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왕기상 6장 해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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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왕기상 6장

솔로몬의 성전

우리는 성전 건축에 쓰인 나무와 돌에 관해서는 이미 살폈다. 이제 우리는 성전 안 쪽으로 들어가 그곳에 있는 방, 가구, 정교한 장식물에 관한 유추를 생각해보자.
고대 세계의 이런 경이로움에 관한 표징성이 지닌 일반적 의미는 이미 살폈다. 가장 높은 의미에서 성전은 주님의 육체(Lord’s body)를 예징한다는 것, 이 육체가 거룩한 모든 예배의 근원이요 대상이라는 것이다. 둘째 의미에서는 천국과 그분의 교회를 표현한다. 이 두 가지는 주님의 신비로운 육체(Lord’s mystical body)인데 그분의 가장 크고 가장 빛나는 형상이다. 세세한 의미에서 거듭나는 사람을 상징한다. 이 사람은 주님의 형상이요 가장 작은 형체에서의 천국이다. 이런 표징성의 고리를 완성하기 위해 우리는 그 고리를 반드시 씌어진 말씀에서 취해야 한다. 씌어진 말씀은 또 다른 형체에서 나타난 신성한 진리 자체이신 육을 입으신 말씀과 거의 같거나 동일시 해도 무방하다.
성전의 분리된 구역(division)으로부터 배우는 첫 큰 진리는 성막의 구역과 마찬가지로 그것들이 표현한 무한한 분과 유한한 인간 모두에 관한 지식의 기초에 놓여 있다는 점이다. 성전도 성막의 경우 같이 세 구역으로 되어 있다. 가장 깊은 장소는 지성소(holy of holies)라고 부르고, 둘째 장소는 성소(holy place), 그리고 뜰(court)이 있다. 신성한 울로 둘러 막은 이 마지막 장소는 두 겹으로 되어 안쪽 뜰과 바깥 뜰이 있는데 그 이유는 나중에 살피겠다.
성전의 이런 구역이 표현한 위대한 진리란, 신성한 존재 안에서, 그로부터 천국과 인간 안에는 세 개가 한 쌍(trine)이 되어 있다는 것이다. 하나 안의 세 가지 것(a trinity in unity)은 무한한 분과 유한한 것 모두에게서 완전을 이루는 보편적인 틀(type)이다. 영원으로부터의 신성한 존재, 더욱이 육을 입으신 이래 우리와 관계되는 신성한 분 안에는 세 가지 신성한 본질(trinity of Divine Essentials)이 있다. 사랑, 지혜, 권능(power)이 그것이다. 이 셋은 하느님 안에 존재하고 영원으로부터서 존재해 왔다. 하느님이 육을 입으신 이래 이와 똑같은 삼위일체는 주님의 본질 되는 신성, 그분의 신성한 인간성, 이로부터 진행되는 성령이다. 신약 성서에서의 경우 이 셋은 아버지, 아들, 성령이라 불리고 있다. 아버지는 본질 되는 신성, 또는 신성한 사랑이고, 아들은 신성한 인간성 또는 신성한 지혜이고 성령은 신성한 권능 또는 거룩한 진행(Holy proceeding)에 해당된다. 삼위일체의 이런 묘사가 외관상으로는 불일치한 듯 보이나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 않다. 그 이유가 신성한 지혜 또는 말씀이 육을 만들었고, 육을 만든 말씀으로부터 성령이 진행되기 때문이다. 영원으로부터 하느님은 삼위일체의 하느님이셨을 뿐아니라 신성한 사람(Divine Man)이셨다. 육을 입으시기 전, 그분은 처음 되는 원리에서의 사람이셨고, 더불어 육을 입으시는 사건 이후, 마지막 되는 원리에서의 사람도 되셨다. 육을 입으시기 전 그분은 창조자요, 보존자로서의 사람이셨고 더불어 육을 입으신 이후 그분은 구속자 구세주로서의 사람도 되셨다. 육을 입으시기 전, 그분은 천사들이 유일한 사람이었던 것 같은 사람이셨고, 육을 입으신 이후 그분은 지상의 우리가 사람인 것 같은 사람이 되셨다. 그러므로 육을 입으시기 전, 그분이 어떤 인물(person) 안에서 나타나실 때 천사들의 속성을 입으셨다. 이것은 천사들의 영적인 형체이고 그분의 현존의 천사, 언약 속의 천사라고 드넓게 불리우고 있다. 육을 입으셨을 때 비록 신성한 아버지에 속하긴 해도 인간 어머니의 자손, 어떤 개인 한 사람, 즉 자연계에 존재하는 인간 속성을 입으셨다. 지상에서 동정녀 어머니에게 태어나고 천국에 계신 신성한 아버지에 의해 영화된 인간성, 그리하여 살과 뼈라 불리는 최말단 까지도 신성이 된 이 인간성이 여호와의 성전이다. 인간의 믿음과 예배의 유일한 참 대상은 주 예수 그리스도이시고, 복되시고 영화로우신 인물이신 그분 안에는 신성한 삼위일체가 있다. 즉 하나 안에 셋이, 셋 안에 하나가 있다. 하느님 안에 있는 이런 셋은 세 인물(tripersonality)을 가르키는 게 아니다. 삼위일체란 한 인물(person) 안에 세 속성, 즉 사랑 지혜, 능력, love, wisdom, power 또는 신성, 인성, 운행하심, divinity, humanity, operation의 세 필수요소가 들어 있는 것이다. 신성한 삼위일체란 신성한 세 인물 안에 하느님이 각각 계신 게 아니라 한 인물 안에 세 가지 신성한 요소가 들어 있는 것이다. 우리는 주 하느님이 우리의 창조자, 구속자, 갱생자이심을 인식해야 한다. “하느님이 그분의 거룩한 성전 안에 계신다. 모든 땅의 것들은 그분 앞에서 잠잠해지어라.”
한 분 하느님 안에 있는 신성한 세 가지는 영원으로부터 조차 모든 것 안에 있는 삼위일체의 근원이다. 창조된 모든 것들은 신성한 근원에 있는 삼위일체의 속성의 닮은 꼴이거나 유추되고 있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본질과 형체, 그리고 사용함이 있다. 이런 세 가지는 아주 저급한 창조물에서 조차 사랑, 지혜, 힘과 상응되거나 유추되고 있다. 그 이유가 사랑은 본질 또는 생명이고, 지혜는 생명이 명백해지는 것, 또는 생명의 형체이고, 사용함은 생명의 힘 또는 적극적인 최말단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삼위일체와 하나 됨은 온 창조에 고루 스며있다.
천국적인 성전은 세 개의 큰 저택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것은 지성소와 성소 그리고 뜰이다. 이와같이 천국 자체도 셋으로 구별되어 진다. 이 중에서 삼 층의 천국은 사도 바울도 언급한 적이 있다. 이 세 천국에서 우리는 신성한 사랑과 지혜 그리고 신성한 작용의 형상과 그릇(receptacle)을 보게 된다. 가장 높은 천국, 세 번째 천국은 신성한 사랑의 형상과 그릇이고, 두 번째 천국인 중간 천국은 신성한 지혜의 형상과 그릇이며, 마지막 천국, 가장 낮은 천국은 신성한 작용, 신성한 힘의 형상과 그릇이다. 이 세 가지 중 마지막인 것에 나머지 두 가지 것이 담겨서 공존한다. 이는 성전 뜰을 거론하면 좀 더 설명된다. 이 뜰은 두 뜰, 즉 안 뜰과 바깥 뜰로 구분되어 있다. 세 천국들 중 가장 말단 또는 가장 낮은 천국은 둘로 나뉘어 있는데, 이는 두 개로 구분되어 버린 천국을 말하는 게 아니라 두 부분으로 나눈 것을 말하는데 이 부분들이 세 번째와 두 번째 천국과 상응되거나 직접적으로 교통되고 있다. 이 가장 낮은 천국은 나머지 천국의 기초이고, 이 천국은 가장 높은 천국, 천적 천국과 교통하는 한편, 두 번째 천국, 영적 천국과도 교통하고 있다. 최말단 천국은 다른 두 천국에 관련해 볼 때 상대적으로 자연적 수준이다. 이렇게 구분지어 보기 위해 그 천국은 자연적 천국이라 불린다. 나뉘어진 자연적 천국의 두 부분은 영적-자연적 천국과 천적- 자연적 천국이고 거기에 소속된 천사들도 그렇게 구별된다.
천국의 성전에 있는 또 다른 구분, 또 다른 특이함이 솔로몬의 성전에서 언급되어 표현되어져 있다. 상징적인 성전의 지성소에는 증거판- 즉 하느님의 손가락에 의해 씌어진 열 계명의 두 돌판이 담긴 궤가 놓여져 있다. 이 계명들은 주님 자신을 표현했다. 이 돌판이 지성소에 안치된 것은 주님의 현존이 가장 깊은 천국에서는 더 직접적이다는 것을 표현한 것이다. 율법의 돌판은 그릇 안의 그릇에 담겨 있다. 즉 율법이 지성소 안의 궤 안에 놓여졌기 때문이다. 가장 높은 천국의 위 또는 내부에 또 다른 천국이 있는데 이를 주님의 교회에 관한 저술에서는 인간의 내부 속의 천국이라 부르고 있다. 이는 가장 안쪽에 있는 그릇이고 하느님께서 인간 존재와 더불어, 참으로 그분의 왕국의 천사들과 함께 거주하시는 가장 높은 처소이다.
가장 작은 것이 가장 큰 것의 형상이기도 하다는 진리를 예증하는 데에는 인간 자신이 가장 적절한 본보기가 아닌가 생각된다. 각 인간은 자기 하느님에 관한 가장 높고 가장 완전한 개체로서의 형상이다. 그는 보편적 천국에 가장 가까운 형상이다. 그는 그의 하느님에 관한 가장 높은 개인적 형상이다. 그이유가 그는 무한한 원리들의 유한한 측정인 그릇이거나 하느님의 인물과 본성을 구성하는 신성한 본질의 그릇이기 때문이다. 하느님은 사랑 자체, 지혜 자체, 권능 자체이시고 인간은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원리들을 제 분량대로 받기 위해 창조되어 졌다. 우리는 이를 속성, 부속물(attribute)이라 단순하게 부르지 않는다. 그것들은 모든 속성들의 근원인바 그 자체는 신성한 본질, 신성한 실체 속의 참 본질이어서 모든 다른 것의 근원이다. 인간은 하느님의 형상인바 하느님으로부터 사랑과 지혜, 권능을 받는 기능을 가지고 있다. 하느님의 사랑을 수용하는 그의 기능은 그의 의지이고, 하느님의 지혜를 수용하는 기능은 그의 이해성이며 하느님의 권능을 받는 기능은 그의 언행이다. 이런 기능은 상속되기에 모든 사람은 복주시려는 창조자와 구속자로부터 영적이고 영원한 선물을 받을 수 있다. 이런 선물을 받는데 있어서 인간 타락으로 도입된 장애물이 주님께서 육을 입으시고 구속해주심으로 제거되었는바 모든 사람은 구세주 하느님으로부터 자유로이 제공된 사랑과 지혜와 거룩함을 자유로이 받을 수 있다. 이런 선물을 실제로 받게 되면 인간은 자기 하느님의 영적인 형상을 만든다. 즉 그는 새로운 창조물, 주님의 거룩한 영의 성전, 주님의 영화되신 육체의 성전의 형상, 가장 큰 사람의 거처인 가장 작은 천국을 만든다. 모든 사람은 각자 자신 속에 아주 작지만 천국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가지고 있다. 창조를 수단으로 그는 이런 모든 것을 잠재적으로 가지고 있으나 거듭남으로 실지로 가지게 된다. 모든 사람의 마음은 세 천국과 유추되는 세 가지 구분되는 등차로 되어 있다. 우리가 세상을 떠날 때 우리는 지상에서 사는 동안 열어 두었던 천국과 유추되는 천국에 들어 간다. 이런 천국의 등차들은 성전의 뜰과 성소, 지성소에 각각 상응하고 있다. 보편적인 천국 같이 인간 마음 안에도 안 뜰과 바깥 뜰이 있고 이 뜰이 거룩한 장소를 둘러 싸고 가장 거룩한 장소 내의 가장 깊은 곳에 신성한 증언을 담은 궤가 있다. 거듭남의 가장 아래쪽의 저택은 하느님의 성전 같이 거룩한 두 부분, 즉 선을 행하고 진리를 말하는 것, 또는 거룩한 생활과 거룩한 대화로 구성되어 있다. 이런 것들은 거듭나는 의지와 이해성의 최말단들이다. 그이유가 새로운 의지는 선한 일들에서 그 끝을 맺기 때문이고, 새로운 이해성은 곧바른 말들에 그 끝이 있기 때문이다.
인간 마음 안에서 가장 거룩한 장소 내에, 또는 그 위에, 더 높은 영역 즉 더 초월적인 기능이 있다. 이 안에서 영원한 분이 홀로 거주하신다. 이 안으로 인간의 내적인 사람은 결코 침입하지 못한다. 이것은 인간의 의식 세계 위에, 인간의 능력 너머에 있다. 인간이 아래쪽에 있는 마음 영역에서 사랑과 진리의 생명을 전복 시키거나 파괴까지 감행할 수 있을는지 몰라도 그는 위 질서를 결코 어지럽히지 못한다. 하느님께서는 스스로 이 질서를 자비적으로 보존하신다. 이 영역은 인간이 좌절한다 해도 결코 사라지지 않는 그분의 거룩하고 높은 장소이다. 이를 통해 주님은 모든 사람 안에서 자유와 합리성의 기능, 뿐만아니라 불멸성을 보존해 주신다. 또한 그분은 이 높은 장소로부터 언제나 내려 오실 채비를 하시고 있어 인간이 겸허해질 때를 기다리신다. 이렇게 인간이 결코 침투할 수 없는 인간 마음 안의 주님의 성소가 솔로몬이 성전을 헌당할 때 거룩한 영에 의해 말해지고 있다. 주님은 그분께서 깜깜한 어둠에 거하신다고 말하셨다. 가장 높은 인간과 천사적인 총명도 이 은밀한 장소를 싸고 있는 구름을 결코 관통할 수 없다. 주님은 그분의 초인간적 지혜와 인간을 압도할 수 있는 섭리의 두꺼운 어둠 안에 거주하신다. 그분의 관심사는 인간에게 영원히 있을 수 있는 흥미에 있고 그것만이 그분의 섭리 체제이다. 그분께서는 인간의 지혜와 의식 세계에서 자신을 감추여 있게 해서 마치 인간 스스로 자기가 향유하는 행복의 창조자나 된 듯 자기 이성에 따라 자유로이 행동하게 하시고 인간의 의식과 감각으로 결코 지각할 수 없는 어떤 섭리를 보고 인정하게 하는 데에는 오로지 계시라는 도구만을 사용하신다.
솔로몬의 성전에서 신성한 것과 영적인 것을 유추해 본 시리즈를 마감하려면 하느님의 말씀이 가장 특출한 주님의 성전이다는 것을 짚어 보아야 한다. 그분이 천국과 그분의 교회 안에 거주하시듯 말씀 안에서 천사와 사람들과 함께 거주하신다. 말씀 안에도 세 가지 구분되는 의미들, 즉 천적, 영적, 자연적 의미들이 있고 이 세 차원을 넘어 가장 높은 곳에 순수하게 신성한 것이 있다. 이곳까지는 인간 총명이 도달할 수 없다.
하느님의 명령에 따라 그분의 예배를 위해 솔로몬이 지은 성전의 일반적인 상응을 추적했지만 건축물의 세세한 모형에 대한 상응은 또 다른 장에서 살필까 한다. 한 가지 더 거론해 볼 게 있다. 그것은 사색, 또는 심사숙고함과 진리는 폭넓은 차이가 있다는 것에 관해서, 실지 응용하는 측면에서, 사색은 이리 저리 여러 방향을 향하는 반면 이론에 그칠 수 있으나 진리는 한 쪽 방향만을 가지고 실제에서 반드시 끝을 맺는다. 우리를 주님이 계신 안쪽으로, 위쪽으로 인도하고 구속과 구원의 섭리를 곰곰히 생각해 보게 하는 말씀의 상징적 의미들은 우리의 이해성을 계발하고 심정을 개선 시켜 주는데 결코 실패하지 않는다. 거룩한 말씀의 역사적 사건들은 가장 평범하면서도 명백한 대화체를 이용해 하늘 왕국의 가장 깊은 신비들을 상응을 통해 밝히 알린다. 따라서 상응에 의거 성서를 살피면 하늘 왕국에 관한 우리의 견해는 더욱 확장된다. 유대인의 성전이 주님이 그분의 백성과 함께 거주하시는 거룩한 성전을 상징한다는 것을 알게 될 때, 말씀의 원리에 의거 형성된 인간 마음이 주님이 거주하시는 처소라는 것도, 주님이 언제나 그 가운데 계시는 천사들의 천국이라는 것도, 무엇보다도 주님의 인성의 성전에는 신성이 충만되어 있다는 것도 동시에 알게 된다. 우리는 이런 신성한 선언을 실감하려고 노력해야 하리라. “보라 이제 하느님의 집은 사람들이 사는 곳에 있다. 하느님은 사람들과 함께 계시고 사람들은 하느님의 백성이 될 것이다” (요한계시록 21:3).

