들이 우리를 제압하는 힘을 획득할 때, 그것들은 스스로 힘을 과시하는 바, 이 원리에 맞붙고자 나선 진리들은 대결을 피하고 우리 속 어두운 곳, 즉 거짓 생각들이나 이기적이고 세상적 애착들 안에 숨고, 급기야 자연적 의지나 이해성으로까지 도피하려 들고 만다. 거듭나는 삶에 대한 기독인의 경험에 관한 표본으로서 위와 같은 것, 또는 위와 비슷한 시련이나 투쟁들 모두 시험을 묘사하고 있는데, 이는 내향적 곤란이나 쓰라림, 말단적으로는 싸움에 관한 것이다. 마음의 이런 상태에서 악과 거짓들은 더욱 흥분되고 적극성을 띄워 그것들이 너무 강력하고 수효가 셀 수 없이 많아 자신으로서는 감당하기 불가능한 듯 여기고 만다. 최고의 인간이 있다면 그는 최고로 심한 시험을 가졌었다는 말이고, 어느 누구도 시험을 통과하지 않고는 진짜로 선해질 수 없다. 주님 역시 가장 고통스런 상황 속에서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소서…”라고 기도하시기도 했다. 길갈에 있는 사울, 전쟁에 질 것이라는 걱정으로 덜덜 떠는 군인들을 거느린 사울이 바로 위와 같은 시련에 빠진 상태이다. 이런 비상 사태에서 그는 무엇을 하고 싶을까? 대군을 이룬 불레셋은 자기 눈 앞에서 버티고 있고, 이스라엘은 어떤 도움도 없다. 이런 곤경에서 이스라엘은 실패 않는 근원을 가졌는데 그것은 하느님을 부르는 것이다. 국가적 이익 관계, 아주 중요한 결정을 해야 함에서 꼭 필요했던 것은 우림과 둠밈(출애굽기 28:30)을 수단으로 하던가, 제물을 수단으로 그분께 나아가 상의하는 것이다. 그리고 주님께 여쭈어 보는 것은 성직자 직분을 행하도록 권한이 부여된 사람을 통해서 하도록 되어 있었다. 사무엘은 길갈에서 사울을 만나 번제물과 친교 제물을 바치기로 이미 약속되어 있었다. 그러나 사무엘은 사울에게 자기를 칠일간 기다리라고 말해 둔 터였다. 당장이라도 불붙을 것 같은 작전 지역에 있는 사울이 자기가 기다리겠다고 약속을 했었다 해도 기다리는 그의 심정은 너무나 암담해 있었을 것은 충분히 납득된다. 그런 데로 사울은 칠일을 지체하다 싶이 보냈으나 사무엘은 길갈에 당도 안했고, 군인들은 그로부터 자꾸 빠져나갔던 바, 사울은 깊은 시름에 잠길 수밖에 없었던 것은 틀림없다. 이런 그의 상태는 참으로 암담한 시험의 상태를 표현해 주고도 있다. 그러나 시험 가운데서, 기도 속에서도 마찬가지지만, 신뢰 외에는 더 필요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만일 신성한 약속이 실패된 듯 여겨지고, 우리의 기도에 대한 응답이 즉각 와지지 않는다 해서 주님께서 은혜를 베푸셔야 하는 것을 깜박 잊으셨다고 결론지어서는 안 되리라. 우리는 그분을 기다리되 인내로 기다려야 한다. 그리고 기다리는 동안 악을 행할 어떤 생각으로 안달해서는 안 될 것이다. 사울은 이 원리를 충실히 해내야 함을 망각했다. 그는 시종들에게 번제물과 친교 제물을 가져오도록 했고, 즉각 그는 성직자의 직분을 행사했다. “사울이 번제를 막 드리고 나자 사무엘이 왔다.” 사울이 그를 마중 나가 인사했으나, 사무엘은 사울이 범한 죄를 알아채고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오?” 라고 꾸짖었다. 사울의 변명은, “군인들은 하나 둘 도망치고 선생님은 정하신 때에 오지 않으시는 데다가 불레셋 군은 믹마스에 집결해 있어 야훼의 노여움을 풀어 드리기도 전에 불레셋 군이 길갈로 쳐내려 올 것 같아서 부득이 번제를 드렸읍니다.” 사무엘이 다시 사울을 꾸짖었다. “그대는 어리석은 짓을 하였소. 어찌하여 그대의 하느님 야훼께서 내리신 분부를 지키지 않았소? 지키기만 했더라면 야훼께서 이스라엘을 다스릴 그대의 왕조를 길이 길이 세워 주실 터인데, 이제 그대의 대는 더 이어가지 못할 것이오. 그대가 야훼의 분부를 지키지 않았으니, 야훼께서는 당신의 마음에 드는 사람을 다시 찾아 당신의 백성을 다스릴 수령으로 세우실 것이오.”
