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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왕기상 6장
솔로몬의 성전
우리는 성전 건축에 쓰인 나무와 돌에 관해서는 이미 살폈다. 이제 우리는 성전 안 쪽으로 들어가 그곳에 있는 방, 가구, 정교한 장식물에 관한 유추를 생각해보자.
고대 세계의 이런 경이로움에 관한 표징성이 지닌 일반적 의미는 이미 살폈다. 가장 높은 의미에서 성전은 주님의 육체(Lord’s body)를 예징한다는 것, 이 육체가 거룩한 모든 예배의 근원이요 대상이라는 것이다. 둘째 의미에서는 천국과 그분의 교회를 표현한다. 이 두 가지는 주님의 신비로운 육체(Lord’s mystical body)인데 그분의 가장 크고 가장 빛나는 형상이다. 세세한 의미에서 거듭나는 사람을 상징한다. 이 사람은 주님의 형상이요 가장 작은 형체에서의 천국이다. 이런 표징성의 고리를 완성하기 위해 우리는 그 고리를 반드시 씌어진 말씀에서 취해야 한다. 씌어진 말씀은 또 다른 형체에서 나타난 신성한 진리 자체이신 육을 입으신 말씀과 거의 같거나 동일시 해도 무방하다.
성전의 분리된 구역(division)으로부터 배우는 첫 큰 진리는 성막의 구역과 마찬가지로 그것들이 표현한 무한한 분과 유한한 인간 모두에 관한 지식의 기초에 놓여 있다는 점이다. 성전도 성막의 경우 같이 세 구역으로 되어 있다. 가장 깊은 장소는 지성소(holy of holies)라고 부르고, 둘째 장소는 성소(holy place), 그리고 뜰(court)이 있다. 신성한 울로 둘러 막은 이 마지막 장소는 두 겹으로 되어 안쪽 뜰과 바깥 뜰이 있는데 그 이유는 나중에 살피겠다.
성전의 이런 구역이 표현한 위대한 진리란, 신성한 존재 안에서, 그로부터 천국과 인간 안에는 세 개가 한 쌍(trine)이 되어 있다는 것이다. 하나 안의 세 가지 것(a trinity in unity)은 무한한 분과 유한한 것 모두에게서 완전을 이루는 보편적인 틀(type)이다. 영원으로부터의 신성한 존재, 더욱이 육을 입으신 이래 우리와 관계되는 신성한 분 안에는 세 가지 신성한 본질(trinity of Divine Essentials)이 있다. 사랑, 지혜, 권능(power)이 그것이다. 이 셋은 하느님 안에 존재하고 영원으로부터서 존재해 왔다. 하느님이 육을 입으신 이래 이와 똑같은 삼위일체는 주님의 본질 되는 신성, 그분의 신성한 인간성, 이로부터 진행되는 성령이다. 신약 성서에서의 경우 이 셋은 아버지, 아들, 성령이라 불리고 있다. 아버지는 본질 되는 신성, 또는 신성한 사랑이고, 아들은 신성한 인간성 또는 신성한 지혜이고 성령은 신성한 권능 또는 거룩한 진행(Holy proceeding)에 해당된다. 삼위일체의 이런 묘사가 외관상으로는 불일치한 듯 보이나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 않다. 그 이유가 신성한 지혜 또는 말씀이 육을 만들었고, 육을 만든 말씀으로부터 성령이 진행되기 때문이다. 영원으로부터 하느님은 삼위일체의 하느님이셨을 뿐아니라 신성한 사람(Divine Man)이셨다. 육을 입으시기 전, 그분은 처음 되는 원리에서의 사람이셨고, 더불어 육을 입으시는 사건 이후, 마지막 되는 원리에서의 사람도 되셨다. 육을 입으시기 전 그분은 창조자요, 보존자로서의 사람이셨고 더불어 육을 입으신 이후 그분은 구속자 구세주로서의 사람도 되셨다. 육을 입으시기 전, 그분은 천사들이 유일한 사람이었던 것 같은 사람이셨고, 육을 입으신 이후 그분은 지상의 우리가 사람인 것 같은 사람이 되셨다. 그러므로 육을 입으시기 전, 그분이 어떤 인물(person) 안에서 나타나실 때 천사들의 속성을 입으셨다. 