열왕기상 4장 21절 해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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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왕기상 4장 21절
솔로몬의 통치 아래 안전을 확실히 즐기다

지상의 정부가 그 백성들에게 확실히 보장해주어야 하는 두 가지는 외부로부터의 적에서 보호하는 것 뿐아니라 내부로부터 있는 적들로부터의 보호이다. 다시 말해 개인의 재산과 사생활이 침해받을까 하는 두려움을 제거하는 일이다. 국가적 안전의 가장 높은 조건은 솔로몬의 백성들이 “마음 놓고 살면서 저마다 자기의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두 발 뻗고 잘 수 있는” 것 같은 상황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적 왕국에서 안전에 관한 위의 두 종류는 손상되지 않게 보존되고 있다. 주님의 왕국의 평화와 안전성을 위협하는 외적인 적은 어둠의 권세이다. 이 세상에서 사악한 자를 구성하고 있는 적들은 영적 삶의 바깥쪽 경계선에서 행동하는 것들의 수단이다. 따라서 내적 삶이 내적 생명의 저자요 보존자 되시는 그분과 연결되어 있는 한, 그리고 심정 자체의 내향의 적들이 우리를 제압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하등 두려워해야 할 이유가 없다. 이런 적들이란 우리 자신의 악한 목적, 악한 기질이나 욕망이다. 어쨋든 주님께서는 구속과 구원을 수단으로 우리의 내, 외부에 있는 적들로부터 안전하도록 설비해두시고 동시에 그분의 나라의 백성이 됨으로 향유하는 복, 즉 안전과 번영을 즐길 수 있게 하셨다. 그분의 왕국 안에서 “유다와 이스라엘 사람은 저마다 자기의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안전하게 거주할 수 있다.”
주님의 왕국에서 일반적이고 세부적, 내적이고 외적인 통치 형태가 이 장에서, 솔로몬의 정부 형태에서 표징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왕자들과 성직자, 여타 높은 관리들 외에도 이스라엘 전역에는 왕과 왕실에 양식을 대는 열 두 관리들이 있었다. 그 관리 한 사람이 일 년에 한 달씩 양식을 대는 책임을 졌다. 통치자와 관리들 사이가 구분되면서 동시에 종속되는 관계는 주님의 왕국이 천국에서, 그분의 교회에서, 그리고 인간 마음 안에 있는 관계를 표현하고 있다. 주님의 왕국에서 선행의 원리가 가장 높은 직위에 앉아 있고 신앙의 원리가 둘째되는 그 다음으로 선행의 원리에 종속되고 있다. 솔로몬 왕국에서 가장 높은 공직자는 두 성직자들이고 이들의 직능은 사랑으로 섬김(ministry of love)과 상응된다. 매 달마다 교대해서 섬기는 열 두 공직자는 신앙으로 섬김에 유추되는 직능들이다. 영적 의미에서 시간대는 삶의 상태를 의미한다. 한 달이라는 간격은 달(moon)의 회전 기간에서 비롯된 것인바 이는 신앙의 상태를 상징한다. 신앙이라는 품위(grace)는 하느님께서 내적 인간의 하늘에 두신 “작은 빛(lesser light)”이므로 이 빛은 사랑과 선행이라는 더 “큰 빛(greater light)”에 의지해서 빛을 내는바 더 큰 빛에 종속된다 (창세기 1:16 참조).
위 유추에 일치되어 기독교 낙원에 있는 생명의 나무는 열 두 가지 열매를 매 달 마다 맺고 있다 (요한계시록 22:2). 그 이유가 사랑과 선행이라는 종교의 생명력 있는 원리는 그것과 연결되어 존재하는 신앙의 상태에 따라 열매를 생산하기 때문이다. 본질과 근원에서 사랑은 생명이다. 그러나 사랑은 신앙을 통해 발달되고 믿음에 의거 그 품질을 가진다. 영혼에 있는 사랑은 자연계에 있는 열과 같다. 사랑은 영적인 것의 가장 가까운 원인이다. 마치 열이 동물과 식물에게 생명인 것과 같다. 영혼에 있는 신앙은 자연계의 빛과 같다. 신앙은 영적 생명이 모습을 나타내는데 도구 역할에 가까운 원인이다. 마치 빛이 아름다움과 열매 맺음을 형성함에서 자연계의 생명이듯 하다.
사랑으로부터 신앙을 수단으로 일해서 만들어지는 매일의 양식(provision)은 영혼의 생명을 받쳐주는 영적인 수단을 공급한다. 그 이유가 영혼도 그 생명 유지를 위해서는 육체가 매일 음식을 섭취해야 하듯 매일 영의 양식을 공급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영혼에 있는 사랑이라는 생명은 매일 아침 장작을 공급받아 꺼지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인 제단에서 타고 있는 불과 같다. 이와 같이 영혼에 있는 하느님의 사랑은 그 사랑의 꺼짐을 막고 동시에 그 사랑의 힘을 새로이 하기 위해 가르침과 정의의 실제화를 계속적으로 공급받는다.
“솔로몬의 하루 양곡은 고운 밀가루 삼십 섬, 거친 밀가루 육십 섬, 기름진 소 열 마리, 목장 소 스무 마리, 양 백 마리 였고, 그밖에 수사슴, 산양, 수노루, 날짐승이 있었다.” 영적 생명을 위한 양식은 통상 빵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다. 그래서 주님의 기도에 있는 “일용할 양식,daily bread”에서 표현된 천적, 영적, 자연적 수준에서 있는 선함과 진리에 관한 모든 원리들을 두루 포함하고 있다. 고운 밀가루는 선으로부터 파생된 천적 진리를 명시한다. 본문에서 “삼십”이라는 숫자가 등장하는데 이 숫자의 표기는 삼이 먼저이고 십이 그 다음에 나열되고 있다. 이 숫자들은 대상의 품질을 표현해준다. 마치 세 배 ,세 겹, 삼위일체가 모든 것 안에서의 품질을, 그리고 십년(decade)은 많은 것 안에서 그 자체 완전해지고 어떤 한 단계의 발달이 완성되는 것을 표현해준다.
“솔로몬은 유프라테스로부터 불레셋 땅을 지나 에집트 국경에 이르는 지역 안의 모든 왕국을 지배하였다. 그들은 솔로몬이 살아 있는 동안 조공을 바치며 섬겼다… 그는 딥사에서 가자에 이르기 까지 유프라테스 서쪽 전 지역을 다스려 사방으로 평화를 유지하였다.” 이렇게 폭넓은 솔로몬의 지배는 영광 중에 계신 주님의 영적 주권을 표현하기 위해 의도되어졌다. 시편 72편에서도 글자적으로는 솔로몬에 관련되고 구세주 하느님과 왕, 그분의 왕국의 범위를 예언적으로 기술하고 있다. 제 8,11절이다. “바다에서 바다에 이르기 까지 이 강에서 저 땅 끝에 이르기 까지 다스리리니…만왕이 다 그 앞에 엎드리고 만백성이 그를 섬기게 되리라.” 즈가리야의 예언에서도 이와 똑같은 말이 발표되는데 이는 주님에 관련되어 복음서에서도 기록되고 있다. “수도 시온아, 한껏 기뻐하여라. 수도 예루살렘아, 환성을 올려라, 보아라, 네 임금이 너를 찾아 오신다. 정의를 세워 너를 찾아 오신다. 그는 겸비하여 나귀, 어린 새끼 나귀를 타고 오시어… 이 바다에서 저 바다 까지, 큰 강에서 땅 끝 까지 다스리시리라” (9:9,10). 그러므로 솔로몬의 통치 영역은 우리 주님의 주권 영역, 특히 지상에 있는 그분의 교회 중 마지막 째요 가장 나은 교회 처방, 즉 이 처방 안에서 그분의 사랑과 지혜가 예전 보다 더 완전해져 인간의 마음과 삶을 통치하는 원리가 되는 교회에서의 주님의 주권 영역을 표현했다. 주님의 주권 영역은 솔로몬의 지배 영역으로 묘사됐듯이 동으로부터 서 까지, 북으로부터 남 까지 이르는 온 땅이다. 동으로부터 서 까지, 즉 바다로부터 바다 까지란 선함의 상태에 관한 마음에서의 주님의 주권 영역이고, 북으로부터 남 까지, 즉 강으로부터 땅 끝 까지란 진리의 상태에 관한 마음에서의 주권 영역이다. 유프라테스 강으로부터, 즉 아시리아로부터 불레셋 땅에 까지, 에집트의 강 까지에 걸처 있는 온 왕국을 솔로몬이 다스린다는 세부적인 서술은 주님의 주권이 마음 전체에 두루 미친다는 것, 즉 합리적으로부터 과학적인 데 까지, 가장 높은 추론의 지각으로부터 가장 낮은 감각의 습득에 까지 두루 미친다는 것을 묘사한 것이다. 인간 마음에는 세 가지 것, 즉 합리적, 자연적, 육체적, rational, natural, corporeal 등차들이 질서적으로 각각의 뒤를 잇고 있다. 이런 인간의 세 부분들은 경이적으로 교통하는데, 육체적(물질적)인 것은 자연적인 것과, 자연적인 것은 합리적인 것과 교통한다. 출생 때 인간은 육체적(물질적) 인간일 뿐이나 후에 자연적 인간이 되고 마침내 합리적 인간이 된다. 그러므로 이 세 부분이 인간을 구성한다. 그 이유가 인간성(humanity)은 가장 깊은 곳에 있는 합리성에서 시작하여 가장 바깥, 즉 최말단인 감각성에서 종결되기 때문이다. 거듭나는 상태에서의 이것들은 솔로몬의 주권이 미치는 아시리아, 불레셋, 에집트이다. 그런데 솔로몬의 주권은 유프라테스와 나일강 사이의 온 나라에 이르고 있다고 말해지는데, 이는 자신의 나라 외에도 모든 다른 나라들이 그에게 종속되고 조공을 바쳤다는 뜻이기도 하다. 다윗이 가나안에 인접한 나라들을 복종시켰다는 것은 이미 살핀 적이 있다. 이는 영적 원리 아래에 유전적 자질들을 종속시킨 것, 그리하여 이 자질들이 영적 삶의 용도에 충당되는 것을 표현한 것이다. 이런 모든 것들이 솔로몬에게 완전히 복종된 상태가 되어 그를 섬기고 공물을 바치되 그가 죽는 날 까지 계속되었다고 본문에서 말하고 있다.
밖으로는 모든 것이 복종되어 섬기도록 된 한편 내부에서는 모든 것이 안정과 평화와 즐거움이 있었다. “솔로몬이 다스리는 동안 유다와 이스라엘은 바다의 모래알 처럼 인구가 불어 났지만 먹고 마시는 일에 아쉬움을 모르며 잘 지냈다…그들은 단에서 브엘세바에 이르기 까지 마음 놓고 살면서 저마다 자기의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두 발 뻗고 잘 수 있었다.”
위의 모습은 거듭나는 마음의 상태를 그리고 있다. 즉 선과 진리가 무한하게 불어 날 때, 영혼의 먹고 마심인 말씀의 선과 진리를 기쁨으로 응용하여 내 것 되게 할 때의 모습들이다. 동시에 평화의 상태 까지 그리고 있는바, 거듭나는 사람이 그의 가장 깊은 생명으로부터 가장 바깥 생활에 이르기 까지에 걸처 살게 될 때의 모습을 “저마다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마음 놓고 산다”는 것으로 묘사해 놓고 있다.
이는 주님의 영적 유다와 이스라엘의 평화롭고 행복한 상태를 묘사하기 위해 사용된 아름다운 비유적 표현인데, 이와 거의 같은 맥락에서 미가서 4장 3,4절에서는 주님의 교회의 미래 상태를 묘사하기 위해 이렇게 기록해 놓고 있다. “나라마다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리라. 나라와 나라 사이에 칼을 빼어 드는 일이 없어 다시는 군사를 훈련하지 아니하리라. 사람마다 제가 가꾼 포도나무 그늘, 무화과나무 아래 편히 앉아 쉬리라. 만군의 야훼께서 친히 하신 말씀이시다.” 전쟁이 끝남이란 육과 영, 영과 육의 대결이라는 기독인의 마음과 삶에 있던 싸움의 끝장이다. 이런 영적 교전은 거듭나려고 스스로 고통받는 이들 안에서 끝을 맺고야 만다. 평화, 참된 영적 평화, 고난을 견뎌낸 평화는 심정과 삶 속의 악들을 정복한 뒤에 온다. 그리하여 칼이 보습이 되고 창이 낫으로 바뀐다. 그 이유가 우리의 부패된 본성 속의 악과 거짓 원리로부터 방어해주고 그것들을 부수는데 사용되었던 말씀 속의 신성한 진리가 이제는 마음을 함양하고, 평화스런 정의의 열매들을 생산하는 생활을 발전시키는데 응용되기 때문이다.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 이 나무 그늘 아래에서 마음이 평정을 갖는바 마음 자체의 생산물이다. 사실 우리 없이, 우리 자신으로부터 분리시켜 놓고서는 폭염을 피하는 그늘도, 폭풍을 피하는 은신처도 있어질 수 없다. 더욱 더 진실인 것은 주님이 포도나무요 우리는 그 가지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생명력은 그분께로부터인바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않은 가지는 시들 수밖에 없고 불 속에 던져 태워질 수밖에 없다. 포도나무에 붙은 가지일 때만이 우리는 살고 성장하고 열매를 맺을 수 있다는 진리 만큼 이나 이런 것도 진리일 것이다. 즉 포도나무의 생명이 우리에게 교통되고 우리 안에서 순환되면서 그 생명과 유사한 생명들을 생산한다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그분의 나라를 포도원을 세우고 농부에게 맡긴 사랑에 비유해주시고 있다. 그분이 세운 포도밭은 그분의 백성의 지성과 심정 말고 어디에 있어질까? 그분의 나라의 씨는 정직한 심정이라는 옥토에만 뿌려질 수 있고 포도나무는 거기에서만 경작될 수 있다. 거듭나는 사람이 안전하게 거주하는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는 먼저 주님에 의해 이식되고 그분의 보호 아래 총명과 미덕의 생활 안에서 자란다. 그분의 생명이 두 나무 안으로 들어가 완전해지게 한다. 그러나 우리에게 할당된 의무도 있다. 신성한 생명이 진리와 사랑 안에서 마음이 성장하고, 거룩한 생활로 발전하도록 그 생명을 받고 명백해지게 할 것인지, 안 할 것인지를 결정해야 한다.
만일 우리가 본문의 비유적 표현이 묘사한 안전과 평화의 상태를 즐기고자 한다면 우리는 주님의 비유에 있는 농부 같이 수단들을 동원해야 한다. 우리는 포도원에서 일해야 하고 무화과나무 둘레를 파고 똥거름을 주어야 한다. 우리는 이전에 칼과 창을 사용한 것 처럼 이제는 보습과 낫을 사용해야 한다. 우리는 딱딱한 땅을 부수어 부드러운 옥토로 만들어 간직해야 한다. 신성한 농부 같이 우리는 시든 가지는 처내서 열매 맺는 능력이 증진되도록 보존해야 할 것이다. 투쟁의 일이 멈추어지면 사랑의 일이 계속되어야 하고, 그 일의 보상은 안전과 기쁨이다.

사무엘하 24장 16-25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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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하 24장 16-25절