위의 여건이 신성한 계획 속에 포함되어 있었다 라고 마음에 품어 보는 것은 불가능할 것 같다. 그리고 위의 사건이 역사 자체를 알려준다고 말하기보다는 더 깊은 신성한 의미를 이 역사 줄거리는 가지고 있다는 것 외의 어떤 다른 생각을 해 보는 것도 거의 불가능 할 것 같다. 사무엘이 늦게 당도한 것은 의심할 것도 없이 의도적인 것이다. 그는 사울이 어떻게 할 것인지도 알았다. 그래서 그는 사울에게서 이스라엘의 왕위를 몰수한다는 것을 천명하고 그 왕위를 계승할 또 다른 인물이 이미 선택되었음을 그에게 암시하기 위해 이미 준비되어 있었다. 유대인의 사회 질서에서 성직자의 직분을 찬탈하는 것은 아주 심각한 범죄였다. 그 이유가 그 행위는 큰 모독을 표현했기 때문인데, 성직자로서의 특성을 소유하지 않은 채 성직을 수행함은 자연적 인간 속의 기능이 영적 인간의 기능을 찬탈하는 것을 표현하고, 이는 영적 인간과 천적 인간의 관계에서도 그러한데, 마치 예복도 입지 않고 결혼식장에 입장하는 모습인 것이다.
이 신비스런 본문의 여건은 주님의 신성화 하심과 인간의 거듭남, 양쪽에 관련되는 더 높은 교훈을 가르치시기 위해 고안되어져 있다. 이 줄거리에서 사울이 표현한 신성으로부터의 진리의 작용과 심판, 그리고 다윗이 표현하는 신성한 진리의 정부 형태를 위해서는 신성으로부터의 진리가 통치하는 원리가 되어서는 안 되므로 거절한다는 것을 우리로 알게 하고 있다. 이 거절의 첫 원인이 된 것은 거룩한 예식을 드림에서 사무엘을 기다리는 대신 사울이 제물을 바치는 불법 행위이다. 주님의 신성화 하심을 묘사한 아브라함, 이사악, 야곱의 역사에 관한 아름다운 해설에서 사울의 행동에 있는 심각한 결말에 대해 추론할 수 있는 근거를 발견한다. “인간을 훈육하시는 과정은 처음에 과학물로부터 합리적 진리들로, 그 다음 지적인 진리들로, 마지막으로 천적 진리들로 진보해 간다. 만일 이 진보가 과학물과 합리적 진리로부터 지적 진리의 중개 없이 천적 진리로 만들어진다면, 이 천적 원리는 위반되어진 것이다. 그 이유는 합리적 진리는 지적 진리라는 매개를 거치지 않으면 천적 진리와 연결될 수 없기 때문이다.” 본문의 경우가 위의 말과 완전히 동일하지 않다 해도 최소한 거의 유사할 것이다. 사울이 표현한 잘못은 결합시켜 주는 매개 없이 낮은 원리가 높은 원리를 추구했다는데 있다. 이것은 더 높은 원리에 위반된 것인 바, 더 낮은 원리는 피해를 받아 파괴되고 만다. 이는 마치 신앙이 선행 이라는 매개를 통과함도 없이 사랑으로 단번에 건너뛰려 하는 것과 같다. 다시 말해 눈에 보이는 이웃을 사랑하지도 않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 있을까 말이다. 사울의 생애가 주님에 관한 것을 언급하고 있다는 가장 높은 의미의 측면에서 본문을 생각해 볼 경우, 사울의 잘못들을 주님이 그분의 생애에서도 그와 비슷하게 경험하셨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이런 악한 행동들은 그분의 행동들이 아니라 그분이 받은 시험들이었다고 이해해 두어야 할 것이다. 주님의 진보가 인간의 거듭남과 유사하다고 말한 경우에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예를 들어 과학을 사랑하는 마음을 표현한 하갈에게서 첫 합리적 원리를 표현한 이스마엘이 출생했다. 이 하갈이 지적 진리를 표현하는 그녀의 여주인 사라를 경멸한 줄거리가 창세기에 있다. 이에 대해 선견자는 말하기를, “주님에게 합리적 원리가 처음 잉태되었을 때 그것은 진리 자체가 아닌 진리의 가상(나타남)이었다. 이때 그분의 합리적 원리들은 지적 진리들을 경시했었다. 그러나 합리적 원리들이 신성이 되면서 가상이라는 구름들이 계속적으로 흐트러지고 지적 진리들이 진리 자체의 빛 속에서 그분에게 나타나셨는데, 이것이 이사악이 성장하자 이스마엘이 집에서 쫓겨나는 것으로 표현되어 있다. 사실 주님 자신이 지적 진리를 경멸하신 게 아니라 합리적 원리는 지적 진리를 경멸하는 본성이 있다는 것을 보시고 지각하셨을 뿐이다. 그러므로 그분은 그런 본성을 꾸짖으신 것이다.” 이제 우리가 다시 생각해 볼 것은, 사무엘과 사울은 주님을 표현하되 주님의 인성 측면에 있는 따로 따로 구분되는 부분이나 상태들을 표현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무엘이 사울을 책망한 것은 주님의 인성 중에서 더 높은 원리가 더 낮은 원리를 꾸짖은 것으로 이해해 두어야 한다. 넓은 의미에서 사무엘은 말씀으로서의 주님을 표현했다. 주님은 말씀, 또는 본질적으로 신성한 진리이셨다. 