이것은 천사들의 영적인 형체이고 그분의 현존의 천사, 언약 속의 천사라고 드넓게 불리우고 있다. 육을 입으셨을 때 비록 신성한 아버지에 속하긴 해도 인간 어머니의 자손, 어떤 개인 한 사람, 즉 자연계에 존재하는 인간 속성을 입으셨다. 지상에서 동정녀 어머니에게 태어나고 천국에 계신 신성한 아버지에 의해 영화된 인간성, 그리하여 살과 뼈라 불리는 최말단 까지도 신성이 된 이 인간성이 여호와의 성전이다. 인간의 믿음과 예배의 유일한 참 대상은 주 예수 그리스도이시고, 복되시고 영화로우신 인물이신 그분 안에는 신성한 삼위일체가 있다. 즉 하나 안에 셋이, 셋 안에 하나가 있다. 하느님 안에 있는 이런 셋은 세 인물(tripersonality)을 가르키는 게 아니다. 삼위일체란 한 인물(person) 안에 세 속성, 즉 사랑 지혜, 능력, love, wisdom, power 또는 신성, 인성, 운행하심, divinity, humanity, operation의 세 필수요소가 들어 있는 것이다. 신성한 삼위일체란 신성한 세 인물 안에 하느님이 각각 계신 게 아니라 한 인물 안에 세 가지 신성한 요소가 들어 있는 것이다. 우리는 주 하느님이 우리의 창조자, 구속자, 갱생자이심을 인식해야 한다. “하느님이 그분의 거룩한 성전 안에 계신다. 모든 땅의 것들은 그분 앞에서 잠잠해지어라.”
한 분 하느님 안에 있는 신성한 세 가지는 영원으로부터 조차 모든 것 안에 있는 삼위일체의 근원이다. 창조된 모든 것들은 신성한 근원에 있는 삼위일체의 속성의 닮은 꼴이거나 유추되고 있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본질과 형체, 그리고 사용함이 있다. 이런 세 가지는 아주 저급한 창조물에서 조차 사랑, 지혜, 힘과 상응되거나 유추되고 있다. 그 이유가 사랑은 본질 또는 생명이고, 지혜는 생명이 명백해지는 것, 또는 생명의 형체이고, 사용함은 생명의 힘 또는 적극적인 최말단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삼위일체와 하나 됨은 온 창조에 고루 스며있다.
천국적인 성전은 세 개의 큰 저택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것은 지성소와 성소 그리고 뜰이다. 이와같이 천국 자체도 셋으로 구별되어 진다. 이 중에서 삼 층의 천국은 사도 바울도 언급한 적이 있다. 이 세 천국에서 우리는 신성한 사랑과 지혜 그리고 신성한 작용의 형상과 그릇(receptacle)을 보게 된다. 가장 높은 천국, 세 번째 천국은 신성한 사랑의 형상과 그릇이고, 두 번째 천국인 중간 천국은 신성한 지혜의 형상과 그릇이며, 마지막 천국, 가장 낮은 천국은 신성한 작용, 신성한 힘의 형상과 그릇이다. 이 세 가지 중 마지막인 것에 나머지 두 가지 것이 담겨서 공존한다. 이는 성전 뜰을 거론하면 좀 더 설명된다. 이 뜰은 두 뜰, 즉 안 뜰과 바깥 뜰로 구분되어 있다. 세 천국들 중 가장 말단 또는 가장 낮은 천국은 둘로 나뉘어 있는데, 이는 두 개로 구분되어 버린 천국을 말하는 게 아니라 두 부분으로 나눈 것을 말하는데 이 부분들이 세 번째와 두 번째 천국과 상응되거나 직접적으로 교통되고 있다. 이 가장 낮은 천국은 나머지 천국의 기초이고, 이 천국은 가장 높은 천국, 천적 천국과 교통하는 한편, 두 번째 천국, 영적 천국과도 교통하고 있다. 최말단 천국은 다른 두 천국에 관련해 볼 때 상대적으로 자연적 수준이다. 이렇게 구분지어 보기 위해 그 천국은 자연적 천국이라 불린다. 나뉘어진 자연적 천국의 두 부분은 영적-자연적 천국과 천적- 자연적 천국이고 거기에 소속된 천사들도 그렇게 구별된다.