백성을 치는 천사가 예루살렘을 남겨두다

이 장의 앞에서 두 세부사항, 즉 백성의 수를 센 다윗의 죄와 벌을 살폈는데 이 사항과 본문의 두 사항 즉 예루살렘을 보존하신 것, 다윗이 여부스 사람 아라우나의 타작 마당에 제단을 쌓은 것을 연관지어 살펴 보는게 유용할 것 같다. 이 제단을 세운 의도는 두 말할 것도 없이 재앙을 멈추게 해서 예루살렘을 보존하는 것이었다. 예언자 가드가 다윗에게 와서 이렇게 말했다. “여부스 사람 아라우나의 타작 마당으로 올라가 거기에다 야훼께 제단을 쌓으십시요…..다윗은….야훼께 제단을 쌓고 번제와 친교제를 드렸다. 그제야 야훼께서는 나라를 위하여 비는 그의 기도를 들으시고 이스라엘에서 재앙을 거두셨다.”
이 본문 외에도 성경에 있는 재앙과 재난들은 주님이 분노하신 탓으로 돌려져 있기 때문에 그 재앙이 번져가는 것을 막으려면 주님의 분노를 달래는 수밖에 없는 것으로 표현되어져 있다. 이에 대한 대표적인 예로서는 코라와 다단과 아비람이 거역하는 사건이 기록된 민수기 16장 일 것이다. 세 반역자와 그의 집안 식구를 삼켜버린, “이튿날 이스라엘 백성의 온 회중은 모세와 아론에게 와서, 야훼의 백성을 죽을 지경에 몰아 넣었다고 불평하였다….야훼께서 모세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이 회중 가운데서 빠져나오너라 내가 순식간에 그들을 없애버리리라.’ 모세는 큰 일이 벌어질 줄 눈치채고 이를 막을 심산으로 아론에게 말했다. ‘제단에서 불을 가져다가 향로에 담아 향을 피워 가지고 어서 회중 있는데로 가서 그들이 죄값으로 받을 재앙을 막아 주시오.’ 그러나 재앙은 이미 이 백성 가운데 번졌고…그는 염병이 물러갈 때까지 죽은 사람들과 산 사람들 사이에 서있었다.” 이미 살핀 바대로 주님의 분노는 주님의 교회와 그 교인들에 의해 그분의 사랑과 진리가 뒤집혀지고 거절되는 것을 함축하는 표현이다. 모든 축복과 보호가 주님으로부터요, 그것들은 그분을 사랑하고 믿는 이들에 의해 경험되듯, 모든 영적인 불행과 재난 역시 사랑과 신앙의 대상(Object)으로서의 그분을 거절한 결과이다. 그분을 사랑하는 가운데에 생명이 있는바, 그분을 거절함은 죽음이다. 영적인 반역, 그분이 권위 있으심을 부인하는 것, 철면피하게 계명을 위반함은 우리를 분노의 주체로 만든다. 그이유가 그 위반은 주님의 나라에 반대되는 것과 상호 교류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인류를 고뇌하게 하는 모든 영적 재앙이 비롯된다. 마음이 악의 영향을 받아들여 악한 원리가 지배하게 될 때 질병과 죽음은 의지와 이해성에 침투한다. 이런 재난은 주님과의 재회와 결합 빼놓고는 막을 방도가 없다. 이것이 성서에서 속죄, 죄 값(atonement)으로 의미되고 있다. 속죄는 참된 영적 예배를 수단으로 가능하고 효력을 발휘한다. 자연적 수준에서, 또는 유대 교회 수준의 경우, 죄 값은 인간을 향한 주님의 분노가 누구려트려지는 것인 듯, 하느님이 인간과 재회하는 것인 듯 비칠 것이다. 그렇게 보여지는 이유는 성을 내신 분이 하느님이신 바, 먼저 화해하실 분도 하느님이라고 착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독교 또는 영적 의미의 수준일 경우 하느님에게는 분노 자체가 없다는 것, 분노는 인간에게만 있는바, 화해 역시 인간이 주님께 청해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 준다. 신약 성서의 교리는 이러하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이 그분께 재회하는 그리스도 안에 있으셔서 그들의 죄가 그들에게 귀여치 않게 하신다.” 그다음 사도들에게 말한다. “비록 하느님께서 우리를 수단으로 너에게 청하신다 해도 우리는 그리스도를 위한 특사이다. 우리는 그리스도 대신에 너에게 간원하는바 너는 하느님과 화해하라.” 다윗이 어리석게 처신하여 죄지었음을 인정했듯, 우리의 악을 회개하고, 아론이 제단에서 불을 가져다가 자신의 향로에 담아 향을 피웠듯 우리를 회복시키시고 보존해주시는 주님을 진정으로 예배하는 것 말고 어떻게 주님과의 화해가 이뤄질 수 있을까? 가장 높은 의미에서 대 성직자로서의 아론은 주님 자신을 표현했다. 우리의 위대한 대 성직자 로서 주님께서는 생명 있는 자와 죽은 자 사이에 서계신다는 것은 영적으로 참되다. 그분께서는 그분의 신성한 사랑의 거룩한 불로 심령을 정결하게 하시고, 마음 속의 모든 생각과 애착에 생명을 주입하심으로 구원해주시고자 모든 인간의 영혼과 함께 현존하신다. 신성한 사랑이 받아들여지고 인정되어질 때 영혼이 보전된다.
다윗이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예언자를 통해 자기에게 명령된 사항, 즉 제단을 쌓고 번제와 친교제를 드렸을 때 “주님은 예루살렘을 치려던 천사에게 ‘이제 그만하면 됐다 손을 거두어라’라고 명령하셨다. 이쯤해서 우리는 왜 천사가 파괴자였는지를 물어보는 것을 멈추어야 할 것이다. 우리는 하느님 자신이 파괴자 쪽에서 행동하시는 것으로 표현된 것에 놀랄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에집트 사람의 장자가 죽은 것은 여호와 자신에 의해 결과된 것으로 말해지고 있다. 그러나 하느님, 또는 그분의 천사는 인간의 영혼이나 신체를 파괴하실 수 없다. 재앙, 염병, 전쟁은 악의 결과요 선한 천사가 아닌 악한 천사에 속하는 중개인에 의해 결과된 것이다. 그렇다면 왜 그들은 재앙의 탓을 하느님이나 그분의 천사들에게 돌릴까? 라고 되물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말씀의 글자 수준에서의 모든 것이나 사건들, 악한 것이나 재난 같은 사건들 까지 하느님의 탓인데 그이유는 하느님은 세상의 창조자요 통치자이시다는 일반적 진리에 일치시키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반적 진리 아래 특수한 진리들이 있는데 이것이 분명한 차이를 밝히 알게 한다. 하느님이 아니면 만물이 존재 않는다고 볼 때 그분은 선한 것과 악한 것 모두를 창조하신 셈이다. 그러나 선한 것은 천국을 통해, 악한 것은 지옥을 통해 유지존속된다. 하느님이 유일한 세상의 통치자이시나 그분은 설비해주심(provision)의 법칙 뿐아니라 허용하심(permission)의 법칙을 수단으로 통치하신다. 그분께서는 선한 것은 설비해주시고 악한 것은 허용해주신다. 허용하시는 이유는 악한 것을 교정하거나 억누르려 해서이다. 그러나 재난은 선한 영이 아닌 악한 영의 대리인을 통해 온다. 악령에게 허용이 있는 반면 천사들은 파괴가 덜되도록 하려 골몰한다. 악한 영이 바람직한 일을 거들어 줄리 없다. 지옥은 파괴의 일만을 위해 돌진할 뿐이다. 따라서 주님의 조절하시는 권능이 아니면 세상은 멸망의 구렁에로 떨어질 수밖에 없다. 신성한 지혜가 하느님의 허용의 정도를 가늠하고, 악마의 권능에 이렇게 말한다. “이제 그만하면 됐다. 손을 거두어라.” 주님에게는 우리 처럼 생각을 돌이키심, 뉘우침(repent)이 없다. 그러나 기록된 글자 뉘우침에는 신성한 의미가 담겨 있다. 인간에게 있는 뉘우침은 하느님 안에서는 자비(mercy)이다. 용서를 비는 인간이 있으면 그분에게는 그것을 수여하심이 있다. 인간과 하느님 사이에는 이렇게 본질적인 차이가 있다. 유한한 것은 변하지만 무한한 것은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똑같다. 그분은 냉대하심에서 자비하심으로 바뀌시지 않는다. 그분이 자비로워져 가는 일은 결코 없다. 그분은 자비 자체이신바 그분의 자비는 언제나 동일하다. 단지 인간이 죄를 지을 때 그분이 성을 내신 듯 여겨지고, 인간이 뉘우칠 때 그분이 자비로워지신 듯 비칠 뿐이다. 다시 말해 주님을 향한 인간의 상태가 인간을 향한 주님의 상태를 생산한다고 말할 수 있다. 하느님이 자비롭고 용서하시게 만드는데 필요한 전부는 그분의 자비와 용서하심이 인간의 심정과 삶으로 스며들지 못하게 방해하는 우리의 고집과 악을 제거하는 것이다. ”야훼의 천사가 손을 뻗어 예루살렘을 치려고 하자, 야훼께서 재앙을 내리시려던 생각을 돌이키시고, 백성을 죽이는 천사에게 명령하셨다. ‘이제 그만하면 됐다. 손을 거두어라.’” 예루살렘은 거룩한 도성, 증거궤가 안치된 성막이 세워져 있는 거룩한 성이다. 그래서 이 성은 일반적 의미에서는 주님의 교회(the Church)를, 세부적 의미에서는 마음의 내면들(the interiors)을 표현했다. 주님께서는 그분의 교회가 파멸되어질 경우 완전한 끝장을 허용하시지 않는다. 그렇게 될 경우 새로운 시작도 있을 수 없다. 시험을 견디어 가는 이들의 파멸 과정에서 주님께서는 내적 인간을 악령의 권능으로부터 보존하신다. 그이유가 만일 파괴하는 천사가 내적 인간 까지 파괴한다면 구원의 능력과 수단이 파괴되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는 현 대목의 상황이 지닌 일반적, 세부적 의미에 관해 말해 보자. 백성의 수를 세고 그에 따른 파괴는 유대 교회의 남용과 종말을 표현했다. 이 주님의 교회의 종말의 완성이 재앙으로 죽어간 백성의 숫자에서 의미되고 있다. 제단에서 제물을 바침으로 결과된 그 교회의 보전은 유대 교회의 회복 또는 보전을 나타내는 게 아니라 그 장소에 새로운 주님의 교회(a new Church)가 일으켜지는 것을 명시하고 있다. 제단은 하느님의 지시에 따라 여부스 사람 아라우나의 타작 마당에 세워졌다.
여부스족은 과거 주님께서 그들과 섞이지 말라고 이스라엘에게 명령된 가나안 족들 중의 하나이다. 예루살렘은 그들의 요새였다. 다윗이 이 성을 빼았았을 때 그 부족은 절멸되지 않았는데 그 잔류민은 유대인들과 함께 계속 거기서 거주해왔다. 비록 통치권은 이스라엘에게 있지만 이스라엘과 함께 살도록 허용된 두 부족이 있다. 하나는 여호수아가 나무를 패고 물을 길어 오도록 계약을 맺은 히위족, 또 하나는 예루살렘에 거주했던 여부스족이다. 이 두 부족은 보존되었는데, 그들은 비록 우상을 섬기지만 선하고 참된 어떤 것을 추구하는 이들을 표현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참된 종교의 원리의 어떤 것이 이식되어질 수 있는 이방인이었다. 여부스족 아라우나의 타작 마당에 제단을 세우도록 다윗에게 요구된 것은 유대인들 사이에서 종말을 맞는 주님의 교회가 이방인들에게 넘겨지는 것을 표현한 것이다. 제단이 아라우나의 마당에 세워지고 제물이 바쳐질 때까지 염병이 계속된 것은 기독교 처방이 개시됨으로 쓸모 없이 만드는 퇴폐가 중단될 때까지 세상에 있는 주님의 교회의 하강은 계속된다는 것을 표징적으로 묘사한 것이다. 그러므로 천사의 파괴가 멈춘 곳은 아라우나의 타작 마당이다. 천사가 서있던 지점, 그리고 그 위에 제단이 쌓여졌는데, 후에는 솔로몬의 성전도 세워졌다. 역대기하 3장 1절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솔로몬은 주님이 선 왕 다윗에게 나타나신 곳, 예루살렘 모리아 산에 주님의 성전을 짓기 시작했다.” 이 성전은 주님의 인성(Lord’s Humanity), 그분의 육체(His Body)에 관한 표징이다. 제단 역시 같은 의미를 지녔으나 이런 차이는 있다. 성전은 진리 측면에서의 그분의 인성을, 제단은 선함 측면에서의 그분의 인성을 표현했다. 성전이 지어졌을 때, 번제단은 성전 쪽에서 볼 때 동쪽 뜰에 놓였고, 분향단은 지성소 내, 젯빵이 놓이는 젯상 가까이에 있었다. 성전과 성막의 제일 중요한 용도는 주님이 모세에게 지시된 예식에 의거 예배되는 것이었다. 제단은 예배가 실시되고, 제물이 놓여져 예배자가 정결되는 예배의 제일 중요한 부분이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복음서에서 이렇게 말하셨다. “어느 것이 더 중하냐? 제물이냐? 아니면 그 제물을 거룩하게 만드는 제단이냐?” (마태복음 23:19). 주님의 신성은 그분의 인성 안에 거하신다. 마치 증거궤가 지성소 안에 안치 되었는 것과 같다. 뿐만 아니라 성전의 제단과도 같은 그분의 인성을 통해 예배의 예물을 본질적인 신성에 바쳐지고 이를 수단으로 우리는 거룩해져 주님께서 응낙하실 수 있다. 제단과 성전의 이런 표징적인 품성을 알게 되면 왜 제단이 여부스족 아라우나의 마당에 세워지고 세워진 그 마당에서 파괴하던 천사의 손이 멈추었는지도 이해된다. 예루살렘 자체는 보존되었다. 그런 이유는 이미 언급한바 대로 주님은 그분의 모든 처방에서 완벽히 끝장이 있지 않도록 명령하시기 때문이다. 주님의 교회가 부패되어 종말을 맞이한다 해도 새로운 교회의 개시를 위해 그 아껴두신 것(remnant)은 구원되어진다. 이렇게 되지 않으면 이전의 교회가 끝을 맞았을 때 새로운 처방은 시작될 수 없었으리라. 따라서 어떤 처방도, 어떤 주님의 교회도 생명의 절멸 또는 종료되도록 허용하시지 않았다. 단지 심판을 수단으로 옛 교회에 종말이 오되 어떤 씨앗의 생명은 남겨지고, 아껴진 옛 교회의 것이 새로운 교회를 건설한다. 주님께서는 이를 이렇게 말하시어 가르치시고 있다. “이런 날들을 줄여 주시지 않으면 어떤 육체도 살아 남을 수 없다. 그러나 주께서는 뽑으신 백성을 위해 그 기간을 줄여주셨다.” 재난의 날들이 짧아짐은 주님의 교회가 그 부패의 연속으로 급기야 절멸을 맞기 전 그 끝을 맺는 것이다. 유대 교회의 아껴두신 것으로부터 주님께서는 기독 교회의 시작을 형성하셨다. 그분의 첫 제자들도 유대 국가로부터이다.
위와 비슷한 섭리는 일반적인 주님의 교회 뿐아니라 인류의 개개인도 관장하고 있다. 백성의 수를 세고, 그로 인해 야기된 염병은 확증된 악한 삶에 푹 빠진 이들 안에서 주님의 교회가 끝을 맞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 이와 더불어 그들의 모든 선함과 진리, 어린 시절로부터 획득했던 선함과 진리 까지 파괴된다는 것을 명시하고 있다. 이런 경우에서 조차 조그만 잔여물이 보존되게 하신다. 그 이유가 인간으로 존재하는데 꼭 필요한 것, 즉 자유와 합리성이라는 자질은 존재해야 하기 때문이다. 최악의 상황이 전개되도 남겨지는 어떤 것이 있음을 계시록 9장 6절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그 다섯 달 동안에는 그 사람들이 아무리 죽으려고 애써도 죽을 수가 없고 죽기를 바라더라도 죽음이 그들을 피해 달아날 것이다.” 그러므로 파괴하는 천사라 해도 절멸이 있기 직전, 그의 손이 멈춰진다. 세상의 인간이 설사 자신의 선함과 진리가 깡그리 사라진 듯 여겨져도 회복할 수 있는 능력이 아예 사라진 채 내동댕이 쳐지는 것은 아니다. 주님의 모든 심판은 인간을 교정을 통해 겸허와 회개의 상태를 확보하여 결국 주님을 참되게 예배하는 상태에 이르게 하려 하고 있다. 죄인이 주님께 되돌아 오는 수단인 회개와 예배가 다윗의 것들로 의미되고 있다. 제단이 아라우나의 타작 마당에 세워졌다. 그이유는 타작 마당은 진리의 선이 있는 곳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예루살렘은 교리에 관한 주님의 교회, 주님의 교회의 교리를 의미하고, 곡식은 영적 생활을 주요하게 지탱시켜 주는 선을 의미한다. 그이유가 그곳에서 밀은 겨와 분리되기 때문이다. 또한 타작 마당은 시험을 의미하는데, 그이유는 영적 시험들을 수단으로 마음과 생활에서 악과 거짓의 분리가 있어지기 때문이다. 참된 예배의 제단, 이를 수단으로 주님과의 결합이 있고, 그러므로해서 그분의 구속과 구원의 모든 혜택이 있고, 이 혜택은 그분의 신성한 인성 안에서 그분 자신에 의해 분배되는바, 제단은 진리의 선 안에서, 또는 신실한 믿음에 의해 획득된 선행 안에서 건설되어야 한다. 여부스의 타작 마당에 제단을 세우는 이스라엘 국가의 겸손함과 뉘우침은 파괴하는 염병을 멈추게 하고 있는바,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단순한 거룩함에서 주님께 뉘우치는 예배는 영적 시련과 시험으로 세련되고 순수해진 신실한 선함의 원리로부터 있게 된다는 것이다. 이 사건을 개인 차원에서 관찰해 본다면, 다윗은 인간의 지성(intellect)을 의미한다. 그가 백성을 세는 것은 자연적 수준의 의지, 또는 이기심 아래에서 지성이 행동하는 것이다. 그러나 참회하는 예배에서 인간의 지성은 신성한 의지에 겸허히 복종하는 상태에로 가져와진 의지의 영향 아래 행동한다. 이해성이 자아 의지로부터 행동하면 악한 결과는 당연히 뒤따른다는 것, 그러나 이해성이 겸손한 심정과 연합하여 행동하면 선함과 축복이 그 결과이다.

사무엘하 24장 1-15절 해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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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하 24장 1-15절