그러나 그분의 인성 속에서 주님의 본질 되는 진리는 갖가지 수준들, 천사나 인간, 심지어 가장 낮은 진리의 가상(appearance)까지 포함되는 모든 것들로 둘러싸여 있었다. 예언자로서의 사무엘은 내적 인간에 속하는 지적 진리를 표현했고, 사울은 외적 인간에 속하는 진리의 가상을 표현했다. “주님은 지적 진리의 원리로부터 생각하셨다. 이 진리는 합리성 위에 있는 진리요, 내면의 원리로부터 합리적 속성에 있는 것을 보고 지각할 수 있다. 주님이 이 능력을 가지셨다는 것은 다음으로부터 나타날는지 모른다. 내면의 원리는 외면에 있는 것을 지각할 수 있다. 또는 더 높은 원리는 더 낮은 원리에 있는 것을 지각할 수 있다. 그러나 그 반대는 불가능하다. 양심을 가진 이들도 이를 할 수 있어 실습되기도 한다. 그 이유가 양심에 반대되는 어떤 것이 생각 안으로 흘러들 때 또는 의지 속의 경향성에 들어올 때 그것을 통각(apperceive)할 뿐 아니라 그것이 범죄에 속한다고 꾸짖는다. 게다가 이런 자극을 느낄 수 있다는 생각에서 고통을 받기도 한다.” 그러므로 사무엘은 사울을 꾸짖었지만 자기 스스로 슬퍼하기도 했다. 우리는 진리의 가상들을 통하여 시험에로 인도될 때도 있다. 그 이유가 악마는 성경의 가상적 진리(apparent truths, 눈에 보여진 대로의 진리)를 통해 우리를 계속 시험하거나 악한 행동을 하도록 충동질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바깥쪽 악을 분명히 볼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어 이를 비난할 수 있고 유혹에 약한 자신, 시험만 오면 넘어지는 자신 때문에 슬퍼하기도 하며, 심할 경우 현재의 자기 마음의 통치 형태를 제거하고 또 다른 형태의 정부를 필요로 하기까지 한다. 그러나 실지로 통치 형태가 전환되는 때나 상태는 곧바로 오지 못한다. 이런 대 변혁이 거행되기 전, 심각히 생각해야 할 많은 가르침들이 우리에게 계속 주어진다. 이런 가르침 중 일부가 본 장 안에도 게재되고 있다.
“그리고 나서 사무엘은 일어나 길갈에서 떠나 베냐민 기브아로 올라갔다. 사울이 자기와 함께 한 백성을 계수 하니 육 백 명 가량 이었다.” 더 높은 것은 언제나 더 낮은 것에 영향을 준다. 그러나 이 영향력이 언제나 느껴지고 지각되는 것은 아니다. 사실인 것은, 더 높은 원리는 적극적인 주체가 되어 더 낮은 원리에 작용하지 않는다. 그러나 더 낮은 원리는 실험실의 시약 같이 더 높은 것 그 자체인 냥 행동한다. 만일 더 낮은 원리가 더 높은 원리의 실존을 언제나 지각하여 자기 행동의 힘과 생명을 더 높은 것에 기대고 있다면, 더 낮은 원리의 자유는 언제나 중단되고 있을 것이다. 가끔 경우에 따라서 더 높은 진리가 그 진리의 집을 떠나 더 낮은 진리가 지각할 수 있는 데로 내려오기도 한다. 사무엘이 사울에게 온 것은 사울이 사무엘을 지독하게 필요로 할 때였다. 그리고 지금 사무엘은 떠나고 있다. 사무엘은 평지에 있는 성에서 언덕(산)위에 있는 레위인의 성으로 올라갔다. 의심할 것도 없이 그는 자기가 견책했던 사울을 위해 기도하고, 그가 슬퍼할 수밖에 없었던 조건들 때문이었으리라. 사울은 자기와 함께 하고 있는 백성의 수를 세어 본다. 남아 있는 군인은 겨우 육 백 명이었다. 이 숫자는 이스라엘이 당해 왔던 궁핍(strait)을 암시하고 있다. 숫자 6은 땀흘림, 또는 슬픔을 표현해 준다. “사울과 그의 아들 요나단이 거느린 군대는 베냐민 지방 게바에서, 믹마스에 진을 친 불레셋 군과 대진하였다.” 그러므로 불레셋은 이스라엘에 소집령이 내리기 전 있어 왔던 장소나 상태로 되돌아 와 있다. 이 상태에서 “기습 부대가 셋으로 나뉘어 출동하였다. 한 부대는 수알 지방 오브라 쪽으로 향하고 다른 한 부대는 벳호론 쪽으로, 나머지 한 부대는 스보임 골짜기를 굽어보고 광야가 바라보이는 지역으로 향하였다.” 수알이란 여우들의 집, 벳호론은 깊은 동굴이 있는 곳, 스보임은 썩은 고기를 먹는 곳 등등으로 이 지명들은 야만적인 광야를 암시해 주고 있다. 이 암시에 한가지 예외가 오브라인데 그 뜻은 새끼 사슴이란 뜻이다. 참으로 이스라엘은 새끼 사슴같이 무방어적 상태, 벌벌 떠는 상태, 추격자로 인해 바싹 얼어붙은 상태이다. 기습 부대가 포위하려 돌고 있는 광야에는 동굴, 웅덩이, 바위투성이, 가파른 지역들로 이루어진 지역인 바, 이스라엘의 많은 백성들이 불레셋이 두려워 도망가 숨은 장소들이다. 이제 그들은 불레셋의 먹이가 될 판이다. 적에 대한 공포가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보다 더 강해질 때 우리의 마음도 이와 똑같이 된다. 살겠다고 도망치는 것은 실로 자아 파멸의 수단이 될 뿐이다.