천국의 성전에 있는 또 다른 구분, 또 다른 특이함이 솔로몬의 성전에서 언급되어 표현되어져 있다. 상징적인 성전의 지성소에는 증거판- 즉 하느님의 손가락에 의해 씌어진 열 계명의 두 돌판이 담긴 궤가 놓여져 있다. 이 계명들은 주님 자신을 표현했다. 이 돌판이 지성소에 안치된 것은 주님의 현존이 가장 깊은 천국에서는 더 직접적이다는 것을 표현한 것이다. 율법의 돌판은 그릇 안의 그릇에 담겨 있다. 즉 율법이 지성소 안의 궤 안에 놓여졌기 때문이다. 가장 높은 천국의 위 또는 내부에 또 다른 천국이 있는데 이를 주님의 교회에 관한 저술에서는 인간의 내부 속의 천국이라 부르고 있다. 이는 가장 안쪽에 있는 그릇이고 하느님께서 인간 존재와 더불어, 참으로 그분의 왕국의 천사들과 함께 거주하시는 가장 높은 처소이다.
가장 작은 것이 가장 큰 것의 형상이기도 하다는 진리를 예증하는 데에는 인간 자신이 가장 적절한 본보기가 아닌가 생각된다. 각 인간은 자기 하느님에 관한 가장 높고 가장 완전한 개체로서의 형상이다. 그는 보편적 천국에 가장 가까운 형상이다. 그는 그의 하느님에 관한 가장 높은 개인적 형상이다. 그이유가 그는 무한한 원리들의 유한한 측정인 그릇이거나 하느님의 인물과 본성을 구성하는 신성한 본질의 그릇이기 때문이다. 하느님은 사랑 자체, 지혜 자체, 권능 자체이시고 인간은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원리들을 제 분량대로 받기 위해 창조되어 졌다. 우리는 이를 속성, 부속물(attribute)이라 단순하게 부르지 않는다. 그것들은 모든 속성들의 근원인바 그 자체는 신성한 본질, 신성한 실체 속의 참 본질이어서 모든 다른 것의 근원이다. 인간은 하느님의 형상인바 하느님으로부터 사랑과 지혜, 권능을 받는 기능을 가지고 있다. 하느님의 사랑을 수용하는 그의 기능은 그의 의지이고, 하느님의 지혜를 수용하는 기능은 그의 이해성이며 하느님의 권능을 받는 기능은 그의 언행이다. 이런 기능은 상속되기에 모든 사람은 복주시려는 창조자와 구속자로부터 영적이고 영원한 선물을 받을 수 있다. 이런 선물을 받는데 있어서 인간 타락으로 도입된 장애물이 주님께서 육을 입으시고 구속해주심으로 제거되었는바 모든 사람은 구세주 하느님으로부터 자유로이 제공된 사랑과 지혜와 거룩함을 자유로이 받을 수 있다. 이런 선물을 실제로 받게 되면 인간은 자기 하느님의 영적인 형상을 만든다. 즉 그는 새로운 창조물, 주님의 거룩한 영의 성전, 주님의 영화되신 육체의 성전의 형상, 가장 큰 사람의 거처인 가장 작은 천국을 만든다. 모든 사람은 각자 자신 속에 아주 작지만 천국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가지고 있다. 창조를 수단으로 그는 이런 모든 것을 잠재적으로 가지고 있으나 거듭남으로 실지로 가지게 된다. 모든 사람의 마음은 세 천국과 유추되는 세 가지 구분되는 등차로 되어 있다. 우리가 세상을 떠날 때 우리는 지상에서 사는 동안 열어 두었던 천국과 유추되는 천국에 들어 간다. 이런 천국의 등차들은 성전의 뜰과 성소, 지성소에 각각 상응하고 있다. 보편적인 천국 같이 인간 마음 안에도 안 뜰과 바깥 뜰이 있고 이 뜰이 거룩한 장소를 둘러 싸고 가장 거룩한 장소 내의 가장 깊은 곳에 신성한 증언을 담은 궤가 있다. 거듭남의 가장 아래쪽의 저택은 하느님의 성전 같이 거룩한 두 부분, 즉 선을 행하고 진리를 말하는 것, 또는 거룩한 생활과 거룩한 대화로 구성되어 있다. 이런 것들은 거듭나는 의지와 이해성의 최말단들이다. 그이유가 새로운 의지는 선한 일들에서 그 끝을 맺기 때문이고, 새로운 이해성은 곧바른 말들에 그 끝이 있기 때문이다.