병적을 조사한 다윗의 죄와 그에 대한 벌

유대 역사의 품성에 관한 올바른 판단은 유대교라는 하느님의 처방을 곁들여 생각하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각 처방은 우선 그 처방이 건설된 이들의 시대와 그 백성의 이익에 부합되고 있다. 동시에 장차 내려질 처방의 그림자 수준에서 표현했다. 그러나 이 처방은 진짜 주님의 교회의 실체에 관한 것은 거의 아무 것도 내포하고 있지 않았다. 유대인들 사이에 존재했던 이 모든 것, 그리고 그들에게 발생했던 것들은 그 처방보다 더 높고 더 순수한 처방의 특질로서 영적 상태와 결과를 표현하고 있다.
다윗의 범죄를 이해하려면 우선 우리는 백성에 의해 표현된 것, 백성의 수를 센 것(병적 조사)이 무엇을 표현했는지 가늠해 보아야 한다.
이스라엘의 백성은 영적인 주님의 교회(spiritual Church)를 표현했다. 이스라엘의 열 두 지파, 마치 어린 양(Lamb)의 열 두 사도 처럼 주님의 교회를 구성하는 선함과 진리의 모든 원리들, 또는 모든 품위와 덕목(grace and virtue)을 표현했다. 이런 여건으로 인해 그 지파나 사도들의 이름이 새 예루살렘 성벽과 문에 새겨져 있다. 주님의 교회는 각 개인의 마음 안에 존재할 뿐 아니라 셀 수 없이 많은 군중 속에도 존재하는바 이스라엘 백성은 거듭나는 마음 안에 있는 주님의 왕국을 구성하는 무수한 선과 진리를 나타내고 있다.
성서에서 수를 센다고 할 경우 이는 어떤 것을 구성하는 몇 개의 부분들과 무수한 세부 사항의 본성과 품질을 아는 것, 그리고 한 개의 완전한 전체를 형성하기 위해서 정당한 질서 안에 있는 각 부분들과 세부적인 것들을 배치하는 것도 의미한다. 하느님의 명령에 의해 이스라엘 아들들의 수를 셀 경우, 이는 한 개의 마음이 천국의 한 부분이 되도록 거듭나는 마음 안에 있는 선함과 진리의 모든 원리들이 배치되고 정렬되는 것을 표현한다. 수를 셈(numbering)의 영적 의미, 그것이 표현하는 배열(arrangement)의 본성은 성경에서 자주 취급되어져 있다. 이사야 40장에서 말해지는바, 주님께서는 별들을 세시고 그것 모두를 이름지어 부른다고 말해지고 있다. 이 경우에서의 셈은 하늘 군대를 창조하신 분께서 완전한 질서로 배치하여 별로 가득한 온 하늘을 아름다움과 장엄함을 만드시고 그분의 권능으로 떠받치고 그분의 지혜로 운행되는 것을 뜻한다. 별이 하늘의 영광을 선포한다는 점을 생각해볼 때, 이는 거듭나는 마음의 하늘에 놓인 그분의 말씀 속의 순수한 진리들을 놓으시는 것, 그리고 영적으로 그분의 영광을 선포하시고, 그분의 권능과 선함을 명백히 드러내 신성한 진리를 배열하시어 조화와 질서의 상태에서 위의 모든 것을 보존하신다. 신성한 권능의 모든 결과는 우리에게는 유익한 것들 뿐이다. 말씀 속의 진리 그 자체는 신성한 배열의 주체이고, 이를 수단으로 하느님의 사랑과 지혜와 하모니 되고 하나를 이루는 증거가 획득된다. 수를 셈의 영적 의미에 관한 또 다른 예는 신약 성서에서도 찾을 수 있다. 그분께서는 우리의 머리카락도 세어두셨다는 구절이다. 이는 하느님의 용의주도하심이 얼마나 세세하신지에 관해서인데 하느님의 지식과 용의주도하심은 우리의 심정 상태와 삶의 형편, 생각과 애정의 세세한 부분에 이르기까지 뻗혀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더 나아가 이는 참된 모든 제자의 마음 안에서 선함과 진리의 원리들은 대단히 잘 배열되고 정돈된다는 것, 따라서 영혼의 영적 복지가 더 잘 증진되도록 하는 쪽에 더 적합하도록 하느님의 통치가 실시된다는 것 까지 우리로 알게 해준다.
이스라엘 후손의 수를 셈은 거듭나는 자의 마음 안에 있는 선함과 진리에 관한 모든 원리들이 배열되고 정돈되는 것을 표현한다. 이를 수단으로 주님께서는 거듭나는 자와 함께 현존하시고 구원의 역사를 펼치신다.
이와같은 영적인 배열은 하느님의 말씀이나 그분의 일에서 살펴볼 수 있다. 우리는 하느님의 모든 일 속에서 어떤 법칙에 의거한 배열이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하느님의 권능은 이 배열을 수단으로 하느님의 뜻하신 바를 성취하신다. 태양계는 흐트러져 있지 않고 행성 운동 역시 어떤 고정된 법칙에 따라 규율되고 있다. 영혼과 마음의 도구요, 감정과 움직임을 담아내는 우리의 신체도 합일되고 조화된 행동을 위해 상호 의존하고 긴밀하게 관계하는 질서 속에서 각 부분들이 배열되고 있다. 인간의 자연적 마음은 세상의 형상을 취하고 있고, 영적 마음은 천국의 형상을 취하고 있는바, 재 창조 또는 거듭남을 수단으로 천국이 되어 간다. 선한 모든 애정, 진리의 지각은 천국의 형태로 정렬되고 천국 질서에 따르는바, 거듭나는 마음은 아주 작은 규모의 천국을 만든다. 그 이유가 천사들의 천국은 한 명의 인간 같고, 그 속의 모든 거주민은 멤버로서 제각기의 진리를 지니면서 선용(use)을 위해 각자의 능력과 자질을 발휘한다. 이런 완전한 정렬은 질서 자체이신 신성한 완전함으로부터 결과되는 질서의 법칙으로 생산되고 보존되어진다. 천국은 신성한 사랑과 지혜의 완전한 정부로서 합일과 조화, 축복의 상태에서 보존되고 있다. 거듭나는 마음이 지니는 천국적 질서에 비례하여 천국과 똑같은 행복이 그에게도 체험되어진다.
거듭남으로 해서 마음에 소개되는 위의 질서의 세부사항들은 거듭나는 자 자신은 충분히 납득할 수 없다. 그 이유가 세부사항들이 그들의 지각에 와닿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신이 주체가 되는 일반적인 영적 배열을 아는 것은 가능하다. 마음을 신체에 비교해 생각해보면, 거듭나는 사람에게 있어서 머리는 주님을 사랑함, 가슴은 이웃을 사랑함, 아래 부분은 세상을 사랑함, 발은 자아를 사랑함에 해당된다. 이 질서가 존재하면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통치하고 자아 사랑과 세상 사랑은 앞 두 사랑을 섬긴다. 이것이 천국의 질서이다. 자아 사랑과 세상 사랑이 하느님을 사랑함과 이웃을 사랑함에 종속되어 있으면 자기 명예나 이득은 사랑과 선행의 법칙인 공정과 공평의 법칙의 승인 없이는 추구되지 않을 것이다.
인간 마음 안에서 주님의 교회와 천국 원리의 이런 질서는 단번에 도달되는 게 아니라 시간이라는 작업의 결과이다. 거듭나지 않은 모든 사람은 이와 꼭 반대의 질서에 있다. 자연적 사람 안에서 자아 사랑과 세상 사랑은 머리 부분에 해당되고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발에 해당된다. 자연적 사람일지라도 도덕적이고 종교적인 품새가 자신의 목적에 도움이 되면 경건하고 도덕적일 수도 있다. 인간은 점진적 등차에 의하지 않고는 천국의 질서에로 회복되어질 수 없다. 그는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하기에 앞서 눈에 보이고 있는 이웃을 사랑함을 먼저 실시해야 한다. 거듭나는 상황에 진입해 있는 이들의 마음에 소개된 질서의 첫 번째 결과는 세상을 사랑함 보다 하느님을 사랑함을 더 드높이는 것이다. 하느님을 사랑함이 마음의 최 상위에 있는 것은 영적 삶과 질서에서 더 높은 등차이다. 거듭나는 자가 주체인 두 개의 다른 임무가 신성한 명령을 표현하는 수단으로 두 개의 구분되는 이스라엘 백성의 수를 셈으로 표현되어져 있다. 처음 실시된 것은 이 백성들이 에집트를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아서였다. 두 번째 수를 셈은 가나안 땅에 진입하기에 앞서 즉각 실시되었다. 이스라엘 백성이 배회했던 사막은 십자가를 날마다 지는 것, 영적 시험과 자기 부정을 표현했다. 여행을 시작하는 초기에 백성의 수를 셈은 시험을 견디기 위해 마음을 준비하되, 이는 이해성에 있는 진리의 배열로 영적 질서의 설립을 표현했다. 두 번째의 수를 셈은 시험의 결과로 뒤따라 오는 거듭남의 더 완전한 질서, 즉 사랑과 선행이통치하는 질서이다. 자아 사랑과 세상 사랑이 마음의 윗 자리에 있는 한 아무도 영적 시험을 치뤄낼 수 없다. 그 이유가 악을 사랑하는 자가 악에 저항할 수 없고, 사탄이 사탄을 추방할 수 없기 때문이다. 신성한 질서의 어떤 것이 마음으로 시험을 수행해 가도록 도입되어야만 할 것이다. 이 질서는 의지 안에서가 아니더라도 최소한 이해성에서라도 세상과 자아 사랑 위에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함이 드높여져 있어야 할 것이다.
그렇다고 위의 사항이 영적 삶에서의 성공을 위해 요구되는 전부는 아니다. 마음 안에 있는 모든 선함과 진리, 참된 질서는 주님만으로부터 임을 알고 인정해야 한다. 이런 인정함의 필요성이 인구 조사 때 재앙을 면하기 위해 자기 목숨 값을 성소 세겔로 셈하여 반 세겔을 주님께 바치도록 모세에게 지시한 법에 표현되고 있다 (출애굽기 30:12,13). 은 조각을 바치는 것은 우리 마음 안에 있는 선행의 선과 신앙 속의 진리 모두는 주님 만으로부터 임을 인정하는 것을 표현했다.
다윗이 백성의 수를 세는 것이 무엇을 내포하고 표현한 것인지 이제 가늠될 것이다. 다윗이 수를 센 것은 하느님의 명령을 받지 않은 것일 뿐아니라 백성의 수를 세는 죄를 짓게 된 것이다. 이 시험은 하느님이 부추킨 듯 말씀의 글자로부터 표현되고 있으나 하느님께서는 어느 누구도 시험하시지 않는다는 것, 단지 인간의 욕심이 자신을 몰아 부쳐 결과 된다는 것이 진짜 진리이다. 역대기 상 21장 1절에서, “사탄은 이스라엘을 괴롭히려고 다윗으로 하여금 이스라엘의 병적을 조사할 마음을 품게 했다”고 기록되고 있다. 다윗이 요압의 간청에도 불구하고 병적 조사를 강행한 것은 인간은 자신이 알거나 소유하고 있는 선함과 진리의 권위나 공적이 자기로부터요 자기 것이라고 주장하는 죄를 짓는 것을 표현했다. 이럴 경우 선하고 참되져 가는 거듭남이 중단된다. 인간의 자연적인 지혜와 의지는 하느님의 지혜와 의지에 반대되어 있는바, 하느님의 특권을 갈라 놓거나 파괴한다.
이 악 자체는 아주 다양한 형체 아래에서 탐지되고 있다. 이 악은 인간의 지혜가 올바르고 하느님의 지혜는 불완전한 듯 하느님의 통치를 비난하도록 불신앙자를 대담하게 자극한다. 이와 비슷한 상황이 신앙자라는 부류, 즉 다양한 종파를 출현시킨 이들에서도 발생된다. 그들은 하느님의 말씀의 진리를 억지로 꿰맟추고 그 진리를 자기들만의 독점물이라도 된 듯 주창하고, 천국의 열쇠를 쥐고 있다고 까지 주창해댄다. 이런 악은 이교라든가 불신앙의 문에만 놓여 있는게 아니다. 이기적이고 세상적인 사랑은 참된 기독 제자들의 마음과 삶을 위해 건립되어 있는 신성한 정부의 질서에 자아 총명이 간섭할 권리가 있다고 부추켜 시험에 노출시키고 죄를 짓게 할 정도로 충분히 강력하다. 이렇게 알랑거려 부추켜 야기되는 결과는 성서를 통해 우리에게 자주 놓여진다. 특히 본문의 역사물에서도 매우 놀랄만하게 우리 앞에 가져와 놓이고 있다. 이렇게 반복적으로 우리에게 주어지는바 거기에 따른 경고와 훈계 역시 뒤따를 것은 의심할 바 없으리라. 이 악들 중 우리 자신의 마음 안에 있는 것들 만큼 사기성이 강한 게 없다. 우리 마음을 지켜주는 것 중 사랑과 진리 만한 보물은 어디에도 없다. 변절이라는 타락 만큼 더 대단한 타락도 없다.
그러므로 이제는 백성의 수를 셈으로 이스라엘과 유다에 초래된 벌, 불순종에 뒤따르는 참담한 처벌의 사건을 보다 수익성 있는 쪽에서 생각해보자. 처벌만 떼어내 생각해보면 이 벌은 그들이 저지른 죄에 꼭 비례되는 듯 여겨지지 않는다. 질서 자체이신 분이 그분이신데 원인과 결과의 법칙과는 무관하게 행동하실 리 없다. 단지 현재의 우리와 그 당시의 유대인들 사이에는 상황 만이 다를 뿐이다. 그 당시의 경우, 즉각적이고 눈에 보일 수 있게 원인의 뒤를 따랐다. 현 시대의 경우 영적이고 도덕적인 원인으로부터의 결과는 점차적으로 많은 경우에서 눈에 띄지 않게 발달 될 뿐이다. 비록 이 대목에서 범죄는 다윗이 저질렀는데 죄 값은 백성들이 치르고 있다. 그럼에도 관계 그 자체가 서술하는 바로는 이런 다윗의 행동은 이스라엘이라는 나라에 존재했던 악의 결과였다. “야훼께서 다시 이스라엘에 진노를 내리실 일이 있어 다윗에게 이스라엘과 유다의 병적을 조사할 마음을 품게 하셨다.” 이 구절을 놓고 생각해보면,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국가에 세워 두셨던 권위, 즉 그들이 긴급한 간청을 받으시는 권위에 도전하도록 부추켜 진 것이다.
병적 조사가 끝났을 때, 예언자 가드는 다윗을 찾아 갔고, 병적 조사의 결과로서 일어나질 처벌을 선택하게 했다. 즉 칠 년 동안의 기근이나 석 달 동안 적들에게 쫒겨 다니거나, 사흘 동안 나라에 전염병이 도는 세 가지 중 하나를 골라야 하는 것이다. 이 벌은 병적 조사가 표현한 악의 결과를 의미했다. 삼 년 기근은 신성한 질서의 이런 파괴, 즉 신성한 질서가 마음 가운데 건립된 뒤, 그들로부터 신앙의 진리와 사랑의 선 모두가 박탈되는 것이다 적들을 피해 석 달 동안 피해 다님은 악과 거짓들이 신성한 질서가 파괴된 마음을 계속 귀찮게 하는 것이다. 삼 일 동안의 염병은 유아기 때에 받았던 선과 진리의 아껴두신 것 까지 사라지고 마는 것이다. 다윗은 마지막 재앙을 선택했다. 물론 이 선택이 신성한 섭리에 속해 있다는 의심할 바 없다. 첫째로 이는 주님이 이스라엘과 유다 족 사이에로 세상에 오셨을 때 모든 선과 진리는 거의 사라지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하고, 둘째 의미는 더 내면적인 바 모든 인간 마음 안에서 영적 질서가 뒤집혀 영적 생명이 깡그리 파괴되는 것, 인간이 자유로부터 이성에 의거 행동하기 전 획득되었던 영적 생명 까지 포함해서 파괴되는 것을 의미한다. 이렇게 황폐해지는 본성과 그 정도가 염병으로 죽어간 사람의 숫자에 표징적으로 표현되고 있다. 7은 거룩을 상징하는 숫자이다. 70은 거룩함이 예보한 것을 표현하는 숫자이다. 숫자 10은 숫자 7로 의미된 거룩함에 관한 생각들을 드높일 뿐아니라 본문의 경우 같이 파괴되어 버린 거룩한 원리들 자체를 표현해준다. 숫자 10은 십 계명에 속하는 것, 선함과 진리에 관한 원리들, 율법과 예언의 모든 것이 걸려 있는 두 계명, 즉 하느님을 사랑하고 인간을 사랑함에 관련된 모든 것을 상징하는 숫자이다. 십 계명은 생활의 법칙이요 젊은 이들의 마음에 맨 처음 각인되어지는 의무들인 바, 십 계명은 발전되어 가는 삶의 기간 동안 마음 안에 남아 있어야 하고 보존되어야 하는 것을 의미한다. 새로운 영적 생활이 시작될 때 계명은 새로운 상태의 기초(rudiment)들이다. 따라서 거듭남의 모든 과정은 이 기초 없이 시작될 수 없는 바 대단히 중요하다. 마음에 남아 있는 영적 인간이 되고저 하는 경향성과 천국에 속한 것들의 양과 질은 그에 따른 선함과 진리를 받는 용적이기도 하다.
일반적 차원에서 주님의 교회, 또는 그 속의 교인들이 성실함에서 타락 쪽으로 기울어 종교의 유효함이나 주님의 교회의 견실함의 기반인 질서가 뒤집힐 때, 잘 보존되고 있던 선하고 참된 것들은 더 적어지고 더 유약해지면서 끝내는 존재 자체가 사라진다. 즉 처음에는 살아 있지만 마지막에는 죽는 것이다. 그것들이 멸해진다면 합리적 존재로서의 인류는 중단되고 멸망해진다. 영적 인간이 되어 가는 참 능력이 파괴된다는 말이다. “주의 천사들이 비록 매우 적지만 아껴둔 게 없었다면 우리는 소돔과 고모라 같은 처지였으리라.” 보통의 교회(a church), 또는 인간 존재에서 이 아껴둠이 영적 생명이 기능을 발휘 못할 정도로 아주 적어질 때 심판이 있고 이 심판은 주님의 교회를 끝낸다. 유대 교회에서의 이런 상태가 주님의 분노가 이스라엘에 떨어져 다윗이 그들의 수를 세도록 부추켜졌다는 것에서 암시되고 있다. 하느님의 분노라는 것은 주님의 교회가 하느님의 속성과 품성에 반대되는 것이다. 그분이 다윗으로 수를 세도록 움직인 것은 질서가 뒤집힘에서 있는 당연한 결과이다. 죄지음에 따른 처벌은 선함과 진리의 거룩한 원리가 파괴되는 것, 소돔과 고모라 같이 되어 가는 것에서 이스라엘과 유다를 구해낼 선과 진리에 관한 거룩한 원리의 아껴두신 것 까지 파괴되는 것이다. 염병으로 죽어 간 칠 만이란 슬기롭고 자비로운 어떤 목적을 위해 거두어 지는 것, 동시에 그것은 표징적인 심판이었다. 그리고 그 속의 역사는 우리를 훈계하기 위해 씌어져 있다.