일련의 주목해 볼만한 서술이 본문 끝 문단에 등장하고 있다. 이스라엘이 방어할 힘이 없고 언제나 불안한 상태로 살아야 하는 이유, 강력한 적이 이스라엘을 제압하고 있게 된 이유를 이렇게 설명해 놓고 있다. “그 당시 이스라엘에는 대장장이가 한 명도 없었다. 불레셋이 히브리인들에게 칼이나 창 같은 것을 만들지 못하게 했던 것이다.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보습이나 곡괭이나 도끼나 낫을 벼리려면 불레셋 사람이 사는 데로 내려가지 않으면 안 되었다. 보습이나 곡괭이를 벼리는 값은 삼분의 이 세겔이었고 도끼를 벼리고 낫을 가는 값은 십분의 일 세겔이었다. 그래서 그 전쟁이 터졌을 때 사울과 요나단을 따르는 무리에게는 칼도 창도 없었다. 무기를 가진 사람은 사울과 그의 아들 요나단 뿐이었다.” 불레셋의 위와 같은 정책은 그 이후 느부갓네살에 의해서도 비슷하게 나타난다 (열왕기하 25:14, 예레미야 29:2). 이와 같은 정책은 서로 비슷한 조건 속에 있는 고대 국가들에게 있어 특이한 사건이라고는 볼 수 없다. 따라서 이에 대해서는 쉽게 설명되리라 본다. 비슷한 시대에 있던 두 국가, 바빌론과 불레셋의 정책에 관한 영적 상응을 이해하는 데는 별 어려움이 없다. 정복한 나라가 정복당한 백성이 다시 방어 태세를 못 갖추게 하려는 것은 당연한 수법이나, 그렇다고 그들의 생활 수단까지 강취하는 것은 생각해 보아야 할 일이다. 어찌됐든 전쟁 무기나 농기구 모두 교리와 상응된다. 두 기구는 방어와 경작을 위해 우리가 고용하는 것들이다. 그러나 교리들은 진실이거나 거짓일 수도 있다. 따라서 그 교리가 하느님의 의지와 지혜에 일치하느냐, 인간의 의지와 지혜에 일치하느냐에 따라 그 교리는 전혀 달라진다. 농기구를 만드는 대장장이는 교리를 만드는 수단인 총명이다. 그런데 이 총명은 자아나 주님으로부터 파생되어진다. 자아 총명은 혀로 일을 치르는 대장장이이다. 이들은 숯불에서 달구고 망치로 두드려 모양을 잡는다 (이사야 44:12). 모루에 대고 두드리는 자를 칭찬하여 “그 쇠 참 잘 붙였다 ”라고 한다 (이사야 41:7). 천국에서 파생된 총명에 관한 가장 완전한 예를 들라고 한다면, 아마도 창세기 4장 22절의 두발가인일 것이다. 그는 구리와 쇠를 다루는 대장장이라고 서술되고 있다. 두발가인은 태고 교회에서 진정한 총명으로부터 구리와 쇠가 의미하는 자연적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을 타인들에게 가르친 이들에 대한 이름이다. 이스라엘 온 땅에 대장장이가 없었다는 것, 히브리인들이 칼이나 창을 만들지 못하도록 했다는 것, 모든 이스라엘인들이 보습이나 곡괭이나 도끼나 낫을 벼리려면 불레셋 사람들에게 가야만 했다는 것, 등등의 자연적 사실에 포함된 영적 사상은 이러하다. 신앙 만으로 만사가 해결된다는 원리가 널리 퍼져 강세를 떨치면 교회 속의 사람들은 진정한 총명, 이 총명으로 가능할 건전한 교리까지 모두 빼앗기고 말아 악이나 잘못과 싸울 때 긴요하게 이용될 무기가 없게 된다는 것, 게다가 선하고 진정한 것을 자신 속에서 함양시키는 것 마저 삶과 아무 관련 없는 원리들에 지휘 받아 이리저리 흔들린다. 종교의 원리가 삶에 응용될 수 있는 종교만이 진정으로 살아 있는 종교이다.