인간 마음 안에서 가장 거룩한 장소 내에, 또는 그 위에, 더 높은 영역 즉 더 초월적인 기능이 있다. 이 안에서 영원한 분이 홀로 거주하신다. 이 안으로 인간의 내적인 사람은 결코 침입하지 못한다. 이것은 인간의 의식 세계 위에, 인간의 능력 너머에 있다. 인간이 아래쪽에 있는 마음 영역에서 사랑과 진리의 생명을 전복 시키거나 파괴까지 감행할 수 있을는지 몰라도 그는 위 질서를 결코 어지럽히지 못한다. 하느님께서는 스스로 이 질서를 자비적으로 보존하신다. 이 영역은 인간이 좌절한다 해도 결코 사라지지 않는 그분의 거룩하고 높은 장소이다. 이를 통해 주님은 모든 사람 안에서 자유와 합리성의 기능, 뿐만아니라 불멸성을 보존해 주신다. 또한 그분은 이 높은 장소로부터 언제나 내려 오실 채비를 하시고 있어 인간이 겸허해질 때를 기다리신다. 이렇게 인간이 결코 침투할 수 없는 인간 마음 안의 주님의 성소가 솔로몬이 성전을 헌당할 때 거룩한 영에 의해 말해지고 있다. 주님은 그분께서 깜깜한 어둠에 거하신다고 말하셨다. 가장 높은 인간과 천사적인 총명도 이 은밀한 장소를 싸고 있는 구름을 결코 관통할 수 없다. 주님은 그분의 초인간적 지혜와 인간을 압도할 수 있는 섭리의 두꺼운 어둠 안에 거주하신다. 그분의 관심사는 인간에게 영원히 있을 수 있는 흥미에 있고 그것만이 그분의 섭리 체제이다. 그분께서는 인간의 지혜와 의식 세계에서 자신을 감추여 있게 해서 마치 인간 스스로 자기가 향유하는 행복의 창조자나 된 듯 자기 이성에 따라 자유로이 행동하게 하시고 인간의 의식과 감각으로 결코 지각할 수 없는 어떤 섭리를 보고 인정하게 하는 데에는 오로지 계시라는 도구만을 사용하신다.
솔로몬의 성전에서 신성한 것과 영적인 것을 유추해 본 시리즈를 마감하려면 하느님의 말씀이 가장 특출한 주님의 성전이다는 것을 짚어 보아야 한다. 그분이 천국과 그분의 교회 안에 거주하시듯 말씀 안에서 천사와 사람들과 함께 거주하신다. 말씀 안에도 세 가지 구분되는 의미들, 즉 천적, 영적, 자연적 의미들이 있고 이 세 차원을 넘어 가장 높은 곳에 순수하게 신성한 것이 있다. 이곳까지는 인간 총명이 도달할 수 없다.
하느님의 명령에 따라 그분의 예배를 위해 솔로몬이 지은 성전의 일반적인 상응을 추적했지만 건축물의 세세한 모형에 대한 상응은 또 다른 장에서 살필까 한다. 한 가지 더 거론해 볼 게 있다. 그것은 사색, 또는 심사숙고함과 진리는 폭넓은 차이가 있다는 것에 관해서, 실지 응용하는 측면에서, 사색은 이리 저리 여러 방향을 향하는 반면 이론에 그칠 수 있으나 진리는 한 쪽 방향만을 가지고 실제에서 반드시 끝을 맺는다. 우리를 주님이 계신 안쪽으로, 위쪽으로 인도하고 구속과 구원의 섭리를 곰곰히 생각해 보게 하는 말씀의 상징적 의미들은 우리의 이해성을 계발하고 심정을 개선 시켜 주는데 결코 실패하지 않는다. 거룩한 말씀의 역사적 사건들은 가장 평범하면서도 명백한 대화체를 이용해 하늘 왕국의 가장 깊은 신비들을 상응을 통해 밝히 알린다. 따라서 상응에 의거 성서를 살피면 하늘 왕국에 관한 우리의 견해는 더욱 확장된다. 유대인의 성전이 주님이 그분의 백성과 함께 거주하시는 거룩한 성전을 상징한다는 것을 알게 될 때, 말씀의 원리에 의거 형성된 인간 마음이 주님이 거주하시는 처소라는 것도, 주님이 언제나 그 가운데 계시는 천사들의 천국이라는 것도, 무엇보다도 주님의 인성의 성전에는 신성이 충만되어 있다는 것도 동시에 알게 된다. 우리는 이런 신성한 선언을 실감하려고 노력해야 하리라. “보라 이제 하느님의 집은 사람들이 사는 곳에 있다. 하느님은 사람들과 함께 계시고 사람들은 하느님의 백성이 될 것이다” (요한계시록 21:3).