사무엘하 23장 8-29절 해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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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하 23장 8-29

다윗의 세 용사가 베들레헴의 샘에서 물을 가져오다

다윗 군대 장군들의 공적이 23장의 뒷부분에서 주요한 논제를 형성하고 있다. 21절 까지에서는 괄목할만한 용사들의 공적을 열거하고 있다. 비상한 용맹과 그 솜씨들은 이스라엘의 적을 두려워 떨게 만드는데 대단히 소중했다.
전쟁이 계속되는 한, 용사들의 품위는 칭송되어지고 그들의 기사도 정신이 찬양받도록명령될 것이다. 아직 까지도 전쟁은 피할 수 없는 것으로 되어 있다.
성경에 있는 전쟁과 역전의 용사에 관한 것들은 국가 간의 싸움이나 용사들의 행적에 대한 기록 그 이상의 주제를 응시해보록 우리를 인도하기 위해 의도되어 있다. 이런 기록들은 내향의 싸움, 즉 영적 전투를 구성하는 요소인 영적인 빛과 어둠의 원리들 사이에 있는 싸움을 숙고해보는 쪽으로 우리를 인도해주려 하고 있다. 사람들은 서로 간에 싸운다. 그 이유는 자신과 싸우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싸움 자체의 근본적인 운명은 전투장에서 결정되는 게 아니라 인간 마음 안에서 결정되어진다. 우리 내부에 원인의 세계가 있고 우리 외부에 결과의 세계가 존재한다. 사람들이 자신 안에서 악을 정복하고 선의 제국을 건설한다면 서로 싸워야 하는 것도 중지되고야 말 것이다.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나라의 신하이다면 그들은 자신 안에 있는 세상적인 것을 극복하기를 바랠 것인바 서로를 향한 행동 역시 비세상적이 될는지 모른다. 기독 신앙의 원 저자는 기독인의 삶과 품성의 모범이 되셔서 이런 것들을 내향의 경험과 외향의 삶 모두에서 본보기를 보여주셨다. 그분은 세상을 정복하여 그분께 순종하고 조화를 이루도록 할 목적으로 세상에 오셨다. 그러나 어떻게 그분은 이 목적이 결과 되게 하셨을까? 그것은 바깥쪽 육체적인 싸움을 수단으로 해서가 아니라 내향의 영적 싸움에 의해 그 목적을 추구하셨다. 그분은 자신 안에서 세상 것들에 저항하시고 정복하셨다. 그와 동시에 똑같은 행동에서 그분은 어둠의 왕국이 세속적 마음을 통해 동료들을 공격하도록 부추키는 것을 극복하심으로 그 왕국을 복종시키셨다. 구세주께서는 인류의 구원과 구속을 위해 입으신 타락한 인성의 원리와 내향적으로 싸우시는 동안 그분의 삶은 가장 순수한 사랑과 덕행의 하나이셨다. 그분의 싸움은 내부에서 있었고 바깥쪽에서는 자비와 평화가 그분 삶에서 더욱 돋구어 지셨다. 이것이 진정한 그리스도의 품성일진대 이것이 기독인의 품성도 되어져야 하리라는 것은 당연한 순리이리라.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이 세상에서 너희는 고난을 받겠지만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 주님께서 정복하신 세상은 제자들이 정복해야 할 세상, 즉 자신 안에 있는 세상이다.
이 전투가 영적 차원일진대 그 싸움에서 사용되는 도구나 대리인 역시 영적인 것들이다. 따라서 육욕적인 무기가 아닌 하느님의 영의 검, 즉 하느님의 말씀이라는 병기를 들고 싸운다. 이런 성별되고 강력한 도구는 용사에 의해 휘둘러지는 게 아니라 강력한 원리에 의해 사용되어진다. 비범한 힘을 내재한 원리란 사랑과 진리에 관한 원리들이다. 이 원리는 선함, 온유함, 겸손함, 인내함, 진지함, 단순함, 성실함, 신중함 등등의 다양한 형체들로 구성되고 위대한 행위의 수행이나 위대한 목적의 성취를 위해 열정으로 옷입혀져 있다. 이런 원리를 수단으로 주님께서는 우리 고유의 집안 식구인 영적인 적의 권세로부터 우리를 해방시켜주신다. 우리는 자연적 이해성과 심정 안에 불레셋, 에집트인, 심지어 들짐승 까지 가지고 있다. 다시 말해 우리는 가짜 총명, 거짓 과학, 야망적 욕망과 욕구를 가지고 있고 이것들은 우리의 유전적인 본성을 근거지로 해서 거의 동시적으로 튀어 나오기도 한다. 거대한 원리인 하느님의 권능과 지혜를 제치고 자기 고유의 능력만을 신뢰하여 뽐내는 개인적인 지혜의 자랑은 그 형태를 어떻게 취하든지 자아 신뢰의 부모에 해당된다. 인생의 목적과 그 마무리는 단지 인간적 지혜와 능숙함에 의해 달성된다는 생각, 심정의 온유함이나 지성의 겸비함은 총명의 부족을 때우려드는 또다른 이름일 뿐이라고 상상하도록 강요당한다. 이런 것들이 참 이스라엘을 풀벌레 따위로 여긴 르바임과 아나킴이다.
이 대목에서 거론되는 장소는 과거 불레셋 군대가 진을 친 르바임 골짜기였다. 그 시대는 오래 전 이스라엘이 다윗을 기름부워 다윗의 통치가 시작되는 때였다. 제 3장 17절에서 이렇게 읽어 볼 수 있다. “이스라엘이 다윗에게 기름부어 왕으로 모셨다는 말을 듣고 불레셋군은 다윗을 잡으려고 쳐올라 왔다…..다윗이 이 소식을 듣고 요새로 내려갔을 때 불레셋군은 이미 르바임 골짜기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아둘람 동굴은 다윗의 초기 시절 그가 사울을 피해 은신했던 곳인데 이 대목에서도 같은 곳을 언급하는 것이라 생각된다. 그가 겪은 시험과 크나큰 정신적 고통의 상태를 시편 142편에서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오른쪽을 살펴보소서, 걱정해주는 사람 하나 없사옵니다. 도망칠 길마저 모두 막혔는데 내 목숨을 근심해주는 사람 하나 없사옵니다.” 본문의 상황에서는 사울이 아닌 또다른 적이 그를 압박하고 있었다. 사울을 죽인 불레셋이 사울의 계승자를 죽이려 하고 있었다. 그 때 다윗은 산채로 피신해 있었고 불레셋 군대는 르바임 골짜기에 진을 치고, 불레셋 수비대는 아둘람 동굴에서 과히 멀지 않은 베들레헴에 있었다. 이 때의 경우는 비록 그가 강력한 적군에 포위되고 감시받는 상황이긴 하지만 초기 시절 “목숨을 걱정해주는 자 아무도 없는” 상황과는 아주 다르다. 이스라엘이 모두 그의 편이었기 때문이다. “삼십 인 부대 가운데 세 용사가 추수가 시작될 무렵에 아둘람 동굴에 있는 다윗을 찾아 갔다.” 이때의 기후 상황은 비 한 방울 떨어지지 않고 있었다. 그래서 땅은 바짝 말라 있었다. 동굴을 굳게 닫은채 칩거한 다윗은 목이 몹시 말라 있었다. 따라서 그가 늘 마셨던 베들레헴 성문 근처의 샘의 물이 그의 눈 앞에 아른거려 이렇게 말했다. “누가 그 물을 길어다 줄 사람이 없겠느냐?” 지금이라 해도 많은 사람들이 극도의 목마름을 경험해보았으리라 생각된다. 이 때 마시는 물은 온 몸에 생기를 불어 넣는다. 그럴 때 그는 맑은 샘물은 하느님이 피조물에게 주신 아주 값진 자연계의 선물이라고 단언할 것이다. 그러나 육체의 목마름은 정신적 목마름과도 유추된다. 즉 지식으로서만이 아닌 진리의 바람은 마시기를 애타게 바라는 것 같이 보편적으로 느끼는 정신적 목마름이다. 이 바람램이 열렬한데도 결핍되어 있다면 견딜 수 없는 정도이기도 하다. 건전치 못한 마음에서는 결핍을 채우는데 오로지 지식만을 바란다. 물론 그 바람은 각기 다른 마음에서 아주 다양해 있다. 모든 마음에 공통된다고 볼 수 있는 것은 지식을 사랑함 일 것이다. 지식을 사랑함에서 특별한 목적을 달성하고저 할 경우는 지식의 개별적인 사랑이 있을 수 있다. 과학자는 과학 지식을, 변호사는 법적 지식을, 의사는 의학 지식을, 등등 각기 특별한 기능에 관련지어 지식을 사랑함이 있다. 급기야 악행자도 악행을 성공적으로 마무리 짓기 위해 지식을 축적한다. 이런 저런 모든 경우에서 지식을 바람은 각기 특수 분야에서 목마른 자가 물을 바라는 정도 이상 열렬하고 고생 까지 감내한다.
이렇게 정신적 목마름 또는 자연적 지식을 사랑함도 열렬할진대, 영적 지식의 바람은 영혼의 목마름을 위해 한층 더 열렬하리라. 바람의 열렬함이 그 대상의 특출함에 견주어 더 증가한다면, 종교적 바람은 모든 바람 중에서도 가장 높고 열렬할 것임에 틀림 없다. 만일 그렇게 느끼지 못하고 있다면 필시 당사자가 종교적 문제, 종교 생활의 추구, 또는 종교적 희망을 실감해 보려는 바람이 열렬해 있지 않은 연유일 뿐이다. 우리가 생명과 불멸을 진실로 높이 평가한다면 우리는 그것들을 빛으로 가져오게 하는 지식을 바랄 수밖에 없다. 그리고 우리와 우리가 바라는 지식 사이에 어떤 장애물이 있어 영혼과 생명수 사이의 교통을 차단한다면 심각한 결핍을 느끼게 되고 우리 영혼은 깊은 곤경과 고통의 상태에 놓일 수 밖에 없다. 우리가 지금 말하는 영적인 지식은 종교학이라 불리는 것, 성경의 교리들에 관한 지식이 아니다. 영적인 지식이란 우리가 생명과 죽음 사이에 있다는 것, 영원한 죽음을 걱정하고 영원한 생명을 사랑하도록 진실로 깨어 있어야 한다는 것을 분명히 알게 하는 지식이다. 영혼의 목마름을 느끼게 하는 것은 종교적인 과학이 아니라 종교 생활이다. 과학의 물은 마음에 만족이라는 감각을 나누어 주는 수단으로 바람직하나 생명의 물은 영혼이 영적인 존재임을 확고히 하는 수단으로서 바람직하다. 전자의 결핍은 쾌락의 결핍일 뿐이고, 후자의 결핍은 행복과 영원한 생명의 결핍이다. 신성한 진리의 부족으로 야기되는 시험은 진리의 삶에 진입하는 이들, 즉 진리가 삶의 수단인 이들에 의해 체험되어질 뿐이다. 이와같은 시험은 주님께서 십자가의 수난에서 겪으신 것들이다. 다윗이 싸우고 시련받고 고통당하는 등등은 세상에 오신 주님에 대한 예징인바 본문의 경우 이스라엘 왕 다윗이 적들의 총 공세에 짖눌려 있듯, 주님도 십자가에서 어둠의 권세로 둘러 싸여 총 공세를 당하셨다. 이 시험에서 어둠의 권세는 정작 그분이 세상에 오신 목적인 인류 구원을 자포자기하도록 구세주를 공격했다. 그러나 창조물의 행복과 구원을 위한 열렬한 그분의 바람은 고통 받는 인성 안에서 생산되었다. 주님께서 “목마르다”라고 말씀하셨을 때, 주님은 육체의 지독한 갈증 때문에서가 아니라 그분의 거룩한 마음의 쓰리고 아픈 바람을 표현하신 것이다. 그분의 목마름은 영원한 생명을 바라신 것, 그 바람을 달성하시는 수단을 확고히 붙잡기 위한 바람을 표현한 것이다. 더구나 이 바람은 그분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닌 타인의 영원한 생명을 위해서였다. 또한 그분의 목마름은 생명의 물을 위해서였다. 그 이유가 그분의 바람은 그분이 시험 가운데에서 공히 필요로 했던 생명 있는 진리로 그분의 인성을 채우는 것, 목말라 하는 그분의 자녀에게 생명의 샘이 되시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베들레헴의 샘물 또한 주님과 그분의 백성들에 관련하여 예증되는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다. 베들레헴은 글자대로라면 “빵의 집,the house of bread”을 의미한다. 본문의 경우에서는 물의 집과 관련되고 있다. 주님이 탄생하신 장소, 베들레헴은 그분이 생명의 빵이심을 가리키고 있고, 그분 안에는 생명수의 샘이 있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
시련과 시험 가운데 있는 기독인의 제자가 자연계의 빵이나 물이 아닌 하느님의 말씀을 듣기를 갈망하는 경우, 이는 베들레헴의 샘의 물을 마시고 싶어함이요, 이는 우리 영혼이 다윗의 집에서 우리를 위해 열려 있는 생명의 샘의 물을 마시기를 바라는 것이다. 이 샘의 물이란 그분의 신성한 인성 안에 있는 하느님의 사랑으로 진행되는 생명 있는 진리이다. 다윗이 마시고 싶어한 샘은 글자대로 보면 베들레헴의 성문 근처에 있었다. 문은 소개함(introductry)이다. 이로부터 주님은 자신을 문이라 부르신다. 그분의 문은 그분의 인성이다. 그분의 인성은 그분의 영원한 신성에 접근하게 하는 매체이다. 그분의 인성 그 자체는 샘, 인간이 필요한 것을 퍼낼 수 있는 샘이다.
다윗이 베들레헴의 샘의 물을 마시고 싶어한 대목이 비록 그 결과는 부하 용사들이 예상했던 것과는 다르긴 했어도 그 나름대로 의미를 담고 있다. 다윗의 삼십 인 용사 중 세 명이 왕의 말을 듣고 “불레셋 진영을 뚫고 들어가 베들레헴 성문 곁에 있는 샘에서 물을 길어와 다윗에게 바쳤다. 그러나 다윗은 그 물을 마시지 않고 야훼께 부어드렸다.”
자연스럽게 생각해본다면 다윗은 세 용사의 대담한 행동을 용기 있는 행동으로 간주하기 보다는 신중함이 결여된 행동으로 간주했는 것으로 여겨진다. 그 이유가 이 행동에 따른 위험도는 성취되는 목적에 비해 너무나 컷기 때문이다. 다윗의 의지와 판단은 물을 길으러 가는 게 아니라 가서는 안 되는 쪽에 있었을 것이다. 이와 같은 일이 영적 사항에서도 종종 벌어진다. 우리는 신중함으로 조절되지 않은 열정의 열렬함으로 행동해버리고는 후에 그 행동 조치를 냉정하게 반성해볼 때 이해성이 그 행위를 승인하지 않았을 법한 경우가 많다.
마음의 움직임, 그로부터 결과 되는 삶에서도 안쪽 인간과 바깥쪽 인간의 작용과 반작용이 있다. 안쪽 인간은 마음의 더 높고 더 평화로운 영역을 점령하고 있다. 바깥쪽 인간은 땅을 밟고 땀흘려 종사하고, 자극적인 흥분을 감당해야 하고 삶의 폭풍을 견뎌야 한다. 안쪽 인간은 우리의 원리들, 양심, 즉 본질적이고 통치하는 생명에 자리를 잡고 있다. 바깥쪽 인간은 원리나 목적 보다 더 많은 방법과 수단을 가지고 움직인다. 영혼의 정부라는 차원에서 생각해볼 때 안쪽 인간은 입법부에 속하고 바깥쪽 인간은 행정부에 속한다고 말할 수 있다. 안쪽 인간으로부터 삶의 법칙이 출현하고 바깥쪽 인간은 안쪽 인간의 뜻을 해석하고 그 법칙을 집행한다. 바깥쪽 인간은 수동적인 도구가 아닌 총명하고 반작용이 있는 대행인이다. 우리의 안쪽 인간은 그의 바람을 표현하고 그의 법칙을 확실히 말하고, 바깥쪽 인간은 안쪽 인간의 선언을 해석하고 집행해 간다. 그러나 바깥쪽 인간이 안쪽 인간의 선언을 언제나 올바르게 해석하거나 또한 언제나 신뢰 있게 집행하는 것도 아니다. 참으로 두 인간의 차이는 대단히 곤란한 경우도 있다. 예를 들면 대중적인 추세가 아주 강해지면 기존의 법을 재해석하거나 도전을 하듯 우리의 자연적 인간도 내적 인간의 뜻을 수정하려 들거나 철저하게 반항하려드는 경우가 있다. 안쪽 인간과 바깥쪽 인간 사이의 작용 반작용은 계속적으로 진행된다. 특히 상호 작용의 결과로 그 품성은 거듭나는 삶의 각기 다른 단계들에서 있는다. 즉 자연적 마음이 매우 거칠고 성급하며 강렬한 열정이 있는 초기 단계, 그러나 이 단계들은 천국적 사랑과 진리의 온순하고 편안한 멍에에 익숙해지는 후기 단계와 재회된다. 이 후기 단계에서 안쪽 인간과 바깥쪽 인간은 하나로서 행동한다. 합일된 이 행동은 거듭남을 구성하는바 진정한 평화와 확실한 행복을 창출한다. 이 합일된 행동은 대리인과 피대리인을 뒤섞어 놓는다는 것을 함축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일는지 모른다. 즉 자연적 마음과 영적 마음, 안쪽 인간과 바깥쪽 인간이 더 조화를 이루고 합일할 때, 그들은 더 구분된 품성과 행동을 획득한다. 그들 사이에 그어진 선(line)은 더 확연해지는바 각각의 기능 역시 더욱 확연히 구분되어 작동된다. 안쪽 인간이 더욱 안쪽으로 물러가지만 바깥쪽 인간에 대한 행동은 더 강력하다. 안쪽 인간이 외부의 소란으로부터 더 멀리 떨어지는바 삶의 위험과 싸움으로부터 더욱 안전하다. 우리가 기독인이 더욱 되어질수록 제아무리 그의 자연적 인간이 바깥쪽 환란으로 고통받는다 해도 그는 내향의 평화의 고요함을 더욱 향유한다. 다윗이 거인의 후손과 대진하여 위태로워졌을 때 다윗의 용사가 거인에게 이렇게 맹세했다. “네가 이스라엘의 불을 끄지 못하도록 너를 전투에 나서지 못하게 하리라.”
거듭남이 발전해 가는 동안 자연적 마음의 많은 반작용이 영적 마음의 작용을 불완전하게 표현한다. 마음 속의 바람이 열정과 에너지를 수반하여 진행되지만 그렇다고 지혜 까지도 언제나 수반하는 것은 아니다. 본문의 경우가 이에 해당되고 있다.
다윗이 베들레헴 우물의 물을 마시기를 간절히 원했다가 마음을 바꾸어 이 물을 “야훼께 부어드렸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이 물을 마셨다가는 야훼께 벌을 받을 것이다. 목숨을 걸고 갔다 온 이 사람들의 피나 다름 없는 물을 내가 어찌 마시랴!” 목숨을 거는 위험을 무릅쓰고 휙득한 이 물을 마신다는 것은 인간 희생 제물의 피를 수납하는 것이나 다를 바 없다. 이와같은 희생이 종교적 열정의 열매일는지 모르나 종교적 지혜가 크게 모자라고 있다. 어떤 측면에서 인간의 희생은 대단히 큰 희생이다. 인간의 희생을 하느님이 열납함, 특히 자발적인 인간의 희생을 수납함은 인간의 혼이 신성한 본질에 흡수되는 것, 가장 높은 진리의 타락은 그 자체 큰 잘못이다는 관념을 표현할는지 모른다. 기독교 신앙은 우리 자신을 하느님께 제물로서 요구하고 있다. 즉 우리 심정 속의 애착과 생활 속의 노동을 그분의 섬김에 헌신하도록 요구한다. 그리고 주님과의 결합을 달성하려 분투 노력하라고 말한다. 이런 노력은 우리가 더욱 그분의 것일 때 우리는 더욱 우리 자신임을 더 구분하려는 것을 느낄 수 있게 한다.
베들레헴 우물 물은 그 물을 획득한 이들의 피로서 주님께 붓는 것은 그들의 생명은 하느님의 선물이요, 그분의 것임을 인정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 물을 성별하기 위해 그분을 찾는 것이고 이 물은 그분의 섬김에 쓰여야 합당하다고 여기는 것이다. 이 물을 붓는 것은 우리로 이런 진리, 즉 “우리는 반드시 죽어야만 한다. 그리고 물이 땅에 부어지면 다시 회수할 수 없다”는 것을 상기하게 한다. 인간은 생명을 줄 수 없고 회복시킬 수도 없다. 이것은 자연적이고 일시적인 생명 뿐만 아니라 영적이고 영원한 생명에서도 마찬가지로 진리이다. 자연적 생명의 숨쉼과 거듭나는 생명 속의 영은 동등하게 하느님의 선물이다. 우리는 모든 선과 모든 완전한 선물은 위로부터 온다는 것을 경건하게 인정하는 영을 다윗 같이 그분에게 부어야 한다. 우리는 그분이 수여하시는 품위, 그분이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을 올바르게 사용하는데 실수가 있었을 때, 비록 지혜가 우리로 도전하지 말라 해도 우리의 열정이 강행할 때, 우리에게 명백하고 또렷하게 말하는데 결코 실패하지 않는 신성한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사무엘하 23장 1-6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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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하 23장 1-6절