마지막 문단에서 묘사하는 서술은 교회의 마지막에 거행되는 것과 같은 모습이다. 교회의 끝이 오는 것은, 사랑이 차가운 상태로 되고 믿음이 지상, 즉 교회에서 더 이상 발견 안 될 때이다. 진정한 사랑이 소멸되고 진정한 믿음이 힘을 잃을 때 거짓 사랑과 겉치레의 신앙이 자리를 차지하는 바, 이것이 이스라엘이 불레셋에 종속 당하고, 유다가 바빌론에게 포로가 되는 것으로 표현되어져 있다. 이런 모습의 첫 상태가 오늘 본문에 관련된 이스라엘의 처지로 표현되고 있다. 전쟁시에 이 백성들은 칼이나 창이 없었다. 이들은 병거나 기마, 다시 말해서 교회의 적인 거짓 교리나 추론들을 당해 낼 재간이 없었다. 그 이유가 적들이 저항할 수 있는 힘을 빼았어 버렸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백성들의 누구에게서도 칼이나 창이 발견 안 되고 있지만 사울과 요나단에게서는 발견되고 있다. 왕 계열에 속하는 이 두 사람의 수중에 있는 무기가 믿지 못할 정도의 위력을 다음 장에서 발휘해 주고 있는 바, 이를 두고 시편은 이렇게 노래한다. “허리에 칼을 차고 보무도 당당하게 나서시라. 진실을 지키고 정의를 세우시라. 당신의 오른팔 무섭게 위세를 떨치시라. 그 날카로운 화살이 적의 심장을 꿰뚫으면, 만방은 당신 발 아래 엎드러지리이다” (45:3-5). 그리고 이사야 63장 3절에서 이렇게 증언해 주고 있다. “나는 혼자서 포도주 틀을 밟아야 했다. 나의 백성 가운데 나를 돕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사무엘상 12장 해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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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상 제12장

왕의 통치에 관해 사무엘이 충고하다

판관의 기능이 중단되어질 때, 사울의 왕권 체제는 더욱 단단하게 건설될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 사무엘은 백성들에게 고별사를 전하고 있다. 긴 세월 동안의 직무 수행에 있었던 그의 자세, 그리고 그 직무를 벗는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더불어 그 직무 수행 동안의 자기의 성실함에 대해 이스라엘 모든 지파의 동의를 얻어 입증하고 있다. “보아라” “나는 너희가 원하는 대로 너희를 다스릴 임금을 세웠다. 이제부터는 이분이 임금으로서 너희를 이끄실 것이다. 나는 이렇게 늙어 백발이 되었고 내 아들들도 너희와 함께 있다. 나는 젊어서부터 이 날까지 너희를 이끌어 왔다. 이제 나에게 무슨 불만이 있거든 야훼께서 계시는 이 자리, 그가 세우신 임금 앞에서 털어놓아라. 내가 누구의 소를 빼앗은 적이 있느냐? 누구에게 뇌물을 받고 눈감아 준 일이 있느냐? 그런 일이 있으면 다 갚으리라.” 이런 직접적이고 엄한 호소에 백성들은 응답했다. “우리를 억압하신 적도, 착취하신 적도 없습니다. 아무에게서도 무엇하나 빼앗으신 적이 없읍니다” 하고 대답하자 사무엘이 그들에게 다짐한다. “너희는 내 손에서 아무런 부정도 찾지 못했다고 하였다. 이 날 야훼께서 이 일의 증인이 되셨고, 그가 기름 부어 세우신 임금도 증인이 되셨다.” 백성들이 “그렇습니다” 하고 대답한다.
사무엘은 거룩한 역사(판관 시대)에서 언급되는 공적 지위에 있던 사람들 중 빼어난 인물 중의 하나요, 악한 시대에 개혁을 목적으로 주님께서 들어 세워 사용한 도구 중 가장 유명한 사람이다. 이스라엘에 사무엘이 등장했던 때의 사회는 풍기 문란했고, 성직자 역시 방탕했었다. 공정해야 할 재판도 썩어 있었는데, 사무엘은 이를 성실하게 원상복귀 시키고, 주님께 바치는 예물 역시 매우 혐오하도록 되었지만, 이 예물 역시 귀하게 여겨지게 회복시켰다. 그는 백성들의 타락해 가고 불순한 우상 숭배에서 진정한 하느님을 예배하는 쪽으로 되돌아오게 했다. 세상적 무기들을 사용하지 않고도 제물과 기도 만으로, 이스라엘을 멸종시키려 든 싸움에서 백성을 구해 내었다.
사무엘의 역사는 위와 같은 그의 성격과 행위에 못지 않게 그의 일생 자체가 표현해 주는 것 역시 우리로 주목하게 한다. 사무엘의 아버지 엘카나는 두 아내를 거느렸다. 야곱의 두 아내 같이 한 아내는 자식을 낳았는데, 정작 그가 사랑했던 아내는 아이를 갖지 못했었다. 똑같은 진리를 두 쌍의 아내들이 표현하고 있다. 거듭나는 삶의 초기 단계에서 자연적 애착은 열매가 풍성하나, 영적 애착은 결실을 맺지 못한다. 다시 말해 자연적인 것이 먼저요, 영적인 것이 나중에 해당된다는 말이다. 그러나 영적 애착이 비록 결실을 못 가지고 있다 해도 열매를 맺고자 하는 열렬한 바람은 있어 언젠가 이 바람은 아이로 축복되어진다. 사무엘은 한나의 기도에 대한 응답이요, 아이를 주시면 주님께 바치겠다는 그녀의 서원에 대한 성취이기도 하다. 사무엘은 이스라엘 후손들에게 있어서 두 번째의 요셉이라고도 할 수 있다. 라헬의 아들처럼 사무엘은 이스라엘(야곱)의 후손들을 구원하여 그는 구원자(Saviour)라는 특출한 형태로 되었다. 그리고 그의 개인적 역사와 성격은 주님 자신의 역사나 성격과 유사한 대목을 많이 지니고 있다. 주님의 초기 삶은 성전과 관계를 갖고 있고 그분의 선교 중 하나는 거룩한 구역에까지 침범한 장사꾼들을 추방하는 것이었다. 일설에 의하면 사무엘의 나이 12세 쯤에 그는 신성한 메시지를 엘리에게 전달했다는데, 이 외의 사항에 대해서는 그가 성인으로 이스라엘 후손들 앞에 예언자로 등장할 때까지 더 알려진 사항은 없는 것 같다. 그 후 그의 삶은 뛰어난 순수성과 유용함으로 일관되고 있다. 사무엘이 표현한 진리, 주님 자신이 표현한 진리 모두는 교리를 위해, 재 보증을 위해, 교정을 위해 정의에 관한 훈육 등등을 위해 매우 유익한 것뿐이었다. 그리하여 이 하느님의 사람은 모든 선한 일들로 철저히 완전하게 점철되고 있었다. 본문 이 후의 사무엘은 진리 측면보다는 선의 측면에서 주님을 표현하게 된다. 그 이유가 이제부터 그는 성직의 기능만을 수행할 뿐 왕권적 기능은 분리되어 사울에게 넘겼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는 판관이라는 그의 특성, 뿐만 아니라 성직자요 예언자로서 지금 백성들에게 연설하고 있다. 그가 백성에게 한 질문들을 주님의 백성의 영적 삶이나 교회 속의 규율에 따른 행동 지침과 관련해 볼 때 매우 의미심장하다. 주님의 백성에서는 영적 선들이 있고, 거기에 백성으로서의 특전과 권리도 있다. 그런데 이런 것들을 잃는다면 그들이 지닌 유한한 것, 일시적 소유물을 잃는 것보다 더 큰 불행이 되고 만다. 그들은 선하고 참된 것에 관한 지식을 획득해서 소유하는 능력이 결핍되어진다. 소나 나귀를 그들로부터 빼앗는다는 것은 그들의 마음을 경작하고 풍부하게 하는데 꼭 필요한 것이 결여된다는 말이다. 자신들의 부함이 경건한 용도만을 위할 때를 제외하고는 일들이 자신들을 구해 주지 않는다 라고 설득 당함으로 그들은 제한된 자기들 노력의 결실을 속아 빼앗길는지 모른다. 믿음과 실제에 관한 문제에서 자신들 스스로 생각하여 뜻할 수 있는 권리를 부정함으로 그들은 억압되어질는지 모른다. 종교적 경건이나 자선 같은 특별한 행동은 신성한 판단자로 그분의 영원한 판단의 법칙을 뒤집게 하거나 중지 시킬 수 있어 천국에의 입장을 허용하게 해 준다고 믿도록 유도해서 뇌물을 바치도록 유인될는지 모른다.
모든 이스라엘의 눈에 정당한 사무엘은 그들을 불러 그들 앞에 서서 그들의 조상들, 그리고 지금의 그들에게 베푸신 주님의 권능에 대해 추론하고 있다. 에집트로부터의 구원, 가나안 땅에서는 시스라, 불레셋, 그리고 모압으로부터 건짐을 받은 경험을 사무엘은 간략히 다시 더듬고 있다. 위와 같은 것들로부터 받은 억압은 일반적으로 교회의 멤버들에 닥치는 각기 다른 시험들을 표현한다. 이런 시험들은 거짓 과학이라는 에집트로부터, 불레셋이라는 왜곡된 신앙으로부터, 모압이라는 왜곡된 선에 발생된 악들로부터 있어진다.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있는 국가들에게 복종 당함은 그들이 하느님을 잊은 결과요, 그들이 해방됨은 그분께 다시 돌아간 결과이다. 모세와 아론을 수단으로 주님은 에집트에서 이 백성을 건지셨고, 여룹바알, 바락, 입다, 사무엘 등등은 가나안 땅 내의 적들로부터 건지시기 위해 도구로 들려졌던 인물들이다. 이를 수단으로 교회 속의 멤버들도 잘못된 믿음이나 행동에서 건져진다. 입법자 모세로부터 판관 사무엘까지에서 간략하나마 우리가 보는 것은, 진리는 우리를 가르침으로 시작해서 우리가 그 진리로 판단함으로 종결짓는다는 것이다. 우리는 모세와 사무엘 사이에 사제인 아론, 미디안을 쳐부순 여룹바알, 바락(구번역, 베단)과 암몬족을 쳐부순 입다가 있다. 아론은 진리로부터의 선을 뜻하는데, 이로부터 진정한 예배가 솟아난다. 선으로부터의 진리, 이를 수단으로 세상적 사랑과 이기적 사랑의 예배가 극복되는데, 이것을 여룹바알이 표현한다. 이 이름은 과거 기드온이 바알 제단을 허물었을 때 받은 이름이다. 위 진리로 획득되는 선을 베단(바락)이 표현하는데, 이는 기름(fat), 또는 건전함(robust)을 뜻한다. 그리고 진리를 모독하려는 것을 극복하게 하는 사랑으로부터의 진리를 입다가 표현하고 있다. 입다는 심정 속의 순수한 애정을 주님께 바침으로 구별되는 원리이다. 과거 입다가 전쟁에서 승리하게 해 달라는 서원의 약속 이행에 그의 딸이 기꺼이 응낙함에서 입다가 표현한 원리를 살필 수 있다.