다윗의 마지막 말

다윗의 마지막 말은 분명히 예언적이다. 다윗의 이 언어들은 과거 저주해 달라는 발락의 부탁을 받은 발람이 오히려 이스라엘 후손에게 복을 빈 이야기와 놀랄만하게 흡사하다. 발람의 이야기는 이러하다. “브올의 아들 발람의 말이다. 천리안을 가진 사내의 말이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하는 말이다. 지존하신 이의 생각을 깨치고 하는 말이다. 전능하신 하느님의 환상을 뵙고 엎어지며 눈이 열려 하는 말이다. 이 눈에 한 모습이 떠오르는구나. 그러나 당장 있을 일은 아니다. 그 모습이 환히 보이는 구나. 그러나 눈 앞에 다가 올 일은 아니다. 야곱에게서 한 별이 솟는구나. 이스라엘에게서 한 왕권이 일어나는구나. 그가 모압 사람들의 관자놀이를 부수고 셋의 후손의 정수리를 모조리 부수리라. 에돔은 그의 속국이 되고 세일은 그의 차지가 되리라. 이스라엘은 힘이 뻗치고 야곱은 원수들을 지배하며 아르에서 빠져 나온 피난민을 멸절시키리라” (민수기 24:15-19). 다윗과 발람 모두 지존하신 분으로부터 직접 영감을 받아 말하고 있다. 이것만으로도 이 말들은 예견으로서 뿐아니라 예언적이다는 것을 우리로 확신하게 하는데 충분하다. 특히 주님의 영이 자기를 수단으로 해서 말씀하신다는 선포는 주체가 누구인지를 명확히 하고 있다. 그러나 주님의 영이 말한다고 하기 보다는 다윗 자신을 두고 말한 부분도 한 군데 있다. 즉 “백성을 정의로 다스리는 자, 하느님 두려운 줄 알고 왕노릇 할 자” 라는 구절이다. 그러나 이것도 세상에 막 오시게 되는 주님에 관련된 것임이 명확하면서도 다윗과 그의 가문에 관련해 나타나는 사실과도 무관한 것은 아니다. 그 이유가 다윗 자신은 솔로몬을 비롯해 이스라엘과 유다의 모든 왕들과 마찬가지로 주님을 표징하였기 때문이다.
다윗이 메시아와 그분의 왕국의 영광에 관한 것을 주님의 영으로부터 말하고 있다는 것은 위에서 살폈다. 이제는 영감된 그의 선언의 취지도 살펴보자.
가장 일반적인 견해 아래에서 이 예언을 다룬다면, 주님의 강림의 두 가지 대상과 결과는 신실한 자와의 언약의 성취, 또는 신실한 자들이 그분 자신과 더 친밀한 관계를 갖는 것, 그리고 세상에서 그분의 나라를 전복했던 이들을 종속시키고 제거하심이다.
주님의 교회(The Church)가 다윗의 가문으로 의미되고 있다. 그 이유가 주님의 교회가 그분의 가문이기 때문이다. 그분의 가문과 더불어 길이 이어질 언약은 주님께서 육을 입으심이 그분 자신과 그분의 백성 사이에서 결과 되게 하는 결합과 관련을 맺고 있다. 타락한 자의 아들들(the sons of Belial)은 특별히 어둠의 권세로 이해되어진다. 그러므로 이는 사악한 자 뿐 아니라 악령들, 즉 주님의 교회가 뒤집혀지고 파괴되도록 하는 영향력과 음모 까지를 포함한다. 지옥 권세를 복종시킴이 사악한자가 내던져 깡그리 태워지는 가시나무로서 묘사되고 있다. 그런데 옷을 입지 않은 신성, 순수한 신성으로서의 주님의 경우 위와 같은 결과가 있어질 수 없는바, 도구로서 인간 본성을 옷 입으셔야만 했다. 이 사항이 사악한 자(sons of Belial)를 만지려면 맨손으로는 안 되고 쇠꼬챙이나 창대를 가져야만 한다는 말에서 암시되고 있다. 주님의 인성은 그분 자신과 그분의 자녀가 교통할 수 있게 하는 매체였다. 이 도구의 힘을 수단으로 그분은 그분의 교회와 나라의 원수들을 대적하셨다. 주님은 육으로 만들어진 말씀, 인성으로 옷 입혀진 말씀이셨다. 이 말씀 속의 신성한 진리가 쇠꼬챙이(iron)로, 신성한 선함이 창대(staff of a spear)로 의미되고 있다. 이와 견주어 생각해 볼 수 있는 성경 구절로는 요한계시록 19장 15절이 있다. 즉 “그분은 친히 쇠지팡이로 모든 나라를 다스릴 것이다.” 이 구절의 쇠(iron)는 자연적 진리를 의미하고 있다.
이외에도 예언의 보편적 의미와 일치되되 특별한 의미들이 각 부분 마다에 감추여 놓여 있다. 4절의 경우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그는 아침에 터져 오는 햇빛, 구름이 걷힌 아침의 해 같아, 이슬을 머금은 푸성귀가 땅에서 이 빛을 받아 자란다.”
일반적 의미에서 이 신성한 말들은 세상에 오시는 주님과 관계되고 있다. 그리하여 이 분은 정의의 태양으로서 어리석은 세상에서 치료해주는 그분의 날개를 가지고 일어나셨고, 장막 위에 세세토록 가리워 내적 영광들을 감추이게 한 구름을 제거하셨고, 예징(type)과 그림자라는 베일을 찢으셔서 그분 자신으로부터 직접적으로 진리의 빛을 발산하시어 참되고 생명 있는 신앙의 영적 계발이라는 새 날을 개시하셨다. 개인적 의미 일 경우, 이 사항들은 영과 말씀을 수단으로 오시는 주님에 관련되고 있다. 그리하여 그분은 회개하는 마음에 오시어 그분의 빛과 사랑을 그들 심정에 드리워 무지와 잘못의 어두움을 제거하고 진리와 선함의 새 날이 그 마음에서 동트게 하신 바, 새 삶의 징조가 여린 풀싹이 돋아 나듯 모습을 드러낸다.
위 사항들은 구름 없는 아침의 모습 같이 우리 삶에 장착된 축복들이다. 그러나 이런 축복들에는 영적 주권과 주님의 정부가 건설된 결과라는 단서가 붙어 있다. 이것이 앞 절에서 이렇게 말해진다. “백성을 정의로 다스리는 자. 하느님 두려운 줄 알고 왕노릇 할 자.” 인간의 통치자로서 주님 스스로에 한정해본다면 그분은 무한하게 정의로우신 분이시다. 그분은 백성들 위에서, 백성들 안에서 정의로 통치하신다. 주님의 정부는 각기 다른 마음 안에서 각기 달라진다. 어떤 이의 경우 그분은 정의로, 심판으로, 사랑으로, 두려움으로, 선함으로, 진리로 다스리신다. 근원적 차원에서 신성한 정부는 똑같다. 이 정부는 무한한 지혜를 수단으로 하는 무한한 사랑의 정부이다. 그러나 인간의 다양해지는 상태에 따라서 바뀐다. 주님께서 정의로 다스린다고 말해질 경우 이는 신성한 선함의 정부를 의미한다. 따라서 이는 인간의 심정에서 있는 통치하시는 그분의 본성과 품질이 묘사되도록 의도된 것이다. 신성한 선함이 통치할 때, 이는 하느님을 두려워함으로 통치되는 것이나 그렇다고 원수갚는 자로서의 하느님을 노예 같이 두려워함으로 통치되는 게 아니라 모든 참된 사랑에 있는 거룩한 두려움(경외함), 사랑하는 대상이 다칠까 걱정하는 두려움으로 통치된다.
이와같은 정의로우신 하느님이 그분의 사랑과 두려움으로 꽉 찬 우리 마음에 오실 때 이는 마치 구름이 걷힌 아침에 해가 떠오를 때의 햇빛 같이 오신다.
아침은 마음의 평화와 평온을 상징한다. 즉 아침은 신성한 진리가 마음에 온화한 빛을 뿌리우고, 신성한 진리의 빛이 들추어 내준 천국의 아름다움과 하모니를 느낄 때를 상징한다. 성경에서의 아침은 영적인 평화의 내면의 상태, 즉 외부의 어떤 곤경이 사라져서 있게 되는 평화가 아닌 내향의 느낌으로부터 있게 되는 평정의 상태를 뾰족하게 상징한다. 거듭남은 평정(tranquility)의 상태에서 시작된다. 다시 말해 하루 중에서 동틀녘(dawn), 인생 중의 유아 시기에서 시작된다고 이해해도 된다. 따라서 거듭남은 한번에 결과되지 않고 한 개의 시리즈가 연속되는 가운데 발전을 거듭해 간다. 거듭남은 계속적인 상태들 안에 각기 구분되는 상태들의 이어짐으로 구성된다. 세부적인 상태들의 그 각각은 전체에 대한 형상이다. 영혼의 삶은 육체의 삶과 상응된다. 영혼의 삶에도 출생이 있고 활동과 쉼, 잠들지 못할 때도, 휴식을 취할 때도 있다. 상태들 역시 시간처럼 한 개 한 개의 회전을 수단으로 형성되고 측정되어진다. 각 상태들은 각기 아침, 정오, 저녁과 밤이 있다. 이런 은택스러운 순환으로 말미암아 마음의 능력들은 즉시 상쾌함으로 기운이 돋구어져 기꺼이 개선되어 간다. 상태들과 그것의 발전도 시간의 진행과 기간을 생산하는 것과 유추되는 원인으로부터 생산되어진다. 참으로 해가 낮을 생산하고, 밤과 낮이 구별되게 한다. 하루의 때를 만드는 것은 태양의 고도의 차이이다. 태양 그 자체에만 의존한다면 영구적으로 빛을 발하는바, 결국 낮만 있겠지만 하루의 때를 만드는 것은 지구의 공전이다. 이는 주님과 그분의 창조 사이에서도 실제로 똑같다. 하느님 안에서는 어떤 변화도, 어떤 다양함도, 어떤 회전함에 따른 그림자도 없다. 그분에게는 어제와 오늘이 똑같고 영원하다. 그분의 태양은 인간의 모든 자손들에게 불변하는 공평함에서 빛을 내신다. 어둠이 태양에 의해 생산된 게 아니듯 빛의 없음이 어둠을 만들었다는 식으로 해서 빛이 어둠을 생산했다고 말할 수 없다. 어둠은 태양으로부터 그 스스로를 돌림으로 해서 심정과 이해성에 올 수 있는 주님의 영향력을 배척함으로 발생된다. 도덕적, 영적 어둠은 영혼과 하느님 사이에 자아가 옴으로, 즉 그분께서 인간으로 그분의 빛과 생명을 지각하고 받도록 하기 위해 주어졌던 자질과 주님 사이에 인간의 이기심이 서있음으로 야기되어진다. 영적 어두움이 인간의 부패된 이기심을 끼워 넣음으로 야기되는바 성경에서도 이렇게 기록되고 있다. “너의 죄가 너와 하느님 사이를 갈라 놓았고, 너의 불법이 너로부터 그분의 얼굴을 가리웠다.” 따라서 갖가지 수준에서 있는 희미함도 인간 이기심의 활동으로 발생된다. 거듭남이 드높아 질수록 그의 이기심은 중립화 되고 결국은 무력해지는 수준에도 이른다 천국에서 조차 주님 보시기에 이기심이 깨끗해 있지는 않다. 그 이유가 인간이 천사 안에 있는바, 천사는 인간의 불완전함에서 자유롭지 않기 때문이다.
만일 인간의 이기심이 모든 영적 어둠과 희미함의 원인이요 그 바탕이라면 희미함의 수준은 이기심의 활성화된 수준과 같은 것이다. 따라서 이기심이 왕성하게 활동할 때는 밤이고, 미미하게 활동할 때는 아침이요, 낮은 저녁 쪽으로 전진하여 다시 밤이 된다. 거듭남에 관련해 볼 때 천사들의 경우 진짜 밤은 없다. 그 이유가 비록 그들이 밤 같은 상태를 경험할 지라도, 그것은 태양이 부재 중이라 해도 태양빛이 아직 남아 있는 수준에서의 밤 같은 상태, 즉 마음에 새로움과 휴식을 주는 정도의 상대적인 희미함인 황혼 같은 정도일 것이다. 다시 말해 천사들의 희미함이나 어둠의 경험은 힘을 비축하고 능력을 확장하여 새 날로의 진입이 가능하게 하여 그들의 의무에 활력과 즐거움이라는 풍미를 주게 된다.
영적 상태의 아침이 다윗의 마지막 말들에서 취급되고 있다. 주님이 구름 없는 아침에 태양이 떠오를 때의 햇빛으로 말해지고 있다. 주님은 아침을 출생하게 하는 떠오르는 태양이시다. 그 이유가 그분의 떠오르심은 심정의 애착 안에서 드높이기 때문이다. 이 드높임은 마음 안에서 우월함을 그분께 바치는 셈이 된다. 결국 그분에게 마음에 대한 지배권과 영향력을 주게 된다. 이는 내향의 마음에 빛과 평화가 확산되는 결과가 있게 된다. 주님을 드높이라는 많은 권고들은 심정 안에서 그분을 드높이는 것과 모두 관계되고 있다. 우리 스스로 어떤 다른 방법에서 실지로 드높일 수 있다고 상상하는 것은 금물이다. 우리가 심정과 이해성 안에서 그분의 사랑과 지혜, 선함과 진리, 정의와 공정을 드높일 때 실지로 주님을 드높인다. 그분의 사랑과 지혜가 드높혀 질 때 주님이 드높혀진다. 사랑과 지혜가 우리 안에 거주할 때 주님은 우리 안에 거주하신다. 그 이유가 신성한 존재(Divine Being)는 그분의 것이 존재하는 곳, 또는 그분 자신으로부터인 것에서만 거주하실 수 있기 때문이다. 정의와 공정은 자기를 낯추고 깊이 회개하는 심정 안에서, 뿐만 아니라 영원한 처소에서 그분의 옥좌가 있는 주소지이다. 정의와 공정은 마음 안에 그분의 거주지를 형성하고, 그 것들 안에서만 그분은 드높혀지실 수 있다.
어떻게 정의와 공정(justice and judgment)의 원리가 드높혀 질까? 정의와 공정에 반대되는 것은 무엇이든 혐오하고 피함으로 가능해진다. 주님은 단지 헌신하는 행동이나 정신적 흥분 만으로 드높혀 지실 수 없다. 우리 속 그분의 거주지의 기초는 겸손과 자기 비난으로 깔려 있어야만 한다. 그리고 드높임의 구조를 짜는 품위들은 각각 자기 부정을 받침대로 하여야만 한다. 겸손해진 자아를 지니기도 전에 하느님을 드높이겠다는 생각은 헛된 것이요 그 노력은 결실이 없는데, 이런 착각 때문에 진정한 하느님을 드높임은 교회에서, 교인의 생활에서 매우 적어진다. 그렇다면 어디에 참된 드높임의 증거나 결실이 있는 걸까? 그 결실은 마음 안에서 하느님의 드높임이 진실로 있어질 경우 그분으로부터 진행되는 미덕들이 생활 안에서 우세해질 때 있어질 것이다. 다시 말해 온유함, 친절함, 관용, 타인의 복지와 자신의 복지를 최소한 동등하게 관심을 기울이게 되는 것 등등 일 것이다. 이런 것들은 주님을 드높임의 참된 결과요 인간의 참된 겸손의 결과이다. 그 이유가 전자는 후자 없이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느님을 드높인다고 말하는 것은 자만심이나 자아 정의에 대해 비웃는 것이다. 자신의 정의는 최소한 남들의 것과 더 낫다고 생각을 하는 이들은 실상 그들 자신을 위한 지식을 조금밖에 얻지 못하고 하느님에 관한 지식은 더욱 덜 얻을 수밖에 없다. 따라서 이 지식은 자신을 낯추고 상대적으로 타인을 좀 더 높게 생각하도록 우리를 만든 확실한 결과이다. 사실 세상에서의 실습은 이와 정반대 일 때가 오히려 정상인 듯 되어 있다.
우리가 구름 없는 아침의 새벽을 경험하고 싶다면, 우리는 마음을 쑤석거리고 흐리게 하는 악한 열정들을 복종시키고, 하느님의 사랑과 진리가 빛과 평화를 주도록 지켜야 한다. 이것은 우리의 특이한 의무이다. 우리가 악 속의 자신을 거부한다면 하느님께서는 선함을 이식하실 것이다. 그분은 우리가 품위 있어지기를 기다리신다. 우리의 이기심 속 품위 없는 것들에 적극적으로 저항함으로 그것들이 제거될 때 까지 그분은 기다리셔야만 한다.
악이 내향의 삶에서 저항을 받고, 바깥쪽 행동에서도 단념되지 않는 한, 어떤 선한 것도 내향의 삶에서 조차 이식되어질 수 없다. 그러나 이식이 결과 된 후에는 또 다른 중요하고 복된 일들이 결과 된다. 우리가 그분께 성실해 있는 동안 주님에 의해 내적 인간 안으로 은근히 심어진 선은 외적 인간에로 내려와진다. 생각과 애착 속의 선은 바깥쪽 삶이나 대화, 그리고 일 속의 선을 만들어 간다. 이것이 “이슬을 머금은 푸성귀가 땅에서 돋아 나는” 것으로 말해지고 있다. 이 대목은 하느님의 말씀 전체를 망라하여 흐르는 유추의 체계에 대한 아름다운 예도 된다. 하늘(heaven)은 영적 마음을 상징해주고 땅(earth)은 자연적 마음을 상징해주고 있다. 진리는 비처럼 영적 마음의 하늘로부터 내려와 자연적 마음의 땅에로 떨어져 땅으로 열매 있게 한다. 비가 오지 않을 때 하늘이 닫혔다고 읽을 때가 있다. 그 이유가 영적 마음이 악에 의해 실지로 닫혀지면 천국의 진리는 자연적 마음에로 내려올 수 없는바 영적 가뭄과 기근이 있게 된다. 이와 반대로 이런 신성한 약속도 읽는다. 우리가 주님께 우리의 예물을 가져온다면 그분은 하늘의 창문을 여시어 축복을 우리에게 부어주신다.
지상에서 열매 있게 하는데 필요한 것으로는 비 뿐만 아니라 햇빛도 있어야 한다. 마찬가지로 정의로운 삶으로 결실을 거두는 데에는 진리 뿐만 아니라 사랑도 있어야 한다. 부드러운 풀잎은 비가 뿌려진 뒤 청량한 햇빛을 받아 자란다. 영적으로 이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 진리는 선함 안에 우리의 선함이 있게 하는데 가장 필요하고 유용하다. 사랑 없는 진리는 햇빛 없는 비와도 같아 결실이 없게 된다. 삶 속에서 성장과 결실을 가져오게 하는 것은 진리의 비가 정직한 심정의 선함을 적신 후 청량하게 빛나는 사랑의 햇빛이다.
마음 자체에서 있는 위의 관계는 서로서로의 인간 관계에서도 똑같다. 서로 교제하는데 있어서도 서로가 신뢰를 주는 것 만으로는 충분치 않은바 우리는 서로 사랑되어질 필요 가 있다. 진리는 그 자체 만으로도 매우 귀중한바 그 스스로 존재하고 배분될 경우 진리는 자신이 수용할 수 있는 선에 대해 차갑고 비 생산적 일 뿐이나 사랑의 영향 아래서는 강력하게 생산적이다. 젊은 이들의 심정에 사랑을 주지 않은 채 그들 지성에 진리 만을 준다면 거기에 무엇이 형성되어질까? 젊은 생명의 성장에는 진리의 비 만큼이나 절실한 게 사랑의 햇빛 아닐까? 이는 우리의 친구 관계에서도 똑같고 영적 형제 다움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진리는 삶의 모든 관계에서 실지 유용함의 필수적 요소이나 사랑은 그 요소들을 하나 되게 한다. 사랑 가운데서 진리를 말하는 것이 완전한 가르침과 훈계이다. 그러므로 종교적 선생은 진리의 사람일 뿐아니라 사랑의 사람이 목표여야 한다. 그는 진리를 가르치는데 충실해야 하고 그 교훈들을 지키게 해야 하나 그가 진리의 비가 뿌려진 후 청명한 사랑의 햇빛을 주지 않으면 그의 거룩한 직무수행의 최말단 결과로서 목표로 삼아야 하는 선함의 생산에는 실패할 것이다. 우리의 위대한 선생, 주 예수 그리스도이시야 말로 얼마나 아름답게 가르침과 본보기를 하나로 하셨는지!!