위와 같은 구원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들은 암몬족의 왕, 나하스가 공격하여 위협받자, 사무엘에게 말하기를, “안되겠읍니다. 차라리 왕을 세워 우리를 다스리게 해 주십시오” 라고 하여 주님이 그들의 왕이셨음을 잊고 있었다. 그들이 바랐던 왕, 그래서 주님께서 세운 왕이 지금 그들 앞에 서 있는 것이다. 그리고 사무엘은 엄중히 경고하여, “만일 너희가 야훼를 두려워하여 그를 섬기며 그의 말씀을 듣고 그의 명령을 거역하지 아니하고 또 너희 뿐 아니라 너희를 다스리는 왕이 야훼 너희 하느님의 뒤를 따르면 좋으려니와 너희가 야훼의 말씀을 듣지 않고 그의 명령을 거역한다면 야훼께서 손을 들어 너희와 너희 왕을 치실 것이다” 라고 선포했다. 우리가 보다 높은 선으로 통치 받기를 거절할 때 보다 낮은 선으로 규율하심으로 우리의 허약 한데까지 그분의 손길을 뻗으신다. 그러나 통치의 어떤 종류이든, 형태에서이든 결코 변하지 않는 한 가지 조건, 이 조건의 충족에서 그분의 보호와 축복은 존재한다. 반드시 주님을 경외하여 그분의 계명을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
위와 같은 엄중한 경고 외에 사무엘은 하늘로부터의 징조를 백성에게 주고 있다. “지금은 밀 거두는 때가 아니냐? 내가 주님을 불러 아뢰면 주님께서 천둥과 함께 비를 내리시리라. 너희가 그것을 보고 주님 앞에서 왕을 세워 달라고 한 일이 얼마나 큰 죄인지 깨닫게 될 것이다. 사무엘이 주님께 아뢰자 그 날로 주님께서 천둥과 함께 비를 내리셨다.” 본 장에서 사무엘에 몇 번씩 다시 상기시켰던 사항과 사무엘의 기도에 대한 응답인 “놀라운 일” 사이에는 어떤 연결점이 있는 것일까? 그렇지 않으면 하느님의 불쾌감에 대한 장엄한 징조라고만 생각하여야 할까? 그 당시 이스라엘 백성 자신들에게는 장엄한 징조, 놀라운 사건 그 이상의 어떤 의미가 없었다. 그러나 표본이 된 백성들에게 있었던 모든 사항은 하나의 본보기로서 우리에게 주는 충고인 바, 매 사건의 줄거리에는 의미를 가지고 우리에게 교훈을 주고 있다. 지상의 열매를 거두어들이는 추수(harvest)는 선한 삶을 거두어들이는 것, 즉 진리의 씨가 정직한 심정이라는 선한 마음(땅)에 뿌려져 60배, 100배로 생산된 선한 삶의 열매를 거두는 것에 대한 표현적 상징이다. 그러나 추수는 심판도 상징하고 있다. 수확하는 때는 선을 위해서 뿐 아니라 악을 위해서도 있기 때문이다. 농부가 씨를 뿌리고 거둘 때, 그는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거두게 된다. 동시에 밀과 가라지를 분리시키듯 추수(심판)때는 의로운 것과 사악한 것이 분리된다. 좁은 의미에서 추수는 각 개인의 지상 삶의 끝에도 있게 되지만, 또한 지상 생활 속에서의 마음 그 자체 속에서 선과 악이 분리되는 것도 넓은 의미에서의 심판이다. 이 심판은 시험의 상태에서 흔히 거행되는데, 이 때 선과 악이 각자의 마음과 삶에서 영적으로 결정된다. 이와 같은 시험의 상태가 앞 장에서는 이스라엘과 암몬과의 싸움으로 표현되고 있다. 영적 이스라엘이 미워해야 할 적을 극복하고 소탕해 버린 날이 “밀 거두는 때”인 것이다. 영적 의미에서의 밀은 사랑과 선행으로부터의 선이고, 밀 거두는 때란 사랑과 선행 속에 있는 상태이다. 이 절에서 표현된 상태는 시편의 다음 구절과 같은 상태이다. “아, 나의 백성아, 제발 내 말을 들어다오. 이스라엘아, 나의 뜻을 따라 걸어다오. 나 당장 너희 원수들을 쳐 부수리라. 나 당장 너희 압제자들에게 손을 대리라…. 그러나 이 백성은 내가 기름진 밀가루로 먹이리라…” (시편 81:13,14,16). 그런데 우리가 생각해 볼 것은, 이 백성들은 주님께 귀를 기울이지 않았고, 그분의 길을 걷지도 않았다는 것이다. 주님이 그들의 왕이셨는데도 그들은 왕을 갖는 쪽을 선택했다. 다시 말해 그들은 사랑보다 진리로 통치되기를 선택했던 것이다. 어찌됐든 주님은 진리로부터 싸우는 이들에게도, 사랑으로부터 싸우는 이들에게도 공히 승리를 주신다. 그러나 진리로부터의 정복은 사랑으로부터의 정복에 비해 악의 뿌리를 뽑는 데는 훨씬 약하다. 이것이 사무엘이 이스라엘 온 지파를 향해 꾸짖는 “불쾌한 것”이요, 이를 그들에게 더 인상 깊게 해주기 위해 밀 거두는 때에 천둥과 비를 주님께 구하게 된데 대한 의미이기도 하다. 추수 때 비가 오는 것이 값진 선물로 간주한 구절을 잠언에서 발견해 볼 수 있다. “미련한 자에게는 영광이 어줍지 않다. 여름에 눈 내리고 추수 때 장마 드는 격이다” (26:1). 성서에서의 미련한 자란 약한 자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니라 불쾌한 자, 사악한 자를 일컫는 말이다. 사무엘이 하늘로부터 내려 달라고 한 천둥과 비는 그들에게는 좋고 값진 것이었으나, 그들은 그것에 잘 어울리지 못했다. 그들은 자기들 상태와 하모니를 이루지 못하고 있다. 사무엘은 그들의 죄를 기억나게 해주어야 했다. 그래서 그들이 빠져 있는 상태에 관해 말해 준 것이다. 천둥은 하느님의 소리라 불리고, 왕의 아들이란 신성한 진리 측면에서의 주님인 바, 이렇게 말해진다. “그분은 풀밭에 내리는 단비처럼 오시리라”(시편 72:6) 그리고 약속하시기를, 우리가 힘써 그분을 알려 한다면, “단비가 내리듯 봄비가 촉촉이 뿌리듯 그렇게 오시리라” (호세아 6:3). 하느님의 사랑과 진리, 이에 대한 상징물이 천둥과 비인 바, 이는 사랑과 진리에 거슬려 죄지은 자에게 내려 올 때의 모습이요, 백성들이 주님과 사무엘을 크게 두려워했듯 두려움을 자극한다. 그럼에도 이 자극은 단지 노예적인 두려움만 수반되게 하는게 아니라, 거룩한 두려움, 사랑이 있는 두려움도 있다. 천적 사랑과 진리가 우리의 영적 상태 안에서 명백해질 때, 비록 우리의 상태가 성숙되고 결실이 풍부한 상태라 해도, 마치 천둥과 비가 밀 거두는 때에 이스라엘에게 내려 왔듯이, 그분의 사랑과 진리는 두려움, 또는 경외심, 즉 사랑과 두려움이 혼합된 상태를 불러 일으켜 주고야 만다. 시몬 베드로가 예수님의 분부대로 그물을 던져 많은 고기를 잡게 되었을 때, 이 상황은 그에게 예수님을 드높여 부르도록 해주면서 자신의 불완전함을 자각하게 하여 그는 이렇게 소리내어 말했다. “주님, 저는 죄인입니다. 저에게서 떠나 가 주십시요” (누가 5:8). 각자의 심정과 지성에 오게 된 강한 인상이 자신으로 주님을 더 완전하게 신뢰하는 쪽으로, 더 높은 상태를 더 열렬히 호흡하는 쪽으로 인도해 주게 된다면 그 사람은 행복해 지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은 이렇게 사무엘에게 간절히 호소하고 있다. “당신의 하느님 야훼께 기도 드려, 당신의 종인 우리들로 하여금 죽지 않게 해 주십시요. 우리가 이미 저지른 죄도 모자라 왕을 세워 달라는 못된 짓을 더 하였읍니다.” 이런 그들의 행동이 우리에게도 있어져야 함을 본문은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다. 이와 같은 죄는 사무엘에 의해 그 백성들에게 자주 통고되어 왔던 바이다. 그러나 그 백성들이 이렇게 고백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리하여 사무엘이 본 장에서 다시 그들에게 그들의 잘못을 반복해서 거론한 목적이 성취된 것이다. 사도 요한이 에페소 교회에게, “… 그러므로 네가 어디에서 빗나갔는지를 생각하고 뉘우치고, 첫째 되는 일들을 다시 하여라…” 라고 말했듯이, 회개는 이 백성들에게도 지금 과거 행실을 되새겨 보게 끔 해 주고 있다. 그리고 예언자는 그들이 죽지 않도록 주님께 기도해 주는 일을 소원 받고 있다. 백성을 위해 기도함으로부터 사무엘은 그들의 위로자가 되고 있다. “두려워하지 말라. 비록 너희가 못할 일을 했지만, 앞으로는 야훼를 떠나지 말고 성심껏 야훼를 섬기도록 하여라. 허수아비들을 따르지 말아라. 그것들은 너희를 도울 수도, 건져 줄 수도 없는 헛된 것들이다. 야훼께서는 너희를 당신의 백성으로 삼기로 하였다. 당신의 높으신 이름에 욕이 돌아가지 않게 하기 위하여 너희를 버리지 않으실 것이다. 나도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리라. 기도하지 않는 죄를 야훼께 짓는 일은 결코 없으리라.” 그가 백성들을 위로하여 용기를 북돋고 그들을 위해 기도해 주기로 약속하면서 이렇게 첨부하고 있다. “나는 너희에게 무엇이 좋고 바른 일인지를 가르쳐 주리라. 야훼께서 너희에게 놀라운 일을 해 보이셨으니, 너희는 야훼를 두려워하며 거짓없이 성심으로 그를 섬겨야 한다. 그러나 만일 여전히 못된 짓을 한다면 너희와 너희 임금이 모두 망할 것이다.” 이것들이 진정한 예언자의 말들이다. 그는 죄를 확신시켜 주어 회개 쪽으로 인도해 준다. 그러면서 그는 죄를 뉘우치는데 신성한 호의를 약속하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고 가르친다. 이 모든 사항은 메시아를 표현하는 사무엘의 특성과 면밀히 일치하고 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재 입증해 주시고 위로해 주셨으며 그들을 위해 기도해 주고 가르치셨다. 현재의 우리를 위해 그분은 그분의 영과 말씀으로 위의 사항들을 섭리해 주신다. 이에 더해서 교회 내에서 진정한 예언적 특성을 잘 해내는 이들을 통하는 원격 조종으로 우리를 인도해 주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