사무엘하 22장 해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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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하 22장

다윗의 감사 찬양

위험과 구출이 뒤범벅된 다윗 인생의 고난과 싸움이 다 지나간 후 영글어진 인격으로 하느님께 감사하는 노래 안에 다윗의 영혼이 다 쏟아져 스며있는 듯 여겨질 뿐이다. 우리는 앞 장에서도 이 아름다운 작문의 일부를 언급하기도 했다. 그 안에서 그는 고난의 시기에도 주님을 신뢰함과 곤경에서 헤어나게 해준 그분의 은택을 표현해놓고 있었다. 이 노래는 다윗의 여느 다른 것보다 품성 측면에서 더 일반적이다. 그리고 주님의 영에 의해 감화되어 그의 경건한 영이 가장 고상하고 달콤하게 표현한 것 중 하나이기도 하다.
이 노래는 과거 모세가 에집트인들의 추격으로부터 안전해진 후 노래한 내용과도 닮은 점이 있다. 우리의 위대한 주석자가 홍해 바다의 경계선에 있는 다른 표징적인 사람에 의해 불렸던 노래를 다루는 가운데 거룩한 노래의 주제에 관해 언급했던 것을 먼저 서술해 본다. “노래 부름은 신성화 하심을 의미한다. 즉 노래는 신성이 되심을 의미한다. 고대 교회에서, 그 후에는 유대 교회에서 노래들은 예언적이었고 주님을 취급했는데 특히 세상에 그분의 오심, 극악무도한 패거리들을 파괴하심, 그들의 폭력으로부터 신실한 자들을 구해내심 등등을 다루었다. 노래 속의 예언들이 내적 의미에서 위와같은 것을 포함했는바, 노래는 주님의 영화하심, 즉 심정으로부터의 기쁨에서 그분을 경축함을 의미했다. 심정(가슴)의 기쁨은 특히 노래를 수단으로 표현되는데 그 이유가 노래 안에서 심정의 기쁨은 거의 동시에 튀쳐나오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여호와 즉 주님은 노래 안에서 영웅, 전쟁의 용사, 군대의 하느님, 정복자, 강함을 주시는 분, 방어자, 피난처, 구원해 주시는 분 등등으로 불리우시고 있다. 그래서 파괴되어졌던 악마적인 패거리들은 때려부수고 짓밟아 지옥에 내던져진 적으로 불리웠다. 내적 의미에 관해 아무 것도 몰랐던 이들은 노래 가사에서 취급한 세상적인 것들을 단지 세상에서의 적, 전투, 승리 라고 만 믿었다. 그러나 신성과 천국적인 것들이 세상적인 것에서 표현되어 졌다는 것, 노래 가사 속의 예언들이 천국적이고 신성한 것들을 포함했다는 것을 알었던 이들은 이런 예언들이 주님이 세상에 오실 때 불신자의 정죄를, 믿는 자의 구원을 취급했다는 것을 알았다. 이것이 위와 같은 경우임을 알고 곰곰히 되새겨 보고, 그로 인해 감화되는 이들은 내적 기쁨으로 감동되어 진다. 그러나 전자의 경우는 외적 기쁨 뿐이다. 인간을 시중드는 천사들 역시 주님의 신성화 하심에서 동시에 있었다. 그러므로 노래한 이들과 노래를 들었던 이들은 마치 천국으로 들리운 듯한 기쁨 안에서 천국으로부터 흐르는 거룩하고 복된 원리로부터 천국적 기쁨을 경험했다. 이와같은 결과는 오늘날 까지 그들이 가지고 있을는지 모른다. 그 이유가 영적 천국의 천사들은 주님과 그분의 나라, 교회에 관련된 노래들로 더욱 감화되기 때문이다. 주님의 교회의 노래들이 이런 결과를 가진 것은 심정의 기쁨과 내면으로부터 튀쳐 나오는 활력이 그들의 신체 외부의 근육 조직에 까지 이르고 그것들이 기쁨으로 흥분되고 거룩한 전율을 가짐으로 활력이 주어진 결과일 뿐만 아니라 천국에서 주님의 영화하심이 콘서트에서 노래하는 수많은 찬양대에 의해 결과 되었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역시 천사들의 언어는 하모니로 그 집단 개개인에게 전달된다. 이로부터 주님의 교회에 소속된 고대인들 사이에서 주님의 신성화 하심은 노래를 수단으로, 여러 종류의 음악 도구를 수단으로 수행되어 졌다. 그 이유가 주님의 교회에 소속된 고대인들은 주님의 오심과 그분에 의한 인류의 구원을 다시 생각하는 가운데 탁월한 기쁨을 자아냈기 때문이다.
경미한 차이는 있지만 이 노래는 시편 18편과 같다. 아마 클라우(Clowes)와 힐러(Hiller)가 선견자의 저서 여러 곳에 흩어져 있는 설명을 한데 모은 책만 언급하는 것으로도 충분할는지 모른다. 어쨋든 다윗의 영이 하느님에 대한 그의 생각과 애착이 고난의 시간이 지난 후 새롭게 되었듯이 다윗의 피흘리는 전쟁의 역사를 따라 온 독자들도 그의 경건한 영적 호흡과 연합함으로 다윗의 평안을 느끼리라 본다.
스베덴보리는 그의 단편적인 메모록에서 사무엘하의 20장을 건너 뛰어 다윗의 노래에 세세한 설명을 붙이고 있다. 세세하다고 말하지만 이는 단어 하나 하나 마다의 설명이 아니다. 각 절 마다 그 절을 설명하는 방법에 관한 것일 뿐이다. 설명 그 자체는 예술가로 말하면 끝내진 작품이라기 보다는 탐구에 그친 수준이라 볼 수 있다. 그럼에도 위대한 스승의 연구들은 드높은 칭송을 받아야 하는바 그 이유가 우리로 그의 연구 흔적을 추적해 볼 수 있게 해서 그 대목들에 대한 생각을 더욱 만족해 가는 쪽으로 발달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위대한 스승의 연구는 대단히 흥미롭고 교훈적이다. 그러므로 이 거룩한 노래의 번역을 제공한다. 어떤 경우에서는 이 설명은 소견을 첨부하거나 급히 써놓은 듯한 메모록의 말과는 아주 다른 그의 출판 서적들로부터 축출하여 설명하고 있다. 번역물의 어떤 일부는 추측적으로 읽혀졌거나 생략되어 건너 뛰었거나 히브리어의 라틴어 번역인 쉬미더스(Schmidus)의 성서를 잘못 읽은 듯 생각되는 부분은 생략하기도 했다.
(1) 적들의 손에서 건짐을 받았을 때의 다윗의 노래
다윗이 내놓은 말들은 하느님-메시아의 영에 의해 영감되어 졌다는 것, 따라서 다윗이 아닌 하느님의 영이 말하고 있다는 것은 23장 2절로부터 명백하다. 그리고 하느님의 영이 말하기 때문에 그 대상은 다윗이 아닌 것도, 내적 의미에서 신실한 사람, 가장 깊은 의미에서는 하느님-메시아를 신뢰하고 사랑하는 이들, 최고 높은 의미에서는 하느님-메시아 그분 자신이라고 이해되어진다. 이와같은 것이 다윗을 통해 말해지는 곳은 어디에서든지 거룩한 영의 의도이다. 이에 관해서는 정의, 손이 깨끗함, 성실, 거룩함 등을 거론하는 21- 27절로부터 확증해볼 수 있으리라 본다.
“야훼는 나의 반석, 나의 요새, 나를 구원하시는 이, 나의 방패, 구원의 뿔, 나의 산채, 나의 피난처, 포악한 자들의 손에서 이 몸 건져 주셨으니,” (2,3절). 이상은 하느님-메시아를 의미하는 이름들이다. 그 이유가 이 구절 외의 다른 구절에서도 그분은 산, 돌, 바위, 방파제로 불리우기 때문인데, 그분 홀로 만이 싸우신다. 뿐만 아니라 거룩하시고 승리를 안겨 주시는 분이다. 전능자이신바 그분은 바위이시다. 보호자이신바 그분은 요새, 높은 탑이오, 산채이시다. 그분은 사탄과 죄의 포악함으로부터 구원하시는바 구세주, 구원의 분이시다.
“찬양을 받으시라 내가 야훼께 부르짖었더니 나를 원수의 손에서 건져 주셨다” (4절). 여기서의 적은 영적인 적, 그외 다른 적을 뜻하고 있지 않다.
“죽음의 물결에 휩싸이고 멸망의 물살에 휩쓸려 겁에 질리고, 포승에 묶여 저승으로 가고, 올가미에 걸려 죽을….” (5,6절). 원수들인 악마의 떼거리들은 죽음의 물결, 멸망의 물살을 닮았다. 그 이유가 악마들은 군대를 이루어 돌진하는 영들이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시험이 오는데, 그 이유가 악마들은 유혹하거나 욕을 퍼붓는 식의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방법으로 돌진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악마들은 지옥의 슬픔, 죽음의 올가미라 불리운다. 악마들은 공격 대상자를 대단한 술수로, 기묘하게 계속적으로 꾀어댄다. 악마들도 사람들에게 감명되도록 시험 중에 고통받으나 그것은 죽음의 올가미이다.
“다급한 때에 야훼께 부르짖었더니 당신의 전에서 내 소리를 들어 주셨다” (7절). 영적인 곤경이 여기서 묘사되고 있다. 하느님-메시아 만이 유일한 피난처인바, 그분의 성전 즉 천국에서 천사들을 통해 애원자에게 도달되는데, 이 구절에서는 애원자라기 보다는 더 강도가 높은 울부짖는 자로 표현함이 더 나을 듯 하다.
“그가 한번 노하시니, 땅은 뒤흔들리고, 하늘 기초도 뒤틀리며 흔들렸다” (8절). 원수들에게 복수하심이 묘사되고 있다. 비록 그분이 앙갚음하신 듯 묘사되었다 할지라도 이는 하느님-메시아에 의해 가해진 벌은 아니고 돌진하는 자가 타인에게 주어진 행위이다. 분노가 최말단에 까지 순서대로 내려 오게 될거라고 묘사되고 있다. 위에 있는 모든 것이 움직여졌다. 마치 성난 사람의 마음 같다. 역시 아래에 있는 것은 무었이든, 육체 안의 최말단 까지도 움직여진다. 이 구절이 말하는바 땅이 떨고, 하늘의 기초가 흔들려 움직여졌다. 악령들은 가장 낮은 부분, 즉 육체가 존재하는 장소, 다시 말해 보다 높은 마음에 비해 상대적으로 보다 낮은 영역인 자연적 마음에 거주하는바 그들은 전율한다.
“코로는 연기를 내뿜으시고, 입으로는 불을 토하시며, 숯불 처럼 모든 것을 살라 버리셨다” (9절). 분노가 연기나 불, 마치 시나이 산이나 그밖의 다른 성경 장소에서 같이 숯불에 비교되고 있다. 그러나 삼킬 듯한 불이나 연기가 주님으로부터 나온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그분에게는 분노라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그렇게 말해진 것은 악으로부터 거짓 속에 있는 이들에게는 주님이 그렇게 나타내지기 때문이다. 연기는 거짓을 명시하고 연기 속의 불꽃은 분노이다. 그 이유가 지적 측면에서 악으로부터의 거짓은 연기와 같고, 분노는 타오르는 연기의 불꽃이기 때문이다.
“그는 하늘을 밀어 젖히시고 검은 구름 위에 내려 서시며” (10절). 어둠은 아주 짙은 검은 구름과 비슷한바 악한 자에게는 밤이다. 여호와께서 하늘을 밀어 젖히시고 내려 오심은 마지막 심판에 앞서 진행되는 방문을 의미한다. 그분의 발 아래의 어둠은 보다 낮은 것 안에 있는 악의 거짓들을 의미한다. 이를 수단으로 영들의 품질의 조사가 결과되고 또한 악으로부터 선이 분리되는 결과도 있어진다. 천국들이 그분과 상호 작용했을 때 주님은 하늘을 밀어 젖히시고 인간의 모습을 갖추시는(Incarnation) 때에 내려 오셨다. 어둠이 그분의 발 아래 있다란 그분께서 우리의 타락된 인성을 입으셨을 때이다. 또한 어둠은 말씀의 글자적 의미이다.
“거룹을 타고 날으시고 바람 날개를 타고 내리덮치셨다.” (11절). 거룹 위에 계셨는데 그 이유가 거룹들이란 내려 오는 이들, 즉 명령을 집행하는 이들이기 때문이다. 바람 날개 위에 계셨는데 이는 똑같다. 그 이유가 천사들이 바람의 날개들로 불리우기 때문이다. 주님께서 거룹을 타심은 그분의 신성한 섭리를 의미하고, 그분이 날으심은 영계의 어디에든지 계심을 의미한다. 바람의 날개 위에서 보여짐은 자연계의 어디든지 계심을 의미한다.
“몸을 어둠으로 감싸시고 비를 머금은 구름을 두르고 나서시니,” (12절). 어둠이 마치 그분 주위를 감싼 장막이다. 또한 물과 구름으로 감싸시고 있다. 모인 물과 빽빽한 구름은 결국은 마찬가지가 된다. 이는 말씀 안에서 주님이 오심과 말씀 안에 현존하심을 다루고 있다. 어둠과 구름은 글자 의미이다. 천국에 있는 신성한 진리가 아직도 글자 의미 안에 있다. 그러므로 어둠은 그분을 감싼 장막으로 일컬어지고 있다.
“그분 앞에 있는 광채를 통해 숯불이 피워졌다.” (13절). 광채란 신성한 진리이다. 그로부터 숯불이 지펴졌다. 그 이유가 (영은) 진리를 수단으로 세련되기 때문이다. 앞 절에서 언급된 어둠은 말씀의 글자 의미이고 이 구절의 광채는 영적 의미이다. 정의에 관련해 볼 때 글자의 어둠은 영의 광채에 앞서 온다. 즉 영에 의거 .주님을 알기에 앞서 육에 의거 주님을 안다는 말이다. 애착들은 주님의 사랑의 불에 의해 지펴진다.
“지극히 높으신 이, 야훼께서 천둥 소리로 고함치셨다” (14절). 그분은 천국으로부터 천둥치신다. 천둥은 분노의 결과이다. 천둥은 구름 안에서 일어난다. 그런고로 (그분은) 공포로부터 고함치는 자(thunderer)라 불리우신다. 주님 자신에 관련해 보면 그분의 천둥은 신성한 사랑이고 그분의 번개는 신성한 진리이다. 이것이 선한 자에게는 감명을, 악한 자에게는 반대되는 영향을 주는바 다음 절에서 설명된다.
“번개는 번쩍번쩍, 화살을 마구 쏘아 대시어 원수들을 흩어 쫒으셨다” (15절). 이것들은 영적 무기들, 즉 진리들과 선함들이다. 번개는 천둥에 이어 오고 이를 수단으로 원수들이 당황하게 된다. 여기서의 천둥은 천국으로부터의 천둥 소리가 표현된 것이다. 번개는 화살을 수단으로 하고 있다. 두 가지 모두 신성한 진리들을 의미하고, 섬광은 번개의 빛이다. 이것은 진리들이고 선한 자에게는 생기를 주면서 계발해 주고, 악한 자는 눈멀게 하고 공포를 느끼게 한다. 이것이 화살을 쏘아대어 그들을 흩으심에 대한 의미이다. 번개가 번쩍거려 그들을 좌절시켰는바, 그 이유는 사악한 자들은 천국으로부터 오는 어떤 빛이나 신성한 진리들에는 견딜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있는 자리에서 혼비백산된다.
“야훼께서 한 번 호령하시니, 바다 밑바닥이 드러나고 그의 콧김에 땅의 기초가 드러나는데,” (16절). 바다 밑바닥, 땅의 기초는 최하위 지옥을 묘사한 말이다. 견책한 소리는 진리의 천둥, 번개를 의미한다. 콧김이란 생명이요 이 생명은 가장 낮은 부분 까지 관통하여 빛을 낸다.
“높은 데서 손을 내밀어 나를 끌어 올리시어, 거센 물 속에서 건져 내셨다” (17절). 영들이 지옥에서 건져지는 것, 하느님-메시아에 의해 거센 물 즉 많은 죄의 저수지로부터 건져내짐이 묘사되고 있다. 즉 지옥으로부터 끌어내셨다. 인간은 원수들, 즉 너무 강해서 자기로서는 어쩌기 힘든 악마로부터 구출되어진다.
“내가 망할 처지가 되자 저들이 달려 들었지만, 야훼께서 내 편이 되어 주셨다” (19절). 재난을 당할 처지에 달려든다는 것은 나를 파괴하겠다는 것이나, 하느님-메시아는 내 기둥이 되어 주셨다는 것, 앞의 2,3절과 같다. 재난의 날이란 진리의 믿음이 약해진 상태를 말하고, 주님이 기둥이시다란 그런 상태에서 있어지는 능력을 의미한다.
“건져 주시고 어깨를 펴게 해주셨다. 하느님께서 이렇듯 나를 좋아 하셨다” (20절). 그분은 나를 넓은 곳, 곧 구덩이, 즉 지옥으로부터 천국의 평야로 데려가셨다. 그 이유는 그분이 나를 좋아 하셔서, 하느님-메시아는 그분의 아들들을 좋아하셨기 때문이다. 여기서 하느님-메시아에 소속되는 것들은 천국과 지상에 있는 하느님-메시아에만 적용된다. 이 구절의 표현은 지극히 불의하기도 했던 다윗이라는 인물에게는 결코 적용할 수 없는 표현이다. 하느님-메시아에게만 적용되거나 그분에게만 귀속되어야 하는 이 구절의 말들은 그분 자신만을 취급하고 있다. 즉 변모산에서 영광된 그분의 모습을 보였을 때 들렸던 말과 같다.
“나는 야훼께서 일러주신 길을 벗어 나거나, 내 하느님께 못할 일을 하지 않았다” (22절). 그분만이 여호와의 길, 즉 복합적인 율법을 지키셨다. 그 이유가 그분은 모든 율법을 내적, 외적 측면에서 충만케 하셨고 뿐만 아니라 율법이 포함하는 모든 것, 즉 희생제나 예배 등등에 포함되어져 있는 율법의 모든 것을 충족시키셨다. 그분만이 정의로우신 분이 되셨다. 그럼에도 그분은 자신을 미워했던 이들을 위해 기도하셨다. 이는 다윗이 결코 하지 않았던 일들이다.
“그의 법을 저버린 적이 없고 그의 법규를 무시한 적도 없다” (23절). 이는 다음의 말들로 지금 확증되어진다. 법은 인간이 살아야만 하는 신성한 진리들이다. 법규는 의식 등과 같은 말씀의 외적인 것들이다. 내적 의미를 상징하고 표현하는 이런 것들이 예배의 법들이다.
“죄에 빠지지 않도록 조심하여 나무라실데 없이 살았다” (24절). 앞 절에서와 같이, 다윗의 죄악은 인간의 죄악들이다. 그분 안에는 어떤 죄악도 없다.
“야훼 보시기에 깨끗하여 죄없다고 이렇게 갚아주셨구나” (25절). 이 구절의 말도 앞 절과 방법이 같으나 이런 차이는 있다. 율법을 모든 등차에서 완성하심으로 그분은 정의 자체가 되셨다. 그분만이 자기의 정의에 공적을 주장하실 수 있다. 그 이유는 그분 자신의 권능으로 율법을 완성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해서 인간이 선을 행하는 모든 능력은 그분만으로부터 파생되고 인간 정의의 모든 공적은 그분의 탓으로 발생된다.
“자비한 자에게는 주의 자비를 보이시고, 곧바른 사람에게는 그분의 곧바름을 보여주신다” (26절). 정의와 거룩함의 귀속으로 이해되어 지는바 이런 말들 즉, 거룩한 자와 더불어 당신은 거룩하시고, 완전한 자와 더불어 당신은 완전하시다는 말씀으로부터도 명백하다. 하느님-메시아만이 거룩하시고 완전하시다.
“ 순수한 자에게는 주의 순수하심을 보이시며 사특한 자에게는 주의 거스리심을 보이실 것이다” (27절). 앞 절과 같이 순수한 자에게는 순수하시다. 이 구절과 앞 구절에서 아주 중요한 진리를 가르치신다. 주님은 각자의 상태에 따라 각자에게 나타나신다. 자비와 순수함 자체이시오 완전하신 분이 불완전한 인간에게, 특히 악령에게 나타나실 수 있는데 그것은 그분이 그들의 심정과 지성의 상태에 반사되어져서이다. 인간이 주님을 교리적으로 생각한다지만 필수적으로 그들은 그분을 그들 자신의 상태로부터 생각한다.
“억눌린 자를 건져주시며 거만한 자를 부드럽게 만드십니다” (28절). 그분은 마음 속에서 고뇌하는 자를 구해주신다. 그러나 거만한 자를 아래로 내던지신다. 그분은 비천한 자만을 들어 올리신다. 그러므로 높다는 자들은 먼지 가운데 있는 자, 곧 비천한 자 또는 고뇌하는 자와 반대된다.
“야훼여 당신은 나의 등불, 내 앞에서 어둠을 몰아내 주십니다” (29절). 그분은 이해성을 계발해 주신다. 그러나 이해성은 고뇌 후가 아니면 결코 계발되지 않는다. 그리하여 어둠 즉 거짓들이 흩트러진다. 그러나 어둠은 마음에 들러 붙어 있는데, 그 이유는 탐욕과 죄 때문이다. 이것들은 하느님께서 몰아내시는 거짓들을 계속 권유하기 때문이다.
“하느님께서 도와 주시면 어떤 담이라도 뛰어 넘을 수 있고 나의 하느님께서 힘이 되어 주시면 못 넘을 담이 없습니다” (30절). 그가 적군을 향해 돌진하고 성벽을 뛰어 넘어 정복할 것이라는 말이다. 불경한 자는 자기들이 견고한 성에 들어가 있다고 생각하나 그것은 착각이다.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에 무슨 잘못이 있으랴. 야훼의 말씀에 무슨 티가 있으랴. 피신해 오는 자에게 방패가 되어 주시는 분이시다” (31절). 인간이 의로워진 뒤의 모습이다. 그이유가 하느님-메시아가 인간과 영을 보호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구절에서는 “하느님이 어떠하시냐면, as for God” 즉 하느님-메시아라고 말해지고 있다. 그분은 길, 성실, 고난을 견뎌낸 여호와의 말씀이라 불리운다. 이는 여호와의 말씀, 연단을 거친 분이 하느님-메시아임을 명백히 의미한다. 하느님-메시아는 그분을 신뢰하는 자. 그분에 대한 신앙을 가진 자에게는 방패가 되신다.
“하느님은 야훼 뿐, 바위가 되실 이는 우리 하느님,” (32절). 여호와만이 하느님이시다는 것, 하느님-메시아 안에는 신성이 충만되어 있다. 그분을 통하여, 그분에 의해서 말씀은 만들어지고, 그분만이 바위이시다.
“나에게 힘을 입혀주시어 나무랄데 없이 살게 해주셨다” (33절). 피난처가 되신 것과 같이 힘이 되어 주셨다. 그분은 인간의 길을 완전하게 만드실 것이고, 인간을 진리의 길로 인도하시고, 이 길만이 완전한 길이고 그분이 준비하신다.
“나의 발을 암사슴처럼 빠르게 하시어 산등성 위에 서게 해주셨다.” (34절). 발빠름이 여기서 취급되는데 그분은 길을 신속하게 준비하신다는 말이다. 발은 그들이 걷는 길이다. 나의 높은 장소에, 내 안의 영기에, 영기는 합리적 마음 위에 있고, 인간 안에서 높은 장소인데, 이 영기는 인간에게 참되고 선한 것을 이해하게 해준다.
“구리활을 쏠수있도록 나를 잘 조련시키셨다”(35절). 그분은 우리가 어떻게 적을 분쇄하며 그들을 정복할 것인지를 가르치신다. 그분은 우리의 팔이 구리활을 당길 수 있게 하신다. 즉 그분은 우리에게 구리활로 의미된 자연적 진리들을 이해하게 해주신다. 팔이란 이해성의 능력들이다. 이것이 인간의 힘인데 팔이라 일컬어지고 있다.
“구원의 방패를 이 손에 들려 주시고, 나를 도와 주시어 굳세게 해주셨다” (36절). 구원의 방패란 구원하는 믿음이다. 고뇌는 나를 위대해지게 한다. 즉 고뇌는 신앙을 크게 만드는 이들을 생산한다. 고뇌하는 것이 메시아에 관해서 말해 지는바 그분이 인간을 위대해지게 만든다.
“내 발(발목)이 미끄러지지 않도록 내 걸음을 크게 하셨다” (37절). 크게 한다는 것을 글자대로 볼 때 넓게 만드는 것이고, 걸음은 발로 의미되는 것인 삶을 넓힘으로 의미되는 것인 진리에 따르도록 가져다 놓는 것이다. 발목은 발처럼 마음의 자연적이고 감각적인 부분과 상응된다. 그런고로 발이 미끄러지지 않음은 자연적 마음이 뒷받침하는 것을 의 미한다.
“나는 원수들을 쫒아가 멸망시켰다. 끝장 내고야 돌아섰다. 내가 때려 눕히니, 원수들은 발 밑에 쓰러져, 다시 일어서지 못하였다” (38,39절). 이런 것들은 인간이 신앙을 획득했을 때 뒤따른다. 주님께서는 그분의 고뇌 가운데에서 어둠의 권세와 투쟁하시되 정복할 때까지 원수들을 추격하시는 일을 계속하셨다. 어둠의 권세는 천국 위에 군림하려고, 아니 주님 위에 올라 서려는 노력을 필사적으로 계속해댄다. 그러나 주님은 그들을 완벽하게 복종시켜 그분의 발 아래 두셨다. 인간에 관련해 보면 주님의 적은 자연적 마음 속의 애착과 생각들이다. 이것들은 주님께서 그분의 신성한 진리와 선함의 권능에 종속되게 할 때까지 영적 신앙의 애착과 생각에 대항하려고 계속 노력해댄다.
“허리를 묶고 싸움터에 나갈 힘을 주시어, 원수들을 내 발 앞에 꿀리셨다. 내가 원수들의 목덜미를 잡고, 적수들의 숨통을 눌러 버리는데,” (40,41절). 여기서의 힘이란 믿음이다. 믿음으로 허리를 묶고 영적인 원수들을 복종하게 한다.
“살려 달라 울부짖어도 들어주는 이 없었다. 야훼께 부르짖어도 들은 체도 않으셨다. 나는 그것들을 먼지 처럼 박살내었고, 길바닥의 흙덩이 처럼 짓바수어 버렸다” (42,43절). 원수들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 어떻게 복종시켜야 하는지이다. 메시아와 인간의 원수들이 주님께 도움을 구하려 부르짖는 것은 보통이 아닌 일인 듯 보일는지 모른다. 그러나 복음서를 보면 예수께서 귀신들린 자로부터 악령을 쫒아냈을 때 자기들을 깊은 곳으로 보내지 말기를 간구하는 대목에서 발견할 수도 있다.
“내 민족이 나를 반역할 때, 나를 그 손에서 건지셨고, 알지도 못하던 민족들이 나를 섬기도록 뭇나라에 영도자로 세워 주셨다” (44절). 이 모든 것을 결과 되게 하는 것은 신앙이기 때문에 여기서의 이런 사항들은 믿음이 없는 것, 즉 의심에서 출발된다. “이교도의 우두머리로 세우셨다.” 내면에서, 최상의 의미에서 이교도의 우두머리는 하느님-메시아이시다. 알지도 못했던 민족들이란 신앙을 확증하는 모든 것, 지적 사항에 속한 것, 이런 것들이 동의하고 섬긴다는 말이다.
“이국 백성들은 내 앞에 와서 굽실거리며 무엇이든지 내가 시키는 대로 하게 되었다” (45절). 이 말들은 위와 마찬가지로서 그들이 동의하고 순종하여 나에게 굽실거렸는데 이방인의 아들이라 불리우고, 믿음과 비교해 노예 적이다.
“그들은 넋이 빠져 숨었던 요새에서 떨며 나오리라” (46절) 여기서 이방인의 다른 아들들, 즉 진리를 응용함도 없이 진리만을 소유한 이들이다. 이들은 보물을 즐김도 없이 그저 지키기만 한다. 이들이 뒤흔들릴 수밖에 없는 바, 그 이유는 그들은 자기들이 소유한 진리로부터 영적, 천적 진리들을 볼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이 구절에서 그들이 보물을 지키고자 했던 “숨은 장소”에서 나오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
“야훼님 만만세! 나의 바위는 칭송을 받으시라. 나에게 승리를 안겨 주신 하느님 높으시어라” (47절). 지금 다윗은 이 장의 시작 부분에서와 같이 마지막 부분에서도 하느님-메시아를 부르고 있다. 이는 신성한 노래들, 특히 주님의 기도에서 같이 처음과 마지막을 장식하는 식이다. “주님은 살아계신다”는 엄숙한 표현이고, 여호와-하느님 만이 생명이시다는 것을 함축하고 있다. 하느님-메시아만이 바위이시다. 하느님은 구원 즉 신앙의 바위이시다.
“내 원수를 갚으시고, 뭇 민족을 내 앞에 꿀리신 하느님,” (48절). 그분만이 인간이 해 받는 것을 방어해주실 수 있고 악한 자를 벌하신다. 참으로 믿음이 이런 결과를 산출하나 그분만이 신앙을 주신다.
“당신께서는 나를 원수의 손에서 구출하시고 포악한 자들 손에서 건지시어 적대자들 위에 높여 주셨습니다” (49절). 앞 부분에서 서술되었던 글들이 반복되는데 이는 관습적이다. 마침내 해방이 놓여지고 있다. 원수들이란 악마의 무리들이다. 포악한 자란 악마이다.
“그러하오니 야훼님! 그 고마움을 어찌 만민에게 알리지 않고 하느님의 이름을 노래하지 않겠습니까?” (50절). 감사의 고백이다. 이교도 사이에서 주께 감사한다는 것을 다른 곳에서 보게 되는 여러 가지 것들을 의미한다. 고백하는 이들은 당신의 이름을 이교도 사이에서 노래할 것이다.
“하느님은 손수 기름부어 세우신 왕에게 큰 승리를 안겨 주시고 한결 같은 사랑을 베푸십니다. 이 다윗과 다윗의 후손에게 길이길이” (51절). 그분의 왕 즉 여호와 아버지의 구원하심을 찬미하고 있다. 그분의 아들은 정의와 공적이다. 그분께서 손수 기름부은 자 다윗, 즉 하느님-메시아에게 자비를 보이신다. 그분께서 고통 받았을 때 그분은 여호와 아버지의 자비에 관해 외치셨다. 아들 자신은 여호와의 기름부은 자이다. 그리고 왕 다윗이다. 그분의 후손은 그분을 믿는 모든 자이다. 한걸음 더 나아가 왕, 기름부어진 자, 다윗은 왕의 아들들, 그러므로 왕들이라 불려지는 이들로 이해되어진다. 다윗이 하느님-메시아로 이해될 때 그 후손은 다윗의 후손에 적용된다. 그러나 왕의 아들이 다윗에 의해 의미된다면 후손은 믿음과 믿음에 소속되는 것들에 적용된다. 한편 시대(age)는 내적 의미에서 영원을 의미한다. 다윗 왕국이 영원할 것이라는 것은 사무엘하 7장 13,16절에서 설명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